번 호 : 7965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0일 01:11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3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프롤로그) 안녕하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동안 아린 이야기 읽어주신 고마우신 분들... 제가 좀 사정이 생겨서요 모두 삭제하고 첨부터 다시 올리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좀 많이씩 올릴 예정이니 저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 잼있게 봐주세요. 그럼 첨부터 다시 시작 합니다. -------------------------------------------------------------------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난 드래곤이 되고 싶어." "뭐??" "난 드.래.곤.이 되고 싶다고." "......" 나는 고3 이다. 이제 청춘 18세의 소녀가 되어 청춘을 불사르나 싶더니 어느새 수험생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나는 그렇게 수능이라는 시험에 긴장되질 않았건만 내 주위의 사람들은 그게 아닌가 보다. 특히 자칭 나의 엄마라는 사람은.... 그녀는 나의 친엄마는 아니다. 내 친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리고 2년 뒤 아빠는 어떤 여자와 결혼 했고 그녀가 지금 내 엄마 역활을 하고 있다. 새엄마와 나는 사이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저 난 말썽 부리지 않는 평범한 딸로, 새엄마는 동화에 나오는 나쁜 계모가 아닌 그저 평범한 엄마 역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진...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새엄마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만 늦게 들어오거나 머리에 칼라 스프레이만 뿌려도 심하게 잔소리 하기 시작했고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처음에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넘겼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고, 고3이 된 지금은 학교가 끝나고 학원을 가야 했고 학원이 끝나면 독서실에 가서 새벽에 집에 들어왔다.(고3은 원래 그런가?) 휴일이 되도 놀러가지 못했으며 친구한테 전화가 오면 눈치 보며 금방 끊어야 했다. 소설책은 물론 TV도 못 보게 했으며, 내가 거실에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잔소리를 해댔다. 그것도 그냥 대놓고 했으면 좋으련만 대놓고 하지 않고 말을 비꼬아서 쏘아 붙치는 것이었다. 나는 점점 새엄마한테 짜증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짜증이 솟구쳤다. 이런 날이 계속되고 있던 어느날 밤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평소보다 일찍 독서실에서 돌아왔건만 새엄마의 비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엄청 짜증이 생긴 나는 씻고 그냥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나에게 속삭였다. "짜증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침대 바로 옆에 내 손바닥 만한 꼬마가 히미한 빛을 내며 동동 떠 있었다. "짜증나?" 그 꼬마가 되물었다. "응. 엄청 짜증나." "그럼 내가 안 나게 해줄까?" "너가 뭔데?" 나도 참 이상했다. 내 손바닥 만한 꼬맹이가 침대 옆에 동동 떠 있는데 전혀 놀랍질 않으니... "나? 난 케로베르스야. 지옥의 7군주 다크 브로크 데블 마스터님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지" "지옥의 7군주?" "그래. 그분은 내 주인님이셔. 지옥의 7군주라고 해도 천상의 7군주보다 세시다구." "그럼 악마겠네?" "인간은 그렇게 부르더군." 나는 엄청 놀랐다... 라고 해야 겠지만 전혀 안 놀랐다. 이런 내가 스스로 신기하게 여겨졌다. 악마를 눈 앞에 두고 놀라지 않다니... 하지만 이건 악마라기 보단 솜인형 같이 생겼구만 뭐... "내가 짜증 안 나게 해줄까?" 내 대답을 기다리던 자칭 그 악마 녀석은 내가 대답은 안 하고 말똥말똥 쳐다보자 재차 또 물어봤다. "어떻게?" "나랑 거래를 하자." "뭐를? 내 영혼을 달라고?" "어? 어떻게 알았어?" 뭐야 이거? 바보아냐? 이런 뻔한 스토리로 나가다니 나원 참... "내가 바보냐? 너한테 영혼을 주면 내가 죽잖아." "그럼 나랑 내기할래? 내가 지면 너의 소원 하나를 들어 줄테니까, 너가 지면 네 영혼을 나에게 줘." "뭔 내기?" "여기가 아파트 5층이지? 여기서 떨어져봐 그래서 너의 짜증이 사라지면 내가 이기는 거고 너의 짜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너가 이기는 거야." 난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거절의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어머 벌써 자는거니? 독서실에서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코피라도 쏟았나 보구나. 그래 자렴. 뭐 다른 애들은 다 새벽까지 공부 하겠지만 넌 실력이 있으니까 뭐..." 새엄마였다. 아무리 딸 방이라지만 그녀는 내 방에 들어올때 노크하는 적이 없었다. 짜증이 더 솟구쳤다. 새엄마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도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래 하자." 나도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짜증이 솟구쳤다고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리겠다니...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자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빠와 새엄마는 안방에 있는지 안방에서는 tv 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자 아파트 앞에 심어 놓은 관목들이 보였다. 옆에서 악마가 속삭였다. "뛰어내려, 자 어서 뛰어내려..." 내가 미쳤지... 그 말을 듣고는 곧장 뛰어 내렸으니까. 하긴 5층에서 떨어지면 잘하면 죽지는 않겠지만...그래도 죽지 않을 확률을 높이기 위해) 관목위쪽으로 몸을 던졌다. 눈 앞으로 나무가 빠르게 다가왔고 눈을 감자 곧이어 배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시작으로 온 몸이 땅에 닿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어렴풋이 쾅~! 소리를 들으면서... 다행히 나는 죽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새엄마였다. "어머 정신이 들었니? 어쩌니 죽지 못해서. 너도 참 죽으려면 15층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야지 5층에서 뛰어 내린다고 죽겠니? 그리고 어깨가 골절이 되어서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구나. 좋지? 학교 안가서 얼마나 좋을까? 다른 애들은 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텐데..." 난 새엄마를 노려 봤다. 짜증이 내 안에서 폭팔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빠한테 전화 한다면서 병실에서 나갔다. 그러자 그 꼬마 악마가 나타났다. "어때?" "짜증나." "그래? 그럼 내가 진거네. 그럼 소원을 말해봐. 소원이 뭐야?" 그 꼬마 악마녀석은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새엄마를 없애달라고 말하려고 그랬 다. 그러나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이녀석이 생글생글 웃는것을 보자 내가 악마가 이끄는 대로 따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파트에서 떨어진것도 그렇고....아마 이녀석은 내가 새엄마를 없애달라고 할걸 알고 있었던게 아닐까? 오한이 들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그러자 예전에 환타지 소설을 읽으며 공상한게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드래곤이 되고 싶어." 꼬마 악마는 멀뚱멀뚱 나만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못 들었다는듯. 그러나 잠시후 무지무지 당황해 했다. 하긴 나라도 그랬을 꺼다. 드래곤이 되고 싶다니... "저기... 드래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래도 되고 싶어." 꼬마 악마는 어쩔줄 몰라했다. 그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저녀석이 이끄는 대로 왔다는 생각 자체가 우습게 느껴졌다. 아파트 5층에서 뛰어 내렸다고 저녀석이 이끄는 데로 따랐다고 생각하다니... 하긴 그때 그냥 죽었으면 저녀석이 내 영혼을 가져 갔겠지만..... 가만 가져 갔을꺼라고? 그럼 만약 내가 새엄마를 없애달라고 했다면? 그럼 새엄마의 영혼을 대신 가져 갔겠지? 이런이런 악마는 악마인 모양이네... "저기 다른 소원은 없니? 돈을 달라던가 아니면 예뻐지고 싶다던가..." "없어." 나는 그녀석이 갑자기 무서워 졌다. 첨부터 저녀석의 말에 응하는게 아니었는데... 어쩌지? 그냥 돈이나 달라고 할까? 그러다가 내가 저녀석을 무서워 한다는걸 눈치 채기라도 한다면? 나는 나대로 고민하고 있었고 그녀석은 그녀석 대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병실은 조용해졌고 벽시계의 짹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렇게 할래?" 그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뭘?" "너의 소원말야. 이 세상에는 드래곤이 없쟎아. 그리고 설사 있다고 해도 내가 너를 드래곤으로 만들어서 마력까지 주지는 못해. 그러니까 다른 차원의 드래곤으로 만들어줄께." "어떻게?" "난 영혼을 다루는 능력이 있어. 그러니까 네 영혼을 가지고 드래곤이 존재하는 다른 차원에 가서 드래곤의 영혼과 네 영혼을 바꿔치기 하는거야. 물론 성인 드래곤은 안되고 알에서 부화하지 않은 새끼 드래곤이어야 가능하지만.." "그게 가능해?" "뭐가?" "영혼을 바꿔치기 하는 건 둘째치고 다른 차원으로 가는거 말야." "원래는 불가능 하지만 난 지금 내 주인의 피를 조금 갖고 있거든. 이거면 불가능하지는 않지." "악마들은 다른 차원에 갈 수 있나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도 거의 몰라 나도 어쩌다 우연히 안거고.... 앗 이건 비밀인데. 그건 그렇고 그렇게 할꺼야? 너가 한다면야 나도 드래곤의 영혼이라는 것을 얻게 되니 손해는 아니지만.. 아~~ 아까운 주인님의 피..." 드래곤이라.... 만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가고, 많은 보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거대한 마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위대한 종족.... "좋아." "그럼 거래 성립이다. 그럼 이제 자.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너가 뭘? 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지고 있었다. 역시 저녀석에게 끌려 다니는 걸까 ------------------------------------------------------------------------------------------------------------------------------------------------------------ 번 호 : 7966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0일 01:13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0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1화 아린 태어나다. "이제 자.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 꼬마 마족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두운 암흑. 물론 잠을 자게되면 눈을 감으니까 어둡지만 이건 좀 달랐다. 잠이 든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서서히 정신이 든 나는 어둠을 느꼈다. 느꼈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어둠을 느끼다니... 그것도 따스한 어둠... 그러다가 난 내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런데 눈이 떠지질 않았다. 어라라... 이게 어찌된 일인지... 열심히 눈을 뜨려고 노력 하면서 몸을 꼼지락 댔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내 몸은 누군가 꽁꽁 묶어노은 듯 움직여지질 않았다. 조금 지나면 몸이 풀리겠지 하고 더 자려고 했다. 한참이 지났다.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더 말똥말똥 해지고 몸을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여지지 않자 답답했다. 아까 병실에 누워 있었는데 어느새 나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나보다. 몸을 쭉 피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까도 내 몸을 묶고 있던 어떤 압박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몸은 더 갑갑해졌고 점차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뭐가 잘못된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꼬마 악마를 믿은것이 잘못이었나보다.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젠 이렇게 조금만 더 있다간 숨막혀 죽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숨은 쉬고 있나??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몸을 폈다. 여전히 내 몸은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있는 것 보다는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게 낳을 것 같았다. 한번.. 두번... 세번.... 몸을 계속 피려고 노력했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몸이 움직여 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답답한 상황에 있는 것 보다는 움직이고 싶어서 계속 몸에 힘을 주었다. 순간 빠직~~ 하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발이 움직여 졌다. 발에 더 힘을 주고 힘차게 뻗자 빠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발이 자유로워 지면서 동시에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몸이 안 움직여져서 초조하던 차에 발이 움직여지자 힘이 솓았다. 그래서 손에도 힘을 주어서 뻗었다. 발이 자유로워지자 손에도 힘이 솟았는지 두 손이 앞의 장벽을 뚫고 나갔다. 오홋 나도 참 장하지.. 이 장벽을 뚫다니.. 뚫어??? 어라? 그러고 보니 내가 갇혀 있었나? 나는 열심히 손을 허부적 대면서 나를 가두던 장막에서 벗어났다. 조금씩 조금씩 얼굴에 바람이 느껴 지면서 내 몸은 자유로워 졌고, 나는 나를 감싸고 있던 장막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처음에는 빛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조금씩 시야가 확보 되면서 주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나를 바라 보고 있는지 시선을 따라 고개를 위로 들어 그 누군가를 바라보는 순간 난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그 누군가는 내가 뒤로 넘어져야만 바라볼 수 있는 높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나는 멍해졌다.그리고....... "끼에에~~~~~~~~~~~~~~~엑" 난 발딱 일어서서 달려 나갔다.......가 아니라 달려가려고 하다가 발라당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원 참. 어미를 보고 도망가는 해츨링 이라니...." 어미라니.. 그리고 해츨링이라니 이게 뭔 소리란 말인가.... 내 앞에서.. 아니 내 머리 높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던 것은 드.래.곤 이었다. 붉은 빚 비늘에 붉은 빛으로 타오르는 커다란 두 눈동자와 그 밑에 위치한 거대한 입.... 머리에는 뿔이 솟은 그 소설에서나 읽어 봤던 그 드.래.곤 이었다. 그러니 내가 안 놀라겠는가? 그런데 어미라니?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말 '성인 드래곤이라면 불가능하지만 알에서 부화하지 않은 새끼 드래곤이라면 가능해' 난 내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 보았다. 내 주위에는 무슨 알 조각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게 '알' 이란 말야? 그리고 난 방금 '알.에.서. 깨.어.난'거고.......... 내 몸을 내려다 보자 이게 왠일... 그 아름다운(?) 가늘고 긴 내 손발은 어디가고 빨간 비늘에 뒤덮인 손과 발이 보이냔 말이다. 게다가 엉덩이 쪽에 느껴지는 이 압박감은 뭐란 말이냐... 손을 뻗어 엉덩이를 만져보자 이상한 이물질이 잡혔다. 꼬.리 였다. 내가 내 꼬리를 깔고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난 그 꼬마 악마가 약속했던 대로 드래곤 새끼 즉 해츨링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정말 세상에 이런일이 일어나다니.... 시선이 느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자칭 나의 '엄마'인 레드 드래곤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너무 놀라서 이제는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드래곤과 같이 살 것 같으니까 익숙해져야겠지... 노려보는 것 같지 않았다. 당연하겠지... 난 해츨링인걸.... 소설이 맞다면 드래곤은 어떤 일에서건 해츨링이 제일 우선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구나 이 분은 나의 엄.마 시니까... 나도 말똥말똥 쳐다 보았다. 그러다가 너무 마주보고 있으니까 어색해서 씩~ 웃어 보였다. "이상하다. 난 태어나자마자 엄마한테 배고프다고 했다는데...... 얘는 태어나자마자 비명을 지르질 않나.... 거기다 이제는 나만 빤히 보고만 있으니.... 말을 못하나? 핫 혹시 내가 저능아를 낳은건....." '엄마'는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긴장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첫 아기인가 보다. 음... 초보 엄마 드래곤에 초보 해츨링이라....... 그럼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겠군..... 내가 아무리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해도 갓 태어난 해츨링이 어떻게 행동 하는지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계속 고개를 갸웃 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런 엄마를 앉아서 말똥말똥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입을 열었다. "배 안고프니?" 배? 음.... 처음 태어나면 배가 고픈건가? 그러고보니 나는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린뒤 부터 먹은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지금 너무 정신 없는 일만 일어나다보니 배가 고픈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 배 고프냐는 말을 듣고 내가 배가 고픈가를 생각하고 있다. 아~ 역시 고프다. "배고파." 그러자 엄마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순간 내 앞에 시커먼 물체가 나타났다. 크기는 성인 남자의 크기에 온몸에는 시커먼 털이 숭숭 나있는 것이 죽었는지 널부러진 채로 꼼짝도 안했다. 이것이 먹는것인가본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난감했다. 내 비록 해츨링으로 태어 났지만 전에는 사람이었단 말이다. 그냥 뜯어 먹는것인가 본데... 통채로 익히지도 않고 어떻게 먹냔 말이다..... 내가 배가 고프다고 했으면서 먹지도 않고 먹이를 말똥말똥 쳐다만 보자 엄마가 말했다. "안먹어?" 먹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난 다시 엄마마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나와 눈싸움을 하던 엄마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앞에 널부러져 있던 '음식'의 팔이 저절로 뜯어지더니만 피를 뚝뚝 흘리면서 날아와 내 입에 쳐박혀 졌다. "컥........" 너무 깊숙히 박혀서 밷으려고 아둥바둥하는데 그 피가 입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바람에 얼결에 삼켰다. 그런데 의외로 맛있었다. 오~~이런 새로운 맛이(피가 맛있다. 난 혹시 흡혈귀?) 눈 딱 감고 입안에 있는 것을 씹었다. 그랬더니 쫄깃쫄깃 오도독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이것이 바로 육회의 맛이라는 것인가? 털때문에 약간 걸리는 것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먹을 만 했다. 그리고 못먹으면 어쩌는가? 바로 위에서 엄마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두 손으로 잡고 쩝쩝대며 먹다보니 어느새 손가락을 마지막으로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음식'에 붙어있던 나머지 한쪽 팔이 몸체에서 떨어져 나와 내 앞으로 날라와 얌전히 착지했다. 난 두 손으로 들고 또 얌얌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커먼 털이 숭숭난 팔을 들고 먹으려니 께름직했지만 어쩌랴....... 먹어야지 안먹으면 또 입안으로 쳐박힐텐데........... 어느새 양 팔을 다 먹고 이번에는 다리가 날라왔다. 다리를 다 먹자 이번엔 다른쪽 다리가......... 양 다리를 다 먹고 나자 이제는 몸통이 네등분으로 나누어 지더니 날라왔다. 그러나 팔과 다리는 어찌어찌 먹었다지만(그래도 맛있었다.) 피가 줄줄 흐르고 내장이 나오는 몸통은 도저히 먹지 못할것 같았다. 배도 왠만큼 찬듯 싶으니 "배불러....." 엄마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팔과 다리를 쭉쭉 찟어서 내 앞에 놓은 것이 아무래도 엄마지 싶었다. 하긴 엄마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해 주겠는가? "배불러? 양이 적네.... 여자라서 그런가? 하지만 난 해츨링때는 오크 한마리 정도는 다 해치웠는데...." 이게 그 말로만 들어보던 오크라는 것이었단 말인가.... 세상에 내가 오크를 먹어치웠다니.......... 그래 이제 난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드래곤 생활에 익숙해져야지.... 어느새 내 앞에있던 오크 몸둥아리가 사라졌다. 헐헐헐 아무래도 난 드래곤이 될 소질이 있지 싶다. 오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어도 놀라질 않으니.... 그런데.... 먹는일이 끝나자 할일이 없었다. 뭘 해야할지 몰라서 또 엄마만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엄마도 나만 빤히 쳐다 보았다. 참 한심한 모녀 드래곤이었다. 한참을 서로 쳐다 보고 있자니 심심했다. 그래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주위는 동굴이었다. 드래곤 래어일 테니까 아마 어느 산맥에 있는 큰 동굴인가보다. 드래곤 래어에는 온갓 금은 보화가 많이 있다고 했지? 할 일도 없는데 그거나 구경해야 겠다. 뭐 엄마꺼니까 구경해도 되겟지. 하는 생각에 끙차하고 일어났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일어나자마자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무게가 뒤쪽으로 쏠리는 것이었다. 왜그럴까 생각을 하자 내 등에 깔려있는 꼬리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난 이제부터 꼬리를 달고 살아야 했다. 근데 꼬리만 있는게 아닌가보다. 뭔가가 등에 또 있는듯 싶었다. 손을 뻗어서 잡아보려 했지만 닿질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내 손과 발은 무지 짧았다. 드래곤의 몸집을 생각해 보면 알듯이 몸통에 비해 손과 발은 괭장히 짧았다. 꼬리야 손을 밑으로 뻗어 어찌어찌해 만져 봤다지만 내 등에 있는건 도저히 만질 수 없었다. 그리고 난 지금 뒤로 발라당 넘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우쒸~~ 움직이기가 넘 힘들었다. 배가 몸의 1/2를 차지하는듯 너무 컸기때문에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일어나려고 바둥대봐도 몸을 반쯤 일으키면 다시 뒤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첨에는 안 넘어가더니 몸이 둥글둥글해서 그런지 곧 넘어갔다. '에구구 힘들어. 너무 힘들다.' 몸 하나 일으키는것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디 걷겠나? 하긴 알에서 깨어난 뒤로 난 아직까지 한 걸음도 걷질 못했다. 걸으려면 계속 발라당 넘어졌으니 걸을수가 있나..... 몸을 굴려서 엎어진 상태가 되었지만 도저히 일어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일어나면 또 발라당 넘어질 것이고, 그리고 지금은 일어날 힘이 남아있질 않았다. 일어날려고 기를쓰로 바둥대다가 지쳐버린 것이었다. 헥헥.... 그래서 일어나길 포기하고 그냥 자버렸다. 위에서 엄마가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것도 모른채..... 그렇게 내가 태어난 첫날이 지나갔다. 번 호 : 7967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0일 01:17 등록자 : LODEMP 조 회 : 90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화 이름을 받다. "우하암~~~ 잘잤다." 역시 사람이란 운동을 하고 피곤할때 자야 푹 잘 수 있다. 오랜만에 잠에서 깨면서 상쾌함을 느꼈다. 기지개를 쭉 펴고 일어나 눈을 부비려니 손이 눈에 안 닿는다.(^^;) '잉? 어떻게 된거지? 아 맞다. 난 이제 사람이 아니지....' 목을 최대한으로 늘려 아래로 내리고 얼굴을 숙이니 손이 눈에 닿았다. 눈을 부비부비 하고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난 어제(?) 잘때 땅바닥에 널부러져서 잔 것 같은데 내가 있던 자리에는 포근하게 마른 풀들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붉은 벽이 있었다. 붉은 벽??? 위를 올려다보니 벽만 보인다. 몸을 눕히고 옆으로 굴렀다.(아직 걷지 못하니까...) 그리고 다시 앉아서 벽을 올려다 보았다. 벽 위로 이제 나의 엄마가 된 드래곤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감긴것을 보니 아직 자고 있나보다. 그럼 내가 붉은 벽이라고 느낀것은 손이었나보다. '무지크군....' 손이 내 키보다 크면 몸은 얼마나 클지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누워서 방향을 틀어서 이번엔 엄마 몸통쪽으로 몸을 굴렸다. 한참 굴러간뒤 앉아서 바라보니 거대한 몸통(으로 추측되는) 한면만 보였고 끝은 보이지도 않았다. 얼마나 큰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으려면 엄마한테 말 해야겠지? 다시 누워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계속 굴리다보니 머리가 어지럽고 온 몸이 아팠다. 겨우겨우 엄마 얼굴쪽에 도착해서 일어났다. 엄마는 아직까지 자고 있었다. "엄마~~" 꿈쩍도 안 했다. "엄마아아~~~" 갑자기 엄마가 눈을 번쩍 떴다. 그 큰 눈이 번쩍 뜨이자 깜짝 놀라는 바람에 뒤로 발라당 넘어져버렸다. "뭐라고 했니?" "배고파.."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뭐라고 그랬더라??? ~~앗 그래도 갑자기 말하려니 되게 쑥시럽네... "엄마~~" 옷 드래곤도 감동을 하는구나. 이런거 보면 사람이랑 다를게 없군... 엄마 드래곤의 그 큰 눈에 감동의 물결이 넘쳐났다. "그래그래 엄마 왜 불렀니?" 이렇게 감동적인 순간에 배고프다고 말해야 하다니... "배고파..." "응? 아 그래 아침 먹어야지." 짐작은 했었지만.... 내 눈앞에 갑자기 생겨난 먹이를 보니까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그렇다고 안먹을 수도 없고... 어제 한번 먹어 봤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까 또 못 먹겠다. 이거 언제나 익숙해 지려나... 그래도 내가 배가 고프다고 했으니 먹어야지... 눈 앞에 얌전히(?) 누워있는 오크를 먹고자 제일 만만해 보이는 손을 잡아 들었다. 한입 먹으려고 입을 앙~ 벌리는데 엄마가 빤히 바라본다. "엄마는 안먹어?" 존대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뭐 여태까지 반말로 나가서 갑자기 존대를 하려니 어색했다. "어머나 엄마 생각까지.... 엄마는 나중에 먹을꺼니까 어여 먹어.." 엄마란 존재는 종족을 막론하고 다 같은가보군.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저 마음....(감동,감동) 감동은 되었다지만 오크를 먹어야 하는 난감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눈 딱 감고 한입 뜯어 먹자 그렇게 먹는게 어렵지는 않았다. 피가 줄줄 흘렀지만 옷을 안 입고 있으니 옷이 지저분해질 걱정은 안해서 편했다. 손을 다 먹고 다리를 먹고 나니 이제 몸통과 목이 남았다. 어제 몸통은 안 먹고 남겼는데 또 남기자니 그렇고 먹자니 못 먹겠고.... 손과 발 만으로 배가 부르면 좋을텐데 배가 부르지는 않고 참 난감했다. 그래도 먹어야지 어쩌겠는가... 우선 피를 쪽쪽 빨아먹고,(나도 이제 야만인이군...흑흑) 한입,한입 뜯어 먹었다. 뼈는 어쩌냐고? 걱정 마시라 다 오도독 오도독 씹을 수 있으니까..... 첨에 어찌 먹나하는 걱정과는 달리 한입, 한입 먹다 보니까 어느새 다 먹었다. 그러고 보면 해츨링도 대식가 인가 부다. 목을 남기고(목은 도저히 못 먹겠다.) 다 먹었다는 뜻으로 엄마를 올려다 보자 엄마가 나를 번쩍 들고(손으로 들은게 아니다. 저절로 떠올랐지만 엄마가 그랬겠지..) 래어 밖으로 나왔다. 레어 앞쪽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지만 그 주위에는 숲이 보였다. 엄마는 나를 들고 골짜기로 들어 가더니 개울 옆에다 나를 내려 놓았다. 그러자 개울에서 물줄기가 여러개 올라 오더니 내 몸을 휘감아 내렸다. 엄마가 나를 씻기려고 했나보다. 물줄기가 나를 다 씻자 이번에는 따뜻한 바람이 나를 휘감았다. 이번에는 물기를 말리는가 보다. 몸을 다 씻자 엄마는 나를 레어 앞에 있는 공터에 내려 놓았다. 그때부터 나의 걸음마 연습이 시작 되었다. 첨에는 걷기는 커녕 일어서서 중심 잡는것 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굴러다니기 싫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걸음마 연습을 했다. 이걸 하면서 난 나중에 절대로 애기들을 강제로 걷게 하지 않으리라 굳은 다짐을 했다. (얼마나 힘든 일인데...) 뒤뚱뒤뚱 거리지만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넘어져도 발라당 넘어지지 않고 몸을 둥글게 말아 한바퀴 돌 수 있는 요령을 터득했을 무렵 엄마가 불렀다. "점심 먹어야지...." 점심을 먹고 아직은 어색한 걸음으로 레어 앞의 공터를 한바퀴 돌았다. 드래곤의 레어 근처라서 그런지 토끼 한마리, 심지어 벌레 울음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레어 안을 탐색해(?) 보기로 결심하고 레어 안으로 들어갔다. 드래곤의 레어라고 해봐야 커다란 동굴일 뿐이었다. 단지 드래곤이 들어가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무지무지 크고 아주아주 깊다는 것 뿐이다. 레어안이 레어 밖깥쪽 공터의 수십배정도 되는 것 같다. 아마 여길 한번 둘러 보려면 하루를 꼬박 새도 다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레어 안에는 엄마가 없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안 보였다. 어디 가는것은 못 봤으니까(그 커다란 덩치로 나가는걸 내가 못 볼리 없지...) 아마 안쪽 어딘가에 있나보다.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레어 안쪽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열심히 걸어왔건만 아직도 내 뒤로는 레어의 입구가 햇빛을 받으며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고 내 앞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에고고 힘들어라... 열라게 걸어왔건만 아직 이것밖에 오지 못하다니.... 이거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거야? 우... 날아가고파..... 나도 드래곤인데 날지 못하나.....' 투덜투덜 대면서 열심히 걸어 들어갔다. 얼마나 걸어 왔을까.... 여전히 동굴은 컸지만 햇빛이 적어진 것으로 보면 꽤 걸어 들어 왔나보다. 그리고 내 앞에는 길이 두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동굴이 두갈래로 갈라 졌어도 크기는 조금도 줄어드는것 같지 않았다. 갈림길로 들어서서 얼마 걸어들어가지 않았는데 앞쪽에 빛이 보였다. 밖으로 통하는 입구인가 보다.... 하면서 기껏 들어온 곳이 다른 입구라는 실망감과 허탈감에 빠지면서 그래도 이왕 온거 어디로 통하는지 알고 싶어서 빛을 향해 걸어갔다. 다리가 무지무지 아파지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때쯤 난 어떤 광장 입구에 들어섰다. 너무 빛이 강렬해서 한동안 눈을 빛에 적응시켜야 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앞을 본 순간...... 내앞에는 보물들이 쌓여 있었다. 광장 위에는 강한 빛을 내는 둥근 물체가 있어 광장 안을 환히 비춰주고 있었다. 그 많은 양의 보물들을 보면서 입을 벌려야 하겠지만 너무 보물이 많다 보니까 보물들이 그냥 그렇게 보였다. 정말 무지 많았다. 큰 포크레인으로 퍼 날라도 며칠을 퍼 날라야 할 것 같이 많았다. '이게 바로 드래곤의 보물이구나.....' 보물을 보긴 봤지만 여태 걸어온 것이 너무 힘들어서 나는 그자리에서 그냥 누워 버렸다. 바닥이 찬 것이 오히려 시원했다. 열심히 걸어와서 열이 났나보다. 여기서 한숨 잘까 하는데 보물산 위쪽에 왕관 비스므레 한 것이 보였다. '옷 저것은 왕관...' 여기까지 온 김에 왕관 한번 써 보고 싶어서 보물 산 위에 어기적 어기적 거리며 올라갔다. 과연 왕관이었다. '나도 참 눈이 좋지, 저 밑에서 여기 있는 왕관을 보다니.....' 히죽히죽 웃으며 털푸덕 주저 않아 왕관을 집어들었다. '가만있자 이 빨간게 루비인가? 그럼 이 파란게 사파이어야? 잠깐 파란게 사파이언가 에메랄든가? 초록색이 에메랄드였던것 같은데?' 평소에 보석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는 보석의 이름을 찾기에 골몰하다가 보물산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몰랐다. 갑자기 와르르~~ 하더니 보물사태가 생겨 버렸는데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다간 보물에 파묻혀 익사하게 생겼다. "끼에에엑~~~~~엄마아아아~~~~" 눈앞이 번쩍했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가 눈 앞에 있었다. "뭐하는 거야? 놀랬잖아. 지도 드래곤이라구 태어난지 이틀밖에 안 된 주제에 엄마 보물창고에 들어와? 어쭈 벌써 하나 잡아들었네?" 내 손에는 아까 집어 들었던 왕관이 아직까지 쥐어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놓지 않았나보다. 멋적어서 슬며시 왕관을 놓고 싶었지만 나는 현재 공중에 뜬 상태여서 여기서 놓았다간 땅에 떨어지면서 망가질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 이거..." 하고 얌전히 엄마께 바쳤다. 그리고 애교스럽게 웃는것도 잊지 않았다. "헤헤헤헤~~~~"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사고치기 시작하니? 위험할 뻔 했잖아. 다음부터 조심해 알았지?"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진심어린 반성의 빛을 얼굴에 띠었다. "저녁먹으러가자...." 엄마는 왕관을 보물더미 위에 올려 놓고는 나를 들고 광장에서 나왔다. "엄마 나는 언제 날수 있어?" "벌써 날려구? 그렇게 일찍 못날아. 빨라야 1년 후에 날 수 있어...." 흠 드래곤도 태어나자마자 날 수 있는건 아닌가 보구나.... "내일은 너 이름지으러 갈꺼야." "이름?" "그래. 너 아직 이름이 없쟎니, 내일 엄마랑 레드 드래곤 어른들께 인사 드리러 가서 너의 이름을 지을꺼야." 아~~! 그러고보니 아직 나는 이름이 없구나..... 전에 인간이었을때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없는 일이니까... 에구구 이름이 없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군.... 음, 드래곤 이름은 어른들이 지어 주는 거구나... 다음날 아침을 먹고 몸을 씻자 나는 엄마의 몸을 타고 날아갈 꺼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나의 기대는 엄마가 폴리모프를 하는 순간에 와장창 깨졌다. 엄마의 몸에서 붉은 빛이 나더니 작아지기 시작 했고 결국에는 내앞에 불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인이 짠 나타났다. 역시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되게 예뻤다. 이럴때 아부를 해야지 언제 하겠냐? "우아~~~ 엄마 되게 예쁘다..." 엄마는 아부가 싫지 않은 듯 웃음을 머금고 내 머리를 삭삭 쓰다듬어 주더니 나를 덥썩 안아 올렸다. " 자 가자." 역시 공간이동으로 가나 부다. 엄마와 내 주위가 하얀 빛으로 둘러 싸이더니 번쩍하는 순간 "다 왔다." 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집(?) 주위와는 달리 붉은 바위만 보이는 것이 삭막했다. 그리고 더웠다. 저 위쪽으로 커다란 동굴이 보였는데 거기가 목적지 인듯 엄마가 나를 들고 동굴을 향해 날아갔다. 동굴은 우리집보다 좀 더 컸다. 그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자 넓은 공터가 나왔는데 어디서 빛이 나오는지는 몰라도 밝았다. 그리고 중앙에는 엄마보다도 더 큰 드래곤이 앉아 있었고 그 주위에는 엄마와 같은 붉은 머리를 가진 여러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않아 있었다. 엄마가 그 공터 안으로 들어오자 큰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오 이제야 오는군.... 어서 오너라." 여자 목소리였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위엄이 서려 있는 목소리 였다. " 오랜만에 뵙는군요. 어머니." 어머니? 앗 그럼 저 드래곤이 내 할머니란 소리네... "그래 아마도 700년 만이지? 전에 인간세상에 나갈때 잠깐 들린 뒤 처음 보는 거니까... 오호라 그 애가 너의 아이냐? 너가 해츨링을 낳다니 정말 믿겨지지 않는구나.... 평생 안 낳을것 처럼 하더니만....." "안녕하세요, 해야지." "안녕하세요~" 난 엄마 손에서 나와 할머니(?) 드래곤 앞을 날라갔다. 아마 할머니가 나를 끌어 당겼나보다. 아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러면서 엄마한테 한마디씩 했다. "오랜만이군요." "저 아이가 당신 애군요, 여자아인가요?" "저 애의 아버지는 지금 인간세상에 있나보죠?" "아니예요. 동면하고 있다던데요?" 저사람들도 다 드래곤일 것이다. 그런데 드레곤들도 모이면 저렇게 수다를 떠는구나... "2000년 동안 해츨링이 태어나지 않아서 걱정을 했는데 네가 이렇게 태어났구나.... 내가 죽기 전에 너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단다. 얘야 내가 네 할미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만 끄덕끄덕 했다. 그러자 내 몸이 휘 날라 가더니 어떤 중년 남자가 나를 꼭 안았다. "에구구 이쁜것.... 요렇게 이쁠수가.... 세상에 세르니안이 낳은 아이라니..." " 자 이제 이름을 짓지요? 뭐라고 하는게 좋을까요?" 중년 남자 옆에 있던 어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했다. 그리고는 나를 넘겨 받아 안았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말이냐? 그러고보니 아무도 너에게 소개를 안 했구나. 난 레드 드래곤의 대표자 란다. 칼 제피로스 라고 하지." 끄덕끄덕 " 그리고 저기 드래곤으로 계시는 분이 우리 레드드래곤을 비롯해서 전 드래곤 종족중 최 연장자이신 칸 세실리스 시란다. 올해로 9243세 이시지..... 그리고 아까 너를 안으신 분은 칸 시스파슈타인 이시란다. 올해 7489세 이시지. 레드 드레곤중 두번째 연장자시고...." 끄덕끄덕 "그러면 우리 엄마 이름은 뭐예요?" "너의 엄마? 칼 세르니안 이라고 한단다. 엄마가 안 가르쳐 줬니?" 끄덕끄덕 "칼하고 칸이 뭐예요? 이름 앞에 하나씩 붙어 있네..." "드래곤의 계급이라고나 할까? 드래곤은 핏줄을 따지지 않으니 인간들 처럼 성이 필요 없지. 단지 나이와 이름 그리고 색뿐이야.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 이게 바로 이름 앞에 붙여지는 칭호지 드래곤이 성인이 되면 5000살이 될때 까지 칼이라는 칭호를 쓴단다. 그리고 5000살이 넘는 고룡이 되면 칸이라는 칭호를 쓰지. 그래서 칼 세르니안, 칸 시스하슈타인.... 이렇게 부르는 거란다." 내가 이렇게 드래곤 명칭에 대해서 강의를 듣고 있을 무렵 내 주위는 내 이름을 짓느라고 씨끌씨끌 했다. "엄마 이름을 따서 세실리안이 어때요?" "이봐요 칼 레스틴, 그건 내 이름이라구욧." "그럼 세라가 어때요?" "너무 흔해요.." "그럼 제인." "그건 더 흔하쟎아요." "좀 예쁜것 없어요? 오랜만에 태어 났는데 좀 멋있게 지어 주자구요."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아시리안으로 하지?" "아시리안? 독특한 이름이네요." "괜찮은데? 신비하게 느껴 지잖아." "그럼 그걸로 하지요?" 그렇게 해서 내 이름은 아시리안으로 결정 났다. 칼 제피로스 아저씨가 애칭으로 아린이라고 부르자 모두 애칭으로 날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짓고 모두 할머니와 엄마와 나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고 나와 엄마도 할머니께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잘 가거라. 먼 거리도 아니니 아린 데리고 자주좀 놀러 오렴." "가끔 아린 보러 찾아 가마. 아린아 나중에 할애비가 옛날 얘기 해주마." 알고보니 칸 시스파슈타인이 엄마의 아버지, 즉 나에게는 할아버지 였다. 하긴 아무리 핏줄이 없다고 해도 엄마와 아빠는 있겠지..... 어째든 이렇게 나는 아시리안, 애칭 아린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번 호 : 7969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0일 01:23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3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3화 아린 성장하다. 제 3화 아린 성장하다. 할머니(?) 레어에서 돌아온 뒤 엄마 레어에서 가보지 못했던 왼쪽 길로 가 보았다. 왼쪽 길 끝 에는 오른쪽 길과 마찬가지로 넓은 광장이 있었고 그곳도 밝게 빛을 내는 구체가 천장에 떠 있었다. 다른점은 오른쪽 방이 보물방(?) 이라면 이쪽 방은 책방(?) 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도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게 아니라 그냥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던 것이다. 저런 곳에서 책을 어떻게 찾나.... 했지만 엄마는 간단히 내 걱정을 해소시켜 주었다. 엄마가 가볍게 손짓 한번 하자 책 속에서 한권의 책이 튀어나와 얌전히 엄마의 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책을 다 읽고 휙~ 던지자 살짝 날아가 책더미위에 착~ 놓이는 것이었다. "와~~ 대단해 엄마." 내가 손뼉가지 치면서 탄성을 발하자 엄마가 싱긋 웃고는 "너도 할 수 있는 거야. 이 방안에는 마법이 걸려 있거든." "엄마가 마법을 건거야?" "성룡이면 어떤 드래곤이든 다 할 수 있는 마법이야." "난 언제 성룡이 되는데?" "500년 뒤에." "그렇게나 오랜 뒤에?" "우리 드래곤이 만년까지 살 수 있는거에 비하면 성장하는 시기가 짧은 편이야. 인간을 보렴, 겨우 100년 살까 말까 하면서 성장하는데는 20년이나 걸리쟎니.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무척 짧은거지." "아 그렇구나. 근데 엄마 나도 책 읽고 싶어~~" 엄마는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럴만도 한 것이 태어난지 3일밖에 안 된 녀석이 책을 읽고 싶다고 하는데 황당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책을 너무 좋아해서 읽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내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걸음마 연습도 하루 이틀이고, 날려면 1년이나 있어야 하고, 근처에는 동물은 커녕 벌레 한마리 없고, 멀리 나갔다간 엄마가 당장 공간이동 시켜 버리니 멀리 가볼 수도 없고, 보물 창고에서는 다시 보물 더미에 묻혀 익사할 까봐 겁나서 잘 못 놀겠고..... 그러니 얌전히 책이나 읽을 수 밖에..... "엄마아아~~ 나 채애애액~~~~" "잠깐 기다려봐, 넌 아직 글도 모르쟎아." 아 글고 보니 난 드래곤 글은 모르지... 말이야 태어나자마자 할 수 있다지만 글까지야 알 수 없을 테니까..... ".........." 엄마는 손가락을 내 머리에 대고 뭐라고 중얼 거렸다. 그러자 내 머리 속에 뭔가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엄마가 책 한권을 건네 주면서 옛날 이야기 책이니 읽어 보라고 했다. 책을 펴들고 보니 첨 보는 글이었는데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글이 고대어라는 것 까지 알 수 있었다. 놀래서 암마를 쳐다보자 엄마가 씩 웃더니 "글을 읽게 해주는 마법을 건거야, 엄마도 어렸을때 할머니가 이렇게 마법을 걸어 주셨거든,,,," "글을 배우는게 아니네.." "언제 그걸 가르치고 있어? 그냥 마법 한번 걸면 간단한걸..... 아~ 인간의 언어와 글도 알 수 있을꺼야." "인간의 글은 왜?" "여기 책의 절반 정도가 인간의 말로 쓰여 있거든..." 우와,,, 마법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보다. 이렇게 편히 글을 익힐 줄이야 누가 알았어? 그날부터 나는 책방에 들락 거리면서 살았다. 가끔 심심하면 레어 앞 공터를 산책하고 책읽기 지루하면 보물방에 가서 보석 분리도 해보고, 금화가 몇개인가 세어보기도 했다. (물론 끝까지는 못 세지만). 단, 보물 위에는 절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 책방의 책은 내용으로 찾았다. '무슨무슨 내용의 책' 하고 맘속으로 생각하면 내 앞으로 착착 날아와서 놓였다. 하긴 내용으로 찾아야지 이 많은 책들의 제목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그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찌라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내용으로 책을 찾지...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갔다. 한달이나 두달에 한번쯤 할아버지(?) 가 찾아 오셔서 옛날 이야기도 해주시고, 간식(?) 도 주시고, 가끔 밖으로 멀리 데려가서 사냥하는 것도 보여 주셨다. 뭐 사냥이라고 해봐야 한번 울부짓으면 음식들이 알아서 나와 쓰러지더구만... 이게 바로 드래곤피어라는 것인가? 그리고 어쩌다 가끔은 할머니 레어에 찾아가 놀기도 했다. 할머니네 보물방과 책방은 엄마꺼보다 훨 컸다. 그래서 여기서도 절.대. 보물더미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뭐 보물더미 사이에 낀 검을 빼려다가 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파묻힌 적도 몇번 있었고, 목걸이 목에 걸어보려다가 얼굴에 끼는 바람에 빼내려다가 망가트린 목걸이도 몇개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놀다가 오곤 했다. 엄마는 처음 몇번은 같이 할머니 레어에 갔지만 나중에는 나 혼자 공간이동 시켜주곤 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갔고 내가 드디어 날 수 있게 되었다. (1년이 지난 뒤 날고 싶다는 목표를 놓고 무지 무지 노력했다) 언덕에서 수없이 떨어져 굴러서 많이 다치기도 했지만 엄마의 마법이면 금방 낳았다. 몇번 잘 날다가 절벽에서 추락 했었지만 그때마다 엄마가 공간이동으로 나를 레어 안에다 떨겨 놨다.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진 날이면 엄마한테 무지 맞았다. "엄마가 그쪽으로 날지 말라고 했잖아!" 하면서 긴 지휘봉 막대기로(뭘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끝에는 금테가 둘렸고 큰 루비도 박혀있는 거였다.) 두들겨 팼다. 물론 폴리모프한 상태에서 팼다.( 안그랬다간 내가 맞아 죽게?) 그리고 엄마가 팬 날이면 치유 마법도 안 걸어 줬다. 그러면 나는 안쓰럽게 보이기 위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엄마 눈치를 힐끗힐끗 쳐다 보면서 낑낑 댄다. 그럼 나중에 엄마가 견디지 못하고 치유마법을 걸어 줬다. 그리고 한번 꼭 안아주면서 "담 부터 그러지마~~ 알았지?" 했다. 역시 엄마는 엄마야~~~. 어느정도 잘 날 수 있을때 난 엄마한테 할머니 레어에 날아서 가겠다고 졸라 봤지만 엄마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거였다. 물론 아무도 해츨링을 건들지 못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있는 거라면서 엄마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 레어에 보낼 때는 꼭 공간이동으로 보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먼 거리를 날아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레어 주위를 날아보는 것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오셨을때 졸라봤지만 역시 할아버지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단지 조금 더 큰 다음에 날아가 보라고 하셨을 뿐이었다. "히잉~~~ 언제?" 라고 울먹여 봐도 역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것에도 흥미를 못 느낄 무렵 난 책방에서 '초보 마법서'라는 책을 발견했다. '오~~! 그래, 바로 이거야~~,드래곤은 마법의 종족, 내가 왜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그러나 나의 이 멋진 생각도 무참히 깨졌다. "안돼!!" "히잉~~~ 왜?" "아직 넌 마나를 다룰 줄 몰라. 그러니까 지금 너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제 1 클래스의 마법도 못해. 아니 태어난지 3년밖에 안 된 녀석이 벌써 마법을 배우겠다고 난리야?" "껄껄껄~~~. 저녀석은 아마 크면 애들 뒤치닥거리나 하게 될 것 같구나." "정말, 이녀석 하는 짓이 꼭 드래곤 대표감이라니까~~." "네 성격을 그대로 닮지 않은것이 다행이지 뭘 그러냐?" "뭐라고욧? 아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너한테는 드래곤 로드고 고룡이고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 드래곤 로드야 네 또래니까 그렇다 치고 고룡한테도 바락바락 대드는게 너 아니냐?" "흥, 고룡이면 고룡답게 굴어야 대접을 해주든 말든 하죠!" "메야? 아니 내가 뭘 어쨌길래 그래?" "어머나~~, 아버지가 주책을 떨고 다녔다는 것을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시나보죠?" "흥, 레드 드레곤에서 성깔 드~~~러운걸로 유명한 너 한테 누가 인정을 받겠냐?" "뭐라고욧? 헬파이어~~!" "흥, 그깟 9클래스의 헬파이어 갖고 이몸을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냐?" 엄마의 손에서는 강렬한 붉은 빛과 함께 불꽃이 솟구쳤고, 그런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눈하나 깜짝 안 하셨다. 그러나 엄마의 손에서 솟구치는 불꽃은 장난이 아니었다. 열기도 열기지만 그 불꽃이 커짐으로 인해 레어가 쿠르릉~~ 하면서 진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럴때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키에에엑~~~ 우왕 엄마아아아~~~." 역시 이번에도 효과가 있다. 엄마는 즉시 불꽃을 소멸시켜 버린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보니 나는 거기에 대응하는 법을 벌써 터득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할머니 레어에서 둘이 싸우다가 할머니 레어 천장을 무너뜨린 적이 있었다. 입구에서 가까운 천장이어서 다행이 레어 안에는 별 피해가 없었지만 그 덕분에 할머니가 화가 나서 엄마와 할아버지한테 가벼운(?) 브레스를 한방 먹인 적이 있었다. 물론 엄마와 할아버지가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와 할아버지의 다툼이 멈췄다. 엄마와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철좀 들으라는 책망을 들었었고 할아버지는 아무 말 못하시고 얌전히 물러 났지만 엄마는 할머니한테 덤벼 들 뻔 했었다. 그때 내가 나서서 엄마한테 아부를 떨지 않았다면( 최대한 이쁜 표정으로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제 2탄으로 엄마는 할머니와 싸웠을 것이다. 이걸 본 레드 드래곤 대표 아저씨가 나보고 "넌 내 뒤를 이어야 할 것 같구나, 나보다 더 능숙하게 잘 하는데?" 라고 하셨다. 그걸 보면 이렇게 싸우는게 흔한 일이었나보다. 역시 드래곤중에서 가장 성격 급하고 더러운게 레드 드레곤 이라더니 그게 맞는 말인가 보다. 어째든 그걸로 나의 마법을 배우겠다는 포부는 조각조각 나버렸다. 할아버지 말에 의하면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마나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되는데 그때서야 인간이 다루는 마법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100살쯤 먹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드래곤의 마법은 용언 마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룡이나 쓸 수 있는 것이고 성룡들은 시동어를 외쳐야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주문을 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 많은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시동어만 알면 마법을 쓸수 있고 위력은 인간 마법사를 훨씬 윗도는 것이니 왜 드래곤이 마법의 종족인지 알 수 있을것 같았다. (원래 판타지 소설을 보고 알고 있었다. ^^;) 어째든 나는 마법을 배우려면 아직 97년을 기다려야 한다. 엑~~ 그걸 언제 기다리고 있냐? 하루 하루가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책들도 이제 이야기 책은 거의 다 읽어서 이제는 마법서나 역사서, 철학서 같은 좀 심오한 책들만 남았다. 이것은 지겨워서 안 읽었다. 할아버지한테 옛날 이야기나 용사의 이야기 듣는 것도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 했고, 보석도 왠만한건 척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 되어서 보물방에는 잘 가지도 않았다. 이렇게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내 눈에 띄인 책이 있었으니.... (역시 책속에 길이 있었다.) 검술교본 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어짜피 인간 세상에 나가서 모험을 하려면 마법갖고는 안 될꺼니까 미리미리 검술을 익혀 놓는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엄마의 보물 방으로 가서 맘에 드는 검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는 여자니까 레이피어가 어울릴꺼야.' 하고 레이피어를 찾아서 들어 봤지만 웬걸 너무 가벼워서 휘두를 맛이 안 났다. '그래그래, 해츨링이라도 힘이 쎈가보지. 그럼 좀 큰 롱소드로 해야 겠군...' 했지만 너무 커서 휘두루기 불편했다. 들고 다닐수는 있었지만 몸에 비해 큰 바람에 잘 휘두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다시 레이피어로 눈을 돌렸고 인간세상에 나갈때는 여자 인간의 모습으로 나가니까 레이피어가 나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하지만.... 몸동작을 하나하나 하면서 역시 롱소드를 들고 하는게 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왕 고른거 이걸로 끝까지 밀어 부치자 하는 생각에 내가 고를 레이피어로 검술 동작을 익히기 시작했다. 찌르기, 베기, 차올리기,...... 검술 교본에는 한가지 동작을 충분히 익힌 뒤에 다음 동작을 하라고 했지만 그걸 언제까지 익히고 있겠는가?(나도 참 성격이 급하다.) 해서 한꺼번에 몇개의 동작씩 해나갔다. 나 혼자 익히는 것이니 (이번에는 엄마와 할아버지께 말씀 안 드렸다.) 어느 정도가 되야 잘 하는것인지 몰랐기에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 그 다음으로 바로바로 나가 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어느날 엄마한테 검술 동작 연습 하는것을 들켜 버렸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데굴데굴 구르며 깔깔깔 웃어 버렸다. "우씨~~웃지마아아아!" 그래도 엄마는 계속 웃기만 했다. "푸하하하~~~~" "히이잉~~~" "아 그래 미안미안 큭큭큭... 너 지금 뭐하고 있니?" "보면 몰라? 검술 연습하고 있쟎아." "그래그래 검술 연습.... 키득키득키득," "나원참 검술 연습한다고 칼들고 설치는 해츨링은 내 생전 너가 첨이다." 보니까 뒤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황당함과 웃긴다는 감정이 섞인 할아버지 얼굴은 참 묘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래 아린아~~ 검술연습은 잘 되냐?" "몰라요!" 우씨 검술 연습하는게 그렇게 웃기나? 나는 화가나서 팩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아린아, 검술은 말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야, 그러니 인간이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거지 너가 아무리 지금 모습으로 검술을 연습 한대도 정작 인간으로 폴리모프하면 몸이 달라지기 때문에 검술을 사용하지 못해요. 그리고 네가 드래곤의 모습일때 검술을 잘 다룬다고 해도 너가 성장하면 검술이 필요없어!" 한 마디로 왜 쓸데없은 짓을 하냐는 거였다. 되게 열 받았다. 여태까지 내가 한 짓이 쓸모없는 일이었는데 그게 열 안 받게 생겼나? "에구구 이쁜 내 새끼~~" 내가 토라져 있자 한참을 웃던 엄마가 나를 덥썩 끌어 안고 부비부비 했다. "엄마~~ 숨막혀!" 이걸로 내 검술 연습은 막을 내렸다. 할아버지가 말씀 하시길 검술을 익히고 싶으면 인간으로 폴리모프해서 익히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폴리모프 하려면 아직 90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래서 검술을 익히자는 목표도 저 뒤의 미래로 미루어 졌다. 세월은 흘러 흘러 갔다. 심심하다고 심하게 투덜 대다가 짜증난 엄마 마법에 의해서 몇년간 동면을 하기도 했고, 엄마의 감시를 피해 산의 지리를 익히러 나갔다가 들켜서 무지 막지하게 맞기도 했었다. 너무 심심해서 인간의 역사책을 읽기도 했고 심지어는 철학책까지 보기도 했다.(몇장 보다가 말았지만.....)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드.디.어 내가 100살이 되었다. 이제 마법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난 너무 기뻤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아아~~ 어떻게 해야해? 응? 응? 응?" "그냥 주문을 외워봐, 거기 써 있쟎아." 엄마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마나를 느껴야 되는거라며? 여기에 형태를 생각한뒤에 마나를 계산해서 넣어야 한다고 했는걸?" "그거야 인간들 얘기지, 넌 그냥 모양을 떠올리면서 주문을 외우면 돼" "마나를 안 넣고도?" "우리는 마나를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용 할 수 있어, 너는 숨쉬기 할때 얼마만큼 어떻게 쉴지 계산하고 쉬니?" "아니." "그거와 같아. 그냥 자연스럽게 해. 시간이 좀 지나면 너가 본능적으로 마나를 느낄 수 있을꺼고, 그때면 너가 마나를 움직여서 마법을 쓸 수도 있을 테니까. 지금은 그것까지는 무리니까 너무 앞서서 나가려고 하지마." "흐음~~" 나는 지금 초보 마법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여기에는 마나란 어쩌고 저쩌고를 서두로 이런 저런 설명이 쭉 있는데 간단히 결론만 말하자면 '마법을 쓰려면 자연속에 고루 분포하는 마나를 느끼고 이것을 자기 몸속에 축적해야지만 마나를 쓸수 있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전혀 그런것을 안해도 주문만 외우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거였다. '오옷, 확실히 드래곤이 편하긴 편하군... 그냥 주문만 외워도 마법을 쓸 수 있다니.... 그럼 뭘 먼저 해볼까?' 뭘 할까 고민 하면서 책장을 뒤로 넘기자 엄마가 한마디 했다. "넌 아직 마나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쓸데없이 큰마법을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거 부터해. 작은거 부터." '흠... 그럼 기초 마법부터 해봐야 겠군,,,, 어디보자,,, 아! 여기 기초마법이 있구나. 음 우선 이거부터 해볼까?" "불에서 태어난 빛이여, 지금 내손안으로 모여 내앞을 비추어다오, 라이트!" 그러자 내밀어진 손 위에서 작은 빛들이 모여들기 시작 하더니 야구공만한 빛의 구체를 형성했다. "우와~~ 됐다. 됐어. 엄마 엄마 이것봐봐 했어, 했다니까~~~" "아 그래그래 잘했어," 엄마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보지도 않고 말했지만 나는 너무너무 신기했다. 손을 살짝 위로 올렸더니 구체가 공중으로 둥둥 떠 올랐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팍! 하고 꺼져 버렸다. "엄마 엄마 이거 왜이래 응? 이거 꺼져버렸어." "그만큼 네가 아직 마나를 쓰지 못한다는 거야. 거기다가 계속 마력을 보내야 그게 계속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 "마나를 어떻게 보내는데?" "그건 나중에 저절로 알게 돼!" "그럼 딴거해봐야지. 아 이거이거..." 나는 파이어 볼을 외쳤고 곧 내 앞에 배구공만한 파이어 볼이 생성되었다. 그런데 볼을 던질때 잘못 던져서 레어 안에 있던 마른 풀더미(내 침대이다.^^) 위로 떨어져서 금방 불이 붙어 버렸다. "우아앗 엄마 엄마 불났어, 어떻해, 어떻해. 물! 물이 어딨지?" 엄마는 콧김을 흥~! 하고 한번 불었고, 그 콧김에 의해서 불은 꺼져 버렸다. 그리고 난 엄마한테 알밤을 하나 얻어 먹고 밖으로 내쫒겼다. "나가서 놀앗!" 레어 밖으로 나와서 내가 마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한 나는 기초 마법이란 마법은 다 해봤다. "...... 파이어 에로우! 우왓 됐다, 됐어. 그다음, 그다음...... 아이스 미사일! 오옷 역시 대단해. 또또.... 라이트닝 볼! 우아 우아 . 그담, 그담....." 레어 앞 공터는 내가 난사한 마법에 의해서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리 기초 마법이라지만 계속 난사하다보니 조금씩 조금씩 망가졌던(?) 것이다. 한참동안 마법을 난사하던 나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 왔고 그자리에서 엎어져서 자버렸다. 한동안 자다가 깨보니 레어 안이었고 일어난 나를 보자 "이 멍청아, 처음부터 그렇게 많이 마법을 쓰는 녀석이 어디 있니? 아무리 신기하다지만 마나를 다 쓸때까지 마법을 써?" 아 그러고 보니 마나를 다 쓰면 피곤해진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럼 내가 피곤했던게 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거구나.....호오, 그랬던 거였군.... 그다음 날부터 나는 초보 마법책에 있는 마법을 하나하나 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시간쯤 하면 피곤해 져서 자야 했는데 며칠이 지나감에 따라 이제는 제법 몇시간동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의 난이도도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레어 앞 공터는 점점 예전의 형상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몇달이 지나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찾아 오셨을때 나는 할아버지를 졸라 음식을 구하러 나갔다. 거기에 가서 내가 여태까지 갈고 닦았던 마법 실력을 마음껏 펼쳐 보았다. (나도 참 잔인해....) 그리고 이왕 여기까지 온것, 대상이 없어서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치유 마법과 회복 마법도 구사해 봤다. 그러자 할아버지 왈 "아린아, 음식갖고 장난치면 못쓴다!" 그렇게 신나게( 나도 참 잔인하다니까 ) 놀다가 레어로 돌아왔다. 그다음부터 몇달에 한번씩은 꼭 나가서(?) 놀다가 오곤 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갔고 나는 드디어 폴리모프를 할 수 있었다. 엄마의 설명에 의하면 내가 변하고 싶은 모습을 자세히 생각 하면서 주문을 외워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이라서 머리색과 눈색 그리고 성별은 바꾸지 못할 꺼라면서 머리와 눈 색은 내가 레드 드래곤이기 때문에 붉을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폴리모프에 많이 익숙해지면 머리와 눈 색은 물론 성별과 종족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했지만 드래곤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별이나 머리색, 눈색을 바꾸지 않아서 보통 그런 것들로 드래곤의 종족과 성별 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어째든 그럼 나는 엄마의 모습을 닮은 소녀로 폴리모프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내 몸에서는 붉은 빛이 났고 나는 신기해져서 내 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빛이 사라자 면서 나는 얼굴만 사람이고 몸은 드래곤인 괴이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엄마가 깔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폴리모프가 다 될때까지 네가 변하고 싶은 모습을 생각하고 있어야해, 그렇지 않으면 되다 만 폴리모프가 될꺼야." 그래서 나는 다시 주문을 외웠고, 이번에는 눈을 감고 계속 내가 변하고 싶었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렸다. 시간이 좀 지났다 싶을때 갑자기 추워졌다. 눈을 뜨자 엄마가 싱긋 웃고 있었다. 내 몸을 내려다 보자 내몸은 붉은 머리를 등까지 늘어뜨린 알몸의 소녀가 되어 있었다. 알몸이어서 추웠나보다. "오, 잘 되었구나...." "엄마 근데 옷은 어떡하지?" 그러자 엄마는 뭐라고 중얼 거렸고(알아듣지 못했다.) 내몸에서 옅은 빛이 생기더니 나는 예쁜 하얀색의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와! 예쁘다." 하고 한바퀴 돌다가 드레스 자락을 밟고 벌렁 넘어져 버렸다. 드레스가 너무 길고 치렁치렁 했던 것이다. "우씨... 엄마 이거 말고 딴거." 그러자 이번에는 간편한 셔츠에 바지를 입게 되었다. 이게 훨씬 활동하기 편했기에 나는 만족해 했다. 이제 사람으로 폴리모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검술을 연습하려고 결심하는 나였다. 또 몇년이 흘러 갔다. 이제 폴리모프를 할 수 있게 된 나는 검술도 독학으로 터득하고 있었고 또 가끔은 사냥하러 나가면서 실전을 쌓아가고 있었다. 어느날 레어 앞 공터에서 열심히 검술 연습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오셨다. "오~~, 아린아 열심히 연습 하는구나." "아! 할아버지 오셨어요? 엄마는 안에 계세요." "오냐, 알았다. 그럼 연습해라." "네~~~." 할아버지는 안으로 들어 가셨고 나는 검술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호~~, 저녀석 정말 열심히 하는걸? 레드 드레곤 역사상 가장 부지런한 녀석일꺼야." "그러게 말예요, 1살이 되자마자 날겠다고 날리를 쳐서 며칠만에 날지를 않나. 마법을 익히겠다고 해서 100살이 된 다음 익히라고 했더니 100살이 되자마자 익히더니, 이제는 7클레스까지 익혔던 걸요? 아직 성룡이 아니라서 주문을 외워야 하긴 하지만.....그래도 첨에는 말도 안하고 움직이려 들지 않아서 저능아가 아닌가 얼마나 걱정 했다구요." "녀석, 빨리 인간 세상에 나가보고 싶은가보군.... 그런걸 보면 꼭 널 닮았다니까. 너두 성룡이 되기 전에 인간세상에 나가보고 싶어서 가출 했다가 몇시간만에 잡혀오곤 했잖냐?" "그얘기가 지금 왜 나와요? 그리고 첨에는 몇시간은 아니었어요, 하루였지." "그래그래, 첨 가출했을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래도 설마 또 하랴 싶었는데... 세르니안이 현명하게도 너한테 추적 마법을 걸어 놔서 그남아 다행이었지, 안그랬음 레드 드레곤 해츨링이 가출했다는 사실이 드레곤 전체에 퍼졌을꺼다." "흥, 해츨링일때 모험을 단행한 첫 드래곤으로 알려졌겠지요." "그래도 아린이 가출할 생각을 안 하는게 다행이야. 저녀석이 가출을 하려고 하면 세르니안이 뒤집혀질꺼다." "칸 세르니안께서 나서면 전 레드 드레곤이 다 나서야 겠지요." "그래, 아마 그렇겠지, 뭐니뭐니해도 저 아린 녀석은 2000년만에 처음으로 태어난 해츨링이니까." "그렇군요, 저녀석 바로 위의 녀석은 화이트 드래곤이지요?" "그래, 그녀석이 태어나고 성년이 되었어도 태어나는 해츨링이 1000년이 넘게 없어서 드래곤 로드도 걱정했었지, 저녀석이 태어나서 다행이야. 아마 저녀석 다음으로 해츨링이 태어나기 전까진 저녀석은 모든 드래곤 종족중 단 하나의 해츨링 이니까." 할아버지와 엄마가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검술 연습을 마치고 레어 근처의 냇가로 가서 몸을 씻고 왔다. "그래, 아린아 검술이 얼마나 늘었니?" "그래도 이젠 좀 늘은것 같아요, 예전에는 사냥하러 갔을때 검술로는 부족해서 꼭 마법을 써야 했었거든요, 그런데 전에 갔을때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한 녀석을 잡았지 뭐예요?" 음음,,, 내 검술 실력이 벌써 그렇게 늘었을 줄이야... 난 내 자신을 너무 기특해 하면서 할아버지께 신나서 얘기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 고작 오크 한마리 잡아온 주제에, 그것도 그거 한놈 잡아오면서 다쳐서 엄마가 치료 해줘야 했쟎아. 오우거나 가고일은 아직도 못 잡으면서..." "윽! 엄마는 이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의 아픈 가슴을 그렇게 콕콕 찌르다 못해 쑤시다니요, 그래도 마법으로는 잡을 수 있쟎아요." "당연하지, 드래곤이 마법으로도 가고일한테 당한다니 말이나 돼?" 윽, 엄마는 전에 내가 가고일 떼에 당한게 아직도 화가 나시다 보다. 그때 검술도 왠만큼 할줄 알겠다, 마법도 7클레스까지 익혔겠다 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사냥을 나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고일떼가 나한테 덤벼드는 바람에 (내가 자기네 먹이로 보였나보지...) 칼 한번 못 휘두르고 마법으로 간신히 간신히 도망쳤는데 (높은 단위의 마법일 수록 주문이 길어서 낮은 단위의 짧은 마법밖에 사용을 못했었었다.) 그걸 본 엄마가 화가 나서 거기있던 가고일을 전멸 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한번 크게 혼이 난 나는 레어로 돌아와서 엄마한테 무지무지 얻어 맞았고 그 다음 날부터 마법이랑 검술을 더욱 더 열심히 익혔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익힌 보람이 있는지 전에는 혼자 어슬렁 거리던 오크를 발견해서 검술로만 그녀석을 잡았던 것이다. 물론 좀 다쳐서 엄마한테 크게 혼나고, 엄마가 오크 전멸 시키러 가려는걸 간신히 말렸었지만, 내 실력이 늘은것은 인정해 줄 수 도 있지 않겠냐는 거다. 그렇게 그날도 지나가고.... 그 다음날도 지나가고, 또 그 다음날도..... 내 몸은 점점 커졌고 그러자 엄마와 내가 드래곤의 모습으로 있을때면 엄마의 레어가 좁아질 정도가 되었다. 어느날 엄마가 나를 불렀다. 거기에는 할아버지도 몇달만에 와 계셨다. "아린아!" "예?" "이제 너도 너만의 레어를 가질 때가 되었구나." "예? 엄마 그게 무슨 말? 이 딸내미가 이제 지겨워 지셨단 말인가요?" "시끄럿! 닭살돗는 짓 하지 말고 잘 들어. 너가 너무 커져서 너랑 같이 살기에는 엄마 레어가 너무 좁단 말야." "그래서 이 할애비가 네가 살만한 적당한 레어를 하나 찾아 놨단다. 그러니 이제부터 거기서 살도록 하렴. 이젠 너도 너 혼자 사냥을 할 수도 있으니, 혼자 살 때도 되었지 않니?" "그럼 거기서 나 혼자 사는거예요?" "그래, 엄마랑 같이 살지 않는다고 너무 슬퍼하지마. 엄마가 가끔 찾아 갈테니까." "그래그래, 할애비도 가끔 찾아 갈꺼고, 또 거기는 할애비 레어와 가까우니까 할애비 레어에도 찾아올 수 있을꺼다." 난 슬픈게 아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운에 어리 벙벙할 뿐이었다. 드래곤은 성룡이 되기도 전에 독립을 하는 구나, 난 500살까지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옷 이제야 이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겠구나. 세상이여 기다려라, 여기 미소녀 마검사가 가시노라! 푸하하하.... "그렇다고 인간세상에 나갈 생각일랑 하지도 않는게 좋을꺼야! 해츨링은 인간 세상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니까, 만약 나가기만 했담봐, 그날이 네 제삿날이다." 윽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입이 해벌쭉 해지는데 엄마가 모를 줄 알아?" 윽. 낭패다. "그러니까 얌전히 네 레어에 가도록 해, 엄마랑 할아버지도 같이 갈꺼니까. 아 그리고 이 검이랑 책 몇개하고 보석 몇개 줄테니까 가지고 가. 뭐 모자라는것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받고." 그렇게 해서 나는 나의 레어를 갖게 되었다. 내 나이 300살이 되던 해였다. 내 레어는 엄마의 레어만했고, 높아보이는 산들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언뜻보면 레어가 안 보이는 묘한 구조였다. 그리고 할아버지 레어와 가까웠지만, 엄마 의 레어와는 무척 멀었다. 엄마는 내게 몇개의 책과 보석을 가져다 놓으시고 내 레어를 한번 둘러 보시더니 "음...꽤 괜찮네요." "그럼그럼, 누가 찾아냈는데?" "참내 뭔 말을하면 꼭 저런다니까." "뭐야?" "와 할아버지 좋네요. 산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크기도 엄마 레어만 하고, 이런데를 어떻게 찾으셨어요?" "흠흠, 이 할애비가 우리 아린을 위해서라면 이정도는 못 해주겠니?" "됐어요, 됐어. 난 이제 갈께요. 아린아 쓸데없는 생각 말고 여기서 잘 지내 알았지? 부족한거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말하고, 그리고 가끔 할머니께 찾아가고." "아 알았어요 엄마, 내 레어를 가진 기념으로 내일 할머니께 갈께요." "그래그래, 우리 아린 착하기도 하지. 그럼 이 할애비도 가마. 가끔 찾아올테니 너무 걱정말고, 그리고 심심하면 할애비 레어에 오너라." "예,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두분." 엄마와 할아버지가 가시고 나 혼자 남자 좀 썰렁한 감이 들었다. 이제껏 엄마와 같이 살았는데, 정말 내가 친 자식인양 온갓 사랑을 부어주신 분이었다. 그래, 이젠 저 분이 내 친엄마야,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이런 다짐을 하면서 내 레어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번 호 : 8042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1일 21:56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0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4화 인간을 만나다. 제 4화 인간을 만나다. 막상 혼자 지내려니 좀 심심했다. 엄마가 있었으면 같이 놀지는 않아도 잔소리 듣거나, 두들겨 맞을 지언정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줄 엄마랑 같이 지내지 않게 되었으니 왠지 허전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뭐 그런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독립을 하게 된 이상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지 말고 나중에 모험을 하기 위한 대비를 해 나가기로 했다. (음... 기특한 나 ^^;) 우선 오늘 하루 계획표를 짰다. ' 아침에 일어나서 마법을 메모라이즈 해 놓고, 어느정도 검술을 익힌 다음에 (음 하기싫음 하지 말구...) 아침 사냥을 하러 가야지, 그리고 그 다음엔.... 뭐 나중에 생각하자. 그럼 지금 은 좀 늦었으니 마법이랑 검술 연습은 생략하고 사냥이나 하러 가야겠다.' 윽, 나도 드래곤이 되다보니까 점점 게을러 지는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우선 배가 고프니 불길한 느낌을 저 멀리 집어 넣어 놓고 사냥을 나섰다. 엄마 레어 근처의 숲은 그렇게 울창하지 않아서 멀리 나가지 않아도 몬스터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산속 깊숙히 위치해 있어서인지 숲이 울창했고 몬스터들은 콧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웃씨~~ 뭐야, 사냥감이 보이지도 않쟎아. 아 가만 엄마도 없는데 꼭 몬스터를 잡아 먹어야할 이유가 없쟎아, 그렇담 오랜만에 짐승을 잡아서 구워먹어볼까? 오홋 불에 구워먹는게 얼마만이야?' 동물들도 하나도 보이지 않구만, 나는 벌써부터 구워 먹을 생각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동물이 보여야 잡아서 구워먹던 삶아먹던 하지, 그 흔한 토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겨? 우씨~~ 되게 배고픈데.... 열받는데 그냥 드레곤피어를 사용해봐? 아냐, 그래도 첫 사냥인데 조금만 더 찾아보자. 앗 저게 뭐다냐? 오 저게바로 토끼가 아닌가? 이제 드디어 토끼 고기를 먹게 생겼군.' 그러나 내가 생각 못 했던게 있었다. 여태 내가 사냥했던 놈들은 다 커서 잡기가 쉬웠고 또 내가 사람의 모습일때는 나에게 덤벼 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쉽게 놓치지 않았는데 이 토끼라는 놈은 나를 보자마자 도망가기 시작했다. 쫏아서 뛰어 갔지만 이놈은 왜이리 재빠른지 수풀속에 숨으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열받은 난 마법을 날리기로 했다. "매직 미사일!" 호 역시 적을 쫏아가서 맞추는 마법을 쓰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토끼는 매직 미사일을 한방 맞고 쓰러졌고, 마나를 적게 넣었기에 털이 약간 그슬렸을뿐 온전했다. "푸하하핫 잡았다 요녀석, 이몸을 피해 감히 도망을 가? 그 벌로 널 구워서 맛있게 먹어주마." 난 근처에서 나무를 모아놓고 마법으로 불을 지폈다. (이럴땐 마법을 아는것이 편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칼이 엄마에게 받은 레이피어 하나뿐이었기에 그걸로 토끼 배를 가르고 (가죽은 벗길 줄 몰라 벗기지도 않았다.) 통채로 불 위에 올려 놓았다. '음... 고기를 좀 씻어야 하지 않나? 에라 모르겠다. 배가 고픈데 그냥 먹지뭐, 그나저나 이거 언제 익으려나? 에구구 털 타는 냄새가 되게 고약하네, 담부턴 꼭 가죽을 벗기고 먹어야 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불 옆에 쪼그리고 않아서 불을 헤집기도 하고, 고기를 뒤집어 놓기도 하면서 고기가 익기를 기다렸다. 얼마후 고기도 대충 익은 것 같아서 꺼내서 뜯어먹기 시작했다. 털이 눌어 붙어서 좀 이상했지만 그래도 불에 구워 먹어 본 것이 얼마만인지....좀 싱겁긴 했지만 호 이것이 바로 고기 씹는 맛이어라~~~. 대충 다 뜯어 먹고 (뼈는 안먹고 버렸다.) 좀 씻으려고 냇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턱대고 찾는다고 찾아지는것도 아니었으니까. 한참을 헤메다가 겨우겨우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찾아냈다. 물에 비춰보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고기를 뜯어 먹으면서 거기에 묻어 있던 검뎅이가 얼굴에 다 묻었나 보다. 손과 얼굴을 씻고 내침김에 물까지 잘 마셨다. 이제 또 사냥을 하러 가야지 하고 일어났는데 해가 뉘엿뉘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때서야 오늘 할머니한테 간다고 했던게 생각 났다. '이런이런 깜박하고 있었쟎아. 차라리 할머니한테 가서 얻어 먹어야겠다.' 나는 익숙해진 공간이동을 외웠고 곧 할머니 레어로 공간이동 해 갔다. 이제는 내 몸도 커진 덕분에 할머니레어에 갈때는 폴리모프 한 모습으로 갔기 때문에 드레곤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다. "할머니~~, 저 왔어요." "오 아린이 왔구나, 그래 새 레어로 갔다며? 어떻든?" "할아버지 레어랑 가깝구요 꽤 넓어서 좋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이제부터는 너 혼자서 살아야 할테니 조심하렴." "그런데 근처에 몬스터가 안보여요. 그래서 오늘 사냥하는데 꽤 애를 먹었어요, 겨우 토끼 한마리 잡았지 뭐예요?" "드래곤이 살지 않았던 곳이라서 그래, 그리고 너무 깊은 골짜기라서 없기도 하고, 사냥을 하려면 숲이 그다지 울창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한단다. 그런곳이 동물이 많아." "아 그렇군요." "그래 배가 고프겠구나." "네~~." "우선 이것 먹고 나중에 갈때 몇개 가져가렴. 그 산이 좀 커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꺼다." "예, 역시 할머니가 최고." "참 아린아 정령술을 배워보지 그러니?" "정령술요?" "그래, 정령을 다룰 줄 알면 사냥하는데 꽤 많은 도움을 줄꺼다." "할머니 우리 레드 드레곤은 불의 정령만 다룰 수 있잖아요." "그런건 아니야, 우리는 모든 정령을 다 다룰수 있단다. 단지 잘 다룰수 있는게 우리의 속성상 불의 정령일 뿐이지, 다른것도 가능해." "그래요? 몰랐어요." "자 여기 하급의 정령이 있으니 불러보렴." 내앞에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작은 새가 나타났다. "어떻게 불러요?" "그냥 불러봐. 그럼 너한테 갈꺼야." "이리와." 그러자 그 새가 내게 날아오더니 스르르 내 안으로 사라졌다. "그건 불의 하급 정령 카사라고 한단다. 드레곤들은 자신들의 속성에 맞는 정령들을 가질 수 있거든, 넌 아직 마나가 충분하지 못하니 하급밖에 못 가질꺼다." "이거 어떻게 불러내요?" "그냥 부르면 돼, 그 정령은 너한테 이제 속한거거든." "카사!" 그러자 내 앞에는 아까 그 불새가 나타났다. "이거 하나만 부를수 있어요?" "네 마나가 가능한 한 많이 부를수도 있지." "카사, 카사!" 옷, 그러자 불새가 두개 더 늘어났다. "와~ 신기해. 그럼 다른 정령들도 이렇게 부를수 있어요?" "그건 아니야, 다른 정령들은 우리와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 계약을 맺어야 한단다. 내 책들중에 정령 마법책이 있으니 가져다가 한번 익혀보렴." "예" 그리고 레어로 돌아오자마자 바람의 정령과 땅의 정령, 그리고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비록 하급 정령이긴 하지만....) 다음날부터 나는 마법이랑 검술 연습은 때려 치고 하루 종일 숲속을 헤메고 다녔다. 숲의 지리를 익히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정령들을 사용하는 재미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의 정령한테는 동물이 있는 곳을 물어보고, 물의 정령에게는 물이 있는곳을 물었다. 그리고 동물을 발견하면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사냥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레어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보려고 마음먹고 반나절이나 뛰어 내려왔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앗, 스물, 하앗, 스물하나....." '이게 뭔 소리야? 어딘가 익숙한 소리같기도 하고.... 사람 소리구나, 뭐? 사람? 여기에 사람이 있단 말이야?'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만히 다가가 보았다. 거기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고 어떤 한 소년이 검을 들고 기합 소리와 함께 내려치고 있었다. "하앗, 마흔...." 17세쯤 되었을까? 갈색머리에 마른 몸매에 크다고 느껴지는 키. 인간은 정말 300년 만에 처음 보는 거였다.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그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자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 소년이 나를 쳐다보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넌 누구야? 여기 어떻게 왔지?" "나?" 윽,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하란 말야? 질문을 받을 거란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땐 공격이 최고의 방어인 법! "그러는 너는 누구야?" "나는 저쪽에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앤드루 라고 해. 그러는 넌 누구니?" "나는 저기 고개넘어에서 살고 있는 아힌이라고 해." 내 이름을 대기는 싫고 해서 아무거나 생각이 나는 이름을 대버렸다. "그렇구나. 근데 아힌, 여긴 어떻게 왔니?" "아! 사냥을 하러 오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좀 멀리까지 나왔는데 설마 여기에 사람이 있을꺼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 "그랬구나, 그럴꺼야. 나도 여기서 산지 5년이나 되었지만 사람을 본건 너가 처음이야." "너는 여기서 혼자 살고 있니?" "아니야, 아버지랑 같이 살고 있어. 아버지가 사람들을 싫어하셔서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거야." "그랬구나. 그런데 너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던것 같은데, 잘 하나본데?" "응? 아, 아니야. 아직은 그렇게 수준이 높지 않아. 아버지 따라 가려면 한참 멀었지뭐. 그나저나 넌 어때? 검을 차고 있는거 보니 실력이 있는 모양이구나, 우리 한번 붙어보지 않을래?" "좋아, 나도 대결을 해보는건 이번이 처음 이거든." 나는 검을 꺼내들고 공터 중심으로 나아 갔다. "와, 좋은 검이구나, 근데 레이피어네." "응, 내가 팔힘이 적어서, 그리고 사냥을 하다보면 스피드가 필요 하거든." "흠, 그렇구나. 자, 그럼 잘 부탁해." "나야말로." 솔직히 나는 좀 흥분된 상태였다. 이 세계로 와서 사람은 처음 보는 데다가 그 사람이랑 검술 대결을 해 보다니.....우 떨려. "하앗." 기합과 함께 앤드루가 돌격해왔다. 나는 그녀석의 검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슬쩍 옆으로 흘려버린뒤 녀석의 다리를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다리에 검이 닿기 전에 앤드루의 바스타드 소드가 앞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는 동시에 내 검을 쳐올렸다. '웃 대단한 힘인걸.' 힘이 나보다 더 셌다. 검을 놓칠것 같아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대단한데?" "너야말로." 우리는 마주 씩 웃었다. 그리고 나는 재빠르게 그녀석 가슴을 노리고 달려 들었다. 그녀석은 당연히 나를 막으려고 검을 들어 올렸고 나는 재빨리 방향을 살짝 바꾸어 녀석의 손목을 노렸다. 확실히 녀석보다 내가 스피드는 빨랐다. 그러나 내 검이 녀석의 손목에 닿기 전에 뒤로 물러나 내 검은 허공을 쳤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세를 가다듬은 녀석이 횡으로 그었다. 재빨리 몸을 숙이고 다시 다리를 노리려고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공격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우리는 몇차례 더 맞부디쳤다. "너는 대결을 많이 해봤니?" "아버지랑은 몇번 해봤지만 나랑 비슷한 나이의 사람이랑 한건 처음이야." 우리는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도 못했고(나야 검술연습도 제대로 안했고 실전때는 마법이랑 정령의 도움을 받았으니...) 서로 급소를 노리지 않았기에 승부는 나지 않았다. "에구구, 그만하자. 힘들다."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이제는 서로 지쳐서 검을 휘두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털썩 주저앉자 앤드루도 내옆으로 와서 털썩 주저 앉았다. "아! 힘들다. 하지만 잼있었어." "뭐가 재밌어? 서로 바주느라고 바빴지." "하하하, 그랬나? 하지만 너가 상처를 입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피차 마찬가지야. 에구구, 그나저나 물 없냐? 목이 마른데..." "아 잠깐만 기다려." 앤드루는 저쪽으로 걸어 가더니 수풀속에서 바구니를 하나 꺼내왔다. 그 속에는 물통이랑 빵이랑, 훈제 고기, 과일 몇개가 들어 있었다. "점심 안 먹었지? 나랑 같이 먹자." "그러고 보니 점심먹을 시간이 꽤 늦었구나. 음식을 보니까 꽤 배가 고픈걸?" "자 여기 많이 가져 왔으니까 먹어. 어쩐지 오늘은 왠지 음식을 많이 챙기기 싶더라니." "오, 너의 그 예리한 예감에 경의를 표한다." 앤드루는 나에게 빵 한덩이를 건넸고, 나는 그것을 들고 감상에 빠져 들었다. 이 얼마만에 먹어보는 빵이란 말이냐? 여기에 와서 맨날 고기(?)만 먹고 살았었는데.... 오 이 맛있는 빵맛... "그런데 너 사냥하러 나왔다고 그러지 않았어?" "맞아." "그런데 하나도 못 잡았나 보지?" "오늘은 아직 못 잡았어." "안 잡아가도 괜찮아?" "괜찮아. 집에 아직 음식이 남아 있거든." "그래? 너희 부모님은?" 내 부모님? 가만 엄마는 여기에 아직 한번도 안 왔고, 아빠라는 드래곤은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뭐하는지 모르겠고... "울 부모님은 볼일이 있으셔서 며칠동안 어딜 가셨어." "그랬구나, 그럼 너 혼자 있겠네?" "그렇지." "너희 부모님도 사냥꾼이셔?" 그렇다고 할수 있겠지? "응. 그런데 너희 부모님은?" "아 우리 어머니는 5년전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아버지랑 살고 있어." "그랬어? 안됐구나." "뭘 이젠 괜찮아." "아버지는 뭐하시는데?" "예전에는 기사셨는데, 여기로 이사 온뒤론 사냥을 하시거나 텃밭을 가꾸고 계시지." "흠, 그래?" 그 뒤로도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고, 난 이 산 밑쪽에 마을이 하나 있다는 것도 알아냈으며, 앤드루의 아버지가 사람들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5년전의 이야기는 하려 들지 않아서 나도 묻지 않았다. "아 이런." "왜?" "아버지가 돌아 오실때가 됐어. 오늘 마을에 내려가셨었거든." 나도 참 타이밍을 딱 마췄었다. 앤드루의 아버지는 한달에 한번쯤 마을에 내려 갔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슬슬 저녁때가 되어 가는구나, 나도 이제 가 봐야 겠다." "저기, 아힌." "왜?" "또 올꺼야?" "글쎄.... 빵 주면 또 올지도." 앤드루가 피식 웃었다. "내일 나랑 사냥가지 않을래? 내가 점심 싸올께." "그럴까? 좋아. 근데 어디서 만나지?" "저쪽으로 가면 샘터가 있거든? 거기서 아침에 만나자. 여기는 아침에 아버지가 검술을 연습하시기 때문에 안돼." "그래? 알았어. 그럼 내일 아침에 거기서 만나자." "일찍 나와." "알았어. 그럼 가기 전에 샘터나 한번 가 보고 가야겠다." "그래 그럼 내일 봐." "응." 나는 앤드루가 가르킨 쪽으로 달려 갔고 어렵지 않게 샘터를 찾을 수 있었다. "음, 여기군 좋아 내일 늦게 일어나면 이 근처로 공간이동을 해오지뭐. 아 지금도 힘드니까 레어까지 공간이동 해야겠다. 헤헤, 내일이 기대 되는걸?" 나는 레어로 간뒤 피곤했는지 곧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간단히 아침을 먹고 늦을까봐 샘터 근처로 공간이동 했다. 샘터에는 앤드루가 나와 있었다. "왔구나." "많이 기다렸냐?" "아냐 얼마 기다리지 않았어." "그래? 그럼 다행이구. 그럼 슬슬 사냥하러 가볼까?" "좋아. 근데 넌 그게 다야?" "다냐니?" "그 레이피어 하나 가지고 사냥을 갈꺼냐구." "그럼 뭘 갖고가냐?" "뭘 갖고 가냐니, 사냥할때 활 안써? 단검은 갖고 왔겠지?" "안갖고 왔는데? 그게 필요하냐?" "너 그럼 사냥한 다음에 가죽은 뭘로 벗기고 배는 뭘로 가르냐? 설마 레이피어로 한다고는 안 그러겠지?" "레이피어로 하는데?" "뭐라고? 너희 부모님 사냥꾼이시라며?" "항상 통채로 갖고 오시던데....." "그래도 단검이랑 활은 기본적으로 갖고 다니실것 아냐?" 윽... 생각도 못해보던 거였다. 엄마야 사냥하는걸 못 봤고 할아버지가 하실땐 드래곤 피어 한방이면 저절로 나와서 쓰러졌으니까....에구구 단검이랑 활이 필요한거구나. 조금있다가 할아버지한테 가서 달라고 해야 겠다. "근데 난 활 쏠줄 모르는데?" 앤드루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럼 너 사냥은 어떻게 하냐?" "정령들이랑 같이 하는데?" "정령? 너 정령술사야?"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나?" "대단해, 그랬구나. 그래서 사냥을 레이피어 하나 가지고 했다고 그랬구나. 무슨 정령을 다룰 수 있는데?" "불이랑, 바람이랑, 땅이랑, 물의 정령들." "대단해, 대단해, 그럼 어서 정령을 소환해봐. 난 말로만 정령에 대해서 들어 보았지 실제로 본 적이 없거든. 어서 빨리 소환해봐." "카사, 노움, 실프, 운디네." 정령의 이름을 각각 불러주자 정령들이 내 앞에 나타났고 앤드루는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대단해, 대단해, 와 이게 정령이라는 거구나, 가만있자 이게 실프인가? 그럼 이게 운디네겠구 나, 오 이건 노움이야 그럼 저게 카사겠군..." "그만좀 해라. 사냥 안 갈꺼냐?" "응? 아 그래, 그래 사냥을 가야지. 근데 정령에게 길을 물어볼 수 있다며? 그럼 어디에 동물이 있는지도 알 수 있겠네?" "응. 보통 실프한테 물어서 동물을 찾아." "그럼 어서 가르쳐 달라고 해." "그래그래, 정말 어린애 같다니까. 실프 부탁해." 실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서 날아갔다. 나는 나머지 정령들은 돌려 보내고 레이피어 하 나만 달랑 들고 쫒아갔고 앤드루도 얼른 짐을 챙기고 쫒아 왔다. 한참을 달려 가자 실프가 멈췄다. 앞에 동물이 있다는 신호였다. 앤드루는 활을 꺼내들어서 활 을 걸고 나는 활대신 아이스 스톰(얼음화살) 주문을 외우면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사슴이야. 근데 그다지 크지는 않다." "그래도 새끼는 아니쟎아." "그건 그래. 이제 어쩔꺼냐?" "어쩌긴 내가 내 활솜씨를 보여 주마." "그래, 잘 해봐라." 나는 여차하면 얼음 화살을 날릴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앤드루는 조심스럽게 활시위를 당겼다. 잠시 숨을 고르고 조준을 하더니 손을 놓았다.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은 사슴을 향해 날아 갔지만 아쉽게도 사슴 정면쪽에서 날아가는 바람에 사슴이 살짝 피해 버렸다. 그리곤 숲속 깊이 도망가 버렸다. "이런, 아깝다." "정면에서 활을 쏘니까 그렇지." "헹 너도 내가 활 쏠때까진 몰랐쟎아." "활 쏘는 사람이 알아서 해야지, 그걸 옆에서 누가 말해줘야 아냐?" "칫, 그래 너 잘났다. 그나저나 도망 갔으니까 다른걸 찾아보자." "그래야겠지. 실프 또 부탁할께." 우리는 또 달렸고 잠시후에 실프가 멈춰서서 가르키는 쪽을 바라 보았다. 우리 허리까지오는 크기의 덤불이 있었는데 그 안에 뭔가가 있는지 부스럭 거렸다. "좋아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어." "잘해봐라." 앤드루는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덤불속으로 곧바로 들어가더니 덤불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와 맞췄나봐." "가서 확인해 보자." 우리가 덤불로 가까이 갔을때였다. 갑자기 덤불속에서 멧돼지가 뛰어 나왔다. "우갸갸, 멧돼지야." "피햇!" 우리는 제각기 양 옆으로 피했고 멧돼지는 그런 우리를 지나쳐 앞으로 나가다 멈추고 뒤돌아 섰다. 우리를 노려보는 폼이 화가 난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앤드루의 활이 멧돼지의 옆구리에 살짝 꼿힌게 보였다. "맷돼지가 화가 났나봐." "화살을 맞았으니 당연히 화가 나지." 그때 맷돼지가 나한테 덤벼 들었고 나는 아까 주문을 외워 두었던 얼음화살을 날렸다. "아이스 스톰" 그러나 그것은 사슴을 상처 없이 잡기 위해서 마력을 약하게 해 놓은것이기에 멧돼지를 쓰러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멧돼지는 얼음 화살을 맞더니 더 화가 난듯 흉폭하게 덤벼 들었다. "우아아악" 나는 얼른 옆으로 굴렀다. 그때 잠시 막간을 이용해 활을 장전한 앤드루가 활을 날렸고 이번에는 엉덩이에 정확히 꼿혔지만 멧돼지는 그정도로는 거뜬 하다는듯 꿈쩍도 않고 이번엔 앤드루를 노려보더니 돌진했다. "노움 저놈 발을 걸어!" 난 재빨리 노움을 불렀고 노움이 땅을 약간 솟아 오르게 해서 멧돼지는 거게에 발이 걸려 넘어져 버렸다. 그러나 스피드가 그리 높지 않았을때 넘어트린거라서 멧돼지는 한번 프루릉 거리더니만 곧 일어났다. 우리는 멧돼지가 넘어지는 사이에 멧돼지한테서 멀찍이 물러 나면서 앤드루는 활을 장전했고 나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라이트닝 에로우!" 전기 덩어리는 곧장 날아가서 앤드루를 바라보고 있던 멧돼지에게 명중되었다. 멧돼지는 돼지 멱따는 소리로 비명을지르며 한번 발광을 하더니 온 몸이 새카맣게 타서 쓰러졌다. 우리는 멧돼지한테 다가갔다. 멧돼지는 죽었는지 꼼짝을 안 했고 쿡쿡 찔러봐도 반응이 없었다. "와~~! 우리가 멧돼지를 잡았어." "운이 좋은데?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가져가지?" "그렇게 크지 않쟎아. 끌고 가지뭐." "바보야, 너 사냥꾼의 자식 맞냐? 그냥 끌고가면 가죽이 상하쟎아. 들고 가야해. 가만 이거 좀 이상하다?" 멧돼지를 만져보며 상태를 확인하던 앤드루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왜그래?" "글쎄 보기보다 좀 가벼운 녀석 같네? 감촉도 좀 이상한 것 같고...." "번개공을 맞아서 그런게 아닐까? 털은 다 탔네." "잠깐만 기다려봐." 앤드루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더니 멧돼지의 배를 쭉 갈랐다. 그랬더니 그 안은 온통 새카많게 탄 숫덩어리 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왜 살은 없고 새카만 숫덩이 밖에 없는거지?" "에구머니나, 마력을 너무 많이 넣어서 날렸다. 그래서 다 타버린거야." "그럼 이게 아까 너가 쏜 그 번개 공때문이다 그거지?" "아하하하...너무 급해서 마력을 조정하는걸 깜박 했나봐. 그게 좀 센 마법이었거든..." "이 멍청아! 기껏 잡은건데 이렇게 다 태워버리면 어떻게해?" "뭐라구? 야 누가 잡은건데 그래? 그리고 사람이 그럴수도 있지." "뭐가 그럴수도 있지야? 마법을 쓸 줄 알았으면 아까 그 사슴한테는 왜 안썼냐?" "너가 잡겠다고 했으니까 가만 있었지!" "그렇다고 가만 있냐? 옆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아냐?" "넌 뭘 잘했다고 큰소리냐? 너가 잘못 쏴서 놓친 주제에." "말 다했냐?" "다했다 어쩔래?" "좋아 한번 누가 이기나 붙어보자." "흥 누가 너한테 질줄 알고?" 우리는 서로 검을 빼들고 겨누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선제공격을 했다. "하앗!" 난 너무 화가난 상태였기에 조금도 봐주지 않고 곧장 급소를 겨누며 달려 들었다. 그러나 앤드루도 만만치 않은듯 내 검을 막으며 오히려 반격까지 했다. 나는 앤드루의 검을 살짝 옆으로 흘리며 앤드루에게 바짝 붙어서 공격을 하려 했지만 어느새 앤드루가 왼손에 빼든 단검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곧이어 앤드루는 오른손의 검을 크게 휘두르며 나를 노렸다. 우리 둘은 서로를 봐주지 않고 날카롭게 공격 했으나 서로 실력이 만만치 않은듯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실전 경험(?) 이 많은 탓에(이래봬도 200년간 검술로 몬스터를 사냥한 경 험이 있는 몸이다. 물론 대부분 마법을 썼긴 하지만....) 앤드루의 어깨와 손등에 가벼운 상처 가 생겼으나 앤드루는 정식으로 검술을 배운 탓인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탓!" 앤드루가 내게 곧장 찔러 들어왔고 나는 그것을 가볍게 막으며 뒤로 물러섰는데 물러선 자리에 아까 죽어 넘어진 멧돼지가 누워 있는 바람에 그걸 밟고 뒤로 넘어져 버렸다. 재빨리 옆으로 굴 렀지만 칼을 놓친 데다가 그 기회를 놓칠 앤드루가 아니었기에 고개를 들자 벌써 나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하하 어떠냐?" "칫 승자의 웃음을 보는 패자는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앤드루는 웃으며 검을 치우곤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씨 저놈만 아니면 내가 이길 수 있었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너 정말 대단한 실력이더라. 아까는 솔직히 이길꺼란 생각도 못했어." "너도 만만치 않던데 뭐. 이리와봐 피가 나는데?" "아~ 별로 깊은 상처는 아니야. 괜찮아." "괜찮긴 뭐가? 여러군데 찔린 주제에. 이리와 낳게 해줄께." 나는 앤드루의 상처에다 손을 얹고 치유주문을 외웠다. "성스러운 치료의 손이여, 어머니 되는 대지의 숨결이여 내앞에있는 이에게 그대의 커다란 자비를....리커버리!" 곧 내 손에서는 빛이 나왔고 그 빛이 앤드루의 상처를 감싸자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갔다. "대단하구나 너. 마법도 할 줄 알다니..." "뭐 그리 높은 마법은 아니야. 울 할아버지가 마법사시거든. 그래서 쬐께 배웠지." "그랬구나.. 대단해. 정령을 부리는데다가 검술에 이제는 마법까지." "푸하하 내가 마검사를 지향하고 있걸랑..." "대단하긴 하지만 그렇게 여러길로 가다간 하나도 제대로 터득 못하면 어떻게해?" "괜찮아, 괜찮아. 정 안돼면 나중에 하나만 고르지뭐." "그나저나 또 실패해서 어떡하지?" "또 찾으면 돼지. 그나저나 배고프지않냐? 벌써 정오가 지났는데.." "그래그래, 우리 점심이나 먹고 또 찾아보자. 여기 좋네 그늘도 있고. 여기서 그냥 먹자." 우리는 앤드루가 싸온 점심을 먹고 좀 쉬다가 또 사냥에 나섰다. 이번에는 내가 마력을 잘 조정하고 앤드루도 그동안 실패한 활 실력을 만회 하려는지 잘 쏜 덕분에 저녁때가 되자 토끼 세마리에 노루 한마리, 산새 두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오 제법 수확이 괜찮은걸?" "이제 슬슬 가야지? 이러다 늦겠다." "그래 그러자. 그나저나 어떻게 나누지?" "내가 노루를 갖고 가면 아버지가 의심하실지도 모르지. 아직 난 사냥에 능숙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토끼와 새를 가져갈께. 그거면 의심하지 않으시겠지." "그래? 그럼 내가 노루를 갖고 가지뭐." "가져갈 수 있겠어?" "그럼. 정령들한테 부탁하면 돼." "하긴. 그럼 내일은 어쩌지?" "어쩌다니?" "오늘 사냥을 했으니 내일은 사냥하러 나온다고 그러지는 못할꺼야. 아마도 내일은 아버지한테 검술 지도를 받게 될꺼야." "그래? 뭐 그럼 못 만나겠네. 그럼 나도 내일은 할아버지댁에나 가야겠군.." "할아버지도 여기 사셔?" "아니 좀 멀리 사시긴 하지만. 할아버지가 우리집이랑 할아버지 집에 마법으로 통로를 만들어 놓으셨거든. 그거면 금방 갈 수 있어." 뭐 공간이동으로 가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그래. 그럼 우리 모래 만나자. 그때는 사냥하러 나올 수 있을꺼야." "그래 글면, 모래 아침에 샘터에서 만나자." "그래. 그럼 나 갈께. 담에 봐." "그래 잘가라." 앤드루는 곧 토끼와 새들을 챙겨 들고 집쪽으로 사라졌고 나는 앤드루가 멀리 갈때까지 기다 렸다가 공간이동으로 내 레어로 돌아왔다. '우~~, 피곤하다. 오늘은 그냥 자고 할아버지께는 내일 가야겠다.' ----------------------------------------------------------------- 안녕하세요? 아린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올리려고 들어왔는데 격려멜이 와 있더군요.. 넘넘 기뻤어요. 참 전에 주신 분들도 넘넘 감사하게 생각하구요, 근데 글을 쓰다보니 이름 짓는게 진짜 힘들더군요, 이 아린이란 이름도 초룡전기에서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구요 아린의 가명 아힌도 마와의 육아일기의 주인공 이름이예요. 이름들이 넘 예뻐서 작가 몰래 도용 했거든요(이래도 되나 몰라^^;) 그러니 나중에 작가님들 아셔도 화내지 마셔요 죄송합니다. 그럼 많이 읽어 주세요....^ 번 호 : 8043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1일 22:05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3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5화 앤드루의 죽음(1) 제 5화 앤드루의 죽음 다음날 나는 처음으로 할아버지 레어에 갔다. 처음 가는 거라서 공간이동은 못하고 그렇다고 드래곤의 모습으로 날아갈 순 없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마법을 써서 날아갔다. 주문은 알고 있었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날아본 적이 없어서 첨에는 무척 긴장했었다. (난 항상 드래곤 모습 으로 날아다녔으니까) 그래도 나는것은 익숙해 있어서 괜찮았지만 마법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마나의 흐름에 계속 집중하고 있으려니 힘들었다.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하면 추락하기 때문에 죽고싶지 않은 이상 계속 신경쓰고 있어야 했다. 어느덧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신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레어는 휴화산의 분화구 안쪽에 위치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을꺼라 했지만.... 휴화산의 분화구는 찾았는데 오랜기간동안 화 산 활동이 없었던 탓에 분화구 안쪽에는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엑~~~. 여기 어디에 커다란 동굴이 있다는거야?" 주위를 쭉 둘러 보았지만 동굴 입구같은것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아린아 뭐든지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거란다." 뒤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힉~! 할아버지 간떨어질뻔 했쟎아요.." "호오, 그랬니? 할애비 레어에 첨 오는 손녀를 보니 너무 기뻐서 그만..." 어느새 내 뒤에 서계시는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셨다. 할머니가 왜 할아버지보고 한숨을 쉬시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가 8000살이 다 되어 가시건만 아직까지 장난을 무척 좋아하시고 젊은(?) 드래곤 못지 않게 혈기가 왕성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레어가 안 보이는데 어디 있는거예요?" "아 내 레어는 입구가 그렇게 크지 않거든. 그래서 작게 변신해서 들어가거나 아니면 공간이동을 해야 한단다. 그나저나 아린아, 여기 경치가 꽤 좋지 않니?" 그러고 보니 넓고 새파란 호수를 가운데로 주위는 수풀이 우거져 있고... 낭만적인 산책 코스로는 딱이었다. "분화구인데 괭장히 넓네요." "그렇지? 여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큰 화산 폭팔이 일어난 곳이란다. 얼마나 컸냐하면 이 화산으로 대륙의 절반이 화산의 피해를 입고 말았지, 그 뒤로 큰 지진이 일어나 현재의 산맥이 생기고 인간들은 물론 모든 종족들이 거의 절반이나 전멸을 당했단다. 그런데 만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을 했지. 그런거 보면 생명이란 참 끈질긴 존재들이야.." "그럼 여기가 가장 큰 화산이겠네요?" "그래, 휴화산이긴 하지만 현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이지. 네 할머니가 계신 곳은 이 산맥과 연결 되어 있는 곳인데 5000년 전에 화산 폭팔을 일으켰지.... 물론 작은 폭팔이긴 했지만 그걸로도 사람들은 꽤 피해를 입었을껄? 거긴 아직도 화산 폭팔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곳이 지..." "그런데 할머니는 왜 그런곳에서 사시는 거죠?" "후후... 아린아 우리 드래곤이 그깟 화산좀 폭팔한다고 무슨 피해나 입을것 같니?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거기서 살지. 늘그막에 뜨뜻한 곳에 있을테니 좋기만 할꺼다." 호 역시 드래곤은 위대한 종족이군, 화산이 폭팔해도 피해를 입지 않으니... "자 여기가 내 레어의 입구란다." "에? 여기가요?" "입구가 좀 작긴 해도 안은 꽤 넓은 곳이지." 할아버지 레어의 입구는 성인 남자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이곳이 드래곤이 살고 있는 레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꽤 들어가자 공간이 무척 넓어지면서 드래곤이 살 수 있는 크기가 되었다. 그리고 좀 더 깊숙히 들어가자 거기에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는 온천이 있었다. "어떠냐 아린아, 이 할애비 레어도 꽤 괜찮지 않니? 이렇게 온천도 있고 말이다." "괭장하네요, 근데 작아서 드래곤은 못 들어가겠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작게 변해서 들어가면 되는 것을... 근데 저래보여도 꽤 온도가 높단다. 인간이 들어가면 화상을 입게 될꺼야." "그런데 수증기가 저기 위에만 모여 있네요, 마법을 걸어 놓으셨나보죠?" "그래, 내가 여길 3000년 전에 발견했을 때만해도 온 동굴안이 수증기로 꽉 차 있었지. 그리고 그때는 온도가 지금보다 더 뜨거웠었거든, 그래서 입구에서 수증기가 조금씩 흘러 나오는 덕분에 여길 찾을수가 있었지. 그리고 저기에는 결계를 쳐놔서 수증기가 저곳에만 모여 있게 해놨단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곳이더라고, 그때부터 여기서 살기 시작했지." "정말 운이 좋으셨네요." "훗훗 그런셈이지. 근데 아린아 여긴 어쩐 일이냐? 그냥 놀러온것 같진 않은데?" "아 맞다. 할아버지 저 단검좀 주세요." "단검?" "예. 사냥하러 다닐때 보니까 꽤 필요하더라구요, 레이피어로는 꽤 불편하구요." "오라, 그래서 할애비한테 단검을 하나 얻으려고 왔구나?" "헤헤헤 예." "그래 사냥은 재미 있니?" "할머니가요 정령마법책을 주셔서 정령과 계약을 맺었거든요, 그러니까 꽤 도움이 되요, 그 덕분에 재미있어요." "정령? 그까짓걸 뭐하러 계약을 맺어, 나중에는 그런것들이 필요 없을텐데..." "하지만 지금은 못하쟎아요, 그래서 물이랑 바람이랑 땅의 하급 정령들하고 맺었어요." "저런 왜 하필 또 하급이냐? 이제는 상급을 다룰 수 있을텐데.." "아직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하급정령으로도 충분한걸요 뭐.. 근데 할아버지 정령들이랑은 대화를 할 수 없나요?" "대화? 왜 정령들이 네 말을 안 듣든?" "아뇨, 그런건 아니구요, 그냥 말을 해보고 싶어서요." "정령이랑 대화를 하려면 마력도 마력이지만 친화력이 꽤 높아야 한단다. 너랑은 대화하기가 좀 어려울꺼야." "왜요?" "우리 드래곤을 정령들이 두려워하고 있거든, 뭐 그런것보단 우리가 정령들과 대화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아서 그런 거겠지만..." "아 그렇군요." "아 여기 꽤 쓸만한게 있구나. 대거라고 하는 거란다." "와 꽤 화려하게 꾸며진 검이네요." "훗훗 이 할애비가 그저 그런걸 갖고 있을 순 없지않니?" "하하하...." "자 이거 하나면 됐니? 또 딴거 필요한건 없구?" "예 이거면 충분해요." 난 할아버지한테 앤드루를 만난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성룡이 되기 전까지 인간세상에 나가는 것이 금지된 만큼 뭐라고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저 그만 가볼께요." "벌써 가려구?" "오늘 아직 아무것도 사냥하지 못했거든요." "할애비가 줄수도 있는데..." "그냥 제 힘으로 해결해볼께요. 단검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나중에 할애비가 한번 찾아 가보마." "예!" 다음날 앤드루와 약속한대로 나는 앤드루와 만나서 사냥을 했다. 우리는 여전히 사냥에 서툴렀 고, 그러다 보면 투닥투닥 다투다가 검대련까지 갔다. 그리곤 다시 화해하고 사냥을 하고....뭐 이런 식이었다. 나는 정령들을 사용하면 간단하게 사냥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 다. 아마 앤드루가 자신의 실력으로 사냥을 하니까 나도 내 실력으로 하고 싶었나보다. (근데 정령이랑 계약을 맺은건 내 실력이 아닌가?) 어드덧 그녀석이랑 만난지 몇달이 지나갔다. 가을은 벌써 지나갔고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계속 만나서 같이 사냥하러 다녔고 앤드루의 아버지가 마을에 내려가실 때면 앤드루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앤드루는 나와 만나는 것을 아버지에게 숨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사냥을 하기위해 만나긴 했지만 간밤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려 함부로 산을 돌아다닐 수가 없을것 같았다. "흠... 눈이 너무 많이 쌓였는걸?" "그렇지? 사냥하러 가기는 힘들겠어." "오늘은 가지 말고 저쪽에서 검대결이나 해볼까?" "거기는 말고, 오늘 아버지가 집에 계시거든. 그러니까 왜 예전에 알게된 그 공터말야 거기로 가자." "거긴 멀쟎아?" "뭐 어때? 시간도 많은데 눈 구경도 할겸 갔다오자." '이녀석은 왠지 아버지한테 나를 숨기고 싶어하는게 좀 심한것 같단말야....' 나는 아무말도 안하고 그녀석의 뒤를 쫏았다. 눈구경 할겸이라고 했지만 눈이 너무 많이 쌓이는 바람에 걷기고 힘들어서 경치 구경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우리가 공터에 닿을 쯤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헉헉대고 있었다. "야 검 대련 하기도 전에 지쳐버리겠다." "누군 이렇게 힘들줄 알았냐?" "에고고 힘들어" 나는 눈이 쌓인 땅에 벌러덩 누웠다. 눈이 등에 닿는 느낌이 참 시원했다. "아~~좋타." 그러자 앤드루 녀석도 내 옆으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만난지 꽤 됐구나, 그치?" "그러게, 우리가 여름이 될때쯤 만났으니까 벌써 6개월 됐나?" "그러고 보면 우리도 실력이 많이 늘은것 같지 않니?" "그렇겠지, 사냥 한다고 만났다가 계속 싸워댔으니...." 앤드루는 피식 웃고는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장난끼가 발동됐다. 그래서 그녀석 몰래 살짝 실프를 불러 내어 앤드루 얼굴에다 눈을 왕창 뿌리도록 시켰다. 그리고 나는 미리미리 도망을 갔다. "우왓 차거워~~, 너 가만 안둔다." "푸하하하. 땀을 흘리길래 시원하게 해준 것 뿐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 "흥 받아랏~" 앤드루는 어느새 뭉쳤는지 나에게 눈덩이를 던져왔다. "헹, 내가 그걸 맞을것 같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 위에서 피하는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나도 곧 눈덩이를 뭉쳐서 던졌다. 우리는 그렇게 신나게 눈싸움을 하느라고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 것을 못 느꼈다. "좋아. 너 가만 안둔다. 실프~!" "비겁하다. 눈싸움에 정령을 사용하는게 어딨냐?" "헹, 여깄지 어딨냐?" 난 실프에게 바람을 일으키게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앤드루!" 누군가가 앤드루를 불렀다. 우리는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어떤 중년의 남자가 서있었다. "아, 아버지..." '저사람이 앤드루의 아버지였군, 앗 그럼 나 들킨건가?' 앤드루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 했다. "어떻게 여길?" "공터 주위에 네 발자국 말고 딴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더구나, 그래서 와봤지" 앤드루의 아버지는 척척 걸어서 나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이쪽은 아힌이라구 제 친구예요." 그러나 앤드루의 아버지는 앤드루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내 앞으로 오더니 날 살벌하게 노려 보면서 물었다. "넌 누구냐?" "앤드루의 친구인데요?" "어디서 살고 있지?" "저쪽 계곡쪽에서요." "거짓말 말아라. 내가 여기서 살아오면서 이 근처 산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자취는 찾지 못했 어." 진짜 계곡에서 살고 있는데....물론 내가 인간이 아니지만.... "사실대로 대답해라, 여긴 왜 왔지?" "앤드루랑 놀러 왔는데요?" "여기 우리가 산다는것을 너말고 또 누가 알고 있지?" "아직 아무에게도 말 안 했는데요?" "그래?" 갑자기 앤드루의 아버지가 검을 치켜 올렸다. 그러고보니 당황 하느라고 앤드루의 아버지가 검을 가지고 왔다는 것 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 걘 제 친구예요!" 앤드루가 소리치며 달려 왔지만 앤드루의 아버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곤 검을 내 목에다 대 고 겨누며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아직 어린것을 다행히 여겨라. 아직 어려서 죽이지는 않겠지만, 다시는 여기 오지 말아 라.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만약 그랬다간 넌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난 내 목에 검이 겨누어져 있고 그 아저씨가 살벌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겁이 요만큼도 나지 않았다. (당신도 드래곤이랑 살아봐요~~^^;) "저기~~, 전 진짜 이 근처에서 살고 있는데요, 근데 어떻게 안 와요?" 내가 주저주저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아저씨의 표정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살벌해졌다. 그때였다. "반역자 디로히스 라무아노르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이 외침과 함께 갑옷을 입고 칼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번 호 : 8090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3일 00:10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1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5화 앤드루의 죽음 (2) "반역자 디로히스 라무아노르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이 외침과 함께 갑옷을 입고 검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런...." 앤드루의 아버지는 급히 앤드루를 끌어다가 자기 등뒤로 오게 했다. 그리고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듯 검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아힌..." 앤드루는 당황한듯 나를 쳐다 보았지만 나를 본다고 뭔 뾰족한 수가 나오겠는가, 나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반역자 디로히스 라무아노르, 나 레스틴제국의 기사 유시라크 알리시아드가 너를 처단하겠다." 갑옷을 입은 한 무리중에서 어떤 한 사람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음... 그럼 저 사람들이 말로만 들어보던 기사들인가보군. 근데 앤드루의 아버지가 반역자였다니 놀라운걸? 하긴 쫒기는 처지가 아니였다면 이곳에서 살지도 않았을꺼고, 앤드루가 날 만난다는 것을 그렇게 꺼려하지는 않았겠지. 그나저나 저 두사람 싸울것 같은걸... "유시라크...네가 나를 처단하러 오다니.. 후후 너조차도 내가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고 믿는 다는 것인가..." "디로히스, 예전의 동료였던것을 감안하여 내가 네 목숨을 거두어 주겠다. 자 덤벼라." "그래, 네가 나의 목숨을 취하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지금은 네게 내 목숨을 내어 줄 순 없다. 내가 만약 지금 죽는다면 내 아들 앤드루조차 죽일것이 아니냐?" "흥, 반역자의 말로를 모르는 것이냐? 반역자는 물론 반역자의 가족은 모조리 처형된다." 뒤에 무리지어 있던 기사중 한명이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앤드루의 아버지는 얼굴이 굳었고 앤드루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럼 저들은 앤드루와 저 아저씨를 죽이러 왔다는 거군, 참 한심해 여름에 오면 좀 편히 와도 될껄 뭐하러 겨울에, 그것도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날에 고생고생 하면서 오냐...." 이렇게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때 앤드루가 말했다. "아힌,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 넌 어서 가봐, 아마 다신 못 만나겠지만 너랑 만나서 즐거웠어. 우리 여기서 작별하자." 웃, 임마 그렇게 슬픈 얼굴로 말하면 내가 '그래 잘 있어라, 나중에 내가 와서 네 시체가 있으면 무덤은 만들어 주마.' 이렇게 말할 순 없쟎아, 우씨 되게 난처하네 어쩌지? "소년이여, 여긴 네가 있을곳이 못된다 그러니 어서 가거라." 앤드루의 아버지와 싸우기 위해 앞으로 나왔던 유시라크라고 하는 기사가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내가 그렇게 쉽게 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왠지 내가 가면 의리없는 놈이 될것 같은..... 윽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무슨 소린가 유시라크, 저녀석이 아직 있을지 모르는 반역자의 무리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않 나?" "저 소년은 여기 마을에서 살고 있는 아이다. 우리완 아무 상관이 없어!" 오 앤드루 아버지 꽤 괜찮은 사람인걸? "닥쳐라, 네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저 소년을 잡아라."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기사중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심문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소년을..." "흥, 감히 황태자를 해하려 했던 자들이다. 동정할 가치도 없다." 이거이거, 왠지 내가 위험한 상황이 되어 가는것 같은걸? 하지만 이봐 아저씨, 당신들이 내게 상처라도 입히는 날엔 울 할아버지가 당신들을 전멸 시킬껄? 날 곱게 보내주는게 당신들이 사는 길이라구..... "나를 쓰러트리고 말하시지!" 그 말과 함께 앤드루의 아버지는 유시라크라고 하는 기사한테 덤벼 들었고 그 기사도 준비하고 있었는지 앤드루 아버지의 검을 막아섰다. '오 저것이 바로 기사들의 검 대결!' 한심한 나, 지금 상황이 어떤데.... 흥미 진진하게 칼싸움을 구경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말고도 기사들의 무리도 구경하고 있는데 뭐 어때? 정말 살벌하게 싸웠다. 나와 앤드루의 대결은 저들에 비하면 어린애들 장난인 것 같았다. (진짜 어린 애들이긴 하지만...) 그때였다. 나를 잡으라고 했던 기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유시라크, 지금 뭘 하고 있는겐가? 반역자를 봐주고 있는겐가? 자네가 소드 마스터란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왜 검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건가?" 저인간 되게 날리치네, 그냥 얌전히 구경이나 할것이지, 너 조금있다가 두고봐라 너만은 내가 가만 안둔다. 유시라크는 그 날리치는 기사의 말을 듣고 흠칫 하더니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검을 들어 앤드루의 아버지를 노리는 모습을 가다듬었는데, '오,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검기라는 거구나.' 유시라크의 검에 하얀 빛이 서리더니 검을 조용히 감싸면서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앤드루의 아버지도 자세를 가다듬더니 검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잉? 그럼 앤드루의 아버지도 소드 마스터란 거네? 그럼 둘다 봐주면서 싸웠다는 거야?' 검에 검기를 맺힌채 싸우는 것은 아까의 싸움이랑 비교가 안 되었다. 물론 싸우는 모습은 비슷 했지만, 음향효과라던지 아니면 주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검기가 땅에 부딧히면 땅이 푹푹 파이고, 검을 휘두룰때마다 주위의 쌓여있던 눈이 날라가는데, 곧 싸우는 두 사람의 주위는 엉망이 되어갔다. 하지만 두사람의 실력이 비슷한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어느새 왔는지 앤드루가 내 옆에서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꼭쥐며 대결을 보고 있었다. 눈이 되게 긴장되어 있는게 보기에 심히 안됐다. 불쌍한 녀석.... 유시라크가 앤드루 아버지의 검을 피하면서 앤드루 아버지 앞으로 찔러 들어가자 앤드루 아버지 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은 아까 유시라크의 검기에 의해 살짝 패여 있었고 물이 고여 있어서 미끄러웠다. 그곳을 밟은 앤드루의 아버지는 휘청 거렸으나 곧 중심을 잡을 수 있 었다. 하지만 유시라크도 뛰어난 검사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앤드루 아버지의 검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검을 앤드루 아버지의 목에 대고 겨누었다. "아버지...." 앤드루가 신음을 흘리듯 아버지를 불렀다. "잘했다 유시라크. 역시 레스틴 왕국 소속 근위 기사단 부단장 다운 솜씨다." 아까부터 계속 나서는 저 날리치는 기사가 말했다. 저인간 되게 맘에 안 드는걸? 그 기사가 앞으로 나오자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나이가 약 50대 중반의 중늙은이었다. '늙은이면 늙은이 답게 얌전히 구경이나 할것이지 뭘 그렇게 나선담? 아마 저 노인이 대장인가 보군...' "자 반역자를 체포하고 저 소년들도 데려가라." 그 늙은이가 말하자 몇명의 기사들은 앤드루의 아버지를 결박했고 나머지 몇몇의 기사들은 우리 에게 다가 왔다. "어쩌지 아힌?" 앤드루가 내게 작게 물었다. "앤드루 안됐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자.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어." 앤드루는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우리가 곱게 잡혀준다 해도 앤드루는 반역 자의 자식으로 처형 당할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나까지 덤을로 끌려가 고생할 것이 뻔했다. 그 러니 곱게 잡혀줄 수야 없었지. 나는 내가 외우고 있는 주문중 가장 음향과 조명 효과가 탁월한 파이어 필드를 골라 주문을 외웠다. 될수 있는한 멀리까지 마법을 퍼트려야 했다. 지금 내가 노리고 있는 것은 적을 공격한 다기 보다 할아버지의 주위를 끌려는 것이다. 여기서 큰 마법이 일어난 다면 할아버지께선 내가 걱정이 될테니 달려오실 것이다. 물론 이 마법이 할아버지께서 계신 곳까지 보여야 가능 하겠지 만.... "앤드루 내곁으로 붙어!" 앤드루는 내가 마법을 외운 것을 알아차리곤 얼른 내 곁에 바짝 붙었다. "파이어 필드!"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마나를 동원하여 마법을 일으켰다. 솔직히 이렇게 큰 마법은 한번도 구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효과가 있는 듯 우리의 주위에서 큰 불 꽃이 일어나면서 기사들을 덥쳤다. "마법사다. 젠장 저 꼬마가 마법사일 줄이야." "우선 뒤로 후퇴하라, 저 꼬마 녀석이 마법을 오래 지속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물러나서 불꽃이 가라 앉을때까지 기다려!" '흥 이놈들아 내가 보통 마법사인줄 아냐?' 하지만.... 이렇게 높은 계열의 마법을 처음 구사해 보기 때문에 마법을 유지 시키는데 온 정신 을 집중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이 불구덩이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앤드루 또한 사방이 불 덩이 인데 이곳을 나를 데리고 빠져 나가기란 불가능 했다. 오직 빨리 할아버지가 이 불을 보고 와주시길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한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더니만 불꽃이 갈라졌다. 거기에는 아까 그 늙은이가 검을 들고 서있었다. 가뜩이나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불 한 귀퉁이가 갈라지자 순간 정신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마법이 풀려 버렸다. "지금이야, 저 꼬마를 잡아!" 윽 저 괴씸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저놈도 소드 마스터인가 뭔가였나보다. "젠장 앤드루 나좀 엄호해!" 이럴땐 주문이 필요한 마법보단 정령이 편한 법이다. "노움!" 곧 우리에게 다가오던 기사들이 바닥에 갑자기 생긴 구멍으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노움은 하 급정령, 그가 만들 수 있는 구멍은 그리 크지 않았다. 빠진 기사들도 몇명 없었거니와 그들도 곧 그 구멍에서 나올 수 있었다. "젠장, 실프 바람을..." 실프가 급히 바람을 일으켜 기사들에게 흙먼지를 날렸다. 지금 저들을 쓰러트리는 것을 기대할 순 없으니 눈을 가리게 한 것이었다. 그 틈을 타서 앤드루와 나는 기사가 없는 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사였다. 곧 3명이 우리 앞을 가로 막아섰다. 앤드루는 기사 하나를 막아섰고 나는 남은 두명에게 카사를 날렸다. "카사, 카사 가랏!" 내가 잽싸게 카사를 불러 날렸기에 그들은 카사를 가슴에 정통으로 맞고 넘어졌다. 하지만 갑옷 을 입고 또 뒤로 물러선 탓에 죽지도 않았다. 나는 얼른 노움을 불러 앤드루가 상대하고 있는 기사 밑에 함정을 만들어 넘어뜨리고는 앤드루 를 끌고 뛰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두명의 기사가 막아섰다. "젠장, 카사,카사,카사,카사!" 이번엔 한 기사에 두 정령씩 한꺼번에 날리곤 곧 뛰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늙은이와 유시라크 라고 하는 기사였다. 정령을 재빨리 날렸지만 그들은 검기가 맻힌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오히려 정령만 소멸되고 말았다. "꼬마야 제법이구나, 하지만 여기까지다." 나는 그 늙은이를 앤드루는 유시라크를 맞아 검을 들고 덤볐다. 그러나 그들은 기사중에서도 소 드 마스터들.... 우리들의 검은 그들의 검기 맻힌 검에 두동강 나버리고 그 늙은이는 내 목에다 검을 들이 대었다. "여기까지다. 꼬마." 그 꼬마꼬마 하지 말란 말야, 나보다 나이가 어린 주제에, 이래배도 난 340살이라구.... ------------------------------------------------------------------------------------------------------------------------------------------------------------ 번 호 : 8109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3일 22:12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2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5화 앤드루의 죽음 (3) '어쩌지?' 내 앞에 그 늙은이의 칼이 들이대 있으니 생각을 하는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젠장... 이 늙은이가 실력이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옆을 보니 앤드루는 벌써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자존심 이 상해서 그냥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면 이 날카로워 보이는 칼이 가 만 있지 않을것 같아 겁이 나기도 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해라. 너같은 꼬마 하나쯤 못 당할 내가 아니다." '힝.....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이 손녀가 위험에 처해 있는 데....'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나는 (비록 반동강이 되어버린 검이지만) 검을 손에서 놓아 버렸 다. 여차하면 공간이동으로 튀기 위해 주문을 외우려고 했지만 그 늙은이가 눈을 부라리며 노려 보고 있었기에 입도 뻥긋 못했다. '하는수 없지 나중에 기회를 보는 수 밖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젠장,젠장, 하지만 어쩌랴 시키는대로 해야지... 너 진짜 나중에 두고보자... 이렇게 속으로 투 덜투덜 대면서 서서히 손을 머리쪽으로 가져갔다.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불꽃이 그 늙은이를 강 타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엄청난 불꽃이었기에 그 늙은이는 정통으로 맞아 버렸고 비명을 지르면서 불 꽃에 휩싸였다. '헬파이어?' 지옥의 불꽅이라고 불리는 고단위의 화염 마법. 상대방이 죽을때까지 지옥의 고통을 주며 한줌 의 재도 안 남기고 모조리 태워 버린다는 헬파이어였다. (이건 적을 죽이면서 주위에 전혀 피해 를 안 준다.) 이런 마법을 쓸수 있는 사람은 이 근처에서는... "할아버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 오시나이까... 역시 내 계산이 맞았어. 나는 기쁜 마음에 할아버지께 한달음에 달려 갔는데 왠지 할아버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앤드루의 일을 할아버지께 말 안한 죄가 있기에 찔끔해서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평소에 할아버지는 항상 인자한 미소를 띄고 계셨고 엄마랑 싸울때 조차 눈에는 장난기가 흘러 넘치셨다. 하지만 지금의 할아버지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계셨고 눈에는 무서운 기운이 피어 올 랐다. 마치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수 있는 느낌... 저게 바로 살기라는 것인가? 게다가 평소에는 내보 이지 않으셨던 드래곤의 위압감도 남김없이 보여주고 계셨다. 나조차도 다리가 후들후들 거릴 지경이었다. 내가 이런데 다른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니 앤드루는 아예 새파랗게 질려 서있지도 못해서 땅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만 있 었다. 앤드루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잡으려던 기사들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채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 다. 그래도 유시라크라고 하는 기사는 제대로 서서 검을 들고 있기는 했지만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어느샌가 그 늙은이는 다 타버렸는지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우~~~ 사람타는 냄새가 그다지 좋지는 않군.... 주위는 너무나 조용해졌다. 지금 바늘 하나를 떨겨도 소리가 날껄? "이 하찮은 인간들이 감히 내 손녀를 해하려 하다니....." 할아버지는 단어 하나하나를 강하게 내뱉았다. 그 말에는 노여움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에구구 왠지 내가 일을 너무 크게 벌린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할아버지를 부르지 말 고 앤드루나 데리고 공간이동을 해버릴껄.....' 그러나 어쩌랴 이미 쏟아진 물이요 쏘아버린 화살인 것을.... 할아버지의 손에는 강력한 불길이 솟아 올랐다. 전부 태워 버리려고 하시는 걸까? 에구구 저기엔 앤드루도 있는데.... 하지만 할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히유~~, 나땜시 불쌍한 애 하나 죽게 생겼구나....' "멈춰라, 나는 레스틴 제국의 기사 유시라크 알리시아드다. 우리는 여기 반역자를 잡으러 왔을 뿐 저 소년을 해할 생각은 없다." 목소리는 심히 떨리고 있었지만 대단한 인간이군... 나조차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할아버지는 콧방귀도 안 뀌시고 그들에게 큰 불덩이 하나를 선사 하셨다. 그들은 자신들 에게 불덩이가 다가가고 있는데도 공포에 눌려서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단지 유시라크 가 재빨리 앤드루를 감싸 안았다. 그의 몸 주위에는 은빛의 엷은 막이 생겨 앤드루와 그를 보호 하고 있었다. "제법이구나 인간.... 내 파이어 필드를 막아내다니.... 하지만 거기까지다. 네놈들이 내 손녀 를 괴롭힌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저기 할아버지 나 괴롭힌 놈은 할아버지가 벌써 태워 죽였는데..." 겨우 살아남은 저 둘까지 죽일 수 없어서 나는 할아버지 소매를 잡아 당기며 기어들어가는 목소 리로 말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를 휙 돌아 보더니... "에구구 이쁜 내새끼... 그래 어디 다친덴 없고? 저 하찮은 놈들이 감히 너한테 해꼬지를 하려 들다니..." '역시 우리 할아버지 맞구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는 본래대로 얼굴에는 가득 미소를 눈에는 장난 끼를 머금고 계셨다. 물론 걱정과 분노가 같이 있긴 했지만..... "할아버지 저들은 안그랬어요. 아까 저놈이 나를 위협했어요, 나중에 무지 패줄려고 했는데..." "에그그, 그랬어? 그럼 저놈들이라도 패련? 네가 원한다면 꼼짝 못하게 묶어주마..." "아니, 그냥 나주면 안될까여?" "무슨 소리냐? 아까 너한테 해코지 할려는 놈들과 같이 온것 같은데... 에구, 우리 아린 착하기 도 하지 저런 하찮은 것들도 아낄줄 알고... 걱정마라, 이번엔 우리 아린이가 부탁하니 특별히 저놈들까지만 손봐주고 저놈들 나라는 봐주마." '힉? 아니 글면 쟤네들 나라까지 멸망시킬려고 했단 말야? 분명 책에서 해츨링을 죽인 마법사의 나라를 멸망시켜 버렸다는 얘기는 읽었지만..... 안말렸으면 큰일 날뻔 했네...' "할아버지 그러지 말구요, 쟤네들 저 주면 안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검술 대련할 상대가 없어서 심심했거든요.... 쟤네들 가지고 매일 놀고 싶은데...." "그럴까? 우리 아린이 장난감으로 한다는데 이 할애비가 그것도 못해줄까봐. 그럼 저놈들을 데 스 나이트로 만들어 버릴까?" "아니요, 살아있는게 더 잼있을것 같은데..." "흠...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럼 그냥 주리?" "예, 제가 정지 마법을 걸 수 있으니까 저들을 관리할 수 있을 꺼예요." "하지만 저놈 꽤 하는 놈일께야, 그냥은 위험하니까 이 할애비가 가벼운 금제 마법을 걸어주 마." "어떻게요?" "글쎄다, 저놈들이 널 공격 못하게 하는게 어떨까?" "에이 할아버지 그럼 저랑 검대련을 못하잖아요..." "아 그렇구나, 그럼 위험하니까 갖고 놀지 말아라." "잉~~ 주신다고 했잖아요." "아 그것도 그렇군... 그럼 이럼 어떨까? 이놈은 왠만큼 마나를 다룰줄 아니 마나를 봉인 시켜 야 겠다. 그럼 너가 충분히 다룰수 있겠지?" "아 그럼 돼겠네요." "그래그래, 그럼 그렇게 하마." "참 할아버지 제 검이 부러졌는데..." "그러냐? 그럼 나중에 할애비 레어에 한번 들려라, 좋은걸로 하나 주마." "예~~." 할아버지는 유시라크의 몸에 마법을 걸어 마나를 봉인 시키고 레어로 돌아 가셨다. 가면서 한마 디 당부하는것을 잊지 않으셨다. "아린아, 이번엔 저 인간들이 네 영역을 침입한거라 가만 있는거지만 다시 인간들을 만나면 그 땐 할애비한테 알려야 한다 알았지? 또 이런 위험에 처하면 나는 물론 네 할미가 인간들을 모두 전멸시켜 버릴꺼야." "에구구 하마터면 큰일 날뻔 했네... 이봐요 당신 괜찮아요?" "아까 그 마법사는?" 앤드루는 아까 기절한뒤론 아직까지 깨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린 유시라크한 테 내가 다정히 말을 건넸건만 저놈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긴 공포에 안 질리는게 비정상이겠지. "아, 할아버지는 가셨어요, 그러니 이제 괜찮아요, 난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에구구 아 까 그 늙은이를 좀 손봐줄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해치워버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잖아?" "다 죽은건가?" "어쩔수 없었다구요. 당신까지 죽을 뻔한걸 내가 겨우겨우 살린거예요, 그러길래 왜 나한텐 덤 벼가지구 그래요?" "그렇군....하아~, 이젠 날 어쩔꺼지?" "글쎄... 우선 당신을 해칠 맘은 없지만 지금 당신을 내가 놓아주면 할아버진 분명 당신을 가만 안둘꺼니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야 할께예요, 어짜피 앤드루도 혼자가 되어서 돌봐줄 사람이 필 요했고 당신도 앤드루를 싫어하는게 아니쟎아요.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도망시켜 줄 테니까..." "우선은 이녀석을 눕히고 나도 좀 쉬어야 될것 같군..." "아 그래 앤드루네 집으로 가면 되겠군요. 지금 당신이 걷는것은 무리일테니 마법을 걸지요." 우리는 앤드루네 집으로 가서 앤드루를 방에 눕혔다. 그리고 유시라크는 갑옷을 벗고 앤드루 아 버지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나는 먹을것을 찾아 보았다. 비록 식기는 했지만 스프하고 빵과 훈 제된 고기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스프를 데우고 식탁을 차렸다. 몇번 와본 집이라서 쉽게 할 수 있었다. 잠시후 유시라크가 나타났다. 몸을 씻었는지 머리가 젓어 있었다. "드실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앉았다. "여기서 살았나?" "아뇨, 난 여기서 살진 않았지만 몇번 놀러 온적이 있지요." "네 이름이 뭐지?" "아힌이요." "아까 그 마법사는 누구였지?" "아 울 할아버지신데 저를 끔찍히 아끼시기 땜에....하하" "그렇다고 제국의 기사들을 다 죽여 버리다니....." "다 죽인건 아닌데......." "다 죽은거지뭐, 하긴 그정도의 능력이면 제국이 겁나지는 않겠지, 정말 대단한 분이더군.... 우리 왕궁 수석 마법사도 그정도는 안 될꺼야." '푸하하하 당연하지 울 할아버지가 뉘신데...' "뭐 어째든간에....근데 당신을 뭐라고 부르지요?" "유시라크, 내 이름은 유시라크..." "아 됐어요 됐어. 아까 들어보니 짧지도 않은 이름이더구만... 너무 길으니까 짧게 유스라고 부 를께요." "좋을대로...." "그리고, 나한테 검술 안 가르쳐 줄래요?" "검술을?" "예, 나도 누군가한테 정식으로 검술을 배우고 싶거든요, 거기다 당신은 실력이 꽤 뛰어나잖아 요, 그리고 당분간 당신은 여기에 있어야 하고....." "넌 제법 검을 다룰 줄 알던데 무엇을 더 배우려는 거지?"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구요. 그리고 이건 사냥을 하면서 어쩌다 몬스터들을 만나면 싸우다 보니 생긴 실력이구...." 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음식만 꾸역꾸역 먹어댔다. "전 이제 가볼테니까 여기 이거는 유스가 치워 주세요, 내가 차렸으니까." "풋 사부한테 설것이를 시키다니..." "전 유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구요, 그리고 내일 한번 와 볼께요. 참 당신 마나가 봉인된 건 알지요? 할아버지가 봉인 시켰어요, 아마 검기는 못 쓸꺼예요. 하지만 나중에 내가 할아버지 눈치를 봐서 적당한때에 봉인도 풀어주게 할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그럼 갈께요. 앤드 루 잘 부탁해요." "넌 어디서 살지?" "저쪽 골짜기 쪽이요." "그 마법사랑 같이 사는 건가?" "아니요, 할아버진 저 산넘어에 사세요. 그럼 갈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가 더 질문을 하기 전에 재빨리 그 집을 나와 내 레어로 돌아왔 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음을 실감하고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할아버지께로 가서 칼 하나를 얻어오고 오후쯤에 멧돼지 한마리를 잡아서 앤드루의 집에 갔다. 유스는 집안을 조사하고 있었고 앤드루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흠... 이상하다 어디 크게 다친데는 없는것 같은데..." "아마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그럴꺼다." "그런가?" 나는 멧돼지를 건네고 곧 레어로 돌아왔다. 앤드루도 깨어나지 않은데다 유스도 침울해 하고 있 어서 거기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매일 앤드루네 집에 갔다. 여전히 유스는 침울해 했고 (그래도 앤드루는 잘 돌보는 것 같 다.) 앤드루는 며칠 후에 깨어 났지만 시름시름 앓았다. 앤드루가 아픈 바람에 식량 조달은 내 가 담당해야 했다. 앤드루는 며칠을 계속 앓으면서 점점 야위어 갔다. 그리고 말을 한마디도 하 지 않았다.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커서 그래." 유스는 이런 말만 되풀이 했다. 며칠 후부터 나는 유스에게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유스는 내 가 레이피어를 쓰는 걸 보더니 팔 힘에 맞는 검이라고 말해줬다. 매일 매일 유스가 시키는 대로 기본 동작을 익히고 저녁에는 유스와 대련을 했다. 유스는 첨에는 나의 실력을 얕봤으나 내가 악착같이 덤벼들고 늘러 붙자 점점 대련에 진지하게 응해주었다. 하지만 아직 유스를 따라 가려 면 먼것 같았다. 유스는 언제나 여유를 가지고 나와 맞섰으니까.... 어느덧 나는 유스와 많이 친해져 대화도 많이 하고 장난도 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점점더 심하게 앓아 가는 앤드루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며칠뒤에 일어날 것 같더니 점 점 더 야위어 가고 이젠 잘 먹지도 못했다. 이러다 죽는게 아닐지 겁이 더럭 났다. 회복마법을 써봤지만 이녀석에게는 듣지 않았다. 유스는 정신적인 병은 회복 마법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거 라고 했다. 결국 일주일이 지나자 앤드루는 죽고 말았다. 그녀석 방에 들어가자 마치 잠자는 것처럼 조용히 죽어 있었다. "우씨......되게 연약한 녀석이로군, 이정도로 못 일어나고 영영 누워 버리다니......" 그녀석이 조용히 잠든것 같은 모습을 보자 괜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여기와서 처음으 로 사귄 친구였는데.... 겨우 죽음에서 구해 줬는데... 이제 살아나서 나랑 유스한테 검을 배울 줄 알았는데..... 다시 나랑 사냥갈 줄 알았는데........ 바보같은놈. 유스가 조용히 내 뒤로 다가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울지마라, 저녀석은 부모를 만나서 행복할께다. 저녀석의 부모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을테 니 지금은 온 식구가 만났겠지...."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나보다. 어쩐지 저녀석이 뿌옇게 잘 안보이더라. 쳇 내가 저깟 녀석때문 에 울다니....... 앤드루는 그녀석이 검술 연습을 하는, 지금은 나와 유스가 연습을 하는 공터의 양지 바른 곳에 묻혔다. 할아버지께 앤드루가 죽었음을 말씀 드리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다 말씀 드렸다. 그러자 할아버 지가 나를 품에 꼭 안아 주셨다. "아린아, 인간은 우리들보다 너무나 빨리 죽는 존재란다. 너는 그 존재들의 죽음을 너무나 많이 경험하게 될꺼야, 그런데 그럴때마다 이렇게 가슴 아파하면 네 가슴이 어디 남아 나겠니? 이건 우리 드래곤들이 이겨내야 하는 거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많았지, 인간 세상에 나가서 놀다 온 드래곤들 치고 그런 일 안 당한 드래곤은 없을게다. 하지 만 우리는 그런 하찮은 존재들때문에 울지 않아. 알았니?" '하찬은 존재라..... 너무나 많은 친구들을 잃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들을 하찮은 존재로 치부해 버리고 슬픔을 지우는게 아닐까?' 오늘따라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나였다..... 번 호 : 8149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4일 22:12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6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6화 성룡이 되다 제 6화 성룡이 되다. 몇달이 지났다. 유시라크는 여전히 앤드루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나는 매일 유시라크한테 가서 검술을 배웠다. 가끔 우리는 사냥을 같이 가기도 했다. 유시라크는 검술에 비하면 활솜씨는 형 편 없어서 대부분 내가 잡았다. 그는 나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언제 보내줄건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에 대해 물어올까봐 걱정을 하던 나는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자 오히려 궁금해졌다. "유스, 가족이 보고싶지 않아요?" 그는 피식 웃더니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유스가 집에 가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아서요." "나에게는 가족이 없어." "결혼 안 했어요?" "그래, 아직 하지 않았지...."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나이가 많다고 다 결혼한건 아니지 않니? 근데 이상하구나, 새삼스럽게 나에 대해 궁금해졌 니?" "아까도 말했지만 유스는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아서요. 나야 유스가 여기 있으면 좋긴 하지만....." "글쎄다,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걸? 여기 있는게 편해." "당신은 왕궁 기사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그럼 직업이 있고 또 거기에 당신 생활이 있쟎아요." "훗, 내직업이라...... 그래, 처음 왕궁 기사가 되었을당시엔 정말 기뻤지, 목숨을 다해 왕께 충성하는 기사가 되고 싶었는데...." "기사 생활이 안 좋았나보죠?" "후후후...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참내, 아직 노인도 안 된 사람이 노인처럼 저렇게 세상 다 산것처럼 굴다니.... 나도 모르겠다. 자기가 가고 싶지 않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왠지 저러는게 찝찝하군.... 며칠이 더 지났다. 유스는 여전히 돌아갈 생각을 안했다. "유스, 돌아가야 하지 않아요?" "왜?" "왜라니요, 생각해보세요, 유스는 여기 반역자를 잡으러 온 왕궁 기사였쟎아요, 그런데 반역자 도 죽고 같이 온 기사들도 죽고 유스 혼자 남았는데 돌아가서 보고를 해야 하지 않아요? 안그러 면 어떻게 된건지 모르니까 여기에 또 기사들을 보내 올지 모르쟎아요, 그럼 여기 이러고 있는 유스는 뭐라고 할꺼여요?" "오 그렇구나. 똑똑 한걸?" "그건 똑똑한게 아니라 상식이라구요, 상식!" "뭐 금방 찾을수 없다는건 그들도 잘 알고 있을테니 몇달 늦는다고 달라지는건 없겠지, 단지 난 조금이라도 늦게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그곳이 싫어요?" "지금은......" "그럼 갔다가 다시 오면 돼잖아요. 가서 보고를 하고 기사를 그만 두고 여기로 와요. 여기 아무 도 못 살게하고 유스를 기다리고 있을께요." "후후후, 처음에는 나보고 당분간 여기 머물라고 하더니만 이제는 날 못 보내서 안달이구나, 내 가 그렇게 싫증났니?" "그런게 아니라구요." "알아, 나도 언젠가는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잠시 나를 억매고 있는 모든 책임과 의무를 잊고 그냥 지내보고 싶었어.... 단지 그것 뿐이야. 네 말대로 나는 곧 가야 하겠 지." ".........." "하하하,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꼭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같쟎아." "기사라는게 좋은게 아닌가봐요, 유스가 그러는걸 보면..." "그렇지 않아. 단지 지금 왕궁이 좀 혼란스러워서 그러는 거야, 예전엔 우리 왕궁 기사단은 다 른 나라에서도 인정해주는 대단한 곳이었다구.... 이제 다시 안정돼면 다시 예전처럼 될꺼야." "흠 나야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알고 싶지는 않지만 어째든 돌아갈 생각은 있나 보군 요." "그래 돌아가야지. 할아버지께 부탁해서 내게 건 봉인을 풀어주겠니?" 벌써 봉인 푸는 방법을 알아 놨다구....... 할아버지께 허락도 맡았구. "언제 가게요?" "빨리 갈수록 좋겠지, 아힌이 이렇게 날 싫어하는데..." "싫어하는게 아니라고 했쟎아요." "그래그래, 어째든 거기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 올꺼야, 그때까지 여기가 이대로 있을진 모 르겠지만...." "아마 그대로 있을꺼예요. 여기에 다른 사람이 살지 않게 내가 봐줄께요." "하하하, 왠지 정든 님을 떠나 보내는 아가씨의 대사 같은걸?" "에게게? 유스가 잘생긴 젊은 남자라도 되는줄 알아요?" "뭐? 내가 어때서, 난 아직 장가도 안간 총각이라구." "총각이면 단가요? 나이를 생각 하셔야지요." "예예~~ 알겠습니다. 아름다우신 레이디." 나는 순간 흠칫했다. 지금까지 그에게 여자라고 말한 적도 없고, 또한 여자처럼 행동한 것도 없 는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요?" "처음에 네 할아버지가 손녀를 해코지 하려고 했다고 펄펄 뛰셨쟎니, 솔직히 그때는 잘 몰랐는 데 네가 그렇게 검술 연습을 하는데도 팔에 힘이 없어서 바스타드 소드를 못 쓰는 걸 보고 눈치 채기 시작했지, 그리고 더운 날인데도 나랑 씻으려고 하지도 않았쟎아. 보통 소년들 같으면 같 이 냇가에서 씻을텐데...." "참내, 눈치하난 빠르다니까. 그런데 왜 여태껏 모른체 했어요?" "그냥 아힌이 말을 안해 주니까,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굳이 아는체 할필요도 없을것 같 아서말야..." "어째든 그럼 언제 출발할꺼예요?" "봉인이 풀린다음 곧 출발할꺼야." "그럼 지금 풀어줄께요." "아힌이 풀줄 알아?" "벌써 할아버지께 허락 맡았다구요, 그럼 오늘은 늦어서 못갈꺼구, 내일 가겠네요?" "그래야겠지? 내일 새벽에 출발해야겠어." "그래요 그럼, 내일 난 배웅 안할꺼예요. 일찍 못 일어나거든요." "이거이거, 내가 가는데 아린이 배웅을 안해주면 섭섭할텐데?" "또 돌아 올꺼잖아요, 그러니까 알아서 가세요. 여기까지도 잘 왔으니까, 짐정도는 챙길줄 알쟎 아요. 참 돈은 있어요?" "그래, 나에게도 얼마정도 있고, 또 이 집에 돈도 조금 있더라고... 그거면 충분해." "잘 됐네요, 그럼 봉인을 풀께요" 나는 할아버지께 배운대로 주문을 외우고 봉인을 풀었다. 할아버지가 봉인할때는 별 힘들이지 않고 하시는것 같은데 내가 봉인을 풀려니까 꽤 많은 양의 마나가 필요했다. 역시 이것이 고룡 과 해츨링의 차이인가? 봉인을 풀고 난후에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레어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난 일부러 늦게 일어났고 앤드루의 집에 가지 않았다. 대신 할머니 레어에 가서 늦께까지 놀다가 왔다. 다음날 도 그 다음날도 난 앤드루의 집에 가지 않았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봄이 왔다. 이제쯤 유스가 돌아 올거란 생각이 든 나는 그때서야 앤드루의 집에 가봤다. 오랫동안 비워놓은 집이라서 그런지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거실의 탁자에는 유스가 떠나기전 써놨을 메 모가 어떤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아힌에게 정말 진짜 배웅오지 않을 줄 몰랐는데 안오다니 너무한걸? 섭섭해... 하하하 농담이고 아힌에게 약속한대로 그곳 일을 정리하고 일찍 돌아오도록 노력할께. 아마 늦어도 2년 안에는 돌아 올꺼야. 그때까지 집 잘 지키고 있어. 그리고 이건 우리 어머니 유품이야. 약속의 징표로 줄테니까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 - 유스가 - 에구구 나이도 많은 아저씨가 닭살돗는 짓하고 있네, 하지만 뭐 기분은 나쁘지 않은걸? 단지 아 저씨가 한 20년만 젊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에구구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탁자위에는 메모지 말고도 목걸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렇게 고급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사파이어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보자 벌써 거의 일년이 지났으니까 일년 안에는 돌아 오겠구나.... 언제 올지 모르니까 가 끔 와봐야 겠다. 그뒤로 나는 가끔씩 집에 와서 청소도 하고 거기서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일년이 다가도록 유 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뭔 일이 생겼나? 하긴 그곳이 좀 복잡한 상황 이랬지? 참 나도 많이 외로운가보군....꼭 낭군 을 기다리는 색시 같쟎아?' 그러나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다시 몇년이 지나도 유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안 오려나 보군. 뭐 하는수 없지, 어짜피 평생을 같이 살 것도 아니고, 또 돌아 와봤자 내가 성룡이 되기도 전에 늙어 죽을텐데뭐....' 라고 위로를 해보았자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을 모른체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레어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폴리모프의 주문을 외웠다. 오랜만에 드래곤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레어에도 오지 않고 앤드루의 집에서 지냈던 것이다. 나는 레어에 누워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린아, 아린아 그만 일어나 언제까지 자고 있을꺼야?" "으응~~ 엄마? 조금만 더 잘래~~" "어리광 피우지 말고 얼른 일어나지 못해? 100년간 잤으면 됐지 얼마나 더 자려고 그래? 너 성 룡이 될때까지 잘꺼야?" 뭐? 100년? 정신이 확 들었다. 일어나보니 인간 세상에 놀러 갔다는 엄마가 어느새 돌아왔는지 내 앞에 계 셨고 그 옆에는 할아버지도 계셨다. "할아버지, 엄마? 언제 돌아 오셨어요?" "쯧쯧 이것아 네가 동면한지 벌써 100년이 지났어." "그러길래 왜 애는 재우고 그래요?" "흥, 해츨링을 버리고 놀러나간 엄마가 뭔 잔소리가 그렇게 많냐? 내가 그랬으면 뭔가 이유가 있는줄 알 것이지." "뭐라구요? 평소에 잘 했으면 내가 이런말도 안하지요. 그러길래 누가 평소에 못하래요?" "흥, 그럼 넌 평소에 못난 행동을 하던 나한테 애를 맡기고 놀러 갔냐?" "아니 누가 아버지한테 맡겼다고 그래요? 단지 레어가 가까이 있으니까 자주 봐달라고 했지." "그게 그거지 뭐냐?" 에휴휴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전혀 변하신게 없군 두분은..... 그래도 이분들이 있어서 다 행이야.그런데 100년이 지났으니 내가 몇살이지? "잠까만요 엄마 내가 100년동안 잤으면 지금 내가 그러니까 나이가..." "400살 하고도 이제 99살이지, 내일이 네가 태어난지 500년이 되는 날이란다." "벌써 그렇게 됐어요? 그럼 내일은 내가 성룡이 되는 날이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너를 깨우러 온게 아니겠냐? 네 엄마도 너가 성룡이 되는 걸 보기 위해 이렇게 왔쟎니...." "세월 참 빨라요, 이녀석이 태어난게 얼마 안 된것 같은데, 벌써 성룡이라니....." "글쎄말야, 이녀석도 이제 한명의 드래곤이 되는군..." "그러고보니 해츨링이 또 태어 났다지요?" "그래, 이번엔 두마리나 태어 났다는군, 실버하고 그린이라고 하던데?" "흠 이제 해츨링도 계속 태어나니 드래곤 로드도 걱정을 덜었군요." "그렇지, 이로써 우리 드래곤도 100명을 채웠군..." "할아버지 그럼 드래곤이 100명이 못 넘었나요?" "그래, 우리 드래곤들은 아기를 잘 낳지 않거든, 그래서 종족수가 몇 안돼지, 너희 엄마가 태어 날쯤엔 50명이 됐나 그럴껄? 그때 전 드래곤 로드가 종족수를 늘리기 위해 무단 애를 많이 썼 지." 흠.... 드래곤 숫자가 100명이라고? 하긴 드래곤이 많으면 큰일이겠지....음식도 많이 필요할꺼 고 또 드레곤 레어도 많이 필요할꺼고, 또 많은 드래곤들이 인간 세상으로 놀러가봐......... 음 역시 능력있는 종족은 적은 편이 좋겠군.... "아! 그래 아린아 내일 할머니 레어로 오는것 잊지 마라. 네가 성룔이 되는 날이니 지금 있는 레드 드레곤들이 다 모일꺼야." "아린 애비도 오나?" "그 용놈(?)은 인간 세상으로 놀러 갔어요. 뭐 자기 자식이 성룡이 되는날인데 올지도 모르지 만..." "흠 그렇군, 그놈 아직 아린을 한번도 안 봤쟎아?" "글쎄 자기 자식한테 관심도 없는 용이라니까요." 그러고보니 난 내 아버지 되시는 드래곤을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궁굼해 하지 않으 니...나도 관심이 없긴 마찬가지군.... 할아버지와 엄마가 내일 늦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돌아가지자 나는 슬슬 밖으로 나왔다. 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여긴 별로 변한게 없는것 같았다. 나는 우선 앤드루의 집이 있던 곳으 로 가 보았다. 누가 부셔놨는지 아니면 저절로 무너졌는지 앤드루의 집은 무너져 있었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앤드루를 묻은 공터를 가 보았지만 거기도 공터였던 흔적은 사라져 있었 다.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구나...' 그러고 보니 숲은 더 울창해져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진 탓이겠지만.... 하지만 여긴 앤드루의 가족이 살았던 곳인 만큼 다른 사람들이 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저쪽으로 좀더 가면 마을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긴 약초를 캐는 사람이나 사냥꾼이 없단 말야? 호기심이 동해진 나는 마을로 내려가보기로 했다. ' 해츨링은 인간 마을에 가는 것이 금지되긴 했지만 난 내일이면 성룔이 되는데 뭐 봐주시겠지, 그냥 얼른 갔다오자.' 이런 나쁜(?) 마음을 먹은 나는 곳 마법으로 공중으로 떠오른뒤 마을이 있다는 쪽으로 날아갔 다. 100년이 지나서 그런지 마나가 예전보단 더 많아졌고, 더 자연스럽게 흘렀다. 나는 길을 잃어버릴까봐 실프를 불러 냈다. "안녕 실프, 오랜만이지? 저기 인간들의 마을을 찾아 줄래?" '오랜만이예요 주인님, 저를 잊으신줄 알았어요.' 힉 실프가 말을 했다? "지금 너가 말한것 맞지?" 실프가 살포시 웃더니 말했다. '주인님의 마력이 높아 지셔서 저와 대화를 하실수 있는 거예요, 더구나 주인님은 저를 인격적 으로 대해 주시니 제가 감히 말을 걸수 있는거예요.' 아 예전에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 났다. 드래곤은 정령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어째든 잘됐네, 실프 너와 말을 할 수 있다니... 잠에서 깨어 나니 좋은 일들만 생기는걸? 그나저나 실프 이 근처에서 인간의 마을이 어디 있지?" '저 산을 넘어가야 마을이 하나 나와요. 꽤 먼 거리지요.' "뭐? 예전에는 이 근처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 근처의 숲의 정령들에게 물어 볼까요?' "그래줄래? 이상하다 분명히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고 들은것 같았는데...." 숲의 정령들에게 물어 본다고 갔던 실프는 잠시 후에 돌아왔다. '백년전까진 저기에 마을이 하나있었대요,' "그런데 왜 지금은 없는거지?" '백년전에 고룡인 레드 드래곤이 와서 흔적도 없이 멸망 시켰다고 하던데요? 그뒤로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오지 않았대요.' "고룡인 레드 드래곤?" 이 근처에서 고룡이라면 할아버지뿐인데? 근데 할아버지가 뭐하러 마을을 없애셨지? 잠깐만 내 가 동면을 하도록 마법을 거신게 할아버지라고 하셨지? 그럼 할아버지가 유스의 일을 알고 계셨 구나.... 그것때문에 화가 나셔서 마을을 없애버리셨구........ 참내 할아버지는 너무 과잉 사 랑을 하신 다니까..... 사라진 마을 사람들은 안됐지만 나는 사악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그럼 실프 마을은 찾지 말고 우리 오랜만에 사냥이나 한번 해볼까?" 번 호 : 8182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5일 23:37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3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6화 성룡이 되다 (2) 다음날 나는 할머니 레어로 갔다. 할머니께선 늘 그래왔듯이 레어에 계셨다. 전과 달라진 점이 라면 할아버지, 엄마를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이 와 있었단 걸까? 마치 내가 태어나서 여기로 이 름을 받으러 온 때 처럼.... "어서 오너라 아린아. 좀 늦었구나." 엥? 난 일찍 온다고 온건데? 하지만 어른들이 먼저 다 와 계셨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군... "죄송합니다. 좀 늦었어요."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역시나..... "어머, 벌써 쟤가 성룔이 되는군요." "해츨링이 태어 났다고 모인지 벌써 500년이나 지났다니...." "아! 당신은 아린이 태어 났을때 인간 세상에 있어서 몰랐겠군요?" "예, 돌아와서 칸 세실리스님께(아린 할머니세요 ^^) 인사드리러 왔더니 해츨링이 태어 났다고 하시지 뭐예요." "그러고보니 해츨링이 또 태어 났다지요?" : : : 여전하군.... 내 인사가 끝나면 수다 떨기 시작하는거.... 비록 이게 두번째 모임이긴 하지만 (^^) "자, 이제 그만 하시고 아린이 왔으니 성룡식을 시작 하겠습니다." 레드 드래곤의 대표자인 칼 제피로스 아저씨가 나섰다. 참 엄마가 그러시는데 이젠 나도 성룡이 기 때문에 아저씨란 호칭을 쓰면 실례란다. 정중히 ' 칼 제피로스님' 이라고 불러야 한다는군. 드래곤의 예절은 간단해서 좋긴 하지만 인간 예절에 익숙해 있던 내가 아저씨라 부르던 사람에 게 갑자기 그럴려고 하니까 상당히 어색했다. "아시리안은 앞으로 나오시오." 성룡식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성룡식이라고 해서 거창한게 아니었다. 그냥 칼 제피로스께서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했다. "위대한 태고의 용 칸 크라비스이시여, 이제 제 앞에있는 아이가 성룡이 되려 합니다. 레드 드 래곤의 대표로서 이 아이에게 성룡의 증표를 당신을 대신하여 내립니다." 흠.... 드래곤들은 신을 섬기지 않는 대신 자신의 조상을 섬기나 보군..... 그때 제피로스의 손을 통해 내 머리속으로 어떤 마나가 흘러 들어왔다. 그런데 내 마나와 다른 주제에 마나끼리 서로 충돌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 섞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 머리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홀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겁먹을것 없단다 아린아. 그건 성룡의 표식, 각 종족의 대표들이 성룡이 되는 드래곤들에게 주 는 거란다. 그게 있어야 대표들이 각각의 드래곤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단 다." 그렇구나... 드래곤들도 서로 가끔은 연락도 하고 그러나 보군. 하긴 그러니까 행사(?) 때마다 이렇게 모이지.... "이제 해츨링 아시리안은 레드 드래곤의 일족 칼 아시리안이 되었음을 선포 합니다." 그게 끝이었다. 그걸로 난 성룡식을 다 마친 거였다. 뭐 드래곤들은 게으른 종족들이라 거창하 지 않을 거라는건 짐작 했지만 이건 간단해도 너무 간단했다. '아니 겨우 이걸 보려고 이렇게 여기 모인거란 말야?' 물론 그렇지 않았다. 지금 끝난건 1부 였고, 이젠 성룡식을 막 치룬 성룡에게 행복한(?) 2부 순 서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종족의 어른들이 이제 막 성룡이 된 드래곤을 축하하기 위 하여 준비한 선.물을 주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나에게 약간 낡아보이는 가죽 주머니를 건네셨다. "아린아, 이건 마법의 주머니란다. 여기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어떤 물건이든 얼마만큼이든 넣을수가 있단다. 거기다가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아무리 많은 물건이 들어가도 무겁지 않 단다. 너를 보아하니 곧 인간 세상으로 나갈 것 같으니 이게 너한테 좋은 선물일 것 같아 준비 했단다." "우와, 고맙습니다 할머니." 호호호, 이젠 짐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 다 여기다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 돼잖아. 이렇게 운이 좋을수가.... 할아버지는 마법의 망토를 주셨다. 겉으로 보기엔 약간 낡은 그렇지만 푸른색의 아주 고급스러 워 보이는 망토였다. 이것을 걸치고 있으면 5클래스의 마법에 정통으로 맞아도 끄떡이 없고 거 기다가 추위는 물론 더위도 막아주는 여행에 딱 알맞는 망토였다. 엄마는 마법이 걸린 부츠를 주셨다. 이건 엄마가 처음 성룡이 되어 인간 세상에 나가서 여행을 하다가 구한 것이라고 하셨다. 역시 여행하기에 좋은 부츠였다.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는건 물론 이고 왠만한 물리력은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다른 드래곤들도 많은 선물을 주었다. 칼 제피로스는 금화 한자루를, 칼 세실리안은 미스릴로 만든 정교한 레이피어와 단검 30자루를... 이렇게 해서 난 하루아침에 왠만한 인간 부자들 못지 않게 큰 보물들을 갖게 되었다. 웃음이 저절로 나와서 입이 찟어질 것 같았지만( 푸하하하하 ) 그래도 웃음을 감추고 정중하게 감사를 표시했다. 이걸로 성룡식이 끝나나 했다. 하지만 한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바로 성룡식의 하일라이트, 드래곤 로드와 전 드래곤 종족의 고룡들께 성인이 되었다고 인사를 드리러 다니는 거였다. 물론 공간 이동으로 빨랑빨랑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그러면 하일라이트가 아니지.... 드래곤들은 시간이 남아 돌아 어쩔줄 모른는 종족, 인사가 한 몇년쯤 늦어도 귀엽게 봐주는 것 이다. 몇달만에 도착하면 빨리 도착했다고 그럴껄? 그러므로 이건 같은 종족의 어른과 함께 인간 세상을 통해서 여러 고룡들께 인사를 드리러 다니 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세상을 구경할 첫 기회란 말씀! 하지만, 이 행복한 기회에는 동행할 어른이 필요한데 말씀이야... 보통 엄마 드래곤이 같이 동 행을 한다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성격이 난폭한 레드 드래곤중에서도 성질 드럽기로 유명한 분, 이분이 갔다간 뭔 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걸 여러 드래곤들이 느끼는 거였다. "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엄마니까 당연히 내가 가야지요!" "네가 갔다가 뭔 일을 저질르려고? 성인식을 치르고 고룡들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벌인 일만 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 안 하냐?" "흥, 내잘못만은 아니라고욧." "칼 세르니안, 당신은 인간 세상에 나갔다 온지 얼마 안 되었으니 좀 쉬시는게 어떨지?" "내가 금방 갔다 왔기 때문에 가려는 거라구요, 그만큼 내가 인간 세상에 대해서 잘 알지 않겠 어요?" 할말 없다.... "흠, 그럼 나도 같이 가마, 난 아린을 지금까지 돌봐줬으니까 끝까지 돌봐 줘야지." "칸 시스파슈타인 당신이 간다면 맘이 좀 놓이겠군요." 오 의외로 할아버지가 인정을 받고 계시는군... 하지만 저 두분이 계시면 내가 피곤할텐데.... "뭐 아린이 두 분을 잘~~ 아니까 문제는 없겠지요." 이거 어째 어감이 이상하다? "그럼 이번 아시리안의 첫 여행에는 칸 시스파슈타인과 칼 세르니안이 함께 동행하는 걸로 알겠 습니다." 어라라? 그렇게 정해버리면 난 어쩌라구? 이번이 첫 여행인데... 저 두분 사이에 끼어서 골치만 아프게 됐쟎아? 이거 여행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번 호 : 8211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6일 23:16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2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7화 인사 드립니다! 제 7화 인사 드립니다! "어디보자, 드래곤 로드가 어디에 있었더라?" "아마 이쪽인것 같은데? 아! 여기 아니예요?" "흐음, 거긴가? 이거 오랜만에 찾으려니 잘 모르겠군." "테아칸 왕국이 옆에 있으니까 여기 맞을꺼예요." 지금 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인간 마을의 한 식당에 와 있다. 내가 성룡이 됬 었기 때문에 모든 종족의 고룡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여행을 시작한 참이었다. 엄마와 할아버 지는 이곳에 오셔서 세계지도를 사신뒤 드래곤 로드가 살고 계신곳이 어딘지 찾고 계시는 중이 었다. 여기서 잠깐, 드래곤 로드에 대해 설명하자면, 로드라고는 하지만 지배자는 아니다. 앞에서도 설명을 잠깐 했지만, 드래곤들은 개개인이 다 잘난 종족이기에 거의 개인 플레이로 산다. 그렇 기 때문에 드래곤 로드라고 해서 지위가 높은것은 아니다. 단지 상징적인 존재이고,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일을 처리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드래곤 로드를 그렇게 우대하지는 않 는다. 더욱이 현 드래곤 로드는 아직 고룡이 아니기 때문에 고룡이신 할아버지는 존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드래곤 로드는 뽑는것이 아니라, 혈통을 이어서 물려받고 있다. 귀찮은 일이라서 서로 안하려고 드는 바람에 골드 드래곤의 한 핏줄이 억지로 떠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로드는 로드이므로 제일 먼저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 보시더니 드디어 찾으셨나보다. "그럼 지금 여기가 에스라왕국이니까 해로로 가는 것이나 육로로 가는 것이나 비슷비슷 하겠 군." "그럼 해로로 가지 말고 육로로 가도록 하지요? 돌아올때 해로로 오면 될테니까." "그러지 말고 해로로 가지? 아린이 처음 여행하는거라 육로로 가면 힘들꺼야, 더욱이 로드를 만 나고 다른 고룡에게도 가려면 어차피 육로로 가니까." 오늘은 설명할께 만군.... 이곳 지리를 간단하게 설명 하자면, 우선 지중해를 생각하고 계시라, 이곳의 대륙은 지중해연안과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우리 가족들(?)이 살고 있는곳은 지중해쪽에 서 아프리카 대륙쪽이다. 단지 그곳에는 밀림이 없고 높은 산맥들이 솟아 있다.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곳은 텐지산으로 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험한 산이다. 그 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맥이 뻗어 가는데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산맥이 쇼이 산맥이고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하날산까지 이어져 있다. 그리고 왼쪽으로 뻗어나간 산맥이 타이백 산맥으로 이 산맥은 쇼이 산 맥보다 더 높고 크고, 길다. 타이백 산맥에는 엄마가 살고 계신다. 그리고 나는 타이백 산맥에 서 분리되어 뻗어 나가는 게덴산맥때문에 생긴 게덴 골짜기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지중해(여기서는 아르카스해라고 한다.) 밑쪽은 큰 산맥들이 있는 고원지대이고, 산맥과 바다 사이에는 기사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레스틴 왕국이 있다. 그리고 산맥 너머에는 아시드 왕 국이 있으며 그 밑으로 더 내려가면 큰 사막이 나오고 그곳에는 부족 국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닷가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켈틴 연합국이 있다. 이곳은 10개의 영주들이 각자의 나라 를 다스리고 왕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연합국이라고 한다. 여기는 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아르카스해를 넘어가면 또다른 대륙이 나오는데 이곳은 대부분이 평야가 차지하고 있고 규모가 작은 산맥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곳에는 테아칸 왕국과 소르드왕국이 존재하는데 그 테아칸 왕국에 드래곤 로드가 살고 계신다는 거다. 우리가 지금 있는 나라는 에스라 왕국으로 레스틴 왕국과 소르드 왕국 사이에 있는 나라다. 이 나라에는 큰 강이 두개 흐르고 있고, 땅이 매우 기름진 나라이다. (지중해쪽으로 치면 메소포타 미아쪽?) 그리고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산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기름진 땅이 있고 또 한쪽으로는 화산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그럼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바다로 가야 겠군요? 여기는 큰 강이 흐르고 있으니까 그걸 이용하 면 편히 갈 수 있을꺼예요." "그렇게 하자꾸나." 흐음..... 왠지 인간세상으로 나오시니까 두분이 안싸우시는걸? 되게 싸우실줄 알고 잔뜩 긴장 하고 있었는데..... 결국 두분이 의논을 끝내고 내린 결론은 여기서 말을 타고 다이도 강으로 가서 배를 타고 바다 로 가서 거기서 배를 갈아 타고 테아칸 왕국으로 간다는 거였다. 두분은 의논을 끝내자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을 사러 나갔다. 우씨, 처음으로 인간들의 식당을 가는 거였는데, 아무것도 못 먹고 식당을 나서야 하다니.... 식사때도 아니고 또 두분은 지도를 사서 들여다 보시느라고 음식을 안 시키셨다.(내가 시킬줄도 모르고....)결국 우리는 식당 주인의 따스한(?) 눈총을 받으면서 식당을 나왔다.(엄마와 할아버 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셨지만....) 이곳은 제법 번화하는 큰 도시 였다. 다도이강과 아브록 강 중심에 위치한 곳이라는데 제법 사 람도 많았고, 큰 건물들도 많고, 도로에는 돌이 쫙 깔려 있어서 깨끗해 보였다. "흠... 할아버지 보통 큰 도시는 강 근처에서 생기지 않나요? 그런데 여기는 강 근처도 아닌데 도시가 꽤 크네요?" "여기가 화산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란다. 네 할미가 사는 곳은 위험하지만 그 근처는 위험 하지 않거든.... 그곳에는 온천관광지로 꽤 유명하단다. 그래서 그덕분에 이곳까지 커진거지." "아, 그럼 올때 온천을 들려서 올걸 그랬어요." "하지만 우리가 활화산 쪽에서 내려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겠니? 그래서 일부러 이 근 처로 공간이동을 한거야, 나중에 돌아오면 그때 온천에 가자꾸나." --------------------------------------------------------------------- 오늘은 되게 짧네요... 더 쓰려고 했는데 넘 피곤해서.... 죄송합니다. 번 호 : 8246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8일 00:18 등록자 : LODEMP 조 회 : 99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화 인사 드립니다!(2) 할아버지가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마(馬)시장을 찾았다. 역시 도시가 크고 관광지로 가는 길목이다 보니까 마시장이 무척 컸다. 말도 많고 사람도 많고 더욱이 무지 소란스럽고 냄새도 고약했다. 하지만 여기서 내 말이 생긴 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되었다. 아주 예쁘고 좋은 말로 사고 싶었다. 돈 걱정은 안해도 되니 까..... 할아버지와 엄마는 말들을 살펴보고 계셨다. 나도 두분을 졸졸 쫒아다니면서 살핀다고 하고 있 었지만, 볼줄 알아야 고르지..... 말들이야 보기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 타본적도 없으니 그것도 문제군... 하지만 뭐 어떠랴? 탈줄 모르면 이제부터 배우면 돼지. 할아버지와 엄마는 어느새 말을 고르셨다. 할아버지는 갈색의 평범하지만 건강해 보이는 말을 고르셨고 엄마는 덩치가 무척 크고 사나워 보이는 흑마를 고르셨다. 그리곤 나보고 어서 고르라 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하지만 고를줄 모르는걸 어쩌란 말야? 차라리 골라주지..... 결국 두분의 무언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나는 우리를 따라 다니고 있던 여기서 일하고 있는듯한 사람한테 부탁했다. "성질이 온순한 말을 골라주시겠어요?" "저건 어떻습니까? 아직 나이가 어린데다가 암놈이고 성격도 온순합죠. 무척 예쁘지 않습니까?" 그사람이 가르킨 말을 쳐다보았다. 연한 갈색의 말이었는데 제법 예뻐 보였다. 말을 볼줄 모르 는 나도 예뻐 보이는걸 보니 꽤 예쁜건가보다. 할아버지를 슬쩍 쳐다보자 그걸 사라는듯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그럼 이걸로 할래요." "말을 고르는 안목이 있으시군요. 이놈은 명마의 피를 이어 받은 놈이랍니다. 선택의 후회는 없 으실 겁니다." 말값은 할아버지가 내셨다. 그러고보니 이 여행의 경비는 할아버지와 엄마가 대신다. 뭐 당연히 어른들이 내는 거겠지만.... 아까 그 사람이 안장을 가져왔다. 그러고 보니 난 안장을 얹는것도 할줄 모르는군.... 어떻하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이 그사람이 안장을 매주었다. 그사람이 하는걸 보니 쉬워보이긴 하지만, 보는거랑은 다르겠지? 말들을 끌고 우리는 여관을 찾았다. 강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서도 7일정도는 가야 하기때문에 오늘은 이 마을에서 쉬기로 하고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했다. 우리가 찾은 여관은 크고 깨끗한 여관이었다. 하긴 여비가 충분한데 작은 여관으로 갈 필요는 없겠지.... 여관의 간판에는 '바람이 머무는 집' 이라고 써있었다. '음 꽤 시적인 이름이다.' 안도 꽤 깨끗하고 깔끔했다. 제법 큰 곳이라 그런지 종업원들도 여럿 보였다. "방 있나?" "세명이십니까? 어떻게 드릴까요?" "침대가 두개인 방 하나하고 침대가 하나인방 한개로 주게."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선불로 30셀입니다." 여기의 기초 화폐 단위는 셀이다. 100셀이 1존드이다. 동전으로는 1셀과 5셀, 10셀이 있고 은화 로는 50셀짜리와 1존드짜리가 있다. 금화는 하나에 100존드 이다. "여기있네." "감사합니다. 이봐 여기 손님들을 이층 5호실과 8호실로 안내해드려." 한 소년이 달려 왔다. "따라오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층으로 안내되어 갔다. 할아버지가 혼자 방을 쓰시고 엄마와 내가 같이 방을 쓰게 되 었다. 할아버지방은 우리 방 바로 맞은편이었다. 저녁이 거의 다 되었기에 우리는 씻고 내려왔다. 드디어 여기서 인간의 음식을 먹을수 있게 되었구나....무얼 먹게 될까? 잔뜩 기대에 부푼 나는 할아버지가 빨리 주문하시길 기다렸다. "여기!" 할아버지가 한 종업원에게 손짓을 하며 부르자 그는 금방 달려왔다. "여기선 뭐가 제일 맛있지?" "여기선 돼지 스테이크 정식 맛있죠, 그리고 산딸기 파이도 괜찮답니다." "흠, 그럼 돼지 스테이크 정식 3개와 후식으로는 산딸기 파이를, 그리고 맥주 3개." 라고 할아버지가 주문을 하셨다. 종업원은 '예,예'를 연달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듣고 있는것 같지 않았다. 시선이 딴데로 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시선을 쫒아가보니 거기에는 엄마가 있었 다. '엄마를 바라보고 있쟎아?' 그만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몰랐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를 흘끗흘끗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중 특히 엄마를 보고 있었지만.... '아하~~!' 엄말 흘끗 쳐다보자 그들이 쳐다보는 이유를 알수 있을것 같았다. 엄마는 지금 붉은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아주 아리따운 20대 초반의 여성 모습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굉장한 미인 이었기 때문에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감탄의 눈길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이런 굉장한 미인과 동행하고 있는 우리를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 보고 있었다. 아마 이 도시에 도착했을때부터 이랬겠지만 내가 너무 흥분한 상태여서 주위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리라.... "이봐, 뭐하고 있는거야?" 할아버지가 종업원이 주문을 안 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셨는지 종업원을 다그쳤다. "예? 아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돼지 스테이크 정식 3인분이랑 맥주 3잔이지요? 금방 대령 하 겠습니다." 와우, 그 상황에서도 주문은 다 듣고 있었쟎아?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로군..... 종업원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끌끌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한심한 녀석들이로군....." "인간들이란 원래 이렇쟎아요." 엄마는 익숙해 있는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 할아버지는 붉은 머리에 히끗히끗 힌 머리가 섞인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모습이었고, 나는 17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귀찮은 옷이 싫어서 남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런 일행중 20대 초반의 미인인 엄마가 눈에 뜨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맥주 나왔습니다." 아까 그 종업원이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며 큰 컵에 담겨져 있는 맥주를 탁자 위에 올려 놓 았다. 여전히 엄마를 바라 보면서 그랬지만.... "아린아 마셔 보거라, 맥주라는 건데 도수가 약한 음료수 같은 술이란다. 인간 세상에서는 흔히 마시는 거지." 맥주는 나도 알고 있다. 비록 마셔본적은 한번도 없지만..... 맥주가 오랜 옛날부터 있어 왔지 만 여기서도 있을줄은 몰랐다. 컵을 들어 조심스럽게 한모금 마시자 약간 시큼하면서도 시원한 액체가 목으로 넘어갔다. 흠... 이래서 맥주를 더운 날에 차게해서 마시는 거구나... 처음 먹어서 그런지 몸에서 잘 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익숙하게 마시고 계셨다. "흠, 꽤 오랜만에 마셔 보는 맥주인데? 그래도 여기 맥주 맛은 괜찮은 편이군..." "나쁘진 않군요." "식사도 이정도로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할아버지의 걱정은 식사가 나오자 깨끗이 사라졌다. 음식이 꽤 맛있었던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버섯 크림 스프에 달작지근하고 약간 매콤한 소스가 들어간 스테이크.... 게다가 싱싱한 야채와 과일로 예쁘게 치장한 셀러드에다가 아까 종업원이 자랑한 기대가 컸던 산딸기 파이까지도..... "역시 큰 여관이어서 그런지 음식도 꽤 맛있네요." "하긴 이렇게 큰 도시에서 이만큼 성장 하려면 뭔가 잘하는 것이 있어야 겠지." "여기로 오길 잘했어요. 정말 맛있는데요?" 식사를 다 끝내고 배가 든든한 포만감에 차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제 한잠 푹 자고 내일을 맞았으면.... 했는데 "아린아 뒷마당으로 나가자꾸나." "예? 왜요?" "왜라니? 넌 아직 말을 탈줄 모르지 않니? 내일이면 말을 타고 떠날텐데 오늘 안에 조금이라도 익혀야지." "아..." 그랬다. 난 아직 말을 탈줄 모르는 것이다. 내일부터 일주일동안 말을 타고 달려야 하는데 말을 전혀 탈줄 모른다면 고생 꽤나 할것이다. 할아버지랑 나는 여관 뒷마당으로 나갔고, 엄마는 잘해보라고 하곤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뒷마당으로 내 말을 끌고 나오신 할아버지는 사람을 시켜 안장을 갖고 오게 하셨다. 그리곤 나 에게 안장을 얹고 묶는 법부터 가르쳐 주셨다. "여길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거란다. 어렵지 않지? 네가 풀러 서 다시 한번 매어 보렴." 나는 할아버지가 했던 것을 쭉 지켜보다가 할아버지가 물러 서시자 안장을 풀고 다시 묶어봤다. 원래 남이 하면 쉬운 법이고 묶는것 보단 푸는게 쉬운 법이라서 안장을 푼건 잘 했는데 다시 묶으려니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 잘 안 났다. "이건 이렇게 했던가? 아니야 이게 아닌것 같은데.... 아! 이렇게다. 음 그러면 이건 이렇게인 가?" 꽤 낑낑거리면서 묶고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지긋이 쳐다 보고 계실 뿐 전혀 가르쳐 주시지 않았 다. 내가 쩔쩔 맬때마다 할아버지께 도움을 바라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매정하게 무시해 버리셨 다. 한참을 낑낑 거리면서 (이게 꽤 어려운 거다.) 대충 비슷하게 묶자 그제야 할아버지가 오셔서 다시 풀어가면서 설명을 해주셨다. "이건 이렇게 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지. 음, 이건 잘 했다. 그다음에는 이렇게...." 할아버지가 다 풀고 나자 또 나에게 묶어 보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좀 서툴긴 하지만 그럭저럭 묶을수 있었다. "흠 잘했다. 이제 말을 타볼까? 먼저 안장을 손으로 붙잡고, 이쪽 발을 여기에 올려 놓고, 그다 음 몸을 들어서...." 할아버직 세세히 지적해 주시면서 도와 주셔서 말 위에는 잘 올라 갔다. 말위에 앉자 제법 자리 가 높았지만, 워낙 나는거에 익숙해 있다보니 이정도 높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앉아 있는 자리가 살아있는것이다 보니 자꾸 움직여져서 균형 잡는게 어려웠다. "그렇게 힘을 주지 말고, 어깨에 긴장을 풀어, 자연스럽게 몸을 펴. 다리에는 힘을 주고..." 다음에 할아버지가 말을 천천히 끌자 말은 앞으로 걸어갔다. 말이 걸어가자 위에 앉아있던 나는 자꾸 뒤로 넘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을 앞으로 웅크리고 손에 힘을 주게 되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라니까. 첨에 말을 탈때는 몇번 떨어져 보기도 하는거야, 떨어진다고 안 죽 으니까 너무 힘주지 말고, 리듬을타. 말을 걷는것을 느끼면 리듬이 느껴 질 꺼야, 하나 둘, 하 나 둘... 그래 그렇게." 우씨 되게 떨렸다. 잘못하면 진짜 말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내가 위에서 잡을 수 있는것은 고 삐 뿐이고 그것도 꽉 잡아서 몸을 지탱할 수도 없는 거다. 그저 내가 균형을 잡아서 몸을 세워 야 하는데 잘 안된다. 조금만 힘을 안 주면 꼭 떨어질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자 온몸이 뻐근하고 쑤셔왔다. 긴장된 어깨가 아파왔다. "자, 잠깐 쉬었다 할까? 이제 어느정도 된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하면 될꺼다." 우씨, 분명히 내일 아침에는 몸살이 나 있을꺼야. 온몸이 쑤셔서 말에서 내리는 것도 힘들었다. 겨우겨우 내려와서 일어서기도 힘들어서 땅에 털 썩 주저 앉았다. "에고고 힘들어...." "그래가지고 어디 여행이나 다니겠냐?" "이렇게 힘들줄 몰랐어요." "처음에 하려면 뭐든지 힘든 거란다. 하지만 차차 익숙해지면 괜찮아 지는 거야." 그만하고 싶었는데 조금 쉬자 할아버지가 이번엔 안 잡아 줄테니 혼자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움직이기도 힘든데.... 어찌어찌 말에 또 올랐다. 이번엔 두번째라 그런지 좀 괜찮았지만, 그래도 떨어질까봐 무서운건 여전했다. "발을 살짝 차보렴. 그럼 말이 앞으로 나갈꺼다."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짝 발을 찼지만 꿈쩍도 안했다. "너무 살짝 찼쟎아. 적당히 살짝 차야지." 그 적당히가 어느 정도냐구, 나는 좀더 세게 찼다. 그러자 말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깨에 힘 빼라니까. 힘을 너무 주면 너도 피곤하지만 말도 네가 뻣뻣해서 힘들꺼다." 옆에서 할아버지가 계속 지시를 하셨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게 아니었다. 얼마나 탔을까? 할아버지가 그만하면 됐다고 하셨을땐 다리에 감각이 없고 허리는 너무 곧게 세 우고 있어서 뻣뻣했고 구부리지도 못할 것 같았다. 겨우겨우 내방으로 올라가서 옷도 벗지 못하고 침대에 그냥 쓰러져서 자버렸다. 내일 분명히 온몸에 알이 박혔을꺼라고 중얼중얼 거리면서.... 번 호 : 8272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8일 23:03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1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 - 1화 레드 드래곤 소동 안녕하세요? 아린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가 여기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가 실수를 한게 있어서요. 지금 아린은 레드 드레곤께 인사를 드리러 가쟎아요. 그래서 제목을 '인사 드립니다!' 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생각 없이 제목을 정해버린것 같아서요. 아린이 인사를 드리러 가는 중에도 여러가지 사건이 생기거든요. 근데 그게 꽤 길어질듯 해서요. 그러면 7화가 너무너무 길어지겠지요? 그렇다고 다시 7화를 지우기는 그렇고... 그래서 제가 소제목을 따로 붙이기로 했습니다. 이상하더라도 봐주세요, 제가 너무 생각 없이 살아서 그래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 7 - 1 레드 드래곤 소동 아침에 일어났는데 온 몸이 멀쩡했다. '어? 이상하다. 어제는 온몸이 쑤시고 아팠는데 오늘은 멀쩡 하쟎아? 내 몸이 그렇게 회복이 빨 랐나? 움직이지도 못할줄 알았는데...'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먼저 내려와 계셨다. "좋은 아침이구나, 잘 잤니?" "예 할아버지, 온 몸이 아파서 못 일어날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하네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를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말하셨다. "멀쩡한게 당연하지 않니? 네 엄마가 어제 분명히 너한테 회복 마법을 걸어 줬을텐데..." 아~~! 맞다. 엄마는 내가 다치거나 그러면 마법을 걸어 주셨지? 아이고, 그러고보니 나도 바보 네, 내가 걸어도 됬었쟎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어제 방에 올라갔을때 엄마는 안 주무시고 계 셨었나? 분명히 먼저 주무신다고 올라가신 엄마였는데.... 딸내미가 힘들게 올라오니까 금방 일어나셨나 보다. 아니면 그때까지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셨는지도..... "엄마 싸랑해요~~" 새삼스레 엄마에 대한 애정이 뭉클뭉클 솟아 올라서 엄마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그러자 갑자기 뒤통수가 따거워 졌다. 주위를 둘러 보니 우리와 같이 아침을 먹기 위해 있었던 사람들이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초리 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봐들, 이분은 우리 엄마란 말야. 질투할 사람을 질투해야지. 그리고 난 여자라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17살의 소년이 20대 초반의 여인보고 엄마라고 소개하면 아무도 안 믿을꺼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얌전히 엄마한테서 손을 떼고 내 자리에 앉았다. "자, 어서 먹고 슬슬 떠나기로 하자." 어느새 종업원이 방금 구워서 따끈따끈한 빵과 스프, 그리고 우유를 가지고 왔다. 우리는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여관을 떠났다. 아직까지 승마에 서툰 날 위하여 우리 일행 들의 전진 속도는 매우 느렸다. 하지만, 날씨도 좋고, 더욱이 경치도 괜찮았기에 할아버지와 엄마는 그다지 지루하시지 않은 눈 치였다. 나? 나는 말에서 안 떨어지도록 균형 잡는데 바빠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느린지 빠른지 느낄 여유도 없었다. 오직 앞만 바라보면서 어제 할아버지가 일러주신대로 자세를 잡는데 여념이 없 었다. 해가 중천에 뜨자 할아버지가 주위를 둘러 보셨다. "어디보자 음, 저기가 좋겠군, 우리 저기서 점심이나 먹고 가자꾸나." 할아버지가 가르키신 곳은 몇그루의 큰 나무들이 있어서 그늘이 생긴 곳이었다. 오랫동안 말을 타서 다시 온몸이 아파오기 시작하는 나에게는 그만큼 반가운 말이 없었다. 얼른 말을 그쪽으로 몰고 가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그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말이 싸면 입으로 곧장 떨어질 위치에 누워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아계신 엄마가 나를 부르셨다.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엄마한테 갔 다. 그러자 엄마가 나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 주셨다. 할아버지는 말들을 모아서 나무에 묶고는 안장에 달아 놓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오셨다. 가져오신걸 보니 샌드위치랑 우유가 담긴 물통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렇게 3일을 갔다. 내가 너무 느린 바람에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해가 져서 늦은 저녁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마을이 가깝게 붙어 있는 바람에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3일 내내 말을 타고 온 나였기에 이제는 말을 타도 반나절은 거뜬했고 말을 타고 달릴수 도 있게 되었다. "다음 마을은 좀 멀단다. 그래서 오늘은 빨리 가야 할꺼야. 안그러면 노숙을 하게 되니까." 하루 묵은 여관을 나오면서 할아버지가 말씀을 하셨다. 마을을 떠나서 한적한 숲으로 말을 몰고 있는데 우리 앞으로 한떼의 사람들이 가고 있었다. 그 들은 전진 속도가 우리보다 느렸기에 우리는 곧 그들과의 거리를 없앨수 있었다. "흠... 상인 일행인가보군." 엄마가 중얼 거리셨다. 그러고보니 그 일행속에 짐을 실은 수레가 몇개나 보였다. "여보시오, 잠깐 기다려 보시오." 상인 일행중 한 사람이 우리를 불렀다. 그는 진한 갈색머리를 가지고 멋진 콧수염을 가졌지만, 키가 좀 작고 뚱뚱한 인상 좋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아마 이 일행의 대장인듯.... "우릴 불렀습니까?" 할아버지가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예, 여행자들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이길은 초행이신가 보군요, 여기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지나가야 무사히 지나갈까 말까하는 길 이랍니다. 5년 전부터 이상하게 이 숲에 몬스터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몬스터요?" "예, 갑자기 수가 많이 늘어났어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여길 지나가는 사람들을 떼를 지어서 습격하곤 한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용병들을 많이 데리고 가시는 거군요." 옆에 가만히 있던 엄마가 한마디 했다. 엄마의 말을 듣고 일행들을 살펴보니 저마다 무기를 들 고 아무렇게나 옷을 걸친 우락 부락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 많이 보였다. '저사람들이 용병들이구나... 처음 봤어.' "그런데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 가려고 하십니까?" "수익이 꽤 높거든요, 이 길이 막히는 바람에 저쪽 도시에는 물품이 많이 끊겼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가는 거지요. 아, 그건 그렇고 이렇게 단 3명이서 가시면 위험합니다. 당신께선 마법사 이신것 같으니 우리와 동행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편이 당신들 쪽은 훨씬 안전할꺼고, 우리도 일행중에 마법사가 한명 더 는다면 더 든든할테니까요." "몬스터쯤이야 우리도 물리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 합니다만..." 드래곤이 몬스터를 무서워 하겠냐? 그러니 이들과 불편하게 동행 하느니 편하게 우리끼리 가겠 다는 할아버지의 대답이었지만... "물론 마법사님의 실력이 낮다는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 몬스터들은 얕보면 안됩니다.더구나 여길 통과했던 여행자들이 말하길 여기서 드래곤을 봤답니다." "드래곤이요?" 할아버지가 눈쌀을 찌푸리며 되 물었다. 그 상인은 할아버지가 무척 놀라는 표정을 짓자 신이 나서 대답을 했다. "예, 드래곤이랍니다. 아주 커다란 레드 드래곤이라고 하더군요." "레드 드래곤 이라구요?" "예, 그렇다니까요. 그 드래곤이 몬스터들을 지휘하고 있었답니다." 엄마와 할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셨다. 여기 레드 드래곤이 산단 말이지? 누가 여기에 사는 걸까? 그럼 인사를 하고 가야하지 않을까? 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할아버지가 말씀 하셨다. "좋습니다. 동행하도록 하지요." "잘 생각 하셨습니다. 그러는게 서로 좋을겁니다.마법사님." 그러나 저러나 왜 자꾸 할아버지보고 마법사라고 하는 거지? 물론 할아버지가 마법을 쓰시긴 하 지만 처음 본 사람이 할아버지가 마법을 쓸수 있는지 어떻게 안거야? 그때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긴 가운을 입은 사람이 일행중에서 앞으로 나왔다. "반갑습니다. 같은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는 베르토 레벤다드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나는 왜 그 상인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지 알수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입고 계신 옷이 바로 마법사의 로브였던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한테만 마법사라고 했구나, 어쩐지 엄마한테는 안그러더라니.....' 상인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애들튼 싱클레어라고 합니다. 그냥 보잘것 없는 상인이지요." "보잘것 없는 상인이라니요, 이만한 일행들을 이끌고 계시는걸 보면 대단하신 분 같은데요. 전 슈타인 시피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딸인 세라와 아들인 아힌이라고 합니다." 얼라리오? 언제 할아버지가 내 가명을 알고 계셨지? 정말 모르는게 없는 분이라니까. 가만 엄마 는 할아버지 딸이고 나는 아들이니까 난 엄마를 이제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건가? "정말, 아름다우신 따님이군요. 아! 여보게 디코, 이쪽으로 와보게." 그러자 일행중 덩치가 큰 남자가 하나 나왔다. "이쪽은 우리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디코 입니다." 그사람은 상체가 다 들어나는 가죽옷을 입고 있어서 몸의 근육과 흉터들을 볼 수 있었다. 이마 에도 자잘한 흉터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보기 싫지는 않았다. 나이는 한 30대 중반정도? 그가 우리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엄마랑 시선이 마주쳤는데 엄마 를 보더니만 순간 멍해져 버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좀 과묵하긴 하지만 실력이 뛰어나고 또 믿음이 있는 친구 입니다." 디코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애들튼은 말을 걷게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애들튼 옆에서 갔고 그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잠시 자리에 멈춰 서있던 일행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들튼은 이야길 참 잘했다. 자신이 왕래를 하면서 겪었던 일이나, 여행한 도시에 대해서 재미 있게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도 옆에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며 듣고 있었고 엄마와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했지만 그래도 귀를 귀울여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엄마가 갑자기 흠칫 하시더니 나를 옆으로 잡아 당기셨다. 할아버지도 신중한 표정으 로 주위를 둘러보고 계셨다. 그런 모습을 본 일행들도 무슨 일인가 생긴줄 알고 재빨리 자기 무 기를 들고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숲속에서 부스럭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튀어 나왔다. "트롤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게 바로 트롤이라는 거군, 재생능력이 무척 뛰어나서 죽이기 힘들다는 몬스터....' 키가 무척 컸다. 2미터도 넘어 보였다. 거기다가 사람으로 치면 엄청난 근육으로 뒤덮인 몸이었 다. 그것도 돌처럼 보이는 근육... 애들튼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고 할아버지도 나와 엄마를 이끌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디코를 포함한 몇명의 용병들이 나서서 트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느긋하게 그들이 트롤과 상대하는 모습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 니 애들튼도 느긋하게 보이긴 했다. 베르토는 입속으로 중얼중얼 대는것이 마법 주문을 외워두 고 있는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법실력을 볼 기회는 없었다. 용병들이 어렵지 않게 트롤들을 처리했던 것이다. "저놈들 실력이 꽤 대단한걸? 트롤들을 저렇게 간단히 눕히다니..." 그러자 옆에서 같이 관전하고 있던 애들튼이 대답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실력이 대단한 만큼 몸값이 높답니다. 저 디코만 해도 혼자 트롤 몇은 처리 할 수 있을 걸요?" "그렇게 실력이 대단한가요?" 옆에서 내가 물었다. "그래, 저 디코는 용병계에서는 실력이 꽤 높기로 알려진 인물이지." 그들이 트롤 시체를 숲속으로 던져 버리자 트롤의 등장으로 멈춰진 일행들을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자 이번에는 트롤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스톰 골렘이군, 그것도 10마리 씩이나..... 길을 막고 있는걸 보니 우릴 기다렸다는 건가? 이 거 뭔가 더 있을것 같은걸?" 엄마가 중얼 거렸다. 골렘이라... 오늘은 전에 못보던 몬스터들만 보는군... 하긴 엄마 레에서 살때는 오크나 가고 일, 아니면 와이번이나 봤었는데..... 이번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는지 용병들이 나서기 전에 베르토가 골렘들에게 한방 먹였다. "라이트닝 볼트!" 골렘들이 있는 지점으로 큰 번개가 한번 긋고 지나갔다. "오 제법인데?"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번개에 의해 일어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4개의 골렘들이 날라갔고, 나머지 골렘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데는 관심이 없는지 우리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젠 자신들의 차례라는듯 용병들이 나섰다. 그리고 베르토는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 했다. 용병들은 골렘들에게 맞서 나갔기는 했지만 왠지 아까보다는 힘겨워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무 기가 골렘들에게 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강도가 강한 놈들이군..." 애들튼이 중얼 거렸다. 이번에는 용병들이 쉽게 처리 못하자 그도 긴장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순간 갑자기 우리 일해의 양쪽 옆 숲속에서 오크들이 튀어 나왔다. "이런..." 잽싸게 베르토가 파이어볼을 쏘았다. 파이어볼에 10명이 넘는 오크가 쓰러졌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표도 안났다. 주위를 살피고 있던 나머지 용병들이 재빨리 맞섰지만 그래도 오크들을 막 지는 못했다. "매직 미사일!" 엄마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몇몇의 오크들을 향해 미사일을 날렸다. 그놈들은 자신의 동료가 쓰 러졌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우리에게 덤볐다. "카사, 실프, 노움!" 나도 재빨리 정령들을 소환해 내고 검을 빼어들고 오크들한테 덤볐다. "덤벼라 이놈들, 내 검술 실력을 보여주마." 나도 제법 검술이 늘었는지 오크들한테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크들이 숫자가 너무 많았지만 그 런건 정령들이 알아서 커버해 주었다. 그리고 간간이 옆에서 튀어나오는 놈들은 엄마가 한방씩 먹여 줬다. 한참을 싸우고 있는데 오크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재빨리 정령들을 더 불러내어 한숨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오크들은 내쪽으로만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서 용병들은 오크들을 쫏아와서 싸 우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놈들이 왜 이쪽으로만 오는거지? 내가 너무 만만해 보이나?'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몇몇놈이 나를 완전히 막아서자 나머지 놈들이 이번에는 엄마한테 달 려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한테는 무기를 들이대지 않는걸 보니 덤비려는게 아니라 엄마를 끌고 가려는것 같았 다. '어라? 이놈들이 엄마를 노리고 있나본데? 흠, 이놈들도 엄마의 미모에 반했나?' 오크들이 엄마를 노리고 있다는걸 알게되자 나는 느긋해졌다. 아무렴 우리 엄마가 누군데 오크 들에게 끌려 가겠는가? 그런데 좀더 싸움이 진행되자 더이상 느긋해질 수가 없었다. 체력이 점점 떨어져 가고 있는데 오크들의 수가 줄어드나 했더니만 이제는 오거에다가 트롤까지 합세해서 쳐들어 오고 있었던 것 이다. 안되겠는지 할아버지가 강력한 마법을 날렸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싸움 구경만 하고 있었다.) "파이어 스톰!" 불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몬스터들을 한번 휩쓸었다. 역시 할아버지,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날아 가거나 타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안심은 금물.... 잠시후에 또다른 트롤과 이번에는 골렘까지 쳐들어 오고 있었던 것이 다. "이거 뭐 끝도 없냐? 언제까지 나오려는거지?" 점점 지쳐가고 있어서 나는 재빨리 엄마 뒤로 숨었다. 그러자 엄마가 덤벼오는 놈들을 향해 한 방 먹이셨다. "버스트 프레아!" 수많은 파이어볼들이 몬스터들을 향해 날라갔다. 그러자 몬스터들이 잠시 주춤했다. 뒤에서는 용병들이 열심히 싸워주고 있었고, 베르토도 지금까지 배운 마법 실력을 남김없이 발 휘하고 있었다. 번 호 : 8306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29일 23:18 등록자 : LODEMP 조 회 : 94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 - 1 화 레드 드래곤 소동 (2) 그때였다. 갑자기 남은 오크들이 주춤주춤 하더니 한 오크가 소리쳤다. "크르르, 크륵크그륵!" 무슨 말인진 못 알아 들었지만 어쨌든 그 말을 들은 오크들은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오 크들을 도우러 온 트롤들과 골렘들까지 물러났다. "어떻게 된걸까요?" "글쎄다, 아무래도 우릴 쉽게 이기지 못할것 같으니 물러난거겠지, 하지만 몬스터치고 녀석들은 참 체계적으로 싸우는군... 누군가가 뒤에서 지휘하고 있는것 같아." "그런데 왠지 그녀석들 엄마를 노리는것 같았어요." "그래, 확실히 그랬어. 이유가 뭘까?" 그때 일행들을 살피고 정리하던 애들튼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 우린 괜찮습니다." "대단한 실력을 갖고 계시는군요. 따님도 마법을 쓰시고 아드님은 정령술사라니.....여러분과 동행하게 되다니 정말 행운입니다." "과찮의 말씀을......그나저나 그놈들 왠지 내 딸을 노리는것 같던데..." "아 예, 그런것 같더군요. 정말 이상하지요?" "몬스터들이 혹시 여자들을 노리는것은 아니요?" "글쎄요, 그런말은 못 들었는데요." "그것 참...." "어째든 그놈들은 다시 공격해올것 같습니다. 빨리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대비하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베르토의 말에 따라 일행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야영 준비를 했다. 짐과 말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에다가 모닥불을 삥 둘러서 태우기 시작했다. 곧 누군가가 저녁을 준비했고 (저녁이라고 해봐야 모닥불에 데운 차와 빵, 마른 고기 뿐이었지 만, 그게 어디야?) 침묵속에서 저녁을 먹었다. 모두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대화는 없었고 오 직 음식 씹는 소리만 들렸다. "정말 기분나쁜 숲이군요." 애들튼이 낮게 말했다. "당신도 이 길이 초행이신가요?" "예, 제 사정이 나쁘지만 않았어도 여기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에 대해 듣고 충분히 대비 를 했다고 생각 했는데 이건 생각을 뛰어 넘는군요....." "정말 조용한 숲이에요, 이제 밤이어서 그렇다지만,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군요." "몬스터들이 이 근처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어째든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면 내일은 좀더 빨리 가야 겠어요. 이 속도로 가다간 하루 더 여기 머물를지도 모르겠군요." "몬스터들이 또 습격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밤이 깊어서 보초를 서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엄마 품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헤헤헤, 엄마품에 오랜만에 안겨 보는걸? 음~~~! 따스한 엄마의 향기." 내가 엄마 품에 파고 들면서 말하자 엄마가 나를 꼭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린아, 이젠 너도 성룡이야, 이번 여행만 끝난다면 이럴 일도 없을게다." 엄마의 목소리에 왠지 쓸쓸함이 담겨 있다고 느낀건 내 착각이었을까? 낮에 열심히 오크들과 싸운 덕분에 지쳐 있던 나는 금방 골아 떨어졌다. 엄마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면서..... 한참을 달콤하게 자고 있었는데 누가 나를 흔들었다. "으응~~엄마?" 하면서 깨어나는데 엄마가 조용히 말했다. "정신차려, 놈들이 쳐들어온다!" 그 말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보니 용병들은 이미 깨어나서 무기를 들고 경계하고 있었 다. 할아버지도 벌써 일어나 계셨다. "얼마나 되는것 같소?" 베르토가 낮게 물었다. "꽤 되는것 같군요. 오크만해도 30이 넘는것 같아요. 게다가 트롤도 섞여 있겠지요." 디코가 조용히 대답했다. 오! 저 사람이 말하는것 첨 들어본다. 역시 저 사람도 말할 줄 아는구나... 이런 상황에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숲속을 노려 보았다. 어둑어둑한 숲속에 눈이 익숙해지자, 뭔가가 보였다. "꽤 많은것 같은데요?" "그건 아까 디코가 말한거야." "아! 그렇군." 누군가가 피식~ 하면서 웃는 소리가 났다. 그래 내가 조금 늦는다! "온다!" 디코가 낮은 소리로 말했고, 놈들이 오는것이 보였다. "파이어 윌!" 역시 첫 타석은 베르토였다. 할아버지야 구경 하시다가 내가 위험해지면 나서실 분이니까.... 우리들 앞으로 거대한 불의 장벽이 생겼고, 그러자 놈들이 주춤 하는게 보였다. 하긴 저놈들이 불을 뚤고 들어오지는 못하겠지... "쯧쯧쯧, 그러면 우리도 나가지 못하쟎아. 차라리 저놈들 중앙에다 공격을 할것이지..." 아~, 그렇기도 하겠구나.... 그러고보니 우리 일행을 불의 벽이 둘러 싸고 있어서 몬스터들도 다가오지 못했고, 우리들도 놈 들에게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불때문에 몬스터들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불을 뚫고 뭔가가 뛰어 들어 왔다. "늑대다!" 누군가가 알아보고 소리쳤다. 그 늑대는 불에 타서 새카맣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우리에게 덤벼 들었다. "위험!" 디코가 재빨리 나서서 그 늑대의 허리를 두동강 냈다. 그러자 치지직~~ 하고 잘린 부분이 타들 어 갔다. "웃~! 이런, 언데드쟎아?" 언데드? 그거 죽은걸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마법이잖아? 흑마법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 마법사가 있는것 같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또 온다!" 불을 뚫고 또 몇마리의 늑대들이 뛰어 들어왔다. 모두 털이 불에 끄슬려 검게 되었지만 아무렇 지도 않은듯 우리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은으로 된 무기를 사용해! 저건 언데드야." "할아버지 난 어쩌죠? 이 검은 은으로 된게 아니쟎아요?" "아린아, 그건 미스릴로 만든 검이란다. 미스릴은 언데드 들에게 은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 어!" 흠, 미스릴도 언데드를 죽일 수 있단 말이지? 오늘은 여러가질 보고 배우는 날이군. 한번 들어오기 시작한 늑대들은 계속 들어오기 시작했고, 용병들은 잽싸게 거기에 대응해 갔다. 다들 자기 무기로 싸우는 걸 보니 모두 은으로 도금을 한 것 같았다. 하긴, 용병들이니 언데드 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겠지, 아님 여기 오는걸 대비해서 준비했거나.... 나도 잽싸게 나서서 내쪽으로 뛰어 오는 놈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늑대는 처음 상대하는 거라 자칫 위험할 뻔 하기도 했다. 딴 몬스터를 상대할 때 처럼 찔러 들어갔다가, 늑대가 펄쩍 뛰어 오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균형을 잃었던 것이다. 마침 엄마가 매직 미사일로 처리를 해줘서 다 행이었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조심해야지, 늑대를 찌르기 하면 어쩌냐? 베기를 해야지." 음, 오늘은 정말 배우는 날 인것 같다니까? 한번 위험을 격고 나자 좀더 신중하게 늑대를 공격했다. 하지만 금방 익숙해 질 수는 없는지 열 심히 검을 휘두르는거에 비해 쓰러지는 늑대 수는 적었다. "레이피어는 늑대들을 상대하기엔 무리야, 앞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사용하는게 어때?" 옆에서 같이 싸우고 있던 용병 하나가 말했다. '하지만 바스타드 소드는 나한테 너무 무겁단 말야.' 라고 대꾸를 해주고 싶었지만, 충고는 고맙게 받아 들이자는 나의 신조에 의해 아무 말도 못하 고 싸움에 집중했다. "불길이 작아지고 있어. 점점 힘이 드는가 보군." "게다가 늑대들도 불을 끄는데 한 몫 했을껄요?" "흠, 이젠 총 공격이 시작 되겠군." 할아버지 말대로 불길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불 밖에 서있는 몬스터들이 잘 보였다. "엄청나군...." 누가 신음소리 비슷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몬스터들은 엄청나게 많았다. 오크들은 물론 트롤과 골 렘들, 거기다가 보너스로 언데드 늑대떼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저놈이 마법사군."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가자 몬스터들 뒤쪽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두운데다가 후드로 얼굴 을 가리고 있었지만 크기나 실루엣이 사람 같았다. "매직 미사일!" 엄마가 그 마법사에게 한방 날렸다. 하지만 화살은 그놈 근처에 가자 팍! 하고 꺼지고 말았다. "실드로군...." "흥,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한번 보지." 힉! 저놈은 인제 죽었다. 엄마의 성질을 건드리다니.... "헬 파이어!" 크다란 불덩이가 마법사를 향해 날라갔다. 이번에도 마법사의 실드에 의해 막히기는 했지만 불 은 완전히 꺼지지 않고 튕겨나와 근처에 있던 몬스터들에게 떨어졌다. "제법인데? 비록 마력을 낮게 하긴 했지만 헬 파이어를 막아 내다니..." 지금 이곳은 숲이라서 아무리 엄마라도 불의 마법을 함부로 쓸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얼굴에 힘줄이 하나 불끈 솟았다. "그래 화염 마법은 제대로 쓸수 없다고 해도 딴게 있지. 이건 어떠냐? 아이스 미사일!" 그러자 엄청난 수의 얼음 화살이 만들어져 마법사를 향해 쏘아져 갔다. 엄마가 단단히 화가 나 셨나 보다. 몬스터들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얼음 화살들을 피하느라 바빴지만 너무 많은 몬스터들이 모여 있어서 거의 대부분 화살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많은 수의 얼음 화살이 마법사를 향해 날아갔고 이번에도 마법사는 실드를 쳐서 막았고 대부분은 부셔져 나갔지만 엄마가 이번에 는 마력을 많이 했는지 몇개는 실드를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마법사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흥. 이놈아 네 녀석이 언제까지 그렇게 서서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엄마는 재빨리 딴 마법을 날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마법사가 손을 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때 까지 엄마와 마법사의 싸움을 구경하던 몬스터들이 덤비기 시작했다. "이런, 파이어 필드!" 할아버지가 재빨리 불덩어리들을 날렸고 용병들도 전투 태세를 취했다. 번 호 : 8345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30일 22:50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08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 - 1 화 레드 드래곤 소동 (3) 지금은 낮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 왔고 거기다가 마법사도 있었기에 할 아버지도 처음 부터 같이 싸우셨다. 마법들이 난무하고, 검이 부딧히는 소리가 요란스러운 싸움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 몬스터들이 수는 많았지만, 이쪽의 용병들은 실력이 뛰어났고 더욱이 뛰어난 마법사가 3명 이나 있었기에 우리쪽이 점점 우세해 갔다. "어리석은 녀석들......" 거대하고 위엄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 몬스터들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벌벌 떨기 시작했다. 우리도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비늘로 뒤덮힌 거대한 몸을 가 진 생물이 있었다. "드, 드, 드래곤이다!" 베르토가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너무 무서워 하는걸? 아니다 무서워 하지 않는게 비정상인가? 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서워 하는 것 같아. 아! 그러고 보니 마법사는 드래곤을 아주 두려워 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해.' 내가 이렇게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때 다른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제기랄, 우린 이제 끝났군." "정말 드래곤이 있을 줄이야....." 이렇게 중얼 거리는 편은 양호한 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털썩 주저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한 눈길로 드래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짜가야."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예?" "저건 가짜 드래곤 이라구, 환영이야." "어떻게 그걸?" "드래곤의 마나가 안 느껴져. 드래곤은 엄청난 마나를 가진 생물이야. 헌데 저 드래곤은 인간 초보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정도의 마나밖에 안 느껴져. 그러니까 짜가라는 거지." 그제야 베르토가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저건 가짜예요. 누군가가 드래곤의 환영을 만든 거예요." "누가 이런 짓을...." "저놈 같은데요?"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드래곤에게 커다란 얼음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그 얼음 화살은 드래곤을 뚫고 지나가 어떤 벽에 부딧혔다. 그러면서 드래곤의 형상은 사라지고 거기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까 그 마법사였다. 그는 자신의 환영 마법이 깨지자 재빨리 숲속으로 사라졌다. "저놈이었군....." 애들튼이 신음 비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땅에 엎드려서 덜덜 떨고만 있던 몬스터들이 드래곤이 어이없이 사라지자 혼란스러워 했 다. 그리곤 우왕 좌왕 하면서 숲속으로 사라졌다. "몬스터들도 저 마법사가 드래곤 환영을 이용해 조정하고 있었나 보군." 저놈도 참 불쌍했다. 최후의 히든 카드를 내 놓았는데 그게 드래곤 앞에서 드래곤 환영을 보여 준거라니.........지지리도 복 없는 놈............ "어떡할까요? 저놈을 잡을까요?" 디코가 애들튼에게 물었다. "잡는게 좋겠군,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야." 그 말이 떨어지자 디코를 위시한 몇명의 용병들이 뛰쳐 나갔다. 아마 저 마법사에게 쌓인게 많 았으리라... 그리고 할아버지도 엄마에게 간단한 눈짓을 하곤 숲속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자 엄마가 작게 말씀하셨다. "저놈은 드래곤의 분노를 받게 될꺼야. 감히 인간 주제에 드래곤의 흉내를 내려 했으니까." 한마디로 할아버지는 그 마법사를 처리하러 가신 거였다. "피튀기는 싸움이 허무하게 끝나 버리니까 왠지 맥이 풀렸지만 레드 드래곤이 이곳에 없다는 것 을 알게 되어서 참 다행이군요. 그리고 이제 몬스터들도 이곳에서 사라지겠지요." 베르토가 조용히 말했다. 남은 일행은 꺼져버린 모닥불을 다시 피우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에 할아 버지가 살짝 돌아 오셨고 할아버지가 돌아오신뒤 한~~참 후에 마법사를 쫒아 갔던 용병들이 돌 아왔다. "죄송합니다. 노쳤습니다. 마법사의 거처 비슷한것을 발견하긴 했지만 완전히 부셔져 있더군요. 자세히 조사는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도망쳤거나 자살했거나 둘중 하나겠지. 어쨋거나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거니 그걸로 충분 해." 다음날 아침, 우리는 늦게 일어나 식사를 하고 길을 떠났고, 오후가 다 되어서야 목적지인 도시 에 도착했다. "정말 아쉽군요,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그렇군요,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왔습니다." "뭘요, 저희도 마찬가지 인걸요. 이건 얼마 안되지만 여비에 보태 쓰시라고 좀 넣었습니다." "아이구, 뭘 이런걸 다. 하여간 고맙게 쓰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요. 나중에 다시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우리는 애들튼 일행과 헤어져 나왔다. "얼마예요?" "흠, 어디보자.... 1존드짜리 은화로구나, 대충 30개 정도는 될 것 같은걸?" "많은 건가요?" "보통 평민 한달 생활비가 10존드란다. 그렇게 치면 괜찮게 받은 거지. 흠, 그놈 참 괜찮은 놈 이군....." "그 마법사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놈 집이랑 같이 재워줬지. 흥, 감히 드래곤을 사칭해? 내가 시간만 넉넉했으면 지옥의 맛을 보여 줬을텐데....." 불쌍한 놈. 하필이면 드래곤한테 걸려가지고..... 에휴, 그것도 네놈 팔자려니 생각해라..... 번 호 : 8383 / 9359 등록일 : 2000년 05월 31일 22:49 등록자 : LODEMP 조 회 : 103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 - 2화 엄마의 기사 7 - 2 화 엄마의 기사 애들튼 일행과 헤어진 우리는 며칠 더 말을 달려 강에 도착했다. 그 강은 엄청 넓어서 강 너머 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여관을 잡은 뒤 우리는 말도 팔겸 배를 알아보러 나갔다. 배터에는 많은 배가 있었지만 그렇게 큰 배는 없었다. "큰 배는 없나봐요." "여기는 강이라서 그래, 큰 배를 찾으려면 바다로 나가야지, 거기 가면 큰 배를 볼 수 있을꺼 야." "그렇구나....." 우리는 배터 관리소를 찾아가서 바다로 가는 여객선을 찾았다. "어디보자... 음 내일 아침에 바다로 가는 배가 있군요. 프린세스 호라구 오늘 아침에 정박한 배입니다. 물자를 운반하는 배 인데 사람들도 태워주기도 한답니다." "그거말고 딴 배는 없나?" "내일 오후에 출항하는 배가 있습니다만 그것도 화물선이예요." "여객선은 없나?" "여객선이요? 요즘은 사람만 태우는 배는 없어요. 짐도 같이 나르려고 하지요. 사람만 태우면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서 거의 화물선으로 바뀌었어요. 그나마 사람도 같이 태워주는 배가 있긴 하지만요...." "그런가? 그렇담 하는 수 없지. 그래 그 배는 어디에 있나?" "저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배에 가셔서 이야기 하시면 될거예요." "알겠네." 할아버지는 관리소 직원에게 50셀짜리 은화 하나를 건네주고는 나왔다. "어디보자... 프핀세스라.... 이건 아니고 이건 펫시군. 참내 이름 하나 이상한 배로군....." "아 저기 있네요, 프린세스 호. 저거 맞지요?" "흐음, 그래 맞는것 같구나." 프린세스 호에는 사람들이 물자를 싣느라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봐 빨리빨리 움직여, 아직 물건이 많이 남았단 말야. 거기 식량은 다 챙긴거야? 빨리빨리 세 보라구. 맞으면 빨리 싣고. 물도 넉넉히 채웠지?" 어떤 사람이 배 난간에서 종이 뭉치를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다다가서 소리 쳤다. "이보시오, 여기 이 배가 사람도 태워준다는데 맞소?" 그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이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맞소. 이 배에 타시려우?" "3사람이 바다까지 가려고 하는데..." "한사람당 30셀씩이요. 내일 아침에 오슈."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종이 뭉치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배를 구했기 때문에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기 맥주 3잔하고 정식 3인분!" 우리가 자리를 잡자 쪼르르 달려온 종업원에게 할아버지가 말했다. 역시 어딜 가나 눈길을 끌어 당기는 우리 엄마.....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여기 저기서 눈길들이 쏟아졌다. 맥주는 금방 나왔고 한참 돌아다니다 들오온 우리에게는 차가운 맥주가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드디어 배를 타게 되었군. 배를 타면 좀 편하게 가겠지?" "하지만 식사는 형편 없을꺼예요. 더욱이 여객선도 아니고 화물선이라니...." "하지만 배는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던데요?" "더욱이 강을 따라 내려가니까 별일 없을꺼고 식사도 그렇게 나쁘진 않을게다." "그냥 공간이동이나 해버릴껄 그랬나?" "쯧쯧쯧, 아린의 첫 여행에 따라 왔으면서 그렇게 말하다니..." "누가 따라와요? 아린의 동행자는 원래 나였다구요." "그걸 누가 정했냐? 너가 빠득빠득 우겨서 동행한거 였쟎아." "아니 그러면 자식이 첫 여행을 하는데 엄마가 동행하는건 당연하쟎아요." "이 여행의 목적이 뭔데? 인사 다니는 거라고, 너가 따라 다니면 인사는 커녕 싸우지 않는게 다행한 일일꺼다." 두 분은 투닥투닥 다투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언으로 마음속으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겉으로 는 앞에 놓인 맥주를 즐기는 다정하고 우아한(?) 부녀로 보였다. '대단한 능력이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맥주를 마셨다. 이제는 맥주를 잘 마실 뿐만 아니라 즐길 수도 있었다. 역시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늘어나나 보다. "식사 나왔습니다." 이 식당에서 가장 값이 비싼 값을 하는지 우리 식탁에 날라져 온 음식들은 참으로 화려하였다. 부드러운 닭고기 크림 스프를 비롯하여 땅콩 버터가 발린 따끈따끈한 빵에 소금으로 간을 한 단 백한 베이커리에 후식으로 달콤한 딸기 소스를 뿌린 팬케익과 여러가지 과일까지 나왔다. 종류를 보고 놀라고 양을 보고 감격하고 맛을보고 감탄하며 우리가 식사를 즐기고 있을무 렵...(식사가 나오자 두분은 말싸움을 멈추셨다.) 어떤 인상 드러운 덩치 큰 놈이 다가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거 어디는 화려하고 어디는 초라하니 정말 열받는군."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주인이 대꾸했다. "그럼 너도 돈을 내, 그럼 저만큼 차려 줄테니." "참내 돈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안그래 예쁜 아가씨?" '이놈 분명히 시비를 거는 것이렸다? 헐헐헐 네놈은 죽었다 삼창하는게 나을걸? 감히 누굴 건드 려?' 자신이 어떤 상대한테 시비거는지도 모르는 그 불쌍한 놈은 주위에서 사람들이 와아~ 웃자 힘을 얻었는지 엄마한테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합석해도 될까 예쁜 아가씨? 저런 늙은이나 애기보단 내가 나을꺼야. 이래뵈도 난 꽤 괜찮은 놈 이라구. 특히 잠자리에선 끝내주지…” 그놈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자 엄마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아났다. '쯧쯧쯧 저놈 이젠 죽었다.’ 속으로 명복을 빌어 주면서 나는 다음에 일어날 사태에 대비하여 음식을 들고 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 무례한놈, 레이디께 무슨 짓이냐?” 누군가가 씩씩하게 외치면서 나타났다. “정의의 기사 등장이로군…” 재미있다는듯이 구겨하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그와 동시에 아직 20대 초반밖에 안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 하나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랍쇼? 이건 또 뭐야?”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 악당이 나타나 어여쁜 숙녀한테 치근덕 거리면 캡빵 잘생기 고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짠 하고 나타나서 악당을 물리치고 숙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흔한 장면 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문제라면 그 어여쁜 숙녀가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질 드럽고 급한 레 드 드래곤중에서도 성깔 나쁘기로 유명한 우리 엄마라는 사실이고 정의의 기사랍시고 나선 놈도 아직은 새파란 기사 흉내나 내는 듯한 녀석이라는 거였다. “이봐 애송이, 너 뭐야?” “나는 기사 후보 테일러 브라운 커틀러스다. 너같은 악당이 레이디께 불손한 행동을 하다니, 참을 수 없다.” “얼씨구 이젠 개나 소나 다 정의의 기사 흉내를 내고 다니는군…. 이봐 애송이 다치기 전에 꺼 지시지? 이몸이 지금 예쁜 아가씨와의 데이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너같은 놈이랑 놀아줄 시 간 따윈 없다고.” “닥쳐라, 누가 애송이라는 거냐? 너야말로 정중히 레이디께 사과하고 얌전히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어이구 무서워라. 참내, 지나가는 개가 웃겠네…” 악당은 살살 기사를 약올렸고 화가난 어리숙한 기사는 악당에게 정의의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악당이 살짝 피하는 바람에 힘을 주체 못하고 몸이 앞으로 기우뚱 할 때 악당이 내민 발에 걸려 꽈당 넘어져 버렸다. “어이구, 정의의 기사님 괜찮으십니까? 악당은 멀쩡한데 기사님이 다치시면 어쩝니까?” 주위사람들이 크게 웃어 젓히자 얼굴이 빨개진 불쌍한 기사는 벌떡 일어나 다시 덤볐다. “웃차.” 하지만 악당은 손쉽게 기사의 주먹을 한손으로 막아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기사의 복부에 펀치 를 먹였다. 이번에는 크게 먹었는지 어리숙한 기사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고 악당은 손을 탁탁 털면서 엄마 한테 다가왔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건 엄마의 분노였다. “윈디!” 갑자기 강력한 바람이 일어나 악당을 식당 밖으로 날려 버렸다. “마법사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주위에서는 눈을 뚱그렇게 뜨고 엄마를 쳐다 보았다. 엄마는 악당을 식당 밖 으로 내 팽개치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쫏아 나가서 작살을 낼 것 처럼 일어섰다. 하지만 할아버 지가 조용히 말리셨다. “밥 안먹어?” 엄마는 할아버지를 한번 째려본뒤 앉아서 마저 식사를 했다. 주위는 조용 했기에 우리도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식당으로 내려오자 주인이 재빨리 달려와서 정중히 인사했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아침 식사 하셔야지요?” “아, 간단한 식사로 3인분.” “옙, 알겠습니다. 곧 대령하지요.” 그리곤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역시 인간은 한방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간단한 아침 식사라고 했지만 음식들은 화려했다. (물론 정식만은 못했지만) “엄마가 그놈을 한방 먹이길 잘 했네요.” 나는 화려한 음식에 기분이 좋아 헤헤 웃으며 말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여관을 나와 프린세스호로 갔다. 거기서 우리는 부선장에게 안내되어 돈을 내고 선실을 배정 받았다. 나와 엄마가 하나, 할아버지가 하나였다. “손님이 한분 더 계시니까 이쪽분은 그분과 같이 쓰시길 바랍니다.” “하는수 없지.” 할아버지는 쳇쳇 거리셨지만 순순히 대답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짐을 갖다 놓고 갑판에 나와서 선원들이 일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때 부선장이 다가왔다. “여기들 계셨군요, 나머지 한 분이 도착하셨습니다. 같이 지내실거니 인사나 하시지요.” 부선장 뒤로 오고 있는 얼굴을 확인한 할아버지는 킬킬 웃으셨다. 왜그러시나 하고 봤더니 어제 여관 식당에서 정의의 기사를 흉내 내다가 악당에게 맞아서 뻗어 버린 그 남자였다. 그는 우리보다 엄마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우신 레이디. 여기서 다시 레이디를 뵐줄 몰랐습니다. 레이디와 한 배를 탈 수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엄마는 뭐 씹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엄마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 난 얘들의 아비일쎄, 이쪽은 내 딸이고 이쪽은 내 아들이지.” 할아버지가 나서서 대신 인사를 하셨다. “그러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기사 후보생 테일러 브라운 커틀러스라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테일러는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나를 끌고 선실로 돌아왔다. “운도 없군, 저런 멍청이와 한배에 타다니……” “너무 그러지 마요, 엄마. 엄마에게 홀딱 반한 것 같은데…” “흥, 그런 멍청이가 졸졸 쫓아다닐 걸 생각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번 호 : 8462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02일 23:18 등록자 : LODEMP 조 회 : 98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2화 엄마의 기사 (3) ' 설마, 엄마에게 호감이 간다고 쫒아다닐까......' 단순하게 생각 했지만 곧 나는 내 생각을 바꿔야 했다. ' 역시, 엄마의 예감이 맞았구나....' 배가 출항하여 강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 했다. 그러자 우리 일행은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라 곤 고작 얌전히 주는 밥 먹고 선원들 일하는거 방해 안되게 얌전히 있는게 다였다. 이런 지루함 속에 유일하게 잼있는 일은 테일론이 엄마의 무시를 얼마나 꿋꿋이 버티는지 구경 하는 거였다. 테일론은 배 위에서 엄마를 본 이후로 자신이 엄마의 수호 기사인양 엄마가 선실에 있을 때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동안 항상 졸졸 쫒아다녔다. 첫날 엄마는 짜증을 내시면서 선실에 틀어밖히셨다. (그때 애꿎은 나까지 엄마한테 끌려서 선실 에 갖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시간.....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신 엄마는 곧 몇시간 뒤에 선실 밖으로 나 가셨다. 황당했던건 엄마가 선실에서 방콕하고 계실때 테일론은 엄마 선실 문밖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는 거였다. (이건 나중에 할아버지가 나에게 슬쩍 말씀해 주신 거다.) 테일러는 엄마한테 정말 지극 정성을 다했다. 엄마가 식탁에 앉으려 하면 잽싸게 먼저 가서 의자를 당겨 줬고, 엄마가 지나 다니는 문을 열어 주는것은 물론이고 갑판 위에 올라갈때면 선원들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눈을 부라리면서 호위했 다. 물론 그가 눈을 부라리며 서 있는다고 눈하나 깜짝할 선원들이 아니었지만 ( 웃지 않는게 다행 이었다.) 그의 지극 정성에 감동하였는지 엄마에게 무례히 굴지 않았고, 말을 걸때는 정중히 '레이디' 라는 호칭을 붙였다. 그리고 테일러도 어느새 선원들 사이에서 '풋내기 기사'로 불려 지고 있었다. 그쯤이면 감동을 받을만 하건만, 엄마는 그에게 말 한번, 눈길 한번 주지도 않았다. "그냥 인사는 하고 지내지 그래요?" 내가 슬쩍 떠봤지만 꿈쩍도 안 하셨다. "귀찮아 하는 사람 곁에 붙어 있으려면 그런건 감당 해야지." "그래도....." "쫒지 않는것만도 다행이야." "쯧쯧쯧, 니 엄마가 어지간히 고집이 쎄야지." 첨에는 불쌍하게 보이던 테일론도 하도 무시를 당하자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테일러에 게는 쬐께 미안하지만 할아버지랑 언제까지 저럴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만 그러는게 아니라 선원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히 돈내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테일론은 사람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엄마가 무시하든지 말든지 언제나 아침 일찍 일어나 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저놈도 꽤 끈질기군..." 어느새 배에 탄지도 일주일이 지났을때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지치지도 않나봐요." 날씨가 무척 흐려졌다. 강을 따라 가는 거기 때문에 날씨에 대해 별로 걱정은 안 했지만 그래도 잔뜩 흐린 날씨가 좋을리 없었다. 오후가 되자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네요." "꽤 쏟아질 것 같구나."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마자 갑자기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판 윗쪽이 소란스러워 졌 다. "많이 쏟아지는군..." 조금 시간이 지났어도 소리가 전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자 엄마가 한 마디 하셨다. 지금 우리는 선실에 와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강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선원들이 내려가라고 윽 박 지르는 바람에 쫒겨 온 것이었다. 비가 오고 강물이 불어나서 그런지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처음 배를 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론 테일러 조차도 배멀미를 하 지 않았다. 엄마와 할아버지야 예전에 타 보셨고, 나야 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 온갓 교통편 은 두루 섭려 했으니 (자동차, 버스, 기차, 배, 비행기, 자전거 등등...) 이런것 쯤에 멀미를 안 한다 하지만 테일러 조차 배멀미를 하지 않았다. "그도 예전에 배를 타봤나보지, 아니면 강을 운행하는 거라서 그렇게 심하게 요동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내가 의문을 표하자 할아버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씀하셨다. 그때 갑자기 엄마가 이상한 표정으로 말씀 하셨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밖에는 테일러가 방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무리 들어오라고 해도 레이디의 선실에 함부로 들 어갈 수가 없다고 빡빡 우기면서 안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밖으로 나가자 테일러는 저만치 구석에서 통에다 머리를 쳐밖고 토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등을 두드려 주면서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계속 토해대기만 했다. 한참을 토하던 그는 일어날 기력도 없는지 그 자리에서 뻗어 버렸다. '참내, 할아버지를 부를 수도 없고....' 나는 투덜투덜 거리면서 테일러를 질질 끌고 그의 선실로 옮겼다. (무거워서 들 수는 없었다.) '배에 익숙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나보네...' 회복 마법을 써주려고 했지만 회복하면 또 토해댈 것 같아서 그만 뒀다. "테일러가 배멀미를 무지 심하게 하네요." 라고 선실로 돌아 오면서 보고 했지만 엄마와 할아버지는 시큰둥 했다. "그래? 그럼 그녀석 내일은 못 일어 나겠군." 하고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을 뿐이었다. 번 호 : 8502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03일 23:40 등록자 : LODEMP 조 회 : 97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2화 엄마의 기사 (4) 할아버지의 말대로 테일러는 완전히 뻗어서 다음날 날씨가 맑게 개었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엄마는 혼자 활개를 치며 배안을 돌아 다닐 수 있었다. "혼자 있으니까 좋아요?" "시원하다." "불쌍한 테일러...." "흥!"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배의 부선장이 다가와서 말했다. "이 배는 내일쯤 휴스턴 항구에 하루 머물 예정입니다. 원하신다면 배에서 내려 휴스턴 시내를 구경 하셔도 됩니다." "휴스턴이요?" "예, 우리의 종착지인 패링던 항구에 가기 전에 한번 들리는 항구 이지요. 여기도 제법 큰 도시 라서 구경할 건 많을 겁니다." "구경 할꺼예요?" "글쎄다...." "만약 하선 하시려거든 말씀해 주십시요. 그럼." "내려가 보지요?" "인간 도시가 그저 그렇지뭐, 이 나라는 강이 큰게 두개나 있기에 항구 도시가 많이 있긴하지만 그게 그거야. 구경 하려면 너나 갔다 오너라." "엄마는?" "구찮아. 너 혼자 갔다와." "윽, 이럴수가, 나 길 잃어버리면 어쩌라구?" "성룡이면서 뭘 그래? 정 길을 못 찾으면 공간이동 해버리면 되잖아." "그래도 그렇지 딸내미 혼자 보내다니..." "씨끄러, 귀찮은건 귀찮은거야, 혼자 갔다와." "흠, 테일러는 안 갈려나? 만약 간다면 같이 가야지." "아마 갈껄? 어제 그렇게 배에서 혼이 났는데 땅을 밟고 싶겠지." "하지만 완전히 뻗었던데 일어 날까?" "젊은 놈이니 오늘 오후쯤에는 정신을 차릴게다." "그럼 나중에 물어 봐야지." 하지만 점심때쯤 일어날 줄 알았던 테일러는 저녁이 되어도 못 일어났다. 이러다가 진짜 나 혼 자 가게 되는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뭐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테일러는 그날은 못 일어나고 다음 날에야 겨우 일어났다. 그런 사람을 붙잡고 하선하자고 말하 는건 양심에 쬐끔 찔렸지만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단 낳을것 같아서 말했다. "테일러 조금 있다가 이 배가 항구에 정착 한다는거 알죠?" "아, 그래 아까 들었어." "하선 할꺼예요?" "글쎄,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배멀미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잠시 배에서 내리는게 좋지 않겠어요?" "뭐, 그렇기도 하겠다." "나 조금 있다가 내릴껀데 같이 가지 않을래요?" "너가? 뭐하러?" "휴스턴이라는 곳은 첨 와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구경할려구요." "그래? 그럼 같이 갈까? 나도 무기점에 한번 들려 봐야 하니까..." "그래요? 그럼 같이가는 거죠?" "그래, 내려갈때 같이 가자. 참 레이디 시피르께서도 내려 가시니?" 왜 안 물어보나 했다. "어 누나는 그냥 배에 있겠다는데요? 아버지랑 같이." "그래?" 이봐요 너무 그렇게 쳐지지 말라고요, 괜히 내가 미안해지잖아. "그럼 잠시후에 봐요. 지금 계속 선실에 계실꺼죠?" "그래, 레이디께는 안부 전해 드려라." "예, 그럴께요." 으이구... 그래도 끝까지 엄마는 챙기는군.... 오후가 되자 배는 항구에 도착했고, 나와 테일러는 배에서 내렸다. "어디먼저 가볼까요?" "우선 점심부터 먹자. 너 흥분해서 배에서 점심도 안 먹었쟎아." "테일러도 안 먹었쟎아요." "나야 속이 안좋아서 안먹은거지." "어? 그럼 아직 안좋아요?" "아냐, 지금은 좀 괜찮아. 간단한건 먹을 수 있어." "흠 그럼 어디 식당으로 가지요? 아무데나 갈까?" "도시 사정은 그 도시 사람이 제일 잘 알지 않겠어?" 테일러는 그렇게 말하며 마침 지나가던 남자를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저희가 이 도시를 첨 와서 그러는데 괜찮은 식당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식당? 그럼 저쪽 골목에 있는 드래곤 식당으로 가면 될꺼요, 그곳이 괜찮지..."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테일러는 그 남자에게 감사하고는 그가 가르쳐준 쪽으로 나를 데리고 걸었다. "드래곤 식당? 식당 이름이 희안하네..." "그렇지? 하지만 이 도시 근처에 드래곤이 산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식당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걸꺼야." "드래곤이요? 어디에요?" "이 도시 저쪽으로 산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드래곤이 살고 있다고 하더구나." "어? 테일러가 그걸 어찌 알아요? 여기 와 봤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사 후보생인데 드래곤이 있다는 지명은 알고 있어야지." "진짜 드래곤이 있대요?" "그래, 50년전 까진 드래곤을 봤다는 사람도 가끔 나오긴 했지." "그럼 지금은요?" "요즘은 드래곤을 봤다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뭐 계속 거기 있겠지. 뭘 하고 있는진 몰라 도..." "흐음...." "아! 저기 있구나, 드래곤 식당." 드래곤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테일러가 식당을 찾았다는 소리에 질문을 다 잊어 먹었다. "에게? 별로 크지도 않고 되게 오래돼 보이는데요?" "식당은 겉만 보고 판단할 순 없지. 뭐니뭐니해도 음식의 맛과 양 아니겠어?" "그런가요?" "그래, 게다가 건물이 낡았다는건 그만큼 오래 된 식당이라는 뜻 아니겠어?" "뭐 그럴지도...." "어서 오세요." 우리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내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활기차게 인사 했다. "두 분이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연달아 질문들이 쏟아져서 어안이 벙벙 했지만 그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그 소녀가 우리에게 안내한 자리는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 지 않아서 그런지 용케 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비어 있었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테일러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간단하게 요기 하실려면 펜케잌이 좋을것 같아요. 거기에다 생과일 쥬스를 곁들이시면 괜찮으 실 거예요. 맥주도 있고요." "그럼 난 그렇게 주고, 참 생과일 쥬스보다는 맥주로 줘요. 아힌은 뭘 먹을래?" "난 푸짐하게 먹고 싶어요. 정식 같은거 없을까요?" "그렇게 정식으로 딱 차려서는 없고, 음... 고기 좋아하세요?" "뭐든 다 잘 먹어요." "송아지 찜 요리에 버섯 파이, 그리고 입가심으로 야채 샐러드와 맥주 한잔 어때요?" "좋아요, 난 그렇게 주세요. 아, 그리고 난 생과일 쥬스도 줘요." "그럼 음식은 그렇게 주고 먼저 맥주부터 줄래요?" 우리가 주문을 다 하자 소녀는 쪼르르 주방쪽으로 달려갔다. "점심을 먹고 우선은 시장쪽으로 가보자. 난 무기상에 들려야 하니까. 그리고 시장에는 구경할 것도 많을꺼야." "그러죠 뭐, 그러고보니 우리 이렇게 대화하는건 첨이네요." 그동안 테일러와 한 배에 같이 타고 있으면서 우리는 서로 별 말을 안 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엄마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다른 누구와 대화를 별로 안 했고, 나도 뭐 특별히 테일러 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 알고 있었는지 테일러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머리를 긁적 거렸다. "테일러는 누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아니 뭐, 좋다기 보다 기사로써 레이디를 보호 하는건 당연하니까....." "그게 아닌것 같은데요? 아무리 기사라도 테일러처럼 누나를 철저히 보호 하지는 못할꺼예요." "하하하, 그런가?" "우리 누나 미모를 보고 반했지요? 보통 사람들은 누나의 미모를 무시 못하니까." "그것도 있지. 레이디 시피르께선 무척 아름다우시니까. 하지만 그것보다는 뭐랄까... 알수 없 는 기품이 느껴져, 당당하기도하고 그 누구도 범접 못할.....여왕같은 느낌이랄까? 하여튼 그 래.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레이디 곁에 있으면 내가 여왕을 호위하는 기사 같은 느낌이 들어." "흐음... 그래요? 난 잘 모르겠는데..." "너야 항상 곁에 있었으니 모를 수도 있겠지." "그런가?" "그럴꺼야." 뭐 그렇다니 그렇다고 해두지 뭐... 하지만 엄마가 여왕같은 위엄과 기품이라... 뭐 드래곤이라 서 위엄은 있지 않을려나? 번 호 : 8546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04일 23:07 등록자 : LODEMP 조 회 : 89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2화 엄마의 기사 (5) 우리는 식사를 다 끝내고 시장의 위치를 물어 본 뒤 그곳에서 가르쳐준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 다. "사람들이 많긴 많네요. 너무 복잡한걸?" "당연하지, 이곳도 꽤 큰 항구 도시거든, 비록 패링던 항구보단 못하지만." "패링던 항구가 그렇게 커요?" "그래, 이 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항구 도시지. 그곳은 여기 이 강과 바다가 이 어지는 길목에 있는 항구이니까. 강을 운행하는 배의 종착지이기도 하고 또 바다에서 운행하는 배들의 항구이기도 하니까 엄청 크지." "그래요? 무지 잘 아네요?" "모르는 네가 더 이상한거야. 페링던 항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니?"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시장에 들어설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급하게 뒤에서 뛰어 오다 가 테일러와 부딧혔다. "에구구구...." 부딧힌 테일러는 멀쩡히 서 있었는데 정작 부딧혀온 사람은 넘어져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역시 기사 후보생 테일러는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예, 죄송합니다. 좀 급해서..." 넘어진 사람은 테일러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일어선 키가 내 허리까지 밖에 안 왔다. '난장이? 드워프인가? 하지만 드워프는 수염이 나 있다고 하던데....'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는지?" "아, 전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전 이만, 바빠서..."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후다닥 뛰어서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드워프인가요?" "호비트야. 드워프 같은 난장이 이긴 하지만 좀 다르게 생겼지. 드워프는 좀 더 덩치가 좋고 수 염이 많이 나 있거든...." "흐음. 처음 봤어요." "아 저기 무기상이 있다." 무기상 안에 들어가자 어느 노인이 앉아 있다가 우리를 바라 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와~~, 많다." 종류도 가지가지, 모양도 가지가지인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흠, 나도 이왕 온김에 대거 하나 사볼까?' 하고 검을 진열해 놓은 진열대로 가서 열심히 들여다 봤지만 다 비까 번쩍해서 뭐가 좋은건지 구분이 안 되었다. 만저 보기도 하고 들어 보기도 하고 무늬를 살피기도 해 봤지만 그거하고 좋은 대거를 고르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국 내가 고르는 것은 포기하고 주인한테 부탁했다. "대거를 사려고 하는데요?" "뭘 하시게?" "호신용으로 하나 장만 하려구요. 단단하고 가볍고 작은걸로 골라 주세요." "가격은 얼마쯤으로?" "얼마 정도가 좋은거지요?" "아주 좋은 대거는 값을 따질 수가 없지. 하지만 호신용으로 하나 장만하려는 거라면 뭐 30셀 이상은 생각 해야 할껄?" "흐음.... 한번 몇개 골라줘 보세요. 그럼 제가 고를께요." "어디보자.... 그래 이거하고, 음.... 이것도 괜찮지. 아! 이것도 있었군...." 그렇게 주인은 대여섯개를 골라 줬다. "음... 이건 누군가 사용한 것 같은데요?" "초보는 새 검 보다는 중고를 쓰는게 좋아. 중고는 누군가가 쓴 거기 때문에 길이 들어 있어서 쓰기 편하거든. 나중에 꽤 실력을 가진 뒤에 자신에게 맞는 검을 하나 사서 자신의 것으로 길들 이는게 좋지." "그런가요? 흠.... 그럼 이게 좋겠군요. 이거 얼마예요?" 난 주인이 골라 준 것 중에서 가장 작고 가벼운 것을 골랐다. "그건 좀 비싼데... 45셀이야." "그거 이것과 같이 계산해줘요." 어느새 테일러가 검 한자루와 검집을 가져 와서 말했다. "어? 테일러가 사주시게요?" "그래, 대거 하나쯤은 사줄 여유가 있으니까 내가 아힌을 만난 기념으로 하나 사줄께." "고맙습니다 테일러." 왠지 선물을 받은게 엄마의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주겠다는데 고맙게 받아야지. "흠... 이 검은 70셀이고 검집은 40셀입니다. 그리고 대거는 이 소년이 잘 생겼으니 좀 깍아드 리지요. 40셀에 드리겠습니다. 다 합해서 1존드 50셀입니다." 테일러는 그 말을 듣고 돈을 꺼내려는 듯 품속에 손을 넣어 뒤적 거렸다. 하지만 갑자기 멈칫 하더니 당황 하면서 온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 이게 어떻게 된거지? 돈이 없어졌어." "에? 잘 찾아봐요. 어디 딴데다 둔거 아니예요? 아님 아까 그 식당에다 놓고 왔거나..." "아니야, 아까 그 식당에서는 분명히 돈을 내고 주머니를 챙겼어. 근데 이게 어딜 간거지? 헉? 아까 그 호비트!" 테일러는 비명처럼 외쳤다. "쯧쯧, 당신들도 그 호비트 소매치기에게 당했구려?" "소매치기요?" "그래, 혹시 급하게 달려오는 호비트하고 부딧히지 않았어?" "아, 아까 오다가 부딧혔었는데..." "그 녀석이 이 근방에서는 꽤 유명한 녀석이야. 호비트인 주제에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더욱이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안 건드리고 타지 사람들만 건드리지. 그래서 그놈을 누구도 잡으려 하지 않아. 이곳 사람들이야 자신들을 안 건드리니까 안 잡는거구, 타지 사람들이야 재수 없다고 생 각 해 버리니까...." "이놈, 잡고야 말겠어." "그만 포기하는게 좋을거유, 그놈이 그래도 도둑 길드에 소속된 놈이라 패거리들도 많다우. 괜 히 그놈 잡겠다고 들쑤시다간 되려 당신이 당하고 말꺼유." '흠... 호비트가 소매치기에다가 도둑 길드 소속이라고? 참. 거 웃기는 호비트도 다 있군." "그건 그렇고 이건 어쩔꺼요? 보아하니 돈도 다 털린것 같은데?" "아, 제가 낼께요. 마침 돈을 가지고 왔거든요." "너라도 안 털린게 다행이네, 갈때도 조심하는게 좋을꺼다." 주인은 내가 건낸 은화를 받아 잔돈을 거슬러 주면서 말했다. '헤헤, 조심은 소매치기가 하는게 좋을껄? 이 주머니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내가 아닌 딴 사 람이 만지면 강한 전기 쇼크를 받게 된다구....' 그래도 들은 풍월이 있어서 이 주머니를 받자 마자 마법을 걸어 놨던 것이다. 테일러는 축 늘어져서 내가 건네주는 검과 검집을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가게를 나왔다. "이렇게 된거 구경은 할 수 없을것 같으니까 그냥 배로 돌아가요." "미안하구나. 에휴휴휴휴~~~ 내가 소매치기를 당할 줄이야..... 아! 아힌, 배에 돌아가면 내가 돈을 줄께." "아니예요. 내가 테일러를 만난 기념으로 선물 드린 거예요." 테일러는 피식 웃고는 다시 축 늘어지면서 걸었다. "어? 테일러, 저놈 아까 그 호비트 아니예요? 맞죠? 저쪽이요, 저쪽." 그러고보니 아까 그 호비트 비슷한 놈이 막 골목으로 사라졌다. "맞아. 넌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테일러는 잽싸게 뛰어 호비트가 사라진 골목을 향해 뛰어갔다. '에휴, 저번에 보니까 실력이 별로 없드구만, 뭐 하는수 없지. 이몸이 쫒아가줘야지.' 한숨을 한번 내 쉰뒤 나도 곧 테일러를 쫒아 달렸다. 번 호 : 8585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05일 23:26 등록자 : LODEMP 조 회 : 96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2화 엄마의 기사 (6) 얼마나 달려갔을까? 열심히 뛴다고 뛰었건만 테일러를 놓치고 말았다. "실프!" 정말 오랜만에 정령을 불러 내어 보는군… '오랜만이네요 주인님.' "아, 그래 오랜만이지? 있지 미안하지만 테일러를 좀 찾아줄래?" '전 테일러가 누군지 모르는데요?' "그럼 호비트 좀 찾아 봐줄래? 쫏아 오다가 놓쳐 버렸거든? 아직 이 근처에 있을꺼야.."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실프는 하늘 높이 올라 사라져 버렸다. 음… 나 혼자 있기 심심하니까 오랜만에 정령들을 다 불 러볼까? "노움, 운디네, 카사!" "야, 정말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흠… 우리야 뭐 잘 지낼게 있나? 그나저나 주인, 정말 오래간만이군.' 아쭈구리 이놈봐라? 주인한테 반말을 해? "이봐, 노움 나한테 반말해도 되는겨?" '뭐 듣기 싫으시다면…' "됐어 됐어. 맘대로 해." 왠지 존대를 쓰라고 하면 아예 말을 안 할것 같다. 더욱이 땅딸막한 할아버지 모습을 하고 있는 노움이라 존대를 쓰는게 더욱 어색할 것 같다. "안녕 카사, 운디네. 정말 오랜만이지?" '저는 주인님의 몸 속에서 있었는데요?' '카사는 주인님 소유이기 때문에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아요. 언제나 주인님 곁에 있을껄요?' "아 그랬어?" 몰랐는데…. "그럼 카사, 너 테일러를 알고 있겠구나." '예, 알고 있어요.' '실프가 돌아오고 있어요.' 운디네의 말에 하늘을 쳐다보자 실프가 내려오고 있었다. '주인님이 말씀하신 호비트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어떤 무리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곳에 호비트가 있더군요.' "그래? 그럼 혹시 그 사람들 싸우고 있지 않았어?" '예, 한 사람을 둘러 싸고 싸우고 있던 걸요?' 아마 테일러인가 보다. 호비트를 쫏아 갔다가 패거리들한테 걸린거겠지? "실프, 안내해!" '주인, 우린 어쩔까?' "어쩌긴 날 도와줘야지. 우선은 정령계로 돌아 갔다가 부르면 와줘." 정령들은 알았다고 대답한뒤 사라졌고 나는 실프 뒤를 따라 뛰어 갔다. 실프는 이 골목, 저 골목 요리 조리 꼬불 꼬불 들어갔다. "헥헥헥, 실프!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다 왔어요. 골목 하나만 더 돌아가면 도착해요.' 실프가 가르킨 골목을 돌아가는데 어디선가 복날 개패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비록 본 적은 없고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럴 것 같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니 왠 사람들이 누군가를 둘 러 싸고 패고 있었다. 맞는 사람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저만큼 호비트가 서서 웃고 있는걸 보니 테일러인 것 같았 다. 나는 살짝 정령들을 불러서 카사와 실프는 저놈들 뒤쪽으로 그리고 운디네와 노움은 내 쪽에 세 웠다. "노움, 저 호비트를 잡아. 그리고 실프는 저놈들좀 한방 먹여." 노움이 재빨리 호비트의 발 밑에 땅을 파서 호비트를 무릎까지 땅에 묻어 버렸다. 그리고 실프 는 강한 바람을 날려서 놈들을 쓰러 뜨렸다. 놈들이 물러나자 가운데서 맞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는데 도저히 누군지 구분이 안 될만큼 얻어 터져 있었다. 단지 너덜너덜해진 옷이나 검을 보니 테일러가 맞긴 맞는 것 같았다. "넌 뭐야?" 나? 뭐라고 대답하지? 정의의 용사라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테일러 동료라고 하기는 싫은 데….(치사한 나 ^^;)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그럼 그냥 지나가. 쓸데 없는데 끼지 말고." "앗 저놈. 저놈은 이놈과 한패야." "뭐야? 이 애송이랑 한패란 말이지? " "얼라? 저놈 상판좀 보게, 꽤 잘났는데? 저거 팔아 넘기면 수입이 꽤 짭짤 하겠어." "잡아, 얼굴은 다치지 않게!" 놈들은 재빨리 나에게 달려 들었다. '얼씨구, 역시 악당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 다니까?' "카사, 알아서 해치워!" 그러자 뒤에 있던 카사가 놈들 앞을 가로 막았다. 아마 놈들은 나만 바라 보느라 자신들의 주위 에 있던 정령들을 보지 못했나 보다. "뭐야? 이 불덩어리는?" 카사가 그들 앞을 가로 막자 놈들은 주춤주춤 거렸다. "저놈 마법사 아냐?" "겁먹을것 없어. 마법사는 짧은 거리에서는 쉽게 이길 수 있어. 그냥 무시하고 덤벼!" 이 말을 하고 몸을 날린 놈은 카사한테 정통으로 맞아서 가슴을 심하게 그을리며 뒤로 나자빠졌 다. 고놈 참 고소하다. "잘했어 카사." "뭐야? 저놈…. 이봐 이것도 마법이야?"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이거 어떻해야 하는거야?" 놈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쉽게 놔 줄것 같아? "운디네와 실프는 이놈들 도망 못가게 막아. " 나는 재빨리 정령들을 부르고는 검을 빼려고 했지만…. 왠지 사람들을 향해서 검을 휘두르는게 좀 찝찝해서 다시 검을 집어 넣고 주먹을 쥐고 달려 들었다. "뭐여? 이놈. 마법사 아니야? " "아닌가본데?" "그럼 저건 뭐야?" "이봐 마검사라는 것도 있쟎아." "뭘 그리 겁먹어? 상대는 애송이 한명 이라고. 모두 덤벼!" 놈들은 한꺼번에 덤벼 들었다. 나는 제일 먼저 주먹을 쥐고 달려드는 놈 팔을 잡고 엎어치기를 해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달려오는 놈의 턱을 차버렸다. 옆에서 달려드는 놈은 카사와 박치기를 하거나 노움이 파 놓은 구멍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이놈!" 한 녀석이 단검을 던졌다. 하지만 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나를 위해 실프가 재빨리 바람 을 일으켜 단검의 방향을 살짝 바꿔 놔서 나를 향해 날라오던 단검은 내 옆에 있던 놈의 동료를 향해 날라갔다. "으악, 야 잘 보고 던져!" "아 미안미안. 거 참 이……" 그 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그놈에게 달려 가서 면상을 한대 후려쳤기 때문이었 다. "이, 이 녀석이~~~" 얼라? 이놈은 한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화가 난 듯 얼굴이 씨 뻘개지며 나에게 달려 들었다. '에구에구… 잘못 건들였구만.....'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고 나에게 달려 들던 놈은 노움에 의해 발이 걸려 넘어져 버렸다. '어쩌지? 어쩌지? 이거 괜히 덤빈거 아냐? 난 주먹 쥐고 싸운적은 없단 말야…. 윽 저놈들 다 일어서네?' 나한테 한대씩 맞고 넘어졌던 놈들도 다 일어서고 있었다. 이놈들 맺집이 좋은지 아님 내 주먹 이 약한 건지 헷갈렸다. '에구에구 어쩌지? 그냥 마법으로 다 날려 버릴까? 잘난체 하려다가 내가 당하게 생겼네….' '이봐 주인, 어쩔까?' 내가 막 고민하고 있을 때 노움이 물어 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놈들은 덤빌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렇게 맞았는데 그냥 가겠냐?) 정령들은 나에게로 모여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끝까지 밀고 나가자. 덤벼!" 나는 이제 만용을 안 부리기로 결심하고 한놈 한놈 맞서서 싸우기 시작 했다. 내가 한놈을 막고 있을 때 딴 놈들이 덤비는건 정령들이 알아서 막아 주었기 때문에 신경 안 쓰고 한놈만 상대할 수 있었다. "한놈을 보냈고, 이제 다음……." 첨에는 무지 긴장하고 덤볐는데 그래도 내가 실력은 있었는지 덤비는 걸 잘 피할 수 있었다. 하 지만 그쪽도 이 일에는 경험이 풍부한 놈들이라 쉽게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 흥, 비록 내가 사람을 상대한 경험은 없어도 이제껏 몬스터들을 상대해온 몸이었기에 네 놈들 도 나를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 한놈 한놈 쓰러트려 갈 때마다 자신감이 붙었고 나는 더욱더 놈들을 빨리 쓰러트릴 수 있었다. "푸하하하 역시 나는 대단해!" '흥, 우리가 도운 건 생각 안하고 자기만 잘났다는군…' 노움이 삐죽 거렸다. "아 미안, 너희들이 도와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 알구 있어. 아 이제 잃어버린 돈을 찾아야지 …" 나는 여지껏 도망 치지 못하고 땅에 반쯤 묻혀 있는 호비트에게 다가갔다. "어? 아까는 무릎까지 밖에 안 묻었었쟎아?" '도망가려길래 허리까지 묻었어.' "흐음…이봐 그러길래 나쁜 짓 하면 벌 받는거야. 어째든 돈 돌려줘." 호비트는 나를 바라보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미안해서 어쩌나, 그건 벌써 위에다 상납하고 나머지는 다 써버렸는데…."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몸으로 때워!" 호비트가 기분 나쁘게 웃는 바람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호비트의 얼굴에다 내 발자국을 남겨 주 었다. (나도 참 험해졌어….) "그럼 지금 가진 거라도 내놔." "보시다시피 팔이 묻혀 있어서….." "흥… 그렇다고 내가 너를 풀어줄 것 같아?" 나는 호비트의 몸을 뒤적뒤적 거렸지만 들어 있는데 없었다. "어라? 아무것도 없쟌아?" 그러자 호비트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거봐, 난 가진게 아무것도 없다니까…" "너 기분나쁘게 웃는데 어디 계속 웃을수 있나 한번 보겠어." 나는 노움에게 호비트를 파내라고 한 뒤 가벼운 헬 파이어를 써서 옷을 다 태워 버렸다. 물론 몸은 좀 뜨거워서 화상을 입었겠지만 뭐, 죽지는 않았으니 된거지….(허걱 나도 점점 잔인해 지 고 있다……) 옷이 다 타버리자 옷 속에 있던 물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디보자…. 단검에 오라, 여기 돈이 좀 있군….. 손수건...어라? 이건 또 뭐야? 왠 잡동사니 가 이렇게 많지?" 난 쓸데 없는건 다 버리고 돈만 챙겼다. 50셀 은화 대여섯개와 동전 몇 개가 있었다. "에라라 이게 뭐야? 겨우 3존드와 70셀 밖에 안되쟎아? 뭐 하는 수 없지. 이것 밖에 없는 것 같 으니… 딴 놈들한테 보충해야지…" "이봐이봐, 그러지 말고 그걸로 봐줘. 딴 놈들까지 털면 난 죽는다구…. 제발 그냥 좀 봐줘…" 호비트는 울상이 되어 말했다. "흥,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호비트의 애원을 무시해 버리고 딴 놈들도 옷을 홀랑 태워 돈을 모아본 결과 그래도 10존 드 넘게 찾아낼 수 있었다. "뭐 이정도면 괜찮군…." 나는 아직까지 기절해 있는 테일러에게 다가갔다. "에구, 그러고보니 테일러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쟎아? 하는 수 없지. 음…. 상처가 너무 심한 것 같으니까 치유 마법을 조금 써주고…" 내가 치유 마법을 쓰자 호비트는 놀라 뚱그래진 눈으로 쳐다 보았다. "마, 마법사셨습니까?" 나는 호비트에게는 대꾸도 안 해주고 테일러를 데리고 배로 공간이동 해버렸다. 그 뒤로 테일러는 계속 꿋꿋이 엄마의 수호 기사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나에게 도움을 받아 서 그러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시무룩해 보이기는 했다. 며칠 더 항해를 한 후 우리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엄마와 나와 할아버지는 그동안 안면을 익혔던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배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때 테일러가 다가왔다. "이제 헤어지게 되었군, 그동안 같이 지내서 즐거웠네." 할아버지가 인사를 하셨다. 테일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엄마에게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엄마 손을 잡았다. "레이디 시피르, 전 당신을 영원히 제 레이디로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원래는 당신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전 아직 많이 부족하고 또 기사도 아니기에 당신의 허락을 구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제 레이디로 섬기고 싶습니다. 나중에 제가 뛰어난 기사가 된다면 당신을 제 레이디로 사람들께 말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제 레이디라는 것을 영원 히 저 혼자 간직하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건강 하시길…." 하며 엄마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마추었다. 그리곤 벌떡 일어서며 나에게 "아힌, 나중에 만나면 너에게 진 빛은 꼭 갚으마. 그럼 건강해라."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저런 저런 그렇게 화난 표정은 짓지 말거라." "맞아요. 훌륭한 기사가 되기 전에는 엄마 이름을 안 밝히겠다쟎아요." "그걸 어떻게 믿어? 첨부터 따라 다니지도 못하게 했어야 했어." "자자, 그만해라. 빨리 바다를 건널 배를 찾아야지….." 번 호 : 8694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07일 23:09 등록자 : LODEMP 조 회 : 86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3화 드래곤 로드 안녕하세요? 제가 또 실수를 해서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전에 제가 드래곤의 수를 100명 이라구 했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너무 많은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좀 줄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글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래서 드래곤의 수를 45로 줄였습니다. 그럼 즐팅 하세요. ---------------------------------------------------------------------------------- 7-3화 드래곤 로드 참 오랫동안 여행을 한 것 같다. 강을 따라 내려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거의 한달이나 걸렸다. 그리고 말을 타고 또 반달동안 달려야 했다. “인사 한번 드리러 가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지, 드래곤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데다가 공간 이동으로 가는게 아니니까… ” “하지만 뭐, 드래곤은 시간이 남아 도니까…” “그러고 보니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가는 것도 꽤 오랜만이로군…… 4000년 만이던가?” “칼 세실리아가 성룡이 될 때 동행하셨을 때 잠깐 만나신게 마지막이었던가요?” “그거야 전대 드래곤 로드였지. 현 드래곤 로드는 성룡이 되었다고 인사하러 왔을 때 만났었 어. 어디보자 너가 드래곤 로드보다 나이가 더 많았던가?” “아니요. 내가 200살 어려요.” “흠…. 그런가? 그럼 너가 성룡이 되어서 인사한 드래곤 로드가 전대 드래곤 로드였니?” “그랬죠.” “그럼 너도 현 드래곤 로드는 로드 승계식때 외엔 만난적이 없겠군?” “아뇨. 그것 말고도 현 드래곤 로드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성룡이 되었다고 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랑 내가 성룡이 되어서 드래곤 로드께 인사 드리러 갔을 때 잠깐 만났던 적이 있었어요.” “흠…. 그랬었던가?” “꽤 별난 드래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푼수기도 했지만….” “그런점이 없지 않아 있지….” “어디에 사시는 데요?” “흠 이쪽 어딘가에서 산다더군.” “어? 그럼 할아버지도 드래곤 로드가 어디 사는지 모르세요?” “몰라. 관심도 없구.” “그럼 지금 어떻게 찾아가는 거예요?” “드래곤 로드를 느낄 수 있으니까 그 느낌을 따라 가는거야. 성룡 드래곤이라면 드래곤 로드가 어디쯤 있는지는 느낄 수 있지. 그래서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갈때는 그 느낌을 따라 가는 거 야.” “이제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요?” “글쎄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아. 이 근처에서 느껴 지는걸 보니.” “저긴것 같은데요?” 우리가 지금 현재 있는 곳은 내가 태어난 남대륙 에서 바다 건너 위쪽에 있는 북대륙에서 테아 칸국가에 있는 소사믹 산맥 끝에 위치한 얀스크 산속 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가르킨 곳은 산속 을 어느정도 헤맨 끝에 (나는 그렇게 생각 했지만 할아버지는 느낌을 따라 온 것 뿐이라구 빡빡 우겨 대셨다.) 찾아낸 어느 공터였다. 그리고 그 공터 가운데는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집이 한채 있었다. 집 근처 둘레에는 울타리 도 쳐져 있었고, 아담한 텃밭에는 채소들이 가꾸어져 있었다. 게다가 마당에는 암탉들이 병아리를 데리고 노닐고 있었다. “여기에 개 한마리 있으면 전형적인 농가집이구만…” 할아버지가 거기까지 말씀 하셨을 때 집 뒤쪽에서 왠 닭 한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강아지에게 쫏 겨왔고 그 뒤를 구경하듯이 느긋하게 부부로 보이는 개 두마리가 걸어 나왔다. “완전 전형적인 농가네요.” “그러게 말이다.” “여기가 확실해요?” “확실해.” 엄마는 대답을 하면서 집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군가가 정중하게 물어 왔다. 목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나무로 만든 현관문이 있었고, 그 곳에 있는 둥그런 두 눈과 커다란 입이 씨익 웃고 있었다. “이게 뭐야?” “껄껄껄, 현 로드가 별나다고 들었긴 하지만 이런 것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정말 별나군 ….” “너 뭐야?” “보시다시피 전 '문' 입니다. 손님들께선 어떻게 오셨습니까?” 자칭 ‘문’ 은 싱글싱글 웃으며 재차 물었다. “우린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왔네. 안에 있는가?” “아, 주인님을 만나러 오셨군요. 주인님께선 지금 마법 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들어와서 기다 리시겠습니까?” “그러지.” 할아버지가 대답을 하자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그리고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어서 오십시오.” 세개의 초를 꽂아 주변을 밝히고 있는 촛대였다. “참 별난걸 다 만들었군….” “이쪽으로 앉으시겠습니까?” 하면서 자리를 내주는건 의자 세개와 식탁이었다. “의자랑 식탁까지……” 나중에 주전자와 찻잔이 차를 대접한다며 나올때는 오히려 담담했다. “로드는 언제쯤 만날 수 있지?” “글쎄요…. 주인님 실험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거든요.” “지금 우리가 왔다고 알리면 안되겠는가?” “죄송합니다. 주인님께선 실험중에 방해받는 걸 싫어하시거든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실험은 대개 금방 끝나니까……” 하고 촛대가 말을 할 때 꽈과광~~ 하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집안이 흔들리며 창문으로 보이는 밖에서는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요…” 그리곤 안쪽으로 연결 되어 있는 듯한 문이 벌컥 열리면서 온 몸이 시커멓게 그을린 여자가 뛰 어 들어왔다. “우왓 콜록콜록, 에구구 또 실패했다.” 그여자가 나타나자 알아서 의자가 하나 더 대령 되었고 의자에 털썩 주저 앉자마자 주전자가 차 를 대령했다. “주인님 이번이 50번째 실패군요.” 라구 말한뒤 한숨을 폭폭 내쉬며 여자가 나온 문으로 사라지는 빗자루와 먼지 털이개와 마대는 분명히 여자가 어질러놓은 실험실을 치우러 가는 것이리라. “주인님 아까 손님이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촛대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응? 누가 날 찾아와?” 하며 우리를 쳐다보는 여자였다. “왠만하면 좀 씻고 오지 그러세요?” 엄마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아! 이런 실례. 오랫동안 혼자 살다보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구 다시 사라지는 여자였다. “이곳은 참 재밌는 곳이네요.” “뭐가 잼있어? 정말 한심하군….” “뭐 어떠냐? 이런 저런 드래곤들이 있는거지. 너 같은 드래곤도 있지 않냐?” “무슨 의미예요?” “좋은 의미다.” “그런게 아니라는 것 쯤은 누구나 알수 있다구요.” “좋은 의미라니까 뭘 그리 의심하는거냐?” “아버지가 평소에 좋은 의미로 그 말을 쓰지 않았으니까 그러지요.” “아~ 차맛 좋타~~” “아. 버. 지~~~” “나 아직 귀 안먹었다.” “정말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봐 여기 얼음물 한컵!” 엄마는 즉시 대령된 얼음물 한컵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나저나 정말 신기하네요." "뭐가?" "드래곤 로드 말이예요. 전 드래곤 레어로 갈 줄 알았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로드가 별나서 그래. 정말 괴짜라니까." "맞아. 로드는 성룡이 되어서 인간 세상에 나갔을때 어느 마법사의 제자로 있었다더군...." "웃기네요. 드래곤이 인간 마법사의 제자라니....." "그러니까 괴짜라고 하지 않았냐? 흠.... 아마 이렇게 사는 것도 그때 받은 영향일지도 모르 지..." "꽤 괜찮은데요 뭐. 꼭 동화나라 같아요." "동화는 무슨.... 귀찮게쓰리 뭐하러 이렇게 산담?" "그러길래 아까도 말했듯이 이런 드래곤도 있고 저런 드래곤도 있는거야. 괴짜로 치면 아린도 괴짜인데 뭐..." "하긴, 태어나자 마자 엄마보고 비명을 질러댄 녀석은 아마 저녀석 밖에 없을걸요?" "윽, 그 얘기가 지금 여기서 왜 나와요?" "1년도 안된 녀석이 날겠다고 하질 않나, 100살도 안된 주제에 마법을 배우겠다질 않나...." "마법을 못 배우게 하니까 해츨링인 주제에 검술을 배우겠다고 검을 휘두르고 다니다가 들키 고..." 할아버지와 엄마는 옛 생각이 난듯 키득키득 웃었다. "우씨~~ 옛날 일은 뭐하러 말해요?" "정말 그렇게 황당하던 꼬마가 벌써 성룡이라니...." "세월 참 빠르지요?" "그래, 정말 그렇구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레드 드래곤의 고룡이신 칸 시스파슈타 인님, 그리고 칼 세르니안님도." 아까 사라졌던 여자인듯한 여자가 나타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 머리에 금빛으로 빛나 는 두 눈동자, 크고 날씬한 몸매, 하얗고 티없는 피부.... 정말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그래, 정말 오래간만이군 로드." "씻으니까 좀 낫네요. 골드 드래곤이자 드래곤 로드인 칼 엘리아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실험하다가 조금 실수해서 그런 거예요." "뭘 만들고 있었는데?" "진실의 거울이요. 물어보면 뭐든 진실을 대답하는 거울!" "거울을 왕창 깨먹었겠군...." "그렇게 많이 안 깨먹었어요. 오늘 깬것까지 합하면..." "합하면?" "아마 약 300장 되려나?" "오늘이 50번째 실패라면서요?" "아, 난 한번에 6개씩 만들거든...." "앞으로 얼마나 더 깰지....에휴~~" "촛대, 너 확 녹여서 오강으로 만들어 버린다?" "허걱~, 주인님 제발 그것만은....." "오호호호, 오강은 놋오강이 최고지 아마?" "에헴, 놋 오강을 만들든 육강을 만들든 그건 자네 일이고..." "아 그렇지,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우리 아린이가 올해로 성룡이 되었거든, 그래서 인사를 드리러 왔다오." "아, 그래요 이 아이가 정말 오랜만에 태어 났다는 그 아이군요?" "그래요, 레드 드래곤 족에서는 2000년 만에 태어난 아이지요." "그리고 전 드래곤 종족중에선 1500년 만에 태어난 아이구요. 어째든 제가 로드 계승식을 받은 뒤로 처음으로 성룡으로써 인사를 하러 온 아이군요." "그렇게 되는군, 어째든 로드께서도 이제 해츨링이 태어나지 않아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아린이 태어난뒤로 두 아이가 더 태어 났다고 하니..." "어머, 전 전혀 걱정 안했는데요?" "..........." ^^; "아하하하, 죄송해요. 제가 실험을 하느라고 좀 정신이 없었어요." "어험험, 으흠." "어째든 성룡이 된걸 축하해야지요. 자 이리와봐." 난 주춤주춤 일어서서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성룡이 된 그대는 누구인가?" 얼라리오?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아참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이지? 어째든 로드는 아 까의 그 푼수 끼 있던 표정과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눈빛조차 엄숙하게 바뀌었다. 거기다가 더욱더 저음으로 깔린 목소리..... "전 칼 세르니안의 딸 아시리안입니다." "칼 아시리안이여, 나 드래곤을 대표하는 자 칼 엘리아스의 이름으로 그대는 우리 드래곤 족의 성룡임을 엄숙히 선언하노라." 껌벅껌벅.... "아린아 끝났어." "아 그래요? 난또 더 있는줄 알았어요." "자 성룡 선포식도 끝났고 또 처음으로 나에게 인사를 온 성룡이니 식사를 대접해야지." 로드는 갑자기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저녁 식사 준비해, 오늘은 4인분이야." 잠시후 나는 신기한 장면을 구경하게 되었다. 세 분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왠 부엌칼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왠지 닭들의 비 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잘못봤나 싶어 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니 부엌칼이 닭 한마리를 쫏아서 날아가고 있었 고 그 쫏기는 닭은 죽어라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건 그렇게 신기한 장면이 펼처지는데도 개 한마리는 원래 그랬다는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누워버리는 거였다. 나머지 한놈은 그걸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잔인한 놈) 텃밭에서는 왠 손이 달린 바구니가 돌아다니면서 야채를 뽑아서 자기 몸속 (그러니까 바구니 속) 에다 넣고 있었다. "하.하.하" "재밌지?" "그렇네요. 정말 재밌어요." "그치그치,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거야, 아마 오늘 저녁 요리는 닭 요리일 것 같군."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왔는지 로드는 자신의 작품(?) 자랑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부엌에서 요리 하는건 국자나 후라이팬이나 뭐 그런거 아니예요?" "맞아, 잘 아네? 집안일 하기 귀찮아서 집안일 하는 도구들에게 다 마법을 걸어 놨거든. 편리해 보이지?" "예, 편리 하기는 하겠네요." "참, 선물은 뭐로 줄까? 너 성룡식이 끝나면 뭘 할꺼니?" "인간 세상을 여행할 참이예요." "그래? 그럼 내가 발명한 물건들좀 줄까? 꽤 도움이 될꺼야." "아니 뭐, 그렇게까지 생각 안해 주셔도...." "아냐아냐. 처음으로 나에게 인사하러 온 드래곤인데 내가 줄 수 있는건 다 줄께." "아니예요, 그렇게 안하셔도 되요." "괜찮아, 그렇게 겸손해 할것 없어." '겸손이 아닌데.....' 로드는 나를 이끌고 다락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내 발명품들을 모아 둔 곳이야." "하하, 꽤 많네요." "그렇지? 어디보자 뭐가 좋을까? 아, 이거 어때?" "손거울이네요?" "이건 보통 손거울이 아니야. 내가 최근에 '진실의 거울'을 만든다고 했지?" "예, 그랬죠." "이건 그때 만들다가 실패한건데 폭팔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버틴거거든." "강도가 굉장히 쎈 거울이네요." "그렇지? 근데 그것 말고도 딴 기능이 있어." "뭔데요?" "잘봐, 거울아 거울아 진실의 거울아 테아칸 왕궁을 보여다오." 그러자 손거울에서 빛이 나더니 거울 속에 왠 왕성의 모습이 보였다. "봐, 봐 신기하지? 어때?" "어라? 이게 테아칸 왕궁이예요?" "그래, 비록 거울이 좀 작아서 다 보이지는 않지만 테아칸 왕궁이야." "대단한걸요?" "그런데 이 거울은 자기가 스스로 진실을 알아서 대답하지는 못해." "그럼요?" "단지 내가 입력 시켜 놓은 자료들을 대답해 주는 정도야." '마치 컴퓨터 같군, 신기한데? 쓸모가 있겠어.' "뭘 입력 시켜 놓으셨는데요?" "음... 세계 지도랑 각 나라나 지역의 특징 정도?" "그래요? 그럼 이것만 있으면 길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군요." "그렇지. 어때 좋지?" "근데요 그게 몇년 전꺼예요?" "글쎄, 내가 세상에 나갔다 온지 한 1000년쯤 되었나? 아마 그때쯤일것... 얼굴이 왜그래?" "그때 당시 꺼면 지금은 쓸모가 없쟎아요." "걱정마 너가 원하면 자료도 입력 시킬수 있어." "얼마나요?"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하지만 꽤 많이 들어갈꺼야. 아마 책 1000권 정도는 더 들어갈 수 있 을껄?" "그래요? 그럼 자료는 어떻게 입력 시켜요?" "그냥 책을 얘한테 던져 주면 돼, 그럼 얘가 책을 먹고 책 속에 있는 내용을 다 입력 시켜." "그럼 책은 사라지고요?" "그렇지." "뭐 여행에 편하기는 하겠네요. 거울로도 쓸수 있고." "그치그치? 그럼 이거 줄께. 그리고 또 뭘 주지? 아, 이것도." "그건 또 뭔데요?" "이거? 잘봐 이렇게 접으면 손가방만하지? 이렇게 펼치면.... 쨘 멋진 침낭이 되었습니다." "정말 별걸 다 만드셨네요." "호호호, 뭐 이정도야..." 이렇게 해서 나는 컴퓨터 거울 (이건 내가 이름 붙인 것이다.), 손가방 침낭, 재료만 넣으면 저 절로 요리해주는 후라이팬, 주문을 외우면 밧줄로 변하는 지팡이 등등을 얻었다. "로드, 우물우물 꿀꺽.지금 레어에 있는 고룡들은 몇명이지?" "얌얌 쩝쩝 꾸우울꺽, 아마 3명 일꺼예요." "와그작, 와그작 꿀꺽, 고룡이 다 몇분인데요?" "응, 이봐 거기 소금좀 줘. 10명." "흠, 그럼 5명은 지금 동면중이거나 놀러 나갔다는 말이군.후루룩~" "뭐 요즘 고룡들께서도 원기가 왕성 하시니까...앙~" "꿀꺽~~ 그래 누구누구가 있지?" "아르카스해의 블루 드래곤 칸 아이비스크님, 그리고 남대륙에 있는 마틸산에 실버 드래곤 칸 크제나님, 나머지는 드래곤 숲에 계시는 그린 드래곤 칸 그라하리님이요. 이 세분이 계시는 군 요.와작 와작~" "그런가? 그럼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출발하도록 하지." "누구에게 먼저 가죠?" "글쎄? 드래곤 숲으로 먼저 갈까?" "그러지 말고 아르카스해를 통해서 드래곤 숲으로 가는게 어때요? 그다음에 남대륙으로 돌아가 도록 하지요?" "올때는 바다로 왔쟎아? 그러니까 갈때는 육지로 가자구." "그게 좋을것 같아요. 배는 너무 지루하다구요." "그런가? 좋아 그럼 뭐 육지로 가지." "그럼 내일 일찍 출발하자." 흠... 드디어 드래곤 로드는 만났고, 이제 고룡 3분만 남았군. 번 호 : 8735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08일 22:41 등록자 : LODEMP 조 회 : 88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8화 드래곤 숲을 향하여 제 8화 드래곤 숲을 향하여… “어디보자…. 드래곤 숲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드래곤 숲이 남대륙과 북대륙 사이에 있으니까 이쪽으로 쭉 돌아서 가야 하겠네요.” “그런가? 그럼 테아칸국 수도하고 소르드국 수도를 거쳐서 가야 하겠군.” “흠…. 빨라야 두달이겠네요. 너무 오래 걸리는거 아닌가?” “뭐, 여기 오는데도 두달이나 걸렸는데…” “왜 숲 이름이 드래곤 숲인가요?” “드래곤이 살고 있으니까 드래곤 숲이지.” “원래 이름은 다른 거였는데 거기에 칸 그라하리님이 살면서부터 사람들이 드래곤 숲이라고 불 렀지.” “요즘도 아무도 못들어가나?” “아마 그럴꺼예요. 칸 그라하리님의 성격 아시잖아요.” “그녀석도 참 웃긴 녀석이지. 원 동족보다도 숲을 더 좋아하니…” “숲이요?” “그래, 그곳에서는 나무 한그루 못 베. 그라하리 녀석이 가만 안있거든…” “숲에 조금이라도 해를 가하면 칸 그라하리님의 노여움을 사지.” “그럼 그 숲에는 엘프들은 살겠네요.” “그렇지도 않아. 앨프들이 뭐가 부족해서 드래곤이랑 한 숲에서 살려구 하겠어?” “그런가? 그럼 그분은 식사는 어떻게 해결 하세요?” “그놈? 웃기게도 채식주의자야. 나참, 채식주의자인 드래곤이라니…” “근데 할아버지는 그분을 별로 안좋아 하시는 것 같아요.” “사이가 좋을리 없지. 예전에 대판 싸운적이 있거든.” “에? 왜요?” “몇 년 전이지? 한 2000년 됐나? 하여튼 그때 할아버지가 잠시 레어를 비웠는데 그때 간 큰놈 하나가 할아버지 보물을 훔친 적이 있었거든, 나중에 알게 되신 할아버지가 그놈을 쫏아 갔었는 데 그놈이 하필 드래곤 숲으로 도망을 친거야.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드래곤 숲에서 그놈을 혼내 주시려다가 숲을 좀 태워먹었거든? 그랬더니 그라하리님이 막 화를 내신거지. 남의 집 마당을 태운다고.” “흥, 그놈이 나쁜거야. 숲좀 태웠다고 그렇게 덤벼드는 놈이라니. 나보다 나이도 어린게…” “그때 너희 할아버지랑 그라하리님이랑 대판 싸웠지 덕분에 드래곤 숲은 반 이상이나 날라갔었 지.” “아마 네 할아버지가 열받아서 일부러 숲을 더 망가트렸을걸?” “당연하지, 원래는 숲 전체를 날려 버릴려구 했다고, 그런데 그놈이 일찍 눈치를 채는 바람에 다 못 날렸지.” “그래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신 거군요. 근데 그 뒤로도 화해 안하신 거예요?” “화해는 무슨놈의 화해? 그녀석이 먼저 와서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지.” “시스파슈타인님도 숲을 날리셨으니 뭐 피장 파장 아닌가요?” “그건 그놈이 먼저 도발해서 그랬던거야. 그러길래 누가 나한테 덤비래?” “어? 그럼 지금 드래곤 숲에 가시면 혹시 다시 싸우시는건?” “설마, 그라하리님이 숲을 다시 날리고 싶으시지 않는 이상 다시는 드래곤 숲에서 싸우지는 않으실걸?” “그말은 딴데서는 싸울 수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당연하지. 물론 그라하리님이 드래곤 숲을 떠나셔야 하겠지만, 그분은 드래곤 숲을 떠나지 않 으실걸?” “그럼 싸울 확률은 없는 거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도 분위기는 안 좋겠어요.” “괜찮아. 그놈도 나도 다 고룡인데다가 이번 방문은 너를 위한 방문이니까 그놈이 그렇게 눈치 없게 그러지는 않을게다.” “더구나 칼 세르니안님이 같이 가시니까 더 큰 화를 당하시지 않으려면 환영해주셔야 할걸?” “어머나? 그게 무슨 뜻인가요?” “하하하, 세르니안님이 딸을 무척 사랑하신다는 뜻이지요. 아무리 고룡이라고 해도 첫 따님을 박대 하는데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쟎아요.” “당연하지요. 감히 누가 내 딸을 박대해요?” “하.하.하.” “뭐 어째든 그럼 우선 테아칸의 수도로 가야 하겠군.” “그럼 수도에 도착하면 며칠 구경하다 갈꺼예요?” “글쎄, 뭐 나나 네 엄마는 구경할것도 없지만…. 네 엄마는 그곳에 갔다 온지 얼마 안 되었을 걸?” “그렇군요. 아린이 독립했을 때 잠시 놀러간 곳이 그곳 이었으니 나로써는 구경할 것도 없지 요.” “에? 그럼 뭐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가도록 하죠 뭐.” “그럴래? 그럼 그래라.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할까?” “잠깐만요. 구경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실꺼면 굳이 말을 타고 갈 필요는 없쟎아요?” “그럼 바다로 가라구?” “아뇨, 그게 아니라요. 제가 예전에 인간 세상에서 있을 때 소르드국에 있었거든요. 그때 그 나라에 있는 와이드산맥에 워프 결계를 만들었었어요.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서 어제 확인해 보 니까 아직 있더라구요. 그곳을 통해 가시는게 어떨까요? 그럼 기간도 훨씬 단축될꺼구 또 편하 게 가실 텐데요.” “흠, 그럴까?” “뭐, 구경하면서 가는게 아닌데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저도 찬성이예요.” “그럼 잠시 기다려 주세요. 제가 여기다가 결계만 그리면 당장이라도 워프 할수 있으니까. 결계도 금방 그릴수 있어요.” 로드는 잠시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한참 후에 왠 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그리곤 거실 중앙을 깨 끗이 치우곤 주머니 속에 있던 가루를 뿌리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가루에서 빛이 나면서 공중으로 흩어지더니 땅에 가라 앉을 땐 어떤 형태를 띄었다. 꼭 만화에서 보던 마법 결계 같았다. 뭐 결계를 만든다고 했으니 당연히 결계 겠지만 만화에서 보던 거랑 비슷한게 참 신기했다. (어쩔수 없지,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는 결계가 없으니…… ^^;) “자 다 됐어요.” “이거 뭐 이상한 공간으로 떨어지거나 하는건 아니겠지?” “걱정 마세요. 그때 제가 하도 길을 잘 잃어 버려서 만든 거거든요. 많이 써봤으니 걱정 안하 셔도 될꺼예요. 그럼 이쪽으로 들어 오세요.” “말들은 어떻게 하지요?” “데리고 가야지. 이봐 빗자루, 우리 말들 좀 끌고 와.”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빗자루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에는 어벙벙한 표정들을 한 말들이 집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빗자루한테 쫓겨 들어 왔을 테니 당연 하겠지.) “자, 그럼 짐하고 말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들어 오세요.” 로드는 우리가 결계 중심에 서자 간단히 외쳤다. “이동!” 그리고 우리는 공간 이동을 할 때처럼 빛에 휩싸였고 잠시 후에는 어떤 숲속 가운데 있는 공터 의 폐허 더미 위에 서 있는 우리를 발결할 수 있었다. “흠, 여기가 예전에 로드가 있던 집이었나보군.” “그럼 여기가 와이드산맥이란 말인가요?” “제대로 왔다면 그렇겠지. 어째든 산을 내려가 보자구. 마을에 도착하면 알게 될 테니.” “근데 어느쪽으로 내려가야 하나요?” “잠시만요. 제가 실프에게 물어 볼께요.” “실프? 아아, 그래. 아린이는 하급 정령들을 소환할 수 있었지?” “하급정령을? 뭐하러?” “얘 할미가 사냥에 도움이 될꺼라며 가르쳐 줬다더군. 뭐 어째든 아린에게 쓸모 있으니 된거 지.” “이쪽으로 쭉 내려가면 산을 내려갈수 있다는 군요. 그리고 쉽게 마을을 찾을 수 있대요.” “그래? 그럼 그쪽으로 가자꾸나.” 우리 일행은 말을 끌고 실프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길이 나 있지 않아서 말은 탈 수가 없었다. 번 호 : 8828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10일 23:05 등록자 : LODEMP 조 회 : 858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8화 드래곤 숲을 향하여..(2) "도대체 언제까지 더 가야 하는 거야?" 반나절을 걸어왔어도 마을은 커녕 사람의 흔적 조차 보이지 않자 엄마가 투덜 거렸다. "더 가야 한데요." "더 가야 한다고 말한게 벌써 몇번째야?" "너가 물은 수 만큼이지." "마을을 쉽게 찾을수 있다고 했쟎아요."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했지, 가까이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흥, 그말이 그말이지." "저쪽에 냇가가 하나 있대요. 우리 거기서 좀 쉬어 가요." "그래, 반나절을 걸어 왔으니 좀 쉬자. 점심도 먹고." 실프의 안내로 냇가를 찾은 우리는 냇가 옆 공터에서 도시락을 펼쳤다. "로드께서 도시락을 싸주신게 다행이네요." "혹시 로드가 마을이 이렇게 멀리 떨어진 줄 알고 싸준게 아닐까?" "아마 그럴지도...." "좋쟎아요. 꼭 소풍 나온것 같네요. 날씨도 좋고." "만약 날씨가 안 좋았다면 네 엄마가 로드를 가만 안 나뒀을꺼다." "흥, 내가 나서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날라갔을껄요?" "내가 너처럼 성격이 급한 줄 아냐?" "아마 만만치 않을 걸요?" "내 나이가 몇인데?" "나이가 많으면 뭘해요? 어머니가 맨날 나이값좀 하라구 하시는 것만 봐도 알수 있죠." "흥, 그 할망구는 나이가 들면 좀 나아지나 했더니 더 잔소리가 많아졌어." "아, 졸리다. 우리 여기서 한숨 자고 갈까요?" "그럴까? 날씨도 좋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오는게 꽤 기분 좋구만..." "뭐 마을을 정 못찾으면 날아서 가면 되니까 한숨 자고 가죠?" 우리는 각자 폭신하게 풀이 난 곳을 골라 누웠다. 하늘은 정말 파랬다. 한국의 가을 하늘도 저렇게 파랬는데.... 그러고보니 한국 생각이 난 것이 정말 오랜만이구나.... 새엄마나 아빠는 내가 사라졌다고 슬퍼하기나 할까? 한국 생각을 하자 괜시리 기분이 우울 해졌다. '생각하지 말자. 이제 난 이곳에서 사는걸, 엄마도 생겼고, 할아버지에 할머니도 생겼고, 후후' 그러고보니 이곳에 와서 난 정말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을 많이 만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좀 다치게 했다고 가고일 떼를 몰살시킨 엄마나 내게 칼을 겨누었다고 다짜고짜 헬 파이 어를 날린 할아버지를 생각하자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난 정말 행복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오는 잠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세상에나, 얼마나 잔거야?" 엄마의 외침에 벌떡 일어났다. 벌써 밤인지 사방이 깜깜해졌다. "잠깐 자려고 했는데 밤중까지 자버렸군..." "어쩌죠? 어두운데 내려가면 위험할텐데?" "그렇다고 여기 이렇게 있을수는 없지 않니? 밤이라서 그런지 꽤 추운데다가 냇가 옆이라서 습 하구나." "날라가죠? 밤이니까 뭐 우리가 보이겠어요?" "그럼 말들은 어떻하지요?" "그렇군, 그냥 버리고 갈까?" "하지만 다음 마을에서 말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않니? 차라리 이렇게 하자. 내가 하늘에 서 좀 살펴보고 오마. 그 뒤에 결정 하자구." 할아버지는 몸을 살짝 공중에 띄우신뒤 저편으로 날라 가셨다. "한밤중인데... 마을에 불빛도 없지 않을까요?" "그래도 한두개쯤은 있을꺼야. 설사 하나도 없다고 해도 마을 하나 구별할 수는 있을테니까." "마을이 가까운데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여지껏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아마 가까운데 마을이 있지는 않을꺼다. 로드도 참 왜 이렇게 깊숙한 곳에서 살았던 거야?" "엄마 불 피울까?" "춥니? 그래 피우자. 잠깐 기다려봐 나무를 모아야지." 엄마는 가까이 있던 삐쩍 마를 죽은 나무를 마법을 이용해 싹둑싹둑 잘라 왔다. 나는 엄마가 잘 라온 나무를 받아서 땅에 잘 쌓아 놓고 불을 붙였다. "엄마, 그러고 보니 엄마도 이렇게 성룡이 된 뒤에 여행을 다녔어요?" "응? 아아, 그랬지. 그건 성룡이 되면 누구나가 다 가야 하는 여행이니까." "엄마는 고룡 몇분에게 인사 하셨어요?" "나? 내가 성룡이 되었을쯤에는 고룡이 몇분 없었어. 다섯 분 됐나? 그나마 그중 네 분은 돌아 가시고 네 할머니 한분만 남았지." "음, 그럼 할아버지도 그때는 고룡이 아니셨군요." "아직 고룡이 아니셨지." "그럼 몇분에게 인사 하셨어요?" "네 할머니하고, 드래곤 로드하고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블랙 드래곤 한분, 세분이구나." "그럼 여행도 짧았겠군요?" "난 짧았던게 더 신났어, 그래야 빨리 나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인사하는 여행을 끝내자 마자 곧바로 또 다시 여행을 떠났어요?" "그랬지, 고룡이신 블랙 드래곤께 인사 드리자 마자 네 할아버지하고 헤어져서 여행을 떠났지." "헤에~~, 그럼 얼마나 오랬동안 하셨어요?" "1년." "에?" "1년 밖에 못했어." "왜요?" "아니, 여행을 가는데 열받는 일이 꽤 있더라구, 그래서 몇번 드래곤으로 변해서 손좀 봐줬지. 그러다가..." "그러다가?" "다른 드래곤 여행을 망쳐 버렸거든. 그 드래곤이 나보고 인간에 대해 더 안다음에 여행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충고 하더군, 나도 그때는 더이상 여행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돌아왔지." "하.하.하." "그 뒤로 인간에 대한걸 좀 더 안뒤에 다시 갔었지. 뭐 그때는 좀 재밌게 지내긴 했지."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었겠네요. 드래곤이 나타 났다고..." "뭐 아예 마을을 없앴으니 난리는 안 났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역사에는 기록이 되어 있더라고, 뭐라더라? 악룡 레드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써 있던가?" "그럴만도 했지, 너가 좀 난리쳤냐?" "어? 할아버지 마을은 찾으셨어요?" "그래, 꽤 멀리 떨어져 있더구나. 어떡할까? 마을로 갈까?" "지금 마을로 가봤자 잠자기는 글렀을것 같은데요?" "그럼 마을 근처로 공간이동을 한 뒤에 천천히 걸어가죠? 그럼 아침에 마을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면 되쟎아요." "그래, 그게 좋겠다. 어짜피 우리야 실컷 잤으니 더 잘수는 없겠지." 할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어딘가로 공간 이동을 시키셨다. "저쪽으로 몇시간만 가면 마을이 보일꺼야." "확실하죠?" "안 믿기면 하늘로 올라가 보면 알것 아냐?" "잘 됐네요, 이제 몇시간 있으면 해도 솟겠지요?" "그래, 해 솟을때쯤 마을에 도착할 거리로 이동한거야." 할아버지가 손위에 라이트를 켜셔서 공중에 띄웠다. "이쪽이야." 그리곤 먼저 말을 끌고 앞장을 서셨다. 엄마와 나는 그 뒤를 따랐다. "확실히 마을이 근처에 있는것 같군요. 이건 사람들이 다니면서 생긴 길인데요?" "그렇다니까."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우리는 해가 솟은 뒤 마을에 도착했고 그 마을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와이드 산맥이 끝나는 산 밑에 있는 마을이고 드래곤 숲과 가깝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이곳 지도를 사서 어떤 길로 가면 잘 갈지 의논하시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거지? 흐음, 드래곤 숲하고 그다지 멀진 않군." "수도를 거칠 필요 없이 이렇게 횡단하면 되겠네요." "그렇군, 그러는게 빠르겠군." "역시 말을 타고 가야 하겠지요?" "그렇지, 걸어갈 순 없지 않니?" "그럼 언제 출발하지요?" "글쎄.... 오늘은 좀 힘들지 않을까?" "그럼 내일 갈까요?" "그러지뭐, 바쁜것도 아니니까." 번 호 : 8991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14일 23:51 등록자 : LODEMP 조 회 : 77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9화 아린 찜 당하다. 안녕하세요? 정말 며칠동안 안 올렸지요? 기다리신 분들껜 정말 죄송죄송.... 이제 다시 시작합니다. ----------------------------------------------- 제 9화 아린 찜 당하다 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마을을 떠나 드래곤 숲을 향하여 2틀이나 달렸다. 그동 안에 마을은 커녕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고 단지 몬스터들의 공격만 몇번 받았다. 물론 우리에게 덤볐던 놈들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지만....(운 없는 놈덜) "다음 마을은 아직 멀었어요?" "어디보자.... 지도에 의하면 하루 더 달려야 나올 것 같은걸?" " 마을들이 무척 떨어져 있네요. 그래서 몬스터가 많은가?" 우리가 지금 야영하고 있는 이곳에도 한떼의 몬스터가 달려 들었다가 지금 모두 잠들어 버린 것 이다. "이놈들은 아마 드래곤 숲에서 쫏겨난 놈들일게다." "쫏겨나요?" "그래, 저번에도 말했지만, 드래곤 숲에 사는 그 웃긴 녀석은 숲에 조금만 해를 가해도 가만 안 두쟎아. 그러니 몬스터들을 그녀석이 가만 둘리 없지. 아마 그 숲에 들어가자 마자 당장 쫏아 냈을껄? 그래서 그 숲에는 몬스터가 하나도 없지만 그 근처 지역에는 이렇게 많지." "흠, 그럼 이녀석들은 다 그때 쫏겨난 몬스터들의 후손이겠군요?" "그렇게 되나?" "그럼 그 숲에는 동물도 없겠군요?" "아니, 왠일인지 동물은 그냥 두더라구." "그럼 동물은 무지 많겠네요?" "그렇지도 않아. 어느 간 큰놈이 드래곤 레어 근처에서 살겠냐? 단지 레어와 멀리 떨어진 곳에 좀 있을 뿐이야. 더욱이 초식 동물은 하나도 없을껄?" "풀을 먹어서요?" "그렇지, 그놈이 또 웃긴게 레어 근처에 꽃밭을 가꾸고 있거든. 그래서 초식 동물이 어쩌다 근 처에 나타나기만 해도 싸그리 없앴으니까." "꽃.밭 이요?" "그래, 꽃밭." "그 꽃들을 심어놓고 가꾸는 밭이요?" "그렇다니까. 그것도 꽤 큰 밭이야. 종류도 무지 많고, 저번에 보니까 별 희안한게 다 있더군. 그걸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그 꽃밭에다가 걸어놓은 보호 마법만도 몇개는 될껄? 왜 옛날에 내가 그놈이랑 싸우느라고 숲을 날려버린 적이 있다고 했쟎아?" "예." "그때 그 꽃밭에다가 브레스를 한방 먹였었거든. 근데 멀쩡 하더라고. 그 주위만 날아갔지." "말도마. 예전에 엄마가 인사하러 갔다가 꽃밭에 들어 갔었거든? 근데 그때 꽃 한송이 꺾었다고 당장에 벼락이 달려 들더라니까?" "대단하네요." "대단하기는 하지. 하지만 뭐 옛날에 그랬다는 거지.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더할껄요?" 정말 희안한 드래곤을 뵙게 생겼군, 꽃밭을 가꾸는 드래곤이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잠이 들었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출발했다. 그리고 저녁때 쯤에 우리는 성을 하나 볼 수 있었고, 한 밤중이 되어서야 성벽에 도착할 수 있 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서 그런지 성문이 닫혀 있었다. "어쩌죠?" "확 부숴 버릴까?" "아서라. 그러다가 이 성 날라갈라. 그냥 날아서 살짝 넘어가지?" "그냥 열어달라고 하면 안될까요?" "한밤중에 열어 달라고 하면 누가 열어 주겠냐?" "그런가?" "그냥 날아서 넘어가." "넘어가면요? 어디서 자요? 밤에는 성문을 닫는 곳인데 여관이 지금 열려 있을까요?" "그것도 그렇네? 그냥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나 들어갈까?" "그래야 할까봐요." "그럼 어디서 자지?" "그냥 저쪽 숲에서 자요. 뭐 하루 밤만 버티면 되는데 아무데서나 자자고요." "그래그래, 뭐 찾기도 귀찮은데 대충 아무데서나 자자구."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근처 숲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아침에 성문이 열릴때 성 안으로 들어 갔다. 근처 문을 연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식당 주인이 자꾸 우리쪽을 힐끗 힐끗 쳐다 보았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또 이쪽을 쳐다보던 주인이 나랑 눈이 마주쳤고 그러자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역시 어딜 가나 엄마는 눈에 뜨이나봐요." 어딜 가나 항상 엄마가 주위의 시선을 끌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난 주인이 엄마를 쳐다보고 있 는줄 알았다. 음식이 나오고 잔돈을 찾기 귀찮아 하신 할아버지가 금화 한잎을 건네 주자 주인의 눈이 둥그래 졌다. "오늘 하루 여기서 묶고 갈테니까 방이나 준비해. 제일 좋은 걸루, 그리고 말들좀 잘 돌봐주 고." 그러자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저기, 오늘 이곳에 묶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왜? 우린 어제 밤새도록 왔기 때문에 무척 피곤하단말야." "그럼 내일 일찍 출발하시겠네요?" "그럴 생각이야." "그럼 오늘 하루종일 방안에 계실 겁니까?" "도데체 왜그래?" 음식을 앞에 두고 먹지도 못하게 계속 말을 걸자 화가난 할아버지가 쏘아 부쳤다. "원래는 말하면 안되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주셨는데..." "왜그러냐니까?" "저 소년 말입니다." "저요?" "예, 오늘 아침 일찍 오셨을테니 손님들을 본 사람이 없겠지요?" "아마 그럴껄?" "그럼 오늘 하루 밖에 나가지 마시고 하루 종일 방에만 계세요. 식사는 제가 방으로 갖다 드리 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가세요." "왜?" "그건 묻지 마시고 제가 가르쳐드린 대로 하세요. 이건 다 손님들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 리고 지금 빨리 드시고 올라 가세요. 누가 오기전에 말입니다. 아니, 아니 손님은 방에 들어가 서 드세요. 제가 올려다 드리겠습니다." 주인은 매우 다급하게 말하고 내 몫의 음식에 손을 댔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미쳐 방으로 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병사로 보이는 사람 세명이 들어온 것이다. "이봐, 우리왔어." 주인은 음식을 들던 손길을 딱 멈추더니 다시 음식을 식탁위에 올려 놨다. 그리고 나를 굉장히 안됐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그리고 식당에 막 들어서던 병사들도 나를 바라보더니 의미 심장한 눈길을 자기들끼리 주고 받 았다. '뭐야 이거?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걸?' 번 호 : 9025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15일 23:33 등록자 : LODEMP 조 회 : 73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9화 아린 찜 당하다 (2) 엄마와 할아버지도 별로 기분좋아 보이시지 않았다. 병사들이 자꾸 내 쪽을 흘끔흘끔 거리자 결 국 화가 나신 엄마가 소리쳤다. "이봐, 할말 있으면 직접 와서 하란 말야, 괜히 뒤에서 수군대지 말고." 그러나 병사들은 아무 대꾸도 안 하더니 자신들 몫의 음식을 먹고 우르르 나가 버렸다. "뭐야 기분나쁘게...."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이봐 주인장 무슨 일이지?" "에휴, 운이 없으시군요. 빨리 저 소년을 숨겼으면 괜찮았을겄을...." "무슨 일이냐니까?" "이제 곧 저 소년을 데려가기 위해 병사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왜?" "그거야 마법사님께 바치기 위해서지요." "마법사한테 바쳐?" 주인장은 본격적으로 말하려는 것인지 우리 식탁으로 와서 의자에 앉았다. "손님들도 여기 오시면서 아셨겠지만 이 근처에는 몬스터들이 많습죠, 이놈들은 시도때도없이 공격을 해 오니 우리들로써는 큰 문제랍니다. 국가에 토벌군을 요청해도 이런 변두리 영지에 군 사들을 보내줄리 없고 우리들끼리 싸우자니 너무 힘들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5년 전쯤인가? 지금 마법사님이 나타나셨지요. 그때 몬스터들이 공격을 해오는 중이라서 성문 을 열수 없었어요. 우리는 사람 하나 죽는구나 생각을 했는데..." "했는데?" "아 글쎄 단신으로 그 많은 몬스터들을 물리쳤지 뭡니까? 그때 굉장했어요, 불꽃이 일지 않나 얼음이 휭휭 날아다니질 않나 번개가 번쩍번쩍 하지 않나." "꽤 하는 놈인가보군." "대단했지요. 그래서 우리 영주님이 그 분을 성으로 모셔다가 여기 머물게 했지요. 덕분에 몬스 터들이 쳐들어와도 마법사님이 해결을 해 주셨으니 우리로써야 고마운 일인데..." "그런데?" "마법사님께는 안좋은 취미가 하나 있다는게 문제지요." "무슨 취미인데?" "그러니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그러니까 여기 이 손님만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애인으로 삼으 시는거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면 내치고, 또 딴 소년을 데려다가 애인으로 삼고 또 얼마뒤에 내 치고.... 뭐 그런 취미가 있으시지요." "영계 취향이구만?"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그럴때마다 마법사님께 소년을 한명씩 바쳐 왔지요. 마법 사님이야 하등 아쉬울게 없지만 우리야 어디 그렇습니까? 마법사님이 여길 떠나시면 우린 끝장 일지도 모르는데...." "그렇군. 근데 그게 우리애랑 무슨 상관이야?" "그게 그러니까, 아무리 성주민을 위한다곤 하지만 누가 마법사에게 자기 아들을 바치고 싶어하 겠습니까?" "아니 왜? 어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애인을 삼는건데. 호위호식할것 아니야?" "물론 호위호식을하지요. 하지만 마법사님은 남,자란 말입니다." "남자?" "여자가 아니고?" "그러니 누가 자기 아들을 바치고 싶어 하겠습니까? 특히 마법사님께 바쳐졌다가 돌아온 아이들 중에는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된 아이들도 있으니 도데체 뭔 짓을 하시는 건지..." "흠 그랬군..." "그래도 어쩝니까? 어쩔수 없이 성주님이 강제로 애들을 뺏아서 바쳤지요. 하지만 것도 얼굴 이 반반해야 받아 주시더라구요. 그러니 얼굴이 좀 못난 애들은 무사했지만...." "그럼 뭐 된거쟎아? 그리고 얼마에 한번씩인데?" "그거야 애가 무사하면 몇년에 한번씩이지만, 애가 맛이 가면(?) 그날 당장에 내쳐지고 곧바로 딴 애들을 바쳐야 하는데요?" "그럼 도데체 몇명이 바쳐졌는데?" "50명 되려나?" "1년에 10명 꼴이군." "그렇지요. 우리 성이 크면 몰라도 인구가 기껏 500명이 좀 넘는데 여기서 잘 생긴 소년들이 얼 마나 있겠습니까? 더욱이 딴 마을은 멀리 떨어져 있고..." "그러니까 우리가 안 좋을때 여길 왔다는 말이군?" "한마디로 하면 그렇지요." "그자식 변태쟎아?" "그래도 우리에겐 고마운 분이지요. 이런 외각 성지에 계셔준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얼굴 한번 보고 싶군 어떻게 생겼는지...." "평범하세요. 지금 한 40대 후반 아님 50대 초반정도?" "원래 희안한 놈들이 평범하게 생겼어." 그때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쿠, 오나 봅니다." "어떤 놈인지 구경이나 하지?" "그놈도 운이 정말 없군요. 하필 걸린게 우리니..." "버릇을 확 고쳐줘야 해요." 우리도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 섰을때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까 그 병사들과 그들의 대장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이 아인가?" "예, 그렇습니다." "흠, 잘~~ 생겼구만, 마법사님께서 기뻐 하시겠어. 너에겐 미안하지만 우리와 함께 가줘야 겠 다." "그런가? 마침 잘 됐군, 우리도 그 마법사란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하던 참이었거든?" "경거망동 하지 않는게 좋을꺼다. 마법사님은 예의 없이 구는 자를 용서치 않으신다." "뭐 그거야 우리 사정이고, 자네는 빨리 앞장이나 서라구."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인이 옆에서 불안한듯 작게 물어왔다. "가보면 알겠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심드렁하게 대꾸 하셨다. 우리는 병사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벌써 내 얘기가 퍼졌는지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성으로 향하자 뒤에서 쭐레쭐레 따라왔다. "구경꾼들이 많군..." "어지간히 할일도 없는 사람들이군..." "아무래도 마법사님이 오신 뒤론 별 일이 없었거든요."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주인이 친절히 설명해 줬다. "그래서 자네도 따라오는건가?" "하하, 저야 손님들이 걱정이 되니까..." "그나저나 그자식을 어쩔까요? 그냥 끝장을 내줄까요?" "죽일 필요까진 있나? 더욱이 여기서 필요한 사람인데..." "그럼 그냥 혼만 내줄까요?" "우선 두고 보자구,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진 않아." 번 호 : 9052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16일 22:25 등록자 : LODEMP 조 회 : 80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9화 아린 찜 당하다.(3) 우리가 성에 들어오기 전에 어렴풋이 보았던 성에 도착했다. 성 앞에서는 성주로 보이는 고급 옷을 입은 사람과 그 옆에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호, 정말 잘 생긴 소년이군요. 이번엔 꽤 맘에 드시겠습니다." "정말 그렇군, 뛰어난 외모를 가진 소년인데..."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은 나를 물건 쳐다보듯 아래 위로 훝어 보더니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치면 닿는 거리에 이르자 그는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얼굴 에 닿기도 전에 엄마가 나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나섰다. "오호라. 네놈이 바로 내 아들을 보고 싶어한다는 마법사로군?" 그러자 그 마법사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할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흥, 네놈도 보아하니 마법사인 게로군? 그럼 저 소년이 네 아들이냐?" "보면 모르냐? 내 얼굴을 쏙 빼닮았쟎아?" 그때 엄마의 얼굴에 힘줄이 솟는것은 왜일까? "그래서 내게서 아들을 지키시겠다?" '불쌍한 짜슥, 넌 이제 죽었어, 마법사면서 드래곤에게 덤비다니.... 쯧쯧 안됐군....' "그렇다면?" 그 마법사는 픽 웃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을 보니 너도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인 것 같다만 보아하니 마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데? 왠만하면 그냥 가지 그러시나? 여비는 섭섭지 않게 줄테니.." '쯧쯧 이놈아, 울 할아버지는 마력을 숨기고 있을 뿐이라구. 넌 기껏해야 5클래스 마스터 인것 같은데....' 인간으로 치면 5클래스 마스터는 제법 높은 실력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에 비하면야 뭐..... "흠.... 보아하니 5 클래스의 마스터인 것 같군, 변두리에 죽치고 있는 놈 치고는 제법 실력이 있다만 그 실력 갖고 큰소리 치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지." 뭐 인간 마법사이면 그정도면 큰 소리 칠만 하지만... 마법사는 자신의 마법 마스터를 눈치 채이자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마력을 숨기고 있을 거란 생 각을 한 것 같았다. 얼굴빛이 약간 달라지며 목소리도 정중해졌다. "실례지만 몇 클래스까지 마스터 하셨는지?" "나? 나야 뭐 10 클래스까지 간단히 마스터 했지."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마법사는 5클래스이고 울 할아버지는 10 클래스라니 상식적으로 울 할아버지가 더 쎄다는 거였으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마법사는 얼 굴이 다시 풀리면서 말투도 다시 무례해 졌다. "푸하하, 웃기는구나. 네가 아무리 최고의 마법사라고 해도 9 클래스까지는 무리이다. 그런데 10클래스라니? 이제보니 클래스도 모르는 멍청한 사기꾼이구나. 마법사로 자칭 하려면 클래스정 돈 알아야지." 이봐 인간은 잘해봐야 9클래스지만, 드래곤은 기본이 9클래스라구. 더욱이 울 할아버지는 고룡 이시란 말야. 마법사는 다시 내게로 성큼 다가와 손을 뻗쳤다. "이리 오너라. 정말 아름답게 생겼구나." 그러나 그는 그 전에 엄마의 화이어볼 한방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유있게 바리어를 쳐서 막아냈다. "3클래스? 제법 하는구나? 네가 진짜 마법사냐?" "이자식 어떡할까요?" "나둬봐, 아린보고 처리하라고 그래." "아린보고 처리 하다뇨?" "이젠 아린도 다 컸어. 네가 감싸고 돌 나이가 아냐. 저런 놈 쯤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어야 지." "그래도 성룡식을 치른지 얼마나 됐다고..." "여차하면 우리가 나서면 돼, 아린아 저놈은 너가 맡아라."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시곤 엄마를 끌고 뒤로 물러 서셨다. "첨에는 아버지가 해결 할 것처럼 말하시더니..." "나도 첨엔 내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젠 아린도 나서서 해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더라고. 뭐 기회가 있고 우리도 있으니까 한번 알아서 해보라 그래." "클클클, 이제 내 실력을 아셨나보군? 그러게 첨 부터 뒤로 물러설 것이지. 내 여비는 섭섭치 않게 주마." 그는 이제 내게로 몸을 돌려서 다가왔다. 그러자 할아버지와 엄마는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 유심 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나보고 어쩌란 말야?' "에고, 보면 볼수록 정말 예쁘게 생겼군." "저기요?" "그래그래" "전 여잔데요?" ............ "그래서?" "남자만 원하신다고 그러던데?" "예쁘면 안가려." "그래요?" "그래." "글면 우리 언니는여?" 엄마 째려보지 말아요, "이쁘긴 한데, 너무 드세보여, 나이두 많고." 엄마의 얼굴에 힘줄이 하나 더 돋았다. "그럼 제가 맘에 드세요?" "응 무지무지." "전 아저씨가 싫은데요?" .......... "괜찮아. 지내보면 나도 괜찮은 남자야." "라이트닝!" 나는 가볍게 주문을 외웠고 그러자 하늘에서 직격으로 그 마법사를 향해 번개가 내리쳐 졌다. "오호, 너도 마법을 할 줄 아냐?" 그는 내 번개를 가볍게 막으면서 말했다. "아린아, 저 녀석은 5클래스의 마스터라고, 겨우 2클래스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우선은 공격 거리를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해야지요. 이건 그냥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살짝 먹 인거라구요.'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재빨리 물러나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마법사 주위로 전기가 다 방충 되고 마법사가 보이자 재빨리 라이트닝 볼트를 날렸다. 이번에는 좀 힘겨운듯(당연하지 5클래스의 마력으로 날렸는데) 마법사가 소리쳤다. "꼬마라고 얕봤는데 제법이구나. 이제부턴 안 봐주마." 에휴 악당들의 전형적인 대사로군. 이제 왕창 깨지겠지? "그냥 확 보내버리지 그랬어?" 엄마가 뒤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사람 죽이는건 싫은데....." 그때 앞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날라왔다. 나는 재빨리 실드를 형성해 나를 보호했다. "윈드 플로우!" 그리고 강한 바람을 일으켜 놈의 시야를 가렸다. (날라갈 것 같진 않으니...) 그리고 강력하게 "슬리핑!" 잠재워 버렸다. 원래 슬리핑은 2클래스의 마법이지만 마법사를 정신없게 한데다 내가 마력을 왕창 집중 시켰으 니 그가 제대로 먹어버린 것이다. "에휴, 아마 며칠은 자겠지?" "그냥 보내버리라리까!" "하지만 죽이는건 싫단 말야." "잘했어. 그정도면 잘 한거지. 쓸데없는 살상도 피하고." "그래도 몇대는 패줬어야 했는데...." "됐어됐어. 그나저나 이제 여기 있기는 그러니까 그냥 여길 떠나자." "그냥요?" "그래, 어짜피 여기 있으면 귀찮아질꺼니까...." 그렇군 저들의 마법사를 쓰러트렸으니 우리에게 보복을 한다던가.... "위대한 마법사님!" 나는 순간 휘청했다. 아~ 인간의 심리란 이런 것인가? "이곳에 그냥 정착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뭐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영주가 울 할아버지께 간절히 청원했지만 할아버지는 콧방귀도 안 뀌셨다. "저녀석 내일이나 모래쯤 일어날꺼니 그때나 대비해. 아린아 가자." "어라? 음식은 좀 챙겨서 가지고 가지...." "음 것도 그렇군. 이봐 주인장?" "예, 손님!" "우리 먹을것좀 싸줘. 한 10인분 정도면 될꺼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우린 그동안 눈좀 붙일까? 그다음에 출발하지?" "그러죠 뭐." 번 호 : 9163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18일 22:28 등록자 : LODEMP 조 회 : 668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0화 드래곤 숲 제 10화 드래곤 숲 "여기가 드래곤의 숲이에요?" 우리는 한시간 전쯤 이 숲에 도착해 있었다. 무지 굵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었고 높이 솟아 서 하늘을 가려 숲 안은 어두컴컴 한데다 새소리는 커녕 심지어 벌레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무지 조용하네요. 너무 조용해서 으시시 해요." "그게 여기는 벌레도 거의 없거든." "벌레도요?" "그래, 보통 벌레들이 나무를 파먹고 살지 않니? 그러니 벌레도 다 없애 버렸지." "그래서 새들도 없는 거군요." "그렇지." "완전히 식물들의 천국이겠군요." "이건 방어막이라고 볼 수 있어. 그녀석이 정말 보호하고 있는건 가꾸고 있는 꽃밭이니까." "얼마나 더 가야 해요? 길도 없어서 걷는것도 너무 불편해요." 그렇다. 우리는 전혀 길이 없는 숲속을 헤치면서 걷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은 커녕 동물이나 벌레 하나 없이 오직 나무들과 풀들만 있던 숲인데 길이 있으면 그 게 더 이상한게 아닐까? 풀들이 거의 어깨까지 오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게 무지 힘들었다. 열받으신 엄마가 파이어 필드를 날려 버리겠다고 길길이 뛰셨지만 그러다가 이곳에 살고 있는 고룡 칸 그라하리를 건드 릴까봐 나와 할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말렸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너무너무너무 힘들다....' 한 시간 이상을 걸어 왔건만 아직도 우리가 들어온 숲의 입구와 그 밖의 초원이 보였다. 더불어 그곳에 놓아둔 말들이 평화롭게 쉬고 있는 모습까지... "도저히 못참겠어. 다 날려버리고 말꺼야." "그러지 말고 우리가 날라가지?" "아! 왜 그생각을 못했지? 날라가면 간단한 것을." "그러게 말이다. 왜 걸어갈 생각만 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싱겁게 웃음을 흘리며 하늘로 날아 올랐다. 뭐 나무들 때문에 숲을 벗어나는게 좀 어려 웠지만 (그냥 올라가면 쉽겠지만 나무들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올라 가려니 너무 힘들었다.) 올 라가니까 너무 행복했다. 탁 트여진 넓은 하늘과 그 밑으로 펼쳐진 짙푸른 숲이 장관이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 는 숲 중앙을 향하여 날라갔다. ...... "꽤 멀군요." "예전에 왔을 때보다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런것 같네요." 한시간이나 날라 왔어도 중앙이 보이지 않는 거였다. "이쯤 아니었나?" "하지만 꽃밭이 안 보이는데....." "귀찮군 그냥 확 날려 버려요." "그러면 더 귀찮아져." "언제 그걸 찾고 있어요. 파이어볼 한방이면 알아서 우릴 찾아 올텐데...." "그럼 뒷 감당은 누가하고?" "어머? 뭘 그런걸 다 걱정하고 있어요? 여기 그보다 더 나이 많고 현명하신 고.룡이 계시는 데..." "난 몰라. 그럴려면 너가 뒷감당을 해." "어머나 뒤로 빼시긴, 설마 칸 그라하리님이 무서우신건?" "넌 *이 무서워서 피하냐? 그녀석 딴건 다 넘어가도 숲을 망가트린데 대한 보복은 끈질기다구." "그래도 성룡이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흥, 놈은 그런거 안따져. 그럼 너가 예전에 여기 인사하러 왔을때 꽃 하나 꺽었다고 길길이 뛴 건 뭐냐?" "아, 그렇군." "안되겠다. 내가 위로 올라가서 알아봐야 겠어." 할아버지는 까마득한 하늘로 올라가셨다. 할아버지가 작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때 쯤 엄마가 투덜투덜 거리셨다. "그래도 레드 드래곤이 셋이나 되는데 늙은 그린 드래곤쯤 하나 못 상대 할라구....." "좋은게 좋은거쟎아요. 그래도 내가 인사를 드리러 온건데..."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찾기 힘든 곳에 사는거면 그정도는 감당 해야지. 누가 이런곳에 살래?" "그래도....." "아 정말, 성질 같아선 브레스를 확 날려 버릴텐데....." "아, 할아버지가 내려 오세요." "그래 뭘 좀 찾았아어요?" "그게 이상하게 숲만 보이는걸? 물론 숲의 끝이 보이진 않았자만, 아무리 숲이 넓다고 해도 숲 중앙까지 안 보일까." "그럼 어떻게 된거지? 꽃밭은 포기하고 나무심기로 취미를 바꾸셨나?" "글쎄다, 뭐 오랫동안 연락을 안해서 알수가 있어야지?" "정말 파이어 볼을 날려버려?" "흠, 그게 좋을지도..." 윽, 할아버지도 그쪽으로 마음이 기우실 줄이야. 하지만 뭐 할아버지까지 못 찾으면 별 수가 없 지 않아? "작게해요, 작게" "걱정마, 1클래스로 할꺼니까." "잘 될까요?" "걱정 말래두, 여긴 레드 드래곤이 셋이나 있다고." 엄마는 손에 배구공만한 불덩이를 만들어 내시곤 밑으로 던져 버리셨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나 는 긴장된 눈으로 숲으로 점점 떨어지고 있는 불덩어리를 바라 보았다. 잠시후 불덩어리는 숲 속으로 사라졌고, 우리는 곧 이어 폭음과 불꽃이 생길 거라고 기대 했다. 그런데..... "뭐야 이거, 아무일도 없쟎아?" "어떻게 된거지? 너무 마력을 낮게 했나?" "한 클래스만 더 올려봐." 엄마는 이제 농구공 보다 조금 더 큰 불덩어리를 만들어서 숲으로 던지셨다. 그러나 불덩어리가 떨어진 숲은 그저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된거지?" "글쎄요. 뭐 이런 황당한 숲이 다 있어?" "저기 혹시 숲 전체에 보호 마법을 건게 아닐까요?" "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숲을 공격하려 한다는건 알텐데..." "그럼 혹시 동면하고 계시는건?" "아냐. 전에 로드가 잘 있다고 그랬쟎아." "그럼 어쩌죠?" "내려가보자. 정 안되면 내려가서 한방 날리는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칸 시스파슈타인님께서 오셨다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번 호 : 9209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19일 23:08 등록자 : LODEMP 조 회 : 63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0화 드래곤 숲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칸 시스파슈타인님께서 오셨다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새 왔을까? 기척도 못 느꼈는데.... 우리 뒤에는 푸른 빛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아주 잘~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청년의 귀는 길고 뾰족했다. '얼라? 귀가 특이하게 생겼네?' "여전히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군.....칸 그라하리.." "당신도 여전히 그 늙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시는 군요, 칸 시스파슈타인님." 왠지 둘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것은 내 착각일까? '착각이었어, 찬 바람이 아니라 불꽃이 튀는군....' "흥, 아직도 그때일을 가지고 그렇게 뾰루퉁 해있나?" "아주 쉽게 그때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군요. 제가 사랑하는 숲을 반 이상이나 날려 버리셨으면 서...." "너가 먼저 나한테 대들었쟎아." "숲의 일부를 파괴하고 슬쩍 넘어가려고 한게 누군데요?" "겨우 나무 몇그루 태웠다고 너무하쟎아?" "겨우 나무 몇그루라니요? 제가 얼마나 소중히 아끼고 가꾸는 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몰랐어." "........" "그리고 나중에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건 사과가 아니었어요. 인사치례였지."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내가 미안하다고 했으면 미안해 하는 줄 알것이지." "보물 조금 잃어 버린거 가지고 쪼잔하게 끝까지 도둑을 추격해서 남의 숲까지 망친 드래곤의 사과 치고는 너무 성의 없었다구요." "쪼잔하기는 누가 쪼잔하다는 거야? 너야 말로 너무 째째하게 굴것 없쟎아?" "째째하다니요? 여기 있는 나무들은 제가 세상을 돌아 다니며 세계에서 몇 안되는 희귀종을 겨 우겨우 구해서 이만큼 키워 놓은거라구요." "나무를 가꾸는 드래곤이 어디있냐?" "여기 있잖아요." "넌 별종이야." '왠지 싸움이 끝날것 같지 않아.....' "흥, 칸 시스파슈타인님도 달라지신건 없쟎아요. 오자마자 제 숲에 불덩어리를 날리기나 하시 고..." "그거야 네 레어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랬지." "그냥 절 부르시면 됐쟎습니까?" "아! 그 방법도 있었군?" "........" "어째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쯤에 도착하리라고 생각 하고 있었거든요." "흠, 로드가 연락을 하던가?" "예, 칸 시스파슈타인님께서 오신다고 말하더군요." "그랬군. 연락 할꺼면 우리한테도 연락 하겠다고 말할 것이지." "나중에 생각이 나셨답니다." "하긴 정신이 없어 보였으니까..." "어째든 아래로 내려 가지요." 지금까지 하늘 위에서 할아버지와 이 숲의 주인인 칸 그라하리가 계속 언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 에 엄마와 난 끼어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우리끼리 내려가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에서 하늘 에 떠 있었다. 그런 엄마와 나를 흘끗 본 칸 그라하리가 앞장서서 숲으로 내려갔다. 우리도 곧 그의 뒤를 따라 숲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위에서는 분명히 숲으로 보였었는데 땅에 가까워지자 울창하던 나무들은 사라지고 꽃밭 이 나타났다. 온갓 색색의 꽃들이 종류도 다양하게 엄청나게 넓은 땅위에 피어 있었다. "어라? 나무들이 있는게 아니었쟎아? 환영이었나?" "예, 가끔 이 숲에 들어오는 멍청한 인간들 때문에 환영 마법을 걸어 놨습니다." "그랬군, 어쩐지 안보이더라. 그리고 보호 마법도 걸어 놨겠지? 아까 마법이 전혀 먹히지 않은 거 보니까." "예, 침입자가 곱게 들어오지는 않으니까요. 이쪽입니다. 아 꽃은 절.대.로 건들지 마십시오." "알았어. 안건드려." 칸 그라하리의 안내로 우리는 그의 레어로 갈 수 있었다. 여느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그의 레어 도 큰 동굴이었다. "이런거 보면 꼭 보통 드래곤 같단 말이야." "전 보통 드래곤입니다." "누가 너보고 보통 드래곤이라고 생각 하겠냐?" "칸 시스파슈타인님 이외의 모든 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겠지." 우리는 곧 동굴 안쪽에 있는 넓은 방에 도착했고 거기서 따끈한 차와 열매를 대접 받았다, "역시 나무를 가꾸는 드래곤 답군." "차 향이 무척 좋은데요?" 이 썰렁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용기를 내어서 한마디 했다. 그러자 그라하리가 나를 쳐다 보았 다. "이 아이가 성룡식을 치른 아이입니까?" "그래 칼 세르니안의 딸이야." "놀랍군요 그 칼 세르니안이 아이를 낳다니...." "왠지 말투에 묘한 뜻이 담긴것 같습니다만?" 엄마가 갑자기 나섰다. "그냥 말 그대로의 뜻일세." 엄마의 얼굴에 힘줄이 돋았지만 모두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왠지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기회가 없네.... 그냥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자신의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째든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옷 엄마가 인사를 했다. "그렇군." 이때다, 나도 인사 해야지. "안녕하세요? 첨 뵙겠습니다. 칼 아시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그렇게 차가운 표정으로 그러면 꼭 아닌것 같단 말야... "엄마의 성격을 물려 받지는 않은것 같군요." "맞아. 그건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어."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 "말 그대로의 뜻이다." "그건 저 분이 벌써 써먹은 대꾸라구요." "아무렴 어떠냐?" 아유 식은땀나, 인사하러 다니는게 원래 이런거야? 아님 이곳만 이렇게 특별한거야? "저 꽃밭좀 구경해도 될까요?" "꽃밭? 그런 쓸모도 없는건 뭐하러 봐?" "칸 시스파슈타인님께는 쓸모가 없어도 제겐 아주 귀중한 겁니다." "아 그래그래 알았어." "꽃밭이 무척 넓고 종류도 다양해 보이던데요?" "호? 혹시 꽃의 종류를 알고 있느냐?" "그런걸 누가 알고 있어?" "전 알고 있습니다." "넌 변종이니까 그렇지." ".....시비걸러 오셨습니까?" "아니." "조심스럽게 다닐께요, 잠깐 구경하는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그럼 갔다....아니,아니다. 내가 안내해주마." "그래그래, 그녀석이랑 갔다 오너라. 난 한숨 자련다." "엄마두~~." 이렇게 엄마와 할아버지는 주무시고 나는 칸 그라하리 뒤를 따라 꽃밭 구경을 나갔다. 번 호 : 9246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20일 23:15 등록자 : LODEMP 조 회 : 59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0화 드래곤 숲 (3) "저기요..." "뭐지?" "할아버지는 칸 그라하리님께 아무 감정 없으신거예요." ......... '얼라? 왜 빤히 쳐다보지?' "아직 어리군..." "예?" "아직 어리단 말야." "아 뭐, 성룡식을 치른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렇군...." 뭘 말하고 싶은거야? "우리 드래곤은 남을 위해 변명해주지 않는다." "예?" "드래곤은 홀로 살아가는 생물, 아무리 네 할아버지라고 해도 그를 위해 변명해 주는건 그에게 실례밖에 안돼. 옳던 그르던 그의 모든 행동은 그가 책임지는 거다. 그게 바로 드래곤이야." "아, 예." "남을 위해 변명을 해주는건 인간이지." 윽, 순간 뜨끔했다. "너도 이제 성룡이 되었으니 네 행동은 네가 스스로 책임 질줄 알아야 하겠지. 그리고 할아버지 를 위해 변명을 한건 어린 드래곤의 실수로 알겠다." "예." '하아, 이게 바로 고룡의 가르침인가?' "어라? 많이 본 꽃인데?" "그건 도라지 꽃이다. 야생화를 옮겨 심은거지." "아 그렇군요." "이쪽에는 야생화들이 있지. 그리고 저쪽에는 각 종류대로 개량화가 있고..." "개량화요?" "그래, 인간세상에서 구해 온거지. 인간들은 정말 잼있어. 별걸 다 할려구 하니까." "그럼 가끔 인간 세상으로 나가시나 보죠?" "그래, 나갔다 온지 벌써 500년이나 되었군. 지금쯤 또 딴 개량 꽃들이 나와 있겠지." "그럼 개량된 꽃들을 구하러 나가시는 거예요?" "딴거는 흥미 없어." "종류가 무척 많을 것 같아요." "뭐 그런 셈이지." "이런걸 어떻게 다 가꾸시나요?"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많은 꽃들을 다 살피지는 못해, 그래서 난 정령들의 도움을 받지." "아하." "그러고 보니 성룡이 된 축하 선물을 해야 겠군, 뭐가 좋을지..." '설마 꽃씨를 준다는건 아니겠지?' "성룡이 되었으니 여행을 다니려 하겠군?" "예. 세계를 여행해 볼 생각이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라하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내 선물을 생각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꽃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꽃들도 무지 많고, 꽃향기도 무척 진했다. 너무 진해서 머리가 어질어질 한 것 같았다. "어지러운가?" "예?" "표정을 보니 머리가 아픈것 같군." "아, 꽃 향기가 너무 진하네요." "하긴, 여기 처음 들어오면 많은 꽃들과 진한 향기에 질려 버리더군. 이제 그만 돌아갈까?" "예." 그의 뒤를 따라 동굴로 돌아오니 할아버지와 엄마는 자고 있었다. "엄마 나왔어." "응? 아함~, 그래 잘 갔다 왔냐?" "아? 아린 왔니? 그래 어떻든?" "꽃이 무지 많고 향기도 무척 진하고 그렇던데요?" "정신 없지?" "하하 뭐...." "저녁을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저녁은 무슨, 또 풀만 내놓을텐데..." "그렇군요. 그럼 지금 선물을 주도록 하죠." "뭘 주게?" "제가 지금까지 모은 '꽃들의 종류 목록책' 입니다." "아니 그런걸 뭐하러 줘?" "왜그러 십니까? 저에겐 아주 귀중한 책인데?" "너나 소중히 간직해." "너무하시는 군요. 제 성의를 무시하다니..." "아니, 고룡씩이나 됐으면서 애한테 뭐가 필요한지 몰라?" "세상을 나가보면 제 책에 없는 꽃은 없을테니 유용하게 쓰이지 않겠습니까?" "엄마, 왠지 칸 그라하리님께서 할아버지를 놀리시는 것 같은데요?" "냅둬, 만나면 원래 저러니까." 흠.... 그러고보니 사이가 꽤 좋으시구나....하지만 할아버지께 말씀 드렸다간 펄쩍 뛰시겠지? 칸 그라하리는 할아버지를 실컷 놀리고는 어떤 상자를 가져 왔다. 납작한게 꽤 컸다. 한 17인치 컴퓨터 모니터 만하달까? "이건 내가 드워프에게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거야." 상자의 뚜껑을 열자 거기에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꽃 10 송이가 들어 있었다. 각각 종류가 다른 꽃들이었는데 정말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말 아름답군요?" "그렇지? 거기다 각각의 꽃 안에는 내가 직접 만든 향수를 넣어 놨지. 맡아봐, 향이 나지?" "예, 세상에 보석 꽃이라니...." "이건 내 꽃밭에 없는 꽃들이지..." "아니, 네 꽃밭에 없는 꽃들도 있냐?" "오래 보다보면 싫증이 나니까요. 그래서 싫증 난 꽃들을 없애는 대신 이렇게 보석을로 가공한 것을 갖고 있지요." "취미 한번 별나다니까." "이건 드래곤들도 탐낼만한 보석인데요?" "이건 만들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어. 한 1000년 됐나? 그때부터 없애버린 꽃들만 한 20여종이 되는군...." "그럼 이런게 20개가 있다는 소리군?" "탐나세요?" "흥, 그런거 말고도 나도 가진거 많아." "하지만 이건 없겠지요?" "너같은 애나 그런걸 만들어서 같고 있는거지." "뭐 그렇기도 하겠군요. 어째든 예.의.바.른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왜 거기서 예의가 나오는 거야?" "아니 칭찬한건데 왜그러십니까?" "됐어됐어, 어째든 아린아 받았으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제 그만 가자꾸나." "예, 감사합니다. 칸 그라하리님." "잘가거라. 이제 성룡이 된 아이여. 성룡이 된걸 진심으로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잘있게나, 나중에 다시 만나길...." "안 바라셔도 됩니다. 칸 시스파슈타인님."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또 뵙죠." "그러지. 칼 세르니안." 이렇게 해서 우리는 드래곤의 숲을 무사히 방문 하였다. "뭐, 이번엔 별 사고 없이 갔다 왔군." "그러네요. 근데 그분도 여전 하세요." "그 성격이 어디 가겠어?" "하긴...." "어째든 이젠 바다로 가는 건가?" "그렇군요, 아르카스해로 가야죠." "배를 탈 수는 없겠지? 바다 한 가운데서 내릴수는 없쟎아?" "그냥 공간 이동을 해야 겠지요. 바다로 가기만 하면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지금 갈까?" "저녁은 다 먹고 가요." "잠은 어디서 자고요?" "뭐 정 잘데 없으면 아이비스크 녀석한테 하루 밤 재워달라고 하든지..." "나쁠건 없네요. 근데 난 한번도 안 가봤는데..." "드래곤 레어가 거기서 거기지뭐, 별다를게 있겠어?" "하긴...." "그럼 우선 배부터 채워볼까?" 번 호 : 9326 / 9359 등록일 : 2000년 06월 22일 23:16 등록자 : LODEMP 조 회 : 34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1화 아르카스해의 블루 드래곤 제 11화 아르카스해의 블루 드래곤 저녁을 먹고 할아버지는 곧바로 공간이동을 하려고 했다. "잠깐만요 할아버지, 이 말들은 어떻게 하지요?" "말? 아 그러고 보니 말들 처리를 생각 못했군." "그냥 여기다 놓고 가죠 뭐, 알아서 살아가겠지." "그래, 그게 좋겠다. 어쩌면 나중에 다시 사람들한테 잡힐지도 모르니까..." "이곳으로 오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쟎아요." "뭐, 이녀석들이 알아서 가겠지. 안장도 그냥 두자구." "그런데 어디로 이동하시게요?" "그냥 아르카스해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나도 그녀석 레어에는 가보적이 없어서 잘 몰라. 단지 아르카스해에 살고 있다는것 밖에는...." "잘 찾아갈수 있을까?" "괜찮아, 괜찮아. 레어 근처에 가면 그녀석이 우리 온 것을 알아챌꺼야. 더욱이 로드가 연락했 을지도 모르니...."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요." "그럼 이동하자고, 짐들은 다 챙겼지? 이동!"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우리 일행은 빛에 싸였고 정신을 차리자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두 컴컴한 공 간에 서 있었다. "우아악~" 나는 멀뚱이 서 있다가 밑으로 추락했다. "조심해야지, 바다 위로 이동한다고 했으니 플라이 주문을 외우고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엄마가 내 뒷덜미를 움켜 잡으며 말했다. 곧 할아버지가 불을 만들어 내시자 엄마와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단지 우리 밑의 물이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무지 어둡네요. 이제 어떻하지요?" "바다속을 뒤져 봐야지. 어짜피 그녀석 영역이니까 조금만 돌아 다니면 그녀석이 우리를 느낄수 있을꺼야." 할아버지가 손을 한번 휘젓자 우리 일행을 중심으로 붉으스름한 빛을 내는 둥근 막이 생겼고 곧 그 구는 바다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구 안으로는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아서 우리는 조금도 젖지 않았다. "얼라? 할아버지 이거 어떻게 만든 거예요?" "마력을 주위에 집중시켜서 막을 형성한 거란다." "흠, 마법책에는 안 나왔는데..." "그건 인간들이 사용하는 거니까 그렇지. 인간이 어떻게 우리 드래곤의 마법 능력을 따라 오겠 는냐?" "아..." "너도 너무 그 마법주문에 의존하지 말거라. 이제 성룡이 되었으니까 마나를 자유롭게 다룰수 있어야지." "하하, 생각도 안해 봤어요." "생각할 필요도 없는거야. 그냥 자연스럽게 느끼고 몸을 맞기는거지." "너무 어려워..." "뭐, 급하게 할 건 없겠지, 단지 넌 너무 주문에만 의존하려 하는게 문제란 거야. 주문에 의존 하지 말고 마나를 느끼고 그걸 그냥 사용할 수 있어야 해. 그게 바로 드래곤의 마법이야." "예." "호, 이게 바다속의 풍경이로군?" 점차 밑으로 내려가자 바닷속의 풍경이 어슴프레하게 보였다. 나야 뭐 전에 TV에서 자주 보던 풍경들이라 별로 놀라워 하지는 않았지만 엄마와 할아버지는 감탄에 감탄을 연발 하셨다. "어? 할아버지도 바다속은 첨이세요?" "그래, 바닷가에 간적은 있었지만 직접 이렇게 바다속 깊이 들어온 적은 처음이구나." "왜 칸 아이비스크님께서 여기서 사시는지 알것 같군요. 꽤 멋진데요?" "그래, 그렇군, 마침 잘됐어.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녀석 찾는데 이런 볼거리라도 있어야지." "이럴줄 알았으면 저녁 먹기 전에 올걸 그랬어요. 천천히 저녁이나 먹으면서 구경하게..." "정말, 그럴걸....그보다 낮에 올걸 그랬나? 밤이라서 잘 안보이는군." "아, 제가 불을 켤께요." 엄마는 당장에 농구공 만한 불을 만들어서 우리들의 앞을 비추었다. 그러자 잠들어 있던 고기들 이 놀라서 여기 저기로 흩어져 버렸다. "호, 바다속에도 여러가지가 있군..... 저것봐, 언덕들 사이로 골짜기가 있는것 같쟎아?" "들어가 봐요." "그러다 너무 깊게 들어가면 어떻게해요?" "괜찮아, 괜찮아. 뭐 별일 있겠어?" '너무 깊이 들어가면 수압이 강해진다구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번도 바다에 온 적이 없는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점점 깊이 들어가자 내심 불안해졌다. '뭐 드래곤이니까 별일 없겠지...' 라는 생각으로 불안을 누르고 있었지만.... 우리는 골짜기로 한참 내려왔다. 나는 점점 불안해지고 초조해져서 손가락을 마구 주무르고 있 었다. 그때... "흠, 뭐 깊숙히 들어 오니까 별거 없구만...." "어둡기만 하네요. 그만 올라가요. 차라리 위쪽이 볼게 더 많네요." '오,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인가?' 불안에 떨고 있던 나는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있을수가 없었다. 사실 깊이 내려가니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이어서 그런지 그리 아름다운 풍경이 나오지 않았다. 단지 어두운 색들의 해초와 바다의 아주 깊은 곳에 사는 듯 보이는 히안하게 생긴 물고기들이 간간이 보였을 뿐이었다. '그래도 대단하네, 드래곤이란. 여기 꽤 깊은 곳일텐데 전혀 압력이 느껴지지 않아.' "이제 어디로 가지요?" 올라오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 보였다. "가만있어봐, 저쪽에서 히미하게나마 마나가 느껴져." "마나가 느껴진다는 것은?" "혹시 드래곤이 있다는?" "가능성이 높지. 바다속에서 마나를 가지고 있는 생물이 있다는건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어째든 가보자구." 할아버지가 마나가 느껴진다는 방향으로 조심스레 다가갔을때였다. 저 멀리 앞쪽으로 왠 물체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게 보였다. 너무 멀어서 검은 점으로 보였지만 이쪽으로 다가오는건 분명했다. "느낌이 강렬해 지는군, 저게 마나를 방출하고 있는건가?" 우리도 그 물체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고 그 물체도 우리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다 보니 곧 그 물 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블루 드래곤...." 그건 엄마보다 더 커 보이는 블루 드래곤이었다. "흠,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가 블루 드래곤에게 가까이 갔을때였다. 그 블루 드래곤은 엄청난 위압감과 살기를 내뿜으 며 우리에게 살벌하게 물었다. "로드가 연락을 안했나봐요." "왠지 그런것 같군. 이거 귀찮게 됐는걸?" 할아버지는 작게 투덜투덜 거리시더니 우리를 바닷물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는 막을 벗어 나셨 다. 그리곤 할아버지의 몸에서 강렬한 붉은 빛이 나오면서 할아버지의 몸이 점점 커졌다. "와우~" 할아버지의 드래곤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나는 감탄했다. 할아버지의 몸은 블루 드래곤 보다 더 컸던 것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몸에서 뻗어 나오는 위압감은 블루 드래곤을 훨씬 더 능가하고 있었다. "나는 칸 시스파슈타인, 이곳에 살고 있는 칸 아이비스크를 만나러 왔다." "아, 칸 시스파슈타인님이시군요. 제가 바로 아이비스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두운 바다속에서 커다란 두 존재가 당당히 버티고 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하긴 육지 위에서는 드래곤이 두명 이상이면 한명은 꼭 폴리모프를 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드래곤의 모습으 로 같이 있는 것은 처음 봤다. "로드가 연락했던가?" "연락이요? 무슨 연락이요?" "아무 연락도 없었던가?" "예, 아무 연락도 못 받았습니다만...." "그럼 자네는 누군가가 영역을 침입했기에 나와 본 것이었군." "죄송합니다. 고룡이신줄 몰랐습니다." "뭐, 우리도 잘한 것은 없지. 로드가 연락한 줄 알고 그냥 왔으니 갑자기 쳐들어온 꼴이지 뭔 가." "우선 제 레어로 가시겠습니까? 거기서 천천히 말씀하시지요." "그러지." 엄마와 나는 여전히 구 안에 있는 상황에서 거대한 두 고룡의 뒤를 따랐다. 한참 가자 바다 속 깊이 있는 골짜기에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 나왔다. 블루 드래곤은 거침없이 그곳으로 들어갔고 우리도 그 뒤를 따랐다. 동굴 안으로 얼마 안 들어가서 길은 위쪽으로 올라갔고, 그 위에는 물이 없는 넓은 방이 나왔 다. ------------------------------------------------------------------------------------------------------------------------------------------------------------ 번 호 : 9351 / 9354 등록일 : 2000년 06월 23일 23:29 등록자 : LODEMP 조 회 : 4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1화 아르카스해의 블루 드래곤(2) 블루 드래곤은 물이 없는 공간으로 올라오자 마자 푸른 머리를 늘어뜨린 미남으로 폴리모프 하 였고, 할아버지도 올라오자 폴리모프 하셨다. "흠, 여기가 자네의 레어인가? 꽤 괜찮군." "훗, 설마하니 칸 시스파슈타인님 레어만 하겠습니까?" "하하하, 하긴 내 레어만큼 괜찮은 곳도 드물지." "어휴, 저 주책." "자자, 그렇게 서계시지 말고 이쪽으로 앉으시겠습니까?" 엄마와 할아버지 사이에 찬바람이 쌩쌩 불자 주인인 칸 아이비스크가 나섰다. "그런데 이곳까지 정말 어쩐 일이신지요?" "자넨 우리 레드 일족에게 해츨링이 태어 났다는 걸 모르고 있었나?" "해츨링이요? 아, 그러면 그 해츨링이 이제 성룡이 되었나 보군요? 이거이거, 제가 동면에서 깨 어 난지 얼마 안됐거든요, 그래서 소식이 좀 늦었습니다." "아, 그랬군. 이 애가 이번에 성룡이 된 아이라네, 그래서 자네에게 인사를 하러 왔지." "첨 뵙겠습니다. 칼 세르니안의 딸 아시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래그래, 정말 축하하네, 그러고 보니 레드 일족에게는 큰 경사였겠군요. 오랫동안 아이가 태 어나지 않았쟎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런데 이녀석이 태어나지 않았나?" "이제 레드 일족에 성룡이 한명 더 늘었군요. 음, 그럼 선물을 줘야지?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동굴 깊숙히 들어가 버렸다. "흠, 왠지 모르지만 여기서 자고 가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 뭐, 별로 피곤하지는 않으니까 상관 없지만, 어떠냐 아린아, 피곤하니?" "아뇨, 저도 뭐 별로 피곤하지는 않네요." "그럼 곧바로 남대륙으로 이동할까요?" "흠, 그러면 오늘은 밤 새겠군." "벌써 샜을껄요? 조금 있으면 해가 뜰꺼예요."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럼 아침은 어떡게 하지?" "글쎄요, 이동해서 먹어야 하지 않나?" "어디보자, 다음이 마틸산이지? 흠, 여기도 가본적이 없는데?" "뭐, 아르카스 해랑 가까우니까 아이비스크님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렇군, 그럼 아이비스크한테 보내달라고 하면 돼겠어." "그러면 산에서 아침먹어요?" "그렇게 돼겠지? 가만있자, 세라야, 우리 음식 갖고 있냐?" "아뇨, 아까 저녁 먹은게 단데요?" "흠, 그럼 음식도 좀 얻어서 가야겠군." "그럴필요 뭐 있나요? 그냥 바다에서 큰거 한마리 잡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여기서 아침을 좀 얻어 먹고 가면 좋을텐데...." "그럼 아침을 달라고 할까?" "그건 좀 그런데요?" "그러면, 안주면 한마리 잡아가고, 주면 얻어먹고 가지 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 말과 함께 동굴 안쪽에서 아이비스크가 왠 나무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그가 나에게 상자를 건네 주길래 열어 봤더니 거기에는 진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와, 진주가 굉장히 많네요?" "하하, 뭐 선물을 주려니 딴 보석들은 벌써 받았을것 같고, 아무래도 내가 바다에 살다 보니 진 주가 제일 좋을것 같아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 이정도로. 내가 준비를 못해서 급하게 준비를 하려니 이것밖에 못주는 구나. 이해해주렴." "아니예요. 이것도 많은걸요." "아아구, 그러고 보니 제가 아무것도 대접을 안해 드렸네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요, 잠시만 기 다리세요. 곧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동굴 안쪽으로 사라졌다. "참 좋으신 분 같아요." "블루 드래곤이 성격은 좋지." "그럼 실버 드래곤은 어떤가요?" "실버? 아, 그러고 보니 마틸산에 살고 있는 드래곤이 실버였지?" "실버는 좀 깐깐해, 고지식하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는다니까." "거기다 잘난체하고." "음... 레드일족과 실버 일족이 사이가 안 좋은가봐요?" "뭐 실버랑 우리랑은 상극이니까." "아, 실버 일족은 얼음을 다루지요?" "그래, 우리는 불을 다루고." "흠, 정말 상극이네요. 그럼 우리가 마틸산에 가면 찬바람이 쌩쌩 불까요?" "아무리 상극이라고 해도 같은 드래곤 일족인데 그렇게 하겠어? 더욱이 같은 종족이나 일족이라 도 사이가 않 좋을수도 있는거고 친할수도 있는거지 다 그런건 아냐." "그래도, 마틸산에 있는 칸 크제나님은 실버 중에서도 가장 깐깐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지 않아 요?" "좀 깐깐하긴 해도 자기 일족은 끔찍히 아끼니까 괜찮아." "흠, 하긴 뭐...." 그때 아이비스크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자, 여기 바다의 특제 요리, 참치 회 대령입니다." '오옷, 저게 바로 말로만 들어보던 참치 회!' 커다란 쟁반 위에는 아직 살아서 파닥파닥 움직이고 있는 커다란 생선이 몸통은 먹기 좋게 회가 떠져 있고 그 주위에는 과일과 야채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것은 바로 "오, 이것은 그 유명한, 너무 비싸서 부호나 왕족밖에 못 먹어본다는 그 초공추장이 아닌가? 자 네 이런걸 용케 구했구만...." "하하하, 회에는 역시 초공추장이 있어야 제맛 아닙니까? 보니까 예전에 구해놨던게 아직 남아 있어서 이렇게 귀한 손님들을 대접할 수 있지 뭡니까?" "오~~, 자네 정말 맘에 들어, 만약 육지로 나온다면 내 영역에 한번 들리게나, 이런 대접을 받 고 내가 가만 있을수 없지." "핫핫핫, 그렇다면 제가 한번 들리지요." "오, 이게 바로 초공추장의 맛이로군, 역시 왜 초공추장이 맛의 극치를 달린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어." "이건 바로 그 초공추장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하이안구우욱 이라는 고장에서 제가 직접 구 해온거랍니다." "하이안구우욱 고장? 거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맛을 가지고 있다는 됭장, 공추장, 강장을 만 들어낼 수 있는 기술을 유일 무이하게 가지고 있는 고장이 아닌가?" "핫핫핫, 잘 알고 계시는 군요. 제가 예전에 세계를 돌아 다닐때 거기에 꼭 들려야 겠다고 다짐 에 다짐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초공추장을 얻어왔지요." "오, 나도 그곳의 명물 음식중 하나인 기이임치이를 맛본 적이 있다네. 정말 황홀한 맛이었지." "그러고보니 기이임치이도 정말 대단한 맛의 음식이었지요." "다시 한번 가보고 싶군." "저도 이번에 인간세상으로 나가면 다시한번 그 고장에 들려볼 생각 입니다." "그런가? 그럼 자네 언제 출발할 생각인가?" "여러분을 배웅하고 나서 곧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만?" "그래? 그럼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나? 아린이 이제 마틸산의 고룡에게 인사를 하면 성룡식도 다 끝이 나거든, 그럼 우리 같이 그 고장으로 가세나." "아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저야 칸 시스파슈타인님과 동행을 하게 되면 더없는 영광이지요. 시 스파슈타인님은 세상 곳곳을 안가본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곳을 다니시 않았습니까?" "하하하, 그거야 옛날 이야기지, 하도 오랫동안 다니지 않아서 이제는 많이 변했을꺼야." "하지만 그 경험이 어디입니까? 그럼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떠나도록 하지요." "아, 그런데 자네 마틸산에 가봤나? 난 다른 드래곤의 영역에는 별로 가본적이 없어서 말야." "저도 보기만 했을뿐 가본적은 없습니다. 이번이 처음으로 가는 거라서요." "그런가? 그럼 결국은 마틸산 근처로 이동을 해야 겠군." "공간이동을 하시게요?" "그럴 생각이네만." "그러지 마시고 바다속으로 이동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서 남대륙으로 가는 바다속은 경치 가 꽤 괜찮거든요. 바다속으로 구경하면서 육지 가까이 가서 그다음에 이동을 하는게 어떨까 요?" "그럼 그러지 말고 그냥 가요. 어짜피 마틸산은 바다 근처에 있는데 공간이동 할 것까진 없쟎아 요." "도시락도 싸가요. 구경하면서 먹게." "그거참 좋은 생각이다. 도시락은 제가 준비 하지요." "좋아, 그럼 바다속으로 가기로 하지." 이렇게 해서 우리는 화려한 아침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바다속으로 들어갔다. 이 번에는 아이비스크가 막을 만들어서 우리를 보호했다. 아무래도 바다속 길을 잘 아는 드래곤이 안내 해야 했기에 그런 것 같았다. 해가 떠서 그런지 바다속은 따로 불로 비추지 않아도 잘 보였고 밤에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아름 다움이 있었다. 온갓 종류의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고 간간이 커다란 고래나 상어도 볼 수 있었다. '잠수함을 타면 꼭 이런 기분일까? 정말 멋있구나. TV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걸?' "저건 배가 아닌가?" "예, 이쪽은 바다속 경치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암초가 많아서 가끔 배들이 가라앉아요. 여기에 산호초가 많이 발달되어 있거든요." "그럼 배들이 이쪽으로는 잘 안오겠네요?" "그렇지, 뭐 재수없는 배들이나 폭풍같은거에 떠밀려 이쪽으로 왔다가 암초에 걸려 가라앉지 만..." "그럼 혹시 저안에 보물이 있지 않을까요?" "보물? 있기는 있지, 하지만 지금은 없어." "예? 왜요?" "왜긴 내가 벌써 다 싹쓸이 했으니까 그러지." "호, 그래도 수입이 꽤 있나?" "바다를 왕래하는 배들은 보통 다 크니까요 꽤 수입이 짭짤해요." "그거참, 바다에도 여러가지 좋은점이 있군." 그렇게 우리는 여러가지 잡담을 하면서 또 바다속 구경을 하면서 육지를 향해 갔다. 가다가 배 가 고프면 도시락을 까먹으니까 기분도 꽤 좋았다. "담에 또 오고싶군." "하하하, 언제든지 놀러 오십시요." "하지만 자네는 이제 인간세상으로 놀러 나갈게 아닌가?" "뭐 그렇기야 하지만 제가 없어도 바다속 구경은 할수 있는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군." "이제 다 온것 같군요. 바다가 점점 얕아지기 시작 했어요. 더욱이 날도 저물었으니 이제 밖으 로 나가야 겠군요." 그렇게 말하곤 아이비스크는 우리를 어떤 항구의 인적이 없는 곳에 내려 놓았다. "여긴 마틸산과 가장 가까운 항구예요. 여기서 말을 타고 가면 며칠이면 마틸산에 도착할 겁니 다." "그래?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 어디 여관을 하나 잡아서 쉬고 내일 말을 구해서 떠나도록 하지?" "그래야 겠군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생각해보니까 난 하루를 꼴딱 세운 셈이쟎아?' 그걸 깨닫자 졸음이 무더기로 몰려왔다. "저 너무 졸려요." "그래 빨리 여관을 잡자고." "이쪽으로 오십시요. 이쪽에 여관이 있을겁니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엄마에게 이끌려 갔고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채 여관에 도착해 침대로 곧장 직행했다. 작성자 : 빠이러브 (shj218@hanmail.net) 조회: 107, 줄수: 145, 분류: Etc. 아린 이야기 - 제12화 마틸산의 실버 드래곤 번 호 : 9403 / 9414 등록일 : 2000년 06월 24일 23:37 등록자 : LODEMP 조 회 : 19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2화 마틸산의 실버 드래곤 제 12화 마틸산의 실버 드래곤 "어디보자.....마틸산이 여기서 그다지 멀지는 않군." "그래도 산 어디 살고 있는지는 모르쟎아요. 더욱이 그 산은 드래곤이 산다고 해서 사람들이 올라가지도 않아서 산 근처에 마을도 없다구요." "가까운 마을이라고 해봐야 산하고는 많이 떨어져 있군요. 그 마을에서 마틸산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도 2틀은 가야 하겠는걸요?" "이봐 아이비스크, 마틸산 근처에 가봤다고 했지?" "예." "그럼 자네가 이동시켜주면 안될까?" "뭐 어렵지는 않겠죠. 하지만 저도 동면 하기 전에 가본거라서요. 정확히 좌표를 잡지는 못할 꺼예요." "땅으로 잡지 말고 공중으로 잡으면 어때요? 그럼 대충 근처로 잡으면 돼잖아요. 거기서 우리가 날라가면 되지 않을까요?" "하긴, 인적도 드물테니까 그렇게 하자구." "그럼 준비할건 없나요?" "어짜피 산을 올라가야 하니까 말을 갖고 가기는 힘들꺼야. 이제 마지막이니 까짓거 편하게 가자구." "그러고 보니 벌써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가네요." "뭐, 인사할 고룡도 몇명 없었쟎아." "이제 아린도 성룡이군요." "새삼스럽게 왜그래? 성룡이라구 해서 네 딸이 아닌건 아니쟎아." "그래도, 해츨링일땐 같이 있었는데..." "흥, 300살까지만 같이 살았쟎아." "꼭 분위기를 깨야 겠수?" "난 진실을 말할 뿐이야. 그러고 보니 넌 이번 여행을 끝내면 뭘할꺼냐?" "난 동면할까해요. 별달리 할일도 없고..." "그래? 그러면 마틸산에서 곧바로 네 레어로 이동하겠구나?" "그렇게 할 생각이예요." "아린은 어쩔거냐?" "저요? 글쎄요 아직 생각을 안해봤는데...." "그래도 너 혼자서 따로 여행을 갈 생각이겠지?" "예, 세상 구경은 해보고 싶어요." "그럼 우리랑 같이 가지 않으련?" "할아버지랑요?" "그래, 어짜피 우리도 여행을 할껀데 같이 가면 좋잖아." "노친네랑 가는게 뭐가 좋아요?" "뭐 어때서 그러냐? 같이가면 안전하고 좋지." "이제 아린도 성룡이라구요.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한 드래곤이 누군데 그래요?" "쩝, 그렇군." "처음 여행이니까 아무래도 혼자 가보고 싶겠지요. 이제까진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했으니까요." "그래도 아직 어린것을 혼자 보내려니 마음이 안놓이는군." "뭐가 어려요? 이제 성룡인데." " 이제 겨우 성룡이 됬을 뿐이쟎아. 언제 세상에 나가 봤다고...." "드래곤인데 뭐가 문제예요?"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초행이면 위험한거야." "쟤 실력 좋아요. 아버지도 아시쟎아요." "실력이 좋으면 뭐해? 그래도 세상 경험이 없으면 위험한거라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혼자 나갈꺼쟎아요." "언젠가 그럴꺼 조금 더 데리고 있으면 어때?" "아버지, 갑자기 왜그러세요?" "그래도 얼마만에 태어난 앤데 뭔일을 당하면 어쩌려구...." "그럼 내가 따라갈까?" "너랑 같이 있으면 더 위험해. 뭔 일을 벌일지 알수가 있어야지." "어머나? 나도 인간 세상에서는 우아하고 지적인 레이디라고 알려졌다구요." "네가?" "그럼요." "안믿겨져."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래요?" "그건 네 자신이 더 잘 알게 아니냐?" "그럼요. 이렇게 현명하고 우아한 여자 보셨어요?" "얼씨구...." "그만하세요. 이제 출발해야지요." "아, 뭐 짐은 따로 없지?" "이제까지 가지고 다닌게 별로 없쟎아요. 그냥 이대로 가면 돼요." "그럼 슬슬 가죠? 아침도 다 먹었는데..." "그러지뭐, 애들아 짐 다 챙겼냐?" "식당에 내려올때 다 가지고 내려 왔어요. 우린 그냥 나갈수 있어요." "그래? 그럼 가자." --------------------------------------------------------------------- 제가 생각해두 오늘거는 넘 짧은거 같네여... 마니마니 보세여^^ ------------------------------------------------------------------------------------------------------------------------------------------------------------ 번 호 : 9421 / 9490 등록일 : 2000년 06월 25일 23:26 등록자 : LODEMP 조 회 : 49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12화 마틸산의 실버 드래곤 (2) 아이비스크는 우리가 식당 문을 나서자 마자 공간이동을 시켜 버렸고 덕분에 준비를 못하고 있던 나는 허공에 뜨자마자 땅으로 추락했다. 물론 이번에도 엄마가 내 뒷덜미를 잡아서 땅에 헤딩하는건 면했지만 낮에 공중에 붕 뜬 기분은 정말 끝내줬다. '에구구, 말이라도 해주고 이동을 시키지....' 고룡 앞이라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꿍얼꿍얼 대고 있을때 할아버지가 말씀 하셨다. "흠, 저게 바로 마틸산이로군?" 멀리는 바다가 보이는 배경을 가지고 넓은 들판 위에 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배경은 좋네요." "여기에 살고 있단 말이지?"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 산이 마틸산인건 확실합니다." "그럼 한바퀴 돌면 알겠군. 어째든 가보자구." 할아버지가 먼저 날아서 마틸산으로 향하자 우리도 곧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흠.....마나가 느껴지지는 않는데?" "마나를 숨기고 계시나보죠?" "자기 레어에 있는데도 그렇게 신경을 쓰나?" "레어에 없는거 아녀요?" "로드가 있다고 했쟎아." "하지만 그동안에 나갔을수도 있고...."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저한테도 로드가 연락을 안 해서 여러분이 조금만 늦게 왔다면 못만났을테니까요." "그렇기도 하겠군." "어쩌죠?" "아직 확실한건 아니니까 조금만 더 돌아 보자구." "그럼 흩어져서 찾아보기로 하죠? 그편이 더 빠르겠어요." "좋은 생각이야. 그럼 난 이쪽을 돌아보지." "그럼 난 저쪽." "엄마는?" "엄마는 위쪽으로 가볼테니까 넌 골짜기 쪽으로 한번 가보렴." 일행은 각자 자기가 맡은 쪽으로 날라갔고 나도 산 틈으로 길게 나있는 골짜기 쪽으로 날라갔다. "어쩌면 골짜기에 레어가 있을지도 모르지... 내 레어도 골짜기에 있으니까...." 하지만 한참을 날라다녀봐도 큰 동굴은 커녕 작은 동굴조차 보이지 않았고 또한 커다란 마나의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쪽이 아닌가베...."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자 찾기를 포기하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쪽으로 가려고 할때였다. 순간 숲쪽에서 뭔가가 빛을 반사하여 내 눈을 찔렀다. "뭐지?" 울창한 나무 숲사이로 살짝 은빛이 비춰 보였다. "은색? 사람인가? 이곳에 사람이 있을리는 없는데?"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 은빛이 언듯 보이는 쪽으로 다가갔다. 대충 짐작하여 땅에 내려서서 둘러보니 왠 큰 나무 밑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색의 마법사 로브를 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은색으로 찰랑거렸기에 위에서 봤을때 살짝 비춰진 것이 그녀의 머리였음을 알수 있었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찌푸린채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어 왔느냐?" "예?" "귀가 먹었느냐?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물었다." 순간 나는 "사람을 찾으러 왔는데요." 라고 말할 뻔 했다. 하지만 말하려고 보니 난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을 찾고 있었다. "저기, 이곳에 사신다는 고룡을 찾아 왔는데요?" 그러자 그녀는 짜증난다는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뭐하러?" "만나러요." "만나려고 온건 알아. 뭐하러 만나려고 하냐고?" "인사드리러 왔는데요?" "왜?" "그게 그러니까...." "드래곤에게 뭔가 원하는게 있나보지?" "아니, 그게 그러니까...." 너무 째려보면서 물어보니까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버벅대다가 '가만, 내가 왜 이여자한테 쩔쩔매고 있는거지?' "잠깐만요. 당신 뭐예요? 뭔데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요? 내가 여기 올수도 있는거지..." "흥,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냐?" "모르는데요?" "뭐라구?" 그녀는 순간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 보았다. "여기에 살고 있는 드래곤을 찾으러 오지 않았느냐?" "맞는데요?" "그럼 그 드래곤이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을 어찌 했다는 말은 들었을게 아니냐?" "안들었는데요?" "그럼 여긴 도데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냐?" "그게 그러니까....잠깐만요 그게 도데체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죠?" 그러자 그 여자가 고함을 빽 질렀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나도 화가나서 대꾸해주었다. "대답할 의무 없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너무 화가난 표정이어서 순간 내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찔끔했다. "무례한녀석..." '역시....어떻하지?' "내가 바로 이곳에 살고있는 드래곤이다." '에구, 어른한테 무례하게 굴었다.' "네가 무엇때문에 나를 찾아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살아 돌아갈 생각 말거라." 이제 그녀는 온 몸에서 거대한 마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어떻게해? 화났나봐...' "저기요, 드래곤이신줄 몰랐는데요?" "흥, 그래서?" "아니, 뭐 사람인줄 알고 그랬다는 거죠." "그래서?"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순간 할아버지와 엄마가 올때까지 버틸까 하다가 내가 이곳에 인사하러 왔음을 상기하고 말했다. "저는 칼 세르니안의 딸 아시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녀가 멈칫 했다. "올해 성룡이 되어 여기 계시다는 고룡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고룡이신줄 모르고 무례하게 굴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풀고 마나를 서서히 사그라트렸다. "어디 일족이지?" "예, 레드 일족입니다." "그랬군." 멀리서 누군가 오는 기척이 있어서 돌아 봤더니 엄마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이비스크가 오고 있었다. 아마 아까 크게 방출 되었던 마나를 느끼고 오는것 같았다. "일행이냐?" "예, 할아버지이신 칸 시스파슈타인님하고 어머니이신 칸 세실리안님, 그리고 아르카스해에 사시는 고룡 칸 아이비스크님이십니다." ------------------------------------------------------------------------------------------------------------------------------------------------------------ 번 호 : 9467 / 9490 등록일 : 2000년 06월 27일 00:28 등록자 : LODEMP 조 회 : 25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2화 마틸산의 실버 드래곤 (3) 그때 제일 먼저 도착하신 할아버지가 말하셨다. "그대가 이곳에 산다는 칸 크제나인가?" "칸 시스파슈타인님이십니까? 미처 마중을 못해 죄송합니다." "아린이 제일 먼저 찾았군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서 계시지 않는줄 알았습니다." "난 인간 마법사들인줄 알고 귀찮아서 마나를 숨기고 있었지." 아이비스크가 인사인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크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아시는 사이인가봐요?" "레어가 가까이 있다보니 몇번 만난적이 있지." "그대도 역시 로드에게 연락 받지 않았겠지?" "예, 이 아이가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이제 성룡이 되었다구요?" "그래, 그렇지. 그래서 자네에게 인사를 하러 온거라네." "결국 로드는 드래곤 숲의 칸 그라하리에게 밖에 연락을 안 했군요?" "칸 그라하리? 드래곤 숲에는 벌써 다녀 오셨습니까?" "아, 로드가 근처까지 이동을 시켜 줘서...." "그렇게 정신 없는 로드가 연락할 만 했군요..." "왜?" "예전에 칸 시스파슈타인님과 칸 그라하리의 싸움은 유명하니까요." "뭐, 두분다 아직 고룡이 되시기 전이었고 또 그랬다고 해도 두 드래곤의 싸움이었으니까...." "숲 하나 날라간 정도로 끝난게 다행이었지요." "험험, 지금 그 이야길 뭐하러 해? 여긴 아린이 인사를 하러 온거라구." "그렇군요. 여기 이렇게 있지 말고 제 레어로 가시겠습니까?" "거기까지 갈건 뭐 있나? 여기도 경치 좋은데 여기에 있지?" "그러시겠어요? 그럼 제가 곧 뭐 드실거라도 좀 가져올테니 잠시 기다리세요." 칸 크제나는 그렇게 말하곤 사라졌다. "헤, 별로 깐깐해 보이지 않는데요?" "뭐 오랜만에 동족을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더욱이 우리가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고..." '에구구 찔려라....' "어째든 이걸로 정말 마지막이군요." "그래, 이제 아린도 성룡이지...." "아린아, 이제 어떻할꺼냐?" "이왕 이렇게 나온거 곧바로 여행을 떠날까 해요. 어짜피 레어에는 금화 하나 없으니까 도둑 맞을 염려도 없구..." "할애비랑 같이 안갈꺼냐?" "여기까지 같이 와주신것만 해도 고마운데요..." "인간 세상은 위험해,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곳이라구." "별일이야 있을라구요." "인간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족속이야. 그러니 언제나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 "예." "많이 걱정이 되시나 봐요." "생각 같아서는 계속 데리고 있고 싶은 맘이 굴뚝 같다구....." "하지만 이 애도 이제 한명의 당당한 드래곤이예요." "나도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어디 그렇게 보여야 말이지. 언제나 해츨링인것 같단말야." "뭐, 정말 오랜만에 태어난 아이니 그렇게 생각 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요." "호오, 칸 시스파슈타인님께서 손녀를 그렇게 끔찍이 아끼시는줄 몰랐는데요?" 어느새 왔는지 나타난 칸 크제나가 음식을 늘어 놓으면서 대꾸했다. "난 언제나 정이 넘친다구." 할아버지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대꾸를 했다. 우리도 모두 크제나가 펴 놓은 자리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크제나가 모두에게 차 한잔씩 내주었다. "흠, 차 향이 기가 막히는군..." "허브차에요. 향이 무척 좋지요?" "맛도 좋군요. 그윽하고....." "크제나님은 차를 즐기시는 편이니까요." "뭐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좋은 차는 모아두는 편이예요." "아~, 좋구나. 날씨도 좋고, 차맛도 좋고...." "소풍 나온 기분이네요." "제가 마지막인가요?" "예,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러 온거예요." "그렇군.... 그럼 여행을 가겠군?" "예, 그럴 예정이예요." "그럼, 나이든 어른이 충고 한마디 할까?" "뭐, 고룡께서 하시는 충고라면..." "넌 드래곤이란걸 잊지 말아라." "예?" "인간들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지. 그걸 부끄러워 하지 않아. 하지만 드래곤은 달라. 드래곤은 약속을 지키는 종족이다. 그게 어떤 약속이든지, 설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일지라도 약속은 지킨다. 그게 바로 드래곤이야." "예." "그런데 아직 성숙치 못한 드래곤이 세상을 여행하다가 인간에게 물이 들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그럼 어떻게 되죠?" "그럼 용언 마법을 쓰지 못하지." "용언 마법이요?" "그래, 고룡들이 쓰는 마법이 바로 용언 마법이야. 이건 마나와 자연과 드래곤과의 약속과도 같은 거다. 그러니 약속을 지키지 않는 드래곤은 이걸 쓸 수가 없지. 또한 마법도 쓰지 못해, 그가 쓰는 마법은 진짜 마법이 아니라 환상일 뿐이지."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는 드래곤이라고 할 수도 없어. 그러니 너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약속은 꼭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넌 드래곤이라 할 수 없어." "예." "또 한가지, 인간 세상에 나가면 온갓 술수가 난무하지. 그럴때는 자신도 모르게 얼결에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할수가 있어. 그러니 어느때라도 항상 말을 조심하거라. 말을 할때는 항상 조심스럽게 하고, 말을 하기 전에는 주의 깊게 생각을 하고 말하도록 해." "예." "뭐 네가 인간 세상에 나가면 여실히 깨닫게 될 테지만 만에 하나 그전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니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명심하고 있으렴." "예, 말씀 감사 합니다." "호, 레드 드래곤이 이렇게 예의 바른줄 몰랐는걸?" "흠흠, 누구 손녀인데..." "호호호, 그런가요?" "그래 칸 크제나께선 저 아이에게 무슨 선물을 하실 겁니까?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크게 기대하지는 말아. 별로 대단한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크제나는 나에게 납작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천 위에 아름다운 목걸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커다란 다이아가 5개나 달려 있었고 그 주위에는 작은 사파이어들이 파란 빛을 반짝 거리며 박혀 있었다. "호오, 이건 바로 그 유명한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가 아닌가?"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요?" "이 목걸이의 처음 주인이 바로 테아칸 왕국의 왕비였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여기 이렇게 반짝이는 판이 보이지? 이건 바로 백금에 진주 가루를 뿌려 만든거기에 이렇게 은은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거란다." "이거 하나면 성 하나를 살 수 있다고 하지." "헤에, 그렇게 대단한 목걸이예요?" "역시 크제나님이시군요." "이건 아주 오랜 옛날 테아칸 왕국의 왕이 무척 사랑하던 왕비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거라고 해. 이걸 만들기 위해 엄청난 거금을 드워프에게 줬다고 하더군.. 그것 때문에 국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물렸고 덕분에 나라는 혼란해져서 반역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지." "저런, 그래서 그 국왕은 어떻게 됐어요?" "왕비와 같이 도망을 가다가 반역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군..." "옛날 이야기야. 뭐 그정도로 비싸고 아름다운 목걸이란 이야기지." "그러고보니 그 반역도들이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이 목걸이를 팔았는데 이걸 본 어떤 상인이 사고 싶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내놨다고 하더군..." "호, 대단한 목걸이네요. 정말 명성에 맞게 아름답기도 하구요..." "그렇지? 여기 박혀있는 이 다이아몬드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부자인걸..." "감사합니다." "뭘, 그러고 보니 내가 고룡이 된 뒤로 처음으로 인사를 온 아이구나." "그렇게 되나? 하긴 이애가 태어나기 전 2000년 동안은 해츨링이 태어 나지 않았으니...." "뭐 앞으로 인사하러 올 해츨링은 많을 테니까..." 느긋하고 한가한 하루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점심을 얻어 먹고 크제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엄마는 곧바로 엄마 레어로 이동했고, 할아버지와 아이비스크와 난 우리가 아침에 출발했던 그 항구로 돌아 왔다. 여기서 할아버지와 아이비스크는 같이 여행을 가시기로 했고 나는 이제 혼자서 세상을 둘러 보러 갈 예정이었다. "아린아, 정말 조심해야한다. 알았지?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엄마나 할머니 한테 이동하고.." "예, 할아버지 염려 마세요." 할아버지는 안심이 안되는듯 몇번이나 더 주의를 주시고 당부를 하신 뒤에 떠나셨다. 그리고 나는 이제 드디어 자유롭게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번 호 : 9449 / 9470 등록일 : 2000년 06월 27일 22:12 등록자 : LODEMP 조 회 : 33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3화 동료를 만나다. 제 13화 동료를 만나다. 할아버지와 헤어져 드디어 혼자 여행을 하게 된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비록 내가 세계를 구경하기 위해 여행을 다닌다고 하지만 막상 그렇게 결정을 하고 여행을 다니려니 너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소위 다른 목적을 만들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 보물 사냥꾼이 되기로 했다. 이 세계에 있는 유명한 보물이란 보물은 무조건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구경하면 잼있을것 같았으니까....(푸하하하) 목표를 세웠으면 우선은 정보를 수집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켈틴 연합국으로 가기로 했다. 켈틴 연합국은 약 20여개의 작은 국가로 나뉘어져 있고 그 국가들이 연합을 하여 큰 강대국가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 연합국가중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나라가 바로 켈틴 이라는 나라였기에 켈틴 연합국이라고 했다. 이 연합국들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주요 산업이 상업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상업이 번창하다 보니 도둑과 용병, 그리고 상업 길드가 가장 잘 발달 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얻고자 하는 정보 또한 쉽게 얻을수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해서 연합국중 가장 큰 나라인 켈틴국으로 가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헤어진 곳이 바로 켈틴 연합국중 한 나라였기에 켈틴으로 가는 길을 알기는 쉬웠다. 더욱이 인사하러 다니면서 한 여행의 경험도 있기에 배짱 좋게 혼자서 말을 구해 켈틴국을 향해 떠났다.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것도 꼼꼼히 챙겨서 넣었고, 길도 잘 뚤려 있었고 말도 이젠 아주 능숙하게 탈 수 있었기 때문에 부푼 가슴을 안고 타박타박 걷기도 했고 빠르게 말을 달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기쁨도 잠시.... 며칠동안 아무 일 없이 혼자 여행을 하자 무지 심심했다. 전에는 엄마랑 할아버지랑 투닥투닥 다투는 것을 재미삼아 여행을 했지만 이제는 말을 할 상대조차 없으니 왠지 허전했다. "에구구 이래서 여행을 할 때는 동료가 있어야 하는거야..." 늦장 부리다가 날이 어두워 졌는데도 마을에 도착하지 못한 나는 길에서 좀 벗어난 어떤 작은 숲에 공터를 발견하고 그곳에 모닥불을 피우며 혼자말을 중얼 거렸다. 어느샌가 대화할 상대가 없자 혼자말을 중얼중얼 거리는게 버릇이 되어가고 있나 보다. "역시 나는 혼자 여행을 하는 고독한 여행자 같은건 될수 없는 체질인가베..." 또 혼자 중얼중얼 거리면서 로드에게 선물 받은 요리 도구를 꺼내서 요리를 시작했다. "헤, 역시 편하긴 편하구나..." 재료만 넣고 불에 올려 놓기만 하면 알아서 요리를 해주니까 역시 편하긴 편했다. 하지만 혼자서 먹는 음식은 별로 맛이 없기에 요리는 잔뜩 해놓고 별로 입에 대지 않았기에 음식이 많이 남았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때 갑자기 뒤쪽에서 우당탕 쿵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어떤 녀석이 이쪽으로 굴러 왔다. 빠른 속도로 데굴데굴 굴러오는걸 보니 뛰어 오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 지는 바람에 구른것 같았다. "무지 아프겠다..." 한참을 굴러 오다가 털푸덕 어퍼져 있길래 한마디 건냈는데 이녀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 나더니 내 앞에있던 음식을 향해 달려 들더니 정신없이 먹어 대는 거였다. 너무나 황당한 일을 당한 내가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 그녀석은 내 음식을 모조리 먹어 치우더니 나를 보며 한마디 한다는 것이 "물은 없냐?" 라는 거였다. 그리고 웃긴건 그 말을 듣고 내가 재빨리 물통을 그녀석에게 넘겨준 거였다. 그놈은 물통을 받아 들고 꿀꺽꿀꺽 마시더니 '푸하~' 하곤 물통을 내려 놨다. "이제야 좀 살것 같군...." 그녀석은 무지 행복한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더니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안녕? 좋은 밤이지?" "너 뭐야?" "하하하. 이거 네 식사였어?" "남의 식사를 먹었으면 그 댓가가 있어야 겠지?" "에구, 잘생긴분이 째째하게 뭘 그러시나. 식사 한끼 대접했다치지..." "난 아무에게나 식사 대접 안하는 주의라서..."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마. 또 알아? 나에게 이렇게 식사 대접을 해서 좋은 일이 생길지. 아~, 착한 일을 했으니 신께서 복을 내려 주실꺼야." "그렇게 말하는걸 보니 댓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나보군?" "하하하, 예리하기도 하지. 어떻게 알았어?" "뭐, 가진게 없다면 몸으로 때우면 되니까 너무 걱정마." "헉? 뭘 원하는 거야?" "글쎄, 어떻게 할까?" "이봐이봐, 설마 날 팔아넘길 생각이야? 그건 너무하쟎아?" "난 그렇게 냉정하지는 않아. 그리고 뭐 식사 한끼 값인데 그렇게 많겠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몰라. 지금 당장 네가 쓸모가 있는건 아니니까. 하지만 뭐 어딘가에 네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참, 넌 왜 여기에 있는거지? 넌 누구야?" "나?" 그렇게 되물으면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를 쓸어올리자 녀석의 얼굴과 함께 귀가 드러났다. 얼굴은 얼마나 헤메고 다녔는지 엄청 지저분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귀는 뾰족했다. "어? 귀가 뾰족하네? 너 엘프야?" "아, 그래. 내 이름은 류미르야.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어." "여행?" 그녀석을 찬찬히 살펴보니 얼굴못지 않게 옷이 엉망이었고 나이도 내 또래로 보이는거 보니까 이녀석은 여행이라기 보다 가출한 걸로 보였다.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데?" "아? 아니 뭐, 이곳 저곳 그냥 떠돌아 다니는거지." "집이 어딘데?" "집? 엘프가 숲에서 살지 어디서 살겠어?" "어디 숲인데?" "레스틴 왕국에 있는 숲이야." "그럼 꽤 멀리서 왔네? 근데 짐은 없어?" "짐? 아, 헤메고 다닌는 사이에 잃어 버렸어." "엘프가 숲에서 헤메?" "여기는 익숙하지 않은 숲이니까..." 참내, 둘러대는 것도 어설프네, 뭐 나랑은 상관 없으니까... "그럼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난 지금 켈틴국으로 가는 중이거든?" "정말? 그래도 돼?" "왜 그렇게 좋아해?" "아니 뭐, 같이 가면은 빚을 갚을 기회도 생기니까 좋쟎아." "그래서 좋아한거야?" "응." 내가 그걸 믿을것 같아? "좋아. 그럼 넌 이제 나랑 동행하는거다." "응~!" 뭐 나랑은 상관 없지. 나도 동행이 있었으면 했으니까.... "그럼 이만 자자. 밤도 깊었으니까..." "저기..." "왜?" "나 덮을것 없을까?" "그런것도 없냐?" "다 잃어버렸다니까." "그럼 그냥 자!" "어떻게 그냥 자?" "에휴, 그럼 이것도 나중에 갚아." 그리곤 로드에게 받았던 침낭을 꺼내서 그녀석에게 건냈다. "이봐, 이걸 어떻게 덮어?" "그거 마법이 걸린거야. 피면 커져." 그녀석이 내 말을 듣고 손바닥 만한 천을 피자 금새 커지면서 사람 하나가 넉넉히 들어갈 침낭으로 변했다. "우와, 신기해." "그럼 잘자." "응, 잘자." 다음 날 아침 냇가를 찾아 얼굴을 씻고 왔는데도 깨어나지 않는 녀석을 발로 차서 깨워 냇가로 보낸 뒤 음식을 준비했다. 이제 일행이 한명 더 늘었으니 음식도 많이 준비해야지 싶었다. 거의 음식이 다 되어갈 무렵 그녀석이 돌아왔다. 수건이 없어서 물기를 옷에다 그냥 문질러 닦은 모양으로 셔츠가 젓어 있었다. 하지만 얼굴과 머리는 깨끗해져 있어서 잘생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었고 머리도 진한 초록색을 띄었다. '왠지 이녀석을 보니 칸 그라하리가 생각이 나는군.... 엘프인것도 그렇고 머리색까지 똑같이 푸른 색이니....' "뭐야? 갈아입을 옷도 없어?" "어제 다 잃어 버렸다고 했쟎아." "흐음, 점점 빚이 늘어가는걸?" "말 안해도 알아." "뭐 나중에 열심히 몸으로 때우길 바래. 옷은 다음 마을에 가면 사줄께." "음식 다 된거야?" "그래 다 됐어, 이쪽으로 앉아." 아침을 다 먹고 우리는 짐을 챙긴뒤 출발하기 위해 일어섰는데 문제가 생겼다. "너만 말을 타고 간단 말야?" "넌 엘프쟎아." "엘프가 어때서, 나도 말을 타고 싶단 말야." "엘프도 말을 탈줄 알아?" "탈수 있어." "그래도 말이 한마리 밖에 없쟎아." "같이 타면 되쟎아?" "그 지저분한 옷을 입고 누구랑 같이 타려구 그래? 넌 걸어와." "우씨, 그러는게 어딨어?" "여깄지, 그리고 넌 나한테 빚이 있다구, 그러니 얌전히 말들어. 나도 천천히 갈테니까..." "싫어~" "꽤 말을 안듣는 꼬마로군...." "누가 꼬마라는 거야?" "너말고 또있어?" "너도 어리쟎아?" "호, 역시 성인이 아니라는걸 부인하지 않는군?" 그러자 그녀석은 찔끔하는 눈치였지만 곧 대꾸했다. "그래서 뭐?" "아니 뭐, 나랑은 상관 없지. 어째든 넌 걸어가." "싫어!" 자꾸 반항하는 그녀석에게 화가 난 나는 실프를 불러내서어 그녀석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나는 느긋하게 천천히 말을 몰았다. 잠시후 그녀석을 날려버린 쪽에서 누군가가 맹렬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짓이야~~~" "잘 뛰네?" "너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난 인간이 아니야' 나는 싱긋 웃고는 좀더 빨리 말을 몰았다. 그리고 류미르는 옆에서 쫑알쫑알 대면서 따라왔다. 번 호 : 9456 / 9470 등록일 : 2000년 06월 28일 22:12 등록자 : LODEMP 조 회 : 33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3화 동료를 만나다.(2) 이렇게 나란히 가자 꼭 내가 주인이고 엘프녀석이 시종인것 같이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할아버지와 엄마가 선물로 주신 고급스러운 푸른 망토에 검은 가죽 부츠를 신고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된 레이피어를 차고 말을 타고 있는 반면에 류미르 녀석은 엉망인데다 더러운 옷을 걸치고 짐 하나 없이 내 옆에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저녀석이 들으면 펄펄 뛸것 같았기에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내가 계속 실실 웃어대자 그녀석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아니, 그냥 웃긴 생각이 나서...." "마을은 아직 멀었어?" "힘들어?" "그건 아닌데 왠지 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싶어서..." "조금만 더 가면 돼. 아마 점심때쯤 도착할꺼야." "그럼 뛰어갈까?" "안힘들겠어?" "이래뵈도 엘프라구. 체력은 좋아서 오랫동안 달릴수 있어." "그럼 그러지뭐, 나야 손해볼건 없으니까..." 류미엘이 뛰기 시작하자 나도 말을 달리게 했다. 류미엘 녀석 정말 가볍게 잘 달렸다. 이게 바로 엘프의 능력인가 싶었다. '이녀석 내 여행에 꽤 도움이 될것 같은걸?' 류미엘이 지치지도 안고 계속 달려준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마자 나는 여관을 잡은뒤 류미엘을 데리고 근처 옷가게로 갔다. "어서오십시오." 주인으로 보이는 멋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우릴 맞았다. "이녀석에게 어울릴만한 옷좀 보여 줘요." "아, 시종에게 옷을 사주시게요? 정말 좋은 주인님이시군요." "누가 이녀석의 시종이라는 거야?" "아, 이런 아닌가요? 이거 큰 실례를 했군요?" 역시 경력이 쌓인 상인 답게 주인은 재빨리 정말 미안한 표정을 얼굴에 가득 담고 사과를 했다. "그럼 고급옷을 보여 드려야 겠네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주인은 좋은 기회를 잡아서 기쁜지 싱글벙글 하며 안쪽에서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상자 안에는 정말 비싸 보이는 옷감들로 만들어진 옷들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옷들을 내놓자 류미엘은 옷을 고르기 어렵던지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우리는 여행을 갈 예정이예요. 그러니 간편한 여행복을 보여 주시겠어요?" "오, 여행자셨군요. 어디보자, 이건 어떻습니까? 가죽옷이라서 질기고 가벼운 데다 감촉도 좋지요. 여행자들께서 많이 찾으시는 옷이랍니다." 주인이 옷들중에서 골라준 옷은 검은색의 가죽 옷이었는데 바지와 조끼가 한 벌로 된 옷이었다. "어때?" "뭐, 괜찮아 보이는데?" "그럼 저걸로 해." 내 옷도 아니고 남의 옷 고르는데 귀찮아진 나는 그걸로 결정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과 같이 셔츠 몇벌도 같이 사줬다. 옷값을 지불하고 나온 우리는 말을 사러 갔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많은 말들이 있자 여기서 또 말을 고를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하지만 내가 말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류미엘이 말들을 살펴 보면서 뭐라고 뭐라고 말에게 말을 건네곤 하더니만 한참 뒤에 건강해 보이는 옅은 갈색 털을 가진 말을 골랐다. "이 말로 할래." 말 값을 치르고 여관으로 돌아 오면서 나는 류미엘에게 물었다. "더 필요한거 없어?" "응? 뭐가 더 필요해?" "그걸 네가 알지, 내가 아냐?" "뭐, 없는것 같은데?" "너 무기는 있는거야?" "무기? 무기는 왜?" "바보아냐?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어떤일이 생길지도 모르쟎아. 그러니 만약에 대비해서 무기는 가지고 있어야지." "음, 망고슈(단검) 하나 있는데 그걸로는 안돼나?" "너 엘프니까 활을 잘 쏠것 아냐? 활은 없어?" "엘프라고 활을 다 잘 쏘는건 아니라구." "그럼 검은 다룰줄 알아?" "아니." "그럼 할줄 아는게 뭐야?" "정령마법, 그리고 마법도 좀 할줄 알고, 나무타기 잘 하고...에 또..." "됐어됐어, 그거 말고 싸움 잘해?" "싸움? 해본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엘프들은 싸우지도 않냐?" "응!" "하긴 뭐....그럼 몬스터들을 만나면 어떻게 할꺼야?" "몬스터? 걔네 한둘 정도는 단검 하나로도 충분해." "그래? 뭐 그럼 어느정도 실력은 있군." "그럼 언제 출발할꺼야?" "점심 먹고 곧 출발할꺼야. 뭐 여기 하루 더 있어봐야 볼것도 없구 그냥 가지 뭐. 근데 너 정말 말을 탈줄 아는거겠지?" "물론이야." "타본적은 있어?" "어? 아니 뭐 그게 그러니까......." "없지?" "아직까지는.......하지만 잘 탈수 있을꺼야." "뭐, 말을 타고 못 쫏아오면 뛰어서라도 쫏아오면 되니까." "탈수 있다니까." "알았어. 네가 그렇게 주장하지 않아도 조금 있으면 알수 있으니까 너무 열내지마." 여관에 도착해서 우리는 우선 각자 방으로 올라가 목욕을 하고 내려와서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엘프들은 채식만 하지 않나?" "아냐, 아무거나 잘 먹어." "모든 엘프들이 그러는 거야? 아님 너만 그렇게 아무거나 잘 먹는거야?" "내가 모든 엘프들의 식성을 어떻게 알아? 내가 그렇다는 거지." "네 주위의 엘프들은?" "흥, 그런 케케묵고 고루한 늙은이들은 풀만 먹고 살아." "호, 늙은이들?" ".....우리 마을의 노인들 말야." "너네 마을에는 젊은 애들은 없어?"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 "내가 뭘?" "아냐 아무것도..." 류미엘은 그렇게 얼버무리곤 다시 음식을 먹는데 열중했다. '흐음, 주변에 노인들만 있었다고?' 점심을 다 먹고 여유 음식을 충분히 챙긴뒤 우리는 또 다음 마을로 향했다. 류미엘은 어설프게 말 위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잘 달렸다. '흥, 말타는건 금방 배우는군, 엘프라서 그런가?' 괜히 열받았다. 난 맨 처음 말타는거에 익숙해질때까지 며칠이나 걸려서 그 뒤에나 말을 달리게 할 수 있었는데 저녀석은 탄지 얼마 안되서 말을 달릴수 있게 하다니... 왠지 심술이 생겨서 말을 좀더 빨리 달리게 했다. 그러자 그녀석은 잠시 주춤 하더니만 그래도 곧 쫓아왔다. '그래그래 너 잘났다.' 말을 좀더 빨리 달리게 해도 그녀석이 잘 쫓아오자 왠지 내가 너무 유치해지는 것 같아서 다시 말의 속도를 줄였다. "켈틴에는 왜 가는거야?" "알아볼게 있어서." "뭘?" "유명한 보물들은 어디에 있나 하고..." "그런걸 알아서 뭐하게?" "내걸로 만들어야지." "어떻게?" "사든지 훔치든지..." "헉? 너 도둑?" "아직은 아냐." "그럼 너가 그 보물들을 살 돈이 있단 말야?" "몰라, 보물 값을 알아야 사든지 말든지 하지." "그럼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응!" "그 보물 가지고 뭐하게?" "몰라, 생각 안해봤어." "그럼 보물은 뭐하러 구하려구 해?" "그냥 여행하면 심심하니까 목표를 만든거야." "그럼 넌 보물 사냥꾼인가?" "뭐, 비슷하겠지?" "그럼 모험을 하러 떠나는거네?" 류미엘은 그렇게 물으면서 나를 바라보는데 눈빛이 너무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좋아해?" "모험을 떠나는 거라며?" "그런데?" "그럼 나도 모험을 떠나는 거쟎아. 너랑 동료니까." "누가 동료야? 넌 나한테 빛을 갚기 위해 같이 가는 거쟎아." "그냥 동료라구 해주면 어디 덧나냐?" "도움이 되면 동료라구 인정해주지." "정말?" "그래, 그게 뭐 그렇게 어렵냐?" "그럼 우리 이제 뭘하는 거야?" "켈틴국으로 간다니까." "그럼 거기 가서 보물이 있는 곳을 알아낸뒤 보물 찾으러 가는거야?" "그렇겠지?" "오옷, 그럼 드래곤 레어도 털어?" "얘가 소설책을 너무 많이 봤군, 미쳤냐? 목숨이 몇개씩이 나 되는줄 알아?" "그럼?" "그냥, 음.... 못된 영주꺼나 아니면, 악덕 상인들이 갖고 있는걸 훔치거나 ,아님 산적들을 소탕하고 그놈들이 훔친 보물을 얻거나...." '에구구 나도 책을 너무 많이 봤군...' "그래? 그렇구나, 그럼 우린 의적이야?" "그건 모르겠어.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의적이라, 너무 멋있어. 우리 의적하자 응? 미소년 의적단, 어때 멋있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정의와 미모에 반해서 찬양할꺼야." "웃기고 있네." "그래, 우린 이제부터 미소년 의적단이야. 너한텐 빛이 있으니까 두목 자리는 너한테 양보할께. 그럼 이제부터 난 부두목이야." "아예 맛이 갔군." "그런데 우리 둘로 될까? 동료가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써라, 써." "그래, 한두명 더 모으는거야. 우리처럼 잘생기고 실력있는 소년들로..." "맘대로 하셔요." "정말이지 두목? 알았어. 괜찮은 애들이 있으면 내가 포섭할께." "이봐이봐, 사람들 앞에서 나보고 두목이라고 하면 눈치채이지 않겠어?" "아,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하지?" "이름을 불러, 이름." "그래 알았어........... 근데 이름이 뭐야?" "빨리도 물어본다." "너가 소개를 안한거쟎아." "그런가? 내 이름은 아힌이야." "아힌? 이상한 이름이네, 뭐 좋아. 이제부턴 난 아힌 부하니까 아힌이 하자는 대로 따를께." '왠지, 애 하나 버려놓은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한나절을 더 달려서 우리는 어떤 성에 도착했다. 마침 좀 늦은 저녁시간 이었기에 우리는 여관을 잡자 마자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류미엘 녀석이 저녁을 먹자 마자 구경 나가자고 졸랐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흥분을 하길래 어쩔수 없이 나는 밖으로 끌려 나와야 했다. "음, 우선 우리는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면서 경험을 쌓아가는거야. 우리가 실력이 높아도 실전 경험이 없으니까 나중에 의적 생활을 할때를 대비해 미리미리 쌓아 두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시장에 가자." "시장에?" "응. 책에 보니까 시장에는 소매치기나 여자들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들이 있더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그들을 물리치자는 거야?" "어떻게 알았어? 역시 두목이야." "네 말투면 누구나 다 알수 있는거야. 그리고 제발 두목이라고 부르지마." "알았어, 두목."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아, 실수야 실수. 앞으로는 두목이라고 하지 않을께." "그래그래, 에휴.." "저기다. 저기가 시장인가봐. 어라?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없네?" "당연하지. 누가 저녁때가 훨씬 지나서 물건을 사러 나오겠냐? 낮에나 사람들이 많지." "그래? 음, 그럼 오늘은 우리가 할 일이 없겠구나..." "그럼그럼, 우리가 오늘은 너무 늦었어." "그럼 내일 와보자." "야, 내일은 길을 떠나야지." "그런가? 음... 그럼 이곳은 그냥 지나쳐야 하는구나..." "어쩔수 없쟎아. 우리가 타이밍을 못 마춘걸..." "아쉽다. 처음으로 내 실력을 보여줄 기회라구 생각 했는데..." "걱정마, 걱정마. 앞으로 계속 이런 생활을 할텐데,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구..." 겨우겨우 류미엘을 달래서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저쪽에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와 여러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상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재빨리 안으로 집어넣고 사람들이 어디론가 피하는 것이었다. "어라 무슨 일이지?" "안좋은 일인가보다." "가보자." "기다려, 섣불이 다가가다가 일을 그르치면 어쩌려구. 기다려봐, 상황을 자세히 알아 보자구." 나는 마침 옆으로 뛰어가던 사람 하나를 붙잡고 물어봤다. "무슨 일이죠?" "이봐요, 당신들도 빨리 피해요. 운없이 당하지 말고 그러는게 제일 좋아요." 그는 이렇게만 말하고 뛰어가버렸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나봐." "아무래도 안되겠다. 우선 몸을 숨기고 살펴 보자." 나는 류미엘을 이끌고 가까운 건물 그늘로 숨었다. 그리고 상황을 살펴 보았다. 번 호 : 9479 / 9497 등록일 : 2000년 06월 30일 00:19 등록자 : LODEMP 조 회 : 327 건 제 목 : [연제] 아린 이야기 - 제 13화 동료를 만나다.(3∼5) "아이고, 나으리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요. 나으리...." 살펴 보니까 왠 청년들이 누굴 둘러싸고 패고 있는데 그 옆에서 늙은 부부가 한 사람에게 매달려 간절히 빌고 있는걸 보니 맞고 있는 사람이 저 부부의 자식인것 같았다. 그리고 저 늙은 부부의 눈물어린 용서를 듣고도 꿈쩍 안하고 있는 못된 녀석이 저놈들의 두목인것 같았다. "에휴, 안됐어. 어쩌다가 잘못 걸려가지구...." 누군가가 우리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놀라서 옆을 바라보니 우리 말고도 이곳으로 몸을 피한 사람이 여럿이었다. "저남자는 누군가요?" "누구긴, 이곳 영주의 외아들이지." "원래 저래요?" "그래, 걸리는 사람이 운이 없는거지." "영주는 가만히 보고 있어요?" "영주님? 에휴,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않으면? 병상에 누워서 오늘 내일 하시는데 볼 기력이나 있겠어?" "그럼 대리인이라도..." "영주님 부인이 대리인인걸? 얼마나 자기 아들을 끔찍히 아끼는지 처음에 아무것도 모를때 촌장이 찾아 갔었는데 자기 아들 편만 들어주더라고. 우리가 어쩌겠어? 힘이 없는걸...." "아힌, 저러다 저사람 죽겠어." 류미엘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길에는 우리가 나서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 강렬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저들을 잘못 건드리다간 성의 병사들이 우리를 잡으러 올꺼야." "튀면 되쟎아?" "말이 여관에 있쟎아." "아,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하지?" "어쩔수 없지." 그때 그 못된 영주 아들이 자기를 붙들고 애원하는 늙은 노부부를 차버렸다. 노인들이 길거리를 나뒹굴며 일어나지 못하자 류미르가 참지 못하고 나서 버렸다. "그만햇!" 그러자 사람 하나 둘러싸고 패던 영주 아들 패거리들이 류미르를 쳐다 보았다. "이건 뭐야?" "곱상하게 생겼네?" "엘프쟎아?" "아직 어린데?" "데리고 놀까?" "그거 좋지." "꼬마야 이 형님들이랑 놀지 않을래? 고거 참 예쁘게 생겼군." "난 꼬마가 아냐!" 그런다구 누가 네 말을 믿냐? "푸하하하, 요놈 성깔이 있나본데?" "그래야 더 잼있지..." 패거리들이 류미르에게 다가가자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내게 소근 거렸다. "안됐수, 저런 놈들에게 걸려서.... 당신마저 안좋은 꼴 당하지 않으려면 나가지 말아요. 당신이라도 무사 해야지." "그냥 꾹 참고 있어요. 어쩔수 없쟎아? 괜히 나서지 말아요." '안그래도 그럴 참이에요.' 영주 아들 패거리의 시선이 류미르에게 쏠리자 그때까지 길가에 나뒹글던 두 노 부부가 급히 일어나서 자신의 아들을 부축해서 사라졌다. '저런저런....뒤도 안돌아보고 가는군....' "다가오지마! 더 다가오면 가만 안두겠어." '아야, 그런다구 누가 네 말을 듣겄냐?' 역시 내 예상이 맞은듯 누군가가 류미엘에게 다다갔다가 한방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아이쿠쿠...."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뒤로 나자빠졌다. "이 꼬마 녀석이..." '드디어 시작 하는군...' 사악하게도 나는 시작하려는 싸움을 흥미 진진하게 보기 시작했다. 여러명이 달려 드는데도 류미엘은 침착하게 자신의 빠른 몸놀림을 여실히 보여 주면서 한명한명 때려 눕히고 있었다. "잘하는데?" "그래도 영주 아들인데 무사 할려구..." "하지만 저놈들이 저렇게 얻어 맞는걸 보니 속은 후련하군..." "그래도 저 아이 나중에 크게 혼날텐데...." "어쩔수 없지. 저 애의 운인걸...." '그러고 보니 나 말고도 관객이 많았군....' 속으로 피식 웃으며 다시 싸움 구경에 열중했다. 패거리들은 한번씩 얻어 맞자 화가 났는지 거세게 달려 들기 시작했고 아무리 몸놀림이 빨라도 실전 경험이 없는 류미엘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안됐어, 점점 밀리는데?" "저기까지인가보지...." 류미엘은 가끔 내가 있는 쪽으로 구원의 눈길을 보내 왔지만 나는 두 눈을 딱 감고 모른척 했다. 그러자 결국 계속 밀리던 류미엘이 지치기 시작했고 내가 도와주지 않자 열받은 류미엘이 소리쳤다. "아힌, 좀 도와줘!" 내가 있는 쪽을 보면서 소리 쳤기에 패거리들 중 몇몇이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보며 다가왔다. '너 나중에 가만 안둬.'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이쪽으로 패거리 몇몇이 다가오자 재빨리 도망쳤고 나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양심상 앞으로 나섰다. "저놈은 또 뭐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말 곱상하게 생겼군..." "이봐, 저녀석말야, 잘사는집 아들내미인가본데?" "그러게? 어쩌지?" 그들은 내가 배경 좋은집 아들일지 모르자 자신들의 두목 격인 영주 아들을 바라봤다. 영주 아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지 내쪽으로 다가왔다. "어쩌죠?" "바보같은 놈들, 어쩌긴 뭘 어째? 없애버려, 증거 남기지 말고...." "하지만...." "증거가 없는데 어쩌겠어?" '우씨, 이놈들 첨부터 없애려 들쟎아?' 녀석들이 옆에 차고있던 검을 뽑아 들자 나 역시 차고있던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내가 검을 빼어 들자 긴장 했으나 빼어든 것이 레이피어자 깔보는 것인지 안심하는 눈치였다. "야, 그쪽도 같이 없애버려!" 아마 류미엘을 말하는듯 했다. '저쪽도 검을 뽑아서 덤비겠군.... 빨리 이녀석들을 해치우고 가봐야 겠는걸..' 한 녀석이 먼저 달려들면서 가슴을 노리고 찔러 왔다. 그 검을 옆으로 살짝 피하면서 재빨리 녀석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그 다음 내려치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여러명이니까 함부로 할 수도 없겠군....' "실프, 카사, 노움, 운디네 좀 도와!" 그러자 뒤쪽에서 내게 달려들던 녀석을 강한 바람이 불어와 쓰러 트렸고 그걸 보고 놀란 동료에게 카사가 나타나 달려 들었다. 노움은 주춤 물러나는 녀석들이 디디던 땅을 꺼지게 해서 넘어트리고 거기에 운디네까지 합세하자 내게 덤벼드는 놈이 없었다.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류미엘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류미엘도 역시 정령을 불러 내어 같이 싸우고 있었다. '흠, 저녀석 정령 마법도 쓸줄 안다고 했지? 그럼 뭐 도울 필요는 없겠군... 그렇다면?' 난 두목을 잡아야지.... 하는 생각에 영주 아들을 돌아 보았다. 하지만 왠걸 녀석은 벌써 저마치 도망가고 있었다. 자기 부하들이 정령에게 당하는 걸 보고 구원을 요청하러 가는것 같았다. '이런, 일이 커지겠군...' "슬립" 재빨리 주위의 영주 아들 패거리를 재워버리고 류미엘의 팔을 잡았다. "빨리 이쪽으로..." "왜그래? 저놈들 그냥 두고 가자구?" "영주 아들이 도망쳤어, 곧 병사들을 끌고 올꺼야, 일이 커지기 전에 어서 여길 피하자." "병사들까지 날려 버리면 되쟎아?" "멍청하게 굴지좀마라. 병사들이 어느정도 될지 너도, 나도 몰라. 그런데 어떻게 대비하란 말야? 그리고 그들중에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르쟎아?" "그럼 이대로 가잔 말야?" "애초에 네놈이 나서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다구." "하지만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냐?" "그래서, 네가 도와준 사람들이 고맙다고 하디?" "그건 아니지만...." "그때 상황을 좀더 두고 보고 나중에 성에 몰래 쳐들어 가든지 해서 한방 먹일수 있었쟎아?" "그럼 그사람들은?" "그정도 가지고 안죽어." "그래도...." "씨끄러, 내가 대장이지 너가 대장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해?" "여관으로 가서 말을 찾아서 떠나야지. 늦으면 성문을 막아놓을꺼야." 우리는 재빨리 여관으로 뛰어 가서 말을 빼앗다시피 끌고 나와서 성문으로 향했다. "제기랄...." 그러나 성문 앞에는 벌써 병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차라리 말을 포기하고 그냥 튈껄..." "이제 어쩌지?" "실프, 저녀석들중에 마법사가 보여?" '예, 한명 있어요.' "마법사까지 있다니 이거 정말 힘들겠군...류미엘 너 플라이 주문 쓸수 있어?" "응 쓸수 있어." "그럼 주문을 외워놔. 그리고 실프들을 불러 내서 네 말좀 들라고 해. 그리고 실프, 넌 내 말좀 부탁해" 이들에게 일일이 지시를 내리고 나는 재빨리 마법을 쏠 준비를 했다. "준비 됐지? 그럼 내가 녀석들을 공격하면 너희들은 재빨리 떠서 성문을 넘어가는거야." "알았어!" "버스트 프레아!(파이어 볼이 수십개가 날아감)" 그들 앞쪽에다 수십개의 파이어볼이 날라가서 터지자 주위는 흙먼지와 연기, 그리고 말들이 놀라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를 틈타 우리는 재빨리 허공으로 도약했다. 우리가 막 성문을 넘어 가려고 할때 뒤에서 갑자기 불화살이 쏘아져 왔다. "마법사가 쏘았군... 하지만 이정도 가지고 뭘..." 나는 가볍게 방어막을 형성해 불화살을 막았다. 우리가 성 밖에 착지해서 달려가려고 할때 성문이 열리면서 기마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쫒아 오려나봐." "류미르 땅의 정령들을 불러서 우리 뒤의 땅을 솟게 만들어!" "알았어!" 류미르는 재빨리 땅의 정령들을 불러서 우리 뒤쪽의 땅을 솟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폭팔 소리와 함께 솟아났던 흙무더기가 날라갔다. "흥, 저쪽 마법사가 제법 실력이 있나 보군..." 나는 실프의 도움을 받아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그러자 우리를 쫒아 오는 녀석들이 보였는데 제일 앞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마법사 같았다. 그리고 그의 뒤쪽으로 30여명의 병사들이 달리고 있었다. "뭐 마법사는 몰라도 딴 놈들은 재워주는게 좋겠군...슬립!" 마법사는 몰라도 쫒아오는 병사들이 다 잠이 들게끔 마력을 많이 넣고 넓게 퍼지게 했다. 그랬더니 역시나 병사들은 속도가 점점 줄어 들더니 길에 쓰러져서 잠이 들었고 마법사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정도 병사들과 마법사의 거리가 생기자 나는 그에게 불화살을 대여섯개 쏘았고 마법사 뒤쪽에서 쏘았기 때문에 뒤늦게 불화살이 온다는 것을 안 마법사는 방어구를 형성할 겨를도 없이 말의 방향을 틀어 피했다. 덕분에 불화살은 애꿋은 길에 떨어져 폭팔만 일으켰고 마법사는 말을 길 옆에 세우게 됬다. 나는 천천히 마법사 앞쪽으로 내려갔다. 마법사는 내가 내려오자 꽤나 놀란듯 보였다. "이봐, 마법사양반. 실력이 높다는 것은 인정해줄테니 이제 그만 쫒아오지?" "네가 나에게 불화살을 날렸느냐?" "그런건 아무래도 좋지 않아?" "어린 나이에 대단한 실력이구나...." "어쩌겠어?" "병사들은 어떻게 한거지?" "마법사면서 그것도 몰라? 단지 잠재웠을뿐이야." "이대로 돌아가면 난 영주 부인을 뵐수 없을꺼야." "그건 당신 사정이지." "도대체 영주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한거지?" "아무짓도 안했어, 단지 패거리들을 좀 패줬을 뿐이지..." "그런가? 그래도 이렇게 그냥 돌아가면..." "아, 그냥 돌아가기 어렵다면 한방 먹여줄 수 있는데?" 마법사는 나를 한참동안 노려보더니 결국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너와 겨루면 내가 질걸 뻔히 아는데..." 그리고 그는 말머리를 돌려 성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대단해, 아힌. 마법사를 물리치다니." "저 마법사가 나보다 실력이 낮아서 그런것 뿐이야." "그럼 아힌이 실력이 더 높다는 거쟎아?" "당연하지." "이제 어쩔꺼야?" "이대로 갈수는 없지. 그 영주 아들녀석 한대 패주고 가야 속이 시원할꺼야." "그럼 쳐들어갈꺼야?" "쳐들어 가면 성가시고 지금 살짝 숨어 들어가자. 아직 밤이 그렇게 늦지 않았으니 시간은 충분해!" 류미엘과 나는 말을 근처 수풀속에 잘 매어둔 뒤 성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내가 성의 병사들을 잠재운곳에 가까이 왔을때 병사들이 아직 있을 줄 알고 긴장하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지만 잠재워 놨던 병사들과 말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고 많은 무리들이 있었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얼라? 여기다 재워뒀던 병사들이 어디로 갔지?" 그러자 무릎을 굽혀 땅을 살펴보던 류미엘이 말했다. "아힌, 이것봐. 땅이 온통 젖어있어. 여기뿐이 아니라 이 주위가 온통 젖어 있는데?" "아하, 물벼락을 내려서 병사들을 깨웠군..." "병사를 깨우다니?" "우리를 쫒아오던 병사들 말이야. 내가 여기쯤에다 마법으로 잠재웠었거든..." "그래서 병사들이 추격해 오지 않았던 거구나..." "마법사가 병사들을 이끌고 성으로 돌아 갔으면 성문은 닫혔겠군." "어차피 날아서 몰래 들어갈것 아니었어?" 류미엘이 나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자 나도 웃어보일수 밖에 없었다. "맞아." 우리는 성문이 보일때까지 계속해서 걸어갔다. 성문은 역시나 닫혀 있었고 성벽 위에는 보초병들이 보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높이 날아올라 성벽을 넘어 곧장 영주의 성으로 향했다. "아힌, 성에 가본적 있어?" 성에 거의 다왔을때에 류미엘이 갑자기 물어왔다. "아니, 한번도 없는데?" "뭐? 아니 그럼 영주 아들 방을 어떻게 찾으려고?" "들어가서 한사람 붙잡고 물어보지 뭐."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 "어떻게든 되겠지." "........낙천적이구나.." 처음으로 이런 일을 해보는 나는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이런거 보면 나도 아직은 철부지 인것 같았다. "와우, 되게 흥분되는걸?" "너도냐? 나두 무척 흥분돼. 하지만 좀 긴장되 되는걸?" 성에 도착한 우리는 성 높은곳에 나있는 테라스에 살짝 내려섰다. 안쪽으로 통하는 유리문으로 불빛이 나오면서 방안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류미엘과 나는 들키지 않게 테라스 유리문에 크게 달려있는 커튼의 그늘 뒤로 몸을 숨기고 방 안의 상황을 살펴 보았다. 방안은 넓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한쪽 벽을 다 채운 책장과 그 앞에 있는 커다란 책상, 그리고 그 앞쪽에 놓여 있는 소파들을 봤을때 서재 같아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화려하게 차려 입은 여인이 흥분해서 앞의 사람에게 말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묵묵히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아까 나와 대치했던 그 마법사였고 또 한사람은 갑옷을 입고 옆에 검을 차고 있는 중년 기사였다. 그리고 한쪽에 놓여있던 붉은 비단으로 씌운 소파에 앉아 사과를 와작와작 먹으면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은 우리가 찾고 있던 영주 아들이었다. "저 여자가 영주 부인인가봐. 그럼 저 기사는 호위대 대장쯤 되려나?" 류미엘이 낮게 나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 우리를 못 잡아서 깨지고 있는것 같은데?" "여자가 되게 앙칼지게 말하는군. 꽤 미인인데 저러니까 되게 표독스러워 보인다." "영주 부인쯤 되니까 예쁘겠지. 그나저나 운이 좋네. 찾기 힘들줄 알았는데 오자마자 영주 아들을 발견하다니..." "이제 어쩔꺼야?" "글쎄, 우선 저 마법사랑 기사가 나가야 겠지?" "그럼 영주 부인은?" "같이 혼내줄까?" "찬성이야. 아들이 버릇 없는 건 엄마 잘못도 크니까." "그럼 저 둘을 우선 잡아야지, 류미엘 너 방음 결계 칠 수 있지?" "응, 왜?" "저 마법사랑 기사가 나간뒤에 나는 재빨리 방문을 잠글테니까 넌 방음 결계를 방안에 치도록 해." "영주 부인이 가만히 있을까?" "내가 방으로 들어가면서 저 둘에게 정지 마법을 걸께." "그럼 마법사가 눈치채지 않을까? 마나가 흐를꺼 아냐?" "아, 그건 그렇군." "정령을 쓰는게 어때? 정령을 불러서 저 둘을 잡고 있으라고 하지 뭐. 그러면 마법사도 눈치 못챌꺼야." "좋은 생각이야. 너도 꽤 쓸모가 있군." "하하하, 이정도야 뭐 보통이지." 우리는 훌륭한 계획을 세웠다고 득의 양양 했다. 이제 남은건 기사랑 마법사가 나간 뒤 영주 부인과 영주 아들을 잡아서 혼내주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느라 소근거리다가 몰래 숨어있다는 것을 깜박하고 소리를 높힌 탓에 기사가 우리가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우리가 득의 양양하면서 안쪽 상황을 살피려고 눈을 돌리는 순간 기사가 테라스 유리문으로 몸통 박치기를 하면서 뛰어 나왔다. "꼼짝마랏!" 그와 동시에 마법사가 마법 무력화 결계를 펼쳤다. 그는 우리가 마법을 쓰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결계를 펼친 것이다. 우리가 마법을 쓰지 못하면 기사가 쉽게 우리를 제어할 수 있을꺼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게 있으니 마법사가 펼친 마법 무력화는 겨우 4 클래스였다. 나는 전혀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고 마법을 쓸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류미엘은 달랐다. "이런, 마법을 못쓰게 됐어." "너 4클래스 마법밖에 못쓰냐?" "응. 마법은 아직 4클래스 밖에 못한단 말야." 위쪽에서 우리가 소란스럽게 하자 밑에 있던 병사들이 위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걸 알고 달려오는게 보였다. "류미엘, 넌 방문을 막아. 난 기사를 막을테니까." 기사가 검을 빼어 들고 덤벼 오는것을 나도 검을 들고 막아서며 말했다. 류미엘은 재빨리 깨진 유리문을 통해서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런 그를 마법사가 막아섰다. 힐끗 영주 부인과 아들을 보니까 그들은 마법사와 기사의 실력을 믿는 듯 태평하게 한쪽으로 물러나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어디 누가 최후에 웃는지 두고 보자.' 기사가 나를 향해 내려친 검을 계속 막아내기에는 내가 힘에 부쳤으므로 그의 검을 살짝 옆으로 흘려버리고 나도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아무래도 좁은 테라스에서 싸우는건 힘들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건 기사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가져다 주는 거였다. 좁은 테라스에서는 그도 나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 불리한 조건에서 싸우는 거였고 여차하면 난 정령을 불러 내서 튀면 됐지만 서재 안은 넓어서 기사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준 거였기 때문이다. 그걸 안 기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직 초보로군..." 그리고 그 말고 함께 검을 들고 내게 돌진했다. 같이 맞부딧히면 힘이 좋은 기사가 유리하기에 나는 옆으로 물러섰고 그걸 노치지 않은 기사의 검이 나를 따라 왔다. 재빨리 검을 들어 기사의 검을 막아 섰지만 팔이 저릿저릿 해왔다. "좋은 반사 신경과 빠르기다." 기사는 후배 상대 하는듯 여유를 가지며 나를 칭찬했다. 그리고는 발을 들어 내 복부를 차버렸다. 나는 뒤로 한바퀴 굴르고 일어 났는데 배가 무지 아팠다. "우씨, 장난이 아니게 아프군..." 검으로만 상대할 수 없는 상대라는걸 깨달은 나는 정령들을 불러냈다. "카사. 실프!" 여긴 물이 없고 땅도 아니기에 노움과 운디네는 도움이 안될거라 생각한 나는 실프와 카사만 불러냈다. 내 주위에 카사와 실프가 나타나자 기사의 표정이 좀 더 신중해졌다. 아마 그는 이들이 정령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보다. 기사도 나에게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나도 기사의 실력을 알기에 덤비지 못하며 우리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을때 나는 머리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재빨리 기사를 향해 외쳤다. "정지!" 그러자 기사는 움찔 하더니 검을 들고 나를 노려보던 그 자세로 멈춰 버렸다. "진작 마법을 쓸껄...."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류미르쪽을 바라 보았다. 그도 이미 마법사를 때려 눕히고 서재 문에다 바리게이트를 쌓고 있었다. "어라? 빨리도 쓰러 트렸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는 일반 사람이랑 같으니까.." "아하. 아까 마법 무력화 결계 때문에 자신도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거군?" 류미르는 서재 문 앞에 쌓인 바리게이트 위에 소파 의자를 하나 더 쌓아 놓더니 씨익 웃었다. "흠, 이정도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겠지?" "그럼 이제 남은건..." 우리는 씨익 웃으며 구석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영주 부인과 아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때 영주 부인이 앙칼지게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우리가 누군줄 알고 이러는게냐?" "흠, 아힌 어떻게 할꺼야?" "여자와 어린 아이를 팰 순 없지 않겠어?" "그렇겠지?"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영주 부인과 아들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러자 바짝 긴장하는 두 모자... "이렇게 힘들게 들어 왔는데 그냥 가기 너무 섭하쟎아?" "아힌 저것봐, 영주 부인이 하고 있는 거, 다 보석 아니야?" "그치?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이 갈수 없쟎야?"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재빨리 영주 부인에게 다가갔다. 류미르가 그녀에게 공손히 말했다. "부인, 내놓으시지요." 그러자 그녀는 꼭 뭐 씹은 표정으로 우리를 쏘아 보며 귀걸이랑 목걸이랑 팔찌랑 반지를 내놓았다. "우와, 여자 하나가 하고 있는 악세사리가 꽤 많구나..." "흠, 이렇게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보답이 없을수 없겠지?" 류미르가 그녀에게 보석을 받아 챙기는 동안 난 뭘 저들에게 줄까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자 말했다. "여러분께 아주 재미있는 마법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우선 영주 부인, 부인의 너그러우신 마음에 감동하여 부인의 그 아름다운 코가 거짓말을 하면 조금씩 조금씩 길어지게 해드리지요. 일명 피노키오 저주라고 하는 마법입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착한 영주 아드님..." 나는 아주 사악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영주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흠칫하여 뒤로 물러났지만 책장이 가로막고 있어 더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당신에게는 타인을 때리면 그 아픔을 자신이 겪게 되는 저주를 걸어 드리지요. 이건 슬레이어즈의 리나양이 받은 저주랑 똑같답니다. 그런 유명한 레이디와 똑같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누구?" "아, 류미르 그런 사람이 있어. 넌 몰라도 돼." 그때 문 밖에서 쿵쿵 하는 무언가 큰 물체가 문에 부딧히는 소리가 났다. "호, 결국 문을 부수려고 하는것 같은데?" "그럼 우리는 이만 가자. 남의 집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도 실례야." 류미르가 땅에 떨어진 사과 하나를 집으면서 씩 웃었다. "우린 예의가 바르니까." "참. 저 기사양반 풀어드리고 가야지? 팔 무지 아플꺼야." 우리가 테라스로 나가서 내가 기사에게 건 주문을 풀려고 할때였다. 갑자기 위에서 커다란 물체가 떨어져 류미르를 덥쳤다. 그 바람에 류미르와 그 위에서 떨어진 물체는 데굴데굴 굴러서 서재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에구구, 이게 뭐야?" 몇바퀴를 구른 류미르가 신음을 내밷으며 말했다. 보니까 왠 소년 하나가 류미르와 엉겨서 쓰러져 있었다. "류미르, 얘가 떨어졌나봐." "도데체 어디서 떨어진거지?" "하늘에서 떨어지던데?" 그때였다. 계속 쿵쿵 거리며 문을 부수고 있던 것이 드디어 효과를 발하는듯 문이 쩍쩍 갈라지며 바리게이트가 흔들리고 위에 쌓아놓은 소파들이 떨어져 내렸다. "안돼겠다. 우선 여길 나가고 보자." "나좀 일으켜줘. 이녀석 때문에 일어설 수가 없어." 내가 류미르를 일으키려고 해도 그 소년이랑 이상하게 얽혀 있어서 도저히 류미르만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냥 가자. 이건 나중에 풀고. 우선 이녀석도 데리고 가야지." 문이 점점 부서지고 바리게이트가 무너지자 다급해진 나는 녀석들을 데리고 우리 말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아, 그 기사 마법을 풀어주지 않고 그냥 왔다. 괜찮을라나?" "거기도 마법사가 있으니 괜찮겠지. 그나저나 이녀석좀 풀어줘..." "얜 도데체 뭐지?" 나와 류미르는 낑낑 대며 녀석을 류미르에게로 부터 풀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 소년이 망토를 입고 있어서 그 망토가 류미르와 소년을 휘감고 있던 덕분에 더 풀어내기 힘들었다. 결국 소년의 망토를 벗겨 내고 류미르와 소년을 떼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도 그 아이를 주물러 댄 덕분에 류미르와 소년이 떨어지자 그 소년은 정신을 차렸다. "어라? 얘 깨어나네?" "이봐, 정신이 들어?" 소년은 주저 앉아서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듯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그 바람에 등까지 내려오는 그의 긴 검은 생머리가 휘날렸다. "여기가 어디?" "여기는 숲속이야. 숲 이름은 나도 몰라." 그 소년은 멍하니 나를 올려다 보면서 눈만 껌벅껌벅 댔다. 그 소년이 나를 올려다 보자 나는 그를 자세히 볼수 있었다. (아직 밤이지만 류미르가 빛의 정령을 불러내어 밝히고 있었으니까.) 그도 정말 류미르 못지 않게 잘 생겼다. 희고 티 하나 없는 피부에 가느다란 얼굴 선. 그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푸른 빛이 도는 칠흙같이 검은 머리.... "와, 이녀석도 꽤 미남이네. 야, 너 누구니?" "나? 난 세이몬 카르테일 아벨리아. 고위 마족 아벨리아 계의 서열 30위." "아힌, 얘 마족이래." "나도 들었어. 근데 마족이 원래 이런가? 마족은 그 뭐시냐 차갑고 교만하고 살육을 즐기고, 뭐 이런거 아니었어?" "글쎄, 나도 마족은 처음 보는거라...." "이봐, 너 왜 하늘에서 떨어진거냐?" 그러자 그 세이몬이라는 마족이 울먹울먹 하더니 나에게 달려들어 덥썩 안기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우왓, 이봐. 왜 이러는거야?" 글 번호 : 599 글쓴이 : 송명환 게시일 : 2000-07-07 , 12:32:23 AM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3화 동료를 만나다 (6) 번 호 : 9661 / 9680 등록일 : 2000년 07월 06일 22:49 등록자 : LODEMP 조 회 : 9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3화 동료를 만나다 (6) 녀석은 정말 서럽게 울어댔다. 그리고 얼마나 눈물 콧물을 흘려 대는지 내 윗옷이 축축하게 젖는게 느껴졌다. "이봐, 왜 우는거야? 안 때릴 테니까 그만 울어." 세이몬의 몸통 박치기를 당해 화가 나있던 류미르는 세이온이 울어대자 어쩔줄 몰라하며 당황했다. 그래도 우선은 울음을 그치게 해야겠다고 생각 했는지 옆에서 왔다 갔다 안절 부절 못하면서도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류미르의 달래는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세이몬은 더욱 더 큰 소리로 울어 제꼈다. "자, 자. 그만 울어. 착하지? 뚝!" 결국 내가 나섰다. 나는 세이몬을 토닥토닥 두드려 준 뒤 똑바로 앉히고 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세이몬의 울음 소리도 작아 졌다. "에구, 착해라. 자 코도 풀고, 흥! 해야지." 세이몬이 흥! 하고 코를 풀자 옆에 있던 류미르가 말했다. "아힌, 그 수건 네가 빨아." 세이온이 조금씩 울음을 그쳐가자 류미르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왠지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야, 너 마족이지? 마족이 그렇게 울어대냐?" "마족은 울면 안돼냐?" 류미르의 말이 퉁명스럽자 세이몬도 훌쩍훌쩍 대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세이몬이라구 했지? 그 성에 왜 간거야?" "일부러 거기로 가려고 한건 아니었어. 훌쩍.... 그냥 어쩌다 보니까 훌쩍, 거기로 떨어진거지 훌쩍!" "어쩌다 보니까~~아?" 류미르가 옆에서 끼어 들었다. "어쩔수 없었단 말야 흐끅, 마계에서 차원 이동을 하는데 흐끅, 너무 급하게 하느라구 흐끅, 아무데나 한거라구 흐끅." "마계에서 왔다구?" 내가 놀라서 물었다. "응 흐끅, 아까도 말했지만 흐끅, 난 고위 마족 아벨리아 족이야 흐끅." "누가 널 고위 마족이라구 생각 하겠냐?" "누군 고위 마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줄 알아? 훌쩍, 나도 흐끅, 알구 있다구 훌쩍, 내가 흐끅, 고위 마족이 흐끅, 될 흐끅, 성격이 아니라는거." 감정이 격해졌는지 다시 울려고 했다. 그래도 류미르에게 지기는 싫었는지 할 말은 다했다. "헹, 잘 아네." "그만좀 해라. 세이몬 울지마. 착하지? 근데 여기는 왜 온거야?" "흐끅, 난 서열이 제일 꼴찌인데 흐끅, 서열 높은 마족들이 훌쩍, 하아~, 나보고 아벨리아 족 망신 다 시킨다고 흐끅, 없애버릴려구 하쟎아. 훌쩍, 쫒기다가 급해서 절벽에서 뛰어 내리면서 흐끅, 하아~, 차원 이동을 한거야." "나라도 너 같은게 친척이라면 창피했을꺼야." 그러자 세이몬이 류미르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 엘프 주제에..." "뭐라구? 이래뵈도 난 하이 엘프라구, 너 따위 멍청한 마족은 내 상대도 안돼!" "호오, 류미르. 너 하이 엘프였니?" "허걱, 아니 아힌, 그게 숨기려고 한게 아니고.... 그러니까 저기...." "됐어. 됐으니까 이거나 빨아와." 그러면서 난 세이몬이 눈물 콧물 다 닦아낸 수건을 내밀었다. 류미르는 처량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냇가를 찾아 터덜터덜 걸어 갔다. "이봐, 세이몬. 그럼 그 서열 높은 마족들이 너를 죽이러 여기로 올까?" "그건 모르겠어. 어쩌면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것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마족이 절벽에서 떨어 졌다고 죽겠어?" "그래도 혹시 나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글면 이제 어쩔꺼야? 계속 인간계에 있어야 겠네?" "당분간은.... 하지만 뭘 할지는 모르겠어. 갑자기 이곳에 왔기 때문에.... 여긴 처음 와보거든..." 세이몬은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그런 모습이 너무 처량하게 보엿다. "우선은 불부터 피워야 겠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벌써 새벽이잖아? 새벽 공기가 꽤 쌀쌀하군." 나는 몸을 한번 부르르 떨어 찬 기운을 몰아내고 일어서서 마른 나뭇가지를 적당히 모아 왔다. 그리고 땅을 파서 흙을 드러내게 하고 나뭇가지를 놓고 불을 붙였다. "운디네, 미안하지만 여기에 물좀 담아 줄래?" 주머니에서 주전자를 꺼내 운디네에게 부탁했다. 운디네는 알았다는듯 싱긋 웃었고 곧 공기중에서 물방울들이 모여 들어 주전자 안으로 떨어졌다. 나는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 놓고 아직도 저쪽에 주저 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는 세이몬을 끌어다가 모닥불가에 앉혔다. 그러자 빤 수건을 들고 류미르가 나타났다. "이게 뭐야? 저녀석 때문에..." "류미르, 저녀석 말야, 잘 생겼지? 거기다가 고위 마족이면 실력도 있을 꺼고..." 류미르가 의아한듯 날 바라보다가 앗 했다. "뭐야, 아힌. 설마 너 저녀석을 우리 의적단에 끼워 주자는건 아니겠지?" "바로 그 설마야." "말도 안돼, 저런 멍청한 녀석을 어디다 써먹어?" "난 멍청하지 않아!" 그때까지 모닥불만 쏘아보고 있던 세이몬이 외쳤다. "둘다 그만해. 그리고 세이몬은 류미르 네가 말한 우리 의적단이 될 조건에 딱 맞쟎아. 거기다 세이몬이 들어오면 네 부하가 생기는 거라고." '부하'라는 말에 류미르는 생각해 보는 눈치였지만 세이몬은 죽각 반발했다. "누가 저녀석의 부하가 된대?" 나는 사~악하게 씨익 웃으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세이모~~온? 너 갈데 있니?" 그러자 세이몬이 잠시 흠칫 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저녀석 부하가 되는건 싫어." "시끄러. 지금 네가 우리 의적단에 들어오면 신참이쟎아. 신참을 부하시키지 대장 시키는게 어딨어?" "그래도..." "그럼 우리와 헤어질래?" 은근히 말 듣길 강조하는 말투, 아 난 역시 너무 사악해.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넌 됐고. 류미르, 넌 어때?"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는 듯한 류미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저 멍청이를 교육 시켜야 한다는 것이 걸리지만, 우리 의적단에 들어올 자격은 있는것 같으니까..." "흠, 그럼 결정된거다. 이로써 우리 의적단은 3명이군." 그러자 세이몬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엑? 이게 다야?" 그러자 류미르 왈 "멍청하긴, 우리 능력이라면 이정도면 충분한거야." "아, 그렇구나..." "그럼 차 한잔씩 할까? 마침 물도 끓는데?" 아린이야기 - 제 14화 산적 털기(1) 번 호 : 9714 / 9726 등록일 : 2000년 07월 07일 22:18 등록자 : LODEMP 조 회 : 7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제 14화 산적 털기 (1) 제 14화 산적 털기 새벽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 잠이 든 우리는 한 낮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물론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씻고 윗 옷을 갈아입고(어제 세이몬이 내 옷에다 눈물 콧물 다 흘렸지만 그들 앞에서 갈아 입지 못해 그대로 입고 자야 했다. 으 찝찝해....) 왔을 때 까지 자고 있었다. 한 침낭에서 사이좋게 자는 걸 보니 잠들 무렵에 투닥거린 일이 생각났다. 침낭 문제로 투닥 거렸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침낭이 두개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나는 내가 쓰고 나머지 하나는 여유분으로 가지고 다니다가 류미르를 만나서 줬던 것이다. 그러니 세이몬이 사용할 침낭이 없었다. (세이몬이 가지고 있을리는 없고....) 결국 난 둘에게 같이 자라고 했지만 그 두 녀석은 같이 자려고 하지 않았다. 류미르가 나와 세이몬이 같이 자는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지만 난 딱 두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두목이 부하랑 자는거 봤어? 부하끼리 자야지." 그래서 둘은 또 투닥투닥 했고, 졸린 나는 거절하는 녀석은 불침번을 세운다고 협박해서 그제야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둘은 침낭에 들어가서도 투닥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 하지 않고 그냥 잤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거야....' 라면서... 내가 일어난 뒤 한참이 지나도 그 둘이 깨어나지 못하는거 보면 꽤 투닥거리다 잔 것 같았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그 둘이 일어나기 전에 아침을 준비하려고 냄비와 후라이 팬을 꺼내 들었다. '이것도 부하 시켜야 하는거 아냐? 에이, 아무렴 어때. 힘든것도 아니고 배 고픈데, 저녀석들 일어나길 언제 기다려?' 그런데 요리 하려고 보니까 재료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전 마을에서 소동을 일으킨 덕분에 짐하고 말만 챙겨서 냅다 튀었던 것이다. '이런이런, 아침 굶게 생겼쟎아? 성에서 좀 가져올껄.... 하는 수 없지. 다음 마을이 여기서 얼마나 멀지?' 지도를 펼쳐보니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도시까진 지금 출발해도 빨라야 한밤 중이 되어서야 도착할 것 같았다. 그나마 상업이 번창한 나라여서 하루 달리면 도착할 거리에 마을이 있었지만 그래도 굶고 갈 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야, 일어나봐. 류미르, 세이몬. 일어나라니까?" 결국 사냥을 해야겠다 싶어서 아직까지 자고 있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깨웠다. 한참 침낭을 흔들어 댔더니 녀석들이 눈을 떴다. 너무 흔들어 댔는지 류미르는 머리를 손으로 집으며 일어났다. "으음, 아힌 그만좀 흔들어, 깼단말야." 그러나 세이몬은 그래도 졸린지 침낭 속으로 더 파고 들었다. "아, 졸려. 난 더 잘래." "이봐, 세이몬, 일어나." "우씨, 왜 깨우고 그래?" "둘다 빨랑 일어나. 지금 한낮이라구." "그게 어때서. 어제 늦게 잤쟎아?" 세이몬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으면서 말했다. "여기서 하루 더 보낼수는 없쟎아? 그리고 우리 식량도 다 떨어졌단 말야." "후아암~, 그럼 마을에 가서 사와야 하나?" 류미르가 하품을 하면서 건성으로 말했다. "멍청한 소리 하지마 류미르, 우리가 그 마을에서 도망쳤는데 다시 어떻게 가냐?" "어, 맞다. 잊고 있었다. 그럼 사냥을 해야 하나?" "맞아. 그러니까 빨리 씻고 짐 챙겨, 사냥하러 가게." 계속 게으름을 피우는 세이몬을 닥달해서 우리는 짐을 챙겼다. "사냥하러 가는데 말은 어떻게 하지?" 세이몬이 말을 챙기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데리고 가야지, 여기다 놓고 갈 수는 없쟎아?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그리고 다시 여기로 올수는 없으니까." "숲으로 갈텐데 말이 있으면 귀찮지 않을까?" 류미르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걱정 마. 말은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너희 둘이 사냥을 해. 그럼 되지?" "엑? 이녀석이랑 나보고 사냥을 하라구?" "왜, 뭐가 어때서? 류미르 너 사냥 못해?" 세이몬이 눈을 껌뻑껌뻑하며 물었다. 그러자 류미르는 그러는 세이몬을 째려봐 준뒤 나에게 말했다. "차라리, 나 혼자 갔다 올께. 사냥 가면서 이녀석까지 어떻게 챙겨?" "무슨소리야? 나도 사냥 할 수 있어." 류미르가 혼자 갔다 온다는 말에 세이몬이 발끈했다. "너, 사냥을 해 본 적이 있기나 해?" "이래뵈도 마물을 여러마리 사냥 했단 말야." "해봤다쟎아. 그리고 나도 같이 갈꺼니까 너무 걱정 마." "말을 돌몬다며?" "말을 끌고 가다가 사냥감이 나타나면 너희 둘은 잡고 난 말을 지키고 있고." "그게 뭐야?" "뭐긴 뭐야, 그렇다는거지. 이제 슬슬 출발하자. 이러다 사냥도 못하고 날이 저물겠다. 류미르, 네가 앞장 서." 류미르는 잘 보라는 듯 세이몬을 힐끗 보고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 내어 길을 안내 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앞장 서서 정령을 따라 갔고 그 뒤로는 세이몬이 그리고 맨 뒤로 내가 말들을 끌고 따라갔다. 한참을 수풀을 헤치며 숲으로 들어가자 세이몬이 투덜 거렸다. "뭐야, 사냥감이 하나도 안 보이쟎아? 이거 제대로 가는거 맞아?" "정령이 안내 하는 거니까 제대로 찾아 가는게 맞을꺼야." 류미르의 머리에 힘줄이 하나 솟아나자 나는 둘이 또 싸울까봐 재빨리 류미르보다 먼저 말했다. "근데 어떻게 지금까지 한마리도 보이지 않지?" "이 숲은 아마 길 근처에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왔다갔다 거리니까 동물들이 깊은 곳에 있지 않을까?" "아 그렇구나...." 그때 류미르가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에게 낮게 말했다. "사슴이야." 그러자 세이몬이 신나서 나섰다. "저게 사냥감이야? 약하게 생겼네? 이제 내게 맡겨. 내가 마계에서 마물을 잡던 솜씨를 보여 줄께." 그러며 자신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힌, 저거 그냥 둬도 괜찮을까?" "나둬보지뭐, 솜씨도 볼겸...." "불안해...." 류미르의 불안은 적중했다. 자신있게 앞으로 나선 세이몬을 눈치채고 도망치는 사슴을 향해 세이몬은 강한 바람의 칼날들을 날렸고 그 칼날들은 여지없이 도망치는 사슴에게로 날아가 조각조각 내버렸고 덤으로 그 옆으 나무들까지 베어버렸다. 사슴이 조각조각 분해된 데다가 그 위로 나무들까지 쓰러지자 황당해진 우리는 멍하니 바라 보았다. 그런 우리를 돌아보며 세이몬은 눈까지 찡긋해 보이며 말했다. "어때? 내 솜씨가.." 나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류미르가 대꾸해 주었다. "이, 이 멍충아~~~~~~~~~~~~" 화가 무척 나 보이는 류미르는 세이몬에게 척척 걸어가서 꿀밤을 한대 먹였다. "우씨, 왜때려?" 머리에 예쁘게 볼록 솟아난 혹을 부여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류미르를 노려보며 세이몬이 소리쳤다. "이 멍청아. 그렇게 사슴을 조각조각 낸 것도 모자라 주위 나무까지 쓰러 뜨리면 사슴고기는 어떻게 찾냐? 그리고 사슴을 뭐하러 저렇게 조각 조각 절단낸겨? 그냥 간단히 죽일수 있었쟎아?" "저게 너무 약했단 말야. 저정도로 저렇게 될줄 누가 알았어?" 그랬다. 세이몬은 마계에서 강한 마물들만 사냥해 보았기 때문에 이 곳의 동물들이 마물들에 비해 얼마나 약한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 "우씨, 몰랐단 말야." "척 보면 모르냐?" "마물들은 저만해도 바람의 칼날 정도면 상처만 입는다구, 누가 저정도로 약할줄 알았어? 난 저런것도 처음 본단말야."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나서기는 왜 나서?" "우씨....." 둘이 투닥투닥이며 싸울동안 나는 사슴이 분해된 지점으로 가 봤다.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가지가 무성한데다 대 여섯개가 쓰러져 있었고 더욱이 사슴이 너무 조각조각 났기 때문에 거기서 고기를 얻을 수는 없을것 같았다. "흠, 다음 사냥물을 찾아야 할것 같은데?" 내가 류미르를 바라 보면서 말하자 류미르는 투덜투덜 대면서 다시 앞장 섰고 그 뒤로 기가 죽은 세이몬이 따라갔다. "괜찮아. 그런거 보면 너도 꽤 능력이 있구나?" 너무 축 처진게 안됐어서 말을 걸어 줬다. "이정도는 마계에선 강한 축에도 못껴." "됐어. 거긴 마계고, 여긴 인간계니까. 여기선 너 무척 센거야. 그러니 다음 부터 동물을 사냥할때는 마력을 아주 약하게 해서 쓰도록 해. 그리고 만약 사람이랑 싸울때면 내가 쓰라고 하기 전엔 마력은 쓰지 말도록 해. 쓰더라도 아주 약하게. 알았지?" "웅, 근데 사람이 뭐야?" "사람? 아, 너하고 나처럼 생긴 생물을 사람, 혹은 인간이라구해." "오, 우리처럼 생긴 생물을 인간계에선 사람이라구 하는구나. 근데 마족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왜 인간이라구 하지?" "마족은 마계에 살고, 인간은 인간계에 사니까." "그렇구나...." "참, 그리고 인간은 대부분이 마력을 사용하지 못해. 단지 일부분이 사용할 뿐이지. 그런 사람을 마법사라고 해." "으응." "뭐, 또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건 나중에 천천히 배우면 돼니까. 그러고 보니 넌 인간계엔 처음 왔지?" "응." 그때 류미르가 또 뭔가를 발견한 듯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의 손짓만 하고 자신 혼자 나서는걸 보니 이번에는 직접 자신이 잡으려는것 갔았다. "여기서 류미르의 솜씨나 보자구." 자기도 나서려는 세이몬의 어깨를 툭 쳐서 나서는 것을 저지하며 내가 말했다. 류미르는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가더니 재빨리 숲속으로 더 들어갔다. 덕분에 우리에게는 류미르가 나무와 덤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뭐야? 보이지 않쟎아?" 세이몬이 투덜 거렸다. "어쩔수 없지 뭐. 여기서 기다리라는데 기다려야지. 우리가 가까이 가면 사냥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때 숲 안쪽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저런, 멧돼지를 잡았나 보다." 그리고 잠시 후에 류미르가 성인이 된지 얼마 안됐는지 그리 크지 않은 멧돼지를 들쳐 매고 나타나더니 우리 앞에 내려 놓았다. "이정도면 한끼는 해결 되겠지?" 내려놓은 멧돼지는 정확히 턱 밑 목에 단검이 찔려 있었다. 그 이외에 별다른 상처가 없는것을 보니 한방에 보낸것 같았다. "칫," 류미르의 의기 양양한 표정을 보자 화가 났는지 세이몬이 칫칫 거렸다. "얼른 구워먹자.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가만있자 이 근처에 냇가가 어디 있지?" "아, 내가 오면서 운디네에게 물어 봤는데 저쪽으로 더 가면 있다던데?" "그래? 그럼 거기로 가서 구워먹자." "내가 안내하지. 세이몬 이것좀 들고 따라와." "내가 왜?" 부루퉁한 세이몬이 대꾸했다. "너가 가장 힘이 센것 같으니까." 내가 부드럽게 대답하자 세이몬은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손으로 멧돼지 앞다리를 하나 잡고 달랑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류미르의 안내를 받아 냇가로 가서 류미르와 세이몬이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꺼내는 동안 나는 말들을 묶어 놓고 나뭇가지를 모아 두 군데다 불을 지폈다. 그리고 냄비를 꺼내 물을 담그고 한두개 남아있던 감자와 홍당무를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다음 고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류미르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왜그래? 무슨 일이야?" 황급히 그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세이몬이 뭔가를 먹으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류미르를 바라보고 있었고 류미르는 그런 그를 마치 야만인을 본다는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왜그래?" 내가 다가가서 말하자 류미르가 세이몬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 말했다. "이녀석이 심장을 그냥 먹었어." "뭐?" 그러자 세이몬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그래? 아힌, 너희한테 주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그럼 너희는 허파랑 간을 먹으면 돼잖아?" "그게 아니라 불에 익히지 않고 그냥 먹어서 그러는 거야. 그러다가 배탈 나면 어쩔려구 그래?" "우리는 그냥 먹었는데?" "여기선 모두 익혀 먹어. 그러니까 너두 여기서는 익혀서 먹도록 해."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우씨, 그냥 시키는 대로 해!" 계속 세이몬이 쩝쩝 거리자 류미르가 소리를 빽 질렀다. "괜히 소리지르고 그래, 알았어 이제부터 익혀 먹으면 돼잖아." 한숨이 푹 나왔다. 세이몬에게는 가르쳐야 할 것이 많구나... 라는걸 새삼스레 느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한쪽 불에는 멧돼지 스프를 끓였고 나머지 한쪽 불에는 멧돼지 고기를 나무 꼬챙이에 꽂아서 불에 구웠다. "아힌, 저 가죽은 어떻게 하지?" 류미르가 나에게 물었다. "그냥 버려. 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쟎아? 팔기도 그렇고..." "그렇지?" 류미르는 그렇게 대꾸하며 저 쪽 수풀에다 가죽을 집어 던져 버렸다. 세이몬을 바라보니 멧돼지 고기가 익어가는걸 바라 보면서 침을 꼴깍 꼴깍 삼키고 있었다. "저녀석 이런거 처음 보나?" 그런 세이몬을 바라 보다가 피식 웃으며 류미르가 말했다. "그렇겠지. 그러고보니 세이몬을 만나서 처음으로 같이 식사를 하는 거네?" "그렇군, 만난지 오래 된것 같았는데 겨우 하루 지났군." "음, 그런데 류미르?" "왜?" "그릇하고 숟가락이 하나씩 모자라." "뭐?" "그러니까 너가 나무좀 깎아서 대충 만들어줘. 에휴, 다음 도시에 가면 살게 많군. 참 컵도 없으니까 컵도 만들어." "뭐? 어제는 우리 셋이 차를 같이 마셨쟎아?" "그때 그릇에다 마신거야." 류미르는 투덜투덜 거리며 굵은 나무를 구해와 세이온 옆에 털썩 앉아서 깎기 시작했다. "어? 류미르, 뭘 만드는 거야?" "너 그릇이랑 숟가락." "그릇? 숟가락? 그게 뭐야?" "저기서 아힌이 끓이고 있는 스프를 떠 먹는거." "아힌이 지금 만드는게 먹는거야? 음 그렇구나. 그럼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어?" "그래." "호, 나 이렇게 먹는거 처음이야. 맛있어?" "꽤. 특히 아힌은 요리는 괜찮게 하니까." "요리?" "이렇게 음식 만드는걸 요리 한다고 해." "그렇구나...그럼 류미르는 요리 잘해?" "나? 난 잘 못해. 보통 요리는 아힌이 다 해." "그럼 류미르는 뭐해?" "설것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그릇이랑 숟가락 같은걸 깨끗하게 씻지." "음, 그럼 난 뭘해?" "너? 너두 나랑 같이 설것이 해야지." "그렇구나. 알았어. 음식 다 먹으면 하는거지?" "되게 신났구나." "이런거 처음 해보거든, 잼있어." "그래? 그럼 너가 나중에 다 해라." "왜? 류미르는 안해?" "너에게 기꺼이 양보할께." "양보할 사람한테 양보해라. 할줄 모르는 애한테 시키면 어쩌자는거야?" 류미르의 못된 말을 들은 내가 한마디 했다. "잼있다는애한테 시키는게 어때서?" "쟤가 제대로 씻을수 있겠어? 시킬려면 제대로 가르키고 시키던지." "아, 그렇군..." "다 깎았냐? 스프가 거의 다 끓어 가는데?" "아, 대충 깍으면 되는거지? 다 됐어." 류미르는 정말 대충 깍아서 투박한 그릇과 컵을 내게 던져주며 말했다. "으이그, 좀 정성들여 깍을것이지..." "왜그래? 어짜피 도시에 가면 새로 살거쟎아?" "그야 그렇지만..." "한끼 먹을거 그정도면 됐지 뭐." 난 쓴 웃음을 지으며 스프를 떠서 세이몬과 류미르 에게 건네 주었고 류미르는 다 익은 고기 꼬챙이를 집어 나와 세이몬에게 건내줬다. 세이몬은 맛있다. 맛있다를 연발하며 음식을 먹어댔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류미르와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녀석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걸?" 류미르가 살짝 나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동료 삼기 잘 했지?" "뭐, 그건 두고 봐야지." 식사를 끝내고 류미르와 세이몬은 설것이를 했다. 세이몬은 무척 잼있어 했지만 설것이를 잘 하지 못했기에 다음 설것이도 류미르와 같이 하라고 했기에 류미르는 나에게 투덜댔다. "역시 멍청해." ------------------------------------------------------------ 오늘 비천무를 봤습니다. 원작도 슬프고 영화도 슬프더군요 아침 첫 상영에 갔는데 사람도 많더라구요.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영화 보면서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으 쪽팔려....) 액션이나 배경은 정말 끝내주더군요. 넘넘 멋있었어요. 그리고 김희선도 정말 예쁘던데요? 번 호 : 9641 / 9642 등록일 : 2000년 07월 08일 23:20 등록자 : LODEMP 조 회 : 1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4화 산적 털기 (2) 저녁을 다 먹고 치우자 날이 저물어 어두워 졌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하루 더 보내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어제 남은 고기로 식사를 하고 출발했다. 말 역시 두마리 밖에 없었기에 한마리에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탔다. 류미르와 나는 말을 타는것이 익숙해 있었지만 세이몬은 말을 탄다는 것에 무척 신기해 했다. 우리는 점심 먹을 것이 없었기에 사냥을 해서 먹기 보다는 한 끼를 굶고 빨리 달려서 성에 도착하기로 결정하고 빠르게 말을 달렸다. 그렇게 달려서 그렇게 늦지 않는 저녁때에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세이몬이 무척 배가 고팠는지 배고파를 연달아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세이몬의 이런 모습을 보며 킥킥 웃자 류미르가 얼굴이 붉어지며 세이몬에게 한마디 했다. "너만 배고픈거 아니니까 떠들지마. 창피하게...사람들이 쳐다 보쟎아." "배가 고픈걸 어떻게해?" "둘다 그만하고 여관이나 잡자고, 그럼 저녁을 먹을 수 있쟎아." 나는 또 티격티격 하려는 둘을 말리면서 저쪽으로 보이는 여관겸 식당으로 앞장서서 갔다. "어서옵쇼." "여기 새끼 통돼지 구이 하나하고 빵하고 스프 3인분, 그리고 먼저 맥주 3잔." 자리를 잡고 앉아 재빨리 주문부터 했다. 식사 먼저 하고 방을 잡으려는 생각 이었다. 아직 그리 늦지 않은 저녁때여서 그런지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우리들처럼 여행객들로 보였고 더러는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봐 아힌, 왠지 여행객들이 많네." "너도 그렇게 생각 했어? 용병들도 꽤 있는걸 보니 무슨 일이 있나 본데?"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세이몬이 끼어 들었다. "자 봐, 저 사람들, 옷들이 두껍고 간편하지만 낡아있고 먼지가 많지? 그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모험가이기도 하지. 그런 사람들은 상금이 걸렸거나 아니면 보수가 많은 단편적인 일을 찾아다녀. 저기 저 등치 좋고 옆에 무기를 두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저런 사람은 용병 이라고 하는데 싸우는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이야. 보통 모험에 참가 하거나 아님 상인들 경호나 전쟁 같은 걸 해주고 먹고 살지.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걸 보면 여기 이 마을에 저 사람들이 흥미를 일으킬 만한 일거리가 있다는 뜻이야. 그런 일거리라는게 보통 험한 일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 되는 거지." 오~ 처음으로 류미르가 세이몬에게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 해주었다. "호, 류미르, 너도 인간 세상에 나오는건 이번이 처음 아니었냐? 그런데 꽤 잘 아네?" "인간 세상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거든..." "그래? 엘프에게 인간 세상에 대한 책이 있나보구나?" "당연히 있지. 우리 한테는 세상 모든 종족에 대한 자료가 있다고, 더욱이 인간이면 자세히 알 만큼 있어." "마족에 대해서는?" 세이몬이 냉큼 물어왔다. "마족에 대해서는 별로 없어. 우리가 마계로 갈 것도 아니고 마족이 또 인간계로 오는건 극히 드물기 때문에..." 그때 마침 점원이 맥주와 빵과 스프를 날라 왔기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여긴 여행객이나 용병이 많군요?" "아아, 산적 때문이예요." "산적이요?" 류미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물었다. 저녀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여기서 켈튼 국으로 가는 쪽에 산이 하나 있는데 한 일년 전부터 그 산에 산적이 생겼지 뭡니까? 이 도시 시장님이 몇번 토벌대를 보냈긴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 했지요. 아 놈들이 그만큼 숫자도 많고 실력이 뛰어 나니까 덕분에 이곳으로 오는 상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산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시장님이 큰 상금을 내 거셨지요." "호오, 그래서 저 사람들은 이번 산적 소탕군에 참여하려고 모여든거군요." "그런 셈이지요. 이번에는 상금도 큰데다 또 모여든 용병들도 꽤 되고 실력도 높대요. 그래서 이번에는 기대를 걸고 있지요." "언제 떠나나요?" "2틀 뒤에 떠난다는군요. 이번에 또 특별히 시장님이 사람을 보내서 마법사랑 기사를 모셔 온대요. 그 분들이 오셔야 떠난다는군요." "그럼 그 마법사랑 기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네요?" "내일쯤 도착 한다는 군요." "어? 마법사랑 기사가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다는걸 산적들이 알면 그들을 가만 두지 않는거 아니예요?" 세이몬이 머리를 갸웃 하면서 물어왔다. 호, 저런 생각도 할줄 알고. 세이몬도 머리가 돌아가는걸? "가만두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그분들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점원이 가버리자 류미르가 말했다. "나도 세미몬과 생각이 같아. 아무리 그들 실력이 뛰어나도 그들이 여기 와서 용병들과 같이 쳐들어오길 기다리는 거 보다 그들이 여기 도착하기 전에 습격하겠는걸?" "하지만 말야. 시장도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뭐야, 그럼 딴 생각이 있다는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단지 우리도 이렇게 쉽게 생각 해내는걸 시장도 모를리가 없다는 거지." "그냥 새어 나온 말일수도 있쟎아?" "그 반대일수도 있지 않아? 일부러 소문을 내는거. 그런 사람들은 있지도 않거나 아니면 미리 와 있다거나 아니면 그들이 모르는 다른 길을 통해서 온다거나 하는거 말야. 아님 저 사람 말대로 정말로 실력이 뛰어나서 당당히 산적 집 옆을 스쳐 지나도 무사하다거나..." 그러자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세이몬이 말했다. "하지만 실력이 그렇게 뛰어 나다면 뭐하러 다른 사람들을 모집해? 차라리 그 마법사하고 기사만 불러서 처리하면 돼잖아?" "그것도 그렇네? 그럼 일부러 소문을 내서 산적들을 겁먹게 하려는거 아냐?" "몰라.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하도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아파진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상관이냐니? 우린 거기에 참석 안할꺼야?" 류미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왜?" 나는 류미르를 황당해서 쳐다 보았다. "왜냐니? 산적을 소탕 한다쟎아?"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산적은 나쁜 사람들이쟎아? 그런데 이런 일을 우리가 그냥 지나쳐?" "마법사에 기사, 그리고 저 많은 용병이면 충분하지 않아? 그리고 난 단체로 가서 싸우는건 질색이야." "그럼 그냥 갈꺼야?" "어떻게 그냥가? 산적 소탕 끝나고 가야지. 가다가 산적 만날일 있어?" 그 뒤로도 류미르가 뭐라구 뭐라구 말을 해댔지만 나는 무시해 버리고 앞에 놓인 음식을 먹기만 했다. 나중에 제풀에 지친 류미르는 나를 째려보면서 한마디 했다. "그러고도 의적이냐?" 그래서 나도 한마디 해줬다. "의적이 산적 소탕하는거 봤냐?" 그러자 류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하긴 의적도 산적도 다 비슷한(?) 종류의 직종이니까. 식사 후에 우리는 방을 세개 구하려고 했지만 산적 소탕한다고 용병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도 침대 하나인 방 하나. 그래서 그 방에서 나는 침대에서 자고 류미르와 세이몬은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잤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우리는 세이몬의 물건을 사러 나갔다. 세이몬의 말과 그릇, 그리고 침낭을 사려고 돌아다니는데 거리가 씨끌씨끌 했다. 슬쩍 말을 들어보니 어제 그 점원이 말했던 마법사와 기사 일행이 새벽에 도착했다는 거다. "흠, 무사히 도착 했네? 그럼 내일 산적 소탕하러 떠나겠군." 내가 중얼 거리자 세이몬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언제 떠나?" "우리는 산적 소탕한 다음날쯤 떠날꺼야." "그것도 산적 소탕이 성공하면 말이지만." "아냐, 성공 못하더라도 갈꺼야. 여기 있어봤자 돈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거쟎아." "뭐야? 그럼 오늘 떠나도 되잖아?" "류미르, 왜 오늘따라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 오늘 가면 산적들이 자기네 소탕하러 오는 사람들을 대비해 잔뜩 준비하고 있을텐데 그럼 귀찮아 지잖아. 차라리 성공하든 못하든 산적 소탕한 다음이면 그들도 전력이 떨어졌을테니 그때 가는게 났지." 세이몬의 물건을 사고 도시 구경을 하면서 시장에서 점심을 사먹다가 저녁 쯤에나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에는 어제보다 더 많은 용병들이 보였다. 아마 오늘 더 용병들이 왔나보다. "우와, 어제보다 사람이 많아졌쟎아?" 세이몬이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며 감탄했다. 우리는 식당에 자리가 없어서 방으로 올라가서 식사를 했다. "얘들아, 세상에서 제일 잼있는게 쌈 구경이겠지?" 내가 불쑥 말하자 류미르가 의하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거야?" 내가 산적 소탕에 끼지 않는다고 해서 별로 감정이 좋지 않던 류미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류미르는 쳐다보지도 않고 나는 세이몬에게 말했다. "세이몬, 우리 내일 산적 소탕하는데 뒤따라 가서 싸우는거 구경하지 않을래? 너도 인간들이 싸우는거 한번도 못 봤쟎아?" "응, 구경하고 싶어." 세이몬이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며 대답하자 류미르가 말했다. "야만인들, 도와주지는 않을 망정 그 잔인한 광경을 구경 하러 가겠다고?" "류미르, 싫으면 말아. 나랑 아힌이랑 갔다 올께." 신이 나서 눈이 반짝반짝한 세이몬이 류미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자 류미르가 삐졌다. "칫." "그렇게 삐지지 말고 너도 따라 나서, 너 내일 할일 있어? 도시 구경은 오늘 했겠다, 내일 너 혼자서 뭐 할꺼야? 괜히 고고한척 하지 말고 같이 가. 너 날나리 엘프인거 다 아니까." "누가 날나리라는 거야?" 번 호 : 9643 / 9649 등록일 : 2000년 07월 09일 22:47 등록자 : LODEMP 조 회 : 1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4화 산적 털기 (3) "날나리가 뭐야?" 류미르에게 한마디 더 말해주려다가 세이몬이 중간에 순진하게 물어오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엘프답지 않은 구석이 많다는 것이야." "흠, 그럼 나도 날나리 마족인가?" 그러자 류미르가 한마디 했다. "넌, 날나리가 아니라 멍청한 마족이야." "우씨..." "자, 둘다 그만하고 류미르 갈꺼지?" "그래, 알았어." 류미르는 하는 수 없다는듯 대답해서 쬐께 기분은 안 좋았지만 어째든 나도 처음 집단 싸움 구경하러 간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어서 잠이 안 왔다. '흐, 영화나 TV로만 보던 싸움 구경 할수 있게 생겼네...' 다음날 아침 식당에 밥먹으러 내려 가려고 했다가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방으로 갖다 달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부탁하려고 내려갔는데 식당안에 사람이 거의 없고 점원들은 부지런히 식탁위를 치우고 있었다. "어라? 사람들이 없네?" 그러자 한 점원이 아는체를 해왔다. "이제 내려 오셨어요?" "사람들이 거의 없네요?" "아, 벌써 아침 드시고 가셨어요. 왜 오늘 출발하쟎아요? 아침 일찍 집합이라서 일찍 드셨거든요." "그래요? 그럼 잠시후면 출발 하겠군요?" "예, 손님도 어서 드시고 구경하러 가세요." "그럴께요." 나는 다시 도로 올라가서 류미르와 세이몬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왔다. 벌써 점원이 우리 몫의 음식을 식탁 위에 갖다 놓고 있었다. "언제봐도 세분은 정말 잘 생기셨군요? 여기 있는동안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예요." "아무일?" 세이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갸웃 거리자 옆에서 류미르가 설명해줬다. "용병들은 거친 사람들이쟎아. 그런 사람들중에는 웃긴 놈들도 있어서 우리처럼 잘~~생긴 애들을 보면 찝쩍 거리는 녀석들이 있거든, 그걸 말하는거야." "세분은 정말 잘 생기셨어요. 우리 식당 여점원들 사이에 이야기가 벌써 퍼졌는걸요. 산적 토벌대 일만 아니었으면 소문이 쫙 퍼졌을 꺼예요." 나는 피식 웃으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그러자 점원은 안쪽으로 들어 갔고 류미르와 세이몬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빨리 먹고 가보자. 아침에 출발 한다더군." 내가 속삭이자 세이몬이 흥분해서 말했다. "글면 우리도 따라가는거야?" "아니야. 그들이 출발한 다음에 좀 있다가 뒤따라 갈꺼야. 말들은 여기다 두고 가야겠지?" 류미르가 끝에는 나에게 묻는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야겠지. 아무래도 구경하는데 말이 있으면 귀찮아지쟎아." 류미르가 작게 중얼 거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건지..." "그만해. 결정된 일이쟎아." "그래도..." 아침을 다 먹고 점원이 가르켜준 출발 장소인 도시 중앙의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어서 중앙에 모여 있는 산적 토벌대는 보이지도 않았다. "뭐야 이거, 하나도 보이지 않쟎아?"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래. 하늘로 올라가서 볼까?" "아서라. 여기서 그렇게 하다간 눈에 뜨일꺼야. 차라리 성문쪽으로 가자. 그러면 지나갈때 볼수 있잖아." 나는 세이몬과 류미르를 데리고 성문쪽으로 향했다. 거기도 벌써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떠나는 산적 토벌대를 보기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쪽까지 가다보니 성문 근처까지 갔다. "사람들이 많기도 하네." 세이몬이 놀랍다는듯 한마디 했다. 그러자 이어지는 류미르의 설명. "이건 별거 아냐. 여기보다 더 큰 도시 같은데는 큰 행사가 있으면 그 도시 사람 말고도 타 지방 사람들도 오기 때문에 정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지." "헤, 사람들은 같이 모여있기를 좋아하나보지?" 이번에는 내가 설명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한다고해. 항상 모여서 살아야 하지. 그래서 모이는걸 좋아하는걸꺼야."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좀더 오가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오나보다." 우리는 곧장 환호성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는게 보였다. "앞에 있는게 마법사와 기사겠지?" "말을 타고 있어." "몇명 뿐일꺼야. 저 많은 용병들에게 누가 말을 대주겠어?" "이쪽으로 온다." 우리 말고도 옆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말을 듣고 이해한다는 듯 세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류미르와 나는 미소를 교환했다. 앞장서서 오는 말탄 사람은 모두 세명이었다. 가운데 사람은 마법사인듯 갈색의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었다. 빼짝 마른 중년 남자였는데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어 엄숙하기보단 오히려 우스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더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마법사를 향해 정말 열렬히 환호 해댔다. "이봐 류미르, 저 마법사 마력이 어느정도인것 같아?" "나랑 비슷한데? 한 4 클래스까지 마스터 했나?" "꽤 하겠네?" "엑? 4클래스가 꽤 하는거야?" "이봐 세이몬, 여긴 마계랑 다르다고 했쟎아. 인간은 기껏해야 정말 특출난 사람이 겨우 9클래스까지 마스터 할 수 있다고, 천재라고 듣는 사람은 겨우7, 8 쿨래스야. 보통 4, 5 클래스 정도면 인간으로선 대단하다고 한다구." 류미르가 옆에서 작게 설명해줬다. 그러자 세이몬의 한마디. "류미르, 너도 4 클래스지?" 그러자 류미르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호, 저 사람들이 기사인가봐?" 내가 작게 속삭이자 류미르와 세이몬도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봤다. "덩치는 크군. 힘은 좋겠어." "잘생기지는 않았다." "류미르, 너 지금 소설책에 나오는 정의의 기사 생각하고 있었지?" "........" 아린 이야기 - 제14화 산적털기(4) 선두의 마법사와 기사 뒤로 대 여섯명 정도의 기사들이 더 말을 타고 지나갔고 그 뒤로 이 도시의 병사들이 열을 지어 지나갔으며 그 뒤에는 용병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지나갔다. "호, 숫자가 꽤 많은걸?" "도데체 산적들이 얼마나 많길래 저렇게 많이 보내는거지?" "아마 저정도가 되어야 이길 정도 겠지." "우린 언제 갈꺼야?" 세이몬이 나를 보고 물었다. "놀다가 점심 먹고." 산적 소탕대가 성문을 거의 다 나서는 모습으로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늦게?" "가자마자 싸우겠어? 좀 신경전을 벌이다가 싸우겠지. 아마 우리가 갈때 쯤에 한창 싸우고 있을꺼야. 뭐 끝났으면 더 좋겠지만...." 류미르의 대꾸에 세이몬이 나를 향해 말했다. "뭐야, 아힌. 끝나버리면 재미 없쟎아?" "세이몬, 저정도의 숫자가 가는데 금방 끝나겠어? 걱정마, 싸움 구경은 실컷 할수 있을거야." 서서히 흩어지는 사람들과 함께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데리고 시장으로 갔다. "아힌, 시장에는 왜 또 가는거야? 살건 어제 다 사지 않았어?" 류미르가 의아한듯 물었다. "구경할때 배고프면 안돼쟎아? 간식거리라도 준비해야지." 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세이몬이 좋은 생각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류미르만... "우리가 놀러가냐?" "뭐 어때? 좋게 생각하자구.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쟎아? 준비해서 나쁠건 없지." 세이몬과 나는 갖가지 음식을 구경하며 고르느라고 신나게 돌아 다녔고 그 뒤로 류미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쫒아왔다. 이정도면 됐다 싶을 정도로 음식을 샀을무렵 대충 정오가 다 되었기에 우리는 간단히 점심을 시장에서 사 먹고 출발했다. 세이몬이 너무 다급하게 가자고 졸라 댔으므로 우리는 싸움이 있을거라 예상되는 장소로 빠르게 이동해 갔다. 비록 말은 타지 않았지만 마법으로 날아갔기에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도 간간이 마법이 터지고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쪽으로..." 우리는 싸움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크고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미 싸운지 오래 된듯 사상자가 많이 있었다. 여기저기 큰 구덩이가 파여 있고 나무가 뿌리채 뽑혀 있고, 새카맣게 탄 흔적이 있는것으로 보아 마법사가 꽤 마법을 난사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랑 기사는 어디있지?" 류미르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흠, 병사들은 몇명 보이지 않네?" 여기저기서 싸우는 사람들을 보니 한쪽은 산적이고 또 한쪽은 용병인건 분명한데 양쪽 다 옷차림이나 생김새나 엇비슷하게 생겨서 누가 어느 편인지 분간이 안갔다. "호, 용병 못지않게 잘 싸우는군? 그러니 산적 소탕에 그렇게 애를 먹었겠지." "아, 저기 기사가 있다. 그럼 같이 싸우는 사람은 산적 두목쯤 되려나?" 그러고 보니 저 쪽에 한명의 기사가 보였다. 그와 같이 대치하고 있는 산적은 덩치가 기사보다 더 커 보였고 투핸드 소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산적은 정말 무식하게도 검을 휘둘러 댔다. 그가 검을 휘두룰때마 다 바람이 불었고 주위의 작은 나무들이나 풀들이 잘려져 날아 올랐다. 그 검에 한방 맞으면 저세상으로 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기사는 이리저리 잘 피하면서 간간히 검으로 공격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적도 만만치 않은듯 기사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기사도 그 산적도 대단했기에 쉽게 승패가 날것 같진 않았다. "이게 인간들이 싸우는 모습이군, 이것도 꽤 재미있는데?" 세이몬과 나는 흥미롭다는듯이 지켜보며 말했고 류미르는 나머지 기사들과 마법사를 찾느라고 계속 두리번 거렸다. "그만좀 찾아대라. 마법사는 저기 저쪽에 있네, 병사들 몇하고 기사 둘이랑 같이 있는데? 마법을 너무 써서 지쳐 보인다." 류미르는 내가 가르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지친 마법사를 기사와 병사들이 둘러싸고 산적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기사 두명은 그럭저럭 산적에게 버티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자꾸 흐트러지며 하나하나 쓰러지고 있었다. "저런, 병사들은 산적한테 상대도 안돼는군. 그나마 저 기사하고 용병들이 있으니 이정도라도 유지했지." "마법사가 없었으면 이정도도 힘들었겠지, 산적 중에는 마법사가 없나?" "아마도 그런것 같아. 근데 산적이 정말 어느정도길래 이정도 마법을 맞고도 저정도야?" "그러니 시장이 골머리를 썩었겠지. 아, 드디어 마법사가 일어났다. 마법을 쓰려나봐." 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져 마법사를 감싸고 있던 벽이 위태롭게 되자 마법사가 힘겹게 일어나더니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산적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 났다. "하지만 저렇게 지쳐 있는데 큰 마법은 쓰지 못할것 같은걸?" 류미르가 걱정스럽다는듯 말했다. "그래도 산적들한테 겁은 줄수 있겠지." 갑자가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법사가 마법을 쓴 것이었다. 마법사 가까이 있던 산적들은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근처에서 싸우고 있던 용병들과 산적들도 강한 흙먼지가 일어나자 싸움을 멈추고 몸을 사리기에 급급했다. "호, 지친 상태에서 구현한 마법치고 대단한걸?" 세이몬이 감탄 했단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필사적이었겠지, 이렇게 되면 우선 후퇴하겠는걸?" 류미르의 말대로 용병들은 조금씩 조금씩 마법사가 있는 쪽으로 후퇴 했다. "이것으로 산적 소탕은 또 실패했군. 저 산적들 정말 대단한 녀석들일세?" "아힌, 넌 저 산적들한테 감탄한거냐?" "너무 그렇게 화내지마 류미르, 어째든 구경 한번 잘 했쟎아?"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류미르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물었다. "이제 어쩔꺼야?" "나 저 산적들에게 호기심이 생겼어.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길래 저정도인지." "어떻게 하려구?" "산적들을 뒤쫓자."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나를 쳐다봤다. "쫓아가서 뭐하게?" "글쎄,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저정도인 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번 붙어보고도 싶고. 또 저 정도의 실력이 있는 녀석들이 재물을 얼마나 모아 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세이몬과 류미르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너희들은 안 궁금하니?" 류미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산적을 치러 가자고?" "NO,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싸우니? 산적 털러 가는거지." 그러자 멍해진 세이몬이 한마디 했다. "뭐하러 몰래 훔쳐? 저정도 녀석들이면 한방에 보낼수 있는데..." "난 쓸데없는 살상은 싫거든. 하지만 털러 간다고 해서 싸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겠지?" "어이구, 살상을 싫어하는 애가 싸움 구경은 좋아하냐?" "류미르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세상에서 제일 잼있는게 싸움 구경이랑 불구경이야. 어째든 너희들 갈거지?" 세이몬이 재빨리 먼저 말했다. "난 찬성." "류미르, 넌?" 그러자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결정은 벌써 난거 아냐?" 아린 이야기 - 제14화 산적털기(5) "푸하하하, 어리석은 녀석들, 우리에게 덤비다니......." 두목같이 생긴 녀석이 나서서 거드름을 피우는걸 보니 슬슬 헤어져 각자의 본거지로 갈것 같았다. "류미르, 넌 저 산적들을 따라가서 저녀석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알아놔. 나랑 세이몬은 도시로 돌아가서 말하고 짐을 챙겨올께. 나중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류미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가 있던 나무에서 옆의 다른 나무로 날쌔게 옮겨 갔다. 그리고 나와 세이몬은 병사들과 용병들이 움직이기 전에 공간이동을 해서 도시로 돌아왔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짐을 챙겨 말을 끌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병사들과 용병들이 돌아오길 기다려 도시를 빠져 나왔다. "왜 저들을 피해서 나오는거야?" 세이몬이 의아한듯 물었다. "우리가 이쪽으로 가려는걸 알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 할거 아냐. 자기들이 산적한테 져서 돌아 왔는데 그 곳을 많이도 아니고 단 둘이 그것도 기사가 아닌 아직 어린 소년들이 가려고 하니까. 쓸데없는 일은 사전에 피하는게 좋은거야." 우리가 류미르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돌아 왔을때 류미르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도 하나도 없었고 단지 싸움의 흔적을 보여 주는듯 여기 저기 흘려있는 핏자국과 뭉개진 공터가 있을 뿐이었다. "나중에 말들은 여기다 놓고 가는게 좋겠다. 얼마간 여기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을것 같으니까." 말들도 기분이 나쁜지 푸르렁 거리는걸 달래서 나무에 매어 놓고 쓰러져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았다. 세이몬도 내 곁으로 와서 걸터 앉았고 우리는 류미르가 올때까지 할 일이 없었으므로 간식을 꺼내어 나누어 먹었다. 시간이 꽤 지나 날이 어둑어둑 해질때야 류미르가 왔다. "왜 이렇게 늦은거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던 세이몬이 일어나서 힐책하듯 말했다. "아, 미안. 될수 있는한 자세히 알아보려고 이것 저것 살펴 보다보니 늦었어." 나는 류미르에게 샌드위치와 물통을 던져 주며 물었다. "그래, 산적 본거지는 여기서 멀어?" "좀 거리가 있던데? 저쪽 골짜기 사이에 있더군. 근처에 냇가가 있고 또 넓은 공터가 절벽을 뒤로하고 바위와 수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야영하는건 물론 잘 보이지도 않고 방어하기도 좋던데? 물론 방어 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긴 하더라." "자세히 살펴 보았구나. 그런데 그들은 지금 뭐하고 있어?" "파티를 벌이려고 분주 하더라. 공터에 자리를 잡고 멧돼지를 통채로 굽고 술도 갖다 놓는거 보면 자축 파티라도 하는거 같았어." 류미르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으며 말했다. "호, 파티를 하고 있다면 털기에 딱 좋군. 그럼 슬슬 가볼까?" 말들이 너무 불안정해 보였기에 우리까지 떠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 나는 말들을 재워 버렸다. 그리고 피냄새를 맡고 올 짐승들을 대비해 말 주위에 방어 결계를 쳤다. "류미르 대충 다 먹었으면 안내해." 류미르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물통의 물을 한모금 더 마신뒤 일어났다. "이쪽이야." 류미르를 따라 세이몬과 나는 수풀을 헤치고 산적 본거지로 향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캄캄했지만 불은 킬수 없었다. 그러나 나나 세이몬이나 류미르는 어둠 따위가 시야를 별로 방해하지 않았기에 별 문젠 되지 않았다. 한참을 나무와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자 류미르가 조용히 하라고 손짓 하면서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 멀리서 불빛이 보였고 왁작지껄한 소리도 들렸다. 그와 함께 고기 굽는 냄새도 들렸다. "한창 파티중인가본데?" "그래도 조심해야지." 세이몬과 나는 소근 거리면서 류미르를 따라 계속 조심스레 걸어갔다. 류미르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산적 소굴 한쪽을 막아서고 있는 가파른 절벽 중간쯤 나 있는 바위틈새였다. 그곳에서는 좀 위험하긴 했지만 눈에 잘 뜨이지도 않고 산적 본거지가 잘 보였다. "저쪽으로 동굴이 보이지? 그리고 그 주위로 천막들이 보이고. 아마 저 동굴이 보물을 숨겨놓은 곳인거 같아. 저렇게 경비병이 있는걸 보면." 류미르가 가르킨 곳엔 성인 남자가 겨우 서서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이 보였고 그 입구에는 산적 두명이 서서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입구 양쪽에는 횟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는 천막들이 여러개 늘어서 있었고 그 천막 앞에는 공터가 있어서 그 공터에서 산적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절벽 끝쪽에는 단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까 산적 토벌대를 이기고 거드름을 피우던 산적 두목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산적으로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보통 산적들 처럼 근육이 나 있지 않았고 오히려 야위었다 싶을 정도로 빼빼 마른 중년인 이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이었다. 거기에 눈에는 외알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아힌, 저 사람도 산적이야?" 세이몬도 이상하게 느꼈는지 나에게 물어왔다. "아닌것 같아. 이상한걸? 잠깐만 뭐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멀어서 잘 안들리쟎아?" 나는 음성 증폭 마법을 써서 단상 위에 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잘 들리도록 했다. "껄껄껄. 수고 하셨소이다. 이번에도 당신들이 승리 하셨군요." "푸하하하. 이게 다 당신 덕분이 아니겠소? 당신이 미리 토벌대의 능력과 숫자에 대해서 알려주고 또 마법을 빗나가게 하는 결계 주문이 걸려 있는 방패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우린 이기지 못했을 것이오." "당연히 최선을 다해 도와야지요. 당신이 이김으로 당신이나 나, 둘 모두가 이익이니까요." "푸하하하, 누구도 생각도 못했을거요. 그 도시의 가장 큰 상인이 나와 손잡고 있을줄은..." "쉿,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푸하하하, 걱정도 팔자요. 누가 우리 대화를 듣는다는거요? 여긴 모두 다 내 부하들 뿐이고, 그 토벌대는 엉망이 되어 도시로 겨우겨우 갔을텐데..." "어째든 이걸로 당분간은 또 잠잠하겠지요.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켈튼쪽과의 운송은 모두 내가 독점을 할겁니다. 그렇게 되면 두목께도 섭섭지 않게 드리 겠습니다." "푸하하하하, 기대하고 있겠소." "아, 오늘도 승리를 축하하는 뜻에서 약소하나마 조그마한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빼빼마른 중년인이 손짓을 하자 두명의 남자들이 한개의 큰 상자를 들고 단상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중년인의 손짓을 보고 뚜껑을 열었다. 그 곳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 금화를 본 모든 산적들은 입을 떡 벌렸고 두목은 그걸 보고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이렇게 좋은 대우를 해주니 우리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될 거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잠시 동안은 저도 조심해야 하니까요." "그러시오. 이봐!" 두목이 소리쳐 부르자 대여섯명의 산적이 앞으로 나왔다. "이분들을 성문 근처까지 모셔다 드리도록." "그럼 안녕히, 다음에 또 뵙지요." "잘 가시오. 멀리 안나가겠소." 그리고 그 빼빼마른 중년 상인은 산적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 밑으로 내려갔다. "호, 그랬군. 그래서 산적 토벌대들이 매번 실패했던 거였군." "아힌, 저 상인말야. 꽤 나쁜 사람같아." "세이몬, 네가 그걸 알다니,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아힌 어쩔껴? 이대로 보고 있을꺼야?" "물론 아니지. 그냥 이것만 보고 갈거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다. 아, 저기 금화를 옮긴다. 아마 보물 창고로 가는 모양인데? 쫒아가자." 나는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산적들에게 들키지 않게 금화를 옮기는 산적들 뒤를 쫒았다. 내 뒤로 류미르와 세이몬도 곧 쫒아왔다. "역시 저 동굴로 들어가는군." 류미르의 말대로 금화 상자를 든 산적들은 천막 뒤쪽에 있던 동굴 쪽으로 가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산적들과 뭐라고 하더니 입구를 지키던 산적 한명이 횟불 하나를 들고 앞장 서더니 곧 나머지 두명도 금화 상자를 들고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세이몬, 저 입구에 서 있는 놈좀 맡아라." 내 말을 듣고 세이몬은 입구에 홀로 서있던 놈 뒤쪽으로 조용히 내려 서더니 목을 꺽어 처리했다. 난 그를 벽에 잘 세워놔 그냥 보면 서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금화 상자를 놓고 나오는 녀석들과 마주쳤다. 나는 재빨리 맨 앞에서 횟불을 들고 오던 놈의 목을 베었고 ( 허걱 드디어 내가 살인을 했습니다.) 다른 한놈은 세이몬이 처리했다. 그리고 맨 뒤에서 오던 놈은 류미르가 재빨리 잡아서 목에 단검을 드리댔다. "자, 아자씨? 동굴 안내좀 해 주시겠어요?" 나는 땅에 떨어진 아직 꺼지지 않은 횟불을 집어 들며 잡힌 산적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정중히 요청했다. 그가 움직이려 들지 않자 류미르가 그의 검을 빼앗아 들고는 단검으로 등을 쿡 찔렀다. 그 산적은 다시 동굴 안쪽으로 들어 가면서 협박 하는걸 잊지 않았다. "이대로 무사할거라고 생각하냐?" 그래서 난 아주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저씨도 무사하진 않겠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지 않은 방이 나왔다. 자연적으로 생긴게 아니라 사람이 깍아서 만든듯 싶었다. 그리고 그동안 받은게 꽤 되는듯 한쪽 벽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상자가 보였다. 세이몬이 가서 열어 젓히자 그 곳에는 금화뿐이 아니라 비단을 비롯하여 향유가 들어있는 항아리등등 이외에도 검을 비롯한 무기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맨 구석에 있는 몇개의 작은 상자들에는 금은 보화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호, 꽤 되는걸?" 우리가 서로 마주보며 싱글벙글 웃자 끌려온 산적이 비웃었다. "어리석기는, 이걸 다 어떻게 들고 가려고 하느냐? 겨우 조금밖에 못가지고 갈껄? 괜히 욕심부리다가 목숨을 잃게 될꺼야." "참내, 그 아저씨 말이 많으시군. 류미르 좀 조용히 시켜라." 그러자 류미르가 산적의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켰다. 그리고 세이몬과 나는 보물을 챙기기에 바빴다. 무기나 깨지기 쉬운 항아리들은 빼놓고 보석이랑 금화, 그리고 비단을 챙겼다. 별로 어려울건 없었다. 세이몬이 보물 상자를 잘 닫은 다음 번쩍 들어 내 마법 주머니에 넣으면 끝이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왜 그렇게 웃는거야? 너 또 무슨짓을 하려구?" 류미르가 그런 나를 보며 물었다. "호, 류미르는 눈치가 빠르군. 그냥 이대로 가면 너무 시시하지 않아?" 나는 동의를 구하듯 세이몬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세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너무 시시해." "그럼, 우리 쬐끔만 녀석들을 놀래켜주지 않을래? 녀석들도 매운 맛을 봐야하지 않아?" 그러자 류미르가 씨익 웃으며 말을 받았다. "첨부터 그럴 작정 아니었어? 새삼스럽게 물어보긴..." "그럼 저녀석들에게 한방 먹여 줄꺼야?" 세이몬도 신나하면서 물어 왔다. "그럼 이렇게 있을순 없지 않겠어? 가자구!" 동굴 밖으로 나오자 들어갈때 벽에 세워뒀던 놈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아직 우리가 여기 온것을 들키진 않았나보다. 류미르와 난 저번에 영주 성에 침입했을때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무작정 쳐들어 가기로 했다. 천막 너머로 아직도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다. 파티가 계속 되고 있는것 같았다. 천막 사이를 지나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공터로 나오자 마자 나는 놈들에게 마법을 한방 날렸다. "버스트 프레아!" 수십개의 파이어볼이 공터 중앙에 떨어지면서 폭팔했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큰 불꽃이 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류미르는 내 오른쪽에서, 세이몬은 내 왼쪽 에서 내달리며 놀라 우왕 좌왕하는 산적들 틈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두목에게 뛰어들었다. 그는 역시 두목답게 무기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난 낮에 녀석의 실력을 봤기 때문에 달려갈때 벌써 정령들을 불러놓고 있었다. 그리고 두목이 보이자 마자 몸을 날려 위에서 그를 검으로 내리쳤다. 그는 침착하게 검을 들어 내 공격을 막았지만 쳐들어 온 녀석이 아직 어린 소년인것을 보고 놀란것 같았다. 그리곤 곧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그는 검에 힘을 주어 나를 힘껏 밀어냈다. 그리곤 덤벼들 자세를 취했다. "카사!" 그러나 녀석이 공격하기 전에 내가 카사를 불렀고 카사는 놈의 옆구리에 불꽃을 날렸다. "우아악! 이게 뭐야?" 갑자기 옆구리에 불꽃이 일자 그는 당황하면서 한 손으로 옆구리의 불을 껐다. 그때를 틈타 나는 녀석의 손목을 노렸으나 내가 공격하는걸 눈치 챈 놈이 손을 뒤로 돌리며 내 옆으로 슬쩍 비키더니 내게 몸통으로 부딧혀 왔다. 나는 재빨리 속력을 더해 앞으로 구르면서 카사와 실프를 불렀고 그 둘이 합세해서 날린 바람을 타 더욱 거세진 불꽃이 산적 두목에게 정면으로 부딧혀 갔다. "우아아악~~" 갑자기 몸에 큰 화상을 입은 산적 두목은 바닥을 구르면서 몸에 붙은 불을 껐다. 그러나 그때 내가 운디네를 불러서 아직 바닥을 구른 산적 두목에게 찬 물을 끼얹게 했다. 온몸에 뜨거운 화상을 입은데다 갑자기 찬 물을 뒤집어쓰자 두목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내가 뛰어들어 그의 어깨를 찔러 검을 떨긴 후에 노움에게 그를 가슴까지 땅에 파묻게 했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검을 들고 내게 덤비는 산적들을 처리해 갔다. 그들은 숫자는 많았지만 술을 많이 마셔 대부분 취한데다가 아까 내가 한방 먹인 마법에 화상을 입거나 놀라서 완전히 정신을 못차린 놈들이 많아서 상대하기는 쉬웠다. 한참 신나게 이리뛰고 저리뛰고 한뒤 슬슬 지칠때가 되자 주위를 둘러 보았다. 류미르는 단검을 들고 정령들을 불러내어 같이 싸우고 있었고 세이몬은 주먹 하나 들고 상대하고 있었다. 하긴 마물에 비하면 인간 상대하는 것 쯤이야 쉽겠지... "얘들아, 그쯤하고 이만 가자. 조금 있으면 성에서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올꺼야. 그러니까 여길 뜨자구." 우리가 말을 매어둔 곳으로 돌아오는데 성 쪽에서 여러마리의 말들이 달려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우리를 스쳐서 산적 소굴로 간 뒤에 말들을 깨워서 다른 도시쪽으로 달렸다. 몇시간 달리자 동쪽 하늘이 뿌옅게 밝아왔다. "음~~, 상쾌하다. 오랜만에 신나게 놀았는걸?" 재밌었다는 나. "조금 더 패줄수도 있었는데..." 아쉬워하는 세이몬. "그런 녀석들은 쓴 맛을 보여줘야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류미르. 우리는 다음 도시를 향해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으며 신나게 달렸다. 아린 이야기 - 제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1) 제 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 우리는 몇주를 더 달려 드디어 켈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켈튼은 켈튼 연합국의 중심이 되는 국가 이름이자 그 국가의 수도 이름이기도 했다. 앞서 소개 했듯이 연합국은 약 20여개의 소국가로 이루어진 국가다. 말이 소국가이고 각 나라에서도 독립국임을 자처하지만 현실상으로는 각각의 나라가 다른 큰 국가의 지방 영지만 했다. 중심이 된다는 켈튼국만 해도 서너개의 큰 도시와 몇개의 마을로 이루어 졌을 뿐이고 하물며 연합국에서도 작은 국가는 수도인 도시 하나와 몇개의 마을로 이루어 졌을 뿐이다. 이런 연합국이 타 국가와 나란히 설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각각의 국가가 작지만 상업이 타 국가보다 크게 발달 하였고 또한 각각의 국가마다 확실한 돈벌이가 되는 그 무언가를 하나 이상씩은 가지고 있었기에 나라 크기에 비해 무척이나 부유한데다, 더욱이 그들이 각각 개인으로 행동 했다간 타 국가에게 쉽게 흡수 될 수 있다는것을 자신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에 연합국의 결속력은 보기보다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이 연합국가도 하나의 커다란 나라였었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데다 여러 나라의 중심점에 위치했기에 무역이 빨리 발전 하였고 그와 더불어 상업이 크게 번창 하였다. 그러나 그런 시기에 왕궁에서는 여러명의 왕비와 많은 후궁들이 낳은 왕자들의 왕 자리의 다툼이 크게 일어났고 왕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왕실이 혼란 스럽자 지방에 대한 간섭과 견제는 할 수가 없었고 이 때를 틈타 재정적으로 탄탄해진 지방 영주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었다. 그중 힘없는 영주나 귀족들은 힘 있는 영주에게로 흡수 되거나 그들에 의해 소멸 당하고 왕실은 무너져 버렸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 남거나 자신의 세력을 넓힌 영주 및 귀족들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자신의 영토가 독립국임을 선포 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켈튼 연합 국이었다. 이들 연합국 대부분의 이름은 그 나라의 국왕이 자신이 원래 보유하고 있던 영지나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 하였다. 켈튼국도 마찬가지로 켈튼 영주가 세운 국가 이름을 원래 영지 이름을 따서 켈튼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워낙 교류가 활발했기에 굳이 여기부터 네 나라 저기부터 내 나라라고 선을 긋거나 따지지는 않았기에 국경선이라고 병사들이 지키거나 따로 보초가 있는건 아니었다. 단지 성이나 도시 자체에서 자신들의 성이나 도시의 치안을 담당 하였다. 물론 각 나라의 영토나 경계선은 확실히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실끼리 정해놓은 거였고 일반 국민들은 전혀 따지지 않았고 실제로 작은 국가이다보니 국가에서도 따로 국경선을 지키는 것 보다는 각자 도시나 성을 자체적으로 치안 유지 하는것이 훨씬 경제적이었기에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다. 연합국가끼리는 상호 침략 불가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각 나라가 작다보니 전쟁해봤자 침략하는 쪽과 침략 당한 쪽만 손해라는 것 때문에 유지 될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랬기에 지명을 말할때도 나라이름을 별로 쓰지 않았다. 예를 든다면 내가 '켈튼'이 어디 있냐고 물어 본다면 사람들은 '켈튼국'을 가르켜 주는게 아니라 '켈튼'이라는 도시를 가르켜 준다는 거다. 음, 이야기가 너무 옆으로 샜는데 다시 돌아와서, 그런 켈튼에 우리가 드디어 도착한 거였다. 처음 여행을 떠날때 내가 최초로 정한 목적지가 바로 켈튼 이였으니 목적지에 도착한 기쁨은 꽤나 감격 스러워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켈튼 도시로 들어선 우리는 도시의 어마어마한 크기와 번화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시의 넓찍한 대로는 편편한 돌들이 쫘악 깔려 있었고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내 시야를 꽉 채웠다. 길거리에는 온갓 마차와 짐을 잔뜩 싣고 있는 수레들이 지나다니고 가지각색의 옷을 입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뭐가 그리 바쁜지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사람들로 너무나 복잡했다. "와우, 정말 크군..." "정신이 하나도 없어." "길 잃어버리기 쉽겠다." 도시에 들어서자 마자 거리 풍경에 정신을 빼앗겨 버린 우리들은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한동안 성문 근처에 엉거주춤 서있기만 했다. "아힌, 어디로 가야해?" 세이몬의 물음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우선은 여관부터 잡자. 그리고 나서 생각 하자구." 내가 이들을 이끌고 켈튼으로 왔지만 나도 켈튼은 처음 와보는 거고 또 인간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커다란 도시는 처음 와보는 거였기에 당황 되었다. 하지만 잠시후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 세상으로 오기 전 내가 살았던 곳은 이곳 켈튼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복잡하고 사람도 더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50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곳에 살면서 점점 그곳을 잊어버리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그곳에서 알던 사람들도 반 친구들 얼굴이나 이름도 가물가물 했다. 하지만 새엄마나 아빠의 얼굴은 여전히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살던 집이랑 항상 지나다녔던 골목길, 학교갈때 타던 전철, 학교, 그리고 놀러갔던 놀이공원 등등은 아련히 떠올릴수 있었다. 아마 오랫동안은 잊어버리지 않겠지.... 정말 오랜만에 예전 생각을 하자 기분이 가라 앉았다. "왜그래 아힌?" 류미르의 물음에 퍼뜩 정신차렸다. 아마 내 표정이 이상해지자 류미르가 말을 걸어왔나보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 버렸다. '현재 나는 여기에 있고, 여행을 즐기러 온거야. 그것만 생각하자.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러면 안돼지.' 마음을 추스려 새롭게 다잡고 기분도 팍팍 낼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세이몬과 류미르를 도시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여관으로 인도했다. 그 여관은 척 보기에도 정말 비싸 보였다. 왠 여관이 대 저택 못지 않은 크기와 화려함을 자랑하며 당당히 서 있었던 것이다. 입구 쪽에는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말에서 내리자 그들이 와서 말고삐를 받아쥐고는 번호표 세개를 주었다. 나중에 말을 찾아갈때 이 번호표를 보고 찾는 건가 보다. 말에서 짐을 내려서 (나는 보물들만 마법주머니에 넣었기 때문에 베낭이 따로 더 있었다. 류미르와 세이몬도 자신들의 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안으로 들어갔다. 안도 겉 못지 않게 휘황찬란했다. 들어가자마자 넓은 홀이 나왔는데 맞은편에는 위로 올라가는 넓고 우아한 계단이 있었고 옆쪽으로 카운터가 보였다. 천장에는 크고 화려한 샹드리아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아힌, 무지 비싸보이는데 괜찮겠어?" 류미르가 내 망토를 살짝 잡아끌며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도 꽤 부자라구. 걱정하지마." 나는 류미르를 안심 시키고 어깨를 피고 당당하게 카운터로 다가갔다. "어서오십시오. 뭘 도와 드릴까요?" 카운터 뒤에 서있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에게 정중히 물어왔다. "여기서 며칠 묵으려고 하는데요?" "특실과 일반 A, B, C 실이 있습니다.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특실로, 침실이 3개가 있는 방으로 주세요." "하루에 1존드 입니다. 선불로 하루치 먼저 계산해 주십시오." 그가 나에게 장부를 꺼내며 말했고 나는 그에게 금화 하나를 건내 주었다. '정말 무지 비싸군...' 라고 생각 하면서... "여기에 싸인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나에게 숙박계와 펜을 건내며 말했고 나는 그곳에 본명을 쓸수 없어서 '아힌 슈타인 시피르' 라고 적었다. 적고보니 과학자 이름을 적었지만 일부러 그런건 아니다. 내 가명과 할아버지 가명을 섞다보니 그렇게 된거지. "짐을 들어드릴까요?" "됐어요. 얼마 많지도 않으니 우리가 들고 갈께요." 그러자 어느새 내 옆에 나타났는지 같은 제복, 단지 바지대신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이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카운터의 남자에게 열쇠를 건내 받자 나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나는 세이몬과 류미르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뒤 그녀를 따라갔다. 우리방은 3층 이었다. 문을 열자 고급스러운 가구로 꾸며진 넓은 거실이 나왔고 거실로 들어가자 거기에 딸린 문이 4개나 보였다. 3개는 거실 못지않게 화려한 침실이었고 하나는 욕실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열쇠를 건내고 나가자 세이몬은 거실의 푹신해 보이는 소파로 뛰어 들었다. "우와, 기분좋다. 이것봐, 푹 파묻히는걸?" 그러나 류미르는 세이몬과 달리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이렇게 사치해도 되는거야?" "걱정 말라니까. 저번에 영주 부인에게 받은 걸로도 며칠은 이곳에서 있을 수 있다고. 아참, 그거 돈으로 바꿔야지!" 그거 말고도 내가 원하는 정보도 있다는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뭐 급할건 없으니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나가자는데 합의를 본 우리는 각자 방을 정하고 그날 하루는 푹 쉬었다. 아린 이야기 - 제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2) 다음날 아침을 먹고 여관을 나섰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커다란 보석상이었다. 그곳에서 전에 영주 부인에게 얻은 악세사리를 돈으로 바꿀 계획이었다. 그곳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맞더니 내놓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를 돋보기로 자세히 살펴 보더니 말했다. "흠, 보석이 흠이 없고 깨끗하기는 하지만 원석이 그리 좋은건 아니군요. 가공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구, 더욱이 세공도 뛰어나지 않군요. 이러면 세공값은 그다지 쳐드리지는 못하겠고 거의 보석값만 드릴수 밖에 없는데요?" "그게 얼만데요?" "흠, 목걸이에 세개, 귀걸이에 각각 하나씩, 팔찌에 두개에다가 세공값을 조금 쳐드리면 그래도 한 5존드밖에는 못드릴것 같은데요?" "뭐, 그정도면 됐어요. 그다지 돈이 궁하지도 않고, 그게 맘에 안들어서 처분하려고 했을 뿐이니까..." "그럼 5존드로 할까요?" 지배인은 일어서더니 상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마 돈을 꺼내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세이몬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힌, 이것좀봐. 보석 경매가 있대. 경매가 뭐야?" 세이몬이 가르키는 쪽을 보니 벽에 보물 경매를 한다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물건을 갔다 놓고 살 사람끼리 서로 가격을 말해서 제일 비싸게 부른 사람이 그 물건을 사는걸 말해." "흠, 보물 경매라....내일 한다는데, 우리도 한번 가볼까? 난 경매하는데 한번도 가본적이 없거든?" 류미르도 흥미를 나타 내는듯 벽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보자, 세계 3대 보석 목걸이중 하나인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가 나온다고 써있는걸? 세계 3대 보석 목걸이가 뭐야?" "그건 말입니다..." 상점 안쪽으로 들어갔던 지배인이 나오면서 설명해줬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3개의 목걸이를 말하지요.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 에스라 공주의 목걸이, 그리고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가 바로 그 3대 목걸이랍니다. 그중 하나인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가 이번 경매에 나온다는군요.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이 무척 높답니다." "호, 모두 다 나라의 이름이 붙여 있군요. 테아칸, 에스라, 레스틴." 류미르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하하, 그야 예전에는 그만큼 아름다운 목걸이를 가질수 있는 사람이 왕족이나 아니면 귀족들 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요. 지금이야 대 부호가 많이 생겨서 그들도 비싼 보석들을 지닐수 있었지만 어디 옛날에야 그럴수 있나요? 그러니 유명한 옛날 보석들은 다 왕실에서 나온 것들일 수 밖에요. 뭐, 현재 그런것들은 왕실만 소유하지 않고 일반 대부호 손에 들어간 것도 많지만요. 아마 어쩌면 왕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자, 여기 돈이 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우리는 돈을 받자마자 보석상을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갈꺼야?" "이봐, 아힌. 저기 책방이 있다. 한번 가보지 않을래? 인간들의 책방은 어떤 곳인지 궁금하거든?" 류미르가 길 건너편에 있던 책방을 발견하자 흥분해서 말했다. "그러자. 뭐 이제 특별히 갈 곳은 없으니까...." 그곳 책방은 예전에 내가 있던 서점이랑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사면 벽에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가 있었고 그 책꽂이에는 온갖 종류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책방 중앙에는 커다란 낮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온갖 책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세계 지리서와 큰 지도를 고르고 책들을 쭉 둘러보고 있는데 그중 '세계의 100가지 보물' 이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책을 들어 훝어보니 거기에는 세계에서 유명한 보물 100가지를 적어 놓았는데 그 보물의 그림과 함께 모양과 가격, 유래 등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곳에 세계 3대 보석 목걸이 소개도 나와 있길래 자세히 살펴 보았다. '테아칸 왕비 목걸이 - 백금줄과 연결된 진주 가루를 뿌려 멋을 낸 백금으로 된 초승달 모양의 판에 직경 2인치 짜리의 다이아 몬드를 작은 사파이어들이 둘러싼 5개의 팬던트 각각을 백금 사슬로 일렬로 연결해 놓아 특이한 멋을 부린 목걸이. 특별히 정교한 조각을 한 것은 없으나 보석의 조화를 최대로 살린 목걸이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목걸이는 옛날 테아칸 왕국의.....' '어라? 이거 어디서 들어봤던 말인데? 어디서 들어 봤더라.....책에서 읽은건 아니구..... 누구에게서 들었는데.........엄마는 아니구, 할아버지가 보석 이야기를 해주실리는 없구, 할머니도 아닌것 같구, 그럼 누구지? 보석에 대해 말해준 드래곤이.......아, 칸 크제나. 맞아 칸 크제나가 나한테 선물로 주면서 말해줬지. 잠깐만 받은게 무슨 목걸이었지? 우씨, 기억이 안나......'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탁 쳤다. 깜짝놀라 뒤를 돌아보니 류미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 책 아직도 못 골랐어?" "응? 아아, 아냐. 다 골랐어. 넌 어때?" "나? 난 이걸 골랐지." 류미르가 나에게 내민 책을 보니 '초보 여행자를 위한 기본 상식' 이라고 쓰인 책이었다. "역시, 류미르. 이게 처음으로 하는 여행이지?" "쳇, 그러는 너는 아니냐? 뭐 피차 다 아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류미르는 책을 얼른 가져가며 말했다. "세이몬은 뭘 고른거야?" "아아, 아직 이 세상일을 잘 모를것 같아서 내가 영웅 소설책 몇권을 골라줬어." "영웅 소설책? 그거 영웅이 일행이랑 모험하다가 뭐 마왕이나 악룡을 만나서 물리친다는 이야기?" "응, 맞아." "그럼 거기 악당이 마왕이야?" "응, 공포와 암흑 마왕. 예전에 내가 잼있게 읽은 거지." "그런데 류미르, 혹시 마왕은 마족 아니냐?" "당연하지. 마왕이 마족인걸 뭐 새삼...힉? 에구구, 이런.." 류미르는 허겁지겁 세이몬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세이몬은 여관에서 책을 읽는다고 아직 보지는 않고 있었다. 그래서 류미르와 나는 마왕이 아닌 못된 마법사가 악당으로 나오는 책을 골라줬다. 처음에 류미르는 악룡이 나오는걸로 골라주려고 했지만 내가 딴걸로 골라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재미있는 세계 건국 전설 모음집' 이란 책도 골라서 같이 샀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각자가 사가지고 온 책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여행하면서 책 읽을 시간은 따로 찾기 힘들기 때문에 시간 있을때 미리미리 읽어 둬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고른 '세계의 100가지 보물' 이란 책을 펼치다가 서점에서 칸 크제나가 준 목걸이가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마법 주머니를 열고 크제나가 준 보석 상자를 꺼냈다. 내가 마법주머니에서 왠 상자를 꺼내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책 읽다 말고 흥미를 보였다. "그게 뭐야, 아힌?" "아, 지난 내 생일날 받은 선물이야." "그걸 갑자기 왜 꺼내는거야?" "아니, 좀 뭔가 이상해서..." 나는 상자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뚜껑이 열리면서 나타난 아름다운 목걸이에 류미르와 세이몬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우와, 아름답다..." "영주 부인꺼는 이거와는 비교도 안되겠는걸?" 류미르와 세이몬이 감탄사를 터트렸지만 나는 목걸이를 보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었던 것이다. "류미르, 세이몬? 이게 무슨 목걸인줄 알아?" "선물 받은거라며?" "내가 어떻게 무슨 목걸인줄 알겠냐?" "이거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야." "그래? 무지 비싸 보이는데? 아힌, 너네 부자인가보다." "왕비 목걸이라쟎아. 그래서 이렇게 화려한 거군." "이 멍청이들아~~~! 아까 읽은것도 기억 안나냐? 내일 경매에 이 목걸이가 나온다쟎아." "아 그게 이 목걸이야?" "세이몬,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때야? 아힌, 이게 왜 너한테 있냐?" "선물 받은거라고 했쟎아. 아는 할머니가 생일 선물로 준거란 말야." "그럼 내일 경매에 나오는건?" "가짜겠지. 이건 진짜라구. 아님 이게 모조품이거나.... 하지만 이 보석은 진짜란 말야." "똑같은 보석으로 만든 걸수도 있쟎아." "내말이 바로 그거야. 하지만 어느게 진짜인지 알수는 없쟎아? 난 이거 받을때 처음 본거라구. 그 분이 주실때도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라구 했구." "만약 이게 진짜라면, 경매에 나오는건 가짜겠네? 그럼 그 사람들은 그게 가짜라는걸 모를까?" "우, 머리아파. 나도몰라. 어째든 내일 그 경매에 가서 확인해 봐야 겠어." 류미르와 내가 심각하게 대화하고 있을때 세이몬이 물끄러미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근데 아힌, 남자가 생일 선물로 이런 목걸이를 받아?" 그러자 류미르가 나를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맞아. 그러고보니, 누가 남자애한테 이런걸 생일 선물로 주냐?"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고 말했다. "얘들아? 내가 언제 내가 남자라고 한적 있어?" "허걱, 아힌. 너 그럼........" 류미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래, 난......" "레즈비언?" "윈디!" 류미르는 갑자기 생성된 강한 바람에의해 뒤로 떠밀려 넘어져 버렸다. "이 멍청아, 거기서 왜 레즈비언이 나와? 난 여자란 말야." "헤, 아힌 너 여자였어? 남자인줄 알았는데...." 옆에 앉아있던 세이몬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왜 숨긴거야?"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뒤통수를 박은 류미르가 머리를 감싸쥐며 일어나며 물었다. "누가 언제 숨겼냐? 너희들이 물어보지 않았쟎아? 난 남자인 척 한적 없어." "칫, 여자라니..." "류미르? 내가 여자라서 기분 나쁜거 있어?" "아니 뭐, 그런건 없지만....." 류미르는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슴이 없으니 정말 남잔지 여잔지 구분이 안 가는군..." "아이스 미사일!" "우아아아~~~악!" "근데 여자라면서 왜 치마를 입지 않은거야?" "생각해봐 세이몬, 치마입고 여행을 다니면 얼마나 불편하겠냐? 귀찮아서 그냥 바지입고 다니는거야." 세이몬이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어쨌든 내일 그 경매장에 가보자. 가보면 어느게 진짜인지 알게 되겠지." 아린 이야기-경매장에서 생긴 일 (3) 번 호 : 9894 / 9956 등록일 : 2000년 07월 17일 01:28 등록자 : LODEMP 조 회 : 45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 (3)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여관을 나섰다. 여관 종업원이 해준 말에 의하면 이 보석 경매는 1년에 한번씩 열리는데 그 경매에 나오는 보석들 대부분이 비싸고 화려한 것들 이어서 구입 희망자는 물론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이 몰린다고 한다. 게다가 그 경매가 시작되면 경쟁이 보통 치열한게 아니라서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때까지 계속 되기 때문에 경매에 참가하지 않는 한 제대로 좋은 곳에서 구경 하려면 일찍 가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나선거였다. 그러나 우리 딴에는 일찍 오느라고 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부지런 했는지 구경하는 자리 중 의자는 벌써 꽉 찼고 그 뒤에도 몇겹으로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우와, 엄청난 사람들.... 이 사람들이 다 구경하러 온거야?" 여관을 나설때는 잠이 덜깨서 몽롱한 채로 류미르에게 끌려와야 했던 세이몬이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을 보자 잠이 확 깬듯 했다. "어쩌지? 자리가 없네.... 아침을 먹지 말고 올걸 그랬나?" "그래도 소용 없었을껄? 저것봐, 사람들이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왔쟎아." 아무리 눈씻고 찾아봐도 적당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계속 훝어보면서 자리를 찾고 있는데 저쪽에 줄로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만들어 놓고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그 길 입구에 어떤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 책상 반대편에는 세명의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 내가 그쪽을 보고 있자 류미르가 내 시선을 쫒아 오다 그걸 봤는지 나에게 물어 왔다. "어라? 저긴 뭐하는 거지?" "글쎄, 한번 가볼까?" "뭐하는 건지도 모르고 그냥 무조건 가면 어떻게해?" "뭐 어때? 여기 있어봤자 자리도 없쟎아. 뭐하는건지 가보자고." 내가 앞장서서 가자 류미르가 따라왔다. 그리고 잠시후 세이몬이 "야, 너희끼리만 가면 어떻게해?" 라고 소리치며 뛰어왔다. 알고보니 책상 앞에 앉은 사람은 경매 참가 신청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경매는 전날까지 참가 신청을 받았지만 이 경매는 멀리 타국에서도 참가하러 오기 때문에 자칫 늦을수도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경매 한시간 전까지 참가 신청을 받는다고 했다. "얘들아, 우리도 경매에 참가하자." 내 갑작스런 제안에 류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 "경매에? 왜? 그거 사려구?" "아니, 그게 아니라 자리가 없쟎아. 경매에 참가하면 편한 자리에 앉아서 구경할수 있쟎아. 뭐 이쁜거 있으면 살수도 있고...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러자 세이몬이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하자, 하자, 하자. 나 그거 하는거 한번 보고싶어." "아힌, 그러다가 돈 다쓰려면 어쩌려구?" "내가 넌줄 알아? 돈을 다쓰게? 걱정마. 우리중 내가 제일 금전 감각이 뛰어난걸 몰라?" "헹, 금전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그런 고급 여관에서 묵냐?" "어때서 그래? 너도 좋으면서, 아힌 빨리 신청이나 하자." "세이몬, 경매할때 너가 갖고싶은거 나오면 말해. 너 경매하게 해줄께." "에? 나 할줄 몰라." "괜찮아,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꺼니까 가르쳐 주면 돼잖아." "정말? 류미르 너도 할꺼야?" "난 그런거 관심 없어." "류미르,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너도 보석 좋아하쟎아." 뜨끔해 하는 류미르를 뒤로하고 나는 참가 신청을 했다. "여기 번호표가 있습니다. 100번 이시군요. 하긴 오늘은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가 경매에 나와서 그런지 보통때보다 참가자가 2배는 늘었어요. 구경하는 사람들도 더 늘고....아, 경매 참가자는 이쪽으로 들어가세요, 이제 한시간 후면 경매가 시작됩니다. 수행원은 2분까지 참석 가능하니까 유념해 주세요." 경매 시작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아서 뭘 하기에는 어중간 했기에 그냥 들어가서 있기로 했다. 줄을 따라 들어가자 사람들에게 가려서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경매장이 보였다. 앞쪽 높은 단상에는 사회자가 서는 자리와 경매 물품을 올려놓는 탁자가 있었고 단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경매 참가자들이 앉는 의자들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 뒤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줄이 가로질러 있었는데 그건 아마 구경하는 사람들과 참가자들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인것 같았다. 그런 경매장에 들어와서 내가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몰라 두리번 거리고 있을때 안내자인 듯한 사람이 와서 정중히 말했다. "번호표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내가 번호표를 보여주자 그는 번호표를 보더니 우리를 맨 뒷줄의 끝에있는 의자로 안내했다. 아마 내가 거의 마지막 참가자였던 모양이었다. 뒤에 구경하는 사람들은 벌써 꽉꽉 들어차 있었지만 경매 참가자들이 앉는 의자들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단지 내 앞줄에 몇명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속속 들어와서 자리를 메꾸어 갔다. 정말 가지 각색의 남녀노소들이 왔는데 공통점은 모두 다 매우 값비싼 옷을 입고 수행원을 한, 둘씩 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역시 부자들만 모여 드는군..." 류미르도 그걸 알았는지 낮게 중얼 거렸다. 내 옆에도 어떤 뚱뚱한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값비싼 실크로 된 옷을 입고 목에는 금사슬을 여러줄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비서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우락 부락한 근육맨이 버티고 섰다. 아린 이야기-경매장에서 생긴 일 (4) 번 호 : 9960 / 10023 등록일 : 2000년 07월 18일 00:14 등록자 : LODEMP 조 회 : 48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 (4) 사람들이 다 자리를 잡고 앉았을때 단상으로 어떤 사람이 올라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부터 올해 보석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나무 망치를 들어 단상을 두번 내려치자 경매가 시작 되었다. 처음 올라온 물건은 머리장식 이었다. 진주로 꽃을 만들어 달고 그 주위로 백금으로 만든 잎으로 둘러싼 무척 아름다운 거였다. "호, 역시 이름 높은 보석 경매 다운걸? 초반부터 저런걸 내놓다니..." 류미르가 머리 장식에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류미르, 맘에 들어? 사주랴?" "내가 저걸 어따가 쓰냐?" "머리 장식할때 쓰지, 너한테 잘 어울리겠는걸?" "헹, 나보다는 너에게 더 잘 어울리는거 아냐?" "그럼 나 사줄래?" "내가 돈이 어딨냐?" "왜 없어? 나한테 있쟎아. 모자르면 내가 돈 빌려줄께 걱정말고 나에게 사줘." 류미르와 내가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머리 장식에 대한 경매가는 계속 올라갔고 세이몬은 정신없이 경매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거라 무척 신기했나보다. 결국 그 머리장식은 어떤 부자집 마나님께 4존드에 넘어갔다. 다음 경매 물품으로 올라온것은 팔찌였다. 너비가 5cm 쯤 되어 보이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팔찌였는데 팔찌 양 끝이 더 두껍게 황금으로 테가 둘려 있었고, 그 사이에는 옆으로 누인 S 자 모양의 곡선이 팔짜를 한바퀴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둥근 곡선 사이 사이에 파란 사파이어가 하나씩 박혀 있었다. "우와, 예쁘다." 여기 저기서 감탄사가 터지는 가운데 내 옆에서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세이몬이었다. "세이몬, 저게 맘에 들어?" "응, 류미르는 안 예뻐?" "비싸보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족쇄같아." "그래? 난 예쁘기만 한데..." "세이몬, 저게 맘에 들면 사줄까?" "정말? 사줄꺼야, 아힌?" " 그러엄, 세이몬이 맘에 들어하는데 하나 사주지 뭐, 경매장에 왔으니 뭔가 하나는 사야 하쟎아?" 그때 벌써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가격을 부르고 있었다. "1 존드 50." "2 존드." "2 존드 30." "2 존드 50." "2 존드 70." "2 존드 80." "3 존드." .......... "3 존드, 3 존드까지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어떤 귀족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가 3 존드까지 불렀을때 더이상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없자 사회자가 소리 높여 물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사회자는 망치를 들어 단상을 내려치려고 했다. 망치를 두번 내려 치면 그 팔찌는 3 존드를 부른 귀족 남자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3 존드 30." 사회자가 망치로 단상을 내려치기 직전에 내가 재빨리 가격을 외쳤다. 그러자 그 귀족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한번 힐끗 쳐다 보더니 다시 가격을 올려 불렀다. "4 존드." "4존드 50." 나도 질세라 50셀을 더 올려 외쳤다. "4 존드 70." "5 존드." 나는 귀족 남자가 더 부를 것이라 예상을 하고 6 존드까지 부를려고 했는데 예상외로 그는 가만 있었다. "5 존드, 5 존드까지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사회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지만 더 가격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예, 그럼 이 황금세공 팔찌는 5 존드에 100번 참가자님께 넘어갔음을 선언합니다." "우와~" 그가 망치를 두번 내려치며 선언하자 세이몬은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쳇, 기껏 영주 부인에게 얻은 5 존드가 세이몬에게 그냥 넘어갔군." "삐지지마 류미르, 너한테도 하나 사줄께." "누가 삐졌다고 그러는거야?" 그 뒤에도 경매는 계속 되었고 정오가 되어서야 점심식사 시간 겸 한시간 휴식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경매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고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뿐이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조마조마 하면서 경쟁을 지켜 볼 정도였다. 그러나 휴식 시간이 될 때까지도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유명한 것이니 만큼 나중에 나오려는 듯 했다. 아린 이야기 - 제 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 (5) 번 호 : 10000 / 10038 등록일 : 2000년 07월 19일 00:41 등록자 : LODEMP 조 회 : 46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 (5) 휴식 및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경매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그때쯤에 나는 자꾸 걸리는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류미르의 태도였다. 세이몬에게 팔찌 하나를 사줘서 류미르에게도 하나 사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괜찮은 물건이 나오면 류미르에게 어떠냐고 물어봤다. 그러나 나오는 물건 모두 맘에 들어하지 않는 거였다. 이유도 가지가지 였다. 세공이 맘에 안든다느니, 너무 커서 무거워 보인다느니, 보석이 안 예쁘다느니, 노땅 스타일이라느니.. 등등, 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안목이 높았는지 류미르가 맘에 든다고 하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죄다 류미르에게 하나씩 흠이 보이는 것 뿐이었다. 결국 난 맘에 드냐고 묻는 것을 포기해 버렸지만, 류미르에게 뭔가 하나 사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내 머리속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이제 경매도 막바지에 이르렀을즈음 새로 물건이 하나 올라 왔는데 그거은 황금으로 된 서클릿이었다. 디자인이 단순, 깔끔 하면서도 우아해 보였고 세공도 꽤 고급스럽게 된 서클릿이었다. 앞쪽이 V자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뾰족한 부분에 푸른 에메랄드가 하나 박혀 있었다. 눈과 머리카락이 푸른 류미르가 하면 꽤 잘 어울릴것 같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 셋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같았는데 류미르는 푸른 색, 나는 붉은 색, 그리고 세이몬은 검은 색이다. 빨강, 파랑, 까망..) 그러나 이번에도 류미르에게 맘에 드냐고 물었다간 또 무슨 이유를 대면서 맘에 안든다고 할 것 같아서 내가 그냥 사서 나중에 주기로 결심했다. 그때 "3 존드 50. 3 존드 50 까지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라고 외치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동안 벌써 서클릿의 가격이 대충 결정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4 존드!" 내가 사려는 걸 남에게 빼앗기기는 싫어서 나는 재빨리 소리쳤다. "예, 4 존드 나왔습니다." "4 존드 20!" "5 존드!" 누군가 나보다 더 가격을 올려 부르길래 경쟁하기 귀찮은 나는 가격을 와창 올려서 불러 버렸다. "아힌, 저걸 네가 하려구? 너한텐 안 어울리겠다." "류미르,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안목이 높았냐?" "이건 누구나 보면 다 안다구, 왜 저걸 사려구 하는거야?" "예쁘쟎아." 내 한마디에 말문이 막혀버린 류미르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긴 예쁘니까 사지, 안그러면 왜 사겠어? 결국 나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 서클릿은 내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이자 가장 관심이 집중되 있던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 가 나왔다. 올라온 그 목걸이를 보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와 정말 똑같을 뿐 아니라 보석들도 모두 진짜였던 것이다. 여기 저기서 여느때보다 큰 사람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났다. 구경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경매에 참가한 사람들까지 모두 크게 술렁 거렸기에 사회자가 망치를 두드려서 조용히 시켜야 할 정도였다. "아힌, 어떻게 된거야? 너거랑 똑같이 생겼쟎아?" "보석들도 진짜야, 이렇게 되면 정말 어느게 진짜인지 알수가 없겠군." "동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할머니가 나한테 가짜를 주실 리가 없는데..." "네 것도 진짜쟎아." "그렇지, 보석도 진짜고, 모양도 저거랑 똑같아." "혹시 테아칸 왕비 목걸이가 원래 2 개가 아니었을까?" "그렇진 않을꺼야, 세이몬. 만약 그렇다면 세계 3대 목걸이가 아니라 세계 4대 목걸이라구 했을껄? 그리고 정말 2개를 만들었어도 이렇게 똑같이 만들었겠어?" "그런가?" "우와, 저것좀 들어봐. 딴 물품이랑 가격부터 차이가 큰걸? 벌써 10 존드 까지 나왔어." "세계 3대 목걸이쟎아. 50 존드 까지 나와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경쟁은 정말 치열했다. 누군가 가격을 부르면 그에 질세라 또 다른 누군가가 가격을 올려 불렀고, 그러면 또 다른 누군가는 더 올려서 불렀다. "불꽃이 튀기는데?" 세이몬도 놀라운지 한마디 던졌다. 근데 그때 내 옆에서 누군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 뚱뚱한 중년 남자가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이 귀 밑까지 벌어져 있었다. 그래도 참으려고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지만 바람이 새어 나오는건 어쩔수 없었나 보다. 그런데 더 이상한건 그 뒤에 서있던 비서같은 중년 남자는 얼굴이 침통해 보이는 것이었다. 경매장에서 가격이 치솟는 걸 보며 좋아하는 남자와 침통해 하는 그의 수행원.... 정말 묘한 관계 였다. 이제 가격은 아까보다 훨씬 높아져 50 존드를 넘어서고 있었다. 포기한 사람도 몇몇 나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걸 보며 내 옆의 뚱뚱한 남자는 입이 더 벌어졌고 그의 수행원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저 뚱뚱한 남자가 이 경매장의 주인인가 보군." 류미르도 보고 있었는지 나에게 낮게 속삭였다. "그런데 그의 수행원은 왜 저러지?" "나도 모르겠어. 정말 묘하지 않아? 고용주가 저리 좋아하는데 우울한 표정이라니. 뭔가 이상해." 내 말에 류미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 가격은 점점 높아져 이제 100 존드 가량 되었다. 이제는 서서히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가격을 높여 나갔다. "정말 어마어마한 금액인걸?" "그만큼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가 탐나는 거겠지, 그러고보니 할머니가 이걸 주며 말씀하시길 테아칸 왕국에서 재정이 모자라 이걸 처분했는데 어떤 상인이 이거 하나 사려구 전 재산을 모조리 내놨다구 하더라. 진짜인지 아님 과장된건지 모르지만 그만큼 매력있다는 소리겠지?" "근데 아힌, 나 네 목걸이와 저 목걸이하구 다른점을 알아냈어." 계속 경매를 지켜보고 있던 세이몬이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다른점? 저렇게 똑같이 생겼는데?" "똑같이 생기긴 했지만, 아힌 네건 무척 오래되어 보였는데 저 목걸이는 새것같이 반짝반짝 거려. 안그래 류미르?" "어?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 이봐 아힌,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는 오래 된거 아냐?" "응? 아, 맞아 몇백년 전꺼라고 했으니 오래 된거지." "그런데 그렇게 오래된 목걸이가 저렇게 새것처럼 반짝 거릴수 있니?" "글쎄, 깨끗이 닦아서 그렇지 않을까? 왜 보석 닦는 방법이 있쟎아?" "그래도 새것처럼 깨끗하게 닦이진 않지." 우리 대화에 갑자기 누군가 다른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 보니 사방이 조용해져 있었고 시선이 전부 우리쪽으로 쏠려있었다. 그리고 아까 그 목소리가 다시한번 말했다. "그래, 맞아. 몇백년 전의 목걸이가 새것처럼 반짝일리가 없지." 이제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단상위의 사회자는 어쩔줄 몰라했고, 내 옆의 뚱뚱한 남자는 경직되어 버렸다. "여러분, 조용히. 우리 보석 경매단은 품질을 엄격하게 심사하여 진짜 물품만 내어 놓습니다." 사회자가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자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몇백년이나 된 목걸이가 마치 새것처럼 반짝거리는 이유가 뭐요? 당신들만의 특별 세척 방법이라도 있는거요?" 그리고 또 다시 터져 나오는 말. "저건 진짜가 아니야!" 경매장은 그 말 한마디로 인해 완전히 소란스러워 졌다. 그리고 화가난 경매 참가자들은 제각기 일어나서 나가버리느라고 주위는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선이 느껴져 그 시선의 근원지를 찾아가 보니 내 옆에 있던 그 뚱뚱한 남자가 나를 죽여버릴 것 처럼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얘들아, 왠지 여기 있으면 안될것 같지 않니?"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데리고 재빨리 일어나서 입구로 다가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있어서 나가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청천 날벼락 같은 소리 "저놈들을 잡아!" 그러자 경매장 내에 있던 경호원들이 우리에게로 우르르 달려 들었다. 잘못한건 없었지만 왠지 잡히면 안될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흩어져. 나중에 여관에서 만나자구." 우리 셋은 달려드는 경호원들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입구가 막혀 도저히 나가지 못할것 같아 구경하는 사람들과 경매 참가자들을 가로 지르는 경계로 돌진했다. 경계가 줄 하나였기에 그걸 뛰어 넘어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 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나는 꼼짝없이 경매장 안에 있어야 했다. 보아하니 류미르와 세이몬도 별 좋은 상황은 아니었기에 나는 도망갈 생각은 포기하고 정면으로 맞붙어 나갔다. "흥, 날 잡으시겠다구? 어디 잡아보시지?" 나는 나에게 달려드는 경호원들에게 파이어 볼을 한방 날리고 그 뚱뚱한 남자가 있는 쪽으로 달려 들었다. 그를 인질로 잡아 경호원들을 막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뚱뚱한 남자 옆에는 근육맨이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번 호 : 9932 / 10363 등록일 : 2000년 07월 21일 00:08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5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 (6) 뚱뚱한 남자 뒤에 서있던 근육맨은 나를 보자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며 느긋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우씨, 되게 여유 만만이네...' 상대방이 너무 느긋하게 있자 나는 내심 긴장하면서 내 검을 뽑아 들고 신중하게 노려 보았다. 그런데 그 근육맨은 싱글싱글 웃을 뿐 덤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뭐야? 왜 저렇게 웃기만 하는거지? 기분나빠라.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나는 바쁜데 상대방이 덤빌 생각을 안하자 내가 먼저 공격했다. 여차하면 재빨리 튈수 있게 급소를 노리지 않고 팔목을 노렸다. 내가 공격하면 그쪽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내가 찔러 들어오자 근육맨은 정말 실력이 뛰어난지 거의 몸을 움직 이지 않은채 내 검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몸을 피한뒤 공격할 거라 생각 했는데 그는 그냥 피하기만 했을 뿐 공격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왜 공격을 안하지?' 나는 뻗었던 검을 크게 원을 그려 다시 뒤로 돌리면서 이번엔 그의 다리를 노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손을 약간 움직여 검을 이동시켜 내 검을 막고는 그냥 싱긋 웃을 뿐이었다. 정말 되게 기분 나빴다. 다시 공격하기 위해 검을 회수하며 뒤로 빠지다가 근육맨과 같이 있던 그 뚱뚱한 남자의 또 다른 수행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는 매우 다급한 눈짓으로 내 뒤를 가르켰다. 얼른 뒤를 돌아보니 거기는 어느새 왔는지 경호원 대 여섯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이런, 포위를 당했군. 그러길래 주위를 잘 살폈어야지." 그 근육맨은 이걸 노리고 있었는지 나한테 씨익 웃어 보이면서 검을 거두고는 친절한 충고 한마디도 해주었다. 재빨리 경매장 안을 훝어보니 아직 경매장 안은 미쳐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가지 못한데다 류미르와 세이몬도 빠져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경호원들에게 쫒기고 있었다. 그럴때 경매장 건물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층 높이에 위쪽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서 경매장 안으로 햇빛이 잘 들어올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내 주위를 다시 훝어보니 뚱뚱한 남자는 아직도 화가 나 있는지 얼굴이 벌개져 씩씩대고 있었고 근육맨은 느긋한 표정으로, 그리고 그 옆의 다른 수행원은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포위한 경호원들은 한발 한발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김건모의 '부메랑'이 생각나는건 왜일까?) 나는 그들을 향해 한번 씨익 웃어주었다. 그리고, "윈드 플로우!" 강한 바람이 내 주위에서 일어나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내게로 다가오던 경호원들이 쓰러지고 의자들이 휩쓸려 가고 사람들이 넘어지고 여기 저기서 비명소리가 났다. 덕분에 혼란스러웠던 경매장 안이 더욱 더 아수라장이가 되었다. 이따를 틈타 나는 벽을 향하여 평소에 사용하는 것 보다 2 배 더 강력한 '버스트 프레아'를 날렸다. 수십개의 강력한 파이어 볼들이 벽과 충돌하여 폭팔하면서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고, 아직 강력한 바람에 경호원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틈을 타 재빨리 구멍을 통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원래는 창문으로 도망치려고 했는데 그 뚱땡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고한 나를 잡으려는 그가 미워져서 조금이라도 더 손해를 입히려고 벽을 부숴버린 것이었다. (나도 못됐지...) 그런데 내가 밖으로 나오자 건물 안을 휩쓸던 바람이 멈췄는지 물건들이 와장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함께 그 뚱땡이가 소리치는게 들렸다. "이 멍청이들아, 뭘하고 있는거야? 벌써 밖으로 나갔쟎아. 빨리 잡아와!" 살짝 뒤를 돌아보니 근육맨과 몇명의 경호원들이 구멍을 향해 달려오는게 보였다. "허걱~" 이번에 잡히면 정말 큰일날 것 같아서 나는 마침 옆으로 나 있는 골목을 따라 재빨리 도망쳤다. 처음보는 골목을 지리도 모르면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가 서서히 지칠때 쯤, 다음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나를 놓쳐서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 있는 경호원들과 딱 마주쳐 버렸다. "우씨, 이게 왠 날벼락..." "이쪽이야~!" 자기 동료들을 부르며 달려오는 경호원들을 뒤로하고 재빨리 왔던 길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길을 잘 못 들었는지 이럴때면 꼭 도착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앞으로 나가면 다시 경호원들과 마주칠것 같고, 이대로 기다리고 있자니 그 근육맨과 싸울것 같고 해서 날아 오르려고 할 때였다. (왜 미리 날 생각을 못했나 몰라.) "이쪽이야."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향하니 아까 근육맨과 같이 있던 그 뚱땡이의 또 다른 수행원이 골목을 막고있는 담벼락 위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빨리 이쪽으로..."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담벼락을 넘어가 그가 안내하는 대로 어느 집의 지하로 들어갔다. 그가 그 뚱땡이의 수행원이라 걱정 되기도 했지만 한참 신나게 쫒기느라 지쳐 있었고 또 아까 경호원들이 날 포위할때 눈짓으로 가르쳐 준 것도 있기에 믿기로 했다. 그가 안내한 지하방은 환기를 위한 조그마한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전부 였기에 방안은 어둑어둑 했다. 그가 곧 초를 가져와 불을 밝히자 그제야 방안이 환해졌는데 작업실인지 여기저기 작업대 위에 본 적도 없는 공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미안하게 됐군." 그가 나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기도 의자에 앉으면서 제일 먼저 꺼낸 말이었다.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자 (원래는 내가 먼저 고맙다고 해야 하는게 정석 아닌가?) 그는 피식 웃더니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나때문에 벌어진거야." "예? 무슨 일이요?" "너와 네 친구들이 쫒기게 된거 말야. 그 테아칸 목걸이가 가짜라는 걸 눈치채는 바람에 이렇게 쫒기게 되었쟎아." "아, 그거야 그 뚱땡... 아니 그 뚱뚱한 남자가 잡으라고 해서 그런거쟎아요." "하하, 그는 그 경매장의 주인이지. 그리고 내 고용주 이기도 하고." "짐작은 했어요. 우리가 그 목걸이가 가짜라는 걸 눈치채서 그는 크게 손해를 보겠지요?" "그렇겠지. 경매 명성에 흠이 갔으니 이제 그의 경매는 망한거지. 하지만 그가 벌어들이는 거에 비하면 경매장이 망한거야 새발에 피겠지." "그가 그렇게 부자예요?" 번 호 : 10007 / 10363 등록일 : 2000년 07월 22일 00:45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4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5화 경매장에서 생긴 일 (7) "그가 그렇게 부자예요?" "그래, 엄청난 부자지. 그는 보석 상인이야. 그러다가 어느정도 자리가 잡히자 10년 전부터 보석 경매를 시작했지. 비싸고 좋은 것들만 골라서 경매를 하다보니 인지도가 높아진거야. 그러다가 욕심이 생기는 바람에 실종되거나 사라진 유명한 보석들을 똑같이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지. 그냥 보석보다는 유명하거나 사연이 있는 보석이 몇배 더 비싸게 팔리거든." "그게 아저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가 나를 쳐다 보았다. 아무 말도 않고 한참이나 쳐다 보기만 해서 오히려 내가 점점 당황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표정 했던 얼굴이 점차 어두어지더니 급기야는 침울해져 버렸다. "그 가짜 목걸이를 만든게 바로 나야. 그것 말고도 여러개를 더 만들었지만 오늘처럼 가짜라는걸 들킨건 처음이지." "에구, 그러면?" 놀란 나는 벌떡 일어나서 여차 하면 마법을 날릴 생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아니야, 너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게 아니라, 난 너희에게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 그 목걸이가 가짜라고 밝혀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 그는 정말 나에게 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부정했다. "왜요? 가짜인게 밝혀져서 아저씨도 곤란한거 아녜요?" 그러자 그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네말이 맞아. 나도 그걸로 꽤 큰 돈을 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가짜를 만들었다는게 밝혀지면 시에서도 가만 나두지 않겠지." 그리고 나는 다시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환하고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하지만 말야,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단지 그게 언제인지 몰라서 항상 맘을 졸이고 있었지. 이제 밝혀져서 오히려 속이 후련해. 이젠 맘 편히 살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엉거주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살꺼 뭐하러 첨부터 그런일을 했어요?" "변명 같지만, 난 정말 그런일을 하고싶지 않았어. 처음에 그 보석 상인이 나를 속여서 만들게 한거지." "에? 어떻게 속여요? 가짜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들어 줬을꺼 아녀요?" "난 애초부터 모조 보석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었어." "에?" "속여서 파는게 아니라 이건 가짜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파는거 말야. 왜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파는 모조품 가게 있지? 그런데서 파는걸 만들었다구." "그랬군요. 근데 왜 하필 모조품을 팔아서 만들었어요? 가짜 보석을 만들어서 팔 정도면 보석을 세공할 줄 안다는거 아니예요? 그럼 차라리 모조를 만들지 말고 보석 세공을 하실 것이지..." "하, 그것도 능력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거야. 무조건 보석을 세공해서 악세사리로 만들어서 내놓는다고 다 사가는줄 알아? 것두 예쁜거나 독특한게 팔릴뿐인걸. 하지만 난 그렇게 내가 독창적으로 예쁘게나 독특하게 만들 센스가 없었어. 어쩌겠어?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는걸, 그래서 포기하고 다른 직업도 찾아 볼려구 했지만 다른 직업은 도저히 못하겠더라구." "왜요?" "난 보석을 무지 좋아했거든, 계속 보석을 다루는 직업을 갖고 싶더라구. 그렇다고 보석상인이 되기에는 상술이 없구...그러니 그만 둘 수가 없더라구. 그래서 생각한게 모조품 만들기었지. 난 딴 사람이 만들어 놓은걸 그대로 만들거나 아님 그걸 다르게 만들어 보는건 무지 잘 했거든. 그래서 보석 세공을 그만두고 모조품을 만든거였어. 그리고 이왕 만드는거 아주 유명한 것들을 만들어 보고 싶었지, 아니면 그것들을 내 맘대로 바꿔 보기도 하고 말야. 첨부터 유리같은 모조 보석으로 만들었으니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없구, 내 맘대로 바꿨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말야. 그리고 내 적성을 살릴수 있기도 하구."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놨다. 어떤 유명한 목걸이는 자신이 디자인을 살짝 바꾸어 봤는데 그게 더 잘 팔렸다든지 자신이 만든 모조품이 진품 못지않게 똑같아서 사람들이 감탄 했다든지 정말 그의 입은 쉴 새도 없이 움직이며 이야기를 해나갔다. 처음에 말할때는 침울한 표정으로 머뭇머뭇 말하더니 자신이 만드는 모조품 이야기가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듯 환한 표정에 하하 웃어 가면서 나에게 모조품 모양 디자인 한 것 까지 보여주면서 신나게 말해주는 거였다. "하아~, 그땐 정말 행복했는데....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었구. 그때 그 보석 상인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보석 상인이 왜요?" "어느날 그가 찾아 왔더라구. 그때 내가 '인어의 눈물' 이라는 목걸이를 똑같이 만들어서 판 적이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왔더라구. 정말 똑같이 잘 만들었다구 감탄하면서 자신이 진짜 보석을 줄테니 그걸 똑같이 만들어 달라구 부탁 하더라고. 자신이 하나 갖고 싶어서 그런다면서 남에게는 가짜라고 말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난 또 그걸 믿었지. 내가 만든 가짜가 진품과 구분을 못한다는 것이 은근히 자랑 스럽기도 했고 또 그런 유명한 걸 진짜 보석으로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건든..." "그런데 그걸 경매로 팔았군요?" "그래. 나중에 그걸 알고 따지러 갔더니 그는 웃으면서 나보고 어쩔 꺼냐고 하더라구. 내가 그걸 만들었으니 나도 공범자가 되었다면서... 하아~, 그때 그냥 자수하고 끝내야 했었는데." "그때 끝내지 못해서 계속 가짜를 만들었군요. 들킬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그래도 남들이 진품과 구별을 못 할 정도였으니 조금은 기뻤지. 내 실력이 그정도이구나 하고 말야. 하지만 그렇게 되니 그건 내가 만든 작품이 아니더라구. 단지 똑같이 흉내를 낸것 뿐이었지." "하지만 모조품을 만들때도 똑같이 만드는 거쟎아요." "그렇지 않아. 모조품을 만들때는 똑같이 만들어서 내놓는것도 있지만 내가 내 나름대로 다르게 바꿔서 만들어 내기도 했단 말야. 그 작품에 나의 생각이, 내 아이디어가 들어갔단 말야. 그게 얼마나 큰 차인지 알아? 새로운 것을 개발해 내는 창의성을 가지지 못한 나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빌려와서라도 내 생각이 들어간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게 얼마나 기쁜지 알아?" 그가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토론했지만 내가 전혀 이해한 표정이 아니었던지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긴, 네게 내 생각을 이해해 달라는게 무리일수도 있지." "이제 어쩌실 거예요?" "자수할꺼야. 그 목걸이가 가짜라는게 밝혀 졌으니 나도 무사하지 못할 꺼고, 또 내가 자수한다고 해도 그가 날 어쩌질 못할테니, 그리고 그 뒤에 죄값을 치르고 나서 또 다시 모조품을 만들어야지." "모조품 만드는게 그렇게 좋아요?" "그래, 난 예쁜 보석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좋을 뿐이야. 보석 하나하나도 예쁘지만 그걸 조화시킨 아름다움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거든, 또 그걸 내가 만들었다는 기쁨을 느끼는건 너무 짜릿하지. 난 단지 그걸 느끼고 싶을 뿐이야." "하하, 이해하긴 어렵지만 아저씨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래요." "정말 아쉬운건, 난 진짜 보석들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는거야. 뭐 사라진 것들이니 누구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은 꼭 보고 싶어. 그림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것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기도 하고, 또 내가 정말 똑같이 만들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뭐 죽는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이야 못들어 줄까? 더욱이 날 도와준 사람인데 목걸이 하나 보여주는 것 쯤이야. 보여준다고 닳는건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난 주머니에서 테아칸 목걸이가 들어있는 상자를 꺼냈다. 내가 뭔가를 꺼내자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아저씨는 상자가 열리면서 보이는 테아칸 목걸이를 보고 눈이 크게 떠졌다. 한동안 그 목걸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저씨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하,하, 이게 진짜구나. 그래, 이런게 바로 진짜였어. 정말 아름답구나. 네가 이걸 가지고 있었니? 그래서 내가 만든게 가짜라는걸 알았구나?" "아니예요. 첨엔 나도 놀랐어요. 정말 똑같았거든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만든거와 이건 차원이 틀려. 그래, 첨부터 만들때 정신상태가 틀렸는걸, 다시 만들어볼꺼야. 이것보다 더 아름답게, 그래, 나도 아름답게 한번 만들어봐야지. 이런 아름다운 보석을 나도 만들어낼꺼야...." 아저씨는 넋이 나간듯 계속 목걸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목걸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 조그맣게 혼자 계속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꼭 정신이 나간듯 하는 아저씨의 행동에 내가 잘 했는지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뭐 얼굴은 저렇게 환하니 나쁜짓을 한건 아니겠지.' 아저씨는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더니 순간 벌떡 일어나서 작업대쪽으로 걸어가더니 종이를 꺼내 뭔가를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완전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공간이동 시동어를 외웠다. 여관으로 돌아오니 잠시후에 류미르와 세이몬도 헥헥거리며 돌아왔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의 짐을 챙겨들고 서둘러 여관을 나와 도시를 빠져 나갔다. "그 경매장 주인 꽤나 열받았을꺼야." 류미르가 킥킥 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왜 죄없는 우리가 이렇게 도망쳐야 하는거야?" 경매장에서 쫒긴것도 모자라 짐까지 챙겨 도망치듯 도시를 빠져 나온게 못마땅 했는지 세이몬이 툴툴 거렸다. "뭐 어때? 그 경매장 주인도 꽤나 손해를 봤을껄 뭐. 그러면 된거지. 아, 그나저나 나한테는 아무 이득도 없이 고생만 했군." "글쎄말야." 세이몬은 계속 툴툴거렸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품속을 뒤적뒤적 거리더니 뭔가를 꺼내서 자신의 왼쪽 손목에 턱하니 찼다. "어라? 세이몬, 그거 경매장에 있던 팔찌 아냐? 언제 챙겼냐?" "이건 아힌 네가 사준거쟎아. 그러니 내꺼 아냐? 당연히 챙겨야지." "야, 난 돈 아직 안냈어." "뭐 어때, 그런 나쁜 놈들은 손해좀 입어야해." 옆에서 류미르가 세이몬을 편들어 주면서 자신도 품속을 뒤적 뒤적 거리더니 뭔가를 꺼내 나에게 던졌다. 얼껼에 받으니 그건 내가 류미르에게 사주려던 서클렛이었다. "류미르, 너도 챙겼니?" "경매장 안에서 도망칠때 단상쪽으로 도망치게 되었는데 거기서 경매 물품을 황급히 챙기고 있더라구. 뭐 그렇게 많은데서 하나쯤 가져오는데 어때? 세이몬도 챙긴줄 몰랐지만." "난 내껄 챙긴거야."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하지만 웃음이 계속 삐져나온는건 참지 못했다. "푸하하하, 역시 너희들은 의적단이야."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서클렛을 다시 류미르에게 던졌다. "받아!" 류미르는 서클렛을 받아들고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걸 왜 나에게 주는거야?" "그거 원래 너 주려고 그랬던 거야. 세이몬과 마찬가지로 너도 네 물건 챙기는데 일가견이 있나보구나?" "아, 그랬던 거였어?" 류미르는 당황한듯이 서클을 만지작 거리더니 곳 기분 좋은듯 씨익 웃고는 머리에 서클렛을 착용했다. "흠, 역시 내 생각대로 잘 어울리는걸?" "이젠 어디로 갈꺼야?" "보석 모으러 가야지. 다음 타겟은 사랑과 평화의 여신상이야." 번 호 : 10167 / 10236 등록일 : 2000년 07월 24일 01:00 등록자 : LODEMP 조 회 : 49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6화 세이몬 납치되다. (1) 제 16화 세이몬 납치되다. 류미르가 변했다. "변했어." "확실히 변했지?" "느물느물해졌어." "느끼하게시리..." "하지만 대신 소득은 많쟎아?" "그건 그렇지." 세이몬과 나는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사가지고 나오는 류미르를 보며 수근댔다. 켈튼을 떠나 다음 목표가 있는 라크네 라는 도시로 향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고보니 내가 세이몬, 류미르와 함께 여행을 한지도 벌써 한달 하고도 2주가 더 지나 있었다. 그동안 인간 세상을 처음 여행하는 세이몬과 류미르, 그리고 성룡이 되어 처음 여행을 다니는 나는 이제 꽤 익숙하게 지도를 보고 길을 찾고, 여관에 묶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도 조금씩 변했겠지만 (한달동안 여행해도 변하나?) 그중 류미르는 상당히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뭐, 여행하면서 변할 수 있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세이몬과 나는 때때로 류미르의 변화에 깜짝 놀라거나 감탄하곤 했다. 우리 셋은 남들이 보기에 정말 뛰어난 미소년들 이었다. (난 여자지만 남장을 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서로 머리색과 눈 색이 틀려도 종종 형제로 오인 받곤 했다. 그런데 우리중 류미르가 키가 제일 크다보니까 사람들은 류미르를 큰 형으로 생각하곤 했다. (참고로 우리 셋중 내가 제일 키가 작다.) 처음에는 주로 내가 여관에서 방을 주문하고 식사를 주문하고, 물건을 사곤 했는데 가끔 류미르가 큰 형으로 오인 받다보니 그런 일을 점점 류미르가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여관에 가거나 가게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이몬과 나를 가르키면서 동생이냐고 묻기도 하고 3 형제가 다 잘 생겼다고 감탄 하면서 류미르에게 주문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점점 류미르에게 그런 일을 맡기게 되었고 또 의외로 류미르가 나보다 더 꼼꼼 했기에 나보다 류미르가 하는 것이 더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뭐, 그것가지고 변했다고 그러는건 아니다. 그런 일은 누구나 그 상황이 되면 할 수 있을테니까.... 그럼 뭘 가지고 그러냐구? 흠, 그건 말이지...... 처음 류미르가 가게나 여관 같은데서 주문하길 요구 받으면 당황하기도 하고 머뭇머뭇 거리는 바람에 내성적이라느니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소리를 들었고 또 그정도가 되면 내가 옆에서 나서야 했었다. 그러다가 점차 익숙해 지면서 자연스레 잘 할수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어느 빵가게에서 빵을 살때 류미르가 포장된 빵을 받으면서 건네주는 소녀 (그 가게 주인 딸내미였다.)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는데 그 소녀가 그걸 보고 뿅~~ 가면서 덤으로 빵을 왕창 더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가끔씩 덤을 받기는 했지만 어색해 하던 류미르에게 반해서 그런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 일이 있은 뒤로는 류미르는 어떤 가게에서 어떤 물건을 사든지 예의 그 (어떤 아주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찔한 미소를 항상 보여 주면서 지불한 돈으로 산 양 보다 더욱 더 많은 양을 받아 왔던 것이다. 그런거 보면 류미르도 생긴거완 다르게 엄청난 짠돌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모르겠지만 한단계 더 발전해서 닭살 돗는 아부성 발언까지 살짝 살짝 곁들어 가면서 더욱 더 수입을 늘려 나갔다. 이젠 대표로 나서는건 전부 류미르의 차지가 되었고 세이몬과 나는 그의 뒤에서 그의 나날이 발전되어 가는 솜씨를 보며 감탄만 하고 있으면 되었다. "대단해 류미르..." "타고 났다니까." 역시나 이번에도 사과 6개 오렌지 3개를 사는데 덤으로 사과 5개를 더 받고 싱글벙글 하면서 오는 류미르에게 세이몬과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후, 이정도 쯤이야. 하지만 오늘은 옆에 남편이 같이 있는 바람에 많이 얻지는 못했어." '이구, 그럼 저 가게 안은 지금쯤 찬 바람이 쌩쌩 불겠군...' 우리가 지금 있는 도시는 세키나라고 하는 도시로 켈튼 보다야 작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번창했고 큰 도시에 속한다. 그리고 오늘부터 3일간 축제기간 이어서 다른 때보다 더욱 더 사람들로 붐벼대었다. 물론 우리도 축제가 있다기에 축제를 구경하고 떠나기로 결정하고 지금 구경나온 것이다. 축제는 정식으로 오늘 밤 부터라고 하지만 벌써부터 거리에는 자리를 깔아놓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묘기를 부리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또 우리들처럼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는 복잡하기도 했지만 활기가 넘쳐 즐거웠다. 특히 인간 세상에 와서 축제를 처음보는 세이몬은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그러고보니 류미르도 축제는 처음 보는거지?' 류미르도 세이몬과 같을거라고 생각한 나는 그를 힐끗 쳐다 보았지만 세이몬처럼 들떠 보이지는 않았다. 이녀석은 큰 형 대접을 받더니 어느 사이엔가 진짜 큰형처럼 나와 세이몬을 챙겨주곤 했다. '참내, 대장은 난데 말야...' 그때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바라보니까 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가보자!" 잔뜩 들떠있던 세이몬이 제일 먼저 달려갔고 나와 류미르도 세이몬을 뒤따라 갔다. 가보니까 중년 남자와 이제 20살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원숭이 한마리를 데리고 재주를 뽐내고 있었다. 놀라운것은 그 아가씨가 정령사 인듯 카사 한마리를 불러내어 원숭이와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와, 저게 뭐야?" "저건 원숭이라는 동물이야. 지능이 꽤 높아." "호, 저 아가씨가 정령사인가? 정령하고 묘기 부리는건 첨 보는데?" "류미르, 넌 묘기 부리는 것 자체를 첨 보는거 아냐?" "푸하하하, 저녀석 되게 웃긴다." 나야 예전에 원숭이과의 동물들이 묘기 부리는건 많이 봤었기 때문에 별루 재미는 없었지만 사람들과 류미르, 세이몬은 정말 재미 있는지 연신 웃어댔다. "푸하하하, 어? 아힌, 넌 안웃기냐?" "별루...." "그래? 그럼 딴데로 갈까?" "갈꺼야? 잠깐만 기다려, 이거 아직 안 끝났쟎아. 이거 끝나구 가." "그래그래, 너두 재밌게 보는데 끝나구가. 그렇게 재미 없는것두 아니니까." 우리가 그렇게 잡담하는 사이 공연이 끝나서 원숭이가 모자를 들고 사람들 앞을 한바퀴 돌았고 사람들은 그 모자속으로 저마다 동전을 던져 넣어 주었다. 번 호 : 10552 / 10558 등록일 : 2000년 07월 29일 23:15 등록자 : LODEMP 조 회 : 3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6화 세이몬 납치되다. (2) 원숭이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자 세이몬도 류미르도 각자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동전을 꺼내어 던져 주었다. "아, 잼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또 이런거 구경하자." "세이온은 이런게 잼있나봐?" "처음 보는 거쟎아." "류미르, 너도 이런거 처음 보쟎아? 그러니까 우리 또 이런거 보자." "그러지뭐. 아, 저기서도 묘기를 하나봐, 가볼까?" 내가 류미르와 세이몬을 돌아보며 말하자 세이몬은 벌써부터 눈이 반짝반짝 해져선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풋, 세이몬, 그러니까 꼭 강아지 같다. 귀여워...." "어리다니까..." "내가 어디가 어때서 어리다는 거야? 그러는 넌 다 컸냐?" "어린애일수록 자신이 어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법이지." "류미르 너어~~" "자,자. 둘다 그만하고 구경 안할꺼야? 길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가자구."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 사이에 끼어 들어 그 둘을 이끌고 다른 묘기를 선보이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류미르와 부딧히고는 사과도 안하고 힐끗 우리를 보더니 그냥 가버렸다. "웃긴 사람이네, 부딧혔으면 사과를 해야 할꺼 야냐? 예의도 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세이몬이 투덜 거렸다. "호, 세이몬. 네가 많이 컸구나. 예의 운운 할줄도 알고....기특하기도 하지..." "우씨, 류미르. 자꾸 그럴꺼야?" "둘다 그만 하라니까. 근데 류미르 너 잃어버린거 없어? 아까 그 사람이랑 부딧혀서 뭔가 떨어뜨렸을 수도 있쟎아?" 왠지 그사람이 일부러 그런것 같은 생각이 든 나는 류미르에게 물었다. "응? 아, 뭐 그렇게 세게 부딧힌것도 아니고, 들고 있는 거라봐야 이거밖에 없는걸?" 류미르는 그러면서 세이몬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과일봉지를 넘겨 주고는 자신의 몸 구석 구석을 점검 하더니 순간 멈칫 했다. "야? 왜그래? 뭘 잃어버렸어?" 류미르가 멈칫하다가 다시 부지런히 자신의 몸을 뒤적 거리자 불안해진 나는 재차 물었다. "없어. 어디갔지? 이상하다..." "왜그러는데? 뭐가 없다는 거야?" 세이몬도 뭔가 이상했는지 류미르를 다그쳤다. "돈주머니가 없어졌어. 분명히 허리띠에다 매어 뒀는데..." "그럼 아까 그 부딧힌 사람이 소매치기였단 말야?" 설마 했었는데.... "흥, 이놈은 잘못 걸린거야. 감히 이 류미르님 돈을 훔쳐? 내가 그 주머니에다 추적 마법을 걸어놓은건 몰랐을꺼다." 류미르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재빨리 아까 그 소매치기가 사라진 쪽으로 뛰어갔다. "뭐야? 류미르 어디가는거야?"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류미르를 보며 세이몬이 황당해 하며 물었다. "아마, 아까 그 사람이 가져간 류미르 돈주머니를 찾으러 가는 걸꺼야. 우리도 가보자." 나도 류미르가 사라진 방항으로 걸어가는데 세이몬이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힌, 나도 따라가야해?" "응? 세이몬, 넌 안따라 올꺼야?" "그깟놈 하나 처리하는데 류미르 혼자서 충분하쟎아?" "딴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쟎아?" "그래도..." "왜그래? , 너 저거 보려구 그러지?" 지금 한창 묘기를 선보이는지 사람들의 감탄사가 쏟아져 나오자 세이몬의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쏠렸다. "그러면 세이몬 넌 여기서 저거 구경하고 있어. 내가 류미르 데리고 다시 여기로 올께." "정말? 그래도 돼?" "뭐 류미르 실력으로 별일이야 있겠어? 그러니까 넌 여기서 있어. 내가 갔다올께. 대신 딴데로 가면 안돼 알았지?" "응, 그럼 빨리 갔다와." 세이몬은 신나 하면서 묘기를 구경하는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정말 여기 계속 있어야 해, 딴데로 가면 안돼 알았지?" "알았어." 나는 세이몬에게 더 당부하고 싶었지만 뭐 별일 있으랴 싶었다. 그리고 아까 뛰어간 류미르가 또 걱정되기도 해서 류미르가 사라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류미르가 금방 눈에 띌 리는 없었고 또 류미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기에 나는 사람들이 없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하늘로 날아 올랐다. 그리고는 실프를 불러 내었다. "실프, 미안하지만 류미르좀 찾아 줄래? 류미르 알지?" 류미르와 같이 동행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 났을때 여러번 정령들을 불러 내었었기에 나와 계약을 맺은 정령들은 류미르를 알고 있었다. 실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류미르를 찾으러 간 사이 나는 어두운 밤 하늘에서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축제여서 그런지 밤이 점점 깊어감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 거렸고 여기저기 상점들이나 길거리에 내걸린 등에서 나온 불빛들로 인하여 거리는 환했다. "호오, 제법 볼만한걸? 서울의 야경 못지 않게 멋있어." 그러고 보니 이런 멋진 야경을 본건 이곳에 와서 처음이었다. 예전에 내가 사람이었을때는 밤에, 특히 여름 밤에 아파트 옥상에 올라 가서 야경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내가 이렇게 밤 거리를 바라 보면서 한창 옛 생각에 잠겨 있을때 실프가 돌아왔다. '주인님!' "아, 그래. 실프 찾았어?" 실프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서 날아갔고 나는 잠시 꺼냈던 옛 생각을 다시 접어 머리 깊숙이 넣어 두고는 실프를 뒤쫒아 갔다. 실프가 안내한 곳은 도시 변두리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곳에는 벌써 일(?)을 끝마친듯 류미르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돈은 찾은거야?" 내가 땅에 내려서면서 류미르에게 말을 건내자 놀란듯 류미르가 나를 쳐다 보았다. "뭘 그렇게 놀래?" "그럼 넌 이 깜깜하고 으슥한 골목에서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면 안놀래냐?" "겁이 많기는..." "이건 겁이 많은게 아니라 누구나가 다 놀라는 거야." "아, 그래그래, 너 겁 없어. 그건 그렇고 돈은 찾은거야?"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나를 노린 놈이 재수가 없는거야. 근데 너 혼자 온거야? 세이몬은?" "아, 세이몬은 거기있어. 아마 묘기를 구경하고 있을껄?" "참내, 혼자 두면 어떻게해? 무슨일이 나면 어쩌려구..." "설마 그녀석에게 무슨일이 있겠어? 거기 계속 있으라고 했으니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꺼야." "그래도 무슨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어서 돌아가보자." 류미르는 다급하게 나를 잡아 끌더니 하늘로 날아 올라서 단숨에 세이몬이 기다리고 있겠다던 그 번화가로 날아갔다. "여기 맞지?" "맞는것 같은데?" "근데 세이온은 어디 있냐?"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여기 분명히 맞아?" "맞다니까, 내가 가기전에 이 근처에 있는 가계 몇개를 기억하고 갔었단 말야. 여기가 확실해." "그럼 이녀석은 어디로 간거야?" "글쎄말야. 길도 모르는 녀석이 어디로 간거야?" 류미르와 나는 세이몬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 한 그 번화가로 돌아왔다. 그러나 분명히 기다리겠다고 호언 장담한 세이몬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나와 류미르는 실프들을 불러서 이 근처의 번화가를 샅샅이 뒤지게 해봤지만 실프들도 세이몬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어떻게 된거야? 여기가 아니라면 딴데 있어야 하쟎아?" "이녀석 그냥 여관으로 돌아간거 아냐?" 세이몬을 찾으러 보냈던 마지막 실프가 돌아와서 고개를 내젓자 류미르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말했다. "설마, 길도 모르는데?" "공간이동을 했을수도 있지." "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류미르는 여관에 가보기로 하고 나는 근처 가계들을 다녀보기로 했다. 한시간 뒤 류미르와 나는 다시 그 거리에서 만났다. "찾았어?" 내가 먼저 류미르에게 물었다. "아니, 여관으로 돌아가 방에 가봐도 세이몬은 없었고 주인에게 물어봐도 세이몬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구. 너는?" "없었어. 또 주인들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구. 하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일일이 다 기억하지도 못할꺼구, 바쁘니까 살필 겨를 이나 있겠어?" "이제 어쩌지?" 이제는 얼굴 가득 걱정스런 빛이 가득한 류미르가 나에게 물었다. "마법으로 투시해보자. 이 근처에서 마족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그거면 세이몬을 찾을 수 있을꺼야." "아, 마법으로 찾는 수가 있었군.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당황해서 그래. 어째든 마력은 내가 너보다 더 높으니까 내가 시전할께." 나는 두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류미르가 당황하며 나를 말렸다. "이봐, 아힌. 길 가운데 서서 그러면 어떻게 해? 저쪽 골목으로 들어가서 하자구." "아, 그렇군." 류미르가 내 손을 잡아 이끌며 사람들을 헤치며 갈때였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봐, 혹시...." "에?" 뒤를 돌아보니 왠 건달같이 생긴 녀석들 둘이 내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내가 그들을 돌아 보느라 멈춰서자 류미르가 내 앞으로 나서며 그들에게 물었다. "아,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고. 우린 나쁜사람 아냐." '나쁜사람이 자기 입으로 나는 나쁜사람이라고 하는거 봤냐?' "저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류미르가 다시 재차 묻자 그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혹시 너희들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가진 잘생긴 소년을 찾고 있는거 아냐? 이름이 뭐라더라?" "세이몬." 세이몬과 비슷한 인상을 말하자 류미르가 흥분해서 먼저 이름을 말해 버렸다. '멍청이, 그걸 먼저 말하면 어떻게해?' "아, 맞아. 세이몬이라고 했지. 어째든 그 애를 찾는거 아냐?" "맞아요. 세이몬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류미르는 그들이 세이몬을 아는것 처럼 말하자 세이몬은 찾은 것 처럼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본 그 건달 두명은 서로 자기들끼리 기분 나쁜 미소를 교환 하더니 처음에 말을 건 사람이 계속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아아, 세이몬은 내 친구랑 같이 있어. 세이몬이 너희들이 자신을 찾을까봐 걱정하더라고." '수상한 놈들이야.' 나는 그들이 뭔가 숨기고 있는것 같았지만 류미르는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이몬이 지금 어디 있는데요?" "아, 내 친구랑 같이 까페에 있어. 묘기를 보다가 만났다고 하더라구." "지금 안내해 주실수 있어요?" "물론이지. 세이몬이 우리더러 너희들좀 데려와 달라고 해서 온걸?" "다행이다, 아힌. 세이몬을 찾을수 있어서. 이녀석 보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을꺼야." 세이몬이 어떤 까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류미르는 너무 기뻐하면서 내 손을 부여잡고 흔들어 댔다. "아, 알았어. 류미르, 알았으니까 이것좀 놔라. 아프다." "아, 미안 미안. 그럼 안내해 주세요." "물론 안내해 주지. 따라와."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건 사람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우리 뒤에서 따라왔다. 글 번호 : 789 글쓴이 : 송명환 게시일 : 2000-07-31 , 12:02:55 AM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6화 세이몬 납치되다 (3) 번 호 : 10622 / 10623 등록일 : 2000년 07월 30일 23:33 등록자 : LODEMP 조 회 : 4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6화 세이몬 납치되다 (3) 나는 류미르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앞에있는 사람이 자꾸 류미르에게 말을 걸었고 또 뒤에있는 사람은 감시하는 것 처럼 우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말할 기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뭐, 실력이 있으니까.....' 결국 난 류미르와 내 실력을 믿고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야."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던 사람이 어떤 건물 앞에 멈춰 서며 말했다. 그곳은 3층짜리의 꽤 큰 건물이었는데 비록 번화가 중심에 위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근처에 있어서 수상한 점이라곤 전혀 없는 그런 평범해 보이는 카페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내가 당황하고 있을때 그들이 우리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와. 세이몬은 안쪽 방에 있대." 우리를 안내해 온 사람중 하나가 카운터에 있던 어떤 남자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또다시 우리를 더 안쪽으로 안내했다. '역시 수상해.' 그곳에는 사람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작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그 문을 열고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문 뒤에는 복도가 있었고 그 끝에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창문은 하나도 없었고 간간이 벽에 등불만이 달려 있어 사물을 분간하게 해주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그리 크지 않은 홀이 나왔는데 거기서 또 여러 갈래로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그 홀에는 어떤 중년 남자와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채찍을 들고 서 있었는데 그중 중년 남자가 나와 류미르를 쓰윽 훝어 보더니 "이쪽으로..." 하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복도중 한 곳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뭐야? 여기에 세이몬이 있다는 거예요?" 이제서야 이상함을 눈치 챘는지 류미르가 주춤하면서 우리를 데리고 온 그 건달들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난 거짓말은 안해." 그 건달은 그 말을 끝으로 우리에게 한번 씨익 웃어 준다음 왔던 길로 다시 나갔다. "어떻게 된거야? 여긴 어디지? 당신들은 뭐야? 세이몬이 어디 있다느 거지?" 완전히 당황해버린 류미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보이는 그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중년 남자의 인상이 찡그려 지면서 그가 손을 들자 뒤에 채찍을 들고 있던 용병 한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런 이러다 싸우겠군. 벌써 일을 저지르면 안돼지.' "시끄러워 류미르. 여기에 세이몬이 있다쟎아. 잠자코 있어." "하지만 아힌, 좀 이상하쟎아." "그래서 지금 어쩌겠다는 거야? 우선은 세이몬을 찾아야지. 이봐요 아저씨. 여기에 얼마전에 머리와 눈동자가 까만 잘 생긴 남자애 하나 온거 맞아요?" "훗, 이곳에 있는 애들은 모두 잘 생겼지. 하지만 네 말대로 아까 머리와 눈동자가 까만 애가 온건 맞아." 중년 남자가 다시 손짓을 하자 용병은 뒤로 물러났다. "거봐, 류미르. 여기 세이몬이 왔다쟎아." "자,자. 잡담은 그만하고 이쪽으로 오실까?" 중년 남자는 다시 복도를 가르켰고 우리는 그가 가르키는 복도로 걸어갔다. 그곳이 어디였는지는 얼마 안 있어 알게 되었다. 그 복도를 조금 따라 걷다 보니 복도 양 옆으로 큰 쇠창살로 막혀있는 방이 쭉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쇠창살 안에는 각각 3~4명의 소년들이 있었다. "호, 또 특등품이 들어온건가? 오늘은 운이 좋군." 그 복도 안쪽으로 채찍을 든 또 다른 용병이 걸어오면서 우리를 쓰윽 훝어 보더니 그 중년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녀석들을 데려가. 저 파란 머리는 주의해. 빨간 머리는 눈치가 빠르니 괜찮을꺼야." "그러지." 또 다른 용병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따라와." "저기, 아저씨?" 나는 기회를 봐서 그 용병에게 말을 걸었다. "왜?" "좀전에 우리말고 또 여기 들어온 애가 까만 머리의 남자애 맞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제 친구거든요." "그래? 쿡, 친구따라 천국에 왔군." "근데 그애 지금 어디 있어요?" "아아, 아마 지금쯤 행복한 경험을 하고 있을꺼야. 다른 곳에서는 경험 못할 아주 독특한 경험을 말야..." "벌써 불려갔군..." 내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중얼 거리자 류미르와 그 용병이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 빨리 안따라와?" 용병이 인상을 쓰면서 채찍을 들어 올렸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류미르, 세이몬이 여기 없다니까 여기 있을 필요가 없겠지? 그 용병은 네가 알아서 손좀 봐줘. 죽이지는 마. 여기 지리를 알아야 하니까." 그러자 류미르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맡겨둬." 그리고는 그 용병을 노려보며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황당해진 용병은 나를 먼저 처리해야 할지 류미르를 먼저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더니 주의하라는 말을 들은 류미르를 먼저 처리하기로 결심 했는지 천천히 류미르에게 다가갔다. "넌 오늘 잘못 걸린줄 알아라. 내가 이 일만 벌써 5년째다. 들어가기 전에 따스한 채찍맛좀 보여주지. 그럼 다시는 건방지게 굴지 못할껄?" 나는 느긋하게 뒤로 물러나서 류미르가 그 용병을 상대하는 모습을 구경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쓸데없는 짓이야. 결국 신나게 맞고 말걸...." "저 용병이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몰라서그래." "또 한 녀석이 맞게 생겼군...." 복도에 나 있는 방에 있던 소년들이 수근거리는 소리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류미르가 있는 근처의 방에 있는 아이들은 다 쇠창살에 매달려 구경(?)하고 있었다. "두고보면 알겠지..." 나는 벽에 편안히 기대며 중얼 거렸다. 번 호 : 10668 / 10729 등록일 : 2000년 07월 31일 22:48 등록자 : LODEMP 조 회 : 48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6화 세이몬 납치되다 (4) 류미르는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쉽사리 그 용병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 용병이 채찍을 휘둘러 류미르를 향해 내리꽂자 류미르는 채찍이 자신에게 닿기 바로 전에 살짝 옆으로 비킨 뒤 곧바로 용병에게 달려 들어 그가 미쳐 채찍을 회수하기도 전에 단검 뒤쪽으로 안면에 강하게 한방 먹였다. 그리고 그 용병이 뒤로 쓰러지기 직전 재빨리 그 용병의 뒤로 돌아가서 그의 팔을 꺾고 무릎을 꿇게 했다. 그 용병도 너무 쉽사리 제압 당하자 오히려 당황한 듯 보였다. "이거 이거, 너무 싱겁쟎아?" 류미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용병에게 다가가서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세이몬은 어딨어요?" "큭, 그걸 내가 말할것 같아? 너희들이 나를 제압했다고 기가 살은 모양인데 여기서 빠져 나갈 수는 없을껄?" "호,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은데?" 용병을 잡고 있던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흠, 말해줄 생각이 없는거 같아. 어쩌지 류미르?" "내가 해결할까?" "뭐야? 뭘 어쩌려는 거야?" 류미르가 이런 일은 많이 해봤다는 듯 자신있게 대답하자 그제야 쬐게 겁 먹은듯 용병이 주춤 거렸다. 나는 그 용병에게 씨익 웃어주며 류미르보고 해결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커다란 폭팔음이 들리면서 복도와 벽이 흔들렸다. "이 기운은...." 류미르가 뭔가를 느낀듯 말했다. "세이몬의 기운이야. 뭐, 이제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어진것 같은데?" 내가 류미르의 말을 이어 대답했다. "세이몬이 흥분한것 같아. 예전같지 않은 강한 기운인데?" "뭔 일이 있나보군, 어째든 그 녀석을 찾으러 가야지?" "아힌, 이 녀석은 어쩌지?" "재워줘." 다시 폭팔음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까 것보다는 작은 소리였고 또 벽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봐, 너희들..." 류미르는 그 용병의 뒤통수를 때려서 잠재우고 세이몬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려고 할때 누군가가 우리를 불렀다. 내 바로 옆의 방에 갖혀있던 소년중 하나였다. "왜?" "갈때 가더라도 우리좀 풀어주고 가지 않을래?" 나는 류미르를 돌아 보았고 류미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세이몬은 그다지 급하지 않으니까..." "풀어주자고?" 류미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왠일이야, 아힌? 너완 상관없는 귀찮은 일에는 끼어들지 않으려고 하면서..."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이지. 그리고 또 다른 생각도 있고....너도 좀 도와라. 내가 이걸 다 하리?" 나는 가벼운 파이어 에로우 (불화살)을 만들어 내어 쇠창살의 자물쇠를 파괴하면서 대꾸했다. 류미르도 다시 어깨를 으쓱 하고는 나를 도와 쇠창살의 자물쇠를 하나 하나 파괴해 가기 시작했다. 얼마후에 복도에는 소년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 풀어 줬으면 밖으로 나가야 할텐데 그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봐, 왜 여기에 서 있는거야? 안갈꺼야?" 마지막 자물쇠까지 다 파괴해서 이제는 소년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고 복도에 서 있기만 하는 아이들을 향해 류미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서로의 눈치만 보면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참내, 풀어달라고 한 녀석 누구야? 기껏 풀어줬더니 도망가지도 않냐?" "나둬 류미르. 이 녀석들은 상관하지 말고 세이몬에게나 가자구." 폭팔음이 계속적으로 들려왔고 점점 더 자주 들려오자 슬슬 세이몬이 걱정되기 시작한 나는 앞장서서 세이몬의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걸어갔고 류미르도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런데 아까 풀어줬던 소년들이 류미르의 뒤를 주춤주춤 따라오는 것이었다. "뭐야? 쟤네들 왜 따라 오는거야?" 소년들이 따라오자 당황한 류미르가 나에게 물었다. "저 녀석들은 여기서 도망칠 자신이 없는거야. 그런데 우리가 강해 보이니까 자신들끼리 도망치는 것 보다 우리를 따라서 도망치려고 하는거지." "그럼 저들을 데리고 갈꺼야?" "누가 데리고 간대?" "그럼 그냥 나둘꺼야?" "그럼, 당연하지." "저렇게 따라오는데?" "자기들이 따라 오겠다는데 누가 말려?" "우리를 따라오면 위험할텐데?" 류미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자기 자신은 알아서들 지키겠지." "아힌, 넌 너무 매정해." "난 현실적이라고 생각 하는데? 평생 남이 나를 지켜줄 수는 없는 거쟎아?" "그래도 가끔은 남의 도움을 받을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거야 그렇지만 항상 그럴수는 없어." "지금이 그 가끔일 수도 있쟎아?" "그래서 저들을 도와 줬쟎아? 그리고 따라오는 것도 가만 냅두고." "하지만 우리가 지금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걸수도 있쟎아?" 복도를 계속 따라가니 아까 우리가 여기 들어올때 중년 남자와 용병 둘을 만났던 그 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홀에는 아까 그 중년 남자는 없었지만 용병 둘이 잡담을 하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놀랐다. "뭐야? 이녀석들? 어떻게 나온거지? 아크는 뭐하는 거야?" "어째든 빨리 저놈들을 처리해. 안그러면 우리가 끝장이라구." 두 용병은 긴장하면서 채찍을 들어 올렸다. 뒤에서 소년들이 움찔 하는 것이 느껴 졌으나 나는 신경쓰지도 않고 그 용병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슬립!" 그 두 용병은 채찍을 든 채로 서로 등을 맞대고 사이좋게 잠이 들었고 나는 그들의 곁을 지나쳐 홀에 들어섰다. 홀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복도가 있었기에 나는 잠시 서서 세이몬의 기운을 느껴 보았다. "위쪽이야. 올라가야 겠는걸?" 내가 이 홀 쪽으로 내려올때 걸어왔던 계단으로 다시 올라가자 여길 들어 왔을때 통과했던 문이 보였다. 손으로 슬쩍 밀어보니 꿈쩍도 안했다. "잠겨있는것 같아." 나는 류미르를 돌아보면서 말했고 그 말에 류미르가 나서서 문을 자세히 뜯어 보았다. "여기에는 자물쇠가 안 보이는데? 밖에서 잠겼나봐. 아니면 우리가 모르느 문을 잠그는 장치가 있는지도 모르지." "어째든 우리는 그걸 찾아내는 재주가 없쟎아? 부수자." "그러다 놈들이 몰려오면 어쩌려구?" "싸우면 돼." "그래도...." 류미르는 평소 답지 않게 왠지 주저주저 했다. "저 녀석들 걱정하는 거라면 이 밖은 1층이니까 재빨리 튀면 도망칠수 있을꺼야." 내 말을 들었는지 뒤의 애들은 수근수근 거렸고 잔뜩 긴장한 표정이 더 더욱 굳어졌다. 나는 그들을 힐끔 바라본뒤 뒤로 몇걸음 물러섰고 류미르도 문으로 부터 멀찍이 물러났다. 번 호 : 10707 / 10781 등록일 : 2000년 08월 02일 22:33 등록자 : LODEMP 조 회 : 49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6화 세이몬 납치되다. (5) "버스트 프레아!" 수십개의 파이어 볼이 문을 향해 날라갔고 잠시 후 문과 부딧히면서 엄청난 폭팔음과 함께 문이 파괴 되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마력을 많이 넣었는지 문과 함께 문 주위의 벽도 같이 날라가버렸다. 덕분에 우리가 있었던 쪽에 파편들이 많이 튀어서 류미르가 실드를 쳐서 막아야 했다. "이봐, 마력을 얼마나 넣은거야?" "응? 아하하, 문이 두꺼운거 같아서 좀 많이 넣었어. 한 4서클 정도..." "아예 여길 다 날려버리지 그랬냐?" "너무 그러지마 류미르, 때론 실수도 하고 그러는거지..." 공중에 흩날렸던 먼지와 파편들이 가라앉자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내가 날린 마법이 엄청난 폭팔 소리와 폭팔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이쪽으로 와보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그 틈을 타서 우리를 쫒아 왔던 소년들은 제각각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왜 사람이 한명도 안 보이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며 류미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아무래도 모두 세이몬쪽으로 몰린거 같아."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힌, 세이몬은 어딨어?" "잠시만 기달려봐."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세이몬의 기운을 느끼려고 했다. 그러나 윗층에서 또다시 폭팔음이 들려 왔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위쪽이야!" 류미르는 소리치면서 먼저 위층으로 연결된 듯한 계단을 찾아내어 뛰어 올라갔다. 류미르의 뒤를 따라 위로 올라가보니 그곳은 넓고 화려하게 꾸며진 홀이었는데 그 화려한 홀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을 온갓 화분들과 샹데리아, 그리고 꽃병들이 모조리 벽 쪽으로 몰려와 박살이 나 있었다. 더욱이 홀 중앙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듯한 식탁과 의자들도 똑같은 운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덤으로 열 댓은 넘어보이는 용병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와, 아깝다." "류미르, 지금 그런 소리 할때야? 저기좀 보라구." 내가 가르킨 곳에는 나와 류미르가 서 있는 쪽의 맞은편 벽이었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그 앞에는 세이몬이 서 있었다. 그리고 세이몬 앞을 여러 용병들이 둘러싸고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이몬의 몸 주위로 검은 기운이 강하게 뻗어나오고 있었기에 용병들은 세이몬을 둘러싸고 경계만 하고 있을 뿐 쉽사리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이몬에게 정신이 팔려 우리가 올라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힌, 세이몬 좀 봐. 아예 맛이 갔는걸?" 류미르의 말에 세이몬을 자세히 보니까 눈에 촛점이 없이 멍해 있었다. "쟤가 왜 저러지?" "나도 모르지." "류미르, 지금 농담이 나오냐?" 나는 류미르를 한번 흘겨 보고는 살짝 날아올라 용병들 머리 위를 뛰어 넘어 세이몬 곁에 사뿐히 내려왔다. "세이몬, 정신차려!" 나는 세이몬의 등짝을 강하게 후려 갈기며 소리쳤다. 내 손에 강하게 얻어 맞은 세이몬은 크게 휘청 하더니 다시 자세를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힌?" 나를 바라보던 세이몬의 눈은 처음의 멍한 상태를 벗어나 점차 촛점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와함께 세이몬의 몸 주위를 감싸고 돌던 강한 검은 기운이 점점 옅어지더니 사라졌다. "아힌~~" 세이몬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어 엉겨 붙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흐어어엉~~~" "으악, 세이몬. 왜그러는거야? 응? 뭔 일이 있었어?" "어어엉~~, 있쟎아. 흐윽, 어떤 뚱땡이 남자가, 어어엉~~ " 세이몬은 너무 서럽게 울어 대느라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세이몬이 그 뚱땡이 남자라고 말하는걸 알아 듣고는 어떻게 된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류미르도 내 곁으로 사뿐히 착지 하면서 물었다. "아마 세이몬을 미소년 취향인 변태한테 선을 보였나봐. 그 인간이 세이몬을 어떻게 했나보지." "호오, 그래서 세이몬이 폭팔한거구? 흐음, 그 인간은 명을 달리 했겠군. 운도 없지...." "그래도 싸지. 그나저나 세이몬도 찾았으니 여길 나가야지?" "하지만 그렇게 울고 있는데 어떻게 데리고 나가지?" "하아~, 것도 그렇군. 이봐 세이몬, 그만 울어. 응? 착하지?" "흑흑흑, 아힌... 흐어어엉~~" 그때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용병들 뒤쪽에서 날카로운 아줌마 목소리가 나더니 용병 가운데가 쫘악 갈라지면서 새로 등장한 인물들을 보여 주었다. 맨 앞에 어떤 중년 부인을 선두로 그 뒤에는 중년 남자 두세명과 우리를 데리고 온 건달 둘, 그리고 용병 5명이 그 뒤에 당당히 버티고 있었다. "뭐야, 저것들은....겨우 꼬마 3명을 처리 못해서 이지경을 만들어놔?" 선두에 서 있던 중년 부인이 아까 그 날카로운 목소리로 또 다시 호통을 쳤다. 그 중년 부인은 약간 통통한 몸매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얼굴은 화장을 안한 맨 얼굴이었는데 무척이나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대빵인듯 다시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얼른 처리하지 못해? 저것들을 잡아다가 지하감옥에 가둬두고 채찍맛좀 보여줘. 그리고 며칠 물 한모금도 주지 말고." 그러나 세이몬의 폭주를 본 용병들은 우리에게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고 용병들 대장인듯한 사람이 주춤주춤 그녀 앞으로 가더니 말했다. "저 녀석은 엄청난 힘을 가진 마법사입니다. 벌써 우리쪽 애들이 20명이나 나가 떨어졌어요. 이 홀을 이렇게 만든것도 저 녀석입니다." "저 꼬마가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어? 얼른 처리하지 못해? 안그러면 네놈들 모두 돈 한푼도 못 받고 쫒겨날줄 알아!" 중년 부인의 또 다른 고함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자 더욱 더 화가나서 몸을 부르르 떨던 그 부인은 뒤쪽을 향해 손짓을 했고 그 손짓을 본 뒤에 서 있던 용병 5명이 앞으로 나섰다. "아 이런, 우리가 이런것도 처리해야 하다니...." 그 5명의 용병중 하나가 부인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서 있는 용병 대장을 흘끗 보면서 비아냥 거리자 용병 대장이 움찔 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 보았다. 그러자 용병은 흥~ 하고 비웃음을 날리고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자자, 꼬마들아. 이 형님이 봐줄때 얌전히 말을 듣는게 좋을거다. 어서 이리로 온..." 아까 그 용병 대장을 비웃은 그 용병이 우리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권유를 했다. "흠, 5명이라.... 그래도 꽤 쎄 보이는걸?" 류미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류미르, 너 혼자 힘들까?" 아직도 울고있는 세이몬을 다시한번 추스려 토닥이면서 내가 물었다. "저들은 우리가 마법을 쓴다는걸 아니까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그냥 달려들꺼야. 그러니 마법은 쓸수 없어. 육탄전으로 나가면 내가 둘은 상대할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야. 아무래도 너도 나서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세이몬이 이렇게 달라 붙어서야...." "그녀석 패대기 쳐버려." 그러자 류미르의 말을 들었는지 세이몬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류미르를 노려 보았다. "이, 훌쩍. 의리도 없는, 훌쩍. 녀석 훌쩍...." "하하하, 들었어? 하지만 어떻게 하냐? 저놈들이 달려 들려고 하는데..." "흥, 훌쩍. 저런것들도, 훌쩍. 처리 못하냐? 흐끅..." "자 자 세이몬, 이제 진정되었으면 일어나. 에구구, 또 셔츠가 다 젖었군..." 나는 세이몬의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흥건하게 젖은 내 셔츠 앞자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류미르, 세이몬. 너희 둘이 각각 맡아서 처리해. 난 옷좀 말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용병 5에게 달려드는 동안 나는 카사를 불러내어 내 옷을 말렸다. 옷을 잘 말리느라고 옷만 보고 있어서 류미르와 세이몬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패는 소리에 뭔가가 날라가는 소리가 나는걸 들으며 '잘 싸우고 있겠거니...' 하며 태평치고 있었다. 옷이 대충 다 말라서 카사를 돌려 보내고 내 앞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역시 내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각자 정령들을 불러내고 순수 마력을 발산하여 용병 5명 모두를 때려 눕혀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용병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고소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쯧쯧, 평소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그러길래 사람은 평소에 잘 해야 하는 거다. 제 16화 세이몬 납치되다.(6) 그들은 우리가 그 5명의 용병들을 쓰러트릴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었는지 (당연 하겠지만...)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중년 부인의 얼굴은 아예 흙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이럴수가.... 대체 저 녀석들은 뭐지?" 나는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에게 다정하게 씨~익 웃어주었다. "류미르, 용병들 다 해치웠으면 저 부인 좀 정중히 모셔와 주겠어?" 내 말뜻을 알아챈 류미르는 싱긋 웃더니 몸을 날려 부인의 코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꺼내들고 있던 대거를 부인의 목에 겨누었다. "자, 부인. 저희 대장께서 부인을 모셔 오라고 하시는 군요." "대, 대장?" 중년 부인은 목에 대거가 겨누어 져 있어서 제대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곁눈길로 류미르를 바라 보면서 당황해 했다. 아, 정말 오랜만에 류미르에게 대장이란 소리를 들어 보는군, 그동안은 지가 맏형 노릇을 다 하느라 날 동생처럼 대하드만... "자, 가실까요? 옆의 수행원 분들께선 저 검은 머리의 소년이 잘 대접해서 보내 드릴겁니다." 류미르의 이런 친절한 말에 수행원들은 새파랗게 질렸지만 정작 그들을 대접해야 할 세이몬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아힌, 류미르가 뭐라고 그러는 거야?" "응, 한마디로 지금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너가 저 뒤에있는 녀석들이랑 이 주위에 있는 용병들을 건물 밖으로 내동댕이 쳐 줄꺼라고 가르쳐 주는거야." "응, 그렇구나. 그럼 저들을 날려 버릴까?" 그러나 세이몬이 직접 그럴 필요는 없었다. 세이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허둥지둥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쯧쯧, 의리없게시리... 그러길래 사람은 평소에 잘 해야해." 류미르가 허둥지둥 도망가는 용병들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혀를 찼다. "날 어쩌려는 거야?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중년 부인이 자신의 수행원들과 용병들이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가버리자 분노로 얼굴이 빨갛게 되어 소리쳤다. "글쎄, 부인. 저도 부인을 어쩔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여길 무사히 빠져 나가기 위해 친절한 부인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일 뿐이니 너무 걱정 마시지요." 물론 우리가 협박을 했지만서도 그렇다고 자신의 고용인에게 버림받은(?) 중년 부인이 가엽게 느껴져 나는 다정하게 대꾸해 주었다. "흥, 누가 네녀석들을 돕는단 말이냐?" 내가 기껏 친절하게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년 부인은 조금도 우리에게 협조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이런, 생긴것 만큼 성격도 별루군..." 류미르가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여자인 이상 그 말이 얼마나 가슴에 콕 와서 밖히는지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류미르에게 한 마디 하려구 했다. "류미르, 그 말은 너...." "내가 못생긴데 너가 보태준거 있어?"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부인이 먼저 날카롭게 반문했다. "어라라? 난 그냥..." 오히려 당황한건 류미르였다. 무심코 던진 말에 크게 반박할 줄은 몰랐던 거였다. "웃기지마. 뭐? 그냥 한번 해본 말이라구? 흥, 그걸 누가 믿을줄 알아? 하긴, 너뿐이 아니지. 사람이 못생겼다고 성격도 나쁘다고 으례히 생각하니까..." "아니, 그러니까 난 아무 생각없이..." 이런이런, 인질에게 인질범이 쩔쩔매고 있군... "흥, 아무생각 없이? 그런 생각이 나같이 못생긴 사람 한테는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알기나 해?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도 남자는 그나마 낮지, 여자가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무시와 비난과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지 알기나 해?" "아니, 저기 그러니까..." "부자집 맏딸로 태어나면 뭐해?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걸 예쁘게 생긴 동생에게 빼앗겼는데... 내가 더 공부 잘하고, 집안일도 잘 하고 하인들도 잘 다루는데 부모님은 내 동생이 더 예쁘다는 것 하나로 가문끼리의 결혼을 나 대신 동생이 하게 했었지.... 하인들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내가 잘해주면 뭐해? 동생이 아무리 구박해도 뒤에서는 다 날 비웃고 동생을 치켜 주는걸.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또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우리 부모님은 날 시집보내지도 않았어. 나와 결혼하려는 집안도 없거니와 설사 결혼한다 해도 누가 내 결혼식에 와주겠냐는 거였지.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에겐 우리 집안과 비슷한 집안에서 혼사조차 들어오지 않았어. 그게 왜 내 잘못이냐구, 누군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줄 알아? 너희같이 처음부터 잘난 인간들은 나같은 사람들을 비웃을 테지만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런줄 아냐구!" 그 부인은 평소에 쌓인게 많았던지 그녀의 입에선 쉴새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류미르는 완전히 당황해서 자신의 대거가 손에서 떨어진 것도 모르고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때... "맞아요. 부인. 어쩜 사람들이 생긴거 같고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지.. 자신들이 나보다도 낳을게 하나도 없는 주제에 자신이 좀더 예쁘다고 해서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미팅 나갈때도 난 물 흐린다고, 폭탄 제거 된다고 끼워주지도 않고, 내가 더 잼있게 말하고 더 잘 노는데도 남자애들은 나보다 더 예쁜 애들만 찍어서 난 거들떠 보지도 않고. 세상에 누가 못생기게 태어나고 싶어 하냐구!" 나는 부인의 손을 꼭 잡고는 부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야,야, 류미르, 미팅은 뭐냐? 폭탄은 뭐구?" 내 행동에 더욱 더 당황한 류미르의 옆으로 가서 세이몬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나도 몰라. 그런데 아힌이 왜 저러는 거지?"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놀라거나 말거나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류미르와 세이몬 말고도 내 행동에 더욱 더 놀란 사람이 있었다. "너는 왜? 그렇게 예쁘면서..." 중년 부인이 나를 황당한 얼굴로 쳐다 보면서 물었다. "나두 원래는 예쁘지 않았어요. 울 엄마가 마법사에게 부탁해서 이렇게 만들어 놨지. 나도 부인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그랬니? 그랬구나~~~, 그렇지? 너도 나같은 일을 당했지?" "그래요. 부인 마음 충분히 이해돼요. 사람을 겉 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인간들을 싸그리 없애고 싶었다구요..." "그래,그래, 나도 그맘 알아. 암, 알고 말고. 우리 부모님도 돌아가실때 나에게는 얼마간의 돈만 남겨주고 저택이랑 모든 재산을 다 내 동생과 제부(동생 남편)에게 물려줬지. 내가 그때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었는지..." "세상에, 부모님이 그러셨다니..." "넌 그래도 부모님이 얼굴을 고쳐 주려고 노력하셨구나..." "외동딸이었걸랑요." "그래, 그랬구나. 너는 나보다 났다."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되셨어요?" "그래도 나에게는 왠만큼의 장사 수완이 있었지. 부모님이 그나마 남겨주신 돈으로 장사를 시작했어. 그러나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무척이나 힘든 일이 많았지. 그래서 예쁘게 생긴 놈들을 괴롭혀 주고 싶었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지." "그래서 이런 곳을 만드셨군요." "그래, 그랬어. 그리고 동생도 괴롭혀 주고 싶었지." "그럼 동생은 어떻게 되었어요?" "훗, 내가 그 집안을 완전히 망하게 만들었었지. 지금 동생은 내 집에서 시녀장 노릇을 하고 있지." "정말 대단해요. 무척 존경스러워요. 하지만 이런 일을 하려면 사람들 모르게 해야 하는거 아녀요? 시장이 알면 가만 안 있을텐데..." "흥, 그놈에게 들어가는 돈도 꽤 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여태껏 무사 했겠어? 하지만 슬슬 이런 일도 그만두려고 했지. 아무리 미소년을 괴롭히고 노예로 팔아도 남는건 허무뿐이더라구. 내가 괴롭혀 봤자 그들은 나의 힘에 의해서 순종하는 것뿐 나를 증오했으니까." "그랬군요. 그럼 이제 어쩌실 꺼예요?" "훗, 글쎄다... 뭐, 네가 여길 다 망가트려 놨으니 그만 둘 필요도 없게 되었지." "아, 그건..." "아냐, 그런걸로 뭐라 그럴 생각은 없어. 나도 오랜만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를 만나서 후련하게 신세 한탄을 해서 기분이 너무 좋은걸...." 이제는 환한 얼굴에 미소까지 띤 그 중년 부인은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너두 이제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갖게 되었으니, 예전 같은 슬픔은 겪지 않겠구나..... 하지만 예전에 겪었던 일은 잊지 말렴, 그리고 나중에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위로해주고....." "그럴께요. 그리고 부인, 그렇게 웃으시니까 너무나 아름다우세요." "그러니? 호호호, 고맙다. 그럼 이제 어서 가보렴. 이제 슬슬 날이 밝아올꺼야. 그럼 사람들이 몰려 올테니 너희도 좋을게 없지." "부인께선요?" "나? 난 이곳 주인이야. 여길 피한다고 해도 다시 불려오겠지. 이런이런,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난 이곳에서 20년 동안이나 장사를 해왔다고. 이런 일 넘어가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야. 자, 어서 가거라. 어서!" 그녀는 나를 잡아 출입구 쪽으로 밀어냈다. "안녕히 계세요, 부디 나중에 크게 성공하세요." 나는 그녀에게 손을 들어올려 인사를 한 뒤 아직도 멍해있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끌고 나갔다. 밖은 이제 해가 뜨려는지 뿌옇게 밝아왔다. "하아, 결국 축제 구경은 못했군." 나는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크게 켰다. 그리고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돌아 보았다. "어때 너희들? 계속 축제구경 할꺼야? 아님 그냥 길을 떠날까?" "아무래도 저 건물 안에서 우리를 본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냥 길을 떠나는게 났겠지?" 류미르가 대답했다. "세이몬은 어때?" "난 한시라도 빨리 여길 떠나고 싶어. 여기 있기도 싫단말야." 세이몬은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호, 세이몬? 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류미르가 세이몬이 몸서리치는 걸 보더니 눈이 반짝여졌다. "글쎄 거기서 어떤 비만 돼지가 그 오통통한 큰 손으로 내 얼굴을 쓰~윽 만졌단 말야! 아 정말 생각하기도 싫어~!" 세이몬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훗, 생각하기도 싫다는 녀석이 잘도 설명하는군. 하긴 나라도 그런 일을 당했으면 폭주했을꺼야." 류미르는 세이몬을 이해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건 그렇고 아힌? 너 마법으로 얼굴을 고쳤다는게 정말이야? 원래 얼굴은 못생겼다고? 그거 진짜야?" 세이몬이 갑자기 생각 났다는듯 물어왔다. 짜식, 별걸 다 기억하고 있군.... "글쎄,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무슨 말이 그래? 진짜야, 거짓말이야?" 내가 아리송하게 말하자 류미르가 즉각 반박했다. 류미르도 궁금했나보다. "글쎄~~에, 너희들 맘대로 생각해." "그러는게 어딨냐?" 내 무성의한 대답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동시에 소리쳤다. '어딨긴 어딨어? 여깄지.' 드래곤의 내 모습을 보고 인간들중 누가 예쁘다고 하겠어? 하지만 울 엄마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가 제일 예쁘게 보일껄? 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할머니 생각이 나네? 녀석들이 잘동안 할머니께 잠깐 갔다올까? 제 17화 류미르 찜 당하다.(1) 세키나를 떠나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인 라크네로 향했다. 라크네는 켈튼 연합국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도시다. 그 도시 주위에는 넓고 기름진 땅이 있기에 농사가 발달되어 있어 도시 주변은 전형적인 시골 풍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라크네 도시는 제법 크고 발달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라크네 도시에 있는 커다란 신전때문이었다. 예전에 켈튼 연합국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국가였을때 그 당시 국왕이 무척 독실한 엘라이어드 여신 (사랑과 평화의 여신)의 신자였기에 라크네 도시에다 신전을 무척 크게 세웠다. 그 신전은 규모도 무척 클 뿐만 아니라 무척 아름답기까지 하여 켈튼 연합국에 있는 엘라이어드 여신의 신전 중에서도 단연 으뜸을 손꼽히고 있었다. 그렇기에 순례를 하고 다니는 수도자들이나 엘라이어드 여신의 신자들이 제일 가보길 원하는 신전이 바로 그 신전이었다. 더욱이 그 신전을 더 유명하게 만든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신전에만 있다는 엘라이어드 여신상이었다. 물론 다른 신전에도 엘라이어드 여신상이 있겠지만 이 여신상은 좀 특별했다. 이 여신상은 크기가 무척 큰게 아니라 자그만 했다. 길이가 약 50cm정도의 작은 조각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조각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커다란 여신상의 조각보다 더 귀한 값진것이었으니 그 조각상은 투명한 수정으로 조각된 것이였기 때문이다. 흠이 하나도 없고 유리처럼 깨끗하고 투명한, 수정 중에서도 아주 고급으로 손꼽히는 그런 수정으로 조각이 된데다가 여신상의 눈은 푸른 에메랄드였고, 그녀가 두 손으로 살포시 바쳐들고 있는 따뜻한 마음은 새빨간 루비였다. 여신은 머리에 금으로 된 면류관을 쓰고 있었고 발에는 백금에 작은 다이아 몬드가 박혀있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신상을 받치고 있는 바침대는 황금이었고 그 둘레에는 진주가 나란히 박혀 있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비싼 여신상이었던 거다. 이 여신상은 예전 켈튼 연합국이 한 나라였을때 어떤 왕후가 신전에 바친거라고 했다. 그 왕후는 왕과 결혼한지 오랜 세월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여 고심에 고심하던 끝에 전 국에 있는 엘라이어드 신전을 순례하면서 기도를 드렸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라크네 도시에 있는 신전에서 기도를 드렸을때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아 기뻐하면서 궁으로 돌아갔더니 과연 아기를 배어 열달 후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기쁨과 감사에 겨워 그 왕후가 직접 지시를 하여 만들어 바친것이 바로 그 여신상이었다. 그리고 그 여신상이 바로 이번에 우리가 노리는 목표였던 것이다. "흠, 여신상을 노리는데 신의 노여움이 무섭지 않아?" 나의 기나 긴 설명을 다 듣고난 뒤 류미르가 던진 물음이었다. "후후후, 우리 의적단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신을 믿는 자가 없다는 거지. 나는 당연히 안 믿고, 류미르 넌 엘프고 세이몬은 마족, 그러니 신의 노여움 따위를 무서워 하지 않쟎아?" 내가 실실 웃으면서 대답하자 류미르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봐, 아힌. 너 말야 뭘 잃어버리고 있는데 우리 엘프는 신의 자식이란 소리를 듣는 존재라고." "에? 그럼 넌 신을 믿는단 말야? 그럼 이번일은 못하겠네?" 엘프가 신의 자식이란 소리를 듣자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뭐 인간이 생각하는 거랑 우리 엘프들이 생각하는건 틀리니까...." "뭐야? 한다는거야, 못한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영 모르겠다는 듯 세이몬이 옆에서 끼어 들었다. "아니, 한마디로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여신상을 훔치는 일에 끼어 들어도 별 상관은 없다는 거야." "그럼 된거쟎아? 괜히 놀랬네." 나는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내가 우리의 다음 목표에 대해 열심히 설명 하느라 말을 천천히 달린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셋은 아직 날이 저물지도 않았는데 어떤 마을에 거의 도착했다. "어라? 벌써 도착해버렸네? 어쩌지? 그냥 계속 갈까?" 류미르가 먼저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보고는 나를향해 물었다. "아냐, 그냥 가서 쉬고 내일 가자. 다음 마을까지의 거리가 어중간해서 오늘 그냥 가면 중간에 야숙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러느니 차라리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고." 류미르의 말에 내가 지도를 꺼내어 대충 지리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래? 마침 잘 됐네. 내 대거가 망가져서 하나 사려구 했거든. 시간이 좀 남으니까 다른 필요한것들도 좀 사야겠다." 류미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해서 여관을 잡자마자 류미르는 얼른 쇼핑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해가 지기전에 마을 구경도 좀 하고 필요한게 있을지 모르니까 빨리 나가자는 거였다. "에구구, 난 힘드니까 세이몬하고 갔다와. 난 목욕이나 하고 쉴래." 그러나 오랜만에 시간이 충분히 남은 나는 마을을 구경하는 것 보다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푹 담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침대로 쓰러지면서 고개를 저었다. "세이몬, 갈래? 맛있는거 사줄께." 류미르가 세이몬에게 꼬시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몬은 맛있는거에 약하니까 그걸로 꼬시는 거였다. 역시나 세이몬은 류미르의 그런 꾀임에 넘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는거 사줄꺼지? 난 갈래." "그래, 그럼 나하고 세이몬은 갔다올께. 참, 아힌. 넌 뭐 필요한거 없어?" "나? 아, 옷좀 사다줘. 셔츠하고 바지. 그리고 수건도 좀 사오고." "알았어. 옷하고 수건이면 돼지? 그럼 갔다올께." 류미르가 재차 확인을 하고 내가 맞다고 손짓하자 세이몬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에구구, 녀석들도 없는데 오랜만에 목욕이나 할까?" 나는 녀석들이 나가자 기지개를 쭉 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목욕물을 주문하러 방 밖으로 나갔다. 아린 이야기 - 제 17화 류미르 찜 당하다.(2) 뜨끈뜨끈한 물속에다 몸을 푹 담그고 있자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정말 얼마만에 이런 목욕을 해보는 건지... 그 동안에는 여행을 하는 중이었기도 했지만 류미르와 세이몬과 함께 동행하고 있어 목욕다운 목욕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목욕이라고 해봤자 재빨리 몸을 닦아내는게 고작이었기에 이렇게 여유있게 마음놓고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있는건 녀석들과 만나 여행을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기분이 좋아진 나는 물이 거의 다 식을때까지 물속에서 있다가 나와서 몸을 씻고는 거기다 덤으로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서 구한 값 비싼 향유 오일을 몸에 고루고루 발랐다. "음~~, 향기 좋고, 기분 좋고.....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행복이야? 아예 이 기회에 녀석들과 헤어져 혼자 다닐까부다..." 목욕을 끝낸 나는 전에 켈튼 도시에서 구했던 '세계의 100가지 보물' 이란 책을 꺼내 들고 우리가 이번에 목표로 한 '엘라이어드 여신상' 에 대해서 다시한번 자세히 살펴보고 그리고 류미르가 가지고 있던 여행 책자를 꺼내서 라크네 도시에 관한곳을 찾고는 필요하다고 생각 되거나 중요한 부분은 체크해 가면서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도를 꺼내어 우리가 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요란하게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쾅~! 하고 벌컥 열렸다. 한참 진지하게 지도를 살펴보고 있는데 방해를 받은 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문쪽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문 밖에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은 나의 매서운 눈초리를 무시해 버리고 급히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시 문을 세게 닫고는 아예 잠가 버렸다. "헥헥헥헥...." "헉헉, 잘 따돌렸지?" "아마 그런거 같아. 에구구 죽겠다." 그들은 얼마나 뛰어 왔는지 얼굴에 땀이 주르르 흘렀고 숨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 도대체 왜그래?" 그들은 내말은 듣는둥 마는둥 하더니 대답도 안하고 땅바닥에 철푸덕 주저 앉더니 결국은 드러누워 버렸다. "야? 내말이 안들려? 뭔일이냐니까?" 말을 씹힌 내가 화가 나서 의자에서 일어나며 인상을 쓰자 그제야 세이몬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에구, 말도마. 왠 여자가 우리를 따라 오는데 따돌리느라고 힘들었다구." "여자? 여자가 너희를 따라 왔다구?" 나는 세이몬의 말을 되물었다. 우리 셋은 뛰어난 미모 때문에 가는 곳마다 눈길을 끌었고 가끔은 여자들 이 우리에게 말을 걸거나 한 적도 많았기 때문에 여자가 따라 온다고 이렇게 까지 지쳐버린 류미르와 세이몬이 이해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야, 처음이면 이렇게 지친걸 이해 하겠지만 한 두번 겪어본 일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거야?" 그러자 이번에는 류미르가 대답했다. "에구,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단 말야. 왠 여자가 날 보고 반했다느니 하면서 다짜고짜로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거야. 첨에는 그냥 거절하고 돌아섰는데 그러니까 그 여자가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서 강제로 나를 끌고 가라고 하는거야. 얼마나 놀랬는줄 알아? 참내, 뭐 그런여자가 다 있는지...." "부하? 부하를 데리고 있었단 말야?" "응, 한 대 여섯은 되는것 같던데? 칼까지 차고 있더라..." "그래서 그 부하들을 뿌리치고 도망오느라 이렇게 지쳤단 말이지?" "말도마, 얼마나 끈질기게 쫒아 오던지.... 한참만에 겨우겨우 따돌렸단 말야." "류미르, 왠지 이정도에서 그냥 끝날것 같지 않아." 나에게 대답을 해주다가 더 지쳤는지 아예 고개까지 땅에 쳐박고 눈까지 감던 류미르가 내가 심각하게 말을 던지자 다시 눈을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생각해봐. 이 마을은 그다지 큰 마을이 아니야. 더욱이 지도를 보니까 여기는 영지라고 하더라구. 그런데 이런 곳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것도 칼을 찬 사람들을 대 여섯씩 데리고 다니는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 그러자 류미르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만 신음을 내 뱉으며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아직까지 뭐가 뭔지 모른다는 세이몬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부하들을 데리고 다닐 정도라면 왠만큼 집안이 빵빵하다는 거겠지. 그런데 여긴 영지라고. 영지 안에서 그것도 여자가 부하를 대 여섯씩 거느리고 다닐 수 있다는건 그 여자가 무척 빵빵한 집안의 여자고 영지 안에서 빵빵한 집안이라면 영주와 관련된 여자라는 거지." "그런데 그게 뭐?" 세이몬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젠 어느정도 진정이 됬는지 일어나 앉았다. 나도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 여자가 너희들을 끈질기게 쫒아 왔다며? 그렇다면 그 여자는 왠만큼 고집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런 여자가 영지 안에 있는 몇 안돼는 여관 하나에 투숙하고 있는 우리를 못찾아 낼 것 같아? 아마 몇 시간 안에 우리를 찾아 낼꺼야. 그러면 이번에는 더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를 데려가려구 하겠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세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궁금한게 있는데 이번엔 누구야? 류미르야, 세이몬이야?" 이번엔 내가 물었다. "아, 류미르보고 반했다고 하던데?" "흠, 그래?" 그때 류미르가 벌떡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안돼겠어. 지금 여길 뜨자. 불안해서 있을수가 없어." 류미르가 너무 다급하게 짐을 챙기자 나는 당황해 버렸다. "왜그래? 그렇게 무서운 여자야?" "무서운게 아니라 끈질긴 여자라구, 너는 안당해 봐서 몰라. 세이몬, 넌 날 이해 하겠지?" 그러자 세이몬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여자가 끈질기게 달라 붙으면 귀찮기야 하겠지만 그게 지금 도망갈 만 한거야?" "뭐라구? 이봐, 세이몬. 넌 나랑 같이 도망쳐 왔으면서도 모르겠냐?" "난 그냥 네가 끌고 뛰길래 같이 뛴것 뿐인걸?" .........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뒤 당황해서 멍청히 서 있던 류미르가 아무말 없이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큰 종이봉투를 던졌다. "네가 부탁한거야. 제일 작은걸로 달라고 했는데 맞을지는 모르겠다." 류미르는 뒤도 안돌아보고 말하고는 짐을 다 챙겼는지 자신의 배낭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까지 세이몬과 나는 짐을 챙길 생각은 안하고 류미르가 하는 걸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뭐해 너희들? 짐 안싸? 빨리 여길 떠나자니까." "이봐 류미르, 지금 떠나면 야영을 해야 해." 내가 정신을 차리고 류미르에게 한마디 했다. "누군 그걸 몰라? 차라리 야영을 하는게 나으니까 그러지." "하지만 야영할때 먹을 음식도 챙기지 않았쟎아?" 이제는 제법 일행중 한 몫을 하는 세이몬도 한마디 했다. "젠장, 한끼 굶는다고 안죽어." "하지만 굶게되면 오늘 저녁은 물론 내일 아침까지도 굶어야 되는데?" "세이몬 말이 맞아. 그리고 지금 떠나봤자 성문에서 지키고 있을게 뻔해. 차라리 여잘 상대하는게 어때? 어짜피 우린 내일 아침에 떠날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쟎아. 그걸 못 참고 도망가려는 네가 이상하다." 우리가 전혀 움직일 기색을 안 보이자 열받은 류미르가 우리를 한참 노려보고 있더니 배낭을 다시 침대위에 내려 놓으면서 말했다. "좋아. 너희들이 우정을 버린다니 어쩔 수 없지. 너희들 말대로 하겠어." 귀찮은 일을 안 하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 세이몬과 나는 마주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러나, 대신 그 여자한테 시달리지 않기 위해 아힌 널 내 애인이라구 하겠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깜짝 놀란 내가 외쳤다. "흥, 네가 친구라면 그정돈 도와줘야 되는거 아냐? 여기 있으면 그 여자한테 시달리는건 나 혼자쟎아. 그러니 그정도는 도와줘." "그럼 난?" 세이몬이 자신이 언급되지 않자 물어왔다. "넌 아힌의 동생이라고 하면 돼잖아. 그럼 의심 받지는 않을꺼야." 나는 막 반박하는 말을 꺼내려구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우리 방 문을 노크했다. 똑, 똑, 똑 나는 벌렸던 입을 다물었고 우리 셋은 서로 마주보았다. 그러더니 아직까지 서 있던 류미르가 문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누구십니까?" "아, 전 여관 주인입니다. 실례지만 잠시 문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번 호] 10943 / 11342 [등록일] 2000년 08월 07일 23:23 [등록자] LODEMP [조 회] 1067 건 [제 목]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7화 류미르 찜 당하다. (3) ─────────────────────────────────────── 류미르는 고개를 돌려 잠깐 나와 세이몬을 바라본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여관 주인이 서 있었고 그 뒤에는 왠 기사 두명과 병사들이 서 있었다. 여관 주인은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기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가버렸다. "나는 이곳 영지의 주인이신 타르멘슨 영주님의 기사 라체프 트라한 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기사중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 기사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류미르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들어오세요." 류미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 기사가 우리 방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러자 류미르에게 말을 건넨 기사와 그와 같이 온 젊은 기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중년 기사는 방으로 들어와서 나와 세이몬을 보더니 정중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래도 겉으로 보기엔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 정중히 말하는데 내가 가만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나도 일어서면서 인사했다. 그러자 세이몬도 덩달아 일어나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류미르가 어느 분이십니까?" 중년 기사는 우리가 인사하자 답례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물어왔다. "아, 접니다." "그러십니까? 저희 영주님의 따님께서 류미르님이 무척 잘 생기셨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렇군요. 이분들은 친구분이신가보죠? 친구분들도 정말 잘 생기신 미남이시군요." "이쪽은 제 약혼녀인 아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쪽의 검은머리 소년은 아힌의 동생인 세이몬이구요." '아니, 내가 언제 약혼녀가 된거지?' 나는 내 옆으로 다가서서 내 소개를 하는 류미르를 째려 보았지만 류미르는 모르는 척 세이몬도 같이 소개를 시켰다. 그 상황에서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그냥 기사를 향해 어색한 미소만 보일 수 밖에 없었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었다. '류미르, 나중에 두고 보자구....' 두 기사는 류미르가 나를 약혼녀라고 소개를 시키자 무척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 헛기침을 하면서 표정을 본래대로 되돌렸다. '아, 영주 딸이 류미르에게 반했다고 했지?' "약혼녀셨습니까? 제가 큰 실례를 했군요." "지금 여행중이라서 간편하게 남장을 했어요." 윽, 내가 듣기만해도 닭살 돋는 목소리... 지금 대답한게 나 맞아? "이곳 영지는 변방에 있는 곳이라서 여행객들이 지나가는 일이 거의 없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청년 여행객들이 여관에 묶고 계신다는 소리를 영주님께서 들으시고 세상 이야기나 들어볼까 하셔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길 원하십니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중년 기사가 실례 했다는 듯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류미르에게 고개를 돌려서 정중히 요청했다. 류미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면서 '어쩔까?' 라는 시선을 보내왔고 나는 허락하라는 뜻으로 고갤 살짝 끄덕였다. "이거 보잘것 없는 저희들을 영주님께서 초대해 주신다니 영광이군요. 그럼 기꺼이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류미르 저녀석 여자들에게나 혀가 매끄러운줄 알았더니 남자들 한테도 상당히 부드럽군.... "지금 여관 밖으로 마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헐, 우리가 거절하면 강제로라도 데려가려구 했나보다. 이거 류미르의 말 대로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거 아냐?' "저, 제의는 감사하지만 영주님의 초대신데 저희가 이러고 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준비도 하나도 못 했고 옷도 이런데...." 우~~, 닭살, 닭살.... 류미르도 느끼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고 힐끔 세이몬을 보니 세이몬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째려보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야? 그냥 확 막가버릴까부다.' "물론 레이디 말씀이 옳으십니다. 그러나 영주님 따님께서 여러분들께선 여행중이시라 따로 준비를 못 하실것 같으니 특별히 친히 준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냥 가셔도 괜찮으실 겁니다." '우쒸, 도망갈 길을 완전히 다 막아놨군. 점점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궁굼해 지는걸?' 나는 그 여자의 치밀함에 점점 놀라면서도 그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솟아 올랐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나보고 어떻게 할꺼냐고 물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나도 '난들 어쩌겠어' 하는 뜻으로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내가 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류미르는 당황해서 대답도 못 하고 어물어물 거렸고 중년 기사는 우리가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 하기만 하자 헛기침을 한번 하면서 주의를 끌더니 류미르를 바라 보면서 빨리 대답하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였다. 압박을 당하자 류미르는 더욱 더 어쩔줄 몰라하면서 나만 바라보았다. '으이구, 저녀석도 이럴때는 정말 바보라니까. 어쩔수 없쟎아. 여기서 튈꺼야?' 나는 그냥 대답하라는 뜻으로 고개짓을 했고 류미르는 그런 내 고개짓을 알아보고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아니, 뭘 그정도까지.... 정 그러시다면야...." "그리고 이야기가 길어지면 시간이 너무 늦어질지도 모르니 짐도 같이 가져오시는게 어떻겠냐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하아~, 점점 잘못 걸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걸....' 내 표정이 점점 굳어졌는지 류미르는 거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친절하시고 사려깊으신 분이시군요. 그럼 저희 짐을 챙기고 곧 내려 갈테니 잠시만 내려가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류미르를 강하게 째려봐준 뒤 중년 기사를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 닭살, 닭살, 우~우~ 닭살, 닭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럽게 요청했다. "물론이지요. 천천히 하고 내려오십시요. 저희는 밑에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중년 기사는 '기다린다는' 말을 특히 강조 하더니 정중히 가슴에 손을 얹고 나를향해 허리를 약간 숙이면서 인사를 하더니 류미르나 세이몬 에게는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거봐, 내말듣고 갈껄...하는 후회가 팍팍 들지?" 류미르가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런 류미르의 얼굴에다 베개를 하나 힘껏 던져 줬다. "류미르, 너 지금 그런 웃음이 나오냐? 이제 성으로 가면 시달릴껀 너라구." "후후후, 아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구나. 영주 딸이 너가 내 약혼녀라는 걸 알고 널 가만 나두겠어? 어떻게 해서는 널 나한테 떨겨놓으려구 할텐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냐? 나 열받게 하면 모두 다 불어버린다?" "흥, 너가 여자라는건 사실인데?" "여자가 뭐 어때서? 아, 그래. 실은 세이몬 약혼녀라고 하는거야. 어때? 그러면 영주 딸이 무척 좋아하겠지? 거기다가 넌 여기로 지나 오다가 우연히 만나서 동행했다고 하면?" 류미르의 얼굴이 심하게 찡그려 졌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좀 도와줘. 내일 까지만 잘 부탁해." 류미르가 두 손을 모아 머리위로 들고는 허리를 숙여 보였다. 나와 세이몬은 재빨리 짐을 챙겼고 미리 짐을 다 챙겨 놓았던 류미르는 먼저 내려가서 여관 숙박비를 지불하기로 했다. 세이몬과 내가 짐을 다 챙겨서 내려가자 류미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 기사분께서 벌써 숙박비를 다 지불하셨대." 꽁짜를 좋아하는 류미르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꽁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가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관 밖에 대기하고 있던 화려한 마차를 타고 성으로 향했다. 기사 두명은 말을 타고서 마차 양 옆에서 갔고 병사들은 마차의 앞 뒤를 호휘하면서 갔다. "이거 호휘 받는게 아니라 꼭 감시받는 기분이군." 마차 밖으로 보이는 기사와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류미르가 중얼 거렸다. 옆에 앉아있던 세이몬 왈 "그럼 다 없애줄까?" "그럴꺼 까진 없어. 성으로 가면 맛있는 음식도 먹게 될 텐데 뭐. 그리고 나도 그 영주 딸을 한번 보고 싶으니까..." 왠지 영주 딸과의 한판이 기대되는 나였다. [번 호] 11009 / 11342 [등록일] 2000년 08월 08일 23:21 [등록자] LODEMP [조 회] 1122 건 [제 목]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7화 류미르 찜 당하다. (4) ─────────────────────────────────────── "류미르~~~!" 영주의 성으로 들어서서 마차에서 내리는데 어디선가 높은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모두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한 16~7세 정도 되어 보이는 왠 소녀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오른손으로 움켜잡아 말아 올려 쥐고서는 곱슬거리는 긴 금발머리를 휘날리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고 동그스름한 편이었는데 아직 예쁘다는 말 보다는 귀엽다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소녀였다. "류미르~, 역시 와줬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소녀는 우리에게로 달려 오자마자 다른건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작정 류미르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에 매달리면서 외쳤다. "저 애야?" 나는 세이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세이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세이몬은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였지만 그 영주 딸이 류미르에게 매달리는걸 보면서 무척이나 복잡하고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얘가 왜이래?' 영문을 모르는 나는 세이몬의 표정을 보면서 멀뚱멀뚱 거릴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옆에서는 류미르가 영주 딸내미를 떼어 놓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었다. "아, 제발 이것좀 놔요. 켁켁 숨막혀." 류미르가 얼굴이 벌개 지면서 영주 딸을 떼어 놓으려고 하자 영주 딸은 배시시 웃으면서 류미르의 목에서 손을 풀고는 뒤로 물러났다. "어머나, 수줍어하긴.... 이런거 가지고 뭘 그래요? 귀여워라."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를 데리고 온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이런 모습은 자주 있는 일인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어흠, 아가씨...." 우리를 데리고 온 기사 중 중년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듯 보였다. "어머, 라체프. 수고했어요. 이 분들은 제가 안내해 드릴테니 이제 가셔도 좋아요." 그러나 영주 딸은 그의 얼굴은 들여다 보지도 않은 채 류미르의 팔짱을 탁 끼더니 건물 쪽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류미르, 어서 가요. 우리 오빠가 당신을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해요. 내가 안내해 줄께요." 류미르는 어,어 하면서 끌려갔고 덕분에 들러리가 된 세이몬과 나는 그들 뒤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뒤로는 우리의 베낭을 든 병사 두명이 같이 따라왔다. 커다란 현관문을 지나 그녀가 이끄는 대로 어느 방에 들어가니 그 방은 접대실인듯 보였다. 방 중앙에는 편안해 보이는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유리창에서는 햇빛이 왕창 들어와서 방을 밝게 해주고 있었다. 그 유리창에 달려있는 우아한 초록색의 비단 커튼이 한층 방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었다. 게다가 천장에 달린 샹데리아라든지 한쪽 벽에 서 있는 갑옷이라든지 장식장은 이 방이 부유한 집이라는 것을 여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영주 딸은 그 방으로 들어와서 시녀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시킬때를 빼놓고 계속 류미르의 곁에 앉아서 그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류미르는 무척 당황 하면서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고 결국 떨어지기를 포기한 류미르는 내게 계속 어떻게좀 해달라는 호소의 시선을 계속 보내왔다. 그러나 나도 어쩌겠는가? 계속 류미르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방 안만 둘러보는 척 했다. 그때 딸깍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차를 가져 오는줄 생각하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거기에는 차를 들고있는 시녀가 아니라 왠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서있었다. "오빠~" 영주 딸은 계속 류미르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의 팔을 붙들면서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헹, 저 사람이 영주 딸내미 오빠로군. 그럼 영주 아들이 돼나?' 우리는 그가 영주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얼굴에 인상 좋은 웃음을 머금고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니며 얼굴에는 무테 안경을 쓰고 있는 전형적인 학자풍의 남자였다. 옷차림도 그가 학자풍이라는 걸 드러내주듯 바지에 셔츠 차림이 아니라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린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어떤 남자에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고는 쓴 웃음을 짓더니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냈다. "어서 오세요. 저희 성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마침 영주이신 아버님과 큰 형님은 일이 있으셔서 타지에 출타중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 둘째 아들인 케인 타르멘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쪽은 이미 아시겠지만 제 동생인 코넬리안 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드디어 영주 딸내미의 손에서 벗어난 (영주 딸이 오빠가 쓴 웃음을 보이자 류미르의 팔에서 손을 내렸기 때문이다.) 류미르가 재빨리 나서서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저는 류미르라고 하고 저쪽은 제 약혼녀인 아힌, 그리고 그 옆은 아힌의 동생인 세이몬이라고 합니다." 나와 세이몬은 류미르가 소개할 때 각각 고개를 살짝 숙여서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내가 류미르의 약혼녀라는 소리를 들은 영주 딸과 아들은 놀란 표정을 하느라고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약, 약혼녀?" 딸은 더욱 더 놀랐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신음처럼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진작 말을 하려고 했었는데 기회가 없어서요..." 류미르는 전~~혀 미안하지 않는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정말 예쁜 분이시군요. 저희 성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먼저 표정을 수습한 영주 아들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류미르가 말 한대로 오히려 저희가 영광인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했던 닭살 버전으로 영주 아들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다시 문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 아들이 "들어와." 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면서 시녀가 차와 간단한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그제야 우리는 계속 서서 이야기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모두들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영주 아들이 주인 대리 답게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시겠군요. 제가 그 생각을 미처 못하고 손님들을 계속 붙잡고 있었으니 이거 실례가 이만저만 아닌걸요? 방을 준비해 두었으니 그만 올라가서 쉬시고 저녁 식사때 뵙죠." "아, 실은 저희가 오늘 이 마을에 도착했기 때문에 좀 피곤하군요. 그럼 지금은 이만 물러가고 저녁 식사때 뵙겠습니다." 류미르가 화색이 만연해서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호호호, 류미르. 류미르 방은 제가 안내해 줄께요." 기회를 노치지 않는 영주 딸~~ 오, 존경스러워라... 결국 류미르는 영주 딸에게 끌려서 방을 나갔고 나와 세이몬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방을 나갔다. 손님 방은 모두 2층에 있었는데 나와 세이몬이 안내된 방은 복도 맨 끝에 있는 방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류미르가 안내된 방은 우리와는 좀 떨어져 있었는데 아마 영주 딸 방과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시녀가 목욕 하겠냐고 물어 왔고 나는 아까 목욕을 했지만 이런 곳에서 하기는 처음이었기에 냉큼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곧바로 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조가 있는 욕실로 안내 되었고 그 욕조 안에는 향긋한 향기가 나는 따뜻한 물과 비누 거품이 준비되었다. 기분 좋게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시녀가 드레스를 한벌 가지고 왔다. "여행중이시라 옷을 가지고 계시지 않을거라고 도련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녀가 드레스를 침대 위에다 펼쳐 놓아서 나는 그 드레스를 볼 수가 있었다. 목과 어깨가 다 드러나는 디자인의 새하얀 드레스였는데 가슴 가운데 부터 치마 끝까지 붉은 천이 한줄로 이어져 있는게 장식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우아한 드레스였다. 그러나 드레스를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게 드레스인건 알겠는데 어떻게 입어야 할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여자 옷은 보는 거 가지곤 입는 법을 모름) 어떻게 입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잠시 후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 코르셋과 속치마를 들고 들어오더니 드레스를 가지고 온 시녀와 함께 내가 드레스를 입는 걸 도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드레스를 다 입자 그녀들은 내 머리를 틀어 올리고 나에게 화장까지 시켜 주었다. "정말 피부가 고우시군요. 머릿결도 무척 좋아요." 중년 여인이 내게 화장을 시켜 주면서 말했다. "그래요? 고마워요." "자, 다 되었습니다." 중년 여인이 화장을 다 끝내자 나를 전신이 다 비춰지는 큰 거울 앞으로 안내했다. 거울 안에는 무척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 한명 서 있었다. '우와, 나지만 정말 예쁘다. 역시 옷이 날개란 말이 딱 맞군.' 나 조차도 내 모습에 감탄할 때 중년 여인과 시녀도 옆에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마치 여신 같으세요." "고마워요. 다 여러분이 예쁘게 해주신 덕분이예요." "여기에 장신구까지 있었으면 좋을텐데...." 시녀가 아쉽다는 듯이 한마디를 던지고는 중년 여인과 방을 나섰다. 잠시후에 모시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나는 그때야 내 성룡식때 어른들께 받았던 선물이 생각이 났다. "어디보자, 분명히 목걸이 하나를 받았지 아마?" 실버 드래곤이 칸 크제나에게 받은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가 있었지만 그건 너무 크고 화려했기 때문에 젖혀두고 딴 목걸이를 찾았다. 마침 적당한게 있었으니 누구에게 받았는지 기억은 안 났지만(이런 못된 녀석 같으니라구...) 다이아몬드 목걸이었는데 목 둘레에 딱 맞을 정도의 짧은 목걸이로 드레스와는 대충 잘 어울렸다. 머리장식과 귀걸이, 팔찌도 있었지만 내 길고 하얀 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딴건 그만두기로 했다. (악세사리를 달 때는 포인트를 주고 싶은 곳만 하는게 최고라는건 상식) [번 호] 11151 / 11342 [등록일] 2000년 08월 10일 22:41 [등록자] LODEMP [조 회] 924 건 [제 목]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7화 류미르 찜 당하다. (5) ─────────────────────────────────────── 큰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 저리 돌려 보면서 살펴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까 나를 치장해주던 젊은 시녀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방 밖으로 나서니 방 밖에는 세이몬이 준비하고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이몬은 자신의 검고 긴 생머리를 단정히 뒤로 넘겨서 푸른색 리본으로 느슨하게 묶고 있었다. 그의 옷도 여기서 준비해 준건지 흰 셔츠에 푸른색 자켓을 걸쳤고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멋있구나 세이몬." 원래는 '와우, 멋있는데? 꼭 귀공자 같아~~'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여기선 내가 누나라고 알고 있으니 품위를 지켜야 했다. 그런데 내가 기껏 칭찬의 말을 던졌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우씨, 가는 말이 있으면 오는 말이 있어야 할꺼 아냐?' 라고 속으로 씨부렁 거리면서 세이몬을 째려 보려다가 그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입도 떡 벌린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그러는 거야?" "우와, 아힌. 네가 그렇게 예쁠줄은 몰랐어." 나는 세이몬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물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이몬이 다시 한번 나를 훝어보며 감탄했다. "호호호, 고마워." '짜식, 나야 얼굴이 받쳐주쟎냐.' 라고 호탕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쪄랴, 시녀들이 옆에서 보고 있는데 숙녀인 척 해야 하는 것을.... 시녀를 따라 식당으로 가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처음으로 신어 본 하이힐이 왜 이렇게 발을 아프게 죄는지, 거기다가 치마는 왜 이렇게 길어서 발에 걸리적 거리는지... 엄지 발가락과 새끼 발가락이 무지 아픈 가운데에서도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더니 꼭 넘어질 것만 같아서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니었다. 더욱이 치마자락이 무척이나 길어서 밟지 않으려고 조심 조심 걷다보니 식당까지 가는 길이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요조 숙녀처럼 보일려니 태연하게 걸어야 했고 발은 무척이나 아팠지만 속도도 느리지 않게 세이몬과 시녀들의 보조를 맞추어야 했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식당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류미르와 영주 딸, 그리고 아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감탄의 말을 던지는 것 같았지만 난 그들이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이 하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의자에 앉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기에 무작정 의자 쪽으로 돌진했다. 그런데 식탁 밑에 들어가 있는 의자를 빼내려고 하는 순간 난 멈칫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새 일어 나서 내 앞으로 왔는지 영주 아들이 나보다 먼저 내가 앉을 의자를 빼내어준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어주고는 그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자 발에 가중되는 부담감이 없어져서 그제야 좀 편안해진 나는 주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류미르도 여기서 준비해 준 건지 하얀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무척이나 잘 어울려 버렸다. 류미르는 식탁을 가운데 두고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 옆자리에 영주 딸이 앉아 있는 걸 보니 아마 영주 딸이 류미르를 그 자리에 끌어다 앉힌 것 같았다. 내 옆자리자 영주 딸내미 맞은 편 자리에는 세이몬이 앉았기에 영주 아들을 가운데에 두고 그의 왼쪽 편에는 류미르와 영주 딸이, 그리고 오른쪽 편에는 나와 세이몬이 앉게 되었다.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리시는 군요.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미인이시군요." 영주 아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드레스가 무척이나 예뻐서 그런 걸 꺼예요. 타르멘슨씨도 무척이나 멋있으세요." "하하하, 타르멘슨씨라고 부르니까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군요. 그냥 케인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어머,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호호호, 그럼 그렇게 할께요." "어머나~~, 그렇게 있으니 아힌과 오빠가 무척 잘 어울리네요. 그렇게 생각 안해요 류미르?" 갑자기 들려오는 저 높은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고개를 돌려보니 영주 딸내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약혼녀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직도 류미르에게 떨어지지 않은것을 보니 약혼녀가 있어도 상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가짜 약혼녀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려면 뭐 어때? 어짜피 내일이면 헤어질텐데...' 나는 그녀에게 그냥 싱긋 웃어주고는 류미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류미르는 필사적으로 영주 딸과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갖은 애를 다 쓰면서 내게는 도와 달라는 듯한 애원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냥 있어도 안될것 같군....' 내가 어떻게 하면 류미르를 도와줄 수 있을지 그제야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자 준비되어 있던 전채와 스프가 나왔다. "자, 드시지요." 영주 아들을 시작으로 우리는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호호호, 류미르 스프맛이 어때요? 오늘은 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라고 했는데...." "어, 맛있네요...." "어머나, 그렇게 그냥 인사치례만 하지 말구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류미르, 미안하지만 거기 있는 후추좀 집어 주시겠어요?" 류미르가 당황하자 나는 필사적으로 대화 끊기를 시도했다. 그게 잘 먹혀 들었는지 류미르는 당장에 영주 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좀 과장게 큰 행동으로 내게 후추를 집어 주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늦게 영주 딸을 보고 싶다는 듯이.... 스프를 다 먹고 정식 요리가 나올때도 나는 필사적으로 류미르와 영주 딸의 대화를 끊어 놓았다. 영주 딸이 류미르에게 매달린다 싶으면 그 옆에 소금좀 집어 달라느니 빵좀 주겠냐느니 아니면 내일 날씨는 어떨거 같냐느니 등등... 나는 정말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쥐어 짜면서 그 둘의 대화를 방해했다. 세이몬도 도와주면 좋으련만 세이몬은 요리를 먹는데 너무 열중해 있느라고 우리에게 관심도 주지 않았다. 나중에 나에게 한다는 말이 "어? 아힌, 그거 안먹을꺼야? 그럼 나 줘. 그거 꽤 맛있는데..." 였다. '임마, 내가 언제 음식 남기는거 봤냐? 류미르를 돕느라고 못 먹은거 아냐? 좀 도와라 너 혼자 그렇게 잘 먹고 있으면 되겠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응? 아, 그래 이거 다 먹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배도 다 못채웠는데.... 류미르는 내가 옆에서 자꾸 방해를 하니까 이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영주 딸은 내가 엄청나게 얄미운 모양이었다. 얼마나 눈총을 주는지 내 얼굴이 따끔따끔 거릴 지경이었다. 나는 '호호호' 웃으면서 슬쩍 영주 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가 영주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음식을 먹는데 열중하는 척 했다. 식사 시간을 어떻게 어떻게 때우고 겨우 티타임을 갖게 되어 우리는 식당을 나와 응접실로 갔다. 거기서도 영주 딸은 필사적으로 류미르와 붙어 앉아서 나는 또 세이몬과 같이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제야 말을 꺼내는 영주 아들... "류미르는 지금 여행중이라고요....어디로 가는 겁니까?" "저희는 현재 라크네 도시에 있는 엘라이어드 여신의 신전에 가고 있습니다." "호오, 라크네 도시에 있는 엘라이어드 신전에요?" "예, 거기 가서 우리 사이를 위해 예물도 바치고 신관님께 축복도 받구, 또 여신상도 구경하려구요..." "이렇게 일찍 가시는걸 보니 엘라이어드 성기사 토너먼트전도 구경하시려고 그러는 것 같군요." "엘라이어드 성기사 토너먼트전이요?" "모르셨습니까?" 류미르가 당황하면서 (그는 정말 몰랐으니까...) 나를 쳐다보았고 그 시선을 받은 내가 재빨리 나서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그 토너먼트전을 볼 생각은 없었어요. 단지 우리 여행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넉넉잡고 일찍 출발한 거거든요." "그랬군요. 하지만 좀 빨리 가시면 토너먼트전을 시작하기 전에 도착하실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그럼 저희는 운이 좋게도 그걸 볼 수 있겠군요..." 그때 세이몬이 내 귓속으로 살짝 물어왔다. "아힌, 그게 뭐야?" "나중에 설명해 줄께." 그때 영주 아들과 류미르가 대화 하다가 중간에 내가 끼어들어 틈이 생기자 기회를 놓치지 않는 영주 딸이 재빨리 류미르에게 말했다. "류미르, 오늘 밤은 달도 무척이나 밝아요. 이런 날은 우리 성의 정원이 무척이나 아름답거든요. 같이 산책하지 않을래요?" "그래요? 그거 참 멋있겠군요. 아힌, 우리 구경하지 않을래?" 류미르가 나에게 같이 산책하길 권하자 당황해 버린 영주 딸이 떠듬떠듬 말했다. "아니, 저기 우리 성의 정원은 그러니까, 그래, 무척 넓어요. 길을 모르는 사람이 밤에 멋 모르고 나갔다간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고요." "그래요? 그것 참 아쉽군요. 그럼 하는 수 없지요." 류미르는 무척이나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케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 쿡쿡 웃었다. 어떻게 보면 웃겨서 웃는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오빠가 동생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짓는 것 같아서 괜히 영주 딸이 부러워 졌다. 그때 영주 딸이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힌? 이름이 아힌이라니... 꼭 남자 이름 같군요. 그게 본명인가요?" "아니예요. 본명은 따로 있어요. 아힌은 내 별명이죠. 류미르와 세이몬 만이 내게 아힌이라고 불러요. 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께선 제 애칭을 부르시죠." "얼마나 말괄량이었으면 별명을 남자 이름으로 짓나요?" "호호호, 제가 그만큼 고집이 세고 성격이 급하대요." 나를 화나게 하려고 시비를 걸었던 영주 딸은 내가 부드럽게 넘어가자 더욱 더 열받았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아힌이 별명이시라구요? 그럼 애칭이 뭔가요?" 그러자 케인이 재빨리 끼어들어 나와 영주 딸을 갈라 놓았다. "아린이예요.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애칭이죠." "아린이라, 정말 예쁜 애칭이군요. 당신과 잘 어울려요." "호호, 뭘요..." "그런데 성은 없나요?" 갑자기 또 끼어든 영주 딸내미.... 또 시비걸 껀수를 만들었나보다. "성이요?" 나는 당황하는 척 되물었다. "그래요. 성 말예요. 없는걸 보니 평민이나 천민이신가 보죠?" 영주 딸은 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막나갔다. 아까 되게 열받은 모양이었다. "코넬리안, 무례하구나..." 너무하다 싶은지 영주 아들이 중간에 끼어 들었다. "궁금하단 말예요." 영주 딸은 어리광 부리듯이 말했고 영주 아들의 엄한 눈초리에 약간 기가 죽은듯 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류미르가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성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사정상 말씀 드릴수는 없군요. 미안해요 코넬리안. 이해해 주겠지요?" 류미르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하자 그제야 코넬리안도 물러났다. "뭐,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요 뭐..." [번 호] 11232 / 11342 [등록일] 2000년 08월 11일 22:30 [등록자] LODEMP [조 회] 777 건 [제 목]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7화 류미르 찜 당하다. (6) ─────────────────────────────────────── 그때 세이몬이 무척이나 졸렵다는 듯이 크게 하품을 했다. "후아아암~~" "저런, 무척 피곤하신가 보군요. 하긴,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세이몬이 눈치도 없이 그냥 하품을 해버리자 정작 당황한건 류미르와 나였다. 그런데 그때 다행이도 케인이 눈치껏 적당히 무마시켜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살포시 감사의 미소를 보냈다. "죄송해요. 저희가 좀 피곤하군요. 이만 실례하고 싶은데, 이해해 주시겠어요?" "아니요. 마침 저나 코넬리안도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요." 그러나 드디어 트집 잡을 껀수를 발견했다는 듯 코넬리안이 끼어 들었다. "무슨 소리예요, 오빠? 아직 이른 시간이쟎아요. 벌써 졸립기 시작하다니.... 꼭 평민 같군요." 여기 모두 귀족들이 모였는데 평민 하나가 끼어 들어서 물을 흐리게 한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행을 계속 하다보니 버릇이 되었군요. 여행을 하다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일찍 자게 되더라구요." 나는 속으로는 열받아서 부르르 떨렸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너 같은 버릇 없는 애도 다 포옹할 수 있다는 인자한 시선으로 그녀를 그윽히 바라 보았다. 그리고 "타르멘슨 양께선 여행을 한번도 안해보셨나보죠?" 애송이가 무얼 알겠냐는 말투로 한마디 덧 붙였다. 여기서 호탕하게 웃어제끼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참았다. 그러자 정말 여행을 한번도 안해 봤는지 코넬리안 얼굴이 굳어지더니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가면서 파르르 떨렸다. "어머나, 정말 여행을 한번도 안해 봤나보죠?" 나의 마지막 일격, 그리고 K.O 당한 영주 딸내미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저, 피곤해서 이만 실례할께요." 라고 한마디 툭 던져 놓고는 찬바람이 쌩 불 정도로 몸을 돌려 나를 한번 째려 보더니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녀의 당돌한 행동에 그녀의 오빠인 케인이 오히려 우리에게 미안해 했다. "죄송합니다. 평소에는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오늘은 좀 피곤한가 보군요." 그러자 류미르가 점잔게 말했다. "아니요. 저희 때문에 그런걸요 뭐.... 오히려 저희가 죄송한걸요." '저희? 이봐 류미르. 이건 다 너 때문 이라구!'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류미르를 한껏 째려봤고 이런 나의 눈초리를 받은 류미르는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때 다시 세이몬이 하품을 했고 그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시길..." 먼저 케인이 밤 인사를 했고 우리도 그에게 답례를 했다. "저녁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럼..." "내일 뵐께요." 세이몬은 간단히 고개만 살짝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내가 묵을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의 발을 사정없이 죄고 있는 하이힐을 벗어 던져 버린 후 드레스와 속옷을 벗고 편안한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었다. "후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역시 여자들은 대단해. 어떻게 이런걸 입고 살 수가 있는거지? 더욱이 이런걸 못 입어서 안달을 하기도 하니..." 새삼 여자들에 대한 (나도 여자지만...) 존경심이 솟아 올랐다. 발을 살펴보니 엄지 발가락과 새끼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고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에구, 불쌍한 내발..." 내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발에다 치유 마법을 행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너희들, 안피곤해? 세이몬은 아까 하품을 두번씩이나 했쟎아?" 아까 피곤한 표정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던 녀석들이 멀쩡한 얼굴로 내 방으로 들어오자 나는 황당했다. "아까야 뭐, 너희들은 잘 떠드는데 나는 할 말이 없으니까 지루해서 그런 거지..." 세이몬이 침대에 털썩 주저 앉으면서 대답했다. "그나저나 아힌, 너 아힌이 가명이었어?" 세이몬이 침대에 앉아 기지개를 쭉 피더니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응. 아린은 여자 이름이쟎아. 여행하다보면 남자인게 훨씬 편하니까 남장만 한게 아니라 가명으로 남자 이름까지 사용한거야. 그럼 날 여자라고 의심은 안 하더라고. 단지 미소년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그런가?" "하지만 넌 아힌보다는 아린이 더 잘 어울리는거 같아. 이제부터 우리도 아린이라고 부르면 안될까?" 세이몬이 내 말을 대충 수긍하자 이번엔 류미르가 한마디 했다. "안되는건 없지만....그래도 남장하고 있을때는 아힌이라고 불러줘. 그리고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 아힌도 나고 아린도 난데..." "그렇지 않아. 아린은 네 할머니가 지어주신 애칭이라며? 너와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아린이라고 할텐데 그럼 꼭 우린 너와 가까운 사람이 아닌 것 같쟎아?" "류미르, 너나 세이몬은 사람이 아니쟎아?" 나는 류미르가 너무 심각하게 말해서 분위기좀 바꾸려고 농담조로 말했건만 류미르가 화를 냈다. "지금 그런걸 따지냐?" "아, 그래 미안하다. 애칭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미안하고 가명만 가르쳐 줘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류미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류미르란 이름도 애칭이거나 가명 같은데?" "난 가명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쟎아? 그건 진짜 내 이름이야." "그러고 보니 나만 내 이름을 전부 가르쳐 줬구나? 이왕 이렇게 된거 너희들도 정식 이름을 말하는게 어때?" 옆에서 세이몬이 제안을 했다. "내 정식 이름은 류미르 홀데인 클리브랜드야. 너희들도 알다시피 하이 엘프족이구. 아린 넌?" "내 이름은 아시리안 시스파슈타인 (성은 할아버지 이름이지만 뭐 괜찮겠지? 어짜피 드래곤은 성이 없쟎아?) 애칭은 아린이야. 할머니가 지어 주신거지. 하지만 여행을 할땐 아힌 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어. 그러니까 너희들도 아린이라고 하지 말고 아힌이라고 해줘." 세이몬의 제안대로 류미르까지 자신의 정식 이름을 말하자 나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성이 원래 없기에 또 드래곤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성으로 붙였다. 뭐, 성이란게 자신의 혈육을 나타내는 거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그럼 평소에는 아힌이라고 불러도 우리만 있을 때는 아린이라고 해도 상관 없겠지?" 류미르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래그래, 맘대로 해라. 좀 편하게 하려구 가명을 쓴 거 뿐이니까. 그건 그렇고 너희들 왜 온거야? 설마 내 이름때문에 온거야?" 그러자 세이몬과 류미르가 찔끔 하는 기색이 비춰졌다. "어? 정말 그거때문에 온거야? 나원 참, 그게 그렇게 맘에 걸리는 일이었냐?" "하지만 네 애칭을 너한테 직접 듣지 않고 다른 사람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세이몬이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그정도였냐? 난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그래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 "우리도 너 피곤한데 찾아와서 미안하다. 이만 갈께.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 할꺼지?" 여태껏 벽에 등을 기대고 이야기를 하던 류미르가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며 말하자 세이몬도 침대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나까지 일어서야 했다.(에구 귀찮아라.) "응, 내일 일찍 출발할꺼니까 다들 짐 챙겨둬. 그럼 내일 봐. 잘자." 나는 그 둘을 문까지 배웅하고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방으로 가는 걸 보고 난 뒤 문을 닫고 침대에 가서 드러 누웠다. 그런데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번 호] 11349 / 11405 [등록일] 2000년 08월 14일 22:45 [등록자] LODEMP [조 회] 611 건 [제 목]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7화 류미르 찜 당하다. (7) ─────────────────────────────────────── "네, 들어오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고 아까 식당에서 잠깐 봤었던 영주 딸내미의 시녀가 들어왔다. "저....." 그녀가 들어와서 머뭇머뭇 거리는 바람에 나는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으~~귀찮아.) "무슨 일인가요?" "아가씨께서 잠시 뵙기를 원하십니다." 그녀가 머뭇머뭇 거리면서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이번엔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 내가 피곤하기도 했고 또 이 밤중에 가려니 너무너무 귀찮기 까지 했다. "미안하지만 피곤해서 그러니 내일 뵙자고 전해주세요." 그런데 내가 단호히 거부의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녀는 계속 머뭇머뭇 거리면서 나갈 생각을 안했다. 내가 빨리 나가라는 강력한 압력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울상이 되어서 떠듬떠듬 말했다. "저, 꼭 모시고 오라고 하셨는데...." "잔다고 하면 되쟎아요?" "그래도 꼭 모시고 오라고 하셔서, 그냥 가면 제가 무척 혼나거든요...." 그 시녀는 영주 딸내미 보다 나이가 한 두 살 많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린 소녀였다. 그 영주 딸내미가 평소에 얼마나 못살게 굴었으면 지금 그녀는 무척이나 겁 먹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제발 같이 가주세요...' 하는 호소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너무 너무 귀찮았지만 너무나 불쌍한 표정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침대에서 내려섰다. "이대로 가도 괜찮겠지요?" 그녀는 내가 가주는 것만 해도 무척이나 고맙다는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끄덕 해 보였다. 영주 딸내미의 방에 들어가자 영주 딸내미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로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자 생글생글 웃으며 일어나 나를 맞았다. "어머, 피곤할텐데 와주셔서 감사해요. 비록 시간이 많이 늦었지만 아린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이번엔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야? 그녀는 내가 편안안 셔츠 차림에 바지를 입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옷차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옷차림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는 했을텐데?' 나는 속으로는 좀 어리둥절해 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은채 방긋 웃었다. "타르멘슨 양께서 저와 이야기를 하길 원하시니 기쁘군요." '기쁘긴 뭐가 기뻐?' "어머, 기뻐해 주시니 정말 고맙네요. 아, 여기 앉으세요." 그녀는 자신의 맞은 편 의자를 가르키면서 나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어느 새 준비했는지 아까 나를 데려왔던 시녀가 쟁반에 차와 약간의 과일을 준비해 왔다. "밤이 늦은 시각이라 수면에 아~~주 좋은 차와 과일을 준비 했어요." "어머, 세심하기도 하셔라." 그녀의 말투가 좀 이상한 것 같았지만 이제 드디어 한판 벌어지나부다 라고 생각한 나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의 향기를 맡아 보았다. "음~, 향기가 무척 좋군요." "그렇죠? 저도 밤에 가끔 잠이 안 올때는 이 차를 마신답니다. 그럼 머리가 맑아지면서 잠을 푹 잘 수가 있어요. 차 맛도 꽤 좋지요. 한번 드셔 보세요." '쬐끄만게 벌써부터 저런 소리를 하냐?' "호호호, 그러세요? 그럼..." 나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차 한모금을 입 안에 머금었다. 정말 그윽한 향이 입 안을 맴도는 것이 목으로 찻 물을 넘기자 달콤한 맛과 함께 끝맛이 매우 깔끔하고 상큼했다. "어머나, 정말 좋군요. 향기 만큼 맛도 무척 좋네요." "호호호, 그래요? 다행이예요. 아린에게 꼭 대접하고 싶었거근요." '이거 점점 수상해. 왜 아직도 시작을 안하는 거지?' 나는 그녀가 뭔가 꼬투리를 잡을 생각을 전혀 안하는 것처럼 보이자 점점 더 어리둥절 해졌다. 차를 한모금 더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자 그제야 영주 딸내미가 차를 한모금도 안 마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 타르멘슨 양께선 전혀 안 드셨네요?" "예? 아, 예~~, 아린이 너무 맛있게 드시니까 기뻐서 마시는걸 깜빡 했지 뭐예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도데체 무슨 꿍꿍이 속인거야?' 나는 그녀의 속셈을 도저히 알 수가 없자 답답한 나머지 목이 타서 차를 한모금 더 마셨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저를 부르셨나요?" "아, 그건 제가 아까 저녁때 너무 무례하게 군 것 같아서요. 그걸 사과하기도 할겸 또 아린이 여행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오시라고 했어요. 아까 제가 그냥 나가는 바람에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거든요." '이상하다? 이렇게 순순히 사과할 애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별말씀을.... 저희 일행을 여기로 초대해 주신게 타르멘슨 양 이시쟎아요. 덕분에 저녁도 대접 잘 받고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는걸요. 그런 면에서 보면 제가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지요." "호호호, 과찬의 말씀을...." 그녀는 찻잔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차를 한모금 더 마시는 나를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그 시선이 좀 묘한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영주 딸과 같이 있으면 그녀의 속셈을 금방이라도 알 것 같았는데 점점 더 아리송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아린은 여행한 지 얼마나 오래 되었어요?" 영주 딸은 과일 한쪽을 포크로 쿡 집어서 입가로 가져가며 물었다. "글쎄요?" '내가 얼마나 오랬동안 여행을 했더라...' 내가 여행한 기간을 머리속으로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생각이 잘 안났다. '이상하다, 도대체 왜 생각이 안 나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여행한 것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나자 오랫동안 대답을 안 하는것도 미안해서 생각이 잘 안 난다고 대답을 하려고 영주 딸을 바라봤다. 그런데 영주 딸이 점점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이상...하...다....이게...도..데...체..." 어떻게 된거냐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 하나하나 내뱉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리고 결국 나는 영주 딸이 나를 바라보며 기분 나쁘게 씨익 웃는걸 마지막으로 보고 눈이 감겨버렸다. ┌───────────────────────────────────┐ │ ▶ 번 호 : 11900/11925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8월 31일 21:49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제 17화 - 류미르 찜 당하다 (8) │ └───────────────────────────────────┘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 군요 그런데 제 이야기가 싸그리 사라졌군요. 얼마간 안 올리면 다 지우는 건가? 어째든 연재 다시 시작합니다. 그동안 기다려 주시고 독촉 멜 보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금씩 정신이 든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어떻게 된거지?"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완전히 정신을 차린 나는 눈을 떠서 내가 있는 곳을 확인했다. "여긴 어디야?" 그러나 눈을 뜬 나는 더욱 더 당황되었다. 분명히 눈을 떳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순간적으로 내 레어로 되돌아 온게 아닌가 싶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라이트!" 우선은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 겠다는 생각에 불을 밝혀서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온통 돌로 만든 벽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레어는 아닌 것이 벽 한쪽에는 철로 만들어 진 것 같은 문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 약간 깔려있는 짚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조금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참내, 꼭 지하감옥 같쟎아? 내가 왜 여기 있는거지?" 문으로 다가가 슬쩍 밀어보니 바깥에서 잠겼는지 열리지 않았다. "어라? 잠겼네? 그럼 난 갇힌건가?" 왜 내가 여기 있는지도 어떻게 여길 왔는지도 모르는 채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저녁을 먹고 내 방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내 방에 왔다 갔고, 그다음에는 영주 딸이 날 불러서 영주 딸내미 방으로 갔었지...." 그리고 영주 딸 방에서 차를 마셨는데 갑자기 정신이 흐릿해 지더니 그 뒤로 필름이 끊겼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런 이상한 곳에 내가 갇혀있단 말이지? 참내,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는군...." 아마 영주 딸이 나에게 마시게 한 그 차에 수면제 비스무리 한 약이 들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수면에 아주 좋다는 말을 강조한 거였군? 이거 이거 웃기지도 않은 꾀에 내가 넘어가 버렸는걸?" 그런 유치한 꾀를 낸 영주 딸도 황당했지만 그 꾀에 넘어가 이모양 이 꼴이 된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그노무 지지배, 날 여기에 가두어 두고 얼마나 고소해 하고 있을까? 우쒸, 열받아. 이걸 어떻게 갚아준다지? 이 성을 그냥 확 뽀사버려? 아님 드래곤으로 폴리모프해서 영주 딸내미만 지긋이 밟아줄까?" 어떻게 해야 내가 통쾌해 질 수 있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비록 영주 딸이 나에게 이런 일을 한건 괴씸했지만 그래도 저녁 식사 할 때 나에게 된통 당해서 이런 일을 벌인거고 또 덕분에 나도 잼있었고 영주 아들내미도 친절한 걸 생각하면 크게 괴롭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봐주지. 이번엔 일을 크게 벌이지 않겠어. 아직 네가 어린걸 감사하는게 좋을꺼야. 쬐끄만 애한테 화풀이 하는 것도 웃긴 일이니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방은 먹여야 겠지? 아~주~ 가볍게 말이야..."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판 벌일것을 생각하며 성에서 내 방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아직 새벽인 듯 밖은 어슴프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흠, 너무 늦지는 않았군...." 거울을 보니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긴 그 지저분한 곳에서 하룻 밤을 보냈으니 엉망이 된 것이 당연하겠지?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 먹은 나는 우선 욕실로 가서 운디네에게 부탁해서 욕조에 물을 채운 뒤 카사를 불러 물을 데우게 했다. 그리고 운디네와 실프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뒤 머리를 말리자 날이 완전히 밝아 왔다. 지저분해진 옷은 베낭에다 집어 넣고 새 여행복을 꺼내 입고 베낭을 챙기자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깨우러 오는 시녀가 없었다. "응? 왜 날 부르러 오지 않지? 아침식사 할때가 되지 않았나? 아닌데, 시간이 된거 같은데? 아참, 영주 딸은 내가 방으로 돌아온지 모르니까 내 방으로 시녀를 보내지 않겠군.... 그럼 그냥 내가 가볼까?" 나는 베낭을 가져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마법 주머니만 허리에 차고는 베낭은 그냥 침대 위에다 놓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으로 다가갈때였다. 류미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린이 방에 없다고?"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시녀의 목소리... "예, 방에 가보니까 아무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하고 있네, 너가 언제 내 방에 왔었냐? 아무도 안 왔는데... 이어 들려오는 세이몬의 목소리... "아린이 어딜 간거지?" "잠시 산책을 나간게 아닐까요?" '흠, 이 목소리는 영주 딸내미 목소리군... 그럼 이제 슬슬 등장해 볼까? 영주 딸내미가 어떤 얼굴을 할지 기대가 되는걸?'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제가 늦은건가요?" ........... "푸하하하, 아유 고소해라, 킬킬킬킬 그 새파랗게 질려서 굳어진 영주 딸내미 표정이란, 큭큭큭큭 사진으로 찍어놨어야 했는데....낄낄낄...." "그만좀 웃어라,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웃어댈꺼냐?" "영주 성을 떠난뒤로 계속 저렇게 웃어대다니, 대단한 체력 이야..." 내가 영주 성을 떠난 뒤로 계속 웃어대기만 하자 처음에는 궁금해서 왜 웃냐고 물어보던 류미르와 세이몬도 내가 대꾸도 못하고 웃어 젓히자 이젠 아예 맛이 간걸로 취급했다. "우하하하, 킥킥 조금만 더 웃고, 낄낄낄.... 설명해줄께...킥킥킥 아이구 배야, 깔깔깔깔...." 결국은 세이몬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등짝을 강하게 후려 갈겼다. 철~얼~썩!! "앗따거, 이게 무슨 짓이야?" "어때? 웃음이 멈췄지? 맛이 갈 것 같을 땐 한대 맞는게 최고지." "누가 맛이 갔다고 그래?" "너말고 또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웃어제끼는거야?" "아? 그거? 흐흐흐흐, 그게말야..." 내가 너무 기분 나쁘게 웃었는지 세이몬이 슬금슬금 류미르 옆으로 갔다. "야, 류미르, 아린이 정말 이상해졌어." "쟤가 뭘 잘못 먹었나?" "씨꺼, 이것들아. 내가 어젯밤에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잘만 잤지? 그러고도 너희들이 내 부하냐?" "어젯밤? 어젯밤에 왜? 아침에 잘만 나타나구선..."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류미르가 말했다. "그거야 다 내 실력이 뛰어나다보니 난관을 잘 극복하구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쨘 하구 나타난거지." "류미르, 진짜 아린이 맛이 간거 같아. 평소에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동감이야 세이몬..." "이것들이...." 내가 류미르와 세이몬을 한껏 째려보자 류미르와 세이몬은 얼른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그래봤자 무서워 하는게 아니었지만... "그래그래, 알았어. 설명을 해줄께..." 류미르 왈. "진작 그럴것이지." 세이몬 왈.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보지?" "그러니까 어젯밤에 말야. 너희들이 내 방을 왔다 간 뒤에 영주 딸내미가 시녀를 보냈더라구. 할 말이 있다나? 귀찮아서 안갈려구 했는데 시녀가 거의 매달리다 시피 하더라구 그래서 가줬지. " "그런데?" "말 끊지마 류미르, 어째든 영주 딸내미 방에 가니까 되게 기분 나쁘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기가 첨부터 그랬던 양 아주 친한 척을 하더라구." "그래서?" "끼어들지좀 마라. 이번엔 세이몬 너냐? 끝까지 좀 들어. 그러더니만 다과랑 차를 내놨거든? 난 아무생각 없이 마셨지. 그 영주 딸내미가 아무것도 안 먹고 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말야. 우씨, 지금 다시 생각 했더니 열받네?" "왜? 그게 무슨 약이기라두 했어?" 짜식. 엘프라면서 눈치 하난 빠르군...엘프라서 빠른건가? "맞아. 수면제였더라구, 그거 마시자 마자 곧바로 정신을 잃었거든..." '그 수면제 양이 드래곤도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독했다는 건 말 못해. 하긴 그러니까 내가 잠들었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세이몬이 또 끼어 들었다. "어떻게 되긴, 나중에 깨어났지. 근데 깨고 보니까 날 감옥 같은 곳으로 옮겨 놨더라구. 그래서 공간 이동으로 내 방으로 돌아왔지. 그 뒤로 너희들도 알다시피 영주 딸과 시녀가 작당하고 있을 때 내가 식당으로 들어간거구." "호오, 그래서 영주 딸이 새파랗게 질린 거였군? 난 또 달라붙지 않기에 그냥 포기한 줄 알았지?" 그때 세이몬이 고개를 갸우 뚱 하면서 물었다. "근데말야. 아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거야? 네 성격으로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을 텐데..." "이봐, 세이몬, 내 성격이 어떻다구 그래?" "넌 받은만큼 돌려준다며?"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번엔 꼬맹이가 그런 거쟎아? 솔직히 첨에 깨어 났을때는 너무 열받아서 성을 완전히 뽀사 버리구 싶었는데 꼬마가 머리 쓴거에 넘어간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또 꼬맹이가 그런거에 화를 내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그정도로 끝내 준거야." "호오, 그래?" "류미르, 너 말투가 좀 이상하다?" "아니, 아린이 좀 큰거 같아서 말야. 보호자로써 가슴이 뿌듯한걸?" "누가 보호자란 거야? 미소년 의적단을 만들고 날 대장으로 추대한게 누구였더라?" "흥, 그런 옛날 옛적에 했던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단 말야? 아린은 아직 어렸군?" "뭐얏? 그러는 넌? 다 성장하지도 않아서 집에서 가출한 주제에!" "윽, 누, 누가 가출을 했다고 그러는 거야?" "호오, 류미르? 찔리는 구석이 있는거 같은데~~?" "찔리긴 누가 찔려? 빨리, 빨리 가자구. 이러다 해가 지겠다." "이봐 류미르, 아직 정오도 안됐어." 세이몬이 한마디 한 뒤로 류미르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 │ ▶ 번 호 : 11930/11959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1일 22:27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1) │ └───────────────────────────────────┘ 아린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이....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제가 이야기를 올릴때 제 이야기를 검색 하다가 안뜨니까 당황했나 봅니다. 왜 안 떴는지 잘 확인도 안 해보고 제 이야기가 지워졌다고 말해버렸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어제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확인해 보니 있더라구요. 가르쳐 주신 분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 ^^;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근데말야 아린, 엘라이어드 성기사 토너먼트전이 뭐야?" 난데없이 세이몬이 물어왔다. 우리는 지금 엘라이어드 신전이 있는 라크네 도시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빠르면 내일 늦으면 내일 밤에라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시가 가까워 져서 그런지 제법 넓고 잘 닦여진 도로가 나 있었고 그 도로 위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 상황이어서 우리는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이동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가고 있는 중이었다. "뭐?" 나는 라크네 도시에 있다던 엘리어드 신전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 세이몬이 물어 오는 것을 듣지 못해서 다시 되물었다. "엘라이이어드 성기사 토너먼트전 말야. 전에 케인이라고 했던 영주 아들이 말한거. 기억 안나?" "아, 그래 알고있어. 그게 뭐냐하면 말야.... 음.....설명 하려면 여신제 부터 설명해야 겠군. 그러니까 엘리어드 여신이 바로 사랑과 평화의 여신 이쟎아? 일년에 한번 그 여신께 감사하고 축복을 비는 예배 비슷한게 일주일간 열리는데 그게 축제 비슷하게 되어서 행사 같은게 많다고 해. 특히 전 도시민이 엘리어드 여신의 신자인 라크네 도시는 더욱 더 크고 화려하게 펼쳐지지. 그게 바로 여신제야." "하긴, 거긴 켈튼 연합국에서도 알아주는 신전이 있쟎아. 아마 그 신전 때문에 그 도시의 시민들이 엘라이어드 여신의 신자가 되었을껄?" 류미르가 옆에서 끼어 들었다. "맞아. 그렇기도 하지. 그런데 라크네 도시에서 열리는 여신제 행사중에서 유명한 것이 바로 세이몬 네가 말한 엘리어드 성기사 토너먼트와 엘리어드 여신상 공개이지." "여신상을 공개 한다고?" 세이몬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7일 동안 열리는 여신제 중에서 마지막의 3일 동안 여신상이 공개가 돼. 하지만 그 공개되는 여신상을 엘리어드 성기사 토너먼트전에서 승리한 영광스러운 성기사 6명이 지키게 돼." "흠, 그럼 그 토너먼트전은 여신상이 공개되는 동안 그 여신상의 경비를 설 사람을 뽑는 것이군." 류미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그렇다면 말야. 혹시 그 여신상을 노리는 사람이 토너먼트에 참가해서 경비로 뽑힌 뒤 훔칠 수 있지 않을까?" "세이몬, 훌륭한 지적이야. 하지만 말야, 왜 그 토너먼트를 엘리어드 성기사 토너먼트라고 했겠어? 그 토너먼트전에 출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엘리어드 신전의 고위 신관들의 추천서를 가진 사람만이 출전할 수 있다구, 그렇기 때문에 그 토너먼트 전에서 승리하면 그 사람의 명예도 높아지지만 그 사람을 추천해 준 신전도 이름이 알려지쟎아?" "그러니까 각 신전에서는 우승할 확률이 높은 실력 있는 사람만 보내겠군?" "호, 똑똑해졌어, 세임몬." "다 내가 잘 가르친 덕이지." "웃기지마 류미르. 네가 뭘 가르쳤다는 거야?" 류미르가 씨익 웃으면서 세이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열받아서 얼굴이 붉어진 세이몬이 류미르의 팔을 탁 쳐버렸다. "됐어. 그만하고. 그러니까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실력은 물론 신분도 확실한 사람들이지. 그런 사람들이 시합을 해서 제일 실력이 좋은 6명의 사람들을 뽑고 그들이 하루에 두명 씩 여신상을 지키는 거지. 물론 하루 종일 지키는건 아냐. 여신상이 공개 되는건 오후에 여신상에 참배가 될 때부터 저녁때 까지라니까 길어야 4~5시간 정도지." "그럼 그 뒤엔?" 세이몬이 류미르를 한번 더 째려보면서 물었다. "그 뒤에는 여신상은 신전에서 제일 깊숙 한 곳에 여러개의 신성 마법진으로 보호되는 방에 보관이 된다고 해. 그 방에는 그 신전의 제 1 신관만이 들어갈 수 있대." "그럼 그 신관이 여신상을 그 방으로 가져가기 전에 노린다면?" 류미르도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물어왔다. "그 방에 갈 때까진 성기사 두명과 5명의 고위 신관들이 동행을 하는걸?" "휘유, 철통같이 지키고 있군." 류미르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라크네 도시의 밥줄을 쥐고 있는데." "밥줄을 쥐고 있다니?" 세이몬이 뭔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 보았다. "생각해봐. 라크네 도시에선 내세울께 아무 것도 없다고.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냐. 단지 기름진 땅이 있지만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거든. 그러니 그들의 생계 수단이 엘라이어드 신관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장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솔직히 책에 의하면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지만 특히 여신제가 벌어질 때는 한달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1주일 전에 가도 방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더군." "헤에, 그정도야?" 세이몬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당연하지. 이 세상에서 손꼽히는 보물 중 하나를 보는 기회인데...." "아린, 넌 어째 보물쪽으로만 생각하냐? 그 여신에게 경배하러 가는 사람도 많을 것 아냐?" 옆에서 류미르가 핀잔을 주었다. "뭘 모르나 본데, 신전은 거기 말고도 다른 지역에도 많다고. 그런데 유독 그 신전이 유명한 이유가 뭐겠어?" "아린, 네가 그 신전이 크고 무척 아름답다고 했쟎아?" "맞아, 세이몬. 거기다가 보물인 여신상 까지 있쟎아. 그러니 그 도시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모두 다 신앙이 두터워서 그 신전을 찾겠냐구? 구경하러 가는 사람이 더 많을껄?" "그런데 말야, 우리가 거기에 도착 했을 때 방을 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거기에 도착 할 때는 여신제가 1주일 정도 남은 때쟎아?" 류미르가 말문이 막히는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글쎄, 그건 나도 자신이 없어. 뭐, 지금부터 걱정 해봤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쟎아? 그때 가서 생각 하자구." "아린,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할 수가 있냐?" "씨끄러 류미르. 그럼 넌 뭐 좋은 생각 있어?" "왜 거기서 날 걸구 넘어지냐?" "세이몬은 가만히 있는데 네가 자꾸 시비 거니까 그러지." "내가 뭘 어쨌다구...."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2) 그로부터 다음날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우리는 라크네 도시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축제로 인하여 분위기는 들 떠 있었고 그 덕분인지 다른 도시에서는 딱딱하고 사무적으로만 굴던 도시 경비대들도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엘리어드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라고 친절하게 인사까지 하는 거였다. "호, 완전 축제 분위기군.... 경비대들 까지 저렇게 친절 하다니...." 우리가 경비대들을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갈 때 류미르가 뒤에 서 있는 경비대들을 흘낏 돌아 보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엄청나게 복잡하군...." 세이몬의 말대로였다. 켈튼 도시 못지 않게 아니 그곳보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북적북적 대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건물끼리 오색의 리본으로 이어 놓고 그 곳에 엘리어드 여신의 가호를 비는 문구가 적힌 종이들이 붙어 있어 꼭 만국기를 보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여기 저기 엘리어드 여신을 상징하는 데이지꽃인 커다란 조화를 장식해 놓았고 거리에도 데이지 꽃을 파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자, 여신께 바치는 데이지꽃을 팝니다. 빨리 사가지 않으면 다 떨어집니다. 이것이 마지막이예요..." "데이지꽃을 바쳐?" 어느 데이지 꽃을 파는 남자가 외치는 말에 세이몬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데이지 꽃은 엘리어드 여신을 상징하는 꽃이래. 그래서 여신께 기원할때 그 꽃을 바친대."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동시에 말했다. "유치해." "쯧쯧,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그렇게 감정이 매말라서야..." "참내, 아린. 넌 뭐 다 컸냐?" "류미르, 겉만 보곤 사람을 판단해선 안돼. 난 이래뵈도 성인식을(성룡식이지만....) 치뤘다구..." "헹, 너네 마을에선 15세 꼬마에게 성인 대접을 해주냐?" "뭐시라? 야, 내가 보기엔 이래 보여두....." "보여두, 뭐? 왜 말을 끊어?" '그러고보니, 난 이곳 사람의 성년이 몇살인지 모르쟎아? 대충 18세나 20세 정도 일텐데... 확실히 모르니....' "그러니까 자랄만큼 다 자랐다 이거지. 자 자, 이러구 있지 말고 빨리 방이나 구하러 가자구." 나는 류미르의 시선을 살짝 피하면서 세이몬을 잡고 이끌었다. 그 뒤에 류미르가 씨익 웃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았지만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우쒸, 나 성룡 맞는데.... 그렇다고 지금 난 드래곤이야, 라구 말할 수도 없구....' 방을 구하러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왠만큼 괜찮고 좋은 여관에는 벌써 방이 다 찬 것이었다. 어쩌다 가끔 어떤 여관에 빈 방이 있기는 했지만 그 여관은 매우 작고 낡은 여관이었다. 그러면서도 바가지를 씌워 몇배나 더 비싼 방 값을 부르는 거였다. 몇시간을 돌아 다니다 지쳐버린 류미르나 세이몬은 그런 방이라도 잡자고 나에게 사정을 했지만 난 내 자존심상 노숙을 할 지언정 도저히 그런 방에 그것도 평소 가격보다 몇배나 더 비싸게 지불 하면서 묶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때 나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고 혹시나 하는 바램으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저기요.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고급인 여관이 어딘가요?" 나는 길거리에서 작은 빵에 꿀을 얹어서 팔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빵 세개를 사면서 물었다. "그 곳에 묶으시게? 거긴 켈튼에 있는 고급 여관들 못지 않게 비쌀텐데?" 그녀가 나와 류미르, 세이몬을 쓰윽 훝어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한번 가 보기라도 하려구요." "이쪽 큰 길로 쭉 가다보면 큰 광장이 나오는데 거기 이정표에 시청으로 가는 길과 경기장으로 가는 길, 그리고 신전으로 가는 길, 이렇게 세 길이 있을꺼예요. 거기서 시청으로 가는 길쪽으로 가다 보면 시청으로 가기 전에 있어요. 그쪽에서 가장 크고 화려 하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꺼예요." 나는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이끌고 그녀가 가르쳐준 방항으로 갔다. "아린, 어쩌게? 그 여관에 묶게? 하지만 다른 데도 방이 없는데 거기라고 있을까?" 세이몬이 걱정 스럽다는 듯이 물어왔다. "혹시 알아?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안 몰렸을 수도 있쟎아?" "글쎄다, 이렇게 큰 행사인데 다른 지역의 부자들이나 귀족들이 한번 쯤 구경하러 왔을지도 모르쟎아?" 류미르가 내 대답에 대꾸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냥 한번 가보는 거야. 방 없으면 말고 있으면 거기 묶고..." 그러나 내 예상이 맞았는 듯 방은 세개나 남아 있었다. 단지 그 방이 엄청난 부자 아니면 못 묶을 정도로 무척이나 비싼 방이었다는 것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흠, 역시 사람은 돈이 있고 봐야 해." 내가 그 많은 돈을 스스럼 없이 떡하니 지불하자 류미르의 눈이 둥그래 졌다. "아린, 넌 도대체 얼마나 부자인거냐?" "엄청난 부자지." 나는 그에게 씨익 웃으며 열쇠를 흔들어 보인 뒤 방을 안내하는 종업원을 따라 우리가 묶을 방으로 올라갔다. "우와, 켈튼에서 묶었던 데 못지 않은데...." 방 안을 한번 휘둘러 본 나는 그 화려하고 우아하게 꾸며진 실내를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여관은 도시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넓은 베란다로 나가면 도시의 정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고 거실은 공놀이를 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한쪽 벽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창문에는 하늘 하늘한 하얀색 실크 커튼이 쳐져 있었고 그 위에 덧붙여 좀 더 두꺼워 보이는 초록색 실크 커튼이 쳐져 있었다. 게다가 거실 바닥에는 푹신 푹신한 카펫트가 깔려 있었고 중앙에 놓인 척 보아도 무지 고급이라는 것을 티내고 있는 우아한 탁자 주위에 앉으면 푹 파뭍히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와 더불어 창가에는 밖을 편안히 앉아서 감상 하라는 듯 안락 의자가 몇개 놓여 있었고 베란다에도 하얀 티 테이블과 그와 잘 어울리는 의자 4개가 있었다. 방은 물론 거실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거의 거실의 절반 크기였다. 방에는 커다란 휘장까지 쳐진 침대가 중앙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탁자와 안락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방에 딸린 욕실에는 세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가 그 당당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와우, 여기서 수영도 할 수 있겠다." 그 욕조를 바라보며 류미르가 감탄했다. "이건 뭐, 켈튼에서 묶었던 여관보다 더 화려한 거 같은걸?" 세이몬이 류미르의 말에 동조하면서 중얼 거렸다. "자, 둘다 그만 정신 차리고 이리좀 와봐." 나는 거실에서 그들을 불렀다. "자, 이거 하나씩 가지고 있어. 잃어버리지 말고." 나는 그들에게 가죽으로 쌓여있는 손바닥 만한 두꺼운 종이 한장씩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세이몬이 그걸 받아 들고는 나에게 물었다. "토너먼트 전 입장표. 그것도 특석이야. 토너먼트 전이 열릴때 부터 끝날 때 까지 사용하는 거니까 잃어버리면 안돼." "특석이라서 그런가? 표도 꽤 고급스럽게 만들었군...." 표를 살펴 보던 류미르가 중얼 거렸다. "이거 어디서 났어?" "어디서 나긴, 샀지. 여기로 안내해준 여관 종업원이 나에게 표를 샀냐고 묻더라고, 아직 안샀다고 하니까 특석 표를 살꺼면 여관에서 구해줄 수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3장 구해 달라고 했지." "이렇게 빨리? 우리가 여기 온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봐, 류미르. 왜냐하면 이런 고급 여관에 묶는 사람들이 대부분 특석표를 살테니까 아예 여관에서 준비해 놓고 있었을껄?" 제 목 [펌/천리안]아린 이야기 18-3 올 린 ID amca 작 성 시 각 2000/9/4 이 름 이상근 조 회 수 417 ┌───────────────────────────────────┐ │ ▶ 번 호 : 12016/12058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3일 22:12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3) │ └───────────────────────────────────┘ "아린 이제부터 우린 뭘 해야 하지?" 우리는 각자 목욕을 하고 짐을 푼 뒤 거실에 다시 모였을 때 류미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후에 이 도시에 도착한데다가 방을 구하러 다니느라 거리에서 몇시간이나 헤맨 뒤 방을 구한 뒤였기에 벌써 한밤중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루종일 돌아 다녔기 때문에 나는 피곤했다. 눈치를 보니 류미르와 세이몬 역시 무척이나 피곤한 모양이었다. "너희 둘 다 피곤해 보이니까 간단히 하고 자자고. 나두 피곤하니까. 우선 우리가 내일부터 해야 할 일은 먼저 신전 안을 잘 파악 해 놔야 해. 그리고 신전 주위의 지리를 익혀 둬야 하지. 그와 더불어 신관들이 어떤 사람들 인지 파악해 놔야해. 그걸 토너먼트전이 열리기 전 까지 끝내야 할 사항이야." "신전 구조와 신전 주위를 살펴 보는건 여신상을 훔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 하는데 왜 신관들이 어떤 사람 들인지 파악해야 하는거야?" 요즘들어 꽤 예리해진 세이몬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자칭 세이몬의 스승인 류미르가 대답했다. "그건말야, 우리가 '의적'이기 때문이야." "의적이랑 여신상 훔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이 있고 말고. 의적은 못된 사람들 것만 훔치는거 몰라? 그러니까 여기 신관들이 모두 신을 섬기는 거룩한 신관들이라면 그냥 관광이나 잘 하고 가는거고 만약 신관들이 타락해서 돈만 밝히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여신상을 슬쩍 하는거지." "슬쩍이라니? 이왕이면 악한 사람들 뒤통수를 한 방 날리는 거라고 해." 나도 류미르의 말 뒤에 한마디 덧붙였다. "자, 그럼 우선 너희들이 할 일을 알겠지? 어짜피 오늘 신나게 돌아 다녀서 대충 지리를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좀 더 자세히 알아 놔야 해. 이왕이면 신전에서 성문까지 이어진 길까지말야. 그럼 오늘은 이만 자자고." 나는 늘어지게 하품에 기지개까지 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묶고 있는 방은 크기는 무척이나 컸는데 침실이 하나였고 게다가 침대도 하나였다. 그래서 침대는 당연히 내가 차지했고 류미르와 세이몬은 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다가 침낭을 깔고 거기서 자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호사스러운 아침을 먹고는 여관 밖으로 나왔다. 축제 전이라서 그런지 아침인데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 "우선은 신전에 먼저 가보자구."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이끌고 신전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이곳은 도시 중앙에 공원 비슷한 커다란 광장이 있고 거기서 부터 커다란 4개의 도로가 쭉 뻗어 있는데 하나는 시청으로 가는 길이었고 하나는 신전으로 가는길, 또 하나는 매년 토너먼트전이 열리고 그밖에 자잘한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이,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성문으로 쭉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곳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에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두개였는데 하나는 우리가 들어온, 보통때 항상 열어놓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하는 정문이 있고 또 하나는 시청 뒷편에 있는 문이었는데 후문이라고 해서 정문보다는 작고 평소에 열어놓지 않는 문이라고 했다. "이거야 원, 도망가기 힘들게 생겼쟎아?" 내가 펼쳐든 라크네 도시의 지도를 바라보며 류미르가 중얼거렸다. 그런 류미르를 흘낏 보면서 세이몬이 물었다. "왜?" "이것좀 봐봐, 여기 신전에서 만약 여신상을 훔친다고 하면은 우선은 성문 밖으로 도망쳐야 하지 않아? 그런데 이곳은 성문이 하나밖에 없쟎아. 무슨 일이 생기면 금방 수색이 강화 될꺼야. 만약 수색이 강화되기 전에 성 밖으로 나갈려고 해도 신전에서 성문으로 가려면 이 광장을 거쳐야 하는데..." "광장에서는 시청에서 출동한 경비대와 마주칠 수 있고 또 그 사이에 성문은 닫힐거란 말이지?" 나는 류미르의 말을 끝맺어 주었다. "맞았어." "하지만 말야 성문을 날아서 넘어간다면?" 세이몬이 류미르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것도 쉽지만은 않을꺼야. 왜냐하면 우리들이 마법을 쓰고 경비병들이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신관들이 있쟎아. 그들이 여신상을 훔친 자들을 가만 두겠어? 최선을 다해 막을껄?" 이번엔 내가 설명했다. "여신상을 훔칠때는 들키지 않게 훔쳐야 하지만 여신상이 신전의 중앙방으로 들어갈 때 까지는 항상 2명 이상의 성기사나 신관들이 지키고 있으니 들키지 않게 훔쳐가는건 불가능 하다고 봐." 류미르도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있지, 그 신전의 중앙방에 걸려있는 신성마법이 그렇게 강해? 우리가 뚫을수는 없을까?" 세이몬이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말을 꺼냈다. "글쎄, 솔직히 말하면 난 신성마법을 한번도 대해본 적이 없거든....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지키는 방이고 아직 한명도 성공 못한 걸 보면은 무지 강력한것 만은 확실하겠지?" 나는 정말 한번도 신성 마법을 직접 격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 없게 대답했다. "그럼 신전을 탐색할 때 그 방도 같이 알아보는건 어때?" 세이몬의 제안이었다. "가능하면.....그 방까지 가는게 쉽다면 말이야." "아린, 왜 너답지 않게 그렇게 자신이 없어?" 내 대답이 시원치 않자 류미르가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그 신성 마법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또 그 신성 마법을 깰 수 있어도 그 마법도 꽤 강력 할테니까 그 마법을 깰때 신전도 같이 무너뜨릴수 있지 않을 까 싶어서. 만약 그렇다면 여신상은 둘째치고 사람들도 꽤 많이 다칠꺼 아냐?" "네가 왠일로 그런 세세한것 까지 염려하냐? 넌 무조건 벌이고 보는 성미 아니었어?" "류~미~르~으으? 남은 심각한데 꼭 그렇게 말해야 겠어?" "하하하하, 아니 네가 너무 심각하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할 것 없쟎아? 아직 그 방에 걸린 신성 마법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렇게 고민하는 것 보다 다 파악하고 나서 고민하는게 어때?" 나는 갑자기 말 문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그냥 류미르를 빤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어이? 아린? 왜그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네가 너무 옳은 말을 해서 내가 무척 놀랐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벌써부터 이렇게 고민해 봤자 소용이 없겠지? 나도 참 한심해 졌다니까... 세이몬의 말대로 신전에 가면 그 여신상을 모셔놓는 방 까지 조사해 보자구." 나는 펼쳐 놓았던 지도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섰다. "자, 가보자구." 신전은 멀리 있어도 금방 눈에 띄었다. 신전 전체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게다가 신전 주위에는 신전만큼 커다란 건물이 없었다. 거기에다 신전 주위의 약 100m 에는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신전 홀로 떡 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위가 온통 잔디와 키작은 화초들로 꾸며져 있었기에 (특히 데이지 꽃이 많았다.) 신전과 무척 잘 어울려서 고대 그리스 신전이 저렇게 아름다웠을까 싶었다. '하긴, 여긴 그리스 신전이란게 없겠군....' 제 목 [펌/천리안]아린 이야기 18-4 올 린 ID amca 작 성 시 각 2000/9/5 이 름 이상근 조 회 수 219 ┌───────────────────────────────────┐ │ ▶ 번 호 : 12105/12106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5일 21:59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4) │ └───────────────────────────────────┘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정신이 없다보니 제목 번호를 잘 못 썼네요. 멜을 받고서야 알았어요. 그래서 다시 올립니다. 헷갈리신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 신전 앞에는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끼리 온 사람도 있었고, 연인들도 보였고 중년 부인들이나 노인 분들도 꽤나 많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저마다 손에 데이지 꽃을 들고 있었다. "아린, 우리도 데이지 꽃을 살까?" 류미르도 우리만 데이지 꽃을 가지고 있지 않은걸 알아 차렸는지 나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그래야 겠지? 물론 참배를 하러 온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의상...."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나는 근처에서 바구니에 꽃을 가득 담아들고 파는 소녀를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엘리어드 여신의 은총이 있으시길... 데이지 꽃 사시겠어요? 한 묶음에 5셀씩입니다." 그 소녀는 내가 다가가자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세 묶음만 주겠어요?" "여신님께 바치실꺼죠?" 소녀가 나에게 꽃 세 묶음을 건내 주면서 물었다. "하하하, 물론이죠. 그런데 여긴 보통 사람이 저렇게 많아요?" "축제가 다가오는 시기에는 저렇게 사람들이 많아요. 축제때는 더 많고요. 하지만 평소에도 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참배하러 오신 분들이 꽤 많지요." "저 신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나요?" 옆에서 류미르가 물었다. "당연하지요. 엘리어드 여신은 사랑과 평화의 여신인걸요. 여신님께 참배하러 온 사람은 누구나 환영해요." 그녀는 당연한걸 묻는 다는 듯 류미르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자, 여기 15셀이요." 나는 그 소녀가 류미르를 더욱 이상하게 보기 전에 재빨리 그녀에게 돈을 지불하고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이끌고 신전쪽으로 갔다. "야, 이 멍청아. 그런걸 물어보면 어쩌냐? 널 이상하게 볼꺼 아냐?" 나는 빠른 걸음으로 신전을 향해 가면서 류미르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어쩌냐? 우린 신전에 대해 잘 모르쟎아?" 내 핀잔을 들은 류미르는 부루퉁 해져서 퉁명하게 대꾸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말도 몰라? 그냥 딴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되쟎아?" "그래, 미안하다. 괜한걸 물어서." "근데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따라서 해야 하는데?" 가만히 우리가 하는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몬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거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면 이상하게 보니까 그렇지." 나는 세이몬의 물음에 대꾸해 주면서 그에게 꽃 한 묶음을 건냈다. "자, 이거 가지고 있어." 그리고 류미르에게도 하나 건냈다. "류미르, 너도." "흥." 류미르는 아직도 화가 났는지 건내는 꽃 묶음을 거칠게 가져갔다. 신전 입구에서는 하얀 신관복을 입은 젊은 사제 2명이 일일이 신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엘리어드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우리도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뒤따라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입구에 서 있던 신관 중 한명이 나를 불렀다. "거기, 붉은 머리를 가지신 신도님, 잠깐만요." "저요?" "예, 잠시만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의아해진 나는 그가 부르는 쪽으로 갔고 그런 내 뒤를 류미르와 세이몬이 따라왔다. "신전에는 처음 오시는 것 같은데..." 그가 나에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신전 안에는 무기를 들고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답니다. 그러니 그 검은 제게 맡겨놓고 가시겠습니까? 신전을 나오실때 돌려 드리지요." 그러자 뒤에서 류미르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검을 풀러서 그에게 건내 주었다.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여러분께 엘리어드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그는 내 검을 받아 들더니 빙그레 미소 짓고는 인사를 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서는 류미르가 계속 킥킥대고 웃었다. "그만좀 해라. 넌 그게 그렇게 좋냐?" "킥킥킥,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며?" "시끄러,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는게 금지 된지는 몰랐단 말야. 야, 류미르. 그러고보니 너도 무기를 가지고 있쟎아?" "아, 나야 눈에 안띄니까 몰랐나보지." 그러고보니 나만 걸릴만도 했다. 세이몬은 아예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고 류미르는 몇개의 단검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걸 교묘하게 몸에 숨겨놓고 있었기 때문에 겉에서 보면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니 나 혼자만 옆에다 검을 떡 하니 차고 왔으니 걸릴 수 밖에.... "그런데 말야. 영웅 소설에서 보면 신관들은 마족을 알아챌 수 있다고 하던데 아까 그 신관들은 세이몬을 알아보지 못하네?" 류미르가 웃기를 그치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건말야. 내가 내 마력을 감추고 있어서 그래. 마계에 있을 때도 나한테 쨉도 안되는 것들이 내가 마력을 감추고 있으면 우습게 보고 덤벼 들었거든..." "그런가? 하지만 거긴 마계라서 다 기운이 비슷할 수도 있쟎아? 근데 여기는 신전이쟎아." 류미르는 계속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건말야. 가능성이 두가지가 있지. 첫째는 아까 그 신관들은 신력이 너무 낮은 자들이라서 못알아 보는 경우, 둘째는 세이몬이 기운을 감추는 능력이 뛰어나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경우 말야. 그런데 난 두번째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류미르 너하고 나하고 세이몬을 처음 만났을 때도 세이몬의 기운이 어둡다는 것을 못 알아챘쟎아?" "하지만 세이몬을 만났을 당시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못 알아 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흠, 그렇기도 하네. 하지만 말야, 지금도 그다지 세이몬의 어두운 기운을 느끼지는 못하겠어. 전에 세이몬이 납치 되었을 때 난리칠때는 잘 느꼈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걸?" "맞아. 아마 거의 못느낄꺼야. 난 정말 기운을 거의 완벽하게 감출 수 있거든.... 이래뵈도 난 고위 마족중의 하나인 아벨리아족이라구." "물론 네가 고위 마족이긴 하지만 거기서 모자란 놈이쟎아?" "너무 말이 심하다 류미르. 세이몬이 좀 소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는 않다구." "맞아. 류미르는 너무해." "아, 미안.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째든 난 조심하자는 말이었다구." "그래 그래, 세이몬 만약 고위 신관 같은 사람이 너보고 '마족이다!' 그러면 무조건 도망치고 봐. 뒤는 나랑 류미르가 봐줄테니. 그리고 계속 조심하는거 잊지 말고. 알았지?" "그래, 알았어." ┌───────────────────────────────────┐ │ ▶ 번 호 : 12078/12078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7일 21:52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5) │ └───────────────────────────────────┘ 앞으로 쭉 뻗은 복도를 따라 가다보니 어느새 제단이 있는 방에 다 다랐다. 그 방은 무척이나 넓고 천장이 높았는데 제단의 위쪽 정 중앙에는 보통 사람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여신이 자애로운 미소를 띄우고 자신에게 경배하는 신도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천장은 거의 대부분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구조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천장의 유리를 통해서 들어온 빛은 방 안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모아져서 오직 여신만을 비추었다. 더욱이 여신의 몸에는 자잘한 유리가 박혀 있어서 햇빛을 반사하여 마치 여신의 몸 주위에서 찬란한 오색 광채가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새하얀 탁보로 덮어씌여진 길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고 여신상을 가리지 않게 양쪽 끝에는 5개의 초를 꽂을 수 있는 커다란 황금 촛대가 놓여 있었고 그 곳에는 아직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 듯 보이는 어른 팔뚝 굵기의 새 초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그 촛대는 가운데 쪽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높아져 마치 여신을 찬양하는 것 처럼 보였다. 제단 밑에는 신도들이 바친 듯한 데이지 꽃들이 쌓여 있었고 그 뒤로 신도들이 정성껏 여신께 절하기도 하고 기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간간히 같이 절을 하거나 기도하는 신관들도 보였다. 우리가 지나온 복도는 한쪽은 벽인데 한쪽은 아치형을 이루는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기둥들 사이로는 복도 옆쪽에 있는 작은 정원이 보이는데 그 정원 가운데에는 물 항아리를 어깨에 들고 있는 여인의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는 분수가 있었고 그 주위에 여러개의 벤치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여러명의 신관들과 신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정원 너머에 다시 우리가 서 있는 곳 같은 복도가 보였다. "저쪽에는 뭐가 있을 것 같아?" 내가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나의 시선을 쫓아온 류미르가 물었다. "글쎄.... 나도 신전을 처음 온거라서 구조를 잘 모르겠어." "저 쪽은 신관들의 숙소와 식당, 그리고 도서관 등이 있답니다." 우리는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 보았다. 거기에는 한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 젊은 사제가 우리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께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아, 예. 감사합니다." 우리는 순간 당황하면서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격이랄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류미르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세이몬과 나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제가 여러분을 놀라게 해드린것 같군요?" 그 사제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럼 뒤에서 갑자기 말하는데 안 놀라냐?' "아하하하, 예. 약간 놀랐습니다." 내 눈치가 별로 안 좋았는지 류미르가 나를 한번 흘낏 보더니 내가 말하기도 전에 미리 자신이 나서서 대답했다. "여기 사제이신가보죠?" "아, 저도 여기온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그래서 아는 신도님이 별로 없어서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쓸쓸했는데, 여러분을 발견 했지요?" 류미르 왈... "그러세요." 내가 말하길........ "저흴요?" 세이몬은 ......... "오늘 같은 날?" 우리 셋은 동시에 말했고 그런 우리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그 사제가 대답했다. "예, 여기 이 신전으로 온지 1달 밖에 되질 않아서요. 그래서 오늘같이 축제가 가까워지면서 신도님들이 신전을 찾으실 때 다른 신관들은 서로 안면이 있는 신도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느라 바쁘신데, 전 아직 그런 신도님이 없어서 혼자 있던 참에 여러분들을 보게 된거지요. 여러분들도 이 곳에 처음 오셨지요?" "아, 그러셨군요. 저희도 이 신전의 명성을 듣고 찾아 왔지만 처음 찾아 온데다가 안면이 있으신 신관님도 없어서 좀 어색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희에게 신경을 써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오우, 역시 달변인 류미르였다. "이것도 다 엘리어드 여신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우선 서로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엘리어드 여신을 모시고 있는 종 얀스크라고 합니다." "얀스크? 성은 없나요?" 이름만 대고 성은 대지 않자 내가 불쑥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보면서 빙그레 웃더니... "엘리어드 여신의 종에게는 성이 따로 없답니다. 사제로써의 맹세를 하면서 부터 자신의 성을 지워 버리지요. 세상에서는 성을 갖고 있는 것고 갖고 있지 않는것이 신분의 고하를 나타내지만 사제들 에게는 신분이란 필요치 않은 거니까요." "아 그렇군요..." 나는 얼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며 말을 얼버무렸다. "죄송합니다. 동생이 철없는 걸 물어서....저희 세명은 모두 형제랍니다. 제가 첫째인 류미르이고 이 철없는 녀석이 둘째인 아힌, 그리고 저기 검은 머리 녀석이 막내인 세이몬 이라고 하지요." "아, 그러셨군요. 형제분 모두가 다 외모가 뛰어나신데요? 부럽습니다." "하하하, 아니 뭘요. 그러시는 신관님이야 말로 정말 뛰어나신 미모이신데요." 류미르가 쑥쓰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저것도 다 연출이다.) 말했다. 류미르의 말대로 그 신관은 정말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 생겼다는 말을 들을 만 했다. 우선 얼굴선이 고왔고 피부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푸른 눈은 크고 시원해 보였다. 그리고 무척이나 맑고 투명했다. 저게 바로 신관이 지니고 있는 눈인가 싶었다. 게다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의 머리카락도 윤기가 흘러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였다. "아, 그런데 벌써 경배 드리신 겁니까? 응? 아니 아직 데이지 꽃을 가지고 계신 걸 보니까 아직 안드렸군요." "아, 예. 사람이 많아서 방으로 들어 갈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역시 류미르. 뭐라고 대답 해야 할지 나는 고민하고 있었는데 류미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술술 잘만 대답하는 거였다. "하긴 그렇겠군요. 저렇게 사람들이 많아서야.... 이거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얀스크 신관이 방 안에서 여신상을 향해 절하는 사람들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그런가요? 그럼 신관님, 괜찮으시다면 저희에게 신전 구경좀 시켜 주시겠어요? 신전에 대한 소문에는 겉에서 볼때도 무척이나 크고 아름답지만 안도 만만치 않다고 하던걸요?" 나는 재빨리 그에게 신전 안내를 부탁했다. 그러자 류미르가 '대단해'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여러분을 만난 기념으로 제가 잘 안내해 드리죠."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아 복도 바로 옆에 있던 작은 정원을 지나 그 반대편으로 보이던 복도에 들어갔다. 그는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신전의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이 신전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층은 여러분들께서 보신 여신상이 모셔져 있는 방과, 그 뒤쪽에 있는 개인 기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에는 식당과 주방, 그리고 견습 신관들의 숙소가 있지요." "이 신전에는 신관이 몇명 정도 계십니까?" 류미르가 물었다. 하긴 우리가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으려면 꼭 알아야 할 정보이지. "이곳에는 고위 신관께서 10명이 계십니다. 그 중 이 신전을 대표하시는 장로님이 5분이 계시고 장로장님이 계시지요. 그리고 평신관이 40명, 순례를 떠나신 신관님이 10명, 그리고 수련 신관이 40명 있습니다." "1층에 수련 신관님들의 숙소가 있으니 평신관님과 고위 신관님들의 숙소는 2층에 있겠군요." "맞습니다. 아힌님. 나머지 분들의 숙소는 2층에 있지요. 그리고 3층이 바로 도서관과 장로장실이 있습니다." "그럼 지하에는 무엇이 있나요?" 이번에는 세이몬이 물었다. "지하에는 자료실과 성물 보관실, 그리고 창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으셨다니요? 한번도 가보질 않으셨습니까?" "하하하, 류미르님께선 날카로우신 데가 있군요. 맞습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지하에는 그 곳에서 일하시는 신관님들과 장로님들 외엔 출입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아, 그렇다면 그 유명한 여신상도 그곳에 있겠군요." 세이몬이 손바닥을 딱 쳤다. "맞습니다. 지하에 있는 성물 보관실에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얀스크 신관의 안내로 신전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모두 신도들을 맞고 있어서인지 가끔 청소하는 수련 신관들만 눈에 뜨일 뿐 신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당에도 식사 시간이 아닌 지라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둘러 본 곳은 중요한 곳이 아니어서인지 경비가 무척 허술했다. 하긴 중요한 것은 모두 다 지하에 있으니 그렇겠지만... 신전 이곳 저곳을 다 구경한뒤 나는 신전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하여 얀스크 신관을 우리가 묶고 있는 여관으로 초대하였다. 그는 우리가 묶고 있다는 여관을 듣고는 한번 가보고 싶은 여관이었다면서 기꺼이 초대에 응하였다. 그래서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나는 대충 여신에게 절 하는 시늉만 하고 꽃을 바친 뒤 얀스크 신관과 신전을 나왔다. 나오는 길에 입구에 있는 신관에게 내 레이피어를 찾는 걸 잊지 않았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그걸 보고는 다시 킥킥 거렸고 덕분에 난 다시 얼굴이 뜨거워 졌다. "그만 웃어. 아까 웃었으면 됐지 왜 또 웃는거야?" 그러자 얀스크 신관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기사이신가 보군요?" "아뇨. 아직 정식 기사는 아니고 지금 수련하고 있는 중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임명 되겠지요. (별로 하고싶지는 않지만....)" "꼭 훌륭한 기사가 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얀스크 신관이 전에 있던 신전 이야기라든지 신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 하면서 여관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해가 중천에 떠 올라 있어서 거리에는 한창 사람들로 붐며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광장에 다 다랐을 때였다. 광장 한쪽 구석에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웅성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쯧쯧쯧, 또 시작이군." "저러다가 애 죽이겠어." "어쩌겠어, 그게 저 애의 운명인걸..." 어쩌다가 그 무리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일이야?" 세이몬이 먼저 그쪽으로 다가갔다. (세이몬은 구경거리를 무척 좋아한다) "우리도 한번 가보지요. 무슨 일인가..." 세이몬이 뛰어 가는걸 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류미르가 얀시크 신관과 나를 돌아 보면서 말했다. 신관과 나는 류미르에게 그러자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세이몬이 먼저 사람들을 밀치면서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 갈수록 이상한 음향이 들려왔다. 퍽, 퍽퍽, 퍼억~. '잉? 이건 내가 몬스터들을 팰때 듣던 소리랑 비슷한데?' 사람들 앞으로 나섰을 때 상황을 알 수가 있었는데 어떤 20살이 될까 말까해 보이는 사람이 길거리에 엎드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는 다른 사람을 열심히 때리고 있었다. 때리는 사람은 무척 뚱뚱해서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면서 저렇게 뚱뚱해 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맹렬하게 쉼 없이 때리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이 무척 고급스런 옷인걸로 보아 권력자 집안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집 아들인 것 같았다. 하긴 그 뚱뚱한 녀석 뒤에 떡 버티고 서서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눈을 부라리고 서 있는 두명의 사병 같아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확실히 권력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엘시온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얀스크 신관은 그 모습을 보자 마자 때리고 있는 뚱뚱한 녀석에게 달려가며 물었다. 얀스크 신관이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것을 본 그 엘시온이란 녀석은 그제서야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 "아, 신전에 오신지 얼마 안되는 신관이시로군." ┌───┬───┬───┬───┬───┬───┐ │ C A │ R R │ O T │ └───┴───┴───┴───┴───┴───┘ 번 호 : 12118 / 12148 등록일 : 2000년 09월 08일 22:07 등록자 : LODEMP 조 회 : 37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6) 하아, 글이 적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담부턴 열심히 올리겠습니다. --------------------------------------------------- 그는 얀스크에게 인사도 안하고는 자신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로 한번 더 차주고 얀스크를 지나쳐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그가 얀스크를 스쳐 지나가면서 작게 속삭인 말이 얀스크 옆에 서 있던 나에게 까지 들려왔다. "쓸데 없는 일에 참견하면 오래 살지 못하지..." 세이몬과 류미르도 그 말을 들었는지 약간 흠칫 했지만 얀스크 신관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땅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엘시온과 그의 뒤에 바짝 따르고 있는 두 명의 사병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비켜서서 그들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 녀석이 하는 말을 들은데다 거드름을 피우면서 걸어가는 것이 보기 싫었던 나는 그가 가는 길 앞쪽을 향하여 살짝 아무도 모르게 마법을 걸었다. "....." 그러자 그 엘시온은 자신의 바로 앞이 나의 마법에 의하여 미끄럽게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채 발을 내디디다가 발라당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의 뒤를 바짝 따르던 사병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m를 쭉 미끄러져 가자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크게 대놓고 웃지는 못해도 서로 얼굴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그러자 엘시온은 벌떡 일어나더니 얼굴이 시뻘개져서 소리쳤다. "누구냐? 이런 짓을 한 놈이?" 그러나 그 범인이 나설 리가 만무했다. 그의 능력으로는 범인을 찾을 수가 없자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협박을 하고는 씩씩 대며 뒤를 돌아 다시 자기가 가던 길을 갔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 엘시온 디로히스를 건드린건 실수한거야. 꼭 찾아내서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해주겠어!" "안 찾는게 나아. 찾는 날이 네 제삿날일껄?" 류미르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그의 시선을 피해 얀스크 신관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지금 땅에 무릎을 꿇고 아까 땅에 쓰러져 있던 사람을 똑바로 눕히고 신성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부터 흘러 나오는 연한 푸른색의 빛이 누워 있는 사람의 온 몸을 덮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이몬은 재빨리 나에게 먼저 여관으로 가 있겠다는 눈짓을 하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래도 세이몬은 마족이다 보니 신성 마법의 영향이 좋지는 않을 것이었다. 잠시 후 누워 있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면서 일어났다. 그는 15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 이었는데 키가 나보다 약간 작은데 비해 비쩍 말라 있었다. 그 아이는 얀스크 신관을 보자마자 웅얼 거리 듯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아이가 눈에 안 보일 때까지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얀스크 신관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몸을 돌려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기다리시게 했군요. 어? 그런데 한 분은 어디 가셨죠?"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사과를 하다가 세이몬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우리에게 의문을 표시했다. "아, 그는 화장실이 급하다면서 먼저 여관으로 갔어요." 나보다도 먼저 류미르가 대답했다. '역시, 이런데는 능숙 하다니까...' "그런데 저 아이와 잘 아시는 사이인가 보군요?" 류미르가 화제를 돌리면서 물었다. "아, 예. 잘 안다기 보다는 그 아이가 누군지 정도 아는 것 뿐입니다. 그 아이는 저를 그냥 신관으로만 알고 있겠지요." 그는 왠지 쓸쓸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흠,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물어도 될까요?" 그 기색을 느꼈는지 류미르가 물었다. "아, 그 아이에 대해서는 아마 이 근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다 아실 겁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시브로 라고 하는데 디로히스 집안의 하인 입니다." "디로히스요?" 아까 그 엘시온이란 녀석이 외칠때 자신을 엘시온 디로히스라고 말한 것이 생각이 난 나는 되물었다. "예. 디로히스 가(家)는 이 라크네 도시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상가 집안 이지요. 그리고 아까 그 소년 엘시온은 그 집안의 둘째 아들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도 말리지 못했군요. 그 집안의 하인이 그 집안의 아들이 때리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너무 심하게 때리던데..." 류미르가 중얼 거렸다. "제가 듣기로 시브로는 고아라고 하더군요. 시브로의 어머니가 그 아이를 임신 한 채로 그 집안의 하녀로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시브로가 5살 때 돌아가셨다더군요. 그러니 의지할 데 없는 그 아이는 계속 그 집안에서 일을 했답니다." "어? 그 시브로란 애의 아버지는요?" 나는 그 대답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아마 얀스크 신관의 입으로 직접 들어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 맘을 알고 있다는 듯이 얀스크 신관은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어 주고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시브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래서 시브로의 어머니가 홀 몸도 아닌데 그 집의 하녀로 들어간거겠지요." ┌───────────────────────────────────┐ │ ▶ 번 호 : 12329/12342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15일 22:16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7) │ └───────────────────────────────────┘ 안녕하세요? 에휴, 이렇게 사과문을 올릴 일을 자꾸 만들면 안돼는데 말예요... 글 늦게 올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드가 갑자기 나가는 바람에 여태까지 제가 썼던 글을 다 날려 버렸지 뭐예요? 추석때는 일을 안한다고 해서 오늘에서야 컴을 고쳐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하드를 갈아 끼우는 바람에 여태까지 다운 받았던 소설이랑 애니 동영상 모두가 날라가 버렸다는 사실 ㅠ.ㅠ 여러분들은 너무 하드만 믿다가 제 꼴 나지 마시길 바래요. 저도 이제부터 몽땅 시디에 저장하기로 했답니다. ========================================================================== ====== ==== "그럼 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군요. 운명치곤 참 가여운데요..." 류미르는 다시 한번 그 소년이 사라진 곳을 흘낏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얀스크 신관의 표정도 영 말이 아니었다. 그도 류미르 못지 않게 슬픈 표정으로 묵묵히 땅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도 안하고 걷기만 해서 여관에 도착했다. 여관에 먼저 와 있던 세이몬은 우리의 표정을 보고는 어리둥절 해 했지만 분위기가 안 좋았는지 물어보지는 않고 가만히 있었다. 결국 우리는 주문한 음식이 방에 배달되어 식탁에 차려 질 때까지 대화 없이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아이가 가여워서 그러세요?" 결국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내가 뭔가 말을 해서 이 분위기를 타파 해야 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어렵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예? 아하, 제가 분위기를 너무 어둡게 만들어 버렸군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너무 슬퍼하시는 표정이라서 오히려 신관님이 걱정 되시는 군요." 류미르는 나에게 눈치를 팍팍 주면서 대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뭘? 그럼 계속 이 상태로 있자는 거야? 음식이 다 식겠단 말야!' 라는 메세지를 담은 강렬한 눈빛을 그에게 팍팍 쏘아 보냈다. "음식이 식겠어요. 어서 먹지요?" 그때까지 음식을 눈 앞에 두고서도 분위기 때문에 함부로 먹지 못하고 눈치만 보면서 침을 삼키던 세이몬이 이때다 했는지 먼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얀스크 신관도 미안했는지 얼굴에 미소를 띄워 분위기를 붇돋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신관님. 제 동생들이 너무 철이 없어서요..." 류미르는 나와 세이몬의 살기어린 눈빛을 모르는 체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 아일 걱정 하시는 맘 저도 조금은 알 것 같군요. 저도 예전에 그런 아이를 본 적이 있었거든요." "하아, 걱정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하지만 저도 정말 죄송하군요. 저때문에 여러분이 편치 못하신 것 같아서요." "괴아나요, 거저마으요.(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세이모온~, 왠만하면 다 먹고 말하지 그러니?" 류미르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아, 미안. 괜찮아요 신관님." "하하하, 그러시다니 다행이군요." 신관은 류미르가 다시 세이몬에게 뭐라 말하려는 걸 눈치 채고는 먼저 말을 해서 류미르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천장을 보면서 뭔가를 생각 하는 듯 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류미르를 바라 보았다. 아마도 우리들 중 류미르와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 한 모양이었다. '흠, 우리가 그렇게 철딱서니 없게 행동했나? 하지만 배고픈걸 어떻게해?' "류미르님, 전 그 아이를 걱정한게 아닙니다. 물론 그 아이를 동정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제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 이십니까?" "후우~, 저는 사랑과 평화의 여신을 모시고 있는 사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보고서도 두려워서 그를 위하여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제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럽습니다. 평생을 여신의 사랑을 베풀고 평화를 전하며 살겠다고 맹세하였으면서 그 아이에게는 그러질 못하고 있는 제가 너무나도 밉군요..." 신관은 식탁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그 아이를 돕지 못하는..." "사연이라고 할 것 까진 없습니다. 아, 이런. 제가 너무 쓸데 없는 말을 주절대었군요." 그는 자신이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른 고개를 들어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띄었다. 그러자 그런 그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류미르가 천천히 말했다. "신관님, 저희는 이번에 이 도시에 처음 왔고 축제가 끝나면 이 도시를 떠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은 이 도시로 돌아오지 않겠지요. 그런 지나가는 바람에게 당신의 근심을 실어 보내는 건 어떨까요? 비록 바람이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 놓으면 당신은 조금이라도 편안해 지지 않을까요?" 오, 세상에 류미르가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이건 정말 놀랄 '노'자군... 얀스크 신관은 그런 류미르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류미르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어느 순간에 신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류미르님. 당신은 마음이 무척 넓으시군요. 부디 제 고민이 당신의 마음에 무거운 짐을 던져 넣는게 아니길 빌겠습니다. 하하, 이런 이런. 신도들의 고민을 들어 주어야 할 제가 오히려 고민을 털어 놓게 되다니..."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더니 다시 슬픈 눈빛이 되어 류미르를 바라 보았다. "몇달 전이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신전에 온지 일주일이 되던 때였지요..." 그렇게 시작하는 그의 말은 이러했다. 축제가 몇달 앞으로 다가온 때였기에 신전에서는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을때 토너먼트전 일을 상의하러 현 디로히스가의 주인이자 아까 그 엘시온이란 녀석의 아버지가 신전을 방문 했는데 그와 함께 엘시온도 왔었단다. 엘시온의 아버지가 장로장과 의논하러 장로장 안으로 들어 간 사이 신전의 정원에 있던 엘시온이 뭔진 모르겠지만 기분이 언짢아 졌는지 같이 왔던 그 시브로란 아이를 두들겨 패는 거였다. 그런데 신전 한 가운데에서 그 아이를 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걸 말리지 않고 모른체 하고는 그냥 지나가더란다. 이 대목을 말하는 그는 얼굴이 약간 붉어 지면서 류미르를 쳐다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그의 목소리가 약간이나마 잠긴 듯 했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때 거길 지나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냥 모른체 하는 걸 이상하게 여길 새도 없이 뛰어가서 그를 말렸다는 거였다. 그것도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냐면서 엘시온이란 녀석을 엄하게 꾸짓었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런 꾸지람을 들은 엘시온이란 녀석은 전혀 반성하는 기미도 없이 이건 뭐냐는 듯 무시하고는 다시 그 아이를 때리더란다. 당황한 그가 엘시온이란 녀석을 붙잡느라고 약간의 소동이 일어났고 그 소동을 보고 달려온 사제들은 자신과 같이 엘시온이란 녀석을 말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말리고 자신의 방으로 밀어 넣더라는 거다. 방 안에 거의 강제로 감금되다 시피 있던 그를 나중에 장로중 한명이 부르더니 다시는 엘시온이란 녀석과 관계된 일에는 상관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더란다. 그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항의 하려고 했지만 워낙에 엄하게 그를 바라보는 장로의 눈초리에 주눅이 들어서 그냥 거길 빠져 나왔다고 했다. 나중에 선배 사제 한명이 슬쩍 말해주길 엘시온의 아버지는 이 신전의 재정 절반의 돈을 매달 기부하고 있으며 토너먼트 전의 전 권을 위임받고 있느니 만큼 이 도시에서의 세력권 중의 으뜸이며 장로장과의 사이가 각별하다면서 그를 건드리면 피곤해 질꺼라고 충고까지 해주었다고 했다. "하아, 그런 말을 듣고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제 자신이나 디로히스 가주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신전에 계신 모든 분들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지요. 이런 모습으로 있다간 어쩌면 우리는 여신님을 모시고 있는 신분 마저도 망각하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벌써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연재] 아린 이야기 - 18화 (8) 류미르는 그 말을 듣고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긴 이 문제는 신전 자체의 문제, 우리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성질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얀스크 신관은 우리의 점심 초대를 받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물 한모금 안 마시고 우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자 마자 류미르는 내 손을 강하게 부여 잡더니 비장하게 외쳤다. "아린, 우리 그 여신상 훔치자!!" "당연한거 아냐?" 옆에서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세이몬의 엉뚱한 말을 무시한 채로 류미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 여신상을 훔치면 성기사 토너먼트전도 할 필요가 없어지겠지? 그럼 신전 쪽에서는 디로히스 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지쟎아?" "류미르, 넌 한가지 간과한 게 있어. 디로히스 가에서는 토너먼트전 말고도 신전의 재정 절반에 가까운 돈을 기부하고 있다는 걸 잊었어?" "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여신상을 훔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건가?" 류미르는 금새 풀이 죽어서 내 손을 놓고는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여신상을 훔치면 우선 신전 쪽에서나 디로히스 가 쪽에서나 재정상, 그리고 명예상 큰 타격을 입겠지. 그럼 좀 자중하지 않을까? '이건 여신의 뜻이야, 정신차리자.' 하고 말야." 그러자 류미르의 얼굴은 금새 밝아졌다. "그렇겠지?" 우리 둘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직 상황 파악이 잘 되질 않고 있던 세이몬이 소리쳤다. "둘이 기분 좋은건 알겠는데 이제 나에게도 설명을 해주지 그래? 나도 좀 알자구!" "별거 아냐, 우리는 원래 신전의 사람들이 착하고 정직하다면 여신상을 훔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얀스크 신관의 말을 들어보니까 그 신전의 장로장이 돈만 밝히는 나쁜 사람이라쟎아. 그래서 그 여신상을 훔치기로 결정 한거야." 류미르가 세이몬을 보는 눈초리가 꼭 한 마디 할 것만 같아서 나는 류미르가 말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서 세이몬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난 또 뭐라고. 결국 그 여신상을 훔치는 거쟎아? 그걸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거야?" 세이몬이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말하자 류미르가 열받아서 또 한 마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난 지금 배도 부르고 몸도 노곤하고 해서 그들의 말싸움을 보고 싶지 않았다. "둘 다 그만하자고. 어짜피 결정 난거 이제부터 제대로 준비 해야지. 오늘 아직 이곳 지리를 익히지 못했쟎아. 조금 쉬고 또 나가보자구." 그러자 류미르는 뭔가 생각이 난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말야, 아린. 너 그애 어떻게 할꺼야?" 내 방으로 가서 한잠 자려고 했던 나는 류미르가 부르는 소리에 발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누구?" "왜 아까 그 얻어맞고 있던 애 말야." "갤 왜?" "왜라니? 안도와 줄꺼야?" "갤 왜도와? 그애 일은 그애가 알아서 해야 하는거 아냐?"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이몬이 한마디 했다. 그러자 류미르가 세이몬을 노려 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매정하게 하냐? 그앤 아직 성인이 안된 애라구. 누군가가 그 애를 도와줘야 하는거 아냐?" "미안하지만 류미르, 나도 세이몬과 동감이야." "아린!" 류미르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꼭 '부르터스 너마저...'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이건 매정한게 아니라 이성적인 거라고 생각해. 류미르 넌 너무 감정적이란 생각 안드니?" "하, 아린 지금 네가 이성적이라고 말했니? 평소에 열받으면 앞 뒤 가리지 않는게 누구였더라?" 류미르는 이제 무척 화가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이 이럴줄은 몰랐어." "그럼 류미르, 넌 그 애에 대해서 뭘 알고 있고, 어떻게 도와주려고 하는데?"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차갑게 류미르에게 말했다. 류미르는 내 말을 듣고는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나는 괜히 화가났다. 류미르가 나에게 화를 내서 나도 화가 났다기 보다는 낮잠좀 자려고 하는데 류미르가 못 자게 해서 열받은 것이다. 결국 나는 낮잠자기는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는 거실에 있는 소파로 와서 털썩 주저 앉았다. "우리가 본 것은 그애가 그의 주인집 아들에게 두둘겨 맞고 있는 거였고 나머지는 얀스크 신관이 말해준 것 밖에 몰라. 그런데 어떻게 도우려구?" 내가 논리적으로 물어가자 류미르는 주저 주저 하면서 말을 꺼냈다. "글쎄, 뭐... 그 애에게 돈을 좀 준다던가..." "돈? 그 애한테 돈을 줘서 어쩌려구?" 옆에 앉아있던 세이몬이 끼어들었다. "그걸 가지고 그 집을 나와서 혼자 산다던가..." "15살 짜리 애보고 혼자 집을 사서 살게 한다구?" 나는 냉정하게 꼬집었다. "아니, 뭐 그게 어려우면 누구 후견인을 붙여 준다던가..." "류미르, 우리가 이 도시에서 아는 사람 있어? 그리고 그 애의 후견인이 되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벌써 그렇게 했겠지." "그건 그렇지만..." "거봐, 너도 결국 감정만 앞세운거쟎아." "하지만 그냥 있기에는 그 애가 안됐쟎아." "자기 인생은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세이몬의 말에 동감이야." "너희들 너무 매정하다." 나는 우리를 비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류미르를 보면서 내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류미르에게 말했다. "내 생각은 이래. 만약 그 아이가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하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한다면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혹은 스스로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어쩌다 우리가 그애의 그 상황을 알게 되거나 보게 되면 도와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애가 만약 그 상황을 벗어나지 않고 주저 앉아 있다면 아무리 우리가 도와주려 해도 그 애는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꺼야." 류미르는 그 말을 듣고는 부루퉁 해져서 툭 쏘았다. "뭐야 아린. 돌려서 말하지만 결국은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란 거쟎아?" "맞아. 자기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쟎아? 그 애 인생이 불쌍하다면 그건 그 애가 자신의 인생을 불쌍하게 만든거라고 생각해." '그럼 내가 수험생이었을때 난 내 인생을 위해 무얼했지? 그때 난 행복하지 않았어. 그럼 그때 행복하지 않았던건 내 잘못이었단 건가?' ┌───────────────────────────────────┐ │ ▶ 번 호 : 12420/12475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17일 23:22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9) │ └───────────────────────────────────┘ 그때 갑작스레 자신의 생각에 빠져 묵묵히 있던 류미르가 말을 꺼내는 바람에 나는 나의 우울한 생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난말야 힘있는 사람은 그 힘이 있는 만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뭐랄까...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말야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그걸 그냥 모른 체 해버리는 것은 잘못 되게 만든 자같다고 생각해. 지금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그 아이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모른체 해버린다면 그 엘시온이란 녀석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 '헤에, 저녀석 정의파로군...' 류미르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예전에 잼있게 봤던 만화 영화 스파이더 맨이 생각났다. 그 만화에서 주인공인 스파이더맨도 류미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파이더맨은 도시에 있는 법망을 피해서 악을 저지르는 나쁜 무리들을 쳐부수는 전형적인 소년 만화중의 하나였다. 그가 악의 무리를 응징하기 위해 활약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던 강도를 붙잡지 않고 그냥 무시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는 그때 그가 강도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를 잡을 수 있는 힘도 있었지만 단지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고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잡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 강도는 주인공의 집에 침입해서 강도를 저지하려던 주인공의 삼촌을 살해하고 도망쳤다. 그 주인공의 삼촌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 밑에서 자라던 주인공을 부모 못지않게 사랑해주고 아껴주던 인물이었다. 자신의 삼촌을 살해한 범인을 잡기 위해 나선 스파이더맨은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경찰보다도 먼저 그를 잡았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자신이 낮에 그냥 무시해 버렸던 강도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스파이더맨은 그의 삼촌이 평소에 강조하던 힘 있는 자는 그만큼의 책임이 있다는 말을 명심하면서 악의 무리를 응징하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류미르가 평소에 정의파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 하고 있는 줄은 몰랐었다. 지금 류미르는 무척 심각한 얼굴로 어떻게 해서든 그 소년을 도우려고 단단히 결심한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딱히 뭐라고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세이몬이 평소 같지 않게 약간 굳은 어투로 말했다. "힘이 있는 자는 그만큼의 책임이 있는 거라고? 왜 그렇지? 힘이 있는 자는 그 힘을 얻기 위해 그만큼 무언가를 희생한거야. 그런 자들은 그만큼 힘을 얻기 위해 희생한 것이 없다는거 아냐? 그런데 그렇게 얻은 힘을 왜 힘없는 자를 위해서 써야 하지?" 류미르도 세이몬이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굳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네 말은 옳아. 하지만 그렇게 다른 무언가를 잃어가면서 얻은 힘을 옳은 일에 쓰자는 건데 그게 그렇게 싫어?" "옳은 일? 왜 힘 없는 자들을 돕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류미르는 세이몬의 물음에 몹시 당황했다. "왜 옳다고 생각 하다니? 힘 없는 자를 힘 있는 자가 돕는게 옳은 일인건 당연한거 아냐?" "당연하다고 생각 안해. 자신을 지킬 힘 조차 없는 자들은 그만큼 노력을 안한거야." "하지만 처음 부터 힘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없쟎아? 그러니까 아직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를 돕자는 거쟎아. 아까 그 아이처럼 말야." "내가 생각하기엔 그 나이 정도가 되었으면 자신의 앞일에 대해선 생각을 해 놓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걸 우리가 좀 도와준다면 더 좋은일 아냐?" "왜 그렇지? 우리가 그 아일 돕는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우리가 그 아일 돕는다고 치자. 하지만 그게 그 아이의 인생에 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 어떻게 알지?" "왜 그렇게 나쁜 쪽으로 생각하는 거야? 물론 득이 되길 바라면서 돕는거 아냐?" "바란다고? 바란다고 그렇게 되는건 아냐. 만약 네가 정말 돕고 싶다면 그 아이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지 알 때까지 지켜보면서 도와야 하는거 아냐? 잠시 득이 되는지도 모르는 채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하는게 돕는거야?" 류미르와 세이몬은 점점 감정이 격해졌는지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잘못했다간 꼭 싸우거나 사이가 갈라질 것 같아 걱정이긴 했지만 나는 좀 더 두고보기로 했다. 세이몬이 이렇게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신기했고 그가 평탄하게만 살아 온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세이몬을 처음 만났을 때 같은 마족들에게 목숨을 위협 당해 이 인간계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같이 여행해 오면서 그의 천진하고 명랑한 행동과 말투로 인하여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류미르도 생각하는게 구체적이라서 좀 놀라웠다. 류미르는 아직 성인식을 치른 것이 아니고 평소 정의를 부르짓는 것이 꼭 영웅 소설에 푹 빠져서 사는 철없는 아이의 생각 같아서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여러모로 이녀석들한테 놀라는걸...' 그들의 언쟁으로 인하여 내가 몰랐던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기에 그들의 언쟁을 말리지 않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안 이상 그들이 지금의 언쟁으로 인해 서로의 생각을 알고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중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예전에 학교 생활을 할때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생각을 모른 상태로 있다가 그 생각이 드러났을 때 친구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사이가 갈라지는 것을 종종 봐왔던 나로서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자신의 생각 때문에 사이가 갈라지지 않길 바랬다. 어떻게 만났던 우리는 지금 같이 여행을 하는 동료였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여행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도 나는 저 둘이 정말 좋았고 그들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의 언쟁으로 사이가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언쟁을 말려서 막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저 둘의 생각의 차이로 인하여 벌어질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 │ C A │ R R │ O T │ └───┴───┴───┴───┴───┴───┘ SF & FANTASY (#107459/107475) 제 목 [펌/천리안]아린 이야기 18-10 올린이 amca 올린이 이름 이상근 날짜 00/09/19 00:09 읽음 181 ┌───────────────────────────────────┐ │ ▶ 번 호 : 12454/12475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18일 22:03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8화 여신상을 훔치다 (10) │ └───────────────────────────────────┘ 그때 갑자기 그들의 대화가 멈춰졌다. 나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든 나는 갑자기 조용해지자 정신을 차리고 그 둘을 올려다 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일어서서 논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노려 보기만 하더니 류미르가 먼저 눈을 내리깔고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세이몬도 류미르가 앉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자리에 앉았다. "난말야..." 류미르가 한 동안 뭔가를 곰곰히 생각 하는듯 하더니만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다시 2탄을 시작하려나 하고 세이몬과 나는 긴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류미르는 그런 세이몬과 나의 시선도 느끼지 못한 듯 뭔가를 계속 생각 하면서 말을 했다. "예전에 내가 무척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마 한 50년 전 쯤 되었을 꺼야..." "50년? 류미르, 너 도데체 몇살인 거야?" 류미르의 분위기가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50년 전이란 말을 듣자 놀란 나는 소리쳤다. 나도 참 바보다. 나는 500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어느새 인간일 때의 생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었으니... 류미르는 한껏 분위기를 잡았는데 내가 초를 쳤다는 듯 나를 째려보더니 설명해줬다. "보통 엘프는 한 700년에서 800년 정도 살아. 그리고 나처럼 하이 엘프는 1000년 정도는 너끈히 살고." "그럼 네 나이는 몇인데?" "난 아직 180살 밖에 안됐어." 계산을 해보면 하이 엘프가 1000년을 사니까 인간의 수명을 100년으로 잡고 생각해 보면 류미르는 인간으로 치면 한 18세 정도 되는 소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50년 전이라면 인간으로 치면 한 5년 정도 전이었으니 그다지 옛날은 아니었다. 뭐, 그 나이에는 1년 전도 예전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에구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꽤나 늙은 것 처럼 느껴지는 군... 어째든 류미르는 다시 자신의 분위기를 잡으려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어린 엘프였어. 지금보다 더욱 더 어렸기 때문에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밖에 할 수 없었지. 그런데 그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전에 그 마을을 나갔었던 엘프 여인이 돌아왔어. 그런데 돌아올 때 혼자 돌아오지 않고 여자아이 한명을 같이 데리고 왔지. 그런데 마을 어른들이 그 아이를 무척 싫어하는거야. 그 아이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었는데 말야. 결국 마을 어른들의 냉대와 멸시에 그 아이는 마을에서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3년 후에는 그 마을에서 떠났어. 난 그 당시에 왜 그 아이를 어른들이 미워하는 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아이는 하프 엘프라는 거야. 인간 남자와 엘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그 여자 아이를 낳은 엘프 여인도 마을로 돌아 오면 여자 아이가 냉대를 받을 것은 예상을 했지만 인간 남자가 죽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아 왔다고 해. 하지만 엘프 중에서도 자존심이 강하기가 제일인 하이 엘프였기에 그 아이의 존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 하지만 말야, 그 아이가 원해서 하프 엘프로 태어난게 아니쟎아. 그런데도 아무 힘도 없는 그 아이를 단지 하프 엘프라는 이유 만으로 어린 나이에 마을에서 쫒아 내는 어른들을 난 정말 이해할 수 없었어. 언제나 엘프는 조화의 종족이라고 주장 하면서 그 소녀와는 왜 조화를 이루지 못 했던거지? 그게 항상 맘에 걸렸어. 그때 나에게 힘이 있었으면 그 아이를 그렇게 마을에서 쫒겨 나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야..." 류미르의 얼굴은 정말 너무 슬퍼 보였다. 아까 얀스크 신관의 얼굴만큼이나...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던 세이몬은 고개를 끄덕 끄덕 하면서 말했다. "그랬었구나... 하지만 말야, 너 혼자의 힘으로 그 아이를 지켜 줄 수는 없었다고 생각해. 결국 네가 힘이 있어서 그 아이를 지켜 주었다고 해도 마을 어른들의 냉대는 멈추지 않았을 것 아냐?" 그러자 류미르가 세이몬을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네 말이 맞아, 세이몬. 그랬겠지... 하지만 말야, 나는 그때 마을 밖 숲에 혼자 앉아 있던 그 애의 슬픈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 그래서 나에게 힘이 있었으면 그 아이의 슬픔을 다 없애 줄 수는 없더라도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류미르를 바라 보면서 세이몬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는 것은 그들의 눈빛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대충 그들 사이의 언쟁이 정리된 것 같았으므로 나는 잠시 그들을 내버려 두고 침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녀석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졌고, 그와 함께 성룡이 되었으면서 그렇게 진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그동안 단지 마법과 검술을 익히면 인간 세상을 여행하는데 도움이 될 꺼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도 단지 내 맘에 안 드는 녀석을 혼내 주는 생각 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 꼭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할 건 없쟎아. 그렇다고 내가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렇다고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쟎아. 나는 나야. 저들 처럼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구. 나중에 필요할 때 심각해지자." 너무 내 자신을 비하하게 되자 나는 천장을 향해 소리내어 말했다. 그리고 시트를 푹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다. ┌───┬───┬───┬───┬───┬───┐ │ C A │ R R │ O T │ └───┴───┴───┴───┴───┴───┘ 아린이야기 11 그날 밤 나를 깨우는 류미르와 세이몬의 목소리에 달콤한 잠을 자고 있던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깨우는 거야?" 열받은 나는 그 둘에게 소리쳤지만 그 둘은 눈도 깜짝 안하고 능글맞게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씨익 웃는 폼이 나를 깨워서 무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는 류미르가 나를 보앗다. "아힌, 아까 밖으로 나간다고 했으면서 나가지 않았쟎아. 그러니까 지금 가자고. 여기 종업원이 그러는데 오늘부터 야시장이 열린대. 그러니 볼 것도 많이 있을거 아냐? 그것도 구경 하면서 우리의 할 일도 하는 거야. 좋은 생각이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세이몬이 찬성 한다는 듯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라? 아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푹 가라앉았던 녀석들이 다시 되살아났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뭔 일이 있었나? 하지만 물어봤자 대답 안 해줄 것 같은데?' 그들은 자신들 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양 서로를 바라보며 너무 기분 좋게 웃는 바람에 나는 따를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게 원하면 너희들 끼리 갔다 오면 되쟎아. 내가 없다고 못 노냐?" 그러자 세이몬이 내 뒤통수를 쳤다. "당연하지. 아린 네가 돈을 가지고 있쟎아." 나는 할 말을 잃어 버려서 세이몬만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욱 더 열받는건 류미르가 세이몬을 향해서 잘 했다는 듯 내가 안보고 있는 줄 알았는지 슬쩍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 보였다. '다 봤다. 임마.' 나는 얼굴을 한 껏 찡그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내 가방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마법의 주머니를 집어들고 그 안에서 금화 5개를 꺼내서 그들에게 던져줬다. "자, 이거면 충분 하겠지? 바가지 쓰지 않게 조심해. 그리고 쓸데 없는 물건들 사지 말고." 그러자 류미르가 냉큼 대답했다. "걱정 마. 그런건 내가 잘 하쟎아." 그리고 그 둘은 내게 잘 자란 인사를 던지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버렸다. "흥, 뭔 일을 저지르기만 해봐라. 가만 두나..." 나는 그 모습에 약이 올라서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내어 투덜 거리고는 다시 침대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느새 들어 왔는지 내 침대 옆 바닥의 두개의 침낭 속에서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각각 누워서 자고 있었다. 나는 괜히 또 심통이 나서 그들을 째려봐 준 뒤 일어서서 목욕을 하고 홀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아침 산책 겸 여관을 나서서 신전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어젯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 주는 듯 무척이나 지저분 했으며 문을 연 상점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오직 어젯 밤에 일찍 잠을 잤던 나와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었다. 신전 앞에도 어제 왔을 때 보다는 무척 한산했다. 나는 어제처럼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고 레이피어를 신전 입구를 지키고 있는 신관에게 맏기고는 안으로 들어서서 얀스크 신관을 찾았다. 어제의 기분이 다 풀어 졌는지 전과 다름없이 환한 미로를 띄우며 나를 맞이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지만 왜 혼자 왔냐는 그의 질문에 의해 또 다시 기분이 구겨졌다. "어제 류미르랑 세이몬 둘이서만 야시장에 놀러 갔다 오느라고 아직도 자고 있어요." 나도 모르게 그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 짐작 했는지 피식 웃었다. "따를 당하셨군요." "하아, 정말 그랬어요. 그 둘이 분위기가 않 좋길래 알아서 해결하라고 자리를 비켜 줬더니 둘만 의기 투합해서 놀러갔다오더라구요... 덕분에 아침도 나 혼자 먹고 여관을 나오니 갈 데가 없었는데 신관님 생각이 나더군요." 그러자 얀스크 신관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거 영광인데요. 마침 저도 어제 여러분과 우울한 기분으로 헤어져 마음에 걸렸던 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번 더 뵐까 했는데 이렇게 오셔서 잘 되었군요." "헤, 저 혼자 왔는데도요?" "아린님의 말씀에 의하면 류미르님과 세이몬님은 무척 피곤하실 테니 제가 방문하면 그게 오히려 폐가 아니겠습니까?" 얀스크 신관은 자신이 이곳 시내를 안내해 주겠다면서 나를 데리고 신전을 나섰다. "제가 그렇게 우울해 했나요?" 신전을 나서자 마자 나는 얀스크 신관에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물음에 얀스크 신관은 이해를 못 했다는 듯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 "아뇨, 신관님께서 저를 신경써 주시는 것 같아서요..." "하하하, 그렇게 티가 났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아까부터 아린님은 쓸쓸해 보이셨거든요..." "그랬군요, 저도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따 당한건 처음이라서요. 뭘 하든 항상 내가 주동이 되어서 했는데 말예요..." 내가 또 우울해 했는지 얀스크 신관이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명랑하게 말했다. "자 자, 그러면 오늘은 그들에게서 벗어나 한번 즐겁게 보내봅시다. 저도 꽤 재밌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이 도시도 구경할 게 많지요." 나는 그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고 그는 다시 한번 나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나를 잡아 끌었다. 아린이야기 12 얀스크는 도시 이곳 저곳으로 나를 끌었다. 그러면서 여기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도 해주고 멋진 건물이나 장관도 보여 주면서 내가 우울하지 않게 신경써주었다. 나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고 또 그는 말솜씨가 너무 좋아서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 말에 푹 빠져서 서운한 마음을 싹 잊곤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정오가 다 되었고 그러자 그때서야 도시의 상점들은 하나 둘 문을 열었다. 나는 그를 대접하겠다고 이 도시에서 가장 고급이라는 식당으로 이끌었다. 거기서도 나는 이 도시의 이런 일 저런 일을 듣기도 하고 축제에 대해서도 자세히 듣기도 했다. 그와 점심을 먹고 다른 찻집에 들려 차를 한잔 마신 뒤 얀스크 신관이 예배 시간이 다 돼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일어설 때에야 우리는 헤어졌다. 여관으로 돌아가자 방 안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둘 다 부루퉁해져서 내가 들어오자 나를 노려보았다. "어라? 일어났네? 언제 일어났어?" 그러자 세이몬이 퉁명하게 말했다. "아침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류미르도 말했다. "어디 갔다 온거야?" "아아, 너희들이 안 일어나서 나 혼자 있기 심심해서 얀스크 신관이랑 도시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지. 내친김에 어제 대접하지 못했던 점심 식사까지 대접하고..." 그러자 세이몬이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흥, 누구는 좋겠네, 아린이 직접 점심까지 챙겨주고... 우리는 네 동료 맞아? 아침도 못 먹고 점심은 빵을 때웠는데..."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왜 안먹어? 바보 아냐? 여기서 종업원에게 시키거나 아니면 여기 식당에 가서 먹어도 돼쟎아? 너희들이 못 챙겨 먹은 걸 왜 나한테 뭐라 그러는 거야?" 그러자 류미르가 열받았는지 벌떡 일어나서 대꾸했다. "돈이 없었단 말야, 돈이! 돈을 네가 다 가지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아침이랑 점심을 먹으라는 거야?" '이게 뭔 소리야?' 나는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식사를 하면 나중에 내가 다 계산을 할텐데 그게 돈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야?" 그러자 세이몬과 류미르가 몸이 굳어지더니 천천히 슬로 모우션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 둘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내가 그들이 갑자기 지르는 비명에 너무 놀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세이몬이 류미르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격렬하게 외쳤다. "이게 다 너때문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척을 해가지고 날 굶겨? 이 멍청이, 해삼, 말미잘!" 그러자 류미르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웃기지마, 너는 책임 없는 줄 알아? 어제 너때문에 아린에게 받은 돈을 거의 다 써버렸쟎아. 그렇지만 않았어도 차라리 밖에 나가서 사먹을 수 있었어. 그리고 너만 굶었냐? 나도 굶었다!" 세이몬의 하얘졌던 얼굴이 열받아서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가 또 뭐라고 소리 지르려는 찰나. "둘 다 그만하지 못해? 계속 싸울꺼면 밖으로 내쫓아서 저녁도 못 먹게 해주겠어!"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차갑게 말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둘은 조용해졌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난 그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류미르으으~?' 그러자 류미르가 찔끔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뭐라고 그랬지이이~? 어제 내가 준 돈을 다 썼다고오오~~?" 류미르는 얼굴이 붉어졌다가 다시 새하얗게 질렸다. 평소 나는 사치스럽게 생활하면서도 그들이 쓸데 없는 데 돈을 쓰면 가만 두질 않았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억울해 하면 내가 쓰는 건 꼭 필요한 의, 식, 주에 쓰는 거기 때문에 아무리 비싼 돈을 지불해도 괜찮다고 못을 박았었다. 그리고 어짜피 그 돈은 내 돈이었으므로 그 들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비록 내가 그들에게 용돈을 준 거지만 금화 5개라면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거면 이곳에서 중산층의 한 달 생활비를 하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제 밤에 다 쓰고 들어왔으니 내가 도끼눈을 뜨고 류미르를 노려보는 건 당연했고 류미르가 찔끔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그게 있쟎아... 세이몬이 이것 저것 하느라고 돈을 다썼단 말야." 류미르는 쩔쩔 매면서 변명을 해댔고 세이몬은 류미르가 변명할 때 자신을 가지고 넘어지자 그의 얼굴도 헬쓱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의 대부분을 세이몬이 썼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세이몬은 아직 이곳 인간 세계에 익숙해 지지 않아서 돈을 함부로 사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돈 관리를 나와 류미르가 해왔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류미르가 변명거리로 세이몬을 걸고 넘어지자 나는 더욱 더 눈을 치켜뜨며 류미르를 노려보았다. "흥,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는거야? 세이몬이 돈 감각이 없다는 건 너나 나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쟎아. 그걸 관리하는게 네 역활 아니야? 너도 구경 하느라고 얼이 빠져서 세이몬이 돈 뿌려 대는걸 못 본거겠지?" 류미르의 얼굴은 점점 더 헬쓱해졌고 세이몬은 이제 희색이 돌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이몬도 가만 두지 않았다. "세이모오온~! 그렇다고 네가 한 짓이 잘한 짓은 아니지지이이~? 내가 돈 쓸때 꼭 류미르에게 물어보고 쓰라고 했지? 그리고 50셀 이상 나가는 돈은 류미르나 나에게 허락 받고 쓰라고 했어, 안했어?" "했어~" 기가 죽은 세이몬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놓고선 너희들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여기서는 식사 값이랑 숙박비가 나중에 같이 치뤄지는 것도 몰라서 식사도 못 챙겨 먹은 주제에 돈이 남아서 빵이라도 사먹었으면 됐지!" 류미르와 세이몬의 고개가 점점 밑으로 숙여졌다. "그래도 아침이랑 점심을 잘 먹지 못해서 이정도로 끝낸 줄 알아. 그 대신 너희들 이 도시를 떠날 동안 용돈은 한 푼도 못 받을줄 알아, 알았어?"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새파랗게 질려서 나를 애원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느새 이 녀석들은 도시에 머무를 때마다 나에게 용돈을 받아서 쇼핑하는 걸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밥을 굶는 일이고 두 번째는 쇼핑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걸 잘 아는 나는 밥을 굶기는 비인간적인 일을 차마 못해서 대신 뭔 일이 있을 때마다 용돈을 가지고 협박해 왔었다. 지금도 그것이 효과를 봐서 류미르와 세이몬이 울상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모른체 했다. "아리인~~" 세이몬이 애원조로 말했지만 나는 들은채도 안했다. 그럼 그들은 이쯤에서 졸라대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그들에게 한 번 제제를 가하면 왠만해선 풀어주지 않았고 또 그럴 때 나를 귀찮게 하면 그 제제에 더해서 아예 입을 마법으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중 정령술은 류미르가, 그리고 완력은 세이몬이 가장 강했지만 마력은 내가 가장 강해서 내가 건 마법은 그들이 풀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저녁을 먹을 때 까지도 불쌍한 표정으로 나의 동정을 얻어서 용돈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돈을 너무 함부로 써서 그렇다기 보다 나를 왕따시켰다는 사실에 분해서 모른 체 해버렸다. 그날 밤 그들은 용돈이 없는 관계로 나에게 야시장을 구경하러 가자고 졸라댔고 나는 그런 그들에게 지는 척 구경 나갔지만 그들에게는 돈 한푼도 주지 않았다. 그 뒤로 일주일간 그들은 틈만 나면 나에게 동정을 얻으려 했고 그들의 그런 행동이 너무나 끈질겨서 나는 결국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다른 때 같으면 며칠 삐졌다가 풀리는 데다가 금방 그 도시를 떠났는데 이번에는 2주 동안이나 이 도시에 머무는 데다가 계속 축제 기간이었으니 그들의 끈질김을 한층 더 부추기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 드디어 축제 기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옷들 중 제일 고급옷으로 골라 입고 토너먼트전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향했다. 다른 때 같으면 거리에 사람을 보기가 힘들었을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경기장 안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차 있었고 경기장 밖에는 노점상들과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들, 그리고 부유층들이 데리고 온 시종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신전의 장로장과 시장, 그리고 디로히스 가의 장이 단상 위로 올라가 축사라고 불리는 연설을 장시간 동안 한 뒤 검은 색에 회색 테두리가 있고 검고 동그란 모자를 쓴 사람이 나와서 커다란 목소리로 경기에 참가한 성기사의 수와 경기 규칙 등등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번 토너먼트 전에 참가한 성기사는 모두 총 40명, 그들 중에서 1차전에서 승리하고 2차전으로 올라 갈 수 있는 자들은 20명이었다. 1차전은 오늘 10경기를 하고 내일 10경기를 해서 끝내고 그 다음 날 2차전을 하였다. 그리고 2차전에서 올라 온 10명이 경기하는 3차전이 벌어지는데 3차전은 10명의 선수를 5명씩 2조로 나누어 그 조원은 자신을 제외한 조원 4명과 경기를 치루어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3명씩 뽑아 6명의 성기사를 탄생 시키는 것이었다. 3차전은 토너먼트 방식에 의해서 경기가 많아지므로 2틀간 열리고 마지막 날에 6명을 뽑으면 그 날부터 여신상이 공개되며 그 성기사들은 신전의 장로장으로 부터 여신상 경호의 의무를 부여받아 2명씩 짝을 이루어 지키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얀스크 신관이 말해준 설명을 덧붙이자면 성기사 토너먼트 전에는 세계에 뻗어 있는 크다고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엘라이어드 여신 신전에서 성기사를 보내 온다고 했다. 그것도 어느 곳은 그 지방의 신전끼리 토너먼트 전을 벌여서 그 지방의 대표로 성기사를 뽑아 이곳 토너먼트 전에 출전시킨다고도 했다. 그 만큼 이곳 토너먼트전은 유명하고 또 이 곳에서 승리하여 여신상을 경호하는 성기사가 되면 그 신전과 성기사의 명성은 드높아 질 뿐만 아니라 성기사가 받는 상금의 액수도 꽤 거액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비공식 적으로 이 곳 토너먼트전에 참가하는 성기사의 수는 평균 200명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수의 성기사들이 토너먼트 전을 벌이려면 축제 기간 만으로는 모자르기 때문에 토너먼트 전에 참가한 성기사들은 축제가 시작되기 2주 전에 이 곳 신전으로 와서 참가 신청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성기사들은 디로히스 가에서 제공하는 여관에서 머물며 축제 기간이 시작되기 전까지 예선전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예선전을 통과한 40명의 성기사들만이 축제 기간에 벌어지는 토너먼트 전에 참가할 자격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만이 자신의 소속 신전을 밝힌다고 했다. 뭐 그건 예선에서 떨어진 성기사들과 그들의 소속 신전을 배려해 주는 것 같아서 좋은 제도라고 생각 된다. 나는 얀스크가 말해 준 토너먼트 전을 생각하다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우리는 로얄석이어서 관람석의 앞쪽 토너먼트 장이 잘 보이는 데다가 머리 위에는 비가오면 비를 막아주고 해가 뜨면 그늘을 만들어 주는 오색 찬란한 차양이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우리와 시장과 신전의 장로장, 그리고 디로히스가의 장 외에도 - 그 옆에 엘시온이란 녀석의 얼굴도 보였다. - 화려하게 차려 입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시종을 거느리고 경기를 구경하려고 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로얄석 밑에는 몇명의 신관들이 앉아 있었다. 아마 다치는 사람들이 있으면 치료해 주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의무반 이로군...'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어 경기장에는 호명된 두 명의 기사가 올라왔다. 그 두명의 기사들은 서로 상의를 하고 갑옷을 맞췄는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통 은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투구와 갑옷도 은색이요, 들고 있는 검들도 은색으로 번쩍 번쩍 빛났다. 게다가 방패와 어깨에 두르고 있는 망토까지도 은색이었다. "참내, 저렇게 똑같이 차려 입으면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구별해?" 세이몬이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말했다. "저것 봐. 투구에 꽂혀 있는 깃털의 색이 다르쟎아." 류미르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투구를 바라보자 과연 그의 말대로 두 명의 기사의 투구 꼭대기에 커다란 깃털이 하나 씩 꽂혀 있었는데 한 쪽은 파란 색 이었고 다른 한쪽은 빨간 색이었다. 그 기털들은 토너먼트전에서 승리와 아주 관계가 깊은 기털이었는데 그 이유는 토너먼트에서 승리 하려면 상대방 투구 위에 꽂혀 있는 깃털을 빼앗거나 잘라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기사들이 육탄전으로 싸우지는 않았으므로 대부분은 검으로 인하여 깃털이 잘려져 나갔던 것이다. 뭐, 생명을 소중히 여긴 다는 엘리어드 여신의 신전에서 주최하는 것이니 아무래도 피를 흘리는 것을 최대한으로 피하려고 생각해 낸 방식 같았다. 그 두명의 기사는 각각 투구를 벗어 들어 옆구리에 끼고는 로얄 석을 향해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주보고 서로 인사를 나누더니 도로 투구를 썼고 그제야 검을 들어 상대방을 노려 보았다. "이제야 시작 하는군..." 기다리다 슬슬 지겨워 지던 때 경기가 시작되자 나는 신음 비슷한 소리로 중얼 거렸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기사가 이길 것 같은지 떠들고 있었고 관중석은 환호성으로 요란해졌다. 결국 그 경기는 파란색의 깃털을 달고 있던 기사가 이겼고 그 다음 경기가 시작 되었다. 경기는 점심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되었고 점심 시간이 되어서야 한 시간 휴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는 오전에 5 경기를 치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기사들의 경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4 경기밖에 치뤄지지 않았다. "쩝쩝쩜... 어떻게 할까? 꿀꺽... 오후에도 이렇게 늦어지면 말야... 그럼 아무래도 나머지는 내일로 넘어 가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바람에 텅 비어버린 로얄석에서 나와 세이몬과 류미르는 여관에서 싸온 도시락을 펼쳐 놓고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류미르가 갑자기 생각 났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글쎄, 하지만, 야~ 세이몬. 그건 내꺼야. 먹지 마! 어째든 만약 오늘 못한 경기가 내일로 넘어가면 내일 경기는 못하쟎아, 우씨 먹지 말라니까?" 나는 세이몬이 노리는 내 도시락의 햄을 필사적으로 사수하면서 말했다. "하나만 줘어~, 아직 3개나 남았쟎아?" 세이몬은 내 도시락에 있는 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빈 틈만 있으면 채어 가려는 듯 포크를 들고 말했다. "웃기지 마, 너껄 다 먹었으면 됐지, 뭘 더 바래?" 나는 세이몬의 말에 코웃음도 치지 않고 도시락을 손으로 가려 버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사이들이 좋으시군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니 거기에는 얀스크 신관이 싱글 벙글 웃으면서 서 있었다. "신관님!" 우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오랜만이군요.." "맞아요. 일주일 전에 신전에서 뵙고는 처음이쟎아요?" "잘 계셨어요?" 우리 세명의 반가운 외침에 그는 빙그레 웃더니 정중히 인사했다. "저도 여러분을 다시 뵙게 되어 무척 기쁘답니다. 여러분께 엘라이어드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그제야 우리는 엘라이어드 여신의 신관들이나 신도들이 하는 인사를 빼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예. 신관님께도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류미르와 세이몬이 당황할 때 나는 재빨리 신관에게 인사를 했다. '후후후, 이번엔 류미르보다 내가 먼저 사태를 수습했당~'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였다. 내가 얀스크 신관에게 인사를 하느라고 도시락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 세이몬이 내 도시락에서 햄을 하나 슬쩍 해간 것이었다. "우씨~ 세이모오오온~!" 그러자 세이몬은 가져간 햄을 얼른 입안으로 집어 넣었다. "아나마 가으가스 (하나만 가져갔어!)" 나는 열받아서 눈에 불을 켜고 세이몬에게 달려 들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누가 에헴 에헴 헛기침을 해대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하져서 뒤를 돌아보니 류미르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나와 세이몬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후후, 즐거워 보이시는 군요." 그때 류미르의 시선을 슬쩍 차단해 주면서 얀스크 신관이 말을 건냈다. "아, 신관님. 정말 죄송합니다." 류미르는 신관을 향해 정중히 사과를 했다. '우씨, 류미르. 지가 평소에 얼마나 잘했다고 지금 잘난척이야?' 세이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햄을 삼키고는 자리에 앉았다. "신관님도 경기를 보고 계셨습니까?" 류미르가 얼른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정중히 물었다. "아, 예. 저는 신관들 자리에 다른 신관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궁금한게 하나 있어요. 오전에 5경기를 치르고 오후에 5경기를 치른다고 하던데 지금은 4경기밖에 치뤄지지 않았쟎아요. 그럼 나머지 한 경기는 언제 치르지요?" 류미르가 무언가 더 말을 건네려고 할때 세이몬이 먼저 끼어들어서 얀스크 신관에게 말을했다. 덕분에 말을 하지 못한 류미르는 세이몬을 노려봤지만 세이몬은 류미르는 쳐다보지도 않고 얀스크 신관만 바라보았다. "아, 그거요. 보통 경기는 상대방의 깃털을 떨어뜨려야 끝나니까요, 한 경기당 시간 제한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전에 5경기 오후에 5경기가 있다는 말은 보통 그정도로 경기가 진행 된다는 말이지요. 경기가 빨리 끝나면 오전에 다 끝낼수도 있고요, 오늘 처럼 경기를 다 못끝내면 밤 늦게까지 치루더라도 10경기를 끝내지요." 그때 저쪽에서 얀스크 신관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제 동료가 부르고 있군요. 사실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여러분들이 보여서 잠시 빠져나온 거거든요. 가봐야 겠어요." 얀스크 신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우리도 모두 자신들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기를 바라면서 여러분께 엘리어드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예. 신관님께도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류미르가 우리를 대표해서 정식으로 인사하고 나와 세이몬은 뒤에서 고개만 숙여 보였다. 얀스크 신관은 우리를 일일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맨 나중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어 보이고는 몸을 돌려 동료 신관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의 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류미르는 세이몬과 나에게 잔소리를 하려고 도끼눈을 뜬 채로 우리에게 몸을 휙 돌렸지만 나와 세이몬은 그를 바라볼 시간이 없었다. 얀스크 신관이 우리에게서 몸을 돌리고 가는 순간 나와 세이몬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틈을 노리고 있다가 얀스크 신관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세이몬에게 덤벼 들었고 세이몬은 그런 나를 피하여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거기 안서? 너 오늘 죽을 줄 알아!" "너무한다. 겨우 햄 하나가지고 그러냐?" "그러는 네 녀석은 햄 하나에 목숨을 내놨쟎아! 거기 서!!" "한번만 봐줘. 하나만 먹었쟎아. 아직 두개는 그대로 있을 거 아냐?" "웃기지마, 그 햄 하나도 몰래 쌔벼가서 먹은거쟎아!" 세이몬과 나는 화려한 좌석들이 열을 지어 놓여 있는 로얄석을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서로 쫓고 쫓기는 사투를 펼쳤다. 그때 류미르의 사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그렇게 뛰어 다니는 걸 보니 배가 부른 모양인데? 그럼 이 도시락 내가 다 먹는다? 더불어 후식까지~~" 그러나 류미르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류미르가 말을 시작하자 마자 그를 바라본 세이몬과 나는 그가 우리들의 도시락을 들고 사악하게 웃는 것을 봤고 그 순간 우리는 총알같이 그에게로 뛰어가서 자신들의 도시락을 빼앗아 들었던 것이다. "웃기지 마!" "죽고잡냐, 류미르?" 류미르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설래 설래 저으며 한숨을 쉬자 열받은 나와 세이몬은 눈짓을 서로 교환해 타이밍을 맞춰서 동시에 그에게 킥을 한방 씩 먹였다. 그 뒤 우리는 서로를 노려 보면서 자신들의 도시락 나머지를 재빨리 먹었고 후식도 똑같이 나눠서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 재빨리 먹어 치웠다. 그런 나와 류미르를 바라보던 세이몬이 한마디 했다. "돼지들~!" 물론 그 뒤에 나와 류미르에게 한 방씩 얻어 맞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뒤에 우리들은 서로 노려보면서 제 2라운드를 시작하려고 하는 찰라에 점심 먹으로 갔던 나머지 로얄석에 앉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서 아쉽게도 주먹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 아마도 그때 그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나중에 엉망이 되고 완전히 부셔진 좌석에 앉아서 나머지 경기를 구경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시 몰려 왔기에 그들 앞에서는 싸울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잠시 후에 다시 경기는 지속 되었고 우리는 경기로 시선을 집중 시켰다. 경기대에 올라와서 열심히 검으로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은 척 보기에도 우리보다는 한수 아래였다. 그러나 그렇게 재미 없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경기를 우리가 열심히 집중해서 보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나중에 여신상을 훔치러 들어 갔을 때 저들과 겨루어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들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아니고 저들 중 6명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르는 거지만 누가 그 6명이 될지는 모르는 거였다. 오후에 들어서 3 경기가 지나가고 다음 경기가 시작 되려고 두 명의 기사가 호명되는 순간이었다. 첫 기사가 호명되어 올라 오면서 관중들의 환호에 답례 하면서 손을 흔든 뒤 다음 기사가 호명이 되었는데 그 기사가 올라 오는 순간 이제까지의 관중들의 환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열광하는 것이었다. '우와아아아~!' "뭐야? 갑자기 왜그러는 거야?" 너무 놀라서 어리벙벙해 진 세이몬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마 지금 올라온 기사 때문이겠지. 저 자가 그만큼 대단한가보지?" 류미르가 열광적인 관중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기사를 지긋이 노려 보면서 세이몬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때 우리 옆에 앉아 있던 어떤 청년이 그 기사를 열광적이고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기사는 루이스 알모어 크레스웰 이라고 하는데 4년 전부터 이 토너먼트 전에 출전해서 연속으로 6명의 성기사로 뽑힌 기사랍니다. 실력이 무척 대단한데다 정말 성기사다운 기품과 성품을 가지고 있어 더욱 더 유명하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동경심과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흐음, 당신도 저 기사를 좋아하나 보군요?"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걸었다. "글쎄요, 좋아한다기 보다 존경하고 있지요." "존경? 그럼 당신도 기사인가요?" "예? 아, 예. 하하, 부족하지만 저도 로페카 왕국의 기사랍니다." '로페카?' "로페카가 어디야?" 그 기사의 말을 들었는지 류미르가 내게 귓속말로 물어왔다.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연합국 중 한 나라가 아닐 까 싶어." 그때 경기가 시작 되어 우리는 대화를 중단하고 그 기사의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는 다른 기사보다 확실히 뛰어났다. 몸 놀림도, 스피드도, 그리고 검에 맺히는 검기 까지도 다른 기사라기 보다 예전에 내가 봤었던... 그리고 지금 까지도 가장 뛰어난 기사라고 생각 했었던 유스(아린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사람) 만큼 뛰어났다. 그 기사와 상대 하고 있던 기사와는 실력 차가 너무 났는지 경기는 금방 끝이 났고 그래서 그의 실력을 모두 볼 수는 없었지만 약간 본 걸로도 그가 무척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는 걸 알수 있었다. "이봐 아린, 어때? 저 기사를 상대 할 수 있겠어?" 나 처럼 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보고 있던 류미르가 그의 경기가 끝나자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어. 검술로만 싸운다면 난 상대도 될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마법과 같이 싸운다면... 글쎄... 어떨지 나도 모르겠는걸?" "그정도야?" 내가 너무 자신 없게 말했는지 류미르의 얼굴에 놀란 빛이 나타났다. 내가 생각보다 약해서 놀란건지 아니면 그 기사가 생각보다 강해서 놀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몰라. 난 저런 기사랑은 싸워 본 적이 없거든... 그러니 나중에라도 저런 사람이랑은 만나지 않게 되길 빌어야 겠지. 솔직히 대결 한다면 .. 에구, 어떻게 싸워야 될 지도 모르겠어..." "싸워보지도 않고 너무 겁 먹는거 아냐?" "겁 먹는다기 보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감을 못 잡는다고 하는 게 맞을거야. 아무리 내가 검술 실력이 없어도 내 모든 마법을 총 동원 한다면 적어도 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 하거든..." 그날 경기는 내 생각 보다는 일찍 끝났다. 오후에 경기 하는 기사들이 실력 차이가 좀 많이 나서 그런지 매 경기가 금방 금방 끝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경기에서는 루이스 알모어 크레스웰 이라는 기사보다 뛰어나거나 막상 막하 정도로 실력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세이몬, 아까 그 기사 말야, 네가 보기엔 어때?" 경기가 끝나고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들이 저녁을 먹고 거실에 모여 앉았을 때 류미르가 세이몬에게 물었다. 세이몬은 잠시 골돌히 생각 하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 물론 그와 내가 정식으로 싸운다면 이기기는 하겠지만 말야, 몰래 처리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건 불가능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싸운다면 시간도 꽤 걸릴 것 같고, 조용히 처리 하기는 힘들 것 같던데?" "만약, 그와 같은 실력자가 더 있다면 여신상 훔칠 때는 조용히 처리하기가 힘들겠어." 나는 세이몬의 말에 동조하면서 덧붙였다. "우선은 내일이 관건이야. 오늘 보니까 그와 같이 뛰어난 사람은 없더라고, 내일 나머지 기사들의 경기가 있으니까 그걸 보면 대충 여신상을 경호할 기사들의 실력을 알게 되겠지..." 류미르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나는 토너먼트라고 해도 기사들의 실력을 얕봤었기 때문에 그 루이스라는 기사의 실력을 보고는 충격을 먹었었다. 그리고 무척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째든, 요번 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말에 류미르와 세이몬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우리는 더욱 더 심각해 졌다. 그 날 경기에는 루이스 라는 기사와 비교해서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 4명이나 더 나왔던 것이다. 2 명의 기사들은 자신들과 실력차가 많이 나는 기사들과 경기를 해서 금방 시합을 끝냈지만 나머지 두 명의 기사는 하필이면 둘이 맞붙어서 경기를 하는 바람에 경기를 무척이나 오래 지속 시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시합이 그날 시합의 맨 마지막 시합인데도 너무 늦게까지 끝나지 않고, 또 그들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시장과 신전의 장로장, 그리고 디로히스 가의 장이 상의를 해서 그 둘을 그냥 2차 시합에 나갈 수 있게 해줬기 때문에 우리는 한 밤중까지 시합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건 좋았지만 걱정거리가 좀 더 커진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말 이번일은 힘들 것 같아..."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세이몬이 중얼 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류미르나 나도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뭐라 반박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크게 소동이 벌어질 것 같아."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스레 말하자 류미르가 피식 웃었다. "야, 우리가 언제는 조용히 처리한 적이 있냐?" 그 말에 나도, 세이몬도 피식 웃었다. 덕분에 나는 걱정이 좀 가라앉는 걸 느꼈다. 2차 예선 경기가 치뤄졌고 거기서 이긴 10명의 기사가 남아 그 다음 날 경기를 치룬 뒤 그 해 6명의 성기사가 뽑혔다. 우리의 예상 대로 루이스라고 하는 기사와 그와 엇비슷한 실력을 가진 4명의 기사가 뽑혔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그들보다는 좀 떨어진 실력을 가졌긴 하지만 그래도 보통 기사보다는 뛰어난 실력을 가졌고 내가 보기에는 머리도 뛰어난 것 같은 기사가 뽑혔다. "저 마지막 기사 말야. 싸울 때 실력 말고도 머리 쓰는게 뛰어난 것 같은걸? 그럼 머리가 좋다는 뜻이겠지?" 세이몬도 그걸 느꼈는지 우리에게 낮게 속삭였고 류미르도 거기에 동의했다. "실력은 다른 나머지 기사보다 좀 낮을지는 몰라도 제일 똑똑한 것 같아." 그리고 그날 오후, 신전에서 장로장이 그들에게 하얀 색의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망토와 함께 백금으로 만든 엘라이어드 여신을 상징하는 데이지 꽃 모양의 브로치를 달아주면서 성기사로 임명했다. 그 후에 드디어 여신상이 공개 되었다. 커다란 여신 석상이 있는 홀에서 그 석상 앞에 있는 제단 위에 작은 탁자가 놓이고 그 위에 유리곽으로 덮힌 여신상이 올려졌다. 그 여신상은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하는 저녁 태양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정말 아름답군..." "그래, 환상적이야." "책에 나온 그림과는 비교도 안되는걸?" 그 모습을 바라 본 우리들은 여신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한마디씩 중얼 거렸다. 여신상 앞으로 가까이 가면 여신상에 대고 경배를 해야 했기에 우리는 제단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쪽에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하긴, 경배할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셋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좋은 시력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멀리서도 여신상을 보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한참 동안 그 여신상에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던 우리들은 뒤에서 사람들이 홀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우리랑 부딪히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는 신전을 빠져 나왔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저녁을 먹고 거실에 모여 앉았다. "자, 이제 작전을 짜야지?" 나는 긴장된 류미르와 세이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우리 셋은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야. 결전의 날은 축제 마지막 날. 알았지?" 내가 류미르와 세이몬을 바라보며 긴장된 어조로 말했고 류미르와 세이몬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 다녔다. 각자 맡은 바가 달랐으므로 각자 따로 따로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저녁 식사 시간에 여관에서 겨우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었다. 신전 쪽을 맡았던 류미르가 제일 늦게 들어오면서 미리 식탁에 앉아 있던 나와 세이몬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준비는 다 했냐?" "물론." 세이몬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후후후, 내일 저녁이 기대 되는걸? 잘 해보자구..." 류미르가 긴장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비볐다. 다음 날 저녁... 축제의 마지막 날이자 여신상 공개의 마지막 날... 드디어 시간이 되어 여신상이 공개 되었고 많은 신도들이 앞을 다투어 여신상 앞으로 나아와 경배했다. 그 들 사이에는 류미르도 끼어 있었지만 나와 세이몬은 그 자리에 없었다. 제단 위에 있는 여신상의 좌우에는 성기사 두명이 은빛 갑옷을 입고 늠름한 자세로 서서 여신상을 지키고 있었고 제단 밑에는 여러명의 사제들이 신도들이 바치는 꽃과 예물을 받고 있었다. 류미르는 그들 사이에 끼어서 앞에 서 있는 신관 중 한명에게 꽃다발을 바치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약간 굳어 졌고 속으로는 숫자를 세고 있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류미르가 100 부터 거꾸로 숫자를 세어서 마지막으로 1 까지 다 세었을 무렵 신전의 천장에 큰 폭발음과 함께 구멍이 뚤렸다. '콰과광~' 천장에 구멍이 뚤리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석들과 먼지들이 홀 안으로 뿌옇게 내려 앉자 놀란 신관들과 신자들이 우왕 좌왕 하면서 소란스러워졌다. 그 순간에도 두 명의 성기사들은 여신상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긴장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허리에 찬 바스타드 소드로 손을 가져갔다. 차츰 차츰 천장에서 떨어지는 가루들도 줄어들고 먼지도 가라 않았을 무렵.... "오호호호호호~~" 날카로운 여인의 웃음소리가 허공에서 부터 들려왔다. 놀란 사람들이 허공을 쳐다보자 그곳에서는 허리까지 내려 올 듯한 긴 검은 머리를 허공에 흩날리면서 온 몸에서는 검은 기운을 풀풀 흩날리고 있는 여인이 공중에 떠 있었다. "오호호호호호~~" 그 여인은 팔꿈치 까지 오는 검은 장갑을 낀 오른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 높여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은 정말 고음이었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가슴 절반이 보일 정도로 깊게 파인데다 허벅지 중간 까지 찢어진 긴 드레스를 펄럭이며 자주 빛 망사 숄을 양 손과 허리에 느슨하게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마찬 가지로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망사 숄이 펄럭이면서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새하얀 다리를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누구냐?"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하는 수 많은 사람들 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며 소리친 사람은 다름 아닌 성기사 중 한명이었다. 그의 커다란 외침 덕분에 사람들은 저마다 정신을 차렸고 그녀의 온 몸에서 풀풀 날리는 검은 기운을 감지한 신관들은 홀 안에 있던 신자들을 밖으로 내 보내느라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호호호호, 이런 예의 없는 인간 같으니라구, 네가 기사라면 나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네 정체를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성기사는 잠시 움찔 하더니 검을 자신의 앞에 세우고 정중히 말했다. "나는 이번에 뽑힌 엘라이어드 여신의 성기사 중 한 사람으로 루이스 알모어 크레스웰 이라고 하오.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난 그대는 누구시오?" '참내, 예의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더니 저렇게 정중하게 물어올 줄이야... 웃긴 놈이군.' "호오, 그대는 정말 기사중의 기사로군. 이렇게 예의를 차려 물어주니 정말 고맙소, 난..." 하면서 그녀가 자신의 소개를 하려는 찰나, 한 신관이 뛰어 들면서 소리쳤다. "마족이다!" "이 곳에는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군... 이래서야 여기가 그렇게 유명한 신전이 맞는거야?" 그녀가 어깨를 으쓱 하면서 한심 하다는 듯 고개를 설래설래 젓자 마족이라고 소리 친 신관이 얼굴을 붉히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때 이 소동을 들었는지 장로장과 고위 신관들이 홀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마족입니다. 마족이 쳐들어 왔어요." 한 고위신관의 다급한 물음에 홀 안에 남아있던 한 신관이 대답을 했는데 그 대답이 마족 여인의 맘에 안 들었는지 그녀가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난 잠시 이 신전을 방문한 것 뿐이라고!" 그러자 장로장이 마족의 여인 앞으로 나섰다. "마족의 여인이여, 이곳에 무슨 일이요?" 그의 눈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까딱 잘못했다간 공격을 퍼 부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장로장의 눈에 서려있는 노기를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어머나? 나는 이 곳에 오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그러자 장로장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았다. "마족이 왜 신전을 찾아온단 말이요?" "저런 저런, 그렇게 화내면 건강에 해로워요. 나는 단지 이 신전에 대한 소문이 너무 자자 하길래 도대체 어떤 신전이길래 그렇게 유명한가 궁금해서 구경하러 왔을 뿐이니까..." "그렇다면 왜 천장을 부수며 들어온 거요? 입구로 들어와도 되지 않소?" "어머, 그렇군요. 내가 그 생각을 못했어요." 그녀가 미처 생각을 못했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자 그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비틀 거렸다. 그때 그녀의 눈에 홀 안을 조용히 빠져 나가는 류미르가 보였다. 류미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입구를 통해 그 홀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류미르의 미소를 못본 체 하고는 장로장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의 눈에 이제는 노여움이 활활 타오르자 괜한 헛기침을 하면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하하, 하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큰 구멍을 내버렸네요..." 그녀는 허공에 떠 있던 몸을 땅으로 사뿐히 착지 시키고는 장로장에게 성큼 성큼 다가갔다. 장로장은 움찔 했지만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께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서 뒤적이더니 금화 5개를 꺼내 들었다. "자자,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지 마시고 이거 받아요. 이거면 천장을 수리 하는데 충분 하겠지요? 아아,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내가 모르고 그런건데, 사랑과 평화의 여신을 모시는 신관이 이런 일로 화내서야 되겠어요?" 그녀는 생글 생글 웃으며 장로장의 손바닥을 펴서 그 위에 금화 다섯개를 놓아주며 손을 쥐어주었다. "이런 이런, 내가 이렇게 까지 하는데도 분위기는 여전히 무섭네?" 그녀의 말대로 그 홀 안에 있는 신관들은 모두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고 두 명의 성기사들은 검을 빼어들고 장로장 옆에 서서 그녀가 허튼 짓을 하기만 하면 달려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체념의 빛을 얼굴에 띄우고는 말했다. "흐음, 하는 수 없지. 잘못한건 나니까.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뭐. 날 반겨주지도 않는데 구경하고 싶은 맘도 사라졌으니까... 그럼 모두 안녕히 계시길..." 그녀는 여유 있게 손까지 흔들어 보인 뒤 공간 이동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모든 신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성기사들도 자신들의 검을 허리에 찬 검집에 꽃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놀라서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보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는 새파랗게 질린 한 신관이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신관이라는 사람이 체신머리없이..." 고위 신관 중 한명이 노한 목소리로 꾸짖는데 그 신관은 고위 신관을 쳐다보지도 않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느 곳을 가르켰다. "저, 저기... 저기..." 그가 가르키는 쪽으로 돌린 모두는 그가 왜 비명을 질렀는지 알게 되자 모두 다 같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그리고 장로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여신상이... 여신상이.... 여신상이 사라졌어어어어~~" 그렇게 신전에서 신관들의 비명이 울리는 그 시각 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으슥한 골목에서 얼굴에 한 화장을 지우고 머리에 썼던 긴 검은 머리의 가발을 벗으며 씨익 웃었다. "깔깔깔, 여기까지 비명이 들리네?" 그러자 내가 옷을 갈아 입을 수 있도록 망토로 내 몸을 가려주고 있던 세이몬과 류미르가 투덜 거렸다. "웃지 말고 빨리 갈아입어. 이러다 사람이 오기라도 하면 어떻게해?" "그래, 빨리좀 해라. 팔 아프단 말야."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다 갈아입었어." 나는 재빨리 내 옷으로 갈아입고는 가발과 드레스를 베낭 안에 챙겼다. "자 빨리 튀자고, 성 문을 닫기 전에 말야..." 내가 말 위에 짐을 싣고 나도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 골목에서 어떤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누구냐?" 나보다도 먼저 세이몬이 소리쳤다. "천천히 걸어 나와, 안그러면 공격하겠다." 류미르도 빛의 정령을 불러내서 골목을 밝히는 한편 단검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그러자 골목의 그늘에서 누군가가 슬금 슬금 걸어나왔다. "어? 넌..." 그의 얼굴을 알아본 류미르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내렸다. 그는, 아니 그 아이는 저번 날에 엘시온이라고 하는 녀석에게 얻어 맞고 있던 시브로라고 하는 소년이었다. "여기서 지금 뭐하는 거야?" 갈 길이 바쁜데 그 소년이 방해가 되자 짜증이 나기도 하고 또 아까 우리의 모습을 보았을 까봐 걱정이 된 나는 소리쳤다. "어? 잠깐만. 이애좀 봐." 그러나 갑작스레 들려오는 세이몬의 말에 나는 화 내려던 것을 멈추고 그 소년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 소년은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낡고 커다란 외투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자그마한 보퉁이도 들려 있었다. 시브로라고 하는 소년은 세이몬의 말에 흠칫 하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부탁입니다. 저를 이대로 가게 해주세요. 그러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도망가는 거군..." 류미르가 멍하니 그애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우리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꺼야?" 류미르의 얼굴은 점점 환해지더니 나중에는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하는 수 없지. 이 정도 남의 인생에 참견 하는 건 괜찮겠지..." 세이몬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띄었다. 그리고는 옆에 세워 두웠던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잠깐만 꼬마. 너 갈데 있어?" 나의 갑작스런 물음에 그 소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래 설래 저었다. "우리는 지금 이 도시를 떠날려고 해. 만약 너도 지금 도시를 나갈 생각이라면 데리고 가주마." 그러자 그 시브로라는 소년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파란 머리의 형이랑 같이 말을 타도록 해. 그 형이라면 널 기꺼이 태워줄 꺼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말 머리를 성 문쪽으로 향했다. 세이몬도 곧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고 뒤쪽에서는 류미르가 투덜 투덜 대면서 시브로를 자신의 말에 태우는 소리가 들렸다. "킥킥, 류미르는 자신이 한 말이 있으니 거부하지는 못할꺼야..." 세이몬이 내 옆으로 와서 나란히 말을 달리며 고소 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나도 세이몬을 마주 바라보면서 싱긋 웃고는 말의 박차를 가해 더욱 빨리 달렸다. 아직 신전에서 연락을 받지 못했는지 우리가 성 문을 지나 밖으로 갈 때 보초병들은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를 향해 즐겁게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여러분께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그래서 우리도 즐겁게 그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병사님께도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 에고고 겨우 18화가 끝났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질질 끌었어요... 점점 제 자신이 게을러 지는 걸 느끼며... 어쨌든 봐 주시는 분들 넘넘 감사합니다.... ^^ ┌───────────────────────────────────┐ │ ▶ 번 호 : 12863/12879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27일 22:06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9화 남의 집 털기..(1) │ └───────────────────────────────────┘ 제 19화 남의 집 털기... 라크네 도시에서 무사히(?) 일을 끝낸 우리들은 시브로라는 소년을 데리고 그 도시를 빠져 나온 뒤 3일 간은 식사 시간과 잠자는 시간, 그리고 가끔 쉬는 시간을 빼놓고 죽어라고 달렸다. 혹시라도 우리가 여신상을 슬쩍 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오면 그야말로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라크네 도시의 주변에는 거의 평야이면서 농촌 지대였기 때문에 우리가 빨리 다른 도시로 피하지 않는 한 발견 될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3일 뒤 겨우 다른 도시를 발견하고는 그 도시에 여관을 잡고 한 숨 돌렸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날 일찍 우리는 또 그 도시를 출발하여 다른 도시로 달렸다. 그렇게 하기를 일주일... 제일 거리가 가까운 도시를 찾아 다니면서 이동하다 보니까 어느새 연합국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켈튼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런... 이대로 가다가는 다시 켈튼으로 가게 생겼는걸?" 저녁에 도착한 어느 마을에서 그래도 깨끗한 여관을 발견한 우리들은 망설임 없이 그 여관으로 들어갔고 늦은 저녁을 마치고 우리 4은 방 안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가장 가까운 도시로 이동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단 말야." 류미르의 힐책 하는 듯한 눈초리에 나는 변명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켈튼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쟎아?" 세이몬의 걱정이 가득 담긴 말투에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돌려 세이몬을 쳐다본 류미르는 소브로 라는 소년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그 곳에 영원히 갈 수 없는 건 아니지... 단지 지금은 시기가 너무 빠르다고나 할까?" "그게 그거지..." 류미르는 소브로를 의식하고 말을 돌리는 것 같았지만 세이몬은 그런 류미르의 눈치도 채지 못하고 더군다나 소브로는 전혀 의식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말을 바꿔 버린 류미르에게 감정이 상한 듯 투덜거리는 조로 말했다. "야!" 가만히 있다가 갑작스레 소리친 나를 그 방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쳐다보았다. "소브로라고 했지?" "아, 예..." 나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시선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어쩌다가 우리 일행이 된 소브로를 쏘아 보며 내가 지적하자 소브로는 약간 겁 먹은듯 엉겹결에 더듬 거리며 대답했다. "너 어쩔꺼냐? 어디 갈데는 있는 거야?" 그러자 소브로는 머뭇 거리다가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그리고 나의 말투와 그의 태도 때문인지 세이몬과 류미르가 나를 너무했다는 듯이 째려보며 한 마디씩 했다. "너무한다 아린." "맞아. 갈 곳도 없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러냐? 매정하게 시리..." "시끄러, 둘다. 어짜피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 져야 한다는 게 내 신조야. 아, 이 얘기가 왜 나온거지? 하여튼 너희들 때문에 제대로 말도 못해 정말... 그건 그렇고 너말야. 그 집에서 탈출 할 정도면은 탈출 한 뒤에는 무엇을 하겠단 계획 정도는 있을 거 아냐?"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자 세이몬과 류미르는 '아하,' 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소브로는 머뭇 머뭇대다가 벌개진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 그러니까.... 저는...." "야, 더듬지좀 말고 말해라. 네가 말하면 누가 패기라도 한대냐?" 내가 또 쏘아 부치자 류미르가 나를 또 다시 째려봤다. "도대체 왜그래? 처음에 네가 이 아이를 데리고 왔으면서 왜 그렇게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야?" "이렇게 답답한 앤줄 몰랐지. 깡다구는 있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영 쑥맥일쎄..." 그러자 더욱 더 얼굴이 벌개진 소브로는 몸 안에 있는 용기를 다 끌어 모은 듯 안간 힘을 쓰면서 소리쳤다. "저는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자 힘이 빠진 듯 '하아 하아' 거친 숨을 쉬었지만 그래도 할 말을 해서 시원한 표정의 그를 우리 셋은 멍하니 쳐다 보았다. 우리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쳐다보기만 하자 점차 제 색을 찾아가던 소브로의 얼굴이 다시 붉어지면서 그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 참, 목소리가 큰 놈일세? 야, 누가 그렇게 소리치라고 했냐? 말하라고 했지?" "또 또, 또 그런다 아린." "아, 됐어 됐어. 그래 류미르 너 잘났어. 그건 그렇고 그럼 너 기사가 되고 싶다고?" "예..." 내가 다시 확인조로 묻자 아까의 커다란 목소리는 어딘가로 숨어 버렸는지 기어 들어가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흠, 그렇다면 기사 학교로 가야 하겠네?" 머릿속으로 이 아이가 기사가 될 수 있는 경로를 생각해 낸 내가 물어보자 소브로는 고개를 끄덕 끄덕 했다. "예..." "그래, 그럼 어디에 있는 기사 학교를 갈 생각이야?" "그건..." 난 분명히 당연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 했는데 소브로는 생각을 못해 놨는지 말 끝을 흐렸다. "어? 정해놓은게 아니야?" 소브로와 나의 대화를 듣느라고 얼굴이 진지하게 바뀌어져 있던 류미르도 소브로가 대답을 못하자 의아한 듯이 물어왔다. "아니요, 가고 싶은 학교는 있는데..." "그런데?" 세이몬도 듣고 있었는지 소브로가 말 끝을 흐리자 금방 재촉해 왔다. "아, 그게 너무 멀기도 하고... 또 학비가 충분한 지도 모르겠고..." 소브로는 자꾸만 더듬 거리며 작게 중얼거리기만 할 뿐 어느 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지 말을 안했다. "도대체 어디 학교인데 그래?" 답답함을 참지 못하던 세이몬이 불쑥 그의 말을 끊어버리면서 물었다. "저기, 레스틴 왕국의 수도에 있는 '국립 기사 양성 학교' 요..." "레스틴 왕국? 정말 먼 곳에 있네? 왜 거길 가고 싶어 하는데?" 레스틴 왕국이라면 옛날에 내가 엄마와 같이 살던 엄마의 레어가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앤드루의 아버지가 그 곳의 기사였었고 유시라크(아린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기사)가 바로 레스틴 왕궁 기사단의 부단장 이었다. 그런 덕분에 인간 세상에 나왔을 때 레스틴 왕국에 대해서 좀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런대로 알고 있는 나라였다. "그러니까, 레스틴 왕국은 기사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기사가 많쟎아요, 그러니까 그 나라에서 기사가 되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거구, 또 거기서는 실력만 있으면 신분은 안 따진대요. 그리고 국립 기사 양성 학교는 평민도 받아준다던데요? 그런데 그곳을 졸업하는 데 드는 학비가 얼마인지는..." "호오, 그래도 꽤나 세세하게 계획했네?" 류미르가 기특 하다는 듯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학비가 얼마인지 모른다쟎아." "걱정마 세이몬, 저 녀석 주인 집에서 꽤 슬쩍 해온 것 같은데..." 내가 피식 웃으면서 소브로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떻게 그걸?" "네가 가져온 보퉁이가 꽤 큰데 옷 보퉁이는 아닌 것 같아서 말야... 네가 그 보퉁이에서 옷을 꺼내는 걸 본 적이 없거든... 그리고 말을 달릴 때 네 보퉁이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더라고... 그러니 뭔가 단단한 물건이 네 보퉁이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쟎아. 도망치는데 가져올 물건이라면 옷 빼고는 돈이 되는 비싸거나 귀한 물건일거라고 생각 했지. 그리고 그런 물건을 평소에 네가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 했고, 그러니 결론은 간단하게 나오쟎아?" "아, 그럼 그 소리가 소브로의 짐에서 나오는 소리였어?" "어? 류미르, 너도 들었어? 난 또 네 짐에서 들리는 소린줄 알았지..." 나는 아직까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겁먹은 얼굴로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는 소브로가 좀 가여워져서 부드럽게 말했다 "야, 그렇게 겁 먹지마. 우리는 이래뵈도 꽤 큰 부자라고. 네 걸 빼앗지는 않을꺼고, 그리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설마 널 경비병에게 넘기겠어? 그러니까 맘 놔도 돼. 난 단지 내 생각이 맞았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고, 또 그랬다는 네가 꽤 기특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자 류미르가 발끈해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아린, 언제부터 도둑질이 기특한 일이 된거지?" "이봐, 류미르. 넌 이 애가 엘시온이란 돼지 녀석에게 얼마나 당했는지 벌써 잊었냐? 평소에 그렇게 당하고 살았으면 보상을 해줬어야지. 그 못된 녀석이 생각지도 않으니까 이 애가 스스로 챙긴거쟎아? 그리고, 그 집은 무지 부자라는데 좀 챙겨오면 어때서 그래? 이 애가 가져온 건 그 집안에서 새발의 피 정도 일꺼다." 내가 이렇게 자신을 둔두해 주자 소브로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불안은 가시지 않은 듯 자신의 보퉁이가 있는 쪽을 힐끔 힐끔 바라보았다. "그래두..." "그만해, 류미르. 너도 저 애를 도우고 싶다고 했쟎아. 내가 엘시온이란 녀석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전에 잠깐 봤을 뿐이어도 충분히 나쁜 놈이라는 건 알겠더라. 그러니 이정도는 그 녀석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하도록 해." 생각지도 못했던 세이몬이 나서서 소브로의 편을 들어주었다. 나와 류미르가 놀라서 세이몬을 바라보자 세이몬이 약간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코를 긁적였다. "됐어. 세이몬도 이렇게 말하니까 그만 하자고. 그리고 우리의 행선지 말인데, 소브로를 데려다 줄 겸 또 켈튼을 피할 겸 우리도 레스틴 왕국으로 가는 건 어떨까? 어짜피 언젠간 갈 생각이었으니 이왕 이렇게 된거 가자고." 그러자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언제는 니가 우리 뜻을 물어보고 행선지를 정했냐? 니 맘대로 했지? 이번에도 니 맘대로 하셔요." "나도 별로 상관 없어. 가자구." ┌───────────────────────────────────┐ │ ▶ 번 호 : 12794/12795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09월 29일 22:04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9화 남의 집 털기...(2) │ └───────────────────────────────────┘ 다행이도 우리가 머물고 있는 도시는 레스틴 왕국과 에스라 왕국이 마주 대하는 국경 지점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원하기만 하면 에스라 왕국으로 가거나 레스틴 왕국으로 가는 건 쉬웠다. 왜냐하면 세 나라의 국경이 맞붙어 있기도 했지만 상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켈튼 연합 국가와 그 나라만큼은 아니더라도 관광업과 상품업, 그리고 상업이 골고루 발달한 에스라 왕국과 인접한 국경이었기 때문에 워낙에 많은 상인들이 들낙 거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같이 어느 나라 출신인지도 모르고 믿을만한 신분 증명서도 없는 이들이 국경을 넘나들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 이 도시에는 국경을 넘어서 물건을 팔러 가거나 사러 가려는 상인 일행들이 많았고 그 상인 일행들이 고용한 용병들이나 또는 그들에게 고용되어 일자리를 얻기 원하는 용병들이 많이 몰려와 있어서 북적 북적 거렸다. 국경 지역이니 상인들이 많이 몰린 것은 둘째 치고 그 상인들이 고용하는 용병들의 숫자라든가 그 용병들이 내 뿜는 분위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렇게 상인들이 거금을 들여가며 실력 있는 용병들을 그것도 많은 수의 용병들을 데리고 있는 이유는 이 곳 세 국경의 국경선이 되어 주고 있는 게덴 산맥의 끝자락에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덴 산맥은 레스틴 왕국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높다란 타이백 산맥으로 부터 나의 레어가 있는 텐지 골짜기를 시작으로 레스틴 왕국과 에스라 왕국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켈튼 연합국에 다다라 그 끝을 보이는 산맥이었다. 그러나 그 산맥은 길기만 무척 길었지 타이백 산맥으로 부터 뻗어 나올 때의 높고 험준한 모습은 두 왕국 사이를 가로 지를때 부터 줄어들어 그 끝에 가서는 산맥 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듯한 낮은 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골짜기가 깊숙하고 또 널찍하고 평평한 구릉이 많아 넘어다니기 쉬운 반면 동물들이나 몬스터들이 서식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같이 갖추고 있기도 했다. 이 몬스터들이 그 산을 넘어다니는 사람들을 습격 하기도 하고 겨울이나 자연 재해로 인해 식량이 부족한 경우에는 산 근처에 있는 도시들을 습격 하기도 하건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세 국가의 국경이 맞대고 있는 지역이라 어느 한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몬스터들을 몰아내기는 힘든 곳이었기에 세 국가에서는 몬스터에 대한 일을 모른 척 하고는 이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나 넘어다니는 사람들에게 그 위험을 떠넘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살기 좋은 지형을 같춘 이 곳은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국가들의 태도 때문에 몬스터들에게는 더욱 더 번성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몬스터들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 류미르와 세이몬과 나는 아무것도 몰라 무서워 하지 않는 소브로를 데리고 산을 넘었다. 그리고 산맥을 가로 지르는 길을 얼마 올라가기도 전에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달려든 몬스터들을 보고 류미르와 세이몬이 가쁜하게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소브로가 기절해 버려서 우리는 반나절 밖에 걸어가지 못하고 자리를 잡고 야영을 해야 했다. "쳇, 보기보다 담력이 약한 놈이쟎아?" "너무 그러지 말고 좀 봐줘라 세이몬, 오늘 처음 몬스터를 봤다쟎아." 세이몬이 아직도 기절한 상태로 나무 그늘에서 뻗어 있는 소브로를 보고 투덜 거리자 류미르가 소브로를 두둔해 주었다. "야, 류미르. 소브로를 두둔 하는 건 좋은데 네가 스프를 젓기로 한 이상 그건 잘 하고 있어야지. 그렇게 가만히 있다간 스프 눌어 붙는단 말야." 이렇게 된 거 점심이나 해 먹자고 모닥불을 피워 그 위에 스프가 담긴 남비를 얹어 놓고 류미르에게 젓기를 시킨 뒤 다른 불 위에다가 후라이 팬을 얹어 놓고 팬 케익을 굽고 있던 나는 류미르가 세이몬에게 참견 하면서 젓고 있던 길다란 나무 국자를 멈추자 잔소를 했다. 내 잔소리로 인해 얼굴이 약간 붉어지면서 헛기침을 두어번 한 뒤 다시 스프를 젓기 시작한 류미르를 보고 낄낄대는 세이몬을 향해 나는 다른 지시를 했다. "야, 우리는 요리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마족! 넌 이 물통 가지고 가서 물이나 떠와." 세이몬이 투덜 투덜 대면서 물을 떠왔을 무렵 우리의 요리도 거의 완성이 되어서 나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소브로의 얼굴에 차가운 물을 약간 튀겨서 그를 깨웠다. "그만 자고, 이제 일어나서 밥 먹어. 이렇게 여행할 때 일수록 식사할 수 있을 때 충분하게 해야 해." 소브로는 헬쓱하게 질린 얼굴로 내가 시키는 대로 모닥불 가로 와서 앉았지만 내가 건내주는 스프를 받아 들기만 했을 뿐 먹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류미르가 소브로를 향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억지로라도 먹어. 너는 이다음에 기사가 될거쟎아. 기사가 되면 이런 일도 많이 볼텐데 몬스터 좀 봤다고 식사도 못하면 나중에 어떻게 훌륭한 기사가 되려고 그래?" "오늘 몬스터란 것도 처음 보았고, 그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것도 처음 봤어요." 질렸다는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난 첨 몬스터를 봤을 때 저렇지는 않았다.' "충격이 컸나 본데, 그래도 뭐 좀 먹어두는 게 좋을거야. 지금 그렇게 안 먹으면 정신적으로도 안 좋은 상태에서 몸까지 허약해 지면 어떻게 기사 학교에 입학 할꺼야? 안그래? 이럴 때 일 수록 이를 악물고서라도 네 몸은 챙겨야지." 재차 그를 권유하는 류미르를 소브로는 힐끗 쳐다본 다음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스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가로 가져갔다. 그 때 세이몬이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열심히 퍼 먹던 스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느 한 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무슨 일인지 알고 있었지만 세이몬이 알아서 일어난 데다가 스프를 놓고 일어서기 귀찮아서 그냥 무시하고는 스프를 계속 떠 먹고 있었다. 그러나 소브로를 열심히 설득 하느라 어떤 기운을 느끼지 못한 류미르나 겨우 겨우 몇 숟가락 째 스프를 떠 먹고 있는 소브로는 영문을 모르는 채 그런 행동을 하는 세이몬을 이상하게 쳐다 보았다. 그러다가 곧 류미르도 어떤 인기척을 느꼈는지 단검을 허리에서 빼 내어 손에 들고는 주의 깊은 눈으로 숲 속을 노려보았고 마침내 나도 스프와 팬케익을 다 먹었기에 그릇을 내려 놓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숲을 향해 말했다. "거기, 그렇게 숨어서 보면 모를 줄 알아? 그만 나오는게 어때? 우리 도망 안갈 테니까..." ----------------------------------------------------- 점점 게을러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게을러 지다간 돼지가 될 텐데... 빨리 정신을 차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 번 호 : 12840/12851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01일 22:25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9화 남의 집 털기... (3) │ └───────────────────────────────────┘ 나의 무덤덤한 말이 끝나자 마자 숲 속에서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인영이 수풀을 헤지면서 앞으로 나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잔뜩 긴장을 해서 딱딱하게 굳어진 소브로와는 달리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나는 느긋하게 우리 앞에 나타난 두 명의 사람을 어 보았다. 그 둘은 둘다 키가 우리 중 제일 큰 류미르 보다 10cm 는 더 커보였다. 아마 180cm 가 넘는 키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옳을 정도로 큰 키였다. 거기에 딱 벌어진 어께에 잘 발달된 근육이 몸에 쫙 달라 붙는 티셔츠를 통해 잘 볼 수 있었고, 둘 다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검을 다루는 사람들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은 흔히 볼 수 있는 짧은 갈색 머리에 보라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거친 금발 머리를 덥수룩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의 눈빛이 냉정하고 날카로운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은 비싸보이지는 않지만 무척 실용적인 두터운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날씨가 더워서인지 어깨 뒤로 제쳐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 들의 신발이 무릎 바로 밑에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라는 것과 가죽 혁대에 매어져 있는 서너개의 단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척 오래되어 보였지만 잘 손질되어 있는 가죽 갑옷 이었다. "용병인가?" 꺼내 들었던 단검을 다시 허리춤에 차면서 류미르가 중얼거렸다. "어이, 이거 식사를 방해해서 미안하구먼?" 그 둘 중 덥수룩한 금발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가 싱긋 웃으면서 말을 건냈다. 그들은 우리가 척 보기에도 20대 후반 아니면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도 우리가 자신들 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알고는 초반이라도 반말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초면에 반말을 해서 기분이 나쁜건지 아니면 식사를 방해해서 기분이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찡그린 인상으로 단검은 집어 넣었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지 않은 눈으로 그들을 조심스레 바라보며 류미르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지..." 이런 일에 보통 류미르가 제일 먼저 앞에 나서서 우리를 대표로 이야기를 했기에 세이몬은 자리에 도로 주저 앉아서 스프 그릇을 집어 들고는 다시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스프에 가 있지 않고 그 들을 조심스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 "아, 너무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마. 우리를 소개 하자면 나는 마틴 이라고 하고 이 옆의 과묵한 친구는 글랜이라고 해. 성은 없구... 그리고 우리는 척 보면 알 수 있듯이 용병이야." 자신을 마틴이라고 하는 금발머리의 사내가 이렇게 순순히 자신들을 소개하자 류미르는 우리를 소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지 약간 머뭇거리다가 우리를 하나 하나 소개했다. "저는 류미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소브로라고 하고 그 다음은 아힌, 그리고 세이몬이라고 합니다. 우리 셋은 형제이고 이쪽 소브로는...." 여기까지 말했을 때 류미르는 소브로를 바라보면서 잠시 머뭇 거렸다. 아마도 그를 뭐라고 소개 해야 할 지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좀 나고 그렇다고 형제라고 하기에는 잘 생긴 미소년 3명과 형제라고 하면 믿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는 애야." 류미르가 머뭇 거리자 나는 류미르를 거들 목적으로 간략하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갑작스레 말을 열자 잠시 당황하면서 나를 쳐다보던 류미르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 앞에서 당황한 기색을 보인 것을 깨닫고는 그들을 보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연히 알게 된 아이입니다." '그렇게 어색하면 누구라도 그 말을 못 믿을꺼다. 이 멍청아...' 하지만 그 들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듯 마틴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고 글랜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침묵을 지켰다. "아 아, 그래? 만나서 반가워. 그건 그렇고 우리가 왜 너희들 앞에 나타났는지 궁금 하겠지? 실은 우리는 너희들이 이 산을 오르기 전 부터 쭉 보고 있었어. 이렇게 위험한 길을 어른도 없이 애들 4이서만 지나 간다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었거든, 그래서 말릴 겸 뒤를 아 왔는데 너희들은 말을 타고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약간 뒤쳐진 사이에 너희들 몬스터를 만났지? 싸우는 소리가 들리길래 급히 뛰어 왔더니 20 마리의 오크와 몇몇 고블린의 시체들만 눈에 보일 뿐 너희들은 보이지 않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말이지만 그거 너희들이 해치웠니?" 그는 길다란 말을 숨도 쉴 시간 없이 속사포 처럼 쏟아 내었고 그런 그를 질린 얼굴로 쳐다 보던 류미르는 마지막의 그의 질문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류미르의 긍정에 마틴은 무척 놀란 표정이었고 글랜도 무표정한 얼굴이 한 순간이나마 약간 동요했다. "그래? 이럴수가, 너희들 실력이 꽤 높구나?" 그 둘은 잠시 서로 마주 보더니 글랜이 살짝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자 마틴이 다시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꼬마라고 해서 얕봤는데 그게 아니었군. 우리는 혹시 너희들이 그 몬스터들을 처리한 사람이 누구인 지 알고 있나 해서 물어보려고 했던 거였어. 그런데 너희들이 그랬다니 정말 놀라워. 그럼 너희들에게 제안 한 가지를 해도 될까?" 그의 갑작스런 제안을 하겠다는 말에 류미르는 더 긴장했다. "무슨..." "실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들어왔는데 말야. 그 일이 보수가 무척 많기는 하지만 좀 힘든 일이라서 망설이고 있었거든... 그런데 혹시 구미가 있으면 우리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어? 너희들이 다 참여 한다면 인원수 대로 분배를 하도록 하지. 어때?" "그 일은 뭐고 보수는 어느 정도 인가요?" "아, 그건 말야. 이 산 너머에 어떤 부자가 예전에 금화를 운반 하다가 이곳 몬스터들에게 털렸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상인이 용병을 고용해서 자기 금화를 털어간 몬스터들의 레어를 찾아내서 쳐들어 갔는데 워낙 놈들이 강해서 오히려 용병들만 죽었다지 뭐야? 그래서 또 용병들을 보냈는데 또 당해서 오고... 덕분에 거기에 걸린 돈이 무척 올라갔는데 지금은 아예 그 레어 안에 있는 금화를 다 준다고 하더군. 물론 그 몬스터들의 목을 가져와야 하겠지만 말야." 그가 거기까지 말하자 무척 흥미가 생긴 듯한 류미르가 물었다. "그 몬스터들이 뭔데요?" "응, 가고일 떼라고 하던 걸?" '가고일? 가고일이 그랬단 말야?' 나는 순간 그들을 의심했고 나 뿐만이 아니라 류미르도 그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 보았다. "어이, 그렇게 의심스럽게 보지 말라구. 가고일이란 놈들도 꽤나 보석을 좋아하고 가끔 사람도 덥친다고. 사람이 그들 눈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밖에 안 보일걸?" 그의 말이 맞기에 나는 어느정도 그의 말에 수긍하였다. "어때? 괜찮지 않아? 원래는 나도 이 녀석도 그 제의를 거절하려고 했는데 아까 쓰러져 있는 몬스터들을 보는 순간 이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더라고." 마틴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우리의 응답을 기다린 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옆에 서 있던 자신의 두 팔로도 껴안지 못할 굵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섰다. 글랜 또한 마찬가지로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 그늘을 찾아 그 곳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들이 그렇게 우리의 응답을 받기 위해 우리가 의논할 시간 동안 기다리겠다는 행동을 취하자 류미르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그 동안의 여행 동안 특별한 일이거나 아니면 단체로 취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거의 내가 독선적으로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들이 제의하는 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몬스터를 처리하는 일은 비록 나에게는 손 쉬운 일이지만 귀찮은 일이기도 했고 현재 나는 돈이 그렇게 궁한 상태는 는 커녕 엄청난 부자인 데다가 남의 의뢰로 일을 한다는 것 자체도 맘에 안들었다. 그래서 일언 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싫어!" 평소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세이몬도 별 다른 반대 없이 수긍하는 표정이었고 류미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나 정작 일행 취급도 안 하고 짐짝 취급 했던 소브로가 열성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요." 우리랑 여행해 오면서 우리가 물어보기 전에는 절대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도 않았고 말 수도 적었던 그가 갑작스레 우리의 결정에 제지를 가하자 우리는 의아해 졌다. "왜 그래?" 대표로 그 아이와 가장 많은 말을 했던 류미르가 물었다. "저기요, 그 의뢰 받아들이면 안될까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도와드릴께요. 그러니까..." 그는 무척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의 표정을 보고는 나는 그의 속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주인 집에서 비싼 물건을 슬쩍 해왔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물건을 제 값을 받고 팔기는 어려울 테고 또 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의 수업료가 얼마인지 모르는 상황에다가, 그 학교를 다니게 되면 자신의 생활비도 들어갈 테니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그는 노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자신은 이번 일을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뭔가 심부름이라도 해서 조금이나마 수입을 나눠 받길 원하는 눈치였다. [연재] 아린 이야기 - 19화 (4) ┌───────────────────────────────────┐ │ ▶ 번 호 : 12865/12898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02일 21:47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9화 남의 집 털기... (4) │ └───────────────────────────────────┘ 그러나 그의 속을 짐작하고 또 이해까지 한다고 해도 그 일이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내가 계속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앉아있자 소브로는 그 애절한 시선을 류미르에게 돌렸다. 한참이나 그 시선을 받고 있던 류미르는 결국 견딜 수 없었던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이봐 아린, 물론 그 일이 귀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별 어려운 일도 아니쟎아. 그리고 이왕 소브로를 도와 주기로 한거 조금만 더 도와주자. 우리가 그에게 그냥 돈을 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러는 것 보다는 소브로가 무슨 일을 해서 그 댓가를 받게 한는게 더 좋지 않을까? 그리고 세이몬 너도 이 곳에 와서 몬스터를 만나서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쟎아. 그러니 몸도 한번 풀겸 이 일을 받아들이는게 어때?" 류미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나는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류미르의 말이 좀 억지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브로를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류미르가 아니라 바로 나였는데 그런 나는 냉담하고 오히려 류미르가 나서서 도와주길 바라자 솔직히 좀 찔렸던 것이다. 슬쩍 세이몬을 바라보니 그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눈치였다. 그냥 그 일을 거절해도 좋고 또 받아들여 한 바탕 싸워보고 싶기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결심을 굳히고 류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래, 까짓거 해보자구. 좀 귀찮긴 해도 우리야 급한 일은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자신들의 실력을 테스트 해보는 것도 좋겠지."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소브로는 펄쩍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그러더니 류미르에게 달려 들어서 손을 부여잡고 몇번이나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돈이 궁했나?' 겨우 자신에게 매달리는 소브로를 떼어놓고 류미르는 용병들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용병들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런 일은 흔치 않은 거라구. 어째든 이걸로 같은 동료가 되었으니 잘 해보자. 이 녀석과 나는 주로 검술을 사용하거든? 그런데 너희는 뭘 할수 있지?" 마틴이 기분 좋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일을 오래 해본 사람 답게 이제 막 동료가 된 우리들의 실력을 물어왔다. "저는 단검을 사용할 수 있고 정령술을 써요. 고급 정령까지도 불러낼 수 있지요. 그리고 아리, 아니 아힌은 우리들 중에서 검술 실력이 가장 뛰어나지요. 마법도 사용할 수 있구요. 그리고 세이몬은 격투술에 능해요. 가장 날쌔기도 하구요." "호오, 아까 그 몬스터들의 상태를 봐서 실력이 꽤 있겠다 싶었지만 정령술에 마법이라니 대단한걸? 그래 이봐 아힌, 넌 몇 서클까지 가능하지?" 나는 그들에게 내 본 실력을 말해주기는 싫어서 조금 낮춰서 말했다. 물론 그 정도라고 해도 이들은 무척 놀랐지만... "5 써클..." "대단하군, 대단해. 그런데 거기에다 검 까지 휘두룰 수 있다는 말이지? 이거 이거 우리보다 실력이 훨씬 좋은거 아냐?" 그러자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던 글랜이 그의 말에 응수했다. 비록 한마디였지만... "그럴지도." 식사를 다 마친 우리는 짐을 챙겨서 일어났다. 새로이 우리 일행이 된 글랜과 마틴에게 식사를 권했지만 그들은 먹었다고 했기에 소브로까지 식사를 마치자 지체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출발했다. 뭐 일행이 되었다지만 저들의 정체가 확실한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거의 침묵을 지켰고 오직 마틴만 활달하게 떠들어 댔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적절하게 맞장구 쳐 주는 사람은 류미르 뿐이었다. 산을 다 넘어 레스틴 왕국의 국경 도시에 도착하자 마틴은 우리를 어떤 큰 저택으로 데려갔다. 그 저택의 주인이 이 일을 의뢰한 사람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로 안내되어 얼마 기다리지 않아 어떤 중년 남자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는 170cm가 넘는 키에 늘씬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서 살짝 달라붙는 바지에 체크 무늬가 있는 조끼가 참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게다가 얼굴도 꽤 준수해서 젊었을 때는 미남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도 살짝 새치가 보이는 짙은 갈색 머리와 거의 검은색 비슷한 남색 눈동자는 중년 남자의 중후한 멋을 풍기는 데 한 몫 거들고 있었다. "그대들이 이번 일을 하겠다고 온 용병들이요?" 그러자 마틴이 나서서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이 나서서 해야 좋을 것 같아서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들은 마틴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리더 자리를 양보했기 때문이었다. "예, 이래뵈도 저히는 용병 세계에서는 알아주는 실력을..." "아, 그만 됐소, 됐소." 중년 남자는 중간에서 그의 말을 끊었다. "이 일을 맡으러 오는 용병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군. 하지만 그들 중에서 살아서 돌아온 자들은 한 명도 없었소. 그 들에게서 참가 비를 받았으면 난 벌써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요." "호, 저희를 불신하시는 모양인데...." "그렇소. 솔직히 요즘에는 이 일을 맡겠다는 용병들이 없어서 당신들에게 맡길려고 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나를 찾아온 용병들 중에서 당신들이 제일 약해보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와 류미르, 그리고 세이몬과 소브로를 봤기 때문에 마틴은 수긍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희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결과를 보셔야 아실 것 아닙니까?" 마틴이 그렇게 까지 말하자 그 중년 남자는 마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왕 맡기기로 한거 더 이상 말은 않겠소. 당신들이 할 일은 알고 있을거요. 내가 가르쳐 준 몬스터의 소굴로 가서 그 곳에 있는 몬스터를 없애면 되는 거요. 일을 무사이 끝마치면 그 몬스터의 보금자리에 있는 것들 중 푸른 매의 문장이 있는 상자를 가져 오면 되는거요. 그러면 내가 그걸 보고 당신들이 그 몬스터를 처리했다는 걸 알겠소. 그 뒤에 그 몬스터의 보금자리에 있는 물건은 모두 당신들이 가질 수 있소. 나는 다만 그 몬스터만 받으면 되니까... 질문 있소?" 이 곳에 오기 전에 대충 마틴에게서 들었기 때문에 그 중년 남자의 말은 마틴의 말을 확인시켜 주는 것 밖에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모두 침묵을 지켰다. "좋소. 그럼 계약서에 사인을 하도록 하시오." 용병들이 어떤 일을 맡을때 계약서를 받는 다는 것이 좀 놀라웠지만 마틴과 글랜은 그것이 당연한 일인 듯 태평했기에 우리는 '그렇구나...' 하면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마틴은 그 중년 남자에게서 계약서를 받아 한번 어본 뒤 류미르에게 한번 보라며 넘겨줬다. 류미르는 그것을 한 번 어본다음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류미르의 손에서 그 계약서를 받아 읽어본 뒤에 마틴에게 넘겼다. 계약서에는 그 중년 남자가 말한 것을 글로 써놓은 것 외에는 더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한가지 맘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몬스터가 뭔지는 나와 있지 않고 단지 몬스터라고만 써 있었다. 그러면 그 몬스터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는 할 말이 없어지는 거였지만 마틴이 가고일 소굴이라고 이야기 해줬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추가로 다른 내용이 있다면 제한 시간은 없다는 것과 그 몬스터를 처리한 후에 이 곳에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기에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용병 세계에서는 신뢰가 무척 중요하기에 계약한 일은 반드시 지킨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계약서에 대표로 사인하는 마틴의 얼굴이 그렇게 비장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연재] 아린 이야기 - 19화 (5~6) ┌───────────────────────────────────┐ │ ▶ 번 호 : 12875/12966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03일 22:03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9화 남의 집 털기... (5) │ └───────────────────────────────────┘ 그와 계약을 끝낸 우리들은 그 집을 나와 여관에 하루 밤을 묶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중년 남자가 가르쳐준 곳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가 국경 대신으로 사용되는 산맥으로 올라가서 좀 더 깊고 길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뭐 몬스터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서 숲 속으로 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니 만큼 우리는 언제 어디서 몬스터들이 튀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한 상태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우리의 비밀을 한 가지 밝힌다면 세이몬과 나, 그리고 류미르가 여행할 때는 길 가나 숲에서 노숙할 때 불침번을 세운 적이 없었다. 단지 번갈아 가면서 한 명씩 자신의 기운을 억누르지 않고 풀어 놓는다면 그 기운이 우리 주위를 감싸면서 보호를 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거창하게 방어벽을 형성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드러내는 드래곤의 기운과 세이몬이 드러내는 마족의 어두운 기운이면 몬스터든 들 짐승이든 두려워 하면서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하물며 곤충들도 다 우리 주위에서 벗어 났으므로 우리는 노숙 할 때는 모기 한번 안 물리고 아침에 깰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류미르는 그런 기운이 없는 대신 자신과 친한 정령들에게 부탁하거나 아니면 엘프의 능력으로 결계를 치곤 했었다. 우리가 소브로와 노숙할 때는 그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기에 안심하고 그가 있으나 없으나 평소 하던 대로 행동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래도 노련한 용병들과 있다보니 나와 세이몬은 자신들의 기운을 각각 최대한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몬스터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우리는 긴장하면서 주위를 살펴야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목적지인 몬스터의 소굴에 도착할 때 까지 우리는 처음에 몇 마리를 만난 거 외에는 더이상의 몬스터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것도 처음에 만난 트롤들은 마틴과 글랜이 나서서 처리했기에 우리는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되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몬스터 소굴로 가까이 가는데 몬스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동감이야, 그리고 더욱 이상한건 풀벌레 소리도 안 들리고 곤충 한마리 안보여." 앞장 서서 길을 가던 마틴과 글랜이 나눈 말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왠지 묘한 느낌이 드는 걸 느꼈다. 어딘가 왠지 익숙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것이 뭔지 알아내지 못한 나는 뭐라고 할 수는 없어서 그냥 묵묵히 일행을 따라갈 뿐이었다. 점심을 간단한 빵과 육포, 그리고 물로만 때우고 우리는 다시 행진에 행진을 거듭하여 날이 어둑어둑 해질 때 쯤 되어서야 저녁을 먹기 위해 좀 넓은 장소를 찾아 앉았다. 이렇게 몬스터들이 많다고 알려진 곳에서는 요리를 하는 것은 위험했기에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육포와 딱딱해진 빵으로 저녁을 때우고 마른 나뭇가지를 잔뜩 모아다가 불을 지폈다. "이게 뭐야? 이걸로는 배도 안 찬다." 점심과 저녁을 내내 이런걸로 허기를 때우다 보니 세이몬이 화가나서 투덜 거리자 소브로는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했고 그걸 본 류미르가 세이몬을 다독 거렸다. "조금만 참아. 이번 일만 끝나면 또 다시 맛있는 걸로만 먹을텐데 뭐." 밤이 되어 우리는 그나마 모닥불에 뎁힌 물로 차를 한 잔씩 마시고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리고 서로 한명씩 돌아가면서 불침번 까지 서야 했기에 세이몬는 더욱 더 부르퉁 해졌고 그런 그를 나와 류미르가 번갈아 가면서 달래야 했다. 하지만 세이몬이 너무 부루퉁해 하니까 마틴과 그랜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아마 이런 일을 처음 해 본 철부지로 생각 했는지 괜히 데리고 왔다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다.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다음 날 우리는 또 빵과 육포, 그리고 과일 한 개씩 먹고 출발했다. 그렇게 이틀을 더 가서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던 목적지 까지 갈 수 있었다. 그 곳은 높은 언덕 밑에 바위로 바치고 있는 입구는 높이가 2m는 됨 직해 보이는 커다란 동굴이었다. 입구 주위에는 꽤 넓은 공터가 있어서 날아다니는 동물들이 산다면 드나들기 꽤 좋게 되어있었다. 그 생각 까지 했을 때 나는 뭔가가 또 떠오를 것 같았는데 그게 뭔지 고민하기도 전에 마틴이 나를 불러서 잊어먹고 말았다. "아힌, 넌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지? 그럼 저 동굴 안을 공격해봐. 얼마나 튀어나오는지 보자구." 나는 그에게 알았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고 나머지 애들은 뒤로 좀 떨어져서 각자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고 입구만 노려보고 있었다. 소브로는 이 곳에서는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좀 떨어져 있는 바위 뒤에 숨어서 눈만 빼꼬미 내밀고 있었다. 나는 동료들이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문을 외운 뒤 - 그들 앞에서 시동어만 외칠 수 없었다. - 크게 시동어를 외치며 불 덩어리를 동굴 안으로 집어 넣었다. "파이어 볼!" 3 클래스의 마력이 담긴 농구공 만한 불덩어리가 내 손에서 튀어나와 동굴 안으로 날아들어가 큰 폭발음과 함께 번쩍하는 밝은 빛을 뿌렸다. 이제 나올 것이라 예상한 나는 동료들이 있는 뒤쪽으로 냅다 뛰었고 동료들은 여차 하면 튀어 나갈 수 있는 자세로 더욱 더 자신들의 무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나 좀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예상하고 있던 가고일 떼가 나오지 않아 의아하게 여기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거야?" "혹시 안에 아무것도 없는거 아냐?" "그럼 그냥 들어가볼까요?" "안돼. 위험해." "그럼 어쩌죠?" "다시 해보는 수 밖에. 아힌, 부탁해." 마틴의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5 클래스의 마력을 담은 파이어볼을 날렸다. 이번에야 말로 몬스터들이 튀어 나오겠지... 하고 긴장하고 있는데 역시 가고일은 커녕 박쥐 한마리 튀어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다른 일이 일어났다. ┌───────────────────────────────────┐ │ ▶ 번 호 : 12929/12966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04일 22:20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9화 남의 집 털기... (6) │ └───────────────────────────────────┘ "크아아아~, 이번엔 어떤 간뎅이가 부은 녀석들이냐~" 너무나 익숙한 위압감과 압력이 담긴 목소리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싶었다. '이 목소리에 실린 느낌은...' 그건 할아버지께서 화가 나셨을 때 느껴봤던 그 느낌과 비슷했다. 물론 그것 보다는 훨씬 위력이 약했지만... "드래곤..." 마틴이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말을 증명이나 해 주듯이 우리 앞 공터에는 밝은 빛이 한번 번쩍 하고 사라진 순간 드래곤이 나타나 우리를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엄마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 물론 약간 작은 느낌이 있었지만 - 드래곤이었다. 엄마와 다른 점이라면 그의 온 몸을 뒤덥고 있는 비늘은 칠흙같이 검은 색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 친 마틴과 글랜은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고 류미르와 세이몬은 그나마 겨우 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를 한 동안 살기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 드래곤의 주위에 조용히 흐르고 있던 마나의 흐름이 갑자기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을 느낀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눈치채고 재빨리 내 앞에 서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을 끌어 당기고 온 몸에 있는 마나를 가능한 많이 끌어모아 제일 두꺼운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와 동시에 드래곤의 입에서는 드래곤 최강의 공격 무기인 검은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무서운 공격력을 자랑하는 브레스를 정면으로 막은 나는 악물고 있는 입사이로 신음성을 흘렸다. 아무리 내가 드래곤이라지만 나는 겨우 성룡이 된 지 1년도 채 안되었고 브레스를 내뿜고 있는 블랙 드래곤은 거의 3000살 정도는 되어 보였기에 그 힘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나마 그 드래곤이 우리를 얕보아서 브레스를 약하게 뿜어서 내가 견딜 수 있었지 그가 있는 힘껏 브레스를 뿜었다면 그 브레스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겨우 겨우 방어막을 지탱하고 있을 무렵 천천히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브레스가 약해졌고 나중에 가서는 멈추어져 그제야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여유가 생긴 나는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내 주위는 그 브레스의 엄청난 능력을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듯 마틴과 글랜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내가 방어막을 형성한 자리를 제외한 우리 주위의 공터는 2m 정도나 되는 깊이의 구멍이 나 있었다. "하. 하. 하. 하." 그걸 본 나의 등 뒤로 식은땀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제법 능력이 있는 인간이로군.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지. 하지만 거기까지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어느새 우리가 그의 브레스를 막은 걸 알아챈 드래곤이 나를 노려보면서 인간의 언어로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뿐 다시 브레스를 뿜으려는 듯 그 주위에 있는 마나가 급격한 빠르기로 움직였다. "잠깐만요!" 다급하게 내가 외치자 드래곤은 잠깐 멈칫했다. 아마 마지막 유언이라도 들어주려는 태도 같았다. "뭐지? 어려보이는 인간인데 대단하군... 나에게 말을 하다니... 그점을 높이 사서 마지막 유언은 기꺼이 들어주마."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죽을 생각은 눈꼼만치도 없었다.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 선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곳의 지배자이신 드래곤이시여. 저는 이곳이 당신의 영역인줄 몰랐습니다. 저는 칼 세실리안의 딸 칼 아시리안이라고 합니다. 아직 성룡이 된지 1년이 채 안되어 아무것도 모르고 한 실수이오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칼 아시리안?" 그 드래곤은 무척 놀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있더니 곧 그의 온 몸에서 검지만 밝은 빛이 (말이 이상하군...) 뿜어져 나오며 차차 작아지더니 빛이 사라지자 그 곳에는 검은 장발을 늘어뜨린 20대 후반의 검사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레드 일족인가?" "예." 그는 턱을 만지작 거리는 오른 손의 팔꿈치를 왼 손으로 바치고는 뭔가를 생각 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흠, 하긴 레드 일족에서 2000년 만에 아이가 탄생했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지. 그게 너냐?" "예." 그에게서 완전히 살기가 사라지자 나는 안심을 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흘끗 류미르와 세이몬을 돌아보니 그들은 아직까지 어벙벙한 상태로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에게 상황을 인식 시키는 것 보다 이곳 영역의 주인인 블랙 드래곤에게 사과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나는 일단 그들을 모른척 했다. "성룡식을 치른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다고?" "예. 성룡식을 치르자 마자 인간세상을 구경하려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네가 지금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 여긴 왜 온거지? 아까 내 레어안에 파이어 볼을 던진게 너지?" "하하하..." 나는 난처한 얼굴로 헛 웃음을 흘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가 별로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자 용기를 가지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그러니까... 어떤 인간한테 속아서..." "속아?" 그가 이제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 예. 정말 면목 없습니다. 어떤 인간이 글쎄 여기가 가고일이 집단으로 서식하는 동굴이라지 뭡니까? 그 가고일들이 자신의 보물을 뺏어 갔다고 해서 그걸 찾아달라고 저와 제 동료들에게 의뢰를 했거든요. 그래서 찾아온겁니다." "흐음, 사정은 알겠는데 여기 오면서 내 기운을 느끼지 못했나?' "아뇨, 그게 그러니까... 에휴,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익숙한 느낌이 드는게 좀 이상했습니다. 그게 드래곤의 느낌인지 일찍 깨달아야 했는데 아까 뵙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쯧쯧, 아직 철부지로군..." "죄송합니다." 나는 그말밖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의 얼굴은 붉어지면서 고개가 점점 밑으로 숙여졌다. 하긴 내가 잘못 했는데 그가 비난을 하든 비웃든 나는 뭐라고 할 수는 없는거였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어린 드래곤이었고 그는 나보다 한참은 연장자였으므로 그가 나를 너그럽게 봐 준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몇 번 찾아온 놈들을 다 너를 여기로 보낸 놈이 보낸건가?" 그가 말을 돌리자 나는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럴겁니다. 그가 이 곳에 용병을 몇 번씩이나 보냈다고 했거든요... 물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당연하지. 감히 내 레어에 쳐들어 오는 놈들을 내가 살려 보낼것 같나?" "아니오." "그럼 이제 너는 어쩔꺼지?" "당연히 그 놈을 찾아가서 저를 농락한 댓가를 몇 배로 치르게 할겁니다. 빠드득~" 그 자식을 생각하자 솟구치는 화를 억제하지 못한 나는 주먹까지 불끈 쥐어보이며 단어 한자 한자를 힘주어 말한 뒤 이빨까지 갈았다. "그래. 네가 나 대신까지 복수를 해준다면 나도 이번 일은 너그럽게 용서해주지." 그가 용서해 준다고 말하자 나는 눈이 번쩍 뜨여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뭘... 그럼 이만 가보거라. 솔직히 처음 유희를 나온 어린 동족에게 뭔가 대접을 해 주고 싶지만 네가 지금 유희중이라 안 하는게 좋을 것 같구나. 어서 가서 네 동료를 치유해주고 내 몫까지 그 못되고 간뎅이가 부은 인간에게 복수를 해주도록."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고 그는 웃는 낯으로 그 인사를 받은 뒤 자신의 레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제야 세이몬과 류미르가 생각 난 나는 아직도 땅에 주저앉아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야, 이제 일어나." "아린, 너... 드래곤이었냐?" 류미르가 놀라서 둥그렇게 커진 눈으로 나를 보며 겨우 겨우 입을 열었다. "응, 그러면 안돼냐?" "하하하, 세상에나..." "뭘 그래? 너도 하이 엘프라고 밝혀졌을 때 내가 너처럼 놀라디?" "하이 엘프하고 드래곤하고 같냐?" "그럼 뭐가 다른데? 단지 드래곤이 하이 엘프보다 좀 더 강한 종족일 뿐이지 둘 다 인간은 아니쟎아. 그런 타 종족이 인간 세상을 구경하다가 만났는데 그게 뭐?" "하긴 우리 일행에는 마족도 있으니까..." 류미르가 세이몬을 돌아보면서 피식 웃자 세이몬이 벌컥 화를 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거야? 내가 어때서..." "아니... 아무것도 아냐." "흥. 아, 그런데 아린 드래곤이란게 모두 저렇게 강해? 아까 그 드래곤은 나보다 훨씬 강한 것 같던데 너도 저 정도야?" "아냐. 저 드래곤은 아마 나보다 3000살은 많을껄 뭐.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만큼 강해지겠지만 지금의 내 힘은 저 드래곤의 힘에 훨씬 못 미쳐. 하지만 저 드래곤보다 더 나이가 많은 드래곤은 그 나이만큼 힘이 더 강하지..." "호, 드래곤은 나이가 많으면 많아질 수록 힘이 강해지는 구나..." 세이몬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둘 다 그만 일어나. 이제 그 모오오옷~된 녀석에게 복수를 하러 가야지. 감히 날 속여서 드래곤의 밥이 될 뻔하게 만들어? 이 빛은 꼭 갚아주겠어." 내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말하자 류미르와 세이몬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이 하이엘프를 속이다니..." "마족의 무서움을 보여주겠어." "아, 그런데 소브로는?" "맞다 소브로..." "저기 있었지?" 그제야 소브로가 생각 난 우리들은 허겁지겁 소브로가 몸을 숨겼던 바위 뒤쪽으로 가봤다. 다행이도 그 바위가 브레스르 맞은 지점과 좀 떨어진 데다가 그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에 별 달리 다친 데는 없지만 브레스가 남긴 강한 여파에 의하여 뒤로 좀 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에 가벼운 타박상을 입고 기절해 있었다. "다행이군... 다친데도 없고 또 기절해 있어서 우리 말을 못 들었을 것 같아. 우리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그를 살펴 본 류미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자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번 호 : 12957/12964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06일 23:42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19화 남의 집 털기...(7) │ └───────────────────────────────────┘ 우리는 우선 소브로를 여관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일(?)을 해치우는 동안 깨어나면 안돼었기 때문에 그에게 좀 강력한 수면 마법을 걸어 놓은 뒤 발걸음도 당당하게 그 못되고 얄밉고 가만 두지 않을 상인의 집으로 갔다. 우리가 그 집으로 가서 집사에게 안내되어 응접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에 놀라서 얼굴이 상기 된 그 상인이 나타났다. "그래, 너희들이 돌아 왔다는 소리를 듣고 좀 놀랐다. 제일 약하다고 생각 한 용병단이 이 일을 해결하다니... 아니, 그런데 너희 대장은 어디갔지?" 그러자 류미르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었습니다. 시체도 찾지 못할 정도로 아주 완전히..." 그 상인은 우리가 별 달리 침통해 하지 않자 자신도 애도의 뜻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덤덤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됐군... 한창 젊은 나이에..." 그의 그런 뻔뻔한 얼굴에 화가 치민 내가 한마디 했다. "네 녀석이 죽게 만든 거 아냐?" 갑작스런 나의 화난 어조에 그가 좀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곧 경륜이 많은 만큼 빨리 침착함을 찾아 얼굴에 웃음까지 띄우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뭐 덕분에 너희들의 몫이 그만큼 커진게 아닌가? 더욱이 이제 너희들은 드래곤 슬레이어로 이름을 날릴 텐데..." 그의 뻔뻔한 말에 나는 더욱 더 화가 치밀었다. "흥, 그럼 그 곳에 있던 몬스터가 가고일이 아니라 드래곤이란 걸 알고 있었군?" 그러자 그의 미소는 더욱 더 깊어지며 능글맞게 말했다. "부인하지는 않아. 하지만 계약서에도 나와 있지만 나는 거기에 몬스터라고 썼지 어떤 몬스터인지 말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계약에 응한 건 너희들이야." 그가 그렇게 까지 말하자 세이몬까지 어느정도 상황이 이해 되었는지 우리 셋은 살벌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의 눈빛에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야. 계약서는 어디 있지? 확인해 볼게 조금 있어서..." 나는 그의 의도가 뭔지 곧 눈치 챘지만 일부러 모른 척 하고는 정직하게 말했다. "계약서? 아, 그러고 보니 마틴이 죽을 때 같이 사라졌군..." 그러자 그의 상인의 눈빛은 음흉하게 빛났다. "호오, 이걸 어쩌나? 계약서가 없으면 그 드래곤 레어에 있을 우리 물건이 너희들의 것이라는 걸 증명할 수가 없는데..." 그가 자신의 속셈을 다 드러내자 나는 차갑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상관 없어. 우리는 그 드래곤을 죽이지 못했거든?" 그러자 그 상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그의 얼굴이 점차로 일그러졌다. "뭐야? 그럼 여긴 왜 온거지?" 나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기분 좋게 바라보면서 우리가 여기 온 이유를 친절하게 말해줬다. "그야 우리를 그런 사지로 몰아 넣은 댓가를 받으려고 왔지. 이자까지 듬뿍 말이야... 하지만 대신 우리를 속인 댓가는 감해 주겠어. 이거야 말로 밑지는 장사 아냐?" 그 상인은 나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더니 내 말이 끝나자 코웃음을 쳤다. "하, 정말 웃기는군. 순진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일도 제대로 처리 못한 주제에 댓가를 받겠다고? 누가 줄 것 같아? 여기!" 그가 고개를 돌려 문 쪽으로 소리치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이 보이는 용병들 다섯명이 우르를 몰려 들어왔다. "치워버렸!" 그 상인은 용병들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자 더 볼 가치도 없다는 듯이 우리를 보지도 않고 손짓했다. 그러자 그 용병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들고 우리에게 덤빌 자세를 취했다. 그 때 내가 아까 그 상인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했다. "하, 정말 웃기는군. 순진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비록 드래곤을 이기진 못했지만 드래곤이랑 맞대면 해서 아무 상처 없이 살아 돌아온 우리들을 치겠다고?" 내 말을 들은 용병들은 잠시 멈칫 하면서 머뭇 거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나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기에 머뭇 거리며 서 있는 그들을 향해 가차없이 마법을 날렸다. "헬 파이어!" 거의 6 클래스에 해당하는 거대한 불꽃이 용병들을 덥치자 그들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정면으로 그 불꽃을 맞았다. 그때 나는 그 상인을 써 먹을 곳이 있었기에 그 상인만은 죽이지 않고 나두었다. 대신 이 곳에 오기 전에 이야기가 된 류미르가 바람의 중급 정령을 불러내어 그 상인을 우리 뒤로 끌고와서 묶어 두었다. 우리를 처리하기 위해 이 곳에 들어 온 용병들이 불에 타들어가면서 외친 비명소리에 1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용병들이 우리가 있던 곳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 마자 문 앞에서 타죽어가는 용병들을 보고 흠칫 놀라며 물러섰으나 살아서 문을 나갈 수는 없었다. 세이몬이 자신의 마력을 마음 껏 발휘하며 그들을 모조리 저세상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법을 쓰지 않고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를 용병들의 머리에 직격시켜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본 상인의 눈은 튀어 나올 듯이 커졌고 입까지 벌어졌지만 너무 놀라서 그런지 그의 입에서는 신음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나의 헬 파이어에 맞은 용병들이 거의 다 타들어갈 무렵 살 타는 냄새를 견디지 못한 내가 바람을 일으켜 우리가 있는 응접실에 나 있는 창문의 유리를 다 날려 버렸다. 창문에 달린 유리가 바깥으로 날려가 바닥과 부딧히며 내는 요란한 소리에 7명의 용병들이 또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도 세이몬의 마력탄에 의하여 모두 생을 마감해야 하는 불쌍한 운명들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우리가 응접실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 응접실을 방문한 50여명의 용병들이 운명을 달리 하자 그제야 그동안 계속 소파에만 앉아 있었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자 류미르와 세이몬도 의아해 하며 자신들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들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한 마디 했다. "이제 슬슬 댓가를 받아야지." 원래 나는 이 집에 들어오자 마자 마법을 날리면서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다 부숴버릴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 집에 오는 동안 이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경비대를 본 순간 마음을 바꿨다. 이 도시는 레스틴 왕국의 국경에 접해 있는 도시여서 도시 경비대 말고도 국경을 지키는 군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란을 일으키면 경비대 뿐 아니라 군사들 까지 달려올거였다. 그렇게 까지 큰 소동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계획을 바꾸어 조용히 처리하기로 했다. 대신 우리의 모습을 본 상인의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숨을 끊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대한 저택의 1층 부터 끝 층까지 온 방을 하나 하나 다 뒤져 값비싼 물건들을 모조리 챙겼고 그 상인의 서재와 침실에 있던 금고를 깨부셔서 그 않에 있던 보석들과 금화들을 모조리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방 들을 돌아다니면서 끌고 다녔던 상인의 목을 몸통과 분리시킨 뒤 많은 용병들의 시체가 쌓여 있는 응접실에 던져 놓고는 그 집의 현관문과 대문을 다 잠궈 준 다음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마 오늘 저녁이나 내일이 되어야 저 상인이 당한 일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야, 빨리 빨리 소브로 깨워."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이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여관으로 도착해서 나는 소브로를 깨울 동안 류미르는 여관에 딸린 식당으로 내려가 음식을 장만했고 세이몬은 여관에 맡겨 놓았던 말들을 끌고 와서 여관 입구에 대기시켜 놓았다. 내가 소브로를 깨워 밑으로 내려가자 그들은 자신들의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여관비를 치르고 우리는 급히 말을 달려 그 도시를 빠져 나왔다. 나중에 들린 소문에 의하면 그 상인의 집에 악마가 들었었대나 뭐라나... ┌───────────────────────────────────┐ │ ▶ 번 호 : 13069/13069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08일 22:19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1) │ └───────────────────────────────────┘ 제 20 화 법 = 정의 (?) 우리 일행이 레스틴 왕국의 국경을 넘은지도 벌써 2주일이 흘렀다. 그 동안 내가 뼈저리게 깨달은 유명한 진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유비무환' 이었다. 이 얼마나 참된 진리란 말인가... 레스틴 왕국은 상업이 그다지 발달한 나라가 아니어서인지 마을과 마을 사이가 켈튼 연합국보다 훨씬 훠얼~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비록 우리가 그렇게 오랫 동안 이 나라 안을 돌아다녀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에 걸쳐온 마을들 중 제일 가깝게 붙어 있는 마을이 3일을 꼬박 (물론 식사시간이랑 휴식시간, 그리고 잠자는 시간은 빼놓고...) 달려서 도착할 수 있었던 거리에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2주일 동안 다녀보면서 거친 마을이라고 해야 고작 3개였다. 그것도 도시는 맨 처음 국경 근처에서 머물렀던 곳을 제외하고는 도시 비슷한 마을도 보지 못했었다. 그러면서도 숲은 왜 이렇게 많고 울창한지 한 마을에서 그 다음 마을로 이동할 때 꼭 한번 이상은 울창한 숲과 그 곳에 살고 있는 몬스터들을 대면해야 했다. 그렇다보니 이 곳을 여행할 때는 며칠 분의 비상 식량을 꼭 준비해 다녀야 했는데 첨에 그것을 모르고 하루치 것도 두끼만 준비하고 (한 끼는 그냥 건너 뛰자는 생각으로...) 출발 했다가 부족한 식량을 숲속에서 구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덕분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식량을 구한다고 산속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간 덕분에 보통 사람들이 걸린 시간의 3배나 걸려서 다음 마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는 항상 일주일치의 식량분을 가지고 다녔기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짐의 절반 이상을 식량들이 차지했다. 그 날도 5일을 길에서 노숙한 뒤에야 어떤 성이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 마을에 도착하자 마자 제일 가까운 여관으로 뛰어들어 음식다운 음식을 배가 터질 때 까지 (보통 오랜 시간 길에서 노숙을 하면 처음 하루 이틀은 몰라도 그 뒤로는 딱딱해진 빵과 마른 고기나 건어물, 그리고 물로만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기에 마을에 도착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식당에 뛰어 들어가 배가 터지도록 먹어댔다.) 먹어댔다. 물론 소브로는 아니었다. 그는 이 나라에 와서 처음 여행할 때 준비한 식량이 다 떨어져 그렇게 힘들게 사냥한 음식으로 며칠을 때워보더니 -바베큐만 며칠을 먹었다고 생각하면 됨- 나중에 마을에 도착 했을 때 우리 못지 않게 엄청 먹어댔었다. 그러나 그의 위는 그 많은 음식들을 다 수용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는지 그는 식사를 마친 뒤 한 시간도 안 되어 배가 아파 여관 침대에서 굴러 다니더니 결국 오바이트와 배탈로 인한 설사, 복통에 밤 새도록 시달렸던 것이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류미르가 나에게 치유 마법을 써 주길 부탁했지만 솔직히 나도 째지거나 부서진 상처를 아물릴 치유 마법은 알고 있었어도 배탈 난 데 대한 치유 마법을 알 지 못했기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간신히 전에 살던 세상에서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민간요법인 손가락 따기를 생각해 내어 시행하였다. 그의 엄지 손가락을 실로 꽁꽁 동여매어 피가 통하지 않게 되어 새카많게 되었을 때 바늘로 사정 없이 손톱 밑의 피부를 콕콕 찔러대었다. 그리고 피가 잘 나오도록 꾹꾹 눌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자그마한 엄지 손가락에서 검은 피가 무척 많이 나오자 세이몬과 류미르는 놀라워 했고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 같아 나는 그에게 잠시 쉴 틈을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그에게 다시 한번 손을 따준 뒤 더이상 검은 피가 나오지 않자 바늘에 의하여 엄청 많이 찔린 그의 엄지 손가락을 치유해 주고 화장실을 수십 번 드나들면서 먹었던 것을 다 배설해서 탈진해 있던 그에게 회복 마법을 써 주었다. 그렇게 내가 고생을 해 주고 밤 새도록 열에 들 뜬 그를 세이몬과 류미르가 번갈아 가면서 옆에서 돌봐준 덕분인지 그 다음 날 그는 그래도 멀쩡하게 걸어서 여관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는 어떠한 일이 있었도 절대 과식을 하지 않았고 마을에 도착하기만 하면 엄청 과식을 해대는 우리를 참으로 불가사이 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제일 먼저 식사를 끝낸 소브로가 우리를 기다리다 못해 지쳐서 먼저 방을 잡아 올라가버렸고 그 뒤로도 조금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배의 포만감을 느껴서 뿌듯한 마음에 후식으로 나온 푸딩으로 입가심을 하는데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니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앞에 높게 쌓여있는 접시들과 우리들을 번갈아 가며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그런 일들을 여러번 격은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어주는 여유까지 보여 주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딴 데로 돌렸지만 그 뒤에 내 시선이 다른 데로 옮겨지면 다시 그 예의 황당하고 놀란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을 돌려 내 옆에 앉아서 오랜 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즐기고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을 바라보니 그들도 이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로 류미르는 붉은 포도주 한 잔을 (저건 순전히 맛을 즐기는게 아니라 멋을 즐기는 거였다.) 우아하게 마시고 있었고 세이몬은 새콤한 빨간 체리를 집어 먹고 있었다. "다 먹었으면 올라가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류미르도 거의 다 마셔가던 잔에 남은 약간의 포도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일어섰고 세이몬도 남은 체리를 두 손 가득히 쥐어 들고서 일어섰다. "으아~ 더워. 도저히 못 참겠다!!" 나는 한 밤중이 되도록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지금 계절은 여름 하고도 그 중순, 가장 찌는 듯이 무더운 계절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한 밤중까지 계속 되는 그 뜨거운 열기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참지 못하고 온 몸이 땀에 축축히 젖은 채로 일어나버렸다. "도저히 못참아. 차라리 밖의 냇가에 가서라도 좀 씻고 와야겠어." 참고로 이야기 하자면 내가 태어난 계절은 초봄이 지나 한창 풀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때였다. 그리고 그때 성룡식을 치른 나는 고룡들을 뵙고 혼자 여행을 하기 시작할 때가 늦 봄에서 초 여름으로 지나가는 시기였으니 그때부터 거의 두달이 지난 지금이 바야흐로 1년 중 가장 더운 계절인 여름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곳 레스틴 왕국은 최 남단에 있다는 사막 부족인 아시드 왕국 다음으로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 국가였으므로 거의 정글에 가까운 울창한 숲이 많았고 겨울이 짧은 온난건조한 국가였기에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곳의 여름은 습기가 많지 않아 불쾌지수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한 여름 밤까지 계속 이어지는 무더위는 종종 열대야 현상까지 만들어내기 때문에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는 데다가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잠을 잘 때 입었던 옷이 땀에 푹 젖어 축축해져 있기 일쑤였다. 그나마 그동안에는 밤이 되면 낮의 무더위를 뚫고 계속 빠른 속도로 여행을 했기 때문에 밤이 되면 지쳐 그 높은 온도에도 불구하고 쉽게 잠이 들었지만 오늘 밤은 약간 피곤해서인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나는 수건과 갈아 입을 옷을 들고 몰래 여관의 창문을 열고 호수나 연못, 하다못해 냇가를 찾기위하여 밤 하늘을 날아 올랐다. ============================================================== 번 호 : 13101 / 13110 등록일 : 2000년 10월 09일 21:54 등록자 : LODEMP 조 회 : 13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 화 법 = 정의 (?) (2) 다행히도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단지 문제가 좀 있다면 이곳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가 살고 있는 듯한 성이 호수와 별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뭐 이곳 까지 병사들이 순찰을 도는 것 같지는 않았고 또 이 한밤중에 성 근처인 이 호수가에서 어슬렁 거릴 간 큰 놈은 없을 것 같아 나는 안심하고 호수 주위를 지키고 있는 듯이 보이는 약간 작은 바위 위에 내가 가지고 온 옷가지와 수건,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올려 놓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낮의 뜨거운 햇빛과 아직까지도 후덥지근한 열기를 받아 물은 아주 따스했다. 하늘에는 아직 모양을 제대로 다 갖추지 못한 보름달이 떠올라 비추고 있어 사방은 환했고, 인적도 없는 데다 숲이 아니었기에 동물들의 기척 또한 없어서 사방은 무척 조용했다. 한 여름밤까지 이어진 나를 잠도 못자게 못살게 굴던 열기를 쫓아보낸 나는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수영을 즐기다가 약간의 욕심을 내어 크게 숨을 들이 마신 뒤 호수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비록 밤이어서 히미한 달빛밖에 물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나에게는 충분하였기에 나는 아무런 꺼리낌 없이 깊숙히 들어갔다. 제일 깊어 보이는 곳이 약 5m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물 밑으로 들어갈 수록 물이 차거워 지면서 나를 향해 계속 밀려 나오는 느낌이 드는 것으로 보아 호수 바닥 어디에선가 계속 물이 솟아나는 곳이 있는 듯 했다. 호수 밑바닥 쪽에서 잠들어 있는 물고기들을 될 수 있는 한 방해하지 않도록 너무 깊숙히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헤엄쳐 다니다가 숨이 약간씩 막힐 즈음이 되어 물 밖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렇게 몇 번을 했을 때 다시 한번 물 밖으로 올라와 거친 숨을 쉬고 있을 때 누군가가 호수가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긴장한 채로 물 속으로 몸을 숨기고 조용히 호수가로 헤엄쳐 가서 귀를 기울였다. 발 소리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사람은 두명인 듯 했다. "아가씨... 밤 산책은 너무 위험합니다." "이 밤중에 이곳까지 오는 사람이 있겠느냐? 걱정 말고 돌아가거라. 나는 호수가를 한바퀴 돌고 들어가겠다." "하지만..." "걱정 말래두...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니 너는 이만 돌아가거라."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지체 없이 소리치셔야 합니다." "그래. 알았다." 약간 늙은 목소리는 몇번이고 더 다짐한 다음에 젊은 목소리의 그 '아가씨' 라는 사람을 두고 혼자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아가씨'는 천천히 내가 숨어 있는 쪽으로 걸어와 달빛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원해 보이는 얇은 천의 푸른 드레스를 입고 짙은 감색의 얇은 숄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에 약간 가느다란 달걀형의 얼굴... 그리고 가느다란 눈썹 밑에는 커다란 짙푸른 눈동자가 수심을 가득담고 있었다. 한 167cm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로는 꽤 키가 큰 편인 그녀는 전체적으로 가는 몸매를 가지고 있는 20살이 되어 보일까 말까 하는 청순 가련형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호수가로 다가 오더니 그 근처에 있는 내가 옷을 올려 놓아 두었던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그런데 너무 생각에 잠긴 나머지 바위 위에 바위가 아닌 다른 어떤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물 속에서 빠져 나갈수도 없게 되어 한참 동안이나 그녀가 어서 가주길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나는 살짝 호숫가에서 조금 멀어진 뒤에 물 표면에 떠올라 일부러 물이 많이 튀겨 큰 소리를 내도록 물을 휘저으며 호수가로 다가갔다.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지만 그녀에게는 빛이 부족했는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어?" 나도 놀란 척 하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나에게 다가왔다. "하하하, 저기 미안하지만 옷좀 주실래요? 보아하니 같은 여자인 것 같지만 그래도 옷을 입지 않고 있으려니..."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쑥쓰럽게 말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부산스럽게 주위를 둘러 보더니 자신이 걸터 앉아있던 바위 위에서 옷가지들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집어 올려 나에게 건냈다. "네거니?" "하하, 예. 고맙습니다." "아니야, 근데 어쩌지? 내가 옷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깔고 앉았는데... 괜찮겠어?" "아, 상관 없어요. 지저분해진 것도 아닌데요..." 나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인 뒤 대충 온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내가 옷을 다 갈아 입을 때 까지 등을 보이면서 뒤돌아 서 있다가 내가 다 갈아입고 옷가지를 대충 챙겨 그녀 옆으로 다가가자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바지를 입었네?" 내 옷차림을 바라보던 그녀가 호기심어린 얼굴로 바라보다가 내가 한 손에는 옷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을 보더니 얼른 손을 내밀어 옷가지들을 받아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내고는 두 손을 사용하여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말리면서 설명했다. "여행중이었거든요..." "여행?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대단하네..." "에이 뭘요. 오늘 이 마을에 도착 했는데 너무 더워서 수영하러 왔어요. 그런데 음..."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 끝을 흐리자 그녀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채고는 말했다. "아, 내 이름은 세레나야. 세레나 모즈크 콘차일." "콘차일이요?" "응, 내 아버지가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님이시지." "그러셨군요. 제 이름은 아시리안 시스파 슈타인, 가족들은 아린이라고 불러요." "그래, 그럼 나도 아린이라고 불러도 될까?" "내가 세레나를 언니라고 불러도 된다면요. 솔직히 전 언니가 없거든요. 그래서 한 번쯤은 언니가 있었으면 했어요." "물론이야. 그런데 성이 있는 걸 보니 귀한 집안 영애인 모양인데 용케 여행을 다니네? 출신이 어디야?" "켈튼 연합국이예요. 그리고 형제들이랑 같이 다니기 때문에 부모님이 허락하신 거구요." "그럼 형제들은 어디 있니?" "지금 여관에 있어요." "저런, 그들이 네가 없어진 걸 알면 걱정하겠구나?" "괜찮아요. 무척 피곤해 했으니까 아침이 되어야 일어날 텐데요. 그러는 언니야 말로 이 야심한 밤에 산책이예요?"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잠시 사라졌었던 수심이 다시 찾아들었다. "응, 그건 집안에 일이 좀 있어서..." 나는 그녀의 시선이 발 끝으로 내려가자 그녀의 팔을 살며시 붙잡으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언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차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어요? 마침 언니를 찾아 온 사람이 있는 걸 보니 이제 성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본데..." 내 말에 놀라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턱짓으로 저 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을 가르켰다. "아가씨..." 아까 그녀를 호수가 까지 따라왔던 그 늙은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약간 작은 키에 통통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그녀의 얼굴에 그늘만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면 인상도 무척이나 좋아 보였을 그런 부인이었다. 나이가 꽤 들었는지 단정하게 모아서 뒤에서 쪽을 진 머리에는 사이 사이 흰 머리가 보였다. "엠마..." 세레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부드러웠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분은..." 엠마라고 불린 중년 부인이 세레나 옆에 서 있던 나에게 시선을 돌리자 세레나가 나의 팔을 잡아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 당기면서 소개했다. "이 아이는 여기서 만난 아이야. 아시리안 시스파 슈타인 이라고 이야기를 하다가 무척 친해졌어." '우리가 그정도까지 친해졌던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우리는 짧은 시간동안 대화를 한 것 뿐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소개하는 대로 잠자코 중년 부인에게 살짝 목례를 보냈다. 중년 부인이 내 이름을 듣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세레나는 흡족한 듯 미소를 띄운 얼굴로 이제 고개를 드는 중년 부인에게 말했다. "엠마, 아린과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 있을 테니까 차와 다과좀 준비해줘요." 그녀의 갑작스런 지시에 중년 부인의 얼굴이 당황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아가씨, 이렇게 늦은 시각에... 저 분의 일행도 걱정 하실텐데..." 그러자 세레나는 걱정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건 내일 아침 일찍 여관으로 사람을 보내면 괜찮을꺼야. 그러니 걱정 말아요." 나도 괜찮다는 듯한 얼굴로 중년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번 호 : 13148 / 13148 등록일 : 2000년 10월 10일 21:56 등록자 : LODEMP 조 회 : 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 화 법 = 정의 (?) (3) 세레나는 나를 성 뒷편에 있는 자그마한 출입문을 통하여 성 안으로 데려가서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여기가 내 방이야." 그녀의 방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비록 자잘한 장식품은 없었지만 벽에 붙어있는 세개의 풍경화는 방 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고 한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세개의 창문에 달려 있는 아이보리색의 얇은 커튼은 방 안을 환하게 만들어 준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아름답네요." 내가 방안을 둘러보면서 감탄하자 그녀가 기분 좋은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보이니? 고마워." 그때 나는 방안 한 구석에 서 있는 사람 키만한 옷걸이에 아직 미완성된 하얀 드레스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니 저건?" 내가 손가락으로 그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하자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다 그 드레스에서 시선이 멈춘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저거? 내 드레스야. 웨딩 드레스지..." "언니의 웨딩 드레스요? 어? 언니 결혼하세요?" 그녀는 방안에 있던 탁자와 같이 있는 의자 중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주저 앉으면서 무감각하게 대답했다. "그래, 일주일 뒤에..." 그녀의 태도는 전혀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의 모습 같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왜그래요 언니? 뭐 안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그녀는 나를 슬픈 얼굴로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좌우로 저을 뿐이었다. "에이, 그런 얼굴로 아니라고 대답하면 누가 믿어요? 그러지 말고... 아, 혹시 이 결혼..." "내가 원한 결혼이 아니지..."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 뒤를 세레나가 씁쓸한 얼굴로 끝맺어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 씁쓸해서 한 동안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레나도 그 미완성된 웨딩 드레스를 노려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잠시동안 방 안에 침묵이 내려 앉았다. 그러다가 돌연 나는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 결연하게 말했다. "도망가요 언니. 내가 도와줄께요. 나, 그정도 힘은 있어요. 그러니까 언니가 하기 싫은 결혼 내팽겨치고 우리와 같이 가요." 그러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나에게 꼭 잡힌 손 하나를 빼내어 내 손등을 살짝 토닥여 주며 말했다. "네 맘은 고맙지만 그럴순 없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대로 언니의 나머지 일생을 불행하게 살꺼예요? 도망간 뒤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라면 걱정 말아요. 내가 도와줄께요." 그녀는 나의 열렬한 반응에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도망치면 아버지 혼자 이곳에 계셔야 하는걸?" "무슨 소리예요? 언니를 강제로 결혼 시키려는 아버지를 왜 생각하는데요?" "아니야, 아버지도 이 결혼을 원하지 않으셔..." 부모님에 의한 강제 결혼을 생각 했던 나는 세레나의 말에 황당해져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세레나가 피식 웃었다. "이건 정말 어쩔수 없는거야..."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문을 살짝 노크했고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어 나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쩔수 없는 강제 결혼이라구?' 세레나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엠마였다. 그녀는 나무 쟁반 위에 찻잔과 찻주전자, 그리고 작은 접시에 과자를 담아가지고 왔다. "마셔, 레몬 홍차라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차지." 엠마가 탁자 위에 찻잔과 접시를 내려놓고 나가자 세레나가 찻잔중 하나에 가득히 찻물을 부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내민 찻잔을 집어 들고 한모금 마셨다. 달작지근한 따뜻한 찻물이 목을 통해 그 밑으로 내려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언니,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말해줄 수 없어요? 어쩌면 내가 언니를 도와줄 수도 있쟎아요." 그러자 세레나는 차를 한모금 마신 후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 놓더니 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듣고 싶니?" '물론, 호기심이 아예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나는 내 속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살짝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며 쑥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비밀은 아니야.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니까 말 못할 것도 없지..." 세레나는 차를 한모금 더 마신 후에 한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 그러니까 지금의 영주님께선 원래는 영주가 될 수 없는 분이셨지." "에? 그게 무슨 말이예요?"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뜸금없이 지금 영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어리둥절해진 내가 묻자 세레나는 내가 왜 어리둥절해 하는 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설명해줄께 가만 있어봐." "예~." 나는 다시 얼른 입을 다물고 이제는 얌전히 듣겠다는 포즈로 살며시 두손을 모아 무릎 위에 얹고 바른 자세로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전 영주님, 즉 내 할아버지께선 두 아들을 낳으셨는데 내 아버지는 그 두 아들중에 두번째 아들 이셨지. 그러니까 이 영지는 첫째 아들이신 내 큰 아버지께서 물려받으셔야 했지." "그런데요?" "그런데 큰아버지께서 25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사라지셨어. 아직 결혼 전이셔서 부인도 없고 더더구나 자식도 없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시는 바람에 성이 발칵 뒤집혀졌었지. 물론 나도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잘은 모르지만 말야."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몇 해동안 찾으러 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결국은 찾질 못했나봐.. 결국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까지 큰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으셔서 내 아버지가 이 영지를 물려받았지. 그런데 말야, 2주 전에 큰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찾아 온거야. 영지를 돌려달라고 말야." "에? 그럴수가... 이제와서 달라고 하는게 어디 있어요?" "하지만 원래 상속권은 큰아버지께 있었으니 그 분께 자식이 있는 한 그에게 넘어갈 수 밖에 없지..." "그렇긴 하지만 영주님께서 돌아가실 때 행방불명이었던 탓에 상속을 받지 못한거쟎아요. 이제와서 그럴수 있어요? 아, 혹시 그사람 거짓말 하는거 아니예요?" "거짓말은 아닌가보더라... 큰아버지께서 친필로 사인하신 혼약서와 출생 증명서까지 가져 왔거든. 더욱이 아버지께서 보시고 큰아버지와 꼭 빼닮았다고 하시던걸..." "그러면 그 영지를 그에게 다 넘겨야 해요?" "그렇지,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영지를 넘겨 받을 때 큰아버지의 생사를 확실하게 확인하지 않았다고 해.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상속권이 없지." "그런데 그게 언니 결혼과 무슨 상관이예요?" "그 큰아버지의 아들이 나에게 청혼했거든." "에?" "솔직히 그가 이곳에 찾아오기 전에 아버지가 병에 걸리셔서 일을 하시기가 힘들게 되었어.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신랑을 찾고 있었거든, 그때 그가 온거야." "그가 언니에게 반했대요?" "그의 말로는... 게다가 우리 부녀의 위치도 어정쩡하니까 차라리 자기와 결혼해서 같이 이 영지를 다스리는게 어떻겠냐고 하더군..." "그건 괜찮을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세요? 아니면 혹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는건..." 세레나는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건 아냐, 따로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또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냐." "그럼 왜?" "글쎄... 내일 그 사람을 네가 한번 보고 판단해 보렴." 의아해 하는 나에게 그녀는 비밀스런 미소를 짓고 그렇게만 말해서 나는 더욱 더 알송달송 해졌다. ┌───────────────────────────────────┐ │ ▶ 번 호 : 0/13250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11일 21:46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4) │ └───────────────────────────────────┘ 다음날 아침, 전날 밤 늦게까지 세레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든 나는 늦게까지 늦잠을 자버렸다. 세레나도 나와 같은 상황이어서 우리는 세레나의 방에서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그 방으로 엠마의 안내를 받아 류미르와 세이몬이 들어섰다. "어? 여긴 어떻게 알고 온거야?" 생각지도 못한 그들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놀랜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서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류미르와 세이몬은 나를 보자마자 철천지 왠수를 만난 것 모양 살기를 담고 나를 무섭게 노려보는 것이었다. 잘못 한 것이 있는 나는 괜히 양심에 찔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들의 눈치만 슬금슬금 살피고만 있었는데 곧 그들의 옷차림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 바람둥이 같이 행동하는 탓인지 류미르는 항상 깔끔한 옷을 맵시있게 차려 입고 다녔고 거기에 덤으로 가끔가다가 멋까지 부리고 다녔었다. 그리고 세이몬도 나와 류미르의 잔소리와 감독 하에 항상 귀한 집 도련님 같이 잘 차려입고 다녔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평소에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쫒기다 온 사람들 처럼 머리들은 풀어 헤쳐져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평소 깨끗과 깔끔을 자랑하던 그들의 옷들은 부시시하고 구김이 간게 곳곳에 그을음 자국까지 있었다. "어? 모습들이 왜들 그래? 여관에 불이 나기라도 했어?"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대꾸도 안 했고, 류미르는 심지어 나를 무시해 버리고 그냥 지나쳐 세레나 앞으로 가더니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제 동생을 돌보아 주신 것에 대하여 무척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희는 나눌 이야기가 있어 잠시 나갔다 오겠으니 양해해 주시겠습니까?" 모습은 엉망이었어도 말은 청산유수, 누가 봐도 귀족집 잘난 도련님이었다. 처음에 류미르와 세이몬의 모습을 보고 나까지 의심스런 시선으로 보던 엠마도 류미르의 이런 말솜씨와 태도를 보고는 '역시' 라는 감탄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는 류미르의 갑작스런 그런 부탁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그녀도 내가 어젯밤 이들에게 아무 말도 없이 여관을 빠져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느정도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저, 그런데 아린은 어젯밤에 제가 이곳에서 묶고 가도록 권한거였으니까 너무 화를 내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아, 역시 생긴것 처럼 마음씨도 곱지... 그녀는 류미르가 무척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이자 나에게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며 류미르에게 나를 변명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류미르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굳은 얼굴로 형식적으로 고개만 끄덕이면서 나를 끌고 그 방을 나왔다. 세이몬과 류미르는 내가 묶던 손님 방으로 와서 다시 나에게 살기 어린 무시무시한 시선을 보냈다. "야, 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유나 좀 알자. 설마 어제 내가 몰래 빠져나간거 가지고 이러는 거야?" 그러자 세이몬이 무서운 얼굴로 나에게 성큼 다가섰다. "아아아아리이이이인~~~" "왜그래?" 그의 기백에 질려버린 내가 찔끔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세이몬의 머리 위를 넘어 내 앞에 어떤 시커먼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얼결에 공중에서 떨어지는 그 물건을 잡아채서 보니까 내 배낭이었다. "어? 짐까지 다 챙겨 온거야?" 그러자 그 뒤를 이어 류미르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보시지." 어리둥절해진 내가 배낭을 열자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내 마법 주머니였다. 그제야 나는 어젯밤에 목욕만 잠깐 하고 올 생각으로 마법 주머니를 여관의 내 방에 나두고 왔다는 것이 생각났고 왜 저들이 저런 꼴이 되었는지도 깨달았다. "아하하하, 미안 미안. 내 마법 주머니 때문에 고생했겠구나?" "웃으면서 사과하면 단줄 알아? 우리가 그걸 챙기느라고 얼마나 고생 했는데?" 상황을 다 이해한 내가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 했건만 세이몬은 아침에 이 마법 주머니를 챙기다 당한 일이 생각 났는지 이를 빠드득 갈며 소리쳤다.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 해서 보호 마법을 잔뜩 걸어놨으면 네가 챙겨서 가지고 다녀야 할 것 아냐? 왜 놔두고 가서 우리만 고생 시키는 거야?" "어우, 야. 그렇게 화내지마. 어제는 정말 이 곳에서 머물게 될지 몰랐단 말야. 그냥 목욕만 하고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우연하게 세레나를 만나서 여기까지 온거야." 그러자 류미르가 화난 얼굴로 꼬투리를 잡았다. "그러면 네가 아침에 여관으로 와서 네걸 챙겨야 할 것 아냐. 그냥 여기서 사람만 보내면 다야?"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어제 밤에 늦게 자느라고 아침에 늦게 일어났단 말야. 너희가 오기 전에는 여관으로 사람을 보낸 지도 모르고 있었어." 나는 최대한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사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이몬이 뾰루퉁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보호 마법을 건거야? 그걸 모르고 만졌다가 벼락을 얼마나 맞은 줄 알아? 덕분에 여관 지붕이 뚫려 버렸고 네가 묶었던 방이 완전히 날라갔다구. 우리가 맨 꼭대기 층에서 머물렀던게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우리 위에 있던 층이 다 날라갈 뻔 했어." 그 뒤를 이어 류미르가 말을 덧붙였다. "그것 뿐이면 또 말을 안해. 거기다 화염 마법까지 걸어놨지? 벼락이 친 것도 모자라 불이 갑자기 타올라서 여관을 태워먹을 뻔한거 알아? 우리가 빨리 손을 썼기에 망정이지..." '하하하, 좀 심했나 보군... 그래서 이녀석들 옷이 그을렸군?' "정말 미안해.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배상했겠네?" 나의 미안함이 섞인 말에 그 둘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당연하지!" "알았어. 정말 미안해. 다음 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마법 주머니는 내가 챙길께.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잘못 했으니까 너희들한테 용돈으로 각각 금화 3개씩 줄께. 어때?" 그러자 세이몬의 얼굴이 확 풀어지면서 눈이 반짝 반짝 빛났지만 그런 세이몬을 류미르가 말리면서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겨우 금화 3개?" 나는 얼굴에 힘줄이 하나 불쑥 솟아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이었으므로 솟아난 힘줄을 손으로 집어 넣으면서 한번 더 양보했다. "알았어. 그럼 금화 5개. 됐지? 더이상은 안돼." 그제야 류미르의 얼굴도 풀어져서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꼭 내가 내 마법 주머니를 챙기기로 다짐에 다짐을 했다. ┌───────────────────────────────────┐ │ ▶ 번 호 : 0/13250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12일 21:46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5) │ └───────────────────────────────────┘ 류미르와 세이몬은 내가 건내 준 금화를 받고는 쇼핑을 하러 간다고 성을 나갔고 나는 그들을 배웅한 뒤 세레나와 못다 한 식사를 마저 다 한뒤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한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 방안 가득히 따뜻한 햇빝이 들어 기분이 좋아지는 방의 창가에 폭신한 쿠션을 가득이 바친 안락 의자에 얇은 모포를 덥은 세레나의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이제 겨우 50을 바라보는 나이 임에 틀림 없을 것인데 그의 머리는 거의 반 이상이나 하얗게 물들었고 몇 달 동안 침상에 누워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단정적으로 보여 주는 듯 창백하고 윤기 없는 그의 피부를 통해 뼈마디가 보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는 세레나가 가까이 다가가 따스한 그녀의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살포시 잡자 감고 있던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왔니?" 따스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를 슬픔이 깃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던 세레나는 짐짓 과장된 명랑함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버지~이. 벌써 정오가 다 되었는데 아직까지 주무셨어요? 사람은 게으르면 안된다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였더라~아?" 그런 그녀의 과장됨을 알아챘는지 그녀의 아버지의 눈에 살짝 쓸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다시 기쁜 기색이 가득 찬 그는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후, 늦잠 잔건 네가 아니냐? 나는 벌써 일어나 있었단다. 그래, 손님이 오셨다고?" "예, 아버지. 정말 좋은 친구를 이번에 사귀게 되었지 뭐예요? 여행하고 있는 중이래요. 아린 인사드려. 내 아버지야." 그녀는 나의 팔을 끌어 자신의 아버지 곁에 서게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시리안 시스파 슈타인 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무쪼록 이 곳에 머무는 동안 즐겁게 지내길 바래요." "예. 감사합니다." "그래, 마침 좋은 시기에 친구를 사귀게 되었군. 세레나, 이렇게 된 것 슈타인 양에게 네 결혼식 때 까지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지 그러냐?"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어요." 그녀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그래줄꺼지 아린?" "물론이죠. 언니가 말 안했으면 내가 졸라서라도 이 곳에 남으려고 했을거예요." "후후후, 그것 참 잘되었구나. 그런데 세레나, 결혼 준비는 잘 되어 가냐?" 세레나는 잠시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지만 아버지에게 얼굴을 돌릴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럼요 아버지.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준비는 차근 차근 잘 되어가고 있어요. 이제 며칠후면 다 끝날거예요." "미안하구나, 원래는 내가 준비해주었어야 했는데... 네 결혼식 준비도 너와 그 아이를 시키다니..." "아유, 아버지도 참, 볼 때마다 그런 말씀 하시기예요? 그도 미안해 하시지 말라고 하쟎아요. 그리고 그가 남인가요? 아버지의 조카이고 이제 아버지의 사위가 될 사람인데요." "그래, 다행이다. 네가 그 사람을 맘에 들어해서... 내가 보기에도 그는 괜찮은 녀석이야. 내가 죽기전에 네가 좋은 짝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구나..." "또 또, 아버지는 또 그런 말씀을 하세요? 금방 일어나시게 될꺼예요."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힘 없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그렇게 거짓말 할 필요는 없어." "누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예요? 내기 할까요? 몇 달 후에 아버지가 건강하게 일어나실지 아닐지?" 그녀는 강한 어조로 반박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물기에 젓어 가는 것을 나나 그녀의 아버지나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풀 누그러진 어조로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 알았다. 미안하구나. 그건 그렇고 너 손님께 실례가 아니냐? 옆에 세워두고 우리끼리만 이야기 했구나." 그제야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세레나가 '아차' 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머, 이런. 미안 아린." "아녜요. 괜찮아요." 나는 정말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두 손을 휘저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그만 나가보렴. 오랫동안 말했더니 좀 피곤하구나..." "예, 아버지. 참, 약은 꼭꼭 챙겨 드시고 있지요?" "그래, 데이브가 얼마나 깐깐하게 구는지, 조금만 남겨도 늙은이 같이 잔소리를 하지 뭐냐?" "그래요? 호호, 그를 칭찬해줘야 겠네요. 그럼 저희는 그만 가볼께요. 쉬세요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그래요. 잘가요 슈타인양." 그녀는 밝은 얼굴로 그 방을 나와서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나를 끌고 가더니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언니..."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죽여 눈물만 흘렸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단지 그녀를 꼭 안아주며 등을 다독거려 줄 뿐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엠마가 두 손 가득히 하얀 천을 한아름 가지고 들어오다 이 모습을 보더니 방의 한쪽에 있던 테이블 위에 가져온 천들을 올려 놓고 한동한 슬픈 얼굴로 세레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에게 살짝 목례를 해 보이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야 세레나는 진정하고 몸을 일으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미안, 놀랐지?" "아니요. 그런데 언니, 혹시 영주님께선 언니와 결혼할 그 남자에 대해서 모르고 계시는 것 아니예요?" 세레나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 아버지께 말씀 드리겠어?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계셔도 내 걱정만 하셨는걸... 그런 아버지께서 그와 결혼한다는 걸 아시고 얼마나 기뻐 하셨는데... 다행히 그도 아버지 앞에서는 잘 하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언니, 꼭 그와 결혼해야 해요? 다른 사람은 없나요?" 그러자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더니 힘없이 말했다. "그는 내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이 성에서 아버지와 당장 내보내겠다고 했는걸..." "그가 협박을 했군요?" 나는 화가 나서 그 비열한 자식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그녀석을 어떻게 혼내줄 지 머리를 굴리다가 뭔가 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언니, 왜 그가 언니랑 결혼을 못해서 그렇게 안달이죠? 협박까지 하고..." 그녀는 그런 나를 다시 한번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예리하네? 그런 것 까지 알아내고? 그건 말이지... 아무리 우리에게 영지 상속권이 없다고 해도 그동안 관리를 해왔기 때문에 어느정도 댓가를 바랄 수 있거든... 게다가 내 아버지가 무척 아프시기 때문에 그가 나의 후견인이 되어야 하지. 그런데 그는 우리 부녀에게 지불할 돈도, 나를 시집보낼 지참금도 없는거야. 그러니 그는 최후 수단으로 나와의 결혼을 생각해낸 거지." "돈이 없어요?" "그래. 어쩔 수 없었어. 작년에 흉년이 들어서 아버지가 그 해 세금을 걷지 않은데다 오히려 영지민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좀 푸셨지. 게다가 아버지가 몸져 누우시는 바람에 뛰어난 의사와 마법사를 불러오느라고... 그래서 지금 성에는 돈이 별로 없는 상황이야." 나는 그제야 납득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 저 질문있습니다. 야산타와 극악서생 끝편이 나왔습니까? 요즘 책방을 안가서 잘 모르겠는데.... ┌───────────────────────────────────┐ │ ▶ 번 호 : 13169/13173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13일 22:12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6) │ └───────────────────────────────────┘ 그때 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고 세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엠마를 위시한 하녀 세명이 어떤 바구니를 각자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들은 들어오자 세레나와 나에게 목례를 하고는 세레나의 방 한 구석에 서 있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아직 미완성된 웨딩 드레스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녀들이 바구니에서 꺼내 드는 것들은 가위와 바늘, 실 등의 바느질거리였다. 그리고 아까 엠마가 미리 갔다 놓았던 하얀 비단 천들을 들더니 자기네 끼리 열심히 자르고 바느질 하고 줄자로 미완성된 드레스의 여기 저기를 재는 등 웨딩 드레스를 완성시키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보통 결혼을 앞둔 새신부라면 자신의 웨딩 드레스를 만드는 작업에 자신도 직접 참여를 할터이지만 세레나는 그 작업하는 모습을 한번 힐끗 보더니 나를 데리고 그녀의 방에 딸려있는 작은 드레스룸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언니?"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갔기에 같이 가기는 갔는데 도착한 곳이 그녀의 많은 옷들이 빽빽히 걸려 있는 작은 방이자 나는 의아해져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서는 씁쓸함은 사라져 있었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장난감을 앞에 둔 장난꾸러기가 눈을 빛내는 것 같았다. "아린 저녁식사 때 입을 옷을 준비해야지. 내가 생각해 둔게 있긴 한데 잘 어울릴지 모르겠네? 그래도 아린이 예쁘니까 뭘 입든 예쁠꺼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즐거움이 배여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나는 그녀를 말리지는 못하고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간단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그녀는 내 애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는 소리 높여 자신의 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엠마를 불렀다. "엠마, 엠마~!" "예, 아가씨..." 세레나가 부르는 소리에 엠마가 대답을 하면서 그녀의 드레스룸에 들어왔다. "당신은 나좀 도와줘요. 저녁때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아린을 꾸며주려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빠듯할 것 같으니까..." 그녀의 너무 신나하는 목소리에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언니..." 나는 절망적인 시선을 엠마쪽으로 돌렸다. 세레나를 말려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엠마는 세레나가 즐거워 하면서 자신의 옷들을 여기저기 뒤적 거리는 모습을 다행스럽다는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이 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해가 서산 넘어로 뉘엿뉘엿 넘어가 어둑어둑 해질 무렵이 될 때까지 나는 거의 몇 십벌 (그 와중에 세보지는 못했음...) 씩이나 되는 드레스를 입었다 벗었다 해야 했고 그 와중에서 세레나와 엠마가 나에게 잘 어울린다는 드레스를 5벌 정도 골라냈다. 그리고 골라낸 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장식품들을 찾기 위하여 세레나의 보석함들을 왕창 다 가져와 드레스 룸의 좁은 공간에다 늘어놓고는 이리 저리 꼼꼼히 살펴보더니 그 중에서 여러개를 골라 그 보석과 잘 어울리는 드레스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좀 시간이 흘러서 짝을 찾지 못한 보석들은 다시 보석함 속으로 돌아가고 마땅히 어울리는 보석들을 지정받지 못한 드레스 2벌도 다시 옷장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3벌의 드레스... 나는 다시 그 드레스를 입어야 했고 이번에는 세레나와 엠마가 같이 골라 놓은 보석들 까지 달아야 했다. 그녀들은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나에게 옷을 입히고 보석들을 달아 준 뒤 내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 보다가 내 머리모양 까지 여러가지로 바꾸어 보면서 가까이에서도 바라보고 조금 뒤로 물러나서도 이리저리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의 심사가 끝나서야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골라진 드레스는... 밝은 붉은색의 드레스였다. 몸에 딱 달라붙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어깨를 드러내며 허벅지 중간부터 옆을 트여놓아 나의 다리를 드러냈지만 무척 길어서 높은 구두를 신은 상태여도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다을랑 말랑 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무늬나 장식이 없어 더욱 더 성숙하고 섹시해보였다. "헉, 언니 정말 나보고 이걸 입으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 진짜 언니꺼 맞아요?" "호호호, 물론 내 것 맞지. 몇년전에 충동적으로 사놨다가 결국 한 번도 입어본 적은 없지만 내 것 맞아." 그 드레스를 입은 상태에서 나는 그녀가 내미는 오백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큰, 엄지 손톱만한 오팔이 가운데 박혀서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는 펜던트를 달고 있는 약간 굵은 줄의 내 가슴 중간까지 내려오는 금목걸이를 목에 걸어야 했다. 그리고 오백원짜리 동전 만한 금 링에 새끼손톱 만한 오팔 팬던트가 달려 달랑달랑 거리는 금 귀걸이를 걸었고 손목에도 링으로 된 금팔찌 두개를 끼었다. 허리에는 작은 타원형의 링으로 사슬을 역은 가는 허리띠를 타이트하게 매었고 허리를 감고 남은 줄은 중앙에서 반뼘 정도 오른쪽으로 간 곳부터 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게 했다. "너무 잘 어울린다. 너무 예뻐..." 세레나는 나에게 꺼내놓은 보석을 다 달아준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훝어 보더니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아 쥐면서 감탄했다. "언니이이~, 너무 야해요." "걱정 마. 너를 위해 준비한게 또 있어." 세레나의 뒤에 서 있던 엠마가 세레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에 어떤 가운을 펴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 가운은 내 발 밑에서 끌릴 정도로 긴데다 옷 테두리와 소매 테두리에는 은색의 테를 두른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하얀 망사 가운이었다. 중국식으로 소매의 통이 넓고 허리가 없었고 그 가운에도 아무런 장식이나 무늬가 없었다. "어때? 예쁘지? 비록 그 드레스랑 같이 산 건 아니지만 이 가운을 본 순간 이 드레스랑 잘 어울릴 거란걸 직감적으로 알았지. 한번 입어봐." 비록 얇아서 속이 비치긴 했지만 그 가운을 입자 그래도 어느 정도 야한 느낌이 사라진 것 같았다. 세레나는 무척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자신의 방으로 끌고와 자신의 화장대 앞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내 머리를 다듬었다. "틀어 올리면 나이들어 보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풀어놓는 게 낫겠어. 그리고 옆머리만 살짝 모아서 뒤에서 묶자고." 그녀는 내 머리를 빗겨 준 뒤 내 양 옆머리를 머리 위에서 모아 금빛 삔으로 고정 시킨 뒤 거울속에 있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어때?" 내가 뭐라고 말했을 것 같아? "예뻐요. 언니 실력이 대단하신데요?" "호호호, 뭘 이정도야..." 그때 엠마가 조심스럽게 세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아가씨도 이제 준비하셔야지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엠마는 세레나가 나의 머리를 손질해주는 동안 세레나가 입을 드레스와 착용할 보석들을 벌써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나도 준비해야지." 그때 세레나의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고 세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어떤 어린 하녀가 한명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손님들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 류미르와 세이몬이 돌아왔나봐요. 그럼 난 그들과 제 방으로 갈께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하녀를 보내주세요." 그 하녀의 말에 나는 쇼핑하러 갔던 세이몬과 류미르가 돌아왔음을 깨닫고 그들을 만나러 방 문 쪽으로 다가갔고 그런 내 뒤로 세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식당에서 보자." 작은 응접실에 머물러 있던 세이몬과 류미르는 내가 들어서자 과장된 감탄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와 아린, 전에 네 미모를 알았지만 오늘따라 더욱 더 예뻐 보이는 구나." "정말 예쁘다..." 그들의 말에 좀 과장이 섞였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류미르, 넌 갈수록 말솜씨가 느는구나? 세이몬 고마워. 그러나 저러나 내 방으로 가자. 할 말이 있어." 나는 그들을 이끌고 내 방으로 가서 침대 위에 옷이 구겨지지 않게 살짝 걸터 앉았다. "으이구, 이런 옷을 입으면 자잘한 것에도 신경이 쓰여 귀찮다니까..." "야, 여자가 그런 걸 귀찮아 하면 어떻게 하냐? 그러다가 시집이나 가겠어?" 류미르도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걸터 앉으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흥, 나랑 결혼하는 자가 용잡은거지." "푸하하하, 그 말이 맞다." 나도 류미르의 말을 농담을 받아쳤고 그 말을 들은 류미르가 감탄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세이몬은 우리가 왜 웃는지 이해가 안 간 모양이었다. "쯧쯧, 세이몬. 내가 용이쟎아. 그러니 나랑 결혼하는 사람은 용잡은거지." "아하~." "자, 그건 그렇고 소브로는 어디있어? 안보이네?" 그러자 세이몬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녀석 여관에 있어. 같이 가자고 해도 극구 사양하면서 여관에 머물러 있겠다고 하더라구, 나중에 마을을 떠날 때 와서 데리고 가달라고 하던데?" "그래? 하긴 그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그녀석도 여기 있으면 어색하기도 하겠지. 아, 그건 그렇고 세레나가 이곳 영주 딸인건 알지? 그녀가 일주일 뒤에 결혼한대. 그때까지 여기 머물러 달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너희도 그렇게 알아둬. 그리고 곧 저녁식사하러 가야 하니까 옷 갈아입고. 시간 없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그들은 나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시간 없다는 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너희 들 방이 내 옆방이니까 거기가서 갈아입어. 짐은 다 그 방에 갔다 놨대." "준비성도 빠르군." 류미르는 피식 웃고는 세이몬을 데리고 문쪽으로 다가갔다. "오른쪽 방이야. 2인 실이고." "알았어." 류미르는 나를 돌아보지는 않고 그냥 한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흔들어 보였다. 그들은 저번에 여신상을 구경하러 라크네 도시로 가기 전에 들렀던 마을에서 영주 딸내미 덕분에 성에 초대받은 뒤 부터 그런 곳에서 입을 만한 정장 몇 벌은 준비한 눈치였다. 그래서 라크네 도시에서도 며칠은 정장을 입고 토너먼트전을 구경하러 갔었다. 물론 나는 드레스 입기는 싫고 정장은 없었으니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행복을 입고 가기는 했었지만... ┌───────────────────────────────────┐ │ ▶ 번 호 : 13227/13238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15일 22:56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7) │ └───────────────────────────────────┘ 잠시 후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정장으로 갈아 입고 내 방으로 돌아왔고 그 둘이 오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데리러 하녀 한명이 왔다.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세레나를 만났다. 그녀는 시원해 보이는 얇은 옷감의 아이보리색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넓은 폭의 천이 어깨와 팔뚝을 살짝 감싸안고 목 둘레를 드러낸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그 드레스에 어울리게 목을 다 드러내는 스타일로 머리를 틀어 올려 진주가 박힌 삔으로 고정시켰는데 그래서 더욱 더 시원하게 보였다. "언니, 너무 예뻐요." "고맙다. 여러분도 정말 잘 어울리시는 군요." 세레나가 류미르와 세이몬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나는 그들을 정식으로 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 내 정신좀 봐. 아직까지 소개도 제대로 안 했네? 언니, 이쪽은 제 오빠 류미르이고요, 이쪽은 제 동생 세이몬이라고 해요." 내가 류미르와 세이몬을 가르키면서 정식으로 소개를 하자 류미르가 오른 손을 자신의 배에 바치고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류미르라고 불러주시길..." 그러자 세레나도 양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아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세레나 라고 불러주세요." 류미르가 세레나에게 정식으로 인사하자 세이몬도 얼른 류미르를 따라 인사했다. "세이몬입니다." "반가워요. 자 그러면 인사는 이쯤 하기로 하고 내려 갈까요?" 세레나는 세이몬에게 미소를 띄우며 무릎을 살짝 굽혀 보인 후 다정하게 나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아, 내가 생각이 짧았네요. 복도에 서서 소개하지 말고 그냥 식당에 가서 한번에 소개할 걸 그랬어요. 덕분에 늦었네요." 아무 생각 없이 류미르와 세이몬을 소개한 덕분에 세레나와 그들이 인사를 나누느라 시간이 너무 지체 된 것 같아 걱정이 된 나는 세레나에게 걱정스런 어조로 속삭이자 그녀는 나를 안심 시켜주려는 듯 명랑하게 말했다. "호호, 그렇게 많이 늦지 않은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데, 너희 부모님은 외모가 무척 뛰어나신 가보지? 너도 그렇고 네 형제들도 모두 잘 생겼는데?" "뭐, 그러신 편이죠." 나는 슬쩍 웃으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면, 언니의 어머니도 무척 아름다우셨겠죠? 언니가 이렇게 예쁜 걸 보면 말예요." "응, 그래. 비록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지만 나는 어머니 모습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셨어." 세레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듯 그녀의 표정은 약간 몽롱했고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말예요. 영주님도 예전에는 정말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셨을 것 같아요. 아까 뵐 때 보니까 이목구비도 뚜렷 하신걸 보면 말예요. 그리고 딸은 아버지를 닮는 다죠?" "그래? 몰랐네." "그렇대요. 저도 들은 이야기예요." 세레나와 내가 재잘재잘 대면서 식당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세레나의 약혼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거의 흰 색에 가까운 옅은 색의 금발 머리를 짧게 자르고 푸른 눈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서 약간 얌전해 보이는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있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언듯 보면 깔끔한 외모에 의한 인상이 매우 좋아서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레나는 그를 보자마자 살짝 얼굴이 굳어졌고 또 나는 세레나가 그를 안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편견이 생겨져 버렸는지 어떻게 보니까 눈이 가늘고 입술이 얇은게 야비하게 생긴 면이 있는 것도 같아 보였다. 그는 식당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세레나의 친구분들 이시라구요? 일찍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요즘 일이 바쁘다보니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군요." 그러자 류미르가 먼저 앞으로 나서면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류미르 시스파 슈타인이라고 합니다. (류미르에게 미리 내 성으로 소개 했다고 말해뒀었다.) 제가 제일 맏이지요." "반갑습니다. 웨이본 모즈크 콘차일입니다." "이쪽은 제 동생인 아시리안과 세이몬입니다." 류미르의 소개에 나는 양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붙들 수는 없어서 (드레스가 몸에 약간 붙는 스타일이므로) 그냥 살짝 무릎만 숙여 보였다. 그리고 세이몬은 웨이본에게 가서 악수를 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슈타인양께서 세레나와 친구가 되셨다고요?" 그는 우리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으면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 저녁에 산책을 하다가 언니를 우연히 만나 친해졌어요. 그 덕분에 이렇게 성으로 초대까지 받고요." "정말 잘 된 일이예요. 그렇지 않아도 세레나는 친구가 없어서 좀 걱정되었거든요." 웨이본은 그러면서 다정한 미소를 세레나에게 보냈지만 세레나는 약간 굳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렸는데 그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 류미르가 나섰다. "아린에게도 정말 잘 됀 일이죠. 솔직히 아린에게는 자매가 없는 탓인지 좀 여성스러운 면이 부족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숙녀의 표본이신 콘차일양과 친해져서 다행이예요. 아린이 콘차일양께 여성스러움을 좀 배울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류미르는 살벌한 나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웃어보이면서 말을 끝맺었고 그 말에 세레나가 얼굴을 풀고 빙그레 웃었다. "아니예요. 아린이 어때서요." "맞아 맞아. 언니 류미르는 평소에 자기만 잘난 줄 아는거 있죠? 그치 세이몬?" 내가 세이몬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자 세이몬은 그 즉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류미르는 짐짓 과장된 얼굴로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동생들 교육을 잘 못 시켜서 철이 없군요. 이게 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세이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고 나도 속이 부글 부글 끓었지만 여기서 내가 더 뭐라고 한다면 나만 철 없는 어린애가 된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단지 류미르만 살벌하게 쏘아볼 뿐이었다. 이런 내 모습에 세레나는 쿡쿡 웃었고 웨이본도 호탕하게 웃으며 중재에 나섰다. "정말 사이 좋은 남매시군요. 부럽습니다." 그때 식당문이 부드럽게 열리면서 구식 휠체어로 보이는 바퀴가 달린 편안해 보이는 안락 의자에 앉은 영주님이 식당으로 들어서셨다. 그리고 그 의자 뒤에서 웨이본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갈색 머리를 가진 어떤 청년이 그 의자를 밀며 같이 들어왔다. 그러자 세레나와 웨이본, 그리고 내가 일어섰고 그런 우리를 보고 류미르와 세이몬도 얼른 일어섰다. 재빨리 웨이본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큰아버지, 건강해 보이시는 군요. 다행입니다. 결혼식 때는 세레나를 데리고 입장하실 수 있겠는데요?" 그러자 영주는 껄껄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암, 그래야지. 세레나의 결혼 식인데 내가 데리고 입장 해야지 안그런가?" "하하하, 맞습니다." "그래 슈타인양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이곳에서 지내면서 불편한 건 없나요?" 영주는 세레나의 옆에 친근하게 서 있는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건냈다. "아녜요 영주님. 모두 다 친절하신 걸요. 저에겐 과분한 대접이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런데 이 잘생긴 청년들은 누구신가?" 그러자 류미르가 세이몬을 데리고 재빨리 영주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아린의 오빠인 류미르라고 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생인 세이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무쪼록 편하게 지내길 바래요." 영주가 자신의 자리 까지 도착하자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의자를 밀어 준 청년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네 데이브." 그 데이브 라고 불린 청년은 영주에게 목례를 해보인 후 영주 옆자리에 앉았고 그가 앉는 것을 신호로 세레나와 웨이본도 자신들의 자리에 앉았으므로 우리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 조지라고 불린 청년은 분명 영주의 시종 같았는데 식탁에 같이 앉아서 이상했던 것이다. 그런 우리들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세레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데이브는 예전부터 아버지의 오른 팔 노릇을 해 온 사람 이예요. 기사로 임명 된 뒤부터는 계속 아버지의 대리인을 맡았지요." 세레나와 영주의 그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보아 그가 영주와 세레나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데이브." "안녕하세요?" 류미르가 그를 향해 인사를 하자 세이몬도 류미르를 따라 얼른 그에게 인사 했다. 그러자 데이브는 약간 묵뚝뚝 하지만 예의 바르게 우리에게 ]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하하, 신경쓰지 말게나. 그는 항상 말이 적고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거든, 그래서 더욱 더 유능한지도 모르지." 류미르와 세이몬이 그의 묵뚝뚝한 대답에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영주가 부드럽게 중재에 나섰다. ======================================================================= 하아~, 역시 전 실력이 너무 부족한가 보죠? ㅠ.ㅠ ┌───────────────────────────────────┐ │ ▶ 번 호 : 13228/13249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16일 22:14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8) │ └───────────────────────────────────┘ 그의 말에 류미르와 세이몬은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어서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러나 그가 지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까지 행동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영주와 세레나가 그에게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는 데다가 영주가 그를 변명해주기 까지 하자 나는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 나의 위치는 세레나의 바로 옆자리였고 그는 세레나의 맡은 편 자리에 앉아 있어서 나는 아무에게도 눈치 채이지 않게 그를 관찰할 수 있었지만 몰래 힐끗 힐끗 쳐다 보는 것도 싫고 또 그가 눈치 못챌 리도 없다는 생각에 대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브는 약간 긴 커트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흐트러져 보일 수 있는 스타일 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님 그의 성격 때문인지 그의 머리는 조금도 흩트러 져 있지 않아 오히려 분위기와 어울려 더욱 더 깔끔한 느낌이 들게까지 만들고 있었다. 그는 인상이 짙어 보이는 굵은 눈썹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푸른 눈동자는 차갑고 날카로워보이기 까지 했다. 각이 진 턱과 약간 야위어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그의 얼굴은 어찌 보면 남자다운 느낌과 함께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지만 또 다르게 보면 신경이 예민해 보여서 함부로 접근하기가 용이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기사 작위를 땄다는 것을 봐서도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것을 증명해 주듯 그의 마른 몸매는 무척 단단해 보였고 피부도 햇빛에 그을려 구리빛을 띄었다. 내가 그를 이렇게 관찰하기 위해 대놓고 찬찬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리도록 차가워 보이는 눈동자가 쏘아보듯 내 눈을 바라보자 움찔해져서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에게 지기 싫다는 묘한 승부욕이 생겨버려 시선을 돌리고 싶다는 본능을 억누르고 지지 않겠다는 눈길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웨이본이 놀랍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과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류미르가 한숨을 내쉬며 못말린 다는 듯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것 까지 볼 수 있었지만 그런 그들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데이브만 쳐다보고 있자 데이브의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푸른 눈동자에 약간의 동요가 일어나더니 그가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다. 덕분에 약간 의기양양해진 기분으로 나도 시선을 류미르에게 돌려 어떠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세레나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내 귀에 그녀의 입술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데이브가 동요했어. 그와의 눈싸움에서 이기다니 대단한걸?" 그녀의 말에 나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와는 눈을 제대로 마주 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래서 웨이본이 나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세레나에게 속삭였다. "어머니가 눈싸움의 대가셨거든요..." 하긴 울 엄마나 아니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똑바로 쳐다보는 인간은 없을테지... 그 뒤에는 준비 된 음식이 나왔고 우리 모두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했다. 물론 대화를 주도해 나간 사람은 웨이본과 영주, 그리고 류미르였고 세레나와 나, 그리고 세이몬은 간간히 대답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정도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고 데이브란 사람은 처음에 류미르와 세이몬에게 한 인사를 제외하고는 식사때 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은 영주는 가벼운 죽과 부드러운 빵으로만 식사를 먼저 끝내고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와 같이 데이브도 우리에게 묵뚝뚝한 몸짓으로 목례만 까딱해 보이고는 영주의 바퀴달린 의자를 밀고 식당을 나갔다. "정말 차갑고 묵뚝뚝해보이는 사람이군요." 그가 식당을 나가자 세이몬이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말했다. "저런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러자 웨이본이 쓴 웃음을 지으며 세이몬의 말에 맞장구 쳤다. "천성이 원래 저런 사람인걸요. 저도 저 사람이 크게 웃는 모습이나 화를 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얼굴에 미소를 띄우는 것 조차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니까요." "그래서 그의 능력이 높은지도 모르죠.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쟎아요." 너무 그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한다고 내가 느낄 무렵 세레나가 그를 둔두하고 나섰다. 역시 세레나는 그를 신임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러나 웨이본은 세레나가 그를 둔두하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웨이본을 둔두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웨이본은 다시 미소 띈 얼굴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잠시 뒤에는 거실로 자리를 옮겨서 모두의 앞에는 각자 차가 가득 담긴 찻잔을 하나씩 놓은 상태로 대화를 계속 해 나갔다. 웨이본은 아는 것도 많았고 화술도 무척 뛰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세이몬과 류미르는 그가 무척 맘에 든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도 처음 그에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밤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세레나가 피곤하다고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람에 그제야 대화를 중단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웨이본은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밤 인사를 한 뒤 서재쪽으로 향하였고 세레나도 피곤 하다면서 자신의 침실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세이몬과 류미르, 나는 내 침실로 들어왔다. "말해봐, 어떻게 된 일이야?" 류미르는 내 침실에 들어오자 마자 탁자 앞에 놓여있던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앉으면서 물었고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 던지며 그를 바라보았다. 세이몬도 내 침대로 다가와 그 모서리에 살짝 걸터 앉아서 내가 말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건가 하면..." 나는 그들에게 천천히 세레나와 만난 일과 함께 그녀에게서 들었던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러니까 영주는 자신의 딸이 결혼을 원치 않는 다는 걸 모르고 있단 말이지?" 내 설명을 다 듣고 난 세이몬이 물어왔다. "그래.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세레나는 그 웨이본이라는 자신의 약혼자를 좋아하지 않더라고. 그러니 결혼하고 싶어 하겠어?" "그런데 왜 세레나는 웨이본을 싫어하는 거지? 난 좋은 사람 같던데..." 류미르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중얼 거렸다. 그의 말에 공감 한다는 듯이 세이몬도 류미르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가 세레나를 협박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 혹시 세레나가 거짓말을 한게 아닐까?" 나도 웨이본에게 편견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호감이 생긴 터라 세레나가 그를 싫어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를 웨이본 보다 더 믿고 좋아하는 나로써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 했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거야. 난 세레나가 무조건 그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 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면서 기대어린 눈으로 세이몬과 류미르를 바라보자 그들이 조금 걱정되는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왜그래?" "있지, 어짜피 결혼할 때 까지 이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니까 우리 누가 나쁜건지 한번 살펴보지 않을래?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만약 웨이본이 나쁜 놈이라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세레나를 도울 거니까 그건 알아 둬." "에... 그럼 세레나가 나쁜 거라면?" 내가 굳게 결심한 듯 말하자 세이몬이 내 결심을 흔들며 말하자 그런 상황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나는 곰곰히 생각 하면서 입을 열었다. "글쎄... 만약 그렇다면 결혼 하도록 나둬야지. 이 결혼은 웨이본이 원한 거니까 말야." "그럼, 세이몬과 내가 웨이본을 맡아야 하는 건가? 아린 네가 세레나를 맡아야 하니까 말야." 류미르가 상황을 결론 내듯이 정리하여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러나 뭐 일부러 그를 미행하고 아니면 밤 새도록 그를 지켜보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너무 무리하게 관찰하지는 마." "그래 알았어. 걱정 마." 류미르와 세이몬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도 그들을 따라서 일어섰다. "그럼 우리는 가서 잘께. 너도 잘 자." "좋은 꿈 꿔." "그래, 너희들도 잘 자라." ┌───────────────────────────────────┐ │ ▶ 번 호 : 13278/13294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17일 22:02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9) │ └───────────────────────────────────┘ 그 다음 날 부터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세레나와 웨이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날이 갈 수록 우리 셋은 점점 혼란스러워 졌다. 세레나와 웨이본에게서 그들을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점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완벽하게 장점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건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을 수 있을 만한 결점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웨이본이 세레나를 협박 했다는 것은 점점 더 믿기 어려워 졌고 또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세레나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따. "모르겠네...." "나도..." "마찬 가지야..." 성에서 머문 지 4일 째가 되던 날 밤 우리 셋은 저녁을 먹고 웨이본과 세레나와 헤어진 뒤 곧바로 내 방에 모였다. 매일 밤마다 이렇게 모여서 하루 동안 관찰한 것을 서로에게 이야기 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왔지만 항상 나오는 결론은 같았다. "모르겠어..." 그날도 마찬가지였기에 우리는 각자 허탈해 져서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봐, 아린. 혹시 첨에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냐?" 안락 의자에 편하게 기대고 앉아 머리를 약간 뒤로 젖히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세이몬이 고개를 약간 돌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등을 침대에 기대고 있던 나를 의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묻자 나는 화가 났다. "아냐, 확실히 들은 거란 말야."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둘 중 하나는 나쁜 사람인데 이건 누가 나쁜 사람인지 정말 모르겠잖아!" "그걸 누가 몰라?" 세이몬과 내가 서로 노려보자 잠자코 있던 류미르가 우리 둘을 말리면서 나섰다. "둘 다 그만해. 그리고 우리가 아직 누가 나쁜 사람인지 못 찾아내기는 했지만 아린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세이몬 너도 느꼈을 걸? 약혼까지 하고 결혼을 앞 둔 사이인 세레나와 웨이본이 이상하게 냉정하다는 걸. 보통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것 보다 더욱 더 냉정해." 그러자 세이몬이 류미르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이상하게도 세레나는 웨이본을 볼 때마다 눈초리가 차가워 지고 어쩌다 보면 미워하는 것 까지 느껴지는데 웨이본은 아예 무시하고 있거든..." "거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세이몬이 류미르의 말을 긍정하자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거만하게 말했다. "피이~, 그래 너 잘났다. 에휴~ 난 정말 모르겠어. 그건 그렇고 우리 계속 그들을 관찰해야 하는 거야?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세이몬이 다시 허탈한 표정으로 말하자 나는 그에게 강력하게 반박했다. "안돼. 누가 나쁜 사람인지 꼭 밝혀 낼거야.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러자 류미르도 동조했다. "맞아. 한번 시작 했는데 끝장을 봐야지." 세이몬은 다시 천장을 바라보면서 의미모를 한숨을 내쉬더니 투덜거리는 어조로 중얼 거렸다. "에구, 영주 자리를 물려 받을 웨이본은 맨날 노는데 손님인 우리는 매일 일하고 있냐?" 그러나 그런 세이몬의 말에 놀란 내가 침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맨날 놀다니? 세레나는 매일 일하던데? 이런 성에도 자잘한 사무 일이 얼마나 많다고. 보니까 세레나랑 그 누구냐? 영주 대리인이라고 하는 사람..." 내가 그의 이름이 생각이 안 나 말 끝을 흐리자 류미르가 대답해 주었다. "데이브!" "맞아, 데이브. 그 사람도 맨날 일하던 걸?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영주 시중들고, 거기에 검술 연습까지 하는 걸 보고 감탄 했단 말야." 내가 이렇게 열변을 토하자 세이몬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하지만 웨이본은 맨날 놀던걸? 승마 하거나 아니면 책 읽거나, 낮잠 자거나 뭐 그렇게 말야." 그러자 류미르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말했다. "이상하다.... 이제 곧 영지를 물려 받을 사람이 영지 일에 그렇게 소홀해도 되는거야? 왜 세레나나 데이브는 그런 그를 가만 두는 거야? 웨이본이 하기 싫어 하더라도 그들이 강력하게 일하도록 밀어 부쳐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이상하네?" 류미르가 그렇게 말하자 나도 이상함을 깨달았고 세이몬도 이제는 그 일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우리끼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봤자 그 해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안되겠다. 이렇게 우리끼리 고민 해봤자 답이 나오는 건 아니야. 그럼 내일 부터는 웨이본하고 세레나만 관찰하지 말고 그 주위사람들도 같이 살펴보자. 특히 그 데이브라는 사람. 영주 대리인이라고 하는 그사람, 그사람이라면 뭔가 알지도 몰라." 그러자 세이몬이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물어도 대답도 안 해줄 것 같은 걸?" "그럼 물어보지 말고 그냥 관찰하기만 해. 그럼 뭐라도 알 수 있겠지." 내 말에 토를 다는 세이몬을 노려보며 말하자 세이몬이 찔끔해서 기가 죽은 어투로 대답했다. "알았어~." "으아함~. 그럼 내일 부터 또 다시 시작해야 겠군. 그럼 내일을 위하여 이만 가서 자자고. 난 슬슬 졸립기 시작했어." 류미르가 크게 하품을 하면서 졸립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세이몬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고 둘은 나에게 간단하게 밤 인사를 하고 자기네의 방으로 건너갔다. ======================================================= 조금만 올려서 너무 너무 죄송합니다. ^^; ┌───────────────────────────────────┐ │ ▶ 번 호 : 13296/13311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18일 22:14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10) │ └───────────────────────────────────┘ 다음 날 나는 '설마 웨이브가 전혀 일을 안 도우랴' 하는 생각에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세레나가 일을 하러 서재로 향할 때 자청하여 일을 돕기로 했다. 세레나는 갑작스럽게 내가 돕겠다고 나서서 약간 놀란 듯 했지만 곧 기분 좋게 웃으면서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먼저 서재에 와 있던 데이브는 내가 돕는 것이 별로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추려서 나에게 건내 주면서도 그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나타난 못 마땅한 기색을 일부러 숨기려 하지 않았다. 물론 동기가 불순하기는 하지만 기껏 도와주겠다고 팔을 걷어 붙히고 나섰는데 막상 도움을 받는 사람이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이자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그가 건내주는 종이 뭉치를 거칠게 빼앗듯이 받아 들고는 서재 중앙에 있는 탁자 앞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데이브가 나에게 다가와서 한 마디 했다. "다 한 뒤에는 저에게 주십시오. 틀렸는지 확인 해 보겠습니다." 나는 화가 난 눈초리로 매섭게 그를 노려 보았지만 그는 눈하나 깜짝 안 하고 예의 그 못마땅한 기색이 약간 깔려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본 뒤 몸을 돌려 책상으로 다가가 그 위에 쌓여 있는 종이 더미속으로 파묻히는 것이었다. 열 받은 내가 계속 나에게서 멀어지는 그의 등짝만 노려보고 드래곤의 기운을 남김없이 드러내면서 쏘아 본다면 저 얼음같은 얼굴이 어떻게 될 까 상상하고 있는데 세레나가 자신의 일거리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데이브에게 아린의 실력을 보여 줘." "칫~, 정말 저 사람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어요." "그래 그래." 나는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말겠다는 열의에 불타 올라 열정적으로 나에게 맡겨진 종이 뭉치들을 파고 들었다. 내가 맡은 일은 회계였는데 성의 예산에서 지출되거나 수입 된 돈들은 장부에 적히는 한 편 장부와 같이 보관되는 수입, 지출에 관련된 서류를 일일이 장부에 적힌 것과 비교해 보면서 계산이 맞는지 검토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수학과 국어를 잘 하는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면서도 양은 많은 그런 일이었다. 그러니 이런 일을 잘 해봤자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고 못하면 바보가 되어 버리니 이 일로는 나의 이 총명하고 뛰어난 점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세레나의 일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 점을 깨달은 나는 속으로 한번 더 부글 부글 끓었지만 자진해서 일을 돕겠다고 한 터라 지금에 와서 일이 맘에 안든다고 다른 일로 바꿔 달라고 불평할 수는 없기에 그냥 꾹 참고 일을 시작했다. 우선 관련 서류들은 지출과 수입으로 나뉘어 있었으므로 그 상태에서 종류별로 나누고 그 뒤에 그것을 또 날짜 순서대로 정리한 뒤 장부를 펼쳐서 각 항목들이 모두 적혀 있는지, 그리고 계산이 정확한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이래뵈도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몸, 게다가 해츨링 시절에 엄마가 기본 지식은 익혀야 한다면서 직접 나에게 가르쳐 준 지식들이 있었으므로 서류 분류와 각 항목들을 차근 차근 살펴 보는 게 좀 시간을 잡아먹었을 뿐이었지 나머지 계산들은 금방 끝이 났다. 틀릴 까봐 한 번씩 더 검산을 해 본 뒤 나는 장부와 서류 뭉치를 들고 데이몬이 앉아서 일하는 책상으로 다가가 약간 힘을 주어 고의적으로 쾅 소리가 나도록 책상 위에 서류와 장부들을 내려 놓았다. 한창 다른 서류들을 들여다 보던 데이몬이 깜짝 놀라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자 나는 거만하게 그를 내려다 보면서 한자 한자에 힘을 주어 또박 또박 말했다. "다, 했, 어, 요." 데이브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얼굴에는 다시 나를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하기 싫어서 대충 대충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자신 앞에 놓인 서류들을 들여다 보면서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거기다 놓고 가세요. 제가 나중에 하죠." '이게 뭔 소리야? 남이 다 했다는 데 그걸 못 믿고 자기가 한다고?' 나는 주먹을 살짝 쥐고 책상을 내리쳐 그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게 했다. "다 했다고 했을 텐데요? 지금 확인해 보시죠?" 그러자 이제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내가 가져온 서류들을 끌어다 자신 앞에 놓았다. "거기 틀린거랑 이상한 건 빨간 펜으로 체크 해놨으니까 알아서 봐요. 그리고 맨 위에 있는 종이들은 계산한거니까 의심이 나면 당신이 직접 계산해 봐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홱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려 세레나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가 그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요?" 나는 그가 듣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않은 척 하면서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투덜 거렸다. 그러자 세레나가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세심하게 신경 써서 그래. 그러니까 너무 기분 나빠 하지마. 하지만 저런 데이브의 표정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것 같아." "흥, 만약 나중에 틀린 곳이 한 군데도 없다고 말하면 그의 정강이를 한 대 걷어 차 줄거예요. 기껏 돕겠다고 나선 사람을 못 믿고 그렇게 말하다니..." "데이브가 다 살펴 보면 아린이 얼마나 뛰어난 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때 사과 할거니까 너무 화내지 마. 아, 그래. 아린 일 다 했으니까 내 것좀 도와줄래? 이것도 별로 어렵지는 않은 거야." 세레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류들 중 한 쪽으로 분류해 놓았던 서류들을 나에게 건내주었다. 그것도 회계에 관련된 일이었는데 앞으로 쓸 예산들을 설명과 함께 적어놓은 것 들로 세레나가 살펴보고 필요한 것 들만 분류해 놓은 것들이었기에 나는 어느 정도 되는지 계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 들면서 알고 싶었던 말을 은근 슬쩍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언니, 이렇게 많은 일을 언니랑 저 웃긴 남자 둘이서만 해요?" 그러자 세레나는 피식 웃는 듯 하더니 별로 꺼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이런 중대한 일들은 우리 둘이서 하지. 데이브는 아버지의 대리인이니 당연한 거고, 나도 영주 딸이잖아. 그러니 일 할 의무는 있다고 생각 했지. 여자라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건 싫거든." '역시, 그 웨이본이란 사람은 안 나오는 걸 보니 세이몬의 말대로 그는 일을 안 하는 군.' 나는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하면서 겉으로는 세레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언니 생각에 동감이에요. 여자라는 이유로 가만히 있는 여자들도 한심한거거든요. 특히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 무시하는 형편 없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여자들도 자신들의 일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내가 데이브를 힐끗 보면서 말을 덧붙이자 그 말을 들었는지 데이브가 피식 웃었다. 나중에 내가 세레나의 일을 도와 다 끝마쳤을 때 그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일을 잘 해주었다고 하면서 미소 띈 얼굴로 정중히 사과하는 바람에 그의 정강이를 걷어 차 주려 했던 내 계획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그렇게 일이 끝나고 세레나와 나는 서재를 나왔고 데이브는 정리를 해야 한다며 뒤에 남았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웨이본은 서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 또 다시 내 방에 모인 우리 셋은 관찰하는 방법을 바꾼 탓인지 지금까지 알아냈던 것 보다 더욱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웨이본이 전혀 일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이한 것과 동시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성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영주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웨이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성 안의 하녀들이나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예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것 뿐 될수 있는 한 그를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고 웨이본이 지나간 뒤에는 그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데이본은 더 심했는데 그는 영주 앞이 아닌 곳에서 웨이본을 만나면 찡그린 얼굴로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에게? 그럼 그 웨이본은 가만히 있어?" 류미르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의아해서 그의 말을 자르고 묻자 류미르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분한 걸 억지로 참더라. 아무래도 영주 대리인이다 보니 그도 어쩌지는 못하는 모양이더라." "흠, 그럼 그 웨이본이란 사람이 수상하지?" "그래, 어쩌면 정말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지도 모르겠어." 내가 세이몬과 류미르를 돌아보며 묻자 세이몬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 그 결혼을 방해할 작전을 짜는 건 어떨까? 이제 낼 모래면 결혼이잖아." 세이몬이 동의를 하자 나는 기운이 나서 웨이본을 어떻게 하면 골려줄까 생각하기 시작 했는데 류미르가 찬 물을 끼얹었다. "잠깐만 기다려, 아직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게 확실한건 아니잖아." "하지만 그가 수상하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좀더 두고 보자고." 내가 뾰루퉁한 얼굴로 항의했지만 류미르는 단호하게 내 의견을 저지했다. 좀 속상하기도 했지만 류미르의 말이 맞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 │ ▶ 번 호 : 13337/13362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20일 22:19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11) │ └───────────────────────────────────┘ 다음 날이 되자 내일로 다가온 세레나의 결혼식 준비로 성 안은 한층 더 부산하고 바빠진 모습이었다. 신전에서 결혼 서약을 한 뒤 이 성으로 장소를 옮겨 파티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각 손님들은 늦게까지 파티를 열고 그 날은 이곳에서 묶고 다음날 점심이 되어야 떠날 예정이었기에 파티가 벌어질 넓은 홀을 단장하는 것은 물론이요 손님들이 머물 방까지 마련해야 했기에 하녀들이 정신없이 이리뛰고 저리 뛰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세레나의 유모이자 하녀장인 엠마의 커다란 목소리도 오늘따라 자주 들렸다. 세레나의 방 한 구석에 서 있던 웨딩 드레스는 이제 완성되어 신부에게 입혀지기만 기다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주함 속에서도 세레나나 웨이본, 그리고 데이브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인 양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자신들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특히 웨이본과 세레나는 정작 자신들이 주인공이면서도 너무나 무덤덤해보였다. 세레나야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결혼이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웨이본까지 들떠 보이지 않자 좀 어리둥절 해졌다. '설마 웨이본도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 게 아냐?' 그 날도 점심을 먹고 난 뒤 난 세레나가 일하는 것을 돕기 위해 서제로 갔다. 어제 데이브의 낭패한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약간 찜찜했기에 오늘은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잡을 수 있으면 물고 늘어져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데이브도 어제 내 실력을 알고 또 내가 오늘 단단히 결심을 했다는 것을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나에게도 세레나를 대할 때 처럼 정중하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더욱이 무시하지도 않고 어느정도 존준해주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니 초반부터 김이 팍 새버린 나는 꼭 뭐 씹은 기분으로 일거리를 받아 들 수 밖에 없었다. 저녁때가 다 되었을 무렵 지방 행정청에서 나온 감찰사라는 사람이 성으로 찾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마치 꼭 올 사람이었던 듯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그들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은 내가 세레나에게 의문을 구하는 표시로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자 그녀는 알아채고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지방 행정청이란 정부에서 파견 된 사람들이 일하는 곳으로 몇개의 영지마다 행정청이 하나 씩 있다고 했다. 이들은 정부로 부터 지시를 받아 각 영지로 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영지에서 일어나는 일들, 예를 든다면 영주 집안에서 누가 태어났다거나 아니면 죽었다거나, 그리고 결혼하는 일들과 영지의 면적, 그리고 매 해 소득 등을 정리하여 정부에 보고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또 각 영지에서 무슨 큰 일이 일어나 영지 자체 내에서 일을 처리할 수 없을 경우 행정청에서 나와 일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니 한마디로 영주들을 관찰하고 감시하는 기관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들 중 하나는 지방 영주들이 죽었을 경우 그 영지를 물려 받을 때 와서 증인으로 참석하고 또 국왕을 대신하여 영지를 하사해 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보통 높은 귀족들이나 권력이 큰 사람들이 죽었을 때 성과 그 집안과 작위 등등을 물려주는 경우 물려줄 것들을 국왕에게 바쳤다가 그 국왕이 물려받을 사람에게 다시 하사했는데 지방 영주들이 그런 일을 하러 왕궁으로 가기도 그렇고 또 국왕 입장에서도 지방 영주들이 물려 받는 일 까지 그렇게 일일이 신경쓰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그런 힘 없고 약한 지방 영주들은 왕궁으로 가는 대신 지방 행정청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국왕 대리인으로 그 일을 처리한다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도청이랑 지방 검찰청을 합쳐놓은 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감찰관도 내일 웨이본과 세레나의 결혼식이 있는 동시에 웨이본이 영지를 물려 받기 때문이었다. 감찰관이 온 데다가 성 안도 준비를 거의 끝 마친 상태였기에 내일이 세레나의 결혼식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밤에 내 방에 모인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나는 별로 좋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류미르와 내가 대판 싸웠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이 하루 앞, 그것도 이제 날이 새면 결혼식이 시작 될 것이었기에 초조해진 내가 무조건 결혼식을 망쳐 버리자고 주장을 했는데 류미르기 강경하게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밝혀진 게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나는 벌컥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류미르에게 소리를 쳐 버렸고 덕분에 류미르도 화가 난 채로 침묵을 지켜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내가 감정적이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지만 화가 나는 것을 어떻게 주체를 하지 못했다. 류미르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거의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한 채 세레나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갑작스레 내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껴졌고, 그렇기에 분노가 느껴진 것이었다. 어느새인가 나는 정말 세레나가 좋아졌나보다. 하긴 나에게 이렇게 친 언니같은 존재는 처음이었다. 전에도 나는 외동딸이었고 이곳에서도 외동딸이었으므로 자매는 커녕 형제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친 언니란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존재를 만났는데 그녀를 도와 줄 수 없다는게 너무나 분했다. 그리고 같은 여자로써, 아직까지는 순수한 로맨틱한 감정을 잊지 않은 나로써는 이 결혼을 가만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류미르에게 말해 봤자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난 류미르와 세이몬을 내 방에 내버려 두고 세레나의 방으로 향했다. 내 집도 아닌 이상 내 방을 나오니 갈 곳이 없었고 또 세레나도 아직 안 잘것 같아서였다. 세레나의 방 문앞에 이르자 자지 않으면 보여야 할 방 문 틈새로 나오는 빛이 없었다. '자나?' 문을 두드려 볼 까했지만 어쩌면 정말 자고 있는지도 모른 단 생각에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갈 곳이 없었다. 지금 내 방으로 돌아가면 아직 그곳에 있을 류미르와 세이몬이 웃을 것 같아서 서재나 가서 책이나 읽으려고 하는 데 살짝 열려진 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어 몰래 들여다 보니 데이브가 아직 까지도 서류 뭉치들 속에 파묻혀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결국 나는 밤 정원을 산책 하기로 마음 먹고 현관 문을 나섰다. 이제는 다 차서 다시 홀쭉해지고 있는 달이 하늘에 고고히 떠 있었고 그 주위를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는 별들이 수놓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아무도 없어서 고요하고 어두운 정원은 낮의 그 아름 다움은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신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정원을 가로질러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천히 흥분된 감정이 가라앉고 다시 이성이 제 자리를 찾아오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에휴~, 우선은 류미르에게 사과 해야 겠다. 너무 화를 낸 것 같아. 좀 더 나이가 많은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결혼식을 그냥 나두기는 싫은데 어쩌지? 하~, 뭐 좋은 방법 없나?' 내가 이렇게 자신만의 생각에 골똘히 잠기면서 걷다가 갑자기 내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앞을 보자 내 앞에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다. 어리둥절해 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서 있는 곳이 정원에 나 있는 길이 아닌 그곳에서 한참 벗어난 관목들이 우거져 있는 덤불 근처였다. '나도 참...'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웃으며 다시 길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덤불 속에서 이상한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 '말소리 같은데?' 호기심이 생긴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치마들이 관목들을 스쳐 소리를 내게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치마 자락을 잡아 올려서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에 단단히 묶고 엎드려 조용히 기었다. 앞으로 기어가면 갈수록 소리는 좀 더 잘 들렸다. "아잉~,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이 밤에 누가 여길 온다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여긴 안전한 곳이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 │ ▶ 번 호 : 13391/13409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21일 22:15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12) │ └───────────────────────────────────┘ 조심 스럽게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조금 더 기어갔다. 덤불 사이에 약간의 공터가 있었고 두터워 보이는 모포가 바닥에 깔린 상태에서 그 위에 두 사람이 엉켜 있었다. 달빛에 비친 은색에 가까운 머리카락... '웨이본...' 나는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겨우 삼켰다. '젠장, 이놈의 작가는 창의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단 말야...' 눈쌀을 한번 찌푸려 준 뒤 조심스레 뒤로 후진했다. 맘 같아선 당장에 뛰어 들어 '이런 못된 노무시키~' 라고 소리치며 웨이본의 면상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싶었지만 지금 내가 소동을 일으키면 세레나에게 먹칠하는 꼴이 될거고 또 이 한밤중에 일어난 소동을 영주가 못 알아챌 리 없었다. 틀림없이 세레나는 이런 일을 눈치채고 있었으면서 영주한테는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을거다. '그러니 내가 나서서 드러낼 수는 없지...'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면서 소리가 나지 않게 뒤로 후진하고 있는 데 뭔가가 치마자락을 잡아 당겼다. 조심스레 살펴 보니 작은 나무 가지에 치마가 걸려 있었다. '제기랄...' 한 손으로는 땅을 집어서 몸을 지탱해야 했기에 오른 손만 들어 가지에 걸린 치마 자락을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나무 가지에 치마가 구멍이 뚤려서 끼워진 상태 였고 그 위로 치마에 구멍이 뚤릴 때 자리를 이탈한 실들이 엉켜 있어서 치마 자락이 잘 빠지질 않았다. 나무 가지를 부러뜨리면 소리가 나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들킬 것 같기에 그러지는 못하고 몸도 불편한 상태에서 끙끙 거리며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땀방울이 이마에 맺혀서 얼굴 선을 따라 또르르 굴러 내려가는 것을 느낄 무렵 참지 못하고 치마를 찢을 까 고민하고 있는 데 웨이본이랑 같이 있던 여자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내일 결혼이신 신랑이 이래도 돼요?" '흥, 그걸 알고 있는 너도 하고 있잖아?' "후후, 상관 없어. 어짜피 그 잘난 요조 숙녀는 나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훗, 나도 그 계집의 몸은 관심 없어. 아마 그 계집은 죽을 때 까지 처녀로 살아야 할껄? 물론 애인이 없을 경우이겠지만, 그 계집의 자존심으로는 애인을 구하지는 못할 거야." "저런, 그래도 명색이 신부인데..." "흥, 그 계집이나 나나 정략 결혼이라는 걸 아는 처지에 무슨... 그 늙은 영감탱이만 죽여버리면 그 계집도 처리해 버릴거야." "호호호, 그럼 당신 부인 자리는 비겠네요?" "왜? 그 자리에 앉고 싶어?" "아이~, 잘 아시면서..."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나쁜 자식.' 나는 거의 다시피 치마 자락을 거칠게 나무 가지로 부터 분리해 내고 천천히 후진을 계속하여 덤불 더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발소리를 죽여 그 곳에서 부터 조금 더 멀어 진 뒤 내 모습을 살펴 허리에 묶어 놨던 치마자락을 풀어서 제대로 정리 하고 온 몸에 붙어 있던 작은 나무 조각과 나뭇잎 들을 털어 내었다. 아까 그 나무 가지에 걸려 찢어진 곳은 주름 사이에 살짝 감춰져 겉으로 보기에는 잘 안 보였다. 왠만큼 옷 정리를 했다 싶자 나는 천천히 걸어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향했다. '웨이본... 바람 피는 남자들은 딱 질색이야, 그런데 뭐? 바람피는 것도 모자라 평생 세레나를 안지 않을거라고? 게다가 영주가 죽은 뒤에 처리 한다니... 이 영지를 그냥 꿀꺽 할 셈이군. 흥, 내가 가만 둘 줄 알아? 넌 이제 죽었어!' 빨리 이 일을 류미르와 세이몬에게 알려 대책을 세우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 놀렸다. 조용히 성 안으로 들어와 이층에 있는 내 침실로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는데 어떤 문 앞을 지나갈 때 안쪽에서 부터 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가 싶더니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거의 본능 적으로 플라이 주문을 외워 날아올라 천장에 몸을 붙히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꺼졌다. 그러나 계속 문 쪽으로 다가오는 걸음 소리는 끊이지 않아 숨을 죽이고 그 문을 노려 보았다. 잠시 후 그 문이 소리 없이 살짝 열리더니 성인 남자가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을 만큼 까지 벌어지자 누군가가 거기서 조용히 나왔다. '데이브?' 그 방에서 조용히 나온 데이브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재빠른 걸음 걸이로 그 곳에서 떠났다. 그의 그런 의심스러운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허공에서 내려와 데이브가 나온 문 앞에 살짝 착지했다. 그리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 하고 난 뒤 그 문을 열고 살짝 안을 들여다 보았다. 넓은 방안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달 빛만이 방안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방 한쪽 구석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침실임이 분명 했다. 나는 그 정도로만 살펴 보고 재빨리 문을 닫고 내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류미르와 세이몬은 내 방에 머물러 있었다. 단지 류미르는 화가 나서 굳어진 얼굴 이었고 세이몬은 졸립고 지루하다는 뚱한 표정으로 있었지만... 내가 그 방으로 들어가자 내 기척을 느낀 류미르가 얼굴을 들어 나를 노려보면서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밖에. 아, 그렇게 화내지 말고 이쪽으로 모여봐. 내가 무슨 일을 보고 왔는지 알아?"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손짓하자 류미르가 굳은 얼굴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풀고 내게 다가왔고 세이몬은 뚱해진 얼굴이 풀리면서 반짝 거리는 눈으로 다가왔다. "아까 바깥에 있는 정원에 갔다 왔는데 말야, 거기서..." 나는 그들에게 내가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찬찬히, 그리고 빠짐 없이 말해 주었다. 더불어 아까 데이브가 보여준 이상한 행동 까지도... "흠, 결국 웨이본이 나쁜 놈이란 말이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던 류미르가 왼 손으로는 오른쪽 팔꿈치를 받치고 오른 손의 엄지 손가락으로는 턱을 바친 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니까, 더욱이 그 작자는 아마 영주도 죽이려고 할거야. 영주가 죽은 뒤에 세레나도 처치 하겠다고 하는데 영주라고 안 죽이겠어?" 내가 흥분된 어조로 분연히 말하자 세이몬이 반짝 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그 웨이본이라는 사람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당연하지. 그런 사기꾼에 도둑에다 바람둥이 같은 자식을 그냥 어떻게 두냐? 류미르, 아직도 날 막을 생각은 아니겠지? 이렇게 까지 그 작자가 나쁜 놈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날 막겠다면 너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내가 류미르를 바라보며 살벌하게 말하자 류미르가 쓴 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에구, 어련 하겠냐? 그렇게 열 받지만 말고 내일 어떻게 할 건지나 생각 하자고." 난 류미르까지 내 의견에 동의를 표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일 어떻게 하면 결혼을 못하게 막을 수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번 결혼식만 막는 게 아니라 영원히 세레나와 웨이본이 결혼을 못하게 해햐해. 특히 웨이본이 영지를 물려 받으면 더더욱 안돼고." "그냥 죽여 버릴 까?" 나의 설명에 세이몬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범인 이라는 것이 들키지 않게 해야 해. 만약 들켰다가는 골치가 아파 진다고." 류미르의 부연 설명에 세이몬은 끙, 하고 신음을 내 뱉더니 다시 생각하는 표정으로 돌아가 입을 다물었다. "웨이본을 죽여 버리는 게 가장 간단 하지만 말야, 그냥 죽여버리는 것 보다는 고생을 시키는 게 어때?" 갑작스런 나의 제안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류미르의 질문에 난 씨익 웃어 보였는데 그게 그렇게 이상 했는지 류미르와 세이몬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졌다. "야, 표정들이 왜들 그러는 거야?" "아하하, 아냐. 그냥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나 할까.." 세이몬이 얼른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면서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조로 말했다. 난 그런 그의 말이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쯤하고 그냥 넘어가 내 생각을 말했다. "틈을 봐서 그 녀석을 공간이동 시키는 거야." "어디로?" "북대륙에 위치한 소르드 국 국경 근처에 있는 드래곤의 숲 근처 지점으로... 그 근처에는 사람들이 없고 몬스터들이 꽤 많아서 거기로 떨어지면 아마 고생좀 할껄?" 웨이본이 거기 떨어져 고생하는 상상을 하자 기분이 좋아진 나는 다시 씨익 웃었는데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의 얼굴이 흠칫 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재빨리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딴 곳을 바라보는 척 하더니 내가 그런 그들에게 살기를 내뿜자 다시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어때? 내 생각이?" "아하하, 뭐 괜찮은 것 같네..." "그래, 그게 제일 좋은 것 같다." '이 자식들...' 그냥 대충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이어서 나는 좀 못마땅 했지만 뭐 내 의견에 동조 한다는 데... 나중에 가서 딴 소리는 못하겠지? "좋아. 그럼 내가 틈을 봐서 그 녀석에게 마법을 걸면 돼겠군. 그럼 됐지?" 내가 약간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 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환하게 피고 미소까지 띄우자 그들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내일을 위해 자자고. 잘자, 안녕~" 내가 그들을 끌다 시피 해서 내 방 밖으로 밀어 내고 문을 닫자 밖에서 그들이 뭐라고 궁시렁 대면서 자신들의 방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피식 웃고는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가 불을 껐다. '흥, 어디 두고봐라 웨이본~' ┌───────────────────────────────────┐ │ ▶ 번 호 : 13463/13467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22일 23:00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13) │ └───────────────────────────────────┘ 그러나 나는 그에게 복수(?)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다음날 이침 이른 시간, 나는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잘 때 입고 있었던 헐렁한 셔츠와 바지 위에 실내 가운만 걸쳐 입고는 방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일이 일어난 곳이 내 침실과 같은 층이었기에 얼마 안 되어 나는 새파랗게 질린 하녀가 문 앞에서 바들 바들 떨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 말고도 계단 쪽에서 부터 여러 사람들이 놀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뒤 쪽에서도 류미르와 세이몬이 달려 오면서 나에게 외쳐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상태 였기에 아직도 새파랗게 질려 문 가에 서서 움직이지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떠는 하녀를 밀치고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방 중앙에 놓여 있는 탁자 바로 옆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는데 눈을 하얗게 까 뒤집고 입에는 거품을 물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누구인지 잘 몰랐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화려한 고급 실크로 된 실내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가 거의 은발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남자였다. "웨이본..."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듯 보이는 유리 잔이 그의 손 근처에서 깨져서 산산 조각이 나 있었고 그 유리잔에 담겨 져 있었던 듯한 술 같은 노란 액체가 그 주위의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내 뒤를 이어 그 곳에 도착한 류미르와 세이몬이 방 안으로 들어와 그의 근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얼굴과 그 주위를 한참 동안 살펴 보더니 일어나 나를 바라 보았다. 세이몬이 먼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죽었군..." 나는 순간 그를 한대 패주고 싶은 감정이 솟아 올랐다. 그러나 내 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광경을 보고 놀라 터트리는 외침을 듣고 있었기에 그러지는 못하고 세이몬을 째려 보며 대답해 주었다. "누가 그걸 몰라?" 일어서서도 그 주위를 차근 차근 살펴 보고 있던 류미르가 그 뒤를 이어 자신이 알아낸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독을 마신 것 같아. 아마 누군가가 이 사람을 죽이려고 술에 독을 탄 것 같은데? 바닥에 있는 술이 거의 마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제 밤에 이 술을 마시고 죽은 것 같아. 하지만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죽은 걸 보면 독성이 꽤 강했나봐, 만약 비명을 질렀다면 우리가 못 들을 리 없었을 텐데 말야..." 그러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나이가 어려 보이시는 데 꽤 날카로우시군요." 고개를 돌려 보니 어제 오후에 이 성에 도착 한 감찰사였다. 그는 나보다 약간 작은 키에 외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도 동안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나이가 어려 보였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과 눈매를 보고 나면 그가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며 능력이 있는 감찰사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방 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이곳 저곳을 세심히 살펴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나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방 구석에 위치해 있던 커다란 침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제 밤에 보았던 창문으로 들어 오는 달빛에 비춰 히미한 빛을 내뿜는 것 처럼 보인 커다란 침대가 생각 났다. '설마...' 그 침대를 멍 해져서 보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살짝 두두렸다. 뒤를 돌아보니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의 데이브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런 건 숙녀께서 보실 게 못 됩니다. 괜찮으시다면 세실리아 아가씨와 같이 계셔주시겠습니까?" 그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나려고 했지만 그의 말 끝에 들린 세실리아의 이름에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마 지금쯤 세실리아도 이 일을 알고 있을 것이고 꽤나 놀라 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문 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밀쳐서 그 방을 빠져 나와 세레나의 방으로 걸어갔다. 가는 도중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침착한 목소리의 데이브가 들려왔다. "자, 신전측에 연락하고 초대한 손님들께도 빨리 연락 하도록. 그리고 모두 입 조심해서 영주님께는 이 일이 알려지지 않도록 해. 영주님께는 나중에 내가 말씀 드리겠다." 그의 침착함과 상황에 맞는 지시를 내리는 능력에 마음 속으로 감탄 하면서 세실리아의 방 앞에 다다라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에 안에서는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 목소리는 세실리아가 아니라 엠마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이 소동이 일어나자 마자 엠마가 세실리아의 곁에 붙어 있었던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역시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되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세실리아 옆에 엠마가 침착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언니, 잘 잔 것 같지 않네요? 얼굴이 왜 그 모양이예요?" "아린..." 나를 바라보는 세실리아의 얼굴이 조금 안정이 되고 혈색이 돌자 엠마는 그 얼굴을 보고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침착한 음성으로 엠마에게 말했다. "엠마, 가서 뭔가 알아낸 게 있으면 지체없이 와서 나에게 알려줘요. 난 아린이랑 있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아가씨." 엠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방을 나섰다. 세실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 옆에 있던 실내 가운을 잠옷 위에 걸치고는 탁자 앞 의자에 앉으며 나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온거니?" 그제야 나도 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쓴 웃음을 지으며 세레나의 앞 의자에 앉았다. "아침에 비명 소리를 듣고 놀라서 일어 났어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 알아보러 급하게 뛰어 나가느라고 옷도 안 챙겨 입고 나갔지 뭐예요?" 내 말을 듣자 세레나는 약간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나는 순간적으로 이 일을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그러나 어짜피 세레나도 알게 될 일이고 또 이 일은 세레나도 알아야 할 일이라고 판단 되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언니, 듣고 놀라지 말아요. 웨이본이 죽었어요." 나의 놀라지 말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세레나의 얼굴은 다시 핏기를 잃었고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그녀의 눈은 놀라서 더욱 더 커졌다. "웨이본이?" "예. 아까 가보니까 침실 바닥에 죽은 상태로 쓰러져 있더라구요." "왜? 무슨 일로?" "류미르가 살펴 본 바로는 독을 마신 것 같대요. 누군가가 웨이본이 마시는 술 속에 독을 넣었는데 그걸 모르고 마셨 다가 죽은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독살?" "예." 세레나는 신음 비슷한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뭔가를 곰곰히 생각 하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나도 내 나름대로 누가 그를 죽였는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제 밤에 그 방에서 나온 데이브가 맘에 걸렸다. 데이브도 영주 대리인이라고 하는 만큼 왜 세레나와 웨이본이 결혼 하는 지 알테고 또 웨이본을 미워 하는 만큼 동기도 충분 했다. 그러나 그걸로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웨이본이 죽어서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누가 범인이 되어도 상관 없었고 그 범인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다. 세레나는 세레나 대로 생각에 잠긴 채 침묵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방해하지 않게 그냥 가만히 있어서 그 방은 잠시 후에 어떤 하녀가 우리들의 아침 식사를 가지고 올 때까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조용한 공기를 가르고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세레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을 바라보았다. "누가 온 모양이예요." 그녀가 너무 놀라자 그녀를 안심 시키려는 차원에서 부드럽게 말 하고는 문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와요." 그러자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커다란 쟁반을 가진 어떤 하녀였다.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 와서는 쟁반 위에 가득 담겨 있는 접시들을 우리 앞 탁자 위에 내려 놓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세레나가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됐지?" "저도 잘 모릅니다 아가씨. 데이본님과 엠마님께서 그 근처에는 기사 몇 분과 감찰사님, 그리고 시종 몇을 제외 하고는 다가가지 말 것을 엄명하셨거든요." "그럼 내 형제들은?" 류미르와 세이몬이 순순히 그 현장에서 빠져 나가지 않을 거란 걸 아는 내가 놀라서 묻자 그 하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손님들 께서도 거기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레나는 그 하녀도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는 듯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았다. 그만 물러 가거라." 그 하녀는 다시 공손히 인사를 한 뒤에 방을 나갔다. 세레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멍 하니 앉아 있어서 나는 손수 앞에 있는 찻잔 중 하나에 차를 따라서 그녀의 앞에 밀어 놓았다. "언니, 마셔요. 그럼 좀 안정 될 거예요." 세레나는 내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고맙다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찻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많이 놀랬어요?" 다시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솔직히 믿겨지지가 않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게...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내 주위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이번이 처음 이거든... 그래서 조금 놀랬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죽었다니까 이상한거 있지?" "그런데 누굴까요? 웨이본을 죽인 사람이..." "글쎄...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긴 했어도 그 사람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그다지 미움 받지 않던 것 같은데 말야." "모르죠. 언니 모르게 무슨 나쁜 짓을 저질러서 원한을 샀는지도..." 내가 일부러 장난 스럽게 말하자 세레나가 약간이지만 웃었다. "호호,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어째든 감찰사가 직접 조사하고 있으니 조만간 범인이 밝혀 지겠지." "아, 범인 하니까 생각 나는데요. 그 범인은 어떻게 되죠? 아마 영주님께 처리 권한이 있겠죠?" "아니, 이건 영지 안의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국법에 따라 처형 될거야. 영주의 의견은 그냥 참고만 할 뿐이지. 어머,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아버지에게 까지 생각에 미쳤는지 세레나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아까 보니까 데이브가 자신이 직접 말하겠다고 입단속 시키던데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지금 언니가 영주님께 가면 무슨 일이 난 걸 눈치 채시지 않을까요?" 서둘러 자신의 의상실로 가려던 세레나는 내 말에 멈칫 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겠지?" "예. 그러니 언니도 무슨 소식이 있을 때 까지 여기서 느긋하게 기다려요. 아침도 든든히 먹구요. 그래야 어떤 일이 있어도 잘 대쳐할 수 있지요. 이럴 때 일수록 몸을 챙겨야 해요." 내가 충고 식으로 말하자 세레나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어." 그리고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숟가락을 들어 이제 식기 시작한 스프를 천천히 떠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음식을 앞에 놓고 속으로 침만 삼키고 있던 나도 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 │ ▶ 번 호 : 13541/13556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25일 21:55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14) │ └───────────────────────────────────┘ 음, 어떻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제 실수인 것 같군요. 원래 (14)화가 있어서 오는 올리는게 (15)가 되어야 하는데 (14)가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네요. 아마 제가 깜박 잊고 안 올린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지금 보니까 중간에 내용이 끊긴 곳이 있네요. 그래서 아까 올린 (14)화 지우고 다시 올렸어요. ===================================================================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치고 나자 세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데리고 자신의 의상실로 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생글 생글 웃으며 평소와 같이 (그 성에서 머무르는 동안 세레나는 매일 아침 나를 불러 나에게 코디를 해주었었다.) 내게 어울릴 만한 드레스와 악세사리를 골라 내고는 화장대 앞에 나를 앉히고 내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내 머리를 천천히 빗어 내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면 내 앞에서 태연한 척 하려고 최대한으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나도 그녀에게 장단을 맞춰 아무 일도 없는 듯 밝게 웃으며 우스개 소리를 해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리가 옷을 다 챙겨 입고 무엇을 하며 놀까(?) 에 대해 의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세레나는 다시 얼굴이 굳어지면서 창백해 졌고 나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한번 쳐다본 후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엠마였다. "감찰사님께서 웨이본님 방으로 와달라고 하십니다." "알았어요." 세레나는 약간 휘청 거리는 몸으로 겨우 겨우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내가 재빨리 그녀의 팔 한쪽을 부축하자 그녀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부드럽게 내 손을 거절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는 똑바로 서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어깨를 펴고 안정된 동작으로 문을 나섰다. 세레나를 따라 웨이본의 방에 가 보니 그 방안에 있던 시체와 깨진 유리 조각, 그리고 바닥에 흘려져 있었던 술은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감찰사가 서서 막 방 안으로 들어서는 세레나를 보고 저마다 인사를 했다. 그러나 세레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감찰사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그래 뭘 알아내셨나요?" 감찰사는 세레나의 말에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조급하게 묻지 않으셔도 말씀 드릴 생각 입니다. 단지 영주님께서 오신 다음에요." 그 감찰사의 말에 세레나는 무척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영주님? 아버지께 말씀 드렸나요?" "데이브라고 하는 자가 모시러 갔습니다. 아마 그가 말씀 드렸겠지요. 아, 저기 오시는 군요." 감찰사가 세레나의 어깨 너머로 문 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우리 모두는 일제히 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데이브가 밀고 있는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은 영주가 창백해진 얼굴로 막 문을 너머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버지..." 세레나는 얼른 영주 곁으로 달려가 그의 손을 부여 잡았다. "세레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하필이면 결혼식 날 이런 일이 생기다니..." "많이 놀라셨죠?" "난 괜찮다. 그러는 너는 어떠냐? 몸은 괜찮고?" "전 괜찮아요." "에헴." 그 때 감찰사가 헛기침을 해서 부녀의 대화를 끊고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오게 만들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뒤에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는 영주와 세레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얼굴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 한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쭉 둘러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다 모이셨으니 이야기를 시작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 아시고 계시리라 믿지만 다시 한번 간단하게 말씀 드리지요. 어제 밤 누군가가 이 방안으로 들어와서 저기 장식장에 놓여 있던 술 안에다 독을 탔습니다." 감찰사가 가르키는 손 끝을 따라가니 방 한 구석에 놓여 있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장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여러 가지 청동이나 은 등으로 만들어 진 것 같은 조각상이나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 말고도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듯한 아름다운 술병이 대 여섯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방의 주인이신 콘차일 씨 (웨이본을 말합니다. 아직 영지를 물려받지 않아 콘차일 경 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는 어제 밤 그 술을 마시고 죽었지요. 시체는 오늘 아침에 발견 되었구요. 그가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한 채 죽은 것으로 보아 독은 무척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 하녀의 말을 들으면 콘차일 씨는 평소에 술 잔에 따른 술을 원샷 한다고 하더군요. 더욱이 밤에 잠자기 전에는 꼭 한 잔씩 드신다고요. 이 것을 볼때 독을 넣은 범인은 콘차일씨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는 거지요. 그리고 시체의 모양과 바닥에 엎질러져 있는 술을 제가 약간 맛을 보니 '검은 저승사자' 라고 불리고 있는 독이더군요." "검은 저승사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에 내가 되묻자 감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독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 '검은 저승사자' 라는 건 그 독의 원래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지요. 본명은 '헤티네크'. 어떤 마법사가 만들어 낸 독약인데 음식에 넣으면 무색, 무취, 무미 이기 때문에 구별이 불가능 하지요." "잠깐만요. 무미인데 감찰사님 께선 어떻게 술의 맛을 보고 그 독약인지 아신 거지요?" 류미르가 그의 말에서 오류를 발견하고는 그의 말을 끊으면서 질문 했다. 감찰사는 그런 류미르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꽤 날카로우시군요. 하지만 그렇기에 그 독인줄 안 거지요. 엄청난 고통에 일그러진 시체의 얼굴 상태와 전혀 맛이 나지 않은 독은 그 독밖에는 없거든요." 그러자 류미르가 이해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사는 류미르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다시 독에 대하여 설명했다. "원래 독약의 색이 검은색이고 무척 독성이 강해서 왠만해서는 해독도 불가능 하지요. 그래서 일단 마시기만 하면 살아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게다가 마시면 엄청난 고통을 주면서 제일 먼저 혀를 굳게 만들기 때문에 비명 조차 지를 수 없어요. 누군가를 죽이기에는 아주 좋은 독이지요. 단점이 있다면 가격이 무척 비싸다는 걸까요? 덕분에 그걸로 한 가지 더 추리가 가능 합니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잠깐 쉬는 와중에 한번 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즉, 범인은 이 독약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지요. 뭐, 술에 독을 타는 거야 딴 사람을 시켰다고 하더라도 독을 구한 사람도 살인범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 중 그 범인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의 발언에 놀란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리 중 누군가가 범인이다. 그때 류미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감찰사에게 반박했다. "잠깐만요. 왜 거기에 우리가 들어가는 건가요? 우리는 여행중이었고, 이 마을에 온지 일주일 밖에 안 되었단 말입니다. 이 곳에 와서 그 웨이본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지요?" 그러자 감찰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 계신 콘차일 양께선 그의 약혼자이고 영주님은 그의 장인 어른이 되실 분이자 작은 아버지가 되시죠. 그렇게 따지자면 이 분들도 다 용의선상에서 빠지지 않습니까? 더욱이 그 콘차일씨는 이 곳에 오신 지 몇년 안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전에 여러분과 안면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영주 뒤에서 잠자코만 있었던 데이브가 나섰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범인을 찾아내실 생각 입니까?" 감찰사는 다시 한번 우리들을 둘러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천천히 말했다. "우선은 여러분들의 소지품을 검사 할 예정이니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압니까? 여러분들의 소지품 중에서 그 독약이 나올지..." "잠깐만요, 범인이 아직 그 독약을 가지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지요? 벌써 버렸을 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나서서 반박하자 그 감찰사는 얼굴에 미소를 띄운 그대로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 독약이 쉽게 구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독약을 구해 본 사람이라면 그 독이 얼마나 비싼 지 알 겁니다. 그러니 그 독약을 버리기보다는 다시 되팔려고 할거라고 생각 합니다." 그가 너무나 자신 만만하게 말해서 우리중 누구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하긴 전문가가 그렇다는 데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가 내 소지품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버렸다. 그 성에서 머무는 동안 챙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내 마법 주머니를 배낭 속에 넣어 놨었는데 깜빡 잊고 소지품 검사를 하기 전에 미리 빼돌려 놓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우리를 웨이본 방에 모이게 한 뒤로 우리들 곁에는 감찰사의 부하들이 항상 붙어 있어서 우리를 감시 했기에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감찰사는 제일 먼저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내 소지품을 검사 했었다. 류미르와 세이몬의 소지품에서는 별 달리 의심이 갈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아 무사 통과가 되었는데 내 소지품을 검사 할때 배낭 속에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쏟던 감찰사의 부하가 탁자 위에 떨어진 내 마법 주머니를 무심코 만진 것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그제서야 아차 싶어서 그의 머리위로 막 내려 쳐지는 벼락을 마법실드를 쳐서 막았었다.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아서 아무런 피해는 없었지만 그 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마법사?"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에 멍 하니 있던 감찰사가 곧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면서 놀랍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뺌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감찰사의 반응이 더 이상했다. "마법사라..." 그는 그렇게 중얼 거리더니 곧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라면, '검은 저승사자'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겠군요?" '젠장, 잘못 걸렸군...' 감찰사의 거의 확신 어린 말투에 나는 내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버렸음을 직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정도로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예요." "하지만 이상하군요... 에, 실례지만 성함이?" 감찰사는 나에게 한걸음 더 다가서며 뭔가 꼬투리 잡을 것 처럼 말하다가 그제야 내 이름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물어왔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정말 마지못해서 내 이름을 알려 주었다. "아시리안, 아시리안 시스파 슈타인." "예, 실례했습니다. 슈타인양. 어쨌든, 귀족 가문의 숙녀분께서 마법을 익히시다니 의외군요. 아주~ 드문 일 아닙니까?" "드물긴 해도 아주~ 없는 건 아니지요." 나는 그의 말투가 맘에 안들어서 그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내 말투에도 신경쓰지 않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귀족집 숙녀분을 이렇게 시종도 없이 여행을 하신 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가요? 그래서요?" 내가 틱틱 대면서 대꾸하자 그 감찰사는 기분 나쁘게 씨익 웃으면서 나에게 정중히 절하며 요청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좀 내어 주시겠습니까?" 감찰사는 나를 데리고 자신이 머무는 침실로 갔다. 거기서 그는 책상 대신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앉았다. 류미르도 나와 같이 이 방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문 밖에서 감찰사의 부하들에게 제지를 당했기 때문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 힐끗 그의 얼굴을 보니 많이 걱정하는 표정이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번 빙긋 웃어주었다. "슈타인양, 켈틴 연합국 출신이시라구요?" "예." "어디로 가시는 길이었습니까?" "이 나라의 수도요." "무슨 일로요?"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당연히 그것은 말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를 사납게 노려보며 되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 했다. "뭐, 말하기 싫으시다면 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곳에 오기 전에 콘차일씨를 알고 계셨습니까?" "아뇨. 여기 와서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 말예요. 이런 대답이 무슨 소용인가요? 어짜피 내가 한 말의 진실 여부도 가리지 못할 것 아닌가요?" "후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런건 제 소관입니다." "걱정하는게 아니라 괜히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고생하니까 그렇지요." 그러자 그 감찰사가 피식 웃었다. "정의를 위해서라고 생각 하시고 조금만 참아 주시겠습니까?" "정의요? 뭐가 정의란 말인가요?" "범인을 잡아야 정의가 바로 실현되지 않겠습니까?" "재밌군요. 범인을 잡는다고 정의가 실현 되나요?" 내가 그의 말을 비웃자 감찰사는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나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법은 최소한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거죠. 전 그렇게 생각 합니다." "하지만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지 않나요? 예를 들면 죄 없는 사람이라도 범인을 찾을 때 까지는 의심이 있으면 이렇게 괴롭히는 것 처럼 말예요." 그러자 감찰사는 다시 피식 웃었다. "범인을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죠. 아무나 범인으로 몰아 붙여서 처형한다면 슈타인 양 말처럼 죄 없는 사람이 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감찰사님 말이 너무 멋지군요. 하지만 말예요. 만약, 내가 평시민이었다면 감찰사님이 이렇게 예의를 다 해주면서 심문할까요? 제 생각으로는 무조건 몰아 붙이고, 대답 안 하면 엄하게 대할 것 같은데요?" "흠,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도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일인가요?" "전 법이 정의와 동일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최소한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말했지요." "그럼 법이 정의를 해할 경우도 있겠네요?" 내가 꼬치꼬치 캐묻자 감찰사는 내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후, 슈타인양 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군요. 그럼 잠시 쉬었다가 계속 할까요? 아,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식사를 가져다 드리죠."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어름같이 차가운 빛을 발하는 것으로 보아 그도 내 말에 무척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집안인 여식인지 모르는 이상 그가 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편치 않았다. 그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난 그가 밝혀지지 않기를 바랬고 또 그러자니 결국 계속 내가 유력한 용의자로 붙들려 있어야 하니 곤란했다. 게다가 이 상태에서 감찰사의 말에 꼬박 꼬박 대답 하다간 또 어디서 꼬투리가 잡혀 계속 범인으로 몰릴지 모르므로 최대한 대답을 피하기 위해 생각 나는 대로 그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가 무척 화가 났지만... 감찰사가 방을 나간 뒤에 감찰사의 부하가 식사를 가져 왔기에 나는 조금이나마 음식을 먹고 또 감찰사가 들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감찰사의 부하가 접시를 치우기 위해 들어와서 전해주는 말이 심문은 내일 다시 계속한다는 거였다. 대신 내일은 지방 행정청에 소속된 마법사가 와서 심문할 것이니 진실이 금방 밝혀진다고 은근히 협박 비슷하게 말했다. 그리고 오늘은 내 방에서 머물되 다른 사람을 만나는건 금한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하루 종일 내 방안에 갖혀 있어야 했고 류미르나 세이몬도 만나지 못했고 억울하고 분해서 그 다음 날이 되자 나는 무척 화가 나서 누군가가 조금만 건드릴 경우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 식사를 가지고 들어 온 감찰사의 부하가 마법사가 도착 했으니 잠시 후에 심문이 시작 될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아침 식사의 접시를 감찰사의 부하가 가지고 나가자 감찰사와 마법사가 들어왔다. "아침을 드시지 않으셨더군요. 좋지 못한 습관인걸요?" 감찰사는 이제는 화가 다 풀렸는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마 마법사가 왔으니 진실 여부는 금방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와 같이 들어온 마법사라는 사람은 푸른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는 이제 막 50줄에 들어선 듯 보이는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호 : 13589 / 13597 등록일 : 2000년 10월 26일 21:55 등록자 : LODEMP 조 회 : 58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0화 법 = 정의 (?) (15) 그와 같이 들어온 마법사라는 사람은 푸른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는 이제 막 50줄에 들어선 듯 보이는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슈타인양. 나는 지방 행정청에서 마법사 노릇을 하고 있는 늙은이랍니다." 그는 따스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지만 화가 날대로 나 있는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코웃음만 치면서 그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흥!!" "아니, 이게 무슨..." 감찰사는 나의 무례한 태도에 화를 내면서 한 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 나이 지긋한 마법사가 손을 들어 막더니 감찰사에게 한 마디 했다. "자네는 나가 있게나." 마법사가 그렇게 까지 말하자 감찰사는 어쩔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더니 나를 한 번 노려 본 후 방을 나갔다. 마법사는 그가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자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흠,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요. 앉아도 될까요?" "좋을대로..." 나는 여전히 약간 삐딱한 태도로 무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노마법사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앞의 의자에 털썩 주저 앉더니 엄살을 부렸다. "에구구, 다 늙어서 반나절씩이나 마차에 시달렸더니 아직까지도 몸이 안 풀렸군... 이런 늙은이를 고생 시키다니..." 그의 표정이 너무나 익살맞아서 몰래 그의 표정을 힐끔 힐끔 살펴보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그 마법사도 너털웃음을 흘리며 표정과 자세를 바로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허허허, 이제야 좀 웃는군.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말 많이 들으셨을 것 같은데..." 그의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아 나는 다시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말 솜씨가 좋으시군요." "껄껄껄, 늙을 수록 느는건 엄살고 말발 뿐이더군요." 그 마법사는 묘하게 사람을 안심 시키고 기분 좋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말과 행동에 완전히 화가 풀려서 똑바로 앉아 그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6서클의 마법사시군... 지방 공무원으로 있기에는 무척 뛰어난 솜씨인데?" 나는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말했는데 그 말을 믈었는지 노마법사는 내가 한 눈에 자신의 마법 써클을 알아내자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보기에는 아직 20살도 채 되어보이지 않는데 꽤 높은 실력을 가지고 계시는가 보군요." 나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뜬 그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뚜렷한 음성으로 또박 또박 말했다. "당신, 꽤 맘에 드는 인간이군." 내가 입을 열어 좀 묘한 말을 꺼내자 노마법사는 다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말이지, 지금 이상황이 맘에 안들어서, 누가 오건 다 뒤집어 엎을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의외로 내 맘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서 생각을 바꿨어. 조용히 처리해주기로 말야. 솔직히 말하면 이까짓 일에 내 정체를 드러내는건 자존심이 무척 상하지만 조용히 처리 하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을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나는 여태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막아뒀던 드래곤의 기운을 드러내 보였다. 역시 그걸로 노마법사는 내 정체를 눈치 챘는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떠듬떠듬 거렸다. "다.. 당신은... 혹시..." 나는 재빨리 잠깐 드러냈던 기운을 다시 몸속으로 갈무리하여 드래곤의 기운을 지워버리고는 마법사를 쳐다 보았다. "이거, 위대하신 종족께 큰 무례를 저질렀군요..." 내 기운을 갈무리한 뒤 조금 지나자 정신을 차린 노마법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하게 나에게 허리를 굽혔다. "됐어요. 그런거 바란거 아니니까. 그래도 다행히 빨리 눈치 채는 군요." "측정 못할 거대한 마나의 기운은 드래곤 밖에 없을 테니까요..." 노마법사는 부러운 건지 놀란 건지 애매 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말투는 많이 침착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에 서서 앉을 생각을 안 하자 노인을 서 있게 하는 데 대해 견디지 못한 내가 말했다. "앉으세요. 목 아파요." 약간 농담조로 말하자 그제야 얼굴을 처음 처럼 활짝 피며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듣던거와는 무척 다르시군요." "듣던 거? 아아, 우리 종족이 어떻다는 거 말이죠? 하긴, 다 자기 개성이니까... 그나저나 당신도 참 특이하군요. 내가 지금까지 만나 왔던 마법사랑은 많이 달라요." "하하하, 그거야 사람 나름 아니겠습니까?" "어째든,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당연히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군요? 그럼 보내줄 수 있죠?" "불가능하더라도 보내드려야지요. 안그러면 다 뒤집어 엎으실텐데..." 노마법사의 농담 짙은 말에 나는 킥킥 웃었다. "사실, 마법사가 온다기에 안 보내준다면 협박을 할 생각이었어요." "제가 와서 다행이었군요. 어찌 되었든 저희가 무례하게 굴었던 것 다시한번 사과 드립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어찌 보면 이웃집의 인심 좋은 할아버지 같기도하고, 또 어찌 보면 큰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현자같기도 한 그 노마법사의 부드러운 태도에 나는 꼭 잔잔한 바다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잔잔한 얼굴이 대답을 못해 쩔쩔 매는 모습을 보고 싶은 짓궃은 장난끼가 들었다. "우습군요. 인간들은 힘 있는 자들에게는 적용조차 못하는 법을 뭐하러 만들어 놓지요? 어짜피 힘 없는 자들을 억누르기 위해서 밖에 사용하지 못하면서 마치 정의를 지키는 것 처럼 말하다니 말예요." 나는 노마법사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노마법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여전히 잔잔한 바다같은 그 얼굴에 진지함까지 띄우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요?" "예, 당신처럼 완전하다고 일컬어지는 존재가 볼 때는 우습게 보이겠지요. 정의를 지킨다고 법이란 걸 만들었으면서도 쉽게 법을 어기는 인간들이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면서 완전을 추구하는 존재지요. 끊임 없이 모순을 만들어내면서도 완벽해 지기 위해 노력해 가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호오~." 비웃음 같기도 한 감탄을 내 뱉자 노마법사는 다시 한번 나를 지긋이 쳐다보다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법도 마찬가지 입니다. 처음에 법은 정의의 기준을 위해서 만들어졌지요. 모든 사람들이 지키면 최소한의 정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모인게 바로 법 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인지 그 법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법이라도 필요하답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예. 힘 없는 자들을 최소한 이나마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것도 거의 효력이 없지 않아요?" "그러나 없는 것 보다는 났지 않습니까?" "흠, 할 말 없네요..." 노 마법사의 씨익 웃는 얼굴을 대하니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 거렸다. "이 세상에는 법으로 인하여 정의를 실현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들이 많지요. 그래서 그들은 끊임 없이 법을 더욱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법을 바꾸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법을 힘 없는 사람들에게도 힘 있는 사람들에게도 잘 적용하기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하하하, 맞습니다." "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아요." "이거 이거, 위대하신 존재 앞에서 늙은이가 주절 주절 잘도 떠들어댔군요." "후후후, 그거 알아요? 당신은 나보다도 한참 어리다는 것. 그러니 내 앞에서 자신을 늙은이라고 말하는 것도 모순이지요." "아, 그렇군요. 하하. 이거 겉으로 보기에는 제가 더 늙어 보이니 자꾸 그렇게 말하게 되는 군요." "뭐, 익숙하니까 상관은 없어요. 그럼 난 언제 여기서 갈 수 있나요?" "이 성을 나가시겠습니까?" "지금 심정으로는 그러고 싶어요. 내가 없어도 범인을 찾는 데는 지장 없지요?" "지장 없을 겁니다. 그럼 지금 감찰사에게 제가 말하지요." 노마법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한번 나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내가 여행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류미르와 세이몬이 자신들의 짐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거야? 그 감찰사가 떫은 표정으로 우리보고 가도 좋다고 하드만..." 세이몬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아, 그 마법사. 말이 잘 통하던걸?" "마법사? 에, 설마 너 네 정체를 밝힌 거냐?" 류미르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잖아? 가만히 있다간 범인이 밝혀 질 때 까지 이 곳에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쩐지... 그 마법사가 다짜 고짜로 감찰사에게 우리를 보내라고 하더라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 말대로 하라고 강경하게 말하더라고." 류미르가 아까 자신이 들은 마법사와 감찰사의 대화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호, 그 마법사 정말 맘에 든단 말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망토를 걸치고 내 배낭을 메고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세레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언니?" "아린. 이야기는 들었어. 마법사님께서 아린의 혐의를 벗겨 주시고 가도 좋다고 하셨다며? 다행이긴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다니 섭섭한 걸? 그리고 미안해. 괜히 나때문에 사건에 휘말리게 해서." "언니 탓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나도 언니를 만나게 되어서 좋았는데요 뭐." 밖으로 나오니 마법사와 감찰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당에는 벌써 우리들의 말이 대기하고 있었다. 감찰사는 뭐 씹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기에 마법사가 대신 나서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불미스런 일로 만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여러분. 만약 다음에 만난다면 좋은 일로 만나길 바랍니다." 우리 중에서는 류미르가 대표로 나서서 인사했다. "아린의 협의를 벗겨 주셔서 감사 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게 되면 식사라도 대접하죠." "껄껄껄, 그거 참 반가운 말이군요." "아 참, 영주님께 작별 인사 드려야 하는 거 아냐?" 나는 갑작스레 영주에게 까지 생각이 미쳐 류미르를 바라보자 류미르가 대답했다. "널 만나기 전에 알아 봤는데 몸이 다시 편찮아지셔셔 잠이 드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왔어." "아버지께는 내가 대신 말씀 전해줄께." 세레나가 내 어깨를 두두리며 부드럽게 말하자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에 올랐다. "그럼 갈께요, 언니. 잘 있어요. 마법사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래요." "저도 만나뵈어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우리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성 바깥을 향해서 말을 몰았다. 그런데 성을 나오기 전에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좀 찝찝했지만 이 곳을 나간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영주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영주는 창 가에 앉아 떠나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흠, 다행히도 혐의가 벗겨졌군. 세레나의 친구가 고생할 까봐 걱정했는데..." "덕분에 영주님께서는 감찰사의 시선에서 멀어지지 않으셨습니까?" 영주의 중얼거리는 말에 뒤쪽에서 조용한 대답이 들려왔다. 영주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피식 웃었다. "그러나 저들이 협의가 벗겨진 이상 어떻게 될지 모르지. 저 슈타인양에게는 정말 미안하군. 그녀가 있어서 세레나가 충격을 덜 받아서 고마워 하고 있었는데 말야." "그렇다면 떠날 때 여비를 좀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제야 영주는 자신의 뒤에서 조용히 서 있는 자를 돌아보았다. "흠, 그런 건 자네가 챙겨야 하지 않나? 명색이 영주 대리인인데 말야." "아, 그렇군요. 깜박 했습니다." "흥, 자네답지 않군..." 영주는 말과는 다르게 별로 실망한 기색 없이 부드럽게 웃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 ▶ 번 호 : 13690/13691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0월 28일 23:42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 (1) │ └───────────────────────────────────┘ 제 21화 개인 인가, 집단 인가... 세레나와 헤어지고 나서 며칠... 우리는 아직까지 어떤 숲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사정이 있었다. 이유인 즉슨, 우리 일행의 혹덩어리인 소브로 때문이었다. 세레나의 성에서 빠져 나온 우리는 여관에서 머물고 있던 소브로를 데리고 그 마을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3일 동안 말을 달려 어떤 숲에 도착했는데 그 숲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고블린 떼를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나와 세이몬, 그리고 류미르는 각자 말에서 내려 자신들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 했는데 문제는 그때 우리 중 누구 하나 소브로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는 거였다. 우리가 고불린들을 일방적이다시피 때려 눕히고 있는 동안 소브로를 태운 말이 놀라서 숲 속을 뛰어 들어가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고블린이 도망치고 나서야 소브로와 말이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류미르가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빠른 시간 안에 소브로를 찾을 수 있었던 거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몇날 며칠을 소브로를 찾아 이 숲속을 헤매고 다녔을 지도 모르고 또 그 동안 소브로가 어떤 위험한 상황에 닥치게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몇 시간 동안 숲을 헤집고 나간 끝에 말에서 굴러 떨어져 기절해 있는 소브로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주인을 바닥에 내팽개 쳐 놓고는 천천히 느긋하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소브로의 상처야 내 치유 마법으로 낳게 할 수 있었지만 우리도 고블린과 싸운 후 그를 찾아 몇시간 동안 숲을 헤치고 다니는 바람에 많이 지친 상태여서 그 날은 그곳에서 야영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실프를 불러 이 곳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 했었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우리가 있는 곳과 가장 가까운 곳의 길은 우리가 있던 곳에서 부터 반나절을 걸어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래도 일단 길이라도 찾았으니 이 길로 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 그 길을 따라 걸었는데 방향을 잘 못 잡았는지 한참을 쭉 따라 걷자 그 길의 흔적이 점점 사라지더니 결국 어느 숲 속의 작은 공터에 우리를 데려다 놓은 뒤 길이 사라져 버렸다. 숲 속이라 날이 금방 어두워 졌으므로 우리가 그 공터에 도착할 때 쯔음에는 벌써 해가 질 것처럼 어둑어둑 해져서 우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야영을 했다. 이렇게 숲 속을 헤매며 2틀을 보낸 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우리가 왔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길을 더듬어 출발했다. 그리고 그나마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우리는 숲 속에서 들려오는 어떤 사람의 기합 소리와 그 기합 소리에 맞추어 리듬을 타며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앗~!" "탁~!" "이얍~!" "탁~!" "아뵤오~!" "탁~!"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기합소리를 참 많이 알고 있군..." 자리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던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중얼 거렸다. "어떻게 매번 기합 소리가, 그것도 저렇게 골고루 바뀔 수 있지? 저것도 재주야." 나도 류미르의 말에 동감하며 소리를 죽여 킥킥 웃었다. 우리는 기합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독특한 기합 소리를 발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20대를 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얼굴은 온통 햇빛에 그을려 까무잡잡 했고 이런 노동에 익숙 해 있는지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몸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굵은 나무의 기둥을 향해서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도끼로 내리치고 있었다. "웃차~!" "탁~!" "아하, 그 소리가 나무를 찍는 소리였군..." 그 모습을 보고 세이몬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뭇꾼인가 봐요." 소브로도 그의 모습을 보더니 낮게 속삭였다. "어찌 됐든, 사람을 찾아서 다행이야. 내가 가서 말을 걸어볼께." 류미르는 자신의 말 고삐를 옆에 있던 세이몬에게 건내고는 앞에서 나무를 찍고 있는 청년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열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서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 그러나 너무 작은 목소리로 불렀는지 그 남자는 자신의 일에 열중할 뿐 뒤돌아 보지도 않았다. "저기요~" 류미르는 조금 더 소리를 높여 그를 부르자 그제야 도끼를 위로 치켜들던 그의 행동이 멈칫 하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류미르를 바라 본 순간 눈이 커지면서 입이 벌어졌다. "안녕하세요?" 류미르는 그제야 자신을 돌아보는 그를 향해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미소를 띄우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인사를 받는 그 남자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얼굴까지 빨개진 채로 허겁 지겁, 그러나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 아니, 저기... 에, 그러니까? 아, 안녕 하세요? 아하하하..." 그제야 우리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전형적인 시골 청년의 모습, 투박하지만 순박해 보이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저기요, 제 일행이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 혹시 마을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실 수 있겠는지요?" 류미르가 조심스럽게 말을 마치자 그 청년은 황급히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 예. 물론입니다." "다행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류미르가 다시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자 그 청년의 다시 제 색을 찾아가던 얼굴이 벌게지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뭘요... 이정도를 가지고.... 하하하" 그리고는 연신 뒤통수를 긁적여 대는 것이었다. 그의 행동이 좀 이상해 보였는지 류미르는 얼굴에 의아함을 띄웠지만 곧 무시해 버리고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류미르의 손짓에 따라 앞으로 나온 우리를 바라본 청년은 다시 한번 눈이 커다래 지며 입을 벌렸다. "하. 하. 하..." "왜그러는 거야?" 그의 모습이 의아한 세이몬이 나를 향해 물었지만 나도 모르기 때문에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나도 몰라." 그때 류미르가 그에게 우리를 소개하는 말이 들려왔다. "제 일행입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아이고, 이렇게 아름다우신 숙녀 분들을 한꺼번에 세 분이나 만나뵐 수 있다니... 오늘이 내 생일도 아닌데..." 그는 그 뒤에도 뭐라고 더 말을 했지만 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입술 사이로 비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옆을 슬쩍 보니 소브로도 땅에 주저 앉아 주먹으로 입 안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세이몬과 류미르는 뭐 씹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중얼거렸다. "숙녀 분들?" 성격이 제일 급한 세이몬이 청년에게 달려 들어 멱살을 움켜 쥐었다. "쨔샤, 네 눈에는 우리가 여자로 보이냐? 엉?" 갑작스레 멱살이 잡혀진 청년은 세이몬이 얼굴을 들이대자 더욱 더 빨개진 얼굴로 두 손을 어쩔줄 몰라 바둥댄 채 말을 더듬 거렸다. "아니, 저... 그게.... 그러니까..." "똑바로 말 못해? 다시한번 말해봐. 우리가 누구라고?" "나... 남자분..." "알겠어? 우린 남자야. 다시 한번 여자라고 지껄였다간 죽을 줄 알아!" 세이몬은 거기까지 말하고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그를 내동댕이 쳤다. 청년은 땅바닥에 널부러지면서도 아직까지 상황 판단이 안 되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게, 도대체..."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앞으로 류미르가 다가오면서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로 가는 길이 어디지요?" 청년은 대답을 못하고 멍한 얼굴로 류미르만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한번 살벌한 류미르의 눈빛을 받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 저를 따라오시지요." 번 호 : 13745 / 13750 등록일 : 2000년 10월 29일 21:25 등록자 : LODEMP 조 회 : 4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 (2) 그 청년은 자신의 주위에 널부러져 있는 통나무들을 주섬 주섬 주워서 한 곳에 모으더니 그 중에서 자신이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밧줄로 묶어 등에 짊어 졌다. "자, 이쪽으로..." 그리고 자신의 도끼를 손에 들고는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쭐래 쭐래 걸어갔는데 소브로가 아무래도 아까 그 청년이 찍다 만 나무가 맘에 걸렸는지 발걸음을 빨리하여 그 청년의 옆으로 가더니 가만히 속삭였다. "저... 아까 그 나무 그냥 나두고 가도 돼요?" 청년은 소브로의 말을 듣고 소브로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 되어 제자리에 멈춰섰다. "어?" "무슨 일이죠?" 청년의 바로 뒤에서 쫒아가던 류미르가 제일 먼저 물었다. 그러자 청년이 류미르에게 손가락으로 소브로를 가르키면서 물었다. "저, 이 아이도 일행입니까?" 그의 엉뚱한 질문에 류미르는 크게 당황했다. "아까 일행을 소개할 때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에? 그랬나요? 난 못봤는데?" 그제야 나는 그 청년이 우리들을 바라보며 '숙녀분 들' 이라고 말 한 것이 생각 났다. 아마 우리들의 미모(?)에 너무 놀란 나머지 평소에도 눈에 잘 뜨이지 않던 소브로를 아예 보지 못했었나 보다. 류미르도 그 사실을 눈치 챘는지 한숨을 푹 쉬고는 대답해 주었다. "그 아이도 저희 일행입니다." 그리고는 시무룩해 있는 소브로에게 다가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청년도 소브로가 시무룩해 있자 뜨끔 했는지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 미안. 정말 미안해. 아까는 내가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 정말 미안해. 너무 맘 쓰지 말아라." "괜찮아요. 익숙해 졌는 걸요..." 소브로의 기운 없는 대답에 청년은 더욱 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더니 아까 소브로의 질문이 생각 났는지 다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아까 나한테 뭐 묻지 않았니?" "그거요? 아까 아저씨가 찍다 만 나무요. 그냥 두고 가도 괜찮은 거예요? 아저씨?" 소브로는 아직도 골이 났는지 척 보기에도 아직 결혼하기 전의 총각임이 분명 한데도 불구하고 청년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당황하더니 소브로의 눈에서 심술기를 읽었는지 다시 본래의 얼굴색으로 돌아오며 약간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뵈. 난 아직 결혼 안 했다고. 아저씨가 뭐야? 아저씨가? 앞날이 창창한 총각한테..." "그럼 뭐라고 불러요?" "형이라고 해." 그러나 소브로는 여전히 툴툴 거리며 대답했다. "친한 사람도 아니고 오늘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형이라고 불러요?" "그런가? 에... 그럼 그냥 이름 불러라.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 보다는 그게 났겠다." "이름이 뭔데요?" "응? 아아, 내가 아직 내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구나? 내 이름은 말야..."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갑자기 옆쪽에서 거의 열마리쯤 되어 보이는 '놀' 이라는 몬스터들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놀' 들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머리모양은 하이에나 같이 생겼고, 얼굴의 생김새 처럼 무지 야비한 놈들이어서 만만해 보이는 사람 일행이면 필요성을 떠나 무조건 공격하고 보는 놈들이었다. 이들은 떼를 지어 서식했고 제법 상, 하의 계급도 갖추고 있는데다 지능도 제법 높아 인간의 말을 할 줄도 알았다. 그런 놈들이 열마리쯤 튀어 나와서 우리 주위를 에워쌌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놈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크크크, 인간? 가진 것 다 내놔..." 그러자 청년은 천천히 자신의 등에 짊어졌던 통나무들을 끌르면서 우리에게 낮게 속삭였다. "제가 외치면 무조건 저를 따라 힘껏 뛰십시요. 그리고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말은 포기하셔야 합니다." 아마 그 청년은 우리를 힘도 못 쓰는 유약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긴 사람들은 우리의 겉 모습만 보고 힘이 없는 줄 생각하니까... 어째든 나는 이 곳에서 일부러 나서기는 싫었기에 류미르와 세이몬 보고 그 청년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으로 눈짓을 했다. 청년은 이제 다 끌러낸 통나무 다발을 천천히 앞으로 내놓는 척 하더니 갑자기 우리 뒤쪽에 포진해 있던 네댓명의 놀에게 던져버리고 자신은 도끼를 들고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녀석들에게 달려 들어 후려 쳐 한 놈이 쓰러지고 다른 놈들이 비키는 사이 우리를 향해 외쳤다. "뛰엇!" 그리고는 자신도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소브로의 팔뚝을 부여 잡고는 냅다 앞쪽을 튀었다. 우리도 그가 시키는 대로 말의 고삐는 던져 버리고 냅다 뛰었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까 몇놈이 사방으로 달려 가려는 말들을 붙잡으려고 이리뛰고 저리 뛰었지만 나머지 네댓 놈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우리 뒤를 쫓아왔다. 점점 그 놈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류미르가 세이몬이 달리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냥 이대로 나둘꺼야?" "응. 지금은 가만히 있어봐. 저 청년이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까..." 세이몬은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조금 더 속력을 내어 앞으로 달렸다. 그때 갑자기 청년이 전방을 향하여 소리쳤다. "도와줘~, 놈들이 따라온다아아아~~" 그러자 갑자기 우리가 달려가는 방향쪽에서 이에 호응하는 대답이 들려 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쪽에서 부터 장정 대여섯명이 저마다 각자 무기를 들고 뛰어 나왔다. "이쪽이야. 빨리~" 우리가 그들과 만나자 우리를 이쪽으로 데리고 온 청년은 소브로를 재빨리 뒤쪽으로 밀어 보내고는 자신은 도끼를 부여잡고 놀의 정면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갑자기 튀어 나온 장정들이 저마다 가지고 온 무기들을 부여잡고 버티고 섰다. 갑자기 새로이 사람들이 더 나타나자 우리 뒤를 쫓아오던 놀들은 그 자리에서 멈췄고 우리의 수가 자신들의 수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닫자 뒤를 돌아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그제야 청년을 위시한 대여섯명의 장정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부여잡고 있던 무기들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 중 우리를 데리고 왔던 청년과 또래로 보이는 다른 청년 한명이 우리를 데리고 왔던 청년의 뒤통수를 인정 사정 없이 힘껏 내리쳤다. "퍽~!" 갑작스레 일격을 맞은 그 청년은 머리를 감싸쥐고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자신을 때린 청년을 올려다 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켄?" 그러자 켄이라고 불린 때린 청년이 눈을 부라리며 다시 주먹을 들어 보였다. "무슨 짓이냐고? 야, 임마. 그러는 너야 말로 이게 무슨 짓이야?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어도 그렇지. 혼자 마을을 벗어 나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어, 알리?" 그리고 들어보인 주먹을 그대로 알리라고 불린 청년의 복부를 향해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알리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곧바로 두 손을 교차한 상태로 자신의 복부 앞을 막아 주먹을 막았다. "어쭈? 막았어?" 켄은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또 다시 주먹을 들어 후려 칠 기세로 알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공격을 하기 전에 어떤 건장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나서서 그를 말렸다. "둘 다 그만해라. 우선은 마을로 돌아가도록 하자." 그리고 그 중년 남자는 몸을 돌리다가 우리를 보더니 멈칫 하더니 다시 알리를 바라보았다. "알리, 이분들은?" "아, 예. 숲에서 만난 분들인데요, 길을 잃었다고 해서 모시고 왔어요." 알리의 소개 비슷한 말에 우리 모두는 그 중년 남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그러자 그 중년 남자는 여러가지 감정이 섞인 복잡 다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하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어쨌든, 여기까지 오셨으니 마을로 같이 가시지요." 번 호 : 13799 / 13819 등록일 : 2000년 10월 30일 22:15 등록자 : LODEMP 조 회 : 23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 (3) 그 중년 남자가 앞장을 섰고 다른 장정들은 우릴 둘러싸다시피 하여 마을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마을은 마을이라기 보다는 요새 같았다. 약 50여호 정도 있는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 주변에는 통나무를 잘라 만든 방어책이 있었고 그 바로 뒤쪽에는 몇 미터 간격 마다 화토불을 피울 수 있는 화로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는 3m는 되어보이는 탑에 큰 종이 달려 있었다. 그 종은 우리가 마을을 들어서자 마자 울렸고 그 종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서 튀어나와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상한건 마을 구석 구석에서 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이거나 아니면 어린아이, 그리고 가끔 군데 군데 노인이 섞여 있을 뿐 장정들은 보기 힘들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 중 몸집이 좋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는 아주머니가 튀어 나오더니 중년 남자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알리는 찾았어요?" "아아..." 중년 남자는 대답 비스무리한 음성을 내면서 턱짓으로 알리를 가르켰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중년 남자가 턱짓으로 가르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알리를 바라보자 마자 그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굵은 팔둑에 그의 목을 가두어버렸다. "이노무 시키!!" "우아악~ 잘못했어요. 아줌마!! 사람살려~!! 켄, 좀 말려봐아아아~!!" 알리는 그녀에게 목을 졸리기 시작하자 두 팔을 허공에서 휘저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그 알리란 청년이 사라져서 저 아주머니가 걱정을 많이 한 것 같았다. 한참을 목을 조르고 알리를 뒤 흔들던 아주머니가 마지막으로 그의 머리를 한 방 때린 뒤에야 겨우 그를 나주자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에고.. 살았다." 그 모습을 본 알리 친구인 것 같은 켄이 킥킥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킥킥킥, 그정도인 게 다행인 줄 알아. 엄마가 네가 없어진 걸 아시고 얼마나 난리를 치셨는 줄 알아? 오죽 했으면 우리가 너를 찾으러 나섰을까?" 그러나 그 켄이라는 청년은 더이상 웃질 못했다. 그의 엄마라고 불린 아주머니가 그의 등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 등짝을 한대 후려 갈긴 것이었다. "앗 따거~" "이노무 자슥이 엄마를 말하는 것좀 봐." 그 중년 여인은 등짝을 갈기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찼는지 곧이어 켄의 한쪽 귀를 휘어 잡았다. "아야야야.. 잘못했어요 엄마. 잘못했다니까요오오~~!! 다신 안 그럴께요!!" 그제야 그 중년 여인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켄의 귀를 놓아준 뒤 손을 탁탁 털었다. 켄은 눈물이 그렁 그렁 맻힌 얼굴로 엄마에게 잡혀 수난을 당한 귀를 부여잡고 투덜투덜 거렸다. "으휴, 다 큰 아들에게 이게 무슨 짓이람... 에휴, 내신세야~" 그의 말을 들었는지 켄의 엄마가 다시 그를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그는 '합' 하고 입을 다물더니 다시 배시시 웃으며 엄마에게 매달렸다. "헤헤헤, 엄마. 아, 그건 그렇고, 알리가 누굴 데리고 왔는지 보세요. 아주 아름다운..." 그러나 불쌍한 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알리가 황급히 켄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것이었다. "하하하, 아줌마. 사실은요.. 숲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저 남. 자. 분들을 만났지 뭐예요? 여행 중에 이 숲으로 들어왔다가 길을 잃고 헤매셨대요." 알리가 말하는 것이 평소 그의 말투가 아니었는지 켄의 어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하며 우리를 돌아 보더니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다시 알리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 "예! 남.자. 요." 알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남자라는 말에 힘을 주어 또박 또박 말했다. 그러자 그 순간 주위에 몰린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남자래." "남자래요." "남자였어?" "남잔가봐." "아닌 줄 알았는데..." "어머, 나두..." "정말 잘생겼다...." "잘생기면 뭐해? 비리비리 해 보이는 구만...."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더 커지자 중년 남자가 갑자기 크게 헛기침을 해서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조용 해지자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인 사람들을 한번 둘러 보더니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난 이 마을의 부촌장 마리오라고 하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소개를 못했지. 이해해 주기를 바라네." 그가 씩씩하게 한 손을 내밀며 자신의 소개를 하자 류미르가 우리의 대표로 나서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물론 이해 합니다. 이렇게 도와 주신 것만해도 감사한 걸요. 저는 류미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동생들인 아힌, 세이몬 그리고 소브로 라고 합니다." 류미르의 소개에 따라 우리는 그 중년 남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형제들이 었나? 하긴, 한눈에 척 봐도 형제임을 확실이 알겠군... 그런데 저 소년도 친형제인가?" 중년 남자가 우리를 둘러보던 눈길이 소브로에게 가서 멎자 소브로의 얼굴이 붉어지며 밑으로 내려갔다. "친 형제는 아니고 아는 사이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같이 동행 중입니다." 그러자 중년 남자는 역시... 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류미르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촌장님을 만나야 하지만 지금 마을 사람들과 물건을 팔러 갔으니 아마 저녁때가 되어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어디서 좀 쉬도록 하지? 음... 이봐요, 도니야?" 그러자 켄의 엄마가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이 청년들 자네 집에서 재워줄 수 있나?" "다락방이라도 괜찮다면..." 켄의 엄마는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마 빈 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류미르가 재빨리 나섰다. "괜찮습니다. 바람만 막을수 있다면 저희로서는 감지덕지 인걸요." "그렇다면 좋아요. 우리집에서 묶게 해주지요." 켄의 엄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그럼 알리도 찾아왔고 손님들 묶을 집도 정해졌으니 그만들 돌아가라구." 부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마리오가 팔을 휘저으며 사람들에게 외치자 사람들은 우리를 힐끗 힐끗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갈 길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켄의 엄마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집으로 갔다. 번 호 : 13665 / 14088 등록일 : 2000년 10월 31일 21:52 등록자 : LODEMP 조 회 : 96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4) 켄의 집은 통나무로 만든 목조 가옥이었다. 1층으로 된 투박한, 그러면서도 아담한 느낌이 드는 집이었다. 그런데 도니야는 우리를 집 안으로 안내한 것이 아니라 집 뒤쪽으로 안내 하더니 그쪽에 있던 투박하고 약간 두터워 보이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은 창문이 전혀 없는 곳이어서 도니야는 그 곳으로 들어 가자마자 그 방의 벽에 걸려 있던 렘프를 들어내어 불을 붙였다. 그 방은 창고인 듯 여러 잡동사니가 여기 저기 쌓여 있었고 먼지도 뿌옇게 내려 앉아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방의 위쪽, 천장 바로 밑에는 방의 절반 정도 크기의 두꺼운 널판지가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사다리까지 달려 있었다. 도니야는 그 사다리를 타고 먼저 올라갔고 우리도 그녀의 뒤를 이어 거기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천장이 매우 가까워서 우리는 제대로 설 수 없어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다. 그 곳에는 아래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물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래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 있어서 그렇게 너저분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우리 넷은 충분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방이 없어서 그러는데, 이 곳도 괜찮겠어요?" 도니야는 약간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향해 류미르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요. 길거리에 비한다면 여긴 천국인걸요." 나와 세이몬, 그리고 소브로도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니야는 우리가 꽤 맘에 든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여기에다 짐을 놓고 내려가요. 씻어야지 점심을 먹지." 그제야 우리는 아침을 먹고 이 곳에 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재빨리 짐을 내려놓고 다시 도니야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밖에는 벌써 켄과 알리가 커다란 통에 물을 담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씻었는지 얼굴과 머리카락이 약간 젖어 있었다. "자, 여기서 씻어요." 켄이 먼저 활발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하면서 그의 옆에 있던 세수대야 같은 작은 통에 물을 담아주었다. 세수대야가 한개밖에 없어서 우리는 한사람씩 차례대로 씻어야 했다. 내가 제일먼저 씻고 그 다음 소브로, 세이몬, 류미르 순으로 간단히 얼굴과 손만 씻고 나자 켄은 우리가 씻은 물을 집 근처에 있던 작은 텃밭에 버리고 나서 우리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들어가자 마자 거실이 보였고 그곳에 바로 붙어서 부엌이 보였다. 그리고 부엌 양 옆에는 문이 하나씩 있었다. 부엌에서는 우리보다 먼저 집안으로 들어갔던 도니야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음식은 거의 다 되었는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음식은 거실에 차려졌다. 원래는 부엌에 있는 식탁에서 먹어야 했지만 그 곳에는 의자가 4개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거실의 탁자에 음식을 차린 것이었다. 비록 고급스러운 음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따뜻한 빵에 스프, 그리고 감자가 식욕을 돋구었다. "여행중이라고요?" 식사 중 도니야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물어왔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던 것 처럼 류미르가 우리를 대표해서 대답했다. "예. 지금 수도로 가는 중이예요." "어디서 왔는데요?" 이번에는 켄이 호기심을 담고 물어왔다. 그러자 류미르가 그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 다른 제의를 했다. "저기, 보아하니 우리보다 나이가 많으신 것 같은데 말을 놓으시지 그러세요? 계속 존칭을 쓰시니까 저희가 불편하네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이름이 류미르 맞죠?" 켄은 말을 중단하고 류미르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는 표시를 하자 안심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류미르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저는 19세 이고요, 아힌과 세이몬은 각각 18세, 17세 예요. 년년생이지요. 그리고 소브로는 15세구요." 류미르의 말에 켄과 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더 나이가 많군요. 알리와 나는 21살이예요. 그럼 우리가 말을 놓을테니 그쪽도 말을 놓는게 어때요? 어짜피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안 나는데..." 켄의 말에 류미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래. 그럼말야, 너희는 어디서 왔지?" 켄이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되물었다. "우리는 켈튼 연합국에서 왔어요." 그러자 켄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 놓으라니까..." 류미르는 켄의 말에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말했다. "아, 우리는 켈튼 연합국에서 왔어..." 그제야 켄의 얼굴은 흡족한 표정이 되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시 후 류미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자 도니야를 비롯한 켄과 알리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로 알리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우와, 꽤 멀리서 왔네? 외국에서 말야." "하하하, 생각보다 그렇게 먼 곳은 아니야. 특히 이 곳은 연합국과의 국경 지역과 가까운 곳이거든." 류미르의 겸양의 말 뒤로 그들의 켈튼 연합국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잘 대답해 주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가 도니야를 도와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끝낼 무렵 현관 문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켄이 누가 왔는지 보려고 문을 열었는데 그는 문을 열어 바깥을 보자마자 무척 황당하다는 얼굴로 집 안에 있던 우리들을 돌아 보았다. 그의 표정을 의아하게 여긴 알리가 문 쪽으로 다가가려는 찰나 문을 막은 채로 서 있던 켄을 밀치고 여러 사람들이 우르르르 집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들 대부분은 중년 부인들이거나 소녀들이었는데 그들은 들어오자 마자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나를 힐끗 힐끗 쳐다 보면서 저희들 끼리 수근거렸다. 그러더니 의아한 얼굴로 거실로 나온 도니야에게 몰려들어 저마다 좀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호들갑스럽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 자기들이 방문한 이유를 정신없이 댔는데 그녀들이 한꺼번에 왕창 말하는 통에 가엽은 도니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기만 했다. "어머, 도니야. 내가 어제 빌려간 그릇을 가지고 왔는데..." "도니야, 이거 내가 음식을 좀 만들어서 가지고 왔는데, 손님이 오셨을 테니 음식이 모자르지 않을까 해서..." "도니야, 혹시 설탕 좀 빌릴 수 있을까? 지금 보니 우리집에 설탕이 다 떨어졌네?" .... 결국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도니야가 버럭 소리를 지르므로써 그 소동은 일단 진정이 되었다. "그만 햇!" 그 곳에 모인 여인들은 커다란 도니야의 목소리에 놀라 모두다 조용히 해졌고 그 모습을 본 켄과 알리는 소리를 죽여 킥킥 대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도니야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뉘 집 구경 났어? 왜 이렇게 몰려든 거야?" 그러자 여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쭈볏 쭈볏 대면서 서로 눈치를 살폈지만 그 와중에서도 류미르와 나, 그리고 세이몬을 힐끔 힐끔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그녀들이 왜 모여든 것인지 눈치 챈 나는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켄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나가지 않을래? 내가 마을 구경 시켜줄께." 번 호 : 13750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02일 21:54 등록자 : LODEMP 조 회 : 85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 (5) 우리가 켄과 알리와 함께 마을을 돌아 다니자 마을 곳곳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그들 중 대부분은 켄과 알리에게 다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틈이 나는 대로 우리를 힐끗 힐끗 쳐다 보았기에 켄과 알리는 진땀을 흘리며 말을 재빨리 끝내고 그들을 보내기에 급급했다. "하하하, 이 마을에 외부 손님이 오신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 또 다시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소녀 둘을 떼어 내고는 켄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어대며 변명을 했다. "그럴만도 하겠어. 마을 바깥쪽에는 몬스터들이 많으니 외부와 교류가 거의 없겠는 걸? 가끔 몬스터들이 마을을 쳐들어 오는가 보군? 이렇게 마을을 둘러싸고 방어책을 만들어 놓은 걸 보면..." 류미르가 괜찮다는 듯이 싱긋 웃고는 마을을 한번 휙 둘러 보고서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말에 알리가 긍정하며 설명해 줬다. "이 근처에는 '놀' 놈들이 집단 서식하고 있어. 예전에는 없었는데 몇년 전부터 갑자기 수가 증가하더군. 그 뒤로 이녀석들이 툭하면 마을로 쳐들어 오는 거야. 그러니 우리도 거기에 대응 하느라고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지." 그의 말 뒤에 켄도 덧붙였다. "그래서 마을을 나갈 때에는 꼭 여러명이서 같이 나가. 이렇게 멍청하게 혼자 마을을 나간 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거든." 켄이 알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알리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마을이 이렇게 몬스터에게 위협을 당하는데 이 곳의 영주가 도와주지 않나요?" 소브로가 자신이 의견을 낸다는 사실에 뿌듯 해 하며 켄과 알리에게 말하자 그들은 왠지 모르겠지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하는데 약간 주저했다. 그러나 켄이 예의 그 명랑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해 줬다. "이 숲은 영지와 영지의 경계선에 있어. 한 마디로 하자면 어느 누구의 영지도 아니라는 뜻이지. 그러니 누가 이런 숲 속의 작은 마을을 위해 병사들을 보내 주겠어?" 그 때 마을 중앙에 있던 높은 종탑의 종이 미친듯이 울려댔다. 그 소리에 놀란 내가 어리둥절 해 있을 때 켄이 긴장된 얼굴로 우리를 돌아 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리야. 빨리 가보자." 그는 알리와 함께 앞장서서 종탑이 서 있는 마을 중앙으로 달려 간 것이 아니라 마을 입구쪽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벌써 여러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고 우리가 들어올 때는 활짝 열려 있었던 마을 방어책의 큰 나무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마을의 부촌장인 마리오를 비롯해 몇명의 장정들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켄과 알리는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서 마리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예요, 아저씨?" "놀 놈들이 왔다. 그런데 그 놈들이 촌장을 데리고 있어." 마리오는 알리와 켄을 힐끗 보더니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는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묵뚝뚝한 말은 켄과 알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말투에 신경쓰지 못했다. 마리오도 그들의 놀란 표정에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웃긴 일이지. 놈들은 우리 인간들을 잡는 족족 죽여왔어. 그런데 이번에는 놈들의 머리가 좋아졌는지 인질을 잡고 있잖아. 촌장님이 살아 계시는건 좋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 생기진 않겠지." 그 때 방어책 밖에서 놀의 컬컬하고 어색한 말투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야기 하자. 몇 사람 우리에게 있다!" "어쩌죠?" 켄이 마리오를 돌아보며 묻자 마리오가 한숨을 쉬더니 나무 문에 붙어 있던 네 명의 장정들에게 소리쳤다. "문을 열어. 내가 나간다." 한쪽 문에 두명의 장정이 달라 붙어 어른 한 사람이 빠져 나갈 만한 틈을 만들자 그 틈으로 마리오 홀로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아직 열려진 문 틈으로 그런 마리오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마리오는 촌장을 잡고 있는 놀 들과의 거리가 열 걸음쯤 되자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표정이 어떤지 우리는 볼 수가 없었지만 그의 음성은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 마리오가 먼저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놀 중의 한놈이 대답했다. "처녀 10명과 아까 낮 네 놈을 내놔. 그럼 이사람을 보내 준다." "나머지 사람은?" "같이 보내 준다." 그러자 놀들에게 붙잡혀서 얼굴이 진흙과 피투성이가 되어 어떻게 생겼는지 못알아 볼 몰골을 하고 있는 촌장이 힘겹게 고개를 들고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듣지 마. 이놈들 여자들을 노예로 팔 생각이야!" 그가 힘겹게 소리 쳤지만 마리오는 무심하게 그에게 대꾸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멍청하게 시리 놈들에게 잡혀서 무슨 꼴이야? 네 녀석 때문에 골치 썩게 생겼잖아." 마리오의 황당한 대꾸에 내 일행이 멍해있자 알리가 쓴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설명해 줬다. "촌장님과 부 촌장님은 절친한 친구시거든." 그때 다시 마리오의 목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네놈들은 여전히 멍청하군, 네놈들이 잡고 있는 인간들은 기껏 해봐야 10명인데 14명을 내놓으라고? 이건 우리가 밑지는 거잖아! 차라리 그 놈들을 너희 맘대로 하지 그래?" "휘유, 대단한 사람이군." 그의 말에 류미르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놀은 그의 말에 무척 당황하며 자신과 같이 온 놀들과 머리를 맏대고 뭔가를 한참 동안 수근 대더니 다시 마리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좋다. 그럼 처녀는 6명으로 줄여준다!" 그러나 마리오는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웃기네, 그렇게 다 죽어가는 남자들을 가지고 뭘 하라고." 놀은 무척이나 당황 하더니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창 끝을 촌장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가 다 빠지고 오래된 창이었지만 무저항인 사람을 죽이기에는 충분히 날카로와 보였다. "죽인다!" 그러나 마리오는 흥, 하고 콧김을 세게 내 뿜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투덜거리는 투로 혼자말 같지만 놀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이라지 뭐, 지들이 잘못해서 붙잡힌 건데.... 나를 이렇게 귀찮게 만들다니, 죽어도 싸." 그가 정말 태연하게, 아니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놀들은 무지 당황해 했다. 다시 자기네들 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는지 그들 중 한명이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 대표로 우리에게 말하던 놀이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라." 그 모습에 류미르가 쿡쿡 낮게 웃었다. "쿡쿡쿡... 저 사람, 정말 대단한걸? 놀들을 저 만큼 다룰 수 있다니... "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켄이 아직 긴장이 덜 풀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야 놈들이 지 욕심밖에 모르는 멍청한 놈들이라서 그렇지. 하지만 아저씨가 도대체 어쩌실 셈이지?" 번 호 : 13790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03일 22:26 등록자 : LODEMP 조 회 : 91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6) 느긋하게 마셔도 차 한 잔은 다 마셨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숲속으로 뛰어 갔었던 듯한 놀이 돌아왔다. 그 동안 마리오와 촌장을 데리고 왔던 놀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대치하고 있었다. 숲 속으로 뛰어 갔다 온 놀은 이제까지 계속 놀의 대표로 마리오에게 대화를 하던 놀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했다. 듣고 있던 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의 얼굴이 아님에도 희색이 도는 것이 분명히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 만만하게 마리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마리오의 어깨가 약간 움찔했다. 놀이 너무 자신 만만한 표정을 짓자 긴장한 것이리라... "처녀 말고 네 놈만 내놔. 그럼 사람들 돌려 준다." 이번에 마리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어깨가 다시 움찔 하더니 가만히 있다가 한참 후에, 우리가 초조해 져서 미칠것만 같을 무렵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겠다. 시간을 달라." 놀은 이번에 마리오가 자신 만만하게 대답하지 못하자 더욱 더 의기양양해져서 거만하게 호의를 베푼다는 식으로 말했다. "좋다. 내일 아침에 온다. 그때 사람들 데리고 오니, 너희들도 네 놈 내놔라." 그리고 놀 들은 촌장을 이끌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마리오는 침중한 표정으로 방어책 속으로 들어왔고 그가 들어오자 마자 방어책에 달려 있던 육중한 나무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그리고 마리오를 위시한 마을 사람들은 종탑이 있는 마을 중앙의 광장에 모였다. 마리오가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그 쪽으로 모이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이 곳에 모여서 의논을 한 것 같았다. "어쩌죠?" 켄이 그 특유의 활달함을 잃은 채 불안한 얼굴로 마리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리오도 어쩔줄 모르겠는지 침통한 얼굴로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늘을 보고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쉬더니 마을 사람들을 쭉 둘러 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아까 들었다시피 저 놈들은 촌장을 비롯한 마을 남자들 10명을 인질로 잡고 알리와 우리 마을에 들어오신 손님 3 분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때 한 남자가 손을 번쩍 들면서 소리쳤다. "잠깐만요, 손님은 3명이 아니라 4명 아닙니까?" 마리오는 그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 소브로를 손가락으로 가르켜 보이며 말했다. "아마 저 소년을 뺀 것 같습니다. 하긴, 저 소년을 뭐하러 원하겠습니까?" 그러자 소브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하기야,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그 자신이 모를테지... 마리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갈등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놈들에게 붙잡힌 사람들도 구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리와 손님들 보고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마을사람들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마리오는 입을 다물고 다시 한번 마을 사람들을 둘러 보더니 한 쪽에서 거의 울상을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서 그 곳에서 한참동안 머물렀다. 그의 눈길을 따라 가 보니 그 곳에서는 새파랗게 질린 몇명의 중년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이 있었다. 아마 놀들에게 붙잡힌 사람들의 식구들일 것이다. 마리오는 순간 그들을 바라보던 안타까운 눈길을 차갑게 굳히고는 그들을 매정하게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놈들의 제의를 거절하려고 합니다." 붙잡힌 사람들의 식구들이 서 있는 쪽에서 작은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마리오는 그쪽으로 눈길도 돌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는 현재 놈들과 싸워서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고요. 놈들에게 잡힌 사람들이 안됐긴 하지만 그건 그들이 운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내일 나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 중 더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말한 것 보다 더 좋은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제안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그때 어떤 여인의 비명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들을 내줘요. 저들을 내주란 말예요. 알리는 고아이니 내 아들을 죽이는 것 보다 백배 났잖아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머리의 절반이 하얗게 센 할머니가 히스테리 하게 소리치며 이쪽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팔을 이제 막 15세 되어 보이는 소년과 중년 여인이 울먹이면서 할머니가 뛰어 나오지 못하 도록 잡고 있어서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계속 발버둥 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놈을 내보내. 저놈 때문에 내 아들을 죽일 수는 없어... 저놈을 내보내란 말이야..." 그 할머니는 키가 작은데다 무척 가냘픈 몸을 하고 있어서 더욱 더 애처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자신만 생각하는 순 어거지였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누구 하나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결국 그 할머니는 실신해 버렸고 주위에 있던 아주머니들에 의하여 그녀의 집인 듯한 곳으로 데려가 졌다. 그런데 그때 마을에 남아 있던 장정 중 한명인 어떤 중년 남자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오, 놈들의 말에 응하는게 어때?" 그의 갑작스런 제의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그의 말이 들리지 마자 켄의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알리를 내주잔 말예요?" 하지만 말을 꺼낸 그 중년 남자는 켄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알리만 내주면 마을 사람 10명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 알리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알리는 가족이 없잖아. 그러나 놈들에게 잡힌 사람들은 가족이 있단 말야. 특히 그 중에는 한 가정의 가장인 사람들도 있어." 켄은 이제는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개 졌다. 그는 그런 상태로 그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마리오가 제지하면서 입을 열었다. "엘, 자네 아들이 둘 있지? 한 녀석은 이제 19이 되었고, 또 한 녀석은 17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마리오의 엉뚱한 말에 엘이라 불린 중년 남자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오는 그 중년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말일세, 자네의 아들 중 한명을 알리 대신 놀에게 넘겨주는 게 어떨까? 알리야 자네가 알다시피 부모를 잃었고 가족은 한 명도 없으니 알리 집안을 이을 사람은 알리 혼자 뿐인데 그 집안의 핏줄을 끊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자넨 아들이 2이니 한 녀석이 없어져도 자네 집안의 핏줄은 끊겨지지 않을테니 10사람의 목숨과 바꾼다고 생각하고 한 녀석을 내놓는게 어때?" "그, 그런..." 엘이라 불린 중년 남자는 벌레씹은 얼굴이 되었지만 뭐라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마리오는 그가 아무런 말도 못하자 냉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자청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남을 희생시킬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네. 더구나 알리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1 년 전에 놈들이 쳐들어 왔을 때 그가 목숨을 바쳐 놈들을 막아준 덕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무사히 도망쳐 목숨을 건지지 않았는가? 자네 말대로 한다면 그렇게 알리의 아버지도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 했는데 그의 아들까지 희생하라고 강요 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 안하는가?" 번 호 : 13828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04일 22:45 등록자 : LODEMP 조 회 : 83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7) 마리오의 일장 연설을 들은 엘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뒤에도 마리오가 마을 사람들을 한 번 더 훝어 보았지만 더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알리가 비장한 얼굴로 나섰다. "저 혼자 나가면 몇 분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가족이 놀에게 잡혀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다시 희망이 감돌기 시작 했으나 켄과 켄의 엄마 도니야는 새파랗게 질렸다. "무슨 소리야 임마? 그 놈들이 네가 간다고 해서 아저씨 들을 고이 보내줄 것 같아?" 도니야의 반응은 켄의 반응보다 더 과격했다. 그녀는 알리의 뒤로 돌아가서 그의 뒤통수를 과감하게 한대 후려쳤던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리고 마리오도 한 마디 보탰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설사 그들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네 탓은 아니니까..." "하지만..." 알리는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다시 입을 여는 마리오에 의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너 말고도 저 아이들 까지 원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놈들을 공격한 것은 너와 우리 마을 사람들 뿐이었어. 그런데 저 들을 원한다는 건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거지." "그럼 우리 셋만 나가도 되겠군요?" 갑자기 그들 사이에 끼어든 류미르의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자 알리가 류미르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소리야? 어쩌려구 그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켄도 같이 소리쳤다. "너희들이 뭘 할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이건 너희 탓이 아니야. 그러니 가만히 있어. 너희보고 나가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들의 강력한 말에도 류미르는 태평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맞아. 그래서 난 이 마을 사람들이 굉장히 맘에 들어. 딴 사람들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우리를 잡아서 놈들에게 줘 버렸을 텐데 말야..." 그의 말을 이어 나도 한 마디 했다. "현명한 거야. 이런 상황에서 한번 요구를 들어주기 시작 하면 놈들은 뭔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계속 인질을 잡을 테니까. 그럼 이 마을 사람들은 더욱 더 마을 밖을 나가는 것이 위험해 지겠지..." 류미르가 즐겁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린, 난 말야. 이곳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우릴 잡아서 넘길 줄 알았어. 몇몇 개인 때문에 집단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때 우리 사이로 세이몬이 끼어 들었다. "집단? 잡힌 사람은 10명인데 어떻게 집단이라는 거야?" 그 말에 류미르 대신 내가 대답했다. "그 정도면 집단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장정들이잖아.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기도 하고 또 이 마을을 지킬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없으면 이 마을의 힘이 그만큼 없어지는 거야." "호오..." 세이몬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류미르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우리가 나서 주는 건?" "나쁠건 없지. 나도 이 마을 사람들이 꽤 맘에 들거던. 세이몬, 너도 나설꺼지?"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마을 사람들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그리고 내가 세이몬의 의견을 묻자 모든 이의 시선이 세이몬에게로 몰렸다. "너희들이 나선다면, 나도 나서지 뭐." "그, 그런..." 도니야가 숨 넘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류미르가 예의 그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걱정하실 것 없어요. 편하게 이 마을에 머물게 해주는 댓가라고 생각 하세요." 그리고 곧 이어 마리오를 돌아 보았다. "그럼 결정한 겁니다? 내일 아침에 저희 셋이 나서겠어요." 마리오는 묘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야 너희들이 나서준 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 "아아, 그걸로 된 거예요. 대신, 뒷 감당은 당신들이 하셔야 할겁니다. 어떻게 될 지는 모르니까요." 나는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싱긋 웃어보이고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떴다. 우리 뒤를 이어 알리와 켄, 그리고 소브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쩌려는 거야, 너희들? 이건 장난이 아니라고. 죽을 수도 있어." "맞아, 지금이라도 그 말 취소해. 위험하단 말야." 그러나 우리 셋은 그들의 말을 들은체도 안 했고 류미르가 우리 대표로 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이미 정한 일이야. 그러니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 그날 저녁 우리는 엄청 푸짐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마리오를 비롯한 놀들에게 가족이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저마다 음식들을 만들어와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다. 낮에 알리보고 소리치다 신실했던 할머니는 우리 손을 꼭 붙들고 몇번이나 고맙다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흠, 이것도 나쁘진 않은 걸? 이렇게 맛있는 음식 까지 잔뜩 먹고 말야..."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 치우고 후식으로 애플 파이 한 조각을 자신의 앞에 덜어 놓으며 류미르가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동감이야, 앞으로 이런 일에는 발 벗고 나서야 겠는 걸?" 내가 아직 못 다 먹은 옥수수 빵에 버터를 바르면서 대꾸하자 닭다리를 이제 막 뜯어서 입에 넣으려던 세이몬이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찬성!"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히히 낙낙하고 있는 동안 켄과 알리, 도니야, 그리고 소브로는 죽을 상을 하면서 자신들 앞에 놓인 음식들을 기계적으로 입 안에 꾸역 꾸역 넣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힐끗 바라보던 류미르가 포크를 든 채로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만 얼굴들 좀 펴요. 그렇게 우울한 얼굴들을 하고 있으니까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여전히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켄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웃게 생겼어? 아무 관계도 없는 너희들이 우리때문에 죽게 생겼는데..." 그러자 막 닭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 거리던 세이몬이 말을 받았다. "우리가 왜 죽어? 이래뵈도 우리 엄청 세다구." "세이몬 말이 맞아. 우리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나선 거야. 그러니 너무 그렇게 단정적으로 생각 하지 마." 나도 세이몬의 말을 받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그 놈들은 사람이 아니라구. 사람보다 몇 배는 강하고, 몇 배는 날쌔다구." 알리가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결국 류미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중얼거렸다. "뭐, 두고보면 알겠지..." 다음 날, 우리가 다락방에서 푹 자고 내려왔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우울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나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과 함께 마을 밖으로 나가는 나무 문 앞에 섰을 때 마을 대표로 마리오가 나서서 우리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미안하군, 괜히 우리들 때문에... 대신 저 아이는 우리가 여행 목적지 까지 데려다 주도록 하지." 그가 소브로를 가르키며 말하자 우리는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류미르가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에휴, 두고보면 알겠지~" 번 호 : 13893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05일 21:59 등록자 : LODEMP 조 회 : 83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8) 잠시 후 4명의 장정들이 문을 열었고 그 사이를 통하여 나를 비롯한 우리 일행 3명과 마리오를 위시한 십여명의 장정들이 나섰다. 그리고 숲속에서 몇십마리로 보이는 놀들이 인질로 잡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놀들에게 끌려 온 사람들은 제대로 된 옷 조차 걸치지 못했고 온 몸에 흙먼지와 함께 오래되어 말라붙은 피들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몸이 성하지 않은 듯 혼자 힘으로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가운데 두고 몇십명의 놀들이 그들을 삥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 앞으로 세명의 놀들이 나섰다. 그들 중 가운데 있는 놀이 대장인 듯 그는 이마에 어울리지도 않게 금으로 된 테를 두르고 있었고 몸에는 비단으로 된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류미르와 세이몬이 낮게 킥킥 거렸고 나는 어이가 없어 혀를 끌끌 찼다. "참내, 꼴에 지도 대장이라고..." 놀의 대장 오른편에 있던 놀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이쪽에서도 마리오가 앞으로 나섰다. "인간 데리고 왔다. 너희는?" "너희들의 조건에 응하기로 했다. 너희가 원하는 사람들을 내줄테니 너희가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 달라." 놀은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로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앞으로 나선 놀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대장을 바라보자 그 대장이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손짓했다. 그리고 그 손짓을 본 뒤에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던 놀들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거칠게 끌고 와 놀들과 사람들 사이의 공간에 던지다 시피 내려 놓았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얼굴은 분노로 차 올랐지만 함부로 나서지는 못하고 자신들의 입술만 짓이기거나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마리오는 침착하게 손짓해서 사람들에게 부상당한 사람들을 마을 안으로 옮기라고 지시하고는 씁쓸한 얼굴로 우리들을 돌아 보았다. 류미르가 먼저 그의 신호를 눈치 채고는 세이몬과 내 팔을 툭툭 쳐 보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나와 세이몬도 마리오에게 싱긋 웃어보이고는 앞으로 나가는 순간 세이몬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아, 맞다!" "왜그래?"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황당해진 내가 그를 쳐다보며 묻자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린, 어떻게해? 짐을 안 가져왔어!" "짐?" 황당해진 내가 되묻자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울상인 표정을 지었다. "응, 켄네 집에 그냥 놓고 왔어. 아침에 챙겼어야 했는데..." "하, 하, 하..." 순간 이 상황에서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서 헛 웃음만 흘리고 있는 나를 류미르가 손쉽게 구해줬다. 그는 번개같이 세이몬의 팔뚝을 잡아 채서는 그대로 끌고 놀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간 것이었다. "헛소리 말고 빨랑 와!" "하지만, 짐은 어쩌고?" 세이몬은 류미르에게 끌려 가면서도 미련을 못 버리고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지만 류미르는 그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계속 걷기만 했다. 그리고 그 뒤를 내가 쫄래 쫄래 쫓아가면서 세이몬을 위로했다. "걱정 마, 세이몬. 도니야 아주머니가 잘 챙겨놓고 계실꺼야. 나중에 다시 여기 들려서 가져가면 되지. 그리고 소브로도 데리러 와야 하잖아." "아, 그렇구나..." 세이몬이 이해 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우리는 놀들의 앞에 설 수 있었고 우리는 한 동안 그 앞에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놀들이 모두 패닉 상태에 빠져 석고가 되어 우리가 앞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세이몬이 그들 중 한 놀에게 다가가 그의 눈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가 흠칫 놀라 뒷걸음을 치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모든 놀들이 패닉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장인 놀이 허둥대면서 재빨리 놀들에게 손짓하자 놀들 중 세 명이 우리 등 뒤로 와서는 창을 들이대며 앞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몇몇 놀들이 앞장을 서서 숲속으로 들어가자 우리도 그들 뒤를 따랐고 나머지 놀들은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우리를 에워싼 형태로 움직였다. 그런 형태로 거의 두시간 가량을 걸어서 간 곳은 숲 속 가운데 있는 넓다란 공터였다. 일부러 그 곳을 공터로 만든 듯 공터 주위에는 여기저기 나무 밑동이 남아있어 이 곳이 원래는 나무가 무성했던 숲이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공터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의 십여명의 사람들이었는데 그중 딱 한명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못하게 생긴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척 보기에도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우람한 근육들을 자랑하는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채찍을 들고 있었다. 놀들도 그들을 보자마자 공터 구석에서 멈추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놀의 대장인 듯한 녀석과 그의 곁에 있는 두 명의 놀만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채찍을 가진 용병 세명과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가는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류미르는 그 모습을 보더니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흠, 과연..." 그리고 나도 그 뒤를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러자 세이몬이 부루퉁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뭐야, 너희들끼리만 알고..." 류미르는 세이몬의 말에 핏 하고 웃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를 그의 코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쯧쯧, 제자야. 이건 각자가 알아서 추측한 거란다. 누가 가르쳐준게 아니야." 류미르의 장난끼 어린 거만함이 또 발동되자 세이몬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우쒸..." "자, 그만 그만. 세이몬 내가 설명해 줄께." 세이몬이 앞뒤 안가리고 류미르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나는 재빨리 세이몬의 팔을 붙잡는 동시에 류미르를 째려봐서 그를 물러나게 했다. "처음에 놀들이 원한게 우리하고 처녀들이었잖아. 보통 몬스터들이 뭐에 쓰려고 처녀들을 원하겠어? 그래서 이건 뒤에 누군가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 아까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뒤에 있는 존재를 눈치 못채게 하려고 하는지 알리까지 내 놓으라고 했지만 우리 셋만 나와도 아무런 말이 없잖아? 그러니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짐작 했고, 지금 저 인간들을 만나러 온 걸 보고는 놀 뒤에 저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안 거지." 나의 기나긴 설명이 끝나고 난 뒤 세이몬은 이해 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가르킨 자의 보람을 느끼고 있을 때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류미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인간은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자신들의 동족을 잡으라고 몬스터에게 시킬 수가 있는 거지? 인간이 욕심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뭘 새삼스레... 인간들은 자신들의 종족을 서로 팔고 사고하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 내가 류미르의 말에 씁쓸한 기분을 느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세이몬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그래도, 자신들의 종족들 끼리 그러는 건 모르겠지만 타 종족의 힘을 이용한다는 건 좀..." 류미르는 계속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번 호 : 13937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06일 21:30 등록자 : LODEMP 조 회 : 81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9) 그때 놀들과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우리를 돌아 보았다. 그는 몇걸음 더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쓱 훝어 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그런 모습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어쩔까? 저 사람의 아지트로 갈 때까지 기다릴까?" 류미르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낮게 속삭였다. "아냐, 지금 날려버리자." 나의 말에 류미르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하지만 지금 쓸어버리면 저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할텐데?" "어짜피 저들을 다 제거한다 해도 이 나라안에 저런 인간들을 다 제거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이 정도만 해도 다시는 놀들과 거래는 안하겠지. 그리고 놀들도 상당히 타격을 입을테고... 이번에는 이정도까지만 하자고. 뒷 일은 마을 사람들의 몫이야." "좋아, 그렇다면 사람은 누가 맡을래?" 류미르의 질문에 나는 세이몬을 돌아보았다. "난 놀을 맡을래. 세이몬 너는?" "난 아무나..." "그럼 세이몬이 저 인간들을 맡아, 나는 튀는 놈들을 막을테니." 류미르의 말에 나와 세이몬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가 끝이 났는지 우리 뒤에 있던 놀들이 우리의 등을 창 끝으로 살짝 찔렀다. 앞으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앞으로 나섰고 놀들과 사람들 중간에서 우리를 인계 받을 용병들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나는 벼락같이 외쳤다. "윈드 스톰!!" 류미르와 세이몬은 내가 입을 열자마자 재빨리 바닥에 엎드려 그 뒤에 올 충격에 대비하였고 그와 동시에 내 몸 주위에서 거대한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일대를 휩쓸었다. "덤볏!" 그 뒤를 내가 지체하지 않고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놀들에게 달려들면서 외치자 류미르와 세이몬도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세이몬은 사람들에게 마력이 가득 담긴 주먹을 휘둘러댔고 류미르는 정령들을 불러내어 이 곳에 모인 자들을 한명도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런 바람에 의하여 큰 타격을 입은 뒤라서 우리가 공격을 해 들어가더라도 별다른 방어를 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거의 일방적으로 그들을 몰아 붙여 없앨 수 있었다. "에게, 이게 뭐야? 너무 일방적이잖아?" 마지막 한명을 쓰러트린 후 세이몬이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 나를 원망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의 눈길에 의아해진 내가 묻자 세이몬이 뾰루퉁하게 대답했다. "너무 강력한 마법을 써서 얘네들이 이렇게 됬잖아. 그냥 가볍게 날리지 그랬어? 그렇다면 이렇게 시시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러자 땅의 정령들을 이용해 시체들을 땅에 묻고 있던 류미르가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넌 싸우는게 좋냐? 시시하다고 하게..." 그의 말에 세이몬이 찔끔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자자, 둘다 그만하고. 류미르, 다 처리했으면 가자!" 내가 먼저 앞장을 섰고 그 뒤로 세이몬이 쫄래쫄래 쫓아왔다. 그리고 맨 나중에 무표정한 얼굴로 류미르가 쫓아왔다. "왜 표정이 그모양이야?" 한참 걷고 있는데 평소같지 않게 류미르가 조개처럼 꼭 입을 다물고 있자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그냥..." 그러나 류미르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또다시 입을 계속 다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 둘 내가 아니었다. "뭔데 그래? 말 못할 일이라도 돼?" 그러자 류미르가 내 쪽을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건 아니라... 인간들이 이해가 안돼서 말야..." "뭐가?" 류미르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자 세이몬도 흥미가 생기는지 그를 돌아보았다. "뭐, 어제 오늘 안 건 아니지만, 난 정말 아직까지 이해가 안 가는게, 왜 인간들은 같은 동족들을 하찮게 여기는 거지? 그러면서도 그렇게 같이 모여서 사는게 참 이상하다니까..." "인간들은 혼자서 살지 못하니까 같이 사는거지." 내가 류미르를 힐끗 바라보며 당연한 걸 가지고 그런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류미르는 여전히 할 말이 있는지 계속 찡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알아. 그런데 그러면 말야, 같이 사는 동족들을 사랑하고 존중해 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러고 있잖아. 너 마을 사람들 보면 몰라?" "그거야 가까운 사람들 일 경우지, 낯선 사람들에게는 안그러잖아. 특히 아까 그 인간들 처럼 낯선 사람들을 물건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건 사람들이 집단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기 때문이지. 만약 집단 이익이 자신의 이익과 일치하면 아주 필사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애쓰겠지만 자신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상반된다면 집단의 이익이고 뭐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애쓸껄? 그런게 사람이지..." 내 말에 세이몬도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람은 너무 욕심이 많아. 그런데 말야, 사람들은 혼자 살지 못하면서 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거지? 그러다가 집단이 와해되 버리면 자신들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모르나?" 세이몬의 물음에 류미르가 장난끼 어린 웃음을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어이구, 기특한 것. 네가 그런 생각도 다 할줄 알고말야... 음... 많이 컸어." 평소 같으면 그런 류미르의 행동을 말렸겠지만 지금은 아까 그의 안 좋은 표정을 봤기 때문에 그냥 가만 냅뒀다. 덕분에 세이몬이 류미르에게 달려 들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사전에 막지 못했지만... 류미르는 세이몬이 휘두르는 주먹을 두 팔을 교차시켜 여유있게 막아내면서 싱긋 웃었다. 그러면서 정말 여유가 많은지 세이몬의 물음에 대답까지 해주었다. "코 앞의 이익 때문에 미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인간이 번영한다는 게 정말 불가사이한 일이라고 생각 안해? 우왓!" 주먹이 막히자 날아드는 세이몬의 발차기에 류미르가 재빨리 옆으로 피하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말 뒤를 내가 이었다. "뭐, 욕심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말야. 하지만 과욕은 멸망을 낳는 법이지..." 류미르와 세이몬의 티격 태격은 우리가 마을에 도착할 때 까지도 계속 되었다. 결국 내가 중간에 나서서 그들을 말린 뒤 우리는 마을에 들어섰다. 곧장 켄의 집으로 간 우리들은 열려진 채로 있는 현관문을 통해 거실에 들어섰다. 그 곳에서는 켄과 알리를 비롯한 도니야와 마리오가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소브로는 침울한 얼굴로 구석에 처량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대낮부터 무슨 술 파티예요?" 그들을 향해 명랑한 어조로 외치자 그들의 시선이 문 가에 서 있던 우리들을 향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마리오는 마시려고 막 들었던 술 잔을 허공에 딱 멈춘 채, 도니야는 안주로 향하던 포크를 허공에 멈춘 채, 알리는 입 안에 술을 한 모금 머금고 술 잔을 입술에 댄 채, 그리고 켄은 바로 입 앞에 있는 안주를 입 안으로 넣지 못한 채 포크를 허공에 띄운 채였다. 그리고 그 순간 마리오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이 그의 손에서 나와 바닥에 떨어지며 낸 '쨍그랑~' 소리를 신호로 그들은 패닉 상태에서 깨어났다. "얘들아~~!!"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도니야였다.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맻힌 채로 그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며 달려와 우리 셋을 한꺼번에 껴안은 채로 얼굴을 부벼댔다.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다행이야..." 그리고 그 뒤로 알리와 켄이 달려왔다. 번 호 : 13974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07일 22:00 등록자 : LODEMP 조 회 : 84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1화 개인인가, 집단인가...(10) 우리가 겨우 도니야에게서 풀려나자 맨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마리오가 나섰다. "정말 다행이군.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말이야...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지?" 그의 질문에 일순 나는 크게 당황했다. 이런 그의 질문이 지극히 당연한 거였지만 마을에 오는 것만 생각 하느라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 못한 거였다. 그렇다고 우리 셋이서 놀들과 그 사람들을 다 무찌르고 왔다고 할 수는 없는 거였다.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뻘뻘대고 있을 때 의외로 세이몬이 나섰다. "놀들이요, 저희들을 어떤 사람들에게 데려 가더라구요..." 류미르와 나는 그가 곧이 곧대로 대답하는 줄 알고 무지 놀랬다. 곧 내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세이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람들은 거의 다 용병이더라고요, 한 사람만 빼고... 아마 그 사람이 그 용병들을 고용했나봐요." 그리고 그 뒤를 류미르가 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대화를 하더니 뭐가 잘 안 되었는지 막 싸우던데요? 급기야는 칼 까지 빼어들고 싸우더라구요." "맞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 틈을 타서 숲 속에 숨어 있다가 싸움이 거의 끝날 무렵에 나머지 놀들을 처리하고 도망쳤지요." 끝마무리는 내가 지었다. 즉석으로 생각해 낸 변명 치고는 썩 괜찮은 변명이어서 속으로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이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로 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놀들을? 너희가?" 예상치 못한 그들의 반응에 내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류미르가 나섰다. "부족하나마 저희는 각자 재주를 가지고 있거든요. 저는 정령을 조금 다룰 수 있고 아힌은 마법을, 세이몬은 격투술에 능하지요." 류미르의 말을 들은 그들은 각자 반응이 달랐다. "와우~" "그랬군..." "어쩐지..." 그러나 마리오는 좀 달랐다. 그는 딴 사람들이 감탄을 내 뱉는 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어 내 손을 덥썩 부여 잡았다. "너!" "예, 예." 나는 그의 반응에 너무 놀라 얼결에 대답을 하자 그가 내 코 앞으로 얼굴을 드리밀더니 나를 사납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우리좀 도와줘~!" "에?" 그의 행동에 예상되었던 말과 동떨어진 말이 나오자 나는 황당해져서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 그러나 그의 말이 계속 되었기에 나는 내가 잘 못 들은 게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법을 할 수 있다면 치유 마법도 할 수 있지?" 그는 거의 내가 할 수 있다고 단정 하고 확인 하는 말 투로 물어보았다.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했으므로 나는 웃지는 못하고 얼결에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오늘 아침에 봤겠지만 놀들에게 잡혔다가 돌아 온 사람들이 많이 다쳐서 지금 각자의 집에 누워 있단다. 지금 이렇게 부탁하는 건 정말 염치 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조금 힘들더라도 도와주렴." 그의 시선이 강렬해서 슬쩍 그의 시선을 비껴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주위사람들은 나와 마리오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내 눈과 마주 친 도니야와 알리, 켄은 부탁한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하지만 그렇게 큰 도움은 안 될꺼예요." 그러나 마리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봐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 우리 마을에는 의사는 물론 마법사가 없기에 네가 조금만 봐주는 것으로도 고마워 할꺼야." 그리고 곧바로 그의 손에 이끌려 나는 도니야의 집에서 벗어나 다른 집으로 가야 했다. 마리오는 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어떤 집에 도달해서는 힘차게 그 집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쾅!!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면서 피로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이 문 틈 사이로 삐죽이 내밀어졌다. "누구세요?" 막 14, 5 세 되어 보이는 그녀의 눈은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었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에는 눈문 자국으로 얼룩 덜룩 한데다 뭔 힘든 일이 있었는지 헬쓱 해 보였다. "나다. 아버지는 어떠시냐?" "아, 아저씨~!!" 그녀는 마리오의 얼굴을 확인하자 문을 활짝 열고 뛰쳐나와 울먹이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흑흑흑,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계세요..." "그래, 그랬구나... 걱정 말아라. 이 아이가 마법사라는 구나. 네 아버지를 봐 주겠다고 해서 이렇게 데려 왔다." 마리고가 그녀를 꼭 껴앉고 등을 토닥여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말하자 그녀는 다시 진정하고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세요. 엄마한테 말씀 드릴께요..." 마리오는 그녀에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 해 보이고는 곧바로 집으로 쑥 들어가 거침없이 어느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 방은 침실이었는지 투박한 통나무로 만든 거칠지만 무척 튼튼해 보이는 큰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마리오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깨끗했지만 창백했고 자잘하게 긁힌 상처들이 많이 나 있었다. 가슴까지 덮인 침대 시트 위로 그의 맨 상체를 감싼 하얀 붕대가 얼핏 보였고 그가 잠을 자면서도 가끔 신음을 내 뱉는 걸 보면 무척 많이 다친 모양이었다. 우리 뒤로 어떤 중년 여인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아침에 집에 온 뒤로는 계속 저 상태예요. 그리고 지금은 열이 무척 높아요. 이러다가 깨어 날 수 있을런지..." 아까 그 소녀와 같은 밝은 갈색 머리를 흩트러진 채 대충 묶고 있는 그녀는 가냘푼 몸매에 얼굴까지 창백해서 더욱 더 불쌍해 보였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고여 주르르 흘러 주름진 얼굴을 적시자 그녀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으며 울음을 삼켰다. 마리오가 나를 향해 저 남자를 봐달라는 듯한 턱짓을 보내오자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침대로 다가가 시트를 걷어 내었다. 시트에 가려진 그의 상체 부분이 드러났는데 그의 옆구리와 배를 감싼 붕대가 새빨갛게 물든 것으로 보아 그 부분에 큰 부상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조심스레 붕대를 풀자 마리오도 옆에서 나를 거들어 주었다. 붕대를 다 풀자 다시금 상처가 터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녀가 재빨리 수건을 가져와 내밀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살짝 붙들어 제지하고는 그 상처 위에 손을 내밀어 주문을 외웠다. "힐링!!" 내 손이 하얀 빛에 감싸이면서 그의 상처에 같이 빛이 감싸이자 눈에 뚜렸이 보이게 빠른 속도로 그의 피가 멈추었다. 그리고 비록 그의 상처가 다 아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고 숨소리조차 편안해 졌다. 나는 그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큰 능력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쯤하고는 마법을 멈췄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마리오와 중년 여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마리오와 같이 환부에 붕대를 다시 감고 조용히 그 방을 나오자 마리오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우이, 정말 고마우이..." 그를 돌아다보니 어느 새 그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피식 웃어 보이고는 명랑하게 말했다. "자, 다음은 어디지요?" 마리오와 함께 집집 마다 돌아다니면서 환자를 치유하는 동안 도니야네 집에서는 잔치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내가 환자 순례를 끝내고 마리오와 함께 도니야의 집에 돌아오자 그의 집에 모여 들었던 사람들이 나를 보자마자 열렬하게 함성을 지르며 환영해댔다. 그리고 곧바로 술잔이 돌려지며 파티가 시작 되었다. 그곳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한번씩은 다 나에게 다가와서 술잔을 건내며 고맙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음식을 얼마 못 먹고 술만 잔뜩 마시게 되었다. 결국 취기가 슬그머니 돌자 나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그들은 내가 환자를 치유하느라 피곤하다고 말하자 얼른 자라고 나를 떠밀었다. 덕분에 나는 쉽게 그 자리를 빠져나와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잠잘 수 있었다. 하지만 류미르와 세이몬은 밤 새도록 그 자리에 붙들려 있었던 듯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옆에 널부러져서 잠들어 있는 그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냅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도니야는 멀쩡한 얼굴로 일어나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스프를 한 그릇 떠서 건네 주었다. "자, 마시거라.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자신의 친 아들에게 말하듯 다정하게 구는 그녀에게 나는 따뜻하게 웃어주고는 스프를 접시 째 후루륵 들이켰다. 그 때 마리오가 멀쩡한 얼굴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봐, 도니야... 어?" 그는 도니야의 이름을 부르다가 나를 바라보자 싱긋 웃었다. "몸은 좀 어때? 그래도 넌 네 형제들보다 좀 나을 걸? 일찍 도망쳤으니 말야. 네 형제들은 어떠냐?" "하하하, 아직도 못 일어나고 있어요. 그런데 아저씨나 아주머니나 멀쩡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걸요?" "껄껄껄, 이 마을 사람들의 주량을 우습게 보면 안돼지... 그나저나 아침 일찍 미안하지만 환자들을 한번 더 봐주면 안돼겠냐?" 마리오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부탁하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려고 했어요." 그와 다시한번 마을 환자들을 순회했다. 확실히 어제 치유마법을 걸어서 그런지 그들은 모두 많이 나아져 있었다. 그래서 오늘 한번 더 치유 마법을 걸자 이제는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사람들도 몇명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도니야의 집으로 돌아오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엉망이 된 얼굴로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들의 상태가 그 모양이었기에 우리는 당장 출발하지 못했고 점심을 먹고서야 그 마을을 떠날 수 있었다. 도니야와 마리오는 며칠 더 묶고 가라고 간청했지만 우리가 많이 지체되었다고 하자 더이상 잡지는 못했다. 그들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서 숲을 나오는 동안 갑작스레 세이몬이 우리를 향해다. "얘들아, 그래도 말야. 가끔은 자신의 이익보다 남을 더 생각해주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동감이야."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류미르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하자 소브로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고, 나중에 류미르가 소브로에게 간단하게 말했다. "아, 그런게 있어. 우리들끼리 얘기니까 넌 신경쓰지 않아도 돼." ===================================================== 오늘은 글이 좀 허접합니다 초 스피드로 쓰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전에 담부터는 제대로 쓰겠다고 어떤 분과 약속 했었는데 그걸 지키지 못하게 되다니... 역시 작심 3일이군요 ㅠ.ㅠ 번 호 : 14005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08일 21:55 등록자 : LODEMP 조 회 : 70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2 화 소브로 입학 시키기 (1) 제 22 화 소브로 입학 시키기 "여기군..." "드디어..." "도착했다." "와, 굉장하다..." 우리는 드디어 레스틴 왕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마리오와 도니야의 마을을 뒤로 한 채 그 숲을 나와 다음 마을이 있는 곳 까지 우리는 꼬박 2틀을 걸어갔다. 그 마을에 오기 전 놀들에게 말들을 다 빼앗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걸었던 것이다. 그나마 가끔 걷기가 귀찮을 때는 류미르보고 소브로를 안게 하여 날아가서 빨리 도착한 거였지, 죽어라고 걷기만 했다면 아마 5일은 걸렸으리라... 그 다음 마을에 도착하자 마자 말을 사서 달리기 시작한 우리들은 3 주 후에 드디어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레스틴 왕국에 들어왔을 때가 여름이 무르익는 계절이었는데 벌써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했고 나뭇잎들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 멀리 수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 중턱에 위치한 성이 바라보이는 이 곳은 수도의 변두리였고 우리의 눈 앞에는 회색빛 거대한 돌담에 둘러싸인 커다란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4 륜 마차 두대는 왕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큰 정문의 기둥에는 커다랗게 '레스틴 왕국 국립 기사 양성 학교' 라고 써 있었다. "왔으니까 우선 어떻게 하면 입학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구." 류미르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한 뒤 제일 먼저 앞장 서서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도 그의 뒤를 따라 쫄래쫄래 걸어갔다. "실례합니다." 류미르는 정문 기둥 바로 뒤에 있는 작은 건물의 현관문 바로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바로 옆에는 창대가 벽에 기대어 있는 데다 그가 제복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소위 말하는 학교 수위 신분을 가진 사람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는 류미르가 다가와 말을 건네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의문을 표했다. "이 학교에 입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실수 있으십니까?" "아아, 너희들도 입학하러 왔냐? 저기 초록색 지붕 건물 보이지? 거기로 가봐." 그는 류미르의 뒤를 쫓아온 우리들을 한번 쓱 보더니 한쪽 구석에 있는 2층 짜리의 건물을 가르키며 말하더니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고맙다고 말한 뒤 그가 가르켜준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이 곳의 건물 배치는 ㄷ 자 모양이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커다란 운동장이 보이고 그 뒤에 본관으로 보이는 3층 짜리의 커다란 건물이 있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직각의 위치에 각각 2층짜리의 건물이 2개씩 있었는데 아까 그 수위 같은 사람이 가르쳐 준 곳이 제일 큰 건물을 앞에서 봤을 때 왼쪽에서 두번째, 즉 제일 끝에 있는 건물이었다. 그 건물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고 건물 앞에는 많은 수의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곳으로 가까이 가자 우리 또래로 보이는 소년 한명이 우리쪽으로 뛰어왔다. "너희들 혹시 입학 원서 내러 왔니?"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반말로 말을 걸어 왔지만 그의 얼굴이 시원하게 웃고 있었고 말투가 경쾌해서 화가 나지 않았다. "응, 그런데 왜?" 류미르가 우리 대표로 해서 그에게 물었다. "아아, 말을 끌고 오길래, 혹시 말을 맡길 곳을 찾고있는게 아닌가 싶어서." 그때 또 다른 소년이 우리쪽으로 달려왔다. "이봐, 카일. 발이 빠른데? 언제 알고 달려온 거야?" "하하하, 늦으면 딴 녀석들에게 손님을 빼앗길 수 있으니까. 돈을 벌려면 재빨라야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류미르가 그 소년들이 왜 우리에게로 뛰어 왔는지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너희들 우리가 말을 맡기길 바라는 거니?" 그러자 맨 처음 우리에게 뛰어왔던 소년이 류미르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딩동댕~!" "좋아. 나쁠 건 없지. 우리도 말을 데리고 건물로 들어갈 순 없으니까 말야." 류미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의 웃음이 더욱 더 커졌다. "한 마리당 5 셀씩이야. 네 마리니까 다 합해서 20셀이야." 그러자 류미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 그렇게 비싸? 야, 우리가 어른도 아니고 다 애들이니까 만만하게 보고 바가지 쒸우는거 아냐?" 그런 류미르의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쿡 웃었다. 그의 주특기인 값 깍기 기술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슬쩍 옆을 보니 소브로와 세이몬도 빙긋 빙긋 웃으면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중에 온 소년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이 곳에 있는 애들도 말 한마리당 다 5 셀씩은 받는다고. 우리만 비싼게 아니야." 하지만 류미르도 만만치 않았다. "그걸 어떻게 믿어?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중 한 명이 남아서 말을 맡고 있는게 났겠다. 보통 여관에서도 말을 맡기는데 비싸봐야 3셀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여긴 2셀이나 더 비싸냐? 이건 순 바가지야." 그러자 먼저 우리에게 달려온 소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어. 이 장사는 학교에서 입학 원서를 받는 동안만 할수 있으니까 봄하고 가을, 일년에 딱 두번밖에 할 수 없단말야." "그래도 그렇지, 우리처럼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비싸게 받는 건 나쁜거야. 너희들 때문에 여관비가 모자라서 노숙할 수도 있잖아." "그건 너무 어거지다..." 나중에 온 소년의 인상이 찌푸려지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류미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좀더 세게 밀어 붙혔다. "뭐가 어거지야? 우리가 이 곳에 오는 동안 어린애들만 있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바가지를 씌웠는줄 알아? 그런데 너희들이 안 그렇다고 어떻게 장담해? 더욱이 내가 지금까지 말 맡기는데 낸 돈보다 많이 비싼데..." 두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 너희들만 특별히 바줘서 3 셀씩 해줄께. 너 정말 대단하구나? 남들에게는 3셀씩 해줬다고 말하면 안된다. 알았지?" 처음 온 소년이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으며 우리의 말 고삐를 받아 쥐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운동장 한 구석을 가르켰다. 그 곳에는 이미 여러마리의 말이 서 있었다. "일 끝나고 저쪽으로 오면 돼. 그 곳에 5 자가 써 있는 팻말이 있으니까 그걸 보고 오면 될꺼야. 요금은 후불이니까 말 찾으러 와서 내면 돼. 그럼 원서 잘 내라." 두 소년은 우리의 말 고삐를 각각 두 마리씩 나눠 쥐고는 사람들을 헤치고 사라졌다. 그들이 가고 난 뒤 자세히 보니 말들이나 마차나 한 무리씩 띄엄 띄엄 떨어져 있는 것이 그 소년들 같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그들 말고도 꽤 있는 것 같았다. 어찌됐든 또 다시 값을 깎은 류미르는 싱글 벙글 웃으면서 우리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번 호 : 14022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09일 21:19 등록자 : LODEMP 조 회 : 56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2화 소브로 입학 시키기 (2) 건물 안에 들어가자 마자 넓은 홀이 보였고 한 쪽으로는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러나 이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반면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그들은 비록 뭉텅이로 서 있었지만 그래도 잘 보면 줄을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줄이 다섯개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는 한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입학 원서를 쓰는 줄이라고 해서 우리도 제일 짧아보이는 줄에 가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래도 어찌 보면 금방 금방 줄이 줄어드는 것이 이 줄에는 입학을 하려는 사람 말고도 우리처럼 같이 온 사람들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원서를 다 써서 냈는지 긴장된 얼굴로 줄 사이를 걸어오거나 아니면 싱글 싱글 웃는 얼굴로 걸어오거나 그런 그를 격려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지만 울쌍을 짓거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어떤 소년은 아예 그자리에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런 그 아이를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업고 나오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소브로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잔뜩 긴장이 되어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앞만 보고 서서 어서 우리차례가 돌아오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우리 앞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피로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 책상 위에는 양쪽 끝으로 많은 서류들이 쌓여 있었고 책상 앞에는 'D - 10' 이라고 써 있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그 팻말이 궁금했는지 류미르는 다짜고짜 그 팻말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이게 뭐죠?" 그러자 책상 앞에 앉아있는 그 청년은 피곤한 목소리로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원서 마감일이 10일 남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발견했는데 책상 옆에는 쌀 한가마니가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 순간 소브로가 책상 앞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물어보지는 못하고 궁금증을 그냥 속으로 내리 눌렀다. 소브로가 앞으로 다가오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은 두툼한 카드 뭉치를 내밀었다. 그 카드는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고 여러장이 겹쳐 있었는데 카드에는 한 문장이 씌여 있었다. 청년은 그것을 소브로가 잘 볼수 있는 위치에 놓더니 한마디 했다. "읽어봐!" 그것은 레스틴어로 '기사는 약한자를 보호하며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다.' 라고 씌여 있었다. 우리는 소브로가 그 청년이 시키는 대로 빨리 그 글을 읽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브로는 얼굴이 붉어진 채 어쩔줄 몰라 안절부절 하고 있을 뿐 그의 입은 꼭 다물려 벌어질 줄 몰랐다. "왜그래? 왜 안읽어?" 답답함을 참지 못한 세이몬이 소브르의 등을 쿡찌르면서 재촉하자 소브로는 더더욱 얼굴이 빨개지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읽을 줄 몰라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청년은 냉정하게도 자신이 내 놓은 카드를 끌어 당기더니 한마디 내뱉았다. "가봐!"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기가죽은 소브로를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 건물을 나오자 마자 난 기가막혀서 투덜 거렸다. "뭐야? 글을 모르면 입학할 수 없는 거야?" "그런가봐. 하긴, 기사가 되려면 글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겠지..." 류미르는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브로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소브로는 어떻게 되는 거야?" 세이몬의 말에 소브로의 어깨가 움찔 하더니 천천히 그의 고개가 들려지며 우리들을 향했다. 그의 눈은 빨개져 있었고 그곳에서는 막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 훌쩍, 이제... 훌쩍, 어쩌죠? 흑흑..." 그런 그를 향해 차마 다음 기회를 노리라고 위로해 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단지 이 학교만을 바라보고 온 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미르도 그걸 잘 알고 있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그의 시선을 피해 딴 곳만 바라보았다. 그때 세이몬이 소브로의 등을 철썩 후려갈기면서 씩씩하게 말했다. "기운 내. 아린이라면 어떻게든 해줄꺼야. 그러니 걱정 마!" 그러면서 희망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나는 눈이 뚱그래져서 세이몬을 쳐다 보았지만 그때 마침 소브로도 희망에 찬 반짝반짝 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차마 "내가 어떻게?"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우선은 여관이나 잡자고. 그리고 나서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배고프면 생각도 잘 안나!!" 라고 씩씩하게 외칠 수 밖에 없었다. ===================================================== 오늘 글이 좀 짧군요... ^^;; 그러나 다음 내용과 갈라지기 땜시 그냥 잘랐습니다. ^^ 번 호 : 14082 / 14088 등록일 : 2000년 11월 10일 22:08 등록자 : LODEMP 조 회 : 19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2화 소브로 입학 시키기 (3) 수도 중심가로 들어와서 여관을 잡은 뒤 소브로는 너무나 기운차게 식사를 했다. 그러면서 가끔 힐끗 힐끗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히망에 반짝 반짝 거렸기에 그 눈과 마주친 내 맘은 커다란 바위 밑에 깔린 기분 이었다. 식사를 다 하고 나서 방으로 돌아온 류미르는 슬짝 소브로를 마법으로 잠재우고 나서 나를 돌아보았다. "어쩌려고 그래? 무슨 수라도 있는 거야?" "몰라. 야, 세이몬.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한거야?" 나는 투덜대면서 세이몬을 째려보자 세이몬은 아주 순진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대꾸했다. "여태까지 무슨 일이든 다 아린이 해결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어떻게좀 해봐." "젠장, 내가 뭐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 원서 마감날이 10일 남았지? 어떻게 하지?" 내가 어쩔줄 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감싸 쥐고 왔다 갔다 하자 턱을 손으로 받치고 곰곰히 생각에 잠긴 류미르가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 거렸다. "글을 읽는 사람만 입학시키는 건가? 그럼 소브로도 글을 배워야 겠군..." 그의 말에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바로 그거야!!" 내가 갑작스레 류미르를 돌아보며 소리치자 류미르는 깜짝 놀라서 손 위에 잘 놓여 있던 턱이 미끄러져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그는 간신히 균형을 잡아 고꾸라지는 것을 면하고 나를 째려봤다. "깜짝 놀랐잖아. 무슨 말이야?" "그거야, 그거. 소브로 저녀석 글을 읽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그럼, 마법을 쓰면 되잖아. '패시즈 (passage)' 마법!!" 그러자 류미르도 이제야 알겠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 그 언어와 글을 알게하는 마법?" "맞았어. 그 마법을 쓰면 간단하잖아? 내가 왜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자, 그럼 류미르, 네가 소브로에게 좀 걸어줘." 나는 모든 고민이 풀려버려 너무나 기분 좋은 상태에서 의기양양하게 류미르에게 말했다. 그러나 류미르의 반응이 내 기분에 찬 물을 끼얹었다. "내가? 왜? 아린, 네가 해!" "뭐? 왜그래? 네가 좀 하면 안돼?" 나는 그의 반응에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그 마법 못한단 말야. 내가 4서클이라는 걸 잊었어? 그건 7서클 마법이라고, 그러니까 네가 해. 넌 드래곤이니까 할 수 있을 거 아냐?" "에? 난 아직 그 마법 해본 적 없는데..." 그의 말에 나도 난처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 지금 배우면 되잖아. 넌 금방 할수 있을테니까 너무 걱정 마." 류미르는 그렇게 친절하게 격려까지 해주며 나에게 강요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베낭 깊숙이 넣어 두었던 마법책을 꺼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르기 때문에 마법책을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그 책에서 '패시즈' 마법을 찾아 그 페이지를 펴들었다. "'패시즈' - 타인에게 내가 알고 있는 언어와 글을 전수해 주는 마법. 처음 익힐 때는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전해 주지만 익숙해 지면 원하는 지식 부분만 전해줄 수 있음. 이런, 어쩌지? 만약 내가 소브로에게 이 마법을 건다면 저녀석 용언은 물론 고대 문자까지 알게 된다는 소리잖아? 그러면 안돼는데..." 내가 그 부분을 읽고는 난색을 표하며 류미르를 바라보자 류미르는 세이몬을 돌아보았다. "넌 어때, 세이몬. 너도 마력이 강하니까 이 마법을 쓸 수 있겠지? 그럼 네가 해주지 않겠어?" 그러자 세이몬은 순진한 얼굴로 싱긋 웃으며 대답 했다. "뭐, 그거야 어렵지는 않지만... 난 인간의 글은 모르는데? 그래도 되는 거야?"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당연히 안돼지..." 류미르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용언이랑 고대문자 좀 알면 안돼나? 정 안돼면 나중에 소브로의 기억을 지우면 돼잖아. 안될까?" 그러나 나는 고개를 설래 설래 저었다. "안돼. 용언이 어떤 언어인지 몰라서 그래? 그건 약속의 언어라고, 잘못 말하다간 소브로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거야. 게다가 다시 기억을 지운다고 해도 내가 한번도 써 보지 못한 마법이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다간 그의 기억이 엉망이 될 수도 있단 말야. 그런 위험을 감수 하느니 차라리 내년에 입학하는게 100배는 나아." 그러자 그때 세이몬이 나섰다. "그럼 글을 가르치면 되잖아. 아직 10일이나 남았는데 그 동안 가르치면 안될까?" "바보야, 어떻게 10일동안 글을 가르치냐? 이게 뭐 쉬운 건줄 알아?" 류미르는 세이몬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뭐? 어떻게?" 류미르는 '너까지도 그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법을 사용하는 거야. 왜 기억력을 높이는 마법이 있잖아. 그거하고 두뇌 세포를 활성화 시키는 마법을 적당히 섞어서 시전하고 집중적으로 가르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건 3서클의 마법들이니까 류미르 너하고 나하고 번갈아 가면서 계속 걸어주는거야. 어때?" 그러나 류미르는 부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될까?" "어때? 해보는 거야. 정 안되면 그만이지 뭐. 그리고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고 해도 테스트는 받아보게 해야지. 혹시 알아? 그나마 소브로가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나올지?" "만약 그러다가 그 상태로 입학하면?" "그럼 입학하고 스스로 익혀야지. 그런 것 까지 우리가 일일이 챙겨줄 수는 없는거잖아. 뭐, 그러다가 퇴학 당하더라도 다시 입학하면 되는 거니까..." 류미르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참내, 정말 낙천적이라니까..." "어때? 해보자고. 그리고 이왕 가르키는 거 세이몬도 같이 가르키는 거야. 좋지?" 내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세이몬까지 거들먹 거리자 세이몬은 거기서 자신이 껴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인지 볼이 부어올랐지만 류미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보자고" 번 호 : 14151 / 14164 등록일 : 2000년 11월 12일 21:44 등록자 : LODEMP 조 회 : 27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2화 소브로 입학 시기키 (4) 우리는 소브로가 깨어나기 전에 그와 세이몬을 10일 내에 글을 다 익히게 할 자료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우선은 제일 먼저 여관을 나와 소브로와 세이몬을 가르칠 책들을 구했다. 역시 한 나라의 수도라서 그런지 우리는 쉽게 큰 서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곳에서 우리는 서점 점원의 도움을 받아 10흘 동안 류미르와 나의 제자가 될 이들이 읽을 책들을 구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잡화상에 들어가 그들이 사용할 공책과 펜들을 구하였다. 그리고 나서 여관으로 돌아오자 거의 저녁때가 다 된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그때까지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소브로를 깨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우리들은 세이몬과 소브로를 여관방에 있는 자그마한 책상 앞에 앉혀놓고 그들 앞에 그들이 읽어야 할 책들을 쌓아 놓았다. 그 책의 용도를 알고 있는 세이몬은 우울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영문을 모르는 소브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책들을 바라보다 옆에 서 있는 류미르와 나를 올려다 보았다.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책이지." 류미르는 소브로의 질문에 정말 자랑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 대답이 소브로의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책인건 저도 알아요..." 소브로가 못마땅 하다는 듯 대답하자 그제야 류미르는 빙그레 웃으며 어른이 사랑스런 아이를 바라보는 눈길로 부드럽게 말해 주었다. "이건 네가 레스틴 글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줄 책이야. 네가 기사 양성 학교에 입학 할 수 있도록 말이지..." 그러나 소브로의 인상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입학 원서 마감일은 이제 겨우 10일 남았는걸요. 게다가 그 하루는 벌써 다 지났고요. 그런데 그동안 어떻게 글을 익혀요?" "가능성이 있으니까 시도하려는 거야. 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몰라." 류미르는 딱 잘라 말한 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먼저 할까?" "그래. 난 나중에 할께." "좋아." 류미르는 끄덕이면서 세이몬과 소브로의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간 뒤 그 둘의 머리에 한 손씩 얹어 놓았다. 그리고 눈을 스르르 감고 작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주문을 외우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서 큰 소리로 시동어를 외쳤다. "브레인 브리스크 (brain brisk) !!" 그러자 류미르의 양 손에서 하얀 빛이 나오더니 그의 손을 완전히 다 감싸자 세이몬과 소브로의 머리를 천천히 감싸가다 점점 빛이 히미해 지면서 그 둘의 머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류미르는 여전히 손을 그들의 머리 위에서 떼지 않은 채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메모리 브리스크 (memory brisk) !!" 다시 한번 류미르의 손에서 빛이 나와 그들의 머리를 감싸더니 또 다시 그들의 머리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자, 됐어. 그럼 이제부터 공부를 시작할까?" 그 뒤부터 나와 류미르의 혹독한 가르침이 시작 되었다. 류미르와 나는 거의 스파르타 식으로 타이트하게 그 둘을 다그쳤으며 식사시간과 용변을 보기 위한 틈틈히 주는 짬을 제외 하고는 하루 왼종일 그들을 책상 앞에 앉혀놓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에 잠자는 시간도 5 시간 이상을 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지칠 틈조차도 없었다. 왜냐하면 류미르와 내가 그들에게 두뇌 활성화 마법과 기억력 활성화 마법 외에 회복 마법까지 덤으로 걸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열렬한 노력에 힘입어 소브로와 세이몬은 2틀만에 "기초, 아주 쉬운 글읽기" 책을 떼었고 그 뒤에 3일 동안 그와 비슷한 책 2권을 더 떼었다. 그러자 소브로도 힘을 얻었는지 더욱 더 열심히 했고 1주일이 지난 뒤에는 어려운 단어가 없는 쉬운 소설책이나 전문 용어가 섞이지 않은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은 떠듬 떠듬이지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그의 놀라운 발전에 류미르와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좋았어. 이대로 가면 입학할 수 있겠어." ------------------------------------------------------- 역시 오늘도 짧군요 ㅠ.ㅠ 번 호 : 14071 / 14087 등록일 : 2000년 11월 13일 22:40 등록자 : LODEMP 조 회 : 38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2화 소브로 입학 시키기 (5) 원서 마감 마지막날... 우리는 잔뜩 긴장이 된 상태로 기사양성학교로 향했다. 마지막날이라서 그런지 처음 원서를 내러 갔을 때와는 반대로 무척이나 한산했다. 덕분에 우리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소브로는 긴장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있는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소브로를 보자마자 역시 어떤 문장이 씌여 있는 카드를 내밀었다. 그 곳에는 '기사는 목숨을 다 하여 군주께 충성하고 레이디를 존중한다.' 라고 씌여 있었다. 류미르와 나, 세이몬은 그 종이 카드를 뚤어져라 쳐다보는 소브로를 긴장된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브로는 그 카드를 조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사는, 모...ㄱ숨을..." 그때 '헉' 하는 억눌린 심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류미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손이 핏기가 다 사라진 줄도 모르고 양손을 꽉 잡은 채로 긴장하고 있다가 소브로가 살짝 더듬을때 놀래 신음성을 터트린 것이었다. 그래도 좀 더듬긴 했어도 무사히 지나가자 그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된 얼굴로 소브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브로 얼굴 뚫리겠다...' 나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다시 소브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제 문장의 중간을 막 읽고 있었다. "군주께, 충, 충성하고... 레이디께, 가 아니라 를...." 이제 마지막 단어. "존중한다.." 소브로가 마지막 발음을 끝내자 류미르는 체면도 잊어버리고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나와 세이몬은 창피해서 그의 곁에서 슬쩍 떨어지며 모르는 사람인 양 고개를 돌렸지만 그런 우리의 시도도 류미르의 행동에 의해서 무산되어 버렸다. 그가 슬쩍 멀어지는 우리 둘을 얼싸 앉으며 방방 뛰었던 것이다. "우와아아~~ 소브로가 읽었어. 소브로가 읽었다구. 우와아아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진정해. 응? 류미르으으~~ 진정하라니까?" 내가 류미르를 꽉 붙잡고 눌러도 류미르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내가 누르는 힘을 밀쳐 올리고는 계속 나를 붙들고 흔들어 대었다. 결국 보다못한 세이몬이 류미르의 등짝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처얼썩~! "앗따거!!" 불시에 한대 얻어맞은 류미르는 등을 부여잡고 펄쩍 뛰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느끼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우리 곁에 와서 섰다. 그러나 그것으로 소브로가 원서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는 그런 일(?)을 많이 겪었는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류미르가 진정이 되자 소브로를 보고 책상 옆에 얌전히 놓여 있던 쌀 한 가마를 가르켰다. "들어보렴." 그러자 소브로는 걱정스런 눈으로 그 쌀 가마를 바라보더니 쭈볏 쭈볏 하면서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쌀 가마를 움켜 쥐더니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을 들어올리려고 힘을 썼다. 쌀 가마는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더니 소브로의 무릎 까지 올라 왔을 때 소브로의 손이 부들 부들 떨림에 따라 심하게 흔들렸다. 게다가 소브로의 얼굴이 새빨개지는데 자칫 잘못 하다간 쌀 가마를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해, 어떻게해..." 그 모습을 보는 류미르는 자신의 손가락 2개를 입 속에 집어 넣고 질겅 질겅 씹으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다 소브로가 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쌀 가마로 쏠린 틈을 타서 조용히 실프를 불러내었다. "실프, 미안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소브로좀 도와줄 수 있겠어? 살짝 저 쌀 가마 좀 들어줘." 실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르르 허공에서 사라졌다. 나는 시침 뚝 떼고 다시 세이몬과 류미르의 곁으로 가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브로의 모습은 참으로 가여워 보였다. 그의 팔은 이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으며 척 보기에도 그의 손가락에 힘이 없는게 곧 그의 손에서 쌀 가마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가 들고있던 쌀 가마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 올라간다!" 세이몬은 소브로가 천천히 쌀 가마를 들어 올리자 좋아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류미르의 얼굴에 감돌던 긴장감이 어디론가 사라지면서 그의 표정이 냉랭하게 변했다. 그때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말했다. "좋아. 이제 내려놔." 테스트에 통과 된 것이었다. 소브로는 쌀 가마를 거의 노치다 시피 내려 놓고는 부들부들 떠는 팔을 주무르며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중년 남자는 소브로 앞에 원서와 펜을 내밀며 말했다. "자, 이것을 작성하렴." 출생지와 나이, 생일, 이름 등등을 다 적자 중년 남자는 소브로가 작성한 원서를 갈무리 하면서 다른 종이를 그에게 내주었다. "자, 이것은 꼭 읽어보고 여기에 적힌 대로 하거라. 그리고 네 번호를 잊지 말고." 소브로는 그가 내미는 종이를 소중히 품에 간직하고는 몇번이고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 하고는 건물을 나왔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류미르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와 세이몬은 눈치채고 있었고 잘못한 것이 있는 나는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고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류미르는 나를 끌고 방으로 왔다. 그리고 방 문을 잠그고는 나를 노려봤다. "너지?"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천장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뭐가?" "시치미 떼지 마. 네가 정령을 불러내어 쌀 가마를 들게 했잖아? 안그래? 우리 셋 중 정령과 계약을 한 자는 나와 너 뿐이야. 그런데 난 정령을 불러내지 않았는데 정령이 나타났어. 그럼 뻔한거 아냐?" 나는 결국 부인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 어때? 조금 도와준 걸 가지고...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 "그게 어떻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소브로는 자신의 힘으로 입학을 한 게 아니잖아?" "소브로는 자신의 힘으로 한 거야. 나는 조금 도와줬을 뿐이고. 그 정도를 가지고 뭘 그러는 거야?" "이건 부정 입학이야." 류미르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나도 그에게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세이몬이었다. "뭐야? 너히들, 둘이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문 안 열어?" 나는 타임을 정말 잘 맞춘 세이몬에게 속으로 축복이 내리길 기원하면서 재빨리 문을 열었다. 문 뒤에는 세이몬과 소브로가 서 있었다. "뭐 한거야, 둘이?" "아냐, 아무것도. 그나저나 소브로, 아까 그 종이에 뭐라고 써 있어?" 내가 재빨리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얼버무린 뒤에 소브로를 쳐다보며 말을 돌리자 소브로는 얼결에 나에게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넘겨 줬다. "일주일 뒤에 학교로 집합 하래요. 2주간 훈련을 받은 뒤에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정식으로 입학을 한다는 군요. 그거에 대한 설명과 준비물이 적혀 있어요." "그래? 그러면 준비해야 겠구나? 점심 먹고 당장 나가자." 나는 세이몬과 소브로를 이끌고 재빨리 식당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뒤에 류미르가 한숨을 내 쉬며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따라 내려왔다. 번 호 : 14103 / 14108 등록일 : 2000년 11월 14일 21:33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2화 소브로 입학 시키기 (6) 그 뒤 류미르는 일주일 내내 별로 탐탁치 못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브로가 너무 기뻐하며 돌아다니자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괜찮을 거야. 그리고 아직 테스트가 끝난 건 아니잖아. 소브로가 아직 실력이 안되는지는 그 테스트가 가려줄 꺼야." 내가 그렇게 그에게 말하자 그는 마땅치 않지만 이제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고... 소브로는 준비물을 다 챙기고서는 기쁨과 긴장이 뒤섞인 얼굴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우리는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교문 앞에는 우리 말고도 학교를 향해 마지막 테스트를 받으러 가는 소년, 소녀들을 배웅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제 저 많은 아이들 중에서 겨우 300명이라는 아이들만 정식으로 입학 허가를 받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교문이 굳게 닫히자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는 일 없이 초초하게 시간을 보냈다. 2 주가 지나기 전에 소브로가 여관으로 돌아 온다면 그는 떨어진 것이고 그 후에 돌아 온다면 그는 입학하는 것이다. 하루 하루가 초조하게 지나 가는 가운데 드디어 1주일이 흘렀다. 우리는 절반이 지났으니 그가 입학 할 확률이 높아지는 거라고 기뻐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 다음날 소브로는 시무룩한 얼굴로 우리가 머물고 있는 여관으로 털레 털레 걸어들어왔다. 그런 그를 향해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는 우리를 향해 그는 씨익 웃어보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저를 위해 그렇게 힘써 주셨는데 입학하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그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급기야는 뺨을타고 흘러 내렸다. "어? 아하하...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는 얼른 소매로 눈가를 가렸지만 눈가를 가린 그의 손은 다시 밑으로 내려올 생각을 안했다. 보다 못한 류미르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주자 소브로는 그에게 매달려 엉엉 울었다. 한동안 울던 그는 나중에는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방을 나와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제 어쩌지?" 류미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방이 있는 위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말야... 다음 입학할 때는 내년 봄이지? 그렇다면 아직 몇개월이나 남았는데...." 세이몬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2주 전에 소브로의 테스트를 도와준 것이 잘한 일인지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에휴, 류미르 네 말대로 그때 도와준 게 잘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자조적인 말에 류미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나를 위로하려는 듯 부드러웠다. "그때 떨어지나 지금 떨어지나 마찬가지인데 뭐. 그래도 그나마 네가 도와줘서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을 거야. 아마 다시 도전하려고 할껄?" 그때 세이몬이 불쑥 끼어들었다. "뭘 도와줘? 야, 너희들끼리만 뭐 한거야?" "아냐, 전에 소브로가 쌀 가마 들때 내가 정령을 불러내서 돕게 했거든... 그걸 류미르에게 들켰지." "아, 그거? 그거 아린이 그런 거였어?" 세이몬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류미르와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 알고 있었어?" 류미르의 놀란 외침에 세이몬은 잘난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연하지. 그때 정령의 느낌이 들어서 난 너희들이 몰래 그녀석을 돕고 있다고 생각 했거든? 나만 쏙 빼놓고 있어서 언젠가는 꼬투리 잡으려고 했었는데..." "이야아~, 세이몬도 무시할 수 없겠는걸?" 류미르의 장난 섞인 과장스런 감탄에 세이몬이 발끈 했다. "뭐야? 아니 그럼 지금까지 날 무시했단 말야?" 그러자 류미르는 더욱 더 익살맞은 표정으로 응수했다. "와우, 이젠 그런 것 까지 눈치채다니..." "야, 너어~" 세이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나는 머리가 지끈 지끈한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둘 다 그만해. 여긴 식당이라구... 밥 안 먹을거야? 원한다면 굶겨 주겠어." 그제야 조용해진 그 둘을 바라보며 난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 어쩌지? 우리가 다음 입학이 있을 때까지 데리고 있어야 하나?" "글쎄... 하지만 그러면 봄에 다시 여기로 와야 하잖아? 사정이 어떻게 될진 모르는데 말야." 세이몬의 걱정스런 말에 의외로 류미르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 녀석이 결정할 일이야.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충분하고도 남아." "헤에,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의외인걸?" 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류미르는 담담한 얼굴로 나를 마주볼 뿐이었다. "아린 네가 그랬잖아. 자신의 인생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고..."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다면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소브로가 말할 때 까지 기다려 보자고." 소브로는 그날 하루종일 잠을 잤고 그 다음 날 아침 퉁퉁 분 얼굴로 부스스 일어났다. 그런 그를 우리는 애써 평소같은 얼굴로 맞았다. "잘 잤냐?" "엄청나게 자더군..." "배도 안 고프냐?" 소브로는 우리의 얼굴을 보고 헤헤 웃더니 식탁의 남은 자리에 와서 앉았다. "저... 할말이 있어요." 그가 앉자마자 진지한 얼굴로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드디어 그가 결심을 말하는 구나 하고 긴장어린 눈으로 그만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도와 주신 거 정말 감사드려요. 그에 대한 보답은 나중에 꼭 갚아 드릴께요." "어째 작별인사 하는 것 같다?" 그의 얼굴을 보며 세이몬이 중얼 거리자 소브로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예. 언제 까지고 여러분께 신세 질 수 없잖아요. 전 여기 남아서 내년 봄에 다시 입학 시험을 보려고 해요. 그런데 여러분께선 여기에 계속 계실 수는 없잖아요." "남아 있겠다는 말이구나?" 류미르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 보았다. "예,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 시험에는 꼭 합격할 거예요." "그래, 잘 해봐라. 하지만 작별 인사는 좀 이르구나. 우리는 아마도 며칠 더 이곳에서 머물게 될 거 같다. 네 일 때문에 우리 일은 하나도 못 했거든? 며칠 같이 있으면서 너도 뭘 할지 생각해 두렴." 나도 소브로에게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소브로의 얼굴이 환해졌다. "예. 알겠습니다." ┌───────────────────────────────────┐ │ ▶ 번 호 : 14117/14133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1월 15일 21:49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 │ └───────────────────────────────────┘ 제 23 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레스틴 왕국의 제 13대 여왕은 레스틴 왕국의 역사상 현왕이라 불린 왕 중의 한명이다. 그녀는 27세라는 나이에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전 왕의 5번째 딸이였으며 그의 11번째 자식이었다. 그래서 왕위 계승 서열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왕권 다툼에 참여하지 않고 일찌감치 성을 빠져 나와 모험가로써 온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그러한 여행은 그녀에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일찌감치 성을 빠져나온 덕에 그녀는 왕위 다툼에서 무사할 수 있었으며 이 여행에서 그녀의 남편이자 나중에는 레스틴 왕궁 궁정 마법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와 함께 그와 가장 절친한 드워프까지 만날 수 있었으니 그녀에게는 정말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그녀가 왕궁으로 돌아가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왕위 계승자로써 여왕이 되었을 때 그녀의 친구 드워프가 왕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선물한 것이 바로 이 목걸이다. 이것은 여성의 아름다운 가슴 곡선에 딱 맞게 만들어진 것으로 안쪽으로 살짝 휘어 들어간 V 자 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자그만치 백원짜리 동전만한 크기의 다이아가 박혀 있으며 그 주위를 아기의 새끼 손톱만한 크기의 자잘한 다이아들이 실 같이 가느다란 백금 사슬로 엮여 굵은 V자 형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와 중앙에 박힌 커다란 다이아 둘레에는 엄지손톱만한 다이아들이 띄엄 띄엄 박혀 있어 어찌보면 별자리 모양을 본 뜬 것 같고 또 어찌보면 덩굴의 우아한 곡선을 표현한 것 같이도 보인다. 모든것을 가느다란 백금 선으로 연결된 다이아로 만들어졌으되 단조롭지 않고 우아하며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이 목걸이는 여왕이 죽을 때 자신의 첫 딸에게 물려 주었으며 그녀 또한 자신이 죽을 때 딸에게 물려 주었다고 한다. "여기까지야." 나는 책을 소리나게 탁 덮으며 말을 맺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전부야." "흠, 그럼 그 목걸이는 계속해서 딸들에게 물려 내려왔겠군?"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있던 세이몬이 물어왔다. "그렇겠지. 그런데 지금은 누가 가지고 있는 거야?" 류미르가 세이몬의 뒤를 이어 묻자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몰라." "에?" 나는 황당해서 눈이 뚱그래져 있는 그들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그걸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어떻게?" 여전히 황당함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한 표정의 세이몬이 묻자 나는 그를 힐끔 바라보며 간단히 말했다. "잘." "장난하냐?" 류미르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그제야 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도둑길드를 이용하려고 해. 아무리 기사도의 나라라 해도 도둑은 있을거고, 그렇다면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도 바로 거기겠지. 문제는 어떻게 길드원을 찾아 내느냐 하는건데 말야..."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세이몬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왜, 왜 그래?" 세이몬은 겁이 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한시간 뒤.... "이게 뭐야아아아~~" 세이몬은 울상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현재 중앙에 루비가 박혀있고 그 위로 보라색 깃털을 세워 장식한 낮은 원기둥 모양의 납작한 비단 모자를 쓰고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보라색 비단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자그마한 금판으로 이어 만들고 중앙에는 커다란 오팔이 달려있는 금 목걸이를 걸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온갓 색색의 자잘한 보석으로 장식한 검집과 화려한 금세공이 멋드러지게 새겨진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그 검은 실용성이라곤 눈꼼만치도 보이지 않았고 장식용으로 차고 다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발에는 앞이 뾰죽이 나온 빨간 비단신을 신고 있었고 그의 다리에는 새하얀 비단 스타킹이 신겨져 있었다. "자, 어때? 돈만 많은 멍청한 촌뜨기 같지 않아?" 나는 세이몬의 차림새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쭉 훝어 보았다. 그리고 내 옆에서는 류미르가 웃음을 참느라고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바람에 아쉽게도 그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 차림으로 시장을 한 바퀴 도는 거야. 그러면 널 맛있는 먹이감으로 안 소매치기 녀석들이 네 든든한 주머니를 노리기 보다는 널 한적한 곳으로 유인할 꺼야. 네 주머니와 온 몸에 걸치고 있는 돈덩어리들을 얻으려고 말야. 그럼 넌 그에 친절하게 응해주기만 하면 돼. 그 뒤에는 나와 류미르가 나서줄 테니까." ======================================================== 아린 이야기가 담 주에 책으로 나옵니다. 기분이 정말 묘한데요. 기쁘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고... ^^;; 그래서 1권 분량을 담주 월요일날 지우려고 합니다. '제 9화 아린 찜 당하다' 까지 입니다. 제 글을 퍼 가시는 분들도 담주에는 지워주세요. ^^ 번 호 : 14190 / 14207 등록일 : 2000년 11월 17일 21:45 등록자 : LODEMP 조 회 : 19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2) 안녕하세요? 한가지 더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제 책이 1권이 나온다음 얼마 후에 2권이 바로 나온답니다. 그래서 2권 분량도 다음 주에 지워야 할 것 같군요. 2권 분량은 '제 17화 류미르 찜 당하다' 까지 입니다. 2권 분량은 다음 주 수요일에 지울 예정입니다. 퍼 가시는 분들도 그렇게 해 주세요. ^^ =================================================================== 30분 뒤... 류미르와 나는 절대로 여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세이몬을 열심히 꾀고, 달래고 아양떨고 추켜주고, 아부해서 겨우 겨우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식당으로 내려가자 마자 그에게 쏠리는 시선들과 그 뒤에 들려오는 낮게 킥킥 거리는 소리, 또는 아예 드러내 놓고 크게 웃어 젓히는 소리에 세이몬은 또 다시 울상인 얼굴로 방 안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덕분에 류미르는 세이몬에게 "너는 나 같은 것 보다 100배는 더 나아. 네가 더 훌륭해. 나는 네 발끝에도 못 미쳐." 같은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떨어야 했고, 나는 앞으로 1달 동안 세이몬이 원하는 음식은 언제 어느때라도 얼마든지 사 주기로 약속을 했고 그가 물건 사는 것에 대한 제제 20개의 조항 중 3개를 없애 줘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관 밖으로 나간 뒤에도 계속 되었다. 류미르와 나는 그와 떨어져서 몰래 그의 뒤를 따라가며 주위를 살펴야 했는데 그가 길거리로 나오자 마자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그는 무조건 여관 쪽으로 튀려고 했기에 우리는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류미르와 나는 그의 부하인 척 행동하기로 했다. 류미르와 내 사이에 세이몬을 두고 우리는 천천히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시장쪽으로 간 이유는 소매치기나 강도 같은 도둑 길드에 소속된 사람들이 시장에 있을 확률이 더 클 것이라는 생각에 우리 모두가 동감했기 때문이었다. 시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 갈 수록 사람들과 길 거리에 서 있는 노점상들이 점점 많아졌고 그것고 비례하여 우리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세이몬은 이제 얼굴이 빨갛게 익은 토마토처럼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촌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우스꽝 스럽게 꾸미긴 했지만 이렇게 그가 싫어할 줄 알았으면 모자를 챙이 넓고 큰 걸로 사서 그의 얼굴을 가릴 수 있게 해주는 거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때 타닥타닥 하고 뒤에서 누군가가 뛰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일부러 모른 척 하고 뒤돌아 보지도 않은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런 우리들의 넓지도 않은 사이를 두명의 남자가 세게 부딧혀 강제로 넓히며 통과했다. 그러고서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리를 돌아보면서 히쭉 웃어보이고는 계속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저만치 달려 가면서 한 손을 들어 휘저어 보였는데 그들 중 한명의 손에는 세이몬이 쓰고 있던 모자가 들려 있었고 나머지 다른 한 명의 손에는 소브로가 차고 있던 화려한 검이 들려 햇빛에 그의 깨끗하고 흠집 하나 없는 검날을 반짝이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우리를 놀리는 것 처럼 그 것들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천천히 군중들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그들이 막 사라지고 있는 쪽으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질 듯 말듯 하면서 뛰어가는 모습을 게속 따라갔다. 얼마쯤 뛰어 가자 그들이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을 따라 그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골목은 여기 저기에 오물들이 버려져 있어 지저분 했고 좋지 않은 냄새도 났으며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곳인 듯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한가롭게 쓰레기 더미 위를 뛰어 놀고 있었던 듯한 쥐 몇마리가 놀라서 후다닥 달아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마치 앞에는 아까 우리를 밀치고 지나 갔던 두 명의 남자들이 세이몬의 모자와 검을 흔들어 보이면서 서 있었다. 우리가 달리는 것을 멈추고 그들 쪽을 천천히 다가가자 뒤 쪽에서 여러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 지면서 십여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히죽 히죽 웃으면서 긴장한 채로 걸음을 멈춘 우리들을 빙 둘러쌌다. 그들 중 한명이 노골적으로 세이몬을 손가락질 하면서 비웃어댔다. "낄낄낄, 저 녀석 꼬라지좀 보라지. 어디서 굴러 먹던 촌뜨기가 처음으로 도시 구경을 하느라고 멋을 부렸나 본데?" 그의 말에 모두 미리 짜 놓기라도 한듯 크게 웃어 제쳤다. 그리고 처음에 입을 열었던 그 녀석이 허리에 맨 무척 낡은 가죽 허리띠에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척 하니 걸고서는 거들먹 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주위를 한 바퀴 천천히 돌면서 아래 위로 훝어 보더니 이죽 거렸다. "이것보게나? 모두 다 고급이잖아? 꼴에 검집까지 차고? 야, 그런데 검은 어디로 갔냐? 검이 너무 무거워서 폼으로 검집만 차고 나왔냐?" 그리고는 다시 우리의 코 앞에 서더니 히죽 웃어보였다. "그래 그래, 이렇게 고급 옷들만 입고 나타난 걸 보면 무지 부자인 가보지? 그렇다면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 들에게 조금 나눠줘도 괜찮을 거야. 안 그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세이몬의 가슴 부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커다란 오팔 쪽으로 손을 내밀어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의 턱 바로 밑에서 내 레이피어의 끝이 반짝이며 조금만 더 다가오면 찔러 버리겠다는 듯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아까 그가 했던 것 처럼 히죽 웃어 보였다. "어따가 손을 대? 이래뵈도 이건 내가 고르고 골라낸 목걸이란 말야." 사실이었다. 이 목걸이를 찾기 위해 난 여관의 우리 바닥 위에 내 마법 주머니를 거꾸로 해서 그 속에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나오게 한 뒤에 맘에 드는 목걸이를 찾아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허비하며 뒤적거렸던 것이다. 물론 만약 이 목걸이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시장에 나가 맘에 드는 걸 찾기 위해 몇 시간이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녀석은 자신의 목젖 바로 앞에까지 닿아 있는 검을 힐끗 내려다 보더니 나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세이몬의 가슴까지 올라 가 있는 그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싱긋 웃으며 약간 방심해 버렸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에 움찔하며 다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그 녀석이 언제 꺼내 들었는지 손에 단검을 쥐고는 번개같이 내 레이피어를 쳐내며 그 순간 내가 당황하는 틈을 타 내 쪽으로 파고 들어 내 목에 단검의 끝을 드리대었다. 그리고는 승리에 찬 웃음을 지으며 이죽댔다. "피부가 아주 고운데? 여기에 상처가 나기라도 한 다면 너무 아까울 거야. 얼굴도 이렇게 예쁜데..." 나는 순간 방심한 탓에 이런 상황에까지 가게 한 내 자신에게 무지 화가 났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여유 만만하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자 나에게 단검을 드리대고 있는 녀석이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왜 그렇게 웃는 거지?" 나는 그에게 여전히 웃어 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뒤를 보면 알아." 번 호 : 14264 / 14288 등록일 : 2000년 11월 18일 22:41 등록자 : LODEMP 조 회 : 31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3) 그는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 봤지만 왜 내가 그렇게 여유 만만한지에 대한 호기심이 동했는지 천천히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순간적으로 경직 되었고 나는 그 틈을 노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가 나에게 드리 댄 단검의 끝에서 멀어지는 동시에 재빨리 땅에 떨어진 레이피어쪽으로 달려가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가 아차 하면서 뒤를 돌아볼 때 다시 그의 목에 검을 드리댈 수 있었다. 그는 "쳇" 하고 혀를 차며 자기가 알아서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놀랍다는 표정으로 류미르가 불러 낸 중령급의 바람의 정령들에게 붙들려 허공에서 1 미터는 떠 올라 공중에서 허부적 대고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허탈한 눈으로 바라 봤다. 한쪽 구석에서는 세이몬이 재빨리 자신이 걸치고 있던 보라색 비단 망토와 신고 있던 빨간 비단 신발, 그리고 하얀 비단 스타킹을 벗어 버리고 챙겨 온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는 다 갈아입자 자신의 옷을 챙겨 온 가방에 벗어 놓은 옷들을 쑤셔 넣고 이제야 살았다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자 류미르가 낄낄 거렸다. "그렇게 끔찍했냐?" 그러자 세이몬이 아주 명쾌하게 대답했다. "네가 한번 입어봐." "사양할래." 류미르는 부드럽게 거절하며 내가 잡고 있는 녀석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 녀석은 약간은 긴장된 눈으로 우리를 둘러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자신 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흥, 꽤 실력이 있는 것 같지만 날 어쩌려는 생각은 안 하는게 좋을거야. 날 건들면 내 동료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걸?" 나는 류미르가 또다사 불러 낸 정령에게 그 녀석의 속박을 맡기고 내 검은 집어 넣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나 대신 류미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너 도둑 길드원이냐?" 류미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 녀석은 우리가 겁 먹은 줄 알았는지 눈빛이 살아나면서 의기양양 해졌다. "그렇다." "너희 길드장을 만나고 싶은데? 정보를 얻고 싶은게 있어서 말야." 그러나 그 녀석은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 대장이 아무나 만나고 싶으면 다 만날 수 있는 줄 알아?" 그러자 류미르의 눈빛이 날카로워 졌다. "난 꼭 만나야 하거든?" 류미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 녀석을 붙잡고 있던 정령의 속박이 사라졌다. 그러자 그 녀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살펴 보다가 다시 우리를 바라 보았다. 그런 그에게 류미르가 다시 말했다. "가서 우리가 만나고 싶다고 전해주길 바래. 그리고 그 대답을 가지고 다시 여기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단, 1시간만 기다려 주겠어. 그 동안 네가 보이지 않으면 여기 있는 녀석들은 다시는 걷지 못하게 될거야." 그러나 그 녀석은 류미르의 말에도 머뭇 거리며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류미르가 한번 더 말했다. "안 갈꺼야? 그럼 다른 사람 보낼까?" 그제야 그는 쭈볏쭈볏 하며 뒷걸음 치더니 그의 뒤쪽에 있던 작은 골목에 가까이 가자 잽싸게 그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세이몬이 불만스런 얼굴로 류미르를 돌아 보았다. "류미르, 한시간이 뭐냐? 한시간이... 너무 길잖아. 그냥 30분 정도만 주지..." 그러자 류미르는 자신 만만한 얼굴로 씨익 웃어 보였다. "점심 먹어야지..." 그러나 그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제야 류미르는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하하하, 좀 지저분하구나. 그렇지?" "뭐야? 이젠 뭐하면서 시간을 때워?" 세이몬은 점심 먹자는 말에 얼굴이 펴지다가 다시 구겨져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딴 데로 오라고 할걸 그랬네..." 류미르가 약간 풀이 죽은 어조로 말했다. "뭘, 그것도 어렵지. 이 녀석들을 어떻게 데리고 가냐? 그냥 여기서 기다려야지..." 나는 류미르에게 위로 비슷한 어조로 말하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한시간을 기다리려니 벌써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한 20여분이 지나자 류미르가 놔줬던 녀석이 다른 사람 한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는 우리를 털려고 했던 건달 녀석들과는 달랐다. 우선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고 눈빛이 무척 차고 날카로워 보였다. 그런데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무기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 우리가 모르는 곳에 무기를 숨겨 놨든가 아니면 무기가 없어도 자신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던가 아니면 우리와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옆에 있는 우리가 놔줬던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이고 기가 죽어있는 채였고 우리가 잡고 있던 녀석들도 그를 보자마자 모두 기가 팍 죽어버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무기가 없어도 자신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제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고 그가 온 이상 우리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들떴다. 하지만 침착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그를 마주 보았다. 우리 앞으로 다가온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조심스러운, 그러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아래 위로 훝어 보았다. 그러더니 굵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보를 사고 싶다고?"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자 류미르가 나섰다. "당신이 길드장입니까?" 그러자 그의 입 한쪽 끝이 올라가면서 그의 눈이 가늘어 졌다. 마치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니다." 그러나 류미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덤덤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단지 정보를 팔 사람입니까?" "그렇다고 해두지." 류미르는 그가 긍정을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과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별로 중요한 정보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러자 그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중요한 정보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결정한다." 그러나 류미르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런가요? 그럼 당신들이 결정 하시길..." "어떤 정보를 원하지?"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 ▶ 번 호 : 14091/14163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1월 20일 21:53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4) │ └───────────────────────────────────┘ 그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찰나였기에 나도 그가 정말로 잠깐이라도 황당해 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좋아. 이틀 후 아침에 찾아 가겠다." 그는 잠시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지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더니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한 후 그는 우리 주위에서 아직도 정령들에게 붙들려 공중에 동동 떠 있는 그의 부하라고 생각되는 건달들을 턱짓으로 가르켜 보였다. 그런 그의 턱짓을 본 류미르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중으로 손을 살짝 휘저어 보이며 말했다. "풀어줘." 그러자 그 즉시 공중에 떠 있던 건달들은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는 단 한마디만 남기고 뒤를 돌아 가버렸다. "그럼." 땅에 부딧힌 엉덩이들을 쓰다듬고 있던 건달들은 그가 뒤를 돌아 가버리자 허겁지겁 일어나서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가면서 우리를 향해 눈을 한번씩 부라려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가 여관으로 돌아와 정확히 2틀이 지난 아침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여러명이 식당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옵쇼~!" 곧 이어 주인의 명쾌한 반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흔히 있는 일이어서 고개도 돌려보지 않은 채 계속 식사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당 문에서 부터 들려오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계속 이어지더니 우리의 곁에 이르자 딱 멈추는 것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우리는 우리 곁에 선 사람이 이틀 전에 만나 이야기를 했던 그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그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건달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할까, 방으로 올라갈까?" 그의 말에 우리는 아쉬운 눈빛을 식탁위로 돌렸다. 거기에는 아직 반밖에 먹지 못한 베이컨과 빵이 남아 있었고 뒤에 올 후식도 우리에게 먹여지길 무척 바라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찾아 온 손님들을 기다리게 하고 남은 음식을 마주 먹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간절한 눈빛을 류미르에게 보냈다.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세이몬도 아직도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서 떼어 놓지 않은 채 나와 같은 눈빛을 류미르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류미르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 솟아 오르더니 나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왔다. 네가 물주이지 않냐는 시선이었다. 그러자 세이몬이 부드러운 시선을 류미르와 나에게 번갈아 가며 보내더니 자신은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너희 둘이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아침 식사를 중단 하는 것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류미르를 힐끗 바라보았다. 일어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류미르는 냉정하게 내 시선을 외면하더니 그도 다시 식사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너 혼자로 충분한데 뭐하러 나까지 끌고 가려고 하냐 란 뜻이었다. 그의 말이 맞기에 나는 슬프게 마지막 말 한 마디만 하고 방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남겨놔라..." 내 방으로 올라와서 나는 그와 마주 앉았다. 그는 내가 권한 의자에 앉자 마자 나에게 얇은 종이 뭉치를 꺼내 보였다. "정보다." "얼마 입니까?" "금화 3개." "먼저 볼수 있을까요?"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나에게 그 종이 뭉치를 건네 줬다. 거기에는 지금 현재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간단한 신상 명세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종이들을 쓱 훝어본 나는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충분하군요. 좋습니다." 마법의 주머니에서 금화 3개를 꺼내에 그에게 던지자 그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품속에 넣더니 잠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덤으로 한 가지를 더 가르쳐 주지. 지금 현재 목걸이를 소유하고 있는 그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한 사이였다는군. 지금의 남편과는 거의 정략결혼을 한 셈이지." 그의 말에 나는 호기심이 동했다. "그렇다면 전에 그녀의 애인이었던 남자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원한다면... 하지만 그는 그녀가 결혼하던 날 사라졌다고 하더군. 뭐, 기사였다니 굶어죽지는 않았겠지..." "흠, 지금 그녀의 곁에 없다면 알 필요는 없겠군요. 그럼 이걸로 됐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도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문을 잡고 열려는 순간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그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다시 정보가 필요하다면 괜히 불쌍한 애들 괴롭히지 말고 '달과 그림자'란 술집으로 찾아와서 렉이란 사람을 찾아라." 그는 그렇게만 말한 후 내가 더 물으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방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그가 데리고 온 건달들 까지 우르르 몰려 나가는 통에 나는 그를 쫓아갈 수도 없었다. 다음날... 류미르와 나, 그리고 세이몬은 소브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도시를 떠났다. 물론 그 전에 소브로에게 전에 일(?)한 댓가라며 조금 남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브로는 그 여관 주인이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자신의 여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고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우리 셋은 그가 쉽게 일자리를 얻게 된 것에 안도를 하는 한편 여관 주인이 혹시 흑심이라도 품지 않게 그에게 슬쩍 소브로와의 친화 마법을 걸어놨다. 그 마법이면 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소브로를 무척 예뻐할 것이다. 그렇게 정리를 한 뒤 우리는 곧장 현재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는 칼 막슈타드 그레놀리 공작의 부인 아리엘 그레놀리가 살고 있는 그레놀리 영지로 향했다. =================================================== 오늘 공지했던 대로 1권 분량의 글을 지웠습니다. ㅠ.ㅠ 조회수가 많은 거였는데 지우려니 무지 아깝더군요. ┌───────────────────────────────────┐ │ ▶ 번 호 : 14138/14163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1월 21일 23:01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5) │ └───────────────────────────────────┘ 소브로와 헤어져 2주동안 달렸을때 우리는 어떤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레놀리 영지는 에스라 왕국과의 국경선인 게덴 산맥과 타이백 산맥이 만나는 텐지 골짜기 (아린의 집이 있는 곳) 근처에 있다. 레스틴이라는 나라 전체를 보았을 때 가장 험하고 변두리에 있는 좋지 못한 땅을 영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남대륙의 등줄기라고 할 수 있는 타이백 산맥과 인접해 있기에 지대가 높았고 산이 많았다.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숲도 평지라고는 할 수 없는 낮은 산이었다. 그러나 겉 모습만 보면 그다지 높지는 않았고 숲만 울창하게 보여 만만하게 보고 무턱대고 돌진 했는데 속은 의외로 골짜기도 있었고 높고 낮은 구릉도 있는 데다가 길도 크게 나 있지 않아서 통과하기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더욱이 이 숲으로 들어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모이더니 굵은 빗줄기를 좍좍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강한 빗줄기였던지 그냥 맨 살로 맞으면 아플 정도였고 하도 엄청나게 내려서 한치의 앞도 분간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나는 성룡식때 선물로 받은 마법의 망토를 가지고 있어 모자만 쓰면 망토에 의해 가려지지 않는 고삐를 잡은 손과 약간 나오는 얼굴만 비에 젖었을 뿐이어서 우리 일행중 가장 무난했다. 세이몬도 커다랗고 두꺼운 망토에 달린 모자를 푹 덮고 있어서 그도 별로 젖지는 않는 것 처럼 보였으나 문제는 류미르였다. 그는 옷을 살때 자신은 추위와 더위에 강하고 자연과 친한 엘프라나 뭐라나 하는 말을 늘어 놓으면서 망토를 전혀 사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지금 오는비 다 맞고 있는 상태여서 온 몸이 쫄딱 젖어 있었다. 더욱이 하필 이 비가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가을비였기 때문에 기온이 무척 낮은 상태여서 류미르가 자신 만만하게 이정도 쯤이야 끄떡 없다고 버티고 있지만 아무리 엘프라고 해도 이런 상태로 오래 있다가는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았다. "젠장, 뭔놈의 영토가 이렇게 험준한 곳에 있는거야? 그 사람 공작이라며? 공작은 귀족 중에서도 높은 거 아냐?"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에 우리는 말을 달리면서 대화할 때 평소보다 소리를 높여야만 했다. 지금도 세이몬이 소리를 잔뜩 높여서 투덜 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도 소리 높여 대답했다. "그 공작이라는 사람이 정권에 관심이 없대. 그래서 그가 작위를 물려 받자 마자 영지를 구석탱이로 바꿔 달라고 해서 이쪽으로 왔다는 군." "우쒸, 왜 하필 그런 사람한테 목걸이가 있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의 부인이야." 나와 세이몬이 그렇게 말을 주고 받고 있을 때 앞장 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던 류미르가 갑자기 말을 멈추는 바람에 우리도 덩달아 말을 멈춰야 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세이몬이 먼저 소리를 높여 묻자 류미르는 뒤를 돌아보면서 비에 의해 젖어 눈을 가리는 길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실프보고 근처에 동굴 같은 우리가 비와 바람을 피할 장소를 찾아 보라고 했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비에 쫄딱 젖은 상태인 그는 이제는 입술이 새파랬고 고삐를 잡고 있는 손의 피부도 파랬다. 아무리 엘프라고는 하나 기온이 거의 영상 3, 4 도 같은 이런 날씨 속에서 온전하다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비를 맞고 있는 것이 거의 한시간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길래 망토를 하나 사지 그랬어? 이제 곧 겨울 인데 망토 하나 없이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그런 그의 모습에 쯧쯧 혀를 차며 세이몬이 참견하자 류미르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흥, 엘프는 이 정도 날씨로는 끄떡 없다고." "하지만 입술이 새파란걸?" 세이몬의 지적에 류미르는 얼른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면서 대꾸했다. "이건 오랫동안 비를 맞아서 그래. 추워서 그런 게 아니라구." "그래 그래, 너 잘났다." 별것 아닌 일에도 세이몬이 말하면 괜히 자존심을 세우는 류미르가 오늘따라 한심스럽게 느껴진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둘을 갈라놨다. 그런데 그때 실프가 빗속을 뚫고 우리에게 날아 오는 것이 보였다. "아, 온다." 류미르도 실프가 다가오자 얼른 반색을 하며 그를 맞았다. 그리고 류미르와 실프가 뭐라고 대화 하는 것을 들으며 (세이몬과 나에게는 안 들림) 우리는 류미르가 이야기를 다 하고 말 해주기를 기다렸다. 우리의 기대 대로 류미르는 곧 고개를 돌리며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 근처에 동굴이 있대. 그리고 그 곳에서는 벌써 어떤 사람이 불을 피우고 있다는군. 다행이지 뭐야. 어서 그쪽으로 가자고."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말 머리를 돌려 빠른 속도로 실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망토를 살 것이지..." "역시 추웠으면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같은 내용의 말을 중얼 거리면서 그의 뒤를 쫓았다. 실프를 쫓아 우리가 얼마 정도 숲을 헤치고 앞으로 가자 나무가 별로 없고 바위로 된 언덕의 끄트머리 부분에 반짝하는 빛이 보였다. 그 반가운 빛을 따라 가자 그 곳에서는 자그마한 동굴이 보였다. 그 동굴은 성인 남자가 일어서면 머리가 천장에 다을 만큼 작은 동굴이었는데 넓이도 작아서 우리 셋이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 근처에 가자 류미르가 얼른 말에서 내려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저희 일행이 비를 많이 맞아서 그러는데 동굴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세이몬과 나는 류미르의 뒤에 서서 말의 고삐를 잡고 초조하게 동굴에서 허락의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동굴 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아 우리가 걱정 스러운 시선을 교환하는데 류미르가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쑥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이 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세이몬과 내가 동굴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밖에서 말 고삐를 잡고 엉거주춤 서 있을 때 류미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다 보면서 말했다. "안들어 올꺼야?" "말은 어쩌고?" 세이몬이 얼빠진 표정으로 묻자 류미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냥 내버려 둬. 이 정도는 괜찮으니까. 저쪽에도 이 사람 말이 있잖아." 류미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자 과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렇게 커다랗지는 않지만 울창한 나무 아래 갈색의 어떤 말 한마리가 앉아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나는 말들의 가여움에 동정을 느끼며 류미르의 말 고삐를 잡고 세이몬에게도 말 고삐를 넘기고 먼저 들어가라고 해 놓고는 세 마리의 말을 끌고 그 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길러져온 탓인지 내가 다가가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말 옆에 내가 끌고온 말들을 놓아 두고는 말 주위에 물리력을 막는 결계를 쳤다. 이 결계는 맹수의 무리는 물론 비, 바람도 막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숲속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말들을 놓고 가야할 때 내가 제일 애용하는 결계였다. 덤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결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그 말들에게 수면 마법으로 잠을 재운뒤 나는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 안에서는 미리 와 있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는지 류미르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 젖은 옷을 말리고 있었고 세이몬도 다 젖은 망토를 벗어 말리고 있었다. "어서 와. 이쪽으로 앉아." 류미르는 입구쪽에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망토를 벗어 한번 물기를 짜 준뒤 탁탁 털고는 류미르가 말한 자리에 와서 그 망토를 깔고 앉았다. 동굴 안은 겉으로 봤을 때 처럼 그다지 넓지는 않아서 우리 모두가 누울 자리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모닥불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벽을 등지고 삥 둘러 앉아 있었다. 류미르의 다른 쪽 옆자리에는 미리 와 있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내가 동굴로 들어와 자리에 앉아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보내 왔다. 나도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번 호 : 14141 / 14162 등록일 : 2000년 11월 22일 22:25 등록자 : LODEMP 조 회 : 37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6) 그는 등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갈색 머리가 비에 다 젖은 바람에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단지 수건만 어깨 위에 걸쳐 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그의 그렇게 우람하지는 않아도 탄탄해 보이는 근육들과 갈색으로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그리고 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하얀 상처 자국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키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앉은 키만으로도 류미르보다 약 5cm는 더 컸다. 게다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단정하고 선이 굵은 그의 외모는 준수한 편이어서 그의 깊고 무감정한 보라빛 눈동자와 너무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너무 차갑고 무표정해서 쉽게 말을 걸기가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잘 생기셨네요.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살짝 고개만 숙여 인사한 뒤 입을 다물고 있는 그에게 나는 말을 터 놓기 위해 농담조로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피식 웃기만 할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보통 우리 일행을 보면 소년들만 있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 마다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무관심 하게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단지 모닥불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하자 다시 말을 걸 용기를 내지 못한 나와 류미르, 세이몬은 괜히 주눅이 들어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단지 애꿏은 모닥불만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꼬르르륵~ 갑자기 누군가의 배 속에서 요란하게 경종을 울렸다. "배고프다. 밥 안먹냐?" 세이몬이었다. 그는 꼬르륵 대며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배를 어루만지면서 분위기에 눌렸는지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그 남자의 눈치를 슬쩍 살피면서 어눌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피식 웃었다. 덕분에 나는 용기를 내어 분위기를 타파하고 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저, 식사 하셨어요? 안 하셨으면 우리랑 같이 하실래요?" 우리 셋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세이몬의 꼬르륵 소리를 듣자 그 순간 나도 너무나 배가 고픔을 깨달았고 류미르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는 그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가 싫다고 하면 아무리 배고픔을 못 견디는 우리라고 하지만 그만 나두고 우리 끼리만 식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너무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 보았는지 그는 다시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빨리 식사를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이들 중 그나마 요리를 할 줄 아는 자가 나 밖에 없었기에 이런 노숙을 할 때는 으례히 내가 식사 당번이었고 류미르와 세이몬은 설거지 당번이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요리할 때 그들이 옆에서 돕기는 했지만... 어째든 나는 재빨리 베낭을 뒤적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릇들 중 큰 그릇 두 개를 꺼내어 동굴 밖으로 내 놓고 빗물을 받았다. 그리고 모닥불 주위에 냄비를 올려 놓을 수 있도록 커다란 돌덩이를 들고 와 내려 놓았다. 비가 한창 많이 오고 있었으므로 동굴 밖에 내 놓은 그릇에는 금방 빗물이 찼다. 나는 물이 가득 찬 그릇들을 동굴 안으로 들여 놓아 잠시 물 속에 있던 먼지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냄비를 꺼내고 그 속에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을 따른 뒤 모닥불 위에 올려 놓았다. "자리가 좁아서 다른 불을 피울 수 없으니까 오늘은 스프만 끓일거야. 그걸로 만족 해." 그 말을 하자마자 류미르와 세이몬의 입에서 아쉬운 한숨 소리가 흘러 나왔지만 그들도 우리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머지 한 그릇에 담긴 물을 살짝 떠서 이제는 먼지만 가라 앉아 있는 그릇을 헹군다음 그 그릇에 물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이것은 우리가 마실 물이었다. 그리고 다시 배낭을 뒤적여 스프를 만들 재료를 꺼내어 다듬기 시작했다. 곧 이어 모닥 불 위에 올려 놓은 냄비 속의 스프가 보글 보글 끓기 시작했고 동굴 안은 구수한 스프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들의 그릇과 숟가락, 그리고 빵과 버터, 약간의 마른 고기들을 꺼내 놓았다. "빵이 없으시면 좀 나눠 드릴께요." 류미르는 기분 좋게 말하며 자신의 빵 덩이를 반으로 쪼개서는 그 중 한 덩이를 그에게 버터와 함께 건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세이몬은 약간 아깝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마른 고기를 그에게 건넸다. "이것도 드세요." 스프가 완전히 다 되자 나는 그들에게 스프를 한 그릇 가득 퍼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릇이 없었으므로 컵에다 스프를 떠 주었다. "잘 먹을께." "맛있겠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언제나 그렇듯이 나에게 감사의 눈길과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많이 끓였으니까 더 먹을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떠 먹어." 나도 그들에게 한 마디 해준 뒤 기분 좋게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그때... "맛있군."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놀라서 스프를 뜨려고 했던 손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우리보다 먼저 동굴에 왔던 사람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놀란 표정을 얼른 수습하고 웃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어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피식 웃으며 음식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분위기를 틈타 류미르가 입을 열어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다. "저, 이름이 뭐예요?" 류미르는 다시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 보이며 다급히 변명조로 말했다. "아니, 별다른 뜻은 없구요 그냥 호칭이 없으니까 부르기가 어려워서요.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씨익 웃어보이는 류미르를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툭 던지듯 말했다. "그냥 모저라고 불러." "아, 그럼 모저. 어디로 가시는 중이세요? 보아하니 용병 같으신데..." 이번에 물은 건 세이몬. 모저는 들고 있던 컵에 담긴 스프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레놀리 영지로 가는 중이야. 그곳에 요즘 몬스터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용병들을 모집하고 있거든. 영지가 구석에 있기는 하지만 내 건 돈이 좀 많아서 말야. 하지만 그만큼 몬스터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왠지 그 영지에서 갑자기 몬스터들이 출몰 한다는게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레놀리 영지 근처에 있는 텐지 골짜기에는 내 레어가 있는데다 내 레어 근처에 있던 마을은 예전에 좀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하여 할아버지한테 박살이 난 후로 좀처럼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 산은 좀 높고 험하긴 해도 산짐승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런 좋은 곳에 몬스터들이 그동안 안 모여들었다면 이상한 거지... ┌───────────────────────────────────┐ │ ▶ 번 호 : 14185/14349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1월 24일 21:37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7) │ └───────────────────────────────────┘ 이런 내 기분에 상관 없이 류미르는 싱글 싱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요? 이거 정말 대단한 우연 인데요? 우리도 그레놀리 영지로 가는 중이었거든요." 그러자 모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쪽 방향으로는 그레놀리 영지밖에 없으니 같은 방향이라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무안함을 느낄 말이었지만 달변의 류미르가 그 정도에 주눅이 들리 없었다. "그럴리가요. 그레놀리 영지에서 다른 곳으로 가던 중일 수도 있고 사냥을 하거나 약초를 캐다가 길을 잃은 것일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방향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우연이지요. 특히 이렇게 비오는 날 같은 동굴에서 만났다는 것만 보더라도 말예요." 모저는 다시 피식 웃었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식사를 다 끝낸 우리들은 더러워진 그릇을 동굴 밖에 내 놓아 비를 맞게 했다. 이렇게 비 오는 날 설거지를 하러 냇가를 찾으러 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설거지 비슷한 것이라도 해야 하겠기에 내가 생각해낸 것이었다. 비록 설거지 하는 것만큼 깨끗하지는 못할 지라도 그래도 비를 맞으면 어느 정도는 깨끗해질 것이다. 그렇게 하고나니 이제는 할 일이 없는 우리는 슬슬 졸렵기 시작했다. 추운 비 속을 오랜 시간동안 헤매면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그 고충을 해결하고 나니 몸이 노곤해진 것이다. 세이몬이 제일 먼저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류미르와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누가 방어막을 칠 차례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류미르와 나는 좀 난처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모저가 함께 있으니 함부로 세이몬이나 나의 기운을 뿜어 내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그가 아무것도 모를 사람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척 보기에도 아주 노련한 용병 같으니 잘못 하다간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채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류미르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누가 불침번 설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둘 중 한명. 난 요리를 했으니 빼줘!!" 하지만 세이몬은 내 말은 못들은 척 하면서 자신의 베낭에서 침낭을 꺼내어 동굴 벽과 바닥에 깔고는 그 위에 앉아 자신의 망토를 덮었다. 그리고 눈을 척 감으며 한마디 했다. "난 잘래." 퍽~ 세이몬은 류미르가 던진 배낭을 머리에 얻어 맞고는 번쩍 눈을 뜨고 류미르를 노려 보았다. "우쒸, 무슨 짓이야?" 그러자 류미르는 코웃음까지 쳐가며 대답해 주었다. "흥, 싸가지 없는 놈의 머리통을 갈기는 짓이다." "누가 싸가지가 없다는 거야?" "여기 너말고 또 누가 있냐?" "왜 내가 싸가지가 없는데?" "불침번도 정하지 않고 먼저 잘려고 하니까 그렇지." "아린은 안그랬냐?" "얜 아직 안 잤어." 둘의 싸움이 점점 심해질 것 같자 이쯤해서 나는 슬슬 그들을 말려야 겠다고 생각 하며 느긋하게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나보다도 먼저 모저가 그 둘을 말렸다. "그만들 둬." 나지막한 저음의, 그러나 단호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 오자 류미르와 세이몬은 서로 노려보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불만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저는 그 눈빛들을 담담히 받아 내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서지. 그러니 그만들 싸우고 나 다음에 불침번을 설 사람을 정해."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왜? 왜 날봐?" 그러자 그 둘은 또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누가 불침번을 설지 네가 정해." 나는 순간 무지 황당해져서 어벙벙하게 물었다. "왜?" 그러자 류미르가 즉각 대답했다. "넌 중립을 지키고 있었잖아. 그러니 우리 둘이 계속 티격 태격 하는 것 보다 네가 결정하는게 빠르지..."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는 세이몬을 다음 불침번으로 정하라는 강렬한 메세지를 보내고 있었다. 세이몬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류미르를 다음 불침번으로 세우라는 손짓을 열심히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그 둘의 정말 한심한 모습을 쳐다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결정을 내렸다. "가위, 바위, 보로 정하자. 이기는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순서에 불침번 서기." 그러자 그 둘은 그 즉시 오른 손을 등 뒤로 넘겼다. "가위, 바위, 보!!" 내가 보, 류미르가 가위, 세이몬이 주먹이었다. "다시, 감, 밤, 보!!" 내가 주먹, 류미르와 세이몬이 가위였다. "내가 이겼지? 그럼 나는 맨 마지막에 하련다. 너희 둘이 한번 더 해." "장, 깽이, 셨!!" 류미르가 가위, 세이몬이 주먹이었다. "난 두번째 할래." 세이몬은 입이 저절로 벌어지면서도 전혀 안좋아하는 척 가증스러운 짓을 하면서 얼른 흘러내린 자신의 망토를 뒤집어 쓰고는 눈을 감았다. "쳇..." 그리고 류미르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침낭을 꺼내 동굴 바닥과 벽에 깔고는 잠잘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도 모저와 나에게 밤인사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 부탁할께요. 아린도 잘자." 나도 모저에게 밤 인사를 하고는 침낭 위에 주저 앉아 눈을 감았다. "먼저 자겠습니다." 그날 밤, 나는 잠결에 부드러운 기타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조용히 부르는 모저의 노래를 들으며 살며시 잠에서 깨었다. 약간 실눈을 뜨고 몰래 모저를 훔쳐 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아주 오래되어보이는 낡은 기타를 뜯으면서 모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헤, 꽤 잘부르네... 의외인걸?' 슬쩍 옆을 보니 류미르도 꿈틀대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자는 척 하면서 그의 노래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이별이 고통 스러운지 몰랐습니다. 추억이 저를 혼란케 했으며 그대의 흔적이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처음엔 이별이란 단어가 아름다운 헤어짐이란 말을 믿었어요 하지만 이별이란 단어는 가슴을 짓뭉게는 헤어짐 이더군요. - 이 주 행 - ┌───────────────────────────────────┐ │ ▶ 번 호 : 14326/14349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0년 11월 26일 21:41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8) │ └───────────────────────────────────┘ 아, 부지런했던 시절은 어디로 가버리고... ㅠ.ㅠ -------------------------------------------------- 다음날 아침, 마지막으로 불침번을 섰던 나는 날이 밝아 오자마자 동굴을 나서 말들 주위에 쳐 놨던 결계를 풀고 그들을 잠들게 했던 마법을 풀어 그들이 일어나서 풀을 뜯게 했다. 그리고는 운디네를 불러내어 그릇을 씻게 하고 그 그릇에 물을 받았다. 어차피 어제 비가 많이 왔으므로 냇가를 찾아봤자 흙탕물이 흐를게 뻔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동료들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미리 세수를 한 나는 이번에는 카사를 불러내어 동굴 앞 작은 공터 바닥에 깔린 흙을 말리게 했다. 이 앞에 모닥불을 피워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생각이었다. 근처에 가서 나무가지를 모아 오는데 벌써 일어났는지 모저가 동굴 밖으로 나와서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그가 동굴 밖으로 나와 있으니 그의 키를 한 눈에 알수 있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걸 보면 한 190cm는 되는 것 같았다. "아, 벌써 일어났어요? 일찍 일어났네요.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나는 그가 말 수가 적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고 가지고 온 젖은 나무가지들을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젖어서 불이 잘 안붙을텐데..." 고개를 들어보니 모저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싱긋 웃어보인 뒤에 카사를 불러내었다. "이 녀석에게 나뭇가지를 말리게 하려구요. 능력이 좋아서 금방 말릴 수 있거든요." 난 카사에게 부탁을 하고는 모닥불을 만들 곳에다 큰 돌들을 옮겨 놓아 후라이팬과 냄비를 올려 놓을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식량이 들어있는 자루를 들고 나오면서 동시에 세이몬과 류미르를 깨웠다. "일어나. 아침이야." 밤 새도록 쭈구리고 자서 그런지 그들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동굴 밖으로 나와서 가볍게 몸을 움직여 뭉쳐진 근육들을 풀었다. "에구구, 이렇게 자는 것도 쉽진 않구나..." "다음부턴 좀 넓은 동굴을 찾아내라구." 아침을 먹고 난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저와 일행이 되어 영지로 향했다. 모저도 우리와 있는 것이 그다지 싫지는 않은 듯 같이 가자는 류미르의 제안에 별 다른 말 없이 응했던 것이다. 그 뒤 우리는 사흘을 더 밖에서 노숙을 한 뒤에야 그레놀리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며칠동안 같이 동행 하면서 다시는 모저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 첨에 그와 말을 달리면서 나는 제일 먼저 노래를 참 잘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모저의 묵뚝뚝하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그의 태도와 분위기상 왠지 그 말을 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팍팍 와 닿았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아마 류미르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내가 그런 말을 안 하면 류미르가 나서서 말하곤 했었는데.... 그렇게 우리는 그레놀리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우리들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영지가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곳인줄은 알았지만 공작이 가진 영지였기에 뭔가 좀 뭐랄까 부유하거나 아니면 잘 발달된 큰 도시를 가진 곳이라고 예측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왠걸.... 그곳은 마을의 집이 채 100여호나 될까? 한 자그마한 마을겸 도시를 달랑 하나를 가진 영지였던 것이다. 이건 마치 변두리 시골의 자그마한 영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런 곳에 있는 넓은 들판은 보이지 않았지만... 의아함을 느끼긴 했지만 모저가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그 곳의 성문으로 다가가자 우리는 당황스런 마음을 누르고는 그의 뒤를 쫓아갔다. 성벽을 들어서서 그 곳에 유일한 여관인 것 같은 낡고 오래된 2층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낮이라서 그런지 식당으로 보이는 홀에는 몇몇의 험상궃게 생긴 사람들, 얼굴에 딱 나는 날깡패요... 라고 써져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들어가자 마자 힐끗 돌아 보았지만 모저의 차가운 눈길을 한번 받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일에 열중했다. "어서오세요..." 안쪽, 주방으로 연결된 듯한 문에서 통통하고 인상 좋게 생긴 전형적인 인심 좋은 시골 아주머니의 모습을 한 여인이 걸어나오며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방 있지요?" 의례히 그렇듯 이번에도 류미르가 나섰다. "당연히 있지요. 묵으시게요?" 류미르는 그 중년 여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모저를 돌아 보았다. "혼자 쓰실거죠?" 모저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까딱해 보이자 류미르는 다시 중년 여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3인실 있어요?" 그러자 여인이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미안한 듯 말했다. "이걸 어쩌나? 큰 방이라고 해봐야 2인실인데..." 그리고는 우리가 나갈거라고 생각 했는지 얼른 덧붙였다. "이 근처에서는 여관이 우리 집 밖에 없는데..." 류미르가 어떻게 하냐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류미르하고 세이몬이 한 방을 쓰는게..." 그러나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동시에 말했다. "싫어." 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그럼 세이몬과 내가 한 방을 쓸까?" 그러자 류미르는 좋다는 얼굴을 했지만 세이몬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왜 난 독방을 주지 않는거야?" 그가 부루퉁한 얼굴로 투덜거리자 류미르가 낼름 대꾸했다. "넌 혼자 두면 안심이 안되거든." "내가 왜?" 세이몬이 발끈 화를 내면서 류미르에게 달려들 자세를 취하자 나는 얼른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됐어. 알았으니까 둘다 그만하고 여기 일인실 4개로 주세요." 나는 재빨리 아주머니를 보면서 말했고 그러자 아주머니는 싱긋 웃으며 카운터로 가서 장부를 꺼내어 펴 들었다. "일인실은 하루밤에 10셀씩이예요. 요금 지불은 후불이니까 나갈 때 계산해 주시고요. 여기 이름좀 써 주겠어요?" 그러자 류미르가 얼른 나서서 그녀에게서 펜을 받아 들었다. 모저는 그런 류미르의 행동을 가만히 볼 뿐 별 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고 또 자신의 이름을 따로 적으려하지도 않아서 류미르의 이름으로 방 4개를 적었다. 여인은 류미르가 다 적고 펜을 돌려주자 안쪽을 향해서 소리 높여 누군가를 불렀다. "바스~, 바스. 거기 있니?" 그러자 곧 어떤 소년이 대답하며 뛰어 나왔다. "저 여기 있어요, 엄마." 16, 7세쯤 되어 보이는 얼굴 가득히 주근깨를 가지고 있는 소년이 초롱초롱 거리는 파란 눈으로 우리를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다 자신의 머리가 어떤 형태인지 깨달았는지 얼른 까치집 같이 헝클어진 갈색 머리를 손으로 쓱쓱 빗어 넘기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예요?" 중년 여인은 그런 자신의 아들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손님들께 방을 안내해 드리렴. 1호실 부터 4호실까지다." 그리고는 카운터에서 열쇠를 꺼내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건넸다. 소년은 그런 열쇠를 얼른 받아들고는 우리에게 쾌활하게 말했다. "저를 따라 오세요." 그는 우리를 윗층으로 연결하는 계단으로 안내 하면서 계속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대단히 운이 좋으신 거예요. 요즘 영주님께서 용병들을 모으시는 바람에 방이 거의 찼거든요. 다행이도 어제 능력이 좋은 용병이 영주님의 초대로 성에서 묵게되는 바람에 좋은 방이 비게 되었지요. 정말 운이 좋았다니까요. 아, 그런데 여러분도 용병이신가요? 지금까지 여기를 찾아 온 용병들과는 좀 달라 보이는데요." 그의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말에 모저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2층에 올라오자 마자 그 소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일 구석진 방으로..." 그러자 그 소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기있는 방은 다 전망이 좋은데요? 아무 방에 들어가더라도 창 밖으로 보이는 경치는 다 멋있 거든요." 그러자 모저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럼 아무거나..." 그 소년은 싱긋 웃으며 4개의 열쇠를 들어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걸로 고르실래요?" 모저는 오른쪽 맨 끝에 있는 열쇠를 거의 잡아채다 시피 가져가고는 스스로 열쇠 끝에 매달려 있는 번호표를 보고는 자신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그 소년이 모저의 뒤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류미르는 재빨리 그런 그를 만류했다. "저기, 우리 방좀 안내해 줄래?" 소년은 다시 우리를 바라보더니 그 특유의 쾌활함으로 말했다. "기꺼이. 너희들도 하나씩 열쇠를 골라. 그럼 내가 안내해 줄께." 우리는 그가 더 말하기 전에 얼른 열쇠를 가져갔다. 세이몬이 1호실, 류미르가 2호실, 내가 3호실 열쇠였다. "그런데 말야, 너희들도 용병이니? 나이가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용병이라니 믿겨지지가 않아. 하지만 설마 이런 구석진 곳에 다른 일로 왔다는 것도 믿겨지지는 않는 일이지. 여기에 몬스터들이 왕창 생겨서 영주님께서 용병들을 모으기 전에는 이 곳에 오는 사람들 이라곤 영주님께 일이 있는 사람이나 장사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말야." 우리는 방에도 못 들어가고 계속 복도에 선 채로 그 소년이 신나게 말하는 것을 계속 듣고 있어야만 했다. 너무 즐겁게 이야기 하고 있어서 차마 그의 말을 끝을 수 없어 난처해 하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스, 바스?" "아, 엄마가 부르신다. 난 가봐야 겠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날 불러." 그는 다급히 우리에게 말한 뒤 얼른 계단을 뛰어 내려 갔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고 나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에휴,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지 은근히 걱정 되었어." 세이몬이 너무 다행이란 표정이 확연히 드러나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하자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도 그 아이에게 얻을 정보가 꽤 있을 것 같아. 이 곳에서 살아온데다 여관에 있고 말하길 좋아하니 이보다 더 좋은 정보 제공자가 어디 있어?" 그러자 류미르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피곤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몰라, 몰라. 정보도 좋지만 난 지금 무지 피곤하다고. 나 먼저 들어가서 자련다. 밥 먹으러 내려갈 때 깨워줘." 류미르가 먼저 자신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이몬과 나도 각각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번 호 : 13520 / 15054 등록일 : 2000년 11월 27일 21:47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8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9) 두어 시간동안 단잠을 잔 나는 날이 어두워졌을 때에야 일어나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모저를 깨워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좀 늦었는지 식당 안에는 거의 다 식사를 한 몇몇 테이블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의 테이블에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즐기기 위하러 모여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몇몇의 사람들은 벌써 많이 마셨는지 벌개진 얼굴로 떠들썩 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계단을 다 내려오자 막 음식을 날라다 주고 빈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가려던 중년 여인이 우리를 발견 하고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일어났구려?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고 잠만 잤으니 배가 무척 고프겠네. 어서 저쪽으로 앉아요. 내 푸짐하게 가져다 줄테니..." 그녀는 구석진 자리에 놓여 있는 빈 테이블을 가르키더니 주문도 듣지 않은 채로 음식을 가져다 주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재빠른 걸음 걸이로 안쪽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의 행동에 우리는 왠지 모를 푸근함을 느끼며 그녀가 가르쳐준 테이블에 앉았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중년 여인은 커다란 쟁반 가득히 빵과 스프, 그리고 고기 완자 등등을 듬뿍 가져와서는 내려 놓았다. "자, 먹어요. 이 곳은 메뉴가 한가지 밖에 없어서 일부러 주문은 안 받은거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모자르면 날 불러요." 그녀는 사람 좋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는 식탁 위에다 접시를 하나 하나 내려 놓았다. 그러더니 우리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는 당황해서 그녀를 마주 보았는데 그녀가 계속 입을 열었다. "쯧쯧,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왔담. 이곳 사람들이야 몬스터들이 자주 쳐들어 오니 용병들이 많이 와주면 좋겠지만 아직 내 아들또래처럼 보이는데 이런 외진 곳에 돈도 별로 주지도 않는 곳까지 오다니...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까... 자자, 내가 다른건 몰라도 음식많은 싸게 많이 줄테니 많이 많이 들어요. 속이 든든해야지 내일 부터 몬스터들과 잘싸우고 올거 아녜요?" 졸지에 가여운 어린 용병들이 되어 버리는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다시 주방으로 가버리자 우리는 모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돈을 많이 준다면서요?" 류미르의 의아함이 담긴 시선에 모저는 단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내 기준으로는... 어차피 너희들과 상관 없는 일 아닌가? 설마 너희들이 용병 일로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을텐데..."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나는 류미르나 세이몬이 어떤 말을 꺼내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뇨. 당신을 만난 뒤에 갑자기 흥미가 생겨서요, 우리도 그 일에 참여해 보려구요." 류미르와 세이몬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리며 그들의 눈이 이의가 있다는 듯 커졌다. 모저도 순간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채 말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걸죽한 음성으로 나를 비꼬았다. "헹, 여기가 어린애 놀이턴줄 아나?"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낮에 이 여관에 왔을 때 한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친 날깡패처럼 생긴 용병들이었다. 그들 중 한명이 입을 열자 다른 한명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나둬, 내일 하루만 지나면 당장에 짐을 싸서 튈텐데..." 그는 길쭉한 얼굴을 하고 있는 빼빼 마른 사내였다. 나이는 한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매우 얍삽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러자 처음에 입을 연 우락 부락하고 붉은색의 피부를 가진 얼굴에 흉터가 많은 사내가 다시 말을 받았다. "뭐,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튀게 해줄 수 있는데 말야..." 그의 비웃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 들었는지 세이몬이 화가난 얼굴로 벌떡 일어서자 류미르가 재빨리 그의 옷자락을 붙들며 만류했다. 그러나 그때 다시 빼빼마른 사내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호오, 일어섰네? 꼬마 주제에 제법 자존심이 있나 보지? 하지만 자존심 만으로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세이몬의 눈썹이 다시 꿈틀 거렸지만 류미르가 계속 옷가지를 잡고 있는데다 나도 그의 손을 잡고 앉으라는 뜻으로 밑으로 잡아당겼으므로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정말 세이몬의 한주먹감도 안 될테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의 힘을 보여 주었다간 주목받을게 뻔했고 그러면 우리의 일에 차질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었다. 저 놈들은 나중에 잘근 잘근 밟아주어도 될 터였다. 그때 그 근처에서 서빙을 하고 있던 바스가 슬그머니 다가와 우리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은 형편없는 작자들이니까 아예 상대도 하지마. 용병으로 왔으면서도 용병 진지에 들어가지도 않고 매일 여기서 자고 있는데다가 거의 싸우러 가지도 않거든. 그러면서 여긴 뭐하러 여길 왔는지..." 그의 마지막말이 조금 컸던 탓인지 그의 말을 들은 붉은 피부의 사내가 움찔 했다. 그리고는 사나운 눈으로 바스를 노려보며 살벌하게 말했다. "이 꼬마놈이... 모르면 가만히 있어. 우리가 그런 하찮은 일로 이런 촌구석까지 온줄 알아?" 그러자 그동안 아무말도 없이 잠자코 있던 뚱뚱하고 윗머리가 다 까진 40대 초반의 남자가 험상궃은 눈초리로 붉은 피부의 사내를 쏘아 보았다. "닥쳐!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 그러자 붉은 피부의 사내가 움찔 하더니 기가 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그리고 그들은 다시 묵묵히 하던 식사를 계속했다. 그들의 그 말로 인하여 나는 그들에 대한 의심이 스물 스물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일도 있는데 그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의심을 저 편으로 밀어 두었다. 저녁을 다 먹은뒤 2층으로 올라가자 모저가 자신의 방으로 가려다 말고 잠깐 멈칫 하더니 우리를 돌아 보았다. "내일 아침에 성으로 찾아갈거다. 너희도 몬스터 방어 용병 부대에 낄려면 같이 가도 좋아." 나는 기꺼이 가겠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모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류미르와 세이몬은 나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뭘 하려고 그래? 뜬금없이 갑자기 방어 부대에 끼겠다니..." 류미르가 치켜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사납게 물었다. "맞아. 그것도 우리랑 사전에 의논도 없이..." 세이몬도 류미르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같이 노려보았다. "야,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내 얼굴에 구멍 나겠다." 내가 분위기를 좀 풀게 하려고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지만 그들의 눈초리는 변함이 없었다. "아, 알았어. 설명해 줄테니까 너무 그러지 마. 미리 이야기 안한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너희들도 알다시피 내가 말할 시간도 없었잖아. 원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하필 식사중에 이야기가 나와서 내 맘대로 말한거야." "왜 우리가 그 부대에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데?" 류미르가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자 그제야 살벌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말야,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성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더라고. 그런데 아까 낮에 그 바스라는 아이가 말한것 생각 나? 그가 말하길 실력이 뛰어난 용병은 성에서 묶는다잖아." "오라, 그러니까 우리가 실력을 보여줘서 성으로 들어가자 이거야?" 세이몬이 금방 이해했다는 듯 물어오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였다. "맞았어. 어차피 우리의 실력을 전부 보여줄 필요도 없어. 성에 초대될 만큼만 보여주면 돼."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으로 초대된다면 공작 부부가 어떤 사람들인지 쉽게 알수 있을거고, 일도 훨씬 쉽게 할수 있겠다, 이거지?" 류미가 내 뒤를 이어 부연 설명까지 덧붙이자 입 아프게 끝까지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된 나는 기분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로 그거야." "뭐, 그렇다면 사전에 동의 없이 맘대로 결정한 것 용서해 줄께. 일부러 그런게 아니었다니까." 세이몬은 정말 자신의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해 준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기에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지만 웃지 않고 너무나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세이몬. 역시 넌 마음이 넓구나..." "이정도야 뭘..." 세이몬이 정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자 류미르와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게 소리를 죽여 웃었다. 번 호 : 13596 / 15054 등록일 : 2000년 11월 29일 22:18 등록자 : LODEMP 조 회 : 130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0) 안녕하세요? 드디어 제 책이 나왔습니다. ^^ 1, 2권 까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너무 흥분했어요. 많이 많이 사주세요 ^^ ===================================================== 다음날 아침, 모저는 아침 식사를 끝내자 마자 곧장 성으로 향했다. 마을이 워낙 적은 탓인지 길은 복잡하지 않아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을 따라가기만 하니까 성의 큰 입구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입구 앞을 지키고 있던 긴 창을 들고 있던 병사 둘은 우리들이 다가가자 거의 기계적으로 창으로 입구를 막아섰다. 하지만 그들 얼굴 표정에는 살기가 아니라 호기심이 감돌고 있어서 덕분에 우리는 기분 좋게 그들에게 웃어 주면서 순순히 그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오?" 병사중 한명이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오자 모저가 우리들 중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곳에서 몬스터 방어를 위한 용병을 모집한다고 하기에 찾아왔소." 그러자 다른 병사가 의아한 듯이 물어왔다. "당신이 용병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당신 뒤에 있는 그 아이들은 뭐요?" 모저는 병사가 손으로 가르킨 우리를 고개를 돌려 한번 쓰윽 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만난 아이들인데, 자기들도 용병대에 참여하기 위해 왔다더군." 모저의 그 말에는 같잖다는 듯한 느낌이 포함되어 있어서 나는 병사들도 그와 같은 표정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 병사들은 두 눈 가득히 동정의 빛을 담고는 우리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쯧, 가여워라...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었으면.." "이런 외지까지... 아직 어린것들이..." 우리는 성에 들어가는 대신 성 안에서 나온 다른 병사에게 인도되어 우리가 이 마을로 들어온 쪽의 반대쪽 외성문으로 인도되어 갔다. 그 곳에는 그렇지 않아도 없는 집들이 아예 없었고 대신 작은 밭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성 벽 근처에는 커다란 막사가 여러개 지어져 있었고 용병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좀 떨어진 용병 막사보다는 수가 적은 여러개의 막사들이 있었고 그 곳에는 이곳 병사들이 보였다. 우리는 용병들이 보이는 막사쪽으로 인도되어 갔고 그 막사들 가운데 있는 제일 작아보이는 막사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작고 엉성해 보이는 침대 하나가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앙에는 커다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이 성과 산맥을 그려 놓은 커다란 지도가 놓여져 있었고 엄지 손가락 크기 만한 빨간 깃발들과 파란 깃발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탁자 옆에 의자가 없어서 서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두 명의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들 중 키가 더 크고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를 가진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굵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 새로 온 용병이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를 인도해온 병사가 손으로 우리를 가르키자 막사 안에 있던 두 용병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그럼 전 이만..." 병사는 그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리자 자신의 일은 다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 해보이는 걸로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병사가 나가 버리자 그 둘은 아예 우리쪽으로 한걸음 다가와서는 노골적으로 아래위로 훝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병사에게 질문을 하던 그 용병이 모저를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입을 열었다. "난 이 용병대 대장을 맡고있는 크러스티일세." 모저는 자신을 대장이라고 소개한 크러스티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말했다. "모저입니다." "이쪽은 부대장인 박스터지." 크러스티가 자신의 옆에 있는 30대로 보이는 엄청 부시시한 짧은 검은 머리를 가진 사내를 손으로 가르키며 말하자 그가 자신의 손을 모저를 향해 내밀었다. "어서오게."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자신들 끼리 인사를 나누자 크러스티는 막사 바깥쪽으로 나가더니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러댔다. "이봐, 존 어딨나? 가서 존 보고 이리로 좀 오라고 해." 그러더니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와서는 그제야 우리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의 눈은 모저를 볼 때와는 달리 무척 차가웠다. "이 곳은 놀이터가 아니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더니 그 상태로 몸을 돌려 탁자쪽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황당해진 우리는 잠시 멍하니 그 곳에 그냥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가 난 류미르가 뭔가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 부대장인 박스터가 우리의 어깨를 톡톡 쳐서 자신을 보게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 나를 따라 오너라. 마을로 데려다 주마." 그러자 그때 우리를 향해 등을 보이고 있던 크러스티가 말했다. "돈좀 쥐어서 보내줘. 집에 갈때 여비에 보태라고." '우리가 그렇게 가난해 보이나?' 하긴 그럴만도 했다. 이곳에 오면서 우리는 돈 있는 티를 내지 말자고 이야기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옷들 중 가장 오래되어 낡은 여행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아무리 마법의 망토와 부츠를 신고 있었다고 해도 평소 보이게 약간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데다 오랜 여행동안 한번도 빨지 않아서 때가 꼬질꼬질하게 껴 있었던 것이다. 류미르와 세이몬도 사정은 같았다. 단지 그들은 나처럼 마법의 망토나 부츠 같은 것이 없었기에 겉보기만 그럴 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그런데 그건 둘째치고 우리가 지금 쫓겨 나가는 이유가 어리다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이렇게 쫓겨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것 봐요." 나는 우리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크러스티를 향해 소리쳐서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왜 모저는 그냥 받아들이면서 우리보고는 가라고 하는 거죠?" 그러자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할 가치 조차 없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렸다. "우쒸~"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화가나서 다시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박스터가 나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그를 돌아다 보자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여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곳이지. 너희들은 이런 곳에서 죽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지 않니?" 그러자 옆에 있던 류미르가 입을 열었다. "왜 위험하다고 하는거죠? 몬스터 토벌대가 아니라 그냥 방어대잖아요?" "흥, 그건 실력이 방어가 고작이기 때문에 토벌대가 아닌거야. 그렇다고 사람들이 다 무사한줄 알아? 여긴 하루에도 몇십명씩 다치거나 죽는 곳이라고." 평생 우리에게는 입도 뻥끗 안할 것 같이 굴던 크러스티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우린 잠시동안 정말 그가 대답한 것인지 어리둥절 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박스터까지 입을 열었기에 크러스티가 우리에게 말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대장말이 맞아. 그러니 너희들은 그냥 돌아가도록 해라. 여비는 넉넉하게 줄테니까." 번 호 : 13663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01일 21:59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1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1) 그러나 그때 갑자기 요란하게 종을 울려대는 소리와 함께 막사 바까쪽이 무척 소란스러워 졌다. 그리고 그 종소리를 들은 크러스티와 박스터는 우리를 제쳐두고는 급하게 막사 밖으로 뛰쳐 나갔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챈 우리도 슬쩍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용병들이 모두 저마다의 무기를 급하게 챙겨 들고 굳건하게 서 있는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둘러 크러스티와 박스터를 찾아보니 그들은 성벽에서도 위로 솟아 오른 망루에 올라가고 있었다. 모저는 그들의 뒤를 따라 재빨리 발걸음을 재촉했고 우리도 슬쩍 그의 뒤를 따랐다. 그 곳에 있는 용병들은 모두 정신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가 망루로 올라가는 것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사히 망루로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가 망루에 올라갔을 때 쯤 세명의 기사들이 그쪽으로 급하게 뛰어 왔다. 그들은 모두가 30대 중반이나 후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었고 그들 중 가장 값비싸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가장 늙어 보였다. 그들이 뛰어 오자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저마다 그 급한 상황에서도 고개를 까딱여 인사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성에 있는 기사단중 가장 높은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 기사단 중 멋진 은빛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사람이 크러스티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이번엔 얼마나 왔소?" 그러자 크러스티가 성 바깥쪽이자 내 레어가 있는 골짜기 쪽으로 이어진 곳을 손으로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좀 수가 많습니다. 평소첨 오크와 고블린이 섞여 있는데 그 수가 평소보다 2, 30이 더 많은데다 가고일까지 섞여 있습니다. 간간이 놀까지 보이는 군요." 은빛 수염을 기른 기사는 침중한 눈으로 크러스티가 가르킨 산으로 이어지는 언덕들을 바라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아니, 너희들!!' 박스터가 뒤쪽에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소리친 것이었다. 그의 소리와 함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리자 우리는 씨익 웃어주었다. 크러스티가 슬쩍 고개를 돌리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정말 우리를 죽일 것 같은 눈빛을 살벌하게 뿌리면서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이녀석들, 제기랄... 지금은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라. 나중에 내가 볼기를 쳐 줄테다." 이 곳에 있는 것을 허락받은 우리는 이제는 아주 당당하게 성 벽 끝으로 가서 밖을 내다 보았다. 지금까지는 사람들 뒤 쪽에 있느라고 그들이 말하는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우..." 감탄을 터트린 것은 류미르였다. 세이몬도 성 밖에 포진해 있는 많은 숫자들을 보고 꽤나 놀란 눈치였다. 하긴 그동안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몬스터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숫자들과 대면해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나도 예전에 엄마와 할아버지와 함께 여행할 때 레드 드래곤이 있다고 소문난 숲에서 떼거지로 만난 몬스터들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그 때보다도 더 많은 수인것 같았다. 그러나 그 때에는 마법사가 그 많은 몬스터들을 지휘하고 있어서 그들의 종류도 다양했지만 정말 체계적으로 공격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지휘자가 없는 듯 그들은 우왕 좌왕 하면서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의외인 것은 평소 한 지역에 많은 수들이 같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떼를 지어 행동하는 일이 적은 고블린들이 이번에는 왕창 떼를 지어 오크들과 놀들, 그리고 하늘을 날며 가끔 그들을 공격하는 가고일들과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종족들과 무조건 싸우고 있는 것인지 여러 종족들이 뒤엉켜 싸우면서 점점 성벽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얼마 안 있다가는 성벽과 부딧힐 것이고 그러다가는 날개를 가지고 있는 가고일들이 이 성벽 위에 있는 우리들을 공격할 테고 몬스터들도 성을 공격할 형세였다. "궁수부대!!" 그 모습으로 보고 있던 은빛 코수염 기사가 소리 높여 외치자 성 벽 곳곳에서 활을 든 병사들과 용병들이 앞으로 나섰다. "불화살을 준비햇!!" 크러스티의 명령도 뒤를 따랐고 그러자 활을 든 병사들 주위로 두세명의 다른 사람들이 달려와서는 기름에 젖은 활들과 횃불을 가져왔다. 몬스터들이 활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 왔을 때 까지 우리는 모두 초조하게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발사!!" 기사의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서 많은 수의 불화살들이 몬스터쪽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그러나 그 불화살들은 그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지도 못했고 그들은 계속해서 다가와 결국은 성 벽 바로 밑에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 벽 위에서 팔팔 끓인 물들과 돌들이 쏟아져 내렸다. 성 바로 아래에는 뜨거운 물에 데이거나 돌들에 맞거나 아님 다른 몬스터들에게 다쳐서 지르는 비명들이 난무했고 그들이 성 벽에 부딧혀져 울리는 진동이 성 벽 위에 있는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몬스터들은 자기들끼리 뒤엉켜 싸우면서도 필사적으로 피할 곳을 찾는지 굳건한 성문을 보자마자 무조건 달려 들어 두들겨 댔다. 아무리 굳건한 문이라고는 해도 나무로 되어 있는데다 이런 공격이 오래 되었는지 성문 곧곧에는 커다란 상처들이 나 있었다. 물론 성문 안쪽에 모래 주머니들로 장벽들을 쌓아 놓기는 했지만 무식한 고블린들이 쿵쿵 부딧혀 오자 성문은 물론 모래 주머니들 까지 흔들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날아 다니다가 가끔씩 하강하여 몬스터들만 공격하던 가고일들 눈에 성벽 위에 있는 사람들이 뜨인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몬스터들 뿐만이 아니라 성 벽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의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들을 드리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벽 아래의 몬스터들을 향하던 화살들중 몇몇이 하늘을 향했고 병사들과 용병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무기들을 거머 쥐었다. 키에에엑~~ 가고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한번 울릴 때마다 성 벽 위의 사람들이 쓰러졌고 그때마다 누군가가 피를 흘렸다. "제기랄, 저 놈들을 어떻게 좀 할수 없나?" 크러스티는 그런 모습을 보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주먹으로 성 벽위에 내리쳤다. 하지만 내가 봐도 마땅히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우선 지금 가고일을 공격하는 유일한 무기인 화살로는 가고일의 두터운 피부를 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고일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한 무기를 던질 수는 없었다. 만약 던졌다가 잘못해서 성 안쪽으로 떨어질 경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방법이란 활로 가고일의 눈을 정확히 노린다던가 아니면 가고일이 날개짓을 할때 생기는 바람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가고일이 성 벽 가까이 내려 왔을 때 공격하는 방법인데, 이 곳에는 그것을 견딜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무의미한 화살만을 하늘을 향해 계속 쏘아 올릴 뿐이었다. "우아아악~" 다시 한번 가고일이 하강하자 성벽 위의 사람들이 모두 엎드렸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망루 위에 있던 기사 한명이 자신의 검을 거머쥐고 달려 들었다. "안돼. 무모한 공격이야!!" 은빛 콧수염의 기사가 달려가는 기사의 뒤를 쫓아 가면서 소리 쳤지만 앞서 달려간 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가고일이 막 성벽 위를 달려가는 두 사람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아 있던 기사 한 명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달려갔다. "공작각하, 위험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박스터도 재빨리 기사의 뒤를 따라 달려가며 이제 거의 성벽 위로 다다른 가고일의 몸을 향해 자신의 무기를 던졌다. 그의 무기는 길다란 쇠사슬 끝에 큰 낫이 달려 있는 거였는데 그의 낫은 목표를 향해 정확히 날아가 가고일의 발에 상처를 내어 주었다. "맞았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가고일은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며 다시 날아오르더니 이번에는 박스터를 향해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성벽 위에서 뛰어 오르더니 달려드는 가고일을 향해 일검을 내리쳤다. 은빛 콧수염의 기사였다. 그러나 안타깝께도 그의 공격은 가고일이 일으킨 강한 바람에 의해 가고일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무산되어 버렸지만 그 가고일이 박스터에게서 눈을 돌리게 하는 데는 성공 하였다. 그러나 대신 그 기사에게로 가고일의 공격이 쏟아져 갔다. 하지만 그 기사는 뛰어 올랐다가 가고일이 일으킨 바람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시 성벽 위로 떨어졌기 때문에 가고일이 다가 오는데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작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며 가고일이 은빛 콧수염의 남자를 덥치기 직전 내가 소리높여 외쳤다. "매직 미사일!!" 3 클래스에 해당하는 마력이 담긴 커다란 불화살이 정확히 가고일의 머리에 맞아 폭발했고 그러자 머리가 날아가버린 가고일은 폭발에 의해 조금 방향이 비틀려 은빛 코수염 기사의 바로 옆에 떨어진 뒤 튕겨져 나가 성벽 밖의 몬스터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성 밖으로 떨어진 가고일의 시체를 향해있지 않았고 모두 나를향해 놀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마, 마법사?" 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크러스티가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번 호 : 13710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02일 22:10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0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2) 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크러스티가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 또 다른 가고일이 커다랗게 괴성을 지르며 우리가 있는 망루로 달려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류미르가 다급하게 중급의 바람의 정령을 불러 내었다. "윈디!!" 그러자 허공에서 온 몸이 새파란 반인 반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령이 스르르 나타나 곧장 가고일을 향해 달려 들었다. 가고일은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정령을 보고 놀란 듯 했지만 완력에 자신 있는 듯 무작정 부딧혀 들어왔다. 그러자 정령은 그 모습을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더니 (정령의 그런 모습 처음 봤다. ) 오른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 정령의 몸 주위에서 거센 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그 기세를 몰아 가고일을 덥쳤다. 가고일은 자신을 덥쳐오는 거센 바람을 이기기 위해 힘껏 날개짓을 했지만 바람이 더 강했는지 그의 날개가 부러지면서 더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곧장 추락했다. 쿵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몬스터떼 위에 떨어진 가고일은 몇번 꿈틀 대더니 곧 움직이지 않았다. 성 벽 위에서 아무리 용병들과 병사들이 뜨거운 물을 드리 붇고 활을 날리고 돌을 떨겨도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밀려오던 몬스터들은 나와 류미르가 가고일을 한 마리씩 떨어뜨리자 그제야 모두 싸움을 멈춘 채 성벽 위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그때를 노치지 않고 오른 손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아주 거대한 불꽃으로 이루어진 볼을 만들어 보였다. 맹렬한 기새로 뜨겁게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을 본 몬스터들은 얼굴이 창백해 지더니 이제는 사이 좋게 서로 산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흐음, 역시 질보다는 양이라니까..." 그 모습을 본 류미르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못 알아 들은 세이몬이 멀뚱하게 물었다. "뭔 소리야?" "아아, 이게 급이 낮은 마법이거든, 단지 마력을 조금 많이 넣어서 크게 부풀린것 뿐이야. 그런데 저 놈들은 이게 센지 약한지도 모르는채 크기만 보고 놀래서 도망가니까 하는 말이야." 류미르가 세이몬을 향해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있을 때 망루에서 뛰어 내려 성벽 위로 달려갔던 세 기사와 박스터가 돌아왔고 크러스티도 긴장된 눈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굉장한 실력들이군..." 그는 우리를 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세명의 기사들, 그 중에서 은빛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기사는 기쁨에 찬 눈으로 허겁지겁 달려 와서는 류미르의 손을 덥썩 잡았다. "굉장해, 정말 굉장한 실력이야. 도대체 자네들은 누구지? 이렇게 우리 성에 와서 도와주다니 정말 고맙네!" 그러자 크러스티가 나서서 류미르와 그 기사를 갈라 놓으며 우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 아직 이들을 신임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너무 굉장한 실력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곳에 온 다는 것 자체도 이상합니다." '헤에, 저 은빛 콧수염의 남자가 공작이였군?' 크러스티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당신 말이 옳기는 해요. 하지만 만약 이들이 다른 목적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그들의 목적을 이루러 갔을 거라고 생각 되는군요." "하지만..." 크러스티는 뭔가 또 다른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공작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괜찮다고 생각해요. 더욱이 이들 덕분에 오늘은 무사히 넘기지 않았습니까? 이것만 해도 나는 이들에게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이들은 내 곁에 두도록 하지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도록 하구요. 그럼 어떻까요?" 공작이 거기까지 말하자 크러스티는 마지 못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로서도 더 이상 반대할 이유는 없지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요. 그럼..." 공작이 우리를 향해 몸을 돌리려 하자 크러스티가 그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공작은 몸을 돌리려던 것을 멈추고 의아한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일이지요?" "이 자도 같이 데려 가십시요." 크러스티가 가르킨 사람은 모저였다. 모저는 갑작스레 크러스티가 자기를 가르키자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길은 무시해 버린 채 크러스티는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자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용병입니다. 같은 일행이니 같이 데리고 가도록 하십시오." "오, 그런가요? 그럼 그러도록 하지요." 공작이 쾌히 승낙하자 모저는 황당한 얼굴로 얼른 손을 휘저으며 부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크러스티가 그에게 가까이 가더니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성으로 초대 되어 그 곳에서 묶게 되었다. 공작을 따라 그의 성으로 들어가 저녁 식사에 초대 되었을 때 우리는 공작 부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려 묶고 있어 그녀의 가늘고 긴 목을 드러내고 있었고, 여자 치고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너무 가느다란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가 고집은 물론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또한 공작의 10살이 된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소년은 엄마를 닯아 밝은 갈색 머리에 제비 꽃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지녔는데 발그레하고 통통한 볼이 무척이나 귀여운 소년이었다. 공작은 자신의 아들을 무척이나 귀여워 하였다. 성으로 들어 가자마자 자신에게 달려 온 아들을 번쩍 들어 한바퀴 돌려주는 가 하면 아들을 보기만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아서 우리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를 띄우게 만들었고 은연중에 나로 하여금 엄마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를 생각나게 하였다. 저녁 식사 시간에 공작은 우리에 대해 거의 묻지 않았다. 아마도 아까 크러스티가 말한 것을 우리가 들은 이상 그가 우리에 대하여 묻는 것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 처럼 보일 것 같아 배려해 주는 듯 했다. 그래서 류미르는 적당하게 우리는 켈튼 연합국 출신인 형제라고 소개 했으며 레스틴 왕국을 두루 여행하다가 이 곳 이야기를 듣고 한번 와 보다가 모저를 만나 같이 오게 된 것이라고 둘러 대었다 그러나 모저는 식사 내내 굳게 입을 다물고 묵묵히 식사만 했다. 괜히 그만 왕따 시키는 것 같아 간간히 류미르나 내가 말을 걸기는 했지만 그의 분위기 상 말을 걸지 말라는 뜻을 너무나 강렬하게 내뿜고 있었기에 종국에 가서는 아예 신경을 끄고 말았다. 그러나 공작 부이는 그가 신경이 쓰이는지 가끔씩 힐끗 힐끗 보는 눈치였다. 저녁을 먹고 공작은 의례 그렇듯이 거실로 옮겨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였지만 모저가 식사를 끝내자 마자 먼저 피곤하다고 일어서는 바람에 우리도 덩달아 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도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모저가 제일 먼저 말을 해 준 것을 고맙게 여기고 그가 일어나자 마자 같이 일어나서 류미르와 세이몬에게 밤 인사를 건네고 재빨리 내 방으로 돌아왔다. 번 호 : 13771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03일 22:18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6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3) 방에 들어온 나는 누가 들어올 까봐 문을 잠근 후 베란다로 나갔다. 밖은 캄캄했고 저 멀리 성벽에서 피우는 화토불만이 자그마하게 보였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한 뒤 난간에 올라 살짝 발돋움을 하면서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플라이!!" 나의 몸은 두둥실 어두운 허공을 날아 올랐다. 지금 나는 나의 레어로 가는 길이었다. 오늘 낮에 본 몬스터들이 나의 레어가 있는 쪽에서 부터 왕창 몰려온 것과 그들의 이상한 행동들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보통 그들은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될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고 살았으며 또한 거의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벗어난다면 타 종족의 영역을 침범할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된 몬스터들은 영역의 주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몬스터들의 세계에서는 거의 불문율이다시피 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그것도 여러가지 종들이 한꺼번에 이렇게 몰려 온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나의 레어가 있는 쪽에서 부터 나왔다는 것은 더더욱이나 꺼림칙 했다. 나의 레어가 있는 주변에는 원래 몬스터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수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뭐, 내가 100년 동안 동면을 한 뒤로 곧바로 성인식을 치르고 레어를 떠나 와서 근간의 사정은 잘 모르는 데다가 거의 200년이란 세월동안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다가 할아버지가 근처 인간들을 싹 쓸어 버리셨으니 그동안 몬스터들이 꼬였을 수도 있겠지만서도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 다니는 것은 거의 생각 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여행을 하기 위해 내 레어를 떠나면서 집에 있는 것을 싸그리 몽땅 가져갔기 때문에 따로 레어 근처에 결계같은 것을 만들어 놓지 않은 상태였다. 해서 나의 레어 상태가 무척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빠른 속도로 날아 올라 얼마지 않아 골짜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곳은 불빛이 하나도 없는 아주 어두운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실프를 불러 내어 길을 안내하게 했다. 아무리 내가 시력이 좋다고 하지만 그건 인간들과 비교할 때였고 이렇게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 에서는 드래곤일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시력이 낮기 때문에 이렇게 밤 하늘의 별빛만 가지고서는 숲 속을 헤쳐 나갈수가 없었던 것이다. 몸 자체에서 희미한 빛을 발산해 내는 실프를 따라 골짜기 안으로 더욱 더 들어가자 그래도 희미하게 보이는 풍경이 점점 낯익어 보였고 아예 땅으로 내려와 둘러보자 그제야 이 곳이 어디인지 기억이 났다. 나는 실프를 돌려 보내고 나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걸어서 내 레어로 갔다. 그러나 그 곳은 이미 고블린들이 다 차지해서 그들의 살림을 벌여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처음에는 경악과 당황감을 느꼈고 그런 느낌이 천천히 가시자 이제는 그들에게 분노가 느껴졌다. 숨을 천천히 고르면서 분노를 진정하고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하면 맛을 잘 보여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을 때 녀석들이 지딴에는 인간 하나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 했다고 무리 중에서도 덩치 큰 놈들이 몽둥이 하나씩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크르르... 인간....." 그 놈들 중 하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어색한 인간어로 말하자 나머지 고블린들이 각자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마 그 녀석이 대장인것 같았다. 그녀석이 혼자 앞으로 걸어 나오자 나는 이녀석이 꽤나 지능이 높고 현명해서 나를 공격하기 전에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물어보려고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넌... 내가.... 잡느은다...." 나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 했다. "이노무 시키가.... 감히 고블린 주제에..." 나는 나를 주저앉게 할 뻔한 고블린을 정면으로 노려 보면서 서서히 내 몸속에 갈무리 해놨던 드래곤의 기운을 뿜어내었다. 그리고 드래곤 피어를 담아서 한자 한자 천천히 내 뱉았다. 그러자 그 곳에 있던 고블린들이 부들부들 떨더니 자신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무기들이 땅에 툭툭 떨어진 것도 모르는 채 공포와 경악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한번 쓰윽 훝어보자 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놈들은 허겁지겁 땅에 엎드렸다. 그러나 맨 처음 내가 지그시 바라봐준 고블린의 대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서 부들부들 떨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대장 녀석에게 다가가 그의 안면을 발로 한번 걷어 차 그를 뒤로 한바퀴 구르게 해준 뒤 그의 가슴을 바롤 지그시 밟아주며 말했다. "이 간뗑이가 부은 놈들이.... 감히 내 집에다가 지들 살림을 차려? 네놈들은 오늘 주우거써~!!" 그러자 내 발 밑에 깔려 있던 고블린이 부들 부들 떨려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입을 필사적으로 열었다. "제발.... 제발... 자비를...." "호오, 그래도 지가 대장이라고... 흐음, 그래도 대단한걸? 비록 내가 드래곤 피어를 아주 조금 썼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입을 열다니 말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리를 구하려고 하는 그 녀석의 노력에 쬐끔 감동을 받아 그의 가슴에 올려 놓았던 발을 치웠다. "야, 너네 무리가 이 곳에 있는 무리들 중에서 강하냐?" "제일... 강한건.... 가고일...." "가고일? 아, 아까 낮에 봤었지? 그래 그 놈들은 어디 있는데?" 그러자 그 고블린은 내 레어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더듬 더듬 말했다. "아, 안쪽에..." "뭐시라? 내 집에 놈들이 있단 말야? 아쭈구리." 나는 그 놈들을 제쳐두고는 내 레어로 성큼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그 안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고블린들이 자신들의 물건도 챙기지 못한 채 재빨리 튀어나와 나에게 길을 열어줬다. 그리고 내가 지나간 뒤에 남은 고블린들은 슬금 슬금 숲속으로 도망갔지만 나는 일부러 모른척 했다. 레어 안은 녀석들이 살았다는 증거를 단정적으로 보여 주듯 악취가 코를 찔렀다. "우쒸, 젠장할...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미리 집단속을 해놓고 갈껄..." 코를 부여 잡고 투덜투덜 대며 걸어가자 내가 평소 잠을 자던 내 침실, 즉 동굴 속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런데 그 곳에는 가고일들이 떼를 지어 자신들의 날개를 접고 그 날개 속에 고개들을 파 묻고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아쭈구리, 이것들이..." 나는 그 모습에 열받아서 농구공보다 더 큰 파이어볼을 형성하여 공간의 중앙을 향해 던졌다. 갑작스런 커다란 불꽃과 폭발음에 단잠을 자고 있던 가고일들은 놀라서 저마다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날아 오르는 바람에 레어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놈들 중에서는 잠이 덜깬 채로 날아 오르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고 밑으로 꼬꾸라지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지 딴에는 적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자신의 동료와 싸우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녀석들은 내가 서 있는 레어 입구 쪽으로 날아왔기에 나는 재빨리 실드를 쳐서 그들을 나에게 부딧히게 하지도, 그리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였다. 가고일들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딧혀 나가지도 못하고 우왕 좌왕하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런데 그때 그들 중 한 녀석이 나를 발견 했는지 커다란 괴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그 녀석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딧혀 그냥 꼬꾸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다른 녀석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지들은 괜찮을 줄 알았는지 녀석이 고꾸라지자 마자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나에게 달려 들다가 내가 친 바리어에 부딧혀 튕겨 나가는 녀석들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더 좋은 생각이 들어 내 레어 밖의 허공으로 공간이동 하는 동시에 내가 친 실드를 모조리 사라지게 만들었다. 내가 허공에 몸을 띄우자 마자 내 레어 안에서는 커다랗게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에 가고일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소리는 무척이나 요란했고 덕분에 그 소리를 들은 숲 속에 있던 몬스터들 까지 일어나서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주위가 정말 소란스러워져 버렸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나는 유유히 허공에 떠 있다가 더이상 레어 안에서 나오는 가고일이 없자 천천히 땅으로 내려가 느긋하게 레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레어 안에는 아까의 고블린들도, 단잠을 자던 가고일도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단지 녀석들이 있었다는 증거만은 남아 있어야 겠다는 듯 놈들의 깃털들과 녀석들이 주워다 놓은 금속의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쳇, 청소좀 해야 겠군..." 나는 내 몸 주위에 단단한 실드를 형성한 뒤에 강한 마력을 넣은 마법을 실현 시켰다. "윈드 스톰!!" 강력한 회오리 바람이 내 주위에서 형성 되어 레어 안을 휘몰아 치면서 단 하나뿐인 입구를 통해 밖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레어 안에 있던 수많은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함께 가지고 나가 버렸다. 그제야 조금 깨끗해진 모습에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직 냄새가 가시지 않은 것을 느끼고는 살짝 인상을 쓰며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워터 사이클론!!" 거대한 물줄기가 내 손으로 부터 생성되어 레어 안을 휘감으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물론 이 마법은 제대로만 하면 정말 엄청난 대폭풍을 일으키지만 내 레어를 날려버릴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아주 작게 일으켰고 덕분에 굵은 물줄기가 레어 안을 한번 쓸어주고나서는 밖으로 나가는 정도에서 그쳤다. 덕분에 레어 안은 물에 완전히 젖어 버렸지만 그래도 냄새는 나지 않아서 나는 만족감을 느끼고는 나도 밖으로 나왔다. 레어 앞쪽 공터는 아까 내가 사용한 마법의 영향을 받아 엉망 진창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숲쪽에서는 아직도 소란스런 소동이 끝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괜히 미안함을 느껴 그쪽을 향해 한번 헤쭉 웃어 주고는 레어 주위를 돌며 결계를 펼쳤다. 아무도 못들어가고, 어떤 물리력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며 7 클래스의 마법으로는 깨트리지 못하는, 게다가 동굴이 아닌 바위 투성이인 언덕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약간의 환상 마법까지 곁들였다. 결계를 다 만들고 나자 이제 나의 레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대신 많은 바위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는 언덕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으로 가기 위하여 날아 올랐다. 그런데 성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질 때 나는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차, 왜 그렇게 몬스터들이 모였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내 레어의 엉망인 모습에만 신경 쓰느라고 딴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에이, 몰라, 몰라. 까짓거 어떻게는 되겠지 뭐..."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중얼 거리며 내 방의 베란다로 조심스레 접근 할 무렵 나는 누군가가 그 옆방의 베란다에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응? 모저네? 아직 안잤나?" 그는 베란다의 난간에 걸터 앉아서 멍하니 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구... 이렇게 가다간 들키겠군? 차라리 공간 이동을 해야 겠다." 그런데 그때 모저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공간이동 하려던 것을 멈추고 숨죽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밤 하늘을 올려다 보는 대신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던 기타를 손으로 어루 만지더니 연주를 하려는 듯 자세를 잡았다. "호오, 연주하려나 보네? 그럼 노래만 듣고 들어가야겠다." 모저의 손이 기타의 줄 위로 올라가자 곧 이어 기타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후에는 모저의 멋진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을때 그대는 사랑으로서 다가왔습니다. 그대의 사랑의 힘으로서 저를 가능케했고 그대의 사랑은 저를 지탱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의 이름으로서 당신을 떠나려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어요? 비록 그대는 힘들겠지만 저에겐 행복을 줍니다. 제가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저에게 사랑을 가르켜 준건 당신이니까요. 사랑의 이름으로서 그대의 품안에 행복만이 있기를 - 이 주 행 - 번 호 : 13866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05일 22:22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3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4) 다음 날, 공작과 우리 일행은 아침을 먹고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의 막사에는 용병 이외에도 이 성의 병사들의 막사도 있었는데 그 막사의 지휘를 담당하고 있는 기사는 예전에 우리가 망루에 있을 때 공작과 함께 올라 왔던 기사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작이 성벽 위로 뛰어 내려가자 자신도 같이 뛰어 내려갔던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기사였는데 그가 앞으로 나와서 공작을 마중했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절제된 동작으로 거수 경례를 하는 그의 행동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지만 잠을 잘 못 잤는지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잠을 못 잤는가? 에렌경?" 그의 인사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공작은 그의 눈이 벌겋다는 것을 발견 했는지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에렌경이라고 불린 그 기사는 황급히 눈을 비비면서 대답했다. "아, 예. 어제 몬스터들이 평소와는 달리 밤중에 소동을 벌였기 때문에 모든 병사들이 밤 새도록 대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몬스터들이?" 공작이 의안한 듯이 묻자 그는 다시 차렷 자세를 유지하고는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어제 한 밤중에 갑자기 소란스러워 지더니 가고일로 보이는 몬스터떼가 밤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숲속이 무척 시끄러웠습니다. 아마 무슨 소동이 일어난 듯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 벽으로 내려오는 몬스터가 없어서 저희와의 싸움은 없었습니다." "그런가? 도대체 무슨 일로..." "그건 저희도..." 공작이 턱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중얼 거리자 에렌경은 자신에게 질문한 줄 알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대답을 해 줄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 끝을 흐렸다. 그러자 공작은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아냐, 아냐. 그냥 혼잣말을 한 거니 너무 신경쓰지 말게. 한 밤중에 숲속에서 일어난 일이니 그런 것 까지 알수 없지 않나?" 그들이 대화 할때 나는 괜히 쿡쿡 찔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했다. 하지만 그게 좀 어설펐는지 류미르와 세이몬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도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서 아마 그들이 봤을 때도 엄청 어색한 미소였을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오늘은 어쩌면 몬스터들이 숲을 나오지 않겠군. 밤에 그렇게 소동을 벌였는데 설마하니 낮에도 소동을 벌이겠는가?" "아, 예. 그래서 성벽 위의 병사들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쉬게 했습니다. 아무래도 평소같은 대기 상태로 있는것은 무리일테니까요." "그래, 잘 했네..." 하지만 공작의 칭찬이 무색하게도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망루에 달려 있던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놈들이 온다아아아~~~" 새파랗게 질린 에렌경은 재빨리 자신들의 수하들을 향해 병사들을 깨우게 했고 공작을 위시한 우리들은 망루로 달려갔다. "젠장, 저놈들은 잠도 없나?" 에렌경과 마찬가지로 벌겋게 충혈된 눈을 잔뜩 찌푸리며 망루 위에서 밑을 바라보던 크러스티는 나무로 만들어진 난간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역시 잠을 못자 퉁퉁 부운 눈에 걱정스러움을 가득 담은 채 서 있던 박스터는 달려 오는 공작으로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작은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재빨리 난간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 보았다. 나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몬스터들의 숫자가 어제보다 많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싸움도 조금 더 격렬해졌다. "젠장, 어제 무슨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제보다 훨씬 숫자가 많아요. 게다가 하늘에 떠 있는 가고일도 어제의 두배나 됩니다." 크러스티가 공작에게 하는 말에 고개를 하늘로 들어 보니 과연, 어제는 겨우 10마리가 될까 말까한 가고일들이 오늘은 10마리가 훨씬 넘어 보였다. 성벽 위에서는 헐래벌떡 병사들과 용병들이 올라 왔지만 너무 다급한 나머지 어제처럼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우왕좌왕 하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 뒤에서 기사들이 큰 소리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지만 워낙 몬스터들의 비명 소리가 커서 그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하아, 이것 참..."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류미르와 세이몬에게 휙 시선을 돌렸다. "얘들아~~" 류미르와 세이몬은 의아한 듯한 눈길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헉' 하는 신음같은 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왜그러는 거야? 내가 뭐라고 했어?" 내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하자 류미르가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말했다. "아린, 미리 말해두는데 왠만하면 우리는 빼주라~" "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자 세이몬이 툴툴 거렸다. "니가 그런 눈을 하는거 보면 뭔가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하는 거잖아?" "호오, 눈치도 빠르셔라. 역시 내 일행이야. 척하면 삼천리라니까..." 그러자 류미르가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발 빼줘." 세이몬도 얼른 류미르의 옆으로 다가서며 고개를 끄덕였기에 나는 말로써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쩔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너희들이 싫다면 하는 수 없지." 그러면서 그들에게 빙글 등을 돌리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난간쪽으로 걸어와서 밑을 내려다 봤다. "헤에, 오늘은 조금 고전을 면치 못하겠는걸?" 세이몬이 몰려오는 몬스터와 성벽위의 우왕 좌왕하는 병사들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중얼 거리자 류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확실히 어제보다 저녀석들 몰려오는 폼이 더 격렬해." 나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은근 슬쩍 난간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윈디!!" 그들을 향해 손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내 손에서부터 형성된 강력한 바람이 그 둘에게 쏟아져 가더니 그들을 살짝 공중에 띄워 성벽 밑으로 날려 버렸다. "우아아악, 아리이이이인~~~!!" "우갸갸갹, 이게 무슨 짓이야!!" 그들은 요란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리더니 그들 나름대로의 실력으로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더니 아직 망루에 있는 나를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우쒸, 갑자기 무슨 짓이야?" "다치면 어쩌려고?" "흥, 네놈들 실력을 빤히 아는데 뭘 그래? 그나저나 놈들이 몰려오는데 그냥 그렇게 서 있을거야?" 나의 장난끼 어린 말에 그들은 황급히 나에게서 부터 자신들에게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떼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싸울 태세를 취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왠지 얼굴이 따끔 따끔거리는 걸 느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망루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황당함과 경악이 담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크러스티는 얼마나 놀랐는지 입을 열어 뭐라고 말을 하고 싶어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아 붕어처럼 뻐끔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들에게 한번 실없이 씨익 웃어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성벽, 아니 이제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향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두 손을 내밀어 그들을 향해 쭉 폈다. "버스트 프레아!!" 번 호 : 13885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06일 21:08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1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5) 나의 마법으로 형성된 수십개의 불덩어리가 몬스터들을 향해서 날아갔다. 이번에도 나는 그들을 아예 전멸시킬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마력을 최대한 자제하고 보기에만 커다랗게 만들어서 날렸다. 그 불덩어리들이 몬스터들 바로 앞에 떨어지며 커다란 폭음을 내자 몬스터들은 더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주춤 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불꽃과 먼지가 가라앉자 다시금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날아오는 마법이 두려웠던지 맨 앞쪽에 있는 녀석들은 필사적으로 안 밀려가려고 버둥대었다. 나는 다시 그들을 향해 마법을 날리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들려오는 물음에 멈칫했다. "무슨 짓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크러스티가 무척 화가 나서 벌개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가요?"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묻자 그는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 한다고 생각 했는지 더욱 더 서슬이 시퍼래져서는 입을 열었다. "네 친구들을 죽일 셈이냐?" "엥?" 여전히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 거리자 크러스티는 이제는 아예 자신의 검을 빼들었다. 그는 정말 오래되어 보이는 바스타드 소드를 가지고 있었다. 손잡이 부분은 그 검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 여기저기 흠집이 생겼으며 손잡이 끝에 달려 있는 약간 긴 가죽끈은 낡아보였다. 그러나 검날만은 여전이 날카롭게 서서 새파란 광채를 내뿜었다. 그가 검을 뽑아들어 나에게 내밀려고 그러자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걸 원치 않았는지 박스터가 그런 그를 말리며 나섰다. "왜 네 친구들을 성벽 밑으로 밀었지? 몬스터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박스터의 표정도 별로 좋지않았고 그에 비례하여 그의 목소리도 차가웠다. 하지만 그제야 그들이 왜 분노하는지 알게 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들이 이정도에 죽을 것 같으면 내려보내지도 않았어요." 나는 가볍게 대꾸해주며 다시 마법을 날리기 위해 몬스터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또 다시 박스터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네 실력 정도면 그들이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보는데?"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해 주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그 전에 성문이 부서져 버릴 거예요. 마법을 성문 바로 앞에 날릴수는 없잖아요? 저들은 성문을 지키라고 내려보낸 거라구요. 며칠동안의 공격에 의해 성문이 많이 약해졌잖아요? 자, 이젠 대답이 되었나요?" 망루는 성문 바로 위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떨어지면 바로 성문 앞에 도착했기에 나는 그들을 성문 앞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그냥 밀어 떨기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대꾸는 바라지 않았으므로 그 즉시 고개를 돌려 밑을 내려다 봤다. 그들이 나를 방해하는 바람에 벌써 몬스터들은 류미르와 세이몬의 코앞까지 다가와버렸기에 벌써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류미르는 바람의 중급 정령과 불의 중급 정령을 각각 하나씩 불러 내고는 자신도 단검을 들고 몸을 날리고 있었고 세이몬도 온 몸에 검은 마기를 풀풀 날리면서 손을 뻗고 있었다. 뭐, 그들이 이 정도 가지고 쩔쩔맬 실력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때문에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살짝 미소를 띄운 채로 느긋하게 손을 들어올려 몬스터떼의 중앙을 향했다. "윈드 스톰!!" 강력한 회오리 바람이 그들을 덮쳐갔다. 녀석들은 강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바람의 폭풍을 보고 놀라서 서로 앞을 다투어 달아나려고 했지만 워낙 그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또한 그들도 서로 싸우고 있었더 터라 몸을 피하는 녀석들 보다는 바람에 날려 하늘 높이 날아가는 녀석들이 더욱 더 많았다. 그러나 그때 그 소용돌이를 피해 나를 향해 가고일 두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 들었다. 쿠어어어~~ "흥, 바보같은 놈들..." 나는 그 모습을 코웃음을 치며 바라보다가 가고일과 나와의 거리가 거의 10m 정도 되었을 때 여유있게 멋까지 부려 손가락을 살짝 부딧끼며 중얼거렸다. "매직 미사일!!" 두개의 거의 어른 팔뚝만한 불화살이 내 주위에서 생겨났다. 내가 가고일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자 불화살들은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곧장 놈들의 머리를 향해 날라갔다. 가고일들은 자신들의 눈앞으로 다가오는 불화살을 보고 얼른 몸을 피하려고 날개를 퍼득거렸지만 나에게 달려 들던 속도가 있었던지라 피하지는 못하고 겨우 제자리에 멈췄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두 가고일이 사이좋게 얼굴 중앙에 화살 한대씩을 맞고는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세이몬과 류미르의 분노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우아아악~~~" "우쒸, 아린!! 어따가 떨기는 거야?" 나는 아차 싶어서 얼른 밑을 내려다 보자 그들은 벌써 하늘에서 떨어지는 가고일의 시체를 가뿐하게 피하고서는 망루 위에서 상체를 내밀어 밑을 내려다 보는 나를 향해 분노에 찬 시선을 보냈다. "아하하하, 미안. 깜빡 했어~~" 나는 그들에게 실실 웃으면서 두 손을 모아 머리위로 올려 사과했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류미르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면 용돈 인상이야!!" "뭐? 아니 무슨 소리야?" 나는 인상을 팍 쓰며 물었다. "네가 잘못한 걸 사과하는 성의는 보여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용돈을 금화 5개로 올려줘어~~" 그는 나를 올려다 보면서 잘도 몬스터들의 공격을 요리 저리 피하며 소리쳤다. "웃기지 마아~~ 금화 3개면 엄청나게 많은 돈 아냐? 그런데 거기서 뭘 더 바래?" 그러자 이번에는 마력으로 그 주위의 몬스터들을 다 쓸어 버리며 세이몬이 소리쳤다. "용돈 인상, 용돈 인상!! 그것도 자주 받는 게 아니잖아? 가끔 주면서 뭘 그래? 올려 줘어~~" "시끄러, 그것도 많은 거라고. 그리고 내가 숙박비랑 식비를 다 대잖아. 그런데 뭘 더 바라는 거야?" 내가 주먹까지 휘둘러 가며 소리치자 세이몬이 능글 맞게 대꾸했다. "그럼 우리 그냥 올라간다? 이거 처리 안하고." 그러자 류미르도 즉시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던 손을 멈추고는 단검을 검집에 집어 넣는 시늉을 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아쭈구리? 그냥 올라오면 가만 안둘껴!!" "헹, 가만 안두면 어쩔껀데? 우리가 언제 여기 온다고 했었냐? 네가 그냥 밀어서 떨겼으면서..." 류미르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면서 코웃음을 쳤다. "젠장, 알았어. 그럼 30셀 올려 줄께." "웃기지 마. 금화 5개!!" 류미르가 팔 하나를 풀더니 검지 손가락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얌마. 금화 다섯개가 뉘집 개 이름인 줄 알아? 자꾸 그러면 아예 안줘버린다?" "그럼 금화 4개하고 50셀!!" 그 옆에서 세이몬이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뛰어 올라 마치 펌프를 하는 것 처럼 이리 저리 폴짝 폴짝 몬스터 머리 위로 뛰어 다니면서 외쳤다. "시꺼!! 그냥 금화 3개에 50셀 !!" "우우~~ 너무 짜다. 그럼 마음 넓은 우리가 양보 해서 금화 4개로 봐줄께!!" 세이몬은 여전히 폴짝 폴짝 뛰어 다니면서 장난기가 가득 담긴 야유를 퍼부우며 외쳤다. "우쒸, 이것들이... 너희들 그러면 다음부턴 싸구려 여관에서 제일 싼것만 시켜 먹는다?" "흥, 그러면 넌 그걸 안 먹냐? 괜히 구두쇠 같이 굴지 말고 금화 4개로 낙찰을 보자구. 우리도 금화 1개를 양보 했잖아?" 류미르가 다시 단검을 뽑으면서 선심 쓰는 것처럼 외쳤다. "제기랄, 알았어. 대신 한 마을에서 용돈은 딱 한번 뿐이야. 알았어?" "오케이!!" 류미르와 세이몬은 기분 좋게 합창으로 대답 한 뒤 서로 마주보며 기분 좋게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괜히 뱃속에서 뭔가가 꼬이는 듯한 기분을 느껴 확 헬파이어를 날려버릴까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물러갑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살펴보니 정말 놈들은 다시 숲속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칫, 더 놀다 갈것이지... 얘들아, 놈들이 간단다. 그러니까 그만하고 올라 와!!" 나는 괜히 아쉬워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시 밑을 향해서 외쳤다.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은 내 말이 끝나는 동시에 자신들의 재주껏 뛰어 올라 망루 위로 올라왔다. "아, 오랜만에 심하게 운동을 좀 했더니 온몸이 쑤시는군..." 류미르가 기분 좋은 얼굴로 기지개를 피며 말하자 세이몬도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한바탕 뛰니까 기분은 좋네. 요즘 추워서 잔뜩 움츠리고 다녔었는데..." 번 호 : 13921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07일 21:55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7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6) 그 후 일주일...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횟수는 점점 적어졌으며 또한 몰려오는 숫자도 줄어들어 일주일이 지난 뒤에는 서로 다른 종족끼리 왁작지껄하게 몰려 내려오는 일은 사라졌다. 더욱이 하늘 높이 떠오르는 가고일을 발견하는 횟수도 점점 적어져 모두들 안도하고 긴장을 늦추는 기색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공작의 제안에 의하여 특별히 돌발 상황이 발생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는 한 공작을 따라 매일 성벽으로 나가는 대신 성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날이 점점 추워진데다 몬스터들의 위협이 점점 사라지는 듯하자 이 마을을 떠나는 용병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성 벽 근처에 만들어 놓은 용병들을 위한 막사와 이 곳 병사들을 위한 막사가 사라지고 이곳을 떠나지 않은 용병들은 성에 있던 병사들을 위한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다. 원래 그 병사들을 위한 기숙사는 성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해 존재하는 거였지만 이곳 병사들은 다 이 마을 출신이어서 대부분 마을에 집이 있었고 게중에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날 당번을 제외한 병사들은 모두 집에서 출퇴근하는 격이어서 그 병사들을 위한 기숙사는 거의 비어있었다고 했다. "흐음, 그렇다면 성벽 근처에 있던 병사막사가 사라진 것도 그 곳에 있는 병사들이 다 집으로 갔기 때문이군요?" 지금은 저녁시간... 우리는 성의 커다란 식당에서 공작 내외와 그의 외아들, 그리고 모저와 같이 저녁식사를 들고 있었다. 모저는 우리와 함께 계속 성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공작과 함께 다녔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만나는 것은 대부분 공작과 함께였다. 공작이 저녁을 먹으면서 현 상황을 친절히 설명해주자 류미르가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질문 하자 공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위급 상황은 넘긴 것 같으니까 병사들을 성벽 근처에 붙들고 있을 이유는 없지않은가. 게다가 이제 추워지니 계속 막사에 있는 것도 힘들고 말야..." "그럼 용병들은 몇명이나 남았어요?" 이번에는 세이몬이 물었다. "아, 지금 현재 20여명이 남았어. 아무래도 위급 상황이 넘어갔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니까 그들은 남아달라고 했지..." "흐음... 그렇군요..." 류미르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일때 문득 걱정스런 기색이 완연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형들은 어떻할꺼야? 형들도 갈꺼야?" 고개를 돌려보니 공작의 외아들 녀석이 보라빛 눈동자에 불안한 기색을 가득 담고 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녀석의 이름은 로버트 막슈타인 그레놀드. 이 성에 자신의 또래가 없다 보니까 그래도 가장 나이차가 적은 우리를 무척 따랐던 것이다. 더욱이 류미르와 세이몬도 녀석을 귀찮아 하지 않고 잘 데리고 놀았기 때문에 현재는 무척 친해져 있어서 우리가 가는 곳 어디나 항상 같이 다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특히 세이몬은 이 애를 무척 좋아해서 녀석이 공부 할 때도 옆에서 같이할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는 공작 부인하고도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로비, 아버지가 말씀 하시는데 끼어들면 못써요." 아들 옆에 앉아 있던 공작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녀석의 애칭을 부르면서 말하자 아직도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로비가 자신의 어머니를 돌아 보면서 머뭇 머뭇 말했다. "하지만, 형들이 가는 건 싫은데..."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공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의 아들을 향해 말했다. "걱정 말거라. 사실 오늘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것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형들에게 여기 계속 있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로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이죠, 아버지?" "그럼,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 하는 거 봤냐?" "아뇨, 헤헤헤..." 공작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끗하자 로비는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기대에 차 반짝 반짝 빛나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기 계속 있을꺼지? 응?" 그러자 공작도 우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용병들을 그렇게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자네들이 있어주었기 때문에 할수 있었던 거네, 자네들만 있으면 정말 든든하니까. 어때, 있어주겠나?" 그러자 즉각 세이몬과 류미르의 시선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덕분에 공작을 위시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선까지 날아왔기에 나는 얼굴이 따끔 따끔 거리는 걸 느끼며 입을 열어야 했다. "에... 뭐, 저희도 겨울을 지낼 곳이 필요했거든요. 용병들이 떠나길래 이곳 일이 끝난 줄 알고 이 추위를 어떻게 뚫고 가나,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그렇게 제안해 주시니 저희로써는 정말 고마운 일인데요." 그리고는 잠시 입을 다물고 뜸을 들인 뒤 로비의 불안한 얼굴을 향해 한번 씨익 웃어 주고는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봄이 올때까지는 계속 머물러 있겠습니다." "야호~~!!" 내 말이 끝나자 마자 로비가 벌떡 일어나 내가 아닌 세이몬에게 달려 들어 그의 목에 매달려 소리를 질렀다. "저런, 저런, 로비. 그러면 못써요, 형 식사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니?" 공작 부인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세이몬에게 매달려 있는 로비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공작이 껄껄 웃으면서 손을 내저으며 그런 부인을 말렸다. "껄껄껄, 그냥 나두구료, 부인. 좋아서 그러는데 보기 좋지 않소?"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는 뭐 사람이 아니요? 항상 예의를 따지는 것도 귀찮은 일이라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게 아니겠소?" 공작 부인은 그래도 탐탁치 못한 얼굴로 세이몬 쪽을 바라보다가 세이몬이 귀찮아 하는 표정이 아니자 안심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럼 당신은 어쩌겠소? 내 욕심대로면 당신도 남아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요." 공작이 이번에는 모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막 포크를 입으로 가져 가려던 모저가 다시 포크를 내려 놓고는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만..." "무슨 소리요? 그동안 몬스터들이 몰려 올때 당신이 성 바깥으로 나가서 보여준 활약이 있는데 어떻게 한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소? 어떻소, 당신이 만약 머물러 준다면 용병 대장 크러스티와 같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데.... 아아, 비록 당신이 평소에 받을 돈보다는 적겠지만 말이요." 그러자 모저는 슬쩍 공작 부인과 그의 아들 로비를 둘러 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일이 없어서 이쪽으로 온 것이었으니까요. 어차피 지금 여기를 떠나 보았자 겨울이라 마땅한 일도 없을테니 저로써야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그러더니 다시 접시로 시선을 돌리고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공작은 그가 그러던지 말던지 신경쓰지 않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거참 다행이구료. 그렇다면 나도 정말 안심이오." 번 호 : 13962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08일 22:41 등록자 : LODEMP 조 회 : 133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7) 다음날 아침, 밤새도록 내린 눈에 의하여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게다가 아침이 되어서도 그치지 않고 계속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와, 눈이다. 눈~~!!" 로비가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 나가려고 하자 공작 부인이 먼저 그를 제지했다. "아침도 안먹고 어딜 가려고? 아침 먹고 옷 든든하게 입고 형들이랑 같이 나가서 놀아요." "예!!" 평소 같으면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을 테지만 눈이 왔다는 기쁨에 그런 감정도 싹 사라졌는지 로비는 힘차게 대답했고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 모습을 보는 모든 이들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우리는 로비를 위하여 최대한 빨리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벌써 성 앞뜰에는 시종들에 의하여 사람이 다니는 길목은 눈이 치워져 있었다. 하지만 넓은 정원에는 길을 제외한 나머지 곳의 눈은 치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새하얀 벌판에 제일 먼저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형아, 눈사람 만들자. 응?" 로비는 가장 절친한 세이몬의 팔을 부여 잡으면서 졸라댔다. 그러자 세이몬은 멀뚱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아린, 눈사람이 뭐냐?" "아, 그건 애들이 장난삼아 만드는 건데, 커다란 눈덩어리를 두개 만들어서 하나를 땅에 놓고 다른 하나를 그 위에 올려 놓은 다음 위에 있는 눈덩이에 눈, 코, 입을 만드는 거야." "그래? 그럼 그 눈덩어리는 어떻게 만드는 건데?" 그러자 로비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헤엥, 형은 그것도 몰라? 봐, 이렇게 작게 눈을 뭉쳐서..." 로비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두 손 가득히 눈을 모아서 꼭꼭 눌러 뭉쳤다. "됐지? 이걸 눈 위에 굴리는 거야. 그럼 아주 커져." 그러면서 작은 눈덩어리를 눈 위에 올려 놓고 굴리기 시작 했다. 처음에는 잘 굴러가지 않고 덩어리도 안 만들어지다가 곧이어 서서히 눈이 묻어 지면서 덩어리도 커졌다. "뭐해, 형? 내가 머리를 만들 테니까 형은 몸통을 만들어." 그러자 멍하니 로비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세이몬은 퍼뜩 정신이 든 듯이 허둥 지둥 자신도 눈을 뭉쳤다. "응, 응. 알았어." "뭐야, 세이몬. 옆이 찌그러 졌잖아. 옆으로 굴려, 옆으로..." "이쪽으로?" "응, 그렇지... 아 조금 더 옆으로, 응, 그래. 그렇게..." 류미르는 세이몬이 눈덩어리를 굴리는데 옆에서 따라가며 이것 저것 코치를 해주었다. 평소 같으면 류미르의 참견에 벌컥 화를 낼 세이몬이었지만 오늘 따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르켜주는 대로 순순히 따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다가 몸을 돌려 성의 부엌으로 가서 그들이 눈덩어리를 다 만든뒤 코와 입 등을 만들 재료를 얻어서 나왔다. 그때쯔음에는 그들도 눈덩어리를 다 만들어서 로비가 만든 작은 눈덩어리를 세이몬이 만든 큰 눈덩어리 위에다 올려 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류미르가 바닥에서 눈을 약간씩 집어 올려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지지 않게 그 틈새에 눈을 꼭꼭 붙이고 있었다. "오, 내가 때를 잘 맞췄군.." 나는 그렇게 외치며 그들에게 다가가 검은 숱덩어리 두개를 눈의 위치에 끼우고 홍당무를 코가 있는 곳에 뾰족한 끝이 보이게끔 끼웠다. 그리고 길다란 막대기를 살짝 구부려 부드러운 곡선을 만든 뒤에 입을 만들었다. "아이구, 잘 만들었네요. 그럼 제가 조금만 도와드릴까요?" 우리가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마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딘가를 갔다 오더니 다가와 낡은 빗자루 두개를 몸통에 꽂고 다 낡아 떨어진 모자를 눈사람 머리에 씌워 주었다. "와, 멋있다!!" 로비가 그 모습을 보며 펄쩍펄쩍 뛰며 좋아 하였다. 나는 왠지 그의 그런 모습에 은근 슬쩍 장난끼가 생겨 눈을 작게 뭉친다음 그에게 다가가 갑작스레 그의 옷 속에 가지고 있던 눈 뭉치를 집어 넣었다. "앗, 차거~~!!" 로비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옷 속에 들어간 눈 뭉치를 빼내려 몸을 비틀었다. "우, 차거, 차거, 차거..." "푸하하하, 차갑긴 뭐가 차가워? 시원하지?"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것도 시원 하겠다?" 내가 로비를 향해 깔깔대고 웃자 갑자기 세이몬의 목소리가 들려 오면서 눈뭉치가 날아왔다. 그러나 나는 여유 있게 슬쩍 옆으로 피하면서 말했다. "헹, 그정도로 나를 맞출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서 나는 세이몬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윈디!!" 그러자 가벼운 바람이 일어나 눈을 들어 올려 세이몬에게 흩뿌렸다. "우왓, 차가워..." "어이, 어이, 눈싸움에 마법을 쓰면 어떻게 해? 이렇게 해야지." 류미르는 낄낄 웃으면서 어느새 뭉쳐 놓았는지 여러개의 눈덩어리를 집어 들고는 하나를 나에게 던졌다. "받아랏!!" "아쭈구리, 좋았어. 네 도전을 받아주지.." 나는 재빨리 몸을 숙여 눈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때 공교롭게도 로비가 던진 눈덩어리가 내 등어리를 직격했다. "우와, 맞았다!!" "로비, 너어~!!" 나는 뭉친 눈덩어리를 류미르에게 던지는 대신 로비에게 던졌다. "우아아악~~!!" 로비는 재빨리 쪼르르 달려가 세이몬의 등 뒤로 숨었다. "비겁하다, 너. 남의 등 뒤에 숨는게 어딨냐?" "뭐 어떠냐?" 내가 소리치자 세이몬이 지지않고 소리치며 나에게 눈 뭉치를 던졌다. 그러나 내가 슬쩍 피하는 바람에 나에게 눈덩어리를 던지려고 몰래 내 뒤에 와서 서 있던 류미르가 맞고 말았다. "좋았어. 다 덤벼. 내가 눈싸움의 진수를 보여 주겠다." 류미르는 세이몬에게 눈덩어리를 던지며 외쳤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들의 눈싸움은 점심때가 다 되어 로비의 유모가 밖으로 나와서 우리들을 부를 때까지 계속 되었다. "도련님, 이제 그만하시고 식사 하세요. 거기 세분도 그만 하시고 들어오세요. 옷이 다 젖었잖아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그러자 지쳐서 헥헥 거리고 있던 로비가 - 녀석은 지기 싫어서 헥헥 거리면서도 끝까지 눈싸움에 끼어 들었다. - 얼른 유모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먹구 합시다!!" 그의 그런 모습에 우리는 피식 웃으면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나의 눈에 어떤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용병인듯 보이는데 나이가 용병을 하기에는 좀 무리인 듯 보일 정도인 세 사람이...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왠지 낮설지가 않았다. '흐음,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나는 슬쩍 아까 우리가 눈사람을 만들 때 도와준 마부 곁으로 가서 물었다. "혹시 저 사람들 누군지 알아요?" 그는 우리때문에 엉망 진창이 된 길을 쓸고 있다가 내 질문에 고개를 들어 내가 가르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아, 저사람들이요? 용병들입죠. 하지만 용병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아요. 자신들끼리 따로 노는데다가 전투에도 잘 참여 안한다던가? 글쎄 용병들 막사에 있지 않고 여관에 있다가 용병들이 이리로 옮겨 오자 그제야 용병대에 합류 했다는군요."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몸을 돌려 저 멀리 가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따라잡기 위해 뛰었다. 그리고는 힐끔 그 용병들을 바라보자 붉은 얼굴의 용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그들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그들은 여관에 온 첫날 저녁식사 시간에 괜히 우리에게 시비를 걸던 용병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에게 느꼈던 의심스러움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번 호 : 14124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11일 22:40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7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8) 성에서 지낸지 몇 주가 쏜살같이 흘렀다. 그 동안 날씨는 더욱 더 추워졌으며 몇번 눈이 또 다시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은 밤만 되면 강하게 바람이 불어 눈보라가 휘몰아치기도 했다. 이렇게 성에서 지내는 동안 세이몬과 로비는 더욱 더 친해져 한시도 떨어져 지내지 않게 되었고 류미르는 추운 날씨에 성 바깥으로의 출입이 사라지게 되자 성 안에 있는 서재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그 녀석은 의외로 아는것이 많아서 가끔은 로비와 세이몬에게 여러가지 이야기도 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게을러져만 갔다. 여행을 다닐 때에는 식사를 내가 챙겨야 했기 때문에 시간만 되면 칼 같이 일어나서 노숙할 때는 식사를 마련했고 여관에 묶을 때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깨워 식당으로 내려가게 했지만 이 곳에 머물고 있으려니 아침에 일어나 요리를 할 필요도 없었고 또 류미르는 거의 서재에서 자고 먹고 하느라 얼굴 보기 힘들었고 세이몬은 로비가 다 알아서 깨우고 있었으므로 내 할일이 전혀 없었기에 나는 아침마다 일어나는 시각이 점점 더 느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추운 날 아침에 일어나는 것 보다는 따뜻한 깃털로 만들어진 이불의 부드러운 촉감을 즐기고 뒹굴 뒹굴 하는 것이 백배는 더욱 더 좋았기 때문에 이제는 아침을 거르고 침대 속에서 뒹굴 거리는 것이 당연시 되어 버렸다. "후아아암~~!!"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오가 다 되어서야 겨우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폈다. 하도 침대속에서 뒹굴 거리다 보니 온 몸이 다 찌뿌둥 한데다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목욕을 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이렇게 추운 날 머리를 감으려는 생각을 하려니 오한이 저절로 들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쳇, 이런 날씨에는 할머니네 집에 놀러가는게 딱인데... 아, 그러고 보니 온천에 가고 싶구나... 애들 데리고 온천에나 놀러갔다 올까?" 하지만 곧 나는 온천에 가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온천에 가려면 공간 이동은 불가능 하고 이 추위를 뚫고 날아서 가든지 아니면 말을 타고 여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고룡들께 인사 드리러 갈때 할아버지를 졸라서라도 가볼껄 그랬어..." 나는 혼잣말로 중얼중얼 대면서 내 침실에 마련되어 있는 세면대로 다가가 그 옆에 있는 커다란 단지 안에 있는 물을 세숫대야 안에다 조르르 따랐다. 아마도 내 방에 날라져 올때에는 따듯한 물이었겠지만 지금은 다 식어서 미적지근 했다. "에잉, 오늘도 그냥 세수하지 말고..." 나는 세숫대야에 담겨 있는 물 속에 손가락 끝을 담가 봤다가 그 시원함에 얼른 손가락을 빼 낸뒤 인상을 쓰고는 "클리어~!!" 라고 중얼 거렸다. 그러자 빛의 입자들이 갑자기 공중에서 생겨나 둥그런 링 모양을 형성하더니 그 사이에 내 몸을 끼우고는 스르르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쭉 훝어갔다. 그러자 그 링이 훝어간 내 몸은 마치 방금 씻기라도 한 것처럼 부시시하고 지저분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는 깨끗 단정한 모습이 되었다. "후후, 역시 마법이란 편리한 것이여..." 이 마법은 내가 요즘같은 추운 날씨에 목욕하기가 싫어서 마법책을 다 뒤져서 찾아 낸 마법으로 직접 물을 사용해서 씻지 않아도 씻은 것 처럼 깨끗하게 해주는 마법이었다. 이 마법을 알아낸 뒤로 나는 한번도 물에 내 몸을 담가본 일이 없었다. -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그래도 깨끗 하다니까... - 이렇게 내 나름대로 씻고 식당으로 내려가자 그때가 점심식사 시간이었는지 공작 내외를 비롯한 세이몬과 로비가 식당에 앉아 있었다. "어? 아린 형아, 지금 일어난 거야?" 이제는 나보고도 친하게 형아라고 부르는 로비 녀석이 내 모습을 보자 마자 친한 척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아아, 로비. 일찍 일어났구나?" "형아는 맨날 늦게 일어나. 엄마가 그러시는데 그렇게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게으름뱅이가 된댔어." 그러자 공작 부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면서 그녀의 눈이 아들을 살짝 흘겨 보았다. "로비, 형한테 무슨 말이니?" "하지만 엄마가 그랬잖아요." 공작 부인은 이제 아예 붉어진 얼굴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자 그런 그녀를 세이몬이 구원하였다. "맞아 맞아. 게으른 건 나쁜거야. 이제부터는 로비가 아린 형아가 더이상 게을러지지 않도록 아침에 깨워줘." 그러자 로비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나 열심히 아린 형아를 깨워서 아린 형아가 게으른 부인처럼 되게하지 않을꺼야." 나는 벙찐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게으른 부인?" "응, 있지 류미르 형아가 해준 이야기속에 나오는 사람인데 굉장히 게으른 여자래. 너무 게을러서 밥 먹는 것도 귀찮아 해서 굶어 죽었다던 걸?" "하.하.하. 그으래?" "응, 그러니까 내가 형아가 그렇게 되지 않게 아침마다 일찍 일찍 깨워줄께!!" 로비는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면서 단단히 결심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 녀석의 그런 모습에 나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내 방에다 결계를 칠 것을 다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어? 그런데 류미르가 안보이네? 이녀석 아직도 서재에 있는 거야?" 내가 세이몬을 돌아보며 묻자 세이몬은 자신도 모른다는 얼굴로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그러자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아, 그래요. 그 청년은 정말 열심이더군. 조금만 있으면 내 서재의 책을 다 읽고 말거야." "흐음, 아마 류미르 형이 어렸을 적에 책을 좋아하는 형을 나쁜 사람들이 책 읽지 못하게 괴롭혔을 거예요. 그래서 형이 그때의 한을 지금 푸는건지도 몰라요." 로비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는 그 추리가 괜찮다고 생각 했는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작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로비야, 꼭 그렇지 않아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단다. 학자들이나 마법사 같은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지." "에? 정말요? 믿을 수 없어..." "저런 저런, 네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 까지 너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돼지이..." 공작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내가 로비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얼라리오? 로비이? 너 책 싫어하니?" 그러자 녀석이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푹 숙이면서 우물쭈물 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게..." 그런 녀석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녀석을 제외한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미소를 짖자 녀석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는 비장하게 외쳤다. "난, 세이몬형 같은 멋진 용사가 될거니까 책을 좋아할 필요는 없어!" "저런 저런, 하지만 용사라도 지식은 지니고 있어야 해요." 공작 부인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 하지만 세이몬 형은 굉장한 용사인데도 책 읽는 건 한번도 못봤는데요? 게다가 아린 형도 마법사인데도 한번도 못봤어요." 로비의 말에 나와 세이몬은 속이 뜨끔 뜨끔한 표정을 짓고 서로 마주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봐 이봐 로비. 우리가 여기 와서 책을 안읽었다고 공부를 전혀 안한 건 아니라고. 여행하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데." 나는 변명조로 로비를 향해 항변을 했다. "정말?" 그러나 로비는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공부를 안하는 거야? 우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공부는 항상 해야하는 거랬어. 아무리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공부를 쉬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는걸?" '우쒸, 그 선생자식 도대체 누구야?" "로비, 형은 로비가 보지 않을 때 공부를 하는 거예요." 공작 부인이 내가 너무 안돼 보였는지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더 이상 그쪽으로 대화가 진행되는 걸 막기 위하여 세이몬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이몬, 네가 어떻게 해서 멋진 용사가 된 거냐?" "아아, 전에 몸이 하도 찌뿌둥해서 이 성의 기사랑 한번 대련을 했거든." "그래? 흐음.." 표정을 보아하니 별로 만족할 만한 대련은 아닌듯 했다. "그럼 나랑 한번 할래? 마침 나도 몸이 찌뿌둥한 참이었거든. 이 참에 밥 먹고 나가서 한판 붙자." 그러자 세이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정말이지? 좋았어." 우리는 점심을 빨리 끝내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로비는 환호성을 지으며 우리를 따라 나왔고 공작도 흥미 어린 얼굴로 따라 나섰다. 바깥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성의 연무장에는 기사들과 용병들이 각각 자신들 나름대로 몸을 단련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모저도 보였다. 그는 몸을 풀고있지는 않았지만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용병들의 실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저는 요즘 자신이 특별 대우 받는건 온당치 못하다며 고집을 부려 성 안의 병사들 기숙사에서 다른 용병들과 같이 지내고 있었기에 내가 성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여전히 묵뚝뚝한 얼굴의 그는 냉정한 눈길로 용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잠깐만." 공작이 큰 소리로 외치자 모두들 동작을 멈추고는 공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린군과 세이몬군이 대련을 하고싶어하니 잠깐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겠나?"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흥미로운 얼굴들로 제깍 연무장 중앙에서 물러나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세이몬과 내가 중앙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린, 마법을 쓸꺼야?" "글쎄, 그러고보니, 난 마법사였지? 넌 그냥 격투기를 쓸거잖아?" "당연하지." "흐음, 그럼 난 그냥 목검으로 할까? 어차피 대련이니까 검기는 쓰지 않고..." "에이, 그러지 말고 그냥 네 검으로 해. 마법을 써도 상관 없어. 그러는게 더 재밌을 것 같아." "너야 재밌을지 모르지만, 난 이곳을 부수고 싶은 맘은 없단 말야." 내가 힐끗 저 쪽에 서 있는 공작을 바라보며 말하자 세이몬도 긍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것도 그렇군. 그럼 넌 목검으로 하고 나도 마력을 쓰지 않고 그냥 하자고." "오케이" =========================================================== 어제는 감기에 몸살이 걸려 누워 있었습니다. 아무리 덥더라도 티 하나 입고 저녁에 돌아댕기는게 아니더군요 ㅠ.ㅠ 여러분은 아무리 덥더라도 꼭꼭 챙겨입고 외출하시길... 번 호 : 14163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12일 22:24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9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19) 처음에는 평소에 장난치는 것 처럼 나는 목검을 들고 기를 안 넣은 채로, 세이몬은 마력을 집중시키지 않은 채로 치고 받았다. 뭐, 아무래도 우리 실력(?)이 조금 있다보니 치고받는 속도는 장난이 아니게 빨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괴력이 있는 건 전혀 아니었으므로 실력이 있는 기사들이 보기에는 장난하는 것 처럼 보일게 뻔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세이몬이 살짝 뒤로 물러날 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뒤로 넘어지려고 했다. 그 순간을 노치지 않은 나는 목검으로 녀석의 얼굴 정면을 내려쳤는데 이 녀석이 재빨리 왼 손을 뒤로 뻗어 땅을 쳐 오르는 동시에 오른 손에 본능적으로 마력을 집중 시켜 나에게 뻗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재빨리 내려치는 목검을 정지 시키고 몸을 뒤로 젓혔지만 내려치는 속도가 있었는지라 세이몬의 주먹은 내가 들고 있던 목검을 두동강 내고는 계속 뻗어와 내 얼굴 정 중앙을 한대 치고는 멈춰버렸다. '퍼억~!!' 그 순간 나는 눈 앞에서 별똥별이 파바박하고 튀어 오르는 모습을 감상하며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자 코가 얼얼하면서 코 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콧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주르르륵~~ "아앗, 어떻게해. 우악, 코피가 났다. 이런... 미안 아린. 이럴려고 그런게 아니었는데..." 내 앞에서 어쩔줄 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세이몬의 행동에 다시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직까지 얼얼한 코에 손을 가져다 대었더니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며 코 끝이 내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코뼈가 부러졌어...." 나의 거의 속삭이는 듯한 중얼거림을 세이몬이 들었는지 그 순간 세이몬의 부산스러운 동작이 딱 멈춰지더니 그의 얼굴이 서서히 내 쪽으로 돌려졌다. 그런데 내 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코뼈가?" "응, 부러진 것 같아." 세이몬은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한번 되물었다. "진짜?" "응. 아프다. 힐링!!" 나는 목검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올려 코 주위를 감싸고는 코 뼈가 제자리를 이탈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문을 외웠다. 곧 내 손에서는 하얀 빛이 나기 시작했고 그에따라 점차 코의 얼얼함과 느껴지던 통증이 사라졌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다시 손으로 코를 만져 보았더니 제대로 붙었는지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콧등을 꾹 눌러도 아프지 않았다. "음, 제대로 된 것 같군..." 내가 세이몬을 바라보며 말하자 세이몬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가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니, 아린... 그게 그러니까...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정말이야, 믿어줘..." "웃기지마, 임마. 첨에 마력은 안쓴다고 해놓고선...." 나는 세이몬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오른손으로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목검에 약간 불그스름한 빛이 어리더니 내가 힘을 좀더 강하게 주자 갑작스레 부러진 목검으로 부터 약 50cm 가량이나 되어 보이는 빛이 치솟아 부러진 목검날을 대신하였다. "죽어써~~!!" "우아아악~~~!! 일부러 그런게 아니야아아아아~~~!!" "시끄럿!!" 나는 있는대로 화가 나서는 세이몬에게 무작정 달려 들었다. 세이몬은 나의 검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는지 얼른 자신의 양 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잘못했어어어어~~~ 정말이야아아아~~~~!!" 쿠왕~~ 콰과광~~~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다양한 효과음과 조명을 뿌리며 우리는 다시 대결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덤으로 세이몬의 처절한 비명소리까지 효과음을 더했다. 성의 연무장은 내가 뿌려대는 검기의 난무로 인하여 점점 엉망이 되어갔으며 그에따라 우리가 발을 디딜수 있는 땅은 점점 줄어만 갔다. 덕분에 우리의 대련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으며 그에따라 나의 공격력도 점점 높아만 갔다. 그러나 세이몬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 녀석은 죽을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얼마나 날쌔게 뛰어 다니는지 내가 날리는 검기를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 모습에 점점 더 열이 뻗친 나는 이성을 거의 상실해 버린 채로 왼손을 뻗어 소리치고 말았다. "파이어 볼!!" 농구공보다도 더 커다란 불덩어리가 내 손에서 부터 세이몬에게로 날아가자 세이몬은 재빨리 저만큼 피해 버렸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구경하던 사람들의 놀란 얼굴과 재빨리 피하려는 움직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아차 싶어서 다시 손을 올릴때였다. 갑작스레 하늘에서 물벼락이 쏟아지더니 내가 던진 불덩어리는 물론 나와 세이몬까지 왕창 젖게 해버렸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공중에는 반인반어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물의 중급정령이 유유히 떠서 우리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 보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류미르의 소리도 들려왔다. "뭐하는 짓들이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류미르가 성의 중간쯤(아마 그 곳이 서재인 듯) 나 있는 베란다에 나와서 상체를 내밀고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놀려면 좀 얌전하게 놀앗! 시끄럽게 무슨 짓들이야? 남 책 읽는데 방해 되잖아!!" "그러는 너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야? 불덩어리만 끄면 됐잖아. 왜 우리까지 젖게 만드는 거야?" 세이몬이 지지않고 소리치자 류미르가 다시 되받아 소리쳤다. "냉수로 샤워하고 정신차리라고 그랬다." 세이몬이 다시 뭐라고 소리치려고 입을 벌리자 나는 얼른 그를 말렸다. "됐어, 그만하자고 세이몬. 이러다가 우리 감기 걸리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추운 날 물벼락을 맞아 벌써부터 몸이 덜덜 떨리는 데다가 손도 새파랗게 되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자 옷이 벌써부터 얼기 시작해서 뿌득 뿌득 소리가 났다. "류미르, 이왕 이렇게 나온거 여기좀 정리해." 나는 류미르에게 그렇게 소리치고는 빠른 속도로 세이몬을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뛰어 들어왔는지 로비가 벌써 들어와서 하녀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였기에 우리는 들어가자 마자 그들이 내온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는 조금 기다렸다가 준비가 다 된 뜨거운 욕탕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젠장, 이렇게 목욕을 하게 될 줄이야...." 나는 빨개진 코 끝을 비비며 투덜투덜 거리다가 물속에서 나와 얼른 몸의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하녀에게 뜨거운 물이 담긴 가죽 부대를 부탁하고는 얼른 침대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온 몸에 오한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뎁혀지지 않은 침대속의 차가운 시트의 감촉에 소름이 돋고 손발이 차가워 졌다. 하지만 곧 하녀가 가져다 준 뜨거운 물주머니를 부둥켜 앉자 그것의 온기에 의하여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좀 풀리면서 살것 같았다. "아, 좋타~~!!" 그 기분 좋은 느낌에 나는 물주머니를 꼬옥 껴안고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려 저녁때까지 자버렸다. 잠깐 누워있는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가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때는 어느새 창 밖이 캄캄해진 뒤였다. "에구구, 얼마나 잔거야?" 내가 벌떡 일어나 얼른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열고 나가자 나를 부르러 온 듯한 하녀가 나를 보더니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 일어나셨군요. 저녁식사 하셔야지요." '허걱, 벌써 시간이...' 새삼스레 내가 오늘 뭘 하며 하루를 보냈던가 되돌아 보면서 터덜터덜 식당으로 걸어 내려가자 그 곳에는 낮과 마찬가지로 모두들 이미 모여 있었다. 다른점이 있다면 류미르도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거였다. "어이, 잠탱이~~!!" 류미르가 나를 바라보자 손을 번쩍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누굴보고 잠탱이라는 거야?" 내가 녀석에게 인상을 써 보이며 말하자 류미르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밖에 더 있어? 어이구, 얼마나 잤는지 눈이 다 부었네?" 그러자 로비가 똥그래진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디 어디, 정말 부었어? 저게 부운거야?" "으이그, 저녀석 말을 믿냐? 난 잘 안 붓는 체질이라구." 나는 로비의 머리를 살짝 흩트려준 뒤 내 자리에 앉았다. "그래, 류미르. 연무장 정리는 잘 했어?" "아, 제법 해놨더라. 깨끗하던걸?" 류미르가 입을 열기 전에 세이몬이 먼저 대답했다. "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너 다시 나갔어?" 그러자 이번에는 로비가 말했다. "흐흥, 세이몬 형아는 목욕한 뒤 곧바로 나랑 나가서 검술 연습을 했는걸? 누구누구처럼 잔게 아니라구~~!!" 로비가 나를 보며 장난끼 어린 시선으로 놀리자 공작 부인이 재빨리 로비를 흘겨보았다. "로비, 형한테..." "아녜요. 아린 녀석은 그런말 들어도 싸요. 도데체 얼마나 자는건지, 하루에 깨어있는게 한시간이나 돼?" 류미르가 날 흘겨보며 말하자 나는 녀석으로 부터 고개를 팩 돌렸다. "냅둬유." "어이구, 그런 녀석이 또 힘은 얼마나 센지. 내가 너희들이 죄다 파 헤쳐놓은 땅을 메꾸느라 얼마나 고생한지 알아?" 그러자 이번에는 세이몬이 류미르를 흘겨보았다. "웃기지 마. 네가 뭘 했는데? 기껏해야 땅의 정령을 불러낸 것 밖에 더 했어? 일은 다 정령이 했는데 왜 네가 생색을 내냐?" 세이몬의 말이 끝나자 마자 로비가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있지, 있지, 아린 형아. 류미르 형아가 땅의 정령을 불러냈어. 나 그런거 처음 봤거든? 근데 땅의 정령이 꼭 난장이 할아버지 처럼 생긴거 있지? 너무 너무 신기했어..." "아아, 노움을 불러냈구나?"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로비의 눈이 또다시 동그래 졌다. "어? 형도 알고 있었어?" "응, 류미르랑 같이 있다보니 불러낸 걸 몇번 본 적이 있어." "그래? 그거 너무 너무 신기하지? 응, 응, 있잖아 흙이 저절로 막 움직여지고 솟아난 흙덩어리가 저절로 막 들어가는 거 있지?" 로비가 계속해서 탄성을 지르자 류미르가 기분이 좋아 졌는지 헤벌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로비, 정령이 그렇게 신기하니? 그럼 다른것도 보여 줄까?" "정말 그럴수 있어?" "그러엄~~!! 이 형아가 이래뵈도 정령술사라구!" 덕분에 그날 저녁시간 내내 류미르는 여러 종류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로비가 저녁먹는 것도 잊은 채 신나서 탄성을 지르게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결국 로비는 다 식은 음식을 먹어야 했고 우리는 늦게 저녁을 먹는 로비를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로비는 무척 좋아했고 그런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다리는 것도 별로 나쁜일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저녁식사를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온 건 좋았는데 오늘 하루 너무 자버린 탓에 침대에 누웠건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 거였다. 침대 속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시간을 죽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한 나는 벌떡 일어나 옷을 입었다. 여기서 뒹굴 뒹굴 거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 밤 하늘의 별이라도 보는게 낮겠다 싶어서였다. 불을 켜지도 않은 채 베란다로 나가니 오늘 밤은 그래도 바람이 별로 불지 않은데다 하늘에 구름이 껴 있지 않아 별들이 아주 잘 보였다. 게다가 눈이 잔뜩 쌓여 있어서 달빛을 받은 눈들이 파랗게 빛을 내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그런데 무심코 눈이 쌓인 정원을 보다가 성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첨에는 순찰을 돌고 있는 성의 병사려니 했는데 저 쪽에서 뚜벅 뚜벅 걷는 소리를 내며 창을 든 병사 두명이 걸어오자 그 그림자들은 재빨리 달려 성의 어두운 부분에 숨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지나가자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내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다가 그들 중 한명이 일층에 나 있는 창문에 달라 붙어 한동안 꼼지락 거리더니 결국 그 창문을 열고는 계속 주위를 경계하며 한명 한명 그 창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직접 내려가서 저들이 들어간 창문을 통해 저들을 쫓아갈까 하다가 갑자기 휭하니 불어온 바람에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소름이 돋자 내려가는 것 자체가 끔찍하게 느껴져 좀 찾기 힘들겠지만 그냥 방문을 통해 밑으로 내려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복도로 내달렸다. 번 호 : 14256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14일 22:09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6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20) 그러나 막상 밑으로 내려가자 성 안으로 침입한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수 조차 없었다. 게다가 이 성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내 방에만 있다시피 한 나였기에 성 안의 지리도 아직 모르는데 어두운데서 멋도 모르고 뛰어 나왔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어쩌지.... 그렇다고 침입자인지 확실치도 않은데 침입자가 있다고 소란도 피울수도 없고....' 나는 속으로 애가타서 방방 뛰다가 나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실프!!"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 거리자 내 앞 허공에서 스르르 히미한 빛을 뿜어내는 바람의 정령이 나타났다. "방금 이 성안으로 들어온 3 사람이 있거든, 아마 지금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을거야.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와줘." 실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실프가 사라지자 조용히 왔던 길을 되집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내가 얼마 돌아다니지 않았는지 얼마 걸어가지 않아서 나는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조심스레 계단 위를 올라가는데 갑자가 실프가 허공에서 스르르 나타났다. '주인님...' "아, 그래. 알아냈어?" '윗층에 주인님께서 말씀하시는 세 사람이 어떤 방으로 들어 갔어요.' "좋아. 안내해." 나는 실프의 뒤를 따라 소리나지 않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실프가 안내한 방은 문짝이 두개나 달려 있는 커다란 방문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방문은 그 방의 주인이 이 성에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듯이 자신의 고급스러운 재질을 어둠속 에서도 당당히 나타내고 있었다. 그 방문은 살짝 열려 있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조금만 더 열고 안을 들여다 봤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약간의 틈을 낸 것이었기에 안쪽의 상황이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침대의 끝인 듯 보이는 시트자락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떤 뚱뚱한 인영이 가냘픈 몸의 인영을 품에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에구구, 이런. 남의 침실에 잘못 왔나봐...' 그러나 그때 방 안에서 조심스럽게 밝혀진 불빛에 의하여 나는 뚱뚱한 인영과 가냘픈 인영의 얼굴을 똑똑히 볼수 있었다. 뚱뚱한 인영은 전에 우리가 여관에 있을 때 우리에게 시비를 걸던 세명의 용병단 중 한명으로 나머지 두 명의 용병이 형님이라고 불렀던 그 용병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는 공포에 질려 커진 눈을 하고 있는 공작부인의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 정도면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나려 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나는 당장에 문을 박차고 쳐들어 갈까 하다가 이 안에는 저 용병 말고도 다른 두 용병들과 공작까지 있을거란 생각이 미쳤다. 게다가 잘못 했다간 공작 부인이 위험할테니 좀더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 나는 뚱뚱한 용병의 시선이 문쪽이 아닌 다른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조금 더 문을 열었다. 과연 공작은 그 안에 있었다. 단지 잠자다 일어난 듯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얆은 잠옷 바지만 입고 있었고 그의 목에는 빼빼마른 용병이 검 끝을 드리대고 있는 좋지 않은 상황에 있었지만 말이다. 공작의 발 밑에는 그의 검이 떨어져 있었다. 아마 침입자를 알아채고 검을 잡고 공격 하려다 그보다 먼저 제압을 당해 떨긴 것이리라. 그리고 나머지 한사람... 붉은 얼굴의 용병은 손에 들고 있던 초를 침대 옆에 있는 커다란 여성용 화장대에 올려 놓더니 그 화장대의 서랍을 소리나지 않게 조심스레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값어치가 날 만한 자잘한 보석들은 그냥 뒤로 내팽개쳐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것들은 바닥에 깔린 카펫 위로 떨어져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바닥에 떨어진 것들은 촛불빛에 반짝이는 걸 보면 분명 귀금속이 분명한데 마치 보잘것 없는 물건을 다루는 것 처럼 녀석은 그것들을 꺼내서는 그냥 힐끗 보고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한참을 더 뒤적거리다가 원하는 걸 못찾았는지 수그리고 있던 몸을 펴서 뚱뚱한 용병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러자 뚱뚱한 용병이 공작 부인의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내더니 그 손으로 단검을 쥐고는 그녀의 목에 살짝 가져다 대었다. "자, 공작부인? 목걸이는 어딨지?" "무, 무슨...." 뚱뚱한 용병의 질문에 공작 부인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서리며 떨리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시치미 떼지 마시지... 우리가 이런 촌 구석까지 와서 찾는거라면 단 한가지뿐 아니겠어?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나는 문 틈에서 살짝 눈을 떼고는 아직까지 내 옆에 있는 실프를 돌아다 보았다. "실프, 가서 류미르 좀 데려와." 나 혼자라면 혹시라도 실수할 수 있으므로 류미르를 불렀던 것이다. 실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으로 스르르 사라져 갔다. 실프가 사라지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방 안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은 고개를 돌려 애처러운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지 마시오, 부인. 저들은 어차피 우리를 해할 것이오." 공작이 결연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뚱뚱한 용병이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호오, 정말 똑똑하시군 그래? 그럼 이건 어떤가?" 뚱뚱한 용병이 여전히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얼굴이 붉은 용병을 향해 고개짓을 했다. 그러자 그 붉은 얼굴의 용병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 싱글 웃으며 자신의 근처에 있던 큰 자루 하나를 가져와서는 모두가 잘 볼수 있는 위치에 턱하니 내려놨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루의 입구를 풀고 그 안의 내용물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로비..." 공작 부인이 울상이 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자루 안에서 나온 것은 로비였다. 온 몸이 꽁꽁 묶이고 입에는 자갈이 물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서는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그 붉은 얼굴의 용병은 이제는 징그럽게 웃어 보이며 단검을 꺼내어 로비의 볼에다 대고 살짝 내려 그었다. 그러자 로비의 뽀얀 볼에 한줄기 붉은 선이 그어지며 곧 거기서 피가 흘러 내렸다. "이런 못된..." 공작의 눈이 부릅떠지며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에 살짝 다가와 있는 검 끝을 느끼고는 다시 입을 다물고 부들 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어때? 이래도 안 가르쳐 줄텐가?" 뚱뚱한 용병이 느물느물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치 이런일을 하도 많이해서 이제는 어떻게 해야 더 악당같이 보이는 지 잘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서 조심이고 뭐고 무작정 쳐들어 가려고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 강한 힘이 움직이려는 내 어깨를 내리 눌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매서운 눈으로 방 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 류미르의 얼굴이 보였다. "가만히 있어." "언제 왔냐?" "방금." 나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서 방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쩔까?" 내가 낮게 류미르에게 말하자 역시 같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날 불렀으니 생각이 있었을거 아냐?" "칫, 그래 알았다. 셋을 세면 내가 정지마법을 걸께 넌 쳐들어 가." "알았어." "하나, 둘, 셋!!" 셋을 세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벌컥 여는 동시에 소리 높여 시동어를 외쳤다. "스톱!!"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움찔 하더니 그 자세 그대로 멈춰 버린 채 눈동자만 돌려 문가에 서 있는 우리를 바라 보았다. 공작과 부인, 그리고 로비의 눈에는 안도감이 흘렀고 빼빼 용병과 빨간 용병의 눈에는 낭패감이 흘렀다. 그런데 그때... 움직이지 못할 줄 알았던 뚱땡이 용병이 갑자기 우리쪽으로 몸을 뒤틀더니 공작 부인을 우리 앞쪽으로 끌고 와서는 그녀의 목에 단검을 드리댄 채 외쳤다. "꼼짝 마!!" "어, 어떻게..." 너무 놀란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내 마법이 깨지는 이런 믿지 못할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걸었던 정지 마법은 그들 중 한사람이 움직이자 마법이 깨어져 버리면서 동시에 모든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줬다. 빨간 용병이 호탕하게 웃어 제끼면서 말했다. "크하하하, 어리석은 놈들. 우리가 이정도 마법에 당할 줄 알았더냐? 우리 형님께 그정도의 마법은 통하지 않는단 말이다." 상황은 역전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낭패감을 느끼며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뚱땡이 놈을 가만히 노려 보았다. 그러자 그 녀석의 허리춤에 묘한 마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5 클래스의 마나의 양... 그제야 나는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알수 있었고 다시 여유를 되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린 틈을 노치지 않은 공작이 재빨리 몸을 숙여 빼빼의 검을 피하는 동시에 자신의 검을 집으며 순간적으로 휘청이는 빼빼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움직이지 말라니까!!" 빨간 용병이 외치면서 로비를 한 손으로 들어올리며 그 아이의 목에 검을 드리대며 외치자 그 모습을 본 공작이 멈칫했다. 그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빼빼의 검이 공작의 등을 통해 그의 가슴팍에서 그 날카로운 끝을 내밀었고 공작은 얼굴이 경악에 물든 채로 서서히 바닥에 몸을 뉘였다. "제기랄~~~!!" 나는 그 모습에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려 했지만 누군가가 내 팔을 강하게 부여 잡았다. 류미르였다. 그는 노려보는 내 시선을 외면하며 내 팔을 잡고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르켜 보였다. 거기에는 용병들의 손에 잡힌 공작 부인과 로비가 있었다. "그러게 말을 들어야지..." 빼빼 용병이 바닥에 쓰러진 공작에게 침을 퇘 뱉으며 중얼 거렸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손을 들어 올려 마법을 쓰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뚱땡이 용병과 빨간 용병의 손이 뒤틀리며 그들이 들고 있던 단검을 떨기는 동시에 공작 부인과 로비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용병들은 두려움과 고통에 찬 얼굴로 자신들의 몸을 서서히 감싸는 검은 마력을 바라보며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바닥에 쓰러져서는 뒹굴며 고통스러운 표정과 신음을 내질렀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세이몬이 분노에 찬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한 손으로는 그들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때 류미르가 공작에게 달려가 얼른 그를 바로 눕히고는 외쳤다. "아린, 빨리!!"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공작의 곁으로 달려가 그의 상처를 살폈다. 빼빼 용병에게 관통당한 가슴에서는 붉은 피가 계속해서 솟아나고 있었고 그 주위는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의 얼굴은 이미 새파래져 있었으며 그의 몸은 눈처럼 싸늘해져 있었다. "젠장할, 늦었어.... 심장을 관통당하는 바람에... 즉사했어..." 내가 낭패감 어린 말을 씹어 내뱉듯이 말하자 류미르가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래도 치유는 해봐." "나보고 어쩌라고? 이미 숨이 끊어졌단 말야." 낭패감에 젖은 내가 소리치자 류미르가 지지않고 다시 소리쳤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 아냐? 게다가 네 마법력은 뛰어 나잖아." "제기랄, 내가 신이냐? 아무리 나라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단 말야." 거기까지 소리친 나는 목이 메어 잠시 멈칫 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듯 겨우 말했다. "게다가... 난... 심폐소생... 기술은.... 모른단 말야...." 심장이 관통된 사람한테도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중요한 응급처지 기술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던 한국의 학교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젠장할...." 어느새 다가왔는지 공작 부인은 싸늘하게 식은 공작의 시신을 부여잡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크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가 더욱 더 슬퍼 보였다. 로비는 세이몬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녀석은 울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는데 그녀석의 얼굴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고 세이몬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녀석의 손 마디 마디는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병사들이 달려오고, 집사가 달려왔다. 병사들이 아직도 세이몬의 마력에 사로 잡혀 맛본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용병들을 결박하고 집사가 하녀들을 시켜 부인을 데리고 나가게 하고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하자 류미르가 나와 세이몬, 그리고 로비를 데리고 그 방을 나왔다. =========================================================== 크어어억~~~ 제가 결국은 비극을 쓰고 말았씀다. 안쓰려고 노력을 했는데 기어코... ㅠ.ㅠ 미안하다 로비. 참, 여기서 공지 한가지 할께요 담 주쯤에 제 책 3권이 나온답니다. 점점 허접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온답니다. 그래서 담 주 23일 쯔음에 3권 분량을 삭제코저 합니다. 분량은 21화(맞나? 나도 몰러 --;;) 법 = 정의 (?) 편 까지 입니다. 번 호 : 14340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16일 23:08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3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21) 하아, 이번이 벌써 세번째 올리는 겁니다. 이번에도 안 올라가면 컴을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군요... ㅠ.ㅠ 그래도 공지는 해야 겠지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담 주에 제 3권 분량을 지운다고 했는데 그게 20화 법 = 정의 (?) 편 까지였습니다. 자신의 글 화도 제대로 모르는 바보가 바로 저였답니다. ㅠ.ㅠ 어쨌든 담 주에 지웁니다. ================================================================ 공작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루어 졌다. 그레놀리 영지와 제일 가까운 영지라고 해야 영지를 감싸고 있는 험준한 산을 넘어가서도 1주일은 달려야 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외부에서 올 문상객은 기대도 하지 않고 영지 내에 있는 사람들만 모여 치루었다. 그리고 그 뒤 성 내의 기사 몇몇을 뽑아 국왕에게 공작의 부음을 알리는 파벌단을 만들어 보냈다. 의아한 것은 이 모든 일을 모저가 도맡아 지휘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마치 예전부터 공작의 옆에 있었던 사람 처럼 모든 일을 막힘 없이 척척 알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 안의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공작 부인조차도 모저의 이러한 행동을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처럼 느껴졌다. 마치 텔레비젼의 모니터를 보는 것 처럼 멍하게 그 모든일을 지켜보다가 류미르와 세이몬에게 이끌려서 이리 저리 다닐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멍해 있으니까 공작 부인이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몇번 나에게 찾아와서는 부드러운 얼굴로 내 탓이 아니니 신경쓰지 말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도 전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성안은 다시 조용해 졌다. 나는 매일 아침 류미르나 세이몬에게 이끌려 일어나 아침을 먹고 성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고서는 하루 종일 그 곳에 앉아서 멍하니 있다가는 밤 늦게 나를 찾아낸 이들에 의해서 다시 잠자리에 들곤 했다. 내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그냥 온 몸에 힘이 쫘악 빠지는 것이 움직이는 것도 싫었고 생각하는 것 조차 싫어 그냥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결국 류미르와 세이몬이 보다 못했는지 어느날 저녁 성 꼭대기에 올라가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 오더니 내 양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렇게 쇼크였냐? 녀석들한테 진게?" 류미르가 내가 눈길을 던지고 있는 풍경에 자신도 같이 눈길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몰라." "그런데 왜 이래? 마치 넋을 잃은 사람 같다." 세이몬도 옆에서 중얼 거렸다. "모르겠어." "그 자식들 자살했어. 지하감옥에 넣어 놨는데 잠시후에 보니까 혀를 깨물었다더라." "혀를 깨물면 아팠을 텐데 말야..." 류미르의 뒤를 이어 세이몬도 중얼 거렸다. "그래?"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젠장할...." 숨을 깊이 들이마쉬고 내쉰 뒤 깜깜해진 하늘을 쳐다 보았다. "하아~, 젠장. 왜 몰랐지? 그 자식이 5 서클 마법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조금만 주의해서 봤으면 알수 있었을 텐데..." "그 상황에서 그런걸 살필 여유가 있냐?" 류미르가 좀 날카로워진 음성으로 따졌다. "너 말야, 혹시 너네 종족은 실수가 없는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네 실수를 용납할 수가 없는거냐?" "그런거 아냐." "그럼 뭐야? 혹시 너보다 못난 놈들한테 당해서 자존심에 상처라도 입은 거야?" "아냐." "그럼 뭐야?" "몰라. 모르겠어.... 녀석들한테 당한게 분하기는 하지만 뭐 나중에 내가 몇배로 갚아주면 되는 거니까 별로 충격 받진 않았어..." "어? 그 녀석들 죽었는데?" "우쒸, 세이몬. 이 상황에 꼭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야 겠냐?" "아, 미안해..." "어쨌든, 난 말야. 내가 공작을 충분히 구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공작이 죽었잖아. 이건 다 내가 잘난 척 했기 때문이라고..." "이 바보야. 넌 모든 일을 다 네 탓으로 돌리는 성격이었냐? 으이구, 한심해. 공작은 자신의 실수로 죽은 거라고. 그때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우리가 다 알아서 구했을 거야. 괜히 나서가지고 손도 못쓰고 죽은건 다 그 사람의 운이고 그 사람 탓이야." 류미르는 흥분해서 인지 높은 목소리로 쉼 없이 빠르게 쏘아댔다. "그래도... " "시끄러, 한번만 더 네 탓이네... 하고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한대 쳐 주겠어." 그때였다. 세이몬이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야, 야, 그만하고 저 밑좀 봐봐. 저거 모저하고 공작부인 아냐?" "어? 정말이네? 무슨 일이지? 이 밤중에 둘이서..." 류미르까지 놀랍다는 말투로 중얼거리자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그들이 가르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정원에 모저가 서 있었는데 그 쪽으로 공작 부인이 다가가고 있었다. "야, 야, 뭐라고 하는지 좀 들어보자." 세이몬이 류미르를 보고 말하자 류미르는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조용히 읇조렸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여, 나의 청을 들어 내가 원하는 소리를 들려다오..." 그러자 나의 귓가에 날파리 소리 같이 왱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그 소리는 뽀드득 뽀드득 하는 눈 위를 밟는 소리로 바뀌었다. 공작 부인이 걸어가는 소리였다. "야, 만났다. 만났어." 세이몬이 약한 탄성을 발했다. "모저, 산책하시는 건가요?" 조용한 공작 부인의 목소리에 그녀가 다가갔어도 미동도 안 하고 눈쌓인 정원만 바라보고 있던 모저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 산책하기에는 좀 추운 날씨 같군요." "바람쐬기에도 추운 날씨 아닌가요?" "그런가요?" 모저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려 다시 정원을 바라보자 공작 부인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른 뒤 모저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게 한 가지 있습니다." 공작 부인이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시선을 정원으로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공작각하께서 저를 아시고 계셨습니까?" "그게 무슨..." "글쎄요... 공작 각하께서 무슨 연유로 그러졌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곳에 도착한 뒤 줄곤 저를 그분 곁에 두시고는 성 안의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돕게 하시더군요. 마치 뭐랄까... 가르치셨다고나 할까...." "그랬나요?" "예. 처음에는 의아했지요. 그래서 이유를 여쭈었더니 대답은 안 하시고 그냥 웃기만 하시더군요. 혹시 부인께서 그 이유를 알고 계시는지 해서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공작께서 당신께 그리하셨다는 것도 지금 알았거든요. 하지만..." "하지만?" "공작께서 돌아가신 뒤 집사가 나에게 와서 그러더군요. 만약 공작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든 일을 당신께 맡기라고요. 글쎄요... 어쩌면 공작께서는 당신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랬나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건 나도 모르죠. 그 분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는지... 단지 나도 당신께 궁금한게 있어요." 그러자 모저가 드디어 그녀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모저로 부터 시선을 돌린 채였다. "왜 이곳에 왔나요?" 모저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부인은 그가 입을 열기를 계속 끈기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모저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건 대답을 해드릴수가 없겠군요. 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공작 부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거라고 예상하고 온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요?" "젠장,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거요? 나를 그런 놈으로 생각 하는 거요?" 모저의 목소리가 약간 거칠어졌다. "나도 모르겠소. 왜 내가 왔는지... 단지 용병 길드에서 이곳에서 보내온 의뢰를 보고는.... 젠장, 그래요. 당신이 걱정 되었소. 어차피 이런 외지에 올 용병들이야 뻔한 일이고... 공작이 의뢰를 보내올 정도라면 국가에서 지원이 없다는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뿐이었소. 다른 일은..." "알아요. 당신은 그럴 사람이지요. 그래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군요." 부인은 그의 말을 가로 막으면서 내뱉듯이 입을 연 뒤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가라앉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작께서 나에게 남겨준 편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당신을 다시 기사로 임명하라고 씌여 있더군요. 이번에는 공작가의 기사라는게 다르지만...." "그런..." 모저가 놀라운 듯이 숨을 들이켰다. "그 분은.... 그래요. 너무 훌륭한 분이예요.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분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 분이 그러지 않았어도 공작가를 책임졌겠죠? 안그런가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어떤 선택이든 한번 하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지독히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그래요. 이번에도 난 끝까지 공작 부인으로 남아 있을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도 당신을 내 곁에 잡아 둘 명분이 없군요." "그럼 말해보겠소? 당신은 내가 떠나길 바라는 거요? 아님 이 곳에, 당신 곁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거요." "당신이 내 곁에 남아 있는다고 해도 난 당신께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요." "알고 있어요. 내가 당신 곁에 있어도 우리는 공작 부인과 기사 사이겠지.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건 당신이 나에게 뭘 해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당신 곁에 남아 있기를 원하냐는 거요." "나는.... 나는...." "당신은, 뭘 원하지, 엘리아?" 모저가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남아있기를 원해요." "그러면 된 거요. 남아 있겠소. 아 아, 그런 표정하지 말아요." 모저는 몸을 완전히 공작부인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려 손등에 살짝 입을 마추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당신과 당신 아들께 충성할 것을 엄숙히 맹세 합니다." 모저는 그녀에게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인 뒤 미련없이 몸을 돌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공작 부인은 그 뒤에도 혼자 한동안 그 곳에 서 있었다. "흐음, 그럼 공작 부인의 전 애인이 모저였구나..." 내가 중얼 거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 알고 있었어?" "응, 실은 도둑 길드에서 서비스라고 가르쳐 주긴 했는데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말 안했어." "헤에... 근데 남자도 저런 순정파가 다 있구나... 흠, 놀라운 발견이야..." "뭐야, 세이몬. 남자는 저러면 안돼냐? 멋있기만 하구만, 뭐." 내가 세이몬을 째려보며 말하자 내 옆에서 류미르가 중얼 거렸다. "하지만 저러면 행복할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저들이 선택한 건데. 저들이 불행하면 잘못된 선택이고 행복하면 잘 한 선택이야." "단순 명확한 결론이었어, 세이몬." "그치?" "응~" "뭐야, 아린? 아까까지만 해도 죽상을 하고 있더니 이제는 화기 애애하구나?"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나는 괜히 멋적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배시시 웃었다. "뭐, 그럴수도 있는 거지..." 번 호 : 14439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18일 21:25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6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3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22) 다음날, 우리 셋은 공작 부인에게 불려 그녀의 방으로 갔다. 그녀는 우리를 앞에 앉혀놓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 보다 조금 더 큰 벨벳 천으로 감싸인 납작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의아한 눈으로 그 상자를 쳐다 보다 공작 부인에게 묻자 공작 부인은 배시시(?) 웃으면서 손수 그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그녀의 침실에 나 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 거리는 그 물건은 목걸이었다. "목걸이?" 넓직한 역 삼각형 모양으로 줄줄이 꿰어져 달려 있는 자그마한 다이아몬드들과, 그 중앙에서 자신의 커다란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서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 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건, 혹시..." 류미르가 그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놀란 눈으로 공작 부인을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지요." "이걸 왜 저희에게 보여주시는 건가요?" 류미르가 감탄이 섞이긴 했지만 분명한 의아함을 담은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묻자 그녀가 빙긋 웃으며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보여드리는게 아니라 드리는 거예요." "예?" 내가 놀라서 되묻자 그녀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이걸 여러분께 드린다고요." "아, 하지만 어째서 이런걸 저희에게..." 류미르가 다시금 묻자 공작 부인의 얼굴에 약간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녀는 물끄러미 목걸이를 내려다 보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고 우리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이건 저한테는 무척 귀중한 목걸이예요. 제가 공작님과 결혼 할 당시 예물로 주신 거니까요." "그렇게 귀한 걸 왜?" 공작 부인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는 나를 보며 생긋 웃어보인 뒤 장난기가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골치덩어리이기도 해요. 처치 곤란한..." "예? 아니 그게 무슨..." "하아, 그러니까 나로써는 소중한 물건인 동시에 처리가 곤란한 물건이라 이거죠. 음, 이런말을 하기는 좀 뭐하지만.... 사실 이 목걸이는 세계 3대 목걸이 중 하나거든요. 그러니 노리는 사람들이 많은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그 중 한사람이 현 황후마마시라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죠." "하아..."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 뱉았다. "그렇다면 혹시 그 목걸이 때문에 공작 각하가 이곳에 영지를 가지고 계신건..." 류미르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공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아요. 황후께서는 이걸 가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 컸었나봐요. 나에게 내려오는 압력이 좀 심했거든요. 그러자 공작께선 수도에 있으면서 압력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런 외지로 와버리신 거죠." "하지만 목걸이 하나때문에 그런다는건 좀..." 내가 '그냥 줘버리고 말지...' 란 표정이었는지 공작 부인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자존심 문제였어요. 이건 그 동안 공작가 대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로 물려 내려왔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며느리가 되기 전에 전 공작부인께서 먼저 돌아가셔서 공작께서 가지고 계시다가 저에게 예물로 준거니까요. 그러니 이런걸 황후께 바칠수는 없지 않겠어요? 더욱이 공작께서도 엄연히 황족이셨으니까 더더욱 바칠 수 없었지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 저희에게 주신다는 건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역시 류미르, 그는 공작 부인의 말을 다 들은 뒤에 다시 똑 부러지게 이유를 물었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께 드린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군요." "에, 그렇다면..." 세이몬이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자 공작 부인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아, 황후께 드릴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 바친다는 건 여태까지 안 바치고 버텨온 공작가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그냥 가지고 있자니 이제 공작도 안 계시는데 황후의 압력을 견뎌 내자니 힘들고, 며느리에게 주려니 며느리가 생기려면 아직 10년은 더 기다려야 될테고, 또 전처럼 목걸이를 노리는 사람들이 오는 불상사가 생기는건 싫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예물로 받은거라면서요?" 내가 입을 열자 부인이 피식 웃더니 몸을 약간 숙이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난 이걸 도둑맞았다고 할 생각이예요. 범인은 누군지 모르는... 전 소동이 있고난 뒤 보니까 사라졌다. 수색했지만 범인은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목걸이는 잃어버렸다. 뭐, 이런 식으로요. 여러분은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어도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을 실력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게다가 이번에 우리를 많이 도와주셨고요." 그녀의 말에 내가 침울해져 시선을 내리깔자 그녀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내 무릎을 톡톡 두드려 그녀를 보게 하고는 싱긋 웃어보였다. "잘못했으면 나나 로비까지 화를 입어 어쩌면 공작가의 대가 끊겼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막아주셨잖아요.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어요. 어쩌면 이걸 드리는 것도 그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어요. 받아줄거죠?" 그녀는 더욱 더 우리쪽으로 가까이 그 목걸이를 밀어 놓으면서 생긋 웃었다. 내가 그 목걸이를 보면서 평소 나 답지않게 어찌할바를 몰라 주춤하고 있을 때 세이몬이 손을 슥 뻗어 그 목걸이 상자를 집어 뚜껑을 닫고는 내 무릎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류미르는 부인을 바라보며 정중히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인. 뜻을 받들어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그 목걸이는 나중에 내 마법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두달여의 시간이 흘러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을때 우리는 성을 떠났다. 새해 맞이를 그 성에서 하기는 했지만 상중이어서 거창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새해를 여관에서 맞는 것 보다야 몇배는 낳았다. 게다가 아버지를 잃은 로비가 어떻게 될까봐 성의 모든 사람들이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도 더욱더 씩씩하게 활동하고 평소보다도 공부와 검술 연습에 정진하자 철이 들었다고 모두들 기뻐하는 한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세이몬에게 슬쩍 들은말이 공작의 장례식이 있던 날 밤 자신의 침실에 찾아 왔다고 했다. 아마 제일 친한 세이몬이니 그만큼 기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자신의 침실로 와서는 다짜고짜로 품에 파고들어 펑펑 울어대는 것이 장례식때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침착했던게 속으로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던 거라고 말하는데, 말하는 세이몬도 눈물이 글썽글썽 했다. 그렇게 펑펑 울고 나중에는 목이 쉬어 소리도 내지 못할 때까지 울다가 세이몬의 품에서 잠들었는데 어찌나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던지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품에 안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앉아서 자신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이 눈을 뜨니까 조용히 또박또박 말하기를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공작이야.나 이제부터 열심히 노력해서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을 훌륭한 공작이 될꺼야" 라고 하더랜다. "허, 참. 기특한 녀석이네..." "어쩐지, 예전과는 달리 열심히 하더라니..." 류미르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자 세이몬이 자신이 칭찬 받은 것처럼 좋아했다. "그치, 그치? 그녀석 참 기특하다니까... 나중에 다시 한번 기회가 되면 만나고 싶어." 성을 떠날때도 로비는 우리, 특히 세이몬이 떠나는 것이 무척이나 서운했을텐데도 매달리지도 않고 어른스럽게 나중에 꼭 들리라는 인사를 정중히 해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긴, 뭐. 모저도 있고, 공작 부인도 현명한것 같으니 그다지 걱정은 안돼. 어떻게든 잘 해나갈거라고 생각되니까..." 그랬다. 모저는 새해가 되던 날 정식으로 그 성의 기사로 임명 받았다. 단지 공작 부인의 기사가 아니라 로비의 기사라는 것이 우리의 예상을 빗나갔지만...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산맥을 넘는거 보면 모르냐? 에스라 왕국으로 가는 거잖아." "난 단지 산맥 너머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물어본거라고." "헤에, 그 거짓말 정말이야?" 류미르와 세이몬이 또 다시 투닥이기 시작했다. "조심해라, 얘들아. 봄에 산은 위험하거든. 그렇게 딴데 정신 팔다가 미끄러지면 다친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겨울 내내 얼어붙어 있다가 봄이 되어 녹아서 진흙이 되어 있는 비탈길에서 발을 헛디뎌 고꾸라지고 말았다. "내 그럴줄 알았다니까..." "우쒸, 너때문이잖아." "왜 나때문이냐? 발을 헛디딘건 너라고. 너가 나를 잡는 바람에 나까지 넘어졌잖아." "흥, 너가 나한테 시비 거니까 너한테 신경 쓰다가 이렇게 된거잖아." "왜 잘못되면 다 내탓이냐?" "네탓이니까 그렇지!!" "야, 너희들. 안 일어날꺼야? 그럼 계속 그러고 있던지... 나 먼저 간다~!!" 내가 정말 혼자 말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기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다급하게 외쳤다. "기다렷, 너 혼자 가는게 어딨어?" "야, 우리좀 일으켜줘어~~" 번 호 : 14544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20일 23:16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5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1)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우리는 현재 에스라 왕국에 도착해 있었다. 처음에는 걸어서 산맥을 넘으려고 했었으나 봄에 산을 오르자니 위험했고(위험하기 보다 귀찮고), 산지가 험하다 보니 말을 끌고 가기도 힘든데다 날씨도 낮에는 따뜻해도 밤에, 특히 산속에서의 밤은 추웠기에 만장 일치로 하늘을 날아 산을 넘어버렸다. 어차피 이 곳은 나의 영역(?)이었으므로 이곳 지리는 내가 훤히... 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에스라 왕국으로 방향을 잡는 거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산맥을 넘어왔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수상한 사람들로 보일거라는건 뻔한 일이었으므로 - 게덴 산맥이 워낙 험하고 드래곤도 둘씩이나 버티고 있었으므로 그쪽으로는 아예 왕래가 없었다- 우리는 밤을 택해 좀 더 날아가 산맥에서 조금 더 떨어진, 그리고 좀 커 보이는 도시 근처에 착지했다. 아무래도 이 정도 큰 도시라면 여행자들이 있는 건 흔한 일일테니 아무런 의심도 없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특히 이곳 에스라 왕국은 켈튼 연합국 다음으로 상업이 번창한 나라였으므로 여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거였다. 물론 레스틴 왕국에 있을때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곳은 기사의 왕국이니 만큼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곳이어서 여행자나 용병들이 극히 드물어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그러한 시선들이 좀 불편했고 덕분에 그러한 시선이 심한 곳에서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꺼려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그러한 시선들이 거의 없었기에 류미르나 세이몬도 좀 편안해진 듯 보였다. "아린, 이제부터는 어디로 갈꺼야?" "에?" 그 도시에서 잡은 여관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세이몬이 불쑥 물어오는 바람에 나는 당황감을 감추지 못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 갈거냐구. 행선지는 항상 네가 정해왔잖아." "아아, 그게 나도 몰라." 내가 어색해서 머리를 긁으며 씨익 웃어 보이자 류미르와 세이몬의 눈들이 커졌다. "뭐어?" "글쎄, 그게... 생각을 안해봤어." "아니, 그렇다면 왜 여기로 온 거야?" 류미르가 황당감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날카롭게 묻자 나는 그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어,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하다 보니까 여기로 왔더라구..." 류미르가 나에게 접시를 던지고 싶다는 눈초리로 자신 앞에 놓여있는 접시를 만지작 거리자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아,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지금부터 잘 생각해 보면 돼잖아. 어차피 마땅히 정해놓은 목적지도 없었으니까 말야." 그때였다. 세이몬이 뜬금 없이 엉뚱한 것을 물어왔다. "아린, 온천이 뭐냐?" "온천? 갑자기 왠 온천?" "아아, 저기 우리 옆에 앉은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온천에 몸을 담그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세이몬의 말을 듣고 힐끗 우리 옆 식탁을 보니 그 곳에는 건장해 보이는 30대 중반정도 되어 보이는 3명의 남자들이 식사에 맥주까지 곁들어 마시며 대화하고 있었다. "온천은 에.... 그러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세이몬에게 땅 속에 있는 마그마까지 설명을 해줘야 할지 몰라 말 끝을 흐렸다. 그러자 류미르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내 말 뒤를 이었다. "뜨거운 물 웅덩이를 온천이라고 하는거야." "뜨거운 물? 그 웅덩이의 물이 뜨겁단 말야?" "그래, 뜨거운 물이 샘 처럼 땅 속에서 솟아 올라서 생긴 웅덩인데 보통 화산지대에 많이 생기지. 거기는 지대가 뜨겁거든..." "아아, 그렇군... 그런데 왜 온천에 들어가길 원하지?" 이건 내가 대답했다. "그 온천물은 여러가지 성분이 뒤섞여 있기때문에 몸에 무척 좋대." "그래? 아,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 세이몬이 정말 가보고 싶은 듯 중얼거리자 나는 눈이 반짝 뜨였다. "세이몬, 정말 가고 싶어? 그럼 우리 이번에는 온천에 한번 갈까?" "정말? 그래도 돼?" "그럼, 이 에스라 왕국에 온천이 유명한 마을이 있거든. 이왕 이곳에 온거 거기 한번 가보자. 어때?" 내가 류미르를 돌아보며 묻자 류미르도 흥미가 생긴다는 얼굴이었다. "뭐, 마땅히 다른 목적지가 없다면 말이지..." "야, 좋으면 좋다고 해라. 무슨 대답이 삶은 시금치 같냐?" 류미르가 얼굴의 표정과는 다르게 신통치 않은 대답을 하자 세이몬이 톡 쏘았다. 그러자 약간 얼굴이 붉어진 류미르가 뭐라고 대꾸하려고 해서 나는 얼른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자자, 그만 하고. 다 먹었으면 얼른 나가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자고. 벌써 오후이니까 빨리빨리 해야하지 않겠어?"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제일 먼저 에스라 왕국의 지리서를 산 뒤 그 다음 류미르가 단검을 좀 마련해야 한다기에 무기점으로 향했다. 류미르가 그 곳에서 단검을 살펴 보는 동안 세이몬과 나는 할일 없이 전시되어 있는 무기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세이몬이 나를 툭툭 쳤다. "아린, 저거좀 봐." "뭔데 그래?" 세이몬이 가르킨 쪽에는 여러가지 굵기와 가지 각색의 무늬를 가지고 있는 길다란 봉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었다. 세이몬은 그들 중 한 봉을 집어 들어 반짝 반짝 빛나는 눈으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봉은 세이몬이 잡았을 경우 엄지 손가락과 다른 네 손가락이 닿을 정도로 가늘었는데 육각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니 은도금 처리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봉의 중앙에는 약 한뼘 길이쯤 되어 보이는 손잡이를 덧 대었는데 양 끝에 금테를 두른 부드러워 보이는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봉의 양 끝은 복숭아 모양으로 처리되어 있었으며 그 곳만 금도금이 되어 있었다. "이거 너무 맘에 들어." "어? 너 무기도 사용해?" 평소 격투기만 사용하던 세이몬을 보던 내가 의아해서 묻자 세이몬이 나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봉을 휙 돌려보이기도 하고 이리저리 휘둘러 보였다. "와, 잘 하네?" 그때 단검을 다 골랐는지 류미르와 무기점의 주인이 다가왔다. "오오, 그것이 맘에 드나보군요?" 주인은 그것을 세이몬에게서 받아 들더니 손을 넓은 간격으로 펼쳐 봉의 끝부분을 양 손으로 잡더니 살짝 비틀어 보였다. 그러자 양 끝부분이 돌아가면서 봉이 세 도막이 났고 각각 그 도막은 가느다란 사슬로 연결되었다. "자, 이렇게 해서 가지고 다니면 더욱 편하시겠지요? 뭐 할수만 있다면 이렇게로도 무기로 사용할 수 있고요." 그러자 세이몬의 눈이 더욱더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돌아 보았다. "아리인~~~!!" "그래, 알았어. 어차피 너 한테도 무기가 하나쯤 있어야 할테니까..."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몬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러자 무기점 주인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어왔다. "흐음, 이렇게 무기를 장만하는 걸 보니 혹시 당신들도 이번 아펜젤러가에서 용병들을 모집하는데 지원하시려나보죠?" "에? 아펜젤러가요?" 류미르가 의아한 듯이 묻자 뚱뚱한 주인은 우리에게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 처럼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말을 이었다. "아아, 당신들은 아주 먼 곳에서 왔나보구려? 아펜젤러가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큰 상인집안이라오. 우리나라 구석 구석 손이 안 뻗힌곳이 없어요. 게다가 그 아펜젤러씨가 무지 잘생긴데다 워낙 유명한 바람둥이라서 한달에 한번꼴로 스캔들을 일으키지..." 우리의 눈이 뚱그래지자 주인이 신나서 뭔가 더 이야기 하려다 우리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입을 다물고 험험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어려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아, 이야기가 왜 이쪽으로 갔지? 어쨌든, 이번에 이 도시에 있는 아펜젤러가에서 바라치나 도시까지 물건을 운송하는데 그 양이 좀 많은가봐요. 집안 자체 경비대로는 부족하니까 용병들을 한 2~30명 모집한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 곳에 지원하려는 것 아니유?" "하하하, 글쎄요..." 우리는 웃음을 얼버무리고 얼른 그 무기점을 빠져 나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류미르가 평소같지 않게 가격을 깍을 생각조차 않하고 얼른 지불하고 나가자고 재촉을 했기에 그에게 끌려 나왔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류미르는 무기점을 나오자 마자 계속 아무말도 안 하고 앞장서서 빠르게 걸어갔다. "도대체 왜 그래?" 그와 보조를 마추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가면서 묻자 류미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불렀다. "아린!!" "왜?" "그 바라치나 도시가 어디 있는거냐?" "에스라 왕국 수도 근처에 있는 대 도시지. 에스라 왕국의 무역 중심지이기도 하고. 근데 그건 왜?" "만약 우리가 그냥 온천지역으로 가는 거와 그 도시를 거쳐 가는 거와 차이가 많을까?" "글쎄... 약간 돌아간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다지 별로 차이는 안 날껄? 바라치나 도시에서 온천지역이 가깝거든..." "그럼, 우리 그 용병 모집하는데 지원하자." '으이구, 왜 그리 서둘러서 나왔나 했더니만...' "너, 경비 아낄려고 그러는 거지? 그럴 필요 없어. 우리 돈 많아." "무슨 소리. 돈은 아낄수 있을때 아껴야 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안단 말이야? 특히 이번 용병 모집에 들어간다면 바라치나 도시까지 꽁짜로 가는 데다가 거기가면 돈까지 받을거 아냐?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수 없어. 안그래?" 류미르가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결연하게 말하자 세이몬과 나는 그의 기백에 밀려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번 호 : 14785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25일 22:05 등록자 : LODEMP 조 회 : 88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2) 류미르는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 나서 그 즉시 길을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아펜젤러가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길을 지나가다 류미르에게 붙들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신사는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고 몸을 돌려 길을 가려다 갑자기 멈칫 하더니 미심쩍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머뭇 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설마겠지만, 용병 모집하는데 지원하러 가는거요?" 보통 이런 대답은 류미르가 해야 했지만 류미르의 정신이 온통 그 사람이 가르쳐준 길 쪽을 살펴보는데 쏠려 있어 대답을 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내가 대답해야 했다. "예. 그럴 생각인데요."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한번 더 우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내가 이런 말 한다고 기분 나쁘게 여기지 말아요. 보아하니 나이도 많아보이지 않는데 왠만하면 거기에는 안갔으면 하는데..." "예? 그게 무슨.... 혹시 그 아펜젤러가가 무서운 곳인가요?" 세이몬이 놀라서 묻자 그 사람은 얼른 허허 웃으며 손을 휘저어 보였다. "허허허...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럼 무슨...." "아니, 내 말은 그곳이 이상한 곳이라는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아펜젤러가가 워낙 큰 상인 집안이다보니 그런 곳에서 어쩌다 가끔 용병을 모집하는데 몰리는 사람들이 장난이 아니라는 거지. 그들 중 뽑히는 사람이 극소수이다 보니 잘못 갔다가 반 병신이 되어서 나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거든....." "하.하.하...." 나와 세이몬은 어색하게 웃으며 류미르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류미르는 그 노신사의 말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못들은체 하는 건지 그 노신사가 가버리자 우리를 이끌고 아펜젤러가 쪽으로 향했다. "이봐, 류미르.... 아무리 경비를 아끼는 좋은 기회라고 해도 그렇게 살벌하다는데 꼭 갈 필요가 있어?" 세이몬이 류미르의 팔을 잡고 늘어지자 류미르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팔로 세이몬을 확 잡아 끌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 좋은 조건을 내 건 곳일수록 살벌한 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면 실력도 만만치 않을텐데..." "흥, 너희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 한다면 나라 하나쯤은 멸망시키는 것도 간단한거 아냐?" "야,야, 우리가 지금 놀러왔지 일하러 왔냐? 돈도 충분한데 뭐하러 귀찮게 그래? 그냥 우리끼리 가자, 응?" 세이몬이 류미르에게 말발로 밀리자 옆에서 내가 세이몬 응수를 들어주기 위하여 한마디 했다. 그러자 빠르게 걷고 있던 류미르가 갑자기 우뚝 서더니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아린? 넌 분명히 용병 모집에 지원하는 걸 찬성했지? 너네 종족이 한 입 가지고 두말 해도 되는거야?" "어우 야, 그렇다고 뭘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냐? 그냥 해본 말이야. 야, 야, 세이몬. 그냥 아무말도 하지 말고 빨리 가자." 나는 기가 죽어서 세이몬의 옷 소매를 살살 잡아 끌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뒤에서 류미르가 외치며 오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제대로 안하면 내가 가만 안나둘거다." 30분 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류미르의 말에 찬성을 해가지고 이 자리에 오게 된 나를 한대 패주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다. "장난이 아니네...." "우와, 살벌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나도 몰라. 어우~, 어떻게 하지?" 세이몬과 내가 작게 속삭이고 있을 때 옆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류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와 우리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너희들, 자꾸 그런소리 할래?" 옆을 슬쩍 살펴보니 우리 근처에 있던 척 보기에도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음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돌아보자 얼른 단상 위의, 지금 한창 살벌하고 무섭게 싸워대는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우리가 아펜젤러가에 와서 문지기에게 지원하러 왔다고 말했을 때 부터 받았던 비웃음인데다 짐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나 세이몬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류미르는 그게 아닌것 같았다. 정문에서 비웃음을 한번 당하자 눈이 매섭게 타오르는 것이 류미르의 상대가 될 사람들이 걱정스러워지기 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말 한번 잘못 했다가 또 다시 비웃음을 사자 그 예의 눈초리를 우리에게 쏟는 것이었다. "알았어. 가만히 있을께..." 내가 오늘은 왜 이녀석에게 꼼짝 못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찰을 해보며 나는 다시 단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펜젤러가에서 용병을 뽑는 방법은 간단했다. 호명된 사람이 단상으로 올라와 그 사람에게 도전하는 10명을 이기면 되는 거였다. 그러니 척 보기에 힘이 약해 보이면 도전자가 엄청 많았고 실력 있게 생겼으면 자신의 실력을 믿는 알짜들만 도전했기에 이래 저래 뽑히는 사람은 정말 실력이 뛰어난 자들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뽑힌 사람들도 다시 밀려날 수 있었으니... 바라치나 도시로 출발하는 것은 내일, 그러니까 오늘까지 지원할 수 있는데, 용병 30명은 지원자를 받던 첫날 다 뽑아 놨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지원하는 사람들은 뽑힌 사람들 중 한명을 골라 이겨야만 그 뽑힌자를 떨기고 자신이 대신 뽑히는 것이었다. 아펜젤러가야 실력이 좋은 사람들을 뽑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지는 용병은 가차없이 내보냈기에 지금 모집된 용병들은 상당한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또한 지금 지원하는 자들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니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놓고 싸우니 상당히 치열할건 뻔한 거였다. "하지만... 찝찝하단 말야...." 내가 중얼거리자 류미르가 한숨같이 물어왔다. "뭐가 또오~?" "아니, 뽑힌 사람을 떨기고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거니까... 꼭 남이 맡아놓은 자리를 빼앗는것 같아서.... 별로 기분은 안좋아." "하, 순진하군...." "키득 키득, 어리다는 거지..." "실력은 될라나?" "나중에 울지나 말라지..." 나는 또 한번 비웃음을 당하고 류미르의 눈총을 받고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를 비웃던 자들은 잠시 후 우리의 상대가 되어 다른 이들의 눈이 크게 떠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야 했다. 우리들 중 맨처음 호명되어 단상위로 올라간 류미르는 우리 옆에서 제일 노골적으로 야유를 퍼 붓던 대머리의 근육질 남잘 자신의 상대로 선택하였다. 그래서 그가 류미르를 얕보고 여유를 부리는 동안 번개같이 그에게 달려 들어 그의 한쪽 눈을 밤탱이로 만들어 주고 그의 왼 팔을 부러뜨려 버렸다. 그리고 복부를 돌려차기로 먹여 단상 밖으로 떨어지게 만든다음 멋지게 착지한 상태로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한마디 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안됐군." 그런다음 우리를 무섭게 노려보아 어영부영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메세지를 강력하게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휴, 어쩔수 없잖아..." 그 다음 세이몬이 한숨을 한번 폭 내쉬더니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등에 두개의 검을 X자로 메고 있던 아까 그 대머리 용병과 죽이 잘 맞던 사내를 지적했다. 번 호 : 14844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26일 21:00 등록자 : LODEMP 조 회 : 94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3) 류미르의 놀라운 실력을 봤던 사내는 처음부터 신중한 얼굴로 등 뒤의 두개의 검을 꺼내 들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세이몬도 척 하니 허리에 차고 있던 세 토막으로 분리된 봉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 봉을 꺼내 들자마자 입이 헤벌쭉 벌어지더니 싸울 자세는 취하지 않고 봉만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뭐하는 거야, 저녀석?" 신음소리 같은 중얼거림을 내 뱉으며 류미르가 이마를 집을 때를 마추어 한 손에 검 하나씩 든 사내가 세이몬을 향해 쇠도해 들어갔다. 사내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세이몬의 옆구리를 놀리고 베어 들어가자 세이몬은 얼른 뒤로 피했다. 하지만 그 사내는 한걸음 더 전진하여 이번에는 왼 손에 들린 검으로 곧장 세이몬의 가슴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세이몬은 아직 봉으로 조립하지 않은 세 도막을 두 손으로 부여 잡고는 몸을 살짝 옆으로 비틀어 찔러 들어오는 검을 피하는 동시에 다시 자신을 쫒아오는 다른 검을 세 도막난 봉으로 막아냈다. 챙강~~ 금속과 금속이 부딧히는 맑은 소리가 울리면서 두 사람의 동작이 잠시 멈췄는가 싶더니 둘이 거의 동시에 뒤로 한 발씩 물러 났다. "쳇, 오늘 산거라 아낄려고 했는데..." 세이몬은 투덜 투덜대며 그제서야 세 도막을 조립하여 하나의 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끝에서 끝까지 한번 손으로 쓰윽 훑더니 그 봉에 살짝 입맞춤을 하며 중얼댔다. "괜찮아, 흠집나면 내가 다 수리해 줄께..." 그 모습을 본 쌍 검의 사내는 픽 웃으며 바닥에 침을 탁 밷었다. "웃기는 군."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또 다시 세이몬에게 덤벼 들었다. 챙, 챙, 챙, 챙.... 봉과 검이 맞부딧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것이 꼭 중국 무협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저녀석, 봉 잘 다루는데?" "근데 문제는 지금 저 녀석 놀고 있다는 거야. 왠 멋을 저렇게 부린담? 빨랑 빨랑 좀 끝낼 것이지...." "냅둬, 처음으로 자신의 무기가 생겼는데 좀 가지고 놀게 나둬도 좋잖아?" "저러다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괜찮아, 괜찮아. 세이몬의 실력이야 맨 손으로도 충분 하니까... 하긴, 실수라도 봉이 어떻게 된다면 상대가 위험 하겠군...." "첨 산거라서 망가지면 무척 화낼꺼야... 저녀석 먹는거 말고 저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봤다니까..." 류미르와 내가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동안 단상 위에서의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해져 갔다. 쌍칼의 사내가 세이몬이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분노하여 더욱 더 격렬하게 달려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차츰 차츰 세이몬이 들고 있던 봉에 거므스름한 기운이 덮이기 시작했다. "오, 시작했다." "드디어 끝내려는군." 세이몬의 봉이 완전히 검은 기운으로 뒤덮이자 세이몬은 봉을 다시 한번 고쳐 쥐더니 쌍칼의 사내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그때 마침 세이몬과 쌍칼 사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으므로 사내는 미처 피하지 못하여 두 검을 들어 막아 냈다. "우윽~~" 그러나 세이몬의 힘이 더 강했던 듯 그는 신음을 토해내며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쓰러질듯 휘청이는 몸으로 겨우 중심을 잡고 서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크게 뜨인 눈으로 자신의 두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그 검들은 그가 세이몬에게서 떨어지자 조금씩 금이가기 시작 하더니 나중에는 '챙강'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 부술 생각은 없었는데..." 세이몬은 미안한 듯 콧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쌍칼 사내는 화가난 듯 쳇쳇 거리면서 손에 들고있던 반 토막만 남은 검을 땅에 내팽개치더니 그것도 모자라 발로 한번씩 차주고는 씩씩 거리며 단상을 내려왔다. "에구구, 이제는 내 차례네?" 나는 단상으로 올라가며 내 상대를 고르기 위해 두리번 거렸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와 마주친 용병들이 모두 내 시선을 피해 딴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이런 그들 중 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게 내키지 않아서 난처한 눈으로 류미르를 바라보자 그가 손짓으로 어떤 사람을 가르켰다. 그는 우리 뒤에 서 있었던 아주 거대한 몸집의 용병이었는데 격투기를 무기로 하는지 별다른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신 팔뚝에 건틀렛만 끼고 있었다. 아까 이 곳에 올때 이 자에게 류미르가 경기장의 위치를 물었었는데 못들은 척 무시하고 가버렸던 일이 있었다. 아마 그것때문에 이 사람을 가르킨 것이리라... 나는 쓴 웃음을 머금고 류미르가 시키는 대로 그 사람을 지목하여 단상에 오르게 했다. 그 자는 천천히 단상에 오르더니 내 앞에 턱 버티고 서서는 사람을 깔보는 듯이 내려깐 눈으로 나를 보더니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지금껏 네 패거리들의 상대는 뽑힌 용병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이었다고.... 나를 그 녀석들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일거다." '그래, 너 잘났다....' 나는 힐끔 녀석의 뒤를 살펴서 녀석과 단상 끝과의 거리가 얼마인지 보고는 녀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빨리 끝내죠?" 그리고 녀석이 태평하게 내가 허리에 찬 검을 뽑길 기다리는 동안 멋있게 오른 손을 들어올려 녀석을 가르키고는 한마디 했다. "윈디!!" 내 손에서 부터 형성된 강력한 바람은 방심한 채 유유자적하게 서 있던 녀석을 단상에서 부터 멀리 날려버려 흙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끝!" 나는 바닥에 쓰러져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어벙벙한 얼굴인 그 사람을 향해 한 손을 들어올려 보이고는 몸을 돌려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로써 우리는 아펜젤러가에서 모집한 용병단에 뽑힐수 있었다. 번 호 : 14925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27일 21:12 등록자 : LODEMP 조 회 : 82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4) 다음날이 되었다. 그런데 배급처럼 지급된 식사를 마치고 한참이나 있어도 도무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용병들은 어리둥절 했지만 뭐 달리 전달된 말도 없는 터라 여기저기 흩어져서 빈둥거리고만 있었다. 우리 셋도 저택의 거대한 정원 한 구석, 햇볕이 잘 드는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들 집합!!" 우리 용병대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는 아펜젤러가의 개인 사병대의 기사가 달려와 소리쳐 우리를 불렀다. 용병들이 하나 둘 어슬렁 거리며 그의 주위로 몰려 들었고 우리도 무슨일인가 하여 용병들 틈에 끼었다. "다 모였나? 그럼 지금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주겠다." 기사는 용병들을 한번 쭉 훓어보면서 수를 가늠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모두 알다시피 원래는 오늘 아침에 출발했어야 했지만 사정이 생겨서 내일로 출발이 연기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더 대기하고 있도록. 원하는 사람은 잠시 저택을 나갔다 와도 상관은 없다. 이상, 질문 있나?" 그러자 용병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사정이 뭔지나 들어봅시다." 다른 용병들도 그게 궁급했었던 듯 그의 말에 동조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기사는 딱딱한 어투로 그들의 입을 막았다. "너희들은 알 바 아니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고 돈만 받으면 돼." 어찌보면 용병들을 무시하는 굉장히 기분 나쁜 말이었지만 틀린말도 아닌지라 용병들은 인상을 구기면서도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그냥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기사도 용병들이 흩어져 버리자 자신도 몸을 돌려 용병들 사이를 헤치고 저택쪽으로 가버렸다. "웅.... 하루라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뭘 하지?" 우리 셋도 아까 뒹굴던 그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세이몬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글쎄.... 그냥 있기에는 심심하긴 한데 말야...." 류미르도 뭘 할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시장이나 갈까?" "에? 거긴 어제 갔다 왔잖아?" 내가 제안하자 즉각 세이몬이 대꾸했다. "하지만 어젠 제대로 구경도 못했잖아. 갑자기 류미르가 우릴 여기로 끌고 오는 바람에 군것질도 못해보고..." 내가 류미르를 힐끔거리며 말하자 류미르가 볼멘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그래서 불만이야?" "뭐, 불만이라기 보다 그렇다는 거지. 그러고보니 너희들도 어제는 쇼핑을 하나도 안 했잖아? 그러니까 겸사 겸사 가보자, 응?" 내가 배시시 웃는것과 동시에 류미르를 툭툭 치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도 어쩔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그런데 그때였다. 세이몬이 손으로 정원의 한쪽을 가르키며 외쳤다. "어? 거긴 우리자린데..." 그가 가르킨 방향을 보니 아까 우리가 뒹굴던 자리인데 이미 그 자리를 다른 용병 둘이서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있다가 세이몬의 말을 들었는지 가늘게 눈을 뜨고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희들? 우리가 여기 누워있는게 불만이야?" 그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다른 용병은 아예 일어나 앉아 인상을 썼다. "아니... 거긴 우리자리라고...." 세이몬이 움찔 거리며 중얼대듯 말하자 일어나 앉은 용병이 코웃음을 쳤다. "흥, 여기 니자리, 내자리가 어딨어? 먼저 맡으면 임자지." "됐어, 세이몬. 우린 나갈꺼니까 상관 없잖아. 그냥 가자고." 류미르가 세이몬의 어깨를 감싸 앉으며 그를 데리고 가려고 하자 누워있던 용병이 갑자기 일어나 앉더니 소리쳐 우리를 불렀다. "야, 그냥가면 어떻게 해?" 그러자 류미르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쩌라고?" 용병은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자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단잠을 깨운 댓가는 주고가야 할 것 아냐? 넌 누가 자고있는데 깨우면 기분 좋냐?" 류미르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그를 바라보다가 일을 크게 벌이고싶지는 않았는지 툭 내뱉듯이 한 마디 했다. "미안하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서 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 용병이 다시 소리쳤다. "야, 미안하면 다냐? 그리고 누가 사과하래? 댓가를 내놓으라고 했지." 그 옆에 있던 용병도 히죽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돈말야 돈. 반짝 반짝 빛나는 예쁜 금속의 납작한 동그라미." 그러자 다시 전의 용병이 말을 받았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든지. 뭐,네 녀석들이라면 몸으로 때우는게 더 좋을것 같은데?" 류미르의 얼굴에 힘줄이 하나 돋으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헐래벌떡 뛰어왔다. 그는 앉아서 능글거리는 용병들과 한 패인듯 주저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옆에 털썩 주저앉고는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이봐, 이봐, 빅 뉴스다. 빅 뉴스!!" 능글맞게 굴던 용병들은 자신들의 장난을 방해한 그가 등장할 때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가 외치는 말을 듣자마자 인상이 펴지더니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어이, 무슨일인데 그래? 뜸들이지 말고 말해봐." 용병 하나가 참지 못하고 그를 다그치자 그는 과장스레 숨을 헥헥거리며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에구, 죽겠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너그들에게 알리려고 죽어라 뛰어 왔드만.... 힘들어 죽겠네...." 그러자 다른 용병 하나가 발을 드러누운 용병의 가슴에 척 하니 올려 놓으면서 장난이 섞인 협박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죽겠으면 아예 내가 죽여줄 수도 있는데 말야... 말 할래, 아님 내 손에 죽을래?" "치워, 임마. 드러운 발을 어따가 올리는 거야?" 누운 용병은 실눈을 뜨고 자신에게 발을 올려놓은 용병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그의 발을 밀치며 일어나 앉았다. 그러더니 뭔가 입을 열려다 말고 우리를 힐끔 보더니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헤이, 너희들. 듣고 싶으면 이리와 앉아. 내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다고. 두번 말하기도 싫고...." 류미르와 세이몬은 서로 마주보더니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주저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석들도 주저없이 내 옆으로 와서 앉아 그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있지 아까 그 재수없는 기사놈이 사정이 있어서 출발이 내일로 미뤄졌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내가 며칠동안 꼬시고 있는 그 하녀 계집애 있지? 아까 그 계집애를 만났는데 그년이 나에게 살짝 말해주더라고." "젠장할, 야 서론은 그만하고 본론을 말해, 본론을." 용병 하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에게 외치자 그가 손을 들어올려 보이며 말했다. "아 글쎄, 중간에서 끊지말고 끝까지좀 들어봐. 그 계집애가 말하길 오늘 그 아펜젤러가의 대빵이 온다더군. 그가 내일 출발하는데 낀다고 하던데?" 그러자 다른 용병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 거리면서 물었다. "아펜젤러가의 대빵이라면, 혹시 가주?" "그래, 그 잘난 면상과 바람둥이로 유명한 그사람 말야." 소식을 가지고 온 용병은 신이나서 그에게 대답해주었다. "흐음, 그렇다면 오늘 잘 해서 그사람 눈에 뜨인 놈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겠군?" "그렇지." "이거 딴 놈들도 알고 있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뭐 곧 알게 되겠지. 비밀은 아닌지 그렇게 쉬쉬하는 눈치는 아니더라고. 그리고 우리랑 같이 바라치나도시까지 간다니까 기회는 많겠지." 그러자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 거리며 질문을 하던 용병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꺼야. 특별히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여행을 하더라도 우리랑 만날 일은 거의 없다고 봐. 그러니 오늘 그자가 올 때가 기회라면 기회겠지."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수만은 없지. 야, 우리 대련이라도 하자." 그러자 그의 동료 용병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우리가 멀뚱멀뚱 가만히 있자 소식을 가지고 달려온 용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야? 너희들은 왜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안 할꺼야?" "아, 뭐..." "우리는 별로...." "괜찮아요." 우리가 어색한 듯이 헤헤 웃으며 말하자 그 용병은 어리둥절한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신의 동료들과 가버렸다. "뭐,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우린 그냥 시장 구경이나 가자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잔디풀들을 털으면서 말하자 류미르와 세이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번 호 : 14981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28일 20:56 등록자 : LODEMP 조 회 : 86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5) 우리는 생각보다 늦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시장에는 의외로 다양한 군것질 거리가 많이 있었고 우리의 눈길을 끄는 가계가 많았던 것이다.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먹고 구경하다 보니까 어느새 해가 져버리고 깜깜해 있는 바람에 우리는 허겁지겁 저택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정문을 지키고 있던 사병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바람에 쉽게 저택 안으로 들어왔지 만약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지키고 있었더라면 용병들을 관리하는 기사가 와서 우리를 확인할 때 까지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지정된 숙소로 갈 때였다. 누군가가 우리의 길목 중앙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달빛에 빛나는 하얀 은발이 너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가슴에 크게 V 네클라인이 있는 소매가 넓은 하얀 실크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테두리에는 진한 보라색 실크가 둘려 있었다. 그가 소리없이 우리쪽으로 걸어오는 덕분에 난 금방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조각같은 단아한 얼굴에 약간 날카로워보이는 은색 눈동자에 붉은 도톰한 입술.... 입가에 약간 잔주름이 나 있지 않았다면 아마 20대 초반의 청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우리앞에 다가온 순간 약간 냉정하다 싶은 그의 눈동자에 능글맞은 빛이 떠올랐다. "호오, 이것 참~" 그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턱을 살짝 바치며 우리를 노골적으로 훑어 보더니 그 중 나를 바라보면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살짝 인상이 구겨진 세이몬과 류미르가 내 앞으로 나서서 그의 시선을 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중하지만 찬 바람이 쌩쌩도는 목소리로 류미르가 입을 열자 그가 피식 웃었다. "호오, 보호자인가?"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등 뒤로 넘어가 있던 가느다란 은색 머리카락들이 스르르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만?" 류미르가 다시 고드름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묻자 그가 쿡쿡 웃었다. "아아, 너한테 볼 일은 없어. 난 단지 너희들이 보호하는 아름다운 아가씨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서 말이지." 류미르와 세이몬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나 보다. 그가 다시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아, 그렇게 놀라니까 더 놀리고 싶어지는 걸? 내 눈은 못속이지. 아무리 남자처럼 꾸몄다고는 해도 여자와 남자는 근본적으로 향기가 다르거든." '이 남자, 꼭 말하는 것이 바람둥이 같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펜젤러씨 이십니까?" 류미르였다. 역시 이 녀석 추리가 빨랐다. "날 아나?"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역시 소문대로이시군요." "쿡쿡 그거 참 고맙군. 그럼 이제 내가 저 아가씨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분명히 류미르와 세이몬은 거절할 것이다. 그래서... "물론이지요." 나는 원래 바람둥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이 녀석처럼 노골적으로 집적거리는 녀석은 더욱 더.... '자신의 얼굴과 능력에 그렇게 자신이 있나보지?' 그래서 녀석을 어떻게 좀 골려주려고 나는 기꺼이 대화에 응했다. 그리고 드래곤피어를 살짝 담아 녀석을 노려봐 주었다. 그런데 의외로 녀석은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보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오히려 피식 웃어서 내가 당황해 버렸다. 덕분에 어떻게 류미르와 세이몬과 헤어지고 녀석이 끌고 가는데로 끌려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택 안인듯한 방 이었다. 그런데 이게또 황당한 것이 응접실이나 침실(뭘 생각한 건데?)이 아닌 넓은 방에 창문과 출입문을 제외한 4면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꽉 차 있는 서재였던 것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래?' 그는 방 중앙에 놓여 있는 푹신해 보이는 가죽 소파를 가르키며 나에게 앉기를 권하고는 자신도 앉았다. 그리고 하녀를 한명 불러 차를 가져오게 했다. 어리벙벙한 채로 그의 앞에 앉아 있는데 그는 하녀가 차를 가져올 때까지 빙긋 빙긋 웃으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입은 꼭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녀가 우리 앞에 차를 놓고 나가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흐음, 이것 참..." 내가 의아한 듯이 그를 쳐다보자 그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잘생긴 녀석들이 들어왔다길래 꼬셔볼 까 했더니만 두 놈은 아직 성년도 안 된 꼬맹이 들이고 한 녀석은 동족이라니..." '이게 뭔 소리여?'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채로 그만 쳐다보고 있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안 마실꺼야? 그거 그래도 고급 차야. 향도 아주 좋고." "아, 저기요. 이것만 말해 주실래요?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지요?" "뭐가? 이게 고급 차라는 거?" "아뇨. 그거말고 그 전에 말한거." "아아, 두 녀석은 꼬맹이고 한 녀석은 동족이라는 거?" "예." 그러자 그의 미소가 더욱 더 진해졌다. "한마디로 하자면 나도 너 처럼 드래곤이라는 거지." 그 순간 나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젖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반갑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또 내 속을 들킨 것 같아 떨리기도 하고.... "하. 하. 하, 이거 제가 큰 실례를 했네요... 저보다 훨씬 어른이신 분께...." "괜찮아, 괜찮아. 나도 이렇게 유희를 즐기다가 동족을 만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예의를 지키지도 못했는데, 뭐..." "아니, 그런데 제가 어떻게 동족이라는 걸 아셨어요?" "네 기운을 감지했지. 아아, 그런 표정 짓지 마. 네가 기운을 갈무리한 솜씨는 뛰어나니까. 단지 나 처럼 몇천년을 지내다 보면 눈치챌 수 있거든.... 너 뿐만이 아니라 고룡들을 만나더라도 알았을 거야. 그러고 보니 넌 아직 나이가 어린 것 같군?" "예. 성룡이 된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흐음, 그래? 그랬군.... 아, 그건 그렇고 말이야." "네?"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우리 한번 즐겨보는 게 어때?" "에? 뭘요?" "아아, 뭘 그렇게 순진한 척 해? 알건 다 알지 않아? 요즘 내가 인간들하고만 즐기다 보니 좀 식상했거든? 그래서 남색을 한번 즐겨볼까 했는데 이렇게 동족을 만나서 말야, 예전에 가끔 동족하고 즐긴 생각이 나거든. 어때? 어차피 너도 유희를 즐기러 나왔으면 생각이 있었을 거 아냐? 아니, 벌써 즐겼을라나, 그 꼬맹이들하고?" "아니 저기... 그러니까.... 부인이 계시지 않아요?" "에이, 뭘 새삼스레 그런걸 따져? 어차피 너한테는 한 주먹거리도 안될텐데... 아, 그러고 보니 레드족이군?흐음, 옛날생각 나는걸? 내가 한때는 레드 드래곤과 사귄적이 있었지..." "하.하, 그러셨어요?" "그래. 레드 드래곤 성격이 워낙 불같잖아? 정말 끝내줬었는데... 하긴 한번 대판 싸우고는 열받아서 그녀한테 드래곤 모습으로 임신을 시켜버렸었지. 아, 이런말 이해하지?" "아하하.... 그럼요..." "말도 마. 그녀는 레드족 중에서도 성격이 가장 더러웠으니까... 말 싸움으로 이길수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대놓고 싸울수도 없고.... 해서 임신을 시켰었는데 뭐, 그녀 성격에 애를 낳을리도 없으니 지워버렸겠지..." "저, 이거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그 여자분 혹시, 혹시..." "응? 아, 비밀도 아닌데 뭐. 칼 세르니안 이야." '오 마이 갇!!!' 나는 그 순간 귀속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고 머리속이 하얗게 되 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한 동안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이럴수가...' 번 호 : 15027 / 15054 등록일 : 2000년 12월 29일 19:43 등록자 : LODEMP 조 회 : 46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6) "응? 아니 왜 그러지? 얼굴색이 안 좋은데? 설마 세르니안을 알고 있나?" 그의 의아한 듯한 목소리에 나는 얼른 제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골이 울리고 어찔어찔한 것이 보통 충격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 정식으로 소개를 드리죠. 저는..." 내가 그 상황에서도 그의 딸임을 밝히려고 입을 열려고 하자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아니... 이럴때는 남자가 먼저 자신의 소개를 하는 것이 예의지." "하.하.하. 그런가요?" '그래, 어디 아버지 성함이나 알려 주시죠?' 나는 잠시 후에 그가 내 소개를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하면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나는 실버 일족이야. 이름은 칼 아펜젤러이지." 그가 정말 자랑스러운 듯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펜젤러?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을 인간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단 말이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내가 일으킨 집안이니 보통 집안이겠어? 그래서 내 이름을 사람들 사이에 알릴겸 해서 사용했지." '흥, 아마 자식들 재산다툼으로 금방 무너질 집안일 거다.' "그래, 이제 아가씨의 소개를 들어볼까?" 그는 다시 우아한 포즈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저는 칼 세르니안의 딸 아시리안이라고 합니다." "오, 그래? 이름또한 아름답군. 칼 세르니안의 딸이라니... 뭐, 뭣?" 그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그 바람에 찻잔이 넘어져 옷에 차가 튀어 묻었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길 간절히 바라른 표정을 한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단어 한자 한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해줬다. "저는 칼 세.르.니.안 의 '딸' 아시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제 멍한 표정이 되어 소파에 무너지듯이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고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세르니안의 딸이라고.... 세르니안의..... 딸이라고...." 드래곤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이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덧 붙이자면 모계 중심의 사회라는 거다. 어쩌면 모계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한 것도 태어나는 해츨링은 아버지가 누구이든 어머니의 종족을 따른다는 것에도 있겠다. 나처럼 아버지가 타 종족 드래곤이라고 해도 엄마가 레드 종족이면 무조건 레드 드래곤이 되는것 처럼 말이다. 드래곤이 성룡이 되면 그동안 타 종족을 막론하고 받아왔던 관심과 사랑이 한 순간에 단절되어 버리고 모든 일을 자신이 책임지고 행동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딱 한가지 있으니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이다. 물론 어머니라고 해서 자식의 인생에 개입할 권리는 없지만 만약 자식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본인만큼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성룡이 되면 정말로 도움이 딱 끊기는 것이 아니라 그 뒤로 한 2~300년 동안은 주위의 어른들이 도와주고 간섭하는 것이 통례이다. 뭐 주위의 어른들이라고 해봤자 부모와 조부모까지 이지만, 이 시기의 다른 어른들은 몰라도 어머니라는 존재의 권리와 의무는 아이가 해츨링이었을때와 별 다를바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만약 어머니가 어떠한 사정에 의하여 그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다 한다면 그것을 대신해 줄 사람은 바로 할머니다. 그 다음이 바로 아버지... 그러니까 드래곤 사회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거의 타인과 같다고 보면 된다. 물론 아이가 해츨링일때에야 온 종족이 그 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부모는 그 아이를 양육해야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란 존재는 자신에게 사정이 있으면 그 의무를 회피할 수가 있다. 즉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아이를 양육해야할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는 자신이 하기가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의 권한이 터무니 없이 적지만... 그러나 울 아버지처럼 해츨링이 태어나서 성룡식을 치를 때 까지 코빼기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는 드래곤은 극히 드물다. 덕분에 내가 해츨링이었던 시절 엄마를 비롯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극히 좋지 않았으므로 나는 아버지란 존재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그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종족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마 오늘과 같은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겠지만... 내 앞에 이제 내 아버지라고 알게 된 드래곤은 아까의 그 능글맞음과 여유는 어디에 갔는지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 손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지상 최대의 종족인 드래곤이, 것도 아마 내 짐작에 의하면 울 아빠도 엄마랑 거의 나이가 비슷할 테니 아마 4000살 정도 되었을 터, 그러한 칸을 바라보는 드래곤이 공포에 질려 떠는 모습은 내 생에 보기 드문 구경거리일 것이다. 아빠가 이렇게 공포에 떠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딸내미를 알아보지 못한 것. 현재 나는 울 엄마가 어디에 계신지 모르는 사정에 의하여 내 인생에 관여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 분은 울 할머니...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울 할머니께 이르면 아빠는 아마 반 죽을것이 분명했다. 울 할머니야 전 드래곤 종족중에서도 최고 고령자인데다 레드 종족. 평소에는 연륜 덕분인지 무척 인자하시고 현명 하시지만 이 분이 한번 화가 났다하면 세상 절반이 날라갈정도라고 한다. 뭐, 나도 직접본 것은 아니고 할아버지께 들은거라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울 할머니는 내 일이라면 물, 불을 안 가리실께 뻔한 데다 평소 아빠한테 감정이 좋지 않으셨으니... 캬캬캬캬 아, 이럴때보면 나도 정말 사악하단 말야...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아버지가 나를 꼬시려 했다는 것이다. 드래곤 사회에서는 종족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규칙이 몇 가지 있다. 개인주의라는 것을 나타내기라도 하는듯이 정말 몇 가지 안되는 규칙이 있는데 그것이 첫번째는 해츨링 보호, 두번째는 근친상간 금지 이다. 뭐 여기서 어머니의 권리는 규칙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데 그건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음.... 인간 사회에서 말한다면 전통 풍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새어 나갔는데.... 여기서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것이 좀 웃긴데 남매끼리는 가능하다. 그러니까 여기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딸 사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 조부나 조모와 손녀나 손자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사항을 어길뻔 했다는 것이다. 뭐, 어겼다고 해서 특별히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규칙을 어긴 드래곤은 스스로 파멸했다. 아버지야 어긴게 아니라 어길뻔 한거니 파멸하지야 않겠지만... "세르니안이.... 너를 낳았어?" 갑작스레 또 다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나는 여태까지 헤엄치던 상념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에?" "세르니안이 너를 낳았냐고..." 이제 다시 정신을 추스린 듯 아버지는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아예 새파랗게 되어 유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차분하고 고요해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와 함께 아까의 능글맞은 느낌이 싸악 사라져 있어 아까 그 사람( 아니 용) 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태생을 거짓말 하는 드래곤도 있어요?" 이제는 내가 여유만만한 태도로 앞에놓인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자 아버지가 허탈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렇겠군..." 그의 표정이 너무나 힘이 없어 나는 오히려 그가 안쓰러웠다. 뭐니뭐니해도 아버지가 아닌가? "할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을께요." 나의 부드러운 어조에 아버지가 하하 웃으셨다. "후후, 날 만났다는 사실에 다 짐작하셨을걸?" 그러더니 나를 한동안이나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셨다. 내가 너무 시선을 받다보니 어색해져서 슬쩍 옆으로 눈을 돌리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구나..." "뭐가요?" "그냥, 모든게 다. 후후후 사실 난 세르니안이 아이를 낳을 줄 몰랐어. 그냥 지워버릴 줄 알았거든.... 그래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나쁜 아버지가 되버렸잖니..." 드래곤중 여성은 임신을 했더라도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자체에서 낙태가 가능하다. 뭐,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드래곤의 모습으로 임신을 아예하지 않겠지만... "네 조부모님께서 나에게 아예 칼을 갈고 계시겠군, 그렇지 않니?" "뭐, 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시진 않아요. 덕분에 아버지가... 아,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죠?" "당연한걸 뭘 물어보니?" 그가 피식웃으며 말하는데 그의 표정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나도모르게 마주 피식 웃어보였다. "음, 어쨌든.... 아버지가 무슨 종족이며 이름은 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나 안보고 싶었어?" "당연히 보고 싶었죠.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건 당연하니까... 하지만 음... 첨부터 없는 존재였으니까 호기심만 있을 뿐 그리움같은 건 없었어요." "네 엄마가 나에대해 물으면 뭐라고 하든?" "아무말도요. 그냥 눈이 너무 뜨겁게 불타오르는 바람에 그 다음부턴 절대로 안 물어봤죠." "쿡쿡쿡, 그녀 답다." "맞아요. 정말 엄마다운 반응이었어요." 번 호 : 15100 / 15104 등록일 : 2000년 12월 30일 21:55 등록자 : LODEMP 조 회 : 9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7) 아버지와 나는 밤 새도록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어디서 그렇게 이야기 거리가 샘솟는지 의아해 했을 정도로 우리 부녀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야기가 계속 됨에 따라 점점 예전의 모습, 능글맞고 장난끼가 다분한 바람둥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눈에 부드러운 빛은 한시도 떠나지 않아 내 맘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푸하하하.... 큭큭큭... 그랬단 말이지? 하하하... 아이고 나 죽네...." "그렇게 웃겨요?" "하하하... 큭큭큭.... 과연 내 딸답다. 넌 정말 내 딸이야... 낄낄낄낄..." "에? 할머닌 엉뚱한 기질이 있는게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 그런 황당한 기질은 날 닮은거야." "아니, 해츨링이 검술 연습을 한게 그렇게 황당스런 일인가요?" "응? 아니, 아니... 그런말이 아니라.... 그런 다른 드래곤은 생각지도 못한 걸 생각해 내는게 날 닮았단 말이지..." "헤에... 할아버지는 자신을 쏙 빼닮은거라고 하시던데? 할머니도 긍정하시고..." "으잉? 네 할아버지가 누구신데 그래?" "어? 몰라요? 엄마의 아빤데..." "보통 자신의 태생을 말할 땐 엄마를 말하잖니? 그러니 아버지란 존재는 특별히 말해주지 않는 한 모르는게 대부분이야." "아, 그런가? 울 할아버지는 칸 시스파슈타인이세요." "아, 그래?" "어째 표정이 모르시는 것 같아요." "맞아. 잘 모르는 분이야. 음... 가만있자... 혹시 그 드래곤 숲의 고룡이랑 대판 싸우신 분 아닌가?" "맞아요. 바로 그분이세요." "우웅.... 그분도 황당하기로는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지... 하지만 넌 날 닮은거라구..." "우우, 애기같아..." "이녀석이 아버지보고..." "헹, 오늘 만난 아버지?" "에에, 그건 아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말로만?" "말만 해. 너가 내 첫번째 자식인데 뭔들 못해주리? 더욱이 내가 잘못한 것도 많으니 더욱 더 잘 해줘야지. 아아, 내가 못하는 건 빼고 말해라." 나 혼자 몬스터 사냥을 나갔다가 가고일에게 다쳐서 돌아오는 바람에 엄마가 가고일떼를 전멸시킨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의 성격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하고, 앤드루 사건을 이야기 할 땐 같잖게 할아버지 같이 충고를 해서 나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성룡식 이야기를 할땐 너무 간소해서 황당하다는 의견이 자신과 일치한다고 좋아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 분이 만약 내가 해츨링이 었을 때 옆에 계셨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그 시절이 안좋았던 건 아니지만 (안 좋았던 게 아니라 행복했던 시절이지만...) 욕심이란게 다 그런거 아닌가? "아, 그런데 아시리안? 네 동료들 말야, 너가 드래곤인거 알고 있지?" "예. 어차피 걔네들도 나처럼 인간이 아닌데다가 같이 인간 세상을 여행하는 거기때문에 서로 자신의 정체는 밝혀놓고 있어요." "걔네들 아직 성년이 안된것 같은데?" "맞아요. 류미르는, 아 하이엘프녀석 말예요. 얘는 자세한 사정을 말 안해주지만 눈치로 봐선 가출한 것 같고요, 세이몬은, 마족 말예요. 얘는 자신말로는 같은 동족들이 자신을 죽이려 해서 도망쳐 왔다고 해요." "흐음, 그래? 애보기 힘들지 않아?" "가끔 그렇지만... 두 녀석다 남자라고 날 보호하려고 하는걸요. 그래서 이래 저래 재밌어요." "그녀석들에게는 이름을 가르쳐줬어?" "예. 그래서 아린이라고 불러요." "아린?" "예. 제 애칭이예요. 어? 그런데 얼굴이 왜 그러세요?" "으아아악~" 아버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질렀다. 너무 놀란 나는 심장이 벌렁 벌렁 뛰는 것을 느끼며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우왁!! 왜그러세요, 아버지?" "너무한다. 왜 나한테는 네 애칭을 가르쳐주지 않은거야? 이 애비가 그렇게도 밉냐?" "에? 그랬어요?" 이 순간 나는 황당하기로는 할아버지 보다 아버지가 한수 위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랬어. 너무해애애~~~ 나만 안 가르쳐주고오오오~~" "에이, 이제부터 아린이라고 부르시면 돼잖아요. 뭘 그런걸 가지고...." "그런거라니? 너무해. 이건 날 무시한거라고." "아버지 무시한 적 없어요. 아휴, 참. 죄송해요. 깜박 했어요." "그래? 죄송하단 말이지?" '헉, 아버지의 눈빛이 왠지 심상치 않아. 류미르와 세이몬도 날 보며 이런 심정이었을까?' 나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났다. "왜요? 뭘 원하시는 거예요?" "죄송하다면서? 그럼 이 애비의 아주 아주 간단한 부탁 한가지 쯤 들어줄 수 있지?" 아버지의 사악한 웃음에 나는 등 뒤에서 삐질 삐질 땀이 나는것이 느껴졌다. "뭐, 뭔데요?" 아버지는 더욱 더 사악하게 웃으시며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입을 여셨다. "아빠라고 부를 것." "잉?" "아빠라고 부르라고. 내 여태까지 지은 죄가 많아 참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뭐냐? 아버지가.... 징그럽게. 그렇게 부르니까 꼭 내가 고룡쯤 된 것 같잖아? 그러니까 귀엽게 아빠라고 불러. 아빠." "하.하.하. 아버지나 아빠나..." "무슨 소리!! 어감이 틀리잖아 어감이. 그리고 세르니안은 엄마라고 부르면서 왜 난 아버지라고 부르냐?" "거야 아버지가 잘못한게 많으시니까요..." "윽, 내 딸이 이렇게 비정하다니...." 아버지는 나이에 맞지 않게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애처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으이구, 정말 안 어울려요. 그렇지 않아도 중년의 인간 모습이면서 그런 표정을 해요?" "지금 그딴게 무슨 상관이야? 내 딸이 매정하게 애비의 부탁을 거절하는데..." "누가 거절한대요? 아빠라고 할테니까 그 웃기지도 않는 표정좀 지울 수 없어요?" "그럼 아빠라고 불러봐." "에? 참내, 앞으로 아빠라고 부른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지금 한번 아빠라고 불러 봐. 듣고싶단 말야." "어이구, 아버지가 지금 몇살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닭살 돗는단 말예요." "또또, 아버지라고 한다." "아아, 그래요. 아빠, 아빠, 아빠. 됐죠?" "그게 뭐냐? 무뚝뚝하게... 좀더 부드럽고 귀엽게 부를 수 없어?" "우~, 나 혹시 아버지가 바뀐 건 아닐까? 엄마한테 아빠 이름이 확실히 아펜젤러라고 들은 것도 아닌데..." "나 맞아. 확실 해!!" "할머니께 확인해 볼까?" 나는 아무생각 없이 중얼거렸는데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사색이 되셨다. "허걱, 아린아, 날 만난 이야기는 안한다고 했잖니? 네가 나하고 만난 걸 알면 네 할머니는 날 죽이려고 달려오실거야." "우웅.... 그런데 아빠. 여태까지도 할머니가 아빠한테 한 번도 안오셨잖아요. 그런데 지금와서 왜 새삼스럽게..." "아린아, 이건말이다. 내 추측인데, 네 엄마가 날 안 밝힌 것 같아. 그러니까 네 아빠가 누구인지 네 조부모님께서 모르신다는 거지. 내가 알고 있는 두분 성격상 내가 너한테 안 간다고 한다면 - 아, 이건 그냥 예를 들어 말하는 거다. - 세상 끝까지라도 쫒아 오셔서 날 반 죽여서라도 네 앞으로 끌고 가실걸? 아니면 내가 네 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할 죽일 놈이라면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거나 네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맹세를 하게 하셨을 거야." "음.... 듣고보니 아빠말이 맞는것 같네요. 그렇다면 할아버지랑 할머니도 내 아빠가 누군지 모르시겠군요."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네 할머니가 아시면 난 그날로 죽음일꺼야." "하지만 어차피 나중이라도 알게될 일 아닌가요?" "아냐, 아냐, 너하고 나 둘이만 입다물고 있으면 돼. 어차피 네 엄마야 지금까지 말 안했으니 새삼스레 말할 이유는 없을테고..." "할머니가 그렇게 무서우세요?" "말도 마. 그분 한번 화가나셨다 하면 세상 절반이 날아갈걸?" 아빠는 정말 두렵다는 듯이 진저리를 치셨다. "헤에, 할아버지랑 말하는 것이 똑같네요." 그때였다. 누군가가 서재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주인님, 여기 계십니까?" "무슨일이냐?" 아빠는 여태까지 나와 이야기 할때 있었던 장난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위엄있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문이 조용히 열리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반백의 집사 복장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번 호 : 15144 / 15164 등록일 : 2001년 01월 01일 21:42 등록자 : LODEMP 조 회 : 38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8)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ps 글 빨리 써야하는데.....--;; - 요즘들어 너무 게으름을 부리는 로뎀프였습니다 - ================================================= 그러자 문이 조용히 열리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반백의 집사 복장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아빠의 앞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평정을 유지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침실에 계시지 않아 와 봤는데 역시 여기 계셨군요. 아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침?' 집사의 말에 놀란 내가 얼른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어느새 해가 떠 올랐는지 커다란 창을 가리우고 있는 두꺼운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아빠도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집사는 천천히 서재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면서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들을 다 열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에따라 방 안에는 점점 많은 양의 햇빛이 들어 왔고 덕분에 방 안은 점점 밝아져 우리 앞에 놓인 촛불이 필요 없게 되었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피셨다. 나도 밤 새도록 앉아 있어서 몸이 굳어 있었던 터라 크게 하품까지 하면서 기지개를 폈다. "후아아암~" 나의 이런 무례한 모습을 보고 집사가 살짝 눈을 찌푸렸지만 아빠는 이런 내 모습을 싱글 싱글 웃으며 보고 있다가 (꼭 팔불출 같은 모습으로...) 한마디 하셨다. "밥 먹자." "아, 애들이랑 같이 먹어도 되죠?" "너 좋을대로 해." 아빠가 기분 좋게 승락하자 나는 지체없이 방을 나서서 녀석들을 찾으러 갔다. 깜박하고 있다가 지금 생각난 거였지만 아마 녀석들 내가 올 때까지 잠도 안 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역시...' 용병들에게 물어 물어 우리 셋에게 배당된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 둘은 나를 기다리다가 잠들었다는 것을 잘 나태내주는 포즈로 잠들어 있었다. 류미르는 방 가운데 있는 작은 탁자 위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나마 세이몬은 침대 위에 있었지만 쭈그린 모습으로 자고 있어서 처량해 보였다. 그 둘은 내가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척을 느끼고 부시시 일어났다. "어, 왔어?" 류미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아직 잠에 덜 깬 목소리로 나를 맞았다. "쯧쯧, 그냥 자지 그랬어? 꼴이 그게 뭐냐?" "후아아암~!!" 세이몬이 침대 위에 주저 앉아서 기지개를 키며 입이 찟어져라 하품을 하고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자 자, 둘 다 일어나서 빨리 씻어. 밥 먹으러 가야지." 내가 방 구석에 마련된 자그마한 대야에 물을 부으며 말하자 류미르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다짜고짜 질문부터 했다. "아린, 그 자식이 너한테 뭐라고 그래?" "맞아.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세이몬도 그게 궁금했는지 얼른 류미르를 거들었다. "아아, 그거? 그러니까 그 분이 울 아빠더라구." "뭐?" "아린 아빠?" 그 둘의 벙찐 모습에 피식 웃으며 나는 손에 물을 가득 담아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그 둘은 내가 세수를 다 끝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을 때까지도 어벙벙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뭐해? 빨리 씻으라니까. 아빠가 밥먹으러 오라고 했단 말야." "잠깐만 아린. 그러니까 그게 뭐시냐... 그 아펜젤러란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란 말야?" 류미르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한번 세차게 흔들더니 아직도 불안정한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응, 맞아." "그런데 그 드래곤이 니 아빠라고?" "응, 그렇대두...." "하아, 이것 참...." 류미르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힘 빠진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 봤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싱긋 웃어줬다. "대단한 우연이지? 나도 아빠도 놀랐다니까... 아, 그러고 있지 말고 빨랑 씻어. 배 안고파?" 나의 이런 재촉에 그 둘은 느릿느릿 일어나서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그 둘을 계속 재촉해 가며 저택으로 들어가자 정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집사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 내 뒤에 있던 세이몬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하, 이것 참.... 아빠가 말한 모양이지..." 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세이몬을 돌아보며 말한 뒤 집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앞장서세요." 수 십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한 커다란 직사각형의 식탁이 있는 식당에는 정장틱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빠가 벌써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아빠~!!" 내가 다정하게 부르자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내 볼에 살짝 입을 마췄다. "에구구 이쁜 내딸..."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을 비롯하여 식당 안에 있는 집사를 포함한 모든 하인의 눈들이 뚱그래 졌다. 평소 아빠의 행동이 아니었나보다. "자, 이쪽이 류미르에요. 이쪽은 세이몬.... 아까 말씀 드렸죠?" 그러자 아빠는 나에게 했던 행동과는 전혀 딴판인 부드럽고 우아하지만 어딘가 위엄있는 포즈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류미르 입니다." "세이몬 입니다." 그 둘은 아빠의 그러한 변신이 얼떨떨한지 어벙벙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개념치 않은 듯 활달한 주인의 모습 그대로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린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자, 자리에 앉을까요?"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식당의 문이 강한 힘에 의하여 열려지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간단하게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는데 얼마나 급하게 뛰어 왔으면 그의 짧은 은색 머리칼은 엉망으로 엉켜 있었으며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급하게 달려온 바람에 숨이 차 있었는지 식당 문을 열기는 했지만 들어 오지는 못하고 식당 문의 문고리를 잡아 몸을 지탱한 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 특히 아빠를 노려보며 숨을 골랐다. 그런 그의 옆에서 그를 쫒아온 듯한 20대 초반의 기사복장을 한 남자가 역시 숨을 고르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아빠는 그런 그들을 힐끔 바라보더니 냉정하게도 외면해 버리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그런 상황에 어쩔 줄 몰라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눈치를 살피고 있다가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자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인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빠의 일이었기 때문에 태평하게 그 상황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자는 숨을 다 골랐는지 거친 발걸음으로 식당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한 건 식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눈초리가 너무나 살벌한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획 돌리더니 아빠 옆에가서 우뚝 섰다. 그리고는 너무나 화가났지만 그걸 억누른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까 제가 아주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 딸이 찾아왔다고요?" 번 호 : 15169 / 15171 등록일 : 2001년 01월 02일 22:15 등록자 : LODEMP 조 회 : 20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9) 류미르와 세이몬이 걱정스런 시선으로 나를 살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느긋했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이 남자를 죽인다 해도 아빠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 이유없이 그럴 성격은 아니므로 그저 상황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 나셔서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바라 보았다. "내 큰 아들이예요. 이름은 주르단. 앞으로 내 뒤를 이을 녀석이지요." 얼결에 세이몬과 류미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린의 동료인 류미르 입니다." "세이몬 입니다." 그러자 주르단이라고 하는 녀석은 마지못해 한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소개를 했다. "주르단 아펜젤러 입니다." 그리고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려 죽일듯이 노려 보았다. 나는 그런 그에게 피식 웃어 준 다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린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냉랭한 질문이 날아왔다. "성은?" 그는 내가 아버지에게 딸로 인정을 받았는지, 또한 내가 아펜젤러가 사람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그의 차가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시스파슈타인." 아마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듯한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의아한 빛을 띄울 때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하고 앉아라." 주르단이 마지못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으려고 할 때 류미르와 세이몬이 자리에 앉지 않고 슬그머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빠와 내가 의아한 듯이 그 둘을 바라보자 류미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나가서 용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별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식당을 나섰다. 그러면서 나에게 잘 해보라는 미소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둘이 식당에서 나가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주르단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아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리고 그에 응하는 아버지의 무덤덤한 목소리로 들렸다. "내 딸이다." 주르단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의외군요. 아버지가 찾아온 자식을 인정한 적은 처음이지 않습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까지 찾아와서 내 자식이라고 주장한 애들은 내 자식이 아니다." "그럼 저 아이는요?" "이 애는 내 딸이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주르단은 화가난 어조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여전히 아빠는 미동도 안한 채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셨다. "네가 인정하고 안할 차원이 아니다." 아빠의 말에 화가 더 난 듯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격양되고 빨라졌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저 아이가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았든 받지 않았든 전 저 아이가 우리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저 아이를 우리집에 들이신다면 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 아일 쫓아낼 겁니다." 그의 결연한 결심이 선 말을 듣자 그제야 무표정한 아빠의 얼굴에 표정이 돌았다. 그러나 그 것은 비웃음이었다. "훗,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뭘.... 말입니까?" "만약 이 아이가 아펜젤러가를 원한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의 모든것을 이 아이에게 물려줄 것이다. 게다가 너와 네 형제, 그리고 네 어미를 쫓아내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주르단의 눈이 커다래지면서 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가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빠의 차가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즉, 나에게 있어서 넌 이 아이의 존재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 그런..." 주르단이 허물어지듯 의자에 주저 앉았다. '하아, 슬슬 나서야 겠군...' "웃기지말아요, 아빠. 누가 아빠 재산에 관심 있대요?" 그러자 아빠의 얼굴이 내 쪽으로 돌려지면서 그의 표정이 180도 바뀌었다. "잉?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이룩한 건데... 그렇게 가차없이 말하다니..." "심혈이 아니라 아빠 평생 공을 들여도 나는 관심 없어요. 어차피 아빠도 알고 있으면서 뭘 그래요?"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이~" "아, 그건 그렇고 저 애(?)가 말한걸 보면 아빠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찾아온 녀석들이 꽤 있나보죠?" "아아, 몇명 있었지... 좀 놀았더니만 애를 낳으면 무조건 내 앤줄 알더라고. 흥, 그렇게 믿고싶은 거겠지..." "으이구, 하여간 남자들이란... 왜 부인 하나로 만족을 못해요?" "흐음, 아린아... 이건 남자들 세계의 문제라 넌 이해 못한다." "호오, 그래요? 아빠, 만약 이다음에 내가 결혼 했는데 내 남편이 바람피면 어쩔까요?" "뭐시라? 아니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을 가만 냅둬? 말만 해. 내가 단번에 죽여주마. 아니, 아니, 그건 너무 약해. 그냥 갖다놓고 엄청난 고문을 해준 뒤에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해주지. 아냐, 그정도로는 안돼. 그 자식 뿐만 아니라... " "아이고, 됐어요. 됐어." 아빠의 말이 끝도 없자 나는 중간에서 잘라 버렸다. "설마 내가 내 남편하나 못 다룰까봐서..." "이게, 이게, 도대체..." 거의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나는 그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는 주르단이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아빠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쯧쯧, 불쌍해라. 아니, 애를 얼마나 못먹였으면 저렇게 유령같아요?"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지. 이제 23살씩이나 먹은 녀석을 왜 챙겨줘?" "에? 그럼 나도 안챙겨 주겠네?" "에이, 무슨 그런말을.... 저 녀석이랑 너랑 같냐?" 그랬다. 주르단이란 녀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빠에게 나와 녀석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채로 인간과 관계를 가져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인간이다. 만약 엘프로 폴리모프한 채로 인간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하프엘프가 된다. 그리고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과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인간이 된다. 즉, 드래곤이 자신의 진정한 혈육인 해츨링을 낳으려면 본체인 드래곤의 모습으로 관계를 가져야만 가능하다는 소리다. 만약 그렇지 않고 어떤 모습으로 폴리모프해도 해츨링을 낳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아마 드래곤 천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것은 아마도 드래곤의 숫자를 적게 조정하기 위하여 신께서 만들어 놓은 해츨링 조정 시스템 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아마 자신의 엄마, 혹은 아빠가 드래곤인지도 모르는 채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다. 그런 그들에게 드래곤인 부, 혹은 모는 적당한 애정을 주겠지만 그것은 그 드래곤들에게는 한 순간의 꿈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드래곤들이 인간 세상에 갔다 오는 것을 한 순간의 유희라고 말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주르단은 꿈 속의 자식이고 나는 현실의 자식이기 때문에 아빠에게 주르단과 나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지만 보통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에게 그의 친 자식이 나타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므로 - 솔직히 이번에도 아빠가 나를 친 딸이라고 밝힌 것은 나에게도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 주르단 같은 가여운 상황에 처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르단에게 물씬 동정심이 인 나는 아빠를 향해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난 아빠 딸로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어요. 이번에 바라치나까지 간 뒤에 또 다시 내 동료들이랑 여행을 떠날꺼니까." "으잉?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게 냉정하게 떠나버리면 난 어쩌라고? 그러지 말고 애비 곁에서 몇년만 있으면 안돼냐? 그래도 상관은 없잖아? 내가 영영 여행을 못하게 막는 것도 아니고..." "싫어요. 솔직히 지금 여기 온 것도 아빠를 만나러 온게 아니라 바라치나까지 쉽게 가기 위해 온거 잖아요. 아빠를 만난건 순전히 우연이었다구요. 솔직히 아빠가 아펜젤러가의 가주인걸 누가 알았나?" "허걱, 아니 아린아, 아빨 만난게 반갑지 않니?" "반갑기는 반갑죠. 그렇다고 아빠 곁에 계속 있을수는 없잖아요. 난 내 갈길을 갈래요." "아니, 그런 냉정한 말을..." "배고파요. 밥 안 먹어요?" 나는 아빠의 애처러운 표정을 냉정하게 외면해 버리며 말하자 아빠가 풀죽은 얼굴로 옆에서 놀랍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는 집사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집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에게 음식을 내오라고 지시했다. 번 호 : 15198 / 15204 등록일 : 2001년 01월 03일 21:25 등록자 : LODEMP 조 회 : 27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10) 아빠의 나에대한 편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식사가 끝이 나고 곧바로 바라치나로 출발한 여행길에서 아빠는 나를 자신이 타고가는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에 거의 반 강제적으로 태웠다. 그리고는 내내 나를 자신의 곁에서 떼어놓지 않고 이것 저것 챙겨 주는 등 지극 정성을 다하셨다. 주르단은 그 아침식사 이후 나에 대하여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싫은 존재인 것 만은 분명했다. 아빠 모르실때 슬쩍 슬쩍 나를 죽을듯이 노려보는 것은 그의 감정이 어떠한지 알게 해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런 주르단의 마음을 모르시는 건지 그에게는 너무 무관심하셨고 오로지 나에게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셨다. 그런 아빠의 관심을 받는 것이 기분 좋기는 하지만 아빠의 아들로 엄연히 옆에 존재하는 주르단의 존재때문에 무조건 좋은 것 만은 아니었다. 더욱이 아빠가 아예 그에게 너무 무관심하게 대하시니까 오히려 그에게 미안한 감정까지 생기게 되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바라치나를 향해 출발한지 어느덧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러간 때였다. 나는 용병으로 고용되었다지만 모든 이들에게 아빠의 딸이라고 밝혀진 이상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일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모든 이들이 나를 아가씨 대접하는 바람에 한가함을 뛰어 넘어 심심함을 느끼는 나였다. 저녁때가 되어 어느 자그마한 도시에 도착한 우리는 일행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여관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두 팀으로 나누어 따로 여관을 잡기로 결정이 되었다. 물론 나는 당연히 아빠쪽으로 붙었고 다른 일행은 주르단이 통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도 주르단에게 이것 저것 지시를 내리는 아빠를 보게 되었다. 행운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는 아빠가 정면으로 잘 보이는데 아빠쪽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아빠는 주르단에게 시선을 주고 있어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아빠가 주르단을 바라보는 눈빛이 나를 바라보는 것인양 너무나 부드럽고 따스했다. 게다가 그 눈길에는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신뢰라는 감정까지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 머리속의 사고 회로가 완전히 엉망 진창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실타래가 엉긴 것 처럼 생각을 정리할 수도 없었고 또한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난 누군가에게 이끌려 (아마 류미르나 세이몬 둘 중 하나였겠지만...) 정신 없이 저녁을 먹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머리 속이 너무 엉망인 상태여서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도 그리고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처음 아빠를 만났던 때가 생각이 나며 그 뒤 아빠와 있었던 시간들이 영화를 보는 것 처럼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처음에 내가 딸인것을 알았을때 너무나 놀란 아빠의 반응, 자신과 만난 것을 말하지 말라던 아빠의 신신당부, 너무나 노골적이다시피 무관심하게 대하는 주르단,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기분좋아하던 바보같은 나까지... 왠지모를 아빠에 대한 배신감과 서운함, 그리고 쓸쓸함이 내 가슴속에 물밀듯이 밀려오자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뺨에 따뜻한 물 한줄기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너무해..." 다음날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그래도 잠을 이룰수가 없어서 내가 묶고있던 여관을 나서서 주르단이 묶고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의 문은 닫혀 있었고 모든 불은 꺼져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내가 그 여관으로 들어가는 데 조금 귀찮게 만들 지언정 방해가 될 수는 없었다. 그곳 여관으로 조심스레 들어간 나는 주르단이 어디 묶고있는지 모르는 데다 또한 그것을 알기 위해 사람을 깨우기는 싫어서 실프를 불러내었다. 실프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주르단의 방은 역시 아펜젤러가의 장남 답게 그 여관에서 제일 고급방이었고 그것도 혼자 사용하고 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다란 침대 위에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주르단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가 그를 깨우려고 침대 위쪽으로 몸을 수그렸을 때 뭔가가 번쩍하며 나에게 날아왔다.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비틀어 그것을 피해내자 주르단의 몸이 튕겨지듯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잡았는지 날카로워보이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난 채로 자신의 방을 침입한 자를 노려 보았지만 어두워서인지 아직 누구인지는 파악을 못한 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단검으로 곧바로 공격할 수 있게끔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라이트!!" 갑작스레 내 손 위에서 어른 주먹보다 약간 큰 빛의 구체가 나타나면서 뿌린 빛 때문에 그는 얼른 단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빛의 구체를 천장으로 띄운 뒤 느긋한 태도로 근처에 있던 의자 하나를 끌고와 앉아 그의 눈이 빛에 익숙해질 때를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눈가를 가렸던 손이 내려가고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이 놀라움을 표시하듯 크게 떠졌다. 그러더니 얼른 자신의 침대 옆에있는 옷걸이로 다가가 그 곳에 걸려있는 셔츠를 벗겨내어 자신의 벌거벗은 상체를 가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반가움이 전혀 담기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가 묻자 나는 다시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네가 보고싶어서..." 그러자 그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그게 무슨...?" "너, 나 미워하지?" 그의 말을 자르고 불쑥 던진 나의 질문에 그의 눈이 다시 차가워졌다. "당연한 걸 왜 묻지?" "왜 미워하니?" 그는 나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힐끗 보더니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넌 생전 처음보는 애가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이라고 하면서 나타나면 그 애를 이뻐하겠냐? 더욱이 아버지는 엄연히 어머니라는 부인이 있는데..." "당연히 미워하겠지." "그런데 뭘 물어?" "예전에 아빠 자식이라고 주장하면서 찾아온 애들이 있다고 했지?" 그의 표정이 의아하다는 듯이 변했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래." "그때 아빠가 어떻게 했니?" "내가 볼 때도 너무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냉정히 그들을 쫓아냈지." "왜? 그들 중 진짜 아빠의 자식도 있었을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버지 말씀으론 절대 그럴리 없다는 거야. 뭐, 어쩌면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건지도 모르지만... 아버진 한번 약속하신 것은 꼭 지키셨거든." 그 말을 하는 녀석의 눈이 약간이지만 부드러워졌다. 그걸 보는 순간 이 녀석이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약속? 무슨 약속?" "내가 알기론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에도 아버지 주위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고해. 뭐, 아버지를 보면 그럴만도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결혼하기 전에 한가지 약속을 하셨다는군." "무슨?" "아펜젤러가의 모든 아이는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아이일것." "호오, 네 어머니 참 현명하시구나?" "맞아. 그리고 아버지는 여태껏 그 약속을 지키셨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나 때문에?" 그의 눈이 다시금 차가워졌다. "당연한거 아냐?" "너한테 아빠는 어떤 분이셨니?" 그러자 그의 눈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듣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였다. 누구보다 현명하시고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고, 우리 남매들을 차별없이 사랑해 주시고...하긴 엄격하신 면이 있기도 했지." 그의 목소리는 예전의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는 듯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거의 완벽한 아버지 상이었군." 그러자 그의 생각이 현실로 돌아온 듯 했다. "그래. 네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너란 존재가 아버지를 그렇게 바꿔놓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게다가 아버진 네가 나타난 후론 나란 존재는 아예 잊어버리신 듯 하지." 그의 음성은 분노로 인하여 날카로웠고 슬픔으로 인하여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곧 이은 나의 말에의하여 그는 당황해 했다. "하, 아빠의 연기력은 정말 뛰어나군. 너까지 완벽하게 속일 줄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 "아빠가 왜 나한테 그렇게 팔불출처럼 대하고 너한테는 무관심했는지 알아?" "너때문 아냐?" "그래, 나때문이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조부모님 때문이야." 그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쉽게 말하면 울 조부모님은 아빠가 꼼짝도 못하실 정도로 대단한 분들이라는 거야. 내가 그 대단하다는 아펜젤러가 재산을 거들떠보지도 않는거 보면 모르겠어? 그런데 그 분들은 내 엄마가 어떤 놈팽이에게 홀려 나를 낳은것 까지는 알고 계시지만 그 놈팽이가 누군지는 모르시거든. 덕분에 나도 네 아빠를 만나고 나서야 그가 내 아빠도 된다는 걸 안 거고." "그렇다는건 설마..." "너가 뭘 생각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이래. 아빤 일부러 나를 편애해서 내가 너와 네 남매, 그리고 네 엄마에게 나쁜감정을 갖지 않게 만들려고 한 거야. 아니, 오히려 동정심까지 갖게 만들려고 한 건지도 모르지. 그러면 내가 아빨 만났다는 것과 내 아빠가 누구라는 걸 내 조부모님께 말하지 않을테니까. 아빠는 만약 내 조부모님이 아빠를 알게 된다면 아펜젤러가 자체가 완전히 풍지박살 날 거란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으니까 말야." 주르단은 이젠 아예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도 어제 안 거야. 아빤 그만큼 너와 네 가족을 사랑하신 거라고." 주르단의 표정이 점점 환해지더니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런 그의 표정으로 보자니 나는 벨이 꼬였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그의 표정이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그가 다급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너 이제 어쩔꺼야?" "뭘?" "설마 이제와서 아버지를 네 조부모께 말씀 드릴껀..." "말 안해. 약속했으니까. 아빠한테 넘어간 건 분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러자 그의 표정에 나를 향한 동정심이 어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아빠가 아니래도 엄마랑 할머니, 할아버지께 사랑 듬뿍 받고 자랐어. 솔직히 아빠를 만날때까지만 해도 아빠란 존재를 필요해 하기는 커녕 보고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단 말야." "그래도 아버지의 집중적인 사랑을 받으니까 기분은 좋았지?" 그의 목소리가 철부지 동생을 달래는 것 마냥 부드러웠다. "부인은 안해. 덕분에 널 가엽다고 생각 했으니까." "고마워."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지고 그의 눈이 다정해지면 다정해질 수록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는 냉담해지고 꼬여져만 갔다. "뭐가?" "이 시간 나한테 온 걸 보면, 아버지께 말씀 안 드리고 그분이 의도하신대로 해 주려는 거잖아. 안그래?" "모르지. 내일 아침이 되어 따지게 될지." "그래도 아버지를 많이 생각해 준거 아냐?" "별로 생각 안했어." "그래 그래, 그럼 날 생각해서 와줬다고 생각해도 될까?" "니 맘대로 생각해. 착각은 자유니까." '젠장, 왜 이렇게 됐지? 내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첨에는 진짜 딸인 내가 그나마 아빠가 생각해 주는 녀석에게 나의 넓은 마음을 보여주려고 온 거였는데 어떻게 된 상황이 녀석이 넓은 맘으로 날 지 동생으로 받아들인 것 처럼 되어버렸다. "본가에 한번 들러보지 않을래? 그래도 남매들인데 한번 만나보지 그래? 걔네들도 예쁜 동생을 만나서 좋아할꺼야." "생각 없어." "그럼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봐. 나 말고도 내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가 있거든. 너한테는 언니하고 오빠가 되겠구나." "누가 인정한대?" "그러지말고 한번 들려. 너 여행중이라며? 에스라 왕국을 여행하는데 아펜젤러가 사람이라면 더욱 더 편하게 할 수 있을거야." "아펜젤러가 사람이 아니더라도 편하게 여행해 왔어." "그래 그래, 알았어. 그럼 한번 구경이라도 할겸 놀러가는건 어때? 아펜젤러가 본가는 꽤 멋있는 저택이라고. 남들은 와보고 싶어서 안달이란 말야." 그의 이제는 너무나 다정해진 목소리와 태도에 은근히 더욱 더 부아가 났다. "생각해 볼께." 그 말을 퉁명스럽게 던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아한 눈으로 따라 일어서면서 날 바라보는 그를 향해 다시 한번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가 뜨려고 하잖아. 이제 갈래." "그래, 그래, 나중에 보자." "보든지 말든지." "아, 아린이라고 불러도 돼? 아버지는 그렇게 부르시던데... 참, 난 그냥 주르단이라고 불러. 오빠라고 불러주면 더 좋겠지만..." "누가 오빠란 거야?" 내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날카롭게 묻자 그는 재빨리 한발 뒤로 물러났다. "아니, 그냥 내 희망사항이야." "흥." 나는 거친 발걸음으로 방 안에 나 있는 창가로 걸어가서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놀라 달려오는 그를 무시해버리고 이제 해가 뜨려고 밝아오는 하늘 쪽으로 날아올랐다. 번 호 : 15135 / 15144 등록일 : 2001년 01월 04일 22:05 등록자 : LODEMP 조 회 : 27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11) 그날 아침, 일행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여행을 시작할 때였다. 내 주위에 있었던 이들, 즉 나와 주르단, 그리고 아빠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눈치 채고있던 사람들이 내 쪽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예전과는 달리 내 마차 옆에서 말을 몰며 틱틱대는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묻지도 않았는데 이것 저것 이야기 해주는 주르단과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전 같으면 주르단은 나와 아빠가 타고가는 마차와 멀리 떨어져 말을 타고 갔었고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살기를 담아 나를 쏘아보았을 거였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하루밤 새에 180도 달라져 있었으니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영문을 모르기는 아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아빠에게 삐져 있던 나로써는 아빠의 시선을 무시해버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그래, 아린아? 누가 기분나쁘게 했어? 누구야? 누가 내 딸내미를 이렇게 기분 나쁘게 만든거야?" "글쎄말예요. 누구죠? 감히 내 동생을 이렇게 기분 나쁘게 만들다니 말예요. 아린아, 말만 해 이 오빠가 혼내주마." 아빠의 팔불출 같은 말을 이어 받은것이 의외로 주르단이었고 주르단 또한 아빠와 비슷한 말투로 말을 한데다 나를 자신의 동생으로 지칭하자 아빠는 놀란 눈초리로 주르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르단은 아빠에게 싱긋 웃어보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말하기 전 까지는 자신도 입을 다물고 있어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웃기지도 않아. 누가 내 생각 해달라고 했나?'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 대신 주르단이 계속 이것 저것, 특히 아펜젤러가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는 동안 우리는 어느 숲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 숲은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라서 빠른 속도로 통과할 거라며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지 말라는 친절한 충고를 마지막으로 주르단은 긴장된 눈으로 주위를 살피느라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을 때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가 나타났다." 내 생각에 빠져 있느라 미처 그들의 기척을 감지 못하였던 터라 나는 크게 당황하며 마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주르단이 다급하게 마차 문을 막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알았지? 마차에서 내리면 안된다!!" '웃겨, 지가 내 보호자라도 돼나?' 그러나 뭐 가만히 있으라는 데 귀찮게 일부러 나서기는 싫었으므로 나는 마차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그때 내 머리속으로 아빠의 음성이 울렸다. 용언이었다. [왜 그래?] 나만 따로 입으로 말하기는 이상했으므로 나도 아빠처럼 의지로 말을 전달했다. [뭐가요?] [너 답지 않아. 내가 뭐 서운하게 한거라도 있어?] [하, 날 서운하게 할 일을 하긴 하신 모양이죠?] 그러자 아빠가 갑작스레 침묵을 지키셨다. 그리고는 조용히, 진지한 눈으로 한참동안 나를 찬찬히 살펴 보시더니 다시 진지하게 말을 건네셨다. [없는거 같은데?] 순간 나는 몸에 힘이 빠지면서 앉아있는 상태 에서도 몸이 휘청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아빠를 매섭게 노려 봤지만 아빠는 눈썹 하나 꿈쩍 안 하시고는 뻔뻔스런 얼굴로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셨다. 아빠의 그 얼굴을 바라보자 그래도 그냥 참고 넘어가려던 내 생각이 확 바뀌어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저 뻔뻔스런 얼굴이 당혹감과 걱정스러움으로 물들게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요?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말하면 아빠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냥 아펜젤러가의 후계자로 눌러 앉을까 진지하게 고민중이예요. 그것도 꽤 재밌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아빠의 얼굴을 살폈지만 아빠의 얼굴 어디에도 당혹스러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의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처럼 보였다. [드디어 네가 내 정성에 감동했구나... 이제야 이 애비 곁에 있고싶은 마음이 생겼니?] '이게 아닌데...' 나는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꼈지만 내색 안하고 다시 다음 펀치를 날렸다. [아빠의 인간 부인은 뭐라고 할까요?] [흥, 그 인간들이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냐? 나에게는 네가 제일이야.] '이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물론 정상적인 드래곤 부녀 사이라면 이 말이 지극히 당연한거겠지만 아무래도 아빠이다 보니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그럼 이 길로 당장 가서 내가 모든걸 차지해도 괜찮죠?] [물론이지. 당연한걸 왜 물어보냐?] '이 용은 얼마나 얼굴이 두꺼운 거야? 하긴, 그러니까 엄마도 넘어간거겠지...'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말발 승부는 그만 둬 버리고 본심을 말하기로 했다. [됐어요. 그만 둬요. 이제 연극은 그만하고 솔직해지시라구요. 내가 뭐 눈치 못 챈줄 알아요?] 그러나 아빠의 뻔뻔스런 얼굴은 여전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연극이라니?] [하, 정말 그만두시지 못해요? 아빠가 인간들에게 나를 딸이라고 밝히고 공주대접해 주면서 주르단에게는 냉담한 거 아빠의 인간 자식들이 내 분노에 당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거 아녜요?] 그러자 그제야 아빠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아빠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자 의기양양해진 나는 한번 더 펀치를 먹이고 싶어졌다. [그거 알아요, 아빠? 할아버지랑 할머니께 말씀 안 드리겠다고 약속 했지만 엄마한테 말씀 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는 거요.] 그러자 아빠가 묘한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계시더니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진지했다. [화가 많이난 모양이구나?] [아빠같으면 화 안나요?] [그래, 네가 어떤 심정인지 짐작하겠다. 하지만 아린아, 나도 좀 이해해 주렴. 난 네가 나와 세실리안의 딸인 걸 알자 마자 걱정부터 되었단 말이다.] [반가움 보다도요?]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네 엄마의 성격이 보통 성격이냐? 그래서 내가 그냥 있다간 모든게 다 풍지박살 날 것만 같았단다. 네가 내 성격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은 정말 못했어.] 아빠의 표정에는 정말 미안해 하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연극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후후, 네가 너에게 정말 좋지못한 일을 한것 같구나... 지금 한 말도 의심될 정도이니...] [....] 나는 아빠의 시선을 무시해 버리고 딴 곳을 보는 척 했다. [아린아, 하지만 널 만나서 반가웠던 건 정말 진심이란다. 네가 분노할 까봐 걱정이 되는 순간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정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면 믿겠니?] [못 믿어요.]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그제야 나는 아빠의 진지해진 얼굴을 돌아보았다. 드래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약속과도 같은 효력을 나타낸다. 그것은 즉, 진실을 말한다는 것과 같다. [정말이야, 널 만나서 기뻤다. 그리고 미안한 것도 사실이야. 지금 내 심정 같아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네가 해츨링일 때로 돌아가서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만 내 분노를 받게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주르단을 아낀 것도 사실이죠?] [부인하지는 않아. 하지만 지금 내가 녀석들에게 진지한 것을 이해해줄 수는 있지 않겠니? 난 지금 유희중이고 그럴때는 항상 그 시간에 충실했으니까... 더욱이 그 녀석은 내가 어렸을 때 부터 키워온 녀석이야.] [진작 그렇게 진실하게 말하면 좀 좋아요? 아빤 나에게 정말 너무하신 거라구요. 아빠한테 배신감까지 느낀 거 알아요?] [정말 미안해. 너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말로만?] 그러자 아빠가 피식 웃었다. [이러면 어떠니? 내가 죽는 날 까지 어떤 상황에서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네가 부탁하는 건 뭐든 들어주마.] 이건 솔직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한가지도 아니고 아빠가 죽을때까지라면 아빠가 아직 고룡이 안 된이상 몇천년이란 세월이 있는데... 특히 드래곤은 개인주의 적인 성격이 강한 종족, 해츨링이나 성룡이 된지 얼마 안된 자식이라면 몰라도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책임 질 나이가 된 자식에게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아빠의 제안이 나에게 얽매이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어느때고 부탁을 들어준다는 것은 드래곤으로써는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인 것이다. [좋아요. 아빠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거예요? 물론 내가 다급할때를 제외하고 아빠에게 부탁하지는 않겠지만...] [그래, 약속했다. 그리고 나도 네가 쓸데없는 부탁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넌 날 닮았으니까.] [흥, 처음에는 엄마를 닯았다고 생각하셨으면서...] 그러자 아빠가 미안한 듯이 웃으시며 변명하셨다. [아, 그거야 너도 레드일족이니까 그렇게 생각했지...] [헹, 그래도 그날 밤에 이야기 할 때 아빠를 닯았다고 주장하셨잖아요?] [날 닮은 면도 있다는 거지.] 아빠의 궁색한 변명에 나는 나도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아빠의 얼굴에 안도감이 흘렀고 그걸 본 나는 다시 벨이 꼬였다. [지금은 이걸로 그냥 넘어가겠지만 아직 화가 완전히 풀린건 아녀요.] [그래, 그래.] 그때쯔음 되자 바깥쪽에서도 모든 일이 해결 되었는지 주르단이 약간 피곤하고 몸 곳곳에 피를 묻힌 채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 해결되어선지 그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가득했다. "몬스터들이 물러갔습니다. 이제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빠가 주르단을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 수고했다. 빨리 이 숲을 빠져나가자꾸나." 다시 출발하는 마차 속에서 나는 슬쩍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아빠 여기서 그냥 머리만 좋은 사람으로 있는 거예요? 마법을 쓸 수 없는?] [마법을 못 쓰는 것 처럼 보이게 했지. 하지만 대신 검술 실력이 꽤 높은 걸 보여줬어.] [그럼 아까 왜 안 싸웠어요?] [내가 아니라도 충분히 해결하는데 뭐하러 힘 빠지게 나가서 싸워?] 순간적으로 이런 게으른 경향은 혹시 아빠를 닮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 호 : 15165 / 15249 등록일 : 2001년 01월 05일 22:00 등록자 : LODEMP 조 회 : 738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4화 아린, 아버지를 만나다 (12) 아빠와 대화를 하면서 그에 대한 감정이 아주 약간이나마 스러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를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뒤로도 나는 아빠와 예전처럼 웃으며 대화하지는 않았다. 아빠도 예전처럼 팔불출처럼 대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미안한 감은 있으신지 틈만 있으면 내 화를 풀어주려고 애쓰셨다. 그래도 그런 아빠를 무시해버리고 틱틱대는 나를 달래주는 것은 주르단이었다. 그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두와 헤어져 내 방으로 와서 누워있는데 주르단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아직도 화나 있어?" "응." "아버진 너도 사랑하시는 거야." "몰라. 나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버지께 말씀 드린 거야?" "뭘?" "너가 눈치챘다는걸." "응, 어쩌다보니..." "많이 미안해 하셨겠네?" "사과는 하시더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버지께 뜯어낼 수 있는 만큼 왕창 뜯어내버려." "너 지금 본가에 같이 가자고 하는 거지?" "아하하하, 들켰네..." "너한테 안 어울리는 짓을 하니까 그렇지." 주르단은 장난하다 들킨 애가 얼렁뚱땅 넘어가려 짓는 웃음을 보여 주다가 다시 진지모드로 돌입했다. "본가에 가자. 모두들 반가워할꺼야. 너도 가족이 생기니까 좋잖아?" "너말야, 나 동정하는가 본데? 내가 얘기했듯이 우리 집안은 아빠까지 쩔쩔맬 정도로 대단한 집안이야." "알아. 하지만 너 외동딸이지? 그러니 형제나 자매가 있는걸 원했을거 아냐? 네 바램이 이루어지는 거야." "흥, 너도 첨에 나한테 냉담했잖아. 그런데 네 동생들이라고 나한테 잘해준다는 보장이 어딨어?" 그러자 주르단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뭇대는 것이 내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마음껏 비웃음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지금 기분같아선 네 동생들이 그렇게 나왔다간 다 뒤집어 엎을것 같단말야. 그래서 일부러 안가는 거야." "처음에는 그럴지 몰라도 나중에는..." "나중은 무슨 나중. 첨에 그렇게 했다간 내가 다 뒤집어 엎는다니까." "그래, 알았어. 피곤할테니 오늘은 그만 자라. 내일 보자." 내 결심이 너무 굳어있어서 그런지 주르단은 더 이상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다정하게 밤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그 다음날에도 그리고 또 그 다음날에도... 주르단은 틈만 있으면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아빠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깊다보니 더 이상 아빠곁에 머무르고 싶은 맘이 사라져 버린 나는 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결국 그렇게 우리는 바라치나 도시에 도착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 즉시 바라치나에 있는 아펜젤러가 지부로 향했다. 거기서 나는 주르단의 지시에 의하여 류미르와 세이몬과 함께 어떤 화려한 방에 안내되었다. 그 동안 내 기분이 좋지 않은데다 주르단이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보지 못한 류미르와 세이몬이 이제는 단 셋만 같이 있게되자 조심스레 내 얼굴을 살폈다. "왜?" 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묻자 류미르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아직도 기분이 안 좋아보이네?" "그럴일이 있어." 그러자 이번에는 세이몬이 끼어 들었다. "무슨 일인데?" "집안일이야. 그러니 묻지 마." 세이몬은 나의 냉담하다시피한 대꾸에 풀이 죽어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류미르가 분위기를 바꾸려는지 활달한 어조로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꺼야?" "온천으로 가야지.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오늘은 그냥 머물러주지만 내일 아침 일찍 떠날꺼야." "그런 상태로? 이렇게 아무런 해결도 안 된채 여행을 떠나면 그 여행이 즐겁겠어?" 류미르의 걱정스러운 어조에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다가 세이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둘은 나의 냉담한 반응에 조심스러운 표정들 이었지만 그 뒤에는 나를 걱정하는 기색들이 완연했다. 나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뒤 이제까지 단단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애써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너희들때문이 아닌데 말야. 괜히 나때문에 너희들까지 기분이 엉망이 되었네..." "그래,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이제야 너 답다." "이 여행을 제의한 녀석이 그렇게 기분이 저조해 있으면 어떻게 하냐? 하마터면 우울한 여행이 될 뻔 했잖아?" 류미르와 세이몬이 안도감으로 얼굴이 풀어지면서 한마디씩 중얼 거렸다. "그래, 어차피 처음부터 아빠는 나한테 필요 없는 존재였으니까. 지금에 와서 이러는 건 웃긴 일이야. 이제 나도 어엿한 성룡인데 말야." 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린 말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무슨 말이야?" "아냐, 혼잣말이었어. 이제 정리해야지. 이번 여행은 너무 머리가 혼란스러웠어. 아, 그건 그렇고 우리는 내일 아침 먹고 떠나는 거다. 알았지?" 나의 활기찬 어조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기다리던 바야." 다음날 아침 우리 셋끼리 식사를 마친 나는 그 둘에게 짐을 싸놓으라고 일러놓고 사람들에게 아빠가 있는 곳을 물었다. 그들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나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빠가 있는 곳을 안내해 주었다. 아빠가 지금 있다는 방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자 사방이 온갖 책들과 서류더미들로 빽빽하게 도배되어 있는 방 중앙에 아빠와 주르단이 또 다른 두 사람과 열심히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린이구나." 주르단이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나서 다정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곧장 아빠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무슨 일이니?" 당황과 의아함이 섞인 아빠의 질문에 나는 아무런 말 없이 다짜고짜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빠가 더욱 더 황당해 하며 눈만 껌뻑껌뻑 대자 그제야 나는 한마디 했다. "줘요." "뭘?" "류미르하고 나하고 세이몬에게 지급될 돈." 그러자 옆에 있던 주르단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떠날 생각이니?" 그런 그에게 나는 아빠에게 오른손을 내민 채로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간다고 했잖아." "그래도 본가에는 한번 가 봐. 거기 가면 돈은 얼마든지 줄께. 아니, 네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데려가줄께." 주르단의 다급함이 섞인 말에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됐어. 지금은 가고싶지 않아. 아직 아빠에 대한 화가 풀린게 아니라서 말야. 나중에... 그래, 어쩌면 나중에 화가 풀릴때 한번 들릴께.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말야. 뭐, 영영 안 들릴수도 있고..." 그리고 아빠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안줘요?" 아빠는 아무런 말 없이 피식 웃어보이시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빠 뒤에 있는 커다란 책상으로 돌아가서는 서랍을 열어 어른 주먹만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셨다. "아버지." 그 모습을 본 주르단은 다급하게 아빠를 부르며 그의 곁으로 가려 했지만 아빠는 손을 들어 그런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내 앞으로 다가와 가죽주머니를 내미셨다. "자." 그의 얼굴에는 체념감과 함께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묵뚝뚝하게 그의 손에서 가죽주머니를 잡아채고는 다른 손을 또 내밀었다. "줘요." 그러자 아빠의 얼굴이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이번엔 뭘?" 그런 그에게 나는 사악한 미소를 띄워 보이며 대답했다. "선물." "아~!!" 아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이 되셨다. "뭘 주지? 생각 안해놨는데..." 그런 그에게 나는 간략하게 대답해주었다. "부피는 적고 비싼 것." 주르단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무시하고는 아빠만 계속 쳐다보았다. 아빠는 더욱 더 심각한 표정으로 이제는 아예 자리에 앉아서 고민하기 시작하셨다. "음.... 비싼거라.... 부피는 적고...."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시던 아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셨다. "어쩌지? 마땅한게 생각이 안 나네..." "쳇." 나는 가능한한 최대한 과장되게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몸을 획 돌렸다. 그러자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속으로 '역시...' 란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왜요?" 그러자 아빠는 자신의 팔에 차고있던 새하얀 팔찌를 꺼내셨다. "이걸 주마." 은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그 팔찌는 아무런 무늬도 없이 매끈한 링 형태의 팔찌였는데 오히려 그런 그 모습이 너무나 고귀하고 순결해 보였다. "이거 비싸요?" 내가 그걸 들고는 무심하게 묻자 아빠가 씨익 웃으셨다. 그리고는 내 머리속으로 곧장 아빠의 음성이 들려 왔다. [당연하지. 내 발톱을 가공한 건데...] "근데 이걸가지고 뭘 하지?" 내가 심각하게 그 팔찌를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다시 아빠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다 내 힘을 좀 불어 넣었다. 그러니 약간의 마나를 가하면 넌 눈보라와 얼음기둥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을거야.] "헤에, 그러니까 마법의 팔찌군." "그렇지. 단지 시동어를 외쳐야하긴 하지만... 일반 마법사라면 무척 탐낼만한 물건이라고. 위력이 좀 크거든." 아빠의 뒤 이은 설명에 나는 만족한 얼굴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뭐, 이정도로 만족해드리죠." 그리고는 곧장 그 방을 나와 기다리고 있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데리고 그 저택을 나왔다. 정문을 나서려는데 주르단이 헐래벌떡 쫒아 왔다. "조심해서 가. 나중에 정말 한번쯤 본가에 들려주고." "알았어. 생각해볼께." 나는 그에게 싱긋 웃어보이고는 류미르와 세이몬과 함께 몸을 돌려 그 곳을 떠났다. 정문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그 저택에서 멀어질때 까지 주르단이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흠, 꽤 괜찮은 녀석인데?" "맞아. 성격도 좋아보이고, 얼굴도 잘 생겼고..." 류미르와 세이몬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우리 의적단에 끼워줄껄 그랬나?" 번 호 : 15422 / 15425 등록일 : 2001년 01월 08일 21:50 등록자 : LODEMP 조 회 : 9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5화 아기 돌보기 (1) 제 25화 아기 돌보기 바라치가 도시를 떠나 우리는 에스라 왕국의 그 유명한 온천 도시를 향해 말을 달렸다. 처음 며칠동안은 애써 웃음짓는 나를 별로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조심스레 행동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며칠이었다. 그들의 조심스러운 행동은 정확히 5일 후에 바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하긴 그것도 그들 딴에는 꽤 오랫동안 버틴거긴 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내가 우울해 있는 동안 쌓여있던 그들의 불만이 터져나와 버렸다. "쳇, 뭐야? 나보고 또 요리하라고?" "네가 나보다 나으니까 그렇지." "헹, 너나 나나 다를게 뭐냐?" "뭐라고? 야, 너의 그 형편없는 요리를 아무런 불평 없이 먹어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지 못할 망정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허이고, 네가 퍽도 불평을 안했겠다. 내가 처음 요리했을 때는 반도 못 먹고 투덜댔었잖아." "그거야 너무 엄청난 맛이었으니까 그렇지." "뭐라고? 야, 네가 재료를 제대로 사오지 않은 건 생각지도 않냐? 네가 재료만 충분히, 그리고 잘 사왔으면 그정도의 맛은 안됐을거다." "호오, 너 네가 만든 요리가 맛이 없다는 건 인정하고 있구나?" "시끄러. 내 요리 맛이 형편 없는건 네가 재료를 제대로 사오지 않아서야." "흥, 그 재료로도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쩔쩔매던 주제에." "그러는 넌! 나보다도 더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나보다 더 아린이랑 오래 있었으면서도 그것 하나 못 배웠냐?" "뭐라고? 야, 내가 아린이랑 더 오래 있었던 것은 겨우 며칠뿐이었다고." 류미르와 세이몬이 모닥불 위에 후라이팬과 냄비를 올려 놓고 투닥 투닥 다투기만 할뿐 전혀 요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요리도 하지 않을거면서 불 위에 왜 냄비와 후라이팬은 올려놓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처음에 자기네 딴에는 조심한다고 낮은 목소리로 투닥이더니 이제는 점점 목소리가 높아진 줄도 모르고 싸우고 있다. 저 둘은 왜 붙기만 하면 서로 자존심을 내세워 싸우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좀 나아졌나 싶더니만 류미르도 평소의 이성을 아예 잊어 버린듯 했고 세이몬도 조금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선다. 아니, 재료만 넣으면 알아서 다 요리해주는 마법의 용구들로 그런 요리를 만든다는 것 자체부터 도저히 이해가 안돼는 녀석들이었다. 처음 세이몬이 한 요리를 가져왔을 때, 류미르가 나보다도 먼저 음식을 한 입 먹은 모습을 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그 음식을 먹고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류미르가 한 입을 입에 넣고는 짓던 그 오묘하고 이상한 표정이란... 결국 녀석은 음식을 목 너머로 넘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숲속으로 뛰어들어 갔었다. 한참 뒤에 돌아온 녀석의 표정은 너무나 창백해져 있어서 하얀 얼굴에 푸르스름한 빛까지 돌아 유령같이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세이몬이 가져온 요리가 마치 독약과도 같이 생각될 정도였다. 그래서 우울한 기분을 이유로 조금도 손대지 않았던 것이다. 헹, 녀석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되게 심각한 줄 알고는 모든 일을 저희들이 알아서 하길래 이렇게 우울해 하는 것도 가끔은 해볼만 하다 했더니만... 에스라 왕국에서 유명한 온천 지역은 하날 지역이다. 바로 울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하날산 밑에 있는 도시가 바로 그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 도시였다. 우리가 그 곳으로 가려면 게덴 산맥쪽에서 직선으로 하날도시를 향하여 가야 했지만, 류미르의 제안으로 인하여 그 직선에서 좀 벗어난 바라치나 도시에 먼저 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 아빠에 의한 충격으로 인하여 내가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류미르와 세이몬이 지도를 보고 알아서 날 이끌고 하날도시로 향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어떻게 지도를 봤는지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근처인 수도로 향했으면 조금이나마 낳았을 것을 그것도 아닌 켈튼 연합국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우울감에 빠져있기 바쁜 나는 관여하기 귀찮아 그들이 하는대로 그대로 나뒀더니 이제는 제대로 방향을 잡는다고 해놓고서는 숲속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엄청난 맛의 요리를 내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내가 며칠은 굶어도 끄덕없는 몸이었기에 망정이지 - 드래곤은 몇 달은 굶어도 마나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아직 한번도 굶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본의 아닌 단식을 하게 되었다. - 그렇지 않았으면 류미르나 세이몬 녀석들 처럼 맛 없는 음식을 억지로 삼켜야 했을 것이다. 녀석들도 그 고통이 컸는지 저녁이 되어 자리를 잡고 요리를 하려고 폼을 잡긴 했지만 함부로 요리는 하지 못하고 저렇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래, 싸워라 싸워.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 하는 생각으로 무시하고 있었지만 녀석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다툼이 격해짐에 따라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시끄러워서 내 생각에 잠겨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벌떡 일어났다. "시끄러!! 둘다 조용히 못해?" 나의 갑작스런 외침에 둘은 대치하고 있던 모습에서 고개만 돌려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나의 서슬이 시퍼런 모습에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한번 더 째려봐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모기만한 세이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아린?" "왜?" "그냥 앉는거야?" "그럼 그냥 앉지." "배 안고파?" 그제야 세이몬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챈 나는 다시 쌍심지를 켜고 그를 노려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때 세이몬의 옆에서 열심히 그에게 응원을 보내는 류미르를 보고는 세이몬을 향해 내쏘려던 분노의 광선을 그에게 대신 보냈다. 류미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들었던 손을 내리며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안 고파." 나는 다시 냉정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자 잠시 후에 머뭇머뭇 거리는 세이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기..." "왜?" "우리는 고프거든..." 나는 순간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며 세이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며칠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 파리해진 그의 얼굴과 움푹 들어가서 더욱 더 커진, 애처러움을 담고 있는 그의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풋, 쿡쿡... 쿡쿡쿡쿡...." 웃음이 나왔다. 그의 모습이 너무 웃겼던 것이다. "왜? 왜 웃는 거야?" 어리둥절한 세이몬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얼른 웃음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아까의 너무 애처럼던 세이몬의 모습이 다시 보이자 또 다시 웃음이 새어나오려고 했다. "아냐, 아무것도..." 그러나 내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어 세이몬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 보았지만 어쨌든 내가 화를내지 않아 그냥 넘어가는 눈치였다. "그래, 그래, 에휴~ 내가 애들한테 뭘 바라겠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는 나의 시선에 류미르의 욱 하는 얼굴이 보였다. "왜?" "아냐, 아무것도..." 그의 댓발 나온 입을 바라보며 나는 또 다시 웃음을 흘렸다. 자존심 보다는 며칠동안 못 먹은 한이 더 강했나 보다. 하긴 이 며칠동안 녀석들은 굶을 수는 없으니까 그 심각한 요리로 겨우 허기만 면했을 뿐 배를 채울 생각은 하지도 못한 눈치였다. 물을 떠오라고 하자 류미르가 쏜 살같이 달려가서 물을 떠왔고 나뭇가지를 가져오라고 하자 세이몬이 재빨리 숲속으로 뛰어갔다 왔다. '하, 음식의 힘이란 참으로 위대한 것이군...' 평소라면 절대로 보지 못할 그들의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을 흘린 나는 팔을 걷어 부쳤다. 잠시 후, 침이 넘어가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완성된 요리를 눈앞에 두고 세이몬과 류미르는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렇게 좋냐?" "응!!" 나의 장난스런 질문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번 호 : 15514 / 15527 등록일 : 2001년 01월 09일 22:23 등록자 : LODEMP 조 회 : 21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5화 아기 돌보기 (2) 다음날 아침, 제 정신을 차린 나를 위시로 우리 셋은 숲을 빠져 나왔다. 일단 길을 잃은 것은 둘째치고 - 그 둘 덕분에 길을 잃었던 것이다. - 우선은 숲을 빠져 나가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기 때문이었다. 숲속을 빠져 나가는 거야 류미르가 있으니 별 어려움 없이 우리는 쉽게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숲을 나오자 우리는 정말 그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푸른 언덕 위에 그림 같은 하얀 집이, 정확히 말하면 신전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전 뒤로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뒤로는 성이 보였다. "하아, 꽤나 멋진 풍경인걸?" "그러게..."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저마다 감탄사를 내 뱉으며 한동안 눈을 뗄 줄을 몰랐다. 그런데 잠시 후 나는 이상한 의문을 느꼈다. "얘들아? 저거 신전 아니냐? 맞지?" 그러자 세이몬이 '얘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맞아. 우리가 털었던 신전이랑 비슷하게 생겼잖아. 게다가 하얗고.... 물론 그 신전보다야 작긴 하지만..." "그냥 작은게 아니라 엄청 작다." 뒤에서 류미르가 보충으로 말을 곁들이자 세이몬이 울컥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말야... 저 뒤에보이는게 외성 맞지?" 그러자 세이몬이 다시 "얘가 정말 왜이래?'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며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보면 몰라? 외성 맞아." 이 세계에서 영지의 특징은 내가 살고 있던 중세 시대 유럽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영지와 영지 사이의 경계는 산이나 강을 중심으로 했고 그나마 없으면 팻말을 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영지 안에 있는 마을은 보통 영주가 거하는 성이 있는 곳이나 산적, 혹은 몬스터의 출현이 잦은 곳 아니면 특별히 마을 경계를 세우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마을, 혹은 도시를 둘러싸고 외성(정확히 말한다면 성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지나 전망, 위치가 좋은 곳에 영주가 거하는 성과 그 성을 둘러싼 내성이 있는게 정석이었다. 그리고 신전은 영주의 성 다음, 혹 영주의 성이 없으면 그 곳에서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보통 신전은 외성 안에 위치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저 신전은 외성 바깥, 그것도 다른 집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허허 벌판에다 성이랑도 꽤 떨어진 곳에 있잖아." 나의 기나긴 설명이 끝나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그렇네." 하지만 나의 기나긴 설명에 비해 녀석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게 다야?"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뭘 더 바래?" "우쒸, 나 다시 삐진다?" 나의 선포에 류미르와 세이몬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아, 정말 이상한 일이지, 세이몬?" "그래, 그래, 정말 너무나 이상한 일이야. 신전이 왜 저곳에 있는 걸까? 우리가 저 이상한 점을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류미르?" "물론이지. 궁금한 걸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화가 될 수도 있어. 안그래?" "맞아, 맞아." 그 둘은 그래도 풀어지지 않는 내 표정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재촉해 그 신전으로 향했다. "짜식들... 진작 그럴 것이지..." 물론 내가 그 신전이 왜 거기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거나 평소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격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녀석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음에 부아가 나서 어거지 반 오기 반으로 향했던 것이다. 신전에 가까워짐에 따라 신전 주위에 자그마한 텃밭들이 보였고 그 곳에 일하는 아이들과 몇몇의 수련신관들이 보였다. "헤, 저기 애들이 있는걸?" 세이몬이 사람들을 보고서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그 모습에서 또 의아함을 느꼈다. "야, 이상하지 않냐?" "이번엔 또 뭐냐?" 류미르가 '또냐?' 란 반응을 보이며 물었다. 그런 녀석의 괘씸죄를 물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나의 뛰어난 관찰력을 녀석들에게 알리는게 우선이었기에 그냥 참고 넘어가줬다. "저거, 척 보기에도 밭이 신전거 같은데... 거기서 왜 애들이 일하지? 물론 한 가정의 밭이라면 자기 부모를 돕는다지만 말야." "신앙심이 깊은 애들인가보지." 류미르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애들만 보이지? 어른들은 전혀 안 보이잖아. 보통 신앙심은 애들보다 어른들이 더 깊지 않아?" "저 마을은 애들이 더 깊은가보지." 나는 속에서 다시 울컥 했지만 내가 정말 별것 아닌 일로 그런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들 뒤쪽으로는 텃밭에서 일하는 아이들 보다 더 어려보이는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놀고 있었다. 텃밭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일을 하느라 몸을 수그리고 있어 아이들이라는 것 밖에 모르겠지만 공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3살에서 많으면 7, 8살로밖에 안보였다. "거참, 왜 애들밖에 안보이지? 저 애들 부모는 어딜 간거야? 애들끼리 놀게 놔두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내가 중얼거렸지만 류미르와 세이몬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전에 가까이 다가가자 텃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우리의 기척을 느끼고는 몸을 일으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어딘지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여서 나는 순간 당황했다. 보통 신전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인데 경계한다는 것은 전혀 안 어울리는 일이었으니까. 텃밭에서는 어떤 아이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서는 신전 안으로 뛰어들어갔고 밭에 있던 수련 신관 한명이 불안안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머지 수련 신관들과 아이들은 얼른 밭에서 나와 공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신전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 저기..." 세이몬이 의아한 표정을 나에게 돌리고는 신전쪽을 손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왜 저러는 거야?" 그리고 그런 세이몬에게 나는 친절히 대답했다. "낸들 아냐?" 우리들이 신전의 이상한 분위기에 눌려 텃밭 가까이 갔을 때 말에서 내려 다가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쪽으로 다가오던 수련 신관 한명이 좀 멀다 싶을 정도로 떨어진 곳 까지 다가오자 멈춰서서는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저, 무슨 일이신지..." 류미르가 슬쩍 나를 한번 보더니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그 수련 신관이 류미르가 한발 앞으로 나서자 움찔 하며 한발 뒤로 물러선 것이었다. 그 모습에 류미르가 더욱 더 당황해서는 세이몬과 나를 돌아봐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세이몬과 나는 아무 짓도 안했다는 뜻으로 두 손을 올려 보이고는 고개를 설래설래 좌우로 흔들자 류미르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수련신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희는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숲 속을 며칠동안 헤매다가 간신히 빠져 나왔는데 여기 이렇게 신전이 보이길래 반가운 마음으로 한번 들려보려고 왔습니다만, 저희가 괜한 일을 한게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류미르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수련 신관의 표정에 서서히 안도감이 퍼졌다. "아, 그렇다면 마을에서 오신 분들이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에? 아니, 그게 무슨..." 류미르는 더욱 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신전 안에서 어떤 수련 신관 복장을 한 여신관이 맹렬히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이자식들~~~" 평소 신관들이라면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단어를 외치며 달려오는 수련 신관의 모습에 류미르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이 류미르 앞에 단숨에 도착한 수련 신관은 다짜고짜 류미르의 팔을 잡고는 엎어치기를 해버렸다. 불시에 당한 일이라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 즉시 땅에 패대기쳐지겠지만 류미르는 날렵하게 땅을 한바퀴 굴러 몸을 일으키고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몸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그러자 그 수련 신관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지며 류미르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만 멈추세요." 번 호 : 15535 / 15545 등록일 : 2001년 01월 10일 21:36 등록자 : LODEMP 조 회 : 7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5화 아기 돌보기 (3) 그와 함께 신관 복장을 한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여러명의 세명의 수련 신관과 함께 다급히 뛰어왔다. 류미르를 향해 다시 달려들려고 했던 수련 신관은 그 신관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허튼짓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계속 류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련 신관과 신관, 그리고 고위 신관은 옷으로 구별한다. 그리고 여신관과 남신관과의 옷은 수련신관일 경우 서로 다르지만 그 외 신관과 고위신관은 남, 녀의 구별이 없다. 수련 신관은 여신관일 경우 종아리 중간까지 오는 하얀색의 투박한 면으로 된 멜빵 형태의 원피스를 입는다. 그 원피스의 가슴 부분에는 엘라이어드 여신을 상징하는 데이지꽃이 하늘색 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남자 수련신관의 경우에는 원피스 대신 활동하기 편한 바지와 남방과 비슷하지만 좀 더 투박하게 생긴 셔츠를 입는다. 그 셔츠에도 데이지꽃이 수놓여 있다는 것은 말할나위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남, 녀 복장이 다른 점은 여자 신관들은 모두 식당 아주머니들이 하시는 머리수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신관들은 머리수건을 하지 않는 대신 목에 수건을 두루고 있다. 신관복장은 수련 신관의 복장에 비할때 실용성이 훨씬 뒤떨어진다. 신관은 땅에 살짝 끌릴 것 같은 길이의 통치마 비슷한 옷을 입은 뒤 그 위에 뒤에 단추가 있는 가운을 입게 된다. 그 가운은 정강이 중간정도 오는 길이인데 가운의 앞 정 중앙에는 어른의 한뼘 정도 되는 넓이를 가지고 길이가 무릎 바로 밑까지 내려 오는 길다란 천이 달려 있다. 그 천에는 고위 신관이면 황금색으로 데이지꽃이 수놓여 있고 보통 신관일 경우 은색으로 데이지꽃이 수놓여 있다. 그리고 각 신관이 맡고 있는 지위의 고하에 따라서 통이 넓은 소매의 테두리와 가운의 밑단, 그리고 가슴 앞에 길게 내려온 천의 밑단에 각각 붉은 색의 테두리가 그려지게 된다. 즉 보통 신관은 테두리가 한개, 신관중에서도 어떤 직분을 맡고 있으면 2개, 고위신관은 3개, 고위신관이면서 장로이면 테두리가 4개가, 그리고 장로장은 5개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신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데이지꽃이 황금색이며 테두리를 5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달려온 신관은 데이지꽃이 은색이며 테두리가 2개 있었으므로 그녀는 신관이면서 어떠한 직분을 맡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다가오자 맨 처음 류미르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수련신관이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의 긴장되어 있던 얼굴색이 펴지면서 나중에는 미소까지 띄운 채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는 엘리어드 여신의 미천한 종 한나라고 합니다." 우리 셋은 얼결에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류미르라고 합니다. 형제중 맏형입니다." "아린 입니다. 둘째죠." "세이몬입니다. 막내입니다." 그러자 자신을 한나라고 소개한 신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여행객이시라고요? 지나는 길에 저희 신전을 보시고 잠시 들리셨다고 하던데..." "예, 저희가 저 뒤에보이는 숲에서 며칠동안 헤맸거든요. 그래서 맨 처음 건물을 보아 너무 반가웠는데 뜻밖에도 그 건물이 신전이더군요. 그래서..." 류미르가 아까 수련신관에게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 해서 말하자 류미르에게 달려들었던 수련 신관이 그의 말을 끊고 나서서 한나 신관에게 말했다. "믿지 마세요, 신관님. 저들은 분명히 마을에서 왔을겁니다. 이번에 또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게 분명해요." 그러자 한나 신관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렇지 않아요, 칸비나 수련 신관. 저들의 모습을 보면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요. 게다가 곧곧에 나뭇잎이 묻어 있군요. 이걸 보면 저들 말대로 저들이 숲에서 며칠동안 헤맸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제일 먼저 다가왔던 수련 신관까지 신관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요. 그리고 저들은 분명히 마을쪽이 아니라 숲쪽에서 왔어요." 그 뒤를 이어 또다시 한나 신관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설사 저들이 마을에서 왔다고 해도 여신께선 저들을 맞이하라고 하실 겁니다. 우리는 사랑과 평화의 엘라이어드 여신을 섬기는 자들이니까요." 그러자 칸비나 수련 신관은 더이상 아무런 말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의 눈초리는 아직도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살벌했다. "자, 이럴께 아니라 들어가서 여신께 경배하시죠? 그 다음 저희가 차라도 대접하겠습니다." 한나 신관이 우리를 데리고 신전 안에 있는 예배당으로 이끌었기때문에 우리는 거의 반 강제적으로 그 곳에 있는 여신상 앞에 절을 해야했다. "이런, 여신께 바칠 꽃을 준비하지 못했군요. 죄송해서 어쩌죠?" 우리가 어떤 방으로 안내되어 의자에 앉았을 때 류미르가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 미안한 얼굴로 한나신관을 돌아보며 말하자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께선 여행중이셨기에 미처 준비하시지 못했던거잖습니까? 여신께서도 이해해 주실겁니다." "아, 저 그런데... 혹시 이 신전을 신관님께서 돌보고 계신 겁니까? 다른 신관님들은 뵙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한나신관이 다시 살포시 웃었다. "예, 부족하나마 제가 대표로 있습니다. 그리고 두명의 신관께서 더 계신데 지금 마을에 일이 있으셔서 가셨습니다." "그런데 신관님? 이 신전은 왜 외성 바깥쪽에, 그것도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보통 신전은 마을 안쪽에 있지 않습니까?" 류미르의 물음에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건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첫째는 저 마을에는 아직 엘라이어드 여신을 섬기는 분들이 없어서이고, 두번째는 우리가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을 데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니, 그게 신전이 여기에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요?" 세이몬의 의아한듯한 질문에 신관의 얼굴이 더욱 더 어두어 졌다. "마을에 계신 분들은 자신들의 자녀들 곁에 저 아이들이 있다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더군요. 그리고 그렇더라도 만약 저 마을에 여신님의 신자들이 좀 많았더라면 이 곳까지 오게 되지는 않았 겠지요..." "그렇군요..." 우리 셋은 괜히 주눅이 들어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신관이 활짝 웃으며 분위기를 돋구었다. "이런 이런, 그런 표정들 지으실 것 없습니다. 우리는 이 곳에 신전이 세워진 것을 무척 감사드리고 있으니까요. 이런 멋진 곳에 살고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더욱이 땅이 넓어서 아이들이 놀기에도 좋고, 또 텃밭 가꾸기에도 좋고, 그리고 영주님 눈치 안 봐서 너무 좋은걸요." "하하하, 그런 좋은 점도 있었군요." 류미르가 얼른 밝게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럼요."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우리가 있는 방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들어오세요." 한나 신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한 여수련신관의 모습이 보였다. "기레네 수련 신관, 무슨 일인가요?" 그러자 그 기레네 수련 신관은 안절부절 못한 모습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아침에 마을로 간 신관님 일행말인데요...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도착을 안해서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 아닐까요?" 그러자 한나 신관은 놀란 눈으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살폈다. 아직 날은 밝았지만 곧 있으면 저녁시간이 될 시간이었다. "이런, 그렇군요. 빨리 가서 남자 수련 신관들을 불러오세요." "예." 수련 신관은 서둘러서 그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한나 신관은 걱정이 가득 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제발, 그들에게 아무 일이 없어야 할텐데... 오, 여신이여 그들을 보호하소서..." "무슨 일인가요, 신관님?" 그녀들의 행동에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낀 내가 묻자 그녀가 걱정이 가득 찬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아침에 신관 두 분께서 아이들 몇을 데리고 생필품을 사러 마을로 가셨답니다. 그런데 마을에는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많으셔서.... 전에 수련신관님들과 아이들만 보냈을 때 다쳐서 돌아왔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신관님들과 함께 보냈는데..." 우리가 그녀의 말에 경악을 느끼고 있을 때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누군가가 방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한나 신관이 급하게 입을 열자 문이 열리며 다급히 뛰어온 듯한 남자 수련 신관 세명이 들어왔다. "신관님, 무슨 일입니까?" "세 분은 지금 즉시 마을로 한번 가주세요. 마을로 간 신관님들이 너무 늦으시는군요." 그러자 우리 셋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대표로 내가 입을 열었다. "저희도 함께 가도록 하죠.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남수련신관 3명과 함께 방을 나갔다. 그들 셋은 그냥 마을쪽으로 뛰어가려 했지만 그것 보다는 우리 말을 타고 가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기에 우리는 각자 뒤에 수련신관을 태우고는 마을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나 마을까지 가기도 전에 우리는 마을에 생필품을 사러 갔다던 신관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외성을 벗어나 신전으로 오는 길에 있는 오르막길 에서 생필품을 실은 수레의 바퀴가 길을 벗어나 길 옆에 있던 진흙 구덩이에 빠져 그것을 꺼내려고 낑낑대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힘쓰는 일을 하지 않은 신관들도 신관복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소매를 걷어 부치고 같이 간 14,5세 정도 된 아이들과 함께 수레의 바퀴를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여의치 않은 듯 수레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수레 바퀴를 빼 내기 위하여 수레에 싣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옆에다 내려놓고 있는 상태였기에 주위는 매우 어수선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흙투성이가 된 얼굴들로 수련신관들에게 우리를 소개 받은 신관들은 환하게 웃으며 정말 고마워 했다. 그리고 곧 이어 류미르가 땅의 하급정령들을 불러내어 너무나도 쉽게 수레를 진흙 구덩이에서 빼내고는 다시 짐을 싣고 말에게 수레를 이끌게 하여 신전으로 돌아왔다. 신전으로 다다르자 잔뜩 걱정된 얼굴로 바깥에 나와 있던 한나 신관과 다른 몇몇의 여신관들이 달려왔다. "오, 무사했군요. 정말 다행이예요." 한나 신관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두 신관이 앞으로 나서서 두 손을 가슴 위에서 X자로 교차한 상태로 허리를 숙였다. "늦었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예요.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서 기쁩니다. 전에는 수련 신관들과 아이들만 보내어서 수레에 다쳤어도 신전에 와서 치유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신관님들이 함께 가셔서 다쳤어도 그 자리에서 치유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안심하고 있었거든요." 한나 신관의 말에 나는 어리벙벙해졌다. "에? 마을 사람들에게 해꼬지 당한 게 아니란 말인가요?" "아, 호호호... 그렇지는 않아요. 비록 마을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을 미워하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할 정도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왔을 때 무섭게 달려들던 그 여수련 신관을 생각하면..." 류미르는 신전쪽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모습에 의아해진 내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쪽 신전 앞 공터에서 류미르에게 공격을 했던 그 여수련신관이 어린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류미르의 시선을 따라 그 수련 신관을 본 한나 신관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호, 칸비나 수련 신관이 성격이 좀 급하긴 하죠. 하지만 그것도 다 아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한 행동이니 나쁘게 생각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희는 저 수련 신관님이 그런 행동을 하셔셔 혹시나 마을 사람들이 좋지 않은 일을 한건 아닌지 걱정했었거든요." "아, 물론 그런 일을 당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저 아이들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거든요." 한나 신관의 음성이 조금은 낮아지며 진지해졌다. 번 호 : 15611 / 15620 등록일 : 2001년 01월 12일 21:56 등록자 : LODEMP 조 회 : 16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5화 아기 돌보기 (4) "자, 이럴게 아니라 들어가시죠. 이제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한나 신관의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한 활기찬 어조에 그동안 신전 앞에 수레를 가져다 놓고 멍해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듯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련 신관들과 나이 많은 어린이들이 저마다 수레의 짐들을 들어 옮기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본 우리 셋도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이왕 도와드리는 거, 더 도와드리죠." "호호호, 그래주시면 고맙고요." 우리도 저마다 야채나 채소가 들어간 자루를 하나씩 들어 어깨에 매고 앞서 가는 수련 신관들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우리가 신전을 들어가기 전 신전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는데, 칸비나 수련신관이 사람들이 짐 옮기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거들 생각을 안 하고 어린 아이들과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류미르가 그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커다랗게 투덜거렸다. "헹, 누구는 짐을 나르는데 누구는 애들과 놀고 있네... 아린, 넌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해?" "에? 아니 그러니까..." 얼결에 지적을 받은 내가 뭐라고 답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류미르의 말을 들었는지 - 당연히 들었겠지만 - 칸비나 수련 신관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류미르의 어깨에 얹어 있던 자루를 잡아채어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류미르의 앞에 양 손을 허리에 얹고 당당히 버티고 섰다.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인가요?" "그럼, 여기에 노는 사람이 당신밖에 더 있나요?" 류미르도 그녀 앞에서 팔짱을 떡 하니 끼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칸비나 수련신관이 코웃음 쳤다. "하,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놀고있는걸로 보인다 이말이죠?" "그래요, 내 말이 틀렸어요?" "아이들 돌보는게 쉬운 줄 알아요?" "그걸 누가 못해요?" "오, 그래요? 그럼 그렇게 쉬운 일좀 해주실래요, 너무나 광명 정대하신 신도님?" "그 쉬운 일이란게 뭔가요, 게으른 수련신관님?" "내일 하루동안 당신이 아무탈 없이 아이들을 돌봐 주신다면 제가 예배당을 혼자 청소하죠." 그러자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여수련신관이 놀라서 그녀를 말렸다. "칸비나, 어떻게 그런 말을... 그 예배당은 혼자서 청소 하기에는 너무 넓어요. 혼자 하려면 하루종일 걸릴거예요." "상관 없어요. 신도님께서 하루종일 아이들을 봐주신다는데 그정도야..." 그녀의 오기서린 대답에 류미르도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요. 나야 뭐, 손해볼 건 없겠죠." 그러나 칸비나 수련신관의 제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신, 신도님께서 정오가 되기 전에 아이들을 때문에 쩔쩔 매는 일이 생긴다면 신도님들께선 신전 대 청소를 해주셔야만 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이몬과 나는 크게 놀랐다. "엥? 아니 왜 거기에 우리까지..." 세이몬의 항의어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류미르가 세이몬의 말을 잘랐다.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하루종일 아이들을 잘 돌봤는데 수련신관님께서 청소를 다 끝내지 못한다면 어쩌실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신도님들 대신 신관 대 청소를 하죠." "글쎄요... 그러면 신전측에서야 좋지 저희로써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좋아요. 그렇다면 제가 신도님께 무례히 군 것 정중히 사과드리지요." "좋습니다. 저도 뭐, 무슨 이득을 바란 건 아니니까요." "그럼 성립된겁니다." 칸비나 수련신관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홱 돌려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아이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동안 칸비나 수련 신관과 류미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도 까닭 모를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신들의 할 일을 했다. 류미르와 칸비나 수련 신관의 묘한 시합 덕분에 우리는 그날 하루 신전에서 묶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류미르, 정말 괜찮겠어? 아이들을 돌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걱정 마, 아린. 내가 그까짓 일을 못해낼 것 처럼 보여?" "그래도 혼자서 하기는 힘들꺼야. 차라리 지금 가서 세이몬과 나도 같이 돕겠다고 말할까?" "에? 난 싫어. 로비 나이또래면 몰라도 저렇게 어린 애들과 놀아본 적은 한번도 없단 말야." 내 제안에 세이몬이 도리질을 치며 거절하자 류미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씩씩한 목소리로 장담했다. "걱정 말라니까. 그리고 그 수련신관도 혼자 청소를 한다고 했잖아. 그러니 나도 혼자 해야지. 너희는 보고만 있어. 내가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아니, 그런데 왜 그녀에게는 까탈스럽게 그러는 거야? 너답지 않아." "흥, 처음에는 자신이 신전을 제일 위하는 것 처럼 우리를 경계하더니, 나중에 보니 뭐야? 남들은 다 일하는데 자신만 혼자 쏙 빠져서는 놀고있잖아? 그렇게 일은 안 하면서 잘난체 하는 사람은 정말 싫어." "글쎄, 그 애보는 게 장난이 아니라니까." "설마 일하는 것 보다 힘들까..." 나는 씩씩하게 신전 앞으로 나가는 류미르의 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정말 힘든 일인데.... 애들도 한 둘이 아니고 거의 열명이나 되잖아..." 내 뒤에서 세이몬이 류미르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류미르 잘 해라. 너 지기만 하면 가만 안 둬. 네가 지면 우리까지 피해가 오잖냐?" "맡겨만 둬!!" 신전 앞 공터로 나오자 칸비나 수련 신관과 류미르의 시합 이야기를 들었는지 신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흥미진지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한나 신관도 있었다. 한나 신관이 신전을 막 나오는 우리 셋을 보더니 환하게 웃음지었다. "어서 오세요, 신도님. 이번 시합의 심판을 제가 맡았답니다. 괜찮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신관님. 마침 저도 심판이 없어 판정 내릴 것이 걱정되던 참이었거든요." 류미르의 시원스런 대답에 한나신관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류미르를 4, 5살 되어보이는 아이들 무리 앞에 세우고 그 옆에는 빗자루와 걸레를 든 칸비나 수련 신관을 세웠다. "자, 그럼 두 분이 하실 일을 설명해 드리죠. 먼저, 신도님. 아이들은 다 씻기고 아침을 먹였으니, 신도님께선 데리고 노시기만 하면 됩니다. 단,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신도님께서 통제가 불가능하시면 신도님께선 무조건 지시는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오가 되기 전에 그렇게 되면 세 신도님께서 신전 대 청소를 해주신다고 하더군요, 맞나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세이몬과 나를 향해 물어왔다. 그녀의 웃음에 나는 괜히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신관님." "좋아요. 그럼 칸비나 수련 신관? 당신은 예배당을 혼자 청소 하기로 했지요? 예배당 안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합니다. 그것도 오늘안으로요. 만약 먼지가 발견되거나 오늘 안에 청소를 다 끝내지 못한다면 당신이 지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신관님." "아, 신도님. 한가지 깜빡 했군요. 신도님께선 아이들 식사를 챙겨 주지 못하실테니 점심과 저녁 먹이는 것은 다른 수련신관님들 께서 도우실겁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아, 이 시합은 해가 질때까지 입니다. 해가 지는 동시에 끝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럼 시작해 주세요." 이렇게 해서 칸비나 수련신관은 비와 걸레를 들고 곧장 신전 안으로 향했고 류미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의 풀밭으로 향했다. 세이몬과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미르와 같이 가기로 했지만 그 전에 한나 신관의 도와주지 말라는 당부를 단단히 들었다. 류미르는 아이들을 언덕 위로 데리고 가더니 아이들의 수를 셌다. "어디보자... 하나, 둘, 셋...., 아홉, 열. 아, 딱 열명이군. 좋아. 이제부터 너희들 맘대로 놀아라." 그러자 아이들은 '와아~' 하며 흩어졌다. 류미르는 그 모습을 느긋한 얼굴로 바라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우리들을 올려다 보며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쳤다. "앉아." "뭐야, 정말 쉽잖아?" 세이몬은 무슨 일이 있기를 기대했었는지 김빠진다는 얼굴로 류미르의 옆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렇다니까." "글쎄다.... 이게 정말 쉬운 일일까?" 내가 옆에서 비관적으로 중얼거리자 류미르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린, 너 왜그러냐? 보고도 몰라? 쉽잖아." "야, 생각해봐라. 그 칸비나 수련신관이 너한테 이렇게 쉬운 일로 시합할 리가 없잖아. 안그래?" "흥, 그녀한테는 어려운 일인가보지." 류미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는 아예 팔배게를 하고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 좋다." 그러나 그의 태평한 모습도 얼마 가지 못했다. 잠시 후 4살쯤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 하나가 류미르에게 어기적 어기적 걸어왔던 것이다. "엉아, 나 쉬~" "응? 쉬?" 류미르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애를 돌본다고 그랬냐? 볼일 보고 싶다는 뜻이야. 바지를 내려서 일 보는 걸 도와주면 돼." "아, 그런 거야?" 류미르는 허겁지겁 일어나서 그 아이의 바지를 내렸다. 그런데 그때 저 쪽에서 남자 아이와 같이 꽃을 띁으며(?) 놀던 여자 아이가 하도 조물락 거려서 다 뭉개진 풀잎 덩어리릴 입 안으로 집어 넣는 것이 보였다. "야, 쟤 풀 먹는다. 저거 못 먹게 해. 먹으면 큰일 나." 내가 급하게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그 여자 아이를 가르키자 류미르는 데리고 있던 아이가 미처 볼 일을 끝내지 못했는데도 그 아이를 내버려 두고 허둥지둥 그 여자아이에게 달려갔다. 다행히도 그 여자 아이가 풀을 입 안으로 넣는 것을 막긴 했지만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들이 취하는 행동을 막지 못했다. 그 여아는 커다란 눈으로 서글프게 류미르를 바라 보면서 울먹울먹 거리더니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렸다. "우아앙~~"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남자 아이도 같이 울기 시작했다. "흐애애앵~~" 류미르가 그 아이들을 달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소리쳐야 했다. "야, 얘 옷 안 입혀?" 내 옆에는 옷에 좀 묻히기는 했지만 그럭 저럭 볼 일을 다 본 아이가 옷을 입지 못한 채로 엉거주춤 서 있었던 것이다. "아린, 네가 좀 해줘."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 이건 네가 할 일이잖냐. 솔직히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도 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매정하게 고개를 가로 젓자 류미르는 당황하다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계속 울고 있는 두 아이들을 양 팔에 끼고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우는 아이들을 옆에 두고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해 엉거주춤 서 있는 애의 옷을 입혀 저쪽으로 보냈다. 한 아이를 해결한 뒤 다시 우는 아이들을 향해 돌아선 류미르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어렸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 아이들을 안아주고 얼르고 달랬지만 울음을 그치게 하지는 못했다. 류미르가 어떻게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자 나는 어쩔 수 없이 한마디 해줬다. "그 애들은 장난감을 뺏겨서 우는 거잖아. 뭐 신기한 걸 보여줘봐." "신기한거? 뭘 보여주지?" 류미르는 고민 고민 하더니 뭔가가 생각 났는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 아이들 앞에 빛의 하급 정령을 불러냈다. 아이들은 갑자기 자신들 앞에 반짝 반짝 빛을 뿜으며 날아다니는 정령이 나타나자 신기한지 금방 울음을 그치고 정령을 바라보았다. "에휴.." 아이들이 일단 울음을 그치자 류미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었다. 그런데 그때 다른 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류미르가 그쪽을 바라보자 어떤 애가 바닥에 넘어져 울고 있었다. 류미르는 얼른 달려가서 그 아이를 일으키고는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풀밭 이라서 얼굴을 살짝 긁힌 것 외에 다친 곳이 없어 류미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때 세이몬이 소리쳤다. "류미르, 저쪽!!" 류미르가 황급히 일어나 세이몬이 가르키는 쪽을 쳐다보니 남자 아이 혼자서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 숲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게 보였다. 놀란 류미르는 얼른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여 그 아이를 데려오게 했지만 류미르가 직접 가지 않고 바람의 정령에게 그 아이를 데려오게 한게 화근이 되었다. 아이는 갑작스레 바람이 불어닥쳐 자신을 멀리 띄워 날려 보내는 바람에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류미르의 품에 떨어졌을 때는 아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있었다. 류미르가 그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고 있을 무렵 나는 다시 한숨이 저절로 나는 것을 느꼈다. 류미르가 보지 못하는 곳에 있는 두 여자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싼 것이었다. 류미르가 바빠서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는 바람에 미처 그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는 못하는 사이 참지 못하고 실례를 해버린 것이다. "제발, 정오까지 버텨다오..." 그 모습을 같이 본 세이몬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러길 바래." 번 호 : 15549 / 15581 등록일 : 2001년 01월 14일 21:34 등록자 : LODEMP 조 회 : 53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5화 아기 돌보기 (5) 잠시 후, 아이들을 점심 먹이러 신전으로 데려가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온 두명의 신관 표정에는 똑같은 표정이 떠 올라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솔직히 그 두 수련신관이 그 말을 소리내어 말했어도 류미르는 할 말이 없었다. 신전으로 가기 위하여 우리 앞에 모인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불만에 차 있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들이 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아이들은 기특하게도 울음은 터트리지 않았다. 대신 류미르가 얼마나 엉터리 보모였는지 여실히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그들의 옷은 모두 흙과 풀물이 들어 얼룩덜룩 했으며 그들 중 두명의 여아는 작은 실례에 의하여 옷이 아직도 축축 했다. 게다가 머리가 조금씩 긴 여자 아이들의 머리를 묶고 있던 리본들은 거의가 다 풀려 있어 머리들이 다 엉켜 있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잃어버린 리본이 몇개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어붙은 표정들의 수련 신관들이 그 아이들의 모습을 살펴 보고 있을 때 류미르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지 계속해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얘들아. 그만 가서 점심 먹자." 수련 신관들은 그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두 어린이의 손을 붙들고 신전으로 향했다. 그러자 모든 어린 아이들이 그들을 뒤따랐고 세이몬과 나도 기가 죽은 류미르를 데리고 그 뒤를 따랐다. 아이들은 걸어가면서 어미를 만난 새끼새들 마냥 아까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신관님, 신관님. 쟤가 아까 저한테 흙 뿌렸쩌요." "바보야, 내가 흙을 던지는데 니가 그 앞으로 걸어갔잖아." "아니야, 니가 흙을 뿌린거야." "아니야." "신관님, 신관님. 제시는요 아까 오줌쌌써요." "우씨, 신관님, 신관님. 재는요 아까 넘어져서 울었어요." "안 울었어." "울었어. 그치, 켈리?" "안 울었어." "울었어, 울었다고. 존은 울었대요~ 울었대요~" 아이들이 서로 떠드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류미르는 설래설래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어떻게 저 애들을 보겠다고 했을까?" "너가 바보니까 그렇지. 내가 말했잖아,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래, 아린. 네 말 안 들은걸 지금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다." 그러자 세이몬이 불쑥 류미르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어쩔꺼야? 오후에도 너가 애들 볼꺼야?" 류미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아니. 차라리 그냥 졌다고 할래." "잘 생각했어. 너한테 맡겨진 애들이 불쌍하더라. 너한테나 저 아이들 한테나 좋은 선택이야." 세이몬은 류미르의 질색하는 모습이 기분 좋은 듯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탁탁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건 그렇고... 아이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뭔가 다른 일로 보상을 해줘야겠지?" 내가 아이들의 엉망인 뒷모습을 가르키며 세이몬과 류미르를 돌아보며 말하자 세이몬은 자신과 관계 없는 일인 양 류미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류미르는 풀 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겠지? 뭔가 다른일로..." 그리고 그 뒤에 세이몬이 덧붙였다. "애 보는 일 말고." "당연하지. 애들을 저 꼴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다시 맡을 생각을 하냐? 그런거 말고 뭐, 청소나 빨래 같은 걸 해주겠다고 해. 아, 그러고 보니 류미르가 정오까지 아이들을 못 돌본다면 우리가 신전 대 청소를 하기로 했었지? 그걸 돕겠다고 하자."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헉, 아린... 난 청소는 한 번도 안해봤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괜찮아, 괜찮아. 청소하는 거 어려운 일 아니야. 그리고 정 못하겠으면 류미르 넌 정령들에게 부탁해. 운디네하고 실프에게 부탁하면 대끼리야." 그러자 세이몬이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끼리? 그게 뭐야?" 나는 살짝 얼굴에 힘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대충 알아들어라. 뭘 일일이 묻고 그러냐? 충분하다, 뭐 그런 뜻이야. 어쨌든, 그건 그렇고 세이몬은 정령을 부리지 못하니까 그냥 짐꾼이나 해. 빨랫감 나르고 그러는 거는 기술은 필요 없고 힘만 드는 일이니까." 그러자 세이몬이 불만에 찬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넌?" "나? 난 빨래를 해야지. 나의 멋진 마법실력으로 아주 끝내주게 해주마." 류미르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한나신관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졌음을 선언했다. 한나신관은 미리 짐작이나 하고 있었던 듯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우리가 다른 일을 돕겠다고 하자 그 미소는 더욱 더 커졌다. 류미르는 한나 신관에게 졌음을 선언하는 즉시 신전 안의 예배당으로 찾아가 혼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청소하는 칸비나 수련 신관을 만났다. "안 힘들어요?" 류미르의 필살 여자 구슬리기 전법이 시작된 듯 그의 미소와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효과가 없는지 수련 신관은 힐끗 류미르를 보던 시선을 다시 돌려 바닥을 닦는 걸레로 향했다. "점심 먹으러 왔나보죠?" "맞아요. 더불어 졌음을 시인하러 오기도 했죠." 류미르의 항복 선언에 칸비나 수련 신관은 벌떡 일어나더니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호오, 그래요? 애들 보는걸 쉽게 생각한 사람치고 빨리 패배를 시인하는 군요?" "내가 애 보기를 너무 얕봤다는 건 인정해요. 정말 쉬운일이 아니더군요." 류미르가 두 손을 들어보이며 순순히 시인하자 칸비나 수련 신관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헤에, 전에 그 잘난 척 하던 사람 맞아요?" "어? 내가 그랬나요? 뭐, 어쨌든 난 잘못은 순순히 인정하는 편이니까." "그럼, 여긴 왜 왔어요?" "음, 우선은 어제 심한말을 한 걸 사과하러 왔고, 이 곳은 내일 우리가 청소할테니 그만하라고 말하려고 왔어요. 뭐, 내일 우리를 도와주면 좋겠지만요." "헤에, 그럼 당신은 정오까지 못 버텼군요? 하긴, 그 애들이 좀 드세거든요." 칸비나 수련 신관은 류미르가 사과하러 왔다는거에 기분이 풀렸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많이 부드러웠다. "다행히 정오까지는 버텼어요. 하지만 애들 꼴이 워낙 말이 아니어서요. 그래서 제 형제들과 의논한 끝에 신전 대 청소하는 걸 돕기로 했죠." "그랬군요. 그거 참 기쁜 소식인데요?" "그럼 어제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칸비나 수련신관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갑작스레 류미르는 한 손을 배에 대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신관님. 저도 잘한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거 참 고마운 말씀이군요. 자,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아직 식사 안하셨죠?" 류미르가 그녀에게 왼 팔을 내밀어 보이자 그녀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고는 그의 팔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기꺼이..." "거 참, 왠지 할리퀸의 한 부분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야." 입구에서 류미르와 수련 신관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내가 중얼 거리자 옆에 있던 세이몬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런게 있어." 결국 그날 오후, 아이들은 칸비나 수련신관을 비롯한 다른 수련 신관들이 맡았고 세이몬과 류미르는 자진해서 설겆이를 도맡았다. 덕분에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식당 청소를 맡아서 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식사를 끝낸 모든 사람들이 신전 앞 공터에 모였다. 신전 대 청소를 하는데 각자 분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어린 아이들은 열 한두살 먹은 5명의 아이들이 돌보기로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대청소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미리 약속한 대로 류미르가 예배당과 신전의 모든 복도를 맡았고 내가 모든 빨래들을 맞겠다고 하여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은 나머지 방과 창문을 맡았다. 나는 우선 류미르를 데리고 한쪽 복도에 서서 실프와 운디네를 불러내어 청소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자, 이렇게 둘을 불러내서 말야, 그 둘에게 약한 바람과 물줄기를 뿜어내게 하여 동시에 복도에 뿌리는 거야. 이때 주의할 것은 바깥쪽을 향해야 하는 거지. 바깥쪽으로 하지 못할 땐 구석진 자리에 먼지가 모이도록 해서 나중에 네가 버리고, 예배당을 할 땐 말야 우선 방 끝에부터 시작해서 중앙으로 모이게 하는 거야. 소용돌이 처럼 말야. 알았지?" "아, 대충 알것 같아." "그럼 잘 해봐. 기물 파손하지 말고. 만약 그랬다간 네 용돈에서 비용을 지불할거란 걸 명심해." "알았어." "쉽게 깨질만한 건 미리 정령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놓고." "알았다니까." "그럼 난 빨래하러 간다." "그래." 나는 왠지 그가 못미더웠지만 평소 류미르가 모든 일을 신중하고 꼼꼼하게 행한데다 정령들과의 친화력이 높았기 때문에 그걸 믿기로 하고 빨랫감이 쌓인 곳으로 향했다. 원래는 신전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흐르는 냇가에서 빨래를 해야 했지만 나는 마법으로 빨 거였기에 냇가 대신 신전 뒷마당에다 빨랫감을 가져다 놓아달라고 미리 부탁했었다. 신전 뒷마당에 이르자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빨래더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전의 모든 커튼을 비롯하여 침대 시트, 그리고 사람들의 겨울 옷을 모조리 빨아야 했기에 양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이들 세명이 서서 불안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내가 한 빨래를 갖다 널도록 배당된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어보였다. "자, 너희들은 내가 한 빨래를 차곡차곡 개어서 제자리에 갖다가 놓으면 되는거야. 알았지?" 그러자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 마주보더니 그들 중 한 아이가 의문을 표했다. "줄에다 갖다 너는게 아니고요?" "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다 말려서 줄테니까." 그러자 아이들은 더욱 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싱긋 웃어보인 후 높이 쌓인 빨래더미에서 시트 세장을 빼내었다. 그리고 실프를 불러내어 그 지저분한 시트를 허공에 띄우게 한 뒤 한마디 딱 했다. "클리어!!" 그러자 링 모양을 이루는 빛덩어리가 형성되어 중앙의 빈 공간으로 시트들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 빛나는 링을 통과한 지저분한 시트들은 마치 삶아서 빤 것처럼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우와아~~"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너무나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이렇게 하면 물이나 빨랫줄이 필요 없겠지? 자, 너희들은 빨리 이것들을 개어서 갖다 놔." 실프가 그 아이들에게 이제 막 빤(?) 시트들을 가져다 주자 아이들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 시트들을 받아서 다시 한번 살펴 보았다. "혹시 안 빨린데 있냐?" "아뇨. 너무 깨끗해요." "이것도요." "마찬가지예요." "그럼 됐어." 난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계속해서 작업을 실행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실프가 가져다 준, 깨끗해진 빨래들을 얼른 받아들어 차곡차곡 갠 다음 빨랫감을 가져 왔던 통에다 담아 제자리에다 갖다 놓기 위하여 분주하게 발을 놀렸다. 우리는 부지런히 작업하여 정오가 되기 전에 일을 모조리 끝냈다. 그래서 점심을 준비하는 팀에 끼어 같이 식당에서 일을 했다. 슬쩍 보니까 류미르도 자신이 맡은 일을 착실히 거의 끝내고 이제는 깨질까봐 치워놨던 물건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있었다. 세이몬은 멀리 떨어진 냇가에서 물을 떠오는 일을 맡아 커다란 통을 양 손에 하나씩 들고는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 대 청소는 우리가 돕기 때문인지 착착 진행되어 저녁이 되기도 전에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신전의 모든 사람들은 이번에는 쉽게 끝냈다고 모두 기뻐하였다. 다음 날 아침, 우리가 떠나려고 말을 끌고 오자 신전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세 신도님들. 세 분을 만나서 정말 기뻤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길에 여신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빌겠습니다." 한나 신관이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하자 류미르가 우리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그러자 이번에는 칸비나 수련 신관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들고 있던 커다란 종이 꾸러미를 류미르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을건데 조금 쌌어요." "뭘, 이런것 까지... 수련신관님도 하루 빨리 신관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칸비나 수련 신관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살짝 고개만 숙여 인사를 대신한 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우리 셋은 말 위에 올랐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세이몬이 말 위에 올라 손을 흔들며 말하자 아이들도 따라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잘가 형아." "나중에 다시 만나." 번 호 : 15697 / 15706 등록일 : 2001년 01월 17일 21:04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1)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우리가 온천으로 유명한 하날도시에 도착한 것은 신전을 떠난 뒤 2주라는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그 곳에서 가장 크고 비싼 온천여관을 선택하여 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 버렸다. "아린, 그럼 넌 여탕으로 들어갈 거냐?" 방을 배정받자마자 온천에 들어가려고 신나게 갈아입을 옷과 수건 등등을 챙기고 있는데 갑자기 류미르가 불쑥 물었다. "응? 아, 아무래도 그래야 겠지? 너네는 남탕에 들어가고." "그런데 아린, 너말야 여기 들어올 때도 남자라고 하지 않았냐? 그래서 침대가 세개인 방으로 온 거고. 그런데 이제와서 여자라고 여탕에 들어가면 들여보내 주려나?" "허걱, 맞다. 미처 생각을 못 했어. 하도 버릇이 되어가지고서리.... 어쩌지?" 그러자 정말 순진무구한 세이몬의 말이 들려왔다. "그럼 우리랑 남탕에 들어가면 돼잖아?" 나는 순간적으로 세이몬에게 파이어볼 한 방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러기도 전에 먼저 류미르가 세이몬의 얼굴 정 중앙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퍼억~ 얼마나 세게 쳤는지 세이몬은 얼굴과 주먹이 맞닿은 다음 몸을 허공에 붕 띄워 바닥에 등부터 착지했다. "우쒸, 무슨 짓이야?" 두 눈이 시퍼렇게 뜬 세이몬이 코를 감싸쥐며 일어 났는데 손 밑으로 빨간 줄이 두 줄 그어져 있었다.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린 거야." 그러나 류미르는 그런 모습을 못 본 듯 싸늘하게 세이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계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여자가 알몸을 보이는 상대는 자신의 반려자뿐이라고, 알겠어? 그렇지 않은경우는 좋지 못한거야. 그런데 넌 아린에게 수많은 남자 앞에서 알몸으로 보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그러자 세이몬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코를 감싸쥐어 맹맹한 콧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건지 몰랐어." "아, 정말 어쩌지? 생각도 못했는데..." 그 둘을 말릴겸 생각을 할 겸 둘 사이에 끼어들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자 류미르가 즉각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들어갈 수 있는 탕이 있는지 알아보지? 모르면 물어보는게 최고잖아." "그래, 그래. 그게 좋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미르는 그 즉시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세이몬에게 다가가 코를 감싸쥐고 있는 손을 떼어내고는 코를 살펴보았다. "아파?" "응." "흐음, 다행히도 코뼈가 부러지진 않았네." "당연하지. 류미르가 주먹을 뻗을 때 살짝 뒤로 몸을 뺐었거든." 세이몬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하자 나는 피식 웃고는 그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래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네. 쌍코피가 터진 걸 보니." "쳇, 가끔보면 아린이 류미르보다 더 못됐어." "호호호, 그랬냐?" 나는 살짝 혀를 내밀어 웃어 보이고는 그의 코에다 내 손을 가져다 대고 가볍게 치유마법을 걸었다. 워낙 세이몬이 건강체질인데다 많이 다친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금방 코피가 멎었다. 세이몬이 흘러나온 코피를 닦고 있는데 류미르가 돌아왔다. "아, 왔냐? 뭐래?" "여러가지 탕이 있대는데... 우선은 보통 남, 녀 탕이 있고, 가족탕도 있대. 노천탕하고 실내탕도 따로 있고." "무지 많네? 그런데 가족탕은 뭐냐?" 세이몬이 순진하게 물어보자 류미르가 '그것도 모르냐?' 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가족들만 들어가는 탕. 아예 탕 하나를 빌리든지 해서 빌린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든 탕이야." "그럼 거기로 가자." 세이몬이 희색이 만연하여 나를 돌아보자 류미르도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래? 그냥 거기로 갈까?" "쳇, 그럼 난 옷 입고 탕에 들어가야 하잖아?" "어쩔 수 없지. 그러나 너만 그러냐? 우리도 다 옷 입고 들어가야 할텐데..." 류미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그제야 나는 녀석들도 나보다야 적지만 그래도 가릴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럼 그러자. 아, 이럴 때 수영복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속 옷을 입고 들어갈 수 없으니 천상 가벼운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 쉬며 중얼거렸다. 이럴때는 정말 옛날이 그립다. 가족탕을 하나 빌리기 위해 우리는 여관의 카운터로 우르르 내려갔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제복을 입고 있는 20대 초반의 여자가 카운터로 다가온 우리를 보고 싹싹하게 물었다. "가족탕 하나를 빌리고 싶은데요." "가족탕이요? 노천탕과 실내탕 어느것으로 하시겠어요?" 류미르가 '어쩔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실내가 낳지 않을까?" "글쎄, 난 노천이 더 좋을 것 같은데?" 류미르가 내 의견에 반대하자 우리 둘은 자연히 세이몬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가 원하는 쪽으로 의결이 될거였기 때문이었다. "음, 난 노천." "결정됐군. 노천으로요." 류미르가 다시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하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빌리시겠습니까?" 그러자 류미르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글쎄,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오래 있을 수도 있고, 며칠 있다 갈 수도 있고..." "이건 정확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대기자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일주일로 할까?" 류미르가 나와 세이몬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무 많다. 5일로 해라." "그래,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알았어. 5일이요." "여자를 부르시겠습니까?" 그녀의 또 다른 질문에 우리는 멀뚱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요?" "예. 이 곳은 여자들이 예쁘기로 유명하지요. 직접 고르실 수도 있어요. 한 여자를 계속 데리고 계실 수도 있고, 매일 바꾸실 수도 있지요. 그리고 원하신다면 여러명을 데리고 계실 수도 있어요." 그녀의 부연 설명에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챈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이런 곳에 없는게 이상한거겠지... "괜찮아요. 원하지 않아요." 류미르의 대답에 카운터 뒤에 있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에게 놋쇠로 만든 내 손바닥 길이만한 열쇠를 건내 주며 인사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 왔는지 카운터 뒤에 서 있는 여자와 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소녀가 우리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노천 온천탕은 여관 뒤쪽에 있었다. 여관 뒷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끝이 안 보일정도로 길다란 나무로 만들어진, 내 키보다 더 커보이는 울타리가 쭉 늘어서 있었는데 울타리 사이사이로 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문에는 놋쇠로 만들어진 숫자판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열쇠와 같은 숫자가 붙어있는 문 앞까지 안내되었고 우리를 안내한 소녀는 자신이 직접 열쇠로 문을 열어주고는 돌아가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것 같는 나무 판막이로 만들어진 공간이 있었다. 거기에는 옷을 갈아입는 곳인 듯 나무로 만든 깔판이 깔려 있었고 옷을 담는 듯한 바구니가 4개 있었다. 그리고 한쪽면은 커튼으로 인해 가려져 있었는데 아마 그 곳이 온천탕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듯 했다. 커튼을 열어 젖히자 목욕탕에 들어온 듯 습기찬 열기가 후끈 우리를 덥쳤다. 그러나 천장이 뻥 뚤려 있는 관계로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고 간간히 시원한 바람까지 들어왔다. 그 곳은 20여평 정도 되는 공간이었는데 가운데 한 10 사람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 크기의 구덩이에 뜨거운 온천 물이 담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넓적한 돌들이 깔려 있어 깔끔하고 흙이 묻지 않도록 되어있었다. 탕 주변에는 푹신 푹신해 보이는 안락 의자 4개가 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볼 수 있도록 놓여 있었으며 각각 안락의자 옆에는 자그마한 탁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헤에, 꽤 좋네?" 내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하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좋은거야? 나 이런데 처음와보는 거라 잘 모르겠어." "나도. 온천은 처음이거든." "나도 이런덴 처음 와봐. 근데 척 보기에도 꽤 좋아보이잖아, 안그래? 야, 구경만 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자." 나는 둘을 돌아보며 신나서 말했다. 그러자 류미르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바라보았다. "아린, 우리 갈아입을 옷 방에다 두고 왔잖아. 탕 빌리려고..." 우리는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와야 했다. 번 호 : 15722 / 15739 등록일 : 2001년 01월 18일 21:18 등록자 : LODEMP 조 회 : 26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2) "앗 뜨거.... 아뜨뜨뜨..." 류미르가 탕 안에 한쪽 발 끝을 살짝 담궈보더니 얼른 빼내며 엄살을 부렸다. "류미르, 그만좀 하고 들어와. 벌써 몇번째냐?" "그래, 꾹 참고 몸을 담궈봐. 그럼 괜찮아져." 그의 평소같지 않은 엄살에 탕 안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던 세이몬과 내가 눈쌀을 찌푸렸다. 그러자 류미르가 볼맨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내 피부는 연약하단 말야. 너희들 말야,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데, 혹시 피부가 두터운 쇠가죽 아냐?" "골고루 한다. 들어오지 않으려면 마음대로 해. 정말 이럴때 보면 애라니까..." "맞아, 맞아." 류미르의 말에 내가 날카롭게 응수하자 옆에서 세이몬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류미르의 입이 한 발 더 튀어나왔다. 그는 식식대며 탕 안에 있던 나와 세이몬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양 손을 탕 속에 집어 넣었다가 세이몬과 나를 향해 탕의 뜨거운 물을 뿌렸다. "앗 뜨거." "앗뜨뜨..." 갑작스런 불시의 공격에 세이몬과 나는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뜨거운 물을 고스란히 받은 채로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야, 이게 무슨 짓이야? 데일 뻔 했잖아?" 세이몬이 얼른 탕을 빠져나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류미르를 노려보자 류미르는 고소하단 얼굴로 웃었다. "헹, 온 몸이 쇠가죽이라서 얼굴도 그런 줄 알았지." "주거써!!" 세이몬은 얼굴을 다 닦자마자 의자 위에 수건을 던지는 동시에 몸을 탕 가까이로 날려 양 손으로 물을 퍼 올려 류미르를 향해 뿌렸다. "받아랏!!" "앗 뜨거..." "자, 2탄이닷!!" "젠장, 나는 뭐 손이 없는 줄 아냣!!" 순식간에 가족탕은 애들 물장난 치는 장소로 전락해버렸고 주위는 류미르와 세이몬덕분에 온통 물천지가 되어 버렸다. 나는 재빨리 실프를 불러내어 물 밖으로 나와있는 얼굴 주변에 바람의 막을 형성하여 녀석들 장난의 파편이 튀지 않게 방어해놓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 역시 애들이라서 힘이 넘치는구만...." 그 때였다. 뭔가 쫘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눈을 떠보니 류미르가 한쪽 나무울타리 밑에 쳐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투성이 바닥을 잘못 디뎌 미끄러진 모습이었다. 세이몬이 그때를 노치지 않고 물을 양손 가득 떠서 류미르에게 달려가는데 누군가가 나무벽을 쾅 쳤다. 너무 놀란 세이몬은 제자리에 멈춰서려다가 미끄러져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찌었고 곧바로 나무 울타리 넘어 어떤 험상궃은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조용히해, 이자식들아. 여기 너희들만 있냐?" 그 소리에 기가죽은 세이몬은 얌전히 탕으로 돌아 왔고 류미르도 멎적은 얼굴로 슬금슬금 탕 가까이 오더니 슬그머니 다리 한쪽을 담궜다. "다 놀았냐?" 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녀석들을 돌아보자 녀석들이 날 패고싶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웃기냐?" "맞아." "응, 웃겨." 나의 솔직한 대답에 류미르와 세이몬은 말문이 막혔는지 고개만 팩 돌렸다. 그 뒤로 얌전해진 둘을 데리고 (류미르는 결국 허리까지 밖에 못 들어왔다.) 몇 시간동안 온천을 즐기면서 놀다가 온 몸이 퉁퉁 불은 뒤에야 겨우 탕을 빠져나왔다. "아, 기분 좋~타." "상쾌해!!" 기지개를 쭉 펴며 발그래해진 얼굴로 서로 마주보며 웃는 나와 세이몬과는 달리 류미르는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좋냐?" "응, 그치 세이모온~?" "응, 그래." "쳇." 끝까지 못 들어간다고 버티다가 허리 아래만 온천을 즐긴 류미르가 (탕에 들어와서 앉지는 못하고 계속 서있기만 했었다.) 우리와 같은 기분을 못 느끼는게 한이 되었는지 계속 툴툴거렸다. "늙은이들처럼 온천을 좋아하긴..." "자자, 류미르 너무 그렇게 툴툴대지 말고 우리 밖으로 나갈까? 어때, 세이몬? 피곤하지 않지?" 내가 류미르를 달래는 어조로 부드럽게 말하자 류미르가 힐끗 창문을 통해 밖을 쳐다보았다. 밖은 벌써 어두워져있어 여관에서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상태였다. "난 괜찮아. 류미르는 어때?" 세이몬이 기뻐하며 류미르를 돌아보자 류미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로긴 하지만 뭐, 너희들이 간다면야 같이 가주지." '짜식, 은근히 애기같다니까...' 나는 류미르의 행동에 남몰래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애들을 재촉하여 얼른 망토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날이 어두웠지만 길거리에는 가로등이 서 있어 제법 환했다. "호오, 이것좀 봐. 마법을 담은 구슬이잖아? 헤에, 햇빛이 없을때만 켜지게 만들었나봐." 류미르가 길가에 서 있는 한 가로등 밑에 서서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불빛을 내는 유리구를 빤히 바라보며 외쳤다. "이거 만드는데 꽤 비쌀텐데 말야." "그래?" 세이몬이 놀란 어조로 되물으면서 류미르의 옆으로 가서 같이 올려다보았다. "이런 걸 보니까 과연 관광도시라는게 새삼 깨달아진다." 나도 주위에 서 있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감탄의 말을 늘어 놓자 세이몬이 내 말을 받았다. "헤에, 그러고 보니 여긴 라크네 도시 (엘라이어드 여신상을 훔친 도시)보다 더 낳네? 거기도 관광도시였잖아?" "그러게, 여기가 더 부자인가보지...자, 그만보고 가자." 하도 올려다 봐서 고개가 아픈지 류미르가 한 손으로는 뒷목을 주무르면서 한 손으로는 세이몬을 잡아끌었다. 우리가 머무는 여관을 가로지르는 골목은 많은 여관들이 주르르 늘어서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여기저기 여관 입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낙날낙 거려 복잡하기가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 골목을 빠져나오자 그 동안 간간히 서 있던 가로등의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 있었다. 덕분에 약간 어둑어둑해진 거리에는 여관 대신 붉은 홍등을 내 건 가게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었다. 그 곳에는 우리가 온 길처럼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그들 중 절반은 야한 옷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여자들을 데리고 있는 남자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은 어느 가게를 들어갈 지 고민하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몇몇 옆에 늘어서 있는 가게들에 전혀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그 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술 취한 사람들의 주정부리는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끌려는 여자들의 콧소리가 난무하는 곳이 바로 그 곳이었다. 말로만 들었을 뿐 처음보는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류미르와 세이몬의 표정을 살피자 류미르는 기분이 상한 듯 잔뜩 지푸린 얼굴이었고 아직 이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세이몬은 약간의 흥미가 서린 얼굴로 그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돌아가자. 잘못 왔나보다." 내가 제일먼저 몸을 돌렸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류미르도 얼른 몸을 돌렸다. 제일 나중에 세이몬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듯한 몸짓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자 뒤에서 짙은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여자가 다가와 그의 옷 소매를 살짝 잡았다. "어머나, 귀여운 도련님들이네? 여기 누굴 찾아 온 걸까? 설마, 나?" 뒤를 돌아보니 아슬아슬하게 살짝 걸친 듯 보이는 야한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세이몬에게 눈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자, 놀러온 거면 이쪽으로 와요. 잘 해줄께. 우리집 서비스 짱이야. 응?" 그러자 류미르가 약간 거칠다 싶을 정도로 그녀의 손을 세이몬에게서 떼어놓으며 정중하게, 그렇지만 차갑게 말했다. "잘못 아셨습니다. 우린 길을 잘못 든거예요." 그러자 옆에서 어떤 술 취한듯한 아저씨의 혀 꼬부라진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켈켈켈, 그러면 그러취이~. 이봐 거기, 그런 젓비린내 나는 애송이들 상대하지 말고, 난 어때? 내가 훨씬 낳지 않아?" 그러자 주위에서 다발적으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자. 더 이상 있을 곳이 못돼." 류미르와 세이몬의 손을 이끌고 그 곳을 벗어나는 내 뒤로 아까 세이몬을 잡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 더 나이가 들면 한번 찾아와요. 그때 잘 해줄께. 하긴 그때까지 내가 여기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번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번 호 : 15759 / 15775 등록일 : 2001년 01월 19일 21:08 등록자 : LODEMP 조 회 : 25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3) "기분 나빠. 놀림감이 된 기분이야." 그 곳을 재빨리 빠져나오자 세이몬이 굳은 얼굴로 투덜 거렸다. "실제로 그랬지 뭐. 하아~, 정말 때를 잘못 찾았어. 이런 곳이 밤에는 어떻게 변하는 지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씁쓸한 기분으로 세이몬의 말을 받아주자 내 말 뒤에 류미르가 덧붙였다. "저런 걸 보면 인간들이란 정말..." 류미르는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은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만 설래설래 저었다. "오늘은 그냥 들어가서 자고, 내일 낮에나 나와보자고. 낮에는 우리가 볼만한 구경거리가 많을거야." 여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내가 제안하자 둘은 굳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빠른 속도로 여관을 향해 걸어가던 우리는 여관 앞 어떤 사람들 때문에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묶고 있는 여관의 입구 앞 골목에 서 있었기에 우리가 여관으로 들어가려면 그들을 삥 돌아서 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안 좋았던 세이몬은 입구를 거의 막고있다시피 한 그들을 보자 투덜댔다. "쳇, 이 길이 자기네껀가..." 그러나 그들 때문에 잠시 멈춘 사이 그들을 잠깐 살펴본 나는 또 다시 새어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살짝 류미르와 세이몬의 표정을 살펴보니 류미르는 그 상황을 금방 알아채고 굳은 얼굴을 더욱 더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고 세이몬은 아직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지 못한 듯 길을 막고 있다는 것에 화만내고 있었다. 우리 앞에는 부자인 듯 보이는 뚱뚱한 50대 초반의 남자가 자신의 경호원인 듯한 사람들 5명을 거느리고 서 있었고 그들 앞에는 다 낡고 떨어진, 아주 초라하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는 비쩍 마른 지저분한 사내가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쩍마른 사내의 깡마른 손에는 어떤 소녀의 손목이 잡혀 있었다. 그 소녀는 이제 막 16, 7세가 되어보였는데 그녀의 눈에는 아이다운 순수함은 전혀 없었고 마치 세상 만사를 다 겪은 듯한 체념감만이 어려 있었다. "그래, 이 계집이 네가 말한 그 계집이냐?" 뚱뚱한 남자는 모든 손가락에 다 커다란 보석반지가 껴 있는, 톡 건들이면 터질듯 토실토실한 손을 들어 소녀의 턱을 잡아올려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소녀는 검은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햇빛에 그을려 약간 까무잡잡한 얼굴에 주근개가 조금 있었지만 그것이 소녀의 귀여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 소녀의 이목구비는 제법 단정하여 보는이로 하여금 호감을 가지게 할 만한 인상이었다. 단지 흠이라면 소녀답지 않은 그녀의 체념감 어린 무표정이 소녀의 인상을 나쁘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 뚱뚱한 부자 영감은 그런것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호오, 제법 괜찮게는 생겼구나." "헤헤헤, 그렀습죠, 나리. 게다가 제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계집은 제법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읍죠. 품에 안는 기분이 아주 그만이랍니다." "호오, 그래?" 부자 영감은 그의 말에 소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그녀가 입은 초라한 드레스 위로 나타난 몸매를 노골적으로 훑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매가 부자 영감이 기대한 것 만큼 그렇게 풍성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자 영감은 좀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초라한 소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흐음, 네 말대로 그렇게 풍성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자 즉각 소녀의 아버지가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이고, 그냥 보고 어떻게 압니까? 제 말대로 한번 안아보시면 제 말이 진짠줄 아실겁니다." "좋아, 네 말을 믿어보지. 뭐, 난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으니까 말야." 부자 영감은 선심쓰는 듯한 표정으로 소녀의 아버지에게 자그마한 가죽주머니를 툭 던져줬다. 그리고는 포동포동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소녀의 팔목을 잡아 끌었고 소녀도 순순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으리." 소녀의 아버지는 그 부자 영감이 여관 안으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쪽에다 대고 연신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때 세이몬이 나를 팔꿈치로 툭 쳤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니 세이몬이 턱짓으로 어느쪽을 가르켰다. 그 쪽은 여관과 여관 사이의 어두컴컴한 작은 골목이었는데 그 곳에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초라한 여성이 서서 소녀가 사라진 여관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내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꽉 물고 있었지만 흐느낌은 주체할 수 없었는지 그녀의 뼈만 남은듯한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저 여자애 엄만가봐." "그러게..." "가자. 이런데 있으면 뭐하냐?" 류미르가 굳은 음성으로 제일 먼저 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여관 입구를 향해 계속 절을하고 있던 소녀의 아버지가 이제는 제 갈길을 가려는 듯 몸을 돌려 걷다가 그의 뒤쪽으로 걸어가고 있던 류미르와 부딧쳤다. 소녀의 아버지는 무척 외소한 체격이었으므로 류미르와 부딧히자 마자 뒤로 두어걸음 휘청이며 물러났다. "에이 X팔, 어떤 재수 없는 놈이야?" 그는 부자 영감을 대할 때와는 정 반대로 길거리에 침을 퇘 뱉으며 류미르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이 눈깔을 어따 대고 다니는 거야?" 소녀는 옆으로 서 있느라 우리에게 옆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부자 영감을 상대하느라 우리에게 아예 몸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제야 우리는 소녀의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주름이 가득하고 뼈에 가죽만 남은 얼굴에 코 끝은 춥지도 않은데 새빨갰다. 그의 앙상한 손으로 만들어진 주먹이 류미르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자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류미르는 그 주먹을 너무나 쉽게 피해버리고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 평소라면 그냥 피했을 텐데 - 소녀의 아버지에게 강하게 돌려차기로 한방 먹였다. 류미르의 실력이라면 그가 살살 봐주면서 했어도 소녀의 아버지에게 큰 충격이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가 전혀 봐주지 않은 발차기였기에 소녀의 아버지는 공중을 붕 날아 길거리에 내동댕이 쳐졌다. "아이고, 저 자식이 사람 죽인다~" 그는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린듯 일어나지 못한 채, 땅에 널부러 져서는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 어느 누구도, 구경하면 했지 그를 도와주기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더욱 더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누구 없소? 저 자식이 사람 죽이네~, 아이고 나 죽는다아~" "됐어, 류미르. 그냥 내버려 두고 들어가자." 그에게 다가가 한방 더 먹이려 하는 류미르를 나와 세이몬이 재빨리 붙잡고 여관쪽으로 밀었다. 그런데 그때, 아까 소녀를 데리고 들어갔던 부자 영감이 소녀와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시 걸어나왔다. 소녀의 아버지가 지른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자 소녀의 아버지가 그의 모습을 보았는지 엉금엉금 기어 그에게 가서는 그의 발에 매달렸다. "아이고, 나으리. 저 자식이 저를 죽이려 합니다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는 한 손으로 류미르를 가르키며 애처러운 눈으로 울먹거렸다. 그리고는 그 얼굴을 그대로 소녀에게 돌려 다시 한번 징징거렸다. "아이고, 이 녀석아. 애비가 맞고 있는데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냐? 나으리께 애비 복수를 해달라고 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게야? 어서 말씀 드리라니까?" 부자 영감이 소녀의 의향을 보려는 듯 소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없이 무심하게 부자 영감의 발에 매달려 있는 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소녀의 아버지는 더욱 더 분통이 터진 듯 손을 휘둘러가며 외쳤다. "뭘 하고 있는 게야? 아니,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면 다 해결 된다디? 어서 말씀드리지 못해?" 그러나 소녀는 계속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소녀가 자신을 위해 말해주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소녀의 아버지는 다시 부자 영감을 위해 애처러운 눈길을 보냈다. "나으리, 소인은 나으리를 위해 딸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부자 영감이 류미르를 힐끗 보더니 흥미진진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긴, 싸움 구경이 재미있긴 재밌지..." "암요, 그렇구 말구요." 소녀의 아버지가 부자 영감이 말을 끝내자마자 맞장구를 쳐댔다. 그리고는 류미르를 향해 의기양양한 얼굴을 해보였다. 부자 영감이 뒤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뭐라고 속삭이자 경호원 중 한명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여관에서 뛰어 나온 지배인에 의하여 류미르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정말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여관에서 지배인이 손살같이 튀어나와 부자 영감에게 말한 것이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아마 이 장면을 여관에서 계속 지켜보다가 정말 귀중한 손님들이 (우리하고 부자영감) 싸우려고 하니까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부자 영감은 의아한 눈으로 지배인을 바라보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경호원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경호원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는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지배인은 경호원이 자리에 멈춰서자 재빨리 부자영감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아마도 우리가 그 여관의 최고급 방에 묶고 있는 손님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리라.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부자 영감의 눈이 놀란 빛을 나타내더니 지배인이 그에게서 떨어지자 어흠, 한번 헛기침을 하고는 경호원을 불러들였다. 도시에서 가장 큰 여관의 고급 방에서 묶는 사람이라면 어느정도 배경이있는 사람일 테니 우리 신분을 모르는 한 아무래도 우리를 건드리기에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자신의 발에 매달려 있는 소녀의 아버지를 발로 한방 차주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다시 여관안으로 들어갔다. "나으리,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나으리, 나으리이~~" 소녀의 아버지가 당황해서 애타게 불렀지만 부자 영감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류미르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무시무시한 어조로 말했다. "자, 이젠 누구한테 복수를 부탁할거죠?" 번 호 : 15948 / 15949 등록일 : 2001년 01월 25일 22:13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4) 이렇게 슬픈 일이... ㅠ.ㅠ 오늘 남쪽 나라에 가서 명절을 지내고 온 우리 가족이 저녁을 먹고 오붓하게 모여 윷놀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편을 갈랐는데 나는 엄마랑 한 편이 되었고, 내 동생은 아빠와 한편이 되었습니다. 한 판에 천원 내기로 시작된 윷놀이... 이 게임에서 전 만원을 날렸습니다. ㅠ.ㅠ 아빠와 동생팀이 어찌나 잘 하던지 줄줄이 제가 계속 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화가난 나는 잃은 돈을 다시 찾기 위하여 지쳐서 게임을 그만하기로 한 식구들을 계속 붙잡았습니다. 결국 제 고집에 두 손드신 아빠가 만원을 주겠다고 하여 저도 한발 양보해 윷놀이를 그만 했지만... 한판, 한판 질 때마다 천원을 내 놓을때의 그 떨림이란 정말 잊을수가 없더군요... ㅠ.ㅠ 아, 내 돈들이여어~~~ 한 판 이길때마다 깔깔 웃던 내 동생이 얼마나 밉던지... 수북이 쌓여 있던 천원들을 한장 한장 세 보던 동생이 얼마나 얄밉던지... 천원들을 드리대며서 '천원짜리로 바꿔줄까?' 하던 동생이 얼마나 뼈에 사무치게 밉던지... 여러분, 여러분은 게임할 때 돈 걸지 마세요.. ㅠ.ㅠ - 실의에 빠져 있는 작가가... - ============================================================ "자, 이젠 누구한테 복수를 부탁할거죠?" 소녀의 아버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를 도와주려고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결국 그는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포기하고는 떨리는 얼굴 근육으로 필사적으로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류미르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무슨 뜻인데요?" 류미르는 너무나 살벌한 미소와 함께 다정스레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소녀의 아버지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결국 포기했는지 류미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주세요, 나리... 이 미천한 놈이 높으신 분을 몰라뵙고 그만.... 이놈이 멍청한 놈입니다. 이놈이 바보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이 사회가 아무리 신분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라고는 하지만 어른이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애걸하는 장면은 과히 보기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류미르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쌀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의 주먹진 손이 바르르 떨렸다. 소녀의 아버지는 류미르의 모습을 보자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너무 놀라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찌면서도 자신의 머리를 보호 하려는 듯 두 팔로 감싸안았다.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잘못했어요. 제발 자비를..." 그때였다. 어두운 골목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소녀의 어머니인 듯한 여인이 그 곳에서 뛰쳐나와 류미르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나으리, 이렇게 빕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결국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내가 류미르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만하면 됐어. 그러니까 이제 가자." 그리고 우리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중년의 부부를 뒤로한 채 여관으로 들어왔다. "이해가 안가.... 어째서 그런 거지?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왜 그랬냔 말야...." 방 안으로 들어온 류미르는 거친 발걸음으로 거실을 왔다갔다 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만좀 왔다 갔다 해라. 정신 없다." 세이몬이 류미르를 따라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면서 투덜댔지만 류미르는 그의 말은 못들은 척, 계속 끊임 없이 움직여댔다. "그냥 놔둬, 무지 심각해 보이는데 우리 말이 귀에나 들어 오겠냐?" 그러자 밤 새도록 왔다갔다 할 줄 알았던 류미르가 자리에서 딱 멈추더니 돌연 나를 바라보았다. "아린, 인간들은 왜 그러지?" "뭘?" "왜 잘난 척 하고 싶어할까? 자신의 힘으로 잘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힘을 얻어서라도 잘난 척 하고 싶어해. 막상 자신들보다 더 강한 사람들을 만나면 빌빌 기는 주제에..." 그의 어조에는 강렬한 경멸이 담겨 있어 나는 아까 그 두 중년 부부의 모습을 떠올리며 실소를 머금었다. "글쎄... 내가 어찌 알간?" 류미르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왜 그럴까? 그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런데도 그러고 싶을까?" "그런게 좋은가보지..." 세이몬이 졸린지 기지개를 펴며 말하자 또 다시 류미르가 멈춰서서는 그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친 혈육을 팔 만큼?" 그러자 세이몬이 기지개를 펴다 말고 어벙벙한 얼굴로 류미르를 돌아보았다. "친 혈육을 팔다니?" "아니, 넌 아까 그 모습을 보고도 모르냐? 아까 내 앞에서 빌빌대는 남자가 자신의 딸을 그 뚱뚱한 영감탱이한테 팔았잖아!" "그게 뭐?"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세이몬이 되묻자 그제야 류미르는 세이몬이 아직 인간 세상의 일을 다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관두자. 네가 그런 일을 알 리가 없지..." "뭐야, 그 태도는?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세이몬은 류미르가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발끈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는 류미르의 강렬한 눈빛에 주춤 거렸다. "그런데 말야, 왜 그 부인은 그런 남편을 감싸는 거지? 자신의 친 혈육까지 팔아가면서 잘난체 하고 싶어하는 인간을 말야." "뭐, 자신의 남편을 사랑했나보지..." 나의 무성의한 대꾸에 류미르는 심각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어.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는 눈이 따뜻하지 않았는걸?" "그래? 그럼 부인이 아닌가?" "그럼 뭐하러 그런 사람을 위해 나서냐?" "아, 그건 또 그렇네..."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대꾸하자 결국 류미르가 화를 냈다. "아린, 난 지금 심각하다고!!"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뭐가?" "뭐냐니? 넌 아까 그 상황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류미르가 자꾸 날 다그치자 나는 화가났다. 덕분에 내 말투와 어조도 약간 격렬해졌다. "어떤 반응을 바라는 거야?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고, 그 사람 부인이랑 딸들은 너무 가여운 사람들이라고?" "아린!!" "난 널 이해할 수 없어. 그래, 네 말대로 그들을 보고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꼈다고 쳐, 그래서?" "뭐?" "그래서 어쩌란 말야?" 류미르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류미르를 바라보면서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여 감정을 가라앉힌 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그러자 류미르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우물쭈물 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 난.... 그러니까... 그런 사람 처음 봤어. 자신의 친 딸을 팔다니... 그것도 자신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말야... 그래서, 좀 놀란 것 같아." "그랬냐?" 내가 또 다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류미르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아린, 넌 어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다?" "난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거든... 돈 때문에 자기 친 자식이나 부인도 팔아먹거나, 너무 가난해서 자신의 아이를 버린다거나... 뭐, 돈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일로도 그런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아까 그 사람은 돈 때문에 그런 것 같지만 말야..."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의 눈들이 둥그래졌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또 있단 말야?" "자신의 친 자식을 버려?" "흔한 건 아니지만... 문명이 발달할 수록 많아지겠지... 뭐, 지금도 꽤 있을걸? 그리고 사람들이야 심하면 자신의 부모나 형제도 죽인다잖아. 흔하지야 않겠지만..." "헤에..." 세이몬은 꽤나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류미르는 침통한 얼굴로 조용히 있더니 조그많게 중얼 거렸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쓸모 없는 사람들이야. 차라리 존재하지나 말지..." "저런, 저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안그래? 우리는 지금 결과만 보고 말하는 거잖아. 아무리 그 사람들이 좋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해도 꼭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봐. 혹시 알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을지?" "하지만, 아까 그 부인은 정말 모르겠어. 어떻게 그 사람을 감싸주는 거지? 분명 사랑때문은 아니야." 류미르는 또 다시 인상을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글쎄,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번 호 : 16014 / 16015 등록일 : 2001년 01월 26일 22:46 등록자 : LODEMP 조 회 : 8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5) 우리는 별로 좋지 못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덕분에 다음날 아침에 상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이게 다 너때문이야, 류미르..." 세이몬은 빵에다 버터가 섞인 포도잼을 바르면서 투덜 거렸다. "뭐가 또 나때문이야?" 류미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묻자 세이몬은 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때문에 분위기가 썰렁 하잖아?" 세이몬의 말대로 우리는 평소와는 달리 조용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어 분위기가 너무 썰렁했다. 하지만 류미르가 여전히 저기압으로 보이는데다 나도 별로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러 명랑하게 떠들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흥..." 류미르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은 부정 못하겠는지 코웃음만 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러지 말고 우리 온천에라도 갈까?" 세이몬이 혼자 툴툴대면서 빵을 뜯어먹는 것이 맘에 걸린 나는 분위기를 바꿀 겸 녀석들을 둘러보며 제안 했다. 그러나 류미르는 여전히 저기압인 표정으로 대꾸도 안 했고 세이몬도 별로 마땅찮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잘 자고 일어나서 온천은 무슨... 피곤하지도 않는데..." "으이그, 그래... 맘 대로 해라." 나도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일부러 명랑하게 제안했건만 돌아오는 반응이 시원찮자 나도 화가났다. 그래서 재빨리 아침을 끝내고 나 혼자 수건을 들고 온천으로 내려가버렸다. "칫, 칫, 젠장할... 류미르 녀석...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거지... 그걸로 저렇게 우울해 하다니... 나까지 씁쓸해지잖아?" 온천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나는 자꾸만 가라앉는 내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기 위하여 소리내어 투덜거렸다. 그러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 더욱 심통이 난 나는 탕 옆, 바닥에 놓여 있던 차갑고 달콤한 과일 쥬스가 담긴 유리잔을 거칠게 낙아채어 벌컥벌컥 마셨다. "칫, 류미르 녀석... 엘프는 그렇게 완벽한감? 사람이 가지각색이니까 여러가지 문명도 발달하고 예술도 발달하고 그러는 거지..." 지금은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원래는 인간이었고 지금까지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는 완벽한 타 종족인 류미르가 인간의 안 좋은 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해못해 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원래 그런 모습은 같은 인간이 봐도 눈쌀을 찌푸릴 일이었고 그렇다고 지금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나는 더욱 기분만 나빠졌다. "칫, 어젯밤에 밖에 나가는 것이 아니었어.. 그냥 자는 건데..." 혼자 소리내어 투덜대다 다시 쥬스를 마시다 또 혼자 투덜대던 나는 그래도 기분은 안 나아지고 열이 올라 얼굴만 뜨거워지자 혼자 중얼거리는 걸 포기하고는 시무룩하게 탕을 나왔다. 그러나 방으로 돌아온 나는 보이는 녀석들 모습에 다시한번 방을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류미르는 생기 없는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 세이몬은 심심해서 어쩔 줄 몰라 몸을 배배꼬고 있었던 것이다. 세이몬은 방으로 들어온 나를 바라보자마자 희색이 만연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아린, 나 심심해~~" "우리 류미르는 내버려 두고 나갈까?" "응, 응." 내가 힐끗 류미르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세이몬에게 말하자 세이몬은 너무 좋아하는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류미르는 내 말을 못들은 것 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류미르의 태도에 조금 화가난 나는 류미르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앉아있는 소파를 세게 걷어찼다. 쾅~ "무슨 짓이야?" 류미르가 화난 얼굴로 나를 돌아보자 나는 그의 앞에 양 손을 허리에 딱 걸치고 당당하게 섰다. "우리 나갈꺼야." 그러자 류미르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잘 갔다와." "넌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을 거지?" 세이몬이 내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며 이죽이자 류미르가 다시 화 난 얼굴로 돌아봤다. "내가 죽상을 하던 밥상을 하던..." 그의 그런 모습에 왠지 더욱 더 화가치민 나는 몸을 확 돌려 내 침실로 향하면서 크게 이죽거렸다. "흥, 애송이 하이엘프 녀석이 고고한 척 하기는... 웃기지도 않아..." 그러자 내 뒤에서 즉각적인 류미르의 강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린!!" 나는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무척이나 화가 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런거에 눈 하나 깜짝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당당히 그에게 대꾸했다. "왜?" "애송이란 말 취소해..." "뭐?" "애송이란 말 취소하라고. 누굴 애 취급하는 거야?" 나는 그에게 약간 과장되게 코웃음을 치면서 그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려 건방지게 팔짱을 탁 하니 꼈다. "하, 애송이를 애송이라고 한 건데 내가 왜 취소해야 해?" "뭐라고? 내가 왜 애송이란 거야?" "바보 아냐? 애송이 짓을 하니까 애송이지. 그럼 어른이냐?" "내가 무슨 애송이 짓을 했다는 거지?" "지금 죽상하고 있는게 애송이 짓이지, 그럼 아냐?" "뭐? 아니,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히히거리는게 어른이냐?" "누가 히히 거리래? 적어도 네가 정말 어른이라면 다른 종족들의 어떤 모습을 보았건 간에 그 놀라움에 충격을 먹고 빌빌거리지는 않았을 거다." 나의 이번 일격에 류미르는 욱 하는 모습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더욱 힘을 얻어 한 소리 보탰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사람들의 한 부분일 뿐이야.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건 잊었어? 그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는거지... 너 설마 그런 모습을 보고 인간 전체를 더럽고 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류미르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뭐야? 정말 그랬던 거야? 그럼 우리가 여행하면서 그 이전에 봐왔던 모습들은 또 뭐라고 생각해? 그것도 어제 그 일때문에 모두 추해 보이디?" "그, 그런건 아냐.." 류미르는 부정했지만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지 않아 나는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도 저렇게 부정하는 걸 보니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것 같아 나는 좀 더 그에게 공격 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까지 죽상하고 있던 건 뭐야? 너 때문에 분위기가 썰렁했던 건 알고 있겠지?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뭐냐고? 놀란 것 치고는 너무 심한 반응 아냐?" 그러자 류미르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자신의 발 끝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흐응, 말 못하는 걸 보니 뭔가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네? 뭐야? 설마, 인간들 세상에 실망해서 더 이상 인간들의 모습을 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단지 류미르를 비꼴려고 한 말이었는데 의외로 류미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얘 정말 애기네? 넌 숲에서 한 그루의 썩은 나무 한, 두 그르를 보고 그 숲 전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 그러자 류미르의 어깨가 더욱 더 심하게 바르르 떨렸다. 그리고 곧 이어 그의 한층 더 붉어진 얼굴이 나를 향해 고개를 들면서 항변했다. "아니야, 그렇게까지는 아니란 말야." 나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씨익 지었다. 그리고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로 류미르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랑 같이 나갈꺼지?" 그러자 다시 류미르는 입을 다물고 우물쭈물 했다. 그의 그런 모습에 화가 난 나는 발을 한번 크게 구르며 소리쳤다. "갈꺼야, 안 갈꺼야?"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류미르가 얼결에 대답했다. "갈께. 가면 될거 아냐? 왜 화를내고 그래?" 그의 그런 모습에 뒤에 있던 세이몬이 소리죽여 킥킥 웃었다. 번 호 : 16089 / 16141 등록일 : 2001년 01월 27일 22:53 등록자 : LODEMP 조 회 : 34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6) 우리는 기분 전환도 할겸 점심을 여관에서 먹지 않고 밖에 나가서 먹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도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류미르는 냅두고 세이몬과 나는 신나게 떠들며 시장 거리를 걸었다. 이번에는 여관을 나서기 전에 미리 길을 물었던 탓으로 이상한 곳으로 빠질 염려도 없었다. 하날 도시의 밤과 낮은 정말 하늘과 땅 만큼 달랐다. 밤의 하날도시는 어느 거리에서나, 심지어 우리가 묶고 있는 여관 바로 앞의 골목에서도 술에 취한 남자와 야한 옷과 화장을 한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낮의 하날도시에서는 언제 그런 사람들이 있었냐는 듯이 활기찬 분위기만 거리, 거리에 가득했다. 관광도시 답게 여기저기에서는 사치품과 기념품을 파는 가계가 많았고 독특하고 예쁘게 생긴 장식품을 길거리에 널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노점상인들도 많았다. 우리도 그런 물품들을 하나 하나 구경하면서 아까까지의 우울했던 기분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노점상들 중 한 곳이 눈에 띄었다. 수레 위에 판을 마련하여 그 위에 상품들을 늘어놓고 팔았는데 수레 위에 놓인 상품이란 대나무로 틀을 만들고 색색의 화선지로 면을 발라놓아 멋을 낸, 등을 씌우는 갓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대나무와 화선지로 만든 물건들은 이 곳에서 처음 봤기 때문에 나는 너무 감격에 넘쳐 그 수레로 다가갔다. 그 곳에서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기도 하고 만져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신이 난 장사꾼이 침이 튈 정도도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 자, 구경들 하세요. 구경은 꽁짭니다.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어디서 다시 보시겠습니까? 한번들 와보세요. 아이고, 거기 예쁜 숙녀님? 숙녀님께서 사신다면 내 아주 싸게 드리지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사 주시는 것만해도 내 무지무지 큰 영광 아니겠습니까?" 그 장사꾼은 정말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평범하디 평범해 미인이라 할 수 없는 어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를 붙잡고 외쳤다. 그러자 그 아가씨는 부끄러움에 약간 붉어진 얼굴로도 기분 좋은 미소를 띄우며 그녀의 두 주먹을 합친 것 보다 조금 더 큰 둥근 모양을 하고있는 등갓을 골랐다. "이거 얼마예요?" "아이고, 역시 얼굴이 예쁘니까 보는 눈까지 높으시군요? 그래도 내 아가씨한테는 싸게 준다고 했으니까 딱, 20셀만 내십시오." 그러자 그녀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머, 너무 비싸요." 그러나 상인은 능청스런 얼굴로 대꾸했다. "어허, 비싸다니요. 아가씨, 아가씨는 이 물건이 어디 물건인 줄 아시나요? 그리고 이게 어떤 용도로 쓰시는지 아시나요?" 그러자 전혀 모르고 있는 아가씨는 주춤거리며 자그맣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상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다시 신나게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건 말입니다. 저 머나먼 동방에서 가져온 물건으로써 이 종이를 보십시오. 이게말입니다, 이 근처에서는 생산은 커녕 볼 수도 없는 종이예요. 안그렇습니까, 신사분? 이런 종이 어디가서 보셨는지요?" 아가씨 옆에서 자신의 딸이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얼결에 지적된 30대 중반의 아저씨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아니오, 본 적 없어요." 그러자 상인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시 아가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 보십시오. 아마, 아가씨도 이런 종이는 처음 보셨을걸요? 이게 저 머나먼 동방에서 사용되고 있는 종이인데, 내 오늘 아가씨를 위하여 특별히 설명해 드리지." 상인은 그러면서 아가씨가 들고있던 것 말고 판 위에 진열되어 있던 갓들 중에서 전등갓 처럼 생긴, 기와지붕 모양의 갓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살짝 뒤집자 밑 면이 넓어서 안쪽을 들여다보기 쉬웠다. 아가씨 근처의 모든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상인이 보여주는 갓 속을 보며 그의 설명을 기다렸다. "자, 이 쪽을 보시면말이죠, 여기 이 갓 모양을 지탱해주는 대가 보이죠? 이게 바로 대나무라는 나무를 쪼개서 만든 거랍니다. 이 대나무란 말이죠, 이 근처에서 보기 힘든 나무죠. 에, 그러니까 아마도 대륙 끝에 있는 마틸산 근처라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아주 희귀한 나무로 만들어진데다 여기 보시면말이죠, 하얀 종이가 보이시죠? 이게 약간 튼튼한 종이로 동양으로 말하면 치앙오지라고 한답니다. 참 희안한 이름이죠? 거기서는 이 종이로 방문이나 창문을 만드는데 사용한다더군요."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 상인의 발음이 너무 안 좋았던 것이다. '치앙오지가 뭐야? 치앙오지가.. 창호지지..." 그러면서 계속되는 상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 치앙오지 위에다 다시 종이를 붙이는게 바로 이 색이 있는 종이입니다. 이 종이는 워낙 얇고 다루기 어려운, 아주 고급 종이인데 이게 잘만 보관하면 몇 백년은 썩지않고 보관할 수 있다더군요." 상인의 설명에 여러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허어, 그것 참 신기한 종이일세..." "그러게... 이 곳의 종이는 몇 십년만 지나면 누렇게 변색되고 부스러지는데..." "그것 참..." 상인은 더욱 더 신이나 설명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죠? 그렇죠? 그러기에 제가 머나먼 동방에서 들여온 아주 신기한 물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곳 사람들은 여기에다 글이나 그림을 그린다고 하더군요. 뭐, 저도 보지는 못하고 들은 이야기 입니다만, 어쨌든 이 종이를 후와? 후우? 아, 후우와서지라고 하더군요." 발음이 잘 안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몇번을 중얼거린 상인이 말했지만 그 역시 제대로 된 발음이 아니었다. '화선지인데...' 그 상인의 발음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여기서 아는체 하다간 시선이 쏠릴 것 같아서 애써 눌러 참았다. 그 때 아까 상인에게 지적되어 얼결에 대꾸한 아저씨의 10살 정도 되어보이는 딸내미가 한쪽에 잘 진열되어 있는 연들 중 나비모양의 연을 집어들었다. "아저씨, 이건 뭐예요?" 그러자 상인은 그 소녀가 집은 물건을 보더니 반색하며 소녀에게서 집어 들었다. "예쁘지? 이건말이다, 방이나 거실 벽에 잘 걸어놓는 장식품이란다. 어때, 예쁘지?" 나는 그 상인의 설명에 숨이 탁 막히는 것이 느껴졌다. '연보고 장식품이라니...' 그 나비모양의 연은 바깥쪽 날개가 노란색, 안쪽 날개가 빨간색, 그리고 몸통 모양은 초록색의 화선지가 붙어 있었다. 그 화선지의 빛깔이란 이런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하고 밝은 색이 아니라 어딘지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깔을 띄고 있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색이 너무 예뻐요..." "그렇지? 그렇지? 정말 독특한 색이지?"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희망찬 눈길로 바라보자 소녀의 아버지는 상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건 얼마요?" "에, 이건 따님이 너무 예쁘니까 좀 싸게해서 10셀만 내십시오. 원래 15셀인데 깎아드리는 겁니다." 15셀이면 이곳 물가로 볼 때 예전 세상에서는 맥도날드에서 특불고기버거 세트를 먹고도 충분히 남을 돈이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500원 천원정도 하는 연을 약 3배정도 비싸게 팔다니... 정말 장사 소질이 탁월한 상인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아버지는 싼 값에 샀다는 얼굴로 기분 좋게 10셀을 지불하고는 그 연을 넘겨받았다. "조심해서 가져가야한다. 약해서 잘못하면 부러지고 찟어지거든." 소녀는 상인의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연을 조심스럽게 잡아쥐고는 나머지 손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인파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런데 그 때 진열대의 구석에서 나는 독특한 것을 발견했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만든듯한 가는 필통 처럼 생긴 상자였다. 호기심에 그 것을 잡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대나무와 창호지로 만든 접채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라? 이건..." 상인이 나의 놀란 외침을 듣고 내가 들고있는 걸 보더니 '손님 잡았다.' 란 미소가 가득 든 얼굴로 내가 서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말이죠, 그 머나먼 동방에서 사용하는 부채랍니다. 이 곳에서 사용하는 천 부채와는 다른, 특이한 부채죠. 어때요? 독특하죠?" 나는 감격에 찬 눈으로 부채를 좌악 폈다. 내 손으로 약 두 뼘 정도 되는 길이의 부채가 펴지자 평소 귀족들이나 왕실의 숙녀들이 사용하는 부채보다 훨씬, 훨씬 더 큰 부채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부채 한쪽에는 멋진 대나무가 그려져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시 한수가 한문으로 쓰여져 있었다. "어때요? 독특한 그림이죠? 이게 바로 대나무라는 겁니다." 그러자 나는 상인에게 짖궃은 장난기로 물었다. "그럼 여기 써 있는건 뭐예요?" 그러자 상인이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얼버무렸다. "허허허, 글쎄요... 난 워낙 무식해서 우리나라 글도 모르는데 남의나라 글이 다 뭡니까?" 평소 한문이 하기 싫어 이과를 택한 나도 그 부채에 멋진 필체로 써 있는 한문을 읽지 못했다. 하긴, 휘갈겨 써 있어 아는 한자가 있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오랜만에 보는 물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기로 결심한 나는 상인에게 물었다. "이거, 얼마예요?" 그러자 상인이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사시게요? 그건 좀 비싼데..." "얼만데요?" "그건 좀 희귀한거라 50셀이거든요." "50셀이요?"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상인을 째려보자 상인이 황급히 덧붙였다. "아, 물론 내가 손님같은 사람에게 비싸게 받을 순 없으니까 조금 깎아줘야지. 그래 45셀 어때요?" '이런 순 바가지...' 여기 돈으로치자면 20셀이나 30셀 정도면 충분히 사고도 남을것이다. 그런데 45셀이라니... 나는 순간적으로 '너무 비싸요...'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니 군소리 없이 사람들이 많이 사 줘야 그 머나먼 동양에서 자꾸 물건을 가져올 것 같았다. '그러면 그 곳도 유익이 되겠지?' 옛 세상과 비슷한 곳이 잘 되게 하고싶은 마음이 한 곳에서 스멀스멀 솟아 오르자 이 얄미운 상인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싶은 마음이 스스르 작아졌다. "좋아요. 여기요." 나는 두 눈 딱 감고 50셀짜리 은화 한닢을 내밀었다. "허허허, 잘 고른거예요. 이런 물건을 또 어디서 보겠어요?" 상인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에게 5셀을 거슬러 주었다. "너희들은 뭐 살거 없어?" 내가 잔돈을 손에 받아쥐며 세이몬과 류미르를 돌아보자 그들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신기하긴 하지만... 장식품은 별로야." "나도, 짐만되지 쓸 곳이 없잖아." 그들의 형편에 맞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럼 가자." [번 호] 16182 / 16221 [등록일] 2001년 01월 28일 21:48 Page : 1 / 15 [등록자] LODEMP [조 회] 235 건 [제 목]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7) ─────────────────────────────────────── 그 도시에는 구경할 것이 정말 많았다. 역시 관광도시라서 그런지 그 도시에서 나오는 온천에 관한 특산물 - 온천욕 할때 바를 크림, 화장품, 온천 돌 등등...-을 제외하고도 여러 도시나 지방에서 올라온 각종 공예품과 장식품들을 파는 상점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를 즐겁게 했던 여러가지 먹거리로 인하여 우리는 입을 쉴 새가 없었다. (떠들랴, 먹으랴...) 어느덧 너무 걸어다녀서 다리도 아프고 해도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우리는 공원 한 구석에서 넓적한 철판 위에 호떡 비스무리한 빵을 구워파는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앗, 저거 맛있겠다." 먹는것을 파는 곳이면 귀신같이 알아내어 제일먼저 뛰어가는 세이몬이 이번에도 역시 먼저 알아내고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야, 그만좀 먹자. 배부르단 말야." 류미르가 세이몬이 벌써 그 앞으로 다가가 호떡 비스무리한 빵 (이제부터 편의상 호떡이라 하겠음.)을 살펴보고 있는 세이몬을 향해 소리쳤다. "이거 양이 얼마 안되니까 하나씩, 맛만 보자. 빨리 와봐. 맛있게 생겼어." 그러나 세이몬은 벌써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 기름이 좌르르 흐르고 있는 호떡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한숨을 내쉬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딱 하나씩만이야." "저녁은 다 먹었군..." 나와 류미르가 한마디씩 하면서 그쪽으로 다가가는데 류미르가 호떡은 안보고 호떡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만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야, 뭐야? 안 먹어?" 벌써 호떡 세개를 받아들고 있던 세이몬이 하나는 나를 건네주고 하나를 류미르에게 내밀었는데 류미르는 고개도 안 돌리고 손만뻗어 호떡을 받아드는 거였다. 그리고 이상한건 류미르의 시선을 받은 그 아주머니는 될수 있는 한 류미르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돌린다던가 아님 괜히 불을 살피려고 허리를 숙인다던가 하면서 어색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왜 그래? 아는 분이야?" 류미르와 그 아주머니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세이몬도 호떡 먹는 것을 잊어먹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류미르는 세이몬의 말에는 대꾸도 안한 채 차갑고 경멸이 가득 담긴 어조로 내뱉았다. "딸을 판 돈으로도 생계유지가 어려운가보죠?" 류미르의 차디 찬 말에 아주머니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류미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럼 이번에는 무얼 팔겁니까? 아주머니 자신이라도 팔 겁니까? 그런데, 아주머니를 누가 사려고나 할까요?" 류미르의 비웃음이 가득 담긴 어조에 지금까지 류미르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땅만 바라보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어 류미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많은 고생으로 생긴듯한 주름 사이에 흐린 파란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도 원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 아주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번 봇물이 터지듯 아주머니는 여태까지 가슴 속에만 쌓아놓고 한 번도 꺼낸적이 없는 말들을 울먹이며 내뱉기 시작했다. "내가 능력만 있었어도... 딸을 팔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긴, 능력이 있다면 그 못난 남편에게 팔려가듯 결혼하진 않았을 테지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뒤 지친 듯 그녀의 뒤에 놓여 있던 낡은 나무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는 옛 일을 생각하는 듯한 몽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편이 무능하고 비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도락에 빠져 돈을 탕진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평소에 친하던 사람끼리 돈을 걸지않고 게임하듯 재미로 몇 번씩 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의 실력이 꽤 괜찮았나 봅니다. 평소 그와 같이 게임하던 사람이 그를 꼬셔서 진짜 도박판에 데리고 갔지요. 그런데 하필 거기서 사기도박단을 만났습니다. 처음에 몇번 돈을 따더니 아예 집 안에 있던 돈을 몽땅 다 가져가서 털리고 말았지요. 그러고도 모잘라 그는 그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답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우리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고... 우리에게 제법 예쁜 딸이 있다는 걸 안 그들은 딸을 데려가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팔려가면 어찌되는지 아십니까? 이 도시에 있는 어딘가의 매춘굴에 팔려가 몸과 인생 모두를 망치겠지요. 그걸 잘 아는 우리가 어쩌겠습니까? 차라리 이왕 몸 망치는 것 부자의 첩으로라도 들어가 그래도 편안한 인생을 보내게 해 주는것이 백배는 더 낫다는 생각에 남편이 도시를 이잡듯 뒤져 돈 많고 여색을 즐기는 사람을 찾았지요. 그렇게 되었던 겁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못난 부모를 만나 지금까지 헐벗고 굶주렸는데 이제부터라도 잘 먹고 잘 입으면 그것으로 족하지요... 그것으로 족해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있던 류미르가 그녀가 말을 다 마친 듯 하자 입을 열었다. "형편 없군요... 만약 그렇다면 남편이 돈을 다 잃고난뒤 도망가지 그랬어요? 차라리 그렇다면 딸을 팔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물에 젖은 눈으로 류미르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우습군요.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우리가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런 일은 당신들처럼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하지요. 우리같은 사람들이야 다른 곳으로 가보았자 또 이런 곳으로 흘러들텐데요. 더욱이 아는 사람도 전혀 없는 곳에 가서 위험한 일 안 당한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차라리 돈 없고 힘 없어도 터를 닦고 생리를 잘 아는곳에 남는게 났지..." 류미르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물러났다. 우리가 그 곳을 떠날때 까지도 그녀는 멍하게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다른 사람들이 호떡을 사기위하여 다가가자 벌떡 일어서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손님을 맞이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댔잖아." 내가 류미르를 힐끔 노려보며 힐책하자 세이몬도 맞장구 쳤다. "맞아. 왜 그런말을 한 거야? 덕분에 좋은 분위기만 다 망쳤잖아." 이제 해가 다 저물어 골목 골목에 가로등이 하나 둘 씩 켜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또 어제밤 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발걸음을 빨리 놀렸다. 그런데 그때 여관으로 가는 것만 생각하던 나는 세이몬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 나를 잡아채자 앞으로 거의 고꾸라질 뻔 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세이몬에게 잡힌 옷자락을 거칠게 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나 세이몬은 나의 무서운 눈빛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느 가로등도 없는 허름한 골목을 가르켰다. 그 곳에는 어떤 인영이 사람 키만한 물체를 낑낑 거리며 거의 끌다시피 옮기고 있었는데 그 인영은 힘들게 그 물건을 옮기면서도 주위에 누군가가 자신을 볼지 몰라 두려워하는 것 처럼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하필이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와 눈이 마주쳐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있던 그 물체를 떨기고는 바들바들 떨면서 벽쪽으로 붙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물체가 바닥과 충돌함과 동시에 그 물체에서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난 것이었다. 놀란 우리가 그 쪽으로 달려가자 벽 쪽으로 붙어 바들바들 떨던 인영이 떨리는 다리로도 재빨리 튀려고 골목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런걸 가만 놔둘 정의의 사나이 류미르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허공을 박차 몸을 한바퀴 돌린 뒤 도망치려는 인영앞에 멋드러지게 착지했다. 인영 앞에 착지한 그는 인영을 바라보다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그 표정은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정말 인연이 많은 모양이군요, 아저씨?" 그의 말에 인영을 돌아 본 세이몬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아까 그 아주머니의 남편, 즉 어젯밤 류미르에게 한대 얻어 맞았던 그 남자였던 것이다. "나리, 나리..." 그 남자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류미르는 그의 모습에 동정을 느끼지 않는 듯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놀라 물건도 버리고 가시나요?" 그러자 세이몬이 그 남자가 들고 있던 물건을 감싼 다 낡아빠진 천을 풀러내자 거기엔 너무 많이 다쳐 정신을 잃고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더욱 놀란건 그 남자의 머리카락이 칠흙처럼 검었고 그의 피부는 약간 노란, 동양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놀란 눈으로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코에 손가락을 대어보니 약간이나마 숨을 쉬는 듯한 바람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군..." 왠지모를 안도감을 느낀 내가 류미르를 돌아보자 류미르는 한층 더 무서운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러자 그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단지... 단지... 저 남자를 데려가 치료해주려고 했던 겁니다... 정말입니다. 딴 뜻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볼까봐 무서워 한거죠?" "그건... 그건...." 남자가 우물쭈물 하면서 대답을 못하자 류미르가 발을 한번 크게 굴렀다. "제대로 대답 못해요?" 놀란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리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못했습니다... 저 사람이 제법 괜찮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치료해주면 돈을 얻지 않을까 싶어서... 딴 녀석들이 보면 가만두지 않을까봐 몰래 데리고 간 겁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류미르는 아직도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 남자를 취조하는 것 보다 정신을 잃은 동양인을 치료하는게 우선이였기 때문에 류미르를 말렸다. "그만 둬,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저씨, 됐으니까 이거 받고 그만 가 보세요. 이 사람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러면서 그 남자 앞에 50셀짜리 은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남자는 은화를 주워 금액을 확인해 보더니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내가 다시 달라고 할 까봐 두려운 듯 허겁지겁 자신의 허리띠 속으로 쑤셔넣고는 허겁지겁 골목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자, 우리도 가자. 여기서 치유마법을 걸었다간 딴 사람들이 볼 수도 있으니까 여관으로 돌아가서 해야겠어. 내가 이 사람을 데리고 먼저 갈테니까 너희들은 걸어서 여관으로 가서 열쇠를 받고 방으로 오도록 해." 나는 내 할 말만 한 뒤 세이몬과 류미르의 대꾸는 듣지도 않고 여관방으로 공간이동 해버렸다. 번 호 : 16362 / 16382 등록일 : 2001년 01월 30일 21:09 등록자 : LODEMP 조 회 : 27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 (8) 류미르와 세이몬이 여관방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내가 이미 데려온 동양인을 깨끗이 씻기고 치유까지 해준 뒤였다. 그 둘은 조용히 거실로 들어와서는 긴 소파위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동양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 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배역이 바뀐 것 아냐? 보통같으면 내가 저 사람을 돕자고 했을테고 너하고 세이몬은 시큰둥했을텐데..."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먼저 말을 꺼내자 그 뒤를 이어 세이몬까지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나는 안락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궁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세이몬과 류미르를 올려다 보았다. "아니, 아는 사람은 아닌데 궁금한게 있어서..." "헤에, 저 사람은 운이 좋았군." "그러게 말야..." 류미르와 세이몬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이어서 수건과 깨끗한 옷가지들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들은 온천에 갔다 올께." "넌 그 사람 지켜보고 있을거지?" 녀석들은 내가 온천에 같이 가지 않는다는 걸 아예 기정사실화 시켜놓고서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래서 난 녀석들의 뒷통수에 대고 소리쳐야 했다. "야, 나가는 김에 여기 과일샐러드좀 갖다달라고 해라." 그리고 문 닫기 전에 세이몬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알았어~" 그 둘이 나가고 나서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 사람이 누워있는 소파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동양인치고 하얀 얼굴이긴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 비하여서는 약간 노란 피부이기는 했다. 그리고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과 반듯한 이목구비, 각이진 턱이 꽤나 강한 인상을 풍겼다. "헤에, 남자답게 생겼군..." 그런데 아무래도 이 사람이 깨어나려면 좀 시간이 걸릴 듯 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깨어나기만 기다릴 인내심이 없는 나는 깨울까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디 이상한데로 끌려갈 지 모르는 걸 구해줬겠다, 씻겨 줬겠다, 치유까지 해줬는데 약간의 실례는 괜찮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이번에는 어떻게 깨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고민은 얼마가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에 의하여 방해를 받았다. "누구세요?" "룸 서비스입니다." 방 문밖에서 예의바른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제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은쟁반에 유리로 만들어진 그릇을 얹고 서 있었다. "과일 샐러드 시키셨지요?" 나는 문 옆으로 비켜서서 그가 들어오도록 했다. "어디다 놔 드릴까요?" "저 탁자에다 놔 주세요." 그는 내가 가르킨 소파 사이에 있는 낮은 탁자위에 쟁반채로 놓더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뭔가 심오한 눈빛을 던지며 한마디 했다. "또 다른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그의 심오한 눈빛이 뭔지를 알아차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50셀짜리 은화 한닢을 던져주며 말했다. "됐어요. 접시는 내일 아침에 가져가도 돼죠?" "물론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그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은화를 익숙한 솜씨로 탁 잡더니 벌어지는 입을 애써 감추며 허리를 숙였다. 그가 나가자 동양인이 누워있는 소파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고있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은포크를 집어 샐러드를 찍었다. '그냥 흔들어 깨울까? 아니면 물을 약간 끼얹는건... 에이, 그건 좀 심했다. 그냥 흔들지 뭐. 그래도 안 일어나면 그때 물을...' 그러나 내가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고민은 내 앞에 누워있는 동양인이 약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뜨면서 필요가 없게 되어버렸다. '쳇, 괜히 고민했잖아?' 그가 촛점을 맞추려고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보며 애꿏은 샐러드만 콕콕 찔러댔다. 촛점이 맞춰져 그에게 천장이 보였던 모양인지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떠지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막 포크를 입에 넣고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헤에, 저 검은 눈동자를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나는 약간 감동을 느끼며 그의 눈동자를 뚤어져라 바라보았다. 껌뻑, 껌뻑~ 깜빡, 깜빡~ 우린 서로를 마주보며 눈만 깜빡대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 하며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약간 어색한 발음...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를 하면 저런 발음일까... "내 방." 나의 짤막한 대답에 그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어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빤히 그를 바라보는 내 눈길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어두워진 창문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앗, 시간이 벌써..." 그리고는 재빨리 창문으로 달려가던 그는 갑자기 멈칫 하더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 봤다. 그의 옷은 좀 심하게 찟겨져 있어 내가 여관에서 제공하는 목욕 가운으로 갈아입혀 놨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몸을 찬찬히 살펴 보더니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제가 도데체 얼마나 여기 있었나요? 혹시, 혹시 며칠동안 이 곳에 있었던건..." '헤에, 동양인도 얼굴이 하얘질 수 있구나...' 그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나는 그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간략하게 해줬다. "한 시간도 안됐어." "한... 시간?" 그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천천히 혈색이 돌아왔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난 꽤 많이 다쳤을텐데... 그런데 겨우 한 시간이라니..." "맞아, 꽤 많이 다쳤더군... 얼굴은 멍에다 팅팅 부어서 알아볼 수도 없었고 오른 손은 꺽인데다 옆구리도 장난이 아니던데?" 나의 친절한 설명에 그는 어벙벙해졌다. "하, 하, 하..." 그러더니 다시 설명을 구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기, 그러면..." "아, 누가 당신을 치료해줬냐고? 내가 했어." "아, 그러십니까? 이거 참..." "고마워할 것 없어. 당신한테 궁금한 게 있어서 구해줬을 뿐이니까." 그의 고마워하던 얼굴이 돌연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그런 그에게 싱긋 웃어준 나는 과일 샐러드의 마지막 조각을 입 안에 넣고 그 옆에 얌전히 놓여있는 대나무 상자를 집어 올렸다. 그 상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커지는 걸 재미있게 바라보며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든 접채를 꺼냈다. "이걸 알고 있는가 싶어서." "그걸 어디서..." "오늘 낮에 길거리에서 어떤 노점상이 팔더군. 연이랑 등갓이랑 부채를..."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인하여 붉어졌다. 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건 저희겁니다." 그런 그를향해 나는 차갑게 웃어주며 물었다. "어떻게 증명할래?"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부채에 대하여 술술 이야기 했다. "그것은 대나무로 살을 만들고 창호지로 면을 붙여 만든 것으로 창호지는 이쪽 지방에서는 전혀 볼수 없는 종이로 제가 살고 있던 동방 지역에서 만든 겁니다. 그리고..."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이 부채를 나에게 판 상인도 잘 알고 있더군. 화선지와 창호지에 대하여 말야." 그러자 그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그런 그를향해 나는 슬쩍 웃어주고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창호지와 화선지란 말의 발음은 엉망이더군. 연도 공중에 띄우는 것이 아니라 벽에 거는 장식품이라고 설명하고..."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다시 커졌다. "어떻게 그런걸..."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나는 그에게 접채를 쫘악 펴 보였다. 그리고는 그림과 글이 쓰여있는 면을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돌리고는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약간 들었다. "이거 누가 만들었지?" "제가 만들었습니다." 나는 왠지모를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여기 글을 읽어봐." "擧頭望山月 (거두망산월)이요, 低頭思故鄕 (저두사고향)이라. -이백-" "이쪽말로 풀어 말하면?" "머리 들어 산 위의 달을 바라보다가, 머리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과연 그 시에 어울리게 멋드러지게 그려진 대나무 위쪽에 아주 자그만 보름달이 떠 있었다. "고향을 생각하며 쓴 시군." 내가 만족스런 웃음을 짖자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저... 그런데..." "응? 뭐?" "저... 실례지만 나이가..." 나는 속에서부터 웃음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무리 적게 잡아봐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것에 비하여 나는 많이 봐줘야 17, 8세 였던 것이다. "풋, 왜? 내가 반말해서 기분이 나쁜가?" "아니... 그게..." "그럼 기꺼이 존칭을 써 드리지요."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의 당황한 얼굴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이 곳에 혼자 오셨나요?" 그러자 그가 앗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창쪽으로 향했다. "일행이 있습니다. 여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어쩌다 그런 꼴을 당했지요?" 그러자 그의 얼굴이 다시 내쪽으로 돌아왔고 돌아온 그의 얼굴은 우울해 보였다. "여관에서 이곳 사람을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무척 친절하고 이 도시에 대하여 이것 저것 가르쳐 주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만드는 물건에도 흥미를 보여 우리가 물건들을 팔러 왔다고 하자 잘 팔릴 것 같다며 자신도 상인이니 같이 동업을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사람이랑 물건을 팔러 나갔는데 그 사람이 당신을 버리고 물건만 가지고 튀었군요?" "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안내한다며 지름길로 가자고 하더군요. 상인들이 많아서 자리싸움이 치열하다나요? 그래서 그 사람을 따라 지저분하고 어두운 골목을 가고 있는데 갑자스레 그 사람이 일격을 가하더군요. 불시의 공격이라 고스란히 맞아 뒤로 나자빠진 사이 그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가버렸어요. 그 뒤에 그 사람을 찾으러 골목을 헤매다가 좋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 "흐음, 어떻게 된 건지 알았어요. 그럼 당신 일행은 어디 있나요?" "이 도시 변두리에 있는 새 바람 이란 여관에 있습니다." "좋아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신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지금 같이 가볼까요?" "어딜 간다고?" 방문이 벌컥 열리며 류미르가 먼저 들어고 그 뒤로 볼이 퉁퉁 부은 세이몬이 들어왔다. "이 사람 일행이 묶고 있다는 여관.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보자 류미르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네가 무슨 짓을 벌일 것 같아서 빨리 왔지." 그러나 뒤에 서 있던 세이몬이 볼맨 음성으로 말했다. "웃기고 있네... 뜨거워서 탕에도 못 들어간 주제에... 못 들어가면 자기만 들어가지 말 것이지 왜 나까지 못 들어가게 하는 거야?" 류미르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그의 고개가 푹 숙여졌고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간 나는 쿡쿡 웃었다. "잘 됐네. 마침 너희들 빨리 오라고 할 참이었거든. 세이몬,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나중에 또 가면 돼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어디 좀 가자." "이 시간에? 어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이몬에게 나는 상큼하게 웃어줬다. "도시 변두리에 있다는 새바람 여관에." 번 호 : 16275 / 16293 등록일 : 2001년 02월 01일 22:16 등록자 : LODEMP 조 회 : 33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6화 쓸모 없는 인간(?) (9) 류미르와 세이몬은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자신만만한 웃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아린, 너 제정신이야?" 결국 세이몬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그 일을 당하고도 또 밤에 나가려고 하냐?" "쯧쯧쯧, 어리석긴... 어제는 우리가 구경을 가려고 한 거고, 오늘은 목표가 정해진 이상 뭐하러 귀찮게쓰리 물어물어 힘들게 거길 찾아가? 게다가 도시 변두리라면 꽤 멀텐데. 이 여관에 있을 마차를 타고 갈꺼야." 그러자 세이몬과 류미르의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커졌다. "마차? 여관에 마차도 있어?" "있을걸? 그리고 없어도 자기네가 알아서 대령해줄꺼야." 왜, 귀여운 여인이란 영화를 보면 마지막쯔음에 가서 여 주인공이 호텔 리무진을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이 정도 고급스런 여관이라면 그와 비슷하게 마차 한대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짐작대로 이 여관에는 손님들을 위한 고급 마차를, 그것도 여러대 보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도시 변두리의 새바람 여관을 찾아갈 수 있었다. "아, 깜빡했는데... 당신 이름이 뭐죠?"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어두워진 바깥 풍경을 아무생각없이 내다보고 있던 나는 이 사람 이름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의 이 질문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아직까지 자기 소개도 안 했어?" "그러게..." "뭐, 그럴수도 있는거지. 당신, 이름이 뭐예요?" 자신도 미처 생각 못하고 있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던 그 동양인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류진우라고 합니다." 그러자 세이몬과 류미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유찌이누?" "아냐, 류찌누 라고 하는 것 같은데? 되게 희안한 이름이네..." 그러자 자신을 류진우라고 밝힌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제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 하더군요." 세이몬과 류미르는 그의 이름을 익히기 위해서인지 계속 입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 발음이 그 발음이었다. "됐어. 하지도 못할 발음을 뭐하러 계속 해? 그나저나 나는 아힌, 이쪽 푸른 머리는 류미르, 그리고 검은 머리는 세이몬이예요." "아,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의 소개에 그들은 마차 안에서 어색하게 고개만 까딱여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고 있는 사이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더니 곧 멈추면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마부의 말에 마차에서 내리니 과연 낡은 나무현관에 새바람이라고 멋드러지게 쓰여진 오래되어 보이는 여관이 우리 앞에 버티고 있었다. 류진우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급한 발걸음으로 여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와 세이몬도 뒤를 따랐고 곧 이어 류미르가 마부에게 기다리라고 하면서 뛰어 들어왔다. 류진우는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방들이 있는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어느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곧이어 그 안에서는 시끌벅적하게 그를 환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들어간 방의 문간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니 그와 같은 동양인 사람들 대여섯명이 그를 얼싸안은 채로 방방 뛰고 있었다. 빠른 목소리로,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대화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함께 기쁨이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얼마후 진정한 그 사람들 중 류진우보다 약간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남자가 우리를 바라보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자 그 모습을 본 류진우가 그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했다. 곧이어 그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고 우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진우의 형입니다. 제 동생을 도와주셔서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군요." 류진우보다도 더욱 더 어색하고 서투른 이쪽 말이었다. 그의 말에 류미르가 앞서 그의 손을 잡으며 같이 미소지었다. "별말씀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류미르는 그들이 이쪽 말에 서투르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말했다. "이쪽은 제 동생들인 아힌과 세이몬입니다." "이럴게 아니라, 여긴 너무 좁으니 식당으로 내려가실까요? 제가 맥주라도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식당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좀더 상세하게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류진우와 그의 형 류민우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수하라고 했다. 저 머나먼 동양의 상인 집안인 두 형제는 집안 사정으로 인하여 이쪽으로 진출해보자 이곳의 문화와 자신들이 내 놓는 물건들의 반응을 살피고자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니 막막하던 차에 진우를 속이고 달아난 그 상인을 만나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물건을 팔러 나간 진우가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설명의 뒤를 이어 진우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설명하고 나자 민우를 비롯한 그들의 수하들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류미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우선은 그 상인을 찾아야죠. 그래서 물건을 되찾고 진우가 당한 일을 복수할겁니다. 그 다음 일은 그 뒤에가서 생각하죠." 민우의 격양된 어조를 가만히 듣고있던 나는 그의 화를 풀겸 분위기를 띄울겸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물건들 꽤나 인기가 좋더군요. 무엇보다 이 도시가 관광도시이다보니 기념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다, 그 물건들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었으니까요. 잘만하면 장사는 꽤 잘 되겠던데요?" 그러자 그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그렇게 반응이 좋았습니까?" "그럼요. 저도 거기서 부채를 하나 샀는걸요." 내가 품 속에 넣어두었던 접채를 꺼내서 보여주자 그들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그러자 내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던 류미르가 불쑥 말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내일 그 상인을 찾는 걸 도와드리죠." 민우는 너무나 기쁜 표정으로 류미르의 손을 덥썩 부여잡았다. "정말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러신다면 저희야 더 없이 고마울뿐이죠." 류미르는 슬쩍 슬쩍 나와 세이몬의 눈치를 살피며 허락을 구했다. "어때, 너희들은?" "난 찬성. 감히 날 속인 놈을 그냥 둘 순 없지." 내가 오른손을 살짝 들어보이며 찬성하자 세이몬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뭘 속였는데?" "뭘 속이긴? 나한테 훔친 물건을 팔았잖아. 그거면 충분히 날 속인거야." 그러자 류미르가 기대에 찬 눈으로 세이몬을 바라보았다. "넌?" 세이몬은 류미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지 뭐, 마땅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다음 날 그 상인을 찾으러 우리 모두가 길거리로 나섰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 상인을 찾을 수 없었다. 전날 연과 등갓을 팔던 장소로 가보았지만 그 곳에는 땅에 펼쳐진 넓다란 천 위에 색색의 실로 만든 장식품을 파는 다른 상인이 있었고 우리가 찾던 상인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물건을 팔 수도 있었기에 우리는 흩어져서 그를 찾아보았다. 나중에는 류미르가 실프들을 불러내어 찾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연과 등갓을 파는 상인은 보이지 않았다. 빨간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을 무렵 시내 중심에 있는 공원에 모인 우리들은 허탈한 심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못찾았군요." "아무래도 이 도시를 떠난 모양입니다. 아니면 도시 어둠 깊숙이 몸을 숨겼을지도..." 진우와 민우가 중얼거리듯 우리에게 말을 건네자 류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민우의 말에 동의했다. "어쩌면 이 도시의 뒷골목 길드에 가입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그럼 더욱 찾기는 힘들거야."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나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것 뿐이 아니지... 찾았다 해도 복수는 못했을걸. 그랬다간 당장에 보복이 시작될 테니, 이 도시에 있지도 못할거야." "게다가 이제부터라도 걱정이야. 물건들을 팔때 녀석들이 가만 있을지도..." 세이몬도 걱정스럽게 덧붙이자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자 진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결연하게 외쳤다. "괜찮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이 곳에 올때 짐작하고 있던 일이니까요. 이 정도에 쓰러진다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을겁니다." 민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우리가 이 정도에서 무너진다면 류씨 가문의 자식들이 아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왠지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해짐을 느끼며 기분이 좋았다. "뭐, 새로운 도시에서 개척하려면 합작하는 방법이 안전하겠지?" 나 혼자 중얼거리자 모두 나를 돌아보았다. "합작?" 류미르가 대표로 포인트를 집어 묻자 민우와 진우가 힘 빠진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우린 이 곳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더구나 어제같은 일이 또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나는 자신만만하게 피식 웃을뿐이었다. 그러자 세이몬이 눈치챘다는 듯 물었다. "아, 알았다. 너 너희 아빠한테 부탁하려는 거지?" "전체를 다 부탁하는 건 아냐. 난 단지 이곳 지부장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려 할 뿐이야. 그리고 그 뒷일은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겠죠. 그 사람에게 당신들과 합작하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건 당신들 몫입니다. 제 말 뜻을 아시겠죠?" 내가 민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그가 정중하게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저희에게 기회를 주셔서..." 그 길로 나는 그들을 이끌고 이 도시에 있는 아펜젤러가 지부를 찾아갔다. 그 도시에서도 중심가의 커다랗고 호화스러운 건물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당황한 진우네 사람들과 류미르, 세이몬의 눈길을 뒤로한채 경호원들을 잔뜩 끌고나온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거만하게 한 마디 던졌다. "난 아시리안 시스파슈타인이다. 이곳 지부장을 만나러 왔으니 나오라고 하도록." 그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내 당당한 모습이 맘에 걸렸는지 뒤에있는 사람 하나를 어디론가 보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서 은테 안경을 쓴 무척 깐깐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날카로운 눈길로 나를 뚤어져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본점으로 부터 연락은 받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공손한 어조로 물어오자 주위 사람들이 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와 나는 그들의 표정을 싸악 무시한 채 담담하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과연 이 곳 지부장으로 있을만하군." "칭찬 감사합니다. 당신도 역시 그분의 따님이시군요." "흥, 그런 말 하나도 안 기뻐." 나는 몸을 획 돌려 내 뒤에 어벙벙한 얼굴로 서 있는 류민우를 끌었다. "이 사람이랑 면담해봐. 시간은 당신 맘이야. 그럼 난 간다." "저런, 차라도 한잔 하시지 않고..." "별루..." 나는 그렇게 하날 도시 지부장 앞에 어벙벙한 류민우를 데려다 놓고 그 즉시 몸을 돌렸다.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당신도 잘 있어." 세이몬과 류미르만 데리고 건물을 나오자 류미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을까? 그 사람 무지 깐깐하게 보이던데." "그 정도 사람도 설득하지 못한다면 성공하지 못하지. 그나저나 과연 주르단이야. 벌써 각 지점에 연락을 해놨군."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세이몬이 아는체 했다. "아아, 그 주르단 아펜젤러? 너한테 끔찍히 잘 해주던?" "응, 그 인간이 만약 이야기를 안해놨었다면 아빠를 호출할 생각이었어." 농담조로 말한 내 말에담긴 속 뜻을 눈치챘는지 류미르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어련 하겠냐? 호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집어 놨겠지..." "호호호, 잘 아네." 그런데 그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세이몬이 뜬금 없이 중얼거렸다. "흐음... 세상에 쓸모 없는 인간은 없구나..." 그의 전혀 상황에 맞지 않은 말에 류미르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세이몬?" "아니, 있지 그저께 너가 자신의 딸을 팔던 남자 있지? 그 사람이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했었잖아? 그리고 아린은 자신의 아버지를 무지 미워했었고." "음... 미워한건 아니다. 단지 그에게 화가 났고 그의 도움은 받기 싫었지." "어쨌든간... 그런데말야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까 그 찌이누와 미누를 만나지도 못했을 거고, 또 도와주지도 못했을 것 아냐. 아, 글고보니 그 못된 상인이 없었더라면 아린이 아펜젤러가에 도움을 청할 일도 없었겠구나." 그러자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 못된 상인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우리가 그들을 만날 일도 없었겠지. 설사 만났더라 하더라도 이렇게 도움을 줄 일은 없었을거야." "그렇게 따진다면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겠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세이몬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키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바로 그거야. 그게 내가 하고싶은 말이었어." "하, 하, 하,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런가보지." "그렇다니까." "그래, 그렇다고 해라." "그래, 그래. 세이몬 네 말대로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류미르의 결론을 짓는 듯한 말에 의기양양해져 어깨와 목이 뻣뻣해진 세이몬을 보고 류미르와 나는 서로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번 호 : 16326 / 16332 등록일 : 2001년 02월 04일 22:40 등록자 : LODEMP 조 회 : 16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되다. (1)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 류진우, 민우 형제를 아펜젤러 지부에 데려다주고 온 우리들은 그 다음날로 하날 도시를 뜨기로 했다. 며칠 질리도록 온천에 들어가본 세이몬과 나는 슬슬 온천욕에 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류미르는 여전히 온천에 몸을 담그지 못하고 바깥에서 식힌 물로 몸을 씻을 뿐이어서 류미르를 온천안으로 집어 넣으려는 노력도 시들해진 우리는 류진우, 민우 형제와 헤어진 것을 계기로 이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그럼 이제 어디가게?" 떠나기에 앞서 아침식사를 하기에 식탁앞에 앉은 세이몬이 떠나자는 의견에 찬성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글쎄... 요즘은 통 보석 수집에도 흥미가 사라져 버려서..." 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세계 100대 보물' 책을 뒤적거리자 세계 지도를 살펴보고 있던 류미르가 고개를 들어 세이몬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우리 소르드 왕국이나 테아칸 왕국에 한 번 가볼까?" "응?" "뭐?" "소르드 왕국이나 테아칸 왕국에 한 번 가보자고. 생각해 보니까 우리 여러 나라를 여행해 봤는데 그 두 나라만 안 가본 것 같아서 말야. 지금 마땅히 갈 곳도 없잖아. 그러니 한 번 가보자고." "헤에, 하지만 우리 켈튼 연합국도 다 가보지 못했잖아?" "으이구 세이몬, 꼭 그렇게 일일이 따져야 겠어? 그리도 다 가보지는 못했더라도 큰 국가는 가봤잖아. 게다가 그 나라를 가는 동안 다른 나라도 거쳤고." 세이몬은 류미르말에 꼬투리 잡다가 곧바로 이어진 류미르의 반격에 한 방 먹고 풀이 죽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그, 그런가? 그런데 그 테아칸 왕국은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것 같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싱긋 웃어주면서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내가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잖아. 그것 때문에 켈튼 연합국에 있을때 경매장에서 한바탕 소란도 부렸었고..." 거기까지 설명하자 그제야 세이몬이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아, 맞아. 그랬었지..." "그리고 그 테아칸 왕국은 드워프가 있는걸로 유명하지. 그 모든 공예품과 건축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땅의 종족말야. 그 나라는 산맥이 많아서그런지 광산이 많거든." 나의 뒤이은 설명에 세이몬이 흥미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래? 그 드워프라는 종족이랑 광산이란 걸 한번 보고싶다." 그러나 류미르의 표정은 세이몬과는 정 반대였다. "헉, 그 나라에 드워프들이 많아?" "잉? 류미르, 어째 네 표정이 뭐 씹은 표정이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세이몬이 히죽 히죽 웃었다. "혹시 드워프 여자를 따라다니다 차인 것 아냐?" "설마..." 세이몬의 농담에 허허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류미르의 씹어 뱉는듯한 말에 웃음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흥, 그런 보물을 좋아하는 녀석들을 뭐하러..." 류미르가 더 험악한 표정으로 빵에다 포크를 거칠게 찍어대자 나와 세이몬은 의아해졌다. "왜그래, 류미르?" "맞아. 왜 죄없는 빵은 못살게 굴어?" "내 맘이야." 류미르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자신이 찍어대는 빵을 들어 거칠게 한입 물었다. "왜그러는 거야? 뭐가 맘에 안들어? 정말 드워프 여자한테 차이기라도 한 거야?" 나의 계속되는 물음에 류미르는 빵을 씹어대면서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그런 가당찮은 소리를... 그런 녀석들 따위 이쪽에서 사절이다." 그의 격렬한 반응에 세이몬과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야? 정말 드워프랑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보네?" "무슨 소리. 그런 녀석들과는 아무런 일도 없어. 아니, 우리 엘프들은 그 녀석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 녀석들은 숲 속에 살면서 숲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 뭐든 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뜯어 고치고 부수고 만들지. 자연 그대로 보존하는 법이 없다니까. 그 녀석들이 사는 곳에는 숲이 나마나질 않아. 그러면서 그걸로는 성이 안차는지 땅을 얼마나 파대는지 알아? 녀석들이 사는 곳 지하는 완전 미로야. 그걸 또 자랑삼아 이야기하지." 그의 끝이 없을 험담에 세이몬과 나는 어리벙벙해졌다. "류미르, 숲을 파괴하는 거면 인간도 마찬가지일텐데?" 세이몬의 의아한 질문에 류미르의 입이 순간적으로 딱 닫혔다. 그는 우물우물 하더니 결국 내뱉듯이 말했다. "어쨌든, 드워프랑 우리 엘프랑은 사이가 안 좋단 말야." 그러자 세이몬의 입꼬리가 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아린, 우리 테아칸 왕국에 놀러가자. 거긴 구경할게 많을 것 같아." 우거지상이 되어 세이몬을 노려보는 류미르의 표정과 그 눈길에 뻔뻔스런 미소를 띄고 있는 세이몬을 바라보며 난 슬그머니 세이몬 편을 들어주었다. "그럴까? 하긴 그 곳은 드워프가 많이 살고있는 나라여서 그런지 여러가지 공예품이나 보석, 장식품으로 유명하지. 나도 한번 가 보고싶던 나라이기도 했어." "그럼 가자. 어때, 류미르? 너도 처음에 테아칸 왕국이나 소르드 왕국에 한번 가보자고 했으니까 불만 없지?" 세이몬이 생글생글 웃으며 류미르를 보자 류미르는 뭐 씹은 표정으로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아마 처음에 테아칸 왕국에 드워프들이 많이 살고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세이몬은 류미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씨익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린, 어쩔까?" 나도 세이몬에게 마주 웃어주며 짖궃게 대답했다. "무언은 긍정. 그럼 우리 테아칸 왕국에 가자." 세이몬과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류미르를 바라봤고 류미르는 계속 쳇, 쳇 거리며 빵만 잘근 잘근 씹어댔다. ============================================================== 죄송함다. 오늘은 양이 좀 적습니다. ^^;; 번 호 : 16404 / 16414 등록일 : 2001년 02월 05일 23:20 등록자 : LODEMP 조 회 : 12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2)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에스라 왕국에서 테아칸 왕국까지 가려면 바다를 건너 가야 했다. 그러나 전에 드래곤 로드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위하여 에스라 왕국에서 테아칸 왕국까지 가 본 적이 있는 나는 배를 타고 아르카스해를 건너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 없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이몬과 류미르에게 배를 타고 건너는 것 보다는 차라리 소르드국을 지나가는 육로로 통해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물론 소르드국과 테아칸 왕국과는 바이투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산맥을 넘는 것이야 정 어려우면 날아서 넘으면 되는 거였기에 별로 문제거리가 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류미르와 세이몬은 내 제안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유인 즉슨 배를 한번 타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것이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한 것인지 아무리 설명을 해봐도 너는 많이 타봐서 그러는 것이 아니냐는 핀잔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녀석들에게 배를 타는 것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에스라 왕국의 국경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아브록강을 왕복하는 배를 타고 바다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것도 배를 타는 것이었고 한 일주일은 넘게 타고 가야 항구에 도착하기에 그 동안 녀석들이 배를 타는일에 질릴것이라 예상하고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브록강이 에스라 왕국과 소르드 왕국의 국경이란 말을 듣자마자 내가 녀석들을 꼬셔서 육로로 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강력하게 반대했다. 아무리 녀석들에게 배를 더 태워주려고 한다 해도 녀석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에스라 왕국에서 가장 큰 패링던 항구까지 말을 타고 가기로 했다. 녀석들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끝이 보이지 않는 넓디 넓은 바다와 소금기 어린 바람에 무척 신기해했다. 게다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크고 작은 배들을 둘러보며 더욱 더 즐거워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쯧쯧, 그렇게 좋아하는게 며칠이나 갈지 어디 두고보자." 류미르나 세이몬이나 어린애 같이 비린내나고 지저분한 부둣가를 걸어가며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즐거워 하는 녀석들을 끌고 예전에 할아버지가 이 곳에서 배를 구하기 위해 하셨던 대로 항구 관리소를 찾아갔다. 그 곳은 말 그대로 이 커다란 패링던 항구를 관리하는 곳이었기에 그에 걸맞게 건물도 무척 컸다. 게다가 우리처럼 여객선을 찾으러 온 사람들을 맞이하는 관리소 직원들도 10명씩이나 되었지만 그 사람들로 부족하여 우리는 이 항구에 있는 배에 관한 정보를 찾기 위하여 늘어선 사람들의 뒤에 서서 거의 2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리 차례가 되어 30대 정도로 되어보이는 통통하고 인상좋은 여성이 우리를 맞았다. "테아칸 왕국으로 가는 여객선을 찾는데요."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책상위의 여러 서류더미중 한 뭉치를 꺼내어 뒤적이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배는 많아요. 언제 출발하시게요?"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게 있을까요?" "어디보자....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여객선은 2개군요. 둘 다 ..." 그녀가 말을하고 있는데 세이몬이 말 중간에 끼어들어 나에게 물었다. "꼭 내일 아침걸 타야할 필요 있어? 오늘거 타면 안될까?" 류미르도 뒤에서 거들었다. "그래 그래, 어차피 배를 타는거니 따로 준비할 건 없잖아? 저기요, 혹시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여객선은 없나요?" 그러자 여인은 다시 서류를 몇 장 넘기며 살펴보더니 말했다. "음... 여기 있군요.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배가 하나 있어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뒤 우리를 어쩔거냐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혹시 배 타는데 준비할 게 많아? 그렇지 않으면 그냥 오늘 저녁이라도 출발하지?" "맞아 맞아. 빨리 가자고." 세이몬과 류미르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나 혼자 내일 출발하는 배를 타자고 우길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체념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 너그들 맘대로 해라."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여인을 바라봤고 여인도 그들에게 마주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배는 빅토리아 호라고 제 37 부두에 있어요. 수수료는 5셀 되겠습니다." 류미르는 그녀의 말에 제깍 자신의 주머니에서 5셀 짜리 동전을 꺼내 기분좋게 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제 37 부두는 이 건물을 나가셔서 7번째 줄의 3번째 칸이예요." "예, 고맙습니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한숨만 푹푹 쉬고있는 나를 끌고 건물을 나왔다. 바다를 왕래하는 배들은 무척 큰 배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항구에 들어올 수 있는 근해를 왕래하는 작은 배들을 빼고는 큰 배들은 항구에서 좀 떨어진 깊은 바다에 닷을 내리고 작은 보트로 항구에 들어온다. 부두는 편편한 돌들이 일직선 상으로 쫘악 깔려 있는데서 어느정도의 간격에 따라 나무로 만들어진 부둣가가 평행으로 바다를 향해 주욱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로 만들어진 부두에는 일정한 간격의 자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그 곳에는 각각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그 앞 말뚝에는 번호들이 쓰여져 있었다. 우리들은 관리소 여직원이 가르쳐준 대로 7번재 줄의 3번째 칸을 찾아가자 그 곳에는 한 20명 정도 탈 수 있는 보트가 2개 정박해 있었고, 각각의 배에는 선원들로 보이는 대여섯명의 사람들과 손님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두개의 보트중 하나 근처에 다가가 그 곳에 타고있는 선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빅토리아 호로 가는 보트입니까?" 류미르가 정중하게 말을 걸자 그 보트에 있던 선원중 나이가 많아보이는 사람이 류미르를 힐끗 바라보더니 귀찮다는 듯 미적미적 일어나 배에서 내려 류미르 앞에 섰다. "그런데, 무슨 일이슈?" "빅토리아 호가 오늘 저녁 테아칸 왕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배에 타려고 하는데요?" "아아, 손님이신가? 오늘 저녁에 떠나는 건 맞소. 그러니 배에 오르려면 지금 이 보트를 타던가 아니면 조금 있다가 다시 오든가 하쇼. 지금 배로 가는 길이니까. 지금 타겠소?" 그러자 류미르가 나를 바라보았기에 내가 그 선원에게 대답해야 했다. "아뇨. 볼 일이 있으니까 잠시 후에 타겠습니다. 언제까지 오면 될까요?" "흐음, 배가 떠나려면 약 2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넉넉잡아 한시간 뒤에 오시오. 돈은 배에 올라서 내니까 준비하고." "그러죠. 감사합니다." 나는 그 선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 세이몬과 류미르를 데리고 부둣가를 떠났다. "아린, 무슨 볼일 있어?" 세이몬이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자 나는 그에게 대꾸하기 전에 길가에 서 있던 과일파는 사람에게 다가가 마시장이 어디 있는 지 물어보았다. "마시장은 왜?" 류미르까지 궁금하게 여기자 나는 상인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말을 팔려고. 배에 말을 태울수 있겠지만 그러면 말에게 별로 안 좋거든. 차라리 이 항구에서 말을 팔고 목적지 항구에서 말을 사는편이 훨씬 나." 그러나 급하게 말을 팔기때문에 제 값을 받지 못하는 것이 흠이긴 했다. 우리는 별 다른 볼 일은 없었기 때문에 말을 팔고나서 곧바로 부둣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까와는 다른 손님들을 태운 선원이 우리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보트에 태워주었다. 세이몬과 류미르는 흥분된 얼굴로 보트의 한 구석에 앉아 배의 흔들림을 감상하며 둘이 떠들어댔다. 그런 녀석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피식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그런 모습들이 얼마나 갈지 생각해 보았다. 내 생각은 별 반 틀리지 않았다. 난 녀석들의 편의를 위하여 빅토리아호에서 남아있는 선실 중 제일 좋은 일등실로 잡았다. 이 곳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경우 서비스를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 녀석들은 저녁에 배가 닻을 올리고 출발하자마자 두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얼굴들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뱃전에서 바다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속에 든것을 열심히 토해대는 녀석들 사이에 서서 두 녀석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우에에엑~~~" "우엑, 우엑, 우에엑~" 양쪽에서 좋지 못한 음향을 사운드로 들으며 열심히 팔 운동을 하고 있으려니까 저쪽에서 나이가 지긋한 한 선원이 다가왔다. "쯧쯧, 배를 처음 타보시는 모양이군요?" 그는 오랫동안 배를 탄 사람인지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피부는 매우 거칠었다. 그의 굵고 투박한 손이 류미르쪽으로 오더니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처음 며칠간만 고생하시면 될겁니다. 젊은 분들이시니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많은 세월의 연륜이 담긴 그의 부드러운 어조에 류미르는 겨우 고개를 들고 그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냈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고개를 뱃전으로 내밀어야만 했다. 녀석들은 좀 더 토해대더니 이젠 나올 게 없는지 우엑 우엑 거리기는 했지만 더 이상 토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하도 토해서 노래진 얼굴들로 갑판 위에 철푸덕 엎어졌다. "젠장, 내 이럴줄 알았다니까..." 나는 투덜투덜 거리며 류미르와 세이몬의 다리 한 쪽씩 각각 붙들고 녀석들을 끌고가려 하자 그때까지 류미르의 옆에 서 있던 선원이 나를 제지하고는 자신이 류미르를 업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내고는 얼른 세이몬을 들쳐 업고 앞장서서 그에게 우리가 묶고있는 선실을 안내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녀석들을 선실에 있는 침대에 눕히자 마자 나는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손님께선 전에 배를 타보신 모양이군요?" "예. 예전에 몇번..." "하하하, 그나마 다행이군요. 일행분들이 깨어나면 선원에게 부탁해서 묽은 스프와 과일 좀 먹게 하세요. 물을 많이 마시게 하시구요."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우리의 선실을 나섰다. 나는 그가 나가자마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지쳐 잠들어있는 녀석들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번 호 : 16427 / 16498 등록일 : 2001년 02월 06일 21:42 등록자 : LODEMP 조 회 : 68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 (3)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자 처음에는 물만 마시던 녀석들도 서서히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멀미로 고생하는 것도 서서히 줄었다. 덕분에 그 동안 배를 타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며 다시 흥분을 느끼던 녀석들은 신이 나서 갑판위로 뛰어 나갔다가 얼마되지 않아 시무룩하게 선실로 돌아왔다. 할 일이 없어 선실에서 책을 읽고있던 나는 녀석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의아해져서 돌아봤다. "표정들이 왜그래? 아까는 신이나서 나가더니만..." "아니... 그게.... 이것 저것 만지다가 선원들한테 혼났어." 세이몬이 풀 죽은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류미르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까 세이몬이 돗대 위에 올라간다고 했다가 선원한테 얼마나 혼났는줄이나 알아? 게다가 입은 또 얼마나 거칠던지..." 그러자 시무룩해 있던 세이몬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았다. "나만 그랬냐? 너도 닷을 내리는 사슬을 만지다가 혼났으면서." "흥, 그래도 난 너보다 덜 혼났다." "뭐? 하, 하지만 넌 두번이나 혼났잖아." "넌 뭐 안그랬어?" 또 싸우기 시작하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나는 말릴 기분도 나지 않아 '탁' 소리나게 책을 덮고 의자에서 일어나 선실을 나가버렸다. 당황해서 나를 부르는 녀석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어? 아린? 어디가?" "너때문이잖아, 세이몬!!" "왜 나때문이야?" ......... '쯧, 시끄러운 녀석들...' 갑판으로 올라오자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그 바다와 같은 색을 하고있는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오늘따라 구름도 한 점 없네?" 뭍과 멀리 떨어져있어 바닷가에서 흔히 보던 갈매기 한 마리 없었고 게다가 가끔 볼 수 있었던, 물 위에 몸을 내밀고 있는 고래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쳇, 지루해라...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차라리 소르드 왕국을 통해서 산맥을 지나가면 이렇게 심심하지는 않잖아. 짜식들.. 내 말을 믿지 않고 어디 너희들이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두고 보겠어." 그러나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심심하다... 심심해.... 심심하네.... 심심 하구나.... 심심해라...." 갑판 위에서 어느정도 시간을 때우다가 선실로 돌아오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세이몬이 침대 위에 엎드려 턱을 괴고 계속 중얼거리는 모습이었다. "쯧쯧,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세이몬의 측은하기까지 한 모습에 안됐다는 듯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어주자 이번에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세계 지리서를 펴 들고 있는 류미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리서라는 것이 재미로 보는 것도 아니고 교양 서적도 아닌데다 필요할때마다 내가 가끔 보았지 류미르는 손도 대보지 않은 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인 양 열심히 들여다보는 류미르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류미르, 그거 재밌냐?" 류미르 바로 앞 의자에 앉으면서 말하자 류미르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아아, 볼만 해." 그러나 한시간이 지나도록 류미르는 한 페이지만 계속 들여다 보고 앉아 있었다. "아린, 나 심심해. 류미르, 넌 심심하지 않냐?" 세이몬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류미르가 즉각 대꾸했다. "어쩌라고?" "우리 놀자. 뭘 하고 놀든지 제발 놀자. 나 너무 심심해 죽겠어." 그러자 류미르가 들여다보고 있던 지리서를 탁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놀 거리가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었겠냐?" "히잉~~ 아리이이인~~?" 세이몬이 나를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보고있던 마법서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냉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시끄러.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배 타면 무지무지 지루하다고. 그런데 내 말을 안 들은건 너희들이야. 그러니 알아서 놀앗!" 나는 배를 타면 얼마나 지루할 지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비하여 미리미리 책 몇권을 준비해놓았던 것이다. 물론 녀석들 몰래... 그리고 정 지루하면 미리 알아둔 뭍에 공간이동해서 몇시간은 때우다 올 수도 있었다. 이것도 녀석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러니 지루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건 녀석들 뿐이었다. 나의 냉정한 대답에 세이몬은 풀이 죽었는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녀석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하여 취한 행동은 잠이었다. 밤 낮으로 먹는 시간과 잠깐 몸을 풀기 위하여 갑판을 산책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녀석들은 계속 잤다. 그리고 정 잠이오지 않으면 침대에서 뒹굴뒹굴 거렸고 그래도 심심하면 아예 나에게 마법을 걸어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녀석들은 항상 잠에 취해서 멍한 상태로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그렇게 지루한 시간들을 겨우 겨우 보내던 녀석들이 테아칸 왕국의 항구인 어소시에이츠 항구에 도착한다는 소리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마치 죽었다가 살아난 친구를 만난 양 둘이 껴안고 비비고 방방 뛰고 뒹굴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배가 닷을 내리고 보트를 내려 우리를 항구로 데려다 줄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저 멀리 뭍이 보이자마자 얼른 짐을 챙겨서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그것 봐. 내 말 안들으니까 그런 거잖아. 내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빵이 생기고 안 들으면 고생만 한다는 진리를 이제는 깨달았겠지?" 항구 근처에 있는 큰 식당에서 나는 두 녀석을 내 앞에 앉혀놓고 평소에 하지 않았던 길디 긴 설교를 늘어놓고 난 뒤 녀석들의 대답을 요구했다. "응, 알았어. 이젠 말 잘 들을께..." "나도.... 그러니 이제 제발 밥좀 먹자, 응? 벌써 이게 몇분째냐? 배고파 죽겠다." 류미르의 말에 옆에서 식판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종업원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 한번만 봐주겠어.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러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거란 걸 명심해. 알았어?"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미 투. 그러니 밥부터 먹자." 그 날 녀석들은 배에서 잠에 취해 사느라 거의 식사를 안 했던걸 만회라도 하려는 듯 엄청 먹어댔다. 덕분에 그 식당 요리사는 우리가 먹어치우는 요리를 빨리 빨리 해주느라 엄청 고생했을 것이다.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각각 정식 5인분에 같이 딸려온 디저트로도 모자라 추가 디저트를 세개씩이나 더 먹고 그제야 만족해서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말을 사기 위하여 마시장쪽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을 통과하여 어떤 지나가던 사람이 가르쳐준 마시장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우리 앞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저기다, 저기 간다~~!!" "쫒아라. 이번에야말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소동을 알아챈 사람들이 양쪽으로 물러나 내 준 길로 여러명의 칼을 든 남자들에게 쫒기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오랜 시간 쫒겨 다녀서 그런지 무척 피로하여 파리해진 얼굴로 헉헉대고 있었고 남자쪽도 별 다를바 없었지만 그래도 여자의 손을 꼭 붙들고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여자의 체력에 한계가 왔는지 여자는 길 옆으로 피하지 않고 멀뚱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우리 앞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이런, 리타... 헉헉헉..." 여자가 주저 앉는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땀이나서 미끄러웠을 여자의 손을 노친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여자를 돌아보다 여자가 땅에 주저앉은 것을 알고는 얼른 그녀 곁으로 가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기운 없이 겨우 겨우 고개를 저었다. "헉, 헉, 알렌... 나, 도저히 못가겠어요... 헉, 헉... 더이상은 무리야..." "하지만...헉, 리타... 여기서... 멈추면 잡힐꺼야." "당신이라도... 도망가요. 저들은 날 어쩌지 못해요." '왠 신파극?' 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연인인 듯한 두 사람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을 쫒고 있던 사람들은 벌써 다가와 우리를 비롯한 두 사람을 빙 둘러쌌다. 그리고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가는 팔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이, 거기. 너희들은 이 일에 상관 없을테니 빨리 꺼져라. 괜히 영웅행세 한답시고 끼어들지 않는게 좋을거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코흘리개 녀석들 손 바줬다가 웃음거리가 되고싶지는 않으니까." 그의 험한 말에 류미르와 세이몬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씩 솟았다. "흥, 누가 끼어들었다는 거야? 우린 가만히 있었는데 저 사람들이 온거라고." 세이몬의 말에 이어 류미르까지 냉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가 코흘리개라는 겁니까? 그리고 우리가 가든 안 가든 그건 저희맘 입니다." "이 자식들이... 어린녀석들이라 봐줄려고 했더니만..." 팔자 콧수염 남자가 흥분으로 얼굴이 벌개지자 세이몬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보아하니 어느정도 나이가 있어서 좀 봐주려고 했더니만... 그런 기분까지 싹 가시게하는군?" "재주도 좋아." 류미르까지 그의 말에 맞장구치자 나는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녀석들이 그냥 가리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그런데 왜 하필 이곳에 온 처음날 저 팔자 콧수염 남자를 만난거지?' 번 호 : 16498 / 16498 등록일 : 2001년 02월 07일 21:54 등록자 : LODEMP 조 회 : 1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 (4) 콧수염 남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온 몸을 부들부들 떨자 이 곳에 온 첫날 소동을 일으켜 자칫 잘못하여 쫒기는 신세가 될까 두려워진 나는 한마디 했다. "공간 이동!!" 그리고 그곳으로 부터 약 100m 정도 높이의 허공에다 일행을 비롯한 우리 앞에 쓰러지는 바람에 원인제공을 한 남, 녀를 띄워놓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거기에서는 갑작스레 사라진 우리때문에 무척 당황한 콧수염 남자와 그의 부하들이 우왕좌왕 하다가 잠시 후 우리를 찾기 위함인지 뿔뿔히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뭐하러 이리 올라온 거야? 저 자식들 한테 한방 먹이지도 못했잖아?" "맞아. 우리 실력이라면 충분히 묵사발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는데." 류미르의 아쉬움이 담긴 항의와 세이몬의 동조에 나는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내가 이렇게 했으면 뭔가 이유가 있는가보다 하고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왠 항의들이야? 내가 너희들에게 누누히 내 말을 들으라고 강조한지 한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반항하는거냐?" 그러자 세이몬과 류미르의 얼굴이 한풀 꺽였고 그 모습에 나는 쯧쯧 혀를 차는데 두려움에 벌벌 떨며 둘이 찰싹 달라붙어있는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흠, 어쨌든 아래로 내려가서 이야기 하자. 저 사람들이 불쌍하다." 그리고는 곧장 여관을 찾아가 방을 하나 구한뒤 일행 모두를 그 방안에다 쑤셔 넣었다. "잘 들어. 이 나라는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바다로만 이루어지는 만큼 거의 고립되어있는 나라라고.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쫒기는 신세가 되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어? 바다만 막아놓으면 보통 사람들은 도망칠 곳이 없단말야. 그리고 우리는 이 곳에 놀러온거잖아. 그런데 구경하나 못하고 도망만치거나 아님 다시 이 나라를 벗어나야하면 얼마나 열받는 일이냐?" 류미르와 세이몬을 앞에 앉혀놓고 또 일장 연설을 해대자 녀석들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데 말을 끝내고서도 녀석들이 아무런 반응을 안보이자 내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래, 안그래?" 발까지 탕 구르며 외치자 녀석들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번쩍 올라갔다. "응... 그래... 네 말이 맞아." "응, 응..." 나는 녀석들의 반응이 좀 맘에 안들었지만 지금 옆에 다른 사람도 있는데 괜히 열내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다음에 또 내 허락없이 이런일을 일으킨다면 그땐 정말 가만 안둘꺼야,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터 안 그럴께." "나도..." "좋아. 그럼 거기 당신들, 왜 쫒기는 거죠? 당신들을 쫒는 사람들은 또 누구예요?" 내가 녀석들의 대답을 듣고 아직도 둘이 꼭 붙어앉아 벌벌 떨고 있는 연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류미르와 세이몬의 얼굴도 자연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 어찌되었든 저희를 도와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왜 쫒기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더 이상 말려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뭐, 그렇게 우리를 생각해준다니 고맙긴 하지만, 그럼 이제부터 당신들은 어쩔거죠?" "저희는 이 나라를 떠날겁니다. 최대한 빨리 다른 나라로 가는 배편을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어..." 그가 뭔가를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며 주저하자 의아한 얼굴로 류미르가 물었다. "왜요? 뭐 부탁하실 거라도?" "이런 부탁 정말 염치없는 줄 알지만.... 제가 배편을 알아보고 올때까지만 이 여자를 부탁드릴 수 없을까요? 최대한 빨리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이정도도 안 봐준다면 넌 못된 녀석이다.' 라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류미르면 몰라도 세이몬까지 왜 저런 눈으로 보는거야?' 나는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대꾸했다. "뭐, 그정도야... 어차피 우리도 오늘은 여기 머물 생각이니 상관 없겠지요." 남자는 다시한번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여자쪽으로 얼굴을 돌려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걱정하지 말라고 속삭이고는 챙이 넓어 얼굴을 절반정도 가리는 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남자가 방을 나갈때 까지 가냘픈 미소를 짖고 있었지만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어 커튼을 내린 창가로 가서 커튼 틈사이로 계속해서 밖을 내다보기만 했다. 그 모습이 안스러웠는지 류미르가 예의 미소를 띄우고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피곤하실텐데 좀 쉬시는게 어떠세요? 남자분이 갔다 오시려면 좀 시간이 걸릴텐데..." 그러나 여자는 뒤도 안돌아본 채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뭐 간단하게 드실거라도..." 그래도 여자는 고개를 좌우로만 흔들 뿐이었다. "놔둬, 불안할거야. 그러니까 그냥 건드리지 말고 냅둬." 내가 류미르의 팔을 툭툭 쳐 나를 보게한뒤 낮게 속삭이자 류미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근데 아린, 우린 이제 어디로 갈거야?" 방 안이 조용해지자 분위기에 눌린 세이몬이 머쓱하게 물어왔다. "글쎄... 우선은 수도로 가볼까? 아무래도 그 곳이 구경할게 많겠지?" "뭐야, 그건 너무 무책임한 발언 아냐?" 류미르가 옆에서 핀잔을 주자 나까지 괜히 머쓱했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갈곳도 없는걸 뭐. 류미르, 넌 가볼만한 곳을 알고 있어?" 내가 약간 풀이죽어 류미르를 바라보자 류미르가 머쓱하게 웃었다. "흠, 너도 없는데 나라고 있겠냐?" "그러면서 뭘 따져, 따지기는..." "아니, 말이 그렇다 이거지..." 내가 째려보자 류미르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머쓱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하아, 그나저나 우리 계속 여기 있어야 해?" 세이몬이 방 안에만 있기 답답한지 부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 남자가 올때까지만 있으면 돼니까 조금만 참아." 내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하자 세이몬이 다시 지루하단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심심하다..." 그러자 여자가 미안한 얼굴로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저,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희때문에..." "괜찮아요.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는거죠 뭐." 류미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여자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여자가 우리쪽으로 완전히 돌아섰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흔히 평민 여성들이 입는 약간 거칠면서도 튼튼한 옷감으로 된 투박한 원피스에 값 싼 장식품이 하나 달려있는 가죽 끈으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동여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허리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어딘지 기품이 있었고 그녀의 손은 평생 고생이라고는 안해본 여성처럼 하얗고 가늘기만 했다. 그녀의 크고 파란 눈동자는 불안과 우리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와함게 단호한 결단력을 함께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그렇게 뛰어난 미인은 아니어도 단아한 얼굴선과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어 한번 본 사람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로써는 약간 큰 키과 늘씬한 팔다리가 시원스러보였다. 하지만 불안하게 맞잡은 두 손의 손가락을 자꾸만 꼼지락 대고 있는 여자는 안쓰러워서 그냥 보고 있을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다리 안 아파요? 우리 당신 안 잡아먹으니까 제발 좀 앉아요. 쳐다보려니 목이 아프네." 나는 정말 목이 아픈것 처럼 뒷목을 주무르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류미르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아힌, 그게 무슨 말이야?" "좀 앉으라고. 천장 안 무너지고 바닥 튼튼하니까 제발 불안하게 서 있지 말아요." "아, 예." 여자는 류미르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말하는 내 퉁명스런 어조에 화들짝 놀라면서 침대가에 엉덩이만 살짝 걸터 앉았다. 여자가 편안하게 앉지 못하자 그것이 내 탓이라는 듯 류미르가 나를 째려보았다. "꼭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해야 하냐?" "시꺼, 내맘이야." "에휴..." 류미르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만 설래설래 저었다. 그뒤로 불편한 침묵만이 방 안에 감돌았고 우리 모두는 불편한 저자세로 앉아 남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 방쪽으로 조심스럽지만 급한 발걸음이 들리더니 곧이어 방문을 두드렸다. 류미르가 일어나 방 문을 열지 않은채로 물었다. "누구세요?" "접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여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알렌이예요." 그녀의 말에 류미르는 얼른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고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희망에 가득 찬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모자를 벗자 드러난 그의 굳은 표정에 여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알렌? 무슨 일이예요?" 남자는 힘 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우리 초상화를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항구에 쫘악 깔렸어요. 게다가 항구 관리소에 우리 초상화가 붙어 있구요. 거기에는 현상금까지 붙어 있더군요. 게다가 배를 타는 사람들 하나 하나 다 조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남자는 거기까지 말한 뒤 미안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저 분들까지 찾고 있더군요. 같은 일행이라고 생각하나봐요." 그러자 여자는 절망적인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해요? 이젠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군요. 이 나라를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린 곧 잡힐거예요." 남자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지금 병사들이 여관을 뒤지고 있는 걸 보고 오는 길입니다. 여러분도 여기 계시면 위험할테니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하아, 완전히 말려들었군." 내가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자 남자의 고개가 밑으로 숙여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된 거 죄송하단 말로 끝낼수가 없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나의 냉정한 어조에 남자의 고개는 더욱 숙여졌다. 그리고 류미르와 세이몬이 나무라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건 아니었기에 나는 일부러 그들의 시선을 모른체 하고 남자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럼 어디 쫒기는 이유나 들어볼까요? 이젠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 같은데..." 번 호 : 16510 / 16510 등록일 : 2001년 02월 08일 22:16 등록자 : LODEMP 조 회 : 3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 (5) 보통 영화같은데서 보면 이 정도의 말을 들으면 그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러나 이 알렌이란 남자는 나의 이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말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그의 단호한 거절에 순간 당황했다. '아니,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아님 내 논리성이 부족한거야?' 그러나 그런 당황스런 심정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채 나는 더욱 더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렇담 당신 스스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나보군요? 그럼, 어떻게 해결할지는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남자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얼굴로 여자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리타.... 우리 돌아갑시다." 그의 주저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더욱 더 커졌다. "알렌? 지금 뭐라고...?" "우리, 돌아가요.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어요." 남자는 여자의 시선을 차마 마주볼 수 없었는지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한걸음에 달려와 남자의 어깨를 양 팔로 붙들며 소리쳤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예요? 돌아가자니? 우리가 어떻게 거기서 빠져 나왔는데.... 당신 지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예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런 말 하는 내 심정을 이해해 줬으면 해요. 항구가 막힌 이상 더 이상 도망가기란 불가능해요. 돌아가면 적어도 당신만은 무사할거예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어떻게 되는건데요? 아니, 말할 필요도 없죠. 당신은 죽을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보고 돌아가자고 해요?" "하지만 언젠가는 붙잡힐거예요. 우린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요.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도 겨우 며칠을 버틸수 있을 뿐이라구요." 그러자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의 양 어깨를 단단히 감싸며 외쳤다. "싫어요. 안 가요. 당신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리타, 제발..." 남자가 애절하게 부르자 여자는 다시 거칠게 돌아섰다. "당신이 죽는걸 나보고 보란 말이예요? 그리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가 무사할 것 같아요? 그는 날 그냥두지 않을거예요. 그런데 돌아가라고요?" "적어도... 적어도 당신만은..." 남자의 목소리는 꽉 잠겨 낮은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웃기지 말아요, 알랜. 난 절대로 안 돌아가요." 그들의 하는 행동과 대화를 듣고있던 나는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랑의 도피행이군?" 내 말에 무척이나 놀란 듯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나를 보며 두 눈을 크게 치켜떳다. "나원 참, 로맨스 소설에서나 보던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의 사랑을 찾기 위한 여행을 직접 보게되다니... 보아하니 여자쪽이 신분이 더 높은 것 같은데요?" 남자와 여자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여자의 벌린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날 존경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훗, 이정도야 뭐.... 아니, 이게 아니지? 웃겨 증말... 당신들을 찾기 위하여 국가의 항구를 전부 폐쇠할 정도이니 당신 아마 이 나라의 공주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권력가 집안의 딸이겠군? 아무리 귀족이라도 함부로 국제 항구를 폐쇠하기란 힘들테니까." 남자의 어깨가 밑으로 축 쳐졌다. "그렇습니다. 이 분은 현 테아칸 왕국 국왕폐하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신..."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아, 됐네요, 됐어. 당신네 이름을 듣고 싶은건 아니니까. 그렇담 결론은 간단하네. 이봐요, 거기 철없는 공주, 당장 돌아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당신을 왕성 뜰에다 떨겨줄테니까!!" 내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며 이야기하자 여자는 움찔 해서는 남자의 등 뒤에 숨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를 꺽고싶은 마음은 없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주장했다. "싫어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어." 내 머릿속에서 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작고 가는 인내심줄이 끊어졌다. 나는 거칠게 남자의 뒤쪽에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끌어 내었다. "웃기고 있네. 정말 철이 없어도 한참 없잖아?" 그러자 놀란 남자와 세이몬, 류미르가 달려들어 남자가 리타를 잡고 류미르와 세이몬이 내 양 팔을 잡아 여자에게서 나를 떼어놓았다. "리타..." "아힌, 이게 무슨 짓이야?" "진정해 아힌, 진정하라고." 그러나 나는 잔뜩 흥분해서 몸부림을 쳤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공주로 태어나서 호강에 호위 호식하고 살았으면 사람이 자각머리가 있어야 할 것 아냐?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철없이 가출이나 하고 말이야. 자기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게다가 당신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할지 생각해 봤어? 이 철없는 아가씨야. 공주면 공주 답게 자신의 위치와 의무를 생각해야 할 것 아냐? 널 찾아다니는 사람들 고생하는건 물론이고 너 때문에 온 왕성이 발칵 뒤집혀진데다 아마 널 모시고 있던 시종이나 시녀들은 문초를 받겠지. 게다가 너희 부모님이 네 생각때문에 국정을 소홀히 한다면 그 고생은 다 백성들이 받는다는 걸 알아, 몰라? 이 철부지 같으니라고. 너 같은 공주들 때문에 백성들이 고생하는 거야." 그 리타라는 공주는 남자 품에 안겨서 훌쩍 훌쩍 울기만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날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난 이번에는 남자에게 화살을 돌렸다. "당신도 말야, 도대체 자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공주를 데리고 튀었으니 죽는건 당연하지. 아마 왕궁을 드나들 정도로 지체 높은 귀족가 아들이거나 기사 같은데 제법 현명하고 처신이 바른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영 철 없기는 저 여자랑 마찬가질세? 당장 저 여자 데리고 안 돌아가? 지금이라도 당장... 읍, 읍" 나의 신랄한 말이 계속 이어지는 도중에 누군가 내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다. 눈을 치켜떠 손의 임자를 바라보니 류미르였다. 류미르는 나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고 약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손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한마디 했다. "아힌, 네가 전에 나한테 한 말 기억 안 나? 어떤 일이든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고 했잖아, 안그래?" 그의 말을 한 장본인이 나였으므로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있던 나는 손과 발, 그리고 눈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날 잡고 있던 손들을 풀었다. "에휴, 왠 힘이 그렇게 세냐? 이제보니 나보다도 더 센것 같아." 세이몬이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주무르면서 투덜거리자 나는 괜히 흥분해서 난리친게 머쓱해져 헛기침을 했다. "험, 험..." 류미르는 그런 나를 보고 작게 웃더니 아직도 찰싹 달라붙어 있는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녀석이 당신들을 곧장 왕국으로 끌고갈 겁니다." 그러자 남자는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여자를 자신에게서 떼어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를 그윽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고 있더니 곧 우리에게로 몸을 돌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왕궁 기사대 소속의 기사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나라의 공주님이시고요. 저희는..." 그러나 나는 그 남자의 말을 또 가로막았다. "아 아, 당신들의 로맨스 이야기는 듣고싶지 않으니까 도망친 사연에 대하여 이야기 해봐요." 그러자 남자가 나를 향해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성격이 불 같으시기도 하지만 무척 급하시기도 하군요. 간략하게 말씀 드린다면, 약해진 국왕의 권력을 쥐고 흔드는 이 나라의 늙은 재상이 아예 왕권을 강탈하기 위하여 공주와 결혼을 강행하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원래는 저희가 서로 사랑하기는 했지만 이루어진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제가 감히 공주님을 감당할 수도 없으려니와 공주님도 이 왕국을 이어받으시려면 그에 합당한 능력과 지위를 가진 부군을 맞아야 한다는걸 공주님이나 저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인자하시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이신 국왕 폐하를 천천히 밀어내고 자신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여 마음대로 휘두르는 재상이 공주님까지 넘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더군요." 남자는 거기까지 말한 뒤 어떠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한가지를 더 물었다. "그래서요, 그 재상이 권력을 휘두른 다음 나라가 어떻게 되었죠? 그 재상이 나라를 잘 다스렸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재상은 현재 52살의 나이이며 공주님보다 5살이나 더 많은 아들도 있죠. 그리고 아내는 2년 전 병으로 죽었지만 첩이 10명이 넘는다죠, 아마? 게다가 그가 권력을 휘어잡은 후로 세금은 2배로 올랐고 국가의 중요 지책은 다 그의 측견들이 맡았답니다. 그리고 제상을 제거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다 처형되고 말입니다. 현 국왕폐하께서도 제상에게 꼼짝 못하시는 처지랍니다. 이정도면 어떻습니까?" 그의 너무 의기양양해 보이는 얼굴이 맘에 안들어 나는 한마디 더 했다. "흥, 당신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알지?" 그러자 그에 대한 대답은 옆에 가만히 듣고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이 했다. "사실인 것 같아. 전혀 꾸밈 없는 얼굴이거든." "내 생각도 그래." 번 호 : 16580 / 16580 등록일 : 2001년 02월 09일 21:15 등록자 : LODEMP 조 회 : 4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 (6) "흠, 그래?"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이몬과 류미르까지 그렇게 생각 한다면 나도 계속 그를 의심하는 척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아 자랑스럽다는 듯이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내가 뚜벅 뚜벅 걸어가자 내가 다가감을 느낀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는 찔끔한 표정으로 움츠러 들었다. 그리고 남자는 걱정스런 얼굴로 여자의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서 있었다. 그런 그에게 씨익 웃어보인 나는 여자가 앉아있는 의자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남자를 향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유도 알았으니 작전을 짜볼까?" 류미르와 세이몬은 얼굴이 환해져서 얼른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렇게 나온 이상 그 남자와 여자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란 걸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생각해 놓은 게 있어?" 세이몬의 물음에 나는 더욱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엄, 내가 누구냐? 벌써 다 생각해 놨다구." 그러자 류미르까지 궁금증을 얼굴에 나타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엔 어떤 작전인데?" 나는 나에게 시선을 던지는 모든 이들의 얼굴을 한번씩 쭉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하여 마왕 대 작전!!" "엥? 그게 뭐야?" "왠 마왕?" 남자와 여자는 류미르와 세이몬처럼 입을 열어 말을 안 했지만 그들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난 녀석들의 그런 표정에 한심하다는 듯이 쯧쯧 혀를차며 부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쯧쯧, 이것들아, 내가 허튼 작전 짜는 것 봤어? 이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거야. 봐봐, 우선 내 목적은 저 남자와 여자가 국왕이랑 기타 관료들한테 인정받는 결혼을 하는거야. 그 국가 권력을 쥐고 흔든다는 재상도 찍 소리 못하게 말이지. 그럴려면 우선 저 빽 없는 기사가 공주랑 결혼 할 대의 명분이 서야하거든. 그런데 이 나라는 현재 저 기사가 큰 공을 세울일이 없잖아. 내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쟁이 있는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 도망중이고 말야. 그런데 만약, 갑자기 마왕이란 존재가 나타나 공주를 납치해 갔는데 저 기사가 마왕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낸다면?" 그러자 류미르가 즉각 대답했다. "기사는 영웅이 되고 공주와 결혼하겠지." "바로 그거야. 그리고 공주를 구해내지 못한 재상은 찍 소리도 못할거구, 안그래?" 내가 남자와 여자를 바라보며 묻자 남자가 미적 미적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소설속에나 나올법한 일을 어떻게... 더욱이 마왕이란 존재 자체도..." "까짓거 만들면 돼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당신은 나중에 공주가 마왕에게 납치당한 후 왕에게 가서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하고 오면 되는거예요." 내가 신이나서 이야기하자 세이몬도 나섰다. "그렇다면 마왕성도 필요하지 않아? 성은 어떻게 할꺼야?" 그러자 이번에는 류미르가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왕성과 가까운 곳에 버려진 성이 없을까요? 아니면 아무도 살지 않은 저택이라도..." "글쎄요... 전 잘..." 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젖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공주가 주저, 주저하며 나섰다. "저기요... 요새라도 괜찮나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면 상관 없어요." 류미르가 얼굴이 환해져서 고개를 끄덕이자 공주가 안심하며 입을 열었다. "국사를 공부할 때 안건데요. 예전에 드워프와 인간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 만들어진 요새가 있어요. 지금은 드워프와 우리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기에 필요 없어져서 폐허가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리타.... 그건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인데..." 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 없어요. 차라리 더 잘됐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거 왕성이랑 가까운 곳에 있어요?" 그러자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수도의 외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래요? 수도랑 가깝다면서 계속 사용하던가 아님 아예 없애지 않고 용케 나두었네요?" 내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묻자 남자가 얼른 대답했다. "아, 그게 그 요새가 숲속에 있거든요. 숲이 꽤 울창해서 사람들도 별로 다니지 않고해서 그냥 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헤에, 더 잘되었잖아? 좋아요. 그럼 마왕성은 거기로 하고. 당신들은 왕성으로 돌아가세요. 우선은 공주가 왕성에서 납치되어야 하니까. 에, 그렇다면 남자는 어떻게 하나..." 내가 약간 망설이는 눈으로 남자를 보자 남자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 몸 하나는 간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왕성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공주가 납치되어 갈 때 왕 앞에 나서겠습니다." "아뇨, 그러지 말아요. 왕 앞에 나섰다가 그 자리에서 처형되면 곤란하니까..." 그러자 류미르가 나섰다. "이러면 어때? 저 남자도 우리와 함께 있다가 기사들이 잔뜩 몰려와서 우리에게 당하고 있을 때 짠 하고 나타나 마왕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게 하는거야." "아, 그거 좋겠다. 어차피 마왕을 무찌를 때 증인들이 필요하니까. 왕성 기사들이 증인이라면 더할나위 없지.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공주 납치는 언제 할꺼야?" 이번에는 세이몬이 물었다. "공주 결혼식날. 그때는 모든 귀족들과 그들의 병사들이 수도에 몰려 있을테니까. 공주가 마왕에게 납치되어갔다는 증인도 충분하고 또 마왕성으로 공주를 구하러 올 기사들도 금방 올 수 있을 테니까 일석 이조야." 내가 막힘없이 술술 설명하자 남자와 여자가 감탄의 빛을 떠올렸다. 그래도 남자는 걱정되는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혹시 위험하진 않을까요?" 그러자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세이몬이 먼저 나서서 자신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다 잘 될테니까." 류미르는 세이몬의 얼굴을 바라보며 예쁜 자식을 보는 듯이 피식 웃다가 세이몬이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자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쪽으로 다가갔다. "자, 그럼 대충 됐고.... 우선은 공주를 어떻게 왕성으로 돌려보내느냐가 문제인데 말야..." 내가 공주를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창 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류미르가 대꾸했다. "생각 하려면 빨리 해야 할거야.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거든." "뭐라고요?" 류미르의 말에 제일 놀란 남자가 빠른 속도로 창가로 뛰어가 밖을 내다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 우리를 돌아보았다. "이런, 재상의 사병들이야." 그러자 공주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그때 난 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봐요, 혹시 연기 잘 해요?" 내가 공주를 바라보며 생글 생글 웃자 공주의 얼굴에 한줄기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류미르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묻자 남자도 류미르를 따라 탁자로 다가왔다. 나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설명했다. "우선 당신들 짐은 챙겨놔요. 그리고 아랫층이 소란스러우면 둘 만 방 밖으로 나가서 도망가는 척 하다가 일부로 잡혀줘요. 그럴 때 공주, 당신이 당신 목숨을 담보로 남자를 보내주라고 해요. 이해 했어요? 그럼 다음에는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러면 공주는 자연스럽게 왕성으로 돌아갈 테고 이 사람은 우리와 함께 남겠죠.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그러자 공주는 입을 앙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께요." "좋아요. 그럼 단검 하나를 소지하고 있어요. 나중에 단검으로 당신 목을 겨누면서 협박해야 하니까." 류미르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아무런 무늬가 없는 평범한 단검 하나를 꺼내어 건내주자 공주는 조심스럽게 그걸 받아 자신의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때맞춰 밑에서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왔나보군. 그럼 시작해요." 남자는 공주의 손을 꼭 잡고는 굳은 얼굴로 우리를 한번 돌아본 뒤 방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저깄다, 잡아라." 곧 병사들의 외침이 들렸고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방 문을 꼭 닫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더 이상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잡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우리가 짰던 대로 공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놔줘. 그렇지않으면 너희들은 내 시체를 끌고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계단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아래층 상황을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남자는 병사들에게 포박되어 한쪽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공주는 자신의 목에 단검을 드리댄 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가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년 남자는 전의 그 팔자수염 남자였다. "공주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네 놈에게 그런 소리 듣고싶지 않다. 어쩔거냐? 그를 놔준다면 순순히 따라갈테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가만있지 않으리라." 공주가 다시 앙칼지게 소리쳤고, 그러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팔자수염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남자 옆에서 그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그의 포박을 풀어 주었고 남자는 천천히 일어나 공주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여관 밖으로 나갔다. "자, 이제 우리도 가자." 나의 속삭임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즉시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열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번 호 : 16651 / 16652 등록일 : 2001년 02월 10일 22:03 등록자 : LODEMP 조 회 : 9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 (7) 얼마 날아가지 않아서 우리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알렌을 발견할 수 있었고 머지않은 곳에 그를 찾기위하여 골목, 골목을 뒤지는 병사들을 발견하였다. 류미르가 얼른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하여 알렌이 병사들에게 발견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를 허공으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자, 이제 공주는 왕성으로 돌아갈 테니 우리는 슬슬 마왕성을 꾸미러 가볼까?" 내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활기차게 외치자 세이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저기, 아린? 우리 여관비를 안 냈는데?"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는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엄, 그런 거야." "아, 그런 거구나." 세이몬과 내가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류미르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슬그머니 알렌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알렌? 이녀석들은 그냥 두고 우린 마왕성으로 갈까요?" 그리고 그 즉시 그는 세이몬과 나에게 쫒겨 더 높은 허공을 날아야 했다. 알렌의 안내로 도착한 왕성 외각 숲에 오랜 세월동안 버려진 요새는 그동안 사람의 손길이 없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듯 곳곳의 돌담이 무너져 있었고 벽은 이끼 투성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요새 문은 곰팡이가 슬고 찌그러져 문의 구실을 하지 못한 채 겨우 겨우 벽에 달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수북히 쌓인 먼지들에 여기저기 지푸라기나 나무조각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하아, 여기가 마왕성이란 말이지?" 류미르가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소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군..." "아냐, 다 할필요는 없고, 우리가 쓸 방 하나하고 마지막을 장식할 넓은 홀만 청소해. 나머지는 쓰지도 않을거니까 할 필요 없어." 우리가 쓸만한 방을 고르느라 류미르와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는 류미르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소리쳤다. 덕분에 천장에 묻어있던 먼지들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에구구, 여기선 함부로 소리도 못지르겠군..." 결국 우리는 제일 온전하게 보존되어있는 방 - 지휘관이 쓰던 방 같았다 - 을 우리가 머물 곳으로 정하고 나는 류미르와 알렌, 그리고 세이몬에게 청소를 부탁한 뒤 요새 바깥으로 나왔다. 공주를 구하려고 기사와 병사들이 몰려왔을 때를 대비하여 요새 주위에 결계를 치기 위함이었다. 요새 주위에는 일정한 거리의 공터가 있었는데 예전에는 땅이 드러나 있었겠지만 지금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런 풀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요새 근처에 있던 바위나 큰 나무 등등 결계석에 적당한 것들을 찾아서 표시하며 요새를 한바퀴 돌아본 뒤 마법서를 꺼내어 강력한 일루전 결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 일루전 결계는 자신이 보길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얼마나 강력한지 보이는 건 물론 촉감까지도 환상에 젖게하는 결계였다. 이 곳에 오는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마왕의 성을 기대하고 있었을테니 음침하고 몬스터들이 득실대는 마왕성이 보일것이다. 그리고 같이 왔던 마법사들이 일루젼에 걸려 마법을 난사했을 때 숲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결계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력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결계도 만들어야 했다. 평소 결계를 거의 사용하지 않던 내가 강력하고 섬세한 결계를 만드느라 땀을 뻘뻘흘리며 일하고 있는데 어느새 청소를 다 끝냈는지 알렌과 세이몬, 그리고 류미르가 어슬렁 거리며 걸어나왔다. "아린, 아직도 다 못한거야?" 류미르가 제일 먼저 날 발견했는지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외쳤다. "거의 다 했어. 너희들은 청소 다 했어?" 그러자 이번에는 세이몬이 대답했다. "물론, 우리가 누구냐?" "그 홀은 음침하게 꾸몄겠지?" "꾸밀 필요도 없더군요. 오랫동안 버려져 있어서 청소를 해도 여전히 음침하던데요?" "하하, 그래요? 자, 그럼 결계도 다 끝났으니까 이제 수도로 가자." 내가 마지막 문장을 다 그려넣자 결계가 웅 울리며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그 소리를 기분좋게 들으며 결계를 그리기 위하여 계속 바위 위에 수그리고 있던 몸을 펴고 일행을 둘러보며 말하자 일행의 얼굴이 황당한 표정들로 변했다. "수도? 거긴 왜?" 류미르가 대표로 나에게 물어왔다. "왜긴, 공주 결혼식 날짜도 알고 또 공주를 납치하려면 수도에 있어야지, 안그래?" "거야 그렇긴 하지만..." "아, 맞다. 배역도 짜야지? 알렌은 영웅 역이고, 마왕이랑 영웅을 도와줄 역이 필요해. 아무래도 혼자 마왕을 무찔렀다는 건 믿기 힘드니까 말야. 그래서말인데 마왕편은 나와 세이몬이 하고 -전에 해본 적이 있으니까.- 류미르는 하이 엘프라고 해서 영웅을 도와주지?" "그러지 뭐." "나도 좋아." 류미르와 세이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자 알렌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수도로 출발해 볼까?" 그러자 알렌이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벌써요? 공주가 수도에 도착하려면 더 있어야 할테고, 더욱이 결혼을 빨리한다해도 한달은 걸릴텐데요?" "그렇지는 않을거예요. 아마 공주가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결혼식을 준비했을걸요? 아마도 공주가 왕궁에 도착하고나서 일주일이나 이주일 쯤 후면 할거예요. 게다가 그렇게 되면 수도에는 사람들이 몰려 여관잡기가 힘들어질 것 아니예요? 그러니 미리미리 가서 여관 잡아놔야죠." 나의 술술 잘 나오는 설명 뒤에 세이몬이 한마디 덧붙였다. "구경도 하고말야." "맞아. 이왕 간 김에 구경은 해야지." "그럼, 그럼." 나와 류미르가 세이몬의 말에 맞장구치자 알렌의 얼굴은 황당함을 넘어 경악의 빛을 띄었다. "그러다 잡히면 어쩔려구..." "에이, 무슨... 공주를 잡았으니 더이상 병사들을 풀지는 않을거예요. 게다가 그렇다고 해도 설마 우리들이 수도로 돌아올거라고 생각하겠어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괜찮으니까. 정 걱정되면 수도로 가자마자 머리를 염색하거나 가발을 사서 변장하고 다녀요." 류미르가 거기까지 말하자 알렌은 마지못해 동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수도에 도착해서 마왕과 멋진 영웅 동료로 변장할 소품들을 사러 돌아다니며 겸사겸사 구경하고 있는동안 1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공주가 왕성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공주의 결혼식이 선포되었다. 결혼식은 일주일 후. "거봐, 내말이 맞지? 아마 그 재상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서둘러서 결혼하려고 했을거야." 내가 공주의 결혼식을 알리는 벽보를 발견하고 세이몬과 류미르를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류미르가 주위에 몰린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르키며 나를 툭툭 쳤다. "쉿!!" "아참." 다행히도 우리 주위에모인 사람들은 벽보를 보느라 내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쉰 다음 얼른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류미르와 알렌은 미리 마왕성으로 돌아가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고 세이몬과 나는 남아서 공주를 납치하기로 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 왕성에서는 갖가지 오색 깃발들이 휘날렸고 축포도 요란하게 울렸다. 거리,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으며 사람들은 잠시후에 있을 공주 결혼식 행차를 기다리느라 모두 길거리로 나와 있었다. 만약 공주가 결혼식을 무사히 치른다면 공주와 그의 부군이 된 재상은 화려하게 꾸민 마차와 백마를 탄 기사 호위병대를 이끌고 수도를 한 바퀴 돌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될껄...' 나는 속으로 싱긋 웃으며 세이몬과 함께 왕성으로 갔다. 왕성으로 가는 길에는 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어서 날아서 가야만 했다. 그리고 왕성의 구석, 후미진 곳에 들어가서 재빨리 마왕으로 분장했다. 이번에도 마왕역은 바로 나였다.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색이 감도는 검은 가발을 썼고 거기에 검은색의 어깨 보호대에 검은 망토를 둘렀다. 옷도 온통 검은색으로 입었으며 발에는 무릎 바로 밑에까지 오는 검은 가죽 부츠를 신었다. 그리고 포인트로는 가슴 정 중앙에 오백원짜리 동전보다 큰 빨간 루비 브로치를 달았고 귀에는 자수정의 길다란 귀거리를 착용했다. 손에도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나는 마지막으로 검은 나비모양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뒤 세이몬을 돌아보았다. "어때? 괜찮아?" "멋있어." "좋아. 이제 슬슬 공주가 등장하길 기다려야지." 우리는 왕성의 커다란 홀을 들여다볼 수 있는 큰 창문 꼭대기에 올라 앉아 화려하게 차려 입은 귀족들이 가득 차 있는 홀을 들여다 보았다. 홀의 끝에있는 큰 단상에 벌써 결혼식을 주도할 신관이 나와있는 걸 보니 곧 신랑이랑 신부가 등장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후... 커다란 나팔소리와 함께 홀의 큰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면서 신랑과 신부가 천천히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이 단상에 거의 다 도착했을즈음 세이몬과 나는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와장창창~~!! 번 호 : 16690 / 16792 등록일 : 2001년 02월 11일 22:27 등록자 : LODEMP 조 회 : 67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 (8) 와장창창~~!! 홀의 한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창문을 단숨에 깨트리며 창문을 넘어 홀 중앙에 내려서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귀족들이 히스터리컬한 목소리로 경비병들을 부르는 가운데 홀의 큰 문이 열리고 창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내 주위를 둘러쌌다. "이런, 이런, 이런..." 내가 느긋한 어조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자 병사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인하여 한층 더 굳어졌다. 그때였다. 결혼식을 주관하기 위하여 단 위에 올라서있던 대신관이 크게 소리쳤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그대는 누구인가?" 그래서 난 그에게 지지 않기위하여 목청을 높여 대답해야 했다. "저런, 무례한 쪽이 누구인지 모르겠군." "무엇이라?" 나의 대답에 대신관을 비롯한 재사장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니, 이 나라의 하나뿐인 공주가 결혼하는 큰 행사에 왜 나만 쏙 빼놓은거지? 왜 난 초대 안하느냔 말이다. 이런 무례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감히 나 혼돈의 마왕을 무시하다니 내가 가만있을 줄 아는가?" 그러자 대신관의 얼굴이 급속히 하얘지며 동시에 홀 안이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마왕이라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덕분에 내가 말해봤자 이 소란스러움에 묻혀 소리가 잘 전달될 것 같지않아 평소에 내가 많이 써 먹던 수법을 동원해야 했다. 콰과광~!! 내 바로 앞에다 파이어볼 한방을 먹이자 큰 불꽃과 함께 폭발음이 일어났고 덕분에 주위는 깜짝 놀라는 바람에 조용해졌다. "아, 이제야 조용해졌군. 감히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말야, 이 곳 사람들은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군." 내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살벌한 시선을 보내자 사람들은 모두 내 시선과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땅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흠흠, 어쨌든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비록 너희들이 날 큰 행사에 쏙 빼놓았다고 해도 이 내가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고 너희들에게 선물을 해주기 위함이지."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신관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크게 소리칠 뿐이었다. "닥쳐라. 이곳은 너따위가 들어올 수없는 곳이다. 소동을 벌인것은 괘씸하나 오늘이 특별한 날이고하니 이쯤해서 그냥 덮어두겠다. 그러니 썩 물러가거라." "어라? 이런경우가 있나? 이 몸께서 친히 축하를 해주기 위해 오셨는데 이런 푸대접이라니?" "흥, 넌 초대받지도 않은 손님이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너 하나쯤은 상대할 수 있다. 그러니 어서 물러가거라." "아, 저 신관 되게 맘에 안드네? 좋아, 네놈이 그렇게 말한다니 그냥 가주지." 나는 일부러 뜸을 들이면서 천천히 허공에 떠 올랐다. 그리고 공주를 바라보며 살짝 눈짓을 하자 공주가 남들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이곳에 온 댓가는 가져가야겠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공주가 허공으로 붕 떠올라 내 손에 착 안착했다. "비명을 질러요." 내가 공주에게 살짝 속삭이자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살려주세요오오오~~~ 아바마마아아아~~~" '어이구 귀따거워...' 나는 속으로 눈쌀을 찌푸렸으나 내색 안하고 마지막 마무리의 말을 던졌다. "네 녀석들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지 한번 두고보겠다. 난 왕성 외각 숲에서 살고 있으니 공주를 구하고 싶거든 언제든지..." 그러나 내 말은 갑작스레 날아온 불화살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얼른 실드를 쳐서 막기는 했지만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허를 찔린거라 속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야, 너희들은 예의도 없냐? 왜 자꾸 내가 말하는데 가운데서 끊는거야? 한번만 더 방해했다간 이 홀을 지옥으로 만들어 줄테다." 그리고 아래에서는 불화살을 날린 마법사에게 날카로운 질책이 떨어졌다. "공주가 다치려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맞소,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었소." "어쨌든, 난 간다. 공주를 구하고 싶으면 알아서 너희들이 와라!!" 나는 내 존재를 무시하고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홀에 화가 치밀어 대충 마무리를 하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공간이동을 해버렸다. "쳇, 쳇, 무슨 사람들이 그래? 마왕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자기네들끼리 떠들기나 하고. 내가 너무 안무섭게 등장했나?" 괜히 투덜투덜 거리면서 흰색과 황금색이 적절하게 섞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얼른 알렌이 달려들어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소?" "예, 전 괜찮아요." "자, 그럼 이제는 사람들이 몰려올때를 기다리면 되겠군?" 류미르가 기대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두 손을 비비며 중얼거리자 모든 사람들이 긴장과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이틀후, 은색으로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한 무리의 기사단과 그들을 따르는 병사들이 요새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너무나 평범한 숲속과 오래되어 허물어지기 직전인 요새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 거렸으나 기사단에 섞인 신관들과 마법사들이 이상하다고 주의를 주자 경곌르 늦추지 않고 조심스레 전진했다. 그리고 얼마후 요새 앞의 넓은 공터로 들어서자마자 내가 쳐놓은 결계에 걸려들어 긴장된 얼굴들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우아아악~ 몬스터들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모두 다 전투 위치로!!" "이런 치사한 마왕 같으니라고, 이곳에다 몬스터들을 매복시켜 놓다니!!" 아무도 없는 허공에다 화살을 뿌리고 검을 휘둘러대고 마법까지 난사하는 모습들이란 우습기도 하고 또한 저들이 불쌍하기도 했다. 그러다 자신들끼리 난리치는 통에 부상자가 생기자 신관들이 얼른 달려들어 부상자들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슬슬 결계 깊숙히 들어간 이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몬스터들로 보이는 환각에 빠져 자신들끼리 검을 겨누기 시작했다. 바깥쪽에서 그 모습을 본 마법사들이 아무리 환각이라고 외쳤도 그들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환각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아챈 마법사들도 자신들의 힘으로 풀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어쩌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세이몬과 나는 너무나 심한 상처를 당해 거의 죽을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은 얼른 저주의 마법을 걸어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이번 일에 마왕을 등장시키기는 했지만 우리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건 보고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저주는 결계가 풀리는 즉시 풀리게 될 것이었다. 시간이 한참을 지나자 실력이 뛰어난 자들 몇몇이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요새 안에는 별 다른 결계는 만들어 놓지 않아서 쉽게 마왕이 기다리는 홀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왕으로 분장한 나와 부하로 변장한 세이몬이 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스톱 마법을 걸었다. 그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세로 있다가 나중에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는 걸 본 증인이 될것이었다. 하루가 다 가기도 전에 두 개의 기사단이 더 왔고 덕분에 요새 공터에는 바위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마왕성의 홀에도 마법에 걸린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저기, 아린? 이제 슬슬 영웅을 등장시켜도 되지 않을까?" 날이 저물어 방으로 자러가자 기다리고 있던 류미르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물어왔다. "이정도면 괜찮지 않겠어? 더 이상 일을 벌이는건 아무래도..." "그럴까? 하지만 하루만에 영웅이 나타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맞아. 영웅은 맨 마지막에 나타나는 거야." 세이몬과 내가 류미르의 의견에 반대하자 옆에서 듣고있던 알렌과 공주도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시간을 더 끌다간 나중에 신전에서 전적으로 마왕을 무찌르기 위하여 나설거예요. 아마 벌써 성기사단을 파견해달라고 신전쪽에 서신을 보냈을지도..." "맞아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들이 힘들어질거예요." 그러자 류미르도 다시 우리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더 강조했다. "이걸로 끝내자. 이정도면 충분해." "하지만 이정도에서 물러나면 아힌은 힘 없는 마왕이 될꺼야." 세이몬이 아쉽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류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원래 처음부터 목적은 저들의 결혼이 인정되게 하는거였어. 이정도라도 충분히 마왕이 쎘으니까 공주를 구해가면 결혼이 인정될꺼야." "그럼 재상은? 그사람도 혼내주는 게 아니었어?" 세이몬의 또다른 질문은 내가 대답했다. "재상은 저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지. 어차피 재상은 건드릴 생각도 없었어. 당신도 잘 들어요, 알렌. 당신이 마왕을 무찌른걸로 어느정도 왕성에서 지지기반이 생길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잘 이용하여 재상을 누르든지 아니면 반대로 재상에게 제거 당하는지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예요, 알겠죠? 우리가 도와주는 건 당신들의 결혼이 인정되는것 뿐이니까. 그 결혼이 성사되느냐 무효가 되느냐는 당신들이 알아서 하세요." 내가 알렌을 돌아보며 말하자 알렌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런 것 까지 당신들을 의지할 마음은 없어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야죠." 그의 모습에 우리는 괜히 흐뭇함을 느껴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영웅 등장 날짜를 정해야지? 이건 내 생각인데, 공주가 납치되간지 아직 3일밖에 안지났어. 지금 영웅이 나타나는건 너무 빨라. 그러니까 하루 더 기다린다음 영웅을 출현시키자. 내일 모래에. 솔직히 내 생각은 그것도 빠르지만 일을 크게 할 생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어때?"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자 류미르와 알레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세이몬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할께." "저도 조금 더 기다리죠." "아쉽지만, 하는 수 없지 뭐." 번 호 : 16770 / 16792 등록일 : 2001년 02월 12일 21:27 등록자 : LODEMP 조 회 : 231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7화 아린 일행, 마왕 일행 되다 (9) 그러나 그 다음날 나는 내 고집대로 더 기다리지 말고 차라리 류미르의 말대로 할껄 하는 후회감에 싸여야만 했다. 더 이상의 찾아오는 기사단이 없어 약간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마왕성을 찾은 한개의 기사단이 나타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사단이 보통 기사단이 아니라 신전의 성기사단이었다. 도대체 언제 신전에 연락해서 성기사단을 끌어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무더기의 은빛 갑옷을 입은 성기사단과 신관들이 몰려오자 우리는 난감해져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더욱이 신관들의 가운과 성기사단의 가슴 막이와 방패에 그려져 있는 문장은 열 십자 모양에 위의 세개의 짧게 뻗어나간 선 끝에는 세개의 잎이 각각 그려져 있었다. "이런... 정의와 진실, 그리고 성실을 상징하는 클레이몬드 신전 기사단이야." 제일먼저 그 문장을 알아차린 알렌이 신음을 내뱉듣이 중얼거렸다. 클레이몬드 신이 상징하는 것이 진실인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신에게 가호를 받은 신관이나 성기사들에게는 환각따윈 통하지 않았다. 덕분에 요새 주위에다 열심히 쳐 놓은 환각의 결계가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어쩌지? 그냥 이대로 들여보내야 할까?" 류미르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저들이 홀 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저들 모두에게 정지마법을 걸 수는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몽땅 홀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걸어야 할터인데 그러자니 먼저 들어온 녀석들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마법에 걸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한꺼번에 들어오지 않고 뭔가 작전을 짜서 들어올텐데 이렇게 저들을 한꺼번에 맞으려니 너무 부담되었다. "글쎄, 수를 좀 줄였으면 좋겠는데... 그냥 지금 내가 나가서 한바탕 쑤셔 놓을까?" "당신 혼자 괜찮겠어요?" 옆에서 걱정스런 얼굴로 알렌이 물어왔다. "아뇨. 수가 너무 많아서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겠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말을 흘리는 것 처럼 뻔뻔스레 말하자 잠시 알렌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옆에서 심각하게 몰려오는 성기사단을 바라보고 있던 세이몬이 불쑥 말했다. "그럼 내가 저주를 걸까?" "괜찮겠어? 보통 기사나 병사한테야 아힌도 쉽게 저주를 걸지만 저들은 신의 가호를 받는 성기사라고. 왠만한 저주로는 힘들텐데." 류미르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세이몬이 이정도 쯤이야... 라는 듯이 싱긋 웃어보였다. "난 마족이라고. 그것도 고위 마족인 아벨리아 마족이야. 비록 성년식을 치루진 않았지만 내 본의의 힘을 약간 끌어낼 수는 있다고. 그거면 저들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을거야." "본의의 힘? 그게 뭐야?" 처음 들어보는 말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세이몬을 향해 묻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이야기하는 것 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우리 마족들이 성년이 되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어. 그걸 본의의 힘이라고 해." "잉? 아니 그럼 네가 그동안 사용한 힘은 도대체 뭐냐?" 류미르가 놀란 어조로 물어오자 세이몬이 다시 피식 웃었다. "그거야 아직 어린 마족들이 사용하는 힘이지. 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라나... 그것도 본의의 힘이긴 한데 성년이 되기전에 쓸수 있도록 허락받은 본의의 힘 중 아주 일부분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거야." "그럼 네가 지금 쓴다고 하는건? 그것도 허락받은 힘이야?" "지금 내가 쓴다는 건 좀 범위를 벗어나는 거긴 하지만 그렇게 많이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지금 잠깐 쓰는거니까 괜찮을꺼야." "그래? 그럼 부탁할께." 평소 힘에관한 한 허세를 부리지 않았던 세이몬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데다 마족에 대해서 아는것이 거의 없었던 류미르와 나는 정말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줄로만 알았다. 덕분에 선선히 부탁했지만 이것때문에 나중에 큰 일이 벌어질줄은 류미르나 나는 상상도 못했었다. "자, 자, 그럼 납치당한 공주님과 영웅은 준비해주세요. 내일까지 시간 끌지말고 오늘 그냥 영웅을 등장시키기로 합시다." 세이몬이 조용히 눈을 감고 집중을 하는동안 난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고 그와함께 공주는 홀의 단상에 놓여있던 의자에 얼른 올라가 앉아 그 곳에 마련되어있던 사슬을 몸에 둘렀다. 그리고 류미르와 알렌은 얼른 영웅으로 변신하기 위하여 우리가 머무는 침실로 돌아갔고, 그들이 몸을 감추자 공주가 실제로 묶인 것 처럼 하고있는지 확인한 나는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쉴 수 있게 걸어놓았던 슬립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정지마법에 걸려있는 상태로 부스스 눈만 뜨고 정신을 차리더니 나를 향해 살기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그런 시선들에게 담담하게 웃어준 나는 세이몬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세이몬은 그동안 가끔 마왕노릇을 하기 위하여 내 몸 주위에서 흐르게 했던 검은 기류를 이제는 자신의 몸 주위에 두루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지금 세이몬의 몸을 감돌고 있는 그 검은 기류는 그동안 그가 보여줬던 검은 기류보다 더욱 더 어둡고 빛 조차 투과시키지 못할 것 처럼 무척 새카맸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것 같아...' 그리고 잠시 후 세이몬이 가슴에서 교차하고 있던 양손 중 하나를 창 밖으로 보이는 성기사단쪽으로 향하여 뻗자 세이몬을 감싸고 돌던 어두운 기류의 일부가 그가 가르킨 쪽으로 스르르 날아갔다. 재빨리 달려가서 밖을 내다보니 세이몬의 몸에서 떠난 검은 기류가 안개처럼 펼쳐져 성기사단의 위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고 성기사들과 신관들은 저마다 몸에서 밝고 푸르스름한 오라를 뿜어 자신들의 몸을 보호하려 했다. 그리고 검은 기류가 완전히 그들 몸 위로 내려앉자 자신의 오라로 그 기운을 이겨내지 못한 신관과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모두 바위로 변해버렸다. 덕분에 거의 100명이 되어 보였던 성기사는 이제 1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20여명은 되어 보였던 신관들도 절반으로 줄어버렸다. "이정도가 한계야." 남아있는 사람들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숫자를 세던 내 귀에 세이몬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세이몬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까지 송글송글 맺힌 세이몬이 보였다. "어? 세이몬, 왜그래? 괜찮은거야?" "아아, 무리하게 힘을 사용했더니 좀 힘들어서 그래. 괜찮아. 하지만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응, 그래. 얼른가서 쉬어. 그리고 수고했어." 내가 활짝웃으며 말하자 세이몬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실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몸이 홀에서 나가자마자 나도 다가오는 발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단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 묶여있는 것 처럼 위장하고 있던 공주가 낮게 속삭였다. "아까 그분 괜찮으신거예요? 얼굴색이 안좋던데..." "힘을 무리하게 사용해서 그래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거예요." "흐음, 글쿤요." "어어, 표정관리, 표정이 풀렸어요. 그게 뭐예요? 마왕한테 납치된 공주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어요." "어머, 미안해요." 그리고 잠시 후 굳게 닫아놨던 홀의 큰 문이 거칠게 열려지면서 저주에서 살아(?)남았던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뛰어 들어왔다. 성기사들은 저마다 은빛 검을 들고 있었고 신관들도 주문을 암송하고 있는것이 여차하면 신성 마법을 날릴 태세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대접용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동안 여러번 써먹었던 멘트를 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아하하하하, 대단한 녀석들이로구나. 이곳까지 오다니... 하지만 여기까지다. 너희들은 이 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많이 들어왔던 대사가 성기사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닥쳐라, 이 악독한 혼돈의 마왕이여. 나 클레이몬드를 받드는 미천한 종, 오늘 널 무찌르고 공주님을 모셔가겠다!!" "후후후, 그게 네 뜻대로 될까?" "시끄럽다!!" 그렇게 호기롭게 외친 성기사가 들고있던 검에서 푸르스름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성기사는 그런 검을 치켜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지만 그 모습을 느긋하게 보고있던 나는 한마디 했다. "스톱!!" 그리고 호기롭게 홀 안으로 뛰쳐 들어온 성기사와 신관들은 그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아하하하하, 어리석은 녀석들... 감히 나에게 도전한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그러면서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홀 안으로 두명이 뛰어 들어왔다. "마왕,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주마." 멋있게 바스타드를 치켜들고 있는 사람은 알렌이었고 - 처음에는 그에게 멋진 옷을 입히고 망토까지 휘날리게 하려고 했었지만 쫒기는 주제에 왠 화려한 옷차림이냐고 반박을 당해 평범하기 그지없는 옷을 입혔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가운데 큼지막한 에메랄드가 박힌 황금 서클렛을 이마에 두르고 뾰족한 귀를 드러낸 상태로 초록색의 가벼운 옷차림과 금빛나는 류트를 어깨에 메고 있는 류미르였다. "알렌!!" 각본대로 공주가 애타게 외치자 알렌이 공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주, 조금만 참으시오. 내 당신을 곧 구해주리다." "당신만 믿고 있을께요." '아, 내가 썼지만 역시 닭살이 돋는구나...'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도리질을 쳤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사를 읊었다. "호오, 이번엔 너희들이냐? 제법 실력은 있는 것 같다만, 나한테는 통하지 않아. 그래도 이번에는 하이엘프까지 오다니... 후후후, 하이엘프 네 녀석은 세뇌시켜 내 종으로 만들어주마!!" 그러자 류미르가 외치며 먼저 달려들었다. "어림없는 소리!!" 그는 재빨리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어 홀 안에 강한 흙먼지 바람을 일으켜 나에게 날렸고 덕분에 나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으윽, 이녀석들이!!" 내가 눈을 가리지 않은 나머지 손을 치켜 올리자 언제 바람이 불었냐는 듯 바람이 잠잠해지자 그 틈을 타 알렌이 몸을 날려 내 심장에 검을 꽂았다. 그 검은 검의 손잡이가 황금이 입혀졌으며 고목에 휘감긴 덩굴 모양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름답게 가공된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고 은실이 길게 매달려 있었다. 검날은 푸르스름한 빛을 낼 정도로 날카로왔고 검 날의 몸체에는 황금빛으로 고대어가 뭐라고 뭐라고 적혀 있었다. "으윽, 이럴수가... 하지만 이정도 쯤이야..." 검을 심장에 꽃은채로 (실은 겨드랑이에 끼운거다) 내가 중얼거리자 알렌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이것은 하이엘프 마을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성한 검이다. 네녀석 정도는 거뜬히 죽일 수 있다고!!" 그러면서 그가 검을 더욱 깊숙히 박자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마지막 대사를 읇었다. "으윽, 분하다.... 내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생을 마감해야 하다니....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그리고 펑 하는 효과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마자 나는 공간이동으로 살짝 그 자리를 벗어났고 알렌의 앞에는 미리 준비해놓았던 내가 입고있는 옷과 똑같은 옷 한벌과 검은 재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와함께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의 마법이 풀렸다. "공주우우우우~~~!!" "알레에에에엔~~~~!!" 공주와 알렌이 멋드러지게 포옹하자 홀에 있던 사람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그리고 알렌의 멋진 대사 한마디!! "자, 여러분 마왕이 죽었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그들이 요새 밖으로 나오자 저주에 걸려있던 사람들이 원상태로 돌아간 채로 기다리고 있었고 그런 그들과 만나 감격의 재회를 한 이들은 왁작지껄하게 왕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쯔음 류미르가 알렌에게 멋들어진 작별인사를 하고 알렌이 들고있던 검을 받아 그들과 헤어질 것이었다. 우리의 작전대로 잘 된 걸보며 싱글싱글 웃던 내가 침실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세이몬이 아직도 창백한채로 누워 있었다. 놀란 내가 그에게 달려가 회복 마법이라도 걸어주려 했지만 그의 몸 주위를 아까의 그 암흑보다도 더 어두운 검은 기류가 감싸고 있어 나는 그의 몸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 제 책 4권이 나왔습니당. 어째 좀 늦은 감이 있지만서도 제가 4권 분량을 전혀 안 지웠더군요. 공지도 안해놓고 해서리 오늘 이렇게 공지를 하고 낼 쯤 지우렴니다. 퍼가시는 분들도 4권 분량 지워주셔요 ^^ 번 호 : 16838 / 16867 등록일 : 2001년 02월 13일 21:42 등록자 : LODEMP 조 회 : 31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8화 헤어짐 (1) 제 28화 헤어짐. 세이몬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너무 안좋아 보였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더 창백해 졌으며 아까까지만 해도 그의 콧등과 이마에 살짝 맺혀있기만 했던 식은땀은 너무많이 나와서 이제는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서는 검디 검은 기류가 계속해서 흘러나와 그의 몸 주위를 감싸고 돌고 있어서 나는 함부로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고만 있었다. 잠시 후에 류미르가 돌아왔을때에는 세이몬의 몸에서 나온 기류가 더 많아진 상태로 이제는 세이몬의 몸이 검은 기류에 휩싸여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린,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도 모르겠어. 방에 오니까 세이몬이 이런 꼴이야. 저 검은 기류때문에 다가가지도 못하겠어."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해?" "하지만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저 검은 기류가 나에게 타격을 준단 말야. 처음에 멋모르고 다가갔다가 튕겨 나왔는걸." "가만있어봐, 내가 어떻게 좀 해볼께." 류미르는 조심스런 몸짓으로 가만 가만 세이몬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검은 기류에 닿기도 전에 그의 몸은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하여 뒤로 물러나왔다. "윽, 이게 어떻게 된거지?" "모르겠어. 그냥 내 마력으로 한번 부딧혀 볼까?" "그러다가 세이몬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대로 그냥 두는것도 위험하잖아. 차라리 죽이되든 밥이되든..." "안돼. 멋도 모르고 달려들다간 세이몬은 물론 너도 위험해지면 어떻게 해. 그리고 이건 세이몬의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 "그건 나도 알아. 하도 답답하니 한 소리지." "차라리 여기서 치유 마법을 써보는 건 어떨까? 넌 좀 떨어진 거리에서도 가능하지 않아?" "아, 그래.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놀라지만 말고 빨리 해봐." "그래, 잠만 기둘려. 나 그 주문은 못 외웠단 말이야." 나는 허겁지겁 내 베낭에서 마법의 책을 꺼내 들었다. 류미르가 말하는 마법이란 것은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환자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마법사가 치유의 마력을 담은 구를 형성하여 환자에게 보내 몸을 치유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무척 고난위의 마법이고 또한 그동안 필요성을 한번도 못 느껴 나는 익히지도 않은 상태에다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마법이었다. "아, 여깄다. 좋아, 기달려봐."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마력을 모으면서 세이몬을 바라보고 내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치유의 구슬이여!!" 내 손 끝에서 마력의 붉은 오라가 피어오르더니 그것은 곳 뭉쳐서 배구공만한 하나의 구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력이 잠시 요동을 치더니 초록빛이 나는 투명한 구가 되었다. 그 치유의 구슬은 나의 손짓에 의하여 세이몬을 향해 날아갔다. 류미르와 나는 제발 효과가 있기를 간절히 빌면서 긴장된 눈으로 그 구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구슬은 검은 기류와 닿자마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버려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다냐..." 나는 너무 황당하여 저절로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세이몬을 감싸고 도는 검은 기류만 바라보았다. 이제 그 검은 기류는 더욱 더 커져 방 높이의 절반정도나 되었다. "이제 어쩌지?" 류미르가 낙담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냐? 마족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데다 이런일은 처음 당하니..." 그때였다. 갑자기 검은 기류 속에서 세이몬의 고통스런 비명이 울려퍼졌다. "으아아악~~" 그리고 세이몬의 비명과 함께 검은 기류들이 약간 압축되었다. 그러나 세이몬의 비명에 놀라 기류들이 압축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세이몬에게로 달려가려고 한 나를 류미르가 강하게 붙들더니 다짜고짜로 창문을 향해 돌진함과 동시에 허공으로 날아올라 전속력으로 요새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의 재빠른 행동도 늦었는 듯 잠시후 커다란 폭음과 함께 요새가 폭발하면서 생긴 강풍에 휩싸여 우리는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많은 낙하물이 우리를 향해 쏟아져 내렸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한 류미르와 나는 고스란히 그 낙하물을 몸으로 받아내고야 말았다. 높은데서 떨어져 머리가 어질어질한데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흙먼지와 돌맹이들을 고스란히 받아낸 나는 온 몸에서 호소하는 통증 때문에 한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도 우리는 요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를 덮친 낙하물들은 그리 크지않은 돌맹이들과 흙먼지들 뿐이어서 가벼운 멍과 찰과상밖에 생기지 않았다. "아야야야~~, 이게 왠 날벼락이람..." 인상을 있는대로 찡그리며 허리를 집고 일어난 나는 내 눈에 뜨인 전에는 없었던 모습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나..." "아이고... 죽겠다..." 다행히 류미르도 다른 곳으로 튕겨나가지 않은데다 별로 다치진 않았는지 곧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듯 했지만 나는 그를 살펴보는 대신 소리를 질렀다. "류미르, 저것좀 봐. 어서, 빨리!!" "응? 뭘~, 오 맙소사..." 우리의 눈앞에는 아까의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임을 과시하는 듯 요새의 크기만큼 커져버린 검은 기류의 소용돌이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저게, 저게 다 세이몬의 몸에서 나온거야?"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류미르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세상에... 세이몬은 괜찮을까?" "나라도 저렇게 마력을 흘리면 죽을걸..." "그럼 그녀석은?" "나도 모르지. 내가 마족이 아니니까. 하지만 분명한건 녀석의 상태가 좋을리는 없다는 거야." "이제 어쩌지?" 류미르가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세이몬에 대한 걱정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건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내가 해결하겠어." 내가 굳은 의지로 말하자 류미르의 표정이 약간 밝아진 것 같았다. "방법이 있는거야?" "해결될지 안될지는 몰라. 하지만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있지. 그럼 나좀 어디 갔다올께, 잠만 기둘려!" 류미르는 내가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오려 한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빨리 갔다와라." 나는 류미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배웅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며 공간이동을 시도했다. "이동!!" 번 호 : 16887 / 16895 등록일 : 2001년 02월 14일 22:19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8화 헤어짐 (2) 내가 간 곳은 할머니의 레어였다. 급하게 할머니 레어 안으로 뛰어 들어가니 할머니는 내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채셨는듯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채로 나를 맞으셨다. "어서 오너라, 아린아. 여행하면서 가끔 찾아 오더니 요즘 통 안오더구나." "할머니, 할머니, 저 큰일 났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원, 녀석두... 숨넘어가겠다.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해야 할미가 도와주든 하지." "저와 같이좀 가주세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제가 모르는 상황이라 설명을 못드리겠어요." "그래, 그래. 알았다." 할머니와 함께 류미르가 있는 곳으로 도착한 나는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과 좀 달라진 장면을 목격했다. 우선은 세이몬이 원인인듯한 커다란 검은 기류는 전보다 더욱 더 커져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요새 공터 주위의 나무들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어서 요새의 한 두배정도 되어 공터까지 다 차지하고 있는 검은 기류 덩어리의 절반정도의 크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가 없는 곳에는 흙 기둥이 높이 솟아있었고 나무와 흙 기둥 바로 앞에는 바람과 물이 뒤석여 검은 기류가 나무와 흙기둥에 닿지 않도록 장막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비정상적인 환경의 원인인듯한 바람과, 물과 땅의 상급 정령들이 둥둥 떠서 심각한 표정으로 장막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류미르? 저거 네가 그런거야?" "아, 아린 어서와. 기류가 자꾸 커지면서 모든걸 다 집어삼키려고 하잖아. 그래서 내가 할수 있는데까진 막아봤어. 그런데 옆에분은 누구?" "울 할머니셔. 도움을 받으려고 모시고 왔어." 내 할머니라면 고룡이 분명했기에 류미르는 할머니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위대한 종족중 한 분이시여, 저는 아린의 동료인 하이엘프 류미르 홀데인 홀리브렌드라고 합니다." "그래, 만나서 반갑군. 그런데 자네 뒤에있는 자들은 누군가? 대단한 마나를 가지고 있는데?" 할머니 말에 류미르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고 나도 눈이 둥그래졌다. 류미르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후 허공이 약간 흔들리면서 네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세이몬과 같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마치 형제처럼 얼굴도 서로 닮은 사람들이었다. "보아하니 마족 같은데? 내 평생에 만난 마족들보다 더 많은 숫자로군..." 할머니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무슨일이 일어날 지 몰라 대비하고 계시는 듯 했다. 그리고 그들도 할머니의 눈빛을 대하자마자 눈초리들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모두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각각 검은색, 녹색, 파란색, 그리고 흰색으로 모두의 로브색이 달랐다. 그러나 그 모든 로브가 무척 고급스러운 옷감이며 단 끝에는 황금색 실로 어떤 무늬의 수가 놓여져 있었다. "대단하군,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데 알아채다니... 과연 드래곤." 그들 중 검은 로브를 입고 허리까지 긴 검은 머리를 가진 마족이 입을 열었다. 할머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그들의 입도 모두 한일자로 다물어지자 류미르와 내가 재빨리 나섰다. "혹시 아벨리아 마족이십니까?" "세이몬 카르테일 아벨리아를 데릴러 온?" 그러자 파란 로브를 입고 등 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파란 리본으로 하나로 묶은 마족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세이몬 카르테일 아벨리아?" 그 순간 류미르와 나는 얼빵해져서 서로 마주보았다. "이름 맞지?" "응, 그럼 우리가 잘 못 짚었나?" "하지만 세이몬과 같은 머리칼과 눈동자색인데..." "어쩌면 다른 마족일수도..." 그러자 그 파란 로브의 마족이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집으며 말했다. "우리가 아벨리아 마족이고 세이 녀석을 잡으러 온 건 맞아. 그런데 세이몬 카르테일 아벨리아라니?" "어? 아닌가요? 하지만 세이몬이 자기 이름이라고 가르쳐준건데..." 내가 당황하면서 대꾸하자 검은 로브의 마족이 끄응 하면서 설명해줬다. "우리 마족은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는 정식 이름을 가질수가 없지. 아마 그 녀석은 우리가 자신의 이름을 정하는 걸 옅들은 모양이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여간 녀석은 아벨리아의 골치덩이군. 성년식도 아직 치르지 못했는데 정식 이름을 까발리고 다니다니..." "게다가 성년식이 두려워서 도망친 주제에..." 마족들이 다 한마디씩 입을 열었는데 우리는 맨 마지막, 흰 로브를 입은 마족의 말에 벙 쪘다. "성년식이 두려워서 도망쳤다고요?" 그러자 마족들이 다시 의아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그러지? 몰랐다고 하기에는 반응이 좀 이상한걸?" "아뇨, 세이몬이 말하기를 같은 마족의 어른들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죽이려고 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도망쳤다고..." 류미르가 더듬 더듬 말하자 마족들의 인상들이 다시 찌그러졌다. "어휴, 골치야..." "마족들의 망신을 다 시키는구만..." "이노무시키, 어디 두고보자." 그러나 마지막의 검은 로브를 입은 마족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틀린말도 아니지. 성년식을 치르다가 죽는 마족도 부지기수니..." "하지만 그렇다고 무서워서 도망을 가요? 이건 우리 아벨리아 마족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요!!" 녹색의 로브 마족이 격렬하게 침을 튀겨가며 항의했지만 검은 로브의 마족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때 할머니께서 나서셨다. "그럼, 저 소동을 일으킨게 당신들의 후손이란 말이군? 그럼 당신들이 빨리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장벽이 무너지려고 하는데말야." 할머니의 말에 류미르가 새파랗게 질려서 그 쪽을 돌아보았다. 할머니의 말대로 검은 기류의 팽창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던 물과 바람의 장벽은 곧 찟어질 것 만 같이 부풀어 올랐고 위에 있던 상급 정령들은 힘에겨운 표정으로 겨우 겨우 버티고 있었다. "이런..." 류미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족들을 돌아보자 흰색 로브의 마족이 나섰다. "내가 장벽을 칠테니 정령들을 물러나게 해라." 그가 말을 끝내면서 한 손을 치켜올리자 정령들이 쳐 놓은 장벽 바로 앞의 땅에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큰 원이 올라오더니 검은 기운들이 세차게 뻗어 나왔다. 그러나 그 검은 기류는 세이몬이 일으킨것 처럼 무질서하지 않고 흰 로브의 마족이 조종하는 대로 질서 정연하고 날카롭게 움직여 큰 장벽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류미르는 얼른 정령들을 돌려보냈다. 정령들이 사라지자마자 정령들이 만들어내던 장벽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검은 기류가 팽창해 흰 로브의 마족이 만들어낸 장벽과 부딧혔다. "크윽~!!" 그에 대한 충격을 받은 것인지 흰색 로브의 마족이 갑자기 휘청거리며 쓰러지려는 걸 옆에있던 녹색 로브의 마족이 얼른 받았다. "이런, 헤리어트... 괜찮은가?" "허억~!! 이렇게... 강할줄이야... 저 혼자서는 좀 힘들겠군요." 흰 로브의 마족은 녹색 로브의 마족에게 기대어 겨우겨우 버티었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입가에서는 한줄기 핏줄기가 흘렀다. "안돼겠다. 코테라, 네가 좀 도와다오." 녹색 로브의 마족이 파란 로브의 마족을 향해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부터 형성된 검은 기류들이 흰 로브의 마족이 만들어낸 검은 장벽으로 날아가 검은 장벽을 칭칭 휘감으며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흰 로브 마족의 얼굴에 약간 혈색이 돌아왔다. 그는 녹색 로브에게 기대었던 몸을 똑바로 세우며 자신의 입가에 흐른 피를 소매로 스윽 닦았다. "제가 너무 얕봤군요. 힘이 멋대로 날뛴다고는 하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검은 로브의 마족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길들인 말보다야 야생마가 더 격렬한 법이지."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된 것 같자 얌전히 서 있던 내가 슬그머니 나섰다. "저기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혹시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자 검은 로브의 마족이 나를 돌아보더니 되물어왔다. "혹시 그 녀석이 저기 보이는 것 같은 기운을 썼는가?" "아, 예. 약간이면 괜찮을거라고 하면서 검은 기운을 사용했어요. 그건 이제껏 세이몬이 써 온 기류보다 더욱 더 어두운 기류였는데, 그게 왜..." "쉽게 설명한다면... 마족은 태어날때부터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 하지만 그 힘이 너무 강해 태어나자마자 그 힘을 썼다간 육체가 힘을 지탱하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말거다. 그렇기에 태어날때 힘과 그 힘을 봉인하는 결계를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그 결계는 성년식을 치룰때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점점 약해지지. 우리 아벨리아 마족의 성년식이란, 힘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는 결계 안에서 힘을 개방시키는 거다. 그래서 그 힘을 자신의 의지로 다스려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성인이 되는거지." "그렇게 하지 못하면요?" 류미르가 불안한 얼굴로 묻자 마족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결계 안에서 힘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죽는거지." "그럼 저기 세이몬은?" "녀석은 성년식을 치룰때가 다가와서 결계가 약해진데다 자신이 일부러 그 힘을 꺼내어 썼기 때문에 결계가 완전히 부서진거야. 하필 힘을 막아주는 우리 마족의 결계 안에서 힘이 개방된게 아니기때문에 더욱 더 심하게 날뛰는 것 같군." "그럼 이제 어쩌죠?" "어쩌긴, 기다려야지. 저녀석이 힘을 다스려 자신의 힘으로 만들던지 아님 죽던지 할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할머니..." 내가 울상인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자 할머니가 날 꼭 끌어안아 주셨다. "어쩔수 없잖니. 이건 그 애가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세이몬이 그 힘을 쓴건 제탓이란 말예요. 제가 쓰라고 했거든요." "그 힘을 쓰려는 결정은 그애가 한거겠지. 네가 만약 그 힘이 어떤건지 알았으면 쓰라고 했을까?" "아뇨." "거 보렴. 이건 그애의 선택이야. 우린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어요." ===================================================================== 아린 이야기 4권 분량을 오늘 삭제합니다 "제 24화 아버지를 만나다 " 까지예요. 퍼가시는 분들도 지워주세요 ^^ 번 호 : 16839 / 16854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22:35 등록자 : LODEMP 조 회 : 307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8화 헤어짐 (3) "히잉~~" 나는 애절한 눈으로 할머니의 소매를 꼭 잡고 할머니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할머니가 피식 웃으시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셨다. "그래, 그래, 알았다. 이 일이 해결될 때 까지 같이 있어주마." "정말요?" "그래, 그게 네가 원하는게 아니더냐?" "헤헤헤~ 할머니, 사랑해요." 나는 실실 웃으면서 할머니 품에 쏙 안겼다. 정말 오랜만에 안겨보는 할머니 품이었다. "원, 녀석두..." 그때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품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살펴보니 류미르가 약간 부러운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며 주먹진 오른손을 살짝 입술에 대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다시 헛기침을 하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척 하더니 마족들에게로 다가갔다. "궁금한게 있습니다. 보통 당신들의 성년식은 언제쯤 끝납니까? 세이몬이 저렇게 된지 이제 거의 반나절이 다되어가는데..." 그러자 검은 로브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글쎄... 보통 결계 안으로 들어간뒤 하루쯤 지나면 나왔지, 늦어도 이틀 안에는 나온다면 사는거야." "그럼 그 후에라도 안 나오면..." "힘을 제어하지 못한거지. 그렇게 된다면 결계 안에서 온 몸이 터져 죽게될거댜." "하아~" 류미르는 걱정스런 눈으로 세이몬이 있는, 소용돌이치고 있는 검은 기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무슨 생각인지 바람과 땅의 중급 정령들을 불러내었다. "너희들은 이 숲에 아무도 못들어오게 막아주길 바래. 혹시 들어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두 중급 정령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람의 정령은 허공에서 스르르 사라졌고 땅의 정령은 땅 속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자, 그럼 기다리는 일만 남았나?" 세이몬을 데리러 온 네명의 마족들은 두 명씩 나누어 계속 세이몬에 의한 소용돌이치는 검은 기류가 더이상 퍼지지 않도록 막을 형성했다. 두 명이 몇시간을 버티다 힘들어하면 다른 두 사람과 교대하는 식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계속 버티어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세이몬에대한 걱정은 요만큼도 보이지 않았고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가끔 자기네끼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류미르와 나는 그 근처에 있는 공터를 찾아내어 모닥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며 차를 한잔씩 만들어 돌렸다. 그러자 모든 이들이 자연스레 모닥불가로 모여들었지만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으므로 모닥불가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할머니가 그 침묵을 깨셨다. "그래, 아린아. 그 동안 여행은 어땠니? 지금 시간도 있으니 얘기나 해주지 않으련?" "그럴까요? 음, 제가 언제 할머니를 뵙고 안 뵈었었죠?" "글쎄다... 아마 겨울이 되기 전이 아니었을까?" "헤에, 그럼 제가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를 얻었다는 건 모르시겠군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 호오, 그 유명한 목걸이를 손에 넣었단 말이니?" "예, 이로써 저한테는 세계 3대 목걸이중 2개가 들어왔지 뭐예요." "그래, 어떻게 얻게 되었지?" 나는 약간 들뜬 기분으로 할머니께 그레놀리 영지에 갔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족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가끔가다 류미르가 끼어들어서 뭐라고 하긴 했지만 내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그때만큼은 세이몬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레놀리 공작이 죽은 대목을 이야기할 때는 풀이 약간 죽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 느꼈었던 우울한것 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져 우리는 잠을 청했지만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보니 류미르의 눈이 벌건게 그도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세이몬을 둘러싼 검은 기류는 여전히 강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굳건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전한걸... 전혀 줄어든 기미가 안 보여." "그래도 아직 하루가 남았으니까..." "괜찮겠지?" "그러길 바래야지..." 류미르와 나는 걱정스런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걸 그나 나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세이몬에 대한 이야기는 곧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간간히 강하게 요동을 치는 검은 기류를 바라보면서 제발 저 기류가 무사히 세이몬의 몸에 흡수되길 바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바람을 무시하는 듯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음에도 검은 기류의 위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세이몬이 무사히 돌아올 거라는 희망이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걸까?" "글쎄... 녀석은 워낙 느림보라서 말야. 지금도 늦장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럴까?" "나도 모르겠어." "그래도 아직 시간은 남았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희망을 아예 산산조각 내려는 듯 다음 날 아침이 밝았어도 그 검은 기류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더 활개를 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마족들은 서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흐음, 아무래도..." "힘들겠죠?" "지금까지 계속 저 모양이니..." "녀석의 성격으로 보아 그놈에게는 조금 무리였을지도..."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뜻인지 뻔히 알거면서도 류미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족들에게 외쳤다. 그러자 흰색 로브의 마족이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건가? 지금까지 힘을 흡수하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살아나오기는 힘들꺼라는 말이다." "그럼... 그럼, 세이몬은 어떻게 되는거죠?" "그의 육체가 기류의 요동에 견디지 못하고 파열되고 말겠지. 그렇게 되면 기류도 대기중으로 흩어질거고..." 그러자 침착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흡수하지 못한 육체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어느정도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길어아 반나절 정도?" "그런..." 나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세이몬..." "방법이 없는겁니까? 세이몬이 살아나올 방법이?" 류미르의 마지막 지푸라기도 잡을 듯한 간절한 목소리에 검은 로브의 마족이 고개를 저을뿐이었다. "없다. 이건 우리 마족의 성년식. 혼자힘으로 해내지 못한 자에게는 죽음뿐." 그때였다. 멍하니 세이몬이 들어가있을 검은 기류를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어떤 생각이 번뜻 스쳐지나갔다. "잠깐만요, 저 검은 기류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아직 세이몬이 살아있다는 뜻이죠?" 그러자 흰 로브의 마족이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곧 무표정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좋았어!!"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번 호 : 16921 / 16931 등록일 : 2001년 02월 18일 22:36 등록자 : LODEMP 조 회 : 312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8화 헤어짐 (4)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뭘 하려고 그러니?" 할머니는 내가 부탁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먼저 입을 여셨다. "할머니, 혹시 할머니 능력이라면 저 마족들이 쳐놓은 벽을 뚫고도 날뛰는 마력까지 뚫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할머니는 의아한 얼굴이시면서도 마력의 소용돌이를 주의깊게 살펴 보시더니 신중하게 말씀하셨다. "응? 글쎄다... 힘은 좀 들겠지만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럼요, 저 마력의 소용돌이 안쪽도 저렇게 심하게 마력이 요동치는지 살펴봐 주시겠어요? 바다도 표면에서 아무리 심하게 물결이 치더라도 깊은 쪽은 잔잔하니까 혹시나 해서 드리는 부탁이예요." 할머니는 잠시 잔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더니 곧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알았다. 네가 그렇게 부탁하는거면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 그리고 할머니는 검은 기류들이 서로 부딧히고 있는 모습을 한참동안이나 유심히 관찰하시더니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시고 한쪽 손을 높이 치켜드셨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할머니 몸에서는 너무 붉어서 햇빛처럼 밝게만 느껴지는 빛이 나더니 그 빛이 할머니의 손을 타고 공중으로 길게 뻗어 올라가더니 곧 검은 기류들의 틈새를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할머니는 그 상태로 눈까지 감으시며 집중을 하시더니 잠시 후 눈을 뜨시며 빛을 거두셨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안쪽은 소용돌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아. 그런데 아린아,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그러니?" 할머니의 질문에 나는 실없이 한번 헤죽 웃어 보였다. "저 안으로 들어가려구요." "뭐라구?" 놀란 탄성의 외침은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침 다른 마족과 교대하고 쉬는 흰 로브의 마족 입에서 튀어 나왔다. 그는 크게 떠진 눈과 온통 놀라움이 담긴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지금 뭐라고 그랬지? 저 마력이 요동치는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예, 그럴 생각이예요." 나의 당당한 대답에 그 마족의 얼굴이 험상궃게 일그러졌다. "죽으려면 너 혼자 곱게나 죽어. 네가 저 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되면 우리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텐데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건가?" 그는 할머니를 힐끗 바라보며 격렬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제야 나는 그가 날 걱정해서 놀란게 아니라 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할머니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자신들을 걱정해서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닫고 쓴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할머니도 조용히 입을 여셨다. "왜 그런 생각을 한거니? 아무리 너라도 저 속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한 일이야." "물론 저도 그런 것 쯤은 예상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죽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예요. 그저 제가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잠깐 들어가서 세이몬 좀 만나려구요. 혹시라도 제가 도울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이대로 그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그러자 흰 로브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마라.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건 우리 아벨리아 마족의 성년식.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거다." 나는 그에게 지지않고 대꾸했다. "그건 당신들 사정이구요. 원래 세이몬은 마계로 돌아가 당신들의 결계 안에서 성년식을 치뤄야 정상 아닌가요? 어차피 이렇게 비 정상적으로 성년식을 치룰 바예야 몇가지 더 다른 요소가 작용한다 해도 상관 없잖아요." "흥, 네가 그렇게 해봤자 그에게 도움이 안돼."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판단합니다."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할머니를 돌아봤다. "할머니, 저 다녀 올게요." 그러자 할머니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셨다. "아린아, 너 저기 어떻게 들어가려고 그러니?" "몸에 실드를 두른 채 뚫고 들어가겠어요." "흐음,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저건 순수한 마력의 기운들이란다. 이걸 한 번 보겠니?"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작은 파이어볼 하나를 만들어 검은 기류들 쪽으로 던지셨다. 그러나 그 파이어볼은 기류에 채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산산히 분해되고 말았다. "잘 봤니? 저긴 순수한 마나들이 격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곳이란다. 보통 마법의 마나 배열은 저안에 들어가면 흩어지고 말아. 즉 저 안에서는 마법을 쓸 수가 없단다. 만약 마법이 가능하다면 저 마족들도 마법으로 실드를 쳐서 막고 있지 뭐하러 몇배의 힘을 들여가며 마력의 기운을 직접 발산하여 막고 있겠니?" "그런가요? 그럼 어쩌죠?" 내가 풀이죽은 어조로 묻자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셨다. "네가 저 안에 들어가고 싶다면 네 순수 마력을 배출해내어 너를 감싸는 방어막을 만들어야해.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러자 나는 아르카스해 속을 들어갈 때 할아버지께서 만드셨던 마력의 구가 생각났다. "이렇게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내 몸속의 마나를 피부에 골고루 배치시킨 후 천천히 발산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고개를 흔드셨다. "아니, 아니. 방어막이 생기지 않았잖니. 그건 단지 마력을 발산하는 것 뿐이야. 머리속으로 네 주위에 막이 있는 걸 집중해서 생각해야지." "흐음, 그런가요?"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내 몸 주위에 할아버지가 만드셨던 막이 둘러쳐진 것을 상상하며 천천히 마나를 뿜어냈다. "오, 그래. 방어막이 형성되는 구나. 천천히 눈을 뜨렴. 정신이 흩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할머니의 말씀에 내가 천천히 눈을 뜨자 할아버지가 만드신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얇고 희미한 붉은 빛을 뿜어내긴 했지만 분명히 내 둘레에 막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눈을 뜨면서 정신이 분산되어서 그런지 자꾸 막이 마력으로 화하여 분해되려고 했다. "집중, 집중해야지. 막이 사라지려고 하잖니?" 나는 얼른 막을 뚤어져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마나를 주입시켰다. 그러자 자꾸 희미해져 가던 벽이 차츰차츰 뚜렸해졌다. 그러나 할아버지거와 비교해서 너무 약해보였기에 나는 은근히 걱정되었다. "할머니, 이정도로 저 안에서 견딜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가 만드셨던거보다 너무 형편없는데..." 할머니가 내 말을 듣고 피식 웃으셨다. "저런, 저런. 성룡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고룡과 비교하려 드니? 게다가 저 아이도 이제 막 성년이 되려하는 아이기 때문에 마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데다 제어도 못한 상태라서 마구 날뛰기 때문에 보기에는 저래도 크게 강하지 않으니 네 방어막으로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게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방어막에 신경쓰고 있어서 나는 감으로 방어막을 느낄수 있었으며 계속 마력을 보내주고 있었다. "흐음, 뭐 이정도면 세이몬과 이야기는 해볼 수 있겠네요. 그럼 저 다녀 올게요." 내가 방어막을 유지하면서 공중으로 떠오르려 하자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으로 뛰어나왔다. "잠깐 기다려. 나도 가겠어." 류미르였다. "너 혼자 보낼 수 없어. 게다가 내가 같이 있으면 넌 방어막에 신경 쓸 수 있잖아. 세이몬과는 내가 이야기해볼 테니." 그러자 할머니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네가 좀 힘들겠지만 그게 좋겠구나. 그리고 내가 길을 뚫어줄테니 그렇게 부담되지는 않을거다. 할미가 버티기 힘들때 쯤 너에게 텔레파시를 보낼테니 그때 나오거라." "그럴께요." 나는 방어막을 해체하고 다시 류미르와 나를 감싼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라 검은 기류의 소용돌이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곧 할머니께서도 다시 빛줄기를 형성하셔서 요동치는 검은 기류의 틈새를 뚫더니 내가 형성한 방어벽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을 벌려놓으셨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할머니의 용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천천히 그 구멍속으로 들어갔다. ===================================================================== 제가 독감에 걸려서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코가 맹맹한 상태에 있답니다. 추운 날씨에 하도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더니 온 몸에 열이 오르며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답니다. 요즘 감기는 무지 독해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는데... 여러분은 감기 조심하세요. 번 호 : 17041 / 17060 등록일 : 2001년 02월 20일 21:36 등록자 : LODEMP 조 회 : 293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8화 헤어짐 (5) 안은 깜깜했다. 조금의 빛 조차 존재하지 않아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단지 내가 형성한 막에서만 약간의 붉은 빛이 흘러나와 류미르의 얼굴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이 안의 마력의 흐름은 바깥에서 보던 것 처럼 소용돌이 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내가 형성한 막으로도 버틸 수 있었지만 약간이라도 강한 기운이 파도처럼 닥쳐오면 막이 흔들려 나는 잔뜩 긴장하고 어서빨리 세이몬을 찾기 위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냐? 한치 앞도 안보이잖아?" 류미르도 잔뜩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낮았다. "야, 말걸지 마라. 나 막 유지하는 것만해도 머리아프니까 세이몬이나 찾으면 말해." "아, 그러냐? 미안." 류미르는 나의 냉정한 말에 풀이죽어 대답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잠시후에 또 입을 열었다. "세이몬은 중심쪽에 있겠지?" "그렇겠지. 지금 마력이 흘러나오는 쪽으로 가고 있는거야." "으응..." 류미르는 내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답하자 다시 풀이죽었다. 그러나 잠시후... "아린, 괜찮아? 힘들지는 않고?" 나는 이마에 힘줄 하나가 솟는것이 느껴졌다. '이노마가 와이러노? 막 유지하느라 신경쓰여 죽겠구만...' "네가 말 걸지 않으면 괜찮으니까 걱정 마." "아, 그래..." 나는 류미르가 자꾸 말을 거는데 너무 차갑게 대하는게 아닌가 해서 약간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여기서 내가 까딱 잘못했다간 류미르나 나나 위험하기 때문에 애써 그런 감정을 억눌렀다. 그런데... "앗, 아린!!" 류미르의 부름에 나는 화가나서 이번에는 따끔하게 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왜? 너 이번에도 아무일 아니면..." 그러나 류미르는 내가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막으로 바싹 다가서며 어느 한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기 뭔가가 있어." 류미르가 가르킨 쪽을 바라보니 멀지않은 곳에 희미한 빛을 내는 물체가 있었다. 그동안 막을 유지하며 흐름을 거슬러올라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주위를 살피는 것을 잠깐 잊어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기다려봐, 가까이 가볼께." 내가 막을 조정하여 그 물체를 향해 조심스레 가까이다가갔다. 그것은 희미한 빛을 내는 어둡지만 얇고 투명해서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막에 둘러쌓인 세이몬이었다. 마치 태아처럼 잔뜩 웅크리고 앉아서 무릎위에 올린 팔 안에 얼굴을 감싸고 있었는데 옷을 어쨌는지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이런, 옷을 어쩐거야?" 그가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당황스럽고 민망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젠장, 혼자 중얼거리지만 말고 세이몬 좀 깨워봐." "그래, 그래. 조금만 더 가까이 가봐." 내가 류미르의 주문대로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가자 류미르가 막에 바짝 붙은 상태로 소리쳤다. "세이모온~, 세이몬~~, 눈 좀 떠봐. 우리가 왔어." 나는 세이몬을 보고 있지 않았기때문에 그가 류미르의 부름에 응답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됐어? 일어났어?" "아니, 꼼짝도 안하는데?" "응? 네 소리가 안들리나?" "그런것 같아. 아무래도 바깥은 마력들로 꽉 차서 내 소리가 세이몬에게까지 들린다고 장담은 못하겠는데?" "아, 글쿠나. 그걸 생각 못했네. 같은 용족이라면 말이라도 걸어볼 수 있겠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이몬을 바라보았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다 그의 길다란 머리카락이 몸의 절반은 가려주고 있어서 처음의 그런 민망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류미르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호오, 이제는 볼만 한가보지?" "죽고잡냐?" 나는 류미르를 한번 흘겨봐주고는 다시 세이몬을 바라보며 소리쳐봤다. "야아아~~!! 세이모오오오오온~~~~!! 내 말이 안들려어어어~~?"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세이몬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 옆에서 즉각 반응이 일어났다. "우왓!! 아린, 말이나 하고 소리칠 것이지, 귀청 떨어질 뻔 했잖아!" 류미르는 깜짝 놀라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귀를 감쌌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를 싹 무시하고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안들리나보네... 어떻게하지?" "아린, 너 정말 이럴 수 있냐?" "시끄러. 가만히 좀 있어봐."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세이몬의 막에 내가 형성한 막을 가져다 대었다. 아무래도 그의 기운과 내 기운이 다르다보니 뭔가 자극이 생겨 세이몬을 깨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차하면 뒤로 물러날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막을 접근시키자 류미르도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거리차가 점차 좁아지면서 세이몬의 막이 내 막을 거부하는 듯 내 막에 어떤 울림이 전달되어 왔다. 그러나 그리 심한것은 아니었기때문에 물러나지 않고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막을 가져다대었다. 완전히 세이몬의 막과 내 막이 맞다았을때 나는 스파크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을 까 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려와 나는 화득짝 놀라며 얼른 막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왁!!" "아이고 깜짝이야. 왜 그러는 거야?" 류미르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니, 무슨 소리가 들렸잖아. 넌 못 들었어?" "소리? 무슨 소리? 난 네 비명 밖에 못 들었는데?" "뭐? 분명히 무슨 소리가 났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났어." 혹시 세이몬은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지 몰라 얼른 그를 돌아봤으나 그는 여전히 그자세 그대로였다. "그래? 이상하다, 분명히 들은건데..." 류미르도 내 말을 딱 잘라 부정하는데다 내 막에도 별 이상이 없었으므로 나는 다시한번 세이몬에게 다가갔다. 다시한번 막과 막이 맞닿자 또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내 막이 파열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안심하고 세이몬의 막과 맞닿은 채로 류미르를 돌아보았다. "봐봐, 무슨 소리가 들리잖아." 그러나 류미르는 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가 들린다는 거야?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구만." "뭐? 이 소리가 안들려? 봐, 들리잖아 우우웅~~ 하고..." 그러자 류미르는 정색을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린, 난 네가 말하는 그 '소리' 라는 게 들리지 않아. 너만 들린다는 그 소리라는게 혹시 세이몬의 막과 닿아서 생기는 진동 같은게 아닐까? 이 막은 네가 형성하는 거니 너만 들리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때였다. 나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들었다. [....어 ....가 ....... 줘어...... 제발.....] "잠깐만, 어떤 말소리가 들려." 나는 류미르를 조용히 시킨 후 그 말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하여 정신을 집중했다. 그 말소리는 세이몬의 막과 내 막이 맞닿아 울리는 진동소리 가운데 간간히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서워.... 싫어..... 벗어나고 싶어..... 제발....] 두려움에 떠는 가날픈 목소리.... 나는 너무놀라 집중하고 있느라 감고있던 눈을 번쩍 떠 아직도 웅크린채 아무런 미동도 하고있지 않은 세이몬을 바라보았다. "세이몬이야..." 제 목 [펌/천리안]아린 이야기 28-6 올 린 ID amca 작 성 시 각 2001/2/22 이 름 이상근 조 회 수 120 ┌───────────────────────────────────┐ │ ▶ 번 호 : 17158/17197 ▶ 등록자 : LODEMP │ │ ▶ 등록일 : 2001년 02월 22일 23:32 │ │ ▶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8화 헤어짐 (6) │ └───────────────────────────────────┘ 류미르는 놀라움과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몬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세이몬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하여 막에 귀를 가져다 댄 상태로 류미르의 말에 대꾸했다. "세이몬의 목소리가 들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막과 막이 서로 닿아서 세이몬의 말소리가 전해졌나봐. 가만있어봐, 들리는 말을 전해줄께." 류미르는 내 말을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세이몬의 말을 듣기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와달래..... 여기에 있는게 싫다는데? 흐음... 무섭다고도 하네, 싫다고도 하고... 이녀석 엄청 무서운가봐, 목소리가 무지 가냘픈데다 엄청 떨고 있어." 나는 세이몬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싶지 않아 막으로 부터 귀를 떨어뜨렸다. "참내, 무서우면 이 곳을 나올 것이지 왜 이러고 있는건지 원..." 내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류미르가 대꾸했다. "저녀석이 안 나오고 싶어서 저러고 있겠냐? 나올 방법을 모르니까 저러고 있겠지." "그걸 내가 모르냐?" 류미르의 한심하다는 말투에 내가 발끈했지만 류미르는 그런 내 반응을 싸악 무시한 채 혼자 심각해서는 중얼거렸다. "우선은 저녀석을 깨워야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냥 머리를 한대 치는 건 어때?" "아, 그래 그게 좋겠다." "뭐시라?"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류미르의 태도에 삐져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대답했는데 류미르가 반색을 하자 오히려 내가 놀랬다. 그러나 류미르는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세이몬과 나의 막이 맞닿은 부분쪽으로 다가가면서 대꾸했다. "좋은 방법이라고, 어차피 여기서 우리가 소리를 질러봤자 세이몬에게는 들리지 않으니 직접적인 수단을 써야지." "야, 너 그거 진심을 하는 소리야?" 내가 너무나 당황해서 목소리까지 떨면서 묻자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진심이야." 그는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리더니 세이몬과 내 막이 맞닿은 부분 중간정도쯤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곧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이를 앙다물고 손으로 막을 뚫었다. "야, 너 무슨 짓이야?" 내가 너무 놀라 소리치자 류미르가 다른 손을 들어 휘휘 내저어 보였다. "시끄러, 정신 사납단 말야." 류미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고 그 일이 그에게 버겹다는 것을 나타내주듯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리고 류미르가 막을 뚫고있는 손 주위에는 세이몬의 막과 내 막의 반발력에 의하여 전류같은 빛이 찌릿 찌릿 흘렀다. 자세히 보면 류미르의 손을 감싸고 있는 희미한 녹색의 빛을 볼 수 있었는데 아마도 류미르 자신의 마력을 손에만 집중시켜 그 힘으로 세이몬과 내 막을 뚫는 듯 했다. 나는 이제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잔뜩 긴장한 채로 류미르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류미르의 손은 아주 아주 힘겨워 보였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고 이제는 세이몬의 막까지 다 뚫고 들어가더니 완전히 뚫어버렸다. 류미르는 거기까지 이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향해 승리의 표정으로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더니 팔을 더 집어넣어 세이몬의 머리쪽으로 손을 옮기더니 다짜고짜 세이몬의 드러난 귀를 휘어잡고는 세게 잡아다녔다. "우악, 무슨 짓이야?" 옆에있던 내가 놀라서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자 류미르가 뭐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짓이긴, 이정도는 해야 이녀석이 정신을 차리지." 그는 한번 더 귀를 강하게 비틀어준 뒤 급하게 손을 빼내었다. 그의 손이 내 막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다른 한손으로 그 손을 부여잡았다. "아이고, 불쌍한 내 손... 친구 잘못 만나서 이게 왠 고생이냐..." "괜찮아?" "너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류미르가 나에게 들어보인 손은 팔뚝까지 새빨갛게 된 채 퉁퉁 부어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손에 부담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치유 마법이라도 써주랴?"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류미르가 피식 웃었다. "이 안에서는 마법을 쓸 수가 없잖아." "아, 참. 그렇지..."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류미르의 얼굴을 피해 세이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세이몬이 약간 움직인 것이 보였다. "야, 야, 류미르, 저걸 봐. 세이몬이 움직인 것 같아." "뭐? 정말?" 류미르가 놀라 세이몬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찰나 그의 팔이 제일먼저 꿈틀 꿈틀 하더니 연이어 그의 어깨가 파르르 떨려왔다. "음하하하, 역시... 내가 이 고생을 했는데 효과가 없을 리 없지." 류미르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외치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 들으며 계속 세이몬을 주시하고 있자 그의 머리가 움찔 하더니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곧 감겼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오, 떴다. 떴어..." 류미르와 나는 숨죽여 세이몬이 우리를 바라보길 기다렸다. 세이몬은 눈을 완전히 뜨자 촛점을 맞추려는 듯 몇번 깜빡 거리더니 곧이어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환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려 손을 뻗었지만 그의 막과 내 막이 가로막고 있어 다가올 수 없자 울상이 되었다. [아린.... 이게 어떻게 된거야?] 그는 울먹이면서 말했지만 나에게는 겨우 희미하게 들렸을 뿐이고 류미르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쟤가 뭐래?" "어떻게 된거냐고 묻는데?" "참내, 누가 이렇게 만든건데..." 나는 세이몬과 말을 나누기 위하여 (아무래도 그와 나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것 같으니까) 막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입을 열었다. "세이몬, 내말 들려?" [응, 아주 작지만 들려.] "이 곳이 어딘지 알겠어?" [몰라, 일어나보니까 이상한 곳이잖아.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여긴 네 마력 안이야. 그러니까 이 바깥은 네 마력이 요동치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햇빛을 가리고 있는게 다 네 마력 덩어리라고. 이걸 빨리 네가 집어넣어야 우리가 햇빛을 볼 수 있다 이거야." [그럼... 혹시 내 결계가 무너진건....] "바로 그거야. 네 결계가 무너진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고. 우리는 그동안 바깥에서 널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가 나오지 않아 걱정이 되어서 들어온거야." [뭐? 어떻게 여길?] "보면 모르냐? 마력으로 뚫고 들어왔지." 그런데 그때였다. 야속하게도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린아, 이제 나오렴. 이제 한계가 되었구나.] "이런, 할머니가 빨리 나오래. 그럼 우리 갈테니까 너 빨리 이 힘을 흡수하고 나와, 알았지?" [잠깐만, 아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난 무섭단 말야.] "괜찮아, 세이몬. 넌 고위 마족인 아벨리아 족이잖아? 할 수 있을테니까 너무 걱정마. 우린 바깥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께, 알았지?" [하지만...] "시간이 없어, 세이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 그리고 류미르와 내가 목숨을 걸고 널 돕기위해 여기 들어온 걸 기억해. 우린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힘 내!!" 내 막은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세이몬에게 떨어져 점점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할머니가 끌어당기시는 듯 했다. 점점 멀어지는 세이몬의 표정이 울상인채여서 불안했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 『ⓜⓨ ⓢⓘⓝⓔ』┓ │[なまえ] : Σανγ-γευν Λεε [생일] 1983y09m09w│ ┗『ⓑⓔⓛⓘⓔⓕ … 하면 댄다 …(-_-#)』 ◈┘ 번 호 : 17186 / 17200 등록일 : 2001년 02월 23일 21:46 등록자 : LODEMP 조 회 : 119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8화 헤어짐 (7) 우리가 세이몬의 마력 안에서 나오자마자 할머니가 계속 열어놓고 계셨던 구멍은 다시 막혔고 그러자 예전처럼,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력은 계속 요동을 쳤다. "그래, 잘 됐니?" 내가 땅에 내려오자마자 할머니가 맞으시며 물으셨다. "잘 모르겠어요. 들어가서 세이몬을 만나 깨우긴 했는데 나올때 까지도 불안한 얼굴이어서 잘 될지 모르겠어요." 한숨을 폭 내쉬며 자신없이 대꾸하자 할머니가 손을 올려 머리를 쓱 쓰다듬어주시더니 자신의 품으로 나를 끌어당기셨다. "수고했다. 넌 네가 할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거야. 이제 나머지는 그 애의 몫이지. 넌 그 아이를 믿고 기다리면 될거다." "예, 할머니..." 할머니의 품에 안기자 세이몬과 헤어진 뒤로 계속 안절부절 못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편안해졌다. 이제는 정말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할머니 품에서 빠져나와 나중에 세이몬이 나온다면 제일 먼저 그를 볼 수 있는, 요새가 있던 공터가 다 내려다보이는 약간 솟아오른 언덕에 류미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가 세이몬의 마력 안에서 나온지 약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마력의 덩어리는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석 혹시 무섭다고 또 질질 짜고 있는 건 아닐까?" 류미르가 세이몬의 마력 덩어리를 향해 돌맹이 하나를 휙 던지면서 아무런 의미없는 질문을 던졌다. 어지간히 초조한가보다. "글쎄... 또 그랬다면 조금있다 나올 때 한대 때려주지 뭐. 그게 네 특기 아니냐?" "하하하, 맞아. 우리가 나간 뒤 질질 짰다고 하기만 하면 이번엔 엉덩이를 한 대 차주고 말겠어." "그래라, 대신 그 뒤에 티격태격할 때 날 끌어들이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에이,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언제 우리가 널 끌어들었냐? 네가 끼어들었지." "아쭈구리,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하하하하..." 류미르는 크게 한바탕 웃더니 점차 그의 웃음소리가 잦아들면서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아린." "왜? 갑자기 왠 심각 모드로 변환한거야?" 류미르는 세이몬이 갖혀있는 마력의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힘겹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만약, 만약에 말야..." "시끄러! 만약이란 없어."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하며 뒤로 드러누워 팔베개를 했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봐야 하지 않겠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말이 씨가된다는 말이 있다." 류미르는 마력 덩어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마력 덩어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시선을 돌리자 마자 그가 뭐에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아린!!" 그의 놀란 외침에 나도모르게 벌떡 일어나 마력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 마력 덩어리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크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세이몬의 마력 덩어리가 더이상 팽창되지 않게 막고 있었던 두 명의 아벨리아 마족의 방어막도 이번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마력의 팽창을 막지 못해 당황하자 쉬고 있던 나머지 두 명의 아벨리아 마족들까지 나서서 방어력을 펼쳤다. 덕분에 더 이상의 팽창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예전과는 달리 마력의 흐름이 두배 이상이나 빠르고 격렬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몰라, 어쨌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 "제발 세이몬이 살아나는 쪽이길..." "그래야지." 류미르와 나는 애써 불안감을 억누르며 초조하게 마력의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마력의 덩어리는 점차 강하게 요동을 치더니 다시 한번 급격하게 부풀어 오르다 순간적으로 푹 가라앉았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류미르나 나나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앞에서 마력의 덩어리는 점점 가라앉더니 나중에는 몇개의 커다란 자락을 형성하더니 중심부쪽으로 파고들어갔다. "내려가보자." 류미르의 외침과 동시에 그와 나는 빠른 속도로 아벨리아 마족들과 할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 내려갔다. 아벨리아 마족들은 힘들었었는지 약간 지친 표정으로 송글송글 맺힌 땀들을 닦고 할머니는 침착한 표정으로 마력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어떻게 된걸까요, 할머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마력들이 안전 상태로 돌아가는 듯 해. 아무래도 네 친구가 힘을 흡수하는 것 같구나."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력이 있던 곳에서 강한 빛이 한번 번쩍 하더니 마력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는 아예 폐허가 되어버린 공터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우악!!" "와앗!!" "어머나~" 처음의 비명은 류미르, 그 다음 비명은 나, 그리고 마지막은 할머니의 탄성이었다. 공터에 나타나는 인영은 바로 세이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마력덩어리 안에서 세이몬을 봤을 때 그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는 걸 깜박 잊었던 것이었다. 지금 빛이 사라지고 멀거니 선 상태로 나타난 세이몬은 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류미르가 제일 먼저 놀라서 그에게 뛰어갔고 그 뒤에 내가 놀라며 시선을 돌리자 할머니가 황급히 팔을 내 얼굴 앞으로 올려 눈을 가리셨다. 덕분에 할머니 옷자락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 내가 서 있는데 세이몬의 갑작스런 비명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들이 뛰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우아아아악~~!!" 놀라서 할머니 팔을 치우고 앞을 보니 어느새 벗었는지 맨 상체로 자신의 셔츠만 들고 멀거니 서 있는 류미르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야, 류미르 무슨 일이야?" 류미르는 내 부름에 뒤로 돌아 나에게 걸어오면서 히죽히죽 웃어댔다. "아, 아린... 지금은 네가 여자라는 사실이 참으로 한탄스럽구나...킥킥킥."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황당해져서 중얼거리는데 류미르쪽 말고도 내 뒤쪽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쿡쿡쿡쿡..." 돌아보니 할머니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신 채로 웃고계신 거였다. "할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대답은 류미르가 해주었다. "킥킥킥... 세이몬 녀석 말야... 후후후... 내가 옷을 빌려주려고 뛰어갔는데 쿡쿡쿡... 옷을, 킥, 받기도, 큭, 전에 내 뒤에서 달려오는 아벨리아 마족들을 보고는, 킥킥, 허겁지겁 도망을 갔다니까? 낄낄낄.... 알몸으로 말이야..." 그러더니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배를 부여잡고 낄낄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푸하하하하, 네가 그 모습을 봤어야 하는건데... 낄낄낄..." "앗, 그런 일이 있었단 말야? 아깝다..." 내가 그 장면을 노치고 분해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세이몬의 약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야야야야~~~, 히잉~~~" 그리고 그 뒤에는 아벨리아 마족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시끄럿!!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냣." "이녀석아, 우리 아벨리아 마족 체면을 깎아도 유분수지..." "어휴, 이 골치덩어리 녀석!!" 잠시 후 세이몬은 -흰 로브의 마족이 벗어줬는지 그는 셔츠와 긴 치마바지 차림이었다. - 흰 로브를 걸쳐입고 그 마족에게 귀를 붙잡혀 끌려왔다. "히잉, 아파요... 나주세요..." 그리고 우리 앞에 마족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멈춰섰다. 아마도 마계로 돌아가려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검은 로브의 마족이 앞으로 나섰다. 세이몬에게는 뭔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흰 로브 마족과 파란 로브 마족 사이에 서서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말을 건네지 못했다. "저희는 일이 해결되었기에 이만 돌아가려 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계에 사시는 위대한 종족, 고룡이시여." 그는 한 손을 배에 대고 한 손을 허리에 댄 채로 할머니께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일이 잘 해결되어 나도 기쁘군. 부디 잘 돌아가길 바라네." 할머니도 살짝 고개를 숙여주며 답례했다. "그럼..." 검은 로브 마족은 할머니께 다시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서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 동족을 도와준것 고맙게 생각한다." "뭘요, 친구인데 당연하지요." "후후, 그런가? 그럼." 그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마족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류미르가 소리 높여 외쳤다. "세이몬, 성년이 된것 축하해. 나중에 인간계로 다시 오면 나한테 한 번 놀러 오라고. 하이엘프족의 류미르가 바로 나야!!"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세이몬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빨개져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으응, 꼭 다시 놀러올께. 기다리고 있어." 그는 눈물을 소매로 스윽 훔치며 중얼거리듯 대답했지만 류미르나 나나 귀가 엄청 밝았기에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다음번에는 도망치다가 오지 말고 당당하게 오도록 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래." "응, 이거에 맹세코." 세이몬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왼쪽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목에는 예전에 켈튼 도시에서 구해(?)줬던 황금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어이구, 그건 어떻게 간직하고 있었네? 옷은 다 잃어버렸으면서..."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세이몬이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이건 소중한 거니까. 그리고 이것도 가지고 있었다 뭐..." 그리고 오른손으로 들어 보이는건 세이몬이 처음으로 자신의 무기로 구했던 봉이었다. "참내, 저건 어떻게 사라지지않고 가지고 있었지?" 류미르가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자, 그럼..." 검은 로브의 마족이 허공으로 손을 들어올리자 그의 앞쪽 허공이 스멀스멀 움직이더니 곧이어 검은 커다란 구멍이 뻥 뚤렸다. 아마 마계로 가는 공간 이동 통로일 것이었다. 검은 로브의 마족을 선두로 마족들이 차례 차례로 그 안으로 들어가고 맨 마지막에 세이몬이 우리를 향해 한번 더 손을 흔들어보이고 안으로 들어가자 구멍은 다시 닿혔고 아무것도 없었던 원 상태로 돌아왔다. "가버렸네요..." 그 모습을 보면서 왠지 쓸쓸해진 내가 중얼거리자 할머니께서 대꾸하셨다. "그렇겠지... 우선은 도망치다 잡힌거니까." "가서 큰 벌이나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류미르도 할머니의 뒤를 이어 입을 열자 할머니께서 피식 웃으셨다.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닐텐데, 꼬마?" "예?" 류미르와 내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짖자 할머니가 다시한번 빙긋 웃으셨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 감히 나와 내 손녀를 옅보고 있었던 건 용서해줄테니..." 그러자 우리 곁에 있었던 커다란 나무 위에서 몇몇의 인영들이 뛰어내렸다. "어? 어느새?"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척을 전혀 못 느낀 내가 크게 놀라자 할머니가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셨다. "넌 정신이 하나도 없었잖니. 게다가 하이엘프 족속들이란 숲에서 숨으면 누구도 찾아내기 힘들다고." "하이엘프요?" 할머니말에 또 한번 놀란 내가 얼른 류미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타난 인영들이 누구인지 벌써 알고 있었던 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번 호 : 17275 / 17285 등록일 : 2001년 02월 24일 22:47 등록자 : LODEMP 조 회 : 13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28화 헤어짐 (8) 그는 나타난 인영들이 누구인지 벌써 알고 있었던 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아, 아버지?" '잉? 아버지라고?' 류미르의 말에 놀라 나타난 인영들을 살펴보자 모두 세명이 나타났는데 그들 중 한명은 류미르와 같이 푸른 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20대 초반이나 중반으로 보여서 도저히 류미르만한 아들이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힐끗 류미르를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돌려 할머니쪽으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고룡이시여. 저는 하이 엘프족의 족장 이루크 홀데인 클리브렌드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저 아이가 자네의 핏줄인 것 같은데?" 할머니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하이 엘프족 수장의 얼굴이 더욱 더 굳어졌다. "그렇습니다. 저 녀석이 제 아들입니다. 혹시나 저 녀석이 무슨 실수라도 하지는 않았는지..." "아아, 그런 건 없으니 안심하시게. 그럼 가서 자네의 볼 일을 보시지 그러시나?" "예, 감사합니다." 그는 다시한번 할머니께 허리숙여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차가운 눈길로 류미르를 바라보며 뚜벅 뚜벅 걸어갔다. 그의 서늘한 행동에 질린 류미르가 주춤 주춤 뒷걸음질을 쳤지만 족장과 같이 왔던 하이 엘프 두명이 벌써 류미르의 뒤를 차단하고 있어 곧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주봐야 했다. 따악~!! 수장의 주먹이 치켜 올라가자 곧이어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이 류미르의 머리에 작렬했다. "아야야야~~" 류미르가 많이 아픈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류미르 홀데인 클리브렌드,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넌 족장인 나와 장로의 허락 없이 인간세상으로 나섰으며 그것도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나이에 했다. 그 죄가 얼마나 큰지 알겠지?"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이 냉정하고 극히 사무적인 말투에 류미르가 풀이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예..." "난 널 장로회의 재판에 넘길 생각이다. 내 아들이라고 특혜가 있길 바라지 마라." 그러자 류미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예? 아, 아버지... 그런.... 그건 너무 심하잖아요? 다른 애들은 재판까지는 안 갔다고요." '저런, 류미르같은 애가 또 있었나보군...' 내가 쓴 웃음을 머금고 있을 때 류미르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렸다. "시끄럽다. 네가 족장 아들인 이상 누구보다도 더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겠다." "에? 그런게 어딨어요? 족장 아들이라고 특혜는 하나도 없으면서 불이익은 다 가지게 하다니, 누가 족장 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류미르가 평소 그답지 않게 어린애 같은 태도로 아버지한테 바락바락 대들자 류미르 아버지의 주먹이 다시 치켜 올라갔다. 따악~ "어디서 말대꾸야? 잘못한 주제에..." "우쒸~" 그래도 류미르가 반항적인 눈빛을 누그러뜨리지 않자 다시 류미르의 아버지가 한대 더 때리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래서 나는 류미르가 맞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할머니한테 말을 걸었다. "할머니, 하이엘프들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나봐요. 인간들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경멸하던데... 난 설마 엘프가 그럴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그것도 하.이.엘.프 가요." 할머니는 내 의도를 눈치채셨는지 싱긋 웃으시고는 맞장구쳐 주셨다. "그러게말이다. 하긴 나도 엘프가 자식 교육시키는 건 처음 본단다." 그러자 치켜올라갔었던 주먹이 슬그머니 내려왔고 류미르는 아버지의 옆으로 내 눈과 마주치자 감사의 눈빛을 보내왔다. "어쨌든, 이 곳은 이야기하기 적절한 장소가 아닌 듯 하니 돌아가서 이야기하자꾸나." 류미르의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할머니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시게." 할머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류미르의 아버지는 숲속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온 몸이 새하얀 말 세마리가 뛰어 나왔다. "어라? 말발굽 소리가 안들렸는데?" 내가 의아한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자 할머니는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저 말들을 자세히 보렴. 저건 보통 말이 아니라 유니콘이라고 한단다. 아름답고 깨끗한것을 좋아하고 인간들을 싫어해서 그들을 피해 숲속 깊숙히 살고 있지. 엘프들과는 친하기때문에 이번에 저들이 같이 온 모양이구나." 할머니 설명에 다시 그 말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이마 정 중앙에 수정처럼 투명한, 나사처럼 꼬인 무늬를 지닌 외뿔이 달려 있었고 온 몸은 새하앴지만 목 뒤로 난 갈기는 파랗고 붉고 푸른등 가지각색이었다. 그리고 더 특이한 것은 네개의 다리 뒤에도 각각 작은 갈기들이 달려 있었으며 먼 길을 달려왔을텐데도 마치 방금 목욕한 것 처럼 먼지 하나 묻은곳이 없었다. 붉은 갈기를 가진 유니콘 - 세 유니콘 중 가장 덩치가 컸다-이 족장에게 다가가자 족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콧등을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요, 우리들의 친구여." 그리고는 류미르를 자신의 앞에 태우고 자신도 유니콘의 등에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나머지 엘프들도 각각의 유니콘에 벌써 올라 있었다. "아린, 미안. 나중에 다시 만나길 바래." 류미르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하자 나는 씩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잘 가라. 너도 가벼운 처벌을 받길 바래." 그러자 류미르가 하하 웃었다. "하하하, 그래 고맙다." "그럼, 저희는 이만..." 류미르의 아버지가 다시 한번 더 할머니께 고개를 숙여 보이자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도 유니콘들이 알아서 숲속으로 힘차게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세 마리가 한꺼번에 뛰는데도 불구하고 말발굽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거참, 신기하네..." "인간들 사이에서는 유니콘이 성스러운 동물이라고도 불린단다." "헤에, 그럴만도 하겠어요." 유니콘의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져 완전히 보이지 않자 나는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으셨다. "아린아, 이제 어쩔거니?" "에? 뭘요?" "너와 같이 여행하던 동료들이 모두 가버렸잖니." "예? 어머나, 글고보니 그렇네... 에구구,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혼자서 계속 여행할거니?" "에? 글쎄요... 갑자기 혼자 하려니... 좀..." 처음에는 혼자 시작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류미르를 만나고 세이몬을 만나 같이 여행하다보니 이제는 항상 셋이 다니는게 당연한 것 처럼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그들이 가버린 지금 혼자 여행을 떠나려니 망설여졌다. "흐음, 그럼 그냥 집으로 가련?" "에? 하지만 겨우 1년정도밖에 여행을 안했는데..." "그럼 혼자 갈래?" "에? 아니 뭐, 그것도 좀..." 내가 어쩔줄 몰라 갈팡질팡 하는 동안 할머니는 계속 옆에 서서 내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에이, 모르겠어요. 집에가서 차근차근 생각해 볼래요." "좋을대로 하렴. 그런데 아린아?" "예?" "넌 참 허망하게 여행을 끝내는구나." "에? 정말 그렇네요. 에휴, 다음부턴 가출한 녀석들은 절대로 여행 동료로 맞지 말아야겠어요." "그럼, 집에가서 뭐할래?" "우선 한숨 푹 자고나서 생각할래요. 그런데 할머니?" "응?" "너무 허망해요. 정말 이게 뭐야? 할머니도 이런 적 있으셨어요?" "아니, 이렇게 황당무게하게 여행을 끝낸 적은 없었지." "하아, 이런 경험을 한 드래곤은 아마 나뿐이겠죠?" "호호호,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 < 아린 이야기 1 부 끝 > - ======================================================================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처음에 쓸땐 끝까지 쓸 지 자신이 없었는데요 무지무지 황당하고 허망하지만 어쨌든 여기까지가 아린 이야기 1부 끝입니다. 그리고 바로 2부 이야기가 들어가는데요, 여기까지가 5권 분량으로 충분히 되는지 안되는지 제가 잘 모르기때문에 5권 원고를 다 정리해서 확인할 때까지 시작을 못 할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하면 낼 모래쯤에나... 만약 분량이 모자르다면 외전 한판 올라갈 것 같군요. 번 호 : 17294 / 17329 등록일 : 2001년 02월 27일 22:10 등록자 : LODEMP 조 회 : 39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외전 <테일론 이야기> 음, 5권 분량을 정리하다보니 쪽 수가 모자르더군요 ㅠ.ㅠ 이건 다 제 잘못이예요. 그래서 외전 하나를 써봤습니다. 테일론이라고 1권에서 나왔던 아린 엄마를 쫒아다니던 풋내기 기사 이야기랍니다. ^^ =================================================================== < 외전 > - 테일론 이야기 나의 이름은 테일론 브라운 커틀러스. 에스라 왕국의 가장 큰 무역 항구 도시인 페링던 항구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밑에서 초여름의 이제는 제법 덥게 느껴지는 햇빛을 맞으며 오늘도 변함없이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글바글한 도시의 어느 한 지점. 항구와 제법 가까운 곳에 여관과 술집들이 즐비하니 늘어서 있는 골목길에서 사람들의 바글바글 거리는 소음을 뚫고 어떤 요란한 소리들이 들렸다. 우당탕 쿵탕~!! 그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곳 근처에 있던 급한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들로 그 곳을 빙 둘러섰다. 거기에는 약간 부수어진 술집 문 앞에 나둥그라진 건달패처럼 보이는 두 청년이 있었고, 그 앞에는 이 도시의 경비대 문장인 갈매기가 그려진 가벼운 갑옷을 입은 두 명의 창을 든 병사와 바스타드 소드를 옆에 찬 기사가 서 있었다. "이런 못된 녀석들, 젊은 녀석들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아녀자를 희롱해? 너희들은 당장 철창 감이닷!! 저 녀석들을 끌고 갓!" 기사의 외침에 병사들이 피식 피식 웃으며 바닥에 나둥그라진 두 날건달 청년들을 일으켜세웠다. "쯧쯧, 안됐군 너희들... 하필이면 커틀러스 경에게 걸리다니 말야." "맞아. 덕분에 우리까지 고생하게 되었잖아? 왜 하필이면 커틀러스 경이 순찰을 돌 때 행패를 부린 거야?" 보아하니 아마 두 청년들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그 근처에 있던 여자들을 희롱하다 마침 그 곳을 순찰하고 있던 경비대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 두 건달 청년들은 재수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갔다. "저런 저런, 오늘도 여전하군." "누가 말려, 저 대쪽같은 성격을..." "하지만 요즘 세상에 저런 기사가 또 어디 있겠어?" "맞아 맞아, 저 커틀러스 경이야 말로 기사다운 기사라고." "하긴, 저 기사가 우리 도시의 경비대라는 것이 우리한텐 좋은 거지." 병사들이 모여있던 사람들을 뚫고 청년들을 끌고가자 그제야 사람들은 하나 둘 그 자리를 떠나면서 한마디씩 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가며 한번 씩 기사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어른들은 부드러운 감정이, 어린 꼬마들에게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이제 20살 초반인 듯한 그는 짧게 커트친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에는 주근깨가 조금 있어 귀여운 느낌을 주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긴 그는 실제 나이가 25세임에도 불구하고 귀여워 보이는 동안의 얼굴 때문에 이제 겨우 20세를 갓 넘은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쪽같은 성격의 경비대 기사로 패링턴 항구에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정말 대쪽같아서 거친 사람들이 많아 싸움도 많고 소매치기도 많고 강도도 많은 이 항구에 어쩌면 어울리지도 않는 듯 보였다. 그는 누구든지 자신이 보는 곳에서 잘못을 하면 그 숫자가 얼마든, 그가 자신보다 더욱 더 강하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체포하려 들었다. 예전에는 한 건달패를 체포하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집단으로 얻어맞아 지나가던 다른 경비대들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목숨을 부지했었는데, 그 뒤에 그들을 다시 만났을때 그들을 체포하려 들다가 또 맞고 병원 신세를 졌지만 그 뒤에 그들을 또 체포하려 들어 결국 그들이 그에게 두 손을 들고 만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아든, 거지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는 정말 교과서 같은 기사였다. 그렇기에 이 도시의 도둑 길드에서도 이 기사에게는 한 걸음 양보하여 이 기사가 있는 곳에서는 될수 있는 한 일(?)을 하지 않았고 설사 하다가 걸린다고 하여도 순순히 잡혀가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 도시의 경비대 기사가 된지 어언 4년. 그가 처음에 도시 경비대 기사가 되었을 당시 그가 그렇게 대쪽같이 굴었을 때에는 동료는 물론 도둑 길드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게다가 그의 실력이 무척 뛰어난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매일매일 다쳐서 집으로 가기 일쑤였으며, 너무나 심하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지느라 일년 12달 동안 경비대에 출근한 날이 6달 정도밖에 되질 않았었다. 그리고 그의 월급은 모두 그의 치료비로 나갔고 그걸로도 모자라 이제 나이가 들어 기사직에서 물러난 아버지의 도움까지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꾸준하게,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대쪽같은 모습을 보여 모든 사람들을 치가 떨리다 못해 아예 질리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페링던 항구의 명물이 되었고 실력이 없었어도 최고의 기사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실정을 모르는 철부지 꼬마들의 선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수도의 높은 귀족 나으리께서 페링던 도시를 살펴보기 위하여 내려오신다는 소문이 도시에 쫘악 퍼졌다. 페링던 시장은 시의 자산과 도시의 유지들의 도움을 얻어 도시의 큰 대로를 청소하고 시청을 꽃단장 하는 등, 높으신 귀족을 맞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 영향은 경비대에 까지 미쳐 경비대 대장과 그의 직속인 5명의 백부장 기사와 십부장 기사들에게는 반짝 반짝 빛나는 새 갑옷이 하달되었고, 병사들에게는 새 제복들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모든 제복과 갑옷, 무기들을 반짝 반짝 윤이 날 때까지 닦으라는 엄명도 함께 떨어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높으신 귀족을 맞기 위하여 분주할 즈음 그 도시의 명물 커틀러스 경은 우울한 표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 하였지만 그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어이, 커틀러스 경!!" 테일론이 병사 서넛과 함께 저녁 시간에 마지막으로 도시를 한바퀴 순회하고 경비대 건물로 돌아왔을 때 마침 그 건물을 나오던 그의 동료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경비대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아아, 매튜인가?" 평소 같으면 활기차게 웃으면서 대꾸를 했을 테일론이었지만 어쩐지 오늘 그의 표정은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그가 겨우 짓는 미소도 마치 병자의 미소 같이 보였다. "야, 왜 얼굴이 그 모양이냐?" 가까이 다가온 매튜가 테일론의 어깨를 툭툭 치자 그는 힘 없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어떻다는 걸 몰라서 물어? 완전 다 죽어가는 얼굴이잖아?" "그랬냐?" "그랬냐가 아냐, 너." 테일론은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매튜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 지금 퇴근하는 거냐?" "응? 아, 그런데?" "나도 지금 퇴근할거거든. 괜찮다면 나랑 술 한잔 안 할래?" 매튜는 너무나 우울해 보이는 친구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더니 곧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크하하하, 그래 좋아. 이 형님께서 오늘 너한테 술 한잔 사마. 여기서 기다릴 테니 빨리 보고하고 나와라." "그래, 고맙다." 테일론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매튜는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에휴, 가여운 녀석..." 잠시 후 순찰 보고를 하고 퇴근을 한 테일론을 데리고 매튜는 자신의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술집으로 갔다. '파도의 속삭임' 이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술집을 경영하시는 분은 매튜의 아버지이자 테일론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분이기도 했으며, 매튜 못지않게 테일론의 사정을 잘 알고 친아들처럼 사랑해주시는 분이기도 했다. 매튜가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맛있는 안주 냄새와 함께 쌉싸름한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겨왔다. "매튜 왔구나. 지금 퇴근하는 거니?" 매튜와 같이 붉은 머리칼을 지닌 작고 통통한 부인이 커다란 쟁반 가득 맥주잔을 나르다가 들어서는 매튜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예, 오늘은 테일론이랑 같이 왔어요." 그러자 환하게 펴 있던 중년 부인의 얼굴이 약간 굳어져버렸다. "아, 그러니?" 그리고 뒤이어 인사를 하는 테일론을 약간 냉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그래, 어서 오너라." 약간은 사무적인 듯 들리는 대꾸를 한 중년 부이는 금방 몸을 돌렸다. "저 쪽에 자리 있으니 한 잔 하려거든 얼른 앉으렴." 그녀의 약간 냉정하다면 냉정한 태도에 매튜는 테일론을 돌아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테일론." "괜찮아. 자, 자리에 앉자." 그 둘이 술집의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자 시커멓게 그을은 우락부락한 얼굴에 덥수룩하게 구렛나루와 턱수염을 길러 얼굴 절반을 가린, 어디가면 산적이라고 오해받기 딱 알맞은 인상을 한 남자가 그 둘에게 다가왔다. "이 녀석, 테일론!!" 그 사내는 그들에게 다가오자마자 그 억센 손으로 테일론의 두 뺨을 꼬집어댔다. "우악~, 아야야야~~" "이 녀석, 그 동안 왜 콧빼기도 안 보였냐? 얼굴 잊어먹겠다." "아야야야, 아모 하요 아이시 (잘못 했어요 아저씨~~) 애유, 기냐 오고망 이쓰끼야? (매튜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울상이 된 테일론이 비명 비슷한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웃고 있던 매튜가 그제서야 테일론의 뺨을 떡주무르듯 하고 있는 사내를 말렸다. "그만해요, 아버지. 그러다 영원히 안 오면 어떻게 해요?" 그러자 그 사내는 흥, 하니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흥, 그러기만 해봐라. 내가 그때는 다리 몽둥이를 뿐질러 버릴꺼다." 하지만 테일론이 너무 울상을 짓자 그제야 순순히 그의 뺨을 놔주었다. 테일론은 빨갛게 되어 슬슬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너무해요, 아저씨..." "뭐야? 그동안 안 온 녀석이 무슨 말이 많아?" 그 사내는 다시 테일론의 뺨을 쥐려고 달려 들었으나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중단했다. "그만하고 주방에나 빨리 가봐요. 지금 일손이 모자라 쩔쩔매고 있는데 주방장이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요?" 매튜의 어머니가 쟁반에 맥주가 가득 담긴 큰 맥주잔 두개와 간단한 안주가 놓인 접시를 얹어놓고 서 있었다. "아, 그래? 그럼 가봐야지. 이 녀석 테일론, 오늘은 그냥 가면 안됀다. 알았지?" 그는 테일론에게 단단히 못을 밖고 빠른 발걸음으로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매튜의 어머니는 식탁위에 쟁반에 담긴 것들을 하나씩 옮겨 놓으며 테일론을 향해 약간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일론, 네 동생이 이번에 온다며?" 테일론은 씁쓸한 눈으로 식탁을 바라보며 작게 대꾸했다. "예." "네 부모님이 무척 좋아하시겠구나? 아마 동생 맞을 준비로 집이 시끌벅적 하겠네?" 매튜의 어머니는 매튜가 강하게 눈짓을 보내오는 걸 싸악 무시하고 물었다. "예, 그렇죠 뭐." "그럼 너도 일찍 가서 도와야겠구나?" "그래야죠." "그래, 그럼 얼른 먹거라. 늦지 않게 가야지. 또 네 아버지께 한 소리 들을라." "감사합니다." 번 호 : 17339 / 17495 등록일 : 2001년 03월 01일 21:57 등록자 : LODEMP 조 회 : 570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외전 <테일론 이야기> (2) 매튜는 자신의 어머니가 주방쪽으로 가버리자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하기 위하여 테일론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때 테일론은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미안해, 괜히 여기로 왔어. 다른 곳으로 갈걸..." "괜찮아. 어쩌면 이 곳으로 와서 날 제어할 수 있는건지도 모르잖아. 요즘같은 때 아버지랑 한바탕 한다면 내가 견딜 수 없을테니까..." "그야 그렇지만..." "너무 그렇게 미안해 하지마. 그럼 내가 불편하잖아. 그만 술이나 마시자구." 그 말을 끝으로 테일론은 묵묵히 맥주잔과 안주만 입에 가져갔고 매튜는 그런 친구를 슬픈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만 갈께." 매튜가 테일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이 큰 컵에 가득 담겨 있던 맥주를 다 마신 테일론은 아무런 미련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당황한 매튜가 같이 일어섰다. "왜? 벌써 가게? 아버지도 안 만나보고?" 테일론은 그런 매튜를 바라보며 쓰게 웃어보였다. "가봐야지. 늦을 수는 없으니까. 아저씨껜 죄송하다고 전해줘." 그리고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매튜가 당황하면서 소리쳤다. "야, 테일론!!" 테일론은 매튜가 부르는 소리에 멈칫 했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러자 매튜는 정말 진심어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난 언제나 네 친구다. 그걸 기억해." "고맙다." 테일론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오른 손만 들어보이며 대꾸했지만 그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테일론이 집으로 돌아오자 집은 저녁이 다 되었는데도 부산스러웠다. 마치 어떤 대단한 손님이라도 오는 것처럼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 단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보통 안주인이 하겠지만 이 집안에서는 안주인이 아닌 가장이 앞장서서 지휘하고 있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 이러다 날 새겠다." 멀린 브라운 커틀러스. 테일론의 아버지이며 커틀러스 집안의 가장. 커틀러스 집안은 기사 집안이었지만 어느정도 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 2층 짜리의 저택과 세명의 메이드, 2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실력도 꽤 괜찮은 축에 드는 기사였기에 퇴직하기 전까지는 경비대 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거실에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메이드 들에게 잔소리하던 그는 테일러가 거실로 들어와 꾸벅 인사를 함에도 불구하고 힐끗 쳐다볼 뿐 곧바로 고개를 돌려 메이드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테일론은 이미 그런 일에는 익숙하다는 듯 별 다른 말 없이 자신의 방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다가 그곳에서 내려오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이제 오니, 테일론?" 자신의 장남을 슬픈듯 동정 어린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을 테일론은 마주하기 싫은지 고개를 돌리며 끄덕였다. "예..." "그래, 어서 가서 쉬거라." 그런데 그때 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 디코의 방은 다 끝났소?" 테일론의 인사에는 대꾸조차 없었던 거와는 다르게 정을 담뿍 담아 애칭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테일론의 어깨가 미미하게 경직되었다. 아들의 그러한 모습을 노치지 않은 앤은 동정어린 눈으로 아들의 등을 바라보다가 곧 자신의 남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편은 성격이 급해서 자신이 묻는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예. 이제 막 끝났어요." "그래, 녀석이 내일 돌아오면 무척 기뻐하겠군." 테일론이 에스라 왕국의 수도에 있던 기사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5년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정도는 커녕 따뜻한 환대마저 없었다. 그런데 내일 동생이 온다는 소식에 온 집안을 들들 볶아서 대청소를 하고 동생의 방을 새로 꾸미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아버지의 모습에 테일론은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어쩔 수 없지..." 디코. 본명은 디코레뮤 브라운 커틀러스. 테일론의 동생이자 멀린의 차남인 그는 장남인 테일론을 제치고 그에게 갈 아버지의 사랑까지 온 몸에 함뿍 받고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가 괜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평범한 동안 얼굴의 테일론과는 달리 금발에 가까운 옅은색 갈색머리를 가진 그는 180 정도 되어보이는 키에 늘씬한 체격, 거기에 남자처럼 강인함과 멋을 가진 뛰어난 미남이었다. 게다가 그의 검술 실력은 무척 뛰어나 테일론보다 2년 늦게 수도에 있는 기사 학교에 입학한 후로 한번도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고 졸업할 때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수도의 높은 귀족의 눈에 들어 곧바로 스카웃 당해갔다. 더욱이 그 뛰어난 외모와 실력에 겸비하여 사교술 또한 높아서 그 학교를 다닐 당시 학교를 같이 다니던 귀족가의 자제들과의 친분을 두텁게 쌓아 놓았다. 덕분에 녀석을 스카웃해간 귀족 나으리는 녀석의 가장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로 녀석은 미래 높은 귀족의 오른팔이 될 탄탄한 기로를 걷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멀린이 집안을 드높이 일으킬 확률이 다분한 디코레뮤를 맏 아들을 제쳐 놓고 아주아주 이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테일론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보통 나이가 엇비슷한 형제가 있으면 그 둘은 부모, 혹은 타인이나 자신들 스스로도 경쟁의 상대이며 비교의 상대가 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둘의 차이가 너무 많아서 빛 처럼 두드러졌으니 나머지 한 아이가 그늘이 되어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물론 테일론의 실력이 아주 형편없는 건 아니었다. 비록 동생처럼 학년 수석은 차지하지 못했더라도 중 상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항상 꾸준히 노력하는 성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동생의 실력에 가려져 누구의 눈에도 띄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가슴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 내일 녀석을 스카우트 해간 귀족과 함께 이 도시에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씻기 위하여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던 테일론은 자신의 검소한 방 안을 둘러보며 다시한번 쓸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그의 아버지 멀린은 아주 대놓고 테일론과 디코레뮤를 차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차별하고 있는 티는 곳곳에서 여실히 들어났다. 아버지 멀린은 항상 디코레뮤를 우선시 했으니까...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우선 동생의 몫부터 챙겼으며 옷을 사더라도 동생 옷이 먼저였다. 덕분에 테일론은 동생이 먹기 싫어하는 음식과 입기 싫어하는 옷의 대부분을 자신의 소유로 해야만 했으며 그에게는 싫다는 투정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테일론은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체념하는 법과 아버지에게 기대하지 않는 법을 타의로 터득하여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것은 절친한 친구인 매튜와 그의 아버지였다. 매튜의 아버지는 테일론 아버지의 친구였기에 누구보다 테일론의 사정을 잘 알았고 털털한 성격과 너그러운 마음씨로 디코와 테일론을 자신의 아들과 똑같이 대해주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테일론에게는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 테일론이 친아버지처럼 느끼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매튜. 그는 아버지의 성격을 이어받아 털털하기도 했지만 외로와 보이는 늑대 한마리를 결코 그냥 놔둘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와 또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테일론의 곁을 항상 지켜왔다. 비록 그의 어머니는 매튜가 테일론보다 디코레뮤와 더 친하게 지내길 바랬지만 말이다. 그 둘의 힘으로 테일론은 비뚤어지지 않고 평범하게 자라났지만 아버지의 잘못된 사랑에 반항하기라도 하듯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에는 도저히 참질 못하고 나섰다. 그 일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든 할수 없든 말이다. 그리고 집안에서는 항상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한다 하더라도 들어주질 않았으므로- 존재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식사시간....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테일론에게 오랜만에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오늘 디코가 오지?" 테일론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잠깐 쳐다보았다가 다시 접시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마치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묻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예." "언제 오지?" "정오쯤 도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집에는 저녁때에 들릴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하긴, 기껏 경비대의 말단 기사가 그걸 어찌 알겠누?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멀린의 냉정한 말에 그 옆에 앉아있던 앤이 슬픈 눈으로 테일론을 바라봤지만 테일론은 묵묵히 시선을 접시에 집중하고 자신의 음식을 먹고 짧고 간단한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는 집을 나섰다. 그날 정오, 수도에서는 예정 대로 귀족 일행이 도착하였고 시관저 에서는 그들을 열열히 맞이했다. 그리고 테일론은 그날 밤 경비 당번이 되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간 그는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쯧쯧, 오랜만에 동생이 왔는데 저녁 순번쯤 다른 사람이랑 바꿀 수 있었지 않냐?" "죄송합니다." 그러자 마침 이층 자신의 방에서 내려오고 있던 디코레뮤가 그 모습을 봤는지 한 마디 했다. "형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거잖아요. 훌륭한 기사의 모습인데 뭐가 어때서 그러세요?" "그래도 그렇지..." 테일론은 더 이상 거실에 있고싶지 않아서 몸을 돌려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쯧쯧, 동생의 반 만이라도 닮았으면..." 그리고 곧 이어 동생을 향한 부드러운 목소리. "아니 왜 벌써 일어났니? 더 자지 않고?" 테일론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허리에 찬 검을 벗어 방에 있던 탁자위에 올려놓고는 옷을 벗지않은 채로 침대로 가 벌러덩 누워버렸다. "어쩔 수 없지..." 번 호 : 17397 / 17495 등록일 : 2001년 03월 02일 21:36 등록자 : LODEMP 조 회 : 49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외전 <테일론 이야기> (3) 정오가 될 때까지 잠을 잔 테일론은 오후가 되어서야 다시 경비대로 나설 채비를 차렸다. 오늘 저녁에는 귀족 환영 파티가 있어 경비대 대장과 백부장들은 파티에 참석할 것이었고 경비대의 인원 절반은 그 파티의 경비를 서러 가기 때문에 오늘 밤 늦게까지는 모든 경비대원들이 밤을 새다시피 해야만 했다. 테일론은 매튜와 한 조가 되어 시내 순찰을 돌았다. 원래 테일론도 시청에서 열리는 파티의 경비조였지만 자신의 상관인 십부장에게 부탁하여 시내 순찰로 바꾼 것이었다. "너 괜찮냐?" 병사들 몇몇과 거리로 나서자 매튜가 은근 슬쩍 테일론 곁으로 붙더니 속삭였다. 테일론은 그게 무슨 말인지 다 알면서도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가?" "몰라서 묻냐?" ".... 별루..." "그런데 네 동생은 수도로 올라갈 때까지 계속 집에서 묶는대?" "몰라, 안 물어봤어." "안 물어 봤어도 아저씨가 말해줬을 거 아냐?" "말 할 시간도 없었어." "그랬냐?" "응." 딱 잘라 딱딱하게 대답하는 테일론을 바라보며 매튜는 더 이상 대화를 이끌어 갈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답답하다는 듯 한 숨만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테일론이 길을 걷다말고 멈추어섰다. "응? 갑자기 왜 그래?" 옆에서 같이 걷던 매튜는 두어 걸음 앞으로 더 걷다가 자신의 옆에 테일론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테일론은 매튜의 말에 대꾸는 안 하고 어느 지점을 노려보더니 그쪽을 향하여 급한 걸음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얼떨떨한 매튜는 그와 마찬가지로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던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테일론의 뒤를 따랐다. 아마도 무슨 일을 포착해 낸 거라 생각하고... 매튜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테일론이 문을 박차다시피 거칠게 열고 들어간 그 여관 겸 식당겸 술집에서는 식당 중앙에 한 명의 덩치 큰 건달로 이름을 날리는 녀석과 신비스러운 파란 곱슬거리는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성이 대치중이었다. 그리고 그들 주위의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그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들어서는 테일론 일행을 보자 더욱 더 흥미 진진한 눈빛을 발했다. 테일론의 뒤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선 매튜는 역시... 란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테일론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 여자 치고는 약간 큰 키에 가냘픈 몸매 밖에 보이지 않던 여인이 주먹을 들어 올려 앞에 서 있던 건달의 턱을 가격한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자의 가냘픈 주먹에 맞은 건달이 허공을 붕 떠 올라 한참이나 뒤로 밀려가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벽에 부딧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건달의 등짝과 부딧힌 벽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반쯤 부서지며 균열이 쭉쭉 나가버렸다. "이... 이게 도대체...."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에 벙 쪄서는 크게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예외는 있었으니 바로 여인의 옆에 한가롭게 서 있던 타오르는 것 처럼 보이는 붉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중년의 남자와 테일론이었다. 테일론은 중년의 남자를 보고 있느라 미처 그 상황을 보지 못해 놀라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중년의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도 재밌다는 눈빛만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테일론이 앞으로 한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매튜와 그 뒤의 병사들은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 저마치 나가 떨어진 건달에게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매튜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저,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그러자 그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매튜를 쓰윽 바라본 뒤 차가운 눈빛을 발했다. "누가 여자란 건가?" 그의 말투와 낮은 저음의 목소리로 봐선 그는 여자가 아니라 분명한 남자였다. 무지 당황한 매튜는 얼른 그, 혹은 그녀의 목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그 곳에는 작지만 분명한 아담즈 애플이 매튜를 보고 인사하고 있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이거 실례를 했군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매튜는 얼른 호탕하게 웃어 제치면서 그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자 그 파란 머리의 남자는 흥 하고 고개를 휙 젓더니 붉은 머리의 중년 옆으로 다가가려다 그쪽으로 다가와 있는 테일론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얼굴로 잘 다듬어져 있는 가늘고 긴 파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저..." 테일론의 약간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에 붉은 머리의 중년 남자가 고개를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테일론을 바라보았다. "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군요. 시피르씨 아니십니까?" 테일론이 중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말을 걸었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왜 몇년 전에 수도에서 이 도시까지 배를 함께 타고오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따님이신 레이디 시피르와 아들인 아힌이랑 같이 타고왔었는데..." 그러자 의아한 얼굴을 짓고 있던 중년 남자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 그때 그 기사 양반이로구만." "하하하, 기억하시는 군요." "물론이지. 왜 모르겠나? 내 딸에게 폭...읍읍" 중년 남자는 끝까지 말을 잊지 못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아챈 테일론이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앗, 그것만은..." 그러자 중년 남자는 자신의 입을 막고있는 테일론의 손을 치우면서 껄껄 웃었다. "알겠네. 그만 말하지. 자네 순진한 건 여전 하구만..." "그런데 어쩐 일로 이곳에 계시는지요? 레이디와 아힌은..." "아아, 둘 다 집에 있어. 나는 어디 좀 갈데가 있어서 말야..." "그러시군요.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신지?" 테일론이 고개를 돌려 파란 머리의 여자보다 더 예쁜 미남자를 바라보며 묻자 중년 남자가 싱긋 웃었다. "내 여행 동료지. 목적지가 같아서 동행하기로 했다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테일론 브라운 커틀러스라고 합니다. 이 도시 경비대 기사입니다." 테일론이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자 그 파란 머리 남자도 피식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갑습니다. 전 아이비라고 합니다." 그 붉은 머리의 중년 남자는 당연히 아린의 할아버지인 시스파슈타인 이었고 아이비는 아르카스해의 블루 드래곤 아이비스크였다. 이들은 아린과 헤어진 다음 곧바로 여행을 떠나는 것 처럼 보였으나 드래곤 특유의 게으름과 늦장 부리는 성격이 발동해 여태까지 뒹굴 뒹굴 거리다가 이제서야 여행을 나선 것이었다. "이거 참, 뜻밖이로구만. 자네가 이 도시의 경비대원이 되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하하하, 하긴 제가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긴 했었죠. 전 이 도시 출신입니다. 시피르씨와 같이 이 곳으로 올때가 기사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이었거든요." "그래, 이렇게 만난것도 다 인연이니 같이 앉아서 한잔 하지 않겠나?" 시스파슈타인이 주위를 둘러보다 빈 자리를 찾아내어 그쪽을 가르키며 말하자 테일론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제가 지금 근무중이라서요. 근무중에는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동료도 있고요." 그러면서 매튜를 돌아보자 매튜가 피식 웃었다. "어이구, 니가 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냐? 난 잊고 있는 줄만 알았지?" 테일론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매튜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제 동료인 매튜 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두분? 테일론과 같은 경비대 기사 매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시스파슈타인은 직접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비스크는 간단히 고개만 끄덕여줬다. "저, 그럼 저희는 이만..." 하면서 테일론이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테일론이 시스파슈타인과 대화를 하느라 임무 수행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잊지 않고있던 매튜의 지시에 의하여 다친 건달을 부축하여 이끌고 밖으로 나간 병사들 중 한명이 황급히 식당 안으로 들어오며 그들을 찾았다. "커틀러스경, 큰일 났습니다." 테일론과 매튜는 시스파슈타인과 아이비스크에게 작별 인사하는 중이었다는 걸 잊어버리고 그 병사를 쫓아 황급히 식당을 나가버렸다. "이런 이런, 가버렸군요..." 아이비스크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시스파슈타인이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아이비스크를 돌아보았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우리도 따라가볼까?" "누가 당신을 말리겠습니까? 그러죠, 뭐."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두 고룡은 의기 투합하여 황급히 뛰어나간 두 기사의 뒤를 따라 나섰다. 번 호 : 17483 / 17495 등록일 : 2001년 03월 03일 22:22 등록자 : LODEMP 조 회 : 225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외전 <테일론 이야기> (4) 테일론과 매튜가 병사를 따라 쫓아간 곳은 그 술집으로부터 멀지않은 골목이었다. 그 곳에서는 이번에 귀족 일행의 한명인 듯한 고급 옷을 입은 녀석과 그 녀석의 수행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귀족 일행인듯한 녀석의 발을 중산층이 흔히 입는 튼튼한 면직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인이 무릎꿇은채로 꼭 붙들고 있는거였다. 이유는 아마도 귀족 녀석의 수행 기사들이 잡고 있는 예쁘장하게 생긴 17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인 듯 했다. 그녀는 기사에게 팔을 잡힌 상태로 새파랗게 질려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그녀의 어머니인듯한 여인은 귀족 녀석의 발을 꼭 붙들고 사정하고 있었다. "나리,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그 애는 놔주세요. 이렇게 빕니다." "시끄럽다. 놓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목숨이 아까운줄 모르는군. 천한 계집을 이 몸이 선택해 주신걸 영광으로 알지 못할망정..." 귀족 녀석은 뭐라고 더 지껄이려고 했지만 급하게 달려오는 매튜와 테일론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테일론과 매튜는 그들을 보자마자 예의 상 어쩔수 없이 한다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 도시 경비대 기사 테일론 브라운 커틀러스라고 합니다." "같은 기사 매튜 그린 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귀족 녀석은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침 잘 와줬군. 이 계집좀 끌고 가라. 지독하게도 떨어지지 않는구나." 매튜와 테일론은 주위를 살펴보고 절박한 표정의 중년 여인의 얼굴을 보더니 상황을 대충 알아챘다. 그리고 테일론의 얼굴을 바라본 중년 여인은 얼른 테일론에게 달려 들었다. "기사님, 제발 제 딸을 구해주십시오. 저 나리께서 제 딸을 데려가려고 하십니다. 제 아이는 이제 겨우 17살입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테일론은 귀족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 여인의 말이 사실입니까?" 그러자 귀족 녀석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넌 내 말만 들으면 돼.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하지만 대쪽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테일론이 그냥 물러설 리 없었다. "죄송하지만 경비대 기사인 이상 도시 시민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저 소녀가 같이가길 거절한다면 당신은 저 소녀를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귀족 녀석의 얼굴이 화로 인하여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뭐야? 감히 너 따위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내가 한다면 한다는 거야. 죽고싶은가?" 주위 사람들, 특히 매튜와 경비대 병사들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테일론은 눈 하나깜짝하지 않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그 소녀를 놔주십시오." "이... 이 자식이!!" 귀족 녀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테일론에게 달려들어 뺨을 한대 후려갈겼다. 테일론은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맞아 그의 얼굴은 옆으로 획 돌아갔고 그의 뺨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네놈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야? 오냐, 내 너의 그 건방진 버릇을 고쳐주지." 귀족 녀석은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려고 했다. 일이 점점 커질 것 같자 귀족 녀석의 수행 기사가 나섰다. "도련님, 그만 두시지요. 이 곳에 오셔서 일을 벌이시면 같이 오신 스톰 남작께 폐가 됩니다." 스톰 남작이란 말이 나오자 귀족 녀석의 손이 멈칫 하더니 뭐 씹은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검에서 손을 떼었다. "좋아, 알았다. 하지만, 너 테일론이라고 했지? 기억해두마!!" 그리고 그는 거친 동작으로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가버렸다. 그러자 병사들과 주위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매튜만은 그렇지 못했다. "어쩌지? 저녀석, 분명히 가만 있지 않을거야." 그가 테일론에게 속삭였지만 테일론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렇겠지..." 그가 마치 남 일을 얘기하듯 말하자 매튜가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쳤다. "야, 이건 네 일이라고. 어쩔려구 그래?" "몰라." 테일론은 거기까지 말하고 자신에게 계속 감사의 인사를 해대는 중년 여인에게서 몸을 돌려 귀족 녀석이 사라진 반대편으로 걸어가버렸다. "어휴, 이제 어쩌지?" 매튜는 한숨을 푹 쉬더니 테일론의 뒤를 따랐다. "흐음, 이거 참... 기대한 것 보다 시시하게 끝나 버렸잖아?" 한 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쭈욱 지켜보던 시스파슈타인이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아이비스크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정도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데요? 아까 그 귀족 나부랭이 녀석의 성격 상 말예요." 시스파슈타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겠지? 그럼 조금 더 두고볼까?" 그의 기대어린 말투에 아이비스크가 약간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배는 언제 타시려구요?"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이것만 구경하고 가자구." "어련 하시겠어요..." 아이비스크가 포기하는 말투로 중얼거리자 시스파슈타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뭘 그러나? 자네도 재미있어하면서." 그러자 아이비스크가 씨익 웃었다.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참 재미있는 녀석이야, 그렇지?" "그렇군요..." 그 다음날 오후, 두 고룡의 예상대로 테일론은 경비대 대장에게 불려갔다. "테일론 브라운 커틀러스,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왔는가?" 경비대 대장은 갈색 머리의 중년 남자로 사리가 분별하고 어느정도 융통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테일론의 대쪽같은 성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덕분에 이번 귀족들의 방문에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보고있던 서류더미를 옆으로 치우고는 자리에 일어나서 책상을 빙 돌아 테일론 앞에 섰다. "자네, 내가 무슨 일로 부른 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짐작은 하겠지?" "....." 집히는 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테일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톰 남작은 수도에서도 세력이 꽤 강한 귀족이지. 그래서 우리로서도 그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테일론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그 망나니 녀석은 자넬 해고시키라고 팔팔 뛰었지만 난 자넬 잃고싶진 않아. 비록 융통성 없이 앞 뒤 꽉 막히긴 했지만 그 점이 내 맘에 들거든, 그래서 말인데..." 경비대 대장은 테일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네, 저 귀족들이 돌아갈 때까지 집에서 좀 쉬게나. 뭐, 저쪽에다는 근신이라고 말해놓겠지만 휴가라고 생각 하게. 자네는 경비대 기사가 된 뒤로 한번도 휴가를 받지 않았으니 이 기회에 휴가를 누리는 것도 좋겠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잘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만 나가보게." "예." 대장에게 거수 경례를 붙인 뒤 테일론은 몸을 돌려 대장실을 빠져 나왔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일 보다 가벼운 처벌이었다. 아마 그 대장이 현명하게 처리해준 덕이리라. 그러나 테일론의 수난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테일론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분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 이녀석, 이게 무슨 짓이냐?" 거실로 들어온 테일론을 향해 멀린은 다짜고짜 일어나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리고 멀린 옆에서는 앤이 언제나처럼 슬픔이 담긴 동정의 눈빛을 테일론에게 보내고 있었다. 테일론은 아버지의 분노나 경멸 보다 어머니의 동정이 더 싫었기에 그는 곧 아버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너때문에 우리 디코의 앞길에 무슨 지장이라도 있으면 어쩔 뻔 했어? 이번에는 그나마 디코를 아끼는 남작께서 잘 무마시켜 줘서 다행이었지. 넌 어떻게된게 네 동생의 앞길을 축복해주지 못할 망정 방해꾼이 되려고 하는게야?" "그것은... 제가 당연히 할 일이었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그 사람이 누구인지 뻔히 알았으면서도 그랬다고? 그냥 좀 눈감아주면 어디가 덧난다더냐? 네가 뭘 잘났다고 나서?" 테일론은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의 덩어리가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이 집에 있고싶지 않아 몸을 돌렸다. "어딜 가려는게냐? 이녀석아, 아예 나가서 들어오질 말아. 우리 집에 너 같은 녀석은 필요 없어!!" 아버지의 고함 소리를 뒤로 하고 그가 막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냘픈 손의 느낌... 이 집안에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릴 사람은... 뒤로 돌아보니 앤이 슬픈 얼굴로 서 있었다. "테일론, 그냥 아버지께 잘못했다고 그러면 안될까?" "어머니, 전 잘못한게 없어요." "나도 안단다... 하지만 얘야..." 그러자 갑자기 테일론이 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평소 자신의 눈과는 마주치지 않으려 하던 아들이 갑자기 눈을 똑바로 마주쳐오자 앤은 순간 당황했다. "테일론?" "어머니, 제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전 동정을 받을 정도로 불쌍하지 않아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있는 슬픔에 앤은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스러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아들의 눈만 바라보았다. 한 없이 깊은 슬픔을 담은 짙은 파란눈이 쏟아질 것 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테일론은 당황한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곧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가버렸다. 테일론이 향한 곳은 매튜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술집이었다. 매튜는 테일론이 그쪽으로 오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들어서는 테일론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어서 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처럼 보이는 매튜의 옆에 털썩 앉으며 괜히 퉁명스레 물었다. "왜 여깄냐?"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안될 이유라도 있냐?" "당연하지. 지금은 근무시간이잖아." "상관 없어. 오늘 조장한테 말하고 빠졌어. 뭐 마실래?" "독한 거. 오늘은 독한 걸 마시고 싶다." 그러자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이걸 마셔보겠나?"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테일론의 눈에 붉은 머리를 가진 중년의 남자와 파란 머리를 늘어뜨린 뛰어난 외모의 청년이 서 있었다. "아, 시피르씨!!" 테일론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시스파슈타인은 그런 그를 제지하고는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서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긴 투명한 유리병을 꺼내보였다. "이건 깡소주라고 하는 술인데 무척 독하지. 어때? 한번 마셔 보겠나?" 그러자 테일론은 시스파슈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취해서 난동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 오히려 자네의 주정부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기대 되는걸?" 시스파슈타인은 싱긋 웃어보이며 유리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 어느새 마련했는지 매튜가 작은 잔 네개와 간단한 소세지 야채 볶음 한 접시를 내려 놓았다. "서비스가 빠르군." 아이비스크가 놀랍다는 듯 말하자 매튜가 싱긋 웃어보였다. "그게 우리 술집의 특징이니까요." 매튜의 장난스러운 어조에 아이비스크와 시스파슈타인은 싱긋 웃어보였지만 테일론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잔 하나를 자신 앞에 가져다 놓고 술을 따랐다. 또르르르... 맑은 액체가 유리병의 입구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자 진한 알코올 냄새가 코 끝을 진동했다. 작은 잔 가득히 술이 채워지자 테일론은 지체없이 잔을 들어 입 안에 부었다. 독한 술이 입으로 들어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속에서 불이 이는 듯 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한 잔 더 따라 입에 부었다. 어른과 함께 한 술자리에선 우선 어른께 먼저 술을 따라드려야겠지만 오늘 테일론은 막 나가겠다는 듯 시스파슈타인에게 권하지도 않고 자신 혼자서 따라 마시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그 테이블에 있던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번 호 : 17534 / 17544 등록일 : 2001년 03월 04일 23:29 등록자 : LODEMP 조 회 : 134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외전 <테일론 이야기> (5) 반 병쯤 비웠을까? 어느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계적으로 혼자 술을 따라 마시던 테일론은 문득 자신 옆에서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매튜를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 갑작스런 황당한 반응에 매튜를 비롯한 두 고룡은 벙쪄버렸다. "얘가 왜이래?" 매튜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들어 테일론의 앞에다 대고 휘휘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정상이라면 보여야할 당연한 눈의 깜박 거림이 없이 촛점이 사라져버린 흐리멍텅한 눈동자만이 매튜를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얘가 취했나봐요...." ".....자넨 친구 주정을 처음 보나?" 시스파슈타인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하하하, 좀 이상하죠? 하지만 같이 대작한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이 녀석 아버지가 좀 엄격한데다 녀석도 흐트러지는 걸 정말 싫어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사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비스크가 느닷업이 입을 열자 시스파슈타인과 매튜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이비스크는 그런 그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테일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실실 웃는 타입인가본데요?" 그의 말대로 테일론은 자꾸 실실 웃으며 흔들거리는 손으로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계속 흔들리고 있어 아까운 술들은 잔 속에 들어가는 것 보다 그 주위로 떨어지는게 더 많았다. "에궁, 아까워라... 어렵사리 구한건데..." 그 모습을 본 시스파슈타인이 테일론에게 준 술이라 빼앗지는 못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쩝쩝 입맛만 다시자 옆에 있던 아이비스크가 한 마디 했다. "하긴 그렇죠. 제 레어 구석텡이에 쳐박혀져 있던 걸 시스파슈타인님께서 어렵사리 찾아내신거잖아요." "그걸 꼭 말해야 겠나?" 시스파슈타인이 아이비스크에게 한 마디 하자 아이비스크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혹시라도 독자들이 오해할까봐서요." "에잉, 숲지기 같기는... -숲지기 = 드래곤 숲의 그린 드래곤 칸 그라하리- " "야, 그만 마셔라. 너 너무 마셨어." 매튜는 테일론의 행동을 보다가 안되겠는지 테일론의 손에서 술 병을 채가버렸다. "아냐, 나 괴안아..." 맛이 가도 한참 간 것 같은 테일론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나오자 매튜는 단호하게 말하며 술병을 옆으로 치웠다. "시끄러. 이제 그만 마셔." 그러자 테일론은 매튜를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어? 얘가 왜이래?" 평소 보지 못하던 테일론의 느글느글한 모습에 매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슬슬 옆으로 피하자 테일론이 얼른 달려들어 매튜에게 안겼다. "매튜야아아~~" "으갸갸갸, 야가 왜이래?" "매튜야, 나 너 무지 무지 좋아한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좀 놔라. 사람들이 오해하겠다." "시져, 시져. 이러고 있을래... 세상에서 내가 젤 좋아하는 매튜우우~~" "테일론, 테일론, 제발 정신차려라. 낼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이러누... 그렇게 보지만 말고 좀 도와주세요오오~~" 둘의 해프닝을 재미있다는 듯 히죽히죽 웃으며 바라보는 두 고룡을 향해 매튜가 처절하게 외쳤지만 둘은 싹 무시했다. "왜? 재밌는데..." "좀만 버텨봐. 또 뭐라고 할지 궁금해." "으아아악~~ 아부지, 핼프 미!!" 두 고룡이 자신을 싹 배신해버리자 매튜는 안쪽을 향하여 처절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 즉시 매튜의 아버지가 음식이 얼룩 덜룩하게 묻은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뛰쳐 나왔다. "무슨 일이냐, 내 아들!!" "아버지, 이 녀석 좀 떼어주세요. 혼자 마시더니 취해버렸어요." "아이구, 그래. 야, 테일론? 테일론, 이 녀석아 정신 좀 차려봐라." 매튜의 아버지는 매튜의 품에 안겨 비몽사몽한 상태로 히죽히죽 웃고 있는 테일론을 보더니 얼른 달려들어 그의 뺨을 때리며 매튜에게서 떼어냈다. 그러자 눈을 힘겹게 뜬 테일론이 매튜의 아버지를 보더니 또 다시 히죽 히죽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아저씨이~~" "그래, 그래, 나다. 야, 매튜야 좀 도와라." "예. 잠시만요." 매튜는 얼른 일어나서 테일론을 일으켜 세우려는 아버지를 도우려고 테일론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테일론이 하는 말에 몸을 경직시키고 말았다. "아저씨~~, 전 말이죠. 매튜가 젤 부러웠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녀석인거 있죠? 자신을 끔찍히 사랑해주는 부모님이 있다는건 정말 행복한 거예요." 술에 취해 제대로 발음 되지도 않은 말들이 왜 매튜에게는 뚜렷하게 하나 하나 잘만 들리는 지 모를 일이었다. 두 고룡도 갑작스런 테일론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매튜의 아버지도 그를 일으키려는 시도를 잠시 멈췄다. "난 말이죠... 예전부터 포기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바보 가치... 포기가 안 돼는 거예요... 정말 바보죠? 아부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두.... 날 바라봐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데... 왜 포기 못하는 건지 모르게써요..." 테일론의 맛이 간 얼굴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기사 학교에 있을때도... 학부모 참간 날에 우리 아부지가 날 보러온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예요... 내 동생이 입학하기 전에는 한 번도 오시지 않은 아버지가 맨 처음 왔을때... 물론 난 아버지가 내 동생을 보러 온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데도...." 테일론의 눈에 가득 담긴 눈물은 그 자그마한 공간에 담겨 있기에는 양이 너무나 많이 불어나버려 결국 넘쳐 흐르고 말았다. "난 아버지가 혹시라도 날 봐주지 않을까... 어쩜 고개를 이쪽으로 한번쯤 돌려주지 않을까... 그랬는데 날 못 찾으면 어쩔까 싶어서... 수업시간 내내 계속 아버지만 보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그랬는데, 아버진 계속 내 동생만 보고 있는거 있죠? 하하하, 내가 아버지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말예요... 우습죠?" "그만해라. 테일론, 이제 됐다. 그만해라. 응?" 테일론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매튜의 아버지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는지 눈시울을 붉히면서 테일론을 달래며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시스파슈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아이비스크와 매튜가 바라보고있는 가운데 그는 테이블을 빙 돌아 테일론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뒷목을 수도로 탁 하고 내리쳤다. 뒷목에 충격을 받은 테일론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질 뻔 했지만 다행히도 매튜의 아버지가 그를 잡고 있어서 테이블에 얼굴을 박지는 않았다. 시스파슈타인은 벙 쪄있는 주위 사람들을 쓰윽 둘러보며 한 마디 했다. "취한 놈한테는 이게 직빵이야." 그리고 다시 매튜의 아버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 오늘 여기서 재울건가?" "예? 아, 예. 그럴 생각입니다만." "흠, 그래? 그럼 우린 내일 아침에 다시 오도록 하지. 이만 가보겠네." 그리고 주저없이 몸을 돌려 입구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앗, 잠깐만요. 같이 가요." 놀란 아이비스크가 재빨리 일어나 그를 쫓아 뛰어 나가자 매튜와 매튜의 아버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저도 몰라요. 하지만 테일론과는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요?" "그래? 참 황당한 사람들이구만. 그건 그렇고 매튜야, 좀 잡아라. 자꾸 미끄러진다. 이 녀석 보기보다 꽤 무겁구만..." "예, 전 다리를 잡을께요." "그래, 그래. 여보, 윗층 손님방 시트좀 깔아놔요." 매튜의 아버지가 카운터에 있던 매튜의 어머니를 향해 소릴 지르자 즉각 그녀의 대답이 날아왔다. "벌써 깔아놨어요. 올때 폼 보니까 꼭지가 돌때까지 마실 것 같아 미리 준비해 놨죠. 내가 이 장사를 몇년이나 했는데 그정도도 모를 것 같수?" 다음날 아침, 두 고룡이 아침식사 시간쯤 되어서 어슬렁 거리며 '파도의 속삭임' 에 들어서자 아직 문 열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모든 탁자들 위에 의자들이 올라가 있었다. 단지 부엌과 가까운 제일 안쪽에 있는 탁자만이 유일하게 의자가 올라가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부스스한 모습의 테일론과 매튜가 앉아 있었다. "어이, 잘 잤나?" "아, 오셨습니까?" 매튜와 테일론이 휘청거리며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아니, 테일론이 삭은 건 이해가 가겠는데 왜 자네까지 그렇게 폭삭 삭은겐가?" 시스파슈타인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묻자 매튜가 한숨을 푹 하고 쉬었다. "제가 사람은 과음한 뒤에 구토를 한다는 걸 깜빡 했지 뭡니까? 그걸 잊지 않았다면 저 녀석 술을 안먹이는건데..." 매튜가 테일론을 째려보며 대꾸하자 두 고룡이 킥킥 웃었다. "아하, 그래서 밤 새 한 숨도 못자고 고생했나보지?" "말도 마세요, 시트도 몇장이나 버려놨는지 몰라요." "호오, 그 정도였나?" "엄청났다니까요." "의외인걸?" 매튜와 시스파슈타인의 대화가 계속 이어질수록 테일론의 붉어진 얼굴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그를 가엽게 여긴 아이비스크가 신나게 대화를 하고있는 두 존재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하시죠. 테일론에게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온게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시스파슈타인이 놀란 얼굴로 아이비스크를 돌아보았다. "엇? 자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시피르님이 아침부터 일찍 오신 건 저사람한테 뭔가 볼일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제가 설마라고 생각한 일은 아니길 바랄 뿐이죠." "호오, 그런가?" 그러자 두 고룡 대화의 주인공인 테일론이 멀뚱하게 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무슨..." 시스파슈타인은 테일론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며 다짜고짜 물었다. "자네, 여행 갈 생각 없나?" "예? 그게 무슨..." 테일론과 매튜는 황당함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고 아이비스크는 역시나.. 하는 얼굴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내가 저 머나먼 동쪽 나라에 한번 가볼려고 하거든. 내 자네의 사정을 듣고 모른 척 하는게 도리가 아닐 것 같아서 말야. 자네가 원한다면 같이 데리고 가주겠네." "그게 아니라 저 사람이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데려가려고 하시는 거 아닙니까?" 옆에서 아이비스크가 콕 하니 끼어들자 시스파슈타인이 아이비스크를 보며 아주 다정하게 웃어보였다. "그래서? 자넨 불만인가?" 아이비스크는 시스파슈타인의 미소를 보고 얼어붙었다. 아무리 자신도 고룡이라고는 하나 시스파슈타인은 자신보다 몇 천년이나 더 많은 고룡이 아닌가? "물론 아니죠. 시피르님께서 원하신다면야 전..." "그래? 그거 참 다행이군." 시스파슈타인은 다시 한번 더 웃어준뒤 테일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가? 뭐 자네가 싫다면야 거절해도 상관 없네만. 그렇게 질질 짜면서 이 곳에 남아 있는것 보다는 한번 다른 곳을 여행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에, 하지만 갑자기 여행이라니..."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매튜는 테일론의 다음 말에 벙 쪄버리고 말았다. "아냐, 괜찮아. 좋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동행하고 싶은데요?" "뭐라고? 야, 테일론 어쩌려구 그래? 경비( 여행할때 드는 돈과 테일론의 직장을 말함)는 어쩌구?" "나 지금까지 모아온 돈이 좀 있어. 그리고 경비대는 나 대신 네가 사표좀 내줘. 언제 출발하실겁니까?" 테일론이 굳은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시스파슈타인을 바라보자 그는 씨익 웃어보였다. "오늘 오후에." "좋습니다. 그럼 정오까지 준비해서 찾아 뵙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우린 '바람의 날개'란 여관에 있네." 그러자 테일론과 매튜가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바람의 날개?" "거긴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여관이잖아?" 시스파슈타인은 둘의 경악어린 반응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럼, 이따가 만나세나." 그러자 그 뒤를 아이비스크가 쫓아가며 물었다. "정말 저 사람을 데리고 가실겁니까?" "응, 재밌을 것 같아. 자넨 싫은가?" "에휴, 제 의견이 당신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헐헐헐, 잘 알구 있군. 하지만 저 인간 괜찮지 않나?" "뭐, 그렇긴 하지만요..." 번 호 : 17584 / 17595 등록일 : 2001년 03월 05일 22:38 등록자 : LODEMP 조 회 : 156 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외전 <테일론 이야기> (6) 두 고룡이 술집을 나서자 테일론도 자신의 집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지만 매튜의 손길에 멈춰야 했다. "테일론, 너 진심이냐?" "뭐가?" "이 자식, 지금 그렇게 딴청 부릴거야? 여행 간다는 거 말야, 여행." 테일론은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꽉 쥐고 있는 매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미안한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진심이야." "야!!" "미안, 매튜. 솔직히 말하면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 동안 용기가 없어서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번 기회에 한번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 매튜는 테일론의 간절함이 담긴 표정을 보고서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미안하다. 아저씨께도 죄송하다고 전해줘." 테일론이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완전히 돌려 술집 입구로 다가갔을때 매튜가 소리쳤다. "야!!" 테일론이 다시 돌아보자 매튜가 물었다. "돌아올거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간 돌아올거지?" "짜식, 내가 죽으러 가냐? 물론 돌아올거야. 돌아오면 제일 먼저 널 찾으마." "약속한거다, 너?" "그래." 매튜에게 기분 좋게 웃어준 매튜는 짐을 챙기러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이 저멀리 보이기 시작하자 그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25년간 집을 향해 걸어갈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어느새 버릇이 된 것 같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도달하여 현관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거실에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멀린은 테일론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어딜 갔다 오는게냐?" 그러나 테일론은 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까닥여 인사한 뒤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화가 난 듯 멀린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이 녀석,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어딜 갔다 왔냐니까?" 막 맨 아랫 계단에 발을 올리고 있던 테일론은 마지못한 듯 고개만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매튜네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멀린의 화를 더 돋운 모양이었다. "저 자식, 뭘 잘했다고 그따위로 구는거냐, 응?" 테일론은 문득 속으로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것을 느꼈다. '그럼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만 두지 못하겠어요?" 그러나 그의 분노는 갑작스레 들려온 다른 이의 외침에 의하여 날아가버렸다. 테일론은 당황한 표정으로 날카롭게 외친 자신의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멀린도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앤은 평소 말이 적고 남편이나 아이들 앞에 큰 소리 한번 내지 않은 현숙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평소 그녀의 모습을 깨버리고 크게 외친 것이다. 그것도 항상 그녀가 존중하고 따르던 남편에게... "앤?" 멀린이 당황한 목소리로 자신의 부인을 불러보았다. 마치 그녀가 정말 그녀 맞는지 확인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앤은 그런 그녀의 남편을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뭔데 내 아들에게 소리치는 거예요? 당신이 뭔데?" "앤?" "저 애는 내가 처음으로 낳은 아들이예요. 내가 10달이나 뱃속에 넣고 다칠새라 조심스렇게 행동하면서 키웠고 죽을 고통을 감수하면서 낳은 소중한 애란 말예요. 그런데 당신이 뭔데 내 아들에게 소리치는 거죠? 한번만 더 내 아들한테 소리치면 내가 가만있지 않겠어요!!" "앤? 당신 왜그러는 거요?" "멀린, 당신이야말로 왜그러죠? 저 애가 뭘 잘못했다고?" "당신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거요?" "그래요, 정말 모르겠어요. 저 애가 뭘 잘못했다는 건가요? 당신은 기사였을당시 당신 부하들이나 아이들에게 어느때라도 기사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 누누히 강조하던 분 아니었나요? 그런데, 지금와서 그게 바뀌었나보죠? 저 애가 뭘 잘못했는데요? 뭘요?" "앤..." 멀린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부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까의 그 당당하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지금은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그러자 앤의 흥분되고 높아진 목소리가 약간은 침착하고 낮아졌다. "멀린, 당신은 기억 안 나요? 저 애가 태어났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이 당신이었잖아요. 저 애의 이름을 짖기 위하여 며칠 밤 낮을 머리싸매고 고심 했잖아요. 아이가 태어난 뒤로 애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님께 혼도 많이 나고, 부하들한테 항상 자랑하고 다녀서 팔불출이란 놀림도 많이 받았잖아요. 그래도 좋아서 허허거리고 다닌 사람 아니었나요?" "그만 하시오." 그러나 앤은 그 정도로 입을 다물지 않았다. "저 애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말했을때 당신은 너무 기뻐서 당장 하늘이라도 날아오를 듯 보였어요. 그리고 저 애가 5살때 처음 목검을 들자 저 애가 마치 왕궁 최고의 기사가 된 것 처럼 기뻐하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만 하라고 하지 않았소!!" 멀린은 크게 소리치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서재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리고 앤은 생전 처음으로 흥분한 사람처럼 기운이 다 빠져버려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자 놀란 테일론이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테일론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자 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테일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네가 그렇게 나를 바라본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어머니..." 테일론은 왠지 목이매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아가야. 정말 미안해. 그동안 혼자 내버려 둬서 정말 미안하구나." 앤은 테일론의 품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테일론은 문득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 기억이 났으며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앤에게 해야한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 저, 할 말이 있는데요..." "응? 뭔데 그러니?" 앤은 테일론의 품에서 약간 벗어나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여행을 떠나려고 해요." "여행?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앤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테일론은 그녀의 눈빛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아는 분이 제 사정을 아시고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하셨어요. 그 분이 지금 여행중이시거든요." 테일론은 여행의 목적지가 저 머나먼 동쪽 나라, 일반 사람들은 있는지 조차 모르고 듣지도 못한 나라라는 것은 쏙 뺐다. "테일론? 그거 가야겠니? 이제라도 취소하면 안될까? 이렇게 널 보내고 싶지 않구나... 나중에 가면 안되겠니?" 앤이 간절함을 담아 테일론에게 물었지만 테일론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이번 기회에 가지 못하면 영영 못떠날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 테일론은 다시 용기를 내어 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 예전부터 이 곳을 떠나고 싶었어요." "얘야..." "죄송해요. 저 빨리 짐을 챙겨서 가야해요. 정오에 만나기로 했거든요." 테일론은 앤이 자신을 붙잡기 전에 얼른 일어서서 빠른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앤은 그런 테일론의 뒷모습을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 차근 차근 자신의 방을 정리하면서 짐을 싼 테일론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을 한번 휘둘러본뒤 밖으로 나왔다. 아랫층으로 내려가자 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말리지 마세요. 전 꼭 갑니다." "그래, 알았다." 앤이 순순히 포기하자 테일론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그 모습을 본 앤이 살포시 웃었다. "놀랐니? 놀랄 것 없다. 넌 예전부터 고집이 셌으니까. 한번 하겠다고 하면 누가 말려도 했었지." 그리고 테일론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몸 조심하거라. 식사는 꼭 꼭 챙겨먹고... 난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으마." 테일론은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예. 어머니, 다녀올께요." "그래, 다녀오렴."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테일론은 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외출 인사를 했다. 테일론이 현관 문을 열고 나가서 다시 문을 닫자 앤은 서재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재의 문은 왜인지는 몰라도 약간 열려져 있었다. 앤은 그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테일론이 당신을 쏙 빼닮았죠?" 그러자 서재의 문이 쾅 하고 다시 닫혔다. "정말 둘이 똑같다니까..." 앤은 설래설래 고개를 젓다가 창 가로 다가가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기에서는 테일론이 이제 막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잘 다녀오렴..." 앤은 테일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테일론은 실로 오랜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앞으로 그의 앞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테일론의 미래를 좋은 방향으로 바꿔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외전 끝입니당 - 1부 & 외전 끝 ==> 2부로 홀홀홀 드디어 2부 연재를 시작합니다. 부디, 제발, 기대하지는 말아 주세요 ^^;; ---------------------------------------------------------------- 아린 이야기 제 2 부 프롤로그 류미르와 세이몬하고 너무나 허망하게 헤어져버린 나는 더 이상 여행을 하고 싶은 의욕을 아에 잃어버렸다. 그래서 할머니와 함께 내 레어로 돌아온 나는 잠들어 버렸다. 하지만... "아린아, 아린아~!!" "우웅..." "아린아, 어서 일어나. 그만 자고 일어나라니까!!" "잉... 누구야?" 한참 단 잠을 자고 있는데 방해를 받은 나는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리면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잠이 덜 깨는 바람에 눈 앞이 뿌연게 잘 보이지 않았다. "아하암~~" 짧고 몽툭한 두 팔을 쭈욱 내밀어 내가 할수 있는 한 힘껏 기지개를 피면서 하품을 하자 두 눈에 눈물이 고여 눈동자를 맑게 씻어 내렸다. "도대체 누가 깨우는 거야?" 눈을 껌뻑여 눈에 고인 눈물을 지운뒤에 앞을 보니 저 머나먼 동쪽 나라로 여행을 가신다며 아르카스해의 블루 드래곤 아이비스크님과 떠나셨던 할아버지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얼라리? 할아버지 아니세요? 언제 오셨어요?" "인석아, 할아비가 깨우면 즉각 즉각 일어날 것이지 뭘 그렇게 꼼지락 대?" "히잉... 잘 자고 있는 드래곤 다짜고짜 깨우신 게 누군데..." "떽, 이 할애비가 깨우면 뭔가 깊은 뜻이 있는 줄 즉각 알 것이지 궁시렁 대긴 왜 궁시렁대는 거야?"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아, 그나저나 도대체 몇년이나 지난거지?" "네가 잠든 지 100년이 지났다. 그리고 빨리 눈에 있는 눈꼽이나 떼거라. 네 할미가 기다리고 있거든." 할아버지의 말에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손로 눈의 눈꼽을 떼면서 물었다. "에? 할머니가요?" "그래, 그러니까 빨리 폴리모프 하렴."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폴리모프를 했다. "잉? 인석아, 넌 아직도 옷을 형성시키지 못하는거냐?" "그럴수도 있지 뭘 그러세요? 앗, 어딜 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내 몸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나는 재빨리 잠 들기 전에 잘 빨아서 고이 모셔놨던 옷들을 찾았다. "욘석아, 내 나이가 몇인데 보면 좀 어떠냐?" "에잇, 보지 마시라니까요." 나는 할아버지를 한번 째려봐준 뒤 얼른 옷을 입었다. "다 입었냐? 그럼 가자." 나는 할아버지의 재촉에 얼른 망토를 두르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는 거에요?" "가 보면 알게 될거다. 그런데 아린아?" "예?" "너 한테는 안 좋은 일이니까 마음은 단단히 먹고 가거라." 아까의 장난끼 넘치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지한 모습으로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질문 할 여유를 주지 않고 나를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공간 이동시키신 곳은 할머니 레어 안이었다. 보통 엄마나 나는 할머니 레어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으로 공간 이동을 하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 바로 코 앞으로 이동을 시키시는 바람에 버릇대로 할머니 레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띄우던 나는 할머니의 커다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우앗, 아이고 깜짝이야." "아린 왔구나..." "어? 할머니?" 평소의 명랑하고 다정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닌, 부드럽지만 어딘지 힘이 없으신 목소리에 난 의아함을 느꼈다. "어디 아프세요?" 할머니는 부드럽게 한번 미소를 지어주시며 대꾸하셨다. "아픈 게 아니라 때가 된거지..." "에?" 영문을 모른 내가 할아버지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또 한번 놀라 버렸다. "얼라리? 두 분은 여기 왠일이세요?" 할아버지가 또 다른 두분과 같이 서 계셨던 것이다. 한 분은 우리 레드 일족의 족장 칼 제피로스,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드래곤 전체의 말 뿐인 대표이신 칼 엘리아스 였다. "오랜만이구나 아린아." "안녕?" 두 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인사를 해왔지만 두 분의 얼굴이 약간 가라앉은 걸 느낀 나는 더욱 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그런데 분위기가 다들 왜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자 칼 엘리아스가 물었다. "아린은 모르는 거야?" "에? 뭘요?" '오늘은 자꾸 의아한 일만 생기네...' 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하자 할아버지가 나서셨다. "아직 아린에게 말 안했어. 당신이 직접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존칭을 쓰는 존재,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하자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셨다. "당신의 배려 고맙군요, 칸 시스파슈타인." "저기요, 정말 죄송하지만 이제는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그 자리에 있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나는 소외감을 느끼다 못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진지한 어조로 나를 부르셨다. "아린아?" "예, 할머니." 할머니의 진지한 분위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눌려서 대꾸하자 할머니가 나를 그윽한 눈으로 한 동안 바라보고만 계셨다. "할머니?" "아린아, 내 아가야... 널 만나서 난 정말 기뻤단다." 나는 얼떨떨했다. "아, 저도 할머니를 만나서 행복해요." "호호호, 그러니? 그거 참 고맙구나. 그런데 아린아?" "예?" "난 이제 수명이 다했단다." "에?" 할머니의 담담한 어조에 응? 하던 나는 그 뜻을 알아차리자 크게 놀랐다. "할머니가요?" 내가 수명을 다 할 때까지 옆에서 항상 계실것만 같았던 할머니가 스스로의 입으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하자 누군가가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아하하, 그게 무슨..." "아이야, 나도 너와 헤어지는 것이 매우 서운하지만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수명은 신께서 정하시는 것. 우리는 거기에 순응할 수 밖에 없지." "할머니..."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떨렸다. "아이야, 가여운 내 아이. 이 할머니가 너한테 참 나쁜 짓을 하는구나... 나에게 조금 만 더 시간이 허락했다면 좋았을텐데... 아직 어린 너한테는 너무나 큰 짐이겠지... 정말 미안하구나..." ............... 드래곤이 수명을 다 하지 못한 채 죽으면 육체를 고스란히 남기지만 수명을 다 한 드래곤이 죽으면 그 육체는 조금도 남지 않는다. 각각의 드래곤 족마다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다 다르다. 그린 드래곤은 눈을 감는 순간 그의 몸이 석화가 되면서 천천히 무너져 내려 흙으로 돌아간다. 블루 드래곤은 거대하고 강한 물줄기에 휩싸여 그 몸이 분해가 되어가며, 블랙 드래곤은 어두운 기운에 휩싸여 소멸한다. 화이트 드래곤은 바람에 의하여 몸이 흩어지며 실버 드래곤은 온 몸이 얼음덩어리가 된 후에 부서져 버린다. 골드 드래곤은 강력한 빛을 뿜어냄과 동시에 공중으로 산산히 부서져 버리고 우리 레드 드래곤은 강렬한 화염에 휩싸여 온 몸이 재가 된 뒤에 공중으로 흩날리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칼 제피로스와 칼 엘리아스가 보는 앞에서 마지막으로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시더니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가 눈을 감으시자마자 그녀의 몸에서는 강렬한 불꽃이 터져나와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할머니..." 나는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겨주신 어린 아기의 주먹만한, 붉디 붉어 피빛의 색깔을 띄우는 보석을 손에 꼭 쥔채 할머니의 몸을 휩싼 화염이 끝날 때 까지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머니..." 묵직한 보석의 무게와 함께 할머니께서 나에게 남겨주신 과제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제 1화 출발!!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1주일이 지난 후인 어느날, 레어 입구 근처의 돌 위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에게 할아버지가 찾아 오셨다. "아린아, 괜찮은 거니?" 할아버지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오자 나는 피식 웃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의 말을 믿지 못하셨는지 여전히 걱정스런 눈빛이다. "내가 같이 가주랴?" 나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아니요, 저 혼자 스스로 처리할래요. 그러고 싶어요." "그래, 알았다. 너 좋을대로 하렴." 할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품 속에서 빌로드 천으로 감싼 어떤 꾸러미를 꺼내어 나에게 내미셨다. "받거라. 급하게 만든거라 네 맘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내 보기에는 꽤 괜찮은 것 같구나." 할아버지에게 꾸러미를 받아들어 펼치자 그 곳에는 은빛으로 반짝 반짝 빛이나는 서클렛이 하나 들어있었다. 이마 부분을 장식하게 될 앞 부분의 정 중앙에는 내가 할머니께 받았던 붉은 보석이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8면체로 다듬어져 박혀 있었고 그 양 옆으로 붉은 보석 절반정도 크기인 이파리 모양의 자수정이 2개씩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5개의 보석을 꽉 잡아 형태를 띄우면서도 머리에 씌여질 수 있게 테를 형성하고 있는 금속은 강력한 마법에도 견딜 수 있다는 미스릴이었다. 보석이 꽤 큰데도 불구하고 별로 무겁지 않은 걸 보니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는 듯 했다. "예쁘네요." 서클렛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 할아버지에게 맘에 든다는 뜻으로 중얼 거리며 그 서클렛을 할아버지께 내밀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계시는 할아버지께 한 마디 더 했다. "할아버지가 씌워주세요." 할아버지는 진지한 얼굴로 그 서클렛을 받아들고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에 씌워주시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셨다. "잘 해내리라 믿는다." "그래야죠. 잘 해낼거예요." 서클렛이 이마에 잘 고정되었는지 살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지금 출발하려구?" 내 행동에 놀라셨는지 할아버지가 약간 높아진 톤의 목소리로 물으셨다. "그래야죠.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 할아버지께 될 수 있는 한 무덤덤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할아버지는 오히려 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셨다. "정말 혼자 괜찮겠니?" "괜찮아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어디로 갈거니?" "먼저 알베르토 산에 가보려구요. 그 근처에서 시작되었다니 아마 뭔가 흔적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쩌면 원인을 알아낼지도 모르잖아요." "네가 판단한 일이니 막지는 않겠다마는... 원인이 어떻든간에 결론은 달라지지 않을게다. 그걸 꼭 기억하렴." "알아요, 할아버지.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혹시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할아버지께 물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냉답하게 대답하셨을 뿐이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당사자에게는 그 방법이 가장 좋을테지." "하아, 그렇군요..." 떠날 준비는 진작부터 되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내 뒤에 버티고 있는 레어를 보자 한 숨이 폭 하고 나왔다. 일년 전만해도, 아니 일주일 전만 해도 내 레어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지금은 할머니께 물려받은 잡동사니(?)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보석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리많치 너무 많은 양의 보석을 받아서 절반 정도는 할아버지와 칼 제피로스, 그리고 칼 엘리아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그래도 내 레어를 가득 채웠다. 덕분에 예전에 내 레어에다 해 놓았던 방어 결계를 더욱 더 강하게 보강해 놓느라 며칠을 소요해야만 했다. 아마 저 보석들이 줄지 않는 한 내가 더 이상의 보석들을 모으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저것들만 없었어도 맘 편히 갔을텐데... 하지만 저걸 다 남 주려니 그것도 아까워서 절반은 남겼으니... 덕분에 결계 보강하느라 골치 좀 아팠지...' 쓸데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할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했다. "갈께요, 할아버지." "그래, 잘 다녀오너라. 너의 앞길에 창조주의 보살핌이 있기를..." "하하하, 그런 말 들으니까 이상하잖아요." 실 없이 웃는것을 끝으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곳들 중 소르드 왕국과 가장 가까운 에스라 왕국의 다도이강 유역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내 목적지인 알베르토 산은 에스라 왕국과 소르드 왕국의 국경 근처에 있었으며 그 두 국가의 국경인 다도이강이 시작되는 산이기도 했다. '창조주의 보살핌이라...' 사람들에게 들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지면으로 부터 꽤 높은 허공으로 이동한 나는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강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할아버지의 인사를 곱씹었다. 창조주... 사람들은 흔히 우리 드래곤들이 신을 믿지 않는 존재, 혹은 신께 대항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요, 오해일 뿐이다. 물론 드래곤들이 그걸 알았다 해도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관계로 아예 기정사실화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드래곤은 누구보다도 이 세상과 드래곤을 창조한 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 인간들 중에 있는 신관들 만큼 신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엘프 다음으로 우리 드래곤일 것이다. 내가 사람들 중 신관들 이라고 딱 지정을 해 놓은 이유는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모두 제각각이어서 그들 중에는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우리 드래곤이 사람들 처럼 여러갈래의 신학이 존재하고 신앙을 강조해서 신전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드래곤의 종족이 이 우주의 한 일부분이며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한 신은 계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드래곤들도 가끔은 신을 찾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처럼... 하기야, 우리 드래곤은 신이 아니라 신의 창조물 들중 하나일 뿐이니까. '후우, 할아버지의 인사가 아니라 제발 창조주의 가호가 있기를...' 난 진심으로 중얼거린 뒤 인적이 드믄 곳을 찾아내어 땅으로 내려왔다. 우선은 이 강을 건너 소르드 왕국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산이 국경 근처에 있다고는 하나 엄연히 소르드 왕국에 있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이 산은 소사믹 산맥의 맨 끝자락에 있는 산으로 산은 그렇게 높고 험한 편은 아니었지만 드래곤 숲과 가깝기 때문에 드래곤 숲에서 쫓겨난 몬스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위험한 곳이었고 근처에는 마을도 없어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한 곳이었다. '그건 그렇고... 배를 타려니 별로 내키지를 않네... 게다가 국경을 넘는거니 양쪽에서 귀찮게 할 거 아냐? 흐음... 그냥 밤에 날아서 건널까?' 별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배를 탈까 말까 고민하면서 배가 즐비하니 서 있는 강의 선착장으로 가자 유난히 병사들이 많이 지키고 서서 사람들을 검문하는 곳이 보였다. '응? 저긴 왜 저렇게 살벌하게 검문을 하는거지?' 예전에 이 곳에 왔을때는 저정도로 검문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흐음, 세월이 흐르다보니 경계가 강화됐나보지?'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배를 타려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들 중에서 몇몇 사람들을 한쪽으로 분류해 놓는데 분류되는 사람들이 모두 18세 정도 되어보이는 소녀부터 20대 후반정도 되어보이는 여성들이었다. '어라? 왜 젊은 여자들만 골라놓은 거지? 이거 혹시 어떤 썩어빠진 귀족 녀석이 할렘가를 만들려고 그러는거 아냐?' 하지만 계속 지켜보니 분류된 여성들중 붉은 머리를 하거나 검을 찬 여성들은 한쪽으로 또 분리되고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만져보면서 살피더니 어떤 여성은 그냥 보내고 어떤 여성은 또 따로 분류하는 것이었다. '흐음... 그런 건 아닌 거 같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내 문제는 까맣게 잃어버리고 호기심에 차서 그 근처에서 떠나지 않고 어슬렁대면서 기웃기웃 대고있는데 그 곳에 있던 기사 한명이 나를 발견했는지 나에게 다가왔다. "거기, 빨간 머리!!" 내 쪽을 향하며 소리쳐 불렀기에 나는 내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근처에서는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나 말고는 보이지 않았기에 기사에게 나를 가리켜 보이며 물었다. "에? 저요?" "그래, 너말이야." 나에게 완전히 다가온 기사가 내 앞에 서서 대꾸했다. "왜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곧장 자신의 궁금증을 물었다. "너 여자냐, 남자냐?" "에?" 나는 더욱 더 황당해져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무척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장난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여자냐?" 그가 다시 묻자 나는 얼떨결에 사실대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런데요?" 그러자 그는 덥썩 내 팔을 잡았다. "잠깐 저쪽으로 좀 가자." "에? 왜요?" 당황하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그는 내 손을 단단히 잡고 놔주질 않았다. "잠깐이면 돼니까 와봐. 조사할게 있어서 그러니까." "어어어..." 그가 내 팔을 강하게 잡고 걸어가는 바람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제목: 아린 이야기 2부 - 제 1화 출발!! (2) 그 기사가 나를 데려간 곳은 여자들 중에서도 또 한쪽으로 분류해 놓고 있는, 그러니까 검을 든 여성이나 붉은 머리를 가진 여성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자, 너도 여기 있어?" 그가 나를 그 그룹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에? 왜요?" 당황한 내가 그를 돌아보며 항의를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않하고 다른 쪽으로 가버렸고 그의 뒤를 쫓아가려는 나를 병사들이 가로 막았다. "쳇,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결국 나는 투덜대는 것으로 만족하고는 여자들 틈에 끼어들었다. 그 여자들도 영문을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 인것 같았다. 모두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저 앞에서 여자들 하나 하나를 심문하고 있는 40대로 보이는 무척 깡마른 마법사와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기사 한명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질문은 기사나 마법사가 번갈아가면서 하는 것 같은데 대충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나이가 몇이냐, 출생지가 어디냐, 어딜 가는 중이냐 등등 너무나 형식적인 질문들만 하다가 보내주고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여자들도 가끔 있었고 그들은 또 다른 쪽으로 분류되어 어떤 조치가 취해지길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결국 지루한 기다림 끝에 내 차례가 와서 나는 그들 앞에 섰다. 그 둘은 나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샅샅이 훑어 보더니 마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름은?" "아린 인데요." "성은 없나?" "시피르..." "어디 출신이지?" "켈튼 연합국 출신인데요." 그 마법사는 뭐가 그렇게도 중요한지 내가 대답하는 것마다 열심히 종이에다 적고 있었다. "어딜 가려는 거냐?" "에, 저기... 소르드 왕국으로 가려고 하는데요?" 그러자 기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와졌다. "거긴 왜?" "그게 그러니까... 언니가 그 곳에서 살고 있는데요. 언니 찾으러 가요." "뭐? 켈튼 연합국 출신이 소르드 왕국까지 시집을 간 건가?" 기사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살벌하게 물었다. "아뇨, 언니는 용병인데요. 일이 있어서 소르드 왕국으로 갔어요." "그래? 흐음... 하긴 요즘 거긴 시끄러우니까..." 기사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마법사가 다시 질문을 했다. "나이가 몇이지?" "17살인데요." "검을 쓸 줄 아나?" 마법사가 내 허리에 차여져 있는 레이피어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아, 예. 조금..." "혹시 마법도 쓸 줄 아나?" "마법이요? 아, 예. 조금은..." "그래? 그렇군. 그럼 혹시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나?" '그런게 있을리가 없잖아.' "아, 저기 없는데요..." "흐음... 성이 있는걸로 봐서는 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집안 문장 정도는 있을 것 아닌가?" "그게 안 챙겨왔는데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마법사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빤히 쳐다보고 있더니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가출했지?" "예?" "척 보아하니 뻔하구만 뭐. 옷 입고 있는거나 머리에 쓰고 있는 서클렛을 보아하니 꽤 있는집안 딸이구만. 검도 하나 차고있는 걸 보니 기사 집안 여식인 것 같은데 그런 집안에서 17살 짜리 딸을 혼자 외국에 보내겠니?" 마법사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기사도 한 마디 했다. "요즘 애들은 정말 겁도 없다니까. 저런 애들은 한번 크게 혼이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빨리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이 무척 걱정하실테니까. 요즘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데, 멋도 모르고 돌아다니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이봐, 이 꼬맹이는 내보내!!" 기사가 옆에 서 있던 병사에게 명령하자 그 병사는 내 팔을 툭툭쳐 자신을 보게한 후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하면서 앞서 걸어갔다. 나는 가출한 철부지 여자애로 낙인찍힌 게 좀 분하기는 했지만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아무 말 없이 병사를 따라갔다. 병사는 여자들을 일일이 검문하는 기사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 무리를 벗어날 때까지 나를 데리고 가더니 멈춰섰다. "어서 가봐. 여긴 요즘 위험한 곳이라구." 아마 그 병사에게는 나 같은 여동생이 있었는지 친근하고도 부드러운 어조로 나를 달래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기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예요?"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가르쳐주지 않았다. "너 같은 애는 알아서 좋을 거 없어. 그러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가." 거기까지 말한 그는 얼른 몸을 돌려 병사들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참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야?" 어찌 되었는 결국은 배를 타고 소르드 왕국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기 위하여 순순히 그 곳에서 몸을 돌렸다. 그런 내가 찾아간 곳은 근처에 있던 식당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고 아무래도 배를 채워야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 에서 출발한 뒤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벌써 몇시간이 흘러서 날도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식사뿐만이 아니라 하루 밤 묵을 방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제목: 아린 이야기 2부 - 제 1화 출발!! (3) 하룻밤만 묵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여관들 중 아무 곳이나 한 군데 들어섰다. 다행히도 방이 있었지만 그것도 평실이 아니라 여관에서 소위 말하는 특실 이었기 때문에 한군데 남은거라고 여관주인이 떠벌떠벌 하는 걸 대충 응수해 주고는 방에 들어섰다. 방에는 그래도 특실이라고 충분히 넉넉한 공간에 더블 사이즈의 침대와 낡은 안락 의자 두개, 그 사이에 탁자 하나, 그리고 방 구석에 옷걸이와 그 옆에 개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개수대에는 오래 되었지만 깨끗하게 닦아놓은 거울까지 있어서 내 감탄을 자아냈다. "와우, 역시 특실이라 다르긴 다르네..." 탁자 위에다 망토를 벗어 올려놓은 나는 손과 얼굴을 씻기 위하여 개수대 앞으로 갔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씻으려니 이마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서클렛이 손에 걸렸다. "흐음, 예쁘기는 한데... 이럴 땐 불편하군." 손과 얼굴이 물에 젖은채로 서클렛을 벗자 서클렛을 따라 나의 긴 생머리가 출렁 거렸다. "그래도 긴 머리는 익숙하지만..." 서클렛을 벗느라 약간 엉킨 머리를 망토 속을 뒤적여 꺼낸 리본으로 대충 아무렇게나 묶은 뒤 다시 얼굴을 씻기 위하여 몸을 숙였다. 얼굴을 다 씻은 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힐끗 서클렛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부터라도 얼굴을 씻을 땐 계속 빼 놔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니 다시 머리에 쓰고 싶지가 않았다. "귀찮은데...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닐까?" 하지만 막상 서클렛을 집어 들고 탁자쪽으로 가까이 가자 왠지 망설여졌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기껏 생각해서 만들어주셨는데 말야... 게다가 끼고 있으면 왠지 맘도 든든하고... 할머니가 곁에 계시는 것 같거든..." 나는 탁자 앞에 서서 주머니를 열지 못하고 서클렛만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 다시 머리에 썼다. "에이, 몰라. 나중에 귀찮으면 그때 집어넣지 뭐." 식사를 하러 내려가기 전에 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베낭 안을 뒤적 뒤적 거리자 오래되어 낡은 배낭이 꺼끌꺼끌한 소리를 냈다. "음... 베낭이 좀 말썽이네... 하긴 좀 오래되긴 했지. 보존 마법을 걸어놓은 것도 아니고. 조금 있다가 나가서 하나 사야겠네. 음, 그리고 옷도 좀 사고. 망토는 멀쩡한데 옷들이 다 낡았단 말씀이야..." 그래도 그 중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어 갈아입고 내려가자 저녁시간대라서 그런지 식당안이 북적북적 했다. 덕분에 맨 구석에 있는, 의자도 세개 밖에 없는 자리에 앉아야 했지만 혼자인데다 남들 눈에 띄이고 싶지 않았던 터라 나는 만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앉았다. "뭘 드릴까요?" 나에게 자리를 안내해 준 여관에서 일하는 소년이 물었다. "음, 지금 무척 배가 고픈데 내가 여길 처음이니 괜찮은 걸 소개해 줄래요?" "우리 여관에서 괜찮은 요리를 찾으신다면 단연 민물고기 요리지요. 강과 가까워서 싱싱한 물고기들을 쉽게 구할 수 있거든요. 그 중에서도 핫 피시 스프는 끝내준답니다." "좋아요. 그럼 그걸로 주세요." "그런데 배가 고프시면 그거 하나로는 양에 안 차실 텐데요?" 역시 상업 정신이 투철한 아이다. 나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요? 그럼 또 뭐가 좋을까요?" 그러자 소년은 땡 잡았다, 란 표정으로 싱글 싱글 웃으며 매끄럽게 입을 열었다. "야채 라이스라는 요리가 있는데요, 핫 피시 스프와 같이 먹기에 딱 좋죠." "그럼 그렇게 두가지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년이 가버리고 나자 나는 저녁을 먹고 나가서 내가 사야 할 것들을 머리속에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음, 우선 베낭부터 사고... 그 다음 옷도 좀 사야지. 그리고 지도도 사야겠군. 있긴 하지만 내가 자기 전 거라 아마 좀 달라졌을테니... 그리고 또 뭐 없나?' 내가 이렇게 혼자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옆자리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큰 소리를 냈다. "뭐라구? 그게 정말이야?" 무척이나 놀란 듯한 그 목소리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다 그들에게 쏠렸다. 아마 큰 소리를 낸 것에 대한 질책의 눈초리인 듯 큰 소리를 낸 사람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그러자 사람들의 고개가 원래 바라보고 있던 곳으로 다 돌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놀랜 사람이 바로 내 옆자리였으므로 나는 고개를 돌리기는 했지만 자연스레 치솟는 호기심에 그들의 대화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아까 그 사람이 계속 물었다. "이봐, 그게 정말이야?" 그러자 상대편의 사람이 신이나서는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너도 놀랐지? 나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척 놀랐다니까..." "세상에나... 아니 저 소르드 국의 성들이랑 우리나라 성들을 모조리 휩쓴게 여자란 말이지?" "그래,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 너 왜 우리 병사들이 요즘 맨날 선착장에 가서 국경을 넘나드는 배들을조사하잖아? 그게 바로 그 여자를 찾는 거라니까." "우와, 무슨 여자가 힘이 남아돈대?" "몰라,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검 하나를 들고 그렇게 설쳐대는데, 실력이 무척 뛰어나서 막을 수가 없다잖아. 그러니까 성 몇개를 멸망시켰겠지. 그런데 그건 둘째치고 얼마나 악독한지 자신의 눈에 띄이는 사람은 모조리 죽였다더군. 그 여자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이나 성은 강아지새끼까지 다 죽었대." "세상에... 그건 사람이 아니라 완전 악마로군." "맞아. 그래서 그 여자를 피의 악마라고 불러. 그런데 말이지..." 신나서 이야기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한 층 낮아졌다. 그러자 듣고 있는 남자까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몸을 숙였다. "응, 응.." "그 여자가 20살 초반쯤 되어보이는 여자인데 빨간 머리를 가지고 있대." "그래?" 듣고 있던 남자는 대꾸를 하면서 놀란 눈으로 나를 휙 돌아 보았다. 아마 내가 자리에 앉을 때 날 본 모양이었다. 그러자 옆의 사람이 핀잔을 주었다. "뭐야, 저 녀석은 남자잖아. 넌 남자 여자 구분도 못하냐?" "아, 하긴 그렇구나..." "봐, 척 하니 남자애구만." 그 둘의 대화에 나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거 기뻐해야 하는거야, 슬퍼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내 음식을 날라 온 소년에 의하여 중단 되었다. "자,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음식을 받고 보니 핫 피시 스프란 민물 고기를 넣고 매콤한 맛이 나게 끓인 스프로 매운탕과 비슷했다. 그리고 야채 라이스란 여러가지 야채를 밥과 함께 넣고 볶은 밥이었다. "와, 이런 곳에서 밥을 먹게될 줄은 몰랐는데?" 옛날 생각에 감격에 젖어 밥을 한 숟가락 떠 먹었다. 비록 똑같은 맛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쌀 맛을 맛볼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여 즐거운 마음과 함께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 치웠다.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빨리 나가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난 뒤 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 아니 뭔 가방이 그렇게 비싸대요?" 저녁을 다 먹고 거리로 나와 제일 먼저 찾아간 가방을 파는 가게에 들어선 나는 갈색으로 된 가죽 가방을 하나 골랐다. 별 무늬가 없는데다 줄이 두개 달려 있어 양 어깨에 멜 수 있는데다 모양도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꽤나 깔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가방을 들고 계산해 달라던 나는 눈이 둥그래질 수 밖에 없었다. "아, 그거? 50셀만 내." 퉁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친절하지는 않는 주인 아주머니의 대꾸에 놀란 것이었다. "뭐가 이렇게 비싸요? 50셀이라니, 좀 너무하잖아요." 예전같으면 50셀에 이런 가방 서너개는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지났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 비싸다 싶어 내가 항의하자 주인 아주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요즘 강 건너 나라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들어오는 물건이 팍 줄었다고. 다른 가게를 가더라도 마찬가질걸? 요즘 시세를 너무 모르는 거 아냐, 청년?" 청년... 나는 나를 청년이라고 부르는 아주머니의 말에 충격을 먹고 전의를 상실하여 순순히 50셀짜리 은화 한 닢을 내놓았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시원시원해서 좋구만. 자고로 남자가 그래야지!!"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요. 다음에 또 살거 있으면 우리집 오고..." 예전에 류미르와 세이몬과 같이 다닐때는 녀석들이 남자라서 사람들이 당연히 나도 남자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고, 또 남자로 행동하는 것이 편해서 그랬는데 지금 이렇게 혼자 당당히 서 있는데도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라고 생각하자 나는 충격을 먹었다. "도대체 뭘 보고 나보고 남자라는 거지? 바지 입은 여자들이 드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미모가 어디 빠지는 것도 아니고... 거참..." 하지만 지나가는 두 남정네가 나를 보고 속닥거리는 대화를 들은 나는 한번 더 휘청거렸다. "오, 저 여자 괜찮은데? 한번 꼬셔볼까?" "야야, 너 눈이 삐었냐? 저게 어딜 봐서 여자야? 미끄덩하게 생긴 남자녀석 이구만... 남자녀석이 저렇게 생겨서 어디다 써먹냐?" "뭐가 남자야? 얼굴을 보아하니 여자잖아?" "바보 아냐? 저렇게 큰 키에 볼륨 없이 마른 몸매. 척 보아하니 남자구만." "아, 그러고 보니 가슴이 없네?" "그렇다니까. 키 큰 여자야 어쩌다 가끔 있을수도 있지만 저건 아예 가슴도 없고 허리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건 남자라구." "흠, 그렇구나. 쩝, 아깝다." "시끄러. 빨리 가기나 하자구." 휘청이는 걸음으로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거울 앞에 섰다. '이게 어디 여자란 말야?' 나는 폴리모프 할때 우선은 얼굴은 엄마의 얼굴을 모티브로 하여 약간은 어린 모습으로 지정했고 키는 예전에 대한민국 고등학생 이었을 때 큰 키를 동경했던 영향으로 항상 키를 167 ~ 170 정도로 만들었다. 그리고 근육질이나 곡선이 뚜렸한 몸매는 싫어했기에 아직 몸매가 발달하지 않은 소녀나 소년의 몸매로, 약간 마른데다 볼륨도 거의 없는 몸매로 형성하고 다녔다. '확실히 중성적인 모습이긴 하군.... 하지만 이 정도면 예전에는 슈퍼 모델감인데...' 하지만, 어쩌면 이 모습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몰랐다. 우선은 어딜 가서든 가출한 철 없는 소녀로 비출 일도 없었고 여자라고 치근덕 거릴 남자들도 줄어들 거였다. -가끔은 예쁘면 남자든 여자든 안 가리는 놈들도 있으니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요즘 이 나라와 바로 옆 나라인 소르드 왕국을 벌집 쑤셔놓듯 들끓게 만든 범인의 인상착의와 비슷하다고 아까 낮에처럼 병사나 기사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노려볼 일이 없어진다는 거다. '그래, 좋았어. 차라리 남자처럼 하고 다니자.' 어차피 지금까지 남자처럼 하고 다녔으니 여기서 아예 남자로 착각되어 진다고 해도 나쁠 건 없었다. 나는 베낭을 거꾸로 들어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을 침대 위에 쏟아놓은 뒤 내용물들 중 단검을 찾아 꺼내 들었다. 원래 베낭안에 쑤셔넣었던 거라 보통 단검이었으면 날 전체가 붉게 녹이 슬어 있었겠지만 이 단검은 할아버지께 예전에 받은 거라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 혼자 오랜 세월을 냅둬도 날이 파랗게 빛을 내며 날카로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단검의 날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나는 거울 앞으로 돌아가서는 단검을 치켜들었다. 사각~, 사각~ 역시, 날이 날카로와보이더니 잘만 잘려졌다. 내 주위에는 내 머리에서 잘려져 나온 붉은 머리칼들이 허공에서 나풀 나풀 춤을추다 땅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각~, 사각~ 처음, 그것도 남의 머리가 아닌 내 머리를 자르는 거라 상당히 조심해서 자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어색했다. 대충 대충 잘라 모양새를 잡은 뒤, 조금씩 조금씩 잘라가며 다듬었다. "아얏!!" 그러다 머리칼과 함께 귓바퀴를 잘라버릴 뻔 한 나는 갑작스런 뜨거운 통증에 얼른 단검에 힘을 가하던 손을 멈추고 귀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살점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베인 상태라 피가 마구 흐르고 있었다. "아야야, 아파라... 젠장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만..." 얼른 수건을 가져와 지혈을 했지만 그래도 상당량의 피가 흘러서 귀와 손을 비롯한 머리칼과 어깨 부분의 옷에 빨간 물을 들이고 있었다. "우씨, 아파... 괜히 잘난 척 한답시고 내가 잘랐나? 차라리 미용실 같은 델 갈걸 그랬어..." 피가 서서히 줄어드는 것 같자 나는 귀에 대고있던 수건을 떼어내고는 치유의 마법을 걸어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리고 빨갛게 물들어 있는 수건을 빨아서 내 옷과 손, 그리고 귀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다. 한번 베인데다 거울을 보니 약간은 어색한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충 모양은 잡혀 있던 터라 나는 더 다듬을 생각을 버리고 주위에 널려 있던 붉은 머리카락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쓰레기통에다 버렸다. 허리 약간 위쪽까지 내려왔던 긴 머리칼이 단숨에 짧아져 버리자 머리가 한층 가벼워진 듯 했고 목덜미가 시원했다. "흐음, 그래도 얼굴이 잘나서리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는 구만. 이 모습도꽤나 괜찮은데?" 한번 더 거울을 들여다보던 나는 스스로 꽤나 만족스러워서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보기도 하고 뒷 모습도 살펴보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래도 더 있다간 왠지 공주병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인정할 건 인정하는게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예쁜건 예쁘다고 하는 거지. 암, 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처럼 보이기 위하여 내 목에다 가벼운 일루젼(환상) 마법을 걸었다. 이것은 사람들 눈을 가볍게 속이기 위한 것으로 아무리 내가 중성적인 매력을 지녔다고는 해도 여자인 이상 남자에게만 있는 아담즈 애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내 목을 보고 눈치채는 걸 방지하기 위하여 날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작은 아담즈 애플이 보이게끔 마법을 건 것이었다. "자, 그럼 마무리 끝!!" 새로 사온 가방에다 베낭안에 넣어두었던 물건들 중 온전한 것들과 새로 사온 옷들과 소지품을 넣고 나머지 쓸 수 없는 물건들을 버리자 휴지통이 꽉 찼다. 내가 전에 사놓은 옷들은 모두 고급이라서 여관 주인에게 넘길까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고급이라도 100년이란 세월 동안 잘 보관한 것도 아니고 베낭 속에 쑤셔박아 놓은 것들인데 온전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버렸다. '뭐, 나중에 휴지통을 비울때 옷들을 보고 맘에 들면 가지겠지.' 그런데 뭔가 한 가지를 빼 먹은 듯한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 정말... 나이를 먹다보니 머리까지 늙어버렸나... 왜 이렇게 안 떠오르지? 뭔가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하지만 아무리 이리 저리 떼구르르 머리를 굴려봐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에이, 몰라. 생각 안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게 아닌가보지. 아님 때 되면 생각나거나... 오늘은 그냥 잘랜다.' 라고 속 편하게 생각한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서 시트를 뒤집어 썼다. 다음날, 옷을 챙겨입고 가방을 어깨에 맨 채로 식당으로 내려가자 한산한 식당에서 탁자를 닦고있던 소년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손님, 머리가..." "아, 이거? 귀찮아서 잘라버렸어요." "헤에, 그랬군요. 역시 미남이라 어떤 머리를 해도 잘 어울리시는데요?" 미남... "하하, 그래요? 고마워요." "아침 드셔야죠? 뭘로 드실래요?" "크림스프와 빵에 베이컨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앉아계시면 곧 가져다 드릴께요." 내가 구석진 자리에 앉자 이 여관에서 하루를 머문 사람들이 아침을 먹기 위하여 하나 둘 윗층에서 내려왔다. "아아, 여기도 아침 식사 좀 갖다 줘." 그들 중 같은 일행인 듯한 3명의 사람들이 내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년의 활기찬 음성이 들렸고 곧이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던 내 몫의 음식을 날라왔다. "자,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내 앞에 내놓는 간단한 스프와 빵, 그리고 달걀 프라이가 덤으로 놓여진 접시에는 바삭하게 익힌 베이컨 한 덩이가 놓여져 있었다. 소년은 빈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내 뒷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뭘로 가져다 드릴까요? 푸짐한 걸로 드릴까요, 아님 간단한거?" 그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배를 타야 하니까 간단한 걸로 줘." "배요? 바다로 나가시나보죠?" 호기심이 담긴 소년의 질문에 그 사람은 웃음기가 섞인 말투로 선선히 대꾸해 주었다. "아냐, 소르드국으로 갈 예정이야. 그곳이 요즘 시끄럽잖아. 그래서 용병들도 많이 모집하고 있거든." 그러자 소년은 아는체를 했다. "아아, 몇개의 도시가 1년 사이에 차례차례 전멸되었단 사건 말이군요?" "어? 잘 아네?" 그 식탁에 있던 다른 사내가 놀라운 듯이 묻자 소년은 잘난 척 하는 어조로 약간 과장스레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곳에 일하고 있으면서 그정도 쯤이야 뭐,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소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주방으로 달려갔고 뒤에 남은 사내들이 껄껄 웃으면서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흐음, 그 여자를 막기 위하여 용병을 모집하는가 보군. 그럼 나도 그쪽으로 가볼까나? 어차피 정보도 얻어야 하니까. 음, 우선은 소르드 왕국의 수도로 가보는게 좋겠군.' 제 2화 아버지와의 재회 소르드 왕국의 수도에 가보기로 한 나는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여관에서 곧바로 소르드 국으로 넘어가는 배편을 탔다. 배를 탈 때에도 기자들과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으면서 철저하게 수색을 했지만 그럴 줄 알고 망토도 바꿔 입은데다 서클렛은 잠시 벗어서 가방 속에 넣었고 머리도 잘랐기 때문에 누구도 나를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검문은 무사히 통과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르드국으로 넘어가자 거기서도 또 검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곳은 피해가 많아서 그런지 분위기가 옆 나라의 에스라 왕국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고 더욱 더 철저하게 검문을 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나도 붉은 머리라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었는데 내 목에 나있는 예쁘장한 아담즈 애플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간단한 질문을 하고는 통과시켜 주었다. '하, 역시 완벽하게 변장하길 잘 한것 같아.' 스스로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나는 도시 안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강을 건너는 것은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았지만 출발전과 도착 후에 검문당하는 것 때문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아침을 먹고 곧바로 출발하는 배에 탑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오가 훨씬 넘어버렸던 것이다. "어서 오세요!!"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식당안에는 제법 사람들로 그득했고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러나 그렇게 식당 안이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침울한 상태여서 이 곳에 앉아서 밥을 먹다간 체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다른 곳을 가더라도 이와 비슷한 상황일테고, 더욱이 배가 고파 더 이상 움직이기 싫었던 나는 빈 자리에가서 앉았다. "뭘로 드릴까요?" "여기서 잘 팔리는 것들 중에서 푸짐하고 맛있는 걸로 아무거나 주세요." 그러자 나에게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던 아가씨가 피식 웃었다. "아하, 옆 나라에서 오신 분이군요. 용병?" "뭐, 비슷한 거죠.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약간 놀란듯이 그녀를 쳐다보자 아가씨가 더 큰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요즘 우리나라가 뒤숭숭해서 옆나라에서 용병이 많이 오거든요. 게다가 이 근방에 살면서 저희 식당에 와서 아무거나 달라는 사람은 없거든요." "헤에, 그래요? 그정도로 여기가 유명한가보죠?" "호호호, 이 도시에서 좀 이름이 높죠." "와, 그럼 요리를 기대해도 되겠군요." "물론이죠. 기대해주세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가씨는 한번 더 생긋 웃어준 뒤 총총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더운가? 얼굴이 발갛네? 하긴 지금이 슬슬 더워지는 시기인데다가 바쁜 시간대니까.' 나는 의아한 눈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보던 눈을 돌려 식당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식당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낮추고는 저희들 끼리만 심각한 얼굴로 수군수군거리고 있었다. '되게 심각하네? 그정도로 심각한가? 하긴 도시 몇개가 박살났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하지만 이건 좀 너무 심각한걸?' 나는 식당 안을 둘러보던 것을 그만두고는 다시 고개를 식탁위로 돌려 아까 그녀가 놓고간 컵에 담긴 물을 한모금 마셨다. '어쨌든, 수도로 가보면 알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급한 발걸음으로 뛰어오더니 식당 문을 거칠게 열어 젖히고 뛰어들어왔다. "이봐, 빅 뉴스야, 빅 뉴스!!"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던 식당 안의 사람들은 한 사람이 들어오며 큰 소리로 외치자 모두들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긴 그사람이 외치는 빅 뉴스가 무엇인지 궁금했던건지도 모르겠지만... 식당 주인인듯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안쪽에서 걸어 나오더니 식당 안의 사람들을 대표해서 물었다. "이봐 와트,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아, 아저씨, 빅 뉴스에요, 빅 뉴스!!" "글쎄, 그 빅 뉴스라는게 뭐냐니까?" "있잖아요, 이번에 에스라 왕국의 도시가 하나 더 당했대요." 그러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모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까부터 식당을 대표하던 중년 남자도 실망스런 표정으로 투덜 거렸다. "그게 무슨 빅뉴스야? 일년 전이면 빅 뉴스겠지만 요즘은 뉴스거리도 아니잖아." 그러나 뛰어 들어왔던 사내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글쎄, 제 말을 끝까지 좀 들어 보시라니까요. 이건 시청에 있던 우리 형이 말해준건데요, 에스라 왕국에서 자꾸 도시가 박살 나니까 그 일이 우리쪽에서 계획한 게 아니냐고 따지고 들더래요." 중년 남자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더니 동시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뭐라고? 아니, 우리 나라도 박살나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래?" "그게 그러니까, 우리 나라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네 나라까지 피해를 본다면서 피해보상을 하라고 하는 것 같던데요?" "무슨 소리야? 그럼, 자기네 나라에선 왜 해결을 못봤대?" "맞아, 맞아. 우리가 잡을 수 있었으면 벌써 잡았지." "그게 왜 우리 책임이야?" "누군 잡기 싫어서 안 잡나?" "자기네가 못 잡으니까 괜히 우리 나라한테 덮어씌우는 거잖아." "이런, 치사한 에스라 왕국 놈들!!" "우리 나라 피해가 더 크다는걸 뻔히 알면서!!" 식당 안의 사람들은 청년의 말이 끝나자마자 흥분해서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댔고 덕분에 침체되어 있던 식당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그러자 식당 주인인 사람이 크게 소리 질렀다. "거 좀, 조용히 해봐요. 말을 끝까지 들어봅시다!!" 식당 안은 그의 말에 의하여 소란스러움이 사그라들었고 그러자 중년 남자는 청년을 향해 계속 말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래서?" "그래서요, 이번에 우리 나라 재상님이 그 일을 타협하기 위하여 이 곳에 오신대요. 저쪽 나라 대표랑 우리 도시에서 만나기로 했다는데요?" 식당 안은 아까보다 더 소란스러워졌다. "재상이 내려 온다고?" "재상까지 내려온다면 강하게 나왔나보네?" "재수없는 에스라 왕국 자식들, 자기네만 살면 단감?" "이번에 재상이 그 자식들 코를 콱 눌러줬으면 좋겠다." "아마 그럴껄? 우리나라 재상이 어떤 사람인데?" "맞아 맞아. 에스라 왕국 자식들 혼쭐이 나서 돌아갈꺼다." '이거 왠지 분위기가 너무 험악한걸? 잘하면 전쟁까지 나겠군. 그나저나 그 재상이라는 사람, 꽤나 지지를 얻네? 괜찮은 사람인가 보지?' 식당 안의 소란스러움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혼자 이런생각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소란스러움을 뚫고 종업원 아가씨가 내 음식을 가져왔다. "자, 음식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맙습니다." 작지도 않은 접시들에 듬뿍듬뿍 담겨있는 음식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헤에, 이 집 인심 한번 좋구나. 양이 꽤 많잖아? 어디, 맛도 좀 볼까?' 나는 실실 웃으며 양 손을 싹싹 비빈 뒤 포크를 들어 가까운 곳에 있던 접시에 담긴, 잘게 썰린 야채가 하얀 덩어리와 범벅이 되어 형태를 이룬 음식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뭐야? 아니, 그럼 재상이 내일 온다고?" 갑자기 터져나온 커다란 음성에 채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사래가 들려버렸다. "푸웃~, 콜록, 콜록, 콜록!!"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치면서 얼굴이 뜨거울 때까지 기침을 해 대자 그제야 막힌 것이 뚤렸지만 얼마나 두드렸는지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 아픔은 잠시 잊고 그 뒤에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니까요. 내일 오신대요. 내일 에스라 왕국 대표도 온다는 걸요. 그래서 시청이 지금 난리도 아니예요." '젠장, 그 재상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나 밥도 못 먹게하냐? 좋았어, 내 그 사람 상판이나 좀 보고 가야겠다. 낼 온단 말이지?' 뭐, 솔직히 말하면 내 식사를 방해한 데 대한 앙갚음을 한다기 보다는 어떤 사람인지 보고싶은 호기심이 더 큰 것 같지만 말이다. 제목: 아린 이야기 2부 - 제 2화 아버지와의 재회 (2) 그리고 내 일도 일분 일초를 다투는 급한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잠깐 옆길로 샐 것을 결정해버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 식당 윗층에 있던 여관에 자리를 잡은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생각해보니 재상 일행이 오늘 온다는 것만 알았지 언제 온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터라 언제쯤 올 거라는 정보를 얻지 않으면 재상을 보기 위하여 반나절을 길거리에서 죽치고 있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 사람이랑 사귈 것도 아니고 어떻게 생겼는지만 보고 싶었을 뿐이었으므로 행렬로 지나갈 때 얼굴만 잠깐 볼 생각이었다. 재빨리 옷을 입고 아랫층으로 내려가자 식탁을 닦고 있던 아가씨가 나를 바라보고 방긋 웃었다. "일어나셨군요." "아, 네." 그때 마침 안쪽에서 걸어나오던 주인 아저씨가 앞치마로 물 묻은 손을 쓱쓱 닦다가 나를 발견했는지 아는체를 해왔다. "어이, 어린 용병군. 부지런한걸?" "하하하, 어쩌다보니 일찍 일어났네요." "그런데 궁금한게 있는데 말야..." 주인 아저씨는 나에게 다가오면서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 뭔데요?" "아아, 그 머리에 쓰고 있는 서클렛 말야. 언듯 보기에 보석인 것 같은데, 그럼 꽤 비싼 것 아닌가?" "그렇겠죠? 제가 산 것도 아니고, 이걸 받을 때 묻지 않아서 가격은 모르겠는데요?" "아니, 아니, 내가 궁금한건 말야, 그렇게 비싼 서클렛을 착용하고 있을 정도면 돈도 어느정도 있는 것 같은데 왜 벌써부터 용병일을 하고 있는거지?" "에?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나이 정도에 용병일에 뛰어드는 것 보다는 아카데미 같은 곳에 입학하는게 정석이지 않나 싶어서 말야.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자네 나이가 아직 20이 안 된 것 같은데?" 악의는 없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는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에... 글쎄요... 이건 사정이 좀 있는거라..."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아쉽다는 기운을 싹 지우지는 않으면서도 체념하는 듯한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뭐. 단순한 호기심이니까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하지 않아도 돼." "하하..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 까지야... 그런데 말야?" "예?" 또 다시 뭔가를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얼굴을 드리미는 주인 아저씨의 행동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두어걸음 물러났다. "에이,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그러자 주인 아저씨 뒤쪽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가씨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저씨, 무슨 짓이예요? 손님께서 놀라시잖아요." "아아, 그렇게 무섭게 굴 것 없다. 난 혹시나 이 소년이 요즘 화제의 주인공인 비밀에 휩싸인 도시 파괴범을 잡으러 가려는 건 아닌지 궁금했을 뿐이야." 주인 아저씨는 뒤에 서 있던 종업원 아가씨를 어깨 너머로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건가?" "에이, 그럴리가요. 전 그런 실력은 없는걸요." 아저씨의 진지한 눈길을 감당하기 어려워 나는 약간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러자 진지한 아저씨의 눈길이 다시 평소의 게슴츠레한 눈길로 풀어지며 몸을 돌렸다. "아아, 그렇군. 잘 생각한거야. 가끔가다가 시덥지 않은 사연으로 도시 파괴범을 잡으러 간다고 난리치는 철 없는 녀석들이 있어서 말야. 혹시나 하고 물어본거야. 만약에라도 그런 생각하고 있으면 즉시 집어치우는게 좋아. 목숨이란 하나뿐인 소중한 거니까." "하하하, 명심 할게요." 내가 근처에 있던 탁자에 앉자 그때까지 한산한 식당에 서 있던 아가씨가 화제를 돌리기 위함인지 주인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 재상님은 언제 온대요?" "왜? 너도 구경가게?" "당연하죠. 이런 변두리 도시에 살면서 언제 재상님 얼굴을 구경해 보겠어요? 이번 기회를 노칠 순 없죠."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카운터에 앉으면서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오늘 안에 오겠지. 오늘 온다고 했으니까." "에이, 그렇게 성의없이 굴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 주세요. 오늘 언제쯤 온대요?" 그러나 주인 아저씨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 했다. "내가 그걸 어찌 알간? 정 보고싶으면 너도 성문으로 가서 죽치고 앉아 있던지. 그럼 언젠간 볼 수 있을 거 아니냐?" "에게게, 그런 말씀 마세요. 이 도시의 정보통 중 한 사람이란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아저씨가 모르면 아무도 모르게요?" "글쎄, 난 정말 모르니까 구경가고 싶으면 네가 알아서 해라. 단 근무 시간중에 나가면 수당에서 제외할꺼야." "어머머, 정말 쫀쫀하게 구시네. 어차피 오늘은 제상얼굴 구경하려고 식당도 텅텅 빌텐데요 뭘. 그러지말고 아저씨도 묻 닫고 구경하러 가시지 그러세요?" "난 생각 없다. 가려면 너나 가라. 난 내 가게나 지키고 있을란다." 주인 아저씨가 카운터에 있던 의자에 앉아 기지게를 크게 키면서 성의 없이 대꾸하자 아가씨의 얼굴이 뾰루퉁해졌다. "으이그, 누가 보면 늙은 영감인 줄 알겠네." 그리고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몸을 돌려 내쪽을 향하더니 다시 방긋 웃으며 물었다. "아침 식사 하셔야죠?" 지금까지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종업원과 고용인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그래야죠." 그러자 주인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푸짐하게 갖다줘라. 저 나이때는 아침에도 무지 배가 고픈 법이거든." "네, 네, 그러죠. 누구 말씀이시라고 거역하겠습니까." 아가씨는 그렇게 비꼬듯 말하면서 탁자를 닦던 행주를 들고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나는 카운터 의자에 길게 눕다시피 앉아있는 주인 아저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작게 불렀건만 그 아저씨는 잘만 알아듣고는 가늘게 뜬 눈을 내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응? 왜?" "재상 일행이 언제쯤 도착할 것 같으세요?" "왜? 너도 구경하러 가게?" "하하하, 예. 저도 한번쯤 보고 싶거든요." 아저씨는 날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천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나도 몰라. 내가 뭐 점쟁이냐? 그냥 시내를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사람들이 와~ 거리면 그쪽으로 뛰어가봐. 아님 시청 앞으로 뛰어 가든지. 그럼 볼 수 있을걸?" "그, 그렇군요..." 아저씨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렇게밖에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화를 들었는지 안쪽에서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가지고 나오던 아가씨가 끼어들었다. "그만 둬. 저 사람은 말하기 싫으면 억만금을 줘도 말해주지 않아. 저 사람에게 그 시간을 듣느니 차라리 시청 앞이나 성문 앞을 하루종일 어슬렁 거리는게 백배 낮지." 그러자 곧바로 아저씨의 반응이 날아왔다. "너말야, 네 고용주한테 그렇게 해도 되는거냐? 난 네 엄연한 고용주라구." "누가 뭐래요? 난 사실을 말해줬을 뿐이라구요." 아가씨가 그렇게 톡 쏘아주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주인 아저씨는 신음을 내뱉었다. "끄응~, 정말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였다니까..." 식사를 마친 나는 주인 아저씨의 충고대로 도시 중심가로 나갔다. 어차피 여관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었고, 또 재상이 온 걸 알아채려면 여관 안에 있는 것 보다는 도시 거리를 걷는것이 낳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수도로 출발하려면 타고 갈 말도 한 마리 사야했기때문에 도시를 구경할 겸사 겸사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제 초여름 날씨로 제법 뜨거워진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직은 아침이었기에 약간은 선선한 감이 있지만 정오가 되면 제법 뜨거워질 것이었다. 구경할 겸 나온 것이었기때문에 나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마시장이 있는 곳을 묻는 대신 발길이 가는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정 못찾으면 그때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될 터였다. 거리에 서 있던 상점들은 이제 문을 열고 가게안을 청소하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해보였다. 제목: 아린 이야기 2부 - 제 2화 아버지와의 재회 (3) 문이 열려있는 서점에 가서 에스라 왕국의 지도를 산 뒤 아직까지는 한산한 시장거리를 걷다가 근처에 있던 장신구를 파는 노점상에게 반대편이 보일 정도로 얇지만 약해보이지는 않는 검은 비단 접채를 사서 한가롭게 부치고 다니다가 마시장을 찾아내어 말 한필을 사고 나오니까 거의 정오가 다 되어 있었다. "음, 어찌 어찌 시간은 잘 때운 것 같네..." 식당의 먹거리 골목에서 군것질 거리로 점심을 때우며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와는 달리 사람들로 복작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면서 떠들어대는 얘기들의 대부분은 오늘 이 도시에 온다는 재상 이야기였다.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까지 재상에대해서 무척이나 지대한 관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여파 덕분인지 시청으로 통하는 대로와 시청 앞 광장에는 어슬렁 거리는 사람들로 복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 중 몇몇 일행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때를 놓치지 않은 잽싼 장사치들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간단한 군것질 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평화롭네... 이 나라의 다른 한쪽에서는 긴장상태일텐데, 같은 나라이면서 이렇게 다르니 좀 묘하다고나 할까?" 시청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붐비고 있어서 내가 말 한마리를 끌고 다니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날 곱지않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렇게 복잡한 거리에 말을 끌고다니는 것은 나에게도 편하지 않은 일이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피해를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끔가다 말이 실례를 하는 통에 그렇지 않아도 따가운 눈길들이 더욱 더 살벌하게 나를 쏘아 보았다. "아무래도... 말은 여관에 맡기고 오는 것이 났겠어." 나는 나를 쏘아보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여관으로 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 머리를 이끌었다. 그런데 그때, "떴다!!" 누군가의 커다란 외침이 있은 다음 경갑옷과 창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 오면서 사람들을 양 옆으로 밀어놓아 시청 앞까지 넓직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나보다." "어디, 어디..." "아직 안 보여." "아, 거기 밀지 좀 말아요." "누군 넓은 줄 아나? 여기도 좁다구." "좀 비켜봐. 안보이잖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병사들이 달려와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길을 만들기 시작하자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안쪽에서는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창을 가로로 눕혀 아예 사람들에게 대놓고 밀어대고 있었고 바깥쪽에서는 나중에 뛰어 온 사람들이 좀 더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자 서로 몸싸움을 하는 통에 가운데 있던 사람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참, 말을 놓고 오려고 했는데 지금 오다니..." 나는 말을 끌고 있었으므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을 가져다 두고 오자니 재상 얼굴을 놓칠것 같고 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사람들 바깥쪽에서 말의 고삐를 쥐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정신없는 가운데에서 나는 내 손목에서 미미한 진동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응? 이게 왜 이래?" 내 손목에는 예전에 아빠가 선물로 준 팔찌가 차여져 있었는데 그 팔찌란 녀석이 희미한 빛을 내면서 미미하게 진동을 하고 있었다. "이게 갑자기 왜 그러지?" 이 팔찌를 하고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터라 이유를 알지 못하는 나는 당황한채로 팔찌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재상 일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상이 보인다!!" "어디, 어디?" "저기 오고 있잖아. 저 백마를 타신 분!!" "저 분이 재상님이야?" "너무 멀어서 잘 안보여." "좀 밀지 마. 곧 있으면 가까이 올거라구." "재상님 만세!!" "에스라 왕국 놈을 혼내주세요." "소르드 왕국 만세!!" "재상님 화이팅!!" 재상 일행이 가까이 왔는지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크게 환호성을 지르자 나는 팔찌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이거야 원, 함성을 지르는게 꼭 운동 경기 선수를 응원하는 것 같잖아?' 나는 피식 피식 웃으면서 이제 곧 사람들 머리 위로 재상 얼굴이 보이길 기대하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재상이 마차를 탔다면 모를까 말을 타고 왔다니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사람들 머리 위로 들어날 얼굴을 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드디어, 맨 앞에서 소르드 왕국을 상징하는, 날개를 활짝 핀 독수리 앞에 두개의 검이 X자 모양으로 교차된 깃발들과 그 외의 삼각형 모양의 깃발들을 들고 말을 탄 기사들이 보였고 그 뒤로 호위기사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더 커졌다. 말을 탄 기사들은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 꽂꽂한 상체와 무표정한 얼굴들로 앞만 바라본 상태로 천천히 걸어서 사람들 앞을 지나갔고 그들이 지나가자 학자들이 즐겨 입는 가운 - 아주 고급스러워보이는- 을 입은 은색의 길다란 생머리를 목덜미에서 가볍게 한번 묶어준 30대 후반이나 40대 초 쯤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재상님이시다!!" "재상님 만세!!" "와아아~~~" 사람들의 외침으로 미루어볼 때 그 사람이 재상인 듯 보였다. '오, 제법 잘 생겼잖아? 중년의 멋을 잘 간직하고 있군.' 내가 재상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재상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호위병들이 놀라 웅성웅성 거리고 앞서 나가던 기사들이 당황해서 멈추는 사이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오면서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 설마 날 본거야?' 그 먼 거리에서도 나와 눈이 마주친 재상의 입술 양 끝이 곡선을 그리며 살짝 올라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잉?' 그리고는 곧 그가 허리를 숙이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폼이 말에서 내리는 것 같았다. 주위에 있던 호위 기사들은 물론이고 사람들까지 당황해서는 함성 지르는 것도 잊은 채 작게 웅성거리기만 했다. 그러더니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이 양 옆으로 좌악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당황해 있는 호위기사들을 놔두고 혼자 이쪽으로 걸어오는 재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손목에 있던 팔찌가 더욱 더 심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 하, 하... 설마....' 제목: 아린 이야기 2부 - 제 2화 아버지와의 재회 (4) "여기서 뭐하니?" 내 앞으로 걸어온 재상이 하는 말이었다. "그러는 아빠야말로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나 말이냐? 나야 물론 여기서 국제적인 회의가 있어서 말이지." "아빠가 재상이었어요?" "넌 아빠 직업도 몰랐단 말이냐?" 아빠는 약간 과장되게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양 손을 허리에 얹었다. "흐음, 딸 자식 교육을 잘 못 시켰어." "에게게?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그나저나 아린아? 너 머리가 왜 그러냐?" "아아, 이거요?" 나는 어색한 짧은 머리를 만지며 웃어 보였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니까 하도 귀찮게 해서 말이죠. 확 잘라버리니까 그런 일은 없더라구요." 그러자 아빠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위 아래로 훝어보며 덧붙였다. "흐음, 그 목에 만들어 놓은 것도 말이지?" "하하하..." 아빠에게는 이런 눈 속임수가 통하지 못할 것이 뻔했기에 나는 얼른 손을 들어 목을 가린다음 마법을 해제시켰다. "뭐,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은 간다만, 그래도 여자애가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건 과히 보기좋지 않구나." 언제부터 그랬다고 보통 보수적인 아버지처럼 말하는 아빠의 말투에 나는 입을 삐죽였다. "쳇, 아빠가 무슨 상관이예요?" "잉? 무슨 상관이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오호라~, 너 아직도 나한테 삐졌구나?" 아빠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짖궃게 웃자 아빠를 따라왔던 기사들이 킥킥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속 좁은 여자애로 추락된 거에 창피하기도 해서 얼굴이 붉어진채로 소리쳤다. "누가 삐졌대요?" 그러자 아빠는 '걸려들었군'이란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럼. 누구 딸내민데, 아직도 그런거에 꽁하고 있지 않지. 암, 암..." 왠지 속임수에 넘어간 듯한 찝찝한 느낌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아빠를 노려보자 아빠는 히죽 웃어보이시며 시선을 슬며시 비켜 주위를 둘러보는 척 하셨다. "자, 자. 여기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우선은 가자꾸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너 어디에 묶고 있지?" "아아, 선착장 근처에 있는 여관인 '뱃터 여관' 이요. 이름은 아힌이라고 해놨어요." "에잉, 여전하구나. 그 남자애 가명을 쓰는건..." 아빠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쌀을 찌푸리자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냅둬유." 아빠가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중 한 사람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그 기사는 거수 경례를 붙인 뒤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여관에 맞겨둔 내 짐을 가지러 가는 걸테지만... 그리고 아빠는 내 손을 붙잡고 아까 아빠때문에 멈추었던 행렬 사이로 끌어들였다. "자, 가자." 그래서 나는 얼결에 아빠 옆에 서서 다시금 시작된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시청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재상 각하." 맨 앞에 시장인 듯한 사람을 필두로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아빠를 맞이하며 허리를 숙였다. "귀하의 환대에 감사하오, 시장." 아빠는 엄숙한 얼굴로 위엄있게 그들에게 대꾸해주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미처 제대로 준비 못했으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허, 무슨 말씀을... 갑작스레 연락한쪽이 잘못이지. 너무 걱정 마시오, 시장." "너그러운 말씀, 감사합니다. 피곤하실텐데 쉬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빠와 나를 비롯한 몇명의 관리복을 입은 사람들은 시장의 손수 안내를 받아 크고 넓고 화려하게 꾸며진 방으로 들어갔다. "누추한 곳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참내, 이게 누추하다면 괜찮은 방은 얼마나 더 화려하단거야?' 내가 방 안을 둘러보며 속으로 삐죽대고 있을 때 아빠의 음성이 들렸다. "충분히 좋은 방이오. 고맙소 시장." "예, 그럼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아, 잠깐 시장?"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하던 시장이 아빠의 부름에 멈칫 하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예?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내일 에스라 왕국 사절단이 도착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요? 준비는 다 되었소?" "물론입니다. 회의실과 사절단이 묶을 방들을 벌써 다 준비해 놓았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거 참 다행이군, 알겠소. 내 귀하의 수고를 기억하지." "영광입니다, 각하. 그럼..." 시장이 다시 몸을 숙여보이고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입을 열었다. "각하, 그 소년은 누구 입니까?" 아마 아빠의 보좌관이거나 아랫 사람인 듯, 아빠와 같은 학자 가운을 입은 30대 중반의 금발머리 사내였다. 그는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둘러보는 날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말도 자연 퉁명스러웠다. 그러자 아빠가 살짝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자넨 저렇게 예쁜 남자애를 본 적 있나? 내 딸일세." 그러자 질문을 한 사람 말고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다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대표로 그 금발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딸이 있으셨습니까?" "그래, 하도 천방지축이라서 집에 있는 날이 없었지만, 내 친딸이 확실하지." 그러자 검은 숏커트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딸이 있다는 말씀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저 나이가 될 때까지 사교계에 왜 데뷰를 시키지 않으셨습니까?" "자네들도 알다시피, 난 거의 왕성에서 살았고 저택에는 안 들어갔지 않나? 게다가 아까 말했듯이 저 녀석도 집에 거의 있지않고 밖에만 나돌아다녔단 말야. 이것도 몇년 만에 만나는건지 몰라." 검은 머리의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무심한 아버지셨군요?" 아버지는 그의 말에 뭐라고 반박은 못하고 흐지부지 넘어가려 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니까 더 이상 묻지 마. 내 딸이라면 딸인 줄 알고. 그나저나 저녀석 순 바지만 가지고 있을테니 시장에게 부탁해서 이 도시에서 괜찮은 의상실 주인좀 불러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들이 방을 나가고 단 둘이되자 아빠가 나를 불렀다. "아린아~" "왜요?" "너 머리 말인데... 그거 다시 기르면 안될까? 마법을 써서 기를 수도 있고 아님 가발도 있는데..." "머리요? 이게 편한데?" "그게 무슨 소리얏? 여자애가 머리를 짧게 자르면 보기 안좋아." "에잉, 머리 기르면 귀찮아요. 이러고 다닐래요." 망토를 벗어 소파에 걸쳐놓은 뒤 의자에 앉으면서 대꾸하자 아빠가 그 즉시 반발했다. "오우, 노~!! 긴 머리가 드레스 입을때도 더 예쁘다구. 게다가 머리 스타일도 여러가지로 할 수 있고." "누가 드레스를 입는데요? 난 바지가 편하다구요." "안돼지, 안돼. 그럴 수는 없다. 난 네가 드레스 입은 걸 보고 싶단 말야." "흥, 아빠한테 보이려구 불편한 치마 입기 싫어요. 게다가 드레스 입으면 구두까지 신어야되잖아요." 내가 자꾸 아빠말을 안 듣자 아빠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여자라면 서로 입을려고 안달인데 넌 왜그러냐?" "난 그런 여자들하고 달라요." "잔소리 말고 곧 의상실 주인을 불렀으니 맘에 드는걸 골라봐라. 아쉬운대로 몇가지만 마련하자. 수도로 돌아가면 많이 사줄테니." "에엑, 싫어요. 내가 왜?" "무슨 소리야? 내 딸이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꼴은 못본다." "에게? 전에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하여간 조금있다가 드레스를 고르고, 지금은 그 머리 좀 어떻게 하자. 긴 머리가 예뻤는데 아깝구나... 그런데 아린아?" "예?" "네가 한 서클렛 말이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구나?" "아아, 이거요..." 나는 아빠의 말에 서클렛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할머니의 힘이예요. 아빠,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 알고 계세요?" "아니... 벌써 세월이 그만큼 흘렀군... 그래도 수명을 다 하시고 돌아가셨으니 축하해 드려야지." 아빠는 소파로 다가와 내 앞에 조용히 앉으셨다. "네가 많이 슬펐겠구나?"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위로하시려는 아빠의 모습이 왠지 어색한 것 같아 나는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저한테는 누구랑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구요." "에엣, 그렇다고 그렇게 꼬집어 말할 것 까지야... 처음부터 네가 태어난줄 알았다면 나도 그렇게 무심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거다." 제목: 아린 이야기 2부 - 제 2화 아버지와의 재회 (5) 아빠의 익살에 내가 피식 웃어보이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들어오게." 익살맞은 표정이 금방 위엄있는 표정으로 바뀌면서 아빠는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아빠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까 아빠의 지시를 받고 여관으로 갔던 그 기사였다. 기사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명령하신대로 가방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다른 손에 들린 건 내가 이 도시에 오기전에 새로 산 책가방 크기의 가죽 가방이었다. 아빠는 그 가방을 보시더니 의아한 눈길로 나를 돌아보셨다. "저게 다냐?" "다예요." "정말?" "예." "아니, 어떻게 하고 돌아다니길래 짐이 저거 밖에 없어?" "어떻게 하긴요, 잘 하고 돌아다녀요." 나의 무성의한 대답에 아빠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기사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에잉, 널 만나길 잘 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여기서도 영락없이 남자꼴을 하고 다닐뻔 했구나. 수고했네. 그건 탁자 위에다 올려 놓게나." 기사가 아빠의 말대로 근처 탁자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자 나는 벌떡 일어나서 가방을 가져다가 내 망토 옆에 놓았다. 그러자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시는 아빠가 입을 여셨다. "뭐하러 챙기냐? 금방 갈 것처럼..." "미리 미리 챙겨 놔야죠. 그래야 안 잊어먹어요." "정말 짐이 그게 다야?" "에이, 아니예요. 중요한건 이 마법 주머니에 다 들어가 있죠. 저건 잊어먹어도 상관 없을 물건들만 넣어 놨어요." 내가 허리에 차고 있던 마법 주머니를 가르키며 대답하자 그제야 아빠의 표정이 풀리면서 납득하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랬구나... 어쩐지... 그래, 이번 유희에는 동료는 없나보지? 혼자 구경하러 온 거니?" "아아, 나온지 얼마 안됐어요. 며칠 됐나?" "그랬어? 그런데 어쩌냐? 요즘 이곳이 뒤숭숭한데... 때를 잘못 찾았구나. 괜찮다면 이번에는 돌아다니지말고 그냥 내 집에서 이 나라 왕궁 구경이나 하지 그러니?" "아아, 그 도시에서 사람들이 살해된 사건 말이죠?" "그래, 알고 있구나? 하긴, 떠들썩하긴 할테지..." "이번에 에스라 왕국에서 그 일때문에 따지러 온다죠? 괜찮겠어요?" "헹, 그깟 녀석들이 날 어쩔수나 있겠어?" 아빠가 그들을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하셨다. "어련 하시겠어요." 나는 본격적으로 그 사건에 대하여 묻고 아빠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또 다시 우리 부녀의 대화를 방해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누군가?" 아빠의 말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아빠의 보좌관인듯한 금발 머리와 검은 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각하께서 부르신 의상실 주인들이 왔습니다." "오, 그래? 생각보다 빨리들 왔군." 아빠는 희색이 만연해지셔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시더니 나를 돌아보셨다. "아린아, 가보자꾸나. 내가 직접 네 옷을 골라주마." 그러나 나는 얼굴을 있는대로 구긴채 아빠의 눈길을 피하면서 소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에잉, 싫어요. 드레스 입기 싫단 말야." 그러자 아빠가 내 허리를 잡고 나를 소파에서 끌어내시며 잔소리를 해대셨다. "무슨 소리야. 네 나이정도의 여자가 드레스를 입기 싫어하다니, 그게 말이나 됀다고 생각해? 빨리 제대로 섯!!" "아, 싫어요. 말이 안돼면 돼게하면 돼지. 귀찮은걸 뭐하러..." 나는 열심히 아빠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빠는 강한 힘으로 나를 강제로 세우시고는 팔을 잡아 문 쪽으로 끌고 가셨다. "안돼, 안돼. 내 딸이 남자처럼 하고 다니게 할 수는 없어. 이보게 데빈?" 아빠가 문 쪽에 있던 남자들을 향해 부르자 금발 머리의 남자가 대답했다. "예, 각하?" "의상실 주인들을 부르면서 당연히 보석 상인들도 불렀겠지?" "물론입니다. 모두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좋아. 자네 일처리는 정말 맘에 드는군." 아빠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나를 이끌고 문 밖으로 향하셨다. 그래서 나는 문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악을 해보았다. "아빠, 나 정말 싫다니까요~~" 그러자 아빠가 나를 획 돌아보시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는 머리속으로 음성을 보내셨다. [아린아? 이 내가 직접 손을 써야 하겠니?] '젠장...' 아빠는 여차하면 나에게 용언 마법을 쓰실 생각이신 거다. 성룡이 되었다고 하나 아직 드래곤 나이로는 어린 내가 아빠의 마력에 당할리 만무했다. "쳇, 쳇... 좋을대로 하셔요..." 나는 포기한 표정으로 순순히 아빠가 이끄는대로 걸어가려 했다. 그런데 아빠가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셨다. "아린아? 너 말투가 상당히 거칠구나... 교육 좀 받아야 겠는걸?" "우아아~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항복이예요." 아빠는 내 항복 선언을 들으시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중얼거리시는 걸 잊지 않으셨다. "진작 그럴것이지..." 두 보좌관에게 안내를 받는 아빠한테 이끌려 들어간 곳은 아빠가 배정받은 방 못지않게 넓고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그 곳에는 커다란 짐을 든 짐꾼들과 시종들 두어명씩 데리고 있는 상인들이 각각 봉을 잡을거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자자, 고개들 들게나. 자네들이 이 도시에서 괜찮은 상인들이라지?" 그러자 맨 앞쪽에 나와있던 통통한 몸집에 붉은 비단으로 된 가운을 입은 사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완전 상인 그 자체인 웃음을 지으며 아빠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입니다, 각하. 저는 이 도시 상인의 길드장으로써, 각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도시에서 가장 좋은 물건들만 취급하는 상인들을 추리고 추려서 데려 왔습니다. 비록 수도만은 못할찌라도 각하 맘에 흡족하실만한 물건들이 꽤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아빠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그래, 기대해 보지. 그럼 옷부터 시작해보겠나?"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면서 시장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가, 각하..."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하게 뛰어오신 거요?" 아빠가 의아한 눈길로 시장을 바라보자 시장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옷을 마련하실 거라면 저한테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비록 부족하나마 제가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더 들을것도 없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저으면서 거절의 뜻을 말했다. "그럴 것 없소. 이건 내가 딸내미 옷을 사주려는 거니까. 당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오." 아빠의 말을 듣고 있던 시장의 눈이 놀람으로 인하여 둥그렇게 떠졌다. "따님이 계셨습니까? 일행분들 사이에서는 못 봤는데... 아, 그러니까 곧 오시나 보죠? 아이쿠, 이런... 빨리 아가씨 방을 준비해야 겠군요." 시장이 요란 법썩을 떨며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빠의 보좌관들 얼굴에 떠오른 시장을 향한 안됐다는 표정과 그 옆에 서 있던 나의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마주친 시장이 멈칫 했다. 아무래도 그 시장은 눈치가 대단히 빠른 사람인 듯 보좌관들과 나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그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흠칫, 하며 몸을 떨었다. 아빠가 뭐 씹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 각하?" 시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빠를 부르자 아빠는 매우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눈이 삐었는가? 자네 앞에 서 있는 예쁜 아가씨를 왜 못본단 말인가!!" 그러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아빠와 나와 보좌관들을 제외한)의 시선이 나와 보좌관들 쪽으로 몰렸고, 그러자 마음이 좀 너그러운 듯 보이는 검은 머리의 보좌관이 슬쩍 손을 들어 나를 가르켰다. 시장은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면서 나에게 허리굽혀 사죄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렇게 크나 큰 실수를 하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상인들은 시장을 향하여 안됐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게되어 안도하는 시선을 보내며 한편으로는 나의 반응을 궁금하게 지켜보았다. 자고로 상인이란 손님의 심리를 잘 파악하여야 장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보좌관들까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아빠를 슬쩍 바라보자 아빠는 나보고 마음대로 하라는 뜻인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됐어요. 내가 이러고 다니니까 오해할 만도 하죠, 뭐. 그렇게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시장을 향해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며 입을 열자 시장을 비롯한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의외라는 눈길로 나를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장은 안도의 빛을 띄우면서도 아직은 못미덥다는 듯이 나를 조심스레 살펴보며 다시한번 물었다. "정말,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니까요." 시장은 이제 완전히 안심을 했는지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각하의 따님이시라그런지 얼굴만큼 마음씨도 고우시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는 남자로 착각해놓고는...' 나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그의 옆을 지나쳐 아빠의 옆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러자 아빠의 한마디... "그러길래, 왜 그러고 다니냐?" "알았어요, 알았어. 자자, 시작해 보자고요. 뭘 보여 주실래요?" 내가 상인들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아빠가 그들을 향해 시작하라는 손짓을 보냈고 그러자 그들은 양 옆으로 물러나 물건을 선 보일 무대 공간을 마련했다. 제 3화 수도로!! 알렌을 데리고 시청 건물을 나서자 알렌의 제복을 본 병사와 기사들이 척척 길을 내주었다. '헤에, 호위병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기분 꽤 좋은데?' 그 모습에 기분 좋아진 나는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우웅... 발 아파... ㅠ.ㅠ' 드레스에 맞추어 평소 신고 다니지 않았던 여성용 하이 힐을 신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어쩌다 가끔 신을 때도 있어 한 건물 안에서 왔다갔다 할 때에는 괜찮았길래 이번에 아무 생각 없이 신고 나온거였다. 뭐, 설사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아빠한테 잔소리 듣지 않으려면 드레스를 입고 나가야 했겠지만... "아가씨, 어디 편찮으십니까?" 내 안색이 안 좋았는지 알렌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하하하... 다리가 좀 아프네요." 발이 아프다고 할 수는 없어 멀쩡한 다리 핑계를 대며 어색하게 웃자 그가 내가 들고있던 쇼핑물들을 받아 들며 주위를 살피더니 근처에 있던 가계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그럼 저기에서 잠시 쉬시겠습니까?" 그가 가르킨 곳은 넓직한 공간을 확보하고 이제 막 더울 시기를 대비하여 실외에다가 각각 차양을 가지고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차와 가벼운 알코올 음료를 파는 듯한 가계였다. "괜찮네요. 저기로 가죠?" 나는 될수 있는 한 절뚝거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아아... 앉으니까 좋네요..." 가계 안의 어느 한 탁자에서 그가 빼내어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던 발들도 그제야 한숨을 돌린 듯 조용해졌다. "아르하나즈경도 앉으세요." 내 옆에 선 채로 앉을 생각을 안 하는 알렌을 올려다보며 권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게 편합니다." '지만 편하면 단가...' 기사의 제복을 입고 있는 그가 내 옆에 서 있자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 힐끔 거리며 지나가는게 보이지 않는지, 아님 그런거에 익숙한지 그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쑥스러운 짓을 덤덤하게 해내는군...' 나는 우리를 힐끗 힐끗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다시한번 그에게 권했다. "그러지 말고 앉으세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그러시다면..." 그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그 앉는 모습도, 앉아있는 모습도 좋게 말하면 절도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꼿꼿하게 있어 불편해 보였다. '기사들이란 원래 저런가?' "편하게 앉으세요." "괜찮습니다. 이게 편합니다." 정말 괜찮은 건지... 새하얗고 긴 앞치마를 두른 청년이 메뉴판 두개를 들고 다가왔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나는 메뉴판을 받아들기 전에 그를 먼저 보았다. "뭐라도 한잔 하실래요?"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목 안 마르세요?" "괜찮습니다." '이 사람은 괜찮습니다 밖에 모르나...' 나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어 그는 상관하지 않고 메뉴판을 들여다 보았다. "아, 이게 좋겠네... 생과일 쥬스로 주세요." "어떤 과일로 해드릴까요?" "음... 키위가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청년은 공손한 태도로 메뉴판을 가져갔다. "아르하나즈경, 뭐라도 하나 드시지 그러세요?" 청년이 가버린 뒤에 내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묻자 그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 혼자 먹기 그렇잖아요." "신경쓰지 마십시오." '넌 앞에 버티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이겠냐?' 나는 더이상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아르하나즈경은 어디 소속이시죠?" "전 플레이저 공작의 개인 사병대 소속입니다." "아하... 그럼 앞으로도 계속 제 곁에 계시는 건가요?" "그건 아닐겁니다. 각하께선 이번에 잠시 아가씨 곁에 있으라고 하셨으니까요." "흐음... 그렇군요..." 대화는 거기서 끊어져 버렸다. 그는 계속해서 정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관심도 없으면서 이것 저것 물어보기는 그랬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나한테 말을 걸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나는 시선을 돌려 가계 바깥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잠시 후에 나온 쥬스만 홀짝 홀짝 마셨다. 그가 안 보는 사이에 발에 힐링(치유마법) 좀 걸었으면 좋겠지만 그는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아 속절없이 갈때도 이러고 가야할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안 보는 척 하면서도 힐끗 힐끗 눈치를 살펴 한 쪽 발을 치마 속으로 구두를 벗고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한 손을 내려 그 발 위에 얹어 놓고 입 속으로 조용히 중얼 거렸다. '힐링!!' 아직 한 낮이라서 내 손에서 터져나오는 빛은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을 테고 일부러 몸을 구부리고 테이블 밑을 보는 사람도 없을 거라 한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시청 건물로 돌아가다가는 내 발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한쪽 발이 괜찮아졌는지 이리저리 움직여보다 다시 슬그머니 내려 구두속으로 발을 집어넣고 한번 더 그의 눈치를 힐끔 살핀 다음 반대쪽 다리를 올렸다. 아직 그는 무덤덤한 표정만 지을 뿐 내가 뭘 하는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갑작스레 소란스러움이 생기더니 어떤 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에스라 왕국 사절단이 온대!!" "오나보군요." "그렇군요." 묵묵히 있던 알렌이 그 소리를 듣고 한마디 하자 나도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그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안 가십니까?" 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지금 가면 엄청 복잡할텐데요, 뭐.... 거길 뚫고 지나갈 엄두가 안 나는데요?" "그래도..." "어차피 그들이 만나려는 사람은 아빠잖아요. 아, 내일이면 회담을 할테고... 하루면 끝날라나?" 내가 중얼거리면서 알렌을 슬쩍 보자 그가 즉각 대답했다. "하루 예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그럼 낼 모래면 수도로 가겠군요?" "예정대로 된다면 그럴겁니다." 거기서 한참을 더 노닥거리며 있다가 이제 슬슬 사람들이 흩어졌겠다 싶을 무렵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만 가요." 시청 관사로 돌아가자 전보다 더 부산스러워진 모습에 병사들도 한층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강 건너기 전에 보았던 문장을 하고 있는 병사들도 가끔 보였다. "에스라 왕국의 병사들인가 보군요." 내가 그들을 바라보자 나의 시선을 쫓아 그들을 본 알렌의 중얼거림이었다. "흐음, 저녁시간은 볼만 하겠군요." "예?" 뜬금없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알렌이 되묻자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녁식사는 에스라 왕국의 사람들과 같이 할테죠? 그럼 아주 치열한 신경전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아아... 그렇군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홀을 가로지르던 시장 부인이 반색을 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오셨군요." "예. 어수선 하네요."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방긋 웃자 그녀가 살짝 당황한 눈치를 보였지만 얼른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호호, 좀 그렇죠? 아무래도 이런 큰 손님들을 받은 적이 없어서요..." "어머,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닌데..." 내가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녀는 다시 웃어보였다. "호호호, 아니예요. 사실이 그런걸요. 아, 그건 그렇고 얼른 올라가 보세요. 주문한 옷이 도착했거든요. 재상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아마도, 그녀는 나를 시중드는 시녀를 통해 아빠가 날 코디(?) 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럼..."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위로 올라갔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3화 수도로 !! (2) 내 방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아빠의 재촉에 다시한번 옷을 갈아입고 치장을 하고나자 저녁 식사시간이 다 되었다. 내일이 에스라 왕국에서 온 사람들과의 회담이지만 직접적인 대면은 오늘 저녁식사때부터였기에 나는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내가 좀 빨리 내려갔는지 식당 입구에서 아빠와 함께 그의 뒤를 따르던 보좌관들과 마주쳤다. "흐음, 역시 내 안목은 뛰어나다니까..." 아빠는 나를 한번 쭈욱 훝어보시더니 만족스러운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슬쩍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낯간지럽게 예의를 차리시는 아빠의 모습에 왠지 닭살이 돋는 것 같아 그냥 무시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버릴까 하다가 나중에 어떤 눈총을 받을지 몰라 아빠가 내민 손 위에 살며시 내 손을 올렸다. "자, 가실까요 레이디?" 아빠는 내가 약간 머뭇대다 손을 올리시자 활짝 웃으며 나머지 한손을 식당 쪽으로 펴 보였다. "기꺼이..." 이렇게 말하는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말 않는것도 이상할까봐 예전에 할리퀸을 봤을때 이렇게 하는 장면이 나온 것 같아 살짝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주위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에구구, 내가 왜 남의 이목을 신경써야 하누....'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아빠의 에스코트를 받아 식당 안으로 일어섰다. 식당 안에는 미리 와 있었던 시장 부부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일어섰다. 그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막 자리에 앉으려 할때 에스라 왕국쪽 사람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 다행히 우리가 늦지는 않았나 보군요." 이 말을 한 사람은 그쪽 대표인 듯, 들어서는 사람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50대쯤 보이는 사람으로, 흰 머리가 히끗 히끗 보이는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그의 키는 아빠보다도 작고 몸도 매우 여리여리 해보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인상또한 평범했고 옷도 평민들이 흔히 입는 스타일의 (옷감은 고급이었지만...) 옷이었기에 마치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같이 들어오는 사람은 한 사람은 아빠의 보좌관 처럼 문관 스타일의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었지만, 그 옆의 청년은 다리에 살짝 붙지만 편안해보이는 바지와 셔츠 차림의, 몸도 단단해 보이는게 마치 기사처럼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미리 마중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이번에 부족하나마 에스라 왕국의 대표로 온 마이클 치핑힐 입니다." "오, 그 치핑힐 후작이 바로 당신이었구료. 당신의 명성은 저희 나라에서도 자자하답니다." "별말씀을... 이쪽은 이번에 저를 도와줄 렌카 노프샤와 반담 스와카랍니다." 후작의 소개에 그들이 아빠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에 여러분을 맞이하게 된 제럴드 A 플레이저 공작입니다." 그러자 후작을 비롯한 두 청년의 눈이 둥그래졌다. "허허허, 저희를 맞기 위하여 재상께서 직접 나오실줄이야..." 그렇게 웃음을 짓는 후작의 눈이 반짝빤짝 했다. 아무래도 뭔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었다. "이쪽은 저를 도와주는 데빈 카버렐리와 윌슨 브로클리라고 합니다." 아빠의 소개에 데빈과 윌슨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회담에 양국 모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그래야죠. 그래야 여기까지 오신 보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허허허, 물론 입니다. 그런데, 거기 계시는 아름다운 레이디는 누구 신지요?" 그는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보면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비웃는 듯 했다. "아아, 이쪽은 제 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시리안이라고 합니다." 아빠의 눈짓에 나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따님.... 이시라구요? 아버님을 닮아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후작은 왠지 모르게 따님이라는 단어에서 묘하게도 길게 끌었다. 아무래도 믿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다. 아빠와 그들이 서로 자리를 권하면서 같이 앉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에 의하여 식사가 날라져 왔다. 작은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덩굴이 돌아가면서 그려져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접시에 담긴,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이 착착 식탁앞에 놓여지자 우리는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후작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오, 정말 푸짐하군요. 이렇게 신경 써주시다니요." "허허허, 뭘요. 이건 다 이곳 시장의 세심한 배려 아니겠습니까?" 아빠의 대답에 시장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저희 준비가 너무 미흡하지나 않나 걱정입니다. 흠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후작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허허, 미흡하다니요... 에스라 왕국에서는 그 정체모를 범인에 의하여 많은 피해를 입으셨다더니 그게 다 헛소문인가 봅니다. 변두리의 작은 시에서 대접하는게 이정도라니 말입니다." "허허허, 이 정도가 과한 대접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신 말씀 이십니다. 에스라 왕국에서는 문화가 무척 많이 발달하였다던데 이런걸 가지고 과한 대접이라고 하십니까?" 아빠의 반격이었다. "허허허, 아니요. 제가 짐작을 잘못 했나 봅니다." 아빠의 1승. 후작은 짐짓 너스레를 떨면서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아빠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여세를 몰아 공세를 가했다. "이번에 에스라 왕국에서는 저희 나라에 비해 절반도 채 되지 않을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들었는데, 그 충격이 상당했나 봅니다?" 아빠의 속셈을 모르는 후작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물질적 피해보다는 정신적 피해가 많았지요... 그렇게 잔인한 일을 저지르다니, 저희 폐하께서 억울하게 죽어간 백성들의 일을 들으시고는 많이 슬퍼하셨답니다." "그러셨군요. 그 심정 저희도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같은 일을 당한 처지가 아닙니까? 이럴수록 양국이 힘을 합하여 그 범인을 색출해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지요." "후작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에스라 왕국은 정말 현명하시군요. 다른 나라같으면 범인을 잡기도 전에 양국사이에 자.잘.한 일로 트집만 잡고 범인 색출은 뒷전이었을텐데요." "그, 그런가요?" 왠지 후작의 얼굴빛이 안좋아졌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아빠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신대로 계속 그 표정을 유지하고 계셨지만 눈빛만은 승리자의 여유를 가지고 계신 듯 반짝반짝 빛나고 계셨다. "이렇게 회담을 하기도 전에 에스라 왕국과 저희 왕국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걸 알게 되어 너무나도 기쁩니다. 안그렇습니까, 후작?" "무, 물론입니다." 이렇게 되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의 K.O승으로 저녁 식사시간의 신경전은 끝나버렸고 그걸 알고있는 아빠쪽 보좌관들은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맛있게 식사를 했고, 반대쪽 후작 보좌관들은 뭐 씹은 표정들로, 그리고 역시 만만히 볼 수 없다는 듯 신중한 눈으로 우리쪽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그러나 기분이 안 좋으니 밥 맛도 없었는지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고 그걸 본 시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는지..." 그러자 고기를 썰고 있던 후작의 보좌관중 한명인 반담 (그 기사같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고기가 좀 질기군요." "그렇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당장에 주방장을 처형하고 제대로 된 음식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시장은 정말 미안하다는 듯 그들에게 사죄를 해댔고 당장이라도 주방으로 달려갈태세였다. 그러자 후작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먹을만 하니 그냥 두시지요. 내일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묘한 암시가 담긴 그 말을 시장은 곧이곧대로 들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내일은 좀 더 음식에 신경쓰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3화 수도로 !! (3) 다음 날, 이번에는 결코 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한듯 굳은 표정의 에스라 왕국쪽 사람들과 여전히 여유 만만한, 그러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의 아빠와 긴장한 얼굴의 데빈, 윌슨이 드디어 회담에 들어갔다. 그들이 회담에 들어간 사이 할 일이 없는 나는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때울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시장 부인과 딸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시리안님, 이곳 상인길드에서 괜찮은 물건들을 구해놨다는 연락이 왔답니다. 괜찮으시다면 구경가시지 않겠습니까?" 시장 부인의 나를 꽤나 신경써주는 듯한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 시장은 대충 둘러본데다 구경할 것도 별로 없었기에 나가서 돌아다니기도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기꺼이 승낙을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들 모녀는 시청 관저 앞에 미리 대기시켜 놓은 고급스러운 마차로 나를 안내했다. "전에 각하의 취향을 알았을테니 이번에는 꽤나 만족스러우실 거예요." "그래요? 그거 참 기대 되는군요." "호호호, 기대하셔도 괜찮을 겁니다. 이곳 상인 길드장은 발이 좀 넓은데다가 손님의 안목을 만족시키는데 탁월한 소질이 있거든요." "그런데 저 때문에 괜히 두 분이 시간 내신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내가 예의상 그들에게 미안한 듯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시장 부인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요. 마침 제 딸애 옷도 몇벌 마련할 참이었어요. 그러니 참 잘되었지 뭐예요? 아시리안님 덕분에 멋진 옷을 고를 안목까지 높히고 말예요." 그러자 시장 딸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거의 반 강제로 끌려나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았다가 엄마의 매서운 눈길을 바라보고 다시 뾰루퉁해졌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조금있다가 그녀의 옷을 한벌쯤 사주리란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뭘요. 제가 아니라 아빠의 안목이시죠." "호호호, 재상 각하께서 그런 곳에 센스가 뛰어나시다니 좀 의외였긴 했어요." "그렇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성의 변두리에 있는, 인적이 드문곳에 세워져 있던 호와스러운 별장인 듯한 건물이었다. 그 곳에는 이미 여러사람이 와 있는 듯 여러대의 마차가 와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차가 도착하자 집사인 듯 제복을 입은 중년 사내와 세명의 시녀가 얼른 나와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아가씨." "그래, 준비는 다 되었겠지?" 시장 부인이 약간 거만하게 묻자 집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겁니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응접실이었다. 그러나 한쪽에, 아마도 장식장이나 여타 다른 가구가 있었을듯한 곳은 치워져서 바닥에 깔린 카펫만 놓여 있었다. 아마 그곳에서 우리에게 물건들을 보일 모양인 듯 했다. 그리고 예전에 보았던 상인 길드장이 우리가 들어서자 얼른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다시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가씨." 나는 그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하면서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시녀가 얼른 다가와서 우리 앞에 간단한 다가와 시원한 음료를 놓고 물러났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많은 공을 들인 듯, 모델들이 직접 드레스를 입고 나와서 우리앞에서 선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드레스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어울리는 악세사리를 같이 곁들이고 있어 드레스를 선택할 때 거기에 곁들어 악세사리까지 선택될 수 있게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나는 그 속셈에 빙그레 웃으며 차가운 음료를 한모금 마시고 소파에 깊숙히 등을 기대었다. "그럼, 어디한번 볼까요?" 거의 반나절이 걸리는 시간동안 우리는 그 별장에 머물렀고 그 곳에 나올때에는 짐이 거의 한보따리나 되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내 것이었지만, 내 양심상 시장 부인과 딸에게도 한, 두벌씩은 사서 들려 주어서 그녀들의 표정도 활짝 펴 있었다. 길드장이 가까운데에 있는 커다란 도시의 길드에 연락을 해서 급히 마련했지만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것만큼, 아빠의 눈총을 받을까봐 좀더 예민하게 굴어 골랐지만 맘에드는것들이 꽤나 많이 있어서 짐이 생각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시청 관저로 돌아왔을때는 저녁이 거의 다 되어 있었고, 아빠도 회담이 다 끝나셨는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날 기다리고 계셨다. "어서 오너라. 그래 맘에 드는 물건이 많든?" "제 맘에 드는건 꽤 있더라구요. 물론 아빠가 다시 둘러보시겠지만 말예요." "당연하지. 아직까진 네 안목이 나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련하실라구요. 그나저나 표정이 좋으신걸 보니 회담 결과가 좋으셨나봐요?" 아빠는 내 방으로 날라져온 옷들을 시녀들이 하나 하나 꺼내 펼쳐보이는 걸 훑어보며 내 말에 대꾸하셨다. "물론. 재미도 있었지. 그 에스라 왕국 대표로 온 녀석은 내가 인정하는 몇 안돼는 녀석들 중 하나거든. 머리가 무척 뛰어난데다 말솜씨 또한 맘에 쏙 든다니까." "헤에, 아빠가 그 정도로 인정하시면 꽤나 뛰어난 사람인가 보군요?" "그래. 그 녀석을 다른 녀석이 맡았다면 완전히 K.O 당했을거야." "그만큼 이번에 우리쪽이 불리했나보죠?" "그런것도 있지만, 여타 다른일이라도 외교에서 녀석의 호적수는 거의 없지." "그나저나 회담은 끝났으니 이젠 수도로 가겠네요?" "물론이야. 내일 에스라 왕국 녀석들이 가자마자 떠날 거다." 그날 저녁식사 시간은 에스라 왕국 분위가 약간은 침울했지만, 그들도 지나간 일로 계속 끙끙대고 있는 성격은 아닌 듯 활달하게 대화에 응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특히 에스라 왕국의 대표로 온 치핑힐 후작은 아빠의 능력에 솔직하게 감탄하며 존경까지 드러내어 권력을 갖고 있는 인간치고는 꽤나 괜찮은 사람의 면모를 보였다. 아빠는 아마도 그의 그런점이 맘에 들었는지 계속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들은 아빠의 배웅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후작은 아빠와 인사를 나누면서 다음에는 자신이 지지 않을거라는 다짐을 내비쳤지만 아빠는 단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들이 국경인 강을 건너는 배에 오르자 그 즉시 우리도 수도로 향했다. 이 곳에 올때 아빠는 말을 타고 오셨지만 이번에는 나와 같이 마차를 타고 가시기로 했다. 나는 뭘 타든 좋았고, 단지 드레스만 벗길 바랬지만 아빠는 단호히 거부하시고는 떠나는 날 조차도 내 드레스를 골라 주시고는 머리를 다듬어 주셨다. 지금 마차를 타고 있는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처음 나올때 입고 있는, 허리는 조이면서 치마는 넓게 퍼지는 초록색 동그라미가 점점이 밖혀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하얀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었고 옆에는 드레스와 같은 천의 리본이 달린 챙이 넓은 밀집 모자까지 두고 있었다. "꼭 이러구 가야해요? 불편한데..." "무슨 소리야? 너 편하게 가라고 일부러 마차를 구한거잖냐?" "누가 마차가 불편하대요? 드레스가 불편하댔지. 이걸 입고 어떻게 여행을 떠나요?" "어떻게 떠나긴, 잘 가면 되는거지. 넌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될텐데 뭐가 불편하냐?" "가만히 있는게 쉬운 건가요? 차라리 밖에서 말 타고 가는게 더 쉽겠다." "안돼. 지금은 늦봄이라서 햇빛이 따갑단 말야. 말 타고 가면 피부가 상해. 아무리 너라도 피부 관리는 잘 해야지." "내가 무슨..." "어어, 무슨이 아냐. 너라도 관리를 잘 안하면 피부가 거칠어진다구. 그러면 아깝잖아. 조금만 신경쓰면 되는 거니까 귀찮아 하지 말고 시키는대로 해." "내가 언제 시키는대로 안 했어요?" "자꾸 투덜대니까 그렇지. 이게 다 널 위해서 하는 거라고." "날 위한게 아니라 아빠의 재미를 위해서 하는 것 같은데요?" 아빠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뜨끔하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건 말 그대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고 다시 능청스런 얼굴로 부인하셨다. "무슨 소리? 다 내 예쁜 딸내미를 위한 거라고." "예, 예. 그렇다고 해드릴께요."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마차의 창 턱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채로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아빠의 말대로 따가워보이는 햇빛이 내려쬐고 있었고 나무들은 한창 푸르르게 잎들을 펼치고 있었고 날씨가 약간 건조한 듯 일행이 걸어가면서 내는 충격에 먼지가 푸석푸석 일어나고 있는게 눈에 보였다. '수도라... 거기를 가면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지.' [제 목]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4화 수도에서... (1) ─────────────────────────────────────── 제 4화 수도에서... 소르드 왕국. 현재 있는 4대 강국중에서 가장 큰 땅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그러나 그 땅중에는 있어도 쓰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드래곤의 숲 같은 땅이 있어 왕의 세력이 닿는 곳은 전 국토의 거의 2/3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소르드 왕국의 소사믹 산맥을 끼고 형성되어 있는 낮은 산들과 구릉들로 분포된 지역에는 여러족의 엘프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어 엘프들과의 원만하기는 하지만 서로 터치하지 않는 암묵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왕국에서, 난데없이 어떤 괴물같은 존재가 나타나 그렇지 않아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으니 왕국에서는 골머리를 썩는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그 괴물은 소르드 왕국 말고도 에스라 왕국까지 덤으로 손을 봐주고 있으니, 에스라 왕국에서 그걸 가지고 넘어지는 미묘한 외교 상태가 대치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젠...." 마차를 타고 가면서 현 왕국 상황을 이야기 해주던 아빠는 심각한 얼굴로 말 끝을 흐렸다. "문제는요?" "그 괴물같은 존재가 우리 왕국 사람이라는 거지. 더욱이 예전 왕실 기사였으니 문제는 더더욱 커질수밖에..." "에스라 왕국에서 그걸 가지고 걸고 넘어질까봐요?" "맞아. 지금 그쪽은 그 존재가 여자라는 것과 어떤 외모를 가졌는지밖에 몰라. 그거야 그쪽에서도 한바탕 난리를 떨었으니 못 알아낼 것도 아니지만... 만약 그들이 그 여자가 우리 왕실 기사였다는 걸 알아내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그쪽 피해 보상을 해줘야 할걸?" "헤에..." "그리고 그 뒤의 외교 관계에서도 계속 걸고 넘어질꺼야. 우려 먹을 수 있을때 까지 안 놔주겠지." "그런데 지금 에스라 왕국쪽에서는 그 여자가 혹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구요?" "아아... 그 회담은 그냥 찔러본 거야. 못 먹는감 찔러나 본다는 식일까?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만큼 얻으려 한것 뿐이니까..." "그럼 외교문제는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는 거군요." "맞아. 이렇게 버티고 있을 때 최대한 빨리 그 여자를 처리해야 하는거지." "그 여자는 어디 있어요?" "몰라." 아빠가 덤덤한 표정으로 한 말에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 "몰라. 그게 가장 큰 문제야." "왜 몰라요? 날뛴지 1년 넘었다면서요? 정체를 알고 있으니 이유까지는 몰라도 패턴 정도는 알수 있을 것 아녜요?" "패턴이 없는걸. 무작위식으로 나타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달까?" "뭐가 그래요?" 아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셨다. "내가 하고싶은 말이야. 뭐가 그렇게 엉뚱한지... 덕분에 지금 총 병력을 남아있는 중요 도시에 분산하고 있는 실정이지.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모르니까." "그래서 용병까지 모집하는 거군요?" "그래. 그들로는 막기 힘드니까... 뭐, 용병까지 동원한다 해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하는데까지는 해봐야지." "미지수?" "그녀의 능력이 어느정도인질 모르거든. 크던 작던 다 말살시켜 버리니... 능력을 알아낼 방도가 없잖냐?" "예전에 왕실 기사였다면서요? 그런데 기록도 없어요? 뭐, 소드 마스터라던가... 그런." "우리가 알아낸 바로는 그녀는 정식 왕실 기사가 아니었어. 그때당시 젊은 나이로 왕실 수석 마법사가 된 도나휴 카페티안이 데려와서는 자신의 기사로 삼았거든. 그러니 그녀에 대한 기록이 적을 수밖에.... 그녀는 따로 왕실 기사들과 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대련도 안 했다더군... 단지 그녀가 마검사라는 것 밖에는 몰라." "마검사?" "그래, 마법과 검술에 능통한 사람 말야. 뭐, 지금까지의 흔적을 봐서도 둘 다 사용한다는 걸 알 수는 있지만 말야..." "그래, 흔적으로 봐서 능력은 어떤데요?" "마법은 5서클 마법을 사용한 것 까지는 확인이 되었지.. 그리고 검술은... 검기까지 사용한 흔적이 있더군... 것도 대량 살상으로..." "뭐... 그러니까 도시를 말살했겠죠." 예상했던 일이라 나는 어깨만 으쓱이는 정도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빠가 은근한 어조로 한마디 더 하셨다. "그리고 또 있어." "뭔데요?" "그녀 말이야... 아마 인간이 아닌 듯 싶어." "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빠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시며 몸을 약간 숙이셨다. "한 30년 전, 그녀가 왕실에 있을때 그녀의 나이가 20대인 걸로 알고 있거든.... 그런데 요즘 날뛰는 그녀 또한 20대 초반의 나이로 보이고 있어. 이게 뭘 뜻하는 거지?" 나는 얼마 생각하지도 않고 즉각 대답했다. "수명이 긴 종족이다!!" "맞았어. 그래서 우린 예상하기로 하프 엘프가 아닌가 싶어." "하프... 엘프요?" "그래, 하프 엘프. 엘프와 인간 사이의 혼혈아. 이들은 엘프처럼 아름다우면서 수명이 길다하지. 그러면서 엘프들의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말야." "다른 종족일수도 있지 않겠어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지만 아빠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냐, 우리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지만... 따져보면 하프 엘프밖에 없어." "어떻게요?" "우선 엘프가 있지? 하지만 그건 금방 알수 있지. 귀가 뾰족하지 않잖아." "에이, 그건 일루젼 마법을 쓰면 감쪽같은 거 아녀요?" "글쎄다... 나중에 너한테 보여 주겠지만, 그 여자 완전히 넋이 나가있는 상태였어.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종족을 숨기기 위하여 마법을 쓸 생각이나 할 수 있겠어?" "그건 모르죠." "하지만 엘프가 아닌 근거 한가지는, 엘프는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아. 철천지 원수가 아닌 한 말야. 만약 그녀가 엘프라면 그녀가 죽인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철천지 원수였을까?" "그건... 아니겠네요." "그렇지? 그래서 엘프는 아니라고 생각한 거야." "그럼, 다른 종족은요?" "글쎄... 우선은 마족이나 아님 마족과의 혼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지. 그들이라면 이렇게 사람들을 살상하는 것도 납득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흑마법의 흔적이 전혀 없어. 보통 마법사라고 하면 한, 두개정도는 썼을텐데... 흑마법 만큼 강한 공격 마법이 없잖니? 그런데 5서클의 마법까지 썼으면서도 흑마법을 쓴 흔적이 조금도 없었으니... 마족일 가능성은 적지 않겠어?" "그들이 일부러 안 썼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왜 흑마법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첨에는 마족인 걸 숨기려 한게 아닐까도 생각해 봤지만... 저렇게 드러내놓고 살인을 해대는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러니 남은건 하프 엘프뿐이지." 아빠의 의견이 논리 정연하여 반박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네요..."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거든... 단지 돌아다니면서 자신앞에 보이는 인간은 모조리 죽이는 것 같아." "왜 그럴까요?" "모르지. 하지만 뭔가 정신적인 큰 충격을 받아 자아가 붕괴되어 버린 것 같아." "흐음.... 수도로 가면 그녀를 처리하려고 본격적으로 돌입하겠죠?" "벌써 돌입했지. 하지만 이번엔 네가 가니까, 일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거란 희망이 생긴거지. 네가 오기 전까지는 정말 막막했었거든. 어쩌면 그녀에게 소르드 왕국이 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헤에, 그 정도 였어요?" "그래. 그렇지않아도 땅에 비해 인구가 적은데 말야... 벌써 도시를 몇개나 파괴해 버렸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젓는 아빠를 바라보며 이제 가장 중요한걸 물었다. "제가 할 일은 뭐죠?" 내가 할 일... 아마도 마지막은 변함 없겠지만, 그 전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빠는 내 눈을 들여다보시더니 등을 마차의 푹신한 소파에 깊숙이 묻으셨다. 그리고 전혀 걱정이 담겨있지 않은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여셨다. "아아, 너무 그렇게 서두르지 마. 어차피 수도에 가면 말해줄 테니까." 그리고 며칠동안 행군한 우리는 수도에 도착했다. 소르드 왕국의 수도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무지 넓었다. 뭐, 다른 나라의 수도도 컸지만 이건 뭐랄까...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의 수도 답다고나 할까? 다른 나라보다 거대한 건축물이나 성벽이 있는게 아니었다. 단지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길의 넓이도 큼직 큼직 하고, 광장도 그리고 국민들을 위한 공원도 큼직 큼직해서 높은 곳에서 올려다보면 뻥 뚤린 길과 그 사이 사이 보이는 커다란 몇개의 광장들까지 잘 보여 너무 시원해 보였다. 성 앞에 커다란 호수까지 있으니 뭘 더 말하겠는가? "참 넓군요." 수도에 도착하기 전, 아빠가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나를 데리고 하늘 높이 떠오르셨다. 그리고 보여준 것이 수도의 광경이었다. 그것을 본 내 감상을 한마디로 하자 아빠가 싱긋 웃으셨다. "그렇지? 내가 이것 때문에 이 나라에 눌러 앉은거야." "시원 시원해서 좋긴 하네요... 게다가 성 안에 호수까지 있으니..." "맞아. 매년 저 호수가에서 축제도 열리곤 해. 큰 축제지. 하지만 올해는 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뒤숭숭한데 안 열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열었다가 그녀가 들이닥치면 또 어쩌라고?" "에이, 설마 수도까지 오겠어요?" 그러나 아빠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셨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어. 그녀는 정말 예측 불가능이라고. 수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니?" "그렇긴 하지만..." "자자, 그만하고 내려가자. 우리 찾는다." 밑에서 잠시 산책간다고 하고 사라진 우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그걸 눈치채신 아빠가 나를 데리고 다시 내려가셨다. 물론 그들에게서부터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말이다. ▩ 제목 제 4화 수도에서-2 성 문을 들어서자 아빠는 마차에서 내리신 뒤 자신이 데리고 온 가병들을 절반으로 나누어 마차에 타고 있는 나를 데리고 저택으로 가도록 지시하셨다. "난 왕궁에 갔다와야 해. 그러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언제 오실건데요?" 이건 분명히 예의상 묻는 말이었다. "어라? 나랑 떨어지려니 서운해서 그러는 거야?" ..... "아빠? 저 기냥 가버릴까요?" "헐헐헐, 뭘 그런거 가지고 화내긴... 귀엽잖아~~!!" 어디서 왔는지 모를 찬바람이 휭 하니 불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석고화가 된 건 내 눈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아빠한테 변태 기질이 있는지 몰랐어요." 내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심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한걸 가지고... 될 수 있는 한 일찍 들어가마. 넌 가서 푹 쉬고 있어." "그러죠. 그리고 다음부터는 사람들 앞에서 이상한 짓 좀 하지 마세요." "알았다, 알았어. 정말 농담이었다니까. 애늙은이처럼 잔소리를 하기는..." 그 길로 뒤도돌아보지 않고 아빠와 헤어진 나는, 수도로 오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던 아빠 사병대 대장인 라몬트 아르하나즈의 인도를 받아서 저택으로 향했다. 이 사람은 알렌 아르하나즈의 아버지였는데 매우 엄격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알렌이 그랬던 것(?)도 저 사람을 보면 이해가 될 것 같다니까..."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맨 앞에서 한치의 흩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말을타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보통 아가씨가 이렇게 위험한 - 차 밖으로 몸을 내미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 입니다 - 행동을 하면 의례 그녀를 따르는 시녀가 말렸을테지만 나에게는 딸린 시녀가 하나도 없어서 옆에서 말을 타고가던 알렌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가씨, 그렇게 계시면 위험합니다." "어머나? 아르하나즈경도 잔소리를 하네요?" 내가 무척이나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 묻자 알렌의 얼굴이 빨개지며 얼른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험, 험. 잔소리가 아니라 위험하시니까 충고해드린 겁니다." 새빨개진 얼굴로 흩트러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알렌의 모습이 무지 귀여워보였다. 그래서 쿡쿡 웃으며 그의 말대로 마차 안으로 들어가주었다. "그 충고 고맙게 받아들이죠." "저택으로 가시면 제일먼저 시녀부터 구해야 하겠군요." "글쎄요..." 내가 그 저택에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는 아마 아빠만 알고 있을걸?" 아빠의 저택은 저멀리 왕성이 보이는 인적이 드믄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도 아빠의 직책상 왕성과 가까운 곳에 저택을 마련한듯 싶었다. 그러나 그 저택이라는 것이 왕성 못지않게 무지 크고 화려했다. 정문으로 저 멀리 보이는 저택 앞으로 들어가는 길은 마차로도 거의 30분이나 걸릴 지경이었고 저택 앞에는 사람키만한 여인의 조각상이 들고있던 물병에서 시원하게 물을 쏟아내었고, 그 주위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는 커다란 물고기들도 입에서 작은 물줄기를 분수 안쪽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가 입구에 도착하고 알렌이 마차문을 열어주고 라몬트는 기사들과 사병들을 이리저리 지휘하고 있을때 커다란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몇몇의 시종들과 머리의 절반이 하얗게 센 깐깐해보이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걸어나왔다. 집사인 듯 제비꼬리 제복을 입은 그는 회색의 머리를 앞가름마타서 한 올도 흩트러지지 않게 기름을 잘 발라 옆으로 넘겼고 멋진 회색 콧수염에 외알안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힐끗 보자마자 인사는 안 하고 은근한 걸음으로 라몬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마 나에게는 들리지 않게 하려는 듯. 그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은근히 그러지 않는 척 하면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르하나즈경, 이번엔 좀 어리군요. 가셨던 도시에서 데리고 오셨나보죠?" 그러자 라몬트가 창백해진 얼굴로 그의 말을 막으려 했다. "티모시, 그게 아니라..." "아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번이 몇번째인데 제가 눈치도 못 채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미인이시군요. 각하는 눈도 높으시지..."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물론 아니죠. 취향이 약간 바뀌시기는 했어요." "티모시...." "그런데 이번에는 얼마정도 머무실 것 같습니까?" "제발..." "아아, 멀리서 마차를 보고 방은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아니라..." "그런데 그 머나먼 곳에서 데리고 오실정도니 많이 빠지셨나봐요." "오, 신이시여..."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있는 집사의 말에 라몬트는 결국 자신의 머리를 집더니 안되겠는지 그를 이끌고 내 앞으로 와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아가씨." 그들의 말을 다 듣고있던 나는 웃지도, 화내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르하나즈경."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저택을 총 관리하고있는 사람 입니다." 라몬트가 소개하자 티모시는 어리둥절한 눈빛이면서도 겉으로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라몬트가 입을 열어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쪽은 각하의 따.님. 이신 아시리안 플레이저 공.녀. 시네." 그의 말에 티모시를 비롯하여 저택에서 나온 시종, 그리고 저택 입구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하녀, 시종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고 입들이 벌어졌다. "따, 따님?"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집사가 정말이냐는 눈으로 라몬트를 바라보자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래, 따.님. 이시네." 티모시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더니 나에게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티모시 애들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미스터 애들튼." "그냥 티모시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러죠."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몸을 돌리다 멈칫 하더니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라몬트에게 다가갔다. "아르하나즈경, 아까한 말은..." 그러자 라몬트가 피식 웃었다. "아아, 무슨 말인지 못들었는데?" "하아,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티모시는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계단을 한 발 올라가던 그는 갑자기 딱 멈춰섰다. 그리고는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저, 아가씨?" "네?" "저... 제가 사전에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방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빨리 준비하겠으니 지금은 손님방에서 잠깐만 쉬고 계시겠습니까?" '응? 아까는 방을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의아했지만 아까의 대화를 들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 그냥 고갤 끄덕였다. "그러죠." "감사합니다." 내가 손님방으로 안내되고 집사가 목욕 준비를 시키겠다며 문을 닫고 나가자 밖에서 시녀의 궁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님? 아까 그 방은..." "이 바보얏, 그걸 말이라고.... 공녀님께 어떻게 각하의 애인들이 쓰던 방을 드리냐?" "어머, 그렇군요..." "에휴,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어. 빨리 빨리 목욕준비 해드려라. 그리고 2층 맨 오른쪽 방을 빨리 청소하고." "예." 그리고 그들이 급하게 멀어져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문에 찰싹 대고있던 몸을 일으켜 바로 세웠다. '헐헐헐... 그랬군... 그 바람둥이 기질은 여전한가보지?' ▩ 제목 제 4화 수도에서-3 아빠는 내가 손님방에서 목욕을 하고 한잠을 잔 뒤, 저녁이 다 되었을즈음에 돌아오셨다. 그때쯤에는 집사인 티모시가 서둘러 마련한 무지 크면서도 전망 좋은 방에서 그가 배치해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으려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급한 발걸음으로 아빠가 뛰어들어왔다. "아린아~~!!" "왜요?" 화장대 앞에 앉아 시녀에게 머리손질을 받고 있다가 거울로 아빠를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묻자 아빠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셨다. "너무해, 내가 너 코디해주려고 일부러 일찍 왔는데..." 그러면서 침대 위에 놓인 드레스를 꼼꼼하게 살펴보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뭐, 제법 괜찮게 고르긴 했구나." 그리고는 머리를 손질하는 시녀를 물리신후 자신이 직접 머리에 손을 대시며 투덜거리셨다. "왜 나 안기다리고..." "언제 오실줄 알고 기다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즐거움을 빼앗다니, 불효녀야."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정말 드래곤이 맞기는 한건지... 어느때 보면 드래곤 같은데 또 어느때 보면 완전 애 아니면 고집스런 늙다리였다. "담부터는 기다릴게요. 됐죠?" 아빠의 밝게 펴지는 표정을 기대하고 말했건만, 아빠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셨다. "아냐, 그럴수도 없을거야." "왜요?" 의아한 얼굴로 거울에 비치는 아빠와 눈을 맞추자 아빠가 어깨를 으쓱이셨다. "상황이 좀 다급하게 되었어. 아무래도 당장 네가 나서줘야 할 것 같구나." "헤에, 그래요? 언제요?" "내일. 저녁먹고 서재로 가자꾸나. 너한테 보여줄 것도 있고, 할 일을 말해줄테니까." "그러죠, 뭐." 잠시 후 내려간 식당에는 아빠 말고도 네명의 사람이 더 있었다. 그 둘은 아빠의 보좌관인 윌슨과 데빈이었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아빠들과는 잘 아는 사이인듯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들어서자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알았다는 듯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은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갈색 머리의 평범하게 생겼지만 푸른 눈이 부드러운, 인상이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보다는 좀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사람 이었는데 붉은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기사인 듯 다부진 몸에 햇빛에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남자다운 굵은 선을 가진 얼굴은 꽤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게 생겼다. "누구예요?" 내가 아빠를 돌아보며 묻자 아빠가 그들을 힐끔 바라보더니 그들이 듣지 못할 낮은 목소리로 간략하게 대답해 주셨다. "이번에 네 동료가 될 사람들이다." "그래요? 흐음..." 나는 더 이상 묻지않고 아빠가 가르키는 자리에 앉았다.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잠시후면 다 알게 되리란 생각에서였다. 별 대화없이 ( 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어색한 분위기로 우리는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 아빠의 서재로 갔다. 그 남자 두 사람은 나까지 아빠의 서재로 들어오자 의아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나머지, 나와 아빠들이 별 개의치 않는 표정이자 가만히 있었다. 아빠는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큰 책상으로 뚜벅 뚜벅 걸어가시더니 서랍에서 얇은 종이뭉치를 꺼내어 나한테 넘기셨다. "우리가 알고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이다. 하지만 별로 많지 않은데다 아마 그동안 말해준게 다일거야." "어쩔수 없죠, 뭐." 나는 아빠에게서 서류를 받아 한장 넘겨보았다. [ 성명 : 세라 시피르 나이 : 모름 출생지 : 모름 (하프 엘프로 추정됨) 40년 전에 왕실 수석 마법사인 도나휴 카페티안과 같이 왕궁으로 들어왔음. 그가 신분 보장을 하였기에 별 다른 공식적인 자료 없이 기사가 되었으나, 왕실 근위대가 되지 않고 전례에 없는 수석 마법사의 호위 기사가 됨. 10년 뒤에 둘이 같이 왕궁을 나가 사라졌음. 알베르트 산에서 은거하고 있다고 알려졌으나 확인된 바 없음. 도나휴 카페티안은 7서클의 마법 마스터로 알려졌으나 8 서클의 마법도 익힌걸로 추정. 세라 시피르는 마검사로 마법은 5서클의 마법까지 다룬것이 확인 되었으나 정확한 실력은 모름. 검술 실력은 검기까지 다루는 소드 마스터로 보이나, 이도 정확한 실력은 확인된 바 없음. ] 대충 이정도의 내용이었다. "흐음... 정말 정보가 별루 없군요." "그래, 그녀도 그녀지만 그녀의 신분을 보장하고 있던 그 마법사도 꽤나 괴팍한 사람이었다더군. 왕성에서는 그들과 같이 어울린 사람이 거의 없어. 있다면 하워드 존 레드포드 공작 정도일까? 하지만 그도 친하게 지낸거에 비해 아는건 별로 없더군." "저.... 각하?" 아빠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무슨 일이지?" "외람된 말씀이오나, 플레이저양이 이번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요?" "아아, 그걸 지금 말해줄걸세."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씩 어보고는 마지막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여셨다. "아린아, 알베르트산에 한번 가줘야겠다." 그러자 아빠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눈이 놀람으로 커지며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각하?" "그런..." "이게 무슨..." 그러나 정작 아빠와 나는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베르트산이요? 흐음... 그녀와 마법사가 은둔했다던 산 말이군요?" "그래, 아직 그녀라는 것을 밝히지 못했을때는 우리는 어떤 마족의 소행 인줄 알고 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사람들을 몇번 보냈었지." "성공하지 못했나보죠?" "그래,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모두 다 돌아오지 않더군. 나중에 그녀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우리는 더욱 더 도나휴를 만나야만 했지. 하지만 그 뒤에 보낸 사람들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 "헤에, 단순히 그녀가 그렇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함인가요?" 그러자 아빠는 기특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녀석, 역시 날 닮아서 영특하구나. 맞다. 단순히 이유를 알기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을 보낸 것이 아니지." "그거 칭찬 맞죠? 하지만 아빠를 닮았다는 건 별로 듣고싶지 않은 말인데..." "잉? 아니, 왜?" "아빠처럼 바람둥이가 되면 어쩌라구요?" 그러자 어디선가 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을 참으려다가 실패한 듯한 소리였다. 아빠는 그쪽을 한번 매섭게 째려봐주시고는 험험 헛기침을 하셨다. "험, 험. 어쨌든, 이번에 네가 가서 해줄 일은 첫째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고, 둘째는 도나휴의 힘을 빌리는 거다." "만약 그 사람이 거기에 없다면요?" "그는 거기에 있을거야. 그녀의 정체를 알아낸 뒤부터 혹시나 도나휴가 은둔생활을 벗어난게 아닌가 싶어 찾았지만 못찾았거든." "흐음, 아빠가 그렇다면 그렇겠죠. 만약 그가 우리를 돕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그가 죽었다면요?" "그가 돕지 않을 가능성은 적어. 그래서 난 그가 살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거든. 그걸 확인하러 가는거지.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도움을 받고."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저 혼자 가요?" 그러자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즉각 대답하셨다. "아냐, 이 둘과 같이 간다." 그 둘은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각하?" 갈색 머리 녀석은 그저 놀라움만 표시 했지만 붉은 머리 녀석은 나를 쳐다보면서 눈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빠나 나는 그런 둘을 싸악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쟤네 둘만 데리고 가요?" "아냐, 더 있어. 요즘 이름을 날리는 용병 둘이 더 있거든. 그쪽 지리도 잘 아는 듯 하니까 같이 가도록 해. 그 둘은 내일 올거야." "알았어요. 그럼 전 내일을 위하여 준비하도록 하죠." 내가 말을 끝내는 즉시 몸을 일으키자 아빠가 한마디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람들하고 인사는 나누어야지. 그래도 명색이 네 동료인데..." 그러자 붉은 머리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아무리 각하의 명령이라지만 이런 여자를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짐을 가지고 가시라니요?" '짐?' 나는 붉은 머리를 향해 피식 웃어보였다. "네놈들이나 혹덩어리가 되지나 마라." 그러자 둘은 벙 찐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들의 얼굴을 한번씩 째려봐준 후 아빠한테 몸을 돌렸다. "저 갈게요, 아빠. 어차피 지금은 인사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으니..." "그런것 같구나... 너 좋을대로 하렴." 제 5화 빨강 머리 길들이기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한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커다란 창문이 있는 어느 방... 창문에 걸맞게 큰 방 안의 한쪽 벽면을 완전히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 빽빽히 꽃혀있는 책들과 그 앞에 고급스런 책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곳은 서재인 듯 했다. 창문 쪽의 책상 한 귀퉁이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런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기대어 서서는 팔짱을 끼고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은발에 가까운 옅은 색의 금발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가끔은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귀찮은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약간은 거칠게 뒤로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작고 가름한 달걀형의 얼굴에 오밀 조밀하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는 깔끔한 인상과 함께 인형같은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지만 그녀의 맑고 날카롭게 빛나는 파란 눈과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술을 보면 어느정도 강단은 있는 듯 보였다. 그때 서재의 문을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들어와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조용하던 실내에 울리자 그에 응답하듯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깔끔하게 숏커트한 갈색 머리에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보이는 키의 그의 부드러워 보이는 초록색의 눈이 그녀를 향하자 따스하게 빛났다. "마음이 심란한가 보군요?" 그의 낮은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천천히 돌아서게 만들었다. 밝은 바깥을 보고 있어서인지 그녀는 바깥에 비하여 어두운 실내 쪽으로 돌아서자 잘 보이지 않는지 몇번 깜박여 시야를 확보하더니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왔어요?" 남자는 뚜벅 뚜벅 걸어 여자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참으로 다정해 보이는 한쌍이 아닐수가 없었다. 남자가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에 두 팔을 두르자 여자는 다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도 몸을 약간 움직여 남자의 넓은 품안에 폭 안겼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에 자신의 턱을 살짝 기대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떠났다더군요..." 창문을 바라보던 여자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다고 나갔잖아요." "어쩌면 그나 우리에게나 이것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요." "글쎄요...." "그런데 이변이 있더군요." 여자의 가느다랗고 긴, 잘 다듬어진 금빛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남자는 직접 그 모습을 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은 했는지 곧장 대꾸해 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재상이 딸을 하나 데려왔다고 해요." 여자의 눈썹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그녀의 눈에는 한심하다는 기색이 옅게 감돌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왠지 모를 분노도 살짝 옅보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 분의 행적을 생각한다면..." 남자가 여자의 목소리에 깔린 느낌을 읽고는 낮은 목소리로 쿡쿡 웃었다. "이거 이거, 만약 내가 바람을 피면 큰일 날 것 같은데요?" 여자의 눈썹이 다시 치켜올라갔고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만약 그런다면 가만 안 둘거예요." "후후후, 예이~ 어느 누가 감히 당신을 거역하리까?" 남자의 장난 어린 대꾸에 여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남자의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데 그녀가 이번 일행에 동행을 한다고 하더군요." "재상의 딸 말예요?" "예." "흐음... 그녀 혹시 가짜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녀를 일행에 끼우고 싶었다 해도 굳이 딸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여자의 눈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깊게 잠기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그럼 그녀가 정말 친딸이라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왜 그녀를 그 일행에 넣었을까요?" "그건 모르죠. 하지만 단순한 이유로, 아무 생각없이 공작이 딸을 일행에 끼워 넣지는 않았을겁니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어쩌면 그녀가 뭔가 큰 변수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자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물었다. "어떤?" "그건 나도 몰라요. 하지만 그녀가 무시할 만한 존재는 아니라는 건 확실해요. 그러니 그녀가 어떤 영향력을 끼친다면 무척 크겠죠." "그렇겠죠. 그녀의 뒤에는 공작이 버티고 있으니..." "그런데, 그녀 이쁘대요?" 여자의 갑작스런 엉뚱한 질문에 남자의 표정이 다시 의아해 졌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에 담긴 장난을 읽어내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요. 아버지를 쏙 닮아서 무척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흐음, 공작을 닮았다면 머리도 꽤나 뛰어날텐데...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살아서 돌아온다면, 만날 수 있겠지요." 아빠의 집을 떠난 우리들은 묵묵히 말을 몰아 수도를 벗어났다. 빨강 머리와 내 사이의 냉정함이 풀풀 날리는 경직된 기류에 휘말린 일행들이 눈치를 보느라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벗어나자 갈색 머리와 마법사가 서로 눈짓을 주고 받더니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 마법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어차피 일행이 된거 서로 자신의 소개를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름 정도는 알아야 부를때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즉각 갈색 머리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래, 그러자구요. 그럼 내가 먼저 소개를 할까요? 나는 브랜이라고 하구요, 나이는 20살. 아직 애인은 없고,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입니다."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어보려고 쓸데없는 것 까지 말한 듯 했다. 그는 애인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처량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덩치가 피식 웃었고 마법사도 웃으면서 냉큼 바톤을 이었다. "저는 안지모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마법사이구요. 능력은 사업상 비밀이니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이는 37이구요, 이 옆친구와 같이 다니다보니 이 나이 이 때까지 여자친구는 사귀지도 못했답니다. 그러니 브랜, 당신만 처량한게 아니라구요." 덩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안지모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굵직하고 걸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 여자친구 없는걸 왜 내탓으로 돌려? 다 네 능력 부족이지." "무슨 소리, 너와 같이 다니면 여자들이 널 보고 나한테까지 안 오잖아. 그러니 이게 다 네 탓이 아니라면 누구 탓이란 말이냐?" 마법사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따지고 들자 덩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얼굴을 돌려버리며 중얼댔다. "흥,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이 붉어지고 혀가 굳어서 말도 못하는 주제에..." "너, 너어!!" 마법사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소리치자 브랜이 킥킥 웃었고 나와 빨강 머리까지 킥 하고 웃었다. 그러나 나와 녀석은 서로 마주보았다가 다시 흥 하고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웃긴 넘...' "자 자, 두 분 그만 하시고요, 거기 용병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브렌이 웃으면서 둘 사이에 끼어들자 덩치는 마법사의 눈짓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반담이라고 한다. 이 녀석과는 같은 고향 친구인데 둘 다 용병이 되는 바람에 같이 다니고 있지." 그가 다짜고짜로 반말로 자기 소개를 하자 빨강 머리의 눈에 노함이 깃들었지만 브랜의 저지로 인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보면 빨강 머리는 분명히 기사이거나 귀족일텐데 브랜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걸 보면 브랜도 분명 같은 계급이거나 더 높은 계급일텐데 성을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신분을 숨기려는 듯 보였다. 분명 아빠가 같은 일행으로 넣어준 걸 보면 뭔가가 있긴 있는듯 한데 말이다. '뭐,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니까...' 반담이라는 덩치까지 이름을 밝히고 나자 나와 빨강머리만 남았다. 빨강머리는 브랜의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애쉬 레드포드라고 하오." 그러자 마법사가 놀란 어조로 외쳤다. "애쉬 레드포드? 그렇다면 레드포드 공작의 아들?" 빨강 머리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했다. "옆의 브랜과는 어렸을때 부터 친구요. 그래서 이번 일을 같이 하게 되었지." 스와카는 한참이나 놀란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절래 절래 고개를 저었다. "허어, 이것 참.... 이번에는 대단한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되었군. 두 사람이 공작가의 자제라니..."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아리아나 플레이저 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버지가 플레이저 공작님이세요." 그러자 빨강 머리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짐짝!!" '그래, 누가 짐짝이 될지는 두고보자구...' 나는 녀석을 노려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 제목 제 5화 빨강머리 길들이기-2 우리는 그날 저녁 수도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어떤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리 넓은 땅을 가진 나라라지만, 수도 근처에는 여러 도시가 하루 안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에 밀집해 있었던 것이다. 반담과 스와카는 익숙한 곳인 양 제일 먼저 앞장서서 골목 골목을 쓱쓱 지나가더니 한 건물 앞에 멈춰섰다. 여관인 듯한 건물은 오래된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는데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 했다. 그걸 안 브랜은 뭐라고 하지는 못하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머뭇머뭇 대자 애쉬가 그걸 눈치채고는 스와카를 돌아보았다. "왜 여기로 온거요?" 스와카도 브랜의 눈치를 알아챈 양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 곳이 비록 이렇게 보이기는 해도, 맛도 좋고 깔끔한 곳이랍니다. 그러니 청결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안은 비록 낡기는 했지만 깨끗하게 꾸며져 있었다. 스와카는 들어가자마자 카운터로 가서 방 세개를 주문했다. 2인실 두개와 일인실 하나였다. 2인실은 각각의 남정네들이 파트너와 잘 것이고 나머지 한 일인실은 내 방이었다. 애쉬는 그걸 알더니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일행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도록 투덜거렸다. "쳇, 여자는 좋구나... 독방을 쓰기도 하고. 여행하는데 팔자도 좋지." 그래서 나는 한마디 안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러우면 여장해요. 내가 여자라고 해줄께. 아님 거세를 하던가." 애쉬의 얼굴은 분노로 인함인지 벌겋게 물들어 머리인지 얼굴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나머지 일행들은 저마다 웃는 걸 보이지 않기 위해 애쉬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가 부들 부들 떨리는건 막을수가 없었나 보다. 애쉬도 그들과 같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가 몸을 획 돌려 윗층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잠시후에 방에서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일행과 같이 식당으로 내려왔다. 애쉬는 브랜에게서 뭔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부루퉁한 얼굴로 날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스와카와 브랜은 그를 풀어주기 위하여 계속 말을 건넸지만 계속 시큰둥하게 있자 결국에는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한마디 더 해줬다. "남자가 쫀쫀하게 아직까지 삐져 있기는..." 그러자 애쉬는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똑바로 맞바다치자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인채 애피타이저로 나온 호두를 무섭게 짓이기며 까먹기 시작 했다. 스와카와 브랜이 쓴 웃음을 지으며 조마조마한 눈으로 있을때 주문을 받으러 왔고, 이 곳을 알고 있는 자가 스와카라는 이유로 우리 모두는 주문을 그에게 맞겼다. 스와카는 우리가 귀족이라는 것을 인식해서인지 식당에서 요리가 가능한 것중 가장 비싼걸로만 골라서 주문을 했다. 그러면서 간간히 눈짓으로 브랜이나 나를 바라보며 의향을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온 음식들임에도 불구하고 브랜에게는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일행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열심히 먹으려고 했지만 결국 반 조금 넘게 먹자 도저히 못먹겠는지 포크를 놓아버리고는 후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에 반담이 비웃는 듯한 눈초리를 보냈지만 애쉬가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리자 딴 곳을 보는 척 했다. 하지만 그의 비웃음은 가셔지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애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잘만 먹고 있었다. 나야 음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는 한 가리지 않는 편이었고, 나온 음식들도 썩 괜찮았기에 맛있거 먹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스와카가 놀랍다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브랜에게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양이 적으시군요. 앞으로 여정이 꽤 힘들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냥 들으면 위로하는 듯한 말투인것 같지만 말 속에는 약간의 경고와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걸 알아챈듯 브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처음으로 오랜 시간동안 말을 탔더니 속이 좀 좋지 않군요. 하지만 앞으로는 괜찮아지겠지요." 스와카는 현명하게 그정도에서 끝내고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거기에서 한마디만 더 했다간 저기에서 무시무시한 기새로 쏘아보고 있는 빨강머리 녀석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플레이저양께선 괜찮으신가 보군요. 혹시 여행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후후, 그냥 이름 부르세요. 저도 이름 부를테니까." "그래도 될까요?" "예. 플레이저양이라고 하면 길기도 하고 어색하니까요. 여행이 끝날때 까지는 같이 있을텐데 어색하면 그렇잖아요." "흠, 그럼 아시리안님이라고 하죠." '그거나 이거나...' "아시리안님께선 여행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전에 잠깐 해봤어요.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러고보니 처음 인간세상을 나와서 돌아다닌게 2년도 채 안돼잖아? 에구... 지금 생각하니 괜히 억울하네....' 스와카는 얼굴 가득히 안도의 빛을 나타내며 말했다. "아, 그럼 지금 그렇게 힘들지는 않으시겠군요." 나는 그의 속마음이 어떨지 짐작 못할바가 아니었기에 피식 웃었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여러분께 짐짝이 될 바에야 아버지가 절 딸려보내지는 않으셨을테니까요." 스와카는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하하하, 물론 각하께서 그러셨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힐끗 브랜을 쳐다보았다. 스와카의 시선을 느낀 브랜은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졸지에 나 대신 짐짝이 되어버린 그에게 나는 심심한 동정을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후식까지 해치운데다 어차피 이녀석들과는 할 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전 이만 올라가볼께요. 내일 뵙죠." 모든 녀석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쉬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어린애의 표정으로 뭉기적 뭉기적 댔지만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안녕히 주무세요." "........." "........." 스와카와 브랜은 한마디씩 했지만 애쉬와 반담은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반담이야 원래 말이 없었지만 애쉬는 아마 예의 상 어쩔수 없이 한 것이리라. '그래, 너 계속 그렇게 해봐라....' 나는 속으로 칼을 갈면서 위로 올라갔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5화 빨강머리 길들이기 (3) 다음날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여전히 안 좋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출발했다. "이제부터는 다음 마을에 도착하려면 한 2, 3일정도 걸리게 될 겁니다. 그러니 야영하실 각오는 해두세요." 그 도시를 나서면서 스와카가 좌중을 둘러보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나야 야영을 해 본 경험이 있었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지만 애쉬나 브랜은 살짝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브랜? 야영 한번도 안 해봤어요?" 그 표정에, 빨강머리 녀석에게 직접 놀려주고 싶었지만 브랜도 같이 놀리게 되는 것 같아 브랜에게 말을 걸었다. "아하하.... 기회가 없었어요. 이번에 한번 해보죠 뭐." 밝게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웃음은 무지 어색해 보였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겁니다. 며칠만 버티면 금방 익숙해질걸요." 스와카가 중간에 끼어들어 부드럽게 그를 위로했다. 브랜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긴장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브랜, 당신은 기사인가요?" "아하하, 저요? 기사는 아니구요, 검술을 약간 익히긴 했어요." "흐음, 마법사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용병은 더더욱 아닌 듯 한데, 그럼 이번 일에 왜 끼어들었나요?" "하하하, 기냥요..."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릴 뿐 확실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런 그를 나나 스와카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애쉬가 무뚝뚝하게 끼어 들었다. "당신들이 상관할 필요는 없잖소." '말을해도 꼭...' 스와카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별로 유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자 브랜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걸로 성이 차는건 아니었지만, 브랜이 너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자 스와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돌렸다. "하긴, 우리야 맡은 일만 하면 되는거니까요. 속 사정까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죠." 나도 별 상관은 없기에 같이 고개를 돌렸지만 궁금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아빠한테 물어보지 뭐...' 그 동안은 애쉬 녀석이 맘에 안 들어서 그들 일에 시큰둥하니 물어보지는 않았고, 아빠도 따로 말해주지 않았지만 만약 물어본다면 쉽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종일 길을 간 다음 날이 어둑어둑 해지자 우리는 길을 약간 벗어난, 수풀이 우거진 곳들 중 평평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웠다. 스와카는 우리가 귀족들이어서 그런지 당번을 정하지도 않을 채 자신이 음식 재료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반담도 아무런 말도 안했는데 슬쩍 일어나서 근처 수풀들을 뒤지더니 얼마 후에는 한아름이나 되는 나뭇가지들을 구해와서는 땅을 약간 파고 주위에 돌들을 가져다 놓더니 익숙한 손길로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스와카가 물이 담긴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고 스프를 끓이고 빵을 썰어 버터를 바르는 등 음식을 만련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애쉬는 뭘 생각했는지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불쑥 물었다. "아시리안님, 우리가 비록 저들을 고용했다지만 같은 일행인데 너무 저들만 일하는 것 같군요. 우리도 뭔가를 해야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의 흉계가 뭔지 짐작이 갔기에 방긋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물론이죠. 애쉬님의 말이 맞아요. 그럼 제가 뭘 할까요?" 그는 내가 이렇게 말 하자 음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스와카씨와 같이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냥 보기에는 어려워보이지 않는데..." 브랜을 비롯한 스와카나 반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브랜은 어쩔줄 몰라하는 눈치였지만 스와카나 반담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본 양 눈들이 반짝반짝 거렸다. 나는 더욱 더 방긋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 물론이죠. 대신, 맛은 보장 못하지만 제가 만든 요리는 애쉬님께서 맛있게 먹어주셔야 합니다." 빨강머리 녀석이 뭐 씹은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스와카는 얼른 휘젓고 있던 스프 냄비쪽으로 고개를 숙였고 반담은 나뭇가지를 주섬주섬 모으는 척 몸을 돌렸다. 그리고 브랜은 쓴 웃음을 지은 채 가엽다는 표정으로 빨강머리 녀석을 쳐다 보며 낮게 속삭였다. "그러길래, 왜 쓸데없이 시비는 걸구 그래?" "으음...." 애쉬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찡그린 얼굴로 고개만 팩 돌렸다. '흥, 네놈이 날 이길려면 아직 멀었다 아그야...' 나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녀석을 어떻게 더 골려줄까 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잠시후에 스와카가 다 된 야채스프를 우리에게 하나씩 돌린 뒤 작은 접시에다 빵 한조각과 과일 한조각씩 올려서 같이 돌렸다. "잘 먹겠습니다." 브랜이 미소 띄운 얼굴로 인사하는걸 시작으로 우리는 각자 스프를 떠먹거나 빵을 스프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브랜도 배가 고팠는지 계속 맛있다는 표정으로 스프를 떠먹고 빵을 찟어먹어 스와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해주었다. 나는 그런 스와카를 보고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스와카, 혼자 하려니까 힘들지 않아요?" "아니요, 아시리안님. 사람이 많은것도 아닌데 힘들긴요 뭘..." 그러자 브랜이 끼어 들었다. "저기요, 우리도 일행이니까 가만히 있는게 좀 그렇거든요. 그러니 우리도 뭔가를 할게요." "맞아요. 아까 애쉬님이 말씀하신게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걸 당번으로 정해서 하기로 하죠." 내가 브랜의 말을 거들자 빨강머리 녀석이 경계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짜슥, 내가 너같은 밴댕이 소갈딱지인줄 아냐?' 그러면서... 스와카는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빙긋 웃으며 물었다. "뭘 하실 수 있으세요?"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간단한 요리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제가 스와카님과 번갈아 가며 식사를 준비하도록 할게요." 그러자 좌중에 있던 녀석들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요리할 줄 아세요?" 브랜이 너무나 놀랍다는 목소리로 물어오자 나는 뒤에 있는 애쉬의 눈치를 힐끔 보며 대꾸했다. "예. 먹을만 하게는 만들 줄 알아요." 아마 내 눈치를 봤는지, 스와카도 웃음기 어린 눈으로 애쉬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가 험악한 인상이 된 것을 알아채고는 얼른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 눈을 살짝 찡끗했다. "너무 일그러졌는데요?" 그가 나에게 작게 속삭이자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줬다. "많이 화가 난것 같죠?" 스와카는 나에게 살짝 기울였던 몸을 바로하고는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시리안님께서 도와주신다면야 저로써도 반가운 일이지요." 브랜은 머뭇 대면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할줄 아는게 없는것 같은데 어쩌죠?" 그래서 내가 방긋 웃으며 대답해줬다. "아무것도 안 하시는게 그렇게 맘에 걸리시면 설거지를 해주는게 어떠세요? 그거야 뭐, 어려운게 아니니까요." 빨강머리의 인상이 더욱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브랜이 설거지를 한다면 자신도 가만있지 못할 것 아닌가? 그걸 알고있는 나는 사악하게도 브랜을 끌어들인 것이다. '홀홀홀홀...' 하지만 내 이 심성을 모르는 브랜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예. 제가 할 수 있다면 해드리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이 녀석은 너무 순진한 듯 하다... '괜히 내가 찔리는걸? 하지만 어쩌랴? 친구 잘못 뒀다고 생각해라...'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5화 빨강 머리 길들이기 (4) 빨강머리는 우리가 식사를 다 끝내고 난 뒤에 스와카가 주섬주섬 챙겨 준 지저분한 그릇들을 들고 브랜을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사라졌다. 이 근처에는 냇가가 없어서 스와카가 가지고 있는 그릇 중 가장 큰 그릇에다 마법으로 물을 잔뜩 담아주고는 적은 물로 깨끗이 그릇을 씻는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해 준 후 들려보내 주었다. 하지만 스와카나 나나 반담이나 그들이 스와카의 설명대로 깨끗하게 해올지는 믿을수가 없었다. 내가 스와카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잘 해올 것 같아요?" "글쎄요... 미덥지는 않군요." 스와카도 피식 웃었다. "스와카, 만약 저들이 못해오면 어쩔꺼예요?" "음... 제가 다시 해야죠, 어쩌겠어요?" "에이, 그러면 안돼죠. 저들이 맡기로 한 이상 저들이 끝내야죠, 안그래요?" "후후후, 즐기시는 것 같군요? 재미들리시면 안돼는데..." 스와카는 재롱둥이 동생을 보는 듯한 인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반담이 중얼거렸다. "온다!!" 그의 시선을 쫓아가니 수풀 속으로 사라졌던 빨강머리와 브랜이 소매를 걷어올린 채로 젖어있는 그릇들을 들고 털래털래 걸어오고 있었다. 스와카는 그들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며 얼른 일어나서 그들의 그릇을 받아들어 가지고 왔다. 그는 모닥불 가로 가까이 와서 그릇들을 살펴보더니 만족스러움과 놀라움이 담긴 눈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깨끗하게 닦으셨군요. 이거, 놀라운데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스와카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살짝 눈을 찡끗하더니 마른 수건으로 그릇의 물기를 닦고 가방안에 넣기 시작했다. 스와카의 칭찬을 받은 브랜이 기분 좋은 얼굴로 헤헤 거리면서 모닥불가에 앉자 빨강머리도 나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면서 그의 옆에 주저 앉았다. 나는 피식 피식 웃으면서 빨강머리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채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당번은 다 정해진 셈이군요. 음식 장만은 나와 스와카씨가 번갈아가며 하는거고, 나무 모으는거랑 모닥불 마련은 반담씨가 담당이고, 설거지는 두 분이 담당하시는 걸로요." 빨강머리의 눈빛에 살기가 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브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저도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눈치 빠르게 빨강 머리의 입을 막은건지, 아니면 눈치 없게 막게된 건지 모르겠지만 브랜은 정말 기쁘다는 듯 환한 얼굴이었다. 좀 양심에 찔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좋다는데 뭐라고 더 하겠는가? 나는 빨강머리에게 한번 더 싱긋 웃어주고는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우리의 대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반담이 불쑥 입을 열었다. "불침번을 정해야지?"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건 지원자가 필요한 법 아니겠어? 반담은 좌중을 둘러보다가 아무도 먼저 불침번을 서겠다는 말이 없자 스스로 자청했다. "내가 제일 먼저 서도록 하지." 그러자 빨강머리도 나섰다. "그럼 그 다음은 제가 맡도록 하죠." "그럼 마지막은 나인가?" 스와카가 둘러보며 말하자 브랜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자청했다. "저기... 저도 불침번을 설께요." 그러자 애쉬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더니 황급히 말했다. "됐어. 처음 여행하느라 비실비실 대면서 뭘 하겠다고 나서?" 스와카도 웃으면서 그를 말렸다. "그래요. 피곤하실텐데 불침번은 익숙한 우리들에게 맡기세요." 그리고 나도 돌아보았다. "아시리안님도요. 그냥 주무세요." 빨강머리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리 내가 미워도 브랜을 쉬게 하면서 나를 불침번 세우는건 못하겠는가 보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쉬라는데 일부러 불침번 선다고 나서는 건 내 체질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부탁할게요." 스와카는 일어나서 모닥불과 약간 떨어진 곳을 돌아다니며 결계를 쳤다. 슬쩍 보니까 누군가가 침입하면 요란한 소리를 울리는 알람 마법인 듯 했다. 그것도 그냥 어쩌다 지나가는 동물들이 들어왔을 때는 울리지 않고 우리에게 살기를 지닌 자들이 들어올때만 울리게 되어 있는 알람 마법 중에서도 고난위도의 마법이었다. '흐음... 역시 아빠가 붙여줄 만 하군.'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아오는 스와카에게 말을 건넸다. "스와카, 내일 아침은 제가 준비할테니 재료 좀 주시겠어요?" 그러자 그가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 아침을 준비하시게요?" "예, 전 불침번도 안 서잖아요. 그러니 앞으로도 아침은 제가 준비할게요." 스와카는 환하게 웃으며서 얼른 나에게 음식 재료가 들어있는 꾸러미를 넘겨 주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별말씀을..." 다음날 아침,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난 나는 마지막 불침번인 스와카게에 인사를 하고는 일행들과 좀 멀리 떨어진 곳 까지 가서 실프를 불러내어 얼굴을 씻은 다음 돌아와서 아침 준비를 하기시작했다. 스와카는 이제 아침이 되었으니 우리 주위에다 쳐 놓은 결계를 지우고 있었다. 거의 다 꺼져가는 모닥불에다 새로이 나무를 넣어 불을 살리고 그 위에 냄비를 얹었다. 재료 중에는 마침 밀가루와 버터가 넉넉히 있고, 설탕까지 있어서 모닥불을 하나 더 만든다음 후라이팬을 꺼내어 팬케잌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딱딱해진 빵은 거의 다 된 스프에다가 한 입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크기로 잘라 넣었다. 좀 눅눅해지긴 하겠지만 그게 딱딱한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쯤 되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일어났고, 음식이 다 되었다고 말했을 때에는 모두 자신들의 짐을 정리하고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팬케잌과 스프를 떠 주자 다른 사람들은 다 한입씩 먹어보고는 맛있다고 칭찬을 해주는데 빨강 머리만은 유독 먹지 않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스프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브랜이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내가 먼저 말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세요. 억지로 먹으면 소화도 안 돼요." 그러면서 그의 손에 들린 그릇을 빼앗으려 하자 그는 얼른 내 손을 피해 그릇을 치우더니 팬 케잌을 한 입 물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먹으면서 한다는 말이... "먹을만 하군요. 먹어 드리죠." '젠장... 아침을 굶기려고 했는데...' 그래서 배 속에서 꼬르륵 거리는걸 들으려고 했는데 그걸 눈치챘는지 빨강 머리가 얼른 음식을 입에 넣어서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 내가 쳇쳇 하면서 자리로 돌아와 앉자 스와카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굶기려는 건 너무 했어요." '헹, 그렇게 티가 났나?'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5화 빨강머리 길들이기 (5) 그렇게 며칠동안 길을 달렸다. 수도에서 멀어질 수록 다음 마을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고, 그럴수록 노숙하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에 브랜은 노숙할 때에는 잠을 잘 못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이 결려서 스와카가 회복 마법을 걸어줘야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익숙해졌다. 그리고 빨강머리와 나는 여전히 틈만나면 서로 씹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별 트집 잡을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냥 서로 으르렁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전 날도 노숙을 하고 아침 일찍이 사람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저 멀리 언덕에 여러명의 말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전력질주로 우리쪽을 향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왔는데 그 수가 20명이 넘었다. 처음 보는 일이라 브랜과 나는 멀뚱 거리며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스와카와 반담, 그리고 빨강머리는 얼굴을 굳힌채 자신들의 무기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물론 스와카는 마법사였으므로 무기를 드는 대신 주문을 외워놓고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온 그들은 한결같이 망토를 두르고 카우보이와 비스무리하지만 챙이 좀 더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빨강머리와 용병들은 얼른 나와 브랜을 안쪽으로 집어넣고 자신들이 바깥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저 멀리 언덕에서부터 달려온 녀석들이 빙 둘러쌌다. 우리의 정면 맨 앞에 선 녀석이 대장인듯,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물건 가격을 매기는 듯한 눈초리로 우리를 쓱 훑어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다섯명이라... 좋은 먹잇감이로군... 게다가..." 그는 말을 하다말고 나를 뚤어지게 쳐다보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무지 비싸보이는 서클렛인데? 값이 꽤 나가겠어." 그러자 그 즉시 빨강머리의 질책이 날아왔다. "쳇, 뭐하러 그런 비싼걸 하고 다니는지... 그렇게 보석이 좋으면 집에 얌전히나 있을 것이지..." "남이사, 뭘 하고있던 말던..." 내가 톡 쏘아붙이자 브랜이 식은땀을 흘렸다. "저기...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때가 아닌 것 같은데..." "저쪽이 먼저 시비 걸었잖아요." 내가 브렌에게 투덜거리자 빨강머리가 대꾸하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걸 하고 다니니까 이런 도적들이 꼬이는 거야." 하지만 그 도적들의 대표는 빨강 머리가 뽑아드는 검을 보고 한마디 했다. "좋은 검이군... 그건 내가 갖도록 하지." "안됐군요, 당신 검도 찍혔는데요?" "흥." 확실히 빨강 머리가 뽑아든 검은 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무지 좋아보였다. 게다가 검 받침대 중간에 박힌 에메랄드만 해도 무지 비싼 거였으니 값이 나가는 검임에 틀림 없었다. 도적 대표는 우리에 대한 감정(?)을 다 마쳤는지 자신의 허리춤에 달아 놓은 검을 쓰윽 뽑아 들더니 외쳤다. "중앙에 두 명은 흠집 내지 마!!" 그걸 신호로 맨 앞쪽에 나서있던 녀석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뽑아 들고 달려 들었다. 스와카는 재빨리 브랜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 방어 실드를 펼쳤고 반담과 빨강 머리가 마주 달려 나갔다. 그러나 2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둘이 맞서기는 너무 무리였다. 게다가 그들에게 둘러쌓이기라도 하면 아무리 날고 기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질게 뻔 했다. 반담과 애쉬도 그걸 잘 알고 있는지 그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들을 둘러쌓고 있는 도적들을 뚫고나가 말을 달려 우리와 멀리 떨어졌다. 당연하게도 도적들은 두 패로 나뉘어 그들을 쫓았고 둘은 재빨리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가끔씩 멈춰 서면서 자신에게 제일 가까운 녀석들을 하나 하나 쓰러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잇던 스와카가 그들을 돕기 위하여 마법을 펼치려 했지만 갑자기 날아온 파이어볼에 의하여 놀라는 바람에 시동어를 외치지 못했다. 안쪽에 스와카와 같이 있던 브랜과 내가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도적 대표가 싱글 싱글 웃으며 스와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마, 마법사?" 마법사 로브를 입지 않고 있어서 마법사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듯 했다. 여기서, 나보고 왜 못 알아챘냐고 묻지 마시라. 난 빨강 머리랑 싸우느라 그들을 살펴보지도 않았으니까... "푸하하하, 맞았다. 너희들 중에 마법사가 있는데 우리가 마법사 없이 왔겠느냐? 켈켈켈, 이거나 먹어라, 아이스 미사일!!" 그의 손짓에 의하여 세개의 얼음 화살이 쏘아져 들어왔지만 스와카는 아까의 당황하던 기색을 재빨리 지우고는 흥 하고 코웃을 쳤다. "그 정도로 내 실드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프리어 에로우!!" 스와카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시동어를 외치자 다섯개의 불화살이 생기는 동시에 그에게 날아갔다. 그러자 그가 손을 재빨리 휘저어 실드를 형성했다. 다섯개의 불화살은 비록 그 실들을 뚫지는 못했지만 그와 동시에 실드가 부서지면서 도적 두목의 몸이 크게 휘청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스와카의 상대가 되지는 않는 듯 했다. "흐음, 그럼 난 저들을 도와주러 갈게요." 이쪽은 걱정할게 못 되었으므로 나는 바깥에서 분전하고 있는 둘을 돕기 위하여 실드를 불러내어 위로 떠올랐다. 말을 타고 나갈수도 있겠지만 말 위에서 싸워본 적이 없던터라 아무래도 저들에게 이기기는 커녕 짐 덩어리가 될 것 같아 실프를 이용해 위에서 공격하려는 속셈이었다. 내가 스와카가 쳐 놓은 실드를 빠져 나가자 스와카와 브랜이 놀랐지만 스와카는 도적 두목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브랜 혼자 소리쳤다. "위험해요!!" "괜찮아요.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나는 여유있게 그에게 손까지 흔들어 보인 뒤 도적들의 머리위로 날아가 그들의 뒤통수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퍼억~~!! 퍽~~!!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갑작스럽게 나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녀석들은 말에서 떨어지든지 옆으로 넘어졌다. 나는 옆에 차고있는 검은 전혀 뽑지 않은채로 공중에서 그들의 머리와 어깨를 살짝 살짝 밟아 도약하면서 그 중간 중간에 발을 놀렸다. 물론 전에는 이런 걸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실드가 내 몸을 받혀주고 있는데다 나 또한 균형감각이 꽤 있어서 밑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받느라 어리둥절 했지만 내가 위에서 뛰고 있다는 걸 안 도적들이 나를 눈으로 쫓으면서 허공으로 무기들을 휘두르자 나중에는 내려올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어야만 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빨강 머리가 외쳤다. "젠장, 다시 들어가요!! 위험하단 말야. 왜 나와서 설치는 거야?" 하지만 나에게는 그의 말을 들을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기에 그의 말을 들은체도 안 하고 도적들이 없는 곳을 찾아 땅에 내려섰다. 그러자 몇명의 녀석들이 나를 잡으려고 말 머리를 돌려 쫓아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가만 보고있을 내가 아니었다. "노움!!" 나의 외침에 땅이 갑자기 푹 꺼져버리자 말들이 그 곳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그와 함께 그 위에 타고있던 도적들이 떨어져서 땅 위에 굴렀다. 나는 재빨리 그 녀석들에게 달려가서 뒷 목을 후려쳐 기절시켜 버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몇명이 놀라 외쳤다. "정령사?" "딩동댕~!! 네, 맞았습니다. 상으로 제 정령을 보여 드리죠. 카사, 카사, 카사!!" 나는 그들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불의 하급 정령인 카사들을 불렀다. 그리고 나의 부름에 나타난 그들에게 도적들을 가르켜 손짓하자 그들은 지체없이 내 손짓을 따라 도적들에게 날아갔다. "으아아악~~!!" 아직 정령들을 없앨 능력이 없는지 도적 세명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어리 새를 보고는 정신 없이 말을 달렸다. 하지만 카사보다 빠르지 못한 그들은 결국 등에 불이 붙어서는 말에서 굴러 떨어져 불을 끄기 위하여 이리저리 굴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쯤에는 스와카가 도적 두목을 날려 버렸고, 빨강 머리와 반담들도 대여섯명씩 해치웠기에 우리가 자신들의 먹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남은 녀석들이 튀기 시작했다. "젠장, 잘못 걸렸다." "살고 싶으면 튀어!!" 나는 싱긋 웃고는 스와카와 브랜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곳에는 스와카가 혼자 서 있었고 브랜은 저 멀리 애쉬와 같이 서 있었다. 아마도 내가 나간뒤로 그도 싸우려고 실드를 빠져 나간 모양이었다. 애쉬는 험상궃은 얼굴로 브랜에게 막 뭐라고 하고 있었는데 브랜이 고집스런 얼굴로 고개를 젖자 더 이상 말은 못하고 한숨을 쉬면서 그를 이끌고 스와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정령사 였습니까?" "뭐, 하급 정령밖에 다룰 줄 모르지만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자 그가 맘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짐은 안되겠군요." 그래서 한 마디 쏘아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언제 당신이 날 들고 다녔어요?" 그러자 그 녀석이 돌아서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능력좀 있다고 나서서 설치지 말아요. 그러다간 크게 다치는 수가 있으니까... 그때가 되어 징징 거려도 절대 들고 다니지 않을거요." "뭐, 뭐라구요?" 나는 너무 기가막혀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 맘에 안 드는 녀석이다. 너무 열받아서 콱 눌러주고 싶은 생각도 사라져 버렸다. '내 다시는 상종을 안하리라...'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6화 알베르트 산 (1) 제 6화 알베르트 산 "저기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이 바로 소사믹 산맥의 끝자락입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는 알베르트 산이 있죠." 스와카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지평선만 바라보며 꾸준히 달리다가 우리는 드디어 저 멀리 거의 어슴프레하지만 산맥이랍시고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우리가 보는 지평선의 절반도 채 안되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본 산맥이어서 기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다. 그리고 그 산맥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이제 우리가 막 들어갈 도시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다. "오늘은 저기서 쉬어 가겠습니다. 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도 멀었으니까 식량도 보충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동안 노숙을 하느라 피곤할 테니 오늘은 푹 쉬고 가도록 하죠." 지금은 아직 정오가 되지 않은 시간... 그래도 오랜만에 도시를 본 터라 우리 모두는 벌써부터 푹신한 침대 생각에 졸음이 솔솔 오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성에 가까이 다가가자 어디론가로 날아가버리고 나는 성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버렸다. 물론 아빠에게 들어서 각 도시에 병사들을 배로 늘이고 용병까지 모집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 도시는 우리가 그 동안 지나쳐 온 다른 도시들보다 더욱 더 심했다. "살벌하군요..." 브랜도 그 모습을 느꼈는지 긴장 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중얼 거렸다. 그러자 스와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마도 여기가 일을 당한 도시와 가까워서 그럴 겁니다." "아..." 성문 가까이 다가가자 잔뜩 무장한 병사들이 우리 앞을 가로 막았지만 애쉬가 나서서 뭐라고 한마디 하자 선선히 길을 비켜 주었다. "휘유, 확실히 신분이 대단한 사람과 다니는게 좋긴 좋군요." 그 모습에 스와카가 씨익 웃으며 말했지만 누구 하나 그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거리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절반이 병사들이거나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걸어다니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모두 불안함과 걱정으로 가득차 굳어 있었다. "하아... 빨리 이 일이 해결되야 할텐데요..." 브랜이 힘 없이 중얼거리자 애쉬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될 거야." 여관에 들어가 방을 잡은 나는 잠이라도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차라리 오랜만에 목욕이나 할까?"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흐느적 대는 걸음을 욕실로 가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아시리안님?" 브랜이었다. "예?" 문을 열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스와카와 반담이 묶을 방 문을 손으로 가르키며 싱긋 웃었다. "스와카씨가 의논할 게 있다고 모이라는 군요." "그래요?" 나는 문 밖에 브랜을 세워둔 채 얼른 방안의 탁자 위에 놓여있던 열쇠를 가지고 나와 방 문을 잠그고 그와 함께 맞은 편 방으로 갔다. 그 곳에는 반담과 스와카가 탁자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벌써 온 애쉬도 침대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묻자 스와카가 일어나더니 입을 열었다. "자, 다 모이셨으니 이야기를 할까요?" 그리고서는 탁자에다 4절지만한 지도를 펼쳐 놓았다. 우리는 그가 펼쳐놓은 지도를 보기 위하여 탁자로 모여 들었고 그런 우리를 확인 한 스와카가 지도의 어느 한 지점을 가르켰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있는 도시 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알베르트 산이구요. 우리가 알베르트 산까지 가려면 도시 2곳을 더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요?" 브랜이 대표로 묻자 스와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 도시 두 곳은 멸살 당한 곳이거든요." 나는 안면이 경직되는 걸 느꼈고 브랜도 하얗게 질렸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사건 현장에 다 온 것이다. 그러나 애쉬 녀석은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식량을 잔뜩 준비해 가야겠군." 스와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가 최대한 빨리 간다고 해도 알베르트 산까지 가는데는 거의 15일 이상 걸리니까 갈때, 올때 식량을 계산하고 알베르트 산에서 헤매는 것 까지 계산한다면 최대한 한달 하고도 보름 정도의 식량을 준비해 가야 합니다." "장난이 아닌 양이로군..." 브랜이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지만 그때 나는 뭔가가 떠올라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 정도까지 가지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나는 대표로 묻는 스와카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물론이죠. 바로 당신이요." "예? 저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가르키는 스와카를 향해 나는 더욱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예. 스와카씨는 마법사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공간이동을 하면 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당장 애쉬의 비웃는 듯한 눈초리와 스와카의 미안한 듯한 눈빛이 나에게 쏟아졌다. "왜요?" 그러자 스와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답니다. 여러분과 말, 짐을 다 합해서 최대한 이동 시킨다고 해도 성 하나를 뛰어 넘는게 한계거든요. 게다가 그렇게 하면 전 거의 일주일을 앓아야 합니다." '에?' 내 생각만 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었다. "어머, 그렇군요... 저는 마법사라면 모두 다 쉽게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줄 알았어요." "하하하, 뭐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순간 이동은 정말 고난위의 마법이라서요. 저 혼자라면 모르지만 여러분까지 모시고 하려면 알베르트산에서 여기까지는 무리랍니다. 저와 같은 능력의 마법사가 한명 더 있으면 몰라도..." "그렇군요. 죄송해요, 몰랐어요." 내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자 스와카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미안해 하지 마세요." "공간 이동이 그렇게 힘든 건가요?" 내가 순진하다면 순진한 표정으로 묻자 스와카 대신 옆에 있던 브랜이 설명해 주었다. "제가 알기로 공간 이동은 5서클의 마법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마력이 너무 많이들어서 5서클의 마법사라면 혼자서 쉽게 넘나드는 범위가 1Km 이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스와카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정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거의 쓰지 않는답니다. 뭐,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8서클의 마법사나 드래곤이 아니라면 쉽게 쓰기는 어렵지요." "헤에, 그럼 나라와 나라를 넘나들 수 있으려면 8서클의 마법사가 되어야 하나요?" 스와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공간 이동 결계가 있으면 4 서클의 마법사라도 가능 하지만 그냥 순수한 자신의 마력으로 이동 하려면 7서클의 마법사라야 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동할 때 결계를 만들어서 이동하면 안돼나요?" "결계로 이동할 때는 세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이동하는 시점과 도착 지점에 결계가 있는 것 하고 이동할 지점에만 결계를 만드는 것과 도착 지점에만 결계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두 곳 다 결계가 있으면 적은 마력으로도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하지만 어느 한쪽에만 결계가 있는건 마력도 두배 이상이 들 뿐만 아니라 안전하지가 못하죠." 그러면서 더 설명해 드릴까요?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길래 나는 고개를 살래 살래 흔들며 거절했다. "됐어요. 나머지는 나중에 듣도록 하죠. 안 그랬다간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겠어요." 뭐, 그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예측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입니다. 저희가 그 많은 분량의 식량을 가지고 간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식량도 상하게 될 뿐더러 양도 만만치 않겠지요?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부피는 줄이고 상하지 않게 보존 마법을 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군?" 애쉬가 스와카의 말을 다 들은 다음에 입을 열었다. "예. 한 2, 3일 정도는 이곳에서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식량 부피를 줄여야 하니 아무래도 지금까지 노숙할 때처럼 충분하게 식사를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스와카는 그러면서 브랜과 나를 돌아 보았다. 아무래도 우리 둘이 젤 맘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고기와 과일은 거의 못 가져가고, 빵도 부피가 크기 때문에 빵 대신 비스킷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육포 약간과 스프정도?" 그러자 브랜이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모든 시선이 나에게 돌아왔다. "저도 괜찮아요." 괜찮기는 개뿔이 괜찮냐? 제대로 못 먹는다는데... '차라리 나에게 마법 주머니가 있다고 털어 놓을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걸 털어놓는다면 빨강 머리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건 싫은데...'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충분히 능력이 있으면서 식사를 잘 못한다는 게 억울하고... 내가 그렇게 혼자 낑낑거리고 있을 때 스와카가 우리를 돌아보며 이야기가 끝났음을 알렸다. "자, 그럼 출발은 며칠이 있어야 할테니 그 동안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하세요." 나는 혼자 고민 고민 하면서 그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기냥 몰래 넣고 다니다가 혼자 살짝 살짝 먹을까? 하지만 그건 너무 비 양심적인데... 그렇다고 말하기도 싫구.... 우웅... 어떻게하지?' 하지만 그 때 스와카가 나를 붙들었다. "아시리안님?"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6화 알베르트산 (2) 하지만 그 때 스와카가 나를 붙들었다. "아시리안님?"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예?" 스와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나를 마주보았다. "저, 시장 좀 같이 봐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시장이요?" 나는 의아해져서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모든 재료들 - 음식, 조미료 등등 - 을 스와카와 반담 둘이서 마련해 왔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나중에 스와카가 건네주는 재료들을 받아서 요리만 해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장을 같이 보러 가자니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하하, 갑작스러우시겠지만서도 지금까지는 계속 제가 선택한 음식만 먹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아시리안님께서 원하시는 음식을 먹어볼까 하구요. 너무 제가 고른 음식만 먹으면 앞으로 거의 한달동안을 계속 먹어야 할텐데 질리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뭐, 틀리지는 않은 말이지만서두... 뭔가 좀...' 나는 속으로 좀 찝찝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런데 내가 차비를 차린 다음 스와카와 반담과 밑으로 내려가자 카운터 쪽에서 머뭇머뭇 대고 있던 빨강 머리와 브랜이 쳐다 보았다. "아, 어디 가시게요?" 브랜이 이상하게도 희색이 만연해져서는 말을 걸었다. "아아, 시장 보러 가요. 스와카님이 도와 달라고 하셔서요." "그래요? 마침 잘 되었네요, 우리도 무기점에 들리려고 했거든요. 어차피 같은 쪽일테니 같이 갈까요?" "예? 아, 뭐 좋을대로 하세요." '도대체 얘네들이 갑작스레 왜그러는 거야?' 나는 어리둥절 해져서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이들이 이러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을 나서면서 브랜과 낮게 속삭이는 빨강 머리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뭐하러 저런 여자를 걱정해요? 혼자서도 충분할 텐데..." "하지만 애쉬, 여긴 다른 지역보다 더욱 위험하다고. 어떻게 여자 혼자 내버려둬?" '나원 참... 지들도 남자라고...' 속으로 같잖은 웃음이 치솟았지만 그래도 뭐, 과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장은 다른 보통 도시의 시장과 마찬가지로 북적거렸지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지나가는 여인들에게 괜히 찝쩍이거나 노골적으로 음탕한 말을 서슴치 않고 지껄이며 낄낄 거리는 녀석들이 두배, 아니 세배는 더 많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그 모습에 눈쌀을 찌푸리긴 했지만 어느 누구하나 나서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 눈을 돌리고 자신의 길만 재촉했다. 하긴, 그들은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하여 고용된 용병들... 어차피 그들을 고용할 때 이런 일은 각오 했을 것이다. 그래도 기분 나쁜 것은 나쁜 것,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심하게 찡그리자 얼른 스와카가 반담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참으세요, 아시리안님. 여기서 일을 벌였다간 오히려 아시리안님이 저들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요즘은 용병이 한 사람이라도 절실한 때라서 어디에서고 용병들과 트러블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을 겁니다." 스와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고, 그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알아요. 하지만 기분은 정말 안 좋군요. 쳇, 저런 녀석들은 군대에 보내 버려야 하는데..." 그러자 뒤에서 빨강 머리 녀석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병들에게 너무 많이 기대하시는 것 같군요." '운디네!!' 나는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는 걸 느끼며 마음속으로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는 나의 부름에 응답하여 내가 바로 지나가고 막 빨강 머리 녀석이 발을 디딜곳에 슬쩍 물을 흥건히 고이게 만들었다. "왁~!!" 그 녀석은 갑자기 생긴 물에 의하여 생성된 고운 진흙덩이와 물을 밟고 좌악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재빠른 몸놀림으로 균형을 잡고는 넘어지지 않았다. '쳇, 확 넘어져버리지...' 속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네 짓이지?' 하는 것 같았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얼굴에 두껍디 두꺼운 철판을 깔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눈을 피해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지만 녀석의 집요한 시선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쳇, 눈치가 빠르기는...' 우리는 브랜과 애쉬를 비롯한 반담 까지도 무기를 사야 한다기에 먼저 무기점에 들린 다음 다 같이 시장으로 갔다. 스와카는 아무리 식량의 부피를 줄이려 한다 해도 과일을 빼 놓을 수 없겠는지 방울토마토만한 크기의 새콤한 사과 맛 비슷한 과일과 금귤들을 잔뜩 샀다. 그리고 밀가루와 말린 육포, 비스킷, 마지막으로 요리할 때 필수인 조미료 - 후추, 소금, 설탕 - 와 입가심할때 쓰이는 커피와 허브차를 샀다. 그러자 그것만 해도 평소의 세 배가 훨씬 넘는 부피였기에 반담 혼자 다 들지는 못하고 빨강 머리와 브랜까지 같이 한짐씩 들어야 했다. 그리고 나와 스와카는 재료를 고르는 특권으로 빈 손으로 시장의 여러 가계를 기웃 기웃 대다가 대충 다 산것 같자 손을 탁탁 털며 그들을 돌아 보았다. "아, 힘들었다. 이제 충분히 산 것 같으니까 그만 돌아가죠?" 빨강 머리가 '왜 너만 빈손이야?' 라는 눈빛으로 집요하게 쏘아 보고 있었지만 나는 싸악 무시하고 브랜을 돌아 보았다. 브랜도 비록 빨강 머리나 반담 보다는 적은 양이지만 양 손에 짐을 들고 있었다. "브랜님, 괜찮으시죠?" "하하, 예. 충분하니까 걱정 마세요." 브랜은 나의 시커먼 속을 모르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의 대답을 듣자 마자 거 보라는 듯 빨강 머리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때 스와카가 살며시 끼어 들었다. "저기..." "예?" "아아, 저는 마법 물품 좀 구입 하려구요. 잠깐 들렸다 갈테니 먼저들 가 계세요." "어머? 그럼 같이 갔다 가요." 나는 멋도 모르고 -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음...- 스와카에게 제안 하면서 나머지 일행을 돌아 보았다. 그러자 브랜도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상하게도 스와카와 반담은 얼굴 빛이 약간 변했고 빨강 머리 녀석은 음흉한 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잘못 한거 같아...' 빨강 머리의 눈빛에 잘못 말했구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스와카가 내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아니요, 저 혼자서도 충분 합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짐까지 가지고 계시니 어서 돌아가는게 좋겠어요." 브랜과 빨강머리가 너무나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스와카의 말에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터덜 터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나중에 뵈요." "예. 금방 갈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저것들은 보존 마법을 걸어야 하니 제 방에 가져다 주세요." "그럴께요." 하지만 내가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반담이 여관에 도착하자 모든 짐들을 받아 들어서 자신과 스와카가 거하는 방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스와카는 우리가 막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갈때 쯤에야 돌아왔다. "아, 제가 시간을 잘 맞췄군요. 조금만 늦었으면 같이 식사를 못할뻔 했네요." 그는 급히 뛰어왔는지 발개진 얼굴에 헉헉 대며 턱밑으로 흘러내린 땀을 씻었다. "얼른 내려와. 기다리고 있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담의 음성이었다. 무뚝뚝하고 낮은 음성이었지만 은근히 스와카를 반기는 듯 했다. "빨리 내려오겠습니다." 스와카는 반담에게는 눈짓으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재빨리 윗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저녁을 먹은 뒤 스와카는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듯 하더니 음식물들이 상하지 않도록 보존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그 방에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풍겨지는 마나의 흐름이 그런 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 음식의 양이 거의 한달 하고도 보름의 식량이었으므로 그는 다음날 뻗어서 도저히 일어나지 못했고 덕분에 우리는 특히 나는 하루종일 여관에 있어야 했다. 것도 스와카를 간호하라는 압력 아닌 압력에 스와카의 침대 옆에서 죽치고 앉아 있어야 했다. 내가 어디 나갈라고 하면 반담과 빨강 머리가 인상을 찌푸렸고 브랜이 걱정스런 어조로 꼭 나가야 하냐고 물어왔기에 차마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와카도 끙끙 앓으면서 한시도 내게 눈을 떼려고하지 않아서 나는 다시 내가 짐덩어리가 된 듯한 착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 신세가 왜 이렇게 한심해졌지?' 나는 녀석들의 시선을 피해 창 밖을 바라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 제목 제 6화 알베르트 산-3 그 다음날... 스와카가 기력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리는 다시 알베르트 산을 향해서 출발했다. 전보다는 더욱 더 많아진 짐들을 들고 말을 달리는 우리는 다른 때와는 달리 모두다 긴장감 어린 분위기로 평소 말을 잘 하던 스와카나 브랜 마저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침묵 속에서 우리는 묵묵히 말을 달리다가 피곤하면 아무 말 없이 잠시 말을 멈춰 쉬었다가 다시 달리고 어둑 어둑 해지면 늘상 하던 대로 반담이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우면 스와카와 내가 번갈아 가면서 요리를 했고, 저녁을 먹으면 모두 동의라도 한 듯이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그 모든일이 척척 이루어지는지 의아해졌지만 그걸 입에 담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한 일주일을 그렇게 달렸을까? 우리는 어떤 도시를 앞에 두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 입이 붙지 않았을까 궁금했던 스와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도시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겠지...' 도시 전체가 몰살 당한 뒤로 보통 같으면 다른 이주민들을 받고 국가에서도 새로 관리를 보내어 처리 하거나 군대를 보냈겠지만, 지금은 일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도시를 지키기에도 빠듯한 실정... 어쩌면, 정말 어쩌면이겠지만 살육 당한 시체들 처리 조차도 안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인 뒤 그 도시를 두고 저 멀리 빙 돌아서 그냥 지나쳐 갔다. 그리고 날이 어둑 어둑해졌어도 그 도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을 달려서 겨우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말을 멈추고 야영할 자리를 찾았다. "오늘 따라 으산하네요..." 반담이 자리를 잡아 모닥불을 피우자 자연스럽게 그 주위에 모여 앉아 있다가 브랜이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기분 탓일 거예요. 하긴 저런 도시를 지나쳐 왔다지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죠." 스와카도 불 위에다 냄비를 얹으면서 대꾸했다. "아무리 별의 별 일을 다 겪었던 우리라도 말야..." 반담까지도 한 마디 안할 수 없었는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두지 않아..." 빨강 머리가 굳은 얼굴로 주먹까지 부르르 떨며 낮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모습에 한마디 해줬다. "가만 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빨강 머리의 분노에 찬 시선이 나에게 쏘아져 왔다. 그러나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비웃는 시선을 마주 되쏴줬다. "마치 하찮은 제가 어쩔수 없는 상대라고 말씀하시는 듯 하군요?" '맞는 말이지...' "맞아요. 도시를 몰살 시킬 정도의 능력자를 당신이 감당할 수 있다고 보여지진 않는데요?" "그렇다고 가만 있거나 살기 위하여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브랜까지 끼어 들었다. "여기서 우리가 그를 막지 못한다면 그는 계속 파멸을 일삼겠죠.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그를 막아야 해요." 그가 결연한 어조로 말한 뒤 입을 다물자 우리는 그것을 신호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을 달려, 우리는 몰살 당한 도시 하나를 더 지나쳤고 몇개의 마을을 더 지난 다음 식량이 1/3 정도 줄어들었을 즈음 산맥의 끝에 있는 산에 도착했다. 비록 내가 살던 곳에 비하여 높거나 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숲이 울창했고 골짜기는 깊어 보여 누가 숨어 살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이제 찾는 일만 남았나요?" 브랜과 내가 산을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 스와카는 그 자리에 앉더니 눈을 감고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뭘 하는 걸까요?" 의아한 눈으로 브랜이 스와카를 바라보자 반담이 스와카 대신 설명해 주었다. "마나가 뭉친 곳을 찾는 중..." "마나?" 더욱 어리둥절한 모습을 하던 브랜은 순간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나휴 카페티안의 집을 찾는 군요. 아무래도 마법사이다 보니 자신의 집 안이나 또는 바깥쪽에 마법 결계를 하나쯤은 만들어놨을 테니까요. 그 흔적을 찾는 거겠죠?" 반담은 브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슬렁 어슬렁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나뭇가지들을 줍기 시작했다. "아, 시간이 좀 걸리나봐요." 브랜이 그걸 보고 나와 애쉬를 돌아보며 말했고 우리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야영할 준비를 했다. 반담이 스와카 근처에 모닥불을 피우고 내가 물을 끓여 차 한잔을 돌릴때 까지도 스와카는 양반 다리를 하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은 상태로 계속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죠..." 브랜이 따뜻한 찻잔을 손에 감싸쥐며 모닥불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스와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브랜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쑥스러운 미소를 잠시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말고도 전에 전 왕궁 수석 마법사 카페티안경을 찾으러 간 사람들이 있다고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도..." 그를 보고있던 이들은 그의 말이 맞다는 표시로 모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브랜은 그걸 보는 것인지 잠시 뜸을 들인 다음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별 다른 일이 없었잖아요. 목숨을 위협 당할 정도의 일은.... 그렇다면 저 산에 우리의 목숨을 위협할 어떤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겠죠?" 반담은 그런 그를 힐끗 보더니 대수롭지도 않다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뻔한 일인데..." 빨강 머리도 놀랍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몰랐었어?" 브랜은 얼굴이 벌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에엣, 난 그냥..." 참 순진한 녀석이다. 빨강 머리도 그렇게 생각한 듯 부드럽게 미소지은 얼굴로 손을 올려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브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을거야... 내가 지켜줄게." "으응..." 브랜도 고개를 푹 숙인채로 작게나마 끄덕였다. 그런데 잠시 후, 우리가 차를 다 마시고 나는 저녁을 준비 하면서 스와카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와카가 헬쓱해진 얼굴로 눈을 뜨면서 우리를 돌아봤다. "이거 상당히 어렵겠는데요?"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6화 알베르트 산 (4) "이거 상당히 어렵겠는데요?" "무슨 일인데요?" 빨강 머리가 잔뜩 긴장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스와카가 평소와 달리 얼굴이 굳은채 알베르트산을 침중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 전체에 걸쳐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물리적 방어 결계는 아니고 어떤 정신적인 혼란을 주는 저주 계열의 결계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군요. 다행히도 마법 무효화 결계는 아닌듯 합니다만..." 그러자 반담도 입을 열었다. "네가 풀수 없는 결계인가보군?" "맞아, 나보다 더 높은 서클의 결계야. 카페티안경이 쳐 놓은 거겠지... 하지만 정말 대단해. 산 하나 통채로 결계를 쳐놨으니..." "보통 결계가 아니겠죠. 게다가 저 결계 안에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으니..." 브랜도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맞아. 그리고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들어가야 해. 그를 찾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목숨이 위협 받을거라는 건 처음 부터 각오한 일이니까." 빨강 머리가 브랜의 말을 이어받자 모든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문젠..." 다시 들려오는 스와카의 목소리에 우리는 모두 스와카를 주목했다. "그의 집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산 전체를 결계가 뒤덥고 있어서 구분이 되질 않는군요. 애를 써봤지만 제 능력으로는 힘들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저 안으로 들어가서 정말로 헤매고 다녀야 한다는 거군요." 브랜이 침중한 눈으로 다시 산을 바라보자 스와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방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스와카는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스와카를 따라 나를 바라보았기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에? 왜 절 바라보세요?" "아시리안님께선 정령을 다룰수 있지 않습니까?" 스와카가 그렇게 말하자 브랜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하고 내리쳤다. "그렇군요. 정령은 아무래도 마법으로 이루어진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겠죠. 특히 저런 정신적인 결계는..." "맞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아시리안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겠군요." 스와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맺었다. "뭐, 그거야..." 내가 허락하는 어조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스와카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가로 다가왔다. "자, 그럼 오늘은 푹 쉬시길 바랍니다. 내일부터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정이 될 테니까요."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일어난 우리들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입 안이 껄끄러웠지만 스와카의 독려로 억지로 자신들에게 배당된 음식들을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말들은 그냥 내버려 두고 짐들은 각자 자신들의 등에 짊어 진 채로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스와카가 간단한 방어 마법을 걸어 주었다. "자, 이제 출발 할까요?" 스와카가 자신의 지팡이를 단단히 잡고 앞장 서서 산으로 올라갔고 그 뒤를 우리가 따랐다. 얼마쯤 올라가자 그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는 결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 모두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자 나는 그의 눈치를 알아채고는 실프를 불러냈다. "실프!!" 그러자 허공에서 온 몸이 새파랗고 투명한 소녀가 스르르 몸을 들어내었다. "이 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줘." 실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허공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자, 그럼 우리도 올라 갈까요?" 우리는 다시 대형을 짰다. 빨강 머리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나, 브랜, 스와카가 주르르 섰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반담이 떡 하니 버티고 서서 올라왔다. 전형적인 안전 대형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천천히 올라갔는데 브랜이 중얼거렸다. "조용하군요. 너무 적막해요." "결계 안이라서 그럴 겁니다. 우리가 지금 안전하지 못한 지역에 와 있다는 증거지요." 스와카의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옳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 되었다. 한참이나 긴장하고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없는 산을 오르느라 지쳐버린 우리가 기슭에 자그마한 공터를 발견하고서는 거기서 잠깐 쉬려고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미처 짐들을 내려 놓기도 전에 물체가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담과 빨강머리 그리고 내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스와카와 브랜을 가운데 두고 둘러쌌다. "젠장, 좀 쉬려고 하니까..." "치사한 놈들이군." "여기서 쉬려고 할 거라는 걸 안 걸까요?" "우연일 수도 있지요."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고 있을때 소리가 좀더 분명하게, 그리고 점점 더 많은 물체들의 소리까지 합세하더니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기랄!!" 그 모습을 본 빨강 머리가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았다. 나타난 녀석들은 모두 다섯 마리의 트롤들. 그런데 뭘 잘못 먹었는지 몰라도 덩치들이 보통 트롤의 두배는 더 커보였고, 게다가 눈동자 흰자 할 것 없이 눈들이 온통 시뻘건 상태에 입가에는 더럽게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 대한 살의를 노골적으로, 짙게 내보이고 있었다. "쿠오오오~~!!" 한 녀석이 제일 먼저 손에 쥐고있던 거대한 몽둥이를 치켜 들며 달려들자 그것을 신호로 다른 녀석들도 같이 달려들었다. 스와카는 재빨리 브랜과 나를 감싸는 방어막을 펼치려 했지만 나는 그 방어막을 빠져나가 빨강 머리와 반담 처럼 한 녀석을 맞서갔다. 그러자 빨강 머리가 그걸 봤는지 크게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이번엔 아무도 널 돕지 못해. 빨리 방어막 안으로 들어가지... 컥!!" 그는 미처 말을 다 맺기도 전에 트롤이 내리친 방망이를 검으로 정면으로 맞대다가 힘이 딸렸는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남 참견하지 말고 당신 일이나 잘해요." 나는 녀석을 보지 않은 채 트롤을 신중한 눈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그리고 가슴 앞으로 들어올린 검에다 조심스레 나의 마나를 불어 넣었다. "넌 오늘 잘못 걸린거야." 트롤 녀석은 항상 그래왔다는 것 처럼 커다란 몽둥이를 하늘 높이 쳐들었다가 내 머리 바로 위로 내리쳤다. "흥, 이 멍청아 그걸 누가 맞냐?" 나는 재빨리 두 걸음 스탭을 밟듯이 통통 튀며 옆으로 물러나 빈 틈을 보이는 녀석의 옆구리에 검을 재빨리 찔러 넣었다. 그렇게 해서 그대로 허리를 잘라버릴 생각 이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다른 트롤들과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던 녀석은 재생력 조차 여타 다른 트롤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라 내 칼이 옆구리를 찌르자마자 상처가 아물어 오히려 내 검을 딱 물어버린 상태가 되어 버렸다. "잇, 잇 이게 왜 안빠져?" 당황한 나는 칼을 빼내려고 했지만 칼이 살과 딱 붙어버린 것 처럼 빠지질 않았다. "마나를 집어 넣어서 빼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브랜의 외침에 그제야 나는 내가 당황하느라 검에 마나를 불어 넣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이런!!" 내가 다시 손잡이를 잡고 마나를 불어 넣으려 했지만 트롤이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은지 그 틈을 주지 않고 옆구리에 붙어 있는 나를 향해 통나무 굵기 만한 팔뚝을 내리쳤다. "위험해요!!" 브랜의 외침을 들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칼에서 손을 떼어내고 몸을 굴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야 이자식아!! 그 커다란 팔로 날 내려치면 어쩌냐?" 열 받은 내가 녀석에게 팔을 휘둘러 보이며 외쳤지만 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칼을 옆구리에 꽂은 채로 다시 몽둥이를 내리쳤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미리 택견이라도 배워 두는건데... 난 권법은 모른단 말야!!" 혼자서 잘도 나불대며 나는 재빨리 카사와 노움을 불러 내었다. 노움은 나타나자마자 트롤이 버티고 있는 지반을 약하게 하여 밑으로 쑥 들어가게 만들었고, 그러자 당황한 트롤이 어쩔 줄 모르며 두리번 두리번 대자 그때를 노치지 않은 카사가 그의 얼굴 정면으로 몸통 박치기를 했다. "크아아아~~!!" 그래도 불에 그을리면 아픈지 - 아니 그럼 왜 검에 찔렸을 땐 가만 있었지? - 녀석이 자기의 얼굴에 붙은 불을 두 손으로 두드리며 꺼 댈때 나는 한번도 하지 못했던 일을 시도했다. "타앗!!" 녀석이 앞을 보지 못한채 괴성을 지르는 사이 내 손에 직접 마나를 불어 넣어 검 없이도 불쑥 솟아나온 검 모양의 마나를 유지한 채 녀석에게 직접 날렸던 것이다.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써먹어보지 못했던 수법은 비록 형태가 잔뜩 일그러지고 처음에 날렸던 마나의 절반은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녀석의 머리에 날아가 제대로 작렬했다. 콰앙!! 그리고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것 처럼 녀석의 두 팔과 머리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하아, 된 건가?" 트롤은 머리를 날려버리거나 몸을 두 동강 내야만 쓰러트릴 수 있다고 배웠었다. 하지만 머리가 반이 날아가버렸으니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내 생각처럼 녀석은 천천히 뒤로 넘어가버렸다. "젠장, 앞으로 고꾸라져서 얼굴이라도 감춰줄 것이지... 죽어가면서까지 불쾌한 녀석이로군." 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면서 손으로 더듬 더듬 트롤 옆구리에 있는 검을 뽑으려고 손잡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때!! "위험해요!!" 브랜의 또 다른 외침과 함께 내 머리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놀란 나는 다시 땅 위를 굴렀고 그 찰나의 순간 내가 있던 곳은 큰 몽둥이가 땅 위에 처박히면서 쾅 소리를 냈다. 내가 몸을 간신히 올렸을 때 트롤이 자신의 범위에서 벗어난 나를 노려보며 다시 방망이를 치켜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날아온 얼음 덩어리가 녀석의 얼굴에 정확히 박혀 버렸다. 스와카였다. 그러나 녀석은 잠시 휘청일 뿐 곧 얼굴에 달라붙은 얼음덩어리를 깨고는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 나는 다시 손에 마나를 집중시킨 상태로 녀석에게 쇠도해 들어가 그의 배에다 대고 한방 먹였다. 콰앙!! 녀석의 배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면서 뒤로 피와 살점이 튀었다. "카사!!" 카사가 나의 부름에 응답하여 녀석의 배에 생긴 구멍에 그대로 작렬했고 다시 한번의 폭발음과 살 타는 냄새가 나면서 녀석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쿠웅!! "이걸로 두 놈!!" 나는 다른 녀석이 덤벼들까 두려워 주의하면서 재빨리 녀석의 옆에 누워있는 트롤에게 달려가 검을 빼들고 자세를 취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반담과 빨강 머리가 각각 한놈씩 해치우고 나머지 한 놈을 맞아 협공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휴우, 난 이제 쉬어도 되는 것 같군." 어느새 내 이마에 형성된 땀을 닦으면서 스와카와 브랜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커억!" 외마디 비명에 고개를 돌려보니 반담과 빨강 머리가 각각 녀석의 목과 배에 검을 찔러넣고 있었는데 그런 두 사람의 검에는 각각 하얗고 불그스름한 검기가 덮혀 있었다. "헤에, 나 말고도 붉은 검기를 가진 사람은 처음 보는걸?" 내가 신기하게 생각할 때 두 사람은 나처럼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검기를 유지하면서 옆으로 검을 휘둘렀다. 트롤은 목과 허리가 양분되면서 천천히 땅으로 허물어졌다. "이제 끝난 것 같군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빨강 머리의 말에 반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들도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 트롤들은 보통 트롤들과는 다르군요. 결계의 영향일까요?" 브랜이 땅에 쓰러져있는 트롤들을 힐끔 바라보며 묻자 스와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산에 걸려있는 결계는 몬스터들에게 사람에 대한 살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군요. 그러면서 몬스터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하아,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괴물들을 계속 만나게 될 거란 말이군요?" 빨강머리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자 스와카가 굳은 얼굴로 긍정했다. "그렇게 되겠죠."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6화 알베르트 산 (5) "허억, 허억.... 이건, 허억, 제... 생각인데요... 허억..." 브랜이 두 손으로 검을 마주 잡은 상태로 앞에 서 있는 고블린을 노려보며 어깨가 들썩 거릴 정도로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허억, 하아... 이 곳에 들어온, 허억, 사람들은.... 모두, 지쳐서 허억, 죽은게... 후우... 아닐까요?" "네 말에는 심히 동감하는 바이지만, 힘들면 말하지 마." 브랜의 옆에 있던 빨강 머리가 턱에 흘러내린 땀방울을 닥으면서 대꾸했다. 빨강 머리는 비록 브랜처럼 말을 더듬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어깨도 크게 들썩이고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젠장, 끝도 없이 몰려 드는군..." 반담도 인상을 팍 찡그리며 중얼 거렸다. 정말 말 그대로 끝도 없이 몰려 들었다. 맨 처음 이 산을 들어와서 트롤을 만나고 부터는 몬스터 녀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줄줄이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야 나랑 반담, 그리고 빨강 머리가 나서서 처리하고 다급한 경우에는 스와카가 마법을 날렸었지만, 너무 녀석들이 많이 몰려오다보니 지쳐버린 우리를 쉬게 한답시고 스와카가 마법을 좀 많이 난사해 버렸다. 결국 거의 반나절이 넘어버린 지금 이 시간 스와카는 우리 뒤쪽에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지팡이로 지탱하여 겨우 겨우 서 있는 실정 이었고 그 동안 스와카의 바리어 안에서 안절부절 하고만 있던 브랜까지 두 손에 검을 쥐게 되었다. 빨강 머리는 그러한 브랜이 심히 못미더웠는지 그의 곁에서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여 스와카는 내가 담당하였고 반담은 맨 앞에서 결사적으로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하하하, 아시리안님... 아까부터 실프가 위에서 맴돌고 있는데... 가엽군요." 스와카가 힘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스와카의 말 대로 실프는 아까부터 나에게로 돌아와서 자신이 발견한 걸 알려주려 했지만, 우리가 바쁘다보니 차마 말을 건네지는 못하고 내 머리 위에서 빙빙 돌다가 내가 위험할 때마다 바람을 날려주곤 했다. "젠장, 우리가 앞으로 거의 전진하지도 못하는데, 으악 카사!! 언제 실프의 안내를 받아요?" "하하하, 그건 그렇군요..." "으악, 도저히 못 참아. 모두 엎드려!!" 나는 결국 너무 지쳐 지탱할 힘이 없자 다시 나에게 달려든 고블린을 차서 넘어뜨리면서 나머지 일행에게 외쳤다. 그러자 그 즉시 반담과 빨강 머리가 브랜의 머리를 숙여 누르면서 자신들도 엎드렸다. "아이스 미사일!!" 나는 양 손 가득 마나를 주입하고는 주위로 흩뿌렸다. 그러자 내 주위에서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형성된 수십개의 얼음 화살덩어리가 촤악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우리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고블린들에게로 날아갔다. "쿠워어어어~~!!" "크와앙~~!!" "캬우~~!!" 나는 고블린도 각자 다른 비명을 지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는 기쁨 조차 누리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나의 아이스 미사일을 맞은 녀석들은 온 몸이 얼음덩어리로 덮여 버렸고 그러자 반담과 빨강 머리가 가볍게 그 얼음 덩어리들을 부셔 버렸다. "에구,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군..." 나는 더 이상 우리에게 덤벼드는 고블린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하늘에 동동 떠 있던 실프까지 내 옆으로 사뿐히 내려와 서 있었다. 브랜도 차마 서 있을 수 없겠던지 엉금 엉금 기다시피하여 내 옆으로 와 축 늘어져 버렸다. "우... 죽는 줄 알았어요..." 빨강 머리와 반담은 주위를 더 둘러 보고는 더 이상 몬스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검을 집어넣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뒤에 털썩 주저앉아있던 스와카가 힘 없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마법을 쓸 줄 아셨어요?" "아아, 약간이요." 그러자 뻗어 있던 브랜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안 사용하셨어요?" "뭐, 일부러 숨기려던건 아니구요. 마법을 쓰면 금방 지치는데다 나 말고도 마법사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내가 일부러 나서서 마법을 쓸 필요는 없었잖아요."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렇군요." 스와카와 브랜은 이해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잠시나마 쉴 수 있겠군. 어쨌든 대단하군요, 아시리안님. 역시 공작께서 일행에 합류시킬 만 하다고나 할까요?" 빨강 머리가 브랜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을 건냈다. "그거 참 알아주셔서 감사하군요." '이제와서 뭘...' 나는 날이 선 어조로 그에게 비꼬았다. 그러자 예전 같으면 발끈 화를 낼 녀석이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는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내려 땅에 거의 얼굴을 쳐박고 있다시피 한 브랜에게 말을 건냈다. "괜찮겠어?" "아아, 죽을 만큼 힘들지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브랜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아..." 그들의 모습을 힐끗 보던 나는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서 나무 밑으로 가 둥치에 등을 기대고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내 옆에서 동동 떠 있던 실프가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저어...] "아, 미안... 그래 찾았어?" 내가 고개만 돌려 실프를 바라보며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실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기서 더 올라가면 가파른 절벽이 나오는데, 그 절벽 위에 넓은 공터가 있어요.] "그럼 그 공터에?" 내가 눈을 빛내며 묻자 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집이 다 부서져 있었는 걸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거면 충분해. 그럼 실프, 좀 쉴테니까 망좀 봐 주지 않겠어?" 그러자 실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에서 스르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 반담이 중얼거렸다. "정령이란 정말 편하군..." "그래봤자 네 녀석은 죽었다 깨나도 정령을 다루지 못할껄? 어떤 정령이 너랑 친하고 싶겠어?" 약간 기운을 차렸는지 스와카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반담이 그를 쓰윽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입 놀리는 걸 보니 겨우 기운을 차린 것 같군. 마법사는 체력이 약해서 안 좋다니까..." 스와카는 그 말에 울컥 했다. "뭐, 뭣? 야, 내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아? 이게 다 내 덕이라구." "하지만 지금은 짐짝밖엔 안 돼지." "내가 매일 마법을 연구하느라 쳐박혀 있어서 그렇지 너 처럼 맨날 싸돌다 다녔으면..." 그러나 반담은 그의 말을 싹뚝 잘라 버렸다. "3년 전부터 그렇게 말했지, 아마? 레파토리 좀 바꿀 수 없냐?" "으윽..." 스와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입만 벌렸다가 닫으면서 씨근대더니 혼자 중얼 중얼 거렸다. "젠장, 나날이 말빨이 늘어난다니까.. 첨에는 나한테 맨날 깨지던게..." 그 말에 나머지 일행이 킥킥 거리고 웃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뱃속에서 시계가 울렸다. 꼬르르륵~~~!! 브랜이었다. 그는 자신에게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리자 빨개진 얼굴을 다시 땅에다 처박았다. "아하하, 그러고 보니 점심 식사때가 훨씬 지났군요." 스와카는 브랜을 구원해주려는 듯 과장되게 웃으며 비실 비실 일어났다. 하지만 그 모습이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아서 내가 말렸다. "됐어요. 제가 할테니 그냥 계세요." 하지만 나도 힘든건 마찬가지였으므로 나는 직접 일어나기 보다는 정령들을 모조리 불러냈다. "자, 노움 넌 가서 나뭇가지좀 가져다 줘. 운디네, 여기 물 좀 넣어주고, 실프, 미안하지만 이것 좀 썰어 주겠어? 카사, 넌 노움이 나뭇가지 가져 오면 불을 피워주길 바래." 그리고 냄새에 이끌려 몬스터들이 다가오는 걸 대비하여 실프를 몇명 더 불러내어 우리 주위에 바람의 장벽을 쳤다. 정령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내 지시에 의하여 모닥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자 그 모습에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던 빨강 머리가 한 마디 했다. "부럽군..."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6화 알베르트 산 (6) "자, 그럼 출발해 볼까요?" 늦은 점심을 먹고 한동안 휴식을 취하던 우리는 스와카의 말과 함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아시리안님, 셋을 셈과 동시에 저희 주위에 쳐 놓았던 실프들을 불러들여 주세요." 스와카가 긴장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면서 하는 말에 나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리고 그와 함께 반담과 브랜, 빨강 머리는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검을 꽉 부여 잡으며 실프들이 형성하고 있는 결계 밖에서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는 여러 종류의 몬스터들을 노려보았다. "젠장, 액스 비크에다가 브로라니... 평소에 보기 힘든 희귀종이 다 모여 있군..." 반담이 낮게 내뱉았다. 액스 비크는 척 보면 마치 타조처럼 생겼다. 그러나 타조가 넓은 초원 지대에 산다는 것에 비하여 이녀석은 숲속 깊은 곳에서 살고 있다. 이 녀석의 부리는 마치 도끼처럼 생겼는데 실제 철로 만들어진 도끼 보다도 더욱 더 단단하다. 게다가 발에 달려있는 발톱도 부리만큼 단단한데다 보통 타조보다도 더욱 더 재빠르고 점프력 또한 어마어마 하다. 하지만 와이번 보다는 약하여 사람들이 녀석의 부리와 발톱을 구하기 위해 눈에 불을켜고 잡아들여 지금은 보기 힘든 몬스터이기도 하다. 브로는 양 머리를 하고 있는 인간형 몬스터이다. 보통 미노타우르스와 같은 종류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미노타우르스가 지능이 뛰어나고 말도 하는 한편,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근육질의 전사와 똑같은 모습에 도끼를 들고 휘두르는데 비하여 이 녀석은 온 몸이 흰 털로 덥혀있어 마치 백곰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팔과 다리가 확실히 사람처럼 길다. 그리고 녀석은 양의 머리를 가진 것 답지 않게 송곳니가 여러 육식 동물처럼 길고 뾰족한데다가 검고 강력한 긴 손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지능이 낮은거에 비하여 본능적으로 3 서클의 마법을 막을 수 있는 실드를 칠 수 있는데다 미노타우르스처럼 힘도 강하고 스피드도 있어 처치하기가 힘든 몬스터들 중의 하나였다. 이런 녀석들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여기에다가 이번에는 오크와 놈 녀석들 까지 끼어있어 우리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확실히 점심을 먹고 잠시 쉰다고 꼼지락 대다가 시간을 너무 끌어 녀석들이 몰려든 것 같았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주위를 환기 시킨 뒤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러자 우리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실프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 올랐고 스와카를 제외한 우리들은 재빨리 땅에 엎드렸다. "브람 브레이저!!" 스와카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그의 주위에 돌던 마나들이 급격히 응축되어 수십개의 푸른 색을 띈 에너지 구로 바뀌면서 사방으로 날아갔다. "자, 지금입니다!!" 스와카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벌떡 일어서서 한쪽 방향으로 뛰어 들었다. 맨 앞에서는 반담과 빨강 머리가 스와카의 마력 구에 맞아 신음을 흘리는 녀석들을 처리하며 길을 냈고 그 뒤로 나와 스와카, 브랜이 뛰어갔다. 그러나 녀석들도 우리를 곱게 보내주고 싶지는 않은 듯 우리가 녀석들의 포위망을 뚫고 얼마 달리지 않아서 우렁찬 괴성을 지르며 쫓아왔다. "쫓아 와요!!" 열심히 달리면서도 뒤를 힐끗 본 브랜이 다급하게 외치자 나와 스와카가 제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디그!!" 스와카의 외침에 우리 뒤를 쫓아오던 몬스터들이 밟고 있던 땅들이 갑자기 움푹 움푹 패이기 시작했고 그에따라 몬스터들은 넘어지고 자빠지고 뒤엉켜 구르기 시작했다. "자, 빨리..."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채 보지도 않은 채 스와카의 팔을 잡고 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에요?" 맨 앞에서 달리고 있던 빨강 머리가 나에게 외쳤다. "오른쪽, 오른쪽으로 달려요!!" 나는 허공에서 실프가 손짓하는 대로 외쳤고 우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꺽어 계속 달렸다. "젠장, 또 오는군요." 스와카가 나의 손을 살짝 뿌리치고는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우리에게 맹렬히 달려드는 녀석들을 지그시 노려 보더니 외쳤다. "Slip(미끄러져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녀석들은 마치 바나나껍질이나 얼음을 밟은 마냥 주르르 미끄러져 여기저기 널려있는 나무 둥치나 바위에 부딧쳤다. "자, 어서..." 스와카와 나는 또 열심히 달려서 앞서 가고 있는 일행들의 뒤를 따랐다. 골짜기를 지나, 졸졸 흐르는 시내를 건너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녀석들을 따돌렸는지 따라오는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헉, 헉... 잠깐만요... 조금만, 헉, 헉, 쉬어가면.... 안될까요?" 제일 먼저 브랜이 지쳐서 점점 속도가 느려지더니 결국 더 이상 뛰지 못하겠는지 제안했다. 그러자 제일 먼저 빨강 머리가 멈춰 서더니 브랜을 부축했고 반담과 뒤를 따라오던 스와카와 나도 멈춰섰다. 반담은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살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깐 쉬도록 하지..." 그러자 스와카가 하늘을 한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두워지는군요. 숲 속은 해가 빨리 져버리니 쉬기 보다는 차라리 오늘 밤 야영할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브랜은 절망적인 얼굴로 스와카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반담이 입을 열었다. "나 혼자 찾아보지. 나머지는 여기서 쉬고 있는게 났겠어." 그리고는 곧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들어가려했다. 그러자 빨강 머리가 브랜을 한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같이 가도록 하죠. 혼자보다는 둘이 찾는게 훨씬 나을 테니까." 그래서 그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사이좋게 숲 속을 사라졌고 나머지 셋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 정말... 목숨을 건 술래잡기를 하는 기분이에요." 내가 한숨을 쉬는 어조로 투덜거리자 스와카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술래가 무지 많긴 하지만요." "그러게요... 왠 녀석들이 그렇게 많은지... 온 세상의 몬스터들을 다 여기다 모아놨나..."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젓다가 왠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브랜에게 시선이 갔다. "브랜님? 왜 그러세요? 많이 힘든가 보죠?" 그러자 그는 힘 없이 작게 소근거리듯 말했다. "아뇨..." 그의 목소리에 너무 힘이 없자 스와카까지 돌아보았다. "브랜님, 정 힘드시다면 제가 회복 마법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아니예요... 그런게 아니라..." 그는 고개를 살짝 들었지만 우울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꼭 제가 혹 덩어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항상 제가 제일 먼저 지치잖아요... 그래서..." 그는 정말 심각해 보였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내가 있어서 더욱 더 우울해진 것 같았다. 여자인 나 보다도 더 능력이 없는 것 처럼 생각될 테니까... '남자들이란...' 나는 브랜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 속으로 혀만 끌끌 차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스와카는 가만 있을 수가 없었는지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입을 열었다. "흐음... 제 생각에는 당신이 이 일에 끼어든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뭔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 일에 우리같은 무력만 필요 하다면 공작 각하께서 당신을 합류시키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러자 브랜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저... 그게... 제가 억지로 청한 거였어요." 스와카가 껄껄 웃었다. "그래서 그렇게 의기소침 하신 겁니까? 하지만 정말 당신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만 각하께선 절대로 넣지 않았을걸요? 제가 알기로 그 분은 국왕 폐하 앞에서도 자신이 아니다 하는 일은 딱 잘라 거절하신다던데요?" "그건 그렇지만..." "거 보세요. 그리고 당신도 할 일이 없어서 이 일에 끼어든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목숨을 걸어야 될 정도로 위험한 일이란 걸 알고 지원한 걸텐데요?" "그거야 그랬지만..." "그러면 됐잖습니까. 당신은 나중에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지금은 그냥 무사히 계셔 주시면 되는 거구요." "그, 그렇겠죠?" 브랜의 얼굴이 약간 펴지면서 고개가 올라왔다. 그러자 스와카는 더욱 더 진한 웃음을 띄우며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요. 물론이죠. 지금은 아무 생각 마시고 살아서 일을 완수할 생각만 하십시요." 이젠 완전히 풀린 어조로 브랜이 고개를 끄덕 끄덕 했다. '마법사란 원래 다 저렇게 말발이 좋은건가?' 스와카가 씨익 웃는걸 보며 나는 예전에, 잠들기 전에 만났었던 스와카 만큼이나 말발이 좋았던 늙은 마법사를 생각했다. '흐음, 아마도 지금은 죽었을테지만... 한번 더 만나봤으면 좋겠군...'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을 뚫고 빨강 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습니다." 그 둘이 안내한 곳은 산의 한 면의 흙이 무너져 깍여 내려간 곳으로 붉은 흙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밑 부분이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마치 커다란 지붕 밑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었다. 비가 내리면 흙사태가 일어날까 두렵기도 했지만 다행히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은데다 앞 부분이 예전에 산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커다란 나무가 뿌리채 뽑혀 뒹굴고 여기저기 커다란 바위들이 굴러다니고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괜찮은 곳이군요. 여기에 약간의 결계만 치면 오늘 밤을 보내기에는 아주 좋겠는데요?" 스와카는 그렇게 말 하고는 작은 공터에 우리들을 들여 보내고 자신은 바깥쪽에 남아서 나뭇가지와 돌들을 주워다가 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담이 남아서 그를 호위하고 있었고 나머지 세명은 들어가 안쪽의 자그마한 공터를 하룻밤 머물기 좋게 돌들을 골라내고 모닥불 피울 자리를 마련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장작이야 그 근처에 통채로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몇그루 있었으므로 걱정할 건 없었다. 잠시 후 공터 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우리 모두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차를 한잔씩 마시고 있었다. "하아, 좋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빨강 머리가 따끈한 차가 들어간 컵을 양 손으로 움켜쥔 채 기분 좋은 숨을 내뱉았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까?"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묻자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모르죠. 내일 얼만큼 몰려올지 모르니까..." "하지만, 적어도 절반은 왔겠죠?" 브랜이 당혹과 다급함이 섞인 어조로 묻자 스와카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초초해 하실 것 없어요. 양식은 넉넉하거든요." "에휴, 내일도 오늘처럼 지낸다면 전 며칠 못가 탈진하고 말겁니다." "어쩝니까, 우린 산의 중간도 못 올라 왔는데..." 브랜은 고개를 설래설래 젓다가 스와카의 말에 눈이 뚱그래졌다. "예? 절반도 못 올라왔다고요? 하지만 하루종일 뛰었는데..." "아니죠... 우리가 하루종일 움직였다고 해도 피하느라 이리저리 뛰었을 뿐 산을 오른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요. 이대로라면 아마 내일 하루 더 움직여야 할걸요?" 그러자 브랜과 빨강 머리는 질린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6화 알베르트 산 (7) 다음날 빨강 머리 녀석이 그래도 머리가 있다고 한 의견을 내놓았다. "날아서 가면 어떨까요?" 스와카와 반담은 서로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별로 찬성하는 표정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빨강 머리는 개의치 않고 꿏꿏하게 계속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시리안님께선 정령들을 다루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스와카씨와 아시리안님 두 분이 힘을 합치신다면 저희 5명이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 어렵진 않을텐데요..." 스와카가 별 탐탁치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물론 애쉬님의 의견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지상에서도 몬스터가 있었는데 공중이라고 몬스터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공중이라면 몬스터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저와 아시리안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지상보다 더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빨강 머리는 스와카의 말에 별로 설득된 표정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지만 그만큼 속력을 내면 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시리안님 말씀에 의하면 카페티안경이 머문 곳으로 추측되는 곳도 절벽 위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어차피 그곳으로 올라가야 할텐데요. 스와카씨가 말씀하신 공중 전용(?) 몬스터가 있다면 그때도 위험한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애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꼭 절벽을 타고 올라가란 법도 없지 않습니까? 절벽 뒤쪽으로 해서 올라갈 수도 있는 일이구요..." 스와카의 반박을 중간에서 딱 자르며 빨강 머리가 강경하게 주장했다.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이 속력으로는 내일은 커녕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식량은 넉넉하고 이 일도 급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갑자기 그렇게 서두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건 시간이 촉박하고 말고를 떠나서 목숨을 걸고 며칠 있는 것 보다는 좀더 위험하더라도 한번 모험을 하는게 더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거야..." 스와카는 빨강 머리의 너무나 강경한 태도에 더이상 말은 못하고 한숨만 폭 쉬었다. 그러면서 내 쪽과 브랜쪽을 바라보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확실히 하늘을 날아가는 게 더 빠르고 편했기에 나나 브랜은 스와카의 애원 섞인 시선을 슬며시 외면해 버렸다. 그러자 스와카는 더욱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그러시다면..."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늘을 날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일행을 이끌고 하늘을 날아가는 건 실프들이 전담하기로 했다. 확실히 공중에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므로 마법을 쓸 수 있는 나나 스와카가 일행을 담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 만약 내가 정령들을 다룰 수 없었다면 빨강 머리도 강경하게 하늘을 날아가자고 하지는 못했을 일이었다. 나는 실프 3명을 불러냈다. 아름다운 세 명의 푸른색의 소녀들은 우리 일행을 바람으로 천천히 감싸더니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우와~~" 이런 경험은 처음인 듯 브랜이 놀라움과 약간은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바깥을 내려다 보았다. 숲을 덮고있는 나무들 위까지 올라오자 실프들은 본격적으로 속력을 내어 저 멀리 보이는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푸르름에 감싸인 숲에서 유난히 붉은 살을 드러내고 있는 높다란 절벽은 뚜렷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곳으로 채 절반도 날아가기 전에 실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들이 몰려와요.] 그리고 실프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반담도 입을 열었다. "몰려 오는군..." 반담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저 멀리 새까만 점들이 사이좋게 몰려오고 있었다. 스와카가 얼른 눈을 감고 중얼중얼 거리더니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가고일에 와이번들이 섞여 있군요." "몇마리입니까?" 빨강 머리가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요... 대충 봐서는 가고일이 약 30마리 정도? 거기에 와이번은 그래도 약간 적군요. 한 10마리 정도 쯤..." "쥬라기 공원이 아니라 몬스터 공원이군..."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들었는지 브랜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 "아뇨, 혼잣말이예요.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군요." 나의 의지에 따라 실프들은 더욱 더 속력을 내었고 나는 공중에서 쓸 만한 마법들을 머릿속에 하나 하나 떠올려 보았다. 스와카도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채 중얼중얼 대는 것이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다가왔어요!!" 실프들이 속력을 내었다 하나 비정상적으로 커버린 몬스터들의 속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던지 얼마 가지않아 몬스터와 우리 사이의 간격이 100m정도로 좁혀졌다. "그럼 시작합니다!!" 스와카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몬스터들을 노려 보았다. "아이스 스톰!!" 스와카가 앞으로 쭉 내뻗은 양 손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공기중으로 스르르 사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수많은 얼음조각들이 형성되어 스와카의 손짓에 따라 몬스터들을 향해 날아갔다. 피융, 피융~!! 그러나 녀석들은 그까짓 정도로는 끄떡 없다는 듯이 온 몸으로 날아오는 얼음 조각들을 맞부딧히며 기냥 날아왔다. "저 녀석들..." 그 모습에 빨강 머리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럼, 제 차례인가요? 버스트 프레아!!" 스와카의 마법으로는 속도를 약간 늦추기는 했지만 밑으로 떨어지는 몬스터가 없자 이번에는 내가 나섰다. 수십개의 불덩이들이 내 의지에 따라 주위에서 형성되더니 곧 몬스터들을 향해 날아갔다. 콰앙!! 쿠아앙~~!! 불덩어리들은 몬스터와 부딧히자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고 그와 함께 몬스터의 비명을 일으키며 녀석들을 그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부족한 듯 여전히 밑으로 떨어지는 놈들은 없었다. "젠장, 아직도..." "이건 어떠냐, 체인 라이트닝!!" 여러가닥의 전기 에너지가 지그재그로 녀석들에 날아들었다. "크아아아!!!" "쿠어어어~~!!" 그제야 전기 충격을 이기지 못한 녀석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겨우 몇몇 녀석들일 뿐이었다. "바리코(바람의 칼날)!!" "봄 디 윈드 (풍마 포열탄) !!" "디그 볼트!! - 체인 라이트닝과 비슷하지만 체인 라이트닝은 마법사로 부터 전기 에너지가 발산되는거에 비하여 디그 볼트는 적의 주위에서 직접 전기가 발생됨 - " "아이스 미사일!!" "브람 가슈 (폭풍탄)!!" 스와카가 내가 정신없이 마법을 써대는 사이 땅 위로 떨어지는 녀석들의 숫자는 점점 늘었고, 녀석들은 더 이상 우리들 가까이로 날아오지 못한 채 우리는 더욱 더 절벽 위로 날아갔다. "자, 조금만 더!!" 나는 절벽에 가까이 다가간 것을 알고는 실프들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절벽위에 내리자마자 반담과 빨강 머리가 앞을 가로막아 다음에 올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몬스터들은 우리가 절벽 위, 그것도 뻥 뚤린 공간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를 몇번 선회하더니 그냥 돌아가버렸다. "어떻게 된거지?" 의아해진 모두가 스와카를 돌아보았다. 그 동안 의문이 생기면 모두 스와카가 답변 해주었으므로 어느새 의문 하면 자연히 스와카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스와카는 마법을 써서 헬쓱해진 얼굴로 허허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카페티안경이 뭔가 조치를 취한게 아닐 까 생각하는데요..." 그러자 반담과 빨강 머리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집어 넣었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6화 알베르트 산 (8) 우리가 있는 곳은 앞은 까마득한 절벽이었고 뒤에는 누군가가 부셔버린 듯 폭싹 무너앉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이 바로 실프가 찾아낸, 예전 궁정 마법사이자 대 마법사 칭호를 받은 도냐휴 카페티안과 그의 애인 아니면 부인이라 추측되는 세라 시피르의 보금자리라 여겨지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집은 지붕이 폭싹 주저앉아 있었고 집을 형성하고 있던 벽들도 여기저기 무너지고 넘어지고 부서져, 제대로 벽의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건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뭐가 또 맘에 안들었는지 한번 크게 불을 질렀던 듯 (물론 금방 끈 듯 하기는 하지만...) 여기저기 불탄 자국과 그을은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하아, 이것 참..." 빨강 머리 녀석이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며 브랜을 바라 보았는데 브랜은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는지 골몰한 모습으로 그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어쩔건가?" 반담이 무뚝뚝하게 묻자 브랜이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우선은 찾아봐야겠죠.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것이라도 있을지 모르잖아요.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래도 좋지만..."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 보았다. 아직까지 헬쓱해진 얼굴로 배실 배실 웃는 스와카였다. "우선은 좀 쉬어야 할 것 같군요. 제가 좀 힘들거든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는 듯 반담은 서둘러 장작들을 구해왔고 빨강 머리와 브랜은 얼른 자리를 잡아 우리를 앉혔다. 뭐, 나야 별루 힘들지는 않았지만 녀석들이 다 알아서 한다는데 그 호의를 무참히 거절할 만큼 속이 좁지는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집터 근처에 있던 우물에서 물을 구해와 모닥불에 올려놓고 브랜이 식량이 담긴 배낭을 뒤져 차잎을 꺼냈다. "어찌 되었든, 목적지까지 무사히 온건가요?" 내가 사람들 뒤로 보이는 폐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묻자 브랜이 대꾸했다. "글쎄요... 물론 저 곳이 카페티안경의 집이였다는 게 증명 된다면야 제대로 왔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좀더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실프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이곳밖에 없다고 했는데요?" 그러자 스와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 마법사란 칭호를 받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다른 차원에 머물러 있을수도 있죠. 그리고 단지 이곳에는 그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을수도... 그렇다면 정령인 실프가 못 찾은것도 설명이 되지 않겠어요?" 우리 모두가 창백한 얼굴로 스와카를 바라보자 스와카는 재빨리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아하하,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만..." "기필코 카페티안경의 흔적을 찾아내야겠군." 빨강 머리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자 브랜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스와카와 나를 쉬게한다는 명목으로 차를 마시며 빈둥빈둥 대다가 정오를 넘겨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뒤 일어났다. 우선은 내가 집안(?)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잔해물들을 실프를 통해 옆으로 치워버리자 일행들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 물건들을 하나 하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흐음.... 확실히 여기가 이렇게 된 건 누군가의 마법에 의해서군요." 시커멓게 탄 마루바닥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던 스와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에 질세라 반담이 입을 열었다. "여기 핏자국이 있군..." 반담이 가르킨 곳은 스와카가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었는데 우리가 다가가자 먼지 투성이인 마루바닥을 쓸어 핏자국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손가락의 한 마디 정도였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의 기색을 알아차린 듯 반담이 고개를 저으면서 설명했다. "만약 사소한 일로 피를 흘린거라면 재빨리 치우지 이렇게 얼룩이 남을때까지 놔두지 않아. 그리고 이건 약간 떨어진 곳에서 튄거야. 방향을 보면.... 스와카가 있는 쪽이군." 반담은 단정짓듯 스와카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반담의 시선을 따라 스와카가 살펴보고 있는, 마루 바닥에 있는 검게 탄 자국을 바라보자 빨강 머리녀석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저기에서 사람을 살해하고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태웠다면? 아마도 범인은 집을 몽땅 태우려고 한 것일테지만... 내가 범인이라고 해도 시체와 그 주변을 먼저 태우려고 했을거야."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그 불을 껐군요. 마법에 의한 불이라면 비가 내렸다고 해도 쉽게 꺼지지는 않을테니까요." "아마도 살해당한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겠죠." "카페티안경 부부라면 가능하군요. 그들은 둘 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스와카와 브랜, 그리고 내가 한마디씩 하자 반담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뭐하러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을 찾아와서 죽였을까?" 그러자 또 각자 한마디씩 늘어놨다. "철천지 원수였나보죠." "음, 하지만 카페티안경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그럼 다른 사람인가?" "그럴지도..." "하지만, 마법사가 살았던건 확실하군요." 마지막의 스와카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보면 그게 확실히 증명 되는군." 반담이 뭔가를 찾았다는 듯한 말에 우리 모두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비록 검게 그을렸지만 집 안에서 유일하게 멀쩡하게 서 있는 방문을 하나 가르켰다. 스와카가 그곳에 다가가서 신중하게 살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 걸려 있군요." 브랜이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 "열수 없나요?" 그러자 스와카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어 문을 슬쩍 밀었다. 삐이걱~~ 오래 사용하지 않아 녹이 슬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문은 순순히 열렸다. "문을 봉인한 마법이 아니라 충격 방지용 마법이 걸린 거예요. 그러니 열릴수 밖에요... 하지만 그건 여기 침입한 사람들도 알고 있었나 보군요." 생글 생글 웃으며 말하던 스와카는 방 안을 들여다 보고는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그 방안은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자그마한 방 안의 한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책꽃이에 꽃혀 있었을 듯한 책들은 온통 방바닥에 어질러져 있었고 남향을 하고 있는 창문 앞에는 예전에는 책상이었을 나무 판자들이 조각조각 나 있었다. 게다가 한쪽 옷걸이에는 마법사 로브였을 듯한 옷이 검게 태워진채 겨우 겨우 매달려 있었다. "심하군요..." 그 모습에 스와카가 제일 먼저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같은 마법사이다보니 마법사 서재가 엉망이 된 것에 분노를 느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곳을 침입한 사람들은 이 집주인이 누구인지 나중에라도 밝혀지지 않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방 안을 둘러보던 반담이 말하자 방바닥에 쌓여있던 책들을 살피던 스와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여기 있던 귀중한 마법서나 이 집주인 글의 서명이 들어간 책들은 모두 가져간 듯 합니다. 여긴 쉽게 구할, 평범한 책들밖에 없군요." "게다가 마법사 로브를 태웠으니 그들의 의도는 더욱 더 명확해진 것 같군요." 브랜이 침중한 눈으로 검게 탄 옷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구부린 허리를 똑바로 펴며 스와카가 싱긋 웃었다. "그게 그들의 실수죠."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더욱 더 진한 미소를 띄우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법사 로브를 태웠다는 건 그 로브가 마법사의 신분을 가르쳐준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보통 마법사 로브는 마법사들 취향에 따라 색도 가지가지에 무늬도 가지가지죠. 그런데 마법사의 신분을 나타내는 거라면..." 브랜이 자신의 이마를 딱 쳤다. "왕실 마법사군요. 왕실 마법사의 로브에는 왕실 문장이 새겨져 있으니까요." 스와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일반 가문에 있는 마법사들은 로브를 자유롭게 입는거에 반해 왕실 마법사들은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왕실에서 지정한 로브밖에 입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이 산에 있을만한 왕실 마법사는 카페티안 경 뿐이고..." 빨강 머리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저 로브를 여기서 그냥 태웠을까요? 가지고 가거나 땅에 묻었더라면 더욱 더 들키지 않았을텐데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이번에는 브랜이 대답했다. "왕실 마법사의 로브는 각각의 마법사의 마나가 불어져 있다고 해요. 그러니 가져가봤자 누구의 로브라는 것이 금방 탄로나겠죠. 땅에 묻는다고 해도 로브가 마법에 걸려 있는한 썩는게 아니라서 불완전한 방법이구요." 스와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마법으로 태워버리는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겠죠. 하지만 침입자들이 채 다태우기도 전에 누군가 여길 왔던게 분명해요. 아마 세라 시피르양이었겠죠? 그렇지 않으면 이 집이 다 타기도 전에 침입자들이 떠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들은 소위 목적 - 아마도 카페티안경을 죽이는 거였겠지만.... - 을 달성했으니 자신들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냥 떠난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는 누가 카페티안경을 죽였느냐와 왜 죽였느냐는 문제가 남는군요. 세라 시피르양이 미쳐버린 이유는 카페티안경이 살해당해서라고 하면 맞을테니까요." 빨강 머리가 입을 열자 브랜도 수긍했다. "맞아. 세라 시피르양이 왜 그렇게 강력한지도 알겠군. 카페티안경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어줄 뭔가를 남겼고 그걸 사용했다고 보면 될테니까." "그럼, 이 산에다 결계를 쳐놓은 사람도 시피르란 여인이었단 말인가?" 묵묵히 일행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담이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보니 그렇네... 그녀가 쳐놓은 결계라고 하기에는... 글쎄요... 아무리 그녀가 대단해졌다고 해도 산 하나를 통채로 해놓는건 어렵지 않을까요?" 브랜이 동의를 구한다는 듯 스와카를 바라보자 스와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군요... 생각해보면 그녀가 이 산에다가 결계를 칠 이유가 없는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 곳을 침입한 사람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 쳐도 뭐하러 그랬나 싶군요. 그녀를 없애려 한거라면 결계까지 사용할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아니요, 그들이 결계를 칠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빨강 머리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카페티안경을 없앤 이유라면 아마도 그들이 하는 일에 그가 방해가 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카페티안경이 사라지기라도 한 다면 의심을 받을 족속들이었겠지요. 해서 아무도 카페티안경이 죽었다는 걸 모르게 하려고 했을수도 있지요. 뭐, 다른 이유가 있었든지 말입니다." 그러나 브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걸로는 설명이 부족해. 정 그렇다면 세라양을 죽이고 집을 아예 없애버릴 수도 있었잖아. 그런데 이들은 세라양은 그냥 두고 가버렸거든. 그렇다면 카페티안경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별 상관이 없다는 거잖아." "아, 그건 그렇군... 그렇다면 정말 세라양이?" "글쎄요... 하지만 확실한건, 이 산을 결계로 덮어버린 사람은 아마도 최소한 6서클 이상의 마법사일 거란 사실입니다." 일행 모두가 굳은 긴장감으로 인하여 말을 잃었다. "스와카? 당신 능력이라면 이 산의 결계를 깰 수 있나요?" 그러나 그 침묵이 싫은 듯, 브랜이 물었다. "예? 아, 글쎄요... 뭐, 깨려고 든다면 깰수야 있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하지 못할거 같은데요? 그런데 그건 왜요? 결계를 깨려구요?" "예,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이 산의 몬스터만 이상하게 변할 리 없을테고 그러면 사람들도 이 곳에 들어왔다가 죽지는 않겠죠." 그러자 빨강 머리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안돼!!" "왜?" "우선은 우리는 시간이 많은게 아니야. 비록 급하지는 않다고 해도 언제 깨트릴지 모르는 결계 때문에 계속 있을수는 없다고. 게다가 이 곳 결계를 없애 버리면 이 곳에 모여있던 몬스터들이 어떻게 되겠어? 모르긴 몰라도 산을 내려가는 녀석들이 분명히 있을텐데..." 스와카도 빨강 머리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이 곳은 결계 때문인지 몰라도 비정상적으로 몬스터들이 많이 모여있지요. 그런데 결계가 깨어지면 산에서 영역을 차지하지 못한 놈들은 분명히 밖으로 나가게 될겁니다. 그렇게 해서 민가로 내려가게 되면 피해가 클걸요? 당신이 결계를 없애고 싶으시다면 우선은 이 산에 있는 몬스터들의 수를 절반 이하로 없애버리고 하셔야 할겁니다." "그, 그런가요?" 브랜은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안된다는 시선을 강력하게 보내는 스와카와 빨강 머리의 표정에 밀려 고개를 푹 숙였다. "자, 그럼 결론이 났으면 그만 이곳을 나갑시다." 빨강 머리는 단호하게 말하며 브랜을 이끌고 집터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카페티안경이 만들어 놨을 결계 바깥선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몬스터들이었다. "역시나..." 그 모습에 브랜과 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는데 스와카나 반담, 그리고 빨강 머리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어, 애쉬?" "아아, 어느정도... 솔직히 여기 올때 우리가 겪은 정도는 왕실 기사단 10명에 어느정도 운만 있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정도야. 그 동안 여기 보낸 사람들의 실력들도 그보다 낮을 수 없다고 할 정도이고.. 그런데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게 계속 맘에 걸렸었거든." "그렇다면?" 브랜이 불안한 시선으로 빨강 머리를 올려다보자 그녀석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올 때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다고 쳐도, 나갈때 저 떼들을 뚫고 나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지.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있을수도 없었을 테고..."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6화 알베르트 산 (9) "어떻게 하지?" 브랜의 중얼거리듯한 질문에 우리는 모두 스와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스와카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도리질을 쳤다. "하, 저라고 뭔 뾰족한 수가..." 그래서 내가 한마디 해줬다. "공간 이동밖에 수가 없겠군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스와카가 둥그래진 눈으로 반박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여기서 저 녀석들을 뚫고 뛰어가는거나, 날아가는 것 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지 않아요?" 그러나 스와카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여기서는 불가능 하다니까요. 이 곳은 2중으로 결계가 쳐진 곳이예요. 알베르트 산 전체의 결계와 이곳만 형성되어있는 결계.... 이 두 결계가 각각, 적어도 6서클의 결계란 말입니다. 결계 하나만 있어도 저 혼자 뚫고 공간이동 하는게 힘들어요." "알아요. 당신 혼자서는 힘들다는거... 하지만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 마법진을 발동 시킨다면요? 그리고 범위를 단지 알베르트산을 약간 벗어난 지점으로 한다면?" "으음...." 스와카는 내 말에 얼른 머리를 굴리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보통 공간이동 마법을 구현할때 좌표를 정확히 지정하지 않는 한 허공에 지정하는게 정석이죠. 그리고 그럴 땐 강이나 연못 처럼 물이 많은 곳 위에 지정해서 위험을 감수하거 나 마력을 약간 남겨 이동하자마자 '레비테이션 (부유 마법)'을 펼치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다르죠. 제가 만약 이동하자마자 실프들을 부른다면 우리는 이동한 뒤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다면 해볼만 하지 않은가요?" 그러자 스와카가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마법진을 그려서 한다고 해도 아시리안님의 마력이 어느정도 저와 벨런스를 맞추지 않는한..." 나는 스와카의 말을 중간에서 딱 자르며 입을 열었다. "이래뵈도 5클래스 이상이예요." '이상'이지, 물론 이상이고 말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놀란 듯 모든 이들의 입들이 쫘악 벌어졌다. 그리고 스와카는 그들 중에서도 더욱 더 놀란 듯 그는 입 뿐만이 아니라 눈도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떠졌다. "5... 5클래스요? 그럼, 그럼... 혹시나지만, 5서클 마법도..." "어느정도는요." 그 어느정도란 사람의 차이에따라 다르겠지만서도... 아마 저들은 몇개만 할 수 있다는 걸로 알겠지? 스와카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하아, 저도 마법 학교에서 뛰어나단 소리를 많이 들었었는데... 그걸로 조금 우쭐해져 있었나 봅니다. 이거 참... 저도 우물안의 개구리였나요?" 그는 고개를 설래설래 젓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디 해볼까요?" 여기서 마법 상식을 잠깐 설명하자면... 마법은 혼자 구현한다면,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그러나 그 마법사가 마법진을 사용하거나 마력 증폭기의 도움을 받는다면 마법진이나 마력 증폭기의 능력과 마법사의 사용 능력에 따라 마법사가 가진 능력의 최대 5배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마법진을 사용하여 마법을 구현할 때 마법사 혼자 하는것 보다는 비슷한 능력의 다른 마법사와 같이 구현하는것이 더욱 더 효과가 크다. 물론 최대 효과를 발할 수 있는것은 마법사가 3명, 6명, 9명... 이렇게 3명씩 짝을 이룰 수 있는 수가 최고지만 지금은 나랑 스와카 단 둘뿐이니 최대의 효과를 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혼자 하는 것 보다는 2배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속담에도 '백지장도 맞들면 낮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역시 한국의 선조들은 현명했다.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스와카는 혼자서 넓은 공간에 커다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와 네개의 작은 돌맹이를 주어와 대충 중심을 맞추어 놓고 볼썽 사납게 쪼그려 앉아서 고대 문자와 마법 문장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 있는 공터를 거의 다 차지할 정도로 큰 마법진을 그려놓고는 안심이 안되는지 품 속을 뒤적 뒤적 거려 네개의 보석을 꺼내 놓았다. 모두 다 보라색의 빛깔을 띈 자수정 이었는데 평범한 자수정보다는 약간 더 진하고 붉으스름한 빛까지 감도는 것으로 보아 마력 증폭기로 가공된 듯해 보였다. "대단하군요... 마력 증폭기까지 가지고 다니시다니... 그거 굉장히 비싸지 않나요?" 내가 감탄의 말을 내뱉자 스와카가 히죽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몇년이나 고생해서 모은 돈을 몽땅 털어넣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그보다 목숨이 더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거 전적으로 동감이 가는 말이네요." 스와카는 자신이 꺼내 든 마력 증폭기들을 아까 마법진을 그릴때 중심을 잡던, 돌맹이를 놓았던 자리에 대신 놓았다. 그러자 나뭇가지로 땅에 그린 마법진이 우웅 하고 울리면서 땅에 그려진 선들이 희미하게나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스와카의 손짓에 나는 내 자리로 가서 섰고 나머지 사람들은 마법 증폭기를 밟지 않는 선에서 짐들을 들고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아시리안님, 이제 시작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스와카와 함께 기나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공간을 다스리는 존재여, 여기 우리가 당신에게 간절히 원하오니 공간의 틈새를 벌려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소서!!" 마법진이 더욱 더 강렬한 빛을 발하고 우리의 마나가 마법진 안으로 흘러들어가 마력이 최대한 활성화가 되었을 때 스와카가 외쳤다. "이동!!" 아마도 두 겹의 결계 영향인듯 마법진은 우뢰가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내면서 강렬한 빛을 한번 크게 발하였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자 우리는 저 밑에 땅을 바라보며 허공에 떠 있었다. "우왁~~!!" 누군가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땅 밑에 숨어있던 중력이란 녀석이 무자비하게 우리를 끌어 당기자 나는 재빨리 실프들을 불러 내었다. 땅에 안전하게 착지해서 바라보니 스와카의 얼굴색이 너무나 창백했고 그가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얼른 반담이 그를 부축했다. 그런데 그에 비하여 나는 멀쩡하게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의아함을 담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시리안님은 괜찮으세요?" 브랜이 대표로 질문을 던졌다. "예, 전 멀쩡해요." 내가 태연스레 대답하자 모두의 눈들이 놀람으로 커지면서 스와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스와카가 피식 웃으며 힘없이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아시리안님 서클렛이 의문의 답일걸요. 제 생각이 맞다면 그거 마력 증폭기 아닌가요?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 중에서 가장 대단하게 느껴지는군요." "맞아요. 아마 이 세상에서도 제일 강력한 것일거예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스와카의 눈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그렇다면 혹시, 드래곤 하트를 가공한 것?" "맞아요." "역시... 어쩐지 서클렛의 테가 미스릴로 되어 있어서 혹시나 했죠." 그러자 주위의 녀석들의 눈들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미스릴!!" 미스릴은 희귀 금속인데다 무지 비싸서 일반 평민은 물론이고 왠만한 귀족이나 왕족들은 평소에 한번 볼까말까한 금속이다. 이게 또 백금과 철과 비스무리하게 생겨서 마법사나 드워프들, 그리고 평생 금속을 다룬 장인들 아니면 구분하기도 힘들다. 아마 녀석들도 내 서클렛을 보고 백금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마법사나 드워프들이 미스릴을 안다고 해도 일반 마법사는 평생 보기도 힘들고 말로만 들었을 텐데 척 보고 알아채다니 스와카도 보통 마법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자, 그만 놀라고 자리를 잡죠. 이대로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스와카씨의 상태로 보아 그건 안돼겠어요." 내가 손벽을 짝짝 치면서 말하자 그제야 정신들을 수습한 일행은 자리를 잡고 각자 할일을 하기 위해 분주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7화 다시 온 수도에서... 바람은 솔솔 불~고, 햇님은 방긋 웃는 어느 화창한 날씨의 오후, 아름답고 우아하게 꾸며진 어느 정원 한켠에는 하얀 돌로 만든 작고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작고 아담하다고는 하나 정원의 분위기에 어울려 한껏 멋을 낸 그 정자에는 8개의 기둥이 박혀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8각정 모양이었고 그 기둥은 모두 대리석이었다. 각각의 기둥과 지붕의 테두리에는 금박을 입힌건지, 아니면 진짜 금을 새겨 넣은건지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정자 안에는 기둥들을 이어주고 있는 테두리가 완전 소파화 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중앙에는 예쁜 테이블과 그와 한쌍으로 보이는 의자 네개가 놓여 있었고 그들 중 두개의 의자는 이미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가벼운 다과와 함께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길쭉한 잔에 호박색의 액체가 절반정도 담겨 있었다. 완벽한 한가한 오후의 티타임 정경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두 남녀도 그걸 충분히 즐기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낮은 목소리로 도란 도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흐음... 그랬군요." 은발에 가까운 옅은색의 금발이 가벼운 바람에 살짝 날려 어깨를 넘어 앞으로 내려오자 여인의 가느다란 손이 다시 그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대단한걸요? 그 곳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그녀의 앞에 앉은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말을 받았다. "뜻밖이었어요. 하긴, 친 딸이 끼어 있는데 공작이 허술하게 준비하지는 않았을테니까요." "그런데 의외예요. 일행은 단지 5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그러나 그들 중 2명은 이름이 드높은 용병들이고 레드포드 공작가의 자제 또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하죠." "하지만 그들 셋으로는 부족할 거 같은데요... 역시 공녀의 능력이 한 몫 한걸까요?" "그렇다고 봐야겠죠. 그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이번 일로 플레이저 공작도 그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봐야 할까요?" "아직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주의하는게 좋겠죠?" 여자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으음... 별로 좋지 않네요... 그가 기울어진다면 지금껏 중립을 표방했던 이들도 하나 둘 기울어질텐데요... 게다가 플레이저 공작 정도의 사람이라면..." "확실히 영향력이 크겠죠.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지 말아요. 아직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또, 그 정도의 능력가라면 차라리 당당하게 선언할 지언정 뒤로 몰래 꾸미지는 않을겁니다." "하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거예요." "괜찮아요. 그래도 마지막 카드는 있으니까요." "그 카드라는 게 상대편에게도 똑같은 거잖아요."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받으며 더욱 더 아무 말 못하는 거죠." 여자가 피식 웃었다. 불안함을 느낀 마음이 남자의 계속 이어진 편안한 미소로 인하여 스르르 사라졌던 것이다. "낙천적이군요." 남자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여인의 손을 가져가 살짝 자신의 입술에 댔다. "당신이 날 선택한 뒤로 부터 항상 그랬죠. 모든 것이 다 잘될 것만 같았거든요." "호호호..." 여자의 미소가 더욱 커지자 남자는 내침김에 계속 입을 열었다. "비밀 한가지를 말해줄게요. 내 인생에는 아름다운 행운의 여신이 항상 지켜주고 있는데, 그녀는 아름다운 옅은 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항상 내 곁에 있죠." "쿡쿡쿡..."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루실... 난 신께서 우리 편이시라는 걸 믿고 있소." 여인의 눈이 행복감과 기쁨으로 인하여 아름답게 빛났다. "아린아~~~!!" 드디어 도착한 수도의 아빠네 집... 어젯 밤에 미리 전갈을 보내서 그랬던지, 아빠의 거대한 저택 정문이 보일 쯔음에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아빠가 달려왔다. "에구구, 내 딸내미... 힘들었지?" 멀리 아빠가 달려오는 것을 본 탓에 말에서 내려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다가오신 아빠는 다짜고짜로 나를 폭 안더니 얼굴을 부벼대었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아빠, 나 며칠동안 목욕 못했는데..." 그 즉시 아빠는 나에게서 떨어져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내 목에 팔을 감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여자가 말이야... 좀 깨끗하게 하고 다닐 것이지... 너 설마 여행 하면서 남자처럼 건들건들 하고 다녔던 것 아니겠지? 응?" "우에에엑, 아빠가 무슨 상관.... 우이이익~~" "아빠한테 말하는 것좀 봐라. 오랜만에 보는 아비한테 할 말이 겨우 그거냐?" "우잉, 오랜만은 무슨 오랜만? 어제도 봤으면서..." "떽, 그걸로 어떻게 만족할 수 있단 말야?" "우에에에, 그 동안 한번도 연락 안 한 사람이 누군데..."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내 목을 꾹꾹 누르고 있던 아빠의 팔이 풀어짐과 동시에 어떤 힘이 나를 똑바로 세웠다. 어리둥절해진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아빠가 예의 그 미소로 다정하게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아 끌었다. "자, 가자. 내가 이 날을 위하여 멋진 드레스를 준비해 뒀단다. 너도 보면 마음에 쏙 들거다." 갑자기 180도 변하는 아빠의 행동에 적응 할 수가 없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벙한 상태에서 나는 아빠에게 이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나와 마찬가지로 어벙벙한 얼굴들의 일행이 따라 들어왔다. "자, 자네들을 위한 방은 따로 마련해 두었으니 가서들 쉬게나. 그럼 나중에 보지!!" 커다란 현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넓은 홀에서 아빠는 뒤의 일행들에게 그렇게만 이야기 하고는 나를 윗층으로 끌고 갔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일행들은 집사인 티모시가 안내하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내 방으로 거의 끌려오다시피 들어온 나는 아빠에 의해서 가방을 벗자마자 욕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벌써 준비를 다 해놓고 나를 기다리던 시녀들에 의하여 옷을 벗고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안에는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며 담겨 있었는데 물의 색이 하얗고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물 위에 붉은 이름 모를 꽃잎들이 동동 떠 있었다. "이거야 원..." 탐탁치 않은 눈으로 그 모습을 보자 나와 같이 욕실에 있던 3명의 시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년 여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친히 명령하셔 준비하였습니다. 한번 목욕을 하고 나시면 온 몸이 개운하시면서도 피부가 무지 고와지실 거예요. 물론 아가씨의 피부는 고우시지만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내 머리맡에서 대야를 받쳐놓고 내 머리를 물에 담가 감겨 주기 시작하던 시녀가 감탄을 터트렸다. "어쩜... 머릿결도 무척 고우시네요. 정말 부러워요 아가씨... 이렇게 아름다우신데다 주인님께서도 무척 신경써주시잖아요." "하아, 너무 신경써서 탈이지...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죠?" 그러자 중년 여인이 얼른 나를 나무랐다. "아가씨, 저희같은 시녀에게 존대를 하시다니요. 당치 않으십니다." "아아, 그래... 알았으니까 자기 소개 좀 부탁할까?" "이제부터 아가씨 시중 들어줄 아이들 입니다. 저는 시녀장인 마샬이고 아가씨 머리를 감기는 아이가 로라, 그리고 팔을 씻어드리는 아이가 비키 입니다." 중년 여인의 소개에 그녀들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 살짝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상황은 이렇지만, 어쨌든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해." 목욕을 다 바른 나는 곧바로 욕실에서 그녀들에 의하여 전신 맛사지를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달걀에 밀가루 같은 하얀 가루를 섞어 온 몸을 발라 주물럭 대더니, 그걸 다 씻고 나자 이번에는 꿀을 온 몸에 발랐다. "참내, 이런 거 안 발라도 되는데..." 내가 몸에 발라지는 꿀을 아깝다는 듯이 바라보며 중얼 거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년 여인이 즉각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지시하신 일이라니까요." "에구... 이런 것 까지 지시하다니... 아빠도 참..." 꿀을 바른 다음 오랫동안 내 온 몸을 구석 구석 시녀들이 주무르고 비비고 나자 그제야 꿀을 깨끗이 씻어낸 다음 향기가 나는 샤워스킨인 듯한 액체를 발랐다. "자, 이제 다 되었습니다." "아아, 수고했어." 가벼운 목욕 가운을 걸친 채 밖으로 나가자 아빠가 싱글벙글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 어디보자... 역시 내가 준비하길 잘 했지. 들어갔다 나오니까 훨 달라 보이잖니." "누가보면 아빠가 아니라 엄마인 줄 알겠어요." "남들이 무슨 상관이냐, 내가 좋으면 된 거지. 자, 이쪽으로 와봐라. 오늘 네가 입을 드레스인데, 한번 보렴." 아빠가 커다란 침대 위에 조심스레 펼쳐 놓은 드레스를 가르키셨다. 연한 하늘빛의 드레스였는데, 여름용인 듯 얇은 옷감이 하늘하늘 거리고 있었다. 소매는 팔꿈치 바로 위까지 내려왔는데 옷감을 많이 잡아 자연스레 주름이 져 지도록 되어 있었다. 어깨는 넓게 파여져 시원하게 목선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었고 상체는 약간 타이트하게, 하체는 옆으로 쫘악 퍼지는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헤에, 무지 시원해 보이는 데요?" "그것 뿐이냐?" "으음... 제 나이 또래에 맞는 스타일이군요. 경쾌해 보여요. 그러면서도 차분한 느낌과 우아한 느낌까지 갖춘 아주 뛰어난 디자인이군요. 역시 아빠의 안목으로 고른 드레스 다워요." 약간은 아부성을 곁들인 발언에 아빠의 입이 다시 상향 곡선을 그렸다. "그렇지? 역시 넌 내 딸이다. 자, 이제 머리를 디자인해 볼까?" 드레스와 똑같은 빛깔의 길다란 리본으로 머리띠를 두르는 가 싶더니 밑에서 한번 꼬아 뒷쪽으로 돌려 귀 높이에서 틀어올린 머리를 고정 시켰다. 그리고 시원스레 드러난 목에는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작은 꽃이 달린 같은 색의 리본을 둘렀다. "다 되었다. 역시 내 딸이라서 그런지 너무 예쁘다." 아빠가 만족스런 얼굴로 찬찬이 훑어보며 말하자 옆에서 도와주던 중년 여인이 탄성을 발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아가씨 미모 정도면 우리 소브르 왕국 제일 미모라고 일컬어지는 공주님 못지 않으실거예요." 그러자 아빠가 힐끗 그녀를 노려 보았다. "무슨 소리야? 내 딸이 더 예쁘지." 중년 여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예, 아마도..."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7화 다시 온 수도에서... (2) 잠시 후, 간단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아빠의 서재에 모였다. 이번 일의 경과 보고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흐음, 어쨌든 수고 했네. 최초로 살아 돌아온 것도 축하하고..." 서재에 자리를 잡은 우리들을 둘러본 아빠가 운을 떼며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카페티안경은 모시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 곳에 안계셨거든요." 빨강 머리 녀석... 어른이 칭찬을 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하고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뭐가 잘났다고 저런 말을 하는건지... "아아, 이야기는 들었네. 아무래도 살해 당한 것 같다고?" "예. 흉수가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마 그것 때문에 시피르양이 날뛰는 것 같습니다." "그런것 같군. 결국 그녀를 막을 방법은 하나 뿐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저기..." 가만히 빨강 머리와 아빠의 대화를 듣고 있던 브랜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브랜은 자신에게로 시선이 쏠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우리가 카페티안경을 살해한 흉수를 찾아내서 알려 준다면 어떨까요? 그럼, 정신을 차릴지도..." 그러자 서재에 같이 있던 윌슨(검은 머리의 아빠 보좌관)이 고개를 저었다. "먹혀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녀가 지금 날뛰는 것이 원수를 갚기 위해 그런다는 것 보다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어버린 채 살기만 품고 있는 거니까요. 우리가 지금 흉수를 찾아서 말해준다 해도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더욱이 흉수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태 아닙니까?" 옆에 있던 데빈(금발 머리의 보좌관)도 냉정한 얼굴로 그의 뒤를 이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흉수를 찾을 여력이 없습니다. 그녀를 막기에도 부족한 상태란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 그런가요?" 브랜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건 그렇고, 그녀가 요즘 안보인 다면서요?" 내가 화제를 바꿀겸 말을 건내자 즉각 윌슨이 대꾸했다. "예, 마지막으로 에스라 왕국의 텔린이란 마을을 멸살한 뒤로는 2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패턴 없이 행동하고 있는 상황이라 다음 타겟이 어디인지는 감도 못잡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에스라 왕국과 저희 나라 국경 주위의 1000Km 이내가 아닐까 보고 있습니다." "헤에, 어떻게 1000Km 이내라고 추측했어요?" "그녀가 잡은 다음 타겟과 전 타겟과의 거리가 평균 500Km 안이거든요. 솔직히 이것도 지금까지 그녀의 행적을 찾아내어 계산한거라 맞을 확률이 50% 미만이긴 합니다만, 나라를 다 방어하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요." "만약 그 범위를 벗어난 곳에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아빠가 어깨를 으쓱 거리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그 곳이 운이 나쁜거라 생각할 수 밖에. 솔직히 지금 이렇게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시킨다 해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니까." "그래서 알베르트 산 근처에 있는 도시에 군사들이 2배는 더 많았군요?"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아빠는 말끝을 흐리며 빨강 머리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녀석에게 뭔가를 시키려는 듯... "이번에 귀족측에서도 사병들을 이끌고 지원을 가게 되었어. 각각의 지방 영주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할테니까. 국가 병사들을 동원했다 해도 이번 타겟 예상 범위 말고도 타 지방까지 지원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라서 말야." "저도 가야한단 소리군요." "당연하지. 자네 집안은 무관쪽 이니까." 아빠의 뱅뱅 돌리고 길게 끈서론에 비해 너무나 당당하게 나온 결론에 나랑 빨강머리의 고개가 갸웃했다. "뭐, 달리 시키실 일이라도?" "이번에 내 딸과 우리집 사병들을 같이 데려가라고." "예?" "말도 안돼!!" 녀석은 너무 놀라 벙쪄버렸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왜 이런 녀석이랑 같이 가란 말예요?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내가 아빠에게 바락바락 대들자 빨강 머리가 처음으로 내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빠는 맘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 단호한 표정이었다. "글쎄... 내가 첨에는 너 혼자 다른 영지로 보내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널 아는 귀족이 없더라고. 그런데 혼자 딸랑 보내놓고 내 딸이라고 말하면 누가 믿겠냐? 나한테 딸이 있다는 걸 모르는 녀석들이 부지기순데..." "아빠 사병들이 있잖아요." "걔네들이 널 아냐? 널 아는 귀족이라고는 애쉬군 밖에 없으니까 그런거야." "뭐하러 그런거에 신경쓰고 그래요? 그냥 있다가 쳐들어오면 싸우면 되는 거지." "내 가문 대표로 가게 되면, 작전 회의 같은데도 참석하고 귀족들이랑 같이 있어야 할텐데? 내 딸로 가기 때문에 그들 중 위쪽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거다. 그럴려면 할 일이 많을텐데 귀찮지 않아?" 아빠의 은근한 어조에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생각해보고 있었다. "아... 그렇네..." "그렇지? 그래서 내가 안배를 한거 아니겠냐? 공녀의 대우를 받으면서 귀찮은 일은 다 떠맡길 동등한 지위의 사람까지 있으니 좋잖아?" "흐음... 그렇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빨강 머리 녀석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저보고 공녀의 뒤치닥거리를 하시란 말씀 이십니까?" 그러자 아빠가 빨강 머리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물론, 내 딸 뒤치닥거리를 해줄 사람은 딸려보내주지." "설마 수십명의 시녀에다가 옷 트렁크와 소지품 트렁크를 들고 갈 수십명의 하인은 아니겠지요?" 빨강 머리가 노골적으로 반항하자 아빠의 눈초리가 약간은 사나워졌다. "자넨 같이 여행까지 해놓고선 내 딸을 그 정도의 여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약간 찔끔한 빨강머리... "아니, 그러니까... 전..." 아빠는 고개를 획 돌리셨다. "내 딸을 보좌할 사람은 여기있는 윌슨 군일세. 자네가 내 딸을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될거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듯 윌슨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싱긋 웃으며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 윌슨이요?"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리벙벙해졌다. "그래, 귀찮은 일을 해결해 줄 수있는 지위에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네 보좌관으로는 딱이지. 더욱이 내 심복으로 알려진 사람이니까 더더욱 적격이야." "그럼 다른 영지로 가도 괜찮잖아요?" "글쎄, 이건 내가 너를 위하여 생각해 낸거라니까. 윌슨은 내 사람이라고 알려졌으니 윌슨이 내 딸이라고 해도 내가 시킨대로 말한 거라 생각할꺼니 널 의심의 눈초리로 볼게 아니냐? 난 내 딸이 그런 대우 받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놔두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대로 저 애쉬군과 같이 가도록 해." "하아..." 내가 별달리 반박을 못하고 자리에 앉자 아빠의 고개가 다시 빨강 머리 녀석에게로 돌아갔다. "자네도, 내 벌써 자네 레드포드 공작에게 연락해 놨으니 암만 말고 시키는 대로 하게나. 그럼 이야기는 끝난 걸세." 빨강 머리 녀석은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와 함께 나머지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참, 자네 둘 말야..." 아빠가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 스와카와 반담을 불렀다. "이번 일 수고했네. 티모시가 자네들 몫을 준비하고 있으니 가져가게나." "감사합니다." 녀석들이 서재를 나가는 틈을 타 나는 살짝 아빠를 끌어당겨 서재에 둘만 남았다. "아빠?" "왜?" "뭐하러 내가 받을 대우에 신경을 쓰시는 거예요? 난 그냥 용병으로 그 곳에 가도 되는데..." "무슨 소리!! 내가 이 나라 재상으로 있는 이상, 네가 이 나라에서 공녀로 대우 못받는 꼴은 못본다." "그런거에 뭐하러 신경써요?" "이왕이면 받을 대우 다 받으면서 있는게 좋지 않냐? 게다가 귀족이라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꽤나 편리한 계급이거든." 아빠는 싱긋 웃어보이며 서재를 나갔다. "참내..." 그리고 나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아빠의 뒤를 따랐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7화 다시 온 수도에서...(3) 높은 천장을 가진 어느 길다란 복도... 한쪽 벽면에는 그 천장만큼이나 커다란 창들이 즐비하니 늘어서 있고 다른 한쪽 벽면에는 어쩌다 가끔 나오는 커다란 방문들과 일정한 거리마다 놓여 있는 우아한 조각을 가진 작은 탁자 위의 척 보기에도 무지 비싸 보일것 같은 장식품들... 어디 집안의 복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은 무지 무지 크고 화려할 것이라 집작된다. 그럼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무지 부자거나 높은 귀족쯤 되겠지? 그러한 복도에 누군가가 터벅 터벅 걷고 있었다. 결이 가느다란 갈색 머리에 평범하게 생겼지만 남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을 가진 남자는 부드러운 푸른 눈으로 앞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그 인상의 남자는 바로 브랜이었다. 아까 아린네 집을 나와 애쉬 녀석과 헤어지더니 이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럼 이 곳은 얘네 집인가? 그런데 왠지 그 눈이 쓸쓸해 보인다. 어느 순간 복도 저 앞쪽에서 한 인영이 뚜벅거리며 다가왔다. 그 인영은 브랜과 같은 갈색 머리를 지녔지만 브랜보다는 약간 더 짙은 색에 초록색의 눈을 가졌다. 그리고 브랜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다부진 몸매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오고있는 브랜을 바라보더니 의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무사히 돌아 오신 것을 축하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동안 안녕 하셨는지요?" "저야 물론 잘 있었습니다.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이신가 보군요?" 폐하? 역시 브랜은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다. 헉, 그럼 여기는 왕성? "예, 돌아왔으니 인사를 드려야지요. 잠시 후에 누님께도 인사 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전해 드리죠. 그럼 이만..." "예." 앞서 오던 남자와 짧은 목례를 주고받은 브랜은 다시 그 사람을 지나쳐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몇개의 방을 지나쳐 복도 맨 끝에 있는, 지금까지 지나쳐 온 방들 보다 훨씬 더 큰 어느 방문 앞에 섰다. 크기에서부터 다른 여타 방문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이 곳에는 두명의 기사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 두기사는 브랜을 보자마자 기사의 예로써 허리를 숙였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왕자라고라고라? 브랜이 왕자였어? "아바마마께 인사 여쭙기 위해 왔으니 알려주게." 그러자 기사 한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 왕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브랜을 위해 방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지요." 브랜은 그에게 고맙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서는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 앉혀주는 듯한 좋은 향기가 흘렀고 커다란 창문에서는 밝은 빛이 흘러들어와 방을 밝게해주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커다란 침대가 있었는데 그 침대를 둘러 싼 엷은 휘장은 침대 천장 위로 살짝 걷혀 올라간 상태였다. 브랜은 자주 드나들었던 곳인 듯 둘러보지도 않은 채 곧장 침대로 다가갔다. 그 침대 중앙에서는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50이 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등에 쿠션을 받치고 앉아 브랜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책을 읽고 있었던 듯 그의 무릎에는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었다. "소르드 왕국 제 1왕자 브랜트 소브르가 폐하를 알현합니다." 브랜은 침대 가까이 가자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 손은 배에 받힌 채 허리를 숙였다.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브랜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좀더 다가갔다. "그래, 레드포드 공작의 영지에 있었다고?" "예. 애쉬와 같이 있었습니다." 어째 국왕은 브랜이 어딜 갔다 왔는지 모르는 듯 하다. 국왕은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브랜을 보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나라 사정이 별로 좋지 않으니 너무 자주 궁을 비우지 말거라. 너도 이제 슬슬 국정에 참가해야 할 나이가 아니더냐?" "누님께서 잘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국왕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걸 본 브랜 또한 슬픈 얼굴로 국왕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너도 이 나라의 왕자이니라. 이 나라가 돌아가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어야지." "저는 아직 부족하니 조금 더 있다가 참여하겠습니다." "무엇이 부족하다는 게냐? 아무 말 하지말고 슬슬 참여하거라. 이제 너도 놀기만 할 나이는 지났다. 조금 있으면 네 배필도 찾아야 할 것 아니냐?" 국왕의 단호한 어투에 브랜은 얕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러다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국왕은 브랜의 그런 눈치를 알아채고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말에 응해주었다. "나야 늘 그저 그렇지." "빨리 완쾌 하셔야지요." "그래, 그래. 네가 장가가서 손주를 안겨줄때 까지는 살아 있을 생각이다." 그러자 브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흥, 그럼 내가 죽을 때 까지 손자를 못 보게 할 셈이냐?" "누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국왕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했다. "난 네 아들이 보고 싶다." "아바마마..." 브랜이 뭔가를 이야기 하려하자 국왕은 단호하게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쓸데 없는 말을 하려거든 그만 나가봐라." "........" 브랜은 결국 말을 하지 못하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럼 쉬십시오." 그가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자 국왕은 책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방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여린 녀석, 저런 정신으로 어떻게 왕좌를 차지할런지..." 브랜은 어떤 화려한 방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자신의 방인 듯 들어오자마자 답답하다는 듯이 거칠게 겉에 입고 있던 예복을 벗어 탁자 위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방 안으로 들어오던 40대 중반의 남자가 얼른 그가 벗어 던진 자켓을 집어 들었다. 브랜의 시종인 듯... "폐하를 알연하고 오셨습니까?" "응." "왕녀 전하께는..." "아, 조금 있다가 가게." 브랜이 썩 좋지 않은 얼굴로 방 한쪽에 있는 화려한 소파에 몸을 던지자 시종이 연민의 빛을 얼굴에 띄우며 다가왔다. "포도주를 가져다 드릴까요?" "아냐, 됐어. 조금 있다 누님을 뵈러 가야 하니까..." "그만 기분 푸시지요. 폐하께서 어디 하루 이틀 그러셨습니까?" 브랜은 고개를 뒤로 젓힌채 눈을 감았다. "하아,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왜 날 가만두지 못해 안달인 거지? 이럴줄 알았다면 왕자 따위는 안되는 건데..." "전하..." "그랬다면, 누님이랑도 사이가 나빠지지는 않았겠지?" 시종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실테니 내일 뵈러 가시지 그러십니까?" "아냐, 아까 대공을 뵈었을 때 오늘 간다 그랬어." "그럼 지금 그러고 계시지 마시고 다녀 오십시오. 그리고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신 뒤에 저녁식사를 드시면 몸이 좀 풀리실 것입니다." 브랜은 눈을 살짝 떠 자신의 시종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고마워.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그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봐야지. 가디라고 계실 텐데." 시종은 예상했다는 듯 자켓을 건네 주었고 브랜은 그 옷을 걸치면서 방문으로 향했다. "그럼 다녀 올께."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 제 7화 다시 온 수도에서... (4) 소르드 왕성은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의 왕성답게 여러개의 커다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앙에는 가장 크고 성 답게 여러개의 첨탑이 같이 있는 중앙성, 이 곳은 국왕과 왕후가 살았고 모든 문무 관리들이 여기서 국정을 처리했다. 그리고 오른쪽에 베르사유 궁전처럼 생긴 커다란 저택이 태자궁, 이 곳은 다음 번 왕좌를 이어받을 왕자, 혹은 왕녀가 자신의 배우자와 같이 산다. 그리고 왼쪽, 태자궁 못지 않은 건물은 결혼해서 왕성을 나가기 전까지의 왕자와 공주들이 사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왕성의 뒤쪽에 있는 건물은 왕의 후궁들이 사는 별궁이다. 그러나 현 국왕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고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지금은 텅텅 비어있다. 브랜, 아니 제 1왕자 브랜트 소르드는 현재 중앙성의 왼쪽 건물에 머물고 있다. 아무래도 그가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한 탓이겠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아까 국왕이란 작자가 브랜에게 왕좌를 물려받을 정신 상태가 안된다고 혀를 찬 사실을 볼때 국왕은 브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브랜이 왜 태자궁에 살지 않고 왕자궁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쉽게 추측될 수 있는 답안. 브랜 말고도 왕좌를 이어받을 국왕의 자녀가 한명 더 있다는 것, 그리고 그(혹은 그녀)가 태자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헤에, 혹시 그 태자궁에 살고 있는 사람이 브랜의 누나?" "맞았어." 잠시 이야기는 벗어나서 여기는 울 아빠네 서재. 나는 여행 동료들이 내 집을 떠나자 아빠에게 가서 브랜의 정체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나 결혼 했어요?" "응. 남편은 대공의 작위를 받고 있지." "그런데 국왕은 왕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은가보네요?" "맞아. 이 나라가 비록 왕녀와 왕자 모두에게 동등한 왕위 계승권이 있지만, 현 국왕이 약간 남자 우월주의자거든." "에게..." "게다가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지. 그 왕녀의 모친 신분이 낮거든." "혹시 후궁 출생?" "글쎄다... 후궁이라고도 할 수 있을라나?" 다시 자리를 바꾸어서 태자궁의 정원... 따뜻한 햇볕이 드는 곳에 내 놓은 탁자 위에 한 여인이 씁쓸한 고소를 띄우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고 있었다. "가끔은... 뭐하러 내 생모가 나를 낳았나 싶어요. 아주 가끔은... 이런 대우를 받게 할 바에는..." "왕녀..." 여인은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눈을 똑바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잠깐만 넋두리 좀 할께요. 오늘 유난히도 감상적이 되네요. 당신도 알다시피 내 생모는 지금은 돌아가신 왕후의 시녀였지요. 평민 출신의... 그런데 웃긴건 그녀가 나를 낳은 이유가 미모가 뛰어나 현 폐하의 눈에 들은 것이 아니라 몸시 만취하신 폐하께서 화풀이로 상대 얼굴도 확인하지 않으시고 품은 상대라는 거죠. 한마디로 정말 어이없이 생겨난 애라는 거예요." "후우..." 그녀의 넋두리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남자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말거나 왕녀의 넋두리는 계속 되었다. "현 국왕께서는 왕후를 몹시도 사랑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 지금 그분은 완전 남자 우월주의 사상에 빠지신 분이잫아요. - 후궁 하나 두지 않으셨죠. 그런데 불행인지 왕후께서는 후사를 낳지 못하셨어요. 처음 왕자를 낳으셨지만 그 왕자가 생후 3개월만에 어이없이 죽고난 후, 다음부터 임신하실때마다 번번이 유산을 하셨죠. 그러기를 다섯번인가? 국왕 폐하와 왕후 전하께선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 하셨대요. 하지만 신관이 말렸다나요? 더 이상 유산을 하게 되면 왕후 전하의 목숨 마저도 위험하다고요. 이건 왕후 전하께서 제게 직접 들려주신 이야기예요. 그 이야를 들으신 폐하께서는 실망과 슬픔과 분노로 과하게 술을 드신 후 지나가던 시녀 하나를 붙잡아 침대에 밀어넣으셨다죠? 그 시녀가 내 생모이고..." 왕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저 멀리 푸른 정원을 한번 바라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그걸 용납하지 못하셨대요. 그래서 내 생모를 죽이려 하셨죠. 그런데 그걸 막으신 분이 왕후 전하세요. 그 시녀가 아기를 낳으면 후궁으로 들 수 있도록 주선하신 분도 그분이시죠. 그런데 다행인지 그 시녀는 아기를 낳다가 죽어버렸죠. 덕분에 그 아기는 왕후의 양녀로 들어가 서류상으로는 온전한 신분의 왕녀가 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왕후의 지지로 인하여 첫번째의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었구요. 폐하께서도, 대신들도 무남독녀의 핏줄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죠. 그런데 문제는 폐하의 동생 내외분이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신 후부터 생겼어요. 그들의 외동 아들내미를 가엽게 여기신 폐하와 왕후께서 그 아이를 양자로 삼으셨죠. 바로 내 동생으로 말예요." 그럼 그 아이가 브랜이란 말이군... "그때 부터 였을 거예요. 폐하와 대신들이 그 아이에게 왕좌를 이어받게 하려는 건... 무척 똑똑하지는 않더라도 심성이 곧고 착한 아이였으니까, 더욱이 아들이었잖아요. 하지만 왕후가 계실때는, 그 분이 저를 감싸주셨으니까 왕위 계승권의 2위로 밖에 만족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 분이 돌아가시자마자 나와 동등한 계승권을 갖게 되었죠. 그 아이가 원하든 말든 말예요." "당신은 왕자보다 더 왕의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예요. 그걸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잖아요?" "능력은 인정하죠. 하지만 폐하와 대신들은 그게 더욱 못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이대로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할 건가요?" 그러자 왕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뇨. 절대로 그럴 수는 없죠. 오기로라도 포기 못해요. 내가 왜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어마마마 께서도 나보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시면서 돌아가셨어요. 난 그 유언을 받들어서라도 포기하지 않아요." 남자의 눈에 가벼운 고소가 스쳐 지나갔다. "후후, 돌아가신 왕후 전하께옵서 남자우월주위를 싫어하셨다는 걸 폐하는 아실지?" 그럴 때 시녀 한 사람이 조용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왕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이리로 모셔라." 남자의 대꾸에 시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드디어 왔군요." 왕녀의 눈이 냉정하게 빛나자 남자가 그녀를 다독였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왕자도 힘들어 하고있지 않습니까?" "흥,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도 확실하게 매듭을 짓지 못하는 겁쟁인 걸요. 그 애가 확실히 하지 않는 한 나는 그애를 적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어요." "거야 그렇지만... 예전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까?" "사이가 벌어진 건 전적으로 그애 탓이예요." 남자는 더이상 말하지 못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고 왕녀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녀의 안내를 받아 브랜이 다가왔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누님?" "어서오세요, 왕자. 무사히 다녀 오셨군요?" "예, 덕분에요." 브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녀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까 뵙고 또 뵙는군요." "그렇군요. 앉으세요." 대공이 일어나 자리를 권하자 브랜이 엉거주춤 그 자리에 앉았다. 왕녀는 그런 그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자 대공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가셨던 일은 잘 되었습니까?" 그게 반가웠던지 브랜은 다행이라는 안도감의 미소를 띄웠다. "카페티안경은 모셔오지 못했지만, 대신 이번 원흉의 이유와 그 동안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는 알아내었습니다." "많이 위험하셨겠군요?" "제 동료들이 워낙 뛰어났거든요. 저는 짐만 될 뿐이었습니다." "폐하는 전하께서 그 곳에 갔다 온 것을 모르고 계시죠?" "예. 제가 말씀을 안드렸으니까요. 누님께서도 말씀 안 드려주신 것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자 왕녀가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폐하께선 저를 만나주시지 않으시니까요." "왕녀..." "누님..." 브랜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돌았고 대공이 약간 당황했지만 왕녀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돌리며 브랜을 보내려 했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가서 쉬세요. 나중에 또 만나기로 하죠." 브랜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는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힘 없이 돌아서서는 터벅 터벅 걸어 정원을 벗어났다. "하아..." 왕성에만 있으면 힘이 저절로 빠졌다. 누님이 왜 그러시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알면서도 그 사이를 되돌리지 못하는 자신의 용기 없음에 한숨만 나왔다. 그러다 문득 태자궁과 중앙성 사이의 경계인 담장을 칭칭 감고있는 덩굴 장미를 바라보았다. 이제 여름이라서 그런지 붉은 장미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생각 났다. 붉은 머리를 가진, 루비같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애쉬 녀석에게 바락 바락 대들던... 여타 다른 귀족의 여식이라면 애쉬가 그랬다면 어쩔줄 몰라하다가 울음을 터트렸을 거다. 그래도 애써서 그녀석과 한마디 하려고 달려들텐데... - 그만큼 애쉬 녀석은 인기가 많았으니까 - 그런데 그녀는 달랐다.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끔가다 애쉬에게 한방씩 먹이기도 했다. 여자에게 당해서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애쉬의 모습은 그때 처음으로 봤었다. 그 장면이 다시 떠오르자 브랜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감돌았다. '정말 이 장미처럼 당찬 여자였어...다시 보고싶군.'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에 눈이 번쩍한 브랜은 싱글벙글 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순간 아빠 서재에 있던 나는 갑자기 코가 간질간질거려 재채기를 했다. "에취!!" 책상에서 서류를 보고 계시던 아빠가 놀라 고개를 드셨다. "감기냐?" "글쎄요... 드래곤도 감기에 걸리나?" 그리고 한시간 후, 수도에 있던 또 다른 공작, 레드포드 저택 응접실에서 브랜을 맞은 애쉬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쳤다. "뭐라고?" 자신의 앞에 있는 브랜의 신분을 생각할 때 그것은 왕족 모독죄에 해당되는 무례였지만 브랜은 익숙한 듯 태연했고, 애쉬도 그걸 따질 정신은 안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못들었어?" 브랜은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찻잔을 집어들어 한모금 쭉 마셨다. "아, 차맛 좋타~!!" 그러자 애쉬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붉어졌다. "지금 차 맛 타령할 때야?" 브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로 멀뚱 거리며 물었다. "왜? 그럼 안돼?" "브랜트 소르드으으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애쉬는 크게 소리를 지르자 브랜이 얼굴을 찡그리며 얼른 자신의 귀를 막았다. "아이구 귓청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소리를 지를 만 하니까 지르지. 너말야, 지금 심심해?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아? 그래서 실없이 와서 장난치냐구?" "난 장난친 적 없어." "이게 장난이지 아냐? 아니 알베르트 산 갔다와서 못느꼈냐? 거기서 죽을 뻔 한거 기억 안나? 그런데 이번에 또 날 따라 가겠다고? 왜, 아예 왕녀에게 가서 죽여줍쇼.. 하지?" "애쉬!!" 브랜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애쉬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어." "다시한번 말하지만, 누님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아무리 너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아."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실언했어. 어쨌든,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절대 못 대려가. 내가 놀러가는 줄 알아?" "물론 네가 놀러가는 게 아니라는 것 알구 있어.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웃기지 마. 안돼. 절대로 안돼. 알베르트산이야 네가 플레이저 공작에게 먼저 부탁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한거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안돼." "애쉬이이이~~!!" "안됀다니까. 이번은 알베르트 산때보다 더욱 더 위험하단 말야." "하지만 플레이저 공녀도 같이 가잖아." "그녀는 너보다 훨씬 뛰어나고, 자기 몸 지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어." "애쉬~~!!" "안됀다니까." 그러자 마지막 카드를 꺼내려는 듯 브랜이 비장해졌다. "그럼 나 다른 영지에 일반 병사로 지원해서 간다?" "뭐, 뭣?" 애쉬 녀석의 눈이 튀어나올 것 처럼 커졌다. "일반 병사로 지원해서 간다고. 내가 왕성을 얼마나 잘 빠져 나가는 지 잘 알지? 게다가 난 얼굴도 알려지지 않아서 일반 병사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브랜은 아주 사악한 웃음을 흘리면서 애쉬를 바라보았다. "지금 제정신이야?" 겉으로는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애쉬는 속으로 신음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물론 자신은 브랜이 얼마나 왕성을 잘 빠져나오는지, 게다가 능청스럽게 평민 흉내를 얼마나 잘 내는지 알고 있다. 게다가 그와 더불어 한번 결심한 일은 어떻게 해서든 해낸다는 것도... '이걸 왕자만 아니라면 두들겨 패서라도 잡아둘텐데...' 하지만 자신의 앞에 사악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골칫덩어리 녀석은 자신보다 신분이 훨 높은 왕자였다. "젠장할..." 애쉬가 짧게 욕설을 내뱉자 브랜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애쉬가 반쯤 허락한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뒤로는 조건이 붙겠지만... "대신 이번에는 왕실 근위대 기사를 5명 이상 붙이고 갈것,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것." 그럼 그렇지.. 하지만 데려가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브랜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아, 그리고 저번에 그 스와카랑 반담 용병도 다시 고용해야겠다. 그들 실력은 무척 뛰어나니까... 네 호위병으로 같이 붙여줄께." "알았어." "젠장, 이번에는 정말 조심해야 해?" "알았어, 알았어." "에휴..." 제 8화 폭풍 전야 애쉬 녀석과 나, 그리고 나중에 꼽사리 끼어든 브랜이 담당하게 될 영지, 정확히 말하면 국가 직할시의 도시는 이번에 다음 타겟 영역 1000Km 이내의 분할된 성들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물론 소르드 왕국에서 몇 없는 공작들 중 2 공작가의 자제가 맡은 도시이다보니 그렇게 되겠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입김이 작용한 듯 했다. 내가 가니 지켜질테고, 그러자니 가장 중요한 곳으로 배정해 놓았겠지... 이번에 브랜은 자신의 호위 기사 5명과 예전 여행 동료였던 스와카, 반담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무래도 공식적인 자리이다보니 나는 그에게 왕족에 대한 예를 - 그를 만나기 전 아빠에게 가볍게 교육 받았다. - 지켜야 했지만, 브랜은 전에 자신의 신분을 감췄던 것이 맘에 걸렸는 듯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이름을 불러 달라고 부탁 하기에 마음이 넓은 나로는 기꺼이 승낙해줬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가 맡은 성, 즉 아몬트시는 국경인 다브로강과 수도 중간쯤에 있는 도시였는데, 아무래도 국경이 강이어서 에스라 왕국과의 교류가 많다보니 수입된 물품을 수도로 옮기기 위해 생겨난 도시라 하겠다. 이 소르드 왕국은 평야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어서 무조건 가는 곳이 길이 되기는 하지만 많은 물품을 가지고 운반하다보면 최 단거리로 가기 마련이고 또한 노숙을 피하게 되기 땜시 거의 필수적으로 넓은 대로가 닦이고, 또한 국경 근처로 인하여 생겨난 많은 군사들의 수시 이동 중간 지점으로 선택된 것에 의하여 소르드 왕국의 제 2 도시라 할 만큼 성장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 성은 군사적인 방어를 위한 시설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성벽은 단순히 성의 경계와 도시의 재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약간 높고 멋들어지게 지어졌을 지언정, 두껍고 튼튼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성문도 하루에 16시간 이상의 개방으로 인하여 가볍고 움직이기 쉽게 제작되어 이 도시의 수호를 위해 달려온 우리들에게 절로 한숨을 나오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하긴 뭐... 그녀에게는 성벽도 소용 없다고 하니까..." 라며 브랜 녀석이 애써 밝은 어조로 우리의 심정을 달랬지만, 그래도 첫 방어막이 될 성벽이 미덥지 못하다는 것에 애쉬녀석과 그의 부관들은 그리 밝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그러자 그게 마치 자신의 죄인 양, 이 도시의 시장인 모드 클리지 남작은 고개도 못들고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됐어요. 어차피 남작님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가 너무 쩔쩔매고 있어 보다못한 내가 한마디 건네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내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누구신지?" 이렇게 된 사정을 잠깐 설명하자면... 우리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남작은 맨발로 뛰어나오다시피 반색을 하며 나와 반겼는데, 우리의 형식적인 대표 브랜과 실질적인 대표 애쉬 녀석만 알아본 채 그들에게 인사를 했고, 그들 옆에있는 나는 당연하겠지만 모르는 관계로 인사를 하지 못한 채 소개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빨강 머리 녀석은 내가 인사를 받아야 한다는 걸 잊어버린 건지 아님, 일부러 무시한건지 다짜고짜 성벽 상태를 살펴봐야 한다며 남작을 이끌고 성벽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힘이 없는 남작은 그냥 그에게 이끌려 갔고 나머지 얼떨떨한 브랜과 나, 그리고 우리 수행인들은 인사를 못한 채 같이 가야만 했었다. '젠장, 저 뻘건 머리 녀석 일부러 그런 걸 꺼야.' 내가 속으로 애쉬 녀석을 씹고 있을 때 브랜이 먼저 나서서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 레이디께선 플레이저 공작님의 영애이십니다." "아, 그러셨군요. 몰라뵈서 정말 죄송합니다." 남작은 미심쩍은 눈빛이었지만, 왕자가 나서서 그렇다는데 감히 토를 달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아뇨, 그러실 수도 있죠." "그런데..." 빨강 머리가 끼어들었다. "성문을 계속 개방하고 계시는군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레드포드경. 이 곳은 교류를 위하여 세워진 도시가 아닙니까? 단 하루라도 성문을 폐쇄한다면 금전적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제가 검문을 강화하면서까지 성문을 계속 개방하고 있겠습니까?" 확실히 그랬다. 남작의 말 그대로 지금 성문에서는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끝도 없을것 처럼 늘어서 있었고, 그런 그들을 수십명이나 되는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몇명의 마법사들이 일일이 검문을 한 뒤에야 통과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될 것 같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만어린 표정들이었고 브랜도 그들이 안됐다는 표정이었지만 남작으로써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흐음, 그럼 어쩔 수 없죠." 애쉬 녀석도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성문에서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검문하는 것을 보고는 그냥 물러났다. 그리고 그제야 성벽 조사가 끝난 듯 주위를 살피던 날카로운 시선을 풀자 남작의 뒤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서 있던 사람들이 말할 찬스를 얻었는지 그제야 브랜에게 말을 걸고 나섰다. "왕자님께서 직접 오실줄은 몰랐습니다." "아마트라 백작,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검게 그을린 얼굴에 멋드러진 검은 팔자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자 브랜도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백작이 브랜을 보자마자 인사를 못드렸던 이유는 남작이 나에게 인사를 못 했던 이유와 비슷했다. 솔직히 남작은 브랜에게만 겨우겨우 인사를 했을뿐, 애쉬에게도 인사를 못한 실정이었다. 덕분에 백작도 인사를 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냥 우리를 따라왔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브랜이 아무 말 없이 묵인하고 있었고 우리가 며칠 늦은 상태였기에 서둘러 성벽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을 백작도 이해해주는 눈치였기에 아무말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진작에 인사를 못드려 죄송합니다." 아마트라 백작 뒤에 서 있던 20대 중반들로 보이는 두 기사들도 인사해왔다. "아닙니다, 두분 아마트라경. 같이 오셨나보군요?" "예. 보잘것 없는 실력이나마 아버지의 힘이 되어드리고자 같이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백작님께서 정말 든든하시겠습니다." "허허허, 뭘요. 이녀석들이 뭐 도움이 되기야 하겠습니까? 걸리적 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백작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은근히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플레이저 공작님의 영애시라니, 정말 놀랐습니다." 백작이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시리안 플레이저라고 합니다. 이번에 부족하나마 아버지의 명에 따라 플레이저 가문의 대표로 왔습니다." "아, 예... 그러셨군요. 하지만 여자의 몸으로 힘드실텐데..." 백작이 약간은 미덥지 못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자 브랜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닙니다. 공녀의 실력은 저도 놀랄정도입니다. 저기 있는 레드포드경까지 인정하는 실력인걸요, 그렇지 않은가요?" 브랜이 애쉬 녀석에게 동의를 구하자 녀석은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작과 두 아들들의 눈에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호오, 그렇군요. 공작님을 닮아 미모만 뛰어나신 게 아니라 그런 실력까지 가지고 계시다니... 공작님께서 무척 자랑스러워 하시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버지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일 뿐입니다." '으웩, 내가 말하고도 닭살 돋는다...' 빨강 머리도 같은 생각인지 몸서리를 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남작의 저택에 자리 잡은, 지원 병력 지휘층들은 본격적인 대비체제에 들어갔다. 뭐, 거창하게 말해봤자 어디서 어떻게 들어올 지 모르는 적 하나를 두고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기에 각각의 성문에 검문 병력을 좀 더 배치한다는 것과 각자 데리고 온 사병들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빨강 머리를 비롯한 아마트라 백작 부자를 매우 바쁘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사병 훈련도 훈련이지만, 각자의 검술들도 연마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백작은 검술 대련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평소 소문이 자자했다던 애쉬 녀석과 같이 대련할 수 있다는 것에 흥분에 들떠 있었다. 게다가 거의 1000명이 넘는 지원 병력들을 돌보랴, 본래 도시의 업무를 보랴, 평소보다 몇배나 바빠진 남작을 윌슨이 돕겠다고 나섰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이 도시는 아빠의 직속 관할지였기에 이번에 윌슨이 나를 따라온 것은 나의 보좌를 맡은 것도 있었지만, 관찰사의 임무도 겸사 겸사 띄우고 내려왔던 것이었다. (느아쁜 아빠... --;;) 덕분에 나는 이번에도 홀로 빈둥거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명목상 데리고 왔던 사병들은 나와 같이 온 사병대 대장인 라몬트 아르하나즈경이 맡고 있는데다, 회의니 뭐니 해서 애쉬와 백작가, 그리고 브랜과 남작이 모이는 것 같았지만 그런건 다 윌슨에게 일임하고 있는데다, 한번 예의상 갔었을 때 할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다가 나오기만 했기에 담부터는 아예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열심히 하는 검술 연습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첨부터 요만큼도 없었다. 솔직히 내가 끼어든다고 해서 그들이 상대해 주기나 할까? 그래서 나는 녀석들의 황당스럽다는 시선을 무시하고 놀러 나가기로 했다. 물론 브랜이 혼자 보낼 수 없다고 자신도 같이가려 했었지만 애쉬 녀석이 무시 무시하게 눈을 부라리며 "넌, 네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않아? 짐이 되고 싶지 않으면 따라 왓!!" 하면서 끌고가는 바람에 울상을 지었지만, 애쉬의 말이 백번 맞는 말이었기에 항변도 못 하고 순순히 끌려갔다. 하지만 그래도 나 혼자서 보낼수는 없다고 붙여준 두명, 스와카와 반담이 나와 같이 가게 되었다. 그 둘에게 나를 따라서 자신들의 실력을 연마하라고 했지만 둘은 설래설래 고개를 저었다. "마법이라는 게 하루, 이틀 연마한다고 해서 부쩍 늘어나는게 아니거든요..." 스와카였다. "그런 짜증나는 기사들 속에 있다간 연마는 커녕 홧병으로 쓰러질 거다." "와우, 반담...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놀라운데요?" 반담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고 스와카가 대신 말해줄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을 깨고 정말 화가 난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슬그머니 스와카가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저택에서 용병은 저희 둘 뿐이라서요..." 그 뒷말은 말 안해도 알수 있었다. 능력이 있어서 애쉬 녀석에게 선택 되었다지만 기사들의 드높은 자만심이 찬 시선들을 없앨수는 없었겠지... "좋아요, 그럼. 나 혼자 나가는 것도 약간은 걱정 되었는데... 그럼 갈까요?" 나는 나를 따라오겠다고 나서는 아빠의 사병 기사들을 뿌리치고 스와카와 반담만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물론 나와 스와카, 반담의 얼굴을 모르는 저택의 호위병들을 위해서 수도의 저택을 떠날 때 아빠가 주신 플레이저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금패를 소지하고 말이다. "와, 복작 복작 하네요." 저택을 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8두 마차 네개가 나란히 가도 충분히 갈 수 있을 만큼 넓은 대로가 쫘악 펼쳐진 길거리에, 그 넓은 길이 복잡하게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마차들이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제 2의 도시라는 소리를 듣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평소 보다 더 북적 대는 건 아무래도 이번 사태를 위하여 모집한 용병들과 지원군들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 스와카도 주변을 돌아보며 나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그리고 만약을 대비하여 여러명이서 조를 이룬 기사와 병사들, 혹은 용병들이 자신의 무기를 소지한 채 순찰하는 듯한 모습으로 지나다니는 모습들이 자주 눈에 띄였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순찰조들이 많아졌군요." "뭐, 병사들이 많아졌으니까요. 덕분에 치안은 훨씬 좋아졌겠네요." 그러자 스와카가 피식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시리안님께선 여행을 많이 하셨다면서 이 곳은 와보지 않으셨나 보군요?" "예? 왜요?" "이 곳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이 곳은 수도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떨어지지 않는 치안 유지가 되어 있거든요. 확실히 전국에서 수도로 이동되는 물자의 50%가 통과되는 곳이니만큼 치안이 철저하죠." "아, 그렇군요. 몰랐어요. 그런데 스카야는 잘 알고 있네요? 몇번 와봤었나 보죠?" "그거야, 아무래도 용병 일이라는게 이렇게 큰 도시에 많이 있으니까요. 여기도 물자 수송 경비로 여러번 왔었죠." "헤에, 그럼 지리라던지, 구경할 거리들을 잘 알고 있겠군요?" "그렇지도 않아요. 일거리 찾으러 왔기 때문에 숙박하는 곳이랑 용병단 길드 정도만 왔다갔다 거렸거든요. 뭐, 거기에 더한다면 의뢰인의 집 정도? 저도 이렇게 구경하러 나온건 처음이예요." "에? 그런가요? 흐음... 그럼 어디 갈건지 정해달라고 할 수가 없겠네요?" 그러자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스와카와 내가 하는 대화만 묵묵히 듣고 있던 반담이 갑작스레 말을 건넸다. "이때쯤이면 아마도 아몬트 시립 학교 축제기간일거다. 뭐, 올해는 하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스와카가 반담의 말을 듣고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하고 내리쳤다. "아, 맞다. 학교 축제 기간이지?" "학교 축제요?" 이곳 사정을 전혀 모르는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즉각 시피르가 설명해 주었다. "예. 이곳 시립학교는 수도에 있는 소브르 왕성 학교 다음으로 쳐주는 명성이 드높은 학교입니다. 보통 13세가 되면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는데요, 평민이든 귀족이든 가리지 않고 학교에서 지정한 테스트에 합격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더군요. 완전 실력제이지요. 덕분에 실력 좋은 애들이 들어가서 하는 축제라 볼거리가 많답니다. 검술부 마법부, 그리고 일반 문학인 경제학, 정치학 이렇게 네 분야로 나뉘어 있죠. 보통 학교는 기사와 마법사만 배출해내는데 비해 좀 종류가 다양하다고나 할까요?" "그래요? 그럼 다른 곳 보다 보여주는 것도 많겠군요." "예. 아마 지금쯤 할겁니다. 매년 이맘때쯤 했으니까... 어쩌시겠습니까? 한번 거기로 가보시겠습니까?" "그러죠. 어차피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으니까요." "그러시죠." 일단 그렇게 목적지가 정해지자 스와카가 앞장섰고 나와 반담은 그의 뒤를 따랐다. 그 학교는 남작의 저택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의 무지 무지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뭐, 각자 가르키는 것이 다른 4개의 분야마다 4층 짜리의 널~~~찍한 건물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검법부와 마법부는 분야의 특징에 맞게 커다란 운동장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와 선생님들의 기숙사, 그리고 식당에 4 분야를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책들을 소지하고 있는 5층짜리의 거대 건물로 이루어진 중앙 도서관, 그리고 축제나 입학, 졸업 등등을 위한 학생광장까지... "이거, 혹시 왕성보다 더 큰거 아니에요?" 넓이의 어마어마함에 내가 놀라서 스와카를 돌아보자 스와카가 피식 웃어 보였다. "뭐, 일간 소문에는 그런 말이 있기는 하더군요." 그런데 그런 넓은 대 운동장에는 시장 바닥이 무색하리만치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대 운동장의 중앙 무대 위에서는 약 14~6세 정도 되어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경갑옷을 착용하고 마치 진짜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사람들인 양 삐까번쩍하는 무기들을 들고 대열을 맞추어 단체 검법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들인 듯 나이대가 거의 엇비슷해 보였다. "흐음, 오늘은 검법부의 날인가 보군요?" "??" 내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스와카를 돌아보자 그는 기꺼이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그러니까 보통 각 부별로 구역을 나누어서 축제행사를 하도록 하는데요, 동아리 같은 소그룹들 까지 있다보니 그런 걸 다 돌아보기는 어렵지요. 특히 멀리 다른 지방에서 오신 학부모들께선 더욱 더요. 해서 생각해 낸 것이, 각 학부마다 날을 정해서 대 운동장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지요. 오늘은 검법부에서 사용하는 날인가 보군요." "아..." 스와카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다시 무대위로 시선을 돌렸다. 맨 앞에서는 그 아이들중 나이가 들어보이는 축이, 그러니까 좀 더 능숙하게 기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고 그 뒤쪽에는 나이도 어리고 기술이 약간은 서툰 아이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날씨가 더운데도 갑옷까지 착용하고 선보여서 그런지 아이들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하나 둘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모두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어른들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혹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무대 위에서 단체 검술을 선보이던 것이 끝났는지 아이들은 단상 중앙 앞쪽에 밀집 대형을 이루어 섰고 그들 중 맨 앞 중간쯤에 섰던 남자 아이가 앞으로 한걸음 나왔다. "이것으로 저희 용기조의 단체 검술 시법이 끝났습니다. 끝까지 보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일동 차렷!!" 아마 조장인듯한 아이의 커다란 호령에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이 뒷꿈치를 착 하고 붙이며 다시 자세를 고쳤다. "경롓!!" 그러자 아이들은 한 손을 이마 위로 들어올려 힘차게 한 목소리로 외쳤다. "용기!!" 관중석에 있던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 아이들의 표정에는 무사히 시범을 끝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자랑스러움이 빛나고 있었다. "바로!! 좌우향 우!! 앞으로 갓!!" 그러자 조장을 포함한 맨 앞에 있던 두 줄이 열을 맞추어 단상 밑으로 뛰어 내려갔고 그들이 거의 다 내려갈 때 쯤 그 다음 두줄이 또다시 뒤를 이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다음 또 다른 일렬의 아이들이 단상 위로 뛰어 올라왔다. ▩ 제목 제 8화 폭풍 전야(3) 이번 아이들은 절반은 창을 들고 있었고 절반은 검을 들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밀집 대형으로 중앙에 맞춰 스자 맨 앞의 중간쯤에 서 있던 조장이 앞으로 나왔다. "전체 차렷!!" 착~!! "경롓!!" "창검!!" 뜨거운 박수가 다시금 쏟아졌고, 잠시 후 박수소리가 잦아지자 소년이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는 저희 창검조의 대련 시범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일동 제자리로!!" 소년의 외침과 함께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멀리 흩어진 대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년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서 자신의 파트너인 소년을 노려보며 검을 들어 자세를 잡더니 크게 소리쳤다. "이얍!!" 그 기합성을 시점으로 검을 든 아이들은 똑같은 동작으로 창을 든 아이들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고, 창을 든 아이들은 창 대를 옆으로 잡아 올려 그 검을 막아냈다. "타앗!!" 같은 기합으로 동작을 맞추며 여러가지 창과 검의 대련 시범을 한창 보이고 있는데 갑자기 쨍그랑~~!! 하는 금속음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마침 기합도 없어 조용하던 단상 위라서 그 소리는 더욱 더 크게 들렸고 그와 함께 아이들의 동작이 일순간이나마 멈춰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소리의 근원지로 쏠렸다. 가운데 줄 쯤에 있던 약 14세 정도의 소년이 손에 들고있던 검을 놓친 것이었다. 검을 놓친 아이는 창피함과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얼굴이 붉어졌지만 얼른 다시 검을 주워들고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여기 저기에서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아이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맨 앞에있던 조장 소년이 그 아이가 자세를 다시 잡은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기 합 소리로 아이들을 다시 움직였다. "하압!!" 그와 함께 다시 대련은 시작되었지만 아까처럼 부드럽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은 그 소년에 대한 안쓰러움과 비웃음으로 바뀌어 버렸다. "아유 참, 저 애가?"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고 곧 이어 무덤덤한, 그녀의 남편인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수도 있지. 너무 긴장해서 그런 걸 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괜찮아, 괜찮아. 한번 실수한걸 가지고..." 이게 왠 인연인지, 그 소년의 부모인듯한 사람들이 하필 우리 일행 옆에 서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인 듯한 여인은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약간 창피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런 그녀를 남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독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챙그랑~~!! 또 누군가가 자신의 무기를 떨어뜨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소년이었다. "루이~~!!" 소년의 어머니는 울상이 되어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었고 단상 위의 소년은 두 번의 실수에 어쩔 줄 몰라하며 검을 주을 생각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 망설임이 길어지자 앞에 서 있던 조장 소년이 눈짓을 주자 눈물이 그렁 그렁한 얼굴로 엉거주춤 검을 주어 들었지만 자세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년의 아버지가 두 손으로 자신의 입가에 나팔 모양으로 가져다 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루이, 괜찮다. 힘내라~!!" 루이라는 소년은 아빠의 격려로 인애 얼굴이 환해지며 아빠와 시선을 맞추더니 얼른 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닦은 뒤 고개를 끄더이며 자세를 취했다. "타앗~!!" 다시 조장의 기합 소리와 함께 루이도 진지한 자세로 열심히 검을 뻗었다. 하지만 열정이 좀 과했던 것인지... 루이는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창을 흘려내리려고 하다가 힘이 좀 과했는지 창을 옆으로 튕기는 동시에 검 또한 손에서 튕겨나가버렸다. 탱, 탱... 떼구르르르... 바닥에서 한번, 두번, 튕겨나간 검은 자리에서 뱅뱅 몇번 돌더니 서서히 멈춰섰고 그와 함께 루이의 고개는 밑으로 푹 숙여져 올라오지 못했다.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모두들 끝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루이와 같은 조의 아이들도 절망감에 젖어 하나 둘 손에 든 무기들을 내렸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라, 루이. 끝까지 해내는 거다. 넌 할 수 있어!!" 어느새 단상 바로 앞까지 나갔었는지, 루이의 아버지는 사람들의 맨 앞에 서서 주먹진 손을 위로 치켜들어 흔들며 크게 소리쳤다. "하, 하지만..." 물론 멀리 있던 나는 겨우 입술이 움직이는 것만 보였지만, 분명 그렇게 중얼 거렸으리라. 쬐끔 치켜든 고개로 완전 절망에 젖은 소년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젠 정말 못하겠다는 듯...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괜찮다. 괜찮으니까 힘내거라. 넌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거야!!" 루이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아이들도 다시 자신들의 무기를 들어 자세를 취했고 조장이 그런 아이들을 격려하듯 힘찬 기합소리를 다시 토해냈다. 잠시 후 아이들의 시범이 끝났고 조장의 호령에 맞추어 밀집 대형을 이루었지만, 모든 아이들의 표정은 시무룩해 있었다. 사람들도 그것을 알았는지 기운을 차리라는 격려의 박수를 간간이 보내줄 뿐, 잘했다는 칭찬의 뜨거운 박수는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 앞으로 한 걸음 나온 조장은 시무룩해있지도 절망에 빠져 있지도 않았다. 그는 유난히도 반짝 반짝 거리는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으로 저희 창검조 대련을 마칩니다. 그리고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것 보다 더욱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가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소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러분은 방금 불행한 실패로 끝나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영광스런 승리를 거둔 한 소년을 보셨습니다. 루이는 얼마든지 중간에 포기하고 단상 밑으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몇번을 실수 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와 배짱을 필요로 하는 일일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저희가 보여드린 시범보다 훨씬 더 멋지고 훌륭한 시범들을 보실지도 모릅니다만, 제가 자신있게 말씀 드린 것은 오늘 저희조가 보여드린 시범 만큼 기사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나타낸 시범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저희 조는 앞으로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기사가 될 것이입니다. 마지막으로 실망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격려해 주신 루시 아버님 정말 감사 드립니다." 소년 단장의 말을 듣고 있던 그 조의 아이들은 하나 둘 표정이 살아나기 시작하더니 말이 끝날때 쯔음에는 모두 다 자랑스러움과 감격에 눈동자들이 빛나고 있었다. "전체 차렷!!" 구령이 떨어졌다. 아이들은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차고 절제된 동작으로 몸을 경직 시켰다. "경롓!!" "창검!!" 수십명이 아니라 마치 수백명이 함성을 지르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우렁창 뜨거운 박수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것은 소년들이 단상을 다 내려갈때 까지 계속 되었다. 잠시 후, 우리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루이의 부모님께 루이가 달려와 폭 안겼다. "어서 오너라. 잘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힘차게 안아주었다. "아버지, 전 나중에 우리 조장 같은 멋진 조장이 될거에요" 나중에 아버지의 품에서 빠져나온 루이가 저 멀리 있는 자신의 조장을 자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속삭인 말이었다. 아린이야기] 2부 제 8화 폭풍 전야(5) 두 형제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로 얼굴만 마주보고 있는데 그 둘에게 잡혀있던 여자가 꽥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에요? 보고도 몰라요? 이 나쁜 사람들이 연약하고 가녀린 날 끌고 가려고 하잖아요?" "연약하고 가녀린..." 스와카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 거렸다. 그리고 그의 심정을 반담이 딱 한마디로 대변해 주었다. "어디가?" "크아아아~~~ 뭐에요, 뭐? 나 같은 청순 가련한 미인을 어디서 또 봤어요? 이런 미인이 나쁜 사람들한테 끌려 가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나쁜 사람들 편을 들다니이이이~~~!!" 여자는 기사들에게 잡혀있던 손을 강하게 뿌리친채 방방 뛰었다. "누, 누가 누구 편이라는 겁니까?" 스와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여자는 즉시 뛰는 걸 멈추고 스와카의 멱살을 붙잡아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누구긴 누구에요? 당신 일행이지. 당신 일행이 저기 있는 기사들과 한패거리잖아요?" 여자는 혼자 소리를 빽빽 질렀고 스와카는 패닉 상태에 빠져 버렸다. "저기..." 결국 보다 못한 내가 스와카에게서 그녀를 떼어 놓으려고 했는데 그녀가 나에게 매섭게 고개를 확 돌리더니 무척이나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을 잃었다. "에? 저, 저기요?" '아니, 얘가 갑자기 왜그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는 약간 더듬거리며 여인의 어깨를 슬쩍 쳤다. 그러자 그 여자가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짚더니 비실비실 거리면서 내 쪽으로 몸을 쓰러트렸다. "아, 어지러워...." "저, 저기요? 이봐요, 괜찮아요?" 너무 놀란 나는 여자를 얼결에 받아들고 흔들자 여자의 감긴 눈이 슬쩍 뜨여지더니 애처러운 얼굴로 내 옷깃을 잡고 울먹였다. "흑흑, 멋진 용사니이이임.... 전 결국 저 불한당들에게 끌려가야 하는 걸까요? 절 도와주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네요..." "저, 저기요..." 여자의 180도 바뀐 행동에 나는 어쩔 줄 몰라 기사들만 쳐다 보았다. '얘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란 시선을 팍팍 보내면서... 기사들은 10년은 더 늙어보이는 얼굴들로 한숨을 내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순간 "으아아악~~~!!" "꺄아아악~~~!!" 여자와 난 동시에 비명을 지르면서 후다닥 소리와 함께 서로 멀찍이 떨어져 버렸다. "뭐, 뭐야 저 여자?" 나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어쩔 줄 몰라한 채 내 가슴을 감싸 안으며 그녀를 노려 보았다. 그녀는 나와 떨어져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며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 여자였어?" "도, 도대체 무슨 여자가 어딜 만지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여자에게 화가 나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랬더니 여자도 곧 패닉 상태에서 빠져 나와 지지않고 소리쳤다. "뭐가 어째서 그러는 거얏? 여자가 여자 가슴좀 만졌기로서니.... 한번 만졌다고 닳아 없어지냐?" 그러더니 쳇쳇 하면서 땅을 찼다. "쳇, 정말... 오랜만에 멋진 남정네를 만났다 했더니만... 여자였다니... 왜 여자가 남장을 하고 다니는 거람?" "무, 무슨..." 얼이 빠진 나는 평소 화려한 말빨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입만 붕어처럼 벙긋 벙긋 거렸다. 그러자 새파랗게 질린 기사들 중 동생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로리아!! 당장 사과드리지 못하겠니?" 그리고 그의 형은 아직도 얼빵한 자세로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녀님. 동생을 대신하여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도, 동생이요?" 스와카의 얼이 빠진듯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어서 사과드려라." "체, 가슴 한번 만진 것 가지고 뭘 그렇게 놀란담? 같은 여자면서..." "로. 리. 아~~~!!" "아, 알았어요. 알았어... 사과하면 될거 아니에요?" 로리아라고 불린 아마트라 백작의 영애인 듯한 여자는 나에게 삐죽빼죽대며 다가와 그냥 고개만 푹 숙였다. "미안해요." 그러자 곧 하인야 (아마트라 백작의 큰 아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대로 사과 못하겠니?" 그녀는 자신의 큰오빠 얼굴을 힐끔 보고는 약간 주눅이 들어 이곳 여자의 정식 예법으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마트라 백작의 딸 로리아가 공녀께 사죄 드립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사과는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인야를 처다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 동생분이시라고요?" 두 아마트라 백작의 아들들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고 곧 하인야가 입을 열었다. "하아, 공녀님께 정말 죄송하게 생각 합니다. 이 녀석은 저희 집 막내인 로리아 입니다. 위로 저희 둘만 있다가 나중에 딸을 낳으시자 부모님께서 무척이나 귀여워해주시는 바람에 약간 철이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그러자 로리아의 입이 즉각 뾰루퉁해졌다. "내가 뭘..." 즉시 하인야와 엑셀룬(하인야 동생)의 눈이 치켜 떠졌고, 엑셀룬이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리아, 너 어떻게 여기 있는거지? 아버지께서 분명히 집에 있으라고 하지 않으셨니?" 로리아는 갑자기 먼 산을 쳐다보면서 딴청을 부렸다. "어머, 그랬었나?"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하인야의 말... "저희 가족이 이곳으로 지원을 온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신도 따라 오겠다고 떼를 썼지요. 어렸을때 하도 조르고 졸라 검술좀 가르쳐 줬더니만, 그 실력을 믿고 나서는데 어떻게 데려올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그래서 아버지께서 불호령을 내려 집에 가두어 놓고 나왔건만,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이곳 용병단에 가입해 있더군요." 왠지 로리아 성격상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서 로리아를 발견하고 데려가시는데 저희와 만난 것인가요?" "하아, 그렇습니다." "집으로 돌려보내시겠군요?" 하인야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로리아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난 안가!!" "로리아!!" "안갈꺼야." "아버지께서 가만 두지 않으실거다." "그래도 싫어. 여기 있을래." "여긴 위험한 곳이야."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 "너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했잖아!! 죽을 수도 있단 말야!!" "오빠들이 있잖아." 그러자 그 동안 엑셀룬과 로리아의 말다툼을 지켜만 보고 있던 하인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우리도 널 지켜줄 수 없을거야." 조용한 목소리 였지만, 평소 그의 존재에 대한 무게가 컸던 듯 로리아와 엑셀룬이 입을 다물었다. "하, 하지만..." 그래도 가기 싫었던 듯 로리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하인야는 가차 없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집으로 돌아가." 로리아의 입술이 댓발은 튀어 나왔다. 그녀가 막 입을 열어 반항을 하려는 찰나, 나와 스와카는 갑자기 흠짓 몸을 떨었다. "어?" "이건..." 스와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방향을 바라 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읽혀진 것이다. 누군가가 강한 마법을 난사했다는 증거. "왔나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하인야가 물었다. "무슨..." "그녀가 온 듯 합니다. 피의 마녀가..." 스와카가 대꾸를 했고, 나와 반담은 그 즉시 몸을 날렸다. "성문 쪽이야!!"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8화 폭풍 전야 (4) "참,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 모습이었어요." 우리가 학교를 나와 시내 중심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스와카가 밑도끝도 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 아이도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버지가 너무 훌륭하신 분이세요." 내가 스와카의 말을 받으며 말하자 동감이라는 듯 스와카와 반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기사가 되겠지." 반담도 가만 있을 수 없는지 한 마디 하며 쓸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스와카도 그와 같은 심정인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쓸쓸한 음색으로 중얼댔다. "하아, 나도 가정을 가졌으면... 싶은데요? 평소 독신으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더니만... 나도 내 아이에게 훌륭한 아버지가 되고 싶군요." "해도 괜찮겠지. 늦은 건 아닌 나이니까..." 그러자 스와카가 반담을 휙 돌아보았다. "우리, 이번 일만 끝낸 다음에 정착할까?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나 짓고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거야. 어때?" "것도 좋지." 스와카는 벌써부터 그 일을 상상하는 듯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맞아, 내 마법이랑 네 힘을 합하면 농사 쯤이야 문제도 안돼지.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식물이 잘 자라나는 약을 개발하기라도 한다면 끝내줄거야. 그러면 유명해질 거구... 아, 내 자식도 마법사로 키워야지." 심각한 얼굴로 스와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반담이 결정타를 날렸다. "다 좋은데, 문제는 너랑 결혼할 여자가 있느냐 하는 거겠지." 그 순간 스와카가 돌이 된 듯한 느낌이 되는 건 내착각이려나? 그 모습에 반담이 휴우~ 한숨을 쉬더니 중얼거렸다. "얼굴 멀쩡하고 성격 좋고 기술도 있는 녀석이 왜 여자한테는 인기가 없나 몰라..." "어? 스와카가 여자한테 인기가 없어요? 그거 참 이상하네요,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그게 미스테리지. 호감을 갖는 여자는 많은데 이상하게도 끝까지 남는 여자가 없거든..." 그러자 겨우 석화 상태에서 풀려난 스와카가 외쳤다. "그, 그거야 내가 용병이니까 그렇지!! 내가 용병만 아니었어도..."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담이 가로채 버렸다. "난 용병이라도 기다려 주겠다는 여자가 있었는걸?" 그 말에 스와카는 폭삭 주저앉아 땅만 긁어댔지만 나는 그 모습보다는 반담을 기다려 주겠다고 한 여자가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우와, 그게 정말이예요? 반담, 대단하네요?" 반담은 약간은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은 그 여자 결혼 했지만..." "하.하.하..." 갑자기 우리가 서 있는 길 위에 썰렁한 바람이 낙옆까지 몰고서 휘몰아치는 건 왠일인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우리는 밥이나 먹으러 가자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남작의 저택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이왕 나온거 이렇게 금방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늦게 들어가기로 하고, 우선은 배부터 채우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대로로 나가기 위하여 골목의 한 귀퉁이를 지나 어느 공터를 지나가는데 나는 진귀한 장면을 목격했다. 기사임이 분명한, 경갑옷도 아니고 완전 무장의, 것도 가슴 보호대에 뚜렷하게 가문의 문장까지 그려진 갑옷을 입은 두 명의 기사가 어떤 여자를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크게 소리치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두 남자, 것도 기사의 힘을 이겨내기는 역부족이었는지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안가, 안간다니까!!" "시끄럿, 빨리 따라와." "싫어. 안 갈거야." "말 안들을래? 자꾸 이렇게 반항하면 엉덩이를 한대 때려준다?" "싫어, 싫어, 싫어, 싫다니까. 싫다고 했잖아!!" "차라리 들쳐 업구가. 그게 빠르겠다." "그럴까?" "싫어어어어어~~~!!" 두 남자는 여자의 반항이 너무 심해서 끌고가기가 여의치 않았는지 의견을 나누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여자의 팔뚝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고, 여자에게 계속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왠지... 불량 기사들이 죄 없는 처녀를 겁탈하기 위해 끌고 가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소설의 한 장면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어색한 감이 있는 그 장면을 보고 식은땀을 흘리며 말하자 스와카와 반담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마도..." 덕분에 우리는 그녀를 도와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몰라 (괜히 우리가 오해한거면 망신떠니까...) 멀뚱히 그들만 보며 서 있었다. 두 기사는 결국 그녀를 메고 가기로 결정 했는지 한 기사가 앞에서 그녀를 들쳐 엎으려 했고, 다른 한 기사는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잡고 앞의 기사가 드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엎히지 않으려고 손과 발을 난사하며 도리질을 치다가 한쪽 구석에서 멀뚱 멀뚱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아까와는 달리 공포에 찬 듯한 새된 비명을 지르기 시작 했다. "꺄아아악~, 도와 주세요오오오~~~ 강도야, 납치범이야, 인신매매단이야아아아~~~, 나쁜 사람들이 날 잡아가려 해요오오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 순진한 처녀가 위험에 부딧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그러면서도 할말 다 하는 그녀의 비명에 우리는 순간 황당함에 젖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왠지 그냥 가는게 나을 것 같은데요?" 스와카가 이마에 송송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나와 반담을 돌아보자 우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 "저도요." "그럼 갈까요?" 스와카의 손짓에 우리는 슬금 슬금 게걸음 비슷하게 옆으로 움직여 가자 그녀가 그 모습을 봤는지 빽 소리쳤다. "이봐요오오오~~ 거기, 멋진 용사님 세부우우우운~~~ 이 가여운 여자 좀 도와 주세요오오오오~~~ 도와주지 않으면 처녀 귀신이 되어 한 맺힌 얼굴로 밤마다 찾아갈꺼야아아아~~~" 처녀 귀신이 여기에도 있었는지... 그녀의 저주 비스무리한 협박에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런데 그때 여자를 들쳐 엎으려다 여의치 않아 다시 땅에 내려놓던 기사 둘이 그녀의 말을 듣고 우리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얼굴을 본 나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나를 본 그들은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저들도 나를 아는 것이라 생각한 나는 슬금 슬금 그들에게 다가갔고 기사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갔다. "저, 저기..." "공녀님, 이건..." 공녀? '내가 공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 곳 시장인 남작하고 여기 파견된 지원군의 지휘층인데?' 나는 그 둘의 얼굴이 지원군 지휘층에 있던 얼굴들인지 다시 곰곰히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나 내가 기억해내기도 전에 뒤에 있던 스와카가 말해줬다. "아하, 아마트라 백작님의 두 자제분이셨군요?" 그제야 생각 난 나는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내리쳤다. "맞다. 아마트라 경들 이셨군요." 두 기사의 얼굴은 당황감으로 물들었다. "저, 저기... 공녀님을 이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두 형제 중 형쪽인 하인야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예, 참 놀라운 일이죠?" "하.하.하.... 그렇군요..."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이신지 알고 싶은데요?" 제 9화 첫 대면 정신없이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뛰어 가는데 마력의 기운이 한번 더 강하게 느껴져 왔다. "한번 더 사용한 모양입니다." 어느새 달려 왔는지, 옆에서 스와카가 열심히 달리며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리고 그때서야 성벽 위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종이 미친듯이 울려대기 시작했고, 여기 저기 걸어다니고 있던 병사들과 용병들은 그 소리를 듣고 사방으로 뛰어 나갔으며, 시내 곳곳을 걸어다니고 있던 시민들도 서둘러 대피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덕분에 길거리는 아까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혼란스러워 졌고 우리는 사람들의 아우성 때문에 뛰어갈 수가 없었다. "젠장, 날아가요." 나는 실프를 대여섯명을 불러내어 나를 따라온 스와카, 반담, 그리고 아마트라 백작의 두 아들, 혹으로 따라온 로리아까지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마 걸리지 않아 우리는 성문 위에 내려졌다. 성문 바깥쪽 멀리에서는 마법 난사의 영향인듯 땅들이 움푹 움푹 파여 있었고 채 꺼지지 않은 불꽃들이 곳곳에서 타오르고 있었으며,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몇명의 병사들이 사람들 뒤쪽에 서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한 사람을 막기 위하여 자신들의 무기를 들어올렸지만, 막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성 바깥쪽에서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 먼저 성 안으로 들어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어, 그 크던 성문도 너무 작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성 안쪽에 있던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바깥쪽으로 나가지 못했고, 그러자 맨 처음 침입자를 막으러 뛰어 나갔던 병사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데도 그들은 지원해주지 못했다. 결국 몇명 있지도 않던 병사들은 모두 다 쓰러졌고 그제야 자신을 방해하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인영은 천천히 성문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맨 뒤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앞쪽의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밀어댔지만, 앞쪽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성문으로 들어오려해 오히려 한 줄로 서서 들어오는 것 보다도 더욱 느리게 들어오는 역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인영은 계속해서 걸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나라를 떠들썩 하게 했던 원인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마구 엉클어져있는 붉은 머리가 얼굴을 절반쯤 가린데다 옷들은 먼지 투성이에 너덜너덜 다 해져 있었다. 오른손에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검집은 어디에다 내팽겨쳤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온 몸에는 붉은색의 마나가 마구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해 머리가 멍해졌다. '달라... 이게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혹시...' 그녀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부터 불과 10여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주문도 외지 않은 채 곧장 마법을 실현해 보였다. "이런, 아이스 미사일!!"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듯 그녀의 손에서 날아오는 불덩어리에 스와카의 얼음덩어리들이 날아가 박혔고, 곧 둘은 공중에서 폭발하여 소진되고 말았다. '역시....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원래 이런 건가?' 그러나 나는 더이상 생각을 잊지 못했다. 그녀가 또 한번 마법을 발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정확히 스와카와 내가 있는 성문 위쪽을 향해. "제기랄... 윈디 실드!!" 스와카가 목소리를 짜내듯이 외쳐댔고, 아마 그가 최대한 마력을 끌어 모아 펼쳤으리라 생각된 실드가 넓게 형성되어 날아오는 불덩어리들을 막아냈다. 그냥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곳이 파괴된다면 밑에 있는 사람들까지 위험해지므로 필사적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스와카는 그걸 마지막으로 마력을 다 썼는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모습을 왠지 무감각한 시선으로 한번 잠깐 바라본뒤 밑으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나오든 말든 실프들을 불러내어 내 몸을 떠받치게 한 후 사람들과 그녀의 사이에 사쁜히 내려 앉았다. 그녀의 눈은 엉망인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는 빛이 나를 향하자 마자 약간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엄마...] 그래서 조용히 불러 봤다. 혹시나 나를 알아볼까 싶어서... 하지만 그녀는 나의 부름에 아무말 없이 조용히 검을 들어올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피묻은 검에는 새빨간 검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역시나... 인가?" 우울했다. 엄마가 날 못 알아볼거라는 건,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듣는 것과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는 법,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말씀 해 주실때는 놀라움도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설마...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정작 내 앞에서 나를 못알아 보자 제일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절망이었다. "결국..." 그리고 분노가 느껴졌다. "바보같이... 왜 약속은 못 지켜서..."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라고 했던가... 그 마법사와 어떤 약속을 했는지 몰라도, 그깟 약속 하나 못 지켰다고 이렇게 파멸되어 버리다니... 예전에 엄마는 거칠 것 없이 당당하고 멋을 아는 멋진 여자 드래곤이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정신이 파멸된, 스스로 파멸되어 가고 있는 드래곤일 뿐이었다. '네 엄마가 아니야. 이걸 명심하거라.' 레어를 떠나기 전, 할아버지가 신신 당부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런 것 같아요, 할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도 못 알아보는데... 게다가 기운도 많이 잃어버렸네요...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내 앞에서 나에게 검을 겨누는 여인이 뿌옇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 사정은 알바 아니라는 듯 검기에 쌓여 날카롭게 빛나는 검을 치켜올려 휘익 옆으로 내리 그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에게 죽어줄 수는 없는 거니까..." 입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나는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기에는 예전에 아빠에게서 받은 팔찌가 차여져 있었는데 이 팔찌는 나의 마나를 주입받아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빛을 내더니 곧바로 내 앞에 든든한 실드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이 실드와 충돌하더니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녀의 눈빛이 놀랐는지 흔들렸다. 그리고 한걸음 뒤로 신중하게 물러선다. 물론 정신은 온데간데 없을것이고, 오직 본능으로 그러는 거겠지만... 그 모습에 다시한번 마음이 아팠다. "그거 알아요? 내 엄만 굉장히 나쁜 엄마예요. 예전에 내 새엄마보다도 훨씬, 백배, 천배는 더 나쁜 엄마에요." 물론 그녀가 들어줄 리는 없었지만, 나는 계속 중얼댔다. "딸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엄마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요? 안 그래요?" 나는 그녀에게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의 엄마는 1년 전에 돌아가신 거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는 파멸되어가는 존재일뿐, 단지 그것 뿐이다. 드래곤에게 스스로의 파멸은 수치스러운 일, 그렇기에 나는 그 존재가 내 엄마의 껍데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녀의 수치스러운 나날을 조금이나마 짧게 해주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녀가 다시 왼손을 들었다. 아까보다 그녀 주위의 마나가 더욱 더 강렬하게 요동을 친다. 그 모습에 나는 얼른 눈가를 훔치고 신중하게 그녀를 노려 보았다. 이번에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헬 브라스트!!" 7 서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공격 마법. 오로지 한 상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마법으로 8클래스의 마력 이상이 아니면 결코 막을 수 없다. 나는 최대한 마나를 끌어내어 팔찌에 집중 시켰다. "실드!!" 그녀에게서 피빛의 붉은 마력 줄기들이 뻗어나오더니 사정없이 나에게로 찔러 왔다. 그러나 내가 형성한 실드에 부딧혀 엄청난 폭발을 해버리고 말았다. 비록 실드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뜨거운 열기와 무서우리만치 강한 압력이 나에게 휘몰아쳐왔다. 이건 예전에 내가 실수로 블랙 드래곤 레어에 쳐들어 갔을 당시 그의 브래스를 막아낼 때보다 더욱 더 힘들었고 - 그때야 그가 봐준 거였으니.... -또 두려웠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텨내자 어느새 그녀의 공격은 끝이 나있었고 대신 내 발은 땅 속에 묻혀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인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다려!!" 나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땅이 내 발을 꼭 붙들고 놔주지를 않았다. "젠장!!" 그리고 내가 땅에서 발을 빼내는 동안 그녀는 흰 빛에 둘러쌓여 어디론가 이동해버리고 말았다. "놓칠 수 없어!!" 재빨리 그녀의 마나 흐름을 읽었지만, 내가 좀 늦은 상황이라 방향과 대충 거리는 잡아냈을 뿐, 정확한 지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9화 첫 대면 (2) 처음 본 그녀의 모습과 충격에, 그리고 그녀를 놓쳤다는 허탈감이 몰려와 나는 그렇게 성문 밖에 홀로 멍하니 한참동안 서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브랜을 비롯한 지도층들과 윌슨, 라몬트가 뛰어 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공녀님, 그녀는?" "아시리안, 괜찮아요?" 여기저기에서 정신없이 질문이 쏟아졌지만, 나는 일언반구 없이 멍하니 내 앞, 아까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서 있었던 허공을 노려보다가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윌슨을 쳐다보았다. "윌슨, 당신 일은 어떻게 됬죠?" "에? 아니, 그게... 아직 다..." 윌슨은 갑자기 지적을 당해 당황하면서 어물거렸고 나는 재차 물었다.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어요?" "예? 아, 아마도..." "좋아요. 아르하나즈경!!" 나는 그의 옆에 있던 라몬트를 불렀다. "옛!!" "내일 돌아갑니다. 플레이저 가문의 사병들은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갈 수 있도록 조처해 주세요." "예? 아, 예." 그는 의문나는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지만 내가 매섭게 노려보자 부동 자세를 취하며 대꾸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애쉬 녀석의 화난 음성과 남작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마음 대로 돌아가다니요?" "고, 공녀님... 지금 돌아가시면 저희는 어쩝니까? 내일이라도 다시 쳐들어 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슬금슬금 내어주는 길을 통하여 성문으로 무작정 걸어들어가버렸다. 그러자 애쉬 녀석이 내 어깨를 잡으며 강하게 외쳤다. "아시리안 플레이저 공녀!!" 나는 고개를 돌려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녀석이 내 어깨를 잡은 손을 탁 쳐냈다. "치워!!"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걸어갔다. 하지만 놈은 다시 내 팔을 부여잡고 강하게 돌려 세웠다. "이게 무슨 짓이요? 당신 혼자서 마음대로 돌아가다니... 아무리 당신이 플레이저 공작가의 영애라고 하나 그건 허락할 수 없소." 나는 녀석이 잡은 팔을 뿌리치며 비웃어줬다. "웃기고 있네, 네가 뭔데 허락한다 만다야?" 나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녀석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여기 온건 아빠의 명령 때문이지 황제의 명령 때문이 아냐. 그러니 내가 너한테 허락 받을 필요가 있나?" 그 말에 녀석은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럼 사병들은 놓고 가시오. 당신은 황제의 명을 받지 않았을지 몰라도 당신 가문의 병사들은 명을 받들어 온거니까." 나는 대꾸도 안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결국 참지 못하겠는지 녀석은 스르릉 검을 빼들어 내 목에 겨누었다. "이것이 마지막이오. 사병들은 놓고 가시오. 당신에 대한 건 나중에 공작께 직접 고하고 처벌하겠소. 허나 이 마저도 무시 한다면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내가 이자리에서 직접 처단하겠소." 그의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 웃기고 있네... 왕자가 있는데 왜 네놈이 나서는 거지?" 그 말에 애쉬와 그 옆에 파랗게 질려 안절부절 못하는 브랜이 동시에 몸이 굳었고, 애쉬는 약간 망설이더니 뻣뻣한 동작으로 다시 검을 집어넣으며 브랜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신의 무례함을 벌하여 주십시오." 브랜은 무척 당황한 동작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만 됐어요, 레드포드경.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리고, 공녀님." 브랜이 부르자 나는 무시할 수 없어 그를 돌아보았다. "왜 가시려 합니까? 아직 이 곳에서 할 일은 끝나지 않았는데요?" 나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뱉어 마음을 진정 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냥 말했다간 내가 울던지 브랜을 치던지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폭발하지 않으려고 꽉 주고 있던 주먹에 약간 힘을 풀고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힘들게 삼켰다. "그녀는... 아마도 이 곳에는 오지 않을 겁니다. 멀리 가버렸으니까요..." "에? 그게 무슨...?" 브랜이 다시 의문을 제기했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몸을 그대로 돌렸다.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나에게 배당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침대에 달린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 보였는데 그게 점점 뿌얘졌다. "제기랄...." 얼른 팔을 들어 눈가를 눌렀지만 따뜻한 물 한줄기가 눈을 통해 귀 쪽으로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바보야..." [아가야... 가여운 내 아기... 미안하구나... 힘들겠지...] 나는 몸을 돌려 얼굴을 시트 속에 파묻었다. "할머니..." 다음 날, 나는 굳은 얼굴들로 형식적인 배웅을 하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 도시를 떠났다. 어제 내가 그렇게 하고 방으로 들어간 뒤 지도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내 말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보장은 되지 않는다는 의견 하에 나머지 사람들은 좀 더 남아 있기로 했다고 아침에 윌슨이 와서 일러주었다. "그러라고 해요. 어차피 시간 낭비일 뿐이야." 그러자 윌슨이 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여자의 감이죠." "에?"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는 듯 윌슨의 눈이 동그래졌다. "감이라고요. 그녀는 이 곳에 내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안 올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멀리 가버린 거죠."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역시 아버지 보좌관... 그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그런 그를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며 나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바이투 산맥과 소사믹 산맥이 갈라지는 골짜기 쯤일 것 같아요." 그러자 윌슨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인해 굳어졌다. "그럼 혹시나..." "뭐요?" "테아칸 왕국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군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죠." 윌슨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거야 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군요." "그러네요..." 성문을 나서고 우리를 배웅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윌슨이 나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뭐, 이것으로 공작께서 브랜트 왕자 편에 들거라는 의심은 사라지겠군요." "아아..." "알고 그러신 거였습니까?" "뭐가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가 오지 않을 걸 알자마자 일부러 레드포드경과 불화를 일으키시면서 떠나신거 아니었습니까? 각하께서 왕자 편에 들거라는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시큰둥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런거 생각도 안했어요." "에? 하지만 레드포드경께 심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무례하게 대하셨잖습니까? 물론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으시긴 했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예의는 지키셨잖습니까?" "아아... 뭐, 어제는 이성을 잃은거라고 해 두죠." 윌슨은 잠깐 놀란듯 하였지만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흐음... 어쨌든, 레드포드경과의 불화설이 왕녀쪽으로 들어갈 겁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공녀님을 끌어들이려고 접근할걸요?" "끄응... 그렇겠죠?" 내가 무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십중 팔구 확실할겁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또다시 떠오르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이며 인상을 풀었다. "뭐, 당분간은 그들을 만날 시간도 없을 거예요. 그러면 아빠가 알아서 하겠죠." "그녀를 쫓아 가실 생각 이십니까?" 눈치 빠르게 윌슨이 물었다. "예. 수도에 도착하는 대로 아빠에게 말씀드리고 난 후 최대한 빨리 다시 출발할 생각 입니다." 그러자 윌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예? 뭐가요?" "아뇨, 그렇게 서두르신다면 수도에 들리실 거 없이 이대로 곧장 떠나셔도 상관 없지 않았을까 해서요. 공작께야 제가 보고드리면 돼는 거였고, 공녀님께선 공작님과 떨어져 있어도 마법으로써 대화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의 말에 나는 나도모르게 움찔 하면서 얼굴이 굳어져버렸다. 그게 너무 심했는지 윌슨까지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공녀님?" 하지만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걸 그에게 정곡으로 찔린 느낌에 당황한 나는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못했다. '왜 나는 굳이 아빠한테 가려고 한 거지? 왜 그럴까?' 윌슨은 내 분위기가 안 좋아보였는지 더 이상 부르지 않고 그냥 묵묵히 옆에서 가기만 했다. 그런 그의 배려에 나는 속으로 감사를 느낄 사이도 없이 혼란스러운 머리를 열심히 정리하려 했다. '왜 갑자기 아빠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걸까? 마법으로 봐도 됐을텐데...'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9화 첫 대면 (3) 아빠도 동감이었는지, 갑작스레 집으로 돌아온 날 보더니 눈을 뚱그렇게 떴다. "어? 왜 왔냐?" "나도 몰라요." 그 모습에 심히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갑작스레 내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흐음...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요? 하도 머리를 굴려서 열이 날 줄 알았는데..." "으음... 그러고 보니 약간 미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구... 너 행동을 보니 확실히 어디가 아픈 것 같기는 하다." 아빠는 내 이마에서 손을 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들여다 보았다. "왜그래?" "그 여자 만났어요." "헤에, 설마 그 도시에 나타날 줄 몰랐는데? 그래서?" "제대로 싸우지는 못했지만, 한번 붙었죠." "그리고는?" "그 여자가 튀었어요." "얼루?" "바이투 산맥과 소사믹 산맥이 갈라지는 골짜기쯤으로..." "그래? 그럼 네가 이긴거네?" "그렇다고 볼 수는 없죠.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그녀의 마법 공격을 딱 두번 막았을 뿐이에요." "그래서 표정이 그 모양이야?" "그것때문은 아나구요." "그럼?" "하아... 문제는 내가 '인도자'란 거죠." 아빠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지긋이 쳐다보셨다. "의외네?" "뭐가요?" "아니, 나한테 말해줄 줄은 몰랐거든." "어? 내가 '인도자'인 줄 알았어요?" "아니, 당연히 몰랐지. 단지 너한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란 짐작을 했었는데, 네가 전혀 말해주지 않을 것 처럼 행동했으니까 그런가보다 하구 있었지." "맞아요. 말할 생각 없었어요." 아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약간 갸웃 거리셨다. "흐음, 이거 참... 기쁘다고 해야할지, 섭섭하다고 해야 할지...어쨌든, 식사 시간이니 밥부터 먹자." 그러나 밥 먹기 전, 내가 여행복을 계속 입고 있었던 관계로 나는 아빠한테 끌려가 다시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식사를 하면서 내가 불만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 왜 자꾸 드레스만 입으라고 해요? 바지가 더 편한데..." 그러자 아빠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거야 드래스가 더 예쁘니까 그렇지. " "우웅... 꼭 인형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단 말예요. 그 왜, 애들이 옷도 갈아입히고 머리도 만져주고 하는 그 인형..." "에이, 설마 그럴리가... 넌 인형보다 훨씬 비싼 옷을 입는걸." "우쒸..." "그러나 저러나, 너 올때 그 빨강 머리 녀석이 암 말도 안 하든?" "뭐, 뭐라고 뭐라고 하긴 하던데 무시해 버렸어요." "그 녀석이 가만 있을리가 없지... 녀석이나 그 아비나 꽤 고지식하거든. 에휴, 어쨌든 이번 일로 또 뭐라고 쨍알대겠군." "알아서 하세요." 내가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하니 대꾸하자 아빠가 울상을 지어 보였다. "아린아~, 넌 애비가 귀찮게 되었는데 너무 무정하다..." "그 정도야 아빠한테는 큰 일도 아닐꺼 아녀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딸내미된 도리로 위로는 해줘야 하지 않겠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빨강 머리 녀석에게 한방 먹여줄게요." 그러자 아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어렸을때 부터 내가 교육을 시켰어야 했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빠는 서재에 준비되어 있던 서류더미에 파묻혔고 나는 느긋하게 책 한권을 뽑아 서재에 마련된 큰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 책을 펴들었다. 잠시 동안은 아빠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와 사인하는 소리,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큰 서재 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그 침묵을 깨고 아빠를 불렀다. "아빠." 물론 나도 아빠도 서로 자신이 할 일을 하느라 고개도 들지 않은 채였다. "응?" "아빠는 '파멸되어가는 존재'를 본 적 있어요?" "아니, 흔한 일이 아니잖니." "글쿤요." "이번에 '파멸되어가는 존재'가 된 이가 세르니안 이냐?" "예." "하긴, 그러니까 네가 '인도자'가 된 거겠지만... 예전에 고룡들께 '파멸되어가는 존재'는 드래곤의 기운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소리를 얼핏 듣긴 했지만, 설마 내가 그녀를 못 알아볼 정도일 줄은 몰랐어." "동감이에요. 첨에 그녀를 봤을 때, 나도 강한 마력을 가진 다른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나중에 그녀가 가까이 와서 육안으로 확인되었을 때 알았죠." "흐음... 그런 존재들을 혈육들만 알아볼 수 있다는 말도 사실이었던 것 같군. 그래서 칸 세실리스께서 너에게 그런 힘을 남기신것이었군?" "헤에, 눈치 채셨군요." "어렴풋이는... 솔직히 그런 것 처음 봤거든..." "제 힘으로는 힘겨울테니까요. 아무리 드래곤의 기운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말예요." "부딧혀 보니까... 어떠니?" 아빠의 조금은 신중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어느새 펜을 집어 넣으시고 나를 바라보고 계셨는데, 그 눈에는 나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다시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더군요." 태연한 어조로 말을 할려고 애를 썼는데, 아빠의 얼굴을 보니까 목소리가 떨려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정말... 그런 모습일줄... 상상도 못했어요. 아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를 품에 꼭 안았다. 아빠의 품은 예전의 할머니 품 처럼 포근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따뜻하고 아늑했다. 아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수고했다. 힘든 일을 해냈구나... 뭐든 처음이 제일 힘든 법이지... 잘 했어." 아빠의 낮은 위로의 말에 나는 서러움과 안도감이 속에서 부터 물밀듯이 밀려와 아빠의 옷깃을 잡고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흐어어엉~~~" "잘 했어. 이젠 괜찮을 거야..." "엉엉... 아빠한테... 히끅, 허엉.... 알리지 않고... 흑흑... 처리할라구... 훌쩍, 히끅, 했는데... 우아아아앙~~~!!" 아빠의 품에 안겨 신나게 울면서 나는 그제서야 내가 왜 수도로 돌아오려 했는지 깨달았다. 내 사정을 잘 알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자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신나게 울기 위한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자를... "엄마 미워... 어어엉엉엉... 못됐어... 흑흑흑..." 한참동안이나 정신 없이 울고나자 나중에는 목이 쉬어서 잠겨 버렸고, 눈물도 바닥 났는지 서서히 멈추면서 딸꾹질만 자꾸 나왔다. 그리고 그제야 짜면은 물이 주르르 나올 것 처럼 젖어버린 아빠의 옷자락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소매로 눈가를 씻었다. 그러자 아빠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자, 코풀어!!"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 비싸보이는 실크 손수건에 코를 대고 힘껏 바람을 내뿜었다. "킁~!! 팽~~!! 훌쩍..." 그때 아빠는 걷옷을 벋어 바라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해보이고 있었다. "어이구, 눈물이 많기도 하지... 이게 다 어디에 들어 있었냐?" "흐끅, 나도 흐끅, 놀라워요.... 흐끅!!" 그러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던 아빠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만 점점 눈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입까지 벌어졌다. "푸웃, 푸하하하하~~!!" "흐끅, 왜 흐끅, 웃는데요?" 아빠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시더니 결연한 얼굴을 나에게 홱 돌렸다. "아니지, 웃을 때가 아니었어." 그러며 나에게 뚜벅 뚜벅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으이그, 여자가 얼굴이 이게 뭐냐? 눈은 퉁퉁 분데다가 얼굴에는 눈물자국 때문에 얼룩덜룩 하잖아? 쯧쯧... 우선은 붓기부터 가라앉혀야 되겠다." 그리고는 내 눈가에 손을 가져다대고는 낮게 읇조렸다. "리커버리!!" 하얀 빛이 아빠의 손에서 부터 뿜어져 나와 나에게 스며들었고, 그러자 뜨거웠던 눈가가 시원해지면서 하두 부벼대어 쓰라렸던 피부가 서서히 나아지는게 느껴졌다. "흐음, 이제는 닦아야지? 클리어!!" 손을 떼고 내 상태를 살펴 보시던 아빠가 다시 손을 내 얼굴에 갖다대고 마법을 행하시자 시원한 청량감이 내 얼굴을 쓰윽 스쳐갔다. "아, 이제야 좀 났군." 만족한 얼굴로 내 얼굴을 살펴 보시던 아빠가 두 손을 내밀어 내 볼을 톡톡 두드리셨다. "역시, 내 딸내미라서 그런지 무지 예쁘구나?" 느글거리는 아빠의 말에 나는 한마디 안 해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을 타고 나서 예쁜거라고 하시던데?" 그러자 흐뭇한 미소를 띄우고 있던 아빠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뭐시라? 아니 그 영감탱이가 노망이 드셨나? 이게 어디 그 영감탱이를 닮은 얼굴이냐? 바로 이 내 미모를 쏙 빼닮았지.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라, 누굴 닮았다고 할 거 같아?" "흐음, 하지만 아빤 내가 본체일 때의 모습을 본 적이 없잖아?" 아빠의 몸이 갑자기 움찔 거렸다. "험, 험... 그거야, 네 얼굴을 보면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거지!!" "헤에, 그래요? 그런건 몰랐는데?" 아빠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갑자기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치며 허둥지둥 책상으로 돌아갔다. "아, 맞다. 나 일이 많았지? 이거 오늘 안에 다 해야 하는데... 급하다, 급해!!" ▩ 제목 제 9 화 첫 대면 (4) 다음날, 아빠가 성으로 출근하고 나자 혼자 저택에 ? 남아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던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우 씨~~ 심심해.... 우웅.... 심심하네.... 이게 뭐야? 할 일도 없구... 책을 읽고 싶지마는... 아빠 서재에 있는 책들은 다 고리타분한 것들이니... 읽고 싶지도 않아...." 그러자 마침 내 방에 들어오던 하녀 - 내 직속 하녀였지만, 여기에 머문 시간이 별루 없어서 얼굴만 알고 있다 -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렇게 심심하시면... 수도 구경하고 오시는 건 어떠세요? 그 동안 다른 지방에만 갔다 오시느라 수도 구경하러 한 번도 가보신적 없으셨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냥 시큰둥 할 뿐이었다. "글쎄, 뭐.... 도시가 다 거기서 거기일텐데... 별루 구경하고 싶지두 않아. 햇빛도 저렇게 쨍쨍인데 돌아다니기는 더욱 더 귀찮구..." "그럼 쇼핑을 갔다 오시는 건 어떠세요? 뭐 필요한 물건 없으세요?" "우웅.... 별루... 아빠가 다 챙기는 걸 뭐... 게다가 샀다가 아빠 맘에 안 들으면 잔소리 들을 게 뻔한데...." "아가씨가 계속 저택에 계실거라면 가정교사를 불러 공부하시는 것도 좋으실 텐데요... 하지만 또 다른 지방에 갔다 오셔야 한다면서요?" 나는 약간 놀라서는 그녀를 돌아다 보았다. "그건 무슨 소리야?" 그러자 그 시녀가 화들짝 놀라서 얼버무렸다. "어머...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 없는 소리를..." "아니 뭐... 별루 그런건 아닌데... 무슨 소린가 해서 말야." "아니 저 그게..." 시녀는 경직된 얼굴로 긴장한 채 주저 주저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저기, 하녀장님께는..." "알았어, 알았어. 암 말도 안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구 말해봐."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머뭇머뭇 대더니 내가 계속 바라보고 있자 결국 체념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사병들이 그러는데, 아가씨 께서는 저기... 그러니까..." "뭐?" "저기... 그러니까... 주인님께서는 지금까지 계속 독신으로 계셨는데 갑자기 아가씨를 데려 오시니까.... 저기..."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주저하는 지 눈치채고 대신 말해줬다. "아아... 사생아 아니냐구?" "예에..." 그녀는 무슨 커다란 죄를 짓다가 들킨 것 마냥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지 못하고 힐끔 힐끔 내 눈치만 살폈다. "흐음... 뭐, 그런 소리 들어도 할 말은 없네... 어차피 아빤 결혼한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저.. 그런데 아가씨 께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데려오신게 아니냐는 소리가... 이번 일을 해결하면 정식으로 공녀가 되신다는...." "아하... 그런데 내가 전에 갔던 데서는 완벽하게 해결을 못 봐서 또 어디로 갔다 온다고 생각한 거군?" "예에..." "그건 그런데, 내가 정식 공녀가 아니란 건 어떻게 알아?" "그거야... 아가씨 나이가 계신데 왕실에나 귀족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를 안 하시니까... 혹시나..." "오... 그렇구나." "저... 정말 하녀장님께는..." 그녀가 다시 내 눈치를 살피며 어렵사리 주저주저 말하자 나는 생긋 웃어줬다. "걱정 마. 암말 안 할께." "하아, 감사합니다 아가씨. 저 그리구..." "응? 뭐?" "전 아가씨가 곧 정식으로 공녀님으로 되실거라고 생각해요. 주인님께서는 아가씨를 무척이나 위해주고 계시잖아요." 그녀는 진심이라는 듯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후후후, 고마워." 그러자 그녀는 안심한 얼굴로 방긋 웃으면서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뭔가가 생각 났다는 듯이 멈칫 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저..." "응? 왜?" "산책은 어떠세요?" "산책?" 내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잘못 말했나봐...' 하는 듯한 불안안 얼굴로 말했다. "저기... 아까 심심하시다고..." "아아, 그래 그랬지... 그런데 산책 이라니?" "왕성 근처에 산책으로 딱 좋은 공원이 있거든요. 연못도 있고, 조각들도 많이 세워져 있는데다 잔디밭도 있어서 사람들이 산책로로 많이 찾고 있어요. 생각 있으시면 한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 "그으래? 흐음... 산책이라... 거 괜찮겠는데? 좋은거 알려 줘서 고마워." 내가 방긋 웃자 그녀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 아뇨...그정도를 가지고..." "그럼 나가볼까?"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녀가 물었다. "아르하나즈경께 알릴까요?" "응? 왜?" 그러자 하녀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설명해 주었다. "아가씨 혼자 가시는건 위험하니까 호위 기사를 데려가셔야 하잖아요." "아아... 괜찮아. 호위 기사가 붙으면 귀찮기만 한걸..." "하지만 혼자 나가셨다는 걸 주인님께서 아시면..." "괜찮아, 괜찮아. 혼자 갔다와도 돼." 그러자 하녀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 애원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왜, 또?" "제가 말씀 드려서 나가시는 건데, 호위 기사 없이 나가셨다는 걸 알면... 전 무척 혼나요." "뭘, 그런걸 가지고 혼나?" "하지만..." 그녀가 머뭇머뭇 대면서도 끝까지 애원하는 눈길로 쳐다보자 나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적당한 사람들로 부탁한다고 해. 아르하나즈경은 내 실력을 아니까 알아서 해주겠지." ▩ 제목 제 9화 첫대면 (5) 그런데, 얼마 걸어가지 않아 그런 좋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싫어요..." "헤헤헤, 그러지 말고 우리랑 노는게 어때?" "에이, 이정도 쯤이야... 여자가 튕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거 아냐?" "비켜 주세요, 제발..." "이봐, 이봐... 남들이 보면 우리가 아주 모오오오옷된 불량배인 줄 알겠다." "맞아, 맞아.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구 했잖아. 이런데 오는 걸 보면 너두 한가한 거 같은데, 한가한 사람들 끼리 재미있게 놀자구 한 것 뿐인걸." "그럼, 그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니 작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작은 공터에서 내 또래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두 날건달에게 붙잡혀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소녀는 이 곳에 꽃을 팔러 온 듯, 낡고 색이 바랜 옷을 입고 있는 소녀의 옆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땅에 떨어져 있었고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할 꽃들은 땅에 다 흩어져 짓밟혀 뭉개져 있었다. "쯧쯧..." 나는 작게 혀를 차면서 뚜벅뚜벅 걸어가 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날건달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갈겼다. 따아아악~~!! 퍼어어억~~!! 내가 만들어낸 음향이 나오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있던 날건달과 그 옆에 있는 날건달이 동시에 서서히 앞으로 꼬꾸라졌고, 내가 치치 않았던 건달이 쓰러지면서 그 뒤에 서 있던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뾰족한 뒷굽이 앞으로 오도록 비단 구두의 앞쪽을 한 손으로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이곳으로 급히 오기 위하여 걸음을 방해하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감아쥐고 있었다. 내가 놀란 것 처럼 그녀도 놀랐는지 크게 치켜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와 그녀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동시에 생긋 웃었다. 그리고 소녀를 향해 물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데 없어요?" 소녀도 무척 놀란 듯 엉거주춤 서 있다가 우리 둘의 질문을 받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방씩 먹인 건달들은 괜찮지 않은 듯 했다. 오랜만에 폭력을 휘둘러서 내 파워가 많이 격감되었는지, 녀석은 금방 뒤통수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 옆의 여인에게 구두 뒷굽으로 맞은 녀석도 신음을 내며 일어서고 있었다. "끄응... 젠장할..." "어떤 쉐이야?" 도끼눈을 뜬 채로 뒤를 돌아보던 녀석들은 우리를 보자 도끼눈들이 음침하게 변했다. "호오... 이게 왠 손님들이신가..." "우리가 오늘 인기가 많은 듯 하지?" "그러게 말야..." 놈들은 아픈것도 싸악 잊어먹었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긴 내 옆에 나타난 그 여자도 나보다 몇살 나이가 많아보기인 했지만 가리가리한 몸매에 한 미모 하는 여자였다. 은색에 가까운 옅은 금발머리를 틀어올려 가느다란 얼굴선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는데 초록색의 눈동자가 분노로 반짝였고 붉고 도톰한 입술은 한일자로 다물어져 있었다. "어이, 아가씨들? 우리가 좋아서 이렇게 달려 오셨나?" "허허허, 하긴 우리가 좀 인물이 뛰어나긴 하지." 그러자 동시에 그녀와 내 입이 열렸다. "한심한 멍충이들!" 그리고는 놀라서 서로 마주보았다. 이렇게 마음과 말이 딱딱맞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가씨, 정말 맘에 드는데?' 두 건달들이 다가오는데도 겁에 질리지 않고 당차게 맞서고 있는 모습에서 그녀에게 그 녀석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호감이 불쑥 불쑥 솟아올랐다. 그녀에게 한번 생긋 웃어주고는 녀석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세를 취하자 녀석들이 놀랍다는 표정을 해보였다. "어이, 이봐... 이 아가씨들이 귀엽게 구는데?" "흐흐흐, 그러면 그에 맞게 우리도 정중히 대해줘야지." "옳으신 말씀." 그러나 녀석들은 우리를 정중히 대해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여자의 뒤에서 어떤 남자가 불쑥 나타남과 동시에 내 뒤에서도 두 명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의 뒤에 나타난 남자도 검을 쓰는 사람인듯, 비록 갑옷을 입지 않은 간편한 외출복 차림이었지만 허리에는 바스타드소드가 달려 있었고 상황을 눈치챘는지 그의 눈이 살벌해지며 손이 검의 손잡이쪽으로 다가가 있었다. 그러자 두 건달들의 얼굴들이 경직되며 몸들이 뻗뻗하게 굳어있다가 한 녀석이 갑자기 우리에게 넙죽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헤헤헤, 실례했습니다 숙녀님들..." 그리고는 옆 건달의 손을 잡고는 부리나케 저쪽으로 달려가버렸다. "쯧쯧...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고 있어." 다시 한번 나와 그녀는 놀라움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헤에, 이렇게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도 있었나?' 그러다가 아까 녀석들에게 붙잡혀서 곤욕을 치루던 소녀가 생각나 그녀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니, 어느새 도망쳤는지 그녀와 그녀 옆에 있던 바구니는 온데간데 없었다. "이런... 가버렸네..." "저런, 꽃값을 좀 보테주려 했더니만..." 그러나 곧 그녀의 존재는 잊어버린 우리는 서로 마주보았다. "우린 마음이 잘 맞는것 같죠?" 그녀가 먼저 생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예, 그런것 같네요. 이렇게 맘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드믄 일인데 말이죠." "그렇죠? 그럼, 이렇게 맘이 맞는 사람끼리 만난 기념으로 차 한잔 어때요?" 그녀는 공원 밖에 있을 찻집으로 가자는 뜻인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르켰다. 하지만 그 전에 내 눈에 알렌이 가지고 있는 두개의 차가운 과일 쥬스 잔이 들어왔다. "것 보다는 여기서 시원한 쥬스 한잔 어떠세요?" 알렌에게 잔을 받아들어 그녀에게 하나를 건네자 그녀가 생긋 웃으며 기분 좋게 넘겨받았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리고는 자신의 뒤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미안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 "에릭, 당신건 없네요. 어쩌죠?" 그러자 내 뒤에 있던 알렌이 번쩍 나섰다. "제가 다시 가서 사오겠습니다." 하지만 그 에릭이라 불린 남자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별로 목 마르지 않거든요." "하지만..." 알렌이 맘에 걸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보다도 먼저 그녀가 나섰다. "우린 여기 있을테니 당신걸 하나 사오시겠어요? 괜찮으면 저 숙녀분의 기사분들것 까지..." 에릭이란 남자는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분부라면... 루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음료수를 가려는 듯 몸을 돌리자 라우진경이 나섰다. "저희도 같이 갈까요?" 그러면서 나에게 허락을 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그러자 에릭과 알렌이 즉각적으로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보자 라우진경이 걱정 말라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끌었다. "자자, 괜찮으니 가자구. 아가씨 실력을 몰라서 그래? 저희 아가씨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계시니 걱정말고 같이 가시지요." 그들이 저쪽으로 사라지자 루실과 나는 잔디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활엽수 밑에 있어 그늘이 져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기사분들이 믿을정도의 실력이라니...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계신가 보군요?" "아니요, 그냥 제 몸 하나정도는 지킬 호신술 정도일 뿐인걸요." "호호호, 겸손할 필요 없어요. 아까 그 건달들을 충분히 쓰러트릴 정도의 실력일거 아녜요?" "뭐... 그정도는..." "그럼 대단한 거네요. 그건 그렇고 이름이 뭐예요?" "아시리안이라고 해요." 나는 그녀에게 성까지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냥 이름만 말했을 뿐인데 그녀가 약간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리안? 당신이?" 그러면서 새삼 나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어? 저를 아세요?" 그녀는 살포시 웃어보였다. "이름은 들어봤죠. 이 나라의, 바람둥이면서도 독신으로 유명한 재상의 따님이 나타났다고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흐음.. 그런가요?" 뭐, 그녀가 귀한 집 아가씨일 거라는 짐작은 했었으므로 그녀가 자신이 귀족층의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말했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당신의 이름은요?" "저요? 후후후, 그냥 루실이라고 불러줄래요?" "본명은 아니죠?" "물론 아니죠. 이건 그냥 제 애칭이예요. 우리는 아마도 나중에 다시 만날테니 그때의 아시리안양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말해주지는 않을래요." "헤에, 아마 난 당신이 왕이라고 말해도 놀라지 않을걸요?" "호호호, 기대할께요. 아, 그건 그렇고... 나이가?" "17세요." "난 25인데... 그럼 내가 위군요? 우리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친구 할까요? 맘도 꽤 잘 맞는 것 같은데..." "좋아요. 나도 루실이 맘에 드니까. 그리고 이왕 친구 하는거,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럴까? 그럼 아시리안도 말을 놓도록 해." "그러지 뭐. 그런데 언니라고 불러도 돼?" "호호호, 물론이야. 아시리안은 시원 시원해서 좋네." "언니도 마찬가지인데 뭘... 그리고 아린이라구 불러 줘. 내 애칭이거든..." "좋아." 우리는 그렇게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 대부분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요령있게 이것 저것 이야기해 주었다. 그 중에서 젤 좋았던 것은, 그녀에게 여자라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키우신 그녀의 엄마 이야기와, 그녀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그녀의 남편 - 아까 그녀의 뒤에 나타났던, 그 에릭이라는 남자 - 의 이야기가 좋았다. 물론 에릭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크게 놀랐지만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멋진 남편을 만났다는 사실에 그녀가 쬐끔은 부럽게 느껴졌다. 솔직히 같은 여자로서 좋은 반려자를 만난다는 것은 크나큰 복들 중 하나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에릭은 그녀와 나 사이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음료수를 사가지고 온 뒤에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고 내 호위 기사들과 함께 우리에게서 약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거보면 참 세심한 성격의 남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딘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대우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더 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눈길에 다시금 그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나였다. 약 한시간쯤 지났을 무렵, 그녀와 내가 남녀 사이의 연애에 대해 한창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에릭이 다가왔다. "루실, 이만 가봐야 해요. 더 이상 늦으면 걱정하실겁니다." 그녀는 하늘의 해를 바라보고는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에? 가야해?" 내가 아쉽다는 얼굴로 같이 일어서며 말하자 루실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응, 미안... 내가 잠깐 산책한다고 하면서 나온 거였거든. 더 늦기 전에 가봐야 해." "어쩔 수 없지 뭐... 언니가 농땡이를 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호호호, 그래 고맙다. 그럼, 나중에 만나자. 그 때도 언니라고 불러줘야 해." "당근이지. 그리고 언니는 오늘 내가 넓은 아량으로 언닐 배려해 줬단 걸 잊으면 안돼." 내가 익살맞게 눈을 찡끗하며 말하자 루실이 크게 웃었다. "깔깔깔, 그래 그래. 내 필히 기억하마. 그럼 나중에 봐." "응, 잘가." 그녀가 간 뒤에 곧바로 집으로 갔지만오랜만에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던 나는 그 뒤에도 매일 그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고 싶었지만, 다음 날 곧바로 '그 존재'의 뒤를 쫓아 다시 수도를 떠나야 했으므로 루실을 다시 만난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어느날이었다. 왕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내 얼굴에서 기분 좋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 루실을 바라보며 에릭은 빙그레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군요. 그 공녀때문인가요?" "예, 정말 맘에 쏙 드는 아가씨더군요. 하아, 그녀가 내 편이 되어준다면 정말 좋을텐데..."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도 당신을 무척이나 맘에들어 하는 것 같던데..." 문득 루실의 기분 좋은 미소가 사라지고는 대신 씁쓸한 미소가 얼굴에 피어 올랐다. "후우... 하지만 정치라는게 맘대로 되는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에릭은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그녀는 정치에 상관 없이 당신 편을 들어줄 것 같던데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어요?" "글쎄요... 감이라고나 할까요? 왠지 그녀가 그럴것만 같거든요." "헤에, 그 감이라는 말 여자가 보통 쓰는말 아니던가요?" "아무렴 어때요? 잘 맞기만 하면 되는거지." "호호호, 그렇네요." 에릭은 다시 루실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오르자 더욱 더 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루실과 헤어지고 돌아온 날 저녁, 왕성에서 퇴근하신 아빠가 나에게 놀라운 소식을 가져왔다. "아린아, 너 낼 갈거지?" "어딜요?" "어디긴 어디야, '그 존재'를 찾으러 갈 거 아니냐?" "뭐,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건 왜 물으세요?" "그 빨강 머리가 너와 동행하게 되었거든." "빨강 머리? 설마 '그' 빨강 머리?" 뜻밖의 소식에 놀란 내가 둥그래진 눈으로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가 탐탁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빨강 머리라고 부르는 녀석이 '그' 빨강 머리 말고 또 있냐?" "아니, 걔를 왜요? 나보고 떠난다고 뭐라고 뭐라고 그랬던 녀석인데... 그 도시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 아직도 거기에 있어. 하지만 네가 '그 존재'를 찾으러 간다고 하니까 그 녀석을 너한테 붙이려구 하더라구." "어머나? 왠일이래?"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녀석을 왜 너랑 붙이려는 거지?" 그제야 나는 아빠의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어라? 아빠는 왜 그래요?" "왜 그러긴? 불길한 느낌이 드니까 그렇지. 그 녀석 혹시 너한테 흑심이라도 품는 거 아냐?" "에이, 설마... 맨날 날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녀석이 무슨..." 나는 피식 웃으며 그냥 넘기려 했지만. 아빠는 정색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냐, 설마라고 방심했다가 당하는 수가 있어." "아빠도 참, 내가 그깟 녀석에게 당하겠어요?" "물론 그렇겠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방심했다가 당하면 어떻게 해?" "에구구, 걱정도 팔자야... 그럼 그 녀석이랑 동행하는게 결정 된거예요?"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한 어조로 묻자 아빠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레드포드 공작이 강력하게 주장 하더군. 오늘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니까 먼저 선수를 쳐서 그녀를 쫓아가야 한다고 나서더라구. 그러면서 그 그룹에는 실력이 뛰어남과 동시에 국내 어느 곳을 가더라도 강력한 지휘권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더군."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라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와 애쉬 녀석이 끼어들겠지... "헤에, 논리적이라서 뭐라 반박은 못하셨겠군요?" "그래, 우리의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는 거니까. 언제 그렇게 준비했는지 녀석이 오늘따라 무척 논리적이더군?" 화가나서 툴툴대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아빠는 애쉬 녀석이 나와 같이 가게 되었다는 것 보다는 애쉬 녀석의 아버지인 레드포드 공작에게 말발에서 밀렸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래서, 허락 하셨군요?" "그으래." "흐음, 그럼 이번에는 누구 누구랑 같이 가게 되나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 대충 너랑 그 빨강 머리가 주축을 이루게 될 것이고, 그 밑에 수하는 각각 5명 이하로 맘대로 정하라더군. 아마 일행을 10명 넘지 않게 잡으려는 것 같아." "그거 하나는 맘에 드네요. 일행이 많으면 귀찮을 수 있으니까. 그럼 나는 그 빨강 머리가 수도로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그러자 아빠는 머리를 저어보이고는 서재의 책상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서랍들 중 하나를 열더니, 그 안에서 어떤 종이를 한장 꺼내어 펴 들고는 나를 손짓해서 불렀다. "아냐. 중간 지점에서 만나 목적지로 가기로 했어. 그 빨강 머리 녀석이 이쪽으로 오는 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니까. 차라리 그것 보다는 각자 그쪽으로 출발해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게 훨 났지." 아빠가 펴든건 소르드 왕국의 지도였다. "자 봐. 너는 여기 수도에 있고, 그 빨강 머리는 이 도시에 있거든." 아빠는 지도에 표시 되어있는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설명 하셨다. "예, 예" "여기가 이번에 너희들이 갈 목적지야. 물론 최종 목적지야 골짜기가 되겠지만, 여기가 골짜기와 가장 가까운 도시거든." "그 도시에는 병력이 집중되고 있겠군요?" "벌써 병력들이 배치되어 있는걸 뭐... 그냥 무슨 일이 없나 하고 조사만 시켜놨으니, 너희들이 가면 결과를 이야기 해줄 거다. 어차피 네가 그 근처라고만 말해놓은 상태니 '그 존재'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면 산맥을 뒤져야될 것 아니냐?" "그래서 혼자 가려구 한건데..." "어쨌든, 이 곳이 그 빨강 머리가 만나자고 한 지점이다. 최대로 빨리 출발한다고 해도 1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넉넉잡아 2주 후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그 도시 시장 관사이고." "알았어요. 그런데 아빠, 나도 누구 데려가요?" 아빠는 잠시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체념조로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다면 한 두어명 정도는 데리고 가도록 해." 그래서 나는 다음날 알렌과 라우진 경을 데리고 애쉬 녀석 일행과 만나기로 한 도시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하고도 3일 후, 나는 애쉬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뭐가 그리도 못 마땅한지 - 아마도 나와 다시 동행하게 되어 그런 거겠지만... -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공녀님." "그렇군요, 레드포드경. 아, 이 쪽은 이번에 저와 같이 가실 분들 이십니다." 그러자 알렌과 라우진 경이 애쉬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알렌 아르하나즈라고 합니다." "흄 라우진 이라고 합니다." 애쉬는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 쪽은 이번에 나와 같이 갈 사람들입니다. 여기 스와카와 반담은 공녀도 잘 아실 겁니다." 물론 잘 아는 사람들이다. 혹시나 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다시 만나니 약간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두분." 정말 반가운 마음으로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스와카와 반담도 마주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록 반담은 안면 근육이 약간 실룩일 정도였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스와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둘의 옆에 서 있던 한 소년이 나섰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다, 나보다도 약간 어려보이는 소년이라 의아한 눈으로 애쉬를 쳐다보자 그는 순순히 설명해 주었다. "공녀께선 못 보셨나 본데, 전에 나와 같이 그 도시에 갔던 아이 입니다. 레드포드 가문의 견습 기사로 있으며, 공녀님과 같은 정령사이기도 하죠." 하긴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는 은은한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트란 마한드라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활짝 웃는 얼굴로 명랑한 어조로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걸 보니 꽤나 활달한 녀석일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가 어려보이는데, 몇살이죠?" "16세 입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애쉬 녀석을 날카롭게 째려 보았다. '이렇게 어린 애를 왜 데려가요?' 란 시선을 팍팍 담아서... 그러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씨익 지어보였다. "비록, 이번에 기사학교를 졸업하긴 하였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검술 실력과 재빠른 몸놀림을 가진데다 뛰어난 정령사이기 때문에 기꺼이 동행하기로 한 겁니다. 자신의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 너무 째려보지 마십시오, 공녀님." 그의 기분 나쁜 미소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갑자기 우리가 있는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린~~!! 다시 만나서 정말 기쁘군요!!" "브랜?" 너무 놀란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브랜이 싱긋 웃어보였다. "예. 브랜입니다." 그러자 내 뒤에 서 있던 알렌과 흄(라우진경)이 얼른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그 둘은 나와 같이 도시로 지원병으로 파견되었으므로 브랜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브랜, 어떻게 여기에?" 내가 놀란 어조로 묻자 브랜이 하하 웃었다. "날 만난게 반갑지 않은 모양이죠? 난 아린을 만난게 너무 기쁜데..."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당신은 왕성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어요?" "물론 돌아가려고 했지만, 거긴 너무 따분하거든요. 그래서 애쉬를 졸라 이번에도 쫓아왔죠." 애쉬 녀석을 다시 한번 째려보자 그 녀석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으로 브랜 몰래 한숨을 폭 내쉬어 보였다. 나는 그 곳에서 뭐라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잠시 후 내 일행이 쉬러 방으로 안내되었을 때 살짝 빠져나와 애쉬 녀석을 불러내었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지 묻고 싶군요, 레.드.포.드.경!!" 녀석은 자신이 한 일이 옳지 못한 것인줄 안다는 듯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그 견습기사는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데려왔다고 하지만, 브랜은요? 이게 무슨 소풍 가는 건줄 알아요?" 내가 화를 내며 바락 바락 대들자 그가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물론, 나도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소." "하아, 그래요오~~?" 내가 기분 나쁘게 말 끝을 질질 끌며 그를 비꼬듯 바라보자 그의 얼굴에 힘줄이 하나 뽀득 솟아 올랐다. "물론이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당신보다는 더 브랜이 여기에 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소." 나는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하, 참.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어떻게 왕자님을 데리고 오셨는지요?"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잘만 대답하던 애쉬 녀석의 입이 딱 다물더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왜 말 못하죠? 설마 브랜의 말 대로 그가 하도 졸라서 이기지 못해 데려온 건가요?"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건만, 그 말에 애쉬 녀석의 몸이 움찔 했다. "뭐예요? 정말 그랬단 말예요?" 녀석은 다시 고개를 돌려 먼 산만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화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고, 그걸 이기지 못해 바락 소리를 쳤다. "당신을 멍청한 빨강 머리라고 부르고 싶군요.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다니!! 당신 힘으로 브랜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 아마도 분노를 삭이는 거겠지만... - 힘겹게 입을 열어 말을 뱉아냈다. "어쩔 수 없었소. 그럴만한 사정이..."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자르며 비꼬았다. "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사정이요?" "..... 어쩌면 그럴지도..." 한참만에 나온 그의 당황스런 대답에 내가 놀라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저마치 가버렸다. "뭐야, 저 자식... 흥, 알아서 하라지. 난 책임 없으니까,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 나중에 혼자 남은 나는 화가나서 땅을 퍽퍽 차며 중얼거렸다. 다음 날, 8명으로 늘어난 일행은 아침 일찍 출발했다. 애쉬와 나는 사이가 냉랭한 관계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고, 무뚝뚝한 반담과 알렌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이런 여행은 처음인 이트란은 흥분에 들떠있고, 원래 사교성이 좋은 스와카와 흄은 처음 만난 사이 같지 않게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데다 중간 중간 브랜까지 끼어들어 여행 분위기는 어느정도 활발한 편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나 혼자 '그 존재'를 추적하려고 했던걸 생각해 보면 일행은 8배나 불어난 상태였기에, 게다가 브랜과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아직 실제적인 전투 경험이 없는 이트란 - 전에 지원 부대에 끼었다고 하나 나 혼자서 그녀를 상대했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싸움 다운 싸움 한번 하지 않았던 것이다.- 까지 있어서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신께서는 우리 일행이 그래도 부족하다 생각하셨는지 또 다른 일행 한명을 더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우리 일행이 두 산맥이 갈라지는 골짜기로 향하던 중 어떤 자작의 영지에 속한 자그마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일행은 오랜 기간동안 노숙을 한 터라, 비록 날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하루 만이라도 여관의 침대에서 자기를 강렬히 희망한 탓에 그 마을에 들어간 거였는데, 때를 잘못 찾았는지 그 마을에는 일반 영지민들은 없고 완전무장을 갖춘 사병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가 휩쓸고 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마을의 풍경에 나는 말을 잃었다. 항상 활달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스와카와 흄이 리틀 조로 라고 별명을 붙여준 - 덕분에 일행 모두가 그를 부를 땐 리틀 조로 라고 불렀다 - 이트란은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고, 그런 그를 비슷하게 창백한 안색의 굳은 얼굴을 한 알렌과 브랜이 얼른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약 30여호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은 마치 어떤 거대한 거인이 나타나서 커다란 붓에 검붉은 물감을 잔뜩 묻혀 이 곳에다 툭툭 턴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거리 거리에는 여기저기 마법에 의한 것인 듯 집들이 부서지고 탄 흔적들이 가끔 보였지만, 그 보다는 예전에는 사람이었을 듯한 조각 조각난 몸체들과 그 안에 있었을 핏물들이 퍼져 있는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죽은 지 벌써 하루 이상이 되었는지 피들은 모두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사병들은 여기 저기 흩어진 처참한 시체들을 마을의 넓은 공터에 모으는 한편 혹시나 생존자가 있을지 몰라 여기 저기를 뒤져보고 있었다. "이 곳을 거쳐갔나 보군요." 스와카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자 모두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못 알았네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왔을 줄이야... 더 멀리 갔을 줄 알았는데..." 내가 예상한 곳은 이 곳과는 한참 떨어진 산맥 근처의 도시와 마을들 이었던 것이다. "공녀님 잘못은 아닙니다. 워낙 예측 불허의 존재이니까요. 그래도 적어도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아닙니까?" 흄이 위로하려는 건지 약간은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건넸지만 내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잘못 한건 잘못한 거예요. 거리를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사병들이 시체들을 모아(?) 놓은 공터로 다가가자 그 곳에는 몇명의 신관들이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병들과 같이 파견된 것 같군요. 혹시라도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흄이 그 모습을 보고 설명이라도 해주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누가 여기 좀 도와줘!!" 목소리가 들린 곳이 우리가 있던 공터에서 가까운 곳이었기에 우리는 지체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곳은 집 한채가 절반정도 허물어져 있었는데, 한 병사가 허물어져서 쌓인 잔해물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애쉬가 대표로 묻자, 병사는 우리를 처음 본다는 눈으로 보면서도 -사실 그렇지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이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애쉬와 흄, 반담은 즉각 그 잔해물들에게 돌진했지만 나의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기다려요!!" 나는 그들이 의아한 눈으로 보는 것에 개의치 않고 실프들을 불러 내었다. "치워줘!!" 강하지만 부드러운 바람들이 잔해물들을 헤집고 다니며 옆으로 날려버리자 그 밑에 있던 사람이 드러났다. 흄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는 기사 였는지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반신이 잔해물들에 깔려 으스러져 있었고 복부에는 커다란 검상이 있었다. 아마 검상을 입고 잔해물 밑에 깔린 것 같았다. 그러나 행운인지 상반신 쪽에는 벽이 버텨주고 잔해물들이 얼기 설키 쌓여 어느정도 공간을 만들어 얼굴은 핏기가 없어 창백했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볼 만 했다. 그의 사체(비록 상반신 뿐이지만...)을 반담과 흄이 조심스레 옮겨 땅으로 내려놓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뭔가를 쥐고 있어요." 어느새 우리 옆으로 다가왔는지 신관 복장의 소녀였다. 알렌과 같은 나이 또래인데도 견습 신관이 아닌 신관인 걸 보면 능력이 무척이나 뛰어난 듯 보였다. 소녀 신관은 잔인한 풍경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입술을 꼭 깨문채로 꿎꿎이 버티고 있는 듯 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죽은 기사의 손에는 한 쪽에는 휴대용 펜을, 다른 한쪽에는 종이를 쥐고 있었다. 소녀 신관이 그의 사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굳어서 잘 펴지 않는 손가락을 억지로 펴서 종이를 꺼내고는 잘 펴서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줄리에게... 우선은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고 싶소. 당신과 함께 오래 오래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신 여신님과, 전에 편지 좀 쓰라며 나에게 이 휴대용 펜을 선물한 당신께 감사드리오. 하지만, 이게 첫번째 편지이자 마지막 편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 뿐이요. 하아, 여긴 너무 어두워서 이게 제대로 쓰여지는지도 잘 모르겠소. 게다가 난 지금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정신이 흐려지고 있소.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쓰기에는 너무 시간도 없고 종이도 너무 작은 것 같구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시오.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 예전에 당신을 처음 봤을때 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만을 사랑한다오... 이런 말... 전에는 한번도...] 거기까지 읽었을 때 신관은 종이에서 눈을 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읽을 때 울먹 울먹 거리더니 결국은 우리를 바라볼 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 이게... 흑흑... 다예요... 훌쩍, 흑흑... 끝 까지... 훌쩍, 못 쓰셨나 봐요... 흑흑..." "그래도 그는 행운아 입니다. 죽는 순간에 이런 메세지라도 남길 수 있다는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요." 묵묵히 우리 옆에서 신관이 읽는 편지를 듣고 있던 한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더니 기사의 시체에서 그의 검과 검집, 그리고 몸을 뒤적여 그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끌러내더니 신관이 건네주는 편지와 함께 잘 갈무리 했다. "이건 제가 그의 아내에게 전해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애쉬가 물었다. "그를 아십니까?" "제 동료입니다. 며칠 전에 촌장의 부탁으로 여기에 파견 되었던 기사들 중 하나였죠." "그럼 다른 기사들은?" 그러자 그 기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메세지도 못 남기고 죽었죠." 그리고는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 십니까?" 우리는 모두 자연스레 애쉬를 쳐다보았고, 그러자 애쉬가 우리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희는 수도에서 파견된, 그 범인의 뒤를 쫓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자 기사 보다도 그 옆에서 더욱 더 격정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요?" 많이 울어서 퉁퉁 빨갛게 부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격렬한 어조로 묻는 그 소녀 신관의 반응에 애쉬가 놀라서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지금 그 범인을 찾으러 가시는 길인가요?" 소녀 신관은 이제는 애쉬의 멱살을 쥐다시피 한 채 물었고 애쉬는 여전히 당황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럼 저두 데려가세요." "예?" 애쉬 말고도 주위에 있던 우리까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우리를 쓰윽 바라보더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 중에는 신관이 안 계시는 군요. 그러니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범인을 잡는데 제 온몸을 다 바쳐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저기..." "사양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래뵈도 여신님의 가호를 받는 몸. 엘라이어드 여신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 한몸 받칠 각오를 하고 있으니까요." 소녀 신관은 주먹까지 불끈 쥐어보이며 결연한 어조로 외치자 우리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 그러실 필요 까지는..." 애쉬가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말리려 입을 열었지만 소녀 신관은 그가 뻗은 손을 양 손으로 꼭 부여 잡으며, 그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계속 말했다. "당장이라도 여러분들을 따라갈 수 있으니 심려 마십시오. 마침 제가 여행 준비까지 해온 상태거든요. 이게 다 여신님의 배려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애쉬 녀석이 멍청하게 그녀를 떼어내지 못하고 버벅거리자 보다 못한 내가 나섰다. "누가 너 같은 혹덩어리를 데려 간대?" 그러자 소녀 신관의 눈이 매섭게 치켜 올라가며 나를 휙 돌아 보았다. "혹덩어리라니요? 이래뵈도 사랑과 정의의 여신의 종입니다." "글쎄, 신관이든 아니든... 혹 덩어리는 혹덩어리야." "무례하시군요!!" "멍청한 것보다는 나아." 내가 그녀에게 매섭게 쏘아보며 말하자 그녀는 나를 한 동안 바라보다가 못당하겠는지 몸을 홱 돌려 애쉬에게 매달렸다. "기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게.. 전..." '멍청한 녀석, 딴 귀족 여자들에게는 매정하리만치 딱딱 끊는다면서 저 신관에게는 쩔쩔 매는 꼴이라니...' "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 하시는 겁니까?" "그게... 그러니까..." "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군요? 그럼 제가 기꺼이 동행해 드리도록 하죠." 소녀 신관은 안심했다는 미소를 띄우며 못을 박자 애쉬 녀석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매정하게 녀석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알아서 해."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있던 스와카가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뭐, 신관 한분이 있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흄과 반담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님도 계시는데... 신관 한명이 더 끼어든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흄이 나에게 낮게 속삭인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신관의 도움을 받을 일은 한번도 없었기에 혹 하나가 더 느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애쉬 녀석은 흄과 같은 생각인지 무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딱 부러지게 거절도 못하고 허락도 못한 채 버벅댄건가?' 그 꼴을 보니 녀석은 아마 그 신관이 어린 소녀가 아니라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면 기꺼이 허락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관이 그 정도로 필요한 존재인가?' 나로써는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애쉬 녀석은 스와카와 반담, 흄의 동의를 받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부탁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 드립니다. 엘라이어드 여신의 종 사르하라고 합니다." 나중에 안 거였지만, 이 꼬맹이 신관은 소속 신전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이 마을에 같이 온 신관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듯 우리 일행에 합류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력이 대단히 뛰어나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그녀가 합류함에 있어 모두들 환영하는 눈치였다. 제 11화 앗, 올만이야!!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골짜기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도착 했을때 그 곳의 시장이 우리에게, 특히 브랜과 애쉬에게 보고한 말이었다. "그동안 주위의 작은 마을에까지 수시로 사람들을 보내 알아봤지만... 말씀하신 그 마을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든 그 범인이 나타난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애쉬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산맥 쪽에서 무슨 일이 있진 않았습니까?" "예?" 애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그 시장이 다시 되묻자 애쉬가 다시 물었다. "예를 든다면... 산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던가, 아니면 산에 살고 있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습격해 온다던가... 하는 평소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갑자기 일어난 적은 없었습니까?" "글쎄요... 연락을 받고는 산으로 들어가는건 금지한데다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몬스터의 습격이 있었다는 소리도... 산 근처에 있던 작은 마을들은 가능한 한 사람들을 큰 마을이나 도시쪽으로 이동 시켰거든요. 그래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애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생각에 잠기자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흄이 조심스레 물었다. "역시, 수도로 돌아가야 했을까요?" 그 마을의 참사를 보고 난 후, '그 존재'가 산맥으로 갔다고만 할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수도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예정대로 산맥에 갔다와야 할지 고민했던 것이다. 결국은 브랜의 이 도시에서 뭔가 알아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의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었지만,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말에 힘이 쫙 빠지는 동시에 그녀가 딴 곳에 나타났을까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아... 조금이라도 흔적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스와카도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젠 어쩔겁니까?" 내가 애쉬를 향해 묻자 그는 어깨만 으쓱였다. "며칠 여기 있어봅시다. 그녀가 이 쪽에 있을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별 일 없으면 수도로 돌아가야겠죠." 일행 모두가 그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그런 그들의 얼굴을 한번 둘러본 다음 몸을 돌려 그 방 -시장의 집무실- 을 나가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죠." 그러자 브랜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가려구요?" "여기까지 온 김에 그 골짜기에 한번 가볼 생각입니다." "예? 아니 왜요?" "글쎄요... 전에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 왠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꽤 멀리 이동하는데다 방향이 이쪽이기에 산맥 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마을에 나타나서 좀 의외긴 하지만 한번 확인은 하고 싶군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장이 외쳤다. "아, 그러고 보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지만, 그는 흥분에 찬 탓인지 그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애쉬와 브랜에게 열렬하게 외쳤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갑자기 산 쪽에서 몬스터들의 부르짖음이 들린 적이 있었답니다. 뭐, 멀리서 나는 소리 같은데다 몬스터들이 산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었기에 직접적인 보고는 없었고, 단지 지나가는 말로 한 소리로 들었기에 저도 기억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애쉬는 그 말에 가만히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 "가 봐야겠군..." 그리고 브랜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나도모르게 인상을 팍 썼다. "아가씨?" 옆에 있던 흄이 의아한듯 쳐다보자 나는 내 심정을 한마디로 대변했다. "귀찮은데..." 분명히 아까 내가 그 골짜기에 한번 가본다고 했었으므로 그게 귀찮은 것이 아님을 이들은 잘 알것이다. 그럼 무엇이 귀찮은 것일까? 알렌과 리틀 조로(이트란), 그리고 사르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듯 머리를 갸웃 했지만, 스와카와 반담, 그리고 흄은 알아들었는지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도시의 시장은 우리에게 호위병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애쉬 녀석은 브랜과 사르하 신관이 걱정되었는지 받아들이려 했지만, 내가 그랬다간 나랑 떨어져 가라고 펄쩍 펄쩍 뛰는 바람에 거절해야 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랑 떨어져 간다는 것에 뭔가 불안함을 느끼는 듯 했다. 하긴,'그 존재'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여기에 나 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애쉬는 호위병을 데려가지 않게 되자 브랜을 두고 가고 싶어 했지만 브랜이 강력하게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호위병이 따로 붙는걸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게 거의 사정하다시피 하여 브랜의 호위병으로 기사를 5명만 붙이게 되었다. 원래 이 곳에 올때도 브랜의 호위병이 붙으려고 했었으나 일행의 수를 미리미리 정해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떨어뜨려 놓은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을 다 붙이고 왔을 것이다. "그래서 혼자 갈려구 했는데..." 결국 일행이 또 추가되자 나는 뾰루퉁해져서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걸로는 성에 안찼는지 나중에는 안내자가 필요하다는 핑계 하에 그 산을 자주 오르내렸던 나뭇군을 두명이나 더 붙여서 일행은 16명으로 늘어나버렸다. 산 밑에까지는 말을 타고 가겠지만, 산 위에까지는 말을 타고 갈 수는 없는 일이라 우리는 제일 가까운 마을에 말을 맡겨놓고는 걸어가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고 해도, 산 밑의 작은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큰 마을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산에 도착하기 까지는 꼬박 일주일이 걸려야 했다. 그 동안, 여기까지 오면서 꽤 친해진 사르하 신관과 리틀 조로로 인하여 분위기는 마치 소풍 나온 것 같았지만 - 애들이 들떠있으니까 - 그 분위기에 안 맞게 나는 가는 동안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흄이나 스와카 조차도 나에게 말을 걸지 못할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일행은 내가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 - 일행이 많아진 것 때문에 기분 나쁘다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가니까... -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날카롭다는 걸 노골적으로 풀풀 풍기고 있어서 함부로 건들지 않고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평소 같으면 그런 그들에게 미안한 미소라도 지었겠지만 (아님 양해라도 구하던가) 지금은 그럴 기분조차도 나지 않아 그냥 잠자코 가라앉아만 있었다. 내가 이렇게 날카로워진 이유는 간단했다. '그 존재'를 찾으러 간다는 부담감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 존재'는 내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상태, 더더구나 기운이 마구 뒤엉켜 있어 기운으로 찾을수도, 또 그 기운을 감지할 수도 없는 상태라, 난 솔직히 '그 존재'가 내 근처에 다가오면 알아차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아마도 '그 존재'가 기척을 숨기고 다가온다면, 난 전혀 못알아차릴 것이다. 그런데 이 떨거지들은 '그 존재'의 진정한 무서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떠들썩하니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나 혼자서도 힘겨운데 이것들까지 신경쓰려니 자연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그냥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내가 이들을 떼어놓지 못한 책임이라도 지고 있는 것인지 무지무지 신경 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밤에 나 혼자 몰래 가는 거였는데...' 하지만, 것두 나중에 이 떨거지들이 지네끼리라도 올게 뻔했기에 - 솔직히 내가 먼저 갔다는 걸 알면 부리나케 쫓아올껄... - 그걸 알면서 그냥 가자니 양심에도 찔려 차라리 옆에 두고 보는게 나을 것 같아 같이 오긴 했는데... 남은 신경이 곤두서서 짜증이 팍팍 치밀어 올라 죽겠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양 즐겁게 떠들어 대는 일행들이 무지 무지 얄미웠다. 뭐, 스와카나 흄 등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겉으로만 분위기를 띄우는 거겠지만, 그래도 맘에 안 들었다. 다행히도 산 밑에 다달아, 산을 올려다보자 그제야 긴장이 되었는지 일행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떨거지들이 알곡(?)들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것 마저도 맘에 안 들었다. - 의외로 나두 성격이 드럽다. - 일행은 제일 먼저 산 속을 잘 알고 있다는 나뭇군 하나가 앞장을 섰고, 그를 반담과 애쉬가 호위하듯 뒤에 섰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사르하 신관과 브랜이 기사들에게 둘러쌓이다시피 한 형태로 섰고, 그 뒤에는 이트란과 스와카, 그리고 나와 알렌, 흄이 섰다. 산 위에 올라가자 이트란과 나는 능력 껏 정령들을 불러내어 따로 '그 존재'를 찾도록 시켰고 우리는 우리 대로 천천히 산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잠깐 놀란 것은 이 리틀조로 녀석은 대단한 정령사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예상 외로 무척이나 정령과의 친화력이 강했다. 물의 정령과 땅의 정령은 상급까지 계약을 맺었고, 불과 물의 정령과는 중급까지 계약을 맺은 것이다. 뭐, 나 같이 하급 정령과 계약을 맺었어도 4대 정령을 모두 부를 수 있는 탓에 괜찮은 정령사란 소리를 듣는 것을 볼 때 리틀조로는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단지 아직 몸에 지니고 있는 마나가 적어, 상급 정령은 하나밖에 부르지 못하고, 것두 상급을 부를 때는 그 정령 말고는 다른 정령을 부르지 못한는 단점이 있기야 하지만, 이 소년도 기사를 목표로 하는 이상 그건 나중에 얼마든지 축적할 수 있는거니까 문제 될 건 없다. "어느 쪽으로 갈깝쇼?" 어느 정도 산을 오르자 길 안내용인 나뭇꾼이 애쉬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전에 몬스터들의 울부짓는 소리가 들렸다던 곳으로 가주시오." 그러자 그 나뭇꾼은 난색을 표했다. "거야, 소리가 났긴 났지만, 워낙 멀리에서 난데다가 거길 직접 본게 아니기 때문에 대강 어디쯤이라는 것만 예측할 뿐 자세하게는 모르는뎁쇼?" "상관 없소. 그 근처까지 간다면... 어차피 계속 그 곳에 있지도 않을 테고, 그냥 정말 그 범인이 한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까." "뭐, 그러시다면야..." 하며 나뭇꾼이 몸을 돌려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신호로 우리도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우리는 한 30분 올라가다가 멈춰서야 했다. 리틀 조로 녀석이 얼굴이 빨개진체 헉헉대며 자리에서 주저 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머리에 동동 떠서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실프들을 본 나는 그가 왜 그런지 알고는 고소를 머금었다. "리틀 조로!!" 사르하 신관이 놀라서 그에게 달려들어 부축하자, 이트란은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기를 부드럽게 거절한 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괜찮아, 사르하." 이 녀석들은 서로가 동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을 터놓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회복 주문이라도 써줘. 저 녀석 지쳐서 그러는 거니까." 내가 갑작스레 입을 열자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꼬맹이 신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입 속으로 신에게 기원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이트란에게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곧 그녀의 손에서 성스럽게 느껴지는 빛이 뿜어져 나오며 이트란을 서서히 감싸다가 사라졌다. "좀 괜찮아?" "아, 응..." 이트란의 혈색이 제대로 돌아오자 모두의 시선이 궁금증을 한껏 담은 채로 나에게 향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선들을 싸악 무시해 버렸고, 대신 스와카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신 입을 열었다. "마력이 딸려서 그런 거예요. 아시리안님이야 소드 마스터의 경지의 마법사이시니 마나가 많지만, 아직 견습 기사인 리틀 조로는 마나가 적을수 밖에요..." "그런데, 마나가 적은 것 하고 리틀 조로가 지친 것 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그 정도의 설명으로는 이해를 못한 브랜이 질문하자 스와카는 생긋 웃고는 더욱 더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리틀 조로는 우리처럼 산을 올라가랴, 이 산에서 범인을 찾는 정령들에게 마나를 공급해주랴, 바빴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정령들이 우리 눈 앞에서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계약자의 마나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어요. 뭐, 정령왕이나 정령기사는 스스로의 마력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하급, 중급, 상급의 정령들은 그들의 능력에 맞는 마나를 계약자에게 받아서 사용하거든요." 그제야 브랜을 위시한 몇명의 떨거지들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리틀 조로는 정령들을 거두어드리도록 해라. 네 능력으로는 이 산을 다 뒤지기에는 힘들테니까. 공녀님, 혼자 괜찮으시겠지요?" 애쉬 녀석이 나를 보았다. 뭐, 나야 마력이 차고 넘치니까... 내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틀 조로녀석 괜히 찔렸는지 버벅대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사르하 꼬맹이 신관도 나섰다. "제가 도울께요. 그럼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애쉬의 고개는 가로저어졌다. "일부러 그럴 필요 없어. 정령을 부리는 건 공녀 혼자로 충분하다니까... 신관님께서도 만약을 대비하여 신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애쉬 녀석은 사르하 꼬맹이 신관도 신관이라고 일행 녀석들은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트란이 불만인 표정이자 애쉬녀석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안돼. 너도 만약을 대비하여 체력을 낭비하지 말아라.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너의 정령술이 큰 도움이 될테니까." 그제야 이트로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알겠습니다." '꼬맹이는 꼬맹이야... 도움이 될 거라는 소리에 얼굴이 펴지니... 단순하긴...' 다른 일행들도 피식 피식 웃으며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11화 앗, 올만이야!!(2) 아무리 계절이 여름이고, 해가 긴 때라고는 하지만 산 속에서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듯 간단한 점심을 먹고 몇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지시 시작했고, 바람은 쌀쌀해졌다. "아무래도 야영할 자리를 찾아야겠군요." 애쉬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며 말하자 나뭇꾼이 냉큼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는 넓직한 공터가 없습니다요. 아무래도 골짜기이다보니 바위투성이거든입쇼. 이 인원이 편안히 자리를 잡으려고 한다면 이 곳에서 한참이나 벗어나야 찾을 수 있을겁니다요." 그러자 애쉬가 브랜과 사르하 신관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제일 걱정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때 스와카가 나섰다. "바위투성이라고 해도, 큰 바위가 있는 곳이라면 인원을 둘이나 셋으로 나누어 야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올습니다요... 이 근처에 그런 곳이 있기는 한데, 계곡이라서 낮이면 몰라도 밤이되면 무척 추울텐뎁쇼?" 그러자 이번에는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브랜과 신관에게 쏠렸다. 그 둘은 일행의 시선때문인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보다가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모포도 따뜻한 것으로 준비한데다 모닥불도 피울테니까 괜찮겠지. 그 곳에 가기로 합시다." 명목상 일행의 리더격인 그가 허락을 하자 나뭇꾼의 안내를 받아 그 곳에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커다란 바위들 주변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고 아래 위로 뻥 뚤린 탓에 바람이 쌩쌩 불었고, 근처에 차가운 계곡물이 흐르는 관계로 무지무지 추웠다. 애쉬는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브랜과 사르하, 그리고 리틀조로에게 모포를 뒤집어 쓰게 하였고, 나머지 일행들도 서둘러 두터운 겉옷을 껴입었다. 일행은 셋으로 나누어 각자 넓직한 바위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모닥불을 지폈고 뜨끈뜨끈한 스프와 차를 마시며 추위를 버텨내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나자 원래 설거지 당번인 브랜과 사르하가 추위와 피로에 지쳐 잠이들어버리는 바람에 나와 리틀조로가 정령사라는 이유로 설거지들을 몽땅 떠맡았다. 뭐, 애쉬 녀석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설거지 그릇을 넘겨 주었을때 알렌과 흄이 자신들이 한다며 일어섰지만, 날씨도 추운데 차가운 계곡물로 이들에게 설거지를 시키려니 도저히 양심에 찔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정령들에게 부탁할 거니 당신들은 가만히 있어요." 리틀 조로와 함께 약간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계곡물 속에 지저분한 그릇들을 넣고 운디네들이 설거지 하는 모습을 멀거니 보고 앉아 있는데 부드러운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계곡의 차갑고 날카롭기까지한 바람이 아닌 탓에 나는 금방 눈치를 채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곳에는 실프가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역시나... 인가? 그래, 어디 있지?" [골짜기를 벗어나서 소사믹 산맥의 북동쪽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리틀조로를 바라보았다. "나 먼저 갈테니까 뒷 일을 부탁해." 그리고는 곧바로 허공으로 날아올라 실프와 함께 날아갔다. 뒤에서 리틀조로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내가 할수 있는 한 최고의 속도를 내어 허공을 가로질렀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 무척 깜깜했지만, 실프의 몸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왔으므로 실프를 쫓아가는데는 어려움이 없는데다 실프도 내 초조함을 알고 있는지 빠른 속도로 내 앞에서 날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날았을까? 몸이야 마법의 망토가 보호를 해주고 있어서 괜찮았지만, 찬 바람을 맨 살로 직접 맞대고 있던 얼굴이 차가워지면서 귀가 떨어져나갈 것 처럼 추워질 무렵, 저 멀리 앞쪽에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함께 마구 요동치는 마나의 진동이 느껴졌다. 낮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먼 곳에 있는 불빛이었지만 깜깜한 밤인데다가 불빛 하나 없는 숲 속이어서 금방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콰과광~~!!'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마법?' 이런 곳에서 마법을 난사하는 정신 없는 자 하면 떠오르는 존재... "무슨 일이 생겼군..." 나는 더욱 더 긴장한채로 점점 약해지는 불빛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번쩍!! 콰과과광~~!! 다시한번의 불빛과 함께 들려오는 폭발음. 이번에는 불빛과 폭발음이 거의 동시에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거리가 340m 안인 듯 했다. - 소리는 1초에 340m 가잖아요 ^^ - "다 왔어. 조금만 더..."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이번에는 세번의 연속적인 폭발이 일어났고 나와의 거리는 더욱 좁혀져 폭발에 의하여 불이 붙은 나무들 사이로 어른거리는 인영의 그림자들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나는 조심스레 땅으로 내려왔다. 계속 되는 폭발로 인해 넓은 공터가 생겼고, 그 공터를 둘러싼 나무들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와 눈을 따겁게 하는 연기 속에서 이곳 저곳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인영들은 정신이 없어서인지 내가 가까이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가까이간 나는 그 인영들의 모습을 잘 볼수 있었다. '엘프?' 한결같이 아름다운 외모에 색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무 위나 땅위를 뛰어다니는 그들의 귀들은 한결같이 길고 뾰족했다. 그들은 두 패로 나뉘어 한 무리는 이제 막 바람을 타고 번지기 시작하는 불길을 잡으려고 했고, 나머지 한 무리는 공터의 중앙에 당당히 버티고 서 있는 적을 맞고 있었다. 나는 불을 끄려고 뛰어다니는 엘프들의 사이를 지나 공터로 다가갔다. 불길을 배경으로 멋드러지게 서 있는 '그 존재'는 강렬한 살기를 내뿜으며 엘프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살기와 함께 뿜어지는 뒤엉킨 마나의 양이 장난이 아니라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엘프들의 어깨가 모두 긴장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존재'의 손이 서서히 치켜 올라가며 뒤엉킨 마나가 손 안으로 모이기 시작하자 엘프들의 손들도 긴장한채로 올라갔다. "카오틱 디스팅레이트!!" '그 존재'의 입술이 열리며 나지막한 어조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그와 동시에 엘프들의 외침이 터졌다. "실드!!" '그 존재' 바로 앞의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푸른빛 기둥 모양 에너지파의 연속적인 폭발이 엘프들이 형성한 실드에 다가와 부딧히자 또다시 커다란 굉음이 들려오며 몇곂으로 싸인 실드가 제일 바깥쪽에 형성된 것부터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럼과 동시에 그 곳에 서 있던 엘프들 중 누군가가 한명씩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하지만 동료들의 쓰러짐에도 아랑곳 않고 - 물론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 이겠지만... - 실드를 형성하지 않고 있는 엘프들이 '그 존재' 에게 나름의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 존재'가 형성한 실드를 깨트리지는 못하고 허무하게 튕겨져 나오기만 했다. 그 모습에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못 봤던 곳곳의 구석진 곳에서는 부상당한 엘프들이 있었는데 그 숫자가 꽤 많았다. "크윽~~!!" 또 다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는 실드가 두곂밖에 남지 않아 공격을 하던 엘프들이 공격을 멈추고 실드를 형성하기 위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채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실드가 하나 또 깨져버렸고 마지막 실드조차 쩌억 쩌억 소리와 함께 금이 가기 시작하자 나도 얼른 손을 들어올린 채 마나를 내뿜었다. "실드!!"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지막 실드가 쩌엉~!! 소리와 함께 깨졌지만, 다행히도 내 실드가 그 뒤를 이어 형성되었기에 엘프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챈 엘프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 제목 제 11화 앗,올만이야!! (3) 그리고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챈 엘프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인사 할 시간은 없었다. '그 존재'의 공격이 끝나자마자 내가 엘프들 머리 위를 뛰어 넘음과 동시에 허리에 차고 있던 레이피어를 빼 내어 거꾸로 쥔 채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면서 '그 존재'의 목을 정확히 겨냥해 옆으로 그으려는 찰나, '그 존재'가 들고 있던 검을 살짝 자신의 목 바로 앞에 끼어넣어 내 검을 손쉽게 막아내었다. 달려오던 속력과 검을 휘두르는 힘이 더해져 있어 상당한 스피드로 쇄도해 들어간 검이 막히면서 그 반탄력이 내 손목과 팔에 가해졌다. 그리고 나는 검을 거꾸로 쥐고 있는 까닭에 검을 쥔 손에 힘이 살짝 빠져 있어 반탄력을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아버렸다. 그러자 그 순간을 노치지 않은 '그 존재' 의 검이 바로 내 오른쪽 목을 향해서 내리쳐졌으나 '그 존재'를 향해 의미있게 씨익 웃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검이 바로 거두어졌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내가 왼 손에 준비하고 있었던 마력탄이 '그 존재'의 복부에 작렬했다. 퍼억~!! "커억!!" 듣기에 좋지 않은 신음과 함께 몸이 허공으로 붕 뜨면서 뒤로 날아가는 모습을 노치지 않고 나는 재빨리 손에 마나를 모아 같이 날렸다. 그러나 내가 날린 날카로운 마나덩어리를 본 탓인지 '그 존재'는 뒤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양 손을 얼굴 앞에서 X자 모양을로 교차시키는 동시에 마나를 내뿜어 내가 날린 마나덩어리를 허공에서 폭파시켜버렸다. 콰아앙~~!! 적지 않은 양의 마나들이 허공에서 부딧혀 폭발을 일으키자 이제까지 일어난 폭발이 우숩게 여겨질 정도의 큰 폭발이 일어나 일대를 휩쓸어갔고, 여파로 일어난 엄청난 열기와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에 나무들이 뿌리채 날려갔고, 몸을 보호하지 못한 부상당한 엘프들까지 날아가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도와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본능적으로 얼굴을 팔로 감싸고 실드로 몸을 보호하여 몸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지탱시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어느정도 열기가 가시고 바람도 잠잠해지자 그제야 정신이 든 내가 실드를 걷고 주위를 둘러보자, 내 뒤에 있던 엘프들도 실드를 걷어내고는 천천히 일어나 몸을 추스렸다. 주위는 아까보다 더욱 더 큰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큰 아름들이 나무들이 허리가 부러지거나 뿌리채 뽑혀 사방으로 난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터 가운데에는 검게 그을린 커다란 구덩이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어야 할 '그 존재' 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놓친건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엘프들에게 시선을 돌릴 때 누군가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아린?" 내 뒤에 있던 몇명의 엘프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서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엘프 청년을 나는 뚱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주위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띄는 푸른 머리에 푸른 눈의 엘프...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누구?" 하지만 이름은 기억이 안 나서 눈만 껌뻑 껌뻑 대고 그를 쳐다보고 있자 그 엘프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하나 솟았다. "야, 너어~~.." 그러나 그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내 뒤를 쳐다 보았다. "뒤 조심!!" 그의 말을 듣고 얼른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늦은 듯 내 머리 위에서 검을 내려꽃고있는 '그 존재'의 모습이 보였다. "아린!!" 그 엘프의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강하게 내 몸을 옆으로 밀쳐내는 바람에 나는 바닥에 나뒹굴어야만 했다. "으갸갸갸갸~~~!!" 볼썽 사납게 땅바닥에서 몇번 구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가 있던 자리에서는 '그 존재'가 땅에 깊숙히 꽂힌 검을 빼 내고 있었고, 내 앞에는 이제는 익숙해진 빨간 머리를 가진 남자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딴데 한 눈을 파니 그렇게 되는 거요, 공녀!!" 저 재수 없는 말투하며... "잘나셨군요, 레드포드 경. 그럼 한번 당신이 상대해보지 그러세요?" 나는 망토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그를 비꼬았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되질 않았는지 모두 긴장한 얼굴로 애쉬 주변에서 '그 존재'를 둘러쌓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는 반담과 흄을 비롯한 내 일행들도 몇명이 끼어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뒤에는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향해 씨익 웃는 스와카와 벌써부터 부상당한 엘프들에게 달려들어 신성력을 발휘하는 꼬맹이 신관이 보였고, 더 뒤쪽에는 아직은 멀쩡하게 서 있는 아름들이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안내자들과 브랜이 보였다. "아항, 마법으로 오셨군요." 스와카를 바라보며 묻자 스와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상황이 위급한 것 같아서요." 그리고 다시 들리는 폭발소리!! 콰앙~~!! 그 여파로 내 망토자락을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스와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렇죠." 뒤를 돌아다보니 '그 존재'의 주위에는 다시금 땅들이 더 파여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아까보다 약한 마법이었는지 '그 존재'를 둘러쌓고 있는 사람들은 뒤로 서너발자국 뒤로 밀려나거나 가벼운 부상과 함께 넘어졌을 뿐, 심하게 다친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법을 쓴 뒤에 '그 존재'가 보이는 빈틈을 놓치지 않은 애쉬 녀석이 검을 치켜든채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호오, 드디어 검을 섞어보는 건가?" 붉은 검기가 감싸고 있는 검이 정확히 '그 존재'의 심장을 향해 찔러들어 갔지만 '그 존재'의 팔에 의하여 막히고 말았다. 하긴 '그 존재'도 급했는지 검을 들어 막지 못한채, 겨우 마나로 감쌓인 팔을 들어 애쉬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애쉬의 검이 좀더 강했는지, 아니면 '그 존재'가 막는 타이밍이 늦었는지 애쉬의 검 끝이 '그 존재'의 팔을 살짝 찌르고 있었다. 검에 찔린 곳에서부터 가는 핏줄기가 흘러나와 팔꿈치에 모이더니 한 방울 두 방울 땅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 존재'의 입가가 씰룩였다. "피해!!" 위험을 감지한 누군가가 소리쳤고 애쉬 녀석도 재빨리 몸을 뒤로 빼내려 했지만, 그 전에 애쉬 녀석의 검을 가로막고 있던 '그 존재'의 팔이 휘둘러지며 강력한 바람이 애쉬 녀석을 강타했다. "크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애쉬 녀석의 몸은 근처에 있던 커다란 나무를 드리박아 부러뜨리며 처박혔다. '그 존재'는 애쉬의 몸이 날아가는 것을 따라 시선을 돌리더니, 애쉬의 몸이 완전히 처박혀 고정대자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안돼!!" 리틀 조로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 녀석이 불러낸 중급 땅의 정령이 '그 존재' 바로 앞의 땅에서 부터 거대한 흙기둥을 솟게 만들어 덥쳐갔으나, '그 존재' 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대한 마력탄을 흙기둥 속에 박아 넣었다. 콰과광~! 음향 효과와 함께 흙기둥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자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재빨리 땅에 엎드렸고, 나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실드를 쳐서 몸에 떨어지는 흙더미들을 막아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그 존재'는 쓰러져 있는 애쉬의 앞에 가서 떡 하니 버티고 섰다. "몸에 상처가 난 것에 무지 무지 열받았나보군..." 실 없는 농담을 흘리며 천천히, 그리고 주의깊게 그쪽으로 다가가는데 애쉬 녀석이 정신을 차렸는지 부들 부들 떨리는 두 팔로 땅을 집고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친 '그 존재'의 모습에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커다랗게 뜨여졌지만, 너무 놀란 탓인지 눈에 다시 힘이 풀리면서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이 힘 없이 벌어지며 작은 목소리로 한 단어를 흘려냈다. [엄마...] 그때쯤 나는 그에게 가까이 접근해 있었던 탓에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단어가 주는 충격으로 인하여 나는 '그 존재'가 목전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엄마]라고? 애쉬 녀석이 어떻게 용언을...?' 머리가 팽팽 도는 것 처럼 어지럽고 정신이 바깥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만 같은 상황에서 다리의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자 나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아린!!" 뒤에서 누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땅에 얼굴을 처밖고 있는 애쉬 녀석만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분명히 인간인데...?'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11화 앗, 올만이야!!(4) 내가 그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 내 귀 바로 옆에서 강한 바람이 부는 가 싶더니 그 뒤에 저 멀리에서 큰 굉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높은 허공에 불의 상급 정령 3명과 바람의 상급 정령 3명이 '그 존재'를 둘러쌓고 있었는데, 바람의 상급 정령들이 '그 존재'의 주위에 강력한 바람의 막을 형성하였고, 그 안에 불의 상급 정령들이 뜨거운 화염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바람의 상급 정령들이 막을 거두자 그 안에 형성되어 있던 진공의 공간에 공기가 공급되면서 폭발과 함께 커다란 화염이 같이 일어났던 것이다. "대단하군..." 바람과 불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무서운 공격에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 뱉았다. 이정도의 공격이라면 아무리 '그 존재'라고 해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에는 무사하지 못하겠지."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가진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옆에서 들려오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오랫만이야, 아린." "류...미르?" "어이구, 이제야 알아보다니 네 기억력도 형편 없구나?" "너!!" 나는 반가움보다는 놀람이 앞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류미르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왜 이렇게 늙었냐?" 그러자 류미르의 이마에 힘줄이 빠직 하고 솟았다. "늙었다니? 성장한거 뿐이라고.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그런 것도 기억 못하는 거야?" 처음에는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노려보던 눈이 점점 누그러지더니 다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마치 어린 여동생을 보는 듯한 눈으로... 무지 기분 나빴다. "얼씨구, 그래봤자 나보다도 어린게..." 그러나 류미르는 나의 말을 못들은 척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래도 잘 살아있군..." 그의 착잡한 어조에 나도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불꽃이 사라지고 난 뒤에 나타난 '그 존재'는 비록 옷이 예전보다 더 너덜너덜해지고 온 몸이 그을려 있었지만, 멀쩡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꽤 충격을 받은 듯 입가에는 가는 실핏줄이 흐르고 있었다. '그 존재'는 가만히 자신을 둘러싼 상급 정령들을 노려보더니 팔을 들어 입가의 피를 쓰윽 닦았다. 그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어라? 한바탕 더 해야할 줄 알았더니..." 류미르의 안도감 반 허탈감 반이 섞인 말투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이 꽤 컸나보군... 아마 오랫동안 나오지 않겠지..." 그러자 류미르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아니, 꼭 저 여자를 잘 아는 듯한 말투 같아서 말야... 그러고보니..." 류미르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주위를 한번 쓰윽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 네 동료들이지? 인간들 치고는 한가닥 하는 실력들인 것 같던데... 그럼 혹시 저 여자를 쫓아온 거야?" '짜식, 예전에도 머리는 뛰어나다 했더니... 추리 능력도 많이 늘었군...' 나는 왠지 기분좋은 감정을 느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 여자가 지금 내가 거하는 나라를 풍지박살 내고 있거든. 그래서 저 여자의 처리를 도맡았어." "흐음, 그랬군...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런거지?" "응? 뭐가?" "너 말야... 아까 이쪽으로 다가온거 그 여자에게 공격하기 위함 아니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가다말고 주저앉았던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류미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주저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내 개인적인 사정이야." "뭐야, 그게?" "뭐긴 뭐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뭘 꼬치꼬치 캐묻고 그래?" 나는 류미르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내 앞에 아직도 꼬꾸라져 있는 애쉬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비록 얄미운 녀석이기는 하지만 그냥 모른척 할 수가 없어서 - 물론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 그 녀석을 바로 눕힌 후 류미르에게 치유를 부탁했다. "류미르, 이 녀석 좀 봐줘." 류미르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해도 되잖아?" "물론 내가 해도 되지만, 해주기 싫어서 그래." 류미르는 더욱 더 알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도 순순히 애쉬 녀석 옆에 주저앉아 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너한테 밉보이기라도 했나보지?" "응. 미운털이 밖힌 녀석이지." 그러자 류미르는 그를 살펴보다 말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린, 너 정말 성질 많이 죽었다? 예전에는 너한테 찍히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았잖아?" "물론이야. 이 녀석이라고 가냥 둘 줄 알았냐? 이 놈은 단숨에 처리하는 것 보다는 두고두고두고 잘근잘근잘근 씹어줄려구 놔두고 있는 거야." 내가 입술까지 잘근잘근 씹으며 내뱉자 류미르는 순간적이지만 동정이 가득한 눈으로 애쉬를 내려다 보았다. "그럼 그렇지... 이 녀석도 안됐군." "녀석이 자초한 거야." "쯧쯧쯧..." 류미르가 녀석에게 손을 얹고 본격적으로 치유의 주문을 걸어주자 나는 그걸 옆에 앉아서 구경하면서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건 그렇고 류미르, 너 왜 여기 있냐?" "나 말야? 그거야 여기가 우리 마을이니까 그렇지..." "에? 여기가 하이 엘프의 마을이었어?" "그래. 이 근처에 있어." "어쩐지..." 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류미르가 애쉬 녀석의 옷을 벗겨 치유된 상처를 살펴보며 물었다. "뭐가?" "너희들이 왜 미지근하게 대적하는지 궁금했거든... 마력이 약하다고 쳐도, 너희 하이 엘프들은 정령과의 교감이 무척 대단하기 때문에 더 강하게 공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거든... 예전에 네가 세이몬 사건때 보여준 것도 그랬고, 아까 공격하던 걸 보면 내 예상이 완전 틀린것도 아니구 말야." "흐음, 그렇긴 하지. 네가 올때 우리는 그녀를 딴 곳으로 유인하던 중이었거든. 아무래도 마을이 가까이 있다보니 마을에 피해가 가면 안되니까... 더욱이 여기는 숲이고 말야." "아, 맞다. 엘프들은 숲을 아끼지?" "그것두 지금에야 생각 났냐?" 류미르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애쉬 녀석을 다 치료했는지 그를 들쳐업고 일어났다. "자, 가자." "응? 어딜?"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더욱 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긴 어디야? 우리 마을에 가자는 거지. 여기에 계속 있을거야?"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의 엘프들이 마을로 이동한 듯 보이지 않았고, 내 일행들도 같이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자." 류미르를 따라가는 길은 격전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 여기저기 불에 탄 흔적들이나 아예 파괴된 흔적이 많았다. "고생 했구나?" "말도 마. 내 장담하건데 마을의 절반이 다쳤을 거야." "너희들 정도니까 그렇지, 인간 마을들은 당하는 족족 완전히 파멸되었는걸 뭐..." "넌 뭐하고?" "나? 내가 나선지는 얼마 안돼었어." "그랬냐? 그런데 넌 여기 인간으로 있지? 용병으로 있는 거야?" "아니. 울 아빠가 이 나라 공작으로 있어. 그래서 덕분에 공녀이자 마검사로 있어." "네 아빠? 실버 드래곤 아펜젤러?" "웅. 바로 그 용." "헤에... 그래서 아빠를 따라 나온거야?" "아냐, 우연히 만났어. 그때 이미 아빠는 공작이 되어 있었고... 덕분에 공녀로 편히 지내고 있긴 하지." "그럼 여기서는 네 본래 모습을 모르고 있겠군?" "맞아. 그러니 너두 입다물고 있어." "그러지 뭐." 류미르의 안내를 받아 간 하이엘프의 마을은 현재 무척 소란스러웠다. 마을의 집들 대부분은 커다란 아름들이 나무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나무들 사이에 따로 줄이나 다리가 연결된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나무들을 왔다 갔다 뛰어다니는 엘프들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 만으로도 여의치 않았는지 땅 위에는 여기저기 누울만한 공간에는 여지없이 부상당한 엘프들이 차지하고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마법사인 듯한 엘프 여러명이 돌아다니면서 부상자들에게 치유의 마법을 걸어주고 있었고, 마법사가 아닌 엘프들은 부상자들이 치유를 받기 전까지 버틸수 있도록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내 일행들도 보이고 있었다. "흐음, 여기에들 있었군..." 류미르는 그 근처 공터에 애쉬를 눕혀놓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도와줄거지?" "당근이지. 네 마을 사람들이잖아."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근처에 있던 부상자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류미르의 도움을 받아 부상자들에게 치유의 마법을 걸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류미르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흠칫 하더니 옆에서 같이 부상자를 돌보던 앨프 한명을 불러 나를 도와주게 하고는 자신은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 쪽으로 뛰어갔다. "잠깐만 나 갔다 올께." "응? 그래." 나는 의아했지만 물어볼 사이도 없이 류미르가 급하게 뛰어가려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궁금증을 꿀꺽 삼키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얼마 후, 류미르와 같이 온 사람들을 보고는 그가 왜 그리 급히 뛰어갔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저희를 도와주시다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에게 지나치리라 생각될 정도로 깊숙히 고개를 숙이는 엘프. 그도 꽤나 다친 듯 머리와 어깨에 붕대를 감고 옷 여기저기에 핏자국을 뭍히고 있었지만, 회복주문을 받은 듯 혈색은 좋아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듯한 얼굴이었다. "저... 누구신지?"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류미르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아린,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 혹시 너네 가족들에게 덜떨어졌다는 소리 안 듣냐?" 그러자 그와 같이 온 몇몇의 엘프들은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졌지만 류미르는 태연자약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할 수 없어서 매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류미르... 죽고잡... 어?" 나는 류미르를 협박하다말고 류미르와 나에게 고개 숙인 엘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거지만, 그와 류미르와는 형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척이나 얼굴이 비슷했다. 물론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쪽이 좀더 성숙해 보이며 차분하고 현명해 보였지만... "아, 그러고 보니..." "이제야 기억 났냐? 하여튼 네 기억력을 봐서라도 정말 의심이 간다니까." 류미르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옆에서 사색이 되어 있던 그 엘프가 소리쳤다. "류미르, 무슨 무례한 말투냐?" 그의 말이 지극히 당연한거긴 하지만, 그 말 덕분에 분위기가 무지 썰렁해지자 나는 그 분위기를 풀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쯧쯧쯧, 여전히 잘 혼나는 구나? 너 전에 아마 이분들께 끄..." "아리이이인~~, 너 네 신분은 감추고 싶다며?" 류미르가 갑자기 다정다감한 미소를 찐~ 하게 지으며 나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더니 살기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렸을때의 일을 자꾸 들추는건 안 좋은 거야, 그치?" "짜식, 네가 생각하기에도 창피하긴 한가보다?" "아리이이이이이인~~~?" 류미르의 눈길에 살기가 번쩍이자 나는 이쯤에서 물러나줬다. "그래, 그래. 알았어. 입 다물고 있어줄께.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건데, 그때 도저히 살아있을 것 같지 않더니 용케 살아남았네?" "하, 그거야 이 몸이 워낙 뛰어난 능력자이다보니.... 저 분들도 인재를 알아 보시니 나이를 헛 드신게 아니라는 거지." "그 잘난체는 여전 하구나?" "난 잘난 체 하는게 아니라 원래 잘난 몸이야." 나는 자아도취에 빠져버린 류미르를 싸악 무시하고 내 앞에 서서히 안색이 풀려가는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전에 류미르를 데리러 오셨던 분들이신 것 같은데요? 그럼 족장님?" "그렇습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이 엘프족의 족장이 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아, 저는 지금 인간으로 여기 온 것이니 너무 그렇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류미르에게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 인간들과 같은 일행이시라고요?" "예. 그러니 제 정체를 모른체 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대충 마을도 정리된 듯 하니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이 곳에 들어온 인간들도 대접해야 하니까요." "그러시죠." 엘프 족장의 뒤를 따라 그 마을에 있던 중에서도 제법 커 보이는 나무위의 집에 올라가자, 그 곳에는 벌써 일행들이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공녀님!!" 내가 그 곳으로 들어가자 피곤한 얼굴들로 여기저기에 축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급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네요." 예의상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주자 같이 들어왔던 족장이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험험, 저는 이 마을의 족장입니다." 그러자 브랜이 앞으로 나서서 그를 맞았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원래는 애쉬 녀석이 나와야 하겠지만, 애쉬 녀석은 아까 기절한 뒤로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고 있었기에 브랜이 나선 것이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저희 마을을 도와주신 것 깊이 감사드립니다."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모두들 피곤하실테니 이만 물러가고 내일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세심한 배려 감사드립니다." 브랜의 인사에 족장도 마주 고개를 숙여보이더니 류미르를 돌아보았다. "류미르, 넌 여기 좀 더 남아서 이분들이 편히 쉬실 수 있게 도와드리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족장과 기타 몇몇 엘프들이 다시금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간뒤에 류미르는 방을 배정하 고, 침대가 모자랐으므로 침낭 까는 것들과 욕실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등 자잘한 일을 하고 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아린, 넌 우리집에 가서 자자. 너 까지 이 곳에 자기에는 여긴 너무 좁으니까." 그의 친근한 태도에 일행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설명해주길 바랬지만, 난 싸악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그러자 알렌과 흄이 즉각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저희들도..." "아녜요, 됐어요. 저 혼자 가도 괜찮으니까 여러분은 여기서 쉬도록 하세요." "하지만..." 알렌이 불안한 눈으로 류미르를 바라보았지만 류미르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마주바라보며 웃어보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안면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정 그러시다면 저희는 이 곳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불안한 표정의 알렌을 잡아끌어 나에게 떨겨놓으면서 흄이 말하자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세요. 그럼 내일 뵙죠."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골아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사르하 신관을 발견하고는 그녀도 불렀다. "너도 갈래?" 그러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미적미적 일어났다. 다른 일행들은 그녀에게 꼭 존칭을 써줬지만, 나는 보자마자 반말로 나갔기에 그녀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까지 오면서 별로 대화도 하지 않은 사이었지만, 아무래도 남자들만 있는 곳에 혼자 두고가자니 맘에 걸렸던 것이다. 그녀도 그걸 알고있기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류미르의 집은 일행에게 배정해준 집과 한 나무 건너에 있었는데, 그 집보다 작았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자 그가 피식 웃으면서 혼자 살기때문에 작은 집을 얻었다고 설명해주었다. 확실히 이곳은 인간들의 사고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아무리 혼자 산다고는 하지만 - 뭐 부모가 지척에 있는데 혼자 사는 것도 이상하지만... - 족장의 아들인데 이렇게 작은 집에서 산다니... 자신이 워낙 소탈한 성격이라서 이런 집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 류미르는 분명 소탈한 성격은 아니었다. - 혼자 살면 누구나 의례히 이런 집에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집의 크기는 가족 수에 비례해야 한다나? 뭐,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인간들 상식과는 안 맞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들은 자신이 능력만 있으면 혼자 살던 말든 큰 집에서 사는 것이 상식이었으니까. 류미르의 집은 크기도 작아서 그런지 침실도 딱 하나밖에 없어 류미르는 그 침실을 나와 사르하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재빨리 욕실에 들어가서 나무로 된 욕조에 따끈한 물을 채워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먼저 하구 자." 나는 그녀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거의 명령조로 그녀를 짐과 함께 욕실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류미르의 침실로 들어가 바닥에다 내 침낭을 깔았다. 침실을 양보해준다고 해도 침대가 1인용 사이즈라 그녀와 나 둘이 자기에는 비좁았던 것이다. 침낭을 깔고 작은 거실로 나오자 류미르가 어느새 끓였는지 차를 내놓고 있어 거실에는 향긋한 차향이 풍기고 있었다. "마실거지?" 의중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확인 차 물어보는 그의 말투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근." "설탕이 없으니까 꿀을 넣어줄께. 두 스픈이지?" "잘 알고 있네?" 난 단걸 좋아해서 설탕을 넣지 않고 차를 즐기는 류미르와는 달리 꼭 설탕을 넣었던 것이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 주다니...'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 다음 나온 녀석의 말에 그 기분이 씻은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당연하지. 내가 넌줄 알아?" "왠지 잘난체 하는건 더 늘은 것 같다?" 그를 째려보며 권해주는 의자에 앉자 그도 후후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동안 못한 자랑 다 해야지." "하긴... 세월이 많이 가긴 했다. 엘프들에게도 적은 시간은 아니겠지?" "그래, 하지만 너에게는 적은 시간이었겠지? 그동안 뭐하고 지냈냐?" "나? 난 그냥 디립다 잤어. 너희들이랑 헤어지고 나니까 넘 허무해서 아무것도 할 의욕이 일어나지 않더라구. 넌?" "나야 뭐... 여기 끌려와서 아버지한테 무지무지 깨지고, 몇달 근신했지. 그러다가 나이가 차서 성년식을 치루고... 그냥 저냥 있었다. 검술이랑 마법을 좀 공부한 정도?" "헤에, 그랬냐? 그래, 마법은 많이 늘었고? 전에 너가 아마 4서클 이었었지?" "그래. 뭐, 지금은 6서클까지 마스터 했지만..." "6 서클? 에게... 겨우 2서클 밖에 증진 못시켰어?" 처음으로 그를 얕볼 건수를 잡고 좋아라 하자, 류미르의 얼굴이 벌개지며 변명을 하려는 듯 입을 열 때였다. 쿵!! "뭐야?" 내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류미르도 같이 일어나 욕실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욕실 안에서 들렸어." 그러나 그는 욕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머뭇머뭇 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 여기 들어간 사람이 여자였지?" "깔깔깔... 그냥 박차고 들어가보지 그랬냐?" 류미르의 벌개지는 얼굴을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가자 사르하가 알몸으로 욕실 바닥에 뻗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 졸면서 욕조 밖으로 나오다가 발이 걸려서 넘어진 듯 했다. 그러면서도 무지 졸렸는지 그대로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사람이 졸리면 이럴수도 있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그녀의 몸에 대충 신관복을 돌돌 말아서 침실로 옮겨줬다.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11화 앗, 올만이야!!(6) 그리고 나서 류미르와 나는 거의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뭐, 류미르한테는 숨기고 싶지 않아서 '그 존재'에 대하여 다 이야기 해줬더니만 그 녀석은 무지무지 놀라는 한편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힘들었겠군?" '첨에는 무지무지 힘들었지... 하지만...' 나는 그에게 괜찮다는 표시로 씨익 웃어보였다. "뭐, 견딜만 해. 아빠도 계시니까..." "하긴, 나는 너희 종족일은 잘 모르니까 아직까지는 잘 이해는 가지 않아." "너한테 이해 바라고 말한 거 아냐."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그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 또 이 녀석이 친구란 것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이 일은 내가 해결할거야. 그건 그렇고 미안하다." "응? 뭐가?" "너희 마을 말이야. 비록 내가 한건 아니지만... 내가 일찍 왔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걸 그랬어." "그게 네 잘못이냐? 그리고 네가 일찍왔다면 너랑 나는 만나지도 못했을 거 아냐? 비록 좋은 사건으로 만난게 아니라서 좀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네 엄마가 조금은 고맙게 느껴진다." "엄마가 아니라니까." 내가 인상을 팍 쓰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얼른 두 손을 들고 흔들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조심할게. 그건 그렇고, 이제 자야지? 안 피곤해?" "뭐 별루 피곤한건 없는데... 넌 무지 피곤한가 보다?" 나는 내가 피곤한 걸 못 느껴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문득 류미르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한 걸 보고는 묻자 그가 배시시 웃었다. "아아... 역시 너랑 나는 다르구나. 저녁때 부터 한바탕 했더니 좀 피곤하네?" "그랬구나... 오래 잡고 있어서 미안. 너 피곤한 걸 생각 못했다. 그럼 이만 잘까? 뭐 몇시간 자지는 못하겠지만 말야." 밤이 무척 깊어 새벽이 다가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자 류미르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오늘같은 날 늦잠 정도는 봐주겠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을 집어들고 부엌 비스무리한 곳으로 가져가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그럼 잠시 후에 봐." "그래, 잘 자라 아린." 침실로 들어가니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있는 사르하가 보였다. 아까 귀찮아서 옷을 안 입혔었는데 덕분에 시트가 살짝 흘러내려가있자 그녀의 맨 어깨와 가슴이 드러났다. "뭐, 여자끼리니까 괜찮겠지?" 나는 속 편한 소리를 하고는 그녀에게 시트를 제대로 입혀주고 바닥에 깔려있던 내 침낭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잤을까? 나는 저 멀리 들려오는 듯한,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에 눈을 떳다. "류미르니이이이임!!" 그리고 들려오는 활기찬, 아직 앳띈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눈을 비비며 부시시 일어났다. "우웅...누구지?" 사르하도 그 소리를 들었는듯,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는게 보였다. "일어났어?" "아? 아린님? 왜 거기서..." 그 애는 내가 반말해도 나한테 존칭을 써줬다. 우선 내가 나이도 많았고, 공녀였기에 내가 반말 쓴다고 자신도 반말 쓸 수는 없었을 테지만... 뭐, 원래 신관은 모든 사람에게 존칭을 쓰는거기도 했다. 사르하는 지금 침대 위에 앉아서 침대 밑에 침낭속에 몸을 반쯤 묻고있는 나를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아뇨. 왜 밑에 계시나 해서요..." 이제는 완전히 잠에서 깼는지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가 침대를 차지했으니까 밑에서 잤지. 불만 있어?" "엣, 아... 아뇨. 죄, 죄송합니다." 사르하는 무척이나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시트가 밑으로 흘러내려가 자신의 알몸이 드러나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어어어..."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듯 그녀는 황당스런 몸짓과 손짓으로 자신이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 물었다. "아아... 그거? 너 어제 목욕탕에서 잠들었어. 기억 안나?" 그녀는 정말 기억이 안 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랬나요?" "응. 그래서 내가 널 침대에 옮겨줬어. 그런데 나도 피곤해서 옷은 안 입혔거든? 뭐, 같은 여자끼리니까 괜찮겠지?" 그녀는 시트로 몸을 다시 감싸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뭐.. 어쨌든 옮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아, 그런데 너 생각보다 무지 무겁더라?" 슬쩍 솟아나는 장난끼에 진심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건네자 사르하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문쪽으로 걸어갔다. "저 세수할께요!!" 무지무지 당황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행동에 나도 당황해 버렸다. "야!! 옷은..." 그러나 내가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문을 벌컥 열었고 그 자리에서 굳어져버렸다. "입고 나가야지..." 뒷 말을 작게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그녀가 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르하가 앞에서 시트자락을 꼭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는지 시트가 스르르 흘러내리는 바람에 그녀의 어깨가 드러났는데도 그녀는 추스릴 생각도 못했는지 가만히 있었고, 그 뒤로 경악어린 비명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까아아아악~~!!" "우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너무 놀랐다는 듯한 비명의 삼중창에 벌떡 일어나 사르에게로 달려갔더니 사르하가 스르르 뒤로 넘어졌다. "사르하!!" 놀라서 그녀를 받아들고는 무슨 일인지 묻기 위해 거실에 있을 류미르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안타깝께도 물을 상황이 되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거에요, 류미르님, 류미르님, 류미르니이이이임~~!!" 패닉 상태에 빠져 굳어있는 류미르를 한 16, 7세쯤 되어보이는 금발머리의 엘프 소녀가 멱살을 잡고 마구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쩜 이러실수가 있어요? 저한테는 눈길 한번 안 주시더니, 어떻게 인간이랑... 류미르님이 그러실줄은 몰랐어요. 너무해요, 정말 너무해. 족장님께 일러바칠거예요. 어떻게 처음 만난 인간이랑... 으흐흐흑" 그 엘프 소녀는 복바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류미르를 뒤흔들던 손을 놓아버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으흑흑흑... 날 두고... 어어엉엉엉... 이러실수가...흑흑흑... 이럴수는 없어... 훌쩍훌쩍훌쩍... 나는 이제 어떡하라고... 엉엉엉엉..."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야, 사르하!! 정신차려!!" 나는 뭐가뭔지 몰랐지만 기절한 사르하를 깨우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외치자 사르하가 부시시 깨어났다. "아린님?" 사르하는 정신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 거렸다. "제가 왜....?" 그런데 갑자기 더욱 더 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아아아앙~~!! 넘해... 엉엉엉엉...어떻게 한명두 아니구 흑흑흑... 두명씩이나.. 훌쩍훌쩍 흑흑흑... 설마 설마... 류미르님이.. 엉엉엉엉 저 하나로는 성에 안 차신 거예요? 우아아아앙~~!!" 류미르는 어느새 패닉 상태에서 빠져 나왔지만, 이 소녀를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리고 의자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집안에는 그 엘프 소녀의 울음소리만 퍼져나가고 있었다. "엉엉엉엉엉~~~!!" 그 한심한 상황에 참다못한 내가 소리를 꽥 질렀다. "시끄러!!" 효과가 있었는지 그 엘프 소녀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울음을 뚝 그치고는 딸꾹질만 해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사르하도 일으켜서 침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옷이나 입구 나와." 그리고 그 소녀에게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인데 아침부터 시끄럽게 하는거야?" 그러자 그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로 눈가를 쓱쓱 닦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부지게 말했다. "전 미래에 류미르님의 신부가 될 엘리사라고 해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시죠? 제 미래의 남편 집에 계시다니요?" 나는 입이 딱 벌어져서는 류미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류미르는 이젠 얼굴이 허옇게 변해 두 손을 필사적으로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아냐, 아냐, 아냐!!" 그러자 그 소녀가 류미르를 매섭게 째려보면서 외쳤다. "무슨 소리세요? 류미르님, 도대체 저 인간 여자가 누구길래 저와의 사이를 숨기시는 거죠?" 류미르는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엘리사, 도대체 누가 네 남편이라는 거냐?" "누구긴 누구에요? 류미르님이시죠. 설마 지금까지 류미르님만 바라보면서 기다린 저를 매정하게 버리시진 않으시겠죠? "엘리사아아아~~~!!" "안돼요. 류미르님은 제거란 말예요." "하아아아..." 류미르는 지친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내 뒤의 침실문이 빼꼼 열리면서 옷을 제대로 차려 입은 사르하가 나왔다. "저기..." "아아, 사르하. 쟤네는 신경쓸 거 없고, 가서 세수나 해." "예.." 사르하를 다시 욕실로 들여보내고 나는 이제 막 진정이 되어가는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만해, 엘리사 ... 이러면 저분들께 실례잖아."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좋아요. 류미르님... 류미르님께서 정 원하신다면 제가 가슴이 찢어지지만, 한 걸음 물러나 양보드리죠." 그 엘리사라는 소녀 엘프가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말하자 류미르가 어리둥절해졌다. " "양보라니?" "비록 엘프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들이 인간인 이상 인간의 관습을 존중하여 저 둘을 첩으로 맞을 수 있게 해드리겠어요." 굳은 결심을 한 다부진 얼굴로 또박또박 내뱉는 그녀의 말에 듣고 있던 류미르와 내 입이 쩍 벌어졌다. "에. 엘리사.. 이게 무슨.." 황당함 그 자체의 표정으로 류미르는 말을 더 이상 잊지 못하고 버벅거렸지만, 엘리사는 류미르를 무시한채 계속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들도 엘프 남편을 가진 이상 엘프의 관습에 딸라야 해요. 그리니 우리 마을에 머물지는 못하게 해주세요. 그건 절대로 용납 못해요." 그러자 도저히 참지 못하겠던지 류미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엘리사. 예의가 없는 것도 어느 정도지." 그리고는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해, 아린... 예전부터 동생처럼 봐주던 애라서...오늘은 좀 심했지만.." 물론 류미르의 애인으로 오해받는 건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재미있는 구경을 했던 차라 나는 기꺼이 그의 사과를 받아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무하세요, 류미르님. 벌써부터 첩을 저보다 더 총애하시다니요. 이러시면 본처의 기강이 바로서지 못한다구요!!" '허허허허...저 꼬맹이가 연애소설을 너무 봤군...' 내가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을때 류미르가 정색을 하고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엘리사. 더 이상 더 무례하게 굴면 정말 화낼거야? 안돼겠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 무정한 류미르의 말에 엘리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는가 싶더니엘리사는 몸 을 획 돌려 뛰쳐나가며 외쳤다. "정말 너무하세요, 류미르니니니님~~~!" 그 애가 닫지도 않고 나간 현관문을 닫으러 가면서 류미르가 한숨을 푹 내쉬자 그제야 입을 열 기회를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 봐도 뻔하네... 평소에 너한테 매달리던 애인데 나이차이가 많이나서 넌 귀엽게만 여기고 오냐오냐 해줬지?" "잘 아네.." "네 성격이 원래 그렇잖냐. 불의를 절대 못 지나치면서 약한것은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도 하나도 안 변했구만?" "나중에 확실하게 이야길 해야겠어." "그런 건 처음부터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놓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상처를 안 입지. 여자들은 나이보다는 조숙하거든. 딱 부러지게 거절하지 않고 어영부영하게 넘어가면 정말인줄 안다구." "하아.. 그런 건 진작 말해주지 그랬냐?" 크게 한숨을 내쉬며 기운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대는 류미르를 보고 피식 웃으며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네가 이렇게 인기 있을 줄 몰랐지....알았다면 벌써 말해줬을 텐데..." "아린, 네 기억력은 정말 무지무지 나뿌구나? 예전에 너랑 여행할 때 내가 여자들에게 사달린 것 기억 안 나?" 류미르가 고개를 소파 뒤로 상테에서 눈만 밑으로 내려떠 나를 바라보며 묻자 나는 씨익 웃어줬다. "그거야 인간 여자들이잖아... 내가 인간 여자랑 엘프 여자랑 보는 눈이 같을 줄 어떻게 알았겠냐?" "쳇.." 류미르가 할 말 없다는 듯 고개를 팩 하니 돌리자 나는 오랜만에 맛보는 승리감에 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사르하가 다 씻고 나올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 다했어요, 아린님." 역시나 내가 욕실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르하가 얼굴이 깨끗하고 뽀송뽀송해진 채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 그래." "오냐, 알았다." 잠시 후, 내가 다 씻고 나오자 류미르가 나와 사르하를 데리고 간 곳은 네개의 커다란 나무가 있고, 그 나무들의 가지가 위쪽에서 서로 얽키고 설켜 있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데다, 왠만한 비정도까지 막아줄 수 있는 그런 자리 밑에 마련한 커다란 식탁이었다. 아마도 이 곳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들을 대접하기 위한 엘프들이 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집들이 없어 일부러 이런 곳에 마련한 듯 했다. 숲 속이라서 아침 공기가 쌀쌀한데다 이슬이 많이 있었을텐데 이 공간에다가 가벼운 마법을 걸어놔서 그러지 공기가 훈훈하고 이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늦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미리 와서 있었다. 어제 기절해서 깨어나지 못했던 애쉬 녀석이나 너무나 많은 마법을 사용해 헬쓱해 있던 스와카도 기운을 차렸는지 얼굴들이 좋아 보였다. 사르하와 내가 비어있는 자리에 앉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류미르의 아버지인 족장이 일어났다. "우선 저희를 도와주신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우리 하이엘프의 은인이십니다. 그러니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사정이 좋지 않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셔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자 애쉬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족장님. 이번 일은 응당 저희들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이니 너무 개념치 마십시오. 그리고 저희는 바쁜 일이 있기 때문에 괜찮으시다면 오늘 떠났으면 합니다." "그렇게 일찍 말입니까?" 족장이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애쉬를 응시했다. "예. 게다가 여러분 마을도 온전치 못한 상태이니 더 이상 누를 끼칠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례라도.."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애쉬 녀석은 족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면서 극구 사양했다. 하기사, 양심이 있는 녀석이라면 사례는 커녕 우리가 이 마을이 다시 복원될 때가지 도와줘도 시원찬을 판이다. 이 일의 원흉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드래곤이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 드래곤과 한 명의 하이엘프만 아는 사실이니 기냥 넘어가도록 하자 - 브랜을 비롯하여 스와카, 반담 등등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심히 불편한 얼굴들인거 보니 아마도 같은 생각인 듯 했다. 그들은 애쉬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강한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여러분들의 마을이 어려운데 그냥 떠나서 오히려 조스러운 마음 뿐입니다." 그러자 족장이 기분좋게 우었다. "하하하, 그렇게 까지 생각하주시다니... 저는 오늘 인간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하하하..." 애쉬 녀석 웃는 품을 보니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두방울 주르르 흘러내리는 듯 했다. 그 후, 엘프들이 열심히 준비한 음식들이 줄줄히 차려져 나왔지만 나와 안내역을 맞은 나뭇꾼들을 제외한 인간들을 어느 누구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마도 양심에 콕콕 찔려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탓이리라. 그러자 엘프들은 엘프들 대로 은인들에게 식사대접을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미안한 얼굴들로 연신 사과를 해대자 브랜을 비롯한 애쉬 등등은 더욱 더 어쩔줄 몰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일이 자신들 때문이라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 그랬다가는 하이엘프들이 우리에게 덤빌 지 모르는 일이므로...- 이었기에 그들은 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괜찮다고만 할 뿐이다. 그렇게 서로 속타는(?)마음을 안고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애쉬는 부리나케 일행들을 재촉하여 서둘러 짐을 챙겨서 마을을 떠났다. 족장을 비롯하여 장로들이 급히 준비한 듯한 약간의 보석과 과일을 건네주었지만 극구 사양하고, 너무 사양하는 것도 안 좋아보여 과일만을 건네받은 채, 산 아래에까지 데레다주겠다는 것도 필사적으로 거절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양보 않겠다고 버티는 -인간들 상태가 안전히 나은 것도 아니었고,'그 존재'가 주위에 있거나 몬스터들이 있을 수도 있었으므롸...- 족장과 장로들 때문에 류미르가 나섰다. "그럼 제가 혼자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호위도 아니니 괜찮으시겠지요?" 그리고 나를 보는 폼이, 나보고 중재를 하라고 하는 듯했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친구의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내가 나서서 애쉬와 브랜을 쳐다보자 그들도 서로 마주보고 스와카도 몇마디 속삭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12화 정체를 밝혀랏!! "아쉽네... 오랜만에 만났다 했더니만..." "어쩔 수 없지.... 너도 너희 마을을 그냥 내버려 두고 나올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렇지....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나도 너랑 같이 여행하고 싶기는 하지만, 이번 일에 너 끼어드는거 싫어." "이번에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나냐?" "글쎄..." 지금 우리는 류미르의 안내를 받아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류미르가 안내를 하기 위하여 앞장을 서야 했으므로, 맨 앞에는 나와 류미르가, 그리고 바로 뒤에는 흄과 알렌이 섰고 그 뒤에는 사르하와 리틀 조로, 브랜과 안내자 나뭇꾼 둘이 선 형태였다. 류미르와 내가 안면이 있다는 건 알지만 어떤 사이인지 모르는 일행들은 나와 류미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우리는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 - 설명해 줄 수도 없고... - 그냥 입다물고 우리끼리만 이야기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혹시, 세이몬 소식은 들었어?" 류미르가 느닷없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세이몬? 아니... 아,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보고싶네..." "흐음... 이맘때 쯤이면 나올 줄 알았더니... 녀석도 그냥 콕 처밖혀 있나?" "혹시 아직도 벌 받고 있는 건가?" "아, 그럴수도 있겠다. 그때 끌려가는 폼 보니까 무지 혼날 것 같아보이더만..." "그런데, 그 녀석은 이쪽으로 와봤자 제대로 다닐수 있을런지나 모르겠네... 이상한데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자 예전 생각이 났는지 류미르가 키득키득 거렸다. "쿡쿡... 맞아, 맞아.. 왜 전에도 끌려갔었지, 아마?" "맞아. 그러다가 놀라서 혼자 난리쳐놓고... 그때 생각만 하면..." "이 녀석이 나한테 제대로 찾아 올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 "세이몬도 세이몬이지만... 생각해보니 너두 이제는 인간세상에 나오기 힘들것 처럼 보이던데?" 나의 뜬금없는 말에 류미르의 눈이 의아함으로 커졌다. "나? 내가 왜?" "왜긴... 혹 하나 만들어 놨더만... 그 애 도대체 누구냐? 네 부인이라고 주장하던애..." "아아... 엘리사?" 류미르는 쓴 웃음을 머금는가 했더니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하아... 말도 마라, 말도 마. 예전부터 잘 따라다니길래 동생처럼 귀여워 해줬는데... 전에 그 사건 후 부터는..." "사건? 뭔 사건? 너 또 사고쳤냐?" "아냐!! 날 뭘로 보는 거냐? 전에 너랑 여행다니던 사건 말야." "아아... 그거?" "그래. 내가 마을로 돌아오던 날 얼마나 울고불고 하던지... 그 다음부터는 매일 아침마다 찾아와서는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보통때도 찰싹 붙어서 떨어지질 않더라니까..." "오오... 너한테 그 정도로 일편단심인 애가 있었다니..." 내가 장난끼 어린 어투로 슬쩍 류미르를 놀려대었지만 녀석은 그냥 시큰둥 했다. "하아... 그게, 나도 그런 마음이 있다면야 무지무지 좋았겠지만서두, 난 단지 동생 같은 느낌밖에 없는걸 어쩌냐? 엘리사 녀석은 자기가 성년식을 치루고 나면 혼례를 치루고 싶어 하더라구. 예전에는 은근슬쩍 드러내더니만, 요즘은 아예 떠벌리고 다닌다니까..." "저런... 그래, 넌 어쩔꺼냐?" "어쩌긴... 결혼 안 할거야." "헤에, 거야 네 생각이구... 넌 그런 애한테는 약하잖아? 예전에도 너한테 달라붙던 영주 딸도 어쩌지 못해서 쩔쩔맸던거 기억 안나?" "으윽... 아린.. 생각도 하고싶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결혼 할 수는 없지. 지금 생각은 엘리사 성년식날 다시 마을을 떠날 생각이야. 혹시 나 찾아가면 데리구 다녀주지 않을래?" "그 때가 언제인지 내가 아냐?" "아아... 이제 30년만 있으면 돼는데..." "그때까지 내가 여기 있는다고 장담 못하지... 저번에 기억 안 나냐? 우리 여행다니던거 2년도 채 안됐다구." "그때야 나랑 세이몬에게 문제가 있었던 거지만... 이번에는 나도 당당한 성년이잖아." "물론 네가 당당하기야 하겠지만, 그 엘리사란 애도 당당한 성년 아니냐? 그 애가 쫓아올 거란 생각은 안해봤어?" 그러자 류미르가 자신 만만하게 씨익 웃었다. 꼭 숨겨 둔 비장의 카드를 꺼내놓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 그건 걱정 마. 엘리사는 네 정체를 모르니까." "네 아버지는 아시잖아. 그 분이 가르쳐 주시면 어쩔래?" "후후후, 상관 없어. 그러면 더욱 더 잘됐지. 그럼 꿈에라도 찾아 올 생각은 못할거다." "글쎄... 아마 더욱 더 날 찾으려구 기를 쓸껄? 넌 여자를 너무 몰라. 엘리사 같은 타입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걸 걸고서라도 나선다구. 그게 얼마나 무서운건줄 알아? 그러다가 나중에 상처라도 받으면 그 사랑이 너에대한 증오로 바뀌어 버린다구." "으윽... 아린... 넌 친구가 되어서는 도와주지 못할 망정, 겁을 주고 있냐?" 내가 정색을 하고 하는 말에 류미르는 생각만 해도 무섭다는 듯 사색이 되어서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겁주는게 아니라 난 사실을 말한 것 뿐이라구. 그러니까 차라리 지금 당장 돌아가서 알아듣게 잘 타일러. 정 안돼면 매정하게 딱 자르던지." "어떻게 그렇게 하냐? 그럼 분명히 울고불고할게 뻔한데... 안 봐도 훤하다." "하지만 지금 정리해놓지 않으면 넌 두고두고 후회할거다." "겁 주지 마." "겁 주는게 아니라 충고해주는 거야." "으음..." 류미르는 내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는 듯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 없이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나도 그의 생각을 방해할 마음은 없었기에, 조용히 그의 뒤만 따라갔다. 우리가 그 산맥을 빠져나오는데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것도, 류미르의 안내로 제일 빠른 길을 헤쳐나와 그 정도로 걸렸지 안내자가 없었다면 아무리 빨라도 10흘은 걸렸을 거라는 나뭇꾼들의 설명이었다. "이제 정말로 작별이네..." 류미르가 정말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고 섰다. "그렇네... 후후 전에는 너무 허망하게 헤어져서 아쉬움도 못 느꼈었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아쉬움은 느껴지는군." "엣? 그럼 전에는 아쉽지 않았다는 말야?" 류미르가 다분히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녀석을 매섭게 노려봐줬다. "너도 그렇게 헤어져 봐라. 아쉬움을 느낄 사이나 있었는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 "에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나중에라도 아쉽지 않았냐?" "흥, 몰라." "매정하기도 하지..." 그러자 옆에 있던 밥맛 없는 녀석이 끼어들었다. "지금도 그 매정함이 필요할 것 같군요, 공녀. 우리가 갈 길이 바쁘다는 건 자~~알 알고 계시겠죠?" 류미르는 애쉬 녀석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천하의 아린이 저런 녀석에게 쩔쩔매냐?" 그리고는 곧 나의 분노에 찬 시선을 피하려는 듯 뒤로 훌쩍 물러나더니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자, 그럼 난 이만 물러가마. 이번에는 즐거운 여행을 하길 바래. 나중에 시간 있으면 우리 마을에도 다시 한번 들려주고." "시끄러 류미르. 내가 너희마을에 다시 가는 날이 바로 네 사망일일 거다." "후후후, 설마 네가 너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해를 입히겠냐? 네가 오길 즐겁게 기다리고 있으마." "그래, 즐~~겁게 기다리고 있어라!!" 류미르는 크게 하하 웃으며 날렵한 몸짓으로 근처에 있던 커다란 나무의 가지위로 뛰어 오르더니 그대로 다시 몸을 날려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녀석의 울림이 들려왔다. "나중에 보자, 아리이이이이이인~~~~"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기꺼이 재회해 주지, 류미르..." 아마 류미르 녀석 가다가 좀 오싹 했을거다. 그리고 일행은 몸을 돌려 우리가 말을 맡겨 놓았던, 산맥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저번, 류미르의 집에서 같이 묶었던 일로 인해 사르하가 나에게 친근함을 느꼈는지 산맥으로 갈 때 쌀쌀했던거와는 다르게 마치 언니를 대하는 듯한 어조로 나에게 찰싹 달라 붙어 물었다. "아린님, 저 엘프분과 잘 아시는 사이신가 봐요?" "아아, 예전에 잠깐 여행을 같이 다닌적이 있어." "헤에.. 그랬구나. 저 분 무척 잘 생기셨던데요?" 옆에 있던 리틀조로 녀석의 몸이 약간 움찔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난 딴데 신경을 쓰느라 그걸 다시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빨간 머리에.. 빨간 빛을 띄우는 마나라... 게다가 전에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녀석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녀석에게 눈길을 주었는지 녀석이 획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공녀? 설마 저에게 관심있으신건 아니겠고...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놀릴 꼬투리를 잡은 듯한 악동 녀석의 눈빛을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한대 패주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솟았지만, 그걸 꾸욱 누른 채 나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잘 아시면 좀 닦으시지 그러세요? 말씀 드리기 곤란해 망설이고 있었는데, 알아서 말씀해주시다니 눈치가 빠르시군요?" 물론 묻어 있기는 묻어 있었다. 숲 속을 빠져 나오며 묻은듯한 약간의 먼지가...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돌릴 녀석을 상상하며 의기양양해 있었는데 애쉬 녀석도 많이 늘은 듯 내 생각을 깨고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나를 놀라게 했다. "호오, 그런가요? 그 정도로 저에게 신경을 써주시다니... 과분할 따름입니다." 하면서 나에게 한발짜국 다가오는 거였다. 그리고는... "그럼 이왕 신경써주시는 것 제 얼굴에 묻은 것도 닦아주시겠습니까? 거울이 없어 제 얼굴을 볼 수가 없군요."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지? 전에 머리를 부딧히더니 맛이 간거 아냐?' 당혹스럽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해서 어떻게 해줄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브랜이 나와 녀석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해 애쉬. 공녀께 실례잖아."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보이며 - 브랜 때문에 산줄 알아라... 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며 - 녀석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씨익 하고 의미있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으으윽!! 저 자식... 언젠가는 그 콧대를 꺾어주고 말겠어!!' 그러나 뒤에 들려오는 사르하의 말에 내가 먼저 휘청이고 말았다. "아린님, 애쉬님께 관심 있으셨어요?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 잘 생긴 엘프의 외모에도 넘어가지 않으셨던 거군요?" "사.르.하!!" "호호호, 알겠어요, 알겠어... 이건 비밀로 해줄께요." 뭔가 대단한 선심을 쓰는 양 너그럽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끗해 보이는 사르하를 바라보며 갑자기 사르하가 몸 담고 있는 신전을 박살내버리고 싶은 살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걸 느꼈다. "그런게 아냐." "호호호, 예, 예. 알았어요." "사르하!!" "알았다니까요, 아린님도 참... 제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봐요? 입을 딱 봉하고 있을게요. 자크라도 채울까요?" "에휴..."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12화 정체를 밝혀랏!! (2) 그 날 저녁이었다. 날이 어두운데다 지친 일행들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적당한 자리를 잡아 노숙할 준비를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식사준비 담당팀에 끼어 있었기에 스프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스프를 젓는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모닥불 한쪽에 앉아있는 애쉬 녀석을 자꾸 힐끔 거렸다. '젠장... 물어보려니 자존심 상하는구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깨름직하고 말야...'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면서 다시한번 녀석을 힐끔 거리다가 녀석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윽, 이런... 하필이면...'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우연히 마주친 척 가장하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지만, 녀석이 슬쩍 짓는 웃음은 놓치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저 능글맞은 녀석 같으니라구... 저 자식 원래 저렇게 능글맞은거야, 아님 전에 머리를 얻어맞더니 저렇게 된 거야?'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애꿎은 스프만 거칠게 저어대자 스와카가 슬며시 다가왔다. "흐음... 정말 레드포드경께 관심있으신가요?" "스와카, 이거 다 뒤집어 엎어도 될까요?" 손은 여전히 스프를 저으면서 눈만 돌려 그를 매섭게 노려보자 그가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냥 궁금해서 한번 물어본건데... 뭘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공녀님 짝으로는 적당한 분이신데 뭘 그러세요?" "흄, 그 말을 아빠가 들었으면 당신은 당장 모가지감일 걸요?" "천하의 공녀님이 부끄러워 하시다니요... 사람은 참 오래살고 볼 일입니다." "당신은 눈이 무척 나쁘군요. 분노하는 것과 부끄러운 것을 구별하지 못하다니 말입니다." 흄에게 매섭게 쏘아주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애가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애쉬 녀석에게 말을 걸기라도 한다면... '으윽... 그 뒤에는 생각하기도 싫어.' 하지만... 물어보기는 해야 했다. 그날 불침번 당번을 애쉬 녀석이 맨 처음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려 녀석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레드포드경!!" 낮은 목소리로, 최대한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무미건조하게 녀석을 불렀다. "호오.. 공녀께서 어쩐일이신지?" 녀석의 눈가에 다시 심술기가 돌았지만, 무시해버리고 용건을 꺼냈다. "물어볼께 있어요." "저에게요?" 무척이나 놀랐다는 듯한 과장스런 녀석의 몸짓에 질문이고 뭐고 상관하지 말고 녀석에게 헬 파이어를 먹여주고 싶어졌지만, 꾹꾹 참고 내 용건만 말했다. '무시하자, 무시하자...' "당신 말예요, 어저께 그녀에게 얻어맞고 날아갔을때요... 정신을 잃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렸죠? 뭐라고 했는지 혹시 기억 나요?" "제가요? 뭐라고 했던가요?" 여전히 장난스러운 몸짓... '열.받.아...' "그래요. 혹시나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닌가 해서 물어본거예요. 기억나요?" 녀석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능글맞은 미소를 베어물자 나는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제가 공녀 이름이라도 불렀나보죠? 공녀께서 이리도 관심을 가지시니 말입니다. 오호라, 혹 그래서 이리도 태도가 달라지신건지요?"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지만, 내가 아쉬운 입장이었으므로 꾸욱 눌러참고는 최대한 냉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닙니다, 레드포드경. 만약 당신이 계속 이렇게 비아냥거리신다면 당신에게 고문을 가해서라도 알아낼테니 알아서 하시죠?" 그제야 녀석의 표정에서 심술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장난끼까지 사라진건 아니었다. "어우~~, 무섭군요. 하지만 이를 어쩝니까? 전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데요? 설마, 기억이 안 난다는 이유로 고문을 하지는 않으시겠죠?" 녀석은 능글맞기는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젠장, 그래도 하고 싶다, 임마!!' 속으로 크게 외쳤지만... 겉으로는 눈물을 머금고... "그렇군요. 역시 그런가요? 어쩔 수 없죠. 실례했습니다." 하고는 일어나 몸을 획 돌려 모닥불가에서 벗어났다. '역시... 기절하기 전의 일이라서 기억을 못하겠지?' 하지만 이대로 덮어둘 수는 없었다. 일행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간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예전에 아빠에게서 받은 팔찌를 들어올려 마나를 가했다. 그러자 내 앞에 작은 화면이 펼쳐지더니 그 안에서 서재 책상 앞에 있던 아빠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 "오랜만이구나, 아린아.. 그래 간 일은 잘 되었냐?" "대충이요. '그 존재'를 발견하고 한바탕 하기는 했지만, 다시 노쳤어요. 그래도 '그 존재'도 부상을 입었으니 당분간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어디로 갔는지 알아채지 못했나 보구나?" "예. 제가 깜빡 했어요. 그건 그렇고 아빠, 부탁이 있어요." "부탁? 뭔데?" "나랑 같이 온 그 빨강 머리 녀석있죠?" "빨강 머리? 그래, 그 녀석이 왜?" "그 녀석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사해주세요.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서 자랐는지 등등... 뭐든지요." "뒷조사를 하란 말이냐? 갑자기 왜?" "맘에 걸리는게 있어서요.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말씀드릴게요. 제가 집에갈 때쯤이면 조사가 다 되어 있겠죠?" "최대한 서둘러 보마. 그럼 조심해서 오너라." "예, 나중에 뵈요." 아빠와의 대화를 끝마친 다음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나는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 곳에는 여전히 모닥불을 지키고 있던 애쉬녀석이 내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었다. "어딜 다녀 오십니까?" 나는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성의없이 대꾸했다. "꽃 따러요." 녀석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꽃이요? 이 밤에? 그런데 꽃은 어디 있습니까?" 녀석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고 눈을 감아버렸다. '못 알아듣는 네가 멍청한거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다음날이 되자 나는 어제와는 다르게 애쉬에게 말을 걸기는 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녀석에게서 얻을 것은 없고, 나중에 수도로 돌아가서 아빠의 조사 결과가 나와봐야지만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더 이상 녀석에게 접근할 필요가 없어진 탓이었다. 그런데 그걸 일행들은 물론 애쉬녀석까지 의아하게 생각한 듯 했다. "스와카님이 너무 심했어요. 너무 놀리니까 아시리안님이 부끄러워서 애쉬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거 아녜요?" 뒤쪽에서 낮게 소근거리는 사르하의 목소리... 나에게 들리지 않게 최대한 낮춘 듯 했지만, 말 위에서 하는 대화이고 내 청력이 보통 인간들보다 뛰어나다보니 다 들렸다. "에? 하지만 신관님, 전 한번밖에 안 했는데요?" 스와카의 주늑 든 목소리... 그러나 사르하의 목소리는 누그러지지 않고 더욱 엄해졌다. "스와카님이 먼저 놀리시니까 딴 분들까지 놀렸잖아요. 시작하신 스와카님이 잘못하신 거예요." '하아.. 잘들 논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애쉬님도 놀리시던걸요?" 스와카가 자신만 당할수는 없다는 듯 뾰루퉁하게 내뱉았다. 그러자 흄까지 끼어들었다. "맞아요. 그런거 보면 애쉬님이 우리 공녀님께 관심이 없으신것 아닌가요?" "아니예요." '사르하, 뭘 믿고 그렇게 단호한거야?' "애쉬님이 공녀님께 짓궂게 구시는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예요. 남자들은 정신연령이 낮아서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습성이 있거든요." '사르하, 너 신관 맞냐?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내가 황당해하고 있을 때 흄의 장난끼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연령이 어려서 죄송하군요." "어, 어머나.. 제 말은 그러니까..." 그 뒤로 들려오는 사르하의 목소리... 말을 더듬는 것 보니 무지 당황한 듯 했다. 그러자 사르하를 돕는 리틀조로의 목소리. "어라? 흄님 혹시 사르하에게 관심있으신 것 아닙니까? 사르하를 놀리시는거 보니까 의심스러운데요?" 녀석도 같이 듣고있었나 보다. "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흄이 크게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재밌게도 노는군...' 그 뒤로, 사르하의 주도 아래 일행들은 항상 나와 애쉬를 같이 앉히려고 애를 썼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사르하의 뜻을 따라 나와 애쉬를 연결시켜주려는게 아니라 가지고 노는 것 처럼 보였다. 애쉬 녀석도 눈치챈 것 같지만, 녀석의 심술상 일행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나에게 능글맞게 굴었다. '이 녀석... 그때 엘프들이 약초즙을 먹인게 아니라 기름을 먹였을 거야.' 그런데 그런 나를 구원하는 사람은 브랜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고, 단지 일행들의 장난이 너무 심하다 싶을때 나와 애쉬 사이에 끼어들어서 둘을 갈라놓고는 했다. 그럴때마다 일행들은 아쉬운 눈초리였지만, 왕자가 나서는데 뭐라고 할 수 없어서 그냥 아쉬운 마음을 접는 듯 했다. 덕분에 나는 악의 없는 장난에 화를 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계속 애쉬 녀석의 능글맞은 언행들을 받아줄 마음도 없어 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브랜의 옆에 항상 붙어있게 되었다. 그러자 애쉬 녀석은 가끔 나를 향해 묘한 눈초리를 보내고는 했지만, 브랜이 옆에 있는 이상 더 이상 심술을 부리지 않았고, 일행들의 장난도 점차 시들해져 갔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우리는 마을에 도착하여 나뭇꾼들과 헤어졌고, 그 마을에 맡겨두었던 말들을 타고 다시 도시로 돌아오자 신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르하 신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요?" 얼굴에 부드러운 주름이 있고, 머리에도 하얀 머리가 히끗히끗 보이는 지긋한 나이의 고위신관이 사르하를 보자마자 호통을 쳤다. "장로님..." 사르하는 고위신관을 보자마자 주눅이 든 표정으로 눈치만 살필 뿐 딴 말은 하지 못하고 있자, 그 장로라는 고위신관의 호통이 다시 이어졌다.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사르하 신관, 당신은 마을에 파견될 때 말썽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신관으로써 부끄러운 줄 아세요!!" 장로는 무척 화가난듯 호통을 쳤지만, 그녀의 눈에는 안도감으로 인하여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죄송합니다아아..." 사르하가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장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처벌은 각오하고 계시겠지요? 어서 신전으로 돌아가십시다." 그러자 사르하의 고개가 번쩍 쳐들어졌다. "죄송하지만 아직 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장로의 눈이 다시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여지껏 말썽부린 것이 모자라다는건가요?" 그러나 사르하의 표정은 단호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하지만 전 마을로 파견되었을 때 잔인한 살인마가 일으킨 실태를 보고는 여신님께 그 살인마를 잡는데 제가 할수 있는 능력을 다 하여 돕기로 맹세했습니다." "사르하 신관!! 당신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 살인마를 잡으러 나서겠다는 겁니까?" 놀란 표정의 장로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사르하는 한치의 물러섬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저 엘라이어드 여신의 종 사르하... 비록 얼마되지 않는 신력이나마 돕고싶습니다." 장로는 떨리는 눈으로 사르하를 바라보다가 겨우겨우 진정하고는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르하 신관, 그 일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정 돕고싶으시다면 여신님께 전심으로 기도드리세요. 더 이상의 아무런 사고 없이 그 살인마가 잡히도록 말입니다. 당신이 간절히 기도하면 여신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장로는 처음에는 침착하게 말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간곡히 그녀를 설득하는 어조로 끝을 맺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하지만 전 이미 그 살인마와 싸우는 곳에 다녀왔고, 그 곳에서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로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고, 그녀의 벌려진 입에서는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 사르하 신관!! 그럼 당신 호, 혹시....?" "예, 산맥에 다녀왔습니다." "오... 여신이시여...." 새하얗게 질린 장로는 얼른 성호를 그으며 여신을 불렀다. 그러더니 다시 사르하를 바라보면서 소리를 꽥 질렀다. "사르하, 너 제정신인게냐? 이 할미의 수명이 줄어드는 꼴을 기어코 보고싶은게로구나? 그 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갔단 말이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괜찮아요, 할머니..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실력이 뛰어나신걸요. 게다가 엘라이어드여신의 가호가 저에겐 있으니까요." 나중에 안 거였지만, 엘라이어드 여신의 신관들은 흔한건 이니지만 결혼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딸도 있고 손녀도 있을 수 있는 거였지... 사르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이번에도 보내 주세요, 할머니. 무사히 돌아올게요. 이미 여신님께 맹세도 했는걸요? 게다가 여기 계신 공작가의 레드포드경께도 약속했단 말예요. 설마 저보고 약속을 깨라고 하시진 않겠죠?" 순간적으로 장로의 얼굴이 폭싹 늙어보였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는 듯 하더니 크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여신님께 맹세를 했다니 내가 더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지.. 넌 내 손녀이기 이전에 여신님의 종이니까..." "감사합니다, 장로님!!" 사르하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쯧쯧쯧... 철딱서니 없는 녀석 같으니라구... 역시 애들은 부모맘을 몰라...' 그 장로도 나와 같은 생각이였나보다. "너두 나중에 너와 똑 같은 신관을 거느려봐야 해. 그래야 내 맘을 알지..." 그리고는 애쉬 녀석에게로 가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많이 부족한 애입니다. 부디 잘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애쉬 녀석도 분위기에 휘둘려서인지 진지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제 이름을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르하는 이 곳에서 헤어지지 않고 우리와 같이 수도로 가게 되었다. 시장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산맥에서 '그 존재'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보고를 듣고는 사병들은 각자의 가문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비록 국군들이나 용병들은 여전히 지원병력으로 머물고 있었지만,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을테니 사병들까지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 존재'가 나타나는 것의 여부는 불투명했지만, 날 믿고 그러는것이 틀림 없었다. 많은 수의 사병을 움직이는 것 보다는 나 혼자, 아니면 딸린 혹(?)들만 왔다갔다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테니까. 내가 두번이나 '그 존재'를 물리치자 왕성에서도 숨통이 트이나보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애쉬가 브랜과 사르하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고 나는 그들과 헤어져 흄과 알렌을 데리고 아빠네 집으로 향했다. "아빠, 어떻게 됐어요?" 아빠를 보자마자 인사도 생략한채 물어보자 아빠가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린아, 아무리 궁금해도 그렇지, 그 일이 나보다 더 중요하냐?" 나는 한번 예쁘게 생긋 웃고는 대답했다. "당연히 아빠죠, 어떻게 됐냐니까요?" "에휴... 딸 자식 하나 있는데.... 애교가 하나도 없으니..." 아빠는 과장되게 한숨을 푹 쉬더니 중얼중얼 대면서 나를 서재로 안내했다. "조사가 끝났군요?" 소파에 앉으면서 아빠가 건네주는 한뭉치의 종이를 받아들며 묻자 아빠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그래, 너 오는 날짜에 맞추려고 최대한 빨리 서둘렀다." "특별한 점은 없었어요?" "특별한 점? 글쎄... 실력이 좋아서 기사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젊은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됐지." "그런거 말구 다른 건요?" "흐음...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데... 아, 그래. 특이한게 하나 있기는 있었지." 아빠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번뜩 떠올랐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자 나는 긴장한채로 물었다. "그게 뭔데요?" "이 녀석, 양자더군." "양자요?" "그래, 친 아들인줄 알았는데 10살쯤에 양자로 삼은 아이라더군. 그런데 특이한건 양자로 삼을 때 레드포드가에서 입단속을 시켰다는 거야. 보통 귀족이 양자를 들이는건 감출 일이 아닌데도 말이지. 하긴, 그래서 지금까지 친아들로 알려진거겠지만... 나도 우연히 알아낸 일이지." "그런가요?"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고 했던가? 왠지 설마... 하는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데 아빠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왜요?" "이제는 말해줘도 돼잖아? 왜 그 녀석에게 신경을 쓰는지 말야." 그러나 나는 대답을 회피하고는 다른걸 물었다. "아빠, 인간들이 사용하는 검기에도 붉은 색이 있어요?" "붉은 색? 흔한 건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럼 용언을 할 줄 아는 인간은요?" 그러자 아빠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용언을 할 줄 아는 인간?" "그 빨강 머리 녀석이 말예요. 용언을 사용했어요.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닌가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들은게 아닌것 같아요." "용언 마법을 사용한 게냐?" "아뇨. 마법이 아니라 [엄마]란 단어를 중얼거리더군요." "흐음... 그러고 보니 그 레드포드경이 전 왕실 마법사와 친한 사이였지..." "아빠, 혹시.... 드래곤이 폴리모프해서 낳은 자식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그러자 아빠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지금 그 빨강 머리 녀석이 네 엄마가 낳은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거냐?" "설마... 라고 생각은 되지만요... 30년 전에 사라졌으니까, 기간으로 따지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죠. 게다가 빨간 머리에 붉은 검기... 우연치고는 너무 많이 겹쳐요. 게다가 양자라면 더욱 더..." 아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증거는 안돼. 인간들 중에도 붉은 검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있으니까. 그 검기라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색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붉은 머리는 얼마든지 있고, 나이나 양자라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래곤이 유희기간중에 낳은 자식은 폴리모프한 종족일 뿐 드래곤이 낳았다는 특징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 엄마가 인간의 모습으로 낳은 아이는 단지 인간일 뿐이야." "확인해 볼수는 있잖아요. 양자라니까 혹시 애쉬도 자신의 친 부모를 알지도 모르고 아님 레드포드 공작이라도 알지 모르죠. 양자라는 것을 숨긴걸 보니 무슨 사연이 있다는거잖아요." 그러자 아빠는 나를 한참이나 묵묵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예?"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보며 아빠는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상관.....이요?" "그래, 유희중 낳은 자식은 드래곤으로 쳐주지 않는다. 그러니 설사 그 빨강 머리 녀석이 세라가 낳았다고 해도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존재일 뿐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 자식이 [엄마] 라고 했어요. [엄마]라고 했다구요. 감히 인간인 주제에 내 엄마한테 [엄마]라고 했다구요. 그 단어는 엄마가 가르쳐 줬겠죠? 그걸 난 용서할 수 없어요!!" 솟구쳐 오르는 분노에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치고 말았다. 그 동안 설마 설마 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던, 나 조차도 무엇인지 몰랐던 감정은 분노였나 보다. 이 세상에서 나 말고도 엄마에게 [엄마]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걸 느끼자마자 애쉬 녀석에게 참을 수 없는 살기기 솟구쳤다. "용서하지 못해요. 엄마도 그 자식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는 아빠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알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분노에 떠는 나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아빠가 한마디 내뱉었다. "질투하냐?" 그 말에 나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 처럼 멍해졌다. "질... 투요?" 아빠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커다란 책상쪽으로 걸어가 걸터 앉으며 팔짱을 꼈다. "그래, 질투. 지금 네 모습이 어떤 줄 아냐?" 나는 아빠의 무표정을 바라보자 무섭게 격동하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심호흡을 한번 한 뒤, 꽉 쥐고있던 주먹을 폈다. "....어떤데요? 그러자 아빠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동생한테 부모 사랑 다 빼앗겼다고 투정하는 어린애 같아." 나는 은연중에 아빠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나 보다. 아빠의 그 말에 애쉬와 엄마를 향한 분노가 천천히 사그라들면서 내가 정말 어린애처럼 굴었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약간은 부끄러움까지 느껴졌다. "..... 그렇게 애 같아요?" 다시 한번 묻자 아빠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래."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머뭇거리던 나는 그제야 내가 일어서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아빠가 이유 모를 한숨을 쉬더니 팔짱을 풀고 뚜벅뚜벅 걸어와 내 앞 소파에 앉았다. "이제야 진정됐냐? 그 불같은 성격을 보아하니 넌 틀림없는 레드 종족이구나? 그 동안 애 같지 않게 침착하길래 니 엄마보다 내 피를 더 많이 물려받았나 했더니만..." "쳇, 그럴수도 있죠." 뾰루퉁하니 고개를 팩 돌리자 아빠가 슬며시 웃는게 보였다. "그래, 그래... 하긴 넌 성룡이라고 해도 아직 1000도 되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어린애 다루는 듯한, 이해한다는 아빠의 표정에 나는 내가 기댈곳이 있고 나를 받아줄 곳이 있다는데 대한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느껴 약간은 슬픈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 인간에게 용언을 가르쳐 줬다는게 너무 화나요. 내가 엄마의 유일한 자식인데..." 그러자 아빠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네 엄마가 가르쳤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어. 그랬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으니까. 지금은 단지 네 엄마가 가르쳤을 확률이 가장 높다 뿐이지, 혹시 알아? 애쉬를 맘에 들어한 딴 드래곤이 있었을지..." "설사 그랬다 해도 [엄마] 란 단어를 가르쳤겠어요?" "용언 자체를 가르쳤을수도 있지. 그렇다면 그 단어를 아는 것도 이해가 가는일 아니겠어? 흐음... 하지만 맘에 걸리는군. 마력도 적어서 용언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녀석이 용언이라니..." "인간이 무슨 용언마법이예요?" 내가 무시하는 투로 말하자 아빠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는 법이거든. 게중에는 태어날때 부터 보통 인간보다 엄청난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 인간이라면 용언마법 하나 정도는 쓸 수 있어. 뭐 몇만명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서도... 아예 없는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에게 용언마법을 가르쳐줄 드래곤이 있을까요?" "모르지... 우리 드래곤들 중에도 별종이 있으니까... 그건 모르는 거야. 하지만, 그 빨강 머리 녀석 경우는 맘에 걸리는 군. 좀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아빠가 골몰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떻게요?" "직접 물어봐야지. 그런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테니." "물어본다고 대답해줄까요?" 그러자 아빠가 자신있게 씨익 웃었다. "대답하게 만들어야지. 물론 본인도 모르게 말야. 마침 잘 되었군? 일주일 뒤에 왕궁에서 무도회가 열려. 거기에 너도 초대받았으니까 그 곳에서 기회를 봐서 네가 그 빨강 머리에게 알아내봐라. 나보다는 네가 더 접근하기 용의할테니까." "무도회?" 아빠의 일사천리로 착착 세워지는 계획에 어리둥절한 내가 묻자 아빠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 존재'를 두번이나 막아냈으니 아마 그걸 치하할게다. 뭐, 빨강 머리도 같이 치하하겠지만 말야. 어쨌든 이왕 그렇게 된거 거기서 널 정식으로 내 딸로 소개도 하고 녀석에게 그것도 알아내라. 이걸 바로 일석 삼조라고 하는 거겠지?" "웅... 하지만 난 무도회 같은데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요?" 그러자 아빠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시라? 아니 그동안 뭐하느라 그런데도 한번 못 가봤어?" "에이... 내가 인간세상에 얼마나 있었다고 모든걸 다 해봤겠어요?" 내가 최대한 예쁘게 생긋 웃으며 말하자 아빠가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끄응... 너 그럼 춤도 못 추겠구나?" "당연하죠." "안돼겠다. 일주일동안 특별 교육이다!!"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제 13화 공녀 유혹하기 레드포드 공작의 거대한 저택 안... 한 나라의 공작 집안 답게 우아하고 화려한 어느 커다란 응접실에서는 호탕한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퍼져나왔다. "하하하하..." "허허허허..." 그리고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중년의 남자 두 명이 소파에 편안히 앉아 가운데 의자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참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레드포드 공작. 플레이저 공녀와 레드포드경이 그 마녀를 물리치고 돌아오다니요.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십니다." 한 남자가 입을 열자 맞은편의 남자도 질세라 입을 열었다. "게다가, 플레이저 공녀가 레드포드경에게 반한 것 같다면서요? 역시 레드포드경입니다. 우리 나라의 수많은 귀족가 영애들의 호감을 한 몸에 받는 청년이니, 플레이저 공녀가 반할만 하죠." "그럼요, 그럼요. 이제 레드포드경이 플레이저 공녀를 꽉 잡아주기만 하면은 중간에서 미적미적대던 플레이저 공작이 우리편으로 들어오는게 아니겠습니까?" "껄껄껄껄.. 그렇게만 된다면 플레이저 공작의 눈치만 보고 있던 귀족들까지 우리편으로 들어오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브랜트 왕자님께서 왕녀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시는건 시간문제 입니다." "허허허, 아무렴요, 아무렴요... 이게 다 뛰어난 레드포드경 덕택이 아니겠습니까?" "껄껄껄.. 이르다뿐입니까? 그리고 그 레드포드경을 만들어 내신(?) 레드포드 공작 덕분이지요." "허허허, 맞습니다, 맞아요. 허허허..." 그러나 가운데 앉은, 레드포드 공작은 앞의 두 남자가 신이나서 떠들어대는데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자 한참이나 웃어제끼던 남자 중 한사람이 그의 표정을 그제야 눈치챘는지 웃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공작님? 어째 표정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레드포드 공작은 그 남자를 한번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거야 당연하지요, 브더셀스 백작... 비록 플레이저 공녀가 내 아들과 같이 임무를 무사히 완수를 했다고 하나, 그 마녀를 죽이거나 잡은게 아니라 놓쳤으며, 이 일로 플레이저 공작이 우리편으로 들어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 좋아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브더셀스 백작 앞에 있는 남자가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아니지요,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동안 어디에서나 그 마녀를 막기는 커녕 항상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그 마녀를 막는것과 동시에 그 마녀에게 큰 부상을 입혔습니다. 게다가 그 마녀를 막으러 간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귀환하였으니 이보다 큰 경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레드포드경은 그 그룹의 리더 아니었습니까?" "모티머 후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게다가 같이 갔던 플레이저 공녀와 레드포드경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건 같이 갔던 일행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제가 듣기로는 플레이저 공작은 자신의 딸을 끔찍히 아낀다고 합니다. 아마 이번에 열리는 왕실 무도회에어서 공녀를 정식으로 귀족계에 데뷔시키려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 공녀와 레드포드경을 이뤄주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우리쪽에 협력할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공작은 좋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 마녀를 막은거야, 애쉬가 돕기는 했다지만 내 아들의 말을 들어보면 전적으로 공녀가 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솔직히 애쉬가 치하받을 일은 아니지요. 게다가 공녀가 직접 고백한게 아닌 이상 공녀가 애쉬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리고 설사 있다고 해도 플레에저 공작이 우리편으로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공작이 아무리 자신의 딸을 아낀다고 하나 그가 한쪽으로 움직이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정파들이 와르르 무너질게 아닙니까? 그걸 잘 알고 있는 공작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겝니다. 그리고 왕녀파 귀족들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제야 백작과 후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야, 그렇지만..." "그러니까 레드포드경에게 플레이저 공녀를 확실하게 잡으라고 하십시오. 지금이야 가만히 있다고 하지만 미래의 사위편을 안 들어주고 배기겠습니까?" "어허... 브더셀스 백작. 거 무슨 소리입니까? 미래의 사위라니요, 아니 그럼 당신은 플레이저 공녀를 레드포드 공작가의 며느리로 생각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갑자기 후작이 정색을 하고 백작을 쳐다보자 백작은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예? 하, 하지만... 플레이저 공작가의 영애정도라면..." 그는 계속 후작이 자신을 노려보자 그와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고 하지만, 모친의 신분이 확실치 못하지 않습니까? 지금 공작이 독신이라서 그렇지, 만약 결혼이라도 했었다면 그 공녀는 사생아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공작이 딸이 있는데도 공녀의 친모친과 결혼을 하지 않은것은 뭔가 모친쪽에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나이가 되도록 데리고오지 않은 것만 봐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가씨를 불경하게도 어찌 레드포드 공작가의 며느리로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백작의 얼굴이 새하얘지며 넙죽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님.. 제가 미처 생각이 짧았습니다." 묵묵히 그들의 말만 듣고 있던 공작은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 뭐 며느리는 어때야 한다고 기준을 정해놓은 것도 아니니까요. 그냥 제 아들이 데려온 여자면 크게 흠이 없는한 인정해줄 생각 입니다. 제 아내도 같은 생각이구요. 하지만 벌써부터 제 아들과 공녀의 결혼을 생각하는건 이른일 아니겠습니까? 당사자들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 말입니다." 후작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공작님의 말씀이 옳긴 합니다. 그럼 레드포드경에게 부탁해서 공녀를 꽉 잡으라고 하시지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왕녀파 귀족들도 공녀를 가만두지는 않을겝니다." 그러자 백작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게다가 그 쪽에는 여자 꼬시는데는 일인자인 자벨리안경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 우리나라 제일의 바람둥이라고 이름이 자자한 자벨리안 백작의 아들?" 후작이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이 계속 말을 이었다. "예, 바로 그 자벨리안경 말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왕녀파쪽에서 자벨리안경을 내놓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얼마 전에 또 애인이랑 헤어졌다고 하던데..." "하, 정말 대단하군... 이번에는 누구였지?" "글쎄요... 워낙 쉬쉬하면서 비밀데이트를 하느라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백작가의 영애라고 하던데... 아마 28번째 애인이라지요?" 후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그 바람둥이 녀석이라면 유부녀도 껌뻑 넘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레드포드경이 신경을 써줘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공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해보겠소만... 정말 웃긴 상황이로군... 각 파에서 공녀를 유혹하려고 팔을 걷어부치다니..." 잠시 후 후작과 백작이 돌아가고 공작이 혼자 자신의 서재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이 조용히 열리고 우아한 중년의 여인이 들어왔다. 검은 머리에 간간히 하얀 새치머리가 보이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그녀의 기품을 깍아내리지 못했고, 오히려 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오, 부인..." 공작이 손을 내밀어 자신의 앞 의자를 가르키자 부인은 빙그레 웃으며 우아한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브더셀스 백작과 모티머 후작이 다녀갈 일이라면 중요한 일인가 보군요?" 그러자 공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허.. 중요한 일이라... 중요한 일이긴 하죠. 플레이저 공작이 달려있는 일이니..." 부인의 가는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플레이저 공작이요? 그 분은 가장 확고한 중립파시잖아요?" "맞소.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허허.. 그게 말이오, 이번에 플레이저 공작의 딸이 나타나지 않았소? 능력이 출중하여 그 살인마를 잡는팀에 끼어있다오." 공작이 거기까지 말하자 부인은 알아챈 듯 아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그 공녀를 끌어들이면 공작까지 끌어들일수 있다는 말인가요?" 공작이 감탄하는 표정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맞소. 그래서 우리쪽에서는 애쉬를 내놓길 바라고 있소. 아무래도 같은 팀이다보니 더욱 친근하고, 우리 애쉬도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지 않소? 하지만, 그런걸 시키려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군. 게다가 워낙 무뚝뚝한 녀석이고 여자를 모르는 녀석이라 잘 할지도..." 그러자 부인이 화사하게 웃었다. "잘 되었네요." 공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잘 되었다니요?" 부인은 중요한 비밀을 말해주는 것 처럼 은밀한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었다. "사실은요, 아무래도 애쉬가 그 공녀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공작은 더욱 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몸 까지 기울이며 다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혹시 애쉬가 관심있다고 말하기라도 했소?" "아유, 참.. 당신은... 애쉬가 어디 그런걸 말 하는 애인가요? 이건 엄마로써의 직감이예요." 그러자 공작은 약간 실망하는 표정으로 다시 등을 소파에 깊숙히 기댔다. "그럼 모르는거 아니오?" 하지만 부인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었다. "엄마의 직감은 예리한 법이랍니다. 전에 애쉬가 돌아와서 잠깐 그녀에 대해 언급을 하더군요. 그 아이가 여자에 대해 말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요? 게다가 말을 하면서 피식 피식 웃는걸 보니 분명 마음이 있는거예요." 공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 그렇소?" "예, 그렇답니다. 아아.. 이번 왕궁 무도회가 기대 되는군요. 과연 어떤 아가씨일지... 후후, 이번 무도회에 갈때는 좀더 신경을 써야겠어요.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요. 드레스를 다시 주문해야겠어요." 공작 부인이 벌떡 일어나 서재를 나가자 공작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닫힌 서재문을 보고 있었다. "거참..." 그리고 여기는 레드포드 공작 저택 만큼 커다란 다른 저택... 이 곳의 멋드러진 서재에서는 세명의 중년 사내가 심각한 얼굴들로 모여 앉아 있었다. "이거 참... 혹시 이러다가 플레이저 공작이 왕자파로 넘어가는 건 아닐까요?" 갈색의 팔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자신의 콧수염을 버릇처럼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두고 봐야지요.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자신의 딸을 왕자파의 사람들과 같이 보낸 건 무슨 생각에서 그런 건지.."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입을 열자 콧수염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럴겝니다. 플레이저 공작이 아무런 이유 없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콧수염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일부러 레드포드경과 공녀를 가까워지게 만들려는 수작이 아닐까요?" "그게 무슨?" 중앙의 남자가 놀란표정을 지어보이자 콧수염 남자는 더욱 더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플레에저 공작이 독신이고 공녀가 외동딸이라고 해도, 그녀는 모친의 신분이 불분명한 상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석으로 좋은 신랑감을 얻기는 힘들테니 편법을 사용하자는 수법일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레드포드경 정도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우위를 다투는 최고의 신랑감 아닙니까?" "으음..." 코수염 남자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두 남자는 반론을 하기는 커녕 신음성을 흘리며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중앙에 앉아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왕자파에서 이번 기회를 노치지 않으려 하겠군? 흠이 있는 며느리를 얻는것이 좀 찝찝하겠지만, 부수적으로 들어오는 콩고물이 화려하니까 충분히 너그러울 수 있겠지..." 그러자 콧수염 남자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눈을 반짝였다. "만약, 정말로 공작이 신랑감을 찾는 거라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남아있습니다. 아직 결혼이 성립된게 아니니까요. 우리쪽에서도 레드포드경 만큼 대단한 신랑감을 내세우면 됩니다. 특히나 그 신랑감이 여자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라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콧수염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간에 앉아있던 남자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 콧수염 남자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무릎을 딱 쳤다. "그래, 그렇군... 우리쪽에는 새신부도 넘어간다는 플레이 보이가 있었지?" 콧수염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부담을 느낀 듯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제 자식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물론, 이 나라에서 자벨리안경을 따라갈 플레이보이가 또 있습니까?" 중앙에 앉아있던 남자도 은근한 눈으로 콧수염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떤가 백작... 비록 아주 쬐에에에끔 흠이 있긴 하지만, 명색이 공작가의 영애일세... 것두 우리나라 재상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야. 며느리감으로 괜찮지 않겠는가?" 콧수염 맞은편에 앉은 남자도 거들었다. "그럼요 그럼요... 게다가 이 일만 잘 성사된다면 우리 왕녀파가 집권하는건 식은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부탁하오... 백작..." 콧수염 남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체념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아들놈에게 말해놓도록 하죠." 그러자 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잘 생각했소 백작." "정말 훌륭하신 선택이었습니다. 이제 공녀가 자벨리안 성을 갖게 되는것도 시간문제이군요." 두 남자는 벌써 일이 다 해결된 양 싱글벙글이자 콧수염 남자가 불안하게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게... 잘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 아닙니까?" "허허허 그게 무슨 소리요? 이 나라에 자벨리안경에게 안 넘어가는 여자가 어디 있다고 그러시는 거요? 허허허, 당신 아들의 실력을 다 아는데 겸손(?)할 필요가 뭐 있겠소?" "자자, 백작님.. 지금 이러고 있을때가 아닙니다. 어서 가서 이 일을 자벨리안경에게 말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재촉에 못 이기는 듯 콧수염 남자는 어기적 일어나서는 두 남자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전 이만..." "허허허, 그러시요. 어여어여 가보시도록 하구려." 가운데 앉은 남자가 시원스레 손짓하며 답례하자 콧수염 남자는 여전히 편치 않은 얼굴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중앙에 앉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후작님께서도 가만 계실게 아니라 어서 대공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으이... 나도 빨리 입궐을 해야겠구만. 같이 가겠나?" "물론입니다. 대공께서 들으시면 무척 기뻐하실겝니다." "허허허, 이르다뿐이겠나? 이제 플레이저 공작이 우리편으로 들어온거나 마찬가지 인데..." "글쎄요... 저는 별로 그렇게 낙관적이질 못하겠군요." 후작 외 다른 남자 한명이 열심히 달려와 신이나서 떠들어대는 말을 다 듣고 난 왕녀는 그들의 성의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왕녀님... 이번 일만 잘 성공하면 플레이저 공작이..." 후작과 같이 온 남자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자 왕녀는 가볍게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막았다. "물론 성공한다면 여러분들의 말처럼 되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공녀가 그렇게 만만한 여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전에 한번 만나본 적이 있는데 꽤나 똑부러지더군요. 더욱이 레드포드경과 같이 그 마녀를 잡는팀에 넣어졌다는 것은 실력 또한 뛰어나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만만하게 보셔서는 아니될것입니다." 그러자 후작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섰다. "허허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자벨리안 경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아실것 아닙니까? 잘 될겝니다." 그러나 왕녀는 여전히 좋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젋은 남자가 나섰다. "그런데 아버님, 플레이저 공작이 공녀를 레드포드경 옆에 두었다는 것은 이미 레드포드경을 사윗감으로 점찍었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공녀가 자벨리안 경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공작이 그걸 막지 않겠습니까?" "괜찮을 겁니다. 자벨리안경도 레드포드경과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 일위를 다투는 뛰어난 신랑감이 아닙니까? 그러니 공작이 딸을 위한다면 딸이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주려고 하겠지요." 그의 말이 다 끝나자 왕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결론을 맺었다. "알겠습니다. 모든건 자벨리안경께 달려있는 거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가만히 지켜보도록 하죠." 다시 장소를 바꿔서, 이 곳은 자벨리안 백작의 커다란 저택. 아까 후작의 저택에서 나온 자벨리안 백작은 때마침 왕성 근위대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아들을 자신의 서재로 불러들였다. "아버지가 왠일이세요?" 서재에 있던 작은 바에서 호박색의 술을 따라 입으로 가져가던 금발 머리의 젋은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콧수염 남자, 즉 자신의 아버지인 자벨리안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 젊은 남자는 정말 잘 생긴 얼굴이었다. 조각같은 외모를 가졌다는 말이 바로 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말 처럼 섬세하고 뚜렿하게 생긴 이목구비에, 기사가 틀림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보다 더 고운 티 하나없는 하얀 피부, 게다가 시원하게 뻗은 눈썹 밑에 자리한 파란 눈동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가 이처럼 생겼을까? 거기에 훤칠한 키와 가늘고 긴 손가락은 그의 외모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러나 백작은 이런 잘 생긴 외모를 바라보면서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살짝 찌푸린 얼굴이었다. "너 지금 사귀는 여자 없지?" "아아... 쥴리아라면 벌써 헤어졌는걸요. 귀엽다고 오냐오냐 해줬더니만, 너무 내숭을 떨잖아요. 것두 정도가 있지..." 젊은 남자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적극적으로 팍팍 밀어줄테니까 어디 네 능력을 맘껏 발휘해 봐라." "그런데... 그 플레이저 공녀라는 여자, 예쁘게 생겼어요? 얼굴이 어느 정도 받쳐 주어야 흥이나죠." "나도 잘 모른다. 이번 왕실 무도회때 한번 보려무나. 어쨌든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 한다. 중요한 일이야." 그러자 젊은 남자는 싱긋 웃으며 술잔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모르죠.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순 없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약속은 드리죠." "에휴... 설마 너의 그 바람둥이 기질을 이렇게 중요한 때 써먹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후후후, 동감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면서까지 작업을 하게 될 줄이야..." "참, 이번에 네 라이벌은 그 레드포드 경이랜다. 그러니 신경좀 쓰거라." 그러자 술을 한모금 마시고 천천히 테이블로 내려오던 술잔을 잡은 손이 멈칫 했다. "애쉬 레드포드 말인가요?" 그의 어조가 약간은 이상한듯 했지만, 백작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전히 시큰둥한 태도였다. "레드포드 경이 그 녀석 말고 또 있었냐?" 아버지의 확답에 젊은 남자의 눈이 반짝 거렸다. "후후후, 이거 참... 이번에는 정말 기대되는 걸요?" 다시 이곳은 레드포드 공작 저택... "플레이저 공녀... 를요?" 애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앉은 자신의 부모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공작은 뭐가 그렇게 안좋은지 낭패스런 얼굴로 아들의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었고, 공작 부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아들의 얼굴에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듯한 날카로운 눈으로 집요하게 애쉬의 눈을 바라보고 있어 오히려 애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험험, 그렇게 되었다. 네가 데리고 갔다 온 일행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공녀가 너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으니까... 일부러 공녀에게 접근할 필요는 없고, 그냥 공녀가 접근하면 그에 맞춰주면 될게다." 그러자 애쉬의 얼굴이 묘하게 찡그려졌다. "도대체 누구에게 뭔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공작의 고개는 부인쪽으로 돌려져 그녀에게 도움을 발하는 듯한 눈빛을 발산하였다. 계속 기쁜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있던 부인은 기꺼이 그 시선을 받아들여 애쉬에게 입을 열었다. "애쉬야,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 이번 기회에 진지하게 결혼까지 생각해 보렴. 이제 나나 네 아버지나 손주의 재롱을 볼 나이가 되었지 않니?" 평소 다른 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얼굴을 팍 찡그릴 애쉬 녀석이 갑자기 딴 때와는 다르게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 눈이 더욱 더 반짝반짝하게 된 공작 부인은 애쉬에게 몸 까지 숙이며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호호호, 네 얼굴을 보니 확실히 그 공녀에게 호감이 가는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넌 평소 이런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니 아무래도 이런 일에는 서툴겠지? 오냐, 내가 이번 무도회 때 나서서 너를 도와줄 테니 넌 아무 걱정도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어, 어머니.." 애쉬는 당황하면서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공작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는 척 하며 애쉬의 요청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공작 부인이 더욱 더 신이난 듯 입을 열었다. "호호호, 싫다고 하지 않는걸 보니 너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알았다. 이 에미만 믿으렴."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가르키는 공작 부인의 모습에 애쉬는 한숨을 폭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어머니를 말리겠습니까?" 그러자 공작이 창 박을 바라보던 시선을 슬그머니 돌려 애쉬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네 엄마의 지원만으로는 좀 힘들게다. 왕녀파에서 자벨리안 경이 내세워질 것 같거든... 너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지 말고 신경을 쓰도록 해라." 애쉬의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자벨리안 경? 혹시 자카르 폰 자벨리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작이 애쉬의 말에 긍정을 하기도 전에 공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흥, 그런 바람둥이 녀석에게 내 며느리를 빼앗길 순 없죠. 애쉬야, 너도 분발해야 한다. 네가 공녀를 빼앗기기라도 하는 날엔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게다, 알겠니?" "하아..." 애쉬는 갑자기 자신이 왜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저쪽 방 한 구석에서 두개의 나무 막대기를 부딧히며 박자를 세고 있는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녀석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지금 나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은 상태에서 알렌을 상대로 무도회 춤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저 방 한구석에서 박자를 세고 있는 남자는 아빠가 구해준 사교 예절과 춤을 가르킬 선생이었다. 뛰어난 실력으로 귀족 영애의 가정교사를 전담하다시피 한다는 유명한 중년 남자라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간드러지는 음성과 여성스런 몸짓에 나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밥맛 없는 녀석일 뿐이었다. 지금도 박자를 세고 있는 저 간드러진 음성에 온 몸에 소름이 오싹 오싹 끼치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TV에서 사람들을 웃기려고 코메디언들이 그렇게 하고 나오는 것을 몇번 보고는 웃기도 했지만, 설마 이 곳에 저런 인간이 정말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처음에 저 인간의 인사를 받고는 소름이 돋아서 닭 돼는 줄 알았다. 그러면서 꼴에 완벽을 추구하는 선생이랍시고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 자연스럽게 스텝을 밟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2시간째 춤 연습을 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게 끝나면 여성스럽게 웃는법과 대화하는 법 등등 사교계에서 귀족들을 대할때의 처세술을 배우게 된다. 그럴때 마다 간들어지는 몸짓에 오싹오싹 해지고 생각 같아서는 녀석을 통닭 구이로 만들어주고 싶지만 나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라 간신히 참고 있다. 아빠가 걱정스레 알려주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나에게는 모친의 신분이 불분명 하다는 귀족으로써의 핸디캡이 있다. 그러니 공을 세웠다고 해도 수다스럽고 잘난체 할줄만 아는 여자들에게는 씹기 좋은 도마위의 생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들에게 예의도 모른다느니, 교육을 받지 못했다느니, 하는 소리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씹는 여자들에게는 이 밥맛 없는 선생에게서 배운 우아한 처세술로 무지막지하게 괴롭혀줘 다시는 나에대해 입도 뻥긋 못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선생이 알고 있는 지식이 필요했다. 유능한 선생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그는 귀족 여자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그런데 맞대응 할 수 있는 체세술을 무척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자 좋았어용. 아주 훌륭하시군요 공녀니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간드러지는 목소리는 도저히 적응이 안됀다. 나는 그 선생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알렌과 떨어저 치마를 살짝 들고 예를 취했다. "수고하셨어요, 아르하나즈 경." 알렌이 허리를 숙이고 그 방을 빠져나가자 선생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무척 흡족하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완벽하세요~. 그 정도면 얼마든지 사교계에 나가셔서 이름을 떨치실 수 있을 거예요~." "다 선생님 덕이지요." 소름이 오싹 끼쳤지만, 그에게서 배운 살짝 곡선을 그리는 우아한 미소를 띄우며 - 이 미소도 며칠동안 거울 앞에 서서 하루에 한시간씩 그의 잔소리를 들으며 만들어 낸 거였다. - 겸양의 말을 하자 그의 고개가 끄덕여 졌다. "좋아요~, 좋아요~, 훌륭하세요~. 저에게 배운 것들을 적절히 사용하시는 군요~. 아주 좋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제가 공녀님께 가르쳐드릴 건 없는 것 같군요~." "아니예요, 아직 부족합니다." 그러자 그의 고개가 설래설래 저어졌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이제 수업은 끝났어요~. 공녀님 정도면, 현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모티머 후작님의 따님과 견줄수 있겠어요~" '오호호호, 이 정도야 뭐 나에게는 가뿐하지' 하지만 겉으로는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인 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캬~, 이 얼마나 완벽한 행동이란 말이냐!! 때론 이런것도 필요한 법. 암 암 그렇고 말고. 이런것도 쓸모가 있는 법이지. 자, 이제는 왕성 무도회에 가서 내 명성을 드높이고 애쉬 녀석에게서 친부모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만 남았다. 아자, 아자, 아자아아아~~!! 내가 이렇게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무렵 왕성에서는... "결.... 혼 이요?" 잘못 들은거길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되물은 브랜의 마음을 가차없이 밟아버리기라도 하듯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혼. 너도 나이가 다 되지 않았느냐? 내 너가 레드포드 경을 따라가게 허락해준 것도 다 결혼하기 전 마지막 자유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니라." "하지만 전 그녀를 본 적도 없습니다." 항의하듯 나온 브랜의 말에 국왕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걸맞지 않는 뭔가를 꾸미는 듯한 모사꾼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알고 있느니라. 그건 다 왕자 네가 왕궁 파티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러니 이번 왕궁 무도회를 잘 이용해 보거라. 그 아이도 온다고 했으니... 내 그 아이를 볼때 참으로 흡족함을 금할수가 없느니라.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총명한데다가 예쁘기까지 하지 않느냐? 아무 말 말고 한번 만나보거라." "그녀는... 아바마마께서 그녀를 제 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아니다. 물론 그 애의 아비한테도 입을 다물고 있다. 젋은 녀석들의 연애에 내가 끼어드는 것도 볼썽 사납지 않겠느냐? 그래서 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니 잘 해보도록 하여라." "하아... 아바마마... 꼭 그녀여야만 하겠습니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브랜이 망설이면서 묻는 말에 국왕의 눈이 반짝반짝 거렸다. "호오~, 그렇게 말 하는걸 보면... 혹시 누구 점찍어 둔 귀족 영애라도 있느냐? 물론 내가 인정할 만한 아이겠지?" 그러자 브랜의 고개가 숙여졌고 그걸 본 국왕의 눈이 날카로와졌다. "혹, 흠이 있는 아이라면 생각하지도 말거라. 넌 이 나라를 장차 이끌어갈 몸. 네 배우자는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아이라야 할 것이다." 국왕의 단호한 말에 브랜은 더 이상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꾸벅 숙였다. "전 이만 물러가 보겠나이다. 쉬시옵소서." 따각, 따각, 따각, 따각... 일정한 말 발굽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가운데 나는 플레이저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하고 아빠의 취향대로 우아하고 멋진 마차에 아빠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국왕이 등장할 때 까지는 무도회장에 얌전히 있으란 말이죠?" 이 시대에는 과학은 없어도 마법이 잘 발달되어 있는 탓에, 이 마차에 스프링 장치는 없어두 '흔들림 방지 마법'이 걸려있는 탓에 마차가 움직이는지 멈춰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진동이 없었다. 단지 바깥쪽에서 간간히 들리는 4마리의 말 발굽 소리와 마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아야만 '아, 이 마차가 움직이는구나...' 할 정도였으니 아마 내가 있던 시대에 한국의 고급 승용차들 보다 승차감이 더 좋다고 느껴진다. 내 앞에 멋진 흰색 바탕에 금실로 수가 놓여진 문관의 정식 복장을 한 아빠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뭐, 그때 까지는 내가 네 옆에 있을테니 걱정할 것도 없다만.. 그리고 나서 국왕이 등장한 다음 너와 빨강 머리 녀석을 앞으로 부를 거다. 그때 하는 예법은 잘 알고 있겠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길에 왠지 열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티 낼수는 없지. "그럼요...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 내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아빠는 피식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그리고 그때 아마 너와 그 녀석에게 자작의 작위를 줄 것 같으니까... 그럼 넌 플레이저 공녀가 아니라 플레이저 자작이 되는 거야." "작위? 에... 난 그런 거 필요 없는데..." "어차피 말 뿐인 작위야. 둘 다 공작가의 애들이니까 영지 같은 것도 없어. 단지 공을 세웠는데 기사의 작위에 둘 수가 없어서 그 빨간 머리 녀석에게 작위를 주다 보니 너한테도 주게 된 거지..." "쳇, 쳇...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가 그 빨강 머리 녀석이 받는 덕으로 받는 거네요?"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현 국왕이 무척이나 보수적인 성격이걸랑." "에게게... 맘에 안 들어." 내가 입을 삐쭉이며 팔짱을 끼자 아빠가 달래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그냥 잠자코 받아 둬. 받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래도 기분 나쁜건 나쁜 거예요." "정, 그렇게 기분 나쁘다면 나중에 왕성에 몰래 찾아가서 국왕에게 몇방 먹이던가..." 아빠는 농담삼아 말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 말이 맘에 들었다. "아, 정말 그럴까?" "그건 네 맘대로 하고, 작위를 받은 다음에는 댄스 타임인거 알지? 그때 나랑 맨 처음 추는거다. 그리고 나서 그 빨강 머리 녀석을 유혹하든지 끌고 가든지 해서 알아내는 건 네 재량에 달렸으니까." "알았어요."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뭔가가 생각 났는지 무릎을 탁 쳤다. "아,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곳은 정원이 최고지만 그 곳에는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이 많으니 조심하도록 해라. 잘못 하다간 너와 그 녀석 사이가 애인 사이인줄 오해살 수 있으니까." "그러죠. 뭐, 이번 일만 알아낸다면 그 녀석에게 더 이상의 볼일은 없으니까..." 아빠와 내가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마차는 왕성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아직 왕성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많은 귀족들의 마차가 몰려있는 바람에 교통체중 현상이 일어나면서 왕궁 시종들과 병사들인 듯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와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교통이 원할하게 소통되지 않는지 마차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하아... 무지 많구만..."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질려서 중얼거리자 아빠는 밖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 대꾸했다. "뭐, 국왕이 직접 연다니까 난다긴다하는 귀족들에, 그들에게 얼굴 도장 찍으려는 귀족들까지 다 바리바리 모였으니까 그렇지..." 연회가 시작되는 건 늦은 저녁 무렵... 그래서 아무리 계절이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해는 져서 날은 어두워졌고 하늘에는 달과 별이 떠 있었다. 하지만 왕성 앞에는 왕성을 들어오는 마차들과 그들의 교통을 정리하는 병사들을 위하여 마법으로 만든 등불이 여기저기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빛들을 받아 마차에 달려 있던 금, 은과 보석 장식들을 비롯하여 마차에 달려있는 말들의 장식품들, 그런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의 갑옷들이 반짝 반짝 빛을 발하고 있어 마치 무슨 예쁜 영상 효과를 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헤에... 예쁘네요... 하긴 이런 눈요기라도 없으면 지루해서 어디 견디겠나..." 그렇게 내가 그 빛들을 감상하는 동안 거의 1시간에 가까운 시간들이 흘러 우리 앞의 마차들이 다 왕성으로 들어간 다음 아빠와 내가 탄 마차가 왕성 안으로 들어가 성의 입구 앞에서 멈춰섰다. "다 왔습니다, 각하." 마차의 문이 열리고 밖에서는 라몬트(아빠 사병대의 대장)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빠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에게 그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다 아는 사이에 쑥스럽게 무슨 짓인지... 하지만 이것이 왕실 예법이란다. "기꺼이..." 나는 그 동안 열심히 연습해왔던, 나를 우아하고 예쁘게 보여지게 하는 미소를 띄우며 아빠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리고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주위에서 아빠와 나를 봤는지 순간적으로 침묵이 감돌다가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를 힐끔 힐끔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귓속말로 속삭이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아빠와 나는 그들을 무시해 버리고 천천히 왕성의 입구로 들어섰다. 왕성의 입구에서 초대장을 건네받는 제복을 입은 시종들이 아빠를 알아보고는 얼른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였고 아빠는 그들의 인사에 살짝 고개짓을 해주는 정도로 답례를 하며 왕실의 문장이 찍힌 고급스러운 종이로 만들어진 초대장을 넘겨주었다. 입구를 지나 얼마 들어가지 않자 아빠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던 데빈과 윌슨(아빠의 보좌관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그들도 아빠와 마찬가지로 문관의 정식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아빠보다는 약간 덜 화려했다. "이제 오시는 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녀님,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후훗, 고마워요 윌슨." 주위를 둘러보니 왕성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 중 남자들은 거의 문관 혹은 무관의 정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뭐, 가끔 그냥 연회복을 입은 남자들도 간간히 보였지만... "아빠, 연회복을 입은 사람들이 적네요... 왜 그렇죠?" "거야... 너무 많은 인간들이 몰리다 보니 서로 얼굴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거야. 실례를 하면 안돼니까... 그냥 연회복을 입은 사람들은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기는 하지만, 왕성에서 특별한 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방 영주들이지." "아하..." 윌슨과 데빈을 데리고 아빠의 에스코트를 받아 거대한 연회장 입구로 들어서자 문가에 서 있던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플레이저 공작 각하와 공녀님 드십니다." 아마 목소리를 크게 울리게 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는 듯 무지 커 보이는 연회장에 퍼져 있던 사람들이 다 듣고는 입구쪽으로 시선을 돌리는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는 작게 작게 퍼지는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들... '흠, 내 이야기가 벌써부터 많이 퍼졌나 보군...' 아빠가 나를 이끌고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아빠에게 와서 인사를 건네었다. "이제 오시는 군요,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허, 어서 오십시오." "먼저 왔습니다." ..... 아빠는 그런 그들에게 가벼운 미소를 띈 얼굴로 고개만 끄덕여 답례를 했지만 나를 소개시켜주지는 않고 그냥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그러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치자 걸음을 딱 멈추었다. "오, 이게 누구십니까? 플레이저 공작님 아니십니까?" 짙은 밤색 머리에 하얀 새치가 언듯 언듯 보이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마치 이제야 발견한듯 양 몸을 돌리며 아빠를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레드포드 공작." 아빠도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제야 나는 그와 같이 서 있던 애쉬 녀석과 우아한 미모의 중년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아하... 가족이로구만?' 그 중년 여인은 아빠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와 아빠를 번갈아바라보면서 말을 걸어왔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재상 각하." "예,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공작 부인..." 그 공작 부인은 검은 비단천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부채를 들어 입가를 가리면서 웃었다. "호호호... 각하도 여전하시군요. 그런데... 그 옆에 계시는 아름다운 숙녀분은 누구신지요?" 아마 다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정식으로 소개를 받고 싶다는 눈치였다. "예, 이 아이는 제 여식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이번에 레드포드경과 같은 팀을 이루었었지요." 애쉬 녀석이 맞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것을 신호로 나는 수십번도 넘게 연습한 우아하게, 그리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치마를 살짝 잡아 올리고는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시리안 플레이저라고 합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은 정말 더 없이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정말 반가와요 플레이저 공녀... 내가 바로 애쉬의 엄마라우." 껌뻑, 껌뻑... "예? 아, 예..." 이럴때는 보통 연장자쪽은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해주면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런데 이 공작 부인은 마치 예뻐하는 조카딸이나 친구딸을 만나는 것 처럼 무지 반가와하면서 친근하게 손을 덥썩 잡는 바람에 내가 조금 당황했지만, 더욱 더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그녀의 소개였다. '애쉬 엄마?' 물론 애쉬 엄마인건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자신을 소개 했지? 공작 부인은 여전히 다정하게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얼굴만 아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예쁜 따님을 두셨군요. 이렇게 예쁜 따님을 아까와서 어떻게 시집을 보내시겠어요?" 그리고는 아빠가 대답도 하기 전에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로 나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것이었다. "어쩜... 정말 예쁘기도 하지... 역시 공작님을 쏙 빼닮았네... 게다가 이렇게 기품 있고 예의바른 아가씨라니... 나도 이런 딸 하나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네... 공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하게 지내요." "아.. 예." 나는 그녀의 친근한 반응에 무지 얼떨떨했지만서도 예의상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공녀... 아, 이런이런.. 공녀라 부르니까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 군요. 그래, 이름이 아시리안이라고 했죠? 하지만 그건 너무 딱딱하니까 내가 아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괜찮겠죠?" "예에..." "그래 그래, 아린... 아아, 그렇게 당황할 것 없어요." "예에..." 왠 전개가 이렇게 빠르다냐.... "나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서... 딸 가진 집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이렇게 아린을 만났으니 마치 딸이 하나 생긴것만 같이 너무 좋지 뭐예요? 아들이란게 하나 있으면서도 애교도 하나 없고 항상 무뚝뚝하기만 하니 재미가 하나도 없답니다." 그러면서 뒤에 서 있는 애쉬 녀석을 슬쩍 흘겨보자 녀석은 슬그머니 고개를 저 쪽으로 돌렸다. "그러니 아린양, 가끔 우리집에도 놀러오고 그래요. 우리 집 양반이나 아들 녀석은 일로 너무 바빠서 코빼기도 보기 힘들다우. 내가 그 넓은 집에 꼭 혼자사는 기분이라니까. 그렇지만 아린양이 놀러와 준다면 더할나위없이 기쁠거예요." "그, 그게... 그러니까..." '내가 뭐하러 그 집에 놀러가?' 하고 속으로는 절규를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거절도 못하고 그렇다고 받아드릴 수도 없고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자 공작 부인이 더욱 더 환하게 웃으며 집요한 눈으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해줘요, 아린양. 그래줄거죠?" 나는 그녀의 손에서 빠져 나갈수가 없어 아빠에게 도움을 막 청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에 나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두분 공작님이 아니신지요?" 공작 부인이 의아함이 드러나는 얼굴을 드는 사이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날 구해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멋드러진 콧수염을 달고 있는 중년 남자였는데 그의 한쪽에는 무지무지 잘 생겼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금발머리의 미남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그 남자와 같은 금발머리의 통통하고 포근한 인상을 가진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다시 환한 미소를 띄우며 살짝 뒤로 물러나 자신의 남편 옆으로 가서 섰고, 나도 아빠의 옆으로 가서 섰다. "오, 자벨리안 백작... 오랜만이구료." 레드포드 공작이 약간은 딱딱한 어조로 그에게 고개를 까딱하자 콧수염 백작도 마주 고개를 까딱였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마주보는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내가 그걸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자 윌슨이 살짝 귓속말로 속삭여줬다. "백작은 왕녀파 사람입니다." '아하...' 두 사람은 언제 불꽃을 튀겼냐는 듯한 표정으로 얼른 손을 놓아버렸고 그러자 백작은 '기회다' 라는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는데 그 표정은 아까 레드포드 공작에게 보여줬던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정말 반갑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재상각하시군요." "백작..." 그리고 곧바로 나에게 돌아오는 그의 시선... "그런데, 이 숙녀분은..." "아, 내 딸이라오." "그렇군요. 난 아담 폰 자벨리안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마치 아버지가 딸을 대하는 듯한 인자한 표정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시리안 플레이저라고 합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고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이 쪽은 내 아내이고 이쪽은 내 아들 녀석이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두분." 그러자 이번에도 그쪽의 백작 부인이 나섰다. 그녀는 정말 포근한 얼굴에 함박 웃음을 짓고 나서서 그녀의 통통한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만나서 반가워요, 공녀... 아,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예, 그러세요." 이미 한번 당했던 터라 나는 이번에는 좀 여유있게 그녀를 마주볼 수 있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여자의 몸으로 큰 일을 해냈다면서요? 정말 장해요. 재상님께서 무척 자랑스러워 하시겠어요." "과찮이세요. 저 혼자 해낸 것도 아닌걸요." '윽... 나 혼자 한 건데...' "어머, 겸손까지... 정말 훌륭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재상각하." 백작 부인이 고개만 돌려 아빠를 바라보자 아빠도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부인의 세 따님에 비한다면야..." "호호호,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 참.. 아시리안양, 나에게는 세 딸이 있답니다. 괜찮다면 소개시켜 주고 싶군요. 셋 다 당신을 무척 좋아할거예요." "아, 그러세요? 그런데... 같이 오시지 않으셨나 보죠?" 내가 그녀들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자 백작 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아, 그 아이들은 남편들과 같이 올거랍니다. 결혼을 했거든요." "그러셨군요." 이제 슬슬 놓아줬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웃으면서 도통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 좋아보이는 부인의 손을 뿌리치기도 좀 그렇고 해서 어찌할 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뿌우우웅~~ 방구 소리가 아니다. 굵직한 뿔피리 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크게 울려퍼지는 소리. "국왕 폐하 납시옵니다." "국왕 폐하 납시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넓은 무도회장을 은은하게 울리던 음악소리도 뚝 그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든 이의 시선이 커다란 무도회장의 입구로 쏠렸고, 상석에 마련된 옥좌와 무도회장 입구의 사이에 깔린 붉은 융단을 밟지 않기위해 좌우로 갈라지는 순간 빰빠라밤~~!! 하는 경쾌한 나팔소리와 함께 입구에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무도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비록 허리를 숙이지는 않았지만, 감히 지금 들어서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만큼 담대한 사람은 없어 모두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그들이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야 일제히 예를 다하여 허리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모두들 일어서시오." 어딘가 병약한 듯한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사람들은 일제히 한마디를 더 하고 허리를 들었다. "감사하옵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국왕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정말 여기 나오기보다는 차라리 쉬라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병색이 완연한 얼굴인데 차려입을건 다 차려입어서 의상에 눌려있는 모습이었다. '쯧쯧... 아프다던데 꼭 저렇게 다 챙겨 입어야 하는건지...' 그리고 그의 오른쪽에는 익히 잘 아는 얼굴인 브랜이 앉아 있었고 왼쪽에는 왕녀로 추정되는 여자와 그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왕녀의 얼굴을 본 순간... "루실 언니...?" 나의 놀라움에 찬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윌슨이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왕녀님을 알고 계셨습니까?" '와... 세상에... 이런걸 가지고 세상이 좁다고 하는 거겠지?' 내가 대꾸로 윌슨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때 국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짐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소. 그렇게도 우리 나라를 괴롭히던 마녀를 드디어 믈리칠수 있다는 소식을 들어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그리하여, 내 오늘 그 마녀를 물리친 두 명의 공로자에게 상을 내리려는 것과 동시에 이 기쁜 소식을 다 같이 축하하자는 의미에서 이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경들도 이 시간을 즐겁게 보내주시기 바라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다시 한번 모든 이들이 허리를 숙이며 입을 모았다. '에게... 여기도 우리나라 사극과 비스무리 하구나...' 내가 남들처럼 허리를 숙이면서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국왕의 옆에 있던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애쉬 레드포드경과 아시리안 플레이저 공녀님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드디어 시작이군...' 나는 약간 긴장되는 마음에 꿀꺽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붉은 융단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내 옆에서는 애쉬 녀석이 내 보조에 맞추어 같이 가고 있었다. 어느정도 앞으로 나서자 우리 둘은 다시한번 국왕에게 예법에 맞추어 허리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들 나게나." 국왕의 말이 떨어지자 우리는 다시한번 고개를 조아리며 허리를 폈다. "황공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 "그대들이 이번에 큰 일을 해내었군. 레드포드경, 수고했소. 경과 같은 젊은이가 이 나라에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크나큰 홍복이 아닐수가 없구려. 참으로 장하오."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그러자 애쉬를 바라보던 국왕의 시선이 나에게로 돌려졌다. "그래, 그대는 플레이저 공작의 딸이라고 했던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플레이저 공작은 정말 훌륭한 딸을 두었군. 그대도 수고했다. 여자의 몸으로 기사들과 같이 움직이는것도 힘들었을 텐데, 이번에 레드포드경을 도와 같이 그 마녀를 물리쳤다고?" '이봐이봐, 내가 빨강 머리를 도운게 아니라 빨강 머리가 날 도운거라구. 이거 주객이 바뀐거 아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전 별로 한 일이 없사옵니다 폐하." '내가 왜 이런 내숭을 떨어야 하느냐구우우우~~~!!' 국왕은 내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대들의 공로를 봐서 상을 내리고 싶소. 해서 둘 모두에게 자작의 칭호를 내리도록 하겠소." "성은이 망극 하나이다." "성은이 망극 하나이다." '망극하기는 개뿔이 망극해?' "자,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 모두 다 같이 즐기도록 합시다."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하자 다시한번 모든 이들이 허리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그 말을 신호로 다시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이 다 벽쪽으로 물러났다. 바야흐로 댄스 타임이 시작된 것이다. 병약한 국왕이야 다시 의자에 앉았지만 왕녀와 그의 부군인 대공, 그리고 브랜이 상석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으로 보아 그들이 첫 타임을 끊으려는 듯 했다. 그러자 모두의 관심이 브랜이 누구를 파트너로 지정할지로 쏠렸다. 왕녀야 벌써 남편이 있었으니 첫 댄스의 파트너가 결정된것이지만 브랜은 아직 솔로였기때문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특히 딸 가진 부모들의 관심은 더 했다. 이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첫 댄스 파트너야말로 장차 왕자비의 후보로 가장 유력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브랜은 상석에서 내려와서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는 국왕의 눈치를 힐끔 살피더니 작게 한숨을 폭 쉬고는 그 곳에 모인 귀족들을 둘러보다가 아빠와 같이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반짝 하는것 같다고 느낀 순간 그가 다시한번 상석 의자에 앉아있는 국왕을 힐끔 보더니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것두 하필이면 내 쪽으루... 그는 뚜벅뚜벅 걸어와 내 앞에 우뚝선 다음 손을 내밀었다. "플레이저 자작, 부디 저에게 첫 댄스 파트너가 될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우째 이런일이... 그가 걸어오는 동안 숨죽이고 그의 모습만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토해내는 듯 주위가 갑자기 웅성웅성 거렸다. 나는 옆에 약간은 놀란 듯한 얼굴로 서 있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거절해도 돼죠?] [당연히 거절해야지. 첫번째 파트너는 이 아빠라구.] 단호한 아빠의 말에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생긋 웃으며 브랜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선약이 있거든요." 그러자 주위의 웅성거림이 더욱 더 커졌다. 감히 어느 간 큰 여자가 거절을 하리라 생각을 했겠는가... 브랜녀석도 생각지도 못했던듯 무척이나 당황하는 얼굴이었고 내 근처에 서 있던 애쉬 녀석이 나를 죽을듯이 노려보는것이 느껴졌다. 브랜은 약간 얼굴을 붉히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두번째 댄스 파트너로 제가 미리 선약을 해도 되겠습니까?" 두번째까지 거절하려니 브랜에게 넘 미안하다. 그래도 전혀 모르는 사이두 아닌데... "두번째라면 상관 없습니다." 생긋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브랜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돌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왕녀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가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왕녀는 잠시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남편 손을 잡고 중앙으로 나왔고 브랜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대고는 팔짱을 척하니 꼈다. 이번 댄스 타임에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지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누나에게 먼저 스타트를 끊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리라. 덕분에 귀족들이 계속 웅성대긴 했지만 왕녀와 그녀의 남편인 대공이 스타트를 끊고 왈츠를 추자 한쌍, 두쌍이 나서서 같이 왈츠를 즐기기 시작했다. "자, 그럼 나가실까요 레이디?" 아빠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한 손은 내밀고 한 손은 배에댄 채 허리를 살짝 숙였다. "기꺼이..." 저 벽에 붙은 브랜이 맘에 걸렸지만, 애써 떨쳐버리고는 생긋 웃으며 아빠의 내밀어진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놨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스탭을 밟으면서 우아하게 나를 이끄는 아빠를 따라 나도 스탭을 밟아 나갔다. 뭐, 운동 신경도 어느정도 있는 편인데다가 예전에 한국에 있을때 가을 운동회에 몇번이나 마스게임을 해본데다가 일주일동안의 고된 연습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빠의 발을 밟지는 않았다. "호오, 잘 추는구나 아린. 일주일밖에 연습을 하지 않아 발을 밟히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말이다." "흐음, 아빠야 말로 절 너무 얕보시는거 아니예요?" "네 능력하고 춤 실력하고는 별개라고 생각했거든." 히죽 웃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번은 일부러라도 밟아주는게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때 음악이 끝났고, 서로 찰싹 붙어 있던 사람들은 파트너와 한발짝 정도 떨어져 인사를 하고는 벽쪽으로 물러났다. 나도 아빠와 함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브랜이 다가왔다. "이제 저에게 기회를 주시겠죠?" '에궁.. 미안해라.' "물론이죠, 왕자님." 하면서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다시 무도회 중심으로 걸어가는데 브랜이 낮게 한숨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아, 아린... 당신에게서 왕자님 소리는 별로 듣고싶지 않았는데요..." "그랬어요? 하지만 브랜, 당신이 왕자인 이상 안 듣는다는건 불가능한거 아녜요?" 의아한 눈으로 그를 힐끗 바라보는데 갑자기 등이랑 뒤통수가 무지무지 따끔따끔 거렸다. 그래서 슬쩍 고개를 돌려 누가 나를 그렇게 노려보는지 찾으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국왕이랑 딱 눈이 마주쳤다. '오마나...'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국왕의 눈초리에 화들짝 놀라 얼른 브랜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브랜이 의아하다는듯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아린?" "하.하.하... 글쎄요... 아마 폐하께서 여자가 작위를 받으니 불쾌하셨나보죠? 나를 별로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네요." "아아..." 브랜은 알것 같은 표정이면서 말은 해주지 않은채 고소만 머금고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아무말 없이 스탭만 밟다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이기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에? 뭐가요?" 브랜은 뭔가 사연을 간직한듯한 우수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냥... 모든것이요..." 평소의 단순하고 약간은 어벙한, 명랑한 브랜의 표정이 아니었기에 나는 점점 황당해지는 기분이었다. '얘가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싶어졌나...?' 하지만 브랜은 노래가 끝날때 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스탭만 밟다가 끝나자 나를 인도하여 바깥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듯한 시종이 브랜에게 국왕이 찾는다고 하면서 그를 데려갔다. 덕분에 오늘 따라 분위기가 묘한 브랜에게 대화다운 대화를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헤어지게되어 황당한 기분을 주체못해 멍하니 서 있는데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왔는지 아빠가 툭 치면서 하는 말... "슬슬 시작해야지?" "아... 그렇군요."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브랜의 일을 다시한번 머리속에서 지워버리고는 목표물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방금 무도회장에 달린 수많은 테라스 중 한 곳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가는 목표물을 포착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도 목표물은 혼자였던 것이다. "기회 포착!!" "기회 포착!!" 나는 벽쪽으로 붙어서 애쉬가 빠져나간 테라스쪽으로 조심스레 움직여 가다가 국왕과 함께 서 있는 브랜과 눈이 마주쳤다. 국왕은 내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고 브랜은 그의 옆에서 옆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국왕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살짝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지나가는결에 얼핏 본 것이라서 왠 엄청나게 예쁜 아가씨도 함께 서 있는듯 보였지만, 애쉬 녀석을 빨리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내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어서 그냥 브랜에게만 살짝 웃어주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겨우겨우 애쉬 녀석이 들어갔던 테라스의 유리문에 다다르자 나는 주위를 재빨리 살펴 나를 눈여겨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본 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빠른 동작으로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껌뻑, 껌뻑...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테라스로 나오자 잠시동안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확 몸을 돌려 기척이 느껴지는 어둠속을 노려보자 피식... 하는 뭔가 새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애쉬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공녀께서도... 아, 아니지. 이젠 자작이라 불러 드려야 하는군요. 그래, 자작께서도 무도회가 흥겹지만은 않은가보죠?" '자작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걸 보니 레드포드 자작은 무도회에 흥미가 없으신가보군요?" 이제는 완전히 어둠속에서 몸을 드러낸 애쉬녀석은 나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몸을 살짝 돌려 테라스 난간에 몸을 걸쳤다. "저와는 맞지가 않는군요." 그리고는 밤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다무는 애쉬 녀석때문에 나도 뭐라고 말을 걸지 못해 머뭇머뭇 거리기만 하자 테라스 안은 조용해졌고, 무도회장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왁작지껄한 소리만이 작게 들려올 뿐이었다. '우쒸... 빨리 물어봐야 하는데... 뭐라고 물어보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아니면 아빠가 가르쳐준 수를 써봐? 하지만 여기서는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나는 속으로 우왕좌왕 하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까..." 그러자 애쉬가 고개를 돌려 아까의 그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저 눈빛은...' 하지만 지금은 그런거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아까 만나뵌 당신 어머니 말예요, 무척 아름다우시더군요." 그러자 애쉬 녀석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찌보면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무척 아름다운 분이시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태도에 더더욱 기분이 나빠지는걸 느꼈다. '우쒸... 내가 궁금하지만 않았으면, 네 녀석한테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지는 않았을거다 임마!!'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외동아들인가요? 딴 형제나 자매는 없어요?" 다시 고개를 돌리는 애쉬 녀석... "자작께서는 저한테 관심이 많으신가보군요?" '으윽... 저 비꼬는 말투...' 생각같아서는 파이어볼 수십발을 먹이고 싶었지만, 나는 억지로 참고 예의 그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다면, 말해주지 않으실 건가요?" 그는 정말 어리둥절한 묘한 미소로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뭐, 비밀도 아니니 말씀 드리죠." '선심 쓰는 거냐?' "제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아이를 잘 가질수 없는 타입이라고 하더군요. 저를 가지게 되신것이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할 정도 였으니까요. 덕분에 다른 형제는 없습니다. 이제 궁금증이 풀리셨는지요?" 녀석의 마지막에 놀리는 듯한 말투에 평소같으면 발끈하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저 녀석은 그녀가 자기를 낳았다고 알고 있네? 10살때 입양되었던 양자라고 하지 않았었어? 그럼 저 녀석은 자신이 양자라는걸 모른다는 건가?' 녀석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은... 아빠가 가르쳐준 수를 써야겠군. 그래야 확실할 것 같아.' 라고 내가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히고 애쉬 녀석을 향해 고개를 들려는 찰나, 내 뒤에 있던 테라스 문이 스르르 열리는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고 있나요, 두분?" 돌아보니 브랜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브랜? 아까 폐하와 같이 있지 않았어요?" "하하하, 살짝 빠져나왔죠. 왜요? 내가 들으면 안될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던 참이었어요?" '그럴려고 했지...' 하지만 나 대신 애쉬가 말했다. "그런거 없어."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왜 가만 있는거지? 아까 내가 브랜의 춤 신청을 거절할 때는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는것 같더만...' 평소 같으면 진작에 나에게 따져들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하긴, 오늘 브랜이나 저 녀석이나 평소같지 않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게 내가 어리둥절해서 머리속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마 그 일도 저녀석들의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기냥 흐지부지 된 것 같았다. '뭐, 나한테 따지고 들지 않으면 내가 좋은거지.' 라고 속 편히 생각하며 브랜을 향해 생긋 웃고 있는데 애쉬가 테라스 난간에서 몸을 떼더니 다시 무도회장으로 가려는지 무도회장으로 통하는 유리문의 문고리에 손을 대는것이 아닌가? '엣? 야, 너 가면 안돼는데...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았단 말야!!' 브랜도 의아했는지 애쉬에게 물었다. "어디 가? 나 때문에 가려는 거야?" 그러자 문고리에 손을 댄 채 고개만 돌린 애쉬 녀석이 무뚝뚝한 어조로 내뱉았다. "배고파서, 뭐 좀 먹으려고." 그리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다시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황당한 눈으로 그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브랜이 미안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미안해요, 아린. 나 때문에 저 녀석이 가버린 것 같군요." "그게 왜 브랜 때문이에요? 레드포드 자작이 배가 고팠나보죠." "그래도..." "참, 그건 그렇고 브랜... 아까 제대로 사과도 못했네요." 그러자 브랜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 뭘요?" '엣? 잊고 있는거야? 그럼 괜히 말했네...' "아까 첫 댄스 신청 거절한 거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때 꽤 당황하는 것 같던데... 아빠랑 첫 댄스를 추겠다고 미리 약속을 했었거든요. 화 나지 않았어요?" 괜히 입을 열어 다시 기분나쁜 일을 생각나게 한건 아닌지 조심스러워 미안한 표정으로 물어보는데 브랜이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딴 남자도 아니었고, 아린의 아버지였잖아요. 그 분 말고는 제가 첫 타자였으니 그걸로 용서해줄 게요." "고마워요, 브랜. 아까 춤 출때 표정이 별로 안 좋아보여서 많이 섭섭해 하는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에? 내가 그랬나요?" 브랜이 장난스레 놀란 표정을 짓자 나도 그에 맞추어 생긋 웃어줬다. "그럼요. 평소 브랜의 표정이 아니라서 내가 얼마나 미안해 했는지 알기나 해요?" "후후후.... 그럼 자주 그런 표정을 지어야겠네요. 아린이 나에게 많이 미안해 하게." "에게? 잘못한게 없으면 미안해 할 것도 없죠 뭐. 그나저나 레드포즈 자작이 의외네요. 내가 브랜의 댄스 신청을 거절하는 걸로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넘어가네요? 의외야..." 그러자 갑자기 브랜이 약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에? 브랜? 왜 그래요?" 의아해져서 그를 마주보자 그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아린은 애쉬에게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봐요?" "엥? 역시... 라뇨?" 브랜은 다시 밝게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살짝 눈을 찡끗해 보였다. "뭘 그래요? 나도 눈치 챘다구요. 여행할 때도 아린은 애쉬에게 계속 신경쓰고 있었잖아요. 둘이서 투닥투닥 할때 부터 알아봤다구요." "브랜, 브랜... 신경 쓴게 아니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거라구요. 그 자식... 아, 자작에게 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거 몰라요? 그런데 뭘 알아봤다는 거예요?" 그러나 브랜은 그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싱긋 웃어보이더니 몸을 돌려 테라스의 난간을 두 손으로 집으면서 나에게 등을 보였다. "에이... 그런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요? 어쨌든 이젠 난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잘 해봐요. 지금까지야 나도 있는데 애쉬만 보니까 약간 심술을 부린 거지만... 역시 나보다야 애쉬가 훨씬 아린과 잘 어울리니까..."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거야?' "브랜? 도데체 그게 무슨...?" 하지만 내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브랜이 놀란 탄성을 외쳤다. "어? 애쉬가 저기 있네? 뭘 먹으로 간다고 하더니만, 왜 정원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 브랜의 말에 얼른 난간쪽으로 다가와서 밖을 내다보니 역시 애쉬 녀석으로 보이는 빨강 머리가 정원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엣? 저 녀석.. 왜 저기루 가는 거야? 그럼 내가 찾기 힘들어 지잖아...' 낭패와 당황으로 어찌해야 할지 열심히 생각하는데 브랜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게 눈에 들어왔다. '얜 또 왜 이래?' "브랜?"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려 테라스 문쪽으로 다가갔다. "아아, 이제 슬슬 가봐야 겠네요. 얘기 도중 잠깐 빠져나온 거였거든요. 더 늦으면 아바마마께서 또 시종들을 불러 찾으실테니 어서 돌아가야 겠어요." 그러더니 다 안다는 듯한 - 뭘 안다는 거야? -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린은 어쩔래요?" "전 여기 좀 더 있다가 나갈래요." 브랜이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나중에 봐요." "브랜도요." 브랜이 문을 열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자 나는 드래스 자락을 잘 치켜올린 다음 높은 구두를 벗고 난간위로 올라가 정원쪽으로 뛰어 내렸다. "젠장... 왜 정원으로 간 거야?"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나는 애쉬 녀석이 사라진 정원 그늘속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양 손에 각각 구두 한짝씩을 들고 치렁치렁대는 드레스자락까지 부여잡고 치켜 올린채 정원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뛰어가는 내 모습은 아마도 무지 무지 웃겼을 것이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얼마 뛰어가지 않아 저 멀리 애쉬 녀석의 빨강 머리가 작게 보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다다다.. 나는 녀석의 바로 뒤까지 달려가서 그를 불렀다. "이봐요, 레드포드 자작!!" 남이 볼까봐 두려워 작게 불렀는데, 녀석은 아마도 내가 뛰어올 때 부터 누가 온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진작에 걸음을 멈추고 있었고 부르자마자 돌아보았다. "호오... 저 때문에 그리 급하게 뛰어오신 겁니까?" 정원 사이사이를 간간히 비춰주는 희미한 등불에 내 모습이 보인 것인지 애쉬 녀석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띈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나는 차마 그의 미소를 마주 바라볼 수가 없어서 손에 들려있던 구두를 땅에 내려놓아 신으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인가요?" '나에게는 무지무지 급한 일이지.' 하지만 그에게 대답하는대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의 팔을 거의 반 강제적으로 끌고 정원에 난 길을 벗어나 사람이 지나더라도 우리가 들킬수 없는 관목들 속으로 들어갔다. "...플레이저 자작?" 당황한 녀석의 목소리를 무시해버리고 나는 적당한 공터를 찾아서 녀석을 커다란 나무둥치에 가져다 밀어붙여버렸다. "자작? 이 무슨...?" 어리둥절함과 황당함, 혼란스러움으로 범벅이 된 녀석의 얼굴은 가관이었지만 그걸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나는 두 눈에 힘을 주며 애쉬 녀석을 노려보았다. "당신!!" 어리둥절하며 날 바라보는 애쉬 녀석의 눈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서서히 내 눈에서 마나를 뿜어내었다. 아빠가 가르쳐준 비법, 일명 '순간 포착 필살 최면술!!' 상대를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한 상황으로 밀어넣어 정신이 흩트러진 사이를 포착하여 눈을 마주보고 마나를 보내어 정신을 제압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애쉬 녀석의 파란 눈이 점점 흐려졌다. '오케이. 그 동안 연습한 대로 되는군!!' 이게 바로 아빠가 말했던, '말하게 하는 방법' 이었다. 하긴 확실히 거짓말도 안 하고 아는대로 술술 불게하는 덴 이것만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애쉬 녀석의 눈이 완전하게 흐려지자 나는 조용히 말을 건네었다. "너, 네가 아는대로 다 불어, 알았지?" 그러자 애쉬 녀석의 고개가 천천히 위 아래로 끄덕여진다. "좋아. 그럼 실험적으로 너 몇살이지?" "21..." "맞군. 그럼 너 평소 나를 어떻게 생각 했지?" 녀석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웃긴... 여자..." 이마에서 갑자기 힘줄이 뽀록 하고 솟았다. '이 녀석을 이거 끝나고 한번 메다 꽂을까?' 라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녀석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여자... 귀족 답지 않은 이상한 여자... 그리고.... 보고 싶은 여자..." 나는 녀석의 마지막 말에 경악해버렸다. "엑? 너, 너... 혹시... 나 한테 반했냐?" 그러나 녀석은 멍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험, 험... 이게 아니지... 좋아, 그렇다면... 네 친 부모는 누구냐?" 녀석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레드포드 공작 부부..." "뭐? 넌 입양된 것이 아니었나? 널 누가 낳았지?" "레드포드 공작 부인..." '뭐야, 이거... 아, 이 녀석은 자기가 입양된 걸 몰랐지? 좋아, 그렇다면...' "넌 10살 때 어디에서 살았지?" "남서쪽의... 레드포드 영지..." "그럼 9살 때는?" "... 9살 때...?" 녀석의 흐릿한 눈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녀석이 격렬하게 몸을 떨며 고통을 호소했다. "커억!!" 머리가 아픈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심하게 흔드는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났다. "야, 너 왜 그래?" 녀석을 부여잡고 흔들며 물어보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몸을 떨며 신음을 내 뱉을 뿐이었다. "크윽... 우욱..." "야, 됐어, 됐어. 생각하지 마!!" 그제야 녀석의 떨림은 멈추었지만 한차례 진통의 휴우증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숨을 헐떡 거렸다. "헉, 헉, 헉..." 멍하니 촛점 잡히지 않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그러는 모습이 꽤나 공포스러웠다. "에구... 안돼겠다." 나는 왕성에 있을 아빠쪽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아빠~!! 아~부지이이~~!!] 그러자 잠시 후에 머릿속으로 아빠의 음성이 들렸다. [왜? 뭐가 잘 안돼?] [웅, 아빠 지금 바빠요? 나 있는 데로 와주면 안될까?] [내가 가야할 정도야? 알았어, 금방 갈께.] 나는 아빠의 대답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아직도 거친 호흡을 하고 있는 애쉬를 땅에 앉아 등을 나무둥치에 기대게 했다. 그러고 있자니 내 옆에서 하얀 빛이 잠깐 번쩍하는가 싶더니 한 손에 붉은 술이 담긴 술잔을 든 아빠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그러더니 애쉬 녀석을 보셨는지 다시 물으셨다. "내가 가르쳐준 필살 기수를 써먹은 거냐?" "예, 그런데 이 녀석이 이상해요." "왜?" "이 녀석은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모르더라구요. 그냥 레드포드 공작 부부가 자신의 친 부모인줄 알고 있는거예요. 그래서 10살때 입양됬다고 하니까 9살 이전에는 친 부모랑 살고 있었을것 같아서 9살때 어디 살았냐구 물으니까 갑자기 발작 같은걸 하잖아요."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아빠는 날카로운 눈으로 애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애쉬는 아까의 그 고통으로도 최면술이 깨지 않아 여전히 그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린아 다시 한번 물어봐라. 어떻게 된 건지 내가 한번 보마." 아빠의 말에 나는 다시 애쉬에게 물었다. "야, 너 9살때 어디 살았어?" "나, 나는... 허억!!" 애쉬 녀석은 다시 고통이 엄습했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나도 당황해서 아빠를 쳐다보니까 아빠는 너무나 냉철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애쉬의 몸부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와... 아빠한테 저런 면이 있을줄이야... 역시 아무리 괴상하다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었어.'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너무나 차가워보이는 날카롭고 냉정한 모습에 나는 나도모르게 작게 몸서리를 치고 있을 무렵 아빠의 입이 열렸다. "됐다. 그만 멈추게 해라." 나는 즉각 애쉬에게 말했다. "야, 됐으니까 생각하지 마!!" 그러자 애쉬 녀석의 몸부림이 멈춰졌지만, 아까보다 더욱 더 거친 호흡과 함께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고 축 늘어져 버렸다. '에궁... 저 모습을 보니 왠지 미안해 지네... 흥, 네가 그 동안 나에게 잘못한걸 탓해라.' 아빠는 축 늘어진 애쉬 녀석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아빠의 손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아빠는 한동안 계속 그 상태로 묵묵히 있더니 조금 후에 손을 떼고 몸을 폈다. "역시..." 뭔가 알아낸 듯한 얼굴과 행동이었다. "뭔데요? 알아 냈어요?" "아아... 이 녀석 기억을 봉인 당했어." "얼라리? 그러니까 자신이 입양했다는 사실을 모르게 기억이 봉인된 거예요?" "그래, 그런데 문제는 그 기억을 봉인한게 용언 마법이라는 거야." "아....!!" 너무 놀라운 사실에 당혹성이 담긴 감탄사를 멍하니 흘리는데 아빠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아마도... 그 용언을 가르친 드래곤이 한거겠지. 그런데... 레드 일족인거 같군." 드래곤은 드래곤의 종족별로 마나의 기운이 조금씩 다르다. 그렇기에 그들이 큰 마법을 일으킨다면 - 작은 마법은 인간이나 엘프도 할 수 있으니까...- 마법에 남아있는 마나의 흔적 가지고 어떤 종족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나 같은 어린 드래곤은 그런 걸 모르고 한 3, 4천살 정도 된 드래곤이라면 본능과 경험상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엄마... 일까요?" 조심스레 입을 열자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애쉬 녀석의 머리만 바라보고 있던 아빠가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글쎄... 모르지. 어쨌든 이 녀석에게는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겠구나." "봉인을 풀면 안될까요?" "그건 나중에 정 알아내지 못했을때 하자꾸나. 무슨 이유가 있어서 기억을 봉인했을텐데, 함부로 풀 수는 없는일 아니겠니? 우선은 내가 레드포드 공작에게 알아보마. 그 때까지 기다리거라." "그러죠." 아빠는 그 자리에서 다시 하얀 빛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건, 여전히 멍한 얼굴의 애쉬 녀석과 나... 이제 녀석의 최면술을 풀고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게 뒷처리를 잘 해야했다. 나는 녀석의 호흡이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것을 알고 회복 마법을 걸어줬다. "리커버리!!" 그리고 녀석을 일으켜 세운다음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단단히 다짐시켰다. "너, 내가 최면 건건 모르는 거다. 알았지?" 녀석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자 나는 다시 녀석의 양 팔을 부여잡고 말했다. "그럼 셋 세면 깨어나도록 해. 하나, 둘, 셋!!" 녀석의 멍한 눈에 차츰 차츰 생기가 돌더니 다시 촛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을 노치지 않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자작? 내 질문이 그렇게 우스운가요? 왜 대답을 안 하죠?" 그러자 애쉬 녀석이 멍청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플레이저... 자작?" 나는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요?" 녀석은 무지 당황했다. "아, 저... 미안합니다.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했나보군요. 죄송하지만 뭐라고 하셨죠?" 나는 그 녀석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차가운 어조로 대답해줬다. "제 질문이 그렇게 우스운건지 물었습니다." 녀석의 눈이 커지더니 껌뻑껌뻑 댔다. 내 질문이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하긴, 그게 당연한거다. 난 질문을 말해준 적이 없으니까. 녀석은 미안한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미안합니다, 자작. 뭘 물어보셨죠?" 나는 화가 난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힐끔 째려보고는 (물론 연기로...) 어쩔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이 다음에 그 마녀를 쫓아갈 때 또 당신과 브랜과 같은 팀을 이루어야 하냐고 물었어요." 오옷... 이 것이야 말로 내가 애쉬 녀석에게 접근하여 물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질문이었다. 아, 이거 생각해 내느라 내가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던가... 내가 속으로 북을 치던 장구를 치던 애쉬 녀석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계속 그렇게 될 겁니다. 폐하께서 그 마녀를 막는 팀이라고 인식하고 계시니까요. 뭐, 인원이 빠지거나 보충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럼, 브랜도 계속 같은 팀에 있게 되나요?" "브랜, 왕자님은... 아마도 다음 번에는 동행하지 않으시도록 할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내가 약간은 차가운 어조를 유지하자 애쉬 녀석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 거렸다. "말씀이 좀 거슬리는군요."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말씀이 좀 거슬리는군요."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이제는 차가운 눈길로 나를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파란 눈동자에 담겨있는 감정은 완연한 분노였다. "제 말이 어쨌길래 당신에게 거슬렸나요?" 애쉬 녀석은 한참이나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슬슬 지루해져서 그냥 갈까... 생각하고 있을때 쯔음 입을 열었다. "자작의 말투는... 꼭... 그러니까... 브랜이 귀찮은 존재라는 것 처럼 들리는 군요." 녀석은 브랜을 나쁘게 말하는게 무지 어려웠는지 평소 녀석답지 않게 힘겨울 정도로 띄엄 띄엄 말을 내뱉았다. "임무에 도움이 안 돼는건 사실이잖습니까? 오히려 신경쓰이게 만들 뿐이지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어 약간은 그 말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데 애쉬 녀석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녀석 무지무지 분노했는지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두 눈은 불꽃을 뿜어낼 것만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쬐께 미안했지만, 애쉬 녀석에게는 사과하고 싶지 않아 나는 더욱 더 냉정하게 말을 내뱉았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고 분노를 할 것 같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브랜을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옳은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브랜이 이런 말은 듣지도 않았을테지요." 녀석의 몸이 잠시 움찔 했지만, 그래도 그의 분노의 불길은 누그러지지 않고 나를 너무나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신은... 당신에게는 브랜이, 아니 왕자님이 귀찮은 존재로만 보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너무 심하게 말을 한 것 같아 양심이 콕콕 찔리고 있는데 녀석이 자꾸 그걸 가지고 늘어지자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럴 맘은 없었는데 일부러 녀석을 비웃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말하면요? 왕족 모독죄로 칼이라도 빼어드시겠습니까?" 애쉬 녀석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더니 갑자기 한숨을 푹 쉬며 어깨의 힘을 뺐다. 그리고는 약간은 힘 빠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과 싸울 맘은 없습니다. 하지만, 브랜이 당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너무 놀라 눈이 뚱그래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한번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후우... 역시 모르고 있었군요."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자작. 당신은 정말로 브랜을 귀찮은 존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건, 단지 친구의 입장으로써 물어보는 거니 부디 사실대로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의 애원조에 가까운 말에 나는 아까 비웃은 것까지 맘에 걸려 괜히 미안해져서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슬며시 고개를 돌려 딴 곳을 쳐다보며 귀에 걸린 귀걸이만 괜히 만지작댔다. "에... 흠, 흠, 그러니까... 뭐... 이번 임무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만 빼면... 별다른 감정은 없어요. 그냥... 괜찮은 친구...랄까?" 라고 말하면서 슬며시 녀석을 보자 녀석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함께 서글픈 표정까지 함께 떠올라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잘 되었군요. 별로 안 좋은 감정만 있는게 아니라서..." '그러면서 왜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은거야?'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분위기가 '묻지 마!!' 분위기어서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아, 그럼 난... 용건은 끝났으니까 이만 돌아가 볼께요. 당신은요?" "전... 좀 더 산책을 한 뒤에 들어가도록 하죠." "그러세요. 그럼 나중에 뵙길..." 나는 고개만 살짝 까딱하고는 몸을 완전히 돌려 왕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다가 살짝 멈칫했다. '웅... 왠지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뭐, 여긴 사람들이 아예 없는 곳이 아니니까.' 그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이거..." 애쉬가 멍하니 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애쉬가 서 있는 곳 보다 조금 더 깊숙한 정원의 그늘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러자 애쉬는 반사적으로 허리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외쳤다. "누구냐?" 하지만 그의 허리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아 - 무도회때 검을 안 가져 왔다. - 다시금 손을 내릴수 밖에 없었지만, 긴장된 눈으로 상대편을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런, 섭섭한걸... 아무리 오랜만에 만난 거라고는 하지만, 벌써 내 목소리를 잊어버린 건가?" 약간은 친근한 척 하는 어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달빛을 받아 황금처럼 찬란한 빛을 발하는 금발과 함께 뛰어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자카르..." 애쉬는 몸의 긴장을 풀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긴장을 유지한 채로 나타난 금발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애쉬... 이런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건 말야. 공식적인 자리에서라면, 아까도 만났었으니까." "여긴 왠 일이지?" 왠지 말하는 투를 보면 잘 아는 사람들인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 그러나 자카르는 그런 일에는 익숙한 듯 싱긋 웃으며 그냥 넘길 뿐이었다. "아아,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자네 목소리가 들려와서 말야. 그래서 오랜만에 동창에게 인사나 할까 하고 왔었지." 애쉬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운 빛을 바라며 자카르를 해부할 것 처럼 노려보았다. "들었나?" 하지만 그런 매서운 눈길에서도 자카르는 태연하게 싱글싱글 거릴 뿐이었다. 그런거 보면 역시 이 녀석도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뭘 말인가?" "모르는 척 하지 마시지. 나와 플레이저 자작이 하는 대화를 들었냐는 말일세." "아아, 그거 말인가? 솔직히 말한다면 다 듣지는 못했네... 단지 자네가 왕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대목에서부터 밖에 못 들었으니... 음, 끝에만 약간 들은 것 뿐이군." 애쉬는 자카르를 매섭게 노려봐주더니 옆에 있던 애꿏은 관목을 한대 후려갈겼다. "젠장..." 그 모습을 침착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자카르는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우습군." 애쉬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자카르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자네가 우습단 말일세." "........" 아무런 말은 없었지만, 몸을 똑바로 하고 자카르를 바라보는 모습이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자카르는 친절히 그의 암묵적인 요청에 대응해 주었다. "자네, 자작에게 마음이 있지?" 애쉬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 거렸고, 자카르의 날카로운 눈길은 그걸 노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자 전하께서 자작에게 마음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얌전히 양보하시겠다는거 아닌가? 참으로 대단한 충정일세... 왕자 전하께옵서는 자네 같은 충신을 데리고 있다니, 인복도 많으시지..." 말은 애쉬에 대한 칭찬이었지만 어조는 완전히 비꼬는 투였다. 그 말에 애쉬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관하지 마라." 그리고 그의 어조도 무척이나 굳어 있었다. "아아, 자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도 상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네... 하지만, 약간은 김 새는군... 처음으로 자네가 여자에게 콩닥콩닥 대는 모습을 보는가 했더니만, 대쉬도 안 해보고 포기해 버리다니 말일세. 뭐, 나야 경쟁자가 자네가 아니라 브랜 왕자 전하라면 더 수월하지만..." 그러자 애쉬의 얼굴이 처음으로 풀리며 그의 입술이 슬며시 곡선을 그렸다. "흥, 네 경쟁자는 딴 남자가 아니라 바로 자작일 것이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도록. 자작이 다른 멍청한 여자들 처럼 너의 손짓 하나에 넘어오리라 생각한다면 넌 평생을 가도 그녀의 마음을 가질 수 없을테니까." "쿡..." 애쉬의 비웃는 어조에 섞인 명쾌함을 읽은 자카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처음보는군. 자네가 하찮게 보는 여자를 그렇게 두둔하다니 말이야. 이거 이거 어쩌면..." 그러자 얼굴이 약간 붉어진 애쉬가 그의 말을 무뚝뚝하게 잘랐다. "쓸데 없는 소리하지 마라.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뜨끔했음을 자카르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오늘은 그냥 나도 자작을 노리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것 만으로도 유쾌한 경험을 했기에 자카르는 딴 여자들이 봤으면 황홀해서 넘어갔을 기분 좋은 멋진 미소를 그리며 순순히 애쉬에게 인사를 하고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럼..." "젠장..." 다시 한번 애쉬가 죄 없는 관목을 주먹으로 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자카르가 좀 멀리 갔을때 까지 기다렸다가 터트린 감정이었지만, 안타깝께도 자카르는 몇발자국 가다가 멈춰서 있었던 바람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카르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이 이상 그를 자극 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숨을 죽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쿡쿡쿡쿡..." "이봐, 싱키쑤우..." 자카르가 혼자 킬킬 거리며 정원으로 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그를 불렀다. 그런데 싱키쑤우...? 자카르는 얼른 웃음을 그치고 자신의 어깨를 친 그를 슬쩍 노려보며 말했다. "신.기.수!!" "그래, 그래... 싱키쑤우... 발음이 어려운 말을 자넨 잘도 하는구만?" "그거야 다 탁월한 내 능력이지." 자카르가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그의 어깨를 친근하게 친 남자도 자카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괴상한 취미야. 자네나 자네 아버지나 말일세... 어떻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나라에 관심이 있어서 자네의 이름까지 그 나라를 따라 지었단 말인가? 그런데 그 이름을 맘에 들어하는 자네도 이해할 수가 없구만..." "가이, 그 말 한번만 더 하면 아마 천번일거다. 넌 어째 오랜만에 만났다 하면 그 말을 하냐?" "너무나 독특한 이름이라서 매번 부를때 마다 신기한 느낌이 들어서 그래." "그리고 하는 변명도 매번 똑같고.... 레퍼토리를 좀 바꿔보지 그래?" 그러자 남자다운 매력을 발하는 시원시원하게 생긴 그 남자는 생김새 그 대로 시원한 웃음을 베어물었다. "이봐, 이봐, 싱키쑤우...나한테 너무 많은걸 바라지 말라구." 두 남자가 사이좋게 왕성으로 돌아오고 있을 무렵 나는 무도회장에 도착하여 아빠가 레드포드 공작 에게서 정보를 다 알아낼 때까지 기다리면서 뭔가를 좀 먹으려고 무도회장 한켠에 마련된 커다란 부폐식 식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대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란 아빠와 브랜, 애쉬 밖에 없는데다 아빠는 레드포드 공작에게 가 있었고 애쉬 녀석은 정원에, 그리고 브랜은 콧배기도 안 보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을 먹어주는 것 밖에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잘 갈무리한 채로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데 내 또래들로 보이는 아가씨들 몇몇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둥그렇게 서서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까르르 웃어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뚫고 가기는 뭐했으므로 그들을 돌아서서 가려는데 그 중 내가 못 본 사이 뒤로 살짝 물러난 어떤 아가씨와 어깨가 부딧혀 버렸다. 툭~!! 그리고 그 바람에 그녀가 들고 있던 부채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그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아가씨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집중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라 나는 예의상 - 내 잘못도 있었으니까... -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를 하고는 지나쳐 가려는데 부채를 떨어뜨린 여자가 나를 붙잡았다. "당신 때문에 부채를 떨어뜨렸는데 이 정도는 주워주시고 가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자작님?" 다분히 악감정이 섞인 목소리에 몸을 돌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니 그녀가 악의가 담긴 눈으로 생긋 웃고 있었다. 마치 적당한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그녀의 모습과 그녀 주위에 있던 여자들은 마치 개구쟁이들이 흥미로운 장난감을 보는 듯한 짓궃은 눈길을 바라보고 있자 며칠 전 들었던 예절 교육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귀족들은 자존심이 대단하죵~. 그래서 흠이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얌전히 보고만 있지 않습니당~. 공녀님도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몇번 겪으실 거예용. 남자들 사이에서야 실력을 내리깎는다지만, 여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주는 수법을 많이 사용하죵~, 보통 그럴 때 많이 사용하는 수법중에 하나가 일부러 부딧혀서는 뭔가를 떨어뜨리는 거죵~. 그러면 상대에게 주워달라고 요구 할 수 있으니까용~. 그리고는 상대가 자신에게 무릎과 허리를 굽.히.는 걸 즐기는 거예용~. 귀족들 사이에서는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허리와 무릎을 굽히는 것이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거든용~. 이럴때는 절대로 무릎을 굽히셔서는 안되용~. 아시겠죠, 공녀님~? 절.대.로 무릎을 굽히셔서는 안됩니당~. 그냥 지나가는 시종을 불러 줍게 하세용~.] 그러나 주위에는 시종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모두들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나에게 한마디씩 해댔다. "어머나,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자작님?" "설마 예의를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호호호, 얘는... 설마... 아무리 모친의 신분이 불.분.명 하다지만 그런 기초적인 예의도 모르실까?" 개개인의 인간은 나약하더라도 군중은 강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것두 상대를 가려가면서 해야지. 너그들은 주~거~써..' 나는 맨 앞에서 부채를 떨어뜨리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여자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시선을 떨기지 않은 채 똑바로 서서는 마음속으로 실프를 불러내어 바람을 일으켜 허공으로 떠오르게 한 부채를 가볍게 낚아채어 그녀에게 건내주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녀들은 설마 내가 마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는지 무지 아깝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다시 생긋 웃어보이며 몸을 돌리면서도 그녀들에게 선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SLIPPING(미끄러져라)!!' 내가 몇 발자국을 걸어가지 않아 내 뒤에서는 곧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우당탕 쿵탕 주르르륵 "꺄아아악~~" "엄마~~!!" "어떻게 해~~!!" 슬쩍 뒤를 돌아다보니 그 네 다섯명의 아가씨들이 주위 사람들과 뒤엉켜 누워있었는데 치렁치렁한 치마자락까지 뒤엉켜 있어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발버둥만 치다가 치마자락이 말려올라가 늘씬한 다리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허겁지겁 달려온 시종들과 몇몇 귀족들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들이 그들을 재빨리 일으켜서 사건은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그녀들은 모조리 울음을 터트리는 채로 휴계실로 이송(?)되어 버렸다. '아마 두고두고 오늘 파티를 잊지 못할테지...케케케' 그리고는 천천히 우아하게 걸어서 부페 식탁에 도착하여 막 빈 접시를 집어들려는 찰나,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아린아.] '에구구... 타이밍이 죽이는구만...' 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이 열심히 나에게 유혹의 손길을 보내왔지만,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곳에서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어디예요?] ================================================================= 오늘은 매우 짧습니다. ^^;; ----------------------------------------------------- 저한테 만화책보다가 10시 30분되서.. 그제서야 썼다고 고백을 하신..;; 헐헐.. 제 15화 나오느니 한숨이요, 쌓이나니 고민이라. "가자!!" 아빠의 음성을 듣고 아빠가 있다는 휴게실을 찾아간 나를 보자마자 아빠가 한 말이었다. 그 말에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일이 다 끝났다는 아빠의 태도에 아무말 하지 않고 졸졸 쫓아서 왕성을 나왔다. "아빠?" 왕성을 나와 마차에 탈 때까지 아빠는 약간 굳은 얼굴로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갈 뿐 아무런 말이 없자 다급해진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응?" 그러나 내 앞에 앉은 아빠는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지 날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내 물음에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아빠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데다가 대답해주는 걸 보니 내가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아 나는 한숨만 푹 쉬고 뭘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빨리빨리 결론을 내고 알아낸 걸 말해주길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다각, 다각, 다각... 일정하게 들리는 말 발굽 소리... 왕성에서 나오는 마차는 아빠와 내가 탄 마차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아직까지 왕성에 남아 무도회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우리가 왕성을 나오자 밖에 마차를 관리하고 있던 시종들이나 우리 가문의 기사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걸 보니 이렇게 일찍 나오는 건 전례 없었던 일인 듯 했다. 하지만 뭐, 아빠가 무겁게 굳은 얼굴이니 모두들 암 말 못하고 쫄아서는 빨리빨리 마차문을 열어 우리를 태우고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니 왕성 앞에서 마차가 밀릴 일은 없어서 마차는 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덕분에 왕성으로 들어갈 때는 몇시간이나 걸렸지만 갈때는 한시간이 좀 넘자마자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아빠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 아빠가 현실 세계로 돌아오길 기다린 나는 그 한시간이 마치 하루처럼 무지무지 길게 느껴졌었다. "주인님? 이렇게 빨리 오시다니..." 예상치도 못한 시각에 우리가 들이닥치자 티모시 (오랜만에 등장한 플레이저 공작가의 집사)가 허둥지둥 하면서 우리를 맞았다. "아아..." 아빠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는데 나는 아빠를 따라가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 방으로 올라가 옷을 벗어도 되는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러자 아빠가 몇 걸음 걷다 말고 휙 돌아서서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거기 서 있어? 따라와." "나 아빠 따라가야 하는 거였어요?"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아빠도 내 생각과 동감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연한걸 뭘 물어? 나한테 듣구 싶은 말이 있잖아?" '씨이...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아빠가 그 동안 딴 세상에서 헤메고 있었으니까 그런거지.' 나는 속으로 꽁알꽁알 대면서 아빠의 뒤를 따라 척척 걸어갔다. 아빠는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티모시에게 따끈한 차를 부탁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아린아." "왜여?" "네 생각이 맞았다." '역시나...' "그럼 애쉬가 엄마의 자식이란 소리?" 충격이 컸는데 의외로 내 목소리는 침착하게 흘러 나왔다. 마치 아무일 없는 것 처럼 담담하게... "그래. 레드포드 공작이 애쉬를 양자로 들이고 입단속을 한 건 그 녀석의 친 부모인 카페티안 부부가 부탁한 것이라고 하더군. 물론 이건 공작 혼자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럼... 애쉬의 기억을 봉인한 것도?" "그래. 도나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네 엄마가, 그것도 용언으로 한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아빠의 얼굴은 다시 신중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그 모습에 나는 괜히 기분이 묘해져서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엥... 그런데 아빠는 왜 그렇게 굳은 표정이에요? 녀석이 엄마의 자식이든 아니든 아빠와는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데?" 그러자 아빠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냐? 너 그 녀석이 세실의 자식이라면 가만 안 둔다고 흥분해서 방방 뛰었잖아? 하필이면 '인도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시기에..." "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어리둥절하여 아빠를 빤히 바라보자 아빠는 이제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얼굴에 뚜렷이 나타내 보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어떻게 이런 어린애한테 그런 임무를 맡긴 건지...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지만 너무 하는군." "아빠, 혼자서 중얼거리지만 말고 나한테도 설명 해줘요." 아빠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린아, 너 '인도자' 지?" "예." "'인도자'는 '파멸되어 가는 존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존재. 그렇기때문에 본능만이 남아있는 '파멸되어 가는 존재'는 '인도자'의 존재에 민감하다더구나. 아마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본능으로 느끼고 있는 거겠지. 본능이란 죽음에 아주 민감한 것이니까." "그... 래요? 몰랐네..." 당사자인 주제에 처음 듣는 이야기라 나는 약간 머쓱해졌다. 그러자 아빠는 그런 날 한번 빤히 바라보시더니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너 되게 여유 만만이다? 전에는 '그 존재'를 찾지 못해 안달하더니만..." "아하하하... 뭐, 어쩌다보니... 에이, 여유를 갖는게 다 좋은거 아니겠어요?" " 보통 '인도자'는 '파멸되어 가는 존재'를 찾아가서 죽음으로 인도하기 마련이지. 그 싸움이 한번에 끝장이 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수도 있지. 마치 지금의 네 경우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경우에는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 존재' 는 두가지 방식으로 대응을 한다더구나." "와아, 아빠 되게 잘 아시네요? 난 그런거 전혀 몰랐는데?" 또 다시 나오는 아빠의 한숨... "이것아, 딸내미가 '인도자'가 되어 있는데 어느 부모가 가만 있겠냐? 게다가 넌 지금 딴 곳으로 신경이 분산되어 있지 않니? 네 임무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도 모자르는 판에..." "에, 그거야..." 나는 반박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 말을 자르며 입을 여섰다. "물론 내 탓이 아예 없다고도 할수는 없지만서도... 험, 험... 어쨌든, 그래서 내 마틸산에 다녀왔다." "마틸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산 이름이다싶어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아빠가 설명해 주셨다. "너도 가보았을 것 아니냐? 우리 실버 종족의 최고 연장자이신 칸 크제나님께서 그 곳에 살고 계시니까..." "아, 맞다. 그랬었지?" 그제야 생각이 난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시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 "에? 그럼 혹시... 저 때문에 '인도자'와 '파멸되어 가는 존재'에 대해 알아보시러 갔다오신 거예요?" "그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란 말도 있지 않니? 내가 그런데는 전혀 아는것이 없으니까 잠시 그 분을 뵙고 왔다. 원래 로드한테 가려고 했는데, 나보다도 어린 녀석이 뭘 알겠냐? 그렇다고 현 모든 종족의 최 고령자는 네 할아버지고..." "헤헤, 죽을까봐 못 갔군요?" 슬며시 미소가 삐져나오자 아빠가 날 흘겨보았다. "녀석, 말하는 것 하고는... 그게 그렇게 우습냐?" "에이, 그 말이 우스운게 아니라 아빠가 날 생각해줬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웃는거예요." "아빠가 딸 생각하는거야 당연한거 아니냐? 어쨌든, 칸 크제나님이라면 우리 실버 일족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시고 아시는 것도 많으시니까... 역시나 '인도자'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계시더군." "헤헤헤, 그랬군요." "그래, 아..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래, 어쨌든 '인도자'의 존재를 느낀 '파멸되어 가는 존재'는 두가지 유형으로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는 자신보다 '인도자'의 능력이 더 뛰어나면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고 한다더군. 이럴때는 찾아내기가 무척이나 힘들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 두번째 자신보다 '인도자'의 능력이 낮을때는..." "그러니까 저의 경우군요?" "그래, 그런 경우에는 자신이 먼저 찾아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인 '인도자'의 존재를 죽이려 한더다군." "허걱!!" "문제는 '인도자'와 '파멸되어 가는 존재' 사이의 일은 결말이 어떻게 되든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가 없으니 '인도자'가 '파멸되어 가는 존재'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걸 막을 수가 없다는 거지. 뭐, 네 경우야 돌아가신 칸 세실리스님의 힘을 빌릴수가 있으니 한바탕 크게 한다고 해도 걱정할 건 없지만, 문제는 네가 주위의 환경이 안 따라주면 그 힘을 발휘하지 않을 것 아니냐?" "에? 주위 환경이라뇨?" "인석아, 너 만약 '그 존재'가 수도에 나타나서 너에게 덤비기라도 해봐라. 그럼 넌 칸 세실리스님께 받은 힘을 총 동원하겠냐? 그러면 이 수도는 싸그리 몽땅 날아갈 거라는 걸 뻔히 아는데도? 아마 피해만 줄이려구 몸부림치겠지, 안 그래?" "아... 그거야 뭐..." 아빠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의 옆을 꾹꾹 누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 네 성격이야 뻔하지 뭐. 레드 일족이면서두 순해 물러 터진 성격... 나 같으면 이런 인간들 도시 하나나 나라 하나 정도는 날라가도 상관이 없겠지만..." "헤헤헤..." 내가 이런 성격인 것은 예전에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고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냥 웃음으로 때워야지. "어쨌든, 그런 네 성격인데 이번에 그 빨강 머리 녀석때문에 신경이 또 곤두서 있지 않니? 녀석을 죽이고 싶다고 해도 네 성격상 몇날 며칠은 그 일로 끙끙 싸매고 있을거고 내가 나서서 속 시원히 처리해줘 봤자 그 녀석이 죽었다는 이유로 또 자책감에 휩쌓여 꽁해 있을걸?" "자알 아시네요?" "네 성격이야, 뻔해. 에휴... 그래서 너한테 말해줄까 말까 고민한 건데..." 아빠가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난 아빠의 말에 또 한번 정신이 번쩍 났다. "에... 그러니까 내가 그 빨강 머리 녀석때문에 신경 쓰느라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어떻게 될 까봐 걱정하신 거에요?" 아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인데... 이것 때문에 네가 더 신경이 분산되면 어쩌냐?" '오, 이 기쁨이여~~~!!' "역시 아빠 뿐이네요!!"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데다가 입이 저절로 벌어져서 어쩔줄 몰랐다. 이런게 바로 울면서 웃는 건가? "그걸 이제야 알았냐?"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오시더니 날 꼭 안아주셨다. "에구, 예쁜 내 딸내미... 에휴, 네가 '인도자'란 사실을 알고 난 후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넌 모를거다." '당연하지. 전혀 걱정한다는 티도 안 냈잖아? 그러니 나 때문에 마틸산까지 갔다 왔을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아빠는 한참이나 나를 꼭 껴안고 등을 토닥이더니 갑자기 뭔가가 생각 났다는 듯이 나를 자신의 품에서 떨겨놓았다. "아, 그런데 말이지.." "에? 왜요?" "너, 그 녀석 이제 어쩔거냐?" 아빠는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 일에 집착할까봐 걱정된다는 듯이...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 알게 되니까 오히려 아무 느낌 안 드는데요? 저번에는 녀석이 엄마 자식이면 죽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얄미운 녀석이라는 감정 정도?" 아빠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내가 진실만 말하고 있다는 흔적이라도 찾아 냈는지 표정이 급격히 펴지더니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다행이구나. 아무 감정이 없다면야 더 이상 걱정할 건 없겠지." "그런데..." 내 말 한마디에 다시 긴장된 표정을 짓는 아빠에게 미안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신경은 계속 쓰일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녀석은 엄마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잖아요? 뭐, 자식 취급은 안하더라도 엄마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실이니까..." "역시... 그냥 말해주지 말걸 그랬어..." 아빠는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중얼 댔다. "엥... 하지만 아빠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더욱 더 의심이 가서 알아내려고 했을걸요 뭐... 그리고 신경 쓴다고 해도 아주 조금일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에휴, 제발 그러길 빈다. 그래 그래, 어쨌든 알려줄건 다 알려 줬으니 이제 그만 가서 자거라. 오늘 너도 피곤했을텐데..." 나는 기꺼이 아빠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라." =================================================== 저 돌아왔어여 ^^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부터 아빠가 내 방에 들어와서 아침을 같이 먹자고 깨우는 바람에 잠에 반쯤 취한 상태에서 꾸벅꾸벅 졸며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체 먹구 있는데 티모시(아빠네 집 집사)가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가씨..." "음?" 잠을 깨기 위하여 눈을 깜빡깜빡 대며 그를 바라보자 그는 들고 있던 은쟁반을 내밀었다. "아가씨께 전갈이 왔습니다." "나에게?" 전갈을 보낼 정도로 친한 사람이 수도에 없었던 터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은쟁반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 봉투를 들었다. 아빠도 무척이나 의아한 듯 식사를 멈추고 내가 봉투를 뜯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멋드러진 친필로 쓰여진 겉봉에는 '아린에게 루실 언니가...' 라고 쓰여 있었다. "헤에... 루실 언니가 보냈네요." "그게 누구야?" "왕녀 말예요." 아빠의 물음에 별 생각 없이 대답하자마자 아빠의 놀라운 외침이 들려왔다. "왕녀? 너 어느새 왕녀랑 친해졌냐?" "엥? 내가 말 안했었던가요? 왜, 산맥에 가기 전에 집에 잠깐 들렸었잖아요. 그때 산책 갔다가 만났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왕녀라는 걸 몰랐었구나... 나두 그녀가 왕녀라는 건 어제 무도회때 보고 안 거였으니까... 음, 어제 애쉬 녀석에게 신경 쓰느라 만나서 말도 못해봤네." "그래, 그 왕녀도 네가 누군지 몰랐다가 어제 안 건가?" "엥... 그건 아닐걸요? 그때 내가 이름을 말하니까 누군지 단번에 알던데요?" "그런 거야? 그런데 뭐라고 써있어?" "아... 잠깐만요." 나는 서둘러서 봉투를 뜯고 그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음... 점심때쯤에 시간 있으면 저번에 만났던 그 공원으로 오래요. 간단한 피크닉을 즐기자는데요." 그러자 옆에 가만히 서 있던 티모시가 끼어들었다. "흠, 아가씨... 괜찮으시다면 답을 주시지요. 밖에서 편지를 가져온 시종이 답장을 받아 가려고 기다리고 있거든요." 나는 다시 종이를 접어 봉투 안에 집어넣으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나 가도 돼요? 뭐, 할 일도 없는데..." 아빠는 다시 자신의 접시 위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뭐, 그 왕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나는 옆에 서 있는 티모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겠다고 말하세요." "알겠습니다." 티모시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식당 밖으로 나가자 아빠가 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흠, 출근하기 전에 너 외출복을 골라놔야 겠구나. 이제 슬슬 가을로 접어들어서 날씨도 더운데다가 햇볕도 따거울거야." 아침을 먹고 나는 아빠의 지시로 따가운 햇볕을 대비한 미용 맛사지를 한시간이나 받아야 했다. 그리고 나서 옷을 차려입고보니 점심때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서둘러서 알렌과 흄을 데리고 공원으로 가니 그 곳에는 벌써 루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늘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자 일어나 그늘에서 걸어나와 싱긋 웃으며 반기는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서 다짜고짜로 물었다. "언니라고 할까, 왕녀님이라고 할까?" 그러자 그녀가 더욱 더 진한 미소를 띄었다. "사적인 곳에서는 언니, 공적인 곳에선 왕녀님." 그제야 나는 그녀에게 생긋 웃어줬다. "오랜만이야, 언니!!" "어제도 봤잖니? 어제는 왜 그냥 간 거야? 내가 왕녀라는 걸 숨겨서 화나기라도 했어?" "어제? 아... 아니. 딴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그거 끝나자 마지 곧장 집으로 갔어. 난 원체 파티 같은거랑은 적성이 안 맞아서 말이지." 우리가 이렇게 슬슬 대화의 장을 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방해했다. "왕녀님, 좋은 사이를 방해하는것이 심히 안타깝긴 하지만... 태양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시는 것 보다는 이곳 그늘에 앉아서 하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비단결 처럼 부드럽고 기름칠 한 것처럼 매끄러운 말솜씨를 가진 청량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루실을 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루실이 앉아 있던 그들에는 루실 말고도 다른 두 남정내가 일어서 있었다. "어?" 한 사람은 루실의 남편인 대공이었고 한 사람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금발 머리의 미남이었다. 내가 놀란 듯한 탄성을 터트리자 루실이 생긋 웃으며 나를 그늘 속으로 이끌며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응...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저 갈색 머리 남자분은 언니 남편이지?" "그래. 그럼 다른쪽은?" 나는 머리를 갸웃 갸웃 거렸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굴은 어디서 본 듯 한데... 기억이 안 나."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금발 머리의 남자가 약간 휘청 거렸지만 얼른 자세를 바로 잡고 미소를 띄었다. "하긴... 제대로 인사를 하지도 못했죠." '인사... 까지 했었나...?' 역시 류미르가 말 한대로 나는 좀 덜떨어진 드래곤인가보다. 드래곤은 기억력이 무지 좋다는데, 인사까지 한 사람의 이름이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니... '윽... 내가 이렇게 자기비하를 하게 될 줄이야... 이게 다 류미르 녀석 때문이야. 이번 일 끝나면 정말 한번 찾아가서 따끈따끈한 우정을 보여줘야겠어." "자, 그럼 내가 다시 소개를 해주도록 하죠. 아린, 이 쪽은 내 친위대 대장이신 자카르 폰 자벨리안 경이야. 자벨리안 백작님의 자제분이시지." 그제야 나는 내 손을 꼭 쥐던 포동포동한 손과 그 손의 임자인 포근한 인상의 금발머리 중년 부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었던, 얼굴이 가물가물한 남자까지도... "아... 어제 그 콧수염 백작님 자제분?" 금발 머리의 남자가 삐질 웃었다. "이제야 기억 나셨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어제 제가 정신이 좀 없었거든요. 그런데, 언니 친위대 대장이시라고요?" "예. 왕녀님께 개인 친위대가 있는것은 당연한거니까요. 정식으로 말씀 드리면 왕실 근위대 소속, 왕녀님 친위대 대장인 자카르 폰 자벨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왠지 애쉬 녀석이 떠올랐다. "아, 그럼 혹시 레드포드 자작도?" 자카르는 뭘 묻고 싶은지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예. 그도 저와 같은 근위대 소속이며, 왕자님의 친위대 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랬구나..." 그제야 왜 녀석이 브랜을 옆에 달고 다녔는지에 대해 납득이 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 있던 루실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니, 아린? 같은 팀의 동료가 뭔 직책을 맡고 있는지도 몰랐어?" "관심이 없었거든... 단지 왜 브, 아 아니, 왕자님이 자작 옆에 계셨는지 의아했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네. 아, 그런데... 그런 직책을 맞고 있으면 보통 궁에서 얌전히 있어야 하는거 아냐? 왕자님의 친위대 대장이라면서 왜 '그 범인'을 쫓는 팀 같은데 들어온 거지?"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뭐, 왕자의 허락에 자신의 의사만 있으면 충분히 들어갈 수도 있는 거니까.." 그 말을 해주는 루실의 얼굴에는 왠지 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야? 뭔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말해줄 수 없는 뭔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루실과 애쉬 녀석 둘 다를 알고 있는 내가 왠지 둘 사이에 미묘하게 끼인 느낌이 들었다. '웅.... 기분은 썩 좋지 않네...' 나오느니 한숨이요, 쌓이나니 고민이어라 (3) 우리가 그늘 풀밭위에 깔린 두꺼운 천 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루실이 손수 바구니에서 음식들을 꺼내어 펼쳐놓기 시작하며 나를 향해 물었다. "배고파?" "응. 슬슬 고프기 시작 했어." 그러자 루실이 피식 웃으며 예쁘게 장식되어 있는 샌드위치를 하나 건넸다. "많이 먹어, 널 위해서 많이 준비했거든." "고마워." 여러가지 야채와 과일이 달콤하고 시원한 소스와 어울려 입 속에서 아삭아삭 씹혔다. 그리고 간간히 씹히는 육질의 맛이 좋았다. "헤에, 이거 무지 맛있다." "맛있다니 다행이네. 아, 이것도 마시면서 먹어. 우유 좋아해?" 루실이 다시 생긋 웃으며 나무로 된 컵에 우유를 따라서 건네 주었다. "응." 그런데 우유를 마시며 샌드위치를 먹다가 루실을 힐끗 보니 루실은 자신의 샌드위치를 먹는 둥 마는둥 하면서 나만 보고 있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루실이 풋 하고 웃었다. "아니, 너무 잘 먹어서... 신경써서 준비한 보람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야." "그거 욕 아니지?" "아냐, 아냐... 잘 먹는 것도 보기 좋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고나 할까? 보통 나랑 같이 먹는 사람들은 깨작깨작 먹거든... 에릭도 그렇게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고..." 에릭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과일 한조각 먹고 있던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이 뚱그래져 있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입 안에 있던 과일조각을 삼켰다. "험, 싫어하는 건 아니예요." "흐음... 난 남자들은 모두 대식가인 줄 알았는데... 특히나 기사 같이 많이 움직이시는 분들은... 음식을 적게 드시는것 치고는 몸이 상당히 좋으시네요?" 에릭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자 그의 어색함을 무마시키려는 듯 자카르가 끼어들었다. "후후... 뭐, 많이 먹는사람만 꼭 몸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요. 제일 좋은 건 적당히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에... 옳으신 말씀이시네요." "음, 그러고 보니 재상께서는 소식가 아니셨던가?" 루실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자신 없는 투로 물었다. "아빠? 소식가이시기는 하지만 대단히 까다로운 미식가이시기도 하지. 그래서 난 우리집에 있는 요리사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아빠 밑에서 가장 오래 버티고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거든. 아빠의 그 까다로운 입맛을 맞출 수 있다니... 존경이 갈 만 하지." "후후후... 하긴 재상이 좀 날카롭고 약간 까다롭긴 하지." "좀이 아니라 엄청일걸? 아빠가 나에게는 좀 풀어지시기는 하지만 딴 사람에게는 칼이라는 걸 잘 알거든." "호호호, 부인은 못하겠네. 그런데, 아린이 먹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으셔? 솔직히 말하면 보통의 귀족 여성이 먹는 것 치고는 좀..." 루실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는지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아아, 무식하다고?" 내가 그녀의 뒤를 이어 무심하게 내던진 말에 루실이 약간 얼굴을 붉혔다. "에이... 무식까지야." "뭐, 아무 여자나 붙잡고 여행을 몇달동안 해보게 해봐. 안 먹고 배기나 한번 보게." "하긴, 아린은 임무 때문에 집에 머물러 있지 못했지?" "응. 아, 이 훈제 베이컨 샐러드 맛있다." 그러자 루실이 다시 풋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붉은 소스를 발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닭다리를 하나 집어들어 나에게 건넸다. "많이 먹어. 아, 이것도 좀 먹어볼래?" "웅. 고마워." 그 뒤로도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많이 오고갔지만, 극히 일상적인 날씨에 대한 거나, 요즘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는 악세사리가 웃기다는 호박씨와, 좋아하는 디자인 등등의 화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 세력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라 그런지 그런 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자니 주위 공기가 무지 어색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루실이나 나나 드레스나 악세사리등에 하등 관심들이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화제는 곧 떨어질수 밖에 없었다. 결국 참다 못한 나는 입을 열었다. "언니!!" "응?"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 말 해라. 도저히 어색해서 말 못하겠다. 머리 아프게 왜 자꾸 말을 빙빙 돌려?" 그러자 루실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더니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에... 들켰니?" "언니 같으면 사람 앉혀놓고 디자인 이야기를 두시간 이나 하면 지루하지 않겠어? 더구나 눈치를 보아하니 언니도 그런데 별 관심이 없는거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루실은 정색을 하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요즘은 한숨 쉬는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아...'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실이 다시 나를 보면서 생긋 웃었다. "그래 그래, 나 아린에게는 다 털어 놓을래." "그려 그려,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놔봐." 내가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하여 편안한 자세를 잡고 말하자 알렌과 흄은 모든걸 다 포기한 듯한 한숨을 푹 내쉬었고 에릭과 자카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그리고 루실은 그 모습에 또 다시 후후 웃어댔다. 나는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던 것이다. 치마 폭이 넒어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도 충분히 다리를 다 감출 수 있어서 창피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역시, 아린아 난 네가 정말 좋다." "나도 언니가 맘에 들어. 어여 어여 하고 싶은 말 해봐." "그래, 솔직히 말하면... 너 재상이 정치적으로 어느 파에 있는 지 알고 있지? 그리고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는지도." "음... 자세한건 모르지만 중립파에 있고 영향력도 꽤 있다고 알고 있는데?" "맞아. 그런데 우리 나라가 지금 내 쪽과 왕자 쪽으로 갈라진 것도 알아?" "응." 내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실 일행이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데... 내 초대에 응한거야?" 나는 다시한번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걸 떠나서 난 언니가 맘에 들었으니까." 루실의 얼굴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을 내가 악이용하려면 어쩌려고?" "나한테 피해가 안 오면 돼. 뭐, 정 내가 귀찮게 되면 그때가서 무슨 수를 쓰던지 하겠지." 루실은 멍 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녀의 입술이 크게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살짝 눈물까지 어렸다. "넌 참 대단하구나." "뭘 그런 걸 가지고 감격하고 그래? 언니도 나 처음에 보고 맘에 든 거 아니었어? 피차 마찬가지인데..." 루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내 위치가 위치이다보니... 사람을 믿는게 힘들거든..." "흐음.. 하지만 지금 나는 금방 믿었잖아?" 그러자 루실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에? 그렇네? 난 보통 남을 잘 믿지 않는데..." "내가 믿음이 가는 타입인가 보지 뭐..." 나는 시큰둥하니 입을 열며 얼른 닭다리 하나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러자 내 옆에서 들려오는 두 명의 한숨소리... "호호호, 그런가보다. 아, 그건 그렇고 내가 말하고 싶은건... 재상을 내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괜찮을까?" 나는 씹고 있던 닭 조각을 얼른 삼키며 입을 열었다. "좋을대로 해." 내 대답이 너무 성의가 없어서였을까? 루실의 얼굴에 약간 섭섭하다는 표정이 어렸다. "에... 너와는 상관 없다는 말 같네..." "응.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아빠가 날 예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터치하지 못하는 부분은 있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언니편을 든다고 해도 아빠가 아니다 싶으면 아빠는 편들어주지 않을 거야." "아... 그래?" 루실은 기운이 쭉 빠진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번쩍 들고는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건, 재상에 관계 없이 너랑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이야기도 되는 구나?" "그렇지." 그러나 루실은 또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다시 기운이 쭉 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 하지만 넌... 레드포드 자작과 같은 팀에 있으니 나랑 친하게 지내기는 힘들겠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거기 있는 거야 임무 때문에 있는 건데... 그리고 난 그 팀 따위 보다야 언니가 더 좋아." 하지만 루실은 여전히 기운 없는 표정이었다. "에이... 하지만 나 때문에 그 팀을 나올 수는 없잖아?" "왜 나올 수 없어? 그 팀에 있으면 귀찮은 일을 다 레드포드 자작이 담당해주니까 있는거지 그런 거 없으면 당장이라도 나왔을 거야." "그럴 수 있어? 그럼 나랑 계속 친하게 지내도 괜찮은 거야?" 루실의 얼굴이 약간 펴졌지만, 이제는 걱정스런 표정도 섞여 있었다. "그런 거 가지고 걱정한 거야? 걱정 마. 아까도 말했듯이 난 언니가 좋다니까." "하지만 나 때문에 아린에게 피해가 가면 안 돼잖아." "무슨 피해가 온다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걱정 마." 내가 태평한 어조로 장담했건만, 루실은 여전히 약간은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태평하게 구니까 날 철 없는 애로 보고 더 걱정스러워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루실이 가져온 음식들이 후식까지 다 동이나고 시간도 서서히 저녁을 향해 다가가자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아가씨... 결국 왕녀는 공작 각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가씨를 이용하려 한 것이었군요." 집으로 가는 길에 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뭐, 아예 모르고 만난 건 아니었으니까 상관은 없어. 그리고 아빠가 나 때문에 어떻게 될 사람도 아니고 말야." "그럼 또 만나실 겁니까?" "응. 난 왕녀가 맘에 들거든." "왕녀가 아가씨께 어떤 해를 가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알렌이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글쎄... 그럴 것 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 정치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더..." 흄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음... 뭔 일을 당하면 내가 왕녀를 잘못 본 탓으로 돌려야지. 그리고 자만인 것 같지만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당할 것 같지도 않고, 또 설사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빠가 가만 계시지 않을테니까..." "왕녀도 그걸 잘 알고 있을테지요. 그러니 좀 더 주의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의라고 해봐야... 별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그건.... 그렇군요." 흄이 말을 끌다가 결국은 고개를 푹 숙였다. "후훗, 너무 걱정하지 마." "공녀는 영리한 걸까요, 아님 철이 없는 걸까요?" 에릭은 묵묵히 걷다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아까 공녀를 만난 걸 다시 곰곰히 생각하던 중이였던 모양이다. "후후, 글쎄요... 제 생각에는 둘 다인 것 같던데요. 어떠세요 자벨리안 경? 여자 보는 눈이야 당신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루실의 한걸음 뒤에서 걸어가고 있던 자카르가 웃었다. "하핫, 저라고 별 수 있습니까? 절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군요, 왕녀님. 흠, 하지만 제가 이제껏 봐온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르더군요. 직설적인데다가 남의 눈치를 보느라 몸을 사리지 않는 여자는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오늘 작업(?)에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있더군. 우리쪽에서는 자네가 나서서 공녀를 유혹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던가?" 에릭이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참고 있다가 이제야 물어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카르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절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무조건 접근하겠습니까? 그럼 여자는 더욱 더 멀어질 뿐이지요. 작업(?)이 성공하는 비결은 여자가 눈치챌 정도로 치근덕 대지 말고 있다가 딱 한번의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넘어오게 하는 겁니다. 뭐, 그 전에는 여자의 스타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 등등의 사전 작업이 치밀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지만 말입니다." 너무나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자카르의 말에 에릭은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 그런가? 그런 일도 쉬운 일은 아니로군." "하하핫, 대공 저하...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답니다." "그, 그렇군..." 두 남자가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묵묵히 있던 루실은 두 남자의 대화가 끝나는 듯 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전 그냥 바라보기만 하겠습니다. 오랜 만에 만난 좋은 친구를 잃고싶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자벨리안 경, 아린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루실의 진지한 표정에 자카르도 가벼운 미소를 지웠다. "그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왕녀님." "하아... 제발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라겠습니다." 왕녀가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자 에릭이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요즘들어 한숨이 많이 나오는 군요.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제 16화 왜 다 일루 왔어? 왕녀와 헤어지고 난 다음날 부터... 난 할 일이 없어서 무지무지 심심했다. '파멸되어 가는 존재'를 놓친 이후로 또 다시 어디에 나타났다는 보고라도 들어와야 출동(?)할 수 있었으므로 그 전까지는 '대기' 상태 였던 것이다. "우.... 심심해라. 뭘 해야지 안 심심할까? 뭘 해야만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나지?" 입 속으로 투덜투덜 대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흄이 웃었다. "아가씨, 그렇게 딴 짓을 하시면서 수련을 하시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랬다. 난 지금 진검의 무게와 같다는 길다란 목검을 들고 열심히 기본 동작을 수련하고 있었다. 것두 찌르기만... "쳇,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검술 훈련을 하겠다고 찾아온 게 잘못이었어. 설마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할 줄 누가 알았겠어?" "험, 하지만 아가씨는 마법과 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상태의 순수한 검술만으로는 알렌에게도 지셨지 않습니까?" 사실이다. 첨에 라몬트(알렌의 아버지 이자 울 아빠 사병대 대장)의 주도하에 가문의 기사들이 연습하는 곳으로 쭐래쭐래 가서 나도 끼어달라고 부탁을 하였을 때, 라몬트는 내 검술 실력을 본 적이 없으니 알렌과 한번 겨루어 보라고 했었다. 단, 자신은 검술 전문이므로 마법과 정령술, 그리고 검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물론 난 알렌을 어찌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흔쾌히 승낙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이길 것이 뻔하다는 -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펑펑 솟았는지는 모르겠지만... - 기분으로 나섰다. 반대로 알렌은 아무도 막아내지 못했던 '그 존재'를 유일하게 막아내는 날 상대하게 되었기에 잔뜩 긴장한 채로 목검을 들고 마주섰다. 그리고 결과는... 위를 보면 알지 않는가? 나의 참패였다. 알렌은 자신이 이겨놓고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이 어벙벙한 표정으로 넘어져 있는 날 일으켜줄 생각도 못한 채 그자리에 서 있었다. 웃긴 넘... 날 일으켜준 건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흄이었다. 그리고 내가 흄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라몬트가 입을 열어 날 나락으로 떨겼다. "흠, 기초부터 다시 하셔야 겠군요." '젠장...' 그리고 친절하게도 내 기초를 다져줄 스승으로는 흄을 지정해줬다. "그라면 괜찮은 스승이 될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 꼴이다. "쳇, 쳇... 나도 검술이 꽤 뛰어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착각 이었다니..." 또 다시 투덜대자 흄이 힘줄이 하나 뾰록 솟은 얼굴로 웃는다. "저도 놀랐습니다. 검기까지 쓰실 줄 아시는 분이 아직 검기를 겨우 일으킬 정도의 알렌에게 참.패 를 당하실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난 원래 마법부터 배웠으니까... 검기도 마나를 다루는 거잖아? 그러니 알렌보다도 더 수월할 수 밖에..." 그러면서 슬며시 검을 내려 놓는다. 찌르기를 200번이나 했는데 조금 쉬어도 돼지? 하는 눈으로 흄을 보자 흄은 별로 만족스럽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건넸다. "흠, 그럼 마법사로 나가셨어도 되었지 않습니까? 뭐 하러 힘들게 검술까지 익히십니까?" "기냥... 튀고싶으니까." 나는 벙쪄있는 그의 손에서 수건을 낚아채어 받아 땀을 닦으며 그늘로 걸어갔다. "이유가... 단지 그것 뿐?" 잠시 후 제정신을 차린 그가 나를 쫓아오면서 묻는다. "후훗, 그건 농담이고... 내가 마법을 배울 때는 나에게 소질이 있었는지 너무 쉽게 익혀지더라고 (사실 난 드래곤이니까 당연한 거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마법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생기지 않는데, 대신 검술 쪽으로 눈이 돌아가더라고. 또, 보통 마법사들 보면 방에 콕 박혀서 연구다, 마법을 익힌다 해서 모두 허약 체질이잖아? 난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해서 마법을 중단하고 검술을 배웠지." "거기다가 정령술도 하시지 않습니까?" "정령술이야... 정령 친화력은 타고난 거잖아. 내가 노력해서 된 게 아니니까 별로 자랑할 건 안된다고 보는데? 아, 그건 그렇고 흄?" "예?" "나말야, 검술에 소질이 보여? 얼마나 훈련하면 알렌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자 흄이 웃는다. "후후후, 글쎄요... 운동 신경이 특출나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뛰어나신 편이니까 소질이 아예 없다고 볼 수 없군요. 게다가 체력도 괜찮으시구요. 그 동안 여행을 하셨다니 단련된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흄이 말 끝을 흐리자 나는 재촉하는 의미에서 물었다. "하지만?" 흄이 이런 말은 정말 하기 미안하다는 듯 씨익 웃는다. "검술은 엉망이예요." "에.... 그래?" "예. 예전에 검술을 배우신 듯 하지만, 글쎄요... 제대로 배우지 않으셨거나 아니면 조금 배우다 마신 듯 한데요? 너무 엉성해요." "아..." 하긴 내가 해츨링때 검술을 배운 건 거의 대부분이 독학이었고, 유스에게 배운 것도 단 몇 달뿐이었다. "지금 아가씨가 휘두르는 건... 글쎄요, 용병들이 휘두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실전에서 저절로 익히게 된... 하지만 그것도 엉성해요. 아마도 어떤 일이 있으면 검술 보다는 마법과 정령술을 사용하셨을테죠?" "그랬던 것 같아." "그러니 알렌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으려면, 아마 지금부터 특훈을 하지 않는 한 1년은 걸려야 할걸요? 게다가 알렌도 가만 있는게 아니니까요. 녀석에게도 꽤 소질이 있거든요." "에... 그렇게나 오래? 흠... 결국 검술로는 알렌을 이길 날이 오기 힘들다는 건가?" "아마도요." "에구... 기운 빠져라..." 내가 축 늘어지자 흄이 웃는다. "아가씨는 마법이 무척 뛰어나시고 정령술도 하시는데 검술 하나 알렌에게 져 주시는 것도 분하신가요? 욕심이 많으시군요." "이왕이면 이기는게 좋잖아?" "후후후, 그럼 특훈을 한번 받아보실래요? 단 시일내에 실력이 향상될 수 있게..."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흄의 눈이 왠지 사악하게 빛나는 것 같아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엥....? 아냐, 아냐. 검술은 그냥 알렌에게 양보하지 뭐." "그러시겠습니까? 이거 참... 아가씨를 위해 제가 특별하게 훈련시켜 드릴 수 있는데, 아쉽군요." "난 하나도 안 아쉬우니까 걱정 마." "뭐, 아가씨가 그러하시다면야... 그럼 이제 충분히 쉬신 것 같으니 다시 훈련을 시작할까요?" ".... 그러지 뭐..." 내가 어기적 어기적 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티모시가 훈련장에 들어서서 이리저리 고개를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아가씨." "무슨 일?" "레드포드 공작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레드포드 자작이 지위를 받은 기념으로 팀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같이 하고 싶다는..." "저녁을? 레드포드 공작 저택에서?" "예." "저녁을? 레드포드 공작 저택에서?" "예."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거절해." "예." 티모시는 어떠한 놀라움도, 당황함도 표시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즉시 돌아서서 가버렸다. 아마도 답을 기다리고 있는 시종에게 간 것일테지... "왜 거절하신 겁니까?" 티모시 대신 옆에 있던 흄이 의아함을 나타내었다. "가기 싫으니까." 흄이 삐질 웃는다. "언제나 답이 명쾌하시군요. 단지 그 이유 뿐이십니까?"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래? 나 찌르기 더 해?" 다시 나에게 할당된 연습장의 귀퉁이에 서서 목검을 들고 흄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번에는 내려치기를 200번 하십시오."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지.. 혹시 이거 다 하면 횡으로 베기 시킬거 아냐?"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흄은 반색하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내려치기 끝난 다음 곧바로 들어가주실래요?" "엥... 이거 기본 동작만 하다가 끝내는거 아냐?" 내가 불만 어린 어조로 부루퉁하니 흄을 쳐다보자 그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뭔가 생각하는 척 자신의 턱을 만진다. "글쎄요... 뭐, 날이 저물때 까지 끝내지 못하면 그렇게 되겠죠..." "쳇..." 나는 더 이상 아무말 하지 못하고 검을 들어올려 내려치기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옆에 있던 흄은 여전히 내가 뾰루퉁한 표정이자 맘에 걸렸는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검술에서 기본 동작은 중요한 거랍니다. 저보다도 훨씬 실력이 뛰어나고 능력도 인정받는 대장님도 아직까지 아침마다 기본 동작을 연습하신다구요." "누가 뭐래?" 나는 흄을 한번 흘겨봐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며 내려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횡으로 베기를 200번 하고나자 아직 날은 안 저물었지만 온 몸이 다 쑤시는데다가 다리까지 후들 후들 떨려서 도저히 서 있지도 못할 것 같았다. "흄, 더 할거야?" 내가 애처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삐질 웃었다. "하하하, 힘드신가 보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할까요?" 집 안까지 부축해 주겠다는 흄의 손길을 뿌리치고 휘청휘청 대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 겨우 겨우 기다시피 해서 욕실 안의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궜다. 두 명의 하녀가 나와 같이 들어와서 내게 맛사지를 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잠시 후 나이가 지긋한 하녀장이 들어왔다. "아가씨..." "응?" 나는 물에 몸을 담근채 눈을 감고 있다가 뜨지도 않고 물었다. "레드포드 자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너무 놀라서 욕조에 편안히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키고 앉아 하녀장을 바라보았다. "빨강 머리 녀석이 왔단 말야?" 내 거친 말투에 하녀장의 눈쌀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순순히 대답해줬다. "자작님께서 붉은 머리를 가지신 건 확실합니다." "그 녀석이 왜 왔대?" "아가씨, 귀족가의 레이들께선 그런 말투를 쓰지 않으십니다." 결국 하녀장이 참지 못하고 더욱 눈쌀을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흥, 됐네요. 그건 그렇고 그 남자가 무슨 일로 왔냐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녀장의 엄한 눈초리에 눌려 - 내가 왜 눌리는 것인지 나중에 심각하게 고찰을 해봐야 겠다. - 슬쩍 '그 녀석' 에서 '그 남자'로 말을 바꾸어 다시 물었다. 하녀장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대답해줬다. "아가씨를 만나러 오셨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쳇, 그 녀석이 갑자기 왜?" "아가씨이이이~~!!" "아, 알았어. 알았다구." 내가 왜 그녀에게 주눅이 드는지 알것 같았다. 그녀의 한번 쏟아지기 시작하면 끝 없이 늘어지는 잔소리... 것두 한숨을 푹푹 쉬어가면서 매번 같은 레파토리로.. "아가씨, 아가씨의 언행 하나 하나가 주인님의 명성을 좌우 한다는 걸 왜 아직까지..." '역시나 이번에도 시작 되었군...' 그녀는 내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아빠를 들먹이는 것. 물론 아빠가 그런 거에 눈 하나 깜짝할 위인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마샬(하녀장)의 말은 내 가슴을 콕콕 찔러대서 견딜 수가 없게 만들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이번에도 나는 일찍이 그녀에게 항복한다는 뜻으로 그녀의 말을 자르고 두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도대체 나랑 얼마나 오래 있었다고 저런 걸 쪽집게 처럼 찝어낸 건지... "하는 수 없지. 맛사지는 하지말고 그냥 나가봐야 겠어.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마샬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하녀들에게 손짓하자 그녀들은 신속한 동작으로 벌려놨던 물품들을 다 치웠다. 그리고 그 동안 나는 재빨리 온 몸에 비눗칠을 하고 몸을 헹궈냈다. "로라, 아가씨께 수건을 가져다 드려라. 비키 넌 나가서 아가씨 옷을 준비하고."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하녀장님?" "지금 치장할 시간 없으니까, 아이보리색 평상복을 꺼내놔." "예." 비키라고 불리어진 하녀가 급하게 욕실을 나가자 마샬의 시선이 다시 막 욕조를 나오던 나와 내게 수건을 건네주던 하녀에게로 향했다. "아가씨, 맛사지는 안 한다고 해도 몸에 코오롱(이 시대의 로션)은 바르셔야죠. 그렇지 않으면 피부가 거칠어진다구요. 로라, 뭐 하고 있니? 아가씨께 발라드리지 않고." 로라의 재빠른 손길이 내 몸에다 시원한 물질을 바르고 나자 욕실을 나왔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비키가 나에게 옷을 내밀었다. 집에서 편히 입을 수 있는 단순한 디자인의 롱 원피스를 입고 거기에 맞게 머리는 풀어 늘어뜨리고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아 촉촉한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원피스와 같은 색의 리본으로 머리띠를 했다. 그리고 나서 마샬의 닥달에 못이겨 얼굴에 아이라인과 립스틱을 바르는 정도의 가벼운 화장을 하고 문을 나섰다. "아가씨, 맨발로 나가시면 어쩝니까?" 그러나 내 옷차림에 만족하지 못한 마샬의 잔소리가 나를 막았다. 하지만 다시 방으로 들어가기 귀찮았던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며 마샬에게 입을 열었다. "마샬, 슬리퍼에 스타킹 신는 것도 웃기지 않아? 그냥 갈래." "아가씨이~~!!" 마샬의 처절한 외침을 뒤로하고 응접실로 내려오자 마침 대접받은 차를 즐기고 있던 애쉬가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플레이저 자작..." "안녕하세요, 레드포드 자작님. 저에게 무슨 용건이신지요?" 나는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앉지 안은 채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제가 갑자기 방문한 것에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내가 이렇게 무뚝뚝하게 나갔는데 녀석은 녀석 답지 않게 피식 웃음으로 나오자 나는 좀 당황이 되었다. 그래서 어조를 약간 누그러뜨려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좀 의아하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플레이저 자작..." "안녕하세요, 레드포드 자작님. 저에게 무슨 용건이신지요?" 나는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앉지 안은 채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심술궂은 눈빛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제가 온 것이 자작님의 맘을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손님으로 대접도 안 해 주시고 빨리 용건만 말하고 가라고 하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흥, 겨우 그런 수에 내가 당할 것 같냐?' 나는 더욱 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제가 굳이 눈치를 안 드려도 되겠군요? 무슨 일이시죠?" 그러자 애쉬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쿡, 제가 졌습니다. 당신을 만만히 본 것이 실수군요." '그러면서 왜 웃는데?" 졌다면서도 기분 좋게 웃는 녀석의 태도에 나는 기분이 상해버렸다. 이건 마치 녀석이 일부러 져 줘서 이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아무말도 안 하고 녀석만 노려보자 녀석은 다시 피식 웃으며 그제야 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제가 보낸 요청을 거절하셨더군요. 같은 팀으로 활약한데다 폐하께 칭찬까지 받은 기념으로 동료들끼리 한 자리 모여 식사를 하자고 한 것 뿐인데 왜 거절하셨습니까?" 이유를 묻는 질문 치고는 참으로 서두가 길기도 하다. 그냥 '왜 거절 했냐'고 물으면 될걸... "저녁 때 외식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요." 내가 시큰둥하니 대꾸하자 애쉬 녀석 벙찐 얼굴이다. "그게... 이유 입니까? 고작...?" "왜요? 그 정도면 이유가 될수 없나요? 그럼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난 국왕에게 받은 칭찬 따위 하나도 안 기쁘군요." 애쉬가 움찔 거렸다. "아... 물론 폐하께선 제가 주된 공을 세우셨다고 알고 계신 듯 합니다만... 그래도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작위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깟 작위쯤이야 저에겐 별 필요도 없습니다." 애쉬는 이제 풀이 죽은 얼굴로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에 동료들에게 폐하께서 따로 특별히 포상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자작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더라도 같은 팀으로써 축하하는 의미로 식사 한끼정도는 함께 하시는게 어떻습니까?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같이 활동할텐데요..." 내가 원해서 팀을 이룬 것도 아닌데다 앞으로도 같이 활동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 동안 같이 동행한 정이랄까? 게다가 스와카나 반담은 처음 부터 같이 여행한 사람들이었고 꽤 괜찮은 동료라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끝까지 거절하려는 것이 왠지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흠, 저녁 식사가 아니라면 괜찮아요." 애쉬가 다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도 저녁 식사라고 해서 거절하셨다고 했는데... 저녁때 모이는 것이 싫으십니까? 보통 이런 식사는 저녁에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냥 내 취향이에요." 아빠가 같이 저녁을 안 먹으면 툴툴댄다는 말을 특히 저 녀석에게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 그럼... 점심은 괜찮겠습니까?" "예, 괜찮아요. 날짜는 언제로 하실 건가요?" "간단한 점심이니 준비할 건 없겠죠. 내일 어떻습니까?" "괜찮군요. 그럼 내일 점심때 쯤 레드포드 공작 저택으로 가면 될까요?" "그러도록 하시죠. 어차피 저희 집에 동료들이 더 많으니까요. 아참, 오실때는 두 호위 기사들도 같이..." "그러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전 용건이 끝났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러세요, 티모시!!" 문 밖을 향하여 크게 소리쳐 부르자 마치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 금방 티모시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자작님께서 가신다니 배웅해 드리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그러죠. 멀리 안 나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애쉬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목례를 하고는 티모시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마자 마샬이 나에게 달려왔다. "아가씨, 손님을 앉게 하지도 않으시고 서서 이야기를 하시다가 보내시면 어쩌십니까? 그건 실례라구요." "대단한 용건도 아니고 이야기도 간단했는데 뭐 어때?" "그래도 그러시는게 아닙니다." "괜찮아. 다리도 튼튼한 사람인데 뭘..." "아가씨, 그게 그런게 아니라니까요? 이건 예의에 어긋난다구요." "나도 안 앉았잖아. 그럼 됐지." "아가씨, 그러니까 그게 실례라니까요. 손님이 오셨으면 우선 의자를 권하신 후에 차나 다과라도 대접해야 예의입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기껏 차를 대접해 드렸더니만 손님께 의자를 권하지도 않고 서서 이야기를 끝내고 보내시면 어쩝니까? 이건 대단한 실례라구요." "아, 아, 알았어... 다음부터는 안 그럴께. 됐지?" 그러나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대답하자 마샬이 불만 어린 표정이다. "아가씨, 그렇게 무성의하게 대답하시면 아가씨의 말에 믿음이 안 간다구요." "알았어. 진짜 다음부터는 안 그런다니까. 내가 언제 허튼소리 하는거 봤어?" 그러자 마샬이 찔끔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로 만족을 못하고 한번 더 다짐시키는 집요한 면을 보였다. "정말 다음부터 그러시면 안됩니다, 아셨죠?" "응, 응, 알았어. 아주 자알~~ 알았다구." 다음 날, 나는 오전에 훈련을 잠깐 받고나서 흄과 알렌을 데리고 레드포드 공작 저택으로 향했다. 아빠는 아침 식사 시간에 애쉬네 집에 간다고 하니까 눈쌀만 살짝 찌푸렸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애쉬 녀석에게 내가 신경을 쓸 까봐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약속을 해버렸으니 이제와서 안 갈수도 없고, 게다가 애쉬만 만나는 게 아니라 딴 사람들까지 있을테니 그걸로 위안 삼고 반대는 하지 않은 듯 했다. 게다가 나도 이제는 신경 안 쓴다고 몇번이나 이야기를 했으니까... "어머나, 어서와요 아린양... 기다리고 있었어요." 레드포드 공작 저택에 도착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제일 먼저 반겨주는 사람은 내 동료들이라고 불리워지는 인간들이 아니라 바로 레드포드 공작 부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얼떨떨했지만 우선은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덥썩 잡아 위 아래로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왜 한번도 안 놀러 왔나요?" "아.하.하.하...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요..." 등 뒤로 땀이 삐질 흘렀다. '오랜만? 왕성 파티가 바로 며칠 전이었을 뿐인데...' "그러고 보니 왕성 파티때는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고... 내가 아린양과 이야기를 하려고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요? 나 많이 서운했어요." '우리가 그렇게 친했던가...?' "죄송해요. 제가 파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일찍 집으로 갔어요." "그래요, 그래요. 어쨌든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쁘네요. 앞으로도 자주 자주 놀러왔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안 온다.' "하.하.하.. 그러도록 노력할께요. 저... 그런데 공작 부인?" 그러자 공작 부인이 서운하다는 표정을 가득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린~~, 공작 부인이 뭐예요? 공작 부인이..." 황당무지로소이다... "예? 아... 제가 뭐 실수라도..." "그렇게 부르니까 너무 딱딱하잖아요. 나도 이름을 부르는데... 그러니까 아린도 내 이름을 불러줘요." '이 부인과 함께 있으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군... 아니 도대체 언제 나에게 이름을 알려주기라도 했나?' "아... 하지만 어떻게..." "어머, 왜 못불러요? 내가 허락했으니까 괜찮아요. 괜히 고리타분한 예의 같은거 따지지 말고 불러줘요." "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퍼졌다. '나중에 애쉬 녀석에게 이름을 물어봐야겠군.' "저... 그런데 제 동료들은 어디에 있나요? 그들을 만나러 왔는데..." 그러자 공작 부인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어머나, 내 정신좀 봐... 아린을 만난 게 너무나 기뻐서 들뜨다보니 내가 깜빡 했네요. 모두들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모두들 아린을 마중나오고 싶어 했는데 내가 하겠다고 극구 우겨서 나 혼자 나왔어요... 기분 상하지는 않았죠?" '정신이 없어서 싱싱한지 상했는지 모르겠음...' "괜, 찮아요." 다음 날, 나는 오전에 훈련을 잠깐 받고나서 흄과 알렌을 데리고 레드포드 공작 저택으로 향했다. 아빠는 아침 식사 시간에 애쉬네 집에 간다고 하니까 눈쌀만 살짝 찌푸렸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애쉬 녀석에게 내가 신경을 쓸 까봐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약속을 해버렸으니 이제와서 안 갈수도 없고, 게다가 애쉬만 만나는 게 아니라 딴 사람들까지 있을테니 그걸로 위안 삼고 반대는 하지 않은 듯 했다. 게다가 나도 이제는 신경 안 쓴다고 몇번이나 이야기를 했으니까... "어머나, 어서와요 아린양... 기다리고 있었어요." 레드포드 공작 저택에 도착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제일 먼저 반겨주는 사람은 내 동료들이라고 불리워지는 인간들이 아니라 바로 레드포드 공작 부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얼떨떨했지만 우선은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덥썩 잡아 위 아래로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왜 한번도 안 놀러 왔나요?" "아.하.하.하...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요..." 등 뒤로 땀이 삐질 흘렀다. '오랜만? 왕성 파티가 바로 며칠 전이었을 뿐인데...' "그러고 보니 왕성 파티때는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고... 내가 아린양과 이야기를 하려고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요? 나 많이 서운했어요." '우리가 그렇게 친했던가...?' "죄송해요. 제가 파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일찍 집으로 갔어요." "그래요, 그래요. 어쨌든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쁘네요. 앞으로도 자주 자주 놀러왔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안 온다.' "하.하.하.. 그러도록 노력할께요. 저... 그런데 공작 부인?" 그러자 공작 부인이 서운하다는 표정을 가득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린~~, 공작 부인이 뭐예요? 공작 부인이..." 황당무지로소이다... "예? 아... 제가 뭐 실수라도..." "그렇게 부르니까 너무 딱딱하잖아요. 나도 이름을 부르는데... 그러니까 아린도 내 이름을 불러줘요." '이 부인과 함께 있으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군... 아니 도대체 언제 나에게 이름을 알려주기라도 했나?' "아... 하지만 어떻게..." "어머, 왜 못불러요? 내가 허락했으니까 괜찮아요. 괜히 고리타분한 예의 같은거 따지지 말고 불러줘요." "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퍼졌다. '나중에 애쉬 녀석에게 이름을 물어봐야겠군.' "저... 그런데 제 동료들은 어디에 있나요? 그들을 만나러 왔는데..." 그러자 공작 부인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어머나, 내 정신좀 봐... 아린을 만난 게 너무나 기뻐서 들뜨다보니 내가 깜빡 했네요. 모두들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모두들 아린을 마중나오고 싶어 했는데 내가 하겠다고 극구 우겨서 나 혼자 나왔어요... 기분 상하지는 않았죠?" '정신이 없어서 싱싱한지 상했는지 모르겠음...' "괜, 찮아요." 그녀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나가니 멋드러진 목초들로 둘러쌓인 넓직한 잔디밭 위에 커다란 식탁이 놓여져 있었고 막 시종들과 시녀들이 그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날라다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는 일명 내 동료들이 서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시리안님~~!!"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르하 꼬맹이 신관이 반색을 하면서 뛰어왔다. "정말 오랜만이예요." "하하하, 그렇네. 수도에 온 뒤로 처음 만나는 거지?" "예, 너무 하셨어요. 어떻게 그 동안 한번도 안 오실수가 있어요?" "미안... 나름대로 바빴거든. 잘 지냈지?" 거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자 나머지 사람들도 내 주위로 몰려왔다. "이거, 이거..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자작 직위를 받으셨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당신의 말 솜씨 또한 여전하군요, 스와카. 혈색이 좋은 거 보니 그동안 잘 쉰 것 같은데요? 모두들 오랜만이예요." 내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을 시작으로 흄과 알렌도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대충 인사가 끝났을 무렵 공작 부인이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음식이 다 준비 되었으니 나머지는 식탁에 앉아서 하는 건 어때요?" 그녀의 말에 의하여 우리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모두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식탁에는 각자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쓰여진 자리에 앉았는데 우연인지 아니면 누구의 사주인지 내가 애쉬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아무 뜻 없이 애쉬 녀석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는 괜히 딴 곳을 보면서 헛기침을 해대는 것이었다. '뭐야, 이거?' 그리고 그런 애쉬 녀석에게 공작 부인은 뭔가가 담긴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한쪽 눈을 찡끗 해보인 후 짐짓 자신은 아무것도 안한 척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모두 앉으신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래요." 모든 이들이 그녀의 말에 일제히 일어서면서 인사를 하려 하자 그녀가 먼저 만류했다. "아니에요, 일어나지 말아요. 아참, 아린양?"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나는 의아해졌다. "예?" "호호호, 아니 이 식사 끝나고 가기 전에 나랑 잠깐 차 한잔 할 수 있을까요?" 저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아, 예. 그러죠." "호호호, 그럼 기다릴께요. 여러분,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그리고 몇시간 후... 나는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식사를 하면서 그들과 나눈 이야기는 대부분 애쉬와 내가 작위 받은 것에 대한 축하와 그들이 받은 상여금을 어떻게 나누며 무엇을 할 것인가와 앞으로 '그 존재'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결론은 앞으로도 '그 존재'에 모두 같이 똘똘 뭉쳐 대응하자는 거였다. 모두들 주머니가 두둑해진 데다가 잠깐의 휴가(?) 비슷한 시기에 좋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어 기분이 좋은 상태였으므로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 했다. 단지 애쉬 녀석이 옆에 있었던 관계로 그가 식사가 끝날때 까지 거의 대화에 참여 안 하고 남들이 물어볼 때도 '글쎄...'라고만 성의없이 응대했다는게 뭔가 일이 있나... 하고 맘에 걸렸지만 녀석은 원래 말수가 적은데다 나랑 별 상관 없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식사가 끝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얹은 파이가 후식으로 나왔지만 나는 공작 부인이 기다리겠다고 한 말이 떠올라 너무나 맛있어 보이는 파이를 눈물을 머금은 채 사양하고 그들에게 양해를 구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흄과 알렌이 후식을 즐기며 담소를 하는 동안 공작 부인을 만나고 올 생각이었다. 물론 완전히 자리가 파한 다음에 그녀에게 가도 되었지만, 그렇게 되면 그 둘이 날 기다리고 있어야 할테고 그러면 내가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생각하기로 나는 공작 부인과의 담소 시간이 길어야 한시간 남짓일 거라고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님, 플레이저 자작님께서 오셨습니다." 한 하녀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방 앞에 이르자 하녀가 문을 두드리면서 안을 향해 말했다. "오, 어서 모셔라." "호호호, 그래서요 제 아들녀석이...... 어머나, 그러고 보니 우리 애쉬가 어렸을때 인데.... 그래서요 제가..... 그랬더니 그 애가... " '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셨나이까?' 나는 속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젠장 이게 몇 시간째야?' 공작 부인은 소위 친해지자는 명목하에 나를 앉혀놓고 벌써 몇시간 째 끊임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된 화제거리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자신의 아들 애쉬 녀석!! 처음에야 간간히 놀라는 척과 감탄하는 척도 해주면서 맞장구를 쳐 주었지만 이야기가 끝도 없이 진행되자 질려버려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있는데도 죽을지경이었다. '젠장할... 평소 수다 떨지 못한데 대한 한이라두 있었나... 인내력 테스트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뭡니까?' "........호호호, 그랬답니다 아린. 어때요, 애쉬가 참 장하지 않나요?" '장하기는 개뿔이...' "하.하.하... 그렇...군요." '더 이상 있다가는 다 뒤집어 버리고 말거야아아아~~~!! 누가 좀 이 아줌마좀 말려봐아아아아~~~~!!' 나의 이 속에서 처절하기 울려 퍼지는 절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지 공작 부인이 차를 한모금 마시며 싱긋 웃었다. '앗, 저것은 다시 수다가 쏟아진다는 신호!!'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하여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그러나 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고 그녀는 차를 목구멍 너머로 다 넘기고 서서히 찻잔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그녀의 입이 열리려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때!! 똑, 똑, 똑 '오, 신은 아직까지 날 버리지 않으셨구나~~!!' "어머니, 들어가도 될까요?" 애쉬의 목소리가 천상에서 들려오는 천사의 목소리로 착각이 될 정도였다. "애쉬군요. 호호호, 내가 너무 아린양을 붙잡고 있었나봐요." '너무가 아니지 아주아주아주 엄~~~~~~청 붙잡고 있었지...' 나는 예의상 '아니요...'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정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미소만 떠올리고 있었다. "들어오너라." 공작 부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나타나는 애쉬의 모습에서 휘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플레이저 자작도 돌아가야지요." '애쉬야, 내가 지금까지 너 나쁜 놈이라구 했던 거 다 취소다!!' "어머나,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예. 자작이 지금 돌아가면 저녁이 다 되었을걸요." "아쉽네... 아린양, 차라리 저녁까지 같이 먹고 가지 않을래요?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겠어요? 그러니까..." '절대 사양이야!!' 하지만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는 나와주지 않았다. "아, 저... 그게...." '윽.... 신이시여, 왜 절 동방예의지국에서 살게 하셨나이까...' "어머니, 자작이 여기에 있으면 재상께서는 혼자 저녁을 드셔야 하잖아요." '허거걱... 애쉬야, 너 왜 이렇게 이쁜짓 하는거니? 고맙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나는 너무 기뻐서 애쉬 녀석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내고 공작 부인에게 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기껏 청해주셨지만 자작의 말씀대로 아버지 혼자 저녁을 드시게 할 수는 없거든요." "어머, 아린양은 착하기도 하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다음 기회를 기대할 수 밖에..."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잘 가요. 아, 애쉬야 네가 나 대신 아린양 배웅을 해주겠니?" "그러죠."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녀가 또 다시 잡기 전에 얼른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에휴~~ 살았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뒤따라 나오던 애쉬가 봤는지 미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요. 원래 어머니가 이러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당신이 맘에 쏙 드시나봅니다." "됐어요. 어쨌든 다음부터 조심하면 돼니까요."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흄과 알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나오셨군요, 아가씨...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피식 피식 웃으며 말하는 흄의 표정을 보니 기다리느라 지루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흄, 목이 전혀 안 늘어났는걸요?" 마음 속으로 그들이 기다렸으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날아가면서 나도 기분좋은 얼굴로 그에게 대응했다. 그리고는 애쉬를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도록 하죠." 애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만나도록 하죠." "그래요. 아참, 그런데말이죠." 나는 몸을 돌리려다말고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어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는 그걸 아직까지 몰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엘레나요. 엘레나 G 레드포드." "그렇군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럼..." 문 밖에서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스와카와 반담, 그리고 꼬마 신관과 리틀조로가 나를 배웅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아시리안님, 나중에 다시 만나요." "안녕히 가시길..." "그러죠. 모두들 다시 만날때 까지 건강히 있길 바래요." 나는 이제야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차서 그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웃으며 작별 인사를 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내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흄이 마차에 올라타서는 작게 속삭였다. "엄청 시달리셨나보군요." "두말하면 입 아프죠. 나 다시는 여기 안 올 생각이에요." 나는 마차안에 놓여진 쿠션들 속으로 쓰러지다싶이 몸을 깊숙히 파묻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흄, 나 잠시 누워있을테니 집에 다 오면 불러요." "쿡쿡쿡, 알겠습니다 아가씨." 애쉬는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집을 빠져나가던 아린을 떠 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몸을 돌려 어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신이 들어왔는데도 태연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래, 아린양은 갔니?" 그리고는 뭔가를 아는 듯한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예. 도망치듯이 가더군요. 왜 그러셨어요, 어머니? 어머니가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분일줄은 몰랐는데요?" "호호호, 나는 뭐 여자 아니니? 오랜만에 속이 후련할 정도로 수다를 떨어봤다. 뭐, 아린양은 죽을 것 같은 표정이더구나..." "그걸 알면서도 그녀를 그렇게 잡아두셨단 말이예요?" 애쉬는 평소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어머니를 보면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보면서 공작 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쯧쯧쯧, 애쉬야... 넌 아직 멀었구나." "예?" "넌 모르겠더냐? 네가 내 마수에서 아린양을 구해주기 위해 들어왔을 때 널 보던 그녀의 눈빛을... 천사를 보는 듯한 표정이더구나. 아마 속으로 너에게 무지 고마워했을걸?" 애쉬는 생각지도 못한 어머니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그걸 생각하시고?" "뭐, 신나게 수다도 떨어볼 겸 겸사겸사.. 후후훗... 역시 아린양은 내 생각대로야." "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 공작 부인은 애쉬의 얼굴에서 궁금함을 읽어내자 짓궂은 미소를 띄웠다. "보통 귀족 영애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애쉬의 얼굴에 또다시 떠오르는 황당한 표정을 즐겁게 감상했다. 애쉬가 자신이 놀림을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무표정으로 무장하자 그제야 공작 부인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아린양은 입이 가벼운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 즉, 보통 귀족가의 여자들이 즐기는 수다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걸 말야. 뭐, 그 점은 맘에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중에 며느리와 수다를 즐길 수 없게 된다는 점이 참으로 아쉽구나..." 그러면서 슬쩍 애쉬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애쉬는 공작 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속 뜻을 깨닫고는 당황한 채로 얼굴을 붉혔다. "어,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플레이저 자작과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공작 부인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시침을 뚝 뗐다. "누가 뭐라고 했니?" 애쉬의 얼굴은 한층 더 붉게 변해버렸다. "그럼, 전.. 할 일이 있어서..." 도망치듯 방을 나가버리는 아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작 부인은 진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평소 보기 힘든 아들녀석의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게 해준 아린에게 속으로 심심한 감사를 보냈다. '내 그 보답으로 당신을 꼭 내 며느리로 맞아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부터 당연한건지 아니면 나한테만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곳에서 초대장이 들어왔다. 듣도보도 못한 귀족들 이름이 찍혀있는 초대장들을 매일 아침마다 티모시는 아빠에게뿐만이 아니라 나에게까지 잔뜩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번에 한번 공작 부인에게 크게 데인 이후부터 나는 가차없이 거절해버렸다. 뭐, 아빠가 나에게 온 초대장들을 한번 쓰윽 훑어보고 난 뒤 괜찮다고 말해주어야만 마음 편히 그럴 수 있었지만 아빠의 영향력이 워낙 컷던 탓인지 대부분의 초대장들이 그냥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동안 나는 흄과 함께 검술 연습에 더욱 더 열을 올렸다. 그렇게 평안한 일상생활이 반복되길 일주일...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지는 생활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이런 편안한 생활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 그 날도 나는 어김없이 흄과 함께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진도는 조금도 나가지 않아 여전히 기본기에 충실히 훈련을 하고 있어 내 능력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하여 우울해질것 같았는데 드디어 흄이 나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날이기도 했다. "와, 정말?" "예. 그 동안 열심히 하셨으니 검술을 가르쳐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기본 동작은 계속 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드디어 나도 마구잡이식 검술에서 벗어나는구나... 라는 생각에 얼른 얼른 가르쳐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나 강한 마나의 기운이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얼라리오..." 그리고 그와 함께 대기에 퍼져있는 몸이 오싹오싹할 정도의 살기가 느껴졌다. 너무나 강렬하고 익숙한 그 느낌에 갑자기 찬 물을 끼얹은 것 처럼 정신이 번쩍 들음과 동시에 그 살기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날 찾아 왔구나..." 아빠에게 말은 들었지만 설마 수도로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일이라 잠시 멍해 있었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야. 그리고 나 나갔다 올게. 손님이 왔어." 재빨리 몸을 날려 저택안의 내 방으로 갔다. 아직 무더운 날 검을 들고 날뛰어서 그런지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지만 그런 걸 씻을 여유따윈 없었다. 아빠의 팔찌를 차고 할머니의 서클렛을 끼자마자 내 검을 들고 다시 뛰어내려와서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으나, 뛸 시간조차 아까워서 실프를 불러내고는 곧장 창문을 박차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가씨!!" 아래에 있던 시종들이 놀라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버리고 이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검은 연기만 침중한 눈으로 바라본 채 계속해서 날아갔다. 다금한 상황을 알리는 요란스러운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소리에 거리에 나와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아차린 듯 재빨리 몸을 피하느라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이번에는 내가 좀 늦었나보다. 아니면 일의 시작된 곳이 성 안이었는지, 성문 근처에 있던 여러채의 집들이 부서져 있었고 곳곳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성 안쪽으로 달려들어가고 있었고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한 존재를 둘러싸고 몇겹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그 곳의 대장인 듯한 기사가 외치는 소리를 듯고 그의 뒤로가서 살짝 내려섰다. "병사의 말로는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걸 검문하기 위하여 제지하자 다짜고짜로 마법을 난사했답니다." "젠장할... 그 살인마인가?" "성문에 올때까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부하의 목소리는 확실하지 않은 듯 힘이 없었고, 대장은 그런 부하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씹어버렸다. "저게 살인마가 아니면 누가 살인마란 말야? 젠장, 마법사들은 뭐하고 있는거야?" "벌써 마법사 두명이 당했습니다." "뭐라구? 이런, 젠장... 마법사도 못 당한 녀석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한단 말야?" 대장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알았으면 모두 뒤로 물러나게 해요. 한 1Km 정도 뒤로 물러나야 목숨을 부지할걸?" 나는 녀석들의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한 친절한 충고였건만 내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 대장 녀석이나 그 부하 녀석은 날 보더니만 '이건 또 뭐야?'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여기가 무슨 여자들이 호박씨 까는 찻집인 줄 알아?" 퍼억~ 어느 시대에서건, 어느 상황에서건 말 한번 잘못해서 피 터지는 녀석들이 꼭 하나씩은 있었다. 이 곳도 예외는 아닌 듯 그 대장인 기사 녀석은 말을 끝내자마자 날아간 내 주먹에 맞아 쌍코피를 흘리면서 뒤로 나자빠져야만 했다. 나는 주먹을 탁탁 털면서 넋이 나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는 부하 녀석에게 외쳤다. "난 플레이저 자작이다. 여기서 살고 싶으면 잽싸게 물러나라고..." 그러나 이번에도 내가 한 박자 늦은 듯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커다란 폭음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쳐 놓은 사람의 장벽 한 쪽이 박살나버렸다. 콰앙~~!! "크어어억~!!" "케엑~!!" "큭~!!" "어머니~~!!" "말자야~~!!" 라고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한방에 횡천으로 가버린 동료들을 본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얼마 후 현명한 병사 하나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후다다닥 도망가버리자 그걸 본 몇명의 병사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면서 물러났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좀 더 많은 병사들이... 나중에는 떼거지로 우르르 달아나버렸다. 내 앞에 있던 녀석은 그래도 그나마 예의를 아는 녀석인지 거수 경례를 하며 한 마디를 한 후 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럴수는 없어~~ 나의 자랑스러운 성문 경비대들이~~~ 안돼. 돌아와아아아아~~ 기사단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단 말이다아아아~~" 저 멀리 날아갔다 뒤 늦게 쌍코피를 흘리며 일어선 대장 기사는 처절하게 울부짖었지만 이미 저 멀리 튀어가는 사람들에게 들렸을 지 의문이었다. "당신도 여기 있지말고 가지 그래? 당신 하나 있어봤자 도움 되는 건 없어." 주위의 수 많은 방해물들을 제거한 나는 마지막 잔해물마저 치우기 위해 그쪽으로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 기사는 나의 이런 친절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자신의 검을 빼어들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수도 성문 경비대 대장. 우리 경비대를 수치스럽게 만든 당신 말 따윈 듣지 않겠소. 기사란 자고로 적을 앞에두고 등을 보이지 않는 법. 내 오는 이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살인마를 처단하고야 말겠소." 아까는 야, 자 하면서 반말로 외치더니만 내가 자작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지 이번에는 제법 높임말을 써주었다. 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멋들어진 대사를 읊어대는 그의 모습이 나에게는 짜증만 돋굴 뿐이었다. "당신 처자식 없어? 아님 부모님이나? 가족을 생각해야지, 가족을!!" "난 아직 결혼하지 않았소, 그리고 부모님은 벌써 3년전에 돌아가셨소." '허걱... 나이가 무지 많아보이는데... 적어도 40살쯤?' 나는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져 그가 '그 존재'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자, 덤벼라." 자기가 덤비라고 외쳐 놓고서는 검을 가로로 빼어들고 자신이 달려들어가던 그 기사는 '그 존재'가 가벼이 손을 내 뻗음과 함께 날아온 마나의 폭풍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뒤로 날아와 내 앞에서 떨어졌다. "커억!!" 그래도 다행한 것은 마나의 기류를 내뿜어 그를 날릴뿐이어서 그는 그나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입술이 터지는 바람에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는 그를 서서 내려다보며 묻자 그는 힘겹게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누가... 나에 대해서... 물어보면... 크윽... 살인마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커억!!" 까지 말하고는 기절해버렸다. "재미있는 기사 양반이야." 슬그머니 뒤를 바라보니 저 멀리에 기사들이 진을치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다가오지 않는것을 보면 지금 막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애쉬 녀석이 그들에게 뭔가 지시를 한 것 같았다. "실프!!" 나는 실프를 불러내어 내 앞에 기절한 기사 양반을 저 뒤에 있는 기사 무리들에게로 옮기게 하고는 천천히 '그 존재'에게로 몸을 돌렸다. "날 찾아 왔죠?"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네자 '그 존재'가 희미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검을 앞으로 잡아 세우며 자세를 잡았는데 그 몸에서는 마나와 함께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아까보다도 더욱 더 온 몸이 짜릿짜릿한 것이 까딱 잘못하다간 스파크까지 파바박 튈 분위기였다. "쳇, 이게 누구때문인데 누구에게 화를 내는 겁니까?" 라고 태평하게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잔뜩 긴장한채로 나도 검을 뽑아드는 척 하다가 잽싸게 몸을 숙이고 왼 손으로 땅바닥을 집으며 강하게 외쳤다. "라필타!!" 눈부시게 강렬한 빛이 내 왼손에서 시작되어 땅을 가르며 '그 존재' 에게로 뻗어나가 '그 존재'의 발밑에서부터 빛의 기둥을 이루며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내 레이피어에 마나를 잔뜩 머금고 달려들었다. 어차피 '라필타' 정도로는 커다란 타격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단지 '라필타'는 약간의 시간을 벌기 위한 연막 작전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빛의 기둥이 서서히 사라지는 지점으로 허공에서부터 내리꽂는 나에게 초승달 모양의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설마 그 상태에서 검기를 날리리라곤 상상도 못한 나는 검을 거두고 아빠의 팔찌를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날린 검기여서 피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필사적으로 마나를 끌어모아 아빠의 팔찌에 주입시키자 팔찌가 하얗게 빛나며 둥근 방어막을 형성했고 그러자마자 곧장 검기가 날아와 막에 충돌하였다. 콰앙!!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나는 팔이 떨어져나갈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뒤로 날아가는 몸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허공으로 도약하며 나에게 날아오는 붉은 그림자가 날 경악시켰다. "쳇, 역시 한수 위라니까!!" 너무 아파서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왼손으로 방어막을 치는 대신 오른손으로 검을 빼어들고 가로로 눕힌 다음 마나를 주입했다. 콰앙!! 마나를 주입한 검과 검이 부딧히자 마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난 것 같은 소리가 났고 허공에 떠 있던 내 몸은 곧장 밑으로 낙하했다. 그러나 플라이 주문을 욀 수가 없는 것이 내 위에서 다시 나에게 수직으로 검을 내리꽂는 '그 존재'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젠장!!" 아까의 충격으로 검까지 떨어뜨린 상태에다 오른 쪽 팔까지 시큰거려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온 몸에서 마나를 뿜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어디선가 검은 기운이 날라와 '그 존재' 와 충돌했다. 그리고 밑으로 떨어져내리는 나를 부드러운 바람이 감싸앉아 천천히 땅에 내려줬다. "어?" 땅에 부드럽게 착지한 나는 누가 나를 구했는지 알기 위하여 시선을 돌린 나에게 왠 검은 머리의 사람과 초록빛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누구지?" 둘 다 내 쪽으로 등을 보이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들을 기른 그 뒷모습들이 왠지 굉장히 낯이 익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아시리안님!!" 언제 왔는지 반담이 달려들어 나를 들고 뛰어서 그 장소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꼬맹이 신관 앞에 내려노았던 것이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듯한 사르하가 달려들어 나에게 치유의 기를 내뿜었다. 청량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밝고 성스러운 빛과 함께 내 양팔속으로 스며 들었고 그제서야 나는 팔들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고마워!!" 사르하에게 진심으로 미소를 띄우며 말하자 그녀 대신 옆에 있던 애쉬 녀석이 불쑥 말을 꺼냈다. "고맙다는 말은 저 사람들에게 먼저 해야 할 거요. 그들이 당신을 구했으니까..." 그제야 두 사람이 생각 난 나는 나 대신 '그 존재'와 맞서고 있는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라리오?" 막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내는 저 녀석은 분명히 엘프의 마을에서 잠깐 만났던 류미르였다. '그렇다면 다른 쪽은?' 손에 검 대신 검은 마나를 뿜어내어 검 모양을 형성한 채 서 있는 검은 머리의 녀석에게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너...?" 그러자 내 목소리를 들은 그 녀석이 '그 존재'를 매섭게 노려보던 시선을 나에게 획 돌렸다. "아린~~!!" 그리고는 다 큰 녀석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채 나에게 폴짝 달려들어 안겼다. "보고싶었어~~!!" "세... 이몬?" "웅!!" 확신 없는 목소리에 크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반응을 보니 분명히 세이몬이었다. "류미르?" 그리고 우리 앞에 바람의 장벽을 형성하고 있던 녀석이 싱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다, 아린." 나는 잠시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고 있다가 황당한 음성으로 외쳤다. "왜 다 일루 모인거야~~?" 제 17화 또 다시... "너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나에게 매달리는 세이몬을 떼어놓으며 류미르에게 물어봤지만 류미르는 '그 존재'를 상대하느라 뒤돌아 보지도 않았고, 대신 세이몬이 입을 열었다. "아린 찾아 왔지." "어떻게?" "류미르가 여기 오면 어디 있는지 알수 있을거라 했는걸? 그 말대로 오니까 아린 맞났네." "그랬어?" "웅!!" 세이몬은 나보다 키가 반뼘쯤 더 커 있었다. 거기에다 머리도 더 길어졌고 얼굴도 성장해 있었다. 예전에는 나보다 키도 작고 얼굴도 17세쯤으로 어려 보였었는데 이제는 류미르나 이 녀석이나 모두 나보다 더 컸보인다. 덕분에 전에는 류미르가 첫째, 내가 둘째, 세이몬이 막내라고 하면서 다녔는데 이제는 내가 막내가 된 것만 같았다. "너.. 많이 컸구나?" 갑자기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느낌과 함께 이들이 인간이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는 서늘한 감정과 함께 이들이 인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나지는 못했을테니까... "그치? 하지만 봐봐. 류미르도 꽤 많이 성장했어." "그래, 그래." 싱긋 웃으며 류미르를 가르키는 세이몬에게 나도 생긋 웃어주는데 류미르만 화가나서 소리쳤다. "이봐, 이봐, 감격적인 해후는 그쯤해두고 나좀 도와주는게 어때? 나 혼자서는 힘들단 말야!!" 그제야 여기가 어디인지 깨달은 나와 세이몬...!! "앗, 미안. 지금 간다!!" "좀만 버텨!!" 세이몬은 걸치고 있던 여행용 검은 망토를 멋지게 펄럭이면서 멋진 폼으로 롱소드를 스르릉 꺼내들었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듯한 검신이 무척이나 검어서 어느것이 손잡이고 어느것이 검날인지 조차 구분이 잘 안되는 검이었다. 내가 놀라서 보는 시선을 느낀 듯 세이몬이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이 검 멋지지? 내가 집에서 슬쩍해온 마검이야." 예전에는 저렇게 싱긋 웃을때는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제는 저렇게 싱긋 웃으니까 멋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몰래 하는건 여전한 거 같다. "괜찮겠냐?" "괜찮아, 괜찮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손짓까지 하더니 곧바로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는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뜬 분위기였었는데 세이몬의 표정 하나가 바뀌자 그의 주변을 맴돌던 분위기도 착 가라앉음과 동시에 검에서 날카로운 마기가 솟아 올랐다. "류미르, 방어벽 치워. 내가 나간다!!" "오케이. 하나, 둘, 셋!!" 류미르가 셋을 셈과 동시에 바람의 상급 정령이 형성하고 있던 방어막이 사라지면서 세이몬이 솟구쳐올랐다. 검을 곧추세우고 뛰어오르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날렵하고 안정되어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만들 지경이었다. "저녀석... 언제 검술까지 익혔지? 전에는 주먹쥐고 무조건 달려들기만 했었는데..." 놀란 표정으로 세이몬이 달려드는 것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류미르가 다가와 말을 받았다. "놀랐지? 나도 놀랐어. 정말 대단하더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동안 검술만 죽어라고 연습했나봐." "그런가보네..." 검술만으로는 세이몬이 '그 존재'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파워와 마력이 딸리다보니 세이몬이 하는 공격은 '그 존재'에게 좀처럼 먹히지가 않았고, '그 존재'의 공격은 세이몬에게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가는 바람에 세이몬은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방어를 위주로 하면서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세이몬을 귀찮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 존재'가 순간적으로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찰나 '그 존재'의 눈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제대로 본 것인지 착각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순간 세이몬이 '그 존재' 에게서 헛점을 발견하고 찔러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존재'의 함정이었던 듯, 세이몬이 찔러들어가는 자리에 있던 '그 존재'의 몸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세이몬은 찔러들어가던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 존재'를 지나쳐 가버렸고, 그 틈을 탄 '그 존재' 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왁!!" 세이몬의 너무나 멋있는 검술에 넋이 빠져 그냥 구경만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그 존재'가 나에게 달려드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놀래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류미르가 나를 확 밀쳤다. "위험!!" 그리고 그와 함께 류미르의 몸도 내 쪽으로 쓰러졌는데 그 보다는 '그 존재' 의 검이 조금 더 빨라서 류미르의 등을 길게 그어놓고 말았다. "류미르!!" 류미르의 등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자 다급해진 나는 무조건 류미르를 들쳐 업고 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한번 공격이 실패한 '그 존재'가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몸을 돌려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우갸갸~~!!" 나는 류미르를 들쳐업은채로 재빨리 왼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빠의 팔찌에게 마나를 주입하려는 찰나!! "에어로 붐!!" 바람으로 만들어진 진공탄이 날아와 '그 존재'와 부딧혔다. 퍼억~!! 비록 폭발력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바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물리적 충격에 의하여 '그 존재'는 한순간 몸을 휘청였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괜찮으십니까!!" 스와카였다. "빨리 이 녀석 좀!!"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스와카와 같이 왔던 반담이 류미르를 넘겨 받아 다시 들고 뛰었다. 그 모습을 한번 힐끗 본 나는 검을 빼어들고 그와는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브라스트 웨이브!!" 내 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엄청난 양의 마나를 검이 받아들이더니 마법으로 화하여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불꽃은 점점 더 붉어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노란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하앗!!" 검술이고 뭐고 없었다. 나를 살기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 존재' 에게 달려들어서는 두 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콰과광~~!! '그 존재'의 마나가 감싸고 있는 검과 내 검이 부딧히자 커다란 폭음과 함께 강한 충격파가 일어나면서 일대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내 양 팔에도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크윽!!"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하마터면 팔에 힘이 빠져버려 검을 놓칠 뻔 했다. 하지만 여기서 검을 놓친다면 남는 건 죽음뿐이기에 입술을 악물고 마나를 양 팔쪽으로 보내면서 버팅겼다. 입 안으로 찝찔한 맛이 퍼져나갔지만 신경쓸 겨를도 없이 '그 존재'의 살기어린 눈을 마주보았다. 예전에... 내가 아직 해츨링이었을때... 딱 한번 어른들 몰래 인간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좋지 못한 사건에 휘말려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할아버지가 제때 와주셔서 겨우 살았었다. 하지만 나에게 해를 가하려한 인간들은 할아버지의 무시무시한 분노를 받아야 했는데 그 때 할아버지가 내뿜던 살기는 나에게 향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 온몸이 덜덜 떨렸었다. 그나마 지금은 성룡이 된 지 10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살기를 마주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1미터도 안되는 거리에서 눈을 마주대하고 있는 나는 서서히 공포에 질려갔다. 팔이 아픈것이나 입 안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단지 그 눈빛이 온 몸을 마치 갈기갈기 찢어놓으려는 것만 같아 몸이 덜덜 떨릴지경이어서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처음 검을 맞대었을때에는 정 중앙에서 힘겨루기를 하던 검들이 서서히 내쪽으로 밀려왔다. "큭!!" 힘들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울고싶은 심정이 내 얼굴에 고스란히 들어났는지 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그 존재'의 입술이 말려올라가며 잔인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손에 힘을 더 주자 나는 이번에는 뒤로 한걸음이나 주륵 밀려났다. '으윽... 더, 더 이상은...' 못 버틸것 같았다. 이제 죽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 시야가 뿌얘졌다. 그러자 더욱 더 크게 미소를 짓는 '그 존재'... '이제 끝...' 이야.... 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 존재'의 잔인한 미소가 크게 일그러졌다. '그 존재'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져 크게 떠졌고 검을 쥐고있던 손에서 힘을 서서히 빼냈다. 덕분에 힘이 빠져나가던 나는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설 수 있었다. '그 존재'는 내가 얼른 뒤로 물러나서 기운을 차리려고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그 존재' 복부에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검 끝을 볼 수 있었다. 암흑처럼 새카만 검날의 끝.. "세이몬?" 바싹 마른 입술에서 힘 없이 이름이 흘러나오자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아린?" '그 존재'의 복부를 뚫었던 검 끝이 다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세이몬.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 핏방울이 또르르르 굴러떨어졌다. "크윽~~!!" '그 존재'는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세이몬을 바라보면서 한걸음, 두 걸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 달려든다면 '그 존재'를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몸을 지탱하는 것도 힘겨웠다. 그래서 세이몬에게 부탁하려고 그를 바라보니 그가 무지 창백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실핏줄이 흐르고 있어 밤에 봤다면 귀신인줄 착각할 정도였다. "하하하, 저 녀석의 방어막을 뚫는게 쬐께 힘들더군."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세이몬의 몸은 서서히 앞으로 쓰러졌다. 녀석의 몸도 심히 안 좋은 상태였었나보다. "그랬냐?" 다시 고개를 돌리니 '그 존재'가 자신의 복부를 움켜지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야 겠네요. 그쵸?" 생긋 웃어주니 '그 존재'의 눈빛이 한번 더 희번뜩 하고는 공간이동 해버렸다. "에구... 살았... 구나..." 온 몸에 긴장이 풀어지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왠지 이놈의 땅이 나에게 반한 듯 불쑥 튀어올라왔다. '오지 마, 임마!!' 소리내어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어서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빠의 얼굴이었다. "괜찮아?" "흠... 저 살았군요?" 아빠의 얼굴이 안도감으로 인하여 부드럽게 풀렸다. "그래, 그 정도에 죽으면 어쩌냐? 아직 얼마 살지도 않은 녀석이..." "후... 이번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너무 쉽게만 생각했나봐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부축해 주는 동시에 편히 앉도록 내 등뒤에 쿠션들을 받혀주었다. 그제서야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느새 옮겨졌는지 이 곳은 아빠 저택의 내 방이었다. '하긴, 그러니 아빠가 곁에 있는 거겠지만...' "뭐, 그 쪽도 자신의 목숨이 달린 거니 죽기살기로 덤볐겠지... 그리고 쉬웠으면 네 할머니께서 왜 그 분의 힘을 남기고 가셨겠냐? 어쨌든 이번에도 수고했다. 비록 결말은 내지 못했지만..." 아빠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자 기분이 좋아져 헤헤 웃었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지자 떠오르는 녀석들이 있었다. "아, 애들은요?" "애들? 아아... 엘프 녀석 하나하고 마족 녀석 하나?" "예. 아, 아빠? 혹시 마족애 정체를 밝히신건....?" "그냥 입 다물고 있어줬다. 덕분에 녀석은 마법사에게 치료를 받게 해야만 했지. 쪼끄만 신관 계집애가 고개를 갸웃 거리길래 녀석이 가지고 있는 마검 때문일거라고 둘러댔다." 아빠의 말에 나는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후후후, 감사 합니다. 역시 아빠가 최고예요. 그럼 그 애들은?" "지금 손님방에서 쉬고 있을거다. 그런데 아린아?" "예?" "그 애들말인데... 혹시 예전에 너랑 같이 다니던 그 꼬맹이 녀석들 아니냐?" "아... 아빠도 그 애들 만난 적이 있었죠? 에스라 왕국에서.. 예, 맞아요. 이번에 다시 만났지 뭐예요?" 아빠는 뭐가 맘에 안 드는건지 살짝 찡그린 얼굴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으래? 흠... 네 곁에 붙어 있는건 맘에 안 든다만, 이번 일에 쬐끔이나마 도움이 될 테니 그냥 두기로 하마." "후훗, 고마워요. 아, 그런데 아빠? 나 이번에도 추적 못 했어요. 어쩌죠? 기껏 새로 만들어진 단서를 놓쳐버렸으니..." 내가 미안한 - 왜 미안한 지는 모르겠지만... -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씨익 웃자 아빠가 피식 웃었다. "괜찮다. 네가 싸우느라 정신 없는 동안 편안히 구경만 한 마법사 녀석이 추척마법을 펼쳐놓고 있었으니까." "응? 마법사요? 아, 스와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녀석이 대충 소재를 파악해놨더구나. 그러니 몸을 추스린 다음에 한번 가보도록 해라." "예. 하지만 지금은 먼저 그 애들부터 봐야겠어요."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내가 침대에서 내려오자 아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라. 나는 할 일이 좀 있어서 서재에나 가봐야 겠다. 참, 몸이 아직도 불편하면 시녀라도 하나 불러줄까?" 침대에서 내려와 근처에 있던 옷걸이에 걸린 가운을 걸쳐 입는 동안 다리가 약간 후들거리는 것 외에는 괜찮은 것 같아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애들이 있는 방을 모르니 안내할 사람 하나는 불러 주세요." "그래, 내 나가면서 들여보낼테니 조금 기다리고 있어라. 아, 뭐 좀 먹을래? 배 고프진 않아?" 아빠가 나가려다가 깜빡 잊었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나는 내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는지 잠시 기다려보다가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자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신이 없는지 배 고프지는 않아요. 나중에 고프면 그때 먹죠, 뭐."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는 내 방문 고리를 잡아 열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상처가 다 치유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본체일때 보다는 회복이 빠르진 않을테니 아직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예." 아빠가 문을 닫고 나간 후 나는 침대 근처에 있던 안락 의자에 앉아 시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한참동안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우... 잠에 취한 것만 같아..." 잠에 취해 본 사람만 알겠지만 그거 머리가 띵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게 할것이 못 된다. 이마에 양 손을 얹어 지끈지끈 거리는 머리를 누르고 있는데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이제는 얼굴이 익숙한 내 전속 시녀가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흠... 그런 것 같아.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하루쯤 되셨어요. 어제 아가씨가 실려오셨을때 주인님께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아세요? 이성을 잃으시고는 안절부절 못하시는데 그런 모습 처음 봤어요." "그.. 랬어?" "예. 아가씨를 치유한 다음에도 깨어나지 않으시니까 신관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셨다니까요." '신관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아빠의 모습이라...' 상상이 안 됐다. "아가씨가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집안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아마 모르실거예요." 그녀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당연하지... 난 자고 있었으니까...' 나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도움을 받아 간단하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 같으면 아빠가 옷을 골라주고 머리도 손질해주었지만 오늘은 그냥 나가신 걸 보니 아까는 몰랐었지만 아마도 정신이 없었던 듯 했다. '후후후, 되게 기분 좋네...' 덕분에 오늘은 시녀가 대신 머리를 빗겨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안내를 받아 세이몬과 류미르가 머무는 방으로 갔다. 아빠의 배려인지 아니면 정신 없는 상황이어서 신경을 못 쓴 탓인지 세이몬과 류미르는 한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가니까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둘 다 괜찮아?" 혈색은 좋아보였지만 아직 눈동자에는 기운이 없어보이는 둘이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아.. 그럭저럭 견딜만 해." 세이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류미르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야 검상만 입었을 뿐인걸? 너희들 처럼 그와 맞선 것도 아니고 말야. 아린은?" 나는 그 애들이 앉은 탁자에 앉으면서 대꾸했다. "난 아직 어질어질 해." 그리고는 시녀를 돌아보고 말했다. "내가 먹을 것도 좀 가져다 줘. 나도 먹게." "알겠습니다." 시녀가 고개를 숙여보이고 방을 나가자 나는 애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세이몬은 정말 오랜만이다. 너 되게 멋있어졌는 걸? 실력도 많이 늘었고 말야..." 세이몬은 예전에 보였던 앳되고 귀여운 모습이 사라졌고 대신 날카롭고 이지적인 미남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 안경만 걸친다면 학자라고 해도 믿겨질 것 같았다. "헤헤헤, 그래?" 하지만 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초롱초롱한 눈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긴 나를 만나러 왔다 치고, 너희들은 어떻게 만난 거야?" 제 목 : [연재] 아린 이야기 2부 - 제 17화 또 다시... (3) "그나저나 여긴 나를 만나러 왔다 치고, 너희들은 어떻게 만난 거야?" 나의 물음에 류미르와 세이몬이 번갈아 가며 대답한 것을 종합해 보자면, 세이몬은 마계로 돌아간 뒤 당연하겠지만 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벌이라는 것이 20년 간 동굴에 갖혀 있는 것과 - 이건 이해가 갔다. 여기에서도 흔한 벌이니까...- 아벨리아 마족 중에서 혹독하게 가르치기로 소문난 마족에게 검술을 수련 받는 것이었단다. 기간은 그 마족이 하산(?) 하라고 할 때까지... - 이건 이해가 안 갔다. 얼마나 지독하게 가르쳤으면 가르침을 받는 것이 벌이 되었을까? - 하긴 그것으로 세이몬이 어떻게 그렇게 검술 실력이 뛰어 나게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기는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어언 70년이 흘러서야 형벌을 다 마칠수 있었다고 했다. 똑, 똑, 똑 "아가씨, 식사 가져왔습니다." "아아... 들어와." 내 시녀가 내 식사를 가져오는 바람에 대화는 잠시 중단이 되었고, 그녀가 내 앞에 음식을 놓고 나가자 다시 시작되었다. "그럼 그 뒤에는 뭐 했어? 넌 여기에 100년만에 온 거잖아?" "아아.. 그게..." 세이몬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교육 받았어. 원래는 성년이 되면 일정 기간동안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나는 벌 받느라고 70년이나 늦게 받게 되었거든... 덕분에 일반 마족들이 받는 거에 비해 거의 두배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받게 되었지만 말야..." 여기에서 나는 마계 또한 인간계와 시간의 흐름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마족들도 인간들 처럼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 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럼 마족들은 마계에 사는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을라나? 세이몬은 그렇게 교육을 끝내고 나서 인간계로 넘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세이몬... 궁금한게 있는데 마족들은 인간계로 맘대로 드나들 수 있어?" 평소 마족보는 것이 무지무지 어렵다는 것을 볼 때 마족들은 인간계로 함부로 넘어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세이몬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친구네 집에 놀러온 양 말을하는 것을 보니 어리둥절 했던 것이다. "응." "뭐?" "그게 정말이야?" 세이몬의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쉽게 나오는 말에 류미르와 나는 무척이나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세이몬은 몰랐냐는 듯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았다. "에? 몰랐던 거야? 능력 있으면 가능해. 넘어오는게 힘들어서 그렇지 넘어오는 거에 특별한 제제는 없어. 아린, 너네 종족만 해두 마계에 갈 수 있을걸? 하지만 못가게 하는 특별한 제제 같은건 없지 않아?" "에? 우리? 뭐, 그렇기야 하지만... 그럼 왜 마족들은 인간계로 안 넘어오는데?" 나는 지금까지 마족들은 호시탐탐 인간계로 넘어오고 싶어하는데 못 넘어오게 막고 있는 제제 같은게 있어서 못 오는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족들은 인간계로 와서 이곳을 점령하길 무척이나 원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건 누가 가르쳐줘서 그렇게 알고 있는게 아니라 예전에 내가 인간이었을 때 읽었던 판타지 소설 영향이었던 것 같았지만... 그걸 지금에야 깨달은 나도 참 멍청하다. 하지만 류미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놀란 얼굴로 내 질문에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이몬은 오히려 황당하다는 표정을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하러 넘어와? 나야 맨 처음 도망치느라 나도 모르게 넘어온 거구, 지금은 너희들 만나러 넘어온 거지만... 마족이 특별히 인간계에 넘어와야 할 일이라도 있어?" 그렇게 되 묻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옆에 있던 류미르는 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있더니만 말까지 더듬으면서 물었다. "내, 내가 알기론... 마계는 이 곳보다 환경이 안 좋아서... 기회만 있으면 와서 이 곳을 차지하길 원한다고 하던데? 아, 아니야?" "누가 그래? 그런 황당무계한 말은 어디서 들었냐?" "아, 아니냐?" "아니야. 물론 마계가 이 곳보다는 환경이 거칠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불편함을 느낄 정도가 아니고... 더욱이 그 곳이 익숙한 우리는 여기가 더 좋다고도 생각하지 않는걸... 게다가 우리 마족은 힘으로 승부하는 건 좋아하지만 인간들 처럼 누군가를 억누르고 지배하고.. 뭐, 그런데는 흥미 없어." 류미르와 나는 놀란 시선을 한번 교환한 뒤 다시 세이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류미르가 계속 물었다. "그럼, 이 곳으로 넘어와서 사람들과 계약을 맺어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뭐 그러는 건 뭐냐? 게다가 가끔 이곳으로 온 마족들은 뭘 부시거나 파괴를 일으키는건 뭐야?" 그러자 세이몬은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곧 잘 생각이 안 나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글쎄... 내가 여기 얼마 없어서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인간들 사이에도 계약 같은게 있잖아? 아니면 약속이라던가... 뭐, 그런걸 마족들과 한 거 아냐? 나도 마족이 인간들이랑 그런 걸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으니까... 게다가 그런 안 좋은 일은 인간들도 하는 거 아니냐?" "하, 하지만.. 계약할 때 재물이 뭐 어린애의 피라던가 심장, 처녀 같은 거라던데?" 류미르는 이제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우물쭈물 물었다. 그러자 세이몬 왈... "별식을 좋아하나 보지. 나도 이곳 짐승들의 심장은 맛있던데? 뭐, 아직 인간 것은 못 먹어봤지만..." "그, 그럼... 그게 그냥 너희들 음식이었단 말야?" "그렇겠지... 나도 잘 모르지만, 마족들 중에서도 미식가는 있거든... 그들에게 별식 주겠다고 하면 무지 좋아하지 않았을까?" 류미르는 멍 하니 있다가 허탈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야 원...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잖아?" "그러게... 역시 잘 모르면서 단정하는 건 잘못된 거야." "아린, 그런데 그렇게 알면서 마족을 친구로 삼은 우리는 뭐냐?" "별종이지 뭐. 우리 심장을 마족 미식가들에게 주면 무지 좋아하겠군? 아, 그건 그렇고... 세이몬은 그렇게 해서 인간계에 왔다고 치고 류미르랑은 어떻게 만난 거야?" 그러자 류미르가 허탈한 표정을 지우고는 다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싱긋 웃었다. "아아, 나? 난 아린의 충고를 받아들여 엘리사에게 딱 잘라 거절했었지. 그랬더니 내 집에 들어앉아 하루종일 대성통곡을 하길래 그날로 마을을 빠져나왔어." "엘리사? 거절했다고? 아아, 전에 너희 마을에 갔을때 날 네 첩으로 인정해주겠다고 한 그 맹랑한 꼬맹이 엘프 말하는 거야?" "그래, 바로 그 애. 하도 울고불고 난리치길래 슬쩍 마법으로 재워놓고 도망쳐 나왔지. 그런데 산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산 속을 헤매고 있는 세이몬을 만났지 뭐야?" "류미르, 전에도 말했지만 난 희미하게 느껴지는 엘프의 기운을 쫓아서 간거였다니까." "에? 세이몬, 너 엘프의 기운을 느껴? 난 엘프의 기운같은 건 모르겠던데?" 내가 또 한번 놀라서 세이몬을 바라보자 류미르가 웃으면서 정정해 주었다. "엘프의 기운이 아니라 정령의 기운을 느낀 거야. 우리 하이 엘프들이야 상급 정령까지 다루니까 정령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거지. 그걸 쫓아온 거야." "정령이나 엘프나..." 세이몬이 작게 투덜투덜 거렸다. "잠깐만,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령술사가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산으로 간 거야?" 내가 혹시 엘프들에게서 느껴지는 정령 기운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다른건가 하고 그걸 느끼는 세이몬이 대단하게 느껴저 경의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해줬다. "그거야... 전에 류미르가 엘프들은 산 속에서 산다고 했잖아. 그래서 산들만 찾아다녔지." "에? 그런 거야?" 내가 실망해서 그러자 의아한 눈으로 세이몬이 날 바라봤다. "응, 그런 거야. 그럼 뭘 바랬는데?" "하하하, 암 것도 아냐. 아, 그건 그렇고... 류미르, 그 엘리사라는 애 안 쫓아올까? 네가 도망쳤다는 걸 알면 가만 안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얼른 류미르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류미르는 끄떡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아아, 괜찮아. 그 앤 성년식을 치룰때 까지 마을에서 못 나올걸? 내가 가출한 뒤로 또 가출하는 애들이 생길까봐 마을 규칙과 감시망이 철저해졌거든. 그러니 40년은 까딱 없어." "그 뒤가 문제겠네..." "하하하, 뭐 어떻게든 되겠지..." "꼭 누구누구 처럼 무책임하군?" -쳇... 무책임 해서 미안하다...--;;- 내가 콕 찝어서 말하자 류미르는 그냥 웃어넘기려 했다. "하하하..." "아, 그건 그렇고 아린?" 세이몬이 갑자기 생각 났다는 듯이 물어왔다. "웅? 왜, 세이몬?" "어제, 그 사람 누구야? 왜 너 죽이려고 했던, 대단하기도 하고 이상한 마나를 가지고 있던 사람말야." 류미르가 그 얘긴 안 한 듯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세이몬에게 해줄까 고민하다가 다시 설명하기 귀찮아서 슬쩍 넘기기로 했다. "아아, 날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야." "뭐? 아니 왜 아린을 죽이려고 해?" 세이몬은 무척이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내가 그 사람을 죽일려고 하거든." 말을 안 해줘서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세이몬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음... 아린이 죽이려고 하는 정도면 굉장히 나쁜 사람이구나? 알았어. 나도 아린을 도와줄께. 그 사람 무지 강하니까 아린 혼자서 힘들꺼야." 내가 죽이려 한다는 것 하나로 나를 믿어주고 '그 존재'를 나쁜 사람으로 단정하는 세이몬에게 놀랍기도 하고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 세이몬." 그러자 세이몬은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었다. "헤헤헤, 뭘 이런걸 가지고... 우린 친구잖아?" "그래. 친구지... 난 네가 친구라는 게 무척 기쁘다." 내가 진심으로 웃자 세이몬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응, 나도 그래 아린." "어이? 왜 나만 따 시키냐? 나도 여기 있다고." 어쩌다가 따가 되어버린 류미르가 뾰루퉁하니 끼어들었다. 다음날, 슬슬 출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전갈이 왔다. 루실이 본낸 것인데 출발하기 전에 시간이 있으면 잠깐 들려달라는 거였다. 뭐, 특별히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어려울 것도 없었기에 나는 전갈을 받자마자 곧바로 준비하고 왕성으로 갔다. 엄밀히 말하면 왕녀가 머물고 있는 태자궁이었지만... "어서 오십시오, 플레이저 자작님. 이렇게 자작님을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내가 태자궁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드럼통보다도 더 허리둘레가 클 것 같은 시종장이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살이 많은데도 허리가 90도까지 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허리를 폈다. 덕분에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볼 수 있었는데 딱 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무지 두툼하고 커다란 그의 입술이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메기입!!' 굴곡이 없이 완전 똑같은 두께로 입을 감싼 입술이 옆으로 쫘악 벌어졌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 태자궁을 파라다이스처럼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 하고 있는 시종장 파라다이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파라다이스..." '웃긴 넘... 언니도 참 희안한 녀석을 데리고 있군...' "왕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테니 따라 오시지요." "그러죠. 부탁해요." 자신을 파라다이스라 소개한 시종장은 그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가벼이 몸을 돌려 사뿐사뿐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하.하... 대단한 능력이군... 저것이 바로 무협지에서 많이 나오는 허공답보일 거야.' "왕녀님, 플레이저 자작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장이 커다란 문 앞에서 안을 향하여 외치자 곧 익숙한 루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모셔라." 안은 커다란 응접실이었다. 아마 루실의 취향인 듯 커다란 창문에 달린 레이스 커튼이나 루실이 앉아있다가 막 일어난 커다란 소파는 모두 베이지색 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 곳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장이나 탁자 등은 금박 무늬가 새겨져 있는 하얀 대리석 이었다. 덕분에 응접실은 깔끔함과 함께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아린." 루실이 방긋 웃으며 나를 맞았다. "여전히 예쁘네요, 언니. 안녕하셨습니까, 대공저하?" 루실 옆에 같이 있던 에릭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플레이저 자작." "자자,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앉도록 해. 파라다이스, 여기 차좀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왕녀님." 파라다이스라 불린 시종은 약간 과장된 몸짓으로 정중히 절을 한 뒤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나는 약간 황당함이 깃든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니는 재미있는 사람을 시종장으로 데리고 있네? 약간 황당하기는 하지만 심심하지는 않겠어." "호호호, 좀 과장이 심하지? 약간 아부가 심하고 욕심이 많긴 하지만 일처리는 확실한 사람이야. 그건 그렇고 아린, 이번에 크게 다쳤다며? 몸은 좀 어때?" 그제야 나는 루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헤에... 벌써 이야기를 들었나 보지? 괜찮아. 워낙 건강체질이라서 좀 누워있었더니 멀쩡해졌어." "이번에도 큰 공을 세우셨군요." "별말씀을요, 대공저하. 그게 제 임무인데요." "그래도 수고 했어. 이번에는 너 혼자서 나섰다며? 그 레드포드 자작은 가만있고..." "뭐, 그렇게 됐어. 그래도 이번에 내 친구들이 와서 도와줘서 무사히 끝낼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정말 큰일날 뻔 했지 뭐야." "아아, 그 갑자기 나타났다는... 마검을 가진 검사와 엘프 말이구나?" "응, 알고 있네? 그 애들이 전에 여행을 잠깐 같이 다녔던 친구들인데 이번에 우연찮게 만났어. 다행히도 이번 일을 그 애들이 도와준대." "잘됐구나." "응, 덕분에 한 시름 놓게 되었어... 솔직히 지금 팀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었거든." "그럼 이번에 같이 가겠군요?" "예, 그렇게 하기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루실 부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쾅!!' 소리와 함께 거칠게 열렸다. 놀란 우리가 문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 곳에서는 서슬이 시퍼런 자카르가 검을 빼어들어 파라다이스를 겨눈 채 서 있었다. "자벨리안경? 무슨 일입니까?" 자카르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안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걸어가며 물었지만, 자카르는 그에 대한 대꾸는 하지 않고 살벌한 목소리로 시종장에게 명령했다. "들어가라." 파라다이스 시종장은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고 그가 다 들어오자 자카르는 응접실의 문을 꼭 닫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에릭이 자카르와 시종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다시한번 묻자 이번에는 자카르가 제대로 대답해주었다. "이 자가 문 곁에 서서 옅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한번 시종장을 노려보자 시종장은 이번에는 하얗게 질리더니 루실에게 와서 매달렸다. "왕녀님,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저는 단시 시녀가 다과를 가지고 오길 기다리고 있으면서 그 전에 혹시 왕녀님께서 시키실 일이 있을까봐 문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제가 그 동안 왕녀님께 얼마나 충성을 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가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자카르가 물었다. "거짓말 하지 마라. 그렇다면 왜 문에 귀를 대고 있었던 거지?" "전 단지 저를 부르실 때 잘 들리지 않을 까봐 그랬던 겁니다. 제가 요즘 청력이 낮아졌거든요." "흥, 그렇다면 계속 그렇고 있을 것이지 갑자기 문에서 귀를 뗀 다음 주위를 살피고 어디론가 가려고 했던 것은 뭐지? 네 녀석은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 않느냐?" 파라다이스 시종장은 두 팔까지 내 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오해십니다, 자카르경. 오해세요. 전 시녀가 너무 늦게까지 오지 않아 왜 안 오나하고 알아보려 했던 겁니다. 믿어..." 그러나 그는 말을 끝까지 다 할수가 없었다. 루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힐을 신은 발로 있는 힘껏 그의 턱을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퍼억~~ "우객~~!!" 독특한 비명을 지르면서 시종장은 옆으로 넘어지더니 아마 입 안을 깨문듯 피가 나고 걷어차여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턱을 부여잡고는 끙끙 거리며 일어났다. "아이오오... 아이오오오..." 아마 혀를 깨문 듯 그는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루실은 그런 모습을 가증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네 녀석이 그랬단 말이지? 그래, 도대체 누구에게 옅들은 것을 말하려고 했던 거지? 대답해!!" "우어, 우어, 우어어..." 시종장은 턱을 부여잡고 나오지도 않는 말을 열심히 내뱉으며 고개만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루실의 눈이 더욱 더 차가워졌다. "죽고 싶으냐?" "우어어어... 우어어어어..." "이, 이녀석이 그래도~!!" 루실의 눈에서 불이 번쩍인다 싶더니만 다시 루실의 발이 올라갔다. 그러자 사색이 된 시종장은 재빨리 땅에 엎드려버렸고 그런 그를 발로 차지 못하게 된 루실은 그의 등을 하이힐로 짓밟아 버렸다. "꾸에에엑~~!!" 에릭 대공과 자카르는 그 모습에 식은땀을 흘렸고 나는 실실 웃으며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실토도 못 하고 분풀이가 될것만 같은 시종장을 가엽게 여겨 루실을 불렀다. "저기 언니?" "응?" 루실은 여전히 시종장의 등에 발을 올린 채 나에게 대답했다. "그 사람 실토도 하기 전에 죽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자기 운명이려니 하겠지." "그래? 하지만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냥 하지 말까?" 그제야 루실은 나를 돌아보더니 슬그머니 발을 내렸다. "그래? 그럼 아린이 실토시켜 줘." "기꺼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생글생글 웃으며 파라다이스에게 다가가갔다. 그러자 시종장은 불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머, 너무 그렇게 겁 먹지 말아요. 난 당신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흠, 이런... 입에서 피가 나네? 그럼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겠죠? 힐링!!" 내가 그의 입가에 대고 주문을 외우자 곧 내 손에서 나온 하얀 빛이 그의 입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어때요? 좀 괜찮아요?" 그러자 그가 넙죽 나에게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자작님. 자작님께선 저의 결백을 믿어주시는 군요." "물론이죠. 단지 문제가 있다면 당신의 충성을 받는 자가 언니가 아니라는 점이지만..." 시종장의 몸이 움찔하더니 서서히 고개가 올라와 불안한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자, 자작님?" 그런 그에게 나는 생긋 웃어보이고는 나와 같이 와서 지금까지 내 뒤에 서 있었던 알렌과 흄을 바라보았다. "알렌, 흄. 이 탁자좀 치워 주겠어요? 언니, 괜찮죠?" 루실이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허락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찬가지로 의아한 표정을 짖고 있던 알렌과 흄이 내 옆에 있던 탁자를 멀리 치웠다. 그러자 탁자가 있던 자리에는 빈 공간이 생겨났고 나는 그 자리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지 형상!!' 그리고 겉으로는 진지한 어투로 중얼중얼 거렸다. "타오르는 마계 지옥의 업화속에서 살아가는 사악한 마물들이여. 이제 나에게 너희들의 모습을 드러내라!!" 물론 이런 주문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난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인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탁자를 치운 빈 공간 바닥에 점차 검은 연기가 보글보글 솟아올라 깔리고 그 검은 연기들이 모여 둥글고 어두운 터널을 만들어내자 그것이 단지 환상인 줄 모르고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아마도 진짜 차원의 통로가 열려 마계가 보이는 것이리라 생각할 것이다. 잠시 후 그 안에는 예전에 내가 영화속에서 봤던 에어리언들과 티라노 사우르스, 삼엽충 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겉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음향 효과로 기이한 울음소리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키아아아악~~ 시종장을 돌아보니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손은 눈에 보일정도로 크게 덜덜 떨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 보는 것들이겠지... 꿀꺽~ 긴장된 표정으로 침까지 삼키는 그를 나는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어머나,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이 진실만 말해 준다면 난 당신을 저 속으로 밀어넣는 아주 잔인하고 몰인정한 짓은 하지 않을테니까." '밀어봤자 응접실 바닥에 코가 깨질 뿐일텐데...' 꿀꺽~ 다시한번 시종장이 침을 삼켰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뭐, 밑으로 내려가봤자 별 일이야 있겠어요? 최악의 상황이래봤자 죽.는.것.일 테고 잘만 살아남는다면 당신은 아마 최초로 마계에서 살아난 사람이 되겠지요?" "저, 저..." 시종장의 입이 열렸다. "예?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너그럽게 묻자 시종장이 바닥에 넢죽 업드렸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왕녀님. 저는 정말 하고싶지 않았는데 국왕폐하께서 엄명을 내리셔서 정말 어쩔 수 없이...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사 목숨만은..." 그러자 루실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자카르에게 말했다. "자벨리안 경, 저 자식은 당신 손에 맡기도록 하죠." 자카르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제 손에서 처리하는 것 보다는 저 안으로 밀어 넣는게 어떻겠습니까?" "히익!!" 시종장이 헛바람을 삼켰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파라다이스.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터널 위로 한발짝을 내 디디자 모든 이들이 놀라서 눈이 뚱그래졌다. "무, 무슨?" "아가씨!!" "아린!!" "자작님!!" 그러나 내 발이 그 곳에 닿자마자 공간은 검은 연기와 함께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후후후, 환상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뒤로 그 자칭 파라다이스 시종장은 무지 차가운 표정의 자카르에게 끌려서 응접실을 나갔다. 그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마 당사자와 자카르, 그리고 신만이 아실 것이었다. "아, 참.. 깜빡 잊을뻔 했는데..."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배웅하러 나온 루실이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이 말했다. "응? 왜?" "이번에 네가 가는 곳이 말이지, 자벨리안 경 집안의 영지야. 그래서 너희팀을 자벨리안경이 안내하기로 했어." "아, 그래? 그럼 우리랑 같이 가는 거야?" "응, 공식적인 공지가 지금쯤이면 내려졌을 거야. 그도 실력이 뛰어난 기사이니까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이번에도 잘 다녀와." "응, 갔다와서 봐." 제 18화 왜들 그러지? 슬슬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어느날의 아침이었다. 쌀쌀해진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아빠 저택 앞 마당에는 일명 '살인마 퇴치 결사대!!' - 이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정말 작명 센스 하나는 꽝이다. - 가 모였다. 지휘자는 애쉬 레드포드 자작. 쳇, 이건 분명이 녀석이 남자라고 국왕이 지휘자로 갖다 붙인걸 거다. 하지만 난 녀석의 지시에 따를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까. 그리고 부지휘자 아시리안 플레이저 자작. 흥 이다. 대원은 마법사 용병인 스와카, 전사 용병인 반담, 레드포드가의 견습기사이자 뛰어난 정령술사인 아트란 마한드라, 엘라이드의 꼬맹이 신관 사르하, 내 경호원이랍시고 따라 붙은 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하게 된 우리의 호프(?) 류미르와 세이몬. 안내원이자 이번 목적지 영주의 후계자 자카르 폰 자벨리안까지 모두 10명이었다. 원래는 알렌도 끼어들려고 했었는데 인원이 너무 많다는 핑계로 남게했다. 뭐, 브랜이 빠진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었지만... "그럼 이번에도 잘 처리하고 오너라." "그러죠." 아빠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을 몰아 출발했다. 앞장은 스와카와 반담이 섰다. 그들이야말로 여행의 경험이 가장 많고 길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지금 가는 자벨리안 영지는 바이투 산맥과 바다가 닿아 있는 곳이었다. 자카르가 설명해준 건 아니고 아빠가 출발하기 전에 잠깐 지도를 보면서 설명해준 건데, 바이투 산맥 앞에는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제법 큰 강이 흐르고 있어 배산입수(? 맞나여?)의 전형적인 지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거기에 보통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 주위의 땅은 엄청난 옥토라는 사실을 입증하듯 거기 땅도 기름져서 농사가 그냥으로도 엄청 잘돼는데 그 옆에 있는 바다는 난류의 영향권 안에 있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은 산맥이 막아주고 있어서 날씨 또한 매우 따뜻해서 에스라 왕국에서는 흔치 않은 1년에 두번 농사를 짓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다가 바로 옆이니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까지 두루 갖춘 일명 노른자라고 불리는 영지였다. '웅... 여름에 가면 해수욕하기 딱이겠는데... 지금은 가을이니 바다에 들어가기에는 넘 춥겠지? 에이... 아깝다. 앗, 글고보니 여름에 간다구 해도 수영복이 없잖아? 에잉... 이 곳은 해수욕 같은 건 모르겠지? 쳇쳇, 좋다 말았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나 보다. 옆에서 말을 몰고가던 류미르가 슬쩍 자신의 말을 내 말 가까이 붙이더니 속삭였다. "걱정 돼?" "응?"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해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다시 말했다. "걱정 돼냐구... 하긴, 걱정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그 사람... 아, 사람이 아니지? 어쨌든 그 존재 너를 죽이려고 하잖아. 이제까지는 그냥 '방해자'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네가 죽이려 한 다는 걸 안 걸까?" "알겠지... 그러니까 이번에 날 찾아온 거 아니겠어?" 시큰둥하니 대꾸하자 류미르가 약간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의외로 담담하다? 괜찮은 거냐?" "그냥 포기했다고 생각해줘. 지금 내가 아무리 머리굴리며 고민해 봐야 딴 방법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괴로워 해 봤자 나만 손해 아니냐?" "흠... 원래 너희 종족은 다 그런거냐?" "몰라. 내 경우는 무척 드문 일이라서... 어쨌든, 지금 고민하지 말구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어." "그래, 그래.. 뭐,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더 좋은데?" 비어 있던 내 옆에 시커먼 그림자가 생기는가 싶더니 부루퉁한 얼굴의 세이몬이 끼어들었다. 아마 둘만 속닥속닥 하고 있으니까 심통난 듯 했다. "이봐, 세이몬... 너두 이제 다 컸으니 그 어린애처럼 삐진 표정은 짓지 마라. 안 어울려. 예전에야 그나마 어렸으니까 어울리기라도 했지, 그게 뭐냐?" 류미르는 말을 돌리려는 듯 괜히 세이몬의 표정을 트집잡았다. "류미르, 너야말로 그 잔소리 좀 집어치우는게 어때?" 류미르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세이몬이 얼른 심통난 표정을 지우고 싸늘하게 류미르를 노려보았다. "아직 젊은 녀석이 말이야 다 늙은 노인네처럼 이것 저것 트집잡고 잔소리 하는게 힘들지도 않냐? 너 처럼 다 참견하고 다닐려면 되게 바쁠거다." "뭐? 야, 내가 참견 안 하고 싶어도 네가 참견하게 만들잖아."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괜히 별 시시껄렁한 것 까지 다 트집 잡은건 바로 너라구." "별 시시껄렁한 것? 네가 나이에 걸 맞지 않게 어린애처럼 군 것좀 지적해줬더니 시시껄렁한 것으로 치부하냐? 그럼 넌 그렇게 애 처럼 살아라." "누가 애 처럼 산대?" "얘들아~~? 너희들 툭 하면 싸우는거 하~~나도 안 변했구나? 이거 보면 누가 너희들을 다 컸다고 생각하겠니? 아직까지도 유치찬란하게 싸우다니말야... 세월이 헛갔구만... 암, 암, 헛 갔어." 둘 사이에 끼어서 본의아니게 싸우는 것을 구경해야 했던 내가 참지 못하고 둘을 중재할겸 끼어들자, 두 녀석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엥? 왜 그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아린 난 우리는 변했어도 넌 하나도 안 변했다고 생각 했는데..." 류미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고 말 끝을 흐리자 그 뒤를 세이몬이 받았다. "너 되게 변했다? 그게 뭐냐? 애늙으니 같은 말투는... 꼭 할아버지 같아." 할.아.버.지이이이~~~? "시꺼, 이것들아. 너그들이 애 처럼 구니까 내가 늙어 보이는 거잖아? 빨리 저리로 갓!!" 라고 말 함과 동시에 양 발을 들어 양 옆에 있던 녀석들의 말 배를 뻥 차주었다. "우아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아리이이인~~!!" 놀란 말들이 펄쩍펄쩍 뛰자 세이몬과 류미르가 재빨리 고삐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일행들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게 느껴졌지만 콧방귀 하나로 무시해버렸다. "흥!!" 며칠동안 아무 일 없이 우리는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우리 일행은 자연스럽게 몇개의 그룹으로 나뉘고 말았다. 우선은 일명 아린파!! 내 곁에서 항상 붙어다니며 떠들어대는 녀석들과 나로 이루어진 그룹이었다. 물론 나랑 류미르랑 세이몬이었지만... 우리 셋의 결속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아무도 이 사이로 끼어들 생각도 엄두도 내지 못하여 항상 우리 셋만 따로이 놀았다. 그리고 유쾌한 집단!! 항상 일행들을 모두 챙기면서 필요할때는 분위기도 띄우고 중재도 하는, 그러나 평소에는 자기네끼리 즐겁게 떠드는 집단이었다. 스와카와 반담, 그리고 날 따라온 흄과 의외인 것 처럼 보이는 자카르가 그 집단 멤버였다. 그리고 꼬맹이 집단!! 나이또래가 같고 저번 여행으로 많이 친해진 두 꼬맹이들이 그룹 맴버의 전부인 집단으로 이 집단은 자주 유쾌한 집단에 끼어서 같이 놀곤 했다. 마지막으로 따 집단. 어느 집단에도 끼지 않고 혼자 노는 따 녀석... 바로 애쉬였다. 생각해보니 전에 여행을 갈 때도 항상 브랜 옆에서 그만 챙겼지 누구와 특별히 어울린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항상 예의 무뚝뚝한 얼굴로 필요한 말 외에는 항상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워낙 튀는 존재였기에 항상 인식이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혼자 논다고 해도 애도 아니고 해서 어느 누구도 녀석을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 저러려니... 하는 분위기랄까? 그리고 그렇게 확연히 구분이 되었을즈음에 드디어 노숙이 시작되었다. 뭐 다들 노숙 경험자들이었으므로 일행은 아무런 걱정 없이 노숙을 할 수 있었고 모두 다 능력있는 사람들이다보니 하루에 3명씩 이틀에 한번 꼴로 불침번을 서는, 괜찮은 상황까지 연출하게 되었다. 물론 나와 꼬맹이 그룹, 그리고 스와카는 서지 않았다. 체격 좋은 검사들이 6명이나 있는데 애들하고 체력이 빵점인 마법사가 왜 서겠는가? 단지 스와카는 매일 저녁 우리가 노숙하는 주변에 결계를 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나는... 원래 애쉬 녀석이 나도 불침번으로 세우려 했었다. 그러나 워낙 내 지지자가 많다보니... 세이몬 왈. "왜 아린까지 서야 하는데?" 류미르도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기특한 흄 "아가씨 대신 제가 서지요." 꼬맹이 신관까지... "어머나, 숙녀보고 불침번을 서라고 하시다니 매정하시군요. 불면은 미용의 적이라고요." 캬캬캬... 그래서 나도 빠지게 되었다. 기특한 것들... 류미르와 세이몬, 흄은 당연한 거였고... 사르하에게는 나중에 예쁜 목걸이라도 하나 선물해야 겠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노숙을 하기 위하여 자리를 잡았고 저녁을 먹은 뒤 불침번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내일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나는 밤에 잘 자다가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더니 잠이 깨버렸다. 슬며시 눈을 떠 보니 내 옆에서 잘만 자고있는 사르하의 얼굴이 보였고 시선을 돌리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닥불을 지키고 있는 자카르의 모습이 보였다. '흐음... 지금은 자카르 차례인가보네...' 자세가 불편하여 잠이 깬건가 싶어 몸을 바로 누였더니 곧바로 하늘이 보였다. 넓다란 들판에 근처에 있는 모닥불 외에는 아무런 빛도 없는데다가 새벽시간이라서 그런지 별들이 유난히 뚜렷하게 보였다. 마치 나에게로 별들이 쏟아질 것만 같달까? 그런데 운이 좋게도 밤 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별똥별 무리들이 보였다. "헤에..."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앉자 내 기척을 느꼈는지 자카르가 낮게 속삭였다. "별똥별이 다 떨어지기 전 까지 소원을 5번 말하면 그게 이루어진다죠?" 시선을 돌려보니 그도 별똥별을 보고 있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래요?" '헤에... 여기에도 그런 말이 돌다니.. 사람 사는데는 다 비슷한가보네...' 나는 더 이상 잠도 올 것 같지 않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 또 떨어지는 군요." 내가 옆에 앉아도 계속해서 하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가 말했다. "소원 빌었어요?"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옆 얼굴을 바라보며 묻자 그제야 그가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예, 그런데 성공은 못했군요. 자작님은 어떠세요?" "자작은 무슨...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이름 불러요." "그럴까요? 그럼 아시리안님도 제 이름을 불러주실래요?" "그러죠, 자카르님." 내가 생긋 웃자 그도 마주 웃어주더니 곧 모닥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지금 생각난건데... 그 사람 어떻게 했어요? 당신한테 들킨 그 파라다이스라고 하던 시종 말예요." " 그 자식은... 처음에 힘 닫는데 까지 신나게 패주다가 좀 쉰 다음 다시 비오는 날 먼지날 때까지 패준 다음 한대 더 때리고 어디까지 국왕에게 일러바쳤는지 알아내려고 고문을..." 거기까지 말한 다음 자카르는 나를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할까 했지만... 뭐, 국왕 몰래 꾸민 짓 같은 건 없었으니 고문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냥 키메라 연구하는 흑마법 길드에 넘길..." 또 말 끝을 흐리길래 내가 선수쳤다. "까 하다가 안 넘겼죠?" 자카르가 풋 웃었다. "잘 아시는 군요. 그냥 자비를 베푸는 마음으로 곱게 죽여줬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손톱 하나하나 뽑아준 다음 발톱도 뽑아주고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잘라주고 그 많은 살들 좀 회떠주려고 했는데..." 생긴 것 답지 않게 잔인한 말을 술술 내뱉자 나는 조금 놀랐다. "원래 고문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화가 많이 나서 있는 고문 없는 고문 다 생각하신 건가요?" 그러자 자카르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겉보기로는 고문 같은건 절대적으로 싫어하는 정의의 용사로 보이시나 보죠?" 자조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걸 보니 많이 겪어본 일인가 보다. 나는 속으로 찔끔해서는 어색하게 그냥 웃었다. "하하하, 뭐 그런 인상을 안 받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저도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으니까요... 뭐, 저도 남을 괴롭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글쎄요... 정치판에 슬쩍 발을 담그고 있다보니 가끔은 고문을 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한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 시종장 같은 사람?" "그렇죠. 정치판이라는 게 겉으로는 웃으면서 얼마든지 뒤통수 칠 수 있는 세계이긴 합니다만... 그게 좋을리는 없잖아요." 역시나... 사람 사는 곳은 다 같다니까... 자카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더욱이 제 주군을 배반하는 작자들이라면... 더욱 더 용서할 수 없죠." "주군이라면... 루실 언니?" "당연한거 아닙니까? 전 왕녀님의 근위대 대장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자카르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궁금한게 있는데... 근위대는 자신이 지킬 왕족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나요?" "그렇죠. 하지만 왕족의 마음에도 들어야 해요. 기사도 원하고 주군 되실 분도 허락하셔야만 근위대에 책봉되는 거죠." "그래요? 그럼 당신은 루실 언니를 처음 부터 존경해서 언니의 근위대로 들어간 거군요?" 그러자 자카르는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았어요." "에?" 그는 내가 놀라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후후후, 그건 제가 아직도 후회하는 부분이죠. 제가 왕녀님의 근위대가 된 이유는 참으로 황당하죠. 레드포드 자작과 제가 같은 기사 학교 출신인 것 아세요?" "그랬어요? 몰랐네?" "같은 학교 출신에 같은 년도에 졸업했죠. 녀석은 수석으로, 저는 차석으로 졸업했어요. 그리고 가장 짧은 기간의 견습기사 생활을 마치고 동시에 왕실 기사단으로 들어갔죠. 그리고 2년간의 생활동안 레드포드 자작은 국왕폐하의 눈에 띄었죠. 덕분에 폐하께서는 직접 그를 왕자님의 근위대 기사로 지명하셨어요. 뭐, 나중에 알고봤더니 왕자님과 이미 안면이 있었던 사이었지만 말예요." "레드포드 자작과는 라이벌 관계였겠군요. 그런데 국왕에게 레드포드 자작이 선택받아서 화가났겠군요?" "그런 것도 있지만... 저는 처음에는 왕자님의 근위대 기사가 되고 싶어했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왕녀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요.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이 많아서 왕좌를 탐낸다고요... 아아,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전 남성 우월주의자도 아니고 지금은 왕녀님을 제 주군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눈에서 힘을 빼지 않은채로 그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그럼 왜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여자한테 무지 시달린 전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는 여자라면 진저리를 쳤죠." "헤에.. 그런데 왜 지금은 바람둥이가 된 거죠?" "하하하, 벌써 알고 계시다니... 음... 뭐, 지금은 여자를 다루는 능력이 생겼고 즐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두죠. 하지만 그때는 저도 순수했답니다." "안 믿기긴 하지만 믿어 드리죠. 그래서요?" "아,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그래요, 레드포드가 먼저 국왕께 발탁되어 왕자님의 근위대가 되자 저는 왕자님 근위대가 되길 포기해버렸죠. 왕자님 근위대가 되어봤자 레드포드 자작이 있는 한 저는 항상 두번째일테니까요. 그런데 그때 아버지께서 왕녀님의 근위대가 되라고 권하셨죠." "그래서 언니의 근위대가 된 건가요?" "후후,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근위대가 될 수 있으려면 주군되실 분의 허락이 있어야 하죠. 저는 아빠의 강권에 못 이겨 왕녀님 앞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속으로는 탐탁지 않아서 왕녀님께 밉보여 떨어지려고 했죠." "그런데 언니가 당신을 선택했어요?" 자카르는 즐겁다는 표정으로 씨익 웃어보였다. "아뇨. 당연히 떨어졌죠. 왕녀님께서는 근위대 기사가 모자라신 것도 아니고, 현명하신 분이니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에게 근위대 직위를 주실 분이 아니잖아요." "그럼 어떻게 근위대가 되었어요?" 의아해진 내가 묻자 자카르는 예전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가 다시 찾아가 무릎꿇고 사정했죠. 근위대로 받아달라고..." "엥?" 이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저도 제가 그럴줄은 몰랐죠. 하지만 저를 정말 냉정하게 내치실때 보여주신 카리스마와 위엄은 저를 저절로 무릎꿇게 만들더군요. 그때야 비로소 제가 왕녀님을 잘못 봤다는 깨달음과 함께 그분이야 말로 제 주군이 되실 분이란걸 알았죠. 그래서 다음날 다시 찾아가서 무릎꿇고 사정했어요. 그러니까 그제야 받아주시더군요." "헤에... 그런일이 있었군요." "예. 그런 일이 있었죠. 자, 그건 그렇고 이제 주무셔야죠? 시간이 너무 흘러갔어요. 잠시 후 움직이는데 졸면 안돼잖아요." "괜찮아요. 잠이 싹 달아났어요." "그래도 억지로라도 눈을 좀 붙이세요. 안그러면 나중에 힘드실걸요?" 자카르가 싱긋 웃으며 위해주는 말을 하자 나는 되게 기분이 좋아져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내 자리로 갔다. '헤에.. 바람둥이들은 다 저럴까? 음... 그럼 아빠도? 나중에 한번 물어봐야지.' 그날 밤 그 대화가 있은 후로 부터 나는 흄이나 스와카 못지 않게 자카르와도 무척 친해졌다. 뭐, 우리 일행이 몇 그룹이로 나뉘었다고 해도 그들과 아예 담을 쌓고 지내는게 아니였기에 간간히 대화할 기회도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게도, 내가 자카르와 친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애쉬 녀석이 날카로운 눈으로 못마땅 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가끔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잘 못 본거려니... 했는데 어느날은 따끔따끔한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다가 녀석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러자 녀석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지만, 이 여행을 할 때부터 워낙 대화를 하지 않았던 터라 왜 그러냐고 묻기도 뭐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눈치 빠른 류미르가 애쉬 녀석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나에게 물어왔다. "저 사람 왜 그러냐? 너한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나?" "원래 사이는 안 좋았어." "그래? 하지만 저렇게 노려보는 건 요 근래인 것 같은데?" "나한테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당신은 다를 줄 알았는데요..." 어느날 밤, 모두들 잠든 시간에 잠시 자리를 뜨고 돌아 온 - 이상한 상상 하지 마시길... 아빠 만나고 온 것 뿐이니까. - 나에게 애쉬 녀석이 모닥불만 뚫어져라 바라본 채로 뜬금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나한테 한 말이예요?" 무시해버릴 수도 있지만, 녀석이 나에게 말을 한 것은 정말 오래간 만이라, 게다가 뭔가 의미심장한 것 같아서 물었다.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은 안 하고 엉뚱한 말만 지껄였다. "당신도 여느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군요. 겉만 번지르르 하면 좋아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저에게 하는 말이라면 제가 알아듣게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자꾸 무시하는 녀석의 말투에 열받아서 녀석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묻자 그제야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눈에는 경멸을 가득 담아서... 녀석에게 그런 시선을 처음 받아보기에 내가 좀 황당스러워할 때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애 감정에 빠져 임무를 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주위의 모든 것을 잊는다죠?" '뭐 이런 게 다 있어?' 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그보다도 먼저 녀석이 고개를 획 돌려 버렸기에 열이 받칠대로 받친 나는 슬그머니 녀석의 뒤로 돌아갔다. 녀석의 어깨가 미미하게 움찔 거리는 걸 보니 내 기척을 눈치챈 듯 했지만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길래 안심하고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심히 안타깝게도 내 주먹이 녀석의 머리에 작렬하기 직전 녀석이 앉은 상태로 슬쩍 몸을 옆으로 비킴과 동시에 뒤로 돌아 내 손목을 턱 하니 잡았다. "앗!!" 얼른 팔을 회수하려 했지만 뻗어 나가던 힘과 함께 녀석이 손목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홱 끌어당겨 나는 얼결에 앞으로 넘어지게 되었다. "우갸갸갸~~!!"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나를 녀석이 다른 손으로 살짝 받쳐줬다. 덕분에 모닥불에 얼굴을 헤딩하는 일은 없게되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녀석에게서 떨어지려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녀석의 팔이 강하게 내 어깨를 붙들었다. 열받아서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고개를 드는데 녀석의 얼굴이 바로 눈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예요?" 그 눈빛이 너무 살벌해서 나는 할 말도 잊어버리고 꿀꺽 침을 삼키고 몸을 슬그머니 뒤로 빼려니까 녀석이 나를 획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우갸갸갸갹~~~!!' 아린, 난생 처음으로 입술을 빼앗기다!! '이럴수는 없어, 내 평생 첫키스르으으으으으을~~~!!' 녀석의 몸을 확 밀치고 벌떡 일어났다. 녀석도 자신의 행동에 놀랐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게 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 이이이~~!!" 뭐라고 말을 해야겠는데 말이 나와주질 않았다. 그래서 '이이..' 거리고만 있는데 뒤에서 누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놀래서 뒤를 확 돌아보니 자카르가 잠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후아아아암~~!!" 아직 졸린 듯 크게 기지개를 키며 하품을 하더니 눈을 슥슥 비빈다. 그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져 그냥 바라보고 있는데 자카르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리시안님? 안 주무셨습니까?"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의아한 표정의 자카르를 보자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아, 아뇨. 저도 방금 일어났어요. 잠깐 실례할께요." 그리고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 내 빨개진 얼굴을 보고 뭐라고 그러는 사람도 없고, 내 얼굴을 감춰 줄 어둠 속으로 냅다 뛰었다. "쿡쿡, 저런 순진한 면이 있을줄이야... 첫 키스인가 보지?" 만약 아린 앞에서 이 말을 했으면 한 두어번쯤 황천을 왔다갔다 했을텐데... 심히 안타깝다. 자카르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으며 애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애쉬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자신도 휙 하니 고개를 돌렸다.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레드포드 자작님? 쿡쿡쿡, 멋진 장면이었어. 하지만, 나도 호감이 있는 여성분께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기분은 좋지 않군."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 치고는 상당히 환하군." 계속 당할 수는 없는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애쉬의 입이 열렸다. "하긴, 자벨리안 경에게는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닐테니까..." 순간 자카르의 눈빛이 사나워졌지만 곧바로 다시 평상심을 되찾았다. "그럴지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애쉬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그럼 난 이만 자도록 하지." "좋을대로." 사람들이 없는 곳에 가서 있는 화풀이 없는 화풀이를 쏟고 나서야 겨우 기분이 진정된 나는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애쉬 녀석은 벌써 잠자리에 들어 있었고 다음 불침번 당번이었던 자카르만이 모닥불에 앉아 있다가 내가 돌아오자 싱긋 웃어주었다. "잘 부탁해요, 자카르." "예. 안녕히 주무세요." 다음 날, 나는 기회만 있으면 애쉬 녀석을 어떻게 해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게 애쉬 녀석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평소의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행동도 전혀 달라진게 없어 - 아 오히려 며칠동안 계속 노려보던 눈길도 사라졌다. - 혼자 벼르고 있던 나만 손해본 듯한 기분이었다. "제기랄..." 녀석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입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류미르가 다가와 속삭였다. "아린, 어째 상황이 뒤바뀐 거 같다?" "시끄러 류미르." 나는 류미르에게 톡 쏘아주고는 묵묵히 앞만 보고 말을 좀더 빨리 몰아 류미르가 어깨를 으쓱 하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 쪽을 보고 있던 자카르와 눈이 마주친 것은 보지 못했지만 류미르가 중얼거리는 건 들을 수 있었다. "왜들 그러는 거야?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을거예요." "왜 그렇게 확신하는데, 사르하?" "왜라니? 당연하잖아. 둘 사이를 보면 모르겠어? 전에는 아시리안님하고 애쉬님은 서로 무시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예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잖아. 분명히 뭐가 있었던 거야." "호오, 신관님. 당신의 추리력에는 항상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그런데 그 일이 뭐죠?" "당신의 칭찬 감사해요, 스와카. 그런 의미에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이건 분명히..." "분명히?" "라.이.벌의 등장 때문이죠." 자신있게 오른손의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진지한 어투로 말하는 사르하의 말에 리틀조로, 스와카, 반담, 흄은 놀란듯이 되물었다. "라이벌?" 그리고는 자연스레 돌아가는 곳에는 애쉬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담히 받아 넘기는 자카르가 앉아 있었다. "흐음.. 그럴지도..." 스와카의 끄덕거림에 사르하는 좋아라 입을 열었다. "그렇죠?" "그러고보니, 아가씨와 자벨리안 경 사이가 전보다 무척이나 가까워졌군요. 전에는 그냥 안면있는 사이로 인사만 했었는데..." "그럼, 자작님께서 질투가 나신 건가?" 리틀 조로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어오자 사르하가 그를 째려보았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그에 찔끔하는 리틀 조로...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하, 하지만 자작님은 그러실 분이 아닌데..." "흐음, 리틀조로... 남자들이란 연적이 나타나면 자신도 모르게 변할 수가 있단다." "그, 그런가요?" 잘난 척 나서는 스와카에 리틀조로는 '정말인가?'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끼어드는 반담.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연애 한번 못해본 녀석이..." "윽, 얌마. 이런건 꼭 해봐야 아냐? 넌 꼭 고기를 먹어야 상했는지 안 상했는지 알겠냐? 그냥 척 보면 착이야." 움찔 한 스와카가 지기 싫다는 표정으로 빡빡 우겨대자 사르하가 편들어줬다. "맞아요. 게다가 지금 분위기 상 못알아챌 수도 없잖아요. 애쉬님이 지금 속이 타시는 거예요. 완전히 아시리안님의 마음을 얻지 못했는데 애쉬님보다 더 나긋나긋 한 자벨리안경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잖아요." "나긋나긋? 이봐요 신관님... 그건 남자한테 표현이 좀..." "아, 그런가요? 그럼 사교성이 뛰어나시다고 표현을 바꾸도록 하죠." 흄의 황당하다는 말에 사르하가 재빨리 표현을 바꾸었다. "그,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해야 하는 거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연히 죽은 듯이 가만 있어야지. 남들 연애하는데 끼어들어서 이것 저것 참견하는 것 만큼 꼴불견인 건 없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리틀조로를 바라보며 스와카가 말하자 그 즉시 사르하가 반발하고 나섰다. "무슨 소리세요? 당연히 애쉬님을 도와드려야죠. 스와카님은 지금까지 쌓아온 정을 외면하실 생각이세요? 애쉬님은 이런데 서투신 것 같으니까 아시리안님을 자벨리안 경에게 빼앗기기 전에 우리가 나서야 해요. 안 그래요, 흄?" "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자벨리안경도 레드포드 자작만큼이나 괜찮아 보이는데요. 난 아가씨께 어울리는 분이라면 아무라도 상관 없습니다." "능력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법이지." 반담이 한마디 하자 스와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다. 뭐, 우리가 나서봤자 아시리안님이 보통 여자분도 아니고... 스스로 좋아하시는 분께 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러자 사르하가 화가나서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보통 이런건 자기 자신도 누굴 좋아하는 지 모를 수도 있다구요. 이럴 때일수록 주위에서 도와줘야 해요." "엥... 하지만 그냥 구경하는게 더 재밌는데... 흄은 두분 중 누가 아시리안님과 될 것 같아요?" 스와카는 자신을 째려보는 사르하의 시선을 피할 겸 슬그머니 화제를 돌려버렸다. "흐음... 글쎄요. 아무래도 자벨리안경 쪽이... 그분은 아가씨의 아버지이신 공작 각하와 비슷하니까 더 우세할 것 같은데요? 반담은 어때요?" "...모르겠군... 넌 어떠냐?" 그러자 바톤을 받은 스와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한가지 간과한게 있는데 말야, 총각은 그 두분만 있는게 아니라구. 뛰어난 미모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총각이 두 사람 더 있잖아. 뭐, 한 쪽은 사람이 아니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따지지 말자구." "아아... 그렇군. 그럼 라이벌이 3명으로 늘어난 건가?"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 반담이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본다면 난 나중에 나타난 세이몬이라는 사람과 엘프쪽을 택하지. 친하기로 본다면 그쪽이 더 친하니까." "무슨 소리세요? 뭐니뭐니해도 아시리안님께는 우리 애쉬님이 제일 잘 어울리신다구요." 리틀조로가 흥분한 듯 나서자 사르하도 거들었다. "맞아, 맞아. 레드포드 자작님이 제일 잘 어울려."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아시리안님이 누구와 연인이 될런지. 어때요?" 스와카가 싱긋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자 모두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뭘 걸지?" 흄이 묻자 사르하가 반발했다. "그건 말도 안돼요. 어떻게 그런 걸로 내기를 할 수가 있죠?" 그러자 스와카가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호오, 신관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에 자신이 없는가보군요?" "뭐라고요? 말이 왜 그렇게 되죠?" 즉각적으로 톡 쏘듯 반박하자 스와카의 미소가 더욱 더 짙어졌다. "그거야, 내기에 질 것 같으니까 반대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난 단지 이런 걸로 내기하는게 나쁘다고 말한 것 뿐이라구요." "뭐 어떻습니까? 친구들간에 가벼운 놀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린 그저 사태만 지켜보고 결과만 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에게도 해는 안 간다구요, 안 그래요?" "그, 그렇지만..." "더욱이 뭐 돈을 걸자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뭘 걸건데요?" 사르하는 마음이 흔들리는지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어조였다. "흐음... 승자는 한 사람이니까 진 사람들이 이긴 사람이 원하는 음식을 사주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식사 한끼를 거는 거죠. 이정도는 괜찮겠죠?" "....그 정도라면야... 뭐..." 사르하가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좋아요. 그럼 각자 선택하자구요. 사르하 신관님과 리틀조로는 레드포드 자작님이시죠? 흄은?" "난... 자벨리안 경으로 하죠. 두 분은?" "난... 세이몬에 걸지." 반담이 먼저 입을 열자 한 사람이 남았고 스와카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남은 한 쪽에 걸죠. 류미르라고 하는 하이 엘프요." ............ "라고 하는데, 아린?" 류미르가 킥킥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 일당들은 나와 류미르, 세이몬이 듣고 있는줄도 모르고 뒤에 누가 이기면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와 기간을 잡는데 열심히 열띤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우쒸... 사르하.. 너 목걸이 사준다는 거 취소다." 이마에 힘줄이 하나 뽀득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도시에 도착해서 식당에서 식사를 하나 했더니만 왠일인지 저 일당들이 우르르 한쪽으로 몰려가 자신들끼리 쏙닥쏙닥 거리는 거였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에 류미르와 세이몬을 데리고 마법을 걸어 옅들었더니... 역시나... "헤에.. 그럼 나도 아린의 애인 후보에 껴 있는거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세이몬이 중얼거렸다. "너만이 아냐, 나도 껴 있는걸?" "그런데 날 아직도 인간이라고 알고 있나봐. 전에 마족의 기운을 내뿜었는데 못 느꼈나?" 세이몬이 의아한 표정이자 류미르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아린이 네가 마검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둘러대었어." "에? 왜?" "인간들 사이에서 마족은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네가 마족이라는 게 알려지면 꽤나 골치아파지거든. 그러니까 그냥 인간인 척 해줘." 내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세이몬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야... 그런데 아린, 너 정말 애인 만들거야?" "당연히 아니잖아. 내가 애인 만들 여유가 어디 있냐? 전에 당한것만해도 열받치는데..." "뭐?" "뭘 당했는데?"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류미르와 세이몬의 얼굴이 보이자 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류미르와 세이몬이 무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일은 절대로 말해줄 수 없었으므로 나는 부리부리하게 그들을 노려보며 딱딱 끊어 말했다. "암 것두 아냐. 그런게 있어." 제 19화 자벨리안 영지 "자, 저희 자벨리안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벨리안 영지의 성에 도착하자 같이 온 자카르는 마치 자신이 먼저 와 있다가 우리를 환영하는 것 처럼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띄고 과장스레 절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 인사를 받는 일행들의 얼굴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도착인가요." "별 일 없어야 할텐데요..." "엘라이어드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 "어떻게든 돼겠지." "잘 된다고 해야지." 긴장 된 얼굴로 일행들이 한마디씩 하자 자카르가 흄과 스와카의 등을 탁탁 쳤다. "자자, 그렇게 우거지상을 짓지 말고 우선은 들어가자구요. 잘 먹고 푹 쉬어야 싸우더라도 잘 싸울 거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이 맞는 말이었기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자카르를 알아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하하하, 그 동안 잘 있었어?" "저야 잘 있었지요. 주인님과 마님도 모두 건강하시지요?" "부모님이야 여전 하시지. 그나저나 텔, 자넨 하나도 안 변했군?" "그렇습니까? 도련님은 더욱 더 늠름해지셨군요. 하아... 어리신 도련님을 뵌 것이 엇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주인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습니다." "훗, 기뻐하시는 것 보다도 걱정하시는게 더 많은데 뭘.. 아, 그건 그렇고 별 일은 없지?" "예. 연락을 받고 경계태세를 전보다 더욱 철저히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알았어. 자, 그럼 이분들을 방으로 안내해 주겠어? 계속 달려와서 그런지 모두들 피곤할 거야." "알겠습니다. 도련님 방은 항상 쓰시던 방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래. 자, 그럼 모두들 나중에 뵙죠." 자카르가 우리에게 몸을 돌려 인사를 하는 것을 신호로 텔이라고 불린 중년의 남자가 우리 앞에 섰다. "자벨리안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안내해준 방에 들어가 테이블 위에 가방을 던져 놓고 망토를 벗은 뒤 의자에 앉아 목적지에 도착한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네~!" 나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고 시녀 제복을 입은 두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이 곳에 계시는 동안 아가씨 시중을 들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두 명의 여자 중 나이가 많아보이는 쪽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흠... 자카르가 신경 써주는 건가?' 이제는 시중 받는 일 따위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귀찮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나에게 대답한 시녀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목욕 준비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내 대답이 끝나자 나이가 많은 쪽이 적은 쪽을 데리고 욕실로 보이는 문 - 방을 안 둘러봐서 뭐가 있는지는 모르고 대충 짐작만...- 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자세를 잡고 앉았기에 다시 움직이기 귀찮았지만 곧 그녀들이 준비를 끝내고 나를 부를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밍기적 대며 일어나서 할머니 서클렛을 벗어 마법 주머니에 챙겨 넣고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놨던 망토를 집어들어 침대 옆에 있는 옷걸이에 잘 걸어놨다. 그리고는 다시 안락의자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으려니 나이 많은 시녀가 욕실로 보이는 곳에서 나왔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알았어요." 밍기적 밍기적 일어나서 그녀가 나온 문으로 들어가니 과역 그 곳은 욕실이었고, 울 아빠네 집 내 방에 있던 욕조만한 나무 욕조가 물을 가득채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욕조라고 해도 무지 비싼 목재인 향나무로 만들어진 듯 은은한 나무향이 풍기고 있었고 그 안에 담긴 물 위에는 넘칠듯이 보글보글 솟아오르는 거품들이 있었다. '거품 목욕인가..?' 내가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이 어린 시녀 - 어리다고 해봐도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가 내 옷을 가지고 나갔고 나이가 많은 쪽의 시녀는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가지고 내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머리를 감겨 드리겠습니다." 내 옷을 가지고 나간 시녀는 내가 목욕을 다 끝낼때 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목욕을 다 끝내고 수건으로 몸을 둘러싸고 욕실을 나가자 방에서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여러개의 드레스를 하나 하나 펼쳐놓고 있었다. "이건 뭐죠?" "도련님께서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에... 안 입어도 되는데...' 탐탁치 않은 눈으로 그 드레스를 바라보자 오해한 듯 나이 많은 시녀가 말을 걸었다. "저... 맘에 안 드시는 지요? 그렇다면 다른 것들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아.... 괜찮아요." "그럼 오늘 저녁때는 어떤 걸로 입으시겠습니까?" 그제야 나는 그들이 나보고 옷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드레스를 다 펴놓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음... 저 베이지 색 드레스가 좋겠군요." 가장 단순한 디자인에 그나마 편안해 보이는 드레스였다. 별 다른 레이스나 장식 품 없이 차이나 칼라에 팔에 딱 맞는 소매를 가지고 있었고 치마도 주름이 없는 통 치마에 양 옆구리가 허벅지에서 부터 밑에까지 쫘악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속에 받쳐입는 속치마가 드러나게 했는데 속치마도 하얀 색이었고 주름이 없는 통치마여서 속치마로 보이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 드레스에 맞게 머리도 그냥 풀러내려 베이지색 리본으로 목덜미에서 가볍게 묶었다. "저.. 이것을..." 잠시 자리를 떠났던 시녀가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작은 다이아가 짧은 백금줄에 매달려 귀 밑에서 달랑달랑 하게 만들어진 귀걸이었다. "세심하게도 준비 했군요." 그걸 받아 착용하고 나자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늦을까봐 서둘러 식당으로 내려가자 먼저 와 있었던 일행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시리안님, 언제 그런 것 까지 준비해 오셨습니까?" 스와카가 대표로 묻자 때마침 들어오던 자카르가 나 대신 대답해 주었다. "아아.. 준비해 오지 못하신 것 같아 여기 있던 제 누님옷을 빌려 드렸습니다. 잘 어울리시는 군요." "고맙습니다 자카르님." 생긋 웃어주고는 자리에 앉으려고 몸을 돌리려는 찰라 뒤에서 냉소가 들려왔다. "그런 옷을 입고 어디 임무를 수행하시겠습니까? 전에는 안 그러시더니 이번 여행에는 전과는 다른 행동을 많이 보여주시는 군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평소의 무표정을 버리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애쉬였다. "이런 옷을 입고 있어도 임무에는 하등 지장이 없으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드포드 자작." 무지 기분 나빠진 나도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응수했다. 그러자 그의 미간이 더욱 더 찌푸려졌다. "믿지 못하겠군요." '누가 너보고 믿어달래?' 난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띄고는 말했다. "제가 그렇게 신용이 없었는줄은 몰랐군요. 정 믿지 못하겠으면 한번 자작께서 입어보시지 그러십니까? 정말 임무에 지장되는지 안 되는지." 열 받았는지 애쉬의 인상이 굳어지며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러자 뒤에서 우리 사이를 중재시키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거 이거, 무척 춥군요. 식사를 즐겁게 하려면 따뜻해야 하는데 말이죠." 부드럽고 정중한 말투.. 류미르였다. 그는 나와 애쉬를 번갈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제가 알기로 리더는 모든 팀원들을 잘 다독거리고 이끌어야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데요, 안그렇습니까 레드포드 자작? 인간들도 저희들과 크게 다를바가 없을테니까요." 왠지 애쉬를 바라보는 류미르의 눈은 부드러웠다. 어느새 내 옆에 서서 같이 애쉬를 바라보는 세이몬은 적개심에 가득 차 있었는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류미르의 말에 애쉬는 심호흡을 한번 해 진정하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 우리도 자리에 앉자." 류미르가 싱긋 웃으며 나와 세이몬에게 말했다. 나도 계속 서 있을 생각은 없었으므로 기꺼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내 자리로 걸어갔고 뒤에서는 세이몬과 류미르가 따라왔다. "왜 저 녀석을 곱게 보내준 거야? 한방 때려주려고 했는데..." 세이몬이 의아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나쁜 녀석이 아냐." "왜? 아린을 미워하는 것 같은데?" "후후후.. 아냐, 그런게..." "뭐? 하지만..." "글쎄.. 아냐." 세이몬은 끝까지 류미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 솔직히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류미르가 먼저 자리에 앉아 버리자 더 이상 말을하지 못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결국 즐거워야 할 저녁식사는 딱딱한 분위기 가운데 끝나 버렸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식사 내내 나온 대화는 일에 관한 것 뿐이었다. 결론은 일이 터질 때 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 존재'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보자는 것. 막상 그렇게 되자 제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된 곳이 바이투 산맥 이었다. "또... 산인가?" 마땅치 않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애쉬가 중얼거리자 스와카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 근처에서 숨기에 제일 적당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애쉬가 인정하기 싫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르하가 반대 의견을 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전에도 아시리안님이 추적하셨을 때 산맥으로 간 줄 알았었지만 마을에 먼저 나타나서 들쑤시고 갔잖아요. 이번에도 그럴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때는 다치지 않았어. 이번에는 그쪽도 크게 다쳤으니까 아무래도 쉴 곳을 찾으려 할거야." 스와카가 그녀의 의견에 이의를 달자 사르하가 또 한번 말했다. "음... 하지만 그녀도 이 근처에서 수색을 제일 먼저 할 곳이 산이란걸 알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다른 곳에 숨었을수도..."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아냐. 그녀에게는 지금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에?" 사르하는 모르고 있었던 듯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탓에 미쳐버린 거거든. 이성이 마비되고 살심 만 남아있는 상태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거야. 그러니 생각하는 것도 본능적일테지..." "아... 그랬던 거였어요? 그 여자도 꽤 가여운 여자네요." 사르하가 동정의 눈빛을 보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렇군요." 분위기는 좀 전보다 더욱 더 가라앉아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하여 자카르가 나섰다. "자자, 너무 가라앉지 맙시다. 기껏 먹은 음식이 걸려서 어디 소화나 되겠어요? 산에 가려면 준비할 것도 있고 컨디션도 최상으로 만들어놔야죠. 아, 그런데 언제 갈겁니까?" 자카르가 애쉬를 바라보며 묻자 애쉬가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준비되는 대로 출발할 겁니다." "그러도록 하시죠. 아, 혹시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길요." "그러죠." 그 말을 끝으로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러자 그것을 신호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에는... 없을 거야." 내 방으로 돌아온 뒤 뒤따라 들어온 류미르와 세이몬을 앞에 앉혀놓고 한참을 고민하던 내 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왜?" 의아하게 묻는 세이몬을 향해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여 하나하나 말했다. "우선은... 아무리 크게 다쳤다고 해도 그쪽도 마법이 강한 이상 치유하는 건 문제도 아니지. 게다가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날을 생각해봐. 아마 지금은 너무나 멀쩡해서 펄펄 날 고 있을 걸?" "엣? 그럼 지금 딴 곳에 있을 수도 있는거잖아?" 놀란 세이몬의 말에 나는 다시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이 근처 어딘가에 있어?" "에?" 놀라서 물어보지도 못하는 세이몬을 대신해 류미르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에는 날 찾으러 수도로 온 거니까, 이번에는 날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아무 래도 우리가 쫓아 올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을 거 같아. 그러니 날 맞을 준비를 어디선가 하 고 있을거라고 생각해. 그게 어딘지와 어떻게 준비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위험할 거란 건 알고 있지." 류미르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뭍으며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겠지..." "그럼 문제는 그쪽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느냐 하는 거네?" 이성을 찾은 세이몬의 말이었다. "응. 그렇지..." 하지만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쪽에서 자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하여 나를 데리러 온 류미르, 세이몬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 는데 아래층 응접실에서 자카르가 심각한 얼굴로 집사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보였 다. "좋은 아침인데 자카르님은 심각해 보이시는군요?" 호기심 반 예의 반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시리안님, 여러분..." 나는 그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몇걸음 더 그에게 다가섰다. "예.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아... 그게... 그렇군요." 뭔가 망설이며 생각하는 듯 하던 자카르는 곧 고개를 끄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모두가 모이면 말씀드릴테니 먼저 식당에 가시겠습니 까?" "일이라면...?" 류미르가 심각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며 그를 바라보자 자카르는 류미르가 뭘 말하는 지 알 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녀가 일을 벌인 듯 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흰 먼저 식당에 가 있도록 하죠." 그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류미르와 세이몬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하는데 세이몬이 낮게 속삭 였다. "그녀라면 우리가 찾는 그 여자?" "응. 그녀가 뭔가를 저지른 것 같아." 세이몬의 말에 류미르가 대답하면서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 가 봐야겠지?" "당연하지. 하지만... 왠지 예감이 별로 안 좋아." "아린의 말대로 혹시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세이몬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모르지... 그럴지도..." 잠시 후에 나머지 일행들이 하나 둘 식당으로 들어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지만 심각한 표 정들로 앉아있는 우리들을 보고는 덩달아 조심스러워져서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입 을 다물고 있었다. 침묵은 맨 마지막에 자카르가 들어와서야 깨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었지요?" 싱긋 웃으면서 인사하고 자신의 자리로 간 그는 평소처럼 의자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약간 긴장된 얼굴로 우리들의 얼굴을 한번씩 쭉 훑어 보았다.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음인지 모든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고 스와카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예. 솔직히 이 소식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까 온 연락 입니다만, 바이투 산맥 근처에 있던 한 마을과 연락이 끊겼다는군요. 요즘은 비상시라서 될 수 있는 한 모든 마을들과 연락을 수시로 하고 있었던 덕분에 알게된 겁니다. 그래서 곧 수 색대를 파견할 생각인데 여러분들께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마을 크기는 어느정도 됩니까?" 스와카가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제가 알기로는 100여호 정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수색대는 언제 파견하실 생각 이십니까?" "오늘 오전에 파견할 생각 입니다." 그러자 스와카가 이번에는 애쉬를 바라보았다. "저희도 가봐야하지 않을까요?" 애쉬가 이번엔 나를 본다. "자작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당연한걸 묻냐?' "전 가볼 생각입니다만?" "그렇다면 다 같이 가보도록 하죠. 수색대 인원은 얼마나 하실 생각이십니까?" 애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카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사람이 얼마 없어서요... 아마 10을 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같이 가주신다면야 저희가 더 환영할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동행하기로 하죠." 빠른 시간안에 식사를 마치고 각자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간단하게 짐을 챙긴 후 다시 내려 와 성의 앞마당으로 나오자 시종들이 우리의 말을 가져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간편한 여행복 차림에 자신의 말 고삐를 쥐고 있는 자카르까지 끼어 있었 다. 나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생긋 웃으며 설명해주었 다. "하하하, 아까 사람이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가 나서야죠." 그리고 그의 옆에는 아마 이 영지의 기사인 듯한 - 마찬가지로 간편한 여행복과 검을 찬 -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자신의 말 고삐를 쥐고 서 있었다. 그 기사를 보고 그의 동행자를 찾으려고 고개를 두리번 거렸지만 그 외에 여행을 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또 의아한 눈초리를 자카르에게 보내자 자카르가 피식 웃었다. "든든한 여러분이 계신데 일부러 많은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잖습니까?" "계산이 빠르군." 이용 당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애쉬가 중얼거리듯 내뱉자 자카르가 싱긋 웃었다. "이왕이면 현명하다고 해주시길..." 일행들이 다 모여 각자 자신들의 말에 오르자 자카르가 외쳤다. "자, 그럼 출발할까요?" 이번에도 자카르가 길잡이가 되어야 했으므로 그가 앞장을 섰다. 어느덧 계절은 완연한 가을이었다. 높아진 새파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햇볕은 따가웠다. 우리가 달리는 길 양 옆으로 쫘악 펼쳐진 들판에는 밀이 누렇게 익어 산들바람에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으며 군데군데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모습들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야 했다. "하아.. 전에는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하는 걸 참으로 당연하게 생각 했었는데... 지금은 올해 무사히 추수를 하게 해주십사하고 신께 기원하게 되는군요." 말이 지쳐서 더 이상 달릴수가 없게 되자 속도를 늦춰 말을 걸어가게 할 때 자카르가 한탄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 일 없이 추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다 신의 은총이예요." '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빠질 수 없다는 듯이 사르하가 나이에 맞지 않는 위엄을 가지고 근엄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 걸 이제야 얄게 되다니... 역시 전 어리석은 걸까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닥쳐야 겨우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니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깨닫는건 어리석은게 아니죠. 그런 일을 겪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도 많 은걸요. 그에 비하면 잃기 전에 깨달을 수 있다는 건 현명한 거랍니다. 잃은 뒤에 깨닫는건 너무 늦은거니까요." 스와카도 연륜이 있었던지라 한소리 했다. "하지만... 때로는 잃기 전에 깨달아도 어쩔 수 없는 때도 있죠. 무기력한 자신을 느끼며 소중한 것을 잃느니 차라리 잃은 뒤에 깨닫는게 오히려 더 좋을 것 같군요." 류미르가 뭔가 뜻이 있는 듯한 말을 내뱉자 사르하가 말했다. "알면서도 잃어야 한다니... 너무 슬프군요. 그럼 정말 절망스러울 거예요." ".... 그렇군요... 류미르님은 그런 경험이 있으셨습니까? 마치 잘 아시는 것 같군요." "아뇨. 전 아직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그런일을 겪은 누군가를 알고 있죠." 그러면서 힐끔 나를 보는 것이 느껴진다. '괜찮아... 난 그렇게 절망적이진 않으니까... 아직은... 그러니 그렇게 보지 않아도 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는 류미르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난 정말 괜찮아. 힘들면 기댈 존재가 있거든... 게다가 너희들도 있으니까....'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리틀 조로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옆에서 말을 달리는 스와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생각에 자신이 없는 듯 꽤 머뭇거리는 어조였다. 그런 그에게 스와카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에? 그래요? 그런데 왜 모두 아무 말씀도 안 하고 계시죠?" "모두들 잔뜩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래." "아..."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일행 중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한시간쯤만 더 가면 우리의 목적지인 그 소식이 끊겼다는마을이 나온다. 소르드 왕국 안에 있는 영지 답게 이 영지는 무지 커서 성에서 그 마을을 찾아가는데 벌써 이틀이 소요 되었다. 아, 오늘까지 합치면 사흘이다. 아무리 영지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라고 하지만, 한 영지 안에 있는 마을인걸 생각하면 무지 먼 거리였다. 그래도 오늘만 더 달리면 드디어 도착하는 거고, 무슨 일이 있는 지 알수 있을거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으면 좋으련만... 오늘 아침에 한 마을에서 출발한 뒤로 우리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모두들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어찌 된 연유인가 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더니 사람이 별로 없다.. 라고 느낀 순간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아침에 출발한 그 마을의 경작지를 벗어난 후로 부터 길에 서 있는 사람을 눈씻고 찾아봐도 전혀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뭐, 비상 사태이니 각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면 납득은 가지만, 벌써 목적지 마을의 경작지로 들어섰는데 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일 하는 사람 조차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그 동안 계속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자카르 수행 기사가 입을 열었다. "마을이 보입니다." 슬슬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폼을 잡느라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때였다. 가을이다보니 예전보다는 더 빨리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을이 저 앞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재촉하여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불길해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요." 사르하가 살짝 몸을 떨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걸까요? 지금쯤이라면 한창 저녁을 지을 시간이라서 여기 저기에서 연기가 피어 올라야 정상인데... 단 한곳도 연기가 보이지 않는 군요." 흄도 뭔가를 느꼈는지 여태까지 사르하 옆에 있다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오면서 말을 건넸다. "여기까지 올 때에도 들판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던걸 보면... 마을에도 사람이 없는 걸까요?" 류미르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간 거야?" 세이몬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그럴리가..." "하지만..." 사르하와 리틀 조로, 그리고 자카르 수행 기사가 신음같은 목소리로 한마디씩 내 뱉었다. 자카르를 슬쩍 바라보니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만 앙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애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 하느냐'는 얼굴로 스와카가 애쉬를 바라보자 애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만..." "확인된 건 없죠." 말 끝을 흐리는 애쉬 녀석의 뒤를 이어 내가 조금은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두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틈을 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실프를 불러내었다. "저 마을에 사람이 있는지좀 봐줘.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는지 또한..." 일행들은 마을을 향해 날아가는 실프를 긴장어린 눈으로 바라보더니 실프가 안 보여도 계속 해서 마을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실프가 마을 광경을 보고 왔는지 사람들 눈 앞에서 보이기 시작하더니 내 앞으로 날아오자 사람들의 눈이 실프를 쫓아 나에게로 모였다. 그 모습이 꼭 잘못을 해서 학생과로 가서 선생님 앞에 서 있는 애들 같아서 잘못 하다간 분 위기에 맞지 않게 웃음이 새 나올 것 같아 얼른 시선을 실프에게로 돌렸다. "그래, 사람들은 있었어?" [예] 실프의 긍정적인 대답에 나는 약간 안도감을 느끼며 재차 물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 말이지?" 가슴 속에서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의아스러움이 생겨났다. 모두 멀쩡히 살아있다면 마을이 왜 저런 것인지... "모두들 어떻게 하고 있지?" [한 곳에 모여 서 있어요.] "에? 뭘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서 있어요.] "살아 있는 건 확실해?" [예] "혹시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어?" [아무도 없었어요.] '무슨 일이 있기는 있구나...' 실프를 돌려보내고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일행을 한번 둘러보았다. "가볼 건데 같이 가실 분?" 일부러 싱긋 웃으면서 명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류미르, 세이몬, 그리고 흄이 나섰다. "나." "나도." "저도 당연히..." 그리고 애쉬와 스와카, 반담도... "제가 리더 아닙니까?" "쫄다구가 따라가는 건 당연한 거죠." "........" 자카르도 나섰다. "저희 가문의 영지니 저도 당연히 가야겠죠?" 자카르가 나서자 그의 수호기사도 당연하다는 듯 나서려고 하자 자카르가 그를 제지했다. "너는 여기 남아라. 만약을 대비하여..." 그 만약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아무도 자카르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사르하와 리틀 조로에게로 쏠렸다. "너희들은 남아." 모든 이들을 대표해서 내가 말했다. "지켜줄 수 없을테니까..." 그러자 리틀 조로가 다부진 표정으로 나섰다. "저도 제 몸 하나는 지킬 줄 압니다. 그리고 저는 레드포드 가문의 수련 기사예요.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사르하를 돌아본다. "다녀 올게." 사르하는 생긋 웃으며 리틀조로에게 다가갔다. "응." 사르하는 여기 있어야 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그녀가 나이에 비해 신성력이 높고, 신성 마법까지 쓸 수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신성 마법의 힘 보다는 우리가 다쳤을때 빨리 치료할 수 있는 신성력이 더 필요할 때였다. 그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는지 사르하는 순순히 남아 있을 거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잘 다녀와." 그러더니 좀 더 리틀 조로에게 다가간다 싶더니 그의 뺨에 살짝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얼굴이 무척 빨개진 리틀 조로가 비틀 비틀 뒤로 물러나는 거에 비 해 사르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나에게 있는 행운을 줄께.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쬐끄만 것들이...'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생각나는 건... '젠장 생각 하기도 싫어!!'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돌리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보였다. "왜?" "기냥..." 하며 실실 웃는 녀석들... 하지만 뭘 원하는지 척 보면 착이었다. "야, 내가 관람측에 있었으면 당연히 해줬겠지만, 나도 나서는 입장이라구. 그런데 그런 같은 처지인데 기어이 내 행운을 뺏어야 겠냐?" 매섭게 녀석들을 쏘아보았더니 녀석들이 재빨리 말 머리를 돌렸다. "세이몬, 뭐해? 빨리 빨리 가야지. 이러다 해 지겠다." "아, 그래 그래." 먼저 나서는 녀석들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둘은 돌아보지 않았고, 뒤에서는 낮게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쒸... 임무고 뭐고 그냥 여기부터 한번 확 뒤집어 엎을까?' 사르하와 자카르 수행 기사를 뒤에 남겨두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마을로 접근했다. 그런데 너무 긴장을 한데다 주위를 세세하게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접근하느라 마을 입구에 다 다랐을때는 붉었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 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 마을은 비록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는 하지만, 마치 한밤중에 공동묘지나 오래 버려져 있던 폐가를 들어갈 때같이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여기에 스산한 바람과 함께 높은 고음의 바이올린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면 한 여름밤의 공포 특급으로 나와도 좋을 듯 했다. "너무 어둡군요." 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스와카가 말을 받았다. "불을 켤까요?" 흄과 같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이제는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어버린 얼굴로 맨 앞에 서서 주위를 살피던 애쉬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뇨. 불을 켜면 이쪽이 있는 곳이 금방 들어날테니까요." 순간적으로 불을 킬지 물어본 사람이 스와카가 아닌줄 알았다. 스와카는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노련한 용병... 그런 일을 모를리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애쉬의 말을 듣고 의미 있게 싱긋 웃는 걸 보니 스와카가 아무 것도 모르고 말한 건 아닌 듯 싶었다. "그럼 오늘은 그만 돌아가죠? 너무 어두워서 우리가 불리해요. 어차피 내일 온다고 해서 하룻밤 새에 이 마을이 사라지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냥 가자는 말을 하려고 그 말을 꺼낸거야?' 하긴... 모두들 바짝 신경들이 곤두 서 있어서 날이 어두워진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마을에 들어가는 것에만 정신이 가 있었으니... 역시 스와카는 노련했다. 애쉬도, 자카르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한번씩 움찔거렸다. 뭐, 나와 류미르 세이몬은 이 정도의 어둠이야 별로 방해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그렇군... 그럼 오늘은 그냥 돌아가도록 하고, 내일 다시 오죠." 애쉬가 자카르와 나를 바라보며 양해를 구했다. "그래야겠군요. 그럼 갈까요?" 자카르가 꺼내 들었던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가 갑자기 그의 뒤에서 밝은 빛이 터져나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당황하기도 하였거니와 어두움에 있는데 순간 밝은 빛이 나타남에 따라 잠시 시력이 저하되어 버렸다. 그러나 놀랄 겨를도 없이 시력이 회복되기 전에 공격을 당하면 큰일이었으므로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팔찌에 마나를 부여하여 모든 물리력, 마법력을 막아주는 방어막을 형성해 감으로 일행들을 감싸버렸다. 그리고 재빨리 눈을 깜빡여 빨리 빛에 눈이 익숙해지게 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자 나는 실소가 나오는 걸 금할 수 없었다. 나만 재빠른줄 알았더니, 일행 중 당황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애쉬와 반담, 흄, 자카르 같이 검을 쓰는 사람들은 눈을 감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각자의 검을 꺼내어 마을쪽으로 몸을 향한채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스와카는 내가 형성해 놓은 방어막 안에 자신도 방어막 하나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리틀 조로와 류미르는 벌써 정령들을 불러내어 우리 주위를 수호하게 하고 있었으며 세이몬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허허허..." "후후후..." 시력을 되 찾고 주위를 둘러보던 일행들이 피식피식 미소를 흘렸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도 있겠지만 일행들에게 더욱 더 신뢰가 갔기 때문에 안심이 된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는 곧 다시 긴장한 얼굴들로 마을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왠지... "우리보고...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지 않아요?" 리틀 조로가 조심스레 말을 던졌다. 그도 그럴것이 아까 갑자기 빛이 터져나오게 했던 것의 범인인 듯한 여러개의 빛의 구체가 우리 앞에 둥둥 떠서 앞길을 밝히고 있었다. 다른 곳은 여전히 어둠에 둘러쌓여있고 우리가 걸어갈 길 위에만 빛의 구체가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니 리틀 조로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두 가지는 확실하군요." 스와카가 자신의 방어막을 조심스레 거두면서 말했다. "첫째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두번째는 우리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를 기다린다니..." 애쉬가 들고 있던 검을 허리에 찼다. "초대에 응해주는게 손님의 도리겠죠?" 자카르도 싱긋 웃으며 검을 다시 집어 넣었다. "뭐... 아름다운 레이디라도 기다리고 있다면 더 좋겠지만..." 나는 방어막을 풀었다. "각자의 몸은 각자 알아서 지킵시다." 모두들 무기는 집어 넣었지만, 긴장은 늦추지 않은 채 마을을 노려보았다. 애쉬가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럼, 갈까요?" 빛의 구들이 밝혀주는 큰 길을 따라 쭉 걸어가지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는 마을의 광장인 듯한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곳에는 실프가 말했던 대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등을 향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서 있었는데, 그런데도 아무 소리가 안 나니까 그것만으로도 꽤 괴기스러운 장면이었다. 우리가 그들 뒤에 도착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같이 멀거니 서 있는데 사람들이 움찔 하더니 조용히 옆으로 물러나 길을 내주었다. 그런데 그 길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듯, 사람들이 양 옆으로 물러나자 길 맨 끝에 '그 존재'가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청난 살기를 온 몸을 내뿜으며 천천히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희안한 것은 '그 존재'가 걸어오며 지나간 쪽에 있던 사람들이 '그 존재'가 지나간 쪽을 향해 몸을 돌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딱딱 맞아서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휘유~, 우리 기사단보다 잘하면 잘 했지 쳐지지는 않는군요. 대단한 데요?"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자카르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그의 장난스런 어조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눈은 매우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이... 풀려 있군요." '그 존재'보다는 군인들 처럼 동작을 착착 맞춰서 몸을 돌리는 사람들이 더 신경이 쓰인 듯 그 쪽을 보고 있던 스와카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저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은데다, 아시리안님 말로는 - 이 들은 실프의 말은 못 들으니 내가 실프의 말을 옮겨주었다. - 살아있었다고 했으니 좀비는 아니군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더 심각한 거죠. 아마.... 환상 마법같은거에 걸려 있는 거 같은데... 그러니 저들이 우리에게 덤빈다면 당신들은 제대로 공격을 못할 거 아니겠어요?" 류미르가 일행을 슬쩍 돌아보며 묻자 애쉬가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면서 말을 받았다. "심각한 거죠." "이성을 잃은 것 치고는 꽤나 머리를 썼군요. 저걸 보면 본능만 있다고 하기 어렵겠는데요?" '그 존재'가 다가옴에 따라 자카르가 얼굴을 굳히며 자신의 검을 빼어 들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혼자 힘으로는 우리를 상대하기 어려우니까 자신의 편을 만든 걸테죠. 아주 말을 잘 듣는 동료를 말예요." 스와카가 설명을 끝낼때 쯤 '그 존재'는 완전히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그들과 우리의 사이에 섰고, 사람들은 모두 몸을 돌려 다시 길을 메꾸고 우리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요, 레드포드 자작님? 혹시 작전 같은게 있습니까?" 류미르가 '그 존재'로 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검을 만지작 거리면서 묻자 애쉬는 벌써 생각해 놨는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플레이저 자작과 류미르, 세이몬 당신들 세 분은 대장을 맡아주시길. 여기에서 싸우면 사람들이 크게 다칠지도 모르니 될수 있으면 이 곳을 벗어나는 곳 까지 유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람들을 맡도록 하죠. 사람들을 죽이면 안된다는 것을 유념하시고 알아서 때려 눕히시기 바랍니다." 일행 모두가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들을 까딱 거릴 때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에게 속삭였다. "마을 밖으로 튀어!!" '그 존재'의 살기가 좀 더 날카로워졌다 느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소리쳤다. "튀어!!" 그 말에 나와 류미르, 세이몬을 제외한 일행은 좌 우로 뛰었고 우리는 뒤로 튀었다. 그와 동시에 '그 존재'는 검을 빼어들고 나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나는 등을 보이고 냅다 뛸 때 '그 존재'보다 더 빨리 뛸 자신이 없었으므로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그 존재'의 기운이 느껴지자 마자 방어막을 쳤다. 쾅~!! 뛰어 오면서 온 힘을 다해 부딧혀 온 충격이었기에 비록 방어막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그러자 세이몬이 자신의 검에 검기를 잔뜩 주입한 상태로 '그 존재' 에게 달려들었고 그 사 이 류미르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마을 밖으로 냅다 뛰었다. 어차피 '그 존재'는 나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세이몬이 슬슬 버겨워져 뒤로 물러나자 더 이 상 세이몬을 상대하지 않고 곧장 나를 향해 쏘아져 왔다. 이번에는 류미르가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마나를 잔뜩 일으켜 '그 존재'를 향해 외쳤다. "리버스 타임!!" 상대방의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게 하는 마법으로 '스톱'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스톱'은 마나를 상대방의 몸을 둘러쌓 강제로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데 비해 '리버스 타임'은 상대방의 시간을 멈춰버리는 좀더 고난위의 마법이다. 이 마법은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지만, 상대방의 마나가 많으면 많을 수록 자신의 마나가 더 빨리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아마 류미르는 자신의 마나를 많이 잃어버리기 전에 마법을 풀어버릴 것이 분명했으므로 버틸 시간은 아마도 2~3분쯤... 나는 그 동안 마을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중간에 세이몬도 같이 '그 존재'의 진로를 방해해서인지 내가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에... 경작지 위라는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추수때가 다 된 곡식들을 그냥 깔아 뭉개려고 하니... 그래도 양심에는 찔리는구만... 뭐, 아빠가 알아서 해주겠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경작지 사이에 난 길에 자리를 잡자 '그 존재'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동안 류미르와 세이몬에게 의해 진로를 방해받자 무지 화가 난 듯 살기 위에 분노의 느낌까지 전해졌다. 그 모습에 본체로 돌아가 싸울까... 했지만, 곧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 그걸 사용할 때는 아마 최후의 결전이 될 때일테고, 그 때는 주위에 걸리는 게 없어야 했다. 그 전에 할수 있는데 까지는 해보고 싶었다. '그 정도로 처리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발을 어깨넓이로 천천히 벌린 뒤 레이피어를 꺼내어 두 손으로 꽉 쥔다음 심호흡을 한 다음 조용히 땅의 정령을 불러냈다. '온다!!' 예전에 몇번 기습공격을 당했던 터라 이제는 나에게 기습할 기회 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먼저 선제공격을 해왔다. 온 몸에 강화 마법을 걸고 마나를 끌어모아 검에 주입한 다음 정면으로 맞부딧혔다. "크윽~!!" 전에도 붙어봤고 충격을 예상하고 대비했다고 생각 했지만 여전히 '그 존재'의 힘은 강했다. '어째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아.' 그 살기가 이글거리고 타오르는 눈빛을 마주 대할 수가 없어서 슬며시 시선을 비낀 상태로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몸을 확 옆으로 틀어 '그 존재'의 검을 흘려버린다음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며 외쳤다. "노움!!" 그러자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노움이 흙을 부드럽게 한 동시에 땅을 꺼지게 해버렸고 갑작스레 발이 땅 속으로 빠지자 당황한 '그 존재'가 잠시 멈칫 거리는 사이를 노치지 않고 나는 재빨리 마법을 시전했다. "라그나 블라스트!!" 적을 오성망으로 만든 공간에 가둬 그 안에서 몇배로 증폭된 마력의 힘을 그대로 적이 고스란히 맞게 하여 소멸시키는 마법이다. 자신이 감당치 못할 상대를 쓰러트릴 때 사용되는 마법인데, 보통 이런 건 미리 마법진을 그려놓고 거기에 여유가 된다면 마법 증폭기 까지 동원하여 미리 적을 가둘 오성망을 만들어 놔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으므로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오성망 안에 '그 존재'를 가둬 둔 것이라 평소 내가 진지하게 시전했을 때와는 위력이 많이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내는 것이라 나는 조금은 안도하고 있었나보다. 내가 만들어 놓은 공간 안에서 펼쳐진 위력이 내가 있는 곳 까지 빛을 보임과 동시에 몸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까지 만들어내자 조용히 그 앞에 내려서서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모습이 보이자마자 마지막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하지만, 존재가 모습을 보이기도 전에 내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뚫고 한줄기의 빛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커억~!!" 그 빛줄기는 내 배를 정확히 관통해버렸고 나는 그 충격에 나도 모르게 뒤로 몇걸음 물러나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저절로 감싸않은 배에서 따뜻하고 약간은 미끌거리는 액체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천천히 내가 만들어 놓은 공간이 깨지면서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이 약간 그슬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혀 타격받지 않은 모습으로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여유있게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젠... 장할..." 욕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것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건데 거기에 '그 존재' 의 다음 공격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그런데 그때 나를 구원해줄 반가운 이의 음성이 들렸다. "아린!!" 그와 동시에 나를 향해 치켜졌던 '그 존재'의 검이 방향을 틀어 뒤를 향해 휘둘러졌다. 붉디 붉은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그 검에서 튀어나와 날아가는 것을 보지도 않고 '그 존재'의 검이 다시 그대로 방향을 틀어 나에게 날아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할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그 존재'를 열받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강력한 바람이 날카로움을 머금음과 동시에 흙먼지를 동반하여 '그 존재'를 덮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따뜻하고 강인한 팔이 나를 감쌓안았다. 따뜻한 팔의 주인은 류미르였다. 그는 나를 가볍게 안아 들고 열심히 달리면서도 그 와중에 질문을 던졌다. "괜찮아?" "아퍼.... 깨끗하게 관통 당했는걸?" 말 하는 도중 입에서 피로 생각되는 액체가 조금씩 흘러 나왔지만 평상시 같은 어조로 말할 수 있었다. "아프다면서 말은 잘 한다. 빨리 치유해."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 이었어. 힐!!" 내 손에서 마나가 밝은 빛으로 화해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 부위로 스며들자 타는 듯한 통증이 가라앉으면서 피도 서서히 멈춰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류미르의 어깨 너머 뒤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저기 류미르?" "응?" "쫓아 오는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널 내려놓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겠냐?" "그런데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어." "것두 알아." "그랬냐? 그럼 슬슬 내가 다시 나서야 하는군." 나는 어느정도 몸이 치유되었다 생각하고 뒤에서 무섭게 날아오는 '그 존재'를 바라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 "딜 브랜드!!" '그 존재'의 반경 20m 이내의 땅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치솟아 오르며 '그 존재'의 모습을 가렸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류미르가 나를 재빨리 땅에 내려놨다. "괜찮겠어?" "응." 서서히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제야 자신의 몸 주위를 붉은 빛을 띄는 마나의 막으로 감싸고 몸을 보호한 채 허공에 떠 있던 '그 존재' 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왠만한 마법은 먹혀들지도 않는군... 단지 '잠시 시간을 끌기 용'으로 사용될 뿐이라니... 결국은 직접 가서 목을 베어야 하는 것 뿐인가?" 그 모습에 질린다는 듯 류미르가 내뱉었다. "그러니까 나도 익숙하지 않은 검을 들고 있는거 아니겠냐? 자, 그럼 간다! 위더 피스트!!" '그 존재' 가 서 있는 앞의 땅에서 갑자기 거대한 주먹이 솟구쳐 올라 덥쳐갔다. 그러나 '그 존재'는 가소롭다는 듯 곧장 검을 들고는 곧바로 그 주먹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그와 함께 류미르와 나도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퍽~!! 사과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주먹이 산산조각 났고 그 사이에서는 '그 존재'가 이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앙~!! 도저히 검 끼리 부딧혔다고 생각할 수 없는 폭발음과 함께 '그 존재'와 내 검이 맞붙었다. 힘으로 '그 존재'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을 때 나보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솟구쳐 올랐던 류미르가 '그 존재'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검을 내리 그었다. 그러자 '그 존재'는 류미르를 알아 차린 듯 갑자기 힘을 빼고 뒤로 물러나 나는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지면서 류미르의 검에 찔릴 뻔 했다. 다행히도 류미르가 재빨리 검을 위로 회수하면서 내 어깨를 살짝 밟고 재도약 하는 바람에 검에는 찔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덕분에 나는 확실하게 앞으로 꼬꾸라졌다. "젠장..." 언제 이렇게 흙 속에 얼굴을 쳐박고 맛사지 받을 기회가 있었던가? 기분 무지하게 나빴다. 하지만 그걸 느낄 여유로움도 없이 재빨리 일어나 얼굴에 묻은 흙을 대충 털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세이몬도 지척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류미르가 '그 존재'와 한번 부딧히고 뒤로 물러나는 틈을 노치지 않고 곧바로 달려들어 옆구리를 노렸다. 그러자 '그 존재'의 검이 반대쪽 횡으로 그어지던걸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돌아와 밑으로 내려오며 정확하게 내 검 끝을 가로 막았다. 하지만 난 놀라기보다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 존재'의 등 뒤에서 검을 휘두르는 세이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에도 당한 수법에 또 당할 맘은 없었는지 '그 존재'는 내 검 끝을 가로막은 검에 힘을 더 가하여 내 검 까지 내리 누르더니 한 손을 검에서 떼어내 내 어깨를 강하게 집었다. 한 손을 검에서 떼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힘이 줄지 않음에 놀랄 틈도 없이 내 어깨를 강하게 짚는 '그 존재'의 힘에 의해 나는 한순간 휘청 거렸다. 그 틈을 타 '그 존재'는 훌쩍 내 머리 위로 뛰어 넘었고 세이몬은 급하게 자신의 검을 회수해야 했다. 그 시점에서 '그 존재'는 그냥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지 뒤로 물러나면서 내 등을 노리고 강하게 횡으로 그었다. "커억~!!" 오늘 칼침 맞은게 벌써 두번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난생 처음으로 내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등뼈까지 부서진 듯 했다. 너무 깊은 상처를 입으면 잠시동안은 피도 안 나오고 고통도 안 느낀다는 걸 들은 적은 있었지만 직접 체엄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까는 배를 통과한 뒤에 불에 타는 듯이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 덮쳐온 힘에 의하여 내 몸은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져 나는 다시 흙더미에 얼굴을 처박아야 했다. "아린!!" 세이몬과 류미르가 동시에 부르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류미르가 금세 달려와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잠시만 참아. 곧 치유해 줄께. 괜찮을 거야." 류미르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한번 등쪽에서 시원한 기운이 스며드는 기운이 느 껴지더니 그와 함께 무지 뜨겁고 신경이 팽팽이 당겨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덮쳐와서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우욱!!" 내 신음 소리를 듣자 잠시 시원한 기운이 사라지더니 곧이어 더 커진 기운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류미르가 놀라서 마법을 다시, 그리고 좀 더 강하게 걸었나보다. 하지만 그 마법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다시 커다란 몽둥이에 얻어 맞는 듯한 둔중한 통증을 상처 부위에서 느껴야 했다. "커억~!!" 그 충격에 의하여 나는 입으로 피를 토함과 동시에 치유의 마법에 점점 희미해지던 정신이 다시 찬물을 뒤집어 쓴 듯 화들짝 깨어나 버렸다. "젠장, 세이몬!!" 류미르의 놀라움과 황당함, 그리고 분노의 외침이 들려왔다. "큭... 미, 미안..." 아마 '그 존재'에게 날려온 모양인데 하필이면 낙하 지점이 내 등 위었던 모양이다. 세이몬이 얼른 몸을 일으키는 듯 싶었지만 아까보다 더 심한 통증이 밀려와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악물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방어막을 치고 치유를 하는 건데..." 류미르의 후회 섞인 투덜거림이 들려옴과 동시에 다시 중단 되었던 치유의 기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진작 그렇게 하지 그랬냐...' 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입을 열었다간 신음이 흘러 나올 것 같아 그냥 참고 있었다. "류, 류미르... 멀었냐?" 멀리서 세이몬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멀었어. 너 때문에 상처가 더 벌어졌잖아!!" 평소 류미르 답지 않게 신경질적이고 초조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 등에 스며들던 치유의 기가 약해지며 흔들리는게 느껴졌다. "젠장, 아무래도 안돼겠어. 실라페!!" 아무래도 세이몬 혼자 '그 존재'를 막는 것에 역부족이었는지 류미르가 치유가 끝나지도 않 은 날 '응급조치'만 한 정도로 끝내고 바람의 중급 정령을 소환했다. "아린을 저 쪽에 있는 신관에게 데려다 줘. 조심해서 들고." 바람의 정령이 바람을 이용해 날 조심스레 들어올리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류미르의 말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내가 간다!!" "아시리안님!!" 놀란 듯한 사르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아, 조금만 기다리세요!!" 바람의 정령이 나를 다시 땅에 내려놓자 사르하가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나... 다다다다~~!! "사르하, 여기좀..." 급한 발소리와 함께 다급한 어조의 리틀 조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마 내 모습을 본 듯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끊겼다. "아시리안님이 다치셨군요? 다 치유가 된 건가요?" 사르하가 나를 치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리틀 조로는 사르하에게 직접 묻지 못하고 옆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아니, 지금 막 오셨어." "큰일났네... 스와카 괜찮아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나보다. "하아, 하아... 난... 그냥... 하아, 지친 것 뿐....하아..." "어떻게 됐지?" 기사의 다급한 물음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게다가 왠만한 마법은 먹혀들지도 않고요. 그럼 전 다시 가볼께요." 다시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기사의 외침이 들렸다. "기다려, 너야말로 매우 지친 듯 한데!!" "전 괜찮아요." 이미 뛰어가버린 듯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쁜일은 연이어서 일어난다고 했던가? '아마 그게 머피의 법칙이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아마도 '그 존재'쪽인 듯 했다. "이런, 큰일이군. 신관님 멀었습니까? 저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만..." "조, 조금만 더요... 너무 상처가 깊어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제발 빨리 하시길..." 기사의 초조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사르하를 바라보았다. "사르하, 그만 해." 갑자기 말을 걸어서 그런지 사르하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 아시리안님?" "내 상처가 깊지? 아마 내 상처를 다 치유하려면 넌 탈진하고 말거야, 그렇지?" "에? 그야, 그렇지만..." "사르하, 지금 날 그냥 나둬도 죽지는 않으니까 그만 치유하고 빨리 스와카의 체력이나 회복시켜. 잠시 후에는 다른 동료들도 네 힘이 필요할테니 힘을 남겨두길 바래." "하, 하지만..." 사르하가 머뭇 거리자 나는 좀더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은 그런 사치 누릴 시간 없으니까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기사님, 날 좀 업어주겠어요?" "예? 아, 예!!" 기사가 내 몸을 조심스레 일으켜 자신의 등에 엎자 그제야 시야가 탁 트여서 주위를 볼 수 있었다. "역시..." 아까 소리를 제대로 들었는지 저쪽에 '그 존재'와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류미르와 세이몬의 모습이 보였다. 그 둘은 힘이 딸리는지 자꾸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둘만으로는 역부족이군... 마을쪽도 밀리고 있다고 했지?"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 했지만 입술을 깨물어 정신을 유지하며 어찌해야 할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와있었다. '튀는 수밖에...' 문제는 어떻게 튀느냐 하는 거였다. 내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동안 사르하 덕분에 체력이 회복된 스 와카가 자신의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우선 물러나는 수밖에 없겠군요." "동감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물러나느냐죠." 류미르와 세이몬 쪽은 조금 더 이쪽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아마도 '그 존재'가 나를 끝장내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이쪽으로 오고 있을 터였다. "이런, 마을쪽으로 간 사람들이 보입니다. 밀려 나왔군요." 마을 입구가 보이는 곳쯤에 위치해 있었던 터라 마을 입구로 바글바글 몰려나오는 사람들과 그 앞에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는 일행들이 잘 보였다. "스와카, 혹시 일행들을 이쪽으로 불러들일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스와카가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외쳤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의 목소리는 마법의 힘을 빌어 공기중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확실하긴 확실하네요." 사르하와 기사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르하, 일행들이 지쳐있을테니 준비해줘. 그리고 스와카는 말 안해도 알죠?" "물론이죠. 저들을 지체시키라는 것 아닙니까?" "하아... 부탁해요." 머리가 점점 더 아파오는데다 이제는 얼굴까지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마 열이 오르는 듯 했다. "하아... 문제는 저쪽인데..." 타다다다닥~~!! "빨리, 이쪽으로~~!!" 일행들이 다가오는 듯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로 스와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딤 윈드!!" 스와카의 손이 쭉 뻗어난 방향을 따라 거대한 돌풍이 일어나더니 일행들 뒤를 쫓아오던 사람들에게 들이닥쳤다. 죽일 수 없으니까 아예 바람으로 날려버리는 듯 했다. "나의 주인이신 엘라이어드 여신이시여, 미천한 종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려 주소서." 사르하도 다급한지 평소에 하던대로 일일이 신성력을 부어주는 대신 한번도 쓰지 않던 신성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뻗어나온 성스러운 빛줄기는 이제 막 이쪽으로 뛰어와서 지쳐버린 몸을 추스리고 있는 일행들을 한꺼번에 감싸안았다. "멋진 광경이군요." "하아... 그렇군요." "텔레포트를 해야겠습니다." 잠시나마 마을 사람들을 지체시킨 스와카가 와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아, 사람들이 너무... 하아, 많지 않은가요? 당신 혼자서는..." "마법진을 써야겠지요. 제가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마을 사람들 쪽은 리틀 조로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잠시간일테니 온 힘을 다 쓰라고 해야죠. 문제는 아시리안님 친구분이 있는 쪽입니다만..." 스와카가 턱을 만지며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은 저희가 가도록 하죠." 시선을 돌려보니 회복을 다 시킨 듯 사르하가 땅에 주저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헥헥대고 있 었고 다른 사람들은 혈색이 멀쩡해져서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와 반담, 그리고 자카르님이 가면 도움이 될겁니다." 애쉬가 대표로 말하자 자카르와 반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한 10여분정도만 막아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나는 몸을 돌려 '그 존재'가 있는 쪽으로 가려는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왼손에 찬 아빠의 팔찌를 힘겹게 빼내었다. "이거... 하이 엘프에게 주세요. 하아... 도움이 될겁니다." 그러자 애쉬가 와서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잠시동안 쳐다보다가 낮게 속삭였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시간만 끄시면 되는 겁니다." 스와카의 당부 말을 들으며 그들은 빠른 속도로 류미르와 세이몬이 분전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스와카는 재빨리 땅에다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는 나와 사 르하, 그리고 기사는 한쪽에서 조용히 구경하고 있었다. "헉헉, 아시리안님.. 헉, 괜찮으세요?" "하아.. 버틸만 해...." "헉, 얼굴이 헉헉, 붉은데... 헥헥, 열이 있으신가 봐요...헥..." "힘들면... 말하지 마... 대답하기도... 힘들다....하아..." 시야가 점점 흐려지면서 아프던 머리가 이제는 어지러워졌다. '하아... 젠장... 내가 이렇게 아팠던 적이 있었던가...?' ..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잠시 눈을 감고 있는다는게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듯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 바로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데다 그렇게 폭신폭신 하진 않지만 그래도 깨끗하고 편안한 베개가 보였다. "...엥...?"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아마도 등에 상처가 난 관계로 누일 수가 없어서 엎어놓은 듯 했다. 침대에 엎어져 있는 걸 보니 분명 이 곳은 집안인듯 했다. '그럼... 설마... 그 마을인가?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아, 잠깐만... 그때 스와카가 공간 이동진을 만들고 있었지?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다는 건 무사히 도망쳤다는 이야기인 데... 그럼 그 마을은 아닐테고... 그렇다고 자벨리안 성으로 돌아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여기가 성일리는 없고... 어떻게 된 거지? 그나저나 이 방안에는 아무도 없나?'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오랜 시간동안 자고 있었는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다 손가락 하 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에구... 기운 없어..." 목소리도 내 목소리 같지 않은게 탁 쉰데다 말 끝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천천히 손가락 끝부터 움직여서 겨우 팔을 움직일수 있게 되자 팔로 상체를 지탱하여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랬더니... "윽!! .... 아프다..." 등이 감전된 것 처럼 찌릿하면서 아직 상처가 있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에구..." 몸을 일으키는 걸 포기하고는 다시 엎어져서 그 상태로 몸 부터 살펴보니 나는 내 몸에 비해 무척 큰 면 남방을 걸치고 있었는데 몸 안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에... 그냥 치료한거 보면... 아, 그때 사르하도 무척 탈진해 있었지... 그럼 아직까지 회복 못 한 건가? 흐음... 치유 마법은 류미르나 스와카도 쓸 수 있는데 말야.. 아... 그들이 완전하게 치유하기에는 내 상처가 좀 심하려나? 그런데... 내 옷은 누가 갈아입힌 거지?" 우리 일행 중 여자가 나와 사르하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설마... 하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놈이 내 옷을 벗긴 거야...?" 혼자서 시부렁시부렁 대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가 들렸다. 달칵!! "에?" 고개만 겨우 돌려서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니 거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열리고 왠 여자가 옷가지로 보이는 천 뭉치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다. 문을 닫느라 목덜미에서 리본으로 묶은 등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면직물로 만들어진 베이지색 라운드 티와 큰 붉은색의 체크 무니가 있는 남색 치마를 입고 있는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그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평범하게 생겼지만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생겨서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음직해 보인 20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문을 닫자마자 곧장 내 쪽으로 다가오던 그녀는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내 눈과 마주쳤다. 그러자 가느다란 갈색 눈썹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어머,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누구세요?"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았네요. 아, 목이 건조해서 그럴 거예요. 입술이 바짝 말랐는데 목 안 마르세요?" 그리고는 침대 옆에 있던 자그마한 서랍장 위에 천뭉치를 내려놓고는 그 곳에 있던 나무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다가왔다. "자, 마시기 힘드실테니 제가 도와드릴께요." 내 상체를 살짝 받쳐주면서 컵을 입가에 가져다 주어 내가 물을 쉽게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아까까지는 목이 마른지도, 물을 마시고 싶었는지도 몰랐는데 차가운 물이 입술에 닿자 입이 저절로 열리면서 나도 놀랄만큼 허겁지겁 물을 꿀꺽꿀꺽 마셔댔다. "천천히 마시세요. 그러다 사래걸려요." 그녀가 옆에서 뭐라고 하던말던 그 컵에 담겨져 있던 물을 다 마시고 나자 그제야 살것 같았다. -언제는 죽을 것 같았나?- "여기가 어디죠?" 목이 물에 적셔져서 그런지 여전히 쉬어 있었지만 목소리가 아까처럼 갈라지지는 않았다. "여긴 저희 집이에요. 자, 붕대를 갈고 옷을 갈아입으셔야 해요. 몸을 조금만 옆으로 기울여 주시겠어요?" 그녀가 가지고 들어온 것이 내가 갈아입을 옷가지와 붕대였나 보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 피투성이로 의식을 잃고 있어서 많이 걱정했어요. 지금이라도 깨어 나셔서 다행이예요." 몸을 옆으로 기울이는데 등이 찌릿찌릿 욱신욱신 거려 움직이는데 무지 조심스러웠다. "내가... 며칠동안 잤는데요?" "이틀동안 내리 잤어요. 아, 아직 움직이면 아프죠? 그럴거예요. 상처가 무척 깊었거든요. 피도 많이 흘린 것 같던데..." "저... 나랑 같이 온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모두 밖에 계세요. 몇분은 옆방에서 쉬시고 계시구요. 아, 이 방에는 딴 여자분이 같이 계셨는데 누워있는게 갑갑하다고 잠시 나갔어요." 그녀는 내 옷을 벗기고는 능숙한 손길로 붕대를 풀고 약 비스무리 한 걸 새로 바르고 다시 붕대를 감았다. "자, 이 옷으로 갈아 입으세요." "혹시, 내 옷은 어디 있나요?" "너무 지저분해서 빨았어요. 게다가 여기저기 찢어진 곳이 많던데 수선이 끝나면 가져다 드릴게요." "아... 고마워요. 그런데... 누구... 시죠?" "에? 아, 그렇구나. 아직 당신과 인사를 못했군요. 다른 분들하고는 다 인사를 해서 다 한줄 착각하고 있었어요. 전 메이라고 해요." "그렇군요. 난 아리시안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을 보니 평소에도 많이 웃는 아가씨인 듯 했다. "하하하... 예..." 메이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나서 나는 다시 엎드리고 메이는 내가 벗어놓은 옷과 붕대를 챙기고 있는데 문이 열였다. 끼이이익~~!! 상당히 조심스레 여는 폼이 아마 내가 깰 까봐 신경써주는 듯 했다. "어? 아리시안님, 깨어나셨군요?" 목을 꺾어 문쪽을 바라보니 리틀 조로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헬쓱한 얼굴의 사르하가 보였다. "안녕.. 사르하." 메이는 우리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방을 나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죽지는 않을 것 같아. 그런데 너야말로 얼굴이 무척 창백한데?" 그러자 사르하는 단지 피식 웃어보였고, 리틀 조로가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면서 투덜대는 어조로 말했다. "바보 같이 탈진했으면서 신성력을 또 썼지 뭐예요? 그래서 아예 쓰러졌었다구요. 아직까지 회복 안 된 것좀 보세요." "그래도 리틀 조로 너는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여긴 도대체 어디냐?" "여긴 바이투 산맥을 이루고 있는 어떤 산속에 있는 마을이예요. 지명은 저도 정확히는 모르구요." 리틀 조로가 사르하를 내 침대 옆 의자에 앉히면서 대답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줄래?" "그러니까... 저도 잘은 모르지만...." 으로 시작 된 리틀 조로의 설명으로는 리틀 조로가 마을 사람들을 막고, 검객(?)들이 '그 존재'를 막고 있는 동안 스와카가 마법진을 완성해서 그들을 간신히 따돌리고 도망을 칠 수 있었다고 했다. 많은 인원이 있었던 터라 멀리 가지는 못하고 그 마을에서 보이는 산 바로 밑까지 이동했었는데, 그걸로도 스와카가 지쳐서 쓰러지고 '그 존재'를 막고 있던 사람들도 마지막에 혼신의 힘을 다해 따돌리고 마법진이 있는 곳 까지 뛰어 오느라 지쳐 있어서 사르하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신성력을 퍼부어 체력을 회복시키려 했었단다. 하지만 사르하도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미처 다 체력을 회복시키기도 전에 - 하긴 체력을 회복해야 할 사람들도 많았긴 했다. - 기절해버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긴장 상태에 빠져 거기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 끝까지 체력을 회복 못한 스와카는 반담이 업고, 사르하는 흄이 들쳐없고 산속으로 들어와 헤메던 중 엘프 - 류미르겠지. - 가 어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한 마을을 찾아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제일 가까운 집 - 바로 내가 누워있는 집 -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구요." "그래? 어쨌든 잘 도망쳤구나." "도망이야 잘 쳤지만, 지금은 모두들 뻗은 상태인 걸요. 게다가 아리시안님은 죽은 듯이 엎드려서는 깨어나지도 않으시니까 모두들 많이 걱정했다구요. 사르하나 마법사님들도 아직 다 회복이 안 되어서 치유를 해드리지도 못하고 단지 약초에만 의존하니까 더욱 더 불안해 했다구요.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서..." 리틀 조로는 그 동안 쌓인게 많았는지 숨도 안 쉬고 그 많은 말들을 내뱉었다. "그, 그랬냐?" "예. 게다가 누워 계시는 그 하이 엘프님도 한시간에 한번씩은 꼭꼭 저에게 아시리안님이 깨셨는지 보고 오게 했다고요." '무지 귀찮았었나 보군... 그런데... 뭔가 빠진 것 같다?' "아, 잠깐만... 혹시 검은 머리의 검사는 암 말도 안해? 그는 뭐하고 있지?" 그랬다. 류미르가 저렇게 애를 들들 볶는데 세이몬이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류미르 보다 더 애를 들들 볶아 류미르가 말렸을 사태가 일어나며 모를까... "아, 그 검사님도 잠들어 계세요." "잠들어 있다고? 다친 거야?" 세이몬이 다친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잠자고 있었을 때는 모두 불안했다고 하면서 세이몬이 깨어 나지 못하고 있다는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리틀 조로 녀석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리틀 조로가 움찔 하는 동시에 등의 상처가 전기 쇼크를 열렬히 보내왔다. "윽~!!" "아시리안님!!" 헬슥한 얼굴의 사르하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에구구... 아야야야... 아, 사르하, 난 괜찮으니까 자리에 앉아. 지금이 낮이라서 그렇지, 밤이었으면 네가 유령인 줄 알았을 거다." 그러자 사르하가 샐쭉해져서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거야, 아시리안님을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요." "네 몸이 다 회복되면 그때 걱정해줘도 안 늦어. 그건 그렇고 리틀 조로? 계속 말해봐. 깜장 검사가 잠들어 있다구?" "에? 아, 예. 그 하이 엘프님이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할 것 없다구 그랬는데요... 그냥 체력이 너무 낮아져서 잠든 것 뿐이니까 며칠 자고 나면 깨어날꺼라고 그랬는데...." 내가 아까 소리쳐서 그랬는지 녀석은 내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면서 우물쭈물 대답했다. "언제 잠이 들었는데?" "여기 오시고 나서요..." '그러고 보니... 산 밑으로 이동한 후에 사르하가 일행 모두에게 체력을 회복시키려는 의미에서 신성력을 썼다고 했지? 이런... 그렇지 않아도 '그 존재'를 상대하느라 체력이 떨어졌을 텐데 사르하의 신성력까지 방어해야 했으니... 참내... 황당한 경우로군...' 나와 류미르가 마족인 것은 숨기라고 했으니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다가 이 곳에 오자마자 잠이 들어버린 세이몬을 생각하니 속으로만 쓴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왠지 미안해졌다. '잠들기 전에 상황을 류미르에게 설명은 해줬나보지? 그러니까 류미르가 괜찮다고 말하지. 그건 다행이네. 성장하더니 그런 세심한 면이 생기구 말야... 짜식, 크긴 컸다 이거지?' "저어... 아시리안님?" 조심스러운 사르하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르하와 리틀 조로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 보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 "응? 아아, 그래... 그럼 내 친구들하고 스와카는 딴 방에서 뻗어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럼 딴 사람들은?" "그 분들은 이틀 쉬고 나시니까 멀쩡히 일어나시던데요? 그래서 오늘 이 집 주인 아저씨가 사냥을 하러 가니까 도와준다고 같이 갔어요. 아, 흄님은 만약을 대비해 여기 계시구요. 불러 올까요?" "그래줄래?" 그 말에 즉시 리틀 조로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 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사르하가 의자를 살짝 끌어당겨 침대에 더 가까이 와 앉더니 그 창백한 얼굴에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못 깨어나시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웃는데 정말 안심했다는 표정에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내가 얘랑 그렇게 사이가 좋았었나?' 의아함이 들었지만, 내가 깨어나는 걸 저렇게 반가워해주는 애한테 의아함 때문에 위로도 안 해줄 정도로 난 야박하지 않았다. "에이, 뭘 이정도 가지고 울어? 다시 만났으니 됐잖아." "예에~!!" 하며 자신도 쑥쓰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소매로 눈가를 쓰윽 닦았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에요. 도움이 되려고 일행이 되었는데도 아시리안님을 완전히 치유 하기는 커녕 단지 목숨만 부지할 정도밖에 치유 못한데다가 신성력이 모자라서 일행 체력도 완전하게 회복 못 시켜서...흑, 혹시... 절... 흑흑..." 눈물을 닦길래 진정했나 싶었는데, 말 하는 도중 다시 감정이 복받쳤는지 울먹이면서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로해 줄 마음은 요만큼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날 너무너무 존경하고 좋아해서 깨어난 것 자체가 반가웠던 게 아니라, 억지로 떼를 써서 일행이 되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도움이 안 된것 같으니까 혹시나 신전으로 돌려보낼까봐 전전긍긍 했었는데 내가 깨어나니까 한시름 놓았다... 이말이지?' 이마에 힘줄이 하나 뾰록 솟는게 느껴졌다. '이걸 확 보내버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게, 이번에 그녀가 없었더라면 정말 우리 일행은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어쩔 수 없지. 확실히 신관이란 필요한 존재로군... 하지만 왠~~~지 그걸 말해주고 싶지는 않아.' 똑똑~~!! '어, 흄이군.' "들어와요." 역시 내 예상대로 흄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리틀 조로가 같이 따라들어오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무지 아프군요." 어떤 대답을 기대한 건지 흄의 얼굴에 황당함의 물결이 번져 나갔다. 하지만 그런 그를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는 얼른 헛기침을 하면서 표정을 수습했다. "험험, 하긴... 크게 다치셨으니까요. 어쨌든 무사히 의식을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어? 사르하, 운 거야?" 그때 같이 따라 들어온 리틀 조로가 사르하의 얼굴에 남아있던 눈물 자국을 봤는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 리틀 조로... " 부끄러운지 다시 얼굴을 붉히며 소매로 씻어 보지만, 빨갛게 된 눈은 도통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왜 울었어?"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두리번 거리다 - 아마 사르하가 울게 된 원인을 찾는 듯 - 나를 힐끔 보더니 슬며시 고개를 숙여 사르하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시리안님이 뭐라고 했어?" '이넘아... 다 들린다...' 몸은 아파도 청력은 여전히 쌩쌩한 탓인지, 아니면 방이 상당히 조용했기 때문인지 리틀 조로의 목소리는 나에게 들렸다. 흄을 힐끗 보니 그도 같이 들은 모양이었다. "에? 아, 아니야.. 단지 아시리안님이 깨어나시니까 너무 기뻐서 그만 눈물이 났지 뭐야." 다시 배시시 웃어 보이는 사르하를 바라보는 리틀 조로의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사르하.. 역시 넌 신관이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곱니? 신께서는 널 사랑하실 수 밖에 없을 거야." "어머, 내가 뭘... 리틀 조로는... 부끄럽게...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냐." "네가 착한 사람이 아니면,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니? 사르하는 겸손하기도 하구나." "아이 참..." '참내...' 황당한 얼굴로 두 녀석이 하고 있는 꼴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피식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흄이 힐끗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곧 조용히 헛기침을 했다. "험험, 내가 아가씨께 할 말이 있으니 둘은 좀..." 흄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둘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더니 리틀 조로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사르하의 팔을 부축했고 사르하는 기꺼이 그의 어깨에 기댔다. "거참..." 피식 피식 웃으며 둘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자 흄이 슬쩍 말을 건넸다. "부러우십니까?" "글쎄... 지금까지 연애란 걸 해본 적이 한번도 없어서.. 부러운 건지, 우스운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흐음... 한번 정도는 해보고 싶기도 해. 과연 어떤 감정일지 궁금하거든... 어떤 감정이길래 저런 표정이 나오는걸까?" "말로 듣는 것 보다 직접 겪어보시는 게 더 확실할 겁니다." "풋, 맞는 말이군요." 같이 싱긋 웃어주던 흄은 뭔가 생각 났다는 표정으로 '아차' 하더니 나를 다시 내려다 보았다. "공작 각하께서 걱정하시겠군요. 매일 연락을 하시던 아가씨께서 며칠동안 연락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아아, 잊고 있었는데... 라우진 경, 미안하지만 하이 엘프에게 가서 내 팔지 달라고 해요. 그게 있어야 아빠랑 연락을 할 수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흄이 방을 나가고 나자 나는 그제야 깨어나서 처음으로 몸 속의 마나 상태를 살펴 보았다. 몸 속에 갈무리 되어 있던 마나는 여전히 잘 갈무리 되어 있었고 바깥쪽에서 몸을 휘감아 돌고 있던 마나도 잘 있었다. 단지 등 때문에 움직이기가 불편해서 그렇지 마나를 움직이는 데는 별 다른 지장이 없었다. "리커버리!!" 온 몸에 마나를 감싼채로 입 속으로 낮게 슷떱홱? 그러자 몸을 둘러싼 마나가 미묘하게 반응을 일으키며 그들 중 일부분이 희미한 빛을 내며 내 몸속으로 스며들어갔고, 그와 함께 몸 속을 흐르는 피에 힘이 느껴짐과 함께 그 힘이 몸 구석 구석으로 번져갔다. "진작에 마법을 쓸걸 그랬어." 의식을 찾고 나서 할 일 없이 멀뚱멀뚱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힘 없이 축 늘어져 있던 몸이 서서히 회복되어 가자 저절로 후회와 함께 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체력이 약간 회복되었다고 해도 등에 난 상처가 다 낳은 건 아니었다. '리커버리'는 회복 주문이지 치유 주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필 상처가 난 곳이 등이라 천상 남이 치유를 해줘야 할 판이었다. 똑, 똑 마법 시전을 끝마치자 때맞추어 흄이 돌아왔다. 그의 오른 손에는 익숙한 팔찌가 들려 있었다. "가져 왔군요. 류미르가 깨어 있던가요?" "예, 계속 주무시기도 힘들테니까요. 기운은 차리지 못하셨지만 깨어 계십니다. 아가씨께서 의식을 회복했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시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팔찌를 건네받아 왼손에 차고는 멀쩡한 그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나저러나, 기사분들은 체력도 좋으시군요. 이틀만에 회복하셔서 멀쩡하게 돌아다니시니 말입니다." 그러자 흄이 피식 웃었다. "자력으로 회복한 게 아닙니다. 하이 엘프께서 마지막 힘을 짜서 저희에게 마법을 걸어 주셨거든요. 그게 아니었으면 저희들도 아직까지 누워 있었겠죠." "그랬어요?" "예. 이 곳에 도착 한 다음 하루 지났을 때 걸어주시더군요. 만약을 대비한 거겠죠." "흐음..." 내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하자 그가 내가 찬 팔찌를 힐끗 내려다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아, 그 동안 아무것도 못 드셨을 텐데 간단한 음식이라도 가져 올까요?" 아빠와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자리를 피해주려 한다는 걸 눈치 채고는 나는 고맙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겠어요? 고마워요." 흄이 다시 방을 나가자 나는 엎드린 상태에서 왼 손을 앞으로 뻗어 조금 치켜올렸다. 나의 마나를 주입 받은 팔찌가 '우웅~~' 소리를 내며 하얗게 빛을 발했고 그와 함께 내 눈앞에는 아빠의 형상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냐?] 나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묻는 폼을 보니 그 동안 꽤 걱정을 한 듯 했다. "헤헤헤.. 보시다시피..." [다친... 거냐?] 아빠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아? 아하하하, 웅. 조금...." [조금 다친 녀석이 며칠동안 연락도 못해? 게다가 뭐냐? 지금 침대에 누워 있잖아?] "누워 있는게 아니라 엎드려 있는 건데..." [그게 그거지!! 그래, 그래,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나 좀 듣자.] "아, 그게요..." 주저리 주저리 아빠 앞에다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쏟아놓자 아빠의 안색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리고 나서 깨어보니까 여기더군요. 일행들은 모두 무사 하구요." [으음... 하지만 이상하군. 왜 너희를 뒷쫓지 않은 거지? 멀리 도망간 것도 아니고, 근처 산 속이라면서?] "솔직히...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앞으로도 '그 존재'는 혼자서 설치진 않을 거예요. 안 그래요?" [그렇겠지... 그럼 지금도 혹시 자신의 수하를 만들기 위해 쫓는 걸 잠시 멈춘 걸까? 어차피 네가 말한 마을 사람들을 산속으로 끌고 들어오기는 힘들테니까.] "흐음...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능력도 없을 텐데요..." [생각한 게 아닐게다. 아마 끌고 가다가 도저히 안돼겠으니까 버리고 새로운 수하를 만들려고 할테지...] "일났군요. 그럼 어쩌죠?" [우선 수도로 돌아오는 게 어떻겠니?] "그건 안될 것 같아요. 수도 근처에서 자기 수하를 만들면 어쩌려구요? 그럼 인명 피해가 엄청날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의 수하를 만들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깟 인간들 조금 죽는게 대수냐? 세상 천지에 널리고 널린게 인간인데... 넌 너무 맘이 여려서 탈이야.] "생명은 소중한 거라구요. 여기서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볼래요. 정 안돼면 그때 수도로 돌아갈께요." [지금 다쳐서 골골 하고 있으면서 무슨 수로?] "제가 깨어났으니까 일행도 곧 회복 시킬 수 있잖아요. 그러니 한번 더 붙어야죠. 그리고 자신의 수하가 있으나 마나 하다고 생각하게끔 이겨야죠." [꼭 그럴 필요가 있냐?] "해볼래요.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몸을 피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이 마을이 맘에 걸리네요. '그 존재'가 이 마을에 뭔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단호하게 말을 해서 그런지 아빠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래. 알았다. 네 맘껏 해봐라. 누굴 닮아 고집이 저렇게 쎈지... 단, 더이상 다치지는 말거라.] "약속은 못드리지만, 안 다치도록 노력은 할께요." [그래, 그래, 알았다. 그럼 또 연락 하거라.] "예이~!!" 아빠가 걱정해주는 걸 느껴서 그런지 마음이 한층 따뜻해져 혼자 히죽히죽 대고 있는데 내가 아빠와 대화를 끝마쳤다는 것을 알았는지 흄이 간단한 먹을 것을 가져왔다. 그가 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똑바로 앉게 하고 내 무릎 위에 쟁반을 내려 놓으면서 물었다. "공작 각하께서 뭐라고 하세요?" "아빠야 뭐... 늘 하시던 대로, 이번에도 내 맘대로 하라고 하시던데요." "이대로 수도로 돌아가는게 아니었습니까?" "끝장은 봐야죠. 이대로 수도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수하들을 만들어낼 거예요. 그럼 한층 골치 아파지지 않겠어요?" "무슨 방법이 있으십니까?" 나는 스프를 한 숟가락 뜨면서 생긋 웃었다.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죠." 사냥을 나갔다고 했던 집 주인과 그를 따라갔던 애쉬를 비롯한 자카르와 반담, 그리고 자카르의 수하 기사가 돌아온 것은 해가 지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었다. 그때 쯔음에는 흄의 도움을 받아 내 방으로 올 수 있었던 류미르와 스와카가 내 마법에 의하여 거진 회복되어 멀쩡히 잘 뽈뽈 거리며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회복된 류미르의 마법으로 등에 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단지 너무 깊은 상처라 류미르의 마법으로는 완전한 회복이 안 되어 흉터가 난 데다 아직 심하게 움직일 수 없었지만 침대 위에 엎드려서 거의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 보다는 백배 나았다. 단지 안타까운 거는 사르하는 신관이라 회복 마법이 듣지 않아 우리가 그녀를 회복 시킬 수가 없었고, 덕분에 나는 사르하가 스스로 회복하여 내 상처를 치유해 줄 때까지는 활개치고 다닐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세이몬은 내가 회복 마법을 걸어줬음에도 꿈쩍도 안 하고 여전히 잠만 자서 속으로 불안하긴 했지만, 숨도 규칙적으로 잘 쉬고 있고 내 마법 덕분인지 안색 또한 약간은 좋아져서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많은 인원이 우르르 몰려갔던 거에 비하여 획득물은 단지 사슴 한마리와 토끼 세마리 뿐인 사냥꾼(?)들은 멀쩡해진 얼굴로 밖에 나와 있는 우리들을 보고는 무척 놀라워 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이 집 주인인 사냥꾼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를 처음 보자마자 딱 받은 인상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산적' 그 사람처럼 산척 같이 생긴 사람은 난 난생 처음 봤다. 실제 산적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잡아다 놓고 그 산적과 저 사람 중에 누가 산적일 거 같냐고 물어보면 난 당연히 집 주인을 선택할 거 같았다. 그만큼 그는 키가 큰데다가 반담 못지 않은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산 속에서 산 탓인지 새까맿고 얼굴 절반은 거칠고 덥수룩한 수염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드러난 얼굴에는 자잘한 흉터들이 여기저기 있어서 '나 험상궃소.' 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상도 잠시. 집 안에서 그들이 온 것을 봤는지 요란하게 두다다다 뛰어 나오면서 딸이 그에게 안기자 그의 인상은 180도 바뀌어 버렸다. "오셨어요, 아버지~~!!" "껄껄껄, 그래. 그 동안 별 일 없었지?" 부리부리하게만 보이는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자 인자한 눈으로 변해 버렸고 호탕하게 웃으며 딸을 꼭 끌어 안고 부비부비 하는 모습을 보자니 아버지란 바로 저런 거구나... 하는 걸 저절로 느끼게 해주었다. "드디어 깨어나셨구만. 그래, 어디 아픈데는 없으신지?" 딸과 감격적인 인사를 나눈 그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하더니 금방 내가 누군지를 알아차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덕분에요. 일행을 도와주셨다 들었습니다. 그 점, 정말 감..." 나는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고 했는데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손을 휘휘 저었다. "아아, 감사 인사라면 벌써 질리게 들었으니 아가씨까지 더 할 필요는 없어요." 감히 내 말을 끊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화는 커녕 왠지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그런가요? 그럼 전 생략하도록 하죠." "허허허, 거참 호탕한 아가씨로군. 맘에 쏙 드는 데? 나에게 아들내미 하나 있었으면 며느리 삼고 싶을 정도야. 나는 쿨터라고 해요. 평민이라 성은 없수다. 아가씨는?" "아리시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귀족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고 미리 흄에게 언질을 받은 나는 성을 밝히지는 않았다. "아버지, 저녁 준비가 다 되었어요." 그 동안 쿨터의 한쪽 팔에 매달려 있던 메이가 속삭이자 쿨터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를 둘러 보았다. "자, 그럼 모두들 들어갑시다. 오랜만에 씨끌벅적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군." 그의 말대로 저녁 식사 시간은 정말 시끌벅적 했다. 이 곳에 와서 모두들 기운 빠져 누워 있느라 같이 모여 식사를 한 적이 없었다가 처음으로 같이 하는 식사인데다 흄과 스와카가 쿨터와 너무나 죽이 척척 맞아 신나게 떠들었던 것이다. 그 흥겨움에 일행 모두가 즐거운 표정들로 그들의 수다에 동참하여 저녁을 다 먹고 차를 한잔씩 마시고 일어설즈음에는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밖에 나갔다 온 사람들은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피곤했는지 하품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고, 류미르와 스와카도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지 피곤하다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단지 리틀 조로만은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사르하 잠자리를 봐 주고 나에게 잡혀서 메이가 뒷정리 하는 걸 도와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까지 잠자리에 들고 나도 침대에 누웠지만 한참이 지나도 정신이 말똥말똥한게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하도 누워 있어서 그런가? 에이, 잠 안와라...' 상처가 있다는 이유로 뻔뻔스레 주인을 침대 밑 침낭으로 쫓아내고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나는 한참동안이나 뒤척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이나 할까?' 메이와 사르하가 사이좋게 마주 보며 곤히 잠들어 있는 걸 밟지 않게 조심스레 피해서 걸음을 옮긴 나는 문도 소리나지 않게 조용히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산 속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별들이 밝게 보였고 밤 한쪽 켠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차지하고 있어서 밖은 제법 밝았다. '산책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군. 그런데... 나온 것 까지는 좋은데 어디로 가지?' 그 동안 집 안에서 누워만 있느라 한번도 바깥을 돌아다닌 적이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나는 주위를 둘러 보다가 거기가 거기 같은 주위를 보고는 산책은 포기하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아~~ 시원 하다." 초가을 저녁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좀 쌀쌀하긴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속까지 말끔하게 씻어줄 것 처럼 청량하게 느껴졌다. 지붕위로 올라오니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빛에 비춰지는 이 마을의 풍경이 보였다. 약 십여개의 집이 공터안에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모두들 잠이 들어서 그런지 불빛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거지만 쿨터의 집은 마을 중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것도 이쪽이 지대가 약간 높은지 지붕위에 올라와 있으려니 마을의 끝이 보일 정도였다. "거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싫어하나? 하지만 우리에게 대해준 것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네. 그 정도의 사교성이면 친구도 꽤 많을 것 같은데... 에,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종일 이 집에 이웃 사람이 한명도 찾아오지 않았네? 이런 산골 마을에 이방인들이 오는 건 호기심 이는 일 아닌가?" 아무도 없는걸 너무나 잘 알아서 대답을 바라지도 않고 혼자 중얼 중얼 거린 거였는데 뜻밖에도 대답이 들려왔다. "쿨터의 말에 의하면, 자신도 이 마을에서 이방인 이라고 하더군요." "에?" 대답은 지붕 아래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나왔는지 애쉬가 마당에 서서 지붕위에 있는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집 근처에 동물 가죽을 말리기 위해 나무 여러개를 얼기설기 묶어서 세워놓은 구조물을 발견하고는 땅에서 훌쩍 뛰어 그 구조물 위에 오르더니 다시 그 구조물을 재 도약판으로 삼아 뛰어 올라 가볍게 지붕 위로 올라왔다. "왜 안자고 나왔어요?"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나는 애쉬가 나에게 다가오자 가만히 있는 것도 뭐해 말을 건넸다. "잠이 안 오더군요. 그래서 산책할 겸 나왔어요. 옆에 앉아도 될까요?" '산책하러 나왔다면서 여기에는 왜 올라왔담?' "그러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애쉬는 나와는 한 팔 거리 정도 떨어져서 주저 앉았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애쉬는 나와는 한 팔 거리 정도 떨어져서 주저 앉았다. "그런데, 아까 그게 무슨 말이죠? 쿨터씨가 이 마을에서 이방인 이라니요?" "말 그대로요.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이 마을에 온지 몇년 밖에 안 되었다더군요.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 마을 사람들과는 친해지지 못했다고 하던데..." "이상하군요. 쿨터씨의 성격같으면 벌써 친해지고 남았을 것 같은데요."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더 묻지 않았어요." "흐음..." 나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 마을쪽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몇년이 지나도 친한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만든건지... 그렇게 잠시간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곧 애쉬에 의해서 침묵은 사라지고 말았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에? 아, 괜찮아요.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지만, 그것도 며칠 후 사르하가 회복하면 해결될 테니까요." "다행이군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약간 망설이며 나오는 말에 나는 예의상 그러려니.. 하고 나도 예의상 맞받아 주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고개를 돌린 채 입으로만 하는게 예의에 어긋날 것 같아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애쉬는 나를 묘~~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 별말씀을..." '왜 한참 있다가 대답하는데?' 녀석은 입을 다물고 계속 나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름달에는 신비한 마력이 있다더군요." '갑자기 왠 보름달?' "그런가요?" "예. 그래서 보름달이 뜬 밤에는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그 신비한 마력에 취하지 않도록..."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러자 녀석의 시선이 하늘에서 떨어져 밑으로 내려갔다. "후후후, 저도 그냥...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예전에 잠깐 들은 이야기 입니다." '이럴 땐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하는 거지?' 맞장구를 쳐야 할지 말아야 할 지 몰라 속으로 당황하고 있을 때 애쉬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당신이 깨어나지 못하면..." '엥?' "그 살인마를.... 내 손으로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거야..." '그게 네 임무잖아.'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더군요. 비록 능력이 안된다고 해도,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 내 손으로 직접 없애리라고 다짐 했었습니다." 나를 보지 않은 채 다시 하늘만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애쉬의 옆 모습을 보던 나는 머리 속에서 벼락이 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바보 같은.... 자기 친엄마인 줄도 모르고....' 왠지 모든게 한심해져버렸다. "후후후후..." "....비웃는 겁니까? 하긴, 당신이 보기에는 우습게 보일지도..." "아뇨. 비웃는게 아닙니다. 단지..." '네 녀석이 가엽다고 느껴졌을 뿐....' 뒷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마을 쪽으로 돌렸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나은 건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게 더 좋을 수도... 나처럼 비참한 기분은 못 느낄테니...' 문득 녀석이 모든걸 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라는 생각에 녀석의 얼굴이 보고싶어져 시선을 돌리다가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부럽다고 해야하나... 가엽다고 해야 하나....' 애쉬가 말한 보름달의 마력에 걸려 버린걸까? 나는 나답지 않은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녀석의 뺨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은 것이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게 좋은 거겠지? 내 엄마의 마지막 흔적.... 아무것도 모르면 행복할테지...' 그러다 문득 녀석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눈과 다시 마주지차 화들짝 놀라 버렸다. '허걱,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급하게 손을 그의 뺨에서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도 먼저 애쉬의 손이 올라와 내 팔목을 덥썩 잡아버렸다. "에...?"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손바닥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우갸갸갸갸~~!!' 녀석의 돌발적인 행동에 너무 놀라 굳어버린 나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애쉬의 따뜻한 입술의 감촉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얼른 녀석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내 손이 움찔 움직이는 순간 녀석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가며 내 손을 더욱 더 꽉 쥐는게 아닌가? '우악, 우악~~!!' 애쉬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싫소?" "에?" 당황한 내가 되묻자 그가 다시 친절히 질문을 던졌다. "내가 그렇게 싫은거요?" 무서운 표정으로 한자한자 또박또박 묻는 녀석의 박력에 나는 순간적으로 쫄고 말았다. "내, 내가... 언제 싫다고 했었나요?" 그러자 녀석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풀리며 믿을수 없게도 녀석의 입술이 양 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에? 저 녀석이 웃네?' 처음 보는 녀석의 미소에 내가 더욱 놀라 정신을 빼놓고 있을 때 내 손목을 잡고 있던 녀석의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내 손목을 잡아당겼고, 덕분에 손목에 붙어있던 내 팔과 내 상체가 저절로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걸 바라고 있었던 듯 기다리고 있던 애쉬의 품에 폭 파묻히고 말았다. 놀라서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녀석의 강한 두 팔이 내 상체를 단단히 감싸와서 나는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아니, 놀라서 굳어버렸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내 귓가에 녀석의 숨결이 느껴졌다. '우아아아악~~!!' 내가 속으로 절규를 하던, 비명을 지르던 계속 다가오던 녀석의 입술이 내 귀 바로 앞에서 멈추는 것 같더니 녀석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당신을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뻤소. 깨어나줘서 너무 고맙소." 그리고는 녀석의 입술이 내 귓바퀴에 닿았다. 얼굴이 화끈 거리고 어쩔 줄 몰라서 멍청하게 가만히 있는데 녀석의 팔이 내 상체를 풀어주더니 내 양팔을 잡아 상체를 똑바로 세워 주었다. 그리고 내 얼굴 앞에 녀석의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얼굴이 빨갛군. 부끄러워 하는 거요?" 치가 떨리는 예의 그 짓궃은 미소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드포드 자작, 죽고 싶어요? 그렇다면 기꺼이 죽여 드리죠." 그러자 녀석이 얼른 나에게서 떨어졌다. "후후후, 미안하지만 아직 죽고싶진 않군요. 하고 싶은 일들이 많거든요. 아, 슬슬 잠이 오니 전 그만 자러 가죠. 플레이저 자작도 너무 늦게 자지 않도록 해요." 그리고는 훌쩍 지붕에서 떨어져 내렸다. '콱 넘어져서 코나 박아버리지.' 하지만 너무나 아쉽게도 애쉬 녀석은 깃털처럼 가볍게 땅으로 착지하여 위에서 살벌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나를 쓰윽 보더니 씨익 웃어주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크아아아악~~~ 저 녀석을 내가 뭐하러 가엽다고 생각했을 까? 차라리 다 말해줘서 괴롭혀 주고 싶어어어어어~~~!!' 한 밤중이라 차마 겉으로 외치지는 못하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속으로만 절규해야 했다. 다음 날 애쉬 녀석은 뻔뻔스럽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소대로, 그러니까 요 근래에 나에게 대했던 태도 그대로 무뚝뚝하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만 보면 내가 오히려 '뭔 일이 있었었나?' 하고 어리둥절하게 돼 속으로 혀가 내둘러졌다. '저 녀석은 연기가 뛰어난 거야, 아님 평소 얼굴이 저렇게 무표정인 거야? 어쨌든 무지 두꺼운 철면피임에는 틀림 없어.' 어젯 밤에는 날씨가 꽤 맑았던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에는 하늘이 흐린게 꼭 비가 올 것만 같았다. "흐음... 날씨가 좋지 않으니 오늘은 집에 있어야 겠군." 사냥 이라는 것도 날씨에 구애를 받는 일인지 해가 떴음에도 오히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던 쿨터씨는 쓴 입맛을 다시며 거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동물 가죽을 손보기 시작했다. 덕분에 같이 사냥 나갈 일이 없어진 애쉬는 쿨터씨의 방으로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이 자그마한 집에는 방이 세칸 있었다. 제일 큰 방은 쿨터씨가 썼고, 중간방은 메이양이, 그리고 가장 작은 방 - 내가 보기에는 한 세평 남짓할 것 같았다. -은 창고 대용으로 쓰이고 있었는데 이번에 쳐들어온 불청객(?)들이 쿨터씨 방에 다 못들어가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내용들을 거실 한구석에 내 놓고는 남자들에게 침실로 내어 주었었다. 하지만 일행들이 그 방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좁은지라 쿨터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인은 거실로 내쫓(?)았던 것이다. "이렇게 여러분을 모이시게 한 것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의자가 없어 여자인 나와 사르하를 빼놓고는 다 바닥에 주저앉은 일행들을 둘러본 애쉬가 운을 떼었다. "어제 저와 몇몇 기사분이 쿨터씨와 나가 살펴본 결과 별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흐음... 그럼 어제 쿨터씨를 따라 나선 건 사냥을 돕는 것 보다는 주위를 살펴보기 위함이었군?' "쿨터씨께서도 별 다른 말은 없었냐?" 신중한 표정의 스와카가 옆에 앉아있던 반담에게 묻자 반담은 고개를 갸웃 하며 어제 일을 떠올리는 것 같더니 잠시 후에 대꾸했다. ".... 별로... 단지, 평소보다 동물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고 하더군." "그으래? 흐음... 그렇다는 건, 주위에 위험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스와카와 반담의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류미르가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하군요. 전 그녀가 우릴 쫓을 거라 예상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크게 다쳐서 다시는 귀찮게 굴지 않을꺼라 생각한 게 아닐까요?" 리틀 조로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때 크게 다친 건 아시리안님뿐이었어. 다른 이들은 단지 지쳤을 뿐이니까." 스와카가 친절히 설명해주자 이번에는 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망을 쳤기 때문에 쫓지 않는게 아닐까요?" "도망을 쳤기 때문이라고?" 모두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흄을 보고 대표로 자카르가 물었다. "예. 그러니까 전에 그녀는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본능만 남아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물의 경우 도전해오는 건 받아주지만 져서 자신의 영역 밖으로 도망친 패배자는 쫓아가지 않고 그냥 나두죠.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져서 도망갔으니 당분간은 자신에게 덤비지 않을 거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놔둔 게 아닐까요?" "일리 있군요. 게다가 며칠이 지났는데도 우리를 쫓아오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멀리 도망온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자카르가 동의를 구하듯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대부분의 일행이 그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린, 네 생각은 어때?"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류미르가 물어왔다. "곧 쫓아 올거야." "하지만 아가씨, 쫓아 올 거라면 벌써 왔지 않았을까요?" 흄이 금방 반박해 왔다. "흄, 아까 그 동물 예로 든거 말야... 패한 동물이 이긴 동물 영역 안에 있으면 이긴 동물은 어떻게 하지?" "그거야... 영역을 벗어나기 전까진 죽이려고 달려들죠." "그럼말이지, 우리가 싸우는 그녀에게 영역이 있다면 얼마만 할것 같아?" 그러자 스와카가 먼저 깨달은 듯 감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군요. 그녀에게는 이 나라 전체가 자신의 영역일테죠." "맞아요. 그리고 아마 그녀도 우리의 영역이 이 나라 전체라고 인식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가 어딜 가든 쫓아갔었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죽을 때 까지 쫓아올걸요?" "그럼, 왜 지금까지 가만 있지?" 반담의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쏠렸다. "한번 이기면, 이긴 방법을 또 쓰려하겠죠? 아마 자신의 수하를 만드느라 바빠서 주춤거리고 있는 걸 거예요." "수하라면...?" 자카르가 고개를 갸웃 하자 스와카가 참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마도... 이 산에 있는 몬스터들이겠지요. 사람까지 자신의 수하로 부릴 수 있을 정도라면, 몬스터들쯤이야...." "그럼, 전에 수하로 부리던 그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 동안 가만히 있던 사르하가 불쑥 물었다. "아마 버렸겠지. 이 곳까지 끌고 오기에 힘든데다가 이 곳에는 자신의 수하로 만들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테니까." 나의 대답에 사르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죽였다는... 거예요?" "죽이진 않았을걸? 우릴 쫓아오랴, 수하 만들랴 바빠서 죽일 시간도 없었을 거야. 단지 그냥 내비 뒀을거란 말이야." "아~~" "그럼, 자작께선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 동안 묵묵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애쉬가 입을 열었다. "한번 더 싸워야죠. 그리고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싸울 때 승리를 바라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녀석이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호오, 너 잘 걸렸다.'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또 다시 패해 버린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수하를 만들어 우리에게 덤비려고 할 걸요? 이번에 우리가 진다면 우선적으로 수도로 돌아갈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녀가 수도로 우리를 쫓아온다면요? 어떻게 될 거 같아요?" 그 말에 모든 이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나는 거기에 결정타까지 날렸다. "수도에는 사람이 꽤 많죠, 아마? 능력이 뛰어난 기사들도 많고..." "아린, 네 말은... 이번에 확실하게 이겨, 수하를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 다는 걸 인식시키자는 말이지?" '역시, 류미르...' 나는 류미르에게 생긋 웃어줬다. "응. 바로 그거야." "반드시 이겨야 겠군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애쉬와 자카르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내용의 말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마주보더니 찬 바람이 휭 일정도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하지만... 그녀가 몬스터까지 끌고 온다면 우리들의 힘으로 막기 힘들텐데요... 게다가 이 마을에 있으면 이 마을까지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 스와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맞아요. 무척 힘들죠. 그래서 우리를 도와 줄 사람들이 필요해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금방 튀어나온 나의 대답에 류미르가 뭔가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거보니까, 벌써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응, 생각이야 있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어." "뭔데?" "이 마을 사람들의 협력을 구하는 것." "에에~?" 류미르의 놀란 외침과 동시에 모든 이들의 놀란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우리가 이 산으로 도망온 이상 그녀가 이 마을에 오는 건 시간문제일걸? 우리가 이 마을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떠난다고 해도 소용 없을거야.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협력을 구하자고."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이 응해줄까요?" "우리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죠." "게다가... 우리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었으니 가만 있지 않을텐데요..." 흄과 스와카, 자카르가 부정적인 말을 하나씩 꺼내놓자 일행들이 동감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를... 보상해 준다고 하면 어떨까요?" 애쉬가 한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먼저 그들이 우리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관건 아닐까요? 아무리 피해를 보상해 준다고 해도 그 말 자체를 믿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스와카의 말을 뒤이어 반담도 한 마디 했다. "게다가 죽을 수도 있지..." 그 말을 끝으로 일행은 모두 침묵속에 퐁당 빠져버렸다. 누구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지 모두 입만 꼭 다물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뭔가... 계기가 있으면 좋을텐데... 저쪽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만한..." 자카르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은 그들이 우리에게 약점 잡힐 일이 있을리가 없다. 우리가 왔는데 환대하지 않았다고 잡아 족칠수도 없고... "하아~" 누군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오자 애쉬가 입을 열어 일행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주목시켰다. "아무래도, 지금은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 각자 생각해 보기로 하죠. 어차피 신관님이 회복될 때 까진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하니까요." 이전글 제 21화 \'그 존재\' 팀 대 우리 팀... (2) 다음글 제 20화 두메 산골 마을... (7) 작성자 제 목 내 용 그리고 또 는 제 목 내 용 작성자 ~ 세상 홈페이지는 [컴내꺼]를 중심으로 ...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한다고요.. 필요한것을 신청하세요 ^^.. 홈공간 200MB I 무료이메일 I 게시판5개 I 방명록CGI I 그림자료실CGI 안내판...^^ 여긴 아린이야기 2부 설 연재란 입니다.. 많이 퍼다날라 쥬시구여.. 다시 메뉴로 가시려면 여기를.. 그럼 저의 홈을 찾아주신 모든분께 행운이 깃들기를ㅡ 사라진다네~눌러보시라네 http://dodogury.com.ne.kr/board3 컴내꺼[Com.Ne.Kr] 제목 : 게시판 입니다. 98 번 글 ::: 글 읽 기 ::: ▩ 제목 제 21화 '그 존재' 팀 대 우리 팀... (2) ▩ 작성자 L리그 [218.48.168.3] ▩ 홈주소 ▩ 이메일 a7a8ss@lycos.co.kr .. 방 밖으로 나오니까 메이가 커다란 물통 두개를 들고 막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어, 메이? 물 뜨러 가는 거예요?" 그러자 메이가 현관 문으로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예, 식구가 많아지니까 물이 금방 떨어지네요." "그 커다란 통에 물을 담아 혼자 어떻게 들고 오려고 해요? 내가 도와줄께요." 이 집에 묶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우리 때문에 메이가 더 고생하는 걸 생각하니 왠지 미안해져 나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말한 건데 메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혼자 그걸 어떻게 들고 와요?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데..." "하지만, 어제 막 일어나신 환자의 도움을 어떻게 받아요?" "흐음... 그게 맘에 걸린 단 말이죠?" 나는 중얼거리면서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흄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 흄이 내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도와 드리죠." "어머, 안 그러셔도 돼요." "괜찮아요, 메이. 아, 그런데 나도 할 일이 없으니까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에? 볼 거리는 없는데요? 그냥 근처 냇가를 가는 것 뿐이예요." "괜찮아요. 산책 겸 같이 가요." "그럼 그러세요." 그렇게 해서 나는 양 손에 물통을 든 흄을 뒤로 한 채 메이와 팔짱을 끼고 집을 나섰다. "냇가는 어디 있어요?" "마을을 약간 벗어난 곳에 있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 그 물을 사용하죠."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제 옷은 안 불편하세요?" 내가 일어났을 때 메이는 내 짐이 따로 없는 것을 보고 - 마법 주머니는 무지 작으니까 - 자신의 옷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거절할까하다가 마법 주머니에 대한 게 알려질까봐 그냥 고맙다고 하고 받아 입었다. 덕분에 난 지금 연녹색의 원피스 형태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에? 아, 괜찮아요. 편한걸요." "저와 체격이 비슷해서 다행이예요." 마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길을 조금 따라 걷다보면 바로 밖으로 구부러져 있는 오솔길이 나왔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으면 시냇가가 금방 보였다. 다른 곳은 무릎을 넘는 풀들이 무성하게 뒤덥고 있었지만 한쪽 방향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서 그런지 풀들 대신 자갈들이 깔려 있었고 곳곳에는 빨래하기 편하게 커다랗고 편편한 돌들이 냇가에 약간씩 담겨 있었다. 냇물은 그렇게 크지도, 또 작지도 않은 크기로 내가 발을 담그면 무릎까지 올 정도의 깊이에 저 뒤쪽에서 달려오면 한번에 풀쩍 건널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흄은 냇가가 보이자마자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앞으로 나서서 냇가에 물통을 담갔다. 그러자 냇가 안에서 헤엄을 치고 있던 송사리 같은 작은 민물고기들이 이쪽 저쪽으로 재빠르게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물통을 통채로 담으시면 물이 더러워지거든요. 바가지로 퍼담으셔야 하는데..." 흄이 자신의 할 일을 대신 해주니까 미안했던지 꽤나 조심스레 지적을 해주는 메이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아마도 물통 안에 있던 바가지를 흄은 보지 못했던 듯 했다. "아뇨, 죄송할 것 까진..." 흄이 물통에 반쯤 담겨져 있던 물을 버리고 냇물이 약간 흘러내려가길 기다려 바가지로 물을 퍼 담기 시작하자 메이는 자신이 뭐라도 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메이, 왜 그래요? 흙탕물이 들어갈까봐 걱정 돼서 그러는 거예요? 흄이 저래봬도 꽤 꼼꼼하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죄송해서..." "에이, 뭐가 죄송해요? 오히려 우리가 미안하죠." 그러면서 흄 혼자 일하도록 나는 메이의 팔을 끌고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이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나는 마을 사람들이 물을 뜨러 왔나보다... 하고 태평한 생각으로, 그리고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며 서 있는데 메이가 아까보다 더욱 더 안절부절 못하는 거였다. "메이?" "저, 아시리안님... 지금은 그냥 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오는게..." "에?" "저기, 조금 있다가 다시 물뜨러 오죠?" "하, 하지만..." "그렇게 하세요." 메이는 막무가내로 얼떨떨한 나를 끌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길은 하나뿐이라 곧 이 쪽으로 다가오던 사람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들은 냇가를 이용하러 오는 것 처럼 보이는 처녀들이 아니라 장정이라고 불릴 만한 청년들이었다. 모두들 산 속에 살아서 그런지 체격이 무척 좋아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메이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좋지 않았다. "어라? 이게 누구야?" "아아.... 그 마을 끝에 있는 사냥꾼 딸이로구만?" "뭐야, 여긴 왜 온 거야?" 다섯명의 청년들은 우리 앞길을 막고 한마디씩 던졌다. "물 뜨러 왔을 뿐이에요. 비켜 주세요." 메이가 굳은 얼굴로 싸늘하게 말을 던졌지만 그들은 꿈쩍도 안 했다. "하, 갑자기 건방지게 구네? 이게 어디서 대들어? 대들긴..." "어라? 왠 아가씨랑 같이 있네? 못 보던 얼굴인데?" "외지 사람인가?" "이거 못쓰겠구만.... 외지에서 온 걸 가엽게 여겨 마을에 살게 해주었더니만, 우리 허락도 없이 함부로 외지인을 머물게 해줘?" "헤에... 하지만 되게 예쁘게 생겼는데?" "비켜 주세요. 당신들관 상관 없잖아요?" 메이가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 당기면서 다시 말했다. "하, 얘들아, 이 계집이 감히 우리보고 비키랜다." 한 녀석이 메이를 손가락질 하면서 자신의 패거리들을 돌아보자 그들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뭐야? 우리가 보는 데서 냇가를 사용한 것도 크나 큰 잘못을 저지른 건데, 거기에 허락도 없이 외부인을 끌어 들이고 무릎꿇고 빌지는 못할 망정 대들기 까지 해?" "이거 이거, 우리가 관대하게 봐줬더니 간덩이가 커졌나보네..." "그럴 때는 맛을 보여줘야지." "그만해요. 더 이상 다가오면 제 아버지께 말씀 드리겠어요." 메이가 단호하게 그들의 대화를 자르며 끼어들자 그들의 몸이 잠시 움찔 했다. 아마 쿨터씨가 이들에게는 함부로 하기 어려운 존재였나보다. 하지만 곧 한 녀석이 큰 소리로 웃었다. "파하하하, 그깟 외지 사냥꾼이 뭐가 대단하다고? 말해, 말해. 그런다고 겁날 줄 알아? 그 자식이 알아봤자 뭘 하겠어?" "맞아, 맞아. 감히 우리에게 덤벼들 수나 있을까?" "요 계집이 갑자기 되게 건방지게 구네?" "흐흐흐, 우리가 친절히 예절 교육좀 시켜 주자구." "좋지." 그러면서 가운데 있던 녀석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메이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내가 메이를 뒤로 끌어당겨 녀석의 손이 허공을 잡게 만들었다. "어라라? 뭐야?" 메이의 팔을 노친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쓰윽 바라보았다. "이 계집이 감히 내 일을 방해하네? 어떻게 할까?" 녀석이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기 패거리에게 묻자 패거리들이 낄낄 웃어댔다. "같이 혼내주자고." "그럼 그럼." "그럴까?" 동료들의 말에 녀석은 히죽히죽 웃으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캬, 이 피부좀 봐라. 이렇게 흰 피부 너희들 봤냐? 게다가 되게 보드랍게 보인다 야." 하지만 그 전에 메이가 나를 뒤로 당겨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낄낄낄, 너무 겁주지 마라. 봐라, 겁먹었잖냐?" 메이가 나를 끌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걸 보고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메이, 이 녀석들 누구예요?" "마을 청년들이에요." "메이를 자주 괴롭히나 보죠? 내가 그냥..." 하지만 메이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 "안돼요. 저 중앙에 있는 남자가 마을 촌장의 아들이라구요. 잘못 건드렸다간, 아시리안님 일행이 마을에서 쫓겨날 거예요." 메이는 무척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그녀의 뒷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메이가 말한 '촌장의 아들' 이란 소리가 내 귀에서 뱅뱅 돌았다. '호오... 바로 그거야.' 이전글 제 21화 \'그 존재\' 팀 대 우리 팀... (3) 다음글 제 21화 \'그 존재\' 팀 대 우리 팀...(1) 작성자 제 목 내 용 그리고 또 는 제 목 내 용 작성자 ~ 세상 홈페이지는 [컴내꺼]를 중심으로 ...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한다고요.. 필요한것을 신청하세요 ^^.. 홈공간 200MB I 무료이메일 I 게시판5개 I 방명록CGI I 그림자료실CGI 안내판...^^ 여긴 아린이야기 2부 설 연재란 입니다.. 많이 퍼다날라 쥬시구여.. 다시 메뉴로 가시려면 여기를.. 그럼 저의 홈을 찾아주신 모든분께 행운이 깃들기를ㅡ 사라진다네~눌러보시라네 http://dodogury.com.ne.kr/board3 컴내꺼[Com.Ne.Kr] 제목 : 게시판 입니다. 99 번 글 ::: 글 읽 기 ::: ▩ 제목 제 21화 '그 존재' 팀 대 우리 팀... (3) ▩ 작성자 L리그 [218.48.168.3] ▩ 홈주소 ▩ 이메일 a7a8ss@lycos.co.kr .. "으아악~~!!" 콰당~! "컥!!" 콰당탕!! "꾸에에엑~~" 털푸덕!! "우악!!" 퍼억!! "켁!!" 쿵!!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나와 메이에게 찝쩍대던 5명의 사내 녀석이 실프에 의해 날려져서 마을 중앙 땅바닥에 패대기 쳐지는 음향과 함께 녀석들이 내지른 비명 소리였다. 하도 요란하게도 소리를 질렀는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을 곳곳에서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들로 하나 둘 나타났다가바닥에 얼키고 설켜 누워 있거나 엎드려 있는 청년들을 보고는 당황해 했다. "어떻게 해요. 이제 곧 촌장이 나올 거예요." 내 등 뒤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메이의 말이 끝나자 마자 정말 어떤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게 무슨 일인가!" "촌장이예요." 메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여준다. 그 촌장이라는 남자는 내가 흔히 보와왔고 촌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완전히 깨버리는 그런 남자였다. 반담 못지 않은 덩치에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 소매가 없는 티를 입고 있어서 근육질의 팔뚝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팔뚝에는 하얀 흉터가 자잘하게 있었다. 피부가 너무 검어서 흉터가 더 부각되어 보이는 듯도 했다. 머리는 빛바랜 거친 금발인데 너무 탈색 되어서 하얀색에 가까웠다. 이마의 중앙에서 부터 오른 쪽 뺨까지 그어진 날카로운 흉터는 눈을 가로지르고 있어서 그는 한쪽 눈으로만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얼굴에는 굵직한 주름이 있어서 그가 나이가 꽤 많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넌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이에 걸맞지 않은 굵직하고 정정한 음성으로 나에게 물었다. "외지인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쿨터씨 댁에 잠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나는 생각하는 바가 있었기에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 예의바른 행동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내가 외지인 이라는 말에 눈썹을 치켜 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발했을 뿐이었다. "외지인...이라고? 반갑지는 않군.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저 애들은 네가 그랬나?" "예, 냇가에서 물을 뜨려고 하는데 저들이 나타나서 치근덕 대더군요. 그래서 가볍게 응징을 가했을 뿐입니다." 그의 눈이 또 한번 번득였다. "그런가? 하지만, 마을 중앙에서 이러는 이유는 아닌 것 같군. 저 애들의 일로 뭔가 요구할 거라도 있는 건가?" '호오... 보통이 아니군. 이런 산속에 처박혀 늙어갈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촌장의 생각지도 못한 예리함에 나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그런데 그때 내 뒤에 조용히 서 있던 흄이 내 옆으로 오더니 낮게 속삭였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촌장을 어떻게 내 뜻대로 움직일지 고민하느라 주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까는 잠깐 보였던 여자들과 아이들이 어디로,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중년층의 십여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우리 주위를 빙 둘러싸고 긴장감을 공기중에 퍼트리고 있었다. "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군. 솔직히 말해. 여긴 뭐하러 왔지? 네 정체는 무엇이냐?" 나에게 은근한 살기를 내뿜으면서 협박해 오는 촌장의 태도에 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그리고 친절히 대답해주려는 찰나 여러명의 사람들이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시안님!!" "아린!!" 자카르와 류미르의 목소리였다. "오, 굳 타이밍이야." 팍 일그러지는 촌장을 향해 나는 다시한번 피식 웃으며 입을 열였다. "자, 이제는 협박 말고 서로 예의를 갖추면서 대화를 하는게 어떨까요? 나는 이렇게 예의를 갖추고 있는데 상대방이 예의를 무시하고 나오면 기분이 안 좋잖아요, 안 그래요?" "어떻게 하신 겁니까?" 흄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아, 저 치한들을 처리할 때 실프 하나를 류미르에게 보냈어요." "그러셨군요." 우리를 둘러 쌓고 있던 장정들의 한쪽이 뚫리더니 급하게 뛰어 온 일행들이 들어왔고 덕분에 마을 장정들은 촌장의 뒤로 물러났다. "메이, 괜찮으냐?" "아버지!!" 쿨터씨도 같이 뛰어와서는 숨을 헐떡이며 메이에게 다급하게 물었고 아버지를 본 순간 메이는 안도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그에게 안겼다. "무슨 일입니까?" 애쉬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 마을의 협력을 구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 마을에 대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는군요." 나는 애쉬에게 친절히 대답해주며 이어 쿨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알고 있겠죠? 이 마을의 비밀이 뭔지... 이런 산 속에서 살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사람이 촌장을 하고 있고, 외부인이란 말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요, 사냥꾼이라고는 하지만 모두들 몸이 너무 좋군요. 게다가 시골 사람 특유의 포근하고 인정감 어린 모습이 아니에요. 그렇다는 건, 이들이 처음 부터 이 곳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쿨터의 얼굴이 굳어지며 천천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맞습니다." "이 곳은 테아칸 왕국과의 국경 역활을 하고 있죠. 덕분에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어요. 국경 수비 역활을 하고 있는 건 이 산맥 밑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대신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인적 없는 산 속에 마을을 짓고 사는 건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건데... 게다가 지금 국가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작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병사들이 있는 큰 마을로 이주시키고 있는데 이 마을은 옮겨가지 않았다는 건, 영주 측에서도 이 마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거군요, 안 그래요?" "예...." "도망자들이 세운 마을이로군." 애쉬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이 곳은 그런 사람들이 세운 마을이죠." "쿨터씨, 당신도 그런 도망자들 중 한 사람인가요?" 자카르가 약간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하긴,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기는 했다. 쿨터씨의 쾌활함과 다정함에 우리 모두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만약 그가 도망자라면 이곳 영주의 아들인 자카르는 그를 체포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쿨터의 몸이 약간 움찔 했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 촌장이 그보다도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아니다.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지." "그래서 그를 배척했던 거군요. 쿨터씨의 성격에 친구가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그런데 그럴거면서 왜 그를 받아들였나요?" 류미르가 자신의 일처럼 분개하면서 촌장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마을에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우리들의 일을 산 밑의 마을에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는데다가. 우리는 수배중이라 산 밑의 마을에서 생품을 사러 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를 받아들인 거지. 그가 마을에 내려갈 때 인질로 삼을 딸 까지 같이 있었으니까..." "그랬었군요... 그래서 당신은 우리를 마을에 내려가지 못하게 했군요. 우리가 발각되면 서로 곤란해 지니까." 애쉬가 쿨터를 바라보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자 쿨터가 서글픈 눈으로 애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들은 기사들이나 귀족임에 틀림 없겠지요? 저들은 아마도 당신들을 이 마을에서 내보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협상을 하죠." 그들 사이에 내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일행과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협상을 하자구요. 당신들도 좋고 우리들도 좋은 방법이 있는데 응할 생각이 있으세요?" "협상을 하죠." 그들 사이에 내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일행과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협상을 하자구요. 당신들도 좋고 우리들도 좋은 방법이 있는데 응할 생각이 있으세요?" ".....무슨 방법이요?" 촌장의 목소리가 약간 수그러들면서 말투도 반말에서 반어체로 올라왔다. 되게 관심있나 보다. '음... 이 관심을 좋게 끝맺어야 할텐데 말야....' "당신은 요즘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촌장은 눈쌀을 찌푸리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결국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솔직히 말하면 쿨터와 마을 청년 몇몇이 얼마전에 산 밑으로 내려갔는데 평소 자주 거래를 하던 마을이 텅텅 비어 있더군.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알았지만, 그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오." "일년 전에 각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사람을 몰살시키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능력은 무척 대단하여 왠만한 도시의 기사나 마법사들은 그를 막을 수가 없었지요. 덕분에 피해는 무척 커졌고 국가적으로 그를 막기위해 각 영지마다 군사를 파견하였으며, 그를 막을 수 없는 작은 도시의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큰 도시로 이주하게 했지요." "그랬었군.... 그런데 그게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요?" "우리는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그 자를 잡기 위해 파견 되었습니다." 그러자 촌장의 눈빛이 미심적음을 띄우며 우리 일행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당신.... 들이?" 그러다 반담과 흄을 보고는 납득이 간다는 눈치였지만 애쉬나 자카르, 그리고 내쪽으로 와서는 심하게 일그러졌다. "안 믿기는군." '이런, 다시 반말로 내려왔잖아?'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입니다." 나는 꽤나 냉정하게 말했는데 촌장이 슬글머니 웃음기를 띄우면서 팔짱을 끼고 있던 손들 중 하나를 올려 턱을 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중앙에서 처치 곤란 인물들이었나?" "중앙?"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스와카가 촌장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중앙이란 수도를 지칭하는, 군대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특히 지휘층에서 사용하는 말이지요. 병사들에게는 수도나 지방이나 별 다를게 없으니까요. 그런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걸 보니 당신은..." 촌장은 계속 되려는 스와카의 말을 헛기침으로 잘라버렸다. "험, 그건 당신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오. 어쨌든, 그래서?" 계속 말하라는 듯 나에게 시선을 주는게 맘에 안들었지만 협상은 끝내야 했으므로 나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 자카르 영지에서 그자와 한번 맡붙었지만, 저희가 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를 피하여 산속으로 온 것인데, 지금까지 그자의 행동으로 봐서는 몇번이나 그를 막은 우리를 쫓아올 것이라 예상되어집니다." "흐음... 하지만 쫓아온다 한들 혼자의 힘으로 여기를 찾는 건 어려워. 이 마을은 이래뵈도 사람들 눈에 잘 안띄는 곳에 있거든." "그자는 마검사입니다. 마법과 검술 실력이 뛰어나지요. 전에 맞붙었을때는 그 자가 한 마을의 사람들에게 환각 마법을 걸어 그의 노예로 만들어 우리에게 덤벼들었었습니다. 이번에도 아마 그자는 이 산에 있는 몬스터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우리들을 찾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제야 가소롭다는 듯한 빛까지 띄우고 있던 촌장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몬스터라... 이거 참 공교롭게 되었군. 그렇다면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인가? 흐음.... 그렇다면, 우리에게 원하는 일이란 곧 쳐들어 올 몬스터들을 같이 막아달라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지원병을 부를 시간이 없는데다 당신들은 이 곳에서 살았으니 이 곳 몬스터들과 대항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촌장은 잠시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긍정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당신들을 돕는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무엇이오?" 이번에는 애쉬가 나섰다. "우선은 당신 마을에 대한 일을 함구해드리겠습니다. 더불어 이번 일에 동참해주시는 분들께는 한 사람당 200셀씩 드리죠. 어떻습니까?" 200셀이라면, 5년 이상 군복무를 한 군인의 한달 월급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용병, 그러니까 스와카나 반담 같은 특급 용병을 고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애쉬는 마을 사람들을 특급 용병은 아니지만 그래도 2급 용병, 아니면 쉬운 일을 맡긴 1급 용병 대우를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촌장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 탐탁치 않은 얼굴로 땅에 침을 탁 뱉었다. '윽 디러.... 예전에 한국에서 침 뱉으면 벌금 2만원이었는데...' 내가 인상을 팍 쓰며 그 모습을 보자 히죽 웃어주며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200셀이라... 목숨을 걸어야 할 일에 200셀이면 너무 적지 않소?" 그러자 이번에는 자카르가 그 특유의 멋진 웃음을 머금고 나섰다. "물론, 돈으로만 당신들을 사려면 싼 값이지요. 하지만 돈 말고도 다른 혜택도 있잖아요." "우리 마을에 대해 입을 다물어 주겠다는? 흐음, 하지만 당신들 말을 어떻게 믿소? 게다가 돈을 주겠다는 것도 믿기 어렵소만?" "제 이름을 걸죠. 전 이곳 영지의 주인 자벨리안 집안의 장남, 자카르 폰 자벨리안 입니다." 촌장의 뒤에 서 있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놀란 외침과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지만, 촌장은 눈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믿지?" "저희 가문의 문장패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촌장은 계속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그 대단하신 가문의 문장을 몰라서 말이지..." "뭘 원하시는 겁니까?" 그제야 촌장이 능글맞게 씨익 웃었다. "계약금이 필요한데? 우리가 당신들을 믿을 수 있게 말이야. 아아, 그리고 한사람 당 300셀씩은 줘야겠어." "하지만..." 자카르가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촌장이 휘휘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우리 마을에 대해 입다물어주겠단 말이지? 솔직히 말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자네 집안에서나 국가에서나 이 조그마한 마을을 없애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들을 파견하지 않을 테니까 말야." "그럼 뭐하러 외지인을..." 자카르가 다시 당혹스럽게 외치려 했지만 이번에도 촌장에 의해 말이 끊어졌다. "아아, 그거야 지레 겁먹은 거지. 왜 도둑은 길 가던 병사만 봐도 긴장하는 법이니까." 그 명성이 자자한 자카르도 촌장의 머리와 연륜에는 당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계약금은 어느 정도면 될까요?" 애쉬가 묻자 촌장의 히색이 만연해졌다. "계약금? 아, 잠깐만...계산 좀 해보고... 음... 마을에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20명 정도니까... 한 사람 당 300셀씩이면 6000 쎌이니까... 거기서 3000셀은 계약금으로 걸어줘야 하지 않을까? 아, 그리고 이건 당연한 거지만 확인 차 묻는 건데 마을의 건물이 부서지거나 여자들, 그리고 애들이 다치면 그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해주겠지?" '저 사람은 군대에서 행정부에 있었나? 왠 돈계산이 저리 빨라?' 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애쉬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더니 곧 정리했는지 촌장을 바라보았다. "물론 부차적인 일은 보상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약 10 존드 (1000셀) 밖에 없습니다만... 그걸로는 안돼겠습니까?" "10 존드? 흐음... 그걸로는 좀 부족한 감이 있는데 말야... 게다가 일이 끝나도 언제 잔금을 받을지는 미지수인 상태에서 좀..." '10존드라면 꽤 큰 돈인데 그걸 가지고도 부족 운운을 하다니.. 저 인간은 틀림없이 큰 돈을 만지고 살았던 사람이야.' 애쉬가 촌장의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에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내가 나서줬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3000셀을 계약금으로 걸기로 하죠. 그리고 일이 끝나면 곧장 잔금을 치르겠어요." 그러자 황당한 표정의 애쉬 시선과 촌장의 의아한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나는 그런 그들의 시선을 당당히 받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대신 이 마을에 우리 일행을 한 사람 더 불러도 돼겠죠? 어차피 이 마을이 알려지는 건 상관 없다고 했으니까요. 그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하죠. 어때요?" 촌장이 의아한 눈으로 애쉬를 바라보았다. "또 다른 일행이 있었나?" 애쉬도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뇨, 없었습니다. 아시리안님,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별거 아니에요. 단지 우리로는 부족할 것 같으니 도와줄 마법사를 한명 더 부르려구요."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의 애쉬와 촌장을 보고 스와카가 끼어들어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아시리안님께선 그 마법사가 텔레포트로 이 곳을 올 때 같이 돈까지 가져오게 하려고 하시는 거군요?" "맞아요, 스와카." 촌장은 눈쌀을 찌푸리며 고민을 하는 듯 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표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나를 대하는 눈빛이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이 곳까지 - 물론 여기서 스와카가 마법진을 만들어준다고는 하지만 - 텔레포트 해 올 마법사를 너무나 쉽게 부를 수 있다는 것과 거금을 금방 준비해 가지고 올 수 있을 집안이라면 꽤 대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집안의 계집애가 이런 덴 뭐하러 왔담..." 그런데 저 말은 왜 나오는 건지... 우리는 곧 닥쳐올 '그 존재' 부대에 대항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마을을 요새화 하기 위하여 류미르가 땅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마을 사람들과 마을 주위에 방어막 만들기에 착수했고, 나는 아빠에게 연락하여 돈과 마법사를 부탁했다. [마법사?] "예. 우리하고 이 곳 사람들만으론 약간 부족한 감이 있어서요. 보내 줄 사람 없어요?" [마법사라... 알았다. 괜찮은 마법사를 빨리 알아보마. 오후에 다시 연락해봐라.] 리틀 조로는 자신이 불러낼 수 있는대로 실프들을 불러내어 온 산을 수색케 했다. '그 존재'가 이 산에 있는지,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쯤이고 어디에 있는지 등등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사르하도 어느정도 회복하여 내 등의 상처를 완케시킬 수있었고, 세이몬에게도 신성력을 쏟겠다고 말하여 그녀를 말리느라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아무리 마검을 가지고 있어 신성력을 받지 못한다고 말해도 마검은 마검이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진땀을 흘렸던 것이다. 결국은 좀 더 회복된 다음에 세이몬을 깨우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다행히 세이몬이 무의식중에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걸 알았는지 그날 저녁 드디어 눈을 떴다. "우웅... 잘 잤다." "후아~~, 정말 다행이다 세이몬. 오랜만이지?" "아하하하, 안녕 아린?" "그래, 그래." "아리시안님, 역시 제가 회복력을 쏟았으면 좀 더 일찍 일어나셨을 거예요." "사르하, 사르하... 넌 좀더 네 신성력을 아낄 필요가 있어. 그리고 이제 세이몬도 깨어났으니 잘됐잖아." "아직 덜 회복되신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신성력을 부어드릴까요? 그럼 몸이 금방 상쾌해지실 거예요." "사르하아아~~? 이제 곧 다시 싸움이 시작될 텐데 그때를 대비해야지 않겠어? 그때 네 신성력이 모자르면 모두들 힘들어질거야." "웅...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몸이 안 좋은기가 보이시면 말씀해 주셔야 해요." "그래, 그래." 그날 저녁, 아빠는 우리집 가신이자 마법사인 죠슈아 말고도 왕실 수석 마법사인 마이터 그레이턴 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들은 내가 소르드 왕국에 오자마자 아빠와 만났을 때 잠깐 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때 수도까지는 같이 왔었지만, 그 뒤로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콧배기도 비치고 있지 않아 잊어먹고 있었다가 아빠가 설명을 해주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 "대단하군요. 한 사람도 아니고 두명씩이나, 그것도 한 분은 전 세계에서 5분 밖에 안 계시는 대마법사들 중 한분이신 마이터 그레이턴이시라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역시 재상님의 능력은 대단하다고나 할까요?" 내가 스와카에게 그 둘이 온다고 마법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스와카가 놀라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대 마법사?" "모르셨습니까? 마법 길드에 두분,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은거 마법사로 알려진 도나휴경, 그리고 방랑하고 있다는 켄틴, 마지막으로 곧 오신다는 마이터 그레이턴 남작, 이렇게 다섯 분이 현재 마법 길드에 등록되어 있는 대 마법사이십니다." "그런 거예요? 헤에... 대 마법사는 몇 서클을 사용할 수 있는데요?" 나는 단순히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본 것 뿐인데, 스와카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거야 당연히 7서클부터 대 마법사란 호칭을 받지 않습니까? 이건 마법을 익힌 사람들에게는 상식인데요?" "으음... 그랬군요. 난 그런데 도통 관심이 없어서..." "하아, 아무리 그래도 그걸 모르고 계시다는 게 더 놀랍군요" 이제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스와카를 향해 나는 생긋 웃으며 얼버무렸다. "자자, 스와카?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그나저나 내일 아침 일찍 온다니까 지금 마법진을 그려야죠?" "예,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상식도 모르다니, 아리시안님은 어지간히 수업시간에 집중을 안 하시는 학생이었나 보군요." 스와카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작게 혀까지 찼다. 그 폼이 꼭 누가 나를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그 분께 동정을 보내는 듯 했다. '.... 그게 그렇게 되나?' 내가 마법을 배울 때 엄마는 가르치기 귀찮다면서 나보고 혼자 알아서 하라고 했었다. '그리고 혼자 책을 보고 마법을 연습하는 날 보고는 한심하게 보셨었지. 어차피 성장하면 자연스레 하게 되는 걸 벌써부터, 그것도 주문까지 외워가며 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하시면서 말야.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책임하고 게으른 엄마였다니까.' 옛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새 마을 바깥쪽에 다다라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건 사람의 키 2배정도 되어보이는 방어책이었다. 아직도 그 위에서는 마을 사람들을 비롯하여 일행들이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게으르면서, 내 곁을 떠나는 건 왜 그렇게 서둘렀어요? 일찍 갈 필요는 없는데...' 다음 날, 아직 이른 아침이라 안개가 발목을 감싸고 있건만 마을 사람들이 왕실에서 온다는 소리를 듣고 구경하러 몰려 나와 스와카가 만든 마법진을 빙 둘러 쌓다. "환영... 인파인가?" "그것 보다는 구경꾼들 같은데?" 류미르와 세이몬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을 주고받을 때 마법진이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희미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온다." 누군가의 외침을 신호로 마법진 가운데에서 강력한 빛의 기둥이 한번 치솟더니 그 빛이 사라지면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둘 다 마법사라는 걸 나타내주듯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는 그들의 짐인 듯한 꾸러미 몇개가 놓여 있었다. 애쉬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애쉬 레드포드 입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여전히 깡마른 고집 센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마이터 그레이턴이 마법진에서 걸어 나오더니 애쉬의 곁을 쓰윽 지나쳐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흐음... 여전히 예쁘군요. 여기서 만날줄은 몰랐습니다만,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플레이저 영애." "하.하.하.. 저도요, 그레이턴 남작.... 그런데 레드포드 자작이 당신을 마중나왔는데..." 그러자 마이터는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뒤에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애쉬를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지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것 처럼... "험,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에게 마중 받는 것 보다는 예쁜 아가씨에게 받는게 더 기분 좋지 않습니까?" 일행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일순간 휘청거렸다. "다시 뵙습니다, 아가씨. 절 기억하시겠는지요?" 평범하지만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마이터 뒤에 서 있다가 앞으로 나와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물론이예요, 죠슈아.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군요. 아빠 밑에 있다고 들었는데..." "하하하, 그게 저... 사정이 좀 있어서 그 동안 왕실에 있었습니다." 죠슈아가 마이터의 눈치를 힐끗 살피면서 어색하게 웃자 마이터가 코웃음을 쳤다. "흥, 내 눈치 볼 것 없이 솔직히 말해도 돼. 나한테 그동안 붙잡혀 있었다고." "스, 스승님..." "스승님?" 죠슈아의 말에 내가 놀라 되묻자 죠슈아가 싱긋 웃었다. "아, 예. 예전에 재상 각하의 도움으로 저 분 밑에서 마법을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간간히 도움을 받고 있죠." "헤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 어쨌든 그건 그거고, 이분은 이 마을의 촌장님이세요. 서로 인사하시죠?" 내가 옆에 서 있던 촌장을 가르키자 그가 한걸음 이쪽으로 다가왔다. "촌장입니다." 순간 내 일행의 시선이 황당감에 물들었다. 보통 처음 만나는 사람, 그것도 앞으로 같이 싸우게 될 동지와 인사를 할 때는 '내 이름은 누구누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등등 의 인사를 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그런 건 다 생략하고 다짜고짜 촌장이라니... 촌장이라고는 내가 벌써 말했는데...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촌장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탓인지 모두 그러려니... 하는 표정들이었다. 마이티가 그런 촌장을 보고 씨익 웃더니 똑같이 대답했다. "마법사다." 일행은 휘청거렸고, 마을 사람들은 '똑같은 놈 하나 더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죠슈아는 땅을 쳐다보며 한숨만 푹 쉬었다. 그러자 마이티가 죠슈아를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뭐 하냐? 너도 네 소개를 해야지?" 죠슈아가 화들짝 놀라면서 얼른 촌장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예. 저도 마법사 입니다." 나는 황당해서 죠슈아를 쳐다보았지만, 마이티는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으로 죠슈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잘 키웠군. 역시 내 제자다.' 하는 듯 했다. 마이티와 죠슈아가 도착한지 2틀이 지났다. 마이티와 죠슈아는 우리 일행들 중 스와카와 우리 셋 ( 나하고 류미르, 세이몬 )과 마을 주위를 둘러보며 방어 결계에 대해 심각히 의논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마을 사람들과 나머지 일행들은 마을 둘레에 방어책을 만들기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아무리 류미르가 땅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도왔다고는 하나 그걸 튼튼하게 다듬고 마무리 짓는 일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며칠이 걸려도 완성을 못했던 것이다. 하긴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고 하나 그 마을을 다 둘러쌓야만 하는 방책을 만든다는 것은 꽤나 큰 일이었다. 더욱이 작은 마을 답게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우리 일행이 도와준다고 해도 전문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솔직히 말해 힘쓰는 일 외에는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언제 쳐들어 올 지 모르는 몬스터 떼를 대비해 마을 사람들 모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방어책을 만드는 한편, 한쪽에서는 창고 속에 쳐박혀 있던 무기들까지 꺼내어 다듬고 화살을 만드는 등등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들 긴장하고 초조해 했다. 그 이유는 어제 리틀 조로가 실프들로 하여금 이 근처를 둘러보게 한 후 말해준 것 때문이었다. "주위가 너무 조용하대요. 어제까지는 동물들도 몇몇 보였는데 지금은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대요." "얼마 안 남았군...." 리틀 조로의 말을 듣자마자 촌장이 신음을 내뱉듯이 중얼거렸고 그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일을 전보다 서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방책에서 불과 10여미터 떨어진 숲과 마을의 경계선에 마을을 한겹으로 싼 방어결계를 치고 돌아왔을때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로써 몬스터들이 마을을 둘러 싼 방책에 도착하려면 우리가 만들어 놓은 방어결계를 두군데나 돌파해야만 했다. 방책에도 직접 방어결계를 해 놓고 싶었지만 날도 저물어가고 있는 데다가 아직 미완성인 관계로 내일을 기약하고 마법사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유일하게 완성 된 방책에 달린 육중한 나무문이 닫히면서 촌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마을 안을 울렸다. "어이, 모두들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지." 그의 말이 끝나자 그동안 마을 안을 씨끄럽게 만들었던 망치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대신 휴식과 저녁 식사를 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시끄럽게 터져나왔다. "저녁은 이쪽이에요." "얘들아, 너희들은 아버지들을 모셔 오너라." "아버지, 저녁 드시래요." "이봐, 그만 하고 저녁 먹으러 가지고." "먹기 전에 좀 씻자. 어우, 이 땀좀봐." "어딜 더러운 손으로 집어? 후딱 가서 손 닦고 왓!!" 사안이 사안인 만큼 현재 마을은 커다란 작업장이 되어 일도 같이 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마을 여자들이 식사를 만들기 위해서 마을의 넓다란 공터에다 지붕만 있는 천막을 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식사를 위한 또 다른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로 식탁과 의자는 마련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모두 땅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형편이었지만,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도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더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식사때마다 저희들끼리 모여 시끌벅적하게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런 모습을 조금은 안심한 마음으로 - 그런것 조차 불편해 하면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으니까 - 배급줄에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내 앞의 아주머니가 익숙하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커다란 쟁반에 오늘 저녁 식사 매뉴인 스파게티를 잔뜩 담아 주었다. "자아, 여기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마이터를 비롯한 죠슈아, 스와카, 류미르는 공터에 나와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나 지쳐 있었으므로 나와 세이몬이 그들이 먹을 음식을 가지고 우리가 묶고 있는 숙소로 가져다 줘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는 건가봐." 먼저 음식을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세이몬이 내가 그의 옆으로 걸어 오자 같이 걸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솔직히 빨리 끝나고 수도로 가고 싶긴 하지만, 그것도 저 방책이 완성된 다음의 일이니.... 끝날 때 까지는 오지 않기를 기다릴 수 밖에..." "그래도 매일 초조해서 기다리고 있자니 미치겠다. 차라리 어떻게 되든 그냥 일어나버렸으면 좋겠어." "너만 초조한거 아냐. 그리고 곧 올거 같으니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음식이 식을까봐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들어가보니 사르하가 지친 마법사들에게 막 신성력을 부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에구, 조금 더 일찍 왔으면 큰일날 뻔 했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데 사르하가 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아, 아시리안님 오셨어요?" "회복 마법을 쓴거야? 신성력을 아끼라니까. 저 사람들은 내일이면 쌩쌩해질텐데 뭐 하러 해주니?" 그러자 마이티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에구구구... 허리야... 요즘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괜히 온 몸이 쑤신다니까... 젊은 사람들은 이런걸 알기나 하는지 원...." 사르하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헤헤헤, 거보세요. 그리고 전 신관이라고 하는 일도 없는데 이런거라도 해야죠." "그래도 너무 많이 쓰지는 말아." "예에~~." "자자, 식사하세요. 어느정도 회복 되었을테니 모두 식탁으로 모이실 수 있죠? 사르하, 너도 우리랑 같이 식사할래?" 세이몬이 식탁에 음식을 늘어놓고 의자를 가져다 놓으며 말하자 사르하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아뇨, 전 나가서 리틀 조로랑 같이 먹을게요." "리틀 조로? 난 못본 것 같은데, 어디 있는지 알아?" "예. 방책 위에서 있겠다고 했어요. 그럼 식사 하세요, 전 가볼께요." 그렇게 말한 사르하는 우리가 더 잡을까봐 얼른 밖으로 빠져 나갔다. "좋~~~을 때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암, 암." 마이티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사르하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오, 남작님이 연애를 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은데요?" 스와카가 포크를 집어 들며 씨익 웃자 마이티가 눈을 부라렸다. "누가? 나도 왕년에는 잘 나갔던 몸이라고. 내가 지금은 요모양 요꼴이지만 한 20년 전에는 길거리에 한번 나가기만 하면 모든 여성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고. 너무 귀찮게 하는 여자들이 많아 내가 길거기를 나가려고 하지 않았었다니까." "진짜예요, 죠슈아?" 마이티의 말을 믿지 못한 이들의 눈길이 죠슈아를 향하자 죠슈아가 식은땀을 흘렸다. "하.하.하... 글쎄요.... 저는 잘...." 그러자 마이티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뭐야?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뭘 의심하고 그래?" "그럼, 그렇게 인기가 많으셨는데 왜 아직까지 독신이십니까?" 마이티의 부라림에도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한 스와카가 묻자 마이티는 코웃음을 쳤다. "흥, 너처럼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녀석이 어떻게 날 이해하겠냐? 그러니 넌 몰라도 됀다." "엥? 아니 제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 남작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스와카가 황당하다는, 그리고 약간 찔린다는 얼굴로 외치자 마이티가 그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내가 여자들에게 인기 있다는 걸 못믿으니까 그렇지. 자고로 자신이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놈들은 남들도 다 인기 없는 줄 알고 인기 있다 그러면 못 믿는 법이거든." "예? 아니, 그, 그런..." 스와카가 당황했는지 떠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마이티는 더욱 의기양양 해져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푸하하하, 거봐. 내 말이 맞지?" 스와카는 이제 얼굴이 빨개져서 머리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를 것만 같았다. "맞긴 뭐가 맞는단 말입니까?" "에이, 거짓말 하면 못써. 사실을 인정 해야지." "아녜요." 평소에는 항상 여유가 있고 평상심을 잃지 않은 스와카였지만, 여자 문제에 관해서는 이상하게도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쉽게 이성을 잃고 흥분했는데 그걸 오늘 그것도 하필이면 짖궃은 마이티에게 걸려 꽤나 놀림을 당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여유있게 버섯으로 만든 소스의 독특한 맛의 스파게티를 즐기며 구경하고 있었다. "어허, 흥분하면 몸에 해로워. 사람이 자고로 장수하고 싶으면 항상 건강을 생각해야지." "제가 언제 흥분 했다고 그러십니까?" "거봐, 지금 하고 있잖아?" "안 했습니다." "했다니까." "안 했다고요." 이성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는지 스와카의 목소리 톤이 약간 낮아졌다. "거참, 젊은 녀석이 늙은이처럼 고집이 쎄어서야, 어디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겠어?" 그러자 마이티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여자 문제를 들먹였고, 거기에 그대로 넘어가버린 스와카가 다시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글쎄, 제가 언제 여자들에게..."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리틀 조로의 다급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일 났어요. 지금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레드포드 자작님, 플레이저 자작님!! 큰일났어요. 비상이예요, 비상!!" 녀석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이 곳에서 우리의 작위를 마을 사람들에게 숨기기로 한 걸 잊어버리고 크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녀석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이 곳에서 우리의 작위를 마을 사람들에게 숨기기로 한 걸 잊어버리고 크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의 신분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방 안에서 느긋하고 흥미로운(?)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던 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방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을 땐 모두들 자신들의 저녁 식사를 내팽개치고는 방책 위로 달려가고 있었다. "침착해.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 모두들 자신의 무기를 챙겨. 그리고 미리 이야기 된 대로 자신의 자리로 가도록 해." 촌장이 공터 중앙에서 크게 외치고 있었다. 여자나 아이들이라고 집 안으로 숨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맨 앞에서 방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뒤에서 보조하는 일을 맡아 바쁘게 이리저리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에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하는 실감과 함께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긴장감이 온 몸을 휘감고 돌았다. 이번에 이기지 못하면 이 사람들이 다 죽을거라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겠다는 각오를 새삼다지며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시작이군요." 마이티가 자신있는 표정으로 웃었다. "헐헐헐, 이때를 위해 그 먼거리를 달려온 겁니다." 류미르와 세이몬도 마주 씨익 웃어주었다. "우린 준비 됐어." 스와카와 죠슈아까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힘차게 말했다. "자, 그럼 가볼까요?" 아직 난간도, 탁자도 없는 방책 위의 지휘관실에는 벌써 촌장들과 나머지 일행들이 모여 있다가 우리를 맞았다. "어디까지 왔어요?" 내가 막 달려온 일행의 대표로 묻자 애쉬가 기다리고 있던 일행의 대표로 대답했다.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서 있답니다. 숲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작전은요?" "저와 촌장님은 여기서 총 지휘를 맡겠습니다. 마법사님들과 사르하 신관, 그리고 리틀 조로도 여기 같이 계십시오. 나머지 일행 중에서 플레이저 자작과 친구분들을 제외한 분들은 각자 방책 위의 마을 사람들과 같이 있어주십시오." 반담을 비롯한 기사들이 알았다고 대답을 한 후 미완성된 원두막 같은 지휘실을 나가 방책위를 뛰어갔다.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애쉬는 나와 류미르, 세이몬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의 역활은 알고 계시겠죠? 당신들 셋이서 '그'를 막아주셔야겠습니다." "그러죠." 어차피 시키지 않았어도 나설 생각이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애쉬가 전에는 하지 않던 말을 뜬금없이 던지더니 즉각 몸을 돌려 촌장 옆으로 가더니 숲만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올까?" 애쉬가 우리에게서 떨어지자 류미르가 낮게 속삭였다. "전과 같을 거야. 나를 자신이 맡고 마을 쪽으로 몬스터들을 총 공격 시키겠지." "이 곳에서는 화염계 마법을 쓰기 힘들어. 하지만, 저쪽에서는 그런 거 고려 안하고 쓰겠지? 상당히 골치아플꺼야." 류미르가 걱정스런 어조로 말하며 숲을 둘러보았다. "괜찮아. 피해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걸 위해 마법사를 더 불러온 거니까." "저들만으로 힘들텐데? 몬스터 막으랴 숲에 불 나는거 막으랴, 거기다가 혹시 우리가 싸울때 일어날 마법 여파를 막으려면...." 가만히 듣고 있던 세이몬이 한쪽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숲과 방책을 가르키며 열심히 의논하고 있는 세 마법사를 바라보며 미덥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하지만 저들도 꽤 실력이 있으니 상당한 도움이 될 거야. 지금은 저들을 믿을 수 밖에 없어." "이번 싸움이 힘들긴 힘들구나. 우리가 이렇게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싸운 적이 있었던가?" 류미르가 회의적인 어조로 중얼거리자 세이몬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한번도 없었던 거 같아." 세이몬의 말에 쓴 웃음을 짓고 있는데 푸른 숲속에서 이질적으로 붉은 빛이 보였다. '그 존재'가 혼자서 숲을 벗어나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온다!!" 나도 모르게 긴장된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오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 존재'는 방책에서 부터 30미터 떨어진 곳 까지 오자 이 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오라는 건가봐." 세이몬이 어쩔거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오라면 나가야지. 저기, 누구 공중전에 자신있냐?" "공중전? 허공에서 하는 거? 난 자신 없는데? 검을 쓰려면 디딜곳이 필요해." 세이몬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젓자 류미르가 나섰다. "그럼 내가 해보지. 아린 넌 어차피 정면에서 부딧힐 거지?" 나는 '그 존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세이몬은 멀리 돌아서 뒤쪽으로 가줘. 류미르는 공중으로 가주고. 그럼 잘 부탁한다."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휘실에서 나가 '그 존재'의 시야에서 멀어지는걸 확인한 나는 일부러 천천히 허공으로 날아올라 '그 존재'와 10미터 떨어진 곳에 내려서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미처 하강 하기도 전에 '그 존재'가 그 자리에서 풀쩍 뛰어오르면서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엄청 빠른 속도로 뽑아냄과 동시에 휘둘러서 나에게 검기를 날리는 것이었다. "우왓!!" 막고 자지고 할 사이도 없이 빠르게 쏘아져 오는 붉은 검기에 놀란 나는 몸에서 마나를 빼어내 그대로 떨어져 내렸고 그 검기는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위를 스치고 하늘로 날아올라가버렸다. "젠장, 기습을 하다닛!!" 뒤로 날아간 검기가 어떻게 되었나 보고 싶었지만 코앞에서 쏘아져 들어오는 '그 존재'의 모습에 허둥지둥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마나로 감쌌다. 하지만 내 몸을 지탱할 여력은 없었기에 나는 '그 존재'의 검을 정면으로 맞부딧힌 뒤 곧바로 튕겨져나가 방책의 밑부분에 쳐박혀버리고 말았다. 쿠당탕탕~~!! 그리고 덤으로 붉은 마력탄이 날아와 작렬했다. 콰앙~~!! "에구에구, 조금만 더 늦게 방어막을 쳤더라면 갈뻔 했군." 볼썽사납게 쳐박힌 몸을 바로 세우고 온 몸을 장식하고 있는 방책의 무너진 더미를 치우고 일어났을 때 내 눈앞에 보이는 건 엄청나게 큰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어오고 있는 몬스터의 떼였다. "괜찮습니까?" 위를 올려다보니 애쉬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안 죽었어요." " '그'가 위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과연 하늘을 손가락을 가르키는 애쉬의 머리 넘어로 '그 존재'가 허공에 유유히 떠서는 이쪽을 바라보며 사악하게 웃음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의 손이 천천히 내쪽으로 향하는 순간 숲쪽에서 난데없이 검은 기운의 폭풍이 밀려와 허공에 떠 있는 '그 존재'를 덮쳐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이 방책 주위에 쳐놨던 첫번째 방어 결계에 도착하여 사정없이 지져주는 전류의 맛을 보며 트위스트를 추고 있었다. 쿠아아아악~~ 언제 들어도 기분나빠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재빨리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가뿐하게 세이몬의 검기 폭풍을 막아낸 '그 존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 프리즈!!" 내 손에서 뻗어 나간 마나들이 빛나는 금빛 고리를 형성하여 '그 존재'를 묶어 행동을 구속하였다. 그러자 '그 존재'는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면서 두 팔에 힘을 주는 동시에 온 몸에 강렬한 마나를 방출시켜 내가 만든 금빛 고리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방관만 하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금빛 고리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존재'는 행동을 묶는 고리를 부수기 위하여 '그 존재'와 나의 마나 줄다리기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갑자기 '그 존재'의 머리 위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곧바로 지름이 1미터는 되어보이는 커다란 물방울이 되어서 '그 존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그 존재'와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류미르의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턴!!" 그의 목소리와 함께 '그 존재' 주위에 엄청난 전앞의 전류가 생성되어 파지직 파지직 거리는 전류의 빛을 형성시키며 '그 존재'에게 달라붙었다. "크아아악~~!!" 물에 젖어있던 '그 존재'에게 전류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괴성을 질러대었다. 얼마나 강력한 전압이었는지 '그 존재'와 약간 떨어진 나에게까지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특별히 소금물로 준비했는데,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군." 류미르가 내 옆으로 다가오면서 말을 건넸다. 나는 약간 어벙한 표정으로 류미르에게 물었다. "야, 너 소금물이 전류가 잘 통한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그러자 더 놀란 류미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 넌 그거 어떻게 알았냐? 난 그거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건데? 예전에 우리 마을에서 어떤 애가 장난치다가 소금물을 뒤집어 썼는데 그때 딴 애가 그 애한테 가볍게 '스파크 - 짜릿 짜릿한 정도의 전류를 흐르게 한다 - '를 걸었다가 엄청 놀랐었거든. 그런데 넌 어떻게 알았냐?" "엥? 나? 아아, 예전에 에... 그러니까, 아, 맞아. 연금술, 그래, 연금술을 약간... 배웠었거든...하하하..." '에구구... 화학이 그러니까 이 시대의 연금술 맞기는 맞지?' 황급히 변명한 거였지만, 류미르는 다행히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도 괴로워 하는 '그 존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금술 배운거 가지고 뭘 그렇게 당황해 해? 그냥 배웠다고 하면 되는 것을..." 그런데 그 때 아랫쪽에서 검은 기류의 날카로운 검기가 '그 존재' 쪽으로 쌩 하니 날아왔다. '그 존재'는 몸이 저릿저릿한 가운데서도 목숨의 위협을 느꼈는지 얼른 몸을 비틀어 단지 머리카락을 약간 잘리는 정도로 몸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아래쪽에서 세이몬의 화난 외침이 들려왔다. "야, 너희들 뭐 하는 거야? 공격 안해?" 류미르와 나는 세이몬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류미르가 먼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공격... 할까?" 아무래도 우리는 무의식 적으로 너무 괴로워 하는 '그 존재'를 보고 공격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나 보다. "해야... 위험!!" 나는 채 말도 못 끝내고 얼른 류미르 앞을 가로막으면서 방어막을 펼쳤다. 수십개의 불덩어리들이 우리를 향해 날라오는 것을 본 탓이었다. 콰과과광~~!! 극대화 된 버스트 프레아였지만, 전보다는 위력이 많이 약해 있어 내가 막아내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그 폭발이 사라지고 난 뒤 보이는 것은 예전보다 더더욱 분노하여 마치 몬스터 같은 괴성을 내는 '그 존재'의 모습이 었다. "크르르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그렇다고 장난스럽게 물어볼 수도 없는게 사납게 눈빛을 번쩍이면서 온 몸에 붉은 마나를 회오리처럼 피워 올리고 있는 '그 존재'의 모습은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무서워서 감히 말을 붙여볼 엄두는 내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일방적인 공격 마법은 안 통해도 전격 마법은 통하나 본데?" 얼른 류미르가 나에게 떨어지면서 외쳤다. "네가 소금물을 뿌려서 그럴거야. 하지만, 한번 당했으니 다시는 당하지 않을걸?" 다른 뭔가 효과적인 공격 마법이 없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그 존재'의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세이몬이 날아 올라왔다. "야, 너희들 뭐하는 거야? 좋은 기회를 놓쳐 버렸잖아?" 세이몬은 아까 우리가 공격을 안 한게 어지간히도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쳇, 아까워라... 이제 이길 수 있나 했더니만... 뭐 하고 있었어?" "미안해, 잠시 딴 생각을 했어." 류미르가 변명한답시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것이 세이몬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딴 생가아아아악~~~?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전투중에 딴 생각을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어?" 세이몬의 반응에 류미르가 '이크!!' 란 표정으로 얼른 얼버무렸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게 미안하다고 하면 끝날 일이냐? 밑에서 싸우는 사람들도 생각을 해줘야지!!" "알았어. 이제부터 조심 할게. 그러니 그만 해라. 나도 잘못한 거 알고 있다구." 솔직히 말한다면 류미르만 딴(?) 생각 한 게 아니라 나도 그랬지만, 나는 지금 '그 존재' 의 시선을 피하느라 용쓰고 있었고 세이몬은 류미르에게 단지 트집을 잡는 것 뿐이어서 나에게 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악하게도 그들 사이의 투닥거림이 거의 끝날 쯤 되어 둘을 불렀다. "얘들아, 다 싸웠냐?" 그러자 그 즉시 류미르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에게 날라왔다. "아리이이인~? 너 혼자 그렇게 빠져 나가기야?" 하지만 나는 능청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몸은 여전히 빨리빨리 움직이면서... "이봐 류미르, 지금 내 모습 안 보여? 난 너희들 처럼 한가한 몸이 아니라구." "으이구... 말은 잘 한다." 류미르는 졌다는 듯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면서 여전히 집요한 시선을 나를 쫓는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무슨 좋은 생각 없어?" 세이몬도 '그 존재'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엄청 화가 나서 그런지 온 몸에 마나가 전보다도 더욱 더 많이, 그리고 더 강렬하게 휘몰아치자 도저히 뚫을 곳을 못찾겠는지 암담한 표정들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세이몬, 너 혹시 저 사람을 어떤 곳으로 유인할 수 있겠냐?" 나는 '그 존재'의 머리 위로 덤불링을 하면서 외쳐 물었다. "뭐어? 그런 건 꿈도 못 꿔. 막는 것도 간신히 막는데다, 저 사람은 오직 아린만 쫓아 가는걸? 내가 오란다고 해서 거들떠 보겠어?" 세이몬이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고개를 젖자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너하고 류미르 둘이 같이 쓸 수 있는 공격 마법 없냐? 아주 강력한 걸루." 그러자 이번에는 류미르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이몬, 너 마법 익힌거 있어?" 세이몬도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마법이라고 따로 익힌 건 없어. 단지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뿐이라고." "그럼 방법 없네. 세이몬, 네가 공격해서 시간 좀 끌어줘. 그 동안 류미르랑 내가 밑으로 내려가서 어떻게든 해볼께. 오케이?" "좋아. 단지 나 오래 못 붙잡고 있는다?" "알았어. 내가 네 뒤쪽으로 갈테니까 그때 부탁해. 하나, 둘, 셋!!" 셋을 외침과 동시에 나는 다시 한번 '그 존재'의 머리를 뛰어 넘어 세이몬 바로 뒤로 내려왔고 그 순간 준비하고 있던 세이몬이 다시한번 자신의 검기를 날리면서 '그 존재' 시야를 방해했다. 그리고 세이몬이 고전 할 동안 류미르와 나는 얼른 땅으로 내려왔다. "아린, 어쩌려고 그래?" 류미르가 다급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류미르, 너 '카오틱 디스팅레이트' 쓸 줄 알아?" "아, 그래. 하지만 겨우 쓸 수 있을 뿐인걸. 제대로 쓸 수 있는지는 자신 없어." "됐어. 쓰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주위에서 적당한 공터를 찾아내고는 내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내 마나를 불어 넣은 다음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크리에이트 이미지!!" 그러자 내 머리카락에서 마나가 기묘하게 움직이더니 점차 머리카락이 부풀어 오르면서 내 모습으로 화했다. "아린?" 류미르가 옆에서 놀란 어조로 외쳤다. "그냥 환각이야. 단지 환각만 일으킨다면 눈치 챌것 같아서 내 기운을 좀 불어 넣었을 뿐이니까." 그걸로는 불안해서 나는 노움을 한명 불러내었다. "너는 누군가가 '이 녀석'을 죽이려 하면 그 즉시 땅 밑을 살짝 꺼지게 만들어서 막아라." 그리고는 공터 근처의 숲을 가르키면서 류미르에게 말했다. "너는 저쪽에 가서 숨어 있어. 그리고 주문을 외워 놓았다가 내가 신호하면 그 주문을 쓰는 거야, 알았지?" "아, 그래... 시키는 대로 하기는 하겠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네?" 류미르가 별로 자신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작전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건 해봐야 아는 거야. 하지만 '카오팅 디스팅레이터' 자체도 강력한 주문인데다가 나도 같이 쓸거니까 큰 타격은 받겠지. 자, 시간 없어. 빨리 숨어." 내가 류미르의 등을 밀어내자 류미르가 다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린, 난 그 주문을 쓰고 나면 지쳐서 딴 마법은 못 쓰게 될 거야." "알았어. 어떻게든 돼겠지." "너말야, 너무 무책임 한거 알아?" "알어 알어, 전에도 말했잖아. 그럼 난 간다." 류미르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몸을 돌리자 나도 재빨리 류미르의 반대편으로 가서 숨었다. "아아, 내 기척을 죽여야지. 컨실 셀프!!" 내가 기척을 지운지 얼마 안 있어 하늘로 부터 어떤 존재가 쏜살같이 내려오더니 내가 만들어 놓은 내 분신 뒤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내 분신은 단지 환각이었으므로 '그 존재'가 뒤에서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어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그 존재'의 얼굴에 잠시 의아한 빛이 스쳐지나가더니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존재'가 넘어오지 않은 줄 알고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는데, 다행히도 '그 존재'는 주위를 한번 쓰윽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내가 만들어 놓은 분신을 노려보며 한발 한발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무서운 살기를 내 뿜으며 천천히 붉은 마나가 넘실대는 검을 들어올려 내 분신을 뒤에서 내리쳤다. 그러자 준비하고 있었던 노움이 '그 존재"의 다리가 무릎까지 땅 속에 파뭍히게 만들었고 그 순간 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야!!" "카오팅 디스팅레이터!!" 라필타의 업그레이드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라필타를 시전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돼는 빛의 기둥이 땅을 뚫고 뻗어나가 '그 존재'를 감쌌다. 더구나 류미르와 내 마법이 합쳐진 것이라 빛 기둥의 굵기는 그 공터를 차고도 넘칠 지경이었고 길이도 하늘을 뚫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빛에 휩싸인 '그 존재'는 처음에는 약간 거뭇거뭇한 그림자만을 보이더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빛의 기둥이 점차 가늘어지더니 빛이 사그라들었고 공터에는 커다란 구덩이만 남아 있었을 뿐 다른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굉장한 마력이었는데?" 세이몬이 공중에서 바닥으로 착지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걸 보니 성공한 게 아닐까?" 류미르가 창백한 얼굴로 비틀비틀 걸어오면서 대답했다. "정말이야, 아린?" 세이몬이 기쁘다는 얼굴로 나를 홱 돌아보았지만 나는 자신있게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 존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꺼림직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대답을 잠시 미루고 얼른 아빠를 불러냈다. "아빠!!" [그래, 준비는 잘 되어 가냐?] "오늘 한바탕 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파멸되어 가는 존재'는 어떻게 죽죠?" [엥?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류미르랑 같이 '카오팅 디스팅레이터'를 시전해서 정면으로 맞췄거든요. 흔적도 없이 사라지긴 했는데, 그게 죽.... 아니, 끝난 건지 아닌지 몰라서요." '죽음'이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다 얼른 다시 들어갔다. 아무래도 그 단어는 쓰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빠는 한숨을 폭 쉬더니 입을 열었다. [끝내기에는 택도 없을 거다, 이 아가씨야. 너하고 그 하이 엘프 녀석이 합쳐도 1000살 짜리 녀석 마력이 될까말까 할텐데 그걸로 될 거 같아? 그리고말이다, 우리 종족은 죽음에 이르면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간단다. 그걸 보지 못했으면 아마 도망간 걸 꺼야.] "에... 그런 거예요?" [그래, 그런 거다. 그러길래 할머니 능력을 쓰라니까?] 아빠가 답답한 듯 인상을 찡그리자 나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나중에요." [나중에 언제?] "때가 되면 쓰겠죠." [으이그...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말을 들으니 대충 잘 된것 같구나. 그럼 곧 수도로 돌아올 수 있겠지?] "그렇겠죠." [흐음... 마법사가 내가 보낸 둘하고, 용병하고 너와 엘프가 있으니 올때는 공간 이동으로 올 수 있겠구나?] "아, 그렇군요. 그럼 일찍 갈 수 있겠네요. 그럼, 그때 뵈요." [오냐, 하지만 오기 전에 연락해야 한다?] "알았어요." "에이... 그럼 결국 또 그 자식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거야? 겨우 끝났나 싶었는데..." 같이 듣고 있던 세이몬이 시무룩한 얼굴로 투덜댔다. "어쩔 수 없지 뭐. 자자,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마을 쪽으로 가 보자. 그 쪽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잖아." 활기찬 어조로 위로하는 듯이 세이몬의 어깨를 껴안아 마을 쪽으로 이끌며 류미르는 고개만 살짝 돌려 나에게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마치 '다행이지?' 라고 묻는 듯 했다. '다행이라...'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 나는 괜히 하늘을 보았다. '후후후, 어쩌면...' 류미르는 몇 걸음 걸어가지 않아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에구구구..." 덕분에 같이 걸어가던 세이몬이 놀라서 그를 얼른 부축했다. "야, 왜 그래?" "아아, 아까 너무 무리했나봐. 세이모오오온~~, 나 너무 기운 없어." 류미르가 평소 녀석답지 않게 애처러운 눈빛으로 세이몬을 바라보자 세이몬이 적지 않게 당황했다. 항상 당당하고 침착하던 녀석이 죽는 소리를 하니 무척 놀란 듯 했다. "야, 괜찮아? 일어설 수 있어?" "아구구구, 힘이 없어서 서 있지도 못하겠어... 아, 빈혈기까지..." 류미르가 더욱 더 엄살을 부리면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집고 뒤로 넘어가는 시늉을 하자 세이몬이 어쩔 줄 몰라 녀석의 등 뒤를 받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아린, 어떻게좀 해봐. 이 녀석 죽겠어." '순진하기는...' 난 벌써 류미르가 장난끼 어린 얼굴로 눈을 찡끗하는 걸 봤기 때문에 쓴 웃음만 지어줄 뿐 별 달리 손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이몬이 벌컥 화를 내며 외쳤다. "아린, 류미르가 이렇게 됐는데 가만 있기야? 네가 그렇게 냉정할 줄 몰랐어!!" '류미르 그 녀석 꾀병이야!!' 라고 까발릴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나는 짐짓 침착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진정해 세이몬, 류미르는 단지 기운이 빠진 것 뿐이니까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거야. 그리고 솔직히 나도 마법을 너무 써서 약간 힘이 들어서 가만 있는 거야." 그러자 세이몬은 금방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 그랬던 거야? 미안, 오해해서..." '정말 엄청 순진하다니까...' 내가 속으로 웃고 있을때 세이몬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류미르를 부축하고 있었다. "류미르, 괜찮겠어? 어디 일어나 봐." "히에에에에에~~~, 에구구구~~ 세이모오오오온~~~" 희안한 신음소리를 내며 류미르가 세이몬에게 매달리자 세이몬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류미르를 일으켜 세워 자신이 업었다. "류미르, 조금만 참아. 내가 얼른 마을에 데려다 줄께. 마을에는 신관이 있으니까 금방 널 회복시켜 줄거야. 아린, 넌 걸을 수 있어?" '에구, 착한 녀석...' 그 와중에서도 세이몬은 걱정스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로 돌아보았다. 날 못 챙겨주는게 되게 미안한 듯 했다. "난 괜찮아. 걱정 안해도 돼." "그래? 그럼 어서 가자." 세이몬은 한 팔로는 류미르가 등에서 떨어지지 않게 잡고 한 팔로는 내 손목을 잡아 빠른 발걸음으로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서는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채였다. 마이터와 죠슈아등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제 일차 방어 결계와 제 이차 방어결계는 군데 군데가 파괴되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고 몬스터들은 벌써 방어책 밑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하지만 비록 미완성인 방어책이었지만 그래도 몬스터들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고, 리틀 조로가 땅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그런 방어책을 보호하고 있었다. 마이터와 죠슈아는 간간히 몬스터들에게 마법을 날리고 있었고 방어책 위에 있는 마을 사람들도 그들에게 열심히 활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런 그들을 뚫고 방어책을 기어 올라가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런 녀석들은 방어책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우와, 되게 많다." "어이구, 많이도 끌어 모았네." 그 모습에 세이몬과 내가 혀를 내두르자 류미르가 걱정스런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아린, 어쩌지? 이러다간 끝도 없을 것 같은데?" "하긴, 되게 오래 안 쳐들어 왔잖아. 이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을 싸그리 몽땅 끌어모으느라 그랬나봐." 류미르의 질문에 내가 감탄만 하고 있자 류미르는 그게 맘에 안 들었는지 약간 화가 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린, 그렇게 감탄만 하고 있을 거야? 네가 어떻게좀 해봐." "저들이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뭘..." 내가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이자 류미르는 좀 당황스러웠나 보다. "아린, 너 왜그래? 너 답지 않게시리..." "내가 뭘?" "평소의 너라면 당장 도와주고도 남지 않았냐?" "헹, 것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때 그랬지... 댓가도 많이 받는데 저 정도는 해결해야 하는거 아냐?" 그러자 류미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 뭔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오호라, 그러니까 너 전에 촌장이 계약할 때 되게 틱틱 거린 거 가지고 화가 났구나? 맞지?" "쳇, 그럼 안돼냐? 하지만 그것 말고도 촌장이랑 계약 하려고 촌장 아들내미 제대로 패주지 못한 것도 맘에 안 들어." "에이, 아린... 하지만 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네 일행들도 같이 싸우고 있잖아." "괜찮아. 이 정도 일에 어떻게 될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때 몬스터들과 마을 사람들과의 싸움을 구경하면서 류미르와 나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세이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런데, 얘들아?" "응? 왜 세이몬?"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류미르가 먼저 명랑한 어조로 - 세이몬이 업어줘서 되게 기분이 좋았는지 - 대답했다. 그러자 세이몬 왈 "류미르 목소리는 되게 멀쩡하다? 벌써 다 회복된 거야? 아까는 목소리도 죽어가더니..." 정곡을 찔린 류미르는 '아차'하는 얼굴로 다시 팍 죽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에구구구... 세이몬이 업어줘서 쪼~~끔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아..." "아아, 그런 거야?" "으응... 그런 거야." 세이몬의 어조가 좀 묘해서 류미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기운 없는 목소리를 고수했다. 하지만... 쿵!! "아얏, 세이몬. 무슨 짓이얏!!" 세이몬이 류미르를 잡고 있던 손을 그냥 놓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류미르의 엉덩이는 땅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면서 기쁨의 비명을 질렀고 덕분에 류미르의 얼굴은 오만상이 다 찌푸려 졌다. "헤에, 벌써 다 회복된 거 같네? 아니면 처음 부터 기운이 없었던게 아니던가... 안 그래, 류.미.르?" 세이몬이 천천히 몸을 돌려 팔짱을 딱 끼고 류미르를 매섭게 노려보자 류미르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식은땀을 흘려댔다. "하.하.하... 세이몬, 그게 말이지?" '들켰구만...' 나는 뒤에 어떻게 될 지 지켜보기 위해 슬그머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감히 날 속여?" "세이몬, 난 정말 힘이 없었다구... 정말이야!" "웃기지 마. 힘 없는 녀석이 날 속일 힘은 있었냐?" 세이몬은 분노에 찬 외침을 터트리면서 번개같이 자신의 검을 빼내어 류미르를 내리쳤다. "우아악, 무슨 짓이야?" 류미르가 앉은 상태에서 얼른 몸을 돌려 칼을 피하면서 외쳤지만 세이몬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흥, 잘 피하는 걸 보니 힘이 펄펄 넘치는 구만?" 그러면서 다시 검을 휘두르자 류미르가 안돼겠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공중에서 제비돌기를 하여 뒤로 훌쩍 물러났다. "세이몬, 진정해, 진정 하라구. 난 정말 힘이 없단 말야." 류미르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한번 속은 세이몬은 여전히 분노하면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시끄러. 내가 또 속을 줄 알아?" "우아악, 정말이라니까?" "거짓말!! 흥,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네 힘을 확실히 빼 줄테니까!!" 세이몬이 자세를 잡는가 싶더니만 무시무시한 검기를 류미르에게 발출해 내었다. "우갸갸갸, 너 정말 날 죽이려는 거야?" "확실히 죽여주지." "우악, 엘프 살려!!" 류미르는 세이몬이 정말 자신을 노리고 검을 휘두르자 놀래서 몸을 피했고 그런 류미르를 세이몬이 무섭게 쫓아갔다. 하지만 정말 우습게도 그들이 피하고 쫓느라 간 곳은 몬스터들이 바글바글 한 마을 방어책 앞이었다. "세이몬, 제발 진정해!!" "너 같으면 진정하게 생겼어?" 콰앙~~!! "우아아아악, 내가 잘못했어. 잘못 했다니까?" "시끄러. 그런 사과는 받아 주지도 않을 테다!!" 퍼버벅~~!! "우갸갸갸, 그렇다고 정말 이러기냐?" "이럴 거다. 그러니 각오 해!!" 싹둑, 싹둑, 사사삭~~!! "엘프 살류!!" 갑작스레 몬스터 사이로 뛰어 든 두 녀석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화살 날리는 걸 멈추고 멍하니 쳐다 보았지만, 그들을 자신들 틈으로 껴 준 몬스터들은 죽을 맛이었다. 세이몬이 사정없이 검과 검기를 날리는데 류미르는 그걸 단 한개도 맞지 않고 모두 피해버려서 류미르 대신 주위에 있던 몬스터들이 고스란히 그걸 맞았기 때문이었다. "세이모오오온~~~ 한번만 봐줘!!" "닥쳐!!" 콰과광!! 꾸에에엑~~!! 케에에에엑~~!! 장장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 끝에 류미르는 정말 지쳐버려 헥헥 대면서 내 뒤로 숨었다. "헉헉헉... 아린, 헉헉, 나좀 헥, 살려줘어어.... 헥헥헥..." "아린, 비켜. 가만 안 놔둘 거야." "세이모오오온... 헥헥, 내가 헥, 정말, 정말, 헉헉... 잘못했다니까... 헥헥... 그러니... 헥, 좀.... 헥헥.. 봐주라... 응? 헥헥, 나 정말... 헥헥, 죽을 거 헥, 같다...헉헉..." 류미르는 정말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처럼 시뻘개진 얼굴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세이몬, 지금은 좀 봐줘. 이러다가 류미르 정말 죽겠다." "싫어, 아린. 류미르가 너무 나빴단 말야." 세이몬이 너무나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나는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히 말하면 류미르가 세이몬을 속일 때 나도 모른척 했던 게 찔렸던 탓이었다. "아아, 나도 류미르가 무지무지무지 나빴다는 건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봐주고 나중에 류미르에게 맛있는 거 무지 많이 사달라고 하면 돼잖아, 안 그래?" "맛있는 거?" 세이몬이 약간 흔들린다는 표정으로 묻자 나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맛있는 거. 우리 곧 수도로 돌아가잖아. 거기 가면 류미르랑 밖으로 나가서 맛있는 거 많이 사달라고 해서 먹어. 그리고 옷이랑 그런 것도 사달라고 하고, 응? 류미르가 너 사달라고 하는 대로 다 사줄 거야." 류미르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헥헥, 그, 그래... 헉헉... 내가 다 헉, 사줄께!!" 그러자 세이몬의 얼굴이 풀려버렸다. "정말 다 사줄꺼지?" "헥헥, 그래, 헥... 약속, 헉, 해!!" 세이몬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지." 그리고는 몸을 획 돌리더니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어? 아까 그 몬스터들 다 어디 갔어?" "어디 갔긴, 어디 갔겠냐? 다 제 집으로 돌아갔지." 내가 좀 황당해서 대꾸해주자 세이몬이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린, 벌써 사람들이 몬스터들을 다 쫓은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다리 힘이 풀려 휘청일 뻔 했다. "세이몬, 그 몬스터들 다 네가 쫓았어." 그러자 세이몬은 더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언제?" "아까." "정말? 난 그런 적 없는데?" 나는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한번 쉰 다음 세이몬을 향해 다정히 웃어 줬다. "그런 거 기억할 필요 없어. 자 이제 마을로 가서 저녁 먹자. 오늘 하루 열심히 뛰었잖아, 그치?" "응, 응!!" "그럼 가자고." 제 23화 아린의 약혼 소동 몬스터들이 모두 물러가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사망자도, 사상자도 전혀 없는 결과에 촌장은 꽤나 흡족해 했다. 이제 남은 건나머지 돈을 받고 우리를 내보내는 일 뿐이었다. 촌장은 금화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건너 받을 때 히죽히죽 거리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푸헐헐헐, 아무튼 당신들도 수고 했소. 우리들이나 당신들이나 모두 좋은 결과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거야 말로 일거 양득이로군." 그에 비해 애쉬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사상자가 없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거기에 기물이 파손된 것도 없으니 그에 따른 손해 배상은 하지 않아도 되겠죠?" "험험, 그렇게 되는 군." 애쉬가 약간 날카롭게 꼬집자, 촌장이 양심에 찔렸는지 머슥한 표정으로 애쉬로 부터 시선을 회피했다. "그건 그렇고, 저 방어책은 우리 때문에 만들어진 거니 저희가 가기 전에 없애드리겠습니다." 애쉬가 마을 주위에 만들어 져 있는 방어책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하자 촌장의 시선이 황급히 애쉬에게로 돌아왔다. "어어? 아니 그럴 것 까지는..." 하지만 애쉬는 촌장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중간에서 짜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마무리도 깨끗하게 해야죠. 우리가 오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어허,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됀다니까 그러네... 자자, 힘들텐데 숙소에 가서 잠시 쉬고 있게나. 마을 사람들이 승리를 위한 잔치를 할 모양인데 피곤한 상태로 참여하면 안돼지 않나?" 촌장은 왠지 애써 짓는 것만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애쉬의 어깨를 붙잡아 숙소쪽으로 몸을 돌리게 하고는 밀어댔다. "자자, 모두들 가서 푹들 쉬라고. 내 준비가 되는 대로 사람을 보낼 테니." "하지만 우리는..." 애쉬는 촌장에게 안 밀리려는 듯 용을 쓰면서 단호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촌장이 그의 말을 중간에서 딱 잘라 버렸다. "어허, 이제 자네들이 할 일은 끝났네. 나머지는 다 우리에게 맡기고 자네는 푹 쉬고 잠시 후 잔치에 참여한 후 내일 떠나기만 하면 돼네. 알겠지?" 촌장이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애쉬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애쉬는 촌장이 하도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표정을 팍팍 지으면서 일행들을 이끌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그 동안 기묘한 표정으로 촌장과 애쉬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던 스와카와 반담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큭큭큭... 레드포드 자작.. 쿡쿡쿡.. 대단 합니다. 하하하, 대단해요, 대단해. 큭큭큭~~" 반담이 서서 쿡쿡 웃는 거에 비해 - 물론 평소 반담의 행동으로 보자면 그것도 크게 웃는 것이지만... - 스와카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땅을 치며 크게 웃어댔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동에 이해를 한 사람은 단지 애쉬 뿐인 듯 다른 일행들은 황당한 얼굴로 스와카의 행동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 일행들의 심정을 대변해 마이터가 한마디를 던졌다. "이기 미칬나?" 작게 말한게 아니었으므로 분명히 스와카도 그 말을 들었을 테지만 그는 웃느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고 대신 죠슈아가 그를 위해 변명 비스무리 한 말을 했다. "뭔가 사연이 있나 보지요." "글쎄, 그 사정이 뭐길래 저렇게 미친 듯이 웃어대느냔 말야." 그래도 자기만 웃고 설명을 안 해주는 - 물론 안 해주는 게 아니라 못해주는 거긴 하지만... - 스와카가 못마땅한지 마이터가 눈쌀까지 찌푸리자 죠슈아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애쉬를 바라보았다. "아마, 레드포드 자작이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스와카를 보면서 자신도 피식피식 웃고 있다가 조슈아의 말을 들었는지 애쉬가 시선을 들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아아... 그게 말입니다. 혹시나 촌장이 우리가 마을 둘레에 방어책을 세운 거 가지고 또 트집을 잡아 돈을 우려내지 않을 까 해서 미리 연막을 친 겁니다. 생각해 보면 그 방어책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해가 되기 보다는 오히려 이익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제 생각이 맞아 떨어진 것 같군요." "오호라, 그래서 그 능구렁이 촌장이 필사적으로 당신을 막은 거였군요? 돈을 우려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말이죠." 자카르가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자 애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왠지 돈을 받을 때 일거양득이니 일이 무척이나 잘됐니.. 하는 걸 보고 불길한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자 흄도 뭔가를 눈치 챘다는 듯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어쩐지, 그래서 전 같지 않게 능글맞게 히죽히죽 웃으면서 나섰군요. 후후후, 하지만 자작께서 멋지게 그를 물리치셨네요." 흄이 낮게 웃음소리를 내자 일행들이 모두들 피식 피식 웃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에 촌장이 우리에게 틱틱 거린게 모두들 못마땅 했었나 보다. "후아~~~,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후련하게 웃었습니다." 겨우겨우 웃음을 그친 스와카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잔치를 즐기고 수도로 돌아가는 것 뿐인가요?" "돌발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렇겠죠." 스와카가 싱긋 웃으며 일행을 둘러보며 하는 말을 애쉬도 빙그레 웃으며 받아줬다. 일행이 한 고비 넘긴 안도감과 함께 긴장을 풀고 몸을 깨끗이 씻고 숙소에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쯔음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을 배경삼아 마을 청년 한명이 숙소에 왔다. "저, 저기요..." 무지 튼튼해 보이는 몸에 걸맞지 않게 무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저주저 하는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우리의 황당함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가만 보니 청년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었다. 마을 사람이 많지 않으니 마을에서 몇번 마주치기도 했겠지만, 마법사들과 어울려 있다 보니 마을 사람들과는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한 교류를 한 적이 없었던 나는 유난히 낯이 익은 청년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저기요, 우리가 어디서 따로 만났던 가요?" 여전히 머뭇머뭇 대는 태도로 이 곳을 찾아 온 용건을 말하지 못하는 청년이 도저히 기억 나지 않아 내가 이렇게 묻자 청년의 얼굴이 흠칫 하더니 하얗게 질렸다. "저, 저기... 그게, 그러니까..." 그러자 참다 못한 마이터가 그 청년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더니 냅다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에라이!!" 불시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청년은 아프다기 보다는 놀라서 뒤통수를 감싸며 주저 앉아서 어벙한 표정으로 마이터를 올려다 보았고 그런 그를 향해 마이터가 주저 없이 날카로운 혀를 놀렸다. "덩치에 안 맞게 뭘 그렇게 쩔쩔 매고 그래?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그러자 정말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청년은 더욱 더 놀라 헛바람을 삼켰고 그런 그와 마이터의 말에 내 기억의 호수에서 뭔가가 하나 떠올랐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너어~~!!" 그 청년은 전에 내가 메이와 물을 뜨러 냇가에 갔을 때 우르르 몰려 와서는 우리에게 시비를 걸던 청년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 마침 저 녀석이 앞에 나서서 이죽대었었기에 내 기억에 남았던 것이었다. 내가 그걸 기억해 냈다는 걸 알아챘는지 청년은 내게 넢죽 엎드렸다. "아가씨, 제발 용서를.... 그 때는 제가 아무 것도 모르고 한 철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때는 자신의 친구들을 믿고 되게 깝죽대더니 지금은 그와는 정 반대로 누가 시키지도 않 았는데 넢죽 업드려서는 발발 기는게 되게 맘에 안 들었다. "허, 참... 사람이 간사하다고는 하지만..." 그 모습이 흄의 맘에도 안 들었는지 내 뒤에서 흄이 낮은 목소리로 혀를 찼다. "야, 너!! 니가 무지무지무지, 무진장 잘못 했다는 걸 알고 있겠지?" 내 날카로운 말이 떨어지자 녀석은 마치 채찍이라도 맞은 것 처럼 몸을 다시 한번 흠칫 떨었다. "예? 예, 예. 제가 잘못 했습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잘못 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겠지?" 내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은근한 어조로 묻자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은근한 어조로 묻자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떤..." "어머나,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마. 난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구." 그 청년의 하앟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며 어떤 벌을 줘야 잘 줬다고 소문이 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찰나 애쉬가 그와 나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 왜 온 거지? 무슨 용건이 있어서 온 게 아닌가?" 청년은 애쉬의 말이 마치 구세주인 양 얼굴이 환해지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습니다. 깜빡 하고 있었군요. 촌장님께서 잔치 준비가 다 되었으니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애쉬가 그에게 싱긋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가? 그럼 용무는 끝났으니 계속 벌을 받도록." 청년의 얼굴은 애쉬의 말에 거무죽죽하게 변해서는 다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너 말고도 네명이나 더 있었지, 아마? 그 애들은 지금 어디 있지?" 기억을 더듬으며 묻는 내 질문에 청년은 풀이 팍 죽어서 그런지 체념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아마 지금쯤 잔치 자리에 참석해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가자." 나의 갑작스런 말에 벌을 받을 줄 알고 축 쳐저 있던 청년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가자고. 너만 벌 받으면 네가 너무 억울하잖아. 잘못한 녀석들 다 같이 받아야지." "에에에~~~?" 그리고 잠시 후 마을의 커다란 공터에 마련된 잔치의 상석 바로 옆에는 진귀한 풍경이 만들어 졌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복창 봐라. 정신을 덜 차렸나?"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머리 위로 들린 양 손 위에 커다란 돌맹이를 하나씩 들고 앉았다 일어나면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다섯 청년들을 구경하느라 잔치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표정을 지었다. 우선은 이 다섯 청년들의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나서지는 못하고 안절부절 못한 상태 에서 안타까운 눈으로 그 청년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꼬맹이들 이나 소녀들은 킥킥 대며 웃고 있었다. "너는 저러지 마, 알겠지?" "응. 그런데 저 형아들은 왜 저러는 건데?" "그건 저 형아들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야. 넌 그러면 안됀다." "응. 그래서 저런 벌은 안 받을께." "그래, 그래. 아유 참 착하기도 하지." 그 모습을 보며 타산지석의 본을 보이는 어느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도 보였다. 촌장은 그 모습을 쳐다보지는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면서 어험, 어험 하는 헛기침만 괜히 터트렸다. 한 20번쯤 청년들이 외치고 나자 이제 그들의 얼굴은 시뻘개져 있었고 돌을 든 손도 부들부 들 떨리며 목소리도 점점 쉬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정 못참겠던지 촌장이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험험, 어느정도 반성을 한 것 같으니 그만 용서해 주는게 어떻겠는지..." "어느 정도 반성한 걸로는 안돼지요. 다시는 그런 짓 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확실하게 혼쭐을 내야 해요." 내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딱 잘라 말하자 촌장이 괜히 헛 웃음을 흘리면서 시선을 돌렸 지만 그를 너무나 애처럽게 바라보는 촌장 아들의 시선을 차마 무시 못하겠던지 다시 나에 게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확실하게 단속할 테니 용서해 주시지요? 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 하겠소." "그래도..." 내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촌장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은 싸움에서 승리한 걸 축하하는 자리잖소? 앞으로도 많은 음식들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가라앉아서야 어찌 음 식 맛이나 나겠소? 내 오늘 특별히 그 동안 아끼고 아꼈던 10년 묵은 과일주와 약초주도 풀 어 놓으려고 하는데... 그런건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아주 귀한 거라오. 시간도 많지 않은데 얼른얼른 다 즐겨봐야 하지 않겠소?" 값을 따지지 못할 10년 묵은 과일주와 약초주라는 말이 나오자 스와카를 비롯한 술을 즐기 는 일행들이 눈빛이 변해 입맛을 다시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이터와 죠슈아까지 눈빛이 변해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힐끗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내가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관계로 일행들의 시선들까지 싸악 무시해 버렸다. "흥, 난 술 별로 안 좋아 하는데요?" 그러자 촌장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어허, 어디 그 술만 내놓는다고 했소? 그거 말고도 이 산에서만 볼 수 있는 요리가 기다리고 있다오. 그건 다른데서는 절대 맛을 보지도, 구경도 못하는 것들이요. 그것도 맛을 봐야지. 기다리다가 음식 다 식겠소. 자고로 음식은 뜨끈뜨끈할 때 먹어야 제맛이 난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요?" 딴 데서는 구경도 못한다는 진미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나도 귀가 솔깃해졌다. 그리고 류미르와 세이몬도 입맛을 쩝쩝 다시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린, 요리가 기다린대." "식는다잖아." "흐음... 뭐, 촌장님께서 앞으로 잘 단속해 주시겠다면야..." 내가 은근슬쩍 못 이기는 체 넘어갈 기색을 보이자 촌장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내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라오.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이 안 일어나게 할테니 걱정 마시오." 그리고는 내가 맘 변할세라 얼른 아직도 앉았다 일어나기 일명 기합을 받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하고 있느냐? 얼른 이분들께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촌장의 말이 끝나자 마자 청년들은 돌을 내던지듯이 내려놓고 일어나 우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번개같이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촌장은 재빨리 신호를 보내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음식들을 들여오게 했다. 촌장이 자랑을 해대던 과일주와 약초주가 날라져 왔고 이 산에서만 나는 약초와 산열매등으로 통채로 요리된 짐승들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자, 드십시다. 이 모든게 여러분들을 위한 거니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마이터는 진한 갈색으로 빛나는 약초주를 잔에 따라 향기를 맡이보더니 한입에 홀짝 털어넣었다. "캬아~~, 좋구나. 혀 끝을 톡 쏘는데다 약초의 향이 그윽하니 궁중의 고급 포도주가 부럽지 않구만." "허허허, 내 오늘 큰 맘 먹고 풀어놨으니 맘껏 즐기시오." 마치 인심 좋은 아저씨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일행들의 입 속으로 사라져 가는 술을 보는 촌장의 얼굴은 무지 쓰라려 보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술을 즐기는 일행들은 각자 한병씩 차지하고서는 서로 따라주어 남의 술을 맛보기도 하고 스스로 따라 자신의 술을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캬아~~, 그런데 공녀님?" 한창 술을 즐기던 마이터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예?" "그 뭐시냐... 아까 그 애송이들에게 시킨게 뭐요?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거."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이터를 보자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아아.. 기합 말이군요. 뭐, 기사 학교같은데도 있지 않나요?" 그러자 내 말을 듣고 있었는지 흄이나 자카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처음 봤습니다. 기사 학교에서 벌을 받아봤자 기본 동작을 몇번 하거나 운동장 돌기, 아니면 징계처분이 다거든요." "도대체 그런 건 어디에서 아셨습니까?" 자카르의 설명에 이어 흄까지 궁금증을 드러내었다. "아아... 있어요, 여러가지 기합이 발달된 데가... 후후후..." '어디긴 어디야, 당근 한국이지.' "꽤 좋아보인단 말야. 나도 내 제자들을 혼낼 때 한번 써먹어 볼까나? 공녀님, 혹시 다른 건 없소?" 마이터가 기합이 무척 마음에 드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물어오자 옆에 있던 죠슈아가 몸서리를 쳤다. "왜 없어요, 많죠. 음... 저거 말고도 땅에 두손을 대고 엎드려서 팔을 굽혔다 폈다 하는 것도 있고요, 한 발을 들게 하거나 땅에 손을 그냥 대지 말고 주먹을 쥐게 하는 것도 있죠." "음음, 그리고?" "그리고 쪼그려 앉은 채로 두 손은 머리 위에 올리거나 귀를 붙잡게 한 뒤에 그 상태로 운동장을 뛰게 하는 것도 있고요. 그건 토끼뜀이라고 하고 그 상태로 걷게 하는 것도 있어요. 그건 오리걸음이라고 하죠." "호오, 호오... 좋군. 좋았어. 나도 담에 써먹어 봐야지." 죠슈아가 나를 원망스런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싸악 무시해 버렸다. 자정이 다 되어가자 잔치는 절정에 다다랐다. 공터 중앙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피워졌고 한쪽에서는 이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밴드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그 음악에 맞추어 마을의 젊은 층을 주축으로 모닥불가를 뱅뱅 돌면서 빠른 왈츠를 추는 커플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 일행들 중 나이가 어린 사르하와 리틀 조로는 밤이 늦어질때 쯔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숙소로 쫓겨났고, 순진한 세이몬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권해주는 술을 사양하지 못하고 다 받아 마시다가 엄청 취해버려서 류미르의 부축을 받고 공터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마이터와 죠슈아, 스와카는 기분 좋을만큼 취한 채 마법에 대해 뜨거운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일행 중 그래도 술이 가장 센 편에 속하는 반담을 비롯한 흄, 애쉬와 자카르는 저희들 끼리 둘러앉아 한쪽에는 빈 술단지를, 다른 한 쪽에는 술이 가득 찬 술단지를 끼고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술을 별로 즐기지 않던 나는 류미르와 같이 술을 권하는 마을 사람들을 피해 상의 한쪽 구석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가 류미르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세이몬을 이끌고 자리를 뜨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러자 혼자 앉아 있는게 되게 신경이 쓰였는데 그렇다고 마이터를 비롯한 마법사들 틈에 끼어서 마법에 대해 토론을 하거나 술을 즐기는 일행 틈에 끼이려니 그것도 맘에 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나게 먹었기에 배도 왠만큼 불렀으니 모닥불의 열기에 달구어진 얼굴을 잠시 식힐 겸, 소화도 시킬 겸 바람쐬러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내가 빠진다고 해서 잔치가 파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버티고 앉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으으으으~~~!! 시원하다." 몬스터가 완전히 물러갔다 판단 되었기 때문인지 방어책 위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 위에 올라가서 계속 음식을 집어 먹느라 앉아 있어서 굳어진 몸을 풀려고 기지개를 쭉 펴자 가을 밤의 찬 바람이 숲에서 불어와 뜨거운 내 볼을 식혀 주었다. "우우... 하여튼 되게 신나게 먹었어. 예전에 내가 한국 학생이었을 때는 밤에 이렇게 먹으면 살 찔까봐 되게 고민했을텐데, 확실히 살 찔 걱정 없다는 건 되게 좋을 거 같군." 비록 약간 찌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탱탱한 모습을 하고 있는 보름달이 환하게 비춰지는 밤인데다 한 고비를 또 한번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이 충만한 상태에서 아무도 없는 방어책을 혼자 걷고 있자니 흥얼흥얼 노래가 흘러나왔다. "꼭두 각시 인형 피노키오 나는 네가 좋구나~~ 파란 머리 천사 오실 때에 나도 데려가주렴~~ 피아노 치고 미술도 하고 영어도 하고 바쁜데~~ 너는 어째서 놀기만 하니 말썽장이 피노키오야~~ 엄마 아빠 꿈속에 언제든 나타나 내 얘기좀 전해줄 수 없겠니~~ 갖고 싶은 것이랑, 놀고 싶은 것이랑~~ 모두 모두 할 수 있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된 건 정말 몇 백년 만이었다. 지금까지도 용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인데 한번 부르기 시작하자 끝까지 막힘 없이 흘러나왔다. 한국에 있을 때 중학교 때 체육대회 할때 응원가로 많이 부른 덕에 익힌 노래였는데 고 3때 힘들 때마다 입 속에서 흥얼흥얼 대던 노래이기도 했다. 드래곤이 되어서는 부를 일이 없어 아예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뚜렷이 기억나는 거 보니 나 도 무늬라도 기억력이 좋다는 드래곤인가보다. 오랜만에 부르는 노래라 그런지 한번 가지고는 성이 안 차서 다시 한번, 이번에는 쬐께 크게 불러제꼈다. 그랬더니 노래가 끝나자 마자 누군가가 박수를 치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짝, 짝, 짝 "당신이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몰랐는데요. 그런데 처음 듣는 언어에 곡조도 처음 듣는데 어디 노래인가요?" 싸움이 끝난 다음에 긴장을 풀러 놨더니 노래 부르는데 푹 빠졌다고 애쉬 녀석이 다가오는 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말해봤자 당신은 모르는 곳이예요." '당연하지. 네가 한국을 알겠냐? 뭘 알겠냐?' 애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숲에서 자꾸 바람이 흘러와 목덜미에서 가볍게 묶었을 뿐인 내 머리를 흩트려 놓아 머리를 묶은 리본에서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나와 목덜미와 뺨을 간질렀다. "아... 고무줄과 삔이 그립다." 마법이 아무리 발달했고 손재주가 뛰어난 드워프들이 있어도 이 곳에는 아직 고무줄과 삔이 활성화 되어 있지 못했다. 고무라는 자체가 없었고 단지 마법과 연금술에 의하여 고무 성질을 내는 물질이 있을 뿐인데 원래 마법과 연금술을 거치게 되면 가격은 껑충 뛰어 오르는 법이었기에 이런 물질을 단순히 머리를 묶기 위한 끈으로 만드는 시도나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게다가 드워프들이 그들 종족 고유의 능력으로 솜씨 좋은 삔을 만들어 내기는 해도 삔이란 그 자체가 한국에서는 흔한 것일지 몰라도 이 곳에서는 엄청 섬세한 세공이 필요한 가공품 으로 분류 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나 일반 평민들이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삔은 그래도 내가 있던 한국에서 보았던 것들 만큼의 수준은 되었지만 하나 하나가 가격이 꽤 높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다가 잘못 실수하여 망가트리기라도 하면 안돼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삔을 대량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수가 적었기 때문에 만들 땐 가격을 더욱 높이기 위해 보석으로 세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방울 고무줄이나 삔이 흔했던 곳에 있다가 이런 곳으로 오니 그런 자잘한 것이 너무나 그리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입 속으로 투둘투둘 대면서 머리를 묶은 리본을 풀자 머리가 생머리인 관계로 뒤로 차르르 흘러 내렸다. "에잉, 귀찮아. 차라리 잘라 버렸으면 좋겠는데..." 혼잣말로 투덜 댄건데 옆에 있던 애쉬가 들었는지 말을 건네왔다. "그렇게 귀찮다면 자르지 그러십니까?" 나는 바람에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면서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곳에 오기 전에는 자르고 다녔다구요. 여기서 아빠를 만나는 바람에 강제로 머리를 기르고 있는 거지... 아빠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귀찮게 하고 다니지도 않아." 예전에 세이몬과 류미르와 다닐 때도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다닌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나였다. 하긴 그때도 귀찮아서 머리를 항상 질끈 동여매고 다니긴 했지만... 내 투덜거리는 어조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다 들은 애쉬가 뭘 어떻게 받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볍게 쿡쿡 웃기 시작했다. "왜 웃는데요?" 내가 기분 나쁘다는 표시로 눈썹을 살짝 치켜뜨자 애쉬가 얼른 웃음을 멈추려 노력했지만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풋, 아, 아니... 실례했습니다. 평소 당신을 보면 독불장군 처럼 아무 것에도 억매이지 않게 행동하다가도 재상 각하 말씀에는 순종하더군요. 아버지가 무서운가요?" "무서우면 순종하나요? 나는 아빠를 좋아하니까 아빠 말을 존중해주고 들어주는 것 뿐이예요." 그러자 애쉬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귀찮은 걸 감수할 만큼?" "그만큼 좋아 한다는 거죠." 당연한 걸 물어보는 녀석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봐 주고는 대충 다 정리한 머리를 다 시 리본으로 묶으려고 셔츠 주머니에 넣어 놨던 리본을 꺼내 목덜미 쪽으로 가져가려는데 갑자기 애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리본을 들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에? 왜 그래요?" 그러자 애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리본을 든 내 손을 힘주어 강제로 손을 내리게 했다. 그리고는 진짜 어려운 일 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머리를 묶지 않고 있어줄 수는 없소?" "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의문사를 나타낸 뒤에 무지 놀라버렸다. 내 의문사를 들은 애쉬가, 그 애쉬 녀석이, 철면피로 이름이 드높고 무뚝뚝하고 무감각한 녀 석이 내 앞에서 수줍은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허걱... 이 녀석이 이러니까 이상해애~~!!' "나는 당신이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리는 모습이 좋소. 그리고..." 녀석은 그러면서 좀 더 용기가 생겼는지 나머지 다른 한 손으로 놀라서 얼어붙느라 아직까 지 머리카락을 거머쥐고 있는 손가락을 풀어 밑으로 내렸다. 덕분에 내 머리카락은 다시 풀어지고 말았다. 녀석은 그 모습에 심히 만족한 모습으로 싱긋 웃더니 내 손을 놓고 다시 손을 들어올려 내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렇게 하면 내가 만질수도 있고 말이오." 그러면서 정말 다정하고 부드럽게 나를 바라보는 애쉬의 눈길에 그제야 나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사실을 깨달았다. '이 녀석... 나 좋아하는거 아냐?' 물론 내가 애쉬가 다른 여자들을 대하는걸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 에.. 물론 사르하랑 애쉬 엄마 대하는 걸 보기는 했지만, 여기에 해당 하지는 않겠지... - 다른 여자에게도 이렇게 대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란 예리한 거다.... 라고 말하는 건 말이 안되겠지. 그 동안 아마도 내 일행들은 눈치를 어느정도 채고 있었는데 나만 못 챈거 같았으니까... '그랬군.. 그래서 사르하랑 리틀 조로가 그렇게 열을 올린거였군.' 하지만 사르하랑 리틀 조로가 열을 올린 건 애쉬가 꼭 나를 좋아해서 우리 둘을 이어주려고 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 나이때에는 본인들이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괜히 어울리는 -그럼 나랑 애쉬가 어울리는 건가? - 사람들을 짝지어 보는 성향이 있으니까. '에... 그렇다면... 얘가 날 좋아하는게 확실한 게 아니잖아? 음... 그렇지. 이래봬도 내가 연애 소설도 많이 읽었다구. 그런데 그 연애 소설을 토대로 애쉬의 행동을 분석해 볼때 나를 좋아한다고 결론을 내릴 만한 행동을..... 했었던가? 안 했던 거 같은데? 에.... 물론 키스를 한번 하긴 했지만 그땐 녀석도 흥분해서 얼결에 저지른 것 같고, 그동안 나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었는데... 으음... 그럼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여전히 내 머리를 만지작(?) 대는 애쉬를 쳐다보니 그가 부드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그 부드러운 눈길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 언젠가 저 것과 비슷한 눈길로 나를 보던 녀석이 있었지... 100년 전 아빠가 에스라 왕국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을 때 아빠 핏줄을 타고 난 녀석... 쥬르단이었던가... 날 자신의 동생으로 여기고 오빠 노릇 하려던 녀석...' 아마 지금은 죽었을 테지만 그때 그 만남이 인연이었는지 묘하게 그리움이 생겼다. 동면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한번 들려볼 걸 그랬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핏줄이 아직까지도 에스라 왕국에 남아 있을지도 궁금했다. 그렇게 내가 이런 저런 딴 생각에 빠져 있자 애쉬가 내 볼을 톡톡 건드렸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이 녀석이 전에는 존대를 꼬박꼬박 하더니 어느새인가 말을 약간 낮추고 있었다. 그리고 싱긋 웃는 이 얼굴이라니... 나는 그런 애쉬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레드포드 자작,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그러자 애쉬가 피식 웃더니 내 어조를 흉내 내어서 대꾸했다. "그게 무엇이오, 플레이저 자작?" "자작... 혹시..." "음?" "당신 나 좋아해요?" 순간적으로 애쉬 얼굴이 벙 찌더니 곧 이어 그 얼굴에 황당함과 놀라움, 그리고 쑥스러움과 즐거움등등의 여러가지 감정이 하나하나 떠오르다 사라지더니 마지막에는 뭔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곧 즐거움과 묘한 기대감이 담겼지만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 안돼오?"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애쉬는 잠시동안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더니 곳 이어 고개를 돌리고 쿡쿡 웃어댔다. "쿡쿡쿡, 보통 귀족가의 영애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긴 했지만..." 그가 웃는 것이 꼭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아 나는 기분이 좀 나빠졌다. "왜 웃는 거죠, 자작? 내 질문이 그렇게도 우스운 건가요?" "아, 이거 실례!!" 애쉬는 실례 했다면서도 계속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정말 처음 만났을 때 부터 계속 날 놀라게 하는군. 언제까지 당신에게 놀랄지 기대가 될 지경이라오." "내가 당신을 즐겁게 했다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좋은 일이군요. 하지만 당신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데요?" 녀석이 대답은 안하고 자꾸 딴 이야기만 하자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는 내가 차갑게 노려보자 애쉬는 피식 웃더니 난처한 얼굴로 괜히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험, 그거 참... 그런 걸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지 않소?" "왜 곤란한 가요? 간단하게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면 되는 건데요." 물론 나도 이게 쬐께 억지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애쉬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조금 억지로 밀어 붙이는 게 좋을 거라 판단했기에 그냥 철판 깔고 있는 거였다. 애쉬 녀석은 하늘을 쳐다보며 뜸을 한참 들이더니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나를 돌아 본 녀석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상황에서도 항상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녀석의 눈이 흔들리자 약간 놀라워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애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요.... 나는 아시리안 플레이저,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에?"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듣고 싶습니다만?" 나는 왠지 머리 속이 멍해져서는 애쉬를 빤히 쳐다보았다. 꽤 오랫동안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애쉬는 나에게서 눈길을 돌리지도 않고 마주본 채 변 함없이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어서 나는 그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때 부터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감정이라... 분명히 미워하는 건 확실해. 무척 얄밉거든.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될까나?' 힐끔 애쉬를 바라보니 여전히 묵묵히 선 채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면 되는 거죠?" 그러자 애쉬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당신이 물어본 거니까 사실대로 대답해야 겠죠?" 다시 한번 애쉬의 고개가 끄덕여 졌다. "내가 뭐라고 하던 화 안 낼거죠? 혹시 속으로 앙심을 품고 있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복수를 한다던가... 아니면..." 그러자 잔뜩 긴장해서 굳어 있던 애쉬의 얼굴이 스르르 풀리더니 녀석이 손을 들어 내 말을 중간에서 막더니 싱긋 웃었다. "아아,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뭐라고 말 할지 뻔하군요. 무지 얄미운 녀석 아닙니까?" 다 안다는 듯한 애쉬의 표정이 너무나도 못 마땅했던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덧붙여 나 보다도 못난 주제에 잘난 체 하는 녀석이요." "파하하하..." 녀석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의미가 불분명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그런 애쉬의 모습을 나도 이해하지 못할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애쉬가 곧 웃음은 그쳤지만 완전히 가시지 않은 웃음기가 감도는 얼굴로 몸을 바로 세웠다. "자작의 생각 잘 알았습니다. 자, 그럼 전 이만 돌아가야 겠군요. 잠시 자리를 떠난 것이라서 술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밤 공기가 차니 자작도 산책은 짧게 하시는게 좋을 것 같군요." 아까의 진지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평소 나를 놀려먹을 때의 짓궃은 웃음이 떠 오른 얼굴 이었지만 왠지 그의 눈은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해 보죠." 나의 냉정한 대답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번 싱긋 웃어보더니 별 말 없이 고 개만 살짝 까딱해 보이고 뒤로 돌아 사라져 갔다. 애쉬의 모습이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때 즈음, 숲을 향하고 있는 방어책 밑에서 부터 무엇인가가 쑥 올라왔다. "왁!!" 너무 놀란 나머지 본능적으로 그 무언가를 향해 검을 빼 내어 휘두르려는 찰나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앗!! 이봐, 아린 나야, 나라고!!" 밑에서 부터 쑥 올라온 물체는 다름아닌 류미르였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류미르? 놀랐잖아?" 놀라움으로 인해 신나게 펌푸질 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나는 거의 다 뽑아냈던 검을 다시 검집으로 밀어넣었다. 바람의 정령 힘을 의지하여 허공에 떠 있던 류미르는 천천히 내 앞으로 내려와서는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미안 미안... 의도적인 건 아니었어." "의도적이었으면 넌 벌써 반쯤 죽었어." 그런 류미르를 향해 눈을 매섭게 치켜뜨자 류미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미안해. 네가 놀랄줄은 몰랐어. 물론 내가 기척을 숨기고 있기는 했지만 말야..." "야, 갑자기 불쑥 튀어 나오는데 안 놀라고 배기냐? 도대체가 말야, 거기서 뭐 하고 있었던..." 막 화를 내며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말을 딱 멈추고는 류미르를 다시 찐(?)하게 노려 보았다. "너.... 설마..." "아하하하..." 괜히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공허한 웃음소리를 내는 류미르를 보니 의심을 확증 시켜주는 것만 같아 나는 녀석에게 달려들어 목을 부여 잡고 흔들어 댔다. "이노무 시키!! 너 죽을래? 엿들었지? 앙? 엿들었구만? 어디까지 들은 거얏?" "켁, 아린.. 컥,컥. 헉, 제발 이 것좀... 컥컥... 놓고... 켁 아구구, 나 죽는다 켁켁!!" 류미르는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내가 정말 죽일 것 처럼 흔들어 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채 과장된 음성으로 죽는 소리를 했다. 그런 류미르가 얄미워져서 나는 세게 몇번 더 흔들어주고는 놓아줬다. 류미르는 정말 죽을 뻔 했다는 양 손으로 목을 부여잡으면서 연신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아린 켁켁, 넘 심했어. 콜록, 정말 날 죽이려고 한 거야?" "시끄럿!! 엄살 피지 말고 익실 직고 해. 도대체 언제 여기 왔으며 어디까지 옅들은 거야?" 내가 주먹까지 쥐어 부르르 떨어 보이며 류미르를 을러댔지만 류미르는 오히려 배시시 웃고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헤에~, 천하의 아린도 사랑 고백 받은 장면을 들키니까 부끄러워 하는 거야?" '역시...' 류미르의 말투로 보아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나는 왠지 기분이 찹착해져버렸다. "다 봤어?" 내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모드로 바뀌어버리자 류미르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에이, 왜 그래? 사랑 고백을 받았으면 기분이 좋아야지, 왜 그렇게 축 쳐졌어?" "사랑 고백 받았다고 기분이 좋냐? 난 지금 심란하다고.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그래?" 그제야 류미르가 아차 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류미르는 딱 절반의 이유만 알고 있는 까닭에 나는 더욱 더 심란했다. 류미르에게 내가 '파멸 되어가는 존재'를 인도할 '인도자'란 이야기는 했지만 엄마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남긴 흔적이 애쉬란 사실은 말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빠가 별로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기는 했지만, 내가 예전에 인간이었던 터라 애쉬를 아예 남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었다. 아마 그래서 예전에 쥬르단 - 100년 전 에스라 왕국에서 만난 아빠의 인간 아들 - 에게 시샘하기도 하고 미묘한 정을 느끼는 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 녀석 생각보다 빨리 고백 했군. 난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류미르가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함인지 명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 알고 있었냐?" 내가 놀란 어조로 류미르를 보자 류미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어제꼈다. "푸하하하, 그럼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아마 세이몬하고 너 빼고는 일행들 모두 알고 있었을 걸?" "웃기지 마. 나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고!!" 류미르가 너무 잘난 체 하는 거 같아 쏘아주고 싶어서 내뱉았지만 류미르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헐헐헐, 눈치 챈게 아니라 단지 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걸? 내가 너를 모르냐? 넌 누군 가가 너를 좋아해서 쫓아다니면 결코 그냥 놔둘 성격이 아니잖아." "쳇!!" 류미르의 말을 반박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팩 돌리자 류미르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웃었다. "캬캬캬, 넘 걱정하지 마. 사랑 하는 건 남들이 다 알아도 당사자는 모른다잖아." "시끄러." 내가 정말 화가나서 류미르를 째려보자 그제야 류미르가 장난기를 지우고 머쓱하게 미소를 띄웠다. "에... 화 났어?" "됐어. 그만 해." 내가 그만 가자는 뜻으로 몸을 돌리고 걷기 시작하자 류미르가 바로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할 거야?" "뭘?" "애쉬 말야. 너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던데..." 류미르가 진지하게 물어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내 사정 너도 알잖아. 거절 해야지." "그런데 왜 아까 딱 부러지게 거절 안 했냐? 전에는 나에게 엘리사 - 류미르를 쫓아 다니는 금발 머리의 엘프 여자애 - 같은 애 에게는 딱 부러지게 거절하라고 말했으면서..." 의아하다는 듯이, 그러면서 엘리사를 딱 집어 강조하는 거 보니까 '너도 당하니까 어쩔 줄 모르겠지?' 라는 듯한 장난기 어린 질문에 나는 약간 망설이면서 대꾸했다. "글쎄.... 뭐, 그 녀석이 나에게 지금 당장 자신의 맘을 받아 달라고 한 게 아닌데다가... 그, 뭐시냐.... 그 녀석 성격으로 보아 네가 말한 그 엘리사 처럼 나에게 매달리지도 않을테니 까.... 음... 그래서 지금은 그냥 잠시 두고보려고." "그으래? 헤에... 너 그 녀석 조금이나마 맘에 있나보다? 그냥 두고 본다는 말이 나오는 거 보니..." 호기심이 가득 담긴 질문에 어찌 답해야 할지 모른 나는 회피할 생각으로 간단하게 대꾸했다. "몰라." 그런데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미르는 계속 물어왔다. "혹시... 아린, 너... 설마이겠지만 말야... 그 녀석에게 상처주는 게 싫어서 미적미적 대는 건 아니겠지?" "몰라. 하지만... 음... 애쉬에게 남겨질 상처 걱정 보다는 뭐랄까... 이런 상황을 그냥 나두고 싶기도 해. 나도 남들처럼 연애란걸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그러자 뒤에서 걷고 있던 류미르의 것이 분명한 놀라서 헛바람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걱, 아, 아린... 너 그렇다면?" "뭐가?" 내 말에 류미르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내가 뭘 잘 못 말했는지 생각하면서 류미르를 돌아보았다. "내가 이상한 말 했어?" 류미르는 놀라움을 가득 담은 얼굴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네 말을 생각해 보면, 너 가능하다면 애쉬랑 사귈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안 그래?" 나는 류미르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뭐.... 가능하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연애까지는 못가지 않을 까 싶어. 하지만 아 까도 말했지만 나도 연애라는 거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그러니까 그냥 이 상황을 즐겨보 고 싶다는 거지." '나도 한때는 꿈 많은 소녀였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자 류미르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 졌다. "그거 별로 안 좋을 거 같은데?" "응? 왜?" 다시 나의 의아하다는 눈빛을 받은 류미르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말야... 애쉬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야. 아린 네가 그냥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다면 애쉬는 분명히 희망을 가지고 더 적극적으로 네 옆에 있으려고 할텐데... 아린 넌 어차피 나중에 가서는 그의 감정을 거절할 거 아냐? 그걸 알면서도 그냥 그를 지켜보는, 아니 아린 네 말대로 애쉬의 감정을 즐기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조리에 딱딱 맞고 진실성이 담긴 조용한 류미르의 음성은 왠지 내 가슴에 와서 콕콕 박혔다. "아... 그럴 수도 있는거네... 그렇군. 그건 생각 못했어. 그럼 적당한 기회를 봐서 딱 잘라 거절해야 겠군." 그러자 류미르가 조용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잘 생각 했어." "그런데 말야..." 하지만 이어지는 나의 말에 류미르는 미소를 잃어버렸다. "내가 거절하는 명분이 연애 할 상황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 하고 내가 안 좋아한다는 거 뿐인데, 그걸로도 포기 안 하면 어쩌지? 애쉬 녀석이야 내가 사람인 줄 아니까 '파멸되어 가는 존재'만 처리하면 상황은 바뀔거라고 생각할 테고 내 감정이야 자기 노력으로 바꾸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당혹감에 물들어 내 말을 듣고 있던 류미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곧 한숨 소리와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휴~, 아린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본 애쉬의 성격으로는 네가 딱 잘라 거절해도 평생 널 가슴에 품고 살 것 같아 보이던데...." "그러냐? 그런데 류미르, 네가 왜 그렇게 애쉬 일에 가슴 아파 해?" 애쉬 보다도 애쉬를 걱정하는 류미르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내가 묻자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냥... 애쉬가 가여워서." 뭐, 평소에도 정의를 부르짓는 류미르였으므로 이번에도 그의 정의감에 불타는 마음 - 과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 때문이라고 생각 한 나는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갔다. "어쩔 수 없는 거지. 감정이란 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나도 그냥 두고 싶지는 않으니까 혹시라도 이번 일을 끝낼 때 까지 같이 있게 된다면 그때 가서 다시 한번 딱 잘라 거절해야겠어." 다음 날, 어른이라는 이유로 잔치판에서 밤을 지나 새벽까지 흥청 망청 놀던 일행들은 정오가 될 때까지 일어나질 못했고, 마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평소 아침대로 일어난 꼬맹이 파들(리틀 조로, 사르하) 과 나, 류미르는 아침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알아서 전날 잔치를 치루고 남은 음식들을 챙겨 먹어야만 했었다. 사르하가 아직 법적으로 성인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 이 나라의 법적 성인은 17세 부터임 - 만약 한살만 더 많았었더라면 그 녀석 성격으로 잔치에 끝까지 끼었을 테고 - 이 곳에서는 신관이 술이나 고기를 먹는 건 금지하지 않고 있었다. - 그러면 정오에 퉁퉁 붓고 부시시한 얼굴로 일어나는 일행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지금처럼 말짱한 정신으로 일행에게 신성력을 부어주지 못했을 거고, 그러면 나는 아마도 오후 늦게나 다음 날에 수도로 돌아갈 때 까지 할일 없이 빈둥빈둥 거리고 있을 뻔 했다. '아냐, 어쩌면 마을 여인들의 일을 돕고 있었을지도 몰라. 사르하가 늦게 태어난게 천만 다행이군.' 나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제일 마지막으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난 마이터에게 신성력을 부어주고 있는 사르하를 바라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았다. 그리고 나서 한시간 뒤 우리는 마법 결계 안에 서서 촌장을 위시한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잘 가시오. 뭐,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함께 싸운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헤어진다니까 꽤나 섭섭하구만..." 촌장이 그 얼굴에 전혀 안 어울리는 순수한 미소를 띄며 말하자 애쉬도 같은 미소를 돌려주며 손을 내밀었다. "협조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촌장은 기꺼이 애쉬 손을 잡았고 둘은 한동안 손을 맞잡고 있다가 떨어졌다. "안녕히 가세요~~" "잘 가요~~" 마법사들이 마력에 의하여 결계가 뿜어내는 새하얀 빛 사이로 마을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대는 것이 보였지만 그것은 결계의 빛이 더욱 더 강해지자 곧 사라져 버렸고, 빛이 사라진 뒤 보이는 건 수도에 있는 아빠 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아빠가 여러 시종들을 거느리고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들 오게나. 모두들 수고했네." 정말 위엄 있고 멋들어지게 인사하는 아빠의 모습에 일행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빠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계속 어리둥절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듯 곧 애쉬가 결계 밖으로 나가 아빠 앞에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상 각하. 그런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질문에 아빠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미소만 싱긋 웃어보이고 말을 그대로 돌려버렸다. "자네 가문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서 쉬시게나. 우리 집에 머물도록 권하고 싶지만 어디 집만 하겠는가? 자, 그럼 여기서 이만 헤어지도록 하고, 나중에 궁에서 보세나. 마이터, 자네도 수고 했네. 이만 가보게." 아빠는 그렇게 너무나 간단하게 애쉬를 비롯한 일행들을 보내 버리고 나를 잡아 끌었다. 덕분에 일행들은 나에게 인사 조차 못하고 쫓겨나듯 마차를 타고 떠났으며 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자신의 짐을 챙겨 숙소로 가야만 했다. "에?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평소의 아빠라면 위엄있게 인사를 하기는 커녕 일행은 거들 떠 보지도 않고 내 이름을 정답게 외쳐 부르며 나에게 달려오셨을 텐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빠답지 않게 오랜만에 본 딸내미 앞에서 위엄 있는 재상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빠가 시종들을 물리치고 나를 구석으로 이끌고 들어가자 나는 더욱 더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저택이 아빠것 임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마치 남의 집에 온 양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 며, 아무 방이나 들어가면 될 거 가지고 그러지도 못한 채 근처의 그늘로 나를 데려갔던 것이다. "아린아, 너에게 두 가지 소식이 있어. 하나는 좋은 거고 하나는 황당한 건데, 어떤거 부터 들을래?" 아빠는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계속 주위를 경계하면서 빠르게 말했다. 그런 아빠의 모습에 의아함은 계속 커져만 갔지만 일단 아빠가 다급해 보였으므로 그 질문에만 응했다. "황당한 거 부터 듣죠." "국왕이 너보고 그 빨강 머리랑 약혼하랜다. 왕명이랍시고 내려왔더군." 한 나라의 재상이라는 사람이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 내린 명령을 마치 옆집에 사는 멍멍이가 와서 짓었다고 말하는 것 처럼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아빠의 모습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이어지는 아빠의 말에 나는 엄청 놀랐다. "그리고 좋은 소식은, 네 할아버지가 찾아 오셨다." "에?" 생각지도 못한 아빠 말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자 아빠는 다급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아빠의 행동에 나는 얼결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잠시 후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어요. "아니, 할아버지가 오신 거랑 아빠가 이러는 거랑 무슨 상관 인데요?" 그러자 아빠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아린아, 넌 내 사정을 제일 잘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네 할아버지는 내가 네 아빠란 걸 모르잖아." "아~참." 그제야 기억나는 사실이었다. 그 동안 할아버지는 전혀 보지 못한 채 아빠와 지내느라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무척 심각하고 난처한 얼굴이었다. " '파멸되어 가는 존재'의 일로 협조를 위해 너를 임시로 내 딸로 이 곳에 소개했다고 말씀 드렸어. 그런데 내가 전에... 에... 그러니까 쬐께... 이름을 날렸.. 험험, 어쨌든 그랬던 관계로 내가 너에게 음... 저기 그러니까.... 해꼬지라도 하지 않았는지 걱정하시더구나."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챈 나는 피식 웃으면서 약간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 폈다. "예, 예. 무슨 말인지 잘 알았으니까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한테 겁 먹고 있는 아빠가 불쌍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걸 알아챘는지 몰라도 아빠는 되게 미안한 얼굴이었다. "미안하구나.... 너한테 이런 일이 생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됐어요, 됐어. 그건 나중에 말하고요,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세요? 뵈러 갈래요." 아빠 일은 아빠 일이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였으므로 나는 곧 기쁜 얼굴로 들떠서 아빠에게 묻자 아빠는 억지로 짓는 듯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아아, 그래... 지금 2층 오른 쪽 손님 침실에 계실거다." "알았어요." 아빠에게서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기 저기에서 시녀나 시종들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걸 무시하고 그 빠른 기세를 몰아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오르고 복도를 두다다다 내달려 할아버지가 묵고 계시다는 방 문을 벌컥 열었다. "할아버지이이이~~~!!" 찬란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를 등지고 문 앞에 서서 이미 내가 온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할 아버지는 인자한 웃음을 머금으며 두 팔을 벌렸다. "아린아아아아~~~~" 폴짝 뛰어서 할아버지의 품으로 그대로 파고 들은 나는 할아버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할아버지이이이, 보고 싶었어요." "에그그그, 내 새끼... 그래, 그 동안 힘들었지? 어디보자, 얼굴이 많이 야위었구나..." 할아버지는 나를 한번 꼭 안더니 팔 힘을 풀어 내 몸을 자신의 몸에서 약간 떨긴 뒤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헤헤헤, 아뇨. 전 괜찮아요. 다행이도 여러 군데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그래, 그래, 그래도 고생했다." 인자한 눈빛을 철철 흘려내며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는 문득 무엇을 느낀 양 고개를 들 어 내 뒤를 바라보더니 의아한 의문을 토해냈다. "엥? 자넨 왜 거기 그러고 서 있나?" 할아버지의 질문이 나를 향한 게 아니란 걸 느낀 내가 뒤를 돌아보자 문가에 어색한 미소를 띄운 채 이 쪽을 보고 있는 아빠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의 질문에 실 없이 하하 웃어보인 아빠는 방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오랜만에 감격스런 상봉을 하시는데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멋들어진 말을 하는 아빠의 눈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채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쯧쯧쯧.... 지은 죄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빠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나는 아빠에 대한 약간의 안쓰러움을 지닌 채 속으로만 쓴 웃음을 지었을 뿐이지만 할아버지는 아빠의 눈빛을 나와는 다르게 해석한 듯 금방 살벌한 눈길로 아빠를 쏘아 보았다.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아빠는 얼른 영문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나 그 표정이 할아버지에겐 안 통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아빠를 노려보면서 경고성 어린 말을 내뱉았다. "네 녀석에 대한 소문을 내가 모를 줄 아나? 드래곤족의 바람둥이로 네 혈족을 제외한 모든 여자 드래곤에게 찝적거린 녀석이라지? 하지만 지금은 안 그러길 바라네." 아빠는 이제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 처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아무리 제가 바람둥이라지만 아직 알을 못 낳는- 드래곤은 1000살이 되어야 알을 낳을 수 있었다.- 어린 드래곤에게 대쉬를 하겠습니까?" "뭐, 이번에 아린을 도왔다고 하는데다 아린에게 별 탈은 없어 보이니 믿어보기로 하지." 아빠가 내 놓은 변명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는지 할아버지는 아직까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물러나셨다. 뭐, 내 생각에는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나에게 마수(?)를 뻐치지 못할거란 계산이 깔려 있는 듯 했지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칼 시스파슈타인님. 자, 이러고 있지 말고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을 드시면서 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아리이이인.... 하.하.하... 시스파슈타인님, 제가 애칭을 부르게 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발 그 살벌한 눈빛만은...." 아빠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하여 아빠 특기인 그 매끄러운 달변을 내놓다가 내 애칭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순간 할아버지의 눈빛이 사나워 지는바람에 아빠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빠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영 기분이 안 좋은 표정이었다. "물론 알지. 하지만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건 맘에 안 들어. 자네가 아린 애.인 이거나 애.비 도 아닌데 말야..." 아빠는 '애비'란 말에 찔끔 했으나 긍정도 못하고 그렇다고 부정도 못한 채 허망한 웃음만 흘렸다. "하하하, 제 처지를 이해해 주시지요. 아시리안양은 지금 제 딸로 되어있는데다 전 지금 유희중이니까요." 할아버지는 기꺼이 수긍하셨다. "암, 이해하고 말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가만 있는 것 아닌가? 만약 상황만 안 이랬다면 자넨 반은 죽었어." 할아버지의 살벌한 말에 아빠는 그냥 어색한 웃음만 짓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아빠가 평소 그 여유로움을 다 잃어버린 채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 매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나는 두 분 중간에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슬슬 배 고프기 시작했어요. 그럼 전 옷을 갈아입고 올테니까 두 분 식당에서 뵙기로 하죠." 할아버지는 얼른 얼굴에서 살벌한 표정을 지우고는 나를 향해 환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오냐. 내 생각만 했구나.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예." 할아버지에게 마주 웃어주며 문을 나서는데 아빠가 내 뒤를 따라 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곧바로 할아버지의 싸늘한 한 마디가 날아왔다. "자넨 어딜 가는가?" 아빠의 몸은 그 즉시 굳어버렸다. "예?" "어딜 가느냐고?" "에, 저.. 그게..." 아빠는 또 다시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어딜 가는데 나에게 양해도 안 구하고 나가는데? 설마하니 아린에게 방을 안내한다든지 아니면 갈아입을 옷을 골라준다던지 머릴 손질해준다는 이유는 아니겠지?" "아하하하... 물론 아닙니다. 저는 단지 저녁 먹기 전에 서재에 잠시 들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아, 그래? 그럼 어서 가보게나." 어느새 문 밖으로 나온 할아버지가 내 손목을 슬쩍 잡은 채로 아빠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한 말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에 아빠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재 쪽으로 횡 하니 가버렸다. '쯧쯧쯧... 불쌍한 아빠.' "할아버지, 너무 살벌하게 대하시는 거 아니에요?" 불쌍한 아빠를 조금이나마 돕고자 슬며시 운을 떼었지만 할아버지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린아, 남자는 다 늑대란다. 특히 저 놈은 늑대 왕이라고 할 만한 놈이지. 조심, 조심, 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내가 이렇게 해야 저 녀석이 너에게 흑심 품을 생각을 애시당초 하지 못할 게 아니냐? 아냐, 그 정도로는 맘을 놓을 수 없지... 암, 암." "에이, 지금 껏 잘 대해주셨는데 그러면 너무 미안하잖아요. 게다가 난 아직 600살 밖에 안 됐구요." "어허, 방심은 금물이야. 게다가 우리에게 400년은 순간이란 걸 모르냐? 혹시나 저 녀석이 400년 후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쩔려고?" 할아버지의 단호한 모습에 나는 아빠가 할아버지께 거의 죽을지언정 사실을 밝히는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애쉬는 그리 심하게 몸을 혹사시킨 건 없었지만, 평소 그라면 적당히 마시고 빠져나왔을 술자리에 새벽이 다 될때 까지 붙잡혀서 엄청 마셔댄 영향인지 아직까지 머리가 어질어질 한 듯해 저녁을 먹고 일찍 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레드포드 공작은 그런 그의 바램을 무시해버리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 그를 조용히 서재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자신을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서재 안을 서성이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애쉬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공작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 앉거라."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폭신한 소파에 엉덩이만 걸친 채 부동자세로 앉아 공작이 입을 열길 기다렸지만 왠 일인지 공작은 입맛만 다신 채 도통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심각한 표정과 함께 국가 안위에 대한 중대사안을 들을 줄 알았던 애쉬는 내심 의아해져서는 먼저 입을 열었다. "중요한 말씀이 있으신게 아닙니까?" "응? 아아,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좀 당황스럽기도 하구나." 딴 생각에 빠져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 처럼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공작의 모습에 애쉬는 공적인 일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자신의 아버지는 뼛속까지 기사로 공적인 일로 대화를 할 때는 아무리 자신의 집안 서재라고 해도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고 항상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적인 일이라고 판단한 애쉬는 긴장을 풀고 자세를 풀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았지만 의아함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근래 집안에 특별한 일, 하다못해 파티라도 열 일은 없었던 것이다. 뭐, '그 살인마' 덕분에 귀족들 사이에서 파티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자신이 편하게 소파에 기대 앉았음에도 아버지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분명히 사적인 일이었고, 그게 무슨 일인지 애쉬는 점점 더 궁금증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집안일에 관한 의논을 할 때에는 항상 어머니도 같이 앉아서 의논을 했었는데 지금 보니 아버지가 일부러 어머니는 부르지 않은 듯 했다. 자신과 아버지끼리 의논할 사적인 일이라니... "험..." 공작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드디어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하려고 하는 신호라는 것을 알아 챈 애쉬는 아버지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허... 참... 나도 솔직히 당황스럽구나. 이걸 어찌 해석해야 할지..." 다시 한번 입맛을 다신 공작은 의아스러움과 궁금증을 담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허탈한 듯한 웃음을 흘리고는 소파에 등을 푹 파묻었다. "어제 우리집에 왕명이 전달되었다." "왕명이요?" 왕명이란 말에 반사적으로 다시 부동자세를 취하며 앉는 애쉬에게 공작은 헛 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왕명이긴 왕명이지... 하지만 뭐라 해야하나... 정식으로 전달된 게 아니라 나에게만 조용히 전달되었지." "왕명이요?" 애쉬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금 공작과 애쉬는 왕성에서 지책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공작과 애쉬가 머물고 있는 저택은 왕성이 있는 수도였고 그렇다면 국왕이 왕명을 내리려면 굳이 문서로 작성해서 사람을 보낼 필요 없이 공작이 왕성에 있을 때, 아니면 공작을 성으로 불러서 내리면 될 거였다. 공작이 대역죄를 지어 처벌하려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귀찮게 문서로, 그것도 정식 절차를 거쳐 - 보통 왕명은 왕명을 받는 귀족 지위와 비슷한 문관이 왕성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가지고 와서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그들 말로는 간략한 예식을 거쳐 받게 된다 - 받은 것도 아니고 조용히 전달되었다니... "뭐라고 쓰여 있었습니까?" 공작은 궁금증을 얼굴에 역력히 드러내며 - 물론 애쉬의 평소 무표정에서 눈썹만 약간 치켜뜬 거지만... - 자신을 주시하는 아들을 힐끔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왕자 전하의 약혼식이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그때 너와 플레이저 자작의 약혼을 친히 공표해 주시겠다고 하더군." 애쉬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무지 놀랐다는 증거였다. 공작은 애쉬가 놀랄 줄 짐작했다는 얼굴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괜히 이마를 문지르며 아들 시선을 피했다. 애쉬로써는 놀랄만도 했다. 그가 누구인가? 왕자, 즉 브랜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근위대 대장이었다. 비록 지금 왕명으로 인해 딴 일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브랜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는 건 여전했다. 그런데 잠시 수도를 비운 사이 갑자기 약혼 이라니? 보통 왕족, 하다못해 귀족들 사이라도 약혼을 하기 몇달 전부터 소문이 돌기 시작해서 약혼이 발표되면 사람들이 '이제야 하는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왕자라는 사람의 약혼이 친한 친구 조차 모르고 있다가 갑작스레 한다고 하는 거였다. 그런데 애쉬는 그것에 놀라 연연해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왕자의 약혼 뒤에 자신의 약혼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제... 약혼을요?" 당황감을 감추지 못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왕자 전하의 약혼일이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서두르시는 듯 해. 그 안에 빨리 해결하라는 거지." 뭘 해결하라는 건지는 말 안했지만 애쉬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빨리 플레이저 공작가와 이야기를 하라는 거겠지. 애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당황감에 소파 모서리를 잡은 그의 손가락이 얼마나 강한 압력을 받고 있는지 피가 돌지 못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놀라운... 소식이군요." 잠시 후에 애쉬가 힙겹게 내뱉았다. 소파 모서리를 꽉 틀어잡은 손이 힘들다고 신호를 보냈는지 천천히 소파에서 손을 떼더니 쉽게 피가 통하도록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머리 따로 손 따로 노는 것처럼 그걸 멍하게 바라보던 애쉬가 문득 생각 났다는 듯이 물었다. "플레이저 공작가도 알고 있습니까?" "그쪽에 서찰을 보냈다는 언급은 없지만, 아마 보냈으리라 예상된다." 애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는 걸 본 공작은 슬그머니 일어나서 서재 한쪽에 마련 되어 있는, 여러가지 고급 술이 예쁜 크리스탈 병에 담겨 놓여있는 일명 '바' 로 다가가 병 하나를 골라 잡았다. "한 잔 하겠느냐?" 고개만 뒤로 돌려 힐끔 아들을 바라보며 묻자 애쉬는 아버지가 무슨 술을 골랐는지 쳐다보 지도 않고 고개만 약간 끄덕였다. 레드포드 공작은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즐기는 버릇이 있어서 그의 서재에는 국내 여러 지방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술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유명한,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술까지 모아 놓았다. 덕분에 지금은 술을 즐기는 것이 취미인지 술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인지 아리송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 있거나 아니면 심각한 일이 있을 때 두 부자가 그때 그때 공작 내키는 대로 여러가지 술을 조금씩 입에 대곤 했다. 오늘 공작이 선택한 술은 레스틴 왕국에서 생산된다는 연한 호박색 빛깔의 술이었다. 크리스탈로 된 병마개를 열자 옅은 약초 비슷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레스틴 왕국에서 생산되는 술은 독하지 않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게 많았다. 한 손에는 자신의 것과 아들의 잔을 잡고 다른 한 손에 술병을 잡은 공작이 다시 애쉬의 맞은편에 앉자 애쉬의 입이 열렸다. "제가 이런 왕명을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습니다." 공작은 애쉬의 앞에 잔을 내 놓고 그 잔에 술을 따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왕자 전하의 몇 안되는... 아니 거의 유일한 친구인 널 왕자 전하만큼 아껴주셨지. 네가 충격 받은 것이 무리는 아니다." 공작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더니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들어 애쉬 앞에 슬쩍 내밀었고 그걸 본 애쉬도 술잔을 잡아 올려 공작의 술잔에 살짝 부딪혔다. "하지만 너무 폐하를 원망하진 말거라. 오죽하셨으면 그런 왕명을 내리셨겠느냐." 한탄조로 중얼거리듯 말하는 공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애쉬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아버지를 바라보자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수도를 떠났을 때 어의가 나를 조용히 찾아왔었다. 폐하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하더구나. 원래 몸이 약하신 분인데다, 지금까지 계속 신관의 신성력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었던 것이 한계에 다다른 듯 하다." 애쉬는 또 한번의 놀라움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왕자 전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니, 모르고 계신다. 왕자 전하께서 알게 될 정도면 왕녀 또한 알게 될 걸 걱정하신 폐하께서 입들을 단속 하셨지. 알고 있는 이라고는 어의와 신전의 신관장과 나 뿐이다." "왕자 전하께서 왕 위를 이으실 것이 확실해져야 밝히실 생각이시군요." "그래,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힘들지. 더욱이 왕자 전하께서 아직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계시니까..." "그래서 폐하께선 마지막 수단으로 왕자 전하의 약혼과 제 약혼을 생각하신 거군요. 아마도 왕자 전하의 약혼녀는 귀족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집안의 영애겠죠? 그리고 저와 플레이저 자작의 약혼으로 인해 중립을 지키고 있는 귀족들을 왕자파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이구요." 지금 왕자와 왕녀 사이의 왕좌에 대한 신경전이 팽배하다는 걸 모르는 애쉬가 아니었지만, 왕좌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으면서 국왕의 강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는 왕자와, 원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 신경전 중심에 서게 될 자신을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네 추리는 정확하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너와 플레이저 자작의 약혼을 갑작스레 발표하려고 한 거지. 왕녀파에서 우왕좌왕 하게끔 말야." "멋진 계획이군요. 폐하의 건강 상태를 모르는 왕녀파 쪽에서는 계속 여유를 가지고 있을테니까요." 말로는 멋지다고 말하지만, 별로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는 아들을 바라보는 공작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솔직히 공작은 브랜 왕자의 친부, 즉 현 국왕의 동생의 절친한 친구로써 브랜이 왕좌 다툼에 휘말리게 되자 그를 지키려는 의도로써 왕자파 쪽에 가담한 것이었다. 그는 이왕 이렇게 왕좌를 가지고 싸우게 된 것 우유부단하긴 하지만 아랫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와 그렇게 뛰어난 건 아니어도 보통 보다 조금 위의 현명함을 가진 브랜이 왕이 되어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누이와의 정을 그리워하고, 자신을 강요하는 국왕을 부담스러워 하는 왕자를 보면서 자신이 왕자를 위해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었던 공작은 애쉬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응? 뭐라고 했냐?" 대화 중에 딴 생각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는 공작이었기에 애쉬는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면서 입을 열었다. "폐하의 계획에 생각치 못한 변수가 있으면 어쩌시겠습니까?" "변수? 네가 그렇게 말하는걸 보니, 변수가 될 만한 걸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느라 멍한 시선을 지우지 못했던 공작은 애쉬의 말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폐하의 계획에는 한가지 꼭 필요한 기본 설정이 있습니다. 바로 왕명을 전해 듣는 저희 가문과 플레이저 가문이 절대 복종 하리란 것 말입니다." 그러자 공작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게 아니냐? 이 나라의 귀족이라면 왕명을 받드는 게 당연하지." 애쉬는 공작의 황당 플러스, 실망의 눈빛에도 개의치 않고 꿎꿎이 말을 이었다. "플레이저 자작은 정확히 말하면 이 나라의 귀족이 아니죠. 그녀의 어머니도 다른 나라 사람이고, 그녀도 몇달 전까지만 헤도 딴 나라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녀가 이 곳으로 온건 단지 재상 각하 때문이죠. 그러한 그녀가 원하지 않는 왕명을 거절하리라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공작은 애쉬의 말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 해도 이 나라의 재상인 아버지 때문에라도 그녀는 왕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애쉬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플레이저 자작이 어떻게 자작의 작위를 받았는지... 그녀는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살인마' 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그녀가 왕명에 불복종 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재상 또한 언제 어느때고 폐하께 직언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끔찍히 아끼고 있죠. 그러니 왕명을 거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작은 뼛속까지 기사였던 사람, 해서 그는 왕명, 아니 주군의 명에 불복한다는 것은 꿈에서 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쉬의 말을 듣고 보니 플레이저 공작(아린 아빠)는 자신처럼 기사가 아닌 문관 출신의 귀족이었다. 게다가 엄청 유능해서 다른 나라에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존재, 만약 그가 왕명을 거역하여 재상직을 박탈당하고 처벌을 받게 된다 하면, 그걸 안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구해내 자신의 나라에 영입하려 할께 틀림 없었다. 특히 이웃 나라인 에스라 왕국은 자신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 능력만 있으면 신분에 관계 없이 빛을 발할 기회가 더 많은 나라였다. 그 동안에도 재상이 전 플레이저 공작의 친자가 아니라 출생 신분이 확실치 않은 양자라라는 이유로 귀족가에서 멸시를 받고 있을 때 호시탐탐 자신의 나라로 영입하기 위해 마수를 뻗치던 에스라 왕국이니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재상 말고도 뛰어난 마검사인 그의 딸까지 있으니... 상상이 끔찍할 정도로 커지자 공작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국왕은 비록 남성우월주의자에 물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긴 했지만, 인재를 알아볼 줄 알았고 (물론 남자에 한해서이긴 했지만...) 국왕 이라는 한 나라의 최고 자리에 앉아 있긴 해도 굽힐 때와 물러날 때, 나설 때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국왕이었기에 그 동안 플레이저 공작이 (비록 뒤에서는 호박씨 대상이 되긴 했지만) 대우를 받으며 이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국왕의 신임이 없어진다면? 공작은 갑자기 말라오는 입 안을 느끼며 힘들게 침을 삼켰다. "내일 당장 폐하를 알현해야 겠다. 혹시라도 재상이 이 약혼을 괜찮게 여긴다면 다행이겠지만,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그에 대한 대책이 있는지 여쭈어야 겠다." 긴장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공작을 바라보며 애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왕명을 듣고 플레이저 자작이 보일 반응은 뻔했다. 재고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고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국왕의 명령을 말이다. "제가 아는 플레이저 자작이라면, 분명히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재상 각하께서는 딸의 의견을 존중하실테지요." 애쉬의 머릿속에는 평소 근엄, 고귀한 기품을 내뿜던 재상이 딸 앞에서만 그런 기품을 다 내팽개치고 팔불출이 된 것처럼 헤벌쭉해서 달려오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제 예상은 맞을 겁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씁쓸한 감정이 밀려올라왔다. '하필이면... 내가 고백한 바로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길게 뭔지... 제발 별 일 없이 그냥 넘어가야 할텐데...' 다음 날, 아침을 먹자마자 아린 할아버지의 눈초리에 눌려 거의 쫓겨나다시피 부리나케 왕성으로 출근하는 공작을 배웅하고는 류미르와 세이몬도 재빨리 저택을 빠져 나왔다. 산골 마을에서 류미르가 세이몬에게 했던, 세이몬이 원하는 건 모든지 해주기로 했다는 그 약속을 지킨다는 핑계를 대고서 말이다. 나중에 세이몬에게 사정과 회유와 애교, 애원 등등을 다 동원한 류미르는 약속을 지키는 기한을 딱 하루로 만드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었고 같은 수법으로 아린에게 용돈도 두둑히 받을 수 있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긴, 그 둘은 칸 시스파슈타인의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눈길을 피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을 거였다. 예전에, 아린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에 뵈었었던 - 물론 세이몬은 정식으로 인사도 못했긴 했지만 - 아린의 할머니는 인자하시고 부드러우신 분이셨는데, 아린의 할아버지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보기만 하면 '아린에게 허튼 짓만 했단봐라!!' 라는 듯이 살벌하게 노려봤기 때문에 아린에게 제대로 말도 못 붙일 지경이었다. 뭐, 류미르와 세이몬을 바라보는 눈길 보다도 아린의 아버지인 아펜젤러를 보는 눈길이 더 살벌했긴 했지만... 아린은 류미르와 세이몬에게 아펜젤러와 친부녀 사이라는 걸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 - '너희들, 내가 아빠의 친딸이라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에게 죽을 거야, 그러니 입조심 해.' - 했기에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 정말 무서웠어.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일족 장로님들하고 사부님 보다 더 무서운 시선을 가진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야. 세상에... 아린 할아버지를 보니까 울 장로님들은 쨉도 안 될거 같아.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니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라니까. 거기에 만약 살기까지 섞였다면... 윽, 생각 하기도 싫어." 플레이저 공작가를 벗어나 시내로 들어서자 그제야 세이몬이 긴장이 풀린 듯 주절댔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정말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까지 부르르 떨자 류미르가 피식 웃었다. "그랬어? 그럼 넌 아린 할머니를 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겠다?" "뭐어? 무슨 소리야? 아린 할머니를 뵈었을 땐 괜찮았다고." 그러나 류미르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네가 괜찮았던 건 그때 너무나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지, 안 그래? 그리고 넌 아주 잠깐 본 것 뿐이잖아. 인사도 못했고 말야." "그, 그래서 그런가? 그럼 류미르, 넌 인사 했겠지? 그 분을 뵈니까 어땠어?" "글쎄... 뭐라고 할까?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아주 높은 산을 바로 밑에서 쳐다보는 느낌이랄까? 아린 할머니가 아린 할아버지처럼 노려보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는데도 감히 쳐다볼 엄두 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어." "그, 그 정도야?" 놀라움으로 눈이 커다래지는 세이몬에게 류미르가 다시 피식 웃었다. "넌 드래곤이 얼마나 사는지 모르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10배는 더 산다고. 더욱이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더 강하다고 들었어. 그 분들은 모르긴 몰라도 수천년은 넘게 사셨을 거야." "어휴... 아린도 나중에 저렇게 될까?" 섬찟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말하는 세이몬의 말에 문득 류미르가 침울해졌다. "벌써 걱정할 필요 있어? 아린이 저 나이가 되었을때 즈음엔, 우린 이 세상에 없을걸..." "에? 아... 그렇구나. 그렇게 되겠지? 우리는 기껏해봐야 천살정도 밖에 살지 못하니까." 세이몬도 덩달아 우울해지며 고개를 끄덕이자 류미르는 시내에서 자신들 앞에서, 혹은 자신들을 지나쳐 걷고, 뛰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우습지 않아? 인간에 비해 우리는 엄청나다 싶은 세월을 사는데 말야... 그런데 그 엄청난 세월이 드래곤 앞에서는 '기껏'이 되는구나." 그러자 세이몬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지. 우리가 같이 있고 싶은 건 저 인간들이 아니라 아린이니까. 그러니 인간들 수명에 비하지 않고 드래곤 수명에 비하는게 당연한 거 아냐?" 류미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야아... 세이몬,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줄은 몰랐는 걸?"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즉각적으로 세이몬의 날카로운 시선이 류미르에게 날아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응? 아하하하, 별 뜻 없는데?" 찔리는 게 있는 류미르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웃자 세이몬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계속 바라보다가 뭔가가 생각 났는지 그냥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세이몬의 그런 모습에 그냥 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류미르는 다음에 들려오는 세이몬의 말에 움찔 했다. "류미르, 오늘 내가 원하는 건 다 사주는 거 맞지?" "세, 세이몬? 그게 무슨 뜻이야?" 벙 찐 류미르가 말까지 더듬으며 묻자 세이몬은 너무나 순진 무구한 표정으로 류미르에게 활짝 웃어보이며 대꾸했다. "응? 아아, 별 뜻 없는데?" "그, 그래? 그렇다면 다행인데..." 정말로 별 뜻 없는 말이 아닌 것 같았기에 류미르는 안심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언제 저렇게 세이몬이 영리해졌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야..." 심각한 생각 속에 빠져 정처없이 걷던 류미르는 갑자기 들려오는 세이몬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 차리다가 마침 뒤에서 걸어오던 세이몬과 부딪히고 말았다. 쿵~!! "아야야~~, 뭐 하는 거야?" 류미르의 뒤통수와 부딪힌 곳이 하필이면 콧등이었기에 세이몬은 반사적으로 나온 눈물을 눈에 달고 콧등을 움켜쥐었다. "아, 미안, 미안... 좀 생각을 하느라..." 류미르도 뒤통수가 욱씬거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잘못한 거라 아픈 내색도 못하고 뒤통수만 어루만진 채 사과를 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정신이 없는 거야?" "별건 아니었어. 그런데 뭐라고 했어?" 세이몬은 아픈 코를 생각하면 류미르를 그냥 나두고 싶지 않았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아무리 자신이 뭣도 모른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화를 내기도 뭐해서 그냥 그를 노려봐주고는 그냥 넘어가줬다. 잠시 후에 그 댓가를 톡톡히 받아내리라 결심하면서...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길은 알고 가는거 맞지?" 세이몬은 류미르가 당연히 뭔가 계획이 있는 줄 알고 그만 졸졸 쫓아왔지만, 시내 중심가로 들어왔어도 계속 걷고 있기만 하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은 것 뿐이었는데, 의외로 그의 질문에 류미르의 안색이 경직되어 버렸다. "에... 그게 말이지...." "뭐야? 설마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던 거야?" 미간을 찡그리며 묻는 세이몬의 말에 류미르는 헛 웃음만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에... 그게 뭐시냐... 세이몬, 오늘은 네가 원하는 곳에 가야 하는거 아냐? 그러니 난, 그냥... 네가 지적할 때 까지 그냥 걷고 있었던 거였어..." 그 변명이 처음에 즉각 나왔으면 세이몬도 '아, 그렇구나..'하고 납득 해 버릴 아주 그럴듯 했지만, 류미르의 반응으로 인하여 변명의 신뢰성이 사라져 버린 지금, 세이몬이 그 말을 믿어줄리 만무했다. "류~~ 미~~~ 르으으으으으~~~~!!" 오늘이 자기를 위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류미르가 아무 생각 없자 화가 치민 세이몬이 목청을 한껏 높이자 그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을 감당 못한 류미르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세이몬의 팔을 잡고 냅다 뛰어 근처에 있던 제법 커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대충 근처에 있는 아무곳으로 뛰어든 것이었지만, 그 식당은 제법 고급스러운 내부를 가지고 있었고 뛰어들다시피 들어온 그들에게 문가에 서 있던 제복을 입은 종업원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예약은 하셨습니까?" 친근한 상업적 미소를 지으며 싹싹한 태도로 물어오는 종업원에게 류미르는 얼결에 고개를 저었다. "예? 아, 아뇨. 안 했는데요..." "그러시군요. 일행은 몇분이십니까? 두 분이신가요?" "예? 아, 예." 이번에도 얼결에 대답하는 류미르였다. "알겠습니다.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는 종업원을 보고 세이몬과 류미르가 마주 보았지만, 여기서 그냥 '아, 우린 그냥 구경하러 들어왔거든요. 나중에 다시 오죠.'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려 나갈만한 요령과 배짱이 없는 그들이라는 걸 시선으로 확인한 그들은 어색하게 종업원을 따라갔다. 마침 식사 시간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식당 안이 한산해서 그들은 이층에 있는 전망 좋은 창가로 안내될 수 있었다. "자자 세이몬,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 뭐좀 먹고 가자. 집에서는 아린 할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잖아." 저택에서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이는 아린 할아버지와 아린이 유일했던 것이다. 나머지는 아린 할아버지의 그 살벌한 시선을 받아야 했으므로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도 못했었다. 종업원을 따라오면서 어느새 이 곳에 머물 핑계거리를 생각해 낸 류미르가 세이몬을 향해 말하자 세이몬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지 뭐." 그리고 나서 내밀어진 메뉴판과 종업원의 멋드러진 설명에 의해 맛있어 보이는 건 모조리 시켜 종업원을 기겁하게 만들어 물러가게 한 후에 그들은 다시 마주보았다. "에... 아린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걸... 이런건 다 아린이 알아서 시켰잖아." 종업원이 경악을 하면서 물러가는 바람에 생전 처음 이런 걸 해보는 세이몬이 약간 불안함을 느끼며 중얼댔다. "에이, 가끔은 이런 것도 해봐야지. 그리고 오늘 아린은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잖아. 아린도 오면 할아버지도 오셨을 걸?" "엑? 그건 싫다." 얼른 고개를 젖는 세이몬을 보며 류미르는 다시 여유를 가지고 피식 웃다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우리 둘만 있으니까 왠지 어색하다, 그치?" "응, 그건 그래...." 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 점점 복작복작 해지는 길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세이몬이 입을 열었다. "저기, 류미르?" "응?" "아린이 그 나쁜 사람 잡고 난 다음에 뭐 할거 같아? 다시 여행을 갈까?" 창 밖만 계속 바라보고 있던 류미르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세이몬을 바라보았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행은 안 갈거 같아." "아... 그런가? 그럼, 류미르... 넌 그때 뭐 할 거야? 집으로 돌아갈 거야?" "모르겠는걸? 생각해 본 적 없어.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웅... 하지만 말야, 아린 할아버지가 오신 이상 그 나쁜 사람 잡는 걸 도와주지 않을까 싶은 데... 그 나쁜 사람은 굉장히 세서 우리 셋만으로는 어림도 없잖아. 그치?" "아마도... 그렇겠지." "그러면, 그 나쁜 사람은 곧 잡히겠네? 그럼 이렇게 다니는 것도 곧 끝난다는 거잖아." 그러자 류미르는 놀란 표정으로 세이몬을 바라보았다. 그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기 때문었다. "아, 그렇구나... 아린 할아버지가 오셨다는 거에 놀라서 그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번 일 끝나고 아린이랑 다시 여행 가고 싶은데 말야... 왠지 이번 일 끝나면 그냥 헤어질거 같아. 그럼 되게 서운할 거야. 전에도 겨우 1년 남짓 밖에 같이 못 있다가 겨우 100년 만에 만났는데..." 세이몬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아린의 사정을 모두 아는 류미르로써는 이 일이 끝난 뒤에 아린이 얼마나 상심할 지 상상이 가는지라 차마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모든 걸 세이몬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그건 아린이 결정해야 할 일 같았기에 류미르 는 대신 잠시 후 집에 가서 이 이야기를 아린에게 해줘야 겠다고 결심했다. 또 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지만 잠시 후 세이몬이 그 침묵을 가르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류미르, 있잖아... 그... 인간 사이에서 약혼이란 게 같은 핏줄의 후손을 생산하기로 하는 약속 맞지?" "응? 응.... 그렇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나 있지, 솔직히 어제 저녁에 아린 약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무척 놀랐었어." "에? 왜? 어차피 그건 아린이 원한 것도 아니었고 아린 아빠가 취소 시키기로 했었잖아." "아, 물론... 그렇게 하기로 결정 났을 땐 안심이 되었지만... 불현듯 아린이 약혼 같은걸 하 면 그것 때문에 우리와 헤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니까 왠지 그 애쉬라는 인간에게 아린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게 나도 모르게 굉장히 분했었어." 류미르는 왠지 기운 빠진 모습으로 허허 웃었다. "뭐야, 그게? 어차피 그 애쉬라는 인간은 아린의 정체를 모른다고. 게다가 아린이 그 인간과 약혼, 아니 결혼까지 해봤자 그건 아린에게 색다른 경험일 뿐 실제로 아린의 후사를 낳는 건 아니라고." 그러자 세이몬이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알게 뭐야. 그리고 그걸 알았다고 해도 기분 나쁜건 나쁜 거라고." "세이몬, 아무리 너가 그렇게 기분 나빠해 봤자, 그런 건 아린의 사생활이라구. 우리가 그거 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할 수는 없어." "쳇, 그래 너 잘났다." 류미르가 선생님 어투처럼 친절하게 설명하자 더 기분이 나빠진 세이몬이 턱을 괴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하지만 곧 뭔가 생각이 났는지 다시 류미르를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류미르 너 말야..." "응?" "넌 아린 약혼 이야기를 듣고 아무렇지도 않았어?" 세이몬의 질문에 류미르는 잠시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건 찰나라고 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 었고 곧 류미르는 선생 같은 온화한 표정과 어투로 입을 열었다. "놀라긴 했지만.. 그건 아린의 사생활이잖아.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닌걸..." 류미르의 그런 어투가 정말 싫은 세이몬은 인상을 팍 써버렸다. "그래, 그래 너 잘났다. 그럼 넌 아린이 결혼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류미르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말야... 몇번을 말해야 알아 듣겠냐?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아린의 사생활이므로..."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이몬이 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누가 너 보고 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래? 내가 듣고 싶은 건 네 감정이 어떤지야." 류미르는 세이몬의 한치의 물러섬 없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을 차마 마주볼 수 없어 슬그머니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내가... 어떤 심정이든 무슨 상관이냐? 그렇다고 나랑 아린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세이몬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어투로 그의 말을 받았다. "당연하지. 만약 너랑 아린이 나만 냅두고 둘만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간 내가 널 가만 안 둘 테니까." "하아~, 그래. 네 맘대로 하셔요. 아, 음식 나왔다. 밥이나 먹자." 류미르는 저 멀리서 세명의 종업원이 커다란 쟁반 가득 음식을 가져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자카르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 보고 있는 왕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에게 자신이 알아 낸 이야기를 심각하게 이야기 했지만 그녀는 간간히 고개만 끄덕일 뿐 자신이 보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결국 자신의 할 말을 거의 다 한 자카르는 왕녀가 어떻게든 반응을 보여주길 기다릴 수 밖 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질문으로 말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제야 자신의 맘을 알아준 듯 왕녀가 보고 있던 서류를 덮어 책상 한 쪽에 쌓여 있는 서류더미 위에 올려 놓으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벨리안 경, 당신이 말하고 싶은 건 폐하께서 플레이저 공작과 레드포드 공작, 둘을 데리고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거죠?" 루실 왕녀는 국왕이 자신의 친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아바마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긴 그녀와 국왕 사이의 불화를 생각하면 그녀가 국왕이 없는 자리에서도 예의를 갖춰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이겠지만 에릭(루실 남편)과 자카르는 '양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바마 마'라고 맘껏 부르는 브랜트 왕자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쓰라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카르가 루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하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에릭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벨리안경, 플레이저 공작은 확고부동한 중립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인물인데... 폐하께서 어찌 한다고 그가 레드포드와 같이 뭔가를 꾸미겠소? 그저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의논하신 거 아니겠소?" "그렇게 여기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입을 열고 나선 건, 자카르가 모종의 임무(?)로 인해 자리를 비웠을 때 그의 자리를 대신 지키고 있던 자카르의 부관이었다.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부관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은 국가 중대사라고 하면, 그 두 공작 말고도 모티머 후작님과 여기 계신 왕녀님과 대공 저하도 부르셨을 겁니다. 항상 그렇게 해오셨으니까요. 게다가 한가지 걸리는 것은 폐하가 일어나실 시각에 맞춰 온 것 처럼 일찍 왕성으로 온 두 공작의 태도였습니다. 그 두 공작은 상대편이 온 것이 의외였는지 크게 놀라는 듯 보였지만 동시에 같이 폐하를 알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작 두분이 급히 폐하를 알현한 것이 대장님(자카르)을 비롯한 폐하의 명을 받고 '그 살인마'를 퇴치하러 갔던 일행이 돌아온 바로 다음날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경의 말은 폐하께서 꾸미신 일이 두 자작과 관련이 있다, 이건가요?" 날카로운 루실의 눈빛에 부관은 약간 움찔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은 하지 않은 듯 했다. "제가 별 거 아닌 일을 확대해석 한 것일수도 있습니다만,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게 폐하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째서?" "두 공작이 들어간 뒤 잠시 후 폐하의 침실 - 아, 폐하께선 두 분 공작을 침실로 불러들이셨습니다. - 에서 분노하신 폐하의 큰 소리가 났으며 공작들이 물러간 뒤에 노한 모습을 보이셨다 합니다." "이거야 원..." 에릭은 부관의 말에 끌리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표정으로 루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실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있을 뿐이었다. "그럼 잘됐군요. 어쨌든 레드포드 공작은 몰라도 플레이저 공작이 폐하의 일에 반대하였으니 그 일은 이루어지기 힘들테니 알 필요는 없겠어요. 하지만 뭐... 뭘 하려 했는지는 뻔하군요. 플레이저 공작을 왕자파로 끌어들일 계획이었겠죠." 그러자 에릭이 뭔가 생각이 번뜩 떠오른 표정을 지었다. "혹시, 폐하께선 레드포드 자작과 플레이저 자작을 연결시켜 주려고 한 게 아닐까요? 플레이저 공작이 왠만한 일로 흔들릴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계시는 폐하께서 시도하실 일이란 플레이저 자작을 이용하는 것 뿐일테니까요." 루실은 여전히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도 있겠군요. 이로써 폐하도 플레이저 자작이 당신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셨겠죠." 그리고는 다시 다른 서류를 끌어와 자신의 앞에서 펼쳐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이걸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에릭은 자카르만 조용히 밖으로 불러내었다. "이보게 자벨리안경, 자네의 그 작업(?)을 좀 더 빨리 진행시켜야 할 것 같네. 그러니, 힘 좀 써주시게나." 류미르와 세이몬은 아침을 먹는둥 마는 둥하고는 일찍 나가더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깔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신나게 놀기에 아직도 안 들어오는 거야?" 평소 같았으면 - 물론 예전에 같이 여행 다닐때 이야기지만... - 둘만 내보내었어도 저녁을 먹기 전에 들어오곤 했었기에 저녁때가 다 되자 은근히 녀석들이 기다려졌지만 왠 일인지 둘은 돌아오질 않았다. "하긴... 오늘이 류미르가 뜯기는 날이니 세이몬이 무지 신났나보네...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려나..." 결국 아빠가 먼저 궁에서 돌아오셨기에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두 분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어차피 세이몬과 류미르가 안 돌아왔다고 할아버지께서 기다려 주실리는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갔던 일은 잘 해결 되었겠지?" 식탁에 앉아 막 스프를 떠서 입으로 가져가던 아빠는 할아버지의 평이한 어조의 질문에 놀 라서 사래가 들어 버렸다. "엣? 켁,켁,켁... 콜록, 콜록..."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것에 대한 반응이 너무나 격렬하자 할아버지가 눈쌀을 찌푸리셨다. "뭐야, 그 반응은? 설마 잘 해결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빠는 급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냉수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키자 그제야 사래 걸린 것이 내 려갔는지 힘 빠진 한숨을 내쉬셨다. 하지만 곧바로 할아버지의 눈길에 움찔하며 급히 기운을 차려 대답해야만 했다. '불쌍한 아빠..." "물론 잘 해결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느분의 명이라고 감히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왔겠습니까?" 나름대로는 자신있게 대답한 거겠지만 할아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거야?" "예? 아, 그건 빨리 대답을 하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급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깟 대답, 스프를 삼키고 해도 되는데 뭘 그렇게 서둘러? 내가 그 정도도 못 기다려 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아빠는 재빨리 비굴하다 싶을 정도의 미소를 띄운 채 능수능란하게 대꾸했다. "물론 칸 시스파슈타인님은 그 정도도 이해 못하실 분이 아니란 것은 저도 잘 압니다. 단지 궁금하셨을 텐데 제가 미처 그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말씀을 못 드린 것을 깨닫고 마음이 급해졌지 뭡니까?" 너무나 매끄러운 아빠 말에 할아버지의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지 할아버지는 곧 아빠 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다시 스프를 떠 먹기 시작했다. "흥, 그놈의 혀는 여전히 잘 굴러가는군." "하,하,하..." 할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빠도 한 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안 심한 표정으로 스프를 떠 먹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국왕이 화는 안 냈어요?" 아빠가 그 정도의 일을 가지고 힘들어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신경을 썼을 거란 생각에 걱정이 되어 묻자 아빠가 싱긋 웃었다. "아아, 뭐 좀 화를 내긴 했지만... 험, 그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단다." "다행이네요. 그럼 레드포드 공작가쪽으로 어명을 취소한다는 말이 전달되었겠지요?" "뭐, 그럴 필요도 없었지. 내가 국왕을 알현하려는데 레드포드 공작이 알현하러 왔더구나. 덕분에 그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약혼을 취소 시킬 수 있었지." "에? 레드포드 공작이요? 그도 약혼을 별로 기뻐하지 않았나 보죠?" 그러자 아빠보다도 먼저 할아버지가 반응을 나타냈다. "뭐시라? 아니 어떤 놈인데 내 손녀를 마다한단 말이냐? 내 손녀가 약혼녀가 된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천만금을 싸와서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려도 시 원찮은데? 이봐, 그 자식이 누구지? 레드포드 공작이라고 했나?" 할아버지는 레드포드 공작이 바로 앞에 있으면 단번에 손을 봐줄 것 같은 시선으로 아빠를 바라보자 아빠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물론 아시리안양이 그 자에게는 감지덕지 하죠. 에... 뭐, 아시리안양 약혼자로 내정된 자가 그 레드포드 공작의 아들이긴 합니다만.. 그런 사소한 것은 그냥 넘어가고 레드포드 공작은 약혼을 취소하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제가 약혼을 취소하자고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 국왕과 의논하러 온 것 같았습니다. 아시리안양이 너무나 뛰어난 인물이기는 합니다만, 레드포드란 작자는 뼛속까지 기사인 인물이어서 약혼녀로 아시리안양이 아닌 다른 여자였다 해도 감히 국왕에게 약혼을 취소 하라는 말은 하지 못할 인물입니다." "흥, 그래? 그랬었군." 할아버지는 그제야 납득을 한 듯 다시 스프로 시선을 돌렸다. "에... 그럼 레드포드 자작은 이 약혼을 반대 하지 않았단 소리군요." 생각해 보니 애쉬도 기사였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약혼이라고 해도 감히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을 듯 보였다. "뭐... 왕명이니 거부하지는 못했겠지. 게다가 그가 거부했다 하더라도 공작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했을게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뻔하다는 아빠의 말투에 나도 수긍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기사라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네요." "누구를 주군으로 섬기느냐에 따라 달렸지." 또 한번 아빠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번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국왕이 순순히 물러났을까요? 자신이 기껏 생각한 걸 아빠가 대 놓고 반대해서 약혼을 깨트려놨으니 화가 많이 났을텐데요..." 내 딴에는 걱정되어서 질문한 거였지만 아빠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받았다. "당연히 화가 났겠지... 하지만 꽤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녀석이라서 별 탈 없이 뒤로 물러 난 거지. 그 인간이 그 정도도 못했다면 난 벌써 이 나라를 떠나고 없었을 거다. 에... 하지 만 녀석이 밴뎅이 소갈딱지 같은 속 좁은 놈이라서 오늘 당한 걸 꿍하니 가지고 있을게다. 나를 한번 골탕먹이려고 노리고 있겠지. 하지만 뭐, 그런거에 내가 당할 거같냐?" 하면서 웃는 아빠의 자신만만함에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책에서 보면 그렇게 속 좁은 사람들은 원한을 두고두고 곱씹고 언젠가는 한번 뒤통수를 치기 때문에 완전히 맘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뭐.. 아빠가 그리 쉽게 당할 분은 아니시니까...' 세이몬과 류미르는 그날 밤 늦게 들어왔다. 류미르는 들고 있는 것이 힘겨워 보일 만큼 엄청난 보따리를 들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세이몬 조차 양 팔에 서너개씩의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싱글 싱글 웃으며 들어오는 세이몬 뒤로 류미르는 죽상을 한 채로 축 쳐진 채 들어와서는 거의 내팽개치다 시피 짐들을 방 안에 던져놓고는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왔다. "저.... 아린?" "고생했어 류미르. 그런데 나에게 할 말이 있나봐?" 뭘 말할건지 예상이 된 나는 그에게 괜찮다는 표시로 싱긋 웃어주자 류미르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처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아... 저기 있지... 저 녀석이 너무 이것 저것 집어대는 바람에... 너가 준 거하고 내가 좀 가지고 있던 것 까지 다 써버렸거든. 그런데..." "그런데?" "그러고도 모잘라서 저기... 네 이름을 대고 외상으로 달아놨거든... 아마 내일 쯤 돈 받으러 올 거 같은데..." "그래? 알았어. 티모시에게 말해둘께. 그런데 얼마나 되는데 네가 그렇게 축 처진 거야?" "에... 그게... 한 20존드 되려나?" 머뭇 머뭇대며 나오는 류미르의 말에 내 눈이 놀람으로 인해 동그랗게 커졌다. "머시라? 20조오오온드으으? 그게 그러니까 외상값만 20존드란 말이지? 야, 내가 너 나갈때 5존드를 줬는데 네 돈까지 합했다면 도대체 세이몬은 하루에 얼마를 쓴 거야?" 내가 비록 부자라고는 하지만 난 의외로 돈 쓰는데 되게 쫀쫀했다. 예전에 여행 다닐때 여관이나 음식 등등은 항상 고급, 아니면 좋은 것만 찾았지만, 필요 없 는데다 돈을 쓰는 적은 결코 없으며 모든 돈 쓰는 일에는 항상 꼼꼼이 따지곤 했었기에 - 물론 류미르도 나 못지 않게 그랬지만... - 류미르도 내가 이럴 줄 알고 있었는지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세이몬 이 녀석.. 쓸데 없는데다 돈 쓰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쳐 줬는데도 100년이 지나니까 다 잊어버렸나? 도대체 뭘 얼마나 산 거야? 그러고 넌 세이몬 사는 거 그냥 보고만 있었 어?" 세이몬이 들어간 방을 한번 째려보고 다시 살벌한 눈을 류미르에게 돌리며 묻자 류미르의 어깨가 밑으로 더 내려갔다. "어쩌냐? 원하는 건 모든지 다 사준다고 약속했는데..." 류미르의 '약속'이란 말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켜올라갔던 내 눈꼬리가 스르르 내려왔다. "에휴~~, 그렇군. 그렇담 어쩔 수 없지. 세이몬은 저 물건들을 다 어쩌려구 샀대냐?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겠다. 나중에 마계로 갈 때 가지고 갈 수나 있을라나?" 허리에 척 올려놓았던 손을 스르르 밑으로 내려뜨린 나는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고는 그에게 잘 자란 인사를 하고 티모시를 만나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세이몬이 즐거움이 가득 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방에서 나왔다. "아리이이이인~~~, 거기 있는 거야?" 너무나 기쁜 나머지 허공으로 날아 오를 것 같은 세이몬의 손에는 자그마한 꾸러미가 하나 들려 있었다. 일명 포장지로 불리우는 금박 무늬가 찍혀있는 하얀색 천에 파란색 리본으로 묶여있는 거였는데 세이몬의 양 손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의 정육각형 모양이었다. "에헤헤헤, 내가 오늘 시내 나가서 아린 선물 사왔어." 내 돈으로 내 선물을 사왔단 사실을 모르는 세이몬은 너무나 순진하게 웃으며 그 꾸러미를 내밀었다. "맘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볼때는 무척 예뻤거든. 에헷~" 나는 순간적으로 황당하기는 했지만, 세이몬의 정성이 갸륵해서 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며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어머나, 내 생각까지 해준 거야? 고마워, 세이몬. 역시 세이몬이 제일이야." "하하하하, 그렇지?"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풀어보니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가 나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장식용으로 도자기로 만들어진 인형 세개가 비단 천 위에 놓여 있었다. 토끼를 사람처럼 세우고 옷을 입힌 거였는데 키가 작고 통통해서 너무나 귀여웠다. 하나는 단순한 여행복 차림의 여행자 토끼였고, 하나는 멋진 망토를 걸치고 검을 빼 들고 있는 검사 토끼였고, 나머지 하나는 하얗고 레이스가 많이 달린 귀여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가씨 토끼였다. "어머나~ 이거 무지 귀엽다." 인형들은 정말로 귀엽고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었기에 나는 정말 감탄해서 탄성을 발하자 세이몬의 웃음이 더 커졌다. "그치, 그치? 이거 보니까 왠지 우리 셋 같아서 내가 골랐어. 이건 류미르고 이건 나, 이건 아린이야. 어때?" 여행자 토끼는 류미르고 검사는 세이몬, 그리고 아가씨는 나랜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것 같네. 어쨌든 너무 고마워 세이몬. 선물 받으니 기분 정말 좋다. 인형도 예쁘고..." 류미르가 왠지 맘에 안 든다는 듯이 얼굴이 찡그려지는 게 보였지만 그를 무시해버리고 나는 세이몬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오늘 너희들 피곤할테니 난 이만 갈께. 둘 다 잘 자고 내일 보자. 그리고 세이몬, 선물 고마워~~" 류미르는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지 고개만 까딱했을 뿐이지만 세이몬은 기분이 좋아서 손까지 흔들어 줬다. "응, 아린도 잘자~~" 둘과 헤어져서 티모시를 만나려고 홀로 내려가는데 마침 서재에서 나오던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어? 할아버지, 아직 안 주무셨어요?" "아, 그래. 요 근래 내가 레어에만 있는 동안 재미있는 책들이 꽤 많이 나왔구나. 그래서 그걸 좀 보느라고... 에, 그런데 아린아? 그건 뭐냐?" 할아버지가 가르킨건 세이몬이 선물로 준 상자였다. "아하, 이거요? 애들이 시내 나갔다가 제 선물로 사온 거래요. 보실래요? 인형인데 꽤 귀여워요." 선물 받은게 하도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기분이 엄청 좋았었는지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내가 보여주는 인형들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흠, 그러고 보니... 나도 이 곳으로 곧바로 오느라 시내 구경을 하지 못했구나. 어떠냐, 내일 나랑 시내구경 가지 않으련?" 갑작스런 할아버지 제안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에? 시내 구경이요?" "그래, 시내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뭐.. 괜찮은 거 있으면 사기도 하고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사고싶은 책도 몇권 있구나." '그런거는 아빠에게 시키면 금방 가져다 대령할텐데...' 뭐, 할아버지도 저택에만 있는 건 답답하셨으니 바람을 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할아버지께서 같이 나가고 싶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저도 심심했는데 잘 됐어요. 내일 같이 나가요." 다음 날, 나는 오랜만에 예쁘게 차려입고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난생 처음 할아버지와 데이트(?)를 하는 거였기에 할아버지가 보기에도, 그리고 스스로가 보기에도 예쁘게 차리고 싶었던 것이다. 중세풍의 단순하지만 우아한 느낌이 드는 원피스형의 드레스에 화려한 덧옷을 걸치고 둥글고 테가 위로 올라가 있어 마치 한국 해군들 모자 같이 생긴데다 하늘하늘하고 길다란 망사가 달려있는 모자를 썼다. 그 모자는 햇빛을 차단한다는 실용적인 면 보다는 악세사리 역활에 더 치중한 듯 했지만 하 얀 바탕에 금빛으로 우아한 무늬가 새겨진 데다 사이사이 박혀서 반짝이는 진주가 너무 예뻐서 오늘 같이 특별한 날 잘 어울릴 것 같아 착용한 거였다. 그리고 모자와 잘 어울리게 머리를 양 옆으로 나누어 길다란 진주로 엮어진 줄과 함께 꼬아서 가슴 위로 늘어뜨렸다. "오호~, 예쁘구나." 먼저 저택 현관문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할아버지가 감탄사를 발했다. "후후후, 할아버지랑 난생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는 건데 아무렇게나 하고 갈 수는 없잖아요." 마샬(시녀장)이 내미는 하얀 비단 장갑을 착용하면서 우아하게 웃었다. 전에 왕궁 무도회에 나가기 위해 받았던 교육이 효과를 보는 듯 했지만, 평소에는 하려고 해도 나와주지 않던 우아한 행동이 옷차림 하나 바뀌는 것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보 니 역시 여자는 옷에 영향을 많이 받는 듯 했다. "그럼, 가실까요?" 할아버지가 장난스런 얼굴로 웃으면서 팔을 내밀자 나도 무릎을 한번 굽혀 답한뒤 그 팔에 손을 얹었다. "그러죠." 우리 뒤로 알렌과 흄이 즉각적으로 따라 붙었다. 평소 같으면 외출할 때 내 옆에서 갈 그들이었지만 오늘은 할아버지의 살벌한 눈길을 받기 싫은지 두세걸음 떨어져서 쫓아왔다. 할아버지는 그들이 달라 붙는게 싫은 눈치였지만 내가 '짐꾼이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라 고 속삭여 납득한데다가 그 둘이 적당한 선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알아서 행동을 취해주니까 신경을 끈 채 있기로 한 듯 했다. 축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일국의 수도라서 그런지 구경할 건 많았다. 게다가 땅덩이가 넒은 나라 답게 고급스런 상점들은 건물 2층 이상은 기본이었고, 안의 평 수 또한 무지 넓고 화려, 우아, 깔끔, 친절 이란 4대 요소는 필수 불가결하게 지니고 있어 한 상점 안에서 구경하는 것도 꽤나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런 상점들 안에서는 구경하다 지친 손님들을 위하여 간단한 음료와 먹을 것(물론 다 고급이었지만) 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몇몇 상점에 들린 뒤 가본 서점 또한 그 못지 않았기에 나는 겉으로는 내색 안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놀란 상태였다. 내가 지금까지 들린 책방들은 모두 사람이 다니는 곳만 겨우 마련해 놓고 책장을 위시한 모든 공간들에 책들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채 무질서하게 쌓여 있어 책방 주인이나 점원이 아니면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건만, 이 서점은 어디에서도 먼지가 쌓인 곳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딴 상점보다는 천장이 낮았는데 이유는 천장까지 닿아있는 책꽂이의 맨 윗층칸에 있는 책이라도 손쉽게 꺼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대신 천장이 높아 갑갑해보일 수 있는 건 가운데를 꼭대기 층 밑부분까지 일직선으로 뚫어놓아 해결하고 있었다. 덕분에 건물이 보통 상점의 2층 높이에 불과했지만 안에는 3층까지 있었다. 모든 책들은 깔끔해보이는 겉표지를 가지고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서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에... 대단하군요. 이런 서점은 난생 처음 봐요." 할아버지는 마법 관련 서적 쪽에서 최근 100년 사이에 새로 나온 마법책들을 골라내시며 대꾸하셨다. "그러냐? 하긴, 이렇게 잘 꾸며놓은 서점은 각 나라의 수도에도 몇개 없지. 서점에 많이 갔었나보다? 필요한 책이 있으면 할애비한테 말하지 그랬냐?" 할아버지의 말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난 그 동안 인간들 도시에서 서점에 간게 딱 한번 뿐이었다. 그것도 맨 처음 성룡식이 끝나 할아버지, 엄마와 헤어진 뒤 류미르와 세이몬을 처음 만나서 그 둘을 이끌고 보물을 소개한 책을 찾기 위해 간 뒤로 한번도 가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책이 필요하단 말 대신 실없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하.하.하... 이제부터는 그럴께요." 그런데 그때였다. "레이디 플레이저?" 듣기 좋은 미성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이 도시에서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던 나는 의아해져서 고개를 돌렸더니 거기에는 자카르가 서 있었다. 고급스런 평상복 위에 한쪽 어깨 위에서 고정시킨 우아한 푸른색 망토를 두르고 그와 같은 색의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모자는 원기둥 모형에 챙을 아예 모자통에 붙인 모양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앞쪽에 V자 형의 트임이 생겨 있었는데 자카르의 금발 머리와 너무 잘 어울렸다. 평소 그를 볼 때에는 그냥 잘 생긴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모자와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어쩌면 나는 모자가 잘 어울리는 남자에게 약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향해 아는체 하는 목소리가 내 귀에도 조금은 들뜬 것 처럼 들렸다. "어머, 자카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여전히 잘 생긴 얼굴이 반가움으로 인해 환하게 빛났다. "역시 당신이 맞군요. 설마 설마 했었는데요.... 오늘 따라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옷차림 때문인지 자카르는 평소 나를 대하던 기사에 대한 예를 취하는 대신 레이디를 대할 때 취하는 예로써 나의 손등에 대고 입을 살짝 맞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내 옆에서 살벌한 기운이 팍 풍겨 나왔다. 자카르는 능력이 뛰어난 기사여서 그런지 기운이 퍼져 나오자마자 몸을 경직시키며 옆을 바 라보았는데 그 옆에는 자신이 처음 보는 마법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서있자 의아한 표정 이 되었다. "아, 소개를 해드리죠. 이 쪽은 제 할아버지세요. 할아버지, 이분은 이번에 알게된 기사예요." "할아버지시라구요?" 할아버지라고 불리기에는 할아버지가 너무 젊은(?) 모습을 하고 있어 자카르가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고 할아버지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카르 폰 자벨리안이라고 합니다. 미력하나마 왕녀님의 근위대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본명과 직업까지 대는걸 보니 아마도 자신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괜찮은 남자라는 걸 할아버지에게 피력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런 자카르의 소개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는 여전히 살벌한 눈으로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아린의 할애비다." 자카르는 할아버지에게서 놀라움, 혹은 감탄을 기대했는지 여전히 냉담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왠지 제가 방해꾼이 된 거 같습니다." 할아버지를 바라보니 왠지 심통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자카르를 볼 때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던게 걸린 나도 어색한 얼굴로 웃을수 밖에 없었다. "아... 할아버지를 오랜만에 뵙는거여서요. 이렇게 우연찮게 만난게 반갑기는 하지만 역시 때 가 좋지 않은 것 같네요. 그런데 여긴 정말 왠일이세요? 지금 언니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 닌가요?" 할아버지의 표정으로 보아 그를 얼른 보내버려야 했는데 왠지 내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그 에게 질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맘에 걸리긴 했지만 이대로 그를 보내버리고 싶지 않았나 보다. "아, 근위대 일은 내일까지 휴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죠." 그러면서 자신이 은근히 시간 많다는 걸 말해주는 자카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할아버지 주변의 공기가 더욱 더 차가워졌다. 그러자 자카르가 땀을 삐질 흘렸다. "아.. 하지만 두 분을 방해할 수는 없겠군요. 같이 점심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죠." "그러세요. 다음에 뵈요." 자카르는 다시 예를 취하기 위해 슬며시 손을 내밀었지만 할아버지가 얼른 나를 뒤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다시 손을 내리고는 그냥 허리만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러자 그 즉시 냉기가 풀풀 날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저 녀석은? 감히 널 넘보다니..." 저 멀리 보이는 자카르를 여전히 노려보면서 할아버지가 내뱉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예요. 모든 여자들에게 다 저렇게 대할걸요?" 그런 할아버지의 시선을 무마시키기 위해 말했건만 할아버지는 그 시선을 나에게 그대로 돌렸다. "그으래? 근데 네 반응은 뭐냐? 왜 얼굴이 붉어져?" "엣? 내가 언제요?" 반사적으로 팔짝 뛰듯 부정했지만 할아버지는 집요하게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난 못 속인다. 솔직히 가슴이 두근 거렸지?" 그 집요한 시선에 못 견딘 내가 부정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긍정을 했다간 단박에 자카르가 어떻게 될 거 같았다. "에이, 저런 대우를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어요? 솔직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거 뿐이라구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충격을 먹은 표정이 되었다. "허걱, 아린아~~, 언제부터 네가 저런 능글맞은 태도를 좋아하게 된 거냐? 역시 애 혼자 보내는게 아니었어. 어떻게 해서든 처음 부터 내가 같이 왔었어야 했는데... 아, 아냐. 100년 전에도 내가 데리구 다녔어야 했어. 암암, 어린 애를 혼자 보냈으니... 안그랬으면 이런 악영향은 받지 않... " 그러면서 혼자 중얼중얼 거리시던 할아버지가 어느 순간 뭔가가 갑자기 생각난 듯 헛바람을 삼키시더니 분노에 찬 얼굴이 되어 주먹을 부르르 떠셨다. "역시, 그 아펜젤러인지 아가리인지 하는 녀석이 아린에게 나쁜 영향을 준 게 분명해. 내 그 자식이 아린 옆에 붙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 능글맞고 기름칠 한 녀석이 아린 곁에 얼씬거릴 수도 없게 했어야 했었어." '허거거걱, 왜 거기서 이 얘기가 나오는 거지?' 왠지 이 상황에서 아빠를 옹호했다간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게 될 것만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나는 속으로만 식은 땀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명복을 빌어드릴께요, 아빠~!'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아빠가 퇴근해서 돌아올 시간이 다 되어가자 무서운 살기를 펄펄 풍기면서 현관과 직결된 홀 중앙에 딱 버티고 서 계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그 곳 주위로는 아무도 얼씬하지 못했고 아빠를 맞아야만 할 사명이 있는 집사 티모시만이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이이이~~~, 그건 영향 같은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냥 그 사람이 괜찮다... 라고 생각한거라고 했잖아요." "아린아, 넌 아직 그놈의 시커먼 속을 알아차리기엔 어리단다. 그러니 모르고 있는 게야. 네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그놈이 너에게 사악한 영향을 끼친 거라고." "잠깐 괜찮게 생각했다고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비약이 심하잖아요." "무슨 소리! 그딴 능글맞은 놈을 괜찮다고 생각 한 자체가 벌써 영향을 받은 거야." "같이 있은지도 얼마 안됐다구요." "아린아, 넌 너무 순진해서 그런 놈하고 단 몇 시간만 있어도 물들어 버릴거야. 내가 진작 깨달았어야 했어. 내 그 녀석이 돌아오기만 하며어어어언~~~~!!!" "할아버지이이이이이~~~~ 그럼 제 임무는 어쩌구요? 도움을 하나도 못 받게 되잖아요." "걱정 마라 아린아, 이 할애비가 있잖니? 내가 다 해결해 주마." '뭘 어떻게 해결해 줄 건데요...' 목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내뱉지 않고 도로 삼켰다. 할아버지가 나서는 거라면 아마도 왕성을 뒤집어 놓고 왕을 떡 하니 잡아 좀 흔들어준(?)다음 "저 애가 시키는 건 다 해놔. 안 하면 나한테 주으으으으~~~글줄 알어!" 라고 할껄? '음... 왠지 그것도 괜찮긴 하다.' 그 국왕이라는 사람이 별로 맘에 안 들었던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쬐끔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이어, 저택의 거대한 정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마차의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정신을 차렸다. '허걱, 그럼 그 전에 아빠는 죽는 거잖아? 어떻게 해? 어떻게? 아빠도 벌써 오시다니... 아직 할아버지의 맘도 못 돌려놨는데... 이대로 아빠가 들어오면 큰일날거야. 어쩌지?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다급해지니 평소에 잘 돌아갈 것 같던 머리도 뒤엉켜버린 듯 마음만 급했지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커다란 현관문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더욱 단호해지고 마침내 마차가 현관문 앞에서 멈추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이 일을 해결 할 뾰족한 수가 없어 머리만 쥐어뜯고 있었다. '어떻게 해애애애~~, 바보같은 아빠. 차라리 미리미리 내 아빠라는 사실을 밝힐 것이지. 이젠 나도 몰라!!' 그런데 이 아빠라는 용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에서 내리자 마자 빠른 속도로 문을 향해 다가왔다. 아빠가 발 소리를 크게 내는게 아니었지만 아빠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나와 할아버지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빨리 오시는 거지? 아, 왔다.' 닫힌 문 앞에서 멈춰 선 아빠는 시종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뭐가 그리 급한 거야? 밖에서 할아버지의 살기도 못 느꼈나?' 속으로 초조해서는 할아버지가 나서면 어떻게 해서든 말리려고 대기를 하고 있던 나는 아빠가 다급한 얼굴로 척척 들어오자 의아해졌다. 아빠 또한 들어서자마자 평소보다 매서운 살기를 날리는 할아버지를 보고 놀람과 의아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곧 무지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살기를 정면으로 맞으면서 들어왔다. 할아버지도 아빠의 그 당당한 태도에 의아했는지 살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는지 아빠가 앞에 서자마자 입을 열었다. "네 이노오오옴~~!! 도대체 내 순진한 손녀 앞에서..." 그러나 할아버지의 말은 채 절반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빠가 재빨리 중간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할아버지께 그랬다간 당장에 저택이 날아갈 정도로 할아버지의 분노를 받게 되겠지만,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의 영향력은 커서 할아버지의 분노를 잠식시키고 말았다. 물론 아빠도 그걸 알고 할아버지의 살기를 맞대고 들어온 것이겠지만... '확실히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신다니까...' "'그 존재'가 있을 것 같은 곳을 알아냈습니다." "어디냐, 그 곳이?" '그 존재'란 말에 할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접고 순순히 아빠를 따라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왜 중요한 이야기는 다 서재에서 하는 지 모르겠지만 - 자료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지... - 아빠가 '서재로...' 하는 말에 모두들 - 물론 나와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윗층에서 아랫층의 사태를 엿보던 류미르와 세이몬 -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모였던 것이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커다란 탁자 위에 이 나라 왕국의 지도를 쫘악 펼치더니 한 지점을 가르켰다. "바로 여기입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자벨리안 영지와 바로 경계선을 맞대고 있으며 진하게 표시된 - 울창하다는 뜻임 - 숲이 영지의 1/3 쯤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숲은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수도와 가장 가까운 영지의 변두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차지하고 있어 이 영지로 들어가려면 숲을 통과해서 들어가던가 아니면 자벨리안 영지나 그 반대편 인접해 있는 영지를 통해서 들어가야만 했다. "이 영지에서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조용하던 이 숲에서 갑자기 몬스터가 침입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그 몬스터들이 일반 몬스터가 아닌, 모습이 기괴하게 변형된 몬스터라고 하더군요." 할아버지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기괴하게 변형되었다고... 헝클어진 마나의 영향을 받아서인가?" 아빠의 고개가 힘차게 끄덕여졌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가능성이 클 겁니다. 헝클어진 마나가 악영향을 끼칠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 숲은 예전부터 묘한 마나의 흐름을 보이고 있어 다른 거대한 자극을 받는다면 몬스터들이 그에 대한 영향을 받을수도 있겠지요." "흐음... 그렇군." 할아버지가 아빠의 말에 일리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빠가 조심스럽게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아린이 한번 가보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아빠와 할아버지가 열심히 대화를 하시는 바람에 그 사이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뒤에서 멀뚱히 서 있던 나에게 할아버지가 시선을 돌리셨다. "아린아, 내일 당장 가보자꾸나." 내일이란 말에 별 상관 없어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왠지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가봐라'가 아닌 '가보자' 였던 것에 생각이 미친 나는 화득짝 놀랐다. "에에? 할아버지도 가시게요?" "당연한 거 아니냐? 내가 왜 여기까지 온 건데? 왜? 내가 같이 가는게 싫으냐?" "아뇨, 정말 같이 가주실 거죠? 너무 기뻐요!!" 솔직히 여기에 아빠랑 할아버지 둘만 남겨놓고 가기도 걱정되었고 할아버지가 같이 가준다면 나야 나쁠 게 없었으니 할아버지가 남겠다고 해도 내가 졸라서 같이 가자고 할 판이었다. 단지... 나와 같이 가는 녀석들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할아버지가 흐뭇한 웃음을 보였다. "헐헐헐,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나는 서재에서 할아버지 몰래 아빠와 만나고 있었다. "아빠아아아아아~~~!!" "쉿! 아린아, 칸 시스파슈타인님이 눈치채시면 어쩌려구?" "쳇, 이건 순전히 아빠 잘못이잖아요. 할아버지를 속이다니..." 내가 마땅치 않다는 듯 아빠를 흘겨보자 아빠가 실실 웃으셨다. "에이, 속인 건 아니잖냐... 그리고 너도 내 형편을 잘 알면서 그러냐? 좀 이해해줘라." "속인 거지 뭐예요? 이게 그 속 좁은 국왕이 삐져서 시킨 거란 걸 뻔히 알면서..." "뭐, 그 밴댕이 소갈딱지가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귀찮은 걸 강요하리라 예상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그 방법으로 나올줄은 몰랐지. 짧은 시간에 꽤 많이 생각했더군. 하지만 '그 존재'가 거기에 있을 수도 있잖니? 몇십년 동안 조용했던 그 숲이 갑자기 요동을 친 것도 이상한 일이고 말이다." 아빠의 설명인 즉슨 이랬다. 우리가 갈 그 영지의 숲은 항상 원인 모를 안개에 둘러쌓여 있어 '안개의 숲'이라 불렸었는데 그 숲에 한번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사람이 없어 '죽음의 숲' 혹은 '죽음의 안개 숲' 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생명체도 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숲에서 몬스터가, 그것도 기괴하게 변형된 몬스터가 뛰쳐나와 사람이 사는 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몇몇의 몬스터가 그랬을 뿐이었고 그 몬스터들도 요즘 경비가 강화된 탓에 금방 처리가 되었는데, 그걸 알게 된 국왕이 나더러 - 정확히 말하면 내가 속한 팀 이지만... - 그 숲을 조사해야 한다고 강요하더란 거였다. 물론 명령이 아닌 강요하는 걸로 보아 전에 왕명을 거부한, 그것도 아침 일찍 쫓아가서 면전에 대고 당당하게 거절해 버린 아빠를 골려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아빠는 '혹시나... ' 하는 생각에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해서 나와 할아버지와 함께 의논하러 왔다가 할아버지의 살기를 알아차리고 의논 대신 할아버지의 분노를 잠재울 방법으로 써 먹은 것이었다. 물론 자세한 설명은 쏙 빼고 '그 존재'가 있을 것 같은 내용만 골라서 말함과 동시에 자신이 전혀 강요는 안 하고 할아버지 스스로 결정한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현란한 말솜씨를 덧붙여서 말이다. 덕분에 아빠는 국왕에게 당당히 '알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테고 - 그럼 국왕이 안절부절 못할 거다. 왜냐하면 울 팀에는 국왕이 총애하는 애쉬가 끼어 있었으니까... - 할아버지와 잠시 헤어질 수 있을테니까. 더구나 할아버지가 나와 함께 가니 그 숲이 전멸할 걱정은 할 지언정 내 걱정은 안해도 되고 말이다. 아빠에게 불리한 상황을 이래저래 좋은 상황으로 바꾼 아빠의 능력에 나는 감탄이 나왔다. "만약 거기에 '그 존재'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지만 아빠는 전혀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없는게 누구 잘못도 아니잖냐. '그 존재'가 어디에 있건 그건 '그 존재' 맘이고,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러니 만약을 대비해 '한번 가보는' 거잖아." 능글능글 웃는 아빠를 보며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어휴, 나중에 어떻게 되어도 난 몰라요. 아빠가 알아서 하세요." "괜찮아, 괜찮아. 걱정할 거 하~~ 나도 없어." "폐하." 국왕은 평소 같은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레드포드 공작을 보자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평소 같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이 왠지 자신의 양심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불편했던 심기가 더욱 더 불편해진 것이었다. 이런 걸 소위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거겠지만... 솔직히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번 일을 벌임에 있어 레드포드 공작에게 잘못한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은 아무리 첨에 플레이저 공작을 골려(?)주기 위하여 한 결정이라고 해도 애쉬가 들어간 팀을 '죽음의 안개 숲' 으로 보내기로 했다는 것하며, 그것에 대한 결정을 레드포드 공작이 아닌 플레이저 공작에게 시켰다는 것 하며, 이렇게 결정된 이상 자신의 강요로 결정 된 거나 다름 없었으니 결국 그 팀이 가게 된 것 등등... 이리 돌려 생각해 보고, 저리 돌려 생각해 봐도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레드포드 공작이 누구인가? 만약 레드포드 공작이 왕녀파쪽 사람이었다면, 아 물론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아주 쬐에에에끔은 찔리겠지만 그렇게 많이 찔리지는 않았을텐데... '애초에 플레이저 공작이 약혼 거부만 안 했어도 이리 되지는 않았을 것을...' 평소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었건만... - 물론 그때는 국왕이 이치에 어긋나는 명을 안 내린 탓이었다 - 외동 딸을 끔찍히 아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렇다고 딸이 싫다는 한 마디에 자신에게 달려와서 약혼 안 하겠다고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솔직히 레드포드 자작이 어디 보통 청년인감? 이 나라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신랑감이 아니던가? '게다가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정략 약혼이나 결혼이 희귀한 것도 아니고 말야...'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국왕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서 있는 공작을 힐끔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 내 이번 일에 왕궁 근위대 소속인 은빛 기사대와 왕실 수석 마법사인 그레이턴 남작을 동행시킬 생각인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레드포드 공작은 명색이 왕실 근위대 대장이었다. 그래서 그 기사단이 잠시 빠져나가도 되겠느냐는 질문이었지만 속 뜻은 그들로써 충분하겠느냐는 거였다. 물론 국왕을 아주 잘 아는 공작은 금방 눈치채고 국왕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속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말이다. "그들 능력이라면 충분하리라 봅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보내시는 팀이야 말로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하다고 볼 수 있는 팀이니까요." 국왕이 왜 그들을 아무도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는 숲으로 보내려 했는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철이 들 무렵부터 국왕 곁에서 생활했던 터라 그의 속을 낱낱이 꽤 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국왕이 자신의 계획이 어긋나서 그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아들을 보내게 되서 미안해 하고 있다는 것도... 그들과 함께 은빛 기사단과 왕궁 수석 마법사를 보내려 하는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마법사는 둘째치고라도 왕실 근위대 소속의 은빛 기사단이라면 이 나라에서 두번째로 쳐 주는 뛰어난 실력의 기사단이었다. 물론 제일로 쳐 주는 것은 금빛 기사단이었지만, 그들은 왕의 그림자라고 할 만큼 왕이 떠나지 않는 한 왕성을 떠날 수가 없는 몸들이었기에 국왕은 자신이 보낼 수 있는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들을 보내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명목이 단순히 '조사'임에도 기사단까지 붙여주는 것은 대단한 대우인데 그 기사단이 은빛 기사단이라고 하면 대단한 대우를 뛰어 넘어 울트라 스페셜 특급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만큼 국왕이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니, 자신의 아들을 사지에 밀어 넣게 되었다 해도 공작은 왠지 웃음이 나오는 것 같았다. 물론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게다가 공작은 그들이 어디를 간다 하더라고 왠지 무사히 돌아올 것만 같은 맘이 들었기에 더더욱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폐하의 계획을 좀 더 빨리 이루어지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목숨이 달린 위험에 처해 있으면 남녀간의 사이가 가까워지기 마련이니까요. 혹시라도 이번 일을 끝내고 돌아와 그 둘이 결혼하겠다고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자 국왕의 표정이 확 펴졌다. "그렇게 생각 하시오? 허허, 나도 그럴거란 생각이 없지않아 있었다오. 그대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기쁘기 그지 없소." 밴댕이 소갈딱지에 고집은 무지 쎄서 옹고집이라 불릴 만 하고, 엄청난 보수성을 지녔지만, 자신의 잘못에 끙끙 거리며 고민하다가 말 한마디에 저렇게 표정이 확 바뀌는 국왕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묘한 벨런스란 말이야... 뛰어난 머리를 가졌으면서 저런 단순한 성격이라니... 아니, 순수하다 할까나?'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철혈냉정한 플레이저 공작도 국왕의 의도를 알면서 그냥 적당히 넘어가준 걸테지만... 왕성의 넓은 뜰에는 삐까번쩍한 갑옷들을 차려 입은 수십명의 기사들이 각자의 말을 잡고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가슴 받침대와 방패에는 소르드 왕국의 문장이 검은색 바탕에 은색으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바로 왕궁 근위대 소속의 은빛 기사단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 뒤로는 그들을 모시고 있는 시종들이 각자 커다란 짐꾸러미와 말을 데리고 서 있었는데, 이번 출정에 저들까지 갈 모양이었다. "도대체 저 쓸모 없는 것들은 왜 가야 하는 거냐?" 할아버지는 척 보기만 해도 위풍당당하고 멋드러져 보이는 기사들이 심히 못 마땅한지 눈쌀을 찌푸리며 말하자 같이 서 있던 아빠가 삐질 웃었다. "그거야 아시리안양이 소중하니까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국왕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안전 보장 조처이니까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쳇, 그런 건가? 하지만 아린하고 나만으로도 충분한데... 뭘 저런 떨거지들까지..."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저들은 칸 시스파슈타인님께서 누구신지 모르지 않습니까? 국왕이 아시리안양을 위해서 준비한 거니 너그러이 봐주시지요. 신경은 전혀 안 쓰셔도 됩니다. 단지 동행만 해주신다면..."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맘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야." 자꾸만 투덜대는 할아버지 때문에 또 뭔 꼬투리를 잡힐 지 몰라 안절 부절 못하는 아빠가 가여워서 내가 나섰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 하신데요? 어차피 우리랑 따로 행동할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된다잖아요." "그런 거와는 차원이 다르잖아. 내가 걱정하는 건 저 수십명이나 되는 늑대들이 네 옆에서 우글대는게 맘에 안 든다는 거야. 저 떨거지들은 그나마 행동은 같이 안 해도 된다지만, 저 녀석들은 행동도 같이 해야 한다며?" 할아버지가 손을 들어 가르키는 쪽에는 애쉬를 비롯한 일행들이 서 있었다. "거기다 저 녀석까지 같이 동행한다니..." 할아버지는 그 일행에 같이 껴 있던 자카르를 보며 더욱 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셨다. 며칠 전에 시내 서점에서 만났을 때 단단히 찍힌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옆에 계신데 뭐가 문제예요?" 나는 할아버지의 시선을 좀 누그러뜨리게 만들고자 할아버지의 팔에 살짝 매달렸다. "그래, 그래.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 정말 오길 잘 했다니까." 류미르와 세이몬이 괜히 하늘을 보며 딴청부리는게 보였지만 그냥 무시해버리고 헤헤 웃었다. 우리가 기사단 옆에 서 있는 일행들쪽으로 다가가자 일행들 중 몇몇이 저마다 아빠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면서 나와 같이 서 있는 할아버지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딱 한사람, 옆에 서 있는 많은 기사들 처럼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금술을 늘어뜰인 꽤 비싼 검을 차고 있는 중년 남자였다. 불그스름한 빛이 도는 금발 머리에 많은 훈련을 했다는 걸 보여주듯 그을린 피부에 넒은 이마가 호방하게 보였으며 눈가에 새겨진 부드럽게 휘어진 주름이 인상을 따스하게 만들어 보이는, 시원시원 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카르는 전에 한번 만났었으므로 호기심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걸 눈치 채고 있는 듯했다. "소개해 드리죠. 이 분은 아린의 외할아버지가 되시는 슈타인 시피르님이십니다. 굉장한 능력을 가지신 마법사이신데, 이번에 아린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슈타인 시피르란 할아버지가 자주 사용하시는 가명이었다. 할아버지가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었던 탓인지 우리가 멀리에서 올 때부터 호기심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마이터를 비롯한 죠슈아, 스와카가 굉장한 능력이란 말에 눈을 빛냈다. 아빠가 굉장하다고 소개하는 거 보니 기대가 - 뭔 기대인지는 모르겠지만. - 큰 모양이었다. 아빠는 제일 먼저 내가 처음 보는 중년 기사를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이 쪽은 저기에 있는 은빛 기사단의 단장이신 로버스 피에르 백작, 그리고 여기는 일행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애쉬 레드포드 자작, 마지막으로 왕실 수석 마법사인 마이터 그레이턴 남작입니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풀려있지 않자 빨리 끝내려는 듯 일행의 대표격인 사람들만 소개했고, 할아버지에게 이름이 소개된 자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마도 아빠의 정중한 태도에 영향을 받은 탓이겠지만서도 할아버지의 오만하고 거대한 위압감도 단단히 한 몫 했을 것이었다. "아, 그리고 저기 있는 사람은 자벨리안경입니다. 이번에 안개의 숲이 있는 브로클리 영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벨리안 영지를 가로지르기로 되었기 때문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할아버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에게 경고성이 어린 매서운 눈빛을 한번 주는 걸 잊지는 않았다. 이번 우리가 가는 인원은 숲을 조사 하기 위하여 가는 인원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했다. 은빛 기사단 전원인 50명에 그들의 시종 50명만 해도 벌써 100명이 되었고 우리 본래의 인원 (스와카, 반담, 리틀 조로, 사르하, 나, 애쉬, 류미르, 세이몬), 거기에다 애쉬와 나에게 딸린 경호 기사가 각각 둘 씩에 마법사인 마이터와 죠슈아까지 합하면 꽤 많은 숫자였다. 그러니 가로지르게 된 자벨리안 영지에 정식으로 통보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어찌된 영문 인지 이번에 또 다시 길 안내로 같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자, 출발하겠습니다." 아빠의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서로 목례를 하자마자 단장인 피에르 백작이 기사단 앞으로 나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잘 다녀 오십시오. 아린아, 너도 몸 조심 하거라." 아빠가 말이 갈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다녀 오겠습니다." 픽 고개를 돌려 버리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방긋 웃으며 대꾸해줬다. "자, 출발!!" 생긴 것 처럼 시원 시원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자 그에 맞추어 기사단이 출발하였다. 질서있게 대열을 맞추어 달리고 있는 기사단의 모습은 꽤나 멋있었다. 보통 기사단이 갑옷을 차려 입고 대열을 갖추고 있어도 멋있다고 감탄할 텐데 왕궁 근위대 특유의 화려하고 우아한 은빛 갑옷에 당당하게 깃발을 들고 달리는 그 모습은 장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멋진 기사단의 행렬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감탄이 아닌 두려움이 섞인 호기심이었다. "또 어디서 일이 발생했나봐..." "그러게.... 이번엔 좀 큰일인가 보지? 예전에 보지 못했던 기사단이 출동하네." "쯧쯧쯧... 또 꽤나 죽었겠구만..." 내가 이 곳에 온지도 벌써 몇달... 이제 가을의 절정에 달해 나뭇잎들은 빨갛게 노랗게 물들인 예쁜 옷을 입었고, 들녘에서는 한창 추수로 바쁜 모습이 흔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추수의 기쁨 보다는 흉흉한 소문들에 의해 그늘이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마을 하나, 성 하나가 전멸하는 커다란 사건에다 수도까지 전멸 까지는 아니더라 도 한번 발칵 뒤집혀졌던 일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동요하는 건 무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사건이라는게 거의 무차별적으로 아무 곳에서나 벌어졌으므로 자신들의 마을이 안전하다고 딱히 보장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도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이래나저래나 운, 아니면 운명에 맡기는 모습들이었다. 내가 처음 이 곳에 올때만 해도 사람들은 불안감에 떨며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많았었지만, 지금에는 아예 모든걸 포기하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사는 모습들에 예전에는 못 느꼈던 감정이 가슴 한 구석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너 때문이 아니니 쓸데 없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사람들을 보는 내 얼굴에 생각이 드러났는지 갑자기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툭 치셨다. "넌 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게 아니냐?" 뒤 이어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뜨끔할 수 밖에 없었다. 열심히 노력은 했지만 최선은 다 하지 않았다는 걸 나나 할아버지나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톡까놓고 말해서 사람들이 다치던 말던, 마을이 날아가던 말던 상관하지 말고 맨 처음 '그 존재'를 만났을 때 할머니의 힘을 썼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결판은 났을 거였다. 내가 죽던 '그 존재'가 죽던 말이다. 어차피 내가 해결하지 못하면 그 다음 '인도자'는 할아버지가 될 터였으니 뒷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말이다. 그럼 저 사람들은 지금까지 불안, 혹은 체념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왠지 한숨이 폭 나왔다. "제가 잘못한 걸까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풀이 죽은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오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전에 만났을 때 '그 힘'을 안 쓴걸 후회하니?" "그게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아린아, 만약에 말이다... 시간을 거슬러서 예전에 '그 존재'를 만났던 때로 돌아간다면 넌 '그 힘'을 쓰겠니?"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마도 못쓸거예요. 처음 만난 곳 바로 뒤는 성이 있었는걸요..." "그럼 된거 아니냐?" 할아버지의 단호한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자꾸만 맘에 걸렸다. "하지만..." 내가 뭐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지 눈치 챈 듯 할아버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저 사람들 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다. 저 인간들의 그늘은 저 인간들이 택한 거니까 말야." "에?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벌써 해결했다면 저들이 저렇게 체념한 채로 살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럼 넌 네가 '그 힘'을 쓸 때 그 여파에 휘말려 운 없이 죽은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겠지, 안 그러냐?" "에? 에... 아마도.. 그렇겠죠." 할아버지는 기운 없는 내 목소리가 맘에 안 드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혀를 찼다. "끌끌... 넌 그렇게 맘이 약해서 탈이다. 네가 모든 사람들을 책임 질 필요는 없지 않느냐? 모든 일에 선택을 함에 있어서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있는 법이야. 네가 운 없이 죽을 사람들의 목숨을 선택한 거라면 저들의 평화는 잃는셈 처야지. 난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헤헤헤, 그래도 신경 쓰이는데 어쩌겠어요?" 나는 어쩌겠냐는 표정으로 웃으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그래... 아직 네가 어려서 맘이 약한 탓이지. 쯧쯧, 아직 어린 너한텐 너무 과한 부담인거 내가 다 안다. 그래도 아린아, 저 인간들이 저렇게 죽상을 하고 사는 건 저 인간들이 선택한 거란다." "에? 그럴리 없잖아요. 저들이 저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된다는 듯이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번 쓰윽 보더니 입을 열었다. "흥, 막말로 저들이 저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면 병사로 지원을 해서 '그 존재'와 맞설 수 있었겠지. 물론 이길 턱이 없지만... 아니면 딴 곳으로 이사를 간다던가... 그도 아니면 딴 나라로 간다던가..." 할아버지의 말에 난 허탈해져버렸다. "에이... 할아버지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저 사람들은 그럴 여건이 안된다구요." "왜 말이 안되냐? 불가능 할 거라고 생각 하니? 하지만 정말 불가능 한 건 아니지. 정말 다른 나라로 가고 싶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버리고서라도 갈 수 있는 일이지. 그 일을 못하는 건 저들이 그 일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다른 방법보다는 자신의 집에 그냥 눌러 앉아서 운에 맞기기로 선택한 거라고."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보니 정말 그런것도 같았다. "에... 그게 그렇게 되나?" "그래, 그러니 넌 저들이 선택한 삶까지 신경쓸 필요 없다 이거야. 넌 네 앞만 바라보고, 네 일만 생각해도 괜찮아." "예에~" "하긴 뭐, 넌 지금도 인간들을 최대한 고려해주고 있으니 더 고려해 줄 필요도 없을게다." 왠지 묘하게 설득력이 담겨있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겠어요. 곧 겨울이 올테고 그럼 움직이는 건 힘들어질테니까요." 안개의 숲 3화 안개의 숲이 있는 영지는 브로클리라고 불리었다. 보통 그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성'이 영주의 이름인데 비해 이 브로클리 영지는 안개 숲 의 원래 이름을 따와 붙여진 이름이었다. 전에는 이 영지도 영주의 성을 따서 붙여져 불려 졌었겠지만 어느새 인가 안개의 숲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그 숲이 공포의, 그리 고 들어가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이 되고 나서부터 그 숲은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대신 그 영지가 숲의 이름으로 불리웠던 것이다. 하기 사,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성으로 영지 이 름을 붙여 줄 영주가 그 영지에 없기는 했다. 몇 십년 전만 해도 그 영지에는 남작의 지위 를 가진 영주가 있었다고 했다. 왕성에 몸을 담지 않고 자신의 영지에 머물며 영지만 다스 리는 소위 말하면 지방 영주에 속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남작이 다스릴 때 안개의 숲이 생 겨났다고 했다. 조사차 사람들을 들여보냈지만 들여보내는 족족 사람들은 되돌아 오지 못했 고, 나중에는 남작의 자식들마저 그 숲으로 들어가 행방불명이 되 버린 까닭에 남작의 대는 끊겨 버렸고 자식을 잃은 충격으로 남작은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 후 영지는 나라에 반환되어 새로운 영주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지만, 워 낙에 안개 숲에 대한 소문이 떠들썩 했는지라 아무도 그 영지를 받으려는 귀족은 나타나지 않았고 브로클리 영지는 저주 받은 땅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었다. 뭐, 지금이야 안개 숲만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 어나지 않는데다가 다른 영지에 비해 특별히 몬스터의 피해가 많은 것도 아니라는 게 알려 지긴 했지만 워 낙에 '죽음의 안개 숲'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각인되어 있는지 아직까지 그 땅을 탐내는 귀족도 없는데다, 왕실에서도 누구에게 줄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관리를 파견 하여 치안이나 관리해주고 세금을 걷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있는 지 없는 지 자신의 존재 감을 거의 잃어버린 영지가 이번에 울 아빠를 골려 주기 위한 재료로써 선택되는 바람에 다 시 왕실의 집중을 받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에 수도로 날아왔던, 특이하게 변종 된 몬스터들이 습격했다는 게 요즘 '그 존 재'때문에 날카로워진 중앙 귀족들의 심기를 쿡 찌른 것이겠지만... 덕분에 아빠와 할아버지 를 떨기긴 했지만, 이렇게 거창한 일행들 속에 꼽사리 끼어 조사를 하러 가게 된 건 영 맘 에 안 들었다. 더구나 그들이 다 젊은 남자들이라는 이유 만으로 내 주위로 반경 5m 안에 들어오면 -지 금은 이동 중이라 그나마 봐준 거다. 행렬이 멈추면 반경 10m로 늘어 버린다. - 할아버지의 살벌한 살기가 어린 눈길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기사들은 고사하고 내 일행들도 나에게 말 한마디 걸기는 커녕 주위에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나마 알렌과 흄은 내 경호 기사라는 이유 로 딱 4m 까지는 허용이 되었고 류미르와 세이몬은 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1m 까지는 허용이 되었지만 할아버지가 무서워 말도 붙이지 못하고 호랑이 앞에 선 똥 강아지 처럼 꼬리를 말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류미르와 세이몬의 접근을 허용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번 일행 의 모든 사람들이 내 곁에 올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살벌한 경계에 예외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은빛 기사단 단장인 피에르 백작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 은 마이터였다. 피에르 백작은 지금 현재 일행의 리더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었기에 가끔 현 재 상황이나 앞으로의 예정을 말해주러 오곤 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일절 우리 일행 - 이라고 해봤자 내 일행은 피에르 백작과 함께 맨 앞쪽 에 있었고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마이터만 동 떨어져 그들을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 근처 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접근이 허용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었다. 마이터는 할아버지의 말벗 노릇을 하고 있었기에 내 곁에 와 있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목적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 경계 대상에서 제외가 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의외로 인간들의 마법 연구에 흥미가 많았다. 우리 드래곤들이 자연스럽게 마나를 다루는 것에 비해 인간은 태어날 때 부 터 타고난 사람들이 마법 수업과 훈련을 몇 년 혹은 몇 십년이란 세월동안 받아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과 우리 드래곤이 마법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다. 드래곤이 마법을 일상 생활로 여기는 것에 비해 인간은 마법을 어려운 학문, 혹은 연구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이요 끝 없는 상상력의 소유자이자 끝 없이 노력하는 자였다. 그래서 인간들은 드래곤이 생 각지도 못한 쪽으로 마법을 연구하고 개발해내곤 했었는데 그런 독특한 성과를 할아버지는 재미있어 하시곤 했던 것이다. 마이터는 그런 할아버지의 흥미거리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기 에 정말 딱 인 대상이었고 말이다. '쳇, 하지만 이건 할아버지만 좋은 거잖아. 난 도대체 이 꼴이 뭐냐구?' 나는 속으로 투덜투덜 대며 옆에서 머리를 맞대고 신나게 토론을 벌이고 있는 두 노인네를 째려보았다. 처음 출발하던 며칠 동안은 할아버지는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이것 저것 챙겨주 며 어떤 이도 접근하지 못하게 경계하는, 자상함과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할아버지의 모습 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며칠 마이터가 접근하여 자신을 같은 마법사라 소개하여 대화가 한 번 트이기 시작하자 마치 구멍 난 둑이 터지는 것 처 럼 시작한 대화가 끝날 줄을 모르는 것이다. 덕분에 난 할아버지의 관심에서 저 만큼 멀어졌었는데 이때를 기회로 난 마음 속으 로 마이터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며 나와 놀아 줄 수 있는 이들에게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 겼다. 그러나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아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아린 아, 어딜 가냐?" '쳇....' 할아버지는 마이터와 신나게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 고 내 곁으로 접근하는 이들에 대한 경계도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덕분에 난 관심도 없는 할아버지와 마이터의 대화를 들으면서 지루함을 참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에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데 저 멀리 서 두 꼬맹이가 나를 측은하다는 듯이 바라보는게 눈에 들어왔다. '쳇, 불쌍하냐? 불쌍하면 와서 나랑 놀아줄 것이지...' 하지만 저 꼬맹이들은 할아버지를 넘 무서워해서 가까이 올 엄두도 못 낸다. 하긴 할아버지 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도망가버릴 정도인데 가까이 온다는 것 더더욱 기대하기 힘든 일 이지... 사르하라면 내 곁에 와도 할아버지가 뭐라고 안 할 테지만 어쩌겠는가? 무섭다는데 억지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내 신세만 불쌍하게 되었다. '차라리 일 빨리 끝내 고 할아버지를 아빠에게 떠 넘기는 게 났겠어. 아빠가 쬐게 불쌍하기는 하지만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훠어어어어~~~~얼 씬 나으니까.' 다시 한번 저 앞에서 시 끌 시 끌 즐겁게 떠드는 일행들을 부럽게 바라보는 나였다. 항상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그리워 하면 할수록 내 안에 다가오는 그대 안개의 숲(4) 그런 처량한 여행을 한지 2주일... - 어차피 급한 일이 아니라 조사차 가는 거였기에 특별히 서두르지 않았다. -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할아버지와 단판을 짓기로 했다. 계속 이대 로 있기에는 내 처지를 견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가을이라서 그런지 점점 해가 짧아져 일행은 해가 지기 전에 미리미리 야영을 할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잡고 저녁을 준비할 즈음 할 일이 없는 두 노인네가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앞에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딱 버티고 섰다. 근처에서 열심히 저녁 준비를 돕고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이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응? 아린아, 왜 그러니?" "할아버지, 나 류미르랑 세이몬이랑 놀래요." "잉?" 할아버지의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커졌다. "나 재내들이랑 논다 구요." 나는 저쪽에서 저녁 준비를 돕다 말고 놀라움으로 인해 헛바람을 삼키며 굳어 있는 류미르 와 세이몬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아니, 왜?" 할아버지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뭔가 짐작한계 있다는 듯 도끼눈을 뜨고는 류미르와 세이몬을 노려봤다. 그 눈길 속에는 '네 놈들이 아린 에게 뭔 수작 건 거 아녀?' 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쳇, 그럴 시간이나 있었남?' 류미르와 세이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게 보였지만 나는 내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그들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싸악 무시해 버렸다. "나 심심하단 말예요." "할애비랑 놀면 되지 않니?" "행, 할아버지는 맨 날 저 마법사랑만 놀 구 있잖아요. 그러면서 나는 못 놀게 하는 건 뭐예 요?"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마이터를 힐끗 바라보며 외치자 할아버지도 마이터를 한번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같이 놀면 되잖니?" "난 그런데 관심 없다구요. 그러니 할아버지가 저 마법사랑 노는 동안 나도 딴 애들이랑 놀 래요." 어떻게 보면 정말 유치 찬란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정말 필사적인 심정이었다. 어느새 저 멀 리에 있던 다른 일행들까지 일손을 멈추고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으... 빨리 단판을 내야겠어. 이대로는 넘 창피하잖아.' "그래도 돼죠?" 그러나 할아버지는 무정하게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돼." "할아버지이이이이~~~" " 내가 있는 한 안돼. 네가 저 늑대들 아가리 앞으로 가는 걸 내가 어떻게 보고만 있겠니?" "누가 늑대라는 거예요? 류미르와 세이몬은 전에도 같이 여행한 애들이라는 걸 아시잖아 요." "그때는 다 어린 애들이었잖냐? 지금은 안돼." 할아버지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마음먹었 다. "정말 그러실 거예요?" "정말 그럴 거다. 넌 아직 어려서 늑대들의 시커먼 속을 감당하지 못해." "좋아요. 그러면 저 할아버지랑 말 안 할 거예요." "으 잉?" 뜬 금 없는 소리였기 때문인지 할아버지의 눈이 황당함과 놀라움으로 인해 커졌다. "아린아,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삐진 척, 뾰루퉁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불퉁한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말했잖아요. 나 할아버지랑 말 안 할 거예요." 그러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정말 나랑 말 안 할거냐?" "예. 이 일이 끝나고 수도로 돌아갈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할거예요." "정말?" "예." "진짜?" "그렇다니까요." 그러자 갑자기 할아버지는 커다랗게 서글픈 한숨을 내쉬더니 처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구구구~~, 딸 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다더니 만... 지 에미가 내 속을 그렇게 썩이고 그렇 게 된 후로 지 하나만 보고 내가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는데... 금이야 옥이야 몸에 생채기 하나 날까 걱정하며 곱게 곱게 키워 났더니만... 이제는 저 딴 녀석들 때문에 이 할애비랑 말도 안한다구 하다니이이이이~~~ “에구구, 이 할애비는 억장이 무너지는구나, 무너져어어 어~~~" 할아버지의 너무나 청승맞은 말소리와 표정때문에 나는 다잡았던 맘이 점점 녹아내리는 것 만 같았다. 하기사, 무신경한 엄마가 날 내팽개치고 놀러 나간 동안 날 돌봐준건 할머니와 할아버지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정말 내가 소중한 보석인양 돌봐주셨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너무 매정한 게 아닌가... 싶은 맘이 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할아버지 한테 너무 잘못한 듯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왠지 사태가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 자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하염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 다. "그게 무슨 말이 예요? 그냥 저 애들이랑 논다는 것 뿐이잖아요." "그게 그거지 뭐냐? 할애비랑은 말도 안 한다며? 에휴우우우우~~~ 불쌍한 내 신세야... 지를 생각해서 그 머나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왔더니만..." "그, 그게... 할아버지가 나 못 놀게 할 경우 그런다고 한거지 누가 무조건 말도 안 한대요?" "자기를 위해서 내가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신경서주는 건 알아주지도 않고... 내가 철저하 게 방어하느라 얼마나 힘들 었는데에에에에..." 할아버지의 처량한 목소리는 계속 되었고 나는 점점 더 커다란 당혹감에 물들어갔다. "누, 누가 그거 가지고 뭐라고 그랬어요?" "아, 너 심심하다며?" "심심하니까 심심하다고 하죠. 맨 날 할아버지만 저 마법사랑 놀고 나는 혼자 있어야 하잖 아요." "오호라, 그러니까 내가 마법사랑 노느라 너 혼자 내 비 둬서 화난 거구나? 그런 거냐?" 나는 당혹감에 폭 빠져들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던 터라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싹 달라졌 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에...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러자 할아버지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더니 결론을 내리는 듯한 어투로 입 을 여셨다. "그래, 그렇구나. 내가 너랑 안 놀아줘서 삐진 거였구나? 오냐, 오냐, 알았다. 이제 할애비가 너랑 놀아주마. 그럼 된 거지?" '얘기가 왜 이렇게 돌아가냐?' 내가 의도한 것과는 정 반대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는 걸 깨달은 나는 패닉 상태에 빠 져 버렸다. "어, 그... 그게 아닌데..." "에이, 뭐가 아냐? 말을 들어보니 그렇구만. 이제부터는 할애비가 같이 놀아줄테니 그만 화 풀어라, 응?" 아주 정이 넘치는 어투로 말하며 바로 코 앞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는 할아버지의 눈에 장난 기가 가득 담겨 있는 걸 본 나는 그제야 할아버지가 나를 가지고 장난쳤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난 나는 빽 소리 질렀다. "할. 아. 버. 지이이이이이이이~~~~!!!"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정말 내가 할아버지에게 큰 잘못을 한 줄 알고 있는 죄 책감,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이러면서 까지 내가 내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지 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했던 것이 너무나 허망해지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익살스러운 표 정으로 귀를 후벼 파면서 웃으셨다. "원녀석두... 누굴 닮아 그렇게 목청이 큰 게냐?" 그 모습이 너무나 미워보일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이이이이이~~~!!"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그러니 그렇게 크게 외치지 않아도 다 듣는다." "너무해요. 손녀를 놀리는게 재밌으신 거예요?" 분한 마음에 빨개진 얼굴로 할아버지를 째려보면서 울먹이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시더니 나를 폭 안아 얼굴을 비비셨다. "에구구, 예쁜 내 새끼... 그래, 그 동안 심심했어? 할애비가 그걸 몰랐구나. 그래, 그래, 알았 다. 저 두 녀석이랑 같이 놀거라. 단, 할애비 시선을 벗어나면 안 된다, 알았지?" "몰라욧, 할아버지랑 정말 말 안 할까보다!!" "헐헐헐, 그럼 쓰나? 그거 가지고 할아버지를 미워하면 안돼지이~~" 안개의 숲 (5) '젠장, 젠장, 젠 장할... 이건 모두 할아버지 때문이얏!!' 할아버지의 허락이 있은 후 - 도대체 왜 그런 걸 허락 받아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류미르와 세이몬은 나와 놀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끔 할아버지가 힐끔 힐끔 바라보기는 했지만, 아예 다가오지도 못하는 것 보다는 흴 나았고 할아버지도 한 입으로 두말하는 분은 아니었기에 가끔 바라보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말은 안 했으므로 첨에는 쭈빗 쭈빗 대던 - 애들 두 아니 구 말야... - 류미르와 세이몬도 점차 익숙해져서는 거의 예전처럼 지낼 수 있 었다. 문제는... 류미르와 세이몬하고 놀기 위해서 할아버지랑 지어야 했던 그 유치 찬란한 담판이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이 되어서 그 뒤로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에는 웃음, 혹은 '아직 애였군...' 이란 시선이 담겨 있어서 날 열 받게 한다는 거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애쉬 녀석은 아직 내 근처에도 오지 못하는 처지였으므로 그 녀석에게 놀림 받을 일은 없었 지만, 할아버지가 없으면 녀석에게 두고 두고 놀림감이 될것이 뻔했다. 가끔 마주치는 녀석 의 눈에 웃음이 어려 있는걸 보면 녀석이 분명 대 놓고 웃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무지무지 비웃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기분 안 좋았 지만 애쉬 녀석이 바라보는 건 더더욱, 훠어어어어어얼씬, 100배 1000배는 더 기분 나빴기에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과 놀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훠얼씬 가라앉아 있었다. 할아 버지에게 투정이나 화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뒤로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인자하고 너그 럽기만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으므로 투정을 부려봤자 풀리는 건 없어 속으로만 삭히고 있었다. "그만 화 풀어.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게 되었잖아." "맞아, 맞아. 그리고 우리랑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좋잖아." 며칠 내내 부루퉁한 나를 달래주는 건 류미르와 세이몬 밖에 없었다. "역시... 나한테는 너그들 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 걱정 되었던 거야?" 감격에 찬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세이몬이 당연하다는 듯이 웃는다. "그러엄, 아린이 부루퉁 하면 아린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화낼 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아린이 그러면 안돼지이. 아린 할아버지는 무섭잖아." '그러니까, 내가 걱정된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날 달래는 거란 말이렷다?' 갑자기 머리속에서 뭔가가 빠직 거리며 뿌사졌다. "임마!!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나는 말 위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세이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우아악~~!!" "그래, 지금 기분도 더러운데 넌 잘못 걸린 줄 알아!!" "왜 나만 갖고 그래? 류미르도 있잖아?" 세이몬은 두 팔로 내 주먹을 막으며 처절하게 외쳤다. "아쭈? 막았단 말이지? 어쨌든 걱정 마라. 너 끝나고 류미르에게도 응징을 가해줄 테니까!!" 걸어가는 세이몬의 말 등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살벌하게 말하자 세이몬의 얼굴이 헬쓱해졌 다. 그리고 내 뒤로 류미르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모오오온~~~!! 거기서 왜 나는 걸고 넘어지냐?" 그렇게 나쁜 기분을 세이몬과 류미르에게 풀어대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자벨리안영지를 통 과하여 자카르 영지와 브로클리 영지가 맞닿은 경계선에 다다랐다. 자벨리안 영지를 통과할 때에는 자카르가 앞장 서서 길을 안내해주었듯이 브로클리 영지에서도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줄 사람이 미리 경계선에서 가까운 마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쪽 하늘 끝자락에서 오늘 하루의 마지막 빛을 비춰주는 태양이 붉게 물들어가는 시각, 우 리가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마자 몇몇의 수행인을 거느리고 나와 있던 30대 후반으로 보이 는 남자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여러분을 안내하기 위해 온 아담이라고 합니다. 지금 브로클린 영지를 관리하시는 브더셀 스 자작님의 부관입니다." 성을 말하지 않는 걸 보니 평민 출신의 기사인 모양이었다. "로바스 피에르네. 만나서 반갑군." 대표로 피에르 백작이 앞으로 나서자 아담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가 살짝 목례를 했다. "연락 받고 무척 놀랐습니다. 설마하니 단장님께서 직접 와주시리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요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폐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 주신거지." "하하하, 그렇습니까? 어쨌든 저희로 써는 기쁠 따름이지요. 숙소를 마련해 놨습니다. 오늘 은 여기서 쉬고 내일 성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브로클리 영지의 성이 있는 도시는 안개의 숲을 눈 앞에 두고 위치해 있었다. 도시를 감싸 고 있는 외성 성벽 위로 올라가거나 도시에서도 지대가 약간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성 의 높은 층에서는 푸르름을 자랑하는 안개의 숲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원래 안개의 숲이 이 정도로 가까운 것은 아니었답니다. 저도 이 곳에 온 지 몇 년 안 되 어서 잘 은 모르겠습니다만, 안개의 숲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된 후부터 숲의 면적이 조 금씩 조금씩 넓어져서 이렇나 가까워졌다는 군 요." 숲과 외성과의 거리가 불과 반나절만 걸어가면 닿을 정도인 것을 보고 당황과 놀라움을 나 타내는 일행을 보고 아담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한번 들어가면 아무도 나오지 못 한다는, '죽음' 이라는 단어가 붙는 숲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면 누구나 가 꺼림찍 해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숲은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까워 졌기 때문에 처음 이 곳을 방문한 사람 외에 이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익숙해졌기에 아 무렇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숲의 면적이 점점 넒 어 지고 있다고 했으니 더욱 더 넓어져 서 외성과 숲의 표면이 맞닿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다는 걸 눈치채 기라도 했듯이 아담은 묻지도 않았는데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뭐, 요 몇 년간은 면적이 넓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저 정도의 거리가 된 후부터는 조금도 가 까워지지 않았거든요. 전 부임 관리인이 매년 넓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매달 거리를 관측하 게 했는데 약 5년 전 부 터는 넓어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계속 거리를 관측하고 있나?" 자신이 들어가야 할 숲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피에르 백작이 묻자 아담은 당연 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제 다시 면적이 늘어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면적이 다시 늘어나기만 하면 이 도시 사람들과 성을 옮길 만반의 준비까지 끝마친 상황입니다." "그런가..." 아담의 말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일행들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자, 어서 가시지요. 브더셀스 자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담의 재촉에 성 안으로 들어선 나는 예상외로 번화하고 있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내가 알기로 이 곳은 안개의 숲 때문에 다른 지방과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할 것이며 수 익성이 큰 특산물 같은 것도 없었기에 중앙의 귀족들이나 왕의 주의를 끌지도 못해 무관심 속에 버려졌다고도 말할 수 있는 영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보통 시골 영지 비슷할 줄 알았 는데 의외로 자벨리안 영지 안에 있는 도시 못 지 않게 번화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곳까지 오는 길도 넓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게 뚫려 있었지...' "꽤 번화한 도시군요. 의외인데요?"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계속 짓고 있자 마이터가 슬며시 속삭여줬다. "빛이 적은 곳에는 어둠이 많기 마련이죠." "예?" 뜬 금 없이 왠 엉뚱한 소리인가 싶어서 그를 돌아보자 마이터가 아담을 한번 힐끗 보고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줬다. "이 곳은 나라든 상인이든 누구의 관심을 끌만한 좋은 요소가 없는 아주 평범한 영지입니 다. 게다가 안개의 숲으로 인해 영지들간의 교류가 더욱 적어지면서 거의 소외되어버렸죠. 덕분에 이 곳에는 나라의 눈을 피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마을이 되어버렸답니다. 저희 같 은 좋은 물건 있으면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따지지 않는 마법사들이나 어둠 속에서 행동하 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곳이죠." 그제야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한 내가 되물었다. "설마... 불법적인 상품이 여기서 많이 거래된다는 이야기인가요?" "맞습니다. 이곳 암시장은 무척이나 유명하죠. 일정한 기간에 한번씩 열리는데 없는게 없다 고 합니다. 암시장이 열릴 때가 가까워지면 이 곳이 무척이나 붐 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그렇게나 유명하다면 이 곳에 부임한 관리인이 모르지는 않을 테고... 그냥 눈감아 주는 군요? 별다른 일을 벌리지 않는 한 도시가 번화 하는 걸 싫어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죠. 게다가 이 곳으로 부임할 정도라면 중앙쪽에서 내쳐진 자거나 빽 이 없어서 지방 으로 돌려지는 자들 뿐 일 테니, 이 곳을 애용하는 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곳이죠." "그렇군요..." 마이터의 말에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할아버지를 바라 보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마이터와 내가 아무리 낮게 속삭였다고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못 들었을리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와 마이터의 대화였기에 안 들리더라도 마법을 써 서 들으셨을 게 뻔했다. "구경 가고 싶은게냐?" 나도 할아버지처럼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없는 게 없다 잖아요. 게다가 전 암시장이라는 건 한번도 구경 못해봤거든요. 한번 보 고 싶어요." "오냐, 알았다. 그렇게 유명하다니 나도 한번 가보고 싶구나. 그래, 그 암시장이 언제 열리 지?" 할아버지는 마이터에게 - 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 처음부터 하대를 했다. 하지만 그게 너 무나 자연스러운데다 아빠의 후광을 - 할아버지는 부인할 테지만.. - 입고 있어서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여겼기에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다. "보름에 한번씩 열립니다. 보름을 하루 전후로 3일 동안 열리지요. 음... 그러니까 지난 보름 이 열흘 전이었으니까 이제 보름이 5일 남았군요. 그렇다면... 사흘 밤에 암시장이 열리겠 죠." 안개의 숲(6) 그렇게 마이터와 할아버지와 속닥속닥 거리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성에 거의 다 도착하고 있 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성의 거대한 문이 열리자 화려하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담하 고 '예쁘다...'라는 감탄이 나올만한 아기자기한 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벽은 하얀빛의 돌 로 쌓아져 있었고, 성의 지붕은 파란색이었다. 거기에 단순한 모양의 성은 척 보기에 실용적 인 면을 가장 중요시하여 만들어진 듯 보였다. 하지만 예쁜 건 예쁜거였다. 내성 안으로 들어서자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보였는데 두개의 굵은 기둥이 입구 위를 덮고 있는 아치형 모양의 지붕을 받치고 있었는데 지붕이나 기둥이나 모두 하얀 빛의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머나~~ 정말 너무너무 예뻐요, 그쵸? 이런데서 사는 사람은 정말 좋겠어요." 내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밀집되는 바람에 어느새 내 곁으로 밀려 왔는지 사르하가 바로 옆에 서서 황홀한 눈으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무지 예쁘다." 나도 사르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아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분이 브더셀스 자작님이십니다." 가벼운 차림을 한 훤칠한 키에 마른 몸매를 가진 남자가 걸어와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 였다. "이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쉴러 브더셀스 입니다. 브로클리 영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피에르 백작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얼굴이 너무나 홀쭉해서 볼이 쏙 들어가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였다. 하지만 덕분에 턱선이 강하게 드러나 왠지 강인해 보이는 듯 했 지만 얼굴 전체적으로는 약간 어두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야, 너 쉴러 아니냐? 브더셀스 자작이란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했었는데 정말 너였구 나. 이게 도대체 얼마만이냐?" 정말 반갑다는 듯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피에르 백작이 앞으로 나서서 그의 손을 움켜쥐었 다. 브더셀스 자작도 무척이나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로바스? 네가 여긴 어쩐일이냐? 네가 왕성 근위대에 들어간 건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만날줄은 정말 몰랐다." "핫핫핫, 정말 대단한 우연이지? 이번에 내가 지휘하는 은빛 기사단이 조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오길 잘했구나. 오랜만에 널 이렇게 보게 되고 말이다. 수도에는 왜 안 오는 것이 냐?" "아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나 저나 너 아들을 낳았다는 소리는 들었다. 늦었지 만 정말 축하한다."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 하는 말에 피에르 백작은 정말 기쁜 듯이 또 한번 크게 웃어 제꼈다. "푸하하하, 고맙다, 고마워. 핫핫핫, 언제 수도로 오면 우리 집에 한번 들려라. 내 아들 내미 얼굴 한번 봐야지. 그 녀석이 우리 집사람을 쏙 빼닮았지 뭐냐? 아, 그건 그렇고 넌 어떠냐? 너도 이제 서둘러서 결혼 해야지? 좋은 때 다 지나가기 전에 한번 알콩 달콩한 재미는 봐야 지?" "후후후, 아직 하고 싶은 맘은 없다." 둘이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듯 이야기가 끊임 없이 계속 이어졌다. 덕분에 오도가도 못하고 그들 주위에 멀뚱히 서 있는 우리는 가만히 있다가는 밤 새도록 여기에 서 있을것만 같은 위기감에 젖어들었다. "둘이 사이가 좋은건 알겠는데, 우린 언제까지 여기 서 있어야 하지?" 오옷, 역시 할아버지!! 결국 참다 못한 할아버지가 약간의 노기를 담아서 투덜거리자 피에르 백작과 브더셀스 자작 이 얼른 떨어졌다. "핫핫핫, 정말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기쁘다보니 본의 아니게 실례를 했군요. 이 쪽은 어렸을때 부터 같이 자란데다가 같은 기사 학교를 졸업한 친구입니다." 시원시원한 피에르 백작은 사교성도 뛰어난지 어느새 브더셀스 자작과 우리 일행 사이에 끼 어들어 서로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익숙한 듯 브더셀스 자작은 미미한 미 소를 지으며 조용히 서서는 피에르 백작의 소개에 간간히 고개만 숙여 보였다. 그는 아마도 약간은 소심함을 가진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서로의 소개를 끝난 뒤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푸짐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자 브더셀스 자작은 우리가 피곤할 거라며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로 미루고 모두 일찍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서두 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먼 길을 왔던 일행들은 정말 피곤했었던 터라 자작의 배려에 진심 으로 감사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성에 도착한 시간이 거의 저녁때가 다 되었기 때문 에 제대로 씻을 수 없었던 나는 내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뜨거운 물을 준비시켰 다. 그 동안은 노숙을 하거나 마을에서 묶었기 때문에 목욕을 한 번도 못했던 것이다. 노숙 할 때는 노숙하느라 못했고 마을에서는 마을에 큰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그냥 넘어갔 었다. 그러니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된 뜨거운 목욕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 정말 좋~~~타. 역시 뜨거운 물에 몸을 담 그는게 최고라니까... 아, 이번 일 끝나면 류 미르랑 세이몬 데리고 온천에나 한번 갈까나?" 이 곳 성이 작은편인 데다가 갑자기 많은 손님이 들이닥친 상황이라 나는 따로 시녀를 배정 받을 수가 없어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 목욕 준비 시키는 것 도 좀 무리한 건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약간 양심이 따끔따끔 거린 나는 괜히 좋은 기분 망치고 싶지 않아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어때? 그냥 뜨거운 물만 준비해준 거잖아. 어차피 딴 사람들도 목욕할지 모르고 말야..." 이왕 이렇게 한 거... 란 생각에 오래 몸을 담그고 있다 보니 욕조에서 나올 때는 물이 다 식어 있었다. "에구구... 여기에 맛사지 까지 받았으면 좋~겠지만... 그것 까지 바란다는 건 너무한거겠지? 쩝, 아빠 저택이 그립구나... 거기에선 매일 저녁 목욕에 맛사지를 받았는데..." 몸을 부드러운 면가운으로 감싸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목욕으로 인해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자 내 방에 달린 베란다로 나갔다. 목욕을 하느라 방 안에 불을 완 전히 다 꺼놓은 상태여서 누가 내 방을 들여다 보았더라면 아마도 자는 줄 알았을 거다. 그 래서였을까? 베란다 문을 조용히 열고 나갔는데 옆 베란다에서 누가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 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켜 놨었더라면 아마 조금 더 소리를 낮춰서 이야기 했겠지만 지 금은 조금만 귀를 기울여 들으면 다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하기사... 평소의 톤으로 이 야기를 하는 거겠지만, 밤이라는 상황이 주변을 너무나 조용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더 크게 들리는 건지도 몰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애쉬 녀석과 마이터, 그리고 죠슈아였다. 아마도 옆방이 그들이 묵고 있는 방이 었나보다. 나는 나도모르게 그들이 나와있는 테라스 쪽으로 좀더 다가가서 그늘로 몸을 숨기고는 좀더 자세히 그들을 살폈다. 조용히 그냥 방 안으로 돌아갔으면 되었을테지만, 것보다는 그들이 뭔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탓이었다. 셋 모두 손에 술잔을 들고있는 걸 보니 한잔 하다가 더워져서 밖으로 나 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번에 조사하게 될 안개의 숲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덧 요즘 이 나라를 뒤 흔드는 '그 존재'에 대해 화제가 옮겨 갔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 기를 조용히 엿듣고 있던 나는 마이터가 '그 존재'의 일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깊숙히 개 입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하기사... 수석 마법사를 이런 일에 놀리고 있을 이유가 없겠지... 그런데 왜 난 지금까지 그 걸 몰랐던 거지?' 아빠가 말 안해준 것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에 간간히 마이터가 끼어 있던 걸 알면 서도 그런걸 눈치 채지 못한 내 어리석음에 한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대화에 할아버지가 거론된 것이었다. " '시피르'란 성이 흔한 성인가요?" 애쉬의 진지한 음성이 질문을 던지자 마이터가 그에 답을 했다. "글쎄요... 어차피 '시피르'란 성이 우리나라에 있는 성이 아니니까 알 수는 없지요. 하지만... 붉은 머리를 가진 '시피르' 성을 가진 마법사라...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치하는 점이 많 군요." 그러자 죠슈아가 놀라움으로 인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슈타인 시피르님이 '그 살인마'의 아버지라는 겁니까?" 애쉬는 그런 죠슈아를 힐끔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단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뿐입니다. 둘 다 붉은 머리 에 '시피르'란 성을 가지고 있고 둘 다 마법까지 쓸 줄 아니까요." "하, 하지만... 만약 정말 둘이 부녀 관계라면, 저희 아가씨는요? - 죠슈아는 마이터 제자이 기도 했지만 아빠 가신이라서 날 아가씨라고 부른다. - " 죠슈아가 이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하자 마이터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어쩌면 그녀의 딸일지도 모르지." "헉!" 죠슈아와 내가 거의 동시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런... 할아버지의 가명을 딴 걸로 바꿨어야 했는데....' 내가 속으로 당황하며 때 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데 침착한 마이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플레이저 자작이 '그 살인마'의 딸이라고 하기엔 여러가지로 맞지 않는 점이 있어. 시스파 슈타인님이 '그 살인마' 의 아버지라는 것도 그렇고 말야." "어떤 점이 안 맞는다는 겁니까?" 애쉬가 약간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저 녀석은 은근히 '그 존재'와 할아버지가 관계 있다는 걸로 이야기가 흐르길 기대했나 보다. 그런 애쉬를 보고 마이티가 뭔가 비밀스런 이야기를 해주듯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선 '그 살인마'와 플레이저 자작의 관계를 들어볼까요? 우린 '그 살인마'가 지금 현재 나 이가 55세가 넘었다고 추측하고 있죠. 시피르 경이 왕성에서 모습을 감춘 건 30년 전이었고 그 때 나이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20대 중반, 혹은 초반이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 니까?" 그러자 죠슈아와 애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둘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이 티는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스러운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작 각하께서 수도에 모습을 드러내신 건 그 뒤로 10년이 지난 다음이었죠. 그때 가 25세셨구요. 그러고보면 '그 살인마'와 공작은 나이차이가 10년 이상이 나는군요. 흠, 그 러고보니... 플레이저 자작은 지금 18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작께서 수도에 등장하 신 뒤 대충 2년 뒤에 태어나셨군요." 알아 듣겠냐는 듯 마이티가 바라보자 죠슈아와 애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 이터가 계속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애쉬가 입을 열었다. " '그 살인마'는 하프 엘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10년 차이 정도야 아무렇지 않을 것 아닙니까? 지금도 20대 중반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마이터는 애쉬의 말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단지 어깨만 한번 으쓱해 보일 뿐 말을 계속 이어갔다. "플레이저 자작이 태어나기 1년 전 쯤 외교사절로 켈튼 연합국으로 가셨었죠, 아마? 그리고 플레이저 자작도 자신이 켈튼 연합국 출신이라고 밝혔고 말입니다." '허걱, 그랬었어? 정말 우연의 일치였군...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마이터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만약 '그 살인마'가 플레이저 자작의 친모라면, '그'는 19년 전에 켈튼 연합국으로 가서 바 람을 피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연인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가 살해 당하 자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어버린 여인이 2년만에 바람을 피러 알베르트 산에서 켈튼 연합국 까지 갔다고 하는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죠슈아는 재빨리, 애쉬 녀석은 마지 못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쯥, 그렇다면 그런 줄 알것이지... 저 애쉬 녀석은 뭐가 저리 의심이 많은 게야?' 그래도 마이터는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앞의 둘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자 신도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자, 그럼 '그 살인마'와 플레이저 자작 사이는 해결 된 거고, 이제는 시피르님과의 사이를 해결해 볼까요?" 그러자 이번에도 마이터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애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프 엘프이므로 아버지쪽이 인간이고 어머니쪽이 엘프일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 그럴수도 있죠. 하지만 레드포드 자작, 시피르님의 나이가 몇으로 보입니까?" 뜬금 없는 마이터의 질문에 애쉬는 황당해 하면서도 그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글쎄요... 그 분은 젊어 보여서 말이죠... 그냥 보기에는 40대 중반, 후반으로 보이는데... 많 이 잡아보았자 50대?" 마이터는 애쉬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음을 지었다. "제가 보기에도 그 분은 많이 잡아보았자 50대 중반으로 보입니다. 18세의 손녀를 두기에 적당한 나이 아닙니까? 하지만 50대의 딸을 두기에는 턱없이 젊은 나이죠." 명쾌한 마이터의 추리에 죠슈아가 자신의 손바닥을 탁 치며 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군요." 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아빠의 장인이 '그 살인마'와 연관있다는게 맘에 걸렸었나 보다. 하 지만 애쉬는 그 결론이 맘에 안 든 모양이었다. "남작님의 말씀도 맞지만... 너무 일치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저 자식이... 너 나중에 가만 안 둔다!!' 그러나 마이터는 내 심정과는 달리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죠.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나이 문제가 걸립니다. 단 하나지만 가장 확실한 걸림돌이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마이터가 이상하게도 말 끝을 흐리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죠슈아와 애쉬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해결하려면, 뭡니까?" 애쉬의 질문에 마이터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점을 해결하려면... 시피르님이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면 모든 점이 다 맞아 떨어지죠." '힉~!!' 마이터의 말에 나는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더욱 더 안 맞을 겁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종족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우선 인간이 아니면 그렇게 늙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늙은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애쉬 녀석이 또 한번 반박했다. "글쎄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본다면.. 폴리모프를 한다는 건 마 법을 사용할 줄 아는 종족이니까... 앨프가 있는데, 엘프는 자존심이 강한 종족이죠. 귀를 감 추는 일이 있어도 늙은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까지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습니 다. 그리고 마족이 있긴 한데.. 마족이라면 신관이 못 알아챌리 없죠." '헷, 못알아 챈답니다. 세이몬은 마족인데 못 알아채잖아요.' 나는 마이터의 말에 싱긋 웃으며 속으로 부정했지만 애쉬는 긍정하는 표정이었다. "에... 그리고 폴리모프하는 종족은... 아, 마법의 종족으로 일컬어지는 드래곤이 있군요." 왠지 그 말을 하는 마이터의 말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고, 그 말을 듣는 애쉬는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농담은 그만둬주십시오. 제 생각이 지나쳤나 봅니다." '헐,헐,헐... 농담이래....' "자, 너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서 잘까요? 내일도 바쁜 하루가 될테니 푹 쉬는게 좋겠지 요." 마이터가 먼저 몸을 방 쪽으로 돌리자 애쉬와 죠슈아도 곧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나는 그늘에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피다가 털퍼덕 주저 앉았다. '허거거걱~~!!'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쭈그리고 앉아서 발이 재렸던 것이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에 발이 엄청나게 찌릿찌릿해져 눈물까지 핑 돌았다. '아구, 아구, 아구...'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혹시나 옆 방에 있는 이들이 들을까봐 이를 악물고 엉금엉금 기다 시피 몸을 움직여 방 안으로 들어와 재빨리 찌릿찌릿 거리는 다리를 주물러댔다. '아야야야... 이거 엿듣는 것도 할 짓이 못되는 구만.... 에구구 아파라....' 안개의 숲(8) 다음 날, 나는 첫 동이 트기도 전에 힘겹게 일어났다. 아침 잠이 많은 나로써는 무지 힘든 일이었지만, 미리미리 물과 바람의 정령인 운디네와 실프에게 부탁해 동 트기 전에 뭔 수를 써서든 나를 깨우라고 말해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잘 때 입었던 면가운과 침대 시트 가 흠벅 젖은 가운데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운디네와 실프가 나를 깨우기 위해 무지 차가운 물을 온 몸에 뿌려댔기 때문이었다. "쳇, 내가 이게 뭔 고생이냐..." 내가 이렇게 일찍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어제밤에 들었던 마이터, 애쉬, 죠슈아의 대화를 할아버지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그 존재'와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 을 거라고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애쉬 녀석의 말투나 얼굴 표정으로 보아 그 결론을 번복 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할아버지에게 말 해서 대비를 할 생각이었다. 원래는 어젯밤 그 즉 시 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아직 잠 들지 않은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면 안될 것 같았기에 새벽을 택해 어렵사리 일어난 거였다. "으이구.. 그 애쉬 녀석은 예쁘게 볼려구 해도 예쁘게 볼 수가 없단 말야..." 아직도 비몽사몽한 정신을 세수로써 정신을 차린 다음 재빠르게 옷을 입고 조용히 방 문을 열고 나갔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둑어둑한 복도는 전날 밤에는 환하게 어둠을 밝혀 줬을 등 불조차 모두 꺼져있어 무지 음침한데다 지나다니는 사람의 기척 또한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 다. 그런 정적이 감도는 복도를 뚜벅 뚜벅 걸을 수 있을 만큼 나는 강심장이 아니었기에 도 둑처럼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사사삭 거리면서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할아 버지의 방은 내 방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같은 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복도를 살금 살금 걸어오던 여세를 그대로 몰아 소리 안나게 조용히 문을 열어 방안으로 들어가 역시 살금살 금 할아버지의 침대로 다가 갔다. 어차피 바닥에는 두터운 융단이 깔려 있어 그냥 걸어도 소리가 안 날 정도였으므로 할아버지의 침대로 가까이 갈때까지는 내가 걷는 소리가 전혀 안 들렸었다. 그러나... "허걱~~!!" 침대를 들여다 본 나는 화들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무지 이른 시간이라 곤히 잠들어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을 깨고 할아버지는 침대 속에 누워 얼굴만 내놓고 멀뚱멀뚱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후아아암~~!! 이 시간에 왠 일이냐?" 정신을 차리고 계시긴 했지만 무지 졸린지 할아버지는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폈다. "에구에구, 할아버지 놀랐잖아요. 일어나계셨으면 일어난 기척이라도 내시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침대 가까에 놓고 거기에 털썩 주 저앉았다. "그러는 너야 말로 이 시간에 뭐하는 거냐? 도둑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다니... 난 또 재수 없 는 쥐새낀줄 알았지." 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태세를 갖추자 할아버지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등을 베 게로 받치고 편한한 자세를 취했다. "에... 살금살금 온건 사방이 조용하니까 나 혼자 큰소리 내지는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나 도 모르게 그런거죠 뭐... 아, 할아버지 그건 그렇고 할 말이 있어요." 그렇게 입을 열기 시작해 어젯밤에 들었던 대화를 간략하게 할아버지에게 말하자 가만히 듣 고 있던 할아버지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흐음... 그런데, '그 존재'가 나랑 같은 성을 썼나보지?" 그제야 나는 '그 존재'에 대해 알아낸 걸 할아버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저 일을 처리하는데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빠도 마찬 가지인 듯 했지만.. 뭐, 아빠야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으니까 안 챙겨드린 건 내 책임이 컸다. "어머나, 할아버지께는 말씀 안 드렸네요. 예전에 '세라 시피르'라는 이름으로 있었대요. 30 년 전에 마검사라고 알려졌고, 왕실 근위대 소속 기사로 있었다고 했어요." "에잉, 그런건 미리 미리 말해주지 그랬니... 쩝, 그들이 의심을 안 할수가 없겠구나... 혹시 혈육이 아닐지 의심은 안하더냐?" 낭패한 기색으로 턱을 쓰다듬던 할아버지가 묻자 나도 덩달아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에...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요..." "뭐, 앞으로 안 한다는 보장은 없겠구나..." 나는 아예 기가 죽어서 할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어쩌죠, 할아버지?" "글쎄다... 어쩌겠냐? 그냥 가만 있어야지. 물어와도 잡아뗀다면 제까짓 것들이 의심을 한들 뭘 어쩌기야 하겠냐? 뭐, 나중에 정 안되면 한바탕 뒤집어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다가 기가 죽은 나를 힐끔 보더니 히죽 웃었다. "뭐, 넘 걱정 말아라. 그까짓 녀석들을 내가 어쩌지 못하겠느냐?" '그 말이 더 걱정스러워지는 건 왜일까나....'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어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할아버지가 더 주무시게 방을 나 왔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잠이 깨버려서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밖으로 나왔다. 방에 가봤자 할 일이 없었으므로 아침 전까지 산책으로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막 해가 제 모습을 다 드러내놓아 아침 안개를 걷고 있는 시간이어서 쌀쌀하고 상쾌한 공기가 기분을 청명하게 만들었다. "음~!! 아침 잠만 없다면... 이렇게 아침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은데 말야..."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성을 반바퀴 삥 돌아 뒤쪽으로 돌아가니 그 곳에는 나 말고도 아 침 일찍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어?' 그는 브더셀스 자작이었다. 아침 수련을 즐겨하는지 손에는 검을 들고 약간 넓은 공터에 서 있었다.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더니 검끝을 들어올린 상태로 가슴 앞으로 검을 들어올려 진지한 눈 으로 검 끝을 한동안 바라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 동작으로 내리긋더니 부드 럽게 회전 시켜 다시 옆으로 그었다. 자세히 보니 그게 모두 다 기본 동작인데 거기에 원을 접목시켜 모두 다 이어진 한 동작 처 럼 움직이는 것이었다. 너무나 진지한 눈빛과 몸짓이어서 아침 수련이 아니라 마치 어떠한 의식을 치르는 듯 보여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겼다. 천천히 움직이는 검의 동작에서는 부드러움과 강함이 느껴졌는데 막 사라지는 아침 안개속에서 진지한 모습 으로 수련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와~! 수련 하는게 이렇게 멋져 보이는 건 또 처음 봤다...' 가까이 가보고도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그를 방해하는 것 같아 그냥 그 자리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자작은 꽤 오랫동안 같은 동작을 수십번이나 반복하더니 오늘 분량은 다 했는지 맨 처음 동 작처럼 검을 가슴 위로 천천히 올렸다가 옆으로 내렸다.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꽤 힘이 들었는지 동작을 다 마친 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매달려 있 었으며 호흡도 약간 가쁘게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태로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입을 열었 다. "거기, 누구지?" 누가 보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고요하지만 분노가 깃든 어조였다. 나는 찔끔해서는 앞으로 나서서 그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다. 우연하게 본 것이라고는 하지 만 몰래 훔쳐본 건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보다도 먼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핫핫핫, 미안하다. 일부러 엿보려던 건 아니라, 아침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 약간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명랑한 어조로 말하며 내 반대편 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 람은 피에르 백작이었다. "로바스, 너 였냐?"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한 감정을 나타내려는 듯 브더셀스 자작이 살짝 인상을 찡 그렸다. "미안해. 그보다도 넌 여전하구나? 매일 아침마다 수련하는 건 둘째치고 여전히 그 독특한 수련을 하는군." "그렇지..." 브더셀스 자작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근처 땅에 떨어진 검집을 주으려고 허리를 굽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피에르 백작이 불쑥 제안을 했다. "우리... 오랜만에 대련이나 한번 해볼까?"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의아한 듯이 자작이 바라보자 피에르 백작은 괜히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 거렸다. "아니, 대련 해본지 꽤나 오래 되었잖냐. 그동안 너도 강해진 것 같아서... 어때? 한번 해볼 래?" 자작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기껏 들었던 검집을 다시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 한번 해보자." 둘은 서로의 검을 빼어들고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진지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오랜만에 대결을 해서 그런지 둘다 좀 긴장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둘은 서로를 향해 빠르게 짓쳐 들었다. 캉!! 카강!! 경쾌한 금속이 부딧히는 소리가 들리면서 둘은 탐색을 하는 듯 몇번 가볍게 맞부딧히더니 다시 두어걸음 떨어져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대단한데? 많이 늘었구나?" 피에르 백작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네자 자작도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넌 여전히 강하군..." 그리고는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미소를 지우더니 다시 맞부딧혔다. 이제 탐색전이 끝나 고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서는 듯 둘은 아까보다는 더욱 날카롭고 빠른 속도로 검을 부딧혀 나갔다. 자작의 검술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강한 힘을 내보이는 반면 백작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운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작이 거의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반면 백작은 이곳 저곳 마치 미꾸라지처럼 자유 자재로 자작의 공격을 빠져나가며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백작의 검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진다 싶더니 자작의 검은 공격보다는 방어쪽으로 치우치 게 되었고 백작의 검은 그 사이를 뚫으려고 동분서주 하는 모습을 보였다. 백작은 처음 긴 장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여유를 가지고 검을 휘두르는 반면 자작이 굳은 얼굴로 낭패한 기 색을 비치는 것을 보아 백작의 실력이 한수 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작도 그냥은 지지 않겠다는 듯 철벽같은 방어를 보여 백작은 쉽게 자작을 항복 시 킬 수 없었다. 몇번이나 더 부딧혀봐도 자작을 무너뜨릴 수 없자 백작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 아마도 자작을 한번에 쓰러뜨릴 묘수를 생각하려는 듯 했다. 그 틈을 타 자작은 숨을 고르 고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하앗!!"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둘이 다시 맞부딧혀 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작과 강하게 맞부딧힌 백작이 옆으로 살짝 기울면서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자 작이 빠르게 그의 가슴으로 검을 찔러들어갔다. 이대로 있으면 백작이 지게 될 것이었다. 하 지만 안타깝게도 휘청이는 듯 하던 백작이 오른 발을 축으로 왼 발을 바깥쪽으로 빼는 동시 에 몸을 반바퀴 돌리더니 자작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던 검을 위로 크게 휘둘러 자신의 가슴 을 노리고 들어오는 자작의 검을 피하는 동시에 그의 검신을 위에서 내리쳤다. 덕분에 목표 를 잃은 자작의 검은 땅으로 향했고 자작의 검 끝이 땅에 닿는 순간 백작의 검은 자작의 목 을 겨누고 있었다.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백작의 검을 흔들리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자작은 한숨을 쉬면서 뒤로 물러났다. "졌군." 백작은 그런 그를 향해 시원한 미소를 보내며 자신의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아아... 하지만 나도 쉽게 이긴 건 아냐." "그런가?" 다시 한번 땅에 떨어진 검집을 주워드는 자작의 등을 향해 백작이 다시 말을 던졌다. "오랜만에 아침 운동을 했더니 땀이 많이났군. 아침을 먹기 전에 다시 한번 도전하겠는가? 그러자 땅에 주워든 검집을 허리에 차면서 자작이 말했다. "너 먼저 들어가라. 난 한바퀴 돌아보고 들어갈테니." "그럴까? 그럼 나 먼저 들어갈께. 수고해라." "그래, 나중에 보자." 안개의 숲(9) 브더셀스 자작은 멀어져가는 피에르 백작을 씁쓸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자리를 떠날 줄 몰 랐다. 그러더니 어느새 백작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허무한 눈길로 하늘을 한번 쳐 다보고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능력은 따라갈 수 없는 건가?" 그리고는 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 뒷모습이 너무나 축 쳐저 있어서 나는 그에대한 동 정심이 뭉클 뭉클 솟아 올랐다. '저런... 저 사람도 꽤 실력이 좋은 거 같은데...' 아마도 아까 그가 수련하는 모습에 꽤 감동을 받았는지 나는 그 둘이 대련을 할 때에도 자 작을 맘 속으로 응원했었다. 그런데 응원하던 이가 져버려서 축 처진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 는 걸 보니 다가가서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몰래 엿보고 있었 다는 걸 알리는 것이므로 포기하고는 그가 멀어진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엥... 정말 아쉽다... 대결도 꽤 괜찮았는데 졌다고 저렇게 기운이 빠지다니 말야... 아, 둘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라고 했지? 그럼 자작은 어렸을때 부터 백작을 라이벌 상대로 생각했겠 구나.. 학교도 같이 다녔다니 대련도 많이 해봤을거고 말야... 그런데 한번도 못 이겼나봐. 자 작은 척 보니까 꽤나 노력파인것 같은데... 아쉽네... 이번에 일 끝나면 백작은 수도로 돌아갈 거니 언제 또 만나서 대련할지도 모를테니 아까 자작이 이겼으면 좋았으련만... 아, 자작의 마음을 풀어줄 만한 일이 뭐 없을까나? 백작보다 나은 능력이 하나라도 있으면 될텐데 말 야..." 그렇게 혼자 중얼중얼 거리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날 툭 쳤다. "아린!!" "왁~~!!"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곧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는 내 머리 위 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헤헤헤, 여기야, 여기!!"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세이몬이 공중에 떠서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세이몬? 너 뭐하는 거냐?" 세이몬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다시 한번 웃어주고는 가볍게 땅으로 착지했다. "아린이 보이길래 그냥 뛰어 내려왔지." 위를 올려다보니 3층에 있는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류미르가 내다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이, 아린. 오늘따라 일찍 일어났네?" "아아...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뭐, 어쨌든 만났으니까 같이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류미르, 아린이랑 난 같이 갈테니까 식 당에서 만나~~!!" 세이몬이 아직도 내다보는 류미르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며 나를 잡아 끌었다. "에? 벌써 아침 먹을 시간이 된거야?" 밥 먹으려면 아직 한참 남은 줄 알고 있던 나는 벌써 해가 하늘로 둥실 떴다는 것을 깨닫고 놀랬다. "하하하, 모르고 있었어? 어쨌든 밥먹으러 가자, 밥!!" 아침을 먹고 나자 자작은 우리 일행들에게 안개 숲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해줬다. 하 지만 그래봤자 안개 숲이 알려진 게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던 걸 다시한번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나서 숲으로 출발하기 위해 일행들이 모였다. 어차피 저번에 이상하게 변형된 몬스터들이 한번 출현하고 난 뒤 별다른 일은 없어 수도에다 보고만 하고 신경을 끊 고 있었지만 국왕이 조사하라고 사람까지 내려보낸 이상 자작도 가만 있을 수가 없었는지 자신을 위시한 5명의 기사가 합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은빛 기사단의 눈치로 보아 그들은 합류한게 아니라 안내하기 위해 따라가는 걸로 여기는 듯 했다. 뭐, 어찌되었든 며칠이 걸릴 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우리는 일주일분의 식량을 가지고 출발했다. 안개의 숲은 외성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 오후가 되자마자 우리는 숲의 외각에 닿을 수 있었다. 숲은 안개의 숲이라고 불릴만큼 고요했고, 그 고요함의 원인인 듯한 안에 빽빽하게 자리잡 은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흐르는 안개가 얼핏 보였다. "흐음.. 그냥 겉으로 얼핏 봐서는 평범한 숲같습니다만..." 들어가기 전에 잠깐 외각에서 숲 안을 기웃 기웃 살펴보던 백작이 고개를 갸웃 하면서 마이 터를 돌아보았다.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으십니까?" 마이터는 백작의 말에 말에서 내려 조금 더 숲으로 다가가 겉으로 나와있는 나무를 만져보 기도 하고 요리조리 살펴보기도 하다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땅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일어 나서 숲 안으로 한발 짝 들어가보기도 하고 팔을 뻗어보기도 하더니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 다. "거참..." "왜 그러십니까?" 마이터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오자 덩달아 얼굴이 굳어진 백작이 물었지만 마이터는 백작에 게 대꾸는 안 하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숲 전체에 마나가 인위적으로 가두어진 것으로 보아 결계가 쳐져 있는듯 합니다만, 무슨 결계일까요?" 그러자 할아버지도 말에서 내려 마이터와 숲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 두 노인네는 숲 앞에서 나무들을 살펴보며 열심히 속닥속닥 거리더니 급기야는 파이어볼을 만들어 숲 안으로 던져 넣어보기도 하더니 곧 둘다 심각한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던 자작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분들도 알아내시지 못하는 군요. 하긴, 예전에 이 곳으로 조사하러 왔던 마법사들도 결계 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무슨 결계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죠. 아마도 직접 들어가보면 알겠지 만, 들어가기만 하면 나오지는 못했으니..." 하지만 자작의 예상을 깨고 일행에게로 돌아온 마이터는 결계의 정채를 밝혔다. "정신계열 결계군요. 가장 골치아픈 결계지요. 차라리 물리적인 결계였다면 정면으로 맞부딧 혀 깨부시고 들어가는게 장땡인데... 저런 계열은 결계의 중점을 깨부시지 않는 한 스스로 이겨내야하는 거니 원...." 끝으로가서는 거의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마이터에게 백작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 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별 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닙니다. 저건 중심점을 깨지 않는한 풀리지 않는 결계인데 그 중 심점이 뭔지 모르니 지금으로서는 결계를 깨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뭐, 숲을 통채로 날려 버린다면 혹 모르겠지만..." "그럼 어떻게해야 합니까?" "그냥 들어가는 수 밖엔 도리가 없죠. 정신력이 강한 자는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 는 죽게 되겠죠. 그러나 솔직히 결계를 통과한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많이 지칠텐데... 결계 넘어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이상 그냥 들어간다는건 좀..." "그러니 들어간 자들이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한 거겠지. 게다가 저 안에는 몬스터들이 있다 는 것이 확실한거 아닌가?" 중간에 끼어든 할아버지의 말에 마이터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에 몬스터들이 나왔다는 걸로 봐서는 저 안에 몬스터가 있다는 이야기인 데..." 백작은 굳은 얼굴로 뒤에 서 있는 자신의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무표정한 얼굴로 조 용히 서 있기는 했지만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모습에 백작은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어쨌든 우린 들어가야 하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 들어갈 수 밖에 없죠. 신관님, 기사들에 게 축복을 내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일행틈에 있던 사르하가 걸어나왔다. "제가 당연히 해야할 일인걸요." 신의 가호가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안 하고 그냥 들어 가는 것 보다는 나았다. 어쨌든 이걸로 조금이나마 마음을 잡아줄 수 있을테니까. 사르하의 축복이 끝나고 나자 마이터가 다시한번 다짐을 주었다. "이 안에 있는 결계는 정신적인 결계입니다. 정신적인 결계 중 가장 흔한 것은 일행이 몬스 터로 보이게 하여 서로 싸우게 한다거나 자신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 덥친다던가 하는 등 등의 정신적으로 약한 면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시기 바랍니다. 물리 적인 타격은 없을 겁니다. 자신이 상처를 입어 고통을 느껴도 그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사들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을 했다. "자, 그럼 출발합시다." 사르하와 리틀 조로 - 위험하니까 남기로 했다. - , 그리고 자작의 부관인 아담등등의 배웅 을 받으며 우리는 조심스레 앞으로 전진했다. 중심에는 마법사들이 섰고 마법사를 몇겹의 반원으로 포위하는 형식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물론 면적이 넓어져 전진하는데 힘이 들긴 하겠지만 서로 위험할 때 즉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최적의 형태였기에 그 모습을 유지하기로 한 것이었다. 말들은 아무리 얼르고 달래고 채찍을 휘둘러도 안개 숲 외각에서 안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버텨서 하는 수 없이 모두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걸어서 가야만 했다. "아린아, 나에게서 떨어지지 말거라."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걱정되는 듯 내 손을 잡고 당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잡고 있으면 떨어지고 싶어도 못 떨어지겠는데 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의상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옆에서 가는 류미르, 세이몬, 알렌, 흄을 바라보며 경고했다. "할아버지 옆에서 많이 떨어지지 말도록 해." 숲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들어가자 숲 안에서만 맴돌던 안개들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마치 침입자를 살펴보려는 듯 일행들의 발목부터 서서히 감싸 올라오기 시작했 다. "결계가 시작된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마이터가 큰 소리로 외치며 라이트를 시전하자 마법사들이 모두 그를 라이트를 시전하였다. 중심에 여러개의 빛의 구가 생겼으니 자칫 일행과 떨어졌더라도 그 구체를 보며 방향을 잡 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러개의 빛의 구들도 안개가 완전히 일행들을 감싸자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의 사람들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지독한 안개였다. 그러자 백작의 목소리가 저 멀 리서 들려왔다. "옆 사람과 떨어지지 마라. 할수 있다면 끈으로 서로 연결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다음에 또 뭐라고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백작과 거리가 벌어지는지 점점 희미해지면서 나중에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볼수 있는 건 오직 나를 잡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 뿐, 옆에서 같이 가고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 그리고 알렌이나 흄의 모습은 어느새 사 라지고 없었다. "어라? 어디 갔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잡고 있다는 생각에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던 나는 사라진 류미르등이 걱 정되어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그들을 찾으려고 했다. "류미르으으으으~~~!! 세이모오오오온~~~!! 어디 있는 거야아아아~~? 나 여기 있으니 일루 와아아아아아~~~" 있는 힘껏 크게 소리쳐 불부른 뒤 잠시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으나 내 목소리만 메아리가 되 어 되돌아 올 뿐 기다리던 류미르와 세이몬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휴우우우움~~~!! 알레에에에에엔~~~!! 어디야아아아~~~!!" 류미르와 세이몬을 기다리던 때 보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내 부름에 대 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아~ 정말... 완전 떨어져 버렸나 보네. 그러길래 내가 들어오기 전에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 고 충고를 해줬건만... 내 말을 안 듣고 어딜 쳐다보다가 떨어진 거야? 어쩌죠, 할아버... 어 라라?" 나는 당연히 나를 잡고 나와 같이 서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할아버지가 서 있을 곳 으로 고개를 돌렸건만,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대신 그 자리는 유유히 흐르는 안개가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꼬옥 잡혀 있을 줄 알았던 내 팔은 허공에 그 냥 들려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할아버지이이이~~~~!! 어디 계세요오오오오~~~?" 애들 찾으려다 졸지에 나까지 미아가 되어버린 꼴이라고나 할까?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할아버지까지 불러보았지만 할아버지의 반응은 어디에서도 들려 오지 않았다. "이거 참.. 환장하겠네... 내가 언제 이런 결계를 겪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기에 우왕좌왕 하던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선 결계를 빠져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너무나 짙은 안개속에서 방향을 전혀 몰랐기에 실프를 불러 방향을 안내 받으려고 했다. "실프!!" 평소 처럼 부르면 즉각 튀어나와 살포시 미소를 짓는 실프를 기대했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실프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엥? 왜 얘까지 안 나오는 거야? 야, 실프!! 나오라니까!!" 한번 더, 좀 더 강하게 소리를 쳤지만 실프는 요지부동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참... 정신 적 결계라고 하던데 정령까지 영향을 받는 건가? 어디, 카사, 노움, 운디네!! 다 나와봐!!" 그러나 그들도 실프와 마찬가지로 나타나지 않았다. "에구구... 안 나타나네... 어쩌지?" 평소에 말을 잘 듣던 정령들이 나타나지 않자 나는 꽤 당황했지만 이 곳이 결계 안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지. 그럼 위로 날아가볼까? 그럼 결계를 뚫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혹시나... 하는 생각에 플라이 주문을 외워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만 보고 한참을 날아오른 것 같은데 내 머리 위에 있는 안개는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도 가도, 날아 올라도 올라도 끊없이 안개만 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꽤 많이 날아오른 것 같은데... 결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이 정도로 높 을수가 있나?"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만 보이자 나는 초조해졌지만 조금만 더 가보기로 하고 더욱 더 빠르 게 날아올랐다. 하지만 결국 날아 올라도 올라도 보이는건 안개뿐이었고 결국 초조해 하던 나는 마음의 안 정을 잃은 덕인지 지쳐버리고 말았다. "헥헥, 드래곤이 플라이 마법 쓰다 지쳤다고 하면 누가 믿으려나..." 결국 위로 날아올라 결계를 뚫는 건 포기하고 나는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정말, 정말, 정말, 황당하게도 1분도 채 되지 않아 내 발은 땅에 닿을 수가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아아아?" 절망감에 나는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안개의 숲(10) "나 어떻게 해...." 이럴 때 기대어 앉을 수 있는 나무라도 한 그루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곳은 숲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나무는 커녕 그 흔한 풀이나 돌맹이 조차도 안개에 가려 하나 도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서 있을 때 나에게 달린 종아리 밑의 발 조차 보이지 않겠는가. 망망한 바다에 홀로 난파되어 떠도는 심정이 이럴지...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서 밑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앉아있는 사이 점차 초조 함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힘이 솟던가 어떻게든 해야 겠다는 의지가 솟는 것이 아니라 허탈한 감정과 모든 것을 포기하자는 자포자기 심정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이래저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이대로 있자, 어떻게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데 내 앞쪽에서 갑자기 인기척과 함께 안개 사이로 안개가 아닌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어렸다. '사람?' 혹시나 나 처럼 헤메고 다니는 일행중 한 사람, 아니면 나를 찾으러 온 이들일 수 있었기에 나는 튕겨나듯 일어나 그 그림자를 놓치지 않으려 있는 힘껏 그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면서 자칫 잘못하다 그 그림자가 나를 보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두려워 목청껏 소리쳤다. "할아버지이이이~~~!! 할아버지세오오오~~~? 저 여기 있어요오오오오~~~!!"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 그림자가 멈칫 하는게 보였다. 그 모습에 힘을 얻은 나는 더욱 더 크게 소리쳤다. "거기 누구예요오오오~~~? 여기 사람 있어요오오오~~~!!" 물론 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은 없었다. 그 그림자는 내가 자신에게 다가 오길 기다려 주는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왠 일인지 내가 그 쪽으로 열심히 뛰어가도 그 그림자와 나는 거리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가도 가도 그 흐릿한 그림자만 계속 보 일뿐이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그 그림자마저 잃어버릴 것 같아 겁이 더럭 난 내가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 해보았지만 여전히 그림자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결국 그림자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지쳐버려 제자리에 멈춰섰다. 지금 멈춰서면 저 그림자를 놓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너무 거세게 뛰는 심장이 아프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다 팔, 다리가 후들거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헉, 헉, 헉.... 젠장할... 헉, 헉, 헉..." 부들거리는 두 손을 두 무릎에 댄 체 허리를 숙여 헥헥 거리던 내가 조금의 기력을 되찾고 허리를 폈을때는 저 멀리 앞에서 아른거리던 그림자가 사라진 후였다. "헉, 헉, 헉... 이런... 헉, 헉..." 내 체력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뺨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린 땀을 거칠게 닦는데 왠지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헉, 헉, 헉... 흑, 훌쩍, 헉... 훌쩍, 흑...."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훌쩍거리는 꼴이란...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한탄하면서도 훌쩍임을 멈추지 못하는 묘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데 내 서러움을 하늘이 알아준 것인지 아까 사라졌 던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너무 지친 나는 그 그림자만 멀거니 바라볼 뿐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데, 생각지도 않게 그 그림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열받는건 내가 아무리 뛰어도 그림자와 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것에 비해 그 그림자는 쉽게 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었 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그림자는 둘로 나뉘었다. "헉, 훌쩍... 한, 헉.. 사람이... 훌쩍, 아니었네.... 헉, 훌쩍..." 다가오는 그 두사람이 제발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기를 빌면서 얼굴을 차지하고 있는 땀과 눈물을 재빨리 닦아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더라도 울고 있던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아 서였다. 그들이 점점 다가올 수록 침착함을 찾아가던 내 심장이 기쁨과 기대감으로 다시 거 세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에 따라 그림자가 점점 뚜렷한 사람의 실루엣을 나타내었고 곧 나는 그들이 한 사람은 펑 퍼짐한 로브를 입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바지에 망토를 둘렀다는 걸 알아챘다. '누구지? 스와 카와 반담인가?' 점점 더 빠르게 뛰는 심장은 그들의 모습이 얼핏 보일때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 습을 드러낸 순간 그렇게 거세게 뛰던 심장이 한 순간에 딱 정지해버렸다. "헉!!" 놀람으로 인해 눈이 부릅떠지고 입이 떡 벌어진 채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잘 아는 사 람들이 아니라 잘 아는 드래곤들이었다. 내 앞에서 몇걸음 떨어진 채 나에게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둘은 바로 엄마와 할머니였던 것이다. 간편한 차림에 초록색의 멋진 망토를 두르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엄마와 하얀 로브를 입고 청 초하고 우아하게 서 있는 할머니... "어, 어, 어...." 너무나 당황하고 놀라 혀가 굳어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엄마가 픽 웃으며 다 가와서는 내 어깨를 탁 쳤다. "뭐하는 거냐, 아린아? 엄마 첨 보냐?" 내가 기억하는 호탕하고 당당한 엄마의 어조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뒤로 들려오는 인자한 할머니의 목소리... "너무 그러지 말거라. 갑자기 만났으니 놀랄만도 하지..." 할머니는 나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보고싶었단다, 아린아..." 따뜻하고 포근한 품안... 마음 속에 안도감이 가득 차 올라자 나는 나도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으며 할머니의 품안으로 더욱 더 파고들었다. "저도요, 할머니.... 너무, 너무, 보고싶었어요." 그러자 엄마의 심통 맞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머니, 그 앤 제 딸이라고요. 그렇게 하니 마치 어머니가 아린 엄마 같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니? 네가 없는 동안 이 애를 나와 칸 시스파슈타인이 돌봤다는 걸 모르 니?" "그래도 그렇죠..." 엄마의 투덜거림을 무시한 할머니는 나를 살짝 떼어내고는 내 눈을 찬찬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동안 힘들었지?" 따뜻한 할머니의 말에 나도 할머니에게 미소를 되돌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할머니." "그래, 그래... 장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단다. 이젠 다 괜찮을 거야."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에 왠지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리고 귓가에 너무나 감미로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한잠 자거라. 많이 피곤했지?" "우웅... 하지만, 할머니... 아직 제 일을 끝내지 못했는 걸요?" 할머니의 목소리에 잠이 물결처럼 쏟아져 졸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웅얼대자 뒤에서 엄마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후훗, 걱정 마라. 그건 할머니와 내가 다 해결했다." 다 해결했다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며 뒤에 서 있는 엄마를 쳐다보니 엄마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나는 다시 할머니의 품에 폭 안겨 있었고 주위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어라아아~? 여어기이가아아~ 어어디이야아아아~?" 졸음에 잠겨서 그런지 말소리가 괜히 길게 늘어졌다. 그러자 엄마가 쿡쿡 웃었다. "여길 몰라? 여긴 할머니네 집이잖아?" 그러거보니 사방이 붉은 바위인데다 꽤 훈훈한걸 보니 영락없는 할머니네 집이었다. "어어어언제에에에 여어어어기이이로오오 와아아았지이이이~? 아아아지이이익 내애애애이이 이임무우우르으으을...." 길게 늘어지는 내 목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엄마가 내 말을 중간에 끊으며 입을 열었다. "네 임무는 내가 해결했으니 잔소리 말고 그냥 자!" '내 임무가 해결 됐다고? 그렇구나.. 엄마가 내 임무르으으으을, 뭐, 뭐라고?'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고개를 들고 할머니 품에서 빠져나와 엄마를 바라보며 다시 재차 확인 했다. "엄마가 내 임무를 해결했다고요?" 엄마는 귀찮게 왜 자꾸 묻냐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대꾸해줬다. "그래." '엄마가 해결했대....' 황당하다는 듯이 엄마를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여기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그래, 그랬구나... 그랬었었지... 그랬었었어....' 옆을 바라보니 할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린아, 왜 그러니? 피곤하지 않니?" 그리고 뒤에서 엄마가 틱틱거렸다. "빨리 자라니까?" 하지만 두 분의 말대로 할머니의 품에서 다시 잠을 청하는 대신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 다. 그리고는 엄마와 할머니를 계속 번갈아보았다. "아린아?" "왜 그래?"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두 분의 모습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조 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후후후..."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다시는 못 볼줄 알았던 두 분을 이렇게라도 해서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뻤고, 그래도 저게 실체가 아닌 허상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슬펐다. 할머니가 의아 한 표정을 지우고는 다시 인자하게 미소를 띄며 물었다. "아린아, 왜 그러니? 모든건 다 해결 되었으니 이제 쉬려무나." 할머니의 말에 나도 피식 웃으며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할머니와 엄 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불러보았다. "할머니, 엄마!!" 두 분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런 둘을 향해 나는 더욱 더 큰 웃음을 보이면서 한마디 더 했다. "사랑해요." 어아니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서로 마주보는 둘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뒷걸음 질 쳤다. 내가 가는 방향에는 할머니 레어의 입구가 있었던 것이다. "아린아, 어디 가니?" "여기서 자라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하는 둘을 향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이며 웃었다. "괜찮아요.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안으셔도 돼요." 그리고는 단호히 몸을 돌려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두 분은 거기 계속 서 있는 듯 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할머니 레어의 입구를 나오자마자 레어는 마치 신기루였던 것처럼 씻은듯이 사라져 버리고 그 곳에는 내가 계속 지겨울 정도로 봐왔던 뿌연 안개만이 존재했다. "역시..." 허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왠지 정신을 차린 듯해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앞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여기에서 주저 앉을 수는 없지. 암, 암... " 안개의 숲(11)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마땅히 방향을 잡지 못해 어쩔 줄 몰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아까 만났던 할머니를 생각하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할아버지가 생각난 거였다.그리고 할아버지를 찾아갈 방법도... "그래, 마나를 탐색하는 방법이 있었지?" 할아버지가 아무리 대부분의 마나를 갈무리해뒀다고는 하지만 본체의 마나가 어디로 간 것 은 아니었다. 게다가 설사 할아버지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라도 찾을 수 있을 터였다.나는 즉시 눈을 감고 내 몸속의 마나를 사방으로 골고루 퍼트리기 시작했다. 이 곳이 결계 안이라 마나가 이상하게 응집되어 있기는 했지만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최대 한도로 마나를 많이 퍼트려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자 내 주위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 여기저기에 몇몇의 희미한 마나 집합체가 잡히기 시 작했다. 그러나 그 마나의 집합체들은 원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깜빡깜빡 거려 그 쪽으로 향하는 건 포기하고 좀 더 뚜렷한 마나 집합체가 어디 없나 살피던 중 저 멀리에서 강하고 뚜렷한 마나 덩어리가 잡혔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마나 덩어리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마나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닷!!" 방향을 탐지 한 나는 눈을 번쩍 뜨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리고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가끔가다 서서 그 마나의 기운이 계속 거기에 있는지 살폈다.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더이상 불안은 없었고, 나를 유혹하기 위한 어떠한 것도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피이잉~~ 하는 뭔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개가 서서 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응? 결계를 나온 건가?" 좀더 속력을 빨리해서 할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안개가 완전히 걷혀 버렸고 그러자 엄청나게 넓은 공터가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공터가 얼마나 넓었는지 꼭 잠실 야 구 경기장만했는데 그것도 전체의 모습이 아닌 듯 내 뒤에서는 아직도 엄청나게 많은 안개 가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고 내 앞 저 멀리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며 헐래벌떡 뛰어 오고 있었다. "아린아아아~~!!" "할아버지이이이~~~!!" "에구구, 인석아... 내가 내 곁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말라고 일렀건만..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냐? 할애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뛰어온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나를 폭 안더니 ?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마땅히 방향을 잡지 못해 어쩔 줄 몰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아까 만났던 할머니를 생각하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할아버지가 생각난 거였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찾아갈 방법도... "그래, 마나를 탐색하는 방법이 있었지?" 할아버지가 아무리 대부분의 마나를 갈무리해뒀다고는 하지만 본체의 마나가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설사 할아버지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라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즉시 눈을 감고 내 몸속의 마나를 사방으로 골고루 퍼트리기 시작했다. 이 곳이 결계 안이라 마나가 이상하게 응집되어 있기는 했지만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최대한도로 마나를 많이 퍼트려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자 내 주위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 여기저기에 몇몇의 희미한 마나 집합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마나의 집합체들은 원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깜빡깜빡 거려 그 쪽으로 향하는 건 포기하고 좀 더 뚜렷한 마나 집합체가 어디 없나 살피던 중 저 멀리에서 강하고 뚜렷한 마나 덩어리가 잡혔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마나 덩어리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마나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닷!!" 방향을 탐지 한 나는 눈을 번쩍 뜨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가끔가다 서서 그 마나의 기운이 계속 거기에 있는지 살폈다.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더이상 불안은 없었고, 나를 유혹하기 위한 어떠한 것도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피이잉~~ 하는 뭔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응? 결계를 나온 건가?" 좀더 속력을 빨리해서 할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안개가 완전히 걷혀 버렸고 그러자 엄청나게 넓은 공터가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공터가 얼마나 넓었는지 꼭 잠실 야구 경기장만했는데 그것도 전체의 모습이 아닌 듯 내 뒤에서는 아직도 엄청나게 많은 안개가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고 내 앞 저 멀리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며 헐래벌떡 뛰어 오고 있었다. "아린아아아~~!!" "할아버지이이이~~~!!" "에구구, 인석아... 내가 내 곁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말라고 일렀건만..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냐? 할애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뛰어온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나를 폭 안더니 질책 어린 말을 하면서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헤..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할아버지의 손을 놓쳤지 뭐예요?" "그래, 그래,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품에서 빠져나와 아직도 흩어지고 있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공터에는 나무나 풀 등은 없었지만 대신 미이라처럼 바짝 마른 시신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마도 예전에 이 숲에 들어왔다가 정신 결계에 당해 죽은 사람들일 것이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결계를 깨신 거예요?" "그래, 인석아... 널 찾으러 다시 들어가는 것 보다는 결계를 깨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그랬단다. 나도 네가 없어졌다는걸 결계 중심체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에 알았거든."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내 손을 꼬옥 잡으며 할아지가 대꾸했다. 완전히 안개가 겉힌 공터는 잠실 운동장 보다도 더 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엄청난 숫자의 나무들이 빽빽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나무들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 전체가 나무로 뒤덮인 숲일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거였다. 공터가 완전히 드러나면서 나와 같이 들어왔던 사람들도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서로 떨어지지 말라고 했지만, 나 처럼 저절로 떨어져 있었던 것인지 사람들은 모두 각각이 흩어져서 별별 모습을 다 보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벌써 당했는지 죽은듯이 누워 있었고, 어떤 이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주저 앉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두려움에 차서 검을 휘두르거나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안개가 걷혔건만 아직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했다. "에휴, 정신 공격이 무섭긴 무섭네요. 어쨌든 저들 부터 정신 차리게 해야겠어요."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나는 가까이에 있던 은빛 기사단 소속일 기사가 얼굴을 땅에 처박고 덜덜 떨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쳐 저 멀리 세이몬과 류미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세이몬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앉고 이곳 저곳 정신 없이 뛰어다니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아아악~~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그럴께요오오오~~~ 아아악~~" 도데체 마계에서 뭔 일을 당했길래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지.. 뭐.. 짐작이 아예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당하긴 했다. 할아버지는 세이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소매 속에서 30cm 정도의 굵은 봉을 꺼내더니 한번 휙 휘둘렀다. 그러자 굵은 봉 속에서 가느다란 길이의 막대가 뻗어나와 길다란 지팡이가 만들어졌다. 할아버지가 맨 처음 꺼낸 그 30cm는 손잡이인 듯 했다. 할아버지는 그걸 쥐고는 세이몬이 이 쪽으로 달려올 때를 기다려 가만히 밑으로 뻗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세이몬은 정신 없이 달려오다가 할아버지가 내민 지팡이에 걸려 대지에 코를 박고 말았다. 꽈당!! 넘어지는 소리가 무지 요란한 것으로 보아 엄청 세게 박은 게 분명했다. 그래도 죽지는 않은 모양인지 잠시 후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부시시 일어나더니 아직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휙휙 돌아보았는데 돌아보는 세이몬의 코에 쌍코피가 주르르 흘러 내려 참으로 과관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휙휙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세이몬이 날 발견하고는 번개같이 나에게 달려와 덥썩 안기며 울부짖었다. "으허허헝 아리이이인~~~!! 나 무서웠어... 무서웠어어어어~~!! 으아아아앙~~!!" 너무나 처량한 세이몬의 모습에 그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해주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할아버지가 그의 머리통을 지팡이로 세게 내리쳤다. 따악~!! "누구에게 달라붙는 게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세이몬은 할아버지가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자 아쉬운 소리 한번 못 하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할아버지는 한번 더 눈을 부라리는 걸로 세이몬을 봐주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는 류미르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을 앞으로 뻗어 필사적으로 휘저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엘리사아아~~ 그만 하라니까. 그만해애애~~~!!" '엘리사라... 훗, 뭘 보고 있는지 알겠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친구의 불행한 모습을 보고 히죽히죽 웃는 못된 나 대신 할아버지가 류미르의 뒤로 돌아가서 예의 그 지팡이로 류미르의 머리통을 장렬하게 내리쳤다. 따아악~~!! "우왓~!!" 불시의 습격에 머리통을 부여잡던 류미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 나와 세이몬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안심을 하기 위해서인지 나를 보고는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아린, 혹시 엘리사 못 봤냐?" '흠흠, 아무리 친구의 불행이 내 행복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겠지?' 나는 류미르에게 씨익 웃어주며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훗, 류미르? 엘리사는 여기 없어. 넌 환상을 본 거야." 그러자 류미르는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웃어제꼈다. "하하하, 그랬구나. 그랬었어." "시끄럽다. 그만 방정 떨고 딴 사람들이나 정신 차리게 해라." 류미르의 웃음은 계속 될 것 같았지만 매정한 할아버지의 말에 류미르는 얼른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에~" 그리고 나서 세이몬과 류미르, 그리고 나와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마이터는 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자신의 주위로 반원형의 실드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제일 형편이 나아 보이는게 역시 연륜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런 마이터의 실드를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또 한번 내리치며 더불어 전기 자극까지 짜릿하게 주자 마이터가 충격을 받고 눈을 떴다. "시피르님!!" 마이터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반색하며 얼른 실드를 거두고는 일어났다. 류미르때도 그렇고 세이몬, 마이터까지 지팡이 하나로 해결하자 나는 경의로운 눈으로 할아버지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와아~ 할아버지, 그 지팡이 되게 쓸모가 많네요." "푸헐, 나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멋 부리느라 드워프에게 하나 달라고 해서 가지고 있던 건데 말이다." 그 뒤로 할아버지는 그 경이적인 지팡이로 계속해서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죠슈아는 꼴 사납게 바닥에 웅크리고 주저 앉아서는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다가 할아버지에게 한대 맞고 정신을 차리고 나를 알아보더니 갑자기 내 앞에 덮썩 무릎 꿇고 엎드려서는 연신 '아가씨이~, 아가씨이~' 하고 중얼댔다. '도대체 뭘 본건지...' 피에르 백작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아서는 눈을 하얗게 치켜뜨고 허공을 노려보며 연신 '이럴수가... 믿을 수 없어...'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검은 그에게 불과 세네걸음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허상과 싸운 듯 했다. 그리고 브더셀스 자작은 아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검을 자신의 옆 땅에 꽂고는 손은 검의 손잡이를 꼬옥 쥐고 있었는데 검을 쥐고 있는 손과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모두 할아버지의 만사형통 지팡이에 한대씩 맞고는 정신을 차렸지만 워낙 충격이 컸던지라 쉽게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땅에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정신을 아예 잃은 사람들은 류미르와 세이몬에 속속들이 엎혀와 죠슈아와 마이터에게 치료를 받고 다행히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할아버지에게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스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사람이 많은가 하면 심지어는 자살을 한 사람과 결계에 당해 영원한 잠에 든 사람도 꽤 있었다. "그래도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 이 정도면 양호한 겁니다." 내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는지 죠슈아가 창백한 얼굴에 맺힌 땀을 닦으며 다가와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마이터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시피르님께서 일찍 결계를 깨뜨려주시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겁니다. 이것만 해도 다행이죠." 은빛 기사단의 기사 50명 중 죽은 사람이 10명, 움직이지 못할 중상을 입은 자는 20명, 경상이 20명으로 온전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게다가 단장인 백작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기사단은 완전 전멸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번 일로 싸울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나와 할아버지, 류미르와 세이몬, 지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보탬은 될 마이터와 죠슈아, 스와카와 반담, 흄, 그리고 애쉬 녀석에, 경상을 입고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은빛 기사단 7명에 자작의 휘하에 있는 후들거리기는 하나 겨우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기사사 3명 정도였다. 거의 80여명이 들어와서 이제 20명만이 남았다. 이 인원으로 조사를 마쳐야 하는 것이다. 뭐, 그래도 다 대단한 인물들이었으니 걱정은 별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드넓은 잠실 운동장만한 공간에는 흙먼지만 날릴 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건물은 커녕 오두막 한 채도, 나무 한그루는 커녕 풀 한포기도 없는 맨 흙바닥 뿐이었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지 허탈했다.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나 처럼 주위를 둘러 본 모든 이들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다 허탈한 표정들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군요." "글쎄 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걸 확인하기 위해 그 고생을 했다니..." "그 동안 죽어간 사람만 억울해지는군요..." 애쉬와 흄이 나란히 주저 앉아 주위를 멀거니 둘러보며 주고받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모든 이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장 날라오는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 "멍청한 것들. 아무 것도 없는 곳을 뭐하러 이런 엄청난 결계로 감싸고 있냐? 결계 만드는게 어디 땅 파듯이 쉬운 줄 알아?" 그 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할아버지 쪽을 쳐다보니 그 곳에는 할아버지와 마이터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역시 연륜이 쌓인 사람은 다른 것인지 두 노인네만은 허탈한 표정 대신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날카롭다 못해 레이저 빔이라도 튀어나올 만큼 눈을 형형히 빛내며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 저기, 할아버지? 뭐라도 발견하신 거예요?" 그 동안 할아버지의 위압적이고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 때문에 감히 말 붙일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내가 조심스레 묻자 할아버지는 그 날카로운 눈길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마이터처럼 금방 뭔가를 눈치 채지 못한 내가 약간은 실망스러운지 푸욱~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에휴, 아린아... 아무것도 못 느끼겠느냐?" "에? 에에.... 뭐가 있나보죠?" 할아버지의 태도에 팍 기가 죽은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지만 역시 눈에 보이는 건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 뿐이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해 주위만 계속 두리번 거리는 날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다가와서는 꽁 하고 머리에 알밤을 먹이셨다. "뭐 하는 거냐? 눈으로 보지 말고 마나로 느껴야지!" 그 소리에 얼른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얼른 눈을 감고 마나를 주위에 흩어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나도 얼른 그들과 마찬가지로 마나의 흐름을 느껴보았다. 과연... 전에 느꼈던 정신적 결계가 깨어져 이 넓은 공간에만 감돌던 대량의 마나들이 이제는 공중으로 흩어져 평범한 마나의 흐름을 보이고 있었지만 공터의 정 가운데에 자연 보다 더 농도가 짙은 마나가 모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하..." 내가 눈치 챈 듯 하자 할아버지는 머리를 다시 쓱쓱 쓰다듬으며 계속 설명을 해줬다. "아린아, 정신적 결계는 보통 물리적 결계보다 얼마나 마나가 더 드는지 아느냐?" "에? 아, 아뇨... 그게요, 한번도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요..." 다시 한번 기가 팍 죽은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냐? 하긴 뭐.. 안 해봤으면 모를 수도 있겠지. 보통 물리적 결계보다 정신적 결계는 마나의 소모량이 2배는 더 든단다. 결계 수식도 더욱 복잡하지. 그런데 여기 있는 정신적 결계는 나조차도 감탄할 만한 뛰어난 결계란다. 그런 결계로 이런 넓은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면 이 결계를 만든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겠찌?" "예. 대충은요..." "그래, 그리고 그런 능력자라면 결계 안에 또 다른 결계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겠지. 저렇게 사람의 오감만 속이는 간단한 결계 정도는 식은죽 먹기겠지... 안 그러냐?" 할아버지가 마지막 말을 내뱉음을 신호로 마이터가 공터 중앙을 향하여 농구공 보다 더욱 큰 불덩어리를 날렸다. "파이어 볼~!!" 할아버지가 설명을 해주는 동안 주문을 외우고 있었나 보다. 정신적 결계 때문에 지친데다 사람들까지 치유해줬으면서 저정도의 마법을 또 쓸수 있는 마이터도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마이터의 손짓에 날아간 불덩어리는 공터의 중앙에 다가가자 미처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무엇과 부딧힌 듯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긴장을 한 채 바라보는 가운데 큰 불덩이를 맞은 공터 중앙에서는 마치 아지랑이 같은 형체가 흐릿하게 생기더니 곧 띄엄 띄엄 떨어져 심긴 나무들에게 둘러쌓인 음침한 집 한채가 나타났다. 얼마나 관리를 안 했는지, 낡고 먼지가 얼룩진 후줄근한 모습이 멀리에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집을 둘러싼 나무들 중 하나가 마이터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불타서 쓰러지고 있었다. "결계가 있는 걸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모르는 사람의 감각은 감쪽같이 속여버리는 결계지." 그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또 한번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마자 후즐근한 집의 다 떨어져 가는 문이 나가 떨어지면서 수십마리의 몬스터가 줄지어 빠져나왔다. "흠, 결계가 깨질 때를 대비해 놨나 보군. 그럼,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수십마리의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는데도 할아버지는 태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로 일어나서 서로 자신의 무기를 주워 들었다. 그 몬스터들은 참으로 괴상한 몰골들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얀스크 산에서 만났던 몬스터들 처럼 비정상 적으로 큰, 보통의 오크보다 2배는 커다란 몸집에 어떤 종인지 모를 정도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어떤 오크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팔은 오우거의 팔에 다리는 스톤 골렘의 다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것은 분명히 미노타우르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건만 그 피부는 시퍼러딩딩한데다 중간 중간에는 철이나 돌로 보이는 넓적한 조각들이 마치 갑옷인 양 붙어있었다. 어떤 몬스터는 팔이 양 옆으로 각각 2개씩 붙어 있는가 하면 어떤 몬스터는 팔이 비정상 적으로 길어 손등이 땅에 질질 끌릴 지경이었고, 어떤 몬스터들은 입이 비정상적으로 커서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안의 날카롭고 커다란 이빨은 그 큰 입도 비좁다고 생각 되었는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도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괴상하고 종 조차 알아볼 수 없는 희안하게 생긴 몬스터들이 거의 30마리가 다가오자 사람들은 참담한 신음성을 흘렸다. 저런 기괴한 몬스터들은 척 보기에도 보통 몬스터들 보다 힘이 더 강해 보일 듯 한데 그런 몬스터들을 한 사람 앞에 두마리씩은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 공터에 나란히 누워 있는 수십명의 사람들까지 지키면서 싸우려니 암담하기만 할 터였다. "하아, 저기 아무것도 모르고 누워 있는 사람들이 부럽구만..." 기사 중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를 표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그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뭐가 부럽단 말이냐? 아무 것도 모르고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기지 못할 상대일망정 맞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 기사의 도리가 아닌가?" 잔뜩 쉬어서 가라앉은데다가 힘이 없어 듣기 거슬렸지만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촛점 없는 멍한 눈으로 앉아 있던 브더셀스 자작이 부들부들 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은빛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지만 백작은 여전히 촛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만 있어 실망을 금치 못하며 환한 기색으로 자신의 상관에게 달려가는 자작 휘하의 기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작의 휘하 기사 중 제일 멀쩡한 이가 얼른 자작을 부축하려 했지만 자작은 매서운 눈으로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부축할 필요 없다.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그러면서 자신의 검을 지팡이 삼아 끝까지 혼자 일어서더니 힘겨운 걸음으로 싸우기 위해 앞으로 나선 사람들 틈에 끼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감탄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호오... 정신력이 대단한 인간이로군." 자작은 사람들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서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눈을 번쩍 뜨며 그와 동시에 지팡이 삼고 있던 검을 자신의 가슴까지 들어 올리며 싸울 자세를 취했다. 몬스터가 지척으로 다가왔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마치 거대한 산과 같이 버티고 서서 앞만 노려보며 잔뜩 쉬었지만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마법사는 뒤로 물러서고 기사들과 전사들은 앞으로!!" 공식적인 리더는 피에르 백작이고 그는 단지 안내를 위해 같이 온 기사의 대장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 조차도 그의 기백이 맘에 들어서인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뒤로 물러나주었다. 그러나 나는 기사가 적은 숫자였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는 대신 검을 빼어 들었다. "마법 공격!!" 자작이 검을 치켜 들며 외치자 기사들 뒤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시동어를 외쳤다. "앞 사람들 고개 숙여!! 버스트 프레아!!" "딜 브랜드!!" "디그 볼트!!" "아이스 스톰!!"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마이터와 죠슈아, 그리고 스와카가 각각 마법을 하나씩 날렸다. 수십개의 커다란 불덩어리가 날라가는가 하면 몬스터들이 밟고 서 있는 땅이 폭발하기도 하고 사방에서 전기가 번쩍거리는데다가 매서운 얼음 조각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마법이 몬스터들을 향해 직격하자 기사들은 환호했다. 분명히 저 수 많은 적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절반은 사라졌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러나 마법에 의한 짙은 흙먼지를 가르며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는 경악과 실망의 신음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럴수가..." 자신의 마법이 먹혀들어가리라고 확신하고 있던 스와카가 신음 비슷하게 중얼거리자 마이터가 훨씬 덤덤한 목소리로 그 뒤를 이었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군요. 그것도 꽤나 고위 계열의..." 몬스터들은 대부분이 멀쩡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하긴 뭐... 팔이 하나 날라가 피를 뚝뚝 떨기면서도 남의 일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오는데다 그 상처도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트롤의 피가 섞인 키메라군." "쉽지 않겠습니다." "흥,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구. 프레임 브라스!!" 마이터와 대화를 주고 받던 할아버지가 한 손을 번쩍 쳐들고 씹어 내뱉듯 외쳤다. 그러자 몬스터들 중앙에서 갑자기 십자가 모양의 강한 빛이 번쩍이더니 주위의 몬스터들을 몽땅 매섭고 뜨거운 불꽃이 휘감아버렸다. 그 열기가 얼마나 강했던지 앞에 나와 있던 내 얼굴이 거의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와, 역시 아린 할아버지야." "열받으셨나봐." 내 주위에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이 속삭였다. 이번에는 꽤나 효과가 있었는지 불꽃이 사라지면서 드러난 몬스터들은 20여마리로 줄어 있었고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있었다. "쳇, 효과가 있는 건 5서클 이상의 마법이로군." 몬스터가 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사들이 기뻐하는 반면 마법사들은 더욱 더 얼굴을 찡그렸다. 할아버지가 방금 시전한 마법이 얼마나 강력한 지 알고 있는 탓이었다. "큰일이군요. 이 쪽 마법사들은 거진 다 지쳐 있는데... 그렇게 큰 마법은 무리입니다." "이제 나머지는 기사들 몫인가요? 우린 단지 잠깐의 저지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죠수아와 스와카가 심각하게 주고받는 목소리를 들으며 브더셀스 자작이 아랫 입술을 깨물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외쳤다. "앞으로 돌겨어어억~~!! 물러서지 마라. 우리 뒤에는 동료들이 누워 있다. 그들을 지켜야 한다아아아~~!!" "와아아아~~~!!" 자작의 말에 기사들이 발악하듯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 나갔다. 이제 20여마리로 줄었다고는 하나 왠만한 마법에는 끄떡도 안 하는 녀석들을 상대하자니 모두들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용케 긴장을 떨치고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쿠워어어~~ 기사들과 뒤섞인 몬스터들이 더욱 더 커다란 괴성을 질러댔다. "트롤의 피가 섞여있기 때문에 자잘한 상처는 소용이 없습니다. 한 방에 베어 죽여야 합니다." 뒤에서 스와카가 큰 소리로 외쳤지만, 이 무식하게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몬스터들을 한방에 베어 죽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기 있는 이들이 지쳤기는 하나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뒤에서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었기에 거의 대치된 상태였지,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는 이들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이 싸움은 장기전이 될거였고, 그렇게 되면 우리쪽만 불리할게 뻔했다. 그나마 류미르와 세이몬이 분전을 해주어 겨우 겨우 하나씩 쓰러트리고 있는게 다행이었다. "타앗~~!!" 지친 몸 상태로 무리하게 검기를 사용하는 기사들은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을 비 오듯 쏟아내며 버티다가 하나 둘 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휘두르는 팔은 마치 거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굵은 봉 같아서 그냥 검을 맞부딧히면 검이 부러지거나 손목이 부러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기 때문에 기사들은 지친 상태에서도 어쩔 수 없이 검기를 끌어 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검기를 끌어 내어 몬스터들을 벨 수도 있는게 아니었다. 그들이 평소 낼 수 있는 능력의 1/2도 내지 못했기에 몬스터의 몸에 자잘한, 혹은 깊은 상처를 내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류미르나 세이몬이 와서 자신이 상대하는 몬스터를 베어 줄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했지만, 류미르와 세이몬이 단 둘뿐인지라 그들이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기사들이 속출하는 거였다. 덕분에 나는 몬스터들과 정식으로 몇번 상대해 보지 못하고 뒤에서 날라오는 마법사들의 조력을 받아 쓰러진 기사들을 구해 내고 그들을 안전지대로 옮기느라 바빴다. 그나마 내가 실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직접 그들을 들쳐 업고 뛰어다닐 뻔 했다. "허억, 허억..." 막 실프 한명이 기사를 들어 싸움터에서 빠져나가는 찰나 나는 또 한명의 기사가 지쳐서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서는 거대 몬스터가 그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내려치는게 보였다. "이런!!" 늦었다... 라는 생각에 움찔 하는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배구공 만한 압축된 공기의 덩어리가 날아와 기사와 몬스터 사이에서 터졌다. 그 순간 엄청나게 공기의 압력이 사방으로 퍼져가 몬스터는 자신의 팔을 내려치는 대신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고 힘이 빠진 기사는 뒤로 날려가 두어번 굴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스와카가 팔을 흔드는게 보였다. 나도 싱긋 웃으며 마주 흔들어주고는 실프를 한명 더 소환해 기사를 뒤로 데려가게 했다. 내가 사람과 몬스터들 간의 치열한 싸움 가운데에서 여유 만만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 뒤에는 아주 든든한 할아버지라는 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한눈을 팔고 놀고 있어도 내 옆에서 머리가 관통 당해 막 쓰러지는 몬스터처럼 나에게 접근한 녀석은 다 이렇게 되었다. '헷헷... 싸움 중에 이러면 안되는데 말야...그래도 할아버지에게 고마운 인사 보내는 건 잊지 말아야 겠지?' 할아버지에게도 고마움의 표시로 싱긋 웃으며 팔을 흔들어 보이고는 또 다시 쓰러져 있는 기사가 없나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내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던 몬스터의 몸 주위로 흰 빛이 한번 번쩍 하더니 그 몬스터의 몸이 머리에서 부터 둘로 쫘악 갈라지며 양 옆으로 넘어졌다. 엄청난 양의 피가 튀고 흐르면서 그 사이로 보이는 건 유령처럼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채 굵은 땀방울을 뚝뚝 떨기고 있는 애쉬 녀석이었다. 몸도 안 좋은 상황에서 상당히 무리를 한 듯 용케 검을 쥐고 서 있었지만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쯧쯧... 저 녀석도 옮겨야 겠군.' 나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애쉬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보다도 먼저 몬스터 한 녀석이 애쉬의 등 뒤로부터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애쉬는 너무 지쳐서 뒤에서 자신을 죽이러 오는 몬스터의 살기를 눈치 채지 못하는 듯 했다. 몬스터는 뱀 처럼 미끈한 피부의 팔을 고무줄처럼 주욱 늘리더니 손을 송곳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애쉬의 등을 향해 찔러갔다. "애쉬야, 엎드렷!!" 너무 다급한 나머지 나는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채 깨닫지 못하고 나에게 덮쳐 온 몬스터의 어깨를 밟고 허공으로 도약해 그 쪽으로 날아갔다. 애쉬의 놀란 표정이 눈 앞에 들어오자 다시 재차 외치면서 검에 마나를 가득 담고 외쳤다. "멍청아, 엎드리라니까!!" 애쉬가 거의 엎어지다시피 몸을 땅에 붙이자 아직 숙련되지 않아 마나만 잔뜩 들어가 있는 뭉툭하고 통통한 내 검기가 검에서 빠져 나와 몬스터에게 날아갔다. 퍼억~!! 류미르나 세이몬이 날리는 검기는 적에게 날아가 '삭둑!!' 같은 가벼운 음향만 날리고 적을 두동강 내는데 비해 내 검기는 몬스터의 가슴을 파고 들어가더니 그대로 수박 터지듯 몬스터를 터트려 버렸다. 그 이상한 음향에 몸을 일으키며 뒤돌아 보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온 몸이 산산조각 나 있는 몬스터의 잔해를 보고 있는 애쉬 옆에 살짝 착지한 나는 속에서부터 울화가 치밀어서 다짜고짜 애쉬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이 멍청아, 그 큰놈이 뒤에서 덮쳐 오는데도 모르고 있냐? 멍청한 자식 같으니라구... 너 내가 보는 앞에서 한번만 더 죽을 뻔 하면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주겠어. 알았어?" 웃긴 애쉬 녀석은 내가 무섭게 윽박질렀는데도 불구하고 방금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충격 때문에 그러는 건지 첨에 황당하던 표정을 잠깐 짓더니 그 다음 부터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더욱 더 얄미워서 나는 그를 뒤로 밀어버렸다. "빨랑 이 곳에서 벗어나!" 하지만 곧 녀석이 거의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지쳐 있다는 걸 기억해 내고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실프에게 부탁해 녀석을 데리고 가게 했다. '멍청한 자식, 엄마의 흔적이면서 그깟 몬스터 하나 처리 못하냐?' 왜 이렇게 화가 치미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속으로 씨부렁씨부렁 거리면서 도움이 필요하는 기사들을 찾는동안 그 화를 주체 못해 나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에게 거리낌 없이 쏟아붇고말았다. "멍청한 놈!!" 콰앙~~!! 꾸워어어~~!! "누가 바보 아니랄까봐..." 슈우욱~~~ 퍼어억~~!! 커어어어~~!! "바보 같은 짓만 골라 하고 있냐?" 콰과과광~~!! 끼에에엑~~!! "아린, 정신 차려!! 몬스터 없애려다가 사람까지 없애겠다!!" 류미르의 날카로운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보니 사방이 온통 폭격을 맞은 듯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그 많던 몬스터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류미르와 세이몬이 한 쪽에서 방어막을 치고 기사들을 보호하고 있는 거였다. "어? 무슨 일이야?" 의외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진 내가 얼빵하게 묻자 막 방어막을 걷어내는 류미르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 뽀득 솟았다.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냐? 이게 다 네가 날뛰어서 그런 거잖아?" "엥? 내가 뭐?" "뭐라니? 죽이려면 곱게 몬스터만 죽일 것이지 왜 힘 조절을 못해서 애꿎은 사람들까지 다치게 만드냐?" 류미르가 식식 대며 걸어오면서 악을 바락바락 질러댔다. "에? 그럼 이게 다 내가 그런거야?"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면서 묻자 류미르가 냉큼 대꾸했다. "그래, 이게 다 네 작품이라고!!" "그런거냐? 몰랐네... 흥분을 좀 했더니 힘이 쬐께 과하게 들어갔나봐..." "쬐께에에에~~? 이게 쬐께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냐?" 아무래도 그 여파에 류미르까지 휩쓸렸었는지 류미르는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자 그의 흥분을 단번에 가라앉힐 인물이 나타났으니... "아린이 쬐께라고 했으면 그런 줄 알지 뭔 잔소리가 그렇게 많은 게냐? 덕분에 잘 해결됐으면 됐지!!" 우리의, 아니 나의 호프 할아버지 등장!! "찍~!!" 할아버지의 도끼눈에 류미르는 얼른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류미르가 찍 소리만 내고 뒤로 물러나자 할아버지가 이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린아..." "에? 왜요, 할아버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할아버지를 바라보니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나를 끌고 사람들에게서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더니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너, 저 빨간 머리 인간 녀석과 무슨 일 있었냐?" "에? 빨간 머리?" 할아버지의 눈길을 따라 간 곳에는 기사들과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애쉬 녀석이 보였다. "저 녀석이요? 저 녀석은 왜요?" 의아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가 날카로운 눈길로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왜라니? 너 저 녀석이 죽을 뻔 하자 흥분했잖니? 도대체 저 녀석과 무슨 사이인 게냐?" "무슨... 사이?" '음... 엄마의 흔적과 친딸 사이라고나 할까? 그 동안 여행도 같이 했고... '그 존재'랑 같이 대항해 싸우기도 했고... 허걱, 그러고보니 나 저 녀석에게 사랑 고백 비스무리한 것 까지 받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그말을 했다간 저 녀석은 당장에 할아버지에 의해 날아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말은 쏙 빼놓기로 했다. "음... 저기요 할아버지... 기회가 없어서 아직 말씀을 못 드렸는데, 그 동안 아펜젤러님과 제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저 녀석이 그러니까..." 나는 애쉬 녀석을 어떻게 해서 의심하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아빠와 함께 작전을 짜서 알아낸 것까지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내 말을 조용히 다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애쉬를 힐끔 바라보며 나에게 속삭였다. "음... 그러니까 저 녀석이 네 엄마의 흔적이란 말이지? 그것도 용언까지 배운..."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그 용언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도 기억 봉인에 의해 알지 못하는 듯 해요. 그때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한 듯 하거든요." "그러냐? 네 엄마가 도대체 뭔 생각으로 용언을 인간에게 가르쳐 줬는지 모르겠다만... 혹시 마법도 할줄 아는거 아니냐?" "그건 아니었어요. 그 동안 저녀석과 같이 다니면서 마법 쓰는건 한번도 본 적이 없는걸요. 그리고 아... -하마터면 아빠라고 부를 뻔 했다...- 펜젤러님께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기사로써만 교육 받고 자랐대요." 거기까지 말하자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눈길과 약간 긴장한 듯한 굳은 얼굴이 안도감으로 풀렸다. 아마 내 말이 내가 흥분한 이유로 납득할만 한 듯 했다. "그래? 정말 세세히도 알아봤구나? 하긴... 네 성격에 그걸 알고 저 녀석에게 신경 안 쓰는게 이상하긴 할테지만... 하지만 아린아? 저 녀석이 인간인 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단다. 저녀석은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는 녀석이야." 그 말에 나는 헤헤 웃었다. "저도 알아요. 아펜젤러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신경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신경쓰고 있었나봐요. 하긴, 저 녀석은 엄마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내 말이 맘에 걸렸는지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었다. "흔적이란 허상과 같은 것, 100년도 채 안되 사라질 걸 뭐하러 신경 쓰느냐? 여기에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통 핏줄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와 내가 다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세이몬과 류미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거의 쓰러지다시피 땅에 주저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들이 창백하고 손, 발이 힘 없이 축 늘어진 것으로 보아 쉽게 회복될 것 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더이상 그 괴상한 몬스터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지금까지 나온 몬스터들이 다였나 보지 뭐. 하긴, 그렇게 강한 정신적 결계가 버티고 있는데 누가 뚫고 들어오리라 생각이나 했겠어?" "아니면... 저 집 안에 또 다른 방어체제가 있는지도 모르지. 아까의 그 몬스터들은 우리의 실력을 시험해볼 겸 진을 빼놓을 겸 내보낸거고 말야." "음... 그럴수도 있겠네. 그럼 지금은 우리의 실력을 대충 알았으니 그에 맞게 준비를 하고 있으려나?" "그럴지도..." "그럼 이 사람들, 이대로 있으면 위험하지 않을까?" 류미르와 세이몬은 거기까지 수근수근 대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린, 어떻게 생각해?" "이제 어떻게 할까?" 그들의 시선에 나는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힐끔 주위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다시 한번 저 공터 중앙에 버티고 서 있는 아담한 집을 보다가 하늘을 보더니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날이 저물고 있으니 날이 밝을때까지 우리도 좀 쉬자꾸나. 나야 상관은 없지만 아린, 네가 저 떨거지들을 두고 가려하지 않을거 아니냐? 아마 내일 아침이면 성에서 결계가 없어진 걸 알고 사람들이 들어올테니 그때 저 떨거지들을 처리한 다음 맘 편이 들어가는게 좋겠지." "헤헤헤, 찬성이예요 할아버지. 역시 할아버지는 절 많이 생각해 주시는 군요." 아부 반 진심 반으로 나는 할아버지의 팔에 엉겨 붙었다. "헐헐헐, 당연하지. 누가 널 이렇게 생각해 주겠느냐?" 할아버지의 결정이 떨어지자 우리는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사람들을 각자의 침낭에다 넣어주고는 모닥불을 군데군데 만들었다. 그동안 나는 준비해온 식량으로 저녁을 준비했고 할아버지는 주위에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쳤다.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넷이서만 한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다가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요 할아버지... 여기에는 왠지 '그 존재'는 없는 것 같아요. 그쵸?" 따뜻한 컵 스프의 온기를 음미하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럴지도 모르지... 뭐 정신 결계야 정신이 완전히 붕괴된 '그 존재' 에게 소용 없는거라고는 하지만 이 곳은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에게 침입 받은 흔적이라고는 없으니까. 여긴 누군가의 연구소 같거든? 아마도 이 곳에 결계를 만든 녀석의 연구소일테지. 그런데 그 정도의 정신 결계를 만든 녀석이 '그 존재'가 들어왔는데 곱게 물러났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렇군요. 하아, 그럼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글쎄다... 뭐, 여기 일을 끝내고 다시 알아봐야겠지." 시큰둥한 할아버지의 말이었지만 난 약간 놀랬다. '그 존재'가 없는 걸 알면 당장 돌아가자고 날 재촉할 줄 알았는데 그냥 여기 일이 끝낼때 까지 같이 있어준다니... "어? 할아버지, 지금 당장 안돌아가도 괜찮겠어요?" "당장 돌아간다고 어디 있는지 금방 알아지겠냐? 어차피 뭔가 또 발견되면 그 아펜젤러 녀석이 당장에 연락을 할테니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난 누가 여길 만들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거든. 뭘 연구하는지도... 뭔 키메라를 연구하는 것 같지만 말야..." 그제야 나는 할아버지가 인간 마법사들의 독특한 마법연구에 흥미가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다음날, 우리가 푹 자고 일어나 아침까지 끝마쳤을즈음 - 우리 넷만...- 할아버지의 생각대로 사르하와 리틀조로가 십여명의 기사들과 함께 숲 안으로 들어왔다. 숲이라고 해봐야 중앙 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으므로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아시리안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예요. 하지만 다른 분들은 그렇지 못하신 것 같네요." "아아, 크게 다친건 없고 단지 지쳐서 그래." "그럼 제가 나서야죠." 사르하는 자신이 할 일이 있어서 기쁜듯 팔까지 걷어부치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 강한 신성 마법을 펼쳤다. "사랑과 정의인 당신의 이름으로, 모든 만물에게 따스하게 내려주시는 당신의 자비로, 내 앞에 있는 이들에게 당신의 힘을 부여해주소서. 홀리 레자스트!!" 사람들의 중앙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외치자 그녀의 온 몸에서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쌓다. "호오, 신성 마법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여겨지는 회복계 마법을 쓰다니.. 저 꼬맹이가 제법이군." "저게 그렇게도 대단한건가요?" "그래, 7서클의 마법과도 맞먹는 거지. 하지만 저들 대부분에게는 필요가 없을텐데 괜한 힘을 쓰는구나. 저들 대부분은 육체적으로 지친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은건데 말이다." "한 일이 없어서 힘이 남아도나보죠." 할아버지의 말대로 사르하의 신성 마법의 구현이 끝나고 몸을 일으킨 사람은 어제 정신 결계를 통과하고도 정신을 잃지 않고 남았던 사람들 뿐, 나머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거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자 신성 마법의 효력을 맹신하고 있었던듯한 사르하가 당황감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거야. 육체적 활력을 불어주는 홀리 레자스크도 효력을 못 보는게 당연한 거지. 성으로 데려가서 정신적인 치료나 해줘." "에? 그, 그런 거예요?" 나의 무덤덤한 말에 쓸데없는데 힘을 낭비한꼴이 된 사르하가 볼이 빨개져서는 말을 더듬었다. "너무 그렇게 무안해할 필요는 없어. 덕분에 몇몇은 일어났잖아. 엄청 지쳐서 밥도 못 먹고 쓰러진 사람들이었거든." 내 말대로 어제 너무 과한 힘을 써서 유령처럼 창백하다 못해 푸르딩딩한 얼굴들로 쓰러졌던 사람들이 멀쩡한 얼굴로 단 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들처럼 기지개까지 피며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20명정도였지만... 그 중에는 어제 리더로써 활약한 쉴러 브더셀스 자작도 끼어 있었다. 나중에 사르하 덕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아침을 챙겨먹고 나자, 자작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성으로 데려가게 하고는 공터 중앙에 있는 집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했다. 원래는 너무 인원이 적은 것 같아 아침에 온 성의 기사들로 인원을 보충하려 했지만, 애쉬가 나서서 지금은 소수의 정예가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사람을 더 늘리지는 않았다. 사르하와 리틀 조로도 끼고 싶어했지만 일행 모두가 허락하지 않아 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돌아가야 했다. "자, 그럼 다시 가볼까요?" 이번에도 브더셀스 자작이 리더가 되어 앞장을 섰다. 지치더라도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 보다 한번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는 것이 더 힘들다는 걸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자작의 불굴의 정신력에 감탄한 터라, 그가 앞장을 서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다. 어떤 마법 결계가 쳐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법과 검술 둘 다 뛰어난 나와 류미르가 앞장을 섰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할아버지와 마이터, 스와카, 죠슈아가 보조를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 보아도 집의 겉에는 아무런 결계가 없는 듯 했다. "류미르, 뭔가 발견했어?" "아니, 너는?" "나도... 아무것도 없는 거 같은데?" 그러자 뒤에서 스와카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쩌면 집안으로 들어자마자 발동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류미르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적으로 마이터와 할아버지께로 쏠렸다. 둘이 가장 연장자인데다가 뛰어난 마법사들이었기에 그동안 이 일행의 머리 역활을 해왔던 까닭에 이제는 뭐 막히는 일이 있으면 자연스레 그들이 해결해주길 기다리게 된것이었다. 마이터와 할아버지는 잠시 숙고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할아버지가 나서서 세이몬을 불렀다. "너, 이리와봐." "예? 저, 저요?" "그래, 너 말야." 세이몬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안갈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엉거주춤 조심스레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이몬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방어용 주문인듯 했다. 갑자기 왠 마법인가.. 고개를 갸우뚱 하는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할아버지는 몇가지의 주문을 세이몬에게 걸어주더니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갑작스레 외쳤다. "에어로 봄!!" 원래 '에어로 봄'이란 공기를 압축해 적을 강타하는 것으로 펀치 정도의 위력이 약한 마법이었지만 할아버지 손에서 시전되니 압축된 공기가 세이몬과 부딧히자마자 강한 돌풍이 휘몰아치며 세이몬을 집의 현관문으로 날려버렸다. "우갸갸갸~~~!!" 불시에 당한 세이몬은 반항 한번 못해보고 날려가버렸고 그 모습을 본 일행은 경악과 놀람과 당혹감으로 인해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할아버지를 나무라는 듯한 빛도 있어 열받은 할아버지가 도끼눈을 뜨고 그들을 한번 쫘악 훝어보며 한마디 했다. "그럼 너희들이 대신 갈래?" 그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제각기 딴 방향으로 흩어져버렸다. 그 동안 세이몬은 나무로 만들어진 튼튼한 현관문을 몸통 박치기로 부시고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가 들어가자마자 스와카가 짐작한 대로 강한 섬광과 함께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과과광~~~!! 얼마나 큰 폭발이었는지 집이 들썩들썩 거리면서 지붕이 날라가더니 잠시 후 푸쉬쉬... 하는 김 빠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면서 4면에 있던 벽이 하나씩 뒤로 넘어졌다. 콰앙~! 쿵~! 꽈당~! 그래도 맨 마지막에 있는 벽 하나는 용케 안 너머지고 버티고 있었지만 금이 쩍쩍 간데다가 시커멓게 그을려 손가락 하나로 톡 건드려도 금방 넘어갈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집 - 이라고 이제는 말할 수 없지만... - 내부의 중앙에서는 세이몬이 엉거주춤한 포즈로 머리를 감싼 채 엎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 폭발에도 무사한 걸 보니 할아버지의 마법 덕을 톡톡히 본 듯했다. "자, 그럼 일단은 해결 되었으니 가볼까나?" 왠지 잘 해결되어 기분 좋은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뒤 앞장 선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할아버지가 이제는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폐허로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사이 나와 류미르는 얼른 세이몬에게 가서 그를 일으켰다. "세이몬, 괜찮아?" 할아버지의 방어 마법은 물리적인 공격만 막아줄 뿐 옷에 달라붙는 먼지는 막아주지 못해서 세이몬의 온 몸은 먼지 투성이었다. "으응... 괜찮은거 같아. 하지만 아깐 너무 놀랐다구." 세이몬은 멀쩡한 얼굴로 일어나서 옷에 뭍은 먼지를 툭툭 털며 대꾸했다. "하아, 그나저나 여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가봐. 아무것도 없는데?" 류미르가 세이몬이 괜찮은 걸 확인하고나자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페어가 된 집안 곳곳은 보통 사람사는 집에 있어야 할 가구는 커녕 천 조각 하나 보이지 않고 텅 비어있는채 맨 나무 바닥에 먼지만 수북히 쌓여 있어 사람들이 움직일때마다 엄청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뭐야? 이래서야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할 수도 없겠군." 할아버지가 엄청 일어나는 먼지구름때문에 인상을 찡그리시며 로브 자락으로 코와 입을 막자 스와카가 얼른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안에 있는 먼지들을 다 밖으로 내보냈다. "별 다른 공격 마법은 없는 것 같으니 조사해봅시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이상한 것이 있으면 절대 건드리지 마시고 마법사를 부르도록 하십시오." 마이터가 집안을 한번 훑어보고 브더셀스 자작에게 말을 건네자 자작은 마이터의 말을 받아들여 감히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엉거주춤 서서 안쪽만 힐끔힐끔 들여다보는 기사들에게 외쳤다. "자, 괜찮으니 들어와서 조사를 시작해라." 기사들이 자작의 말에 하나 둘 들어오려고 할때 누군가가 다시 외쳤다. "아, 잠깐만요." 모두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거기에는 스와카가 손을 들고 서 있었다. 급해서 엉겹결에 손을 들고 소리쳤던 듯 스와카는 자신에게로 시선을 몰리자 얼굴이 붉어지며 손을 얼른 내렸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자작이 왜 방해하냐는 듯한 힐난이 담긴 어투로 그에게 묻자 스와카는 얼른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는 좁은 곳이니 조사하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많으면 방해만 될 뿐이니 여긴 저희 마법사들이 조사를 했으면 좋겠는데요. 그 동안 여러분은 쉬고 계시구요." 한마디로 조사하는 데 기사는 필요 없으니까 가만히 있어달라는 이야기였다. 자작이 그 말에 기분이 약간 상한 듯 했지만, 스와카의 말도 일리가 있다 느껴지는지 마이터를 바라보았다. 마이터도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그게 났겠다고 결론이 났는지 자작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자작은 알겠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다시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그 바깥을 조사해보도록 해라." 그래도 한 일이 없었으니 쉬라는 말은 안 나오나 보다. 세이몬도 마법을 할 줄 몰랐기에 조사가 방해 된다는 이유로 밖으로 쫓겨났고 스와카와 같이 들어왔던 반담도 같은 이유로 쫓겨나 안쪽에는 마법을 할 줄 아는 사람들만 남았다. 하지만 집터(?) 가 대충 25평쯤 되는 크기였기에 할아버지와 나, 마이터는 부서진 잔해 더미의 평평한 곳에 앉아서 대충 훑어볼 뿐, 쭈그리고 앉아서 세세한 조사를 하는 건 죠슈아와 스와카, 그리고 류미르뿐이었다. 한참동안 텅 빈 집안을 샅샅이 훑어보던 세 마법사(?)들은 용케 안 쓰러진 벽 밑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드려 보기도 하고 깨끗이 닦아 살펴보기도 하더니 농땡이를 치고 있는 두 노인네와 나를 불렀다. "여기좀 보십시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스와카가 바닥을 가르켰다. 그 지저분한 바닥 중 그들이 손으로 깨끗이 쓸어놓은 곳을 자세히 바라보니 잘 보이지도 않는 희미한 금으로 장정 하나가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크기의 사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정교하죠? 이 곳에서 희미하게 마나가 흘러나오지 않았더라면 저희도 찾지 못할 뻔 했습니다." 마치 칭찬을 받길 바라는 학생처럼 씨익 웃으면서 스와카가 설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 올리죠? 혹시 이것도 들어올리면 공격 마법이 발동되게 만들어져 있는게 아닐까요?" 아무리 둘러봐도 그 바닥과 다를 바 없는 정교한 뚜껑을 들어올릴 수 있는 홈이라던가 끈이 보이지 않자 류미르가 좌중을 둘러보며 묻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마이터와 할아버지에게로 쏠렸다. 마치 자신들의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두 분이 나설 차례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생각이신지 두 노인네는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바닥으로 그 나무바닥을 조심스레 쓸어보더니 고개를 갸웃 거렸다. "흐음... 별다른 공격 마법은 안 걸려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군. 하지만 희미한 마나가 흘러 나오는 건 맞아. 이 안에서 어떤 마법이 발동되는 것 같군."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마나의 기척도 안 느껴졌지 않습니까? 아, 여기가 혹시 통로라서 마나가 새어 나오는 걸까요?" "그럴지도..." 할아버지는 신중한 표정으로 나무 뚜껑을 바라보더니 손짓으로 류미르를 불렀다. "예? 저, 저요?" 아까 세이몬의 경우를 당할 까봐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류미르가 떨떠름하게 묻자 할아버지가 인상을 팍 썼다. "그래, 어른이 부르면 제깍제깍 부르셨습니까? 할 것이지 뭘 확인하는 게야?" "아, 예에... 그런데 왜, 왜요?" "너 정령 부릴 줄 알지? 그럼 정령보고 이 뚜껑좀 들어 올리라고 해봐."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잡고 그 곳으로 부터 멀찌감치 떨어졌다. 혹시나 모를 만약을 대비한 거였다. 그러자 모든 마법사들이 후다닥 그 곳으로 부터 멀어지고 류미르도 얼른 실프를 불러내 부탁한 후 후다닥 물러났다. 그리고 우리 여섯명은 잔뜩 긴장해 방어막까지 친 채 실프가 천천히 들어올리는 뚜껑을 바라보았다. 끼이이익~~ 오랫 동안 사용되지 않아 뻑뻑했는지 실프가 천천히 들어올리는데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뚜껑이 완전히 열려 뒤로 젓혀지자 나는 질끈 눈을 감고 곧 이어 들릴 폭발음소리를 예상하며 귀까지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폭발음이 들려오지 않아 이상하게 여긴 내가 살포시 눈을 뜨고 바라보자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걸까요?" 마이터도 의아한 듯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가 퉁명스레 대꾸하셨다. "낸들 알간?" 그러면서 뭔가 음흉한 눈으로 류미르를 바라보자, 류미르는 할아버지의 시선을 느낀 듯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쓸어 넘겨댔다. 그리고 그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할아버지의 한 마디. "내려가봐." 류미르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바람의 상급 정령을 불러 자신의 몸을 보호하게 한 후 방금 생긴 통로로 천천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내려간지 한참이 되었는데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류미르의 얼굴이 바닥 위로 빼꼼 올라왔다. "아무 공격도 없습니다." 그의 말에 마이터는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바깥을 조사(?)하고 있는 자작을 불르러 갔고 우리는 먼저 류미르의 뒤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바로 밑에는 그냥 넓은 방 안이 있었는데 위에 있던 집보다 더 큰 크기였다. 그 곳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데다 공간 가운데 커다란 마법진만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법진이 얼마나 컸는지 그 공간을 거의 다 차지하고 우리가 서 있는 변두리 부분만 조금 남겨놓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죠슈아, 그리고 스와카가 마법진을 밟지 않게 조심해가며 마법진을 살펴보고 있는 동안 마이터가 내려왔고 그 뒤로 기사들이 하나 둘 내려왔다. "무슨 마법진입니까?" 자작이 궁금한 듯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공간 이동 마법진. 게이트로 반 영구적으로 만들어놨구만. 그런데 마법진이 좀 강력한게... 보통 공간 이동이 아니라 아마 차원의 틈새로 이동시키는 거 같아. 어쨌든 가보자구." 할아버지가 무덤덤한 태도로 마법 진 안으로 저벅 저벅 들어가 서자 모든 이들이 주춤 주춤 할아버지를 따라 마법진 안에 서자마자 시동어도 외치지 않았는데 갑자기 마법진이 강한 빛을 발하더니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깜짝 할 사이 우리는 전혀 다른 방 안, 그러니까 전에 있던 아무 것도 없어 텅 비고 빛 조차 들어오지 않은 깜깜한 방안이 아니라 적당하게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넓찍한 방안에는 여러가지의 가구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은 약 50여평 정도로 무척 넓어보였는데 - 왠지 갈수록 공간이 더 넓어지는 듯한 느낌이...- 그 넓은 방의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책들과 그것도 모자라 그 앞에 여기저기 사람 허리까지 쌓여있는 책들이 위태위태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엄청 커다란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도 여러개의 책이 쌓여 있거나 펼쳐져 있었고 그 밑에는 아마 메모지로 보이는 종이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칸막이에 반쯤 가려진 검소한 침대가 보였고 한쪽에는 자그마한 옷장과 간단한 세면대가 보였다. 그 반대편에는 여러가지 약품이 진열된 장이 있었고 성인 남자도 충분히 드러누울 수 있는 큰 직사각형의 탁자가 있었다. 그 한쪽 옆에는 마법으로 실드가 쳐진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 안에는 나무로 만든 상자가 있었고 상자 위에는 빛을 내는 야구공만한 구체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검은 색의 로브를 입은 어떤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서 실드 안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우리가 나타나자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뭐냐, 너희들은?" 천천히 일어나며 우리를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그는 평범한 인상에 동글동글한 얼굴에 들창코를 가지고 있는 늙은 남자였는데 하필 대머리여서 얼굴의 주름만 아니었으면 완전 공 같았을 거였다. 게다가 키도 작달막해 그를 처음 딱 보고 생각난게 바로 눈사람이었다. 키메라를 연구한다고 해서 깡마르고 음침하고 심성이 사악하고 굉장히 못되게 생긴 흑마법사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내 상상을 완전히 깨는 모습이자 나는 저절로 긴장이 풀려버렸다. 나쁜 사람이 정말 못된 사람처럼 생겨야 싸울 맛이 나는거 아니겠는가? 일행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모두들 약간은 김샌 듯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여기가 연구실인 것 같은게 어두침침하고 여기저기에 해부 당한 이상한 몰골의 몬스터가 있는가 하면 창살에는 실험중인 몬스터들이 울부짓는 듯한 연구소를 상상한 내 예상이 또 한번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동글동글한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우리를 한번 쭈욱 훑어 보다가 마이터를 보더니 한층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 마이터?" 잘 아는 사이인 듯한 그의 어조에 마이터를 바라보니 마이터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는... 요르그...? 40년 전에 갑자기 행방불명 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때 부터?" "뭐냐? 아는 사이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마이터는 놀란 표정을 전혀 지우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학교때 동기입니다. 몬스터나 동물에 꽤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 했었는데 여기서 키메라를 연구하고 있었다니..." '그러고보니 안개의 숲은 몇십년 전에 생겼다고 했었지?' 요르그라고 불린 마법사는 일행중에 마이터가 있자 약간 안심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재차 물었다. "마이터, 네가 여긴 왠일이냐?" "나는... 안개 숲에서 괴상한 몬스터들이 나왔다기에 조사하러 들어 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거다. 그런데 네가 있을줄이야..." "안개 숲? 왠 안개 숲?"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는 요르그를 향해 마이터가 재차 설명했다. "모르냐? 네가 살고 있는 이 숲이 안개 숲이다. 항상 숲 안에 안개가 떠돌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지." "그... 랬었군..." 요르그가 이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마이터가 물었다. "넌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여기서 키메라를 연구한 거냐?" 그러자 요르그가 그 동글동글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키메라라... 그렇게 말하기에는 좀 그런데... 난 단지 새로운 멋진 동물을 좀 만들어 보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그정도의 말로는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부족했기에 만족을 못한 마이터가 재차 질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다면 한번 들어오면 다시는 못 빠져나가게 한 이 숲의 결계는 뭐고 이 숲에서 나온 그 괴상한 몬스터들은 또 뭐냐?" 요르그는 여전히 살짝 찡그린 얼굴로 대꾸했다. "난 단지 내 연구를 방해 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이상한 소문에 시달리는 것도 싫었고... 어차피 결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나? 난 들어오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네가 말한 그 몬스터들은 전에 몇마리 여기서 빠져 나갔었는데... 아마 그 녀석들 같군.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안 돌아 오더라니... 사람들 사는 곳으로 갔다가 변을 당했을 줄이야..." 무지 안타깝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마이터를 비롯한 우리는 더욱 더 어리둥절 했다. 자신의 실험체인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마이터도 요르그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점점 더 알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 여기서 도망친 몬스터들이 왜 돌아 온단 말인가?" "그 녀석들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거든... 보통 동물들은 멀리 갔더라도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려는 본성을 지니지 않았는가? 그걸 아마 회귀의 본능이라고 하지?" 왠지 대화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도중 할아버지가 그들 사이로 끼어 들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궁금한게 있는데, 숲을 둘러서 만든 정신적 결계라던지 여기 차원의 틈새에 만들어 놓은 이공간이라던지, 모두 자네가 만든건가? 내가 보기에 자네에게는 그렇게 큰 마나가 없는 것 같은데?" 요르그는 갑자기 끼어든 할아버지를 이상하게 한번 쳐다보기는 했지만 숨길 맘은 없었는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물론 제 능력으로는 택도 없지요. 그래서 전 마족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나와 류미르, 세이몬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중 마이터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 자네.. 마족과 계약을 했단 말인가?" 아마도 편견 때문이겠지만... 마이터는 놀람을 가라앉히자 이제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마도 그 분노는 태연한 요르그의 태도에 더 커진 것 같았지만... "도대체 자네 제정신인 겐가? 자네의 연구심을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마족과 계약 까지 하다니... 그래, 도대체 계약의 조건이 뭔가?" 크게 분노하며 외치듯이 묻는 마이터를 잠시 바라보던 요르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터와 같은 마법사인데다 같은 학교의 동기이니 마이터가 왜 분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일거였다. "마이터,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네. 마족이라고 다 사악한 건 아니거든..." 하지만 그의 말은 마이터의 차가운 말에 중간에서 짤려버렸다. "변명은 필요 없네. 도대체 마족과 한 계약의 조건이 뭔지나 말해보게나." 요르그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난 단지 그 마족이 맘에 들어할 만한 멋진 애완동물 한마리를 만들어주기로 했을 뿐이라네." 마이터는 기가 찬듯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하, 이 세상을 정복하는데 쓰일 괴물들이 아니라?" 요르그는 마이터를 이해시키려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설명했다. "마이터, 그는 이 세상을 정복할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단지 마계에서 잘 살수 있는데다 멋진 모습을 가진 애완동물을 원할 뿐이라고." 하지만 마이터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하, 그런가? 얼마나 잔인하고 흉측한 괴물인지 정말 궁금하구만." 결국 말로써는 마이터를 이해시킬 수 없다 생각한 요르그는 포기의 한숨을 내쉬며 어느 한쪽을 가르켰다. "그렇다면 자네가 직접 보지 그러는가? 저 안에는 그에게 보내줄 애완동물까지 있으니 한번 보게나." 요르그가 가르킨 쪽에는 평범한 나무 문이 있었다. 마이터는 그 문을 보자마자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가 거칠게 문을 확 열었다. 하지만 그 안을 본 그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할아버지가 그 쪽으로 다가가자 그걸 기회로 나머지 일행들도 우르르 그 곳으로 걸어가 문 안쪽을 들여다보고는 모두 놀라서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렸다. 아마 이 곳도 이공간 안에 만들어진 세계인 듯 한데 마치 천국과도 같은 이 곳에는 여러 종류의 괴상한 몬스터들을 비롯, 일반 몬스터들과 동물들까지 그 안에서 노닐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서로 사이좋게 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엄연히 천적이 구분되어 있어서 초식 동물들은 육식 동물들과 몬스터들의 눈치를 보며 구석 구석에서 자신들끼리 오밀조밀 모여 있었고, 몬스터들도 서로 상하의 계열 관계에 따라 혼자 떨어져 있거나 몰려 있곤 했다. 그런데 그때 입과 날카로운 이빨이 비정상적으로 큰 한 몬스터가 배가 고팠는지 어슬렁 거리며 기회를 보다가 가까이에 있던 팔이 네개가 달린 몬스터에게 달려들어 그의 한쪽에 있는 팔 두개를 뜯어버렸다. 팔이 뜯긴 몬스터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고 나는 다음 순간 입이 큰 몬스터가 다시 공격 할것이고 팔이 네개인 몬스터는 죽으리라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을 깨고 입이 큰 몬스터는 팔 두개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고 팔이 뜯겨진 몬스터도 잠시 후 뜯겨진 면에서 새로운 팔이 돋아나 그 팔을 휘적휘적 움직여보며 전혀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는 거였다. "세상에..." 누군가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몬스터들을 한 곳에 데리고 있다보니 제일 걸리는게 숙식이더군. 물론 장소야 이공간을 만들었긴 했지만 먹이는 내가 계속 댈 수가 없더라고. 생각다 못해 이 안에서 자생을 할 수 있게끔 환경을 만들어 줬지. 저들은 모두 트롤의 혼혈이야. 그래서 팔 한둘정도는 충분히 재생이 가능하지. 저들도 그걸 알고 있는지 공격하는 녀석도 항상 그정도만 노리고 당하는 녀석들도 그정도는 양보해 주더군. 어떻게 보면 참 영리한 녀석들이지..." 어느새 걸어왔는지 요르그가 우리 옆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어조로 설명해 주자 우리 모두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의 설명을 들었다. "대단하군..." 마이터가 놀란 표정을 한껏 얼굴에 드러내며 중얼거리자 요르그가 그의 감탄이 싫지는 않은지 히죽 웃었다. "여기에 그에게 보내줄 애완동물도 있다네. 한번 보겠는가? 아, 저기에 있구만..." 요르그가 가르키는 손 끝을 따라 쭈욱 가보니 너른 벌판에서 약간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 위에 요르그가 말한 그 마족의 애완 동물이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이공간 안에 있는 모든 동물들과 몬스터들을 굽어보는 듯한 녀석의 폼을 보니 제왕의 모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온 몸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카만 털로 뒤덥여 있었는데 커다란 두 눈만은 에메랄드 빛이었다. 게다가 이마 정 중앙에는 혹이라고 할지, 점이라고 해야할지 모를 마름모 모양의 붉은 돌이 박혀 있었다. 전체적인 면을 보자니 완전 표범이었는데 앉아있는 크기만으로 해도 송아지보다 더 컸다. 그녀석은 거만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구에 오밀조밀 서 있는 우리를 보자 경계를 하는 것인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러면서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날개가 쫘악 펴졌다. 몸의 색깔과 같은 검은 색의 피막 날개였는데 그 날개까지 핀 걸 보니 몸이 두배는 더 커보여 장정 한두명은 거뜬히 태울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그 마족이 저 녀석을 타고다니려고 선택한 건 아닐까?' 그 녀석이 일어나자 그 근처에 있던 몬스터들과 동물들이 움찔 거리면서 녀석과의 거리를 점차 늘렸지만 그 녀석은 그런건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날개를 천천히 움직여 날아 올랐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었다. "멋지군..." 할아버지도 감탄한 표정이었다. 우리 앞에서 불과 2, 3미터 앞에 착지한 녀석은 우리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도 두려운 모습은 보이지 않는게 되게 거만하고 잘난 척 하는 녀석인 듯 했다. 그 모습이 조금 맘에 안 든듯 할아버지의 눈쌀이 쪼끔씩 찌푸려 지기 시작하자 요르그가 할아버지의 상태를 눈치 챈 것인지 아니면 그때 정말 막 생각이 난 건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 저 녀석의 동생이 곧 태어나지?" "뭐? 저 놈의 동생도 있었나?" 마이터가 그의 말을 받으며 의아한듯 묻자 요르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들이 오기 전에 내가 보고있던 그 알이 바로 저 녀석의 동생이지. 저녀석과는 좀 다르게 태어날 수 있도록 조작을 했는데... 어떻게 태어날지는 나도 모르겠어. 내 예상으로는 반시간 내로 태어날 듯 한데, 한번 보겠는가?" 그렇게 말하며 요르그가 걸음을 옮겨 그 공간에서 벗어나는 문으로 향하자 모든 이들의 걸음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그 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요르그를 따라 요르그의 연구실 한쪽 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는 알 상자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물론 대빵격인 할아버지와 마이터, 요르그와 나만이 맨 앞에 쭈그리고 앉았고 나머지들은 모두 뒤에 서서 구경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건 뭔가?" 알 위에서 따스한 빛을 내고 있는 구체를 가르키며 마이터가 묻자 요르그가 한번 더 자랑스러운 얼굴로 실실 웃으며 설명해 줬다. "이것도 내가 발명한 거지. 알이 부화하기 위해서는 따뜻해야 하지 않나? 실드가 쳐진 안의 온도를 조절해주는 마법구야." "호오... 그래? 거참, 신기하구만..." 마이터가 다시 한번 감탄한 표정으로 알 위에 떠있는 구체를 바라보고 있는데 요르그가 움찔 거렸다. "아, 알이 움직였어." 그러자 모든 이들이 상자 안의 알을 뚤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알은 시선을 받고 있다는 걸 눈치 채기라도 한 듯 다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조금 시간이 흐르자 또 한번 움찔 거렸다. 그리고 또 가만히 있다가 다시 한번 움찔거리고, 또 가만히 있고... 그러기를 수차례... 기다리는 사람들이 초조함으로 인해 애간장이 타 녹아내릴 것만 같을 무렵 드디어 알이 움찔거리기를 그치고 뽀직, 뽀직 소리를 내더니 알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오려나봐." 내가 태어났을때도 저랬을까... 싶은게 금이 가면 퍼뜩퍼뜩 나올 것이지 안에 있는 녀석은 힘든지 한참을 또 가만히 있다가 답답해질즈음 다시 한번 다른 쪽으로 알 표면에 금을 내었다. 그러더니 서서히 알 껍질을 부수기 시작했다. 작은 몸부림으로 금을 계속 톡톡 치는 듯 하더니 균열이 점점 벌어져 틈이 넓어지자 그 사이로 계속 손인지 발인지를 내밀어 알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너무 더디고 힘겨워 보여 참다 못한 뒤에 서 있는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거참, 도와줬으면 속이 시원하겠구만..." 그러자 요르그가 냉큼 그를 나무랐다. "도와주면 안돼. 그러면 몸이 약해진단 말야.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그 만큼 살수 있는 확률이 높아져." 머쓱해졌을 기사는 - 안돌아 보았지만 그럴거 같다 - 다시 입을 다물었고 우리는 계속해서 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그 조그만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거의 한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될 무렵 자그마한 생명체는 드디어 완전히 알을 벗어났다. 처음 탄생한 생명체가 모두 그렇듯이 털이 하나도 없는 새빨간 피부로 덮인 내 손바닥 만한 녀석이 꼬물락 꼬물락 거렸다. 모두들 경의의 표정으로, 특히나 요르그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는데 그 생명체가 갑자기 부르르 떨더니 동작을 멈춰버리는 거였다. 놀란 사람들이 헛바람을 들이키고 있을때 요르그가 재빨리 실드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 - 물리력 결계는 아니었는지... - 그 생명체 위에 손을 얹고 회복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다시 그 생명체가 꼼지락 거리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 생명체의 몸에서 털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자라기 시작하더니 곧 그 생명체의 몸을 다 덮고 생명체도 조금 자라 있었다. 그렇게 자란 생명체는 하얀 털로 뒤덮인 강아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는 새끼 손톱 반만한 자그마한 뿔에다가 등에는 새의 날개까지 달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아지 비스무리한 생명체는 힘이 겨운지 누워서 일어나지 못한 채 요르그의 마력에 힘 입어 몇번 꼼지락 대더니 결국 바르르 떨다가 죽어버렸다. "이런..." 할아버지까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요르그가 너무 침통한 표정으로 그 죽어버린 강아지 비스무리한 녀석을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소중한 자식이라도 되는양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손 끝으로 쓰다듬는 모습이 너무 안되보였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려 너를 죽게 했구나... 성장 촉진제는 사용하지 않는건데...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차라리 시간이 모자라더라도 사용하지 말것을..." 그렇게 중얼거리며 울먹이는 요르그의 어깨에 마이터가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이보게, 자네는 최선을 다한 거 아닌가?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말게나. 그리고 또 다시 만들면 될 거 아니겠는가?" 요르그는 마이터의 말에 중얼거림을 멈추고 한참동안 계속 그 죽은 녀석만 쓰다듬고 있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녀석이 태어나는 건 아니지... 게다가 난 이제 연구를 계속할 수 없다네..." "무슨 소린가? 왜 시간이 없어?" 의아한 듯한 마이터가 묻자 요르그는 천천히 일어서며 슬픈 눈으로 그 죽은 녀석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서 마이터를 바라보았다. "내가 처음에도 말했듯이, 내 능력으로는 이곳을 유지하지 못한다네. 그래서 마족의 힘을 사용했는데, 그것도 오늘까지라네. 마족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건 그의 애완동물이 다 자랄때 까지였거든. 자네도 보다시피 그 녀석은 다 자란 상태지. 그래서 그가 오늘 데리러 오기로 했다네." "그,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하면 되지 않는가?" "하, 다른 곳에 이정도의 시설이 있을 거 같나?" "그, 그건..." 마이터가 말문이 막힌 듯 말을 더듬자 요르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연구하기 위해 다시 또 마족의 힘을 빌릴수는 없지. 그리고 나도 원하는 만큼 연구를 했으니 더 이상의 미련은 없네." "그런가..." 둘이서 그렇게 말을 주고받고 있을때 갑자기 연구실 안의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구멍이 쫘악 벌어졌다. 할아버지가 나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길 즈음 벌어진 구멍에서는 빛나는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데다 귀가 엘프처럼 뾰족한 인물이 튀어 나왔다.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는 송곳니가 살짝 삐져나와 있었고 손톱도 마치 동물의 것인 양 길고 뾰족하면서 끝이 살짝 구부러져 있었다. 그는 마치 제 집인양 당당히 서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요르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인간이 많네?" 그러자 요르그가 얼른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이들은 제 친구들과 그의 호위들이니 크게 신경쓰실 건 없습니다." '친구들'이란 말에 할아버지의 인상이 잠깐 구겨졌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마족은 우리를 둘러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오늘이 이 곳에서 나가는 날이니 친구들이 마중을 나왔나보군. 나야 뭐 상관 없는 일이지. 그런데..." 말 끝을 늘이던 마족이 갑자기 우리 일행쪽으로 손가락을 가르키며 물었다. "네 친구 중에는 마족도 있었나?" 그가 가르키는 손가락을 끝에는 세이몬이 서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이들이 놀라면서 세이몬과 조금씩 떨어지며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마족이 세이몬에게로 다가오며 세이몬을 훑어봤다. "헤에, 뭐야? 너 아벨리아족이잖아?" 놀랐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마족에게 세이몬은 조용히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순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세이몬을 다시 바라본 그 마족은 황당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벨리아족 중에 어떤 덜떨어진 녀석이 용케 성년식을 치뤘다는 소리를 들었지. 그런데 그게 너였냐?" "우쒸..." 자신을 비웃는 말에 화가 난 세이몬의 볼이 부풀어 오르자 그 마족이 하하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아, 화내지는 말라고. 아벨리아 족이랑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너도 네가 아무리 아벨리아족이라고 해도 나에게 이기기 어려울 테니 그만 두라고. 우리 타자시나 족도 너희 아벨리아 족 못지 않은 고위 마족에 속하니까." 그의 말에 세이몬이 뭔가 떠오른 표정을 지었다. "아, 타자시나 족 들어봤어요. 사치와 허영을 무지 좋아한다는 마족이라고... 은발에 호박색 눈이 특징이라는..." "참내,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못알아 본거냐?" 세이몬의 말이 맘에 안 드는지 투덜거리는 그 마족의 눈은 세이몬의 말대로 노란 호박색이었다. "어쨌든, 나는 다른 볼일이 있으니 이만... 이봐 요르그? 그 녀석은 어디 있지?" 여전히 기분 나쁘다는 투로 몸을 획 돌린 마족이 요르그에게 묻자 요르그가 얼른 이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가르켰다. "저 안에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내가 직접 데리고 가지. 아, 그리고 오늘 이 곳이 사라진다는 건 알지? 반시간 후에 사라지도록 조절할테니 얼른얼른 정리하고 여기서 나가라고." "그러죠.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요르그가 얼굴 가득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정중히 인사하자 그 마족이 물끄러미 요르그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 좋으려고 한 계약이니까 고마울 건 없지. 하지만 너도 참 이상한 인간이군. 내가 알기로 마족과 계약을 하는 인간들은 다 자기 중심적이고 불평 불만만 가득하다고 들었는데 말야." "하하, 그렇습니까?" "어쨌든, 이걸로 이별이군. 그럼 잘 있으라고." 마족은 요르그에게 손을 흔들며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마족이 사라지자 할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자, 그럼 우리도 서둘러 나가자고." 할아버지의 말에 모든 이들이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마법진으로 향했다. 하지만 요르그만이 그 자리에서 움직일줄을 몰랐다. "요르그?" 몇 발자국 가다가 요르그가 자신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안 마이터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며 묻자 요르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게나." "자네도 가야지.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게나. 뭐 챙길게 있는 건가?" 챙길 게 있으면 도와주려는 모습으로 마이터가 주위를 둘러보자 요르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마이터. 그게 아니라 난 가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가지 않으면 여기서 죽게돼. 이 공간이 사라진다는 소리 못들었나?" 놀란 마이터가 다시 요르그에게 다가오며 외쳤지만 요르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래서 남겠다는 거야." "도대체 왜 그러는 건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네. 이 곳이 사라지면 저 안에 있는 녀석들도 같이 사라질테지. 난 저 녀석들과 운명을 같이할 거라네. 원치 않는 녀석들 강제로 개조시킨 죄책감이랄까?" "그런 말도 안돼는..." 마이터가 막 화를 내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요르그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 곳에 들어와서 죽은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들은 내가 죽인 셈이야. 게다가 말일세..." 요르그가 약간 머뭇거리더니 한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난... 애완 동물을 만들 때... 사람도 사용했다네." "허걱!!" 충격적인 발언에 마이터가 경악성을 터트리자 요르그가 그 모습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죄를 지은거지. 물론 사람을 죽인 적은 없네만... 그런 고로 난 갈 수 없어. 어쩌면 나가서 죄값을 치를 것이 두려워 그런지도 모르지. 이해해 주겠나?" 마지막에 간절한 표정으로 마이터를 바라보는 요르그의 눈에는 단호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그래도 마이터가 머뭇머뭇 대자 요르그가 몇마디 덧붙였다. "난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어. 이 나이까지 내가 하고싶은 걸 하면서 살았네. 원도 없지." 한참을 머뭇거리며 갈등하던 마이터는 결국 요르그를 데리고 나가길 포기했다. "그런가? 허허, 자네가 부럽구먼. 나도 죽을 때 원없이 살았다고 말하고 싶군. 그럼 먼저 가게나. 이다음에 저세상에서 만나세나." "후후, 그러지. 좋은 자리 맡아놓고 있을테니 서둘지 말고 쉬엄쉬엄 오게나." "그러지..." 그렇게 말하는 마이터나 요르그나 모두 조용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이터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우리가 있는 마법진으로 들어왔다. 곧 마법진이 다시한번 발동하고 우리는 부서져 버린 집 밑에 있던 어두운 방안에 돌아와 있었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이공간이 사라지면 여기도 같이 사라질 겁니다." 마이터의 말에 우리는 그 방에서 서둘러 빠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르릉 거리는 천둥이 치려는 신호와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땅이 한차례 진동을 하더니 곧 조용해 졌다. 이 곳과 연결되어 있던 이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울림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폐허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요르그..." 그 모습을 보며 마이터는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그 감정을 털어내더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갈까요?"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세이몬을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에이, 아까 그 마족이 쓸데 없는 소리를 해서 그래." "글쎄 말야. 아까 그 말 못하게 막을 걸 그랬어." 나와 류미르는 투덜투덜 대다가 할아버지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자가 할아버지 뿐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간절한 시선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는지 할아버지는 입맛을 한번 다시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그래, 그래... 알았다. 내가 힘 한번 써주마." 그리고는 나와 류미르, 세이몬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기시더니 용언으로 나머지 일행들에게 명하셨다. [이 아이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잊어라. 그리고 내가 마법을 걸었다는 사실도!] 권능이라고도 말해지는 용언 마법이 발현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한결같이 멍한 표정이 되더니 곧 정신을 차리며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뭔 일이 있었어?" "몰라. 있었어?" "나도 몰라." "우리가 왜 여기 가만히 있는 거지? 빨리 돌아가자구." 수도에서 일행들을 데리고 온 피에르 백작은 우리가 성으로 돌아와서 3일 후에 깨어났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서 수도로 돌아간 뒤 얼마동안은 요양을 계속 해야한다고 했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라 안개 숲에서 실려 나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끝까지 남아서 나중에 걸어서 그 숲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쌩쌩했다. 아마도 정신적 결계를 이겨냈다는... 그러니까 자신의 가장 무서운 점을 이겨냈다는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일 거였다. 그건 자작도 마찬가지로, 맨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어두운 모습이 많이 사라진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일행을 안개 숲에서 무사히 데리고 나온 공로가 인정 되어 곧 수도로 불려갈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 영지도 안개 숲이 사라진 탓에 누군가의 영지로 하사될거라고도 했다. 야담이지만, 안개 숲 일을 빨리 해결하고 구경가려고 했던 암시장은 결국 못 가게 되었다. 안개 숲을 조사하러 수도에서 기사단이 파견되는 바람에 돌아올 암시장이 급하게 취소된데다가 안개 숲이 사라졌다는 정보가 벌써 밖으로 나돌게 되어 앞으로의 암시장 장소가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인 양 미안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전해주던 마이터가 빠른 시간 안에 어디서 암시장이 열리는지 알려 주겠다고 했지만, 한번 김이 새버려서 그런지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제 26화 결심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01/10/27 16:24 이제는 평범한 숲이 되어버린 '안개 숲'의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수도는 사건이 하나 터져 있었다. 하루의 절반은 침대에서 지내야만 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던 국왕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오늘 내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국왕이 그냥 그대로 조용히 갔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내일하는 그 힘겨운 상황에서도 쥐어짜낸 소리가 브랜트 제 1 왕자를 황태자로 임명해버린 거였다. 그 국왕이 그대로 죽었으면 똑같이 왕위 계승권을 -상식적으로 이럴 수 없는데 그 국왕이 빠득빠득 우겨서 이렇게 되었다나 어쨌다나... - 가졌다고 하나 여러가지의 타당적인 논리에 의해 루실 왕녀가 왕위를 이어받았을테고, 그럼 괜찮았을텐데 국왕이 그런 하등 쓸데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국왕이 죽을때까지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게 된 것이었다. 그 동안도 왕위 쟁탈전이 음으로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황태자로 지정된 이가 없는 와중에 왕자파가 있다고 해도 왕자가 흥미를 보이지 않고 능력도 안 보여주는 이상 왕녀파 쪽에서는 크게 왕자를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필히 왕자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했기에 불쌍한 브랜트는 이제는 노골적인 암살에 시달리게 되었고 루실 왕녀도 노골적인 감시에 시달려 몸을 사려야만 했다. 덕분에 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고 보필해야만 하는 자카르와 애쉬만 엄청 바쁘게 되어 수도에 오기도 전에 먼저 출발한 그들은 내가 수도로 돌아와도 콧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뭐, 나야 왕궁에 직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국왕에게 보고하러 갈 의무조차 없었으니 할아버지와 함께 아빠네 저택에서 띵까띵까 놀고만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왕자파와 왕녀파에서 서로 견재하느라 겉으로 드러내며 아빠를 끌어들이려는 몸짓은 보이지 않았기에 아빠네 집으로 찾아오는 이들은 없었기에 아빠네 집 주위는 귀족들 사이의 분위기에 맞지 않게 무척 한가하고 평화로웠다. 그래도 매일 왕성으로 출근해야 하는 아빠는 내가 루실과 친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저녁때마다 왕성의 분위기를 세세하게 이야기해주곤 했다. 재미있다는 듯이 이야기 하는걸로 봐서 아빠는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 그런 사람들이 가장 무섭지, 아마? - "하아... 심심하당. 수도에 돌아오면 저 녀석들을 데리고 왕성에 놀러갈까 했는데 말야... 루실 왕녀를 소개도 시켜줄겸..." 무지 한가한 날의 오후... 여느때처럼 할일이 없어 빈둥대고 있던 나는 집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집 뒤에 마련된 연무장으로 나왔다. 그 곳에서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서로 검술 연습을 위한 가벼운 대련을 하고 있었다. '그 존재'를 잡는데 더욱 더 도움이 되고 싶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원래 같으면 나도 흄에게 검술을 배울 시간이었지만 할아버지가 오고 난 후로는 중단 되었기에 할일 없이 빈둥대고 있었던 것이다. 뭐, 전에는 할아버지랑 같이 놀기도 했지만, 지금은 할아버지가 아빠 서재에 콕 박혀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기에 심심함을 견디다 못해 나온 거였는데, 류미르와 세이몬도 자신들의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사이에 끼어들기도 그렇고 나만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것만 같아 - 실제로 그렇지만 - 왠지 처량해졌다. 그래서 연무장 가에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땅에 박아둔 커다란 돌맹이 위에 앉아 멍하니 그 둘이 대련하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다가 둘이 대련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눈짓을 교환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촤악~~!! 그걸 눈치챘다면 갑자기 머리 위에서부터 물이 쏟아져 내려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넋을 거의 빼놓고 있던 나는 불시에 물벼락을 맞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 상황에 멍청히 앉아 있는데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횡 하니 불어와 쫄딱 젖은 내 몸을 한번 휘감고 가자 그제야 차가운 기운이 온 몸을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정면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황당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보였다. "아, 아린?" "너... 괜찮냐?" 왠지 더듬거리는 듯한 그들의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 그대로 대꾸했다. "아니. 안 괜찮은거 같아. 얘들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니?" 어리둥절한 상태라 목소리가 약간 잠겨 나와 목소리를 다듬고 다시 말하려 했는데 갑자기 류미르와 세이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세이몬이 먼저 부들부들 떨리는 걸음으로 뒷걸음질 치더니 손사래를 치며 중얼 거렸다. "나, 난 아니야. 난 안그랬어. 난 안그랬다구. 난 하지 말자구 했는데에...." 멍 하니 세이몬을 바라보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류미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나 처럼 세이몬을 바라보던 류미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 보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지 헛바람을 삼켰다. "허걱... 아, 아린... 그게 말이지.... 난 단지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고... 멍하니 있길래... 저기, 난 네가 충분히 피할 줄 알았거든? 정령을 불러낼 때 까지 가만히 있길래... 눈치 챈 줄 알고... 저기.. 그래서..." 류미르의 말이 대뇌에 전달되고 그걸 받아들인 대뇌가 맹렬히 회전을 시작하자 머리에서 부터 서서히 열기가 번져나와 온 몸으로 뻗어가자 서서히 굳어있던 몸이 풀어졌다. 그리고 대뇌가 열심히 움직인 덕분에 류미르의 말을 해석하여 이 상황을 추리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너희 둘이 장난을 치자고 결의했고, 곧 류미르가 물의 정령을 불러내어 날 이모양 이 꼴로 만들었단 말이지?" 물기를 머금고 앞으로 축 늘어져 시야를 방해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집어 뒤로 넘기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묻자 류미르와 세이몬이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 아린... 그게 말이지... 장난이라기 보다는..." 류미르가 얼른 열심히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그런 노력은 세이몬의 행동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세이몬이 어린애 같은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도망가 버린 거였다. "우아아아악~~~!!" 하긴, 예전에 한번 실수로 날 쌍코피 터트리게 했다가 엄청 당한 기억이 있는 세이몬이었다. 이 상황에서 담담히 있었다면 그가 아니었을 거다. 세이몬의 돌발적인 행동에 뒤통수를 맞은 류미르는 변명을 하다 말고 멍하니 세이몬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내가 부르자 화득짝 놀랐다. "류미르? 말은 끝까지 해야지."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머리카락을 모아서 쥐어짰다. 자꾸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던 것이다. 류미르는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다가 내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이 한마디를 하고는 튀어버렸다. "아린, 미안해애애애~~~!!" 그의 점점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한마디 해줬다. "너희들은 죽었어." 밖으로 나가진 않았을 거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지리도 모르는데다 내가 찾기 힘든 저택 밖으로 나갔다가는 나중에, 이 숨바꼭질이 끝났을 때 나에게 엄청 당할 것을 잘 알고 있을테니까. 게다가 돈도 한푼 없어서 나갔다가는 식사시간대가 되어도 밥도 못 먹을테니 집안 어딘가에 숨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술래의 소질이 없는지 저택을 샅샅이 뒤졌는 데도 녀석들은 콧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내가 몸을 말리고 옷 갈아 입는 동안 충분히 꼭꼭 숨었겠지만, 마법을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사용하고 있을까봐 내가 계속 마나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마법을 사용하는 듯한 마나의 변동은 없었기에 그냥 꼭꼭 숨어있던지, 아니면 내 행동을 보면서 몸을 요령있게 피하고 있을 거였다. 내가 그 둘보다 운동 능력이 떨어지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한시간이 넘도록 찾지 못하자 조금 열받기 시작했다. 그 동안은 녀석들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 자신들의 힘으로 숨어 있을거라 나도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찾아다닌 거였다. 그런데 한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류미르는 정령도 다룰줄 알았다. 그리고 정령을 이용하면 마법을 사용할 때 일어나는 마나의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걸 지금 생각해 낸 나는 혹시 바보가 아닐까...' 라는 자기 비하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내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을까봐 마법을 사용할지 말지 고민하던 나는 그들을 직접 찾아낼 수 있는 탐지 마법보다는 육체적 능력을 약간 높여주는 마법만을 사용해서 찾기로 했다. '뭐, 어차피 그들의 운동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니까 이 정도는 괜찮잖아.' 라고 자신을 스스로 위안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윈드 보이스' 였다. 시전자가 능력만큼, 원하는 범위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법. 이걸로 저택 안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면 류미르나 세이몬을 찾기 수월하겠지만 어차피 이 마법으로 저택을 감시한다 해도 그들이 조금의 소리도 안 낸다면 난 헛고생 하는거긴 했다. 하지만 지들이 동상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소리를 낼 테고 나도 양심이 있지 저택 전부를 범위 안에 넣기 보단 반경 5m만 범위로 설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법을 시전하며 다시한번 저택의 온 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지만 결국 저택 내에서는 찾아내지 못해 정원으로 나왔을 때였다. 너무나 익숙한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여기 계셨습니까?" 위를 올려다보니 정원쪽으로 난 아빠 서재의 창문에 아빠의 것이 분명한 은발머리가 슬쩍 비치는 거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빠 서재가 마법의 범위안에 들어간 듯 했다. '허걱.. 그러고보니 서재에는 할아버지도 계셨지?'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려다가 혹시나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깨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멈칫 거렸다. 그래도 옅듣는 건 안 좋은 거라 다시 가려고 했지만, 은근히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실 지 호기심이 생겨서 잠시 갈등을 하다가 결국 류미르와 세이몬을 찾는 건 뒤로 미루고 그 근처에 있던 커다란 나무의 그늘로 들어갔다. 이 곳에 가만히 서서 듣다간 왠지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무의 그늘 밑에 편안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잠든 척 하며 서재 안에서 들려오는 할아버지와 아빠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 오후라서 그런지 정원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옅듣기에는 안성마춤 이었다. "아시리안양은 어디 갔나보죠?" "아아... 그 두 꼬맹이들과 놀고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그건 왜?" 건성으로 대꾸해주던 할아버지의 말투가 끝에가서 갑자기 살벌하게 변했다. "하.하.하... 전 단지... 칸 시스파슈타인님 옆에 아시리안양이 안 보여서 그냥 물어본 것 뿐입니다." 아빠의 목소리가 약간 경직된 것이, 안 봐도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 했다. 그 뒤에 할아버지의 낮은 코웃음 소리와 함께 잠시 서재에 침묵이 흐르기에 이제 대화가 아예 단절된 줄 알고 나는 다시 류미르와 세이몬을 찾아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아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와 나는 엉거주춤 엉덩이를 다시 마른 풀밭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데... 이건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저는 좀 의외였습니다." "뭐가?" 여전히 무성의한 할아버지의 태도였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말을 받아주는 걸 보니 아빠가 못마땅하긴 해도 날 도와주는 상황이다보니 무시하지는 못하는 듯 했다. 아빠도 그걸 알고 있는지 자신이 알고 싶은 걸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시리안양을 왜 재촉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 아시리안양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모르시지는 않을텐데요." '엥? 이게 무슨 소리?' "흥, 그랬나?" "'인도자'는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임무를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것이 전에는 같은 종족이었던 '파멸되어 가는 존재'에 대한 마지막이자 최고의 예의이지 않습니까?" 처음 듣는 소리에 나는 어리둥절 했다. 물론 '인도자'의 임무가 '파멸되어 가는 존재'가 된 혈족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줄여주기 위한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해주는 것이 예의였다니...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지는 않았었다. 단지 내가 처리해야만 한다고 말해줬을 뿐이었다. 아빠의 질문에 할아버지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있는 걸 보니 아빠의 말이 사실인 듯 했다. 한참 후에 할아버지가 내뱉듯이 말했다. "흥, 지금의 '파멸되어 가는 존재'에게 예의 따위를 지켜주고 싶은 맘은 눈꼼만큼도 없다. 아린을 이 일에 끌어들인 것만 해도 괘씸한 마당에..." "하지만 전에는 당신의 딸이 아니었던가요?" "흥, 지 애비는 안중에도 없던 딸? 차라리 그것 보다는 애교 있는 우리 아린이 백배는 났지. 아니 천배라고 해도 괜찮겠군." ".........그래도, 시간을 끌면 아시리안양만 더 괴로워지지 않겠습니까? 빨리 끝내는 편이..." 아빠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할아버지가 아빠 말을 중간에서 잘라버렸다. "난, 그애의 뜻에 따를거야. 다른 이유는 필요 없어. 지금 그 아이가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다고 해도 그 앤 곧 자신의 현실을 직시할거라고 믿으니까. 괜히 나나 자네가 쓸데없이 나설 필요는 없어." 할아버지의 칼 같이 단호한 말에 아빠가 감탄했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시리안양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시군요." "당연하지. 그 앤 내 손녀야." ".... 부럽습니다..." 의미심장한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가 의기양양한 어조로 대꾸했다. "헹, 자네의 핏줄에서는 저런 아이가 나오기 힘들걸?" 부럽다는 의미가 둘 사이에서 살짝 엇갈렸다는 걸 할아버지는 아실런지... 나는 슬며시 미소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법 시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저택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빠져나왔다. 어떤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고 단지 탁 트인 거리를 그냥 걷고 싶을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내가 처음 와보는 거리에 와 있었다. 아마도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거리인 듯, 내가 늘상 보아왔던 넓은 골목이 아니라 약간은 좁고 거리에 깔린 돌도 군데군데 깨져있는 거리 양 옆으로는 아담한 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골목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는 약간 넓은 공터가 있었고 그 곳에는 근처 사람들의 생활용수를 담당하는 듯한 분수가 있었다. 뭐, 분수라고 해봤자 멋진 동상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게 아니라 단지 깨끗한 벽에 상수도와 연결된 관을 나오게 하여 그 곳에서 물이 언제나 쏟아져 나오도록 설치해 놓은 거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일정량의 물이 항상 고여 있을 수 있도록 돌로 만든 낮은 둑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돌로 만든 낮은 둑 위에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떤 젊은 남자가 앉아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는데, 이야기 하는 남자의 얼굴이나 그 앞에 올망졸망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어린 꼬맹이들의 얼굴이 너무 즐거워보여서 나는 나도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나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있는 법, 그 남자가 재미있게 들려주는 이야기도 한 용사가 나쁜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다는 줄거리였는데 한참을 그 근처에서 듣고 있어도 왠일인지 그 이야기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용사가 여기저기로 모험을 하면서 친구를 만났을 때 나쁜 마왕이 나타나 나라를 위협하여 용사와 친구들이 힘을 합하며 마왕을 물리치면 또 다른 모험을 겪게되는 거였다. 결국 그 남자의 이야기는 날이 어두워져 아이들의 부모가 그 아이들을 데리러 왔을때 까지 끝나지 못했다. 아이들은 부모 손에 이끌리어 그 자리를 떠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에 내일 다시 나머지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고, 그 남자도 그러마 하고는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난 다음 남자가 자신의 옆에서 낡은 류트를 드는 것으로 보아 그 남자는 음유시인듯 했다. '하긴... 음유시인이 아니라면 그렇게 좋은 말솜씨로 아이들을 홀딱 반하게 하지는 못했겠지.' 아이들이 골목 골목으로 다 사라지고 주위가 한산해지자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싱긋 웃어보였다. 어깨 넘어로 늘어뜨린 갈색 머리에 단정한 얼굴선을 가진 남자는 약간 야위어서 그런지 유약해보이는 인상이었다. 그의 태도가 내가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는 걸 아는 듯해 보여서 나는 서슴지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이죠?" 역시나,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빙긋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렇군요. 좋은 저녁이예요." 예의 상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를 해주자 그의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기뻐서 짓는 미소라기 보다는 위로를 해주는 듯한 따스한 미소였다. "이런 저녁에는 따끈한 스튜를 먹는게 제일이죠. 제가 잘 아는 식당에서는 스튜를 아주 맛있게 만들거든요. 같이 가시겠어요?" 그러고보니 벌써 저녁때였다. '돌아가지 않으면 할아버지와 아빠가 날 찾으려고 사람들을 풀어놓을지... 아, 아니구나. 두 분은 내가 어디 있던 쉽게 찾으실걸...' 나는 그의 청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청하는데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왠지 이 사람에게는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골목 골목을 돌아가자 오래 되어보이는 자그마한 식당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곳에 오래 자리를 잡고 있었던 듯한 그 곳에 그는 익숙한 듯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몇몇개의 오래된 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있고, 입구 바로 옆에는 카운터가 있었는데 그 곳에는 덩치가 큰 중년 여자가 앉아 있다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못마땅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그 중년 여자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저녁이예요, 메이." "쯧쯧, 매일 그렇게 놀러 다니지 말고 어디 일자리라도 알아 봐야지. 젊은 사람이 그렇게 빈둥빈둥 놀면 써? 오늘도 꼬맹이들이랑 놀다가 들어온 거지?" "하하하..." 그가 웃음으 로 얼버무리자 중년 여자가 고개만 설래설래 저었다. 눈쌀을 찌푸린 것이 그가 미워서 그런게 아니라 걱정 스러워서 그런 듯했다. 첫 인상을 찡그린 모습을 봐서 좋게 안 봤는데 그녀는 의외로 인심이 좋은 여자인 듯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흘러나온 여자의 말에 나는 내 생각이 옳은건지 의심해 봐야 했다. "그러다가 밀린 방값 못 내면 어쩌려고 그래? 벌써 세달치나 밀렸다는 거 알아?" "하하하, 돈이 생기면 곧 갚겠습니다." 메이라고 불린 중년 여자는 뭐라고 더 한마디 하려다가 옆에 멀뚱멀뚱 눈을 뜨고 둘만 바라보는 날 보더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나를 이끌고 식당 안에서 주방과 가장 가까운 식탁으로 가서 앉게했다. "백수 였어요?"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면 음유시인이예요. 요즘은 일이 없어서 쉬고 있지만..." "흐음..." 그때 주방에서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자 못지 않은 큰 덩치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나오다가 우릴 보더니 웃으면서 다가왔다. "여어, 데이너... 오늘도 꼬맹이들과 놀고 온 거냐? 어라? 이 아가씨는 누구냐?"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이곳저곳 뜯어보던 남자가 내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겠던지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하긴, 나는 류미르와 세이몬과 놀다가 그대로 나온 상태였기에 수중에 돈 한푼 없었고, 옷도 놀기 편하게 입은 단순한 바지에 셔츠 차림이었다. "그냥 우연히 만난 분이세요. 피터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예요." "그으래? 하지만 이 근처에서 살진 않나보구나.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하하하,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오늘 처음 만났다니까요. 신경 끊고 저녁좀 주세요. 계속 아가씨만 쳐다보다가 메이가 질투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닌게 아니라 카운터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가 이쪽을 날카로운 시선을 바라보고 있어 신경쓰이고 있던 참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어쨌든 너도 참 큰일이다.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말야. 데이너 너는 목소리도 좋으니까 좀 큰 식당 같은데 가서 테스트라도 한번 받아보지 그래? 이런 곳에서만 머물고 있으면 올 기회도 안 온다고." "그럴게요." "말로만 대답하지 말고 내일은 정말 그쪽으로 나가보라구." "계속 그렇게 잔소리만 하실 거예요? 저 배고프다구요." "아이고 참, 내 정신좀 봐라. 잠시만 기다려라. 곧 가져다 줄테니." 그 덩치 큰 남자는 자신의 이마를 딱 치더니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참 좋은 분이세요. 덕분에 신세를 지고 있죠." 주방으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데이너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백수라는 것을 알아버린 나는 그에게 약간의 선입관이 생겨서 그런지 그 순수한 웃음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 "빨리 신세를 갚아야 겠네요." 그래서 그런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냉담한 말투가 튀어 나왔다. 데이너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래지자 좀 미안해져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생각해보니 나란 존재도 부모를 잘 만나서 떵떵 거리며 살았던 것 뿐, 내 스스로 일해서 먹고 산 적이 없었으니 그를 안 좋게 볼 자격 또한 없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나는 더욱 미안하져서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런 말 할 자격은 없는데..."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남을 기분 좋게 해주는 웃음이라기 보다는 허탈하게 보이는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럼, 그런 자격이 있으면 말해도 된다는 소리군요." 명랑한 어조였지만, 그 말 속에 들어있는 차가운 뜻에 허를 찔린 것 같아서 나는 발끈했다. "적어도 어른이라면, 자신은 책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예요." "그래요? 그럼 어른이라면 실수도 하지 말아야 돼고, 방황도 하지 말아야 겠군요?" "예?" 또 다시 내 말을 걸고 넘어지는 그의 질문에 그가 화가 난 건 아닌지 의아해져서 살펴 보았지만, 그다지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대답을 안하고 묵묵히 있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죠. 그리고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다보면 스스로를 책임 질수 없을수도 있죠. 그러면 어른이 아닌가요?" 왠지 약간은 자조가 섞인 그의 말에 내가 하지 말아야할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당신 이야기인가요?" "글쎄요..." 애매한 말로 대답을 회피하며 싱긋 웃는 그의 얼굴이 왠지 그늘져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문득 엄마가 생각나버렸다.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어른이란 꼭 엄마를 말하는 듯 했다. 잠시 그나 나나 입을 다물고 각자의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주방에서 예의 그 아저씨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스튜에 빵, 중간을 십자 모양으로 갈라 구운 감자가 전부였지만 그걸 바라보는 데이너는 진수성찬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와우, 오늘도 멋진 메뉴군요. 고마워요, 피터." "오냐, 많이 먹어라. 아가씨도 많이 먹어요." 친절하게 웃으며 건네는 피터의 말에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스픈을 집어 들었다. 비록 좋고 비싼 재료가 가득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꽤 맛있었다. "맛있죠? 피터의 음식 솜시는 정말 끝내준다니까요." 한참 신나게 퍼먹던 데이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싱긋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맛있네요." 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스튜를 떠 먹고 빵을 뜯어 먹는데 데이너가 멈칫 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예?"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멋적은 듯 웃으며 스튜를 뜬 스픈을 들어 보였다. "왜... 아까 당신이 말할 때마다 걸고 넘어진거 말예요. 나도 모르게 화가 났었나 봐요." 그제야 그가 뭘 가지고 사과를 한 건지 안 나는 피식 웃었다. "아아... 그건 내가 잘못한 건데요. 호의를 베풀어주신 분에게..." 내가 쉽게 사과를 받아들이자 데이너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20살이 넘은 듯 한데 마치 어린애 같은 면을 보이는 그가 신기하게만 보였다. "하하, 호의랄 것 까지야... 단지 당신이 아까 부럽다는 듯이 애들이랑 나를 바라보길래 피터가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어요. 피터의 음식은 맛도 좋지만 따뜻해서 우울한 기분을 씻어주거든요." "그런 거 같네요. 그런데.. 내가 그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어요?" "그래요, 그랬어요. 주제넘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 아이들 처럼 해맑게 웃고 싶은 거죠?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후후... 그건 누구나가 꿈꾸는 일 아닌가요? 아,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있는데..." 그의 말이 왠지 내 맘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아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뭐든 물어봐요. 대답 못하는 것 빼고 다 대답해줄게요." 데이너는 싱긋 웃는 얼굴로 구운 감자를 하나 집어들어 껍질채로 베어 물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당신이 그 애들에게 해준 이야기 말인데요... 그거 어디서 들은 이야기예요?" 그러자 그가 악동 같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왜요? 내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 있었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딴 데서 들을 수 없는 거라구요." "알아요. 그렇게 긴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봤으니까... 보통 이야기는 용사가 한가지 악당을 물리치고 잘 먹고 잘 산다는 걸로 끝나지 않나요? 그런데 당신 이야기는 끝이 없더군요.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면 이번엔 드래곤이 나타나고, 드래곤을 무찌르면 폭군이 나타나고... 당신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대체 몃살까지 살죠?" 황당하다는 듯한 내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자꾸 피식 피식 웃었다. "모르죠. 한 천살 정도 살려나? 어쩌면 저주에 걸려서 영원히 살지도..." "참 불쌍한 주인공이군요. 작가를 잘 못 만나서... 그 이야기 당신이 지은거죠?" 그러자 그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하하, 아니예요. 저도 들은 이야기예요." "에?" 믿겨지지 않는 그의 말에 내가 진짜냐고 묻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니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제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예요." "당신 할아버지가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는 한번 더 웃어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할아버지가 지으신 거니까요." "헤에..." 의미가 불분명한 내 감탄사에 그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이야기 하나 하나가 끝날 때 마다 무척 아쉽고 안타까워 했죠." "그거야 보통 그렇잖아요." 당연한 말을 한다는 내 말에그가 소리없이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선 내가 안타까워 하는게 맘에 걸리셨나봐요. 그래서 어느날 부턴가 시작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분이 돌아가실 때 까지 끝나지 않았죠." "헤에..." 그의 할아버지에게 감탄 되어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이야기가 끝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내 눈초리를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훗, 지금은 할아버지의 말에 저도 동감하지만요. 어쨌든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내가 그 분에게 끝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뭐라고 했어요?" "네가 이어간다면 그 주인공은 더 오래오래 살 거라고 하시더군요." "와, 그래서 당신이 그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가요?" "그렇죠. 뭐, 솔직히 말하면 할아버지가 이야기 해주신 것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도 계속 이어갈 생각이예요. 난 아직 그 이야기가 끝나지 않길 바라거든요. 내 이야기를 듣는 어린 청취자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래요." "호오..." 그 이야기를 하는 데이너의 얼굴이 너무 환해서 나는 나도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그의 말솜씨 보다는 그의 행동에 취해 이야기를 듣게 하는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를 해서 기분이 좋아진 듯 데이너는 싱글 싱글 웃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삶은 감자를 집어 먹다가 문득 손도 안 댄 내 접시에 담겨진 구운 감자를 바라보았다. "그거 안 먹어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다구요." "아아, 스튜하고 빵을 먹다 보니 배부르네요. 당신이 하나 더 먹을래요? 내가 하나 먹을께요." "난 좋죠." 신나라 하며 내가 건네주는 감자를 받아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께서 아쉬우셨겠어요. 당신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으셨을텐데..." 감자를 먹던 그의 행동이 멈칫 거렸지만 곳 그는 예의 그 기분 좋은 미소로 싱긋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내가 있으니까. 내가 그분 대신 다른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줄 테니까 날 믿고 편히 눈을 감으신 거겠죠. 당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퍼트리고 당신을 계속 기억 해줄 내가 있으니까요. 서운하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그의 부드러운 말이 눈에 안 보이는 물결이 되어 내 마음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렇네요. 당신이 있으니까..." '엄마는 어떨까? 서운하겠지? 하지만... 지금 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을 거야. 혹시 지금 괴로워 하고 있는건 아닐까? 내가 가면... 기뻐해 줄까?' 접시에 달랑 혼자 남은 감자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데이너가 접시를 톡톡 건드렸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싱긋 웃었다. "감자가 식는다니까요. 당신에게 먹혀지길 열렬히 바라며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 기대를 버리지 말아줘요." "그러죠.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해야죠." 나도 그에게 싱긋 웃어주며 감자를 집어 올리며 속으로 결심했다. '내일 당장 가자. '그 존재'가 날 기다릴거야. 자신을 인도해주길...' 든든하게 얻어먹고 일어나 그와 작별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식당을 나가기 전에 메이라고 불리는 중년 여자가 나를 가로막았다. "5셀이라우." "에?" 분명히 나보고 식사 값을 내라고 하는건데 나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집에서 그냥 나와서 동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데이너에게 초대를 받아서 먹은거긴 했지만, 저 중년 여자가 데이너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눈치채고 있기에 돈이 있으면 그냥 내가 냈으면 좋으련만, 돈이 없어 난처해진 나는 데이너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데이너가 나서서 그녀에게 말했다. "메이, 이건 내가 사는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흥, 외상은 안돼. 네가 저녁마다 여기서 노래를 부르는 건 알지만, 그건 네 식비값일 뿐이잖아. 방세도 밀린 주제에 언제 갚겠다고? 아가씨, 말해두지만 외상은 안돼우. 돈이 없다면 병사를 부를 수 밖에 없어." 나에게도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며 단호하게 말하자 무지 난처해졌다. '하아... 돈이 없으면 무지 서럽구나.' 이런 서러움을 매일 겪을 데이너가 가엽기도 했고, 그걸 꿋꿋이 버텨 왔을 그가 대단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고 이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저기요. 지금 제가 돈이 없거든요. 그러니 집에서 돈을 가져와서 드리면 안될까요?" '흑흑... 처량하다 아린아.. 네가 언제 이렇게 쩔쩔 매고 살았더냐...' 할아버지가 아시면 노발대발 하실 만큼 나는 미안한 미소로 정중하게 물었건만 메이라는 여자는 코웃음만 쳤다. "흥, 미안하지만 그건 안돼겠구만. 집에 갔다 온다고 해도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아?" 이럴 때 장식품이라도 하나 떼어 주면 좋으련만... 뭐가 달려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다보니 내 옷에는 그 흔한 금단추나 브로치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하아...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전 지금 돈이 없는데요." 그러자 그녀가 두 눈에 상씸지를 켰다. "돈이 없는데 식당에는 왜 들어온담?" "메이, 내가 대접한 거라고 했잖아요." 데이너가 또 중간에 끼어들자 여자의 시퍼런 눈길이 그에게 쏟아졌다. "돈도 없으면서 누굴 대접해? 너가 그런다고 내가 봐줄 거 같아?"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탓인지 주방에 있던 피터가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이 아가씨가 돈이 없다고 하잖아요. 돈이 없으면 먹질 말던가..." 그녀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하는데 되게 기분 나빴다. '내가 원해서 여기 온 건가?' 피터는 난처한 데이너의 얼굴과 막 화가 나려고 하는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 여자에게 손짓했다. "그냥 보내 줘. 데이너가 대접한거잖아." 하지만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여봇, 우리는 뭐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우?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누굴 공짜로 먹여줘요? 앙? 당신은 우리가 부자인줄 알우? 난 절대 못 보내요. 돈이 없으면 병사를 부를테니 알아서 해요." "병사를 부르면 당신이 난처해질텐데요? 난 이래뵈도 귀족이라구요." 화가 속에서 끓오오르려 했지만, 용케 참고 침착하게 말해줬다. 하지만 그녀는 콧방귀만 한번 더 뀌었을 뿐이었다. "하, 요즘 귀족 나리들은 돈 한푼 없이 이런 변두리 식당에서 밥을 먹나보지? 당신이 귀족이면 난 왕족이겠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참지 못하고 차갑게 대꾸했다. "어머, 무식한게 용감하다더니 딱 그짝이로군." "머여?" 여자의 거대한 얼굴이 분노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게 어리다고 봐줬더니만, 싸가지가 없네." "누가 봐줬는지 모르겠군. 이런걸 보고 적반하장이라고 하지 아마?" 팔짱까지 딱 끼며 정말 싸가지 없게 고개도 돌린 채 틱틱거리자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데이너와 피터가 뻗어나오는 분노를 주체 못해 곧 폭발할 것 같아 보이는 그녀와 나를 걱정스럽게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 이. 맞아야만 정신을 차리려나?" 본격적인 행동으로 나서려는 듯 자신의 소매를 걷어 부치며 여자가 카운터 뒤에서 걸어나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두 손을 올리는 찰나,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며 나에게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낯익은 얼굴은 식당 안을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카운터 앞에서 여자와 대치하고 있던 나를 보더니 달려왔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시피르님께서 엄청 화가 나셨습니다." 그 순간 나에게 손을 뻗치던 여자의 몸이 딱 굳었다. "흄, 혹시 할아버지 저녁 안 드셨어?" 흄 뒤로 알렌과 몇몇의 사병들이 식당 안으로 주르르 들어왔다. "당연하죠. 저녁도 안 드시고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신다구요." "그래? 큰일났네. 나 여기서 밥 먹었는데... 아, 맞다. 흄?" "예?" "돈 있어? 내가 집에서 그냥 나오느라고 돈을 안 가지고 나왔거든 그랬더니 이 여자가 날 막 패려고 하네?" 내가 손가락으로 바로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르키자 흄이 황당하다는 듯이 나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용케 그냥 두셨군요. 보통 그러면 반쯤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여자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머나? 놀랐나보네? 내가 귀족이면 넌 왕족이라며?" 내가 기분 나쁜 어조로 비아냥 거리자 옆에서 가만히 있던 피터가 털썩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주십시요. 미천한 것이 귀한 분을 못알아 봤습니다. 제발 선처를 베푸시어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 모습을 보니 여자를 골려주려던 생각이 싸그리 사라져 버렸다. 이 곳의 평민과 귀족 간의 격차가 얼마나 심한지 잠시 잊고 있었던탓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인심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많이 먹으라고 말해주던 아저씨가 무릎까지 꿇고 싹싹 비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보고 싶지않은 장면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려버리고 괜히 흄에게 쨍알댔다. "흄, 돈 있냐니까?" "얼마나 필요 하십니까?" "내가 집에가서 줄테니 있는 거 탈탈 털어봐." 내 말에 흄이 자신의 품을 뒤져 꺼낸 건 50셀 은화 한개와 10셀 은화 3개, 그리고 5셀과 1셀 동전이 각각 5개씩이었다. 나는 그걸 그에게 건네받아 옆에서 굳어 있는 데이너에게 넘겨 주었다. "자, 이건 내 몫의 식사값이야. 난 남이 사주는 건 별로 안 좋아하니까 더치페이로 하자구." 그리고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피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이봐요, 피터?" "예?" 두려움으로 가득 한 그 눈을 바라보다가 나는 피식 웃어줬다. "당신 요리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는 일어나서 데이너와 피터를 번갈아 보며 한마디 했다. "잘있어요." 몸을 돌려 내가 먼저 식당을 빠져 나오자 그 뒤로 흄과 알렌이 줄줄이 빠져 나왔다. 이미 밖은 캄캄했고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셔츠 하나만 달랑 입은 내가 염려스러웠는지 흄이 자신의 망토를벗어서 걸쳐 주었다. "고마워 흄. 그런데 말이지, 내가 저기 있는거 어떻게 알았어?" "주인님께서 말해주시더군요. 여기 있을 거라고." '흠, 마법을 사용했구나.' "그리고 전언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흄의 말에 나는 쿡 웃었다. "돌아오시면 배가 부르더라도 꼭 저녁을 드셔주십사 하더군요. 안 그러면 큰일난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제 27화 결판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났다. 나를 깨우려고 들어온 마샬(내 전속 시녀장)이 벌써 세수까지 마치고 머리를 빗고 있는 나를 보더니 눈이 둥그래졌다. "어머나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좋은 아침이야, 마샬. 내가 오늘 어디 좀 다녀와야 하거든. 그런데 할아버지하고 아빠는 일어 나셨어?" "주인님이야 벌써 일어나셨죠. 음, 그러고보니 시피르님도 일어나셨더군요. 오늘 제가 모르는 무슨 날인가요?"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나에게 다가와서 머리 빗을 받아 들으려는 그녀에게 나는 손을 저어보였다. "됐어. 오늘은 내가 할거야." "그러실래요? 그럼 옷이라도 준비해 드려야 겠군요. 외출하신다니까 외출복을 준비해 드릴까요?" 몸을 내 드래스 룸쪽으로 돌리며 묻는 마샬에게 나는 다시 한번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내가 다 준비해 놨으니까 신경 쓰지마." 내 말에 방 안을 둘러보던 마샬이 탁자 위에 놓인 망토와 물건들을 발견하더니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나 아가씨, 또 임무 때문에 나가시는 건가요? 하지만 출장 가신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게다가 이 근처에서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못들었구요." "임무 때문에 가는 건 아니고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가는 거야. 마샬, 거기 있는 것들 좀 가져다 줘." 머리를 다 빗고 목덜미 부근에서 가죽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다음 전신 거울 앞에 서며 말했다. "이런 옷차림으로 가시는 거라면... 심각한 일이신가요?" 마샬이 망토와 물건들을 가져오며 걱정스레 물었다. "음....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기는 해." 제일 먼저 할머니의 서클렛을 착용하고 레이피어는 가지고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가지고 가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망토를 두르자 준비는 끝났다. "주인님도 알고 계세요?" 뒤에서 망토에 잡힌 주름을 펴주면서 마샬이 다시한번 물었다. "지금 부터 말하러 갈 거야." 할아버지와 아빠는 응접실에서 가벼운 모닝 티를 즐기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활기찬 나의 인사에 둘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망토까지 다 갖춰 입은 내 옷차림에 둘의 시선이 의아하게 변하길 기대했는데 의외로 두 분은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잘 잤니?" "호오, 드디어 결심이 선 게로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헷, 벌써 눈치를 채고 계셨네요. 아침 먹고 갈 생각이예요." "그래 알았다. 장소는 어디냐?" "알베르트 산이요. 거기에 있을 거 같아요." "지금 간다구?" 식당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 내려와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이 내 옷차림을 보고 의아해하다가 설명을 듣고 나자 무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정보가 들어온 거야? 저번에는 출발하기 며칠 전에 알려줬잖아?" "맞아. 설마 우리를 떼어 놓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류미르의 질문에 세이몬까지 맞장구를 치며 나를 바라보는데 그 시선에는 서운함이 깃들어 있었다. "에 그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동안은 내가 찾기 싫어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만 쫓아다닌거지. 내가 직접 찾으러 다니면 금방 찾아낼 수 있어. 지금부터 그럴려고 하는거고." "그러면 너랑 항상 같이 다니던 그 사람들하고는 같이 안 가는 거야?" "응. 이번에는 나 혼자 갈거야." 세이몬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할아버지의 호통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냐? 누가 너 혼자 보낸다고 하든? 나도 간다." "에? 하, 하지만..." ''인도자'와 '파멸되어 가는 존재'의 싸움에는 아무도 끼어들면 안돼는 거잖아요...'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내 말을 잘라버렸다. "누가 네 싸움에 끼어든다고 했냐? 난 단지 구경하러 갈 거다." "그, 그래요?" 손녀 싸움을 구경하러 간다는 말에 황당해져있는데 아빠가 끼어들었다. "뭐, 그 싸움에 참관자가 몇명 있어도 상관은 없겠죠. 그래서 말인데, 저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아빠의 질문에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네가? 네가 뭐하러?" "하하하, 솔직히 말하자면... 보고싶어서요. 안... 될까요?" 남은 목숨걸고 싸우는데 보고싶어서 따라간다고 하는 말이 별로 맘에 안들었지만, 아빠의 간절한 눈빛과, 설마 딸내미가 싸우는데 구경하러만 따라가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난 괜찮은데요, 할아버지도 괜찮죠?" "맘대로 해라. 뭐, 여차하면 어디에든 사용할 수 있겠지."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나섰다. "저기.. 저희들도 가면 안될까요?" "방해는 안 할게요." '이게 뭔 구경거리인줄 아나?'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갑자기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느낌에 긴장감이고 결심이고 다 풀려버리는 듯 했지만 그 동안 날 도와준 두 녀석의 청을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에휴, 맘대로 해라. 난 모르겠다." 그러자 할아버지도 한마디 하셨다. "구경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는 게 좋을게다." 그렇게 해서 알베르트 산에는 나와 구경꾼(?) 네명이 같이 가게 되었다. 알베르트 산과 도나휴 카페티안이 살던 오두막집 근처에는 결계가 쳐저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못 뚫을 분은 아니었으므로 나의 기억에 따라 할아버지가 우리 모두를 이동시켰다. 내가 해도 될거였지만, 난 싸움을 위하여 힘을 아껴야 한다나 뭐라나... 그런데 의외로 우리 말고도 그 곳에 온 이가 또 있었다. "이게 누군가?" "안녕하셨습니까 칸 시스파슈타인님? 100년 전에 성룡식 인사차 같이 오셨을 때 뵙고 처음 뵙는군요?" "그렇군. 그런데 자네를 여기에서 볼 줄은 몰랐는걸?" "호호호, 모르셨군요? 저기 있는 칼 아펜젤러가 '인도자'와 '파멸되어 가는 존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저에게 몇번 다녀갔었답니다. 덕분에 저도 이번 일을 알게 되었지만요." "그래서... 구경하러 왔다는 말이로군?" "호호호, 눈치 채셨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렇죠." 할아버지는 눈쌀을 살짝 찌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심히 못 마땅한 표정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안심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셨어요? 칸 크제나님?" 그랬다. 그녀는 예전에 내가 성룡식을 끝마치고 인사를 한 고룡중 한 명으로 얀스크산에 살고 있던 실버드래곤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이런 일로 만나서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힘내길 바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와 내가 인사를 나누자 아빠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일찍 오셨군요, 칸 크제나님?" "호호호, 자네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달려왔지. 오고 나서 보니 내가 너무 서둘렀더군." "연락이요? 아빠가 연락했어요?" 아빠와 칸 크제나의 대화에 놀란 내가 작게 속삭였다. 저쪽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이 소리가 들렸다간 아빠가 또 한번 곤욕을 치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칸 크제나도 그걸 알고 있는지 나와 마찬가지로 작게 속삭여 줬다. "그래, 내가 고서를 뒤적여 정보를 알아내는 대신 아펜젤러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주기로 했단다. 홍홍홍..." 나에게는 심각한 일을 재미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게 좀 미안했는지 칸 크제나가 약간 멋적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칸 크제나가 말하는 모습을 보니 아빠가 내 친 아빠라는 것도 다 말한듯 했다. "그랬군요. 그런데 여기에서 아무도 못 보셨나요, 칸 크제나님?" "글쎄다... 나도 방금 전에 왔기 때문에..." 내 질문에 칸 크제나와 아빠도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칸 크제나의 표정에 약간의 호기심이 이는 걸 보니 정말 우리가 오기 바로 전에 온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 할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 뭐..." 나는 말을 하다말고 딱 멈췄다. 거의 쓰러져가는 도나휴 카페티안의 오두막집에서 살기가 천천히 뻗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내 예상이 맞았네?"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오둑막의 반은 떨어져 나간 문짝을 바라보았고 할아버지와 류미르, 세이몬도 내 쪽으로 급하게 다가왔다. 잠시 후 우리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던 문짝이 천천히 기울어지며 완전히 떨어져 나가 바닥과 부딪쳤다. 쾅~!!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어 조용한 가운데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움찔 하는 가운데 어두컴컴한 집안에서 '그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저 집안에서 얼마나 오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지 마치 창고에 오래 처박아둔 물건처럼 온 몸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어서 머리카락 색이나 옷 색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어서 움직일때마다 머리카락과 몸에서 먼지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 눈만은 여전히 붉은 안광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 존재'의 모습을 처음 본 할아버지와 칸 크제나는 작은 신음성을 흘렸다. "쯧쯧, 목욕이라도 하고 있지... 음, 그건 너무 무리한 바램이었나?" 하등 쓸데 없는 말을 하면서 내가 일행 앞으로 한 걸음 나서자 그것을 신호로 할아버지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이 저 뒤쪽으로 몸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앞으로 10발자국 쯤 떨어져 선 '그 존재'의 몸에서 좀 더 진한 살기와 뒤엉킨 마나가 뻗어나왔다. 꿀꺽~ 긴장감으로 인해 메마른 입안을 적시려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할머니의 서클렛에 손을 가져갔다. 드디어 할머니의 힘을 써먹을 때가 온 것이다. "우~ 떨려라..." 너무 긴장이 되어 손끝이 떨리자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려고 '그 존재'에게 실없이 한번 웃어주고 나서 심호흡하고 단호하게 외쳤다. "봉인 해제!!" 장소가 장소니만큼 나는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르면서 온 몸을 감싸오는 서클렛에서 흘러나온 거대한 마나의 기운에 몸을 적용시키면서 다시한번 중얼거렸다. "폴리모프!!" 아무래도 인간의 몸으로는 할머니의 힘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내 몸이 점점 커지는것을 느끼며 앞을 바라보자 어느새 '그 존재'도 허공에 몸을 띄우고 드래곤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내가 변신하면 감당하지 못할 걸 알고 같이 모습을 바꾸는 듯 했다. 쿠워어어어어~~ 완전히 모습이 변한 '그 존재' 드래곤이 크게 울부짖었다. 나도 울부짖을까 하다가 아직 그런거에 익숙하지 않아 쑥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울부짖는 대신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느라 훤히 드러난 '그 존재'의 가슴팍에다 강하게 돌려차기.... 는 다리가 짧아서 불가능 하기 때문에 몸을 돌려 꼬리로 후려쳤다. 파앙~!! 거대한 북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제대로 들어간 듯 꼬리에 감각이 왔다. [우쌰~~!!] 다시 몸을 돌려 '그 존재'를 바라보자 인상을 팍 쓴채 뒤로 약간 밀려가 있었다. 마나가 뒤엉켜서 그런지 예전에는 선명한 선홍색과 비슷한 붉은 빛을 띠고 있던 몸이 지금은 되게 짙은 검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꼭 상한거 같아...] 깔보는 것 처럼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리자 '그 존재'가 이빨을 빠드득 갈더니 그 나보다도 더 큰 거대한 몸을 그대로 나에게 부딪쳐 왔다. 슈우우웅~~~ 퍼억~!! 마치 제트기가 날라오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대로 옆구리를 부딪쳐 버린 나는 머리가 크게 흔들려 어지러움증을 느낄 지경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정신이 흩어지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부터 본격적인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옆구리와 옆구리를 붙인 상태에서 '그 존재' 드래곤이 자신이 더 몸집이 큰 점을 이용하여 굵고 몽툭한 팔로 손톱을 가득 드러낸 채 내 목덜미를 향해 내리치는 거였다. [아린아, 목 조심해라!!] 밑에서 보고 있던 아빠가 재빨리 용언을 보내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완전히 밑으로 180도 회전시켜 '그 존재' 드래곤의 배를 보게되자 거기를 손톱으로 쫘악 긁어버렸다. 하지만 '그 존재'도 가만있지 않고 내가 몸을 숙여버리자 내 목덜미 대신 내 날개죽지를 내리쳤다. 퍼억~~!! [아야야 아퍼... 왠지 나만 당한 거 같아.] 날개죽지를 맞은데다가 드래곤의 배를 긁은 손톱이 빠질 것 처럼 무지 아팠다. 아직은 내 손톱이 드래곤의 비늘보다 강하지 못한 듯 했다. [꼬리를 사용해. 꼬리를!!]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서 꼬리를 위로 올렸다가 힘차게 내리치자 뭔가가 맞았다. [머리가 맞았다. 다시 한번 내리쳐!!] 할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다시한번 꼬리를 올렸다가 내리쳤는데 이번에는 뭔가 때리는 느낌 대신에 엄청난 통증이 꼬리에서 느껴졌다. 꼬리를 물린 것이었다. 키에에엑~~!! [우갸갸갸~~!! 아포, 아포!!] [날아올라! 날아올라서 상황을 보면서 싸워~!!] 아빠가 다급하게 용언을 날렸다. 날개를 파닥거리려고 했지만, 아까 날개죽지를 맞은게 잘못 됐는지 날개를 한번 움직일때마다 통증이 와서 마법을 사용해서 몸을 띄웠다. [레비테이션!!] 꼬리가 아직 물린 상태였기에 너무 아파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위쪽으로 떠오르게 하자 꼬리를 물고 머리를 흔들고 있는 '그 존재'의 머리통이 보였다. 퍼억~!! 꼬릴 더이상 못 물고 있도록 위에서 그대로 밑으로 하강하면서 뒷발로 '그 존재'의 머리를 쳐버린 거였다. 하지만 덕분에 '그 존재' 드래곤의 이빨에 내 꼬리가 쫘악 찢어져서 피가 튀었다. 쿠워워워~~!! [우에에엥, 아포라~!!!] [정신 차려.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버렷!!] 아빠의 지도에 나는 좀 더 하강하면서 엉덩이로 '그 존재'의 등을 한번 찍어주고 위에서 '그 존재'의 목덜미를 양 손으로 꽈악 부여잡은 채로 목을 힘껏 물었다. 쿼어어어어~~!! 찝찔한 맛이 입안에 느껴지는 것이 피가 나온 듯 했다. 거기에 만족하지 못한 아빠가 또 한번 외쳤다. [마법을 써라. 마법을 써!!] '마법? 뭘 쓰지?' 하지만 길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내 엉덩이 공격에 의해 날개가 부러졌는지 밑으로 추락하면서 '그 존재'가 나를 떨궈내려고 몸을 강력하게 흔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존재'가 강력하게 머리를 흔들면 흔들수록 내 머리도 같이 흔들어졌고, '그 존재'의 목에 박힌 이빨이 흔들거려서 아팠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내가 물고 있던 '그 존재' 목의 상처가 점점 더 벌어져 피가 더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린아, 빨리 서둘러라. 조금 있으면 땅에 부딪친단 말이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할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면서 좋은 생각까지 떠올랐다. [다그 하우트!!] 강력한 마나를 지면으로 날려보내며 외치자 우리 바로 밑의 땅에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송곳 모양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는 '그 존재'의 위에서 타고 있는 형상이었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내 몸에 실드를 쳐 놓고 '그 존재' 가 밑을 볼 수 없도록 목을 문 입에 더욱 더 힘을 주었다. 콰과과광~~!! '그 존재'가 날카로운 바위 송곳을 몸으로 직접 부딪칠때 부터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그 보다도 더 큰 충격이 느껴졌다. 콰앙~!! 드디어 땅에 부딪친 것이었다. 비록 '그 존재'를 쿠션삼고 있었다지만, 충격이 고스란이 전해져 와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 했고, 목을 물고 있던 이빨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에구, 에구, 에구구... 이럴 줄 알았으면 충격 흡수 실드까지...] 그러나 내 푸념은 계속 되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동시에 외쳤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거냐? '그 존재'가 정신을 차리려고 한다.] [아린아 빨리 심장을 노려라.] [아냐, 목이야. 목을 잘라 버렷!] [에에? 목이에요, 심장이에요?] 아빠와 할아버지의 급한 말소리때문에 퍼뜩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두 가지로 갈린 의견때문에 나는 갈팡질팡 했다. [심장이라니까? 빨리 심장을 찔러라.] [뭐 하는 거냐? 목이야. 목을 잘라버렷!] [흐에에에~~~!!] 솔직히 의견이 한가지 였어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목을 자르고 심장을 찌른단 말인가... 두 분의 다급한 목소리가 자꾸 재촉을 했지만,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나는 이리저리 기웃대기만 할 뿐이었다. [아린아!!] [아린아!!] 그때 그 두분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으니... [두 분, 그만좀 하세요. 애가 어떻게 할 줄 몰라하잖아요. 얘야, 네 맘대로 하려무나. 하지만 서둘러야 할 거다. 지금 '그 존재'가 정신을 차리려고 하거든.] 침착하고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날 경직시키기에 충분했다. 칸 크제나의 말에 밑을 내려다보니 '그 존재'가 움찔 움찔 거리는 것이 곧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아린아!!] [어서 서둘러!!] [깨어난다!!] [에라, 나도 몰라!! 루비아이 블레이드!!] 나는 아직 검기를 제대로 다룰 줄 몰랐기에 검을 형상화 하는 마법을 쓴 것이었다. 곧 내 손에는 마나가 모여들어 무척 밝은 선홍색의 거대한 검 모양을 형상화 시켰고 나는 그것으로 곧장 '그 존재'의 심장을 향하여 찔러버렸다. 푸헉~!! 내 손톱까지 막는 비늘이라 찌르는데 힘겨울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쉽다고 여겨질 정도로 너무 수월하게 그 뾰족한 마나 덩어리는 '그 존재'의 비늘을 뚫고 들어가버렸다. [들어.... 갔다?] 심장을 찔렸기 때문인지 곧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존재'가 꿈틀댈 때마다 울컥 울컥 하면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와 내 몸을 적시는데 나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 존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 존재'의 움직임이 멈춰버렸다. [끝난.... 건가?] 저 위쪽, 그러니까 도나휴 카페티안이 살고 있던 절벽 위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이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 내려왔다. [아린아, 괜찮으냐?] [정신 차려.] [얘야, 이제 다 끝났단다.] 할아버지부터 아빠, 칸 크제나까지 한마디씩 다 던졌다. [....끝난 건가요?]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묻자 세 분이 또 한마디씩 대답했다. [그래, 끝났어. 네가 해낸거야.] [잘 했다 아린아.] [수고 했어.] [그렇군요. 끝났군요...] 이제는 차가운 주검이 되어버린 '그 존재'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슬프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하여튼 여러 감정들이 뒤엉켜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린, 괜찮아?" 갑자기 들려오는 인간의 말에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거기에는 류미르와 세이몬이 내 얼굴 부근의 공중에 동동 떠서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얘들아..." "괜찮은 거야?" 세이몬이 다시금 걱정스럽게 묻자 류미르가 세이몬의 어깨를 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린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이겨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 "아아, 그런 거야?" 정말이냐는 눈으로 나를 보는 세이몬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응, 그래." [아리시안양, 정중하게 장례는 치뤄야 하지 않을까?] 칸 크제나의 조심스러운 말에 또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제가 할께요.] 레드 드래곤의 죽음은 불과 함께 사라지는 것. 나의 말에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칸 크제나가 류미르와 세이몬을 이끌고 저 멀리 뒤로 물러났고 나는 '그 존재'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헬 파이어!!] '그 존재'의 몸 전체가 불꽃에 휩싸이기 시작하자 그 열기는 엄청났다. 하지만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이정도에 견디지 못하는 이는 없었기에 모두들 멀찍이 물러나서 아린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다. 칸 시스파슈타인님." "그렇군. 어쨌든 와줘서 고맙네 칸 크제나. 도움이 됐어." 칸 크제나는 빙그레 웃었다. "뭘요. 그나저나 다 잘되었군요. 아시리안양도 임무를 잘 끝냈고, 칸 시스파슈타인님도 아시리안양의 아버지와도 화해를 하신 듯 하니..." 칸 크제나의 말에 한 용은 얼어버렸고, 한 용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걱!!" "엥?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자 칸 크제나는 얼어버린 용을 가르키면서 친절히 설명해 줬다. "무슨 소리냐니요? 저기 있는 아시리안양의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 한 걸 보면 서로..." 칸 크제나는 설명을 끝내지 못했다. 칸 시스파슈타인의 온 몸이 붉은 분노의 마나로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칸 크제나, 다시한번만 말해주겠나? 누가 아린의 아.버.지 라고?" 그제야 상황을 눈치 챈 칸 크제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쏟아진 물이었다. "어머나, 모르고 계셨었나요? 난 다 아시는 줄 알고..." 칸 시스파슈타인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획 돌려 슬금슬금 몸을 피하려는 칼 아펜젤러에게 분노와 살기에 찬 어린 시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 이 노오오오오옴~~~!!" "우아아아악~~~~!!" 한참 감상에 젖어서 활활 불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져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아빠와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라라? 뭔 일 있었어요?] 나의 질문에 칸 크제나가 어쩔 줄 몰라는 표정으로 재빨리 달려와서 대답해줬다. "이걸 어쩌니, 내가 네 아버지가 칼 아펜젤러라는 말을 칸 시스파슈타인님 앞에서 해버렸구나. 설마 모르고 계시리라고는..." [허걱!!] 경악에 찬 나는 급하게 폴리모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칸 크제나가 언제 수거(?) 해 두었는지 내 망토를 가져다가 알몸인 내 몸위에 덮어주었다. "큰일났네요. 할아버지 성격상 가만 계시지 않을텐데... 어디로 가셨죠?" "저 쪽으로..." 칸 크제나가 가르킨 숲에서는 여기저기서 폭발이 마구잡이로 일어나고 있었고, 그에따른 음향효과로 할아버지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와 아빠의 처절한 비명, 그리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두분의 추격전에 말려들어 죽어가는 애꿏은 몬스터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거기 안서!!" 쿠와앙~~!! "우갸갸갸~~~ 제발 고정하시고오오오 제 말조오오오옴~~~" "시끄럽다. 네놈의 말 따윈 듣고 싶지 않아~!!" 콰과과광~~~!! "우아아악~~~ 그럼 아린을 생각해서라도오오~~~~" "닥쳐. 네가 아린을 들먹일 자격이나 있어?" 쿠구구궁~~꽈앙~~!! "헬프 미이이이~~~~!!" 잠시 넋을 잃고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칸 크제나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의견을 묻고 곧바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야겠죠?" "그래, 칸 시스파슈타인님을 말릴수 있는 이는 너 뿐이니까. 저러다 네 아버지가 죽겠다." "그럼 가요!!" 아빠와 할아버지를 찾는 건 쉬웠다. 워낙 지나간 흔적이 뚜렷한데다가 두 분이 어디 있다는 걸 폭발음이 확실하게 알려줬으니까. 우리가 아빠와 할아버지를 따라잡았을때는 아빠가 결국 할아버지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노오옴, 죽을준비 해라!!" "허거걱..." 할아버지의 손에서 새빨간 붉은 마나가 검의 모양을 형성한 채 위로 치켜져 있는 순간이었다. "할아... 헉!" 급한김에 할아버지의 팔에 매달리려 달려가던 나는 갑자기 번개를 맞은 듯 온 몸을 강타하는 충격에 말도 잇지 못하고 쓰러지려다가 달려가던 탄력 그대로 땅바닥에 헤딩한 뒤 몇바퀴 구르고 말았다. "칼 아시리안!!" 칸 크제나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나를 부축해 주는것이 느껴졌지만 온 몸이 오래달리기를 하고 난 듯 힘이 하나도 없고 심장이 너무 격렬하게 뛰어 아플 지경이어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허억, 허억, 허억..." "아이고, 아린아!!" 칸 크제나의 외침을 들었는지 할아버지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고 곧이어 후다닥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애야, 정신 차려라. 얘가 왜 이러는 거지?" 당황한 할아버지의 말소리와 함께 몸 안에 차갑고 이질적인 마나가 스며들어왔다. 그 차갑고 이질적인 마나가 온 몸을 구석구석 돌면서 한번씩 어루만져주자 터질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던 세포들이 조금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는 거 같은가?" 할아버지의 질문에 칸 크제나가 대꾸했다. "힘을 무리하게 사용한 것 같군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까의 싸움에서는 그렇게 크게 힘을 과용하지 않은 듯 한데..." "아, 그렇군. 그랬었어." 칸 크제나의 말에 할아버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이 녀석이 지 할미의 힘을 썼거든. 칸 세실리스가 생의 종지부를 찍을때 자신의 힘을 봉인하여 아린에게 줬었지. 이때를 대비해서 말야. 그래서 아까 이 아이가 쉽게 이긴 것 처럼 느껴졌었군." "그랬군요. 그렇다면 지금 칼 아시리안의 모습이 이해가 갑니다. 감당하지 못할 힘을 쓴 뒤의 부작용이군요. 며칠 쉬면 다시 회복할겁니다." "그래, 그래. 수고했네." 칸 크제나가 나를 할아버지에게 넘겨주는 모양이었다. "상황이 모두 끝난 것 같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보세나." "예. 칼 아펜젤러, 그대도. 늦게나마 만난 딸에게 잘 대해주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칸 크제나님." 목소리가 멀쩡한 걸 보니 아빠는 무사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 나는 잠속에 빠져버렸고 깨어보니 다시 아빠 저택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곁에서 나를 반겨주는 걸 보니 아빠가 할아버지의 시달림속에서 살아난 모양이었다. "잘 잤니, 아린아?" "고생했다." 그 후의 이야기 알베르트 산에서 정신을 잃고 나서 며칠만에 일어나보니 그 동안에 국왕이 죽었다. 국장은 한달동안 행해졌기 때문에 국왕의 시신이 무덤 속에 묻힐때 까지는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어야만 했고 귀족이라면 한번쯤은 국왕의 시신 앞에 예를 표해야 했다. 나도 명색이 이 나라의 자작이라 귀찮았지만 오랜만에 브랜트 왕자와 루실 왕녀를 만나볼 생각으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아빠를 따라 성으로 갔다. 국왕의 시신이 안치된 무지 넓은 홀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왕성 근위대가 지키고 있었고 나 처럼 예를 올리러 온 상복을 입은 귀족들과 시종들이 조용히 지나다니고 있었다. 홀의 단상에는 마법으로 냉장처리 된 국왕의 시신이 화려한 관 안에 담겨 놓여 있었고 그 앞 에는 예를 표하러 온 귀족들이 놓고 간 하얀 꽃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아빠를 따라 그 홀로 들어서자 홀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저희들 끼리 속닥속닥 거리던 귀족들이 아빠를 보고는 모여들어 말을 건넸다. "오셨군요, 재상 각하." "각하, 혹시 소식 들으셨습니까?" "각하 생각으로는 왕위 즉위식을 언제 하는 것이..." 아빠가 모여든 귀족들에게 둘러쌓여버리자 나는 저절로 아빠와 떨어져버렸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살짝 뒤로 물러나와 홀을 빠져나왔다. 친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국왕이 죽었다고 예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길로 나는 원래 목적인 왕녀와 왕자를 만나보려고 본 성에서 빠져나와 우선 루실 왕녀를 만나기 위해 태자궁으로 향했다. 태자궁은 예전과 달리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고, 처음 보는 시종장이 나와서 나를 맞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왕녀님을 뵈려고 하네. 그런데..." 너무나 삼엄한 경계에 어리둥절해 있던 내가 그 이유를 물으러 했지만, 묘하게 굳어지는 시종장의 표정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채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시종장은 기분 나쁜 눈치였지만, 경륜이 있는 시종 답게 정중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죄송하지만, 왕녀님께서는 얼마 전에 왕녀궁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이 곳은 태자 전하께서 거하고 계신 태. 자. 궁 입니다." 묘하게 태자라는 말을 강조하는 그 시종장의 말투가 되게 기분나빴지만, 브랜이 태자로 책봉된 후 이 곳을 옮겼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내 잘못이 있었으므로 화를 내지는 못했다. "그래? 그랬었군. 뭐, 어차피 태자 전하도 뵈려고 했었으니까, 그럼 태자 전하를 뵐 수는 있는가?" 그러자 시종장이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몹시 바쁘십니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면 태자 전하께 왔다 가셨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어라라? 잘못 찍혔나보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으므로 나는 다시한번 말했다. "태자 전하가 지금 시간을 내시면 나중에 밤을 새시게 되더라도 나는 만나주실테니 전하기나 하겠는가?" "하지만 전하께서는..." 끝까지 버티는 시종장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한 나는 그의 말을 짜르고 차갑게 말했다. "나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전하께서 정하실 일이네. 자네는 시종장이지 전하가 아니지 않는가?" 시종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내 말을 반박할 수는 없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응접실로 안내해드리겠으니,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지." 시종장의 뒤를 따라 느긋하게 응접실로 향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봤는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린?"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검은 경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애쉬가 서 있었다. "맞군요. 여긴 어쩐 일이오?" 반갑다는 듯 미소까지 띄우며 나에게 다가오는 애쉬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얘가 언제 나랑 이렇게 친했었지? 왜 애칭까지 부르고 그래?' 지금 가만히 있다가는 애칭 부르는 걸 허락하는 것만 같아 나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반갑게 맞아주시니 고맙네요, 레드포드 자작. 하지만 제 할아버지 앞에서는 제 애칭을 부르지 말라고 충고해 드리고 싶군요." 그러자 애쉬가 피식 웃었다. "그 충고 고맙게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당신의 할아버지가 안계시지 않소?" '허걱, 얘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지?' 내 말을 잘 돌려서 할아버지가 안 계신 곳에서는 애칭을 불러도 된다고 만들어버린 애쉬의 능력에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런데, 여기 오신 이유를 아직 못들었군요?" 왠지 애쉬에게 진 것만 같아 기분 나빠진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태자 전하를 뵈러 왔어요." "그래요? 마침 잘되었군요. 나도 태자 전하께 가는 길이었으니 제가 안내해 드리죠. 이보게, 자네는 이만 가보도록 하게." 애쉬가 멍하게 서 있는 시종장에게 말하자 시종장이 퍼뜩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시종장이 가버리고 나서 응접실로 가는 대신 곧바로 브랜이 있는 곳으로 가면서 나는 아니꼽지만 애쉬녀석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아무래도 애쉬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레드포드 자작, 왜 이곳 경비가 이렇게 삼엄해진 거죠? 예전에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그러자 이 애쉬 녀석이 내가 묻는 질문에는 대꾸를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애쉬라고 불러 주겠어요, 아린? 나는 애칭을 부르는데 당신이 그러지 않으면 남들이 이상히 여기잖아요." '이, 이 녀석이...' "흥, 누가 애칭 부르는 걸 허락 했나요? 당신이 멋대로 부른 거잖아요." "하지만 당신도 부르지 말라고 한 적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아린?" 너무나 즐겁다는듯이 내 애칭을 부르는 녀석의 면상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아까 내가 말을 잘 못한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종장 앞에서 애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망신을 주기 싫어서 둘러서 말한다는 것이 애칭 부르는 것을 허락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녀석의 입장을 헤아려 주려고 한 내가 바보지... 이딴 자식 입장이고 뭐고 그냥 딱 잘라 거절했어야 하는건데...' 하지만 지금에 와서 후회해 봤자 쏘아버린 화살이요 쏟아진 물이었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안 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됐어요. 됐으니까 아까 질문한 거나 대답해 줘요. 왜 이렇게 경계가 삼엄한 거예요? 태자궁이라서 그런 거예요?" 그러자 애쉬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웃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설명해 줬다. "그런건 아니요. 단지, 며칠 전에 태자 전하께서 암살을 당하실 뻔 했기 때문에 그런 거요. 혼자 정원을 산책하시다가 변을 당하셨다오. 다행이 미수로 그쳤지만 또 다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귀족들이 건의하여 경계를 강화한 것이라오." "흐음, 그랬군요..." '짐작은 했었지만...' 브랜은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태자로 책봉된 뒤에 그 동안 정책에 참여 안 하고 빈둥빈둥 놀았던 것을 만회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학자 타입의 노인 한명과 탁자에 앉아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서재 안에는 세명의 기사가 그의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예의를 갖추어 치마를 살짝 들고 무릎을 굽히자 브랜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누구십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의외의 말을 들은 내가 어리둥절해서 반문하자 브랜 또한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닌 가요? 자작께서 그동안 나라를 어지럽히던 살인마를 처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크게 다치셔서 그 동안 성에 오지 못했다고 하던데요." '아빠가 그렇게 말해놨나 보군.' 그제야 상황을 이해 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걸 말씀하시는 거군요. 단지 며칠동안 정신을 잃었던 것 뿐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랬군요. 어쨌든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 아, 남작? 토론은 나중으로 미뤘으면 하는데요." 브랜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선 늙은 학자를 향해 말하자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제가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브랜은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뒤에 버티고 서 있던 세명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당신들도 잠시 나가 있도록 하시오." "하, 하지만 전하..." 그들 중 한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브랜의 표정은 단호했다. "뭘 걱정하는 거요? 대단한 실력을 가진 두 자작이 곁에 있는데 못 미더운 거요?" 그제야 기사들은 나와 애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서재의 문을 닫고 나가자 브랜은 폭신한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군." "그 동안 힘들었나봐요, 브랜. 좀 야윈 것 같기도 한데요?" 내가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면서 말을 건네자 브랜이 처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린이 보기에도 그래요? 사실 요즘 난 죽을 것 같다구요. 어딜 가나 기사들이 붙어있죠,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죠, 게다가 공부하라는 건 왜 그리 많은지... 이대로 있다가는 제 명에 못살 거 같아요." "왕이 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빙그레 웃으며 위로조의 말을 건네자 브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렇죠. 무척 힘드네요. 왕같은거 되고 싶지도 않은데..." 그러자 브랜의 뒤에 서 있던 애쉬도 브랜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브랜,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질문에 브랜이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요." "그럼 왜 돌아가신 국왕께 말을 안 했죠? 왕이 되기 싫다고 했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잖아요." 그러자 브랜이 움찔 거렸다. "하, 하지만... 아바마마께서 워낙 강경하게 나오셔서..." "에휴, 하긴... 돌아가신 국왕께서는 고집이 되게 세시다면서요? 브랜도 고생 많아요." 내 말에 브랜이 힘 없이 웃었다. "나 보다도 누님께서 더 안돼셨죠... 확실히 누님이 왕의 자리에 더 어울리시는 분인데... 이제는 누님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겠어요." 한심하기도 하고, 가엽기도 한 브랜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이왕 브랜이랑 인연이 된 거 그를 한번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 "브랜,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볼래요?" "에?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브랜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다가오자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내가 생각한 계획을 말해줬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될까요?" 겁 먹은 듯한 표정을 짓는 브랜에게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뭐 어때요? 당신이 맘만 먹으면 가능해요. 그리고 정 안될 거 같으면 내가 아빠를 부추겨둘테니 너무 걱정 말아요. 어때요, 해볼래요? 이게 마지막 기회라구요." 마지막이라는 말에 움찔 한 브랜이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린의 말대로 한번 해볼께요." "좋아요. 지금 그 마음 잊지 말아요." "저... 애쉬에게는..." 브랜이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뻗뻗하게 굳은 애쉬를 슬쩍 가르켰다. 아마 나와 브랜 둘이서 속닥대는 게 되게 맘에 안 들었나보다. "그건 브랜 맘대로 해요.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그러자 브랜이 당황해서 일어났다. "에? 벌써 가게요? 식사라도 같이 하고 가시지..." "아니예요. 고맙지만 지금은 또 가볼데가 있으니까 나중을 기약할게요. 그럼 나중에 만나요." 태자궁을 나온 나는 루실이 머물고 있다는 왕녀궁으로 향했다. 원래 여기는 브랜이 살고 있을때는 왕자궁이었는데 루실로 주인이 바뀌니까 왕녀궁으로 이름이 바뀐 듯 했다. 그리고 그 곳도 태자궁 못지 않게 경비가 삼엄했다. "언니, 혹시 언니도 암살당할 뻔 했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루실이 픽 웃었다. "아니, 태자는 경호해주고 나는 감시하는 거지." 어지간히 심사가 안 좋은지 루실의 말에는 가시가 팍팍 돋혀 있었다. "그나저나 아린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던데?" "그거야 뭐.. 운이 좋았죠. 저 혼자 한게 아니라 친구들과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는 걸요. 그런데 언니? 왠지 궁안이 어수선 한 것 같네요." "아아... 국장이 끝나고 태자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이 궁을 비워달라고 하더구나. 대공에게 하사된 영지로 가라고 강력히 권유하던걸?" "그래서 짐을 싸고 있는 거예요?" "쌀 필요가 있나? 이사온 뒤로 짐을 안 풀렀을 뿐이야." "에휴, 어지간히 화가 나있네요." 조용히 한숨을 쉬며 그녀를 바라보며 웃자 루실이 자신의 앞에 놓여진 찻잔을 만지작 거리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미안해 아린... 국왕만 생각하면 화가 치솟아서..." "쿡쿡, 언니 감정이 많이 격해졌군요? 전에는 폐하라고 꼭꼭 존칭을 하더니 이제는 국왕이래." "냅둬라. 이렇게 해서라도 화를 풀지 않으면 어떻게 하니? 어떻게 해서든 날 골탕먹이려 하더니 끝에가서는 뒤통수를 치는구나." "너무 화내지 말아요. 그러면 언니만 손해야. 혹시 알아요? 누군가가 언니 대신 국왕의 뒤통수를 쳐 줄지?" 그러자 루실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응? 그게 무슨 말이니?" "훗훗, 그런게 있어요." 나는 그 정도로만 이야기 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즐거운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내 계획을 아빠에게 말하며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아빠, 도와줄거죠?" "그래, 알았다. 누구 부탁이라고 거절하겠냐?" "후훗, 아빠만 믿어요." 이제 배역은 다 준비 되었으니 무대가 만들어져 막이 오르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드디어 국장의 기간이 끝나고 국왕은 무덤속에 묻혔다. 그리고 왕자파 귀족들의 주장으로 인해 일주일 뒤 왕위 즉위식이 거행됐다. 항상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그리워 하면 할수록 내 안에 다가오는 그대 드넓은 홀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꽉 차 있었고 홀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붉은 비단천은 옥좌가 있는 단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준비 되었어요, 전하?" 식이 시작되기 전 잠깐 만난 브랜은 굳은 결의에 차 있었다. "예!" 빵빠레가 울림과 동시에 홀의 거대한 출입구가 열렸고 그 곳에는 아직 왕관을 쓰지 않은 브랜이 흰색과 황금색이 조화를 이룬 화려한 옷과 하얀 털로 테두리를 이룬 길다란 붉은 망토를 걸치고 나타났다. 브랜의 뒤에는 어린 시종 둘이서 땅에 끌리고도 남을 망토의 끝자락을 잡아주며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단상 옥좌 옆에는 최고위 신관이 붉은 방석 위에 왕관과 홀을 든 두명의 신관과 함께 브랜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브랜이 단상 앞에 다다르자 그는 최고위 신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최고위 신관은 그에게 엄숙하게 물었다. "그대는 이 나라의 왕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 왕의 임무를 다 할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사랑과 정의의 여신 엘라이어드의 이름으로 브랜트 소르드가 소르드 국왕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최고위 신관의 선포와 함께 또 다시 팡파레가 울렸고 귀족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최고위 신관은 뒤에 서 있던 두명의 신관에게 왕관과 홀을 받아 브렌에게 씌워주고 건네주었다. 이로써 브랜이 정식으로 국왕이 된 것이었다. 브랜은 최고위 신관의 축복의 말을 들으며 단상위로 올라가 옥좌 앞에 떡하니 서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것을 신호로 귀족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브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국왕이 된 멋드러진 소감 한마디를 기대하면서... 그런 귀족들을 한번 쭉 훑어보던 브랜은 단상 아래 끝쪽에 서 있던 루실 왕녀를 바라보고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짐의 즉위식에 와준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이제 짐이 국왕이 되었으니 이르기는 하지만 첫번째 왕명을 명하는 바이오."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나 브랜트 소르드는 다음 소르드 왕국의 태자로 루실 소르드를 책봉하는 바이오." 그 말에 홀 안은 벌집 쑤신듯이 소란스러워졌다. 왕자파 귀족들은 새파랗게 질렸으며, 왕녀파 귀족들은 이런 상황이 믿기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루실 왕녀는 너무 놀라서 둥그래진 눈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듯 브랜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하시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마법의 힘을 빌려 증폭된 브랜의 말에 귀족들의 입은 즉각 다물어졌지만 그들은, 특히 왕자파 귀족들은 할 말이 많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브랜은 그런 그들을 싹 무시해 버리고는 루실의 반대편에 서 있던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힘내라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브랜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루실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다시 한번 선포했다. "그리고 나 브랜트 소르드가 두번째이자 마지막 왕명으로써 지금 이 자리에서 루실 소르드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소. 이에 항의하는 자는 왕명을 거역하는 죄로 다스릴 것이니 명심하기 바라오." 브랜의 말에 이제는 시뻘개진 얼굴로 외치려던 왕자파 귀족들은 브랜의 뒷말에 입을 다물고 이빨만 득득 갈아댔다. 멍 해 있던 왕녀파 귀족들은 브랜이 직접 단상에서 내려와 자신의 손으로 왕관을 벗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루실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홀을 건네주자 환호성을 질렀다. 브랜은 루실을 이끌어 단상 위의 옥좌에 앉힌 뒤 그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나 브랜트 소르드가 국왕 폐하께 충성을 다 할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국왕 폐하 만세!!" 그러자 아빠가 단상 앞으로 걸어나가 외쳤다. "국왕 폐하 만세!!" 그에 호응하듯 여기저기에서 발작적으로 국왕 폐하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린 루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네가 말한게 이거였어?'라고 묻는 듯 해서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렇게 얼렁뚱땅 브랜이 즉위하자마자 루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아빠가 나서서 루실을 옹호하자 왕자파 귀족들의 반발은 금세적으로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루실은 갑작스럽게 국왕이 되어버려 일을 해결하느라 무지 분주한 듯 했다. 다행히 브랜과 루실은 화해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브랜은 왕성에 머물지 않고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하고싶은 공부가 있었지만, 국왕의 반대로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은 거 맘껏 하고 살겠다고 말하는 브랜의 표정은 무척이나 환해 보였다. 그리고 브랜이 자신의 근위대를 없애는 바람에 애쉬는 레드포드 공작의 부관으로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고 자카르는 국왕의 근위대 대장으로 승격되었다. 나중에 루실이 나에게 영지나 상금을 주겠다고 전해왔지만 필요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고, 대신 할아버지가 인간들의 마법에 관심이 많으니 왕성안에 있는 마법사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달라고 해서 그걸 받았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마이터와 함께 인간 마법을 토론하는 재미에 폭 빠져서 거의 왕성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아빠의 저택에서 뒹굴뒹굴 하며 류미르, 세이몬과 놀러갈 계획을 짜고 있는데 자카르가 찾아왔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방문이었지만, 그 사람이 내 호감을 사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나는 기쁘게 그를 맞았다. "자카르, 바쁘지 않아요?" "하하하, 요즘은 좀 한가해졌어요. 그래서 시간을 냈죠. 아시리안양이 보고싶기도 하고 또 할말도 있어서요." "그래요? 할 말이 뭔데요?" 의아한 듯 묻는 내말에 자카르가 웃었다. "훗훗훗, 단도직입적인 건 여전하군요. 뭐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아시리안양께 사과하고 싶어요." "예? 자카르가 나에게 뭘 잘못했나요?" 더욱 더 의아해져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약간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은... 아시리안양이 자작의 작위를 받을 때쯤에, 저희 아버지께서 제게 한가지를 시키셨어요." "그게 뭔데요?" 자카르는 잠깐 머뭇대다가 나를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당신을 유혹하라는 거였죠. 당신의 아버지가 이 나라에서 중요한 요직에 계신 분이다보니, 우리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하셨거든요." "아아... 이해 해요. 그래서 당신이 자주 우리 일행에 끼었군요." 그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던 일들이 이제야 모두 상황파악이 됐다. "예. 하지만, 이건 꼭 말해주고 싶은데, 난 억지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아시리안양에게 정말 호감이 갔거든요. 지금은 친구가 되어서 기쁘게 생각해요." "나도 자카르와 친구가 되어서 기뻐요. 그런데 말예요..." 내가 말을 끌자 자카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죠, 당신이 나에게 그다지 유혹의 손길을 뻗친 거 같지 않네요. 당신이 너무 고단수라서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가요?" 그러자 자카르가 피식 웃었다. "아니예요. 솔직히 제가 그동안 다른 여성들을 유혹할 때처럼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아시리안양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요. 아까 말했잖아요. 난 아시리안양에게 호감이 있고 친구가 되어서 기쁘다고. 그런 존재에게 유혹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헤에, 그거 참 기분 좋은 말이네요. 하지만 그래서 아버지께 혼나지 않았어요?" 내가 기분좋게 웃자 자카르도 크게 웃었다. "하하하, 뭐, 닥달 당하긴 했죠. 그래도 지금은 다 잘되었으니까 만족하시는 눈치세요." "다행이네요. 이제 자카르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네요, 그쵸?" 나는 아무생각없이 말을 꺼냈는데 내 말에 자카르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후후.. 그게..." "엣? 설마, 벌써 있었어요? 그게 누구예요? 내가 알면 안돼나요?" 그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 느낀 나는 솟구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줄줄이 질문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자카르가 잠시 망설이더니 순순히 털어놨다. "그냥... 혼자만의 짝사랑이예요." "예? 정말요? 누군데요?" "루실... 왕녀님이요." "오옷~!!" 내가 놀라움과 감탄이 어린 표정을 짓자 자카르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진지하게 부탁했다. "이건 비밀입니다?" "예!" 나 또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자카르가 널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참.... 사과와 감사를 하러 왔다가 엉뚱한 말만 늘어놨군요." "감사요?" '사과는 뭔지 알겠는데 또 뭐 감사 받은 일을 했던가?' 의아해 하는 나에게 자카르가 빙긋 웃었다. "예. 이번에 왕녀님, 아 아니.. .이젠 폐하라고 해야 하죠? 그분이 왕이 되실 수 있었던 건 아시리안양 덕이라고 들었습니다. 브랜 전하께서 다 말씀해 주셨죠." "아아... 그거야 뭐... 루실 언니가 더 왕 자리에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그런거니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거죠. 폐하께서도 고마워 하고 계십니다." "대단한 일 한거 아니니 신경쓰지 말라고 전해줘요." "훗, 겸손하시군요." '그게 아닌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뭐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자카르가 돌아간 뒤 그 다음날, 이번에는 애쉬가 잔뜩 긴장해서는 찾아왔다. "무슨 일 있어요?" 그가 왔다고 해서 응접실로 내려가 보니 애쉬가 가만 있지 못하고 응접실 안을 계속 서성거리고 있길래 인사 대신 물어보았다. 내가 등장하자 애쉬도 딱 멈춰 섰지만, 계속 머뭇머뭇 대더니 한참 있다가 겨우 말을 꺼낸 것이 좀 황당했다. "같이... 산책 좀 하겠어요?" 왠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었지만, 애쉬의 표정이 너무 간절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정원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제 막 초겨울로 들어서는 정원이라 앙상한 가지만 있는 나무들과 마른 풀들 뿐인 황량한 모습이라 좀 허탈했다. "하하.. 시기가 시기인 만큼, 보여드릴 건 없네요." 정원으로 들어서며 내가 김 빠진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애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무작정 걷기만 하는 폼이 뭔가 말할 게 있는데 말하기가 무지 곤란한 듯 했다. "애쉬,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예요?" 그의 뒤를 따라가다 못해 던진 나의 말에 애쉬가 갑자기 우뚝 서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 이름을 불러준 거요?" 그의 반응에 얼떨떨해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에... 안돼나요? 전에 애쉬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그러자 애쉬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는데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린 듯 했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건 처음예요." "에... 그랬나요?" 그러면서 본론을 말하길 바라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훗, 이거... 처음 하는 거라서 그런지... 무지 긴장되는 군요." '도대체 뭘 가지고 그러는 건지...' 감을 전혀 잡지 못한 나는 어리둥절 했지만 그가 말하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딴 곳만 바라보던 애쉬가 드디어 심호흡을 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왠지 쑥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험험, 아린.... 괜찮다면... 음.... 결혼을 전제로 나와 사귀어 주겠소?" 한참 뜸들이며 떠듬떠듬 말하던 애쉬는 끝에가서는 빠른 속도로 숨도 쉬지 않고 말해버렸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의외로 순진한 그의 표정이 웃겼지만, 웃을 기분은 나지 않았다. '아... 이런.... 설마 했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사실일 줄이야... 자꾸 허탈한 웃음만이 나왔다. "저기 애쉬? 한가지 물어봐도 돼요?" 거절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천천히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나의 갑작스런 질문에 애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의 자리를... 그러니까 레드포드 공작 부부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아들이고, 이름난 기사이며, 왕성 근위대 자리를 버릴 수 있나요?" 내 질문을 이해 하지 못한 듯,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애쉬의 시선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 곳을 떠날 겁니다. 나에게는 귀족이란 것이나 자작이란 직위는 필요 없고 가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맨 처음 아빠를 따라 이 곳에 온 것도 이곳이 다급한 상황이라서 그걸 해결해 줄 때까지만 있기로 한 거예요."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겁니까?" 잔뜩 쉰 목소리가 애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글쎄요... 아직 정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소르드 국내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죠." "재상각하와 당신의 할아버지는?" "그분들도 알고 계실걸요. 예전에도 여행을 하다가 아빠를 만난거고... 이곳 일도 끝났으니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애쉬는 머뭇거리다가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 머물러 줄 수는 없는 겁니까?" 나는 그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귀족의 생활이 답답하거든요. 그걸 참을 만큼 당신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미안합니다." 내가 정식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이자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후후후, 확실한 거절이로군요. 알겠습니다. 대답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애쉬도 나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 길로 저택 밖으로 가버렸다. "괜찮을까?"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 류미르가 보고 있었는지 말을 건네왔다. "몰라. 그건 자신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가 상관할 건 아니라고 봐." "냉정하긴..."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인 류미르는 다시 세이몬과 같이 여행가고 싶은 곳을 찾으러 지도에 눈을 돌리며 나를 손짓해 불렀다. "아린, 이리와 봐. 대충 다 표시한 거 같은데 너도 한번 봐야하지 않아?" 그러자 각 나라의 관광 명소지 책과 지도를 번갈아 들여다보고 있던 세이몬이 고개를 들었다. "아린, 이거 다 하면 여행 가는 거지?" "그래. 전에 다 못한 여행을 다시 시작해야지." 에구구... 힘들다.. 이거 벌써 두번째 올리는 거랍니다. 용량이 많으니까 확실히 올리기도 힘들군요. 어쨌든 이걸로 아린 2부가 끝났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고 저 며칠 잠적할겁니다. 찾지 마세요 - 에... 아무도 안 찾으려나? - ^^ 항상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그리워하면 할수록 내 안에 다가오는 그대 프롤로그 (아린, 차원의 틈새에 빠지다) 루실이 여왕의 자리에 오른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즈음에는 류미르와 나, 세이몬은 아빠의 서재에 있는 지리서 대부분을 탐독하면서 앞으로 행할 여행의 경로와 사전 조사를 거의 끝마친 상태였기에 나는 아빠와 할아버지에게 슬슬 말을 하려고 틈 을 보고 있었다. 아빠는 여전히 소르드 왕국의 재상의 임무를 충실히 행하면서 할아 버지가 없는 틈을 타 내 코디 노릇을 해주는 걸 낙으로 삼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마이터와 마법 연구에 푹 빠진 터라 며칠에 한 번씩 나를 보러 오는 것 외에는 아빠 저택에는 얼굴도 비춰주지 않고 있었다. "아린, 우리 언제 여행을 떠나? 벌써 갈 곳은 다 준비해 놨는데......" 세이몬이 슬슬 이곳에 있는 게 지겨워졌는지 슬그머니 나에게 물어 왔다. "음... 그러고 보니 어제 할아버지가 다녀가셨으니까, 한 이삼일 후에 는 오실 거야. 그때 두 분께 말씀드려야겠어." 세이몬에게 피식 웃어주고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자 세이몬의 얼 굴이 금방 환해졌다. "난 빨리 드워프라고 불리는 종족이 사는 마음에 가보고 싶어. 내가 읽은 책에 의하면 그들은 뭐든지 잘 만든다고 했어든. 그들이 사는 마 을은 신기한 게 많을 거 같아."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류미르가 원가 세이몬을 놀릴 건수를 잡았 는지 장난기로 반짝이는 눈으로 묘하게 실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세이몬, 너 드워프의 말을 알고 있어?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말을 걸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는대. 심하면 자신 의 마을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공격해서 내쫓는다고 하더라......" 아마도 세이몬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고 시퍼 그 말을 꺼냈을 것이 다. 하지만 류미르의 기대와는 달리 세이몬은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 는, 단지 멀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뭐?" 류미르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 어? 세이몬, 너 드워프의 말을 알아?" 세이몬은 무척이나 당당하게 대꾸했다. "아니." "에?" 너무나 당당한 세이몬의 대꾸에 류미르는 당황하자, 그 모습이 이해 가 안 됐는지 세이몬은 류미르가 왜 이러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조차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들 그러는 거야? 내 말이 뭐가 잘못됐어?" 세이몬의 말에 표정을 수습한 류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못된 건 없는데... 드워프의 말을 모르면 세이몬은 그 마을에 들어갈 수가 없잖아?" 그래도 세이몬은 뭔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류미르를 번갈아 보았다. "말을 모르는 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대화는 할 수 있는 걸 뭐. 난 인간의 말을 모르지만 이렇게 너희들이나 사람들하고 대화 할 수 있 잖아." 세이몬의 말에 류미르와 나는 놀람을 넘어 경악에 물들었다. "에엑? 그게 정말이야?" "인간의 말을 모른단 말야?" 류미르와 내가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자 세이몬이 더 놀 라 버렸다. "야, 왜들 그래?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자, 잠깐만... 우선 정리를 좀 해보자. 그러고 보니 세이몬은 예전에 여행할 때 몇 몇 나라를 다녔음에도 그 나라 말을 할 줄 알았었지? 비 록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말은 할 줄 알았었어. 그런데 그게 인간의 말을 배워서 할 줄 아는 게 아니었단 말야?" 내가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할 겸 예전 기억을 더듬어가며 물어 보자 세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은 따로 언어를 배우지 않아." "그럼 어떻게 우리랑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건데? 넌 처음 이 세계에 오 자마자 우리랑 대화를 할 수 있었잖아?" 류미르가 큰 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듣 고 있자니 흥분이 되었나 보다. 세이몬은 류미르의 반응이 이상한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대꾸해 주었다. 하긴, 자신이 당연 하다고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가 경악으로 받아들이자 이상하긴 했을 것이다. "우리 마족은 자신의 의사를 의지로써 전달하거든. 그러니까 언어랑 은 상관없잖아?" "지금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거 아냐?" "아니야, 난 지금 의지로 말하는 거야. 입을 열어 의지를 발하고 있는 거지. 너희들은 내 의지를 받아들여 내 의사를 이해하는 거구. 음... 하긴, 난 인간의 말을 알긴 해. 예전에 어떤 인간 아이에게 글을 가르 칠 때 너희들이 나보고 글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서 같이 가르쳐 줬었잖아. 이름이 소보르였던가......?" 류미르와 나는 다시 한 번 놀란 시선을 교환했다. 확실하게 잘은 모르 겠지만 마족들이 대화하는 건 아마 텔레파시 비슷한 것이었나 보다. "그랬구나... 그래서 마계에서 막 도망쳐 온 어린 마족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우리랑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거였어. 어린 마족이라고 특별히 인간의 말을 교육한 게 아니었을 텐데....." 내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류미를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 세계로 소환된 마족들이 어느 나라로 가든 쉽 게 계약할 수 있었던 거구나." '글고 보니 그렇군." 류미르의 말을 듣다 보니 나는 세이몬에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세이몬, 우리가 네가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했었던 건 우리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들린거야? 그럼 엘프의 말을 하고 있거나 드위프의 말을 하고 있으면 그렇게 들렸겠 네?" "응? 에...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린, 네가 무슨 언어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내 말은 알아들었을걸?" "그러면 한 가지 더, 다른 나라 말을 전혀 모르는 나라 사람들이 같이 네 말을 듣고 있으면 각각 자신의 나라의 말로 말한 것처럼 들린단 말 이지?" "에... 그렇게 되나? 몰라. 어쨌든 내 의사는 다 알아들을 거야." "와! 대단하구나." 세이몬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자 세이몬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아린? 그럼 넌 어떻게 인간이랑 대화를 하는 건데? 나처럼 그 냥 의지로 의사를 표현하는 거 아냐?" "나? 나는 예전에 엄마가 인간의 글과 말에 대해서 지식을 줬었어." "그래? 그럼 류미르도 아린처럼 엄마한테 배운 거야?" 그냥 엄마가 마법으로 내 머리에다 지식을 집어 넣어준 걸 배운 걸로 착각한 세이몬의 발언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그거 같아서 그 냥 조용히 류미르의 대답을 경청했다. "나? 음... 지금은 인간의 언어를 배워서 사용할 줄 아는데, 예전에 우 리가 여행할 때는 인간의 언어를 아직 배운 게 아니라서 마법을 사용 했었어." "마법? 그런 마법이 있어?" 세이몬이 신가하다는 듯이 류미르를 쳐다보자 그가 기분 좋은 표정으 로 웃었다. "응, 그런데 그게 의미만 주고받을 수 있어서 생활 습관이나 풍습이 아예 다른 곳으로 가면 완벽하지 못하지. 예를 든다면, 이쪽 세계랑 마족처럼 '결혼'이라는 의미가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간다면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쪽은 못 알아들을걸? 반대로 그쪽에 있 는데 여기에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쪽이 못 알아듣고." "헤에... 그건 마족과는 좀 다르구나." 세이몬의 말에 류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셈이야." "흐음... 류미르가 말한 그 마법, 나도 듣기만 했지 실제로는 사용한 적이 없는 거야. 이거 여행 가기 전에 미리미리 익혀놔야겠네? 그래 야 드위프 마을에 갔을 때 써먹지. 아, 이번에 엘프 마을도 한번 들러 본다고 했지? 거기서도 사용해 봐야지. 류미르, 나 그 마법 익히는 것 좀 도와줄래?" 그러자 류미르가 의아한 듯이 나를 보았다. "에? 아린, 이 마법 몰랐어? 넌 드래곤이잖아?" "야, 드래곤이라고 세상의 모든 마법을 다 아는 줄 아냐? 난 공격과 치 유 마법 쪽으로만 집중적으로 익혔다구. 그런 쪽은 잘 몰라. 게다가 아직 용언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마법을 따로 익혀놓지 않으면 자유 자재로 사용하지도 못해." "헤에, 그래? 몰랐네. 난 드래곤이라면 모든 마법을 다 알고 자유자재 로 사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야."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류미르의 시선에 나는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쳇,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구. 그건 내가 어려서 그런 거니까. 나도 이제 몇 백 살만 더 먹으면 네가 생각하는 드래곤처럼 된단말야." 내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투덜거리자 류미르가 달래려는 것 처럼 실실 웃었다. "뭘 그걸 가지고 기분 나빠하긴... 아, 내가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는 마법만 적어놓은 마법책을 가지고 있는데 한번 볼래? 이 번에 집을 나오면서 여행에 도움이 될 거 같아 챙겨놨지. 나도 아직 다 못 익혔으니까 같이 익혀보자구." 류미르의 그 애를 달래는 듯한 표정은 맘에 안 들었지만, 공격 계열이 나 치유 계열이 아닌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책에 흥미가 생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보자." 류미르가 내민 책은 일반 마법서처럼 두꺼운 것이 아니라 약 200페이 지 정도의. 이쪽 세계에서 보자면 얇은 쪽에 속하는 책자였는데 그 안 에는 내가 첨 보는 재미있는 마법이 많았다. 예를 든다면 잠긴 자물쇠 를 따는 마법이라든지, 반대로 어떤 열쇠로도 열지 못하는 잠금 마법 이라든지,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을 미끄러지게 만드는 마법, 원하는 물 건을 공중에 띄워놓을 수 있는 마법, 옷을 더럽히지 않게 하는 마법 등등 정말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마법이 많았다. "헤에, 이런 마법도 있었구나. 정말 마법을 여러 군데에 다양하게 사 용하는 걸?" 아마 이런 마법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고 색다르게 마법을 창안해 낸 것을 보니, 할아버지가 인간들의 마법 연 구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계신 것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 즉시로 난 마법 익히기에 몰두했다. 어차피 할아버지와 아빠에게 말하기 전에는 내가 이 집에서 할 일이라곤 먹고 노는 것밖 에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며칠 동안이야 류미르, 세이몬과 같이 이번 여행에 가볼 관광지를 찾느라 분주했지만, 그전에는 난 할 일이 없어 심심했던 것이다. 류미르와 세이몬은 저희들끼리 검 대련이라도 했지 만 난 그들 사이에 낄 실력이 안 되었기에 스스로도 끼어들 생각도 못 했었다. 그래서 류미르와 세이몬의 대결을 멀리서 보며 다음 유희 때 에는 꼭 기사학교에 입학해서 검술을 익히기로 결심까지 했었다. 뭐, 지금이야 며칠 있으면 오랜 시간 동안 놀러 나가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검술을 외면하고 있지만...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적어도 5일에는 한 번씩 얼굴을 비춰준 데 비해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일주일이 넘게 저택에 올 생각을 안 하던 할아버지가 일주일하고도 이틀이 자나서야 흥분해서 저택으로 달려왔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마이터와 죠슈아까지 대동하고 아빠 저택으로 쳐들어와서는 나를 저 택 마당으로 끌고 내려왔다. "아린아, 아린아, 이것 좀 보렴. 내가 아주 신기한 게 있어서 너에게 보여주려고 이렇게 달려왔단다." "도대체 뭔데 그러세요, 할아버지?" "지금부터 설명해 줄 테니 놀라지 말아라. 이걸 실험하는 걸 너와 같 이 보려고 내가 이렇게 달려왔지. 참으로 인간들은 나를 깜짝깜짝 놀 라게 한다니까.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할아버지는 앞으로 일어날 실험이 무지 기대되는지 연시 흥분을 감추 지 못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에구, 뭔데 그렇게 흥분을 하신 거예요? 설명을 해주셔야죠." 가만있다가는 흥분한 할아버지에게서 설명을 듣지 못하게 될거 같아 내가 할아버지의 말을 자르고 묻자 할아버지는 허허 웃었다. "허허허,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그래, 너한테 설명해 줘야지. 지금 우 리가 실험하려는 게 뭐냐 하면 차원의 문을 여는 실험이란다." 뭔가 대단한 마법인 줄 알고 기대했던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차원의 문을 여는 건 비록 쉬운 게 아니지만 예전부 터 있어왔고 잘 알려진 마법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신기하고 대단 하다고 이렇게 흥분하신 건지..... "할아버지, 차원의 문을 뭘 실험까지 하며 열려고 하세요? 할아버지 라면 충분히 쉽게 여실 거 아니에요? 마족을 소환할 때 열리는 게 차 원의 문인데 뭐 하러....." 내가 실망감이 가득한 어투로 중얼거리자 할아버지는 웃으며 손을 내 저었다. "푸헐, 물론 그렇지. 하짐나 이건 아주 독특한 거란다. 차원의 문을 공 간 이동하려고 사용하는 거거든."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더욱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에? 공간 이동이요? 아니, 차원의 문을 통해 공간을 이동한다는 이야 기는 못 들어봤짐나, 어쨌든 그게 가능하다곤 해도 차원의 문을 여는 건 공간 이동 마법보다 훨씬 힘들잖아요. 그런데 뭐 하러......" "글쎄, 그러니까 내 설명을 들어보라니까." 할아버지의 또 한 번의 손짓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할아버지의 표정 이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있을 것 같냐?'라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 었다. "네 말대로 차원의 문을 통해 공간 이동을 시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 지. 하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거든.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게 실제 로도 가능한지 실험하려는 거란다. 아아, 그래... 네 말대로 차원은 문 을 여는 건 그냥 마법으로 이동 공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 그런데 말이다. 마법으로 공간 이동을 할 때 공간 이동하려는 숫자에 비례하 여 마나의 사용향이 배로 늘어나지 않니? 게다가 이동하길 원하는 지 검에 아무것도 없어야 하지. 자칫 그곳에 무언가 이물질이 있다간 공 간 이동을 한 다음에 사람 몸 안에 그 이물질이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 그렇게 되면 목숨이 왔다 갔다할 정도로 위험해지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 않니? 차원의 문을 바로 그 두 가지 점을 해결해 줄 수 있단다. 우선 차원의 문을 여는 데 큰 힘이 필요하지만, 한번 문을 열기만 하면 유지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많 은 인원을이동시킬 수 있지. 게다가 문을 직접 통과함으로써 이동하 는 것이기 때문에 이동하는 장소에 뭐가 있든 세심한 신경을 쓸 필요 가 없지." "오~ 할아버지늬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점이 있었군요. 그러니까 공 각 이동 마법은 소수의 인원을 이동시킬 때 유용하고, 차원의 문을 이 용한 공간 이동은 불특징한 다수의 인원을 이동시킬 때 유용하겠군 요?" 그제야 이해가 간 내가 신기함과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흥미를 나 타내며 묻자 할아버지는 한층 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렇지. 그렇지. 바로 네 말대로다. 게다가 한 가지 더, 공간 이동 마 법은 거리에 따라 비례하여 마나가 더 많이 필요하지 않니? 그런데 이론대로 한다면 차원의 문은 거리가 얼마나 되든 타 차원을 통해 두 공간을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한 마나가 같단다." "헤에... 그런 먼 곳으로 갈수록, 이동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차원은 문 을 통한 이동이 더 좋군요?" "바로 그거다. 자, 벌써 거의 다 준비가 되었구나."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면 저택 뒤쪽에 있는 연무장으로 다가가자 평 소 그곳에서 수련하고 있던 기사들과 사병들은 한쪽으로 몰려서서 구 경을 하고 있고 중앙에는 마이터와 죠슈아가 그 넓은 연무장을 반으 로 나누어 각각 그 절반을 대부분 차지하는 큰 마법진을 두 개나 그려 놓고는 종이 뭉치를 들여다보면서 마법진과 비교하고 있었다. 할아버 지와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우리의 기척을 느낀 듯 마이터가 고개 를 들더니 우리를 보고는 반색을 했다. "오셨군요, 시파르님. 준비는 거의 다되었습니다. 자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네요, 마이터님.이번에 재미있는 마법 실험을 하신다면서요?" "헛헛헛, 이건 재미있는 게 아니라 획기적인 실험이지요. 이 실험만 성공한다면, 이동 마법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될 겁니다."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마이터를 보니 그는 이번 실험이 성공하리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에... 뭐, 어쨌든 잘되기를 바래요." 내가 그들이 실험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자 두 명 이 나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류미르와 세이몬이었다. 아마 그들은 연무장에서 대련을 하고 있다가 마이터와 죠슈아에게 밀려난 듯했다. "아린 저게 뭐야?" 세이몬이 호기심이 잔뜩 어린 시선으로 연무장에 그려진 두 개의 마 법진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응, 저게 그러니까 차원을 문을 여는 마법진이래." "차원의 문? 마족이라도 소환하려는 거야?" 류미르가 차원의 문이란 소리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 또한 6서클까지 익힌 마법사라 차원의 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차원의 문이 마족을 소환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 것도...... "아니야, 공간 이동으로 이용하려는 거래." "차원의 문을 공간 이동으로? 그게 가능한 거야?" "뭐, 이론상으로 가능하니까 직접 실험해 보는 거겠지." "그래? 난 차원의 문으로 공간 이동한다는 건 처음 들어봐." "그러니까 획기적이라잖아." "뭐야, 뭐? 둘만 알아듣게 이야기하고... 나에게도 설명해 줘!!" 우리 둘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세이몬이 뾰로퉁해져서는 둘사이에 끼어들며 투덜거렸다. "아, 그러니까 세이몬... 공간 이동이라는 건 알지? 그 왜..." 류미르가 설명해 주는 건 세이몬을 살살 놀리면서 하는 거라 세이몬 과 류미르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나기 쉬웠으므로 류미르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와 마이터, 죠슈아는 물론 많은 기사들과 사병들까지 있는 데서 싸우는 걸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 문이다. 하지만 내가 미처 설명해 주기 전에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아린아, 시작한다." "세이몬,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직접 보면 알 거야. 우리 저기로 가서 보자." 류미르와 세이몬을 이끌고 할아버지 곁으로 가자 마이터와 죠슈아가 각각 마법진 하나씩을 앞에 두고 서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르는 암흑의 별들이여, 대지를 감싸는 영혼의 계약이여. 이 제 그 속박의 사슬을 끊고 내 명령에 따라 문을 열어다오. 게이트!!" 그들이 시동어를 외치자 마법진이 웅웅 하고 울리는 소리는 내면서 활동을 시작하더니 마법진 바로 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쫙 갈라지 더니 성인 남자가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크기의 시커먼 구멍을 만들 어냈다. "자, 우선 여기까지는 성공이군요, 이제 여기가 이어졌누냐 하는 문제 인데....." 약간 긴장했던 탓인지 마이터가 이만에 맺힌 땀을 훔치며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죠슈아에게 가볍게 손짓하자 죠슈아가 바로 옆에 준비해 놓았던 개 한 마리를 끌고 왔다. 그 개는 밤에 아빠네 저 택을 순시할 때 기사들이 데리고 다니는 잘 훈련시킨 경비견으로, 목 에는 아빠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동판을 단 갈색 가죽끈을 매고 있었 다. 그런데 그 개는 훈련이 잘된 탓인지 죠슈아의 말을 듣지 않고 오 히려 그를 물려고 이를 드러내가 죠슈아는 황급히 물러서며 옆에 서 있던 기사에게 부탁했다. "좀 도와주겠나?" 죠슈아가 아무리 왕성에 자주 머무느라 이 저택에 얼굴을 잘안 비친 다고 해도 엄연히 아빠의 가신이었기에 그 기사는 순순히 죠슈아의 말에 따라 개의 끝을 대신 잡고 끌어주었다. 그러자 그 개도 순순히 기사를 따라 한쪽의 마법진 앞에 섰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사는 마법진 앞에 서서 시커멓게 벌어진 구멍을 보고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약간 두려운 눈빛으로 죠슈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 은 '설마 나보고 이 개를 데리고 저 구멍 안으로 들어가 라는 건 아니 겠지요?'라고 묻는 듯했다. "그냥 개를 그 안으로 넣어주시면 됩니다." 죠슈아가 간단하게 대답해 주기는 했지만, 기사도 약간 두려워하는 마당에 개가 쉽게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갈 리 만무했다. 가시가 구멍 앞까지 줄을 이끌긴 했지만 개는 자꾸만 뒷걸음질치며 도저히 들어갈 각을 안 했다. "안 되겠군, 혹시 다른 방법이 없나?" 개가 안 들어갈려고 버티면서 시간이 자꾸 흐르자 서서히 할아버지의 인상이 찌푸려지기 시작했고 그걸 눈치 챈 죠슈아가 초조하게 기사를 돌아보며 무어라 말햇다. 기사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하다다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어딘가롸 달려가서는 곧 짧은 나무 막대 기를 하나 가지고 왔다. "그게 뭐지?" 의아한 듯 기사의 손에 쥐어진 나무 막대기를 바라보는 죠슈아에게 기사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개들은 모두 저희들이 던지는 건 물어오도록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독한 훈련을 받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잊을 수 있다는 건 예전 에 무협지에서나 봤던 거고, 지금은 사람도 아닌 개라서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어쨌든 다른 수가 없었으므로 나나 다른 사람들 모두 잠자 코 그 기사가 하는 것을 바라보도 있기만 했다. 기사가 개 앞에서 구해온 나무 막대기를 그 시커먼 구멍으로 집어던 졌다. "자, 이걸 물어와!!" 그러자 그 개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솟구쳐 그 나무 막대기를 따라 구멍 안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개라고 해도 훈련으 로 죽음의 공포조차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기사가 던진 막대기는 바로 앞에서 벌어진 구멍 안으로 들어가 그 반 대쪽 마법진 위에 형성되어 있던 또 다른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막대기에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뒤따라 시커먼 구멍 안으 로 뛰어들었던 개도 뛰어나와 그 막대기를 입으로 잡아채는 놀라운 묘기를 선보였다. 두 개의 마법진 사이가 약 10m였는데 그걸 눈 깜짝 할 새에 통과한 그 모습에 모두들 놀라움의 감탄성을 말했도 죠슈아 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이터를 돌아보았다. "스승님, 성공입니다. 성공이에요!!" 죠슈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부르짖자 마이터도 기쁨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할어버지는 좋은 기색을 내비치기 싫었는 지 짐짓 비웃는 기생그로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계산한 건데 실패하겠어?" "자, 이제는 사람도 무사히 통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군요. 누가 한번 들어가 줬으면 하는데......" 마지막 과제를 말하며 마이터가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들 황급히 마이 터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돌려 버렸다. 혹시라도 마이터와 눈이 마주쳤다간 지목당해서 저 시커먼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엄습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가 무사히 통과되었다 하더라도 이건 처음 해보는 실험이었 기에 자신까지 100%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보장은 없었던 것이 다. 그러니 저곳을 통과할 때 뭔 일을 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간덩 이가 부은 사람이거나, 저곳을 통과할 때 기분이 어떨지 무지무지 궁 금한 사람이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면 나설 리가 없었다. 바로 나처럼...... "내가 한번 해볼래요." "아가씨께서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죠슈아는 숨이 넘어갈 듯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마이터는 생 각지도 못했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둘에게 싱 긋 웃어주고 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죠?" "뭐, 게이트는 확실하게 열린 거니까 한번 해보려무나." 할아버지는 조금이라도 잘못될 거란 생각이 안 드는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죠슈아는 좀 달랐는지 하얗게 질려서는 나에게 다 가왔다. "아가씨, 왜 하필 아가씨께서... 나중에 주인님께서 아시면 어찌......" 그러자 죠슈아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아빠를 자칭하는 말이 나오자 마자 할아버지가 도끼눈을 뜨고 죠수아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알베 르트 산에서 아빠가 내 친아빠라는 것이 밝혀진 뒤 할아버지는 아빠 에게 큰 분노를 표하고 싶었했지만 내가 쓰러지는 바람에 그냥 얼렁 뚱당 넘어간 게 아직까지도 속이 쓰린지 아빠를 볼 때마다 도끼눈이 되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짚고 넘어가기에는 자 존심 때문에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는데 그 부위를 죠슈아가 저도 모르게 자극시킨 거였다. 죠슈아가 할아버지의 눈길에 찔끔해져서는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피 자 할아버지가 살벌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물론 할아버지가 만들어낸 마법진은 완벽했다. 단지 그 마법진이 외 부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나는 무사히 실험을 성공시켰을 것이다. 아니, 내가 드래곤의 피는 여느 마법 물품보다도 더 큰 마나가 담겨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더라면 난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내 소매에 달려 있던 금단추의 화려한 세공이 날카롭다는 것만 인지했어도...... 그 세 가지를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마샬(내 시녀장)의 닦달에 의해 밖으로 나가지 전 끼고 있었던 얇은 가죽장갑을 벗다가 손등을 소매 에 달려 있던 금단추에 긁혀 버렸다. 손에 땀미 고여 있었던 탓인지 장갑이 잘 벗겨지지 않아 힘을 좀 가해 벗었던 탓인지, 아니면 세공이 좀 날카로웠던 탓인지 세공이 거쳐 간 내 손등은 살갗이 벗겨지면서 하얀 속내가 드러나더니 곧 이어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내 옆에서 같 이 가고 있던 죠슈아가 놀라서 허둥지둥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내 손 등을 싸맷고 할아버지와 마이터, 류미르와 세이몬까지 놀라서 달려오 는 조그마한 소동이 벌어졌지만 모두 나에게만 신경 쓰느라 누구 하 나 내 손등에서 나온 피 몇 방울이 마법진 위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눈 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유 참, 나 괜찮아.그냥 긁힌 거 가지고 야단 떨기는......" 내 부주의로 인하여 소동이 벌어지자 나는 약간의 창피함을 느끼며 나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솑시해서 물러서게 했다. 큰 상처도 아닌 데 사람들이 지나치게 야단 떠는 것 같아 창피했던 것이다. "그럼 갑니다." 할아버지는 마이터가 치유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큰 상처가 아니 었기에 나는 죠슈아의 손수건으로 손등을 감싼 것이로 만족하고 마법 진 위에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큰 구멍 앞에 서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이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막 그 구멍 안으로 한 발을 집어넣고 몸을 들이미는 순간 죠슈 아의 비명이 들렸다. "우왁!!" 의아해진 나는 한 발과 상체의 반은 그 구멍 안에 넣은 채 고개만 돌 려 새파랗게 질려 나에게 달려오는 죠슈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가씨, 빨리 나오세요! 마법진이 이상해요. 빨리......" 죠슈아의 말대로 아까까지만 해도 작게 웅웅대면서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던 마법진에서 이상한 마나의 파동이 느꺼지며 마법진이 전보 다 더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웅~ 웅~ 할아버지와 마이터가 얼굴이 굳어지며 마법진을 향해 달려오는게 보 였고 그 앞에서 죠슈아가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가씨, 빨리요!!" 죠슈아가 내 코앞까지 거의 달려오며 나에게 손을 뻗자 나는 무의식 적으로 손을 들어 죠슈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 기 시커먼 구멍 안으로 집어넣고 있던 발 밑이 허전해지면서 나는 그 대로 구멍 속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죠슈아가 내 손을 잡기 바로 직전 , 정말 아슬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아가씨이이이~!!" 죠슈아의 처절한 부르짖음을 들으며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버렸 다. 예전에, 내가 아직 한국에서 살고 있을 적, 아마 초등학교에서도 저학 년에 다닐 때였을 거다. 그때 TV에서 '이상한 나라의 폴' 이라는 만화 가 일요일 아침마다 방영되었었는데 나는 그걸 무지무지 좋아해서 매 번 일요일 아침만 되면 밥도 안 먹고 텔레비전에 빠져 있다고 긁어대 는 엄마의 잔소리도 무시하며 TV 앞에 꼭 붙어 앉아 있곤 했다. 그런 데 거기서 '폴'이라는 주인공 애는 자주 4차원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왔다 갔다 하곤 했었는데 거기서 차원을 이동하는 시간은 꽤나 많이 걸렸었다. 적어도 2, 3분,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거다. 그 만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만화에서도 다른 세계로 빠질 때 그정 도의 시간은 걸렸으니까 나는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을 비웃는 것처럼 죠슈아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구멍 안으로 머리가 들어오자마자 나는 곧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 고 있는 태양과 시선이 마주쳤다. "웃" 아주 눈 깜빡할 시간에다시 태양과 조우한 것이었다. '쳇, 만화 영화에서 나온 건 다 구라였어'라고 투덜대는 나는 내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내 주위에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이상하 게도 내 머리에서부터 발 쪽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내 발 밑에는 아주아주 새파랗고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하 늘이 보였다. "우엑? 이게 뭐야?"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머리 를 바로 밑으로 두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째 이런 일이.....". 황당함 속에서도 나는 한줄기 안도감이 샘솟았다. 만약 마법진이 오 묘한 변화를 일으키지 않아 그대로 게이트가 유지되었다면, 나는 할 아버지, 마이터, 죠슈아, 류미르, 세이몬, 그리고 수많은 기사들이 보 는 앞에서 뒤로 넘어지며 뒤통수 깨지는 모습을 보일뻔했었다.더 재 수없었으면 코가 깨졌을지도....... 여기가 어딘지는 머르겠지만, 어째든 허공에서 차원의 문이 열려 머 리를 밑으로 하고 떨어지는 걸 보니 마법진이 잘못되어 공간이 일그 러진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허공에서 열린 게 다행이네. 어쨌든 이제 떨어지는 걸......" 꽝~!! 순간적으로 눈앞에 별이 반짝반짝하더니 정신이 순간적으로 아찔했 다. .. '아아....딴생각하기 전에 몸부터 허공에 띄우고 있을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라고 했던가...속으로 후회의 말을 중 얼거리며 옆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추수리지도 못하는 사이 갑자기 청 범 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몰려들자 정신이 번쩍 들 었다. "어푸,어푸 ...." 머리를 박은곳이 물의 표면이었는지 난 어느새 물에 빠져 있었다. 놀 람과 당혹감으로 인해 입을 벌리자마자 물이 입 안으로 들어왔는데 으외로 짭짤했다. '바닷물이닷!죠스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어푸,레비....어푸푸....테이셔언...." 바닷물을 열씸히 삼키면서 시동어를 외친 보람이 있는지 나는 곧 물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내몸은 바닷물에 쫄딱 젖어 있었다. "우쒸,언제 바닷가까지 날려온 거야? 이거 그대로 말릴 수도 없잖아?" 바닷물 표면에 뜬 상태로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자락과 머리카 락을 쥐어짰다. 추운 날씨였기에 두텁게 차려입은 드레스가 물에 젖 어 몸에 착 달라붇는 바람에 웁직이기가 되게 불편했다.빨리 육지로 올라가서 근처 인가라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내가 있는 곳의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근처에는 육지가 있었지만 내 눈에 보이 는 건 높이가 50m는 어 되어 보이는 절벽뿐 이었다. 그 밑에는 무지 큰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파도에 씻기고 있었고 나는 거기서 약 200m 떨어진 바닷물 위에 있었다. 그 장면을 보니 소름이 오싹 끼쳤다. '허걱 ...혹시라도 문이 저 위에서 열렸었다면 ....난 완전히 가실 뻔했 군. 그런데...난 도대체 어디에다 머리를 부딪힌 거지? 꽤 단단한 것 같았는데....너무 좊은 곳에서 떨어져서 바닷물 표면에 부딪혔는데도 그런 충격을 받은 건가?' 내 의문은 당연했다. 절벽과 바위는 저 멀리 떨어져서 장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내 쥐위에는 출렁이는 바닷물뿐 단단한 물질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음....혹시 바닷물 속에 숨은 암초나 산호초에 부딪힌 건가?' 라고 생각해 봐도 부딪힐때 바닷물에 적셔지는 느낌은 없었는데다 내 주 위의 바다 속에는 암초나 산호초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바다 속 깊이 바위와 모래가 보이고 그 주위에 해초가 바다 물 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웬 파란색 실 뭉치가 빠른 속도록 떠오르고 있었다. '헤...누가 털실 뭉치를 바다 속에다 빠뜨렸나봐...그런데 되게 큰거어 얼 ~?' 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 파란색 실 뭉치는 아주 빠른 속도로 떠오르 더니 급기야는 바닷물에서 뛰쳐나와 허공에서 멈춰섰다. 그제야 나는 그 파란색 실 뭉치가 어떤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가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 아이이며,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비록 바닷물에 쫄딱 젖어버렸지만 내 주위에서 보던 남자 아이들이 보통 입는 옷이 아니라 마치 여자 옷처럼 하늘하늘한 옷자락이 물에 젖어서 속바지 까지 드러난 게 처음 보는 복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남자 아이 의, 나를 노려보는 파란눈동자는 엄청난 분노를 담고 있어서 툭 건드 리기만 하면 파란 불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엄청 화가 난 듯 식 식 거리면 급기야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입을 열었는데 분 노로 부들부들 떨다 보니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았다. "이,이....너,너 따위가 감히이이~!!" 내 머리 속에서 울려 퍼지는 분노에 찬 음성.나는 저 아이가 말하는게 용언이라는 걸 깨닫고는 무척 놀랐다. '어라? 그럼 내 동족이네?' 나는 이런데서 동족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그 애가 화가났다는 것도, 그 리고 내가 2.000년 만에 새로 태어난 해츨링이라는 것과 내가 성룡이 될때 즈음에야 또 다른 해츨링이, 그것도 실버와 그린 족에서 태어났다 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머, 원래 잊고 있었지만...). 즉, 내 또래의 동족은 없다는 소리였다. "아하하하, 야~ 너도 드래곤이었구나.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난 레드일 족의 칼 아시리안이라고 하는데 넌 이름이 뭐냐? 머리가 파란걸 보니 블루 일족이지?" 그런데 이 파란 머리 남자애는 나의 이 친절하고 사교성 어린 말을 싸그 리 무시해 버리고는 자신이 할 말만 했다. "이,이이이...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감히, 감히 용족의 5왕자인 내 머 리를 때리고도 제가 무사할 성싶으냐? 썩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지 못 할까? 아,아냐, 그보다도 먼저 네 이름과 가문을 대거라!!" '어? 내또래가 아닌가베?' 그제야 나는 내 또래의 동족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사색이 되었다. '에구머니나! 어른을 때렸나봐....말하는 걸 보니 내 머리랑 저분의 머리 랑 부딪혔나 본데....' 나는 그제야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일족의 어른께 무례를 저질렀군요.일부러 그런 게 아니 니 용서해 주십시요.너는 칼 세실리아의 딸 칼 아시리안이라고 합니다. 블루 족의 어른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러자 그 파란 머리 남자애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이 팔짱을 탁 낀 채 코웃음을 쳤다. "하, 왕자의 머를를 쳐놓고도 용서를 바라는 겐가? 듣자하니 칼 세실리 아 가문이라고? 그런 가문은 들어보지 못했다. 어지간히도 별 볼일 없 는 가문의 여식이로군" 그 드래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 꼈다. 우리 드래곤에가 가문이 어디있고 왕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로 드가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명분일 뿐 드래곤 뒤치다꺼리나 하는 가여 운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시 물어 보았다. "죄송하지만 당신의 신분을 밝혀주시겠습니다?" 그러자 그 파란 드래곤이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며 크나큰 인심을 쓰는 것처럼 툭 내뱉었다. "흥, 별 볼일 없는 가문의 여식이라 그런지 날 못 알아보는군. 아시 한 번 말해 줄 테니 잘 들어라. 나는 현 용왕족 중에서 5번째 왕자인 청룡 청명이라고 한다. 올해 성룡식을 마치고 인간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차 원을 건너왔다." '이게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지가 왕자래.용왕족은 또 뭐야? 청룡은 또 뭐고? 블루 드래곤이 아니란 말야?' 나는 의아해 졌지만 다시 한 번 물었다. "저...그런데 실례지만 나이가....?" 내가 계속 저자세로 나가자 기분이 점점 가라앉는지 스스로를 청룡이라 고 밝힌 용은 틱틱대면서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흥,멍청하군.올해 성룡식을 치르었다면 충분히 알 거 아닌가? 올 해 500살이다." '500살....그래,500살이군....500살이었어어어어~!!' 나는 그, 이제는 나보다 100살이나 어린 녀석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쥐 고 있는 힘껏 녀석의 머리를 내려쳤다. 퍼억~!! 순간적인 내 행동에 그 파란 녀석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얻어 맞고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면 나를 노려 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난 나는 이제 그 녀석이 나보다도 어리다는 걸 알았으므로 전혀 꿀 릴 게 없었다. "뭔 짓이냐고? 이 자식아, 그러는 넌 뭔 짓이야? 나보다도 100살이나 어 린 주제에 잘난 척을 해? 아쭈구리? 뭘 꼴아 봐? 그리고 용왕족? 웃기 고있네. 얌마, 우리 드래곤에게 왕족이 어딨냐? 이 짜식이 누굴 속이려 구들어? 내가 현 로드를 알고 있는데 로드에게는 자식이 없어. 그런데 뭐? 5왕자? 지금 장난 하냐?" 주먹을 들어 보이며 드래곤 피어를 남김없이 쏟아내면 몰아붙이자 녀석 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나에게 당 한게 무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씨~ 난 정말 용왕족의 청룡 왕자란 말야. 니가 나이가 많으면 다야? 평민 주제에, 난 왕자라구!!" "이게 끝까지 우기네? 야, 우리 드래곤에게 왕족이 어딨어?" "왜 없어? 넌 용계에서 안 살았냐? 분명히 아바마마가 용계의 왕이고 형,누님, 그리고 내 동생들도 다 왕자님과 왕녀님으로 불린다구!!" "이노무시키가 계속 거짓말을...너, 자꾸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한대 더 맞는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 파란 머리 녀석은 움찔하더니 곧 이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발작처럼 외쳤다. "이,이....감히, 감히 나에게에에에~!!" 엄청 화가 난 듯 녀석의 몸에서 파란색의 기운이 뻗어 나와 녀석을 감싸 며 휘몰아 쳤다. 그리고 곧 그 녀석은 파란 기운에 휩싸여 모습이 보이 지 않게 되었지만 기운 덩어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 본모습으로 돌 아 가려는 것 같았다. "아쭈, 너만 드래곤이냐? 나도 그래곤이다." 녀석이 먼저 드래곤의 모습으로 나에게 덮쳐(?) 오면 내가 아무리 녀석 보다 100살이 많아도 불리할 것 같아 나도 서둘러 본모습으로 변신했 다. 그리고 변신하기 전 옷을 벗어 챙기는 것도 잊지않았다. 그런데 나는 본모습으로 돌아간 후 황당감을 감추지 못했다.아마 내 앞 에 본모습으로 돌아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던 저 파란 용도 마찬가지 였 을 것이다. 놀람으로 인해 큰 눈이 더욱더 커진 상태로 한 동안 날 물끄 러미 바라보던 녀석은 하탈한 듯 입을 열었다. "너...너어...돌연변이였냐?" "이 자식이 주글라구~!!" 그 녀석의 말에 열이 확 받친 나는 처음으로 드래곤 브래스를 쏘기 위해 입안에 마나를 모았다. 그러자 녀석은 내 상태를 알아챘는지 급히 자신 의 앞에 파란 기운을 응축시키며 외쳤다. "하,하지만...난 너 같은 용은 처음 본단 말야.용계에서도 너 같은 용이 있다는건 보도 ,듣도 못했다구우우~!!" 녀석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녀석의 말이 어는 정도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녀석과 내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난 녀석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한국 학생이었을 때 자주 듣던 동양의 용!!! 머리에는 사슴의 뿔과도 같이 생긴 거대한 두개의 뿔과 입 주위에는 수 염이 있고 몸통은 마치 미꾸라지 처럼 늘씬한 몸매에 앞뒤로 날카로은 발톱이 달리 세개의 짧은 다리를 자랑 하고 있었다. 녀석이 말하는 그 용계란 아마 저 녀석처럼 늘씬한 용들만 살고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인 가 보다.녀석의 말에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인간이었다면 녀석의 기운 에 눌려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을 그 용태(?)를 아예 대놓고 아래 위로 흝어보며 감상을 내뱉었다. "헹,완전히 뿔 달린 파란 미꾸라지네." 그러나 녀석의 머리에 혈관이 하나 빠직 솟더니 질수 없다는듯 나에게 외쳤다. "그러는 넌 뭐냐? 꼭 뻘건 비만 도마뱀같이 생겨가지고는 잘났다고 우 쭐대긴. 너처럼 뚱뚱한 도마뱀보다 늘씬한 미꾸라지가 휠씬 낫다!!" 녀석의 말에 나는 가라앉았던 열이 아까보다 100배는 빠르게 치솟는 걸 느꼈다. "뭐시여? 뭐시 어쩌고 저째? 그래,퍼런 미꾸라지가 난지 비만 도마뱀이 난지 어디한번 해보자!!" "그래, 바라던 바다!! 평민, 아니 돌연변이 용인 주제에 왕족인 나에게 대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흥 너야말로 이 누나에게 덤빈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너 나한 테 지기만 하면 날 평생 누님이라고 깍듯이 대해야 할 거다." "좋아. 내가 진다면 너에게 평생 누님 대접을 해주지. 대신, 네가 진 다면 넌 내 시종이 되는 거다." 녀석의 말이 끝나는 것을 신호로 우리 둘은 몸으로 부딪쳐 갔다. 나의 거대한 몸뚱이를 녀석에게 그대로 밀어붙였지만, 녀석은 오히려 그 긴 몽퉁으로 나를 한바퀴 감더니 온몸에 힘을주어 나를 강하게 죄기 시작했다. 빠직, 빠지직........ 그힘이 얼마나 강한지 내 몸의 비늘이 녀석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부스 러지는 것처럼 소리를 내자 나는 다급해졌다. 하지만 몸을 아무리 흔들 고 비틀어도 내 몸에 착 감겨있는 녀석의 몸뚱어리는 떨어져 나갈 생각 을 안했다. 내 머리 옆에 있던 녀석의 얼굴에 벌써부터 승리의 기쁨이 감돌기 시작하자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스타 플레어!!" 내몸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원래이 주문은 적의 주위에서 불길이 치솟아 적을 꼼짝못하게 막는 주문인데 나는 그 걸 역이용하여 내 몸 주위에서 불길이 치솟게 만든거였다. 어차피 나는 불의 기운을 가진 레드 드래곤 이었으니 이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 었다. 하긴, 녀석도 드래곤은 아니지만 용이니 마법따위에 큰피해는 입지 않 겠지만, 녀석이 우선은 적룡이 아니라 청룡이므로 나는 녀석이 놀라 잠 시 움찔하는 사이를 벌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내 몸에서 치솟은 불길이 녀석의 몸에 옮겨 붙었고,녀석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해 강하게 몸부림을 치면 나에게서 떨어져 나와 바다속으로 들어갔다. "어라? 의외네... 용인데 이정도의 마법에 당하다니..." 의외의 사태에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나에게 유리하게 된 터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몸에 방어막을 친뒤 녀석이 들어간 바다를 쳐다 보았다 아무래도 들어간 녀석이 그냥 나올리는 없을것 같았기 때문에... 역시나....... 잠시후 내 예상대로 바다가 갑자기 휘몰아치기 시작하더니 여러 회오리 들이 나를 덥쳐오기 시작했다 한두개는 쉽겠지만 10개정도가 되자 난 다 피하지 못하고 한개의 물줄기를 정통으로 맞았다. 비록 몸에는 방어 막을 쳐놓았기에 다치진 않았지만 그 타격이 몸에 그대로 느껴져 정신 이 없었다. 그다음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오더니 번개가 나에게 그대로 작렬했 다. 눈부신 빛과함께 콰과광~! 하는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쉴드 때문에 타격은 받지않았지만 그 번개때문에 물줄기에 한대 맞았 다 "우쒸,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 그래도 아직 크게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하늘 을 올려다보았고, 아까까지만해도 구름없던 하늘이 먹구름이 끼여있었 다 "엥? 갑자기 왜 먹구름이 끼었지? 아까까지만 해도 저쪽에 뭉게구름 밖 에 없었는데?" 다시한번 번개가 내리치고 그번개는 역시 나에게 그대로 날아왔다 그것 도 5번이나... "뭐야? 이거?" 그제야 나는 이번개가 자연적이 아닌 걸 깨닳았다. "이,이 자식이~!!" 그 번개를 맞자 몸이 찌릿찌릿했다. 그리고 내가 두번이나 번개에 맞자 크게 타격을 입었으리라 생각되었는지 청룡녀석이 바다속에서 떠올랐 다...... " 푸하하하! 어떠냐? 네가 제법 주술을 부릴줄 알았나 보지만, 왕족인 나의 신력에는 당하지 못하겟지?" 의기양양해서는 크게 웃어 젖히면서 떠오르던 녀석은 멀쩡한 내 모습을 보더니 곧 눈을 크게 떳다. "아니, 어떻게 그 번개를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나는 녀석의 말대로 멀쩡하지 못했다. 얼마나 몸이 찌릿찌릿 한지 정신을 차릴수 없었고 까닥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곤 두박질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녀석에게 이렇게 당하고만 있는 나에게 무지 분노가 치밀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나의 모 습에 녀석이 놀라서 잠시 가만히 있는사이에 나는 녀석에게 당한걸 갚 아주기 위해 분노로 타오르는 눈길을 녀석에게 보내는 동시에 이를 빠 드득 갈며 외쳤다. "모노 볼트!! 쇼트 스피어!! 스턴!!" 내가 알고있는 전격 마법 중에서 적에게만 공격할수 있는 최강의 주문 들만 골라서 외치자 녀석의 주위에서 갑자기 화려하고 강한 빛을 뿜어 내는 수십 가닥의 빛줄기들이 생겨나 빠르게 녀석에게 쏘아져 들어갓 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녀석은 방어막을 만들 생각조차 못했고, 더구 나 녀석은 방금 바다 속에 있다가 올라 왔기에 그의 몸에는 소금물이 묻 어 있는 상태여서 전기들이 좋아라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강한 마법 을 세개나 사용했기에 녀석의 몸이 빛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을 정도였 다. 파직, 파지지직~!! 녀석이 나에게 떨어지게 만든 번개보다 더욱더 높은 전압의 전 기 쇼크 가 수분 동안이나 녀석을 흔들어주고 사라지자 시커멓게 그슬린 녀석의 몸이 드러났는데, 녀석은 내 마법을 직통으로 맞아 서인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르 바다위로 떨어져 내렸다. 슈우우웅~ 첨벙~!! 아무리 늘씬한 몸매를 가졌다해도 그 큰 몸뚱어리가 떨어지자 수면이 충격을 받았는지 큰 물결이 솟아올라 떨어져 내렷다. 그리고 잠시후 나에게 한방 맞아서 곧바로 공격할 줄 알고 긴장한 채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건만, 한참을 기다려도 녀석은 파도의 물결에 흔들린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용이 이정도에 죽을 만큼 약한(?)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너무 큰 쇼크에 정신을 잃은듯 했다. " 흥, 그렇다면 내가 칠절을 베풀어 깨워주지 프리즈 레인!!!" 빨리 녀석을 깨워 나의 승리를 각인시켜주고 싶었던 나는 기꺼이 친절 을 베풀었고 곧 녀석의 머리위에서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이 수십 개 생 겨나더니 곧바로 녀석에게 떨어져 내렷다. 퍼억~ 첨벙~ 첨벙~ 퍼억~ 퍼억~ 첨벙~ 퍼억~!! 몇개는 녀석을 맞추지 못하고 그대로 바다속으로 떨어졌지만, 나머지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히 녀석의 몸과 부딪쳐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얼음 덩어리가 몇몇의 타격에 의해 막 정신을 차리려는 녀석의 얼굴 정면에 떨어져 내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사라지자 녀석이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퍼억~!! "우아아악, 무슨 짓이야?" 효과가 높았는지 녀석은 곧장 솟아올라서 내 앞으로 날아왔다.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그 짧은 앞발로 나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외치는 녀석에게 나는 아주아 주 너그러운 미소를 담아 보이며 다시 외쳤다. "누가 누님이라는 거야? 너, 바보 아냐?" 바보라는 말에 화가 빠득 솟았지만, 녀석이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 는 거 같아 난 너그러이 용서해 주기로 했다. 지금의 이 버릇없는 태도 는 잠시 후에 차차 고쳐 주기로 마음 먹으면서. "네 녀석이 싸우기 전에 그랬잖아. 내가 이기면 날 평생 누님으로 모시 겠다고. 너희 용족은 한 입으로 두말 하는 족속인가 보지?"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마지막으로 예쁘게 웃어 보이자 그제야 상 황이 파악되었는지 녀석의 시퍼런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그런..." 하지만 이대로 굴복할 수는 없었는지 다시 발작적으로 외쳤다. "누, 누가 너한테 졋다는 거야?" "호오, 방금 나한테 한 방 맞고 기절한 용이 어디의 누구였더라...?" "그, 그건... 네가 주술을 썼기 때문이잖아!! 난 주술을 사용할 줄 모른다 고!!" "그거야 네 사정이지 내가 알 바 아냐. 그리고 아까 넌 내 주술- 아, 물론 난 마법을 사용한 거지만, 너네는 그걸 주술이라고 하나 보지?- 이 네 신력에는 못 당할 거라면서? 내가 마법 -네가 말하는 주술 말야-을 사용한다는 걸 네가 몰랐던 것도 아니고 너도 그 신력이라는 걸 사용했으면 된 거 아닌가? 싸우기 전에 육탄전으로만 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말야, 안그래?" 나의 말에 녀석은 분노를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반박할 말이 없 는지 입이 열리지는 않았다. 그런 녀석에게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럼 나에게 졌다고 순순히 인정해야지?" 녀석은 무척이나 인정하기 싫은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열었다. "... 좋다. 나 용계의 5왕자 청룡 청명은 이번 싸움에서 패배하였음을 시 인한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지만 억지로 그런 티는 내 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래도 녀석에게서 "누님"이란 말은 듣고 싶어 그 말을 채근하려고 하는데 갑작스레 내 몸이 기우뚱거렸다. '어? 이게 왜 이래?' 몸이 살짝 기울어지면서 머리까지 어질어질한 게 상황이 안 좋은 듯 했 다. 게다가 내 몸을 허공에 떠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마나의 운용이 점 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왜 이러지? 녀석과 싸울 때 너무 무리했나? 하지만 이 정도 가지고 마 나가 고갈되다니...' 의문이 들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마나를 완전히 써버릴 것 같아 나는 우선 마나 사용을 줄이기 위해 재빨리 저 멀리 보이는 절벽 위로 날아가 서 사람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했다. 인간의 모습이면 드래곤의 모습일 때보다 마나의 사용량이 훨씬 적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까 미리미리 잘 보관해 둔 옷을 챙겨 입고 몸속에 남아 있는 마나의 양을 점검하고는 놀라 버렸다. 마나의 양이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양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적은 양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얼라리오? 이게 웬일이래? 정말 내가 너무 무리한 건가?' 혹시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더럭 겁이 난 나는 얼른 할아버지나 아빠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왼손에 찬 아빠의 팔찌에 마 나를 주입했다. 아빠를 불러내어 이곳이 어딘지도 알 겸 아빠네 집이 내 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마나의 양으로 공간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인지도 알 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아빠의 팔찌에서 뻐어 나온 빛이 내 앞에 빛의 막을 만들어주고 있었지만 그 막은 텅 비었을 뿐 평소 잘 나타나던 아빠의 모습은 나타나 지 않았다. '이, 이게 도대체...' 더욱 강하게 마나를 주입해 봐도 빛만 강해질 뿐 아빠의 모습이 끝내 나 타나지 않아 나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던 나는 내 옆에 아까 그 청룡이 내려와 사람으로 변신한 후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팠기에 신경 쓰지 않고 머리 속에 엉클어진 문제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침착하자,침착해. 내가 당황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 생각 해보자, 아빠랑 연결이 왜 안 되는 거지? 팔찌가 망가진 건 아닐 거야. 내가 실드까지 씌워서잘 보관했으니까. 그럼 내가 부여한 마나가 모자 른걸까? 하지만 아까는 평소보다도 더 많은 마나를 부여했었는걸. 그럼 그 것도 아니고....가만,, 그리고 보니 난 지금 까지 아빠와 연락한 곳이 소르드 왕국 안에서 만이었잖아? 그렇다면...여긴 소르드 왕국 아닌 건가? 음...아무리 아빠가 만든 거라 고 해도 연락할 수 있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겠지?그렇다면 내가 그 한 계를 벗어난 곳에 있다면 연락이 안 되는 건 이해 가 가. 에휴....내가 되 게 멀리도 왔나 보구나.'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결과가 나오자 그제야 머리 속이 정리되는 느 낌과 함께 나는 안정을 찾을수가 있었다. '우선은 가까운 인가를 찾아봐야겠다. 그래야 여기가 어디인 줄 알지. 그리고 마나가 다 보충되 때까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나중에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고 나자 나는 겨우 주위를 둘러볼수 있는 여유가 생겼 다. 그러자 맨 처음 내 옆에 서서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청룡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의아한 듯 바라보며 묻자 청룡이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아무것도 아니야....요." 녀석의 이상한 말투에 의아함이 들었지만 지금 내 사정만으로도 감당하 기 벅찼기에 나는 더 이상 녀석에게 관심을 두지않고 주위를 둘러본 후 절벽을 따라 조심스레 걸어거기 시작했다. 절벽근처는 풀만 듬성듬성 있는 바위투성이였지만 그 뒤로 꽤 가파르게 보이는 산이 이어져 있었 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산을 넘어가야만 인가가 보일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드레스에다 구두를 신고 있어 이런 곳을 걷기가 불편했지만, 아까 저 청룡 녀석과 싸으느라 마나를 많이 낭비해 버려 될수 있는 한 마법을 쓰지 않으려고 이렇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청룡 녀석이 내가 움직이자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거였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자신도 걸음을 멈추고 내 눈치만 살피다가 내가 또다시 걷기 시 작하면 자신도 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오는 거였다. 처음에는 상관도 하지 않았지만 자꾸 나를 따라오는 녀석이 신경 쓰여 서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왜,왜...요?" 내 시선이 심상치 않았는지 녀석이 쭈삣쭈삣거리면서 나보다도 먼저 물 어 보았다. "너, 왜 날 따라오는거야?" "그, 그거야...." 내 말투가 냉담했는지 녀석이 더욱더 움추러들어 말을 잇지 못하며 한 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더듬거리며 말했다. "...누,누님이잖아...요." 엉뚱한 대답이였기에 나는 황당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내가 니 누나라는 거하고 네가 날 따라오는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녀석은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망설이더니 또다시 우물쭈물 대꾸했다. "...그,그러니까...누님은 동생을 ...보살펴 줘야 되잖아...요" 황당한 녀석의 대꾸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까 나와 싸울때 의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내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하 는 녀석이 우습기도 했고, 또 놀려주고 싶은 짓궂은 마음이 솟아올랐지 만 지금은 내 처지가 처지인지라 녀석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나는 녀석이 따라붙는게 달갑지 않았다. "너, 성룡이라며? 그리고 내가 너에게 뭐 시킨 거라도 있어? 됐으니까 너 갈길로가." 하지만 녀석은 요지부동, 움직일 낌새조차 보이지 않으며 계속 내 눈치 만 보고 서 있는 거였다. "왜 그러는데?" 한참을 또 망설이던 청룡은 결국 다 말하기로 결심했는지 한숨을 내쉬 면 떠듬떠듬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난 여기...처음온거구...그...누..님은...여기에 꽤 오랬동안 있었던 거 같으니까..이렇게 만난 것두 인연이구.... 또 내 가 ....누...님이라고 인정했으니까...내가 여기 익숙해질 때까지는 날 좀 도와줘도 되잖아...요"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날 '누님'이라고 부르거나 끝에 존대를 사용할 때 무지무지 억울하고 힘든 표정을 지엇는데, 그게 그렇게 말하기가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보다. 그래도 자신이 말한 걸 지키는 녀석을 보니 같은 동족이 아니라 비스무리한 사촌 동족이 래도 녀석이 기특하게 느 껴졌다. 게다가 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서 여기가 어딘지만 알면 아빠나 할아버지에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한 탓에 맘이 편안해져 꽤 너그 러워졌다. 그리고 이 녀석을 할아버지나 아빠에게 한번 보이고 싶다는 생각도들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인간 세상에 처음 왔다니까 내가 널 데리고 다닐께. 네 말대로 이 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이왕 내가 내 누나가 됐으니까 내 용심 한번 쓰마." 그러자 그개를 번쩍들어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 고마워...요" 그래도 존대 쓰는건 되게 싫은 모양이었다. 끝에 '요' 자 붙이는 걸 무 지 힘겨워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용심 쓰는김에 크게 쓰기로 했다. "야야, 됐어. 존대는 쓰지마. 나랑 나이 차이도 100살밖에 안 되는데 뭔 존대냐? 그리고 누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누나라고 불러. 누님이란 소리 들으니까 쫌 징그럽다." 그러자 녀석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환해졌다. "어,뭐 ...그렇게 하라고 하면야...." '내가 시켜서 하는 것처럼 말하려면 표정이나 잘 관리하면서 말할 것이 지...표정은 저렇게 환한데 그렇게 말하면 누가 믿나?' 청룡의 서툰 표정 관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고 한순간은 놀리고 도 싶어 졌지만 그냥 넘어가 줬다. 우리는 산을 내려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절벽 쪽은 무척 가파 라 넘어가는게 힘들것 같아 걱정했는데 으외로 한 고개를 넘어가니 경 사면이 무척 완만하고 나무들어 빽빽하게 나 있는게 아니어서 드레스에 구두를 신고 있지만 않았다면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을 수 있을 만한 곳 이었기에 걸어가면서 대화를 할 수 가 있었던 것이다. 청명이의 말에 의하면 ,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용들이 인간들의 모 습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사람의 모습으로 집도 짓고 살고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는 평민 계층이 있고 그들을 다스리는, 인간 세계로 치면 귀족 과 왕족도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신은 현 용족을 다스리는 용왕 백 룡의 다섯 번째 아들이라고했다. 평민은 용과 인간으로만 변신할 수 있 는 능력만 있을 뿐 그 외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고 , 그들 위에는 나처럼 마법 - 그들은 주술이라고 했다 - 을 쓸수 있는 주술사와 신을 받들며 계시를 받는 신관, 신녀들 , 약재를 다루어 용을 치유하는 의사들, 그리 고 투기- 싸움에 사용하는기- 를 다스리는 장군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 고 왕족들은 그들만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 있는데 바람이나 물, 땅,불 등을 직접 다스리는 능력으로 신력으로 불린다고 했다. "아하, 그럼 아까 나를 향해 물로 공격을 한 거라든지 번개를 내리치게 한 게 바로그런 능력?" "응, 나는 아직 미숙해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물을 다루는 것과 번개 를 다스리는 것밖에 없니만...그중에서 물을 제일 잘 다스릴수 있어." "신기하네. 아치 초능력 같잖아? 하긴, 용들이 사회를 이루고 산다는것 도 신기해. 우리 드래곤들은 다 개개인의 플레이라 사회를 이루는 건 꿈 도 못 꾸는데 너희는 계급까지 있잖아? 할아버지나 아빠가 널 보시면 무척 놀라워 하실 거야." 내가 흥분에 들떠서 말하자 청명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렇게 신기해? 난 누나네 종족이라는 그 드래곤들이 혼자 산다 는게 더 신기한데." 그렇게 우리가 서로 자신들의 종족들이 사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하 며 한참 동안이나 걸어가고 있는데 문득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사람인가 보다. 우리가 제대로 온 거 같은데? 저들에게 마을이 어 디인지 물어보는 게 좋겠어." 내가 그렇게 말하며 청명이의 손을 덥석 잡아 이끌고 발걸음을 더욱더 빨리 하려는데 갑자기 청명이가 내 팔을 가볍게 뿌리쳤다. 의아해서 그를 돌아보니 청명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얼굴 뿐만 아니라 목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 왜 그러는 거야?" 의아한 그 모습에 혹시 그도 몸이 안 좋은가 해서 그에세 가까이 다가가 며 묻자 청명이는 깜짝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야? 왜그러는데?" 나를 거부하는 그의 몸짓에 기분이 나빠져서 그 자리에 서며 두손을 허 리에 얹고 화난 것처럼 약간 차갑게 묻자 청명이가 더듬더듬 대꾸했다. "아,아니...그게.......그러니까 ...아무리...누나가 되었다고 해도...외 간 남자의 손을 함부로 잡는 건...음... 그검... 저기...아무래도... 좀...." 비록 말을 확실하게 끝낸 건 아니지만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 는지 안 나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보수적인 그를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그에게 다가 가 팔짱을 끼며 쫑알댔다. 그가 다시 내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내가 꽉 붙들고 있었기에 여의치 않게 된 청명이는 더욱더 얼굴을 빨갛게 물 들였지만 나는 개의치 앟았다. "하, 손좀 잡는다고 닳냐? 이러면 좀 어때?" "하,하지만...." "푸하하하하.순진하긴.그러니까 더 해주고 싶잖아!!" 내 주위에 있던 남자들은 다 뻔뻔함의 극치를 자랑했고 세이몬이 제일 순진한 축이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기에 나는 청명이의 반응이 신 선하기도했고 무지무지 재미있는 한편, 이순진함을 빨리 물들여 주고 싶은 사악한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올라 그의 팔을 놔주지 않은 채로 인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빨리 가보자구!!" "저,저기... 누나... 이 팔 좀....." "아, 정말, 빨리 가자니까!!" "누,누나아아....." 빨개진 얼굴로 내 팔을 부드럽게 뿌리치기 위해 노력하는 청명이를 보 고 있자니 너무 재밌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 낸 사람들을 보고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나와 청명이를 너무나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두 중년남자를 나 도 무척 놀란 심정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얼라리오....." "@###$$%%%^^&&&............." "**&&&&^^%%%$##@@."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저희들끼리 소곤소곤대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예전 한국에서 살 떄 너무나 즐겨 보았던 무혐 영화에 나 오는 옷차림을 하고는 꼭 중국어 같은 말로 속닥거리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도대체... 난 어디까지 날려온 거지? 내가 살던 곳에 중국같은 나라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 아, 맞다......" 패닉상태에 빠져 내가 뭐가 잘못 알고 있는지 열심히 기억 속을 뒤적여 보던 나는 그제야 예전 성년이 안 된 류미르와 세이몬을 데리고 여행할 때 에스라 왕국의 온천에 놀러 갔다가 만났던 동양인 형제를 떠올렸다. 머나먼 동쪽에서부터 왔다는 동양인의 두 형제들... 그 생각이 떠오르자 그래도 다른 대륙이나마 같은 세계에 있다는 생각에 나는 적잖은 안심 을 했다. 혹시나 하고 딴 세계로 날려왔는 줄 알고 엄청 놀랐던 것이다. "에구구... 엄청 멀리도 날려왔네........" 혼자 중얼대면서 나는 청명이를 끌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했다. 어쩄든 이곳이 어디인지 저들에게 물어서 알아야 했기 떄문이었다. 며칠 전에 류미르와 함께 익힌 마법을 처음으로 써먹을 수 있게 되어 약간은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걸어가려는데 청명이가 날 툭툭치 며 속삭였다. "누나, 우리보고 색목인이라는데? 색목인이 뭐지? 우리같은 용을 말하 는건가?" 나는 너무나 놀라서 걸어가려다 말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라? 너, 저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그러자 청명이가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누나는 못 알아듣는 거야? 용계에서 사용하는 언어랑 똑같은걸 뭐." 그제야 나는 청명이와 내가 대화를 한 건 입으로 직접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지를 상대편 머리 속에 직접 전달했기에 가능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도 청명이와 나는 입으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 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맀구나... 뭐, 내가 사용하던 언어와는 다르지만 난 네가 말하는 주 술로써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그런데 색목인이라고 했다고?" "응,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예전에 내가 본 책에 의하면, 검으니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들만이 살고 있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색의 눈동자나 머리카락을 가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자신들과는 다른 색의 눈동자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색목인이라고 부른다더라. 저 들이 보기에는 우리도 파란색과 빨간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렇게 부르는 거겠지." "아하. 그렇구나." "어쨌든, 저들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봐야겠다. 나도 여기가 어디인 지는 모르거든." 그들에게 다가가기 전에 재빨리 언어로도 대화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을 나에게 건 뒤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물어봤다. 그들은 내가 다가오자 약 간 경계하는 눈초리였지만, 나나 청명이가 어려 보여서 그런지 크게 긴 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례합니다만, 뭐 좀 여쭈어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키가 좀 더 큰 사람이 나에게 대꾸했 다. "뭔데 그러슈?" "호오, 마법이 효과가 있네?" 나는 처음 건 마법이 괜찮게 효과를 보이고 있자 비록 그들이 퉁명스레 대꾸했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질문했다. "여기가 어디죠? 무슨 나라이며 어느 지역인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들은 나를 무척이나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대꾸해 주었다. "여긴 명나라이며 이곳은 광동 지방의 바닷가요." 그들의 퉁명스런 대꾸에 나는 딱 굳어져 버렸다. "명, 명나라요?"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며 묻자 나에게 대꾸를 해 주 던 남자는 더욱더 이상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수. 그런 것두 몰랐수?" 그런데 그 때 같이 있던 다른 남자게 뭘 생각했는지 약간은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날 경계하면서 나에게 대꾸해 주는 남자를 툭툭 치며 주춤주 춤 뒤로 물러났다. "이, 이보게, 우린 다 말해 줬으니 이만 가자구." "그, 그러지." 나에게 대답을 해주더너 남자도 옆의 남자가 겁에 질린 듯 하자 뭔가를 깨달았는지 굉장히 조심스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어느 순간 도망치듯 잽싸게 뒤로 내뺐다. 영문 모를 그들의 모습 에 황당해할 만도 했건만 나는 너무 쇼크에 빠져 있었던 탓에 그들이 도 망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명나라래... 명나라... 중국에 있던 그 명나라? 미치겠군. 여기 진 자 명나라 맞아?" "누나, 왜 그러는데? 뭐가 잘못됐어?" 한동안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자 중얼대자 청명이가 나를 툭 쳤 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넋 빠진 얼굴로 그를 바 라보며 말했다. "야, 여기가 명나라래... 원나라 다음이 명나라지? 그 다음이 청나라 구... 그리고... 한국은 지금 고려인가, 조선인가? 명나라 말기에 조선 으로 바뀌었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맞나? 난 원래 사회는 잘 못 해서..." 그러자 청명이가 놀란 얼굴로 내 어깨를 잡고 나를 가볍게 흔들었다. "누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청명아..." 나는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감동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 로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응? 왜 그러는데?" "나... 나도 차원 이동한 거 같아... 여긴, 내가 살더너 곳이 아냐... 흑, 할아버지랑 아빠가 지금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청명이는 나의 말에 눈을 동그렇게 떴다. "누나, 그게 정말이야? 에이, 좋다 말았잖아. 오자마자 괜찮은 안내자 를 만난 줄 알고 좋아했더니만... 악!!" 청명이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어내고 반쯤 돌아서서 투덜투덜대다가 나 에게 정강이를 쪼이고 말았다. "누나, 아프잖아!!" 자신의 정강이를 붙잡고 폴짝폴짝 뛰면서 항의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 는 녀석이 아까의 감동한 마음을 배신당해서인지 고소하게 보였다. 뭐, 덕분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고마운 마음은 전혀 안들었다. "시꺼, 이 누님께서 실의에 빠져 있으면 성심성으껏 위로는 못할망정, 뭐가 어쩌고 저째?" "쳇, 팔팔하면서 뭐가 어때서 그래? 그런데 이젠 어떻게 할 거야?누나 도 여기 처음 오는 거잖아." 용이 한순간에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지... 아까는 나에게 손목 한 번 잡혔다고 얼굴이 빨개져서는 어쩔 줄 몰라 하 던 쑥맥이 이제는 막 나가고 있었다. 아까 내가 장난쳤던 게 악영향을 발한 듯 했다. "뭐야, 너? 아까는 손목만 잡혀도 얼굴이 빨개지던 게, 이제는 아예 막 나가네?" 그러자 청명이가 나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말하는 거하고 손 잡는 거하고는 상관없잖아." "오호라, 그러니까 직접적인 접촉만 안 하면 얼마든지 막 나갈 수 있단 말이렷다?" 내가 의미심장한 눈을 한 채 그에게 한 발 다가서자 청명이가 놀라서 얼 른 뒤로 물러났다. "됐어, 됐어. 내가 잘못했어." 왠지 내가 음흉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인지... 어쟀든 내가 묘한 시선을 거두자 청명이가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 는데 그의 말이 내 가슴에 콕 하고 박혀 버렸다. "어휴, 어떻게 여자가 쉽게 외간 남자에게 달라붙을 수 있는 거지?" '우쒸... 내가 뭘 어쨌다고...' 화가 나긴 했지만 여기서 화를 냈다가는 나만 이상하게 될 것 같아서 나 중을 기약하고는 그냥 넘어갔다. 그러자 청명이가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물었다. "누나, 이제 어쩔 거야?" "그러는 넌 어쩔 건데?" "나? 나야 뭐... 어차피 놀러 나온 거니까 여기가 어디든 아무런 상관없 는데? 그냥 다녀볼 거야." 정말 태평하게 말하는 녀석이 부러웠다. 내가 있던 곳과는 완전 다른 세 계. 그러고 보니 원래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온 거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곳이 타향처럼 느껴졌고 한시라도 빨리 할아버지와 아빠가 있는 소르 드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간절했다. '하지만 난 지금 차원을 이동하는 방법을 모르는데다 마나까지 별로 없 는데...아, 그러고보니 마나!!' 이 곳이 내가 살고 있던 곳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나에게 마나가 없다는 게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 마나가 없다는 걸 깨닫자 마음 한구 석이 섬뜩해졌다.난 마법 빼면은 제대로 할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게다가 지금 가진것은 몸뚱이와 입고 있는 옷밖에 없는 빈털터 리엿던 것이다. 돈 없는 사람이 얼마나 서러운지는 저번에 겪어봐서-빈 몸으로 아빠네 집 나왔다가 한번 겪어봤다-잘 알고 있는 나는 더욱더 걱정이 커져갔다. '우선은 마나를 다시 모아야 해. 이곳도 마나는 있지 않을까?아까 내가 마법을 사용할수 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은 이곳에서도 사용할수 있으니 까 마나만 전처럼 유지할수 있다면.....' 나는 재빨리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주위에 있는 마나를 느껴 보았다. 그러자 주위에 흘러다니고 있는 마나를 곧 느낄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더 침울해졌다. 이곳은 마나가 있기는 있는데 그 농 도가 내가 전에 살던 곳에 비해 너무 옅었던 것이다. 전에 내가 살고 있 던곳은 물속에서 있는 것처럼 충만한 마나가 느껴졌는데 이곳은 마치 공기와도 같았다. '이런...그럼 지금 있는 마나는?' 몸속의 마나를 느껴보니 아까보다 조금 많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평소 내가 가지고 다니던 마나의 반정도밖에 없었다. '그랬구나...그래서 아까 그 정도의 마법에 쉽게 마나가 고갈된거였구 나.....' 우리 드래곤들이 몸속에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 방법은 딱 두가지엿다. 몸 자체에서 스스로 마나를 만들어 내는 방법과 자연에 있는 마나를 자 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다. 해츨링일때는 몸에 보유할수 있는 마나의 양이 적어 자연에서 마나를 받아들일수 있는 양도 적?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나를 몸 자체에서 스스 로 만들어내는 마나에 의지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츨링일때는 삼시 세끼 꼬박꼬박 잔뜩 챙겨먹어야만한다.하지만 성룡이 되면 몸에서 수용 할수 있는 마나의 양이 많아져 마나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진다. 게다가 용언을 사용할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자신의 몸안에 있는 마나 말고도 의지에 따라 주변에 있는 마나를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 르기 때문에 몸안에 있는 마나의 사용량도 줄어들게 된다. 예를 든다면 인간 마법사나 성룡들이 허공에 떠오르려면 자신의 몸안에 있는 마나를 밖으로 분출해 내 자연의 있는 마나를 움직여서 떠오르지만 용언을 사 용하는 성룡들이나 고룡들은 그냥 주위에 있는 마나를 타고 몸을 떠오 르게 만드는 것이다.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해츨링의 마나는 옹달샘 이고, 성룡의 마나는 강물이고, 고룡의 마나는 바다라고 했었다. 해츨링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마나가 적어 쓰는 족족 마나의 줄어듦이 보이고 그 줄어든 마나가 보충되길 기다려야 하지만, 성룡은 받아들이 는 마나의 양이 커서 사용하면서도 계속 받아들일 수 있어 마나의 끝을 보지 않을 수 있고(물론 엄청나게 큰 마법을 사용하면 강물이 가물기야 하겠지만....) 고룡은 자연의 마나도 내 마나요, 내 마나도 내 마나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용해도 사용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바다와 같다고 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성룡이 된지 겨우 100살이 지났기에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 직 애 티도 벗지 못한 존재인데다 용언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자연에서 마나를 받아들일쑤 있는 양도 크지 못해 강이라고 할수 없는 데다가, 이 세계의 마나 밀도가 내가 살던 세계에 비해 많이 쳐줘봤자 1/2가 좀 넘는다고 할 수 있으니 마나가 전보다 쉽게 채워지지 않는 것 이다. 게다가 아까는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 마법을 사용했기에 훨씬 더 빠르게 마나의 양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드래곤의 모습일때면 움직 이는 것 하나하나도 마나를 사용해야만 하니까-그 큰 덩치를 어떻게 쉽 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뭐, 어쨌든... 우선은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해. 청명이에게 차원을 이 동할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꽤나 자존심 상하는 데다가 녀석이 뭔 조건을 달지 모르니까 최후로 보류하고... 이곳에도 마법이 존재하는 지 알아봐야 겠다. 뭐, 중국에는 그런 게 있을 것도 같 으니까 이곳을 구경하는 겸사겸사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그렇다면... 지금은 그냥 청명이와 계속 같이 다니는 것이 좋겠어' 힐끔 청명이를 바라보니 지루한 표정으로 내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 다. "흠... 그렇다면 당분간 내가 너와 같이 다녀주지. 어차피 넌 이곳에 대 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큰 용심 쓴 것처럼 내가 말하자 녀석이 픽 웃었다. "누나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 아냐?" "어허. 내가 너와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너 아까 내가 말한 거 못들었어? 지금이 명나라인데 명나라 전에는 원나라가 있었고 명나라 다음에는 청나라가 생길 거라는 말. 난 이곳의 미래까지 알고 있다고(완 전히는 모르지만....)." 내가 큰소리를 탕탕 치자 그제야 청명이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그거야 내가 이곳의 미래에서 내가 살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말을 살짝 바꾸었다. "그건 내가 예전에 지금으로부터 몇 백년 뒤의 시대에서 왔거든. 그래 서 지금 시대의 역사를 아는 거지." 놀라움과 감탄 어린 얼굴로 날 바라보길 기대했건만 청명이 녀석은 다 시 같잖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게 뭐야? 어차피 그래도 이곳은 처음 오는 거 아냐? 게다가 누나가 갔었던 미래가 지금 이 시대의 미래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거구 말야." 녀석의 반응에 당황한 나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단정하지 못해? 조금만 확인하면 금방 알수 있는 거 아냐? 물론 내 가 명나라 왕들까지 다 모르긴 하지만, 명나라 이전에 원나라가 있었다 는 것만 확인하면, 아 뭐 그전에 딴 나라가 더 있었다는 것까지 확인한 다면 더 확실하겠지만... 그럼 확실한 거 아냐?" 청명이는 나의 반응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 었다. "아아... 누나는 차원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있지. 이 세상은 수많은 차원들로 이루어져 있대. 그 차원들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도 있지만 거울을 보는 것처럼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차원이 있다 는 거야." 갑자기 차원 운운하는 설명이 나오자 나는 더욱더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게 뭐?" "끝까지 들어봐. 그런데 그 같은 모습을 가진 차원들은 말야. 과거에는 한 개의 차원이었는데 분리되어서 두개의 차원이 될 수도 있다는 거야. 재미있는 건 사소한 일로 인하여 미래가 두 개 생길 경우 각각 다른 미 래를 향하여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르게 차원이 두 개로 분리된다는 거지." 청명이는 쉽게 설명해 주기 위해 모력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더 더욱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청명이는 뭔가를 더 골똘히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예를 들어줄께... 누나는 다른 차원에서 여기로 넘어 왔 다고 햇지?" "그렇지." "그러면 이 차원은 둘로 갈라지는 거야. 하나는 누나가 이곳에 오지 않 은 상태로 시간이 흘러가는 차원과 다른 하나는 누나와 내가 와서 이곳 에 영향을 주는 차원 말야. 뭐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세월이 꽤 흘러 우리를 모든 사람이 잊어버리고 같은 미래의 모습을 가지게 된 다면 다시 합쳐지겠지만 말야. 무슨 말인지 알았어?" "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도... 무슨 물줄기 같다? 두 갈래 로 갈라질 수도 있고 다시 합쳐질수도 있고... 그럼 소멸 할수도 있고 생 성할 수도 있나?" 나는 그냥 물어본 건데 의외로 청명이가 고개를 그덕여 내 스스로가 놀 라 버렸다. "응, 누나 말이 맞아. 차원은 오랜 시간의 흐름 동안 소멸될 수도 있고 다시 생성될 수도 있어." "헤에... 정말 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 나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잇어. 그게 그냥 믿거나 말거나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인줄 알았는 데 사실이었다니 신기한걸? 내가 들은 이야기는 말이지. 사람이 만약 과거를 갈 수 있다면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 지 못한다는 이야기야. 만약 과거에 수천명을 죽인 못된 왕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왕이 되기 전의 과거로 가서 그 사람을 죽인다면 수천명이 죽 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잖아? 하지만 재밌게도 그 사람이 죽는 다면 다른 나라나, 아니면 그 나라에서 그와 비슷한 다른 사람이 왕이 되어 수천명을 죽이게 된다는 거야, 그게 뭐라더라... 역사의 회귀성이 라고 하던가?" "호오... 누나가 있던 곳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단 말야? 하긴, 우리 가 설사 이곳에서 왕이 되거나 그와 비슷한 영향을 주어 이곳의 미래가 둘로 바뀌더라도 두 개로 갈라진 미래는 오랜 세월이 흘러 언젠가는 하 나로 합쳐진대. 하지만 지금 이곳은 우리가 왔음으로 미래는 달라져 버 렸을걸? 그러니 누나가 말한 대로 지금의 나라 다음에 청나라가 생길지 아니면 계속 명나라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우리가 이곳에 어 떤 영향은 줄지는 모르는 거잖아." 청명이의 말을 흥미 반 재미 반으로 열심히 듣고 있던 나는 문득 한가 지 불안이 떠올랐다. "청명아... 그럼 말야... 너나 나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긴 있는 거냐? 차원이 자꾸 그렇게 분열되고 합쳐진다면, 가닥 잘못하다간 자꾸 다른 차원으로만 가서 내가 있던 곳으로 영영 못 돌아가는거 아냐?" 그러나 청명이는 여전히 태평했다, "아냐, 괜찮아.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차원은 우리를 데리고 있으려 는 힘이 존재하고 있대. 우리가 다른 차원에 갔어도 항상 돌아가야 한다 고 생각하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항상 차원이 우리를 끌 어당기고 있어서 특별한 자극이 없는 한 자신을 당기는 힘에 몸을 맡기 면 돌아올거래." "와... 너는 그 이야기를 다 어떻게 아는 거냐? 네가 사는 곳은 그런 게 잘 알려져 있나 보지?" 청명이의 말을 듣고 나서 안심이 되는 한편 청명이가 알고 있는 많은 지 식에 감탄하자 청명이는 기분이 좋은디 쑥쓰러워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에헤헤... 뭐, 그렇게 알려지진 않은 건데 나는 특별히 숙부님에게 들 은 거야. 숙부님은 인간 세상에 다녀오신 경험이 있으시거든." "너네 세계에서는 차원을 넘나드는 게 쉬운가 보다?" 내가 다시 한 번 감탄어린 눈길로 바라보자 청명이 녀석이 더욱 기분 좋 은 얼굴로 술술 잘 털어 놓았다. "당연히 어렵지. 부왕과 대 신관의 허락을 받아야만 넘어올 수 있는데, 나는 성룡이 된 기념으로 부왕께서 소원 하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하셔 서 인간 세상으로 넘어오는 걸 원했지. 대신 큰 사건을 일으키기만 한 다면 당장에 소환될 거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오랫동안 원하던 일이었는지 이 이야길 하는 청명이의 얼굴은 더할수 없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후후후.숙부님께 인간 세상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한번은 꼭 와보고 싶었거든. 내가 살고 있는 세계말고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이 무척 신 기하게 느껴져서 말야. 뭐, 숙부님이 가보신 곳이 아니라 약간 섭섭하긴 하지만....." 청명이 말고도 또 인간 세상에 나온 용이 있다는 말에 나는 군금증을 이 기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네 숙부님은 어디를 가셨었는데? 네 숙부님도 허락을 맡고 가신 거야?" 뭐, 그렇게 중요한 비밀은 아니었는지 청명이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응.'신라'라는 인간의 나라였대. 뭐, 숙부님이 인간 세상으로 가셨을 때 는 용왕 자리를 놓고 약간의 소란이 있어서 말이지...그 소란을 피해 넘 어가신 거라 비록 허락을 맞고 간게 아니어도 50년 동안의 근신인 가벼 운 처벌로 끝났지." 청명이의 말에 나는 입이 딱 벌어지도록 크게 놀랐다. "얘, 청명아... 혹시... 숙부님의 성함이 처용이시니?" "응? 아니, 그건 왜?" "아아... 내가 예전에 있었던 인간 세계가 말야... 네가 말한 그 '신 라'나라의 미래였거든... '신라' 시대에 처용이라는 용이 왔었다는 전설 을 들었는대 그게 혹시 네 숙부님이 아닌가 해거말야." 그러자 청명이가 반색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어쩌면 숙부님이셨을 지도 몰라. 숙부님이 그곳에서 가명을 사용하셨 을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아명(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을 사용하셨을 수도...난 숙부님 아명은 모르니까.그런데, 숙부님은 어떻게 지내셨어? 숙부님은 인간 세상 이야기는 해주시면서 정작 자신이 지낸 이야기는 안 해주셨거든.누나, 혹시 알고 있어?" 청명이가 너무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말을 안해줄 수도 없어 나는 재빨리 예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에? 아아... 그게... 잘 생각은 안 나는데... 춤과 노래를 무척 잘했다 고 하더라. 신라의 국왕이 무척 좋아했다고 하던데... 맞나 모르겠다." "그래? 하긴, 숙부님은 노래를 무척 잘하셔.그런데 왜 용계로 돌아가신 지는 몰라? 무슨 일이 있어서 돌아가신 거 같던데......" "응? 아아...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냥 전설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 세히 알아두지 않았엇어. 그냥 그런 전설이 있다는 것정도로만......" 물론 모르지는 않았다.하지만 자신의 숙모(?)가 될 인간이 바람을 펴서 숙부가 용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청명이는 내가 얼버무리자 무척실망하는 표정이엇다. "아아... 그렇구나. 아쉽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에이,네 숙부가 말해 주지 않을 정도면 좋은 일은 아니잖아. 그냥 모른 체하는 게 어때? 숙부는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알아내서 좋을 건 없잖아?" 청명이의 머리속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는 떠올리게 하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청명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 였다. "누나 말이 맞아. 내가 알아낸다면 숙부님께서 곤란하실 지도 모르겠 어."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자,어쨌든 정리가 되었으면 이제 서두르자고. 벌써 저녁이 다 되었어. 지금은 인가를 찾기 힘드니까 오늘 밤을 보낼 준비를 하자." 내 말에 청명이가 하늘을 바라보고는 오늘밤을 지내기에 괜찮은 자리를 찾으려고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던 나는 은은하게 풍기던 숲의 향기 사이에 이상 한 냄새가 끼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어디서 많이 맡아봤던 냄새 같은데 너무 희미해서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가 그쪽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그제야 다른 냄새가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약간 비릿하기도 한 냄새의 근원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다. 혹시 청명이가 뭔가를 알고 있지는 않을까 해서 나는 청명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청명아, 너 이상한 냄새 안 나냐?" "응? 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청명이는 아무것도 못 느낀 것 같았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여기서 괘 먼 곳에서 나는 거 같은데 한번 가보자." 서둘러서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청명이의 한 마디에 좀 더 발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헤에. 누나 코는 개코?" "이게 주글려구!!" "우갸갸갸~!!" 누나에게 버릇없이 구는 청명이의 정강이를 한 번 더 차줘야 했기 때문 이었다. "빨리 안 따라와? 늦게 오면 놓고 간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저 뒤에서 다리를 일부러 크게 절뚝거리 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 청명이 녀석을 노려보았다. 청명이 녀석은 나 에게 좀 심하게 정강이를 차였는지 한참이나 아파서 쩔쩔맨 다음에 날 따라 걸음을 옮겼는데 삐쳤는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긴, 왕자라는 녀석이 언제 정강이를 차여봤겠는가? 그래도 내가 누나 가 되었기에 대들지는 못하고 혼자 투덜투덜대는 게 고작이었다.그리고 나는 녀석의 태도를 이해해주기보다는 녀석의 속좁음에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래서 녀석이 또 한번 투덜투덜대는 소리가 들리자 저절로 눈이 치켜 올라갔다. "쳇,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놨으면서... 내가 왜 이런 신세가 되어야 하 지?" "너, 빨랑 안 올래?" 투덜대던 청명이는 내가 다시 한 번 눈을 부라리며 목청을 좀 더 높이 자 그제야 입을 다물고 속도를 좀 더 빨리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보 기에는 느렸기에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고 거칠게 당겼다. "빨리 좀 와!!" "어, 어어어......" 그렇게 청명이를 이끌고 걸음을 빨리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 걸음을 멈췄다. '혹시... 저쪽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거라면, 이대로 막 가는 건 좋겠지? 음... 마나가 절반 넘게 찼으니까 마법을 사용해서 기척을 죽이 는 게 좋겠어.' 속으로 결론을 내린 나는 청명이를 돌아보았다. "야!!" 내 얼굴이 굳어 있어서 청명이가 긴장했는지 내가 부르자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으응?" "너 혹시 네 몸을 지킬 수련 같은 거 했니? 검술을 배웠다던가, 아니면 호신술 같은 거 배운 적 있어?" 그러자 녀석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인간 세상을 구경하려면 자신의 몸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숙부님이 말씀하셔서 권법과 각법을 좀 배웠는데?" "오, 그래? 잘됐다. 그럼 네 기척을 죽일 수 있어?" 혹시나 청명이까지 내가 마법을 걸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던 나 는 안도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자 이 녀석이 삐친 게 아직 안 풀어졌 는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오히려 틱틱대는 표정으로 되물었 다. "왜?" 나는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어차피 청명이가 알 아서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청명이가 스스로 조심하면 더 좋을 것이 란 생각이 들어 순순히 설명해줬다. "저쪽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사전에 조심하자는 거지. 할 수 있어, 없어?" 그제야 청명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다가가는 건 한 번도 안해 봤지만 해보지 뭐." 녀석의 대답이 못 미더웠지만 나는 마나를 조금이라도 아낄수 있다는 생각에 청명이 스스로 기척을 죽이도록 했다. 그래도 한번 더 다짐 하는 건 잊지 않았다. "기척을 최대한 죽여야 해, 알았지?" 내가 되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청명이가 그제야 사태가 심각할 수 도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도 저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조심할게." 그의 대답과 표정에 만족한 나는 수풀을 헤치고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조금 더 가서 상황을 보아 기척을 죽이는 마법을 사 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한 번 더 내 쪽으로 불어 오자, 그제야 나는 나의 궁금증을 솟게 만들었던 냄새의 정체를 알아차 렸다. 혈향...... 비릿한 그 냄새는 바로 피 냄새였던 것이다. 일이 정말 심각하게 될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가서 가서 상황을 볼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 혼자면 몰라도 실력을 확실하게 모르 는 청명이까지 같이 있으니 약간 불안했던 것이다.하지만 썩어도 준치 라고 용인데 별일이야 있겠아... 하는 생각이 불면서 불안을 가라앉혔 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청명이게 입을 열었다. "청명아, 앞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같아. 피 냄새가 나거든. 아까 우리 가 있었던 저쪽가지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꽤 심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 까 넌 여기서 기다릴래? 내가 상황을 살펴보고 올게." 그러자 청명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도 갈래." "위험할 지도 모르는데?" 은근히 떠보자 청명이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이래봬도 나도 꽤 능력있단 소리 들었어. 충분히 조심할테니 까 걱정 마." "좋아. 그렇다면 우리 두 갈래로 갈라지자. 나는 위쪽으로 갈건데. 넌 어떻게 할래?" "나는 이대로 가지 뭐." 청명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래에도 자신의 몸을 감출 수 있는 수풀 이 있다는 걸 알았는지 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럼 너, 바람을 다룰 수 있다고 했지? 바람으로 네 주위를 보호하면 서 가도록 해. 조심하는 거 잊지말고. 기척 죽이는 것도 잊지말고." "알았어." 청명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몸을 허공에 떠올렸다. "레비테이션!!" 그러다 뭔가 한가지 생각나자 나는 다시 청명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참,지금부터 나에게 말을 걸 때에는 입을 사용하지 말고 의지로 전달 해라. 알았지?" 막 걸음을 옮기려던 청명이가 방해를 받아 화가 났는지 얼굴을 살짝 찡 그렸지만 순순히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청명이가 나보다도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걸 보고 나도 급히 내 몸에 마 법을 걸고는 혈향이 나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컨실 마이셀프!!" 나의 몸을 투명하게 만듦과 동시에 내 기척도 완전히 가려주는 4클래스 의 마법이었다. 청명이의 모습을 위에서 간간이 체크하면서 그보다도 앞서서 날아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혈향이 점점짙어졌고 그 그누언지가 눈에 보일 무렵 에는 금속이 부딪치는 것과 같은 음향 소리까지 들리고 있었다. '누가 싸우고 있나 봐.......' 숲을 가로지르는 듯한 길 위에 예전에 무협영화에서 가끔 봤던 마차가 서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쓰러진 사람들과 일행으로 보이는 다섯명의 사람들 이 검은 색 옷에다 복면까지 해서 눈만 내놓은 아주 수상한 다섯 명의 사람들과 대치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좀 떨어져서는 다섯 명의 검은 옷에 복면까지 한 사람들 이 가만히 서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대치 중인 사람들은 싸우는 모습이 무척 힘겨 웠고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벌써 많이 다친 모양이었 다.그들을 도와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가 갈등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검은 복면의 다섯사람은 자신들과 대치하는 사람들의 목을 그어버 리고 있었다. '저게... 중국 무술인가 보군. 어쨌든 이제는 너무 늦엇으니 나중에 저 사람들을 묻어주기나 해야겠어.' 그리고 밑에서 저들을 살피고 있는 청명이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막 근처에 와서는 잔뜩 긴장한 채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는 조심스레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 곳에 와서 몸을 숨기는 동 안 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기척을 들키진 않은 모양이었다. 청명 이도 안전하게 잇다는 걸 확인한 나는 검은 옷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은 저들이 사라져야 만 나가서 살피고 시신도 묻어 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갈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몇몇 검은 옷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하는 듯 시신들을 일일이 들춰보며 들고 있던 검으로 찔러보고 있었다. 그리 고 마차안에서도 곧 검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나와서는 저쪽에서 가 만히 서서 사태만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자 신들이 찾는 것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사태를 바라보고 서있던 사람들 중 가운데 있던 사람이-대장이었는지-자세히 보면 알아차리지 도 못할만큼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있는 쪽과는 반대 방향의 숲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마치 그곳에서 뭔가가 나오기를 기다 린다는 듯이 시체를 뒤져 보고 마차안을 확인하던 검은 옷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다했는지 별도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그 대장으로 보 이는 사람의 뒤로 가서 조용히 섰다. '뭘 기다리는 거지?' 더 이상 검은 옷의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고 계속 숲쪽만 바라보고 있자 나도 호기심이 생겨 그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거의 20분쯤이 지났을 무렵, 숲속에서 3명의 사람들이 걸어나왔다. 아 마 검은 옷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일행인 듯 그들도 검은 복면에 검은 옷의 사람들이었는데 한 사람이 앞장을 서고 있었고 다른 두사람 이 자신들의 가운데에 어떤 여인을 끌고 오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이 그 여인의 모습을 가렸기 때문에 그들이 완전히 숲에서 빠져나와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의 앞으로 가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을 때에야 나는 그 여인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약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꽤 예쁜 부인이었는데, 무척 지친 안색에 머리 와 옷은 잔뜩 엉망인 폼으로 보아 도망치다가 잡힌 듯 했다. "애들은?"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조용하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그 대 장의 목소리인 듯 했다. 그러자 여자 뒤에 서 있던 남자들중 하나가 대 답했다. "죄송합니다. 놓지고 말았습니다." "귀찮게 됐군" 예의 그 대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대장은 여자에게 애들이 어 디 있는지 물어볼 생각도 없는지 여자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가볍게 손 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한 남자가 자신의 검을 꺼내더니 여자의 등을 푹 찔렀다 빼었다. 내 눈에 희미하게 보일 정도의 굉장히 빠른 속도여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 남자가 무슨 일을 했는 지 모를 정도였다. 심장을 관통했는지 여자의 가슴부근에서 선홍색의 많은 양의 피가 흘러 나왔고, 여자는 서서히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그 여자 주위에 있던 검은 옷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여자를 거들 떠 보지도 않았고 다시 대장에게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그 아이들을 찾으려고 하겠구나. 이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 리겠는걸?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뒤로 빠지는 게 좋지 않을까?' 애들을 놓쳤다는 부하의 대답에 귀찮음을 표시한 대장의 말과 지금 가 지 않고 모여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그럴 것 같았다. 게다가 수색을 하려고 저 사람들이 흩어진다면 저들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고, 만 약 저들과 마주치기라도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것같았다. 사람들을 모두 죽인 것을 보니 증인을 없애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서 멀어지는 게 낫겠어.' 생각을 정리한 나는 검은 옷무리들을 주시하며 청명이를 부르려고 했 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대장이 뭔가 지시를 하다가 멈추는 것이 들어 왔다. 그와 동시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검쪽으로 손을 가 져 가는 게 보였다. '이런, 들켰다.' 나는 마법으로 기척을 아예 죽이고 있었으니 아마도 청명이가 들킨 것 이리라. 이럴 때를 대비하여 한 가지 마법을 더 준비하고 있었던 나는 지체없이 마법을 구현시켰다. '크리에이트 이미지!!' 환상마법중에서도 고위환상마법으로 시각은 물론 촉각, 후각, 청각까지 현혹시킬수 있는 마법이었다. "사형, 여기 피 냄새가 나고 있어요!!" "이쪽인 것 같은데요? 가보는 게 어떨까요?" 예전에 무협영화에서 봤던 청색 도사복 차림의 남자들을 십여명이나 만 들어내어 떠들게 했던 것이다. 마치 지금 이곳을 발견한 것처럼 소란스 럽게 했다. "누나!!" 아무것도 모르는 청명이가 자신의 뒤쪽에서 여러명의 사람들이 나타난 것에 놀라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괜찮아. 내가 만든 환상이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내 말에 일어나려던 청명이가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도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르니 모두 주의하도록 하여라. 너희들은 먼저 앞 으로 가서 살펴보도록 하고 사제들은 제자들을 단속하게!!" "예, 사형!!"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뒤 몇몇의 도사들이 나타날 듯 발자국 소 리가 요란하게 나자 검은 옷의 남자들이 다급해졌는지 대장의 손짓에 재빨리 반대 편 숲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들 의 모습이 사라지는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저게...이곳의 무공 이구나.빨리움직이는 방법을 신법이라고 하지, 아마?' 순시간에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때 내가 만들어낸 환상 의 사람들은 죽어 있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서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 다. "이럴수가..." "이렇게 참혹하다니...." "이건 너무한 것 같습니다" "누구짓일까요?" 나는 검은 옷의 사람들이 사라졌지만 안심을 못하고 마법으로 주위의 기척을 살펴본 후 그들이 아주 멀리까지 갔다는것을 안다음에야 안심 하고 밑으로 내려와서 청명을불렸다. "청명아.이제나와도돼.그리고 너희들은 수고했으니까 그만 사라져줄 래?" 주위에서 아직도 떠들어대는 도사들에게 말하자 도사들은 그들을 바라 보며 숲에서 쭈뻣쭈뻣 나오는 청명에게 살짝 웃어주고 사라졌다(물론 내가 시킨 거지만) "와~저들이 정말 환영이였단 말이에요?" "그래.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거야." "정말 진짜 같아요." 그들이 환상인게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는 청명이 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니깐 눈속임이지.십게 속지 않는다면 그게 눈속임이니?그건 그렇 고 나좀 도와줘.이들을 묻어줘야겠어.무슨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죽 다니 가엽잖어?"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길을 벗어난 곳의 공터에 마법으로 구덩이를 팠다. "디그" 그러자 청명이가 바람을 다스려 주위에 있는 시체들을 하나하나 구덩이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르지.그러나저러나 저 마차는 어떻게 하지?그냥 여기에다둘까?" 말은 도망쳐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이곳에서 피투기는 싸움이 있었 다는걸 증명하듯 온 몸에에 핏자국이 선명한 마차만이 홀로이 남아 있 었다. "우리가 한번 살펴보는건 어때요?뭔가 알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청명이의 제의에 나도 호기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였던 터라 귀가 솔 깃했다. "그럴까?그럼 우선 이들부터 묻어주고." 주위에 있던 시체들이 모두 한 구덩이에 들어가자 청명이와 나는 그 위 에 흙을 덮고 무덤으로 보이게 둥그렇게 흙을 높이 쌓아줬다 "한명 한명 묻어줘야 하지만,이곳은 장소가 넓지 않으니까 이걸로 봐주 세요." "부디 편히 잠드세요" 무덤을 앞에 두고 우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뒤를 돌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차를 바라보며 다가갔다. "헤에...이곳 마차는 입구가 뒤에 있구나. 내가 살던곳의 마차 는 옆에 있는데...어쨌든 꽤 큰 마차다. 어른만 해도 여덟명쯤은 충분히 들어 가겠구나." 마차의 겉모양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청명이와 나는 조심스레 마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안도 누군가가 뒤져본듯 잔뜩 흐트러져 있었는데대부분이 옷가지 같은 것들이었다. 꽤 괜찮아 보이는 것들이었기에 나는 그들중 깨끗한 것들만 골라서 챙겼다. 어차피 나는 이곳 옷차림이 아니 어서 이곳 옷을 따로 마련해야? 했던것이다. 그러니 공짜로 생기는 기회를 차버릴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청명 이는 이런 내모습이 못마땅하게 보였나보다. "누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에는 황당감 마저 어려 있었다. "뭐 하는 거긴, 쓸 만한걸 찾아내고 있잖아 너도 가만 있지만 말고 돈 될 만한것들은 다 챙겨" 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청명이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나무랐다. "이건 저들 것 이 잖아.남의 것을 뒤지면 어떻게해?" "뭐 어떠냐? 저들은 이제 죽은거고, 우리들은 이게 필요하단 말야." "그래도 그렇지.." "시끄러. 그럼 너 돈있냐? 난 돈 하나도 없다고." 화가나서 뱉은 말에 청명이가 약간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돈?음... 보석을 약간 가지고 왔는데, 그 정도로는 모자랄까?" 청명이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응그래?그럼 뒤지지 말지뭐...' 라고 말하기는 싫어서나는 내주장을 계속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러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있는건 다 챙겨." "뭐야, 꼭 이래야 해?" 이렇게 하냐고 묻는듯한 녀석의 말에 나는 여석이 왕자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 왕자라는 녀석들은 다 저렇지...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 구... 기회란 흔하게 찾아오는게 아니라구!"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인간세계에서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나단 말야. 우리가 이 나라 를 구경하다가 돈이 모자라거나 잃어버릴수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대비 하는 셈 쳐. 게다가 우린 지금 이옷을 입고있지 않잖아. 넌 좀 이곳과 비 슷한 옷을 입었지만 난 완전 딴세계 옷이잖아 그러니 옷을 갈아입지 않 으면 너무 튄다구. 튀면 얼마나 고생하는줄 알아? 잔소리 말고 빨리 시 키는대로나 해." 그제야 청명이가 풀이 죽어서 보따리 속에 있는것들을 챙기기 시작했 다. 생각같아서는 시신들의 몸도 뒤져 보고 싶었지만 벌써 다 묻어준데 다가 설사아직 묻어줬다고 해도 그건 생각일뿐엄두도 안나는 일이어서 나는 잠자코 옷가지들을 뒤졌다. 그런데 그 옷들 중에는 아이들이 입는 듯한 자그마한 옷들도 여러벌 끼어 있는것이다. '아이옷?어라?한두벌이 아니라 꽤 많은데? 여기에 아이들도있었나? .. 의아한 듯 그 옷을 집어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아까 그 검은 옷의 사람들이 하던 말이 기억났다. "아차!!" "왜 그래?" 위돌아서 열심히 마차안을 뒤지고 있던 청명이가 나의 놀란 목소리에 의아한 듯 돌아보자 나는 그에게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아싸 그 사람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는데 숲속에 아이들이 숨어 있다고 했어. 그 애들이라도 찾아서 도와주자고." 나는 서둘러서 지금까지 골라낸 옷가지들과 방금 내가 찾아낸 아이들의 옷가지들을 황급히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청명이도 덩달아 급하게 일어나며 물었다. "뭐야, 왜 이렇게 서두르는데?" "곧 있으면 밤이니가 이대로 애들이 숲에 있다가는 위험할지도 몰라. 언제 그 검은 옷의 사람들이 수색할지도 모르고, 또 밤에는 위험한 동물들도 돌아다니니까 빨리 찾아내야지.서둘러!!" 내가 급하게 말하며 마차에서 뛰어내겨 숲 속으로 뛰어가자 청명이가 뒤다라 달려오면 다시 물?다. "마차는?" "지금 마차가 문제야? 벌써 많이 어두워졌잖아. 시간이 없어!!" 최대한 빨리 서두르기는 했지만, 우리가 마차에서 나왔을 때에는 벌써 해가 다 진 때였기에 숲을 얼마 들어오지 않아 하늘에는 달과 별이 떠버렸다. 물론 이 정도의 어둠은 나에게 별다른 망해가 되지 않았지만 청명이는 나와는 다른 듯 주위가 어두워지자 나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누나, 벌써 어두워졌어. 이래서는 찾기도 힘드니까 나중에 찾는 게 어때?" "안 돼. 애들에게는 밤이 위험하다고. 또 지금 얼마나 무서워서 떨고 있겠어? 잔소리 말고 빨리 좀 찾아봐. 야, 혹시 넌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은 없냐? 그러면 금방 찾을 수...아, 이런....." 나를 만류하는 청명이를 이끌고 숲 안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빠른 속도로 걷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왜? 뭔가 찾아냈어?" 의아한 듯 내 곁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청명이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그게 아니라...아, 나 왜 이렇게 바보 같냐? 나한테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이 있는데 그걸 깜박 잊고 있었잖아. 내가 왜 이러지? 나 지금부터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아라!" 청명이에게 정말 일방적이다시피 빠르게 말해 놓고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시동어를 외치며 정신을 집중했다. "Detect Invisibility!!" 이 마법은 숨어 있는 생명체를 찾아내는 마법이기는 하지만 시전자의 시야 내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마법을 시전한 채로 아이들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이들이 몇 명인지, 몇 살인지, 약한지 강한지 등등 아이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는 탐지마법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 가자!!" 청명이를 한 번 툭 치며 앞장서서 걸어가자 뒤에서 녀석이 투덜대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 또 숲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거야?" "이번에는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이 어두운 숲에서 벌벌 떨고 있을 애들이 가엽지도 않아?" "그거야 그렇지만....." "더 이상 말 걸지 마라. 정신 사납다." "알았어" 청명이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꾸한 뒤 입을 다물고 계속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하지만...반달이 밤하늘 가운데로 올 때까지 아무리 숲을 뒤지고 다녔어도 아이들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북두칠성-그러고보니 참 오랜 만에 보는 별자리였다. 내가 살던 곳은 북두칠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내 머리 위에서 빛나는 걸 보니 새벽 3시는 된 듯했다. 결국 난 마나도 많이 써버린 데다가 숲 속을 오래 헤매고 다녀 지쳐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지칠 때까지 아무 말 안 하고 나를 따라서 같이 다녀준 청명이가 고맙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했다. "청명아, 여기서 좀 쉬자!!" 어두운 숲을 하도 돌아다녀서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 겠지만, 꽤 굵어 보이는 큰 고목 밑에 약간 평평한 공터가 있고 풀도 적당히 나 있는 걸 발견한 나는 그곳으로 청명이를 끌고 갔다. "어우, 넘 힘들다." 너무 지쳐 버린 나는 고목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라서 그런지 북두칠성이 유난히도 가깝게 보여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하아, 저게 얼마 만에 보는 북두칠성이냐... 아까까지는 애들 찾느라 정신이 없어 저걸 굉장히 오랜만에 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네...' 아직 과학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별들이 에스라 왕국에서 보던 것처럼 무척 밝게 보였다. 내 옆에 주저앉은 청명이가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누나, 이제 어쩌지? 혹시 애들이 벌써 숲을 벗어난 게 아닐까?" 그래도 다리 아프다고 투덜대지 않고 애들을 걱정해 주는 청명이가 기특해 보여 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럴지도...넌 괜찮아? 힘들지는 않구?" "나? 아, 이 정도야 뭐....." 청명이가 내 얼굴을 마주하기 어색한지 얼른 자신의 다리 쪽으로 시 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나는 더 진한 미소가 나왔다. "착하네? 힘들텐데 투덜대지도 않구." "내가 앤감?" "후후후, 하긴... 너도 성룡이지?" "그나저나 이젠 어쩔거야? 그렇게 열심히 애들을 찾아다?는데 찾지도 못하고....." 청명이가 화제를 돌리려는 것인지 다시 애들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글쎄... 이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녔는데 찾지 못한 걸 보면...네 말 대로 숲에 없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이들끼리 숲을 벗어났다고는 생각 안 되고... 혹시, 아까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발각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좀 쉬었다가 다시 한 번 찾아볼까?" 내가 어두운 얼굴을 해서 그런지 청명이가 약간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아냐, 이렇게 찾았는데도 없으면... 이곳에 없는 거 같아. 어쩔수 없 지. 그 애들이라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우리와는 인연이 없나봐. 그냥 날이 밝으면 우리는 우리 갈 대로 가자." "괜찮겠어?" 아예 몸을 내 쪽으로 돌리며 묻는 청명이에게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응, 괜찮아. 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그 애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고 생각하니까... 단지 그 애들을 돕지 못한 게 좀 아쉽기는 하네." "그 애들도 괜찮겠지 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해." 청명이는 자기도 편안히 앉고 싶은지 고목 밑둥치로 자리를 옮기더니 두 손을 깍지 껴 뒷머리에 대고 고목에 등을 기대려고 하다가 갑자기 뒤로 넘어갔다. "우악!!" "청명아!" 놀라서 몸을 일으키니 청명이의 상체가 고목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청명이를 위하여 황급히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여 주의를 밝히고 바라보니 청명이가 몸을 버둥거리며 구멍에 끼인 상체를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고목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밑둥치에 커다란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이 수풀과 낙엽,나뭇가지들로 인해 가려져 있어서 청명이나 나나 둘 다 보지 못한 것이었다. "도와줄게!!" 위로 넘어간 상태에다 머리가 어디에 걸렸는지 잘 나오지 못하는 청명이를 위해 송을 잡아서 달겨주자 그제야 구멍에서 머리를 빼낼 수 있었던 청명이는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기 위함인지 고개를 흔들어댔 다. "아휴,놀랐네." "그러게,웬 구멍이라니?" 청명이가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갑자기 발련한 고목 밑둥에 생긴 큰 구멍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불빛이 언뜻 구멍 안에서 옷자락이 보이는 것을 보고 놀라서 좀 더 다가갔다. "청명아, 이리 와봐!!" 청명이를 부르는 동시에 구멍을 가리고 있던 낙엽과 물들,나뭇가지들을 샅샅이 걷어내고 들여다보니 과연,구멍 안에 사람이 있었다. 구멍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아 어른은 들어갈수 없었지만, 어린아이라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 크기였던 것이다. "찾았다. 애들이 여기 있었어. 얘들아 괜찮니?" "뭐? 애들이 거기 있어?" 구멍은 작아도 안의 공간은 넓었는지 두 명의 아이가 안에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겁에 질렸는지 내가 말을 걸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얘들아,괜찮아. 도와주려고 왔어. 아휴,여기 있는 걸 왜 못 봤을까? 어서 나와!!" 나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애들을 직접 끌어내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기어나오길 바라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반응을 보이지도 않고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너무 겁먹은 거 아냐? 우리 나쁜 사람 아니니까 나와도 돼. 나쁜 사람들 다 갔어." 조금 기다려도 애들이 나올 생각을 안 하자 청명이가 몸을 굽혀 구멍 안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지만, 그래도 애들이 가만히 있자 결국 손을 뻗어 애들을 건드렸다. "얘들아? 어?" 청명이의 놀란 외침을 듣자 나는 곧 바로 청명이의 옆으로 가서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 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아야?" 청명이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애들, 되게 굳어 있어. 너무 오랫동안 주그리고 앉아 있어서 그런가?" 청명이의 말에 왠지 불안함을 느낀 나는 외쳤다. "나무를 부숴. 구멍을 넓혀서 애들을 빼내자!" 나의 외침에 청명이는 손바닥으로 강하게 구멍의 바깥 부분을 쳐대기 시작했다. 탁~!! 탁~!! 나무가 썩어 있어서 그런지 청명이의 손직에 가볍게 부거져 나갔고 덕분에 구멍을 점점 커져서 아이들의 모슴을 완정히 드러내기 시작했 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히 애들을 꺼낼수 있겠어!!" 구멍이 아싸보다 두배 정도로 커져서 어른도 쉼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청명이를 멈추개 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서 아이들을 밖으로 꺼내었다. 그 애들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여아와 파란 옷을 입고 있는 남아였는데 열 살도 채 되어 보이 지 않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생김새도 비슷한데다 나이도 같아 보이는 게 이란성 쌍둥이거나,아니면 연년생인 남매가 분명했다. 둘은 마치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는데 몸이 무척 차가운데다 맥박도 뛰지 않았다. "꼭 자는 것 같네. 어렵게 찾았는데 죽다니... 이 애들도 참 안됐다." 청명이가 아이들의 머리에 붙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주면서 중얼거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 애들...왜 죽었을까?" "모르지...내가 이런 데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에휴, 아까 이 애들을 왜 못찾아냈는지 이제야 알겠군. 내가 시전한 마법은 생불을 찾는 거였으니, 이미 죽어버린 애들이 내 마법탐지에 걸릴 리가 없었지......." "이 애들...묻어줘야지?" 다시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묻는 청명이의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야지. 이렇게 된거 여기에다 묻어줄까?" "어, 누나? 이것 좀 봐봐." .. .. "왜?" 청명이의 부름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돌아보자 그는 남자 아이의 손에서 뭔가를 빼내고 있었다. 나는 몰랐는데 남자 아이는 그 물건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가문을 상징하는 패인 것 같은데? 금으로 만들어진 거 보니 꽤 괜찮 은 가문이었나 봐" 청명이가 살펴보고 나에게 건네준 패는 금으로 만들어진, 내 손 바닥 절반만 한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위에는 고리가 있고 그 고리에는 붉은 술 두 개가 달려 있었다. 한쪽에는 한자가 하나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 반대 편에는 학이 고고한 자세로 날아가는 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한문을 워낙 싫어 해서 진로도 이과로 설정했던 나로서는 그게 무슨 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자지? 너, 아냐?" 청명이에게 묻자 그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해 줬 다. "그것도 몰라? '은'이라고 써 있는 거잖아" "헤에, 너네는 이런 글자를 사용했나 보다? 잘 아는데? 하지만 우린 이거와 는 다른 문자를 사용했다구." 다시 패를 바라보며 '이게 '은' 자였구나……'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청명이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하지만 말은 잘하잖아?" "그거야 주술을 사용한 거야. 대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른 뜻 이 숨겨 져 있는 거는 못 알아듣지만, 그래도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지" "그래? 누나는 별 희한한 주술을 다 알고 있네." "내가 사는 곳은 주술이 무척 발달한 곳이었거든." 손 안에 있는 패를 바라보며 이것을 팔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던 나는 문득 차가운 땅바닥에 눕혀져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자 조용 히 패를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 아 중얼거렸다. "이걸 팔면 벌받겠지? 본가에 가져다 주는 것이 좋을 거야.이 애들의 행방도 알려주 고……" 내 말을 들었는지 청명이가 나와 반대 편에 와서 쭈그리고 앉으며 대꾸했다. "그래야지.그러면 민이와 진이도 고마워할 거야." "민이와 진이?" 생각지도 못한 청명이의 말에 내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며 묻자 청명이가 고개를끄덕였다. "응, 아마도 이 애들 이름인 것 같던데? 봐봐, 여기에 새겨져 있어." 청명이가 가리킨 곳은 남자 아이의 왼쪽 팔목 안이었다. 거기에 검게 한문 한 개가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여자 아이의 왼손을 바라보자 그 아이의 손목 안쪽에도 역시한문 하나가 새겨져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들 쌍둥이인가 보다. 그러니까 아이들 손목에 이름을 새겨놓지. 그 런데 누 가 민이고 누가 진이냐?" 한문을 모르는 나는 어느것이 '진' 자이고 '민' 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청명이 에게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여자 이이는 '진' 자가 새겨져 있고, 남자 아이는 '민'자가 새겨져 있는걸?" "그래? 그럼 여자 아이는 은진이고 남자 아이는 은민이구나……"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청명이를 바라 보았다.그가 내 생각에 찬성해 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청명아, 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응? 뭔데?"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는 청명이에게 나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왠지 내 생 각이 재미있게 느껴졌기도 했지만, 아이들 앞에서 재미있게 생각한 것이 미 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있지… 우리 이 아이들로 변신해서 다니지 않을래?"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청명이는 나의 말에 무지 황당해하며 쳐다보았다. "이 아이들로 변신해서 다니자고.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튀지않니? 이곳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인데 우리처럼 빨갛고 파 란 머리에 눈을 가지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받기 쉽상이지 않니?" "그렇다면 우리가 검은색으로 바꿔서 다니면 되잖아." "물론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우리가 이 아이들의 모습으로 다닌다면, 혹시 이 아이들이 왜 이런 일들을 당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애들의 가문에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다니면 주위에서도 관대하게 본단 말야. 응? 응? 이 아 이들과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인연이니까 그렇게 하자."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간절하게 말하자 청명이는 못 미더운 표정 으로 나를 보더니 혹시나 하면서 일을 열었다. "누나, 이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건 아 냐?" 아니라고 하면 못 믿겠다는 표정인 걸 보니 간절하게 말하긴 했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나 보다. 나는 웃어 보이며 부정하지 않았다. "헤헤헤… 겸사겸사… 어쩔래? 할래, 말래?" 그러자 청명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대꾸 했다. "뭐… 누나 말대로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고 싶기는 한데 … 나는 딴 모습으로 변신할 줄은 몰라" 거의 찬성하는 말투였기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얼른 대꾸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주술을 사용해서 너를 바꿀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그럼 할 거지? 하는 거다?" 내가 너무 좋아하자 청명이는 약간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거절할수는 없었는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게 하지 뭐… 하지만, 그러다가 귀찮은 일에 말려들면 어쩌려고?" 정말 그렇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 모든 게 다 재미있게 생각되 어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혹시 알아? 우리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지도… 후후 훗, 그럼 이제 나는 진이가 되는 거고 너는 이제부터 민이가 되는 거다? 이제 부터 너를 부를 때는 민이라고 부를게." "그럼 나는…누나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하지만 누가 누나거나 오빠인지 모 르잖아" "뭐 어때? 설사 민이가 오빠라고 해도 진이가 워낙 말괄량이라 오빠를 휘잡 아서 그렇게 부르게 했다고 둘러대면 되니까 너무 걱정 마. 좋아, 그럼 이제 아이들의 모습으로 바꿔볼… 려고 했지만, 지금은 내가 너무 지쳐서 안 되겠 다. 우선은 푹 쉬고 나서 내가 회복된 다음에 하자고!!" "그래, 그래. 다 좋은데 이 아이들부터 묻어주는 건 어때?" 청명이가 만사 다 포기한 어주로 제안하자 나는 그제야 아차싶어 얼른 고개 를 끄덕였다. "아,그래. 깜빡했다." 아이들을 묻어주고 좀 쉬고 난뒤 청명이와 난 민이와 진이로 모습을 바꾸었다. 청명이, 아니. 이제는 민이라고 불리는 그는 어린애의 모습이 된게 영 이상한 모양이었다. 숲을 나오는데 자꾸 자기 발에 걸려서 비틀 거리지를 않나, 툭하면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걷질 않나, 거기에다 키가 작아지는 바람에 전에는 거치적거리지 않던 키 작은 수풀까지 자꾸 자신을 귀찮게 하자 무지무지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에잇, 정말...애들은 어떻게 이렇게 작은 모습으로 살았을까? 너무 불편한데." 다시 한 번 길 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자 민이는 화가 났는지 그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숲으로 던져 넣으며 투덜거렸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아직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렇다니까. 급할 게 없으니까 천천히 가자고 했건만......" 나는 자연스럽게 민이의 얼굴에 생긴 긁힌 자국을 살펴보며 가볍게 충고했다. 그동안 민이는 하도 자주 엎어지고, 넘어지고, 굴러서 온몸이 자잘한 상처투성이었다. 치유 마법을 써주고 싶기는 했지만, 그건 자주 사용하면 좋지 않은터라 나는 크게 다친 게 아니라면 될 수 있는 한 써주지 않았기에 작은 상처는 자국이 다 남았던 것이다. 이번 상처는 다행히도 가볍게 긁힌 거였기에 살 껍질만 하얗게 일어났 을 뿐 피가 나오지는 않았다. "나도 안다고. 하지만 이 조그만 발로 걸으려니 답답해서 결딜 수가 있어야지. 보폭이 너무 차이가 나." 무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그마한 발을 들어 보이며 투덜거리는 민이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풋, 지금 그 심정을 고이고이 간직해서 이 다음에 너 아이 생기면 그때 잘 해주라구. 그럼 넌 아주 훌륭한 아버지가 될 거야." "몰라!!" 진이와 민이는 정말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비록 우 리가 지금 그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난 때때로 민이의 얼굴을 바라 보면서 너무 귀엽단 생각에 깨물어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느라 힘들 지 경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민이(청명이)도 가끔 나를 보며 그런 생 각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귀여운 애의 얼굴로 너무 어른스러운 말을 하 면 애늙은이랑 같이 있는 것 같아서 정이 뚝 떨어진다고도 했다. '어쩔 수 없잖아. 겉모습은 애라고 해도 안은 600년 묵은 용인걸... 쿡쿡...' 조용히 웃던 나는 먼저 앞서 가는 민이와 거리가 멀어지자 얼른 발걸음 을 옮겼다. "누나, 우리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가자." 정오가 되었을 무렵, 민이는 힘든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나를 돌아보았 다. "그럴까......?" 우리는 아직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숲 속을 가로지르는 길가로 나와 그 길을 계속 따라가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어린아이의 모습인 데다가 익숙하지가 않았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나마 한나절 내내 계속 걷느라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그 래도 아직은 좀 어색했다. 길가로 나와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들고 있는 보따리에서 건량을 몇 개 꺼내 그중 하나를 입안에다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어제 마차 안을 뒤질 때 나는 미처 생각을 못했건만 민이가 건량을 발견하고는 챙겨놨었던 것이다. 아침에 내가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쑥스러운 표정 으로 건량 보따리를 내밀던 민이 녀석이 얼마나 예뻐 보이던지...... 민이도 자신의 몫 중에서 몇 개를 꺼내어 씹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분명 입에 안 맞고 그걸로는 배를 채우지 못해 기분이 안 좋은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위로의 말을 꺼냈다. "좀만 참아. 마을만 찾으면 거기서 제대로 된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거 야." 물론 그곳에 있는 식당에서 어린아이들을 손님으로 대접해 줄 때 이야 기지만...... "알고 있어." 민이는 자신이 쀼루퉁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얼른 표정을 바꾸어 대꾸했지만, 어린아이의 모습이라 그게 무지 귀여워 보여 나는 또 슬며시 웃음이 났다. '짜식, 귀엽게 놀긴......' 건량을 씹으며 쉬고있던 우리는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자 다시 자 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열심히 걷고 또 걸었건만, 우리가 마을을 발견한 건 그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마을로 들어가 여관을 잡고 씻으려는 생각에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안 빗어(이건 빗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부스스한 머리에 꾀죄죄한 얼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우리의 꼴은 영 락없는 어린거지였다. 그 모습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마을로 들어가서 마 련할 필수용 품을 곱씹으며 걸음을 더 재촉했다. 겉은 꾀죄죄해도 돈을 가지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져 우리가 지금 힘없는 모습이라 누구든 쉽게 껄떡댈 수 있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마을로 들 어서기 전 껄렁대는 10대 중반에서 후반쯤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아이 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허라... 얘들아, 저기 좀 봐라." "케케케, 꼬맹이 거지들이네? 우리 마을에 들어올 건가 본데?" "우리 마을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가 손수 가르쳐 줘야 하지 않을까?" "낄낄낄... 당연한 말씀." "아, 우린 너무 착하단 말야......" 하릴없이 마을 입구에서 어정어정대던 녀석들은 우리가 눈에 띄자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 눈빛을 빛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이, 거기 꼬맹이들!!" 앞장서서 우리 앞을 가로막은 17세쯤 되어 보이는 녀석들이 건들대며 우리를 불렀다. 분명 좋지 않은 의도로 우리를 가로막았다는 걸 알아챈 듯 민이가 내 곁으로 붙으며 속삭였다. "왜그러지?" "심심해서 장난치려는 거야. 참내, 이거 귀찮게 되었군......" 마을이 그렇게 작은 곳은 아니라서 마을 입구를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 하나 그 모습을 보고 말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 다. 저마다 갈 길이 바쁜지 우리 쪽을 힐끔 바라보고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저 녀석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우리를 막은 건 지도 몰랐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 소곤거리고만 있자 맨 앞에 서서 우리 를 부른 녀석은 우리가 겁먹은 줄 알았는지 의기양양해져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시비를 걸었다. "아쭈구리? 이것들이 감히 이 어르신께서 부르시는데 대답도 안 하네? 간덩이가 부었구만? 거지 새끼들은 우리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아무도 안 가르쳐 준 모양이지?" 그러자 뒤에 있는 녀석들이 낄낄거리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낄낄, 그럼 우리가 가르쳐 줄까?" "그냥 가르쳐 줄 수 있나?" "암암, 우리가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데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야지?" "낄낄, 거지 새끼들에게 뭘 바래?" 민이가 녀석들의 시비에 어지간히 열받은 모양이었다. 나에게 낮게 속 삭이는 그의 어조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나, 가만히 있을 꺼야?"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곤란해. 그러니까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저것 들을 유인해 가자. 내가 신호하면 무조건 나를 따라고 뛰어. 알았지?" 나는 우리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녀석들을 보고 있다가 녀석들 이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오자 한 손을 내밀며 외쳤다. "라이트!!" 갑작스레 내 손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오자 녀석들은 시력을 잃어 버리고는 자신들의 눈을 감싸 쥐었다. "우아악~!!" "눈이. 눈이......" "우욱......" "지금이야!!" 나는 민이를 데리고 있는 힘껏 뛰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라 도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했으므로 이왕 이렇게 된 것 마을 안의 어느 구석에서 해결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녀석들이 지금은 빛으로 인해 시 력을 잃었지만, 그것은 잠깐의 시간을 번 것일 뿐, 곧 시력을 회복하고 우리를 잡으려고 쫓아올 것이었다. 우리가 본래의 몸이었으면 이런일 까지는 안 하더라도 얼마든지 유인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린아이 의 몸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차피 달리는 속도는 저들이 더 빠를 테니 곧 따라잡힐 것이었고, 그때까지 사람들이 없는 으슥한 골목을 찾 아내야만 했다. 나는 민이를 데리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며 마을의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 쪽의 골목, 골목으로 열심히 뛰었다. 아무래도 인적이 없는 으슥 한 곳은 변두리에 더 많은 것이라는 생각 하에서 였다. 그리고 내 생각 대로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 왔을 즈음, 드디어 시력 을 회복하고 쫓아왓는지 저 멀리에서 우리를 찾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이야. 저쪽으로 갔대." "이 자식들, 잡히면 가만두나 봐라." "잔소리 말고 빨리 찾아봐." "젠장할... 그 꼬맹이들에게 당하다니......" "뜨거운 맛을 보여줄테다." "누나, 쫓아왔나 봐." "흥, 지들이 당할 줄은 모르고... 좋아, 저쪽 골목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자." 앞쪽에 우리가 뛰는 골목보다 좀 더 좁아 보이는 골목이 보이자 나는 그곳에 몸을 숨긴 채 녀석을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우 리가 모퉁이를 돌아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골목을 꽉 메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놀라 반사적으로 모퉁이를 되 돌았다. "헉!!" 그곳에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둘러싼 채 싸우고 있었다. 아마 막 시작한듯 앞쪽에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쪽에 있는 사람딜이 막 검을 뽑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금속이 부딪 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챙! 챙! 챙! 좁은 골목 안이라 여러 사람이 싸우기가 여의치 않은지 뒤쪽에 잇는 사람들은 검만 빼 들고 앞의 싸움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 는데 갑자기 쉬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빛줄기 하나가 날아 오는가 싶더니만 뒤쪽에 서 있는 남자 하나가 뒤로 넘어갔다. 그 남자 의 양 눈썹 사이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는지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잇는 것으로 보아 뭔가에 미간을 맞아 죽은 듯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아 까 그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남자가 넘어갔는데 그도 미간에 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민이와 나는 모퉁이에 숨어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싸우는 모습이 잘 보이지 는 않았지만,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강한 모양이었다. 빛줄기가 더 날아와 세명을 쓰러뜨리자 그제야 나는 안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 데, 안쪽도 거의 싸움이 마무리된 듯 두 명의 남자가 거의 동시에 쓰러 지고 있었다. 그리고 맨 안쪽에서 이들과 싸운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 는데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앞쪽에는 녹색의 장포를 입은 30대 중반, 혹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막 검을 허리에 찬 검집에 넣고 있었고, 그 뒤에는 오렌지색 옷을 입은 여인이 막 땅에서 보따리를 집어 들고 있 었다. 보퉁이를 어깨에 멘 그녀는 뒤를 돌아 정확히 우리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싱긋 웃었는데 쾌활한 인상에 큰 눈이 서글서글한 20대 후반으 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정말 끈질기게도 따라붙는군. 능력도 안 되는 것들이 말이지. 뭐, 그건 그렇고 자, 거기 그만 나오실래요?" 우리가 몰래 숨어서 보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말투 였기에 나는 민이를 데리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대로 도망쳤다가 는 오해해서 우리에게 해를 가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보아 하니 그들은 꽤 고수인 듯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무척 어린 꼬 마라는 것에 놀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남자는 다 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여자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남자 가 여자에게서 보퉁이를 하나 건네받고 어깨에 걸치는 동안 여자가 앞 으로 나서서 우리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민이와 나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여 누가 대답할 것인지를 정한 다음 다 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부모님이 안 계세요. 그리고 여기 있는 건......" 그러나 내가 미쳐 대답하기도 전에 우리의 상황을 알려주는 소리가 들 려왔다. 아까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아마 이 골목을 벗어나면 저들과 금방 마주체게 될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어디 있는 거야?" "분명히 이쪽으로 갔다고 했어!!" "얼마 못 갔을 거야. 그 녀석들은 여기 처음 오는 거니까 지리도 모를 거 아냐?" "그래 맞아. 잡히는 건 시간문제라고." "이 자식들, 잡히기만 하면 애들이고 뭐고 상관없이 신나게 패줄테다!" 나는 소리나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치며 말을 맺었다. "저들에게 쫓기고 있었어요." 너무나 담담하게 대꾸하는 나의 모습에 여자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피 식 웃었다. "그래? 그런데도 당황하지 않네?" 그러자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민이가 입을 열었다. "저런 녀석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요." "대단한걸?" 그녀는 씨익 웃으며 가볍게 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굽혔던 몸 을 펴고는 자신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자 의 시선에 뭘 읽었는지는 몰라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이쪽으로 걸어 왔다. "나머지는 이곳을 벗어나서 하자고." 굵고 낮으면서 조용하고 침착한 어조였다. 그는 오자마자 다짜고짜 민 이를 번쩍 안아들더니 가볍게 몸을 솟구쳐 골목을 만들어 내고 있던 담 장과 지붕 위로 올라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어어~?" 그 모습에 내가 놀란 입을 벌리자마자 여자가 나를 가볍게 들고는 자신 도 몸을 솟구치기 시작했다. "우와~!!" 마치 청룡 열차를 탄 듯 풍경이 빠르게 뒤로 휙휙 지나가는 한 번씩 올 라갔다가 내려앉는 모습에 나는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감탄이 흘러나왔 다. 그러나 나를 안고 있던 여인이 피식 웃는 듯 희미한 바람 빠지는 소 리가 들렸다. '쳇, 그게 우습나?'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집들의 지붕들을 한 번씩 가볍게 밟아 가며 통통 뛰듯이, 그러면서 빠르게 날아가던 그들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 에 도착하다 우리를 내려놓았다. 나는 마치 방방이를 타다가 내려온 것처럼 발이 어질어질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내가 약간 비틀거리자 여자가 얼른 내 뒤에서 부축해 주었다. "괜찮니?" "아, 예... 괜찮아요." 머리를 흔들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고는 혼자서 섰다. 그러자 그녀는 뭐가 그렇게도 재미 있는지 또 한 번 피식 웃더니 쭈그리 고 앉아 나와 눈 높이를 맞춰주는 그녀의 배려에 나는 약간 그녀에게 호 감이 생겼다. "자, 아까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너희들은 부모 님이 안 계시다고? 그럼 너희들 둘뿐?" 나와 민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묻자 나와 민이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 다. "혹시 어디 가는 길이니?" 뭐, 언젠가는 이 아이들의 가문에 가서 '패'를 돌려준다는 생각은 있었 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의 일이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옆으로 설레 설레 저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어떻게 둘만 있게 되었는지 말해 줄 수 있 을까?" "나쁜 사람들이 부모님과 사람들을 모두 죽였어요. 엄마가 나하고 민이 만 몰래 숨겨줘서 둘만 남았어요." 나는 최대한 처량하고 침울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며 대꾸했다. 내 연기 가 먹혔는지 그녀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동정 어린 표정 으로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장하네? 둘이서만 잘 다니고......" 내가 그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자 머리 속으 로 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연기가 대단한걸? 혹시 자주 해본거 아냐?"] ["시꺼. 그럼 어쩌냐? 이 대목에서 태평하게 대꾸하는 게 더 이상한 거 라구. 너두 빨리 우울한 표정을 지어."] ["누나가 잘하는데 나까지 그럴 필요 있어?"] ["야, 네가 가만히 있으면 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꼬맹이 로 찍힌단 말야. 그래도 괜찮아?"] ["앗! 그런건가?"] 민이랑 둘이서 몰래 대화를 주고 받는데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 가 들려 서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니?" 고개를 옆으로 도리도리...... "그래?" 여자는 뭘 생각하는 건지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고만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무섭지는 않은가?" 그러자 나보다도 먼저 민이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요?" 남자는 민이의 반응에 황당한 모양이었다. "왜라니? 우린 사람을 죽였다. 너희들까지 죽일지도 모르잖아?" 민이는 '뭘, 그런 걸 가지고......' 하는 표정으로 즉각 대꾸했다. "우리를 죽일 거였으면 벌써 죽였겠죠." ["이 멍청아, 그게 열 살도 안 된 애가 할 말이냐?"] 나는 민이에게 메시지를 날리는 동시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 우리를 쫓아오던 그 나쁜 애들보다 훨씬 나은걸요. 그러 니까 안 무서워요." 남자의 표정은 되게 묘해 보였다. 나는 혹시 그가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 할까 봐 조마조마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어떻게 든 우리의 반응을 이해했는지 다시 본래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 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나를 뒤에서 폭 껴안더니 웃으면서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호호호, 승랑. 이 아이들 귀엽지 않아요? 꼬맹이들이 참 맹랑하게 말하 죠? 아유, 귀여워라!!" 그러면서 내 볼을 가볍게 꼬집는 것이었다. '윽... 내 나이가 몇 살인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가만 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내 모양이 우스웠는지 민이가 킥킥대며 웃었다. 그런 민이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날려 입을 다물게 하고는 여자 에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여자는 나를 놔주지 않고 더욱더 힘을 주어 꼭 안았다. 결국 나는 여자의 품에서 빠져나오길 포기하고 가만히 잇다가 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여자가 나를 안고 있는 채로 계속 남 자를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 남자는 여자 쪽을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가 끔 한숨을 내쉬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어쩌다 가끔 여자를 바 라보는 것이 왠지 둘이 뭔가 대화를 하는 것만 같았다. '거참... 내가 잘못 느낀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행동에서 관심을 끈 나는 민이에게 손짓하여 가 까이 오게 했다. 민이가 주춤주춤 다가오자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조심해야지. 넌 지금 열 살도 안 된 애라구. 항상 애라는 걸 명심하고 애답게 행동해."] 그러자 민이의 볼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내가 뭘?"] ["내가 뭐어어얼? 야, 열 살도 안 된 애가 '우리를 죽였을 거면 벌써 죽 였겠죠'라고 금방 말하냐? 그걸 말할 거면 좀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고 말할 것이지. 애들은 그렇게 말 안 해. 그냥 '음...우리를 안 죽일 거 같 은데요?'라든가 '우릴 죽일건가요?' 라고 묻든지, 여하튼 순진한 반응을 보여야 할 거 아냐?"] ["오우, 누나 그런거 되게 잘 안다. 그런데 열 살도 안 된 애가 그렇게 똑 부러지게 말하던가?"] ["응? 음... 그건 아닌 거 같다. 내 반응도 한 열 살은 넘어야겠지?"] ["누나는 그런 인간의 기준을 되게 잘 안다? 나는 아직 열 살이 라는거 대충 어린애라는 것밖에 감도 못 잡겠는데 말야. 예전에 숙부님께서 말 씀해 주신 걸로 인간의 수명이 백 살 정도밖에 안되고 성인이 되려면 스 무 살은 되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말야."] ["난 인간들 틈에서 오래 있었거든. 그러니까 너보다 자세히 아는 거지. 어쨌든 무조건 애같이 굴어, 알았지? 무조건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처럼 굴란 말야."] ["알았어, 노력해 볼게. 하아... 애들 노릇도 쉬운 건 아니군..."]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대화를 끝낼 즈음, 여자와 남자도 저희들끼리 의 대화를 끝냈는지 여자가 기쁜 기색으로 나와 민이를 향해 말했다. "얘들아,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래?" "예?"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는 나와 민이의 모습이 귀여웠더니 그녀는 나 를 안고 있던 한 팔을 풀어 민이까지 껴안으면서 우리에게 자신의 얼굴 을 가져다 비벼댔다. "아유~ 귀여워라.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완전 쌍둥이잖아?" "저, 저기......" 민이가 익숙하지 않은 듯 얼굴이 빨개지면서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려고 하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우리를 놔주면서 기분 좋게 웃는 눈으로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떠니? 내가 너희들의 엄마가 되어줄게. 우리랑 같이 갈래? 나에게는 아이가 없거든. 너희들이 나의 아들,딸이 되어준다면 난 정말 기쁠 거 야." 그러자 민이가 나에게 어떻할거나는 시선을 보내왔다. ["음... 우리가 아직 이쪽 세게에 익숙한 것도 아니고, 여행하는 것도 나쁠 건 없으니까 익숙해질 때까지 교육받는다는 셈치고 애들 노릇 하는 건 어때? 이들이 고수니까 우리에게 저 기술을 가르쳐 줄지도 모르잖아?"] 민이는 나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여자를 바라보며 천천 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무척 진지해서 가볍게 그녀의 제 안을 받아들이려던 내가 무안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민이가 고개 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자 정말 기쁜 듯 활짝 웃더니 민이의 두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좋았어. 그럼 이제 내가 네 엄마다. 알았지? '엄마' 하고 불러 볼래?" 민이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무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엄...마......" "꺄아~ 날 엄마라고 불렀어. 한 번만 더 불러볼래? 응? 응?" 그녀는 너무 기뻐하면서 민이를 꼭 부여안고 외쳤다. 민이는 얼굴이 벌게졌지만, 싫지는 않은 듯 그녀의 품 안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작게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엄마......" "그래, 그래~" 그녀는 무척 행복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왠지, 민이도 행복해하는 것 같아 보여 나는 민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 둘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옆에 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는데 내 어께에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느 껴졌다. 바라보니 어느새 옆으로 왔는지 남자가 내 어께를 살짝 감싸 쥔 채 나를 보고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에 대한 답례로 씨익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잘 부탁해요, 아빠." 에스라 왕국에서 걱정하고 있을 아빠가 알면 서운하다고 울상을 지을 테지만 그 남자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 스쳐 지나가자 저 세계에서 날 기 다리고 있을 아빠에 대한 죄책감이 사르르 사라졌다. "그래, 잘 부탁한다, 딸아." 그들은 우리에게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의 보금자리를 마을과 멀리 떨어 진 산 속에다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우리가 만난 마을에서는 양부모도 일을 저질렀고(?) 우리도 불량한 청 소년(?)들에게 쫓겼기 때문에 그곳에서 머물지 못하고 바로 다음날 우 리는 산 너머의 다른 마을로 갔었고, 거기에서 며칠 머물다가 산속에 있 는 집으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다. 우리집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그것도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건너가는 길목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과 꽤 떨어져 사람들조차 잘 드나들 지 않아 길도 없는 곳이었다. 맨 처음 그곳을 봤을 때는 약간 큰 공터에 거의 쓰러질 것만 같은 빈 집이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주위의 풀 이 무성한 걸 보니 사람이 떠난 지 되게 오래된 것 같았지만, 나는 이런 데에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이 있었던 게 더 신기했다. 그래도 마을과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햇볕이 잘 들고 공터도 꽤 널찍하 여 사람 살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어떠니, 이곳 정말 괜찮지? 여기가 이제부터 우리가 살 집이야!"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며 엄마는 무척 들뜬 음성으로 외쳤었다. 근처 마을 여관에 우리를 내버려 두고 며칠 동안 바깥만 돌아다니다 우 리를 데리고 간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동안 떠돌아다니느라 집도 하나 없어서 우리가 살 집 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폐허가 우리의 집으로 결정되니 다음부터 우리의 새로운 부 모는 그 허물어져 가는 집을 새로 수리하고 단장하여 10여 일 만에 괜찮 은 집으로 바꾸어놓았다. 계절은 이제 막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 기였기에 집을 수리하는 동안에는 집 옆에다가 움막을 짓고 거기에서 기거를 했었다. 우리의 새로운 아빠의 이름은 현승권이라고 했다(덕분에 우리는 이제 부터 은민,은진이 아닌 현민, 현진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굵직한 눈 썹을 가진 데다 얼굴 선도 굵직하여 꽤 다부져 보이며 항상 무뚝뚝해서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며칠 지내보니 그는 성격이 사 교적이지 못해 말을 잘 안 하는데다 잘 웃지 않는 것뿐, 실상은 꼼꼼한 성격에 따스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싸움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수리에도 꽤 탁월한 재능을 가 지고 있었다. 엄마는 이름이 능지연이라고 했다. 항상 활달한 웃음을 머금고 있고 말 도 많았다. 무뚝뚝한 아빠 때문에 자칫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항상 말과 행동이 시원시원 호탕스러웠지만, 자 신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 사항에 대해서는 딱부러지는 성격이었다. 그 래서 그녀가 한 번 '안 돼' 라고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애원하고 애교를 떨어도 절대로 그 말을 번복하는 적이 없었다. 그리고 외모 가꾸는 것에 무척 지대한 정성을 쏟고있는 노력과 미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거나 집안일을 제쳐 놓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어서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존경스럽지...... 우리는 '은' 씨 가문에 대한 건 그들에게 숨기기로 했다. 그들도 과거 이 야기를 안 해주려고 하는 걸 보니 - 민이와 내가 몇 번 물어보긴 했었다 -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거기에다 우리의 일에 까지 말려들게 하 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정말 민이, 진이가 된 듯 그 일을 우리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그 '은' 씨 가문의 '패'는 우리의 방, 우리만 아는 비밀의 장소에다 꼭꼭 숨겨놨다. 그곳은 내가 결계까지 쳐놔 우연적으로라도 발견될 수 없게 만들어높았으니 들킬 염려는 전혀 없었다. 민이와 나는 한 방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집은 현관문과 바로 붙 어 있는 거실, 부엌을 빼놓고 방이 세 개였는데, 가장 큰방은 당연히 안 방이 될 것이라는 나와 민이의 예상을 깨고 그곳은 서재 겸 우리의 공부 방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비슷한 크기의 두 개의 방을 부모방과 나 와 민이가 사용하는 방으로 나누었다.집 뒤쪽에 방이 하나 더 있기는 했 지만, 그곳은 바닥도 깔려 있지 않아 흙바닥인 데다가 창문이 있긴 하지 만 햇볕도 들지 않아 어둠침침한 곳이었기에 헛간으로 사용하게 되었 다. 그렇게 집 안이 제자리를 잡아가자 두 분은 집 바깥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우선 아빠가 집 주위의 공터를 싸그리 정리했다. 집앞은 햇볕이 잘 들었기 때문에 집 안을 진입하는 중앙을 뺀 양 옆은 채소밭으로 만들 었고, 집 뒤쪽의 공터에는 우리의 연무장이 되었다. 연무장의 중앙에는 아빠의 팔뚝 굵기만한 수십 개의 나무가 세로로 저 마다 다른 불규칙한 높이로 땅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아 빠의 키 크기만한 굵은 통나무에 그보다 가느다란 통나무 두 개가 십자 가 모양으로 묶인 것이 위쪽에 하나, 중앙쪽에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 것에는 새끼줄이 꽁꽁 묶여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으로 수련을 하는 듯 했다. 그렇게 연무장과 집 앞에 밭까지 다 만들어진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끝 내고 나자 아빠와 엄마가 나와 민이를 점잖게 불러 거실에 앉혔다. 그전까지는 아직 집 단장과 집 주변 단장 때문에 바빴기에 민이와 나는 두 분이 신경 쓰이지 않게 하기 위해 알아서 산 이곳저곳을 다니며 놀았 기에,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을 먹고 나가 놀려고했는데 두 분이 우리를 잡자 가벼운 긴장과 호기심을 느끼며 시키는 대로 거실의 우리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자 아빠가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며 입을 뎔었다. "이제 집 안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으니, 너희들의 교육을 시작해야겠 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와 네 엎마는 약간의 재주가 있어 그걸 너희들 에게 가르쳐 주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너희들도 이제 여덟 살이니 - 여 덟 살이라고 대충 둘러댔음 - 교육이 이른 것은 아닐 게야. 오늘부터 시 작할 터이니 열심히 하거라." "예" 나와 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 기특하구나. 그럼 어디 지금부터 네 오른손을 한번 내밀어보겠 니?" "손이요?" 의아한 듯이 손을 내밀자 아빠가 내 손목을 잡아 맥을 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갑자기 왜 맥을 재는 것일까... 의아해하던 나는 속목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몸안으로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아빠의 손을 뿌리쳤 다. "앗, 차거!!" '이게 무슨 짓이에요?' 라는 시선으로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 대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엄마 가 호호 웃으면서 설명해 줬다. "호호호,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아빠는 네 몸의 기운을 느끼려는 것뿐 이야." "기운... 이라뇨?" 민이도 의아한 듯이 묻자 엄마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줬다. "음... 그러니까, 이건 나중에 배울 거지만 미리 좀 말해 준다면... 우리 몸속에는 기운이 자리 잡고 있단다. 그것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 한 사람도 있지. 기운이 따뜻한 사람도 있고, 차가운 사람도 있고... 그래서 아빠는 너희들 몸속에 있는 기운이 어떤지 알아보려는것뿐이 야." "그럼 아까 내 손을 차갑게 한 게......" 내가 다 말하기도 전에 엄마가 말을 가로채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아빠의 기운이야. 아빠의 기운은 차가운 특징을 가지고 있거든." 그 기운이라는 것은 마나일 것이 분명했다. 아까 몸속에 들어온 것도 마나 같았으니까...... '윽! 마나를 갈무리해 놓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안 드러나도 몸속으로 직접 마나를 집어넣는다면 이거 들키는 거 아냐? 괜찮을라나? 애가 엄청난 마나를 가지고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나는 다시 아빠가 손을 내밀라는 뜻으로 자신의 손을 펼쳐 내밀자 손을 안 내밀 수가 없어 천천히 내 손을 아빠 손 위에 얹으면서 무지 걱정했 다. 그걸 엄마는 아파서 걱정하는 줄 알고 다시 호호 웃었다. "호호호, 진이야, 그렇게 아픈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주 잠깐 이면 끝날 거야." 아빠가 다시 내 손목을 잡자 아까의 그 기운이 천천히 들어왔다. 나는 내 마나가 몸속에 있는 그 기운에 대항하려고 하는 걸 억지로 잡아두면 서 아빠의 마나가 쉽게 흘러가도록 배려했다. 그 기운이 팔뚝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한번 스쳐 가면서 배꼽까지 내려가더니 다시 올라와 팔뚝을 통해 아빠에게로 돌아갔다. "됐다"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놓아주자 나는 얼른 뒤로 물러서서 팔뚝을 문질러 댔다. 찬 기운이 한번 훑고 지나가서 그런지 추워서 소름 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민이의 손을 끌어다가 다시 맥을 재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민아, 애들은 기운이 적어야 하니까, 네 기운을 알아서 안들키게 해."] ["알고 있어"] 그렇게 민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아빠가 잠시 후 민이의 손목을 놓자 민이가 뒤로 물러났는데, 난 추워서 팔뚝을 문지른 거에 비하여 민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어라? 넌 안 차가워? 난 차갑던데......" 의아해진 내가 묻자 민이는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 다. "난 괜찮은데? 누나가 너무 호들갑 떠는 거 아냐?" "뭐어?" 이 녀석이 감히 누나에게... 라고 말하려는데 우리가 싸울 것 같았는지 아빠가 선수쳐서 우리를 떼어놓았다. "그건, 민이의 기운이 아빠처럼 차가워서 그런 거란다. 그래서 아빠 기 운의 차가움을 느끼지 못하는 거야. 하지만 진이는 아빠와는 달리 따뜻 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아빠의 차가운 기운을 예민하게 느낀 거지. 흐음... 보통 여자가 차가운 기운을 가지고 있고, 남자가 따뜻한 기운을 가지기 마련인데 너희들은 반대구나. 뭐, 사람마다 체질은 다른거니 까.." '그거야 내가 불의 속성을 가진 레드 드래곤이고 민이는 물의 속성을 가진 청룡이니까 그렇죠.' 나는 속으로 가만히 속삭이고는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수련을 시작할 터이니 뒷마당으로 나오거라." "예" "열심히 해라. 잠시 후에 엄마도 가볼 테니!" 엄마의 응원을 들으며 민이와 나는 쫄래쫄래 아빠의 뒤를 따라 뒷마당 으로 향했다. "너희들은 아직 무공 수련을 한 적이 없어 내력이 없더구나. 그래서 토납법부터 가르쳐 주겠다. 내력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서 초식을 가르 쳐 줄 테니 그때까지는 신체 단련과 단전호흡에 힘을 쓰도록 하여라." 뒷마당에 평평하고 큼지막한 바위가 두 개 있었는데 아빠는 각각의 바 위에 나와 민이를 올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내력이 뭔데요?" 민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묻자 아빠가 빙그레 웃으며─그래봤자 눈만 웃고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지만─설명해 줬다. "내력이란 아까 너희들이 느꼈던 나의 기운 같은 것이란다. 그 기운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이 튼튼해지고 강해지는 것이지" "우리가 내력이 없는지는 어떻게 아신 건데요?" 민이가 다시 한 번 묻자 아빠는 설명하기가 좀 난해한 듯 생각에 잠기더 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물론 사람에게도 본래의 기운이 있지. 하지만 수련으로 해서 그 기운을 크게 만들 수 있는데, 수련으로 해서 생긴 기운은 단전에 만들어 진단다. 그렇게 때문에 그 단전에 기운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고 이 사람이 수련 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알 수 있지. 게다가, 내 기운을 집어넣을 때 기운 이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강도에 따라서도 알 수 있고 말이다. 내가 너희들의 몸속에 기운을 집어넣었을 때는 별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거든. 그건 나의 기운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너희들의 기운이 약하다는 뜻이지." "아하....." 민이와 나는 알겠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빠가 우 리에게 내력이 없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 단전이라는 곳에 마나가 보통 의 사람과 같은 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아빠 마나의 앞을 막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나저나 마법에서 마 나를 갈무리하는 것과 이곳에서 마나를 쌓는 곳은 다르구나. 나는 심장 의 바로 옆에다 마나를 갈무리해 놨는데......' 우리의 질문이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아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기운이란 것은 사람의 몸뿐만이 아니라 나무에도 있고, 동물 에도 있고, 공기 중에도 있단다. 지금부터 배울 토납법이란 이 나무나 공기 중에 있는 기운을 호흡을 통해서 너희들의 몸속에, 그러니까 단전 에 받아들이는 것이란다. 이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기운을 많 이 가지게 되는 것이니 너희들은 열심히 해야 한다." "예" "좋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자세를 취하거라. 우선 편안히 앉아서 허리 는 곧게 세우거라. 다리는 이렇게 엇갈려서 발바닥이 모두 하늘을 보게 하고 어깨에서 힘을 뺀 다음 두 손을 겹쳐서 다리 위에다 놓거라. 그리 고 눈은 코끝을 본다고 생각하고." 아빠의 모습을 보고 어설프게 따라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자 아빠는 직접 일어나 민이와 나의 자세를 직접 교정시켜 주었다. 양반다리를 한 채 발바닥을 하늘 쪽으로 보이게 하려니 발을 좀 더 바깥쪽으로 돌려야 했는데, 평소 이런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무척 불편하기만 한 자세였다. 그 불편한 맘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아빠는 피식 웃으며 입 을 열었다. "지금은 불편하겠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다. 자, 그런 다음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크게 심호흡 하는 거란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인 다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많이 하다 보면 이곳에─단전─어떤 힘 이 느껴질 것이다. 그것이 느껴지면 아빠에게 말을 하도록"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애써 교정한 자세가 무너질까 봐 손도 들지 못하고 입만 움직여 질 문을 했다. "그래, 뭔데 그러니?" "아빠가 말한 그 자연의 기운이라는 건 얼마 만에 느낄 수 있나요?" "음... 그건 말이지... 오늘 하루 만에 느낄 수는 없는 거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한 3일은 되어야 느낄 수 있을걸? 흐음, 그것도 무척 빠른 거군. 어떤 사람은 일주일이나 15일 정도 되어야 느낄 수 있 다고 알고 있으니까." "허걱, 그렇게나 오래....?" 내가 경악 어린 표정을 짓자 아빠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웃었 다. 요즘 들어 아빠가 웃는 모습이 많아졌다. 엄마는 그것이 우리 때문 이라고 하긴 하지만... 뭐, 사람이 웃는다는 것을 좋은 거니까.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아까 일러준 것처럼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받아 들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크게 심호흡을 하거라." 아빠의 말에 나와 민이는 자세를 가다듬고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민이의 메세지가 머리 속에 울렸다. ["누나, 이 상태로 며칠 내내 있어야 하는 거야? 난 단전이라는 데 기운 을 모으는 거 금방이라도 할 수 있는데...."] ["며칠만 참아봐. 그리고 아빠가 계속 여기 지키고 있겠냐? 아빠가 가버 리면 그때 환상을 만들어놓던지 하자구."]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내력이 있다고 할 걸 그랬나?"] ["그럼 우리가 수련받았다고 생각할 거구, 그렇게 되면 어디서 수련을 했냐고 물을 거아냐? 그럼 뭐라고 대답할래?"] ["아, 그건 그렇구나"] ["잔말 말고 3일만 버텨. 3일만에 기운을 느껴 버린 걸로 하자고."] ["3일만 버티자고... 3일만......"] 민이는 마치 주문처럼 그 소리만 되뇌이며 자세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 만 그 3일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차라리 몸이 힘들어도 새로운 것을 배 우는 게 낫지. 다 할 줄 아는데도 부모님의 눈을 의식해 일부러 처음 하 는 척 얌전히 앉아 있으려니 너무 힘들었다. 나중에 생각해도 무공을 배 우는 도중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맨 처음 무공 을 배우기 시작한 3일 동안이라고 말할 것 같았다. 육체적으로는 편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 지루해서 힘들었으니까. 그 3일 내내 민이와 나는 엄마, 혹은 아빠의 감시 속에서 계속 그 자세 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아빠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때는 엄마가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우리를 감시하곤 했기에 우리 둘만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민이와 나는 도망가려고 환상 마법의 시전할 틈도, 수도 없었다. 항상 두 분의 감시 속에 있었으니 미리 환상 마법을 펼칠 수도 없었지만, 감시하는 분이 잠시 딴 눈을 팔 때 마법을 시전했다가 주위의 마나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상함을 눈치채시는 것이었다. ["그... 무공을 사용하면 자연의 기 흐름에 대해서도 민감해지나봐....."] ["으윽... 그럼 3일 내내 이러고 있어야 한단 말야?"] ["어쩔 수 없지 뭐......"] ["허거걱, 누나... 어떻게 좀 해봐아아......."] ["낸들 별수 있니? 정 괴로우면 너 혼자만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 도 있으니까 그걸로 위안이나 삼아."] ["아, 그건 그렇다."] 새벽부터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는 밥 먹은 시간, 중간중간의 휴식 시간,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그러고 있 어야 했다. 처음에는 발이 엄청 저려서 어쩔 줄 몰랐지만, 사이사이 쉬 는 시간에 엄마나 아빠가 솜씨있게 주물러줬기 때문에 그건 점점 나아 졌다. 그래도 그 나머지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는 건 너무 괴 로운 일이었다. 민이와 내가 아무도 모르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 까지 없었다면 우리는 반쯤 맛이 갔을지도 몰랐다. ["민아, 머 재밌는 이야기 없어?"] ["음... 내가 어렸을 때인데... 그랬었어. 누나는 뭐 없어?"] ["이건 내가 여행 다닐 때 이야기인데... 그랬었어."] ["우웅... 좀 슬픈 이야기네. 그 애가 잘되었으면 좋았을걸......"] ["모르긴 몰라도 잘되었을 거라 생각해. 자, 이제 네 차례야."] ["음... 그러니까......"] ["......"] ["우웅... 이제 할 이야기도 거진 다 떨어진 거 같은데?"] ["그럼, 끝말 잇기 게임 하자."] ["어떻게 하는 건데?"] ["내가 낱말을 제시하면 그 끝에 있는 말로 시작되는 다른 낱말로 제시 하면 돼. 예를 들면, 내가 '나무'라고 말하잖아? 그럼 네가 '무'로 시작되 는 단어를 말해야 해. 무지개라든지 무릎이라든지... 단어를 제시못하면 지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누나부터 시작해."] ["응. 음... 나비."] ["비? 비옷"] ["옷...장"] ["장...수"] ["......"] ["누나, 이제는 끝말 잇기도 지겹다. 딴것없어?"] ["그럼, 앞말 잇기 게임 해볼래? 그건 어떻게 하는 거냐면......"] ["......"] 우리가 부모님과 같이 있어도 유일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새 벽 시간이었다. 그때는 부모님도 운기조식과 심법을 수련한다 하여 우리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들 주위에서 엄청난 양의 마나 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비록 다른 수련한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 종도면 4,5서클의 마나의 양이었기에 그들이 대단한 수련을 쌓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분이 운기조식과 심법 수련에 들어간 동안 우 리는 맘껏 놀 수가 있었다. 단지 흔적은 안 남게 놀아야 했기 때문에 자 세를 풀고 짝짜꿍이나 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3일째 날이 되었다. 새벽부터 하는 수련이 평소에는 힘들었지만, 우리는 드디어 이 지겨운 모습을 탈 피할 수 있다는 기쁨에 젖어 그날만을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나, 언제쯤 느꼈다고 할까?"] ["더 이상 기다리기 싫으니까 부모님께서 눈 뜨면 느꼈다고 하자."] ["너무 빠른 거 아닐까?"] ["그런가.....? 그럼 저녁때쯤으로 할까?"] ["으음... 그런데 우리 둘이 비슷한 시기에 느꼈다고 하는 건 좀...."] ["뭐 어때? 우린 쌍둥이잖아."] ["그래도...."] ["좋아. 그럼 내가 지금 느꼈다고 할테니까, 넌 나중에 느꼈다고할래?"] ["음... 그건 싫은데......"] ["그러면 그냥 둘 다 지금 느꼈다고 하자구. 우리가 느꼈다는데 뭐라고 하겠어? 게다가 아빠가 말씀하시길, 새벽이랑 해질녘이 더 잘 느껴진 다고 했잖아. 그러니 새벽이나 해질녘에 뭔가 느껴진다고 하면 자연스 럽겠지만, 난 해질녘까지 기다리기 싫다고."] ["웅... 그런가? 좋아, 그러지 뭐."] ["자, 그럼 단전에 기운을 집어넣자구. 그런데 아주 쪼끔 넣어야 해. 알 았지? 너무 많이 있으면 또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알았어. 걱정마."]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단전에 마나를 아주아주 쪼오오오금 집어넣고 두 분이 눈을 뜨길 기다렸다. 해가 완전히 뜨고 나자 두 분의 주위를 맴돌 던 마나가 천천히 몸속으로 갈무리 되어지고 두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누나, 지금 말해?"] ["잠깐만 기다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내가 말하면 너도 그런거 같다고 말해."] ["알았어"] 우리와는 달리 맨바닥에 앉아 심법의 수련까지 마친 두 분이 자리를 털 고 일어나더니 그들을 말똥말똥 보고 있는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구, 우리 보물들... 그래, 뭔가 느껴지는 게 있니?" 우리가 토납법 흉내를 낼 때는 아무도 안 건드렸기에 엄마가 평소처럼 우리를 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에 상응하는 환한 미소를 띠며 묻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음... 저기... 배꼽 밑에서 뭔가 따뜻한 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그게 기 운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래? 벌써 느꼈단 말이지? 그거 참 대단한걸?" 엄마는 놀라움과 대견함을 동시에 나타내며 천천히 내 등 뒤로 돌아가 서는 척추 밑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내가 놀라서 약간 움찔 거리자 나머지 손으로 내 어깨를 살며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입 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봐. 엄마가 진짜 내력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게." 엄마가 손바닥을 댄 척추 밑 부분부터 색다른 기운이 흘러 들어오더니 앞쪽에 있는 단전을 부드럽게 한 바퀴 돌고는 다시 되돌아갔다. 그 기운 이 몸속을 다 빠져나가자 엄마가 내 등에서 손바닥을 떼고는 감탄했다 는 듯 입을 열었다. "호오, 그렇구나. 벌써 내력이 모이기 시작하는걸? 진이는 정말 빠르구 나?"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두 분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민이에게 눈짓하자 민이도 얼른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느껴지는 게 있어요." "어머나, 민이도?" 다시 한 번 놀란 목소리로 묻던 엄마가 민이의 등 뒤에 가서 내 경우와 같이 등 뒤, 척추 밑 부분에다 손을 대고 살펴보는 듯하더니 잠시 후 정 말 놀랍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정말이구나. 너희들은 속도가 무척 빠른걸?" 그러자 가만히 있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 민이는 기초 체력 다지기와 운기조식을 같이 병행해야 겠구나." 엄마가 아빠의 말을 이었다. "진이는 어느정도 내력이 쌓일 때까지는 운기조식만 중점적으로 할거 야"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있다가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할걸 그랬 나?"] 민이가 못마땅한 어조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나보다 낫잖아."] ["그건 그래."] 민이가 뒷마당 한구석에 서 있는, 어른 남자 크기만한 데다 굵은 통나무 에 단단히 고정해 놓은 여덟 개의 가지를 하나하나 차례대로 치면서 대 꾸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민이를 부럽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가 단전에 기운을 조금 집어넣고 기운을 느낀다고 말한 다음부터 민이와 나의 수련 방법이 달라졌다. 우선 민이는 기초 체력 단련까지 같이 했기 때문에 새벽과 해질녘에 단 전호흡을 하는 것을 빼고 나머지 시간에는 몸을 움직여서 근력을 기르 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루 종일 토납법에 매달려야 했다. 이유인즉, 기초 체력을 다지면 근육이 생기는데, 여자 몸에 근육이 붙는 건 보기 안 좋다는 엄마의 말씀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여자와 남자의 신체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자가 아무리 근력을 수련 해도 같은 수련을 거친 남자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나는 내력을 중점적으로 수련을 하겠다는 거였다. 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었기에 나는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 다. 어차피 수긍이 안 가더라도 알겠다고 끄덕거릴 수밖에 없지만...... 내력이 어느 정도 생기면 근육이 붙지 않아도 충분히 강한 힘을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근육이 필요 없으니, 내력이 어느 정도 더 쌓인 다 음에는 근력 단련보다는 어느 정도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련을 위주 로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민이가 기초 체력을 단련하는 동안 나는 계속 바위 위에 앉아서 숨쉬기 운동(?)이나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난 이런 것이 필요없는 게 사람은, 아니, 이곳에서는 마나를 단 전에서부터 받아들이는지 몰라도 나는 온몸으로 마나를 호흡하는 것처 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부러 단전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빈둥빈둥 놀면서 앉아있다가 나중에 엄마가 검사 하러 오실 때 즈음이면 몸속에 갈무리 해 놨던 마나 약간을 단전에 보내 버리면 장땡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번 기운을 느끼기 시작하면 쌓 이는 속도가 좀 빨라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맘놓고 좀 더 많이 마나를 집어 넣었다가 전진 속도가 빠르다는 엄마의 감탄을 들으며 내일부터 운기법을 가르쳐준다고 했기 때문에, 오늘만 버티면 내일은 뭔가 좀 달 라질 거라 기대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도 벌써 민이가 체력 단련을 병행하며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나 지나 있었다. 그동안 너무너무 심심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 러지는 않았다. 민이의 수련 방법이 바뀌는 것을 기점으로 우리는 드디 어 글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츨링이었을 때 엄마에게 글을 배울 때에 비하면 무척 힘 들었지 만, 한자라는 게 그냥 외우기만 하면 되는 거였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 다. 단지, 열받는 일이 있다면... 민이는 그 한자를 벌써 다 알고 있는 거 였기에 그 녀석은 글자 배우는 시간에 딴짓하거나 날 놀릴 수 있었지만, 나는 본래부터 한문에 흥미가 없어 알고 있던 한자가 적었기 때문에 공 부 시간에 집중을 하고 있어야 했다. '쳇, 민이 녀석이 지식을 전달하는 마법을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머리 싸고 공부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야......' 덕분에 난 민이보다 떨어진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가 않아서 매일 공부하기 전에 암기력을 높이는 마법을 나에게 걸었다. 그러면 암기력 이 훨씬 좋아지기 때문에 원래 공부하기 싫어하는 나도 민이보다 떨어 지지 않을 수 있었고, 열심히 한다는 칭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공부하는 건 정말 싫었다. '쳇, 지금 수학도 같이 배운다면 그건 정말 잘할 텐데......' 다음날 새벽, 단전호흡을 끝내고 나자 드디어 나는 진짜 수련에 들어간 다는 기대감을 인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아직 아침 식사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수련을 더 해야 했는데, 이 시간 에 엄마와 아빠는 오늘 민이와 내가 해야 할 분량을 말해 주었다. "자, 진이야? 오늘부터 운기법을 배운다고 했지?" 끄덕끄덕! "좋아. 진이의 진전 속도가 빨라서 엄마는 무척 기대하고 있단다. 그럼 우선 이걸 양 발목에 찰래?" 엄마가 내미는 건 천으로 만들어진 띠 같은 거여였는데 뭐가 들엇는지 속이 두툼했다. "이게....뭐예요?" 받아 들어보니 내가 들기도 힘겨울 만큼 꽤나 무거웠다. "모래주머니?" 의아한 듯 말하며 만져 보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래의 감촉이 아닌 뭔가 딱딱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모래는 아니고 쇠로 만든 고리란다. 하지만 쇠가 피부에 닿으면 피부가 거칠어지지 않니? 여자의 외모에서 피부도 상당 부분 중요한데, 그 피 부가 상하면 안 돼지. 그래서 내가 특별히 천으로 몇 겹이나 쌓은 거란 다. 엄마가 채워줄게." 그 쇠고리는 반원 두 개를 이어 붙여 열었다 닫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 었다. 단지 그 쇠고리의 모든 부분이 꼼꼼하게 천으로 둘둘 감겨 있어 내가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쇠고리를 양쪽 발목에 차자 발이 축 늘 어졌고 너무 무거워서 걸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엄마, 너무 무거워요. 이걸로 걸을 수 있을까?" "물론 네가 지금 상태로 그걸 차고 걷기는 힘들 거야. 하지만 전에 말했 다 싶이 내력이 쌓인다면 그걸 차고도 펄펄 날 수 있단다. 그걸 채운 이 유는 네가 내력을 어느 정도 쌓았는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야." "에... 그런 거에요?" "그래. 자, 그럼 이제부터 네가 배울 운기법에 대해 설명해 주마." 힐끔 옆을 보니 어느새 아빠가 민이를 데리고 사라져 있었다. 민이는 오 늘 집 바깥에서 체력 단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운기법이란 네 몸속에 쌓아놓은 내력을 직접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란 다. 엄마가 매일 아침에 하는 것 있지? 그건 네가 나중에 배울 심법과 오늘 배우는 운기조식을 하는 건데 이 운기조식은 내력으로 몸속을 구 석구석 쓰다듬어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이걸 하면 네가 낼 수 있는 힘의 몇 배는 더 낼 수 있는 데다가 상처가 나더라도 치유가 빨라 지고 피로 회복도 빨라진단다. 어때, 대단하지?" 엄마가 내가 크게 감탄하길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기에 나는 차마 엄마의 기대를 져버릴 수가 없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다 안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 안 되겠지?' "우와, 정말 대단해요. 정말 그런 게 있어요?" '아아... 나 이러다가 정말 배우로 나가도 될까 봐......' 엄마는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네가 그걸 지금부터 배울 거란다. 자, 지금은 말로 설명해 봤 자 어려우니까 엄마가 직접 운기를 도와주마. 엄마가 이끌어주는 대로 경로를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네 스스로 움직여야 한단다. 알겠니?" "예." "좋아. 그럼 지금부터 시작할 테니, 엄마가 다시 말할 때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움직여서도, 말을 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간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라." "예." 아주 진지하게 끄덕이자 엄마는 한 번 웃어주고는 내 등에다가 손을 가 져다 대었다. 그러자 곧 엄마가 손을 댄 부근에서부터 따스한 기운이 흘 러 들어와 단전으로 들어가더니, 단전 안에 있던 기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항문 쪽으로 내려가더니 다시 등 쪽으로 올라와 척추를 타고 몸 위 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머리를 한번 쓰윽 감싸고는 다시 얼굴 쪽으로 내려와 단전으로 들어갔다. 말로는 한바퀴 순식간에 돌고 난 것 같지만, 엄마가 날 생각해서 그런지 아주 천천히 돌렸기 때문에 이걸 하 고 나자 벌써 해가 제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자 엄마가 내 등에서 손을 뗴고는 입을 열었 다. "자, 느낌이 어떠니?" 엄마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음... 왠지 목욕을 하고 난 듯한 기분이에요. 몸속이 깨끗해진 것 같고, 시원해진 데다가 가뿐해진 듯한......" 정말로 몸 안을 부드러운 수건에다 따뜻한 물을 적셔 한번 닦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호호, 네 느낌이 정확하단다. 그것이 바로 운기조식의 효과지. 그럼 엄마가 이끌어준 길을 기억하겠니?" "예, 대충은......" "좋아요. 그럼 아침을 먹고 다시 한 번 해보자꾸나. 엄마가 한 번 더 도 와 줄 테니, 그 다음에는 너 혼자 해봐야 한다." "예." 벌써 아침 먹을 시간이 다 되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집으로 들 어 가려고 보니 아빠와 민이도 막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으응... 이제 또 새로운 수련을 하게 되었거든." 그런데 그 말하는 민이는 왠지 기운이 빠져 보였다. "너...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민이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난 오늘따라 누나가 부러워 보여." "왜?" "아니... 내일부터 아빠가 나보고 물 떠오래." 나처럼 하루 종일 꼼짝 못하고 앉아서 숨 쉬기 운동하는 것보다는 훨 낫 다고 생각하던 녀석이 내가 부럽다고 하는 걸 보면... 난 드디어 민이의 수련이 힘들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물 떠오기라니...... "그게 뭐? 아아... 혹시 물을 많이 떠오래?" "아니, 처음이니까 조그마한 물통을 보여주시던데?" "그럼 왜?" "거리가 너무 멀어." "에? 벌써 갔다 왔는데 멀다니?" 아침 먹을 시간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숨 쉬기 운동을 끝낸 다음 에 거의 1시간 정도 지났기에 그 정도 거리면 대충 가는 데 30분, 오는 데 30분 걸리는 거리였으므로 아직 우리가 열 살도 안 되었다고 하지만, 한 시간내내 걷는 건 아니었을 테고 가서 샘물을 떠 마시며 이야기까지 했다면 멀다고도 할 수는 없는 거리였기에 나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민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민이는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빠가 오늘은 길만 가르쳐 주는 거라고 날 안고 뛰어갔다 오셨단 말야. 엄청 먼 데라구. 보통 엄마가 물 긷는 근 처 냇가가 아니라 숲 속에 있는 자그마한 샘이야. 아빠는 언제 그런 걸 발견하셨는지... 아침 먹고 다시 한 번 데리고 가주신데. 그런데 그거뿐 인 줄알아?" 아빠가 뛰어갔다고 하는 건 예전에 우리와 부모님이 처음 만났을 때 부 모님이 보여주셨던 그 빠르게 달려가는 능력이었다. 그걸 아마 예전 무 협지에서는 경공이라고 했던가...... "또 뭐가 있는데?" 내 질문에 민이는 잠자코 자신의 바지를 걷어 올려 나에게 자신의 발목 을 보여주었다. 민이의 발목에는 내가 지금 차고 있는 것보다는 약간 가 늘어 보이는 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민이는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이걸 끼고 하래. 그래야 빨리 근력이 는다구......" "안됐다." 나는 그 말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내가 차고 있는 것이 너무 무거워 나 는 잘 움직일 수 없었기에 항상 엄마가 나를 안아다가 옮겨주고 한 거에 비해 민이는 그 쇠고리를 차고도 걸어다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무겁 지는 않아보였다. 그래도 그 먼 거리(민이 표현에 의하면)를 다녀오는 것도 힘들 텐데 거기에다 작다고는 하지만 물통 하나에다 발목에는 쇠 고리가 하나씩 채워져 있으니 민이가 한숨을 내쉬는 것도 무리는 아니 었다. 그런데 이런 민이의 모습이 부모님 눈에는 무척 귀여워 보인 모양 이었다. 나에게 처량하게 신세 한탄하는 민이를 보는 두 분의 눈에는 웃 음기가 가득 들어 있으니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왠지 나도 곧 너와 같은 신세가 될 거 같으니까......" 나는 그런 민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응, 나도 그걸로 위안 삼고 있어." 그래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아직은 견딜 만하든 가 아님 나처럼 무공 배우는 데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후자의 경우였으면 좋겠는데... 나는 웬만큼 무공을 배우고 싶거든. 그 래야 내가 돌아갔을 때 류미르, 세이몬하고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테니 까.' 그렇게 민이를 위로하면서 아침을 끝내고 난 후 나는 본격적으로 운기 를 하기 시작했다. 민이가 처량한 얼굴로 엄마에게 물통을 받아 나가는 걸 보니 그도 물 떠오기를 오늘부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엄마가 나의 기운을 인도하여 몸속 한 바퀴를 돌고 나자 엄 마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한 바퀴 도는 걸 일주천을 했다고 하는 거란다. 그럼 네가 한번 해보겠니?" "예." "주의할 건 말이다. 아무리 기가 천천히 가더라도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라는 거야. 넌 이제 시작하는 단계니까 기의 흐름이 빠르지 않거든? 천천히 흐르는 걸 인도만 한다고 생각하고 너무 심하게 당기려고 하지 말거라. 까딱 잘못하다간 큰일 나는 수가 있어요." 이미 두 번이나 길을 익혀뒀으니 마나를 단전에서부터 끌어내어서 엄마 가 간 길을 따라 한 바퀴 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 말 대로 처음해서 그런지 마나가 무지 느리게 쫒아와서 성질 급한 나로서 는 한 바퀴 다 돌리는 게 너무 답답했다. 이렇게 몸속의 길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내 임의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를 모은 건 정말 순식간 이었는데 자가용을 타고 가다가 자전거를, 아니, 걸어가려니 온몸이 달 싹거리는 것만 같아서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 성격대로 했다가는 큰일 날 수가 있다고 하니 다른 수가 없는 난 이것을 기회로 인내력을 쌓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동안 하루 종일 운공을 하고 나서 난 뭔가 이상하다 는 걸 깨달았다. 새벽에 온 가족이 뒷마당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저 마다 할 일을 하는데, 민이는 숨 쉬기 운동만 하니까 나보다도 빨리 끝 낸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공 연마를 한다는 부모님조차 내가 마나를 몸 안에서 두 바퀴 돌리는 동안 다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원래 는 나도 그 시간에 숨 쉬기 운동을 해야 하는데, 할 필요가 없어서 숨 쉬 기 운동 시간에도 그냥 운기를 했다. 그래서 두 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부모님이 운기하는 양이 내가 지금 몸속을 돌게 하는 마나의 양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단전에 넣어놓은 마나의 양보다 수십배, 혹은 백배가 훨씬 넘는 양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슬쩍 물어봤더니 부모님이 새벽에 운기할 때 딱 한 번만 돌리는 게 아니라 보통 7번 정도 돌린다는 거였 다. 그런데도 나보다 속도가 빨랐다. '그럴 수가 있는 건가? 보통 양이 많으면 속도가 더 느려야 하는 거잖 아?' 나의 이 질문을 들은 엄마는 대견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나, 기특하구나. 그런 걸 알아챌 줄도 알고... 역시 우리 진이는 똑 똑한걸? 그럼 엄마가 조금 설명해 줄까? 어차피 자세한건 아빠가 나중 에 다 설명해 주겠지만... 음... 진이는 냇가에 물 흐르는 거 봤지? 왜, 냇 가에 흐르는 물은 다른 곳으로 새지 안고 내만 따라서 흘러가는 걸까?" '그런걸 나에게 묻다니......' 나는 순간 허탈해졌지만 지금은 내가 열 살도 안 된 애라는 걸 상기해 내고는 제법 진지하게 생각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음... 내는 보통 땅보다 밑으로 파여져 있어서 그런 거예요. 만약 내의 깊이나 옆 땅의 높이가 같다면 물은 옆으로 퍼져 버리겠지만, 내가 땅 밑에 파여져 있으니까 그 길을 따라가는 거예요." "맞아요. 그래서 물이 딴 곳으로 퍼지지 않는 거지. 진이는 정말 똑똑한 걸? 그렇게 물이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진이는 하는 운기도 사 실은 내력이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거란다. 그럼 한가지 더. 진이는 대 나무 속을 본 적이 있니? 대나무 줄기는 뻥 뚫려 있지?" "예." "대나무 막대기를 세로로 들고 위에서 물을 부으면 어떻게 될까?" "금방 밑으로 빠지지요." "그렇지? 그렇다면 만약 대나무 막대기 안에 돌들이 꽉 차 있다면? 물을 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쉬운 문제를... 엄마가 뭔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았어.' 그래도 나는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하면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는 훌륭한 엄마의 표본인 듯 내가 입을 열 때까지 참 을성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으음... 대나무 통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겠죠. 옆으로 새든가 아니면 아 주 천천히 돌 사이로 스며들어 나중에야 밑으로 떨어질 거예요." "맞았어. 정말 그렇단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진이 몸 속에 있 는 내력이 다니는 길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서 돌로 꽉 막혀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다 진이가 내력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무척 천천히 흘러가요." "그래. 진이가 하는 운기는 말이지. 그 막힌 길을 뚫으려는 목적도 있는 거란다. 그래서 그걸 오래 하면 기을 막고 있는 돌들이 다 부셔져 나가 거든? 그럼 진이의 운기 속도고 빨라지겠지?" 여기에서 이해 못한다고 하면 또 다른 설명이 이어질까 봐 나는 재빨리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서 엄마랑 아빠의 속도가 빠른 거군요?" "그래, 진이는 이해력도 빠르구나." "에헤헤헤......" "어머나, 여자가 웃는 게 그게 뭐니? 여자는 자고로 살포시 웃어야 한단 다. 소리를 될 수 있는 한 내지 말거나 예쁘게 내면서 우아하게 미소를 지어야지." "아.하.하.하... 예에......"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자, 다시 한 번 웃어보렴." '이걸 꼭 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엄마의 말은 거역할 수는 없어서 나는 그냥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씨익~ "그게 아니야. 살포시 웃어 보이라니까. 자고로 미인이란 웃는 모습도 예뻐야 하는 거란다." '거참, 미인 되기 되게 힘드네......' 생긋~ 나는 최대한 귀엽게 보이려고 노력을 하면서 입술로 곡선을 그렸다. "그래, 아까보다는 낫구나. 우아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우아한 것이 어울리지 않으니까... 좀 더 크면 연습하자꾸나." 그렇데 틈틈히 엄마에게 미인이 되는 교육을 받으면서, 그리고 언제 자 신처럼 수련하냐고 나에게 묻는 민이를 위로하면서, 너무 진도가 빨라 서 의심받지 않으려고 될 수 잇는 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치밀한 계산 하에 단전에 들어가는 마나의 양을 조절하면서 하루 종일 운기만 하는 나날이 30여 일이 되었을 때 드디어 나는 발목에 쇠고리를 차고 자연스 럽게 걸을 수 있었다. 그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성과를 보기 위하여 걷게 하였는데, 세 번째 성과를 검사받을 때는 발목에 걸린 쇠고리가 그 리 무겁지 않았건만 걷는 폼이 자연스럽지 않았는지 엄마는 다시 운기 만 하도록 고집하셨다. 그래도 그 검사 후에는 엄마가 나를 안아서 이곳 저곳으로 옮기는 대신 스스로 내가 걸어다닐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내가 네 번째 검사에서 합격하여 드디어 다른 수련도 하자는 말 을 들었을 때에는 민이도 어느 정도 단전에 마나를 모을 수 있게 되어 운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저녁마다 배우는 글공부도 기초 단계인 천자문을 드디어 다 떼어서 이 제부터는 소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우리가 어느정도 글을 읽 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아빠느 우리에게 소학 말고도 무공하는 사 람에게 필요한 기초 지식인 혈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난 그때 인간에게 수많은 혈도가 있는 것을 보고 무림인이란 마나만 많 이 모으고 칼질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어... 몸으로만 때우면 되는 줄 았았는데 머리까지 써야 하다니...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다 천재였어.' 무협지에서는 보통 주인공들이 무공 구결이나 진법 같은 건 앉은자리에 서 한 시간쯤만 하면 다 외우기에 무공을 배우는 건 무지 쉬운 줄만 알 았는데, 그게 아닌 것으로 보아 주인공들은 외우는 것에만 뛰어난 능력 을 발휘하거나 아이큐가 200정도 되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아니면 역시 현실과 소설은 엄청난 차이가 있던지...... 아빠는 서재에다가 사람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알몸으로 그려진 커다란 그림을 가져다 놓았다. 그 그림에는 사람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혈 도의 부분에 검은 점이 찍혀 있었고 그 옆에 혈도의 이름이 적혀 있었 다. 그리고 그 점의 수는 무려 100개가 넘었다. 그 그림에 서재에 붙여지는 날 아빠는 민이와 나를 서재에 불러 앉히고 혈도에 대해서 가르치시겠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사람의 몸에는 강한 곳이 있는가 하면 약한 곳이 있단다. 그리고 그 약 한 곳 중에서 맞으면 엄청난 통증이 생기게 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바 로 급소라고 하기도 하고, 혈도라고 하기도 한단다. 사람의 몸에는 수많 은 혈도가 있는데 그중에서 발견되어 이름이 붙여진 건 108개밖에 안 된다." '108개밖에에에~?' 내가 속으로 그렇게 덧붙이고 있는 사이 아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만약 너희들이 나쁜 사람들을 만나 싸우게 된다면 그때 이 혈도를 알고 있는 게 유리하지 않겠니? 같은 세기로 때린다 해도 보통의 몸을 때리 는 것보다 혈도를 때리는 것이 더 효과가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이 혈도 라는 것은 너희들이 운기할 때에 지나가는 길 중간중간에 있단다. 아직 너희들은 내력의 길이 막혀 있지?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막힌 부분이 이 혈도라는 곳이란다. 하지만 이곳은 어느 정도 타격을 주면 큰 고통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알아서 조심한다면 고통을 유발시키지 않 을 수 있지." 아빠는 말을 잠시 멈추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를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혈도들은 각각 유발하는 통증도 다양하단다. 어떤 혈도는 찍 히면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 없게 하는 한편, 어떤 혈도들은 아무런 통 증 없이도 몸의 한 부분, 혹은 몸 전체를 움직일 수 없게 하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 무공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혈도는 중요한 거야. 그럼, 우 선 너희들은 혈도의 이름과 위치를 외우도록 해라. 그리고 나중에 혈도 의 특징에 대해서 배우도록 하겠다." '으윽... 암기력을 높이는 마법을 알고 있는 게 무지 다행이었어......' 솔직히 한국에 있을 때에 소학이라는 것이 천자문 다음에 배우는 한문 책(?)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단지 옛날 조 선 시대에 있었다는 것하고, 무협지에서 가끔 주인공 글 교육시킬 때 등 장하는 책이라는 것밖에는 몰랐지, 그게 설마 공자님 말씀을 써놓은 도 덕책일 줄은 정말 몰랐다. '뭐야,뭐야,뭐야, 이게... 이 나이에 무슨 도덕책을... 그것도 읽는 것이 아니라 외워야 한다니... 차라리 탈무드가 더 낫지... 이게 뭡니까,정말.. 것도 두 권이나... 뒤에 건 공자님 말씀은 아니지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어어어......' 하지만 너무나도 슬프게도 소학만 달달 외우는 걸로 교육이 끝나는 것 이 아니었다. 이주일 뒤쯤, 민이와 내가 몸에 나 있는 혈도를 다 외울 수 있게 되자 그때무터 아빠의 혈도 강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혈도에 대해 알려주겠다. 우선 혈도란 전에 말했다 시피 우리 몸에 있는 약한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내력이 지나다니 다가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기에 혈도에는 기가 많이 모여 있어 이곳을 가격하면 기가 흐트러져 고통을 수반하거나 인 체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수 잇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곳이란다. 그리고 혈도를 내력이 지나다니는 순서로 차례로 연결해 놓은 것이 바로 기들 이 지나가는 통로, 즉 경략이라고 한단다. 경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 래에서 위로 지나다니는 내력의 길이라고 보면 되고, 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내력의 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락'보다는 '경'을 더 중요시하는데 이 '경'은 12경맥으로 크게 나뉠 수 있다. 이 12경맥은... 음, 이건 지금 필요 없으 니 나중에 가서 말해 주마." ['누나... 뭔 말인지 알겠어?'] ['대충은... 하지만 머리 아프다. 저걸 다 알고 잇는 아빠는 한의사해도 되겠다. 뭐가 저렇게 많다냐......'] ['한의사?'] ['저런 거 다 알고 저걸로 사람 몸 치유하는 직업이야. 으이고... 그나저 나 길기도 하다. 우리가 애라는 걸 잊은 거 아냐?'] ['어휴. 저걸 또 다 외워야겠지?'] ['그렇겠지... 우우... 쓰면서 들으면 안 되려나?'] 우리가 지루하다는 감정 반, 어렵다는 감정 반으로 얼굴을 서서히 찡그 리기 시작하자 아빠가 눈치 챘는지 피식 웃었다. "벌써 그걸 다 외우라고 하지 않는다. 어차피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았잖 니? 단지 대충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 말해 준 거 고, 나중에 또 설명해 줄 테니 우선은 이런 것이 있다는 것 정도로만 기 억해라. 너희들이 오늘부터 와워야 할 건 따로 있으니까. 자, 그럼 오늘 분량은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힘내고, 음... 대충 12경맥이 뭔지는 알았겠지? 이 열두 개의 경맥 중에서는 여덟 개의 경맥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단다. 이 여덟개의 경맥을 기경 여덟 맥이라고 하지. 이 기경 여덟 맥은 독맥, 임맥... 음유매긴데, 독맥은 너희들이 운기하는 그 기리 바로 독맥이란다. 그렇기에 너희들이 큰 내력을 지녀 운공을 하려면 독맥에 있는 혈을 다 뚫어야 한단다. 그리고 독맥을 다 뚫으면 임맥의 혈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의 의지로 내력을 흐르게 하는 게 아니 라 몸 스스로가 알아서 움직이는 내력의 길이란다. 그래서 임맥의 혈을 뚫으려면 많은 내력을 빠른 속도로 독맥 속으로 흘려보내 그 힘의 파동 이 임맥에까지 미치게 해서 뚫는 수밖에 없지. 그래서 내공을 많이 쌓은 사람일수록 임맥에 있는 혈을 많이 뚫을 수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임맥의 혈도를 뚫었느냐는 내공의 측도록 사용되기도 한단다." ['슬슬 지겹다.'] ['나두......'] "너희들이 처음 알아야 할 건 독맥을 이루는 혈도란다. 이제 너희들도 다 운기가 가능하니 빨리 내력을 모아 이 혈도들을 다 뚫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무나. 독맥은 전정, 뇌회, 상성... 이렇게 쭈욱 올라가서 백회혈 을 돌아 내려와... 현추, 명문, 요양관, 요유, 장강으로 끝난다. 어떻게 되는 줄 알겠지? 너희들이 운기하는 건 내가 말한 방식의 반대로 하지. 내력을 장강으로 보냈다가 다시 명문에서 백회혈 쪽으로 돌려 앞으로 내려와 단전으로 들어가니까, 알겠지?" "예!" "예!" 우리가 더 이상 설명하지 말라는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가 알아차린 듯 희미하게 웃었다. "좋다. 그럼 오늘부터는 독맥이 뭔지 외우거라." "예." "예." 혈도에 대해 외우는 건 정말 지겨웠다. 혈도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다 소 학은 정말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 나중에 실전에 사용하기 위해 수련할 때 다시 한 번 배운다는 거였다. 그러니 지금 열 심히 외워둬야 수련할 때 조금이라도 힘을 덜 들일 수 있었기에 민이와 나는 머리를 쥐어짜면서 외워야 했다. 독맥에 대해 외우고 나자 그 다음은 임맥,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실전(?) 에서 사용되는 스물한 개의 점혈(소혈-일시적인 마비나 무력함을 유발 시킴)과 서른한 개의 극혈(마혈이라고 하기도 하고 대혈이라고 하기도 함-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르는 치명적인 혈)에 대해서 배웠다. 이곳은 자신의 혈은 필사적으로 보호하며너 남의 혈을 필사적으로 찔러야(?) 하는 곳들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인체의 모든 혈을 이론상으로 달달달 외우고 있 을 무렵 어느덧 우리가 살고 있는 산은 알록달록한 예쁜 옷들을 벗고 우 아하고 순결해 보이는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런 멋진 정 경에 둘러쌓인, 평화로워 보이는 자그마한 우리 집에서 난데없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아아악~!!" "진아, 엄마가 잡고 있으니까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아주 천천히 하 고 있잖니." "하지만 엄마아아... 우으윽!!" "이건 중요한 거야. 자고로 무공이란 힘만 좋다고 다 되는 건 아니란다. 힘과 더불어 몸이 아주 유연해야 해." "아, 알고 있지마아아안... 아으으윽~!!" 뭔 소리인고 하니 엄마가 내 다리를 찢는 걸 감행하는 소리였다. 내가 무용이나 체조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비록 열 살이 안 된 몸을 하 고 있다고는 하나 태어나서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하 려니 몸이, 특히나양 허벅지 안쪽의 근육들이 아프다고 제일 비명을 지 르고 있었다. "우우우욱... 엄마, 넘 아파요오오... 쫌만 쉬었다가 하면 안 될까요?" 한쪽 발을 벽에다 대어 미끄러지지 않게 버티고 다른 한쪽 발은 엄마가 잡은 상태에서 내 몸을 받쳐 중심을 잡고 천천히 다리를 벌리고 있는데 어느 정도까지 벌어지자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엄 마가 내 몸을 내리누르면서 다리를 잡아 벌리는데 톡 까놓고 가랑이가 정말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안 돼. 한 번에 성공해야지, 실패하고 다시 하면 그때는 더 아파요. 거의 다 되었으니 조금만 더 참아라." "우우우~ 우우~ 우우우~ 우우~ 우악!!" "됐다. 이제 완전히 벌어졌어." 엄마가 기쁜 음성으로 말했지만 나는 너무나 아파서 엄마의 말이 제대 로 들리지도 않았고, 엉덩이가 땅에 닿았는지도 못 느낄 정도였다. "어우우우~ 넘 아파요오오오......"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져. 이러고 반각 정도만 버티고 있으렴." "우우우욱~" 내가 끔찍하다는 표현을 신음으로 내뱉고 있자, 옆에 서서 수련을 하고 있던 민이가 한마디 툭 내 뱉었다. "나보다는 낫구만 뭘 엄살이야?" 그랬다. 민이의 폼은 나보다도 더 힘든 포즈였다. 그는 벽에 딱 붙어 서 서 한쪽 발을 거의 일자로 세워서 벽에 기대놓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동시에 키워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민이에게 시킨 동작이었다. 그래도 민이에게 지기는 싫었던 나라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야." 그러나 유연성을 위한 수련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민이는 다리를 일 자로 벌려 벽에 기대고 반 각을 버틸 수 있게 되자 이제는 한쪽 발목에 끈을 매달아 그 끝을 천장에 있는 서까래를 한 번 돌아 다시 밑으로 내 려와서는 손으로 그 끝을 쥔 채 발을 일자로 세우고는 일각 동안 버티고 서 있는 수련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레 아니면 양발을 의자에 하나씩 걸쳐 다리의 힘으로만 몸을 지탱하게 하고 일정 시간을 버티는 수련까 지 했다. 게다가 허리의 유연성도 중요하다 하여 똑바로 선 채로 허리를 뒤로 숙여 두 손을 위로 뻗어 따에 잡아 몸으로 반원을 그린 상태에서 배 위에다가 물통을 올려놓고 반각 동안 버티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처 음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물통만 달랑 올려져 있었으나 그것 이 익숙해지자 물통 안에는 물이 들어가더니 겨울이 거의 끝나갈 즈음 에는 아빠가 그 위에 올라타서는 수련을 하고 있는 민이에게 혈도의 위 치와 특징에 대해서 질문하고는 했다. 그 모습을 보면 아빠가 사악하게 느껴지고 그 밑에서 수련하는 민이에게 동정이 가려고 했지만, 내 처지 도 누굴 동정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아니었다. 엄마는 민이가 수련하는 동안 나에게도 유연성을 위한 수련을 집중적으 로 시켰다. 게다가 온몸에 근육을 유연하게 풀어준다는, 예전 한국에서 스트레칭이라고 불리던 그런 체조 비스무리한 것을 엄마와 둘이서 민이 가 수련하는 내내 하고 있어야 햇던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근력까지 키 우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민이보다는 내가 쬐께, 아주 쬐끔 더 나았을지 도 몰랐다. 그렇게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집 안의 거실에서 땀을 흘리며 수련을 하는 동안 겨울이 물러가는 비가 내리고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새싹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무공을 배운 지 겨우 반 년 정도 지났지만, 원래 민이와 내가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반 년밖에 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놀라워할 만큼 꽤나 많은 양의 내력 을 쌓은 것처럼 되었다. 물론 우리는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최대한 조금씩 마나를 단전에 넣은 것이었지만, 원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잔돈만 사용하면 감질 맛이 나는 터라 아주 차근차근 조금씩 조금씩 가능한 한 많이 단전으로 들어가는 마나의 양을 늘려왔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엄청나게 많은 양의 내력을 모은건 아니였는지 엄마와 아빠는 우리에게 재능이 있었 다고 감탄할 뿐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아 나와 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양부모를 만나서 첫 새해를 맞은 기념으로 나는 민이와 나의 키를 1cm씩 늘려줬다. 솔직히 열살도 안 된 어린이가 평균 일년에 몇 cm씩 자라는지 모르는 나는 대충 반 년에 1cm씩 키워주려고 생각했 는데, 계산을 해보니 지금의 키가 120cm정도 였으니 15세가 되었을 때 는 약 132cm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11세 였을 때부터 두 세 달에 1cm씩 키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15세쯤 되면 140cm 쯤 되 어 있을 거고 그때부터는 좀 더 많이 씩 키워서 17세쯤에는 160cm까지 키워놓을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이곳 사람들의 평균 키 혹은 조금 더 큰 셈일 것이니 안심이지만, 만약 민이가 원한다면 170cm까지 키워줄 요량은 있었다. 단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민이와 내가 이란성이라고는 하지만 쌍둥이라서 키를 비슷하게 유지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틀려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지를 모르는 거랄까? 어쨌든 키도 1cm씩 컸겠다, 이곳에 와서 새로운 해를 맞았겠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무공 수련에 임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는 달리, 우리가 새로운 수련을 시작하게 된 건 그로부터 석 달이나 더 지나고 나서 막 여름이 시작되려 할 때부터였다. "누나, 앞,앞!!" "으응? 우악!!" 퍼억!!! 쿠당~!! "아이고오~" 커다란 나무에 정통으로 박치기를 한 나는 뒤로 나동그라져 나무와 부 딪힌 코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나무도 나와 부딪힌 것이 큰 충격이었는 지 마른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뒤에 떨어져 있던 민이가 황급히 달려왔다. "누나, 괜찮아?" "아야야야...안 괜찮아." "그러길래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신법ㅡ먼 거리를 빠르게 달리는 경공ㅡ 으로 왜 그렇게 빨리 달리는 거야? 엄마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내력을 사용하지 말고 보법ㅡ발 밟는 법. 신법의 한 갈래가 절대 아님ㅡ만 밟으 면서 갔다오라고 했잖아." 내가 나무와 부딪히는 바람에 손에서 놓쳐 저쪽으로 떼굴떼굴 굴러간 물통을 집어오며 민이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시끄러. 보법을 대충 다 외었으니까 해본 거지. 거기다가 내공을 아주 조금만 사용했다고." "그나마 내공을 조금 사용해서 이 정도였지, 내공을 더 많이 사용했어 봐. 그럼 저 나무는 물론 누나 이마랑 코도 무사하지 못했을걸? 어디, 이마 좀 봐봐?" 민이는 화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쥐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 며 살펴 보기 시작했다. "에... 그래도 까지지는 않았네. 하지만 빨갛게 부풀어 오른게... 혹이 나든지 아니면 멍들 거 같은데?" 그러더니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손을 들어 올려 슬며시 눌러봤다. "아퍼?" "당연히 아프지. 안 아플 거 같냐?" "하필이면 이마 정중앙을 부딪혀 가지고... 집에 갈 때 즈음에는 부풀어 오를 것 같은데? 그나마 코피가 안 나와서 다행이다." "쳇, 나무 하나를 피하려고 방향을 꺾었는데, 그 꺾은 방향에 또 다른 나 무가 있을 게 뭐람......" 민이의 손을 치우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마른풀들과 흙 들을 털어내며 투덜대자 민이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누나가 계속 앞을 보지 않은 탓이잖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충분했다 고." "시끄러... 참내... 무공 하는 사람들은 체조만 잘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장애물 경기도 잘해야 하잖아?" "뭐?" "아냐, 혼자말이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는 민이에게 대충 얼버무리며 나는 민이 가 가져와 근처에다 놔둔 내 몫의 물통을 집어 들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엄마는 나에게 심법과 신법을 가르쳐 주었다. 새벽이나 해질 무렵 내공을 수련할 때 아빠와 비슷한 기운이 흘 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민이도 아빠에게서 심법과 신법을 배우 는 듯 했다. 웃긴 건 엄마와 내가 한 식구임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민이 에게 자신의 절기를 전수해 줄 때 나와 엄마가 보지 않는 곳에서 하고는 했다. 의아해진 내가 엄마한테 물어보니 엄마와 아빠의 무공이 달라서 그런다고 했다. 강호에 나가면 다른 사문의 무공을 연마하거나 전수받 을 때 지켜보지 않는 게 예의라고 했다. 까딱 실수해서 보게 된다면 얼 른 그 자리를 피해야지, 안 그랬다간 친한 사이더라도 그 일로 인해 사 이가 벌어지거나 심하면 결투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도 같은 가족 끼린데도 그러는 건 좀 너무하다 싶었지만, 엄마나 아빠도 그런 면에서 는 완고한데 내가 뭐라고 말한들 들어줄까 싶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한 번 나무에 부딪히고 나자 다시는 내공을 사용하여 신법을 전개하고 픈 맘이 싹 사라져 나는 엄마가 시킨대로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발만 놀 려 자세를 잡으면서 샘물로 향했다. "누나, 내공 안써?" 뒤에서 민이가 놀리듯 묻자 이마에 힘줄이 하나 빠득 솟았다. 그런데 힘줄이 솟으면서 아까 부딪힌 근육을 자극시켰는지 상처 부위가 화끈거렸다, "시끄러워! 오늘은 됐으니까 내일 다시 할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내가 내공을 사용해서 신법을 전개한 이유는 빨리 신법 을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낮잠을 자기 위해서 였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지금 민이와 내가 물을 뜨러 가는 샘은 우리 걸음으로 집에서부터 약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가는 데 한 시 간, 오는데 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 우리가 가지고 가는 조롱바가지로 한 번 뜨기만 하면 샘의 물이 절반 가까이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줄어든 샘에서 물을 뜨면 모래가 들어가기 쉽기 때문에 한 번 뜨 고 나서 다시 샘이 찰때까지 잠시 기다리다가 또다시 떠야 하는데 그러 려면 물통 채우는데 거의 2,30분 걸리는 것이었다. 아빠는 우리에게 인 내심을 길러주기 위해서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30분 동안 쪼그리고 앉 아서 샘이 천천히 차오르는 것을 기다리는 건 꽤나 열불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더운 여름날 물통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 갈 때 최대한 빨리 뛰어가서 내 마법이나 민이의 신력으로 물통을 순식간에 채워버리고 나머지 시간을 그늘에서 쉬는 시간으로 만드는 거였다. 가는 데 한 시간, 오는 데 한 시간 걸리는 데다 물 뜨는 데 30분, 총 2시간 30분에서 중간 30분을 그늘에서 쉴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달콤한 일이었다. 게다가 한 시간 이내에 샘에 도착할 수 있는 신법을 알고 있는데 그냥 걸어간다는 건 내가 알고 있는 신법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맨 처음 신법을 좀 더 몸에 익히기 위해 민이와 함께 물을 뜨러 갔다 오라고 시킨 3일은 착실히 보법ㅡ신법을 전개하기 위한 발을 디디 는 규칙ㅡ만 밟으면서 갔다 왔으니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 오늘 처음 으로 내공을 사용하여 신법을 전개한 거였다. 물론 결과는 반쯤 가다가 나무에 한번 호되게 부딪힌 걸로 끝났지만.... 덕분에 집에 가면 또 그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은 쌍둥이면서 어쩜 그렇게 성격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니?" 민이는 좀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하라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절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좀... 뭐랄 까... 모험을 하고 싶어하는 선구자의 성격이 있다고나 할까(캬캬캬... 쳇, 알았다 알았어. 솔직히 말하지)? 엄마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청개 구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해도 호기심 을 이기지 못하고 꼭 한 번씩은 해서 어딘가 한 군데를 다쳤다. 뭐, 그래 도 이런게 바로 새로운 발명과 발견의 원동력이 되는 성격 아니겠는가 (우쒸, 알았다니까... 이말 취소할테니 그 돌 내려놔라)? 덕분에 작년 겨 울에는 어느 정도 허리와 다리의 유연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할 즈 음, 엄마가 엉뚱한 짓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놨음에도 불구하고 땅 짚고 뒤로 넘어가기 그러니까 체조 선수들이 하는 건데 똑바로 선 상태에서 허리를 뒤로 숙여 양 손으로 땅을 짚고 그대로 발로 힘껏 땅을 차서 몸 을 반 바퀴 회전시키는 것. 예전에 체조 선수들이 하는 거 보고 무지무 지 하고 싶어했었다.ㅡ한 번 해보다가 잘못해서 넘어져 손목을 접질린 적이 있었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손목에 부목을 대고 있어야 했고, 손목이 움직이지 않아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다음에 엄마가 직접 땅 짚고 뒤로 넘어가기 를 가르쳐 줬었다. 나보고 못 말린다나 어쩐다나라고 하면서 말이다(쿄 쿄쿄, 이런게 바로 학구열에 불타는... 아, 알았다니까... 그만 할께). 뭐, 그러니까 오늘 집에 가면 이 팅팅 부은 이마를 보고 엄마랑 아빠가 또 한마디씩 할거다 이 말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딱 들어맞아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또 엄마에게 한소 리 듣고는 그 다음날부터 내공을 사용하여 신법을 전개 해도 좋다는 허 락을 받았다.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으니 그동안 2시간 30분 정도 걸렸 던 시간에서 한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쳇, 나무에 부딪히지만 않았어도... 그러면 휴식 시간이 더 늘어나는 건 데......" 밤에 우리 방 침대에 누우면서 물 길으러 갔다 오는 시간이 한시간 준 거에 대해 내가 투덜거리자 민이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누나, 누나의 그런 잔머리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생각 안들어?" "우쒸,너 꼭 그렇게 애늙은이 처럼 말해야 겠어?" 내가 눈을 부라리며 민이를 보았지만, 어차피 침대에는 침대를 가릴수 있는 커튼 형식의 천이 달려 있었고, 밤에는 둘다 그것으로 침대위를 가 리고 있었기에 내가 볼 수 있는건 천뿐이었다. 민이도 그것 때문에 내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애늙은이 같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나, 내가 애늙은이가 아니라 누나가 너무 철이 없는 거야. 우리 나이 가 몇인데 그래?" "야, 우리 모습에는 내가 행동하는 게 더 어울린다는거 몰라? 네 모습으 로 그렇게 말하면 애늙은이로밖에 안 보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끄러.이제부너 말시키지마. 나 잘 거야" 내가 톡 쏘아붙이고 입을 다물자 민이도 더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녀석이 뭘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분명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젓고 있겠지. 나잇값도 못한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래, 나 이렇게 철없이 산다. 쳇....' 다음날부터 나는 내가 원하던 대로 맘껏 신법을 전개해 물을 뜨러 갈수 있게 되었지만, 소요시간을 한시간이나 줄여 버렸기 때문에 결국 내가 쉴수 있는 시간도 길어야 15분에서 20분 사이가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 았다. 이유인즉슨 아직 신법을 몸에 완전히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내공 을 사용해 봤자, 잘 응용하지는 못 하는데다 맨 처음 내공을 사용해 신 법을 전개한 날처럼 샘물로 가는 길에 있는 엄폐물(?)들을 완전히 피해 내지 못해 부딪히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내 가 배운 신법은 '교연천파'라 불리는 것으로 낮은 고도로 물 위를, 마치 물살을 쫘악 갈라 버릴 것처럼 빠르게 날아가는 제비의 모습을 본따 만 든것으로 직선 거리에서 빠르게 달리는게 장점이라 장애물을 요리 조리 피하는데는 약간 맞지 않아서 더욱더 쉽게 부딪히는 건지도 몰랐다. 그 런데 오기가 더 생기는 데다 점점 더 수련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중간에 휴식을 간절히 원하게 된탓에 -운기로 몸의 피로를 회복시킬수 있었지 만, 낮에는 검법 수련을 하느라 심법을 연마하는건 새벽과 해질 무렵뿐 이었다- 좀 더 많이 쉬려는 욕심에 무리하게 경공을 전개하다가 부딪혀 접골이나 뼈에 금이 간 정도로 크게 다친적도 부지기수 였다. 너무 심하 게 다쳐서 엄마에게 보이기도 쑥스러워 -수련을 못하게 될까봐..그럼 민이보다 뒤떨어질거란 생각에 수련을 쉬고 싶지는 않았다- 내 스스로 치유한적도 세번이나 있었다. 그때마다 민이는 나보고 이렇게 말했다. "욕심이 과해서 그래. 마음을 비우는게 어때?" "이런 욕심이 무공을 발전시킬수도 있다는거 몰라?" 내가 이렇게 되받아치면 민이가 또 되받아 치는말이 따로 있었다. "그러다가 주화입마가 들어 인생 망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지?" 맞는말이었지만 여기서 무너질수는 없었다. "사람이 때로는 모험을 감행할 줄도 알아야지. 가끔은 이런 대범함이 있 어야 큰걸 얻을수 있는 법이야." "큰걸 얻으려고 위험을 감수 하느니 차라리 포기하고 말겠다." "그게 바로 영웅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점이지." 대충 이 정도의 선에서 민이가 뒤로 물러나는것으로 대화가 끝을 맺고 는 했지만, 어지간히도 누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건 내스스로도 잘 알 았다.그래도 내 성격이 이러는 걸 어쩌겠는가? '혹시 알아? 이 성격으로 정말 큰걸 하나 얻을지....' 그렇게 민이와 투닥거리며, 그리고 엄마의 잔소리와 아빠의 피식거리는 웃음을 보며 몇 달이 지나자 나는 드디어 한번도 안 부딪히고 샘물을 떠 올수 있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과에 힘입어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간격이 이틀에 한번, 사 흘에 한번으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일주일 내내 한번도 안 부딪히고 무사히 돌아오자 엄마가 기특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갔다오는 시간에서 이 각(30분)을 줄이도록 하마." "예에?" 너무나 갑작스런 날벼락이라 얼이 빠진 내가 되묻자 엄마가 슬며시 시 선을 돌렸다. 하지만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냉혹하기 그지 없 었다. 아마도 평소 너그러움을 왕창 선사하던 엄마가 이렇게 비정하게 나오기가 힘들었을테니 시선을 돌렸겠지만, 그래도 너무한건 너무한거 다. "이제부터 검법을 배우기 시작할텐데 신법 수련에 너무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지. 게다가 검법을 연마하는 동시에 보법-서 있는곳에서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자신의 공격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일정공간에 중점을 둔 경공-도 같이 배워야 할텐데........" "으윽...." "알았지?" "예에......" 나는 어쩔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대답했다. 하기 싫어서 대답을 얼버무릴 때 엄마는 그냥 넘어가 주는법이 없었다. 평소에는 칼같다가 결정적일 때 민이와 나의 애교에 어쩔수 없이 넘어 가 주는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항상 호탕하면서 이럴때는 맺고 끓는게 너무 칼 같아서 확실한 답을 할 때까지 계속 재차 묻곤 했다. 게다가 엄마가 재차 물으면 물을수록 엄마의 표정은 살벌해 졌으니 그 살벌한 시선을 감당하느니 재빨리 엄마가 원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 훨 씬낫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 다음날부터 엄마의 검법과 보법, 그리고 거기에 하나 곁들여서 지공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산 중턱에 있는 집에서 살기 시작한후로 두 번째의 새해를 맞은 뒤의 봄날이었다. 엄마의 검법은 소검만환식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었는데, 보통의 검 -아빠도 가지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길이가 대충 일미터는 되어 보인다 -의 절반정도 되어 보이는 소검-단검이 아님-을 하나 사용하는데 보통 검을 잡을 때 상대편쪽으로 검날이 가게 잡는것에 비해 이 검법에서는 검을 거꾸로 잡아 검날이 내쪽으로 오게 해서 사용하는게-물론 항상 그 런건 아니다. 바로 잡아서 사용하는 초식도 있다-특징이었다. 그래서 횡으로 베는 것과 내리찍는것에 유용할 것 같지만, 실은 이 검법의 대부 분의 초식은 방어위주였다. 검을 거꾸로 잡기 때문에 항상 사선으로 검 을 사용하게 되어 상대방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내기에 쉽고, 또 초식의 대부분이 사량발천근-150그램의 힘으로 600킬로그램의 힘을 발휘한다 는 무공, 상대방의 공격의 방향을 바꾸는데 많이 사용-을 응용한것이었 다. 거기다가 중점을 두는 것이 유검(부드러운검)과 환검(변화 무쌍한 검)-오죽 했으면 검법이름이 만환(만가지 변화)이겠는가?-위주였기에 초식이 무척 화려하기도 하여 어떻게 보면 마치 검무를 추는 것 같아 보 이기도 했다. 하지만 완전히 습득하지 못해도 웬만한 공격은 다 막아낼 수 있고, 극성으로 익힌다면 못 막아낼 공격이 없다고 자랑하는 엄마를 보니 검법에 대한 자긍심이 꽤나 높은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엄마 정도의 고수가 자랑스레 여길 정도라면 뛰어난 검법 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검법이 수비 위주이기 때문에 여기에 공격을 보완할 지공이 필 요했던 것이다. 그 이름하여 '옥잠지'라고 이름 붙은 이 지공은 손가락 끝에서 내공이 튀어 나가는 시점에 하얗고 가느다란 빛줄기를 형성하여 날아가는데 마치 옥비녀의 모습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지공 은 익히면 익힐수록 빛줄기는 점차 가늘어지고 극성으로 익히면 바늘처 럼 가늘어 진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보니 옥비녀가 아니라 마치 혜성을 작게 축소시켜 놓은것만 같았다. 그러나 가늘다고 위력이 약한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가늘어서 암기처럼 적이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 이에 적을 쓰러뜨릴수도 있는 무서운 지공이었다. 뭐, 사족이긴 하지만 엄마의 심법인 옥녀신공으로 인하여 새하얀-피부가 하얗다 못해 투명 해지는 것이 엄마 심법의 특징이다.그래서 이름이 '옥녀' 인지도... -손가락에서 하얀 빛줄기가 뻗어 나가는건 어찌보면 무지 잘 어울리는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각법(발차기)과 권법도 같이 배웠다. 엄마의 검 법은 소검을 사용하는거라 아무래도 보통 검을 사용하는 사람들보다는 적과의 거리가 짧았던것이었기에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기 좋은 지공보 다는 근거리에서 싸울수 있는 권법과 각법이 소검마환식과 더 잘 어울 렸던 것이다. 게다가 권법은 양손을 사용했기에 그에 따라 검법도 양손 중 어느 손으로도 펼칠수 있게 수련했다. 그런데 수련의 성과인지 나는 내 감각이 점점 더 예민해 지는 것을 느꼈 다. 뭐 오감은 원래부터 사람보다 뛰어난 거였으니 그건 둘째 치고라도 예전에는 내가 주위의 마나 흐름이나 멀리있는 마나덩어리, 그러니까 에너지 덩어리인 생명체를 느끼려면 눈을 감고 집중한채 내 마나를 몸 바깥으로 흘려보내 주위의 마나와 부딪치는 느낌을 가지고 알아채거나 아니면 마나 탐지 마법을 써야만 알아낼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마치 예민한 사람이 산들바람이라도 쉽게 느끼는것처럼 문득문득 주위의 마 나 흐름이 쉽게 느껴지곤 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터라 처음에는 바람인가 했었지만, 엄마와 가볍게 대련할 때 엄마의 공격과 함께 나에 게로 쏘아져 오던 마나의 기운이 너무나 확연하게 느껴져 너무 놀라는 바람에 공격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내가 문득문득 느껴지던 것이 마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무공 의 대련에 있어 상대방의 공격이 있을 때 마나의 흐름이 자연에서 흐르 는것과는 달리 날카로워 져서 나에게 쏘아져 온다는것까지 더불어 깨닫 게 되었다. 무공에서는 그것이 바로 투기(싸울 때 나타나는 기 )를 느끼 는 단계라나 뭐라나....... 그런데 내가 엄마가 공격할 때 나에게 기운이 쏘아져 오는 것을 느낀다 고 엄마에게 말하자 엄마는 무척 놀라워 했다. 보통 이런건 무척 강한 살기부터 느끼기 시작해서 점점 더 익숙해지고 예리해진 다음 나중에 투기를 느끼는 거라는데 나는 그런걸 다 건너 뛰었기 때문에 엄마가 놀 라움을 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잠깐, 세상에는 이해할수 없는 일 이 많았기에 엄마는 단지 내가 기에 예민한 체질인가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수련하는 종종 아빠의 지도 하에 명상 까지 하게 되었다. 기를 느끼게 하는 감각을 더 예리하게 키우기 위해서 라나? 그런데 이 명상이라는게 눈을 감아 세상과 단절한채로 마음을 비우고 자연을 느껴보라는건데 솔직히 이제 겨우 열한살이 된 애한테-검술 수 련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난 때였다-가만히 앉아 있으라는건-명상하라는 것이 나에게는 이렇게 하라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한다고 반박을 하 다가 민이까지 명상을 하게 되어 민이의 원망까지 받게 되었었다. 원래 는 민이도 명상을 해야 했지만 아직 민이는 나처럼 기를 예민하게 느끼 는 단계가 아니었기에 하려고 해도 그건 나중의 일이 었지만, 나 혼자 시키면 제대로 안 할거라는 부모님의 생각에 의해 어거지로 민이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안해애애...설마 널 끌어 들일줄은 몰랐어어어......."] 맨처음 명상하는날...... 왜 명상은 꼭 폭포 앞에서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폭포는 자연에서도 엄청난 기의 파동을 내뿜기 때문에 기를 더욱 잘 느낄수 있다나 어떻다 나(설명해 줬지만 잘 모르겠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어쨌든 아 빠가 숲을 뒤지고 뒤져 찾아낸 골짜기의 멋진 폭포 앞에 있는 널찍한 바 위 위에 앉아 명상을 시작할 때 나는 민이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민이는 감히 부모님께 불평하지 못하고-녀석은 고지식해서 그런 걸 못 한다. 그럼 잘 바락바락 대드는 난 뭐지?-나에게만 불만 어린 시선을 잠 깐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는데 그게 나의 여린맘에-우웩. -걸려가지고 편치 않았던것이다. ["됐어.어차피 나도 할거 였다며?"] ["그래도....."] ["됐어.아버지 말씀대로 미리 한다 생각할 거야.그나저나 누나는 대단 하네?벌써 그런걸 느끼고 말야."] ["기의 흐름이야 예전부터 느낄수는 있었어. 이래뵈도 나는 너보다 100살은 더 먹었다고. 단지 이렇게 예민하게 느끼지는 못했거든.아마 이게 수련의 성과 인가봐. 무공이라는것이 기의 싸움에 사용하는 거잖 아."] ["흐음...누나 말이 옳을 지도....'] 그 뒤로 민이가 무슨말인가를 더 하려 했지만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 자 얼른 메세지 보내는 것을 중단했다. "딴 생각하지마라. 그냥 마음을 편안하게 한 채 기운을 느껴보는 거야. 진이는 느낀다니 자연속에 흘러가는 기운을 찾아 보렴. 그리고 민이는 아직 그런게 힘드니까 바람의 흐름을 느껴 보든지 새소리에 귀를 기울 이던지,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서 집중해 보렴." ["폭포 앞인데 새소리는 무슨...."] 내가 투덜거리는 메세지를 보내자 민이가 피식 웃는게 느껴졌다. 비록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민이에게서 아주 가볍고 부드러운 마나의 기운이 흘러 나왔던것이다. 멀리 있었으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나와 민이가 나란히 앉아 있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곧 조용히 하고 아빠가 시킨대로 하기 시작 했다. 폭포 앞이라서 그런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참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차가운 자잘한 물방울들이 폭포가 떨어지는 힘에 의 해 우리가 앉아 있는곳까지 튕겨 나와 우리에게 부딪히곤 했다. 그 차가운 물기를 느끼면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주위의 마나 흐름을 느 끼는데 정말 폭포가 떨어지면서 기의 파동이 강하게 뻗어 나오는지 내 주위의 마나가 폭포에서 부터 강하게 밀려 나와 위로 상승하는것이 느 껴졌다.그런데 재미있는건 폭포에서 부터 공기 또한 마나와 같이 흐르 는 거였다. '헤에...보통은 공기와 마나의 흐름은 다른데 말야... 하지만 저 폭포가 공기와 마나를 같이 밀어내서 그런가 보지? 그럼 평소 움직이는 것도 그러는 걸까? 흐음....하지만 엄마가 나에게 공격을 할때는 공기가 엄마 에게 밀려 옆으로 퍼져 갔지만 마나는 나를 향해 쏘아져 왔지. 그럼 그 건 어떻게 되는 걸까? 우웅... 엄마와 폭포의 다른점은 뭐지? 우선... 엄 마는 살아 있고 폭포는 살아 있지 않다. 그리고....아하, 엄마가 공격할 때는 '나'라는 목표가 있어서 엄마의 마나가 나에게 쏘아져 온 거고, 폭 포는 아무런 목표가 없으니 마나 또한 목표에게 날아갈 필요가 없었구 나. 우웅.... 뭔가 알 듯하기도 하고.... ' 오랜만에 아주 심오한 고민에 빠져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공 중에서 뭔가가 나에게 쏘아져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딴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갑자기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마나 의 흐름이 약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단지 나에게만 떨어져 내린다 는 생각에 다급해져서 황급히 눈을 뜨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우아아아악~!!" 그리고 어느때라도 항상 침착할수 있는것이 유리하다는 걸 몸소 체험했 다. 당황하는 바람에 내가 폭포에서 흘러 나오는 냇가의 옆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는걸 깜박 잊고 몸을 굴리다가 갑자기 몸을 받쳐주던 바위 의 느낌이 사라졌다는걸 깨닫자 마자 또 한번 비명을 지르며 그 차가운 냇물에 풍덩 빠졌던 것이다. "우갸갸갸~!!" 풍덩!! "진이야!!" 뒤에서 우리와 같이 명상에 잠겨 있던 아빠가 놀라서 날 부르며 달려 왔 다. "아구구구구~~~~~~~~!!!!!!!" 다행히 물은 얕았지만, 덕분에 물밑에 있는 돌에 호되게 몸을 부딪혀 정 신이 헤롱거렸으나 물이 너무 차가워져서 금방 정신을 차릴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자 마자 제일 먼저 날 반겨준건 갑자기 엄습하는 추 위였고, 그 다음이 내 몸을 건져 내는 아빠의 손길이었다. "진이야, 괜찮아?" "우우우....다다다닥....." 무슨소리인고 하니 너무 추워서 입술이 안 움직여져 말이 제대로 나오 지 않는 거였고, 그 다음은 추워서 이빨을 부딪치는 소리였다. 아빠는 나를 보더니 더 묻지는 않고 황급히 내 온몸을 문질러서 더 이상 열을 빼앗기지 않게 했다. 하필이면 지금이 봄이라서 햇볕은 따뜻했지만, 아직 날씨는 수영을 하 기에는 추웠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날 얼음보다 더 차가운 계곡물에 온 몸을 던졌으니... 아빠는 재빨리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나에게 씌워주었 다. 그리고 민이도 달려와 아빠와 합세하여 열심히 내 몸을 문지르자 잠 시 후 드디어 제 체온을 되찾은 나는 제대로 된 말을 할 수있었다. "으...추워... 에, 에, 에취~!!" 내가 드디어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아빠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갑자기 비명을 지르다니..." 그러자 민이도 덩달아 물었다. "누나, 혹시 졸다가 악몽이라도 꿨어?" "에취~!! 훌쩍... 야, 말을 해도... 어떻게 졸았다고 말을 할 수가 있냐? 훌쩍, 나는 단지 나에게 떨어져 내리는 기운을 느끼고 놀라서 피한 거라 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떨어졌다고?" 내 말에 아빠가 다시 한 번 되물으며 고개를 돌리자 민이와 나도 아빠를 따라 내가 앉아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시 선에 답례를 하고 있는 건... "새...똥?" 그랬다. 아직 식지 않아서 따끈따끈 한 김이 올라오는데다 위에서 떨어 져 내리느라 본래 자신의 모습을 잃어 납작하게 되어버린 하얀 새똥이 었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동시에 감히 내 머 리 위에다 실례를 한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는 새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 다. "아니, 어떤 놈의 새가 나에게 똥을 싼겨? 당장에 잡아서 구워먹어도 시 원치 않을 새 녀석같으니라구우우~!!" 분을 이기지 못해 벌떡 일어나서 허공을 향해 소리소리 지르자 민이가 크게 웃어 젖혔다. "푸하하하, 새똥이래... 새똥... 큭큭큭큭... 누나에게 똥을 싸는 간덩이 가 부은 새가 있었다니이이... 큭큭큭... 그나마 다행이었네? 누나가 피 하지 않았으면 새똥을 맞았을 거 아냐? 하하하~" "웃지 맛!! 민이 녀석에게나 싸지 왜 나한테 싸는 거야?! 너, 웃지 말라니 까? 가만 안 둔다?" 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계쏙 웃는 민이 녀석에게 화가 나서 주먹을 날 리려는데 아빠가 나를 제지했다. "잠깐만, 진이야?" "왜요, 아빠(민이는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나는 친근하게 아빠, 엄마라고 불렀다. 역시... 내가 철이 없는 건가?)?" 설마 같은 남자라고 민이의 편을 들어주시는 건 아니겠죠? 라는 시선으 로 아빠를 바라봤지만 아빠는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신건지 진지한 눈으 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말이다, 아까 새똥이 떨어지는 걸 어떤 기가 너에게 떨어진다고 느 꼈지?" "그, 그랬죠... 그게 새똥인지는 모르고 놀라서 피했지만..." 또 그 창피한 일을 왜 꺼내는가 싶어서 아빠를 원망스레 바라보는데 아 빠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네가 느낀 그 기운이 강한지 약한지는 못 느꼈니?" 웃으면서 말했으면 꼭 놀리는 것 같았겠지만, 아빠가 너무 진지한 표정 이어서 나는 덩달아 심각하게 아까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으음... 그냥요, 나에게 떨어져 내리기에 너무 놀라서 피하는 것만 생각 했지, 그 기운이 어떤 건지 자세하게 느낄 생각은 못했어요. 금방 그 기 운에 맞을 것만 같았거든요." 아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젖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대단하구나. 네 엄마에게서 말을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예리 할 줄은 몰랐는걸? 자, 우선 집에 가서 몸을 말리고 옷부터 갈아입자꾸 나." 그리고는 아직도 바위 위에 주저앉아서 실실대고 웃는 민이를 향해 말 했다. "민아, 오늘은 이만 할 테니 그만 웃고 일어나거라."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일어났지만 얼굴 한가득 있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는 민이에게 '좀 있다 보자' 라는 눈길을 보내고는 아빠에게 안겼다. 내가 갈 수도 있었지만, 지금 경공을 전개해서 집으로 돌아갈거라 아빠 가 더 이상 내가 춥지 않게 나를 안고 가려는 거였다. 뭐, 내가 심법으로 내공 수련을 시작한 지 벌써 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운기를 하면 이 정 도 젖은 건 괜찮겠지만, 아빠 마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나도 뭐, 아빠 품에 안겨 집에 가는 게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생 각보다 좀 세게 냇가 밑의 바위와 조우한 모양이었다. 아까는 젖어서 몰 랐는데 옷도 조금 찢겨 있었고, 손과 얼굴은 긇힌 데다가 오른쪽부터 부 딪혔는지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쯧쯧,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얼굴은 보호했어야지. 여자는 얼굴이 생 명인데... 긁힌 정도라 흉터는 안 남겠지만, 심한 상처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니? 다음부터는 얼굴만은 꼭 감싸도록 해라." 엄마가 내 몸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준 뒤 약을 바르며 하는 말이었다. 왠지 이 상황에서 안 어울리는 말같았지만, 엄마는 내 외모 가꾸는데도 지대한 관심을 쏟았기에 나는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진지 한 표정으록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안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런고로 몇 년 동안이나 수련만 하고 있 을 수는 없었다. 우리도 먹고 입고는 해야 하는데, 그런 데는 다 돈이 들 어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엄마, 아빠의 지도를 받는 시간이 점점 줄어 들면서 아빠와 엄마는 지니고 있는 돈이 거의 다 떨어졌는지, 아니면 미 래를 생각한 건지는 모르지만 사냥을 하거나 산나물, 도라지 등을, 그리 고 운이 좋으면 약초까지 캐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도 열세 살이 되 던 해부터 부모님과 같이 산행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예전에는 도라 지와 고사리밖에 모르던 내가 이제는 취나물, 산나물, 돌나물, 씀바귀는 기본적으로 알았고, 몇 가지 약초도 구분할 수 있게되었다. 그렇게 모아놓은 산나물과 사냥된 동물의 고기는 우리의 반찬이 되었고 , 약초와 동물의 가죽, 뼈, 뿔 등은 한 달에 한 번씩 근처 성(광동성)으로 가서 팔곤 했다. 민이와 나는 몇 년 동안은 얌전히 산속에서 수련에만 힘 쏟으며 살고 있었지만, 원래 목적이 이 세계를 구경하고자 하는 것이 었으므로 5년이 지나고 6년이 지나자 아빠가 산을 내려갈 때면 따라가 고 싶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특히 내가...). 그래서 그때부터 틈 만 나면 조르기 시작하여 1년 동안 아주 끈질기고 끈질기게 조른 탓에 드디어 동행을 허락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오늘... 민이와 나는 새벽 수련을 마치자마자 아침 식 사를 먹는 둥마는 둥 재빨리 끝내고 산을 내려갈 차비를 서둘렀다. 오늘 이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빠가 산을 내려가는 날이었던 것 이다. 그리고 오늘은 아빠에게 두 혹(?)이 붙었기 때문에 특별히 엄마도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엄마도 오랜만의 외출에 들뜬 모양이었다. 그동안 집에 있을 때는 안하 던 화장을 가볍게하고 머리에도 그동안 잘 꽂고 다니지 않던 비취 장식 이 매달려 달랑거리는 은비녀를 꽂고 새하얀 속치마와 잘 어울리는 하 늘색 겉옷을 입고 짙은 파란색의 띠를 둘렀다. 그리고 나와 민이에게는 머리를 깨끗이 빗겨주더니 평소 입던 두꺼운 무명옷을 벗기고 화사한 연두색 옷을 입히고 초록색으로 띠를 매주었 다. 그러자 아빠도 우리에게 맞춰 입으려는 듯 청색 장포를 꺼내 걸쳤 다. 이로써 준비는 끝. 오늘 집을 나서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3일 후에는 돌아오게 될 것이었 다. 마지막으로 내 침대 주위에 쳐놓았던 결계와 마법을 지우고 내 몫의 짐 꾸러미를 어깨에 걸친 다음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호남성은 이곳에서부터 걸어간다면 이틀 혹은 3일 정도 걸리는 거리였 지만 우리는 오늘 안에 성까지 도착해야 했기에 아빠는 집을 나서자마 자 경공을 전개하며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우리도 곧 뒤따랐다. 우 리의 경공 실력이라면 오늘 저녁에는 틀림없이 성에 도착할 거고, 그럼 그때부터 이곳 구경이 시작되는 거였다. 남대문을 양옆에서 밀어붙여 넓이를 축소시킨 겉 같은 모양의 광동성 문 앞에는 10명정도 되어 보이는 이곳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오가 는 사람들을 검문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얼마 쯤 걸어가자마자 길거리에 물건을 내놓고 팔고있는 사람들이 시내일 거 라 짐작되는 쪽으로 드문드문 늘어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물 건을 홍보하고 있었다. 이 세계로 와서 이 정도로 큰 성안으로 처음 들어오는 데다 노점상들이 늘어놓고 파는 물건들 또한 처음 보는 것들이라 흥미로워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아빠가 눈길도 안 주고 큰길을 따라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 했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빠를 따라가야했다. 하지만 길거리에 잇 는 물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아 빠의 낮은 음성이 우리의 귓가에 들려왔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구경하거라." 아빠 눈치는 정말 귀신같았다. 우리가 아빠의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리자 뒤에서 따라오던 엄마가 쿡쿡 웃으며 우리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자, 저녁 먹을 시간이란다. 더 늦으면 배가 무척 고플 거야." 아빠는 시내 쪽으로 얼마를 더 들어가더니 '청풍객점'이라고 쓰인 객점 을 발견하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분주히 오가며 일하고 있던 점소이 한 명이 잽싸게 달려와 인사를 했다. "어서옵셔!!" 시간이 저녁때라서 그런지 객잔은 벌써 절반 정도가 차 있었다. 아빠가 그중 빈자리의 탁자 하나를 선택해 자리에 앉자 그 뒤를 쫄랑쫄랑 따라 가던 우리 셋도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소이는 재빨리 탁자 위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마른 수건으로 한 번 훔치고는 차가 들어 있음직한 자기로 된 주전자를 하나 가져왔다. "뭘로 드릴깝쇼?" 아빠가 대답하는 대신 엄마를 쳐다보자 엄마가 그 시선에 응하여 즉각 입을 열었다. "닭고기 국수 4개하고 고추잡채, 물만두 2접시... 음... 승랑, 더 시킬 것 있어요?" 엄마가 아빠에게 묻자 아빠가 점소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리 통구이 하나와 죽엽청 한 병도 추가해서 가져다주시오." 점소이가 주문을 받고 가버리자 아빠는 우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내 볼일을 보러 가서 오후에나 돌아올 것이다. 그 러니 그때까지 엄마와 함께 성안을 구경하고 있거라. 그리고 이왕 온 식 구가 여기까지 온 것, 내일 저녁을 이 성에서 유명한 음식점에 가서 먹 자꾸나." 그 말에 민이와 나는 한 목소리로 기쁘게 대답했다. "예!!" 저녁을 먹고 나자 우리는 딴 데로 갈 것 없이 그 객점에서 방을 잡고 묵 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 묵은 방에서 가볍게 운기조식을 하고 나 서 아침을 먹자 아빠는 볼일을 보러 간다는 말과 함께 우리보다 먼저 객 점을 나섰다. 우리 셋만 남게 되자 엄마는 생긋 웃으며 민이와 나를 돌 아보았다. "자, 그럼 우리도 가볼까?" 엄마도 오랜만에 멀리 성까지 왔으니 살려고 마음먹은 물품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우선은 식구들의 옷과 신발을 사더니 몇 가지의 생활용품들 과 양념들을 사고 마지막으로 장신구를 파는 가게에 들렀다. 화장이 진한 주인 여자가 지키고 있던 그곳에는 여자들을 위한 수많은 장신구와 화장품을 팔고 있었다. 거기에서 엄마는 몇 가지 자신의 화장 품과 패옥을 사더니 연두색의 비단 머리끈 두 개를 사서는 나에게 쥐어 주었다. 중국의 고대 장신구들과 화장품들은 모두 처음 보는지라 나도 엄마 못 지 않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여기저기를 구경하는데, 이런 데는 도통 관심 없는지 한쪽 구석에서 멀거니 엄마와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민 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하다가 나에게 얻어맞 았다. "여자들이란......" "짜식이... 하여튼 맞을 말을 골라서 한다니까." 나에게 정강이가 차여 팔짝팔짝 뛰던 민이는 내 말에 쀼루퉁한 얼굴로 반발하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엄마와 나는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를 싸악 무시해 버렸다. 그렇게 엄마와의 쇼핑이 끝났을 즈음, 우리는 길거리에서 파는 호떡, 꿀 떡 꼬치, 만두, 국수 등등 맛있어 보이는 군것질거리들을 한번씩 섭렵하 면서 돌아다니다가 정오가 훨씬 지나 객점으로 돌아와 아빠를 기다렸 다. 우리가 시간을 잘 맞췄는지, 아빠는 우리가 객점에 도착한 후 잠시 후에 돌아오셨는데 손에는 검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아빠의 허리에는 검이 차여져 있었는데 또 검 두 개를 들고 있어서 의아해하며 바라보고 있는 데 아빠가 우리가 앉아 있던 탁자로 다가오자마자 그 검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바라보니 하나는 보통 장검이고 나머지 하나는 장검의 절 반 길이밖에 안 되는 소검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빠에게 시선을 돌리니 아빠가 옅게 웃으면서 그 검들을 우리 앞으로 밀어주는 거였다. "너희들의 열다섯 살 생일 선물이다. 이제 너희들도 어느 정도 검술의 경지에 올랐으니 진검을 가질 때가 되었다 생각하여 여기 오기 전에 너 희 엄마와 의논해서 마련해 주기로 결정했었단다." 놀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검을 집어 들어 검집에서 검을 빼어보니 붉게 물든 저녁 노을에 검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비록 예전 세계에서 가지고 있었던 미스릴 검보다는 못한 철검인데다 검집이나 손잡이도 아무런 무 늬가 없는 밋밋한 검은색이었지만 드디어 목검 대신 진검을 가질 수 있 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그리고 이것은 검을 가르쳐 준 스 승에게서 진검을 가질 수 잇는 능력이 되었다는 걸 인정받은 것이었기 에 뭔가 뭉클하고도 뿌듯한 감동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올랐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민이도 감격했는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어 감사를 표하자, 그제야 나 는 아직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너무 기뻐요, 아빠.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들이 기뻐하자 부모님도 기쁜지 흐뭇한 미소를 주고받더니 곧 아빠 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생일 잔치를 하러 갈까?" 그러고 보니 민이와 나는 잊고 있었지만 바로 며칠 전이 부모님이 지정 해 준 우리 둘의 생일이었었다. 우리는 깜빡했어도 부모님은 기억하고 있었던 듯해서 우리는 더욱더 감동했다. 아빠의 뒤를 따라간 그 음식점은 제법 큰 곳이었다. 3층짜리의 큰 건물 을 모두 다 차지할 만큼 큰데다 멋들어진 흘림체에 금박까지 입혀서 삐 까뻔쩍했다. 우리는 그 건물 중 이층으로 올라갔는데 아직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불 구하고 좋은 자리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구석에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무엇을 드릴까요, 손님?" 확실히 큰 음식점의 점소이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우리거 머물고 있던 객점의 점소이보다 훨씬 깔끔한 옷차림과 정중한 몸짓과 말투를 보고 있자니 점소이란 이래야 한다는 표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이곳을 처음 와서 그러는데, 괜찮은 것을 소개에 주겠소?" 점소이는 잠시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아빠의 요청에 즉각적으 로 입을 열었다. 그걸 보면 이런 요청을 하는 사람이 꽤 있었던 것 같았다. "광동성을 찾으셨으니 광동 요리의 진미를 맛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사오(구운 돼지고기)와 피옌피루주(어린 통돼지구이), 구라오러우 (광동식 탕수육), 사오마이, 차오핀, 호황봉조(닭발 요리) 정도가 타지 에서 오신 분들이 즐겨 찾으시는 광동 요리 중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 다. 그 밖에도 진짜 광동의 진미라고 할 수 있는 뱀, 개구리, 개 물방개 등으로 만들어진 요리가 있는데 맛보시겠습니까?" 처음에는 점소이의 말을 반짝이는 눈으로 듣던 엄마와 민이는 끝에 가 서는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 모습에 아빠가 한 번 가볍게 웃더니 점 소이에게 말했다. "광동의 참 진미까지 먹기에는 우리의 식사 양이 적으니 타지 사람들이 흔히 찾는 요리만 가져다주게나. 아, 그리고 선양주-소홍주 중에서도 고급 술-도 한 병 가져다 주게. 이곳까지 왔으니 선양주도 맛봐야지." 점소이가 주문을 받고 가버리자 엄마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며 입을 열 었다. "광동에서는 별별 이상한 걸로 요리를 만든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 군요." 그러자 아빠가 가볍게 웃으며 반박했다. "하지만 뱀이나 개구리는 다른 지방에서도 먹지 않소?" "그야 그렇지만... 여기서는 고양이도 먹는대요." 뭔가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듯 엄마가 목소리를 살짝 낮춰서 말하자 민 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정말 먹나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자 아빠가 무 마하려는 듯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며 얼버무렸다. "글쎄다... 그런 소문을 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확실히 모르겠구 나." 그러자 민이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으으... 그건 거짓말일 거야. 어떻게 고양이를 먹을 수 있지?" 민이가 끔찍하다는 듯이 몸서리까지 치자 나는 그 모습이 순간 한심해 보여서 심드렁하니 말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 어떤 데는 원숭이도 먹구, 지렁이도 먹을......"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식구 전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는 것을 느 끼고 나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먹을지도 모르잖아.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말야... 가끔은 괴상한 곳 도 있으니까... 혹시 알아? 사람을 먹는 곳도 있을지......" 그러자 엄마가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진아, 여자애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아니요, 저는 그냥......" 내가 찔끔하며 입을 다물자 민이가 머리속으로 물어왔다. ["누나, 그거 누나가 살던 곳 이야기야?"] ["아니, 이곳 이야기지."] 그렇게 대답해 주며 민이를 살짝 쳐다보자 민이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이구, 여린 척하기는......' 나는 민이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음... 그러고 보니, 이곳에선 용의 살을 먹으면 무병장수하거나 내공 이 급진적으로 발전한다는 이야기가 있던 것 같은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이가 굳어져 버렸다. '캬캬캬... 난 넘 사악한 거 같아......' 그리고는 민이에게 한 마디 더 해줬다. ["확실한 건 아니야."] 내가 그렇게 민이를 놀리고 있을 즈음 음식점 안으로 또 한 부리의 사람 들이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더니 우리의 옆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도 무공을 익혔는지 각자 검과 도 같은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식당 안은 제법 시끌벅적했지만, 그들의 자리가 바로 옆자리인데다 우리의 청력이 뛰어난 편이었으므로 가만히 있는데도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렸 다. "이보게, 자네 이번에 호남성엘 간다지?" "호남성? 이 사람 아직도 옛날 생각하고 있나? 호남성이 어니있나? 얼 마전에 호남하고 호북하고 합쳐서 호광이라고 하잖아. 내가 내일 가는 곳은 호광성이라구." "아아, 그래, 그래... 호남성이든 호광성이든 거기가 거기 아닌가? 하여 튼 며칠 내로 그곳에 가기는 가잖아." "그렇지. 나 말고도 이 사람하고도 같이 가지. 호광성 성주님이 칠순이 라더구만. 하여튼 호광성은 이번에 더욱더 시끌벅적할 거야. 그렇지 않 아도 성주님 생일이 중추절하고 겹친데다가 이번에 자신의 아들에게 성 주직을 물려준다고 하더군. 그러니 올해 호광성에선 중추절을 다른 때 보다도 더 크고 화려하게 보내게 될 거야." 그러자 그동안 조용히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뭐 하나, 우린 나리 경호하느라 구경도 못할 텐데... 쳇, 여기 있 었으면 중추절날 집에 가서 마누라 얼굴 좀 볼텐데, 호광성 가느라 몇 달은 또 집에 못 들어가게 생겼잖아." "그렇구 말구. 자넨 호위에 안 뽑힌 게 천운인 줄 알라구." "하하하, 그렇게 되나? 그래도 자네들이 호위에 뽑힌 건 그만큼 자네들 실력이 인정받았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게 우거지상을 하지 말고 한 잔하세나. 어이, 이봐?" 그 뒤로는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 나 민 이의 시선이 아빠에게로 쏠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차마 아빠 에게 뭐라 말하지는 못하고 눈짓으로 나를 재촉했다. "아빠아아아∼" 나는 최대한 귀엽게 아빠를 불렀다. 그러자 아빠가 흠치거리며 나를 바 라보았다. "왜, 왜 그러니?" "저기요오오오, 아빠아아∼? 진이느으으은 중추절에에에 계소옥 집에 마안 있었는데에에∼ 진이도오오 중추절에에에 마을에에 내려가서어어 놀고 시포요오오오∼ 이왕이며어어언, 아주아주 크으으으게 중추절으 으을 지내느으으은 고오오옷에 가보고 싶은데에에에∼" 최대한 말을 아주아주 늘려서 말하자 아빠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아빠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민이의 옆구릴 살짝 콕 찌르자 민이가 싱긋 웃으면서 내 말을 받았다. "이왕이면 호광성 같은?" "바로 그거야, 한 번 가보면 정말, 저어어어엉마아아알 좋겠다. 그치?" "응... 나도 지금까지 중추절을 어떻게 보내는지 몰라서 말야... 중추절 이라고 해도 계속 집에서 수련만 했는걸......" 엄마까지도 우리말을 거들고 나섰다. "중추절은 춘절과 원소절 다음으로 큰 명절이라서 하는 게 많단다. 밤에 는 촉죽도 터뜨리고 경극도 많이 하고 말이지. 큰 성 같은 데서는 광대 들도 많이 와서 묘기도 부린단다. 볼 게 참 많은 명절이기도 하지. 월병 이라는 떡도 먹고 말이다." "우웅... 진이 가보고 싶다아아......" 괜히 침울하게 말하면서 아빠를 힐끔 보니 아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 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빠는 본래부터 사람이 많고 북적북적거리는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 기에 우리는 명절에도 계속 집에만 있었던 것이다. 어제, 아니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이 성에 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는데 호광성에서 있을 축 제 이야기를 듣고 보니 너무 가보고 싶었다. "나도 한 번 보고 싶어. 경극이라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거든." "우웅... 진이도오오... 엄마는?" "엄마도... 오랜만에 보고 싶구나." 엄마의 말을 끝으로 우리 셋이 동시에 아빠를 보자 아빠는 졌다는 듯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 한 번 가보자꾸나. 그런데 어쩌냐... 오늘 산 물건들을 가 져다 놔야 하고, 돈도 더 가져와야 하고, 집에 들렀다 가려면 시간이 더 걸릴 텐데......" 아빠가 은근히 못 갈 거 같다는 의미가 담긴 말을 하자 엄마가 염려없 다는 듯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승랑, 당신 능력이라면 이틀 안에 집에 갔다 오는 게 충분하 잖아요. 그동안 우리는 여기 머물면서 구경이나 더 하고 있죠 뭐. 어떠 니, 얘들아?" "진이는 찬성!!" 내가 아빠가 말할 새도 없이 빠르게 손을 번쩍 들고 말하자 민이도 방긋 웃으며 말했다. "민이도요." 그러자 아빠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갔다 오지 뭐......" "누나, 자?" 아빠가 혼자 집에 갔다오려고 떠난 날 밤, 막 잠들려고 하는데 민이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아직, 왜?" 비록 민이가 실없는 애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대답은 해줬지만, 자려 는 걸 깨웠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속에 짜증스러움이 묻어나자 민이 가 약간 기가 죽었다. "아니, 그게... 이번에 호광성 갔다오는 데만 대충 한 달 정도 걸린다며? 혹시 모르니까 우리도 비상금을 가지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야. 게다가 어쩌면 우리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나보고 우리 방에 숨겨뒀던 돈이랑 금채를 가져오라고?" 한마디로 나에게 귀찮은 거 시키는 민이의 말에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약간 분노를 담아 묻자 민이가 움찔거렸다. "아니, 뭐... 꼭 그러라는 건 아니지만...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 야......" 민이가 너무 움찔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해져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 히 생각해 보니 민이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혹시라도 부모 님 몰래 내가 원하는 물건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나도 어느 정도의 돈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께 달라고 해봤자 동전이나 몇 닢 받을 것이 뻔하니까. "쩝... 귀찮긴 하지만 네 말대로 갔다 오는 게 좋겠다. 아빤 지금쯤 집에 계실라나?" 내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어 더 더욱 기가 죽어 있던 민이가 내가 그의 의견에 찬성하는 투로 입을 열자 기쁜 어조로 답했다. "아니, 아마도 오고 계시는 중일 거야. 집에서 안 주무시고 곧바로 오겠 다고 하셨거든." "그래? 알았어. 에잉, 여기서 이동하면 엄마한테 들킬지도 모르니까 밖 으로 나가서 해야겠군." 나는 투덜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놨던 겉옷을 주섬주섬 차려 입고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 "갔다 올게." 작별 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약 15분쯤 후에 다시 들어왔다. ["다녀왔어."] 내가 메시지를 민이에게 날리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던 민이가 벌떡 일 어났다. "빨리 갔다왔네?" "이것만 가지고 오는 건데 뭐... 네 말대로 아빠는 벌써 들르셨더라. 자, 모조리 다 가져왔어." 방안의 탁자 위에 내가 가지고 온 것들을 조용히 내려놓자 민이가 다가 와 보더니 반으로 나누었다. "자, 누나 반, 나 반이야, 이 패는 누나가 가지고 있을래?" 민이가 마지막으로 남은 금패를 가리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금채의 머리 쪽에는 맨 처음 우리가 잃어버리지 않게 목에 걸고 다니려고 매어 놨던 천이 다 낡아빠진 채 그대로 걸려 있었다. "됐어, 그냥 네가 가지고 있어. 아, 잠깐만......" 막 금패를 잡으려던 민이를 제지한 나는 내 짐 꾸러미에서 비단끈 하나 를 꺼내 가지고 왔다. "천이 낡았으니 이걸로 바꿔 끼자. 그대로 했다가 끊어지면 큰일이잖 아." 비단끈은 두 개가 더 있었으니 하나 정도는 안 보여도 엄마가 눈치 채지 못할 거였다. 민이는 금채에 달려 있는 낡은 천 조각 대신 비단끈으로 바꿔 끼운 다음 자신의 목에 걸었다. "자, 이제 다 된 거지? 그럼 그만 자자." 다음날 오전 아빠가 약간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자 그날 그대로 출발할 수가 없던 우리는 하루 더 그 객점에서 묵고 그 다음날 호광성으로 출발 하였다. 민이와 내가 열심히 재촉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호광성에 도착한 때는 중추절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고, 그날부터 여러 가지 행사가 시작되 었던지 길거리 여기저기에서는 흥겨운 악기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신의 솜씨를 뽐내는 차력사들의 외침 소리와 어린이들의 시선을 유혹하는 인 형극도 곳곳에서 공연되고 있어 무척 소란스러웠다. 게다가 거리에는 사람들도 엄청 많아서 엄마 아빠와 떨어지지 않으려면 손을 꼭 잡고 가 야 할 지경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네요.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했나 봐요. 이래서야 어디 방이나 잡을 수 있을는지......" 엄마가 주위를 둘러보며 걱정스레 말하자 아빠가 담담히 대꾸했다. "우선 찾아나 봅시다." 그러나 엄마의 우려대로 웬만큼 적당히 크고 깨끗한 객점들은 벌써 꽉 꽉 차서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주인이나 점소이에게 물으면 다 차서 방이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올 뿐 이었다. 그렇게 방을 잡으려고 객점을 돌아다니는 중 날이 저물어 버렸 다. 그래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았고 이제는 여기저기에서 요란하게 폭죽 터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거리를 뛰어 다니는 아이들 의 손에는 불꽃을 내뿜는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한동안 인파를 헤치며 객점을 찾던 아빠는 또 다른 객점 한곳을 발견하 고는 우리 셋을 돌아보았다. "저기 가서 요기부터 합시다. 그리고 저기에도 방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소." 들어선 객점은 하필 저녁 시간대라서 그런지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꽉 꽉 차 있었다. 난처한 표정의 점소이가 식당 안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 다.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어서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합석이라도 하시겠 습니까?" 아빠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부탁하네." 점소이는 식당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다가 인원이 적은 탁자를 발견했 는지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반짝이는 까까머리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 옆자리에는 화색 승복만 걸친 승려 네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잇는 걸 보니 모두 샅은 일생인데 탁자가 모자라서 두 사람만 옆자리에 앉은 것 같았다, 아니면 두 승려가 네 승려보다 직분이 높아서 따로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 점소이는 그중 두 승려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가서 합석을 부탁하는 말 을 건넸다. 점소이의 말을들은 승려 두 사람이 우리 쪽을 바라보다 아빠 를 발견한 것인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데 행동이나 눈빛은 패기가 넘치는 노승이었다. "아미타불... 현 시주가 아니십니까? 그 노승이 염주를 낀 한 손을 가슴 앞에 올려 세우고 고개를 숙이자 아 빠도 포권을 취해 보였다. "정각 대사님이셨군요.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미타불... 그렇군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자리가 없다고 하던데 저희 와 같이 합석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합석이 결정되자 이제 자신의 일행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정각 대사가 먼저 자신과 같이 앉아 있던 승려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 제자입니다." "아미타불... 소림에 몸을 담고 있는 지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현 시주." '호오, 소림이라구? 그 유명한 소림사의 승려란 말야? 그럼 여기 잇는 사람들 모두 소림사 승려? 무승들이었네......' 지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승려는 정각 대사보다는 쬐께 젊어 보였 다. 한,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정도? 그러나 약간 마른 체형의 정각 대사보다도 키도 더 컸고 덩치도 더 좋았다. 그 승려가 먼저 인사하자 아빠도 그에 답했다. "현승권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입니다." 아빠가 엄마를 옆에 세우며 말하자 엄마가 포권을 취해 보였다. "능지연이라고 합니다." 그에 정각대사는 담담히 한 손을 올려 불호만 외우며 답례하는데 반해 지운 스님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아, 이곳에서 열혈사후 능 시주를 만날 줄이야... 이거 참 놀랐습니다. 능 시주의 위명은 익히들었습니다. 강호의 무뢰한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는 여걸이 아니십니까?"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엄마의 몰랐던 과거를 처음 알게 돼 약간 놀라워하는 우리를 아빠가 두 승려에게 소개했다. "제 자식들입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꾸벅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엄마가 두 승려 몰래 손 짓으로 포권 동작을 해 보여 얼른 포권으로 바꾸었다. "진이라고 합니다." 내가 먼저 나서자 그 뒤를 민이가 이었다. "민이입니다." 그러자 두 승려가 얼굴 한 가득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두 어린 시주들, 반갑습니다." "아미타불." 그렇게 서로의 소개가 끝나자 우리는 드디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 빠는 같이 동석한 승려들을 의식해서인지 간단히 국수와 만두만 시켰 다. 비록 내가 포만감을 느낄 정도의 양은 아니었지만 방을 잡기만 하면 얼마든지 나가서 군것질을 할 수 있었으므로 나는 조용히 내 몫의 국수 만 먹어치웠다. 그런데 내가 다 먹었을 때에도 엄마, 아빠는 승려들과 이것저것 이야기 를 하며 먹어서 그런지 국수가 채 반도 줄지 않고 있었다.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지 그렇게 먹다가는 식사를 끝내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서 나는 가만히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왜?" 아빠의 말을 듣느라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몸만 약간 내 쪽으로 기울이 며 낮게 묻는 엄마에게 나는 작게 소곤거렸다. "엄마, 나 다 먹었는데 민이랑 나가면 안 될까요? 멀리 가지는 않을게 요." 힐끔 보니 민이도 자기 몫의 국수를 다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민이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매정하게도 생각하는 시늉도 안 한 채 즉각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직 방도 못 구했잖니. 아빠 식사 끝나시면 또 방을 구하러 다 녀야지." "이 근방에만 있을게요, 예?" 아주아주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단호했다. "그냥 조금만 참아라, 잘못해서 사람들에게 휩쓸려 멀리 가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니? 너희 둘만 내보낼 수는 없어." "우웅... 예에......" '우리가 어린애인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진짜 정체를 모르는 엄 마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거였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물러났 다. 그런데 내가 시무룩하게 입을 다무는 것을 정각 대사가 안타깝게 여 긴 모양이었다. 역시 자비를 강조하는 승려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현 시주, 방은 구하셨습니까?" 아마도 대화하고 있던 화제와는 동떨어진 질문인 듯 아빠는 일순 어리 둥절한 모양이었으나 그래도 순순히 대답했다. "저희가 너무 늦게 왔는지 빈방이 없더군요." 짐작하고 있던 대답이라는 듯 정각 대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는 4인실 방 두 개만 남아 있어서 그 방 을 잡았는데 아까 어떤 시주께서 이곳을 나가시는 덕에 2인실 방을 하 나 더 얻을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2인실 방이 저희가 잡은 방들과 좀 떨어져 있는 바람에 2인실 방을 그냥 내놓을까 생각 중이었습니다만 , 그냥 저희가 2인실 방을 쓸 테니 4인실 방 하나를 현 시주 가족께서 쓰 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아빠는 갑작스런 이 행운이 믿겨지지 않는지 잠시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곧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대사님의 배려에 감복할 뿐입니다." "허허허... 아닙니다. 10년 전 현 시주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데요. 아미타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오호라, 10년 전에 아빠와 저 정각 대사라는 분 사이에 뭔가 인연이 있 었던 모양이군.' 그래서 아까 아빠를 처음 봤을 때 반색을 한 모양이었다. "자, 그럼 우리는 식사를 천천히 즐기고 어린 시주들은 놀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가? 마침 저희 제자들도 나가고 싶어했거든요." "아니,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엄마가 놀라며 얼른 사양하려고 했지만 정각 대사는 엄마의 말이 채 끝 나기도 전에 괜찮다는 듯 손을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실은 저도 제자들의 애원이 담신 눈길이 신경쓰이던 참이었 습니다." 정각 대사가 말하는 그 제자들은 우리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그 네 명의 승려들이었다. 모두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보였는데 지운 스님의 제자들이라고 했 다. 첫 제자부터 차례로 지가, 지광, 지무, 지법이라는 법호를 가지고 있 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소림사에서 성장해서 그런지 꼬박꼬박 존대 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말투는 친형제처럼 편안했다. "에에, 다 '지' 자 돌림이네요? 지운 스님도 '지' 자 돌림이던데... 사제지 간이 같은 돌림자를 쓰시네요?" 같은 항렬에는 같은 돌림자를 쓰며 항렬에 따라 돌림자가 달라지는 줄 만 알았는데 소림사는 그런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묻자 맨 막대인 지법 승려가 웃으며 말해 줬다. "같은 돌림자는 아니에요. 저희는 '알 지(知)' 자를 사용하고 사부닌 항 렬은 '지혜 지(智)' 자를 사용하세요." "아하......" '그럼 내 생각이 맞은 거네.' 그들은 이번에 처음 하산하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며 구경하는데 우리 못지 않게 들떠 보였다. 그래서 그들을 꼬 셔 간식 사 먹는 건 무척 쉬웠다. 소매를 붙잡고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간식거리를 가리키기만 하면 그들이 오히려 더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 던 것이다. 비록 제일 큰 형님인 지가 승려는 점잖게 행동했지만 사제들 의 행동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절 안에서만 자랐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애들보다 더 순진해 보여 웃음이 났다. 그들은 나오기 전에 어느 정도 용돈을 받았는지 우리 것까지 모조리 사 주곤 했기에 민이와 나는 기쁨이 두 배로 뛰었다. 그래도 나중에는 은자까지 몇냥이나 밖으로 꺼내어지는 것이 그들이 흥 분하는 바람에 너무 돈을 많이 쓴 거 같아 민이와 상의해서 은 한 냥을 그들 모르게 마법으로 슬쩍 넣어주었다. 복잡한 거리와 나의 뛰어난 마 법, 적절한 타이밍이 어울려 배출해 낸 환상적인 작전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돌아다니던 우리들은 거리에 사람들이 좀 줄었다는 걸 느끼고는 그제야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에는 어린아이나 부 녀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온통 술집을 찾는 남자들뿐이었다. "사형,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데요?" 지광 승려의 갑작스런 말에 나머지 세 승려는 놀란 듯 모두 놀란 듯 모 두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더니 굳어버렸다. "허걱, 늦었다." "큰일 났군." 지무와 지법 승려가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듣던 맏 형 지가 승려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각오해 두는 것이 좋을 거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실 거 야. 그런데 지광아, 우리 돈 얼마나 썼냐?" 사형의 말에 회계를 담당하고 있던 지광 승려가 소매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들고 확인해 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내가 집어넣은 은 한 냥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과히 돈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을 거였다. 내 예상대로 걱정스런 얼굴로 돈주머니 안을 확인해 보던 지광 승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히 그리 많이 쓰지는 않았습니다." "휴, 다행이다. 셋째 사형, 난 아까 하도 많이 사 먹어서 좀 걱정했어요." "나도. 그래도 우리가 적당히 먹었나 보다. 어쨌든 돈 때문에 혼날 일은 없겠군." 지무, 지법 승려의 안도 어린 말에 민이와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길거리의 한 퀴퉁이에 몇몇 사람이 동기 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피리 소리가 들려왔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지금 까지 이곳에서 들어왔던 은은한 대나무 피리 소리가 아니라 약간 톤이 높고 맑은 소리였다. '그래, 마치... 플루트나 피콜로 소리처럼... 음... 피콜로보다는 톤이 좀 낮구나.' 그러나 이런 곳에 그럼 금관 악기가 있을 리는 없었기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지체없이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당황한 지광 승려가 나를 불렀다. "어린 시주, 우린 이제 돌아가야 해요." 하지만 나는 빨리 돌아가는 것보다는 내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었기에 돌아보지도 않고 외치며 그쪽으로 뛰었다. "잠깐만요, 저기서 뭐 하는지만 보구요." 몰려 있는 사람들이 몇 안되었기에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그 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는 약 30대 중반 정도의 청수하 게 생긴 데다 비단으로 지어진 유생 차림의 남자 하나가 내 궁금증을 유 발시킨 소리를 내는 피리를 불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피리는 붉은 빛을 띠고 있었고 은은한 광택이 나는 것으로 보아 금속이나 돌로 만들 어진 듯했다. '으음... 이 시대에 금속으로 피리를 만들 수 있었나? 의외네... 혹시 옥 으로 만든 거 아닐까? 뭐, 직접 보거나 들은 건 아니지만 신라 시대 전 설에도 옥피리가 나오니까 아예 가능성이 없는건 아닐 테고 말야......' 내가 이렇게 혼자 피리의 재료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 유생이 연 주를 끝내고 피리에서 입을 떼자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하며 박수를 쳤 다. '으음... 그렇게 좋은 노래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진, 내가 이 시대 음악 을 별로 안 좋아해서 말야......' 예전 '패왕별희'를 볼 때도 경극에서 나오는 음악은 그렇게 좋게 느껴지 지 않았는데 그와 비스무리한 노래를 좋게 느낄 리가 없었다. '에잉... 한국 전통 음악도 좋아하지 않는데 중국 전통 음악이라고 좋아 하겠어?'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피리에 대해 물어보려고 기회를 엿보는 데 그 유생은 환호에도 답례하지 않고 긴장된 눈으로 자신의 옆을 바라 보는 거였다. 그의 옆에는 사람 한두 명 정도는 걸터앉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바위 위에 한 늙은 남자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원뿔을 중간에서 자른 모양의 낡고 검은 천으로 된 모자를 쓰 고 꾀죄죄한 회색 옷에 검은 조끼, 그리고 보통 평민이 신는 검은 신을 신고 있었는데 비쩍 마른 데다가 얼굴 또한 작아서 꽤 왜소해 보였다. 나이가 많아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는데, 얼굴형은 역삼각형이었 고 눈은 자그마해서 생쥐를 연산시켰는데 거기에다 코밑에 팔자 콧수염 이 나 있어서 완전 생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노인장은 유생이 자신을 바라보자 히죽히죽 웃으며 자신에 찬 어조 로 말했다. "서원별곡, 유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노래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 지만......" 그러자 유생이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서생원같이 생긴 노인은 기분이 좋은 듯 껄걸 웃으며 자신의 가느다 란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껄껄걸, 내가 이겼구려." 그 말에 유생은 들고 있던 피리와 함께 소매 속에서 금 한 냥을 꺼내어 그 노인장에게 건네주었다. "제가 졌습니다. 자, 여기 약속한 돈......"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탄성이 흘러나오고 유생 은 마지막으로 노인장의 손에 쥐여진 피리를 아쉬운 눈으로 보더니 결 국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그 노인장은 히죽 웃으며 돈을 품속에 집 어넣더니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누가 또 도전해 올 사람 없수? 누구든지 환영이요." 그 도전이 뭔지 모르는 나는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아저씨, 무슨 도전인데요?"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순박하게 생긴 그 남자는 노인장의 피리를 힐끔힐 끔 보면서 말해 주었다. "저 피리를 걸고 내기하는 거지. 원래 저 피리를 그냥 사면 황금 500냥 인데 한 가지 내기를 해서 노인장이 지면 저 피리를 내주겠다고 하는 거 야. 물론 상대방이 지면 금 한 냥을 내놔야 하고." "무슨 내기인데요?" "저 노인장이 모르는 노래를 연주해야 하는 거야. 기회는 단 한 번이고. 하지만 내가 아까부터 봐서 아는데 저 노인장은 한 번도 지지 않았어. 아마 저 피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 그 남자는 거기까지 말해 주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자리를 떴 다. 주위 사람들도 시간이 늦은 데다가 잠시 기다려도 더 도전하는 사람 이 없자 하나둘 떠나 버려 결국 남은 사람이라곤 그 피리의 주인인 노인 장과 우리 일행뿐이었다. "누나, 우리도 가자." 민이가 뒤에서 재촉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막 일어서려는 노인장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그 피리 뭘로 만든 거예요?" 그러자 그 노인장이 히죽 웃으며 피리를 들어 보였다. "이거 말이냐? 이건 홍옥이라는 귀한 보석으로 만든 거란다." '헤에... 정말 보석으로 만든 피리가 있었어... 그런데... 보통 홍옥이라 면 루비를 말하는 건데... 이건 가공을 안 해서 그런지 투명하지 않고 속 이 옥처럼 뿌옇네... 원석을 그대로 깎아서 그런 걸까? 그래도 홍옥으로 만든 게 어디냐.' 나는 신기한 마음에 노인장에게 조심스레 요청했다. "저기요...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노인장은 일어서려던 것을 멈추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나를 바라보았 다. "왜? 너도 한 번 도전해 보려고? 나야 상관은 없다만, 내기의 조건은 알 고 있겠지?" "음... 내가 그 피리를 불 수 있다면 한 번 해볼게요." 의외로 노인장은 나에게 순순히 피리를 건네주었다. 내가 이대로 들고 튀어도 잡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라. 한번 보여주는 거야 어려울 것 없지." 피리를 받아 들고 살펴보니 대충 단소 비스무리하게 생겼는데 그것보다 약간 긴 것 같았다. 거기에 앞쪽에 난 구멍이 7개, 뒤쪽에 난 구멍이 1개, 모두 9개로 리코 더와 비슷하게 생겼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생이 단소와 리코더를 연주하게끔 만들었던 대한민국의 교육이 갑자기 무지무지 고맙게 느껴지던 나는 자 신있게 피리를 잡고 끝에 입술을 대었다. 이래봬도 음악 실기 점수에서는 항상 괜찮은 점수를 받아온 데다 대부 분 한국 학생이 그렇듯 피아노 체르니 30까지 뗀 나는 악기 연주하는 것 을 좋아했기에 이 피리에 흥미가 생겼던 것이다. '게다가 이 피리는 홍옥으로 만든 거라잖아. 헐헐헐......' 역시... 나도 보석을 밝히는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몇 번의 시도 후에 소리를 낼 수 있었고 익숙해지자 구멍을 하나씩 차례 로 열며 음을 맞춰보니 대충 8음계와 엇비슷한 소리를 내는 데다 높은 솔까지 올라갔다. 한국 대중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데다 소리까지 맑은 음색이었고 거기 에 보석으로 만들어진 거였으니 나는 이 피리가 무지무지 가지고 싶었 다. "할아버지, 내기해요!!" 기필코 내가 이길 것이란 생각과 피리에 대한 욕심에 불타는 눈으로 자 신있게 제안하자 그 노인장은 이런 모습이 익숙한지 히죽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연주하는 노래의 제목을 내가 맞추지 못하면 그 피리는 네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제목을 맞추면 네가 금 한 냥을 내놔야 한 다. 돈은 있니?" "물론 있어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피리를 입가에 가져다 대자 노인장이 입을 다물며 귀를 기울였다. 이 내기에 자신있는 듯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노인장에게 한 번 씨익 웃어 보이고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곳이 중국이니 아무래도 중국 음악이 좋을 것 같아 선택한 곡은 '소호 강호'였다. 예전 '동방불패'란 중국 무협 영화에 푹 빠져서 용돈을 털어 비디오까지 산 나는 주인공으로 나왔던 '임청하'와 '이연걸'의 팬이 되 었고 주제가인 '소호강호'도 다 외울 정도였다. 물론 중국어로 부른 거 라 가사는 무르지만, 멜로디는 다 기억해서 피아노로도 칠 수 있을 정도 였다. '동방불패'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때 얼마나 흥얼거리고 다녔는지 모른다. 피리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여유만만하던 노인 장이 일순간 어리둥절해하며 잠시 후에는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하지. 이건 처음 들어보는 것일 테니... 20C에 만들어진 음악 을 무슨 수로 들어봤겠어? 음화화화... 내가 이겼군.' 이미 노인장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속으로 호탕하게 웃으며 연주를 마치고 노인장을 바라보았다. 제목을 말하라는 무언의 재촉이었 다. 노인장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나를, 정확 히 말하면 내 주위에서 감탄사를 흘리고 있는 네 명의 승려들을 살펴보 더니 체념 어린 얼굴로 말했다. "노부가 졌네." "헷헷헷, 그럼 이 피리는 제 거죠?" "그래, 그건 이제 소저 거야. 그런데 그 곡의 제목이 뭔가?" "'소호강호'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죠. 그럼 전 가볼게요." 기쁨을 감출 수 없어 헤죽헤죽거리며 친절한 답변에 정중한 인사까지 한 나는 빨리 돌아가서 부모님께 자랑하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노인장 의 눈이 사악하게 번뜩였다는 걸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몸을 돌려 객점을 향하여 막 한 발짝을 내미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엄청 난 마나가 나에게 쏘아져 오더니 내가 움찔하는 사이에 내 손에서 피리 를 채간 그 노인장이 번개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나가 나에게 쏘아져 올 때 몸을 피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을 당해본 경 험이-새똥사건 외엔-별로 없는데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어서 미처 피하 지 못하고 당한 나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할 법도 했지만, 그보다도 먼 저 방금 내 것이 된 보물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엄청 분노한 나는 지체없 이 한 손을 뻗어 막 내 앞 5m거리에 도달한 노인장을 가리키며 외쳤다. "슬라이딩!!" 원래는 미끄러지게 하는 마법을 사용하려 했었다. 하지만 너무 분노한 나머지 혀가 꼬였는지 '스네어!!'라고 외쳐야 하는데 말이 헛나와 버렸 다. 그러나 다행히 그 노인장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벌러덩 넘어졌고 그 때를 틈타 쫓아가느라 깨닫지 못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때가 의 지로써 마법을 구현하는 '용언 마법'을 처음 사용한 것 같았다. 정말 얼 떨결에 사용한 거였지만...... 어쨌든 그건 아주 나중에 깨달은 거였고, 나는 내가 뭘 해냈는지도 모른 채 노인장이 넘어지자 마자 번개같이 달려가 그를 잡아챘다. "이, 이, 이이이∼느아쁜 노오오오옴∼!!" 노인장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때에는 그냥 좀 왜소한 노인네다 싶었는 데 이렇게 잡고 보니 키도 자그마한데다 말라서 내가 멱살을 잡고 흔들 자 짤짤짤 잘도 흔들렸다. 내가 솟아나는 흥분을 주체 못하고 그 아주 모오옷된 노인장을 흔들고 있는 사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하고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수습했 는지 민이와 네 명의 승려가 달려왔다. "안돼셨네요, 노인장... 누나 물건에 손을 대려 했으니... 명복은 빌어드 릴게요." 민이가 동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정중히 말하는데 후두둑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다보니 수십 개의 금덩어리들이 노인장 주위에 떨어져 굴러다니고 있는 거였다. 아까 넘어지고 지금 나에게 흔들리는 바람에 품에 넣어놨 던 것들이 빠져 나온 모양이었다. "아이쿠!"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동안 나에게 힘없이 흔들거리던 노인네가 갑자기 강한 힘으로 나를 밀쳐내고는 황급히 떨어진 금덩어리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 틈에 어느새 챙겼는지-아마도 같이 땅에 떨어져 있던 모 양이었다-민이가 나에게 홍옥 피리를 건네며 말했다. "자, 누나 거. 저 영감님 이 피리로 내기 걸어서 돈 엄청 벌었나봐. 우와, 도대체 금이 몇 개지?" 민이와 금을 재빨리 주워 드는 노인을 번갈아 보던 나는 마지막으로 노 인을 혼내줄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모노 볼트!!" 공기의 마찰로 전기를 만들어내 적을 감전시키는 주문인데, 전기가 무 척 약했기에 가벼운 전기 쇼크를 주는 정도의 효과만 있는 거였다. 내가 시동어를 외치자 곧 공기가 마찰되면서 전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노인장을 감전시키는 대신 모두 그 밑에 흩어져 있는 금속으로 흡수되 었다. 과연 금이 구리보다 더 뛰어난 도체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 다. 그러자 노인장이 금 덩어리를 줍는 순간 금 표면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앗, 따거!! 앗, 따거!!"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노인장은 손이 따가운데도 불 구하고 금 줍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은 전기 쇼크로 인해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금을 줍는 즉시 모두 품속에 넣었기에 속에 들어간 금 덩어리들이 사정없이 전기 공격을 해댔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금 덩어리들을 떨어뜨릴까 봐 꼭 부여잡고 고통을 참는 그 노인장이 더없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측은 해 보이기도 했다. 그 노인장은 금을 다 주운 뒤 다시 우리에게-정확히는 네 승려에게-붙 잡힐까 봐 피리를 포기하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하지만 나는 뒤쫓고 싶 은 마음도 없어 그냥 보내주고 말았다. 그 노인장에게 걸어놓은 마법은 처음부터 약하게 걸었기에 한 10분 정도만 지속되다가 사라질 거였다. 그때까지 고통을 참고 금 덩어리들을 부여잡고 있을지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금 덩어리들을 내려놓고 고통에서 벗어날지는 모르겠지 만... 어쨌든 이번 일로 혼은 났을 거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거기서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놓칠 뻔했는데요." 지법 승려가 노인장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나머지 승려가 동 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라... 다행히 마법 사용하는 걸 안 들킨 모양이네.' 이번 일로 나는 내 수중에 들어온 보물은 꼭 보호 마법을 걸어놔야 한다 는 것과 마나가 나에게 쏘아져 들어오면 그게 날 위협하는 거든 아니든 우선 피하고 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어린 시주들, 이젠 정말 가야 합니다." 지가 스님의 절박한 말에 우리는 미련없이 그곳을 떠났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객점까지 경공을 전개하면서 뛰어갔는데 그 와중에 나는 피리에 여러 가지 보호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우선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피리를 가지고 나에게서 100m 이상 멀어지기만하면 5연발 청천벽력을 맞게끔 조치를 취한 다음, 어쩌다 내가 잊어버리더라고 찾을 수 있는 추적 마법 에 1톤 트럭에 깔리는 충격에도 까닥 없도록 보호 마법까지 걸어놨다. '이 정도면 안심이야!!' 다행히 객점은 아직 문을 열고 있었다. 문 닫을 시간이 아니었는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식당 안을 2/3쯤 채운 손님들 사이로 점소이들이 바쁘게 서빙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식사보다는 술을 즐기 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우리가 객점을 나올 때보다 더욱더 시끌 벅적한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 사이, 우리가 저녁을 먹었던 한쪽 구석 탁자에 아빠, 엄마 가 두 승려 분과 같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세상에나... 아직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뭔 할 말이 그렇게 많대? 덕분에 금방 찾기는 했지만......' 그런테 탁자에는 그들 말고도 처음 보는 인물이 앉아서 같이 대화에 참 여하고 있었다. '어라? 아는 사람을 만난 건가?' 비단임이 분명한, 검은색과 황금색이 적절히 조화된 아주 비싸 보이는 장포에다 희끗희끗한 머리는 중국식 상투를 틀었는데 상투를 맨 비단끈 정가운데에는 비싼 것이 틀림없는 파아란 돌이 금테를 두른 채 박혀 있 었다. '엄청 부자인가 보군......' 머리에 검은 머리카락보다 하얀 머리카락이 더 많은 것으로 보아 나이 가 꽤 많은 것 같은데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주름이 별로 없어 얼굴만 보면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하지만 코밑과 턱에 멋진 수염이 있어서 얼 굴만 젊어 보이는 것을 살짝 가려주었다. 그래도 왠지 모를 묘한 부조화 를 눈치 챈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그의 몸 안에는 아빠보다 많으면 많았 지 결코 적어 보이지 않는 마나가 갈무리되어 있었다. '고수다. 아빠보다 더 강한 거 같은데? 그럼 내공이 이 갑자가 넘는다는 소리군......' 하지만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단지 아까는 없었던 새로운 인물이 탁자에 앉아 있었기에 의아해서 잠 시 살펴본 것일 뿐 이내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에 곧 시선을 돌리고 환 하게 웃으며 엄마를 불렀다. 물론 새로 얻은 피리를 자랑할 생각도 있었 지만, 늦게 온 죄를 조금이나마 덜려는 생각도 같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빠보다는 엄마가 내가 얻은 피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줄 것 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관심을 피리로 집중시키려는 생각에 피리를 들고 엄마에게 달려가는데 황당하게도 엄마보다도 먼저 옆에 앉아있던 그 처음 보는 인물이 먼저 달려들어 내 팔을 낚아챘다. 이번에는 나에게 쏘아져 오는 마나를 느끼자마자 당한 일이라 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진이야!!" 엄마의 놀람과 다급한 외침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면서 나는 처음 보는 그 남자의 얼굴을 코앞에서 봐야만 했다. 그 남자가 내 팔꿈치 바로 아 래 부분을 강하게 잡고 자신에게로 가까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이다. '아, 오늘 일진은 왜 이려? 젠장, 마나를 넘 늦게 느껴서 그래... 좀 더 수 련을 쌓아야 했는데......' 마나를 조금 더 일찍 느꼈더라면 한 발자국이라도 피할 수는 있었을 것 이다. 완전히 피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였지만(나는 아직 고수가 아니 었던 것이다)...... 비록 내가 마나의 흐름을 전보다 예민하게 느낀다고 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집중하고 있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강한 흐름이 생성되고 난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 다음에 움직여 봤자 지금 처럼 내 팔뚝을 낚아챈 인물 같은 고수에게는 늦은 반응이었던 것이다. '수련을 더 해야 해... 수련을......' 집중하고 잇지 않아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새똥 때문에 일어나는 마나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었다. 내 팔뚝을 잡아챈 그 중년 남자 어깨 너머로 새파랗게 질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태세를 취하고 있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제지하면서 침착 하게 사태를 지켜보는 아빠,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두 승려가 보였다. 식당 안은 나에게 닥친 일과 아까 엄마의 비명으로 인하여 쥐죽은 듯이 고요해져 있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내 피리를 노리는 거라면 부모님께 들키게 되더라도 좀 따끔한 마법을 사용해 주리라 결심하면서 나는 코앞에 있는 인물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그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한 경악과 놀라 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그 감정이 너무 커 보이자 나는 슬며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이 피리의 원래 주인이 이 사람이었던 거 아냐? 옷차림을 보아하지 엄청 부자인것 같은데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지... 아까 그 꾀죄죄한 생쥐 같은 노인네가 이런 비싼 피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더 안 어울리는 일이야. 헉, 그렇다면 혹시... 그 생쥐같은 노인네가 이 걸 훔쳤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에구구... 그럼 어쩌지? 이걸 되돌려 달라고 한다면... 에잇,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 피리를 빼앗길 수는 없 다!!'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중년 남자를 다시금 쳐다보니 그는 이 제는 나와 내 손을 번갈아 가며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시 선은 피리에 머무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어라? 피리가 아냐?'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과 혹시... 하는 생각에 슬며시 잡 히지 않은 왼손으로 오른손에 쥐여진 피리를 빼갔다. 하지만 내 짐작이 맞는지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네... 그럼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어디가 그의 관심을 끌었을까 생각하는데 그의 손에 잡힌 내 팔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엄마의 시선을 끌려고 피리를 든 팔을 들어올리는 바람에 풍성한 소매가 흘러 내려가 내 오른쪽 손목 안에 새겨진 글자가 드러나 있었다. '호, 혹시......' 저 남자가 진이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맨 처음 우리가 이곳에 오며 본 광경을 떠올려 볼 때 이 남자는 나에게 좋지 않는 존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어 그의 시선을 끌어봤 다.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변태 아저씨라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그러자 일순간 움찔한 그 남자가 나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그의 눈에는 따스한 웃음기가 담겨있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생각 외의 반응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그의 입이 열리며 중후한 목 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얼굴은 엄마를 닮았는데 말하는 투는 영락없는 열혈사후를 닮았구나." 뜬금없는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놓아주더니 내 뒤 에서 경계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민이에게 다가간 그는 난데없이 민이 의 오른팔을 잡아채 소매를 걷어보는 것이었다. 그가 내 팔을 놓고 민이의 팔을 잡아챈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었기에 나는 내 팔이 풀렸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민이의 놀란 외마디를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민이의 손목 안쪽의 글자를 확인하더니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으 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뭘 발견했는지 갑자기 민이의 목 언저리로 손을 뻗는 거였다. 민이가 놀라 얼른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팔이 그 남자에게 잡혀 있어 단 지 조금 움찔할 수 있을 뿐이었고, 그 순간 남자는 민이의 옷깃 속에 감 춰져 있던 금패를 빼냈다. 어쩌다 보니 목에 걸어놨던 끈이 밖으로 드러 나서 들킨 모양이었다. 그가 금패를 가져갈 거란 생각이 들자 다급한 나머지 나는 내가 한 행동 이 무림에서 비겁하게 여겨지는 기습이란 건 생각도 못하고 즉각 왼손 에 들린 피리로 그의 어깨를 찔러갔고, 민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 지 얼른 손을 들어 금패를 그의 손에서 낚아채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보다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민이의 행동이 거의 기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이의 손이 금패 에 닿기 바로 직전에 민이의 팔을 놓는 동시에 몸을 부드럽게 270도 회 전시켜 내가 허공을 찌르게 만들면서 나와 민이를 자신의 정면 시야 안 에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감탄, 그리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기쁨의 감정이 섞여 드러난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대신 내가 화가 났다. '쳇, 우리보다 고수라 이거지?' 오늘은 정말 물건을 빼앗기는 날인가 보다. 마법을 쓴다면 간단히 그의 손에서 금패를 되찾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은 엄마, 아빠와 같이 있는데다 아빠 못지 않은 고수인 정각 대사까지 있으니 사용하기가 꺼려졌다. 거기다 지금 상황이...... "누나, 어쩌지? 부모님께서 우리가 금패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 었잖아? 으으... 금패에 대해 물어보시면 뭐라고 하지?" 그랬다. 금패를 숨기고 있었다는 걸 부모님께 들킨 것이다. "가만있어 봐. 지금은 금패를 되찾는 게 우선이야. 나중 일은 나중에 생 각하자고!!" 나는 뒷일은 잠시 접어두고 바로 코앞에 있는 일부터 해결하기 위해 그 중년 남자의 빈틈을 노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엄마와 아빠가 검을 빼 들고 달려와 민이와 내 앞을 가로막고 서는 바람에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앗... 이런......' 금패를 가져간 남자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두 분 때문에 내가 낭패스 러워하는데 일이 좀 더 커지고 말았다. 엄마와 아빠가 검까지 빼 들고 그 중년 남자를 노리자 아마 그 남자의 호위인 듯 근처 식탁에 앉아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든 다섯 명의 남자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신들의 무기를 빼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식당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지고 일이 점점 커질 것 같자 나는 금패 찾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민이와 함께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이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재빨리 객점 밖으로 뛰쳐나갔고, 객점 밖에서는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객점 안을 기웃 기웃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고 객점 주인과 점소이들은 어느 새 피해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객점 안에는 적막과 긴장감이 감돌며 여차하면 서로 달려들 상태로 팽 팽히 맞서는 가운데 나는 여차하면 마법까지 쓸 생각으로 실내에서 피 해를 최대한 줄이며 사용 할 수 있는 마법을 생각해 놓고 있는데 누군가 긴장감의 중심부에 끼어들었다. "아미타불......"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각대사였는데 아까 우리에게 인사를 할 때의 조용 하고 낮은 목소리가 아닌 마나까지 섞인 엄청나게 큰 소리였다. 아주 조용하던 식당 안에 갑자기 울려 퍼진 소리라 모두들 움찔거렸고 덕분에 긴장이 조금 완화되었다. "사자후......" 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자후? 저게 사자후야? 난 또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단지 큰 소리 로 외치는 것뿐이잖아?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든 말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 리자 정각 대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현 시주, 능 시주... 내가 아는 은 시주께선 결코 허튼짓을 할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잠시 감정을 가라앉히시고 사정을 들어보시 는 게 어떻습니까?" 그 금패를 빼앗아간 남자의 성이 은씨였나 보다. '은씨라......' 아빠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검을 든 손에서 힘을 뺐다. "대사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아빠의 말이 끝나자 정각 대사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와 함께 우리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비록 무기는 집어넣지 않았지만 뒤로 두 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그 은씨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그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양 물기 어린 감상적인 눈으로 그 금패 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은 시주......" 정각 대사가 조용히 부르자 그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대사를 바라보았다. "아...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대사님. 저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 쨌든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대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그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울 부모님이었지만...... "실례를 범했군요. 그런데 두 분은 이 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은씨 남자가 패를 살짝 들며 말하자 아빠는 슬쩍 고개를 돌려 우리를 한 번 바라보고는-우리는 찔끔해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고개를 저었 다. "모르겠습니다. 혹여 제 아이들이 실례를 한 거라면......" 우리가 시선을 피하자 뭔가 잘못됐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은씨 남자가 아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정해 주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 패는 우리 가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특 히 이것과 같이 금으로 만들어진 패는 우리 혈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죠. 이건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인데 오늘에야 되찾게 되었군요. 두 분 은 저희 집안의 은인이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모시고 싶은 데 어떠십니까?" 주위를 슬쩍 바라보며 말하는 폼이 이 이야기가 외부로 새 나가길 원하 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사람들이 다 나간 줄 알았는데 몇몇이 구석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문이 열 린 객점 밖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그 은씨 남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약간 꺼려지는 게 있 는지 대답하기를 주저하자 그 은씨 남자가 얼른 덧붙였다. "물론 여기 계신 대사님과 제자 분들도 함께 모실 겁니다." 정각 대사도 안심하라는 뜻인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아빠가 승낙했다. "좋습니다." 그 말을 신호로 모든 사람들이 무기를 집어넣었고 그 은씨 남자는 호위 겸 부하들에게 마차를 준비하게 했다. 엄마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무척 불안한지 나와 민이를 꼬옥 안 고 있었다. 민이와 나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금패를 숨긴 까 닭을 뭐라 둘러댄단 말인가...... ["누나, 어쩌지?"] ["가만있어 봐. 지금 열심히 머리 굴리고 있는 중이니까. 다 정리되면 말해 줄게."] ["서둘러. 도착하기 전에는 말해 줘야 한다구."] ["나두 아니까 말 시키지 마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짜고 짜내어 대충 어린애가 말할 수 있는 줄거 리를 마련해 민이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드디어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군." 아빠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입가가 경직되어 있는 게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엄마도 아빠의 말에 흠 칫하더니 가늘게 떨리는 팔로 우리를 한 번 더 꽉 안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 내느라 딴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나는 그제야 두 분의 심정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에궁... 처음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일이 엉뚱하게 흘러가네....' 긴장하고 있는 엄마의 손을 잡고 어느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착잡함과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내가 이만큼이나 사랑받고 있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기 때문 이었다. 민이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 안타까운 어조로 말을 걸어 왔다. "누나, 만약 저 금패를 뺏어간 남자가 우리의 친혈육이라면 우린 부모님 과 어떻게 되는 거야?" "에휴, 보아하니 저 남자 되게 부자인 것 같으니 아마도 얼마의 보상을 해주고 우리를 데려가려 하겠지. 쳇, 단지 평범한 상인이었다면 괜찮았 을 텐데 문제는 저 남자가 아빠보다 좀 더 강한 고수라는 점이야. 그럼 이 집안이 어느 정도 명성있고 실력있는 무가라는 이야기인데... 힘이 달리는 이상 부모님이 어쩔 수 없으실 것 같아." "뭐야, 그럼 누나는 부모님과 헤러진다고 해도 가만있을 거야? 그분들 은 우리가 부모로 인정한 분들이라고!" "바보야, 누가 가만있는데?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 우리 능력껏 부모님 과 있으면 돼. 그러면 저 남자도 어쩔 수 없을 테니 우리를 무조건 부모 님과 떼어놓지 않고 뭔가 다른 타협점을 찾아내겠지." "그렇겠지? 누나, 부모님과 헤어지지 않을 거지?" 거듭 간절한 어조로 다짐을 받으려는 민이가 좀 의아해서 힐끔 바라보 니 그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정말 정이 많이 든 듯했다. 나 야 저쪽 세계에서 나를 끔찍이 생각해 주는 할아버지와 아빠가 있었으 니-아마 지금쯤 난리가 나 있을 테지... -양부모와 헤어진다 해도 무지 서운하긴 하겠지만 민이처럼 절박하게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언 젠가 우리는 우리의 세계로 돌아가야 했기에 헤어지는 건 이미 기정사 실이었다. 그 헤어지는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것일 뿐... 어쩌면 나는 처 음부터 이별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덤덤하게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 물론 안 헤어지도록 노력할 거긴 하지만, 네가 그 정도일 줄은 몰 랐네... 그렇게 양부모님이 좋아?" "그게 무슨 소리야? 누나는 부모님과 헤어지는데 슬프지도 않아?"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말에 민이가 버럭 화를 내자 나는 순간적으로 쫄 아버렸다. "아, 아니야... 누가 뭐 안 슬프대? 그러니까 내가 부모님과 안 헤어지도 록 생각도 해놓은 거 아냐? 그런데 왜 화는 내고 그래. 놀랬잖아!" 말하다 보니 내가 녀석의 말에 쫄았다는 게 열받아서 나도 버럭 화를 내 자 이번에는 민이가 쫄아들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아... 누, 누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 같으 니까 그렇잖아......" "내가 작전 짜느라고 그런 거지. 그럼 너처럼 감정에 젖어서 말하면 내 가 세운 작전에 신용이 가겠어?" "에? 아, 물론... 그렇긴 하지......" 우리가 그렇게 투닥이는 동안 일행은 중국식 응접실에 안내되었다. 한 탁자를 가운데 놓고 의자가 빙 둘러 있던, 내가 있던 세계의 응접실과는 달리 상석이 중앙 맨 윗자리에 있고 그 앞 양옆으로 마주 보게끔 배치된 의자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는데 각 의자 사이사이에 자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어 각 사람, 혹은 두 사람이 하나의 탁자를 사용하게끔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가 당연한 것처럼 상석에 앉았고 그 다음 의자에 아빠와 정각 대사가 마주본 채로, 그 다음은 엄마와 지운 선사가 , 그 다음은 민이, 나, 마주보는 의자에는 지운 선서의 제자들이 주르르 앉았다. 그렇게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잠시 동안은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 어서 응접실 안은 정적이 흘렀지만 그동안에도 민이와 나의 대화는 계 속되었다. "누나, 나는 정말 부모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분들은 나에게 처음 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들이거든." "뭔 소리야. 용계에 너그 친부모님 계시잖어?" "계시긴 하지만... 날 낳아주신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는걸? 아바마마는 오로지 태자 형님께만 관심을 가져주시고... 세 번째 왕후께 서 날 데리고 있어주셨긴 하지만, 후궁 소생인데다 어머니까지 없는 나 에게 관심을 가져준 건 아무도 없었어... 단지 나중에 타계로 출타하셨 다가 돌아오신 숙부님 외에는......" 처음 만났을 때 왕자라는 신분을 내세워 날 복속시키려는 녀석이었기에 모두에게 더받들여진 채 기고만장하게 살아왔는 줄로만 알았지 이런 사연이 있느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좀 의외였다. "너... 외로웠구나?" 그러자 민이가 즉각적으로 반발해 왔다. "그런 건 아냐. 그래도 왕자 대접받으며 풍요롭게는 자랐다고. 세상에는 나보다 더 가여운 아이가 많으니 내가 외롭다고 하는 건 투정부리는 것 밖에 안 된다고 숙부님께서 말씀하셨어." "그래그래, 네 숙부님은 정말 현명하시구나. 그 말이 맞다." 그렇게 대꾸해 주면서도 나는 부모님과 헤어져도 그만, 같이 있어도 그 만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을 버리고 민이를 위해서라도 금방은 헤 어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좋아, 이곳에서 생긴 동생을 위해 힘 좀 써주지.' 그렇게 민이와 내가 대충 앞으로 할 일을 결정했을 즈음 시종들이 들어 와서 간단한 다과와 차를 내려놓았다. 민이와 나에게는 배려가 있었는 지 우리의 탁자에는 다른 탁자에는 없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떡, 튀 김, 경단 등등의 간식거리가 많이 올려졌다. 그걸 사양할 내가 아니었기 에 나는 즉각 생글생글 웃으며 하나씩 집어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이 는 경직된 분위기에 얼어붙어 감히 탁자 위에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쯧쯧, 왜 안 먹어? 안 먹으면 너만 손해잖어?" 그러자 곧장 한심하다는 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누나는 이 상황에 그게 넘어가?" "넘어가니까 먹고 있지. 뭐가 문제야? 우리 문제는 다 결론났잖아?" "그건 우리끼리 얘기고, 지금 분위기는 그게 아니잖아?" "그게 우리랑 뭔 상관이냐? 그건 어른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누나는... 그게 그렇게 돼?" 우리가 또다시 투닥거리려고 하는데 그 상석에 앉은 남자가 차를 한 모 금 마시더니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해서 민이와 나는 곧 투닥거림을 멈 추고 그에게 주목했다. "아까는 주위의 눈과 귀 때문에 정식으로 내 소개를 못했소만, 내 이름 은 은허잠이라 하외다." 은허잠, 별호는 자양노군이며 현 5대 세가 중 하나인 은씨 세가의 가주 이자 아빠가 말해 준 요즘 시대의 5대 고수 중 한 명이었다. '얼라리오... 꽤 배경 빵빵한 인물이었잖아? 그래서 그런지 말투부터 하 오체로 바뀌었네... 어쩐지... 아빠보다 많은 마나가 느껴지더라니......' 아까 말을 안 했다면 아빠 엄마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을 텐데 모두 담담 한 걸 보니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주의 말은 계속되었다. "나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소. 그러나 큰아들은 7년 전 며느리, 두 손자 들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오. 내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같이 간 식솔들 모두가 시체로 발견되었으나 내 손자 손녀들만 은 발견되지 않았소. 혹시나 하고 일이 일어난 숲과 그 근처 마을을 샅 샅이 뒤졌지만, 아이들은커녕 그와 비슷한 애들을 봤다는 목격자조차 없어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그는 나와 민이를 기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음... 부담되는 시선인데......'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닌, 앞으로 그를 무던히도 애먹일 거라는 걸 뻔히 아는 나는 감히 그의 시선을 바로 볼 수 없어 슬며시 고개를 돌리 는데 아빠가 나섰다. "그러니까... 가주님 말씀은 제 아이들이 그때 실종된 가주님의 손자들 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빠의 굵은 음성이 실내를 울리자 가주가 고개를 돌려 아빠를 바라보 았는데 그 시선에는 착잡함과 미안함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렇소. 저 아이들이 바로 그때 실종되었던 내 손자들이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가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가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발악하듯 물 었다. 분명 무례한 태도였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가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더니 소매에서 아까 민이에게서 뺏은 금패를 꺼내 보였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단 세 개밖에 없는 거라오. 하나는 내가, 다른 두 개는 각각 두 아들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을 당한 큰아들은 이 패를 가지 고 있지 않았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단정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부인 말이 맞소. 그러나, 한 가지 더 확증적인 증거가 있소. 그 애들은 쌍둥이였기에 구별하기 위하여 아이들의 손목 안쪽에 이름을 새겨놓았 소. 여아는 '진', 남아는 '민'이라고......" '쩝... 하긴, 완벽하게 하기 위하여 아이들의 문신까지 그대로 만들어놓 기는 했지......' 엄마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잇는 아 빠의 팔을 붙들었다. 아빠가 엄마의 그 손을 토닥여 주기는 했지만, 아 빠도 아까의 무덤덤한 표정을 잃어버리고 딱딱하게 굳은 것이 엄마처럼 평정심을 잃은 채 가주의 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판사나 의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것처럼. "누나......" 민이가 걱정스럽게 나를 불렀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이었다. "기다려... 조금만 더......" 안심하라는 듯 민이에게 방긋 웃어준 다음 나는 꿀떡 하나를 더 집어먹 었다. '음, 이거 꽤 맛있군.' 그 모습에 민이는 긴장을 풀기보다 신뢰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가주가 선고했다. "두 분은 우리 집안의 은인이요, 내 손주들을 찾아주었으니 뭐든 답례를 하고 싶은데......" 엄마와 아빠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움찔거렸고, 가만히 듣고 있던 두 승려 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불호를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이제 슬슬 나서볼까?' 더 늦었다간 내가 나서봤자 아무것도 안 될 거였다. 그러나 내가 막 입 을 열려고 할 때 누군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버지, 절 찾으셨다구요?" 가주 못지 않게 비싸 보이는 푸른 비단 장포를 입은 남자였다. 평범하지 만 눈매가 약간 휘어져 있어서 웃으니까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남희석을 닮았군.' "어서 오너라. 너에게 기쁜 소식이 있어서 급하게 찾았다. 네 조카들이 돌아왔단다." "예? 제 조카라 하심은......?" "7년전 잃어버렸던 네 형의 아이들 말이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구나." 놀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아들에게 가주는 우리를 가리켜 보였다. 웃 을 때는 안 보이던 눈이 놀라니까 무지 커져 있었다. "너, 너희들이......?"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던 그는 곧 표정을 환 하게 바꾸고 두 팔을 벌린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너희들이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정말 꿈만 같구나......" 그러나 나는 그가 다가오기 전에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엄마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민이도 즉각 쫓아왔다. '자, 이제 시작이야∼!' 나는 최대한 무표정에 정색을 하고 그 하회탈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그의 동작이 즉각 멈추어졌고 반응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진아, 모르겠니? 네 숙부님이시다." 무지 황당한 듯한 가주의 말에 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냉담하게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가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진아, 나는 네 할아비다. 그래, 네가 일곱 살 때 헤어졌으니 잘 기억나 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 잘 생각해 보렴. 날 모르겠니?" '음... 그럼 난 지금 열네 살인가?' 안타깜고 애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그 모습에 조금 마음이 흔들렸지 만 민이와의 약속이 우선이었다. 나는 겁먹은 척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내 허벅지가 엄마의 무 릎에 닿았고 엄마는 나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날 등뒤에서 감싸안았다. '그래, 이 품을 포기할 수는 없지.'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려면 최대 한 냉정하게 굴어야 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 금패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품이 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지만 친모께선 절대로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 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금패로 인하여 부모님과 우리를 떨어 뜨리려 하니, 당신이 진짜로 우리의 친조부인지, 아니면 그날 친부모님 을 습격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는 당신을 믿 지 못하겠습니다." 가주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나는... 5대 세가 중 하나인 은씨 가문의 가주란다. 내 신분은 저기 계신 대사께서 증명해 주실 것이야. 그리고 난 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않니?" [민아, 이제 네가 나서라, 나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 게 더 좋겠지. 둘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리기도 하고 말이야.] 그 내 말에 민이가 나섰다. "우린 당신의 신분이 무엇이건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에 대해서는 그날 습격했던 검은 옷의 사람들도 잘 알고 잇을 테지요." [멋진 말이었어. 그런데 우리말투 말이야, 열네 살인 애들이 말했다고 하기엔 너무 논리적이지 않아?] [몰라. 어차피 쏟아진 물이야. 근데 누나, 우리 열네 살이야? 열다섯 살 아니었어?] [7년 전에 여덟 살이 아니라 일곱 살이었대. 처음 계획대로 키는 159cm까지 키우지 않은 게 다행이었군.] 민이와 내가 그렇게 헛소리를 주고받고 있을 때 경악 어린 표정으로 민 이와 나를 번갈아 보던 가주가 뭔가 결심을 했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우 리를 쳐다보았다. "그래, 어린 너희들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았구나. 하지만 내가 너희 친할 아비인 것은 사실이고, 너희들의 본 집은 바로 여기다. 너희가 우리 집 안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명령하듯이 말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이만 가서 쉬거라.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이야기 하자꾸나. 총관, 이 아이들을 방으로 데려다 주게." "알았습니다. 가시지요, 도련님, 아가씨." 이미 하인들 사이에서도 우리가 친손자들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된 듯 했다. 민이가 어쩔까? 하는 시선으로 나를 보기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물러나면 우리의 말은 어른들에게 잊혀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여기서 버팅겨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건 부모님도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날 감싼 팔을 풀고 등을 살며시 밀기에 뒤돌아보니 그 총관이라는 노인 을 따라가라고 눈짓하고 있었다. 불안한 시선으로 엄마를 바라보자 엄 마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민이와 함께 총관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이 총관이라는 사람이 건물 밖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더니 깊숙이 위치해 있는 건물로 가서는 그곳도 모자라 민이와 나를 떼어놓는 거였다. '허, 참내......' 미리 준비가 되었던 듯 네 명의 시비가 각각 둘씩 민이와 나에게 붙더니 다른 방향으로 데리고 갔다. [누나, 어쩌지?] [참내, 지금 우리를 애들이라고 얕보는 거야. 흥, 이 정도로 우리를 떼 낼 수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어리석군. 민아, 걱정 말고 이들이 하는 대 로 얌전히 있다가 너 혼자 남으면 나 불러라.] [누나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불러? 떨어져도 연락이 되는 거야?] 그제야 나는 민이가 드래곤이 아닌, 마법을 하나도 모르는 용이라는 것 을 기억해 냈다. 그동안 쉽게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니 나와 같은 드래곤 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맞다. 넌 마법을 쓸 줄 모르지? 알았어. 내가 연락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 [누나만 믿을게!] 날 안내하는 시비들을 따라 도착한 방은 완전 여자애 방이었다. 온통 방 안이 분홍색과 흰색 천지였다. 게다가 민이 방에도 있는지 모르지만 몸 전체를 비출 수 있는 청동 전신 거울에 그 옆에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 록 병풍이 3면에 둘러쳐져 있는데 그 병풍에는 꽃이 만개해 있는 매화 가지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 다란 놋쇠로 만든 욕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벌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물에 이름 모를 붉은 꽃잎까지 잔뜩 담겨 있었다. '참내... 저쪽 세계에서 목욕시킬 때는 목욕물에 우유며 향수를 집어넣 더니만 이곳은 자연산 입욕제를 집어넣는군.' 그들이 내 옷을 벗기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내 피리에 손을 대려 하자 나는 얼른 그 손을 쳐냈다. "피리는 건드리지 마. 내가 가지고 있을 거야." 그러자 두 시비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쪽-그래 봤자 20대 후반으로 보 이는-시비가 날 달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예. 저희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여기다 놓으세요. 목욕하시는데 가 지고 계시면 불편하시잖아요. 저희가 아무도 안 가져가게 지켜보고 있 을게요." '완전 애 취급이군......' 기분 나빴지만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목욕을 하고 새옷을 갈아입자 시비가 머리를 빗겨주고는 나를 침대로 데려갔다. 장정 두 명이 누워도 충분할 만큼 큰 침대는 휘장도 이불도 베개도 다 분홍색이었다. '엄청나군. 왜 여자애는 모두 분홍색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여기 꾸민 사람 도대체 누구야?' 시비들은 내가 침대 속에서 잠든 척할 때까지 지키고 있다가 조용히 물 러갔다. '에궁... 감시하라는 명까지 받았나?' 그 시비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는 주위의 마나를 자세히 살 피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둘... 셋, 아니다, 넷이군. 둘은 내 방문 앞을 지키고 있고 둘은 복 도 끝에 있구나. 음... 그래도 아직 마나의 양이 3클래스도 안 되는군. 그 럼 마법을 사용해도 되겠어.' 나는 혹시라도 누군가 방에 들어와 살펴볼까 봐 침대 위에 내가 있는 것 처럼 보이게끔 가벼운 환영 마법을 걸고 내 기척을 완전히 감춘 다음 민 이 방으로 이동해 갔다. 민이 방이 어딘지는 몰랐지만 동료가 어디에 있 던지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퍼억∼! "욱!" "앗! 미안, 미안......"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민이의 위에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다행히도 민이가 밖에서 경비 겸 감시를 서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고 있어 얼 른 입을 막아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들킬 뻔했다. "누나, 나한테 감정있어?" 얼른 민이 위에서 내려오자 민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눈 안에는 안도감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찾아오지 않을 까 봐 걱정하고 있었나 보다. "미안해. 내가 방금 사용한 주술은 동료 근처로 이동하는 건데, 그 근처 어디로 떨어질지 몰라... 많이 아파?" "괜찮아.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 부모님이 우리를 데려가실 수 있을 까?" "부모님만으로는 불가능할 거야. 그 가주가 아주 당당히 작정한 모양이 던걸. 너하고 나도 떼어놓은 거 보니까 아마 내일 부모님과도 못 만나게 방해할 거야. 그리고 그동안 부모님을 쫓아내려 하겠지." "저기... 부모님이 이 집에서 나간 다음 우리가 쫓아가면 안 될까? 우리 둘이면 여기서 쉽게 나갈 수 있잖아." "우리가 어디로 갈지 뻔히 아는데 가만있겠어? 쫓아오겠지." "부모님께 부탁해서 이사 가면 되지." "그러다가 우릴 찾아내면? 또 이사 가자구?" "그, 그거야......"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도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야. 나중에 또 귀찮아진 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해." 내가 결연하게 말하면서 막 대책을 이야기하려는데 민이가 내 말을 가 로막았다. "저기, 누나!" "응?" 의아해서 바라보자 민이가 미안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저기... 나 있잖아... 검을 뺏기고 말았어......" "에?" "그게 그러니까... 목욕한다고 옷을 벗겨놓더니 나중에 싹 가져갔더라고 ...게다가 내 짐 보따리까지 싹 가져가서... 거지, 나 돈까지 다 털렸어.." "허걱!" 내가 입이 딸 벌어지자 민이가 재빨리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이마 위로 올린 뒤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화낼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미안해애∼ 나고 그들이 나간 다음에야 알았어! 검을 옆에 두려고 찾아 보니까 아무것도 없잖아∼" 나는 그런 민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넋 나간 어조로 중얼거렸다. "민아... 난 지금 알았어......" "엥?"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민이를 외면한 채 나는 처절한 절규 를 내뱉었다. "우아아아악∼ 어떡해, 어떻해... 어떡해애애애애∼ 젠장. 젠장, 젠장하 아아알∼ 목욕시키려고 할 때 눈치 챘어야 했어. 젠장! 짐 보따리까지 가져가다니이이∼ 이럴 줄 알았으면 돈주머니에도 방어 마법을 쳐놓는 건데, 제기라아알∼ 치사한 가주 자식!! 아주 철저하게 계획해 놨구만!! 우아아악∼ 내가 돈을 뺏기다니이이이∼!! 가만 안 두겠어, 민아!!" "응? 왜?" "우리 가주 녀석에게 확실한 본때를 보여주자, 알았지?" "응? 으, 응......" "좋아, 어디 두고보자구. 빠드득∼" 다음날 아침, 어제 내 짐을 싹 들고 갔을 두 시비가 아침 식사와 옷을 한 벌 가지고 왔다. '쳇, 치사하게 옷까지 다 가지고 가더니, 그래도 오늘 입을 옷은 갔다주 는군.' 그녀들이 내 방으로 들어왔을 무렵 나는 7년 동안 꾸준히 해 왔던 새벽 수련이 몸에 밴 탓에 벌써 일어나 운기까지 마친 상태였다. "아가씨, 아침 식사 하셔야죠." 한 시비는 방 안의 식탁 위에 음식들을 올려놓았고 나머지 한 시비는 나 에게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빗겨주었다. "부모님과 같이 먹을래." "그분들은 벌써 식사를 끝내셨는걸요. 그러니 아가씨도 얼른 드세요. 오 늘 또 축제 구경하러 가셔야죠." 어린애를 달래듯 상냥하게 말하는 시비의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흥, 그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그래? 그럼 민이랑 먹을래." 그나마 내 물건 중 유일하게 남은 피리를 집어들고 그녀들이 뭐라 대꾸 하기 전에 잽싸게 문 쪽으로 뛰었다. "앗, 아가씨!!" 뒤에서 다급한 시비의 외침을 뒤로한 채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데 문밖 에서 지키고 있던 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창대를 X 자 모양으로 교차 시킨 채 내 앞을 막는 거였다. 하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나는 교차 지 점을 도약대 삼아 훌쩍 창대를 건너뛴 뒤 복도를 달려나갔다. 민이와 아침에 건물 밖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민이도 지금쯤 뛰쳐나오고 있을 거였다. "아가씨, 거기 서세요!!"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더욱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확실 히 단전에 마나를 더 집어넣은 건 잘한 것 같았다. 내공이 많이 흐르니 신법이 더 빨라졌던 것이다. '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예 혈도를 다 뚫어놓을 걸 그랬나? 에잉, 그 러다 부모님이 의아하게 생각하면 골치 아파져. 어차피 여차하면 마법 을 쓰면 돼.' "누나!!" 건물 앞마당에는 민이가 먼저 와 있었다. 폼을 보아하니 날 기다리느라 잠시 멈칫하고 있다가 경호원 겸 감시자들에게 둘러싸인 듯 하다. 내가 그들 사이에 뛰어들어 민이 옆에 서자 날 쫓아오던 사람들과 민이 를 둘러싼 사람들이 합세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 옷 입자마자 곧바로 뛰어온 거야. 속옷 차림으로 뛸 순 없잖아. 그나 저나 넌 빈손이냐?" 나는 그나마 검 대용으로 쓸 수 있는 피리를 들고 있었지만 민이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미안, 검을 구하지 못했어." "에휴... 그럼 지금은 내가 나서야겠군." 오랜만에 머리 속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대신 입으로 떠들었더니 우리 앞을 막고 잇던 인간이 다 들었는지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 었다. "아가씨, 도련님, 들어가시지요. 그렇게 멋대로 돌아다니시면 안됩니다. 식사를 같이하게 해드릴 테니 들어가셔서 식사하세요. 식사를 하고 나 시면 저희가 축제 구경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주위를 훑어보니 우리를 막고 있는 사람들 모두 우릴 다 잡았다고 생각 하는지 느긋한 표정들이었다. '흥! 애들이라고 얕보다간 큰코다치지.' 나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어주고는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주술로 저들을 뚫을 테니 넌 부모님을 찾아내.] [알았어.] 민이는 그 즉시 작게 중얼거렸다. "바람이여, 나의 의지를 받들어 내가 보고 싶은 이들을 찾아내라!!" 그러자 민이의 몸에서 부드러운 마나가 빠져나와 공기 중에 섞이더니 갑자기 민이의 주변으로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민이를 감싸 돌기 시 작했다. "누나, 난 준비 다 됐어." "오케이, 그럼 나도 시작한다." "다스트 팁!!" 내가 우리를 둘러 싼 사람들에게 한 손을 뻗으며 외치자 내 주변의 공기 가 급속도로 얼어붙더니 새끼손가락만한 뾰족한 얼음조각이 수백, 수천 개가 생겨나 앞을 가로막은 녀석들에게 쏟아져 들어갔다. "지금이야." 갑자기 나타나 자기들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얼음 조각을 막아내느라 바쁜 그들 시야를 빠져나가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들에게서 많이 떨어져 나오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한 가지 마법을 더 선사했다. "다그 웨이브!" 그러자 그들 발 밑의 땅이 폭발하여 그들을 하늘 높이 띄워 버렸다. "좋았어. 가자!!" 민이가 앞장서서 달려갔다. 엄마와 아빠는 건물 안의 홀처럼 넓은 텅 빈 공간에 그 가주를 위시한 은씨 가문의 무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가주 사이에 는 정각 대사와 그의 제자들이 끼어서 싸움을 막고 있었다. "아미타불... 가주님, 이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비키시오, 대사. 당신은 이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이다." "나중을 생각하셔야지요. 그 아이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그 애들의 할아버지요. 그 애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것 이 아니오? 나는 다시는 그 아이들을 잃고 싶지 않소." "그래도 이건 옳지 않습니다." "벌주를 택한 건 저들이오. 난 저들에게 충분한 사례를 하려 했단 말이 오." 그러자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나섰다. "나에게는 당신이 주는 그까짓 금붙이보다는 내 아이들이 소중하단 말 이에요." 엄마가 날카롭게 외치자 그 가주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그 애들은 내 손자들이야!!" 그의 모습이 평소 모습이 아니었던지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은씨 가문 의 무사들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내가 봐도 지금 그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민아, 난 아까까지만 해도 저 가주를 괘씸하게 생각해서 한 방 먹이려 고 했거든... 그런데 저 모습을 보니 쬐께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그 가주의 모습이 마음에 찡∼ 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하지만 민이 녀석은 단호했다. "누나, 부모님과 안 헤어지기로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저 가주도 가엽다 이 말이지." "쯧쯧... 우리를 떼어놓으려 한 자야." "뭐... 그거야 그렇지." "에휴, 나도 모르겠다. 난 너무 맘이 약해서 탈이야. 어쨌든 뛰어들고 보 자구." 엄마와 아빠가 있는 그 넓은 홀 주위를 무사들이 몇 겹으로 싸고 있었기 에 그대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민이를 데리고 기척을 감춘 채 천장에 붙어 있다가 그 가운데로 훌쩍 뛰어내리며 멋들어지게 외쳤다. "짜쟈안∼ 정의의 용사 등장!!" 너무나 갑작스런 우리의 등장에 그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은 놀라움을 감 추지 못했다. "누나,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야? 여기가 뭐 악당 소굴이라도 되는 줄 알아?" "시끄러. 그냥 내려오는 건 너무 싱겁잖아. 그래서 양념을 겉들인 것 뿐 이야." "헹,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겠지." "어쭈구리. 니가 지금 나한테 반항을 하는 것이냐?" "거창하게 무슨 반항씩이나......" 내가 언제 이렇게 민이를 크게 놔뒀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려는데 엄마가 우리를 끌어안았다. "얘들아!!" 그러자 이 민이 녀석이 입을 딱 다문 채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은근히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쯧쯧... 애기라니까." "엄마, 우리 보고싶었죠?" 그런 민이를 위해 나는 슬쩍 엄마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싱긋 웃었다. 그 런데 안도의 미소를 짓는 엄마의 어깨 너머로 씁쓸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가주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에구머니나......' 화들짝 놀랐지만 시선을 피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아 난 그냥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설마 내 인사를 받아줄 것이란 생각은 못하고 어색한 상황을 모면해 보 고자 그냥 말해 본 것인데 의외로 가주가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잘 잤느냐?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왔지? 네 숙소를 지키고 있 던 이들은?" "음, 그들은 제가 뛰어난 기지를 발휘해 처리했구요, 여긴 민이가 찾아 냈어요." "그러냐? 대단하구나... 이거 안심하고 있다가 한 방 먹었는걸? 그럼 여 긴 어떻게 들어왔니?" "음... 그건요......" 마법을 써서 들어왔다고 할 순 없으니 뭐라 둘러댈까 머리를 굴리던 나 는 결국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자 최후의 수단을 썼다. 주먹을 쥔 상 태로 검지손가락만 편 오른손을 얼굴 옆으로 들어 보이는 동시에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의 귀여운 표정으로 윙크를 해보이며 한마디로 얼버 무렸던 것이다. "그건... 비밀이에요!" 순간적으로 주위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가주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렷다. "푸하하하하∼!" 나는 내 주위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 건 이해가 갔지만 가주의 태 도는 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하하하하, 걸작이다, 걸작이야... 하하하하하......" 그렇게 신나게 웃던 가주는 한순간 웃음을 뚝 그쳤다. '저러는 것도 재주지......' 웃음을 그친 가주는 침착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러자 그의 온 몸에서 근엄함과 태산 같은 굳건한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헤에, 정신을 차리니까 사람이 달라 보이네......' 내가 그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데 가주가 조용히 나에게 이리오라고 손짓했다. 그에게 꿀릴 것도 두려울 것도 없던 내가 당당히 그에게 가자 왜 그런지 몰라도 주위 사람의 눈에 일순 감탄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바로 그의 앞에 서자 가주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맞추더 니 진지하게 물었다. "진이야, 내가 싫으냐?"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지만 나는 솔직히 대꾸했다. "겪어보지 않아서 아직 확실한 감정은 없지만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아 요." "그러냐? 그거 참 다행이구나. 그럼 내가 네 친할아버지가 아닌 것 같으 냐?" 나는 물끄러미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고요히 가라앉아 있어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거짓말하시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저는 부모님의 돌아가 신 날만 기억날 뿐 그전의 나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요. 아버지 얼 굴도 모르는걸요. 단지 굉장히 절박한 표정의 어머니의 얼굴만은 기억 나요. 땀에 젖어 피곤하고 지쳐 있는데도 무척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제 가 기억하는 건 그것뿐이라서요. 그래서 그 말을 믿고 싶긴 하지만....." 내가 말끝을 흐리자 가주가 내 말을 이었다. "그날 불행을 가져왔던 사람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주저한단 말이지?" "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면 그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있었을 테지만요. 하지만... 지금의 부모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지금의 부 모님도 저희를 무척 사랑해주시거든요. 게다가 민이도 무지 많이 저분 들을 사랑하고요." 그러자 가주가 빙그레 웃으며 놀렸다. "진이는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게요... 저도 저분들을 많이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어제 민이와 이야 기를 하다 보니 나보다도 더 민이가 저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 어요." "흐음... 그래. 어제 민이와 부모님을 따라가기로 결정했구나?" "예."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은 없니?" "죄송해요. 이곳은 저에게 단지 낯선 곳일 뿐인걸요." "과연 그럴까?" 뜬금없는 가주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예?" "진이야, 나는 어제 너희를 이곳에 데리고 올 때부터 너희들을 보고 있 었단다. 너희들은 산속에서만 살았던 아이들치고는 이곳 환경에 쉽게 적응하더구나. 너희가 살던 집과는 완전히 다른 곳임에도 불구하고 처 음에만 잠깐 신기한 듯 쳐다봤을 뿐 그 다음은 아주 익숙한 곳에 온 것 처럼 편하게 행동하더구나. 오히려 너의 부모님이 더 부자연스러워 보 였지. 그건 바로 너희는 기억 못해도 너희의 몸은 이곳을 기억하고 있 다는 거란다." "에... 그런가요?" '거야, 난 소르드 왕국의 왕성이나 아빠의 으리으리한 저택에 익숙해져 있고, 민이도 왕자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으리으리한 곳에서 살았을 테 니 당연한 거 아닌가?' 라고는 말할 수 없어 난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가주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는 일어나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너는 결국 부모님과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거구나?" "예? 예에......" "그래? 그렇구나......" 가주는 뭐가 그런지 몇 번이고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가 나타난 뒤로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정각 대사가 나섰다. "아미타불... 가주께선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러자 가주가 힘없이 웃었다. "어쩌겠소?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강제로 떼어놓는다 해도 이 아이들 은 절대로 안 떨어지려고 할 테고... 항상 아이들이 가버릴까 맘 졸이며 살 순 없지 않소이까?" "그럼 가주의 말씀은......?" "현재로선 별 뾰족한 수는 없소. 하지만 아이들과는 헤어지고 싶지 않으 니 우선 모두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핫핫핫, 잘 생각하셨습니다. 현명하신 판단이군요." 정각 대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잘됐다는 듯 아빠를 바라보았고 아빠도 한시름 놨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휴, 어쨌든 이걸로 일단락은 되었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여전히 엄마 품에 안겨잇는 민이에게 미소를 보냈다. [잘됐지?] [뭐, 그럭저럭......] [야, 이 누나가 힘써 노력해서 이 정도가 되었는데 그렇게 밖에 말이 안 나오냐?] [후후후... 누나만 노력했나 뭐?] [쳇, 저녀석을 언젠가 한번 손을 봐줘야지 안 되겠어.] 그 뒤로 정각 대사와 가주는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 듯했지만 전음을 사 용했기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 일이 있은 뒤 부모님의 처소는 민이와 내 방이 있는 건물로 옮겨졌고 가주의 명으로 인하여 은공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 만 우리 가족이 머무록 있는 그 별채는 가주의 장남 가족이 살던 곳이라 고 했다 . 아, 그리고 그 가주의 차남은 창해일검 은제영이라고 했다. 요 즘 꽤 각광받고 있는 신진고수중 한 사람이라는것을 보니 어느 정도 인 정받는 모양이었지만 내공은 엄마보다도 약간 적었다.(참고로 울 엄마 내공은 약 4클래스 정도였다). 엄마, 아빠와 한 건물에 살게 된 뒤로, 더 이상 행동에 제약받는 일은 없었기에 민이와 나는 나머지 축제 기간 내 내 밖으로 놀러 다녔다. 가주가 우리에게 안내자 겸 호위를 붙여준 데다 그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비용을 모조리 대신 지불했기에 처음에 빼았긴 (?)돈의 몇 배는 펑펑 쓰고 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가주가 그 동안 해주지 못한것 다 해주겠다고 하며 매일 선물을 잔뜩 사서 가져다 주는 한편 축제 기간 동안에는 새벽과 해질 무렵의 내 공 수련 외에 다른 수련은 방학을 맞이했기에 더없이 기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맨 마지막에 누군가 훼방을 놓지 않았다면 민이와 나는평생 중 가장 행복한 휴가를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축제인 맨 마지막 날이자 명절날 당일 밤, 달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답게 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고, 축제를 끝내는 맨 마지막 행 사로 등에 불을 켜고 강물에 띄어 보내며 소원을 비는 풍습을 행하기 위 하여 호광성 근처의 강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복숭아 모양의 등을 사 왔던 나는 대나무와 색 지, 창호지로 만들어진 등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망가지지 않게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으아~ 정말 이럴 때는 키가 작은 게 무지 원망스럽다니까아~ 민이와 둘만 있었으면 하늘로 날아서 왔을 텐데 따라붙은 호위 때문에 마법을 쓸 수도 없고...!!' 다시 한 번 앞의 사람의 뒤로 밀려오자 등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내가 안쓰러웠던지 뒤에 서 있던 호위 중 한 사람이 등을 뺏어서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제가 들고 있겟습니다, 아가씨" "아, 고마워.;" '일찍 좀 들어주지.......' 그제야 내가 한시름 놓자 옆에 있던 민이 녀석이 쫑알댔다. "그러게 왜 등을 사 와서 고생이야? 그냥 구경만 하고 가도 됐잖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나도 해보고 싶었다고, 얼마나 낭만적인 일이냐? 넌 낭만을 몰라.." "낭만은 무슨... 낭만이 아니라 고생이다 고생!!" "쯧쯧... 아무런 힘도 안 들이면 무슨 감동이 있겠어? 이 정도 고생은 해 야 등을 띄어 보낼 때 가슴이 뿌듯해진다구" "그건 낭만이 아니라 성취감 같은데? 해냈다는..." "어머, 얘는 이런 운치있는 행사에서 그런 말밖에 못하냐? 쯧쯧 벌써부 터 애가 이렇게 감성이 메말라서 어떻게 하냐??" "잘만 살고 있는데 뭐,,.,"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면 인생의 묘미를 맛보지 못한다고. 그게 얼마나 가여운 일인데......" "거창하게 무슨 인생씩이나......." 그렇게 둘이 투닥거리며 열심히 사람들 틈을 헤쳐 나가자 드디어 강가 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강물 위에 띄어 보내서 저 멀리까지 강줄기 를 따라 둥둥 흘러가는 등의 행렬이 이어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강 위에 떠 있는 등들은 마치 허공에 떠서 하늘로 올라가는 불빛의 행렬처럼 보였다. "우와~ 멋지다~" "그치? 거봐, 멋있잖아, 아, 나도 해야지!" 초에 불을 붙여 등 위에 꽂은 뒤 강물 위에 내려놓자 곧 내 등도 물결에 휩쓸려 다른 등등과 함께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 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쥐고 기원했다. '제발 제가 돌아갈 때까지 저쪽 세계에서 아빠와 할아버지가 난동을 부 리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부모님과 가주가 행복하게 해주시요....." 손을 슬쩍 밑으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민이가 물어왔다. "많이 빌었어?" "음... 세 가지 빌었어" "뭔 소원을 세 가지씩이나......." "쯧, 넌 아직 어려서 뭘 몰라. 커봐라 그것도 작은 거다." "쳇 ! 누나 잘났어" 뒤에서 호위들이 피식피식 웃는 걸 흘려들으며 강을 바라보았다. 강 위 에는 여전히 많은 등의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지만, 저 모습에 뭔가 더 큰 기여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나는 사람들 몰래 시동어를 외웠다. '크리에이트 이미지!' 그러자 강물 위를 떠내려가던 등의 불에서 반딧불만한 작은 빛의 입자 들이 빠져나오더니 허공으로 떠올라 가볍게 흩날렸다. 수십개의 등에서 각각 여러 개의 입자가 떠오르자 그 수는 엄청 많아졌고, 마치 하늘의 은하수를 허공에다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우와~" "어머나~" "아름답다..." "어쩜~" "세상에나....."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러나왔고, 민이가지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더욱 기분이 좋아진 내가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리는 순간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마나가 무서운 기운을 품고 이쪽으로 날아오는게 감지되었다. "숙여!!" 그것의 목표가 이쪽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민이의 멱살을 잡고 밑으로 내리는 동시에 나도 황급히 몸을 숙였다. 평소 같으면 감지 못했 을 것이다. 다행이 내가 빛의 입자들을 사람들 머리 위에다 옮기기 위하 여 내 주위에 환상 마법을 위한 마나를 퍼뜨려 놓고 있었기에 그 마나를 가르고 오던 이질적인 마나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나에게 멱살을 잡힌 민이는 당바닥에 고꾸라졌고, 날아 오던 마나는 우리 머리 위를 지나 운 나쁘게 우리 옆에 서 있던 어떤 남 자에게 가서 박혔다. 픽! 잔뜩 집중하고 있지 않으면 듣지도 못했을 너무 미약한 소리가 나자마 자 그 남자가 허물어지듯 스르르 쓰러졌다. 너무나 조용히 일어난 일이 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눈치 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계속 신경 쓰고 있던 호위들은 그 모습을 보았고 긴장한 채 민이와 나를 둘러쌌다. "아가씨, 도련님, 여길 빠져나가야겠습니다." 하지만 한 명씩 한 명씩 빠져나가기도 힘든 판에 4명이나 되는 호위가 우리를 둘러싸고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두 번이나 더 암기가 날아와 애꿎은 사람들만 더 쓰러졌다. 결국 생각다 못한 호위 둘은 우리를 업고 둘은 뒤에서 호위한 채 사람들 의 어깨를 발판 삼아 사람들의 머리 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뭐,뭐야?" "꺄악~" "우왁!!" 우리에게 밟힌(?) 사람들은 엉겁결에 비명을 질렀고 덕분에 주위는 소 란스러워지고 뭔 일이 발생한 것 같자 사람들은 서로 이 곳을 피하려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우릴 노린 사람들도 우리처럼 사람들 위로 몸을 드러내며 쫓 아오기 시작했다. 수는 모두 다섯! 그들은 우리 호위보다 더 경공 실력이 빨라 우리가 그 곳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이런, 우리가 막을테니 어서 아가씨와 도련님을!!" 뒤에서 따라오던 두 호위가 걸음을 멈추며 비장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 건 소용없는 짓이었다. 경공 실력으로 볼 때 우리를 노리는 자들의 실력 은 결코 호위들의 아래가 아닌 듯한데 둘이서 어떻게 다섯 명을 막는단 말인가! "내려줘, 저 사람들 만으로는 막지 못해!" 민이가 먼저 외치며 자신을 업었던 호위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도련님!" 민이를 업었던 자가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민이는 벌써 검을(검을 돌려 받았다) 빼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민이에게 세 명의 살수(두 명은 호위에게 가로막힌 살수를 제외한)들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 는 무기를 던졌다. 동시에 상, 중 , 하를 노리고 날아드는 곳에서 찔러오 는 짤막한 세 자루의 비수였다. "윽!" 예상치 못했는지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칼침 맞게 생기자 민이는 반 사적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실드!!" 정말 내가 몇 초라도 늦게 달려왔다면 민이는 꼬치가 될 뻔했다. "멍청아, 눈은 왜 감냐?" 나는 민이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끌어당기며 세 살수들을 노려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검이 민이의 코앞에서 튕겨져 나가자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자세를 잡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네놈들은 뭐냐? 왜 우리를 노리는 거지?" 대답하지 않을 것 같은데도 나는 물어볼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와서 아 직 원한 살 일이 없었던 나는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녀석들이 황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녀석들이 입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 감긴 검은 옷을 보고 있자니 머리를 스쳐 가는 장면이 하나 떠올랐다. '아,,, 역시나... 가주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버리다니... 그 몇 년전의 의 문의 무리까지 우리의 존재를 알아버렸구나... 우리가 이렇게 대단한 존 재였을 줄이야...' 그 시커머스 3인조는 자세를 가다듬고 재차 찔러왔다. 황당하게도 민이 에게는 한 명이 달려들면서 나에게는 두 명이 같이 달려드는 거였다. "뭐야 뭐!! 왜 나한테는 두 명이 붙는건데?" 열밭아서 펄쩍 뛰며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날카롭게 빛나는 두 자루의 비수였기에 나는 뒤로 물러나야 했다. "치사하다. 어린애한테 다 큰 어른이 두 명이서 협공하냐?" 나는 쉴 새 없이 발과 손을 놀리며 외쳤다. 입으로는 호기있게외쳐 대고 있었지만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연신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내가 드래곤이라 해도 무공을 배운 지 겨우 7년 인데 되게 잘 싸우는 살 수 두 명을 검술로 상대하기란 역부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나 정신없이 공격을 해대던지 지공이나 이기어검술은 써먹어 볼 틈 조차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배운 검술이 근거리 방어 위주였기에 망정이었 지 공격 반 방어 반 검술이었으면 벌써 상처를 입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호위 한 명이 나와 협공을 해주고 있어서 크게 절박하지 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살수들은 호위의 공격은 스리슬쩍 피하면서 나만 집요하게 공격하는것이었다. "아 정말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거야? 우쒸, 두고 봐. 집에 가면 당장 수 련을 시작하고 말겠어. 정말 왜들 실력은 좋아가지고 사람 힘들게 하는 거야?" 긴박한 상황에서도 간뎅이가 부어가지고 쨍알쨍알대던 나는 결국 내 몸 에 좀 큰상처를 내고 말았다. 얼굴 쪽으로 찔러 들어오기에 고개를 옆으 로 숙여 피했는데 찌를 때의 여세가 너무 날카로워서 칼날이 피부에 닿 지 않고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뺨의 절반 넘게 가로지르르 칼에 베인 것과 같은 상처가 생겨 버린 것이다. "아앗, 난 몰라!! 얼굴에 상처나면 엄마한테 얼마나 혼나는줄 알아? 당 신이 대신 혼나줄것도 아니면서 왜 얼굴에상처는 내고 그래? 당신은 양 심도 없어?? 여자에게 얼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아냐구우~!!" 살수들의 몸이 일순간 휘청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건 내가 착각한 것처 럼 생각될 정도로 극히 짧은 순간이었고, 그들은 재차 다시 찔러 들어왔 다. 하지만 난 그들을 상대하는 대신 후닥닥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당신들이 먼저 치사하게 나왔으니 나도 딴 방법을 사용해 주겠어! 스네 어!!" 내가 살수들을 가리키며 외치자 빠르게 날 쫓아오던 두 살수들이 달려 오던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주르르 밀려왔다. 얼마나 빠르게 달리고 있었으면 땅에 굵은 선까지 그으면서 약 1M 정도는 밀려온 듯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그들의 혈을 짚었다. 마법을 사용할까 했지만 산 속에서 살 때 머리 싸매고 지겹게 외웠던 혈도들을 이런 기회에 써먹지 못한다면 무지 억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코앞의 살수들이 잡혀 버리자 그제야 여유가 생긴 나는 주위를 둘러보 았다. 나와 같이 싸운 호위는 저쪽에서 살수 둘을 힘겹게 막아내는 동료 들을 도우러 갔고, 민이는 호위한 명과 살수한 명을 조금은 여유있게 상 대하고 있었다. '음.... 민이쪽은 된거 같으니까 나도 저쪽을 도와주러갈까나? 므흣~ 이 번에는 지공을 써먹어봐야징~!!' 아까의 절박했던 상황은 바로 잊어버리고 곧바로 장난하러 가는 기분이 되어버리는 나였다. 다행히 호위들은 두 명이 심하게 다치기는 했지만 모두 무사할 수 있었 고 살수는 나와 민이를 공격한 세 명을 붙잡았고 나머지 두명은 호위들 에 의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뭐, 좀 더 정확히 한다면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들도 산채로 잡고 싶었는 데 그들이 자신들이 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스스로 호위들의 검끝으로 몸을 내던졌던 것이다. 그걸 보고 나는 좀 황당했다. 물론 무협지에서 묘사되길 이곳은 목숨을 너무나 쉽게 내버리는 곳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들을 이해할 수도 없 을 뿐더러 너무나 어리석게 여겨졌던 것이다. '왜 자살한 거지? 도망가면 죽나? 그래도 최소한 살려고 몸부림치지도 못해? 자기 목숨이 그렇게 가볍게 여겨질 수 있는 거야? 설마 그걸 멋지 게 여기고 살았던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내가 그들에 대해 잘 아는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설레 설레 젓고는 그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사로잡은 살수들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심하게 다친 두 호위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두 호위와 나와 민이도 겉옷이 너덜너덜하게 여기저기 찢겼고, 군데군데는 피부까지 같이 찢어 져 피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심한건 아니었지만 가주(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와 부로민 을 새파랗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얘들아!!" 엄마가 우릴 보더니 구를 듯이 달려와 우리를 부두켜않았고 가주는 의 원을 부르라고 소리쳤다. "괞찮니? 무슨일이 있었던 거냐? 응?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새파래진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울 듯이 묻자 민이가 콧등이 시큰한지 자기도 모르게 울먹였다. "어머니~ 훌적, 저흰 괜찮아요오~ 훌쩍,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오~ 훌 쩍." 나도 덧붙였다. "우리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에요. 별 탈은 없었어요" 그러자 엄마가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또 한번 놀라더니 내 얼굴을 잡았다. "이게 별게 아니면 ... 어머낫! 진아~! 얼굴이 이게 뭐니? 누가 내 딸 얼 굴을 이렇게 많들었어? 누구야? 앙?" "엄마.. 그게 내가 경험이 없어가지구서링..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말은 제대로 나 오지 않았고, 엄마는 내말을 듣지도 않은채 다시 흥분했다. "경험이고 나발이고 여자는 얼굴이 생명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도 모르는 꼴통이 누구라니? 노리려면 딴 데를 노릴 것이지 왜 얼굴을 노 리고 난리야? 시집 못가면 책임질거야?" '내 이럴줄 알았지 그러게 왜 내얼굴을 노려가지구-0-' "어,엄마 지금 그런 말은 좀....." 내가 한숨만 내쉬고 있자 결국 민이가 흥분한 엄마를 말리러 나섰다. "어머, 내 정신좀 봐라. 그래 진아 딴덴 다친데 없고?" 민이의 말에 정신을 차린 엄마가 180도 돌변해서 걱정스런 어조로 나에 게 묻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아빠는 괜히 딴데 처다보며 헛기침을 해댓다. "괞찮아요. 그냥 가벼운 상처만 입었는걸요" 3부11화 진이민이목숨의위협을받다(2) 엄마는 그래도 내 몸을 자세히 살펴 큰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야 안심이 되었던지 진정했다. 그러자 그제야 뒷전으로 밀려 있던 가주 와 아빠가 나섰다. "그래 무슨일이더냐?" 가주의 질문에 우리 뒤에 서있던 호위중 한사람이 나섰다.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계실때 갑자기 암기가 날아왔습니다. 첫암습은 저희는 몰랐으나 다행히 아가씨께서 알아차리시고 도련님까지 보호하 시어 무사히 넘길수있었습니다. 그 뒤 저희가 두분을 모시며 피하는데 살수 다섯명이 나타나 공격해왔습니다. 하지만 천운으로 두살수가 실수하는 바람에 셋을 사로잡을수 있었고 둘 을 처리할수 있었습니다." '처어언우우우운~? 쳇, 내가 마법을 쓴건데 천운이라니... 천운이 울고 가겠다. 치.. 뭐 그래도 마법을 쓴건 안들켰으니 그걸로 된건가? 아니 다. 그걸 천운이라고 해야겠구나?' 가주는 호위의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심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혹시.. 은원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아빠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빠아~ 그걸 생각해 볼정도인가요? 그럼 있기는 있다는소리잖아?" "제아이들을 노릴 정도로 심하게 맺은 은원은 없습니다. 게다가 제아이 들이 습격을 받은건 처음있는 일입니다만.... 혹시..." 그러면서 아빠가 가주를 바라보자 가주가 뭔가 생각난듯 눈가에 미미 한 경련을 일으켰다. "설마.. 7년전 큰아들 가족을 습격한 자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빠는 진중한 어투로 긍정했다.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문에 원한이 있는거라면 왜 7년씩이나 기다렸다가 이제 와서 아이들을 공격하는건가?" "글쎄요.. 그것도 그렇군요. 예전에 큰아드님 일행을 몰살시킬정도의 능 력이라면, 이제와서 아이들을 노린다는것도 말이 안됩니다. 그전에 얼 마든지 가주님이나 작은아들님을 노릴수 있었을테니까요..." "아이들에게 집적적인 원한이 있을리도 없고... 후~ 모를일이군,.. 도데 체 뭘 원하는 걸까? 어쨌든 아이들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원이 오면 한번 보이도록하게" "알겠습니다." '어쩐지...아빠와 가주사이가 조금더 가까워진것 같네' 나쁜건 아니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검까지 겨누던 사이가 이 렇게 달라질수 있다는게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아빠가 가주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를 데리고 나갈때 가주가 총관에 게 경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우리 가족이 거하는 별채에도 경비가 무지 삼엄해 졌다. 게다가 그 다음날에는 민이와 나에게 외출금지령이 내려진 것이 었다. 뭐- 축제도 끝난뒤였고 이제 수련에 좀더 힘을 쏟어려고 했었으 니 별 상관은 없지만 나가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니 왠지 은근히 나가고 싶어졌다. 그러자 이런 내말을 들은 민이가 점잖게 충고했다. [그러다 들키면 엄청 혼날 거란 생각은 안들어?] [쳇, 누가 진짜로 나간대? 그냥 외출금지란 소리를 들으니까 그런맘이 생긴다는거지..] [누나 청개구리심보구나?] [야, 하지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맘이 생기는게 보통 아니냐? 나는 지극히 평범한사고를 가지고 있는거라구!] [난 그런맘 안생기는데?] [그거야 네가 고지식하니까 그렇지.] [쳇, 그럼 누나는 평범한 거구?] [평범? 음... 그것보다는 자유분방하다고 해줘] [그거 말안듣는 애들이 즐겨쓰는말 아냐?] [어머머, 무슨 그런 섭한소리를.. 나같이 말잘듣는애 봤냐?] [누나가아? 산속에서 살때 엄마가 하지말라는건 한번씩 모조리 해봐서 매일 다쳐서 집에 오던 누나가아?] [시끄럿! 째째하게 옛날 일을 들먹거리냐?] [하아아~] [땅꺼진다. 한숨쉬지마!] 3부 12편 진이, 혹한덩이 만들다 (1) 그날 오후, 전날 민이와 내게 생긴 습격 사건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 혔을때 얼굴을 비치지도 않았던 가주의 둘째 아들이 찾아왔다. 이유인 즉슨, 어제 자신이 친구네 놀러 가는 바람에 일이 생겼는데도 같이 있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다가 맛있어 보이기에 사왔다며 고기만두를 내놓았다. 그건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꿀떡만한 작은 만두였다. 그가 있으나 없 으나 별 상관은 없었지만, 그가 내놓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만두 는 반가웠다. 민이와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꺼이 그의 사과를 받아 들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민이가 그에게서 만두를 받아 들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 마침 수련을 쉬고 있었다니 다행이구나. 식으면 맛이 없을테니 어서 먹으렴" 둘째 아들은 하회탈 웃음을 보여주곤 가버렸다. 그가 가자마자 민이와 나는 재빨리 봉지를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갔다. 만두는 모두 40개. 둘이 똑같이 20개씩 나누고 막 먹으려는 순간 나는 욕심이 생기고 말았 다. 그래서 민이에게 제안을 했다. "민아 " "앙?" "우리 그냥 먹는건 재미없으니까 게임하면서 먹자" "게임? 뭔게임?" "젓가락 싸움!!" "젓가락싸움?" 의아한 듯 날 바라보는 민이에게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먹을때도 수련을 하면서 먹자는 심호한 생각이 담긴 게임이지" 그렇게 서두를 펼치면서 난 장황하게 게임 방식을 늘어놓았다. 그걸 다 듣고 있던 민이는 내 설명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자기 만두는 안 먹고 오로지 상대편 것만 젓가락을 사용해 뺏어먹는거라구?" "그렇지.." "그리고 먼저 만두를 다 잃는 쪽이 지는거고 이긴쪽이 남은만두를 상품 으로 먹는다?" "바로 그거야. 어때, 할래?" 잠시 생각에 잠기던 민이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자!" 각자의 만두를 앞에 놓고 젓가락 대련이 시작되었다. 규칙은 간단했다. 양손을 다 사용할수 있지만 만두를 집는 건 젓가락만 사용할것.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며 발을 사용할수 없다. 땅에 떨어진건 무효처 리된다. "시작!!" 나의 외침과 동시에 민이의 젓가락이 내 손목을 노리고 달려왔다. 만두 를 노리는게 아니라 내 손목, 그것도 젓가락을 든 손이 아니라 그 반대 손을 노리는게 의아했지만, 손의날을 세워 녀석의 젓가락을 탁쳐버리고 나도 공격에 들어갔다. 슉!! 정면으로 찔러들어가자 민이의 왼손이 당연하게도 정면으로 막았다. 속 으로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더 찔러 들어간뒤 재빨리 젓가락을 빙그르르 돌려 거꾸로 쥐는 순간, 팔을 내쪽으로 당기 는 동시에 만두를 찔렀다. '후훗, 하나성공!'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막 팔을 빼려는 찰나 어느새 돌아왔는지 민이의 젓가락이 내 젓가락과 손 사이에 끼어들며 진로를 방해했다. 그런데 가 만히보니 민이의 젓가락은 한짝뿐인 거였다. '앗! 나머지 한짝은??' 나머지 한 짝은 반대 편 속에 들려 내 만두를 찍은 채 막 절반쯤 이동하 고 있는거였다. '뺏길수없다!' 나는 막힌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쥔 손을 풀고 손가락을 이용하여 젓가 락을 180도 회전시켜 바로 쥔 다음 민이의 제지에서 벗어나는 한편 내 만두를 앗아가는 사악한 민이의 젓가락중간을 왼손손가락으로 잡아챘 다. 내 만두는 허공에서 딱 정지했고 민이의 만두는 내쪽으로 거의 도착 하려는 찰나, 민이의 한쪽젓가락이 내손가락부터 시작해 젓가락끝까지 슥 훑어 내젓가락에 끼인 만두를 빼냈다. 그러더니 자신의 젓가락끝을 사용해 만두를 허공으로 튕겨다시 자신의 만두진영속에 떨어뜨리려 했 다. 하지만 그렇게 놔둘수는 없었기에 나는 만두가 착지하기 직전 젓가 락으로 만두를 잡았다. "나이스~!" 라고 외친순간 젓가락에 너무힘이 들어가버렸는지 만두가 짜부되어 터 져버렸다. "우아악!~" 이 호아당한상황에 내가 잠시 멈칫하는사이 민이가 허공에 붙잡힌 만두 를 다른한짝의 젓가락으로 빼내더니 자신의 입안으로 던져넣었다. "음~ 맛있다." "아악~!! 이럴순없는겨!!!" 다시는 빈틈을 주지않겠다고 마음먹으며 2차공격을 시도했다. 파바박! 타닥!! 팟~ 타다닥! 그동안 민이도 열심히 수련했는지 내공격을 막는솜씨가 보통이 아니었 다. 거기에 간간이 해대는 공격은 내간담을 서늘하게 할정도였다. "빙설난분!!" '허걱. 무공초식까지!' 민이의 외침과 동시에 민이의 젓가락끝이 수십개로 늘어나더니 내 만두 진영을 향해 쏟아져오기 시작했다. "소검만선!!" 내젓가락이 크게 소용돌이를 그리며 민이의 젓가락들을 튕겨냈다. "빙하개동!!" 한줄기의 잔상을 그리며 순식간에 내만두를 찌르는 쾌속한 수법. 하지 만 그 순간 민이의 젓가락은 내 손가락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그리고 난 다른 손에 들린 젓가락으로 민이의 젓가락에 꽂힌 만두를 빼냄과 동 시에 민이의 손을 쳐내고 일직선으로 민이가 허공으로 던져진 자신의 만두를 사수하려는걸 왼손으로 제지하면서 허공에 뜬 세개의 만두를 젓 가락에 나란히 꿰어 내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민이는 그 만두들을 포기하고 대신 내 만두 두개를 찔러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수십차례의 교전을 펼치며 만두를 뺏고 빼앗기며 먹는 동안 절 반밖에 못먹었는데 만두는 다 식어버렸고 휴식시간은 다 끝나버렸다. 하지만 민이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만두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걸 알아차린 것은 그때쯤이었다. 거의 30여분이 넘는 시간동안 겨우 10개를 먹으려고 신나게 쟁탈전을 벌이던 민이의 얼굴 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얼굴에 조금씩 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거였다. "하아~ 누나, 나 힘들다. 조금 쉬었다가 하자." "민아, 너 웬지 안색이 안좋다?" "응? 으응... 웬지 배가 아픈것도 같고 ... 기운도 없기도 하고...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만두먹으며 운동해서 체했나?" "야, 팔만 움직엿는데 무슨... 어? 야,야!!" 민이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지더니 애 몸이 옆으로 스르르 넘어지는 거였다. 호아급히 민이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는데 민이의 몸이 얼음 장처럼 차갑다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얘가 왜이러지?같이 만두먹었는데 왜 얘만...?"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갑자기 으슬으슬 추워지더니 몸이 덜덜 떨리며 식은땀이 나는 게 느껴 지는 거였다. "뭐, 뭐야 이거... 혹시 만두가 상한거야?" 정신까지 차차 흐려지는것을 이를 악물며 버티면서 나는 해독주문을 외 웟다. 상한만두를 먹어서 식중독에 걸린 거라면 회복이나 치유보다는 내가 먹은 상한음식에 생긴 독소를 없애는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회복주문을 외웠다간 독소가 더 퍼져 버려 정말 큰일나게 된 다고 들었다. "큐어 포이즌!!" 아무래도 정신이 가불가물한 상황에서 마법을 시전하다 보니 제대로 마 법이 발동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을 잠식해 들어가던 추위가 어느 정도 풀리고 정신도 아까보다 훨씬 더 맑아지긴 했지만 완전히 나아지진 못했다. "하아~ 엄청 상한 만두였나봐....." 나는 나에게 한 번 더 마법을 시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완전히 쓰러진 민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피부는 아예 시퍼렇고 입술은 보랏빛 이 되어 있었다. 왠지 숨도 안 쉬는 것만 같았다. 얼른 코에 손을 대어보 니 호흡이 너무 미약하게 느껴졌다. "이런...이건 왠지 상한 음식을 먹은 게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나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민이 위에 손을 올려놓고 몸 안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여전히 머리가 띵해서 마나를 얼마나 모았는지 인식도 못한 채 시동어 를 외쳤다. "큐어 포이즌!!" 손에서 하얀빛이 빠져나와 민이의 몸을 감싸며 스며들기 시작했다. 잠 시 후 민이가 크게 숨을 쉬더니 아까보다 좀 더 편하게 숨을 쉬게 되었 다. 하지만 여전히 피부는 차가웠고, 얼굴에 혈색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다시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마 지막으로 온몸의 힘을 끌어모으고는 민이와 나에게 한꺼번에 다시 해독 마법을 걸었다. 간신히 민이의 혈색이 돌아온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만 족스러운 마음으로 흐려지는 정신을 다시 한 번 차리고는 내가 할 수 있 는 최후의 수단을 썻다. "살려주세요오오~!!!" 그리고는 기절해 버렸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내 몸 안에 많은 양의 마나가 들어와 몸안을 휘 젓고(?) 있다는 걸 느꼇을 때였다. 의아함에 눈을 떠보니 나는 양반 다 리를 한 채 앉아 있었고 누군가 내 뒤에 앉아서 명문혈(제2요추 아래쪽 에 있는 혈)에 손바닥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고 주고 있었다. 너무나 익 숙한 마나의 기운을 보고 그 누군가가 엄마라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 었다. 그 다음에는 입 안에서 쌉싸름한 맛이 느껴졌다. 결코 만두 맛은 아닌 게 어떠한 약을 먹인 모양이었다. 눈앞에서는 가주가 걱정스런 표 정으로 보고 있다가 내가 눈을 뜬 것을 알아차리고는 안심하는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직 움직이지는 말거라. 네 어머니가 내공을 다시 가지고 간 다음에 일어나렴." 나는 가주의 말에 다시 눈을 감고 엄마가 움직이는 마나를 쫒았다. 엄마 의 마나는 단전에 있던 내 마나를 이끌고 몸 안을 돌고 있었다. 엄마의 마나가 내 몸에서 빠져나간 건 그로부터 약 15분 후였다. 나는 엄마의 마나가 빠져나가자마자 발딱 몸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엄마는 내 마나 를 움직이느라 지쳤는지 일어나지 않고 운기를 하고 있었다. "괜찮으냐?" 가주(家主)의 말에 나는 잠시 몸 상태를 살펴보고 빙긋 웃었다. "머리가 좀 띵하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다행이구나. 하긴 넌 민이보다 중독 상태가 양호했으니...문젠 민이인 데...." 다시 안색이 가라앉은 가주의 시선이 바라보는 곳에는 아빠가 민이의 뒤에 앉아서 마나를 주입해 주고 있었다. 다행이도 아까 봤을 때 보다 형색은 많아 좋아져 있었지만 민이는 아빠가 손을 떼고 물러나자마자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옆에서 지켜보던 총관이 얼른 민이의 몸을 받 아 들어 옆에 있던 침대에 눕혔다. 그제야 깨달은 거지만 이곳은 방이었 다.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민이의 맥을 짚어보더니 잠시 후 몸을 일으키 며 가주를 향해 말했다.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늦어도 내일쯤이면 정신을 차리시 수 있을 겁니 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어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원은 나에게도 다가와 맥을 잠시 짚어보더니 말했다. "독이 대부분 해독되었으니 움직이셔도 상관 없지만 아마 얼마 간은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우실 겁니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무리 하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십시오." 의원이 몇 가지 처방을 해주고 나가 버리자 어른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하아~ 큰일이로군. 습격을 당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독에 당할 뻔한 건지... 진아. 도대체 이번에는 어떻게 된 거냐?" 가주가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그게요... 수련을 하다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하회... 아니, 그 가주님의 둘째 아드님이 우리에게 미안하다며 만두를 사다 주 셨거든요. 그걱 먹는데 민이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런데 왜 민이가 더 많이 중독된 거지?" "그게요... 민이가 저보다 몇개 더 많이 먹었걸랑요." "그랬구나. 그래. 알았다. 너도 어서 방으로 가서 좀 쉬거라." "예에~" 가주는 시비 한 명을 불러 나를 내 방에 데려다 주세 하고는 부 모님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그 하회탈 얼굴의 둘째 아들을 불러 진상을 물어볼 듯했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우선 목욕부터 해야 했다. 나는 잘 몰랐 는데 몸에서 땀이 얼마나 났던지 옷이 무척 축축해져 있었던 것 이다. "하아~ 독에 당했다고? 거참. 살다 보니 독에도 당해 보는군. 울 아빠나 할아버지가 아셨다면 한바탕 뒤집어졌을 거야." 안 봐도 뻔한 그 상황이 떠오르자 쿡쿡 웃음이 나왔지만 곤 사 그라들고 말았다. 아까 낮에 있었던 만두 쟁탈전이 생각나서였다 가주와 부모님께는 자존심상 말을 못했지만 내가 덜 중독된 것은 민이 녀석보다 실력이 달려서 내가 빼앗긴 것보다 덜 뺏어 먹었 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민이 녀석. 언제 나보다 실력이 높아졌지?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건 동시였는데 말야......." 하지만 난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수련을 할 때 나 는 게으름을 부리는데 반해 민이는 정말 고지식한 녀석답게 착실 히 수련해 나갔던 것이다. 무공을 배우면서 깨닫게 된 건데, 무공 이란 내력만 많다고 만사형통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아주 기본 적인 체력과 기초적인 동작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온몸에 완전 히 익힌 다음에 내공이 곁들여져야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었다. 초식 한 동작 한 동작을 수십, 수백 번이나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엄청난 인내력과 끈기가 수반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내공만 많이면 다 고수가 되는 줄 알았던 나에게는 뒤통수를 때 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쳇, 예전에 무협지 보면 고인을 만나서 내력을 전수받거나 영 약을 먹어 내공이 급속도로 늘어나면 다 고수가 되기에 여기도 그런 줄 알았건만... 그런 거짓말을 쓴 게 도대체 누구야. 누구?" 한 마디로 무공 고수란 운이 좋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 다. 그리고 아무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였다. 하지만 이 고수가 되어가는 과정이 천성적으로 게으름을 타고난 나에게는 너무 안 맞았다. 한 동작만 하루 종일 몇백 번씩 반복한다는 게 솔직히 끔 찍한 일이 아니겠는다? 내가 그런 수련을 버티지 못해 은근 슬쩍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는 것에 비해 민이 녀석은 묵묵히 그걸 다 해냈던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께 민이는 '크게 될 녀석' 이었고, 나 는 '재능은 있는데 끈기가 없는 녀석'으로 찍혀 있었다. "그래에~ 민이가 나보다 실력이 높을 수밖에 없겠지이~ 쳇. 그래 나 끈기 없다.!!" 점점 위축되는 감정을 견디다 못한 나는 크케 소리치고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그러면서 내일부터는 정말 열심히 수련할 거라고 거듭 다짐했다.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날 아침, 부스스 눈을 뜨던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평소 일어날 때 보이는 어둑어둑한 새벽의 모습이 아니라 환한 아침 햇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왓!! 늦잠 잤다.!!" 허둥지둥 세수하고 옷을 입고 머리를 빗는데 시비 하나가 들어 오며 말을 걸었다. "어머, 일어나셧네요, 아가씨? 아침 드셔야죠?" "몰라, 몰라. 지금 아침이 문제야? 늦잠 자서 혼나게 생겼는데.... 아, 정말 나 좀 깨워주지." 평소 머리를 내가 빗지 않았기에 그냥 대충 빗고 머리를 하나 로 묶으려는데 시비가 다가와 빗을 넘겨받았다. "그게요... 오늘 아가씨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고 깨우지 말라고 하셨는걸요. 게다가 오늘은 수련하지 말고 하루 쉬라고 하시던데 요?" "누가? 우리 엄마가?" "예!" 그제야 늦잠 잤다고 혼나지 않을 거란 걸 안 나는 마음이 느긋 해져서 편안히 시비에게 머리를 맡기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음... 오늘 하루 쉬는 건 좋은데... 그럼 민이랑 똑같이 쉬는 거 잖아? 하지만 그러면 민이의 실력을 뛰어넘지 못하겠지? 아쉽지 만 휴가를 반납하고 수련한다고 해야겠어.' 보통 내가 수련할 때는 엄마가 아침저녁으로 지도해 쥤기 때문 에 엄마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엄만 어디 계서?" 시비가 머리를 다 빗겨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묻자 시비가 고개 를 갸웃했다. "음... 은학관(가주의 거처)에 가주님과 같이 계실 거예요. 아까 올 때 그쪽으로 두 분이 가시는 걸 제가 봤거든요." "그래? 알았어." 하지만 곧장 그쪽으로 뛰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아무도 계시지 않았다. "엄마나 아빠 못 봤어?" 가주의 집무실을 청소하는 시종 한 명을 붙잡고 다짜고짜 묻자 그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에... 그게... 세 분이 반성관 쪽으로 가시는 것 같던데요." "고마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무실을 뛰쳐 나가자 그 시종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아앗. 아가씨이~ 그곳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구요오~ 아 가씨이~!!!" 반성관은 한 마디로 감옥인데 집안 맨구석에 따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돌로 지어진 자그마한 일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입구는 늘상 두 명의 무사가 지키고 있었다. 들어가 보지는 못했어도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던 터라 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입구에서 제 지당했다. "안 됩니다. 아가씨.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 다." "잠깐이면 돼. 엄마에게 말할 게 있다니까." 내가 막무가내로 떼를 써도 입구를 지키는 무사는 단호했다. "아. 정말~ 언제 나오시는데?" "글쎄요. 들어가신 지 좀 되긴 했지만... 언제 나오실지는......" 한 무사가 잘 모르겠다는 투로 말끝을 흐리자 다른 한 무사가 말을 받았다. "좀 오래 걸리실 테니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아가씨를 습격한 그 암살자들을 취조 하시거든요." "아, 그 사람들? 그들이 여기 있었어?" "그럼요. 잡혀오자마자 여기 감금되었죠." "그랬구나......." 더 고집을 부려봤자 들여보내 줄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그쯤 에서 물려서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막 작별을 고하려는 순간, 안 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너무 멀게 들려 보통 사람 같 으면 잘 들리지 앟앗겠지만 보통 인간보다 감각이 뛰어난데다 수 련하는 동안 더욱 예민해진 나는 들을수 있었다. 그건 너무나 고 통스러워 울부짖는 듯한 비명 소리였다. 이런 종류의 비명은 들어 본 적이 없는지라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이 굳어졌고 눈이 커다랗 게 떠졌다. 무사들도 그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난처한 기색을 떠 올리며 얼른 나를 보내려 했다. "아가씨. 이제 가세요. 여긴 아가씨가 올곳이 못 돼요." "예, 아가씨가 여기 계신 걸 총관님이나 대장님이 보신다면 저 의가 혼난다구요." 그러자 나는 그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씹어버리고 물었다. "저기, 안에서 고문도 해?" "예? 아,예에... 그게 그러니까... 뭐 ......" 무사 둘은 더욱 난처한 기색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 에게 나는 가볍게 웃으며 불렀다. "저기, 이봐들?" "예?" 둘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며 묻자 난 생긋 웃으며 시동어를 외 치자마자 손뼉을 쳤다. "라이트!!" 짝!! 내 손바닥 안에서 막 제 모습을 갖추어가던 빛의 구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내 양 손바닥에 눌려 터지며 일순간 강한 빛을 분 출해 냈다. "우악!" "욱!!"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한 두 무사는 자신들의 무기를 떨어뜨리고 는 낮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쥐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수련 을 한 무사라 낮게 비명을 질러 다행이었지. 크게 질렀다면 아마 사람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미안해, 자꾸 못 들어가게 막으니까 그렇잖아." 그냥 들어가기는 뭐해 사과 한마디를 중얼거리며 둘 사이를 지 나 두터운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열었다. 문턱 바로 밑에는 몇개의 계단이 있었고, 그 앞에는 방 한 칸 만한 공간이 있었는데 공간 안에 간이침대와 식탁, 의자들이 배치 되어 있었고, 식탁 바로 옆의 벽에는 여러 개의 열쇠들이 주르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이, 모두들 가주와 같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너머에는 두 갈래 길이 잇었는데, 하나는 좀 더 안쪽으로 들 어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또 한 번의 고통에 찬 신 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실 쪽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그런 지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하게 들렸다. "크어어억~!!"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는지 목소리가 금속을 긁는 것처럼 잔뜩 쉰데다 갈라지고 있었다. 나는 급히 자하로 내려가는 길로 뛰어들었다. 이미 엄마를 만나 려는 생각은 저만큼 날아가 버렸지만, 나는 뭐에 홀린 듯이 돌로 만들어진,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의 계단 위를 내달렸다. 계단이 끝나자마자 두터운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누 군가 그 안에 있다는 듯이 문은 조금 열려 있었고 지하실 특유의 습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몸을 엄습해 오는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나는 마 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조용히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땅을 파서 만들었다는 걸 그대로 증명하듯 한쪽 벽과 바닥은 깎인 암석이 드러나 있었고, 그곳에는 드문드문 횃불이걸 려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반대 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내가 막 지나온 문 같은 철문이 굳건히 닫힌 채 늘어서 있었는데 인기 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유일하게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맨 끝에 있는, 방금 지나온 문과 마주보고 있는 철문이었다.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그곳으로 향하기 시작 했다. 엄마를 만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까 그 고통에 찬 비명 소 리를 낸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왜 만나고 싶은 맘이 든 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 비명 소리를 그냥 무시하고 돌아갈 수가 없었다. '고문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내가 있던 세계에도 분명히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TV나 영화에서도 고문당하는 장면을 보았고, 소설책에서도 고문당하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된 걸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적 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철문과 점점 가까워지자 내 손 끝이 점점 차가워지고 심장은 점점 더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조용히 문을 열려고 했는데 문이 녹슬어 있었는지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덕분에 안에 있던 어른들이 문 쪽을 돌 아보다가 나를 발견하고 모두들 굳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에서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안은 꽤 널찍한 공간이 있었는데 아마도 고문을 하는 곳인 듯 했다. 그리고 그 공간의 벽에는 한 남자가 두 팔을 벌려 들어 올 려진 채 팔목이 쇠사슬에 묶여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벌거벗은 상체에는 가느다란 상처 줄기가 수십 개나 나 있었고 상처가 오 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그런지 꽤 깊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피 는 흐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남자의 전신이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의하한 듯 힘겹게 고개를 드는 남자의 얼굴 은 얼마나 맞았는지 멍투성이에다 팅팅 부어 본래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었고, 가슴에는 가느다란 상처 줄기말고도 시커멓게 탄 자국도 여러 군데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왠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해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속에 갈무리해 놨던 마나와 함께 드래 곤의 기운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몰론 저 녀석이 날 죽이려 한, 죽어도 시원치 않을 아주 나쁜 놈인 것도 잘알고 있었고, 왜 고문을 당하는지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내 머리가 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타당하고 논리적인 이유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내 분노를 가라앉혀 주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중에 생각해 봐도 난 단 한 번뿐이지만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있었고, 피 튀기는 상황을 왜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지 스 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반항조차 못하고 있는 저 사람을 죽지 못하게 한 채 괴롭히고 있는 게 너무 맘에 들지 않았다. 그 리고 그 일을 행하는 이들이 날 끔찍이 아껴주는 사람들이라는 게 더 더욱 분노를 치솟게 만들었다. 그건 나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분노였기에 스스로 주체를 할 수 없어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숨만 몰아쉬었다. 조 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분노를 터뜨릴 것 같아서 겁이 났던 것이다. "진아,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빠가 서둘러 다가와 나를 데리고 나가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 만 그는 내 분노에 찬 시선과 마주치자마자 움찔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스스로 움찔거린 게 놀란 일이었는지 당황한 표정 이었지만 그는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안에서 얼어붙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 보고는 안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내디뎠다. 날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감히 제지를 할 염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벽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이 모든 상황을 묵무기 보고 있다가 내가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놀란 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하 지만 내가 허리에 찬 검을 빼어 들자 순간 더 놀란 듯했지만 곧 체념과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내가 자길 죽이려는 줄 알았나 보 다. 그리고 내가 검을 휘두를 때는 눈까지 감아버렸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이 눈을 뜨고는 나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앞으로 넘어졌 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끝까지 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조 금 웃겼다. 나는 검을 들어 그를 벤 것이 아니라 그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베어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넘어지려는 그의 상체를 받아내다 가 그의 몸이 나보다 훨씬 컸기에 잠깐 휘청거렸다. "진아, 이게 무슨 짓이냐?" 이번에는 가주가 질책과 놀람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 는 그를 넘어 지지 않게 받치면서 가주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 사람은 내 거예요. 아무도 손 못대요. 이 사람이 습격한 건 나니까 이 사람 목숨을 취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이라구요. 그러니 까 내가 데려갈 거예요. 막는 사람은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는 그의 허리를 양 팔로 둘려서 그를 달랑 들어올렸다. 그런데 그가 나보다 체격도 크고 키도 큰 바람에 내가 허리를 들었음에 도 불구하고 그의 두 다리는 땅에 끌렸고, 내 팔이 짧아 허리만 겨우 잡 았기 때문에 그의 두 팔이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하지만 난 상 관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행이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 나가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도와 주는 사람도 없어서 그곳을 나서기까지 무지 고생했다. 몰론 그를 드는 게 힘겨웠던 건 아니다. 단지 그가 나보다 더 커서 들고 움직이는데 불편했던 것이다. "아, 정말... 왜 나보다 커 가지고 말이지... 사람 힘들게 하는 거야? 힘 들다, 힘들어... 이럴 줄 알았으면 민이도 데리고 올 걸 그랬어... 왜 바 보같이 혼자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건지......." 투덜투덜대며 걷는데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에게 충격이 갔는지 그가 억눌린 신음 소리를 냈지만 그를 들고 옮기는 것도 힘들었기에 그 냥 무시해 버렸다. 나중에 그가 말하길 그때는 온몸이 너무 아파서 내 말투가 웃긴데도 웃을 수가 없어서 고생했다고 했다. 웃으려니까 상처 가 더 아팠다나? 그러니까 그 신음 소리는 그가 아파하면서 웃는 소리 였던 것이다. 결국 지상으로 올라와 건물 밖으로 나오자 나에게 매달려 옮겨지던 그 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그 다 쉰 걸걸한 목소리로 힘겹게 자신 스 스로 걸을 테니 놓아달라고 부탁해 올 정도였다. 나도 그때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건물 밖에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에 게 이 사람을 옮겨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둘은 아 직도 시력을 회복 못하고 있어서 차마 부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지 아픈 사람을 걷게 하고 옆에서 부축해 주는 형식으로 여러 사람 놀라게 하며 내가 머무는 건물로 들어온 나는 내방이 아님 민이 방으로 쳐들어갔다. 손은 그를 부축하느라 사용할 수가 없어 발로 뻥 차서 문을 열자 침대 에 누워 있던 민이가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가 내 꼴을 보고 더 놀라 이불 자락에 발이 걸려서 밑으로 고꾸라졌다. "쯧쯧, 조심하지..... 다 큰 게 그게 뭔 꼴이냐?" "아야야야... 누, 누나... 그 사람 누구야? 이게 무슨 일이냐고?" 땅바닥에 부딫힌 엉덩이를 비비며 엉거주춤 일어나 묻는 민이를 발로 옆으로 밀어낸 다음 나는 그를 민이의 침대로 밀어버렸다. "잠시 네 침대 좀 빌리자." "아, 그,그래... 그런데 이 사람 누구냐니까?"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해 주면서도 자신의 궁금증은 참을 수 없 었는지 다시 묻는 민이에게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물론 입으로 만... 몸은 민이의 방에 있던 세숫대야와 수건, 물을 챙기고 있었다. "아, 이사람? 왜 그저께인가? 강에 놀러 갔다가 습격당했잖아? 그날 우 릴 습격한 사람 중 한 사람이야." "아,그래?... 가 아니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이 사람이 여기 있는데?" 민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침대를 점령 한 피투성이의 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데려왔으니까 여기 있지. 아, 부탁 좀 하나 하자. 나 아직 남자의 벗은 몸은 본 적이 없어서 말야... 나 잠깐 나가서 옷 갈아 입고 올 테니 까 그동안 이걸로 저 남자 몸 좀 닦아줘. 정 힘들면 하체만 해줘. 나머 진 내가 할 테니까." 나는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채운 뒤 부드러운 수건을 적셔 민이에게 억 지로 맡기고는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누, 누나아아~ 왜 내가 그래야 하는데?" "그럼 내가 하리?" "응?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좀 해. 한 가지만 더. 혹시라도 가주나 부모님이 저 남자 넘기라 고 해도 넘기지 마라. 넘겼다간 나중에 나한테 죽을 줄알아!!" 내가 문을 막 닫으려고 하자 민이가 처절하게 나를 불렀다. "누나아아~ 그냥 가면 어쩌라고?" "에쩌긴 뭘 어째? 몸을 닥아주라고 했잖아!" "누나아아~ " "잘 부탁해!!" 내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에는 민이 녀석이 한숨을 푹푹 쉬어가 면 그 남자의 상체를 닦고 있었다. 그래도 민이 녀석, 맘이 여러서 그런 지 수건이 상체에 닿을 때마다 남자가 움찔움찔거리자 살살 하려고 꽤 애를 쓰고 있었다. 다행히 하체는 다 닸았는지 남자의 걸레 조각 같은 바지가 벗겨져 밑에 떨어져 있었고, 남자는 아랫부분을 이불로 덮고 있 었다. "어머나, 다 해주려고?"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민이에게 다가가자 민이가 화난 눈으로 나를 노 려보았다. "그럼 어떻게 누나보고 시켜? 아, 그리고 아버지가 왔다 가셨어. 누나가 시킨 대로 남자를 안 넘긴다고 하긴 했는데, 어쩌려고 그래? 이 남자를 취조하는데 누나가 그냥 데리고 나왔다며?" "흠... 내 눈앞에서 누군가 고문당하는 건 두고 볼 수가 없더라고,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지." "어휴, 거긴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며? 그런데 거길 막 들어간 거야?" "어머머, 그 경호 서는 무사들에게 사과는 하고 들어갔어. 그리고 원래 엄마 만나려고 간 거라고." "하여간... 그런데 아버지가 좀 놀라셨던 모양이던데 어떻게 한 거야?" "그냥 화내니까 모두들 놀라시더군." 그러자 민이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용의 기운을 사용한 거야?] 나는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몰라. 너무 화가 나서 나도 정신이 없었거든. 하지만 최대한 기운 은 억눌렀는데 조금 새었나 보네......." "하아~ " 민이는 천장을 한 번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자신의 작업에 몰 두하며 물었다. "이제 어쩔 거야? 이남자는 어떻게 처리하려고?" "어머, 민아.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묻는건 실례잖니." "누나아아~ 지금 장난할 때야?" 민이가 의외로 도끼눈까지 뜨고 나를 바라보자 나는 얼른 물러났다. 지 금은 민이가 나를 도와주고 있으니 민이를 화나게 해서 나에게 이로울 건 없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농담 한마디 한 거 가지고 화를 내기는... 우선은...치유해 줄 거야." "그리고는?" "응?" "치유해 준 다음에는 어쩔 거냐고?" 나는 민이의 생각에 잠시 숙고해 보다가 싱긋 웃었다. "음... 몰라." "뭐?" 너무 놀란 나머지 상처 부위를 닦던 손에 힘을 주었던지 누워있던 남자 가 신음 소리를 냈다. "윽!!" "아, 미안합니다." 민이는 정말 예의 바르게 그에게 사과하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누나. 지금 장난할 때야?" "장난 아냐. 정말 모라.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데리고 나온 거란 말야." "하아아아~ " 민이는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 치유해 준다고 했지?" "응." "이 남자가 다 나은 다음에 다시 우리를 죽이려 들면 어쩌려고?" 민이는 너무 심각하게 말했지만 나는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뻔한 걸 뭘 물어? 막아야지." 당연하게 말하자 민이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 대답을 듣고 싶어 물은 줄 알아? 누나가 이 남자를 치유하겠 다고 하면 부모님이 가만 안 계실 거라고." "음... 그건 그렇다." 민이는 한동안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날 불렀다. "누나......" "응?" "누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였구나?" "아까 그랬다고 말했잖아." "하아~"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민이가 황당한 눈으로 우릴 바라보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도 안됐네요. 이런 누나에게 얽매였으니......." 잠시 후, 민이와 함께 남자의 몸을 다 닦아준 뒤 남자에게 마법을 걸어 줄지 그대로 둘지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는데 가주와 부모님이 들어왔 다. 그들은 모두 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아,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우선 네가 허락도 없이 반성관에 들어간 것은 잘못인 건 알겠지? 그곳은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는 걸 알고 있을거야." 가주가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찔끔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좋다. 그리고 아까 네가 한 말 말인데... 저자가 널 습격했으니 저 남자 의 목숨이 네 것이라고 했으렷다?" "에... 그랬죠......" 나는 다시 한번 가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한바탕 뒤집어놓고 나간 뒤 네 부모님과 오랫동안 의논을 햇다. 너 민이한테 남자를 우리에게 넘기지 말라고 했다며?" "예." "그래서 네 부모님과 나는 너에게 벌을 줄 겸 한 가지 의무를 내리기로 했다." "그게 뭔데요?" "진이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하고 만다며? 그러니 저 남자를 우리가 다시 끌고 가봤자 네가 다시 데리고 나올 것 아니냐? 그래서 차라리 저 남자의 신변을 너에게 맡기기로했다. 저 남자를 어떻 게 하든 네 마음대로이지만 그로 인한 책임은 모두 네가 져야 한다. 알 겠니? 만에 하나 저 남자가 다시 이 집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 습격한 다고 하면 저자는 다시 반성관으로 데리고 가겠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 보상은 모두 너 한테 넘길 것이야. 어떠냐? 이제라고 다시 저 남 자를 우리에게 넘기겠니. 아니면 네가 저 남자의 신변을 맡겠니?" 가주의 엄한 말을 죽 듣고 난 지금도 대답은 한 가지였지만. 나는 그전 에 궁금증이 생겨서 대답을 뒤로 미루고 질문을 했다. "음... 그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다 대답해 주마." "어떻게 저 남자를 저에게 맡길 결심을 하셨어요? 아직 저는 못 미더울 실 텐데요. 제가 다시 습격당할까 걱정은 안 되세요?" 그러자 가주는 빙그레 웃으며 뒤에 서 있던 부모님을 바라보았고, 그대 신 아빠가 내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 "물론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그는 심하게 다친 몸이기 때문에 움직이 지 못할 것이고 너에게 맡긴다고 해도 우리가 계속 감시할거란다. 그리 고 마지막으로, 눈빛 하나로 나는 물론 가주님까지 못 움직이게 만든 네 능력이라면 그를 충분히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뭐. 이렇 게 안일하게 생각하다 나중에 되려 당한다면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것 이라는 게 밝혀지겠지만......." 대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 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헤에, 그럼 제가 저 남자를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인정 받은 거네요? 좋 아요. 귀찮기야 하겠지만, 저 남자를 제가 맡죠. 그런데... 취조는 어떻 게 하신 거예요? 저남자에게 다 알아낸 건가요?" 그건 가주가 대답했다. "물론 알아낸 건 하나도 없단다. 하지만 저 남자는 죽어도 말을 하지 않 을 거란 걸 알았기에 취조를 포기하려 했지." "음... 그럼 이제 저 남자를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죠?" "그래. 이제 저 남자를 건드릴 수 있는 건 오로지 너뿐이다." 뭐. 그렇게 해서 그 남자를 완전히 넘겨 받게 되긴 했지만, 덕분에 남자 에게 주어진 방문 앞에는 항상 무사 둘이 지키고 서 있게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남자가 스스로 어떨게 할 것인지를 모른다는 걸 깨닫고는 우선 그걸 알 아보기로 하고 민이를 데리고 남자에게 갔다. "궁금한게 있는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는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말야... 다 나으면 어떻게 할 거지?" 잠시 생각해 보던 남자는 거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마도... 이곳을 탈출해 본 문으로 돌아가겠지." "본 문? 그게 뭐야?"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한심하다는 듯이 날 쳐다 보았다. "그것도 모르나?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 말이다." "아하, 그러니가 암살자 조직 말이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호오... 돌아갈 거구나. 그럼 내가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 없잖아? 당 신 다 나으면 내가 내보내 줄게." 그러자 그가 한참이나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가서 처벌을 받겠지." "그래? 그건 당신 사정이고... 당신이 가고 싶어하니 보내줄게." 남자는 순간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가면 죽을지도 몰라. 아마 그럴걸? 임무를 실패하는 자는 가만 두지 않으니까. 게다가 나는 여기서 치료도 받았고......." "그건 당신 사정이니 내 알 바 아니지. 게다가 당신은 그곳으로 돌아가 고 싶어하잖아." 남자는 한참 동안이나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달리...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안됐네. 이 넓은 세상 천지에 갈 곳이 없다니... 여행이라도 해보는 건 어때?" 남자는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 다. "왜 날 구해준 거지? 너의 목숨을 다시 노릴지도 모르는데... 뭔가 원하 는 게 있어서 구해준 것 아닌가?" "그런 거 없어. 전에도 말했잖아. 아무 생각 없이 데리고 나온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 처리를 두고 고민하는 거지. 원하는 게 있었으면 벌써 말했겠다." 남자는 허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아... 내가 이렇게 쓸모가 없는 몸이었다니......."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민이가 끼어들었다. "누나한테 얽히게 되면 다 허탈해지니까 너무 그렇게 비하할 필요 없어 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다친 거 치료해 주고, 가겠다는 거 보내주겠 다는데 그게 뭐 잘못됐어?" 민이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고, 남자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날 필요해서 구해준 줄 알았다. 부하로 삼아준다든가 뭐 그런......." "부하? 나느 그런 거 별로 필요 없는데? 그리고 당신은 아까 당신 본문 으로 간다며?" 그러자 남자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가면 죽을 거라니까. 그러니 뭐 하러 가고 싶겠는 가? 게다가 딴 곳으로 간다고 해도 조직을 배신한 것이 돼버러니 아마 날 죽이기 위해 쫓아올 거다." "그럼 왜 본문으로 간다고 한 거야?" "그러야 뭐... 부하로 삼을 줄 알고 한 번 튕겨본 거지. 덥석 당신께 충 성하겠습니다... 하면 가치가 떨어지잖아." "에? 난 부하 필요 없다니까." "아, 그렇다면 이제부터 필요로 해봐." 이젠 이 남자가 배짱인지 아예 대놓고 말했다. "뭐야, 왜 내가 당신을 부하로 삼아야 하는데?" "거야, 내 목숨은 당신 거라며? 아직 어린애를 섬기긴 좀 그렇지만... 내 사정이 사정이니 충심을 다해 섬겨주지." "잠깐만, 누가 당신을 부하로 삼아준대?" "날 구해줬으니 끝까지 책임져야지. 아까 그 가주도 당신보고 날 책임 지라고 했잖아. 난 이곳을 벗어나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잘 부탁해, 주군!" "이봐, 이봐... 주인에게 반말하는 부하가 어디 있어?" 그러자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지금부터라도 존대를 해드리죠, 주군!" "난 아직까지 당신을 부하로 삼겠다고 한 적 없어." "뭐, 결국 그렇게 되실 건데 힘들게 뭐 하고 고집을 부리십니까?" "우악! 민아, 이 남자 어떻게 해봐." "왜 나한테 그래? 이 남자는 누나 거잖아. 듣고 보니 남자 말이 맞는데 뭘 그래?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냥 인정해 주지 그래?" "현명하신 말씀이십니다. 주군 동생님." "난 인정한 적 없다구우우우~" 결국, 그렇게 해서 나는 절대로, 저어어얼대로 인정한 적 없는 혹 덩어리 하나를 달게 되었던 것이다. 아린이야기 "당신의 이름은 유 !!" 참으로 얼결에 받아들이게 되어 나의 수하가 된 그는 그 다음 날 부터 의원에게 직접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뒤로 일주일이 흘 러서야 나는 그의 생김새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맨 처음 만났을 때에는 두 눈 자리에만 구멍이 뚫린 시커먼 두건을 쓰 고 있어서 얼굴을 아예 보지 못했었고, 그 다음에 만났을 때에는 하도 두드려 맞아 얼굴이 팅팅 부은데다 검고 붉고 시퍼런 멍이 얼굴의 피부 색에 도배가 되어 있어서 생김새를 못 알아 볼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싱글싱글 웃는 표정이 정말 웃는 건지 아파서 찡그리는 건 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런데 드디어 일주일이 지나 붓기가 가라앉고 멍도 많이 옅어지며 드 러난 그의 생김새를 본 나는 솔직히, 아주 소오~올직히 실망하고 말았 다. 그는 길거리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몸이 마른 체구인데 비해 얼굴은 조금 큰 편이어서 얼굴만 보고 서는 말랐다는 걸 못 느꼈다. 그냥 괜찮은 체격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에이, 살수들은 모두 날카롭게 생긴 거 아니었어?" 얼굴이 쬐께 두꺼운 편이었던 내가 실망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투 덜거리자 그가 의아한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예?" "아니, 난 살수들이 다 날카롭게 생긴 줄 알았는데... 큰 인내로 오랜 시간을 견디어내고 있다가 단 한 순간의 허점을 파고들 어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게 살수 아니야? 한순간에 빠르고 날카롭게! 그래서 난 살수들은 다 날카롭게 생긴 줄 알았지." 그러자 옆에 있던 민이가 덧붙였다. "거기다가 잘생기기까지 하고?" "맞았어, 바로 그거야! 날카로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답게 생긴 차가운 미남, 고독을 온몸에 휘감은 채 모든 정을 떨쳐 버리고 오직 목표를 노 리는 매서운 표범의 눈길로 앞을 바라보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멋진 것 같아 감상에 젖어 있는데 이 두 낭만을 모 르는 남정네들이 내 감상을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하.하.하......!" 허탈한 듯이 웃는 전직 살수 녀석과 한심하다는 듯한 민이의 말! "쯧쯧, 삼류 소설을 너무 많이 봤군!" "시끄!! 이 낭만도 모르는 무심한 인간들아!!" 내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째려보자 전직 살수, 현직 자칭 내 심복 이 입을 열었다. "주군, 살수는 얼굴로 뽑는게 아닙니다." "쳇, 나도 알아, 안다구!" 그래도 그는 항상 복면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비록 피부가 거칠긴 했지 만 되게 희었다. 그래도 그 점을 빼면 어디 한군데 일반무사들과 다른 점을 찾아 볼 수 없어 진짜 살수인지 믿어지지 않던 나는 그의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보 며...... "정말...아무리 봐도 살수처럼 보이지 않아. 그냥 인심 좋은 평범한 옆 집 아저씨 같은걸?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날카로운 기운도 안 느껴 지고 말이야." 그러자 그가 삐질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기척을 숨길 수 있도록 훈련받은 게 살수인데 왜 평소에 살기를 드러 내겠습니까? 훈련할 때나 습격할 때를 제외하고는 살기를 들어내지 않 아요." "하긴, 될 수 있는 한 살수는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니까 평소에 살 기를 드러내어 주의를 끄는 짓은 하지 않겠지."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렇다면 평소에도 항상 그렇게 웃고 있어? 친구들이랑 어울릴 수 도 있나 보지?"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뒤 항상 그가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당연 히 전부터 그랬을 거란 생각에 해본 질문이었는데 그는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 친구란 없습니다. 단지 같은 급의, 같은 조의 조원과 조장, 그 리고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감 정 표현이 철저히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감정의 흔들림으로 인하여 자칫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요." "엑? 정말?" "진짜요?" 민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의 말에 나처럼 크게 놀라 움을 표시했다. "그곳에서는 항상 무표정으로 있어야 합니다. 웃는 것은 물론 울어서 도, 화를 내서도 안 되죠.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신음 소리 조차 내서 는 안 됩니다." "하아~ 그 살수라는 거, 되게 힘든 직업이네. 어떠한 감정도 가져서는 안 되고 친구도 없다고?"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내 말을 그가 정정해 주었다. "친구뿐만이 아니죠. 조금이라도 정을 주는 인간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 다. 정을 준 다는 것 자체가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니까요." '에구... 사람을 로봇화시키려나? 설마 저쪽 세계에 있는 암살자들도 이럴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전직 살수였던 그는 자신과 같이 우리를 습격했 던 자들의 죽음이나 자신과 같이 우리에게 잡혀 지하 가목에 갇혔다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자결한 이의 죽음에 대해 별 다른 감정을 가지 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틈을 찾지 못해 자결하지 못한 자신이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죽임당한 이들은 실력이 없어 임무에 실패해 죽은 것이니 당연하다고 까지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좀 황당하기도 하고 혹시 부모님의 염려대로 이자가 지 금이라도 날 죽이기 위해 나에게 복종하는 척 위장하는게 아닐까... 하 는 의심까지 들었지만, 그 말을 하는 눈은 당연한 것을 말하는 듯 진지 그 자체였고, 지금 설명을 듣고 보니 그가 거짓을 말한 것 같지는 않았 다. "무지 살벌하네... 그정도라니......" 민이의 중얼거림에 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그럼 다른 인물로 변장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아요? 평소 그렇게 무감 정하게 지내도록 훈련받는다면 일반 서민들이나 특정 인물로 변장해서 기회를 노리는 경우 그들처럼 행동하기 어렵지 않아요?" 저런 질문을 하는 거 보면 민이도 분명 소설 한두 권 정도는 읽은 게 분 명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감정을 확실하게 막아낼 줄 알게 된다면 민이 님이 말씀하신 타인으로의 위장술을 또 훈련받게 됩니다." "헤에, 그럼 당신은 위장술까지 익힌 실력자야?"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인심 좋은 사람처럼 항상 싱글싱글 웃을 수 있는 건가 싶어 묻자 그가 되게 어색하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저는 아직... 능력이 거기까지 되질 않아서요. 잠입술이나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술까진 배웠지만 위장술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에? 진짜? 그럼 당신 실력은 그렇게 뛰어난 건 아니네?" 그러자 그가 삐질 웃었다. "아, 예... 뭐... 그래도 예전 제가 몸담고 있었던 문에서 특급은 아니더 라도 일급 살수 조직에 속해 있었으니... 아주 낮은 편은 아닐겁니다." 처음에는 내 말에 긍정하려다가 억울한지 가볍게 항의하는 그에게 민 이가 순진한 표정으로 질문하면서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애 둘을 습격하는 데 다섯 명이나 필요한 실력인데도 일급에 속한 정 도의 실력인가요?" 전직 살수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가 조금 후에 반박할 말을 찾았는지 입을 열었다. "...호위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그럼 그때 우리를 호위했던 자들은 이곳 전체로 볼 때 한 실 력 하는 사람들인가요?" 민이의 말에 그는 삐질거리더니 체념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대꾸 했다. "일류... 는 못 되더라도 한 이류와 일류 사이쯤은......" "그럼 당신은 간신히 일류 같다... 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실력이란 거 네? 하긴, 내가 보기에 당신은 그때 우리를 호위하던 사람들보다 내공 이 더 높은 듯 하니까......" 내 말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쩝... 2클래스를 좀 넘은 마나의 양을 가진 게 거의 일류에 가까운 실력 이라니... 그럼 1갑자(3클래스) 정도 가진 사람은 일류라고 불리겠군. 에... 그렇다면 아빠나 할아버지는 고수겠군. 아,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는 전에 아빠가 말한 현 시대에서 손꼽히는 5명의 고수 중 한명이었잖 아? 참내, 할아버지도 기껏해야 5클래스의 마나를 가지고 있더구만... 그 정도가 손에 꼽히는 정도라니...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5클래스 정 도면 '괜찮은' 마법사일 뿐인데......' 그러나 내가 이때 착각한 것이 있었으니, 내가 있던 세계에서 마법을 익힐 수 있던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마나에 대한 재능을 타고나는 사람들뿐이었던 거다. 그러니 마법을 익힐 수 있는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0.01%나 될까? 그 렇게 마나에 대한 능력을 타고 난 사람들 중에서 '최고'란 칭호를 받는 것과 인연이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한 수 정도는 배울 수 있는 무공의 세계에서 '최고'란 칭호를 받는 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니, 비록 비 슷한 마나의 기운을 사용한다고는 하나 비교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 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마법은 오로지 마나만 가지고 행해지는 능 력인 데 반해 무공에서 내공이란 무공을 뛰어나게 해주는 여러 가지 요 소들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한 요소일 뿐이라는 거였다. 그러니 마나만 엄청나게 가졌다고 해서 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소리였다. 그 산 예로 바로 내가 있지 않은가? 또 한 가지, 이곳은 내가 살던 곳에 비해 자연에 흐르는 마나의 농도가 절반 정도 옅다. 그래서 이곳에는 엘프나 드워프가 없는지도. 그 때문인지 이곳에 있는 무예를 익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공을 많 이 가지고 있는게 아니었기에 아주 적은 양의 마나로 최대의 힘을 이끌 어내는 무예가 많이 개발되어 있었다. 그래서 1클래스의 마나로 2클래 스의 마법을 사용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도 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모두 나중에 안 사실들이었기에 나는 일급에 속해있었다 고 말하는 그이 말에 이 세계의 실력을 깔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오 죽했으면 '최고 고수'라고 손꼽히는 할아버지나 아빠를 그저 괜찮은 실 력을 가진 자라고 치부해 버리고 있었을까? 이렇게 내가 나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말이죠, 너무 늦게 물어보는 거 같은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 요?" 그러고 보니 난 내 첫 심복(물론 내가 원한 게 아니라 얼결에 그렇게 된 거긴 하지만...)인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거의 만나서 이야기 할 때는 대화에 참여한 이가 나, 민이, 그, 이렇게 셋뿐이라서 그를 부 를 때 이름을 몰라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터라 이름을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진짜 이름을 모르네......" 이래 봬도 양심은 있던 터라 쬐께 미안한 표정으로 삐질 웃어 보이자 민 이의 질책이 날아왔다. "쯧쯧... 저래 가지고 수하가 누날 따르고 싶겠어? 이 무신경한 주군씨!" "아, 그래, 미안하다아~ 처음 내 직속 수하를 거느려 보는데 얼마나 잘 하길 바라는 거야? 그리고 이게 내 탓만 있냐? 내 수하가 된다고 맹세한 다음 이름을 안 가르쳐 준 저 사람의 잘못도 있다구. 안 그래?" 그러면서 침상에 있던 그를 바라보며 내 말에 동의하라는 텔레파시를 팍팍 내쏘아 보내자 그가 삐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주군." "거봐, 내 말이 맞다고 그러잖아!" "그게 정말 누나 말이 맞아서 그런거야? 누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누나 의 잘못을 대신 덮어쓴 거지." 민이가 또다시 힐닌하자 난 민이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 말이 맞다면 맞는 거야. 내가 맞다는데 불만있어?" "뭐야, 그게? 순 어거지잖아!" "시끄러,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네 탓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거기서 내 탓이라는 건데?" "아, 정말 쩅알쨍알 시끄럽네. 왜 자꾸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니? 너 때문에 내 수하가 자신의 이름을 말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잫아! 자, 민이는 신경쓰지 말고 말해 봐. 이름이 뭐야?" "그, 그런......" 내가 민이를 무시해 버리며 말하지 민이가 불만에 찬 표정으로 뭔가 더 말하려고 하다가 한숨을 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왠지 그 폼이 꼭 '내가 그냥 참아준다!' 라고 항변하는 듯 했다. 하지만 민이가 입을 다물자 그제야 피식피식 웃으며 나와 민이를 보던 그가 묘하게도 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주군께 알려 드릴 만한 이름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에? 그게 무슨 소리야? 이름이 없다니......" 혹시 전에 불렀던 이름을 가르쳐 주기 싫은가 싶어 조심그레 그의 표정 을 살피는데 내 말의 뒤를 잇는 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그럼 전에 조직에서 뭐라고 불렀나요?" 그러자 그가 씁슬한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근에는...17호라고 불렸었습니다." "에... 뭐, 살수니까 신분을 숨기려고 암호명 같은 걸로 불렸겠지.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없어?" "제 기억으로 가장 어렸을 때 불렸던 제 호칭은 훈련조 소속 357호였습 니다. 아마 아주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거두어진 것 같습니다만... 그 뒤로 소속이 바뀔 때마다 호칭이 바뀌었지만 항상 어떤 조 소속 몇 호 가 호칭이었습니다." "어... 그, 그런거였어? 아... 그럼 지금이라도 이름을 만드는게 어떨까? 아주 멋진 이름으로 지으면 되잖아. 안 그래?" 왠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나는 좀 과장스레 명랑하게 말하며 얼른 민이에게 시선을 돌려 동의를 구하자 기특하게도 눈치 빠 른 녀석이 얼른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아주 멋진 이름을 지어서요, 새로 소개받는 사람 들이 감탄하게 만드는 거예요!" "내 말이 바로 그거라니까! 어때, 당신도 찬성이지?" 라고 민이의 말에 동조하며 그를 쳐다보자 그가 아주 상큼(?)하게 웃으 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주군께서 지어주십시오." "에휴우우우~ 에휴우우우우~~ 에혀~ 어쩌지?" "누나, 땅 꺼지겠다. 한숨 좀 그만 쉬는게 어때?" 누님께서 큰 고민거리에 직면하여 끙끙 앓고 있건만 저 치사하고 매정 하고 양심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동생 녀석은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책을 읽고 있다가 핀잔이나 주고 있다. "야, 이 치사한 녀석아! 내가 이렇게 고민에 빠진 게 누구 때문인데? 바 로 너 때문이잖아!" 민이 녀석의 스팀 팍팍 오르게 하는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만 큼 맘이 너그러운 내가 아니었기에 나는 당장 민이 녀석에게 달려가 녀 석이 앉아 있는 탁자를 양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으르렁댔다. 손바닥이 쬐~께 아프기는 했지만 민이 녀석이 찔끔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좀 손해를 보긴 했지만 만족스러웠다.. 잠깐 찔끔한 표정을 짓던 민이는 내 부라려진 눈을 보며 뾰로통한 것척 럼 볼을 부풀렸다. "그게 왜 내 탓이야? 누나한테 부탁한 건 그 사람이라고." "지금 책임 회피하는 거야? 내가 사양하려고 할 때 그의 편을 들어서 떠넘긴 자가 누구인데?" "내가 뭘~ 난 그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게 그거잖아! 아우~ 머리 아파 도대체 뭐라고 지어줘야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나지? 끄응~" 내가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자 나 몰라라 하며 지 할 일만 하 고 있던 민이가 양심에 찔렸는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부모님께 도움을 청해보지 그래?" "벌써 해 봤어. 그에게 부탁 받자마자 할아버지, 아빠, 엄마, 심지어 예 총관에게도 말했단 말야." "그랬어? 그런데 아무도 도움을 안 줘?" "응.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내가 열심히 고민 고민해서 생각해 주 는 게 더 뜻 깊지 않겠냐고 하시고, 아빠는 헛웃음을 흘리시며 자리를 피하시더군. 엄마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런 거 못한다고 그러고... 예 총관은 바쁘다며 도망치던걸?" "하.하.하......" 민이가 어이 없는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동정의 눈초리를 보내자 나는 다시 한숨이 푹 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지. 아~정말... 뭐라고 지어주지? 어우, 내가 왜 이런 걸로 골머리를 싸매야 하는 거야?" "저기... 정 생각이 안 나면... 괜찮은 한자를 골라서 한번 쭉 써보는 게 어때? 그러다 보면 뭔가 좋은 이름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조심스레 나온 민이의 의견이 제법 괜찮은 거 같아 나는 눈이 번쩍 뜨 였다. "아, 그게 괜찮은 생각이다. 그런데... 민아아아~?" 내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민이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삐질 땀을 흘리며 불안에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뭐얼~? 난 단지 아~ 주 간.단.한 부탁 하나를 하려는 건데......" 나는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하게 방긋 미소를 지어주었건만 민이는 더 많은 땀을 삐질 흘리면서 머뭇 머뭇대더니, 잠시 후 집요한 나의 시선 과 예쁘디예쁜 내 미소의 세례를 견딜 수 없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한자 찾는 거 도와달라고 할 거였지? 도와줄게." "역시! 난 민이가 도와줄 줄 진작에 알았다니까!!" 내가 환하게 웃으며 민이의 어깨를 툭툭 치자 민이가 퉁퉁 부은 얼굴로 작게 쫑알거렸다. "쳇, 내가 거절하면 날 가만두지 않을 게 뻔한데 어쩔 수 없잖아......" 비록 내 귀에 민이의 투덜거림이 들리긴 했지만, 난 기분이 좋았던 터 라 넓은 아량으로 그냥 넘어가 줬다. "음...어디보자... '하늘 천'도 괜찮고... '희다 백' 자도......" 내가 천자문 책을 주르르 훑어보며 괜찮은 한자를 골라내 쓰며 입으로 중얼거리는데 민이가 듣고 있었는지 참견을 해왔다. "누나, '희다 백'은 살수였던 그에게 아무래도 안 어울리는 것 같지 않 아?" "아, 그런가? 그럼 '검다 흑' 자를 쓸까?" "지금은 살수가 아니잖아." "것도 그렇네. 그럼 이것도 빼면... 흠, 색을 나타내는 글자는 그냥 다 빼야겠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그에게 아무래도 어울릴 만 한게 없는 거 같아." "그럼 '맑다 청'도 뺄까? 음... '지혜 지' 자랑 '알 지' 자는 넣어보고......" 민이가 자신이 써 내려가는 한자들을 다시 훑어보며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흔한 거 같아. 저번에 우리가 만났던 소림사 무승들도 그 한 자를 항렬자로 썼고 말야." "그런가? 그럼 누나, '기쁘다 희'는 어때?" "남자에게 쓰기는 좀...그렇지 않냐?" 내 말에 생각해 보려는 듯 잠시 머리를 갸우뚱하던 민이가 한숨을 내쉬 며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어렵네. 몇 개나 찾았어?" "응? 에... 대충 10개네. 하지만 딱 이거다 하고 맘에 드는 건 없다." 탁자 위에 놓은, 여전히 하얀 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종이를 보 자니 저절로 어깨가 축 처졌다. "에혀~ 이름 짓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왜 돈 받고 이름 지어주는 곳 이 생겼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렇게 어려우니, 원......" "누나가 있던 곳에는 별 가게가 다 있네? 이름을 파는 가게라니......" 다시 책을 뒤적이며 훑어보고 있던 민이가 고개를 들고 황당하다는 표 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게 내가 전에 있던 곳이 아니라 이 새대로부터 몇백 년 후에 있 는 일이지만, 설명하기 귀찮았던 나는 민이가 그렇게 오해하도록 그냥 내버려뒀다. "헐... 이름을 파는 가게라... 뭐 그만큼 이름을 짓기가 어렵다는 소리겠 지. 아, 근데 진짜 딱 필(느낌)이 오는 글자가 없다. 단순하면서도 쉽게 알아듣고, 흔하지 않아서 한 번 듣고 안 잊어버릴만 한 그런 글자 어디 없나?" 괜히 애꿎은 천장을 노려보며 중얼거리자 민이가 피식 웃었다. "금방 찾을 수 있으면 이름 짓기가 쉽게? 그나저나 정말 의외야. 귀찮 은건 질색하던 누나가 이번엔 되게 진지하네? 대충 아무거나 지어주고 말 줄 알았는데 말야." "딴 거면 몰라도 이름인데 함부로 할 수 있냐? 이름이 인생까지 좌우한 다는 말도 있잖아. 될 수 있는 한 좋은 걸로 해줘야지." 딴에는 괜찮게 말했다고 만족해하는데 예전에 내가 드래곤으로 태어났 을 당시 내 이름을 짓기 위해 여러 드래곤들이 의논했던 것이 생각났 다. '그때 맨 마지막에 할머니가 생각해 낸 이름이 내 이름으로 결정되었었 지......, 쩌비... 할머니는 내 이름 지어주실 때 이만큼이나 고민하셨을 까? 혹시... 귀찮다고 대충 아무렇게나 떠올린 건...아냐. 그래도 손녀 이름인데...모르지, 어쩌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허걱, 그만하자.' 생각이 거듭되면 거듭될 수록 안 좋은 쪽으로 기울어지자 나는 황급히 머리를 저어 그런 생각들을 떨쳐 버리고 있는데 민이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헤에~ 의외야. 의외. 아무리 그래도 누나가 남의 일에 이렇게 진지한 건 처음 본다고. 그런데 이름 말야. 외자로 지을 거야. 두자로 지을 거 야?" "몰라, 몰라. 나중에 봐서 결정할 거야." "성은?" "성? 그건...음...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내 성을 주기도 그렇 고 말야. 나중에 그보고 성은 알아서 하라고 해야지." "헤에, 살다보니 누나가 이렇게 섬세한 배려를 해주는 일도 있구나. 역 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라니까." "웃겨. 겨우 성룡식을 치른 주제에 얼마나 살았다고... 에혀, 하긴... 나 도 설마 내가 남의 이름 지어줄 거라곤 생각 못했어" 턱을 괴며 한 손에 든 붓을 괜히 먹물 위에다 비비고 있는데 민이가 탁 자를 탁~! 쳤다. "아, 누나!" "왜?" "좋은 단어가 떠올랐어. '존재하다 유' 어때? 그와 우리의 새로운 인연이 생긴 덕에 짓게 된 이름이니까 '존재하다 유'에 '인연 인', 이름하여 '유인'. 어때?"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보는 민이에게 나는 시큰둥한 시선을 보 냈다가 다시 먹 위에 비비대고 있는 붓으로 시선을 보내며 대꾸했다. "어감이 좀 그렇지 않냐? '유인'이라니... 차라리 '인연이 존재하다'라는 뜻보다는 '좋은 인연' 어때?" "'좋은인연'? '연분'?"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민이의 말에 나는 땀을 삐질 흘렸다. "쩌비... 그건 연인 사이를 자칭하는거군, 거참......" "흐음... '인연'이란 뜻을 넣으려니 영~괜찮은 이름이 없네. 차라리 '인연 인' 자를 뺄까나?" "오, 그래. 그냥 '유' 어때? 네가 말한 '존재하다 유'로 말야." "외자로?" "응. 남자 이름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데다 어감도 괜찮고, 뜻도 그 냥 보면 단순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심오해지...는 건 모르겠군. 어쨋든." "그, 그런가? 뭐... 누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좋았어. 이걸로 결정하자" 탁자를 손바닥으로 한 번 탁 친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민이가 뚱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왜 갑자기 일어서고 그래?" "아, 지금 말해 주려고." 빠르게 문을 향하면서 뒤도 안 돌아보며 대꾸하는데 민이가 황급히 자 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 누나아~!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 안 해? 내일 말해줘도 되 잖아!" "뭐 어때? 용건이 긴 것도 아닌데 같이 갈 거면 빨랑 따라와!" "글쎄, 지금은 한밤중이라고! 지금 쯤 자고 있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매일 침상에 있는 사람인데 뭐." 씩씩하게 민이의 방문을 나서긴 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도 보이 지 않는 어둡고 조용한 복도를 달려갈 맘은 들지 않아 나는 다른 자는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하게 복도를 지나 그의 방으로 가서 열심히 고민한 끝에 새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한 밤중에 쳐들어간 건 너무했어." 이제 유로 불리게 될 사람의 방에서 나오는 데 민이가 작은 목소리로 날 책망했다. "쳐들어가다니? 나누 분명히 노크하고 들어갔다." "들어오란 말도 없었는데 그냥 들어갔잖아. 그게 쳐들어간 거지 뭐야? 게다가 자다가 놀라서 일어나는 사람에게 '유야. 당신이름. 어때? 괜찮 은 이름이지?' 라니... 황당해 하고 어안이 벙벙해 하는 게 역력하더라." 내 말투까지 그대로 흉내 내며 쫑알거리는 민이의 표정이 너무 귀여워 서 나는 한마디 톡 쏴주는 대신 그냥 피식 웃었다. "뭐 어떠냐? 그래도 좋아했잖아." "그게 진짜 좋아서 웃어준 건지......" 민이는 계속해서 작게 쫑알댔지만, 며칠 동안 날 압박하고 있던 일이 해결되었다는 기쁨에 민이의 투정조차 귀엽게만 보였다. "좋은 게 좋은 거야." "유가 불쌍해......" 아린이야기 "아린, 쇼크받다(난 잘난 게 아니었어!!) " 유는 그 뒤로 사흘이 더 지나자 침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그가 나에게 맡겨진 뒤로 내가 머물고 있는 전각 의 경비가 한층 강화된 데다 희미한 긴장감까지 돌고 있었는데, 그가 침상에서 일어나 돌아다니게 되자 긴장감은 한층 더해졌다. 나와 민이에게는 저택 안에서 조차-공부할 때나 놀 때, 밥 먹을 때도 -호위가 붙어 다녔고, 할아버지, 엄마, 아빠는 민이와 나를 예전보다 더 자주 찾아다녔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유를 나에게 맡긴건지 모르겠다(뭐 안 맡겼더라면 내가 빼냈겠지만). 그런데 유는 이런 긴장된 분위기를 모르는지, 아니면 다 알고도 무덤덤 한 건지 아직 완전히 회복이 안 되어서 걸을 때에는 지팡이에 의지해 절룩대면서도 침상을 벗어나자 마자 내 뒤를 따라다니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불편해지는 건 나였다. 호위 무사들이 저택안에서도 붙게 된 게 신경쓰이는데 환자(?)까지 따 라붙었으니 더욱 신경이 쓰이는데다, 그가 아무리 내 수하가 되겠다고 자청하긴 했지만 전적(?)이 있던 터라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 속 에 경계와 의심이 담겨있었다. "에혀, 이게 바로 수하를 두고 있는 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인가봐......" 이래저래 하루종일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평소 같으면 팔팔 했을 저녁 시간에 괜히 지쳐서 탁자에 엎드리며 투덜대는데 민이가 피식거렸다. 지금은 유가 지쳐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있기에 호위들이 문밖에 있 지, 만약 유가 옆에 있었다면 호위들도 다 옆에 있었을 거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편한 자세로 있을 수도 없었을 테지......' 하루종일 긴장하고 항상 뻣뻣한 자세로 있었던 걸 생각하니 온몸이 하 루종일 고생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뼈마디가 쑤시고 근육이 아파왔다. "사명은 무슨... 누나가 특이한 경우지. 자신을 죽이려 한 자를 수하로 삼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쳇, 유를 수하로 받는데는 너도 한 몫했잖아." "그거야 누나가 그의 목숨을 구해주기만 하고 그 다음에는 나몰라라... 하니까 그렇지. 한 번 구해 줬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냐?" "유가 어린애냐? 왜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냐구우~" 갑자기 내 자신이 가여워져서 절규 비스무리하게 투덜거리는데 민이의 말이 들려왔다. "흐음, 누나? 지금 유를 구해준 걸 후회하는 거야?" 싱글싱글 웃으며 날 바라보는 폼이 내 답을 뻔히 알면서도 묻는듯했다. "쳇,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아? 다 알면서 묻기는... 다시 자각시켜 주는 거냐?" "아니, 뭐... 누나가 후회하는 것 같아서 말야." "그냥 유랑 같이 있으려니까 좀 피곤하다 이거지." 그러자 민이의 눈이 가늘게 휘어지면서 입가에 간신 같은 미소가 그려 졌다. "쿄효효효, 누나아~ 솔직히 고백해 봐. 누나가 피곤한 게 유에게 신경 써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요즘 수련 시간에 농땡이를 치지 못하니까 피곤한 거야?" "익, 민이, 너어~?" 나의 째려보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민이 녀석은 당당하게 날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왜에~? 난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라고. 진.실.을!!" '민이, 이 녀서억~' '진실'이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며 말하는 저 녀석을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일어나 한 대 날리거나 정 안 되면 마법이라도 먹이고 싶었지만, 몸이 피곤하지 만사가 귀찮았던 나는 그냥 탁자위에 놓아두었던 머리 를 반대 편으로 돌려 버리기만 했다.(이거 보면 '드래곤은 게으른 족속 이다' 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다.) "쳇!" 뒤에서 고양이 웃음 소리 같은 민이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쳇, 잘났어......' 유가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후로 변하게 된 내 일상 중 한 가지는 바 로 수련 시간에 농땡이를 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였다. '흑, 농땡이를 못 치게 되다니...농땡이를......' 자고로 수업 시간에 몰래 보는 만화책은 쉬는 시간에 보는 만화책보다 몇 배는 더 재밌는 법이고, 수련 시간에 취하는 휴식시간은 휴식 시간 에 취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달콤한 법이다. 걸릴까 봐 조마조마 긴장하면서 맛보는 스릴감이란... 캬~아, 그렇다고 한 번 해보라고 권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라. 내 경우가 그렇다는 거다. 어쨋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달콤한 농땡이, 다른 말로 떙땡이 를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이와 내가 부모님께 무공을 하사받기 시작한지 어언~7년 하고도 수 개월...... 그동안 우리의 무공 성취가 착실하게(?) 이루어지자 부모님은 우리의 경지가 어느 정도 올라간 뒤에는 수련 시간에 같이 계시지 않았다. 대신 수련 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으므로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 는 게 아닌 이상은 2,3일에 한 번씩 수련이 끝날 즈음에 와서 그동안의 성과를 봐주고는 했었다. 그러니 부모님 오시는 시간만 잘 맞추면 수련을 얼마든지 쉬엄쉬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항상 그렇다는 건 아니다. 단지 거의 반나절을 차지하는 수련 시간 중 아주 잠깐, 쬐에에에끄으음 만 더 쉬는 것뿐이다. 험, 험..... 어허. 그 눈빛은 뭔가?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밤마다 홀로 어기어검술을 수련하는 것에 슬슬 질렸던 터라 명상 수련으로 전환한 탓에 성취속도가 조금 늦어졌기로 부모님의 의심을 받고 있는데, 그대들까지 날 의심한다면 내가 너무 가 엾지 않은가(쩝,요즘 왠지 할아버지나 아빠 말투를 닮아가는 것 같다는 ....)! 어쨋든 그 수련이 이곳으로 와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유가 날 따 라다니는 바람에 수련시간 내내 부모님과 함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농땡이는 꿈도 꾸지 못하지... 아, 정말 어차피 유는 우리가 수 련하는 걸 보지도 못하는데...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건지.. 그 렇게 유가 못 미덥나? 하긴, 나도 첨에 유를 믿지 목해서 마법으로 사 악한 오로라가 풍기는지 안 풍기는지 탐색할 정도였으니.. 그래도 유는 진심인데..' 평소 싸늘함과 경계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날 따라다니며 항상 싱글 싱글 웃는 유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찡해왔다. "에휴. 언제쯤이면 유에 대한 경계가 사라질지..."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자니 목이 아파 다시 민이가 보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자 민이의 대꾸가 날아왔다. "뭐, 당분간은 계속 경계하겠지. 어쩔 수 없지... 풋, 푸키키키키...." "뭐,뭐냐? 그 요상한 웃음소리는?" 민이는 부모님께 14세-물론 그때는 우리가 15세인 줄 알았고, 진짜 생 일도 아니었지만-생일 선물로 받았던 진검을 소중하게 닦으면서 날 보 더니만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꼭 꼬부라진 소시지처럼 눈을 휘면서 요 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거였다. "푸키키키...누나...키키... 지금 내 방에서 나가지 마라. 나간다면 누나 를 보는 사람에겐 작은 기쁨을 선사하겠지만 누나는 열 받을걸? 쿠쿠 쿠." "뭘 그렇게 비빙 돌려서 말해?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미러!" 물론 민이 방에 거울이 있긴 하짐나 21C에 널리고 널린 수은과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이 아니라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라 잘 비춰지지도 않을 뿐더러 희미하게 비춰지는 상은 일그러져 보이기 일쑤여서 난 보는 사 람이 없을땐 마법을 애용했다. "오마나!" 거울에 비춰진 얼굴의 왼쪽 뺨이 탁자에 눌려 호떡처럼 납작해진 데다 가그 자리가 빨개져서 마치 불에 덴 것만 같아 보였다. 게다가 그 자국이 뺨 전체를 거의 차지해 버려서 양쪽 뺨이 짝짝궁이가 된 게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거였다. "에궁... 이런...." 계속 킷킷 웃어대는 민이를 한번 째려봐 주고는 자국을 빨리 없애려고 볼을 문지르는데 민이가 문득 생각난 듯 웃음을 멈추고 말해왔다. "그러고 보니 유도 대단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든지 상관 하지 않고 항상 웃고 있잖아. 자신만 떳떳하다면 딴사람의 시선은 아무 렇지도 않다는 생각일까?" "글쎄..." 하지만 유가 항상 웃고 다닌 이유는 정말 황당헀다. "예? 하하하!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요. 저 때문에 주군께 심려를 끼 쳐드렸군요.. 하지만 이런 분위기 정도는 제가 전에 몸담고 있던 조직 에서 훈련받을 때의 그 살벌함에 비하면 견딜 만한데요 뭐..." 일순간 난 기운이 쭉 빠졌다. 솔직히 내심 '주군의 곁에 있기 위해선...' 이라고 시작될 비장한 답변 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쩝.하긴... 내가 그런 걸 바랄 처지도 안 되지만 말야..' 민이도 약간 힘 빠진 표정으로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랬던 건가요? 그래서 항상 웃고 계실 수 있었던 거군요." "예? 아 뭐,... 주군을 뵈면 웃음이 절로 나오거든요. 제가 처음 웃었던 때가 주군을 습격하던 그때라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요즘은 제 스스로도 놀랄 정도입니다. 제가 이렇게 웃음이 많을 줄은 저 자신도 몰랐거든요. 그때 제가 웃지만 않았더라도 실수해서 넘어지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 면 임무에 성공해서 여기에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아, 물론 지금 이 렇게 된게 오히려 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오해 마시길 바 랍니다." 그러면서 유는 나를 향해 또 한 번 싱긋 웃어 보였다.(쩜...얼굴만 받쳐 줬더라면 아주 멋진 영화의 한 장면이었을텐데, 현실이 그렇지 못해 조 금아쉬었다.) '쳇, 내가 그렇게 웃기게 생겼단 거야? 넌 웃느라 실수해서 넘어진게 아니라 내 마법에 걸려 넘어진 거라고! 쳇쳇....!' 내가 속으로 툴툴대고 있는데 유가 민이에게 말하는 게 계속해서 들려 왔다. "주군께선 정말 보기 힘든 분이시라니까요. 민님, 제가 전에 갇혀 있다 가 주군께 구출받았을 때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십니까? 꽤 얻어터져서 절로 신음이 나올 만큼 고통스러운데 주군의 행동에 웃음이 막 나오려 는 겁니다. 웃고는 싶은데 웃으려니 몸이 고통스러워서 웃지 못하겠고, 웃음을 참 으려니 견딜 수 없고,,,하아, 그때가 제 생애 중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이었다니까요. 후훟..." 유는 그때 생각이 났는지 또 실실대고 웃었는데 그 모습에 나는 괜히 얼굴에 피가 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유! 그럼 그떄 끽끽댄게 신음 소리가 아니라 웃음소리 였단 말 야?" "예? 예.. 뭐, 신음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웃음을 참느라 넘 괴 로워서 난 소리였으니까요." "그게 그거지!1" 그떄 민이의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누나가 그때 어떻게 했는데요?" "아..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우! 말하면 가만 안 둘 거야!1" 즐겁게 웃으며 민이에게 말해 주려던 유에게 날카롭게 외치자 유가 슬 그머니 물러났다. "아하하하...민님,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겠는데요, 뭐 그떄 일은 말로 듣는다고 해도 직접 겪어보시지 않는 한 이해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에 그래요? 그럼 나중에..." "민.아`~~~~~~~``!" "핫핫... 그냥 포기하죠 뭐..." 실실 웃어대는 민이를 노려보다 그를 확 잡아끌었따. "어물쩡거리지 말고 빨리와. 수련 시간 다 됐단 마랴." "에 벌써? 아직 시간이..." "민아, 주~글~래애애~?" 주먹을 꽉 지며 들어 보이자 민이가 재빨리 몸을 돌렸따. "앗 누나, 우리 좀 늦은 거 같지 않아? 부모님께서 기다리실지도 모르 겠네." 나의 매서운 눈길에 뒤통수가 따가웠는지 민이는 삐질 땀을 흘리며 발 걸음을 재촉해 나보다 앞서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짜식이 말야, 진작 말을 들을 것이지 꼭 힘을 쓰게 해요.' 그렇게 우리가 도착한 연무장에는 부모님 말고도 생각지도 못한 할아 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가끔 우리를 만나러 오시긴 해도 강호 예의상 수련 시간은 피하던 분이 부모님과 같이 우리를 맞아주시니 민이와 나는 어리둥절했따. "어? 할아버지?" 의아한 눈으로 할아버지와 부모님을 번갈아 보는 우리에게 엄마가 입 을 열었다. "얘들아, 할아버지께서 너희들에게 은씨 가문의 검법을 가르쳐 주시겠 다는구나." "엑!" "정말요?"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나타난 민이와 나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민이는 새로은 무공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는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지만 나는 별로 탐탁지가 않았다. 오히려 학교 다닐 때 배워야 할 과목이 한 가지 더 늘어난다는 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이었 다. 솔직히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엄청난 고수라고 해도 마법이란 걸 모르 시니 내가 마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할아버지께 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 각과 함께 마나는 할아버지보다 내가 더 많이 가지고 있으니 엄마의 검 법만 좀 더 수련하고 마나로 단전을 크게 키운 뒤 임독양맥을 다 뚫기 만 하면 무공만으로도 할아버지와 동수를 이룰 수 있을 거란 자만심이 ㅡ한마디로 할아버지를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ㅡ은연중에 머리속 에 자리잡고 있었던 탓에 할아버지의 검법을 배울 필요성도, 배우고 싶 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뭐 수련을 즐기지 않는 탓도 조금은 있는 듯하지만...... 할아버지는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엄마와 아빠가 '그럼그렇지..'란 표정으로 한숨을 포옥 내쉬는 걸 보니 미리 할아버지게 귀띔을 한 모양이었다. '진이는 재능은 있는데...' 라 고 시작하면서 말이다. '안 봐도 뻔하지 뭐......' 뭐 내 천성이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마법을 할 줄 안다는 것에 안주하 여 무공을 익히는 데 성의를 다하지 않은 탓도 클 것이었다. '쩝, 나도 내가 성의없다는 건 알고 있다고......하지만 하기 귀찮은걸..' 할아버지는 민이가 기특했는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날 쳐다보 았다. "진이는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구나. 나에게 배우는 것이 싫으냐?" '에구,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내가 난감하지이~' 그렇다고 솔직하게 '할아버지가 대단해 보이지 않아서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라 난처한 표정으로, 약각 미안한 감정도 섞어서 대답했 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단지 전 무공 배우는 것에 큰 뜻이 없어서 요...... 그냥...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거 뿐이예요." 내 말을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날 유심히 보더니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오호라, 넌 지금 네 실력이 네 몸 하나 건사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 는 거구나. 자신감이 대단한걸?" "에? 아니, 뭐...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 대놓고 '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나라도 그러지는 못하겠어 서 그냥 쑥스럽게 웃어보였다. 뭐 그래 봤자 은근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거긴 했지만. "호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자신있다 이거지? 그래, 진이와 민이가 또 래 중 성취 속도가 빠른 편이라고 들었지. 그렇다면 진아, 어디 나랑 한 번 대련해 보련?" "예? 대련이요? 저랑 할아버지랑요?" "그래, 네 실력을 나에게 한번 보여주려므나, 만약 네가 공격을 성공시 키거나 내 공격을 받아낸다면 나에게서 검술을 배우지 않아도 좋다. 어 떠냐?" '흐음...이거 왠지... 날 구슬리는 거 같은데... 으음... 그래도 잘하면 검 술을 더 안 배워도 될지도 모르는 데다가... 내 실력이 어느정도인지도 알고 싶어. 난 항상 엄마나 민이 하고만 대련을 해서 내가 얼마나 뛰어 난 건지도 모르겠거든......' 게다가 내 비록 모범적인 무공 수련생은 아니었지만 이쪽 세계에 한쪽 발은 담그고 있는 몸이었기에 조금은 호승심이 있었는지 이곳에서 오 대고수 중 한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할아버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기에 결국 할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대신 할아버지는 저보다 무공 실력이 훨씬 좋으니까 공격할 땐 살살하셔야 해요?" "허허허, 그래 알았다. 살살하도록 하지. 아, 그래, 난 검을 사용하지 않고 저걸 사용하마. 그럼 되겠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연무장 근처에 있던 사람 키를 훨신 넘는 나 무쪽으로 가서 엄지손가락 굻기의 나뭇가지를 하나 적당한 길이로 꺾 었다. '앗, 저런 자연보호에 위배되는 일이... 하긴, 여긴 그런 게 없지....' 그 나무를 보니 자주 이런 일을 당했던 듯 여기저기에 나뭇가지가 꺾인 흔적이 보였다. '쯧쯧... 쟤도 안됐다. 괜히 연무장 근처에 있어서리......' 할아버지가 나뭇가지를 가지고 연무장 중심부에 자리를 잡자 나는 허 리춤에서 검을 빼내어 민이에게 건네주고 검집만 든 채할아버지 앞에 섰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응? 왜 검을 사용하지 않고?" "할아버지가 검을 사용하지 않으시는데 제가 사용할 수는 없잖아요."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할아버지가 빙긋웃었다. "그러냐? 난 상관없다만, 네가 그렇게 한다면야... 자, 그럼 시작할까? 선공하거라." 먼저 공격하라고 말하면서 방어할 태세를 취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맞아 주겠다는 뜻인지 양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려 놓고 있었다. '쩝... 저렇게 공격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포즈를 보고 있으려니 왠지 오 기가 생기는걸?' 물론 그렇다고 해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주의하면서 할아버지의 마나 를 느껴보았지만 거대한 양의 마나는 단전에서 꼼짝도 안하고 있었고, 소량의 마나만이 몸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으음... 단전의 마나를 끌어올리지도 않고 있네. 끌어올리는 속도에 자 신이 있나 본데? 하긴, 임독양맥이 다 뚫린 상태일 테니 속도는 빠르겠 고... 음, 어쩌면 난 저 정도의 마나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그렇다면 어디 한 번 편법으로 선공 해볼까나?' 나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자, 그럼 갑니다! 홀드!!" 어차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전에 있던 곳의 언어를 모르니 시동 어를 크게 외친다 해도 괴상한 기합 소리라고 생각할 것이고, 마법도 1,2클래스의 마법만 사용할 테니 이상한 마나의 흐름을 느낀다 해도 대련 중의 마나 파동이라 여겨질 테니 맘 놓고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발을 묶어놓고 보법(일정한 거리를 빠른 속도로 움 직이는 방법)을 사용하여 할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히자마자 나는 검집 을 내지르는 대신 허리춤에 끼워 넣고 할아버지의 멱살을 틀어잡고 엎 어치기를 먹였다. "허를 찌르는 공격!" 할아버지에게는 어지간한 검술은 통하지 않을 터, 그러니 생각지도 못 한 방법으로 공격해야 조금의 데미지라도 입힐 수 있으리란 계산 하에 서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이럴 땐 21C 한국에서 살 때 보았었고, 그동안 민이를 상대로 틈틈이 익혀뒀던 (물론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 동작만 어설프게 따라 하는 거지만...) 태권도, 유도, 프로 레슬링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 생각이 들어맞았는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할아버지는 허공 에서 몸이 한번 뒤집혔지만, 이 정도로는 당해줄 수 없었는지 발이 땅 에 닿자마자 얼른 주저않아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몸을 반바퀴 회전시 키며 왼 다리를 쭉 뻗어 할아버지의 발목을 쓸어갔다. 그러자 할아버지 는 살짝 허공으로 뛰어올라 내 공격을 피한 후 할아버지가 허공에 떠 있는 틈을 타 양손으로 땅을 짚고 올려 차진 내 두 다리를 왼손 바닥만 드로 가볍게 막으면서 훌쩍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기다렸나이다!' "스네어!" 발이 땅에 닿기만 하면 미끄러질 테고, 그 와중에 두 발도 묶여있는 상 태이니 분명 커다란 허점이 들어날 터였다. 그리고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공격하면 이 대련은 분명 나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자신하며 마지 막은 검술로 장식하려고 허리춤에 끼워뒀던 검집을 꺼내 할아버지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일검천월!" 소검만화식 중 유일하게 쾌검(빠른 검)을 추구하는 검식으로 눈을 현 혹하는, 화려한 검상을 남기지 않고 오로지 빠르게 찔러들어가 단번에 승부를 내는 방법이다. 할아버지가 땅에 착지하는 순간 미끄러졌는지 휘청하는 모습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어깨 쪽으로 방향을 틀어 검집을 날리려는데 갑자기 할아 버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헉!" 내 손에 들어오기 바로 직전이었던 승리가 휘리릭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에 헛바람이 삼켜지고 심장이 덜컥 정지되는 듯한 기분이었 다. 재빨리 발로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훌쩍 뒤로 물러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할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도 할아버지의 모습을 찾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 르고 당황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낯익은 기척이 느껴지면서 누군가가 내 등을 쿡 찔렀다. 기척이 느껴진 것과 등이 찔린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 크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할아버지가 승리자의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아함과 놀라움 이 더 컸기에 내가 졌다는 건 깨닫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런고로 나는 앞으로 할아버지에게서 검법을 배우게 생겼다는 것도...... 할아버지는 내 여러 번의 공격을 다 막아내고 단 한 번에 공격을 성공 시켰던 것이다. 능글맞다고 해야할지 능수능란하다고 해야 할지... 엄마 같았으면 그 열혈 성격을 못 이겨 '안 배우면 가만 안 둘겨~!' 라고 펄펄뛰었을 테 고, 아빠는 예의 그 무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실망했다는 눈초리로 나 에게 심적부담을 팍팍 안겨줬을 텐데, 할아버지는 말은 그렇게 해도 처 음부터 내가 이렇게 될 줄 안 듯 느긋한 표정이였다.(물론 내가 별로 탐 탁지 않은 기색을 띠었을 떄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역시 오랜 세월의 연륜이란 걸까?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만... 에, 그러면 몇 배는 더 묵은 난 뭐지?' 생각이 진행될 수록 왠지 나만 점점 더 비참해 지는 것 같아 얼른 고개 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버리고 할아버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겨...은씨 가문 무공은 강한 건가요?" 그러자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눈썹이 꿈틀댔다. "진아, 남의 집 얘기하듯이 은씨 가문이 뭐냐, 은씨 가문이...... '우리 은 씨 가문' 이라고 해야지. '우.리.은.씨.가.문.'!" 할아버지는 유난히 '우리' 자를 강조하면서 다시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한 눈길을 팍팍 보냈다. 그 눈길에 순간적으로 쫄아버린 나는 할아버지 의 뜻대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예에... 그러니까 우리 은씨 가문의 무공이 강한 건가요? 그냥 할아버 지의 능력이 뛰어나니까 무공이 강해 보이는 게 아닌가요?" "무슨 소리냐! 아무리 내가 선천적인 무골ㅡ무예를 익히기에 좋은 신체 ㅡ을 타고났다지만ㅡ그래도 능력이 없다고 하진 않는다ㅡ그거 하나만 으로 고수라 불릴 순 없다. 다 뛰어난 무공과 스승이 뒷받침되어야만 될 수있는 거란다." "그, 그런건가요?" 왠지 할아버지가 흥분하신 것 같아 말릴 겸 끼어든 건데 오히려 흥분을 더 부채질해 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내 나중에 말해 주려 했던 거지만 우리 은씨 가문은 부끄럽게도 50년 전만해도 지방의 그저 그런 중소 문파 계열에 겨우 낀 무가였단다. 그 러나 신체는 허약하나 지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셨던 너희 작은 고조 할아버님께서 우리 가문의 무공이 약함을 한탄하사 일평생 연구하신 끝에 개선, 보완하여 새롭게 변화시키셨지. 그것이 바로 현 가문의 입문 무공인 '낙성검법' 이다. 이 무공 또한 대문파들의 입문 무 공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할 수 있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이 검법 을 바탕으로 한 단계 더욱 상승된 무공을 창안해 내셨지. 그것이 바로 우리 가문의 절기인 '은하검법' 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희 작은 고조 할아버님의 명이 다하실 때까지 완 정을 못 하셨단다. 이때 그 무공을 완성하신 분이 바로 너희 증조 할아버님이시다. 뛰어난 무골을 타고나셨으나 지방의 작은 무가란 이유만으로 무당파에 서 직계 제자가 되지도 못하여 절기의 전수도 받지도 못하시고 입문 무 공만 조금 배우다가 수모를 참지 못하시고 그곳을 박차고 나와 작은 고 조 할아버지께서 변화시켜 놓았던 '낙성검법'에 매진하셨다. 그리고 미 완성이었던 '은하검법'을 완성시켜 50년 전 일어났던 정사 대전때ㅡ강 호 일반에서는 그냥 '정사격돌'이라고 하지만 무림맹이나 이름없는 정 파 가문들에선 '정사대전'이라고 한다ㅡ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시 어 '검왕'이란 칭호를 받으시기도 했지. 그리고 그분이 가주가 된 이후 로 우리 가문이 급성장하여 5대 세가 중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할 수 있었느니라." 할아버지는 점차 격앙된 목소리로, 마지막에 가선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는 거였다. <거참... 할아버지도 설움 당하셨나 봐.> 민이가 머리 속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게...한이 골수까지 미친 거 같은데?> <난 할아버지 마음 이해해. 나라도 열심히 해서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려야겠어.> <민아, 다 좋은데 왜 거기서 '나라도'란 말이 나오는 거니?> 내가 쫙 가라앉은 메시지를 보내자 민이가 움찔거렸다. <앙? 내, 내가 그랬어? 에이... 누나가 잘못들은 거겠지......> <그렇...겠지? 내가 잘못들은 거겠지? 민이가 감히 누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도 무.사.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말야. 그치?> <그, 그럼.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 잘못 들은 거야.> <그런...거지?> <응. 그런 거야.> 우리가 이렇게 메시지를 주고 받는 동안 할아버지의 말은 계속 이어졌 다. "그러니 너희들은 은하검법을 배울 때 경건한 마음으로 배우는 자세에 임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옛!" 할아버지의 박력에 밀려 민이와 같이 힘차게 대답은 했는데 하고 나니 까 뭔가가 좀 이상했다. '어라? 나 아직 배우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되 버린거야?' 왠지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기분과 함께 뭔가 찜찜했지만, 뭐 어쨋거나 결과는 같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 가 버렸다. 하지만 그 대단하다는 은하검법의 위용과 할아버지의 진짜 실력을 한 번 보고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은하검법이야 이제 우리가 배울 거니 어 떤 건지는 조금 지나면 알게 되겠지만, 시범으로 펼쳐지는 것과 대련할 때 펼쳐지는 것에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것이었다. 게다가 아까 할아 버지의 실력을 조금도 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를 넘긴다면 또 언제 할 아버지의 실력을 볼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할아버지를 불렀다. "근데요, 할아버지?" "음? 왜 그러느냐?" "은하검법이 대단하다고 해도 말로만 듣고서는 짐작도 못하겠거든요. 그러니까 저희에게 조금이라도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시범을 보여달라는 게냐?" 할아버지가 그렇게 물으면서 옆에 있던 부모님을 힐끔 보는 폼이 시범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부모님 앞에서 시범 보이는 걸 꺼려 하는 듯했다. "아뇨, 아뇨. 시범은 그냥 검법 동작만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거 가지고 서는 아직 경험이 없는 저희로서는 알아볼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아직 내가 뭘 원하는지 감을 못 잡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귀여운 미소를 크게 지어보 이며 말했다. "아까 저랑 했던 것처럼 아빠랑 대련하시면 안 될까요? 아빠도 굉장히 강하시거든요." "응?"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듯 할아버지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더니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에게 말했 다. "이 녀석이 아무래도 날 못 믿겠나 보군. 그러니 자네가 날 좀 도와주어 야겠네." 그러자 아빠는 지체하지 않고 한 발 앞으로 나와 포권까지 취해보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전부터 가주님의 크신 명성을 듣고 흠모해 왔습니다. 오늘 저에게 가 르침을 주신다면 크나큰 영광이겠습니다." 평소보다 많은 말을 하시는 아빠의 눈이 빛을 발하는 걸 보니 꽤나 흥 분하신 모양이었다. 강자와의 대련에 이렇게 흥분하다니, 역시 아빠도 뼛속까지 무사였다. "헛헛헛, 본인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너무 그렇게 기대하진 말게나." 할아버지의 그 말로 인해 둘이 대련하기로 결정되어 민이, 나, 엄마는 둘을 방해 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그보다도 먼 저 할아버지의 말 소리가 들려 우리는 가려다가 다시 멈춰 섰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검을 가진 게 없어 곤란한데? 자네를 상대하려 면 나뭇가지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말야."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들어 보이는 나뭇가지가 왠지 나와 대련하기 전 에 봤을 때보다 짧아진 듯 했다. "저기, 할아버지?" 긴가민가함을 참지 못한 내가 할아버지를 부르자 할아버지가 반색하며 날 봤다. "오, 진아, 네 검을 빌려주려고?" "에?" '그게 아니라...'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진짜 그렇게 말할 수 는 없어서 그 말을 삼키고 대신 분위기에 밀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그 보다도 먼저 할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네 검은 소검이라서 장검에 익숙한 나로서는 어색할 것 같구 나, 마음은 고맙다." "에? 아, 예에......" '거참......' 좀 당황하면서 지금 물어볼까 말까 다시 고민하고 있는데 민이가 도도 도 달려와서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할아버지, 제 검을 빌려 드릴게요, 제 건 장검이라 괜찮으실 거예요." "오냐, 그래, 고맙다." 두 손자 녀석들이 다 자신에게 검을 빌려주려 하니까ㅡ물론 이건 할아 버지의 오해였지만...ㅡ되게 기분이 좋은지 큰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 려 있던 나뭇가지를 버리고 민이의 검을 받아 드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지금 물어보지 못했다간 할아버지와 아빠의 대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때라고 물어볼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치 않았기에 지 금 후딱 해치워야 했다. "근데요, 할아버지, 이 나뭇가지가 저랑 대련하기 전보다 짧아진 거 같 아요. 그쵸?"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버린 나뭇가지를 주워 이리저리 살펴보자 막 민 이의 검을 시험 삼아 휘둘러 보던 할아버지가 멈칫하더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진이 너와 대련하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니더냐? 너와 내 내력(내 공)을 견디기에는 아무래도 나무는 약하지. 네 내력과 충돌 할 때 버티 지 못하고 끝이 산산조각났더구나." 할아버지가 말해 준 건 그게 다였지만, 그 말만 듯고도 내 머리는 빠르 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내 내력이라고? 아, 내력이 마나지. 그런데 충돌했다고? 어, 그럼... 혹시 아까 그 마법이 해제된 이유가 할아버지가 자신의 내 력으로 마법을 형성하고 있던 마나를 흩어버리신 거란 말야? 음... 가 능해. 저쪽 세계의 마법에서도 마법으로 발현하지 않은 순수 마나 덩어 리를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헤에, 할아버지도 대단하네. 비록 낮은 계열의 마법들이라 해도 하나는 1클래스였고 하나는 3클래스였 는데, 그 두 마법을 한꺼번에 깨뜨리시다니... 아냐, 가능한가? 할아버지도 6클래스에 가까운 마나를 가지고 계시니까... 음...그래도 두 마법에 걸려 있는데도 내가 눈치 채기 전에 깨뜨렸다는 건... 게다가 아마 마법은 처음 당해보셨을 것 아냐? 역시 능력이 대단 한 건가? 음... 연륜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연무장 중간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대련할 자세를 취했다.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긴장 때문인지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버렸고, 바람도 숨을 죽이 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할아버지가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아빠에게 입을 열었다. "오게나." 단 한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이나 마 풀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답하는 아빠의 목소리도 침착 그 자체였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빙설난분!!" 대련할 때는 후배에게 공격을 양보하는 것이 예의란다. 그래서 할아버 지가 아빠에게 먼저 공격하라고 한 것이고, 아빠 또한 사양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첫 공격은 탐색전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 하는 것 예 의가 아닌지 아빠의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눈처럼 차가운 빛을 뿌리는 수십개의 검 잔산은 일견 보기에는 날카로워 보였지만 매서운 기운을 머금고 있지는 않았다. 그 검의 잔상들은 할아버지의 정면 공간을 다 채우고 있어 검에 맞지 않으려면 뒤로 물러나야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여유로 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는 대신 검을 들어 오른쪽 발을 강하게 내디디 며 아빠가 펼쳐 내는 현란한 검세 사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은하성붕!!" 강력해 보이는 행동에 비해 극히 평범한 어조의 한마디가 할아버지 입 에서 나오자마자 검에서 폭풍과도 같은 강력한 압력이 뿜어져 나와 주 위를 가득 메우며 덮쳐 오던 수십 개의 검 형상들을 흩어버리더니 그 여세를 몰아 아빠를 향해 몰아쳐 갔다. "차압!!" 그에 반응하여 아빠가 낭랑한 기합성을 발하자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 진 검의 잔상들이 아빠에게 모여들어 검으로 변하더니만 할아버지의 쏘아져 들어오는 공격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챙ㅡ챙ㅡ챙ㅡ 두 분 다 목숨을 건 사투가 아니라 단순한 대련이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마나를 활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런 대련을 보고 있는 나는 마른침이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손발이 가늘게 떨렸다. '세상에나...저게 고수들의 대련이란 말야? 난 쨉도 안 되겠다.' "대단해, 대단해. 내공까지 사용했으면 더 엄청났을 거야. 무공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저 정도일까?" 드넓은 연무장을 무슨 앞마당 드나들듯 종횡무진하며 수차례 검을 주 고받는 둘의 모습에 민이는 무지 흥분한 듯 두 주먹을 움켜 잡고 부르 르 떨며 연신 감탄의 말을 내밷고 있었다. "두 분이 너무 뛰어나신 거지. 너희 할아버지의 실력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까지 다섯 분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는걸. 그러니 그 실력이 상상이 가지?" "그럼 그 할아버지와 대등하게 겨루는 아빠도 대단하신 거네요?"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엄마에게 묻자 엄마가 빙그래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할아버지께서 봐주셔서 대등한 것처럼 보이는 거지. 그래도 이 건 엄마 생각인데, 현 무림 5대 고수 밑에 있는 10대 강자 중에는 속할 거라 생각해." "그래요?" 엄마가 말한 10대 강자 중 일 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인지 모르는 나는 단지 아빠가 할아버지보다 한 수 아래란 뜻으로만 받아들 여 '그런게 있으려니...' 정도로만 기억하고 연무장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대련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아빠가 대부분 공격하고 할아버지는 계속 방어 위주로 가다 가 간간히 공격하곤 해서 아빠가 할아버지보다 한 수 아래라는 건 알았 지만 실력에 그리 큰 차이는 없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검이 부딪치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역시 할아버지 가 한 수 위구나...' 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아빠는 공격횟수가 많았지만 번번이 공격이 성공하기 전에 할아버지에 게 막혀 버렸고 좀 강한 공격을 하기 위하여 할아버지와의 간격을 넓혀 자세를 잡으려 하면 타이밍 죽이게도 그 순간을 포착한 할아버지가 달 라붙어 공격하곤 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공격이 그렇게 강한 게 아닌지 아빠가 거뜬히 막아 내곤 했지만, 그때마다 아빠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고, 아빠의 얼굴에 는 낭패스런 기색이 언뜻 스쳐 지나가곤 했다. "대단해, 할아버진...... 간단한 공격으로 아버지의 절기를 다 무산시켜 버리고 있잖아? 그러니 아버진 절기를 못 쓰시고 시간벌기 용인, 그저 그런 공격밖에 못하시지,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몰아붙여질 줄이야....."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민이의 감탄이 흘러나올 즈음 아빠가 할아버 지와의 거리를 다시 한 번 벌이자 아빠를 쫓아가서 공격할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지막이다. 어차피 승패는 난 것이니 이걸로 대련을 끝내려는 거야." "빙천열지!" 엄마이 말이 끝나자마자 아빠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할아버지를 향해 수직으로 검을 내리그으며 외치자 매서운 검풍이 강하게 몰아치며 할 아버지에게로 날아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두 발을 살짝 벌린 상태로 땅을 단단하게 딛고 선 채 아래에서 위쪽으로 비스듬히 검을 쳐 올렸다. "은하앙시!!" 그런데 아빠가 내려친 속도에 비해 할아버지의 쳐 올라가는 검의 속도 가 터무니없이 엄청 느릿느릿한 거였다. 저러다간 검을 다 올리기도 전 에 할아버지가 아빠의 검풍에 맞고 대련이 끝날것만 같아 성질 급한 나 는 답답해서 내가 달려가 할아버지의 팔을 함번 찍어주고 싶을 지경이 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가 발을 떼기도 전에,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들어 올 리는 검이 채 반도 올라가기 전에 할아버지 주위에서 부드럽고 웅장한 파장이 할아버지를 한번 휘감더니 천천히 공중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 혀 나가는 거였다. 마치 거인이 웅크리고 있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듯한 느낌이었 다. "오......!" "와......!" 그 기운을 느낀 민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떡 벌렸다. 몸속의 마나를 반도 채 쓰지 않고도 이 정도인데, 만약 정식으로 했다 간 어땠을까... 를 상상하니 등 뒤로 한기가 흐르며 오싹해졌다. '엄청났을 거야......' 할아버지에게서부터 파장된 웅장한 기운은 자신을 꿰뚫어 버릴 듯이 매섭게 쇄도해 들어오는 아빠의 검풍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소리소문없이 흡수해 소멸시켜 버렸다. 그리고 막 땅으로 내려오는 아빠까지 흡수하려는 듯 아빠에게 다가가 더니만, 막상 거의 다다르자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아마 할아버지가 그렇게 되도록 손을 쓴 것 같았다. 그리고 마주 선 할아버지와 아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검을 거두 었다. 대련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우와아아~!!" "대단해요!!" 내가 먼저 환호하며 박수치자 민이까지 덩달아 박수치며 외쳤다. "졌습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자네도 훌륭했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두 분이 인사까지 마치자 엄마는 우리 둘을 데리고 그쪽으로 다 다갔다. "환상적인 대련이었어요. 두 분 덕에 오늘 제 견문이 더 넓어졌군요." "헛헛헛, 다 부군의 실력이 뛰어난 덕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자네 또한 실력이 만만치 않을 테지? 아까 진 녀석의 예상치 못한 놀라운 공격만 봐도 말야." 할아버지는 민이와 내가 무지무지 감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무지 기 분이 좋으신 모양이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나온 아까 내 공 격 이야기에 엄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다 제가 잘못 가르쳐서......" "아닐세, 아니야. 난 나무라는것이 아니라 칭찬하는 걸세. 진이 녀석의 임기응변식 공격은 진짜 내 허를 찔렀어. 애라고 방심했다가 정말 놀랐 지. 욘석은 머리 회전이 정말 빠르던걸? 하지만 진아, 그런 임기응변은 웬만한 자들에게는 통할 지 몰라도 진정한 고수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단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헷헷......" 그러자 신통깨는 민이의 말! "잔머리만 빨라요. 누나, 고수들에게는 안 통한다잖아. 좋아할 게 아닌 거 같은데?" 나는 할아버지의 손길에서 빠져나와 생글생글 웃으며 민이에게 다가갔 다. "민아? 쯧쯧... 옷에 웬 먼지가 이렇게 많니?" 내가 다가가자 주춤거리는 민이의 어개를 탈탈 털어주며 상냥하게 속 삭이던 나는 번개처럼 녀석의 팔을 낚아채 등 뒤로 꺾어 버렸다. "아야야야야~~ 누나아아아~~" "뭐 아직 고수가 아닌 동생한테는 통하니까 상관없어. 특히 이렇게 예 쁜말만 골라 하는 동생에게는 더욱 잘 통하겠지?" "잘못했어. 잘못했다니까아~! 항복! 항보오옥~~!" 민이의 쩔쩔매는 얼굴을 보며 이쯤에서 봐줄까 하는데 뒤에서 할아버 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허, 역시 진이는 임기응변이 빠르구나."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엄마 음성.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가르쳐서 애들 버릇이......" '쩌비......' 이로써 민이와 나는 할아버지에게 은씨 가문의 은하검법을 배우게 되 었고, 덕분에 수련 시간이 더 늘어나 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동안 고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은연중 에 할아버지와 아빠를(엄마까지 포함해서) 약간 깔보고 있던 마음이 조금 고쳐져서 이제는 그분들을 조금은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되었 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깨달을 때면 조금은 부끄러워 졌다. '쩝... 드래곤이 되고 나더니만... 조금은 잘난 체하고 있었나봐.....' 아린 이야기 제 15화 "아린 피 볼 뻔하다" 할아버지에게 '은하검법'을 배우기 시작한 후부터는 정말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해가 진 후의 저녁시간은 자유시간이었지만 '은하검법'을 수련한 후부터 어느 정도 익숙해질 동 안은 운기하거나 휴식하는 시간으로 대체되었기에 노는 시간이 정말 팍 줄어들어 버렸다. "아...오늘 하루도 벌써 다 지나가 버렸구나." 이젠 아예 하루 일과처럼 되어버린, 저녁 식사 후의 운기를 마치고 나 서 캄캄해진 창밖을 바라보며 한탄조로 내뱉자 비슷하게 운기를 끝내 고 눈을 뜬 민이가 피식 웃었다. "왜? 예전이 그리워?" "예전?"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해 의아해서 쳐다보자 민이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 다. "할아버지께 검술을 배우기 전에 말야. 오전에는 교양 수업, 오후에는 수련을 했었을 때." "아아. 그때?" 지금은 오전에 할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우지만 전에는 그 시간에 세가 의 자녀들은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 아래 몇 가지를 배웠었다. 시, 서예, 다도(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시와 서예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티 타임을 가지는 것뿐이다. 이것도 하나의 수업이라나 어쨋다나...), 악기 , 그리고 양가댁 규수는 필수적으로 익혀야 한다는 이유 하에 나 혼자 배워야 하는 수! "에구... 정말 지겨웠었지." 아~주 예전에 한국에 살았을 때 받았었던 학교 수업이 생각나게 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른 것들은 다 괜찮았지만 정말 질색이 었던 건 시와 악기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래, 뭐... 어느 정도 이름있는 집안의 자녀이니 괜찮은 시 몇 수는 알 고 있어야 하겠지. 그건 다 이해한다. 이백이나 두보처럼 어렴풋이 이 름이라도 들어본 시인들의 시부터 시작해서 듣도 보도 못한 시인들의 시와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시들까지...... 읽어보는 거? 좋지. 외우는 거ㅡ뭐 외우라고 직접적으로 강요는 안 했 는데, 가끔 가다 앞부분을 읊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주길 바라니...그 게 외우라는 거 아니면 뭐겠는가? 괜히 분위기 잡고 아닌 척하면서도 물어볼 건 다 물어본다ㅡ이해한다. 그런데 왜 거기서 나(and 민이)까 지 시를 지어야 하냔 말이다. 시인은 커녕 하다못해 문관이나 학자로 나갈것도 아닌데 왜에에에~ 허연 수염을 기른 인자한 노인 모습의 그 학자 선생님 방침은 시 한 수 를 배우면 그 시에 대한 감상을 몇 마디 말해야 했고, 그 다음은 자작시 하나를 내놓아야 했다. 내가 그런 데 취미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몰라 도 전~혀 없었으니 얼마나 환장했겠는가? 그나마 일주일에 3일만 한 시간씩 했으니 망정이지 매일매일 했으면 난 분명히 안 한다구 바락바 락 대들고 한바탕 뒤집어엎기라도 했을 것이다. 아, 그랬던 적이 한 번 있었다. 악기를 가르쳐 주기 위해 왔던 선생님한 테. 지금 생각하면 그때 너무 무례하게ㅡ속된말로 싸가지없게ㅡ굴었기에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아직까지 있었다. 솔직히 그는 초빙되어 온 선생 님일 뿐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다 내가 좀 이름있는 집안의 여식이다 보 니 날 어떻게 하지는 못하고 스스로 그만뒀었다. 덕분에 엄마한테 엄청 혼나기는 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잘못이었으니 할 말은 없었다. 악기 선생님은 순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는데 몸집에 비해 유난히 손이 크고 손가락이 길어서 얼굴은 잊어버렸지만 그 손만은 기억이 났다. 그 손가락을 날렵하게 움직이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감탄할 만했 다.그러나 음악은 영~~ 그가 처음 온 날 소개를 하고 나자 처음 만난 기념이라며 청하지도 않 았는데 자신이 가져온 악기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야금이나 거문 고 비스무리하게 생겼는데 길이는 좀 더 짧았고 넓이는 더 넓고 줄 수 도 많았다. 그걸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니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자세를 잡고 손가락을 놀리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는 악기 연주뿐만 아니라 노래도 가르쳐 줄 선생님이었나 보다. 둥기당당~ 둥기당당~ "...히이이이~ 이이이~ 헤에에에~~" 물론 가사는 있었지만, 내 귀에 들려 온 건 다음 단락으로 넘어 갈 때 끝을 길게 늘이는 소리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매정하게도 내 뒤통수를 가차없이 후려 갈겼다. '허거걱...나도...저렇게 해야 하는 거야?' 아주 진지하고 열정적인 표정으로 부르는 그 선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 니 필사적인 각오가 떠올랐다. '안 해. 못해. 절대로 안 하고 만다!' 그 뒤로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싸가지않는 모드로 변해 밀어붙였다. "싫어! 그게 뭐야? 내가 광대야? 안 해! 못해! 가르치려면 민이나 가르 쳐! 난 안 해!! 이거 끝까지 배우라고 하면 차라리 가출해 버릴 거야!!" 민이에게는 자신이 연주했던 가야금과 거문고 비스무리한 금과 피리를 , 나에게는 비파ㅡ기타랑 비스무리하게 생겼는데 기타보다 좀 작고 세 로로 세워서 연주한다ㅡ와 피리를 권해 주며 기대와 긴장감 뒤섞인 표 정을 보이던 그 순한 인상이 내 발악에 당혹과 경악으로 물들어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매다가 민이의 언질로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 뒤에 당혹감에 물든 엄마가 달려와 훌륭한 규수는 어쩌고 저쩌고 하 면서 신나게 설교하다가 그래도 내가 말을 안 듣자 평소에 안 하시던 ㅡ하긴, 평소에는 어지간한 설교면 내가 항복했었으니...ㅡ온갖, 회유, 분노, 유혹까지 동원하셨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자 결국 불 같은 성격은 터져 버리고, 아빠 달려오시고, 난 도망가고...하 여간에 난리가 아니었다. 뭐, 결국 내 완강한 버티기에 엄마가 항복하셨지만, 그래도 그 뒤로 얼 마 동안은 포기 못하신 엄마가 별의 별 수단을ㅡ예로 든다면 민이 혼자 배우는 걸 보여주든가, 아빠를 동원하여 멋진 폼으로 피리를 부는 걸 보여준다든가, 재밌는 이야기를 해준답시고 악기 연주하는 예쁜 여자 랑 잘생긴 남자 만나는 이야기를 해준다든가 등등...ㅡ다 썼지만 끝까 지 안 넘어갔다. 속직히 그 음악 자체를 안 좋아하는 나에게 아예 씨가 안 먹힌 거지만 그 덕에 엄마가 한동안 저기압으로 있어서 난 찍소리 못하고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알아서 기어야 했었다. "그때 누나 악기 안 배우겠다고 한바탕 소란 일으켰었잖아. 덕분에 엄 마께서 엄청 화가 나셨었는데...기억나?" '윽, 그때 생각하니까 가슴이 콕콕 쑤신다.' "내가 어떻게 잊어버렸겠냐? 처음으로 엄마한테 반항한 건데...쳇, 엄 마도 그래. 내가 그렇게 버티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해해 주지.. 끝까지 우기냐?" "어머니도 어머니지만 누나도 대단했어. 아버지랑 나는 무척 놀랐다니 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머니도 꽤 놀라셨을 거야. 근데 누나, 왜 안 배우려는 거야? 피리까지 가지고 있잖아." "이곳 음악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 피리 불 줄 알아. 그러면 됐지 뭘 더 배우냐?" "그래? 흐음... 난 괜찮은데......" "그럼 너나 많이 배워." "그렇지 않아도 나 혼자 배우고 있잖아." "아, 그렇지." 그랬다. 그 소동 이후 결국 악기는 민이 혼자 배우게 되었고, 선생님도 바뀌고 말았다. '아, 지금 다시 생각하니까 더 미안해지잖아......' 그 뒤로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닫고 보니 뜨거웠 던 햇살은 따갑게 바뀌었고, 저택 근처에 있던 나무들의 잎들이 노랗게 물들다 못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헤에, 벌써 가을 하고도 늦가을이군. 어쩐지 새벽 수련할 때 입김이 보 이더라니......" 막 오전 수련을 마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평소 무심코 지나치 던 나무가 그날따라 눈에 뜨이며 늦가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누나, 그렇게 말하니까 꼭 노인같아. 아, 유수같은 세월이여~ 나의 젊 음은 다 어디로 갔느뇨~ 하면서......" 민이의 능청에 뒤에 서 있던 유가 결국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나보다 네가 더 잘 어울린다. 평소 애늙은이가 너잖아." "그건 누나가 평소 너무 애같이 구니까 내가 어른스럽게 보이는 거라 고." "얼씨구, 애가 애같이 구는 게 당연한 거지, 어른처럼 구는 게 당연한 거냐?" 내 말에 민이는 잠시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했지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는지 잠시 후에 급히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부모님은 날 칭찬해 주신다 뭐......" 그런 민이를 아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나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 렸다. "야, 지금은 네가 더 애 같은 거 알지? 애처럼 억지 부리긴... 어린 나이 에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면 칭잔받는게 당연하지, 애가 애처럼 구는데 칭찬받냐? 그럼 어른이 어른처럼 굴면 칭찬받게?" "윽......" 완전히 할말을 잃어버린 민이에게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띄며 유유히 돌아섰다. 요즘 민이 녀석, 무공 실력이 나보다 쬐께 높다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 지다가 매번 말발로 져서 물러나곤 했다. 하긴, 예전처럼 힘으로 밀어 붙이면 오히려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내가 작전을 바꿔 말발로 승부 를 한 덕이긴 하지만...... '아, 어쨋든 간에 나도 열심히 수련을 해서 민이를 따라잡아야 하는데 말야. 그렇지만... 수련하는 건 넘 귀찮단 말야.' 그런데 그때였다. 저 멀리서 웅성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리가 있 는 쪽으로 조금씩 다가오는 듯했다. "응, 뭐지?" 예전에 민이와 내가 두 번이나 위험에 처한 후에 우리가 머물고 있던 저택의 경비는 한층 강화되었고 출입 또한 엄중히 통제 되어 부모님과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 했다. 물론 민이와 내 외출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머무는 저택 주위는 항상 고요했고, 소란이라고 해봐야 나나 민이가 일으키는 것ㅡ대부분이 내가 일으키는 거지만ㅡ이 전부였 으니 우리 말고도 소란을 일으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의아했던 거 였다. "가볼까?" 호기심 어린 표정의 민이가 내 의향을 물어오자 나는 즉각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지 뭐." 우리가 그곳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터였고,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 또한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덕에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그래서 잠깐이라고 했잖아. 잠깐, 잠깐 보는 거뿐이라니까." "안 됩니다. 가주께서......" "나도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잖아." "하지만......" "어허, 이봐. 우리 사이에 이 정도 부탁도 안 되는 건가?" 우리가 머무는 저택 주위를 감싼 담에 달려 있는 출입문을 경비하는 무 사들과 실랑이를 하며 문 안으로 한참이나 들어와 있던 세 명의 청년들 이 보였다. 같은 색의 무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경비 무사들과 잘 아는 사이인 듯 제지하는 무사들은 난처한 표정인 방면, 그 세 청년들은 마 치 자기네 집 앞마당에 들어온 듯 태연한 표정들이었다. 하긴, 무사들 이 청년들에게 존대하는 걸 보면 청년들 지위가 더 높은 듯 했다. "무슨 일입니까?" 민이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짓는 무표정과 무감각하고 무뚝뚝한 사무적인 목소리로 유가 물었다. "아, 그게... 이분들이 아가씨와 도련님을 뵙고 싶다고......" 우리를 발견한 무사들이 당황한 듯하면서 한편으로 묘하게 안도의 표 정을 짓는 게 보였다. 저 세 청년들은 꽤 상대하기 난처한 존재들이었 나 보다. 그런 무사들을 대신하여 유가 앞으로 나서서 예의 그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가주님의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허락을 받지 않았다면 이대로 돌아가 주십시오." 유가 무감각, 무표정으로 말하면 그게 은근히 협박하는 것처럼 들릴 텐데도 이 청년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듣는 둥 마는 둥 하 면서 유의 뒤에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는 민이와 나를 호기심과 감탄(?)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더니만 그중 제일 얼굴이 갸름하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청년이 나섰다. "혹시 그 신비에 둘러싸인 가주님의 손자, 손녀 분 되십니까?" 몸매가 남자치고 호리호리하다 했더니, 목소리 역시 남자치고 가늘며 톤이 높아 자세히 살펴보니 목에 아담즈 애플이 없었다. 아까 무사들과 실랑이할 때 앞에 나서지 않아 몰랐었는데 지금 보니 여자였다. 다른 두 사람과 똑같은 청색 무복에 머리도 그냥 목덜미 근처에서 한번 질끈 묶고 있어서 으레 남자인 줄 알고 여기고 있었던 터라 좀 당황했다. 그 건 민이도 마찬가지였던 듯 당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자...네?" 이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호탕하게 웃어 젖히며 말했다. "푸핫핫핫, 여자라서 놀라셨습니까? 아, 우선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저는 예은이라고 합니다." "아...응......" 이름 말한다고 누구인 줄 아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그 정도 소개면 다 알 줄 알았는지 달랑 이름만 말해 주고는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봐 민 이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게끔만들었다. 그러자 나머지 두 청년들도 나서서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아, 나머지 둘은 진짜(?) 남자들이었다. "저는 예필이라고 합니다. 은이와는 사촌 간이죠." 예은이라는 여자 무사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ㅡ대충 스물이거나 스물 한두살 정도?ㅡ 의리파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 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우리와 몇 살 차 이 안 나 보이는, 청년이라기 보다 아직 소년이라 불리는 게 더 어울릴 듯한 무사가 나섰다. "나는 모용소취라고 하네. 부족하나마 청해일검ㅡ진, 민이의 삼촌(은재 영)ㅡ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지." "하아......" 나중에 안 거였지만 이들은 항렬로 따지자면 우리와 같은 항렬이었고, 우리보다 먼저 은씨 세가의 문하생이 된 셈이었으니 우리의 사저, 사형 들이었다. 그러나 예은, 예필은 은씨 가문의 가신인 예씨 집안(총관네 집안, 그들은 예총관의 손자, 손녀였다)이었기에 우리에게 존대를 사용 한 것이었고, 모용소취는 은씨 세가처럼 큰 무가인 모용세가 사람이었 기에 항렬에 적용하여 하대를 한 거 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사실은 커녕 소개한답시고 자기들 이름만 말해 놓고 기대에 찬 눈으로 우릴 바라보는 저들이 뭘 원하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덕분에 주위에서는 예기치 못한 침묵이 깔렸고, 세 남녀의 기대에 찬 눈빛이 서서히 어리둥정함으로 물들어갈때 참다못한 내가 한마디 던졌 다. "그래서요?" "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남녀의 입이 딱 벌어지며 황당감으로 물든 눈들이 나에게 모아졌다. 도저히 무슨 영문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이어서 나는 귀찮음을 감수하며 설명해 줬다. "당신은 예은, 당신은 예필, 그리고 당신은 모용소취인 건 알겠는데요, 여기는 왜 왔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당신들의 신분도 모르고......" 세 남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처한 빛을 교환하더니 예은이라 자신을 소개한 그 털털한 여무사가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에...저...그러니까...저는 은씨 세가의 33대 제자이고...에, 또... 저희 아버지는 예 자 철 자를 쓰시는데 32대 제자이시며 현재 검술 교관이시 고......" 아주 어렵사리 설명해주고 있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좋 았으련만, 할아버지가 은씨 세가의 31대 가주이고 우리가 33대 제자 항렬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민이와 나는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대 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모용소취라던 소년 무사가 나서서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33대 제자라네 자네들이 현 가주님의 손들이 맞다면 우리 와 같은 항렬이지." 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녀석이 나이 많은 사람 같은 말투를 사용하 니 웃겼지만, 일단 우리가 알아듣게 설명해 주는데다 표정 또한 심각했 으므로 웃을 수는 없어서 그냥 이해했다는 표시로 고개만 끄덕여 줬다. "자네들은 이러한 걸 몰랐나 보군. 어쩐지... 예 교관님도 모르더라니... 예 교관님은 예 총관님의 둘째 아드님이시지.아, 총관님은 알려나?" 그거야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우리를 안내해 준데다 가깜 우리를 살펴보 러 왔었기에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울 할아버지가 위엄있는 할아버지 상이라면, 예 총관은 뭐든 받아 줄 것 같은 인자한 할아버지 상이라고 나 할까? 어쨋든 이곳에서 몇 안 되는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람의 손들 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 그럼 예 총관의 손자, 손녀?" 민이도 동감이었는지 '진작 그렇게말하지...'란표정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 예씨 남녀를 돌아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둘은 '드디어!!' 란 표정으로 환히 웃어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민이가 친근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군요. 한데 여긴 무슨 일로......?" "에?" 환한 표정들이 다시 당혹감으로 바뀌어 버리자 내가 서둘러 나섰다. "아, 예의가 아니란 건 알지만 우리가 보기에 당신들은 허락을 받지 않 고 온 것 같아서 말이죠. 딴사람들 눈에 띄였다간 난처할 텐데요?" 그러자 예은이 납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저희와 대련을 한 번 해 주실수 없겠습니까?" "예?" 이번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건 민이와 나였다. 예은의 말은 계속 이어 졌다. "갑작스런 부탁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두분은 가분의 절기(비전) 무공인 은하검법을 배우고 계시단 소리를 들어서요. 그건 입문 무공인 낙성검법을 다 익혀야 배울 수 있는데 두 분은 벌써 배우 신다고 하니 한번 대련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대련을 허락해 주시겠습 니까?" 그녀의 말대로 이곳 가문에서는 낙성검법을 다 익힌 자에게만 은하검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뭐 어차피 우리 가문의 핏줄과 가신들, 그리고 은씨 가문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만 전수되는 거라고는 하지만, 은씨 세가에서는 다른 문파 나 무가에 입문할 때 사부가 결정되는 것과 달리 처음 입문하면 몇 대 제자라는 지칭만 얻은 상태에서 한꺼번에ㅡ마치 학교에서 수업받는 것 처럼ㅡ낙성검법과 그에 딸린 심법(내공ㅡ마나-운용법), 경공(심법, 보 법), 기타 등등을 배운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수한 자와 그렇 지 않은 자로 나뉘는데 우수한 자들 중에서 끝까지 세가에 남을 사람들 중에서만 윗대 항렬 사람들이 자신들의 제자를 뽑는다고 한다. 아, 물론 모용소취 같은 경우는 두 가문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보내 진 거라 낙성검법을 다 배우지 못했지만 명목상 제자로 삼아준 거고, 어차피 그는 자신의 가문 무공을 배우는데다 울 가문에 남을 확률도 적 으니 낙성검법을 다 배운다 해도 은하검법은 전수 안 해준다. 뭐 그쪽도 그걸 알고 있는 모양이고, 모용소취 같은 제자가 몇 몇은 더 있지만 이런 걸 안 것도 나중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규칙(?)에서 나와 민이는 예외였다. 하긴 33대 제자는 우선 32대 제자인 검술 교관에게 기초 무공을 배우는 데 반해 우리는 처음부터 할아버지에게 직접 배우기 시작했으니 처음부터예외였는지 도 모르겠다. 게다가 민이와 나는 낙성검법과 은하검법을 같이 배우고 있었다. 물론 은하검법을 중점적으로 배우고 있는 터라 대학 수업에 비교하자면 은 하검법은 전공 과목이고 낙성검법은 교양 과목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민이와 내가 뛰어나서 한 달만에 낙성검법을 다 터득하고 은 하검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둘을 동시에 가르치니까 배우 는 거였는데(우리 할아버지가 왜 한꺼번에 가르쳐 주시는지는 모른다. 아마 노인네가 뭔 속셈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거겠지만...) 우리 눈앞에 있는 이들은 그걸 모르는 듯 했다. "대련이라......" 민이가 은근히 맘이 동한다는 표정을 짓고 날 바라보았다. "누나, 한 번 해볼까? 난 그동안 아버지나 할아버지하고만 대련을 해 와서 그런지 내 또래의 사람들과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 '흐음......' 물론 나도 그런 마음이 없진 않았기에 허락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데 유가 끼어들었다. "안 됩니다." "유?" 평소 항상 웃는 낯으로 우리가 뭘 하든 조용히 따라주던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반대하자 민이와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가주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들과 대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또한 대련을 한다고 해도 어디서 하실 것입니까? 두분은 외출 하려면 가주 님이나 부모님께 허락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설마 잊고 계신 건 아니 겠지요?" 유는 대련을 한다고 하면 우리가 허락받지 않고 몰래 나가서 하고 올 것임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허락받으면 되니까 걱정할 거 없어." 민이가 걱정할 거 없다는 눈으로 자신있게 말했지만 유가 고개를 저었 다. [허락해 주실 리가 없습니다. 두 분의 존재는 가문 내에서도 비밀에 부 쳐져 있단 말입니다. 대련을 하게 되면 두 분의 존재가 가문 내에 다 알 려지게 될 텐데 허락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심각한 표정의 유의 전음이 귓가에 울렸다. 전음(자신이 이야기하고 싶 은 것을 상대만 들을 수 있게 내공을 사용하여 말을 전달하는 방법)이 라는 것을 배우긴 했지만 연습할 때 외에는 써먹은 적이 없어(평소에 전음을 사용할 일이 없는데다, 민이하고는 머리 속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면 땡이었으니까) 갑자기 유의 전음이 들려 움찔 놀랐지만, 유가 저 세사람을 경계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별 다른 생동은 하지 않았다. [아마 저들은 예 총관의 손들이라니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던 두분의 이야기를 어쩌다가 듣고 충동적으로 몰래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허락 을 구하려 했다면 절대 오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그냥 돌려보내시 고 저들에 대해서는 꼭 부모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아아... 거참... 몇 번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고 외출은 커녕 이 곳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하더니만... 우리의 존재조차 극비리에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쩝, 저번 독 먹은 사건 때문에 내부에 첩자가 있을 거라 생각 한 거군. 그렇다고 우리를 꼭꼭 숨기고 있으면 땡인감? 어차피 우리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를 다 알고 있을 텐데... 할아버지나 부모님이나 무지 놀랐나보구만......' 유의 말을 듣고는 귀도 한번 만지작, 코도 한번 만지작, 입술도 한번 만 지작거리면서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유가 말한 대로 할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의 눈에 걱정스러움이 차 올랐다. 유는 나에게 청개구리 기질 (어허험...)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군, 설마...안 좋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유는 날 주군으로 섬기긴 하지만 아직까지 날 애 취급하고 있었다.그러 나 난 애가 아니란 말씀. 솔직히 유의 말이 옳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까지 이곳에만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물론 할아 버지나 부모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아, 어쩌면... 그들은 민이와 나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 놓은 후에야 우 리의 존재를 발표할 생각인 걸까? 그래서 할아버지는 은하검법까지 전 수하시는 거고... 어쩐지, 요즘 엄마하고 너무 자주 대련을 한다 했더니 만......' 그런데 그 생각까지미치자 또 다른 생각이 연이어 떠올랐다. 가만 따져 보자면 내가 이곳을 자유로이 벗어날 수 없다는 건 목숨을 노리는 위험 을 내 스스로가 막아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고, 뭐 하나를 한다 해도 주의하고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는 뜻? 에엑~ 귀.찮.아. 사람이 어떻게 그러고 사냐? 난 그냥 여기 있을란다.' 그렇게 결정하고 막 거절하려는 순간 민이의 메시지가 머리속에서 울 렸다. <누나, 유가 뭐래?(내공(마나)이 많으면 여러사람에게 한꺼번에 전음 을 보낼 수 있지만 적으면 한 사람에게밖에 못 보낸다)? 대련하지 말라 고 그래?> <응, 유 말로는 우리의 존재가 가문 내에서도 비밀에 부쳐지고 있는데 우리 멋대로 대련을 허락한다면 우리가 알려질 테고, 그러면 할아버지 와 부모님이 애써 비밀 엄수시킨 것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냐고 하는 데? 그 말도 맞는 거 같아서 그냥 허락받아 보겠다고 할려구.> 유는 할아버지나 부모님 이야기는 안 했지만, 그게 그거고, 민이에게는 그들을 들먹이는 게 더 효과가 좋기 때문에 일부러 말한 거였다. 그러 자 역시 민이는 내 말에 좀 망설이더니 채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허다, 동생아.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귀찮은 건 질색이 잖냐.' 난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그리고 유가 걱정할 걸 생각한 게 아니라 순 전히 내가 귀찮아지는 것이 싫어서 거절하려 한 것이었기에 민이의 실 망한 표정에 죄께 마음이 찔렸다. 그래도 귀찮음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훨 나았기에 외면해 버리고 다시 그 세남녀에게 거절의 말을 하려 했 다. 그런데 그 순간 또다시 민이의 메시지가 날 방해했다. <누나!> <왜?> <부모님 몰래 하면 안 될까?> <뭐?> 나는 너무 놀랄 만함 메시지를 들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 모르게 대화 하고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동그래진 눈으로 민이를 쳐 다보았다. 그럴 만한 것이, 완전 범생이 스타일인 민이는 내가 몰래 하 자고 해도 허락이 없으면 안 된다고 날 말릴 녀석이었던 것이다. 난 설 마 민이에게 이런 소리를 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민이는 내 반응이 너무 격렬했는지 자기도 놀라서 날 쳐다보았다. <뭐야? 뭘 그렇게 놀라? 몰래 빠져나가는 거 정도는 누나에게 일도 아 니잖아.> <응? 아, 뭐 그렇지...... 그 정도 쯤이야 나에겐... 아, 이게 아니지, 야, 내가 안 놀라게 생겼냐? 나라면 몰라도 네가 부모님과 할아버지 몰래 하자고 하니까 그렇지.> 내가 받은 충격이 조금 컸는지 난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다가 퍼뜩 정 신을 차리고 본론으로 돌아왔다. <에...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 꼭 대련을 해보고 싶은걸.> 민이는 자기가 생각해도 묘한지 쑥스럽게 웃었다. <대련이야 나중에라고 할 수 있지 않냐? 꼭 지금 할 필요는......> <에에~ 누나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나야말로 놀랍네.> '거야 내가 귀찮으니까 그렇지.' 딱 잘라 안 된다고 거절하고 싶지만, 내가 범생 스타일도 아닌데다 거 절하는 동기도 불순하고, 또 흔하게 듣기 힘든 민이의 부탁을 듣자니 망설여졌다. 그러자 내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민이가 다시한 번 간절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누나, 부탁이야. 누나가 내키지 않더라도 이번 한 번만 부탁할게. 응? 누나아~> 귀여운 얼굴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데 도저히 거절하기가 어려웠 다. <에잇, 그래, 까짓거... 저 사람들은 어차피 우리 존재를 아니까 대련 한 번 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 좋아. 알았어.> 하지만 유가 있고 경비 무사들이 있는 데서 대놓고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민이를 시켜 그들에게 전음을 보내게 하고 나는 직접 그들에게 거절의 말을 했다. 뭐 전음의 상승 경지에 오르면 입으로 말 하는 것과 전음 보내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난 아직 그 경 지까지 도달 못했기에 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유의 말대로 우선 저희 부모님께 허락을 구해야될 것 같 으니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대신 당신들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으니 허락을 받으면 전하도록 하죠." 그러자 그들 중에서 모용소취가 대표로 나서서 나의 말을 받았다. "그런가? 참으로 아쉽구먼. 비록 나보다 몇 살 적은 듯하나 벌써 절기 를 전수받는다기에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도록 하죠." "뭐... 하는 수 없지 어쩌겠나. 사제들의 사정도 모르고 무턱대고 찾아 온 우리들도 잘한 것 없으니 너무 미안해하지는 말게나. 그나마 제자들 사이에서 은밀히 퍼져 있던 소문의 주인공들을 직접 만나봤으니 그것 만드로도 만족일세. 아, 괜찮다면 하나 물어봐도 되겠는가?" "예,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면 뭐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아, 별건 아니고... 내가 전에 듣기로는 가주님의 손들은 7년 전에 행방 불명되었다고 들었네만, 그들이 자네들인가? 그 외에 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거든." 아마 우리가 다른 쪽의 핏줄, 그러니까 할아버지나 삼촌, 그리고 친아 버지가 외도해서 낳은 아이들일 수도 있으니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런 데 우리의 존재가 비밀이 부쳐 있다는 걸 안 마당에 별 거 아닌 거 같은 데도 그걸 말해 줘도 될지 안 될지 몰라 되게 고민됐다. 망설이면 안 좋 은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질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자 유가 도움의 전음을 보내왔다. [어차피 두 분은 나중에라도 강호상에 소개될 테니 지금 말씀 하셔도 괜찮을 겁니다. 그가 은씨 가문 내에 머무는 한 입은 단속 될 테니까 요.] 나는 유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보내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입을 열었다. "저희가 7년 전에 실종되었던 그 아이들이 맞습니다. 사정이 좀 있었지 요." 자세한 건 얘기하기가 그래서 말 안 했지만 모용소취도 확인한 것에 만 족한 듯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군. 말해 줘서 고맙네." "뭘요." 이때에 민이의 메시지가 머리 속에서 울렸다. <누나, 다 됐어.> 그와 함께 모용소취도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도록 하겠네. 사제들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케 한 것이 아니면 좋겠네만 오늘 자네들을 만나서 반가웠으이. 그럼 나중에 또 만나도록 하세나." "그러죠. 배웅은 않겠습니다." 포권을 취해 보이며 답하자 모용소취와 대화하는 동안 내내 입을 꾹 다 물고 있던 예필이 웃으며 말했다. "핫핫핫! 배웅하신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기가 바로 동문인데요 뭐." 그러자 민이도 맞장구쳤다. "하하, 정말 그렇네요." "그럼 이만." 예은이 포권을 취해 보이는 걸 마지막으로 그들은 몸을 돌려 동문을 빠 져나갔고, 우리도 바로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외출 금지도 풀릴테고, 다 른 문파나 가문에도 정식으로 소개 될 텐데 벌서부터 무리하게 나가실 필요는 없죠. 그때 가면 받기 싫으셔도 대련 신청을 받으실 거니 아쉽 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아, 그리고 저들의 일은 부모님께 꼭 말씀 드려야 합니다. 이후 다시 저런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아셨습니까, 주군?" 저택으로 들어가는 내내 유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이건 왠지 심 복을 들인 게 아니라 유모나 할멈을 들인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유도 꽤 잔소리쟁이네.> 민이의 웃음기 어린 메시지가 울려왔다. <그러게, 뭐. 그래도 우리가 몰래 대련하기로 모의한 건 눈치 못 챈 것 같네.> <그렇지? 다행이야.> <언제 하기로 했어?> <아, 3일 뒤 자정에.> <딴 사람에게 알리지 않게 했지?> <응 그때 다른 사람이 보인다면 대련은 즉시 중단될 거라고 했어.> <그래, 잘 했다.> 민이는 3일 뒤의 대련이 기대되는지 무척 들뜬 듯했지만 유가 이상하 게 여기까 안 나타내려고 조심하는 모습이였다. '쩝, 저렇게 좋아하다니... 뭐, 귀찮음을 감수할 만했어.' 그날 오후 대련 시간에 봐주러 와주신 부모님에게 그 이야기가 들어갔 고, 덕분에 동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 무사들이 조금 혼난 듯했다. 그래 도 별다른 변동은 없었던 걸 보니 그들이 아무레도 예 총관의 손자 손 녀였으니 가벼운 징계로 끝난 듯했다. '그렇다는 건... 대련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소리겠군.' 경비 무사들에게도 별로 달라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들 또한 큰 징계를 받지 않을 거 같았다. 뭐, 그 징계가 일주일 간 근신이거나 한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어차피 그때 가보면 알 수 있는 거고... 난 될 수 있으면 대련은 안 했으 면 좋겠지만 말야.' 그러나 이런 내 바람은 절실하지 않았던 탓인지 신께선 들어주지 않으 셨다. '쩝... 결국 하는 건가?' 그들과 약속한 날 밤... 자정이 다 되어서 나는 민이와 함께 아무도 눈 치 채지 못하게 하늘 높이 날아올라 월담을 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할 까 했지만 그게 워낙 높은 레벨의 마법인지라 마나의 파동을 누군가가 느낄지 모르는 일이었고, 설사 넘어간다 쳐도 그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 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텔레포트가 불가능 했기에 그냥 담을 넘 었다. <어디야?> <동문을 지나 왼쪽으로 담을 쭉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동문이 나온대. 거기서 기다린다고 했어.> 그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가는 동안 순찰을 도는 경비 무사들을 몇 몇 보긴 했지만, 우리가 워낙 공중 높이에서 날아갔기에 그들은 우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잠시 후, 그들이 말하던 동문이 저 멀리 보이자 우리는 땅에 내려와 조 심스레 다가갔다. 만에 하나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다행인지 그런 일은 없었고, 전에 우리와 만났었던 그 삼인 조가 동문 앞을 서성거리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 다른 인기 척은 없는 것으로 보아 약속은 지킨 듯 했다. 그들과의 거리가 얼마간 가까워지자 나는 민이와 나의 기척을 숨겼던 마법을 해제시키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늦은 건가요?" 조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초조하게 있던 그들은 우리를 보자 마자 반 가워하며 다가왔다. "오셨군요. 실은 좀 걱정을 했었습니다. 전에 저희가 그곳에 갔던 것이 알려져서 할아버지께 꽤 혼났거든요. 그래서 두 분이 혹시 못 오시는 건가 하고......" 예은이 활짝 웃는 표정으로 낮게 속삭였다. "아, 우리는 괜찮아요. 그래도 그쪽도 별다른 징계는 받지 않은 듯 하 군요." "예에... 뭐......" 씨익 웃으면서 얼버무리는 폼이 뭔가 징계가 있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뭐 그쪽 사정이었으니 난 더이상 상관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자, 그럼 대련 장소로 갈까요? 이쪽입니다." 그들이 안내한 곳은 나와 민이가 기거하는 저택에 딸려있는 연무장보 다 두배는 더 커 보이는 연무장이었다. "연무장?" 아마 이들이 사용하는 연무장일 거였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가 있을 수 도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긴장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모용소취가 웃으 면서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건 없네. 여긴 정식 제자들이 사용하는 연무장이지. 평 일 같았으면 지금 같은 때도 몇몇을 만날 수 있겠지만 요즘은 모든 제 자들에게 일이 많아서 말이지. 자기 숙소에서 곯아떨어지지 않앗으면 아직도 일을 하고 있을 걸세." 과연 그의 말대로 연무장 내와 근처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 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그런데 일이 많아졌다니요?" "응? 당연한 거 아닌가? 지금이 늦가을이지 않나? 대부분의 추수가 끝 난 시기라 이때에 가장 선물이 많이 들어오기도 하고, 가문 내 여러 가 지 보급도 이루어지고 말일세. 명절 이외의 날 중에서 봄과 가을이 가 장 바쁜 시기이지." "아아......" 대충 이해가 가는 말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민이는 이해가 안 됐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 되었는지 더 묻지는 않았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연무장 안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자 예은이 우리를 향해 말 했다. "그러죠. 그런데 대련은 어떻게 할 거죠?" 예은은 날 보고 싱긋 웃더니 모용소취와 예필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 켜 보이며 말했다. "글쎄, 이쪽 남정네들이 여자와 대련하는 건 정말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하더라구요. 그래서 저와 아가씨께서 대련하고, 도련님과 이쪽 남정 네들이 대련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민이 도련님과 모용 사제가 대련하 기로 하죠." 그들 중 이긴 쪽이 예필과 대련하기로 했고 나와 예은은 첫 대련이 끝 난 다음 두 번째로 하기로 했다. '음... 어차피 이들은 마나가 2클래스도 안 되니까 아빠나 할아버지를 상대할 때보다는 수월하겠지만... 무공이란 게 내공만 많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니 조심해야겠지? 모용소취가 예필보다는 마나가 조금 더 높 은데 먼저 대련하는 걸 보니 실력은 좀 딸리나 보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모용소취와 민이는 연무장 중앙에 서서 서 로 마주 보며 예를 취했다. "내가 사형이 되니 자네가 먼저 공격하도록 하게."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비성암도!"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빛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와중에 모용소취 는 침착한 표정으로 검을 들고 그 길목을 막아갔다. "성막밀밀!!" 민이가 낙성검법을 사용하여 공격해 가자 모용소취 또한 낙성검법으로 그의 검을 막아갔다. 민이는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의 검이 그에게 막히자 훌쩍 뒤로 물러나더니 재차 땅을 박차가며 검을 허공에 뿌렸다. "성월쟁요!" 마치 밤하늘을 별들이 수놓은 것처럼 민이의 검이 열 줄기로 갈라져 달 빛을 받아 차가운 빛을 뿌리며 어두컴컴한 허공에 수놓아졌다. 모용소 취의 몸 열군데를 정확히 노리며 쏘아져 들어가는 검은 빠름과 함께 날 카로운 기운이 담겨져 있어 바라보던 날 감탄하게 만들었다. '짜슥, 제법이네. 예전보다 훨씬 더 정교해졌어.' 이 초식은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더 많은 검줄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 다. 하지만 민이는 아직 열 개가 한계였고, 나도 이제 겨우 열줄기의 검 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번 공격은 좀 감당하기 버거웠는지 모용소취는 아까처럼 정면으로 맞붙는 대신 몸을 틀어 현란한 보법을 펼쳤다. 낙성검법과 같이 배우는 보법이 아니라 내가 처음 보는 것인 걸 보아 아마도 그의 가문 무공 중 하나인 듯했다. 그래도 그 열 줄기의 검 사이사이를 누비면서 피하는 게 아니라 민이의 공격 범위에서 아예 몸을 피하는 것으로 보아 엄마나 아빠에 비해 정말 실력이 낮은 듯 보였다. 아마 엄마라면 그 정도는 생긋 웃으며 순식간 에 피해냈을 것이다. '흐음... 뭐, 민이가 이길 것 같군.' 몇 살이나 위인 모용소취를 거뜬히 상대하고 있는 민이를 보자니 그가 무공에 소질이 꽤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또한 무공을 배우 는 데 흥미가 있다 보니 5년 안에 그는 분명 지금의 엄마 수준까지 뛰 어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음... 분발해야겠네, 분발해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요즘 쪼금씩 딸리는 것 같은데... 내가 넘 게으름을 피운 거 아닌가 몰라.' 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내 옆에서 같이 대련을 지켜보 고 있던 예필이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도련님 제법인데요. 모용 사제도 또래에서 괜찮다 소리 듣는 실력인데 ... 역시 검왕의 후손이시며 자양노군의 뒤를 이을 분이 십니다." 그의 표정이 흐뭇해 보이는 게 왠지 잘 기른 자식을 보는 듯한 표정이 었다. 내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예은이 낮게 속삭여줬다. "필이는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주군으로 모시게 될까봐 걱정 하고 있었거든요. 솔직히 아가씨는 여자분이라서 가녀린 몸매를 가지 고 있어도 그런가보다. 하지만 도련님은 은씨 세가를 이끌어가실 분인 데 연약하면 아무래도 힘드시지 않겠어요? 처음 도련님을 뵈었을 때 아무래도 연약하신 것 같아서 필이가 좀 걱정을 하더라구요." "아하... 민이가 좀 말랐긴 하지만 근육은 꽤 있어요." "예, 지금 보니 그런 것 같네요. 게다가 무공도 꽤 높으시구요. 그런데.. 아가씨, 지금 도련님이 사용하는 검법은 은씨 가문의 무공이 아닌데 요?" "아아... 아빠한테 배운 거." "아버지라면... 그... 가주님의 첫 번째 아드님?" "아뇨. 에이, 그런 거 나한테 묻지 마요. 난 뭘 말해도 되고 안 되는지 모르니까 대답하기 곤란하다구요." "아, 예, 죄송합니다." 민이와 대결하고 있던 모용소취는 낙성검법만으로는 민이를 상대하기 어려웠던지 자신의 가문 무공ㅡ내가 처음 보는 거니까 정확한지는 모 른다ㅡ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자 민이 또한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한 은하검법이나 낙성검법 대신 아빠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빙반냉망!" 파바박ㅡ 지금 저들은 자신의 내공을 제한없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검과 검 이 부딪치는 금속음 대신 공기가 찟어지는 소리와 터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철검초개!" 콰과광! "빙설난분!" "철검대연!" 콰과과곽~! 민이가 펼치는 아빠의 검법은 냉정하고 날카롭게 상대의 빈틈을 노려 빠르게 날아가는 검인 데 비해 모용소취가 펼치는 검법은 웅장하면서 상대의 모든 것을 멸하려는 듯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아... 이러다가 지는 쪽은 분명히 맥이 상할 텐데...그럼 곤란한데..." 점점 내공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싸움 또한 절정에 이르자 필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건 둘째 문제고...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어. 이러다가 대련하는 거 들키는 거 아냐?" 예은이 주위를 둘러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내 공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그 둘이 부딪칠 때마다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폭팔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비록 이곳 연무장이 건물들과 꽤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라 하나 이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공을 익 히고 있던 터라 오감이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 혹은 세 배 정도 뛰어났 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래저래 곤란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내공을 사용하지 말고 대련으로 할 걸 그랬어." 예필 또안 예은의 말이 맘에 걸리는지 자신 또한 주위를 조심스레 돌아 보며 말하자 예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와서 그렇게 말해 봤자 늦었지 뭐, 둘 다 자신의 전력을 다할 줄 알았나? 이거이거, 오늘은 저 대련을 끝으로 더 하지 말고 다음을 기약 해야겠는데? 아가씨 생각은 어떠세요?" 난 대련만 안 한다면 찬성이었다. "그래야겠어요. 대련하다 들키면 난리날 거예요."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 기척을 어렴풋이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민이가 대련하기 전부터 마나 를 근처 넓은 지역에다 퍼트려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이런,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군요. 아무래도 대련을 중지시켜야 겠 어요." 나는 예은과 예필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민이에게 달려가며 메시지를 보냈다. <민아, 그만 해. 누군가 온다. 빨리 여길 피해야 해.> <엣? 아직 대련 안 끝났는데......> 민이가 막 공격해 들어오는 모용소취의 검을 정면으로 막는 대신 훌쩍 옆으로 물러나며 막 달려오는 날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문제야? 빨리 튀어야 한다니까!> 민이가 피하는 바람에 허공을 친 모용소취는 재공격을 하려다 달려오 는 날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 사매?" 나는 그의 앞까지 단숨에 달려가 민이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모용소취 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해요. 지금 누가 오거든요. 저희는 이곳에서 몸을 피할 테니 뒤처 리 부탁합니다."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앟고 곧장 인기척이 다가오는 방향과 반대 방향 쪽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알아서 잘 해결하길 바라면서.... <에이, 끝까지 했으면 내가 이길 수 있었는데......> 내 뒤를 따라 발을 부지런히 놀리던 민이가 연무장을 벗어나자 투덜거 리는 어조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맞아. 네가 더 실력이 좋은 것 같더라. 그 모용소취라는 사람, 너보다 나이가 많아서 좀 걱정했는데 의외더군.> 민이의 말에 내가 맞장구를 치자 민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치? 내가 더 실력이 좋았지?> <그래그래. 자, 이 근처에는 인기척이 안 느껴지는 것 같으니까 여기서 부터는 날아서 가자.> 그렇게 민이와 허공에 떠오른 건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는 거였다. <그런데 누나, 연무장에서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은 알아?> <아니... 급해서 그냥 튀었어.> <허......>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민이를 난 매섭게 쏘아보았다. <뭐냐, 그 무례한 눈길은? 그럼 넌 그 상황에서 길 물어보겠냐?> 그러자 민이가 슬그머니 눈길을 아래로 돌렸다. <그래도 그렇지. 그럼 우리 어떻게 돌아가지?> <하늘 위에서 떠다니면서 찾으면 되잖아. 이곳이 한도 끝도 없는 평야 도 아니고 말야.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 발견하겠지.> <에? 그냥 무작위로 돌아다녀?> 다시 한 번 황당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민이에게 나는 다시 한 번 째 려봐 줬다. <그럼 너에게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저기 그 누나 주술로 가면 안 될까? 왜 먼 곳까지 금방 갈 수 있는 주 술 있잖아? 그 텔... 머시기라고 하던거......> <텔레포트? 하지만 안 돼. 그게 꽤 어려운 주술이라서 내공 또한 많이 필요하고 그걸 실현할 때 생기는 기의 파장도 꽤 크다구. 엄마나 아빠 가 알아차리기 쉽단 말야.> <그래도......> <시꺼. 그럼 넌 엄마나 아빠가 네 방까지 달려오는 동안 옷 다 갈아 입 고 누울 자신있어?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위로 일어나는 파장은? 분명 히 뭔 일인지 수색할 거야!> <아... 것도 그렇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은씨 세가 위를 정처없이떠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몇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세가 안에는 수십개의건물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건물 사이의 거리 또한 상당하다는 거였다. 그리고 난 우리가 기거하고 있던 건물을 위에서 본 적이 없어서 찾는다 해도 그게 우리가 거하는 건물인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아, 젠장... 이게 무슨 달밤에 산책이냐. 이럴 줄 알았으면 매정하게 여 겨지더라도 민이의 부탁을 거절해 버리는 건데......'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돌아가야 했으므로 나는 최대한 머리를 쥐어짰 다. <어디 보자. 우리가 거하는 건물은 외진 곳에 있었으니까... 혼자 동떨 어진 곳에 있는 물건을 찾아봐. 그리고 그 근처에는 연무장이 있어야 해.> 그렇게 해서 찾자 범위가 꽤 축소되어 딱 세 개의 건물이 후보가 되었 다. 그런데 두 개의 건물은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한데 한 개의 건물 은 뭔 일이 있는 듯 사방팔방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사람들이 급하 게 돌아다니는 거였다. <민아, 혹시... 우리가 빠져나간 게 발각된 걸까?> <허걱! 그럴지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그렇겠지? 저기는 우리가 거하는 건물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이곳 건물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가지구 긴가민가하잖아.> 세가의 허공 높은 곳에 동동 떠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민이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누나, 차라리 한 건물씩 내려가서 살펴보자. 아니면 다시 올라오고 맞 으면 들어가면 되잖아. 어차피 건물도 세 개 뿐인데.> <그래, 그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어디 먼저 가지?> <불 다 켜진 곳, 혹시 모르니까 거기부터 가 보자.> <좋아.>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그 건물의 난간에 내려왔다. <여기 맞냐?> <모르겠어. 조금 돌아다녀 봐야 알 거 같은데? 누나는?> <나도 모르겠어. 조금 돌아다녀 볼까?> <조심해!> 그렇게 민이와 내가 조심스레 복도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환히 켜진 방문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안에 기척이 있었지만 나 올 생각은 없는 것 같아 조용히 지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그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냐, 너희들? 왔으면 빨리 들어오너라.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그가 우릴 힐끔 보더니 자신이 먼저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며 말하는 거였다. "보지 못한 얼굴인 거 보니 33대 제자들인가 보군. 성구 녀석 33대 제자 들을 보낼 거였으면 자신이 길 안내를 해야지. 분명 인력 더 조달한답 시고 이 녀석들만 먼저 보냈을 거야. 아,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해?" 우리가 안 들어가고 문밖에서 주춤거리고 있자 그 남자가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보며 말해서 민이와 나는 어쩔수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무슨 사무실 인 듯 여기저기 서류 더미가 쌓여 있는 널따란 탁 자 위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서류와 씨름하고 있었고, 일어선 사람들은 서류를 나르고 정리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그런데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중년 남자가 들어온 우리를 보더니 손짓해서 불렀 다. "이리 오너라. 혹시 너희들 수를 셈할 수 있느냐?" 그의 말에 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외로 민이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그러냐?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어디냐. 그래, 너는 저리로 가서 서류 정리를 돕고 너는 이리 오너라. 에휴, 가을은 너무 바쁜 계절 이로구 나." 그는 제법 잘생긴 남자였다. 비록 중년이라서 얼굴에 주름살은 좀 있었 지만,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깔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는 민이를 보내 버리고 날 자신의 옆 자리에 앉히더니 한 뭉텅이의 서류 더미를 건네주 고 설명했다. "자, 네가 할 일은 각 한 장 마다 쓰여 있는 돈들의 총계를 내면 되는 거 란다. 이 밑에 써 있는 건 총계거든? 넌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알아 보면 되는 거란다. 틀린 게 있으면 그건 따로 내놓거라. 알겠지?" "예." 그는 그러면서 주판을 하나 나에게 건넸지만, 나는 손으로 계산 하는 데 익숙했던 터라 주산은 종이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는 일을 하게 하고 나는 마법 붓을 꺼냈다. 이건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류미르와 함께 만든 휴대용 마법 펜(언제 어디서든 꺼내서 사용할 수 있고 잉크도 안 떨어지는 마법이 걸려 있는 팬)을 만든 것을 기억해 내서 팬 대신 아주 가느다란 붓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제법 괜찮게 만들어져 항상 가지고 다니며 필요할 때 애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옆을 힐끔 보니 그 중년 남자도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단지 다르다면 그는 손으로 써서 계산하는 대신 주판을 열심히 튕기고 있다는 거였다. '흠, 고등학교 까지 다닌 내 실력을 보여드리지. 더하기만 한다는 게 좀 김이 빠지지만.' 속으로 그에게 씨익 웃어 보이고는 곧 일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오랫만 에 하는 산수인지라 조금 어색했지만 한 장 한 장 넘어가다 보니 곧 익 숙해졌고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훗훗, 당신은 오늘 아주 대단한 사람 손을 빌리는 거라고.' 속으로 그렇게 자화자찬을 하면서 옆에서 일에 열중해 있는 그를 바라 보다가 깜짝 놀라 버렸다. '허걱! 이럴 수가......' 처음 내가일을 받았을 때 그가 가지고 잇던 서류의 높이는 내 두 배 정 도는 되어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가지고 잇는 서류는 반도 못 줄 었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서류는 거의 처음 내가 받았던 양까지 줄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두 배였던 양의 반을 벌써처리하고 있던 것이었 다. '말도 안 돼. 나도 수학은 꽤 했었던 몸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명나라 시대의 사람에게 뒤질 수 있지? 이건 내가 넘 게으름을 피워서 그런 걸 거야. 어디 한번 해보자. 누가 먼저 끝내는지 보자고.' 묘하게 그에게 전희를 불태우며 난 좀 더 내 일에 열중하며 손을 놀렸 다. '침착하자. 침착하게 빨리빨리..너무 빨리했다가 틀리면 창피하니까...' 그렇게 열심히 한 덕에 나는 아까보다 좀 더 빠른 속도로 서류의 마지 막 장의 계산까지 끝낼 수 있었다. '다했다! 오케이, 그럼 그는?' 이라고 고개를 돌린 순간 그도 막 마지막 장을 끝내고 날 보려던 참이 라 두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허걱!' "오, 벌써 다 끝냈구나. 제법 야무진 아이일세. 자, 어디 틀린 걸 줘보 렴." "예에......" 약 50여장의 종이 중에서 틀리게 계산된 건 5장밖에 없었다. 그걸 받아 든 그는 아마내 실력을 알아보려는 듯 빠르게 주산을 놀려 계산해 보더 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틀린 것들이구나. 좋아. 자, 그럼 이젠 이걸 하거라." "예에......" 그에게서 또 다른 종이 뭉치를 받아 든 나는 기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 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주판을 놓은 속도는 내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 보다 더 빨랐고, 종이 한 장을 계산하는 속도도 나보다 더 빨랐다. 그러니 내가 어찌 기가 안 죽겠는가. '에구구구~ 명나라 사람이라고 깔봤더니 그게 아니네. 이건 나보다 더 빠르잖아?쳇, 곱셈으로 하는 거 어디 없나? 아냐, 인수분해를 사용하는 건... 아,그런데 인수분해의 공식이 뭐였더라? 하도 오래전에 해서 생 각이 잘......' 그렇게 속으로 꽁알꽁알대면서 다시 작업에 착수하려는데 민이의 메시 지가 들려왔다. <누나아, 어떻게 해?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빨리 가야 하잖 아.> <나도 몰러. 나보고 어떻게 하라구우...... 당분간 그냥 일이나 하고 있 어봐. 조금 있다가 화장실 간다고 하구 빠져나가자구.> <내가 벌써 볼일 본다구 해 봤는데, 바로 옆 칸을 가르쳐 주더라. 거기 요강이 있던데?> <흐비... 그랬냐? 그럼 어쩔 수 없네, 당분간 찍소리 말구 일해 봐. 나중 에 뭔 수가 생기겠지.> 그런데 뭔 수가 아니라 뭔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가 다시 일 에 몰두하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명랑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요?" 자동적으로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여러 명의 아이들ㅡ이 라고 해봤자 모용소취 나이만한ㅡ을 데리고 있는 20대 초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꽤 단정한 이목구비에 깨끗한 치아와 피부를 가진 청년이었 는데 인상이 어디서 많이 본 듯 했다. '어디서 봤지? 내가 저 사람을 알고 있었나?'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내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자리 에서 일어나 그를 반겨 맞았다. "늦었구나, 성구야. 그래도 네가 먼저 보내준 애가 일을 잘해서 도움이 되고 있따. 어서 너도 일을 돕거라." "죄송합니다, 아버지. 33대 제자들이 모두 곤히 자고 있던 터라 데리고 오는 데 좀 늦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글쎄 은이 녀석하고 필이 녀석 이 연무장에서 대련을 하고 있지 뭡니까? 그 모용 사제랑 같이 있더군 요." '아버지 였구나.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만, 아버지를 쏙 배닮았네 그 려.' "그 녀석들이? 이런, 이런... 근신에 처해진 녀석들이 빠져나오다니... 아우가 펄펄 뛰겠군." "후후, 그렇지 않다도 숙부님이 펄펄 뛰시는 걸 진정시키고 오는 길입 니다. 자, 이쪽에 잇는 제자들이 수를 셈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성구라 불린 청년이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애들 중 두 명을 자신의 아 버지 앞으로 내 보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난 네가 먼저 보내준 애가 있으니 저쪽을 돕게 하거라." 그러면서 중년 남자가 자리에 앉았는데 성구라 불린 청년은 아버지의 말에 놀랐다는 듯 다시 되묻는 거였다. "예? 먼저 보냈다뇨?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러자 중년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날 가르켰다. "무슨 소리냐? 이 아이를 먼저 보냈지 않느냐?" 그의 말에 성구란 청년이 날 바라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넌 누구냐?"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목에는 그가 뽑은 검끝이 겨누어졌 다. 참으로 전광석화라고 할 만한 빠르기와 정확성이었다. 조금만 더 찔렀더라면 난 분명 피를 봤을 거였다. '에구... 결국 이렇게 들키는 건가? 엄마가 무지 펄펄 뛸 거야...... 난 죽 었다.' 성구란 청년의 외침 덕에 방 안은 조용해졌고, 모두 우리쪽으로 시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모르는 애더냐?" "처음 보는 아이입니다. 33대 제자라면 제가 몰라볼 리가 없습니다." 분위기는 냉각되어 버렸고, 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난처했 다. 이곳에서는 날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중년 남자는 천 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 즉 성구란 청년 옆으로 와서 서더니 조금 은 굳은 음성으로 물었다. "얘야, 넌 누구더냐? 우리 은씨 세가 사람이더냐?"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세가 식솔(하인, 하녀, 혹은 그 가족)이라면 내가 몰라볼 리가 없지. 넌 식솔이 아니야. 그렇지?" 이번에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구의 말에 의하면 넌 33대 제자도 아니구나." '맞는데......' 그러나 내가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자 그는 긍정이라고 받아들 인 모양이었다. "그럼 넌 누구지? 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거라도 있느냐?" 당연히 없다. 나와 민이에게는 은씨가문의 핏줄을 증명하는 패도 주어 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건 17세가 되야 준다나 어쨌다나. 그렇다고 이름을 밝히는 것도 문제이다. 진이의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 히 소수이고, 진이는 지금 자신의 거처에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한다. '곤란하네......' 내가 머뭇대고 있자 성구란 청년의 눈초리가 점점 더 차가워지더니 나 지막하게 말했다. "바른대로 대거라. 그렇지 않으면 매운 맛을 볼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방문이 또 한 번 벌컥 열리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긴 왜 일들을 안 하고 있는 게냐?" 그러면서 방 안으로 들어 온 사람은 예총관이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 이 그를 향해 예를 취해 보였고, 내 앞에 있던 중년 남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성구란 청년만 나에게 검을 겨누고 있느라 가만있었고, 그 모습은 예 총관의 눈에 딱 띄였다. "성구냐? 너 거기서 뭐 하고 있는... 으헉!!" 의아한 목소리로 이쪽으로 다가오던 예 총관은 성구란 청년의 모습에 가려 보지 못했던 날 발견하더니 너무 놀라서 뒤로 휘청거렸다. "아버님!!" 그걸 본 중년 남자또한 놀라 얼른 달려가 예총관을 부축하려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예 총관이 균형을 잡고 나에게 달려왔다. "아이고, 아가씨이~!!" "하.하.하... 좋은 밤이죠?" '이제 난 죽었다.' "도대체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성구 이 녀석아, 얼른 검을 치우지 못 할까? 아가씨, 무례를 용서하세요. 이 녀석이 아가씨를 몰라보고 저지 른 짓입니다." "하.하.하......!" 그 뒤로는 일이 순식간에 커져 버렸다. 방 안의 경악에 물든 사람들 사 이로 민이를 발견한 예 총관은 다시 한 번 놀랐고, 성구라는 청년과 중 년 남자(그러니까 예 총관의 첫째 아들래미란다)는 나에게 무릎을 꿇 어 사죄하고, 그들을 달래느라 정신없는 사이 엄마랑 아빠, 할아버지가 달려오셨고, 민이와 난 금방 우리가 머무는 저택으로 끌려(?)가게 되었 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이 일의 주동자가 내가 되어야 하는 거냐고 오~ 젠장 할...... "진아!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만 또 일을 벌이는 구나. 그런데 이번에 는 민이까지 끌고 나간 거냐?" "어머니, 그게 아니라 제가 나가자고 했어요." "민아, 누나를 감싸는 건 좋은데 진이가 꼬신다고 해서 같이 나간 너도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제가 먼저 나가자고......" "됐어. 둘이 똑같이 벌을 줄 테니까 나설 필요 없다. 진이 너 이녀석, 하 마터면 큰일 날 뻔한 거 알아? 그 성구라는 아이는 무공 실력이 뛰어난 아이였단 말야. 네가 안 대들었길 망정이지 그랬다간 피 봤을 거란 말 야. 알겠어?" "예에......" 지금 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누......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날 샐 때까지 설교를 들으며 벌을 섰고, 우리의 존 재가 세가에 다 퍼져 버려서 할아버지는 며칠 뒤에 그냥 우리 외출 금 지를 풀어버리셨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대련한 건 안 들켰다는 거다. 그것까지 들켜 버렸으면 우린 더 더욱 크게 혼났을 것이다. 물론 유는 그걸 눈치 채고 얼마나 나에게 잔소리를 했는지 모른다. "주군, 주군께선 좀 더 상황을 파악하시는 능력을 키우실 필요가 있습 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십니까? 결국 대련하러 나가셨군요. 제 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그러시다니요. 아직 어리다 하나 두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셨으면 모든 일에 신중 하셨어야지요. 이제 주군의 존재가 다 알려져 버려 앞으로도 또 위협이 올 것이니 앞으로는 조심에 또 조심 신중에 또 신중, 주의 또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그러니 제발 잠 좀 자자!" 아린 이야기 제 16화 "모용세가로" 우리가 은씨 세가 안을 자유로이 돌아다니게 된 후에도 시간은 계속 흐 르고 흘러ㅡ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노인네 같구만ㅡ가을이 끝나 겨 울이 오고, 더불어 새해도 돌아와 우리는 진짜 15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가족에게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가장 먼저 울 아빠가 정식으로 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성이 은씨로 바뀌게 되었 단 것이다. 그리하여 민이와 나도 정식으로 은진, 은민이 되었다. 뭐, 가주 계승권은 없는 모양이었지만, 어차피 아빠 또한 그런 데 관심없었 고, 단지 우리 가족 모두 같이 살고 거기에 더불어 우리를 친혈육과 떨 어뜨리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양자가 되어준(?) 눈치였다. 그래도 은씨 세가의 일원이 된 데다 할아버지가 은하검법까지 전수해 주시고 지도 해줘서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고수가 되려면 좋은 무공과 배우는 이의 소질, 그리고 훌륭한 스승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빠는 자질과 무공은 있어도 스승이 없어 스스로 이 룰 수 있는 깨달음의 한계에 부딪쳐 더 이상 무공의 진전이 없어 혼자 고심하고 애먹고 있었는데(물론 내가 눈치가 빨라 진작 알아채고 있었 던 게 아니라 엄마가 말해 준 거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꽤 도움을 받은 모양이었다. 뭐, 은하검법이랑 낙성검법까지 배우는 거 보니 도움 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자가 된 격일지도...... 하긴 양자가 되었으 니 그게 당연한 건가? 그러니 불만이 없을 수 밖에... 아니, 어쩌면 은근 히 기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민이와 나는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은씨 세가를 이끌어가는 기둥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은씨 가문은 어찌 된 일인지 자손이 귀한 가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때도 아들이 둘이었는데 한 분은 이미 돌아가시고 지금은 할아버지 혼 자 남았따. 우리 윗대도 아들만 둘있고 큰아들은 안 좋은 사건으로 인 해 벌써 세상을 하직했고, 단 하나 남은 아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결혼 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지라 할아버지는 대가 끊 어지는 게 아닌지 엄청 걱정했다고한다. 그때 우리가 '짠' 하고 나타났 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강제로 우리를 부모님과 떨궈서라도 은씨 가 문에 데리고 있으려 했던 게 이해가 간다. 뭐, 그런 연유로 인하여 세가를 이끌어가는 사람 중 은씨 성을 가진 자 는 가주인 할아버지와 그의 아들인 은재영뿐이었다. 아, 이번에 울 아 빠가 은씨가 되었으니 이제 세 명이라고 해야겠지(근데 중국에서는 결 혼하면 여자가 자신의 성 대신 남편의 성을 사용하기 때문에 엄마도 능 지연이란 이름 대신 은 부인이라고 불리는데, 이걸 은씨라고 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 그동안 할아버지의 권유로 아빠와 엄마는 틈틈이 세가 의 일에 참여해 왔다고 한다. 아마 양자로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 작업 이었으리라. 그러니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정식 제자가 아니면 가신인 예씨 사람들 이었다. 예 총관은 할아버지와 함께 울 증조 할아버지에게서 무공을 배운 사이,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사제지간이라고 했다. 그 둘은 은씨세가의 31대 제자인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몇몇 더 있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31대 제자는 그 둘뿐이라 했다. 예 총관에게도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아들이 바로 나에게 일을 시켰던 그 잘생긴 중년 남자였다. 이름은 예현이라나? 그는 무공에는 소질이 별로 없어 애초부터 무공은 적당히 배우고 잡무 보는 일을 일찍부터 배 우기 시작하여 지금은 총관과 함께 세가의 대부분의일을 도맡아 처리 하고 있었다. 뭐, 다음 대 총관이 될 거라니 당연한 거겠지만. 그리고 나에게 칼을 겨누었던 그 성구라는 청년은 예현의 큰아들이었 고 예필의 작은 아들이라 했다. 딸도 하나 있는데 그녀는 무공을 배우 지 않는 요조숙녀라 연무장에 얼굴을 거의 내비치지 않아서 거의 보기 도 힘든 존재였다. 얼마 안 있음 혼인한다니 더 더욱 보기 힘들어질 아 가씨다. 그리고 예 총관의 작은 아들이라는 사람은 바로 예은의 아버지였다. 뭐, 첨에 예은과 예필이 자신들을 소개할 때 서로 사촌 간이라고 소개 했었으니 금방 짐작은 했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게 그는 예필의 아버지 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수긍할 만큼 예필의 나이든 모습의 남자였는데 성격 또한 생긴 것처럼 호탕했다. 예은이 바로 이 사람의 성격을 그대 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는 형과는 다르게 꽤 실력있는 무가로 현제 검술교관이자 세가 경비 책임자이기도 했다. 예은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모용소취와 같은 나이인 17세였는 데 착한 녀석이었다. 그는 우리가 세가 안을 돌아다니게 되었을 때 민 이에게 붙여졌는데, 민이를 친동생 이상으로 끔찍히 아껴주고 챙겨줘 서 나는 그 녀석을 괜찮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은재영 말고도 또 다른 숙부가 한 명 더 있었다. 친숙부는 아니고 할아버지의 제자라서 우리의 숙부뻘인 사람이었는데, 문파였 다면 사숙이라 불러야 마땅했지만 여긴 무가인 데다가 그 또한 가족 같 은 존재가 배 숙부라 불렀다. 이름은 백배리인데 지금은 돌아가신 친부 와 친형제처럼 무지 친한 사이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린 몰랐던 일이지만, 우리가 이곳에 온 후 할아버지 못지 않게 기뻐한 이가 그였고, 우리가 두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았 을 때도 가장 앞서서 수색에 나선 것도, 우리가 거하는 저택 경비의 총 책임자를 자진해서 맡은 이도 그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그를 몰랐었지만 그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세가 안에서 할아버지와 예 총관 다음가는 고수였 기에 할아버지 대신 우리를 지도하게 되었다. 뭐, 그렇다고 이제 할아 버지는 아예 안 온다는 건 아니고 매일매일 오시는 대신 며칠에 한 번 씩 들르곤 했다. 그런데 배 숙부가 은하검법을 가르치는 자가 우리 말고 또 있었기 때문 에 필연적으로 우리는 그들과 같이 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희여송이라고 배 숙부의 첫째 제자인데, 나이가 40 이 다 되어가는 자였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원래 용병이었는데 강호에 나간 배 숙부와 인연이 생겨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꽤 좋은 인연이었는지 그는 배 숙부를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배 숙부가 죽으라고 하면 정말 자결할 것 같은 우직한 성격의 남자였 다. 예전에 용병 생활이 험해서 그런지 얼굴에 흉터도 많고 거칠어서 인상은 드러운 데다 말제주가 없는 탓에 말수가 적어서 첨에는 말 거는 것도 꺼려졌었다. 그런데 매일매일 마주치고 그를 겪다 보니 잔정도 많 고 인상과는 달리 세세하게 챙겨주는 성격이라 이제는 많이 친해졌다. 특히 유하고는 죽이 척척 맞을 정도로 가까워져 둘이 자주 붙어 있었 다. 배 숙부에게는 제자가 다섯이 있는데 그들 중 둘은 호광성(중에서도 호 남 지방, 은씨 세가는 호남 지방에 있다)에서 꽤 이름있는 상인 집안과 표국(요즘 말로 하면 택배 사업) 집안의 자식들로, 아직 낙성검법을 다 못 익혔는데도 불구하고 배 숙부의 제자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그들 또 한 우리 가문과의 관계를 돈둑히 하기 위해 제자가 된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배 숙부의 진정한 제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앞서 말해 준 희여송이었고 나머지 둘은 지원과 포능곽이라는 사람이다. 그들은 어렸을 때 은씨 세가에 들어와 낙성검법을 다 익힌 뒤에 숙부의 제자가 된 사람들로 낙천적이고 사교성도 많아 세가의 대 부분의 소문과 사정은 그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세가에서는 제자들을 30년에 한 번씩 모집한다고 한다. 뭐, 그렇다고 모집 기간에만 받고 30년 내내 안 받아주는 건 아니지만, 어쨋든 30년 마다 한 번씩 공고(이런 것도 붙인다니 좀 웃겼다)를 붙여 모집하면 인 근 평미의 자제들과 고아들이 많이 모여든단다. 힘없는 일반 서민들의 자식이나 고아들로서는 출세하기 쉬운 코스 중 하나일 테니(강호에서 는 출신에 상관없이 무공의 실력에 따라 지위가 달라진다) 모집 기간에 는 몰려든 아이들로 정신이 없다고 한다. 그 아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하 여 뽑기는 힘들기 때문에 오는 족족 몇 가지 테스트로 자질을 실험해 보고 어느 정도 소질도 있고 현명해 보이는 애들을 가려낸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에 통과되었다고 다 제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지원과 포능곽이 말해 주길 자기들 때만 해도 그렇게 모집된 인원이 500명 조금 안 되는 숫자여서 세가에서 그들을 다 수용하지 못해 연무 장 하나에다 임시로 첨막을 쳐놓고 거기서 아이들의 숙식을 해결했다 고 한다. 뭐, 모집은 초봄에 시작하더니 천막 생활을 해도 크게 춥지는 않았을 듯했다. 그렇게 모집된 아이들 연령 또한 다양해서 10살이 채 안 된 어린아이들 부터 서른이 다 된 청년까지 있는데 그들을 나이별로 몇 그룹으로 나누 어 가을이 될 때까지 7, 8개월 동안 지옥 훈련이라 불려도 무방한 체력 쌓기 수련만 시킨다고 한다. 물론 연령층대로 조금씩 농도의 차이는 있 겠지만... 그때는 그 지도를 하는(이때는 교관들이라 안 하고 그 윗대 제자들이 맡아서 한다) 무사들이 정말 매정하고, 지독하고, 폭력 난무 하고... 장난이 아니란다. 모집되었을 당시 열둘, 열 살이었던(현재 나이 지원은 서른이고 포능곽 은 28세 이다) 둘은 그때 지도했던 무사들이 마치 귀신처럼 보여서 밤 에는 애들을 하나씩 잡아먹는 줄 알았댄다. 그러니 말 다했지. 그들이 그렇게 착각할 만도 했던 건 하루에 적으면 한두 명, 않으면 여러 명씩 지독한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제자가 되길 포기했던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와 같은 천막을 배정받았을 때 양친 다 계시고 집안에 여유도 좀 있어서 삼시 세 끼 다 배불리 먹고, 들어올 때 용돈까지 조금 받아 가지고 온 어떤 녀석은 고아 출신인 자신들을 드러내 놓고 깔고보 그스 대다가 며칠 못 버티고 집으로 돌아갔댄다. (이 얘기를 하던 둘은 그때 그에게 한이 맺혔었는지 되게 신나서 말했 주었었다). 지금 그는 부모가 하던 가게에서 일한다나? 자신들은 그를 알아보는데 그는 자신들을 못 알아보더라며, 가끔 세가 밖으로 나갈 때 그곳을 꼭 들러서 그를 조금 골려준다고 은근히 털어놨다. 뭐, 그 말고도 맨 처음 천막에 같이 배정됐던 열 명의 아이들 중 끝까지 남은 건 자신 둘뿐이라니 수련도 무지 고되었겠지만, 그 고된 수련을 끝까지 버텨낸 이 둘도 꽤나 악바리로 보였다. 그 수련은 아마도 강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끈기와 체력을 길러주려 는 목적도 있겠지만, 같은 항렬 제자들의 우애를 다지려는 목적도 있는 것 같다고 그들은 덧붙였다. 그 산 증거가 자신들이라나? 그들은 여기 모집되고 같은 천막으로 배정받았을 때 처음 만났단다(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음 대에 들어오는 녀석들은 자기들 손에 다 죽을 거랜다). 그렇게 해서 가을이 절정에 향해갈 때 남은 아이들은 약 150명쯤이었 고, 그제야 그들은 건물을 숙소로 배정받았고 그해가 지나고 새해가 되 자 정식으로 33대 제자로 임명받고 검술을 배울 수 있었단다. 그러나 그 검술을 배우는 동안에도 자신들처럼 빠른 성취를 보여 30년 이 되기도 전에 다 습득하여 정식 스승이 생기는 자들이 있는 반면, 더 딘 성취에 실망하여 그만두고 이곳을 나가거나 사무쪽으로 전향하여 세가의 임무를 담당하는 사람들 또한 더러 있어 지금 낙성검법을 배우 는 자들은 70명 정도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전부 은하검법 을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30년이 되기 전에, 그러니까 새로 다음 대의 제자들을 모집하기 전에 낙성검법을 다 익힌다고 해도 실력이 이 류 무사 이상이 되지 못한다면 제자로 뽑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낙성검법을 다 익히지 못 했거나 다 익혔다 하더라도 실력이 모자라 스 승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세가의 무사가 되어 따로 지도도 받고 수련을 더하여 나중에라도 정식 스승을 모시려 하거나 더 이상 수련하는 걸 그 만 두고 세가를 나가 그동안 익혔던 무공으로 일자리를 구하거나 한다 고 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32대 제자 중 은하검법을 익힌 사람은 은재영, 배 숙부, 그리고 예철 뿐인 걸 보니 30년 안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거 의 기호는 없는 것 같았다. 아, 지원과 포능곽에 대해 말하다 보니 말이 옆으로 많이 샜군. 그걸 반성하는 의미에서 우리와 같이 수련받는 사람 중 이제 남은 마지 막 한 사람의 소개는 짧게 하겠다. 그는 전에 내 목에 칼을 들이민 적이 있는 예성구였다. 뭐, 이자야 아직 2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예씨 가문 의 장손이다 보니 아주 어려서부터(말 들어보니 걸음마하기도 전에 나 무 칼 가지고 놀았다던데...) 배운 데다 그 자신 스스로도 소질이 있어 올해부터 삼촌을 스승으로 모시고 은하검법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 다. 그런데 스승은 삼촌이지만 배우는 건 배 숙부에게 그의 제자들과 같이 배워왔고 지금은 우리랑 같이 수련하게 되었다. 민이와 나는 그들에게 충고와 지도 등등의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 배우 는데 그들은 우리의 사형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존대를 해서 첨에는 쬐께 어색했었다. 예성구야 우리를 도련님, 아가씨로 지칭하고 있었으니 존대해도 별로 안 어색했지만, 배 숙부의 제자들은 우릴 '사제, 사매'라고 부르면서 존 대하니 영 이상했던 것이다. 예를 든다면. "사매, 이건 이렇게 해야 더 쉬워요." "사제, 사부님께서 오시라는데요." 이렇게 말이다. 얼마나 어색한가? 이들을 우리 곁에 붙여놓은걸 보니 수련에 도움을 받는 것도 받는 거지만, 앞으로 또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한 것 같은데 사형들에게조차 떠받들여지니 좀 부담스럽기도 했 다. 게다가 수련에 아주 열성적인 이들과 같이 수련하다 보니 땡땡이는 물 건너, 바다 건너 훠이훠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조금 변한 환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봄이 돌아 왔고, 세 가 안은 봄맞이 준비로 한층 분주해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일로 세가 한쪽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우 리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하게 된, 좀 멀리 가는 나들이 준비 때문이 었다. 명목상으로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축하 사절단에 끼게 된 거지 만, 아직 어린 축에 속하는 우리가 가서 하면 뭘 얼마나 하겠는가? 첨 에 인사만 하고 얼굴이나 알리고 딴 문파 후계자들 얼굴 익히며 놀러 가는 거지.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 옆 지역, 그러니까 강서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용세가에서 셋째 아들이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왔 다. 모용세가야 울 은씨 세가와 같이 5대 세가(은씨 세가, 모용세가, 사 천당가, 단목세가, 남궁세가:여기에 하남예방, 하북팽가, 혁련세가를 덧붙이면 8대가 된다) 중 한 가문으로, 그 집안 다섯째 아들내미인 모용소취를 울 가문 제자로 들여보내 올 정도니 가문 간의 친목이 어느 정도 있구나... 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울 할아버지가 그 가문 가주의 아버지(그러니까 모용소취의 할배, 그는 벌써 아들에게 가주 자리를 물 려주고 자신은 무공 연마에 전염하고 있단다. 자손도 많아서 그 할아버 지 아들만 넷, 딸 둘, 가주는 아들 다섯, 딸 셋. 울 할아버지가 무지 부 러워하는 집안이랜다)와 친구라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직접 사절단에 참여하여 사절단 할아버지, 아빠, 엄 마, 민이, 나, 유, 배 숙부의 제자인 희여송, 그리고 예시 집안에서 예성 구, 예강, 이렇게 여덟 명과 모용세가 핏줄인 모용소취, 호위 무사 열에 짐꾼(축하 선물 운반) 셋이 집에 가게 되었는데 사절단치고 꽤 많다 소 리 듣는 거 보니 아무래도 민이와 나를 배려해 좀 더 데려가는 듯 싶었 다. 그런데...... "에휴우~ 엄마, 꼭 이러고 가야 해요?" 나는 날 이모저모 살펴보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 에게 불만 어린 어조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엄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 다. "진아, 몇 번 물어보는 거니? 벌써 끝난 이야기야." "우웅~ 하지마안~" 내가 볼을 퉁퉁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하자 엄마의 눈이 더 가늘어 졌 다. "또! 또 그런다아~ 엄마가 그런 표정 짓지 말랬지?" 나는 엄마의 눈초리에 얼른 볼에서 바람을 빼고 입술도 제자리로 돌려 놓았지만, 그렇다고 불만스러움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우잉~" "어허!" "......" 나는 한 번 더 투덜대려 했지만 사나운 빛까지 번쩍이는 엄마의 눈초리 에 황급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자 엄마를 돕고 있던 시녀들이 저 마다 재잘댔다. "아가씨, 너무 예쁘신데 왜 그러세요?" "맞아요. 이렇게 하고 다니시면 호광성 제일의 미인이라고 금방 소문날 걸요?" "호광성이 뭐예요? 무림의 꽃이라 불려질 거예요." "아가씬 무공도 높으시니 어쩌면 봉황이란 칭호를 받을지도 몰라요." 시녀들의 재잘거림에 엄마의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 "거봐라. 다들 예쁘다고 하잖니. 그러니 시무룩한 표정 짓지 말고 예쁘 게 웃어야지." "에혀~ 예에......" 지금 나느 바닥에 거의 끌릴 것만 같은 치렁치렁한 연두빛 치마를 입 고, 머리에는 금과 옥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달고, 앞쪽에도 허리띠를 고정시킨 패옥을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무도회가는 것처럼 중국식 치장을 했단 소리다. 도대체 이제 막 15세가된 애를 왜 이렇게 치장시키는 거냐고오~ 물론 저쪽 세계에 있을때도 아빠의 성화 때문 에 치장도 많이 해봤지만, 이렇게 한숨을 내쉬는 이유는 이렇게 하고 그 강서성에 있는 모용세가까지 가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엄마는 나 못지 않게 치장했으면서 전혀 불편하지 않은지 연신 생글생 글 웃고 있다. 여자들이란 미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더니 그게 바로 울 엄마를 두고 하는 소리라니까. 그동안은 수련 많이 한다는 핑계로 계속 간편한 경장이나 무복만 입고 있었는데 엄만 그게 늘 불만이었다. 여자는 가꾸어야 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그런데 이번 기회에 엄마 뜻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것 때문에 저렇게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안 기뻐......' 여행하는 데 불편하니까 그쪽에 거의 도착했을 때 치장하면 안되겠냐 고 하니까 엄마가 단호히 거절했다. 난 그동안 이런 차림새를 거의 안 해서 익숙해지려면 지금부터 하고 있어야 한다나? 어쩜 엄마는 여행 내내 내 옷을 갈아 입히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엄마한테 이끌려 밖으로 나오자, 거기에는 벌써 갈 채비를 갖춘 사절단 일행들과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모두 엄마와 날 보더니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도 꽤나 미인이었던 것이다. 뭐, 나도 꽤... 엄마의 심법 때문에 피부 하얗지, 잡티 하나 없지, 눈 크 고 서글서글, 코는 반듯하게 오뚝, 입 작고 도톰, 얼굴 선 갸름한 달걀 형... 이렇듯 미인의 조건이 잘 조화되어 얼굴에 모였으니 이쁘긴 이쁘 지. "아이구, 선녀 둘이 하늘에서 하강했구나." 할아버지의 그 감탄에 선두로 모두들 각자 한마디씩 했는데 그 중 민이 녀석의 말이 귀에 와서 콱 박혔다. "헤에, 옷이 날개라더니만 정말이었네. 누나도 그렇게 입으니 평소와는 완전 딴판인데?" '저게 주글라구... 야, 옷만 예쁘면 다냐! 옷걸이가 예뻐야 옷도 빛나는 거야!' 하지만 그 자리에서 주먹을 휘둘렀다간 분명히 엄마의 잔소리를 한 시 간 이상 들을게 뻔했으므로 난 녀석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수밖에 없 었다. 그렇게 해서 사절단의 출발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얼마나 나와 민이를 배려했는지 나와 민이, 그리고 무공이 약한 예강과 모용소취를 중심에 두고 앞에는 할아버지와 아빠, 중간에는 엄나와 유, 뒤에는 희여송과 예성구가 우릴 감싼 형태로 이동한 거였다. 원래는 마차로 이동했는데 스프링도 없는 데다 마법도 없는 이 시대의 마차는 굴러가는 중에 생기는 충격의 흡수가 거의 안 돼서 되게 덜컹덜 컹거리는 것이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여기에 익숙지 않아서 말하다가 혀 여러 번 깨물었다. 게다가 몇 시간이 지나니까 허리가 아파오기 시 작하는 거였다. 깔고 있던 방석이나 뒤에댄 쿠션, 둘 다 두툼하고 폭신 폭신 했는데, 그것 때문에 더 허리가 아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고 마차 안에서 서서 갈 수도 없고... 결국 견디다 못한 내가 바득바득 우겨서 말에 타고 가게 되었다. 말이야 예전 세계에서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기에 훨씬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모두 마 차에서 내려 말을 타는 거였다. 원래 희여송, 예성구, 유, 아빠 빼고 나 머지는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내가 말을 타자 민이 또한 마차가 불편 하다고 말을 탔고, 결국 그래서 할아버지와 엄마까지 마차에서 말로 옮 겨 타자 예강과 모용소취도 저희들끼리 마차를 타기 뭐했는지 말로 옮 겨 탔다. 덤으로 나는 망사가 어깨까지 내려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모자를 써야 했다. 햇빛은 미용의 적이라는 이유로. "어차피 피부도 안 타는데 안 쓰면 어때요?" 라고 엄마한테 반항하다가. "그럼 마차 탈래?" 라는 엄마의 말에 찍소리없이 쓰게 됐다 아린 이야기 제 17화 "아린, 결국 피 보다" 길을 빠르게 재촉하여 한 달 조금 넘게 걸려 도착한 강서성도 호광성 못지 않게 꽤나 번화한 곳이었다. 특히나 강서성 성주가 거하는 남창 (무용세가도 여기에 있다)은 호광성 성주가 거사는 장사(은씨 세가도 여기 있다)처럼 강을 옆에 끼고 있는 도시여서 그곳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우리는 강을 건너야만 했었다(장사에 갈 때는 강을 따라갔었음). 도착할 동안 별일이 없었기에 혼인 날에 맞추어 넉넉잡고 출발했던 우 리는 혼인 날을 3일 앞두고 도착할 수 있었다. 은씨 세가 못지 않게 큰 저택들을 소유하고 있던 모용세가는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손님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세가 사람들로 인해 북적북적했다. 결혼을 앞둔 집이라 그런지 세가의 커다란 대문을 비롯하여 결혼식이 열릴 커다란 건물에는 붉은 천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꽃과 늘어뜨려진 붉은 천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모용소취는 오랫만에 집에 돌아와서 그런지 잔뜩 들뜬 모양이었다. 묻 지도 않았는데 나와 민이, 예강이에게 여기로 가면 어디가 나오느니, 나 있을 땐 저기가 어땠느니 하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그게 북 적이는 상황가 어울려 조금 시끄럽게 느껴졌지만 기뻐서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듯한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어서 대충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무시하려고 애썼다. 우리 집안은 꽤 중요한 손님인지 집안이 꽤 바쁜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 고 모용세가의 어른들이 달려나와 맞이했고, 순식간에 중국식 응접실 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할아버지의 친구라던 모용 세가의 전대 가주 현 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대 가주란 사람은 키가 160cm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았지만 눈매 는 매서웠고, 비록 주름이 많이 졌지만 깡다구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 다. 그가 오자마자 할아버지와 손을 마주 잡으며 웃음을 크게 터뜨렸 다. "헛헛헛, 이 무심한 사람아, 그동안 연락도 거의 안 하더니만, 이럴 때 만 얼굴을 비춰주는구먼 그래." "이봐, 말은 바로하자구. 하릴없는 노인네야 시간 많지만, 난 아직 바쁜 몸이라고. 자네가 자주 찾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껄껄껄, 그게 그렇게 되던가? 할 말 없구먼. 어쨌든 오랫만일세. 정말 오랜만이야. 오늘은 밤새도록 대작해 보세나." "거 좋지. 내가 올 줄 알았을 테니 좋은 술은 준비해 놨겠지?" "여부가 있겠나? 내 자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잔뜩 준비해 놨으니 걱정 말라구. 아, 그런데 이분들은 뉘신가? 처음 보는 듯한데... 응? 그러고 보니 자네 아들은 같이 안 왔나 보구먼? 보고 싶었는데......" "어허, 자네 나이를 먹더니만 시력이 약해졌나 보이. 아, 내 아들 여기 에 있지 않나? 이 애가 바로 재영이 형일세. 승권아, 인사드리거라. 모 용 숙부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은승권이라 합니다." 포권하며 인사말을 하는 아빨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던 전대 가주는 미미하게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이 애가 바로 그 애구먼. 이런 아들을 두어서 든든하겠어." "푸헐헐, 두말하면 잔소리지. 아, 이쪽이 내 며느리야. 아가, 인사하거 라." 할아버지의 손짓에 엄마가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그도 환히 웃으며 인 사를 받아줬다. "어서 오시게나, 은 부인. 대단한 미인이시로구먼. 이 녀석이 며느리 복 은 있어." "푸~헐헐! 아무려면 자식 복 있는 자네만 하겠나? 내 자네 이번 아니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몰라 손주 녀석들까지 이번에 다 봐 두라고 데려왔다 네. 자, 진아, 민아, 할아버지께 인사드려야지?" 그 말에 엄마, 아빠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나와 민이가 앞으로 나섰다. "은민이라고 합니다." "은진이예요." 그러자 그가 부드럽지만 예기있는 눈으로 우릴 잠깐 살펴보더니 다시 한 번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저 나이에 내력들이 상당하구먼? 게다가 사내는 헌 칠하고 계짐은 빼어나니 일이 년만 지나면 강호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 이 다 자네 집으로 몰려들지도 모르겠어. 이참에 내가 미리 찍어놓을 까?" "푸~헐~헐~헐, 쟤들이 내 아버님 핏줄을 타고 난 듯해. 나조차 감탄할 지경이라니까. 저 조그만 것들이 벌써 조금 재간을 가지고 있다네." 할아버지의 기분은 완전 날아갈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자 그 모용세가 의 전대 가주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이해하는 눈빛으로 미소를 흘리 면서도 겉으로는 투덜댔다. "이런이런, 자네 이제 보니 내 손주 결혼을 축하하러 온 게 아니라 자네 손주들 자랑하러 왔구먼?" "엥? 핫핫핫... 물론 축하하려고 왔지. 아니, 뭘 그렇게 성 내나? 많은 손주를 가진 자네 앞에서 딸랑 둘 가진 거 자랑 좀 했기로서니." "자네 이야기를 듣고 있다간 여기서 밤새겠네 그려. 아, 술 한잔 안 할 겨?" "물론 해야지. 내 자네가 주는 술을 마다할 수 있겠나?" 그렇게 두 할아버지의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자 우리는 나머지 사람 들, 그러니까 모용세가 가주와 그의 형제들과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가주는 자신의 아버지에 비해 키도 컸고 조금 살이 오른 체구를 가지고 있어 그를 보는 순간 '사장님' 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본처 외에 작은 부인이 둘이나 있다고 하니 왜 자식이 그렇게 많은지 이해가 갔다. 그 후에 이번에 정말 결혼한다는 그 셋째 아들내미가 인사하러 왔는데 그는 정말 가주와 판박이었다. 그런데 눈덩이에 살이 많아서 그런지 눈 매가 가늘었는데 그게 왠지 야비한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게다가 엄 마나 날 보고 요상하게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되게 기분 나빴다. 뭐, 그 요상한 눈빛을 낸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말이다. 그 뒤에 우리가 잠시 머물 숙소를 확인 한 나와 민이는 자의 반타의 반 으로 모용소취의 형제 자매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우리 또래거나, 아니 면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소년 소녀들뿐인 걸 보니 나이 많은 축들은 다 일을 돕는 듯했다. 그들이 모여 잇는 곳에는 모용세가의 자녀들 말고도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던 남궁세가의 자녀들도 있었다. 다른 8대 세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5대 세가란 말을 잘 쓰지 않고 대신 8대 세가라 고 많이 자칭한다. 아무래도 문파 중 대표적인 곳이 아홉곳이니까 그에 맞추어 여덟 곳을 집어 넣은 듯하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남궁 세가는 강서 지방 위쪽에 있는 남경지방에 있어 지리적으로 은씨 세가 처럼 모용세가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세가다 보니 일찍 도착한 모양이 었다. 대충 말 들어보니 가주는 안 왔고 대신 소가주인 20대 중반 청년 과 그의 동생인 20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왔는데 둘 다 키도 평균 이 상에다가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자 민이와 내가 나이 어린 축에 속했다. 모용소취가 중간에 껴서 우리와 그들을 서로 소개시켜 준 뒤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들과 이야기를 하는 데 흥미가 전혀 없었던 나는 말을 시키면 예의에 어긋나 지만 않게 대꾸해 주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민이가 머리 속으로 날 부르는 거였다. <누나!>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왠지 주변 분위기가 묘했다. 모용 세가의 여식 하나가 날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고, 주위 사람들 은 그걸 눈치 채고 쓴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모르 는 척 즐겁게 대화에 열중한 척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황당하기도 하고 이유없이 미움을 받는 것이 기분 좋을리 없어 뭔 일인가 하고 가만히 살펴보니, 이유인즉 그 모용세가의 여식이 날 질투하고 있는 거였다. 그 모용세가의여식은 나보다 한 살 많았는데 얼굴이 단정하게 생겨 미 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음... 이름이... 소소랬던가? 하긴 모용세가의 여러 딸중 가장 예쁘게 생기긴 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내미한테 은근히 맘이 있는지 시선도 자주 보내고 말도 자주 시키고 그가 눈길 보내면 다소곳한 척하고 앉아 있는 거였다. 그런데 이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내미는 그걸 모르고(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괜히 나한테 자주 말을 거는 거였다. 그러 니까 상황이 소소란 아가씨가 그 남궁중(남궁세가 둘째 아들내미, 그 형은 남궁상이란다. 동생은 아마도 남궁하일 거다)에게 말을 걸면 그 남궁중은 대답을 한 다음 거기서 끝내면 좋을 텐데 꼭 나에게 그 질문 을 다시 하는 거다. 그 말투도 꼭 자신은 이런데 나는 어떻냐는 식으 로... 아니, 그게 내 탓인감? 내가 그 모용소소란 여자보다 쫌 더 예쁘긴 하지만(앗, 그 돌 내려놓으란 말 야!!)...... <누나, 저 남궁중이란 남자가 누나한테 관심있나 봐.> <난 관심없어.> <누나가 관심없다고 해결 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그 남궁중 녀석은 내가 관심없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묻는 말에도 짧고 간략하게만 대꾸하는데도 끈질기게 질문하는 거였다. 덕분에 남궁중에게 호감이 있는 모용소소의 날 대하는 눈길은 점점 더 살벌해졌다. 결국 누이동생의 행동을 가여이 여긴 모용소취가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섰다. "아, 날씨도 좋고, 모두 모인 이 즐거운 자리에 음악이 없어 좀 서운하 군요. 어떠냐, 소소야. 네가 네 솜씨를 한번 보여주지 않으련?" 모용소취가 은근히 소소를 떠보자 남궁상 또한 얼른 이에 맞장구쳐 줬 다. "예전에 모용 소저의 금 솜씨가 뛰어나단 소리를 들어서 언젠가 한번 청하려 했는데, 이번 기회에 저희에게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이 어 떠실지요." 그러자 그 모용소소, 얼굴을 살짝 붉히며 부끄럽다는 듯 몸을 꼬며 고 개를 모로 잘짝 숙였다. "부끄럽사옵니다. 그리 대단치 않은 솜씨인지라......" 이때 모용소소를 은근히 추어주는 모용세가의 어느 여식의 말. "어머, 네가 대단치 않은 솜씨면 누가 대단한 솜씨란 말이냐. 그러고 보 니 네 노래를 들어본 지도 꽤 되었으니 오랫만에 우리도 한번 들어보 자꾸나." 그러자 모용소소는 더 겸양하지 아니하고 예전에 본 적이 있었던 그 가 야금 비스무리한 금을 가져왔다. "그럼 부족한 솜씨나마 한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귀를 더럽히 지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면서 금 위에 손가락을 얹고 타기 시작했다. 둥기당당~ 둥기당당~ "에헤에에에~ 이이이이~" "푸웃~ 쿨럭 쿨럭~" 살포시 눈까지 반쯤 내리깐 우아한 포즈로 입을 여는 순간 나온 소리에 나는 차를 마시다가 사레 들릴 뻔했다. 그렇다고 노래를 방해할 수는 없어 재빨리 입을 막고 소리를 죽였다. 다행히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 는지 내 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저러고 싶을까?' 뭐, 아무래도 이곳의 음악은 자주 접해보지 않은 탓에 어색하고 이상하 게 느껴져 거부감이 일어나는 것이겠지만 자주 접해서 익숙해지고 싶 은 맘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심지허 예성 구나 유, 예강조차도 그 음악에 귀 기울여 듣는걸 보니 왠지 나 혼자만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에... 하긴, 난 이곳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도 그 노래를 계속 듣고 싶지는 않아서 남들 눈치 못 채게 내 주위 에만 소리가 안 들리는 마법을 쳐놓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찻잔 속에 담겨 있는 찻물만 뚜러져라 바라보면서 딴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그녀 의 노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안들린 탓에 계속 찻잔말 뚫 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누나아~!!> 민이의 메시지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모용소소가 아주 노 골적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에구구......' 노래를 좋아하진 않았어도 끝날을 때 예의상 박수는 쳐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으니 할 말 없던 내가 뭐라 사과를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 고 있는데 그녀가 입을 열어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어조로 말했 다. "제 노래가 은 소저의 귀를 더럽힌 모양이군요. 역시 실력이 부족한 제 가 노래를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끝까지 사양했어야 했는데......" "아, 저... 죄송합니다. 제가......"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그녀는 내가 말을 다 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다. "보아 하니 은 소저께서도 음악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제게 안목을 넓힐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눈길은 내가 바로 옆에 놓아둔 옥피리에 닿아 있었다. 내가 나에게서 일정 거리 떨어지면 그 주위에 벼락이 떨어지도록 조치 해 둔 터라 집에 놓고 올 수가 없어 가지고 왔다가 계속 지니고 있던 게 화근이었다. 한마디로 네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보자는 그녀의 말에 헛바람을 집어삼킨 건 예성구와 유, 그리고 예강이었다. 그들은 내가 음악 가르치러 온 선생임을 어떻게 그만두게 했는지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만큼 그들은 수하로서 감히 끼어들지 도 못하고 발만 도동 굴렀다. 그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에는 망신당하지 말고 빨랑 사과해서 위기를 모면하라는 압력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도 사과를 해서 그냥 이 상황 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 눈치코치 없는 남궁중 녀석이 입을 열어 다 망 쳐 버렸다. "은 소저, 한 곡조 들려주시지요. 핫핫, 은 소저께서 연주하시는 건데 천둥 소리인들 안 아름답겠습니까?" '저노무시키가아~!!' 예성구와 유, 그리고 예강은 순간 모든 걸 포기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 라보고 있었다. 남궁중이 그렇게 말하자 모용소소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러시지요. 저도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설마 거.절.하시지는 않 으시겠지요?" 아까는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였다면, 이번에는 모든 걸 얼리는 동 시에 빠개 버릴듯한 어조였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한마디씩 내가 연주하길 부탁했다. 그러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이 재미있는 상황으로 인해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누나, 잘해봐.> 민이의 응원 아닌 응원을 들으며 나는 결국 피리를 가져다 입에 대었 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다가 경악해 버리는 엄마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옆에 첨 보는 사람들이 같이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또 다른 세가의 사절단이 와서 나에게 소개시켜 주러 오는 길이었나 보 다. '내 잘못만은 아니라구요......' 속으로 그렇게 변명을 하면서 하는 조용히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곡명은 '사랑의 인사', 어려운 후렴부 파트는 모조리 빼버리고 앞 부분 의 단순한 부분만 두 번 반복했다. 시~ 레시라솔#파솔 도~도~도~레~ 시~ 레시라솔#파솔 라~라~라~#라~ 시~ 레시라솔#파솔 미~미~미~ 처음에는 의아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나중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괜찮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연주를 긑내고 피리를 입에서 떼자 모두들 박수를 치며 예의상 인지는 몰라도 감탄 어린 말들을 한마디씩 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리군요." "처음들어보는 독특한 음악이었어요." "은 소저의 피리 솜씨가 상당하시군요." ...... 그사이 엄마와 아빠를 위시한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왔고, 우리는 모두 당연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예를 갖추었다. 내 예상대로 그들은 다른 세가의 사람들이었고, 서로 인사를 끝내자 어 른들은 아이들을 남겨두고 어른들끼리 또 우르르 가버렸다. 그리고 그사이 엄마가 전음을 보내왔다. [언제 피리 부는 걸 익혔니? 전에 그 소동 있은 후에 피리 연주하는 건 물 건너간 줄 알았는데... 어쨌든 다행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른들이 다시 몰려가고 나자 모용소소가 이젠 대놓고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은 소저는 정말 대단하시군요. 이제 보니 못하시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무가의 여식인 이상 당연히 무공 또한 고강하시겠군요. 그 무공 실력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척 보니 까딱하다간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 태세였다. 그러자 안 되겠 던지 모용소취의 형이 나섰다. "소소야, 무례하구나. 저분들이 여기 왜 오셨는지 모른단 말이냐?" 그러나 그 모용소소는 화가 날 대로 났는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머, 오라버지,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무가의 자식들은 모두 한 수 재간이 있을 터, 전 은 소저께 한 수 배우고 싶을 뿐이에요. 지금이 아 니면 언제 또 은씨 세가의 무공을 경험해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게다가 강호에서는 정중해 청해오는 대련을 아무 이유 없이 거절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난 그녀가 물러서지 않는 한 하기 싫어도 검을 들어야 한다는 거다. 게다가 지금 이곳은 세가의다음 세대 들이 모여 있는 곳.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려 있는 터라 잘못 거저했다간 은씨 세가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된다(여기 오면서 귀따갑게 들어온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내 뒤에 서 있는 예성구와 유가 초긴장하고있는 것이다. 강호에서는 시비가 붙으면 칼부터 빼 들고 본다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실제로 검을 뽑지만 않았을 뿐 기세로는 검을 벌써 뽑 아 든 것만 같았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그녀는 모용세가에서 가장 예 쁜데다 어디 가서도 미인 축에 들었기 때문에 꽤나 자존심이 높았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가주나 전대 가주가 오지 않는 한 그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막 도착한 다른 세가 사람들 또한 흥미있는 얼굴로 가만히 사태 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이대로있다간 아무래도 대련까지 갈 상황이었 다. '아, 정말... 왜 이렇게 된 거야? 귀찮아서 가만히 있다가 가려고 했는 데......' 나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모용소소의 정면에 서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녀를 아예 무시해 버리는 태도로 예의에 어긋나지만 하고 싶지도 않은 대련을 하느니 차라리 예의없다 고 소문나는 게 훨씬 나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절 무시하시는 겁니까? 설마 무서워서 도망치시 는 건 아니겠지요?" 뒤에서 날 도발시키려는 그녀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싸그리 무시해 버린 채 계속 걸어갔다. 이대로 이곳에서 벗어나 숙소로 가서 한숨 자 는 게 훨 나릉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용소소가 도리를 넘어 버린 말에 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비열하시군요.하긴, 당연한 건가요? 청루의 기녀 손에서 자랐으니 말 이에요. 아마도 힘있는 자에겐 꼬리부터 살랑거리는 걸 배웠겠죠?" "소소야!!" 그녀가 너무 지나치게 나오자 그녀의 오빠가 참지 못하고 정색을 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 다. 하지만 쏟아져 버린 물이라고 했던가? 한 번 내뱉은 그녀의 말은 이미 주위로 퍼진 뒤였다. 그리고 그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민이였 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민이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무시할 수 없는 어떠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본래 화가 나면 화가 난 대로 펄쩍펄쩍 뛰는 사람보다 화가 날 수록 차분히 가라앉은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다. 민이가 바로 그랬다. 모용소소가 당황하며 아무 말도 못하자 민이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가 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금 저희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 같은 데요." 민이의 매서운 눈길과 주위 형제 자매들의 질책 어린 눈길을 받던 모용 소소는 순간 자책하는 것 같다가 반발심이 생겼는지 형제 자매들의 입 다물라는 압력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입을 열어버렸다. "흥, 제, 제가 뭐 틀린 말 했던가요? 현재는 은 부인이시지만, 열혈사후 능지연 여고수는 본래 청루 기녀 출신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 는 사실인데요." 중국에는 기녀(기생)가 있는 집이 두 가지로 나뉜다. 그게 바로 청루와 홍루인데, 청루는 고급 기생, 그러니까 춤, 시, 서예, 음악에 능한 데다 미색까지 뛰어난 기녀가 잇는 곳이고, 홍루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 기녀 가 있는 곳이었다. 음, 그러니까 청루는 고급 술집이고 홍루는 좀 떨어 지는 술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기녀는 기녀였 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드러내 놓고 말하는 건 엄청난 모욕이었고, 이제는 은씨 세가의일원이 된 엄마를 모욕하는 건 세가를 모욕하는 일이나 다 름없는 일이었기에 모용소소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성구와 유, 그리고 예강이는 자신의검을 뽑았다. 그러자 그 즉시 모용세가의 수하들 또한 모용소소를 보호하기 위하여 검을 뽑아 들었다. 놀란 모용소취와 그의 형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고 소소를 뒤로 밀어버리고 민이에게 사과를 했지만, 민이는 너무나 큰 충격에 휩싸인 나머지 그들이 뭐라 말하든 상관하지 않고 멍한 눈길로 날 바라보았다. 솔직히 나도 충격받긴 했지만(엄마가 기녀라는 건 몰 랐으니까.내가 모르는 엄마 일을 저 모용소소에게 듣는 게 놀랐을 뿐이 다. 아무래도 21C의 한국에서 살았던 나는 기녀라는 것에 대해 그리 큰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뿐이었던 나는 민이를 바라보며 그를 뭐 라 위로해 줘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다가 그 뒤에 이어진 민이의 메 시지에 오히려 분노해 버렸다. <누나, 엄마가 기녀였대......> 놀라움과 실망이 뒤섞인 어조, 거기에 분노까지 섞여 있어 더 더욱 날 화나게 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분노가 가득한 내 목소리에 민이가 움찔 하더니 정신을 차린 듯했다. <응? 아... 그, 그게......> <엄마가 기녀였대. 그래, 그런데 그게 어떻다고?> <아니, 그냥 놀랐다 이거지. 조금... 저기하고......> <저기 하다는 게 뭔데? 엄마가 네 부인이냐? 왜 네가 꺼림칙해 해? 정작 남편인 아빠는 담담한데? 왜, 엄마가 기녀라는 소리를 들으니까 엄마가 싫어져? 나보다도 엄마를 더 사랑했던 네가? 웃긴다. 지금 왕족 이라고 유세 떠는 거냐?> 나의 차가운 말에 민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그를 나는 비웃음까지 보태서 또 한 번 차갑게 몰아붙였다(아무래도 같은 여 자라고 엄마 편 들어주는 것 같았다). <이제 어쩔 거니? 엄마가 기녀였다는 걸 알았으니 엄마와 있었던 기억 을 모두 잊어버리고 떠나기라도 할 거냐? 하지만 한 가지 충고하겠는 데, 만약 이 일로 엄마에게 상처를 줬다간 내가 널 가만 안 둘 줄 알아.> 민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시선을 피한 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한 번 노려봐 주고는 몸을 돌려 모용소소 에게로 걸어갔다. 주위 분위기는 벌써 얼어붙어 버려서 모용소취와 그 의 형, 그리고 모용소소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아, 모용세가의호위 무사들은 빼고. 나는 내 앞으로뛰쳐나가 그들과 대치하고 있던 예성구와 유에게게 낮 게 명했다. "둘 다 칼 집어넣어." 엄청 열받은 상태였기에 내 목소리는 쫘악 깔려져서 나왔고, 거기에 드래곤 피어까지 섞여 있다 보니 내 목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움찔 거렸다. 둘은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순순히 검을 집어넣 고 물러나 줬고, 난 그들을 지나 모용 형제 뒤에 서 있는 모용소소에게 말했다. "그럼 대련을 해 볼까요?" 이 아가씨는 기껏 미소까지 지어줬더니만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그 리고 모용소취의 형이 황급히 나서서 나를 만류했다. "은 소저, 제가 이렇게 사과드릴 테니 용서해 주시지요, 제 동생이 너무 철이 없어 저지른 짓입니다." '누가 용서해 준대?' 나는 그는 싸악 무시해 버리고 뒤에서 입 꼭 다물고 있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대련을 먼저 신청한 쪽이 모용 소저, 당신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거 기에 있는 거죠? 설마 직접 대련한다니까 무서워 진 건 아니겠죠? 하 긴, 가.정.교.육. 잘 받고 자랐을 무가의 여식께서 대련 신청을 해 놓고 겁.이 나서 꼬.리.를 말고 도.망.칠 리는 없을 테니까. 시간 끌기 싫으니 까 간단하게 끝낼까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놓고 비비 꼬면 아무리 겁에 질렸다 하더라도 누 구든 화가 나기 마련이다. 특히나 자존심 센 그녀는 내가 이렇게 말하 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오빠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누가 꼬리를 말았다는 거죠?" "훗훗, 역시 모용세가의 아가씨답군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녀가 앞으로 나서자 대련 당사자 모두가 나섰으므로 더 이상 끼어들 수 없었던 모용 형제들은 염려의 눈길을 던지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우리 주위에 넓은 공터가 생기고, 우리 둘이 마주 보자 나는 드래곤 피어를 일으키며 막 검을 뽑아 들려는 그녀에게 쏘아 보냈다. 화가 엄청 나기는 했지만 이성이 아예 끊어진 게 아니었고ㅡ나중에 생 각난 거지만, 그녀만 겁을 주려 했다면 마법으로써 그녀에게만 공포감 을 주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그 생각은 못하 고오로지 그녀만 혼내줘야겠단 생각이 드래곤 기운을 방출해버려서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내력을 지니고 있단걸 다 눈치 채버렸다ㅡ단지 그녀를 조금 혼내주려는 생각이었기에 적당히 봐주면 서 드래곤 피어를 쏘아 보냈건만, 16년 동안 온실에서 자랐던 철없는 아가씨였던 그녀에게는 그것도 버거웠는지 검도 뽑지 못한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사색이 되어서 바들바들 떨었다. 그렇게 하길 몇 분... 나는 여유있게 검을 뽑아 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검을 조금도 뽑지 못했고, 나는 충분히 혼냈다 생각이 들자 드 래곤 피어를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그녀는 그 즉시 털썩~ 하고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동안은 무서워서 온몸이 얼어붙어 주저앉지도 못했던 거였다. '오줌은 안 쌌나 몰러. 오줌 쌀 때까지 쏘아줄 걸 그랬나?'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아주 꼬습게 생각하며 겉으로는 한심하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대련하자면서 검조차 뽑질 못하다니... 정말 한 심하군요. 그럼 뭐 하러 대련 신청은 했어요?" 공포에 질렸으면서도 그놈의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내 말에 열받아 이 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한마디 대꾸조차 못하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비웃음까지 날린 후에 난 천천히 돌아섰다. 여기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사라져 주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왜 이리 끝마무리를 잘 못하는지... 그 버릇없는 그녀를 혼내 줬다는 통쾌함 때문에 마음이 들떠서 적에게 등을 보이면서도 전혀 주 위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자존심이 걸린 대련에서 검 한 번 못 뽑아본 분한 마음과 나에게 실컷 조롱당한 분함에 이성을 잃고 검을 뽑아 나에게 달려드는 그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야아아앗~!" "소소야!!" "주군!!" "아가씨!!" 그녀의 분노에 찬 외침과 모용소취의 외침 소리, 그리고 내 앞, 그러니 까 대련할 때 뒤로 물러나 있었기에 내가 몸을 돌리자 내 시야에 들어 와 있던 유와 예성구가 사색이 되어 날 부르며 달려드는 모습에 위기를 느껴 몸을 돌렸지만, 한 발 늦게 반응한 탓에 옆구리를 찔리고 말았다. 푸욱~ 고기 찔리는 소리가 서라운드로 생생하게 들리면서 나는 뒤로 휘청거 렸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민이가 놀라서 날 부르며 달려오는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그나마 모용소취가 소소가 나에게 달려드는 순간 그녀의 몸을 쳤기에 내 심장을 노렸던 그녀의 검이 살짝 빗나가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난 정말 죽을 뻔했다. '아니면 위기를 느꼈을 때 몸을 뒤로 돌려 다시 그 여자를 보는 대신 몸 을 옆으로 비켰더라면 찔리지는 않았을 텐데... 아, 역시... 칼에 찔리는 건 좋은 기분이 아냐......' 모용소소 또한 순간적인 충동으로 저지른 짓인지 내 옆구리에 박힌 자 신의 검을 보자 새파랗게 질려서 얼른 검을 뽑아버렸다. 그게 더 안 좋은 짓인데(이럴 땐 의사나 응급 요원이 올 때까지 검을 그 대로 놔두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의사가 없었으니 어른들이 올 때까 지 그대로 뒀어야 했었다) 너무 놀란 그녀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정신이 없었던 거였다. 검이 뽑히자마자 옆구리에서 피가 과장 좀 보태서 샘물 처럼 흘러내리는데 뜨끈뜨끈한 핏물이 내 옷을 적시며 허리를 지나 다 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은 유쾌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피를 흘러내리는 옆구리를 강하게 누르는 게 느껴졌지만 나 또한 순간적으로 당한 일에 너무 황당했던 터라 그게 누구인지 쳐다볼 생각도 나지 않고 오로지 피 묻은 검을 들고 새파랗게 질려 어쩔 줄 몰 라하는 모용소소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은...... '쩝, 쥐도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만... 너무 몰아붙였나 봐. 담부터는 적당히 해야지......' 그리고는 과다 출혈 쇼크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당연하겠지만 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옆구리는 욱신욱신 쑤시고 머리가 띵~해 정신이 멍한 상태에 서도 침상 옆에 앉아 있는 엄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 화가 났 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내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음에도 불구 하고 날 매섭게 째려보고 있는 거였다. 그 모습에 나는 화들짝 놀라 정 신을 차렸다. '앗, 엄마가 여기서 일 저지르면 가만 안 둔다고 경고했었지.' 은씨 세가에서 지낼 때 몇 가지 일 좀 저질렀다고 이곳에 오기전에 얼 마나 신신당부를 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놓고서는 깜빡 하고 있다가 엄마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생각이 난 거였다. '허걱! 난 죽었다...... 설마 이곳에서 벌 주지는 못할 테니 세가로 돌아 가면 그 날부터는 지옥이겠구나.'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엄마의 기분을 풀어서 벌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 는 필사적인 생각으로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날 매섭게 째려보던 엄마 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떨어지는 거였다. "어, 엄마?" 머리 속에서 오만 가지 변명거리를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그 모 습에 놀라 변명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엄마 도 눈물 흘렸다는 것에 놀랐는지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날 흘겨보 았다. "뭐 하는 거니?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고 맨날 일만 저지르고 다니다 니... 너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에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아, 그러고 보니 그 모용소소 지지배가 검을 확 뽑아버려 가지구 피가 무진장 많이 나왔었지?' 덕분에 기절도 했고 말이다. 엄마가 그거 보고 많이 놀랐나 보다. 그 생각이 들자 방금까지 초긴장 됐던 게 스르르 풀리며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에헤헤......" "뭐가 좋아서 웃는 거야? 다친 게 그렇게 좋아?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웃지 말랬지?" 나는 화들짝 놀라서 웃는 모습을 얼른 바꿨다. 배시시시~ '아, 미인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여라......' "훌쩍,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엄말 자세히 보니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게 아니라 눈이 퉁퉁 부어가지고 붉어 보이는 거였다. '오마나, 많이 울었나 보네...... 옆구리 한번 찔린 거 가지고 안 죽는데 그렇게 놀란겨?'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에이... 누가 이 정도에 죽는다고......" 그러자 엄마가 날 찌릿 째려보며 말했다. "그래, 그 정도에 안 죽으니까 뒤에서 찌르는데 바보같이 가만 있었냐? 대련할 때 이겼다면서 왜 끝마무리를 못해서 찔려? 대련에 진 지지배 는 멀쩡한데 이긴 녀석은 칼침 맞고 누워 있냐?" "아하하하...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머. 설마 대련 끝난 다음 찌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자 엄마가 날 흘겨보는 거에 그치지 않고 손을 뻗어 내 뺨을 꼬집 었다. "그래, 그게 자랑이냐?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언제든 긴장을 풀지 않고 있어야지. 대련 끝났다고 긴장 풀고 있다가 오늘처럼 뒤에서 푹 찌르면 그냥 죽을래?" "우에... 냐 아이 화야이데(난 아직 환자인데)......" 그런데 어느 순간 엄마는 내 뺨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빼더니 그 손을 그대로 올려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까 할아버지의 친구 분과 모용세가의 가주가 다녀가셨다. 자신들이 교육 잘못시켜 일어난 일이라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더구나." "흥, 맞아요. 딸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거야? 내가 그 지지배 다리몽 둥이라도 하나 뿔겨줄까 하다가 할아버지 생각해서 그 정도로 참은 거 라니까요. 짜식이 실력은 쨉도 안 되면서 잘란 척하긴......" 그러자 엄마의 손이 스르르 내려와 다시 내 뺨을 꼬집었다. "에효, 엄마 생각인데... 자식은 아무리 교육시켜도 고쳐지지 않는 게 있는 것 같아. 엄마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또 그런 거친 말투니? 도대 체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니까. 게다가 그 '짜식'이라 니 '쨉'이라니 하는 말은 어떻게 안 거야?" "우에에~" "좀 조신하게 말해. 알았지?" "우잉... 노력해 볼게요." "하여튼 너란 애는......" 엄마가 또 뭐라 잔소리를 할 기미를 보여 속으로 '나 죽었소...'하고 있 는데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지며 아빠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연, 진이 일어났소?" 아빠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암마를 부인이라고 불렀지만, 이렇게 우리 가족끼리 잇을 때는 '연'이라고 불렀다. 쫙 가라앉은 저음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부르는 그 모습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캬~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울 아빠는 로맨스의 주인공 남자같아. 나도 이 담에 저런 남자랑 로맨스를... 에헤헤헤~' 엄마는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아빠가 날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침대에 늘여뜨려진 휘장을 걷어 올리면서 답했다. "예, 지금 막 일어났어요." "그럼 당신은 이제 가서 좀 쉬구려. 그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여기 있었 지 않소? 이제 내가 있을 테니......" "아뇨, 전 괜찮아요. 여기 있을게요." "당신 안색이 안 좋단 말이오. 그런 얼굴로 앉아 있으면 진이가 어디 편 하게 누워 있겠소? 그러니 계속 있을 거면 잠시 나가서 좀 쉬고 뭘 좀 먹고 다시 오시오. 안 그러면 사람을 불러서라도 내보내겠소." 아빠가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때는 정말 실행시킨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아빠 말에 따랐다. "그럼, 잠시만 쉬다 올게요. 진아, 의원이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니까 답 답하다고 일어나면 안 된다. 알았지? 너 조금만 움직여도 엄만 다 아니 까 속이려고 하지 말고." "예,예, 알았어요." "정말 움직이면 안 된다?" "엄마도 참... 움직이고 싶어도 콕콕 수셔서 움직이지 못하겠는 걸요." "그래........" 몇 번이나 당부해 놓고도 엄마는 안심이 안 되는 듯 아빠에게도 한 번 더 당부하고 그제야 방을 나섰다. '나참, 내가 그렇게 신임이 없었나......' 엄마가 방을 나서서 그녀의 기척이 멀리 사라져 갈 때까지 아빠는 엄마 가 나간 문을 주시하고 있다가 엄마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몸을 돌려 침대 곁으로 다가와 방금까지 엄마가 앉아 있었던 의자에 앉 았다. "그래, 몸은 좀 어떠냐?" "으음... 옆구리는 콕콕 쑤시구여, 얼굴이 좀 뜨거운 것 같아요. 그리고 머리는 띵~하고 입안은 쓰네요. 음? 그러고 보니 입 안이 꽤 쌉싸름해 요 나 약 먹였어요?" "그래.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어찌 안 먹일 수가 있겠느냐? 단환 3알 먹였다." "하.하.하......!" 피를 맑게 해주고 원기를 보충해 주는 약이라 피를 많이 흘렸을 때 먹 기는 하지만, 웬만큼 피를 흘려도 한 알 먹는 게 보통인데 그걸 세 알이 나 먹였으니... 어른들이 어지간히 놀랐나 보다. 서늘한 아빠의 손이 이마에 올려졌다가 떨어졌다. 얼굴이 뜨겁다고 하 니까 확인해 보려는 듯했다. "그래, 열도 꽤 있구나. 하지만 다쳤을 때 열이 나는 건 당연하단다. 그 게 바로 네 몸의 상태가 안 좋다는 징조지. 옆구리는 많이 아프냐?" "음...많이 아픈 건 아니구여, 그냥 견딜 만 해여." "엄마가 많이 놀라셨지. 할아버지도 그 친구 분께 펄펄 뛰시더구나." "헷... 저 때문에요?" "그래. 그 모용 소저는 벌을 받게 될 모양이더라. 하긴, 뒤에서 기습한 것도 비열한 짓인데 대련이 다 끝난 뒤에 그랬으니 더욱 더 비열한 짓 이지. 그것도 다른 세가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랬으니... 이것으로 모용세가의 명예가 실추되어 버렸지." "호호호, 고소해라." 그때는 그녀를 혼내주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생각외로 더 큰 효과를 가져온 듯 했다. 이로써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녀의 얼굴은 안 봐도 될 것 같았다. '아냐, 어쩌면 사과하러 올지도 모르지. 그때 신나게 놀려줄까?' 그런 지지배에게 당해놓고서는 자신의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건 깨 우치지 못한 채 기가 팍 죽어 있을 그녀 생각에 기분이 좋아 헬렐레하 고 있는데 아빠가 지그시 날 바라보았다. "진아 이번 일로 수련에 더욱더 정진해야겠다고 깨달았겠지?" "에?" "아무리 대련이 끝났다고 하나 방심한 건 네 잘못이다. 그리고 방심하 고 있었다 해도 기척에 민감한 네가 그동안 얼마나 수련을 게을리했으 면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못채고 찔렸단 말이냐. 설마 명상 수련 을 게을리한 것이냐?" "엣.....?" 그러고 보니 가문의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밤에 자느라 바빴지 명 상 수련을 조금도 하지 않았었다. '에구구......' 내 표정에 그게 다 드러나 있었는지 아빠가 피식 웃었다. "안 했구나?" "그게....." "앞으로 열심히 해야겠지?" "예에......." 기가 팍 죽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빠가 부드럽게 웃으 면서 내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래, 그렇게 열심히 수련해서 강해져야 엄마를 모욕하는 녀석들을 무 섭게 혼내주지." "에?" 뜻밖의 말을 들은 내가 놀라서 아빠를 바라보니 아빠가 빙그레 웃어 보 였다. "성구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다. 원래는 대련을 하지 않으려 했는 데 엄마를 모욕하는 소리를 듣는 바람에 나섰다면서? 그 때 네가 엄청 화가 나서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하더구나. 아마도 전에 네가 유 를 구했을 때 네가 보인 기운보다 더했겠지?" "에...뭐......." '성구 녀석이 벌써 다 말해 버렸군.' 괜히 쑥스러워서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는 대신 천장만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는데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아빠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혹시... 엄마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앗더냐?" "에? 왜요?" "엄마가 예전에...그......" "기녀였다는 것 때문에요?" 아빠가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자 아빠가 조 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응? 그게 어때서냐니... 그,그건...아니 혹 실망이라도 하지 않았더냐?" "과거 일을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이제와서 엄마 가 싫어지는 것도 아니고... 좀 놀라긴 했지만, 그때 엄마가 기녀가 되 지 못하도록 내가 도와준 일도 하나 없는데 실망할 권리가 어디 있나 요?" 그러자 아빠가 정말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였다. 아마 아빠 도 모르는 새에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아빠는 얼른 당황하며 표정을 고 쳤지만 벌써 봐버린 난 평소 웃는 것이 무지 어색해 보이던 아빠가 그 모습만큼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자(여자만 아름다운 건 아니다 뭐... 인간적으로 너무 아름다웠단 말이다)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입을 떡 벌 렸다. 그러자 아빠가 이 쑥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함인지 헛기침을 하며 입을 벌렸다. "험험,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구나. 사실 엄마는 아 직 그 사실을 모르고 단지 네가 모용소소랑 자존심 대결하다가 대련까 지 간 걸로만 알고 있단다. 뭐,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진이가 이렇게 생각해 준다는 걸 알면 낙심하지는 않겠지." '호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구나. 멋있다. 넘 낭만적이야.' 아까 어떻게해서든 엄마를 내 보낸 것이 엄마를 걱정해서 그 일을 알기 전에 나와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나 보다. "아빠, 되게 멋있네요. 역시 엄마가 남편 하난 잘 만났다니까." 그러자 아빠가 평소의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냐? 하긴, 딸도 잘 만났지." "호호호........" 서로를 칭찬하며 쑥스럽게 웃고 있다가 나는 민이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 녀석은 엄마가 기녀라는 걸 알고 되게 충격 받았었던 것이다. "아,아빠... 저 얼마나 누워 있었죠?" "응? 아아... 꼬박 하루 동안 누워 있었다." "그래요? 그럼 민이 녀석 어디 있어요?" 민이 이야기가 나오자 아빠의 안색이 약간 흐려졌다. 아마 아빠가 민이 녀석이 충격 받은 걸 보고 그 애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걱정하고 있 었나 보다. 그래서 나도 걱정되어 미리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거겠지. "민이는... 지금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단다. 아무래도... 그 아이는 충격이 컸나 보다." "그래요? 유는 지금 어디 있죠?" "유는 방 밖에 있단다. 불러주련?" "예." 아빠의 부름에 방 안으로 들어온 유는 안색이 좀 핼쑥해져 있었다. 이 유인 즉슨 주근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데 자신이 어찌 편히 쉬고 먹 겠냐면서 아무것도 안 먹고 나 깨어날 때까지 방문 앞에서 죽치고 이 었다는 거다. 황당해서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을거냐고 물으니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예'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난 결국 내가 죽을 때 따 라 죽는 건 좋은데 내가 다시 정신 잃고 있다가 깨어났을 때 퀭~한 모 습으로 있으면 가만 안 둘 거라고 협박하고는 그를 부른 이유를 말했 다. "민이 녀석 불러와. 부르는 즉시 안 왔다가는 내가 직접 가서 가만 안 두겠다고 해." 그리고 민이가 오기 전에 이빠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부탁했다. 아빠 는 내가 민이에게 뭘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 챈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선 선히 자리를 비켜줬다. 그리고 잠시 후, 내 협박이 먹혀 들어갔는지 민 이가 들어왔다. 유 또한 내가 사적인 이야기를 하려한다는 걸 알고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문 밖에 섰다. 그런데 이 녀석도 유 못지 않게 퀭~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선 거다. "야, 너도 굶었냐?" "어? 응......" "왜? 설마 내가 다친 게 네 탓이라고 자책하느라 굶은 건 아닐테고... 고민했냐?" "으응...." 그렇게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갑자기 날 바라보더니 내가 뭐 라 하기도 전에 허리를 깊게 숙이는 거였다. "누나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 생각했어." "에?" 민이 녀석에게 한참을 설교하고 협박하고 설득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 고 있던 나는 민이의 그런 갑작스런 행동에 눈이 뚱그레졌다. 민이는 내가 그러든 말든 계속 허리르 깊게 숙인 채 자신의 할 말만 했다. "사실은 그때 엄청 충격 받고 어머니께 실망한 것이 사실이야. 누나에 게 혼난 다음에도 솔직히 누나는 계급이 없는 사회의 용인데다가 여자 라서 엄마 편 들어준 거라고 여기고 있었거든. 그런데 내 방으로 돌아 가서 부모님과 할아버지 몰래 이곳을 떠나려고 이것저것 챙기고 마지 막으로 남길 편지를 쓰려고 종이를 펼치는데 누나의 호통 소리가 들리 면서 처음 엄마를 만난 날이 생각나는 거야. 근데 있지... 처음에는 날 자식으로 생각해 준 사람이 왜 하필 기녀인 사람인 걸까... 하고 괴로워 하는데 누나가 한 말이 떠오르더라." "응? 내가 뭐라고 했는데?" 그때 생각나는 대로 막 쏘아댔던 탓에 뭔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던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그랬잖아. 왕족이라고 유세 떠냐고." "에... 내가 그랬냐?" "응. 있지... 나 그런 말 용계에 있을 때 많이 들었던 소리야.내 앞에서 는 아무도 그런 말 안 했지만, 뒤에서는 힘도 없는 후궁 소생인 주제에 왕족이라고 거들먹거린다고...... 그때는 그런 말 들을 때 되게 분했었 지. 누군 비천한 출신의 후궁에게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가 하고 말야. 아마도 전에 그런 말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전에 기녀라 는 게 되게 맘에 걸렸나 봐. 그런데......"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엄마가 기녀라는 이유 하나로 싫어한다면 나 또한 백 없는 후궁 출신이라고 날 멸시하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더라고. 게다가 어머니 또한 원해서 그렇데 된 건 아니실 테고 말야. 게다가 우 릴 돌봐주실 때의 어머닌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내가 모르는 과거의 일 로 해서 한순간에 어머니가 싫어졌다는 걸 보니 누나 말대로 전에는 정 말 어머니를 좋아한다고 말했던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니까, 길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걸 종합해 보자면, 네가 말하 고 싶은 건 한마디로 네가 잘못했다는 거지?" "응."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됐지. 뭘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어쨌든 네 가 깨달았다니 내가 설교할 필요는 없겠군." "응. 누나, 정말 미안......" "왜 나한체 미안해하냐? 엄마한테 미안해해야지. 나중에 엄마한테 정 식으로 사과해. 아 그리고 아빠도 눈치 채고 걱정하는 듯했으니까 아빠 한테도 사과하고." "응. 그럼 누나는 나 용서해 주는 거지?" "내가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난 네가 엄마한테 상처 입힌다면 혼내주겠다고 했지 그전에 대해서는 뭐라 안 그랬어. 근데 넌 엄마한테 상처 주기 전에 깨달았잖아? 그럼 된 거지 뭐." "그렇게 되나? 어쨌든 미안해."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 좀 미안하다고 해라." "응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에혀, 됐다. 알았어. 그럼 밥 먹자." 나는 뭐라고 하려다가 그랬다가는 또 미안하다를 소리를 들을 것 같아 다른 말을 꺼냈다. 그렇지 앟아도 하루 꼬박 정신을 잃은 탓에 아무것 도 안 먹어서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응? 웬 밥?" "나 배 고프단 말야. 너도 굶었다며? 배 안 고퍄?" "에? 난 별로......" "그래? 그럼 넌 먹지 마. 나 혼자 먹을 겨." "에? 그러는 게 어딨어? 나도 먹을래." "안 먹는다며?" "내가 언제?" "별로 배 안 고프다고 했잖아." "하지만 안 먹는다고는 한 했다 뭐." "그게 그거지." 우리는 그렇게 예성구가 간단한 먹을 것을 가져올 때까지 계속 싸워대 고 있었다. "자자, 아가씨께서 일어나셨다고 해서 죽 좀 가져왔습니다. 시정하셨 죠?" "오호라, 성구, 눈치가 빨라 맘에 들었어." "하하하, 감사합니다, 아가씨." "나도 먹을 거라니까!" "아, 그래, 그래. 먹어라. 먹어. 내 것도 아닌데 먹어라." 아린 이야기 제 18화 남자도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 내릴 수 있다. 그 후 하루가 더 지나고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동안 몸에 상처가 있 다는 핑계로 방 안에서 죽치고 있을 수 있던 나는 이번에도 아프다고 죽치고 있을까 하다가 신부 얼굴도 궁금했고, 결혼식도 한번 보고 싶었 고, 오늘 하루만 더 버티면 내일이나 늦으면 모래에는 집으로 돌아갈 거란 생각에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내가 방 안에 콕 처박혀 있던 동안 속속들이 도착했던 8대 세가 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에게 몰려와 인사를 건네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9대 문파에서도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처음 얼굴을 내미는 나에게 첨에만 간단하게 인사하고 곧바로 저희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 누었다. [9대 문파와 8대 세가는 같은 정파라는 이유로 왕래하고 있긴 하지만 기실 사이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서로 경쟁하고 있는 관계라고나 할까 요? 그래도 공동의 적인 사파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하 고 형식적이나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죠.] 너무나 형식적인 그들의 모습에 내가 황당해서 힐끔 바라보니 예성구 가 전음으로 나에게 설명을 해줬다. '완전 정치판이로구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기에 곧 신경 끄고 나에게 말을 건네는 8대 세 가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용소소는 아마 벌을 받고 있는 중인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모용세가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잘 걸지도 않았 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첨 만날 때 나에게 호감을 보이며 툭 하면 말을 걸어왔던 남궁중도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도, 가까이 앉으려 하지 않은 채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왜 저런데?' 그에게 별 관심은 없었지만, 호감을 받다가 갑자기 그 호감이 뚝 떨어 지자 왠지 기분이 상했다. '참내....저럴 거면 첨부터 대시하지 말든가... 자기 때문에 대련까지 했 는데...' 그래서 난 그에게 신경 끄고 다른 세가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중 얼 마 안 되어 가장 친해진 사람들은 단목세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단목세가에서는 이번에 소가주인 단목확선과 그의 아들들인 단목대현, 단목대혁이 왔는데 그 아들들이 민이와 나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을 뿐이 었기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단목대현은 이 세계에서는 드물게 180에 육박한 아주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대한 근육질의 사내는 아니었고, 정상적이고 균형 적인 몸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키가 너무 크다 보니 말라 보였다. 덕분 에 그의 좀 큰 머리가 쬐께 강조되어 보이는 체형이었다. 사춘기인지 얼굴에 여드름이 꽤 많이 있었는데 꽤나 활달하고 사교적인 소년이었 다. 아는 것도 많고 말재주도 많아 그는 자연스레 무리의 대화를 주도 해 나가는 역을 맡게 되어 분위기를 활발하게 띄우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그의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빼닮은 듯 어른들 쪽 분위기를 힐 끔 보니 거기서는 단목확선이 그곳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그의 동생인 대혁도 머리가 좀 큰 데 형처럼 큰 키는 아니었지만 그래 도 큰 축에 속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형의 성격과는 달리 좀 말 수가 적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곳에서 조용히 있으니 까 오히려 음침해 보였다. 그래도 말 시키면 말은 잘하는 걸 보니 음침 한 성격이기보다는 나서길 꺼려 하는 성격인 듯했다. 그렇게 좀 명랑한 사람의 곁에 있어 나도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드디어 신부를 태운 가마가 도착했고, 신랑을 위시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신부를 맞이했다. 붉은색으로 치장된 가마에서 천천히 내리는 신부는 붉은 천으로 얼굴 을 가리고 있어 앞이 안 보였는지 두 명의 중년 여자에게서 인도를 받 고 있었다. 신랑 신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회를 맡은 사람의 인도로 식을 끝내자 보격적인 잔치가 시작되었다. 신부가 식이 끝나자마자 신방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혼자 남은 신랑은 수많은 사람 들의 장난스런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야만 했다. 물론 그건 그 또래의 사람들이 하는 장난이고, 아직 어린 축에 속한 우 리 팀(?)은 잔치가 벌어지는 대청의 한구석에서 우리끼리 먹으며 신랑 이 겪는 고초를 구경하고 있어야 했다. 신랑이 무가의 사람이라 무공이 꽤 있는 탓에 많은 사람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어도 별로 취한 기색을 보이지 않더니만, 그것도 한 계가 있는지 해가 저물어가자 얼굴이 붉어지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짓궂은 사람들은 신랑 술 먹이기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보다 못한 신랑의 아버지와 신부의 아버지가 대신 마셔주고, 신랑과 신부의 어머니들이 말리는 등 잔치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콰콰당~!! 무엇인가 박살나는 소리를 시작으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점차 크게 번져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잔치가 벌어지는 대청의 문을 박차고 숨이 턱까지 차 헐떡거리는 한 무 사가 뛰쳐 들어와 외쳤다. "가주님, 습격입니다!" 대청 안은 순식간에 찬물로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가 정신을 차린 사람 들이 밖으로 뛰쳐나가느라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가보자!" 이미 우리 팀의 리더격이 된 단목대현이 말과 함께 뛰어나가자 우리 팀 의 애들이 우르르 따라나갔다. 그 사이에는 나와 민이도 끼어 있었다. 밖은 되게 소란스러웠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축하객으로 몰리다 보니 아무리 넓은 대청이라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 대청 안 에는 중요 인물들만 수용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넓은 마당에다 자리를 깔고 거기서 대접한 까닭에 누군가가 침입해 들어오자 그들이 우왕좌 왕하면서 몸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밖으로 나가는 길목은 모두 예의 그 침입 자들로 인해 다 막혀 있었던 터라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뒤쪽으로 물러나자 그제와 상황이 좀 진정되었고, 우리는 침입자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근데 좀 황당하게도 그들은 모두 다 떨어져서 걸레가 되어버린 옷을 입 은 일단의 무리들이었는데 손에는 농기구인 호미, 낫, 괭이 등등이 쥐 어져 있었다. '뭐야? 농민 반란이라도 일어났나? 하지만 여긴 무가인데? 여기서 농 민들에게 잘못한 거라도 있었던 거야?' 대충 200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모두 못 먹고 못 입어서 그런지 다 빼빼 말라서 뼈만 앙상했다. 게다가 피부까지도 시퍼레 팅팅하다 못해 아예 거무죽죽했고, 눈들은 다 초점이 없었다. '얼마나 못 먹고 시달렸으면 모두들 눈에 초점이 없을까? 꼭 다 죽은 사람들 같잖아?' 그런데 그들 중 그나마 깨끗한 옷을 입고 피부도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마도 그가 그들의 대표인 듯 했다.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단지 모용 세가에 볼 일이 있을 뿐이니 가만히 계신다면 별 탈은 없으실 겁니다." 그러자 모용세가에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니, 너는......!!" 그에 대한 호통이 아닌 놀라움이 담긴 외침이 들리는 걸 보니 아마도 아는 사람인 듯 했고,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넌 총관의 아들이 아니더냐?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모용세가의 가주가 앞으로 나서서 대표로 그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그 총관의 아들내미란 남자가 크게 웃으면서 가주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크하하하, 비천한 저를 가주님께서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 영광이외다. 이놈, 그동안 헛되이 산 건 아니었소이다. 하하하하!" "네 이놈!! 반 년 전에 사라졌다 했더니 이런 일을 꾸미기 위해서였단 말이냐? 왜 이런 짓을 한는 거냐?" 가주의 호통에 그 남자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정 말 원한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가주를 서럽게 쳐다보며 비통한 목소리 로 외쳤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물으셨소? 그걸 알고 싶다면 그 잘난 당신의 셋 째 아들에게 물어보시오! 그라면 아주 알 알고 있을 테니!"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가주 옆에 서 있던 신랑의 예복을 입고있던 셋째 아들내미한테로 모였다. 그는 아까 그 취한 듯 비틀거리던 게 연기였는 지 아주 말짱한 얼굴로 서 있다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모이자 당황한 얼굴로 도라질을 쳤다. "전 모릅니다.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 정말......" 하지만 그의 말은 침입자들 대표의 외침에 끊겨 버렸다. "모른다고? 정녕 네가 모른단 말이더냐?" 엄청 분노한 듯이 외치는데 얼마나 리얼했는지 입과 눈에서 불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아 보였다. 그 산랑은 조금 움찔하더니 곧바로 그의 말에 받아 외쳤다. "네놈이 미친 게로구나! 그동안 입은 은혜도 저버리고 이런 짓을 하는 저의가 무엇이더냐? 네 아비의 목숨이 걱정되지도 않더냐?" "크하하하! 은혜? 네 녀석이 정녕 은혜라고 했더냐? 그래, 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 인생 30여 년 동안 네놈들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 바쳤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네놈이 한 짓이 무엇이더냐?" "무엇이라? 아니, 저놈이 끝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나! 뭣들 하 느냐? 어서 저놈을 잡아 무릎 꿇리지 않고!!" 신랑이 그 자리에서 펄펄 뛰며 외치자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검을 들고 주춤주춤 그 침입자의 대표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다시 한 번 외 쳤다. "네놈은 정말 끝까지 비열하구나! 그래, 오늘 내 그동안의 원통함을 다 풀리라! 무사들은 비키시오.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당신들을 해하고 싶 지는 않소. 나는 오직 저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걸로 만족할 테니... 그 다음에 날 어떻게 하든 그건 상관하지 않겠소." 총관의 아들이라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테니 무사들과도 아는 사이일 터였다. 무사들은 신랑이 명령에 검을 뽑아 들기는 했지만, 그 의 말 때문인지 무척 망설이는 듯한 태도였다. 덕분에 열받는 건 신랑 이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 펄쩍펄쩍 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뭐 하는 게냐! 당장 저놈을 잡지 못할까! 지금 네놈들이 내 말을 무시 하는 게냐!" '쳇... 열받으면 자기가 나서면 될 거 아냐? 자기는 나서지 않고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주제에......' 나는 그 신랑을 처음부터 안 좋게 생각하고 있던지라 그의 모습에 눈살 을 찌푸렸다. 그 침입자의 대표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신랑을 명배 하게 비웃으며 외쳤다. "그렇게 잘란 도련님께서 직접 날 잡으로 오시지 않고 뭐 하는건지 모 르겠구나. 하긴 대련에서 한 번도 날 이겨보지 못한 주제에 직접 날 잡 으로 나서기가 두렵겠지. 안 그런가? 크하하하~!!" "이, 이놈이~! 네놈이 정녕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아~!!" "그래, 난 오늘 죽으러 왔다. 하지만 나 혼자 죽지는 않으리라. 반드시 네놈만은 저승길의 길동무로 데려가고 말리라!!" "무어라? 저, 저놈이이~!!" 모용세가의 셋째 아들은 정말 대련에서 그 침입자의 대표를 한 번도 이 겨보지 못했는지 열받고 분해서 소리는 고래고래 질렀지만 나서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면서 애꿎은 가문 무사들을 탓했다. "네놈들은 뭘 보고만 있는 게야? 빨리 저놈을 잡으란 말이다 아~!" 무사들이 어쩔 수 없이 주춤주춤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중 후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모두 멈추거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였다. 그가 나섰다는 사실이 조금 뜻밖인 신랑은 당황하며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님, 도대체 왜......?"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는 자신의 손자를 바라보는 대신 침입자들의 대 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잘 알고 있는 사이였던 듯 그를 바라보는 시 선에는 분노는 없었고, 조금 착잡하고 놀라움만이 담겨 있었다. "소아야, 도대체 무슨 일이더냐?" 아마 그 남자의 이름이 소아였나 보다. 그 소아란 남자는 전대 가주를 보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중하게 큰 절을 올렸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그의 절을 조용히 받아들이더니 전대 가주는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가 다시 물었다. "연유라도 알자꾸나. 내 알기로 너는 착한 아이였다. 내 너에게 꽤 사랑 도 쏟았다고 생각하거늘, 나에게 서운한 거라도 있더냐?" 그러자 신랑이 얄밉게도 중간에 끼어들었다. "할아버님, 저런 녀석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저 배응망덕 한 녀석을 잡아 죽이시는 게......" 그러나 그는 전대 가주의 매서운 눈길에 찔끔하여 말도 다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다. "어르신, 어르신의 은혜 이놈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줄 압니다. 오 늘 어르신께 심려 끼친 점 죽어서도 사죄 못할 줄 아오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이다. 어르신께서는 이놈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소서." 진심이 가득 담긴 그의 말에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널 그렇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더냐?" 그러자 그 소아라는 남자는 신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통하게 외 쳤다. "저놈이, 저~놈이 소인의 정혼자를 강간하고 죽였나이다! 제 정혼자라 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거부한다고 강간한 다음 제가 보는 앞에서 다 른 사내 놈들에게 강간하게 했나이다! 그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채찍질 을 해 죽이고서는 저까지 때려 정신 잃은 저와 그녀를 강물에 버렸나이 다아아~!!" "내가 언제 그랬더냐! 저놈이 거짓을 고하는구나!! 할아버님, 저놈의 말 을 믿지 마소서! 모조리 거짓이옵니다!!" "네 이놈!! 네놈이 정녕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구나! 네 놈이 한 짓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이놈아!!" "아니, 저 미친놈이!! 네 녀석이 우리 가문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가 문의 명예에 누를 끼치려 하느냐? 당장 닥치지 못할까!!" 그러자 열이 받칠 대로 받친 소아란 청년이 자신의 겉옷을 찢을 듯이 벗어버려 자신의 맨살을 드러내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네가 한 짓이 아니더냐? 이래도 발뺌을 하겠단 말이냐!!" 그의 상체는 앞뒤 할것 없이 마치 거미줄 같은 상처자국이 빼곡이 나 있었다. 척 보기에도 엄청 심했을 상처들이었다. 그러나 그걸 신랑이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탓인지 신랑은 더 펄 펄 뛰었다. "저놈이 어디서 맞고 와서 여기서 화풀이를 하는구나! 이놈아, 그걸 내 가 했다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이래서는 끝이 없겠군.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공방전만 계속 될 뿐이 야.> 내가 민이에게 메세지를 보내자 민이가 즉각 답 메세지를 보내 왔다. <누나는 누구 말이 맞는 것 같아?> <척 보면 모르겠냐? 저 소아라는 남자가 진실을 말하는 거야.> 민이와 내가 메세지를 주고 받는 동안에도 소아라는 남자와 모용세가 의 세째 아들내미의 공방은 계속되었다. 전대 가주가 다시 나설 때까 지. "둘 다 그만 두지 못할까!!" 그의 호령에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전대 가주는 둘을 번갈아 바 라 보다가 자신의 손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 말이 사실이더냐?" 전대 가주의 못소리가 착 가라앉은 채 흘러나왔다. 아무 죄 없는 내가 찔끔 놀라 전대 가주를 바라보니 그는 눌을 날카롭게 빛내며 자신의 손자를 바라보고 잇었다.그 손자는 잠시 움찔 했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정말이렷다?" "예!" "가문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그 말에 손자는 잠시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당당하게 외쳤다. "예!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 그 소아라는 청년이 발악적으로 외쳤지만 모용세가의 세째 아들내미는 당당했다. 전대 가주는 그런 손자를 바라보다가 낙심한듯 크게 한숨을 내 쉬더니 소아란 청년을 바라보았다. 근데 왠지 그 눈길에는 애처로움 이 가득했다. "나는 내 손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더불어 우리 가문에 쳐들어온 너를 가만 내버려 둘 수가 없구나. 내 손속이 잔인하다고 원망 말거라. 이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한마디로 이제 그 소아란 청년을 치겠단 소리였다. 그 청년은 움찔거렸 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인 득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손에 죽을 수만 있다면 무한한 영광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 다고 저놈을 그냥 내버려 둘수는 없습니다. 절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냐, 네가 할수 잇는 모든 힘을 발휘해 보려무나." 전대 가주는 그렇게 말하더니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며 외 쳤다. "이건 우리 가문의 일이니 동도 여러분께서는 가만 계셔주시오! 이 일 이 끝난 뒤에 불미스런 일을 겪게 해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이 다!" 그리고는 세가의 무사들을 뒤로 물린 뒤 세가의 핏줄들만 나서게 했다. 물론 어린아이들과 가주는 빼고 말이다. 그러자 소아란 청년은 뒤에 있 는 자신의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쳐라!!" "우워어어어~!!" 청년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그들은 청년의 명령에 따라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무기를 치켜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그러자 모용세가 의 사람들이 그들을 맞서갔다. 하지만 싸움은 정말 일방적이었다. 일반 농민들하고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힌 무사들하고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 질 않앗던 것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약이라도 먹었는지 자신의 팔다리 가 허공으로 날아감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세가 사람들에게 달려들 었다. 그 사람 같지 않은 괴상한 소시를 지르며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난 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분명히 머리가 날라가고 팔이 날라가고 옆구리 가 날아가는데도 불구하고 땅에 떨어져 있는 피는 무지 적다는 거였다. 게다가 그 피는 붉은색이 아니라 다 시커맸다. <맙소사! 저 사람들 언데드잖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 보니 생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 다. 그렇다면 단 하나, 저들은 시체들이란 소리다. 하지만 조금도 썩어 있지 않은 멀쩡한 모습인데다 이곳에도 언데드를 부리는 주술이 있다 는 소리도 못들었기에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언데드? 그게 뭔데?> 민이의 어리둥절한 질문에 나보다도 먼저 답해주는 이가 있었다. "강시!! 강시다!! 저들은 모두 강시야! 세상에... 내가 직접 강시를 보게 될 줄이야......" 단목대현이었다. 아는 것이 많더니만 저게 뭔지도 금방 깨닫고는 놀라 서 외쳤다. 하지만 그의 말에 나는 더 놀랐다. '강시? 강시라고?' 중국 영화에 가끔 등장하는 소재였는데, 그들은 모두 귀신으로 알고 있 던 나였다. 청나라 관복을 입고 두 팔을 앞쪽으로 수평으로 뻗은 채 콩 콩 뛰어다니며 산 사람의 피를 빨아먹어 그들도 강시로 만드는.. 아, 그 러고 보니 지금은 명나라 시대라 청나라 관복을 입고 있을 수는 없을 거다(명나라 다음에 청나라). '하지만 저건 완전 언데드를 부리는 주술이잖아? 저게 강시란 말야?' 그렇게 강시든 언데드든, 하여간 시체들과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싸우 는 동안 소아란 청년은 죽어라고 모용세가 셋째 아들내미만 쫓아다녔 다. 아마 죽기를 각오한 채 어떻게 해서든 그 작자만은 죽이려고 작정 을 한 듯했다. 그리고 그 셋째 아들내미는 죽고 싶지 않은지 필사적으 로 그를 피해 도망 다녔다. 싸우는 사이사이를 누비며 쫓고 쫓기는 필 사적인 사투가 계속되는 동안 그 농민의 모습을 하고 있던 시체들의 수 는 하나둘 줄어가고만 있었다. 대충 200여 구 되던 것이 단 십여 명의 인원들에게 의해 전멸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 소아란 청년이 필사적으로 쫓아간 것에 효과가 있었는지 결 국 모용세가의 셋째 아들내미는 거의 잡히게 되었다. "죽어랏!!" 첨에는 소아란 청년의 공격을 대부분 피해내더니만 시간이 지남에 따 라 힘이 다 떨어졌는지 상처가 하나둘 늘더니 결국 땅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밟고 나동그라졌다. 소아란 청년이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면 무 조건 죽이려고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신랑의 붉은 관복은 찢기고 피가 묻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신랑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 다. "거기까지다! 이제 나와 사이좋게 저승으로 가자!!" 드디어 원수를 갚게 되어 기분이 좋았느지 소아란 청년이 광기 젖은 눈 으로 웃으며 한 발 한 발 신랑에게 다가가자 그 신랑은 볼썽사납게도 벌벌 떨면서 그에게 소리쳤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 제발 예 정을 생각해서라도 목숨만은 살려 다오! 제발 목숨만든......!" 그러나 소아란 청년은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신랑의 애걸복걸에도 코웃음을 쳤다. "네놈은 내가그렇게 애원했는데 들어줬더냐? 그녀의 목숨만은 살려달 라고 그렇게 외치고 빌었건만, 네놈은 들어줬더냐?" "미안하다, 미안해! 내 이렇게 빌으마. 내가 다 잘못했다. 그러니......" 소아란 청년은 매정하게도 그의 애원을 다 듣지도 않고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가 내리치려 했다. 신랑은 결국 죽는구나 생각했는지 팔로 자신의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다 른 검이 뒤에서 날아와 청년의 심장을 등 뒤에서부터 꿰뚫었다. 한참을 지나도 자신이 멀쩡하자 이상하게 여긴 신랑이 눈을 들어 청년을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끝을 발견하고는 얼 굴에 희색이 돌았다. 반대로 천천히 뒤를 돌아 누가 자신을 찔렀 는지 확인한 청년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감돌았다. 청년의 등뒤에 는 전대 가주가 착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결국 청년이 복수하기 한발 전에 모용세가 사람들이 강시들을 다 처리했고, 그 는 자신을 아껴준 전대 가주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우하하하, 이놈, 네놈이 정녕 나를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분수를 알아야지!!" 다 죽다 살아난 놈이 입만 살아가지고, 아까까지 죽상을 하고 있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로 휘청거리는 청년 의 복부를 힘차게 차버렸다. "커억~" "흥, 비천한 자식이...감히 누구를......"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 청년에게 침까지한 번 밷는 그는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저 잘했죠?'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나는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이놈아... 내가 네 동생에게 뼈저리게 깨달은 교훈이 뭔지 아느냐? 바 로 싸움이 끝나더라도 절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거지.' 심장을 꿰뚫리고 복부에 발차기까지 한 대 먹어 바닥에 쓰러졌어도, 원 한으로 똘똘 뭉친 그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손을 들고 있던 검을 딴 데 보고 있는 원수의 아랫도리를 향해 찔렀던 것이다. "크아아악~!!" 그리고 그는 원수의 처참한 비명 소리를 들으며 만족스레 눈을 감아버 렸다. 여자의 한이 무섭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볼 때 여자의 한 못지 않게 남자의 한도 무서워 보였다. '그러게... 싸움 끝났다고 긴장 풀면 내 꼴 난다니까. 음... 나도 앞으로 남자한테서 원한 살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신랑은 아랫도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급히 안으로 실려 들어갔지만, 나 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남자의 상징이 잘려 나가서 내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를 생각하면 무지 고소한 일이었지만, 결혼식 날 남편이 불구 가 되어버렸으니 그의 부인만 가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에게 여자들이 더 이상 괴롭힘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결혼식이 완전히 망쳐지고 잔치도 파행되어 모두들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 다음날 모용세가를 떠나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데 한밤 중에 세가 안에는 또 다른 소동이 일어났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 용세가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전대 가주가 극히 뵙고 싶어한다 며 할아버지를 모시고 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지 무지 궁금했던 나는 할아버지께 살짝 추적 마법을 걸어놨다. 그리고 자는 척 내 방으로 들어간 다음 마법을 사용하여 할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영상으로 나타나게 했다. 할아버지는 어느 작은 방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는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와 현 가주가 창백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할아버지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모용세가의 전 대 가주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큰일일세. 내가 불민하여... 그걸 잃어버리고 말았다네." "무어라? 언제 잃어버렸단 말인가?" "아마도... 아까 그 소란을 틈타 누군가 침입한 것 같으이." "허어......" 할아버지가 신음성을 흘리자 전대 가주는 입을 다물었고, 이번에는 현 가주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소아를 이용한 듯싶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소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보아 세가 안에 협조자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도대체 누가......?" 할아버지의 질문에 현 가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소아와 친한 사람들 중 한명이겠지요. 조사를 지시해 놓긴 했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허어... 거참......" 할아버지가 연신 자신의 수염만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시자 입을 다물 고 있던 전대 가주가 비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탓이네... 내 탓이야...... 내가 교육을 잘못 시킨 게 죄지. 그놈이 그 런 일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건데......" '흐음, 그러니까 저 할아버지도 자신의 손자가 그 짓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자책하지 말게나,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리고... 솔직히 한 가 지 고백하자면... 나도 예전에 그걸 잃어버렸다네." 할아버지의 말에 전대 가주와 현 가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 가문에서도?" "그게 정말입니까?"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러나 우리는 별다른 일 없이 누군가가 침입해서 감쪽같이 가져가 버렸어. 하지만 침입한 흔적이 조금도 없어서 난 그걸 잃어버리 고서도 며칠 동안은 모르고 있었다네. 그걸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누 군가 안에서 도왔던 게 틀림없어. 아님 내부자의 소행이거나." 할아버지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전대 가주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무 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 듯하이. 누군가가 그걸 모으로 있는 것 같아." 할아버지도 무거운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처음에는 난 누군가 우리 가문에 원한이 있는 자의 소행이 아닐까 생 각했었다네. 그러나 원한을 갚으려면 꼭 그걸 가지고 갈 필요는 없더 군. 그리고 그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중대한 비밀이 아니었는가?" "그렇지. 그건 9대 문파와 5대 세가의 수장들만이 아는 비밀이 지. 그런데 그걸 알고 빼내 갔다니......" "그것도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말이지. 모두 내부에서 도운 사람들 이 있었어." 그렇게 말을 주고받던 두 노인네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각자 생각에 잠겼 다. 현 가주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 만 했다. 잠시 후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5대 세가의 수장들을 모아 의논해 봐야겠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안전하면 좀 더 주의하라고 해야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래, 난 그동안 이 일을 숨기려 했지. 하지만 그래서는 더 안 좋은 결 과만 불러일으킬 뿐이니 좀 수치스럽다 하더라도 밝혀놓고 다음 일을 대비해야겠어."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 말에 찬성하자 전 대 가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자네가 해주지 않겠나? 난 이번 일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앞에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으이." "하긴.. 그렇겠구만. 알겠네. 5대 세가의 수장들을 불러 모으는 일은 내 가 맡아서 하지." "고맙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내일 일찍 출발하기로 했 거든." 그렇게 말하며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마법으로 켜놨던 영상을 껐다. '흐음... 뭔가 딴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거기에 할아버지도 낀 것 같 으니... 이거 잘못하다간 엄마, 아빠랑 나랑 민이까지 휩쓸리는 거 아 냐?' 하지만 뭔 일인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거, 이거.. 내일 민이랑 의논해 봐야겠다. 뭔가 물건을 숨기고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도대체 뭘까? 뭐, 할아버지가 5대 세가의 수장들을 불러모은다니... 그때 뭔가 좀 더 알 수 있겠지.' 그런데 다음날 모용세가에서는 또 한 번의 소동이 일어났다. 어제 침입 해서 복수극(?)을 벌였던 소아란 청년의 아버지인 총관이 목을 매어 자 살한 게 발견되었던 탓이다. 아무래도 어제 일어났던 일과 무관하지 않 겠지만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던 터라 자세한 걸 알기는 어려웠다. 이 렇게 여러 가지 안 좋은 사건들이 겹쳐 일어나자 결국 모용세가는 당분 간 세가의 문을 닫아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시키고 근신에 들어가게 되 었다. 이번 일로 많은 망신을 떨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거참, 할아버지 친구 분은 꽤 괜찮은 사람이던데.. 가주는 어쩐지 모르 겠지만... 그런데 그 손자들은 왜 그 모양인지......' 아린 이야기 . 제19화 어느 날의 수상쩍은 밤 모용세가에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자 할아버지는 뭐가 그리 바쁜 일 이 있는지 몇 달 간이나 우리에게 코끝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아마도 모용세가에서 그 전대 가주와 의논한 일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지만 민 이와 나는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알려주지 않을 테고 우 리 또한 큰 관심은 없었던 탓이었다. 단지 나중에라도 우리 가족이 그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예의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모습조차 보기 힘들자 일부러 할아버지를 찾아다닐 수도 없는 일이라 점차 잊고 있을 즈음, 할아버지가 친구 분을 만나러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세가를 떠났다. 모용세가에서 돌아온 지 대충 세 달 만의 외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 총관과 호위 무사 세 명만을 대동한 채였다. 세가 사람들이 좀 걱정을 하긴 했지만 시대도 평화스로웠고, 할아버지나 예 총관 모두가 뛰어난 고수들인데다 할아버지가 조금 고집을 부리자 아 무도 말리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민이와 나는 수련에 더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나는 밤마다 명상 수련을 다시 속개했다. 이번에 칼침을 맞은 이유가 긴장을 늦추기만 하면 주위의 기척을 감지하는 것이 둔화되기 때문이라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위만 좀 더 기울이면 넓은 곳의 기척을 다 감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아무 생각이 없으면 옆에 누가 다가오는 것도 근처까지 와야만 깨닫게 되니, 무공 수련 덕분에 마나를 느끼는 감각이 많이 예민해졌 다 하나 내 게으른 정신이 항상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정 신을 좀 더 단련하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명상이라는 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로 주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정신을 맡기는 것이다 보니 명상 수련을 하 려고 앉아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보이는 건 옆으로 기울어 진 채 잠자다 깨어난 내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에 명상 수련을 할 대도 항상 수련 시작한다 하고 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리기 일쑤여서 그대로 포기해 버렸던 거 다. 그런데 한번 칼침을 맞고 보니 잠들더라도 명상 수련을 계속해야겠 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시작한 거였다. 하지만 문제는... 처음에 주의를 기울여 내 마나를 넓은 지대에 엷게 퍼 뜨리고 집중을 하면 은씨 세가 내의 모든 기척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별다른 일 없이 고요한 기척들만 느끼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이 잠이란 녀석이 내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 와 내 감각을 천천히 둔화시키더니만 결국은 날 잠재워 버리는 거였다. 역시 뭔가 긴장시킬 만한 요소가 없 으면 난 주의를 계속 집중할 수 없는 타입인가 보다. '거참... 딴 사람들은 명상 수련을 어떻게 하는 거지? 에혀~ 역시 내가 게을러서 그래. 내가 천선적으로 게을러서......' 할아버지가 세가를 빠져나간 후 일주일이 지난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명상 수련을 한답시고 침상 위에서 자세를 잡고 눈을 감고 있다 가 깜빡 졸았는데, 이 머리란 녀석이 앞으로 꾸벅 꾸벅거리다가 어느 순간 뒤로 꾸벅대는 바람에 내 바로 뒤에 있던 벽에 뒤통수를 부딪쳐 버렸다. 쿵!! "아코!!" 덕분에 화들짝 깨어나기는 했지만 또 졸고 있었다는 생각에 기운이 축 쳐졌다. "아.. 또 졸았네. 난 왜 이럴까......" 해시(밤9시부터 11시까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수련을 시작했는데 막 축시(새벽1시부터 3시까지)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수련을 한 시간 정도 하다가 졸았다고 계산하더라도 거의 3시 간을 졸고 앉아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참내... 이러고 앉아서 몇 시간을 잘 수 있는 나도 대단해.'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그냥 이대로 잘까 하고 찌뿌드드한 근육을 풀기 위해 본능적으로 기지개를 한번 쭉 켜는데, 하품까지 한번 하고 나니까 이놈의 잠이란 녀석이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아앗... 자려고 하니까 잠이 가버렸잖아. 에잇... 수련을 더 하라는 신 의 계시인가 보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침상 위에 자리를 잡고ㅡ이번에는 졸더라도 뒤통수 는 부딪치지 않기 위해 아예 등을 벽에 댔다ㅡ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 자 내 몸속의 마나가 서서히 대기 중의 마나와 어우러지는 것이 느껴지 면서 내 주위에 있는 기척부터 시작해 점점 더 멀리 있는 기척이 하나 둘 느껴지지 시작했다. '흐음... 별다른 건 없네.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은 자고, 순찰 도는 무사 들은 순찰 돌고.... 오늘도 평화로운 밤이로구나.'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아주 순조롭게 흘러가는 밤의 일상을 깨고 누군 가가 빠른 속도롤 움직이는 것이 포착된 것이다. '어헛... 지붕 위로 통통 뛰어간다. 오옷. 순찰 무사들이 오니까 피했다. 흐음..... 밤에 순찰 무사들을 피해 지붕 위를 통통 뛰어가는 사람이라 고 하면... 도선생? 간이 얼마나 크면 무가의 돈을 노린대?' 여차하면 뛰쳐나가서 그를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채로 조심스레 몸 을 일으키는데 의아스럽게도 이번에는 그와 좀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인기척은 비록 지붕 위를 통통 뛰어다니지는 않 았지만 아주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이 수상했다. '어허라... 동료가 있던 것인가/ 이거이거,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있네. 어라라.... 그런데 왠지 좀 낯익은 기척인데....' 몇 달 동안... 비록 많아야 한 시간쯤 하다 잠들었지만, 꾸준히한 덕에 세가 안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기척은 익숙해 있던 터였다. 사람들은 각자 독특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운은 내력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가질 수 있을수록 뚜렷이 구별되었다. 게다가 지금 느껴지는 사 람만큼의 내력을 가진 사람은 세가 안에서 몇 안 되니 누구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은재영.... 이런 야심한 시각에 어딜 가는 거지? 혹시 몰래 숨겨둔 애인 이라도 만나러 가나?' 한쪽은 도선생으로 예상되는 기운, 또 다른 한쪽은 은재영... 둘 다 호기심을 느껴졌기에 나는 두 기운에 정신을 집중하여 쫓기 시작 했다. 도선생은 세가 안에 들아와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는데, 은재영 은 세가 밖으로 벗어나 더욱더 멀어질 기미를 보였기에 그의 기운을 쫓 기 위해서는 세가 안으로만 한정시켜 놨던 내 마나를 은재영이 가는 곳 까지 퍼뜨려야만 했다. '조심, 조심... 신중하게...' 이천 살이 넘은 드래곤은 자신의 레어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대기 마나 의 흐름을 통해 수십 킬로미터 영역 안의 미세한 기척까지 모조리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난 겨우 600살이었기에 일부러 자신의 마나를 대기의 마나에 동화시켜 주위에 집중을 해야만 기척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영역 또한 이천 살이 넘은 드래곤의 영역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다. 기껏해야 수 킬로미터 내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명상 수련을 통해 키우려 했던 능력은 적은 영역안이라고 해도 내 마나를 대기의 마나와 동화시키지 않고, 단지 대기의 마나 파 동에 의하여 기척을 느낄 수 있게끔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능력이 많이 발전하지 못하여 세밀한 기척은 느낄 수 없어 자세히 알아 보려면 이렇게 내 마나를 대기 중에 퍼뜨려야만 했다. 그래도 어느 정 도 성취는 이루어서 예전보다 마나의 농도를 적게 퍼뜨려도 기척을 쉽 게 느낄 수 있었고, 덕분에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넓어져 지 금 자신있게 은재영의 기척을 쫓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점점 세가에서 멀어져 가는 은재영의 기척을 놓치지 않으려 주의 하면서 조용히 방에서 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도대체 은재영이 어딜 가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지붕 위를 통통 뛰어넘으며 빠르게 이동했던 도선생이 이 동을 멈추었다. 그가 멈춘 지점은 바로 배 숙부가 머무는 건물 안이었 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배 숙부로 짐작되는 기척이 느껴졌다. '옳거니.... 들켰구나...' 참으로 운없는 도선생이라고 생각하며 곧바로 배 숙부의 '도둑이야~' 하는 외침과 함께 배 숙부가 도선생을 잡으려고 달려들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배 숙부는 분명히 도선생과 마주하고 있음이 분명 한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그 도선생도 마찬가지 로 집주인에게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갈 생각은 안 하고 대담하게 그과 마주하고 있는 거였따. '응? 혹시 대치하고 있는 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도선생의 기운을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니 놀 랍게도 배 숙부보다 더 많은 내력을 몸에 지니고 있는 고수였다. '이런.... 이 시대의 도선생은 무공도 익히고 있네. 어쩌지?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하나? 근데 좀 이상하다. 도둑이랑 대치하고 있는 데 왜 숙부의 몸에서 투기가 느껴지지 않잖아? 뭐야, 그럼 저자는 도선 생이 아니라 숙부를 만나러 온 사람이란 말이야? 근데 왜 이렇게 한밤 중에 몰래 찾아온 거지?' 배 숙부가 갇혀 있는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만나기가 황제처럼 힘든 사람도 아닌데 밤중에 몰래 만나러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더구나 배 숙부를 만나러 온 사람도 대단한 고수인 듯한데..... '숙부는 저런 고수와 몰래 만나 뭘 하시려는 거지?' 그러나 나는 마법을 써서 숙부가 있는 방을 비춰볼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정신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그쪽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은 세가를 벗어나 경공까지 사용해 빠르게 달려가는 은재영을 쫓느라 정 신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마법을 사용해 허공에 떠 있는 것도 쫴 께 부담되는데 여기서 또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마 법을 사용하려면 난 은재영을 쫓는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고민되네. 은재영을 포기하고 숙부의 방안을 보느냐... 아니면 이대로 둘 다 예의 주시하고 있느냐.... 어느 걸 선택해야 할 것이가...' 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은재영은 결국 성내를 벗 어나 버렸다. 밤에는 성문이 닫혀 출입이 금지되는데도 불구하고 무공 을 사용해 가뿐히 성벽을 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성을 벗어나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당으로 갔다. 낮에는 소 원 빌러 사람들이 오는지 모르지만 성문까지 닫힌 한밤중에 소원을 빌 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라 사당 근처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 다. 오직 사당 안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마도 은재영 이 만나러 가는 사람인 듯했다. 은재영은 사당에 들어가기 전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 니 곧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은쟁영과 만나고 있는 사람 또한 내력이 상당한, 배 숙부나 배 숙부가 만나고 있는 사람보다 는 한 수 아래지만 유가 말해 준 기중에 의거해 본다면 그는 일류 고수 였다. '흐음...... 이게 웬일이래. 한밤중에 세가의 기둥 둘이서 각자 남몰래 고수를 만나고 있다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결국 나 혼자 이 모든 걸 알아낼 수 없다는 생각 하에 자신의 방에서 곤 히 자고 있는 민이에게 메시지를 마구마구 날려서 깨웠다. 우리가 그동 안 수련하면서 서로의 기척에 익숙해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얼마 떨어져 얼굴이 안 보여도 쉽게 메시지 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밤에는 각자의 방에 들어 가서도 우리는 메시지를 주고받는게 가능했다. 뭐, 지금은 그 능력이 민이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킬테지만, 나에게는 정말 유용한 능력이었 다. [야, 민아~!! 일어나, 일어나라구우~~!! 당장 안 일어나? 빨랑 일어 나~! 급한 일이 생겼단 말야~!!] 그러자 잠시 후에 졸음과 짜증이 가득 담긴 민이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우웅~ 누나아~ 도대체 왜 그러는데? 중요한 거야?] [중요한 일 같아. 그러니 빨리 옷 입고 온나] [이 밤에? 내일 하면 안 돼?] [시끄러! 내가 지금 누굴 주시하고 있는데 너 때문에 그들을 놓치게 된 다면 가만 안 둘줄 알아!] 그렇게 협박까지 하자 민이는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일어나서 옷을 입는 듯했다. [누나, 어디 있는데?] [나? 지금 우리 집 위에 떠 있어]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민이의 말이 끝나고 잠시 후 민이는 자신의 방 창문을 통해 몰래 빠져 나오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라 내 곁으로 왔다. [도대체 이 밤중에 무슨 일이 생긴 건데?] [야, 너 저기 성밖에 사당 보이냐?] [사당? 성문 밖에 멀리 떨어져 있는 거?] [그래. 뭐 칠선녀인지 뭔지 모시고 있다는 거 말야. 보여, 안 보여?] [으음...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 있는 건지는 알아] [그래? 그럼 잘됐다. 너, 기척은 쫓아갈 줄 알지?] [에...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게 아니라면.....] [좋아. 내가 말한 그 사당에 은 숙부하고 어떤 사람하고 같이 있거든? 너는 그들이 뭔 아야기를 하는지 몰래 엿듣고 그들이 헤어지면 은 숙 부랑 같이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뒤쫓도록 해. 할 수 있겠어? 네 존재는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약 들킨다면 얼굴은 보이지 않 게 가리고 있어. 할 수 있겠지?] [한번 해볼게. 그런데 누나는 뭐 하고?] [나? 나도 살펴볼 사람이 있어. 그 사람 좀 살펴보고 곧바로 너한테 갈 게] [알았어. 될 수 있으면 빨리 와야 해] 그 말을 남기고 민이는 사당이 있는 쪽을 향해 날아갔다. 한쪽을 민이 에게 맡기고 나자 여유가 생긴 나는 지체 없이 배 숙부와 그 정체불명 의 고수가 뭘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마법을 실현시켰다. "클레이로디언 디벤져!!!" 이 마법은 마법을 일으키는 시전자가 원하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장면 과 소리를 마치 영화처럼 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인데, 단지 문제가 있 다면 그 장소를 구별하는 기준을 마법사가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는 점이다. 장소를 모른다 하더라도 그곳에 있는 물건이나 존재를 확실 히 알고 있거나, 그곳에 있는 것들은 몰라도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으 면 실현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면 실현 못하는 마법이다. 전에는 할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할아버지란 존재를 확실 히 알고 있었기에 실현 가능했고 이번에는 난 배 숙부가 머무는 방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배 숙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 하여 마법을 실현시킨 것이다. 마법에 의하여 내 눈앞에 나타난 영상에는 검소한 방 안이 비쳐졌고, 그 방 안에는 배 숙부와 또 다른 인물이 서 있었다. 그 인물은 검은 옷 에 두건을 쓴 채 눈만을 빼꼼이 내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예전에 내가 진짜 민이와 진이를 만나기 전, 그들의 일 행을 습격했던 의문의 무리들 또한 그런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게 생각 났다. '설마... 그때의 그 무리들 중 한 사람인 건가? 그럼 배 숙부가 저들과 한패란 소리?' 내가 너무 늦게 그곳을 살폈는지 그 시커머스 인물은 막 배 숙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럼, 잘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지. 그럼." "다음에 또 보세." 그 시커머스의 수상한 인물이 밖으로 나오자 나는 얼른 더 높이 떠올라 그가 날 보지 못하게 하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자가 예전에 그 사람들과 같은 일행이라면... 배 숙부 또한 그들과 한패란 건데... 그렇다면 진이, 민이의 친부모를 살해할 건 배 숙부란 소리가 되겠군. 하지만 배 숙부는 진이, 민이의 친부와 형제처럼 친한 상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연기/ 하지만 이해가 안 돼. 배 숙부가 뭘 노리고 민이, 진이의 친부를 살해했지? 그들이 죽으면 배 숙부에게 뭔 이득이 있는 건가?' 그 순가 떠오르는 건 은씨 세가에서 은씨 핏줄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배 숙부는 할아버지의 직전 제자니까 은씨 핏줄이 사라진다면 그가 은 씨 세가를 이어갈 확률이 높았다. '그래, 배 숙부가 그걸 노렸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맞는 점이 있는데...' 은씨 세가에 은씨 성을 가진 자가 별로 없다고 해도 세가를 이어받을 사람은 한곳이 더 있었다. 바로 대대로 은씨 세가에 충성을 해온 예시 가문... 그들 또한 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가문을 이 어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배 숙부보다 훨씬 가 능성이 높은지도 몰랐다. '게다가... 민이, 진이의 친부모까지 살해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은재영은 살려두고 있는 거지? 그는 분명히 은재영보 다 내력이 높았어. 그런데 그동안 민이와 나는 두 번씩이나 노려졌는데 왜 은재영은 한 번도 노려진 적이 없는 거지?' 그렇게 따져 보자니 아무래도 배 숙부가 민이, 진이의 친부모를 살해할 타당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까 그 시커먼 수상한 인물이 그때의 그 일행이 아닐 지도 모른단 이야기인데... 음, 확실하진 않지만 시커먼 옷에 시커먼 복 면쯤이야 얼마든지 구해서 착용할 수 있겠지?' 그렇게 이야기가 전개 된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는 누구이며 왜 배 숙부와 접촉을 했는지가 의문으로 떠오른다. '음.....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 좀 더 살펴봐야겠어. 오늘은 대화도 듣지 못했으니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잖아. 하는 수 없 지. 그럼 여긴 이쯤해 두고 민이에게나 가볼까?' 라고 결론을 내리고 민이와 은재영이 있을 곳으로 주의를 돌리자마자 막 이쪽으로 달려오는 은재영의 기척이 느껴졌다. '흐음..... 저쪽도 벌써 대화가 끝난 모양이네. 민이가 은재영과 만난 사 람을 쫓아갈 테니 빨리 민이가 있는 쪽으로 가봐야겠다.' 민이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그가 있는 쪽으로 마나를 빠르게 퍼뜨리는 데 의아스럽게도 민이는 아직 그 사당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은재영과 헤어졌을 그 인물도 아직 가지 않고 사당에 있었다. 단지 전 과 달라진 점이라면 사당에 그 인물 말고도 또 다른 인물 한 명이 더 그 곳에 있었다는 점이다. 빠른 속도로 그쪽을 향해 날아가는데 민이 녀석이 사당 위의 공중에 떠 있다가 천천히 사당을 향해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당의 지붕에 조용히 착지한 민이는 몸을 구부려 지붕 위에다가 귀를 대려고 하는 거였다. 아마 공중에서는 그들이 대화하는 게 잘 들리지 않아 결국 그렇게 직접 귀를 대고 엿들으려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그들에게 민이의 기척을 느끼게 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당 안에서 매서운 기운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 기운이 한곳으로 뭉쳐 민이를 향해 빠르게 쇄도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검기 같은 형식이리라. '이런!!' 민이를 부르고 자시고 할 시간이 전혀 없음을 느낀 나는 다짜고짜 사당 을 향해 마법을 날렸다. "매직 미사일!!" 내가 미리 마나를 퍼뜨려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민이를 시기 적절하게 돕지 못했을 것이다. 화살의 형상을 하 고 있는 몇 개의 마나덩어리들은 내 의지를 받아들여 빠르게 날아가 사 당에서 매서운 기운이 천장을 뚫고 나오자마자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그 기운과 부딪쳐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다행히 민이도 자신에게 공격이 날아옴을 알고 얼른 뒤로 물러났기에 크게 다치진 않은 듯했다. 나는 사당의 지붕이 나아간 덕분에 먼지와 지붕의 잔재들이 시야를 가려주는 사이 민이를 얼른 이끌고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사당 문이 부서지려는 듯이 벌컥 열리고 두 인물이 밖으로 쏘아져 나왔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내가 몇 초라도 더 늦었더라면 그들은 허공으로 떠오르는 나와 민이를 발견 했을 거였다. 그들 둘은 순식간에 갈라져서 아까 느껴졌던 기운의 주인공을 찾기 시 작했다. 그러면서 둘 사이가 점점 벌어지는 걸 보니 아나 수색하는 동 시에 이곳을 피하려는 듯했다. 그들이 점점 멀어지는 동안 난 쫓을 생 각은 못하고 그들이 멀리 갈 때까지 숨죽이며 있다가 그들과의 거리가 안심되 정도로 멀어지자 민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지붕 위에는 올라간 거야? 내가 기척을 들키지 않게 조심 하라고 했잖아! 에유, 제때에 와서 다행이었지, 안 그러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그러자 기가 팍 죽은 민이가 기어 들어가는 어조로 메시지를 날렸다. <미안, 누나. 그 정도로 기척을 들킬지는 몰랐어. 조심하느라 했는데..> <됐어.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으니 그걸로 된 거지 뭐. 몸은 어때? 혹시 다친 데라도 있어?> <응? 아니, 없는 거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 그들이 뭐라고 하던?> <그게...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은 숙부가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그래서 누나가 시킨 대로 사당 안에 있던 나머지 한 명을 쫓아가려고 하는데 그는 사당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고, 대신 잠시 후에 다른 사람이 오는 거야. 그 사람이 은 숙부 갔느냐고 물으니까 있던 사 람이 갔다고 그러더니만 온 사람이 은 숙부를 어쩔 거냐고 묻더라? 그 러니까 있던 사람이 좀 더 두고 보자고 한 다음부터 갑자기 말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첨에는 대화를 중단하나... 했는데 조금 있어도 안 들 려서...> 민이의 메시지는 점점 기어 들어가 끝까지 전달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 가 뒤에 뭔 이야기를 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안 들리는 말소리를 들으려고 지붕 위로 내려왔다고? 참내... 너, 바보야? 그들이 무공 익힌 건 알아볼 수 있었을 거 아야? 그런 그들 의 말소리가 안 들렸다면 당연히 전음을 사용했겠지.> <아. 맞다. 그렇구나.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 아무래도 평상시 전음을 잘 사용하지 않다 보니 민이가 깜빡하고 있었 던 듯했다. <에혀... 어쩔 수 없지. 전음을 사용했다면 뭔 대화인지 몰랐을 테니... 결국 은 숙부도 왜 저들을 몰래 만나는지를 알아내지 못했군. 양쪽 다 허탕인걸> 내가 이렇게 말하자 민이의 풀 죽어 있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어? 누나, 누나가 맡은 쪽도 실패했어?> <응, 대화를 엿들으려고 하니까 벌써 다 끝났더라고, 그래서 다음에 다 시 만나자는 말밖에 못 들었어> <그랬구나. 뭐 하는 수 없지. 둘 다 시간이 잘 안 맞았네. 그래도 누나 쪽이 다음에 다시 만난 다니 이쪽도 다음에 또 만나겠지. 그때를 기다 려야겠네.> <그렇겠지. 뭐. 우리가 헛고생하게 되더라도 별일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야. 어쨌든 이걸로 됐으니까 돌아가자. 벌써 많이 늦었다고... 조금 있으면 새벽 수련할 시간이야.> 그렇게 민이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몇 달 전 모용세가에서 들 었던 일과 이번 일이 연관되면서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은재영과 배 숙부까지 그 일에 연관된 거라면 분명히 아빠와 엄마도 휘말릴 텐데..... 그 일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제20화 은씨 세가 도서관의 못생긴 사서 노인 한밤중에 배 숙부와 은 숙부가 신원 불명의 서커머스 남정네들과 만난 뒤로 일주일 하고도 삼 일이 흘렀다. 그동안 혹시 또다시 그들이 올까 봐 밤마다 내 마나를 세가 전체에 흩어놓고 살피고 있었지만 아직 연락 할 시기가 아닌지 그들은 오지 않았고, 표면적으로 보면 별다른 사건 없는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또 다른 골칫거리가 하나 생기고 말았다. 그 단체명 은 이름하여 바로 ' 진이 독서시키기, 단장은 우리 엄마, 부단장은 배 숙부, 회원은 아빠, 유, 예성구, 희여송, 지원, 표능곽.....' 평소에는 내 행동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돌연히 내가 책을 안 읽는다고 구박, 구박을 하는 거였다. 거기 다 배 숙부와 아빠까지 합세해서 훌륭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느니, 누구는 얼마나 읽었다느니... 옆에서 얼마나 긁어대는지 몰랐다. 게다 가 배 숙부의 제자들과 유, 성구는 맞다고 맞장구치고..... 결국 그들의 등살에 못 이긴 나는 은씨 세가에 와서 가보기는커녕 근처 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세가의 도서관(서고)에 가느라 이렇게 터덜터 덜 걷고 있었다. "아... 정말... 도대체 왜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인 거야? 정말, 정말, 정 말.... 사람은 왜 꼭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구? 필요하다면 내가 알아서 읽을 텐데..." "후후후, 누나가 못 미덥나 보지." "내가 뭘 어쨋다고...... 쳇, 쳇, 쳇..... 이곳에는 무협지나 판타지 소서, 연애 소설 같은 건 없을 거 아냐? 만화책은 더 더욱.... 난 그런 것만 읽 는데.... 아, 도대체 나보고 뭘 읽으라는 거야? 난 공자 왈, 맹자 왈 같은 건 관심없다구우우~!!" 내 설움 맺힌 절규에 민이가 피식 웃으면서 위로한답시고 입을 열었다. "그냥 서고 구경하러 간다고 생각해. 한번쯤은 구경 가는 것도 괜찮잖 아."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유가 톡 쏘았다. "구경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군. 자고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는 책을 가까이 하셔야 한다는 걸 모르십니까? 이번에 가셔서 읽을 책 을 한 권이라도 가져오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는 주군을 배반할 수 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은 부인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치사하다, 유. 넌 내 심복 아니냐?" "그것이 주군을 위하는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못마땅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려, 그려. 네가 엄마와 한통속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구." 어느 정도 능력있는 가문은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은씨 세가에서는 책 을 보관하는 건물이 따로 있었다. 3층의 건물이었는데 아까도 말했다 시피 나는 오다 가다 멀리서 슬쩍 지나쳤을 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 어서 조금은 흥미가 생기긴 했다. '흐음... 명나라 시대의 도서관이라...과연 어떻게 생겼을지...' 이 도서관은 아무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출입할 수 있는 시간도 사시(오전 9시부터 11시까지)부터, 신시(오후 3시부터 5시까지)로 정해져 있는 데다가 스승이 정해진 33대 제자 이상이어야 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일반 무사나 다른 제자들이 들어가려면 교관이 나 자신의 상관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되게 까다롭다니까...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런고로 유 또한 이곳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 어가지는 못하고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주군, 부디 책 한 권이라도 가지고 나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알았어, 알았다구."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이 나와 민이를 알고 있었는지 문 앞 에서 비켜주며 인사를 건넸다. "아, 어서 오십시오, 두 분." 입구를 통해서 들어가자 작은 홀이 있었고, 그 홀 한쪽 구석에는 작은 책꽂이와 함께 책상이 있었는데 그 앞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다가 우리 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분을 확인함과 동시에 출입 서 명을 받기 위해 있는 거였는데 그는 우릴 알고 있었는지 따로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 대신 이름을 쓰는 책과 붓을 내밀었다. "어기에 두 분의 이름을 써주십시오, 나올 때는 이 옆에다 성함을 써주 셔야 합니다." 사람의 이름, 들어갈 때의 시간, 나올 때의 시간, 그리고 대출해 가는 책 제목을 쓰겠끔 칸이 그려져 있었다. '흐음.... 한국에 있을 때 보던 도서관과 별다를 게 없네.' 그걸 다 쓰고 나서야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안쪽으로 들 어가는 문 말고도 그 옆에 위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건물이 3층이다 보니 그 위층으로 가는 계단일 것이다. "어딜 먼저 가지?" 내가 민이를 돌아보자 민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세.... 나도 직접 와본 건 첨이라서..." 그의 대답에 나는 의아해졌다. 평소 그는 책을 읽는 모습을 자주는 아 니더라도 가끔 보였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가 도서관을 출입할 거라 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응? 왜? 너, 가끔 책을 읽더구만, 여기 와서 네가 빌린 거 아니었어?" "그게.... 내가 직접 빌린 게 아니라..... 총관이나 아빠가 꼭 읽어 보라고 가져다 주신 것들이었어. 아, 스승님도 가끔 가져다 주셨다.' "에? 정말? 그런데 왜 너만 가져다 주냐? 이거 남녀 차별 아냐?" 갑자기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담에 가면 아빠나 총관한테 한마디 하려고 결심하는데 민이가 아주 한심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책 가져다 주면서 누나도 같이 읽어보라고 했는데 안 읽은 건 누나잖 아?" "그, 그랬냐? 험, 험... 그랬었군. 기억이 안 나서 말이지....." 무안해진 나는 어른 고개를 돌려 우리가 지나쳤던 사서가 듣고 웃나 안 웃나를 살펴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저 사람에게 물어봐야겠군." 다행히 그는 책을 읽느라 우리의 대화를 못 들은 듯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그에게 물었다. "저기... 여길 처음 와봐서 그러는데.... 위층에는 어떤 책들이 있고, 아 래층에는 어떤 책들이 있지?" 그러자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아래층은 일반 서고이고 위층은 가주님의 혈족이나 32대 직전 제자 (스승이 있는 제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별 서고입니다." "특별 서고라...." 특별이란 말을 들으니 호기심이 일었다. 얼마나 대단한 책들만 모아놓 았길래 32대 제자 이상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저기... 우리는 들어갈 수 있지?" "두 분은 가주님의 직계 혈통이니 당연히 들어가실 수 있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민이를 이끌고 위쪽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 랐다. "누나, 위로 가게?" "응, 이왕 온 김에 구경이라도 해보려구." 아래층의 일반 서고에는 드나드는 사람 몇이 있었지만, 이곳에는 사람 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빼곡이 들어찬 책장만 우릴 반 겨주었다. "헤에.... 이것 좀 봐. 여긴 책을 세로로 세워 꽂는 게 아니라 가로로 아 예 눕혀서 칸마다 차곡차곡 쌓아놓는다니까. 신기해. 내가 있는 곳은 세로로 세워 꽉꽉 꽂아놓는데...." 예전 집의 아빠 서재에서도 보긴 했지만, 거긴 이렇게 책이 많은 게 아 니었기에 정리하기 귀찮아 그렇게 놓은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흐음... 책이 많긴 많은데... 여기서 내가 읽을 만한 걸 어떻게 찾지? 제 목을 아는 것도 아닌데 말야.' 민이가 한곳의 책장으로 다가가 여기저기 책을 뽑아보며 읽는걸 곁눈 으로 보던 나는 그를 냅두고 혼자 책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 다. 그러고 보니 각 책장의 모서리마다 그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의 종 류를 써 놓았기에 책 찾는 건 그리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흐음.... 다른 문파의 무공.... 음악... 유교... 음식... 학문... 아, 여기.'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나는 뜻밖의 글자를 발견했다. 그건 바로. ... "소설? 오옷... 소설이란 말이지? 이야기책. 헤에 여기에도 이런게 있었 네. 이렇게 반가울 데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바련하자 나는 무지 기뻐서 그 안으로 냉큼 들어 가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재미있는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응? 이건 뭐지? '은 말한 밤'? 오옷.... 혹시 이게 바로 이곳의 미성년 금지 도서란 말인가?" 아까 이곳에 들어와서 사람이 없는 걸 봤으면서도 주위를 한번 사사삭 둘러보아 사람이 없음을 다시금 확인할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책 한 장을 넘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책 보려구?" '허걱!!' 아까 분명히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건만 갑자기 나타난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책을 덮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느끼 지도 못한 사이 나타난 것에 대해 놀란 건 둘째 치고 내가 들고 있던 책 이 문제였다. 그러자 책장 끝, 그러니까 책장사이에 나타난 복도에 한 노인이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겨우 155cm 넘을 것 같은 데다 가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서 있어서 더 작아 보였는데 주름 진 얼굴은 온통 곰보투성이였다. 하지만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도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누구세요?" 세가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 존대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노인 은 나에게 하대를 하는 걸 보니 32대 직전 제자 이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이 노인을 본 적이 없었던 나였기 에 좀 경계가 되었지만, 이곳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생각해 내고는 긴장을 풀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곰보투성이 노인 은 복도에 서서 날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지팡이를 짚으며 척척 들어 와 내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자연스레 넘겨받아 책장에 다시 넣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이곳의 사서란다. 그러는 넌 누구냐? 첨 보는 얼굴인데?" "예? 아아... 전 은진이라구여... 이곳에 처음 와봤어요. 그런데 사서시 라구요?" "그래, 사서. 서고에서 책 정리하는 사람. 몰라?" "사서란 뜻을 모르는 게 아니라... 사서를 하시기엔 나이가 좀 많아 보 이시는데요? 진짜 사서 맞아요?" "허어... 사서 하는데 연령이 무슨 상관이더냐? 그냥 기력이 있으면 하 는 게지. 그런데 은진이라고? 오호라, 네가 바로 몇 년 만에 다시 돌아 왔다던 가주님의 손녀인 게로구나." "아, 예." "흐음... 그래, 무슨 책을 찾는데? 내가 도와줄까?" 이제 거의 160cm에 가까워지는 키의 내가 155cm도 겨우 넘는 키의 허리 구부정한 노인과 대화를 하려니 시선이 자연히 아래를 바라보 게 되었고, 그 노인은 고개를 치켜들어 위를 바라보고 있어 왠지 마주 보며 대화를 하기가 조금 거북스러웠다. 그래서 시선을 돌려 책들을 살펴보며 그의 말에 답했다. "음....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찾고 있는데요, 혹시 찾아주실 수 있으세 요?" "이야기책? 소설?" 놀라움과 실망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예. 하하하.... 여기에서는 찾기가 힘들려나...?" 그제야 여기가 출입이 통제된 특별 서고라는 것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 노인은 실망한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돌아 섰다. "당연히 없지. 기분 전환으로 읽으려는 걸 찾는 거라면 아래층으로 가 보려무나. 아, 아까 그것 같은 걸 찾지는 말고." 한 걸음 디디려다 다시 날 돌아보며 찌릿하는 폼이 아까 그게 정말 미 성년자 금도서였나 보다. 하지만 지금 삐질 웃으면 내가 그게 뭔지 알 고 보려 했다고 말하는 거였기에 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 왜요? 아까 그게 뭐였는데요? 그냥 소설책 아니었어요? 여기 소 설란인 거 같은데...." 그러자 자신을 사서라 밝힌 노인이 움찔 놀라더니만 헛기침을 했다. "험, 험.... 여기는 어른들이 보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만 모아놓은 곳이란다. 네가 읽기에는 좀 어려울 게다." "아아, 그런 거였어요?" '홋홋홋~~ 넘어갔당' "자, 그럼 가자꾸나. 여기가 좀 넓어서 입구를 찾기 어려울 테니 내가 데려다주마." 어차피 여기에서 책을 고를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 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나왔다. "예, 아참.... 여기 제 동생도 같이 왔거든요? 그 애도 찾아야 하는데...." "그러냐? 흐음... 알았다. 그 애 먼저 찾도록 하자." 그러면서 먼저 앞서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노인의 뒤를 따라 가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기도가 대단한데 사서라고? 이런 업무는 무공에 별로 소질이 없는 제자들이 하는 거잖아? 저 사람은 기도만 대단한가? 아니면 무공 을 배우다가 주화입마에 걸려 다시는 무공을 못 쓰게 되었다든가... 아 니면 어떤 일로 인해 단전이 망가져서 내력을 잃었나 보다.' 비록 얼굴은 못생겼지만 보통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 혹시 사고로 인 해 무공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면 도와줄 요량으로(무사가 무공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의 낙을 잃어버린 것과 같으니까. 게다가 그가 다시 무공을 회복한다면 능력이 높은 고수가 될 것 같아서 세가의 고수를 한 명 더 늘릴 생각으로)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마법으로 그의 몸을 조용 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나는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뭐, 뭐야. 이 노인네? 내력이 장난 아니게 많잖아? 오옷... 아빠보다 더 많아. 이거 할아버지랑 삐까삐까한데? 게다가 몸도 굉장히 단련되어 있어. 그런데 사서를 한다고?'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전에 이곳에 몰래 침입한 사람도 있었다시피, 이 사람도 고수라면 일반 무사들의 이목을 속이고 몰래 여기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할 생각으로 조심스레 물었 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사서를 하셨어 요?" 그러자 앞서 책장들 사이를 걸으며 민이를 찾던 그는 순순히 대꾸해 주 었다. "나? 음... 어디 보자..... 한 20년 되었나? 아니, 20년은 좀 안되었군." 더욱더 수상해졌다. 실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무사가 수련을 안하고 일 개 사서를 20년 동안이나 하고 있는 것도 수상했고, 설사 사서를 하면 서 수련을 했다고 해도 저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사서를 한 지 20년도 안 되었다는 것 역시 수상했다. '수상해... 수상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노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는 데 그 노인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아, 저쪽에 있군." 그러면서 그가 말한 방향을 향해서 걷는데 아무리 보아도 민이의 모습 은 보이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대기의 마나를 살펴보니 그가 가는 방 향에 분명히 민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거리가 약 100m는 되어 보였다. '그 거리의 민이 기척을 알아냈단 말야? 역시.... 고수가 분명해. 그런데 저 노인네가 뭐 하러 여기 들어온 거지? 혹시 민이와 날 해하려는 살 수? 아냐, 엄마가 도서관에 언제 가란 말은 안 했으니 언제 올 줄 알고 여기 와서 기다려? 게다가 내가 숙부나 아빠랑 같이 왔다면 어쩔 뻔했 어? 그럼 왜.......?' 그렇게 속으로 고민고민하며 걸어가는 내 눈에 책장 모서리에 붙여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공 서적! 옳거니, 여긴 특별 서고이니까 분명히 희귀한 무공 서적이 있을 거야. 그럼, 그걸 노린 도선생?' 그게 확실한 것 같았다. 무인이라면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무공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으니까.... '그래, 분명해. 민이와 같이 이자를 잡아야겠어.' 그러헤 결심을 하고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벌써 민이가 있는 책장 사이에 도착한 거 였다. 민이가 책 몇 권을 뽑아놓은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읽 고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는 노인의 눈에 이채가 잠깐 흘러가더 니만 아주 흐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호오, 역시........... 한인물이 될 녀석이야. 저렇게 열심히 책에 빠져 있 다니 ...... 그에 비하며............" 그러면서 날 힐끔 바라보는 표정에는 한심함과 체념이 섞어 있었다. '흥, 도선생 주제에......' 그리고는 민이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민아, 이 작자 잡을 거니까 도와라. 할아버지랑 삐까삐까한 실력을 가 지고 있는 거 같으니까 조심하고.> 난데없는 내 메시지에 민이는 한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 정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그러자 그 노인이 나에게 대답한 말 그대로 민이에게 대답했다. "난 이곳의 사서란다. 그런데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는 거냐?" '에... 뭐.... 나에게 말한 것보다 몇 마디 더 길지만....' "아, 예 병법 책을 좀.... 그런데 생각 외로 어렵네요." 그 노인네는 흐뭇한 표정으로 민이를 바라보더니만 그가 빼놓았던 책 들을 집어 책장에 잘 정리해 놓으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여기에는 고차원 병법 책만 있단다. 네가 병법에 관심이 있 다니 내가 기초 병법 책을 골라주마." 그리고 그가 돌아서는 순간, 나는 허리춤에 차여 있던 검을 번개처럼 뽑아 그의 목에 들이댔다. 지금은 막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도 서관에 들른 참이라 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챙! 손질이 잘 되어 있는 날카로운 검끝이 자신의 목 바로 앞에서 겨누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무슨 일이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 검은 왜 여기에 와 있느냐?" 그의 말에 난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죠? 나이 많으신 분께 실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하지만 험하게 대해 드리고 싶진 않으니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큰 잘못이 아니면 이대로 보내 드릴 수도 있어 요." 그러자 그 노인네가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 민이도 그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란 존재가 여기 있는 게 잘못된 거죠. 도대체 할아버지 정체가 뭐죠?" "말했지 않느냐, 이곳의 사서라고." "20여 년 간 여기에서 사서로 일하셨다고요?" "그래, 그렇게 말했지. 그게 뭐 잘못되었느냐?" "당연하죠. 몸에 2갑자가 넘는 내력을 가진 고수가 20여 년 간이나 일 개 사서로 일했다고요? 그것도 무가의 사서를? 믿을 말을 하시죠. 척 보니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무공 실력을 가지 고 계신 것 같은데.... 그런데 울 할아버지가 그런 당신을 사서로 고용 했다면 난 우리 할아버지가 노망이 드신게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에요." 내 말에 노인이 흠칫 놀라더니만 두 눈에 다시 한 번 이채가 흐르면서 날 바라보았다. "호오.... 호랑이 무늬를 지닌 고양이인 줄만 알았더니만, 역시 호랑이 는 호랑이었더냐?" 마치 다시 봤다는 듯한 말투..... '어라라? 뭐야, 날 그저 그런 애로 보고 있었단 말야?'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 내가 이곳에 와서 본 책이나 찾고 있는 책이 나 그렇게 보이게끔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죄송하지만, 진짜 신분과 이곳에 계신 목적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자 그 노인네가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난 정말 이곳의 사서이고, 여기에는 이곳을 관리하려고 있었 던 거란다." "자꾸 그렇게 진실을 숨기려 하시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잡아 어 른들게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정말 그렇게 할지는 자신없었다. 아까 슬쩍 마법으 로 탐지해 본 바에 의하면 이 노인네에게서는 악한 오로라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쁜 목적으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란 소 리였다. '어쩌면..... 이 할아버지 도둑질하려는 나쁜 목적이 아니라 순순한 호 기심으로 이곳에 왔는지도 몰라. 아니면 그냥 우리 세가의 경비를 뚫어 보고 싶었는지도 .... 뭐 도둑 중에는 '천사 소녀 네티' 같은 도둑도 있 을 테니까.....' 그래서 난 그냥 순순히 사실을 말해 주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는 약속 을 하면 놔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는 이런 내 생각은 몰라 준 채 계속 이곳의 사서라고 우겨대는 거였다. 결국 보다 못한 민이가 참견을 했다. "할아버지, 우리 누나는 자기에게 직접 해가 오지 않는 한 웬만한 일에 는 너그럽거든요. 그러니 사실대로 말씀하시면 누나가 놓아드릴 거예 요." "계속 고집을 부리시겠다면 부득이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건만, 내 말을 들은 그 노인네의 눈에 장난기 가 어렸다. "그러냐? 하는 수 없지. 나는 진실만을 말했건만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 나 또한 실력 행사를 하는 수밖에......" 그가 정말 실력을 보이려 한다면 나와 민이로는 그를 사로잡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좀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를 사로잡아 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대가 노인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상처라도 입거나 크게 다친다면 내 맘이 편치 않을 것 같았기 때 문이다. 어른들게 넘기려면 마법으로 몸을 묶지 말고 혈을 짚어 못 움직이게 해 서 넘겨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우선은 저 할아버지를 잡아야지!' "잡아, 민아! 타임!! " 나는 그렇게 외치면서 몸을 날렸다. 타임 마법이란 마법사나 상대방의 시간을 조절하는 것으로 마법사의 시간을 빨리 조절하면 남들이 보기 에 마법사는 몇 배나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반대로 상 대방의 시간을 느리게 조절한다면 그 상대방은 평소보다 엄청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된다. 나는 그걸 이용하여 노인의 시간을 엄청 느리게 만든 거였다. 그러면 그는 마법에 걸린 걸 모르는 채 나와 민이가 자신 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을 보일 거였다. 혹시라도 그가 내가 사술 같은 걸 썼다고 말할까 봐 그에 대비한 거였다. 내가 몸을 날림과 동시에 그 할아버지는 내 마법에 걸려 버린채로 자신 도 몸을 띄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마법에 걸려 평소보다 엄청 동작 이 느릴 텐데도 불구하고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라 책장 위에 착지한 그 를 민이와 난 간발의 차이로 놓쳐 버렸다. 그는 평소라면 민이와 내가 쫓아가지도 못할 엄청난 빠르기의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 보다 어렵게 되었는걸.' 내가 또 다른 마법을 사용해야 할지 말지 고민을 하는 동안 민이가 그 할아버지를 쫓아가느라 몸을 허공에 띄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그 다음 책장 꼭대기를 밟으며 민이에게서 멀어지는 거였다. 책장은 높고 천장은 그렇게 높지 않아 천장과 책장 꼭대기 사이에는 공간이 대충 1m밖에 없어 그 위로 올라간 민이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그 할아버지를 쫓아야만 했기에 속도가 현저히 느려질 수밖에 없어 그 할 아버지를 쫓기는 쫓았지만 도저히 잡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난 밑에서 책장들 사이를 달려가며 그 할아버지에게 어떤 마법 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홀드(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는 마법, 그러나 몸을 줄로 꽁꽁 묶은 효 과만 있어서 몸 전체를 움직이는 건 막을 수 없다)만으로는 부족해. 전 에 할아버지께 사용했지만 할아버지는 거뜬히 그걸 풀어내셨는걸. 그 렇다고 스네어(미끄러지는 마법)을 사용했다가 저 할아버지가 저기서 떨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에혀... 역압 마법(큰 압력으로 원 하는 상대의 몸을 묶어버리는 것)을 사용할까? 하지만 그것도... 그렇 다고 공격 마법을 상용할 수도 없구........' 책장이라는 장애물이 공간을 거의 차지하고 있어서 밑에서 달리고 있 긴 하지만 나라고 빠르게 달릴 수는 없었다. 결국 한참을 그렇게 술래 잡기하던 나는 할아버지가 좀 다치는 것을 감수해야겠다 생각하고 그 할아버지가 민이를 피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서는 외쳤다. "스네어!!" 그러자 책장을 디디던 할아버지의 발이 쭈욱 미끄러지면서 책장 밑으 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험!!" 나는 할아버지의 몸이 땅에 닿아 다칠까 봐 몸을 날려 할아버지의 몸을 받아내었다. 그런데 이 배은망덕한 할아버지는 그런 내 몸을 디딤판 삼 아 밟고 도약하려다가 내 마법 때문에 또 쭉 미끄러지면서 결국 책장에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자 이 책장이 할아버지가 부딪친 충격 때문 에 뒤로 휘청 넘어가려는 거였다. "아앗, 안 돼!!"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달려가서 그 책장을 잡았다. 이곳은 책장이 주 르르 일렬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가 넘어가면 그 뒤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주르르 넘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 장을 넘어가지 않게 바로 세운다는 것이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이 책장 이 저쪽으로 휘청대다가 도로 내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에구구~~!!" 얼른 책장을 받치기는 했지만 문제는 책장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책들 이었다. 그것들이 와르를 쏯아지면서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의 몸 위를 덮치려고 하는 거였다. "에잇~~! 어쩔 수 없다. 살신성인!!" 나는 할아버지의 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책장을 받치는 대신 내 몸으로 할아버지 몸을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쏟아질 책들과 책장을 몸으로 받아내는 충격에 대비해 마나를 등 위로 보내어 층을 만들고 팔과 다리로는 땅을 굳건하게 버텼다. 그러자마자 와르르 하는 소리들 과 함께 내 몸 위로 책들이 쏟아졌고, 잠시 후에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책장이 넘어가면서 앞의 책장을 들이받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책장들 이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듯했다. '오 마이 갓! 저거 정리하려면 꽤나 힘들 거야. 난 분명히 혼나겠지?' 잠시 후, 넘어갈 것들은 다 넘어갔는지 쿵! 쿵!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대신 민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누나, 누나아~~! 어딨어?" 할아버지는 기절했는지 꼼짝도 안하고 있었다. 다행히 책장과 바닥 사 이에는 어느 정도 공간이 있어서 책장에서 깔리는 것만은 면하고 있던 나는 땅에 어질러져 있던 책들을 헤치고 노인의 몸을 끌고 기어나왔다. "에혀.... 놀랐다. 민아, 나 여기 있어!!" 그리고는 노인네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혈을 짚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수상하니까 어른들게 넘겨야겠어요. 그 래도 고문 같은 건 안 하게 제가 막을 테니 너무 염려 하지 마세요." 여차하면 또 유의 상황처럼 빼내리라 결심하면서 나는 나에게 다가오 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민이 말고도 또 다른 기척이 나에게 다가오는 거였다. '이 기척은.......!!' 제20화 은씨 세가 도서관의 못생긴 사서 노인 (마지막까지) 잠시 후, 문을 열고 나타난 중년의 남자는 서고의 상황을 보고 엄청 놀 란 표정을 짓더니 쓰러져 있는 책장들의 모서리를 밟으면서 나에게 나 는 듯이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러나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시 외치며 몸을 날렸다. "타임!! 민아, 이 사람 잡아, 잡아!!" 갑작스레 나에게 태클을 당하게 된 그 남자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몸 을 빼내려 했지만, 나에게 마법을 걸린 터라 한발 늦어서 내게 허리를 붙잡힌 채 책 더미 위로 쓰러졌다. 그 뒤에 민이가 달려와 그의 혈을 재 빨리 짚었다. 그러자 궁금함이 가득 담긴 질문이 날아왔다. "그자는 또 왜 잡는 거냐? 그자도 수상하냐?" 돌아보니 언제 뭔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그 노인네가 서서 지팡이까지 짚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엑?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분명히 혈을 짚었는데......." 너무 놀랐지만 벌떡 일어나 또다시 그를 잡을 태세를 취하는데 그 노인 네가 얼른 손을 저으며 날 만류했다. "됐다, 됐어. 네 실력은 충분히 봤으니 그만 하자꾸나. 더 이상 숨바꼭 질을 했다간 여기 책들 다 망가져요. 난 도망 안 갈 테니 걱정하지 말거 라." 그의 말이 맞았기에 내가 공격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자. 얼결 에 나에게 태클을 당한 중년 남자가 황당한 어조로 물었다. "스승님,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스승님? 저분이 당신의 스승님이라고?" 노인네는 사뿐사뿐 걸어와 내 곁에 서더니 날 향해 다시 헌 번 물었다. "이 사람은 왜 잡은 거냐?" 그러나 그 노인네는 수상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선뜻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없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가 수상한 데다가 제자 분까지도 수상하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대신 할아버지의 신분과 목적이 밝혀지면 말씀 드릴게요." "허.... 거참....일의 경중을 가릴 줄 하는 현명한 아이일세. 오냐, 알았 다. 그럼 이것을 보거라." 그러면서 나와 몇 발자국 떨어진 그 노인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 러자 민이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나는 그 노인의 몸에서 투기나 살 기가 일지 않는 것을 알고는 가만히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인의 손에 잡힌 지팡이가 천천히 허공을 가로지르며 춤추기 시작했 다.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목적인 듯 아주 천천히 알아볼 수 있게 움직 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와 민이는 동시에 소리 쳤다. "은하검법?" 세가의 사람들 중 스승을 가진 사람들만이 익힐 수 있는 검법, 그렇다 는 건 저 노인은 세가의 사람이라는 거다 민이와 내가 소리치자 그 노 인은 그 즉시 지팡이를 거두어 들이더니 우리를 돌아보았다. "어떠냐, 이젠 내가 적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겠지?" 하지만 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어서 머뭇거렸다. "하, 하지만....' "그래, 그래 네 말대로 난 무공 또한 가주님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 단다. 하지만 내가 이곳의 사서인 것 또한 사실이야. 음.... 난 너희들의 사숙조뻘이구나. 가주님이 내 사형 되시니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또 한 번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향해 묻자 노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 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뭐... 원래는 말하면 안 되지만 ..... 어차피 나중에 너희들 도 알게 될 테고, 또 너희들이 날 잡았으니 그 상으로 말해주마. 은씨 세가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비밀 조직이 하나 있단다. 그게 바로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란다. 이름은 '은영' 이지. '은'은 은씨 세가를 가리키는 말이고, '영' 은 그림자, 즉 은씨 세가의 그림자란 뜻이란다. 뭐,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조용히 처리할 일들을 맡아서 하는 조직이 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보통 큰 세가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 조직이기 도 하지.' "에... 그러니까 사서 일을 하고 계시는 건............. 위장이고 말이죠?" "그래. 취미를 살릴 겸 위장할 겸, 겸사겸사지. 자, 그럼 아이야. 이번엔 네가 말해 줄 차례구나." 그 노인, 아니, 사숙조의 말에 난 삐질 웃으며 얼른 그 중년 남자의 혈 을 풀었다. "아뇨, 사숙조님의 제자라니...... 제가 오해했나 봐요." "흐음. 왜 오해를 했는데?"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나 보다 "에... 그게 말이죠. 한 일주일쯤 전에 이분이 몰래 지붕 위를 돌아다니 다가 어느 건물에 들어가는 걸 봐서요." 그러자 민이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이분이 그때 그..." "응. 배 숙부님 쪽........" 내 말에 중년 남자의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그 말에 나는 멋쩍어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그게요, 우연이에요. 우연. 요즘 밤에 명상 수련을 했는데, 그날따라 수련에 집중이 안 되어서 바람 쐴 겸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봤어요." "그게 아니라, 어떻게 나인 걸 안거지? 그때 나는 분명히 얼굴을 가리 고 있었는데....." "아, 그건요.... 그때 본 몸집하고 비슷한 데다가 기운이 같아서 금방 알 아챘어요. 지붕 위를 몰래 다니는 사람이니까 혹시나 해서 기운을 기억 해 두고 있었거든요." 그러자 이번에는 사숙조가 물었다. "기운?"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독특한 기운 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건 내력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을수록 뚜렷하게 나타나요. 음 한 일갑자 정도의 내력을 가지고 있으 면 쉽게 구별할 수 있어요." "호오..... 네가 기에 대해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가주님 께 들었었지.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숙조가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자 나는 얼른 덧붙였다. "에....... 그건요, 요 근래 들어서 느낄 수 있게 된 거예요. 명상 수련을 했더니만 구별할 수 있겠더라구요." "그렇더라도 대단한 거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던 사숙조는 문즉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더 니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여길 제대로 해놓으려면 ..... 고생 좀 하겠구나......." '하. 하. 하.....에고........' "도와드릴게요." 차마 그냥 빠져나가기에는 양심에 찔려서 그렇게 말하자 민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숙조가 환하 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겠느냐? 그렇다면 나도 오늘 일은 비밀에 붙여주고 너희들이 원 하는 책들을 골라주마. 그러면 진이는 어머니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겠지?" 다 안다는 듯 싱긋 웃으며 하는 투를 보니 왠지 그는 우리가 도와주겠 끔 하려고 한 말인 듯했다. "에혀........ 유보고 먼저 집에 가라고 해야겠네. 치우려면 한참 걸릴 거 같으니까......." 제21화 무림대회 도서관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사숙조님을 만나고 은씨 세가에 대한 비 밀을 하나 더 듣고 나자 왠지 나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진짜 은 진인 것처럼 여기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전에는 할아버지나 아빠를 부 를 때 내가 전에 있던 세계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할아버지와 아빠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전혀 스스럼없이 그들을 진짜 친조부, 친부처럼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 다. 이러다가 진정 내 자신 이대로 있어야 할지, 아니면 이곳을 떠나야 할지 고민도 되었다. 처음 이곳에 홀로 떨어져서 여행을 떠나야 할지 고민도 되었다. 있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 다 내 수명이 아직 1/10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러다 정말 여기에서 평생 눌러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평화로운, 한 세가의 핏줄로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이런 생활을 포기하려니 망설여졌다. '우웅... 어떻게 해야 할지 ...' 차라리 이런 생활에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언젠간 이곳 가족과 헤어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누구에 게도 큰 정을 주려 하지 않았다. 이곳은 류미르나 세이몬처럼 내가 살고 있던 세계와 연결된 곳에 있는 차원이 아니었기에 내가 저쪽 세계로 가버린다면 영영만날 수 없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첨에 부모님 양녀가 된다고 허락했을 때도, 한 10여 년 정도만 무공과 이곳 세계에 대한 잡다한 정보를 얻은 뒤 헤어지려는 가벼운 생 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양부모님과 살게 된 지 아직 10년이 안 되었지만, 그동안 정말 친부모처럼 정이 들어버려서 10년이 다 된다 해도 내가 이들과 헤어지려 할지 의문이었다. '내가 ...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갑자기 떠오른, 내가 과연 이들과 헤어질 수 있을까...또한 돌아갈 수나 있을 까...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걸까...하는 걱정과 두려움에 한 번 휩싸이기 시작하자 도저히 헤어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이들 또한 저쪽 세계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할아버지나 아 빠만큼 중요한 존재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도.. 유희라고 생각해야 할지...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닌데 말야.' 그렇게 걱정을 맘속에 담아뒤고 있게 되자 생활이 전 같지가 않았다. 무공 수련이나 교양 수업을 받는 것은 물론, 민이와 장난치거나 맛난 요리를 먹는 것도 나에게 재미를 일으키지 못했다. 대신 틈만 나면 주 저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땅이 꺼져라, 하늘이 날아가라 한숨만 내쉬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주의 사람들은 갑자기 변해 버린 내 모습에 웬 변덕이냐... 하는 반응을 보이다가 그런 행동이 일주일이나 지속되자 차츰차츰 걱정하 기 시작했다. "왜 저러지? 사춘기인가?" 엄마의 걱정스런 어조에 민이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춘기? 누나한테? 설마... 그런 일은 죽었다 깨도 없을걸." 유는 갖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했다. 그러자 엄마의 목소리가 긴장한 채 물었다. "혹시 뭐?" "혹시.. 연모하는 분이 생긴 건....." "에이... 설마......." 아까부터 자꾸 부정하는 민이 목소리............. "아닙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보세요. 완전 상사병에 걸린 사람의 모습이잖아요." 예성구도 옆에 있었나 보다. "그런가? 하지만... 누나가 요 근래 새로운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는데.. 엇... 설마.........." 잔뜩 기대감에 서린 예강의 목소리. 다들 모였구만......... "음... 설마라고 생각이 되긴 하지만.... 요 근래 새로이 만난 사람들은 그분들밖에 없으니까........" "그게 누구지?" 민이가 자꾸 뜸을 들이자 엄마가 답답한지 재촉했다. "그게 말이죠... 저는 정말 아닌 것 같지만, 혹시 누나가 보는 관점은 저 와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누군데?" 다시 한번 이어진 엄마의 재촉에 민이가 정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게요... 요번에 도서관에 갔다가 만난 사서 아저씨 두분.........." "에? 설마... 한 분은 나이가 70이 넘었고, 다른 사람은 내 또래인데?" 허... 배 숙부도 계셨었다니........... "그러니까 아닌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엄마의 목소리가 민이의 말을 부정했다. "아냐. 어쩌면 민이 말이 맞을지도 몰라. 진이는 정말 내가 보기에도 특 이한 애거든. 가끔 이해 못할 행동을 종종 하는데다... 어떤 때 보면 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늙은이 짓도 하니까... 가능성이 있을지도......." '어무이... 내가 평소에 뭘 어쨌길래.......' 그러자 배 숙부의 목소리가 경악에 차서 들려왔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어쩐단 말입니까? 이거 큰일이군요." 그 뒤에 이어진 엄마의 심각한 목소리............. "아무래도 확인을 한번 해봐야겠어요. 누가 가서 그 두 분 좀 모셔오게. 저 애가 두분을 앞에 두고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봐야겠어." 엄마 말에 정말 누군가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허......참............' 나는 다시 허탈한 마음에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에 누군가가 달려가더니만 정말 사숙조와 그의 제자를 데리고 왔다. 그들을 보자마자 배 숙부와 엄마가 맞이하면서 쑥덕거리는데 요 는 아주 우연히 이곳에 들른 것처럼 해서 내 앞에 나타난 척해달라는 거였다. '거참... 저런 모의를 하려면 내가 안 듣는 데서 해야 하는 거 아냐?' 사숙조와 그의 제자가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그들은 진짜 천천 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제자가 먼저 날 보고 아주 어색하게 놀 란 척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 아.... 이거... 참 우, 우연이군요. 여기서, 험, 험, 만나뵐... 줄 이야. 험, 험.........." 그 모습에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 허, 허허허......." 그러자 들리는 쑥독이는 소리............. "어머, 어머, 어쩜... 진이가 웃었어, 웃었다고.................." 이건 엄마 목소리............. "허, 누나가 ... 정말 취향 한번 독특하네요. 아냐. 누나라면 충분히 가 능할지도.........." 뭔가를 납득해 보린 듯한 민이의 목소리에 이어 유의 허탈한 듯한 중얼 거림이 이어졌다. "주군............." "그런데... 어느 쪽이지?" "글쎄요... 저는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젊은 쪽이................" "그럼 난 나이 많은 쪽........" 저러다 곧 있으면 내기라도 하겠다. "그럼 우리 내기할까?" '배 숙부우우우우.........' 더 이상 가만있기 힘들어진 나는 발딱 일어나서 외쳤다. "아, 정말 ... 여긴 웬 참새들이 이리 많아서 고민도 못하게 하냐?" 그러자 의외로 반응이 내 앞에서 나타났다. "허허허허......."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는 사숙조의 모습에 눈이 뚱그레져서 바라보자 사숙조는 곧 웃음을 그쳤지만,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잇는 눈으로 날 바 라보며 입을 열었다. "즐겁지 않습니까? 아가씨를 위하는 분들이 저리도 많으니, 아가씨는 행복하신 겁니다. 바라보고 있는 이 늙은이도 즐거워지는데요." 그가 뭘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 눈치챈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내 진정한 처지를 모르고 있었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다. "행복해요. 내가 얼마나 많은 행운을 받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 렇기에 ......이 행복을 잃어버릴까 봐 얼마나 두려운데요." 사숙조는 조용히 날 바라보더니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띠며 입을 열었 다. "아가씨.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사숙조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이 아닐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요?"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담배 피우며 놀던 시절에 말입니다. 개미와 송 사리와 잠자리가 살았더랍니다. 이 셋은 무척 친해서 자주 같이 놀았는 데, 어느 날 또한 같이 재미있게 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송사 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개미와 잠자리에게 아주 심각하게 말했답니 다. '얘들아, 나에게는 한 가지 아주 큰 고민이 있어' 그랬더니 친구들 이 말했죠. '그게 뭔데 그래? 우리가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줄 테니 말 해 보렴' 하지만 송사리는 고개를 저었지요. '아니야, 너희들은 날 도와 줄 수 없어'. 그래도 친구들이 한번 말이라도 들어보자고 재촉하는 바 람에 송사리가 겨우 입을 열었지요. '난 말이야.... 내가 이렇게 헤엄칠 수 있는 강물이 다 말라 버려서 내가 헤엄칠 물이 모조리 사라져 버릴 까 봐 걱정된단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러자 잠자리와 개미가 입을 모아 말했죠. '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런데 이 번도 걱정이 한 가지 있어. 저 푸른 하늘을 내가 지금은 이렇게 날아다 니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무너져서 내가 날아다닐 공간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뻔한 뒷 이야기에 피식 웃었다. 사숙조는 내 가 눈치 챘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자 송사리와 개미가 입을 모아 말했답니다. '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근데, 개미도 고민이 있었어요?" "물론이죠, 그 뒤에 개미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답니다. '얘들아, 사실 나도 내가 집을 짓고 걸어다닐 이 땅이 꺼져 서 모조리 사라져 버릴까 봐 걱정이야. 이 걱정 때문에 요즘 통 입맛이 없어서 이렇게 허리가 가늘어졌지 뭐니'." 사숙조의 능청스런 표정에 나와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 자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사숙조는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자 송사리와 잠자리가 말했죠. '얘, 얘, 절대 그럴 일 없을테니 밥 먹어'." 드디어 사숙조는 이야기를 마치고 조용히 날 바라보았고, 나는 그의 마음에 감사하는 뜻의 미소를 보이며 조용히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사숙조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어다. "사람이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글쎄요...많아봐야 100년쯤....?" "뭐 운이 좋으면 그 정도까지도 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사람의 수명은 각자가 다르니까요.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아이였을 때 죽기 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늙어서 오래오래 살다가 죽기도 하죠. 이렇게 자 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도 정말 아깝지 않습니까?" 뻔히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숙조의 말을 들으니 어쩐일인지 머 릿속이 정리되는 듯했다. '맞아. 기껏해야 100년인데... 100년이 뭐야? 앞으로 50년을 더 같이 부 모님과 있을 수 있어도 대단한 거지. 그런데 그걸 못 참아서 난 왜이렇 게 안달한 걸까? 할아버지는 앞으로 이천 년은 더 살아 계실 거고. 아 빠도 아직 4000살이 안 됐는데 말야. 한 50년쯤은 충분히 기다려 주실 텐데... 한숨 자도 그 정도는 후딱 지나가겠다. 아, 물론... 난리는 안 벌 였으면 좋겠는데... 그냥 몇십 년 여기서 놀다 간다 생각하고 느긋하게 있다. 갑자기 내가 빠릿빠릿해진 것도 아닌데 그동안 뭐 하러 고민고민 하고 있었담? 여지껏 그 아까운 밥도 못 먹고...............' 거기가지 머리 속을 정리하자 나는 개운해진 표정으로 사숙조를 바라 보았다. 그는 내가 다 정리했다는 걸 눈치 챘음인지 기특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그걸 요 근래에 와서 깨달았는데, 아가씬 빠르시군요." 그에게 한번 방긋 웃어준 다음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 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 뒤에 엄마의 지시에 의해 시녀들이 차려온 푸짐한 진수성찬을 눈 깜 짝할 사이에 다 해치운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거의 일주일 동안 밥 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만 머리 속이 정리되고 나자 엄청난 허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덕분에 엄마한테 잔소리 좀 들었지만 배가 든든하니 모든 것이 기분 좋게만 느껴졌다. 그 뒤로 한 일주일 후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나와 민이는 거의 매일을 틈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사숙조와 이런 이야 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거의 우리 쪽이 듣는 거지만...-책 한두 권 얻어오는 것이 일상화되었을 때 소문이 들려 왔다.(난 관심없었는데 이 상하게도 주의 사람들이 묘하게 흥분하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대문 파 중 하나인 공동파에 5년 전에 파문당한 제자가 앙심을 품고 침입해 서 전각(건물)하나를 불태우고 무공 책도 하나 훔친 채 튀었다는 소리 였다. 덕분에 공동파가 발칵 뒤집혔고, 그 파문 제자를 잡기 위해 사람이 파 견되었으며, 각 문파와 세가마다 발견하면 잡아달라는 서찰까지 띄어 보냈다. 우리가 그러한 서찰을 받은 것은 내가 소문을 듣기 전이었다. 서찰에는 그 파문 제자의 얼굴까지 그려져 있었다지만 관심도 없는 데 다가 난 이상하게도 초상화와 사람얼굴을 잘 매치시키지 못해서 보지 도 않았고, 반 달 후쯤에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에는 그 사건을 거의 잊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자 세간묘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온 것도 온 거지만, 할아버지가 오면서 덩달아 날아온 또 다른 소식 때문 이었다. 난 몰랐는데 50년 전에 정사 격돌 대문에 무림맹이 생긴 후 사태가 원 만히 정리되자 5년에 한 번씩 무림대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요지는 새 로운 인재 발탁과 평화로운 무림 정사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모든 대회 가 다 그렇듯이 요즘 들어서는 어느 문파, 혹은 세가 출신이 일등해서 자신의 출신지를 빛내느냐 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 버렸다. 그러다 보 니 그 대회는 각 문파나 세가의 후기 지수들은 물론, 이름 한번 날려보 려는 능력있다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대회가 되어버렸고, 드러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는 9대 문파와 8대 세가들의 싸움 을 겉으로 드러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분출구가 되기도 했다. 뭐, 여기에 참가하면 여러 가지 강호 경험도 할 수 있을 테니 경험이 없 는 신출내기들도 대거 참가하는 모양이었고, 거기에 나와 민이도 예오 는 아니었다. "무림대회에 참가하라구요?" 나와 민이는 할아버지 말에 동시에 외쳤지만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내 가 또 귀찮은 일을 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반면, 민이는 눈 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녀석은 드디어 신나게 무공을 겨룰 수 있 다는 사실이 무지 좋은가 보다, 게다가 이건 공정한 대회여서 남을 죽 일 수는 없는 데다 항복 선언을 하면 경기가 중단되니 목숨을 잃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 정말 신출내기들에게는 경험 쌓기에 딱이었으 니 이젠 완전한 무인 같은 민이가 좋아할 만했다. "그래. 우승까지 바라는 건 아니고, 단지 경험을 한번 쌓을 겸해서 출전 해 보라는 거다. 어차피 5년에 한번씩 열리니 이번에 설사 진다 하더라 도 다음 대회를 기다리면 되는 거니까................." 근데 좀 웃긴 건... 무림대회가 강호 전체에서 가장 큰 대회이다 보니 참가하는 사람이 무지 많다는 거다(예선만 해도 한달 이상 걸리는 수도 있다니 말 다했지). 그래서 대회를 에선, 본선으로 나누어 치렀는데 9대 문파 장로 이상, 8대 세가의 장로 이상의 추천이 있으면 예선을 치르지 않고 본선에 오 를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추천으로 우리를 본 선부터 진출시킨다는 거고...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건 '백 없으면 서럽다'였다. 역시 인간이 사는 사회는 어디나 다 같다니까............... 그렇게 할아버지의 추천을 통해 본선에 진출하게 되면 예선에 진출하 기 위해 본선이 열리기 몇 달 전부터 가지 않아도 좋고, 그러면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 수련을 쌓을 수 있지 않겠냐는 조리있는 설명이 덧붙여 졌지만 놀랍게도 민이는 그걸 단호히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께서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저는 예선 부터 치르고 싶습니다." '오우... 본선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건가?' 그러자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난색을 표했다. 편안히 본선부터 치를 수 있는데 그걸 마다하니 기특하기는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뻔히 아 는데도 허락하기가 숩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재수없어 예선에서 무지 강한 사람 만났다가 은시 세가의 이름 을 가지고 예선을 통과 못하면 그게 뭔 창피겠는가.................... 그래도 민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본래 평소 조용한 애들이 한 번 고집 부리면 누구도 못 꺾는다). 결국 옥신각신하던 할아버지는 몇 가지 조건을 붙인 걸로 만족하고 민이의 뜻을 허락했다. 우선은 은씨 세가라는 걸 안 내세우는 거하고(이건 나와 민이가 강력하 게 주장한 거다). 두 번째는 할아버지가 붙여주는 사람은 다 데리고 갈 것. 세 번째는 예선에서 떨어지면 그 즉시 집으로 돌아올 것. 네 번째는 예선을 치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떠한 사고가 생겼을 시 즉시 돌아올 것. 뭐, 그 뒤로 이런저런 조건들이 몇 가지 더 붙었지만 자잘한 거라서 민 이와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해결을 봤다. 무림대회가 열리는 것은 내년 9월 1일, 막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 가오는 시기였다. 그건 본선이 열리는 날짜니 예선은 8월 1일부터 열린다고 봐야했다. 아주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경기를 펼쳐야 한다는 소리다. 더 늦게 시 작하면 겨울깢 대회가 열리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면 차라 리 봄에 예선을 치르면 뭐가 어때서... 그럼 푹푹 찌는 엶에 본선을 해 야 하니, 분명히 그래서 피한 걸 거다. 본선은 선선할 때 치르게 하려 고......... 그러니까 예선은 8월 1일에 열리고, 등록은 일주일 전이 마감이라니 늦 어도 7월 셋째 주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치면,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으 남양까지 가려면 여기서 대충 넉넉 잡아 2달(빨리 가서 방 잡아야 하니 까)로 잡아서 5월 중순경에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이 가을 초입에 들어가는 9월이니까... 수련할 시간은 앞으로 8개 월... 그때까지는 특별 훈련을 받는다는 것도 조건에 들어가 있었다. '8개월 동안은 죽어라... 해야겠지만 그 두로 3달 동안은 자유로운 여행 이니까 그걸 생각하고 버텨봐야지.' 그랬다가... 8개월 동안 후회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본선부터 출전하겠다고 할걸.' 그렇게 해서 나와 민이는 이 세계에 '덜어져서 우리끼리의 첫 강호 여 행을 하게 되었다. 물론 유, 희여송, 지원, 포능곽, 예성구, 예은, 예필 이 따라붙게 되었지만 항상 민이 옆에 붙어 있던 예강은 이번에 짐이 될지도 모른다며 나중에 우리가 본선까지 올라갔을 때 오기로 했다. 우리와 같이 가는 이들이 좀 많았지만, 이들 모두 예선부터 무림대회에 출전할 것이었기에 우리와 같이 특별 훈련 받아야만 했다.(아, 물론 대 회에도 참석 안 하는 유는 빼고). 제22화 늘어난 동료들 한 해가 또 지나가고 민이와 내가 16세가 되고도 4개월이 지났 을 때 드디어 특별 수련이 끝났고, 우리는 같이 특별 수련 받은 이들과 함께 세가를 떠나 무림대회가 열리는 남양으로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30대인 배 숙부의 제자들이 같이 가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안심이 안 되는지 가는 당일 날 아침까지도 우리를 잡고 신신당부를 해댔다. 특히 나한테...... "진아, 일행들과 헤어지지 말고, 일 벌이지 말고, 알았지? 사형 들의 말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예은 소저 옆에 붙어 있고, 민이는 항상 데리고 있거라. 거긴 사람들이 무척 많을 테니 이건 정말 명심해야 한다. 여행 이 힘들더라도 식사는 꼬박꼬박 하고, 설사 건달 녀석들이 시비를 걸더 라도 사형에게 맡기고 넌 나서지 말거라. 밤에 민이 데리고 몰래 빠져 나가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고!!" "예이, 예이, 예에이~!" "대답만 잘하지 말고 꼭 명심해야 한다. 알았지?" "예에~!" "에휴, 아무래도 불안하다니까......" "엄마도 차암... 엄마 때문에 출발 늦어지고 있잖아요." 내가 뾰로통하게 툴툴대자 엄마가 날 곱게 흘겨봤다. "그게 왜 나 때문이니? 평소에 네 행동이 어땠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쩌비......" 엄마가 또다시 한바탕 설교를 할 기색을 보이자 결국 아빠가 나섰다. "그만 하고 이제 보내주구려. 진이도 이제 다 컸는데 알아서 잘 하겠 지." "하지만......" 엄마가 맘이 안 놓인다는 표정을 짓자 아빠가 피식 웃었다. "그 애들만 가는 것도 아니지 않소? 게다가 배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 다오." 엄마는 끝끝내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빠가 그렇게까지 말하 자 더 이상 날 붙잡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때까지 조용히 기 다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나섰다. "그럼 조심해서 가거라. 처음이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고 그냥 구경 간 다 생각하거라.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돌아오는 것도 잊지 말고." "예에~ 그럼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나중에 봬요." 나와 민이가 할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하자 나머지 일행들도 꾸벅 고개 를 숙여 보이고는 선착장에서 출발 준비를 다 끝낸 배에 올랐다. "자, 그럼 출발~!!" 우리 일행이 배에 다 탄 것을 확인한 뱃사람 한 명이 크게 외치자 돛대 가 펼쳐지고 노들이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서서히 배가 선착장 에서 멀어지더니 강물 중앙에 둥실 떠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출발이다!" 그동안의 지옥 같았던 특별 훈련을 끝마치고 드디어 여행을 다시 하게 되었다는 기쁨에 나는 선착장에 서서 우리를 배웅하는 일행들이 보이 지 않게 되자 기지개를 쭉 켜며 기분 좋게 외쳤다. 기분이 좋다 보니 내 얼굴에 부딪치는 강바람도 매우 기분 좋게 느껴졌다. 예은과 예필도 나와 민이처럼 잔뜩 들뜬 표정이었다. 이들도 어른들을 따라 밖으로 몇 번 나가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또래끼리만 여행을 해본 적은 처음인 데다가 무림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처음 이었기에 흥분과 긴장가미 뒤섞여 있었다. 눈들이 벌건 걸 보니 아마 전날 밤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잔 듯했다. 그와는 반대로 이 일행들을 책임지고 인도해야 할 배 숙부의 세 제자들 과 유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우리를 무사히 데리고 가야 할 의무 감이 있다보니 흥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이게 바로 의무가 있고 없고의 차이점인 걸까? 은씨 세가가 있던 장사의 옆으로는 장강의 한줄기인 큰 강이 흐르고 있 었는데, 어른들은 우리가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 이 강을 통해 출발하길 바랐다. 비록 배 여행은 무 지 지루하고 답답한 일이란 걸 아주 잘 아는 내가 강력히 반대하긴 했지만, 일행을 이끌고 갈 책임이 있는 희여송도 적극적으로 배 여행을 추천하는 데다가 배 여 행의 지루함을 모르는 나머지 일행 또한 큰 반대를 하지 않아 그렇게 결정이 났던 것이다. 이 강을 타고 올라가 동정호에 이르면 거기에서 또 배를 갈아타 무창까 지 간 다음에야 거기서부터 말을 타고 남양까지 가게되는 것이다. 배를 타고 간다면 호북 지역까지 쉽게 갈 수 있기는 하겠지만, 동정호에서 배를 갈아탈 때의 잠시를 제외하면 무창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배를 타 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엄청 지루한 여행이 될 것이 뻔했다. 나야 배를 타기로 결정되자마자 그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했지만, 배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나머지 일행은 아마 지루해서 몸을 배배 꼬게 될 것 이다. 하지만 뭐 지루하지만은 않을 듯했다. 저렇게 탈진할 정도로 뱃멀미를 한다면 지루할 여력이 없을 테니 말이다. "우엑~!!" "우에에엑~!!" "쿠엑~!!" "캑캑!!" 배 여행의 지루함을 모를 때부터 눈치 채고 있었긴 하지만, 나와 희여 송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하긴, 장사를 떠나본 일이 지금까지 한두 번밖에는 없었고 여행도 거의 못해본 이들이니 배를 탈 기회도 거의 없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무예 를 익힌 사람들이, 그것도 나이가 서른 이 넘은 지원과 포능곽까지 정 신없이 뱃멀미를 한다는 게 좀 황당했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배의 그 흔들거림을 뱃속이 견뎌내는 건 무리였나 보다. 그나마 민이는 배를 처음 타본다 하면 서도 멀미를 안 했는데, 이녀석도 본래 용이다 보니 드래곤 못지 않게 뱃속 위장이 튼튼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처음에 흔들거리는 배에 적응을 못해서 어 질어질하긴 했지만 구토를 안 한 것만 하더라도 열심히 속의 것을 게워 내는 이들의 부러움을 살 만 했다. "그러길래 배 타지 말고 말 타고 가자니까... 내 말 안 듣더니만...쯧쯧." 나는 뱃전에 핼쑥한 얼굴들로 힘없이 기대있는 그들 옆에 쪼그리고 앉 아 작게 혀를 찼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원망스런 시선을 강력 하게 보냈지만 어느 누구도 한마디 대꾸하지 못했다. 약 2주일쯤 되는 기간 내내 멀미에 시달리다가 드디어 동정호에 도착 해서 배를 갈아타기 우해 선착장에 내리자 일행들이 리더역을 맡고 있 는 희여송에게 부디 배를 타지 말고 말 타고 가자고 애원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였다. 하지만 희여송은 말 타고 가면 자신이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좀 지루하더라도 편안한 배를 고집했다. 하긴, 일행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배를 타고 가면 공간이 배안으로 제한되어 버리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리 크게 신경 쓸 일이 없긴 했다. 그러니 일행을 보살필 의무를 가진 그로서는 배를 고 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국 일행은 희여송에게 맞설 수 있는 나와 민이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나는 싸그리 무시해 버렸다. 집 에서 떠나기 전에 내가 그렇게 배 타고 가지 말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어 도 단 한 명도 내 편 안 들어줘서 배신감을 맛보게 했던 그들 편을 들어 줄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난 애초부터 배 여행의 지루함에 대 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왔으니 일부러 말을 고집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민이 녀석이 슬그머니 희여송에 게 부탁하려는 듯했지만, 내가 위에 말한 이유를 세세하게 들어 민이 녀석을 눌러 버렸기에 결국 일행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근데 보통 사람 같으면 한 이주일 정도면 배에 익숙해져서 멀미를 더 이상 하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우리 일행들은 생전에 배와 원수가 졌었는지 무창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뱃멀미에 시달 려야 했다. 뭐, 장 사에서 동정호까지 올 때처럼 구토까지 하는 심한 멀미는 아니었지만 속이 울렁거려서 식사를 제대로 못했고, 바닥이 흔들리고 머리가 어질 한 갑판 위로 올라오지 못한 채 답답한 선실 속에 콕 박혀서 지내야만 했었다. 덕분에 편히 오긴 했지만, 너무 일행의 체력이 떨어져 버려서 우리는 무창에 도착하자마자 그 다음날 말을 구해 출발하지 못하고 삼 일을 그곳에 체류하고 그 다음날에 출발할 수 있었다. 남양은 하북의 남쪽 지방에 존재하는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호북과 근 접한 거리였기에 호남 지방을 비롯한 귀주, 광서, 광동, 강서 지방에서 무림대회에 오려는 사람들은 모두 육지로 호북 지방 을 거쳐 하남으로 넘어가든가, 아니면 호남 지방을 통해 우리처럼 장강을 따라 올라가 무 창 지방에서부터 육지로 가든가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무창의 위쪽에 있는 양양이란 도시는 장강 이남지역에서 육로, 수도로 올라왔던 사람들이 함쳐지는 길목이 되어 버려 우리처럼 좀 일찍 무림맹으로 가려는 사람으로 북적북적했 다. 거리마다 보이는 사람의 절반은 일반 시민이고 절반은 병장기를 들고 있는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고, 시내 안에 있는 객점은 몰려든 무림인들로 인해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헤에... 장강 이남의 사람들만 몰려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강 호 전역에서 무림인이 몰려들 남양은 더 복작복작하겠다." 객점이 거의 꽉 차 자리를 잡지 못해 세 개의 객점에서 발걸음을 돌렸 다 겨우 네 번째의 객점에서 자리를 잡아 일행들이 한숨 돌리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일행은 그렇지 않아 도 9명이나 되는 데 벌써부터 이렇게 복작복작하다가 정작 남양에 도착하여 제대로 방 이나 잡을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었다. 그러자 희여송이 빙긋 웃으며 내 걱정을 해소시켜 줬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도시는 작은 편이라서 사람들이 조금만 몰려들어도 복잡해 보이는 것일 뿐, 남양은 이 도시보다 훨씬 큰 곳인걸요. 게다가 무린대회 때 객점이 모자른다 는 걸 안 일반 사람 들이 자신들 집을 객점으로 활용하기도 하지요. 그 시점에는 숙박비가 엄청 올라가니까 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헤에,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렇게 내가 희여송의 설명을 듣고 있는 사이, 객점 안이 분주해져서 몹시 바빠 보이는 점원이 막 한무리의 무림인들을 배웅하고서는 조금 지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뭘로 드릴깝쇼?" 그런 그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희여송이 주문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객 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원래 길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나다니고 있 었기에 시끌시끌했지만, 이건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내는 소음이 아니 라 뭔가 일이 벌어져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몰려든 거였다. 그것도 하필 이면 객점 바로 앞에서! 날씨는 아직 여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거려서 그런지 객점은 출입문을 황전히 열어놓은 상태였고, 우리는 늦게 객점 을 들어온 터라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출입구 근처에 있는 자리 를 잡고 있어서 바로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뭐야, 이 자식들!!" "어라라? 이것들 봐라? 사파 녀석들 아냐?" "허어, 이것들이 간덩이가 부었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라고 사파 녀 석들이 설치고 다녀, 다니길?" 출입문을 등지고 있는 희여송과 마주 보고 앉은 터라 나는 처음부터 어 떻게 된 일인지 볼 수 있었다. 그건 막 이곳에서 빠져나간 5명의 무림 인들이 객점을 나서서 걸어가려다 일단의 사람들과 부딪힌 것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그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미처 못 보고 실수로 부딪힌 것뿐인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인 양 그 들을 둘러싸 고 시비를 거는 거였다. 둘러싸인 세 명의 사람들이 그들 말대로 사파 의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50년 전, 정사의 싸움에서 사파가 지자 정파의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며 영역을 다 차지해 버려 사파의 사람들은 숨죽이고 지낸다는 소 리를 들었었다. 그래서인진 몰라도 난 이곳에 오면서 한 번도 사파 쪽 의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터라 그들을 눈여 겨보았다. 나는 사파와 정파를 나누는 기준은 말로 들어 알고 있었다. 정파와 사파를 나누는 대표적인 건 내공인데, 정파는 처음부터 정순한 내력만을 단전에 받아들여 차근차근 쌓아 나가는 데 반해 사파는 닥치 는 대로 모든 내력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물로 표현하자면 정파는 정수기에서 걸러진 물만 마시는데 비해 사파 는 수돗물, 우물물, 샘물 가리지 않고 다 먹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정 파 사람들이 보통 10년 쌓을 내력을 사파 사람들은 5년이내에 쌓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무공 성취도가 정파에 비해 급속도로 빠르나 어느 정도 쌓이면 더 이상 진전을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뭐, 정파 쪽도 무공이 어느 정도 발전하다가 벽에 부딪치지만 그 시기 가 사파보다 더 늦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사파 쪽의 내력은 탁한 기가 보이지만 정파 쪽 기는 그보다는 덜 탁하다고 한다. 뭐, 인간으로 태어 난 이상 아주 정순한 내력을 가질 수는 없다고 하더만, 그럼 더 탁하고 덜 탁한 게 뭔 차이인지는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근데 가장 큰 특징은 정파 쪽에서 내력을 쌓은 사람은 죽을 때 그냥 꼴 까닥 하고 죽는 데 반해 사파 쪽에서 내력을 쌓은 사람들은 무지 괴로 워하며 죽는단다. 그게 내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고 하던데, 그래서 사파 쪽에서는 그 고통을 안 느끼게 해주려고 임종이 가까워져 고통을 겪기 시작하면 가까운 사람 중 하나가 순식간 에 목숨을 끊어준다고 한다. 뭐, 어느 정도 무공을 가진 사람이 마음만 먹는다면 사람 한 명 정도는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르는 사이 목숨을 취할 수 있으니 고통은 안 느껴 서 좋겠지만......... 정파는 무공을 수련하는 목적이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데 있지만 사파 에서는 오로지 힘을 기르는 데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파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무공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연구, 개발되어서 그 렇다고 한다. 무공도 정파 쪽은 형식적이고 화려한 모습이 많지만, 사 파에서는 패도적이고 매서운, 완전 실전 무공이 많이 발달되었다고 한 다. 그러면서 어떻게 50년 전에 정파에게 진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주 오랜 세월이 걸쳐 보면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건 정파 쪽이라는데 이 이야기는 내가 할아버지께 들은 거지 실제로 사파 쪽 무공을 공부한 건 아니기 때문에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힘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쪽이 사파라 불린 건 아니고, 너무 힘 만 추구하다 보니 그 방법이 좀 악랄한 방법을 종종 취하게 되고, 그게 무림에 알려지면서 정파 쪽에서 우리가 옳은 방법으로 수련한다 해서 정파라 명명하고 그쪽을 사파라 지칭하게 된거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파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고,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한 건데 그게 전체를 그렇게 불리게 만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자기네가 흡혈귀인지 피를 마시면서 운기하면 내력이 더 빨리 쌓는 방법을 연구했다든지, 아니면 남의 내력을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한다든지, 아니면 그 무협지에서 흔히 나오 는... 여자를 강간하면서 그 여자의 기력을 빨아내 자신의 내력으로 만 든다든지... 뭐. 이건 나도 들은 이야기라서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 겠다. 하여간 그런 일이 있었댄다. 그래서 그 뒤로 사파라 불렸다나 어 쨌다나......... 근데 난 분명히 모든 사파 사람들이 그런 게 아니고 아주 극소수의 나 쁜 사람만이 그랬다는 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모든 사파 사람들은 낮보다는 밤을 더 좋아하는, 아주 음침하고 음산 하게 생긴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 자신들이 정파라고 으스대며 시비 거는 그 사람들보 다 훨씬 더 착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거였다. "헤에... 사파 사람들도 보통 사람같이 생겼구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 같아 놀라며 중얼거리자 희여송이 피식 웃었 다. "사파 사람들도 다 같은 무림인입니다. 단지 추구하는 방향이 조금 다 른 것뿐이죠. 그런데 그걸 인정해 주지 못하고 배척만 하는 건 안 좋은 겁니다." "아, 지금 보니 그런 거 같아요. 저 사람들도 보통 무림인이랑 같은 거 보니... 오히려 저 정파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더 나쁜 사람들 같은데 요, 어, 어, 싸우기 시작했다." 내 말에 일행들의 눈길이 객점 문 밖으로 쏠렸고, 거기에는 숫자의 열 세로 인하여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는 사파의 사람들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에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좀 너무하는 거 같은데요." "맞아. 별로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나와 같은 쪽에 앉아 있던 예성구, 예필, 예은이 허락만 떨어지면 곧바 로 뛰쳐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하자 희여송은 고개를 저었 다. "그러다가 일만 더 크게 벌어지면 곤란해. 이 주위에는 정파 출신의 무 림인들이 쫘악 깔렸다고. 우리가 나서서 말리다간 그들까지 끼어들어 서 일만 더 커질 거야. 저들이 안됐긴 하지만 조용하게 남양까지 도착 하길 원한다면 그냥 있도록 해." "하지만........." 이번에는 지원까지 항의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대사형을 바라보았지만, 희여송이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 다. 그래서 다시 희여송이 주문을 하려고 점소이를 바라보았는데, 이번에 는 점소이가 밖의 상황을 바라보느라 희여송이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 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에구, 에구 ... 저 사람들. 나쁜 사람들도 아닌데..... 어쩌나? 저러다 진 짜 큰일 나겠네." 아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듯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안타까운 표 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힘이 없던 터라 나서지 못하고 애꿏은 손만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예은과 예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났다. 평소 그들의 성격으로 볼 때 지금까지 참은 것도 참으로 용한 거 였다. 그러자 동시에 희여송의 날카로운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앉아!!" 하지만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그 둘이 그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파의 한 사람으로서 정파 사람의 옳지 못한 행 동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대로는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 허락해 주지 않으셔도 저희는 가겠습니다." 그러자 희여송의 눈이 매섭게 치켜 떠졌다. "지금 너희들이 누구를 모시고 있는지 잊어버린 거냐? 너희들 때문에 막내 사제와 사매(민이와 나)까지 말려들게 할 수도 있어!" 그의 단호한 말에 예필은 잠시 움찔거렸지만 예은의 단호한 말에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저희의 단독 행동으로 아시고 상관하지 말아주십 시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저희 둘이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렇 게 하면 아가씨와 도련님께는 피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둘이 몸을 날리려 하자 희여송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검 을 검집째 빼 들었다. "너희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움직인다면 내가 먼저 너희들을 치겠다.!" 이제는 완전 협박이었다. 희여송이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자 둘은 두려움을 느꼈는지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예은과 예필이 아직 낙성 검법을 다 익히지 못한 것에 반해 희여송은 예전에 익히고, 은하검법도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달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둘쯤은 충분히 제 압할 수 있다는 걸 우리 일행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예은은 참지 못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계속 막으시겠다면 실력은 안 되겠지만 뚫고 지나가겠습니다." 적은 저쪽에 있건만, 같은 일행임에도 불구하고 가려고 하는 자와 막는 자 사이에 생긴 신경전으로 불꽃이 튀는 상황에 내가 슬며시 끼어들었 다. "예은 소저, 누가 도와주려고 나타났는데?" 잠시 예은 소저에 대한 나와 민이가 부르는 호칭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리 모두는 33대 제자인데다가 출신 또한 은씨 세가이기에 나이가 나 보다 더 많은 그녀로서는 나에게 사저가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낙성검법을 다 익히지 못했기에 자신의 아버지를 정식 사부로 모시지 못한 상태였고,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할아버지께(물론 지금 은 배 숙부에게지만)은하검법을 배우는 입장이었기에 그녀는 내 사저 가 될 수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면, 세가에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낙성검법을 다 익히고 먼저 스승을 모시는 순서대로 사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서 만약 희여송이 지운이나 포능곽보다 늦게 은하검법을 배웠다면, 그 는 자신이 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이나 포능곽을 사형이라 불러야 했다. 그래서 나와 민이는 예은이나 예필을 사형이나 사저로 부 르지 않고 예은 소저, 예필 소협이라 불렀던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나 와 민이를 아가씨, 도련님이라 불렀으니 은하검법을 배우든 안 배우든 호칭에 어려움은 없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슬며시 중간에 끼어든 나의 말에 모두들 시선 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내가 말한 어떤 사람이 나서서 일방적으로 사파 사람들을 구 타하던 정파 사람들을 모조리 제압해 놓고 있었다. 옅어서 밝아 보이는 청색의 가운 비스무리한 겉옷을 입고 한쪽허리에 는 검을 차고 있었는데 실력이 상당한 듯 맨손으로 다섯이나 사파의 사람들을 제압했다. 그는 머리를 중국식 상투를 틀지 않고 그냥 길게 늘어뜨렸는데 빳빳한 생머리라서 그런지 정파 사람들을 제압하느라 움 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움직였는데도 엉키지가 않고 고스란히 본래 차 분했던 모습 그대로 가라앉았다. 근데 그 머리 길이가 보통 남자보다 더 길어서(남자는 보통 어깨만 조금 넘기거나 길더라도 등까지밖에 안 기른다) 허리까지 내려왔다. 여자면 몰라도 남자인데도 그렇게 머리로 기르고 다닌다는 게 좀 신기했다. 수련을 많이 해서 그런지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에 짙은 눈썹, 살이 없 어서 더욱더 두드러져 보이는 굵은 턱선, 단호하게 다물어진 얇은 입 술, 오뚝한 콧날에 날카로운 눈매가 남성다운 분위기를 퐁겼다. 아마 옷차림을 단정히 가운 같은 겉옷을 입지 않고 먼지가 어느 정도 쌓인 약간 낡은 옷을 입고 머리도 거칠게 풀어헤쳤으면 터프해 보였을 인상 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정한 머리와 깨끗한 옷차림으로 인해 어느 누구의 접근 도 허용하지 않을 차갑고 냉정한 인상을 풍겼다. 어찌 보면 아빠랑 비 슷한 것도 같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아빠는 남을 대하는 일에 서툴러서 얼굴이 굳어지다 보니 원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분위기가 된 것에 반해, 이 사람은 처음부터 남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눈길로 남들이 자 신에게 다가오면 귀찮은 표정을 역력하게 내보일 타입이었다. 그러면 서 세상의 모든 고난을 자신이 다 겪은 듯 허무함이 깊숙이 담겨져 있 었는데 지금은 그게 경멸과 멸시에 가려져 잘 안 보였다. 그가 오만한 표정으로 경멸스럽게 바라보자 그 시선을 내가 받는 것도 아닌데도 되게 기분 나빠졌다. 그런데 그걸 정면으로 받는 사람은 오죽 하겠는가? 5명의 무림인들은 자신들이 방금 그 단 한 사람에게 제압당해 땅을 굴 렀다는 것도 잊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둘러쌌고, 한 사람이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된 채 소리쳤다. "뭐냐, 네놈은? 왜 사파의 쓰레기를 돕는 거지?" 그러자 그의 입에 열리면서 얼음장처럼 차갑고 경멸에 찬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쓰레기는 네놈들이 아니던가?" "뭐,뭐시라?" "5명이서 3명을 상대로 사우는 게 정파의 사람이 할 짓이더냐? 게다가 싸울 의욕조차 잃은 사람들을 구타하는 게 정파의 방식이더냐?" 그의 날카로운 추궁에 할 말을 잃고 이만 빠드득 갈던 중 한 사람이 발 작적으로 외쳤다. "네 이놈, 네놈이 사파를 돕는 걸 보니 네놈도 사파 놈이로구나!" 그러자 비웃음이 분명한 미소를 흘리면서 그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어쩔 테냐?" 완전 도발하는 듯한 미소에 예의 그 다섯 명의 무림인들은 이성을 잃어 버린게 분명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에 자신의 병장기를 들고 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아까도 당했는데 이번이 라고 이길수는 없었는지, 각자 그에게 한 대씩 맞고 나가떨어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 나가떨어진걸 보면 강도를 더해서 때려준 것 같 았다. 아마 기절까지 한 듯 나가떨어진 정파의 무림인들이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하자 그제야 신나게 구타당했던 세명의 사파 사람들이 겨우 몸을 일으켜 자신들을 도와준 그에게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절뚝대는 다리를 서로 의지하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구경꾼들 중에는 이곳 시민의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근처에 있던 무림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망나니 같은 5명처럼 정파 쪽이라 고 자칭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모여있는 가운데에서 사파라 불렸는데도 부정하지 않던 사람이 정파 사람들을 때려눕혔으니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자신 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던 사람들은 더 더욱. "이거, 이거...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저런 형편없는 녀석들 이 정파인이랍시고 설치고 다녀 정파 사람들이 망신을 당하는구만 그 래?" 그러면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구경꾼들 중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창피한 줄 알았으면 아까 사파 사람들이 억울할 때 나 서주지 왜 지금 저렇게 잘난 척 나서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외공(내공과는 반대 개념의 무공, 내공이 기 쌓기 훈련이라면 외공은 신체 단련의 무공이다)을 주로 수련해 왔는지, 키도 보통 사람보다 머 리통 하나는 더 큰 데다가 우람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 굴이 붉은 데다가 턱에는 뻣뻣해 보이는 턱수염이 수북이 나 있는 걸 보자니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가 떠올랐다. 하지만 좀 비열한 장비라고 나 할까? 그가 시비 거는 어조로 말을 건네며 앞으로 나섰지만, 우리의 영웅께선 관심이 없는지 비열한 장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몸을 돌려 가버리려 고 했다. 그런데 그 비열한 장비와 같은 무리인 듯 한 사람들이 그의 앞 을 막고 비켜주지 않는 것였다. 결국 그는 무지 귀찮다는 기색을 노골 적으로 드러내며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뭔가?" 그의 거만한 행동에 그를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이 발끈했다. "뭐야. 사파 자식 주제에!" "저 시원찮은 녀석들 좀 이겼다고 거만 떠는 꼴이라니............" 어느 정도 무예를 수련한 사람이라면 무게감을 좀 가지고 있어야 보기 좋을 텐데. 저들은 자기들 가볍소....를 광고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처 럼 재잘재잘 스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러자 그 비열한 장비가 손을 척 들며 그들의 입을 막았다. 아마도 그가 일행들 중 대빵이었나 보다. "아, 난 솔직히 자네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건 아네. 그러나 아무리 덜떨 어진 녀석들이라 해도 같은 정파의 인물들인데, 사파의 인물에게 져서 나가떨어지는 걸 본 이상 같은 정파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서 말이지... 그 점 자네에게 양해를 바라는 바이네. 뭐 요즘은 너나없 이 무공 조금 익힌 녀석들이라면 죄다 정파랍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니 는 놈들이 많아서, 그런 놈들을 위해 나서는 것도 맘에 안 내키지만 어 쩔 수 없지 않나. 나 같은 진정한 정파의 인물이 사태를 수습해 정파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수밖에." 말은 길게 했지만 한마디로 사파에게 질 수 없다는 소리였다. '웃긴 놈.'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계속 웃으며 구경만 할 수 없는 게, 저 영웅이 진다면 지금 비척비척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는 녀 석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을 것이고, 이긴다 하더라도 또 저 비열한 장비 같은 녀석들이 나설 테니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여기 앞에서 사태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예은과 예필이 또 나서겠 다고 난리 칠 것이 뻔했다. "희 사형!" 내가 조용히 부르자 그가 날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여길 벗어 나죠." 그러자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사매.. 이곳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다른 객점들 또한 꽉꽉 차서 식당의 자리는커녕 방을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요...그냥 조금만 참고..." "아니예요. 솔직히 저런 모습 가만히 보고 있기도 뭐하고요... 제 말은 다른 곳으로 가자는 소리가 아니라 이 도시를 벗어나자는 이야기였어 요." "사매, 지금 이곳을 나선다면 노숙을 해야 할 텐데요?" "저와 민이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이렇게 불편한 곳에 있느 니 그게 더 편할 듯하군요, 게다가 저와 민이는 예전에 노숙도 여러 번 해봤으니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희여송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은 제 말대로 해주세요. 우선 지 사형과 곽 사형. 그리고 예 사형은 우리가 타고 온 말들을 지금 당장 가지고 이 도시를 벗어나세 요. 그리고 이봐요 점소이!" 여전히 밖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그를 톡톡 두드리자 그가 화들짝 정 신을 차리며 날 바라봤다. "예. 예. 주문하시죠?" "도시락을 준비해 줄 수 있어요? 간단하고 푸짐한 걸로. 음... 대충 10 인분 정도면 되려나?" 그러면서 맞냐는 듯 희여송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 끼로는 모자랍니다. 20인분으로 하세요. 거기에 술도 10병 추가해 주시고요." 나 말고도 일행 모두가 먹기는 엄청 먹어댔던 것이다. "들었죠? 얼마나 걸릴까요?" "에... 금방은 안 되굽쇼. 조금 시간이 걸리겠는뎁쇼?" "알겠습니다. 그럼 희 사형은 예은 소저와 예필 소협을 데리고 도시락 이 다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지고 오세요. 아, 유도 도와주도록 해. 음...북문에서 만나면 되겠죠?" 그러면서 내가 몸을 일으키자 내 지시를 받은 이들이 각자 자신들이 할 일을 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예은과 예필이 날 붙잡았 다. "아가씨, 설마 저희 때문에 이곳을 피하려는 건 아니겠죠?" "저희는 저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아가씨마저 그걸 막으신다면 저희는 일행을 벗어날 겁니다." "저 사람을 외면하려는 게 아니라 도와주려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도 시락이나 잘 챙겨." 그렇게 예은 소저와 예필을 달래놓고 나는 민이를 데리고 객점 밖으로 나가 구경꾼들 틈에 끼어들면서 주위를 살폈다. 나중에 튈 때를 대비하 여 주변 지리를 파악해 놓으려는 거였다. '음... 역시... 사람이 많아서 대로로 뛰어가는 건 좀 힘들겠어. 난 아무 래도 장애물 경기에는 약하니까 말야. 그렇다면... 그 길밖에 없겠군. 북문이 어느 쪽이더라. 아, 저쪽이군. 좋았어. 이걸로 준비 오케이!' 그렇게 상황 파악을 다 해놓고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는데 민 이의 메시지가 머리 속에 울려왓다. <누나 ,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 저 남자를 도우려고 그러지.> <사파 사람인데 괜찮겠어?> <헐.. 얘가, 얘가... 너도 파 갈라서 싸우려고?> <아니, 뭐 .. 도와주는건 괜찮은데 우리까지 일에 휘말릴까 봐 걱정 되 어서 그러는 거지. 사건을 일으키면 그 즉시 할아버지께서 돌아오라고 하셨잖아.>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너도 저 사람을 돕고 싶지 않았어? 그러니까 사건 안 일으키고 도우면 되는거야.> <어쩌려고?> <그건 말이지..............> 나는 드디어 시작되는 싸움을 구경하면서 민이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이렇게 하면 괜찮겠지?> <흐음.....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관건은 나하고 너하고 얼마나 타이밍을 잘 맞추느냐야. 너는 최대한 빨리 해야 해. 안 그러면 내가 타이밍을 맞출 수 없으니까.> <알았어 최선을 다할 테니 누나도 조심해.> <흐훗... 걱정을 마라.> 그렇게 민이와 내가 의논을 다 끝낼 때 즈음 되어 영웅과 비열한 장비 의 싸움도 거의 끝을 맺었다. 퍼억! 질긴 가죽을 몽둥이로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지면이 지진이 난 것 처럼 흔들렸다. "와, 또 이겼다." "저 청년 참 대단하구먼 그래........." 무림인 사이에 끼어서 구경하던 시민들이 감탄의 말을 한마디씩 했지 만, 그건 곧 무림인들이 매섭게 노려보는 바람에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또 한 명의 무림인이 그와 맞서기 위해 나섰다. "나는 전진파 출신의 전 아무개라고 하외다." 슬쩍 주위를 살펴 도시락 담당 일행들을 찾아보니 벌써 저만큼이나 가 고 있었다. '좋았어.' 그들을 확인한 나는 이제 우리만 남았음을 느끼고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아. 지금이야!> 전 아무개라는 사람이 자기 할 말을 끝냈는지 검을 뽑으려고 하고 있었 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의 대결을 기대하며 막 검을 뽑는 전 아무개라 는 사람에게 쏠려 있는 틈을 타 민이가 번개처럼 뛰쳐나가 사파라는 이 유 하나만으로 세 번 연속으로 대결을 펼칠 뻔했던 그를 잡아채 지붕 위로 날아 올라갔다. 대로에는 사람들이 많아 경공을 제대로 펼칠 수 없을 테니까 지붕 위로 올라가 뛰라고 말해 놨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무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병장기를 뽑으 며 민이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내가 그들을 향해 외쳤다. "타임!!" "자아아압~ 아아아아~ 라아아아~!!" "도오오오~ 마아아앙~ 가아아안~ 다아아아~!!" "노오오오~ 치이이이~ 지이이이~ 마아아아~ 라아아아~!!" 그들의 사간이 현저히 느려졌기에 평소 같으면 빠르게 들렸을 그들의 고함 소리가 잔뜩 늘어난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처럼 질질 늘어져 들렸 다. 그러면서 민이 뒤를 따르기 위해 지붕 위로 솟구치는 그들의 모습 이 마치 슬로우 모션을 틀어놓은 비디오마냥 처언~천히 상승하고 있 었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영문을 몰라 저들이 뭔 장난하는 건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나는 슬쩍 그곳을 빠져나와 걸음을 빨리해 그 들을 벗어난 다음 경공을 펼쳐 북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란스러움을 눈치 챈 일행들이 벌써 말 위에 한 명씩 올라타 있었고, 잠시 후 민이까지 도착하여 그 영웅에게 말 하나를 내주고 난 민이와 같이 탄 뒤 말을 재촉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행히 민이 뒤를 쫓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직 마법에서 풀려나지 않았던 터라 북문이 죄끄만 점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맘을 놓지 못해 그 도시가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 을 달리다가 사방이 깜깜해져서야 말을 멈추고 야영할 자리를 물색했 다.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희여송은 우리가 자리를 다 잡고 모닥불까지 하나 피우고 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별 것 아닌데요, 단지 틈을 봐서 이분을 모시고 도망쳤을 뿐이에요." 민이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희여송의 눈썹이 꿈틀했다. "도망쳤을 뿐이라니요, 혹시나 실력이 뛰어난 자가 있어 사제를 따라잡 았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건 누나가 해결하기로 했는데요..........." 그러자 희여송의 눈길이 나에게 향했다. "사매... 설마 ... 그들과 검을 섞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요?" "아뇨,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즉각 대답하자 희여송을 비롯한 주의 사람이 놀 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추격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겁니까? 설마하 니 아무도 안 쫓아온건 아닐 텐데요." "아아.... 거기 있는 사람들 모조리 쫓아오긴 쫓아오더라구요. 수십 명 의 사람이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어요." '슬로우 모션으로 뛰어 올라가는 폼은 말이지.........' "그럼 어떻게...........?" "아아 , 직접적으로 대치는 안 하고 편법을 사용했을 뿐이에요." 희여송은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해 줬다. "그건... 비밀이에요." 갑자기 주변에 침묵이 깔리면서 모두의 황당하다는 시선이 나에게 쏟 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영웅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도움을 받은 것 감사하게 생각하오." 척 보기에도 오만해 보이더니만 그가 말하는 말투는 도와주지 않아도 자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괜히 끼어들었다는 것처럼 들 렸다. 그래서 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먼저 그에게 대꾸했다. "감사할 필요 없어요, 당신 때문에 끼어든 게 아니라 우리 일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든 것뿐이니까." 그러자 일행의 놀란 눈이 나를 향했고, 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가. 그럼 감사할 필요는 없겠군." "전혀 없어요." "어허허엄............." 내가 좀 딱딱대자 희여송이 갑자기 크고도 긴 헛기침을 해댔고,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일행 근처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지 는 거였다. 나는 혹시나 우리를 쫓아온 건가 싶어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쪽을 노려보았다. 만약을 대비하여 이 근처에 마나를 퍼뜨려 놓고 있 었던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날 멀뚱히 쳐다보다가 곧 희여송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긴장한 채로 자신의 검을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그제야 뭔가 있다는 걸 알아챈 일행들이 저마다 일어나 긴장한 채로 우 리가 바라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인기척은 점점 가까워졌고, 곧 그 사람이 내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 렸다. 저벅,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면 두 사람이었다. 조심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두르는 것도 아닌 평범하게 걷는 발자 국 소리.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따라온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조금 긴장을 풀긴 했지만, 그래도 확인하기 전까진 완전하게 맘을 놓을 수 없었다. "거기 누가 있소?" 희여송의 외침에 이쪽으로 다가오던 발 소리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 니 조금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곧 드러 나는 그들의 모습. 그 모습을 보자마자 민이 녀석이 제일먼저 뛰쳐나가며 반갑게 외쳤다. "아니, 단목 형님이 아니십니까?" '저 녀석 언제 지인을 사귄 건지... 그런데 단목이라면,,,,,,,,,,,,' 나나 민이가 알고 있는 단목 성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단 목대현, 단목대혁밖에 없었다. 결혼식 보러 모용세가에 갔다가 만났던 형제. 민이가 반갑게 달려나가자 그와 함께 반가이 대꾸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이거 은 아우 아닌가? 하하하. 만나서 반가우이." 잠시 후, 민이와 함께 우리 일행에게 다가온 두 사람은 내 생각대로 단 목대현과 단목대혁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같이 모용세가에 갔었던 희 여송과 예성구, 그리고 유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다가오자 포권을 취 해 보였다. "단목 공자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도 그들과 같이 포권을 취해 보이며 인사말을 건네자 그 둘도 포권을 취에 이에 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은 소저." "모용세가에서 뵈고 다시 뵙는 건가요?" 그렇게 한차례 인사가 오가자 민이가 물었다. "그런데 두 분 형님들께선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아아...... 우리는 일행을 찾으러 왔다네." "일행...이요? 일행이 있으셨습니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민이에게 피식 웃어 보이며 단목대혁이 일행들 사이에 있던 영웅에게 다가갔다. "이들과 같이 가는 걸 뵙고 쫓아왔는데 늦었군요. 괜찮으십니까. 신 대 협?" "아는 사이였어요?" 어리둥절해하며 묻는 내게 단목대혁이 대답했다. "저희 일행입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일행을 수습한 건 희여송이었다. "자자, 나머지 이야기는 앉아서 하시겠습니까? 저녁도 드셔야지요. 두 분 단목 공자님들께선 저녁 식사를 하셨는지요? 안 하셨다면 같이 드 시겠습니까?" "그거참 고마운 말이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단목 형제까지 끼어든 우리 일행이 모닥불에 둘러 앉자 아 까 객점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 돌려졌고, 우리는 그걸 먹으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 단목 형제들고 우리들처럼 무림대회에 가는 길이었는데 양양에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 거라고 했다. 원래는 객장 이 다 차서 셋이 헤어서 빈 곳을 찾는 사이 그 신씨 성을 가진 남자가 일을 당한거고, 뒤늦게야 그걸 안 두 형제가 돕기 위해 달려오는데 한 발 늦어 민이가 먼저 그 남자를 데리고 튀었던 것이다. 그걸 보면서 자 신들도 뒤쫓아 오려고 했는데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그 도 시를 벗어나는 데 평소보다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려서 이리 늦어진 거 라고 했다. '어머나, 이들도 내 마법에 걸려 버린 거구나,' 뒤쫓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려고 그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다 마법에 걸리도록 범위를 넓게 잡았더니만, 운없게 단목 형제까지 그 범위 안에 들어갔었나 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민이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저희들은 그것도 모르고... 세 분을 헤어지게 만들 었군요." "아닐세. 우리가 미처 도와주지 못한 걸 자네가 도와준 거니 오히려 우 리가 감사해야지. 도와줘서 정말 고맙네. " 그렇게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단목대혁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아직 대회의 본선이 열리려면 세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가는 건가?" 그러자 민이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 그게.... 실력은 안 될 것 같지만.... 예선부터 치르고 싶어서 말입 니다. 그래서 어른들보다 한발 앞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어른들께선 본선이 치러질 때에 맞춰 출발하실 겁니다." "그래? 이런 우연이 있나, 우리도 그럴 참이었다네. 그럼 잘하면 우린 본선에 올라가기도 전에 대련을 해볼 수 있겠군." "예? 형닐들께서도요?" "그래, 물론 어른들께선 좀 반대하시긴 했지만, 어떤가? 아직 우린 나 이도 많지 않으니 예선쯤 통과 못했다 하더라도 크게 망신스러운 것도 아니고 말일세. 이런 건 우리 나이에 해보지 언제 또 해보겠나?" 명랑하게 말하는 단목대현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흥분에 가득 차서 들 떠 있다는 것이 팍팍 티가 났다. "아, 그랬군요..........." "하하하! 어떤가, 은 아우,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남양까지 같이가지 않 겠나? 목적지도 같으니 일부러 헤어져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아, 뭐..........." 민이는 슬쩍 얼버무리면서 나와 희여송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자신 혼자 맘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희여송을 힐끔 바라 보니 잠시 생각해 보는 표정이 찌푸려지지 않는 걸로 보아 괜찮게 여기 는 모양이었다. 나도 별로 반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 여 줬다. 오히려 단목대현같이 분위기를 즐겁게 띄울 수 있는 사람 한 명 정도 있으면 즐겁게 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와 희여송의 긍정의 뜻을 비추자 민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 았다. "좋습니다, 형님 ." '근데... 민이가 언제 저 사람들과 친해진 거야?' "그런데... 저분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보통 분이 아니신 듯 한데...." 조심스런 희여송의 질문에 우리의 시선이 모두 그 신씨 성을 가진 남자 에게로 모아졌다. 그는 아까부터 조용히 앉아 자신의 몫으로 받은 도시 락만 먹고 있었는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별로 대화에 참여하 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여튼 어지간히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아, 우리 세가 분은 아니시고, 전 무림대회 때 처음 만난 사이지. 비록 9대 문파나 8대 세가에 속하신 분은 아니라 하나 무위가 엄청 뛰어나셔 서 본선 8강까지 오르신 실력자라네. 8강 때 정말 아쉽게 대련에서 지 셨지. 그 무위에 반한 내가 쫓아가서 친분을 만들었다네. 운 좋게도 저 분 또한 귀주 지역에서 살고 계셨더라고. 내가 이렇게 예선부터 치르겠 다고 마음먹은 것도 신 대협의 영향이지." 이름은 신기수, 나이는 32세, 귀주에 있는 작은 집안 출신인데 9대 문 파나 8대 세가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다. 아마 그들과 예전에 무슨 일을 겪어서 그런 것 같다고 단목대혁이 귀뜸해 줬는데 말하는투 를 보아 그들도 추측만 할 뿐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듯했다. 그래도 단목대현이 워낙 세가의 장손답지 않게 명랑, 싹싹, 쾌활해서 이정도까지 친분을 쌓은 모양이었다. 하긴 틈만 있으면 동생과 함께 신 기수네 집에 쳐들어가서 놀곤 했다니까 어지간히 속이 배배 꼬인 사람 이 아니라면 친해질 만도 했다. 그래서 그 친분 덕분에 이렇게 같이 무 림대회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근데, 이 사람은 진짜 말수가 적었다. 꼭 필요한 말을 할 때를 제외하곤 입을 거의 열지 않았다. 게-다가 그 필요한 말도 앞뒤 다 자르고 용건 만 간략하게 말하는데, 그 모습을 보니 한국에서 80년대 초 전화 예절 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멘트 '용건만 간단히!'가 떠올랐다. 그런데 생긴 건 꽤 괜찮게 생겨서(꼭 한국 축수 선수 안정환같이 생겼 다)입 꼭 다물고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거보니 주위 에 냉기만 풀풀 날린다면 완전히 얼음 조각이었다. 말재주가 없어서 입 을 다물고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데 다 자신이 관심없는 일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성격인 듯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면 저리 될 수 있는지 심히 궁금했지만 그것 보다고 그런 성격으로 아까 어떻게 그 사파 사람들을 돕게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거참.... 저런 사람도 있었네." 아무튼 단목 세가 형제와 신기수라는 사람이 이번 여행에 동참함으로 인해 도착할 때까지 지루하지는 않을 듯했다. 제23화 한여름 밤의 귀신소동 (여기까지 3부완결) 단목 형제 일행과 합류한 뒤 일주일쯤 말을 더 달리자 우리는 드디어 호북 지역과 하남 지역의 경계선을 지나 하남 지역에 들어설 수 있었 다. 이제 일주일 정도 더 달리면 남양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였다. 그런데 우리가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마 을에 도착하여 방을 구하지 못했다. 남양에 가까워질수록 그곳으로 향 하는 무사들이나 장사치들, 구경꾼들이 점점 들어나고 있던 탓이었다. 그래서 노숙을 하려고 했는데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리기 시 작했다.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리더니만 결국은 비를 내렸던 것이다. "곤란하군요, 이래서는 노숙도 할 수 없겠는데요." 난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희여송이 자신의 사제들을 데리고 어떻게 해서든 비라도 피할 수 있는 헛간이라도 구하려 했지만, 헛간조차 벌써 다른 사람들이 차지한 뒤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 는 그가 안됐는지 마지막으로 간 곳에서 헛간조차 꽉 찼다고 말하던 객 점 주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무인이시라면 담이 크시겠죠?" 갑자기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니 객점 주인이 머 뭇머뭇하며 말을 이었다. "어떤 곳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말입니다......" 뭔가 있다는 소리에 희여송이 반색을 했다 "비만 피할 수 있다면 괜찮소, 돈도 얼마든지 주겠으니......" "아뇨, 돈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게......" 뭔가 있기는 있는데 쉽게 말을 모사고 우리 눈치만 살펴보던 객전 주인 은 재촉하는 눈초리에 결국 입을 열었다, "그게... 폐가라서 말입니다." "폐가?" 뭐 마을에 폐가 하나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데 주인은 이상하게 도 그 말을 하는 데 머뭇거렸다. "예, 그게 좀 큰 집이라서 나리 일행들이 충분히 하룻밤 머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도대체 뭐 때문에 그리 머뭇머뭇거리는 거요?" "아, 그게... 그러니까...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거든요." "귀신? 허허허, 그런 거라면......" 희여송이 괜찮다는 듯이 말했지만 주인이 정색을 하고 그의 말을 가로 챘다. "허튼소리가 아닙니다요. 그 집이 꽤 괜찮은 집이라 예전에 몇 번이나 사람들이 살려고 했는데, 그 집에 살림을 차리는 족족 얼마 안 가다 다 죽고 말았습니다. 많이 살아봤자 한 달을 넘기지 못했지요. 그래서 요 즘은 아무도 그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요. 호기심에 들어갔 다가 살아 나오지 못한 자들도 부지기수거든요." 그러자 희여송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살아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소?" "아, 그게...낮에 들어가면 아무 일 없이 멀쩡하게 살아 나오는데, 밤에 만 들어갔다 하면 변을 당하지 뭡니까? 밤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사람 도 몇 있다고 합니다만, 멀쩡하지 못한데다 귀신을 봤다며 헛소리를 하 니, 이게 귀신의 노릇이 아니고 뭡니까?" "흐음... 어쨌든 말해 줘서 고맙소." 희여송이 그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며 몸을 돌리자 객점 주인이 아 무래도 괜히 말해 줬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나리, 제가 하도 죄송해서 얼결에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행여 그곳 에 가실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비를 맞고 노숙을 할망정 귀 신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희여송은 그에 대한 대꾸는 안 하고 멀찍이 서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렇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모두 망설이는 표정으로 고민하는 듯했지만, 단 세 사람만이 동 시에 와쳤다. "반대!!" 예은 양과 단목 대혁, 그리고 나였다. 셋은 상대방들도 그럴 줄 몰랐는 지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곧 진한 동지애를 느끼고 결의의 눈빛 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민이는 내가 반대한 게 무척 의외였나 보다 "누나? 왜 반대하는데?" "귀신 나오는 집에 가느니 차라리 비 맞으며 노숙하련다." 나의 단호한 말에 민이 녀석이 잠시 멀뚱히 날 쳐다보더니 뭘 깨달았는 지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헤에... 누나, 귀신 무서워하는구나?" "그면 안 되냐?" 그러자 머리 속으로 들려오는 민이의 메시지. <용이면서 인간의 허상을 무서워 해?> '드래곤이기 전에 인간이었으니까 그렇지......' 지금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내가 인간이었을 때 여름이면 '전설의 고 향'이 항상 나왔었다. 그리고 그걸 보면 난 무서워서 밤에 잘 못 잤다. 이게 다 내 짖궂은 사촌 오빠 때문인데, 내가 채 10살이 되기 전 '귀신 의 집'에 날 데리고 가서 슬그머니 내 손을 놓은 다음 겁에 질려 있던 날 뒤에서 놀래켰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귀신의 집은 근처에도 못 갔고, 공포 영화는 보지도 못하게 되 었다. 그 기억이 지금까지 내려와서 귀신의 집 하니까 온 몸이 굳어버 렸던 것이다. 참 이상하게도 전 세계에 있을 때에는 흡혈귀나 언데드 같은 것들을 무 서워하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 갑자기 귀신∼ 하니까 겁을 먹게 되는 거다. 게다가 지금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때에 몇십 년이나 버려진 폐가에 가는 건 완전히 귀신 만나러 가는 것 아닌가? 그러느니 차라리 나에게 별 영향을 안 미치는 비 맞고 노숙하는게 훨 나았다. 이까짓 비 정도야 내 마법이면(물론 남들에게 눈치 안 채이게 해야겠지만) 얼마든지 안 맞을 수 있었고, 습기쯤이야 레드 드래곤인 나에게는 별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행에게는 난 온실 속에서 고이 자라난 16세의 소녀였고, 그들은 이런 나에게 밤새도록 비를 맞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이었으니 귀신을 무서워하는 16세 소녀의 의견은 완전 묵살되었다. "어쩔 수 없군요. 비를 맞으며 밤을 샐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린 괜찮지만 사제와 사매에게 비를 맞게 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땅이 젖어서 누울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의견이 점점 그 폐가에 가기로 결정되려는 것 같아 난 단호하게 말했 다. "난 거기 안 갑니다. 가려면 여러분들이나 가세요!" 정색을 하고 말했건만 사람들이 날 보는 시선이 철없는 어린애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로 희여송이 한숨을 내쉬며 날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사매, 사매를 두고 우리가 어떻게 갑니까? 우리가 함께 있을 테니 그 깟 귀신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자 지원과 포능곽도 그를 거들었다. "예, 귀신은 사람이 많으면 나오지 않는대요." "게다가 귀신은 불을 무서워한다니까 불을 환하게 밝히겠습니다. 그러 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밤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온 사람이 없다잖아요." 영화에서는 꼭 가지 말라는 데 갔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걸 잘 알고 있 는 나로서는 그곳에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다. 갔다가는 뭔 일을 당하 려고... 더구나 귀신이 나온다지 않는가? 내가 도리질을 치며 물러나자 이번에는 유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나 서며 내 어깨를 꽉 붙들었다. "주군,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군을 지키겠습 니다. 그러니 걱정말고 가시지요." 그러자 뒤에서 한숨을 내쉬는 민이...... "유. 우린 싸움터로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런 말까지 들으니 난 더 이상 뒤로 뺄 수가 없었다. 옆을 힐끔 보니 나의 동지들도 각자 뭔 말들을 들었는지 암 말도 못하고 대세에 묵묵히 따르려는 듯했다. '에이... 몰라... 어차하면 난 텔레포트로 튀고 말 거다, 귀신이 텔레포 트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까.' 그렇게 일행들에게 이끌려 가면서 나는 속으로 후회를 많이 했다. '우잉∼ 이럴 줄 알았으면... 신성마법을 조금이라도 배워둘 걸......' 지금만큼은 신성마법이 신전에서만 가르치는 거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처럼 신을 잘 믿는 드래곤은 아마 세상에 없을 거니 내가 신 관 해도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하면서. 일행들에게 이끌려 큰 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길에서 좀 벗어난 곳에 진짜 그 폐가가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 기 사이에 빛 한 점 없이 어두침침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은 뿌연 안 개에 휩싸여 있는 것이 마치 전설의 고향에서 처녀 귀신이 등장할 때 피어 오르는 허쳔 연기 같게만 생각되었다. '아...... 정말 가고 싶지 않아. 왠지 서양 귀신보다 동양 귀신이 더 무서 운 것 같아........' 그렇게 주춤대는 날 유와 민이가 이끌면서 우리는 제법 큰 저택의 대문 앞에 섰다. 오랜 세월 동안 주인이 없었다더니만 대문은 무지 낡아 있 었고, 한쪽 문은 위쪽 경첩이 떨어져서 아래쪽 경첩 하나로 간신히 기 둥에 붙어 있었다. 게다가 두꺼워 보이는 나무가 무지 삭아 있어서 조 금만 충격을 주면 바스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 문을 조심스레 열자 저 앞에 2층 짜리 건물이 보였고, 그곳의 입구 부터 대문까지 납작한 돌이 쫘악 깔린 길이 보였다. 하지만 그 양 옆은 물론이고 돌 틈새에도 잡초가 아주 무성했다. 그길에 돌이 깔려 있지 않았더라면 길이 있는지도 몰랐을 거였다. 그 길을 따라 건물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자 두텁게 쌓인 먼지가 피 어 올랐다. 그나마 비가 오는 중이라 습기가 많아 잘 안 피어 올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숨 쉬는 대신 콜록거려야 했을 것이 다. 창문과 문은 낡아서 반쯤 뜯겨져 그곳으로 비가 조금씩 들이치고 있었 지만, 천장은 새지 않아 비는 피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방 안에 널려 있는 가구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방 한가운데에 모 닥불을 피웠다. 그 방에 아주 오래된 등이 있어 그걸 밝혀도 되었지만, 아까 포능곽이 나에게 불을 환히 밝혀주겠다고 약속했기에 등을 키는 대신 모닥불을 만든 거였다. 그리고 우리는 쓰러져 있는 가구들 중에서 대충 깔고 앉을 수 있는 것 들을 구해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자, 이쯤이면 별로 무섭지 않지요?"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로 예성구가 짓궂게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흥!" 그의 말대로 모닥불을 피우고 일행 모두가 옆에 같이 있으니까 아까 귀 신의 집이란 소리를 듣고 겁먹었던 게 많이 진정되었다. 게다가 조금 지나자 고집 피우지 않고 이들을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던 참 이었다. 잠시 후에 이 주변을 돌아보겠다고 나갔던 희여송과 지원이 뭔가를 들 고 희색이 만연해서 돌아왔다. "뭘 가지고 왔는지 한번 보시지요." 보니까 세숫대야만한 청동화로였다. 그런데 둘 모두 비에 흠뻑 젖은데 다 안이 깨끗하게 닦여 있는 걸 보니 밖으로 나가서 씻어 온 모양이었 다. 게다가 화로 안에는 깨끗한 물이 담겨 찰랑거리고 있었다. 희여송은 그 화로를 모닥불 위에 올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육포로 때우는 것보다 뭔가 뜨뜻한 국물을 마시는 게 좋을 거 같아 가져왔습니다." 확실히 으슬으슬 추운 날씨에는 이렇게 딱딱한 육포를 구워먹는 것보 다는 맹물일망정 따뜻한 국물울 마시는 게 훨씬 좋을 것이었다. 그런데 희여송은 물을 끓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곳에다가 딱딱하게 굳은 떡 과 만두, 그리고 육포를 집어 넣고 끓이는 거였다. 그러자 지원과 포능 곽이 주위에 있는 나무로 된 가구들을 부셔서 단검으로 그것들을 다듬 어 젓가락과 그릇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호오, 손발이 척척 맞으시는군요. 감탄했소이다." 단목대현은 감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동생과 함께 젓가락 과 그릇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동참하여 종국에 는 자신의 것을 만드는 형국이 되었고, 덕분에 빠른시간 내에 모두들 젓가락과 그릇을 들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즈음에는 희여 송이 만든 잡탕국(?)도 완성이 되어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거나 막 넣어서 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가 떠준 국을 한모금 마 시자 의외로 짭짤한 게 먹을 만했다. 게다가 딱딱했던 떡조각이나 육포 조각이 뜨거운 물에 삶아져서 쫄깃쫄깃한 게 맛있었다. "오, 맛있어요. 정말 대단한데요?" 단목대혁의 감탄사를 서두로 모두들 한마디씩 놀라움을 표시함과 동시 에 희여송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우리는 기분 좋은 저녁 식사 시간 을 가졌다. 비록 잔뜩 먹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저녁도 먹 었겠다. 모닥불을 피워 주위도 따뜻해지자 밖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리면서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일행 모두 평화로운 얼굴로 마지막 작업인 불침번을 정하려고 할 때 단 목대현이 악동 같은 미소를 띠며 일행들의 얼굴을 둘러 보았다. "자, 슬슬 잘 시간이 될 것 같은데, 제가 자장가 삼아 재미있는 이야기 를 들려드릴까요?" 그의 미소가 장난기가 어려 있어 뭔가 불안했는데 역시나 그의 동생인 단목대력이 움찔하더니 자신의 형을 노려보았다. "형님, 또 귀신 이야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그러자 단목대현이 능글맞게 웃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아우야, 이런 분위기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 그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 이겠느냐? 게다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밤을 지샐 수 있는 것이 어디 흔 한 일이더냐? 자고로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잡을 줄 알아야 한단다." "하지만 형님이 이야기해 주시는 건 너무 실감난단 말입니다.' 아주 정색을 하며 진저리를 치는 단목대혁을 보고 그제야 나는 그가 왜 나처럼 이 폐가에 오는 걸 반대했는지 눈치 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항상 단목대현이 실감나게 귀신 이야기를 해대는 바람에 그도 나처럼 귀신에 대해 무서움을 탔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무지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들은 바로 예성구와 예필, 그리고 민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이들만이 눈까지 반짝이면서 몸을 내밀었다. "단목 형님, 귀신 이야기 많이 알고 계세요?" 민이의 질문에 단목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좀 알고 있지. 들어보겠나?" "형님!" 단목대력의 처절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단목대현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얼마 전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어떤 시골에 사는 유생이 과거를 보러 수도로 가고 있었다네. 그런데 그는 수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 어서 길을 잘못 들어버렸지. 날은 어두워지고 거기다가 비까지 주룩주 룩 내리는 게 ...... 그래, 바로 오늘 같은 밤이었다네........" 전형적인 귀신 이야기의 서두, 단목대혁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곳을 벗 어나 조금 멀리 떨어져서 귀를 막도 드러누웠다. 나 또한 귀신 이야기 엔 진저리를 치기 때문에 내 주위에다가 마법을 쳐 소리를 막을까 고민 하고 있을 때였다. "흐으으윽~" 아주 처절한, 한 맺힌 울음소리 비스무리한 게 들렸던 거다. "어? 저게 무슨 소리지?" '혹시'라는 생각에 온몸이 굳어지며 목소리가 쬐께 날카로워지자 모두 들 행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잠시 후에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으윽~~" 그러자 예필이 피식 웃었다. "바람 소리 아닙니까? 이런 밤에 바람이 좀 강하게 불면 저런 소리가 나기도 하지요."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그 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두의 긴장은 풀렸고 단 목대현은 다시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안 정이 안 되어서 이 근처에 누가 있는가 확인하려고 - 사실은 귀신을 확 인하려고....마나로 확인이 될지는 모르지만 - 내 마나를 조용히 대기 속으로 풀어놓기 시작했다. 제발 내가 잘못 들은 거고 아무도 없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이게 웬 걸........ 마나를 대충 은씨 세가를 다 덮을 정도로 퍼뜨렸을 무렵,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척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 실을 안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누군가 있어!!" 내 말에 모두들 다시 긴장한 무렵, 그 울음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이번 에는 더 크고 또렷하게. "흐으으윽~~ 허어어어억~~~ 억울하다아아아~~~" 남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예은이 비명을 지르며 옆에 있 던 예필에게 매달렸다. "까아아아악!! 나왔다!! 나왔어!!" 그녀의 비명 소리에 내가 더 놀라서 나는 얼결에 유에게 달라 붙었다. "뭐야, 뭐야!" 나머지는 곁에서 검을 뽑아 들어 경계하고, 희여송과 신기수만이 자신 들의 검을 뽑아 들고 방문을 박차 아예 부수어 버렸다. "누구냐?" 비 사이로 희끄무레하게 보이던 무엇인가가 희여송의 외침과 함께 사 라져 버렸다. 이 일대에 내 마나를 깔아놓았던 터라 평소 같으면 그 움 직임을 안 놓칠 나였지만, 지금은 너무 놀라 머리가 굳어버렸기에 그것 이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귀신이야, 귀신..........." 새파랗게 질린 예은의 목소리에 나조차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귀신이래, 귀신........" 그때였다. 신기수가 무엇을 느꼈는지 갑자기 검을 들어 방문 바로 위의 천장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곳이 부서지면 서 뭔가가 훤히 뚫린 출입구 앞으로 털썩 하고 떨어졌다. "흐어어어~~~ 억울해애애애~~`" 그건 흰옷을 입은데다 얼굴은 시퍼렇고 머리는 풀어헤쳐진 데다가 입 술은 새빨간 귀신이었다. "까아아아악!" 예은과 나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서로 잡고 있는 상대에게 파고들었 고, 그 순간 그 귀신은 훌쩍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우잉.................. 할아버지이이.............. 할아 버지이이............" 나는 유의 가슴패기에 얼굴을 묻고 눈물이 나는 것을 느끼며 저쪽 세계 에 있을 할아버지를 불러댔다. 내가 이렇게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날 도 와줄 수 있는 존재가 할아버지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민이가 내 어깨를 콕콕 찌르며 날 불러댔다. "누나, 누나아아~~" "왜? 나 부르지 마!" 나는 유의 가슴패기에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톡 쏘아붙였다. 그래도 이어지는 민이의 말. "누나, 그럼 저 사람 안 잡을 거야?" "사람은 무슨, 귀신이잖아!" "사람이던데?" "귀신이 원래 사람이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사람이야." "그래, 원래 귀신이 사람...... 뭐?" 유의 가슴패기에 매달려 소리만 냅다 지르고 있던 나는 하도 정신이 없 어서 뒤늦게서야 민이의 말을 알아듣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유의 가슴패기에서 얼굴을 떼고 민이를 돌아보자 민이가 어깨를 으쓱 거렸다. "사람이야. 사람도 머리는 풀어헤칠 수 있는 거고, 흰 옷 정도는 입을 수 있잖아. 얼굴이 시퍼런 건....." 그건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민이에게 내가 말해 줬다. "그건 분장한 거지." 한마디 한마디 씹어 내뱉듯이 말하는 날 보더니 민이가 흠칫거렸다. "헉, 누나 화났다.!!" 그랬다. 엄청 열받았던 것이다. "감히, 감히 날 놀라게 했겠다!! 이 자식, 넌 오늘 제삿날이다!!" 분노로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몸을 획 돌려 문가로 저벅저벅 걸어가며 동시에 이 저택 내를 휘감고 있는 내 마나를 느끼자 관연 그 빌어먹을 자식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기다!!" 그런데 내가 가리킨 것은 저택 내의 공중. 그 사람은 허공에 둥둥 떠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풀어헤친 머리가 비에 젖어 더 괴기스러 워 보였지만 사람이라는 걸 안 이상 무서울 건 없었다. "이 자식!!! 넌 오늘 죽었어!!" 하지만 이런 나와는 반대로 뒤에 있던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허, 허공에 떠 있어!" "저럴 수가............" "역시 귀신이었단 말인가!!" 나나 민이는 자신 스스로 하늘을 날 수 있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허공을 날지 못해 그 모습에 기겁을 한 거였다. 뭐 경공 중에서 상승의 경지에 는 허공답보(허공을 평지처럼 걸을 수 있는 경공)나 능공허도(허공을 날 수 있는 경공)가 있다지만 그건 전설로만 내려 오는 소리고, 현 시대 에서 최고의 상승 경공 실력이라고 해봐야 초상비(풀잎을 밟고 서 있을 수 있는 능력)나 답설무흔(눈 위를 밟아도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몸 을 가볍게 해서 펼치는 경공), 혹은 무력답수(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경 공)이 최상이고, 그것을 펼칠 수 있는자도 50년 전의 인물일 뿐 현재는 없다고 하니 일행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분노로 인하여 차갑게 식혀진 내 이성이 곧 그가 어떻게 해서 허공에 둥둥 떠 있을 수 있는지 알아냈다. "흥, 겨우 줄을 밟고 서 있었던 거냐?" 저택의 지붕 위쯤에 몇 가닥의 가느다란 줄들이 쳐져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 줄은 무척 가는 데다가 밤이라서 나도 잘 안 보일 뻔했 지만, 다행이 지금 비가 오는 중이라서 그 줄에 빗방울이 맻혀 주르륵 떨어지는 바람에 금방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발견한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검을 뽑아 들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2층 건물의 위쪽에 설치되었을니 약 4m 이상의 높이에 있었지 만 나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차앗!" 뛰어오르는 동시에 검을 휘두르자 검에 맺혀 있던, 이제는 제법 검기의 형상을 갖춘 얇고 날카롱운 검기가 검에서 뛰쳐나와 공중을 가르고 있 는 줄들을 잘라냈다. 그러자 그 공중에서 줄을 딛고 서 있던 인간이 훌쩍 뒤로 재주 넘기를 하더니만 냅다 대문 쪽으로 튀는 거였다. "놓칠 줄 아느냐!! 홀드!" 그러자 잘 튀어거던 그 인간의 발이 갑자기 엉겨 붙더니만 그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동시에 서너 번 데굴데굴 굴러간 후에야 멈춰서 널브러졌 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쫓아가서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이 자식이! 감히 누굴 놀려!! 앙? 너, 죽을래? 내가 진짜 귀신으로 만들 어줄까? 앙?!" 빗물이 흥건한 바닥을 몇 차례 구르느라 얼굴에 바랐던 푸른색의 물감 이 벗겨져 얼룩덜룩 한데다가 진흙까지 묻어 무지 지저분한 얼굴이 내 살기에 뻗뻗하게 굳어버렸다. "허, 허거걱......."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앙? 지금 누굴 놀리는 거야?! 빨랑 대답 안 해? 셋 셀 동안 대답 안 하면 가만 안 둔다?" 열심히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대답을 요구해도 이넘이 제대로 맛을 못 봤는지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건방진 넘을 어떻게 요리 해 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뒤늦게 날 쫓아왔던 민이가 날 만류했다. "누나, 그렇게 흔들어대면 누구라도 대답 못해." "............" 난 엄청 화가 난 나머지 그를 붙잡고 해골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흔들어 대고 있었던 거다. 그제야 내 실책을 깨닫고 그의 멱살을 놔주자 그가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하지만 다행이 기절은 안 했는지 곧 몸을 일으 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민이가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헤에, 기절 안 한게 용하네..........." 그가 그렇게 주저앉아 희여송이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심문하기 시 작했다. 그 귀신 분장을 했던 남자는 모든 걸 체념했는지 순순히 희여 송이 묻는 말에 대꾸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귀신 노릇을 한 건 몇 년 되었다고 했다. 그는 원래 고수를 바라보는 무인이었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무공 실력은 늘지 않고, 오 직 경공 실력 하나만 썩 괜찮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실력으로는 표국 같은 데서 좋은 대접도 못 받고 앞날의 희망 또한 보이지 않아 그 런 직장을 관두고 도둑이 되었다고 한다. 경공 하나에는 자신이 있었으니 수입도 꽤 괜찮아서 전국을 떠돌며 도 둑질을 하고 살아갔는데, 어느 날 이곳에 왔다가 날이 저물어 마을에 들어가 객점에서 쉬는 대신 이 폐허에서 하룻밤 신세 지기로 했단다. 그런데 운없게도 그날 이곳 2층에서 복면을 한 일당의 사람들이 회담 을 가지고 있었더란다. 얼결에 그 모습을 보다가 들켜 버린 그는 죽자 사자 경공을 펼쳐 도망갔지만, 결국 잡혀 버려 이젠 죽는구나 하고 있 었는데 자신의 경공 실력이 꽤 괜찮다는 걸 안 그들이 자신을 살려주는 대가로 이곳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귀신 노릇을 시켰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까지 귀신 노릇을 한 거예요?" 단목대혁의 말에 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도망갈까 봐 독약까지 먹였는걸 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해약을 가져다 줄 겸, 절 감시할 겸 그쪽 사람 이 옵니다. 그걸 먹지 않으면 죽는다니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귀신 노릇을 해야 했지요. 뭐 그 대가로 돈까지 받았으니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자 희여송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댔다. "그렇다고 사람까지 죽이는가?" 희여송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묻어 있어 그가 잠시 움찔한 듯했지만 덤 덤하게 대답했다. "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전 단지 사람을 놀래키고 심하게 해봐야 다 리 하나나 갈비뼈 하나쯤 분질렀을 뿐입니다. 그래야 다시 오지 않거든 요. 하지만 운없는 사람들은 이곳에 회담이 있던 날에 들어와 그들에게 들켜 죽임을 당했지요. 그건 제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그들이 운이 없 을 뿐이지..........."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모릅니다. 저에게는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들에 대해 이 야기한 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호담하는 날은 저도 이곳에 오지 못합니 다." "그들은 얼마나 자주 이곳에 모이는가?" "모임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한 달 만에 온 적도 있고, 어떤 때는 몇 달 만에 온 적도 있습니다." 그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희여송은 마무리 질문을 했다.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그러자 그가 힘없이 대꾸했다. "전 이제 죽을 겁니다. 그들이 누군가에게 들키는 날에는 절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설사 도망간다 해도 해독제가 없으니 곧 죽겠지요. 관청에 넘기신다 해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제가 덮어쓸 테니 아 마 사형당할 테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었던 일을 입 다물고 있으면 되지 않나? 자네도 입 다물면 이곳에서의 일은 아무도 모를 텐데?" 희여송이 제안했지만 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을 객점 주인에게 이곳 이야기를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 들 또한 여러분들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걸 눈치 챌 테고, 그럼 제가 추 궁당하겠지요." "우리가 귀신이 나타나도 덤덤했다고 하면 어때요?" 이번에는 민이가 제안했다. "그럼 내가 사람인 걸 들키지 않았을까 의심받겠죠." 이래나 저래나 정말 죽을 운명인가 보다 하고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 을 때 신기수가 나섰다. "자네 몸의 독을 해독하고 이곳에서 도망친다면 어떻겠나?" "그렇다면 살 희망이 있긴 하지만, 어떤 독인지도 모르는데 해독할 수 있겠습니까?" "해독만 해주면 도망칠 수 있다는 소리군." 그러자 단목대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신기수를 바라보았다. "신대협,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내공만 뒷받침되어 준다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네. 하나는 내공으로 몸 안의 독을 유도해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예 내공으로 몸 안의 독을 태워 버리는 것이지." "하지만 그러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할 텐데요. 적어도 일갑자 이상은 ..... 그런데 우리 중에 누가 그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혼자 할 필요는 없지. 비슷한 성질의 내공을 가진 두 사람이 힘을 모은 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그는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희여송을 비롯한 배 숙부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같은 시법과 운기 방법으로 내공 수련을 쌓았다면 내공이 비슷한 성질을 가지게 됩니다. 같은 가문의 사람들이라면 가능할 것 같 은데요." 게다가 우리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니 내공 또한 많을 것이 라 추측한 거였다. 하지만 희여송은 우리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익힌 무공이 있었으므로 빠지고, 대신 처음부터 가문 내에서 수련을 했 던 지원과 포능곽, 그리고 예성구가 나서서 그를 돕기로 했다. 성격이 가장 침착한 지원이 중심에 서서 내력을 유도하고 포능곽과 예 성구는 그 옆에서 내력을 보태주는 역을 맡기로 했다. 그래서 양반다리 를 하고 앉은 그 귀신 분장을 하고 있던 남자 뒤에 지원 또한 양반다리 를 하고 앉아서 그의 목 바로 밑과 허리 밑 부분에 양손을 대고 내력을 흘려 넣어줄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포능곽과 예성구는 지원의 뒤에서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앉아 지원의 혈에 손을 대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원의 말과 함께 지원의 내력이 서서히 그 남자의 몸속으로 들어가자 그와 함께 포능곽과 예성구의 내력도 지원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렇 게 세 남자의 내력을 받아들인 그 귀신 분장의 남자는 피부가 열로 인 하여 붉어지고 머리 위에서는 김까지 솟아올랐다. 얼굴은 고통으로 인 해 일그러졌지만 지금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이를 악물고 참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약 30분쯤이 흘러 그 귀신 분장 남자의 피부가 붉다 못해 보랏 빛으로 몰들 무렵, 그가 갑자기 울컥 하더니만 시커먼 피를 토해냈다. 아마 독을 태우지는 못하고 유도해서 밖으로 배출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자 내력을 보내주던 세 사람은 각자 손을 떼고 스스로 운기하 기 시작했고, 그 남자 또한 스스로 운기했다. 그렇게 해서 또 한 번 30분이 흐르자 한 사람, 한 사람씩 눈을 뜨기 시 작했다. 내력을 보태줬던 세 남자는 회복이 덜 되어서 그런지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모든 게 잘 되었다는 생각에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 귀신 분장을 한 남자는 우리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절을 한 뒤에 돌아갔다. 아마 이 길로 짐을 챙겨서 멀리 도망칠 터였다. 그 뒤로 우리는 새벽이 올 때까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벌써 한 밤중이 지나 버려 몇 시간 뒷면 새벽이 올 터였지만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잠을 자는 대신 명상 수련을 하려고 자세를 잡는데 머리 속에 민이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아, 아쉽다. 귀신을 진짜로 볼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그치?> <뭐가 아쉽냐? 난 다음부터 폐가에서는 절대 밤을 안 보낼 거 같아.> <하지만 귀신은 없는 거라고 오늘 밝혀졌잖아?> <누가 귀신이 없대? 오늘은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한 거지만, 귀신은 정말로 있단 말야.> <에? 누나는 귀신을 본적이 있어?> <에? 아, 아니 ... 아직 한 번도............> <거봐. 누나도 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하지만 책에서도 귀신은 있다고 그러고, 사람들 세계에서는 밝혀지지 않은 신비한 일들도 많이 일어나고, 귀신을 체험한 사람들도 있다고 했 단 말야. 귀신을 물리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던걸?> <헤에, 그 정도야? 하지만 난 잘 모르겠어. 내가 아직 인간 세상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걸까? 나도 진짜 귀신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다.> <끔찍한 소리 하지마, 난 보고 싶지 않아!!!> 민이가 소리 죽여 웃는 게 느껴졌지만 나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 내 자 신이 너무 창피했으므로 화를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비 개인 맑은 하늘 위로 밝은 햇빛이 비쳐 오기 시작했 다. 그렇게 해서 귀신 소동이 일어난 여름밤은 무사히 지나갈 숭 있었다. [[연재]] 아린 12권....제24화 제갈준희 소저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드디어 무림대회가 열리는 남양에 도락했다. 남양에 도착하기 직전 겪은 귀신 소동 뒤에 우리는 혹 그 폐가에서 귀신 노릇을 시 킨 수상쩍은 조직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두려워 그 마을에는 들르지도 않고 열 심히 말을 달린 탓에 일주일쯤 걸리는 거리를 이틀 단축하여 5일 만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때까지 우리를 뒤쫓는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우리 는 그 수상쩍은 조직에 관해서는 잊어버렸다. 하긴, 무림 대회를 앞둔 채 계속 그 생각에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좀 일찍 도착한 편인지 다행히 객점에 방이 꽤 남아 있어 우리는 수월하게 방을 잡 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동행한 데다 귀신 소동을 같이 겪은 탓에 우린 다목 형제 일행과 따로 떨어지는 대신 그들과 함께 묵기 위하여 크고 좀 고급스러운 방으로 잡았다. 운이 좋아 본선에까지 올라갈 수 있으면 한 달 이상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방값이 엄청 많이 들 테지만, 단목 형제들이나 민이나 나나 한세가 하는 자녀들이 었기에 돈 걱정은 하지 않고 냉큼 그 방을 잡았다. "자, 그럼 출전 신청을 하러 갈까요?" 먼 길을 걸어온 탓에 온몸에 때가 꼬질꼬질해서 목욕부터 하고, 든든히 먹고, 푹 쉬고 싶었지만 힘들더라도 출전 신청까지 하고 푹 쉬자는 희여송의 말에 이끌려 우리는 다시 우르르 객점을 나섰다. '무림대회 출전 희망 참가자 신청 접수처' 란 긴 말이 써있는 천은 무림맹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볼 수 있었다. 무림맹안은 은씨 세가보다 더 커 보였는데, 이 곳에 처음 오는 것일지도 모르는 신청인들을 배려한 탓인지 신청 접수처는 입구 에 있어다. 게다가 접수하는 사람 또한 10명이 주르르 앉아 있어 신청자들이 좀 많기는 했지만 우리는 얼마 기다리지 않아 신청서를 써 낼수 있었다. "일행이 열두 명이라고요? 흐음.. 많군요. 어느 문파의 사형제 들이신가 보죠?" 주르르 늘어서서 대표로 신청서를 작성하는 예성구- 그가 우리 중에서 젤 글씨를 잘써서 대표로 뽑힌거다-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 접수처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어왔다. "아뇨, 모두 오다가 우연히 동행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성구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모두의 신청서에 써야 하는 문파란은 비워뒀다. 아 무리 우리가 어리다고 하나 예선에서 탈락하면 창피하기 때문에 민이와 나는 예 전 이름인 현민과 현진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고, 단목 형제들은 '박'이란 성을 사 용하기로 했다. 가명을 무엇이라 정해야 할지 고민해하던 그들에게 내가 슬그머 니 가르쳐 준 성이었다. 저 머나먼 동쪽에 있는 나라의 성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박대현, 박대혁이 되었다. 우리 일행 중 나와 민이, 단목 형제들만 빼고 나머지는 감출 이유가 없었기에 신청 서를 완전히 작성했다. "흐음..같은 문파의 형제 분들이 아니라지만 일행인 건 확하니 예선에서 될 수 있 으면 안 붙게 해드리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피곤한 텐데 친절하고 배려 또한 세세해서 나는 그 사람이 꽤 맘에 들었다... 이곳 예선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어쩔수 없어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러니깐 둘씩 짝을 지어 진 사람은 탈락이고 이긴 사람은 이긴 사람끼리 또 둘씩 짝 을 지어 경기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같은 조에 있으면 언젠가 부딪칠지도 모르는 일이라 그는 우리 일행을 떨어뜨려 줬던 것이다. 예선은 무림맹에서 치러지는 게 아니라 남양 땅에 있는 중소 문파의 협조 하에 그 것에서 치러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본선만이 무림맹 안에서 치러졌는데 그 접 수원은 우리를 각각의 중소 문파로 뿔뿔이 흩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협조하는 문파는 5곳이 었기에 어쩔수 없이 우리는 2명, 혹은 3명씩 붙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단목대혁과 예은과 붙어서 청조각이라는 문파에 가서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어차피 단 문파에서 치른다고 하여도 심사는 공정을 기하기 위해 무림맹 에서 파견한다고 한다. 그리고내가 예선을 치르는 곳에는 무림맹의 현무단이 와 서 심판을 본다고 했다. '흐음...현무단, 주작단, 백호단, 청룡단이라..하긴, 동양의 4방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그거니...거기에 중앙단까지 합해서 5개의 단. 헷, 민이가 예선 치르는 곳은 청룡단이 심판을 본다니 좀 웃긴다. 민이 자신이 청룡인데 말야' 어쨌든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각기 갈린 사람끼리 모여 자신이 예선전을 치를 문파 에 가서 이것저것을 살펴본 뒤 객점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이 도시를 구경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만은 그 다음날 부터 난 객 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딴 사람들 모두 예선에 대 비하여 몸 단련하느라 놀 시간이 없었으므로 내 호위는 유 혼자밖에 없는데, 지금 전국 각지에서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이 도시에 호위 한 명 딸랑 붙여서 밖에 내놓을 수 없다는 것였다. 그리고 대회치르러 왔으면 그 준비를 해야지 놀러 나간 다는 게 원 말이냐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아시겠습니까, 사매? 사매는 이곳에 놀러 온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부터예선 전을 치를 때까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수련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은 부인께서 신신당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예선전이 열리기 전까지 사매를 객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보내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에잉...엄마두 참...." 내가 부루퉁한 얼굴로 낮게 투덜대자 희여송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뭐, 지금부터 수련 일정이 꽉꽉 짜여져 있으니 나갈 틈도 없을 겁니다." "윽...." 그렇게 해서 나는 예선전이 시작되기 전날까지 꼼짝없이 잡혀서 수련을 해야 했 다. 어차피 밖에서 하지 못하고 실내에서 해야 했기에 검법 수련 같은 것은 못하고 대신 가벼운 스트레칭 같은 근육 단련과 내공심법에 증점을 뒀는데, 희여송을 비 롯한 모든 이들 또한 예선을 치를 몸들이었기에 날 주시할 이가 아무도 없어 나는 수련 중간중간 농땡이를 쳐도 되겠구나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대회에 참가 안 하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그 이름은 바로 유!! "주군, 설마 지금 딴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윽!' 유는 내 심복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것이 희여송보다 더 깐깐하게 굴었다. 그가 내 감시 역을 맡아서-민이야 워낙 범생이고 다른 이들은 아주 진지한 모습들이었 으니 역시 문제는 나 하나뿐이었다.-항상 날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 금만 농땡이를 부리는 기색을 보인다 싶으면 저렇게 한마디씩 했다. 그리고 이어 지는 건... "주군, 이건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던 것입니다만 강호는 너무나 험난한 것입니 다. 이런 곳에서 사실 분은 항상몸과 마음이 단련되어 이어야 합니다. 제가 항상 주군을 지켜드릴 수 없는 일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주군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 도록 강해지셔야 하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단련하는 건 대회를 준비한다기보다 앞날을 위해 주군 스스로를 단련한다 생각하시고 진지하게 임해주시기 바랍니 다." 그렇게 그의 설교가 이어지면 희여송은 너무나 옳은 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이들이 내가 또 한번 농땡이를치려 했다는 걸 눈 치 챘다. '우쒸....' 참으로 억울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솔찍히 나는 민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대회 우승을 목표로 이곳에 오느 것이 아니라 구경을 목적으로 온 것이었다. 그래 서 단 사람들이 객실 내에서 열심히 수련하는 동안 나는 도시 안을 돌아다니면 지 리를 익혀놓을 셈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대회가 시작돼었을 때 이도시 안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행사들을 구경할수 있을 게 안니가? '하아..그런데 이렇게 꼼작없이 갇혀 있어야 하다니..그냥 예선 시작될 때를 노려 야 하나 봐.' 그렇게 천장 한 번 보며 한숨 한번 쉬고, 바닥 한 번 보면 한숨 한 번 쉬면서 겨우 겨우 한 달쯤 버텨서 드디어 예선 날짜가 가까 워져 희여송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건만 웬걸. "예 사매, 유. 알겠는가? 절.대.로. 은 사매에게서 눈길을 떼어놓지 말도록 하게. 혹시라도 은 사매가 길을 읽어서 혼자 길거리를 방.황-왜 이걸 강조하면서 날 바 라보는 건지...-하는 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절.대.로. 은사매를 혼자 두지 말게. 예 사매가 예선을 치를 때는 유, 자네만 믿겠네. 그리고 예 사매도 자네 일이 아니 고서는 절.대.로. 절.대.로. 은 사매 곁을 떠나지 말도록. 심지어 보일 보려 간다 해 도 같이 동행하여 볼일 보는 옆에 서 있도록 하게나." [아... 저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요주 인물이 된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절대로' 란 말을 몇번이나 하는거야? 한번만 말해도 알아듣는다구.] 민이에게만 이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 하고자 메시지로 투덜거렸지만, 이 매정한 동생 녀석은 내 편이 아니었다. [그러길래 평소에 조용히 있었으면 좀 좋아? 얼마나 누나에게 질렸으면 저러겠 어?] [내가 도대체 뭘 어쨌다구 그래? 막말로 야, 내가 할아버지랑 같이 살면서 일 저 지른 적이 도대체 몇 번이나 있었냐?] [수도없이 많았지. 올해야 특별 수련을 받느라고 누나가 별 사건을 안 일으켰지만 , 그전에 어디 그랬어? 아, 특별 수련 받기 전에 장서 내에 사과 파동을 일으킨 것 도 누나잖아?] [쳇,쳇,쳇,쳇! 그건 내가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검술 실력 좀 늘리려고....] [두 번만 순수했다가는 사과 파동이 아마 호남 지역까지 넓혀 졌을걸?] [쳇,쳇,쳇!] 민이가 말한 그 사과 파동이란 아주,아주,아~주 단순한 사건일 뿐이었다. 일상생 활을 쬐에에~끔 벗어난 사건이랄까? 우리가 수련하기 전이니까... 아마도 8월 달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풋 사과는 물론 이제 막 익은 사과까지 모습을 보일 즈음이었으니까 그때가 맞을 거다. 어느 날 온 가족이 모여서 티타임을 가졌었는데, 그때 엄마가 사과를 준비해서 우리가 보는 데서 껍질을 깎았다. 근데 그 사과를 공중으로 던져 과도를 몇번 휘두르자 사과가 4조각이 되어서 접시에 살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오옷... 저것은 가끔 만화에서만 보던 고수들의 사과 자르기 ~!' 그게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하고 싶은건 꼭 해보고야 마는 난 그날 당장에 고수들의 사과 자르기 연습을 시작 했었다. 근데 그게 보는 것처럼 쉬운게 아니었다. 사과가 공중에 떠있는 상태로 칼질을 빠 르게 두번하여 정확하게 4등분을 하는 거였으니까 칼질하는 속도가 조금이라도 느리거나, 힘이 조금이라도 적으면 사과는 베어지는 게 아니라 칼에 맞아서 멀리 날아가 버리는 거였다. 게다가 잘리는 단면조차도 칼로 썬 것처럼 베어지는 게 아 니라 맞아서 깨져 버리는데, 그 힘 조절하는게 무지 힘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과의 중심부를 기준으로 정확하게 4등분을 해야 하는데, 사과 의 모양이 어디 일정하던가? 각각의 모양이 천차만별이니 그 각각의 크기에 맞추 어 칼을 휘두르는게 의외로 빠른 눈썰미가 필요한 일이었다. 뭐, 한마디로 그렇게 어려운 사과 자르기를 연습하다 보니 연습에 사용되는 사과 가 쬐께 많이 들어갔다고나 할까? 하루에.......음.... 지금 생각해 보니 약 100개쯤 들었나? 뭐, 일정하지는 않았다. 하기 싫은 날은 50번 정도만 연습했고, 좀 의욕이 있는 날 은 100번 좀 넘게 연습했었으니.... 아, 내가 생각해도 좀 무식하게 했다. 어쨌든 그래 가지고서리 덕분에 장서 내 시장에서 사과를 보기가 쬐께 힘들어졌 다는.... 핫,핫,핫..... 내가 좀 실력이 없어서리.... 그거 익히는 데 시일이 쫌 걸렸었다. 그 래서 사과 보기가 더 더욱 힘들었는지도.... 아마 울 집이 부자가 아니었다면 감당 못할 일이었을 거다. 덕분에 울 집안 사람들은 사과를 아주 진저리치도록 먹었었 다. 결국 먹다 먹다 못 먹어서 이웃 분들게 나눠 드려 가지고 해결했었다. 근데 한 일주일쯤 지나니까 그분들도 진저리를 치시고 안 드시더만.... 헷,헷,헷, 뭐, 그랬다는 거지. 그런 사연을 가지고 어느 날 드디어 아무 사과나 던져 정확히.... 는 아니더라도 하 여튼 비스무리하게 사과를 4등분 할 할 수 있게 되어 아주 의기양양하게 엄마 앞 에서 시전해보였었다. 그랬더니 엄마가 후후후 하고 웃더니 사과를 공중에서 던 져 칼을 휘둘렀는데 그 사과가 괘씸하게도 접시에 딱 떨어진 다음 8조각으로 나뉘 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괘씸한 사과였다. 그래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 경지까지 오르겠다고 난리치자 총관과 아빠와 민 이가 날 결사적으로 말렸드랬다. 쳇,쳇,쳇,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번엔 사과에 질렸으니 배로 하려구 했는데........... 난 내 스스로가 아주 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큰 말썽쟁이란 소리는 안 들을 정도 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게 아닌지, 예은 소저나 유는 아주 진지하고 굳은 각오 를 한 표정으로 희여송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덕분에 나는 예선전 때도 밖으로 나갈 수는 있었지만 둘이 내 옆에 딱 붙어서 어디로 가보지는 못하고 청조 각이라는 문파와 객점만 왔다리 갔다리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얼마나 처량한 신세란 말인가....' 청조각이라는 문파 내에서도 예선 참가자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 세 연무장에서 동시에 경기가 치러졌는데 다행이도 우리 셋은 각 팀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첫 예선전이 끝날 때까지는 하루에 몇 번씩 경기가 진행된다고 정해져 있었다. 수 만은 사람들이 하루, 혹은 그 이상을 기다리지 않게끔 하려는 배려인 듯 했다. 하 지만 그 다음날부터는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시간이 되는 대로 경기 가 진행되게 되었다. 그래서 첫날은 자신의 경기가 시작될 즈음에 와서 대련하고 객점으로 돌아가도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음에 자신과 겨루게 될 사람이 누 구인지, 그리고 그의 실력은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 자신의 경기가 끝난 뒤에, 혹은 시작하려면 한참 있어야 하는 데도 예선 첫 경기가 시작될 때부터 와서 가려 하지 않았기에 경기장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내가 경기하는 그룹에 속한 이들만 해도 약 300여 명은 되어 보였다. “와! 200명이라 계산하면 첫 예선전만 해도 100번이나 치러야 한단 소리잖아? 그 럼 예선전만 해도 몇 번이나 치러야 돼? 심판들은 죽어났군.” 바글바글한 인파를 헤쳐 자리를 잡으며 혀를 내두르자 유가 나지막하게 대꾸했 다. “이런 기회가 흔한 게 아니니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 수밖에 없겠죠. 하 지만 이들 중 절반은 다음 경기를 치를 수 없을 테니, 아무리 많아 보여도 숫자가 줄어드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을 테죠.” “쩝… 맞는 말이긴 해도 막상 들으니까 살벌하다.” 경기 순서는 먼저 신청서를 내는 대로 짜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신청서를 좀 일찍 낸 편이었기에 나는 첫날 7번째에 치르게 되어 있었다. 나와 같이 청조각 문파로 배정받은 예은과 단목대혁도 각각 6번째 7번째였기에 지금 자신이 대련하게 될 연무장에 가 있어서 내 옆에는 유만 있었다. 비슷한 시간이 경기가 진행될 테니 끝 나자마자 청조각 문파의 정문에서 만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뭐, 하지만 단목 대혁이나 나는 만약에 첫 시합에서 이긴다면 그 다음 상대는 우리 다음에 경기할 두 사람중 한 사람일 터라 그들의 시합까지 보고 나서 약속 장소로 간다고 했으니 예은이 먼저 날 찾아올 것이 틀림없었다. 내 첫 상대는 산에서 만났다면 산적이라고 오해할 만큼 키 크고, 덩치 크고, 단정 치 못한 머리에 텁수룩한 수엽이 나 있는 남자 였다. 그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가 사용한 것 같은 긴 자루가 달려 있는 도(도는 한쪽에만 날이 있는 무기다. 가장 대 표적인 도는 부엌칼, 일본도인 사시미. 부엌칼을 보면 알 수 잇듯이 베거나 써는 데 유용한 무기다. 검은 양쪽에 날을 가지고 있다. 유럽 중세 시대에 기사들이 가 지고 다녔던 바스타드 소드가 바로 검이다. 찌르기에 유용한 무기다)를 가지고 있 었는데, 그 도의 날이 내 손으로 두뼘쯤 되는 것이 되게 무거워 보였다. 그 남자는 수염때문인지 나이가 30대로 보였는 데 척 보기에 힘도 무지 세 보였 다. 하지만 내공은 나보다도 적었는 데, 그는 내가 어린 데다 여자애라서 그런지 날 무지무지 깔봤다. “푸하하하! 얘야, 여긴 소꿉놀이 하는 곳이 아니란다. 조쪽에 가서 네 또래 애들이 나 찾아보지 그러냐?” 내공이 낮아서 그런지 상대의 내공 크기를 가늠해 보는 능력은 없는 듯했다. 그러 니 저렇게 대놓고 깔보지. 그는 내가 아무 말 없이 꺼내 드는 소검을 보더니 또 웃어댔다. “푸하하하! 너에게 딱 어울리는 검이로구나. 그걸로 사람을 찌를 수나 있겠냐? 혹 시 피만 보면 무서워서 벌벌 떨며 우는 거 아냐? 난 우는 애 달래는 재주는 없는 데?” 나는… 아무래도 쓸데없는 자존심이 강한 애인가 보다. 예선전에서는 엄마에게 배 운 검술만 이용해서 치르려고 했는데, 저렇게 애라고 무시하는 사람을 보니 정정 당당하게 싸우고 싶은 맘이 사라지는 거였다. ‘뭐, 이번 한 번쯤이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검을 다시 검집에 끼워 넣고 그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 자 그 모습을 본 그가 또 웃었다. “푸하하하! 그래그래, 잘 생각했다. 항복하려는 거지? 이 대인께서 넓은 아량으로 네 항복을 받아주도록 하마. 푸하하하~” 그런 그와 세 발짝쯤 떨어진 곳까지 오자 나는 멈춰서서 그를 향해 오른팔을 수평 으로 들곤 손바닥을 펴며 외쳤다. “위디 위더 피스트!!” 그러자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바람으로 형성된 거대한 주먹이 형성되어 나를 깔보느라 방심하고 있던 그 남자를 후려쳐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우악~!” 쿠당탕! “장외! 현진 승!” 그 남자는 나에게 밉보인 관계로 자신의 무기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탈락하고 말 았다. 근데 내가 마법을 사용한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장풍을 쓴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자, 장풍?” “장풍이었어?” “저런 어린애가?” “설마…….” “못 봤어, 저 덩치 큰 남자가 나가떨어지는걸?” ‘장풍은 무슨 얼어죽을 장풍, 난 장풍 쓸 줄도 모른다구,’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경기장에서 내려오자 유가 다가와 물었다. “아까 사용하신 게 뭐였습니까? 설마 하니 장풍은 아닐 텐데요?” “장풍은 무슨… 그냥 기를 조금 뿜어내서 놀래킨 것 뿐이야.” “단순히 기를 내뿜은 것은 아니던데요?” “당연하지. 그냥 내뿜기만 해선 사람 하나 날릴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응용해 봤 을 뿐이야.” 그러자 유가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내시는군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주군이 무슨 대단 한 고수인 줄 오해할지도 모르니 다음부터는 주의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유의 잔소리에 대꾸해 주며 다른 경기장을 관람하고 있는 데 얼마 안 있어 예은이 사람들을 헤치며 날 찾아왔다. 그녀 또한 자신의 경기를 끝내고 그 다음 경기까지 본 다음 온 거라 하는 걸 보니 아마 그쪽 연무장에서는 우리와 시합이 비슷하게 진 행된 듯 싶었다(난 7번째 시합이었고 그녀는 6번째 시합). 그녀와 함께 정문으로 향하니 거기에는 벌써 단목대현이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그는 나 와 같이 7번째에 시합을 치렀을 텐데, 내가 나 다음 시합을 다 구경하지도 않고 나 왔는데도 그보다 늦은 걸 보니 아마 그쪽은 우리보다 시합이 더 뻘리 진행되었나 보다. 우리를 보자 빙그레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에 나는 그가 이겼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는 데, 내 생각대로 그도, 예은 도 모두 이번 시합에서 이겨 다음 예선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같이 일주일 후 다음 예선전이 치러지길 기다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본선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각 그룹당 4명뿐이었다. 그러니 청조각에 서는 모두 12명만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기에 나는 그 남은 기간동안 또 객점에 틀어박혀 수련만 해야 할 것이었다. ‘아… 이럴 거렴 차라리 그냥 져버리는 것이… 아냐, 너무 일찍 지면 자존심 상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객점으로 돌아오니 다행이 모두들 1차 예선전은 통과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뿐 우리 일행 모두는 조촐한 축하주 한잔 없이 저녁을 먹고 다시 각자의 수련 에 몰두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덕분에 축하하는 의미에서 오늘 하루만 놀자고 제 안했던 나는… 뭐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날 정오였다. 겨우겨우 희여송의 마수(?)에서 벗어나 휴식겸 점심 먹는다 는 핑계로 일행중 제일 먼저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와 한심하다는 유의 눈 초리를 받고 있는데 모자를 감싸며 내려오는 하얀 천에 의해 얼굴을 가린 어떤 여 자가 계산하느라 바쁜 주인장에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점심 시간이 가까워져 시끄러웠던 식당 내였지만 운 좋게도 내가 앉은 식탁 이 카운터 근처에 있던 터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실례지만 이곳에 신기수라고 하는 무사님이 묵고 계신가요?" 약간 주저하는 듯했지만 조용하고 담담한 어조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신기수?잠시만요, 숙박 명부를 보지요." 통통한 얼굴에 팔 자 콧수염을 기른, 인상 좋게 생긴 주인은 그 이상처럼 맘씨도 좋았는지 그녀의 물음에 쉽게 주판을 옆으로 치워놓고 숙박 명부를 뒤적거렸다. "요 근래 묵고 계실 거예요." "아,예.신기수, 신기수...신기수우...음...신기수......." 몇 장에 걸쳐명부를 넘겨보던 주인은 다시 되돌아오며 집어봤지만 이름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없군요. 아, 혹시 그분이 일행이 있으신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다른 분의 이름으 로 기입될 수 있는데." "글쎄요...그것까진 잘... 그럼 혹시 키가 좀 크고 잘생겼지만 차가운 인상에 검을 든 무사 분을 보지 못하셨는지요?" "죄송합니다. 요즘 무림대회 예선전 기간이라 무사 분들이 어디 한두 분이셔야지 요. 그렇게 말씀하셔서는 저는 잘......." "...그런가요?" 무지 실망한 듯 어깨가 축 처진 폼이 되게 안쓰러워 보였다. 결국 그녀를 외면하지 못한 나는 그녀가 내 옆을 지나갈 때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붙들었다. "아?" 옷자랑이 당겨짐에 의아함을 느낀 그녀가 돌아보자 나는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 어 보였다. 그러자 유의 다급한 전음성이 들려왔다. [주군, 어쩌시려구요?] [신 대협을 찾고 있잖아?]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일행이라고 말씀하시게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녀가 신 대협에게 해코지를 하려는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그래.] [주구운~ 주군이 그걸 어떻게 알아내시겠다는 겁니까?저 여자가 연기를 하는 거 면 어쩌시게요?] [아,거참 시끄럽네. 걱정말아. 나 그런 거 알아냘 수 있다니까~] 유가 열심히 날리는 전음성에일일이 대꾸해 주는 와중에도 나는 그녀에게 생긋 웃으며 내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녀는 어린 소녀가-16세면 어린 거지 뭐- 건방지게 일어난 것도 이나고 앉아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손짓으로 앉으라고 하는데도 일단 무슨 이유인지 들어나 보 자는 생각인지 화를 내지 않고 순순히 내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면서 슬 며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천을 모자 위로 걷어 올렸다. 비록 천이 얼굴을 가리고 있더라도 대춛 20세쯤 된 여자라는 건 눈치 채고 있었는 데 꽤나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을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진한 쌍꺼풀이 있는데 쌍꺼풀이 하나 가지고는 부족했는지 하느가 더 있어 보이는 조금 큰 눈에 오뚝한 코,얇지도, 그렇다고 도톰하지도 않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얼굴이 매우 작아 보였 다. 그러니 이목구비가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되게 예쁘게 배치되어 있었다. 피부 는 하얀 것도, 그렇다고 까만 것도 아닌 보통의 동양인 피부인 살구색이었는데, 그 녀의 얼굴을 보자니 동양인은 그렇게 하얗지 않아도 예쁠 수 있구나...하는 걸 새 삼 깨닫게된다.(보통 미의 기준이 하얗고 티 없는 피부였으니까.) 그런데 이 아가씨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는지 지혜로워 보이는 잔잔한 눈으로 날 흔들림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거였다. "소저,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인데요, 아까 신기수라는 무사님을 찾고 있다고 했죠? 왜 찾으시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자 그녀의 잔잔한 눈동자가 반가운 기색을 띠며 동그래졌다. "소저, 혹시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는 건가요?" '아...저렇게 좋아하면 미안스러운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아주 순진하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녀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하긴, 나라도 그랬을 거다. 아니, 난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앞에 앉아 있는 녀석을 가만두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굳은 얼 굴로 한참 동안 날 바라보더니 뭘 느꼈는지 얼굴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목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를...바라는 건 없습니다. 단지 그 분이 제가 아는 분인지 알기만 하면 됩니 다." "무슨 소리인지모르겠네여." 여전히 능청을 떠는 나는 유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싹 무 시했다. "내가 무엇을 말해 주면 될까요, 소저?" 떨리는 눈길을 감추며 그녀가 담담하게 물어왔다. "어떻게 그 무인이 남양에 있다는 걸 알았나요?"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한번 깨물도는 순순히 대꾸했다. "유연히 봤어요. 금방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지만...그래서 알게 된 거예요." "아아...그랬어요?" "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그녀에게 나는 방긋 웃으며 한마디했다.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라고 한 이유는, 비록 튀지 않으려고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옷이 꽤 비싼 옷감인 것으로 보아 그녀는 평범한 집 여인이 아닌 듯 했다. 그런 그 녀가 이렇게 온 나라의 무사들과 건달이 몰려드는 이 시기에 쉽게 밖으로 나와 돌 아다니다가 우연적으로 신기수를 봤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혹시 그녀가 신 기수가 예선전을 치르는 문파의 여식이라고 해도 내가 부모라면 딸내미를 집 안 에 꼭꼭 숨겨두거나, 아니면 예선전이 시작되기 전 미리미리 다른 지방의 친척 집 에 보내 버렸을 것다. 아무리 무림대회라고 해도 어떤 사람들이 몰려들지 모르는 데 어떻게 딸내미를 돌아다니게 하겠는가? 그것도 사람이 엄청 많아 여자 하나쯤 사라진다고 해도 티도 안 날 시기에 뭔 일이리도 당하려면 어떻게 찾으려고? 그런데 이 아가씨는 혼자 이렇게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집안 어른들 몰래 빠져 나온 게 틀림없었다. 하긴 슬쩍 보니 무공을 좀 익혔는지 내력을 좀 가지고 있었 다. 그런데 나의 말에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하지만 아랫입술만 꼬옥 깨물 뿐 더 이 상은 아무런 말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은 캐묻는 걸 그만뒀지만 그녀가 신기수가 이 도시에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이 결코 우연이 아 니라는 건 눈치 챌 수 있었다. "뭐, 소저가 나쁜 목적으로 신 대협을 찾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아무래 도 상관 없겠죠. 그냥 우연히 알았다고 해드릴게요."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왔다. "신 대협이 어디 계시는지 이제 말해 줄 수 있나요?" "저기 와요." 내가그녀의 뒤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에는 이층에서 내려오는 계단 이 나와 마주 보는 방행으로 있었는데, 거기에서 막 나머지 일행이 주르르 내려오 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살피던 그녀가 신기수를 발견했는지 얼른 고개를 돌리더니만 머리며 옷을 새삼 다시 확인하며 재빠른 손놀림으로 정리하는 거였 다. '호오.....' 왠지 왜 그녀가 신기수를 그리 찾아 남양 도시 내를 뒤지고 다녔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내 일행 중 가장 먼저 식탁에 다가온 민이가 딸랑 차 두 잔 만 놓여 있는 식탁 위를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날 보고 물었다. "누나, 배고프다고 먼저 내려가더니 뭐 하고 있었어? 식사를 시키긴 한거야?" "그게...사람이 많다고 조금 기다려야 한대.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아, 민 아, 이분은....." 거기까지 말했다가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도 모르다는 걸 깨닫고 그녀를 향해 어 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자 그녀가 나 대신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갈준희라고 해요." 민이도 포권을 취하며 그에 대한 답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다른 쪽에 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준희누님?" 그곳에서는 놀라움이 가득 담겨 둥그래진 눈을 하고 있는 단목 대현이 서 있었다. 그러자 그 제갈준희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소저 또한 놀라움을 표현했다. "어머나, 대현아, 벌써 와 있었어? 하지만 단목세가가 왔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 데?" "아하하...사정이 좀 있어서 저희 먼저 출발했습니다." 대현의 말을 잇기라도 하듯 같이 있던 대혁도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준희 누님. 어른들도 모두 평안하신지요?" 잘 아는 사람들인 듯했다. 그렇다면 분면 제갈준희라는 소저는 대단한 집안의 여 식이거나 문파의 제자일 것이다. '흐음... 하지만 내력은 겨우 1클래스 (20년 내공) 정도인데 (어느정도 이름있는 문파에서 20살에 20년 내공을 가지고 있으면 별로 재능이 없는 축에 속했다)?' 의아한 듯이 그녀를 살펴보는 나에게 유의 전음이 들려왔다. [제갈세가의 소저군요. 제갈세가는 비록 뛰어난 무가는 아니지만 무림맹의 군사 를 맡고 있는 집안입니다. 세력이 그리 크지 않다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집안입니 다.] '그래서 단목 형제들과 잘 아는 사이였군.' 유의 설명에 납득을 하며 나는 이제야 신기수를 발견했다는 듯 시선을 돌리는 그 녀와 그 시선을 덤덤히 받고 있는 신기수를 조용히 살펴보았다. "예전에...한번 뵈었던 분 같군요. 성함이...." 그녀가 잘 생각이 안 난다는 듯─내숭은...─말끝을 살짝 끌자 신기수가 담담한 어 조로 인사했다. "신기수라 하외다." "아, 예. 신 대협....이들과 일행이셨군요." 그녀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신기수가 입을 더 이상 열지 않자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 고 있던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눈치 채기전에 담담한 표정이 되어서 시선을 돌 리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 쳐 지나가면서 그녀의 전음이들려왔다. [소저,제가 신 대협을 찾고 있었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그녀의 간절한 전음성에 나는 단지 빙긋 웃어 보였을 뿐이지만 다시 확인하는 전 음이 없는 걸로 보아 그녀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쩝... 비밀을 지킬 자신은 없는데 말야. 뭐, 그래도 떠벌릴 생각도 없으니 상관없 겠지.' 속으로 피식피식 웃고 있는데 단목대현이 그녀에게 제안했다. "누님, 식사하셨어요? 안 하셨다면 저희와 같이 하시죠?" "응? 아아… 하지만…." '쯪쯪… 여기 있고 싶으면서…' 예의상 한 번은 거절하려는 그녀를 위하여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같이 하세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하지만 여긴 너무 복잡아니 자리를 방 안으로 옮기는게 좋겠죠?" "예? 제가 끼어도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반대하는 사람 없어요. 그럼 올라가죠?" 나는 그녀를 이끌고 제일 먼저 앞장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은씨 세가의 사람들이 내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왔고 제갈 준희와 아는 사이인 단 목 형제들 또한 신기수를 이끌고 따라왔다. "은씨 세가의? 아, 그렇다면 몇 년 전에 행방불명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그녀는 우리의 소개를 받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하하하… 예. 뭐, 그런 일이 있었죠." 원래 우리는 이곳에서 은씨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녀가 무림맹에서 큰 존 재인 제갈세가의 일원인 이상 언젠가는 밝혀질 것였으므로 그냥 본명을 알려줬 다. 뭐, 단목 형제와 잘 아는 사이 라는 것도 한몫했지만……… "어머, 반가워요.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은 부인을 뵌 적이 있었는데, 정말 아름답고 우아한 분이셨어요. 은진 소저는 그분의 외모를 그대로 닮았군요." "그런가요?" 식사가 나오기 전 그녀와 여러가지 대화를 하다 보니 나는 그녀가 분위기를 잘 파 악할 줄 알고, 말 또한 조심스레 가려 할 줄 아는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 가 제갈세가의 일원답게 아는 것도 많은 데다 성격 또한 나쁘지 않은 듯해 나는 그 녀가 맘에 들었다. 더구나…… 앞으로 신기수와의 사이를 관찰해 보려면 친해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저어,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죠. 나도 은진 소저 같은 동생이 생긴다면 정말 기쁠거 예요." "후훗, 동생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말씀 낮추세요." "호호, 그래도 될까?" 그녀는 예은 보다도 3살 많은 23살이었는데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한다. 여자가 17, 18세쯤에 결혼하는 것도 이 시대에선 늦은 편에 속하는 거니 그녀는 엄청난 노처녀에 속했지만, 무림에서는 결혼에 대한 강요가 좀 덜한 편이었기에 20대 혹 은 30대여도 결혼 안 하는 여자가 간혹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있는 세가의 딸이 20살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않은 것은 뭔가 이유가 있는 듯했다. 희여송의 귀띔으로는 예전부터 혼담에 대한 거론은 많았지 만 이상하게도 제갈준희가 혼인을 안 한다고 버티고 있다고 했다. '흐음………' 제갈준희는 그날 점심을 우리와 같이 한 뒤 수련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이유 하에 곧바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다음날부터 이번에 친해진 날 돕겠다는 명목으로 매 일같이 찾아왔다. 그녀는 일행 모두가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자질구레한일을 자처해서 맡았 고, 얼마 안 있어 수련 프로그램까지 만들어주거나 나와 예은의 스트레칭을 도와 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신기수는 그녀에게 누길 한번 주지 않았고, 그녀 또한 우연 인 척해서라도 그에게 눈길을 주는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는 성격이 아니라 그냥 옆에있기만 해도 행복해하는 타입인가 보다. 그러다 보니 제 갈준희가 아침에 와서 저녁에 돌아가도 사적인 대화는 오가지 않았고, 정말 필요 해서 하는 대화도 신기수의 예, 아니오뿐인 대답으로 끝나 버리는 거였다. '뭐야, 이거? 제잘준희 소저가 드나들면 뭔가 썸씽을 볼 수 있겠거니 기대했는데.. ... 어떻게 며칠이 자나도 뭔가 일어날 낌새도 안 보이는 거지? 이제 내일 모래면 2차 예선이 시작되어서 일행이 뿔뿔이 흩어진다구……' 결국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날 것만 같자 안달이 나 난 어떻게 해서든 썸씽이 일어날 꺼리를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다. '좋아, 하는 수 없지. 내 한 몸 기꺼이 희생해 주겠어!!' 지금 나는 다리의 유연성을 기르는 한편 근육의 단련을 위하여 다리를 세로로 쫘 악 벌린 상태에서 허리를 한쪽 옆으로, 가슴이 무릎에 닿고도 남을 정도로 숙인 채 오래 버티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위에서는 제갈준희가 내 등에 살짝 걸터앉아 무게를 실어주는 채로 시 간을 재주고 있었다. "진아, 견딜 만해?" "아아… 그럭저럭… 언니가 조금 무겁기는 하지만……헤헤헷." "어머, 얘는... 그런 실례되는 말을... 괜찮다면 오늘은 시간을 좀 더 늘려도 될까?" "끄응… 뭐… 하는 데까지 해보지 뭐……" 그러면서 눈길을 돌려 슬쩍 창밖을 보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제갈준희가 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인 것이다. 제갈준희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잠시 후에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일으켰 다. "어머, 벌써 날이 어두워지네. 안되겠다, 진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줄게." "응? 아, 그래. 그럼 언니, 내가 배웅을…윽!!" 나는 은근슬쩍 일어나는 척하다가 인상을 팍 쓰며 다시 주저앉았다. 약간의 신음 성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반응은 즉각적으로 왔다. "진아, 왜 그러니?" 제갈준희의 놀란 외침에 심법 수련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내 쪽을 바라보았고 희여송과 유가 놀라서 달렸왔다. "무슨 일입니까?" "주군?" "아하하… 아무것도 아냐. 하도 이러고 있었더니 다리가 저리네……." "아, 그렇다면 제가……." 옆에서 나와 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예은이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하 지만 그보다도 먼전 제갈 준희가 내 옆에 주저 앉았다. '오호호홋, 이걸 노리고 있었다.' "아니예요. 제가 할게요. 예은 소저는 계속 수련하세요." "아, 하지만 소저께선……." 예은이 망설이자 제갈준희가 방긋 웃으며 내 발을 잡았다. "괜찮아요. 조금 늦는다고 해서 큰일 날 일은 없으니까요." 유와 희여송은 이런 일을 해결하겠다고 나설 수 없을 거였다. 나와 같은 집안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엄연히 그들은 남자고 나는 여자였으니까. 그러니 내가 이렇게 엄살을 부리면 날 돌봐줄 사람은 예은과 제갈준희뿐인데 예 은을 이런 간단한 일에 신경 쓰게 놔둘 제갈준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저." "예. 걱정 마세요." 희여송의 정중한 말을 끝으로 모두들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미안해요. 언니… 으갸갸갸… 넘 저려… 언니이이~ 좀 사살, 사살……." "이렇게 해줘야 금방 풀려. 조금만 참아." "으갸갸갸∼ 하지만, 하지마아아안∼으갸갸갸∼" 나는 겉으로는 그렇게 엄살을 부리면서 곁눈질로 일행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흐음… 그렇다면 어디 한번… 슬립!!" 신기수만을 제외한 모든 일행들이 잠들어 버리게 조심스레 마나를 잘 조절하여 퍼뜨리고 마법을 걸었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이곳에 와서 기를 다스 리는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일정 범위 안에 모두 같이 있더라도 내가 원하는 사람 만 잠재울 수 있게끔 마나를 좀 더 섬세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일행 모두가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둘씩 마법에 걸려 자신들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결국 괜찮진 것 같다는 나의 말을 듣고 제갈준희 가 돌아가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에는 나와 제갈준희, 그리고 신기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잠이 들어 있었다. 아, 민이 녀석만은 눈 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에는 '이거 누나 짓이지? 뭔 일을 벌이려는 거야?'란 물음을 한껏 띤 채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모두들……."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제갈준희가 약간 긴장한 채로 잠들어 있는 일행들에게 다가 가 그들의 살펴보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잠들어 있다는 것 외에 어떤 증상도 발견 하지 못하자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이렁났다. "모두 무리해서 피곤했나봐요. 2차 예선전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하지만……." 내 말에도 납득하지 못한 채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신기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 다. 그 또한 제갈준희와 마찬가지로 잠들어 있는 일행들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별다른 이상한 점은 찾지 못하겠군요. 갑자기 모두들 잠들어 벌이는 것을 제외하 고는… 독은 아닌 듯해요. 우리들은 괜찮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고, 언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요? 오늘은 다른 때보다 좀 늦었는데……." 내 말에 제갈준희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돌려 창밖을 확인했다. 해는 벌써 서산에 반쯤 몸을 가린 채 하늘을 붉게 수놓고 있었다. "이런, 돌아가야겠구나." 황급히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는 그려에게 내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나보다도 먼 저 신기수가입을 열었다. "오늘은 바래다드리죠. 아무래도 혼자 가시게 하는 건 불안하군요." 정말 뜻밖이었다. 제갈준희 또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그러는지 무척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아, 저, 저는……."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으므로 얼른 끼어들었다. "그렇게 해요, 언니. 솔직히 그동안 언니 혼자 보내는 것이 맘에 걸렸었다구요. 오 늘은 심 대협께서 바래다주신다니 정말 잘됐네요." "아, 하지만 너희들끼리 놔두고 어떻게……." "저희는 괜찮습니다. 이래 봬도 자기의 몸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기특하게 민이도 한마디 거들며 나왔다. 그녀는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그에 상 관하지 않은 신기수는 자신의 검을 들어 허리에 차고는 문을 향해 걸어가며 그녀 에게 말했다. "갑시다." "에? 예에……." 얼덜결에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 제갈준희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고 얼 굴도 약간 붉어진 듯했다. "잘 가요, 언니. 이들을 침상에 빨리 옮겨야 하니까 배웅은 못하겠네요." 내가 먼저 선수쳐서 작별 인사를 하자 제갈준희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럼 내일 보자꾸나." 그 둘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민이는 그 둘이 객점 밖으로 나가고도 남은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날 돌아보았다. "누나, 이거 누나짓이지?" "오호호홋∼ 당연하지. 나 말고 누가 또 이런 재주가 있겠냐?" "도데체 무슨 속셈인 거야?" "곧 알게 돼!"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기어검술의 방법을 약간 응용하여 일행들을 침상에 다 던져 버리고는 마법을 시전했다. "클레어로디언 디벤져!!" 그러자 허공에 빛으로 만들어진 화면이 떠오르더니 그곳에 곧 두 사람의 모습이 잡혔다. 바로 신기수와 그가 데려다주고 있는 제갈준희였다. "아아… 나왔다, 나왔다. 내가 기껏 둘만 있게 만들어줬는데 설마 아무 일도 안 일 어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의자를 끌어다 놓고 걸터앉았다. 그렇자 민이도 덩달 아 내 옆에다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으면서 물었다. "뭐야, 누나? 왜 갑자기 주술을 쓰나 했더니만 저 둘만 같이 있게 해주려는 거였 어?" "응." "에? 왜?" "척 보면 모르냐? 저 둘 사이에 뭔가 일이 일어나길 바래서지." 그러자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민이가 물었다. "중매라도 서게?" "중매… 라고 할 수 있으려나? 난 단지 기회만 만들어줬을 뿐이야. 나머지는 준희 언니가 하기 나름이라고." "에? 왜 하필 제갈 누님이야? 혹시 제갈 누님이 신 대협에게 마음이 있대?" "응. 몰랐냐?" "엑? 누나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음… 몰랐나 보네. 하기사 언니가 워낙 티를 안 내서… 뭐, 그럴 일이 좀 있었지. 이제 그만 입 좀 다물어라. 저것 좀 보자." "아, 응……." 그러나… 그 둘은 기껏 둘만 있게 만들어줬더니만 한마디하기는커녕 서로에게 시 선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 걷기만 하는 거였다. 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 부터 시선 한번 안 주고 앞만 보고 걷는 건 신기수이고, 제갈준희는 그런 신기수를 처음에 한번 힐끔 보더니 체념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땅만 보며 걷고 있었다. "에휴, 저게 뭐야? 말이라도 좀 걸어볼 것이지……."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무림맹-제갈준희는 거기서 거하고 있었다.-은 점점 가까 워오건만 이 아까운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무지 답답했다. "에잉∼ 이런 답답할 데가… 그냥 헤어지기만 해봐라. 다시는 이런 기회 안 만들어 줄 테다." 실망스러운 기색을 가득 담고 투덜대자 민이가 쿡쿡 웃었다. "누나는… 딴 사람은 몰라도 신 대협인데 말 걸기가 쉽겠어? 신대협 근처에 있어 도 안 얼어붙는 게 다행이지. 신 대협이 워낙 차가운 사람이래야지." "그래도 이 황금 같은 기회를 그냥 저버리냐? 사랑은 용감한 자만이 쟁취할 수 있 다는 말도 몰라?" "에… 그나저나 곧 무림맹인데 안됐네… 누나가 기껏 기회를 만들어 줬는데 말야." "글세 말야. 말 한마디 못해보고 헤어지기만 해봐라."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제갈준희가 알아 준 건지 땅만 쳐다보고 걷던 그녀가 문득 걸을음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오늘의 마지막이 될 붉은 빛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신기수는 그녀가 멈춘 것을 금방 눈치 채지 못한 듯 몇 걸음 더가서야 멈춰 서서는 그녀를 향해 왜 안오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 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면서 부 드러운 미소를 짓는 거였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늘이… 참 아름답네요. 이상하죠? 다른 때는 안 그러는데 왜 하필 해가 질 무렵 에만 붉은빛을 띠는 걸까요? 마치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것인 양… 하루 중에서 가 장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군요." 그러나… 이 무뚝뚝한 인간은 그에 뭐라 한마디 대응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묵 묵히 서서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뭐 저런 무뚝뚝한 인간이 다 있나? 여자가 저렇게 무드를 잡고 나오면 뭔가 다정한 말 한마디라도 해줘야 하는거 아냐?" 내가 안타까움에 신기수를 나무라자 민이가 옆에서 피식 웃었다. "신대협의 차가움이 어디 하루 이틀이야? 하지만 누나도 예전에 차가운 미남이 좋 다고 하지 않았어?" "쳇, 그러갸 동경의 대상으로야 좋지만 저렇게 대시하려고 할때 어디 좋겠냐? 아 아… 언니도 차암… 그 많고 많은 남정네들 다 나두고 왜 하필 저런 차가운 남자랑 ……." 제갈준희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가 해가 완전히 서 산으로 넘어가 노을이 사라져서야 고개를 내려 신기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웃 긴건 신기수도 그동안 말 한마디, 손짓 하나도 하지 않은 채 꼼짝 않고 서서 그녀 에게 시선을 향한 채 그녀를 기다려 주는 거였다. "거참… 원래 성격인 거야, 아니면 신기수도 뭔가 맘이 있어서 그런 거야?" "글세… 하지만 신 대협도 제갈 누님이 아예 싫어하는 것은 아닌가 봐." 민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마따나 최소한 악감정은 없는 것 같다. 근데… 아예 아무 관심이 없는 거면 어쩌지? 그럼 더 골치 아픈데… 차라리 악감정이라도 감정이 있는 편이 더 낫지 않나?" "에이, 설마. 아무 감정 없는데 저렇게 기다려 줄까? 어… 신 대협이라면 그럴지도 … 음… 하지만 지금은 계속 제갈 누님을 바라보고 있잖아. 아무 관심이 없다면 바 라보겠어? 그냥 딴 데 쳐다보고 있다가 누님이 움직이면 그제야 움직이겠지." "그렇겠지? 뭔가 감정이 있는 거 같지?"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지는 가운데 고개를 내려 신기수를 똑바로 바라보던 제갈준 희는 또 한 번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적극적으로 대시할 용기가 생겼나 보다란 생 각에 숨을 죽이고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번 웃고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갈까요?" 휘청∼ "언니이이이∼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거야?"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그녀에게 들릴 리 만무하지만, 너무나 실망이 큰 나머지 도 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민이도 좀 기대하는 것이 있었는지 황당하다는 듯한 웃음만 흘렸다. 결국 그 둘은 무림맹까지 가지도 않고 무림맹 정문이 저 멀리 보이는 지점에 멈춰 서서 간단한 상투적인 인사만 나눈 채 헤어졌다. "뭐야, 뭐야, 이게 뭐야? 기껏 기회를 만들어줬더니만… 쳇, 내가 다시는 이런 기 회를 만들어주나 봐라." 그냥 아무 일 없이 헤어진 것에 실망한 나머지 투덜거리며 마법을 해체하려고 하 는데 민이가 그런 날 만류했다. "누나, 잠깐만. 저것 좀 봐." "응? 오옷∼" 민이가 가리키는 화면에 나타난 모습에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생각지도 못했는 데, 놀랍게도 제갈준희가 무림맹 정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신기수 는 헤어진 자리에서 꼼작도 않고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 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머나, 어머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냐?" 두 눈으로 봤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확인차 민이를 향해 묻자 민이도 놀랍 다는 듯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훗 아무래도 신대협도 제갈 누님께 호감이 있는 모양이야." "그런 거 같지? 미아, 왠지 예감이 좋구나." 내가 한 일이 헛수고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서 앞으로도 둘 사이 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금방 깨닫게 된 것이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난 더 이상 그 둘 사 이를 관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날은 예선 2차전의 바로 전날인데다 모두들 지난 저녁에 이상하게 금방 잠들어 버린 것에 의아함을 느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나는 더 이상 그들 을 따돌리거나 잠 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갈준희와 신기수,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줄 수도 없어 속으로 무지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지 저녁이 되어 준희 언니가 돌아갈 무렵이 되자 아무도 권하지 않았는데 신기수가 스스로 그녀를 데려다 주겠다고 자청하며 나선 거였다. 덕분에 일행들의 장난기 섞인 야유를 받긴 했지만, 그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덤덤히 서 있는 바람에 그 야유는 곧 사그라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로써 일행은 신기수와 제갈준희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채버 렸기에 그 뒤로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둘 사이를 배려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이면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일행은 또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제갈준희는 당연하게도 신기수 쪽으로 붙어 갔기에 나는 그 뒤로 둘만의 시간을 훔쳐보지 못하게 되었다. 유를 비롯한 일행이 항상 내 곁에 붙어 있는 바람에 마법을 사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잠재워 놓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항상 할 수는 없는 터 라 그냥 얌전히 포기한 채 내가 없더라도 둘이 잘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줄 수밖 에 없었다. 2차 예선은 4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예선 때는 워낙 경기도 많았고 또 초창기 에 제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 여겨 우리 경기가 끝난 뒤 다음 내 상대 가 될 사람 경기 하나만 보고 객점으로 돌아와 1차 예선이 끝날 때까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2차 예선부터는 본격적인 경기라 생각되었던지 일행 모두가 경기가 끝 났다 하더라도 돌아가지 않고 시합을 지켜보길 권했다. 그런 상황이니 내가 갈라진 일행들을 볼 수 있을 때는 그날 예선전이 다 끝난 늦은 저녁때쯤, 그때는 이미 제갈준희는 돌아간 상태였기에 난 둘 사이가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신기수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거니와 그가 뭔 일이 있었다고 얼굴 표정이 변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표정에서 알아챌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기수와 같이 붙은 포능곽에게 물어보기도 뭐했다. 그도 신기수와 제갈준희 사 이가 쬐께 신경 쓰이기는 했겠지만 그 보다도 더 다급한, 예선전에서 자신과 붙을 수도 있을 사람들을 살펴보느라 바빴을 테니 어디 둘 사이를 지켜볼 틈이나 있었 겠는가? '으음... 잘되어가고 있을까? 궁금하다, 괜찮을지... 분명히 언니가 고생하고 있을 거야.......' 그러나 3차 예선이 끝나고 4차 예선이 시작하기 전 주어지는 휴일이 돌아와야 제 갈준희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는 궁금해도 꾸욱 참을 수밖에 없었다. 1차 예선전과 2차 예선전은 시일이 좀 걸리기 때문인지 전 예선전이 끝나면 그 다 음날 바로 다음 예선전이 곧바로 시작되지만, 3차 예선전 다음부터는 예선전이 하 루만에 다 치러지기 때문에 다음 예선전은 휴식을 취하라는 뜻인지 2일 후에 치르 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2차 예선전을 4일 동안 치러지고, 3차 예선전은 3일 동안 치러지니 내가 둘 사이의 진도를 알아보려면 거의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아~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무지 한탄스럽게 느껴지는구나... 마법만 쓸 수 있었더라면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황은 알 수 있을 텐데... 으음... 마법만 쓸 수 있었더라면... 마법만.......' 하지만 유가 내 곁에 항시 붙어 있는 한 그건 힘든 일이었기에 나는 꾸욱 참고 3차 예선이 끝나고 제갈준희를 만날 날만 기다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또 마법을 사용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2차 예선과 3차 예선을 통과했다. 상대편한테 좀 미안한 감도 들고, 하필 나랑 붙게 된 그 사람이 안됐지만 나보다 강한 사람과 싸울 때 -그러니까 할아버지나 도서관의 그 노인이랑 상대할 때- 다급하면 마법을 사용한 것이 그만 버릇이 되었는지,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사용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신기수와 제갈준희 사이를 신경 쓰느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3차 예선이 끝난 날 밤이었다. 나는 어차피 첫날에 경기를 치렀기에 편안 한 마음으로 예선전을 구경하고 유의 닦달에 의해 명상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마나를 조용히 대기에 풀어놓고 자연 속 마나의 흐름과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마나의 움직임을 느끼는 데 집중하는 무렵 익숙한 마나 한 덩어리, 그러니까 사람 한 명이 객점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응? 어딜 가는 거지? 이 시간이면 모두 내공 수련을 하고 있을 텐데... 오호, 그러 고 보니 신기수는 나갈 이유가 있었지? 므흣, 밤 데이트인가?'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앞을 살폈다. 하지만 역시나 거기에는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한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유가 있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걸 보니 명상에 잠긴 것이 틀림없었 다. 그렇다 해도 내가 조금만 움직였다가는 당장에 알아채고 눈을 뜰 거였다. '으음... 어쩌지? 기냥 마법을 쓸까?' 하지만 유는 어찌 재운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에 있는 일행들이 무제였다. 신기수 를 쫓아간다고 해도 그들은 아직 자고 있지 않을 테니 분명 날 따라 쫓아오거나 말 릴 거였다. 특히나 희여송과 그 두 사제들이. 그렇다고 여기서 마법을 쓰자니 분명 마나의 파동을 느끼고 이상히 여겨 이 방에 온다면 낭패였다. '그렇다고 다 잠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쩐다?' 그렇게 나 혼자 고민고민하는 가운데 신기수의 기운은 점점 멀어져 갔기에 나는 황급히 마나를 더 퍼뜨려 그의 뒤를 쫓았다. 우선은 그를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 았기 때문이다. 아직 이 성내를 다 돌아다니지 못해서 지리는 잘 모르겠지만, 대기 중에 퍼진 내 마나가 가져다주는 느낌상 인적이 점점 드문드문-솔직히 늦은 시각이라 사람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해지는 곳으로 가더니 결국 근처에 인기척이 없는 곳까 지 가서야 신기수는 멈췄다. '오옷... 음흉해... 밤 데이트를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다니....... 므흣흣흣... 그러나 누군가가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모르겠지? 우히히히~ 기대하겠어용~!!'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속 있는데 멀리서 한 기척이 그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 다. 제갈준희는 내력이 별로 없는 데다 평소 나도 그녀의 내력이 풍기는 기운을 느껴 보지 못했기에 그녀인지 아닌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 시각에 만날 사람은 그 녀밖에 없을 거라 추측한 거였다. 뭐, 내일 그녀가 올 때 은근슬쩍 떠본다면 더 확실해질 것이다. '온다, 온다... 오옷... 둘이 만났다.......' 그러나 둘이 만난 것까지는 알겠는데 나는 단지 둘의 기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니 그들이 뭔 행동을 하는지, 뭔 대화를 주고받는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으음... 이거 참... 궁금한데. 궁금해... 둘이 뭘 하는 걸까?' 우선 대화를 주고받는지 둘의 기척은 처음에 만났을 때 그대로 전혀 움직이지 않 았다. '흐음. 신기수가 무뚝뚝해 보이더니만 무드조차 없잖아? 대화를 하더라도 어떻게 그 자리에서 그냥 할 수가 있지? 별이 잘 보이는 풀밭으로 그녀를 데려간다던가, 아니면 분위기 좋은 찻집에라도 가야 하는 거 아냐? 하기야, 둘이 만난 장소가 그 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만.......' 근데...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도 둘은 좀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왠지 불안감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우웅, 그냥 이야기만 하는 건가? 산책이라도 좀 할 것이지, 어떻게 그 자리에 그 냥 서 있으면서 대화를 하는 거지? 어엇? 지금 뭔가가......?' 나는 지금 둘 쪽으로 온 신경을 다해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 둘의 기운에 대 해서는 무지 민감해져 있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잘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기운의 미묘한 흔들림을 운 좋게 포착할 수 있었다. '이상해... 기운이 흔들리고 있어... 특히 제갈준희 언니 쪽이 심하게 흔들려. 내력 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신기수 쪽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네... 그리고 신기수도 흔들 리잖아? 다른 사람의 기척은 없으니 둘 사이에 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흥분한 건가? 기쁜 것 같지는 않고... 이건 마치... 그래, 무척 슬퍼하는 거 같아. 슬픈 기운이 느껴져.......' 사람의 감정에 따라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마나의 기운도 파동이 달라진다. 하지만 아직 내가 그 정도까지 쉽게 느끼는 경지는 아니라서 다른 때는 못 느꼈지 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알 수 있을 것 같아. 둘은 지금 슬퍼하고 있구나... 특히 언니는 무척 슬퍼하 고 있어. 슬픔만이 아니라 절망까지 느껴질 정도인걸... 이거, 이거, 진짜 언니인가 ? 혹시 딴 사람인 거 아냐? 으음... 하긴, 언니 내력은 내가 잘 모르니까 딴 사람을 착각할 수도 있겠지. 부디... 내가 착각한 것이길.......' 내가 제갈준희라 여긴 내력이 신기수에게 떨어져 나오더니 점점 멀어져 가기 시 작했다. 그런데도 신기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슬픈 기운을 띠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자정 즈음이 되어서 유의 권유로 인하여 명상 수련을 그만두고 잠자리 에 들었지만, 아까 느꼈던 기운들이 맘에 걸려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 뒤 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객점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신기수는 계속 그곳이 있 는 듯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내가 아침에 일어나 일행들과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 들어 오지 않았다. 일행들은 제갈준희도 오지 않고, 그도 아직까지 안 돌아왔다는 사실에 -일행 모두 그가 전날 늦은 저녁에 객점을 나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의아해했지만 곧 키득키 득거리면서 농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흐음, 아직까지 안 온 걸 보니 너무 즐거워서 오고 싶지 않은가 보군요." "그러게. 얼마나 즐거우면 올 생각을 안 할까?" "혹시, 이거 너무 진도가 나가 버린 거 아닐까?" "쿡쿡쿡... 그럼 우린 이번 대회가 끝나자마자 결혼식에 초대받을지도 모르겠군." "결혼식은 어디에서 할라나?" 그러나 전날 신기수의 기척을 계속 느끼고 있었던 나는 장난기 가득한 그 대화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주군? 나가시려고요?" 아침을 마치자마자 내가 머무는 객실로 돌아와 겉옷을 챙겨 입는 날 유가 의아하 다는 듯이 물어왔다. "응, 무림맹에 좀 다녀오려고. 딴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 "그럼 동행하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나서는 유를 바라보며 난 잠시 머뭇거렸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제갈준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좀 곤란할 것 같아서였다. "으음... 아무래도 유가 있으면 곤란할 것 같은데?" "그럼 희여송에게......."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어쩌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지도 몰라서 말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같이 있는 건 곤란할 것 같아." "그런 거라면... 제가 몸을 숨긴 채 주군을 호위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괜찮을까? 무림맹에는 고수들도 많을 텐데......." "기척을 숨기는 거라면 꽤 자신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도 다른 때보다 더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그렇게 유는 몸을 숨기고 난 홀로 일행들의 시선을 피해 객점을 빠져 나와 빠른 속도로 무림맹으로 향했다. 하늘이 우중충하니 곧 비가 올 것만 같아 빨리 다녀오려는 생각이었다. 무림맹에 들어가는 것이 혹시 어려우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출입 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단지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이름을 쓰고 들어가고 나간 시각을 적기만 하면 되었 다. '으음... 본명을 써야 하겠지만, 예선전까지는 전 이름을 쓰기로 했으니 여기다도 그렇게 해야겠지?' 무림맹 안은 예전부터 은씨 세가보다 크다는 건 눈치 채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훨씬 컸다. 마치 어떠한 마을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보통 마을과 다른 점이라면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무사라는 점일까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묻고 물어서 제갈세가가 거하는 건물까지 찾아오는 데 는 무려 30분쯤이나 소요되었으니 무림맹 전체의 넓이가 얼마나 큰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 건물의 대문을 지키는 두 무사에게 제갈준희를 찾아왔다고 하자 한 무사가 안 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어떤 20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와 같이 나왔다. 날 보고 따라오라면서 다시 들어가는걸 보니 그녀는 안내역인 모양이었다. 대문을 들어가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지나 안쪽으로 한참 더 들어가서 작은 동문을 열고 들어가자 잘 꾸며진 작은 정원이 보이고 그 뒤로 아담한 2층짜 리 건물이 자리해 있었는데 그녀는 그 건물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까 봤던 정원이 보이는 응접실이 듯한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나만 남겨두고 방을 나가 버렸다. 아마도 제갈준희를 부르러 간 듯했다. 제갈준희는 다른 시녀가 나에게 차와 다과를 가져다주고, 내가 차 한잔을 다 마신 다음에서야 나타났다. 단정한 옷차림에 단아한 행동거지는 평소와 같았지만, 잠을 못 잤는지 핼쑥한 얼 굴에, 눈은 쑥 들어갔고, 눈 밑이 까매진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어제 느꼈던 그 슬 픈 기운을 다시 느꼈다. "진이구나......."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휴... 설마라고 생각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그녀는 시치미를 뗐다.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시치미 떼지 말아요, 언니. 첨에 언니와 내가 어떻게 만난 건지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게다가 어젯밤 일, 난 눈치 채고 있다구요." 내가 여기까지 말하자 그녀의 얼굴에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었던 미소는 순식 간에 사라졌고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랬니?" "후우......." 기껏 생각해 줘서 기회도 마련해 주고 마음속으로도 열심히 응원까지 해줬건만, 일도 생각대로 되지 않고 당사자까지 저리 풀이 죽어 있자 나는 한숨만 나왔다. "도대체 이유가 뭐래요? 아마 신 대협 쪽에서 먼저 그만 만나자고 했을 게 분명해. 그쵸? 언니가 그랬을 리가 없지." 똑바로 바라보는 내 시선을 차마 받아내지 못하고 커다란 창 밖으로 바라보이는 정원으로 눈길을 돌린 채 한참이나 가만히 서있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간 있으면... 산책이나 할래?" "언니가 부탁하는 건데 없더라도 만들어내야죠." "후훗... 고맙다." 그녀가 날 안내한 곳은 그녀가 거하는 건물의 뒤쪽이었다. 그곳에도 정원이 꾸며져 있었는데, 건물 앞쪽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넓었고, 인공 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작은 호수에 연결된 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호수 위로는 구름다리가 걸려 있었고, 그 밑에는 연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이끌고 호수 위의 구름다리에 올라가서는 멍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호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뭐라 묻기도 그래서 나도 그녀 옆에 서서 연꽃만 내려다보았 다. '으음... 곧 비가 올 거 같은데....... 폼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시간은 많이 걸릴 것 같고... 결국 갈 때 비를 맞고 가야 하나 봐.' 그녀가 말해 주길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열릴 것 같지 않 던 그녀의 입이 열리고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작아서 하마터면 못 들을 뻔할 정도였다. "내가... 부담스럽대....... 자신과의 차이가 너무 난다나? 그래서... 감당하지 못하 겠대......." "후우... 상투적이네요." 연애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하디흔하게 쓰이는 소재지만, 어쩌면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그녀는 강호에서도 알아주는 제갈세가의 딸내미, 그리고 신기수는 이름없는 지방 의 작은 무가의 집안 아들내미. '신기수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루어지기 힘들지도... 으음... 그 래도 꽤 실력있어 보이던데... 그럼 이번 대회에 우승하거나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당당히 청혼하면 안 되나? 그런 목표라도 가지고 한번 해보기라도 하지. 이건 예선 끝나기도 전부터 포기해 버리냐... 에혀.......' 속으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나는 옆에 서서 호수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너무 우울해 보여서 까딱 잘못하다간 호수에 빠져 버 릴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언니도 그래... 그렇게 한 번 채였다고 포기해 버리냐? 그 정도밖에 안 좋아한 거 야? 폼 보니 무지 좋아했니 본데.'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다음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언니는 이대로 포기해 버릴 거예요? 신 대협이 한 번 헤어지자고 해서?" 그러자 의외로 답이 쉽게 흘러나왔다. "하아... 모르겠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너무 답답해." "에게. 겨우 한 번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푸욱 숙이더니 한참 그러고 있다가 아주 조그맣게 속삭이 듯 이야기했다. "...사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5년 전에도 그랬어. 그때는 이렇게 직접적으 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사라졌었지. 이번에 겨우 용기를 내어 찾았는데... 또 이 렇게 되어버리고 마는구나......." '5년 전? 5년 전이라고?' 5년 전이라면 전 무림대회 때일 것이다. 단목 형제의 말에 의하면 신기수는 그때 도 대회에 출전했었다고 하니 아마 둘은 그때 처음 만났었나 보다. '아니, 그럼 그때 둘이 사귈 뻔했었는데, 신기수가 아무 말 없이 은근슬쩍 사라졌 단 말야? 어허...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용기가 없는 남자일세.' 속으로 그렇게 씨부렁거리는데 제갈준희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어쩌지? 이젠 시간이 별로 없는데... 아버님께서 이번에는 잔뜩 벼르고 계시거든. .. 이대로 이번 무림대회가 끝난다면 난 아마도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결혼해야 할 거야." '헛... 그런 일이... 하긴... 제갈세가에서 언니를 그냥 냅둘 리가 없지... 참내, 신기 수는 이런 언니의 고민을 알고 있기나 한 거야? 아, 잠깐만. 혹시 그랬던 거 아냐? 뭐, 결혼 이야기가 오간다는 건 얼마든지 소문 이 날 수도 있는 거니까. 그걸 알고 미리부터 언니를 포기한 거 아냐?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어... 둘 다 바보같아. 뭐, 신기수의 속사정이야 모르지 만, 언니까지 이렇게 손 놓고 한숨만 푹푹 쉬면 어쩌자는 거야? 그런다고 뭐가 돼? 처음에 신기수를 찾아다녔던 그 용기는 다 어디다가 내팽개친 거냐구우!' 우울해 보이는 그녀의 옆모습을 힐끔 본 나는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 미안해... 난 니가 싫어졌어, 우리 이만 헤어져 다른 여자가 생겼어, 너보다 훨씬 좋은. 실망하지는 마, 나 원래 이런 놈이니까. 제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 그래, 이래야 했어. 이래야만 했어. 거짓말을 했어, 내가 결국 널 울리고야 말았어. 하지만 내가 이래야만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을 모두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 마음을, 내 결정을, 어쩔 수 없음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니가 날 떠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너무나도 잘 알기에 어쩔 수 없어, 널 속일게. 미안해, 널 울릴게....... ]] 예전 한국에 있을 때 좋아했던 가수 그룹 중 하나인 god의 노래였다. 아무래도 이 순간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아 나는 평소 랩을 못해 기피함에도 불구 하고 그녀가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또박또박 불러댔다. 처음에는 갑자기 이상한 노래를 불러 젖히는 날 의아하단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점차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아무래도 내 노래가 잘 먹혀 들어간 듯 보 였다. 하지만... 내 노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도저히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입술만 꼬옥 깨물고 무지무지 갈등하는 표정만 보일 뿐이었다. '에혀... 이거 하나 가지고는 모자르려나? 그럼, 다시 한 번.......' [[ Suddenly. 이렇게 나에게 찾아온 슬픔이 너무나도 힘든걸. Just for you. 마지막 한 번만 떠나는 그대를 볼 수만 있도록 내게 남겨진 기억 속에 마지막 모습 찾고 싶어 찾아간 그곳에서 그댈 볼까. 어떻게든 잊으려고 지우려고 했지만 더욱더 커져 가는 마음속에 상처뿐, 후회도 내 체념도 더욱 파고드는 그리움뿐. 하늘도 이런 나를 미워하고 있는지 내 모음 아프게도 적시고만 있는걸. 꺼멓게 다 타버린 나의 마음만이 남아 있는걸. Close to you. 기억에 잠기면 아직도 조금은 행복한 추억도 이젠 더 이상 의미없는 세상이 된걸. 바로 지금 편안히 잠들고파, 영원토록. 어떻게든 잊으려고 지우려고 했지만 더욱더 커져 가는 마음속에 상처뿐, 후회도 내 체념도 더욱 파고드는 그리움뿐.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을 만큼 힘든걸. 아무리 참아봐도 더해가는 고통도. 사랑이 참 이렇게 가시 가득 고인 아픔이란 걸. 마지막 한 번만 더 그대의 그림자조차 볼 수만 있게 해줘. 멀리서 다가오는 그대 모습 보았다. 갑자가 굳어버린 나를 원망했지만 차라리 그 모습을 보지 않았어야 했을 텐데. 내 볼에 흘러내린 빗물이 내 눈물을 감추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싶었어. 그렇게 스쳐 가는 그대의 향기만이 남이 있을 뿐. ]] '아, 오늘 내 밑천 다 나온다... 이건 랩 생략해야지. J-Walk 그룹의 노래까지 불렀 는데도 안 움직이면 내가 설교 한마디 해줘야겠어.' 내가 이 노래들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신기수는 언니가 정말 싫어서 헤어지자 고 한 게 아니라는 것과 이렇게 헤어져서 그렇게 계속 슬퍼할 거냐고 질책하는 뜻 이 담겨 있는 거다. 아마 제갈준희는 현명하니까 알아들으리라. 노래가 다 끝났음에도 그녀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설교까지 해야 하 는 건가... 생각하며 입을 여는데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갑작스레 날 스쳐 지나 걸 어가더니 그 걸음은 점점 빨라져 급기야는 뛰기 시작했다. "에휴, 이제야 가네. 언니~ 신 대협은 아마도 그 장소에 있을 거야. 가서 한 방 먹 여주고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줘~!" 열심히 달음박질하며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뒤에다 대고 소리쳐 주는데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빗물이 떨어지더니 급기야 쏴아~ 하고 쏟아지기 시작 했다. "흠, 그럼 이제 나도 따라가 볼까?"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는지라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 즈음되어 따라 가려고 몸을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스슥 하며 유가 나타나더니 내 어깨를 턱 하니 잡았다. "주구운~! 지금 어딜 가시려는 겁니가?" "에이, 다 알면서 뭘 물어?" "제갈 소저를 따라가려고 생각하셨다면 그만두십시오. 그건 실례 아닙니까? 게다 가 비까지 내리니 얼른 객점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에엣... 이 정도 비쯤이야 괜찮은데......." "주군, 설마하니 제갈 소저와 신 대협 사이의 일을 구경거리로 생각하시는 건 절. 대. 아니시겠지요?" '핫!' "돌아가시지요." '우쒸.......' 그렇게 말한 유는 다시 사라졌지만 나는 유의 말대로 객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제갈준희를 쫓아갈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유는 또다시 나타나 날 객점으로 이끌 테고, 유를 떼어놓는 것도 힘들기에 순순히 구경을 포기한 거였다. '뭐, 잘된다면 나중에 제갈준희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면 되니까.' 그러면서 느릿느릿 객점으로 돌아가니, 객점에 도착할 즈음에는 비를 쫄딱 맞아 서 온몸이 다 젖어 있었다. "아가씨,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딜 다녀오셨기에 이렇게 다 젖으신 거 죠?" 내 모습을 본 예은이 호들갑을 떨며 당장에 목욕 준비를 시키고 마른 수건을 가져 와 날 닦아주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내 방에서 머리를 말리 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나 못지 않게 쫄닥 젖은 신기수가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게 무슨 실례예욧? 여기는 아가씨 방이라는 걸 몰라욧?" 내 옆에서 같이 머리를 말려주던 예은이 벌떡 일어나며 언성을 높였지만, 그런 그 녀는 아랑곳 않고 다가온 신기수는 다짜고짜 예은에게 들고 있던 뭔가를 안겨줬 다. "아앗? 이게 뭐... 어머나!!" 그건 다 젖은 채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제갈준희였다. 그걸 깨달은 예은은 재빨리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소리쳤다. "아가씨, 빨리 수건 좀 가져다주세요!!" 수건을 가지고 나 또한 그녀에게 달려들어 정신을 잃은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젖 은 옷을 벗기는 사이 신기수는 방에서 나가 목욕할 수 있는 뜨거운 물을 주문했다. 잠시 후 도착한 뜨거운 물로 정신을 잃은 제갈준희를 씻기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 힌 뒤 침상에 눕히고 여기저기 주물러 주자 그제야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에 핏기 가 돌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까는 아가씨가 쫄딱 젖어서 들어오더니, 이번에는 제갈 소저께서 쫄딱 젖는 것도 모자라 정신까지 잃은 채 실려 오다니......." 예은이 제갈준희의 온몸을 구석구석 부드럽게 문질러 주면서 옆에서 그녀를 돕고 있던 나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 내가 언니랑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보아하니 신 대협이랑 같이 있 었던 것 같은데......." "둘이 싸웠나?" "으음... 그럴지도... 사랑싸움했나 봐. 그러다가 제갈 언니가 너무 화가 나서 정신 을 잃은 게 아닐까?" "어머, 어머,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도대체 뭐 때문에 싸웠을까?" "그거야 모르지. 궁금하면 신 대협에게 물어봐." "아가씨는... 그 사람이 물어본다고 말해 줄 거 같아요?" "하기야... 그 사람이 좀 무뚝뚝해야지." "맞아요. 제갈 소저는 그 사람이 어디가 좋다고 그러는 건지......." "그러게 말야. 그 사람은 애인으로는 영... 아닌데." "어머, 어머. 아가씨도 그런 걸 아세요?" "나 무시하는 거야? 이래봬도 알 건 다 안다구." 이렇게 둘이서 신 대협을 막 씹고 있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허락하는 말도 안 했는데 문이 열리고는 신기수가 뚜벅뚜벅 들어왔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 온 듯했다. 비록 그가 좀 무례하게 들어오긴 했지만, 우리 둘은 그를 씹고 있던 처지라 그의 무례에 대해 항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일어났다. "도와줘서 고맙소. 이제는 내가 여기 있을 테니, 두 분은 나가주시겠소?" '여기는 내 방인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틋한 눈으로 제갈준희만 바라보는 신기수의 분위기상 말하지 못하고 예은과 나는 쫓겨나듯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 다. '으음... 아까 언니가 달려가서 이야기나 제대로 했나 몰라.' 하지만 이제 와서 방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법을 쓸 수도 없었던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산을 가지고 객점 지붕 위로 올라갔다. 우리가 머무는 객실은 이 객점의 가장 좋은 객실로 객점의 꼭대기 층에 있었던 탓 에 객실 바로 위가 지붕이었던 것이다. 그곳으로 가서 마나를 풀어 방 안의 기척을 살핀 채 귀를 최대로 기울이면 방 안에 서 대화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우산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유가 날 째려 보면서 날 따라 올라왔고, 그 뒤로 배시시 웃는 예은이 같이 올라오는 거였다. "주군, 이건 정말 실례라고요."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봐줘야 하는 거라구. 안 그래, 예은 소저?" "홋홋홋, 동감입니다. 아가씨." "거봐." 유의 완전히 구겨지는 얼굴을 바라보며 히죽 웃는데 이번에는 단목 형제가 슬그 머니 올라왔다. "앗, 동지 분들께서 여기 모여 계셨군요. 이거이거, 명당자리를 벌써 빼앗겨 버렸 습니까?" "형님, 목소리가 너무 크면 들킨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 대협은 우리들보다 고수이신데 기척을 죽이지는 못할망정 말을 하시다니요." 그러자 그 뒤를 막 올라오던 예성구가 받았다. "괜찮을 겁니다. 신 대협은 아마도 제갈 소저께 정신이 푹 빠져서 주위에서 싸움이 일어나도 모를걸요?"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사제?" 오옷... 이번에는 희여송을 위시한 지원, 포능곽이 민이를 데리고 올라왔다. '에혀, 이러다가 지붕이 무너지는 거 아닐까 몰라.' 일행들은 음모를 꾸미는 동지들이 된 기분으로 피식피식 웃으면서 자리를 잡았 다. 그리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밑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최대한 자신들의 청력을 집중시켰다. 나도 슬그머니 내 몸 속의 마나를 좀 짙게 밑쪽으로 내려보내어 객실 안을 살펴보 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걸 보니 제갈준희는 깨어나지 않은 듯했 다. 하지만 신기수가 제갈준희 옆에 딱 붙어 있는 걸 보니 손이라도 잡고 있는 모양이 었다. '우훗훗, 시작은 좋고.'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긴장되어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의 기다림 속에서 제갈준희의 내력이 움찔거리다 전보다 좀 활발히 움직이는 걸 보니 드디어 정신 차린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신기수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들었소?" '오옷... 목소리 좋고~ 분위기 캡짱이닷~!!' 빗소리 속에서 다른 일행들이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긴장 상태로 들 어간 모양이었다. "여, 여기는......?" 제갈준희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머물고 잇는 객점이오. 이 객실은 진이 소저가 양보해준 거고." '내가 언제 양보해 줬어? 지가 날 쫓아냈지.' "아......." 제갈준희의 기운이 더욱 활발히 움직였다. 아무래도 몸을 일으키려는 모양이었 다. "일어나도 괜찮겠소? 아직 더 누워 있는 편이......." "괜찮아요. 그리고 불편해서 일어나고 싶어요." "도와주겠소." 그리고는 대화는 중단되었다. 신기수는 제갈준희를 일으켜 편히 앉게 도와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제갈준희 또한 할 말이 없는 건지 가 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으윽... 지금 둘이 뭐 하는 거야? 동상 놀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뭐야? 이거 참... 내가 나설 수도 없고.......'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 없이 침묵만이 흐르고 있자 나는 너무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드디어 제갈준희가 입을 열었다. "저어......." '오옷... 드디어......!' 란 생각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는데 제갈준희가 뭐라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신기 수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준희, 나부터 말해도 되겠소?" '오옷... 언니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었구나! 놀라워라~' "아? 아, 예. 그러세요." 제갈준희가 당황하면서도 선선히 승낙하자 신기수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당신이 누워 있는 사이... 많이 생각해 봤소. 내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아까 당 신이 한 말들에 대해서......." 신기수가 거기까지 말하는데 제갈준희의 기운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신기수의 말은 담담하게 계속 이어져다. "우선은... 당신에게 사과를 하고 싶소. 나는 그동안 당신과 나 모두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했었지만, 이제 보니 나는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을 뿐 당신의 감정 이나 생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소. 그것 때문에 당신이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게 뻔한데도 내 생각만 한 나머지 알아차 리지 못하고 있었소. 아니, 외면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 나는......." 제갈준희가 무척 당황하면서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신기수가 제지한 듯했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헤어지자고 말했던 건... 후우, 사실대로 말하자면 당신의 집안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미리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소. 나는, 나로서는 당신 을 맞아들이기에 부족하다고... 준희, 아까... 5년 전에 왜 그렇게 가버렸냐고 물었 잖소? 그 이유는... 당신도 알 테지만, 내가 본선 8강까지 올라갔을 때 날 꺾었던 사람이 남궁상이었지 않소? 후우... 내가 그에게 지고 무림맹을 나오는데 당신의 집안에서 한 사람이 나에게 찾아왔었소. 방금 나를 이긴 사람이 당신의 부군이 되실 분이니 이루지 못할 생각은 접으라고 하더군. 그 당시 나는 아직 치기 어린 생각에 내 자신이 무척 뛰어나다고 착각을 하고 있던 차였소. 그래서 당신의 가문을 알긴 했지만 내 능력이라면 충분히 당신과 어울릴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 하지만 나보다도 나이 어린 자에게 패배해 버려 정신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은 차에 그가 당신의 부군이 될 거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소. 그는 나보다도 무공 실력도, 가문도 훨씬 뛰어났으니까. 그런 감정을 참을 수가 없어 그대로 남양을 벗어난 거였다오. 그 뒤로 당신과 그 사이에 혼담이 오고 간다는 소문이 들려오기에 난 당신이 그와 혼인한 줄로만 알 고 있었다오. 그래서 이번에 당신이 날 찾아왔을 때 솔직히 많이 놀랐소. 그리고 미안하기도 하고......." 신기수가 잠시 말을 멈추자 제갈준희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랬군요... 난 몰랐었어요. 그런데 혹시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한 건가요? 그래서 나보고 부담스럽다고 한 건가요?" "후우, 그건 아니오. 혼인하지 않은 채 날 찾아준 당신이 정말 고맙게 느껴졌소. 그 래서 이번에는 무림대회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용기를 내려고 했었지... 그런데, 후우... 2차 예선전이 끝나고 당신과 헤어져 돌아오는데 당신 집안의 사람 이 또다시 날 찾아왔더군. 당신 곁에 계속 있는다면... 실격시켜서 본선에 진출시 키지 않겠노라는 협박이었소. 화가 나더군. 그래서 당신 집안에 보란 듯이 우승하고 그 자리에서 당신에게... 험 험, 청혼을.. 흠, 하려고 했었지. 하지만 그전에 그 협박에 맘에 걸리더군. 그래서 본선에 진출할 때까지만 당신과 헤어져 있으려는 생각에 그렇게 말한 거라오. 하 지만 그 말을 하는 내 자신이 정말 처량하더군." "그게...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 나에게 청혼할 생각이었어요?" 제갈준희의 목소리는 무지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기쁨에 겨워 떠는 것이리라. "내 생애에 가장 의미있는 여성은 내 어머니와 당신뿐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만약에... 만약에... 당신이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 부모님이 반대한다면 당신은 어쩔 거죠? 또 날 버려두고 갈 건가요?" 전적이 있으니 제갈준희는 신기수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도 불안한 모양이었 다. 그러자 신기수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자신있게 대답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 부모님께 찾아가서 따님을 주십사 간청할 거라오. 정 반대를 한다면 당신을 몰래 훔칠지언정 당신과 헤어지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설 마 이 소리까지 들었는데 위에 있는 저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겠소?" 그 소리를 듣자마자 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헛바람을 삼켰다. 모르고 있을 줄 알았건만 신기수는 벌써부터 눈치 채고 있었나보다. 그리고 모른 체하며 주저리주저리 낯뜨거운 말을 다 한 것은 우리가 돕게끔 하려는 계산이 깔 려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이거 참... 안 도와드릴 수가 없게 됐군요." 얼굴을 살짝 붉힌 단목대현이 웃으면서 민이와 나를 바라보았다. 일행 중 저들을 도울 능력이 있는 자는 나와 민이, 그리고 단목 형제뿐이었기 때문이다. 민이도 웃 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제 누나는 벌써부터 저 두 분을 응원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적극적으 로 도와줄 겁니다. 아마 저 두 분을 방해하는 자들이 위험해질걸요?" 비는 아직도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지만 이곳 분위기만은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 워 이 기분 좋은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나라 주야장상에 오늘이 오늘이소서. 오늘이 오늘이소서. ]] 오늘처럼 기쁜 날이 매일매일 계속되기를 바라는 신라 시대의 새해 정초에 불렀 던 민요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무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모두 내려가서 신기수, 제갈준희 커플을 데리고 조촐한 술상 을 벌였다. 이런 기쁜 날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단목대현의 주장에 모두들 찬성했 기 때문이다. 뭐, 민이와 나, 그리고 단목대혁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술 대신 차를 앞에 놓고 있어야 했지만 원래 술을 안 즐기는 나는 별 상관없었다. 그리고 술이 몇 잔씩 돌아갈 무렵, 아까 신나게 노래 불렀다는 이유 하나로 지목당 해 나는 둘을 위하여 노래를 부탁받았다. 물론 나도 둘을 축하하는 노래를 해주고 싶었기에 사양하지 않았다. "험험, 그럼... 제가 노래 한 곡 들려드리죠. 이건 신 대협의 입장이라면 이런 생각 을 가지고 있을 거다라고 생각되는 노래랍니다." 그래도 이곳과 맞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어서 내 맘대로 이곳에 맞게 조금 고쳐 봤다. [[ 향긋한 차의 향기와 나의 아침을 깨워주는 상큼한 입맞춤 아직 달콤한 꿈에 흠뻑 취해서 '조금만 더' 그러겠지. 하얀 앞치마 입고 내 아침을 준비하는 너의 모습 나의 구겨진 옷자락까지도 모두 다 너의 몫일 거야. 나 오늘도 행복한 너와 나의 그 모습을 상상하며 하루를 시작해.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는 내 단 하나의 소망으로. 사랑해, 지금 너의 모습과 세월에 변해갈 니 모습도. 그보다 더욱 사랑하는 건 영원히 날 지켜줄 너의 믿음. 사랑해, 널 알게 한 인연과 두려움없이 널 선택하게 한 운명까지도. 내 마지막 바램은 다음 세상까지 함께라는 것. 현실이 나를 속여도 내 아침은 햇살처럼 눈부실 거야. 나의 아침을 깨울 너를 꼭 닮은 우리의 작은 아이. 나 오늘도 너와 많은 날들, 너를 위해 채워야 할 행복을 준비해. 나만의 여인이 될 거라는 내 단 하나의 예감으로. ....... - 젝스키스의 예감 중에서... - ]] 아린이야기[3부25화]또 한 명 늘어난 심복 "우웅... 도 해버렸어... 에혜... 역시 난 어쩔 수 없는 애인가 봐." 오늘은 최종 예선전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까지의 시합에서 남은 사람들은 바로 본선에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예선전을 치른 청문각에서만 12명이 본선에 진출하니까 다른 곳에서 예선전을 치러 본선에 올라가는 이들까지 합하면 60여명 정도 될 것이다. 우리 일행 중에서는 정말 아쉽게도 예은,예필,그리고 단목대혁이 예선 4차전과 5차전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절반이 넘는 나머지 일행이 본선 진출권 을 따냈으니 성과가 크다고 말할 수 있는 데다 나 또한 본선 진출권을 따냈으니, 얼마 흐면 무림대회 본선을 구경하러 올 할아버지와 부모님 일행이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으니...... 내 방 침대 위에 올라가 벽에 머리를 박고서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데 민이의 메 세지가 들려와 나는 울먹이는 메세지를 보냈다. "누나... 또 그랬어?" "우잉...말도 마. 이번에는 안 하려고 굳게 다짐까지 했는데... 이게 버릇이 됐는지 저절로 해버리고 말았어." "쯧쯧" 일행 중에서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민이뿐이었다. 강호에서 활 동하는 대부분의 무림에게는 자신의 이름 앞에 별호가 붙는다. 이 별호라는 것은 무림인 당사자의 별명 같은 것인데,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사람들 사이를 누비다 보면 그 사람의 특징을 담아 불러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울 아빠의 별호는 냉검서생이고, 울 엄마의 별호는 열혈사후다. 척 보 기에 차가운 이미지의 아빠나 불 같은 성격을 가진 엄마를 잘 나타내 주는 별명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이 별호는 그 사람의 개성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단시간에 붙는데 예선전 몇 번 치르면서 별호가 붙여진 사람은 아마 천 명 중에 한 명도 안 될 거다. 근데 그 천 명 중 한 명이 바로 내가 되어버렸으니...... '홍옥소소 현진' 붉은 옥피리를 가지고 있는 소녀란 뜻인데, 여기까지는 좋다 이거다. 내가 내 옥피 리에다 나 아닌 사람이 만지거나 나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수십 개의 벼락이 떨어지도록 마법을 걸어놓은 바람에 몸에서 떼어놨다간 뭔 불상사가 생길지 몰라 항상 가지고 다녔더니만 그렇게 불리는가본데, 정말정말 안타까운 건 이 앞에 네 자가 더 붙는다는 거다. '천상행운녀 홍옥소소 현진' '하아아아......' 천상행운녀란 말이 붙은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너무나 운 좋게도 예선전을 쉽게 통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두 한두 번이면 그냥 운이 좋 구나란 말은 듣겠지만. 최종예선전까지 무려 여섯 차례 모두 그랬으니 '천상행운 녀'가 내 별호가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내 입장에선 그것이 바로 다 내 실력인데 말이다. '크흑흑흑... 마법을 사용하는 게 버릇이 되어버리다니... 이번 에는 정말 안 쓰려고 했는데......' 첫 번재 예선전에서 내 상대인 사람이 너무 거만한 태도로 날 깔볼 때는 그냥 혼내 주려는 생각에 마법을 사용했지만, 그 뒤로는 내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 볼 겸 할아버지와 부모님 앞에서 떳떳하게 이 정도까지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 게끔 무공으로만 예선전을 치르려고 했었다. 2차 예선전에서 만난 사람은 솔직히 순수 무공 실력으로 본다면 나랑 삐까삐까하 고-이건 유가 말해준거다-내공은 나보다 적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무공 실력 으로만 겨루었어도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 거다. 뭐, 좀 어렵게 이길지도 모 르겠지만. 그런데 이 사람은 실전 경험이 무지 풍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공 이 더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실전 경험을 바탕 삼아 날 쉽게 몰아붙이고 승리를 거 머쥘 뻔했다. 내가 마법만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너무 그에게 코너로 몰리는 바람에 다급해져 버려서 나도 모르게 미끄러지는 마법을 걸어버렸던 것이다. 덕 분에 나는 한발 내디디다 주르르 미끄러져 버린 그에게서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이 다. 그래도 그때는 이번에는 내가 실전 경험이 적은 탓이라고, 원래 실력은 내가 더 뛰어났으니까 괜찮은 거라고 스스로를 토닥거리며 다음에는 내가 지더라도 기 필코 무공 실력으로만으로 예선전을 치르리라 결심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예선전에서 다급한 순간 얼떨결에 마법 시동어를 외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 다음 예선전에서는 정말 마법 을 사용하지 않기 위하여 마지막 방법으로 나 스스로에게 일정 시간 동안 말을 하 지 못하게 ‘사일런스’ 마법을 걸고 예선전에 임했다. 그런데 너무나 황당하게도 그 동안 다급할 때마다 사영한 마법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는지 시동어를 외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만으로 마나가 움직여 마법을 실현시켜 버렸다. 고위 마법사들 중에는 아주 간단한 마법은 시동어나 주문을 외우지 않고 의지로 써 발현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걸 내가 그냥 해버리게 된 것이다. 비록 1서클의 마법인 '스네어(미끄러지게 하는 마법)'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수월하게 예 선전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는 상대자가 어쩌다 미끄러지거나 뭔가에 걸려 뒤로 넘어지 는 바람에 아주 운 좋게 이긴 거라고 인식되어 버렸고 덕분에 천상행운녀란 별호 까지 붙게 된 거였따. 솔직히 자꾸 그렇게 되다 보니 심판관들이 혹시 내가 뭔 술 수를 쓴 것이 아닌가 하고 경기장 바닥을 아주 샅샅이 조사를 했지만, 마법이란 것 을 아예 모르는 이들이 뭘 찾아낼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는 본선 진출권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정말... 이번에는 정말 안 쓰려고 했는데, 이놈의 마나가 주인 말을 안 듣 고 지 멋대로 움직이구 있어!' 홀로 마나 탓도 해보고 자책도 하며 침대 위에서 벽에 머리를 쿵쿵 박고 있는데 유 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사람들의 이야기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운이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본선에 올라가서까지 그 운이 따라준다는 보장은 없으니 이 제 그만 기분 푸시지요. 본선에서는 주군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시면 되지 않습 니까?" 그러나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유우~ 그건 내가 그런 거란 말야... 흑흑... 본선에서도 분명 히 마법을 쓸 거 같은데 어쩌지?' 내가 계속 머리를 박고 있자 이번에는 예성구가 나섰다. "아가씨,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그것도 실력 아니겠습니까? 운이 없어서 졌다는 건 보통 무사란 소리예요. 뛰어난 고수들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 은 법이거든요. 그러니 그들이 너무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흑흑흑. 고마워 예성구......' "그, 그런 거겠지?" 내가 처음으로 답하자 예성구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럼요. 그들이 너무 실력이 없어서 한 번 미끄러진 걸로 승리를 놓친 거예요. 진 장한 고수들은 한 번 넘어졌다고 해서 그냥 져 버리진 않는다구요." "그렇지?" "그럼요." "그들 실력이 너무 없어서 내가 이긴 거겠지?" "물론이죠." 솔직히 예성구의 말은 옳은 게 아니었다. 고수들의 싸움일수록 승부는 한순간의 작은 틈으로 인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한 번 넘어진다는 건 졌다는 걸 의미하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걸 생각할 겨를도 없던 터 라 틀린 말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의 말에서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다. "헤헤헤... 그렇구나." 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누군가 내 객실문을 벌컬 열어젖히면서 내가 가장 듣 기 싫어하는 말로 날 불렀다. "우리의 행운 아가씨는 어디 계시는가?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웃음기가 가득 담긴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곧 도착한다더니만 벌써 도착해서 날 찾으러 온 거였다. 그 말에 나는 축 처져서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머리를 벽에 박았고 일행들은 겨우 달래놓은 것이 무용지물이 되자 망쳐 놓은 인물에게 화를 내지도 못하고-가주한데 화낼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한숨만 내 쉬었다. 뭐, 할아버지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부모님이 설명을 듣고 웃으면서 괜찮다고 등 을 두드려 주는 탓에 더 우울증에 빠질 수가 없어-거의 두 달 만에 만나는 분들께 우울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일어나서 인사를 하긴 했지만, 내 가슴에 콱 와 서 박혀 버린 천상행운녀라는 말이 야기한 우울한 마음은 어떻게 해서도 풀어지 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단목세가의 사람들과 함께 무림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목세가의 사람들도 단목 형제들을 데리러 객점에 먼저 들렀던 탓에 나는 소가주인 단목확 선과 함께 단목세가의 가주인 단목수호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나이 에 맞는 위엄보다는 괘활함이 더 많은 사람이었는데, 완전 단목확선과 단목대현 의 판박이였다. 신기수는 단목세가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기로 했기에 같이 무림맹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 단목세가의 거처에서 함께할 테니 제갈준희와는 더욱 쉽게 만날 수 있을 거였다. 일주일 후, 드디어 무림대회의 본선이 시작되었다. 본선은 예선과는 달리 개회식은 물론 폐회식까지 거행되었다. 무림맹 안의 거대 한 연무장에는 사람들이 꽉 찼고 연무장 주변에는 높은 단상이 세 곳이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9대 문파의 높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고, 왼쪽에는 8대 세가의 사람 들이, 그리고 중앙에는 무림맹의 중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개회식이 시작되기 전 가벼운 여흥거리로 재주꾼들이 몰려나와 여러 가지 재주들 을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연무장의 세 곳에 마련된 단상에 올 사람들이 모두 다 와 서 자리에 앉은 뒤 잠시 후 무림맹주가 일어나 앞으로 나서자 그것을 신호로 연무 장에서 묘기를 선보이고 있던 광대들이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갔고 사람들은 조용 해졌다. "이번 무림대회룰 위하여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와 주신 무림동도 여러분께 진심 으로 바라는 바이오. 이번 무림대회 또한 역대 무림대회와 마찬가지로 공명정대 한 가운데 여러분들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 주시기 바라오." 내력을 섞어서 외치는 말은 비록 마이크가 없었지만 넓은 연무장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저자가 바로 무림맹주인 일검경천 헌원패입니다. 그 또한 현무림의 5대 고수 중 일인이지요.] 풍성한 허연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그는 풍채에 어울리는 당당한 몸짓으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는 끝에 가서 무림대회의 시작을 선언하고 들어갔다. 그러자 관 중들이 열광적인 환호성을 질렀지만 나는 유의 설명을 듣느라 시작하는지도 모르 고 있었다. [정명에 있는 단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들이 바로 9대 문파의 장문인이거나 장 문인과 동급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동파의 사람들은 안 보이는군요. 하긴, 전 에 공동파에 안 좋은 일이 있다는 소리가 들렸으니 그 때문에 못 온 모양입니다.] 8대 세가 쪽에서는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모용세가 또한 안 좋은 일 을 당한 고로 참석치 못한 모양이었다. 나와 민이는 은씨 세가의 일원이라는 이유 로 8대 세가 사람들이 있는 단상에 자리해 있었다. 그곳에는 단목 형제와 신기수 뿐만이 아니라 남궁상,중,하, 형제들도 와 있었다. 남궁세가에서는 남궁상과 남궁 중이 출전한다고 했다. 남궁상은 저번 무림대회에서 4강까지 진출한 경력이 있었기에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으로 떠오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번 무림대회에서 우승하면 상금과 함께 명예도 얻게 되지만, 그것과 함께 무림 맹의 5단, 즉 중앙, 청룡, 현무, 백호, 주작단 중 한 단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 5개의 단은 무림맹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그래서 이 5단의 단주는 무림맹 직속 기관인 여러 각의 각주들(맹주,부맹주,그리고 장로 다음은 직분)과 동급이며 , 이곳에 속한 단원 개개인들은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대부분이어서 이곳에 속했 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능력이 인정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무림맹의 일반 무사 들이 가장 들어가길 원하는 곳 중의 하나이기에, 이미 무림맹에 속한 사람들 중에 서도 빠르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무림대회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승자에게는 한 가지 더 특권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무림대회에 온 사람 들 중 원하는 사람 한 사람과 대련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여기 에는 무림맹주조차 지적당하면 대련을 거부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건 무림맹주가 물러난 다음에 나선 사람이 일일이 설명해 준거다. 그는 여기까 지 말한 다음 본선의 경기 진행 방법을 설명했다. 예선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신청한 순서대로 5그룹으로 나누고 또 그곳에서 3그룹씩 나누어 토너먼트 식으로 치른 것에 비하여 본선은 본선에 진출한 사람들 의 이름이 적힌 나무조각을 커다란 통에 넣고 경기 시작 전에 경기할 선수 두명을 임의대로 뽑아 호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본선에서는 그룹을 나누는 것도 없 었고, 경기장도 딱 한 군데였다. 그래서 본선 경기는 언제 자신이 호명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잡고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누가 자신의 상대가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 다. 그러한 설명이 모두 끝나자 한 사람이 붉게 칠해진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무림맹의 중요한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는 단 위로 올라갔다. 그 상자 안에는 사람 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 나무조각이 들어 있었고 상자 위쪽에만 어른 주먹이 들어 갈 수 있을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에 손을 집어놓고 경기자를 뽑는 거였다. 첫 대전 선수를 뽑는 영광을 가진 사람은 당현히 무림맹주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상자 속에 손을 쑥 집어넣고 휘휘 젓더니 두 개의 나무 조각을 꺼내고는 크게 호명했다. "귀주 지방 출신의 신기수와 운남 지방 출신의 덕순!" "와, 신 대협이 제일 먼제 뽑혔내?" "힘내세요, 신 대협!" 신 대협은 같이 있던 단목 형제의 응원을 받으며 천천히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그 러자 잠시 후 그의 상대인 듯한 남자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몸만 본다면 정말 잘 단련된 사람이었다. 키도 175cm 정도로 이곳에서 제법 큰 키였고 움지이는 폼이 되게 날렵해 보였다. 그런데 생김새는 완전 악당 그 자체인 얼굴은 가지고 있었다.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코는 매부리코였고, 눈은 둥글지 못하고 거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이마는 넓어서 조금만 더 넓었으면 앞 대머리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거기에 턱 선은 너무 날카롭고 얼굴에는 살이 없어 볼이 쏙 들어가는 바람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와 저 사람 악당 같아." 민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정말 저 사람은 21C 한국에 있었으면 영화나 드라마에 악당 역으로 분명히 캐스팅됐을 거다. "근데...이름이 덕순이라고? 전혀 안 어울려." 남자가 여자 같은 이름을 가져서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놀림을 당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둘이 연무장에서 마주 보고 서서 인사를 하고 대련할 자세를 취하자 여기저기서 그들을 응원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좀 안타깝게도 그 대부분의 소리 가 신기수를 응원하는 소리였다. 심지어 누군가는 신 대협을 보고 악당을 물리쳐 정의를 실현하라는 둥의 고함을 질러댔다. 아마도 반은 농담 삼아 하는 소리였겠 지만 그가 정말 악당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그러는 건 좀 심한 듯했다. 근데 그 덕순이라는 사람은 익숙한 일이었는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신기수만 응시 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흐음...내공은 반 갑자가 넘긴 하지만 신기수보다는 적네... 그래도 유보다는 내공 이 많은걸? 하긴, 본선 진출권을 따냈을 정도이니 실력은 어느 정도 있겠지?' 그는 도를 사용했다. 일반 장검 길이와 같은 길이에 도의 특징상 한쪽 면은 편편 한 데 비해 다른 한쪽 면은 물고기 배처럼 불룩했다. 그곳이 바로 날이 있는 곳이 다. 그리고 도의 끝은 뱀의 혀마냥 두 갈래로 갈랴져 있는데 오래 사용해서 그런 지 날카롭지 못하고 끝이 다 닳아 있었다. 그래도 손질은 무지 잘 되어서 햇빛을 받아 도날이 시퍼렇게 빛났다. 신기수와 그 덕순이라는 남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며 탐색에 들어갔다. 신기수가 검을 들고 오른쪽 발을 반 보 내민채 상체를 숙이고 언제라도 뛰어나갈 듯한 폼을 잡은 거에 비해, 덕순이라는 남자는 양 발을 어깨 넓이로 벌려 땅을 단 단히 디딘채 몸을 약간 낮춘 걸 보아하니 공격하려는 것보다 공격해 들어 오는 걸 막으려는 기색인 듯했다. 연무장 끝을 천천히 돌면서 둘은 틈을 보더니 몸이 움찔거린다 싶은 순간 신기수 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달려들며 검을 찔러 넣었다. "호오... 제법 빠르네." 엄마가 감탄성을 흘릴 때 신기수의 검은 덕순의 지척에 달하였고, 나는 분명 그가 몸을 옆으로 비켜서 신기수의 검을 흘려보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웬걸, 그 는 도를 옆으로 세워 검을 정면으로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저런, 무식하기는... 저러면 도의 날이 나가 버릴 텐데! 아니, 그것보다 잘못 박았 다간 손목과 팔이 다칠 텐데!" 그러나 엄마의 염려와는 달리 막은 덕순은 굳거니 버티는 데 비하여 신기수가 부 딪친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살짝 휘청거리는 거였다. "호오, 저 사람 완력이 대단하군요. 그러니 그걸 믿고 정면으로 막안내 거겠죠?" 덕순은 신기수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 도로 막고 있던 검을 더욱 힘을 줘서 밑으로 내리찍으며 그와 함께 한쪽 발을 내디디는 동시에 몸을 바깥쪽으로 회전시켜 다 른 쪽 발로 신기수의 무릎 뒷부분을 노렸다. 신기수 못지 않은 재빠름이었다. "호오, 호오, 저 사람은 검객이 아니라 완전 싸움꾼인걸? 싸움을 많이 해본 솜씨야 !!" 엄마의 감탄 섞인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그 둘의 싸움을 보면서 나는 점점 덕순이 란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엄마 말대로 정말 노련한 솜씨로 신기수를 상대해 나갔다. 신기수는 검만 사용하는, 그러니까 무공 초식으로만 그를 상대하는 데 비 해 덕순은 도를 들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도를 휘두르는 것보다 주먹과 발이 날 아가는 횟수가 더 많은 것 같았다. 분명 도를 사용하는 무공을 배운 듯한데 어쩜 저렇게 무공과 싸움질을 적절히 섞어서 신기수를 상대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 다. "저 사람은 무공 대련을 하는 게 아니라 싸움을 하는 듯하군. 분명히 무공은 착실 히 배운 듯한데 말이야." 나는 그런 싸움이 맘에 드는데 아빠는 그런 모습이 보기 싫은 듯 살짝 눈살을 찌푸 리는 거였다. "엄마, 엄마,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둘 다 실력이 비슷비슷한 거 같 아서 도무지 누가 이길지 모르겠어요." 나는 신기수와 친분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기수를 응원하는 걸 보니 청개구리 심보인지 왠지 덕순이라는 남자가 이겼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말 그 사람이 이긴다면 단목 형제는 물론 제갈준희가 실망할 테고, 그럼 신기수가 제갈세가에 청혼하러 가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덕 순이라는 남자만 응원하기도 뭐했다. 그리고 보아하니 둘의 실력이 비슷비슷한 거 같아 누가 떨어지더라도 넘 아쉬울 것 같았다. 저번 대회에서 8강까지 올라갔던 신기수와 막상막하로 싸우는 저 덕순이란 남자 도 실력이 꽤 있는 편이니, 첫 번에서 신기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혹시 그도 8강 에까지 올라갈지도 모르는 일인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누가 이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은근슬쩍 엄 마에게 물어본 건데. 엄마는 고민하는 흔적도 없이 곧바로 술술 대답하는 거였다. "엄마가 보기에는 말이지, 아무래도 신대협(신기수를 지칭)이 이길 거 같구나." "에? 정말요? 으음... 물론 신 대협이 내력이 좀 더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큰 차이 는 없으니까 무공 초식으로 상대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엄마 대신 아빠기 대답했다. "물론 무공 초식이 신 대협보다 더 뛰어나다면 이길 수 있겠지. 하지만 저 덕순이 라는 남자는 꾸준히 도법만 수련한 것 같지 않구나. 그는 도법을 수련하면서 그와 동시에 크흠... 그러니까 각법과 권법... 비슷한 것도...-아빠는 아마도 싸움을 많 이 했다는 표헌을 하려는 듯했다-같이 행했어. 그걸 하는 시간에 도법만 충실히 연마했다면 그의 도법이 더 패도적인 기세를 띠었을 텐데 정말 아쉽구나. 하지만 그와 반대로 신 대협은 어렸을 때부터 착실히 검법만 꾸준히 수련해 온 게 한눈에 드러나 보일 정도야. 그의 검법이 아직 흐르터지지 않은 것에 비해 그에 맞서는 도는 자꾸 흐트러지고 있어. 그것을 손과 발로 무마하고 있기는 히지만 곧 그것도 한계에 부딧힐 거다." 아빠의 말대로였다. 처음에는 간간이 도로써 패도적인 공격을 하여 신기수를 몰 아붙이기도 했었는데 이제 그의 공격을 모조리 신기수에게 막혀 버렸고, 기습적 이거나 생각지도 못한 그의 손과 발에 의한 공격만이 먹혀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 쪽으로도 신기수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큰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도법에만 충실하지 못한 덕순보다는 검법에만 충실한 신기수가 한 수 위의 실력이란 것이 보여지는 순간이었다. 덕순이란 남자는 결국 어깨와 팔, 옆구리에도 검에 의한 부상을 입었고, 누가 보더 라도 패색이 짙었건만 이상하게도 그는 패배를 시인하지 않고 악착같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대련일 뿐인데도 그는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 마냥 기를 쓰고 신기 수에게 달려들었다. 그 험악한 인상을 팍 구기며 달려드는데 어두운 데서 보면 괴 물처럼 보일 만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의 그러한 모습이 되게 처절해 보였다. 이미 졌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무모하게 덤벼드는 그의 모습이 음... 뭐랄까... 넘지 못할 벽을 넘으려는 것 같은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였다고나 할까? 신기수는 어느 정도 승리를 잡자 적당히, 그러니까 둘 다 별 부상 없이 대련을 끝 내려는 듯 그를 공격할 때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은 곳만 골라서 공격을 하며 그가 패배를 선언하길 기다리는 듯했다. 뭐, 그를 기절시킨다거나 연무장을 벗어나게 만든다면 저절로 대련이 끝나겠지만, 덕순이란 남자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그 렇게 하기는 불가능해 보여 그냥 그가 패배를 선언하길 바라는 듯했다.(대련은 상 대방이 더 싸우지 못할 몸이 되거나 연무장을 벗어나거나 패배를 시인하기 전에 는 안 끝난다.) 그런데 그 덕순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이제는 승패에도 연연하 지 않은 채 악착같이 덤벼들자 그냥은 못 끝내리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덤벼드는 덕순을 밀어낸 후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난 그는 검을 들어 올리더니 덕순을 향해 겨누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이것이 단지 기량을 겨루 는 대련이라 해도 대련은 대련. 승패를 떠나 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내가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기만 하구만...-당신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며 나 또한 당신 을 전력을 다해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설마 이 기술을 벌써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 지만 당신에게는 이 기술을 보여드려도 절대 아깝지 않을 것같군요." 신기수의 태도에서 앞으로의 공격은 앞서 보여줬던 것과는 다를 것이란 걸 깨달 은 듯 덕순도 자세를 바꾸었다. "석권건곤!" 신기수가 제자리에서 갑자기 팽이처럼 회전한다 싶었더니 낭랑한 외침과 함께 그 의 몸에서부터 마치 매직 미사일처럼 생긴 검기들이 쏘아져 나왔다. 아빠의 검술 초식 중 하나인 빙설난방을 한층 업그레이드한 초식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빠의 빙설난방은 한순간의 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 같다면, 이건 완전 사생 결단을 위해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수의 검기들이 외침 그대로 하늘과 땅을 뒤덮 는 것처럼 연무장을 뒤덮는다 싶더니 단 한 사람, 덕순 쪽으로 곧바로 쏘아져 들어 가기 시작했다. "대단하구나. 지금 신 대협이 땅에서 시전해 위력이 반감되었지만 만약 공중에서 시전했다면 주변을 초토화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검기의 방향까지 조 절 가능하다니......" 덕순의 주위는 온통 검기가 난무하였기에 그가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는 듯 보였 다. 검기들이 사방을 점유한 채 쏘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뒤로 물로난다고 해도 빠르게 날아오는 검기의 속도를 이길 수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하압!!" 덕순이란 남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도를 가슴 앞으로 곧추세우고 강렬한 기합과 함께 도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단순히 도 기(검으로 말하면 검기)를 형성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도기가 형성된다 싶더니 도 에서 내력이 뻗어 나와 넓게 퍼지더니 그의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비록 불완전 하여 몸을 다 가리지고 전에 내력이 흩어져 형상도 없었지만, 그건 분명 실드와 비 슷했다. "도막? 그 경지까지 오르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무리하고 있군. 분명 얼마 버티 지 못할 꺼야." 예전에 내가 배운 것에 의하면 검기를 자유자제로 다루는 것은 내공이 일 갑자가 넘어야 가능했다. 뭐, 검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건 10년 내공 정도만 있으면 가능 하다고 하지만, 문제는 그걸 얼마나 오래, 그것도 다른 일을 하면서도-예를 든다 면 경공술을 펼치면서(대련할 때는 기본적으로 펼치는 거니까)-유지 시킬 수 있 느냐는거다. 가만히 서서 온몸의 내력을 검에만 집중시켜 검기를 형성하는 것과 온몸을 움직이면서-대련할 때는 몸에서도 내력을 사용한다-검기를 유지시키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뭐, 10년 내공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검 기를 오래 유지시킬 수 없다. 아린이야기 [3부 26화]곤륜파 수뇌들의 비밀 논의 다음날, 본선 1차전 마지막 날 경기가 치러졌다. 어제까지는 총 본선 진출자 100 여 명 중에서 거의 절반이 넘는 60여 명의 사람들이 경기를 치렀고, 거기서 30여 명이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내 사형인 지원도 섞여 있 었다.정말 재수없게도 1차전에서 이번 대회에 가장 유력시되는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화산파 사람과 붙었기 때문이다.이 사람도 전 무림대회에서 4강까지 올라간 실력자였다. 나는 덕순을 보러 가는 바람에 경기를 보지 못했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정말 멋진 경기였기에 이긴 화산파 제자나 진 지원 사형이나 둘 다 커다란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물론 실력 차이는 좀 나긴 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멋있었다나? 그래서 그 화산파 제자가 대련이 끝난 다음에 지원 사형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 를 했댄다. 그 모습이야말로 무림대회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겠냐고 민이가 얼마나 흥분해서 떠들어대던지... 아마 분명히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을 거다. 그런고로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민이, 희여송, 포능곽만이 남았었다. 이들 모두가 오늘 경기 를 갖게 될 터였기에 나는 좀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운이 없어 아는 사람들끼 리 대련하게 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셋은 따로 떨어져 서 다른 사람과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그런데 민이 녀석이 대련할 때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민이의 모습을 보시는 그 눈 빛이란...... '쳇쳇쳇.' 비록 내가 질투할 입장도 아니고, 질투할 성질의 것이 아니란건 알고 있지만 마음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민이는 정말 멋진 무인답게 대련을 이끌어 나가 승리를 이루어냈다. 그동안 나처 럼 농땡이를 부리지 않고 범생처럼 착실히 수련을 하더니만 오늘과 같은 경지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예선전에서 나처럼 마법ㅡ하긴 그는 마법을 모르 지만, 그래도 용으로써 바람이나 비를 다스릴 수 있는 신력이 있지 않은가?ㅡ같은 술수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검술로써만 본선 진출권을 따냈던 것이다. 이제 16세의 아직 소년이라 불릴 나이에 키도 나보다 조금 크게 해줬으니 170cm 정도의 앳된 얼굴의 녀석이 말 잘 듣고 착실히 수련하더니만, 무림대회에서 아주 훌륭한 검술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경지까지 다다랐으니 부모님은 물론 잃어버 린 줄 알고 체념하고 있었던 손자를 다시 찾은 할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아주 대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한 그런 시선들을 나는 쬐께 마음이 삐뚤 어지는 것을 느꼈다. '쳇쳇쳇...그래, 뭐 나도 저 세상으로 가면 날 끔찍이 아껴주는 할아버지랑 아빠가 있다 이거야. 쳇쳇쳇.' 비록 예선전을 치를 때 나와 상의하여 결정한 대로 아직 은씨세가의 무공을 사용 하는 대신 아빠에게 전수받은 빙검오식만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민이의 기량 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하긴 뭐, 아빠의 검법은 은씨 세가의 검법인 낙성검법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 검법이니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나는 민이는 물론 희여송과 포능곽이 본선 일차전 에서 이겨 무사히 다음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히 기쁘지 않 았다. 물론 내 아량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은근히 삐뚤어진 마음은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혀... 난 맨날 생각은 열심히 수련해서 검술 실력을 높여야지, 높여야지 그러는 데 왜 행동은 안 따라주냐?' 생각이 자기 비하까지 미치자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아서 본선1차전 경기가 다 끝 나 우리 가문 사람들이 우르르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민이 옆에서 나란히 걷지 않고 조금 뒤처져 괜히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일단의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 가문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9대 문파와 다른 8대 세가의 사람들도 각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 는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보였는데 맹 안쪽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급하게 달려나오 더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사람들 중 한 무리 앞에 멈춰 서서 뭐라 말하는 거였 다. 아마 그들은 같은 문파의 도사들인 듯 모두 도사복을 걸치고 있었다. 맹 안에 서 달려나온 두 도사의 이야기를 들은 나이 많은 도사는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뒤에 있던 사람들을 이끌고 급히 맹 안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으음... 저 사람은 곤륜파의 장문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곤륜파에서 뭔 일이 있 나 보지?' 축 처진 기분 때문에 잠시 내 관심을 끌 만한 무엇인가가 있기를 바라고 있던 터라 나는 즉각 호기심을 느꼈다. 그렇다고 그들을 미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우선은 곤륜파의 장문인을 잘 기억해 두었다. 그러고는 은씨 세가에게 배정된 숙 소로 돌아가자마자 기분 안 좋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을 물리친 후 내 방에 들어 가 문을 잠그고 결계를 쳤다. 생각 같아서는 곤륜파의 전각(건물)에 잠입해서 알아보고 싶었지만 언제 부모님 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이곳에서 곤륜파 장문인의 주위를 살펴보는 것 으로 만족해야 했다. 잠시 후 나의 마법 시동어에 의해 허공에 나타난 화면에는 아까 내가 눈여겨보아 이번 마법 시전의 기준이 되게 한 곤륜파 장문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지 금 어느 방 안의 탁자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한 도 인이 서 있었는데 눈빛이 범상치 않은 게 보통 인물은 아닌 듯했다. 그 앞에는 장문인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도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곤륜파 장문 인은 어떤 종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아마 그것이 장문인을 급하게 불러들 인 원인인 듯했다. 잠시 후 그 종이에 쓰여진 것을 다 읽었는지 장문인은 천천히 옆에 앉은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도사에게 그 종이를 넘겼다. 그러자 그 도인은 기다렸다는 듯 종이를 넘겨받아 읽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내 용이 좋지 못한 것인지 장문인의 얼굴은 무지 창백해진 채 연신 천장만 바라보며 그 도인이 다 읽을 때까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옆에 앉은 도인 또한 종이의 내용을 다 읽자 얼굴이 창백해진 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이런 일이... 장문 사형,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사형이라고 하는 거 보니 그는 장문인의 사제였니 보다. 장문인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연신 천장만 바라보며 도호를 외우고 있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이를 어쩌한단 말인가. 내 대에 와서 문파에 오명을 남겼 으니... 무량수불... 무량수불... 돌아가신 스승님의 얼굴을 어찌 대한단 말인가. 무량수불......" 장문인 옆에 서 있는 젊은 도인은 무신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 다. 그는 분위기 때문에 조용히 있다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둘의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물었다. "저어... 사숙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본 파에서 내려온 제자들의 말로는 도 둑이 들었다던데... 혹시 저희 문파의 비급이라도 훔쳐서 달아났다는 겁니까?" "그렇다는구나. 에휴~ 물론 문파의 비급도 비급이다만......" 장문의 사제 도인은 젊은 도인에게 말해 줘도 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못하겠 다는 듯 장문 사형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장문인과 그의 사제ㅡ아마도 무림맹에서 장문 대리인으로 무림맹장로 직 일을 하 는 곤륜파의 장로겠지만ㅡ이외 아무도 없는 곳에 있을 수 있는 거 보면 그는 아마 도 곤륜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후계자인 듯한데 그런 그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란 거 보면 되게 중요한 건가 보다. 그때 장문인이 뭔가를 결심했는지 자신의 사제를 향해 시선을 돌린 채 단호한 음 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보게. 사제, 이건 우리 곤륜파의 명예가 달린 일일세. 그러니 우리는 이 일을 함 구하세.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고 비급을 찾는다는 명목 하에 자체적으로 해결해 보세나." 그러자 그 사제 도인의 두 눈이 놀라서 크게 떠졌다. "하지만 장문 사형, 그게 어떤 것인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우리 곤 륜파의 명예도 명예이지만 이 문제에 우리 정파 무림이 시달릴지도 모르는 일입 니다. 당장 무림맹에 알려야......" "그걸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우리 문파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 하나쯤 잃어버렸다 해도 다른 문파에서 건재하는 한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하지만 이대로 방관하고 있다가 50년 전의 그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어쩐단 말입 니까?" "어허 쓸데없는 소리, 그럼 자네는 우리 곤륜파의 명예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도 좋단 말인가?" "무,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일은 우리 곤륜파뿐만 아니라 정파 무림 전 체의......" "어차피 다른 문파에서 잘 지켜준다면 괜찮지 않겠는가? 게다가 우리 또한 가만히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우리야 이번에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 대부분이 문 파를 비우는 바람에 발생한 일이지만, 다른 문파야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 고 그걸 가지고 간 사람이 50년 전 사파의 일당이라고 어찌 장잠하는가? 그냥 도 둑이 중요한 비급인 줄 착각하고 가져갔을 수도 있지 않은가?" 장문인이 너무 단호하게 말하자 그의 사제는 입을 다물고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 만 잠시 후 그는 한번 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장문 사형... 이건 정말 만약입니다만, 만약 다른 문파에서도 이처럼 잃어 버렸는데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면 어쩐단 말입니까?" "무슨 소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9대 문파에는 소림과 화산, 무당이 있네. 흥, 속세의 5대 세가야 사제 말대로 잃어버렸어도 아무 말 않고 입 다물고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정말 인정하기는 싫지만 소림과 화산, 그리고 무당은 하늘을 나 는 새조차도 뚫지 못하리라 생각하네 그러니 그곳만 무사하다면 괜찮네." "으음......" 장문과 그 사제는 젊은 도인은 따시키고 자신들의 이야기에 열중했다. 그러니 젊 은 도인은 무슨 영문인지 알고 싶어도 분위기상 감히 끼어들지도 못한 채 입만 다 물고 있을 뿐이었다. "알겠나, 사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우리 곤륜파의 명예가 달린 일이세. 그 러니 모든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고 설사 말을 해준다고 해도 곤륜파의 비 급만 잃어버린 걸세. 후우... 솔직히 그것만 하더라도 곤륜파는 치욕을 당한 꼴이 로군......" "그럼 무림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 여기에 머무시겠습니까? 아무런 내색도 하 지 않으시겠다면 아무래도 그러시는 게......" "내가 이제 가봤자 비급이 돌아오겠는가? 난 무림대회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이네. 하지만 무림대회에 참여하지 않은 제자들과 무림 5개의 단에 속해 있는 제자들을 내일 당장 곤륜파로 올려 보낼 생각이네. 거기에는 사형과 원로들께서 계시니 일아서 잘해주실테지. 그러니 자네는 각 5개의 단주에게 말해서 제자들 좀 빼달라고 부탁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서 일단락되자 장문의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일 보낼 제자들을 준비시키려는 듯했다. 그가 나가고 나자 이제는 장문인과 젊 은 도인만이 남았다. 장문인은 이 상황에 머리가 아픈 듯 두 손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누르면서 침묵에 잠 겨 있었다. 그러자 옆에 계속 서 있던 젊은 도인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차 마 장문인의 분위기상 물어보지는 못하고 자신도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약간 숙인 몸을 바로한 장문인은 자신의 옆에서 있던 그 젊은 도인 을 불렀다. "소람아, 이리 앉거라." 차분함이 가득 담긴 위엄 어린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문파의 명예 를 위해 무림맹에 중요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함구하는 비열한 면이 씻은 듯 사라 지고 한 문파를 이끌어가는 대인의 풍모만이 있었다. '헤에...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9대 문파 중의 한 문파의 장문인은 뭐가 달라도 다 르구나.' "예, 사부님." 공손히 대답하고 앉는 그는 장문인의 제자였던 모양이다. 그런 그를 담담히 바라 보던 곤륜파 장문인은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저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네가 들었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겠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래,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파 무림에서도 아주 소 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 그러니 너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디에도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 이 비밀은 너와 내 사형제들인 장로들에게 선택받은 후계자만이 알고 있어 야 하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건 네게 정식으로 내 뒤를 이을 때 알려주려 했건만 왠지 사제의 말이 맘에 걸리는구나. 어쩌면 난 정말 우리 문파의 명예 때문에 아주 중요한 실수를 하는 건지도 모르지... 부디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기를 비는 수밖에... 무량수불......" 잠시 흔들리는 눈빛을 다시 바로잡기 위함인지 도호를 한 번 외던 그는 결연한 눈 으로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소람아, 잘 듣거라, 너는 50년 전에 일어났던 정사대전을 알고 있겠지?" "예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 정사대전에서 마지막 결투를 기억하느냐? 무림맹으로 인해 뭉쳐진 정파 의 무인들이 마지막 결전을 위하여 각 문파의 정예 중의 정예들을 모아 전 무림맹 주를 비롯하여 9대 문파의 장문인들과 각 세가의 가주들이 마교의 잔당이 몰려 있 는 복건 지방의 황강산 골짜기로 달랴갔단다. 그때는 나를 비롯하여 현 9대 문파 의 장문인들도 대부분 있었지. 그리고 우린 그걸 보았단다." 다시금 그때의 생각이 났는지 약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부르르 떠는 장문인의 모 습에 그의 제자인 소람 도인도 긴장된 얼굴로 장문인의 입만 바라보았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지. 가공할 마공... 최후의 수법을 남겨두고 있던 마 교의 교주는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보이자 그 마공을 시전했지. 정말 끔찍했다. 어디서 그런 것들을 구한 건지... 생전 처음 보는 괴물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와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우리는 그 녀석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정말 정신없이 죽여댔다. 마치 지옥이 따로 없더구나. 결국 그곳으로 달 려간 정파의 인물 대부분이 명을 달리하자 이대로는 끝장이라 생각하신 삼성께서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겨우 그 마교 교주를 죽일 수 있었지. 놀라운 건 그 교주가 죽자마자 괴물들 또한 씻은 듯이 사라졌단 거다. 우리는 죽은 교주의 품에서 그 괴물들을 불러내 부릴 수 있었던 마공의 비급을 찾 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곳에 남 아 있던 9대 문파의 장문인들과 8대 세가의 가주들. 그리고 전 무림맹주와 무림맹 의 군사인 전 제갈세가의 가주가 모여 의논한 결과 세력이 약해진 3대 세가를 빼 놓은 15개의 곳에서 그 마공을 보관하기로 했다. 생각하기도 싫고, 이름조차 알려 져서는 안 되는 극악의 마공 비급은 군사인 잔 제갈세가의 가주에 의해서 15개로 분리되고 각각 무림맹주를 비롯한 9대 문파의 장문인들과 5대 세가의 가주들에게 넘겨졌지. 우린 그걸 극비리에 보관하고 있었던 거다. 순서는 전 제갈세가의 가주 외에는 아무도 모른단다." 그러자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소람 도인이 긴장된 얼굴 그대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아까 말씀하신 그것이란......" "그래, 바로 그 마공이 적힌 비급의 한 조각이라는 거지. 솔직히 그건 누구 하나가 잃어버리다면 무림맹주에게 이야기해 모두들 즉각 모이게 해야 한다. 하지만 솔 직히 그건 15개의 조각이 모이고 지금은 가주 자리에서 은퇴하여 조용히 지내는 전 제갈세가 가주만이 알고 있는 순서대로 맞추어야만 마공이 완성된다. 그것들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절대 마공은 완성될 수 없지. 난 그걸 믿고 우리 문파의 명 예를 선택한 거란다." "아,예에......" "하지만 최대한 그걸 빨리 찾아내야겠지. 그러니 네가 내일 제자들을 이끌고 문파 로 돌아가 쥤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부디 네가 직접 수색에 참여하길 바란다. 알겠 느냐?" "예, 알겠습니다." 정색을 하고 대꾸하는 그의 모습에 장문인은 만족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 내 뒤를 이을 너이니 이 일을 꼭 해내리라 믿는다. 네가 이번 무림대회에 참 여하지 않은 게 다행이구나. 그럼 이만 나가보자꾸나. 다른 제자들이 이상히 여기 겠다." 그러면서 장문인이 몸을 일으키자 제자 또한 몸을 일으켜 그 방을 나섰다. 더 이상 엿보고 있을 필요성을 못 느낀 나는 화면을 끄고 방에 쳐두었던 결계를 풀었다. '마공이라... 곤란하군. 그렇다면 전에 할아버지가 모용세가의 그 전대 가주와 속 닥거리던 게 바로 이거겠지? 문제는 할아버지나 그 모용세가에서도 무림맹주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거야. 알렸다면 9대 문파의 장문인과 5대 세가의 가주가 모였을 테니...... 하지만 전에 할아버지가 말하길 5대 세가의 가주들만 모아놓고 이야기를 한다고 했지, 무림맹주에게 이야기한다고는 하지 않았어. 흐음... 이로써 그 마공 비급의 조각은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벌써 3조각이나 잃어버린 거군. 하지만 다른 문파들 도 잃어버렸는지 아닌지 모르잖아? 역시... 할아버지 말대로 누군가가 모으고 있 는 걸까? 만약 우리 가문에 그게 있었으면 내가 마법을 걸어놔서라도 범인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군.' [제 27화] 무림의 꽃 그 다음날부터는 본선 2차전이 시작되었다. 총 100여 명의 사람들 중 절반인 50여 명의 사람들만이 1차전에서 승리하여 2차전을 치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본선 2차전에서 첫날에 경기를 치르는 선수에 뽑히게 되었다. 이때 나는 그 경기에서 엄마 빼고 난생처음으로 여자와 대련을 해보게 되었다. 그녀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무사였는데 아미파의 속가 제자라고 했다. 이쁜 건 아 니었지만 단아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걸 보니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지 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아미파 장로의 추천으로 본선에 진출할 정도면 어느 정도 실력은 있다는 뜻이지만. 그녀를 대하고 인사를 나눈 뒤 자세를 취하는데 뭐랄까 그동안 경기를 치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진지한 감정이 내 몸을 휘감는 것이 느 껴지자 나는 내 자신에게 놀랐다. 솔직히 그동안 경기를 치르는 상대편들은 모두 나보다도 훨씬 나이도 많은 남자들뿐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처음에 날 보자마자 얼굴에 깔리는 건 모두 깔보는 것, 아니면 싸우기도 전에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 하는게 역력한 표정들이 었다. 그러니 나는 처음 경기를 할 때는 조금 긴장되 마음 으로 올라오지만 그런 표정들을 보기만 하면 속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 밀어 올라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겨 버리고 말겠다고 결심하는 거였다. 아마 그런 마음 때문에 다급하면 내 스스로가 원하지 않았어도 저절로 마법을 사용해 버리 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동안 많은 경기를 치르면서 땡땡이는 많이 쳤어도 그 나마 꾸준히 익히고 수련해 왔던 검술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마법으로써 금 방 이겨 버린 것이다. 덕분에 원하지 않은 '천상행운녀'란 별호가 붙어버렸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지못하고 있었다. 음, 뭐 민이 보다 조금 아래의 실력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번 경기는 전혀 달 랐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지만 전혀 나를 깔보는 표정이 아닌 아주 진 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은 남자니까 마음 밑바닥에 서는 조금 창피를 당하게 해줘도 괜찮을 거라 여기고 있었지만, 여자를 대하고 있 으려니 될 수 있으면 창피를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부터 떠오르는 거였다. 그녀 또한 무를 추구하는 무인이지만 그보다도 먼저 여자였기에 같은 여자가 마 법으로 인해 미끄러져서 연무장 바닥에 발라당 나동그라지는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무림대회에 참여하여 정말 처음 진지한 마음으 로 나의 소검을 뽑아 들었다. 아미파는 9대 문파 중 유일하게 여성으로만 이루어 진 문파로 불교를 추구하는 문파이다. 여자 소림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불교사대 명산 중 하나인 사천 아미산에 있는 문파인데 아미산에 있어서 아미파라고 하는 듯하다. 뭐, 기원은 복호사라지만. 이곳에는 여러 절기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으 뜸이라고 할 수 있는건 검법이다. 그래서 검법 하면 무당, 화산, 아미, 곤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 또한 검법을 연마했는지 조용히 들어 올리는 건 평범한 장검 이었다. "타핫!" 짧은 기함 소리와 함께 나에게 찔러 들어오는 검은 닿기 직전 한 개에서 두 개,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로 점점 늘어나더니만 결국 수십 개의 검줄기가 되어서 뻗어 왔다. '에,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다니이이∼' 나는 그걸 그대로 맞설 만큼 내 실력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에 그동안 한 번도 펼친 적이 없던, 엄마에게 배운 검법 중 철저히 방어만 하는 초식을 펼쳤다. 검을 거꾸로 잡고 보법을 밟으며 마치 춤을 추는 듯 검을 쥔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려 놀려댔다. 그 와중에 나에게로 쏘아져 들어오던 수십 개의 검줄기는 내 곁을 스쳐 지나가든지, 아니면 내가 움직이던 검에 맞아 옆으로 빗겨 가든지 튕겨 나갔 다. 그러는 동안 그녀와 나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그녀가 얼른 검법을 바꾸어 내 오른쪽 팔을 겨냥하여 밑에서 위쪽으로 쳐 올리는 것을 눈치 채고는 밟고 있는 스 텝을 그대로 연셜시키며 얼른 왼쪽으로 한 바퀴 빙 돌면서 그녀의 뒤쪽으로 돌아 가려 했다. 하지만 나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 또한 내 의도를 눈치 챘는지 같이 돌 아와 그녀와 나는 또다시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그와 함께 그녀에게서 뻗어 나오 는 날카로운 검들을 나는 뒤로 조금씩 물러서며 하나하나 쳐내기 시작 했다. 원래 그녀와 나처럼 가까이 서 있는 상태라면 장검을 가진 그녀보다 소검을 가진 내가 더 유리한 법이다. 그러니 거리를 넓히려고 뒤로 물러나는 건 그녀가 되어야 하고 나는 거리를 좁혀 공격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소검을 가진 내가 뒤로 물러서고 장검을 가진 그녀가 계속 간격을 좁히며 다가서는 것이 다. 아직 내가 너무 경험이 부족하여 다가섬에 있어 겁을 먹고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심으로는 그녀의 뒤로 돌아가기만 하면 권법으로 그 녀를 향해 공격하려 했었는데 내 움직임이 그녀에게 읽히는 바람에 아까부터 공 격은 계속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련을 하면 할수록 긴장감과 진지함, 그리고 약간의 겁먹음을 통해 뻣뻣 하게 굳어 있던 내 몸이 흐름을 타면서 조금씩 자연스러워졌고, 몸가짐 또한 아까 보다도 훨씬 더 부드러워져 이제는 완전 춤을 추면서 그녀를 상대하는 듯한 기분 이 들었다. 그러자 조금씩 여유가 생긴 나는 뒤로 물러나기보다는 매섭게 검이 나 에게 공격해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맞서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한 발자국 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팔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 수 있을 만큼 거리를 좁혀 권법과 발차기로 공격하려는 찰나. 챙! 휘익∼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알아채고 내 검을 막아 뒤로 밀치는 동시에 자신도 뒤로 훌 쩍 물러나 거리를 아까보다도 훨∼씬 넓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앗… 아까버라…….' 겨우 흐름을 잡아서 드디어 공격을 하려는가 했더니만 그녀가 흐름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 은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그녀가 멀어져 다시 공격하 려고 자세를 취하는 걸 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향해 마나를 발사 했다. 슈욱! 옥잠지. 엄마에게 배운 지공으로써 나는 그동안 이걸 배웠다는 걸 정말이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얼결에 사용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예전 엄마와 대련하면서 배울 때 상대편이 거리를 넓히면 그 순간 생기는 빈틈을 놓치지 않게끔 옥잠지를 날리 도록 버릇을 들려 놨던 것이 기억났다. 그 버릇이 지금 튀어나올 줄이야……. 비록 그동안 단련을 안 하고 있던 탓에 비녀보다는 조금 더 굵은 빛줄기가 날아갔 지만 그 빛줄기는 정확히 그녀가 잡고 있던 검격(검 손잡이의 가장 윗부분으로 검 날과 검 손잡이를 구분함과 동시에 손을 보호하기 위해 손잡이보다 튀어나온 부 분)에 맞아 그것을 부숴 버리고 말았다. 아미파 속가제자인 그녀는 그 충격에 손 목이 팍 꺽여 버렸는데 제자리로 돌아온 손목을 보니 막 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녀 는 놀란 근육을 진정시키려 검을 잡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손목을 주무르는데 얼 굴을 미미하게 찡그리는 걸 보니 꽤나 아픈 모양이었다. 게다가 슬쩍 보니 점점 부 어오르고 있었다. '에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있는 힘껏 지공을 날리다니 말야… 손목이나 팔 에 맞았으면 얼쩔 뻔했담? 완전 3클래스의 매직 미사일 수준이구만.' 충격이 컸는지 공격 자세를 풀고 자꾸 손목을 움직여 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쬐 께 미안해져서 -정말 위험할 뻔했으니까-공격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그녀가 시선을 돌려 날 보더니 생긋 웃었다. '엑?' 그러더니 다가왔다. "아… 저기?" 이제는 되게 부풀어올라서 부은 티가 팍팍 나는 손을 바라보며 의도를 몰라 어정 쩡하게 묻자 그녀가 다시 한 번 생긋 웃으며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제가 졌습니다. 정말 멋진 경기였어요." "에… 아니아니, 운이 좋았을 뿐인걸요." 얼결에 같이 포권을 취하며 마주 인사를 하자 그녀는 다신 한 번 방긋 웃고는 몸을 돌려 경기장을 내려갔다. "은진 승!!" 심판자의 선언이나 관중들의 환호도 들리지 않은 채 나는 정말 얼떨떨했다. "나… 정말 이긴 건가?" 그동안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경기를 치른 적이 없던 터라 되게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환호를 받아본 것도 솔직히 처음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내 상대편에게 아깝다는 소리가 나오거나 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연무장을 내려오면서 얼떨떨함이 가시자 그제야 기분이 좋아지면서 미소가 감돌 았다. "헤헤헤… 이렇게 이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그리고 이 대련으로 인하여 나는 무림화 중 일인이 되었다. 뭐, 대련 하나로 그렇 게 되었다는게 쬐께 웃기긴 했지만 솔직히 내 미모 정도면 예선전을 통과했을 때 무림화로 불렸어야 했다.(허거걱… 돌 날아온다. 이봐,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 고. 꽥~~ 그걸 나에게 던지려는 건 아니겠지? 제발 그 바위는 내려놔라. 무겁지 도 않냐?) 하지만 그동안 내 미모(?)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어도-험험…- 미모보다는 내 별호인 '천상행운녀'가 먼저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바람에 진지 한 이미지가 없어서 무림화라 불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대련으로 인하여 그 우스운 이미지를 몰아내고 내 미모와 능력을 각인시켰다는 것 아니겠는가?캬캬 캬. 아직은 남양 내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이지만 이 얘기가 무림대회 때 알려지기 시작한 이상 강호 전체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 즉, 이제 난 명실공히 무림화란 이 야기!! 후훗(근데 내가 왜 이리 좋아하누? 역시… 나도 여자였던가?) 물론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무림 정세에 관심이 많은 덕순과 예성 구가 소문을 듣고서 이야기 해준 거였다. "허허허, 물론 우리 진이라면 무림화가 되고도 남지. 암, 그렇고말고. 당연한 거 아 니겠느냐? 이렇게나 예쁜데… 그동안이야 내가 너무 세가 안에다 꼭꼭 싸두고 남 들에게 안 보여줘서 그렇지 나는 우리 진이가 나오자마자 무림화로 불릴 줄 짐작 하고 있었느니라. 허허허."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지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면서 할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그 러나 난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으니… "무림화? 무림의 꽃? 강호에서 예쁜 여자들을 말하는 거야?" '으음… 미스 강호쯤 되려나?' 그러자 희여송이 피식 웃으면서 성명해 줬다. "아닙니다. 외모가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무림의 꽃이라고 불러지지는 않습니다. 외모만 본다면야 무림화에 뒤지지 않을 만큼 유명한 기녀들도 많은걸요. 무림화 로 불려지려면 우성은 당연하겠지만 강호에 몸담고 있어야 하고, 꽃이라 불릴 정 도로 외모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모만큼이나 능력이 있어야 하지요. 아마도 험한 강호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 같습니 다." "그렇군요. 아아, 이제야 아까 성구와 덕-나는 덕순이 이름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냥 성만 불렀다-이 말한 걸 알겠어요. 그동안은 내가 음… 내 입 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예쁘긴 예뻤는데 능력을 보이지 않아서 무림 화로 불리지 못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렇죠." "그럼 한 가지만 더… 아까 무림오화라고 했지요? 그럼 나 말고도 무림화가 있다 는 이야기네요?" "아따, 주군께서는 그런 것도 모른다요? 그런 건 무림 사람이라면 다 아는거 아닌 감요?" 내가 답답했는지 덕순이가 슬쩍 끼어들었다가 유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고 슬그머 니 입을 닫았다. "죄송하구만이라………." 얼굴에 안 어울리는 머쓱한 표정으로 그가 입을 다물자 일행들이 그 모습에 피식 피식 웃었다. 요즘 그 때문에 세가 사람들이 웃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덕순이도 그런 걸 좋아하는 눈치여서 마음 놓고 웃는 거다. 덕순은 내 수하가 된 후로 정말 많이 밝아졌다. 아직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를 볼 때 움찔 놀라기는 하지만 같이 다니는 세가 사람들은 그를 피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본성이 요 즘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그는 의외로 말이 많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태어 나서부터 운남 지방에서만 살아 사투리가 진한 말투는 그의 익살맞은 행동과 함 께 되게 웃겼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어찌 보면 무례하게 비춰질 수 있었는데, 그게 유가 보기에는 안 좋았는지 덕순은 가끔가다 유의 눈초리를 받곤 했다. "사매가 무림화가 되기 전에는 무림 사화라고 불리고 있었답니다. 뭐, 그 전에는 무림오화였지만, 무림화로 불릴 수 있는 건 혼인전까지라서요. 세월에 따라 숫자 는 계속 바뀐압니다." "그 나머지 무림사화는 누구이데요?" 민이 도한 무림화에 흥미가 있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다가 틈을 타서 질문 했다. "현 무림화라면… 우선 두 분과 안면이 있는 제갈세가의 제갈 준희 소저가 있지 요." "에엑? 준희 언니가 무림화였다고요?" 제갈준희 얼굴이 예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무림에서 나까지 포함하여 단 5명밖 에 없다는 무림화가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란 사실이 정말 뜻밖이였다. 내가 너 무 경악했는지 엄마가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넌 그런 것도 모르고 사람을 사귄 거니?"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는걸요? 그리고 솔직히 무림화가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어 떻게 알았겠어요?" "에… 그럼 제갈 누님 또한 한 수 재간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런데 왜 무림 대회에 참여하지 않으셨을까요?" 민이의 질문에 희여송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갈준희 소저는 무공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지혜가 뛰어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은 거의 은거하다시피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시는 전 제갈세가 의 가주께 친히 가르침을 받았다더군요. 제갈 소저 별호가 괜히 '만박천미' 이겠 습니까?" "우와∼ 우와∼ 준희 언니도 대단한 사람이었네? 그럼 나머지는 누구인가요?" "나머지는… 현 화산파 잔문인의 손녀인 화산검봉 공손혜가 있지요. 아, 아까 예 사제와 대련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녀입니다." "에엑? 그랬었어? 난 못 봤는데……." 나의 안타까운 외침에 덕순이 끼어들었다. "아따, 주군께선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뭐 하느라 못 보셨다요?" "쳇, 딴생각하고 있었단 말야. 우잉… 정말 아깝다. 어떻게 생겼는지 봤어야 했는 데… 예 사형, 그여자 어땠어요? 그렇게 예뻤어요?" 갑자기 내 질문을 받은 예성구는 무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같은 무림화인 내 앞에서 다른 무림화를 예쁘다고 말하기가 대단히 곤란했었나 보다. 특히 가주의 손녀에게는. "아, 저, 그, 그러니까…그때 긴장해서 제대로 보지 못해 잘 기억이……." 그가 제대로 대답 못하고 말끝을 흐리며 어물거리자 민이가 끼어들었다. "난 봤어. 예 사형이 대련하는 경기라서 잘 보고 있었지. 객관적으로 보면 예쁜 편 이기는 한데 어머니보다 예쁘지는 않더라. 아, 그래도 인상이 착해 보이긴 하더 라." "아… 아쉽다. 나도 정신 차리고 있을걸. 근데 대련은 예 사형이 이겼지?" "응. 그 여자도 꽤 하던데 예 사형이 한 수 위더라고." 그러자 예성구가 즉시 겸양의 말을 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니까요. 첨에 대련할 때 제가 이길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상대였습니다." 그에게 희여송도 성멸을 덧붙였다. "하긴, 화산검봉이라고 불릴 만큼 화산파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이니까요." "헤에, 그럼 그 화산검봉을 꺾었으니 예 사형은 더 뛰어난 실력자란 소리네?" 내가 그렇게 묻자 민이도 냉큼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예 사형이 한 수 위였다니까?" 우리의 노골적인 칭찬의 말에 예성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러자 포능곽과 지우너도 피식거리며 끼어들었다. "예 사제의 능력이야 벌써 증명된 게 아닙니까? 저희도 꽤나 소질있다는 소리를 듣는 편인데 그런 저희들보다 낙성검법을 5년이나 더 일찍 습득하였으니 말입니 다." "맞습니다. 저는 본선 1차전에서 떨어졌는데 예 사제는 벌써 2차전까지 통과했으 니 말입니다." 그 말에 예성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앗, 그건 제가 운이 좋아서 그리된 겁니다. 검술 실력이라면야 저보다 사형께서 훨씬 뛰어나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지원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봐 사제, 운도 실력이야." "지 사형, 그럼면서 왜 날 보는 건데요? 그 눈빛 이상하게 기분 나쁘네요." 내가 살짝 삐친 척하자 모두들 한바탕 크게 웃어댔다. 내 별호로 '천상행운녀' 자 가 붙은 뒤 일행들은 나보고 운도 실력이라고 위로 했던 것이다. "사형, 이제 나머지 무림화들도 말씀해 주셔야죠. 나머지 둘은 누구인가요?" 모두의 웃음소리가 작아질 무렵 민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어지간히도 알고 싶었 나 보다. "아,예. 나머지 둘 중 한 명은 사천당세가의 은마호접 당연화입니다. 그녀는 당씨 세가의 여식답게 암기를 잘 사용하는데 그 중 특히 나비 모양의 암기를 사용하는 것이 주특기라 그런 별호가 붙었지요.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희여송은 거기까지 말한 다음 날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끌었다. "왜요, 또 나랑 관련된 사람인가요?"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구렬봐도 무림화라 불릴 만한 인물이 떠오 르지 않았다. 그러자 희여송이 피식 웃으면서 나머지를 말해주었다. "깊은 관련이 있지요. 바로 모용세가의 모용소소거든요." "모용소소? 소소? 으아악∼ 그 철딱서니없는 기집애?" 모용소소가 누구인가? 내가 모용세가의 혼인 잔치 보러 갔다가 자기가 연모하는 남궁중이 내게 호감을 느낀다고 질투를 느껴서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 잡으려다가 결국 내 옆구리에 칼침 놓은 그 기집애가 아닌가?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그 기집애가 무림화가 될 수 있지? 도데체 누가 그 기집 애를 무림화라고 뽑은 거야? 나보다 이쁘길하나, 무공이 뛰어나나?" 정말 기가 막힌 말을 들은 내가 그렇게 투덜대자 엄마가 피식 웃었다. "그러엄∼ 우리 딸이 더 예쁘고 더 무공도 뛰어나지. 진아, 엄마는 오늘 진이를 다 시 봤다? 진이 무공이 그렇게 뛰어난 줄 미처 몰랐는걸? 오늘 네가 펼친 소검마환 식은 정말 아름답더라." 아, 정말 나는 왜 그러는지… 아까는 그렇게 황당했다가도 엄마의 그 칭찬 어린 말 에 금세 맘이 풀려 가지고 베시시 웃음이 나왔다. "에이∼ 엄마는 뭘 그정도 가지고… 호호홋……." 아린이야기 3부 28화 - 정파수뇌들의 회의 내가 헤벌쭉해 있는 동안 시간은 착착 흘러 무림대회는 계속 진행되었다. 2차전에 서는 단국대현이운없게도 남궁상과 맞붙게 되어 패배하는 바람에 탈락하고 말았 다. 다행히 민이는 무당파의 고수랑 붙어 거의 실력이 비슷한 그를 상대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이겨 3회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민이가 내력이 많아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2회전에서 탈락할 뻔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없는지 포능곽은 1차전 에서 지원이랑 맞붙어 이겼던 그 화산파의 음… 그 뭐라더라? 아, 그래. 신검사예 좌세기랑 만나 버려서 2차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따. 그래도 신기수와 희여송은 무사히 올라가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3차전. 3차전은 다른말로 16강이라고 불린다. 신기수는 저번 대회에서 3 차전까지 올라갔다가 4차전에 올라가지 못하고 여기서 패배한 것이었다. 이번에 는 기필코 이기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다른 시합 때 보다도 더욱더 긴 장으로 굳은 얼굴이었다. 16강부터는 번호가 적힌 제비를 선수들이 직접 뽑아서 같은 번호를 뽑은 사람들끼리 대련을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16명의 선수들은 16강전을 하기 전 모두 연무장에 마련된 비무대에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 에서 제비를 뽑는다. 나와 민이, 신기수, 희여송을 비롯하여 저번 무림대회에서 4강까지 진출한 남궁중, 화산파의 제자인 좌세기, 소림사의 지수란 법명을 지닌 무승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중에는 나와 같은 무림화 중 의 한 명인 사천당가의 당연화도 있었기에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대리석 조각이 떠올랐따. 그녀의 첫인상이 되게 서늘했 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무림사화 중 나 빼고 가장 예쁜 외모를 가진 그녀 는 정말 조각같은 외모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눈매가 서늘한것이 어느 단체의 대표로 나서기에 딱 어울릴 만한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어, 덕분에 감 히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게 너무 아쉬웠다. 부드럽고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면 당장에 쪼르르 달려가서 인사라도 한번 해봤을 텐데 말이다. 내가 너무나 당당하고 멋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힐끔 눈길을 돌려 날 보더니 너무나 익숙한 일이라는 듯 가볍게 피식 웃었다. 아마 도 그녀는 같은 여자 무사들에게서 선망의 눈길을 많이 받는 편인가 보다. 그런데 이 어찌 된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와 내가 같은 번호의 제비를 뽑고 말았 던 것이다. ‘윽… 하필이면…….’ 제비를 뽑고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돌아보았는데, 그녀 또한 약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내가 쳐다보자 다시 피식 웃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과 안 만난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마땅하겠지만, 솔직히 그녀의 너무나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에 그녀가 8강에 올라갔으면, 아니, 우승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 상대가 돼버리자 그녀가 계속 이겨서 진출 했으면… 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지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생기지 않 는, 아주 모순적인 감정이 들어버렸다. 분명 내가 이긴다면 그녀는 더 이상 진출하 지 못할 것을 뻔히 아는데도 왜 져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건지…….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일행들도 좀 안 좋은 상대를 만나고 말았다. 예성구는 바로 자신의 사형인 희여송과 대련하게 되었고, 민이는 지원과 포능곽을 연속으로 만 나 이겨버린 그 화산파의 제자 좌세기랑 대련하게 되었떤 것이다. 성구는 제비를 뽑고 확인한 순간 피식 웃더니 희여송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사형이랑 대련해 보네요. 잘 부탁합니다. ” “나야말로.” 신기수만이 전혀 안면이 없는 종남파 제자와 맞붙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 다. 첫 경기는 민이와 좌세기의 대결이었다. 그 둘이 비무대에 올라가자 사람들이 환 호성을 질렀는데, 그 속에서 나는 처음듣는 소리를 들었다. “검성의 후손 대 검왕의 후손의 대련이다!” “검성? 검왕? 뭔 소리야?” 내가 모르는 것들을 제일 잘 설명해 주는 희여송을 향해 묻자 희여송이 황당하다 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왠지 모르는 게 잘못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는 그 시선에 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 자 희여송은 힐끔 옆을 봐 할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할아버지는 막 올라오는 민이 에게 시선을 빼앗겨 옆에서 뭔 이야기를 나누는지조차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래도 희여송은 약간 신경이 쓰이는 듯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전음으로 설명해 줬 다. [검왕은 사매의 증조부님이 아니십니까. 설마 모르셨습니까?] ‘증조부? 그럼 할아버지의 아버지란 소리인데? 으음…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들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흘려들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난처한 표정으로 희 여송을 쳐다보자 희여송이 폭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전음을 보냈다. [50년 전 정사대전 때 크게 활약하신 후로 전 가주님께서는 검왕이란 칭호를 받 으셨습니다. 그래서 민이 사제를 보고 검왕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성이란 정사대전의 맨 마지막 결투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 마교의 교주를 제 압한 삼성 중 한 사람 입니다. 검성, 도성, 봉선. 이렇게 세 분을 가리켜 삼성이라 고 하지요. 원래는 다른 별호를 가지고 계셧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 일 이후 삼성 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중 검성은 화산파의 장로였다고 하던데, 심검사예 좌세기가 아마도 그 직계후손인가 봅니다.] 밑에서는 벌써 비무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힐끔 보니 초반이라서 그런지 민이 가 그럭저럭 잘 대처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 삼성이란 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으음… 분명히 최근에 들어본 것… 아, 알았따. 곤륜파의 장문인이 말할 때 들었었 지?’ [그럼 그 도성과 봉선은 누구인데?] [도성은 현 무림맹주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 무림맹주가 처음 맹 주가 되었을 때 아버지 덕에 맹주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꽤 나돌았었지요. 그 리고 봉선은 곤륜파의 도사였다고 합니다.] [에엣? 곤륜파? 곤륜파는 검을 사용하는 문파 아니었어?] [검이 대표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무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창법도 있고, 도법도있고, 장법도 있는데 그중 검법이 가장 뛰어난 것 뿐이지요. 다른 문 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일반 사람들도 대부분 사매처럼 생각을 하기 때문에 봉 선께서 봉을 들고 무림에 나오셨을때 사람들이 많이 어리둥절 했다가 그분의 실 력을 보고 경악을 했다고 하지요.] 민이와 좌세기의 비무는 점점 절정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매화노방!!” 좌세기의 외침에 따라 쭉 뻗어 나가는 검이 7개의 매화를 피워내자 민이가 훌쩍 뒤로 물러나더니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빙설난분!!” 아름답게 피어난 매화들이 차가운 얼음조각에 짓이겨질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매화들이 얼마나 튼튼(?)한지 매서운 얼음조각들의 공격을 꿋꿋히 이 겨내며 민이를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놀란 민이가 헛바람을 삼키며 자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꽃들을 피하려 공중 으로 뛰어올랐다. “이런! 공중은 위험해!!”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외침에 부응이라도 하듯 공중에 떠 있는 민이를 향해 좌세 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떨쳐 냈다. “뇌전검!!” 마치 번개처럼 번쩍이는 검기가 그의 검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떠 있는 민이를 향 해 날아갔다. 그러자 다급해진 민이는 공중에 떠 있는 그대로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검을 내려 쳤다. “크읏! 빙천개열!!” 민이의 검에서 뻗어 나온 차가운 검기는 공중을 치솟아 올라오는 번개같은 검기 와 맞부딪쳐 큰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콰앙~!! 그 충격에 의하여 허공에 떠 있던 민이는 뒤로 날아갔고, 연무장에 있던 좌세기는 충돌 여파로 생긴 강한 바람에 눈을 뜨지 못한 채 몸을 바닥으로 낮추어 날아가지 않도록 몸을 지탱했다. “대단하군. 디딜 곳도 없는 공중에서 빙천개열의 위력을 제대로 낼 수 있다니….” 아빠의 감탄을 들으며 나는 저 멀리 날아가는 민이를 지켜보았다. 솔직히 민이나 나나 얼마든지 하늘을 날아다닐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무공이 뛰어 난 고수들도 공중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정도의 경공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없었 기에 어쩔 수 없이 그냥 힘에 이끌려 날아가 주는 것이었다. [야, 너 비무대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거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어떻게 해? 누나가 절대로 날지 말라며?] [그렇다고 두 손 놓고 그렇게 날아갈거야? 되돌아올 방법좀 생각해 봐라. 내가 도 와줄까?] [됐어, 내 스스로 할래.] 그렇게 이야기하던 민이가 떨어져 내린 곳은 9대 문파의 수뇌들이 앉도록 마련된 높은 단상의 햇빛과 비를 막기 위한, 머리 위를 가리는 천막이었다. 민이는 그곳을 가볍게 디딘채 다시 허공을 뛰어올라 비무대 위로 착지하려고 했 다. 하지만 좌세기는 그 틈 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매화청심장!!” 매화가 가득 피어 있는 나뭇가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듯 한 부드러운 바람 이 뻗어져 나왔지만, 그 바람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커다란 기운을 담고서 민이 를 향해 날아갔다. 아마도 민이에게 상처를 주려는 게 아니라 단지 비무대 위에 착지하지 못하게 방 해만 하려는 의도 같았다. 그 의도를 알아차렸음인지 민이는 그 장풍에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고 살짝 뒤 로 떠밀려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더니 비무대 밖 바닥에 착지했다. 솔직히 민이가 알고 있는 어떠한 방법을 쓴다 해도 하늘을 나는 수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충격에 의해 뒤로 밀려갈것은 뻐언~ 했다. 아마 민이도 그걸 알고있었기 에 가만히 장풍을 맞아준 것이리라. “아쉽군…. 민이가 조금만 더 경험이 많았더라면 좀 더 좋은 경기를 펼쳤을 텐데.” 아빠가 아쉬움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리자 엄마가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아까 공중으로 떠오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긴, 이번 대련으로 공 중으로 떠오른다는것은 다음 공격에 무방비가 된다는 걸 잘 알았겠지요.” 민이가 비무대 위로 올라오자 심판은 좌세기의 승리를 발표했고, 둘은 마주 인사 를 한 뒤 비무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세가 사람들이 있는 단상으로 올라온 민이가 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져버렸어요.” 그 다음은 나의 경기였다. 당가는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세가인 데 다 당연화 또한 나비모양의 암기를 잘 쓴다고 알려져 있는 아가씨라서 난 당연히 그녀가 암기로써 승부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암기를 다루는 자를 상대해 보는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비무대 위에 섰 는데 그녀는 의아하게도 갈색의 돌돌 말린 채찍을 꺼내 들더니 한차례 휘둘러 보 는거였다. “어… 저기… 암기 사용하시는 게 아니에요?” 그러자 그녀 또한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보며 되물었따. “암기?” “예, 저기… 사천당문 분이시라고…….” 그녀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묻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아아… 하지만 이런 단순한 비무에서는 살상용 암기를 사용하지 않는게 규칙이 잖아요.” ‘그, 그랬었어?’ 머쓱해진 내가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검을 빼들자 시합이 시작되 었다. “자, 먼저 갑니다!!” 당연화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채찍이 마치 뱀 처럼 구불구불거리 며 빠르게 나에게 뻗어왔다. “이크!!” 급한 마음에 폴짝 뛰어서 채찍을 뛰어넘으려고 했는데 전방에서 거대한 물체가 나를 향해 쏘아져 오는 느낌에 바라보니 그녀가 직접 몸을 날려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따. “옥잠지!!” 허공에서 방향을 틀 수가 없어 대신 손을 뻗어 지공을 날렸더니 그녀가 빠르게 채 찍을 회수해 기가 담긴 채찍을 들어 올려 내 지공을 막아냈다. 그동안 틈을 얻은 나는 바닥을 한 번 찍고 그녀에게 달려들며 검법을 펼쳤다. “소검만선!!” 내 공격에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채찍을 뻗었다. 그러자 그 채찍이 마치 회오리처럼 나선을 그리며 강한 기운을 머금고 내 검과 부 딪혀 왔다. “치잇!!” 재빨리 미끄러지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상체를 살짝 뒤로 숙였다. 채찍이 내 머리 위를 지나자 미끄러지듯 그녀에게 다가가 땅을 박차며 그 반동으 로 몸을 솟구치면서 검을 내뻗었다. 그러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빙글 돌아 채찍을 잡지 않은 손으로 내 팔을 잡 아 뒤로 꺾으려 들었다. 그러기 전에 나도 같이 반 바퀴 돌아 팔이 꺾이는 것을 막고, 그와 함께 무릎 뒤를 노리며 다가드는 그녀의 발을 왼발로 막은 뒤 재빨리 오른발을 들어 그녀의 무릎 을 차고, 그 반동으로 몸을 띄우며 연속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디딤돌 삼아 훌쩍 뛰 어올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땅에 닿기도 전에 나 를 노리고 채찍을 휘둘러 나는 하는 수 없이 검을 들어 막았는데, 이 채찍이 마치 산 것 처럼 검에 닿자마자 내 검을 친친 감아버렸다. 하필 검이 짧아서 검에 감기던 채찍의 끝에 달린 추가 내 손등을 쳤다. 찰싹! 소리도 소리였지만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무지 아팠다. 추가 옆으로 흘러내리며 보인 내 손등이 빨앟게 부풀어 올랐는데 욱씬욱씬거리는 걸 보니 시간이 좀 지나면 피멍이 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손등에 입김이라도 호호 불어줄 시간이 없었다. 당연화의 채찍이 내 검에 감기자마자 채찍을 잡아당겨 내 검을 뱄으려 했기에 양 손으로 검을 붙잡고 그녀의 힘에 맞서야 했다. 내가 검을 꼭 부여잡고 맞서느라 채찍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그녀가 씨익 웃더니 자신의 쪽에서 채찍을 휘감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도 한번 씨익 웃어주고 그녀의 머리를 향해 옥잠지를 다시 한번 날리자 그녀가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 틈을 타 약간 느슨해진 채찍을 풀러내 검을 빼낸 뒤 검을 들고 그녀에게 달려들 었다. -잔풍비화!!- 여러개의 매서운 검기가 그녀를 향해 쏘아져 들어가자 그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 나며 채찍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러자 그 채찍은 그녀의 주위에 막을 형성하며 내가 보낸 검기를 모조리 차단해 버리는 것이였다. 그 뒤로도 여러 번 격돌했지만 격돌 하면 할수록 나를 점점 초초해져 갔다. '문제야...채찍이란 게 원거리 공격만 하니 검이랑 완전리 다르잖아? 내 검법은 거 의 대부분이 방어 위주이고 공격은 별로 없는데... 공격을 하려면 가까이 붙어서 권법으로 하든 다리차기로 하든 해야 하는데 그녀 또한 그런 데 조예가 깊은것 같 으니 함부로 다가설 수도 없고.. 이렇게 멀리서 채찍이나 막아내고 있어야 하나? 지공을 날리자니 정확성이 떨어져서 함부로 날릴 수도 없고.....' 솔직히 그동안은 그녀를 다치게 하는게 싫어서 될수 있으면 좋게 끝내려고 헀지 만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도저리 보이지 않아 결국 나는 피 보 는 걸 감수 하기로 했다. 또다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채찍을 피할 겸 하늘 높이 떠오르자 그녀가 그런 날 향해 다시 한번 채찍을 날렸지만 그에 대한 방어는 하지 않은 채 아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은하도사!!- 마치 분수처럼 뿜어져 내리는 것처럼 여러 개릐 검기가 폭사되어서 비무장 위를 메우며 떨어져 내리자,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비무장 바닥이 부서지면서 먼지가 뿌옇게 피어 올라 시야를 가렸다. 그래도 그녀를 크게 다치게 하기 싫어서 내가 낼 수 있는 위력의 절반 정도만 냈으 니 아마 완전히 부서진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착각하고 있는게 있으니, 상대를 다치게 하기 싫어 봐주고 있는것은 나뿐만이 아니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녀의 실력을 얕봐 이 정도면 그녀를 제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채 여유 만만하게 허공에서 내려오던 나는 전보다 훨씬 강해진 채찍의 공격을 맞고 뒤로 튕겨져 날아가야만 했다. 몸을 경직시키는 감각에 얼른 검을 들어 몸를 보호해서 다행이였지, 그렇지 않았 다면 나는 복부를 정통으로 맞고 나가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허공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익숙해진 나는 침착하게 몸을 비틀어 땅에 안 전하게 착지하고 재빨리 비무장 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막 먼지가 가라앉고 있던 그곳에는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몸은 멀쩡 해 보이는 당연화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들려오는 심판의 목소리가 당연화의 미소를 좀더 짙게 만들어 주었다. -은진 장외!- '쩝... 졌군....' 그 뒤에 있었던 예성구와 희여송의 대련에서는 당연하겠지만 희여송이 이겨서 그 는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로써 민이와 나는 둘 다 16강에서 탈락했고, 우리 세가에서 8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건 희 사형밖에 없었다. 뭐, 부모님은 이번대회는 경험삼아 한 거고 다름 기회에 더 잘하면 된다고 위로해 주셨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지니까 되게 기분이 나빠서 그런지 나는 그날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깊은 밤중에 무림맹 소속의 무사가 다급히 달려와 우리 세가가 머무 는 숙소의 문을 두드렸을 때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수 있었다. "무슨 일이오?" 숙소의 경비를 총책임지고 있는 지원과 포능곽이 제일 먼저 뛰어 나가서 그를 맞 았다. "밤 늦은 시각에 죄송 합니다만, 무링 맹주님의 지시로 가주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무림맹주가? 잠시만 기다리시오." 숙소의 불이 환하게 켜졌고, 자고 있던 중이여서 그런지 옷을 제대로 차려입지 못 한 채 겉옷만 대풍 걸친 할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맹주가 날 찾는 다고?" "예, 중요한 일이니 부디 와주십사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라." '오홋 이게 뭔일이다냐? 분명히 뭔가 일어난 것 같은데?' 오밤중에 무림맹주가 급히 할아버지를 찾는 다는 건 뭔 일이 나도 단단히 났다는 증거였다. 잠시후 옷을 다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세가의 무사 두 명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데 리러 온 무림맹 소속 무사를 따라나섰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둠에 싸인 건물 사이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창을 통해 바라 보고 있는데 슬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민이가 들어왔다. "누나~!" 뒤를 돌아보니 옷을 다 챙겨 입고 있는 모습이 이 녀석도 아직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은 듯했다. "왜?" 그러자 민이가 히죽히죽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다 알면서 뭘 물어? 누나, 지금 할아버지가 무림 맹주를 만나서 뭐 할건지 볼거 아니였어? 같이 보려고 왔지." "쳇....혼자보려 헀더니만" 그러면서도 나는 문밖에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 한후 문을 걸어 잠그고 방 안에다 결계를 쳤다. 내가 사용하는 마나의 파장이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 이였다. 솔직히 유나 덕순을 시켜 뭐 간식거리라도 가져오게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우 리가 잘 때까지 유나 덕순이 바깥에서 지키고 있을 게 뻔햇기에 그렇게 할수가 없 었다. 그들때문에 나는 초저녁에 자는척 하느라 불을 끄는 바람에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하늘의 별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지붕위에 올라가 별을보고 싶었지만, 무림맹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럼 한번 볼까나?" 민이 녀석은 마치 비디오 방에라도 온 것처럼 장의자에 거의 눕다 시피 기대 앉아 서는 내가 허공에 화면을 만들어 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클레어로디언 디벤져!!" 나도 재빨리 허공에다 화면을 만들어 놓고는 민이 옆에 털썩 주저 앉아 화면에 비 친 영상을 바라 보았다. 화면에서는 할아버지가 아까 그 무사의 안내를 받아 어느 건물안에 들어가고 있 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헤에...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 주술 참 신기하단 말야.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 디든 볼수 있으니까." 아직 본격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민이가 쫑알거렸다. "응, 이건 아주 고난이도의 주술이라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건줄 알아? 하긴 뭐 우 리 종족이라면 누구든 쓸수 있겠지만.." "신기해 신기해 아앗 누나 도착 했나보다" 그런데 민이가 말하는 그 방문은 보통 방문처럼 나무로 만들어 진것이 아니라 되 게 두꺼워 보이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 보였다. 보통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듯 그 문에는 커다란 용이 양각으 로 새겨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용의 두 눈과 그 용의 앞발에 뒤어져 있는 내 주먹 만한 여의주는 번쩍 번쩍 거리는 보석으로 되어있었다. "야 야 저기 너네 종족이 새겨져 있다. 이런데서 보게 되다니 새롭지 않냐?" 민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실없는 농담을 하자 민이가 시큰둥이 대꾸했다. "새롭긴... 이상하게도 여긴 우리 종족이 만만하게 보이는지 툭하면 별 이상한 곳 에다 우리 종족을 그려 넣더라고. 누나 그거알아? 나 전에 할아버지 화장실에 한번 들어가 봤는데, 글쎄 용변기에(요강)우리 종족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거야. 그것도 황금으로 아주 거창하게 새겨놨더만? 나원참, 왜 그런곳에까지 우리 종족을 새겨 넣으냔 말야.." "푸헐...." 아마도 이곳에서는 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있던 세계에서 용변기에 드래곤을 새겨 넣다가 그걸 들키는 날 엔 그 나라는 끝장일 테니 감히 그런 짓은 못하는 거다 우리가 그렇게 떠드는 동안 할아버지는 그 거창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스많은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는데, 마치 회의장인듯 길다란 탁자가 놓여져 있었고 중앙에는 무림 맹주가 앉아 있다가 할아버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은 가주님. 밤늦게 오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제가 늦은 모양이군요." 주위에는 놀랍게도 무림대회에 참석한 9대문파(공동파 빼고)의 수장들과 5대세가 (모용세가 빼고)의 가주들이 벌써 자리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들 중 안면이 있는 자들에게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5대 세가의 가주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무림맹주가 선 채로 앉아있는 사람들을 한번씩 쭉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 다. "본좌가 이렇게 여러분들을 급히 모신 이유는 중대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중요하니까 오밤중에 사람들을 모은거 아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씹으면서 무림맹주가 빨리 본론을 말하길 기다렸다. "아까 아미파의 장문인이신 혜공신니께서 절 급히 찾아오셨습니다. 이유는 아미 파에서 보호하고 있던 그 마공의 조각을 도둑맞으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회의실(?)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거친 숨을 들이 마셨다.그러나 그렇 게 놀라지 않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내옆에 앉은 녀석이었다. "마공? 아니, 아미파에서 왜 그런 걸 가지고 있었던 거지?" "입 다물고 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께." "어? 누나는 알고 있었어?" "응. 그러니 잠깐만 기다려." "아미타불....혜공신니,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소림사의 대표로 온, 우리도 잘 아는 정각 대사가 제일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 저희문파에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문파 내부에서 도운 자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 누군가의 놀란 외침. 그것은 바로 우리 할아버지 였다. 무림맹주는 그 모습에서 뭔 가를 느꼈는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은 가주님. 왜 그렇게 놀라시는지요? 혹시 이번일에 대하여 뭘가 아는거라도 있 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맹주님....사실은 정말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저희 세가에서 보 관하고 있던 마공의 조각 또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뭐라고요?! 그렇다면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9대 문파중 하나인 화산파의 장문인이 질책하는 듯한 말투로 외쳤다. "휴우,,,,미안합니다." "그런...." 화산파의 장문인이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 했지만 정각 대사가 그를 만류했다. "아미타불. 자,자,공 시주(화산파의 장문인의 이름이 공손초이다),그만 진정하시 구려. 우선 어떻게 된 사태인지 들어봅시다." 무당파 장문인인 춘방태허 도사도 정각 대사의 말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우선은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둘이 그렇게 나오자 공손초는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고,할아버지 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우...사실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린 지는 꽤나 오래되었습니다.처음에는 그것을 잃어버린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자 점창파의 장문인이 비꼬는 말투를 던졌다. "흥 얼마나 관리가 허술했으면 도둑이 들었는지도 몰랐단 말이오?" "도둑이 든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그랬기에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던 거지요. 그 래서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저희 세가 또한 안에서 누군가가 도운 것 같았습니 다.그게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해봤지만...." 할아버지가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못 찾은 모양이었다.그러자 그 점창 파의 장문인이 다시 한 번 질책했다. "흥, 그렇다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단 말이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했는데, 재미있는 건 첨참파 장문인 옆에 앉은 곤륜파 장 문인이 정창파 장문인의 질책이 나올때마다 몸을 움찔움찔거리는 거였다. "푸헐 저할아버지 되게 찔리나 보지? 그런데 말 안 할 건가?" 내가 그 모습에 웃음을 흘리자 민이가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누굴 말하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저기 녹색의 도복을 입고 있는 할아버지 말야. 음, 우리 할아버지 한테 되게 딱딱거리는 할아버지 옆에 앉은......" "아아, 저도사? 근데 저 도사가 뭘 어쩄는데? 음, 그러고 보니 저 도사는 곤륜파의 장로잖아?" "맞아. 저 곤륜파에서도 마공을 잃어버렸걸랑. 근데 저 점창파의 장문인이 자꾸 떽 떽거리니까 말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잖아." "헤헤, 그래서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구나.근데 누나,누나는 곤륜파에서 마공을 잃 어버렸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긴, 며칠전에 곤륜파 사람들이 되게 허둥지둥거리길래 의아해서 이 주술을 써 장문인을 좀 살펴봤지." "에엣, 너무해 난 안 부르고 누나 혼자만 봤단 말야?" 그때는 내가 민이 녀석 칭찬받는 거 보구 배알이 꼴려 기분이 나빠졌을 때였다. '그러니 내가 널 불렀겠냐?' "어떠다 보니 그렇게 됐어.그리고 내가 너 이런데 관심있는 줄 알았냐?" "그래도 그렇지.....전에는 나랑 같이 봤잖아?" "내가 언제?준희 언니랑 신기수 이어줄때나 같이 봤지. 그것 말고는 같이 안 봤 다." "에엣? 그럼 누나는 다른 것도 또 몰래 훔쳐본 적이 있단 말야?" "훔쳐보다니? 난 내방에 편안히 앉아서 관람했을 뿐이야." "너무해애~~누나 혼자만 보다니.뭘 또 봤는데?" "얘는, 내가 맨날 이런 것만 보는 줄 아냐? 나도 엄마랑 아빠때문에 신경 쓰여서 되게 궁금한 거 뺴고는 잘 안본단 말야." "그래도 나없어 혼자 본 적이 있단 소리잖아? 또 언제 혼자 봤는데?" "쳇....그러니까 모용세가에 갔을때 거기서 난리난 날 밤에 할아버지가 모용세가의 전가주에게 불려갔을때 , 그때밖에 없어." "에엣?그때도 봤단 말야? 쳇, 진작에 알아채고 누나 방에 갔어야 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모용세가도 그때 마공의 주각을 잃어 버렸다고 하더라.그것 때문 에 할아버지를 부른거고." "에? 그럼 모용세가에서도 마공을 가지고 있었단 말야?" "너, 바보냐? 저기 모여 있는 사람들 안 보여? 9대 문파하고 5대세가 사람들이잖 아. 저들을 모아놓고 마공 이야기를 하는데 눈치 못챘냐?" "에? 그런거였어?" 민이와 내가 토닥토닥하는 동안 화면 속에서도 할아버지들끼리 말싸움을 하고 있 었다. 완전 국회의사당에서 의원들이 싸우는 꼴이었다. 9대 문파 쪽에서는 화산파와 종남파,점창파,청성파,의 장문인들이 할아버지를 공 격하는 반면, 세가 쪽에서는 할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가주들이 할아버지를 방 어해 주며 아미파를 공격하고 있었다. 9대문파와 8대 세가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니만 이렇게 까지 사이가 안 좋을 줄은 정말 몰랐었다. "헤에,완전 당파 싸움이잖아?" 결국 정각 대사와 무림 맹주가 나서서 그들을 뜯어말렸다. "아미타불 모두들 그만 하시지요. 우리가 여기서 자 잘못을 따져봤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맞습니다 이제부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자 점창파의 장문인이 또 땍땍거렸다. "대책은 무슨 대책입니까? 어차피 지금 마공의 조각을 잃어버린곳은 단 두곳, 아 미차와 은씨 세가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머지 문파와 세가에서 마공을 잘 지 키고 있는다면 별 탈 없을것 아닙니까?" 종남파의 장문인도 거들고 나섰다. "옳은신 말씀입니다.뭐, 다른 세가에서도 지키지 못할것 같으면 일치감치 저희 쪽 으로 넘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다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요." 그러자 남궁세가의 가주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말은 우리 세가들을 업신여기는 것이오?" "제가 언제 업신여겼다고 그러는 겁니까?" 또다시 한바탕 싸울 분위기가 되자 무림맹주가 나섰다. "커험험, 그만들 하십시오 한 무리의 수장들께서 이러시면 어쩝니까?당신들은 정 파의 기둥들이 아니십니까? 그러는 당신들께서 적극 나서서 정파의 단합을 도모 하지는 못할망정 이러시면 어쩝니까?" 그제야 한참 열을 올리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은 알았는지 헛기침을 하며 수 그러들었다. 무림 맹주는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하십시다 이 자리에는 공동파와 모용세가의 분들이 안 계시오 그들 또한 마공의 조각을 지키고 있는 분들이 아님니까? 그러니 그분들까지 같이 모여 서 의논도 할 겸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각자가 지키고 계시는 마공의 조각이 여전 히 잘 보관이 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 하신후에 다시 모여 의논하도록 하십시 다. 그때도 부디 잃어버린 마공의 조각이 2개밖에 없기를 바라겠소." 그러자 사천당가의 가주가 물었다. "그럼 다음번에도 다시 무림맹에서 모입니까?" 맹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겅각 대사가 나섰다. "그건 별로 안 좋은것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정말 마공을 모으고 있다면 그는 우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을것 아닙니까? 그러니 별 상황이 없는데도 우리가 무림 맹으로 몰려든다면 틀림없이 마공을 더욱더 철저하게 지키려 한다는 걸 알테니 남들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모이는것이 좋겠습니다." "비밀 회담이라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청성파의 장문인이 묻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화산파의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후면 제 생일 이지요, 저는 그날을 기점으로 장문인 자리를 후계에게 넘겨줄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런 날이라면 무림맹주를 비롯하여 여러분 모두가 오신다고 해도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테지요." 무림맹주가 그에게 확인차 물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가 다시 모여 회의를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거의 가만히 있던 무당파의 춘방태허 도사가 찬성했다. "그거 좋은 묘안입니다.그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은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그걸 본 무림맹주가 선언했다. "그렇다면 화산 장문인의 생신에 다시 한번 모여서 의논하도록 하겠습니다. 화산 장문인께서 수고스럽겠지만 공동파와 모용세가에 서신을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무림맹에서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자연스레 보이려면 화산파에서 서신이 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지요 어차피 초청장을 보낼 생각이었으니까요." "다시 한번 당부 드리지만 꼭 마공의 조각이 있는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자중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다시 만나길 바라며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 습니다." 맹주의 선언에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 밖으로 빠져나갔다. 때는 거 의 새벽이 다 된 시각이어서 하늘에는 별이 모두 자취를 감췄고, 오직 샛별만이 드 아름다운 빛을 뽐내고 있었다. "흐음, 화산파라....."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화면을 끈 후 결계를 해제시키자 민이가 일어서며 신신 당부를 했다. "누나, 치사하게 화산에서도 혼자 보면 안 돼. 알았지? 나도 꼭 같이 볼꺼야." "그려...그려..." 무림 대회는 예정대로 계속 열렸지만 난 탈락한 몸이라서 그런지 더 이상 그런데 관심이 쏠리지 않았다. 그래도 희여송과 신기수가 8강에 진출했기에 예의상 결과 는 봐주었다. 날 이기고 올라갔던 당연화는 무당파 도사에서 맞붙었는데 져버렸고, 희여송은 소림의 무승과 붙었다고 이겨서 4강에 진출할수 있었다. 남궁중은 자신과 같이 저번 무림대회에서 4강까지 진출했던 좌세기랑 맞붙어 져버렸다. 정말 안타깝게 도 그는 저번 대회에서는 4강까지 진출했는데 이번에는 8강에서 탈락하게 된 거 였다. 덕분에 남궁세가는 분위기가 쫘악 가라앉아 누구 하나 말을 건네지도 못했 다. 그리고 신기수는 8강에 진출한 또 다른 소림의 무승과 맞붙었는데 거기서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그 무승은 희여송과 맞붙은 무승의 사형이라고 하더니만 역시 실 력이 더 뛰어났다. 그래도 신기수는 이번에는 8강까지 진출했으니 작년보다 한단 계더 발전했다고 할수 있겠다. 4강에서는 희여송과 신기수를 이긴 그 무승이 붙었고 당연화를 이긴 무당파 제가 는 좌세기와 붙었는데, 각각 희여송과 무당파 제자가 져서 좌세기와 그 무승이 결 승에 올랐다. 결국 우승은 좌세기가 차지했고, 그는 무림대회 역사상 3번째로 20대의 나이에 우 승자가 되었다. 뭐, 무림대회 역사상 첫 번째로 20대의 나이에 우승을 차지한 사람은 바로 현 무 림맹주인 헌원패라고 한다. 그는 무림맹이 결성된뒤 처음 열리는 무림대회에서 우승르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 실력자이니까 현 정파의 5대고수중 한 사람인 거겠 지만...... 두 번째로 20대에 우승한 사람은 바로 진,민의 친아빠라고 한다. 뭐 그 덕에 당시 의 무림화였던 진, 민의 친엄마와 결혼할수 있었다던데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세번째로 우승한 사람이 나온 거다. 화산파에서는 좌세기가 검성의 손자이다보니 새로운 검성의 탄생이라고 떠들어 댔고, 화산파 장문인은 자신이 은퇴하기 전에 마지막 우승자를 봤다고 무지 기뻐 했다. 덕분에 자연스레 화산파 장문인의 생일 이야기가 나왔고 그때 자신의 자리 를 후계에게 물려준다는 이야기도 같이 퍼질수 있었다. 그쯤 해서 무림대회는 새로운 우승자를 탄생시키며 끝을 맺었고, 그 뒤에 우승후 보자인 좌세기가 중앙단에 입단하는 입단식을 거행했는데 우리 세가와는 상관없 는 일이었기에, 우리는 그걸 보지 않고 무림맹을 떠나 집으로 향했다. 아 ,깜빡 잊을 뻔했는데......신기수와 제갈준희의 사이는 무사히 허락을 받았다. 워 정학히 혼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건 아니지만 제가 가주가 묵인해 주었으 니 반쯤은 성공한 듯 싶었다. 이게 어띠 된 거냐 하면 준희 언니 의 말로는 이번 대회에서 남궁상이 좋은 결과를 받는다면 제갈세가 쪽에서 정식으로 혼인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하필 남궁상 이 8강에서 떨어져서 남궁세가 사람들은 우승자가 나오는 것만 보고 돌아가는 바 람에 말도 못 꺼냈다고 한다. 그리고 둘 사이도 솔직히 가문끼리 아는 사이였이에 안면만 있지 그다지 친한 것도 아니고 남궁세가 쪽에서도 제갈준희를 괜찮은 며 느리감의 후보 중 한 명으로 보고 있었을 뿐이지 예전부터 꼭 혼인을 시키자고 약 속한 것은 아니었기에 신기수가 남궁세가의 눈치를 안 보고 당당히 가서 청혼을 할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는 그를 응원할 겸, 사태를 구경할 겸 단목 형제와 나, 민이도 같이 갔었다. 그러니 5대 세가 중 두 세가와 친분이 있는 신기수를 두 세가의 후계자가 있는 곳에서 내칠 수가 없었기에 어영부영 묶인 형태가 된 것 이지만 내가 생각하 기에는 뭔가 다른 요인도 있는 듯했다. 우리가 제각 가주를 만나러 갔을 때 가주는 뭔 일이 있었는지 겉으로는 태연한척 우리를 맞이했지만 웬 남자 녀석이 달내미를 주십사....라고 부탁을 하는데도 제대 로 듣지 못할 정도로 어디 딴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에 제갈준희도 무지 의아하게 느꼈지만 결국 그 덕에 신기수는 당장 내쳐 진 것도 아니고 사이도 거의 반허락 받았으니 우리가 정말 타이밍은 잘 맞춘듯 했 다. 제갈 가주는 그 자리에서는 지금 집안에 뭔 문제가 있어 당장 대답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면서 허락은 미뤘지만, 그 뒤로도 준희 언니에게 당장 그딴녀석과 헤 어지라고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빠른시란 안에 혼인 허락이 떨어질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 준희 언니는 차선책으로 무림맹이 아닌 어느 시골 지방에 가서 은거를 하고 계시는 전 가주를 신기수와 함께 찾아가 허락을 받는다고 했다. 이래서 딸내미는 키워도 소 용이 없다고 하는가 보다. 허락할 때까지도 못 기다리고 같이 사는것도 아닌, 멀리 떨어져서 사는 할아버지를 찾아간다니 말이야. 전 가주는 준희 언니를 무지 아낀다고 하니 아마도 준희 언니가 애원한다면 선선 히 허락해 줄지도 몰랐다. 하기야 신기수가 배경이 좀 미미하다뿐이지 인물 자체 는 괜찮은 사람이니, 현명하다는 소리를 듣는 제갈세가의 할아버지라면 언니의 짝으로 선택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제 29화 화산파에서 화산차 장문인의 생일은 겨울이었다. 무림대회가 끝난 시기는 가을 초, 그래서 우 리는 집에 오자마자 얼마 있지 않아 다시 화산파로 향해야 했다. 화산파는 울 세가 에서 무림맹보다 조금 더 먼곳인 섬서 지방의 화산에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촉 박했다. 덕분에 올해는 화산파로 향하다가 첫눈을 맞이하게 되었다. "눈이 오네........" 난 이상하게 레드 드래곤임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무지 잘탔다. 물론 드래곤의 본 체 모습으로 있거나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면 괜찮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있으면 쉽게 추위를 타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내력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던데,나는 단전에 갈무리해둔 내력이 거의 일갑자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찬바 람이 휘잉불자 이빨이 다다닥 부딪치면서 마차에 저절로 눈길이 가는 거였다. 그 안에서는 할아버지가 청동 화로를 앞에두고 불을 쬐고 있으리라. "사매, 추우면 마차 안으로 들어가지 그래요?" 희여송이 내가 추워 보였는지 마차 안으로 들어가길 권유했다. 사실 출발할 때부 터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기 시작했기에 사람들은 내가 마차 타고 가길 바랬다. 그런데 예전에도 내가 말했듯이 스프링 시설이라든지 보호마법이 걸려있지 않은 이 시대의 마차에는 도저히 적응할수 없어서 일부러 말을 타고 가는 거였다. "에취이~~훌쩍.괜찮아요,희사형 . 저는 마차를 타면 온몸이 쑤셔가지고 견딜수가 없더라구요." 그러자 내뒤를 따라오던 덕순이 끼어들었다. "아따, 주군 그게 무슨 할매 같은 소리다요? 온몸이 쑤신다니,그 나이에 벌써부터 그러면 안 되지라." "하이고오 그 나이 때는 펄펄 날아댕겨야 정상 아닌감요? 몸이 쑤시는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만 있응께 좀이 쑤시는 거지라." "무슨소리! 나는 몇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다고." '넌 아느냐? 몇십년 동안이라도 잠만 잘수 있는 종족이 바로 우리 드래곤 이란 사 실을..' "그라믄 그냥 들어가시씨요. 눈발까정 날리는디....." "마차타면 허리가 아프다니까?" "하이고 참말이다요?" "아프니까 아프다고 그러지. 나도 마차타고 싶다고." "거참, 묘한 주군이다요. 남들은 마차 타고 싶어 안달을 하는데......" 덕순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하기야 당사자가 덜덜 떨면서도 안 들어간다고 버티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나저나 정말 날씨한번 무지 춥군. 이번 여행의 인원은 참으로 단출했다. 할아버지와 나 민이 배숙부, 희여송, 예성구 그리고 호의 무사들. 원래 나는 날이 별로 안 좋아서 할아버지가 안 데려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 곳에서 뭔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아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조르고 졸라서 따라가게 된것이다. 하지만 추운 날씨를 뚫고 가자니 괜히 따라 왔다는 후회가 자꾸 드느거였다. 물론 화산파에서 열릴 9대문파와 5대 세가의 회담이 무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 문에 이 추위에 먼 길을 가려니 진저리가 쳐졌던것이다. '아아~~난 추위를 왜 이리다 잘 타는 것이람.?' 주위를 바라보아도 나 혼자만 추위를 타는것 같았다. 민이조차도 멀떵하게 말을 타고 잘만가고 있는 거였다. 이렇게 추위를 탈 거 마차라도 탈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만은..... "헤취~~!훌쩍....." 그래도 다행인지 화산파에 도착할때 까지 그렇게 덜덜 떨었으면서도 감기에 걸리 지는 않았다. 하긴 레드 드래곤이 감기에 걸려봐라. 용인 민이 앞에서 드래곤의 망 신이란 망신은 다 떠는 꼴이 될것이다. 화산파에서는 장문인의 생신에다가 은퇴식까지 겹쳐서 그런지 손님들이 엄청 많 았다. 하긴 9대문파와 5대세가는 다 참석 했을 데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리는 게 당연한 건지도. 게다가 거기에는 모용세가 가주와 할아버지의 친구인 전 가주까지 와 있었다. 물 론 그들의 자녀들은 한명도 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들은 마공에 대한 회담이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거였다. 대충 그들에게 인사한 뒤 할아버지, 배숙부와 헹져 우리 배분의 아이들이 모여 있 는 곳으로 가니, 거기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아이들이 모여 있었는데.그들을 대접 하고 있는건 이번 무림대회에서 우승한 좌세기와 무림 오화중의 한명인 공손혜였 다. 좌세기는 무림의 5개 단 소속이 되었지만, 이번에 장문인의 생신 때문에 잠시 무 림맹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의 무리에 둘러싸여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도해나가고 있었다. 좌세 기는 이번 무림대회의 우승자로, 공손혜는 무림화중의 한명으로 무리들의 중심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들과는 좀 떨어진 곳,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자가가 내 눈에 띄었 다. 옷소매에는 매화가 수놓아진 것으로 보아 화산파 제자로 무리를 대접하기 위 하여 온것같은데 일행중에 끼지 않고 오히려 존재감없이 앉아 있으려 해서 내 호 기심을 자극했다. 보아하니 공손혜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고 내력 또한 더 많은걸 보니 윗사람인 듯한데, 좌세기는 간간이 그녀 쪽으로 눈길을 던지는 데 반해 공손헤는 그녀를 아 예 무시하고 있는듯 보였다. '흐음....' 그녀는 이쁜 얼굴은 아니었다. 눈 코 입이 중앙에 몰려 있었고, 얼굴 피부는 검은 편이었다. 게다가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어서 입술이 무지 두꺼워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단목형제가 나를 부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쪽으로 가야 했다. 이곳에도 9대문파와 8대세가의 편가르기가 팽배해 있는지 좌세기와 공손혜를 둘 러싼 사람들은 모두 9대문파 사람들이었고, 8대세가 사람들은 그들과 조금 떨어 진 곳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들 사이에서 당연화를 발견했다. "어라?" 그녀는 모영세가의 결혼식이 있을 때에는 오지 않았기에 무림 대회에서 처음 안 면을 익힌 사이 였으나 ,오늘 8대세가가 모인 자리에 여자라고는 나와 그녀 외에 는 보이지 않앗기에 나는 그녀와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건만 괜히 친한척 인사 하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여기서 다시 뵙네요. 저 기억 나세요?" "물론이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은 소저" "오옷 기억하고 계셨군요. 기뻐라." 내가 약간 호들갑을 떨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역시... 예쁘시네요. 그때도 예쁘신건 알았지만 지금 보니 같은 여자라도 감탄할 지경이에요." 그녀는 내 말 이 듣기 싫지는 않은 듯 빙그레 웃었다. "칭찬이 과하군요. 은 소저 또한 무림화가 아니던가요?" "에이, 그래도 전 당 소저 같은 카리스마는 없는 걸요. 당 소저는 분위기도 정말 멋 져서 부워요. 아,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저는 16살이거든요." "좋을 대로 해요." "정말요? 그럼 언니, 말 놓으세요. 우와, 이걸로 전 친해진 언니가 둘이나 생겼어 요. 한명은 제갈 준희 언니라구.... 아 언니도 아시죠? 제갈세가의...." "아아, 그녀 또한 무림 화지?" "훗훗, 이제 무림화에서 나가게 될 걸요? 저번에 보니까......" 내가 막 신기수의 일을 이야기해 주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갑자기 다 들을 만큼 크게 말한 것이였다. "이야~ 이곳에 무림화가 두분이나 계시니까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는 것 같은데요 ?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당연화와 같이 온 당세민이라는 자였다. 그에게 지적된 자는 당세운이라고, 그들 모두가 당세가 사람으로 사촌지간이라고 알고있다. "훗훗, 그렇구나 평소에 만나기 힘든 무림화를 두 분이나 가까이서 뵐 수 있다니 이거 참 행운인걸?" "은소저, 저와는 전에 모용세가에서 봤었죠? 저는 그때 은 소저 께서도 무림화가 되실줄 알소 있었담니다." 당세민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왔다. '에궁... 그떄 이 사람이 있었던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화사하게 웃으며 대꾸 했다. "어머, 너무 과찬의 말씀이세요. 연화 언니에 비하면 저는 많이 부족한걸요." [오옷 누나 왠일이야? 완전 요조 숙녀인데?] [훗 타고난 연기자라 말해다오.] 그런데 그때 좌세기와 공송혜의 곁에 있던 9대 문파 사람 중 한명이 우리 쪽을 향 해 시비조로 말을 던지는 것이였다. "흥 그대들은 눈이 안 좋은가 보군. 여기에도 무림화가 계시는것이 안보이는가?" 그러자 이에 대응하는 단목대현. "아아, 그랬던가? 잡초들이 너무 많아서 그 사이에 낀 꽃 이 안보이는 구려." "뭣이랴? 지금 우리보고 잡초라고 한겐가?" "거참, 이곳에서는 시를 읊지도 못하겠군." "이,이.........!" "놔두시게. 훗, 이번 무림 대회에서 우리 9대 문파가 우승을 차지했으니 얼마나 배 가 아프겠는가? 이렇게라도 속을 풀도록 우리가 봐줘야지." "하핫, 하긴 사형 말씀이 말씀이 옳습니다. 게다가 이번 좌 대협 께서는 무림사상 3번째로 20대에 우승을 하신 것이 아님니까? 세가 쪽에서 엄청 배가 아플만도 하 지요." 세가 사람들은 화가 난 게 역력해 보였지만 할 말이 없는 터하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고, 그 모습에 9대 문파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내비쳤다. 그러자 공손혜 또한 기분 나쁘게 생글 생글 웃으면서 9대 문파 사람들을 만류하는 척 헀다. "아이, 그러시면 안 되지요. 저분들도 저희 문파의 손님들이신데 자꾸 그러시면 제 입장이 난처해진답니다." '으윽......... 가증스러워라.' "아, 이거 저의가 미처 공손 소저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헀군요. 이거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회로 검성이 검왕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했군요. 좌 대협은 역시 검성의 후손 이십니다. 검왕의 후손이라고 해도 좌 대협의 실력에 는 미치지 못하지 않습니까?" '오옷, 너 말 한번 잘헀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흐음....검성이란 분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라 들었는데, 검성의 후손께서 자신보 다 어린아이에게 이긴걸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분이였군요." 그러자 그 말을 한 9대 분파의 제자가 딱 얼어 붙었다. 자신의 말 때문에 좌세기가 되먹지 못한 놈으로 매도되었기 때문이다. "사형은, 그런분이 아니세요." "아아, 그러세요? 하지만 그 주위분들은 어린애한테 이겼다고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옛말에 친구는 닮는 다고 하던데.... 으음, 연화 언니, 제 말 맞죠?" "이익.....사형은 그런분이 아니시라니까요!!!." "그래요? 그럼 인격이 참 훌륭하신 분이군요. 그런데 왜 거기 계시는 거죠? 옛 시 조에 보면 까마귀 노는 데 백로보고 가지 말라고 하던데..." 나는 좌세기를 살짝 높이는 동시에 그 주위 사람들을 까마귀로 치부해 버린 것이 다. 덕분에 9대 문파 사람들은 모조리 굳어 버렸고, 5대 세가 사람들을 피어나기 시작했다. "푸핫핫핫, 맞습니다, 소저. 그런 시조가 있지요." 호탕한 단목해현의 웃음소리에 세가의 사람들이 저마다 동조의 말을 한마디씩 하 며 같이 웃어댔다. '흥, 그러기에 누가 내 동생을 씹으래?'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굳어버린 9대 세가의 사람들을 곁눈질로 쓰윽 바라보다가 가운데 있는 좌세기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그러자 그 좌세기가 날 보더니 그냥 피식 웃는게 아닌가? 그런데 그 모습을 공손혜가 보고야 말았다. 아까 나 때문에 화가 난 상태에서 이 모습까지 본 그녀는 엄청난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거였다. '아앗, 이러다가 나 또 뭔 일 당하는거 아니야? 여자의 한은 무서운데... 조심해야 겠다.' 결국 9대 문파 쪽에서 우리를 무시한 채 다시 자기네들끼리 떠들기 시작했고, 우 리고 우리끼리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그룹사이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기 시작헀고, 그것은 잠시 후 화산파의 제자들 이 저녁 식사를 날라올때까지 계속되었다. "저녁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가." 화산파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가슴에 매화 문양이 새겨진 무복을 입은 20대 초 반의 약간 여리게 생긴 무사가 먼저 들어와 우리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동안 구석 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화산파의 여제자의 눈에 생기가 돌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 손수 제자들을 지휘하여 그들이 가져온 식사들을 차려놓기 시작하는 거였 다. '호오... 갑자기 생기가 도는건 왜일까나?' 아까부터 계속 그녀가 신경 쓰여 주시하고 있건 걷에 나는 그녀의 표정을 금세 눈 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화사하게 피어나 미소까지 짓는 그녀의 모습에 약간 놀라 유심히 살펴보니, 아까 맨처음 들어와 우리에게 식사 가져왔다고 외친 그 무사를 자꾸 힐끔힐끔 보는 폼 이 뭔가 있는 듯 했다. 게다가 그 무사 또한 식사는 다 가져다 놓고 나갈때 그녀에세 싱긋 웃어주고 나가 는 거였다. '호오~' 그렇게 제자들이 식사를 다 놓고 나간 뒤, 기껏 일어나서 제자들을 도와 상을 차린 그녀는 계속 일어서서 왔다 갔다 한 탓에 자리를 잡지 못했고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당황한채 서 있었다. 남들이 이야기할 때는 구석에 조용히 있어도 눈에 띄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모두 들 식사를 할 텐데 그녀만 식사도 못한채 구석에 있는 건 정말 눈에 띄는 일이였던 것이다. 그녀도 그걸 알고 있는지 9대 문파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으려고 헀지만 좌세기와 공손혜 주위에는 빈틈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세가쪽 사람이였다면 내가 당장에 일어나서 끌고 왔을텐데 9대 문파쪽 사 람이라 함부로 나서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안됐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보고 있엇다. 결국 그녀는 어디에도 끼지 못 한채 방을 나서려고 헀다. 그런데 그때 좌세기가 일어나 그녀에세 손짓했다. "사매 어딜가려고 그래? 이리와서 같이 앉지?" 그러면서 공송혜에게 눈치를 주자, 공손혜를 살짝 눈을 찌푸렸지만 남들이 있는 앞에서 뭐라 하지는 못하고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봐도 무지 싫어하는 티가 역력한데 그녀라고 못 알아 채겠는가? "아니에요 사형. 저는 제자들이 잘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하거든요." "하지만......" 좌세기가 뭐라 더 말하려고 헀지만 공손혜가 그의 말을 잘랐다. "사현, 언니가 저렇게 말하잖아요. 언니가 뭐 어린애 인가요? 신경쓰지말고 식사 하세요. 사형때문에 아무도 식사를 못하고 있잖아요." 공손혜의 말대로 다들 그 모습을 보느라 젓가락을 들지 않고 잇었다. 그녀 또한 좌 세기를 재촉했다. "그래요, 사형 전 신경쓰지 마시고 식사하세요." 그리고 좌세기가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그곳을 나섰다. '흐음...저 아가씨가 공손혜의 언니란 말야? 친언니니까 언니라고 하겠지? 친언니 가 아니였으면 사저라고 했을 테니까... 쯧쯧..왜 구석에 처박혀 잇었는지 이제야 알겠다.저 공송혜, 성깔 무지 나쁘구만.. 언닐아예 무시하고 있네? 아마 공송혜만 되게 떠받들여 키웠나 보지? 쯧쯧.. 그러게 얼굴 예쁜 것들은 꼭 얼굴 값을 한다니 까. 근데 둘이 자매인데 어떻게 그렇게 엏굴이 전혀 안 닮을 수가 있지?'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동정을 표한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식사하는데 열중 하였다. 화산파 장문인의 생일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러니 그날 밤늦게 까지 손님들은 속 속들이 도착헀고, 어른들은 밤늦도록 숙소에 가지 않은 채 주거니 받거니 술판을 벌였다. 민이와 내가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민이와 나, 그리고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20대 이상의 나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저녁 식사가 끝나자 술이 들어왔고,그때부 터 한잔 두잔 하기 시작한것이 밤늦게까지 끝날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시간도 이른 때라 분위기를 맞추어줄 겸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던 것 인데, 그러다 보니 중간에 빠질수가 없어 밤 늦게 까지 그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이 다. 술을 마시지 않던 나였기에 차만 몇 주전자를 마시고 안주만 너무 집어 먹어가지 고 나중에는 안주 때문에 배가 찬 건지, 차 때문에 배가 찬 건지 헷갈릴 지경이였 다. 결국 견디지 못한 나는 눈치를 봐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민이가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단목 형제 에게 꽉 잡혀 있는 그를 구하 다가는 나까지 붙잡힐까 봐 두려와 외면해 버리고는 나와 버렸다. [누나, 누나아~ 나만 놔주고 갈꺼야?] [네가 알아서 빠져나와!]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몰라서 물어? 좀 도와 줘어~!!] [으이그... 그럼 나보구 어쩌라구?] [누나 잔머리 잘 굴리잖아 ? 이럴 때 좀 써봐.] '잔머리'란 단어로 내 맘에 상처를 입힌 민이 녀석을 도와줄 만큼 난 착하지 못했 다. 그래서 그 녀석을 싸늘이 노려봐 준 후 몸을 돌렸다. [흥!] [누나, 누나아~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몰라!] [아앗, 누나아~ 누나 내가 잘못 했어 ~! 제발 도와줘!] [흥,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와서 주술을 써줄테니 너무 걱정 마. 그럼 그때까지 잘 버텨 보라고!!] 그래도 끝까지 동생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 방을 나서기 직전 녀석을 바라보며 희망(?)을 북돋아 주는 말을 던져 준후 그곳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참내. 아직 10대 청소년들이 그 자리에 같이 있으면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 할 것 아니야? 이게 무슨 망년회라고 갈 때까지 가자는 분위기람? 당연화 언니도 대단해. 벌써 술을 마시고 있잖아? 아직 20살이 안된걸로 알고 있 는데 말이야...' 속으로 그렇게 궁시렁궁시렁대면서 그 건물을 빠져나와 숙소 쪽으로 가고 있는데 왠지 가면 갈수록 점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길을 밝혀놓은 석등조차도 점점 띄엄띄엄 있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라? 이상하다? 보통 손님들이 묵는 숙소 쪽은 밝게 해두는거 아닌가? 왜 이렇 게 어둡게 해놨지?' 고개를 갸웃대며 계속 길을 재촉한 결과, 나는 인적도 없고, 길을 밝히는 석등은 커녕 건물에는 불조차 달려있지 않아 어두 컴컴한 곳에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길을 잘못 들엇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보며 되돌아 가기 시작헀다. '이거 참, 여기가 어디야? 왜 불도 안 밝혀 놓고 있는거람?'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 보고 싶어도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터라 열심히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길을 되짚어 가는데,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잔득 예민애진 내 신경에 사람이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포착되었다. '아, 저기 사람이 잇나보다. 가서 물어보......' .....려고 햇지만 저기 있는 건 분명히 화산파의 사람들일 텐데 저들에게 물어보았 다간 은진이라는 여자가 겨우 문파안에서 길을 잃고 헤맷더라.. 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9대 문파 와 8대 세가 사람들 간의 사이가 무지 안 좋은 이때에 무 림화까지 된 내가 길을 잃고 헤맷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져나갈게 분명헀다. '으음...아무래도 작전을 변경해서 그냥 저 사람들을 몰래 따라가는게 낫겠어. 그 러다 보면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갈 테고, 그럼 아는 사람들도 만나기가 쉬워지겠 지? 그래, 그래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바뭐 먹은 나는 기척을 죽인 채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살금살 금 걸어갔다.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는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더욱더 어두운 어느 건물의 그림자 속이였다. ".....해" "하.....이래야 .......건가요?"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더 더욱 조심스레 걸어가서 그들이 있는 건물 벽의 코너까지 다가간 나는 숨을 죽이고 염탐하기 시작헀다. '얼라리오, 저 아가씨는?' 그들 중 한 명은 아까 우리와 같이 있다가 식사가 시작되었을때 방을 나갔던 아가 씨였다. '공송혜의 언니라고 했지?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오호라... 그러고보니 저 무 사,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만...' 그녀와 같이 있던 남자는 아까 식사를 가져왔던 화산파 제자들중 한 명으로 그녀 와 심상치 않은 눈빛을 주고 반던 남자였다. '오마나, 운이 좋은 것. 아까 유와 덕순을 돌려보내길 잘했디. 안그랬으면 이 좋은 구경도 못할 뻔했잖아?' 내가 후지기수들이 있는 방에 갈 때 그 방에 들어갈 처지가 못 되는 유와 덕순을 숙소로 미리 돌려보냈었던 것이다. 하긴 그들이 같이 있었으면 길을 잃지도 않았겠지만, 그랬다면 이 좋은 구경이 있 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근데....왠지 비밀 데이트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심각한것 같다.' "사제, 제발 그러지마. 응? 조금만 더 인내한다면 분명히 사제도 배울 수 있을꺼 야." "그만 해요, 사저. 사저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는 다는 걸 잘 알잖아요." "그렇지 않아. 사제의 재능은 사제의 사부님도 잘 알고 계셔." "훗, 재능이 있으면 뭘 하죠? 사저, 사저도 잘 알고 있잖아요? 사부님은 내게 절대 로 매화 검법을 가르쳐 주지 않을 거란걸. 장문인 께서는 내가 기다리다 지쳐서 제 발로 화산파를 설어나가길 기다리고 계신 거라고요." "아니야, 그렇지 않다니까." "훗. 자꾸 부인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아요. 내가 겨우 육합검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도 다 사저가 가르쳐 줬기 때문이란걸 난 잘 알아요. 하지만 더 이상 사저가 나 를 가르쳐 줄 수 없잖아요." "그만 해요. 이제보니 사저도 장문인과 똑같군요." "사제 !!!." "그렇잖아요? 나는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가르침을 받지 목한다는 걸 사저도 나도 잘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런 말만 하고 있을 거죠?" "그런......." "훗, 역시....이제 솔직해지는 게 어때요, 사저?난 사저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였 던 거죠? 단지 한순가의 장난감이었을 뿐이겠죠? 그래서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화산파에서 나가길 기다리겠죠? 장문인께서 정해주신 아주 훌륭한 혼처로 시집가 기 위해!!" '이거, 어째 남자와 여자 역할이 바뀐것 같은.....' "아냐, 그렇지 않아!!" "거짓말도 정도껏 하시죠!!" "사제, 제발......."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죠? 상처받은 사람은 사저가 아니라 바로 나라구요! 하긴 고아에다가 첨에 화산파에서 하인 노릇을 하고 있던 내가 사저에게 특별한 존재 가 되길 바란다는 것이 배은망덕한 거겠죠? 훗, 그동안 받은것도 감지덕지인데..." "왜 그런말을 하는 거야? 내 맘이 진실이라는 걸, 사제도 잘 알잖아!" "훗, 말로만 그럴 뿐이잖아요. 그 말을 믿고 몇 년을 기다린 내가 너무 한심스럽군 요. 다른 제자들은 20세만 넘으면 매화검법을 배울 수 있고 무림대회에도 나갈 수 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해도 사저만 믿고 기다렸어요. 하지만, 하지만 이제 난 지쳤 어요. 그래요. 장문인께서 기대하시는 대로 이까짓 허울 좋은 화산파 제자라는 것, 당장이라도 때려쳐 주겠어요!!" "사제, 왜 내 맘을 몰라주는거야? 나는 지금 당장 사제와 결혼할수 있어!!" "훗.......사저만 그러면 뭘하죠? 장문인께서는 코웃음도 치지 않을 텐데... 난 배경 도 재력도 없고, 하다못해 무공도 뛰어났다면.......무공이라도......" "하지만, 하지만 문파의 절기를 함부로 가르쳐 줄 수는 없어. 그걸 들켰다가는 사 제의 사지의 힘줄이 절단되고 단전이 파괴되는 형벌을 받게 될꺼야." "그렇겠죠. 그렇게 된다면 장문인께서 절대로 날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훗, 결 국 난 사저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만 뼈저리게 깨닳을뿐...차라리, 차라리 다 른 무공을 배울 수 있다면...: 아주 절망적인 어조로 그 남자가 중얼거리자 침묵에 잠겨 있던 그녀가 고개를 번 쩍 들었다. "좋아, 이렇게 해! 내가 사제가 무공을 배울 수 있게 해주겠어!" "하, 하지만 문파의 절기를 가르쳐 준다는 건.........." "그건 아니야.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헀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고 내 가 아는 다른 무공은 없으니까. 이렇게 해. 내가 화상파에 보관되어 있는 타 문파 의 무공 비급을 사제에게 가져다 주겠어. 그러니까 사제는 그걸 가지고 화산파에 서 나가 은거한 채로 그걸 익히길 바래. 그래서 고수가 되어서 날 데리러 오면 되 잖아!" "훗......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런 무공 비급이 보관된 곳은 들어 갈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 데다 가지고 나오는 것도 금지 되어 있잖아요. 게다가 매일 아침마 다 일일히 확인한다고 들었어요." "맞아, 매일매일 확인하지. 하지만 확인하지 않는 비급이 한 가지 있어. 그게 무엇 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대단한 무공 비 급임이 틀림없어.할아버지의 서재 비밀 장소에 보관된건데 나도 정말 우연하게 발견한 거야. 그걸 가져다 줄게. 할아버지께서는 필요하지 않으신것 같으니까. 몰 래 빼나온다고 해도 금방 눈치 채지 못할꺼야. 그 틈네 넌 그걸 가지고 멀리 도망 갈 수 있겠지." 그러자 그남자의 눈이 반짝 반짝 빛났다. "저, 정말 날 위해 그래줄 수 있어요?" "물론이야, 넌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걸. 내일 할아버지 생신이라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지금은 모두 정신이 없을 테니 쉽게 빼내올 수 있을꺼야. 그러니 내일 이 시간에 옥겨지(화산파 근처에 있는 유명한못)에서 만나." "사저........" 그 남자가 감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두 팔을 벌렸고, 그녀는 그 품에 폭 안 겼다. 한참동안아니 그러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진전(?)없이 두 사람이 떨어지더 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꼭 거기서 만나. 난 이만 가볼게." "예, 조심하세요, 사저." 그녀가 자리를 뜨려고 하는 것 같아 나는 재빨리 허공으로 떠올라 지붕 위로 몸을 피했다. 아무래도 그 둘은 몰래 만았다는걸 들키지 않으려고 남자 쪽이 좀 더 있 다가 갈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 남자가 갑자기 피식 웃었 다. 너무 기뻐서 웃는 웃음이 아닌 명백히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멍청하군. 그게 어떤 건 줄 알고 나에게 넘겨주겠다는 건가? 어쨌든 저 계집이 직 접 나에게 건네어 준다니 잘 되었어. 훗....그게 장문인의 서재에 숨겨져 있었군. 어쩐지 서고를 몇 번이나 뒤져봐도 보이지 않더라니... 이로써 임무는 반 성공했군 . 저 계집이 빼온다면 죄는 다 저 계집에게 돌아갈 테지? 뭐, 빼오지 못한다하더라 도 어디 있는지 알아냈으니까 상관없지. 훗..훗...." 범죄를 저지르는 녀석들은 범죄가 성공하면 그걸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라고 하 더니만 저 녀석도 만사가 잘 풀리는 것 같자 그걸 혼잣말로라도 떠들고 싶었나보 다. 물론 위에서 내가 듣는걸 모르고 한 거겠지만.... 그러나 처음에 그녀와 함께 있을 떄 저 녀석이 말했던 사정이 너무 안타까워서 둘 사이를 도와주려고 마음먹었는데 그게 저 녀석의 연극이라는 걸 깨닫자 너무 열 받았다. '넌,주우우우~거써!!감히 여린 여자의 마음을 이용하다니... 흥!어디 네 뜻대로 될 지 두고 보자꾸나!!' 그러면서 내일을 대비하여 그 녀석을 향해 추적 마법을 거는 순간 지붕위에 매달 리느라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기와가 괘씸하게 내몸무게가 무겁다고 비명을 질렀 다. 빠직! 깨진 건 아니다. 단지 좀 비틀리면서 다른 기와와 부딪쳐 소리가 났을뿐. 그러나 그 녀석이 그 소리를 듣고 즉각 내가 있는 지붕 위를 올려다보며 뛰어 올라 왔다. 육합검법만 배웠다는 녀석치고 단 한 번의 디딤대를 밟고 올라오는 녀석의 경공은 정말 뛰어났다. 하지만 튀는 거라면 날 따라올 자가 없었다. [공간이동!!] 녀석이 올라오기도 전에 공간이동으로 허공 높이 떠오른 나는 녀석이 지붕 위로 올라와 주변을 둘러보는 걸 느긋이 감상할 수 있었다. 결국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녀석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자 고개를 갸웃거리 며 다시 내려가 제 갈 길을 갔다. '훗,임마,네가 날 발견했다 하더라도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어쨌든... 이거 내 일 밤이 기대되는걸? 아,맞다...내일 밤에 9대문파랑 8대 세가의 수뇌들이 비밀 회 담을 할지도 모르는데..에있, 그래도 이게 더 재미있을 거 같은데 뭐.' 그 다음날은 화산파 장문인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잔치 분위기 물씬 풍 기고 있었다. 비록 산 위에 문파가 위치해서 날씨는 추웠지만 미처 천막도 못 친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먹 마시느라 추위를 별로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와 민이는 할아버지와 함께 커다란 대청의 단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우 리가 앉은 쪽에는 8대 세가 사람들이 주르르 자리해 있었고, 우리의 맞은 편에는 9대 문파 사람들이 주르르 자리해 있었다. 사이가 안 좋다, 안좋다 그러지만 가는 곳곳마다 이렇게 서로를 아예 갈라놓으니 사이가 좋아질래도 좋아질 수 없을 것 같았다. 화산파 장문인은 중앙의 단상에 앉아 음식을 입에 댈 시간도 못 가진 채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을 받고 감사읭 니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9대 문파와 8대 세가는 물론 화산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섬서성의 중소 문파들과 화산파를 나가 속세(?)에서 상점이나 표국을 운영하는 제자들도 몽땅 몰려와 가 지고 중요 인사들만 대청 안에 들여놨는데도 불구하고 자리가 모자라 힘없는 사 람들은 선물 주며 얼굴 도장 한번 찍고 밖으로 밀려 나가는 형펀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다른 건물의 대청들과 연무장 등에 마련 된 천막 안으로 들 어가 찬바람이나마 피할 수 있었지, 호위 무사들은 맨땅에 짚으로 만든 돗자리만 깔고 그 위에서 앉아 상을 받아야 했다. 선물의 행렬은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손님인 우리는 그동안 편안히 자 리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구경을 했지만. 당사자인 화산파 장문인은 몇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계속 웃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으니 죽을 맛이었을 거다. '쩝...그러니 저런 자리에는 아무나 못 앉는 거야.' 그렇게 선물 행렬이 끝이 나자 화산파 장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제가 한 명이 반짝거리는 금대야헤다 물을 담아가지고 장문인 앞에 대령했다. 저것은 금분세수식인지 금세수식인지 하는 거라던데, 저 나이까지 강호에서 갈아 온 사람이 대야에다 손을 씻음으로써 그동안 강호에서 맺어온 은원 관계를 모조 리 씻어내고 은퇴한다고 선언하는 거다. 강호에는 많은 인연이 얽히고 설켜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은혜를 베풀 수도 있고, 우너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는 거다.뭐,다른 세상이야 안 그러랴만은 강호는 받은 만큼 베푸는 기브앤 테이크 방식이 너무 확연하다 보니 강호에 사는 일반 무 사들의 평균 수명은 50 이 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환갑이 넘도록 살 수 있는 사람은 거대 문파에 몸을 담고 있던가, 아니면 너무 착해서 원한 관계를 하나도 안 맺던가, 아니면 엄청난 고수라서 덤벼드는 놈 을 다 물리칠 수 있는 사람뿐이다. 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런 험난한 곳이기에 강호에서는 노인과 여자, 그 리고 어린아이를 보기가 힘들다. 그리서 강호에 떠도는 명언에 '강호에서는 노인 과 여자와 아이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보기 힘든 그들이 있다는 건 그만큼 자신 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뭔가 있으니 함부로 굴다간 큰코다친다는 소리이다. 내 자신이 여자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여자나 노인, 아니면 어 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는 걸 본 적이 없다.보더라도 꼭 동행이 있는 모습만 보았던 것이다. 뭐, 그만큼 강호가 험한 곳이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겠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그래서 저 나이의 분들이 은퇴를 선언하면 그동안 험난 한 세월을 살아온 걸 사람들이 모두 인정(?)해 은퇴를 선언한 후에 아무리 깊은 원 한을 가졌다 해도 그걸 풀고자 찾아 올 수 없다고 한다.한마디로 강호 개근상이라 고나 할까? "정말 아쉽습니다, 공손 장문인. 좀 더 강호에 계서서 후학들을 이끌어주시면 좋을 텐데요." "맞습니다.은퇴식이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 9대 문파 쪽에서 예의상인지 그런 소리가 나오자 장문인이 허허 웃었다. "허허허, 이런 노물이 너무 눌러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 수 가 있겠소이까?장간의 앞 물결은 뒷물결에 밀려가는 법이라 했소이다. 이제 다음 후학을 위해 자리를 내줘야지요.게다가 내 뒤를 이을 장문인은 나보다 더 훌륭한 장문인이 될것이외다." 그러면서 그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장문인의 평에 조용히 서있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다음 화산파의 장문인이 될 공손남붕이었다. 그는 장문인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화산파의 제자인데,장문인의 친딸과 결혼하면 서 성을 바꾸어 양아들이 된 것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제가 어찌 감히 아버님과 비교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뭐, 그 뒤로 9대 문파 쪽에서 공손남붕을 칭찬하는 말이 몇 마디 오고 간 뒤 드디 어 공손초는 금대야에 손을 씻을 수 있었다. "자, 이로써 본좌는 강호에서 은퇴하겠소이다. 본좌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던 분 들도 오늘로 모두 다 잊어주시구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젓가락을 드는 것을 시점으 로 우리는 또 점심이라는 이름 하에 새로운 음식들을 받게 되었다. '에혀... 이건 너무하는 거 아냐? 뭔 음식을 하루 종일 먹냐? 이걸 어디다 다 넣어? 먹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일 거야.' 나도 꽤 많이 먹는다는 소릴 듣는데, 이곳에 와서는 남들이 먹는 것의 절반도 안 먹는데도 배가 불러서 쩔쩔매는 실정이었다. 이만한 음식을 마련하고 내오는 이 문파 사람들도 참 위대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새로운 장문인의 취임식이 있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오늘 은퇴식을 한 공손초에게서 화산 장문인의 표식인 매화 검령을 정중히 물려받고, 그 뒤에 역대 화산파 조사들의 영전을 모신 사당에 가서 절을 한 다음 자신이 화산의 장문인이되었음을 아뢰는 게 땡이었다. 뭐, 소림에서는 방장이 된 기념으로 설법-교회로 치자면 설교-집회를 가진다던데 여기는 속가여서 그런지 그런 건 없나 보다. '에, 그럼 도교의 문파에서 장문인이 바뀔 때는 도교 이념을 설파하려나?' 그 뒤에는 새로 장문인이 된 공손남붕에게 또 축하의 선물이 전달되었고, 그게 끝 나니까 벌써 깜깜해져 있었다. 아무리 산이라서 해가 빨리 진다고 하지만 진짜 선물 받다가 시간 다 간 거 같았 다. 그제야 잔치는 파하고 문파의 중요 인물들과 후기지수들은 나누어질 수 있었 다. 그런데 눈치를 보아하니 중소 문파들이나 화산파의 제자들이 다 내일 이곳을 떠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도 밤새도록 술판이 벌어질 것 같았다. '흐음... 그런 상황에 9대문파 장문인들과 5대 세가 가주들, 또 무림맹주가 한꺼번 에 자리를 비우면 의심하겠지? 저들은 의심 안 받으려고 노력하니까 오늘 밤에는 비밀 회의를 안 하겠군. 흐음, 그럼 마음 놓고 그 싸가지없는 자식이 어떻게 나오 는지 구경하러 갈까?' 그런데 또 혼자가면 민이 녀석이 궁시렁궁시렁거릴 게 뻔했기에 후기지수들 사이 에서 슬쩍 얼굴만 잠깐 비추다가 민이를 데리고 나와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고 화 산파를 나가려 했다. 오늘 밤, 그 나쁜 사제 녀석과 공손혜의 언니- 이름을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인 공 손영이 만나는 장소인 옥녀지는 화산 문파 바깥에 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 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 전에 미리 찾아가서 지리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별당을 나서는데 나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전날 밤에 비하여 경계가 무지 강화됐던 것이다. 게다가 무림맹 소속인 듯 보이는 사람들까지 화산파의 제자들과 같이 경계를 서 고 있었다. 아마 화산파 제자들이 손님맞이로 바쁘니까 그들이 도와 주는 듯했다. "민아, 뭔가 좀 이상하지? 벌써 무공 비급이 사라진 게 들켰나?" "에이, 설마.. 들켰으면 소란이 나고도 남았지. 이렇게 조용히 경계만 강화하겠어? 난 그보다는 뭔 일이 날까 봐 대비하는 것 같은데?" 그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아 우리는 태연히 정문을 향해 갔다. 그런데 정문은 꼭 닫혀 있었고 평소보다 배는 몰려 있던 무사들과 화산파 제자들 이 우리를 제지하는 거였다. "실례합니다만 성함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한 화산파 제자가 정중히 청해오자 민이가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은씨 세가의 사람으로 저는 은민, 누님은 은진이라 합니다." "아아.. 은씨 세가 분들이셨군요. 근런데 호위 무사도 두지 않으신 채 어딜 가시려 합니까?" "예, 취기가 잠깐 올라 산책이라도 하려고 나왔는데 문파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바깥으로 나가려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옥녀지에 가보려고 합니 다만......"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산중이라서 밤에 바깥으로 나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옥녀 지는 내일 낮에 보도록 하시고 문파 내에도 정원이 있으니 그곳을 이용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한데... 어제보다 경계가 삼엄한 듯한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이라 도 있습니까?" 민이가 그곳에 있는 무사들을 둘러보며 묻자 화산파 제자가 정중히, 그러나 단호 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혹시라도 화산 지리를 모르시는 분이 밤에 나갔다가 자칫 길을 잃어 헤매실 까 봐 미리 대비하는 것뿐입니다. 어제보다는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으니까요." "그렇군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그들에게 계속 묻기도 뭐해서 우리 둘 은 그대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누나 어쩌지? 그들은 옥녀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며? 몰래 빠져 나갈거야?] [글쎄... 얘, 민아. 이렇게 경계가 삼엄한데 그들이 몰래 나갈 수 있을려나? 보니까 정문을 아예 닫았구만...] [샛문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곳으로 나갈 수도 있지.] [화산파 제자들이 거기는 모르겠냐? 아마도 다 지키고 있을테지. 가만있어봐. 내 가 그 남자에게 추적마법을 걸어놨거든? 미리 걸어놓길 잘했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탐지 마법을 시전해 보자.] [마법? 아아, 주술말야?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서야......] [괜찮아, 괜찮아. 탐지 마법은 그렇게 큰 마법이 아니라서 기의 파장이 별로 안나. 내가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적은 곳만 찾으면.....]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다가 기억난 곳은 그들의 모습을 엿본 바로 그 장소였다. "흐음.. 괜찮은 장소가 한 군데 있긴 해. 거기로 우선 가보자." 어젯밤에 헤맨 덕택에 그곳으로 가는 방향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은 화산파 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만 있는 곳이라 했다. 그래서 경기 무사도 없고 길을 비춰주는 석등조차도 없었나 보다. 오늘도 역시나 다른 곳에는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지만 그곳에는 아주 가끔 순찰 도는 무사들이 지나갈 뿐 어제처럼 아무도 없었다. 하긴 지금쯤이면 그들 모두 바브게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터 였다. "아무도 없지?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조용히 마나를 주위에 퍼뜨렸다. 혹시라도 순찰 무사들이 오 면 잽싸게 튈 생각이었던 것이다. "디텍트 매직!!" 마법의 시동어를 외치며 손바닥을 내밀자 그곳에는 내 주먹만한 붉고 둥근 납작 한 판이 생기더니 중앙에서 좀 떨어진 곳에 초록 빛이 반짝반짝거렸다. "헤에, 이게 뭐야?" "여기 중앙에 있는 게 우리야. 그리고 이 반작반짜거리는 게 내가 추적 마법을 건 사람이 있는 장소고. 에, 그러고 보니 좀 멀리 있구나." 그 판을 보면서 나는 조심스레 민이를 이끌고 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기 시 작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 중소 문파의 사람들이 모여서 떠드는 건물이 나 오는 거였다. "민아, 아무래도 그는 시간이 안 되어서 일하고 있나 보다. 어쩌지?" "어쩌기는.. 우리도 돌아가 있다가 이 사람이 이곳을 벗어나면 그때 다시 추적할 수밖에 없잖아." "에엣... 나 거기로 돌아가기 싫은데....." "그럼, 아까 그 화산파 사람이 말한 정원이라도 가 있을까?"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그 정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법판에 그 남자가 중소 문파 사 람들이 거하는 건물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나타났다. "아앗! 간다, 간다." "빨리 쫓아가자"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걸으면서 우리는 그 마법판을 계 속 주시하며 따라갔다. 그런데 결국 도착한 곳은 아까 내가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찾은 바로 그 장소인 것 이다. "응? 왜 이리로 왔지?" 민이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함을 나타냈다. "글쎄... 아마 저들도 문파 밖으로 못 나가서 이리로 온 게 아닐까? 저쪽이야." "아, 응" 그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민이를 이끌고 막 가려는 찰나, 내 주위의 공중에 퍼 져있는 마나의 속으로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누가 온다!" "공중으로 떠!" 내 메시지에 민이가 황급히 나를 이끌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행히 지붕 위에서 경계를 서는 무사들이 없어서 우리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누나,저기에....] 민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거기에는 공손영이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흐음,역시 여기에서 만나기로 했군. 하긴 여긴 담 근처이니 경공 실력만 있다면 쉽게 튈 수 있겠지!] 나는 그녀를 따라가 그녀와 그 남자가 만나는 곳 근처의 건물 지붕 위에 민이와 내 려앉았다. "사저...." 그 남자가 감격스럽다는 목소리로 공손영을 부르자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 했다. "사저가 뭐예요... 이제 당신은 화산의 제자가 아니잖아요." "...여,영....." "운랑....." 남자가 수줍게 부르자 공손영 또한 아주 수줍게 그 남자를 불렀다. '얼씨구.' "영, 비급은 가져왔소?" "예,여기......" 공손영은 남자의 말에 품에서 비단으로 곱게 싼 자그마한 물건을 내밀었다. "그런데 비급치고는 조금 작은 거 같아요." 공손영의 말에 남자의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걸 펴보았소?" "펴본 건 아니고요. 거기 있는 걸 그냥 가져오긴 했는데 비급책이 이렇게 작은 건 처음 봤어요." "훗,아마도 품속에 숨기고 다니기 좋게 만드느라 그런 거겠지." 남자는 그러면서 재빨리 그 비단 뭉치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럴까요? 아무튼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이오. 정말 고맙소,영. 당신의 은혜는 결코 잊지 못할 거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공손영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 다. 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못했다. "잘 있으시오." "부디 큰 성취를 이루고 돌아오세요." 공손영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더니 그곳을 벗어나 담 밑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록 담이 2m 정도의 높이였지만,어제 본 저 남자의 경공 실력이라면 충분히 넘을 수 있을 터였다. 민이와 나는 다른 건물 지붕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담 근처에는 1층짜리의 작은 건 물밖에 없어서 그냥 허공에 떠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허공에 떠서야 눈치를 챈 거지만 담 근처에는 듬성 듬성 꽤 큰 나무들 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나무들 위에는 각각 무사 한 명씩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 이다. 우리가 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허공으로 떠올라 다행이었지, 안 그 랬으면 우리가 허공에 떠오를 수 있는 것을 들킬 뻔했다. 그 남자가 비록 주의하며 담으로 다가갔지만,설마하니 나무 위에 숨어 있는 무사 를 알아채랴 싶었다. 하지만 웬걸... 그 남자는 건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자마자 태연하게 담 근처에 있는 나무 밑으로 다가가 바지를 고정시키는 허리띠를 풀면 서 실례를 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가 싶더니,언제 꺼내들었는지도 모를 비수 를 번개같이 던져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사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누나,도대체 저 남자는 비수를 어디다가 숨겨놓은 걸까?] [허리띠 아니면 속옷.]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사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고,그의 시체는 그대로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땅에 떨어지지도 않아 그를 지켜보고 있던 민이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무사가 죽은 걸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 남자는 나무 위를 쓰윽 한번 올려다본 후 무사가 죽은 걸 확인하고는 다시 바지 를 제대로 추스르고 담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고요한 주변으로 요 란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랑,딸랑,딸랑~ "젠장할!" 담 위에는 잘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줄이 쳐져 있었고,그 줄에는 방울이 연걸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남자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담 위를 훌쩍 넘으려다 그 실에 걸려버린 것이다. [와우,저런 장치를 해놓았다니......] 민이가 감탄사를 내뱉는 동안 남자는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 줄을 잘라버리고 냅 다 튀기 시작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방울 소리를 들은 무사들이 땅과 지붕 위 에서 막 달려왔는데,지붕 위로 달려오던 무사 중 한 사람이 허공에 떠 있던 우리를 발견하고 외쳤다. "뭐냐,너희들은?" 경계 어린 말투로 보아 우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는 건 눈치 못 채고,아마도 경공을 사용하여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는 걸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민이를 이끌고 담 위로 내려서 그 담을 살짝 밟고 밖으로 튀어 나가면서 외쳤다. "범인은 벌써 밖으로 갔다구요!" 이왕 우리의 모습을 들킨 거 지금 당장 우리의 신분을 밝히는 것보다는 무사들의 의심을 받을지라도 차라리 드러내 놓고 그 남자를 쫒아 잡은 뒤 의심을 푸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내 의도를 눈치 챘는지 민이도 내가 이끌지 않았음에도 같이 경공 을 발휘하여 그 남자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누나,어느 쪽이야?] [직진! 흥,네 녀석이 내 마법에 걸린 이상 튀어봐야 벼룩이다!] 무사들 또한 우리 뒤를 쫒아왔지만 부모님과 살던 시절, 조금이라도 더 쉬기 위하 여 필사적으로 경공을 펼쳐 샘까지 달렸던 우리의 실력을 따라올 수 없었던지 점 점 멀리 처지기 시작했다. 하긴 우리는 그때보다 단전에 내력을 훨씬 많이 가지고 있는 터라 그때에 비해 속 도가 장난이 아니게 빨라져 있었다. 게다가 내가 사용하는 마법으로 인하여 그의 흔적을 찾느라 지체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거리가 좁혀지고 있어! 조금만 더 가면 보일거야!] 내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민이가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있다!] 과연 앞쪽에 그 남자의 모습이 보였는데,그는 우리처럼 땅을 가로지르는 대신 나 뭇가지들을 디디며 이동하고 있었다. "게 섯거라!! 빙설난분!!" 민이 녀석이 먼저 허공에 뛰어올라 그 남자를 향해 검식을 펼쳐 발목을 잡으려 하 는 동안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다른 무사들이 도착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 었다. 하지만 아까 점점 거리가 벌어진 덕인지 아직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훗,그럼 마음 놓고 사용해도 되겠군. 스네어!!" 그 남자가 민이의 수많은 자잘한 검기를 피하기 위해 얼른 몸을 빼내어 옆에 있던 다른 나무의 위로 착지하려 했지만, 나뭇가지를 밟는 순간 내 마법에 의하여 발이 미끄러지면서 넘어졌다. 그러나 떨어지는 대신 얼른 손으로 나뭇가지를 붙들고 넘어지는 속도를 그대로 타서 몸을 튕겨 올려 마치 철봉하는 체조 선수처럼 나뭇 가지를 돌더니만 위로 돌라갔을 때 나뭇가지를 놓고 공중돌기를 한번 하더니 다 시 착 하고 나뭇가지 위에 착지하려다가 다시 미끄러졌다. 그는 아직 내 마법에 걸린 상태였던 것이다. 정말 미끄러지지만 않았으면 만점 받았을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지만,안타깝게도 민이와 나는 그의 모습에 환호하는 대신 다시 한번 미끄러지는 그에게 달려들었 다. "타핫!!" 그를 잡아다가 심문을 해야 했기에 민이는 검날 대신 검의 옆면을 사용하여 당황 하는 얼굴로 떨어지는 그의 어깨를 내려쳐서 더욱더 빨리 떨어져 내리게 만들었 다. 그리고 밑에서는 내가 그의 혈을 짚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남자가 감히 그런 나의 머리를 밟고 다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려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 대신 내 머리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는데,하 필 내가 밑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쿠션 역할을 해주고야 말았다. 콰당탕!! "꽤액~!" "누나!!" 민이가 놀라서 날 부르며 달려오려고 하는데,그때 마침 근처까지 도착한 무사들 이 우리를 발견한 듯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다!!" "치잇!!" 그 남자는 사황이 무지 다급해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른 몸을 일으켜 손가락을 입에 대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부는 동시에 품에 있던 비단 꾸러미를 내력을 사용 하여 하늘 높이 던지고 말았다. 삐익~! 그리고는 허공으로 던져지는 비단 꾸러미를 잡기 위하여 몸을 날리려는 민이의 허리를 태클로써 잡아 민이를 땅으로 넘어뜨리는 거였다. "누나~!!" "오냐!!" 그 사이에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내가 대신 허공으로 뛰어올라 그 비단 꾸러 미를 잡으려고 했는데,어떤 괘씸한 매 한마리가 쌔앵 날아오더니 내가 바로 잡기 직전인 그 비단 꾸러미를 잡아채서 휘익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악! 저 괘씸한 새 같으니라구!!"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드래곤 피어를 날리거나 아니면 매직 미사일이라도 날리거 나,아님 하다못해 추적 마법이라도 걸려고 했지만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하는 화산 파 제자들과 무림맹 무사들이 허공에 뛰어오른 날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뒤늦게 뛰어 올라온 주제에 무기를 나에게 겨냥하며 얌전히 내려가기를 종용하는 것이 아닌가? "뭐예요,당신들? 당신들 때문에 저 새 놓쳤잖아요?" 너무 열받아서 땅에서 내려와 방방 뛰는데 이 인간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 히려 나보고 차갑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검을 건네주시겠습니까? 저희와 함께 화산파로 돌아가셔야 겠습니다." "뭐라구요? 이봐요,당신들은 아까 날아간 매도 못 봤어요? 그 매를 놓친 게 당신 들 때문이잖아요?" "물론 봤습니다. 하지만 그 새는 저희 쪽에서 알아서 뒤쫒을 테니 소저께선 저희 와 함께 화산파로 가주십시오." "이......!" 내가 뭐라 더 하려고 할 때였다. 저 멀리서 두 명의 인영이 날 부르며 달려오는 거 였다. "주구운~!" "아따,주군~ 괜찮으시당가요?" [누나,아무래도 소란 피우면 안 될 거 같은데?] [젠장,젠장! 누구 때문에 그 새를 놓친건데!! 지들 잘못은 생각도 안하고 나한테 왜 이러냐구우~!!] 유와 덕순은 날아오자마자 분위기가 안 좋다는 것을 눈치 챘음인지 당장에 무사 들과 우리 사이를 막아섰고, 결국 그 무사의 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나에게 화산파 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던 그 무남자는 다시 한번 그 말을 반복해야 했다. 이번에는 좀 더 사정 설명까지 곁들여서...... 그런데 또다시 일이 발생했다.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결박을 당한 화산파 제자인 척하던 그 남 자가 자결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유언이랍시고 한마디 남겼는데...... "크으윽... 너,너희 커억... 정파 놈들은... 후후후,크극... 곧,곧...허억!!" 그리고는 죽어버렸다. "독을 복용한 것 같습니다." 시체를 살펴보던 무림맹의 무사가 보고를 하자 그 상관인 듯한 무사가 시체를 보 며 내뱉듯이 명했다. "흥,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 시체를 끌고 가도록 해라!" "옛!" "자,그럼 여러분들도 같이 가주실까요?" '쳇......' 그들과 함께 화산파로 돌아가니 화산파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화산 장문인의 생 일 잔치를 했던 그 대청은 어느새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9대 문파 사람들과 8대 세가 사람들, 그리고 무림맹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앙에 무림맹 무사들과 화산파 제자들이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더니만 무림 맹 무사가 대표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아룁니다. 누군가 담을 넘는 것 같아 그 쪽으로 달려가 보니 여기 계시는 은씨 세 가의 두분께서 막 담을 넘으려 하고 계셨습니다. 그 주변에는 잠복하고 있던 화산 파의 제자가 피살당해 있었으며, 이분들을 쫒아가자 화산파 제자 복장을 하고 있 던 한 무사를 포박하고 계셨습니다. 이자가 가지고 있던 비단 꾸러미는 매가 채가 지고 갔습니다." '쳇! 누구 때문에 그 매를 놓친 건데? 쳇쳇! 네놈들이 오지만 않았어도 잡을 수 있 었어!!' 그 무사의 보고를 다 듣고 난 무림맹주가 시신을 가리키며 손짓하자 무림맹 무사 한명이 시신을 덮고 있던 짚으로 만든 멍석 비스무리한 것을 벗겨 사람들 앞에 시 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남자가 정말 화산파 제자의 복장을 하고 있자 화산파 사람들 쪽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무림맹 사람들 쪽에서 한사람이 슬며시 나오더니 시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느 마치 포청천에 나오는 공손 선생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공손 선생 같은 수 염까지 기른 걸 보니 얼굴도 되게 비슷하게 생겼다. "어떻소?" 그가 다 살펴보기를 기다려 무림맹주가 묻자 그가 공손히 대답했다. "피부의 반점과 손톱을 살펴본 결과 사망 원인은 독이 분명합니다. 입안을 살펴보 니 왼쪽 어금니 자리가 하나 비어있고, 그 주위가 검게 변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자리에서 독약을 물고 있다가 위험해진 순간 깨물어 독약을 삼킨 듯합니다. 그리고 이자가 사용한 독은 흔히 구할수 있는 단혼산이옵고, 몸에도 별다른 표식 이 없어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표식? 문신 같은건가?' 그 공손선생 비스무리한 남자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유의 전음이 들 려왔다. [살수들은 동료라 해도 서로의 얼굴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같은 동 지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몸에 문신을 해놓습니다. 저 또한 오른쪽 어깨에 문신을 새겼었지요.] '헤에......' 그 남자가 죽었을 때 남긴 말까지 다 보고가 된 뒤에야 사람들의 시선은 그 남자의 시신에서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이 아이들이 저 남자를 잡았다고?" "그렇습니다. 방울 소리를 듣고 달려갔을 때 저분들이 막 담 위로 내려서고 있었습 니다." "그래? 그렇다면 저 아이들 전에 먼저 담을 넘다가 방울 소리를 낸 사람은 바로 저 자란 뜻이군. 그럼 은 소협, 내가 몇가지 질문을 하려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소?" 딴 사람 같으면 하대를 했겠지만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한 세가의 사람들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기에 존대를 해주는 듯했다. "제가 아는 것은 모두 답해드리겠습니다." 민이가 공손히 포권을 취해 보이며 대답하자,무림맹주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 였다. "우선은 그대들이 왜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에...그건......" 처음부터 참으로 난처한 질문이었다. 어떻게 밀회를 속삭이는 걸 구경하러 갔다 고 대답하겠는가? 민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할아버지와 날 번갈아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나는 이왕 말썽꾸러기로 인식된 거 내가 다 뒤집어썼 으면 좋으련만, 문제는 그걸 설명하자면 화산파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공손영의 이야기까지 다 나와야만 했다. 그녀가 정말 멍청한 짓을 하긴 했지만 어제 저녁에 봤었던,동생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아 날 머뭇거리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남자의 시신을 보고 무지 충격에 싸여 있는데 이 상황에서 말했다가는 그녀는 무 거운 처벌을 면치 못할 거였다. [누나, 어쩌지? 다 말할까?] [끄응... 그래야 하나? 하지만 저 여자가 맘에 걸리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우리가 의심받는다구.]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주위 사람들의, 특히 9대 문파 사람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나, 그냥 다 말하자. 응?] 그 눈초리를 감당하지 못했던지 민이가 간절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나는 어 쩔수 없지만 냉정해지기로 했다. '하는 수 없지.' 그래도 내가 직접 말하기는 싫어서 자수를 권유하기로 했다. 원래 자수하면 형이 좀 감면되는 거 아닌가? [공손 소저,미안하지만 당신이 직접 사실을 말하지 않겠어요? 이대로라면 어쩔 수 없이 제가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당신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만약에 그녀가 혐의(?)를 부인하는 것에 대비하여 그녀에 게 진실만을 말하는 마법을 걸려고 준비했다. 솔직히 이 진실을 말하는 마법은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진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사적인 이야기들까지 다 털어놓게 되는 거라 어찌 보면 좀 잔인 한 마법이라고 들었지만,단 한번도 시행해 본 적이 없어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지 내 전음을 듣고 몸을 움찔하더니 뭔 가 아주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사람들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그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 다. "아버지, 그리고 무림맹주님, 소란을 일으킨 죄 죽어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제일 놀란 건 새로 화산파 장문인이 된 공손남붕이었다. "영아,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썩 물러나지 못할까?" "아버지,이번 일은 모두 제가 벌인 일입니다." "무엇이라?" "죄송합니다. 문파의 비급을 훔친 죄, 죽음으로도 씻지 못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 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왜 운랑에게는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으신 겁니까? 운 랑과 저는 미래를 약속했습니다만 이대로는 저희 사이를 허락받기 힘들 것이라 여거 혹시 운랑의 무공이 높아진다면 쉽게 허락을 받을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제가 그 비급을 훔쳐서......" 거기까지 말하자 화산 장문인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바닥을 한번 굴러 밑에 깔린 돌을 부숴놓더니 삿대질까지 하며 호통을 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 어리석은 것! 저 녀석은 단지 널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게냐?" 화산파 장문인의 호통에 계속 담담히 말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가 뭘 아세요?!" "닥쳐라!! 그래, 그래서 네가 그걸 훔쳐 저놈에게 넘겨줬다는 거냐? 그게 뭔지나 알고?" "단지 비급일 뿐이잖아요?" "이런 멍청한!! 넌 네가 뭔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는 게냐? 이런 어리석은!! 화산파 의 명예를 네가 다 먹칠하는구나!!" 너무 화가 나 그 자리에서 방방 뛰는 화산파 장문인의 말에 그녀는 입을 잠시 다물 더니 곧 너무나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훗, 화산파의 명예요? 그깟 명예, 개나 줘버리라지요." "뭐,뭣이라?" "화산파가 제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요? 차라리 일반 농민의 딸로 태어났더라면 이 렇게 뢰롭지는 않았을 것을... 화산파 장문인의 손녀로 태어나 남들의 비웃음과 쑥 덕거림 속에서 자랐습니다. 항상 동생과 비교당했으며 내가 무엇을 해도 인정받 은 적이 한번도 없었지요. 하다못해 친부모에게서 따스한 시선 한번 받지 못하고 자란 내게 이곳은 항상 차가움과 괴로움만 주었을 뿐인데, 그런데 제가 무엇 때문 에 화산파의 명예를 생각해야 한단 말입니까?" "닥치지 못할까!" "훗,왜요? 제 말이 틀렸나요? 그런 저에게 유일하게 따스하게 대해주었던건 운랑 뿐이었습니다. 이용당했다고요? 훗, 이용당하면 어떻습니까? 이용 가치로 보아주 지 아니하고 비웃기만 하는 화산파의 사람들보다 저에게는 그가 훨씬 소중합니 다. 이용이요? 훗,그가 솔직히 원한다고 하면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해서 내주었을 것입니다.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 하셨지요? 엄청난 죄를 저질렀지요. 비급을 문파 밖으로 빼돌리려 했으니, 이건 사지를 절단하고 단전을 파괴하는 형벌을 당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죄지요.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죄를 짓 게 만든 건 화산파의 모든 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녀의 원한 맺힌 말에 화산파의 모든 이들, 심지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펄펄 뛰던 장문인까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단 한사람만 빼고...... "흥,그게 자랑이야? 언니는 죄를 지은 것이 자랑스러운가 봐? 그까짓 남자에게 이 용당한 게 그렇게 행복해?" 화산검봉 공손혜. 참으로 싸가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내려진 일갈. "넌 가만있거라!!" 화산 장문인의 말에 그녀는 상처받은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 아빠아......" 그러나 장문인은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은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흑... 너무하세요." 공손혜는 울먹이면서 몸을 휙 돌려 그곳을 나가버렸다. '쯧쯧... 애를 어떻게 키운거야?' 그녀의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 다음에 애를 낳더라도 절대로 저렇게 키우 지 말아야지란 결심을 하고 있는데 공손영의 말이 들려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파의 일원으로서 제 죄가 얼마나 큰지는 알고 있습니다. 더 구나 오늘 같은 할아버지의 생신과 아버지의 취임식 때. 그래서 이런 제 잘못을 죽 음으로써 조금이나마 갚으려 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어 번개같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누가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모두의 놀람과 경악 속에서 그녀는 힘겹게 그 남자의 시신 위로 넘어지더니 기쁘 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항상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네요... 운랑....." [저 여자... 불쌍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민이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도 죽을 때는 행복해 보이니 잘됐지 뭐.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축복받은 사 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그래도... 항상 괴롭다가 죽을 때만 행복하면 뭐 해?] [설마 항상 괴로웠겠냐? 저 남자랑 밀회를 즐길 때는 행복했겠지.] 결국 우리는 의심을 벗었지만 위험한 짓을 했다고 할아버지와 배 숙부,그리고 2차 적으로 유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모른다. 날이 채 밝지도 않은 꼭두새벽에 곧바로 9대 문파와 5대 세가, 그리고 무림맹주와 의 회담이 열렸다. 죽은 공손영이 넘겨준게 화산파에서 보관하고 있던 그 마공 비 급의 조각이었던 모양이었다. 화산파에서는 이제는 은퇴한 공손초와 새로 장문인이 된 공손남궁 둘 모두 참석 하였는데 공손영의 사건으로 풀이 팍 죽어있었다. 그의 영향 때문인지 전 수뇌파 (?) 회의 때는 기세등등하던 9대 문파의 사람들 모두 기세가 수그러들어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5대 세가의 가주들은 거 보라는 표정으로 9대 문파 사람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한 묘한 기류를 타고 흐르는 침묵을 깨고 무림맹주가 입을 열었 다. "아까 무림맹 무사가 말한 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 자살한 그는 아무래도 마공 비급 의 조각을 빼내라는 지시를 받고 화산파의 제자로 위장했던 것 같소이다. 이로써 누군가가 마공 비급 조각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소. 게다가 정파 놈들이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마공을 새로 만들어내려는 인물은 분명 사파이거나 정사 대전 때 살아남은 마교의 인물인 것이 분명하오." "마교 쪽 인물임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 마공은 마교의 교주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영세가의 가주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글쎄요... 그럴 가능성도 높지만 그때 당시 사파 대부분이 마교와 연합하지 않았 소이까? 그러니 사파 쪽에서도 그 마공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지요. 어쨌든 그 건 그렇고, 이로써 아미파와 화산파, 은씨 세가... 벌써 세곳의 마공 비급 조각이 도난당했군요. 이건 모두 저쪽 손에 들어갔다고 봐야 되겠지요?" "으음......" 무림맹주의 말에 화산파 전 장문인인 공손초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데 그 때 공 동파의 장문인이 조심스레 나섰다. "험험,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너무 부끄럽습니다만 사실 저희 공동파에서도 도난당 했습니다. 범인은 저희 문파에서 10여년 전에 파문한 제자였지요. 자체적으로 해 결하려고 노력을 해봤습니다만 그의 행방이 감쪽같이 사라졌지 뭡니까. 그제야 저희도 파문당한 제자의 뒤에는 어떠한 조직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 니다." "그럼 예전에 그 파벌을 보내신 것이......" 종남파 장문인이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이 입을 열다가 침울한 공동파 장문인의 얼굴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부끄럽습니다." 그러지 이번에는 곤륜파 장문인이 침중한 얼굴로 나섰다. "무량수불... 본 문파에서 그것을 지키지 못했답니다. 하아... 조사이신 봉선께서 목숨을 걸고 막아내신 것이건만... 후세에서 그걸 지키지 못했다니... 돌아가신 조 사님의 얼굴을 어찌 뵙지요... 무량수불......" 그 뒤를 이어 청성파와 점창파의 장문인들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희 문파에서도 그것이 감쪽같이 사라졌지 뭡니까? 하아... 이게 다 본 좌의 불찰입니다." "청성파에서 그랬습니까? 후우... 저희 문파와 마찬가지로군요. 누가 침입한 흔적 도 없는데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지 뭡니까?" 그들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무림맹주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고, 소림사 방장과 아 미파의 장문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식이 담긴 불호를, 그리고 무당파, 곤륜 파의 장문인들은 탄식이 담긴 도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이거 참 심각한 일이로군요. 분명히 이번에도 누군가가 내통한 일일 겁니다. 그럼 이로써 벌써 9대 문파 쪽에서만 6조각을 잃어버린 것이군요." 그러자 드디어 나서는 모용세가의 가주. "실은... 저희 세가에서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 못난 자식 놈 의 혼인식 날 벌어진 난리를 틈타 누군가가 훔쳐 갔더군요. 후우... 범인은 알아냈 지만 그는 잡히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추궁도 할 수 없었답니다." [아아... 그러니까 모용세가에서 자살했다는 그 총관이 범인이었나 보지?] 계속 조용히 듣고있던 민이가 알겠다는 듯 메시지를 날려왔다. [척하면 척이지. 그 난리 친 게 총관의 아들이었잖아.] [아,맞다. 그랬었지?] 무림맹주는 이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는지 양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이제 종합해 보자면 9대 문파 쪽에서는 소림, 무당, 종남파만 남은 것 입니까?" 그렇게 물으며 그쪽을 바라보자 그 세 문파의 수장들이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 덕거렸다. "그럼,5대 세가 쪽에서는 남궁, 단목, 사천당가만 남은 것입니까?" 이번에는 반대 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묻자 세 세가의 가주들이 맞다는 듯이 고개 를 끄덕거렸다. "후우... 그럼 무림맹에 보관하고 있는 것까지 이제 7개만이 남았군요." 그러자 소림 방장인 정원 대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맹주, 한가지가 더 남았잖습니까? 마공을 본 유일한 생존자인 전 제 갈세가의 가주가 없다면 마공 비급의 조각을 다 모은다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니 까요." 그 말을 들은 맹주는 그제야 얼굴을 조금 폈다. "그렇군요. 게다가 그분이 은거하시는 곳은 제갈세가에서도 몇몇만 아는데다 그 분이 은거하시는 곳에 아무나 쉽게 들어오게 하실 리가 없을 테니 그 주위에는 엄 청난 진식이 깔려 있겠지요." "그렇겠지요. 그러니 천하의 어느 누가 전 가주를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이군요." 모두들 정원 대사와 맹주의 말에 긍정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그럼 마공 비급 조각을 지키고 계신 문파와 세가에서는 더욱더 경계를 철저 히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자체적인 조사를 계속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슨 단서라도 찾으시면 꼭 알려주십시요. 무림맹에서도 조용 히 이 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주가 결론을 내려는 듯 그렇게 말하자 청성파의 장문인이 조심스레 이의를 제 기했다. "맹주,그 정도로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면 저희 문파의 제자들을 보내 다른 문파의 경계 강화하는 것을 돕고 싶습니다만....." 그러자 점창파에서도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눈을 속이고 마공 비급 조각을 몇개씩이나 빼낼 수 있 다는 건 꽤나 큰 조직이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무림첩(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무림맹주의 이름으로 각 문파에 도움을 청하는 것)을 발행하여 무림맹에 좀 더 무사를 모으는 것이...." 하지만 맹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섣부른 행동은 그쪽을 자극시켜 움츠러들게 할 뿐 입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은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희 무림맹에는 5개 단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나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무량수불, 맹주의 말씀도 옳은 것 같군요. 맹주 뜻대로 하시지요." 곤륜파의 장문인이 그렇게 나서자 더이상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뒤로 회담 을 끝낼 분위기여서 나는 거기서 화면을 꺼버렸다. [흐음... 이제 남은 건 7개란 말이지? 잃어버린 건 8개고?] [그렇지. 근데 전에 곤륜파 장로의 말로는 무당과 화산, 소림의 경계는 무지 철저 하다고 하더라. 그 남자도 화산파의 제자로 위장한 지 몇년이나 지났는데도 못 찾 은 거 봐. 아마 공손영이 아니었다면 훔치기도 어려웠을 거야.] [하지만 누나, 아무리 경계가 철저하다 해도 이번처럼 내부에 있는 사람이 훔쳐 낸다면 소용없잖아.] [그렇기야 하겠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이 내부에 침투해 있을지도 모 른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을 텐데 뭐.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하겠지.] [그럴까?] [에혀,그건 그렇고 슬슬 틈을 봐서 이 세계를 구경 좀 하려고 했더니 분위기가 요 상하게 돌아가는구나. 그러지 않게 되길 바랬지만 아무래도 우리 세가까지 이번 일에 휩쓸리겠지?] [당연하지. 우리 세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며? 아마 잃어버린 책임을 지려고 할 거야.] [쩝... 귀찮은 건 싫은데......] [누나,그래도 할아버지나 부모님이 위험하면 나설 거지?] [어쩌겠냐? 이제까지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지.] [훗훗.....] [왜 웃어?] [아니,그냥.] [쳇.] 30화 단목세가에서 날아온 급보 그 다음날 늦은 아침이었다. 새벽녘까지 정파 수뇌부들의 회담을 시청하느라 늦게 까지 자지 못한 덕에 새벽 수련도 빼먹고 아침 먹는 것도 잊은 채 신나게 자고 있 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덕이 들어왔다. "주군, 주군, 아직까정 주무신다요? 아따, 빨랑빨랑 일어나 보시랑께요!" 그는 차마 내가 자고 있는 침대의 휘장은 걷지 못하고 그 밖에서 파닥파닥 뛰며 소 리쳤다. "우웅... 시끄러워... 나 어제 늦게 잤단 말야." "주구우우운~! 아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랑께요! 빨랑 일어나 보시랑께요!" "우잉... 밥 안 먹어!!" "주구우우우우우우우우우운~!!" "아, 정말! 왜 그러는데?" 덕의 너무 큰 목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체를 일으키며 짜증스럽게 말하는데도 덕은 그런 것을 못 느끼는지 옆에 있던 내 겉옷을 휘장 사이로 던져 주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주군, 주군, 빨랑 나가보랑께요. 지금 단목세가에서 급한 연락이 왔는데 뭔가 큰 일이 생긴 모양이랑께요!" "단목세가에서?" "하모요, 그렇당께요!" "도대체 아침부터 뭔 일이람?" 투덜투덜대며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벼 대충 눈곱만 떼고 겉옷을 추스르며 나 서는데 막 희여송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 희 사형!!" 그를 부르자 그가 날 그제야 발견한 듯 빠르게 다가오면서 입을 열었다. "사매, 안 좋은 소식이에요. 단목세가에서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했답니다!" "습격?" "예, 지금 급하게 와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단목세가 정예들만 급하게 출발할 모양인데, 거기에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원군을 보내줄 모양입니다." "덕, 우리도 준비하자!!" 그렇게 외치면서 몸을 돌려 나도 빨랑 짐을 챙기려는 찰나, 희여송이 다급히 나를 붙잡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사매는 여기 있어야지요!" 단호하게 나를 막아서는 희여송에게 나는 아주아주 상큼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사형, 저만 여기 두고 가실 거예요?" "엑!!" 난 누구도 막지 못하는 말괄량이로 인식되어 있는 바, 날 여기 두고 가더라도 혼자서라도 쫓아올 것임을 희여송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괜히 이야기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좀 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 의견보다는 가주님 의견이 더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아... 그렇군요." 물론 보나마나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실 게 뻔했다. "안 된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왜요? 방해는 안할게요. 예?" "지금은 놀러 가는 게 아니야. 절대로 안 된다." "흐음... 정말요?" 이렇게 내가 뭔가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면 왜 사람들은 움찔거리는지 모르겠 다. 늘 이게 잘 먹혀서 써먹기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난처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배 숙부가 할아버지를 구원 코자 나섰다. "진아, 단목세가에서는 정말 급하게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려갈 거란다. 진이가 따라오지 못해 뒤쳐지더라도 신경 써줄 수가 없어요. 워낙 사안이 급한 것이므로 경공이 빠른 사람들만 뽑힌 거야." '훗훗... 날 뭘로 보고.......' "괜찮아요. 지체하더라도 유하고 덕이하고 같이 갈 테니 넘 걱정 마세요." 그러자 배 숙부는 할 말을 잃은 채 뒤로 물러났고 대신 할아버지가 정말 무서운 얼 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아, 너 때문에 길을 지체한다면 할아비 입장은 무척 난처할 게다. 그런데도 따 라오겠느냐?" "옙!!" "좋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에는 곧바로 화산으로 돌아간다고 약속하 거라." "예, 조금이라도 제가 뒤쳐진다면 그 즉시 조용히 화산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좋아, 알았다. 그렇다면 데리고 가마." "사부님......." 배 숙부가 난처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 었다. "후우... 이 녀석 고집을 누가 꺾겠는가? 그래도 저번 무림대회에서 16강까지 올라 간 전적이 있으니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겠지. 게다가 수하 둘도 곁에 붙어 있지 않는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진이가 따라간다면 민이까지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흥, 민이 녀석이라면 좀 더 신중하니 오히려 더 나을 거야. 둘 다 영리한 아이들이 라 별 탈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하루도 못 쫓아오고 뒤쳐지면 알아서 돌 아가겠지. 약속은 잘 지키는 애들이니까." '훗, 민이와 나를 너무 모른다니까.' 그렇게 우리는 아침도 재빨리 해치우고 화산파에서 마련해 준 며칠 분의 간단한 먹거리를 각자 챙긴 다음 출발했다. 급한 일이라고 하더니만 화산파의 정문을 나서자마자 경공으로 내달리기 시작했 는데, 1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빠르게 달려 내려가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 행렬에 끼지 않고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입장이었다면 말이다. 길은 당연히 단목세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경공이 빠른 단목세가 가주가 안내 역을 맡았고, 나머지 길을 아는 사람들은 뒤쳐지는 사람들을 대비하여 각 세가에 한 명씩 끼워 넣었다. 우리 세가에도 30대 무사 한 명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는데, 자기 집안에 뭔 일 이 생겼다니 마음이 다급했는지 무지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잘 때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달렸다. 그것도 하루 종 일 경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달리니 며칠 지나자 내력이 달리는 사람들이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이와 나는 여유만만하게 할아버지 옆에서 잘 달렸기에 모든 이들의 놀 라움을 샀다. 그들은 아마도 민이와 내가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가리라 여기고 있었 던 것 같다. 귀주 지방이 다가올수록 할아버지는 약속한 것이 있으니 우리를 떨어뜨려 놓을 수도 없어 무지 난처해했다. 정예만 뽑아놓은 이 집단에서도 뒤쳐지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보다도 훨씬 어린 우리는 전혀 지치지도 않는지 잘 따라오자 무지 기특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위험할지 모르는 곳에 우리를 데리고 가야만 했다. 그 때문에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리를 힐끔힐끔 바 라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해서 나는 할아버 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싱긋 웃어주곤 했다. 다행히 유와 덕순도 뒤쳐지지 않고 잘 따라왔다. 하긴 유는 살수로 있을 때 아주 먼 거리를 제대로 쉬지 않고 완주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고 하고, 덕순도 신기수 와 맞먹을 정도로 꽤나 무공이 높은 편이라 우리를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밤낮 제대로 쉬지도, 자지도 않고 달린 결과 우리는 평소 같았으면 한 달 이 넘게 걸릴 거리를 단 열흘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덕에 처음 출발한 자들 중 1/3이 떨어져 나가고 나온 결과였다. 그래도 그동안 단목세가의 사람들의 마음은 바짝바짝 탔는지 그들은 단목세가에 있는 귀주 지방의 귀양에 도착하자마자 세가로 내달렸다.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후줄근한 사람들이 꽁지에 불붙은 것마냥 냅다 달리는 모습이 남들이 보기에는 되게 웃겼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가 화산에서 출발할 때 즈음 화산에서 미리 전서구로 귀주 바로 옆 지 역인 호광 지역에 있던 우리 세가와 사천 지방에 있던 아미, 청성, 점창 문파는 물 론 당문에도 급히 지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보냈기에 우리보다도 그들이 먼저 도착했을 것이다. 물론 아주 소오올직히 말해서 습격했다 하더라도 세가를 차지하지 못했으면 누가 열흘씩 진치고 있겠는가? 주위 문파와 세가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그러니 단목세가 사람들이 저리도 서두르는 것이겠지만....... 내 예상대로 우리가 단목세가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정문에는 누군가가 상을 당했을 때 내거는 상등이 걸려 있었다. 그 모습에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단목세가의 가주가 문을 두드려 누가 열어주길 기다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문을 내력이 실린 발로 차서 부숴 버리다시피 열어버 리고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확선아~!! 한 총관~!!" 얼마나 다급했는지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들어가자마자 목청 터져라 외치 는 모습이 마치 철없는 어린애 같았지만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마치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던 정면에 있는 건물의 문이 벌컥 열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가주님!!" "가주님이 돌아오셨다!!" "크흑흑흑... 가주니이이임~!!" 안으로 들어가 가주 일행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사람, 가주 앞으로 달려와 무 릎 꿇고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정말 아까까지만 해도 인적 하나 없이 조용했던 곳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총관, 총관은 어디 있느냐? 확선이는?" "크흑흑...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가주의 말에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맨 처음 달려나와 가주 앞에 무릎 꿇고 울음 을 터뜨렸던 사람이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주를 안내했다. 가주와 같이 온 일행들도 그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의 넓은 대청에 는 수많은 사람들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었고, 그 앞의 커다란 청동 화로에는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위에는 하얀 천이 쳐져 있었고 단목세가로 보이는 대부분, 아니, 모든 사람들은 하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 이런......." 그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가주에게 누군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오셨습니까? 미처 맞으러 나가지 못한 점 용서해 주십시오." 그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니 울 세가의 예 총관만큼 나이 든 남자가 있었는데, 환자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듯 창백한 얼굴을 한 그는 이번 일로 오른팔을 잃었 는지 팔이 있어야 할 곳에 빈 소매만 바람에 날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한 총관... 그, 그 팔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주의 모습에 그 한 총관이라는 사람 은 피식 웃었다. "소인의 능력이 무능해서 잃고 말았습니다." "그, 그럼... 확선이는?" "소가주께선 무사하십니다. 단지 상처가 심하여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실 뿐입니다. 의원의 말로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앞으로 무공을 하는 데도 큰 지장 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가......." 가주는 다행이라는 표정이었지만 곧 대청에 모셔진 수많은 위패들을 보고 다시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한 총관의 말에 의하면 우리 세가는 물론 다른 문파의 지원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 에 상황은 끝났다고 한다. 하긴 수상한 놈들이 쳐들어온 건 밤이었고, 그들을 모두 물리친 건 날이 새기 시작 하는 새벽이었다고 하니 채 반나절이 안 되어서 상황이 끝난 셈이었다. 덕분에 뒤늦게 도착한 지원병들은 세가 안 정리와 부상자 치료를 돕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성과 점창은 모든 뒷정리가 끝난 뒤에 다시 돌아갔고 사천당문 사람들 은 지금까지 남아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세가에서 온 사람들과 아미파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대신 맡아서 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엄마와 아빠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민이와 나는 그 자리에서 이 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지만, 대신 팔을 걷어붙이고 엄마 아빠를 돕기 위해 나섰다. 어차피 사정은 나중에 들어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단목세가 내부의 모습은 정말 참담했다. 건물 안이야 사람이 살아야 하니까 급한 곳만 수리하고 핏자국도 다 닦아내었지만 마당 같은 곳에는 시체만 치웠을 뿐 일 손도 적고 날씨도 추운 탓에 핏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결국 그날 도착한 사람들 대부분은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기에 그 대로 숙소를 배정받아 쉬고 그 다음날 돌아가기로 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문파에 돌아갔다가 다시 조문객이 되어 이곳에 와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민이와 나도 팔까지 걷어붙이고 엄마가 있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거기서 그대로 쫓겨났다. 그 지저분한 몰골로 어떻게 음식 만드는 걸 도울 수 있냐는 것이 엄마의 말이었다. 그 몰골로 만들다가는 깨끗한 사람도 병에 걸릴 거라나?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얌전히 물러나와 아빠의 도움으로 목욕하고 나서 다시 달려갔다. 민이는 아빠의 곁으로, 나는 엄마가 계시는 부엌으로....... 그러나 생각해 보니 나는 요리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부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감자만 깎았다. 칼질은 그래도 자신있었는데, 난 아직 택도 없다고 칼질은 시켜주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감자도 엄청 느리게 깎고 제대로 깎지도 못한다고 얼마나 구박받았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껍질을 깎기만 하면 될 걸 가지고 껍질을 두껍게 깎았다고 잔소 리를 얼마나 하는지....... '쳇, 잘났어 정말... 도와주는 건데도 왜 이렇게 잔소리를 들어야 하냐구우.......' 정말 치사하고 자존심 상해 내 실력을 보여주자고 마음을 먹었건만 이게 생각보 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자라는 게 일반 과일처럼 매끄럽게 둥근 것이 아니라 무지 울퉁불퉁한 녀석이 다. 왜 이렇게 못생겼는지, 그날따라 못생긴 감자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 다. '그래, 널 보니 못생긴 게 죄라는 말이 사실 같다.' 그러니 이 울퉁불퉁한 감자를 좀만 힘주어 깎다 보면 깍여진 감자는 되게 매끄럽 게 둥글둥글했다. 대신 껍질은 무지 두껍고... 그럼 이렇게 두껍게 깎으면 어떻게 하냐는 둥, 먹을 수 있는 것까지 다 잘라 버린 다는 둥의 잔소리가 날아왔다. 그래서 정성 들여 조심조심 싹 나는 곳까지 세심하게 다 파내며 깎으면 왜 이렇게 늦게 깎냐는 둥, 감자 깎다가 날 새겠다는 둥의 잔소리가 또다시 날아왔다. 무지 열받아서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훨 많아 보이는 아미파의 여승인데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보 니 찍소리 못하고 그냥 속으로 차라리 민이를 따라갈 걸 왜 여기 왔을꼬... 하는 후 회만 잔뜩 했다. 그러다가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겨우 부엌에서 풀려 나와 지친 몸을 이끌고 나에게 배정된 방에 가서 그대로 침상 위로 엎어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달게 자고 있는데 누가 내 몸을 열심히 흔드는 거였다. [누나, 누나아~ 좀 일어나 봐!] [우웅... 시끄, 임마. 나 넘 피곤하단 말야!!]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날 흔들던 손을 팔을 휘둘러 떼어내고 다시 잠을 청하는데 [글쎄, 좀 일어나 보래두!] [싫어! 잘 거야!!] 이번에는 발로 걷어차서 그 손을 떨어뜨리고 기분 좋게 다시 베개를 끌어안는데 그 귀찮은 손이 또 달라붙었다. [볼거리가 있단 말야!] [다 필요없어. 그냥 잘래.] 이제는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 몸만 한 바퀴 굴렸는데도 그 손은 끈질기게 따라붙 었다. [단목세가에 관련된 일인데도?] [단목세가고 뭐고 관심없어!!]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굴렀는데도 그 손이 안 떨어졌다. [이번 일에 관련된 일이란 말야!] [이번 일은 무슨... 이번 일?] 이번 일이란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번 일이라고?] 눈을 뜨니 침상 앞에 서 있는 민이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래, 이번 일. 할아버지가 아까 단목세가의 가주를 보러 간다고 나가셨단 말야. 빨랑 안 보면 놓쳐 버린다고!!] [젠장! 왜 자꾸 오밤중에 그러냐? 대낮에 하면 어디가 어때서?] 나는 빠르게 일어나 정신을 차리려 기지개를 켜고 방에다 결계를 치면서 투덜거 렸다. [으이그... 낮에 일을 하면 우리는 보지도 못하잖아. 차라리 밤에 보는 게 훨씬 낫 지.] [하지만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있느라고 온몸이 쿡쿡 쑤신단 말야. 쳇, 아무래 도 회복 마법을 걸어야겠군. 리커버리!]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중얼거리자 내 손에서 파생된 밝은 빛이 온몸을 감싼다 싶더 니 몸이 시원해지고 가뿐해졌다. "으싸, 좋아. 어디 한번 볼까나?" "난 볼 준비 다 됐어!" 내가 화면을 만들어내자 한창 어느 방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단목세가의 가주와 단목세가의 총관, 그리고 할아버지와 사천당가의 가주, 또 할아버지의 친 구인 모용세가의 전 가주와 현 가주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5대 세가 중 4곳의 사람들이 모인 거였다. 남궁세가는 아직 마공의 비급을 보관하 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뭔일이 있을까 봐 급히 세가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문에서는 세가 주위에 아무도 침범하지 못할 무시무시한 함정들과 기문 진식이 깔려 있어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좀 늦게 일어난 탓인지 이야기는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침입한 사람들은 모두 낭인 무사(돈을 받으면 무슨 일이든 하는 무사들 . 일명 용병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들만의 조직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단지 낭인 시장이라고 하는, 낭인 무사들과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 곳 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였단 말인가?> 사천당가의 가주가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총관의 말에 이번에는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침음성을 흘렸다. <허어... 겨우 100명 정도 되는 낭인 무사들에 의해 단목세가의 절반이 넘는 사람 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믿을 수가 없군.> <직접 보지 않는다면 믿지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 난 것만 같았습니다. 칼에 찔려도 신음은커녕 아픔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 으니까요. 사지가 절단되는 것 정도로는 그들을 멈출 수도 없었고, 목을 날리거나 심장을 찔러야 겨우 멈췄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한 총관의 말에 이번에는 모용세가의 가주가 외쳤다. <그럴 수가!! 낭인 무사들이란 자고로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하면 줄행랑을 치는 자들이 아닌가? 그래서 무사로서의 대접을 못 받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 아니던 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엄청난 괴력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몇 시진을 싸 워도 전혀 지치는 기색 없이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악몽 그 자체였습니 다.> 한 총관은 그때의 생각이 다시 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가의 제자들 또한 실력이 달려서 목숨일 잃은 자보다는 지쳐서 싸우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단목세가의 가주가 탁자를 내려쳤다. <그런데, 그런데 왜 힘없는 식솔들과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손을 댔단 말인가?> 보통 살인 멸구나 전멸을 시킬 -이런 것도 악독한 거지만- 생각이 아니고 단지 필 요에 의하여 봉문(문 닫게 하는 것) 정도나 명예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느 한 문파 나 무가와 싸움을 할 경우, 무공을 모르는 세가의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는 게 강호 의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한다. 이건 무인끼리의 싸움에 무공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규칙과 비슷한 건데, 이번에 쳐들어온 낭인 무사들은 그 규칙을 무시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지켰지 않습니까?> 한 총관의 위로 어린 말에 단목세가의 가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까짓 마공 비급의 조각쯤 잃어버리면 어떠한가? 차라리 그걸 잃어버리고 제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편이 훨씬 좋았어.> <가주님.......> 감격한 표정으로 가주를 바라보는 한 총관을 방해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는 듯 슬쩍 헛기침을 한 울 할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군. 100명의 낭인 무사들을 모으는 것에는 큰돈이 들어가지. 설 사 저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해도 낭인 무사들은 계약금을 걸어야 움직이니 그 돈도 적은 돈은 아니었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돈을 들여 낭인 무사들을 풀어 놓은 그 누군가는 왜 그 혼란을 틈타 마공 비급 조각을 훔쳐 가지 않았지?> 그러자 한 총관이 자부심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마공 비급 조각 보관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일 겁니다. 옮긴 장소 도 가주님께서 무림맹에서 돌아오신 직후였으니 아마 그 누군가는 전에 있던 장 소만 생각하고 그곳으로 갔다가 낭패를 보았겠지요.> <호오, 그랬었군. 거참 불행 중 다행이로구먼.> <게다가... 그날 저희 세가에 침입했던 낭인 무사 한 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 다.> <그게 사실인가?> 한 총관의 말에 너무 놀란 건지, 아니면 원한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는 기쁨인 지 단목세가의 가주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습니다. 미처 말씀드리지는 못했습니다만, 세가의 제자가 너무 없어 감옥에 가두는 대신 골방에 가두고 있습니다.> <당장 안내하게나.> <알겠습니다.> 단목 가주가 너무 서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 방에 있던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은 채 한 총관의 뒤를 따라 그 방을 나섰다. "으음... 이거 혹시... 고문이라도 하는 거 아냐? 그런 건 질색인데......." "그럼 누나는 고문 나올 때는 보지 마. 내가 고문 끝나면 상황을 알려줄게." 민이의 태연자약한 말에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야, 넌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고문한다는 걸 본다고 그러냐? 너, 혹시 고문이 뭔지 모르는 거 아냐?" 그러자 민이가 황당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이래봬도 용계의 왕자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직 어린 주제에 고문한다는 걸 태연하게 본다 그러냐?" "헤에... 누나가 그런 약한 소릴 할 줄은 몰랐는걸? 하지만 누나도 왕궁에 있어봐. 별꼴을 다 보게 된다고." 민이의 말에 나는 설마 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에... 그럼 너... 혹시 고문하는 것도 봤냐?" "아니." 너무나 태연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민이 녀석을 보자니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하긴 이제 막 성룡이 된 왕자에게 누가 고문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는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왕자는 왕자인 것을... 설마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그럼 그렇지." "하지만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용은 몇 번 봤어." 그게 그거 아니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민이를 보자니 한숨이 폭 나왔다. "야, 야, 고문당하는 모습하고 고문당한 후의 모습을 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차라 리 고문 다 당하고 난 후의 모습이 낫지." "괜찮아. 정 못 보겠으면 누나에게 말할게." "글세, 볼 게 못 된다니까? 너, 설마 호기심으로 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으음... 뭐, 부인은 못하겠네." "그러니까 볼 게 못 된다니까." 애를 나쁜 물(?)에 들지 않게 열심히 말리는 동안 가주 일행은 그 낭인 무사가 갇혀 있는 골방까지 도착했다. "아, 누나, 도착했다." 민이의 말에 더 이상 말릴 수 없었지만, 나는 고문이 시작되자마자 화면을 확 꺼버 리리라 결심하고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그 골방은 음침한 곳은 아니었고, 단지 창고 대용으로 쓰는 곳인 것 같은 약 5평정도 되는 작은 방에 침대와 의자 하나만이 놓여 있었는데, 그 낭인 무사는 아직 고문을 당하지는 않은 듯 약간 핼쑥하기는 했지만 멀쩡한 모습으로 누워 있 다가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자그마한 골방에 등이 켜지고 방의 문이 닫히자 그제야 총관이 그 낭인 무사에게 말을 건넸다. <이분께서는 우리 단목세가의 가주님이시네. 자네에게 몇 가지를 물으러 오셨으 니 거짓 없도록 고하게.> 낭인 무사는 단목 가주의 얼굴을 차마 볼 수 가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음, 음...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나 보지?" 그 모습에 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르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고개를 들어보게나.> 단목 가주의 말에 낭인 무사가 어렵사리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내 몇 가지 물어볼 테니 대답해 주게나. 만약 거짓을 고하는 날에는 어떻게 될지 잘 알겠지?> 협박을 하는 단목 가주의 눈빛은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나서 무지 무서워 보였다. 그 모습에 움찔한 낭인 무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선은... 우리 세가를 침입하도록 시킨 자가 누구인가?> 그러자 즉각 낭인 무사가 입을 열었다. <모릅니다.> 그 말에 단목 가주는 버럭 성을 내었다. <뭐시라? 모른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분노로 인하여 이성을 잃은 듯한 단목 가주는 진짜로 그를 죽일 듯이 내력을 가득 담긴 팔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그 낭인 무사를 향해 내려쳤다. 그러자 재빨리 울 할아버지와 전 모용 가주가 나서서 그를 막았다. <단목 가주, 진정하시게냐!!> <그래, 흥분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네.> 전 모용 가주가 단목 가주의 내력이 담긴 팔을 막고 울 할아버지가 단목 가주의 등 뒤로 가서 그의 몸을 껴안았다. 그러자 잠시 몸부림을 치던 단목 가주는 결코 두 노인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힘을 뺐다. 그러더니 낭인 무사를 한번 노려보고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도저히 화가 나서 제대로 심문을 할 수 없네. 미안하지만 자네들이 해주겠 나?> 그리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후우... 사람 참, 성질하고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 모용 가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할아버지는 좌중 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누가 심문을 할 텐가?> 그러자 사천당가의 가주가 나섰다. <내가 한번 해보지.> 이들은 아마도 어려서부터 안면을 익히고 친해져 스스럼없이 서로 반말을 하는 듯했다. 당문 가주가 나서자 전 모용 가주와 할아버지는 뒤로 빠졌다. <그럼 묻겠네. 왜 모른다고 대답한 건가? 설마 사주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의뢰를 맡았다는 건가?> 그러자 아까 단목 가주의 행동으로 잔뜩 겁을 먹었던 낭인 무사가 표정을 풀고 천 천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희들을 모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그는 단지 대리인일 뿐이었 고 직접적인 요구를 한 사람은 얼굴을 복면으로 가렸기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의뢰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당문 가주의 말에 낭인 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정당하지 못한 일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그러니 저희에게 신분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의뢰인도 많은 데다 저희 또한 돈만 받으면 그만일 뿐이어서 의뢰인이 알려주지 않은 건 일부러 알아보려 하지는 않 습니다.> <그렇군. 그럼 이번에 자네들이 맡은 일은 정확히 무엇이었나?> 당문 가주의 말에 세상 다 포기한 것 같은 낭인 무사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으득... 그가 말하길, 우리는 단지 소동만 벌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비록 8대 세가 중 한곳이기는 하나 반 시진 정도만 죽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끌면 된다고 했기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그러자 그의 말에 한 총관이 화를 냈다. <거짓말하지 말게!! 그날 자네들이 한 짓이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나? 자네들 은 살인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네!!> 그 말에 낭인 무사가 분노가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저희들 또한 속은 것입니다. 낭인 무사가 왜 목숨을 도외시하며 실력이 안 된다 는 것을 뻔히 아는 세가에게 달려들겠습니까? 그건 짚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꼴 아닙니까?> <이.......> 한 총관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당문 가주가 그를 제지하며 좀 더 자세히 물었 다. <자네는 자꾸 속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왜 자네들은 도망가지 않고 계속 죽을 때까지 싸움을 한 거지? 설사 도망치면 죽인다고 협박했다 해도 100명이나 되는 낭인 무사들이 한 명도 도망치지 않고 목숨 걸고 싸웠다는 건 말이 안 되네.> <으득, 그들은 그런 협박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원기를 원활하게 해준다 는 이상한 단약을 나누어주었을 뿐이지요. 세가를 치려 하는 것이라, 단지 시간을 끄는 것뿐이라 해도 많이 다칠 수도 있으니 그때를 대비하여 미리 먹어두라고 하 더군요. 훗, 우리는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인 줄도 모르고 감사히 먹었지 요. 목숨은 중요한 것이니까요. 비싼 것이 아니라서 얼마 안 있으면 상한다고 친절 히 덧붙여주기에 어느 누구도 나중에 사용하려고 보관할 생각은 못한 채 그날 모 두 복용했습니다. 단지 저만 빼고요. 그것이 저를 살게 했지만 말입니다.> <자네는 왜 복용하지 않았는가?> <일부러 복용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저도 먹으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옆에 있던 녀석이 실수로 제 팔을 치는 바람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약을 받은 때는 세 가를 코앞에 두고 있던 시점이라 사람들이 밀집한 상태였거든요. 하필 시간도 밤 이었기에 떨어뜨린 뒤 몸을 숙여 찾으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더군요. 사람이 몰려 있는 데다 시간도 거의 다 된 상태라 운이 없다 생각하고 포기했었지요.> <그랬군. 근데 그 약이 무엇이기에 속았다고 하는 거지?> <저도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그걸 먹고 일각(15분) 정도 지나자 녀석들이 이상해지더군요. 그 어두운 밤에도 보일 정도로 눈이 붉어지고 마치 짐 승처럼 으르렁대기 시작하더니 저 같은 이는 못 견딜 정도로 살기를 내뿜어대더 군요. 그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그들 틈에서 빠져나와 보니 우리에게 지 시를 내리던 사람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더군요. 그때였습니다. 그 녀석들이 저에게 덤벼든 것은. 마치 인간이 아니라 괴물들 같았습니다. 필사적으로 도망칠 곳을 찾는데, 마침 코앞에 있던 단목세가가 보이더군요. 그래서 그쪽으로 도망을 친 거였습니다.> <그 이상해진 낭인 무사들은 자네 뒤를 쫓고?> <이건 변명이 아니라 제 생각입니다만... 제가 없었어도 그들은 세가로 향했을 거 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싸울 상대를 찾느라고 정신없었으니까요. 세가 안에 들어 서서 저는 싸울 생각은 못하고 숨을 곳을 찾느라 정신없었지요.> <그리고 싸움은 벌어졌고?> <예. 그들은 마치 미치광이처럼 무조건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저는 처음에 세가 사람들을 모조리 전멸시킬 줄 알았지요. 하지만 동틀 무렵이 되었을 즈음 세가 사람들에게 죽지 않고 다행히 살아남은 그 들은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습니다. 온몸의 근육이 모조리 끊어진 채였습니 다.> 그 낭인 무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예, 그의 말이 맞습니다. 동틀 무렵이 되자 그들은 우리가 어쩌지도 않았는데 스 스로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흐음.......> 당문 가주가 뭔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가 물었다. <왜 그러는가?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단 말인가?> <아아... 아니, 그건 아니고, 이들이 먹었다는 약 말일세. 뭔지 알 것도 같아.> <그래?> <신선폐라는 독약을 아는가? 이건 원래 신선단이라 이름 붙은 건데 나중에 신선 폐로 명칭이 바뀌었지. 처음에 먹으면 평소보다 힘도 몇 배나 세어지고 내력 또한 불어나지. 하지만 그건 단지 잠재력을 끌어내서 사용하는 것이라 두세 시진 후면 잠재력이 고갈되어 버리지. 그때 부작용으로 그 사람은 근육이 모조리 끊어진 채 죽게 되지. 그래서 '폐' 자가 붙은 거야.> <그럼 저들이 먹은 게 바로?> <아니야. 그렇다 해도 이성을 잃게 만들지는 않네. 아마도 누군가가 그 신선폐를 좀 더 개발한 것 같아. 흐음... 그리고 그건 독문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거긴 우리 당문만큼이나 독에 대해 해박하니까.> <그럼 자네 말은.......> 전 모용 가주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당문 가주가 그의 말을 막았다. <험험, 너무 늦었으니 우리는 이만 나가보기로 할까?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 도록 하세.> 그의 말에 전 모용 가주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 낭인 무사 앞이라서 이야기하는 걸 막은 모양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시간이 너무 늦었어.> 할아버지가 당문 가주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먼저 몸을 돌리자 나머지 사람들 도 우르르 그곳을 빠져나왔다. "휴유, 고문 같은 건 안 해서 다행이야." 그들이 방을 다 나서자 나는 그동안 긴장하고 있던 몸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근데 누나, 독문이 뭘까? 문파의 이름 같은데......." "나도 몰라. 내일 유에게 슬쩍 물어보자구. 그럼 대충 이야기는 알았으니까 이만 자자. 응?" "누나, 또 졸려?" "넌 안 졸리냐? 지금 너무 늦은 시각이라고. 곧 할아버지가 돌아오실 텐데 언제 돌 아가려고 그래?" "하긴, 누나처럼 순식간에 내 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 주술이 있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나중에 갔다간 들킬 수도 있을 테지. 알았어." 민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는 얼른 화면을 끄고 결계 를 풀었다. 빨랑 보내지 않으면 이대로 밤을 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잘 가라. 나는 자련다." "으응......." 그렇게 민이를 거의 쫓아내듯 보내놓고 나는 다시 밀려오기 시작하는 잠을 청하 기 위해 얼른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하아아암... 아까 회복 마법을 썼는데도 졸리네... 역시 나는 드레곤인가 봐." 다음날 유에게 슬쩍 물어본 바로는 독문은 말 그대로 독을 다루는 문파로 사파에 서도 아주 큰 문파라고 했다. 정파에서는 당문, 사파에서는 독문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독에 관한 한 당문과 맞 먹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50년 전 정사대전 때 참여했다가 멸문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했다. '흐음... 그럼 그 나머지 잔존 세력들 또한 그 마공 조각을 모으는 집단 밑으로 들 어간 것 같군.' 제 31화 청명이의 검은 청명검(1) 며칠 지나지 않아 단목세가로 조문객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잔치와는 달리 조문객들은 더 머물지 않고 단지 조의만 표하고 돌아갔지만, 그래도 손님을 맞이하는 데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당문과 울 세가, 모용세가, 그리고 아미파는 단목세가에서 상을 치르는 동안 남아서 그들을 도와 잔일을 처리해 주었다. 그동안 배 숙부와 아빠를 위시한 단목세가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울 세가의 제자 들은 세가로 돌아갔고, 엄마와 나, 민이는 남아서 끝까지 일을 도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 화산파에 남겨두었던 호위 무사들이 무사히 세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고, 세가에서는 일단의 무사들이 도착했다. 단목확선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지만 무공을 사용하려면 좀 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상이 끝나는 날 단목세가의 가주는 봉문을 선언했다. 너무나 많은 제자들을 잃은 탓에 다시 받아들이고 예전의 세력만큼 성장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듯했 다. 우선은 세가의 모든 걸 정리할 동안만 봉문하고 그 뒤에는 새로운 제자들을 받 아들인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단목 가주가 할아버지를 조용히 청했다. 당연히 민이와 나는 무 슨 일인지 궁금하여 얼른 내 방으로 와서 결계를 치고 마법으로 허공에 화면을 만 들어 시청했다. <무슨 일인가?> 아마도 가주의 서재인 듯 넓은 방 안의 벽은 책장으로 가득했고 중앙에는 커다란 책상도 있었다. 단목 가주는 그 서재 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할아버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맞아 들여 서재 안에 있는 탁자에 자리를 권했다. 할아버지는 단목 가주가 권하는 대로 묵묵히 자리에 앉아 따라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용건을 물었다. 그러자 단목 가주는 대답하기 전에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내 자네에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네.> 너무 힘들게 입을 여는 단목 가주의 모습에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무슨 부탁이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는가?> 단목 가주는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단목세가의 세력이 절반이나 줄어버렸지. 이대로는 세가라 불릴 수도 없을 거야.> 기운없는 단목 가주의 말에 할아버지가 꾸짖는 듯한 어조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어허, 그 무슨 소리인가? 세가라 불리는 것이 어디 가문의 세력으로 불리는 것인 가?> <후우... 그렇긴 하네만... 이보게, 내 솔직히 말함세.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지킬 수 가 없을 것 같네.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 세가는 끝장이야.> <하긴.......> <게다가 그쪽에서는 이번 일로 그것을 가지고 가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기회를 노 릴 걸세. 어쩜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도 못할 뿐더러 멸문당할지도 모르네.> <그래, 자네의 맘 내가 아네. 그래서 나에게 무엇을 부탁하려 하는가?> <그것을 소림사에 전해주지 않겠는가? 솔직히 다른 세가도 있긴 하지만 난 그것을 재앙덩어리라 생각하네. 난 그런 걸 내 친우에게 전해주고 싶지는 않아. 소림사는 정파의 등줄기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니 그곳에 맡기려는 걸세. 게다가 그곳에는 자 네와 친분이 있는 분도 계시지 않은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게야.> <그렇군. 하긴 당문 가주는 자신의 세가에서도 맡고 있을 테고, 모용세가는 이렇게 와서 자네를 도와주고 있긴 하지만 거기도 봉문 상태이니 소림사에 가기는 어렵겠 지.> <정말 미안허이. 내가 직접 가야 하는데.......> 단목 가주가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자 할아버지가 허허 웃었다. <허허, 이 사람. 자네와 내가 어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 정도 부탁쯤이야 얼마 든지 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닌가? 난 아직도 자네가 우리 가문에 베풀어준 은혜를 다 갚지 못했네. 이번 일로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야말로 기쁘다네.> <그리 말해 주니 정말로 고맙네.> <허허, 고맙긴... 이번 기회로 유람 한번 다녀오는 셈치지 뭐. 그렇지 않아도 놀러 가기 좋은 봄의 계절이 아닌가? 훗, 다른 친구들은 바쁜데 난 팔자가 좋군. 그래, 그건 어디 있는가?> 할아버지의 말에 단목 가주가 품에서 조심스레 비단에 싸인 꾸러미를 내놓았다. <여기 있네.> 단목 가주는 그걸 탁자에 내려놓고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것마냥 노려보았다. <너무 걱정 말게나. 내가 책임지고 꼭 소림에 전해주도록 하지.>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그 비단 꾸러미를 품에 갈무리해 두고는 자신에 찬 어조 로 말했다. <자네만 믿겠네.> <허허, 너무 걱정하지 말래두.> <그럼 언제 떠날 생각인가?> 단목 가주의 말에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우선은 세가에 돌아가야지. 나도 너무 세가를 비워두었거든. 그리고 소림사 로 가겠네. 마침 곧 있으면 정각 대사의 생신이거든. 매년 그때는 소림에 선물을 보 냈으니 이번에 직접 가더라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게야.> <그렇군. 부디 조심하게나.> <훗훗... 이번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볼까나?> 할아버지의 말에 단목 가주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이보게, 그렇게 위험한 일에 자네 손들을 데라고 가다니? 정예들만 이끌고 가도 부족할 판에.......> <허허, 자네는 뭘 모르는군. 이봐, 자네는 화산에서 이곳까지 올 때를 기억하지 못 하는가? 그때는 정예들만 뽑아서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1/3의 무사들이 뒤쳐졌 지.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은 조금도 뒤쳐지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쌩쌩했지. 그 녀석들은 분명 자기 몸 하나 지킬 재간은 가지고 있을 만큼 성장 한 게야. 난 그 녀석들을 믿네. 게다가 이번에 소림에 생일 축하하러 가는데 정예들 을 이끌고 가보게. 그럼 당장에 의심을 사고 말 것이네.> 그러자 단목 가주의 눈에 감동이 가득 찼다. <자네... 우리 세가 때문에 손들까지 위험에 끌어들이다니... 우리 세가는 자네 세가 에게 너무 큰 빚을 졌네.> <허허, 무슨 소리인가? 내 아이들은 자신의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는 녀석들이라 니까 그러네.> <그래도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단목 가주가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하는데 그 말속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걸 눈치 챈 할아버지의 눈가도 물기가 어려 촉촉해졌다. <허어, 이 사람. 큰일을 겪더니만 많이 약해졌구먼.......> 그래서 민이와 나는 더 이상 보면 정말 실례 -언제는 실례 아니었남?-일 것 같아 거기에서 얼른 화면을 껐다. "흐음... 민아, 아무래도 재미있는 여행을 할 것 같구나. 이거 기대되는데?" "누나, 이번에는 제발 조심해 주길 바래. 우리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가는 거라고." "훗, 얘가 비밀 요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내가 갑자기 너무 진지해져 버리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의심을 살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일을 벌이면 안 돼." "얘가 얘가, 야, 내가 언제 마구잡이로 일 벌이는 거 봤어? 넌 항상 내 옆에서 지켜 봤으면서 그런 말 하냐?" "하긴, 누나는 정말 위험한 짓은 안했으니까. 그럼 누나만 믿을게." "훗, 당연하지, 캬캬캬......." 귀주 지방의 귀양에서 호광 지방의 장서까지 가는 건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선은 말 타고 가다가 강을 세 번이나 건너서 도착하는 것, 또 하나는 호광 지방에 들어선 후 장강의 줄기 중 하나인 강을 타고 동정호까지 가서 다시 다른 줄기를 타 고 거슬러 올라가 도착하는 것. 나는 당연히 전자를 택했지만 엄마와 할아버지는 후자를 택해버렸다. 이유인즉슨, 단목세가에서 많이 일했으니 편안하게 쉬면서 가자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할아버지가 그 이유를 택하자 나는 뭐라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엄마는 정말 이 곳에 와서 많은 일을 해주셨던 것이다. 물론 나도 돕느라고 이리저리 설쳐댔지만, 진지하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니 제대로 도운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찍소리 않고 호광 지방에 진입한 후에 곧바로 배를 타는 것으로 결정 봤다. 물론 귀양 근처에도 강이 있었고, 그것도 장강의 줄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강을 타고 올라가면 사천 지방을 거쳐 호광에서도 호북 지방을 지나 형 주를 들러 동정호에 도착하기에 호광 지방에 진입하여 배를 타고 가는 것보다 시 일이 거의 두 배 이상은 걸리기 때문에 이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다음날 우선 말을 타고 단목세가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하였다. 단목세가에서 벌어진 일은 강호에서도 큰 빅뉴스였는지 우리가 들르는 객점마다 그 이야기로 떠들썩하였다. 저마다 침입자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어떤 이는 세가만큼 세력이 커진 무가에서 세가의 일원이 되기 위해 친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귀주 지방에서 권한을 잡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 했다. 또 어떤 이는 사파에서 복수를 한 것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다. 그러자 그와 함 께 등장한 소재는 모용세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이야기 또한 강호에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으음... 왠지 분위기가 뒤숭숭하네요." 조용히 객점에서 이야기를 듣던 민이가 자신의 감상을 내뱉었다. 엄마 또한 단목세가를 나오 뒤로 이러한 분위기들 때문에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에 아빠와 배 숙부가 세가로 돌아갈 때 정예 대부분이 같 이 돌아갔기에 지금 우리와 같이 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반 무사들이었고, 고수 라고 해봐야 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 민이, 덕순, 유, 희여송이 다였기 때문이 다. 물론 엄마는 나와 민이를 빼고 생각하겠지만. 아빠라도 있었으면 엄마가 덜 불안하련만 아빠마저도 미리 돌아가 버려 엄마가 한 층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이럴 때 사파들이 들쑤시고 다닌다면 곤란한데 말이다. 그들이 일어난 다 해도 무림맹에서는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형편이거든." 그러자 엄마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 말씀은 마시지요. 불안합니다." 그제야 엄마가 더 긴장했다는 것을 눈치 챈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래, 그래. 미처 그 생각은 못했구나. 미안하다." 그나마 호광 지역에 진입하여 배를 탄 뒤에는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던 탓에 엄마는 긴장을 덜 수 있었다. 어차피 분위기가 불안하다 하더라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만 주의하면 되는 데다 그 배에는 화물을 지키는 호위 무사가 몇 있긴 했지만 엄마보다 고수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장서로 내려가는 배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낙양에 하선하였을 때이 다. 평소 낙양은 동정호 덕에 유명한 관광지였기에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였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때보다 엄청난 수의 무사들이 몰려 있었다. 게다가 그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팽배해 있어서 누군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만 같은 분위기였다. "허어...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호광 지역은 은씨 세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었다. 게다가 낙양은 은씨 세가가 있는 장서와도 가까운 지역이라 낙양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자 할아버지 가 무척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뭔 일인지 알아보고 싶어도 곁에 민이와 내가 옆에 있기에 직접 나서기도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무사들은 서로 자신들의 일행이 아닌 다른 무사들을 경계하느라 객점에 앉아 음식 을 먹는 사람들 중 대화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자리가 꽉 찬 객점 안인 데도 불구하고 어울리지 않은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눌려 점소이들 또한 발소리를 죽인 채 돌아다녔고, 주문을 받을 때 도 작은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뭘로 드릴깝쇼?" 우리에게 다가온 점원도 마찬가지로 그는 고개를 숙여 귓속말을 건네듯 우리에게 주문하길 청했다. "이보게, 도대체 이곳이 왜 이러는가? 어디 난리라도 난다고 하던가?" "글쎄,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요. 한 일주일 전부터 무사님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많이 몰려드시더군요. 예전에도 꽤 자주 무사님들이 오시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한꺼번에 많이 몰린 적은 처음이거든요. 그런데 분위기 가 심상치 않지요?" 거기까지 말한 점원이 주위 무사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입을 다물려고 하자 희여송 이 슬쩍 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그에게 찔러주었다. 그러자 그 점원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다시 한 번 무사들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종알댔다. "아이고, 뭘 이런 걸. 이건 대인께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요즘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싸움이 일어나는 모양이에요. 어제는 사람도 죽었다더군요. 처음에는 관 아에서도 신경을 썼지만 무사들의 일이니 이제는 나중에 뒤처리만 하는 실정이랍 니다. 그래서 낙양 사람들은 요즘 몸조심을 하고 있지요. 대인들도 조심하세요." "무사들이 왜 몰려드는 건지는 모르는가?" "글쎄요......." 점원이 또 한 번 머뭇대자 희여송은 동전보다 좀 더 파워가 센 은전을 꺼내 들었다. "이거면 되겠는가?" "헷헷헷, 정말 이러시면 안되는데... 저기, 저도 아주 우연히 엿들은 겁니다만, 이곳 에 뭔가 보물이 있다는 모양입니다. 저도 그 보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것 이란 건 틀림없을 겁니다." "보물? 그게 어디에 있다던가?" "낙양에서 남동쪽으로 가면 야산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있다더라구요. 그래서 하루에 수십 명씩은 그쪽으로 가는 모양인데 아직 그걸 가지고 온 사람이 없는 걸 로 보아 발견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 "예, 그리고 이건 정말 남들이 쉬쉬하는 겁니다만 제가 대인께만 특별히 말씀드리 는데, 그 보물이 무지 귀한 거라서, 왜 호광성에서도 '날고 기는 은씨 세가'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세가에서도 이번 보물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구 요." 정말 황당한 말에 할아버지는 차를 마시다 사례에 들려 콜록거렸고, 희여송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게 사실인가?" 덕분에 객점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희여송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고, 누구 큰일 나는 꼴 보고 싶으셔서 그러는 겁니까?"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점원이 나무라는 어조로 말하자 희여송은 화내지도 못하 고 쩔쩔맸다. "미안하군. 그런데 그게 정말인가?" 우리가 엄청 놀라자 점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신이 나서 종알댔다. "아, 정말이래두요. 은씨 세가뿐만이 아닙니다. 서로 신분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이 근처의 이름있는 문파들은 다 몰려왔답니다. 저 9대 문파에서 몰려오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하더군요." 신나게 떠들던 점원이 밑천이 다 떨어졌는지 주문을 받고 가버리자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그 보물이 뭐예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내 눈에 담긴 장난기를 읽은 탓인지 피식 웃었다. "예끼, 인석아. 저 점원이 잔뜩 부풀려 말한 걸 믿는 게냐? 기껏 해봐야 이 근처에 있는 중소 문파에서 온 거겠지." "하지만 정말 많이 몰렸습니다. 어중이떠중이들만 있는 것도 같지만 무시 못할 사 람들까지 몇몇 보이는 걸 보면 근거 없는 소문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희여송의 말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 "왜, 탐나느냐?" "아, 아닙니다. 단지 그 보물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얼른 고개를 내젓는 희여송을 보며 할아버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욕심내지 말거라.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보물 은 피바람을 몰고 올 것 같구나. 그런데... 이 근처에 보물이 있다는 소리는 전혀 못 들어봤는데 이상하군......." 하지만 정말 황당하게도 우리는 세가에 도착하자마자 그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 었다. "가주님, 요 근래 이 근처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맨 먼저 우리를 맞은 예 총관은 뜬금없이 소문 이야기를 꺼냈다. "소문?" 낙양에 잠시 들렀을 때 그에 의한 분위기를 직접 체험했던 터라 민이와 나는 예 총 관의 말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예, 아주 은밀히 도는 이야기라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낙양 근처의 산에 청명검이 있다는 소문입니다. 그 소문 때문에 낙양에 무사들이 모여들고 있답 니다." "그건 알고 있네. 우리가 낙양에 들러서 왔거든. 분위기가 아주 살벌하더군." 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할아버지가 몸을 돌리며 지나가는 투로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흘러들을 수 없는 것이, 그건 바로 보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예 총관님, 그 청명검이란 것이 뭐지요?" "청명검이란 100년 전에 세외에서 온 한 고수가 사용하던 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검집 자체로도 뛰어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검날은 더욱더 귀한 보물이 라고 합니다. 철이 아닌 이상한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의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강철보다도 더 강하고, 그 검으로는 바위조차도 두부 썰 듯 할 수 있는 보검이라고 합니다." "호오, 그래요? 그건 어떻게 생긴 건데요?" "언뜻 보기에도 그 검은 아름답게 꾸며진 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검격 (손잡이와 검날을 나누는 부분으로 손을 보호하기 위해 손잡이에 비해 툭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일반 장검처럼 나와있지 않다는 이야기지요. 전체적으로 백금으로 도 금이 되어 있는데 양 옆 면 중간에는 일정 간격으로 성인 남자의 엄지손톱만한 청 옥이 한쪽 면에 7개씩, 도합 14개가 박혀 있다 합니다. 그리고 그 청옥들을 휘감아 내리는 한줄기 푸른 물결이 새겨져 있는데, 그 세공이 무척 세밀해서 언뜻 보면 정 말 푸른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듯하다고 합니다." '오옷, 듣기만 해도 무지 비싼 거라는 감이 팍팍 오는구나아아~.......' 내 눈이 반짝반짝거린다는 걸 느꼈음인지 예 총관은 피식 웃으며 내가 헛된 꿈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하여 미리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그 검은 100년 전 그 고수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뒤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고수의 무덤에 있던가, 그 고수의 집안에서 보관 하고 있겠지요. 그런데 그 검이 있다고 하다니, 아마 다른 검을 착각한 것일 겁니 다." "에엣... 그래도 비슷하기만 해도 비쌀... 아, 아니, 멋질 것 같은데요?" "뭐, 그런 거라도 있으면 다행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검을 차지 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일 뿐이니 그 검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무척 치열할 것 입니다. 차라리 그냥 온 산을 뒤지더라도 발견하지 못한 채 헛수고한 셈치고 내려 오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일 테지요." "에... 그런가요......." 그란 예 총관의 말대로 진짜 그 비스무리한 검이 발견되긴 발견된 모양이었다. 우리가 세가로 돌아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거의 몇백 명이나 되는 일확천금을 노 리는 무사들이 산으로 올라갔는데 대부분의 무사들이 돌아오지 못한 일이 발생한 거였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예전에 단목 가주에게 약속한 대로 소림사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 작업 -우선 할아버지의 밀린 일거리를 대충 끝마치고 민이와 나를 데리 고 간다고 선포한 후, 엄마와 아빠를 달래고 같이 갈 무사들을 고르는 작업 등등- 또한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원래 낙양에 무림맹 지부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세가 외에 큰 문파가 없는 호광 지 역에서는 무림맹의 영향력보다는 은씨 세가의 영향력이 더 컸기에 이런 드러내 놓 고 정식으로 조사하는 일은 도움을 요청하는 명목으로 울 세가에게 약해를 구하는 거라고 총관이 자랑스레 설명해 줬다. 근데 문제는 하필이면 우리가 떠날 즈음에 그런 요청이 들어와 엄마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얘들아... 꼭 가야 하겠니? 이번이 아니라도 다른 기회가 또 있을 테니 이번에는 그 냥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 요즘은 강호 분위기도 뒤숭숭하다는 것을 알고 있잖 니?" "에이, 엄만... 우리가 그 산에 가는 것도 아니고, 단지 배 타고 낙양을 거쳐가는 것 뿐이잖아요.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누나 말이 맞습니다, 어머니. 그냥 근처를 지나가는 것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 시오. 게다가 할아버지와 배 숙부도 같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랬다. 원래는 할아버지와 나, 민이, 그리고 희여송 이렇게 넷이 호위 무사도 없이 -물론 유와 덕순은 내 수하이기 땜시 같이 간다- 유람 가는 형식으로 가려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너무 불안해해서 할아버지가 배 숙부도 일행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도저히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엄마 말대로 혹시나 뭔 일이 있다면 잽싸게 튈 테니까. 엄마도 내 가 튀는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잖아요." "네 경공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네 호기심이 걱정이야, 요것아. 넌 호기심 때문에 툭하면 엄마 말을 안 듣잖니." "에엣, 누가 들으면 지독한 말썽꾸러기인 줄 알겠어요. 그동안 일을 많이 벌이기는 했지만 정말 큰일을 벌인 적은 없잖아요." "맞아요." 민이까지 거들고 나서자 그동안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빠가 나섰다. "이제 그쯤 해두구려. 이 아이들도 이제 다 큰 나이가 아니오? 게다가 녀석들은 현 명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해결할 거요." "하지만......." "그냥 보내줍시다. 게다가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소?"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부디 조심해야 한다." "예이~!!" "넵!!" "에휴, 이것들이 엄마 맘도 모르고 저리 좋아할꼬?" 엄마가 낮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지만 좋은 건 좋은 거다. 게다가 민이와 내가 누 구인데 쉽게 죽겠는가? '훗, 걱정 마시랑께요!!' 하지만 세상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원래 할아버지는 낙양에서 하루도 머물지 않고 그대로 배만 갈아타고 무창으로 떠 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세가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우리 가 낙양의 선착장에서 내리자마자 일단의 무사 무리가 우리에게 잽싸게 달려왔다. "실례지만 은 가주님 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여전히 많은 무사들이 바글바글거리는 것을 보고 일행 모두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무리가 다가오자, 일행은 손을 자신의 무기에 가져다 대고 여차하면 빼낼 수 있게끔 몸을 긴장한 채 그들을 바라 보았다. "그렇소만, 그대들은 누구시오?" 할아버지가 대꾸하자 맨 먼저 말을 건 사내가 작게 대답했다. "저희는 무림맹 낙양 지부 소속 무사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하니 부디 시간 좀 내어주시겠습니까?"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허락을 기다리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일단 을 들어보자는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시오." 하지만 그들이 혹 우리를 속일 수도 있는 터라, 우리 일행은 긴장한 채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가 정말 무림맹 낙양 지부라 쓰인 현판을 보고서야 무기에 가져다 댔던 손 을 내렸다. "이쪽입니다." 그의 뒤를 따라 낙양 지부의 안으로 들어서서 넓은 대청으로 들어가자 웬 중년 무 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낙양 지부장을 맡고 있는 교수신공 포일천이라고 합니다. 기다리 고 있었습니다." "반갑네, 포 지부장. 은가일세." 할아버지와 그 지부장이 인사를 나누고 모두 자리에 앉자 차가 내어져 왔다. "그래, 날 부른 이유가 무엇이오?"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할아버지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울 할아버 지는 뭔가를 묻기 전에 차 마시는 게 습관인 듯했다. "우선 이렇게 갑작스럽게 모신 점, 정말 사과드립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은 가 주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전에 뭐 좀 물어봐도 되겠는가?" "물어보십시오." 그러자 할아버지가 손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동시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부장 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왜 날 데리러 온 무사들이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것인가? 날 이곳으로 데려오는 걸 숨겨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지부장은 얼른 두 손을 내저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아닙니다. 이거, 제가 오해를 사게 해드렸군요. 음... 그 이유는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릴 때 같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전후 사정을 아셔야 할 것 같군요." "어디 들어보지." 할아버지의 말에 지부장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가주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낙양 근처의 산에 청명검이 있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돌 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들은 무사들이 한창 몰려들었구요." "그렇지." "처음에 저희는 그 소문이 근거없는 것이라 치부했지요. 솔직히 청명검은 100년 전 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졌다는, 이제는 전설로만 내려오는 검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검이 갑자기 이 근처에서 존재할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무사들 이 몰려들어도 큰 싸움만 벌이지 않는다면 저희는 관여하지 않았었습니다. 어차피 산을 뒤지느라 얼마 동안은 북적이겠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수그 러들거라 생각했지요."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마 가주님께도 연락드렸을 거라 생각 합니다만, 산으로 올라갔던 무사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한 사건 말입니다. 덕분 에 소문이 커져 버렸지요. 누군가 정말 청명검을 발견했는데, 그것 때문에 큰 싸움 이 벌어져서 모두 죽었다고 말입니다. 덕분에 무사들은 더 더욱 모여들어 이제 산 에 올라가 실종된 무사의 숫자만도 수백 명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희가 나서야 했지요. 무림맹 낙양 지부의 이름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모조리 차단하고 저희 지부에서 수색대를 조직해 산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알고 있네." "문제는 그들마저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거지요. 저는 만약을 대비하여 하루에 두 번씩, 낮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전서구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으로 들어간 첫날 낮과 저녁에 전서구가 도착한 이후 그대로 끊겨 버렸지 뭡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래, 뭐라고 쓰여 있던가?" "낮에는 아직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만 저녁에 온 전서구에 서는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숲 속에 한두 구씩 띄엄띄엄 발견되 다가 한 공터에서 거의 2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살당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 더군요." "허어... 결국 참극이 벌어졌군." "예." "그런데 그거하고 나를 맞으러 보낸 무사들이 평복을 한 거하고 무슨 상관인가?" "아, 예. 그건 산에서 일어난 일에 비하면 정말 미미한 일일지도 모릅니다만, 무림 맹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모조리 차단하자 무림맹에서 청명검을 가로채려 한 다는 소문이 돌아버렸습니다. 아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소문이 이상하게 왜곡이 되어 9대 문파는 물론 5대 세 가에서도 비밀리에 검을 찾으러 무사들을 보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던 터라 우 리가 청명검을 가로채려 한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고 말았지요. 덕분에 무사들이 저희를 보는 시선이 곱지가 않습니다. 전에는 또 몇 번 칼부림도 일어난 적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몇몇이 외출을 할 경우 지부 복장을 하지 말고 평 복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가주님을 모시러 간 무사들도 평복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 그랬는가? 그럼 나에게 부탁할 거란 뭔가?" 그러자 그동안 진지하게 설명을 해주던 지부장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예, 정말 이런 부탁을 드려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이번에 새로이 수색대를 산으로 보내려 합니다. 그때... 그 수색대에 같이 가주실 순 없겠는지요?" "흐음... 내가 말인가? 그렇게 걱정스럽다면 무림맹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지 그러 는가?" "아, 그게 말입니다만, 사실 지원을 요청해서 무림맹 청룡단의 단원 5명이 내려왔 습니다. 그런데......." 지부장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머뭇대자 할아버지가 재촉했 다. "그런데?" "아... 정말 이런 말씀드려서 부끄럽습니다만... 후우, 그 무림맹주 직속 5개 단에 소 속된 이들은 일반 무사들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는, 다음 대 정파의 기둥들이 될 후지기수들이 아닙니까?" "그렇지." "후우... 그러니 그들이 지부 소속 무사들을 무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 니다만......." 한숨을 내쉬며 얼굴빛을 흐리는 지부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러니까, 지부 무사들 사이에서 청룡단원에 대한 감정이 안 좋다는 거지?" "에,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그들은 필요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만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저를 포함한 지부에서 고수 축에 속한 이들로 그들과 함께 갈 수색조를 새로이 편성했습니다. 하지만... 후우, 그 청룡단은 분명 저보다 계급이 한 단계 낮음에도 불구하고 제 말 은 듣지도 않습니다. (5개 단의 단장은 지부장과 계급 높이가 같다)" 할아버지는 지부장의 말을 거기까지 듣고 나자 그가 하고 싶은 부탁이 무엇인지 알 아챈 듯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수색조에 같이 가서 자네와 청룡단원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거로구먼?" 할아버지가 정곡을 찔러대자 지부장은 화들짝 놀라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고 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리 콧대 높은... 아,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어쨌 든 청룡단의 단원들이라 해도 가주님의 말을 무시하기는 힘들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뛸 줄 알았으면 미리 처음부터 그들을 제어할 사람도 같이 보내달라고 하지, 왜 급하게 날 청한 것인가?" 그러자 지부장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누가 저렇게 고고하게 굴 줄 알았겠습니까? 하긴, 여긴 무림맹 본부에 가 까운 곳이라서 그런지 아직 5개 단원을 요청할 정도로 큰일이 일어난 적이 없거든 요. 경험이 없었던 제 불찰입니다. 그래서 급히 저들을 제어해 줄 분을 찾다 보니 가장 가까운데 계시는 분이 바로 가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장서 지부에 급히 연락을 해보니 낙양으로 떠나셨다는 소 식을 들어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랬는가?" 할아버지의 표정은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무지 덤덤했다. 그래서 지부장은 할아버지의 얼굴 표정만으로는 부탁을 받아줄 것인지 거절할 것 인지 감을 잡지 못해 무지 안절부절못하며 할아버지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 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의 애타는 심정을 모른 척하고 차만 홀짝 마시더니 민이 와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뜻을 알아챘음인지 할아버지가 뭐라 하기 도 전에 지부장이 얼른 말을 이었다. "물론 가주님께서 수색대에 참여해 주시는 동안 나머지 분들은 저희 지부에서 성심 성의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희들은 어쩔 거냐?" '훗훗, 할아버지의 지금 그 말은 대답을 예상하시고 하는 거겠지요?' 회심의 미소를 지은 나는 즉각 대꾸하려 했다. 하지만 나보다도 먼저 민이가 입을 열었다. "저도 참가하고 싶습니다." '쳇, 한발 늦었군.......' "훗, 그럴 줄 알았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그대로 지부장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들이 껴도 되겠나?" 그러자 지부장의 얼굴은 벙쪘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 곳인지도 모르는데 아주 태 연하게 손들을 데리고 간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놀란 것이리라. 아무리 할아버지가 이름 높은 검왕의 아들이고 현 5대 고수 중 일인이라 하더라도 이제 겨우 17세가 된 아이들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데리고 간다는 건 좀 무모 하다 생각될 터였다. 하지만 우리 뒤에도 배 숙부에 희여송, 유, 덕순까지 바라본 그는 그제야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 분들이 모두 보통 분들이 아니시군요. 이런 분들이 같이 참여해 주신다면 저 희야 무척 기쁠 따름입니다." "그럼 결정되었군. 그래, 출발하기 전까지 우리가 머물 곳은 당연히 준비했겠지?" "예, 물론입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부장도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 며 수하를 불러 우리를 안내하게 했다. 숙소로 안내되어 가는 도중 배 숙부는 아무래도 불안한지 할아버지에게 낮게 물었 다. "저어... 사부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진이와 민이를 데려가도......." 그러자 할아버지는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너도 봤지 않느냐? 화산파에서 단목세가까지 경공으로 달려가던 저 애들의 모습 을. 저 애들은 아마도 그때 우리에게 맞춰주느라 저희들의 경공 실력을 제대로 펼 치지도 못했을 거야." "예에? 설마요......." 배 숙부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할아버지가 또다시 웃었 다. "훗, 무공 실력이 우리보다 낮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게냐? 하지만 누구라도 자신만 의 특기가 있기 마련이지. 게다가 경공은 물론 내력에 많은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무공 수위와는 별개야. 그리고 저 아이들은 제 또래에 비해 많은 내력을 가지고 있 지. 모르긴 몰라도 일 갑자에 가까울걸?" "허어... 진심으로 하시는 말이십니까? 은 사제도 이제 일 갑자를 넘는 내력을 가지 고 있습니다만......." 이제 배 숙부는 무지 놀랐다는 표정으로 입까지 쩌억 벌렸다. "그 애는 그 애고 저 애들은 저 애들이지. 게다가 진이의 내력 느끼는 능력을 알지 않는가? 저 아이처럼 내력에 대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내 아직까지 보질 못했지. 그 도서관에 있던 사제도 저 아이의 능력에 무지 감탄하더군." "허허... 그분이 말입니까?" 배 숙부는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한 듯 허허거렸고, 그 모 습에 할아버지는 후후... 웃을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이런 위험 속에 쉽게 데려가시는 것으로 보아 화산파에서 단목 세가로 갈 때 우리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우리의 실력을 확실하게 알아보려는 생각인 듯했다. '으음... 역시 한 세가의 가주란 뭔가 달라도 다르다고나 할까? 호랑이는 자기 새끼 를 절벽에서 떨어뜨린다고 하더니만.......'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유의 전음이 들려왔다. [후우... 위험하다고 말씀드려도 개의치 않으시겠지요?] [홋홋홋, 잘 알면서 뭘 물어?]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제발 조심해 주십시오.] [아아... 노력할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혀 안 그러시다는 걸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이번에는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려, 그려.......] "후우......." 유가 침울하게 한숨을 내뱉자 희여송이 그를 보더니 네 맘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 로 어깨를 탁탁 두드려 줬다. 그리고 그를 위로하려는 듯한 덕순의 명랑한 말. "아따, 행님. 너무 걱정 마시랑께요!" 그날 저녁, 우리는 그 무림맹 본부에서 왔다는 청룡단원들을 볼 수 있었다. 지부장이 청룡단원의 기세를 꺾기 위함인지 우리와 하는 식사에 그들을 초대했던 것이다. [쿠쿠쿠, 민아, 네 수하들이냐? 청룡단원들이라고 하는데.......] [누나, 정말 재미없는 농담인 거 알지? 어쩜 적룡이면서 이렇게 주위를 춥게 만드 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야? 대단해.] [훗, 그러는 너야말로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구나.] [아하하하... 그냥 넘어가자, 누나.] 그들과 같이 식사하기로 한 장소로 가면서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어 떤 일단의 무리와 딱 마주쳤다. 다섯 명인 데다가 남 보는 시선이 무지 버릇없는 것 으로 보아 누구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바로 이번에 지부로 내려왔던 청룡단 원들이었다. 네 명은 남자고 한 명의 여자가 끼어 있었는데 모두 자기들이 평범한 집 자식들이 아니라는 것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경장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남자들 중 한 명은 마치 부유한 집의 도령이 유람이라도 나온 것처럼 땅에 질질 끌릴 정도의 길다란 비단 장포까지 걸치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사람은 어떻게 무림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거지?] 되게 거들먹거리는 시선으로 우릴 바라보는 그 눈초리가 맘에 안 들었는지 민이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며 나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내 생각인데 돈이 무지 많아서 자신의 상대편이 된 무사들을 모조리 돈을 주고 샀 을 거 같아.] [으음, 나도 누나 생각이 맞는 듯해.] 할아버지는 배 숙부와 먼저 지부장에게 갔기에 민이와 나, 그리고 희여송과 유, 덕 순밖에 없었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를 마음 놓고 깔보는 듯했다. "호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대들은 처음 보는 듯한데 누구시오? 이 지부에 저렇게 어린 무사들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들 중 제일 덩치가 큰 남자가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희여송이 우리 대표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은씨 세가의 사람들이오. 이곳 지부장님의 요청으로 수색대에 참여하려고 오게 되었소." 그러자 그 사람들이 눈빛에서 무시하는 건 사라졌지만 깔보는 건 여전했다. 그리고 그들 중 부채를 들고 있던 유들유들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호오, 은씨 세가의 위명은 익히 들었소만, 이렇게 어린 무사들을 수색대에 참여시 키다니, 무사의 숫자가 부족한 모양이오?" 빠직! 열이 받은 내가 나서서 한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나보다도 먼저 희여송이 나 서서 그의 말을 유연하게 받아쳤다. "훗, 이 정도의 수색은 우리 정도만이라도 충분할 거라 생각한 것뿐이오. 보아하니 댁들이 바로 이름 드높은 청룡단의 단원이신 것 같은데, 그대들이 이번 사건을 그 렇게 어렵게 생각할 줄은 몰랐소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단원들과 같이 오지 그러 셨소?" '오옷, 희 사형, 파이팅!!' 우리를 더욱 깔아보려고 말을 던졌다가 본전도 못 건진 그 유들유들한 부채 녀석의 얼굴이 일순간 분노로 일그러졌다. "흥, 우리 실력이라면 우리가 다 갈 필요도 없이 단 두 명만 가도 사건을 해결할 수 있소. 단지 만약에 대비하여 우리 조가 모두 내려온 것뿐이오." 그러자 희 사형이 유들유들하게 받았다. "아, 그러셨소? 그것참, 우리와 생각이 같다니 참으로 반갑구려." 계속했다가는 그 유들유들한 부채 남자가 완전 짜부러질 것 같은지 그 남자들 중 가장 깔끔하게 생긴 남자가 나섰다. 그래도 우리 세가의 예성구보다는 못생겼다. "자자, 같은 수색 임무를 띠고 오신 동지 분이신데 아직 자기소개도 못하고 있군요. 저는 곤륜의 속가제자 출신인 엽곡이라고 합니다. 별호는 검유이지요." 그러자 희여송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소개했고, 그들은 내 이름을 듣더니 무지 놀 란 눈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야, 그 유명한 무림화 중 한 분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정말 놀라운데요? 같이 일 을 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 엽곡이란 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아까 우리를 무시하던 그의 눈빛을 먼저 봐버렸기에 친절한 그의 행동에도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방해나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서로의 소개가 시작되고 보니 부채 남자는 상린공자 목우령이라 했고, 맨 처음 우리에게 말 건 사람은 이들의 대표 격인 조장으로 철마협 상관초라 했다. 그리고 여자는 검옥 사예란. 여자의 몸으로 청룡단원이니 아마도 실력은 대단할 것 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맨 처음부터 안 좋은 모습을 보인 덕에 우리는 그들과 친해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9대 문파의 제자 출신이라 첫인상이 좋았다 하더라도 관계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첫 번부터 삐그덕거리는 청룡단과 무림맹 지부 조사단과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아린이야기13권 청명이의검은 청명검(2)-1 다음날, 평소같으면 막 일어나 식사를 하기 위하여 어기적어기 적 세수를 할 시간에 나는 벌써부터 식사를 끝내고 싸늘한 이른 아침의 공기를 느끼면서 무림맹 낙양 지부의 앞뜰에 나와 있었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낙양 지부장은 수색 팀을 아침 일찍 출발시 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에혀... 뭐가 그리도 급해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출발한다는 거야?' 간간히 나오려는 하품을 간신히 억누르며 수색팀의 앞에서 간 단한 연설을 하고 있는 지부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번 수색 팀은 그가 직접 지휘를 맡았기에 그도 간편한 경장 에 외출복으로 자주 애용되는 소매가 짧은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래. 원래 저렇게 입어야 정상 아냐? 울 할아버지도 저렇게 입었는데... 그에 비하면 저인간은 지금 유람하러 가려는 것인지, 수색하러 가려는 것인지 헷갈린다니까?'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따분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며 낙약 지부 소속 무인들과 떨어져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섯 인물 중 한 명을 바라보았다. 상린공자 목우령. 이 인간은 지금 마침 선보러 가려는 듯 입고 있는 옷이 휘황찬 란했다. 아까 이곳에 집합하러 나올 때 저 남자의 옷차림을 보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치 잔치, 혹은 진짜 선보러 가거나 아니 면 황제를 배알하러 가려는 듯한 아주 화려한 옷차림이었던 것이 다. 비싸 보이는 비단으로 된 듯한 옷자락은 땅에 거의 끌리다시 피 했고,소매 또한 무지 길어서 팔을 밑으로 늘어뜨리면 땅에 닿 을 듯 말 듯했다. 거기에 손에 들고 있는 건 커다란 부채...... 아무리 높지 않은 산이라 해도 불편할 것임에 틀림없는데 저 인간은 상식이 없는지,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건지 아주 당당 히 그런 옷차림을 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의 일행인 나머지 청룡단원들은 그가 항상 그래 왔었던지 그 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저 사람이 어떻게 그 이름 높은 청룡단이 되었는지 의아 하다니까. 아니,노숙할 때 어쩌려고 저래?' 나중에 가서 불편하다고 투덜투덜거리면 신나게 이웃어주리라 결심하면서 나는 지부장이 연설을 끝내자 얼른 준배된 말에 올라 탔다. 도시를 벗어나 야산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타고 간 뒤 산에 오를 때부터는 도보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어차피 산 밑에는 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는 낙양 지부 소속 무사들이 있었으므 로 수색을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말은 그들이 맡아줄 터였다. 아린이야기 13권 청명이의 검은 청명검(2)-2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봄날의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 는 날이었다. 이런 날에 봄꽃들이 막 피어나기 시작해 아름답게 치장된 산을 소풍이 아닌 수색을 위하여 올라간다는 사실이 참으 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솔찍히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애인도 없는 주제에 소풍 은 무슨 소풍이겠는가? 애도 아니니 가족 야유회를 기대할 수도 없고,근처에 친구도 없는 상태이니 같이 가줄 사람이라고는 민이 뿐이지 않은가? '쩝... 평소 인맥을 못 넓힌 게 한이로구나. 어떻게 그동안 같이 놀러갈 친구 하나 못 만들 수가 있지? 아아...류미르랑 세이몬이 그립구나....../' 주위 사람들은 잔득 긴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긴 장감을 느끼지 못한 채 오히려 딴생각까지 해가면서, 그와 더불 어 좌우의 경치도 느긋하게 감상하며 천천히 산을 올라갔다. 아, 정확히 말하면 긴장하고 있는건 낙양 지부 사람들하고 유와 덕 이밖에 없었다.아마 유와 덕이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상황 때문에 긴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잔뜩 긴장 하고 있는 것일 테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내색하지 않는 건지 모 르겠지만 모두들 태연하게 나처럼 주위 풍경도 감상하면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주위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첫 시체를 발견한 건 점심을 먹기위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오르기 시작한 지 2,3시간 이 지난 후였다. 정말 보기 안 좋게도 상체는 앞가슴 부분을 나무 둥치에 기댄 채 이제는 허옇게 뒤집어진 눈으로 막 산을 올라오는 우리를 쏘 아보고 있는데,하체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얌전히 뻗어 있 었다. 한마디로 허리가 싹둑 잘려 죽어있었단 소리다.죽은지 꽤 된 시신인지 주위의 피는 검게 굳어 있었고 파리가 시신 주위에 왱왱 날아다니고 있었다. "으윽...보기 좋은 건 아니네." 그 모습에 유와 덕순은 나를 슬쩍 뒤로 밀어내며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어차피 그들이 등을 떠밀어도 시체에 가까이 디가갈 생각이 없었던 나는 순순히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뒤로물러났다. 그런데 할아버지와 배 숙부, 그리고 지부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마지 고깃덩어리 감정하듯 그 파리 날리는 시체에 다가 가 자세히 살펴보는 거였다. 게다가 청룡단원들도 인상을 미미하 게 찌푸리면서도 가까이 다가가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나머지 무 사들은 주변을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주위에는 그 말고는 다른 이들의 시체는 없는 것으 로 보아 아마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다가 혼자 적을 만나 죽은 것 같았다. "음...한칼에 잘렸군.허리를 한 번에 두 동강 낼 수 있을 정도 면...내력이 일 갑자 이상을 가진 자겠돈. 이거,실력이 상당한 인 물이겠는걸?" 사람을 두 동강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고기를 써는 것도 아니고 뼈까지 단 한 번에 잘라내려면 힘도 힘이거니 와 물렁물렁한 피부와 근육을 단번에 베어낼 수 있는 빠르기가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그걸로 보아 순수한 근육의 힘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을 테니, 분명히 검기를 사용했다는 결론이 나온 다. 단지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사람을 등 뒤에서-시신이 앞으로 넘어진 듯한 모습이었기에 할아버지는 등 뒤에서 당했다고 보고있었 다- 죽이는 데에 검기까지 사용했을 이런 무식한 짓을 하는걸 보 면 많은 내력을 가진 자일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내력이 적은 자 였다면 그냥 등 뒤에서 심장이나 쿡 찔러 버리는 방법을 택했을 테니까.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을 뒤이어 배 숙부도 자신의 의견을 말했 다. "취미 또한 좋지 못한 자로군요, 이 정도의 실력자가 관련되어 있다면 이번 일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부이 이 정도 의 실력자가 단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요." "흐음... 그러길 바래야지." 배 숙부의 말에 할아버지는 수긍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 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신분을 나타낼 만한 별다른 소지품을 지니지 않은 것으 로 보아,아무래도 소문을 듣고 몰려든 무사들 중 한 사람인 듯합 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배 숙부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는 동안 시신 의 소지품을 살펴본 모양이다. 그런데 드렇게 말하는 지부장의 표 정은 착찹함과 안도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자신보다 먼저 앞서서 산으로 보내져 연락이 끊겨버린 수 하들 또한 이와 같은 꼴을 하고 있을 것이 뻔했으니, 그 시신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시신이 자신의 수하가 아닌 이상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조사가 끝나자 대기하고 있었던 듯한 낙양 지부 소속 무사 둘이 근처에 있던 햇볕이 잘 드는 공지에 그 시신을 정성스레 묻어주었다. 비록 이름은 몰라서 위패는 세우지 못했지만, 그래 도 무덤이라도 만들어준 것이 어디인가? 첫 시신을 발견해서 그런지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일행들 사이 에서는 아까 전보다 좀 더 심각해진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 번에는 낙양 지부장은 물론 청룡단원 다섯 명 또한 긴장감으로 인해 얼굴이 약간 굳어져 있었다. 그 긴장감에 보답하기 위함인지 우리는 채 한 시간도 가지 못해 또 다른 시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두 구였는데,둘 사이가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할아버지와 배 숙부가 살펴본 바로는 단 일 격에 사망한 것이 라고 했다. 거기다가 얼굴에 극도의 공포와 당혹감이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도망치다가 당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했다. "흐음... 시체가 점점 늘어가는군요. 이거 참 흥미로워지는데 요?" 및; 야유회 나온 것마냥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랑살랑 부치고 있던 부채를 탁 손바닥에 쳐서 접은 상린공자 목우령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남자는 저렇게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편안한 긋이 아주 사뿐사뿐 잘만 걸어다녀 처음본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 아무래도 같은 사람의 소행같아. 단 한 번에 두 동강을 낸 것 하며, 잘린 면이 매끄러운 것 하며..." 이곳에 온 청룡단원의 조장인 철마협 상관초가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화예검 혁진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적이 한 사람인 것이 어히려 저희로써는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 니까?" "글쎄...적이 한 사람이라고는 단정할 수만은 없지. 같은사람 의 소행이라 해도 그 사람이 홀홀단신으로 일을 벌이고 다닌다고 단정할 수는 없듯이 그를 도와 주고 있는 일행이 있을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대꾸한 상관초는 뭔가 생각 났는지 주위에 있던 자신의 동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검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는데 자네들은 단 한 칼에 사람의 허리를 이 등분 할 수 있나?" 아린이야기13 청명이의 검은 청명검(2)-3 에고 힘드네혀... 그러자 검유엽곡이 잠시 생각하다 진지한 어조로 대꾸했다. "글쎄요...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제 생각에는 가능 하긴 하더라도 베기 직전에 호흡을 가다듬고 제 기력과 정신을 집중해야 할듯합니다." "그렇다면 싸우는 도중에 그러기는 불가능하겠군?" "예, 그럴 마음도 없지만요." 엽곡의 말에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상관초가 다른 이들을 둘러보자 사예란과 목우령, 혁진아는 마찬가지라는 듯한 몸짓을 해 보였다. "그렇단말이지? 흐음...역시 우리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자 란 말인가......" 그의 어조에는 걱정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걸 느낀 화예검 혁진아가 얼른 그를 위로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합공을 받아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이곳에는 은씨 세가의 가주님도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그 뒤를 이어 사예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훗,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우리가 전력을 다해 상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각 문파의 어른들을 제외하고 는.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합공을 해야만 상대할 수 있을지 모 르는 적입니다. 흥분되지 않으세요?이번에 우리는 우리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가 있지요." 그러자 엽곡도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적이 죽을까 애써 힘 조절을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마지막은 목우령이였다. "훗훗, 그동안 펼치지 못했던 내 실력을 마음껏 보여주도록 하 지. 훗훗,자네들도 기대해보겠어."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모두 흥분과 자신감이 어우러진 미소를 교환하였다. 비록 처음부터 맘에 안근 그들이었지만,그러한 모습 에서 가슴 한쪽이 든든해져 옴을 부인할수가 없었다.그건 낙양 지부 무사들 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그 뒤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서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으니 말이다. '쳇...처음부터 저들에게 기댈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말야.' 다섯 명의 청룡 단원의 자신만만한 대화로 인하여 일행을 감싸 고 있던 알지 못하는 적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약간이나마 해소되어 사람들은 좀 전보다 가법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해질녘까지 계속 지속되었다. 비록 그동안 몇 몇의시체를 더 발견하고 그 시체들 또한 동일한 자에 의하여 죽 임을 당한것 같다고 판명되기는 했지만 일행 모두 시체가 꽤 있 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던 터였다.시체들 모두 소문을 듣 고 몰려온 듯한 떠돌이 무사들인것 같이 보였기에 모두 '쯧쯧, 운이 나빴군'이란 표정외엔 아무런 감정 없이 그 시체들을 대했 다. 그러나 그러한 조금은 여우로운 표정들은 해가 뉘엇뉘엇 서산 으로 넘어가고 슬슬 오늘 밤을 보내기 위해 야영할 장소를 찾는 동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뀌고 말았다. "헉헉. 지, 지부장님!지부장니님~!" 낙양 지부 소속의 무사들이 몇몇씩 짝을 이루어 흩어져 적당한 장소를 찾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이라고 해봐야 청룡단원5명이지 만-은 여기저기 흩어져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나와 민이는 할아버지와 배 숙부, 그리고 낙양 지부장이 열심히 적에 대하여 이런저런 논의하는걸 그들 근처에 앉아 듣고 있던 중이 었다. 무사들이 임무(?)를 띠고 출발한 지 대충 15분이나 되었을까 하 는 무렵,새파랗게 질린 무사 둘이 다급리 뛰어오며 지부장을 불 러 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챈 모든 일행들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부장이 대표로 그들을 향 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들 또한 어느 정도 무공을 수련한 가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마치 마라톤이라도 한 듯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온몸 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평생 겨어보지 못한 충격이라 도 받은 모양이었다. "지,지부장님... 헉헉, 그들이...그들이..." 낙양 지부장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무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느 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부장은 그 모습이 무지 답답한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한 번 돠물었다. "그들이라니?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냐?" 그러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연신 숨 고르기에 몰두해 있던 다른 무사가 이번에는 좀 진정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첫 번째 수색팀을 발견했습니다. 이 앞쪽의 공터에 있는데... 모두 몰살당해 있습니다." 침중한 그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부장은 자신과 같이 있던 수하들에게 손짓을 하는 한편 그들이 온족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할아버지를 위시한 우리들과 청룡 단원이 뒤따랐고 곧 이어 지부장의 지시를 받은 그의 수하의 흩 어진 무사들을 불러 모으려는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아린이야기 13권(2)-4 "처참하더군요......." 희여송이 한 말이었다. 물론 나와 민이는 보지도 못했다. 나와 민이가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와 덕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곳이 보일 듯 말 듯할 정도로 멀리 뒤로 물러나서 그쪽 방향만 힐끔힐끔 보고 있다가 그곳을 다 살펴보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희여송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질문에 희여송의 맨 처음 해준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처참할 것 같네요. 이렇게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도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걸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으면 이렇게 심할가요?" 민이가 낙양 지부 소속 무사들이 모두 생을 달리한 채 쓰러져 있을 그 장소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희여송이 자신이 본 모습을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 "야영하다 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나마 저 자리에 있는 무사들이 먼저 출발한 수색 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랄까요? 아마도 범인이 수색 팀의 무사들 모두를 상대하기 버거웠기에 몇 명만 처리하고 자리를 피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습격당한 모습 그대로 있는 걸 보아 하니 나머지 무사들도 범인을 쫓다가 당한 듯싶군요. 무사한 사람이 있었다면 저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아따 그랗께 , 한마디로 다 당했다~ 이 말 아니다요?" 희여송의 말을 다 듣고 난 덕이 그의 말을 간추리자 희여송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렇지. 비록 고수는 아니지만 명색이 무림맹 지부 소속 무사들인데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몼했다는 건 ... 아무래도 범인은 자신을 본 이들을 모두 죽이려고 작정했던 모양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무지 진지한 어조로 말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자는 뜻이 강력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범인이 누구든 내 한 몸 건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데다가 그 범인이 누구인지와 그가 정말 청명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기에 나는 그의 필사적인 시선을 싸악 무시해 버렸다. 민이도 나와 같은 행동을 취했는지 한참 우리를 바라보던 희여송은 결국 시선을 거둔 채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훗훗훗. 미안, 희 사형. 하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다구요.' 힐행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야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날이 완연히 저물어 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원래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지는 편이라 우리가 자리를 잡은 시기는 무지 늦은감이 있었지만, 명을 달리한 동료들의 유품을 갈무리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것만 해도 조사가 다 끝난 뒤에 했기에 시간이 좀 걸렸던 데다 안 좋은 일을 당한 곳에서 밤을 지새우고 싶은 마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던 터라 그곳에 서 좀 덜어진 곳에다 야영하기 좋은 새로운 장소를 찾아내느라 더욱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모닥불을 피우고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하여 무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분위가가 너무 무겁게 가라앉은 탓인지 무사들이 빠르게 움 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왠지 천근만근의 추가 달린 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낙양 지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런 임무를 띠고 나오는 무사들은 어떠한 일을 겪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먹을 수 있을때 잔뜩, 그리고 세 끼는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불안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 던 그가 결국 수하들의 시신을 보자 '결국은...'이라는 착잡함과 함께 은근한 죄책감도 얼굴에 비추며 수하가 건네준 따끈한 국물을 몇 술 뜨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그는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보는 듯했다. 그는 아까 그 참담한 광경을 본 뒤로 의기소침해져서 수색팀의 지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거의 배 숙부에게 맡겨놓다시피한 채 자신은 뒤로 물러나 있는 거였다. 이럴때일수록 지휘자가 강한 모습을 보여 불안한 부하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야 함에도 불 구하고 자기 자신까지 축 늘어져 있었으니, 만약 청룡단원과 울 은씨 세가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이 수색 팀은 범인을 만나기도 전에 산을 그냥 내려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걸 보면 지부장에게는 리더쉽이라는 게 쬐께 모자라는 듯 했다. 하긴, 그랬으니 청룡단이 아무리 위세가 드높다 하더라도 자 신보다 훨씬 나이도 어린데다 지위도 한 단계 낮은 녀석들을 휘 어잡지 못해 할아버지를 이 일에 끌어들인 거겠지만. 덕분에 배 숙부는 난데없이 수색 팀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은씨 세가에서 제자들을 다스리던 경력이 꽤 있었던 터라 그리 어렵지 않게 지휘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래 봤자 배 숙부가 낙양 지부장에게 '이러이러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건의하는 식 으로 하면, 지부장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하에게 '배 대협 말씀대로 하라!'라고 하는 식이었지만. '혹시... 저 지부장... 낙하산 아냐? 그래,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겟다. 무림맹 본부의 고위층에 인척이 있다던가... 뭐, 그런 거 아닐까? 음음, 여기라고 그런 부정부패가 없으라는 법도 없으니까.' 잠이 안 오는 밤에는 생각도 많아지는 법인지, 잠을 자려고 누 웠건만 오라는 잠 녀석은 안 오고 자구만 저쪽에 힘없이 않아 있 는 지부장 쪽으로 시선이 가며 생각까지 지부장을 격하시키는 쪽 으로 한창 진행되면서 내 스스로가 나의 생각에 만족스러워 고개 를 끄덕이는데 옆에 누워 있던 민이가 몸을 굴려 내 옆에 바짝 붙 으며 툭 쳤다. (용언 `` ) ``왜 자꾸 저 사람은 훔쳐보는데?`` ``잉?`` 갑작스런 녀석의 메시지에 나는 놀라 둥그레진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까부터 계속 바라보데? 지부장한테 관심있어?`` 또다시 들려오는 민이의 메시지에 나는 몸을 밤 바퀴 굴려 민 이를 마주 대한 채 그를 아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메 시지를 보냈다. ``도대체 네 머리 속에는 뭐가 들어 있길래 생각이 그쪽으로 빠지는 거냐? 저번에는 도서관에 게시는 사숙조님(사서 할아버지)에게 관심있 는 게 아니냐고 하더니만.......`` 그러자 민이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냐? 그럼 왜 바라보고 있었는데? 호감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순진무구한 그의 메시지에 나는 속으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후우... 뭘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건지... 얘가 산다는 용계는 도 대체 어떤 환경이길래 이런 황당무계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 지?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왜 만날 생각하는 것이 이런 쪽이냐고?' 민이도 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뭔가 골똘히 생 각하더니만 결국 자신도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중얼거렸다. ``아아... 원래는 이런 이야기나 하려던 건 아닌데... 하지만 겨우 몇 백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관심 가진다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건가?`` '하.하.하.......' ``이눔아, 당연히 이상하지이이이~!! 우리 종족은 사람의 수명에 비해 백 배라구, 백 배!! 사람에게 100년은 일생이라고도 할 수 있단 말야! 사숙조님은 우리 종족에 비한다면 거의 생을 다 산 용이나 마찬가지라 구!!`` 이 정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민이 녀석은 정말 이해 못하겠다 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게 뭐 어때서? 우리 용계의 역사에 보면 8천 살이나 9천 살에도 재혼하는 용은 많은걸?`` 그의 메시지에 나는 녀석을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허허, 그곳에서는 용끼리 결혼까지 해? 하기야 인간들처럼 사 회를 이루고 산다니... 하지만 생각하는 거 하곤.......' ``하아아아~ 관두자, 관둬. 그려그려, 네가 ㅏ는 곳에는 정력(?)이 아 주아주 넘치는 분들이 많으시구나아아~`` 물론 민이가 말한 일이 드래곤 쪽에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 다. 드래곤이란 수명이 다 하기 직전까지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 록 노쇠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강대해지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하긴 울 할아버지만 해도 지금 딴 드래곤이랑 여차저차 해서 충분히 2세를 다시 생산하실 수도... 아아, 왜 나까지 이런 쪽 으로 생각이 빠진 거야? 이게 다 저 녀석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그래. 으음... 근데 민이 녀석 때문에 할아버지랑 아빠가 생각나네. 부디 내가 돌아갈 때까지 큰 사고는 치지 마셔야 하는데... 에휴~ 세이몬이랑 류미르가 할아버지랑 아빠를 잘 막아야 할 텐데 말야. 설마 자기들도 날뛰는 건 아니겠지? 음... 세이몬이라면 충분히 그 럴 수도 있겠지만... 훗, 류미르. 난 너를 미는다. 부디 힘들겠지만 잘 좀 막아다오.' 오랜만에 떠오른 저쪽 세계에서 내가 갑작스레 실종-이라고 말 할 수 있으려나...-되어 걱정하실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류미르 와 세이몬의 생각에 잠긴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 를 그리고 있었다. '분명히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게이트를 다시 열려고 난리 치실 테고 세이몬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류미르는 그 런 세이몬을 달래면서 어떻게 해서든 날 찾으려고 할 테고... 흐 음, 그럼 할아버지는 누가 말리려나? 아, 마이터(소르드 왕실의 수석 마법사)가 있었지? 으음, 그가 부디 할아버지를 잘 말려야 할 텐데. 후훗... 하지만 소식 듣고 달려온 아빠가 마이터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지 않을까나? 할아버지한테는 뭐라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야. 헷, 아빠는 죠슈아가 말리려 들겠지? 설마 하니 인간이 막는 다고 다 휩쓸어 버리진 않으신 거야. 날 이곳으로 보내 버린 마법 진을 그들이 할아버지와 함께 만든 거니까 날 찾기 위해서라도 큰 위해는 가하지 않으실 테지?' ``무야? 뭔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해실해실 웃어?`` 그런 내 상념을 뚫고 민이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응? 아아... 그냥 내가 살던 곳에 있을 가족이랑 친구들 생각. 아, 정 말 오랜만에 생각났네. 그동안은 이래저래 사건들이 많아서 까맣게 잊 고 있었지 뭐야. 근데 왜 부른 겨?``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까 말야... 우리 여기 와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갑자기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어 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민이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 하지만 민이는 내 시선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생각해 봐, 누나. 우리가 왜 소림에 가는 건데? 할아버지가 단목세가 가주의 부탁을 받고 마공 비급의 조각을 가져다 주려는 거잖아. 그거 아주 중요한 일 아니었어?`` ``아, 맞다......!` 그제야 생각나는 사실이었다. 청명검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정 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나 정말 왜 이러니? 왜 코앞의 일 때문에 이런 중요한 걸 잊어 버리냐?`` 나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스럽다는 생각에 침울해하고 있는데 민이 또한 침울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누나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방금 생각난 거야.......`` 그랬냐? 아아... 우리는 정말 멍청한 남매구나.`` 그런 말 들어도 싼 거 같아.`` ``그렇지?`` '아... 우울하다.......' 그렇게 자기 비하에 빠져 있는데 민이의 의아하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근데... 우리는 그렇다고 해도 할아버지도 잊고 계시는 걸가?`` ``에이, 설마.......`` 하지만 정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민이의 메시지를 자신있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민이도 내 메시지에 자신감이 없음 을 알아챘음인지 자신의 주장을 한 번 더 펼쳤다. 아린이야기 13권(2)-5 {하지만 그 비급을 전달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잖아. 한시라도 빨리 가져다 줘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여기 있으면 며칠을 허비해야 할지 모르는 거잖아.} {에에...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우리처럼 청명검 때문에 깜빡 잊고 계시는 걸 거야.} 민이는 자신의 생각이 만족스러웠던지 아주 자신있는 표정이었다. {설마.......} 그러나 민이의 말에 완전히 찬성할 수 없었던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할아버지를 변호할 수 있는 말을 찾았다. {에... 혹시 딴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까? 솔직히 그 소림사의 스님 생신은 아직 많이 남았잖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두르면 이상하게 생가할 테니까... 아, 그래.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지부장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겠지. 게다가 갑작스런 지부장의 부탁을 받고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신 게 아닐까? 게다가 우리처럼 청명검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도 궁금했고 말야.} 말하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그럴듯했다. 덕분에 끝에 가서는 자신에 차서 민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민이 또한 내 논리에 수긍이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에... 그런 건가?} {그런 걸 거야, 분명히! 설마 할아버지가 그런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저번에 마공의 비급을 보관하고 있던 5대 세가 가주들하고 9대 문파 장문인들하고 회담을 가질 때도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화산파 장문인 생일 잔치 때 모인 거잖아. 이번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그렇게까지 말하자 민이는 완전히 납득한 표정이었다. {으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까 정말 할아버지가 지부장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이 없네. 호광 지방은 우리 은씨 세가의 영향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무림맹 지부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테니까 평소 때였다면 지부장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겠지.} {헤에... 너, 어떻게 그런 것도 알고 있냐?} 내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민이랄 바라보자 민이가 씨익 웃었다. {누나, 난 이래 봬도 은씨 세가의 소가주란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심이 담긴 민이의 메시지에 나는 정말 놀라 버렸다. {뭐? 소가주? 니가 왜 소가주냐?} 그러자 민이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지며 불만스럽다는 감정이 드러나 잇는 메시지가 전해져 왔다. {뭐야? 내가 소가주인 게 불만이야?} {그런 게 네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잖아?} 당황스러움을 진정시킨 채 상투적인 말로 반박하자 민이가 은밀하게 씨익 웃어 보였다. {할아버지가 이번 여행을 떠나시기 전에 살짝 말씀해 주셨어. 소림에서 돌아오면 얼마 후에 우리 생일이잖아? 그때 정식으로 내가 소가주임을 발표해 주신댔어.} {정말?} {응!} 민이 녀석은 아무래도 소가주로 발표된다는 것이 무지 좋은 모양이었다. 하기사 할아버지의 직계손은 민이밖에 없으니 어차피 나중에라도 민이가 소가주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겠지만, 문제는 민이와 할아버지 사이에 있는 숙부인 은재영이었다. 일반 문파라면 문주, 혹은 장문인의 후계자는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후계자가 될 이가 어느 정도 지지 세력도 갖고 능력도 인정받을 즈음에 적당한 기회를 잡아 공표되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다. 물론 보통 장문인의 제자들 중 한 명이 후계자가 되긴 했지만, 장문인의 제자들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다른 제자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았다. 뭐라 해도 강호는 능력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핏줄로 이어진 무가는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크게 능력이 달리지만 않는다면 장손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정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씨 세가처럼 장자가 뭔 일을 당하거나 엄청난 바보라면 가주의 자리는 차남에게로 넘어간다.(그럼 나중에 장자의 자식과 차남의 자식 사이 간의 가주 자리 다툼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비록 아직까지는 소가주라는 호칭을 얻지 못했지만-태어나자마자 소가주라 불리는 장자와는 달리 차남이 소가주라 불려지려면 가주가 직접 그를 소가주라고 불러줘야만 다른 사람들도 그를 그제야 그렇게 불러주기 시작한다- 은재영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그는 독신주의였기에 나중에는 민이가 그 뒤를 이어 가주가 되기야 하겠지만 아마 은재영도 그것이 당연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거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은재영을 제치고 민이를 소가주라 공표한다니....... '문제네. 은재영이라는 사람이 가주 자리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더구나 충분히 가주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민이가 소가주라 불린다면 가주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 아냐? 그럼 주변에서도 말들이 많을 테고, 비록 가주 자리에 욕심이 없다 하더라도 본인도 기분 안 좋을 텐데 할아버지는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거지? 은재영이 딴 맘 품어도 민이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자신하시는 건가? 하긴 민이도 이제 17세이고 할아버지도 금방 돌아가실 것 같지 않으니 괜찮을 테지만... 뭐, 민이가 그런 녀석에게 당할 애도 아니고... 후우~ 결국 문젠 민이 녀석인가? 언젠가는 용계로 갈 녀석이 소가주가 되는 것에 뭘 그리 좋아하는 건지... 몇십 년 동안 이곳에 있는다면 괜찮겠지만 그전에 돌아가게 된다면 어쩌려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면서 점점 어두운 쪽으로만 가는 까닭에 내 얼굴을 조금씩 조금씩 찌푸려졌다. 그런 내가 의아했던지 민이가 내 생각을 가르며 질문을 던져 왔다. {왜 그래? 뭐 밟은 사람처럼 찜찜한 얼굴로.} 남은 자기 걱정에 끙끙거리고 있는데 정작 나이에 맞지 않게 나보다 현명하고 침착하다고 소문이 돈 당사자 녀석은 '천하태평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괜히 혼자 쓸데없는 고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열받았다. 덕분에 민이에게 전해져 가는 메시지는 곱지 못했다. {네놈이 과연 가줏감이 되는가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톡 쏘아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이는 싱글벙글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도대체 할아버지가 뭐라 하면서 소가주라 발표한다 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훗훗훗... 누나, 난 이래 봬도 용계의 왕족으로서 교육받은 몸이라고. 이깟 인간계의 세가 하나쯤 못 다스릴 것 같아? 할아버지도 그걸 인정해 주셨으니까 날 소가주 자리에 앉히시려는 것 아니겠어?} 이놈이 이렇게 잘난 체하는 모습 정말 오랜만에 봤기에 나는 순간 황당했다. '하긴... 이놈, 첨에 만났을 때 엄청 잘난 체하던 놈이었지? 나한테 깨지고 난 뒤 다시는 그러지 않았지만. 그래, 원래 이런 놈이었어.' 민이 녀석이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아서 무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주가 되려고?} {응. 한번 해보고 싶어.} 내 질문에 민이의 답은 망설임도 없이 금방 나왔다. '허어, 지금 폼을 보아하니 몇십 년은 이곳에 눌러앉을 모양이군. 하긴, 할아버지로서는 잘된 일이려나?' 잠을 자려고 누웠건만 생각지도 못한 민이의 말에 오라는 잠은 안 오고 이런저런 생각만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바람에 밤늦도록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새벽녘에야 깜빡 잠이 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평소 새벽 수련하는 시간보다도 훨씬 지나 있어 해가 뜬 지 한참이나 된 시간이었다. '어라? 어라라?' 생각보다 너무 늦게까지 자버린 걸 깨닫고는 놀라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무림맹 낙양 지부 무사들이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내 빽이 든든하다 보니 차마 불침번은 세우지 못하고 아침 식사 당번조차 시키지 못한 채 일어날 때까지 가만 내버려 둔 모양이었다. "누나, 이제야 일어난 거야?" 머리 위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민이가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피곤했나 봐?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하품을 하는 나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옆에 주저앉았다. '우쒸... 내가 누구 때문에 잠을 못 잤는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덕이 다가와서 내가 잔 자리를 정리했다. "아따, 오늘따라 늦게 일어나셨네요잉~" "후아아아암~ 몰라, 너무 자서 머리가 띵~해." 기지개를 한번 쭉 켜며 세수할 곳을 찾아가려는데 웬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쪽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일어난 지 좀 되었는지 벌써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는 청룡단원들이 서 있었다. 그들 중 예의 그 치렁치렁한 옷차림을 하고 왔던 목우령은 여전히 그 치렁치렁한 옷차림이었는데, 옷이 다른 걸로 바뀌어 있었고 집에서 막 나온 듯한 어디 한 군데 흐트러짐없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휘유~ 저 남자도 대단하단 말야.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오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되게 깔끔 떠네. 저러면 피곤하지 않을까?' 아직 잠에 취한 기운이 덜 풀려서 그 정도만 생각하고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날 따라오는 거였다. '뭐야?' 몇 걸음 더 가지 못하고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주 분명하게 그 녀석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건 분명히 한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한술 더 떠 검옥 사예란은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아주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피식~ 하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는 거였다. '뭐, 뭐야, 저것들은?!'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많이 자서 머리가 띵해 기분이 가라앉은 판에 아침부터 저런 기분 나쁜 표정들을 보자니 더 더욱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시리.......'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으면 하루 종일 안 좋은 법이다. 그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더 더욱 기분이 안 좋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는 데다 아침부터 저 인간들하고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무시하구 가려는데, 목우령의 느끼하고도 느글느글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내 귓가에 도착했다. "흐음... 무림화라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제가 상상하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군요. 이거 실망인데요?"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목소리... 아마도 저 목소리가 화예검 혁진아였지? "무림화 나름이겠지." '으윽~!'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나라도 저런 말을 듣고도 태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 녀석들을 상대해 봤자 웃음거리가 되는 건 나뿐이라는 걸 아주 자알~ 인식하고 있던 터라 이가 뿌드득 갈리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놈들... 딱 걸렸어. 두고 봐!!' 이번 일은 나중에 두고두고 갚아주기로 결심하며....... 아린이야기13권 청명이의검은 청명검(2)-6 그런데 정말 이찌 된 영문인지 녀석들의 시비라고 생각되는 일 들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런,어떻게 된 것이 정상까지 오라왔는데도 범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호호호,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우리 일행 중에 행운아 로 그 이름이 드높은 천.상.행.운.녀 은진 소저가 있는데 범인을 만 나는 불운이 우리에게 임하는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하하.그런가?하지만 우리에게는 범인을 금방 만나는게 행운 인데 말아." 에이,행운아의 실력에 따라 행운, 불행이 결정되는 거 아닙니 까?" "것도 그러네" '저,저것들이~!!' 내가 정말 싫어하는 그 별호를 들먹이며 저희들끼리 쑥떡이는 데 정말정말정말 얄미웠다. 게다가 말을 가만 드어보면 내 실력이 저희들보다 아래라고 얕잡아보는 게 아닌가? '허,허,허,허,......' 하는 짓거리들이 정말 유치했지만 내 분노를 극으로 끌어올리 기에는 부족함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내가 폭발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민이를 비롯한 유와 덕이 때무에 어쩌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곱씹었다. '그래,잘들 놀아라.그게 얼마나 갈지는 나중에 두고 봐야겠지 만.' 뿌드득~!! 내가 이렇게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가는 동안 할아버지를 비롯 한 일행을 이끄는 수뇌부(?)들는 난색을 표한채 의논에 들어갔다. 아침을 먹은 뒤 다시 시작한 산행에 정상까지는 도착했지만 몇몇 의 무사 시체만 발견했을뿐,청룡단원의 말대로 범인은 코빼기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이대로 수색을 계속해야 할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지 의논하려 한 것이다. 이 산은 이름도 없는 것을 보면 알다시피 그렇게 높은 산은 아 니었다. 솔직히 정상에 오르고자 마음만 먹었으면 반나절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정상에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 일행 은 수색이라는 임무를 띠었기 때문에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또한 시체를 발견하면 그 시체의 조사와 함께 수습을 같이 해주 느라 정상에 도착하는 데에 하루가 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정상까지 오르면서 범인을 찾지 못한 이상 산을 샅샅이 훑어야 하겠는데,아무리 높지 않더라 해도 괜히 '산'이라고 불리 는 것이 아닌 터라 이렇게 이행이 다 뭉쳐서 산 전체를 수색하기 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범인이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청룡단원5명 이 한꺼번에 같이 상대해야 할 정도-추정되었기 때문에 인원을 나누 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다. 청룡단원들이야 제압은 못하더라도 그 를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괞찮겠지만,문제 는 낙양 지부 소속 무인들이었다.우리보다 앞서 보내진 수색 팀이 전멸-그렇게 예측하고있다-된 것으로 보아 지부 소속 무인들이 십 단위로 모여 있어도 상대하기 벅찰 것이 분명한데 이곳에 같이 온 지부 소속 무인 들은 20명이었기 때문이다.이들을 나누어서 수 색해봤자 범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범인에게 죽기 전에 범인이 나타났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으면 다행 정도를 넘어 천운이라 여 겨질 정도였다. 그러니 수색 팀을 몇몇 조로 나누어봤자 청룡단원이나 우리 은 씨 세가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는 이상 무사들의 죽음만 늘어나 뿐이었기에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그렇다고 이렇게 뭉쳐서 다닌다면 산 전체를 수색하는 데 오랜 시일이 걸릴테고, 또한 우리가 이렇게 몰려 다닌다면 우리가 범인을 발견하는 것보다 는 범인이 우리를 발견하고 피할 확률이 더 높았기에 좋은 방법 이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가 그를 찾느라 산을 뒤지고 다니는 동 안 그가 산 밑으로 내려간다면 산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고 있 는 낙양 지부 무사들이 그를 다해낼 턱이 없었기에 그를 영영 놓 칠 확률은 더욱 높았다. 수색 인원을 더 데려올까도 생각해 봤지만 범인을 상대하 수 있는 이들은 일 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그 런 일류급 무사들을 모아 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데다 그렇지 않은 이들을 데려와 봐야 그들만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었 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팀을 두 개로 나누기로 했다. 모두 다 같이 뭉쳐서 다니는 것보다는 그나마 그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기준이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청룡단원 5명과 우리 은씨세가의 사람 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쪽 실력이 더 우월하다는 근거를 들어 이 번에 친히 참석(?)한 무림맹 낙양 지부장은 청룡단원 쪽으로 붙게 되었다. 그쪽을 가라는 말에 반박은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낙양 지부장의 표정이란...너무 불쌍했다. 사실 그가 할아버지를 이쪽으로 오게 한 이유가 바로 청룡단원 들을 휘어잡지 못해 그 일을 할아버지께 부탁하기 위함이 아니었 던가? 그런데 할아버지 없이 청룡단원과 함께 행동하게 되었으니 절망했을 것이다. 범인을 발견하면 다른 팀을 부르는 신호는 낙양 지부 무사들이 맡기로 했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 서로를 부르는 신호가 있었던 것이다.우리는 단지 다른 팀이 도착할 때까지 범인을 잡아두면 되는 거였다.뭐,우리쪽이 범인을 먼저 발견한다면 제압까지 가 능하겠지만.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쪽또한......" 그러한 잠시간의 -어차피 또 만날 것이니까-작별 인사를 마친 양족 대표(?)를 선두로 양 팀은 좌우로 갈라져서 산을 수색하기 위해 출발했다.우리는 서쪽을 훑어보기로 했고 저쪽은 동쪽을 훑 기로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약 10분쯤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그러니까 지 금까지 우리가 산을 올라왔던 것처럼 걸어가더니만 갑자기 경공 을 써서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덩달아 뒤따르던 위도 경공 을 써서 달리기 시작 했지만 갑작스레 이렇게 빨리 달리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린이야기 청명이의 검은 청명검(2)-7 할아버지가 멈춰 선 것은 청룔단원을 위시한 낙양 지부장 등과 헤어진 뒤 처음으로 시신을 발견했을 때였다. 민이와 나는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시신 근처에는 못 가게끔 제지당 할 줄 알고 미리 알아서 안 가고 멀찍이 떨어져 왜 할아버지가 갑자기 경 공을 사용하여 빠르게 달리신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하여 추측하느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할아버지 곁에 있던 희여송이 다가와 우 리 둘을 불렀다. "은 사제,은 사매, 가주님께서 부르세요." '뭔 일로 우리를 ?'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민이와 주고벋고는 주춤주춤 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사실 내가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 아왔어도 사람의 시신을 무감정하게 쳐다볼 만큼 단련(?)되지 않았던 터 라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게다가 그 시신이 머리부터 사타구니 까지 일직선으로 갈라져서 두 쪽이 되어 있는 시신이라면 더욱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시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펴보는 할아 버지와 배 숙부가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할아버지는 별로 가싸이 다가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와서 멈춰 선 나와 민이를 바라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 다. 그에 세발자국까지 더 가긴 했지만 그뒤로는 더 이상은 절대로 가까 이 가고 싶지 않았던 터라 할아버지가 손짓을 하더라도 가까이 가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고는 멈춰 섰고 민이 또한 나와 같이 멈춰 섰다. 이러한 내 결심을 알아챈 것일까? 할아버지는 더 이상 가까이 오라고 말 하지는 못하고 대신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를 부른 이유는,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하다만 얼마안 있으면 너희들 또한 어엿한 무림인이 될 터, 앞으로 또 이런 일을 겼을지 모르니 미리 경험을 시키게 하려는 거다. 그러니 적을이 안 되더라도 꾹 참 고 이 시신을 한번 살펴보거라." 그럴 거면 이전에는 왜 안 그랬는지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이런 일을 빨리 겪는 것이 달가운 일도 아니고 이전에는 많은 인물이 같이 동행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속도가 느린데 우리에 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느 라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었을 테니 그럴 것이라 지레 이해하고는 할아버지 앞에 놓인 시신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할아버지처럼 근처까지 가지는 못하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 춰 서서는 이쪽에서 보기도 하고 저쪽에서 보기도 하면서 내 나름대로 열 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민이는 나보다 한발 앞쪽까지 다가가긴 했지만 그 또한 팔을 벌려도 시신에 닿지않을 정도로 떨어져서 고개만 삐쭉 내밀어 기웃대고 있었다. 한 10분 정도 말없이 우리가 살펴보는 걸 바라보고 있던 할아버지는 이 정도 시간이면 되었다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래, 무엇을 알아냈느냐?" 그러자 민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범인은 내력이 높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즌육과 뼈를 한꺼번 에 잘라내는 건 단순한 힘만으로는 하기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데 이렇게 사람을 세로로 쪼개놓았으니 그는 아마도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있는 사람이 듯싶습니다." "그래, 맞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이자는 범인을 정면에 두고 당한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뒤로 누 워 있을 테지요." 할아버지는 내말도 맞다는 듯 고개를 삭짝 끄덕여 줬다. 그러자 기다였다는 듯 민이가 내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자는 별다른 반항을 해보지 못한 듯합니다. 손에 검이 쥐어 져 있기는 한데 뽑혀 있지 않은 걸 보아 검을 뽑을 새도 없이 당한 듯합니다." "그래그래, 잘 알아쟀구나. 또 알아낸 것이 있느냐?"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다른 건 알아낼 수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민이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더는....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처음에 그 정도 알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하지만 몇 가 지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있다면, 범인은 이 남자의 소지품을 노리고 이 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보렴, 옷 속을 뒤진 흔적이 없지 않 니? 게다가 돈 또한 전혀 건들지 않았구나. 아마도 이자를 죽인 뒤로 그 대로 뒤돌아서서 가버린 것 같구나. 또 한 가지는 시신에 난 상흔을 살펴 보자면 어떠한 초식도 사용한 흔적이 없구나. 그냥 일검에 내려친 것뿐이 야. 그렇다는 건 범인이 초식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 남자의 실 력이 형편없었거나, 아니면 초식이 필요없을 정도의 상승 경지에 있는 사 람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지." 보통 처음 무공을 배울 때는 신체를 어느 정도 단련시킨 뒤에 기초적인 초식부터 착실히 배운 뒤 확실하게 습득했다 여기면 고난워의 초긱을 배 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모조리 마스터하여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깨달음의 경지라고 해서 일반 무인들로서는 꿈도 못 꿀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이기어검술이라든가- 울 아빠가 하는 건 단지 흉내 내기에 불과할 뿐 진정한 이기어검술이라 할 수 없다고 한다-검강의 단계인 기만으로 검 대신 사용한다든가 등 등... 이때쯤 되면 진짜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른다는 경지가 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초식 따위가 필요없게 된다고 한 다. 몸짓 하나하나, 손짓 하나하나가 상승 무공과 비견할 수 있다고 한 다. 마도 마법사로 말한다면 고위 마범사는 주문이나 시동어 없이 의지만으 로도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과 비슷 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 경지 에 다다른 사람들은 몸에서 대단한 기도를 뿜어내는 대신 오히려 내력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울 할아버지는 아직 거기까진 닿지 못한 모양이지만...어쩌 면 범인은 할아버지와 비슷한 경지이든가,아니면 조금 더 높은 경지에 있 는 무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범인에게 점점 더 호기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비슷한 경지에 이른 사람과 겨룰 기회가 별로 없었으 니 이번 기회에 한번 겨루어보고 싶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렇게 내가 민이와 함께 할아버지 에게 이런저언 설명을 듣고 있는데 어째 안 보인다 싶었던-평소에는 항상 할아버지와 함께 이었으니까-배 숙부가 어디론가 갔다가 오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청명이의 검은 청명검(2)-8 "스승님!" "그래, 알아보았느냐?" 마치 기다리고 있엇다는 듯한 할아버지의 말투로 보아 배 숙부 는 할아버지의 어떤 명을 받고 어딘가 갔다 온 모양이었다. "예, 스승님 말씀대로였습니다. 지금 제 제자와 유가 흔적을 쫓 고 있습니다." "그래?좋다. 우리도 빨리 출발하자꾸나." 할아버지의 말에 배 숙부는 주변에 흩어져 잠시 휴식 겸 시신 수습을 하고 있던 낙양 지부 소속 무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이 모이는 동안 나는 배 숙부의 말에 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이아하게 여겨 뒤를 돌아보니 항상 내 뒤에 시립해 있던 유는 사라져 있고 덕이 혼자 서 있는 거였다. "어? 유는?" 그러자 덕이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모았다. "아따,주군,행님이 없어진 걸 지금 아셨다요잉? 무심하시구만 이라... 행님은 아까 저그 저분이 데리고 가시지 않았다요?" 덕이 가리킨 것은 배 숙부였다. "배 숙부가?" 배 숙부에게 물어보기 위해 시선을 돌리려는데 그럭 할아버지 가 알아챘는지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설명해 주셨다. "유와 여송이는 지금 흔적을 쫓고 있을게다. 그 애들은 이런 일에 경험이 많거든," '하기야 유는 전직이 살수였고 희여송은 전직이 용병이었으니 이런 일을 맡는 거야 십분 이해하지만... 갑자기 웬 흔적?' "할아버지,흔적이라뇨?" "가면서 말해 주마." 지금 희여송과 유만 따로 떨어져서 할아버지가 말한 그 흔적이 라는 것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그둘을 쫒아가야만 했는지 할아버지와 배 숙부는 무사들이 모이자마자 서둘러 출발했다. "우리가 그동안 발견한 시체들 주위에는 범인인 듯한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단다. 하지만 우리는 그 흔적이 범인늬 것이라 단정할 수 없었지." "예? 보통 그런 흔적이 남아 있다면 범인의 것이든 아니든 쫓아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의아하다는 내 말에 할아버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물론 진이 네 말이 옳단다. 하지만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가는 건 시간 낭비라 여긴 거지. 왜냐하면 이 산에는 그 범인 말고도 많은 무사들이 왔었지 않니? 시신 주위에 너무나 뚜렷하게 남은,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이 간 걸 들켜도 상관없다는 식의 그 흔적 을 범인이 남겼다고 하기보다는 우연히 그 시신을 발건한 다른 무사가 남긴 흔적이라 생각한 거지.우리는 범인늬 실럭이 뛰어날 것이라 추측하잖니.그런 실력자라면 충분히 자신의 흔적이 안남게 이동할 수 있을 테니까." "범인이 흔적이 남든 안 남든 상관 안 할 수도 있잖아요?" 이번에는 민이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나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 을 거다." "어째서요?" "민아, 이 산에 무사들이 왜 모인건지 잊은거야? 사람들은 이 곳에 청명검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거란다. 그러니 이 산 에서 살인 사건이 잇다면 그건 반드시 청명검과 관련있으리라 여 겨지지 않겠니? 아마 추적술에 능한 자였다면 분명히 시신 주변 의 흔적을 따라갔겠지." "그러니까 범인은 자신이 남긴 흔적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원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죠?" 내가 할아버지의 말에 보충 설명을 하자 할아버지가 시선은 그대로 가는 방향 쪽을 향한채 고개를 끄덕었다. "그래,범인은 사람을 죽이고는 그들 소지품을 뒤지지 않았어. 그것으로 보아 범인이 그 사람들을 죽인 이유는 범인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여겨지는구나." "예를 든다면 범인이 청명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 같은 거 요?" "아니면 청명검이 잇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증거라든지." 민이와 내가 번갈아가면 추측하자 할아버지가 기특하단 표정으 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래,똑똑하구나.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단다. 그러니 그러한 범인이 자신의 흔적을 남길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전에는 쫓아가 지 않은 거란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는 흔적을 쫓아가는 건가요?" [@연재] 청명이의 검은 청명검(2)-9 나도 그 점은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할아버지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긴 서두를 끄집어낸 것이겠지만. "그래그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단다. 처음에는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이유로 인하여 그냥 넘어갔었단다. 우리가 발견한 모든 시신에 흔적이 있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했었지. 그 시신들을 우리만 발견했다고는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보다 앞서 파견되었던 낙양지부소속 수색 팀 알지? 그들이 야영하다 변을 당한 장소에는 흔적이 모조리 지워져 있더구나. 이상한 일이 아니더냐? 한 명씩 죽었을 때는 흔적을 신경 쓰지 않다가 한꺼번에 여러 명을 죽이니까 그제야 신경 쓴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더 있단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은밀해지자 민이와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면서 할아버지의 말에 더욱더 집중했다. "우리가 첨에 출발할 때 낙양지부장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산에 오른 무사들은 적게 잡아도 수백 명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우리가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동안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비록 산이긴 하지만 그렇게 큰 산도 아닌데 우연이라고 해도 한 명도 만나지 못할 수가 있을까? 게다가 이렇게 시신은 만나는데도 싸움한 흔적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산에 오른 이들이 모조리 전멸했다 하더라도 만난 시신들은 너무나 적은 숫자야. 다 합해봐야 한꺼번에 변을 당한 낙양지부 무사들까지 더해도 채 20명이 되지 못하는 숫자다. 그리고 한가지 더, 나는 솔직히 낙양지부 무사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하기는 했어도 처음 출발한 인원중 일부분만 있는 걸 보고 나머지 무사들 또한 그들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을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 나머지 수색 팀들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단다. 흔적 또한 없었지. 이상하지 않니? 분명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게 당연할 텐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흔적이 조금도 없었단다.그 다음 발견된 시신 근처에는 또다시 뚜렷한 흔적이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혹시나 내가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단다. 그리고 어쩌면 이 흔적들은 누국ㄴ가가 무사들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놓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지." 할아버지의 긴 설명을 들은 민이와 나는 할아버지의 결론에 동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지금 이렇게 흔적을 따라가는 것이군요." "그래, 혹시 내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썬 다른 좋은 방법도 없으니까. 산 주변을 그냥 훑어보는 것보다는 더 낫지 않겠니?" "것도 그렇네요"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희여송과 유가 남긴 표식을 따라-물론 그건 배 숙부가 찾아서 따라간 거고 나는 그 뒤를 쫓은 것뿐이지만- 빠르게 달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둘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둘은 흔적을 잃어버렸는지 바닥에 거의 밀착하다시피 앉아서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다가 우리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것이냐?" 배 숙부가 묻자 희여송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던 흔적이 여기에서 갑자기 지워져있습니다. 다시 찾으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배 숙부가 할아버지를 돌아보며 지시를 기다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배 숙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간단하게 지시를 내렸다. "그럼, 흔적을 찾을 때까지 우리는 휴식을 취하기로 하지." '진짜 간단하군' 희여송과 유가 끊어진 흔적을 다시 별건한 것은 그로부터 대충 30분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흔적은 우리가 있던 곳으로부터 양 500m쯤 떨어진 곳에서 다시 이어졌고 방향이 완전 엉뚱한 곳으로 이어져 있어 찾는데 좀 애를 먹은 것 같았다. 그 뒤로 우리는 또 흔적을 따라 이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흔적은 끊어져 그걸 유와 희여송이 다시 찾아냈고... 그런 일은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다. @연재 청명이의 검은 청명검(2)-10 흔적이 진행되는 방향은 일정하지 않았다. 산을 내려가는가 싶으면 다시 올라왔고, 남으로 간다 싶으면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다시 동쪽으로 꺾어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마치 누가 정신없이 산을 헤매는 것만 같이 보여 이 흔적을 낸 사람이 도대체 뭔 생각으로 이리 헤매고 다녔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리고 가다가 흔적이 사라지는데 그 흔적이 끊어진 거리가 맨 처음 우리가 흔적을 잃어버렸을 때처럼 지워진 장소의 넓이가 거의 엇비슷하다는 거였다. 마치 누가 일부러 일정 공간만을 꼼꼼히 지운 것처럼 말이다. "이상하구나, 정말 이상해. 마치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함정에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야." 이게 과연 무슨 일을 나타내는 건지 궁리를 해봐도 결국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한 할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정말 심상치 않았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와 벌써 이틀째 밤을 지내고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말대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던 것도 그랬다. 이 산에 올라온 사람들은 정말 어디로 모두 사라진 것일까? 서산에 걸린 해가 완전히 뒤로 넘어가고 사방이 깜깜해지자 낙양 지부 소속 무사 하나가 검은 하늘에다 대고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밤마다 양쪽이 무사하다면 이러한 신호를 주고받기로 했던 것이다. 어느 쪽에서 먼저 쏘아 올리든 그 뒤로 곧바로 다른 쪽도 이에 응답하듯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되어 있었다. 오늘 밤은 우리 쪽이 먼저 쏘아 올린 거지만. 곧 저쪽에서도 신호탄이 하나 하늘로 올라왔다. 생각 외로 무척 가까운 거리였다. 내가 경공을 써서 달린다면 한 15분이면 도착할 거리쯤? 양쪽 다 산을 수색하다가 우연치 않게 거리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우리는 양쪽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잠들 준비를 했다. 오늘 하루 종일 청명단원에게 시달렸을 낙양 지부장에게 심심한 애도의 마음을 보내며. 그러나 우리 일행 모두는 자리에 누운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하늘에 다급하게 두 번 연달아 쏘아 올려진 신호탄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도움을 요청하는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청룡단원을 위시한 다른 팀이 있는 쪽에서 들려왔다. 삐이익∼ 밤이라서 그런지 되게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걸 듣자마자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야영 준비한 것들을 내팽개치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경공을 전개해서 달렸다(아마 뒷정 리는 낙양 지부 소속 무사들이 해줄 것이다). 열심히 달리는 동안 피리 소리는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아마 어두운 산속을 달려올 우리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듯 했다. 뭐, 그쪽에는 청룡단원도 5명이나 있고 낙양 지부장도 있으니까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우리가 다른 쪽 수색 팀이 있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 본 것은 역시나 범인인 듯한 웬 남자를 청룡단원 5명이 맞서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뒤쪽으로 낙양 지부 무사들과 지부장은 그들의 싸움을 열심히 관전(?)하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우리를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낙양 지부장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자가 바로 그 범인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희들을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한데 남자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듯합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상해 보였다. 남자는 꽤 돈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비단으로 된 장포까지 걸치고 있었는데, 며칠 동안 산속을 헤매고 다녔는지 그 장포가 여기저기 찢어진 것은 물론 먼지투성이였다. 게다가 머리는 마치 처녀귀신처럼 풀어헤쳐 바람에 나풀거렸고, 그가 신고 있는 신은 가죽신인 것 같은데 무지 지져분해져서 확신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길 잃고 헤매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칼 들고 설치는 그의 눈이었다. 그의 눈은 완전 동공이 돌아가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흰자위만 번뜩이는데, 그 눈에서 강력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모습은 완전 공포 영화를 보는 듯했다. 게다가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은 핼쑥하고 창백한 게 정말 귀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와아∼ 누나, 저 남자 눈 좀 봐. 완전 맛이 갔어." "그러게. 정신이 아예 나간 것 같은데?" 그는 한이 서리서리 맺힌 사람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청룡단원들을 향해 죽일 듯이 덤벼들고 있었다. 그의 내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들고 있는 검은 검기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맺힌 검기가 뻗어 나가 청룡단원들은 감히 그와 검을 맞댈 생각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면서 행동을 제지하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오옷, 내력은 많은가 보네? 저렇게 검기를 마구마구 내뿜는 걸 보면." 감탄인지 놀라움인지 모를-아마도 둘이 섞인 거겠지만-민이의 말을 들으며 그 남자를 구경(?)하고 있던 나는 그 남자가 들고 있던 검에서 묘한 마나가 뻗어 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의 검은 약간 푸른빛이 도는 흰색이었는데, 보통 장검을 이루는 재료인 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철이라기보다는 꼭 은 같다고나 할까? '아냐, 미스릴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곳에 미스릴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미스릴이라면 푸른빛을 띠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럼… 저게 뭐다냐?' 하지만 그러한 생각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왠지 그 검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이 되게 기분 나빴기 때문에 검날의 재료가 뭐든 상관없이 저 검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검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은 뭐랄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이용해서 나쁜 짓을 시키며 즐거워하는 사악한 변태 놈을 보는 것만 같다고나 할까? 그 검은 자신을 쥐고 있는 남자가 살기를 폴폴 풍기면서 자신을 휘두르는 것이 무지 즐거운 듯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 남자를 멍청이라고 비웃고 있거나. '그러고 보니 저 남자… 검에 의해 조종되는 거 같은데? 에, 그럴 수도 있나? 검이 의지를 가지고 사람을 조종하는 일이 있을 리가… 아냐아냐, 있구나. 에고 소드. 그럼 저 검이 에고 소드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에고 소드는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검을 말한다. 보통마법사들이 검에 의지를 부여해서 만들어낸다고 알고 있는데, 무생물에게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터라 내가 있던 세계에서도 존재하고 있던 에고 소드는 드래곤이나 마족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끔가다 천부적인 마법적 재능을 타고나 인간으로서는 이루기 힘들다는 8클래스나 9클래스에 이른 마법사들이 만든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 에고 소드는 보통 만든 이에 따라 명검-의지가 사악하지 않은-일 수도 있고 마검-의지가 사악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에고 소드는 검을 쥔 자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한 것부터 대화는 못하더라도 의지는 전달할 수 있거나 아예 의지조차 전달 못 할 수도 있는 등 기능(?)이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보통 이런 에고 소드일 경우 대부분 자존심이 드세 가지고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은 절대 주인으로 안 모시려고 한다(뭐,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아무나 주인으로 섬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건 극히 드문 일이니 그냥 없는 걸로 치고). 에고 소드의 의지가 사악하지 않은 경우에는 주인으로 인정 못하겠으면 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심하면 간단하게 죽이거나…-마검일 경우에는 자기보다 능력이 낮은 자는 무조건 지 밥으로 여긴다. 그래서 몸을 점령하여 자신의 인형으로 만든다거나, 아니면 기력을 다 빨아먹는다거나, 심하면 영혼을 빨아먹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이 마검이란 놈은 한번 주인으로 인정했으면 끝까지 충성해야 하는 명검과는 달리 어떻게 해서든 주인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집요하게 노린다. 그래서 마검을 가진 자들은 틈을 파고드는 마검에게 조금씩 조금씩 이성을 제압당해 결국에는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된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다. 뭐, 이것들은 내가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단지 책이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솔직히 이런 에고 소드에 비하면 차라리 마법검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다. 그 마법검들은 의지는 없고 단지 마법이 결려 있어 시전자의 마나를 이용하여 마법을 행하는 건데, 마나를 빼앗길지 언정 의지를 빼앗길 경우는 없으니 속 편하지 않을까 싶다. 아, 에고 소드들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므로 검 스스로가 마나를 지니고 있도록 제작되어 있다. 그래서 좋은 에고 소드들은 급하면 주인의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마나를 사용하여 마법을 사용하기도 한단다. 마검은 절대로 그런 일은 안 하지만서두. '그럼… 저 검이 마검? 헤에, 마검은 처음 보는 건데 이곳에 마검이 있을 줄이야…….' 내가 스스로의 결론에 놀라워하는데 그 옆에서 덩달아 놀람에 가득 찬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설마… 저건 청명검?" '에?' 중얼거림의 근원지는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놀라움이 가득 담겨 휘둥그레진 눈으로 맛이 간 남자가 휘두르는 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 남자의 왼손에 들린 은빛으로 빛나는 검집과 오른손에 들린 검을 번갈아 바라보는 거였지만. 할아버지의 시선에 따라 그 남자의 왼쪽 손에 들린 검집을 바라보니 은색 바탕의 중앙에는 파란 물결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헤에∼ 예 총관에 들은 말대로잖아? 그럼 저게 진짜 청명검? 헤에∼ 예쁘기는 진짜 예쁘다. 저 검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진짜 기분 나쁘지만.' 그런데 내가 이렇게 놀라는 동안에도 청룡단원들은 그 남자를 제압하지 못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남자를 막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제압할 실력까지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안 되겠군. 저 싸가지없는 청룡단원들이 못 막으면 할아버지께서 나서실 텐데, 그럼 저 남자는 분명 끝장이겠지? 저 청룡단원들은 더 당해도 괜찮지만 저 남자는 청명검에 홀려(?)서 그런 거니 도와줘야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슬며시 할아버지 옆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속삭였다. "할아버지, 저 검에서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와요." "음?" 의아하다는 표정이 아니라 놀랍다는 표정인 걸 보니 할아버지도 눈치 채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말 나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버렸다. "저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저 남자를 감싸고 있는데요? 혹시 저 검이 저 남자를 조종하는 게 아닐까요?" "호오, 그렇단 말이냐? 저 남자가 이지를 상실한 것이 저 검 때문이란 말이지?" '아, 검에서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 아니라 저 남자가 이지를 상실한 채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거야?' 하긴, 저 남자의 눈을 보면 누구라도 지금 이성을 잃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저 남자가 이성을 잃은 건지 몰랐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쓰지 않았나 보다. 저 남자가 정말 악인인지 아닌지 모르는데 손을 쓴다는 건 할아버지로서도 주저되는 일일 테지. 내 말을 듣고도 한동안 사태를 주시하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번개같이 움직여 그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청룡단원들 틈을 교묘하게 뚫고 그 남자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리곤 검을 들고 있던 오른팔을 혈을 짚어 손에서 힘을 빼게 하는 동시에 오른 손목을 수도로 내려쳐 검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청룡단원들은 할아버지의 개입이 달갑지 않은 표정들이었으나 우리가 여기 도착하고 얼마간 기다려 주는 동안 그 남자를 제압하기는커녕 막기에 급급해하고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못한 채 각자 자신들의 무기를 집어넣고 그 남자와 할아버지를 주시했다. 그 남자는 손에서 칼이 떨어지자 흰자위만 치켜뜬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는지 앞으로 꼬꾸라졌다. 아마 할아버지가 재빨리 그의 몸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의 얼굴은 땅과 정면으로 부딪쳤을 것이다. 그와 함께 그 검에서 나오는 기분 나쁜 마나는 스르르 움직여서 다시 검으로 돌아갔고 그 검은 예쁘기만 한 그냥 보통 검처럼 되어버렸다. "이게 뭐야? 생각보다 시시한 결말이잖아? 검을 놓으면 그냥 쓰러질 놈이었다니……." 항상 튀는 상린공자 목우령이 그를 상대하느라 많이 흐트러진 옷자락을 추스르며 어이없다는 듯이 투덜댔다. 그런 그에게 이 정도에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뭘 바라는 거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싱겁게 끝났지? 나는 뭔 일이 더 일어날 줄 알았어." 민이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도 모든 일이 무사히 해결되었으니 다행이지." 검유 엽곡이 교과서 같은 말을 하면서 땅에 떨어진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가 말리려는 듯 움찔거렸지만, 청룡단원들은 보통 무사들이 아니었으므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냥 남자를 데리고 그들 틈을 빠져나와 낙양 지부 무사들에게 넘겼다. "흐음, 이게 그 유명한 청명검인가? 소문대로 정말 신비한 검날이로군. 이런 금속은 처음 보는 것 같아."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펴보던 그가 검날 표면에 손가락을 대보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른 청룡단원들 또한 그 검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그 주위에 몰려들었다. 나도 그들 곁에 가서 그 검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관계로 검날 대신 할아버지가 들고 온 그 남자의 왼손에 쥐어져 있던 검집을 살펴보았다. 검집은 이미 그 남자의 손에서 떠나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내가 살펴보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과연 검집의 표면은 백금으로 도금되어 있어서 하얗게 반짝거렸고 그 가운데에는 푸른 물결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에는 청옥, 그러니까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와아, 예쁘네요." 내 옆에 와서 같이 구경하고 있던 민이가 감탄사를 흘리자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정말 정교한 세공이구나. 이 파란 물결은 아마도 청옥 가루로 만든 것 같다." "헤에… 이게 진짜 청명검일까요?" 내 질문에 할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아까 청명검에서 느껴졌던 그 기분 나쁜 마나의 낌새가 다시 느껴진다 싶어 내가 시선을 청룡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리는 찰나…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살기가 뻗어 나오며 피가 솟구쳤다. "크아악∼!!" "맙소사! 상 형, 괜찮아요?" "이럴 수가!!" "엽 형, 정신 차리세요!!" 놀라움에 가득 찬 외침과 함께 청룡단원들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보이는 건 크게 베였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뚝을 지혈하고 있는 상관초와 눈이 뒤집어져서 살기를 뿌리고 있는 엽곡의 모습이었다. "이런, 검에게 당해 버렸네?" 엽곡의 옆에 아무런 긴장 없이 있다가 그가 불시에 휘두른 검에 맞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저렇게 살기 뿌리는 놈이 봐줄 리는 없었을 테고, 상관초가 그 와중에 재빠르게 행 동을 취하여 급소는 피한 모양이었다. "호오, 역시 이름만 높은 건 아닌 모양이지?" 다친 상관초를 얼른 뒤로 보내고 나머지 셋의 청룡단원이 무기를 뽑아 들었지만, 자신들의 동료였던 그에게 검을 휘두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엽곡이 뿜어내는 살기는 전에 검을 들고 난리쳤던 그 남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아마도 지배당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실력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머뭇대면서 다시 할아버지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동안 맛이 간 엽곡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해왔다. 그 첫 타자는 검옥 사예란. 가장 만만해 보였는지 다짜고짜로 검을 들고 달려든 것이었다. 양 옆에 있던 목우령과 혁진아가 그녀들 돕기 위해 달려갔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사예란과 맛이 간 엽곡이 부딪쳤고, 그 단 한 합에 사예란은 입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날려갔다. "컥∼!" "와∼ 장난이 아니네? 아까 저 남자가 난리칠 때완 비교도 안 되잖아?" 그 모습에 목우령과 혁진아는 재빨리 자신의 내력을 끌어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고, 뒤로 날려간 사예란에게는 막 치료를 끝낸 상관초가 달려갔다. "안 되겠군." 결국 할아버지는 자신이 빨리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또다시 그쪽으로 달려가셨다. 목우령과 혁진아는 할아버지가 달려오는 걸 보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맛이 간 엽곡은 그것을 기회라 여겼는지 그 둘 틈을 빠져나와 오히려 할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달려드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잠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일 뿐 곧 침착하게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청명검을 바라보며 양팔을 수평으로 내뻗었다. 그러한 할아버지의 손에서는 부드러운 마나가 뻗어 나와 맛이 간 엽곡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마나의 속도는 빠르게 다가오는 청명검의 속도에 못 미처 채 얼마 나오기도 전에 청명검이 할아버지의 가슴을 찌를 것마냥 다가드는 거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할아버지의 가슴이 검에 꿰뚫릴 것만 같아 급한 마음에 내가 뛰쳐나가려는데 그러한 나를 막는 손길이 있었다. "배 숙부?" 의아하게 바라보는 나에게 배 숙부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표정으로 할아버지 쪽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의 실력을 앝보지 마라. 저 정도의 검에 당하실 분이 아니다." '그렇게 가만있다가 할아버지가 다치면 어쩌려고?' 라고 속으로 꿍시렁거리면서 시선을 돌리니 이게 웬걸? 청명검의 검끝이 할아버지의 심장으로부터 약 몇 센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딱 멈춰 있는게 아닌가? 심장 바로 앞에 검을 두고 있는 할아버지는 태연한 표정인 데 비해 오히려 맛이 간 엽곡의 얼굴은 당황함과 경악으로 물들은 채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손에서 뻗어 나왔던 그 느려 터진 부드러운 마나가 할아버지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던 검을 완전히 감싼 채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는 거였다. "헤에……." 저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뛰어 제 임무를 다하는 강철 같은 할아버지의 심장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감탄사를 흘려냈다. 만약 할아버지의 내력, 즉 그 부드러운 마나의 힘이 조금만 모자랐더라면 저 검은 그대로 할아버지의 심장을 뚫어버렸을 터였다.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어서 저럴까? 과신하고 있는 거라면 그 자리에서 죽는데 말야. 흐음, 역시 자신의 능력은 물론 상대편의 능력까지 다 꿰뚫고 있어야 저럴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붙잡혀 꼼짝하지 못하게 된 맛이 간 엽곡이 안 되겠던지 발로 할아버지를 걷어차려고 했다. 하지만 그 발은 채 올라오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발에 의해 발등이 찍혀 다시 땅으로 내려갔고, 그 움직임과 동시에 할아버지의 몸이 앞으로 스슥 전진한다 싶더니 엽곡의 검을 들고 있던 손목 아래를 왼손으로, 그리고 검을 쥐고 있는 손등을 오른손으로 한 번에 가격을 하셨다. 빠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엽곡의 손목은 멋들어지게 부러져 버렸고 검은 엽곡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엽곡의 눈동자가 제대로 돌아오더니 그의 눈에서 힘이 빠지며 몸 또한 앞으로 스르르 넘어졌다. 청명검에게 정신을 제압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저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축 늘어지는 엽곡의 몸을 한 팔로 부축하는 동시에 땅으로 덜어지는 검을 발로 살짝 차올려 손으로 잡아챘다. 그러자 이 청명검 녀석이 옳다구나 하면서 할아버지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사악한 마나를 내뻗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는 임자 잘못 만난 듯 할아버지의 내력이 녀석의 뻗어 올라오는 마나를 막아서며 할아버지의 몸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하는 거였다. 한동안 할아버지의 손과 청명검 사이에서 할아버지의 내력과 청명검의 마나의 밀리고 밀리는 접전이 펼쳐지더니 결국 할아버지가 손에 내력을 좀 더 보태주자 결국 청명검의 마나는 다시 청명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굴복한 게 아닌 듯 할아버지가 검에게서 내력을 조금만 거둘 낌새가 보이면 바로 청명검에서 마나가 흘러나와 할아버지를 호시탐탐 노리려고 했다. "허어, 참으로 위험한 검이로구나.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싶을 만큼 보검이로다." 그렇게 말은 했어도 할아버지는 계속 그 검을 잡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까딱 잘못 방심했다간 엽곡처럼 맛이 갈 텐데, 그걸 알면서 누가 계속 갖고 있겠는가? 뭐, 자신의 목숨이 간당간당할 것 같은 위험이 닥찬다면 그 검을 잡아 휘두를지 몰라도. 그리하여 그 검은 검집에 넣어져-검집에 들어가자 청명검은 더 이상 그 요상한 마나가 뻗어 나오지 않았다. 아마 검집이 그 요상한 마나를 막아주는 듯했다-한쪽 구석에 조심스레 놓아졌지만, 어느 누구도 그 검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일행들이 애써 그 검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하는 틈을 타 나는 슬금슬금 그 검 가까이 가서 재빨리 집어 들었다. "주군!!" 뒤늦게 그걸 본 유가 놀라서 외쳤지만 나는 그에게 생긋 웃어주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긴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할아버지도 여차 하면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검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집에서 해방되자마자 곧 나를 지배하기 위하여 나에게 그 요상한 마나를 뻗어왔다. 그걸 느낀 나는 속으로 인자하게(?) 웃어주며 내 마나를 뻗어 검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금 더 힘을 주어 내 마나로 검 안을 구석구석 훑어주었다. 내 마나가 첨명검의 마나를 뚫으면서 검의 구석구석을 헤집자 검이 두려운지 부르르 떨었다. 덕분에 내 마나가 청명검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청명검의 마나는 자신의 검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 손에 마나가 많이 있지 않게 했음에도 나를 얕보고 마나를 뻗는 짓을 하지 않았다. "오호라……." 청명검의 고분고분함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항상 소검만 사용하던 나에게 장검인 청명검은 약간 맞지 않는 감이 있긴 했지만, 검이 허공에서 휘둘러지며 내 손에 전달 되는 감각이 내 소검에 비해 훨씬 좋았다. "헤에… 이게 바로 명검이라는 건가?" 내가 가지고 있는 소검은 명검은커녕 좋은 검이라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검이다. 이건 예전에 엄마와 아빠가 나와 민이에게 15세 생일 선물이라고 준 것으로 대장간에서 흔히 파는 보통 검들 중 하나였을 분이다. 민이도 아직 그 검을 가지고 있었다. 뭐, 우리가 좋은 검을 가질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이걸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은씨 세가에 들어왔을 때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검을 주려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검이 크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잘 관리한데다 사용한 일도 거의 없어 이 빠진 데도 없었다. 거기다 생을 선물로 받은 것이라 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나나 민이는 소위 좋은 검, 명검이라는 걸 쥐어본 적이 없었다. 아, 물론 나는 전 세계에 있을 때 할아버지가 주신 검이 있었지만 솔직히 그때는 내 검술 경지가 현저히 낮아 그냥 휘두르는 수준이었기에 이런 감각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검을 들고 논(?) 지 꽤 시간이 자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저… 주군? 아무렇지도 않다요?" 아무래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는지 덕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뭐가?" "그 머시냐… 거시기… 그 검을 잡은 사람들은… 에, 그렁께… 쬐까… 좀… 이상해지지 않는감요? 그렁께, 주군도… 에, 거시기… 그렇게 되지 않을까……." "별거없는데? 아, 말 나온 김에 잠깐만 이리 와봐." "예? 왜, 왜 그런다요?" 내가 손짓으로 부르자 덕이가 얼어버렸다. "아, 글쎄… 이리 와보라니까." 내가 재차 부르자 덕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춤주춤 내게 다가왔다. "고개 좀 숙여봐." "에?" 긴장감과 어리둥절함이 뒤섞인 덕이의 표정은 정말 웃겼다. "푸훗… 별거 아니니까 숙여봐." 키득키득 웃으면서 재차 손짓하자 덕이가 약간은 안심이 되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의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냈다. "앗, 따거!!" "호호호, 미안." 그런 일을 멍하니 보고 있던 민이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물어왔다. "누나,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뭐긴, 당연한 걸 가지구. 내가 예전에 들었는데 보검은 검날 위에 머리카락을 올려놓고 입김을 불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싹둑 잘린대. 내가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한번 해 보려구." 내 말에 저도 호기심이 당기는지 슬금슬금 다가오며 민이가 괜히 툴툴거렸다. "그럴 거면 누나 머리카락도 있는데 왜 남의 머리카락을 뽑는 거야?" "시끄러워. 그렇게 툴툴거릴 거면 절루 가버리든가." 내가 살짝 눈을 흘기자 민이가 은근슬쩍 내 시선을 피하면서도 딴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민이뿐만이 아니라 유랑 덕이도 궁금했는지 잔뜩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날 재 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사람들도 힐끔힐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 그럼 해본다." 머리카락이 떨어질 염려가 있기에 머리카락 한쪽 끝을 잡고 검날 위에 살짝 올려놓은 다음 숨을 들이쉬었다. "후!" 그러자 정말 검날 위에 올려져 있던 머리카락이 두 동강이 나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우와, 우와, 우와∼ 그 말이 사실이었네? 그럼 이거 진짜 보검이란 말야? 헤에……." 내가 호들갑을 떨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부러움과 탐욕이 어렸다. 하지만 감히 나에게 검을 보여달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나와 할아버지 외의 다른 사람이 검을 쥐면 맛이 가버리니 욕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달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 거였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은 청룡단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다른 무사들보다 더욱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주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나에게 다가왔다. "진아, 괜찮으냐?" "에? 뭐가요?" "그 검을 쥐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에? 아하하하… 괜찮은데요?" "허어… 그거참. 처음에 검을 쥘 때 아무 일도 안 생기더냐?" "예? 별일없는데요? 도대체 이런 검 가지고 왜 그러는 건지… 그런 거 보면 청룡단도 별거 아닌가 봐요. 이런 검 하나 잡지 못해서 그 난리 치는 거 보면." '홋홋홋, 예전의 복수다, 이것들아." 저쪽에 있던 청룡단원들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감히 나에게 와서 이 검을 잡아보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일행 중 한 명이 눈앞에서 그렇게 되었는데 누가 도전하겠는가? 단지 저 멀리서 이만 빠드득 갈 뿐이었다. "허허허, 그랬느냐?" 물론 내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는 게 눈에 빤히 보였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니 그걸로 어떻게 검을 컨트롤했을 거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나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헤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근처에 적당한 크기의 바위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위 하나만 딸랑 있는 건 아니고 산사태로 인함인지 붉은 속살이 드러나 있는 언덕이었는데 그 속살이 바위였던 것이다. 높이는 나보다도 작은 거 보니 약 1m쯤? "좋아." 이왕 명검을 손에 쥐었으니 시범을 한번 해봐야 할 것 아닌가? 나는 호흡을 고른 뒤 자세를 잡고 검을 내질렀다. "은하성붕!!" 그냥 검의 강도만 시험해 보고자 함이었으니 내력은 아주 조금만 넣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바위만 조금 뚫고 말리라 여겼던 위력이 바위를 뚫는 것을 지나 아예 그 언덕을 산산조각 내었던 것이다. 비록 높이가 1m도 안 되는 자그마한 언덕이라고 하나, 예상치 못한 효과에 내가 놀라 버렸다. "허거걱!!" 그리고 유와 덕이, 민이가 놀라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주군!!" "아따, 뭔 일이다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나는 뭘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벙긋 대고 있었는데, 상황을 둘러본 세 사람은 검을 한번 시험해 보느라 힘을 쓴 걸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주군, 살살 하셔야지요." "아따, 주군… 팔팔하시네요잉∼" "누나, 이 산 없앨 일 있어?" '이것들이……!' 괜한 오해를 받게 된 난 열받아서 그 검을 민이에게로 넘겼다. "야, 그럼 니가 해봐라. 어떻게 하나." 내가 민이에게 넘겨주자 유와 덕이는 화들짝 놀랐지만 그 검은 내 손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이의 손 안에서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얼결에 검을 넘겨받은 민이 는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내가 째려보자 움찔거리며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거리다 적당한 나무를 발견하고는 그 나무를 겨냥했다. 이곳은 내가 전에 있던 세계처럼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굵은 나무라고 해봤자 둘레가 내 양 손가락을 최대한 넓혀 둥그렇게 만 것보다 조금 더 굵은 정도랄까? 가는 것은 내 팔목만한 것도 있었다. 그런 가느다란 나무들이 키만 멀대같이 큰 상태였다. 그리고 민이가 선택한 나무는 그들 중에서도 긁은 축에 속한 나무였다. "그럼 어디 한번… 빙천열지!" 가볍게 자세를 취하고 휘둘렀음이 분명해 보이건만 그 검은 바로 앞에 있는 나무를 세로로 쪼개놓는 것도 모자라 그 뒤에 있는 나무도 쪼개놓고, 그 뒤에 있는 흙으로 된 듯한 언덕에도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위력을 선보였다. "허거걱!!" 그 위력에 놀란 민이가 입을 쫘악 벌리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알았냐, 멍청아? 그 검은 예리한 것은 둘째 치고 아마도 검에 주입된 내력을 증폭시켜 줄 수 있는 모양이야. 그러니 보검이란 소리를 듣는 거겠지만." "대단하네… 정말 대단한 검이야." "그치?" 감탄 어린 어조로 검을 살펴보던 민이는 곧 나에게 넘겼다. 아마 맨 처음 검을 휘어잡은 게 나였기에 날 주인으로 은연중에 인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그 검을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응? 왜 안 받아?" "그거 너 가져." "에? 정말?" 평소 이런 것이 손아귀에 들어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 나였기에 이런 내가 정말 의외였는지 민이가 눈을 뚱그렇게 떴다. "아, 뭘 그렇게 봐? 확 뺏아버린다?" 그러자 흠칫한 민이가 얼른 눈을 제대로 돌려놨다. "그냥 너 쓰라구. 나는 장검이 손에 안 익으니까 별로 쓸모가 없잖아. 게다가……." 그리고 녀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청명검은 청명이가 가져야지." 솔직히 그 검이 탐이 나기는 했지만 이 세상에 와서 나는 홍옥 피리라는 보물을 얻었지만 민이는 그에 비하는 보물을 한 가지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집에 가면 일반 패 물이야 얼마든지 얻을 수 있겠지만, 이 검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엄청난 보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민이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할아버지와 아빠가 있는 세계로 돌아가면 할아버지가 주신 검도 있을 테고, 정 이 검이 탐나면 할아버지께 이 검보다 훨씬 더 좋은 걸로 만들어달라고 해도 될 터였다. 민이의 눈이 다시 둥그레졌지만 곧 그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후후후, 고마워, 누나." 그 모습에 왠지 얼굴이 가려워진 나는 괜히 시선을 돌리며 투덜거렸다. "야, 너 웃는 게 왜 그 모양이냐? 애늙은이 같게시리……." 그러자 민이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누나가 철이 없는 거야." 그 말을 한 직후 민이는 내가 집어던진 청명검의 검집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저게 꼭 매를 벌어요." 민이가 청명검을 가진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이후에 민이가 청명검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검을 노리는 녀석들이 꼬일까 봐 걱정이 좀 되기는 했지만, 그거야 할아버지가 알아서 잘 막아주실 거였다. '하긴 뭐… 그래 봤자 민이가 귀찮아지지 내가 귀찮아지는 건 아니니까. 홋홋홋." 그 뒤 할아버지와 낙양 지부장은 우리가 보아왔던 무사들의 시치는 이 검을 가진 자의 짓이라 잠정 결론을 내렸다. 덕분에 범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낙양 지부장이 산 아래로 내려가 지부 소속 무사들을 왕창 이끌고 와서 산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놀라운 건 그렇게 많은 수의 무사들이 산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산에서는 우리 외에 살아 있는 무사는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고, 죽은 시신 또한 50구가 겨우 넘는 숫자만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많은 무사들은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인지……. 그리고 청명검에 조종을 당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던 사람은 낙양 지부로 운송된 후에 하루쯤 지나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원래 내공도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이 청명검에 이성을 제압당해 있는 동안 너무나 많은 내력을 무리하게 써버렸기에 오랜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청룡단원 엽곡은 다행히도 청명검에 조종당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하루쯤 자고 나자 다시 원상 회복되었다. 그들은 청명검에 조종되는 동안의 기억을 고스란히 할 수 있었는데, 엽곡 전에 청명검을 휘두르던 남자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한 이들은 청명검에게 조종당하여 정처없이 헤매고 다니며 살아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죽인 자들은 도합20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청명검을 발견했을 때에도 같이 발견했던 사람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웠다고 했었다. 그의 말에 그 산에서 누군가가 무슨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 사실로 다가왔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너무 단편적이다 보니 아무도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낙양 지부장이 앞으로 그 일을 자세히 조사한다고 했으니 그가 뭔가를 발견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청명검 같은 검이 또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해준 희여송도 말로만 들어봤고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지만 명검 중에는 주인이 죽었을 때 스스로 진동하면서 슬픔을 나타낸 검도 있었고, 스스로를 파괴해 같이 수명을 마친 검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대화를 하거나 자신의 의지를 표시하는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검은 없는 것 같고 단지 청명검 정도가 제일 뛰어난 성능(?)인 듯했다. '하기야 마법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건가?" 33화 끝까지 낙양에서 낙양 지부장에게 붙잡힌(?) 덕에 5일 가까이 시일을 허비한 우리는 다시 서둘러 소림으로 향했다. 소림사가 무림정파의 9대 문파 중 하나인데다가 가장 큰 절이라고 하기에 어느 정도 클 것은 예상했었지만, 이건 내 상상 이상이었다.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여긴 아마도 무림맹과 비교하여 크면 컸지 절대로 작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싶었다. 하긴,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거의 만 명에 가깝다고 하니 그들을 다 수용하려면 은씨 세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커야 할 것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목탁 소리와 함께 한쪽에서는 수력을 하고 있는 것인지 힘찬 기합 소리도 들려왔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곧 전갈을 올리겠습니다." 정각 대사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한 무승이 우리를 안내해 준 곳은 '지객당'이라 팻말이 쓰여 있는 곳으로 소림사에서 방문객을 머물게 하는 곳이라 했다. 우리가 정각 대사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소림사에 오기는 했지만, 사실 스님이란 속세를 버리고 불교에 투신한 것이기에 속세의 생일이란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울 할아버지처럼 생일을 챙겨주기에 장로라는 지위에 있어도 잔치를 벌이지 않고 단지 찾아온 친인들만 맞이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냥 일반 사람이었다면 방장까지 만날 일은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8대 세가 중 하나인 은씨 세가의 가주이다 보니 방장에게까지 인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할아버지가 이곳에 온 다른 중요한 목적을 생각해 본다면 가주가 아니었어도 방장을 만나야 하긴 했을 것이다. 마침 점심 시간이라 그곳에서 마련해 준 푸른 초원뿐인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한 무승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미타불,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러 시주님들." 그는 몇 년 전에 민이와 내가 부모님과 호광성으로 나들이를 갔었을 때 정각 대사와 같이 있었던 무승들 중 한 사람이었다. 법명이 아마도… 지법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각 대사 제자의 제자였는데, 그때 당시 그와 그의 사형제들이 민이와 나는 호광성 시내를 구경시켜 준다고 데리고 다녔었다. "그래, 자네가 정각 대사의 사손이었던가?" 할아버지의 질문에 그가 다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지법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와의 인사가 끝나자 민이가 먼저 반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민이 또한 그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와아∼ 정말 오랜만에 만났네요. 지법 스님!!" "반가워요." "아미타불, 그렇군요. 두 분 모두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시군요. 아, 방장 스님과 사조님께서 여러분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인사가 모두 끝나서야 그는 자신이 온 용건을 말했고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라 지체없이 그를 따라 그곳을 나섰다. 여러 건물들을 지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방장실이었다. 여덟 개의 건물에 둘러싸여 삼엄한 경비를 받는, 소림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기거하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민이와 내가 살고 있는 건물보다 작고 검소했다. 역시 속세를 떠난 스님이 살고 있는 곳답다고나 할까? 우리가 안에 들어가자 두 노스님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다가 우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명은 익히 잘 알고 있던 정각 대사였고 다른 한 명은 화산파에서 화산 장문인 생일 때 본 적이 있었던 소림 방장이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두 노스님이 동시에 한 손을 가슴 앞으로 세우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른 절에 가면 양손으로 합장하면서 인사를 하는데 유독 소림에서만 한 손을 세워서 인사를 한다. 이건 예전에 달마의 제자였던 혜가가 팔 한쪽이 없어서 항상 한 손으로 인사를 했던 것이 유례가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걸 보면 소림사의 스님인지 다른 절의 스님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할아버지 또한 두 노스님의 인사에 답하느라 포권을 취해 보였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민이와 나도 덩달이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안면이 있는 정각 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아는 체를 해왔다. "오오∼ 이게 누구이신가? 예전의 그 어린 시주들이 아니신가? 그래, 부모님들께선 안녕하신지?" "예, 염려해 주신 덕분에 부모님께선 모두 건강하십니다. 정각 대사님께 대신 축하 인사를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민이가 나서서 정각 대사의 말에 답했다. "아미타불, 고맙다고 전해드리게나. 그리고 은씨 세가의 양자가 되신 것, 다시 한 번 축하드린다 전해주게. 내 직접 만나서 축하해야겠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이해해 달 라고도 전해주시게."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모두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다. 뭐, 대부분 할아버지와 방장스님, 그리고 정각 대사, 이렇게 셋만 이야기하고 민이와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는데, 우리 연배가 낮다 보니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할아버지가 정각 대사에게 생일 선물이라고 자그마한 보따리를 건네었다. 정각 대사가 무척 기뻐하며 펼치자 그 안에는 비단에 쌓인 자그마한 불상이 나왔다. 하얀색인 것을 보니 흰 옥을 깎아 만든 것 같은데 크기가 내 손바닥만했다. 그래도 아마 옥으로 만든 것이라 무지 비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님들은 생일 선물 받을 때 매년 비슷비슷한 것만 받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스님들께 선물할 거라곤 염주나 불상밖에 없을 듯해 보였던 것이다. 가사야 절에서 다 지급되는 것일 테고, 따로 소지품 같은 것도 없을 테고, 불경이라고 해봐야 속세 사람들보다 절에 있는 분이 더 많이 가지고 계실 거고 말이다. '으음… 그렇다면 저분은 그런 거 다 어찌 가지고 계실라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의 말에 민이와 내가 거론되는 것을 듣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허허허, 방장스님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제 손주 녀석들이 이번에 소림사에 처음 오는 것이라 무척 궁금해해서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소림사 내부를 구경시켜도 될런지요?" 방장스님은 그다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금지 구역만 가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그의 말에 의견을 내놓는 정각 대사. "그렇다면 지금 구경시켜 주는 것이 어떠할런지요? 노인들의 대화에 아이들이 같이 있으면 지루하지 않겠습니까? 제자 하나를 붙여서 안내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오, 내가 어린 시주들 생각을 못하고 있었군요. 사제의 말이 옳습니다." 이번에도 방장이 쉽게 허락을 하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두 분의 마음 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미타불, 천만의 말씀입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방장이 소리 높여 외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 아까 우리를 안내해 왔던 지법이라던 무승이 들어왔다. "찾아계시옵니까?" "지법이구나. 바쁘지 않으면 어린 시주들에게 사내 구경을 시켜주도록 하여라." 뜬금없이 사내 구경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오게 된 민이와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처음 소림사에 오게 된 것이니만큼 그 이름 높은 소림사 안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민이와 나는 그보다는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전개시킬 일에 모든 호기심이 쏠려 있었던 터라 우리가 이곳에 오는 동안 소림을 구경하고 싶다는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할아버지가 구경을 핑계로 우리를 내보낸다고 하는 것은…….' "누나,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지금 그것을 넘겨줄 건가 봐." "역시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럼 우리 숙소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 "글쎄다… 숙소로 돌아가기야 하면 얼마든지 엿볼 수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숙소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나는 눈짓으로 안내한다고 우리 앞에서 걸어가는 무승 지법을 가리켰다.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나선 건데 이렇게 금방 구경을 사양하고 숙소로 돌 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지법이라는 무승은 전에 우리와 같이 구경을 다녔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친근감있게 대하는데 그런 그에게 '숙소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민아, 어쩔 수 없다. 이번은 그냥 포기하자꾸나." "에… 그렇지?" "그래, 어차피 뻔하잖냐. 할아버지가 그걸 넘길 테고 두 노스님은 받겠지." "하긴, 그럼 우린 내일쯤에나 돌아가려나?" "그럴지도. 생일 잔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 할아버지도 여기서 할 일이 없겠지. 설사 할아버지가 여기 며칠 머무신다 하더라도 빨리 가자고 내가 조를 거다. 여기서는 우리가 할 일이 없잖아." "동감이야. 근데 누나?" "왜?" "그거 말야, 그거. 여기서는 어디다 보관하고 있을까?" "낸들 알아? 아마 경비가 삼엄한 곳에 보관하고 있겠지. 보통 이런 대문파에는 소중히 보관하는 게 하나둘쯤은 있을 거 아냐? 그거랑 같이 보관하고 있겠지." "흐음… 근데 혹시 여기서도 화산파에서처럼 서재에다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 "바보야, 거기가 보통 서재였냐? 화산파 장문인의 개인 서재였잖아." "그럼, 여기는 방장의 개인 서재?" 우리가 그렇게 남들 모르게 쓸데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동안 지법은 착실하게 우리를 안내해 주고 있었다. 소림의 커다란 본당과 고루, 다수의 석비, 삼존불 등등을 보여주 며 열심히 설명해 주는 그에게 우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도 잘 듣고 있는 척 대충 대답을 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들 외에 나한전이라든지 소림삼십육방 등등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구경만 했다. 이곳들은 소림을 지키는 무승들이 기거하며 훈련하는 곳이라 외부인인 우리는 구경하지 못하는 거였다. 하긴, 무림에서는 다른 문파 사람이 수련하는 것을 훔쳐보는 것이 큰 실례라는 것을 감안할 때 당연한 것이긴 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장경각의 건물 근처까지는 가 볼 수 있었다. 물론 들어가지는 못했다. 장경각이란 소림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인데, 이곳 역시 외부인 출입은 금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림의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데다 삼엄한 경비가 항상 펼쳐져 있다고 한다. "흐음… 혹시 여기다 보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은씨 세가의 서고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 장엄한 건물을 바라보며 민이가 메시지를 보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 그럼 이만 다른 곳으로 가볼까요?" 지법 시님의 말에 우리가 발걸음을 돌릴 때였다. 우리 뒤에서 약간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고개를 돌려보니 장경각의 입구에서 막 두 명의 스님이 나오고 있었다. 한 명은 대충 30대 정도로 보이는, 지법 스님보다 몇 살 더 많이 보이는 스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스님이었다. 우리 쪽으로 외친 사람은 젊은 쪽 스님인 듯 그는 우리를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리는 무시한 채 우리를 안내하고 있던 지법 스님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추궁했다. "그대는 어디 소속의 무승인데 외부인을 데리고 이곳에 있는 것인가? 소속을 밝히시게!" 그러자 지법 스님이 얼른 한 손을 들어 올려 예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소승은 장로원 소속의 지법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장스님의 명을 받고 어린 시주님들게 사내를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방장스님의 명을 받았다 하나 이곳은 외부인이 올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그 스님은 지법의 말에도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 투로 계속 추궁했다. 그를 보며 되게 깐깐한 녀석이라고 속으로 쨍알쨍알대는데, 지법 스님이 우리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 이는 게 안 좋을 거라 생각했는지 얼른 사과했다. "아미타불, 스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지요. 단지 겉에서 보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자 뒤에서 천천히 다가왔던 그 나이 지긋한 스님도 지법 스님 편을 들어줬다. "지진아,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단지 밖에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더냐?" '헐, 지진아래… 지진아… 쿠쿠쿠…….' 그러나 그 지진이라는 법명을 가진 깐깐한 스님은 물러나지 않았다. "하오나 스승님, 이곳은……." 하지만 그가 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그 스승이라던 스님이 그의 말을 막았다. "되었다. 저 무승 또한 나쁜 의도로 온 것도 아니고 이런 어린 시주들께서 단지 구경한 것뿐인데 무슨일이 있겠느냐? 게다가 이 시주들은 방장스님의 손님이지 않더냐?" 그러자 얼른 지법 스님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이분들은 은씨 세가의 시주님들이신데 이번에 정각 사조님의 생신 때문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둘이 그렇게 나오자 그 지진이란 스님도 어쩔 수가 없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하나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은 것이 좋을 것이오." 그러면서 그냥 몸을 돌려 가버리는 것이 성격이 깐깐한 것뿐만이 아니라 되게 고약하기까지 했다. 그의 모습에 오히려 그의 스승이라던 스님이 미안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대신 사과했다. "아미타불, 두 어린 시주님께 사과드리오. 하지만 이곳의 법도가 엄격한 데다 저 아이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 그러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비록 우리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그 성깔 못된 스님 때문에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나이 많은 스님이 이렇게 정중히 사과하는데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예,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미타불, 두 어린 시주님의 이해심에 감사드리오. 두 분께 부처님의 가호가 있으시길." 그렇게 인사를 한 그 스님은 몸을 돌려 저만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제자에게 걸어갔다. 그분이 좀 멀리까지 가버리자 이번에는 지법 스님이 미안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사과해 왔다. "아미타불, 정말 죄송합니다. 소승 때문에 두 분 시주님께서 마음이 상하셨겠군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요, 지법 스님이 잘못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지법 스님의 미안함을 달래며 막 걸음을 옮기던 나는 마지막으로 그 성깔 나쁜 스님에게 속으로나마 엿 먹으라고 외쳐 주기 위하여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말 놀랍고도 황당무계한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그 지진이란 법명을 가진 스님과 그 스승님은 막 장경각 건물 모퉁이를 돌려는 참이었기에 조금만 늦었더라면 보지 못할 뻔했다. 우리와 많이 떨어진 상태인데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던 터라 안심하고 있었나 본데 운 나쁘게도 내 눈에 포착된 거였다. 그것은, 아까 분명히 제자라고 말한 그 지진 스님이 자신의 스승의 빰을 툭툭 치는 거였다! 그것은 뺨을 갈기는 것이 아니라 건방지게 툭툭 건드리는 거였는데, 그러는 그 스님의 얼굴은 이죽거림이 가득했다. 아마 그 지진 스님은 내가 그 먼 곳까지 뚜렷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그럴 수 있었을 터였다. '허, 허, 허… 저럴 수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뭔가가 잘못돼도 대단히 잘못된 거였다. 어떻게 스승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건지… 스승 알기를 하늘같이 아는 이 시대에 저런 장면은 세상의 이런 일에…를 넘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올라도 될 만한 장면이었다. '이상해, 뭔가 이상해…….'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스승 스님도 좀 이상한 것 같았다. 무지 선한 인상이긴 했지만 어딘가 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그냥 넘어갔지만 그 장면을 본 후로 자꾸만 맘에 걸렸다. '뭐가 이상했더라… 뭐가 이상했지? 으음… 뭘까…….'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자꾸만 굴리려니 머리에서 쥐가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누가 나를 툭툭 건드리는 거였다. "뭐야?" 가뜩이나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누가 건드리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자연 무지 거칠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놀라서 뚱그레진 눈으로 나는 바라보는 민이와 지법 스님이 있었다. "누, 누나……." "아, 아하하하……." 하지만 그런 당황스러워하는 그들을 바라보니 아까 그 스님이 뭐가 이상했는지 번개같이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맞다!! 그랬구나!!" 눈이었다. 바로 눈이었던 것이다. 그 스님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기는 했는데 시선이 우리를 향한 게 아니라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공허했었다. 그 눈이 하는 행동과 묘한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경우는 딴생각을 한다든가, 아니면 시력이 없다든가, 아니면 또 하나의 이유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과하는데 딴생각을 하느라 당사자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빠져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니 첫 번째 이유를 제외시킨다면…….' 한번 뭉클뭉클 샘솟기 시작한 호기심을 멈출 수가 없었던 나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 지법 스님?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아까 우리에게 사과하신 스님 말이에요……." 당황스러워하던 지법 스님이 얼른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함인지 내 말에 대답해 줬다. "아아, 지성 스님 말씀이십니까? 그분은 현 방장스님의 제자로서 장경각에 계시지요." "그러세요? 그런데 장경각에는 시력이 안 좋으신 분들도 일할 수 있으신가요?" 그러자 뭔 소리냐는 듯 지법이 말했다. "설마요, 장경각에서의 일이란 책을 관리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시력이 좋지 않으면 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그렇다면 지금 저 스님은 누군가에 의해 이지를 제압 당한 상태겠군. 그 누군가는 아마도… 그 지진이라는 스님이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에? 그럼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까 낮의 그 스님을 살펴본다구?"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정각 대사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푼다는 명목 하에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회포를 푸는 동시에 요 근래 일어난 사건들에 대하여 심각한 대화를 나눌 것이 분명했다. 민이는 그걸 엿보려고 일행 모두가 잠자리에 든 시각에 조용히 내 방에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아버지는 안 보고 웬 스님의 모습을 본다니 의아하게 여긴 것이다. "응, 아까 말했다시피 그냥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해 보려구." 그러자 민이가 마땅찮은 표정을 그대로 내보이며 투덜댔다. "에이, 그런 걸 뭐 하러 봐. 그냥 할아버지나 살펴보자. 우리가 모르는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잠깐만 살펴보면 돼. 그냥 내 짐작이 맞는지만 알아보면 되니까 조금만 참아. 그 다음에 네가 원하는 대로 할아버지의 모습을 비춰줄게." "쳇." 민이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했다. 하기야 이 모든 일은 원래 내 맘대로 보는 거였고 민이는 그저 옆에서 같이 구경하게 된 것뿐이니 자신이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자꾸 자신이 우기면 열받은 내가 안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걸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이제 17세가 다 된 모습으로 꽁알꽁알대며 자리에 앉는 민이의 모습에 나는 분노보다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실실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리고 그제야 왜 류미르가 여행을 다닐 때 내가 투덜투덜댈 때마다 화내지 않고 실실 웃으며 달랬었던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마다 솔직히 나는 속으로 꽤 의아해했지만 내가 드래곤이라서 그냥 져주는 것이려니… 라고 생각하고는 넘어갔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니라 내 모습이 자기 딴에는 꽤나 귀여웠나 보다. 류미르는 항상 나와 세이몬의 보호자같이 굴었었던 것이다. "삐치치 마, 응? 그냥 확인만 하고 할아버지 모습 비춰줄게." "알았어, 알았다고." 민이는 내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고개를 홱 돌리면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귀여운지… 그동안 민이와 같이 지내면서 나도 모르게 민이를 진짜 동생 으로 여기고 있었나 보다. '쿡쿡, 애같이 굴기는… 평소에는 나보다도 어른스레 보이는 녀석이 요즘 나랑 있을 땐 가끔 저런다니까? 으음… 근데 류미르도 이랬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스레 기분 나빠져서 나는 얼른 화면을 켰다. 성년식도 못 치른 류미르에게 동생 취급받고 있었다는 것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화면에 나오는 장면은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비록 지금이 밤이긴 하나 하늘에 반달이 떠 있어 밖은 그렇게 어둡지 않았기에 화면에 비추인 곳이 창문 하나 없거나 아니면 달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실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음… 깜깜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는걸?" 아무리 내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시력이 좋아 밤에도 별 무리 없이 볼 수 있다고 하나 이처럼 빛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는 그 좋은 시력도 별 소용 없었던 것이다. "에… 혹시 자는 거 아닐까?" 민이가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어조에는 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빨랑 할아버지 쪽으로 채널(?)을 돌리라는 암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으음… 그래야 할라나? 자는 거라면 지켜보고 있어도 소용없으니까." 민이의 말이 맞다는 건 알지만 할아버지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마도 내일, 늦으면 오후에는 집으로 돌아갈 것 같았기에 지금이 아니면 내 추리가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채널(?)을 돌리는 게 너무 아쉬웠다. 이런 내 아쉬움을 신께서 알아주셨는지 내가 채널(?)을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탁탁 소리가 나더니만 불이 켜졌다. 누군가가 부싯돌을 사용하여 등불을 켠 것이었다. '앗, 다행이다.' 그리고 더운 운이 좋게도 막 등불을 들어 올리는 사람은 바로 내가 스승을 조종하는 게 아닐까… 라고 의심하고 있는 지진 스님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아마도 서고 안인 듯 양 옆에는 책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는 책장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고, 그의 뒤에는 더욱 더 운이 좋게도 지진 스님의 스승인 지성 스님이 서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지성 스님은 아까 낮에 우리와 만났을 때 보다 더욱더 시선에 초점이 없었다. 그때는 그래도 허공이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초점이 약간이라도 남아 있었는데 지금 지진 스님이 들고 있는 등불에 의해 보여지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약간 희멀건하게 보이는 것이 마치 눈동자에 허연 막이 한꺼풀 덮여 있는 것만 같았다. "야, 야, 민아, 저것 좀 봐. 저 스님의 눈동자 이상하지 않냐? 아까 낮 보다 상태가 좀 더 심각한 거 같다?" 내 말에 체념의 표정을 짓고 앉아 있던 민이가 그제야 관심을 보이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디?" "저기, 저기 말야. 등불 들고 있는 스님 뒤에 서 있는……." "헤에… 정말? 누나 말대로 이지를 상실한 것 같은데?" "그렇지? 그렇지?" 민이가 내 말에 동의를 표하자 든든한 아군을 얻은 것 같아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솔직히 아까 내가 그런 추리를 하긴 했지만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소림에서 스승의 이지를 없애고 자신의 맘대로 조종하려는 제자라니,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내 추리에 민이가 확신을 더해준 것이라서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곳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등에 불을 붙인 지진 스님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득의양양한 웃음이었는데 되게 비릿해 보여 기분이 나빴다. 그렇지 않아도 그 스님은 되게 깐깐하게 생긴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되게 사악한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내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그는 뒤에 자신의 스승을 대동한 채 어디론가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러다가 아마 그 방의 구석인 듯한 곳에 이르자 등을 자신의 스승에게로 넘기고 자신은 책장의 구석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들었다. "훗훗훗, 이거 참 운도 좋지. 내가 작전을 시행하는 날 또 다른 하나가 더 손에 들어올 줄이야. 나중에 은씨 세가의 가주께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는걸? 소림에 오랫동안 잠복하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훗훗, 여기까지 오느라 꽤 힘들긴 하지만 한꺼번에 두 개를 얻을 수 있다니… 이것만 있으면 한 단계 진급은 문제없겠군." 그렇게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그는 꺼내 든 그 무언가를 얼른 품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 그의 스승이라는 지성 스님은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지진 스님이 일어나 몸을 돌리자 등불을 건네주었다. "흐흐흐, 이것도 재미있단 말야. 고명하신 스님이 내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 가자!" 그러자 지성 스님이 자연스레 몸을 돌려 앞장서는 것이 아닌가! "누나,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광경인데?" 그 모습에 민이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봤다. "뭐긴 뭐야? 화산파에서 이런 거 봤었잖냐! 저 남자 지금 마공 비급 훔지는 거야!" 내 메시지에 민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문을 그대로 뚫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야, 야!! 이 멍청한∼ 같이 가야 할 거 야냐!" 민이 뒤에다 대고 애써 메시지를 날려봤지만 민이는 그대로 경공을 사용하여 달려가 버렸다. 하지만 나는 마법으로 만들어놓은 화면을 끄랴, 내가 마법을 쓰는 동안 마법에 의한 마나의 파동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방 안에 쳐놓은 결계를 해체하느라 금방 뒤쫓아가지 못했다. '저런, 바보 같은!!' 나는 속으로 되게 초조해져서 얼른 손을 놀렸다. 민이가 비록 자신의 또래들 중에서 뛰어난 편이고, 무림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만큼의 실력이 있다고는 하나 상대는 한 명이 아니라 둘이었고, 그 둘 모두가 민이보다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들'이 스파이라는 건 민이와 나, 그리고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를 테니 장경각을 지키고 있던 무승들이 민이를 도와줄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 지진 스님이나 지성 스님의 명을 받아 민에게 공격을 안 하면 다행이었다. '큰일이야, 큰일이야!!' 내가 막 결계까지 거두고 민이의 뒤를 쫓아가려는 찰나, 내 방문이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열리면서 유와 덕이, 그리고 배 숙부가 뛰어 들어왔다. "진아, 도대체 무슨 일이냐!" '어이구, 저 인간들도 있었지!' 나는 더욱더 머리가 아파짐을 느끼며 급하다고 무조건 뛰쳐나가 버린 민이를 원망했다. 아마도 그 애는 화산파에서 약간 늦는 바람에 마공을 영영 잃어버리고 범인 또한 결국 죽에 만든 사대를 이번에도 다시 일으킬까 봐 서두르는 것 같았다. 내 방에 쳐들어온(?) 사람들은 방 창문이 거의 부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창가로 달려가고 나에게 다가와 날 살피는 등 부산을 떨어댔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아따, 뭔 일이다요?" '젠장, 바빠 죽겠는데!' 이들이 방에 뛰쳐 들어오는 바람에 놀라서 멈칫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들과 창문을 살펴보고 있는 배 숙부까지 밀쳐 버리고 나도 뛰어나갔다. "주구우운∼!" "진아아아∼!" 뒤에서 그들이 덩달아 쫓아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 버리고 내가 낼 수 있는 전속력으로 민이가 간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렇게 전속력으로 달려갔건만 내가 민이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지성 스님이 민이를 상대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무승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벌써 장경각을 지키고 있던 무승들이 소란을 알아채고 나온 것이었다. '하긴, 안 와보는 것이 아상한 거지… 그런데 그 자식은?' 민이를 도와주러 가고 싶었지만 내가 뛰어든다면 지금 주위에서 관망하고 있는 무승들까지 뛰어들어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설사 민이가 제압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민이의 목숨을 취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마공 비급을 가지고 있을 지진 스님을 찾았다. 아마 그는 이 소람을 틈타 이곳을 벗어나려 할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내 생각대로 그는 무승들 틈에 있다가 막 슬금슬금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게 섯거라!!" 내가 소리치며 달려들자 그가 흠칫 놀라며 얼른 무승들 사이로 숨어덜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나 또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나도 성급했구나.' 그가 무승들과 좀 멀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달려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걸 미처 생각지 못하고 슬금슬금 도망치는 모습에 다급해져서 소리치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지진 스님, 아니, 스파이라 불려 마땅할 그 남자가 무승들 사이로 사라지는 대신 무승들이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봉을 들고 나를 막아섰다. "여시주, 그만두시오. 왜 이곳에서 소란을……." 맨 앞에 나서서 나를 행해 뭐라 말하려 했던 무승은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내가 다짜고짜로 그를 뛰어넘어 스파이를 쫓으려 했기 때문이다. "젠장, 비켜욧!!" 하지만 소림의 무승들은 그대로 날 보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가 나에게 말을 한 그 무승을 뛰어넘자마자 양 옆에 있던 무승들이 날 제압하려고 내 다리 사이로 봉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비키라니까욧!!" 하지만 그보다도 먼지 내가 내 발 밑에 있던 무승의 머리를 도약대 삼아 다시 훌쩍 뛰어오르며 그 봉들을 피하자 또 다른 두 명의 무승들이 도약하여 날 쫓아왔다. "그만두시오! 그러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무력을 행사하겠소!" '으그그… 바빠 죽겠는데!' 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 눈으로는 연신 무승들 사이로 파고드는 그 스파이를 쫓았고 다리로는 그들의 공세를 피해내느라 바빴다. "여시주!" 그런 나를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무승들이 막는 대신 이제는 직접적으로 공격을 해왔다. 무승들은 나를 포위하기 위해 빠르게 흩어져 주위를 넓혔고, 몇몇의 무승들이 나를 자신들이 짠 포위망 안으로 유도하기 위해 공격해 들어왔지만 나는 그 스파이를 뒤쫓느라 그걸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들이 유도하는 곳으로 자꾸만 밀려났다. "게 서라!!" 하지만 그 와중에 다시 한 번 그 스파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소리치며 그쪽으로 몸을 날리는데 무승 둘이 갑자기 나타나 내 앞을 막아서는 거였다. 그대로 돌파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봉을 들이대는 모습이 살벌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기세가 그렇게 흉흉하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돌파했을 텐데, 그들의 기세에 찔끔 겁을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돌파하지 못한 내 실수를 또 한번 자책했다. 뒤로 물러나 살펴보니 나는 그대로 무승들에게 포위되었던 것이다. '젠장, 젠장, 젠장!' 속으로 수도 없이 자책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미타불, 여시주는 검을 버리고 우리의 말에 따라주시오." "검을 뽑지도 않았는데요?" 그랬다. 나는 스파이 뒤를 쫓느라 검을 뽑지도 못한 채 계속 달려들기만 했던 것이다. 내 말에 앞으로 나선 무승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얼른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고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검은 버려주시오." 나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지만 순순히 허리에 찬 검을 풀어서 앞으로 던졌다. 민이가 무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대로 돌격하는 것보다 거들의 말에 따라주는 체하면서 틈을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민아, 부디 조금만 참아라.' 지금 민이가 괜찮은지 메시지라도 날려보고 싶었지만 혹시나 내 메시지 때문에 주의가 흐트러져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서 메시지도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민이가 다급하게 도움을 청하는 메시지를 날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무사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를 따라서……." 하지만 그 무승은 또 한 번 자신의 말에 끊기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누군가가 그를 밀치고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까 민이를 상대하고 있던 지성 스님이었다. "어, 어떻게……." 내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얼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다짜고짜 나에게 손을 휘둘렀다. "까악∼!" 재빨리 팔에 마나를 주입하여 얼굴 앞에서 X 자로 교차한 후 그가 쏘아보내는 장풍을 막아냈지만 그 큰 힘을 버티지 못하고 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야 했다. "스, 스님……." 무승들이 놀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는 민이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깨닫고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밖으로 내달았다. 그들이 당황하느라 나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 탓에 쉽게 밖으로 뛰쳐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있어야 할 민이는 온데간데없고 내가 그에게 주었던 청명검만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와 땅에 꽂혀 있었다. "민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시 내 주위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무승들 외에 그 스파이와 민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민아아아∼!!" 그들의 포위망을 다시 빠져나가려고 몸을 솟구쳤지만, 그런 내 앞을 지성 스님이 가로막고 나섰기에 나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야 했다. "민이 어쨌어요!! 민이 어쨌냐구요!!" 한순간 지성 스님에 대한 분노가 솟구쳐 나는 앞 뒤 안 가리고 청명검을 쥔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지성 스님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피하지 않고 오히려 내 쪽으로 달려들더니 넓은 소매를 휘둘러 청명검을 감싸 검을 휘두를 수 없도록 봉쇄한 직후 다른 쪽 손을 내 쪽으로 뻗었다. "크윽∼!!" 분노로 인하여 그냥 달려든 나에 비해 그는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듯 그의 오른 주먹은 정확히 내 배에 꽂혀 들어갔고, 그 인정사정없는 힘에 의하여 나는 신음을 토하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청명검을 어떻게 휘둘러 볼 새도 없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욱!" 배를 정통으로 맞은 탓에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그냥 참고 삼켰다. "젠장할……." 하지만 검을 쥐고 자세를 잡을 틈도 안 주고 이번에는 다른 무승들이 달려들었다. 주위에 적을 두고 싸워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나는 제대로 초식 한번 펼쳐 보지 못한 채 몇 번 그들과 부딪치지도 못하고 검을 놓치곤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젠장, 젠장, 젠장! 그냥 마법을 쓸까? 그러면 어린 녀석들쯤이야…….' 여러 개의 봉들이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몸을 봉쇄하고 있어 나는 꼼짝없이 무릎 꿇고 앉아 이만 갈아야 했다. 그런 나에게 지성 스님이 천천히 걸어왔다. 초점없는 눈으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에 나는 다시 한 번 속에서부터 열불이 솟아올랐다. "젠장할, 이 자식아! 니가 그러고도 소림사 중이냐? 니보다도 나이 어린 녀석에게 당해서 조종당하는 주제에 소림사 중이냐고! 이름이 아깝다!! 너, 민이 어쨌어? 민이 몸에 상처라도 냈다간 봐라! 내 그날로 소림은 가만두지 않는다!! 스파이 녀석에게 당해서 죄없는 어린애에게 손을 대다니!! 니가 그러고도 불교에 몸을 담았다고 할 수 있냐?! 그게 자비를 베푸는 중이 할 일이냐고!!"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고, 민이가 괘씸하고, 그 스파이가 너무너무 밉고, 이 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너무 멍청해서 얄미웠다. 그게 그 스님에 대한 분노로 합쳐져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무승들이 놀라워하며 화를 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에게 다가오던 지성 스님이 내 말에 움찔거리더니 내게 다가오던 걸음이 천천히 늦춰지기 시작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 모습을 분노한 것이라 착각한 나는 더욱더 소리를 높였다. "야, 이 자식아! 열받냐? 난 더 열받는다!! 너, 민이 어쨌어? 어쨌냐고?! 민이 어디다 둔 거야?! 민이에게 해코지만 해봐라! 너, 가만 안 둘 거야!! 니가 그러고도 중이냐?! 이 땡초야!! 멍청한 땡초 같으니라고. 니가 멍청하니까 스파이가 너한테 꼬인 거 아냐? 넌 니 제자가 스파이인지도 몰랐냐? 그래 가지고 이지를 제압 당했지? 멍청한 땡중!! 이 멍청이, 똥개, 해삼, 멍게, 말미잘, 해파리 같은 자식아!!" 그러자 주위에 있던 무승들이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내 입을 봉하기 위해 혈을 짚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지성 스님이 일을 벌였다. 땅에 떨어진 청명검을 잡더니 다짜고짜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른 거였다. 푸욱! 듣기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경악으로 물들어 그를 향해 있는 동안, 그의 몸이 고통으로 인함인지 부들부들 떨리더니 힘겹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그의 눈은 고통이 가득했지만 초점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그, 그… 어린 시주는… 크윽… 바, 밖으로……." 고통으로 인해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꺼풀이 심하게 떨리더니 다시 초점을 잃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온 힘을 쥐어 짜낸 듯한 동작으로 자신의 허벅지에 찔러 넣어진 청명검을 옆으로 비틀었다. "크아아악∼!" '아프겠다…….' 보는 나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제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어, 어서… 쫓아가길… 느, 늦으면… 안 되는… 부, 부디… 그, 그 물건도……."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낀 탓인지 내 움직임을 봉하고 있던 무승들의 봉들이 풀려 있었다. 나는 그걸 느끼자마자 얼른 그 봉들을 떨치고 일어나 지성 스님의 손 안에 쥐어져 있던 청명검을 빼앗아 들고 몸을 날렸다. "디멘션 도어!!" 텔레포트와 비슷하지만 거리가 한정되어 있는 이동 마법이다. 하지만 정확한 목표가 있으면 그 주위로 갈 수 있는 마법으로-동료를 잃어버렸을 때 자주 사용되는 마법으로-나는 너무 급한 나머지 무승들을 벗어나 얼마 달리지 않아 그 마법을 사용해 버렸다. 그러자 눈 깜빡할 사이에 내 주위의 광경은 소림사 안의 건물들이 보이는 곳에서 나무들이 주위에 들어차 있는 숲 속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던 내 몸은 중력의 힘에 의하여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조심하고 있던 나는 사뿐히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 주위에 민이가 있다는 소리인데…….'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며 민이의 기척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내 뒤쪽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더니만 한 인영이 막 달려나오다 날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너, 너는……!" 그자는 아까 내가 놓쳤던 그 스파이였다. 그는 어깨 위에다가 뭔가 커다란 짐을 들쳐 메고 있었는데 내가 그를 발견하고 검을 겨누자 얼른 그 짐을 내려놓고 그 즘을 향해 단검을 들이대었다. 그 짐이란 바로 민이였던 것이다. "움직이지 마라!!" "민아!!" 제압을 당한 것인지 꼼짝 하지도 못하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민이가 미안한 시선으로 눈알을 굴려댔다. "야, 괜찮은 거야? 뭐라 메시지 좀 보내봐라!!" "아, 응… 괜찮은 거 같아." 약간은 쑥스러운 듯한 그러나 멀쩡한 민이의 메시지를 듣고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직은 괜찮구나.' "바보같이, 그러기에 왜 그냥 뛰쳐나가냐? 얼마든지 작전을 세우고 가도 됐었잖아! 으이그∼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미안… 누나……." "잠깐만 기다려! 곧 구해줄게." 그 스파이는 민이의 목에 단검을 겨눈 채 천천히 내 주위를 빙둘러 나를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민이가 인질로 잡혀져 있는 이상 내가 못 움직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녀석을 마법으로 제압하려고 적당한 마법을 생각해 내느라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 결코 민이가 다칠까 봐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내가 실수해서 민이가 다치더라도 죽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었기에 조금 다치는 건 상관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처 마법을 쓰기도 전에 민이의 단호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만둬, 누나. 그냥 나둬줘!" "뭐?" 너무나 어이없는 말에 나는 마법을 쓰려다 말고 민이를 바라보았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자 민이의 단호한 결심이 서린 메시지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부탁이야, 누나, 그냥 가만히 있어주면 안 돼" 점점 더 영문을 모를 말뿐이었다. "얘가, 얘가 지금…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 그냥 가만히 있으라니, 그럼 넌 그 자식한테 끌려가잖아?" "그렇게 나둬줘. 부탁이야." "야, 무슨 부탁이 그래? 동생이 잡혀가는 걸 그냥 보고 있으라니." "내가 해결할 게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냥 나둬줘.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다는 거 누나도 잘 알잖아." "무슨 영문인지 이유나 알자. 네가 뭘 해결하려고? 설마 그동안 잃어버린 마공을 되찾아려고 그러는 거야?" "그건 아니야. 그냥 이들에게 잡혀가서 갇혀 있는 동안 검술을 더 연마하려고 해." "얘가 점점… 야, 그들에게 잡혀가서 검술 연마는 무슨 검술 연마야? 그런 건 집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아냐, 나는 솔직히 그동안 내가 잘난 줄 착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오늘 내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뼈저리게 느꼈지. 내가 만족할 만큼 검술을 더 연마할 거야." "이봐이봐, 그런 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거잖아?" "집에서는 안돼. 집에서 하면 난 칭찬만 받을 거고 그럼 또다시 해이해질 거야. 살벌한 분위기에서 필사적으로 해보고 싶어." "하아∼ 그럼 폐관 수련인지 뭔지 하면 되잖아?" "부모님이 그걸 허락해 주실 리가 없잖아? 그래서 그래. 내 힘으로 검술을 연마해서 잡혀 있는 곳에서부터 탈출해 보이겠어!" "그래그래, 그 결심은 기특한데 말야, 이봐, 우리는 어차피 인간이 아니잖아. 넌 용왕족이라며? 용왕족의 특기는 검숙이 아니라 신력이잖아? 게다가 그곳에 잡혀가서 검술 수련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막말로 너를 항상 꽁꽁 묶어두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용족인 것과는 상관없어. 그리고 누나도 날 항상 꽁꽁 묶어두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 난 알고 있는 정보도 얼마 없으니 고문당할 이유도 없고, 아마 지하 감옥 같은 데나 갇혀 있겠지. 나 이번 기회에 검술을 진지하게 해보려고 해. 그러니 날 설득할 생각은 말아줘." "하아아……." 도대체 민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저런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녀석이 뭔가를 단단히 결심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게 민이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동안 스파이는 나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하지만 나는 민이의 간절하고도 단호한 부탁에 그 뒤를 쫓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속으로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민이 또한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녀석은 아니었기에 그 격정을 그냥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둘 수 있었다. '뭐, 죽지는 않을 테지. 에? 그럼 난 뭐 때문에 그 난리를 치면서 저 녀석을 구하려고 한 거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아까 내가 그 난리를 쳤던 것이 왠지 무지 허망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기운이 쫘악 빠졌다. 어느덧 그 스파이의 모습과 민이 모습이 보이지 않은지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민이에게 마지막 메시지가 날아왔다. "누나, 뒤를 부탁해!" '뒤는 무슨 얼어죽을 뒤." 속으로는 그렇게 꽁알대었지만 이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소림사 안은 지금 난리가 났을 거였다. '이걸 어찌 처리한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민이 녀석 혼자 뛰쳐나갈 때 나라도 그냥 가만있을걸. 덕분에 뒤처리는 내가 도맡아야 하잖아? 으음… 이걸로 소림에서도 마공 비급을 잃어버리게 된 건가? 에휴∼ 큰일 났군. 아무리 할아버지가 8대 세가 중 한 세가의 가주라고 해도 소림에는 비할 바가 못될 텐데… 혹시 할아버지께 난처한 일이 되는 건 아닐 테지? 으음… 그럼 곤란한데…….' 그렇다고 그곳에 서서 계속 고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나는 터덜터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 나와 민이를 찾는 수색대와 만나 소림으로 돌아가니 할아버지가 새하얗게 질려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날 보더니 반색을 하고 달려들었다. "진아∼! 진아, 괜찮으냐?" "죄송해요, 할아버지. 많이 놀라셨죠?"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에게 사과를 하자 할아버지가 날 덥석 끌어안고 외쳤다. "인석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희가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다고! 그런데 민이는 어디 있는 거냐?" 그제야 민이가 내 곁에 없는 줄 알아챘나 보다. 하지만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난처한 웃음만 흘렸다. "그게 말이죠∼ 못 찾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못 찾았다니? 민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리냐?" 할아버지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새하얗게 질려서 날 다그쳤지만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방장스님과 정각 대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미타불… 은 시주, 잠시만 실례하겠소." 할아버지는 내게 더 묻고 싶은 표정이 가득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어린 여시주,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나도 설명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수.' 하지만 그렇다고 민이와 내가 마법의 사용하여 지진 스님을 엿보고 있다가 그가 마공을 훔치는 것을 알아챘고, 그걸 막으려고 민이가 달려갔지만 지진 스님에게 조종당하는 지성 스님이 민이를 막아서 제압한 뒤에 지진 스님에게 넘겨줬고, 다시 날 막는 동안 지진 스님이 마공 비급 조각과 민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어찌 말할 수가 있을까? "저기요, 죄송하지만 지성 스님은 어찌 되셨나요?" 방장 스님은 난데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뒤쪽을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을 받은 정각 대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치료를 받고 있네.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네만, 그건 왜 물어보는 건가?" "저기요, 그럼 정말 죄송하지만… 그분이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에 같이 대답하면 안 될까요? 저도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정말 피곤해서 그런다기보다는 지성 스님의 상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와 같이 심문을 받게 된다면 그의 상태를 살펴볼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그가 제 정신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거였다. 뭐, 그렇다고 완벽한 대비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내 말에 방장스님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기는 했지만 곧 얼굴을 풀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이곳이 소림이니만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 그래도 안심을 못한 모양인지 난 은씨 세가의 주어진 지객당으로 가지 못하고 계율원(잘못한 스님들이 벌받는 곳)의 한 독방에서 자야만 했다. 하지만 차가운 방바닥에서 자는 건 아니고 괜찮은 침대에서 편안하게 잘 수 있게 배려를 해주어 큰 불만은 없었다. 다음날, 운이 좋은 건지 정신을 잃어버렸던 지성 스님이 아침에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과 힘께 나는 방장실로 불려 나갔다. 내가 은씨 세가의 여식이다 보니 배려를 해주는 모양이었다. 방장실에는 방장을 지킨다는 팔대호원과 방장, 정각대사, 첨 보는 늙은 스님들-아마도 정각 대사와 같이 장로들인 듯했다-그리고 우리 은씨 세가의 사람들이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씨 세가의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밤새 잠 한숨도 못 잔 얼굴들이었다. '에고… 괜히 미안해지잖아.' 그쪽을 행해 괜히 한번 히죽 웃어주는데 다시 방장실 문이 열리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지성 스님과 그를 부축해 주는 두 명의 다른 무승이었다. 아마도 어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를 때 무지 깊게 찔렀었는지 그는 혼자 서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부축으로 겨우겨우 걸음을 떼고 있었다. 게다가 피도 많이 흘렸는지 얼굴이 무지 핼쑥했다. 그래도 다행한 점은 그의 눈에 초점이 또렷이 있다는 거였다. 아마도 어제 일로 정신을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으음… 그나마 다행이지? 여전히 제압당한 상태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제자 지성이 인사드립니다." 그 몸이 안 좋은 가운데서도 그는 비척비척거리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아직 서 있는데 나이도 많은 어른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자 되게 난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에는 관심이 없는 듯 우선 그에게 시선이 쏠린 가운데 방장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지성아,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불러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우린 너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혹시 어제 일이 사라 진 비급 두 개와 관련이 있더냐?" 그러고 보니 그 지성이란 스님은 방장스님의 제자이다. 그래서 그런지 방장스님의 얼굴은 지금 매우 긴장한 표정이었다. 방장스님의 질문에 지성 스님은 침울한 얼굴로 잠시 조용히 있더니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상태 그래도 이마를 바닥에 댄 채로 입을 열었다. "죄인이 방장스님께 아룁니다. 이 모든 일은 이 못난 죄인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죄인은 제자로 변장한 적의 침입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사술에 제압당해 본 문의 비급을 빼내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것을 어린 두 시주님께서 알아채고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옷! 제압당해 있을 때의 일을 다 알고 있었잖아? 이거 참 다행인걸?' 방장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 그것이 정녕 사실이더냐?" "추호도 거짓이 없는 사실이옵니다." "허어…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찌 이런 일이… 아미타불……." 연신 불호를 외우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방장스님을 대신하여 정각 대사가 나섰다. "그럼 사라진 네 제자 지진이 적이 변장하였던 것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지성 스님의 긍정에 이제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뒤에서 있던 늙은 스님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허어… 우리 소림에까지 적의 손길이 뻗쳐 있었을 줄이야… 아미타불……." "아미타불… 등장 밑이 어두운 법이로군요."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빨리 무림맹에 알려야……." "허어, 우리 대에 와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조사님들 얼굴을 어찌 뵐꼬." 그러자 지성 스님이 다시 한 번 바닥에 이마를 찧으면서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면목없습니다. 모두 다 부덕한 제 탓입니다." 그러더니 울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은 시주께도 사죄드립니다. 어린 은 시주가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에 일조를 했으니, 이 죄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허어……." 할아버지는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곰곰이 뭔가 생각하고 있던 정각 대사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시주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말씀하세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지성 스님에게 쏠리는 동안 뭐라 변명을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나는 정각 대사의 말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여시주께서는 도대체 지성이 제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아, 그건 처음 만났을 때 우연히 알아챈 거예요." 그러자 정각 대사는 더욱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알아챘다고? 어떻게?" "눈 때문에요." "눈이라고?" 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그게… 우리가 장경각을 구경하러 갔는데 지진이라는 스님이 좀 무섭게 대하셨거든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여기 계시는 스님께서 저희에게 직접 사과를 하셨는데, 그때 이 스님의 모습이 뭔가 부조화스러운 거예요. 으음… 표정이 이상하게 어색했다고나 할까요? 첨에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이 스님의 눈에 초점이 맞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정각 대사가 날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설마, 단지 그것 한 가지 가지고 제압당한 것을 눈치 챈 것인가?" 그 질문에 나는 무지 난처해져서 옆에 있던 지성 스님을 쳐다보았다. "에… 그건 아닌데요… 그게 그러니까……." 말하기가 꺼려진 이유는 지성 스님의 위신이 손상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꺼려하는 걸 다르게 생각했는지 방장스님까지 엄하게 물었다. "여시주, 왜 망설이지는 겐가? 여기서 대답하는 말에는 한 치도 거짓이 없어야 하네." "에… 하지만……." "어허, 뭔지 모르지만 어서 대답을 해보게. 뭘 그리 꺼려하는 겐가?" 방장스님이 다시 한 번 채근하자 나는 어쩔 수 없음을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하아… 그게 말이죠… 우연히 지진 스님이 스승이신 지성 스님의… 에… 그러니까, 뺨을 툭툭 건드리는 걸… 봐서 말이죠… 그러니까 어쩌다가……." 말하면서도 나는 되게 민망했다. 듣는 스님들도 얼굴에 난처한 빛이 돌면서 괜히 헛기침을 한번씩 해대는 거였다. '그럴 거면서 왜 묻는 거야?' "험, 험, 그랬구려. 잘 알았네. 그래서 눈치 챌 수 있었던 거로군. 그런데 어떻게 저들이 비급을-그들은 마공 조각이라는 걸 숨기려는 지 자꾸만 비급이라고만 지칭했다-가지고 가는 걸 알아채고 막을 수가 있었던 겐가?" 방장스님은 얼른 화재를 돌리려는 듯 빠르게 물어왔다. 나는 부디 내 변명이 잘 먹혀 들어가글 속으로 빌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그때에 민이가 제가 장난을 걸어왔거든요. 그래서 화를 내며 쫓아가려는데 이 애가 급해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도망쳤었고, 제가 뒤늦게 쫓아갔는데 그때 마침 민이가 지성 스님을 상대하고 있었어요." 집에서도 그런 일이 가끔-이 아니라 자주-있었기에 은씨 세가 쪽 사람들은 쉽게 납득한 표정이었다. 민이와 나의 쫓고 쫓기는 설전의 범위는 세가 전체일 때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림사 쪽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기에 그들을 납득시키려는 듯 얼른 배 숙부가 나섰다. "허어, 이곳에서는 얌전히 있으라고 했건만 또 그런 장난을 쳤단 말이냐?" "죄송해요……." 내가 기거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소림사 쪽에서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정도에서 나에 대한 심문이 끝났기에 나는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 내가 나서기 전에 지성 스님이 나에게 감사의 말을 해왔다. 그는 자신이 뭘 하는지 뻔히 다 알면서도 몸을 제압당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내가 막 호통-나는 욕한 건데… 험, 험…-을 쳐준 덕분에 약간의 기력이나마 짜내어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걸 보면 괜히 소림사의 이름이 드높은 게 아닌가 보다. 그 또한 평소의 수련이 깊었기에 몸을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그런 기력을 짜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나? 게다가 솔직히 그가 그때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더라면 나는 민이를 쫓아가지 못했을 것이고, 민이는 꼼짝없이 마공을 탈취하며 그 지진 스님을 인질로 잡고 튀었다는 죄를 뒤집어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거 하나만큼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에, 욕한 것도 사과했고 말이다. 으음… 이 이야기가 엄마에게 들어가면 잔소리 되게 많이 들을 텐데 그것도 걱정이다. 할아버지와 배 숙부는 나보다도 훨씬 뒤늦게 숙소로 돌아오셨다. 아마도 민이의 행방에 대해 소림과 의논하느라 그런 것 같았다. 결국 민이는 나중에 은씨 세가와 더 나아가서는 소림과 어떤 거래를 하기 위하여 적 측에서 잡아간 것으로 여겨졌고, 우리는 그쪽에서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이 났다. 우리는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우리는 세가로 돌아가기로 했고, 소림에서는 지속적으로 민이의 행방을 찾는 한편 무슨 단서를 찾거나 연락을 받는다면 그 즉시 은씨 세가로 연락해 주기로 단단히 약조를 했다. 이번 일로 무림맹은 또 발칵 뒤집혀질 것이었다. 이제 우리 쪽에 있는 마공의 비급은 무림맹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과 무당파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 이렇게 단 두 개 만이 남게 되었다. 지성 스님은 계율원에서 처벌이 내려졌지만-뭐라 내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꽤 엄하게 내려졌을 것이다-그것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스스로 참회동이라 불리는 동굴에서 평생 동안 수련을 하겠다면서 들어갔다고 했다. 선량하게 생겼던데 운없이 스파이에게 걸리는 바람에 인생이 이렇게 바뀌고만 참으로 불쌍한 케이스였다. 그리고 며칠 후에 소림에서는 얼굴 가죽이 벗겨진 시체가 발견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스파이가 분장하고 있었던 지진 스님이리라. 그도 참 운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제 34화 갑자기 나타난 숙모 (1) 집에 도착한 나는 엄마로부터 무지무지 혼날 거라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엄마는 나를 부둥켜안고 울 뿐 조금도 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대접이 혼나는 것보다 마음을 더 더욱 무겁게 했다. 엄마의 눈물이라는 거, 되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날 보자마자 부둥켜안는 것을 보니 소림에서의 일을 벌써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엄마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소림으로 직접 가겠다고 나서서 아빠가 말리느라고 되게 진땀 뺐다고 한다. 그 이야기까지 듣자 나는 민이 녀석에 대해 말할까 말까 되게 고민했다. 나는 민이 녀석 조금도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잘 있을 거란 걸 빤히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집안에서는 민이 녀석을 다 죽은 녀석으로 취급하며 장삿집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걸 바라보고만 있자니 좀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특히나 세가에 오자마자 보게 된 엄마의 눈물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테고, 오히려 내가 위로하려는 줄 알고 우울한 티 안 내려 노력할 것이 뻔했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속으로 삭이는 걸 보며 답답해하느니 차라리 대놓고 우울해하는 걸 보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며칠이 지나자 소림에서도, 소림에서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담담하고 침착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던 할아버지가 돌연 폐관 수렴을 선언했다. 민이를 잃어버린 충격을 견딜 수 없어 정신을 차릴 때까지 현실을 도피하려는 건지, 아니면 나중에 누구인지 모를 적이 민이를 가지고 협상할 때를 대비하여 힘을 길러두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의 폐관 수련은 되게 갑작스러운 것이라 집안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더욱이 총관과 아빠는 요즘 한창 어지러운 시기인데 가주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하냐고 우려를 표했지만 할아버지의 결심은 단호했다. 덕분에 세가 안은 봉문 아닌 봉문이 되어버렸다. 가주가 자리에 안 계시는데 다른 곳과의 왕래가 활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가주가 잠깐 세가를 비우고 외출을 하는 것과 아예 안에 콕 틀어박히는 것과는 분위기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하긴, 외출한 거라면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연락할 수 있겠지만, 저렇게 폐관 수련을 하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가주를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뭐, 할아버지도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한 건 아니고 다 총관과 도서관 사숙조를 믿고 있는 것이기에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렇게 우울한 집 안에서 며칠을 보낸 어느 날이었다. 나에게만은 예전처럼 평상시 일상을 하도록 배려해 주는 집안 어른들 덕분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형들과 함께 배숙부의 지도 아래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아, 단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내 옆에 민이가 없다는 것일라나?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는 다른 제자들을 봐주러 이만 가볼 테니 너희들끼리 수련하거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집 안은 평소보다 좀 더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하루에 몇 번은 만날 수 있었던 총관도 요즘은 하루 종일 볼 수가 없었고, 배숙부와 함께 제자들 수련을 담당하고 있는 예철도 하루 종일 수련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 같았다. 배 숙부 또한 나를 가르치러 올 때를 제외하고는 예철과 같이 다른 제자들을 수련시키느라 바빴다. 갑자기 제자들에게 특훈을 시키는 듯했다. 도서관의 사숙조도 마찬가지였다. 놀러 가면 늘 그곳에 있기는 했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그의 제자와 의논하느라 나랑 놀아주기도(?) 못했다. 그건 엄마와 아빠도 마찬가지였지만. 요 근래 갑자기 세가가 세가 힘 기르기 운동을 전개해서 세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 운동의 여파는 나에게까지 미치지 못해서 왠지 나 혼자만 세가의 움직임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따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 같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 없이 나에게 행해지는 교육들에 투덜투덜대느라 하루하루를 소비했을 테지만, 요즈음에는 왠지 무관심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민이 녀석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가 세가 일에 무관심으로 지냈다고는 하더라도 요 근래 이러한 움직임이 나중에 민이 녀석을 구출하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모를 만큼 둔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 나는 제외될 것이 분명했다. 어른들은 민이를 구하는 것에 세가의 총력을 기울일 테지만 그들은 최고로 운이 좋으면 목숨이 붙어 있는 민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10 중 8,9는 민이의 목숨을 구할 수 없으리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가의 힘을 비축하고 있는 건 혹시나… 를 대비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여기에 세가의 단 하나 남은 핏줄을 끼워 넣어줄 리 만무했다. 아마도 내가 떼를 쓰고 발광을 해도 안 끼워줄 거였다. 하긴, 지금 상황을 본다면 내가 떼를 쓸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고 애초부터 이런 움직임에 끼워 넣지 않는 데다 세가 사람들의 입 단속을 단단히 시키는 거겠지만. 특히나 내 곁에 항상 있는 유와 덕이는 요 근래 바짝 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내가 워낙 행동이 예측 불허라 이렇게 얌전히 있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튀는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그 행동으로 인하여 혹시라도 그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그걸 알아차리고 끼워달라고 떼를 쓴다면 날 막는데 무지 애를 먹을 것이 분명했기에 사전에 미리 방어하려고 두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이다. 하긴, 요즘 들어 이 핑계, 저 핑계, 이 이유, 저 이유를 다 들어 교양 수업 시간이 갑자기 길어진 것도 그에 한한 한 방편일 것이다(이건 필시 엄마의 농간이 들어간 것일 테지만…). 게다가 그 둘은 내가 민이가 없어 우울해할까 봐 항상 노심초사했다.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요상하다 싶으면 분위기를 띄우려는 덕이와 너무 신경 쓰는 게 팍팍 티가 나는 유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어휴… 그러기에 내가 하려면 집에 와서 하라구 했잖아! 으이구, 그 녀석 하나 때문에 이게 뭐냐고! 민이 녀석, 지하 감옥에 집어넣고 고생 좀 팍팍 시켰겠지? 밥을 제대로 안 주거나 주더라도 아주아주 형편없는 것들로만 주길 바래. 안 그랬단 봐,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 한바탕씩 흔들어줄 테다.' 험, 험, 딴 데로 많이 빠졌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배 숙부와 함께 제자들 수련을 도우러 가려는 희여송을 얼른 붙들었다. "희 사령, 잠깐만요." 그러자 희여송이 자연스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진 사매?" 한 치의 어색함도 없는 표정 역시 노련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이기에 같이 수련 받는 다른 사형들 중에서 내가 제일 의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부르기만 하면 잔뜩 긴장해서 날 바라보곤 했다. 내가 뭘 물을까, 혹시 자신이 대답한 것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나 않을지 염려하는 것이 얼굴에 팍팍 티가 난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는 거였다. "사형, 바쁘지 않으면 나랑 대련 한 번만 해주지 않을래요? 물론 내력은 빼고요." "대련이오?" 희여송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 부탁해요." 그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도 이해는 갔다. 평소 나는 누가 시키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제의해서 대련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희여송은 내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흐음, 진 사매의 부탁이라면 못 들어줄 건 없지만, 갑자기 대련이라니 이상하네요. 예전에는 먼저 대련 신청한 적이 없었잖아요?" "별건 아니구요, 나도 검술 수련에 조금 더 진지해져 볼까 하고요/" 어깨를 으쓱하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대답에 희여송의 얼굴이 긴장했다. "진 사매, 설마 저번에 소림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진 사매가 약해서 진 게 아니에요. 그때 진 사매가 상대했던 무승들하고 내가 붙는다면 나도 몇 초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을걸요." 그때 내가 무승들에게 제압당해 민이를 쫓아가지 못하자 열받아서 지성 스님에게 고래고래 고함칠 때 그 자리에서 은씨 세가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에엣? 그 얘기는 왜 꺼내시는 거예요, 창피하게……. 물론 그때 겪었던 일도 자극이 되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구요." 본심은 며칠 동안 옆에 없는 민이를 생각할 때, 그 녀석은 감옥에서 필사적으로 수련을 하고 있을 텐데 나는 집안 어른들의 지나친 배려에 의하여 이도 저도 아닌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는 게 한심스러워서였다. 절대로 민이 녀석 걱정을 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단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민이 녀석에게 뒤떨어지지 않게끔 수련에 박차를 가해볼 생각에서 대련을 청한 것이다. 희여송과 대련을 하면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을 테고, 그의 조언 또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검술로만 상대한다면 내가 질 걸란 건 분명히 알고 있었다. 희여송은 저쪽에서 주춤주춤거리며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머지 세 명―나와 같이 수련을 하는 사형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스승님을 도와드리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냐?" 아마도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너희들 일을 하라는 듯했다. 그러자 그 세 명은 사형만 믿는 다는 진득한 눈빛을 보내면서 사라져(?) 갔다. "자, 그럼 진 사매, 비로 꽌객은 없지만 한번 해볼까요?" 아마도 내 말에서 본심은 알아내기 어려웠을 듯했지만 더 이상 물어보았다가 내가 이상하게 여길까 봐 그냥 넘어가 주는 듯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련할 때 항상 하는 시작하기전의 예의를 갖춘 후 검을 빼어 들었다. 나는 아직 부모님이 예전에 선물로 준 평범한 철로 만들어진 소검을 사용하고 있었다. 민이 녀석은 감히 내가 준 청명검을 내팽개치고 잡혀갔기에 그 청명검은 지금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 '그럼 녀석은 뭘 가지고 수련을 하는지 몰라.' 희여송과는 은하검법을 수련하느라 그 검법만을 가지고 대련을 해본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자신의 실력―물론 내력은 빼고…―을 다하여 대련해 본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탐색전이 이어졌다. 물론 나는 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기에 지공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수비로는 무지 뛰어난 소검만환식을 사용했기에 내가 검술이 쬐께 달리지만 희여송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탐색전에서 희여송에게 밀리지 않고 대등한 대결을 펼쳤기에 그런 자만심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여송이 봐줬을 때의 이야기일 뿐, 그가 내 실력을 다 파악하고 나자 상황을 달라졌다. 어느 순간 나와 검을 맞대던 그가 싱긋 웃더니만 훌쩍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둘었다. "자, 그럼 진짜로 가겠습니다!" '뭐어? 그럼 지금까지는 봐줬다는 소리야?' 그의 말에 황당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그가 순식간에 접근해 왔다. "은하비무!"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순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니만 내 주위에 뿌연 안개가 휩싸인 것처럼 수많은 검의 잔영이 펼쳐졌다. 몰랐으면 그대로 당했을 테지만 그가 펼치는 검법은 나무 배웠던 거라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극 검이 나에게 쏘아져 들어올 검로를 미리 차단시키려고 했다. [@연재] 제34화 끝까지 역시나 그의 검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방향으로 찔러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대로 그의 검을 막고 반격을 가하리라 마음먹고 내 검이 그의 검과 맞부딪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웬걸, 그의 검이 막 내 검과 부딪치려는 찰나 그의 검이 스슥 하며 순간적으로 사라지더니 어느새 그의 검을 찾기 위해 약간 뒤로 물러나며 주위를 둘러보려는 내 목에 떡하니 다가와 있는 거였다. "어라? 언제?!" 놀란 표정 그대로 그를 바라보며 묻자 희여송이 싱긋 웃어주었다. "배운 초식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그 초식을 한번 본 사람에게는 이기지 못할 겁니다. 상황에 맞게 활용해야지요. 사매는 적을 치는 검로가 여덟 개라고만 배웠겠지만, 조금만 응용해서 각도를 달리해 본다면 어느 곳에서든 적을 칠 수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사형은 내가 그 검로를 차단할 줄 미리 예상하고 처음부터 약간 변형해서 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군요?" "그렇죠." 희여송이 검을 거두어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이거 참… 배운 대로만 움직인 내가 되게 한심하게 생각되는데요?" "상황은 항상 같지 않아요. 매번 조금씩이라도 차이가 있답니다. 그런 상황상황에서 항상 똑같이 움직인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사매도 매번 대련할 때 초식의 응용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그거와 마찬가지예요. 단지 나처럼 초식 자체를 변형시켜 응용하려면 초식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어야 하지요."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사형의 검술을 보고 대충 이해는 갈 것 같네요. 그건 그렇고 사형,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희여송이 약간 움찔거렸다. "뭐가 궁금한가요?" "사형, 사형이 생각하기에는 나에게 부족한 점이 뭐 같아요?" 내 질문에 희여송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함께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음? 그런 거라면 평소 스승님께서 지적해 주시지 않나요?" "에이, 배 숙부는 초식의 틀린 점을 지적해 주시는 거구요. 내가 묻고 싶은 건 내 태도라든지 성격이라든지, 뭐, 그런 거 말이에요." "허허허, 오늘 사매가 뭔가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네요. 정말 평소와는 다른데요?" "말했잖아요. 검술 수련하는 데 좀 더 진지해지고 싶다고. 그러니까 저에게 지적해 주고 싶은 점 같은 거 없으세요?" "으음… 우선은 그래요, 사매는 배우고 싶어서 배운다기보다는 의무감으로 검술을 배우는 것 같았어요. 무가에서 태어난 운명에 거스르지 않지만 의욕은 없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뭐, 이제는 검술을 익히는 데 있어 진지해지겠다고 하니 그것은 좀 바뀌겠네요." "에… 내가 그랬나요? 처음에 엄마에게 검술을 배울 때는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으음… 그랬구나. 그리고 또 다른 거는요?" "다른 점은 아까도 이야기했다시피 너무 배운 대로만 움직인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하는 게 검술을 빨리 익히는 데 좋기는 하겠지만, 직접 싸울 때는 도움이 안 되는 버릇이에요. 엄연히 이론과 현실은 다르니까요. 사매의 검술은 여전히 책 속에서만 사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빨리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음, 음, 그렇군요. 그런데 어떻게 현실에 적용시키나요?"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나가서 많이 싸워보는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보통은 대련을 많이 하지요." "아아, 그렇군요." "하지만 비슷한 검술을 가진 사람들끼리 하는 것에도 한계는 있을 거예요. 그러니 빨리 현실에 적용시키고 싶다면 다른 검술을 가진 사람과 많이 해보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음, 음… 그럼 유와 덕이와도 대련을 많이 해봐야겠네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해준다면, 검술에 조금 더 의지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사매는… 그렇군요, 아직까지는 그렇게 위험한 지경에까지 처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보통 대련을 할 때 질 것 같으면 금방 포기를 해버리더군요. 으음… 달리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내가 여기서 포기하더라도 얼마든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런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검술을 펼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현실에서는 그렇게 한다면 끝장이거든요. 조금 더 필사적으로, 질 것 같더라도 끝까지 해보는 것도 중요해요. 현실은 대련과는 다르니까요." '에… 아무래도 마법에 의지하고 있는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 같아… 반성해야겠는걸?' "그렇군요. 명심할게요." 그 외에도 희여송이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저쪽에서 예성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 사형, 그리고 아가씨, 저, 잠깐 와보셔야겠는데요?" "사매도 말이냐?" 의아한 듯 되묻는 희여송에게 예성구가 격렬하다 여겨질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침착하고 어른스러웠던 모습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되게 흥분해 있는 그의 모습에 나도 의아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저… 그게… 가, 가보시면 압니다." 말할까 말까 되게 망설이다 결국 말을 못하는 성구의 모습이 더 더욱 의아스러웠지만 가보면 안다는 소리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가보면 알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가 나를 인도한 곳은 세가의 본 건물의 접대실이었다. 그쪽으로 가는 걸 보고 손님이 오셨나 생각을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접대실에는 모두 아는 얼굴들만이 우르르 몰려 있었던 것이다. 울 부모님, 예총관, 예 총관의 두 아들, 배 숙부, 그리고 지금 막 도착한 우리 세 명까지.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건 오랜만에 오는 숙부 은재영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자는 처음 보는 여자였다. '어? 그럼 저 여자가 손님이란 말야?' 대충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꽤나 예쁘장하게 생겼다. 하지만 울 엄마보다는 덜 예뻤다. 게다가 눈이 살짝 치켜 올라가서 평소 여우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을 법했다. '저런 여자들이 애교가 무지 많다고 하던데…….' 엄마 옆으로 슬며시 가서 서며 그 여자를 힘끔힐끔 쳐다보다가 나는 그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배시시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나도 얼결에 덩달아 씨익 웃어주고는 엄마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엄마, 저 여자 분은 누구세요?" 하지만 엄마보다 먼저 은재영 옆에 서 있던 그 여자가 나에게 걸어오며 말을 건넸다. "오라, 네가 바로 진이구나?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단다. 역시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미인인걸?" "아, 감사합니다." 예의상 대꾸는 하면서도 첨 보는 나에게 되게 친한 척 구는 그녀의 태도에 어리둥절해하는데 엄마가 그런 내 심정을 알았는지 설명해 줬다. "인사드리거라. 네 숙모 되시는 분이란다." "숙모요?" 숙모라고 한다면 삼촌의 부인이다 그런데 내 삼촌이라고 있는 사람들은 배 숙부나 은재영이나 모두 독신인데 웬 숙모? 더욱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엄마의 얼굴과 그 숙모라는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은재영을 눈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호호호, 저분이 내 낭군님이 되실 거란다." "에에?" '저 인간이 갑자기 왜?' 은재영은 쑥스러운지 괜히 천장만 바라보며 헛기침을 해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 숙모가 되었다는 여자는 계속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호호호, 생각 같아서는 빨리 식을 올리고 싶지마안∼ 아버님이 지금 폐관 수련 중이시라면서? 그래서 식은 아버님이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아, 예… 그러셨군요. 그럼 지금은 인사하러 오신 건가요?" 그러자 그녀의 웃음이 더 커졌다. "오호호호, 물론 원래는 인사차 오고 아버님이 폐관 수련을 끝내실 때까지 처가에 있어야 하겠지마안∼ 그이랑 나는 우리끼리의 혼인을 벌써 올렸거드은∼ 아, 아직 어린 아가씨에게 이런 이야기하면 안 되려나?" 그녀가 말하는 와중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서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러자 그녀가 얼른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쳇, 사람을 애 취급하는 거야? 나도 알 건 다 안다구우∼' "어쨌든 그래서 나는 여기에 있기로 영랑과 이야기가 되었단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해." 뭐, 부부 사이에 이야기가 다 되었다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마는 참으로 시기가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민이가 잡혀가고 할아버지가 폐관 수련을 할 때 은재영이 결혼을 한다니∼ 이거 민이가 잡혀가서 소가주라고 발표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안타까이 여겨야 할지……. 이전에는 은재영이 독신이고 후손을 생산할 생각을 안 하는 듯이 여겨서 나는, 아니, 다른 사람들 또한 민이가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는 데 별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뭐, 할아버지가 은재영을 제치고 민이를 곧바로 가주 자리에 앉히려고 하니까 쬐께 걱정을 했었지만. 하지만 그가 결혼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가 결혼을 했다는 건 후계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렇게 된다면 민이가 가주가 되려면 반드시 은재영을 거치지 않고 민이가 할아버지 뒤를 이어받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은재영이 먼저 물려받고 그 뒤로 민이가 예정된다면 아무리 민이가 소가주의 호칭을 받는다하더라도 은재영의 자식과 민이 사이의 가주 자리 다툼은 기정사실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설사 은재영의 자식이 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다손 치더라도 주위에서 그를 가만 내버려 둔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 건, 지금 어른들은 민이의 목숨이 보장된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이가 멀쩡히 살아 돌아오라는 것은 오로지 나밖에 알고 있지 못하니 어쩌면 어른들은 은재영의 혼인을 열렬히 환영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가주 자리를 생각하지 않고 볼 때 그가 결혼한다면 은씨의 핏줄은 더욱더 견고해질 테니까 세가를 걱정하는 이들로서는 사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에혀∼ 민이가 돌아오면 그냥 우리끼리 슬며시 사라지자고 할까? 어차피 우리는 진짜 은씨 핏줄도 아니고 말야.'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 말고도 은재영의 결혼을 100% 환영하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예 총관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그러나 혼인식을 치르지 않고 같이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저희 세가처럼 명망있는 집안에서는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가주님께서 나오신 뒤에 정식으로 매파를 보내어 청혼을 할 때까지 조금만 참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세가의 이미지를 생각한 듯했다. 그러자 은재영이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것 없어요. 여기에도 사정이 있으니 그냥 제가 하는 대로 해주세요." "하지만 도련님……." 예 총관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우리 세가의 일이라면 어떠한 것보다 우선으로 하는 자인데다 할아버지의 사제이기도 했기에 할아버지조차 그에게 항상 예의를 갖추고 존중해 주었기에 이렇게 은재영에게 맞설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은재영이 예 총관의 말을 자르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건 제 사적인 일입니다! 그런 것까지 당신의 허락을 받아야합니까?" 아무도 예상 못한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예 총관이 놀라 아무말도 못하는 사이 배 숙부가 나섰다. "사제, 예 총관님께서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지 않습니까? 게다가 사제의 혼사 문제가 어찌 사제만의 문제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은재영은 그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만두십시오. 아버지께서 안 계신 이상 이 집안의 결정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말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단호한 그의 말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하나 쏘아보는 그의 눈빛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더구나 그의 말 또한 이론적으로는 옳았기에 예 총관도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할아버지에게까지 존중을 받는다 하더라도 본래 직분은 우리 집안의 가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게 하나둘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도 엄마와 아빠에게 이끌려 나가면서 뒤를 힐끔 돌아보니 은재영은 여전히 기분 좋지 않은 표정으로-표정이 굳은 건 쑥스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기분 나빠서 그런 것 같았다-천장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는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연애해서 하는 혼인은 아닌가베…….' 뭐, 그랬든 아니든 은재영에게 호감을 갖지 못한 나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고, 게다가 가주 자리 다툼이 생긴다고 해도 그건 민이가 돌아온 후의 일이었기에 나는 그러려니 하고 어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숙모라고 온 그녀에게 관심을 끊었다. 그 후 나는 활발하게 집 안을 돌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집 안 분위기상 그녀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다 보니 그걸 바꾸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무림맹에서 급작스러운 연락이 날아들었다. 제갈세가의 전 가주, 그러니까 갈라진 마공 비급의 조각 순서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가 누군가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이었다. "에에? 그분은 그 뭐더라… 음음, 그분이 은거하시는 곳은 몇몇 사람 외에 아무도 모르는 데다가 그 주위에는 함정이나 어려운 진들이 펼쳐져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걸 누가 파괴했나 보죠?" "으음… 그건 아닌 것 같군요. 전서구에 쓰여 있기로는 손녀 분도 같이 잡혀갔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분이 아가씨와 친분이 있으시죠?" "저와요? 에… 제갈세가의 여식이라면… 설마 준희 언니가?!" 예 총관의 말에 나는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아니, 왜 제갈세가에 잘 있을 언니까지 갑자기 잡혀갔다는 거죠? 그럼 그 사람들이 제갈세가에 가서 언니를 납치해 제갈 전 가주님께 가서 협박이라도……." 거기까지 말한 나는 그녀가 헤어질 즈음에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그때 당시 그녀의 아버지인 현 제갈세가 가주가 그녀와 신기수 사이를 정식으로 허락해 주지 않아서 그녀의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으러 갈 거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녀가 할아버지에게 가는 걸 나쁜 사람들이 알고 미행하여 전 제갈세가 가주기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제갈준희를 납치해 그녀의 할아버지를 협박한 게 아닐까? '에… 설마… 그럴 리야… 가 아니라 가능한 일이로군. 근데 누가 그녀가 할아버지께 간다는 걸 알고 미행한 거지?' 무림맹에서는 전 제갈세가 가주와 그의 손녀를 되찾기 위하여 8대 세가와 9대 문파에 지원병(?)을 요청한 거였다. 아무래도 무림 맹주는 무림맹에서 보관하고 있는 마공 비급을 지키기 위하여 무림맹 인원을 아끼려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 세가에서는 엄마랑 아빠가 가게 되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흐음……." 내가 심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예 총관이 괜히 미안한지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예 총관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잖아요. 뭐, 하는 수 없죠. 엄마랑 아빠는 강하시니까 별일없이 돌아오시겠죠 뭐." 이미 결정된 사항에 내가 뭐라 왈가왈부할 수 없었지만, 왜 하필 엄마와 아빠가 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배 숙부도 있었고, 희여송에다가 그의 두 제자인 지원과 포능곽도 있었고, 은재영에다가 하다 못해 예철도 있는데 말이다. 이럴 때는 내가 세가의 일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민이와 나는 아직 세가의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세가의 일을 직접 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교육을 받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세가의 일에 결정권은 없었기에 이미 정해진 일에 의의를 제기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아마 할아버지는 올해 우리 생일이 지나고 나면 그제야 참여시킬 예정이신 듯했지만-민이를 그때 소가주라고 발표하신다는 걸 보니-민이 녀석이 납치되어 버렸으니 그게 예정대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차라리 이 기회에 나도 세가 일에 참여한다고 나서볼까?' 물론 예전 같았으면 세가에 참여할 수 있어도 내가 귀찮아서 이리 핑계 저리 핑계를 대어서라도 참여하지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민이에게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데다가 이번 일에서는 엄마와 아빠를 세가에서 떼어놓으려는 듯한 기분까지 들어 아무래도 내가 직접 참여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빠에게는 세가를 이을 권한이 없기는 하지만 상황이 이래서 그런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예 총관이 내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예?" "아가씨께서도 나이가 나이이신만큼 슬슬 세게의 일에 참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도련님-울 아빠를 말한다. 아빠가 은재영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렇게 불린다-내외분은 금방 돌아오지 못하실 듯하니 세가 일을 도울 겸 미리 배울 겸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그쪽으로 동하고 있던 터라 나는 그의 말을 좋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번쯤은 사양하는 겸양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예의 아니겠는가? "아, 제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괜찮겠어요? 세가의 다른 어른들이 허락해 주실지 모르겠네요." 내 말에서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읽었는지 예 총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가씨의 현명함이야 제가 잘 알고 있지요. 게다가 다른 분들께 여쭈어봐야 하겠지만 모두 허락해 주실 겁니다." 그렇게 예 총관이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의 자신감을 무색케 한 인물이 있었으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예 총관! 아직 어린아이에게 세가의 일을 돕도록 시킨다니…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더 늦게 시작해도 될 일입니다!" 은재영이었다. 그는 예 총관의 말을 듣자마자 더 들을 것도 없이 딱 부러지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고 저렇게 정색을 할 것까지야…….' "하지만 진이 아가씨도 충분히 세가의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세가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시는 게 아니라 이제 조금씩 배우시게 하려는 건데 그렇게 받대하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 총관이 한번 반박을 해봤다. 하지만 은재영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 17세도 되지 않은 아이입니다(아직 생일이 안 지나서 그렇지 몇 달 후면 17세다). 진이가 충분히 성장했다면 아버지께서 폐관 수련하시기 전에 언질을 하셨겠지요. 하지만 아무런 언질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아무리 총관, 당신이라도 마음대로 하겠다는 겁니까? 그러자 예 총관이 다시 한 번 더 반박을 했다. "도련님 또한 가주님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 아가씨를 부인으로 세가 안에 들이고 그분께도 세가의 일에 참여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진대 하물며 당연히 세가 일을 하셔야 할 진이 아가씨께서 조금 일찍 참여하는 건 왜 반대하시는 겁니까?" '에? 그럼 그 숙모도 벌써 세가 일을 하고 있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어?' 예 총관의 반박에 은재영이 화가 났는지 탁자를 손으로 내려쳤다. "그것과 이것은 다른 일입니다! 게다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아무튼 진이가 세가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그렇게 아시고 이만 물러나십시오!" 밖에서 몰래 엿듣고 있는 나를 비롯한 예성구, 유, 덕이, 예은, 예강까지도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이거이거… 너무 강경한 거 아냐? 기분 나쁘게끔… 꼭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러는 거 같잖아?' 예 총관은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이번에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예 총관이 은재영에게 계속 밀리는 듯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인지……. 그런데 예 총관이 미처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은재영이 예 총관을 불렀다. "아, 그리고… 내 처가 재정 장부를 보려고 했는데 못 보게 막았다고 하더군요? 마음대로 볼 수 있게 조처해 주세요." 그러자 예 총관의 언성이 높아졌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세가의 제정 장부를 보려면 가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실 텐데요?" "남도 아니고 제 처가 아닙니까? 조처해 주세요." 짜증스럽다는 은재영의 목소리에 예 총관의 굳은 목소리가 대꾸했다. "가주님의 하명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안 계실 때에는 세가의 결정권을 가진 자가 저라는 사실을 잊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장부에 대한 건 가주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합니다. 도련님은 아직 가주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정말 그러실 거예요?" 은재영의 목소리가 더욱더 짜증스러워졌지만 예 총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죄송하지만, 이것만은 뭐라 하셔도 가주님의 명이 없는 이상 안 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예 총관이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자 안에서는 다시 탁자를 내려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저 탁자에게 묵념을…….' 속으로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 총관이 나에게 다가와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아기씨의 심기만 불편하게 해드렸군요." "아니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전 이만……." 평소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예 총관이었는데, 지금은 약간 굳은 표정인 걸 보니 아무래도 그도 화가 많이 난 상태인 듯했다. 그래서 내 뒤에서 기웃대고 있던 예씨 문중의 자식(?)들은 그에게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멀어져 가는 그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하아… 이거 참, 분위기가 무거우니 숨조차도 제대로 못 쉬겠군. 이래서야 어디 제대로 숨 쉬고 살겠…켁!"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그걸 타개해 보고자 함인지 예강이 두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를 받치면서 괜히 큰 소리로 투덜대다가 예은에게 복부를 한 대 얻어맞았다. "시끄러! 숨 못 쉬겠으면 쉬지 않으면 되잖아!" "쳇." 예강이 예은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예성구가 그걸 가로막았다. "둘 다 시끄럽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게다가 너희들, 휴식 시간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의 엄한 말에 둘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채 머쓱한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후닥닥 사라져 갔다. "아가씨도 가시지요. 곧 배 숙부님께서 수련을 지도해 주실 시간입니다." 예성구에게 이끌려 내 처소로 발걸음을 하면서도 머리 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생각해 보니까 예 총관은 부모님이 무림맹으로 가게 된다면 낭게는 조금 미안해지기는 하겠지만 예 총관으로서는 잘된 일이잖아? 근데 그걸 은제영이 어떻게 순순히 따라준 거지? 이상해… 이상해… 그렇다면 왜 아빠와 엄마만을 보내려는 걸까? 보아하니 은재영 저 인간이 세가를 장악하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자신을 방해할 확률이 높은 배 숙부나 예철-예 총관의 둘째 아들-을 보내는 게 훨씬 더 이득 아냐? 엄마랑 아빠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데다 가주 자리에 욕심도 없어서 나와 민이에게 해만 가지 않는다면 아무런 방해도 안 할 텐데 말야.' 어차피 예 총관이나 배 숙부가 주장했거나 부모님이 자청해서 가게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봤자 은재영이 자신의 뜻에 안 맞으면 강력하게 반대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님이 가게 되었다는 건 은재영이 흔쾌히 허락했거나 아니면 그가 먼저 그렇게 보내자고 말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다른 거는 예 총관의 뜻에 계속 거슬리면서 왜 이번만은 이렇게 조용히 있는 거지?' 물론 배 숙부나 예철에게도 울 부모님보다 더 큰 권한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 총관과 은재영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예 총관을 선택할 이들인데다가 몇십 년 동안 세가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왔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은재영에게 반발한다면 제자들에게 혼란이 생길 터이고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은재영이 할아버지의 아들이라 해도 세가를 손에 넣는 데 힘이 들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물론 이건 나라는 은씨의 또 다른 핏줄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흐음… 그렇다면 나를 제거하려고 부모님을 보내려는 건가? 하지만 부모님이 안 계시다면 은영에서나 배 숙부나 더 나를 보호하려 들 텐데? 아냐아냐, 나를 그렇게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여자인데 말야, 으음… 머리 아프네…….' 게다가 그건 둘째 치고라도 갑자기 세가를 손에 놓으려는 은재영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할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세가를 차지하려 한다면 좋은 기회이긴 하자만, 세가 사람들은 민이가 살아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죽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가주 자리가 자신에게 올 것이라 여길 텐데 뭐 하러 이렇게 무리하게 세가를 손에 놓으려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이렇게 무리하게 일을 진척시키면 지금처럼 예 총관을 비롯한 세가 사람들에게 반발을 산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만약 민이가 있었다면 민이가 소가주로 선언된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런다고 이해나 하지 민이도 없는데 말야. 민이가 멀쩡히 살아 돌아오리라고 확신하는 건지, 아니면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건지… 아∼ 머리 아파. 나도 몰라. 에잇, 될 대로 되라지.' 그날 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명상 수련을 한답시고 세가 안에 마나를 퍼뜨려 세가 안의 기척들을 살피다가 예 총관과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밤늦도록 만나서 회담하는 것을 눈치 챘다. 요 근래 나는 밤마다 세가 안의 기척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예 총관과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만나는 것을 자주 발견하곤 했었기에 오늘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회담은 평소의 두세 배 정도는 길어졌다. '흐음… 오늘은 다른 때보다 되게 심각한 주제인가 보네.' 은재영의 처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오늘따라 은주-숙모가 된 여자-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은재영은 그녀를 정말로 사랑해서 결혼하려는 건 아닌 듯 했다. 평소 그는 그녀에게 항상 냉랭하게 대했고, 내가 살펴본 바로는 같이 자지 않고 항상 따로따로 잤었다. 물론 은주는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사근사근하게 대했지만. '웃긴 건 그러면서도 세가를 장악하는 일에 그녀를 동지로 삼았다는 거지. 그녀를 신뢰하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신뢰하는 게 뭐야, 어느 때보면 그녀를 되게 미워하는 것 같기도 하던데… 의논이나 제대로 하는지… 그러면서 왜 그녀를 세가에 데리고 온 걸까?' 엄마와 아빠는 그 다음날 세가를 떠나 무림맹을 향해서 출발했다. 두 분 다 민이도 할아버지도 없는 세가에 나 혼자 남겨둬서 몹시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그나마 예 총관이나 배 숙부를 믿고 있는 눈치였다. "진아, 엄마랑 아빠가 없는 동안 예 총관님이나 배 숙부님 말씀 잘 듣고 있어라. 부디 사고는 치지 말고. 알았지? 조신하게 있어야 해." "엄마는… 누가 들으면 엄마랑 아빠가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겠어요. 너무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너니까 걱정하는 거야. 민이도 없는데 너마저 어떻게 되면 엄마는 살지 못할 거다. 그러니까 명심해야 해." "훗, 엄마, 민이 녀석은 건강하게 잘 있을 거예요. 그 녀석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오면 엉덩이나 때려줄 준비나 하고 계세요." "그래그래, 알았다. 그러니 너도 몸조심해야 한다?" "예이∼ 엄마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빠도요∼" 나는 이미 말에 올라타 엄마를 기다리고 있던 아빠를 향해서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아빠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마." "예이∼" 엄마가 정말 마지못해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에 오르자 아빠를 위시한 세가의 제자 10여 명은 드디어 출발할 수 있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오오∼ 오실 때 선물 사 오시는 것 잊지 마시구요오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뒤에다 대고 신나게 소리치고 있는데 같이 마중 나와 있던 은주가 생긋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진이는 씩씩하네? 부모님과 떨어지게 됐는데도 겁도 안 나나봐?" "훗, 어린애도 아닌데 겁은요. 게다가 저도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거든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그녀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오우, 대단한데?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걱정없겠구나?" 묘한 뉘앙스가 있는 그녀의 말에 의아해진 내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녀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기에 나는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흐음… 결국 뭔 일을 벌일 모양이지? 훗, 그래, 어디 한번 해보셔요.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도 지켜보고.' [@연재] 제35화 꼬리가 길면 발각된다. 부모님이 무림맹으로 출발한 뒤 5일이 지나자 나는 왜 은재영이 울 부모님만 무림맹으로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은재영이 세가의 결정권자의 권한으로 예 총관을 총관 직에서 파직시켰던 것이었다. 그가 내건 이유는 나이가 있으니 이제 쉬게 해드려야 한다는 거지만 진짜 이유는 뻔했다. 예 총관이 모든 일에서 그에게 반박하고 나섰지만, 은재영은 할아버지와 같은 서열의 총관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보다는 그의 아들은 예현이 자신과 같은 서열이고 나이 차도 별로 안 나기에 더 다루기 쉬울 거라 생각하고 예 총관을 파직시킨 듯했다. "사제,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다! 예 총관님을 파직시키다니요? 당장 철회하세요!"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간 은재영의 서재에서는 나보다도 한발 앞서 도착한 배 숙부가 흥분하여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자 은재영이 얄미우리만치 침착하게 대꾸했다. "언제부터 사형께서 세가의 결정권자가 되셨습니까? 한재 세가의 결정권자는 바로 나입니다. 저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세가에 반항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렇다고 어떻게 몇십 년 동안 세가를 위하여 일해오신 총관님을 파직시킬 수 있는 겁니까?" "누가 들으면 제가 아주 못된 불한당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파직이라니요? 저는 단지 그동안 수고하셨으니 이만 쉬시면서 남은 인생을 즐기실 수 있게끔 배려한 것뿐입니다." "그게 무슨 배려입니까? 총관님께서는 한평생 세가를 위해 살아오셨고,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앗으려 하시다니요! 이 일을 스승님께서 허락하실 것 같습니까?" "허락하셨을지 모르지요. 아버님께서는 예 총관님을 무척 걱정하셨으니까요."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릴! 어떻게 이런 일을 사제, 당신 혼자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 어쩌겠습니까? 아버님도 안 계시고, 형님 또한 안 계신데. 아, 아직 세가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진이와 의논했어야 했나요?" "이… 이런!!" 낭패스러운 배 숙부의 표정, 그리고 승리자의 미소를 띠고 있는 은재영. 은재영은 이번 일을 위하여 아빠와 엄마를 무림맹으로 보내 버린 것이었다. 세가의 직위 대부분은 세가의 일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고 결정한다. 하지만 단 두 자리만은 은씨 세가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었다. 바로 가주의 자리와 총관의 자리였다. 이 자리는 현 가주가 결정하는 거였는데 여기에 반발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은씨 성을 가진 자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재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 가주 대리 직분을 맡고 있는 은재영이 총관 자리를 갈아치울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고, 여기에 반항할 수 있는 건 가주 자리를 이을 권한은 없다 하나 정식으로 양자가 된 울 아빠와 나뿐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재갈 전 가주의 사건 때문에 무림맹으로 출발한 지 며칠 되었으니 아빠에게 빨리 연락이 된다 하더라도 아빠가 다시 오려면 5일쯤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아빠가 돌아올지도 미지수이고, 난 아직 세가의 일에 참여하지도 못해 세가의 일에 뭐라 말할 권리가 없었다. 은재영은 이걸 노리고 예전에 예 총관이 내가 세가의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하는 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삼촌!" 그러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은재영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오! 어서 오너라, 진이야." 그의 얼굴에다 대고 엿이나 먹으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참으면서 물었다. "삼촌, 예 총관이 총관의 자리에서 물러나신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그래, 예 총관께서도 나이가 벌써 70이 넘으셨잖니. 이제는 쉬 실 때도 되었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예 총관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삼촌의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아버지도 이젠 쉬실 때가 되었지. 하지만 내가 가주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아 지금껏 가주 자리에 계신 거란다. 내가 아버지 생각을 너무 안 해드렸지." '얼씨구, 퍽이나 생각했겠다.' "그럼 할아버지가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오실 때 두분을 같이 쉬게 해드리는 건 어떨까요? 지금 예 총관만 쉬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네 할아버지께서 언제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오실지 아무도 모르지 않니? 게다가 가주 자리가 교체되는 건 총관 자리가 교체되는 건 총관 자리가 교체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거란다. 그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진이 넌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은재영의 목소리가 점점 차가워지는 걸 보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흠, 일단은 물러나는 게 좋겠지?' "삼촌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하는 수 없지요." 힘없이 그냥 물러난다는 사실에 배알이 꼴렸지만 미리미리 세가 안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끔 힘을 길러놓지 않은 내 잘못이었기에 꾸욱 참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 힘을 한번 길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은재영과 인주의 사이를 좀 알아봐야겠어.' 어차피 예 총관이 은재영에게 굴복하다 하더라도 금방 총관의 자리에서 물러나지는 못할 터였다. 아들에게 물려주더라도 인도 작업에는 2, 3일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게다가 지금 물러난다 할지라도 나중에라도 다시 복귀하면 될 테니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라 여겨졌기에 나는 우선 그 은주라는 갑자기 숙모가 된 여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요즘은 거의 매일 밤에 만나서 이야기했으니까 오늘 밤에도 만나겠지?딴 때는 몰라도 오늘은 예 총관을 파직시킨다고 선언했으니 분명히 만날 거다.' 오늘부터는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자정이 지나자 그날도 두 곳에서 회담이 열렸다. 도서관에서는 사서 할아버지와 예 총관 외에도 배 숙부와 예현-예총관의 맏아들-그리고 사서 할아버지의 제자인 담동이 모여들었다. '흐음, 도서관 쪽은 오늘따라 인원이 많아졌네? 하지만 은재영 쪽은 오늘도 단둘이로군.' 마나를 퍼뜨려 그들이 만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즉시 방에 결계를 치고 마법을 구현시켰다. "클레어로디언 디벤져!" 허공에 화면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걸 보고 있자니 민이가 생각났다. '그 녀석, 나 혼자만 또 이렇게 봤다는 걸 알면 삐치지 않으려나? 하기야 스스로가 원해서 혼자 있는 거니 뭐라 말 못하겠지. 흠, 검술 수련은 잘 되고 있는지…….' 민이가 뭐 하고 있는지 마법을 사용해서 볼 수도 있겠지만 한번도 시도해 보지는 않았다. 안 보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굳게 결심하고 간 녀석인데 녀석이 나타나 자신이 스스로 해낸 것을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 나타난 화면에는 무지 화려하게 치장된 방 정경이 비춰졌다. 커다란 방 안에는 비싸 보이는 금세공 장식품이나 화려한 도자기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호랑이 가죽이 깔려 있었다. 비단으로 된 식탁보가 덮인 탁자에는 은재영이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아무도 안 앉아 있는걸 보니 은주라는 여자는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왜 내가 너희 조직에게 자금을 대야 한다는 거지? 처음 나와 계약을 했을 때에는 그런 말은 없었잖아?" 그러자 간드러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방구석에서 흘러나왔다. "아아, 물론 없었지요. 단지 당신께 다시 건의를 하는 거랍니다. 새로운 계약을 해보지 않겠냐구요." 그 말 후에 여자는 방구석에 있던 꽃들이 화려하게 수 놓인 병풍 뒤에서 걸어나왔다. 야시시해 보이지만 되게 편해 보이는 가운 비스무리한 옷을 걸치고 나온 걸 보니 거기서 옷을 갈아입었나보다. "흥, 내가 너희 조직을 어떻게 믿지? 난 너희 조직에서 말한 조건을 지켰다. 하지만 너희는 지키지 않았어. 그런데 뭘 보고 자금을 대준단 말이냐? 훗, 자금이 쪼들리는 걸 보니 조직 운영이 잘 되지 않나 보지? 그녀는 유연한 걸음걸이로 탁자로 다가와 우아한 포즈로 걸터 앉은 후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호호호, 그런 건 아니랍니다. 단지 저는 당신이 미리 우리 조직에 자금을 댐으로써 좀 더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 어떨까 싶은 거지요. 어쨌든 저도 당분간은 당신 곁에 있어야 하는데 높은 대우를 받는 사람 옆에 있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훗, 대우라… 난 네가 세가에 들어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네가 없더라도 나 스스로도 세가를 손에 놓을 수 있어. 게다가 너희 조직과 계속 연결되고 싶은 맘도 없고." 그러자 그녀는 짙은 미소와 함께 눈을 가늘게 뜨며 은재영을 바라봤다. "어머나,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보아하니 세가의 중심 인물들 중에서 당신 편은 한 명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더군요. 그런데 혼자서 할 수 있다고요? 호호, 좀 힘들걸요? 그나마 내가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기에 사람들 정신이 분산되어서 나아진 거 아닌가요? 도대체 그동안 세가에서 당신 편도 한 명 안 만들고 뭐 하고 있었는지." 비웃는 듯한 어조에 은재영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너희들이 제대로만 했으면 이런 귀찮은 일들을 하지 않아도 가주는 내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아, 물론 우리로서도 생각지 못한 변수가 나타나긴 했지요. 상부에서도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한시라도 빨리 민이 녀석의 목을 나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까지 민이 녀석을 그렇게 살려둘 셈이지? 민이 녀석을 죽일 생각이 정말 있는 것인가?" 충격적인 말이었다. '잠깐만! 그러면 은재영은 민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세가를 장악하려 했던 거야? 게다가 민이를 데리고 있는 조직과 거래까지 했다고? 민이를 죽이기 위해서? 하, 그리고 그 조직원과의 연락책이 저 은주라는 여자란 말이지? 잠깐만, 그럼 민이를 납치해 간 녀석은 소림사에서 마공 비급의 조각을 가져간 그 남자잖아? 그럼 저 여자의 조직이 마공 비급의 조각을 모으고 있단 말야?' 한번 시작된 생각은 끝이 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 생각이 계속됨으로 인하여 의문의 숫자는 계속 늘어만 갔다. '그렇다면… 은씨 세가에서 보관하고 있던 마공 비급 조각은 은재영이 넘겨줬겠네? 그렇다면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 이해가 가. 그런데 왜 은재영은 세가를 장악하려는 거지? 민이는 저들 조직의 손 안에 있고 은재영에게 민이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며? 근데 뭐 하러 이렇게 힘을 들여서…….' 하지만 그러한 내 생각은 계속 들려오는 대화에 중단되었다. 은주란 여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한심하다는 감정을 살짝 드러내며 은재영을 향해 흘러나왔다. "그건 전에도 설명해 드린 것 같은데요. 은민 군은 나중에 은씨 세가에 가할 협박의 도구로 사용될 겁니다. 그러려면 인질이 무사함을 보여줘야 하지요. 그 후에 확실하게 처리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흥, 민이 녀석이 없다면 세가는 당연히 내 차지야. 그렇다면 너희들이 나중에 세상을 볶든 지지든 나는 가만히 있어줄 요량이 있다." "호호호, 물론 당신은 그리해 주시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우리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은민을 우리가 죽였다는 것쯤 누구라도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세가에서 가만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때를 대비하려는 거지요." "흥… 아무리 그래도 민이 녀석만 없다면……." "흐흥, 자꾸 같은 설명을 하게 만들지 마시고 현재의 이야기를 하죠. 제가 세가의 제정에 관여할 수 있는 건 언제쯤이 될까요?" "빠른 시간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해주지." 그녀랑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조차 싫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리며 퉁명스레 대답하는 은재영을 바라보며 그녀는 이를 드러낼 정도로 비웃는 미소를 짙게 지어 보였다. 아마도 은재영이 보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겠지만. "빠른 시간이라… 하지만 쉽지는 않을껄요? 그 총관의 첫째 아들이던가? 곧 새로운 총관이 될 사람 말이에요. 그도 꽤 만만치 않을 것처럼 보이던데요?" 그러자 은재영의 고개가 획 돌아와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잘 알면 네가 해보지 그래?" 은주는 그런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도 전혀 꿀리지 않았지만 은재영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다 생각했는지 배시시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호호호, 저에게 무슨 힘이 있겠어요? 저야 미래의 가주님께서 해결해 주길 기다릴 뿐인데요." "흥, 예현이라면 지금 총관보다는 더 다루기가 쉬울 테니 걱정 마." 은재영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지간히 삐걱거리는 동지들이었다. "아, 그건 그렇고… 내일은 잠깐 외출할 거예요. 그래도 되겠죠? 본문에서 사람이 나온다더군요. 그때 여기에서 자금을 대줄 거라고 말해 놓을까요?"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지. 하지만 설사 내가 그럴 마음이 생긴다 해도 당분간은 힘들 테니 장담은 하지 마라." 은재영이 이제 대화를 끝내고 싶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게 전하죠." 은재영을 화면의 목표로 삼았기에 은재영이 그 방에서 나감에 따라 나는 더 이상 은주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으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은주란 여자에게 초점을 맞출 걸 그랬네. 담부터 그래야지.' 잔뜩 찡그린 얼굴인 은재영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을 끄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일 그 여자가 본 문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홋,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럼 나도 한번 따라가 볼까나?' [@연재] 제35화 꼬리가 길면 발각된다. (끝까지) 다음날 그녀가 언제 나갈지 몰라 계속 살펴보느라 아침부터 세가 안에 마나를 퍼뜨리고 있던 나는 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수련 시간에도 집중 안 하고 딴생각만 하고 있다고 배 숙부에게 몇 번이나 지적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냥 마나를 퍼뜨리며 기척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어야 했기에 그녀의 기척에 계속 정신을 집중 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진짜 정신이 두 개로 분열되어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던 나는 다른 것들은 포기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정신을 딴 데로 팔고 있는 것처럼 보여-사실이 그렇지만-검술 수련을 봐주던 배 숙부에게 꾸지람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이제나저제나 그녀가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중 드디어 그녀가 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나가려면 빨리 갈 것이지 왜 이제야 나가는 거야? 기다리느라 지칠 뻔했다고!' 하지만 참으로 공교롭게도 그녀가 세가를 빠져나가는 시각이 하필이면 내가 수업을 받던 중이었다. 요즘은 세가의 일을 할 때를 대비한다고 하여 교양 말고도 이것저것 더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무가의 자식이라도 무공만 잘한다고 만사가 형통인 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물론 평소에도 되게 공부하기 싫어했지만…-집중을 안 하는 탓인지 날 가르치던 선생이 수업을 중단하고 막 잔소리를 하려던 찰나였다. "선생님, 정말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그가 막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내가 선수 쳐서 입을 열자 그가 말을 채 꺼내지도 못하고 어리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너무나 미안한 미소를 씨익 보여주고 낮게 중얼거렸다. "슬립!" 내 마법에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책상 위로 그대로 엎어졌다. '훗, 이걸로 나머지 수업들도 땡땡이닷!' 은주라는 여자의 정체를 밝힐지도 모른다는 것보다는 오후 수업들을 땡땡이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자, 그러면…….' 내가 공부는 무지하기 싫어했지만, 그래도 수업 시간만은 착실히 지켰기 때문에 항상 내 곁에 있던 유와 덕이는 내가 수업받는 시간에는 자신들의 할 일을 하고는 했다. '고로, 지금 방문 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 홋홋홋, 평소에는 수업 제대로 들어줬으니 오늘 같은 날은 봐주겠지?' 문밖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그곳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떠올랐다. 걸어서 세가를 빠져나가려고 했다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가 있었기에 미리미리 그러한 제거할 겸 그 은주라는 여자를 쉽게 미행할 겸 택한 방법이었다. 하늘 높이 떠올라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주니 과연 호위 무사는커녕 시녀 한 명 없이 홀로 큰길을 따라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헤에, 용케 혼자 세가를 나섰네? 아무리 명목상이래도 은재영의 부인인데 말야. 하기야 지금 어딜 가는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겠지? 그런데 성 밖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성 변두리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갈 것이라는 내 예상을 깨고 그녀가 찾아간 곳은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거리는 시장 길목이었다. '뭐야, 미행이 있을까 봐 그러는 거야?' 첩보 영화 같은 데 보면 주인공이 누굴 만나러 갈 때는 미행이 있을까 봐 괜히 멀리 돌아서 가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시정 거리나 백화점 같은 곳을 통과하여 힘들게 가는 적이 많았기에 나는 그녀가 그런 것이라 여긴 것이다. 과연 내 생각이 맞았는지 그녀가 시장 거리를 계속 따라가다가 들어간 곳은 노리개 같은 장식품과 화장품, 비단 등등을 파는 여자들이나 찾을 법한 상점이었다. '참내, 이 시대에도 이런 미행 따돌리기가 있었네. 하기야 미행은 보통 남자들이 할 테니 저런 여자들을 위한 상점에는 들어가기 어렵겠지? 과연 머리 좋은걸?' 이런 걸 보고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하는 법이다. 나는 내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만족하면서, 이렇게 위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란 사실에 뿌듯해하면서 기분 좋게 그녀가 다시 상점 뒷문으로 나와-보통 첩보 영화에서도 뒷문으로 몰래 나갔으니까-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지 대충 짧게 잡아도 15분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올 생각이 없는지 도통 보이질 않는 거였다. '뭐야,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참내, 자기도 여자라고 상점 안을 구경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면서 5분쯤 더 기다려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뭐야? 왜 안 나와? 정말 뭐 사려고 그러는 거야?' 조금씩 생긴 불안감을 해소시키지 못한 나는 내 몸으로 거두어 들였던 마나들을 다시 공중으로 풀어놨다. 그녀의 기척을 찾기 위해서였다. '빨랑빨랑 좀 나올 것이지. 뭐 하느라 꼼지락대서 불안하게 만드는 거야?' 그러나 마나를 풀어 그녀의 기척을 살펴본 결과 역시나 그녀는 상점 안에 없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상점 뒤쪽에 있는 작은 주택 안에 있었던 것이다. '왜 저기 있는 거지? 여기가 아는 사람 집이었나? 근데… 어째 좀 아래쪽에 있는 것 같다?' 설마설마 하는 감정에 그 주택 안에 있는 작은 뜰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나는 그 뜰의 구석진 곳에 조용히 내려섰다. 그런데 은주라는 여자의 기척은 내가 땅에 내려섰음에도 불구하고 더 밑쪽에서 느껴지는 게 아닌가? '지하? 지하에 들어가 있단 말이지? 에? 그렇다면 여기가 그녀가 말한 그 본 문에서 온 사람을 만나는 곳이란 말야? 그렇다면 여기가 그녀가 속한 조직의 비밀 기지?' 생각 외였다. 이런 걸 바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걸까? 나는 그녀가 속한 조직이 되게 비밀스러운 곳이라고 해서 성밖의 음침한 관제묘라든지, 아니면 아무도 찾지 않는 거의 허물어져 가는 사당, 아니면 성 변두리의 인적이 없는 외딴 곳에 있는 오두막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그런데 성 번화가에 번 듯이 자리한 여자 용품 상점이었다니……. '허참… 진짜 깨네… 하기야 여자 용품 상점이니 은주라는 여자가 쉽게 드나들 수 있었겠군. 어쨌든 그렇다면 한번 이 기지를 뒤져 볼까나?' 내가 은주라는 여자를 뒤쫓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이상한 비밀스런 조직에 속해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서 세가에서 그녀를 쫓아내려는 생각이었다. 이 시대에는 비디오는커녕 녹음기나 하다 못해 마법도 없어서 이렇게 귀찮은 작업을 동반한 증거를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솔직히 그녀가 속해 있는 조직에 대해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은재영과 저 여자를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은재영까지는 어렵더라도 저 여자라도 몰아낸다면 은재영도 잠시 주춤할 것이 뻔했다. 조직에 대한 것이야 민이가 그 조직 안에 있다니 나중에 민이가 있는 곳을 급습해 뒤져 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거였다. '자, 그럼 어디 한번… 컨실 마이 셀프!' 내 기척과 몸을 완전히 숨겨주는 마법을 건 뒤 천천히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건물은 평민들 중에서 꽤나 잘 산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큰 저택이었는데 2층 건물이었다. '으음… 어디를 먼저 가볼까나… 그래, 우선 지하에 먼저 가볼까? 보통 그런 데다 중요한 물품을 숨겨두잖아?' 역시 난 한국에 있을 때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때의 영향이 지금까지 이렇게 미치고 있지. 지하에 제일 먼저 가보기로 한 나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일층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지하로 가는 통로는커녕 비스무리한 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나무로 된 바닥에 통로가 숨겨져 있을까 봐 저택 안에 있던 방 안의 바닥이란 바닥은 다 두들겨 보고, 또 침대 밑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 침대 밑에도 샅샅이 조사를 해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한 나는 괜한 먼지만 잔뜩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내가 한 가지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에혀∼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나 왜 이렇게 바보지? 중요한 걸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가는 통로를 이렇게 경비가 허술한 데다가 만들 리가 없잖아? 어휴∼' 그랬다. 내가 저택의 일층을 샅샅이 뒤지며 바닥도 두들겨 보고 침대도 움직여 보는 와중에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어차피 지나가 봤자 내 존재를 눈치 채지는 못할 테지만, 이곳이 비밀 조직의 기지라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무공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 텐데 방마다 콩콩콩하고 바닥 두드리는 소리가 나도,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도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고 와보질 않는 거였다. '아… 정말… 처음부터 그걸 알아챘다면 괜한 헛수고는 하지 않았을 거 아냐? 에혀∼ 그럼 이층을 뒤져 봐야 하나? 하지만 분명히 그 은주라는 여자는 지하에 있는 것 같은데… 음… 역시 지하로 가는 통로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걸 보니 분명히 그곳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거야. 하지만 그 통로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에혀∼' 몇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일층을 뒤지고 있었기에 나는 휴식을 취할 겸 마나를 아낄 겸 마나를 풀고 있는 동안 몸을 숨길 곳을 찾느라 다시 저택 밖으로 나왔다. 몸이 보이는 것을 막아주고 기척도 가려주는 마법이 비록 4클래스의 마법이긴 하지만, 몇 시간하고 있다 보면 마나의 소모량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곳을 앚기 다 뒤져 보지도, 아니, 뒤지는 것을 시작해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나의 소모량이 많았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마나의 양이 모자라 낭패를 보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내공 수련으로 마나를 모을 수도 없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조금이라도 마나가 보충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체엣, 이곳 마나의 농도가 내가 살고 있던 세계와 비슷하다면 마나가 모자를까 봐 걱정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투덜대며 나는 저택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작으나마 꽃밭도 있었고 그 옆에 앉아서 쉴 수 있게끔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담 근처에는 키 작은 나무가 삥 둘러서 심어져 있었다. '으음…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지? 그렇게 마땅한 데가 없네. 차라리 집 안에서 숨을 걸 그랬나?' 그곳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기는 하지만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 몸을 숨길 만한 구석진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저택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산책이라도 하려는 듯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그 남자의 눈은 연신 주위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조심스레 걸어온 남자는 내가 숨조차 안 쉬며 서 있는 곳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며 내 심장을 벌렁이게 해놓고 탁자에 다가가 다시 한 번 주위를 돌아보더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지 탁자의 윗부분을 한 바퀴 삥 돌렸다. 이 탁자는 다리가 중앙에 하나뿐이었고 그 다리를 받치는 지지대가 좀 넓적한 스타일의 탁자였다. 돌로 되어 있어서 윗부분도 되게 무거울 것처럼 보였는데 그 남자는 아주 쉽게 탁자의 목을 돌려 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의자 하나를 밀어놓고는 탁자를 옆으로 넘어뜨리는 거였다. 그러자 그 탁자 밑에는 장정 한 명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의 시커먼 구멍이 드러났다. '헐… 바로 저곳에 통로가 있었구나!' 그 남자는 그 구멍에 몸을 집어넣고는 익숙한 듯이 탁자를 밑에서 잡아 바로 해놓았다. 그러자 탁자의 윗부분이 제 스스로 한 바퀴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아항, 저 목 부분이 통로를 잠그는 장치인가 보지?" 그제야 통로를 발견했다는 기분에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을 싸그리 잊어버리고 그 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 남자가 했던 것처럼 탁자의 목 부분을 비틀고는 옆으로 쓰러뜨렸다. 역시 돌로 만들어진 것이라 되게 무거웠는데 아주 쉽게 쓰러뜨리고 밑으로 내려가서도 다시 바로 세운 걸 보니 그 남자는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아래의 공간은 마치 지하에다 집을 지어놓은 것만 같았다. 내가 내려온 구멍은 현관이었고 착지한 곳은 마치 거실과도 같았다. 그런데다 복도가 나 있었고 그곳에는 일정한 거리거리마다 횃불이 벽에 붙어 있어서 어두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오옷, 이것이 바로 내가 기대했던 비밀 기지의 풍경이야!' 정말 비밀 기지다운 모습에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조용히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으니 우선 한번 둘러본 다음 천천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쉴 곳도 찾아서 좀 쉬고 말이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이 나 혼자였지만 복도를 따라 조심스레 걸어 들어감에 따라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한둘은 아니었다. 복도의 양 옆으로 한쪽에 다섯 명씩 나란히 서 있었는데 복도의 벽안에 무슨 공간이 있는지 그 속에 들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적이 오면 잽싸게 나타나서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마나를 공중에 풀어 주위의 기척을 감지하고 있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런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 그곳을 지나갔다. 몇 개의 방문을 지나쳤지만 그 안에는 모두 사람들이 있어서 감히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복도를 따라 계속 걷던 나는 결국 그 복도의 끝에 다다라 버렸다. 그곳에는 밑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기에 나는 뒤돌아갈 수는 없어 하는 수 없이 조심스레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곳에는 아마도 감옥인 듯했다. 위쪽보다는 더욱 띄엄띄엄 있는 횃불들 때문인지 위층보다는 되게 어두컴컴했고, 양 옆으로는 자그마한 쇠창살이 달린 데다 습기가 찬 지하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검게 곰팡이가 잔뜩 낀 나무문들이 굳게 닫힌 채 주르르 늘어서 있었다. '에… 괜히 내려왔나 봐. 감옥만 있는데 말야. 근데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 가둬둔 사람이 아무도 없나 보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대기 중에 퍼뜨린 내 마나에 희미한 두 명의 사람이 감지되었다. '어? 사람이 있긴 있었네? 뭐아, 그럼 도망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그래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여기서 잠시 쉬어갈 생각을 하고 잠기지 않은 감옥 문을 찾으려고 걸어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어… 이상하다. 기척이 되게 익숙한데? 그럼 여기 갇힌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인가?' 내가 기척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세가에서도 내공이 높은 사람들뿐이었고, 일반 제자들의 기척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주 익숙한 듯한 기척의 느낌에 나는 의아해져서는 조심스레 그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두 기척 모두 나에게는 익숙해 있었는데 그 둘은 따로따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흐음… 둘 다 독방을 쓰고 있네. 그럼 기척이 약한 곳부터…….' 나는 슬며시 감옥 문에 달려 있는 자그마한 쇠창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 안을 밝혀주는 횃불이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빛이라고는 복도에서 내가 들여다보는 쇠창살을 통해 들어가는 빛 뿐이었다. 그 빛에 의지해 바라보니 희끄무레한 인영이 습기 찬 차가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얼마나 빗지 못했는지 까치집이 되어 있는 데다 얼굴은 보이지도 않아 낯익은 기척을 가진 그, 혹은 그녀가 누구인지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그냥 들어가 볼까?' 주위를 살펴보니 이층에는 감옥에 갇힌 사람 둘과 나뿐이었다. '좋았어.' 우선 나는 나에게 시전한 마법을 풀었다. 저 안에 들어가서 인영을 흔드는데 투명 인간이 흔든다는 걸 알면 저 사람이 얼마나 놀라겠는가? 문을 슬며시 밀자 역시나 잠겨 있어서 살짝 흔들릴 뿐 열리지는 않았다. '오오, 여기 자물쇠가 있네? 오홋홋홋, 류미르와 열심히 익혔던 그 마법을 사용해 볼 찬스닷. 언록!' 잠겨 있는 자물쇠나 빗장 등을 여는 마법이었다. 내 손에서 희뿌연 빛이 반짝이는가 싶더니만 자물쇠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쉽게 열렸다. '와우! 이거 되게 편리한 마법인데?' 감옥 문에 달린 경첩이 되게 녹슬었는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는데도 불구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크게 나버렸다. 끼이이익∼ 그 소리에 지레 놀라 버린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혹시나 이 소리를 듣고 누가 올까 봐 긴장하고 서 있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내려올 낌새는 보이지 않았고, 감옥 안에 쓰러져 있는 인영조차도 움직이지 않자 나는 안심을 하고 감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감옥 안에 있던 사람은 내가 바로 옆까지 다가갔음에도 아는지 모르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냘픈 어깨가 숨을 쉴 때마다 살짝살짝 오르락내리락거려 살아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겨, 이봐요." 나는 그 인영의 어깨를 살짝 흔들며 불러보았다. 하지만 그 인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기요, 자나요?" 조금 더 세게 흔들자 그 인영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 누구……." 얼굴은 얼마나 세수를 못하고 있었는지 얼룩덜룩했고, 입술은 비쩍 말라 다 갈라 터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못 알아볼 얼굴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즉시 경악에 차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 준희 언니?"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멍청한 얼굴로 초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누구세요?" "언니, 언니, 정신 차려요! 나 모르겠어요? 나 진이예요. 은씨 세가의 인진! 언니의 연애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잖아요?" "진이? 진이?" 눈을 깜빡이며 내 이름을 되뇌어보던 제갈준희는 잠시 후에야 생각났다는 듯 제대로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이니? 너니?" 그 모습에 나는 얕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겨우 정신은 차린 것 같네? 언니, 이거 몇 개로 보여요?" 손가락 두 개를 펴서 그녀의 눈앞에 대고 흔들자 그녀가 피식 웃더니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여서 나는 얼른 그녀의 몸을 부축해 줬다. "아아, 고마워. 그런데 넌 어떻게 여기 있는 거니?" 그녀의 목소리는 쉬어서 막 갈라져 나오고 있었다. "그게, 어떤 수상한 여자 뒤를 미행하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설마 언니가 여기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네. 언니 일어설 수 있어요?" "조금만 부축해 줄래? 하아……."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진아, 혹시 신 대협을 보지 못했니? 나랑 같이 이곳으로 끌려온 것 같은데……." 그제야 나는 다른 감옥에 홀로 갇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아, 저쪽에 갇힌 사람이 신 대협이었나 보죠? 걱정 마세요. 내가 구해줄게요." 나는 제갈준희를 복도로 데리고 나와 그곳에 앉혀놓고는 신기수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도 역시 마법을 사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제갈준희보다 더욱더 처참한 모습으로 있는 신기수가 있었다. 두 개의 굵은 철사가 그의 양 쇄골을 뚫고 있었고, 그 철사는 쇠사슬로 인하여 벽에 연결되어 있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쇄골이 뚫려 버리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그 모습을 직접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해 보였다. '아아… 정말… 이런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말야. 이렇게 힘이 없어서 기력이 약해져 있으니 내가 금방 눈치를 못 챘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나는 우선 신기수의 쇄골을 뚫고 있는 두 철사를 쇠사슬로부터 분리해 내었다. 다행히 신기수가 의식을 잃고 있었기에 마음 놓고 마법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오늘 하루 자물쇠 푸는 마법을 유용하게 사용하는걸?' 뼈를 뚫고 있는 철사를 최대한 조심스레 빼내긴 했지만 그게 엄청 고통스러웠는지 신기수가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크윽……!" "아, 미안해요. 아프죠?" 당연한 걸 물어보는 나를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던 신기수는 잠시 후에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으, 은진?" "헤에, 신 대협은 준희 언니보다 그나마 났네요. 언니는 첨에 날 알아보지도 못하던데… 아, 근데 일어설 수 있겠어요? 저기…내가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라서 약 같은 건 가져오지 못했거든요. 견딜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 정신을 잃고 있었으면 그나마 회복 마법이라도 사용해 주겠지만, 척 보고 날 알아볼 정도로 정신이 또렷했기에 그러지는 못한 채 그의 눈치만 살폈다. "아아… 그래요. 일어날 수는 있을 것 같군요." 그러고는 그는 낑낑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양팔을 통증 때문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그런지 일어서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휘청휘청대는 그와 함께 복도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제갈준희가 반색을 하며 우리를 맞았다. "신 대협, 신 대혀여어업∼!" 제갈준희는 신기수의 품에 안기려고 했지만 신기수의 팔을 건드리는 순간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기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크윽∼" "신 대협! 괜찮으세요? 어딜 다친 거예요?" "으윽… 괘, 괜찮소. 하아, 하아… 견딜 만해요." 하지만 신기수의 말을 그대로 믿지 못하는 제갈준희가 신기수의 옷을 벗겨 그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울먹이면서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매기 시작했다. "세, 세상에나… 왜 이런 짓을……." 그 옷은 오랫동안 빨지 않아서 엄청 지저분했다. 그걸로 상처를 싸맸다가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둘만의 무드에 빠져 있는데 끼어들기도 그렇고 해서 나는 슬그머니 그들과 떨어져 나와 위층을 살펴보고 빠져나갈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뭐, 나중에 소독해 주면 괜찮겠지.' 하지만 내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채 밟기도 전에 나는 위층에서 나는 듯한 무척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 뭔 일이래? 혹시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들킨 건가?'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여차하면 마법을 사용할 마음을 먹은 채 빠른 속도로, 그러나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내가 계단을 다 올라가기도 전에 위층 복도와 연결된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사람이 빠르게 내려오는 거였다. '이런!' 너무 다급한 김에 누구인지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마법을 날리려는데 문을 열고 내려오던 사람이 그보다도 먼저 소리를 쳤다. "주군!!" "엑?" 아이스 미사일이라고 막 외치려 했던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시동아가 외쳐지는 걸 막기 위해 급하게 입을 다물다가 혀를 깨물어 버렸다. "아구구구∼" 그러자 나를 놀라게 했던 그 인물이 황급히 다가와서 나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주군, 다치셨습니까? 어딜 다치셨습니까? 관찮으신 겁니까?" "아구, 아구, 아구구… 유… 조용히 좀 해. 아구… 아파라. 너 때문에 혀 깨문 거란 말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하자 유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하.하……. 그러신 거였습니까?" 그때 다시 불쑥 나타난 또 다른 사람 한 명. "아따, 거시기… 주군 땜시 행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신다요? 주군 찾는다고 성 전체를 들아다녔다가 포도시-가까스로, 겨우겨우-찾았당께요!!" 덕이였다. 덕이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더 이상 유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에… 그랬어? 호호호… 미안, 워낙 급해 가시고 둘에게 말할 사이도 없었어." '원래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물론 둘은 내 맘을 훤히 꿰뚫고 있었기에 내 말을 그렇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의 눈초리를 계속 받고 있기에는 내 양심이 너무나(?) 연약했기에 나는 얼른 화재를 돌릴 겸 그 둘을 이끌고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아, 그런데 둘 다 마침 잘 왔어. 나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되었었는데 너무 잘됐지 뭐야? 유, 이번에도 나에게 묻혀놓은 그 천리향이라는 거 냄새를 맡고 찾은 거야? 그런데 도대체 그 천리향은 언제 묻혀놓은 거야?" 그러자 유가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천리향이라는 건 한번 묻히면 한 달 정도는 그 냄새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주군께서는 언제 어느 시기에 감쪽같이 사라지실지 알 수가 없으니 항상 냄새가 사라지지 않게 신경 쓰고 있습니다." "엣… 뭐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항상 말썽만 일이키는 것 같잖아?" "그게 사실 아니다요? 전에 소림사에서도 주군 땜시 이넘 간뎅이가 덜렁덜렁했지라." "아하하… 예전 이야기는 뭐 하러 꺼내? 남세스럽게." '이거 참… 내가 얼마나 일을 저질렀다고…….' 그렇게 속으로는 궁시렁궁시렁대면서 그 둘을 이끌고 간 곳은 당연 지하 감옥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 복도에는 이제 막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는지 진지하고 굳은 표정으로 이것저것 의논하는 재갈준희와 신기수가 있었다. "야호∼ 언니, 저 왔어요." 우리가 내려온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탓이었을까? 내 말에 그 둘은 놀라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내 뒤에 버티고 있는 두 장정을 보고 또 한 번 놀라 버렸다. "지, 진아?" 걱정스러움과 두려움이 가득한 제갈준희의 말에 나는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활달하게 그 넷을 서로 소개시켜 주기 시작했다. "자자, 소개해 드릴게요. 이쪽은 내 수하들이에요. 유는 예전에 무림대회 때 본 적이 있을 테니 아실 테고, 이쪽은 덕이라고 나중에 내 수하가 된 사람이에요. 두 분은 처음 보시겠지요? 유, 유는 이 두 분을 알지? 제갈세가의 준희 언니하고 신기수 대협 말야. 덕이는 처음 보겠네?" 그러자 제갈준희는 안도감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반갑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 보였지만 신기수의 얼굴은 더욱 더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위에 있는 소란이 이 둘로 인한 거요?" 유한테 직접 묻지 않고 나를 보고 묻는 태도가 기분 나빴다. '아니, 기껏 도와주러 왔는데 왜 저런 태도야?' "그게 뭐 어쨌는데요?" 내가 그가 묻는 것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다시 되물으며 인상을 구기자 험악해진 분위기를 타개하려는 듯 얼른 제갈준희가 나섰다. "진이야, 신 대협은 사태가 심각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저들이 누군가 이곳으로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면 밖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있을 테니 진이가 우리 때문에 이곳에 붙잡힐까 봐 그러는 거지." 그리고 그 뒤를 신기수가 이어받았다. "이곳은 입구가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곳만 막힌다면 우리는 잡히거나 죽는 수밖에 없소. 만약 이곳에 들어올 때 적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탈출할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들켰다면……." 거기까지 말한 신기수는 덕이와 유, 그리고 나를 차례로 보더니 절망한 어조로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당신들 셋이 저 밖에 있는 인원을 다 감당하지 못한다면 끝장 아니겠소?" 그러자 유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 밖의 소란은 저희 세가의 제자들이 일으킨 소란이거든요." 그의 말에 제갈준희와 신기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난 오히려 간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버렸다. "에? 당신들만 온 거 아니었어?" 세가의 제자들가지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건 일이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는 뜻이었다. 나는 단지 은주란 여자를 세가에서 내쫓을 증거만 얻으려고 왔는데 우연찮게 제갈준희와 신기수를 만나 일이 쬐께 어려워졌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딱 이짝이었다. "세가의 제자들이 이곳을 쳐들어왔다니… 난 집에 돌아가면 죽었다." 절망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며 덕이와 유를 너무나 원망스럽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유가 '왜 날 보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끌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그런 권리가 있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있다고 해도 일을 크게 벌였다간 주군이 어찌 될지 뻔히 아는데 그러겠습니까? 저는 단지 덕이와 단둘이서 이곳으로 몰래 숨어들었는데 나중에 세가의 무사들과 제자들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 소란을 틈타 쉽게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 그래? 그럼 아직 내가 여기 있다는 건 모른다는 거지?" 나는 조금의 안도를 느끼며 희망을 확인차 물었지만 덕이가 이런 내 자그마한 희망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그게… 긍께… 저그가 세가 사람들에게 들켜 가지고… 거시기……." "허걱! 세가 무사들이 너희를 봤단 말이지? 에고… 난 몰라. 유, 혹시 이곳에 온 무사들 지휘자가 누구인지 알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배 대협과 여송이도 같이 온 것 같습니다." "으미… 하필이면 배 숙부하고 희여송이 왔어? 당신들을 봤으니 날 찾아내지 않으면 돌아가지도 않겠네. 몰라몰라, 빨랑 가자. 빨랑 가서 배 숙부를 보면 시치미를 딱 떼……." 유의 말에 더욱더 절망을 느낀 나는 빨랑 이곳에서 사라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지…….' 타이밍이 너무나도 잘 맞게 배 숙부와 희여송이 지하 감옥 출입구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뒤에는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당동이 같이 있었다. '에… 은영까지 왔네.' 배 숙부는 나를 보더니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진아." "예옛!!" 잔뜩 얼어가지고 나도 모르게 부동 자세까지 취하며 대답하자 배 숙부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다친 덴 없느냐?" "예?" 뭔 불호령이 떨어질까 두려워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떨어지자 나는 잘못 들었나 하고 다시 되물었다. "네가 무사한지 물었다. 어디 다친 덴 없느냐?" "아, 예, 저는 멀쩡합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끝이 가서는 빙그레 미소까지 지어주며 내게 다가와서는 머리를 쓱쓱 쓰다듬더니 배 숙부는 곧바로 신기수와 제갈준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갈 소저인가?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늦게 구해줘서 미안하군.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네." 그녀가 붙잡혀 있었던 곳이 은씨 세가의 영향권 내의 지역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몰랐던 일이라 하더라도 배 숙부가 사과하는 것이었다. 아니, 영향권 내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기에 더 사과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이렇게 구해주셔서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갈준희가 몸을 일으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몸에 기운이 없어 비틀거렸기에 내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원래는 신기수가 부축해야 했겠지만 그는 현재 양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내가 나서준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제갈세가의 전 가주님이 계시지 않는가?" "예, 할아버지께선 저희와 헤어져서 다른 곳으로 끌려가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제갈준희의 얼굴이 죄책감과 슬픔, 분노가 어우러져 어두워졌다. "그분이 얼마나 현명한 분이신지는 자네가 잘 알 테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분께서 스스로를 잘 보호하고 계실 거야." "예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할아버지를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제갈준희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자,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세가에 가서 하기로 하고, 우선 이곳을 벗어날까?" 신기수는 덕이가 업고 제갈준희는 내 부축을 받으면서 지상 밖으로 나오자 날은 벌써 다 저물어서 깜깜해져 있었다. '헤에, 내가 지하로 들어갈 때에는 막 노을이 지려고 할 때였는데 벌써 이렇게 어두워졌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갔나?'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는 저택의 뒤뜰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제압당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이곳을 제압한 세가의 무사들이 부상당한 사람을 응급 처치하여 밖으로 옮기고 죽은 사람을 땅에 파묻는 등 뒤처리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제압당하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은주라는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에… 희 사형, 혹시 여기에서 숙모는 못 봤어요? 여기에 있었을 텐데……." 그러자 희여송이 즉각 대답해 줬다. "물론 봤습니다. 저희와 싸우기까지 했는걸요? 하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이곳에서 달아났습니다.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는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경공술은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더군요. 그녀와 다른 한 사람을 쫓으려고 했지만, 이곳에 남아 있던 녀석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 남은 한 명이란 본 문에서 나왔다는 사람일 것이다. 뭐, 그녀와 그 본 문에서 파견한 사람이 잡히지 않은 것이 좀 아쉽긴 했지만, 이로써 그녀가 요상한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이 발각된 셈이었다. 덕분에 은재영 입장은 난처해질 테니 그의 세가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은 주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 총관은 계속 총관으로 남아 있겠지?' 제갈준희와 신기수는 곧 세가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그들을 구출했다는 소식은 그 즉시 무림맹으로 날아갔다. 제갈준희가 말해 준 바에 의하면 그들과 제갈 전 가주가 붙잡힌 상황은 내가 추측한 것과 같았다. 제갈준희는 아버지가 신기수와의 사이를 허락해 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할아버지께 갔다가 허락을 받고 나오는 와중에 일단의 무리에게 잡혔다고 한다. 신기수가 열심히 분전하여 준희를 지키려고 했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숫자가 워낙 많아서 제갈준희를 지키면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렇게 제갈준희와 신기수를 인질로 제갈 전 가주를 불러내어 잡은 뒤 제갈준희와 신기수는 이곳으로, 제갈 전 가주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제갈준희가 울음을 터뜨렸는데 너무 우는 바람에 배 숙부가 그녀의 수혈(잠자게 하는 혈도)를 짚어서 잠들게 할 정도였다. 그동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울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모든 상황이 안정되자 마음 놓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 그동안 참고 참은 것을 한꺼번에 터뜨린 듯했다. 그렇게 그녀와 신기수를 안정시키고 나자 그 다음은 바로 내 차례였다. 본 건물의 대청으로 가자 그곳에는 배 숙부와 예 총관, 예현, 그리고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와 그의 제자인 담동까지 와 있었다. 하지만 은재영은 근신이라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울 할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원래 세가의 제일 큰 어른은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였기에 그분이 세가 어른들 대표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아, 지금 현재 은씨 세가의 핏줄이 너밖에 없는 것 알고 있지?" '민이도 있는데요?'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내가 아닌지라 얌전히 고개만 끄덕끄덕할 수밖에 없었다. "세가에서는 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잘 알고 있지?" 끄떡끄떡. "그러한 네가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면 되겠느냐? 이번에는 다행히 네 수하들도 금방 너를 찾아내었고, 백리와 담동이 때마침 제자들을 이끌고 침투한 곳이 그곳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나 위험할 뻔했느냐? 도대체 그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혼자 침투한 것이더냐? 까딱 잘못했다간 너까지 붙잡힐 뻔했어!"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풀이 팍 죽은 얼굴로 중얼거리자 사서 할아버지의 엄격한 표정이 ㅁ낳이 풀렸다. "도대체 그곳에는 왜 간 것이더냐?" "예… 그게… 숙모가 좀 수상해 보여서 확실한 증거를 잡으려고……." "녀석, 이 세가에 너만 있는 줄 알았더냐? 그런 건 바로 우리가 할 일이었다. 아직 어린 네가 왜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든단 말이냐? 넌 그런 일은 나중에 해도 돼." "예에… 그런데 은영에서도 그 여자를 감시하고 있었나요?" "당연하지. 그런 출신도 불분명한 여자를 쉽게 세가에 받아들일 것 같더냐? 재영이가 그 여자를 데려온 그날부터 감시하기 시작한 거다."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와 접촉하던 수상한 녀석의 뒤를 몇 번이고 미행한 끝에 찾아낸 곳이 바로 그 상점이라고 했다. "엑? 밤에 세가에 누가 침입했었단 말이에요?" 보통 무협 영화에서 보면 그러한 비밀스런 접촉은 밤에 접촉자가 경공술과 은신술로 침입해 들어와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세가 안을 새벽까지 감시하고 있었건만 그런 기척은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놀랄 수밖에. "아니다. 처음에는 우리도 그럴 줄 알고 밤에 세가의 감시를 강화했었지. 하지만 영악하게도 그게 아니었더군. 접촉자는 가끔 그녀가 불러들이는 그 상점의 점원이었다." "아……." 여자들이 보통 노리개나 장신구를 살 경우 상점에 직접 가서 고르기도 하지만, 부잣집 마나님 같은 경우에는 상점의 상인에게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오도록 하여 집 안에서 고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적이 거의 없었고 낮에는 은주라는 여자에게 거의 관심을 쏟지 않은 나는 그런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그녀의 방이 되게 화려하게 꾸며졌다 했다. 그 수많은 장신구 하며, 방 안을 꾸며놓은 비단 천 하며… 엑! 그럼 그러다 우리 세가 돈으로 산 거잖아!' 처음에는 이상함을 못 알아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에 그 점원을 주목했다고 한다. 세가 안으로 점원이 많은 수의 물품을 가지고 오는데도 그녀가 사는 것은 한두 점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면서 너무나 자주 점원을 불러들이는 데다가 한두 개밖에 안 사는데도 불구하고 점원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 혹시 점원에게 우리가 모르는 뭔 일을 시킨 게 아닌가 싶어 점원을 미행했으나 놀랍게도 점원이 미행을 몇 번이나 따돌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있다고 확신하고 그 상점을 알아낸 순간 적당한 때를 봐서 그곳을 습격하려고 했는데, 그 은주라는 여자가 집을 비운 날 나와 유, 덕이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지자 혹시나 싶어서 부랴부랴 제자들을 이끌고 상점이 문 닫을 때를 타 습격한 것이라고 했다. "그랬구나." '어쩐지 타이밍이 지나치게 잘 맞았다 했지." 도서관의 사서 할아버지가 설명을 마치자 이번에는 예 총관이 나섰다. "에휴, 어쨌든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없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혹시나 아가씨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제가 가주님의 얼굴은 어찌 뵙고 큰 도련님의 얼굴은 어찌 뵙는단 말입니까? 부디 이 늙은이 생각도 좀 해주세요." "하지만 기특하구나. 비록 경계가 허술했다고 하나 지하 감옥까지 누구의 눈에도 들키지 않고 침투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요행을 다시 바래서는 안 돼. 다른 곳도 그곳처럼 경계가 느슨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다시 한 번 못 박는 사서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예, 명심할게요." '하지만 지하에서는 감시가 삼엄했는데 말야…….' 그러자 사서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흥, 그래도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은 알 하는구나?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넌 또 나설 테지? 그래서……." 묘하게 웃음 짓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내게 불길함으로 다가왔다. "네 무공 실력을 빨리 늘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내일부터는 수련 시간을 지금보다 두 배로 늘리기로 하겠다." "에엑∼!!" '그런 끔찍한 소리를… 지금 하는 것만 해도 정신 집중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시간이건만 그걸 두 배로 늘린다고?' 하지만 끔찍한 소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서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예 총관의 차례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가의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아가씨를 위하여 내일부터 세가의 일을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전에 말씀드렸을 때는 긍정하셨는데 설마 지금에 와서 반대를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이 정도면 너무 바쁘셔서 엉뚱한 일을 벌일 시간도 없으실 겁니다." "에에엑∼!!" '아니… 은재영의 일도 해결되어서 이제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그거 다시 바꾸면 안 될라나?' 두 번이나 경악성을 내뱉는 내가 조금은 안쓰러웠던지 그동안 가만히 서 있던 배 숙부가 피식 웃으면서 나섰다. "하지만 그 대신 네가 지금까지 해왔던 교양 수업과 세가의 일을 돕기 위해 배웠던 수업들은 모두 중단하기로 했단다." "휴우∼ 그나마 정말 다행이네요." 은주라는 여자가 몸담고 있던 조직의 비밀 거점이었던 그 상가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조사해 본 결과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상인이고 점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원래 그 상점을 운영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상점을 무리하게 번창시키다가 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망한 상점을 10년 전에 인수한 것이 바로 그 밝혀지지 않은 이상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 상점을 운영하지는 않고 예전부터 계속 상점을 운영해 왔던 상인에게 맡긴 데다 점원들도 그대로 고용하게 했단다. 단지 그 조직에서는 몇몇의 점원을 더 추가로 보내어 상점을 같이 운영하게 했는데, 그 점원들이 은주라는 여자와 또 한 명의 사람이 도망갈 때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시간을 벌어준 바로 그 사람들이라고 했다. 상인과 평범한 점원들은 상점에서 일은 할 수 있었으되 그 뒤에 있는 집에는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해 그곳에 누가 있었는지도, 누굴 만났는지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단지 은주라는 여자가 상점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상점을 인수한 사람의 친척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을 뿐 은주라는 여자와 대화를 해본 적도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것 외에는 더 이상 알아낸 것이 없어 그 상인과 점원들을 약간의 보상과 함께 풀어주기는 했지만, 세가에서는 이상한 조직이 10년 전부터 세가의 영향권 내에 비밀 기지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인 듯했다. 하지만 상점 뒤에 있던 저택에서는 단순한 장부만 건졌을 뿐 그 이상한 조직에 관한 서류는 세가의 무사들에게 제압당하기 전에 모두 불타 없어졌기에 그 조직에 관해서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제갈준희와 신기수를 발견한 것 때문에 그 조직이 그동안 사라진 마공 비급 조각을 모으는 단체와 어떤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바로 그 단체라는 것만 추측할 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지만. [@연재] 제36화 은씨세가 습격사건-(1) .. 무림맹에서는 금방 연락을 해왔다. 제갈준희를 호위할 무사들을 보낼 테니 그때까지만 우리 세가에서 그녀를 보호하고 있어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거기에서 신기수의 이름은 쏘옥 빠졌지만 어쩔 수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분위기를 보니 그도 제갈준희를 따라 무림맹으로 돌아갈 것 같아 보였다. 아마도 가서 현 제갈 가주에게 용서를 구할 것 같지만. 제갈준희는 별로 다친 곳도 없었고, 단지 영양 상태가 안 좋아서 기력이 쇠해진 것뿐이었으므로 다음날부터 침상에서 일어나 나다닐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그녀와 놀고 싶었지만 예 총관이 말한 대로 그 다음날부터 아침저녁으로 무지 바빠졌기 때문에 휴식 시간에는 쉬겠다는 생각만 할 뿐 어디 놀러 가려는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마 예 총관은 나를 무지 바쁘게 해서 엉뚱한 일 벌일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도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 듯했다. 게다가 제갈준희도 하루 종일 신기수 병수발을 들기 위해 그의 곁에 딱 붙어 있다고 하니 아마도 나랑 같이 놀 생각도 못하고 있을 거였다. 그 와중에 은재영은 할아버지처럼 폐관 수련을 한다고 선언을 한 채 어디론가 틀어박혔다. 당분간은 세가를 장악하는 일을 유보할 모양인 듯했다. 그렇게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어느새 일주일이 후딱 지나가 버렸고, 드디어 무림맹에서 제갈준희의 보호를 위해 보내준 사람들이 도착했다. 주작단 단장을 비롯하여 단원 20명과 놀랍게도 울 부모님이었다. 무림맹의 5개 단은 각각 단원이 50명에 불과한 소수 정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 중 20명을 보낸 걸 보면 제갈세가가 정파에서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제갈준희를 무림맹으로 데리고 가는 도중 그녀를 납치하기 위해 적이 다시 한번 나타났을 때 그들을 생포해 뭔가 실마리라도 잡으려는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엄마아아아∼" 엄마와 아빠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련 중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급하게 정문으로 뛰어간 나는 막 말에서 내리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녀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와아∼ 이렇게 일찍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말예요." 품 안으로 안겨드는 나를 꼬옥 안아주면서 엄마는 화사하게 웃었다. "호호호, 그래. 정말 뜻밖이지? 그동안 아무 말썽도 안 부리고 얌전히 있었겠지?" "아하하하… 뭐… 그렇죠." 엄마의 말에 자신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헤프게 웃으며 얼버무리려 했다. 하지만 엄마의 눈은 속일 수 없었는지 엄마는 가볍게 내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너어∼! 또 뭔 일을 저질렀구나?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거니?" "에에에… 별일 아니에요. 뭐, 이렇게 멀쩡히 있는 걸 보면 아시잖아요." "네가 일 저지를 때 네가 다친 적이 있든. 맨날 네 주위 사람들만 네 뒤처리하느라 힘들었지." "윽… 엄마는……." 삐쳤다는 듯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자 엄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허, 엄마가 그런 표정 짓지 말랬지? 이제 다 큰 여자애가……." 그러자 우리 뒤에서 예 총관이 낭랑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하, 언제나 봐도 정겨운 모녀지간이시군요. 어서 오십시오." "아, 예 총관님. 진이가 그동안 말썽 안 부렸나요?" "하하하, 그건 아가씨께 물어보십시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다시 뵙게 되다니 기쁩니다, 큰도련님." 예 총관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얼른 옆에 있던 아빠에게 인사를 했다. "예. 이쪽은 이번에 우리와 같이 온 무림맹 소속 주작단 단장입니다." 아빠가 자신과 같이 서 있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훤칠한 키에 남자다운 강인한 인상의 사내를 나와 예 총관에게 소개시켜 줬다. "처음 뵙겠습니다. 헌준이라 합니다." 그래서 나도 예의 바르게 마주 인사를 해줬다. "은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 뒤를 이어 총관도 인사를 했다. "저희 세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는 현 무림맹주의 큰아들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신진고수들 중 한 명이라고 했다. 하기야 지금 나이가 35세가고 하더만, 벌써 주작단의 단주가 된 거 보면 무공도 꽤 높은 데다가 어느 정도 리더십까지 있는 모양이었다(다른 단의 단주는 다 40세를 넘었단다). '음… 어쩌면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지도…….' 그 정도로 가벼운 인사를 나눈 우리들은 우르르 본관 대청으로 몰려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또한 이제는 세가의 일을-비록 아직 배우고 있는 입장이라 잡일 비스무리한 수준이지만-하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그 자리에 낄 수 있었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정말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예 총관은 은재영이 세가를 장악하려고 했었던 일은 쏘옥 빼버리고 은주라는 여자가 은재영의 약점을 하나 잡아 그걸 빌미로 세가 안으로 들어와 세가를 장악하려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은재영은 현재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폐관 수련을 하고 있다고까지 이야기가 발전되어 나갔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헌준이 예의상인지 크게 놀라움을 표했다. "아우가 정말 큰일을 당하였군. 비록 그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 밝히지는 못하였지만, 세가에 대한 그들의 음모가 성공하기 전에 미리 알아채고 막으신 예 총관님의 노고가 크셨습니다." "아닙니다. 어디 그것이 저 혼자만의 힘이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조직 잔당들을 잡지 못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지금 세가의 제자들을 풀어 수색은 하고 있지만, 녀석들이 이럴 때를 미리 대비해 놨었음인지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빠의 말에 예 총관이 겸양을 표했다. 그는 모든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영 기분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은씨 세가의 영향권 아래에 거점을 마련한 뒤 10년 동안이나 은밀히 바라보며 기회를 찾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하지요." 헌준은 예 총관의 말을 받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런 얼굴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번에 은씨 세가에서 소탕한 그 조직이 요즘 무림에서 일어나는 범인을 알 수 없었던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무림맹의 생각입니다. 해서 이번에 그 조직의 거점을 점령하면서 회득하신 자료들을 무림맹으로 가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괜찮으실지요?" 아빠는 지금 막 세가로 돌아와서 그것들을 보지도 못했지만,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세가를 대표할 수 있는 자가 아빠였기에 헌준이 아빠를 향해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빠가 예 총관을 향해 의견을 묻는 시선을 보냈고 그에 답하려는 듯 예 총관이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외랍됩니다만, 저희가 획득한 자료를 조사해 봤지만 그것들 중에는 그 의문의 조직에 관련된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곳에서 저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운영했던 상점의 장부뿐이었습니다. 아마 저희가 침입해 들어갈 때 관련 자료들을 모조리 없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가져가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헌준은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가 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아무리 쓸모없는 것이라 해도 저는 위에서 명령이 떨어진 대로 할 뿐이라서요." 아빠가 다시 한 번 의견을 묻는 듯 예 총관을 바라보자 예 총관이 넘겨도 좋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저희 세가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무림맹에서 발견할지도 모르니까요." 어쩐지 준희 언니 단 한 명을 호위하는 데 울 아빠와 엄마를 포함한 정예랄 수 있는 고수가 20여 명씩이나 왔다 했더니만, 따로 이런 지시까지 받고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헌준이 받은 지시는 그것만이 아니었는지 헌준은 다시 한 번 부탁조로 입을 열었다. "저… 그리고 한 가시만 더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 조직이 머물렀던 상점을 저희에게 보여주시겠습니까?" 아빠는 그런 지시에 대해 전혀 몰랐던 모양인지 헌준의 말에 당황한 눈치를 보이며 예 총관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 총관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여긴 것인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마침 저희 세가에서 그곳을 조사하느라 상점을 아예 인수한 상태입니다. 언제라도 가보고 싶으실 때 말씀해 주시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씨 세가의 배려 무림맹으로 돌아가면 상부에 꼭 전해 올리겠습니다." 헌준이 아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아빠 또한 답례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그렇게 해서 주작단 단주를 비롯하여 단원 20명은 오늘은 쉬고 내일은 그 상점을 조사하기로 했다. '흐음, 그럼 아마도 내일 모레에나 돌아가겠구나.' 주작단 단원들을 쉬라고 숙소로 보내주고는 나도 슬슬 오늘 일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진아아아∼?" 엄마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날 부르는 거였다. "예?" 갑자기 왜 그러시나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엄마가 씨익 웃으면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이번 일에 끼어들어서 뭔가 일을 벌이지는 않았니?"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엄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까 네 성격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세가 안에서 얌전히 앉아 있을 리가 없거든? 그러니까 숨길 생각 하지 말고 이실직고할래?" "에이, 엄마는… 별일없었다니까요." '그럼그럼, 나한테는 별일 아니지. 홋홋홋.' 하지만 엄마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훗, 유하고 덕이한테 물어본다?" 그러나 나 또한 엄마랑 같이 산 지 벌써 몇 해던가… "어머, 딸내미를 이렇게 믿지 못하셔서야… 좋을 대로 하세요." '미리 입을 막아놨지롱∼!!' 그러자 엄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진짜야?" "예에∼" "정말?" "그렇다니까요." "정말 얌전히 있었어?" "저는 이번 일 해결하는 데 해준 거 하나도 없어요." '음… 뭐, 일을 쬐께 빨랑 앞당겨 준 거밖에 없는데, 그건 도와 준 거라고 할 수 없겠지?' 내가 계속 시치미를 떼자 엄마의 시선이 옆에서 피식피식 웃고 있는 예 총관에게로 넘어갔다. "허허허, 이번 일을 벌일 때 아가씨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었답니다. 덕분에 아가씨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맞아맞아, 세가의 일은 나중에 일 끝나고서야 알았지.' 이렇게 총관과 내가 손발이 척척 맞아서 나는 이번 일은 무사히 넘어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제갈준희였다. 그녀는 이런 내 사정을 전혀 모른 채 엄마와 아빠가 신기수를 병문안 갔을 때 내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감사의 인사를 해벼렸던 것이다. 덕분에 그 즉시로 난 엄마의 방문을 받아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건 몇 시간 후의 일이었지만. "그건 그렇고 큰도련님." 화제를 돌리기 위함인지 예 총관이 갑자기 아빠를 불렀다. "말씀하시지요." "큰도련님께선 무림맹에서 온 무사들이 돌아갈 때 같이 갈 생각이십니까?"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아빠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예 총관의 직문이다 보니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갈준희 소저를 구해냈다고 하나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제갈 전 가주님이시니까요. 그분을 구출하기 전에는 무림맹의 일을 도와야 할 테지요." "물론 저도 그건 압니다. 하지만 현재 세가에는 세가를 이끌어 줄 결정권자가 안 계십니다. 가주님과 작은도련님 모두 폐관 수련에 들어가시지 않았습니까? 이럴 때 큰도련님께서 세가에 계셔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예 총관의 말을 듣고 있던 엄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예 총관님의 말씀이 맞네요. 당신이 여기 계셔야 하겠는데요?" 하지만 아빠는 별로 안 내키는 모양이었다. "물론 예 총관님의 말씀이 옳긴 하지만, 이 사건이 해결될 조짐도 보이지 않는데 중간에서 빠지기는 그렇지 않습니까? 게다가 세가의 일은 총관님께서 잘해 나가주실 텐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하지만 세가에 결정권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큰 것입니다. 정 중간에 빠지는 것이 걱정되신다면 도련님 대신 제 아들이나 배 교관-배 숙부를 예 총관은 그리 부르고 있었다-을 보내면 될 것입니다." 예 총관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아빠는 계속 그의 뜻을 거부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늙은이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연재] 제36화 은씨세가 습격사건(끝까지) 그날 저녁, 세가에서는 돌아온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세가를 방문한 무림맹 소속 주작단 단원들을 위하여 조촐하나마 술판이 벌어졌지만 나는 엄마에게 벌을 받느라고 그곳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이랄까? 제갈준희가 어떻게 내가 혼난 사실을 알았는지 미안하다며 나를 찾아와서 둘이 밤늦도록 수다 떨며 놀았기에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불만은 없었다. 뭐, 덕분에 나는 밤마다 명상 수련한답시고 앉아서 세가 안을 살피던 것을 하지 못했지만, 오늘 같은 날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 하에 그냥 놀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주작단 단원들은 세가 무사의 안내를 받아 그 이상한 조직의 거점이었던 상점을 살펴보러 갔고, 제갈준희는 평소처럼 신기수의 병간호를 했다. 하기야 그녀가 내일 집으로 돌아간다고는 해도 우리 세가에 올 때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것이 아니니 별달리 준비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신경은 온통 신기수가 무림맹으로 같이 갈 수 있을 만큼 나았는지 아닌지에 쏠려 있을 테니 다른 데 신경 쓸 여지도 없을 터였다. 다행히도 신기수는 그날 그의 상세를 살펴보러 온 의원으로부터 완전히 다 나은 건 아니지만 크게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여행해도 좋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제갈준희와 함께 돌아가게 되었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신기수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무리를 해서라도 제갈준희와 같이 가려고 했을 거였다. 뭐, 의원까지 허락했으니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몸이 팔팔한 건 아니었기에 세가에서는 제갈준희와 신기수를 위하여 마차를 한 대 준비해 주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거진 다 되어갈 무렵, 상점 지하를 살피러 갔던 무림맹 소속 주작단원들이 돌아왔다. 얼굴 표정을 보니 다들 그저 그런 것이 새로운 것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우리 세가의 사람들이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샅샅이 훑은 곳을 오늘 하루 살펴본 그들이 뭘 더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기 위해 간 것이 틀림없었다. 세가에서 내어준 푸짐한 저녁을 먹은 후 그들은 세가의 어른들과 가볍게 술을 한잔씩 하며 대화를 즐기다가 내일 무림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손님을 맞은 세가에서는 약간의 북적스러움을 동반한 채 새로운 내일을 약속하며 밤을 맞았다. 손님들 때문인지 평소보다는 약간 많은 야간 경비 담당 무사들만이 깨어서 세가를 둘러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 시각, 나는 평소처럼 명상 수련을 하려고 내 방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세가 인에 내 몸에 있는 마나를 퍼뜨렸다. '으음… 준희 언니는 오늘 자기 방에서 자는구나. 다른 때는 신기수랑 같은 방에서 자더니만, 주작단원들 때문에 그러는 건가? 에… 유하고 덕이는 아직까지 내공 수련을 하네. 요즘 들어 수련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음,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도 아직 안 주무시는구나. 요즘도 할 일이 많으신감?" 그렇게 세가 전체를 내 마나가 감싸 안음으로써 느껴지는 사람들의 마나를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마악 오늘의 명상 수련을 끝내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세가의 밖에서 묘한 느낌이 대기를 타고 흘러 들어와서는 내 마나를 자극하기 시작하더니, 그런 자극은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나까지 오싹해질 정도였다. '뭐, 뭐야, 이거?!' 갑작스러운 그 변화에 놀란 내가 세가 안만 감싸고 돌던 내 마나를 세가 바깥까지 펼쳐 보니 놀랍게도 수많은 인원이 세가를 둘러싼 채 고요히 서 있는 거였다. '뭐지? 저 사람들은 언제 온 거야?'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느낌은 너무나 차고 어두워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불안한 기분에 재빨리 마나를 거두어들이고 내 방을 박차고 나가려는 순간,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무언가 커다란 물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지직∼! 그리고 그와 함께 몇몇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나더니 곧 세가에 급한 일이 있거나 집합할 때만 사용하는 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걸 감지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본관으로 달려가자 유와 덕이가 곧 달려와 내 뒤를 따랐다. 내가 본관 건물에 도착할 때에는 세가의 제자들도 막 모여들고 있었고, 부모님과 예 총관, 예 총관의 두 아들들, 배 숙부, 그리고 도서관 서사 할아버지까지 벌써 도착해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도착하는 걸 보더니 얼른 나를 끌어 그들 중앙에 끼워 넣었다. 내가 혹시라도 엉뚱한 짓을 하거나 아니면 위험이 닥치더라도 쉽게 보호하려는 것이다. 별로 반항할 생각도 없던 터라 그들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중앙의 자르를 차지하고 사태를 보니 세가의 큰 대문이 박살나 있었고, 그곳으로 아까 내가 느꼈던 그 차갑고 어두운 마나를 가진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 들어와 본관 앞뜰을 메우고 있는 중이었다. 세가의 사람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사이, 거의 300여 명이나 되는 음침한 사람들이 부서진 대문으로 들어오더니 맨 마지막에 그들 중 가장 튀는 복장을 한 인물이 들어와 그 음침한 사람들 사이를 걸어나와 맨 앞에 섰다. 앞으로 나서는 걸 보니 그가 대장인 모양인데, 그는 놀랍게도 등에 검과 하얀 태극이 그려져 있는 노란 도복에 집처럼 생긴 노란 관을 쓰고 한손에는 놋으로 만든 종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칼을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을 보니 딱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전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가장 좋아하던 영화 중 하나인 강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도사였다. 강시를 다루기도 하고 또 나쁜 강시가 나타나면 물리치는 역할을 하던 바로 그 도사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나 예 총관은 그 인물을 잘 알고 있었는지 그가 등장하자 신음 소리 같은 목소리로 똑같이 중얼거렸다. "모산파의 인물……." "모산파?" 그들이 내뱉은 단어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가 전음으로 설명해 줬다. [모산파란 강시를 제조하고 다루는 데 뛰어난 기술을 가진 문파입니다. 하지만 기 기술 때문에 사파로 몰려 50여 년 전 정사대전 때 멸문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몇몇의 문파인들이 간신히 살아남아 몸을 피했다고 들었는데, 저자는 그들의 후예인 듯하군요.] '세상에나… 19C 후반에만 해도 강시 영화 때문에 가장 인기를 끌던 도사님이었는데, 이 시대에서는 사파로 몰려 곤욕을 치르는 신세라니… 정말 아이러니라니까."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사이, 음침한 사람들의 맨 앞으로 나온 그 노란 도사복 차림의 모산파 사람이 세가를 침입한 목적을 밝혔다. "은씨 세가의 사람들은 들어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니, 그대들이 이 목적을 충족시켜 준다면 그냥 조용히 물러가겠다! 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 세가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할 줄 알라!" 그러자 우리 세가에서 아빠가 대표로 나서서 그에게 응대했다.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나, 만일 그 목적이 사악한 것이라면 쉽게 이룰 수 없을 것이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제갈준희뿐이다. 그러니 그녀만 내놓는다면 너희들의 목숨은 보장해 주겠다." 노란도사의 말에 이번에는 예 총관이 나섰다. "제갈 소저를 내놓으라고? 그렇다면 너희들은 은주라는 여자와 같은 조직의 사람들이란 말이냐?" 그러나 그 노란도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은주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단지 제갈준희라는 여자를 받으러 왔을 뿐이다." "제갈 소저를 노리는 자라면, 혹시 제갈세가의 전 가주님의 소재를 알고 있지 않을까요?" 주작단의 단장 헌준이 작게 속삭였다. "단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마도 그 은주라는 여자와 같은 조직의 사람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제갈 소저의 신변을 요구하는 것이겠지요." 예 총관의 말이 끝나자 엄마가 다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고는 하나, 왜 제갈 소저를 내놓으라는 거지요? 그녀가 왜 필요하다고……." 그러자 이번에는 아빠가 답했다. "아마도 제갈세가의 전 가주를 협박하는 데 인질로 사용하려고 하는 거겠지." "그렇다는 소리는 지금 제갈세가의 전 가주님은 그들의 협박에도 잘 견디고 계신다는 소리겠군요.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아직까지는 무사하시다는 뜻이겠구요." 헌준의 말에 예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기로는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무공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갈세가의 전 가주님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그러한데다 나이도 많으시니 그들은 그분께 함부로 고문을 가할 수도 없을 겁니다. 혹시나 잘못되기라도 했다간 그들의 목적은 물거품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 협박할 수 있게 제갈 소저가 필요한 거겠지요." 세가 쪽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들끼리 쑥덕거리는 동안 노란도사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지금부터 셋을 셀 동안 제갈준희라는 여자를 내놓을 건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 결정하기 바란다! 하나!" 그가 하나를 세자 세가 쪽 사람들은 다시 쑥덕거렸다. "저자를 생포하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그 조직에 대해 알지도 모르니까요." 헌준의 말에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저자는 나와 배 교관(배 숙부)가 맡겠소이다. 저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기습적으로 저 도사를 먼저 제압한다면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테니 한번 해볼 만할 거요." 노란도사 왈, "두울∼!" 헌준 왈, "그럼 저희 주작단이 두 분을 엄호해 드리겠습니다." 엄마 왈, "그럼 나는 세가의 제자들을 보호하는 데 힘써야겠군요." 그동안 조용히 듣고 있던 예철을 비롯하여 32대 제자들이 대답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아빠가 그런 그들을 향해 잘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헌준을 돌아보았다. "그럼 저자가 셋을 셈과 동시에 뛰어나갑시다." "알겠습니다." 헌준이 대답함과 동시에 노란도사가 마지막 숫자를 외쳤다. "세엣∼!" "지금이야!!" 아빠가 소리치며 뛰어나가자 그와 함께 배 숙부와 주작단도 번개같이 뛰어나갔다. 하지만 이 노란도사는 그걸 예상이나 하고 있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씨익 웃으면서 소매 인에 손을 집어넣더니 노란 부적을 꺼내 부채처럼 쫘악 펼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아빠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던지더니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펴 들고 자신의 코앞에 가져다 대면서 낭랑하게 외쳤다. "화!" 그러자 그 부적들은 각각 농구공만한 불덩어리로 변하면서 더욱 빠르게 아빠 일행에게 달려드는 거였다. "저게 뭐야?" 이런 곳에서 나 말고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라 내가 외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가 즉각적으로 대답해 줬다. "주술입니다. 모산파는 주술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옷, 그래?" 아빠를 비롯한 일행들은 빠르게 달려가다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불덩어리들을 보고는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팀을 타서 노란도사는 음침한 사내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런, 어디로 간 거지?" 당황한 배 숙부와 아빠가 음침한 사내들 사이로 파고들려고 하자, 본관 앞뜰에 들어온 뒤 마치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가람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크아아아∼!" '아, 착각했다 사람 모양을 하고 있던 괴물이었나 보군.' 하지만 내 예상은 예 총관의 외침에 다시 한 번 변경되어야만 했다. "강시?" '괴물도 아니었군.' 이곳에 와서 강시를 딱 한 번 모용세가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이들처럼 강한 마나를 지니지 못했다. 단지 어떠한 주술로 인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만 알 정도의 약한 마나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의아해할 정도로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나가 차갑고 어두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음공이라고 해서 차가운 마나를 몸에 지니고 있는 무공이 있다는 것을 들을 적이 있기에, 처음 겪어본 나는 그냥 그 비스므리한 희안한 무공을 수련한 사람들이거니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차가운 기운의 마나라고 해도 저 정도까지 차갑지는 않겠지.' 어쨌든 그런 강시들의 틈새를 파고드는 아빠와 배 숙부를 향해 그 강시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을 주작단 단원들이 막아섰다. "여기는 저희들이 막겠습니다!!" 아주 호기있게 외치면서 아빠와 배 숙부 주위를 막아섰지만… 왠걸, 그 강시들은 그낌부터 예전 모용세가에서 봤던 강시들과는 다르더니, 질은 물론 실력까지 훨씬 월등한 강시였던 것이다. 주작 단원들을 마주 본 그 강시들은 마치 무인들인 양 각자 가신의 무기들을 꺼내 들더니 단원들을 향해 초식을 선보이면서 달려드는 것이다. 비록 그 움직임이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자연스럽지 않고 어딘가 어색하고 뻣뻣했지만, 한 동작 한 동작에 엄청난 마나, 즉 내력이 실려 있어 무시하지 못할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초식으로는 주작단원들보다 한 수 아래였지만, 완전히 힘과 사람 머릿수만 믿고 달려드는 그들의 공세에 아빠와 배 숙부를 엄호해야 할 주작단은 엄호다운 엄호도 하지 못하고 계속 그들에게 밀렸다. 결국 그들에게 둘러싸일 위험에 처하자, 그곳에 있는 것은 포기하고 그들 사이를 빠져나와 자신의 몸을 추슬러야만 했다. 아빠와 배 숙부도 상황은 좋지 못했다. 아빠와 배 숙부는 그 노란도사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가급적이면 강시들과 맞서지 않고 그들 사이사이를 그냥 빠져나가려고만 했다. 하지만 아빠와 배 숙부가 그렇다고 해서 강시들까지 그런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경공으로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으려는 아빠와 배 숙부에 맞춰 강시들도 허공으로 뛰어올라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곤 어쩔 수 없이 땅으로 내려선 아빠와 배 숙부의 주위를 기다렸다는 듯이 빽빽이 둘러싸고는 한꺼번에 집단 폭행하듯 덤벼드는 거였다.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아빠와 배 숙부는 당황하지 않고 서로의 등을 맞댄 채 자신들에게 덤벼드는 강시를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놈의 강시들은 도대체 몸을 뭐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힘으로는 강시의 몸에 상처를 내지도 못할 정도로 그들의 몸이 단단한 듯했다. 검으로 그들의 몸을 찌르면 오히려 검이 튕겨져 나올 정도였으니 나는 맨 처음에 그들이 강철 같은 금속으로 온몸에 무장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 그들의 몸에 상처를 내려면 꼭 검기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 강시들은 한두 번 몸이 찔리는 걸로는 아픈 내색은커녕 뭔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공격을 감행하는 거였다. 하기사 강시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었기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점을 이용해 오히려 자신이 검에 찐린 것을 기회 삼아 검을 봉쇄하고는 역으로 무서운 공격을 해가는 거였다. 결국 아빠와 배 숙부도 견디지 못하고 그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주작단과 합세하여 강시들에게 대항해 나갔다. "목을 자르든지, 머리를 부수든지, 허리를 절단해야 합니다!!" 예 총관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내력이 잔뜩 들어간 초식을 마구 휘두르며 검기가 아니면 상처조차도 낼 수 없는 그들을 상대하기도 힘겨운데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강시들의 숫자는 300이었고, 그들을 막아선 이들은 겨우 23명이었기에 강시들이 인해전술로 그들을 둘러싸려 했고, 세가쪽 사람들은 둘러싸이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 황급히 엄마와 예철을 비롯한 32대 제자들이 뛰어들었지만, 그래 봤자 100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었기에 세가의 무사들까지 나서야 했다. 그러나 사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주작단원들과 아빠, 엄마, 배 숙부, 예철, 그리고 32대 제자들 쪽에서는 하나하나 천천히 처리해 가고 있었지만, 아직 마음대로 검기를 쓰는 수준이 아닌 세가의 무사들은 막아내면 다행이었다. 강시들의 손에 다치거나 심하면 목숨을 읽는 무사들이 속출했지만 세가의 무사들과 강시들의 능력의 차이가 너무 났기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본관 앞에서 싸우는 강시들이 적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가 본관으로 달려오기 전 방 안에서 느낀 바에 의하면 우리 세가는 이미 다른 강시들로 인하여 포위된 형국이었다. 우리가 세가 안으로 들어온 강시들을 어찌어찌 막아낸다고 해도 세가를 포위한 강시들까지 들이닥친다면 상황은 무지 적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중에는 보다 못한 유와 덕이까지도 나서서 지원을 했지만 세가 쪽 사람들은 자꾸 밀려서 본관에 거의 다 닿을 지경이었다. 결국 뒤에서 보다 못한 제갈준희가 나섰다. "제가 그냥 저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세가의 사람들은 무사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보고 가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설사 세가의 사람들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그녀를 보호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제갈세가의 전 가주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제갈세가의 전 가주는 지금은 15개로 조각난 마공 비급의 순서를 아는 사람이었다. 마공 비급이 제 모습을 찾게 된다면 위험에 빠지는 사람들은 한 세가가 아닌 정파무림 전체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예 총관도 그녀를 만류하는 것일 터였다. "제갈 소저, 아직 속단하실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안 가면 세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해요." "저희 세가의 저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설사 저희 세가가 약하다 하더라도 소저만은 기필코 지켜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러나 예 총관은 제갈준희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은 채 비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어서 제갈 소저와 함께 이곳을 피하십시오. 그리고 기필코 살아남으셔서 다시 은씨 세가를 일으켜 주시기 바랍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예 총관 또한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ㅇ르 알고 있는 거였다. 하기야 전력 차이가 나도 너무나 났다. 저 300여 구가 되는 강시들은 하나하나가 일 갑자는 충분히 넘는 내력을 가진 고수들이었고, 강시들을 충분히 상대할 만한 인원은 주작단 단원들을 합친다 하더라고 50을 겨우 넘었다. 여기에 은영까지 가세한다 하더라도 300이나 되는 수를 상대하기에는 버거울 터였다. 그래서 예 총관은 자신까지 나서서 시간을 버는 동안 나와 준희를 대피시키려는 듯했다. 예 총관은 나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려 그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가자!"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았다. 돌아보니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나와 제갈준희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예 총관까지 나섰는데 그보다도 더욱 뛰어난 실력을 가신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의 제자까지 나서지 않고 내 뒤에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은영은 저 사투에 투입되지 않고 나와 제갈준희를 보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본관 앞뜰은 아빠를 비롯한 세가의 사람들과 주작단 사람들, 그리고 힘이 부족하나마 시간이라도 끌어보려는 세가의 무사들까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세가의 무사들은 도망가지 않는 거죠? 저렇게 대들어봤자 상대도 되지 않을 텐데요. 다 같이 도망간다면 조금이나마 더 많이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내 손목을 끌어당겼지만, 나는 거기에 끌려가지 않은 채 버티고 서서 물었다. "저들은 세가의 무사들이기 때문이지. 세가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인 거다. 세가가 무너진다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걸 막으려고 하는 것이 저들의 사명이요 인생의 목표이며 명예인 것이다."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나를 다시 한 번 끌어당겼지만 나는 또 한 번 버팅겼다. "이해가 안 가요. 세가가 무너지면 다른 세라고 가버리면 되잖아요." 내가 자꾸 버팅기자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잠시 화가 났는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내가 굳은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본관 앞뜰에서 벌어지는 혼전만 바라보자 낮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해 줬다. "너는 우리 나라가 무너지면 그냥 우리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쉽게 가버릴 수 있겠느냐? 그리고 설사 다른 나라로 간다 하더라도 망국의 국민이라는 이름표는 너를 끝까지 물고 놔주지 않을 거다. 강호의 무인들에게는 자신의 문파와 세가가 나라와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거지. 그렇기에 오랜 전통을 가진 세가와 문파의 무사들은 존경과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게야."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는 거기에서 잠깐 말을 끊고 숨을 고른 다음 비장한 어조로 다시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 저들이 목숨까지 버리면서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동안, 너는 목숨을 부지해서 나중에 다시 은씨 세가를 지금처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것이 세가의 핏줄을 이은 네 사명이자 저들의 지금 잃어버릴 목숨에 대한 보답이다. 너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저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기억해 두거라. 자, 이제는 갈 시간이다." 할아버지는 이제 조금 더 강하게 나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소용없어요. 세가는 이미 강시들로 인해 포위되어 있는걸요. 할아버지의 부하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1갑자 이상의 일류고수들이 100명이 안 되는 이상, 섣불리 그들의 포위망을 뚫으려 하면 오히려 잡혀 버릴 거예요." 그러면서 나는 되려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본관 앞뜰 쪽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사서 할아버지가 놀라서 날 막으려고 했다. "진아, 뭐 하는 거냐? 네가 나서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다! 너는 어서 몸을 피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야." 그런 할아버지를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훗, 아뇨 제가 나선다면 해결될 일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이곳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여기서 도망친다면 나중에 민이 녀석에게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거예요. 그럴 바에는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제 뜻대로 할 겁니다." '게다가 엄마와 아빠를 이대로 두고 나만 갈 수는 없지.'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할아버지의 몸을 슬쩍 옆으로 피해 앞으로 달려나가 뜰로 내려섰다. 그러자 세가의 무사들이 놀라서 날 보호하려고 나에게 달려왔고, 강시들은 그 틈을 타서 더욱더 본관 쪽으로 다가섰다. "진아!!" 뒤에서 사서 할아버지가 놀라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마나를 풀어 세가 안과 세가 주변까지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외쳤다. "홀리 라이트!" 이 마법은 신성 마법이었기에 보통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마법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소르드 왕국에서 류미르, 세이몬과 여행을 떠나기 전 일상 생활에서 편리하게 사용되는 마법들 중에 이 마법이 들어 있어서 나는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마법은 신성하지 못한 것들, 즉 언데드나 유령, 귀신, 괴물, 더 나아가서는 마물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는 마법이었다. 원래는 언데드나 마물들을 퇴치하는 데 사용되는 마법이었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유령 같은 것도 가끔 만날 수 있는 법이고 묘지 같은 곳에도 지날 수 있을 테니 그럴 때 사용하면 두려움을 이기는 데 효과 만점이다. 더불어 유령도 쫓을 수 있고 말이다. 물론 그럴 때는 적은 마나로 약하게 사용하지만. 하지만 나는 세가 안으로 들어온 강시들은 물론 바깥에서 세가를 둘러싸고 있을 강시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기 위하여 좀 강하게 5클래스의 마나를 사용했다. 이곳 내공의 양으로 따지자면 2갑자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내 시동어가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마치 태양 빛과도 같은 찬란한 빛이 세가를 비추었고, 그 빛을 보거나 쐬인 강시들은 울부짖으면서 괴로워했다. "크에에엑∼!" "키아아아∼!" 물론 그 비명이 정말 아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공격하기 전에 내뱉는 기합인지는 헷갈렸지만, 그 후에 괴로워서 몸을 비트는 걸 보니 비명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오우, 예! 효과 좋고. 그럼 이제 해결사 진이가 나가신다. 버스트 프레아!"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 곁을 둘러싼 세가의 무사들이 마법으로 형성된 강렬한 빛에 놀라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들이 형성한 방어벽을 벗어나 강시들만 모여 있는 곳으로 몸을 던지며 마법을 날리자 아까 그 노란도사가 날린 불덩어리들의 숫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수십 개의 불덩어리들이 강시들을 직격하여 폭발했다. 쿠아앙∼! 그 불덩어리들을 직격으로 맞은 강시들은 물론 그 여파에 휩쓸린 주위에 있던 강시들까지 순식간에 불에 휩싸여 타 들어갔다. 하지만 폭발에 의해 산산조각 난 강시들을 빼고는 단지 불만 옮겨 붙은 강시들은 온몸에 다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그 몸을 움직여 사람들에게 덤벼드는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힘만 센 녀석들이었는데 불에 휩싸인 채로 덤벼들자 더욱더 위력적이었다. 덕분에 세가 쪽 사람들은 그 강시들을 막을 생각도 못하고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 모습에 내 실수를 깨들은 나는 재빨리 경공을 사용하여 그 강시와 세가 쪽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강시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고, 잘못했다. 다른 마법을 썼어야 했는데… 그럼 이거나 먹어라. 바리코!" 시동어가 끝나기가 무섭게 매서운 바람이 내 주위에서부터 형성되더니 곧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불에 타는 채로 움직이는 강시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그 강시들은 곧 바람의 칼날에 의해 몇 등분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우, 나이스!" 그 모습에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신나 하다가 곧 주위 사람들의 놀라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잔뜩 받는 바람에 나는 슬그머니 팔을 내린 채 배시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잠시, '홀리 라이트'의 효력이 다 떨어져 빛이 사라지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강시들이 다시 정신을 차려 사람들을 공격해 왔고, 그러자 세가 쪽 사람들도 더 이상 나만 바라보지 않고 얼른 전투 체제로 들어갔다. 다행히 강시들의 위력이 예전보다 훨씬 약해져 있어 세가 사람들이 전보다는 쉽게 강시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나는 뒤로 물러나 사태를 주시하고 있어도 될 듯싶었고 마나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그냥 슬그머니 물러나려고 했는데, 그런 내 시선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아까 잔뜩 몰려들었던 세가의 무사들이 한 떼의 강시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는 것이 보였다. 세가의 무사들이 잘 버티고 있기느 ㄴ했지만 어째 위태위태해 보이는 데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강시 몇몇이 더 달려가는 것이 보여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에잇, 이렇게 된거 이판사판이닷! 그냥 마음껏 쓸란다. 매직 애로우!!" 시동어를 외치자 5개의 마법 화살이 만들어지며 각각 세가의 무사들을 둘러싸고 있는 5개의 강시들 등판에 틀어박혀 폭발하며 그 강시들을 산산조각 냈다. "아자! 다섯 보냈고, 이번에는 파이어 에로우닷!" 내 시동어에 이번에는 불로 이루어진 화살 다섯 개가 또다시 생성되어 강시에게로 날아갔다. "풍!" 하지만 미처 화살들이 강시에게 틀어박히기도 전에 어디서 매서운 바람이 날아와 다섯 개의 화살들을 서로 부딪치게 만들고는 공중에서 폭발하게 만들었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왼손에는 부적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코앞에 댄 형세를 취한 채 서 있는 노란도사가 날 째려보고 있었다.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대단하구나. 벌써부터 주술의 수준이 그 정도라니… 충분히 내 상대가 되겠구나. 어디 한번 막아보아라. 수!" 그가 왼손으로 부적을 허공에 띄우며 다시 한 번 오른손의 손가락 두 개를 세운 형태를 취한 채 외치자, 그 부적이 굵은 물줄기가 되어 소용돌이를 치면서 나에게 달려드는 거였다. "흥, 윈디 실드!"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위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ㅇ르 알아챈 나는 몸을 피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서서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바람으로 형성된 방어막이 내 주위를 감싸 그 물줄기를 사방으로 분산시켰다. "이번에는 제 차례군요. 윈디 위더 피스트!" 내 전공인 마법 싸움이 되자 나는 자신감에 넘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리고 이 세계의 마법이 어떤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군두군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그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바람으로 형성된 거대한 주먹이 그를 향해 돌진하자 그가 얼른 소매 족에서 다른 부적을 꺼내 허공에 던졌다. "풍방!" 내가 시전한 윈디 실드처럼 바람이 그의 주변에서 휘몰아치며 방어막을 형성했고, 내가 만들어낸 바람의 주먹은 그 방어막 위를 강하게 가격했다. "크윽!!" 그러나 내 마법의 힘이 그의 주술의 힘에 비해 월등했던 모양이었다. 방어막을 강타한 충격이 노란도사에게도 전달되었는지 그는 직접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가 만들어낸 바람의 방어막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얼근 다시 시동어를 외쳤다. "프리즈 애로우!" 내 주변에서 형성된 얼음의 화살들이 그를 얼리기 위해서 날아가자 그 노란도사는 비틀거리는 몸을 재빨리 바로잡은 후에 침착하게 부적을 공중에 던지면서 외쳤다. "수!" 그러자 아까 내게 달려들었던 그 굵은 물줄기가 이번에는 소용돌이를 치면서 내가 만들어낸 얼음 화살들을 감싸더니 그대로 얼어버린 채 커다란 몇 개의 덩어리로 조각이 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이 하필이면 강시들과 주작단원들이 싸우는 머리 위였다. 다행히도 그 싸움을 보고 있던 세가의 무사들이 외쳐 준 덕에 주작단원들은 얼른 얼음덩어리가 떨어지기 전에 경공으로써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한 템포 느린 강시들은 그대로 머리에 얼음덩어리를 맞고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쳇!!" 그 모습에 노란도사가 심히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지만, 곧 이어 이어진 나의 공격으로 인하여 허둥지둥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다그 웨이브!" 내가 그가 서 있던 발 밑을 폭파시켜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노란도사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그는 발 밑이 채 폭발하기 전에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채고 경공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덕분에 그는 단지 흙먼지만 뒤집어썼을 뿐 별 피해 없이 다른 곳에 무사히 내려설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 번 마법을 날리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아까 홀리 라이트를 너무 강렬하게 쓴 데다가 노란 도사와 마법 대결을 하느라 마법을 좀 많이 써버렸더니 마나가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마나의 절반밖에 남지 않은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세계에서는 내가 소모한 마나가 빠른 시간에 채워지지 않아 조심하고 있던 터였기에 나는 마나를 고갈시키더라도 그 노란도사를 아예 제압을 해버릴 것인지, 아니면 지금 잠시 물러나 마나를 아껴 나중을 대비할 것인지 되게 고민이 되었다. 만약 저 노란 옷의 도사를 제압해 버린다면 세가 사람들을 공격하는 강시들이 공격을 멈출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고민은 곧 주위에서 열심히 강시들을 맞서 싸우는 세가 쪽 사람들을 보자 금방 해결되었다. 이제 겨우 양쪽 전력이 비슷하게 되어 싸움이 동등해졌기에 지금 내가 무리해서 노란도사를 잡지 않더라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혹시라도 모산파의 도사가 그 말고 또 있을 수도 있으니 마나를 아낄 수 있을 때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 다시 본관의 현관 앞, 그러니까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까지 후퇴했다. 그러자 그곳에서 제갈준희의 곁을 지킨 채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던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날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니, 잘 싸우다 말고 왜 돌아온 거냐?" 그래서 그를 향해 배시시 웃어주며 대꾸했다. "그게요… 내력을 거의 다 써버려서요." "허참… 너란 녀석은… 아니, 그런데 그런 주술은 언제 배운 거냐?" "예전에요." 내 말에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전에 네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지하 감옥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술 덕인 게냐?" 이제는 감출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홋홋홋, 예." "흐음… 그랬었군. 어쩐지 놀랍다 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주술 실력을 믿고 검술 수련에 그렇게 게으름을 피웠던 거로구먼?"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아.하.하.하… 할아버지는… 왜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건데요?" 이게 다 세가 쪽 사람들이 강시들을 상대로 점점 우세해지고 있었기에 나오는 여유였다. 이제는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돌면서 세가 쪽 사람들이 저 강시들을 빨리 처리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상대하던 그 노란 옷의 도사는 내가 갑자기 물러나자 무척이나 의아한 모양이었지만, 내가 지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인지 감히 더 덤빌 생각은 못하고 강시들 뒤편으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채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노란도사는 뭐 씹은 표정으로 강시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의 명을 받고 그에게로 몰려든 강시의 수는 채 100구도 되지 못했다. 처음에 300구의 강시들이 온 것에 비하면 이번 대결에서 겨우1/3의 수만 살아-강시인데 살았다고 할 수 있을런지-넘은 거였다. 이게 다 내 신성 마법 때문에 강시들이 큰 타격을 받고 위력이 현저히 줄어든 덕이었다. 위력이 많이 줄어든 강시들은 비록 여전히 보통 무기로는 상처를 낼 수도 없었지만 일반 세가 무사들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검기를 마음껏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를 수 있었던 주작단원들이나 32대 제자들, 그리고 아빠와 엄마, 배 숙부, 예 총관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기에 노란도사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였다. 노란도사가 강시들을 자신의 뒤로 불러들이자 세가 쪽 사람들도 얼른 본관 앞으로 모여들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다가올 공격에 대비했다. 약간 지친 것도 같았지만 강시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는 덕인지 부서진 세가의 대문으로 또 한 무리의 강시들이 들어올 때도 그렇게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음… 역시 저 노란도사가 여기 있는 강시들을 조종하고 있었군. 근데 지금 들어오는 강시들은 세가를 포위하고 있던 강시들 같은데… 그들도 저 노란도사가 조종하고 있었던 걸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마는,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세가를 포위하고 있었던 강시들이 부서진 대문으로 다 들어오고 나서 그 뒤로 노란도사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조금 더 나이가 많은 도사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던 것이다. "흠, 2차전인가?" 좀 더 늙은 노란도사가 세가 안으로 들어와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오다가 강시들 앞에 서 있는 노란도사의 옆까지 와서 멈춰 서자 세가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채 그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늙은 노란도사는 세가 사람들의 긴장 어린 시선이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담담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한번 쓰윽 훑어보더니, 본관 바로 앞에서 은영들에게 보호받고 있던 나에게서 눈길을 멈추고는 기분 나쁘게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오… 이거 참…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상황도 볼 수 있고… 참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구만. 우리 문파가 사파라고 몰리게 만든 빌미를 주던 것이 바로 강시 제조술과 주술이었는데 정파의 기둥 중 하나인 은씨 세가의 핏줄이 주술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말이야. 이런 걸 모순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고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하는 그 늙은 노란도사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 나에게로 쏠렸다. "에… 이런 건 익히면 안 되는 거였어요?" 사람들의 시선에 난처해진 내가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려 묻자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만 살짝 으쓱해 보였다. "흠, 약간 곤란하긴 하지." 울 세가에서 약간 곤란한 거라면 보통 중소 문파나 세가였으면 사파로 몰릴 수도 있을 정도의 일이었다. "헤에… 그 정도인가요? 그럼 저 큰일 났군요." 비록 그렇다고 해도 크게 걱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나 때문에 은씨 세가나 부모님이 곤란해지는 거는 쬐께 걱정되었다. 하지만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는 오히려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 날 바라보았다. "주술은 사파에서 사용하는 걸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도가에서도 도술이라고 해서 주술과 비슷한 능력이 있긴 하지. 요즘은 무공을 너무 앞세우다 보니 사용하는 걸 거의 보기 힘들긴 하지만 말야. 게다가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은씨 세가의 핏줄을 감히 누가 건드린단 말이냐? 좀 난처한 입장이 되긴 하겠지만 괜찮을 거다." 너무 자신만만한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를 바라보자니 나는 문득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에… 할아버지, 혹시 이런 의문 안 들었어요? 내가 가짜 진이가 아닐까 하는. 사파의 어떤 사람이 제 모습으로 분장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이런 배우지도 않은 주술 능력까지 사용하는데도 의심 같은 거 안 하세요?" 그러자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너, 가짜냐?" 그래서 나도 웃으면서 대꾸했다. "훗, 그럴지도 모르죠." 도서관 할아버지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럼 가짜가 아냐. 가짜라면 자신이 진짜라고 박박 우기지. 하지만 진짜라면 그렇게 우기지 않거든." "에게, 겨우 그런거 가지고 단정짓는 거예요? 이거이거, 할아버지가 이렇게 무르실 줄이야……." 할아버지와 내가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노는 동안 주작단 단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동요가 일어났고, 그걸 바로 옆에서 보는 세가 사람들도 약간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걸 잠시 지켜보고 있던 약간 늙은 노란도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은씨 세가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는데……." 그가 말을 꺼내자 세가 쪽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늙은 노란도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 늙은 노란도사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 또한 무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오?" 그가 허공으로 들어 올려 흔들고 있는 것은 이 시대에서는 꽤 고급 신발로 분류되는 가죽 신발 한 짝이었는데, 어디선가 꽤나 많이 본 신발이었다. '으음, 저걸 어디서 봤더라…….' 그런데 내가 미처 알아내기도 전에 먼저 엄마가 그게 뭔지 알아채고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민이… 신발?" '에, 저게? 어쩐지 꽤 많이 본 거 같다 했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민이의 소지품 중에 하필이면 신발을 가지고 온 거지? 그렇게 가지고 올 게 없었나?'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엄마의 놀라움과 당황스러운 모습을 본 그 늙은 노란도사는 더욱더 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역시 어머니란 다르군. 맞소. 이건 은민이 신고 있던 신발이오." 그러자 아빠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민이가 당신들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오?" "그렇소이다. 당신의 아드님은 우리가 잘 보호하고 있지. 아들이 없어져서 걱정이 많으셨겠소." 능글맞은 늙은 노란도사의 말이 끝나자 떨리는 엄마의 목소릭가 흘러나왔다. "뭘 원하는 거죠?" "훗훗, 내 사질이 아까 말하지 않았었나 보군. 우리는 제갈준희라는 계집을 원하오." 늙은 노란도사의 말에 세가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 옆에 같이 서 있던 제갈준희에게 쏠렸다가 다시 늙은 노란도사에게 돌아갔다. 그는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민이의 신발 한짝을 흔들어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훗훗훗,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일주일의 시간을 드리겠소. 만약 은민과 제갈준희를 교환할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제시하는 곳으로 오시오." 그러자 아빠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정말 민이를 데리고 있는지 어떻게 확신하지? 게다가 민이가 무사하다는 보장은 어디 있단 말인가?" "아아, 그건 본 문의 명예에 걸고 보장하리다. 아무리 사파로 몰려 거의 멸문 직전까지 간 문파라고 해도 본 문의 명예를 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겠지? 은민이라는 소년은 우리가 데리고 있고 다친 곳은 한곳도 없소. 자, 그럼 우리는 볼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소이다. 만약 교환을 원한다면 일주일 수 낙양성에 있는 초월향이라는 청루에서 명월이라는 기녀를 찾으시오. 그럼 그녀가 안내를 해줄 것이오." 늙은 노란도사는 우리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는지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뒤 지체없이 몸을 돌리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자, 그럼 다음에 보십시다." 그와 그의 사질이라는 노란도사가 세가를 빠져나가자 세가를 침입했던 강시들도 마치 썰물 빠져나가듯이 모조리 나가 버렸다. 하지만 남은 세가 쪽 사람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라도 움직이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란 걸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을 터,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예 총관이 나섰다. "큰도련님, 피곤하실 테니 우선 들어가서 쉬시지요. 뒷정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작단 여러분들께서도 지금은 지친 몸을 누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야기는 내일 다시 모여서 하시지요." 그러자 아빠와 주작단 단장이 서로 마주 보며 의향을 물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단장의 생각은 어떠신지?" "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요." 그 둘이 합의를 하자 주작단 단원들과 세가의 무사들은 지금까지 꺼내 들고 있던 자신들의 무기를 집어넣고는 각자 자신들의 갈 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주작단 단원들은 그들에게 배정해 준 처소로 움직였지만, 세가의 무사들은 식솔들과 함께 남아서 뒷정리를 해야만 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들어가도 그렇게 오래 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벌써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고 있는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연재] 제37화 제갈준희를 보호하라 그 다음날, 평소와 같은 시각에 피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나는 제일 먼저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밤에 자기 전 곰곰히 생각해보니,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는 내가 주술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놀라지 않은 눈치였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엔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그 다음에는 금방 받아들이고 나랑 농담까지 나누었는데다, 내가 사파로 몰릴지도 모르는데 나를 보호해 주겠다는 굳은 의지까지 내비쳤던 것이다. 물론 난 내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사파로 몰려 곤란해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단지 내가 부모님과 처음 만났을 때에 사람으로서의 내 나이가 고작 7살에 불과했기에 마법을 그렇게 잘 사용한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까 생각해서 숨긴 것뿐이다. 그리고 이왕 무공을 배우게 된 거, 마법은 사용하지 말고 무공만 열심히 배워 고수가 되고자 될 수 있는 한 마법은 사용하지 않으려고 해왔었다. 물론 마법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무공 수련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게으름도 많이 부리긴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이곳에서 민이를 제외한 아무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쉽게 받아들여 줘서 그때 당시에는 은씨 세가의 핏줄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의문을 해결하고자 조금 더 잘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으로 향하는 거다. 은씨의 핏줄과 허락된 몇몇의 소수만이 갈 수 있는 위층 도서관으로 올라가자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는 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멀쩡한 모습으로 도서관 알을 돌아다니며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놀랍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런, 진아, 일찍 일어났구나? 그런데 네가 언제부터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을 찾는 독서광이 된 거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 정말 주무셨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피로해 보이지는 않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훗, 날 뭘로 보는 게냐? 난 아직 정정하단다. 그런데 정말 웬일로 아침부터 여길 찾아온 게냐? 설마… 책을 고르려고 온 거냐? 그렇다면 난 정말 기쁠 텐데 말이다." "에헤헤… 죄송하지만 그건 아니구여, 궁금한 것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래? 나에게 궁금한 게 뭔데 그러느냐?" "저기요, 할아버지… 처음부터 제가 마법… 에… 그러니까 주술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걸 알고 계셨었요?" "호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한 거냐?"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는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한 채 오히려 싱긋 웃는 얼굴로 나에게 되물었다. "아뇨… 그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많이 놀라시는 것 같지도 않구요, 게다가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서… 혹시 알고 계셨던 건 아닌가 싶어서요. 정말 그러신 거예요?" "허허허,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더니만, 내가 너무 연기 실력이 없었나 보지?"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의 그 말에 나는 놀라움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 그럼 알고 계셨어요? 언제요? 아니, 어떻게 아신 거예요?"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는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대답해 줬다. "허허허,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란다. 민이와 네가 처음 은씨 세가로 들어온 날을 기억하느냐? 그때 가주,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가 너희와 너희 부모를 떼어놓으려고 했지 않았던? 그때 부모에게 가려는 너희들을 가로막은 세가의 무사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네가 주술을 사용하지 않았더냐?" 그랬다. 그때 당시 할아버지가 민이와 나만 따로 건물에 데려다 놓은 뒤 엄마, 아빠에게 가지 못하게 세가 무사들을 시켜 막게 했었다. 단호하게 우리의 앞을 막아서는 그들을 쓰러뜨려야 부모님께 갈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큰 해를 가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무기를 들이대는 대신 편하게 해결하려고 그들 발 밑을 폭발시키는 마법을 사용했었다. 아, 물론 그전에 주의를 흩뜨리려고 얼음 조각들을 날리는 마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두 마법 다 그렇게 크게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그 뒤로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마법을 사용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민이와 나를 막아섰던 세가의 무사들은 내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아아… 그랬구나. 에, 그럼 혹시 할아버지도 알고 계세요?" "당연하지." '아하,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와 대결할 때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그 사태를 해결하셨었구나.' 솔직히 그때는 할아버지가 내가 마법을 사용한 걸 몰랐을 거라 생각해서 그 상태에서 마법을 깨뜨린 할아버지를 엄청 대단하게 봤었는데, 지금 보니 할아버지는 이미 그게 주술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던 탓에 침착하게 대응하실 수 있었던 거였다. '에잇,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할아버지를 우러러봤잖아? 이거 웬지 속은 듯한 느낌이 드는걸?' 속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그렇게 넘어가려고 하던 나는 순간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 것을 느끼고 다시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에… 그럼 말이죠, 지금이야 주술 사용하는 걸 이미 알고 계셔서 제가 진짜 진이라 확신하고 계신다지만, 처음 주술을 사용한다는 걸 아셨을 때는 제가 가짜라고 의심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하며 괜히 애꿎은 천장이 뚫리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고 있는 거였다. 그 모습에 '혹시…'라고 생각했던 게 '어… 정말?'이라고 생각되어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계속 바라보자,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내 뜨거운 시선에 견딜 수가 없었는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날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헐헐헐… 뭐, 부정은 못하겠구나. 그래, 처음에는 의심도 했었단다. 네가 은씨 성을 가지는 것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그것도 혹시 치밀한 계산 하에 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한동안은 계속 너와 민이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헤에……." 놀라움과 당혹감을 숨기지 않은 채 바라보는 내 시선에 더욱더 미안해졌는지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날 살펴보며 물었다. "진아, 화났느냐?" "에…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애초에 저나 민이는 은씨든 아니든 그런 건 별로 상관 없었는데요. 세가를 나간다면 할아버지께서 무척 서운해하실 거 같아서, 그냥 할아버지랑 같이 살 생각에 이곳에 머물러 있는 건데, 우리도 모르는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 조금… 서운하기는 하네요." 뺨을 긁적이며, 땅만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해하지는 말아라. 네 할아버지는 너와 민이를 처음 보는 순간 자신의 핏줄이라는 걸 굳게 믿었으니까. 단지 우리 은영에서 완벽을 기하기 위해 지켜본 것뿐이란다. 은씨 세가의 세력은 그만큼 큰 것이라서 누구나 탐낼 만한 것이니까." "예에, 이해는 가요." "훗, 하지만 조금은 서운하지? 그래도 진이는 현명하니까 모두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예." 은씨 세가 사람들과 주작단 단원들, 그리고 제갈준희가 모인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제갈준희는 아마도 이 사건에 제일 큰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이 자리에 끼인 듯했다. 우리 은씨 세가 쪽 사람으로는 아빠랑 엄마, 배 숙부, 예 총관, 예헌, 예철, 그리고 나도 꼽사리 낄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주작 단원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맘에 걸렸는지 나를 자신의 옆에 앉히고는 계속 손을 잡고 놔주질 않아서 나는 속으로 엄마에게 되게 미안했다. 모산파 출신의 그 늙은 도사의 제의를 의논하기 위해 모였지만 모두 굳은 얼굴로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아 분위기는 무거웠고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서로 상대방의 눈치만 살피며 입을 열지 못하고 초조해만 하는 사이, 이런 분위기를 한번쯤은 타개하고 말꼬리를 틔워줄 예 총관이 조용히 입만 다물고 서 있자 나는 의아해져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덤덤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뭔가 기다리는 것이라도 있는지 가끔 가다 대청의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던지곤 하는 거였다. 그의 모습에 내가 잘못 오해하는 것일까 봐 다시금 확인하려는 차원에서 예 총관만 자꾸 바라보고 있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음… 역시 뭔가 있나 보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다른 세가 사람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굳은 얼굴로 앉아 있지는 않을 테니까. '아, 혹시 기다리는 게 빨리 오지 않아서 초조해하고 있는 건가?' 그 상태에서 약 15분쯤이 더 흘렀을 때 드디어 예 총관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온 모양이다. 대청 문밖에서 예성구의 목소리가 들리자 예 총관의 얼굴이 화악 퍼졌던 것이다. "큰도련님, 저 예성구입니다." "무슨 일인가?" 아빠의 말이 떨어지자 예성구가 문을 열고 조심스럽지만,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아빠의 앞에 부복했다. "가주님께서 폐관 수련을 끝마치고 나오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든든한 아군이 나타났다고 느낌인지 아빠는 안색을 활짝 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뒤에서 그동안 조용히 서 있던 예 총관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서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야지. 주작단장, 미안하지만 실례해야 하겠소이다. 이 자리는 잠시 후에 다시 계속하는 것이 어떻겠소?" 아빠가 주작단장을 보며 말하자 그는 더욱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셔야지요. 그럼 저희는 숙소로 돌아가 있을 테니 다시 시간이 된다면 전갈을 주십시오." "이해해 줘서 고맙소. 그럼." 아빠가 주작단장에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빠져나가자 은씨 세가 사람들도 아빠의 뒤를 따라 우르르 그곳을 빠져나왔다. 예성구의 안내로 찾아간 할아버지의 방에서는 마악 목욕을 끝냈는지 머리가 다 젖은 상태로 옷을 걸치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폐관 수련 끝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빠가 제일 먼저 할아버지를 향해 축하 인사를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 그런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하는 할아버지는 예전보다 약간 야위긴 했지만, 눈빛만은 더욱더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마나의 양도 전보다 조금 더 많아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수고들했네." 할아버지가 그곳에 모인 이들을 치하하자 배 숙부가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제때 나와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스승님께서 건재하시는 한 무림맹에서도 자신들 마음대로 하지만 못할 겁니다." "허허허,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우리 세가와 무림맹 사이가 벌어졌단 말인가?" 그러자 예 총관이 담담한 어투로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술(마법)을 사용하여 강시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내 양손을 한쪽씩 잡고 있던 아빠와 엄마가 무지 긴장했는데, 그런 부모님의 심정을 알았음인지 할아버지가 슬쩍 아빠와 엄마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씨익 웃어주고는 다시 예 총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할아버지의 행동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교환하는 부모님에게 나는 작게 속삭여 줬다. "할아버지는 제자 주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셨대요." 그러자 엄마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도대체 그런 주술은 어디서 배운 거니?" 이 질문은 아마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도 나에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분이 저하되는 바람에 묻지 않고 속으로만 그 의문을 묻어두었을 것이다. "그건 말이죠… 스스로 책 보고 익힌 거예요." 그건 사실이었다. 울 엄마는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스스로 마법책을 보고 독학하는 나를 보고 피식피식 웃었었다. 나중에 자연스레 다 할 줄 알게 되는데 괜히 성격이 급해 그 세월을 기다리지 못하고 미리부터 머리 싸매고 주문을 외우는 내가 우스웠던 것이다(해츨링 때는 주문까지 외워야 마법이 구현되었었다). '어쨌든 독학한 건 사실이니까.' 그러자 엄마의 눈이 더욱더 뚱그레졌다. "아니, 그런 주술이 적힌 책은 또 어디서 난 건데?" 그런 엄마를 향해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호홋, 그건 비밀이에요." 내 대답에 엄마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엄마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고 했지만, 다행히 그보다도 먼저 아빠가 엄마를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기연을 얻은 모양이니 더 이상은 묻지 맙시다." 우연한 일로 인하여 무공비급을 얻거나 아니면 고수를 만나 한수 배우거나, 운 좋게 뛰어난 영약을 얻게 되는 걸 기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건 대답해 주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당신 같으면 산삼을 어디서 발견했는지 말하겠는가? 나 같으면 나 혼자만 알고 있겠다-강호에서도 묻는 건 실례였다. 아빠는 내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 배려해서 그렇게 엄마의 입을 다물게 했던 것이다. "호호, 역시 아빠가 최고예요." 우리 세 식구가 그러고 있는 동안 어느덧 예 총관의 설명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흐음… 제갈 소저와 우리 민이를 맞교환하자 그랬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나온 주작단에서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들에게는 우리 민이보다는 제갈 소저가 더욱 가치 있을 테니… 아, 주작단장과 이야기는 나누어봤는가?"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는 나누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잠시 후에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서둘러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겠군. 이런 일은 가급적 빨리 해결하는 것이 좋으니까." "그럼 지금 주작단에게 만나자고 전할까요?" "그러도록 하지. 나도 준비를 하고 나가겠네."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주작단원들은 숙소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불려와야 했다. 그런 걸 보면 남의 집에서 머문다는 건 참으로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도 주작단원들은 굳은 얼굴로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지만, 그들과는 반대로 은씨 세가의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얼굴이 펴진 상태였다. "이번에 우리 세가를 도와 불온한 무리들을 막아냈다고 들었소. 그대들의 도움 감사하게 생각하는 바이오." "별말씀을…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아버지의 의례적인 인사에 주작단장도 예의로 맞받았다. "그건 그렇고… 그 불온한 무리들이 물러가기 전에 우리 세가에 제안을 하나 해왔다고 들었소이다." 주작단장 헌준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은민 군을 데리고 있다며, 제갈 소저와 교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제안을 주작단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보다는 본인의 생각을 우선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헌준이 가리킨 것은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제갈준희였다. "옳은 말인 것 같군. 그래, 제갈 소저는 이 제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더불어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네만……." 그러자 제갈준희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만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해 나갔다. "소녀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소녀를 원하는 이유는 제 할아버님을 협박할 인질로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그를 생각해 볼 때 제가 그들의 손으로 넘어간다면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입니다. 하나, 그들이 지금까지 한 행동으로 볼 때 그 목적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겠지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후 주위를 둘러보더니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달리 생각해 볼 때 제 할아버님을 협박할 인질은 저 말고도 또 있으며, 다른 조건으로 협박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더라도 그걸 저지할 수 있는 은씨 세가로서는 은민 소협이 그들 손에 있음으로 인하여 세력이 저지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눈을 질끈 감으며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상황을 보아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주작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미안하지만, 제갈 소저의 말 중에 하나는 틀렸습니다. 그들이 제갈세가의 전 가주님을 협박할 수 있는 인질은 제갈 소저를 제외하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갈세가는 현재 무림맹의 엄중한 경비 아래 보호받고 있으므로 제갈 소저만 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들은 제갈세가의 전 가주님을 협박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배 숙부가 일어나 날카롭게 말했다. "주작단장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란 것이오?" 배 숙부의 기세에 놀렸는지, 아니면 이곳이 은씨 세가라서 그런건지 헌준은 자신의 본심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한 채 약간 어물거리듯 말했다.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은민 소협과 제갈 소저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한쪽은……." 헌준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리면서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빠가 나섰다. "어느 한쪽을 지레 포기하는 것보다는 둘 모두 구하기 위해 작전을 짜는 게 어떻겠소?" 헌준은 아빠의 말에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제가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혹시 은 대협께 좋은 묘안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그들의 제안을 일단 수락한 뒤 민이와 제갈 소저를 교환다는 장소를 덮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헌준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아빠를 쳐다보았다. "저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은 대협도 그들의 전력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일류고수 못지 않은 강시들이 수백 명이었습니다. 그들 또한 만약을 대비하여 그 강시들을 포진 시킬 텐데, 현재 우리의 전력으로는 그때 남은 강시만 상대한다고 해도 버겁습니다. 그런 강시들이 더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아빠가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동안 조용히 서서 대화만 듣고 있던 희여송이 나섰다. "아룁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저희 세가에 침입해 왔던 강시들 외에 더 이상의 강시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있다면 그들보다 위력이 현저이 떨어지는 강시들일 겁니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할아버지 또한 약간의 놀라움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의문을 던졌다. "허어,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여송이 네가 그걸 어찌 알고 장담하느냐?" "그날 저희 세가에 침입해 온 이들 중에 낯익은 복장을 입고 있는 강시들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옷이 해어져 있고 그때 상황도 다급했던 터라 금방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옷은 분명 무림맹 낙양 지사 소속 무사들 복장이었습니다." "희 사질, 그게 강시들이 더 있지 않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요?" 엄마의 질문에 희여송은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할아버지와 배 숙부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정각 대사님의 생일을 위하여 가주님이 소림사로 가실 때 동행했을 적의 일입니다만, 그때 낙양에서 작지 않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가주님과 스승님은 그게 뭔지 아실 겁니다." 그러자 가만 듣고 있던 헌준이 아는 척하며 나섰다. "은민 소협이 얻었다던 청명검 때문에 일어난 소동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청명검이 낙양 근처에 있는 야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리 때문에 수많은 무사들이 그 야산으로 올라갔었지만,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내려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지요. 그리하여 낙양 지부장의 부탁을 받고 가주님을 비롯한 거의 세가의 사람들도 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야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해결되었지만, 야산으로 올라갔던 수많은 무사들은 몇십 구의 시체를 제외하고는 발견하지 못했지요." 희여송의 말에 배 숙부가 놀라움을 드러내며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그때 사라진 무사들이 우리 세가를 침입했던 바로 그 강시들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렇습니다. 저희 세가에 침입했던 강시들은 행동이 약간 부자연스러웠긴 하지만 우리에게 덤벼들 때 분명 무공의 초식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희여송이 말 끝에 던진 질문에 좌중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레 바라본 희여송은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얼마 전에 감쪽같이 사라진 수백 명의 무사들, 그리고 전에 사라졌던 무림맹 낙양 지부 소속 무사가 이번에 나타난 강시들 사이에 있다는 건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흐음… 일리있는 말이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류고수급 강시가 300명이나 됩니다. 거기에다 모산파의 사람이 더 있는지도 모르는 일! 우리 쪽이 너무 열세입니다." 헌준은 희여송의 말에 일만 수긍하긴 했지만, 아빠의 의견에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그때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던 예 총관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제갈 소저와 민이 도련님을 모두 구하려고 노력하듯이, 저들 또한 민이 도련님과 제갈 소저 모두를 노리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좌중이 순간적으로 씻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한참 후에 배 숙부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민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희여송이 이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해온 행동을 봤을 때, 저희가 제갈 소저를 데리고 간다 해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분위기가 제의 자체를 불신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헌준이 은근히 반기는 얼굴로 얼른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하지만 그는 은씨 세가 쪽 사람들의 눈초리 때문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제갈준희가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녀의 생각으로는 그들과의 접촉을 계속 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록 그들에 대한 믿음이 없긴 하지만, 이번 접촉이야말로 그 조직에 대해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또 다른 기회를 잡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갈 소저는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할아버지가 묻자 제갈준희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나, 예 총관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그들이 어떤 비열한 술수를 쓸지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갈 소저의 말이 옳긴 합니다만, 우리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모르되 받아들이려 한다면 칼자루는 저쪽이 쥐게 됩니다. 은 소협을 보기 위해서라도 저들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대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헌준이 다시 한 번 기운 빠지는 소리를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기에 아무도 뭐라 할 수도, 그리고 그에 맞는 좋은 묘안을 내놓을 수도 없었기에 좌중은 다시 한 번 조용해졌고, 누군가가 중얼거린 목소리에 암묵적으로 긍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역시… 제안을 거절하는 수밖에 방법은 없는 건가?" 하지만 나는 내심 그 제안을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었기에-물론 제갈준희를 그쪽으로 넘기려고 하는 건 아니다-제안을 거절할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요, 뭐 좀 여쭈어봐도 될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고, 할아버지도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뭔데 그러는 거냐?" 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감사하다는 뜻으로 할아버지에게 생긋 웃어주고는 내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까요, 민이는 그들 쪽에서 보면 무척 가치있는 인질이잖아요. 그런데 그 인질을 포기한다고 하는 거 보니까 준희 언니는 민이보다도 더욱 중요하단 소리겠죠?" "그렇지." "그런데요, 그렇게 중요한 준희 언니를 우리가 제의를 거절한다고 해서 포기할까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제의를 거절한다면 언니가 무림맹으로 가는 걸 노릴 거 같은데요? 하지만 지금 준희 언니를 호위할 분들은 겨우 자작단원 20명뿐이잖아요. 그것도 어제 강시들이 침입한 덕분에 다친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내 말에 주작단장인 헌준이 대답했다. "그건 걱정 마시오.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오." 그런 그에게 나는 미안하다는 뜻에서 생긋 웃어 보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에 전서구를 보내고 지원이 올 때까지는 최소로 잡는다고 해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 아닌가요? 그 시간이면 그쪽에서는 우리가 제의를 거절한 걸로 알고, 준희 언니를 무림맹으로 데려갈 지원이 오기 전에 우리 세가를 다시 한 번 침입하기에 충분할 거 같은데요? 게다가 우리는 그쪽의 전체 전력을 모르는 데 비해, 그들은 어제의 침입으로 인하여 우리의 전력을 대충 꿰뚫고 있겠지요." 처음에는 별 시답잖다는 듯이 내 말을 듣고 있던 헌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보니 쪼끔은 고소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쪼오오오∼그으음∼ 미안해졌지만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말을 이었다. "제 말이 맞다면 우리는 어쨌든 그 제의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예 총관이 장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시는 제갈 소저를 보내야 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아가씨의 얼굴은 그렇게 슬퍼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그렇다는 건 아가씨께 뭔가 생각이 있으시다는 거겠지요?" "에… 괜찮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우선 우리가 제의를 받아들인다고 낙양으로 간다면요, 무림맹에서 시간에 맞춰 우리에게 지원을 보내줄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 세가보다는 낙양이 무립맹과 훨씬 가까우니까요. 게다가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그곳에서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하고 만날 방법을 정하느라 며칠은 시간을 더 끌 수 있지 않을까요?" 거기까지 들은 희여송이 내 계획에서 허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사매, 그들은 아마도 무림맹에서 지원을 보내지 않을까 주시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니 지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쪽에서도 제갈 소저와 민이 사제를 교환하는 장소에 그에 대한 대비도 다 하고 나올 텐데요." "아니에요, 사형.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민이와 준희 언니를 교환하는 장소를 덮치자는 것이 아니에요." "설마… 그냥 제갈 소저와 민이를 교환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되게 의심스럽다는 듯 날 보라보는 헌준에게 나는 자신에 찬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자 헌준이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허… 이거야 원……." 그러는 헌준이 되게 맘에 안 들었지만, 내 계획을 다 말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그렇게만 한다면 무림맹에서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교환을 하는 건 미끼일 뿐이죠. 그들이 순순히 민이와 언니를 교환해 주든 아니면 우리를 속여서 민이와 준희 언니를 다 차지하든 상관은 없어요. 그 다음 계획이 성공하다면 말이죠." 그런데 헌준은 내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 다음에 그들을 미행해 본거지를 덮치자고 할 거라면 나는 너무 무모하다고 말해 주고 싶군요. 미행이 성공한다면 모를까 까딱 잘못해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나요?" 그런 그에게 나도 되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대꾸했다. "미행을 하자고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오랜 기간 동안 은밀하게 움직여 왔을 조직인데 그렇게 쉽게 미행당해 줄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미행할 걸 대비하여 뭔가 꾸며놨을 거예요." 그러자 헌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날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할 생각인가요? 지금 은 소저의 계획은 그들의 본거지를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요?" "헌 대협께서 제 말을 자꾸 가로막지만 않으셨다면 벌써 다 말씀드렸을 거예요. 물론 제 계획은 본거지를 치는 겁니다. 하지만 미행 같은 불안한 방법보다는 그들의 본거지를 찾는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내 말에 헌준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오히려 배 숙부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게 어떤 방법이지?" "바로 제 주술이요." 내 대답에 좌중의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해줘야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주술 가운데 추적 주술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그 주술을 준희 언니에게 걸어둔다면 나는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알아낼 수 있죠." 그러자 할아버지가 감탄을 표했다. "허어, 그런 주술도 있단 말이냐? 그런 게 있다면 그들의 본거지를 충분히 찾아갈 수 있겠구나." "예. 추적할 수 있는 거리도 같은 지방 내에 있거나 옆의 지방에 있는 정도라면 충분히 찾아갈 수 있으니까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여유있게 쫓아갈 수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작단장 헌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주작단장은 이 아이의 의견을 어찌 생각하시는가?" 그러자 그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은 소저의 생각대로 된다면야 훌륭한 계획이지만, 그쪽에는 주술에 능한 모산파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은 소저의 주술을 눈치 채고 뭔가 조치를 취한다면 소용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들이 제 주술을 눈치 챌 수 있을 리도 없겠지만, 눈치 채서 어떠한 조치를 취하더라도 또 다른 방법이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추적 마법에는 추적할 인물이나 물건에 직접 마법을 걸어 멀리서 위치를 알아내는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직접 마법을 걸지 않아도 찾을 대상만 정확히 알고 있다면 찾아낼 수 있는 마법도 있었던 것이다. 내 자신있는 대답에 헌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저는 좋습니다." "그대까지 허락하면 결론은 난 거군. 우리는 진이의 계획에 따라 우선 제갈 소저와 민이를 교환한 후 진이의 주술로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어 그곳을 칠 것이오. 제갈 소저, 괜찮겠는가?" 할아버지의 말에 제갈준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하여 내 계획에 따르는 것으로 결정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방금 생각난 것 때문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에…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한 가지 있어요." 그러면서 내가 제갈준희를 바라보자 제갈준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데?" "에에… 그게… 내 주술은 언니가 어디에 있는 확실히 알아낼 수 있긴 하지만, 언니가 그 조직에 붙잡혀 있는 동안 언니를 보호해 주지는 못해. 그러니까 그 조직의 손으로 넘어가는 즉시 언니의 몸은 언니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거지. 본거지만 알아내면 최대한 빨리 그곳을 습격하겠지만, 그전에 언니에게 뭔 일이 생긴다면……."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이마에 비벼대자 제갈준희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환히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이래 봬도 난 그렇게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건데 그 정도의 위험은 충분히 감수해야 하지 않아?" "에… 그래도 언니 혼자 그곳으로 보낸다는 건 조금 걱정되네. 차라리 그들이 비열하게 사기를 쳐서 언니와 민이를 다 데리고 간다면 민이 녀석이 있으니까 그나마 안심이 되지만… 아, 그래." 나는 또 다른 괜찮은 생각이 나서 손뼉을 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뭔 이야기를 하려는가 하고 날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제가 준희 언니로 변장하고 교환되면 안 될까요? 그게 훨씬 나을 거 같은데." 그러자 엄마의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고, 예 총관의 입은 따악 벌어졌다. 하지만 주작단원 쪽은 얼굴들이 활짝 펴졌다. 그리고 대표로 헌준이 기쁜 음성으로 입을 열어 환영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은 소저가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하기야, 은 소저는 무공 실력도 뛰어나시고 주술까지 하실 수 있으니 제갈 소저보다야 훨씬 안전하지요." 그러나 그는 그 뒤에 들려온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여 딱 굳어져 버렸다. "그런데 진아, 네가 없으면 그들 조직의 본거지는 어떻게 찾으란 말이냐?" 그 말에 엄마와 예 총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렇군요.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어쩔 수 없지. 언니, 잘 견디고 있어. 내가 금방 또 구해줄게." 그러자 제갈준희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진이만 믿고 있을게." 그리하여 우리 세가 사람들과 제갈준희, 신기수, 그리고 주작단원들은 다음날 낙양을 향하여 출발했다. 아무리 같은 지역 내에 있는 성이라고는 하지만 천천히 갔다가는 일주일 내에 못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서두르는 것이었다. 신기수는 제갈준희가 민이와 교환될 거라는 소리를 듣고 엄청나게 반발했지만-무뚝뚝한 사람이 이럴 때는 열혈 기질을 발휘했다-제갈준희의 설득에 의하여 겨우 입을 다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되게 불안한지 아직 전력이 되지도 않는 주제에 따라 나서겠다고 우겨서 어쩔 수 없이 데려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고 같이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기절을 시키거나 수면제를 먹여 재워놓고 우리끼리 출발하려고 했지만, 제갈준희가 같이 가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동행이 허락된 것이다. 그런 거 보면 제갈준희가 아무리 담담하게 있는다 하더라도 속으로는 꽤나 떨리고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시가, 그것이 당연한 거겠지만… '음, 그러니까 역시 내가 변장하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라나?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 때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리 편이랑 연락이 되지 않으면 역시 무리겠군. 나 혼자 난리칠 수도 없고 말야.' 낙양 지부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 일행을 보고 반색을 하며 맞아들이긴 했지만, 주작단장을 소개받자 마치 '전에는 청룡단원이 오더니 이번에는 주작단원들에 단장까지 왔냐?'라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무림맹에서 또 다른 인원들이 내려온다 그러자 아예 울상이 되어 한숨만 푹푹 내볕었다. '헐… 저번에 청룡단원들에게 어지간히 학을 뗀 모양이네.' 낙양을 관할하는 지부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무림맹에서는 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말라고 지시가 내려온 모양이었다. 주작단장이 그에게 설명하는 걸 대충 들어보니 은씨 세가를 침입한 불온한 무리들을 쫓아오다 보니 낙양에서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어 온 것이니 협조해 달라고만 하는 거였다. 낙양 지부장은 그들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식으로 협조할 의사만 내비치고는 물러갔다. 모산파의 사람들이 강시를 이끌고 우리 세가에 쳐들어온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 아빠와 배 숙부, 희여송, 그리고 주작단장과 두 명의 주작단원들은 그들이 말한 '초월향'이라는 청루로 향했다. 나도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남장하고 같이 가면 안 되냐고 한번 말했다가 세가 사람들의 뚱그레진 눈들을 보고는 다시 조르려는 마음이 쑥 들어가 버렸다. '에잇, 내가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구경 좀 해보겠다는데 그렇게 볼 건 또 뭐야? 쳇, 나중에 나 혼자 가볼 거다. 아아, 아니다. 민이랑 같이 가보면 되겠구나.' 초월향으로 갔던 일행들은 한 시간쯤 지나자 곧바로 돌아왔다. 이왕 청루라는 곳에 간 김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쬐끔은 놀고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생각일 뿐 그곳에 간 일행들은 놀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되었어요?" 제일 마음 졸이고 있었던 엄마가 아빠를 비롯한 일행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제일 먼저 뛰어나가 아빠를 맞아들이면서 물었다. "별건없었다오. 단지 내일 아침에 성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소." "거기서 민이와 교환한대요?" "설마… 그건 아니고, 안내자가 나온다고 하더군. 우리는 단지 제갈 소저를 데리고 내일 아침에 성문 앞으로 나가 있다가 안내자를 따라간다면 교환 장소로 간 수 있다고 했소." "아아……." 엄마는 그 말에 더욱더 근심이 쌓이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엄마 뒤를 이어 나도 아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요? 혹시… 몇 명만 나오라던가, 아니면 누구 한 사람만 지목하여 그가 준희 언니를 데리고 오라던가 그런 말은 없었어요?" 내 말에 배 숙부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허, 그런 이야기는 또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런 말은 없었단다. 그래서 이곳에 온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갈 거란다." "몇 명만 오라고 하지 않은 걸 보면 그쪽에서도 전력을 다 데리고 올 생각인가 보군."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에 희여송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러자 주작단장 헌준이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직 무림맹에서 지원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저희만으로 가도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의 걱정을 해소시켜 줬다. "괜찮아요. 준희 언니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머지 분들만 자신의 몸을 지키시면 돼요." 거기에 할아버지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허허, 아마 너와 민이를 오히려 잡아들이려 할 테니 너는 다치는 것을 조심하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네가 없으면 그들의 본거지를 찾지 못할 테니까." "홋홋홋,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 경공 실력 아시잖아요. 절대 잡힐 일 없어요. 아, 준희 언니? 혹시 혼자 그들의 소굴에 들어가는 게 걱정되면 민이보고 다시 잡히라고 해서 같이 있게 해줄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날 흘겨보았다. 그걸 제갈준희가 눈치 챘는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진이는 민이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잖아. 그 만남이 나 때문에 더 미뤄진다면 내가 진이에게 너무 미안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내가 진이에게 받은 도움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이번에 나는 가만히 그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될 뿐인데 뭐…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어." "에혀,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가주고 싶지만… 언니, 그곳에 가서도 너두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꼭 구해줄 테니까." "그래, 그래. 진이만 믿을게."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세가의 어른들을 따라 낙양 성문으로 나갔다. 엄마는 내가 뭔 일을 당하거나 아니면 엉뚱한 일을 저지를까 봐 그냥 낙양 지부에 머물러 있기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렇게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내가 빠지려 하겠는가? 그래서 엄마의 은근한 눈총을 싸악 무시하고 따라나선 거였다. 아직 좀 이른 시각이라서 그런지 성문을 지키는 관병들 외에는 성문을 지나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 이들 중에서 누가 안내인인지 모르는 우리들은 성문 바로 밖에 옹기종기 모여서 성문을 지나 다니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낯뜨거운 일을 세가의 어른들이나 주작단원들이 어디 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성문 바로 밖에는 세가의 몇몇 무사들과 낙양 지부 소속 무사들을 세워두고 우리는 성문에서 가장 가까운 객점에 모여 앉아서 간단한 요리를 즐기며 성문으로 보낸 무사들이 안내인을 데리고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 30분쯤이 지났을 때였다. 이제 슬슬 안내인이 올 때가 됐으려니 하고 있는데 객점의 열린 문으로 세가의 무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뛰어 들어와 할아버지 앞에 부복했다. "아, 아룁니다." "안내인이 왔느냐?" "예, 그… 그런데… 그것이… 저기……." 안내인이 왔다는데 왜 저렇게 난처한 얼굴로 말을 못하고 우물거리는 이해를 못해 그 무사가 제대로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객점 안으로 성문으로 갔던 나머지 무사들과 한 여성이 들어섰다. 세가의 무사들과 같이 있어서 그녀가 안내가인가 보다… 하고 바라보던 나는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바로 예전에 은재영의 부인으로 세가 안에 들어왔었던 그 여자, 은주였던 것이다. "어라라라?"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긋 웃어 보이더니 척척 걸어와 할아버지 앞에서 멈춰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전에는 폐관 수련을 하시느라 미처 뵙지 못했네요." 그러자 웬만한 일에도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고 덤덤하던 할아버지가 나와 만난 뒤 처음으로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 아버님?" 옆에 있던 배 숙부가 그녀를 보더니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까지 빼어 들어 그녀에게 겨누며 외쳤다. "이 발칙한 것!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에게 검이 겨누어짐에도 불구하고 전혀 놀라지 않은 채 마치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유연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자신이 들고 있던 부채를 들어 배 숙부가 내지르는 검의 끝에다 정확하게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닌가? "아아… 너무 흥분하지 마시지요, 아주버님. 오랜만에 만난 제수에게 너무 무례하신 게 아닌가요?" "제수는 무슨 제수!! 도대체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나타난 게냐?" "어머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하지요. 제가 삐쳐서 그냥 가버리면 무척 곤란하실 텐데요? 이래 봬도 전 안내역으로 온 거랍니다." 그녀는 배 숙부의 검끝을 자신의 부채로 부드럽게 밀어낸 뒤 그 부채를 펴 살랑살랑 부치면서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그녀의 태연함에 배 숙부는 기가 막혀하며 검을 거두어들였다. "뭣이라? 네가 안내자라고? 허… 참……." 배 숙부와 그녀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평정심을 되찾은 듯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온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네가 재영이의 안사람으로 우리 세가 안으로 들어와 음모를 꾸몄다던 그 아이로구나. 어쨌든 지금은 안내역으로 왔다니 네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호호호, 아버님의 명이시니 당연히 따라야지요. 아, 아주버님과 형님도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아빠는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해 보였고, 우리의 호프 엄마는 그녀 못지 않은 화사한 미소를 보이면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호호호, 우리야 잘 있었지. 자네야말로 별 탈 없어 보이는군?" "형님이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저도 잘 있었답니다." "그래, 우리 민이를 자네가 데리고 있어준 건가?" "아, 물론 제가 직접 데리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셈이네요." "호오, 그래? 우리 민이를 잘 보살펴 줬다니 정말 고맙군. 물론 민이에게 어떠한 상처라도 있을 시 그건 자네의 목숨으로 갚을 준비는 되었겠지?" 여자는 약하여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은주에게 말하는 엄마의 눈빛은 끝에 가서는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엄청 무서운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잠시뿐이고 엄마는 다시 평소의 부드러운 여자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살기를 정면으로 맞은 은주는 두려움을 느꼈는지 잠시간 얼어 있다가 겨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미소를 짓는 볼이 억지로 움직여진 것이라 푸들푸들 떨렸다. "명심하죠." 은주라는 여자가 더 이상 열받게 굴지 않고 자신의 본연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듯 몸을 돌려 객점 밖으로 향하자 세가의 사람들은 엄마에게 '무지 잘하셨어요'란 시선을 한번씩 보내주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성문 밖을 한참 벗어난 곳에 있는 동정호의 주변이었는데 농지로 개간이 안 되어서 풀이 무성한 널따란 들판이었다. 근처에 갈대밭이 있긴 하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고, 주변에는 숲도 나무도 바위도 없어서 누가 숨어 있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물론 땅 파고 숨어 있는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넓은 들판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서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멈춰 서자 은주가 우리에게서 벗어나 그들 쪽으로 합류했다. 그들의 무리를 바라보니 얼마 전에 우리 세가를 침입했던 모산파의 도사 두 명과 그들을 호위하듯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대충 300명으로 보이는 강시들, 그리고 은주와 그 옆에 서 있는 검은 경장 차림을 한 차름을 한 두 남자가 꾀죄죄한 몰골로 서 있는 민이를 제압하고 있는 게 우리를 상대하고 있는 인물들의 전부였다. "에이, 민아? 너 맞냐?" 내가 메시지를 보내자 금방 답이 왔다. 역시 저들은 진짜 민이를 데려온 것이었다. "아아, 누나… 잘 지냈어?" "으이그, 너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우중충해서 질식하는 줄 알았다. 집안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래, 너는 어느 정도 소득이 있었냐?" "후후후, 축하해 줘, 누나. 나 생각보다 조금 더 높은 경지에 들어선 거 같아. 아빠의 빙검오식은 이제 4개를 완전히 터득했고, 은하검법도 3개나 완벽하게 터득한 거 있지?" "오옷, 그러냐? 축하한다. 하지만 또다시 붙잡혀서 연마한다고 하면 너, 가만 안 둘 거다. 알겠냐?" "알았어, 알았어. 그냥 이번 한 번만 해본 것뿐이야.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말야." "글세,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집에서 폐관 수련을 하면 될 걸 가지고 왜, 뭐 하러 그쪽에 붙잡혀 가서 수련을 해야 한느 거냐구우?" "에이… 그건 전에도 계속 잔소리한 거였잖아. 그러니 그냥 넘어가자구." 민이와 내가 그렇게 잡담을 하는 동안 양쪽 진영(?)은 자리를 잡고 서서 한동안 눈빛만으로 서로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서로 째려보고 가만히 서 있었단 이야기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모산파의 두 도사 중 더 늙은 노란 도사복의 도사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허허허,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셨구려." 그러자 우리 쪽에서는 배 숙부가 앞으로 나섰다. "자, 어떻게 교환할 거요?" "방법은 간단하오, 그냥 양쪽의 아이들이 천천히 걸어 상대편으로 가는 것이오. 절대로 달리지 않고 천천히 걸어야 하오. 그럼 시작하겠소?" "그전에, 우선 저 아이가 민이라는 것과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오?" "그건 내 본 문의 명예에 걸고 장담하겠소. 우리는 그대들이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고 진짜 제갈준희를 데리고 왔다고 순순히 믿어줬는데, 그대들은 너무 의심이 많군." 그가 은근히 비꼬았지만 배 숙부도 만만치 않게 맞받아쳤다. "훗, 그대들이 지금까지 해온 일은 생각지도 않고 그냥 믿어달라고 하다니, 너무 어려운 요구가 아니오?" 그러자 그 모산파의 늙은 노란도사가 인상을 팍 구기더니 기분 나쁘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며 거칠게 말했다. "교환합시다. 셋을 세면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게 합시다. 내가 셋을 세겠소." "좋소." 배 숙부는 그렇게 말하면서 뒤로 물러나 나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아, 네 주술은 어찌 되었는냐?] 그래서 나는 자신에 찬 미소로 대답해 줬다. [걱정 마세요. 벌써 걸어놨습니다.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요.] [잘했다.] 그 다음 배 숙부는 제갈준희에게도 전음으로 몇 마디 보낸 것 같았다. 신기수는 그때까지도 무척이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제갈준희의 손을 꼬옥 잡고 있다가 늙은 노란도사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놨다. "하나, 두울……." 그러자 저쪽 진영에서 민이가 앞으로 나섰고, 이쪽 진영에서도 제갈 준희가 나서서 걸어갈 준비를 했다. "세엣!!" 늙은 노란도사가 마지막 숫자를 세자 민이와 제갈준희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쪽 진영은 여차하면 뛰어나갈 수 있도록 온몸을 긴장시킨 채 제갈준희가 가고 민이가 오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민이와 제갈준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드디어 마주친 순간 둘은 눈짓으로 짧은 인사를 건네고는 곧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곧 제갈준희는 저쪽 진영에, 민이는 우리 쪽 진영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엄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뛰어나가서 민이를 부둥켜안았다. "민아∼!!" "죄송해요, 어머니. 많이 걱정하셨지요?" "죄송한 건 아니? 이녀석, 그동안 한번도 마음 고생 안 시킨다고 은근히 장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거 다 취소다!" "하하하, 정말 죄송해요."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예. 전 멀쩡해요." 우리 쪽 진영 사람들이 감격스러운 모자 상봉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기분 나쁜 목소리가 우리들의 잔잔한 감동을 깨뜨려 버렸다. "저기요오오∼ 소중한 시간을 방해해서 정말 죄송한데요오오∼ 제가 꼭 알려드릴 말씀이 있거든요오오? 그러니 저 좀 봐주시겠어요오오?" 은주였다. 그녀의 말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엄마와 아빠는 재빨리 민이의 온몸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설마… 하는 생각에 저쪽 진영을 의심과 긴장이 가득 찬 눈길로 노려보았다. 은주는 우리 쪽 진영의 시선을 아주 담담히 받아넘기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아이, 그렇게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시면 제가 부끄럽잖아요." 그러자 배 숙부가 심히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말을 내뱉었다. "무슨 용건이 더 있다는 거냐? 남아 있으면 빨리 말해라." 하지만 은주는 뭘 가지고 있는지 아주 기대감 넘치는 얼굴로 웃었다. "호호호, 성급도 하셔라. 그렇게 재촉하지 않으셔도 제가 뭘 말하려는지 잠시 후면 은민 군이 알려줄 거예요." 그러자 주작단의 의심스럽다는 시선이 민이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은 마치 '너, 가짜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민이는 첨에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다 주작단원들의 집중적인(?) 시선에 볼멘소리로 항변했다. "저 가짜 아니에요. 진짜라구요. 누나, 뭐라고 말좀 해봐." 그래서 나두 민이를 위해 한마디 해줬다. "쟤 진짜 맞아요." 그리고 은주도 민이를 편들어줬다. "홋홋홋, 저 민이 군은 진짜 민이 군이 맞답니다. 여기 계신 도사님께서 본 문의 명예를 걸고 장담하셨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뭘 은 소협이 알려준다는 거지?" 헌준이 민이를 보며 말했지만 민이 자신도 모르는 일인지 고개만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그렇다면 저 여자의 말대로 잠시 기다려 보지요." 희여송의 말에 모두들 찬성하고는 입을 다물고 민이만을 주시한 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10분이 지나고 15분이 지나도 민이 녀석은 멀뚱멀뚱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만 마주 보면서 가만히 있고 뭔 말을 하려는 것도, 뭔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다. "아, 정말…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진영에서 제일 참을성이 없는 사람은 바로 나였나 보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계속 기다리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은주를 향해서 소리쳤다. 그런데 정말 의외로 그녀 또한 뭔가 잘못됐는지 당황해하면서 민이만 계속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 "이상하네… 분명 나타날 때가 됐는데… 이게 도대체… 약이 잘못됐나? 아님 내가 시간을 잘못 알았나?" 그녀의 중얼거림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무공 고수들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민이와 나도 있었다. "약? 무슨 약이라고 한 거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면서 뭔가 아는 거 없냐는 시선으로 민이를 쳐다보자 민이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드디어 뭔가를 깨달았는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아, 이거 말하는 건가?" 그러면서 입 안에 손가락을 넣더니 곧 이어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게 뭐냐?" 어금니만한 검은 알약이었다. 그런데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 질문에 민이도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나도 몰라. 그냥 내가 갇혀 있던 곳에서 나올 때 저들이 먹이려고 하길래 먹는 척하면서 어금니 뒤쪽에다 넣어놓고 있었지. 확실하게 넘기려고 혈도까지 누르더라고. 하마터면 먹을 뻔했지." "저 여자가 먹이려고 한 거 보면 안 좋은 것만은 분명해." 내가 은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 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민이가 입 안에서 꺼내 든 것을 보더니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들고 있던 부채를 바닥에다 패대기쳤다.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런 제기랄!!" 그 모습에 그게 뭔지 모르는 눈치인 모산파의 젊은 도사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아니, 저게 뭔데 그러는 거요?" 그러자 그녀는 무지 짜증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뭐긴 뭐예요? 독약이지. 저걸로 은씨 세가를 확실히 묶어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 어린 녀석이 저걸 안 먹고 버텼을 줄이야!!"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민이의 어깨를 툭 치며 방긋 웃었다. "야, 너 안 먹길 잘했다. 야." 그러자 민이도 덩달아 웃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뭘, 먹었어도 누나가 치유해 줬을 거 아냐?" "훗훗, 하긴… 저 여자 괜히 힘 빼고 약만 낭비해 버렸군." 그러고 있는 우리에게 배 숙부가 다가와 민이의 손에서 그 독약을 가져가 버렸다. "이리 주거라. 이건 사천에 있는 당씨 세가에 보내어 성분을 알아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럼 저들이 나중에 이런 독약을 사용하더라도 우리가 방어할 수 있겠지." '하긴, 사천당가는 독약 전문가라고 하니까……." 은주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씹어버릴 듯이 바라보다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몸을 돌리고는 걸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때를 맞춰 모산파의 노란도사가 우리를 향해 크게 팔을 휘저어 보이면서 외쳤다. "발!!" 그러자 갑자기 우리 진영 주위의 땅이 작게 폭발하더니 거기에서 노란 연기가 마구 피어 올라 우리의 시야를 감싸는 것이었다. 되게 매캐하고 냄새도 고약한 것이, 최루탄이 바로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견디지 못한 나는 재빨리 소매로 내 코와 입을 틀어막아 준 누군가의 손기를 뿌리치고 허공을 향해 외쳤다. "윈디!!" 그러자 내 주위에서 강한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그 노란 연기를 우리 진영에서 멀리 날려줬다. 그러고 앞을 보니, 거기 있어야 할 은주를 비롯한 모산파 팀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려고 연막탄을 사용한 듯했다. 그러나 내가 마법을 사용하여 금방 연기를 흩어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눈에 뜨이고 말았다. 그들은 동정호에 미리 배를 준비하고 있었는지, 우리가 볼 때에는 배를 막 동정호의 중앙을 향해 저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우리 진영들 중 누구도 그들 뒤를 쫓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이 멀리 달아나 봤자 내 손바닥 안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배 숙부가 확인차 나에게 물어왔을 뿐이다. "진아, 제갈 소저가 저 안에 있느냐?" 그래서 나는 손바닥 위에 마법으로 자그마한 판을 만들어 보여줬다. 그 판 위에는 배가 있는 방향에서 제갈준희를 가리키는 점이 자그맣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게 바로 준희 언니가 있다는 표시예요. 바로 저 배인 것 같은데요?" 내가 보여주는 판을 바라보던 배 숙부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연재] 제38화 뜻밖의장소 우리 일행은 우선 낙양 지부로 돌아가서 지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 무림맹에서 보냈다던 지원병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주와 모산파 일당이 배를 탔으니 본거지에 도착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기수는 제갈준희가 그들 손으로 들어간 후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더니만 나에게 시시때때로 제갈준희가 어디쯤에 있는지 물어왔다. 처음 몇 번이야 이해를 해주겠지만 그 뒤로는 너무 그가 귀찮아져서 나는 낙양 지부 내에서 그를 피해 도망까지 다녀야 했다. 내가 이렇게 하면 그쯤에서 날 이해해 주고 스스로 자제해 줬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나보다 제갈준희가 더욱 소중했는지-물론 당연한 거겠지만…-피해 다니는 날 물어물어 쫓아다니는 거였다. 그래서 낙양 지부 안에서는 때아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었다. 이럴 때 민이 녀석이 날 도와줬으면 좋으련만 민이는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향상됐는지 알고 싶어 안달하더니만 지부에 도착하자마자 희여송을 이끌고 지부장 연무장으로 달려가 버렸다. "치사한 놈 같으니라구……." 그래서 나는 그날 하구, 날이 저물도록 혼자의 힘으로 신기수를 피해 도망 다녀야만 했었다. 무림맹에서의 지원은 그 다음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지원이라는 것이 청룡단장을 비롯한 청룡단원 20여 명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저번에 청명검 사건으로 낙양 지부에 왔던 그 5명도 끼어있었다. 그들은 날 다시 만나자마자 예전의 그 안 좋은 감정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는지 날 대하는 태도가 되게 무례했다. "호오, 은 소저, 정말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사파가 되기 위하여 사악한 주술을 열심히 배우셨다면서요?" 처음부터 빈정 모드로 나가는 목우령이 되게 맘에 안 들었던 나는 그대로 맞받아쳐 줬다. "훗, 당신을 배추벌레로 바꿔 버리는 주술을 배우려고 노력했지요. 다행히 제 능력이 따라줘서 거기까지는 가능하답니다. 한번 제 실력을 보시겠어요?" 그러면서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마법을 시행하려는 척하자 목으령의 얼굴이 핼쑥히지면서 얼른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 대신 화예검 혁진아가 정색을 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질책하듯 말했다. "설마, 정말 사파인처럼 사악한 주술을 배우신 건 아니겠지요? 당신은 정파의 기둥 중 하나인 은씨 세가의 사람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능력을 보고 말씀하셨으면 좋겠는데요? 도대체 사악하고 안 하고의 기준이 뭔가요? 그냥 불덩어리를 날리고 물을 날리면 모두 다 사악한 건가요? 그럼 당신들의 동료인 주작단원들은 사악한 주술의 도움을 받았다는 소리군요?" 그러자 철마협 상관초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이 모자랐기에 당신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청룡단이라면 그러한 도움은 받지 않았을 테지요." 그런데 그 말을 근처에 있던 주작단원 한 명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내 곁으로 다가와 비웃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훗… 정말 아직 위험한 일을 겪지 못한 철부지들이 하는 말이란… 나도 은 소저처럼 직접 겪어보고 말하라고 하고 싶군." 그러자 목우령이 발끈하며 나섰다. "누구보고 철부지라고 하는 것인가? 우리도 자네 못지 않게 많은 사건을 해결했어!" "오∼ 그런가? 아, 그러고 보니 은 소저와 아는 사이라면……." 그 주작단원은 뭔가가 갑자기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더니만 갑자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면서 그 청룡단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훗, 자네들도 그 소문을 들었나 모르겠군. 낙양 근처의 야산에서 사건이 벌어져 5개 단 중 어느어느 단의 단원이 파견되었는데 자신들보다 훨씬 나이 어린 이들보다 실력이 낮다는 것만 만천하에 공개하고 돌아왔다고 하더군. 혹시 그들이 누구인지 아나?" 무지 빈정대고 비비 꼬는 그의 말에 목우령이 다시 한 번 발끈했다. "우리는 그래도 자네들처럼 주술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네!"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듯 주작단원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훗, 그들이 바로 자네들이었나 보지? 이거 몰라봐서 정말 미안허이." "이익……!" 화예검 혁진아가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자신의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그때 이곳의 험악한 분위기를 알아챘음인지 청룡단장이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5명의 청룡단원들을 불렀다. "거기, 지금 뭐 하는 건가!" 각 단원들 간의 시비가 알려지면 좋을 것이 없었는지 청룡단장의 말에 화예검 혁진아는 자신의 검으로 가져갔던 손을 후닥닥 떼었다. 그리고 주작단원은 그런 그들에게 비웃음을 한 번 더 던지고는 자신과 같은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나도 그들에게 '꼴 좋다'란 표정으로 비웃어주고는 그 자리를 떴다. 아, 그전에 그들에게 비웃음을 날림녀서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게 뭔지는 모를 테지만, 어쨌든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 챘을 것이다. 낙양 지부장은 지원이 5개의 단 중 또 다른 단의 단원들과 단장까지 포함될 정도로 대단할 줄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청룡단이 떡하니 도착하자 머리 싸매고 드러눕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곳을 관리하는 장의 입장에 정말 머리 싸매고 드러누울 수는 없었던 터라 손님들 접대를 하긴 했지만 울 할아버지 옆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데다 주작단장과 청룡단장과는 될 수 있는 한 눈길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데… 그의 노력이 정말 눈물겹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 그의 노력이 하늘을 감동시켰으면 정말 좋았으련만. 무림맹에서 지원이 도착하자 바로 그 다음날 우리는 제갈준희를 추격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그들이 제갈준희를 데려간지 3일째였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이동하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마법으로 만들어낸 판 위의 모양을 보여주며 그들이 별로 이동하지 않았다고 말하자 헌준이 불안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그들이 별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소리예요. 위치를 보아하니 여전히 동정호 위에 있군요." 그러자 추적 작전을 짜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한 시선을 교환했다. "왜 본거지로 움직이지 않을까요?" 주작단장의 말을 처음으로 사람들은 서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희여송 왈, "혹시 동정호 위에 띄어놓은 커다란 배가 본거지일까요?" 청룡단장 왈, "은 소저의 주술이 잘못된 거 아닙니까? 혹시 모산파에서 소저의 주술을 알아차리고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대꾸했다. "그건 절대 아니에요. 만약 모산파가 제 주술에 무슨 술수를 썼다면 제가 못 알아차릴 리 없습니다. 게다가 이건 다른 주술도 써서 알아본 결과니까 확실해요." 배 숙부 왈, "그렇다면 정말 동정호에 띄워놓은 배가 본거지? 아니야, 그러려면 배가 무척 커야 할 텐데 그렇다면 눈에 너무 띄지. 흐음… 무슨 속셈이지?" 그러자 묵묵히 있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혹시 미행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시간을 끄는 게 아닐까요?" 아빠의 말에 의외로 주작단장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헤에… 저 사람이 웬일이래? 맨날 우리 세가에 반하는 의견만 내놓더니만.' 내가 속으로 그렇게 의아해할 때 배 숙부도 아빠와 비슷한 생각을 내놓았다. "어쩌면 낙양에 우리가 아직 버티고 있는 데다 무림맹에서 지원까지 와서 머물러 있다는 걸 알고 우리가 가버리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청룡단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거 참…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그냥 동정호 위에 있을 배를 덮칠까요?" 주작단장이 그렇게 말하자 배 숙부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기다려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제갈 소저를 그들에게 넘어가도 그냥 있었던 건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어차피 제갈 소저에게 해를 가하지도 못할 테니 좀 더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는다면 저들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청룡단장이 말하자 희여송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그러자 청룡단장이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은, 소저의 능력으로는 옆 지역에 있어도 어디에 있는지 알아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돌아가는 척 무림맹으로 천천히 향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주작단장이 그의 의견에 딴지를 걸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본거지가 낙양에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낙양에서 벗어난 사이 그들이 본거지로 돌아가 제갈 소저를 이용하여 제갈세가 전 가주를 협박한다며… 우리가 제 시간에 맞춰 그들의 본거지를 탈환할 수 있겠습니까?" "아뇨아뇨, 그러니까 우리는 천천히 가는 척만 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낙양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말아야하지요." 주작단장에게 밀리기 싫다는 듯 다시 청룡단장이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였지만 반박하는 주작단장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거라면, 우리가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리 천천히 되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은 며칠 더 동정호에 머물게 될 뿐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 아닙니까? 차라리 그럴 바에야 그냥 여기서 더 지켜보다가 그들이 정 움직이지 않는다면 동정호 위의 배를 덮쳐 제갈 소저라도 구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좌중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 둘의 치열한 접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같은 무림맹 소속단이라고 해도 서로 경쟁 관계에라도 있는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아까 내가 청룡단 녀석들과 상대하고 있을 때 청룡단 녀석의 말에 주작단에 대해 비웃는 투의 말이 나오는 것과 그 말을 들은 주작단이 금방 발끈해서 쫓아와 내 편을 들어 청룡단 녀석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오, 어쩐지 주작단장이 이길 것 같은데?' 이번에는 청룡단장이 말할 차례였다. "자꾸 시간을 맞출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하루에 갈 거리를 이틀이나 사흘에 걸쳐 간다면 충분히 시간을 맞출 수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그들이 움직일 때 우리도 같이 움직인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청룡단장의 말에 주작단장은 납득이 갔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꾸욱 다물었다. 그러자 청룡단장이 그걸 기회로 삼았는지 채차 입을 열었다. "좋은 계획을 가지고 기회도 잡았는데 잠시 기다리지 못해서 놓친다면 정말 아깝지 않습니까? 우리 청룡단의 지원까지 받았는데 저들의 꼬리만 잡게 된다면 이건 돼지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의 말에 주작단장이 눈썹을 치켜뜨며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들을 얕보지 마시지요. 일류고수 못지 않은 능력의 강시들의 수가 300입니다. 직접 상대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얕보는 것은 청룡단장께서 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험……." 주작단장의 매서운 말이 청룡단장의 정곡을 찔렀는지 청룡단장은 주작단장의 말에 반박할 생각은 못하고 한번의 헛기침으로 그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다. 그렇게 두 단장의 대결이 마무리되는 것 같자 배 숙부가 상황 정리에 나섰다. "하지만 우리가 제갈 소자의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얻고자 한 것이 그들 조직에 대한 정보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주작단장의 말씀이 타당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호수 위에 있는 그들의 배를 덮치는 건 조금 무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주작단장의 마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그를 달래려는 듯 배 숙부가 그 특유의 트레이드마트인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주작단장,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지금 배 위에 있는 적들 중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소? 모산파의 두 도사와 은주라는 여자, 제갈 소저와 그녀를 제압하고 있는 무사 두 명을 제외한다면 모두 강시뿐입니다. 강시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니 물속에 있더라도 호흡 곤란을 일으키지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니 물 위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우리 쪽이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제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배 숙부의 조용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에 주작단장이 순순히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훗, 역시… 배 숙부는 외유내빙 서생이라니까?' '외유내빙 서생'은 세가의 제자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배 숙부의 별명이었다. 그는 얼굴도 단아하게 생긴 데다 거기에 그의 특유 트레이드마트라고 할 수 있는 부드럽게 살짝 짓는 미소를 시종일관 달고 있어서 처음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되게 착하고 부드러운 사람인 줄 오해한다. 하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 그는 자신의 그런 부드러운 미소에 속아 말 잘 듣지 않는 제자들을 웃으면서 반 죽여놓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지금 있는 제자들도 처음 세가에 들어왔을 때 그의 미소에 속아 50%는 당했다고 한다. 물론 교관을 만만하게 여겨 말 안 들은 그들이 잘못한 거긴 하지만. 그러나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배 숙부의 저런 부드러운 미소와 조용조용하고 차근차근하는 말발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음이 사르르 녹아 넘어가 버린다. "그럼, 배 대협께선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저봐저봐, 주작단장도 배 숙부에게 넘어갔군. 그동안 세가에 자꾸 반박하던 사람이 저리 사르르 녹아서 배 숙부의 의견을 묻네?' 배 숙부는 다시 한 번 싱긋 웃어준 다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청룡단장의 생각과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그들도 우리도 움직이지 않은 채 계속 대치 상태만 되겠지요. 그러니 저들이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가 움직여 저들까지 움직이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작단장이 시무룩해졌다. "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배 숙부는 그런 그에게 다시 한 번 싱긋 웃어준 뒤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스승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할아버지도 배 숙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움직여 보는 것도 좋겠지. 해볼 만하겠어." " 그럼 내일 무림맹 쪽으로 출발할까요?" 청룡단장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활짝 펴진 얼굴은 감추지 못한 채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아니야, 그건 너무 서두르는 감이 있군. 내일까지만 더 지켜보고 그래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그 다음날 무림맹으로 가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이 되어도, 그리고 그 다음날이 밝아왔어도 청룡단장의 말대로 우리가 낙양에 버티고 있어서 그런지 그들은 동정호 위를 떠다니기만 했을 뿐 어디론가 움직이려는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그리하여 할아버지가 말했던 그 다음날 아침 주작단과 청룡단은 불온한 무리들을 놓쳐 버렸다는 핑계 하에 무림맹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우리 은씨 세가 사람들은 무림맹에 가서 은씨 세가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하여 의논하러 간다고 하며 주작단, 청룡단과 합류했다. 낙양 지부장은 드디어 우리가 간다고 하니까 너무 기뻐하면서 낙양 성문을 벗어나 저 멀리까지 배웅을 할 태세였다. 하지만 우리의 만류로 인하여 성문까지만 배웅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우리가 성문을 지나 한참 동안 갈 때까지, 그러니까 그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성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서 있는 거였다. 그게 우리랑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기뻐서 그리 오랫동안 배웅하며 서 있다는 걸 아는민이와 나는 그의 모습을 자꾸 뒤돌아보며 키득댔다. "엄청 기뻤나 보다." "그러게. 그의 인생에 이렇게 기쁜 날이 또 있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낙양성을 떠났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기에만 그랬을 뿐이었지만, 우리는 평소 여행을 하는것보다 더욱더 천천히 휴식 시간도 자주 가졌고 식사 시간도 평소의 두 배는 주어지는 등, 가기는 가는데 무지 천천히 가려고 노력하면서 무림맹으로 향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산파와 은주 일당은 동정호 위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거였다. "왜 움직이지 않는 걸까요?" "혹시 정말 그 배 위가 본거지였던 걸까요?" "그럼 당장 낙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여송과 청룡단장, 주작단장이 무지 걱정스러운 어조로 저마다 입을 열었다. 아빠와 엄마조차도 걱정스러운지 조금 초조한 얼굴로 할아버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담담한 얼굴로 피식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배 숙부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직 낙양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벌써부터 그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그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였던 조직입니다. 우리가 낙양을 떠났다고 금방 움직일 정도로 성급하진 않을테지요. 아마도 그들은 우리가 정말 떠났는가 알아보는 중일 겁니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하루 이틀 더 기다린다고 크게 손해날건 없을 테니까요." 그러자 주작단장이 배 숙부의 말에 납득하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걱정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무림맹으로 향해야 합니까? 그러면 낙양에서 점점 멀어질 텐데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직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내일까지 그들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생각하지요. 우리가 지금 열기서 되돌아간다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주작단장은 납득은 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배 숙부의 말에 모두 찬성한 표정이었다. "배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의논하기로 하지요." 청룡단장의 말을 끝으로 그날 저녁의 의논은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우리가 늦게 아침을 먹고 출발할 때에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정오에도 그리고 그날 저녁이 되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젠 어떻게 합니까? 하루 더 기다려야 할까요?" 주작단장이 말을 했지만 그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주작단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냥 낙양에서 살펴보다가 정 움직임이 없다면 제갈 소저라도 구하려고 작전을 세워야 했어요. 너무 그들의 본거지만 생각하다가 실수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아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어쩌면 우리가 무림맹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건지도 모르죠." 아빠의 뒤를 이어 청룡단장도 입을 열었다. "흐음…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난처하군요. 더 이상 움직인다면 정말 제 시간에 낙양에 도착하기 힘들 겁니다. 지금 거리도 최대한 빨리 달려야 반나절을 넘기고 낙양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할까요?" "만약 우리가 낙양으로 돌아간다면 그대로 제갈 소저를 구하기 위해 뛰어 들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동정호 위에 있단 말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희여송이 걱정스런 어조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자 좌중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곧 이어 배 숙부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 일파를 제압하는 건 포기하고 제갈 소저를 구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사형의 말은 전면전을 피하고 몇몇의 소수 정예를 투입해 제갈 소저만 구출하자는 겁니까? 아빠의 말에 배 숙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물 위에서라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해. 배만 부서진다면 우리는 끝장이니까. 하지만 그쪽은 그렇지가 않거든." "결국은 그들의 본거지를 찾는 건 포기해야 하는 걸까요?" 청룡단장이 서운하다는 감정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어쩔 수가 없지요. 그들이 본거지로 움직일 때까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으니까요. 낙양으로 돌아갈 수도, 이곳에 야영을 한 채 머물 수도, 그렇다고 무림맹으로 계속 향할 수도 없는일 아닙니까?" 처음부터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낸는 것보다는 제갈준희를 구하는 데에 더 마음이 기울어 있는 주작단장이 청룡단장이 또 뭔 소리르 할까 싶은지 딱 못을 박아버렸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수중전에도 능한 대원을 뽑아서 내일 아침 일찍 낙양으로 출발시켜 제갈 소저를 구출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는 은 소저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은 소저 외에 제갈 소저가 어디 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청룡단장이 본거지를 찾아내려는 마음을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었다. 역시 불가능한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고 나머지 기능성을 찾아가는 모습이 지도자 답다고나 할까? 그는 주작단장의 못 박는 말에 어떤 반박을 하는 대신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를 구체적으로 짜내기 시작했다. 나까지 포함시킨다는 말에 세가의 어른들이 움찔거렸지만 그의 말이 맞기에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대신 아침 일찍 출발하는 일행에 세가의 어른들이 다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내일 아침 은씨 세가 사람들이 중요한 전갈을 받아 급히 세가로 돌아가는 것으로 하여 낙양으로 돌아가 배를 타는 척하며 동정호 위에 있을 제갈준희를 제압하는 모산파와 은주 일당을 치기로 했다. 그리고 청룡단과 주작단에서 뽑힌 정예들은 세가의무사들로 변장해 우리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갔다가 세가의 어른들이 정면에서 그들을 침입해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나와 뒤로 침입하여 제갈준희를 구출하기로 했다. 그렇게 계획을 짜고 사람들은 내일 있을 일을 대비하여 준비하며 밤을 보냈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게도 그 다음날 아침 확인차 다시 살펴보니 그들이 막 배에서 내려 낙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 그들이 움직였어요!" 그걸 알아차린 내가 할아버지께 달려가며 외치자 세가의 무사들을 지휘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던 세가의 어른들이 재빨리 할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움직였단 말입니까?" 청룡단장과 주작단장 또한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재빨리 달려왔다. "그들이 준희언니를 데리고 지금 막 낙양으로 들어갔어요." 그러자 청룡단장이 다급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은 가주님, 저희도 빨리 낙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서둘러 모두 우르르 몰려간다면 그들이 놀라서 다시 숨어버릴지 모르네. 그러니 일단은 계획한 대로 우리 세가 사람들만 빨리 출발하고 자네들은 천천히 이동해 오다가 밤을 틈타 낙양으로 들어오게나." 하지만 청룡단장은 할아버지의 의견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나 그러게 하다가 그들과 전면전으로 맞부딪친다면 불리하실 텐데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빙긋 웃었다. "걱정 말게, 자네들이 도착하기 전까진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테니." 할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청룡단장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순순히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천천히 이동하다가 밤을 틈타 낙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밤에 성문 앞에 자네 단원들 중 한 명을 안내인으로 보내겠네. 그를 따라오면 될 걸세." "옛!!" 그리하여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빠르게 낙양으로 출발했다. 올 때와는 달리 휴식 시간도 거의 없이 냅다 달려야만 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나, 신 대협이 다시 돌아온 우리를 보면 깜짝 놀라겠다. 그지?" "그러게. 게다가 드디어 준희 언니를 구한다는소리를 들으면 좋아하겠지." "훗, 혹시 자기도 간다고 나서지 않을까?" "아, 맞다. 분명 그러고도 남아. 그냥 신기수는 만나지 말아야겠다." 신기수는 아직 완전히 부상이 낫지 않았기에 낙양 지부에다 맡겨놓고 왔던 것이다. 낙양 지부장은 청룡단과 주작단이 간다는 소리에 너무 좋아하며 기꺼이 신기수를 돌봐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런데 낙양 지부장 말이야… 조금 있다가 다시 청룡단과 주작단이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될까?" 민이의 메시지에 나는 직접 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훤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푸하하하, 이번에는 정말 머리 싸매고 드러누울지도 몰라." "그 사람도 정말 안됐다니까. 쿠쿠쿠." "맞아, 맞아." 잠시 후, 먼 거리를 달려온 사람들은 잠시 쉬게 할 겸 점심을 먹을 겸 우리는 적당한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사이에 나는 다시 한 번 제갈준희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제갈준희가 지금 있는 곳이 물 위에 떠 있는 배 안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상해요. 언니가 다시 배 안에 있어요!" "뭐라고?" "그럼 다시 첫 번째 작전-우리도 배 타고 가서 제갈준희를 구한다는 작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희여송과 배 숙부가 내 외침에 달려와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잠깐만요, 조금 위치가 바뀌어 있네요. 전에는 동정호 한가운 데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론가 향하는 것 같아요." 지도를 꺼내 들어 내 마법으로 나타난 제갈준희의 위치와 비교해 보던 나는 또 한번 다급하게 외쳤다. "장강을 따라가고 있어요! 무창으로 향하는 배 위에 있군요!" "무창?" 엄마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외치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들의 본거지가 무청에 있었던 건가? 이거 참, 난처하군." 할아버지는 그냥 보기에는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말하며 턱을 쓰다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리야(배 숙부), 지금 당장 무림맹 무사들 중 경공이 가장 빠른 자를 골라서 천천히 오고 있을 주작단과 청룡단에게 무창으로 신속히 이동하라고 전하여라. 그리고 우리 중에서도 경공이 빠른 자를 선별하여 낙양 지부장에게 보내서 무창으로 향하는 배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여라." "알겠습니다." 원래 낙양에서 무림맹이 있는 하남 지역으로 가려면 동정호에서 배를 타고 가든가, 아니면 육로로 가더라도 장강을 건너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는 시늉만 하는 거였기에 낙양성을 벗어나 장강을 건너지 않고 그와는 반대 편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 모든 것이 낙양에 그들의 본거지가 있을 거라 생각하여 최대한 빨리 낙양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하지 위한 거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 때문에 잘못하다간 그들의 본거지에 시간에 맞춰 침입하지 못할까 봐 할아버지가 이렇게 급히 서두르는 거였다. 배 숙부에게 지적당한 이들은 아마 점심도 못 먹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도 별로 상황이 다르지 않아 밥을 먹고 한 10여 분 쉬자마자 또다시 경공을 발휘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낙양에 도착한 때는 거의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노을이 만들어지기 전의 시간이라 무창으로 갈 배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배 숙부가 먼저 낙양으로 보낸 이가 벌써 도착하여 낙양 지부장에게 부탁을 한 뒤였기에 우리가 난양에 도착했을 때에는 낙양 지부 소속 무사의 안내로 곧바로 배 선착장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악 거래를 끝내고 배를 구해놓은 지부장이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르 맞았다. "다행히도 금방 구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출항하는 배는 시간이 맞지 않았기에 배를 한 채 전세를 냈답니다. 괜찮으시겠지요?" 울 세가에서 배 숙부가 대표로 나서서 지부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자 지부장이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여러분게 입은 은혜에 비한다면 이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지요." 그러자 할아버지도 나서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맙네. 이번 일이 끝나면 여기에 한번 들를 테니 술이나 한잔하세나." "아이고, 그러시다면 저로서야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서로 인사하는 건 그 정도로 하고 우리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재빨리 배에 올랐다. 다행히도 낙양 지부장이 우리가 급하다는 걸 알고 신경 써줬는지 배 안에는 푸짐한 저녁이 마련되어 있었다. "헤에, 이 지부장 맘에 드는데?" 그 모습에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민이 또한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정말 푸짐하게도 준비해 줬네. 이거 금방 준비하려면 좀 힘 들었을 텐데." "훗훗, 어쨌든 지부장으로서도 다행한 일이지 뭐, 그들이 무창으로 가주는 바람에 이곳에 올 뻔했던 청룡단과 주작단이 다시 무창으로 향했잖아. 그들은 지금 건량이나 씹으면서 발바닥에 땀나도록 달리고 있겠지?" 속으로 고소한 생각이 들어 웃고 있는데 민이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꼬집어주었다. "그렇데 누나, 이거 알아? 그들 중에는 우리 세가의 무사들이 있다고." "아, 맞다. 우리 세가의 무사들하고 청룡단원이랑 주작단원이랑 바꿔치기 했지? 에고, 어쩌냐? 그들은 신나게 고생하고 있을 텐데……." "뭐, 그들의 운명이려니 해야지. 그나저나 그쪽이나 우리나 제 시간에 무창에 도착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빨리 서둘렀다 해도 모산파와 운주 일당 또한 무척 서두르고 있었기에 우리가 무창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들이 또다시 강을 타고 양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양양 쪽으로?" "예, 강을 타고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요?" 무창에서 주작단, 청룡단과 합세한 우리는 한 번 의논을 하기 위해 모였고, 그 자리에서 나는 제갈준희의 위치를 확인하고 말해 주었다. 내 말에 주작단장이 무척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낙양이나 무창이야 큰 도시이니 얼마든지 본거지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양양이라니? 그곳은 작은 도시잖아? 왜 그리로 가는 거지?" 그러자 희여송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진짜 본거지로 이동하기 위해 그동안 계속 움직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대부분은 강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 대낮에 길거리를 지나다닐 수 있겠습니까? 저희 세가를 침입했을 때에도 아마 배로 장강을 타고 내려와 밤을 이용해 장서 내로 들어온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배를 타고 본거지로 향하는 거겠지요." 그의 말에 청룡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본거지가 정말 양양에 있다는 겁니까? 양양 이후에는 더 이상 배를 타고 갈 수 없습니다만……." 하지만 그의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자, 우리가 여기서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선은 그들 뒤를 계속 쫓는 것이 좋겠지요." 배 숙부의 말대로 결론이라고는 단지 그들 뒤를 어서 빨리 쫓아가야 한다는 것뿐이었으므로 우리는 그 선에서 의논을 끝내고 또다시 그들 뒤를 쫓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양양까지 가더니 강시를 비롯한 모산파 사람들과 제갈 준희 제압을 책임지고 있는 은주를 비롯한 두어 명의 무사가 갈라져서 모산파 사람들은 다시 배를 타고 무창으로 내려갔고 은주 일행은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연히 제갈준희가 중요했기에 모산파 사람들은 포기하고 은주 일행의 뒤를 쫓아갔다. 그런데 정말 황당하게도 그들은 호광(그러니까 호북 지역)을 벗어나 하남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허… 정말 황당하군. 도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지? 설마 무림맹이 있는 남양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나의 보고에 주작단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가 있듯이 은주는 하남 지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정말로 남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설마… 설마 무림맹 옆에 저들의 본거지가 있는 건 아니겠지?" 너무 놀란 탓에 두 눈이 둥그렇게 되어 중얼거리는 주작단장을 청룡단장이 가엽게 여겼는지 위로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 말대로 설마일 걸세. 간이 붓지 않은 이상 그런 불온한 무리가 무림맹 바로 옆에다 본거지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냥 남양을 지나쳐 가려는 걸 게야." 그러나 청룡단장의 말은 합리적이지 못했다. 단지 지나쳐 갈 거라면 뭐 하러 무림맹이 있는 남양을 가로질러 가겠는가?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여 돌아서 갈 터였다. 그리고 주작단장과 청룡단장은 이런 말도 못 들어본 모양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그들은 정말 남양으로 들어가 우리가 남양에 도착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허, 허, 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무림맹 바로 옆에 불온한 무리들의 거점이 있었다니……." 내가 남양에서 아직까지 안 움직이고 있다고 하자 주작단장은 입이 떡 벌어졌고 청룡단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허… 정말 간이 큰 놈들이로군." 아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배 숙부도 한마디 했다. "흐음, 아마 들켜도 조직 자체에는 큰 지장이 없는 지점 같은 건가 보지. 설마 무림맹 옆에 중심이 되는 본거지를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 제갈 소저를 데리고 온 것으로 봐서는 여기에 제갈세가의 전 가주님이 계시다는 소리가 아닐까요?" 희여송의 말에 배 숙부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모르지. 네 말대로 제갈세가의 전 가주님이 계시는지, 아니면 제갈 소저를 다른 이유로 데리고 온 건지. 우선 우리가 할 일은 제갈 소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낸 다음 그녀를 구출할 계획을 짜는 거다." "뭐, 한 가지 좋은 점은 무림맹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거군요. 무림맹 바로 옆이니까." 엄마의 말에 모두의 이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이야기 39화 등잔밑은 정말 어둡다. 번호:338 글쓴이: ♡♥I Love U♥♡ 조회:62 날짜:2002/09/04 23:59 .. 헤헤헤.. 여기에는 글 첨 얼려보내. 어쨋든 아린이야기 올리는데 아마 오타가 쬐께 마늘 꺼에여~ 그래드 아라서 (넘흐 안이한.,...) 봐즈세여~ ================================================================= 제 39화 등잔 밑은 정말 어둡다 낙양에 도착한 우리들은 우선 무림맹으로 갔다. 우리 은씨 세가 사람들은 곧바로 예전 무림대회 때 우리가 묵었던 바로 그 숙소로 안내되어 쉴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배 숙부는 얼마 쉬지도 못하고 그들을 부르러 온 무사의 안내를 받아 무림맹주를 만나러 가야 했다. 아마 청룡단장과 주작단장도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할 터였다. "아,할아버지 가신다. 이럴 때는 내가 일행의 대표가 아니란 것이 기쁘다니까" 나는 나에세 배정된 방의 창으로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배숙부가 건물 밖으로걸어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중얼겨렸다. 그러자 내 방 탁자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던 민이녀석이 내가 뭔 뜻으로 말했는지 짐작한 듯 내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밑에 있는 걸 좋아하는 것 도 아니잫아. 단지 귀챃은 일 하는 걸 싫어하는 것 뿐이지." "야 누가 귀찮은 일 하는 걸 좋아하겠냐? 그건 모든 사람들이 다 바라는 일이라고." 창문에서 떨어져 민이가 앉아있는 탁자로 다가가며 반박하자 민이가 차의 맛을 음미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으며 대꾸했다. "모든 일에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법이지." "얼씨구,할아버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민이의 바로 맞은편에 앉으면서 빈정대자 민이가 눈을 뜨더니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숙부님이 나에게 자주 말씀해 주셨던 거야." "숙부? 은재...아,미안......" '숙부하는 말에 자연스레 은재영을 떠올리며 의아해 했던 나는 민이의 표정을 보고 내가 헛다리 짚었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민이가 말한 숙부님이란 지금 용계에 있을 청명이의 진짜 숙부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숙부가 청명이의 가장 소중한 이라는 것을 알고 있 던 나는 머쓱해져서 빈정댔던 것을 얼른 사과했다. 그러자 민이 녀석은 어른스럽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시고는 사과를 받아들였다. "괜찮아" '어른인 척하기는...' 그 모습에 왠지 배알이 꼴린 나는 속으로 궁시렁댔지만 그 미소 가 민이에세 어색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새삼스레 다시 민이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동아 나는 예전 그러니까 우리가 진이. 민이의 모습으로 변하여 다녔을 그때만 생각하고 민이를 애 취급했는데 우리는 벌써 성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였던 것이다. 아마 이 상태로 몇 년만 지나면,아니,이번일만 다 해결디고 나면 어쩜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민이와 내 배필을 찾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흐음.,..배필 하니까 나에게 대시하던 녀석이 하나 있었지, 지금은 어찌 지내고 있을라나 몰라.' 내가 이곳에 떨어진 지 벌써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차원이 다르니까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이 같지는 않을지도 애쉬가 있는 새계도 최소한 몇 년은 흘렀을 것이다. '어쩜 몇십년이 흘렀을지도, 음,그럼 지금쯤 겨혼해서 애도 하나 둘쯤 있을라나? 설마 날 잊지 못해 독신으로 있는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곧 스스로가 어이없어져서 웃음을 흘렸다. 내가 갑자기 실없이 웃자 민이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무시해 버렸다. '푸히히히,설마... 내가 돌아갈때까지 애쉬 녀석이 정말 독신으로 있다면 진짜 사귀는 거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 본다.' 그렇게 혼자 쿡쿡 웃으며 애쉬가 결혼했다면 그의 부인은 어떤 사람일까를 상상해 보고 있는데 민이의 목소리가 내 상상의 세계 를 뚫고 드려왔다. "뭐 해 누나? 안 볼거야" 주어,목적어가 다 생략된 질문에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그르 바라보며 되물었다. "뭘?" 그러자 민이가 눈을 찡그리며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뭐냐니? 내가 왜 여기 온 건지 몰라서 물어? 할아버지랑 아빠랑 배 숙부는 분명히 맹주를 만나러 간 거 아냐? 그거 안 볼거야?" 그제야민이의 질문을 이해한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아아. 뭘 그런 것까지 보냐? 어차피 오고 가는 이야기는 뻔할 텐데. 준희 언니가 어디 있는지 알아낸 다음 그곳을 치자고 할 테지 뭐." "에? 뭐야, 그럼 안 볼 거란 말야?" 민이가 실망과 '괜히 여기 왔잖아?'란 심정이 뒤석인 펴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작세 투덜거렷다. "에잉, 그럴 거면 진작 이야기 해 주지." 아무리 작은 소리라고 해도 나에대한 이야기가 내 귀에 안 들 어올리가 없었다. 민이 녀석의 말에 나는 눈썹까지 치켜뜨며 말 했다. "얼라라? 웃긴다. 내가 언제 본다고 했냐? 그냥 니가 온 거지." "누나는 중요한 의논이 있을때는 놓치지 않고 꼭 봤으니까 이 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뻔히 치 챘 으면서 안 볼 거였음 말해주면 안 돼?" "그러는 너는? 내가 결계 안 치고 빈둥빈둥대고 있으면 안 볼 거라는 것 쯤은 눈치 못 채냐? 다른 때는 내가 말안 해도 엿보는거 뻔히 알면서 왜 오늘은 안 보는 거 눈치 못 챘대? " "우이씨. 누나가 멍하니 딴생각 하느라 깜빡한 줄 알았지. 하여 간 안 볼 거지? 그럼 나 갈 거야." "맘대로 해라" "쳇!" 내가 전혀 관심없다는 듯 고개까지 돌리며 말하자 민이는 조금 이라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한 몸짓으로 빠르게 걸어 밖으로 나가더니 문이 부서져라 세게 닫고 가버렸다. 꽝! "저거, 저거, 으이그... 내가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저렇게 철딱서니 없는 녀석을 다 컸다고 생각하다니..." 민이가 세게 닫는 바람에 닫힌 뒤에도 흔들흔들거리는 문을 바라보며 혼자 혀를 차고 있는데 그 문이 다시 열리면서 쟁반에 내 가 좋아하는 여러가지 간식거리를 담아가지고 들어오는 유가 민 이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쳐다보더니 나를 보고는 물었다. "주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은 무슨. 지녀석이 혼자 삐져서 간 거지." 유에게서 쟁반을 덥석 받아 그 위에 놓인 전병을 하나 입에 물며 대꾸하자 유가 피식피식 웃었다. "별일이시군요. 두분이 싸우시는 모습 보기 힘든데요." "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싸운 것이 아니라 민이 녀석이 스스 로 삐친거야." 내가 강한 어조로 못을 박았건만 유는 내 말을 별로 믿는 눈치 가 아니었다. 하지만 믿는 척이라도 해주고 싶었는지 순순히 고개 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이, 예이, 하지만 동생 분이 토라지셨는데 달래주지도 않으셨어요?" "흥, 내가 뭐 하러?" "저런, 민이님에게 화가 나셨나 보네요, 그럼 이걸 어쩌나, 민이 님이 좋아하시는 호떡을 챙겨왔는데 민이님 방으로 가져다 드려야 할가요? " 그러고 보니 쟁반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전병을 비롯한 간식거리가 가득 담겨 있는 접시 맑도 ㅎ떡만 높이 쌓아놓은 접시도 하나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걸 바라보는 대신 유의 완전 보모같 은 말투에 황당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유는 처음에는 평범한 옆집 아저끼 같았는데 어찌 된 것이 날 이 가면 갈수록 엄마처럼 잔소리도 늘어나 완전 보모가 다 되었다. 거기에다 내 수하가 괸 초장기에는 주군은 이래야 한다느니 저래야 한다느니 말이 많았는데 요즈음에는 살살 나를 달래는, 마치 나를 애 취급하는 듯했다. 지금도 애를 달래는 듯이 생글생글 웃는 유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무게를 잡곤 입을 열었다. " 거 세 개만 남겨놓고 가져다 줘,." 유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펴정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려다 접시 위에 수북이 쌓인 군것질거리들을 보더니 멈칫했 다. "설마...이것들을 다 드시려고요?" "응, 왜? 나 먹으라고 가져온 거 아냐?" "물론 그렇습니다만, 민이님도 함께 드실거라 생각하여 넉넉히 준비한 양이라......"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 쯤이야." 그러면서 내가 접시 위로 손을 가져가며 과자 하나를 더 집으려고 하자 유가 재빨리 접시를 잡아 냐 손에 닿지 않게 뒤로 뺐다. "혼자 드시기에는 너무 많은 양입니다. 게다가 저녁 드신 후 시간도 별로 안 지난 시각 아닙니까? 이것도 민이님께 조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유는 내가 접시를 낚아채기 전에 접시에 있는 군것질거리들을 민이에게 가져다 줄 접시 위에다 덜기 시작했다. "치사하다,유.먹는 거 가지고 그럴 거야?" 하지만 유는 단호했다. "이것도 다 주군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곧 주무실 것 아닙니까? 솔직히 주무시기 전에 군것질하는 것도 안 좋습니다만, 그동안 그 들 뒤를 쫓느라 피곤하셨을 테니 오늘만 봐드리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드시다 탈이라도 나면 주군을 위하려는 제 마음 이 오히려 주군께 해를 가져다 드리게 되지 않습니까? 주군께선 그러셨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유는 접시에 있던 간식거리를 절반 가까이나 덜어내고서는 내 앞으로 밀어놓는 거였다. "배탈같은거 날 리가 없는데......" 드래곤이 너무 많이 먹어서 탈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유는 내가 드래곤이라는 걸 모르니 이런 말이 씨알도 막힐리가 없었다. "과식은 몸에 안 좋은거 아시죠? 그리고 내일을 위해서도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마시고 일직 주무셔애 합니다!" 내 말은 못 들은 체한 유는 그 말만을 남기고 민이에게 가져다 줄 간식거리들을 챙긴 뒤에 방을 나섰다. "쳇, 수하가 아니라 보모 같다니까. 아니, 유가 언제 어느새 왜 어떻게 저렇게 되어버린 거지?" 나는 유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투덜거리면서 탁자위에 놓인 또 하나의 전병으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갔다. "음, 이거 꽤 맛있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 집안 식구들이 모였을 때였다. 민이는 어제의 화가 아직 안 풀렸는지 나와 맞은 편에 앉았음 에도 불과하고 한 번도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진 나는 민이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 밴댕이 소갈딱지야!아직도 삐쳐 있냐?] 그러자 그 즉시 매서운 민이의 눈길과 메시지가 날아왔다.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네가 아직까지 삐쳐 있으니까 그렇지!!] [그럼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속도 없이 히죽히죽 웃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별꼴이 반쪽이다! 네가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서는! 솔찍히 네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냐?] [하! 청룡이 물 마시다 배 터져 죽는 소리!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어?] 할아버지를 비롯한 배 숙부, 부모님과 같이 하고 있는 자리였기에 우리는 차마 경거망동하지는 못하고 겉으로는 다소곳이 앉아 있는 채로 매서운 눈길로만 힘 겨루기를 하면서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랑 무림맹주랑 만나는 거 안 본다는 거 말 안 해줬 다고 시비 걸었잖아!] [그게 시비야? 솔직히 누나가 말해 줬어야하잖아!] [얼라리? 얼라리? 그게 무슨 드래곤 보석 알레르기 생기는 소리냐? 내가 언제 그거 본다고 너 불렀냐? 그냥 제가 온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의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누나로서 동생 허탕치는게 그렇게도 좋아? 내가 그거 보는 줄 알고 하릴없이 계속 죽치고 앉아 있었으면 좋겠어?] [누가 그렇대?] [그런데 왜 말 안 해줬다고 내가 한마디 했더니만 시비 걸었다고 뭐 라고 그러는 거야?] [네가 말하는 투가 꼭 말해줘야 하는게 내 의무인데 그 의무를 저 버렸다고 하는 것 같잖아!!] [내가 언제......] 민이가 내 말에 또 한 차례 반박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옆에 앉은 엄마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바람에 퍼뜩 놀라 민이의 메시지를 흘려보냈다. 얼른 주변을 살펴보니 할아버지와 배 숙부가 민이와 나를 번갈 아가며 바라보고 있었고 민이 옆에 앉은 아빠는 연신 민이의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듯 헛기침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제야 들은 거지만 유가 계속 나에게 빨리 정신 차리 라는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은 민이와의 말까움, 아니, 메시지 싸움에 푹 빼져 있느라 하나도 못 들었던 것이다. 민이 또한 아빠의 헛기침과 내 태도 때문에 정신을 차렸는지 무안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무라 는 투로 입을 열었다. "허어 인석들, 식탁에서 너희 둘만 이야기를 하면 어찌하느냐? 예의를 지키느라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 받은 건 기특하다만, 전음에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주위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모른다면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보다 못하지 않느냐?" 물론 그 투가 부드러워서 무섭게 꾸중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까지 미안해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민이는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해요,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민이의 뒤를 따라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하자 이 정도 반응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할아버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 시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하기야 처음부터 그렇게 크게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래,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니 되었다. 하지만 내가 말한 건 하나도 듣지 못했겠지? 그의 질문에 민이와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줄 알았지. 간략하게 다시 설명해 준다면 진이는 늦어도 오늘 안에 제갈소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만 한다느 구나. 있는 곳 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면 무림맹에서 선발된 무사가 널 호위해 줄 거란다." ] 할아버지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민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하러 선발도니 무사를 붙여주죠? 그냉 지리를 잘 아는 사람만 붙여주면 될 텐테. 아버지와 어머니도 계시고 할아버지도 계시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요? 그러자 배 숙부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들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취지지. 은씨 가문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닌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대단한 집안의 아가씨를 태운 가마를 호위하는 무사들이라면 설사 수십 명이 몰려다녀도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겠지." "그럼 우리 가문에서는 누나 혼자만 가야 한다는 건가요?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배숙부, 저조차도 같이 가면 안 된다는 건가요?" 마지막에 민이를 가리키는 말에 아빠와 엄마, 배숙부가 동시에 외쳤다. "너는 절대로 안 돼!!" 그 단호한 반응에 민이가 찍 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이 혼자 보내는 것도 마음이 안 놓이지. 그래서 말인데.... 아가야, 네가 같이 가줬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그러자 엄마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 즉시 입을 열었다. "기꺼이 가겠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와 나만 보내는 것이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둘만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저도 같이 가는 것이....." 그러나 아빠의 걱정스러운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할아버지에게 가로막혔다. "둘만이 아니지. 무림맹에서 뽑힌 정예들과 함께야. 제갈 소저의 일도 있고 해서 특별히 신경 써서 보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게다가 모녀끼리 가는데 아버지가 끼어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느냐? 무림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분타를 만들고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왔다는 건 그들이 이 도시의 일에, 특히나 무림맹의 움직임에 촉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있다는 소리일 테지. 그래서 조심에 조심을 하지는 거다." 할아버지의 이어지는 설명에 아빠는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런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엄마가 활달하게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내 실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말아요, 진이랑 둘이서 멋지게 해내 보일 테니까." 그러면서 엄마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나도 엄마의 말에 맞장구를 치느라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아빠와 민이가 동시에 똑같이 심히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집안 식구들이 아침 식시를 끝마치고 느긋하게 식후의 차 한잔을 거의 다 마셔갈 무렵 무림맹에서 뽑힌, 날 호위할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회색 무복을 다 같이 맞춰서 입고 온 걸 보니 그들이 무림맹 사람이라든가 내가 은씨 세가의 여식리아는 걸 드러내지 않을 모양이었다. 20명이나 되는 호위 무사를 데리고 가마를 타고 다닐 정도면 집안이 꽤나 빵빵할 수준일 텐데 집안을 나타내는 표식을 하지 않아도 될지 의아해하긴 했지만 뭐, 그러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고 하니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거란다. 하긴 의심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엄마랑 내가 가는데 아빠를 끼지 못하게 할 정도로 신경 쓰는 사람들이 그 점을 생각 못했을리 없었다. 그들이 마련한 고급스럽기는 하지만 신불을 알아챌 만한 어떠한 표식도 없는 가마에 오르자 이번에 호위를 받은 무사를 지휘하게 된 듯한 주작단장과 청룡단장이 가마의 앞과 뒤에 섰고 나머지 무사들이 인간 장벽을 쌓듯 주위를 둘러쌌다. 게다가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의 신원 보호 효과를 내려 함인지 가마꾼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주작단과 청룡단에 소속된 단원들이었다. '훗, 그러고 보니 그 단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실력도 식력이지만 배경도 빵빵하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임무 때문이라고 해도 남이 탄 가마를 메고 다녀야 한다니 속이 무지 꼴리겠군. 어쩐지 딴 사람들은 긴장으로 인해 굳어 있는데 그들은 그냥 딱딱하게 굳어있더라니... 호호호, 안됐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장난이나 좀 쳐볼까나? 내 몸무게를 무지 무겁게 하혐...'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했늕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의 전음이 들려왔다. [주군, 설마 그 안에서 장난차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오.호.호.호... 유는 ~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 [하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주군께서 설마 하니 아주 유.치.하게 어.린.애 같은 장난은 이제 취급하지 않으실 테지요?] [아.하.하.하... 그러엄~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럼 전 주군만 믿겠습니다.] '젠장! 귀신같기는. 우도 떼어놓고 갈 수 없나?' 하지만 유가 떼어놓는다고 떨어질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포기하고 그냥 가마 안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몽클몽클 속아나는 장난기를 완전히 다스린 건 아니었다. "북동쪽으로 가주세요." 가마에 타기 전에 대충 지로를 보며 어느 쪽이라는 것은 이야기가 된 상태이지만 마치 택시를 타는 것 같은 기분에 가마의 앞을 가린 휘장을 살짝 걷어 올리면서 가마 앞에 선 주작단장에게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가마 옆에 서 있던 유의 눈쌀 찌푸려지는 게 보였지만 '이 정도의 장난은 봐줘야징~!' 하는 의미의 시선을 보내며 혀를 빼꼼 내밀었다가 집어넣는 동시에 휘장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비록 내가 무림맹 안에서는 위치를 찾아르 수 없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무림맹을 나선 건 아니었다. 어차피 마법진 위에 나타나는 건 동쪽, 서쪽 같은 방향과 거리였으므로 자세한 지도가 있었다면 쉽게 찾을 수 있었겠지만 도시 안의 집 하나 하나까지 나와 있는 정교한 지도는 없다 보니 대충 위치만 알아 낸 뒤 이렇게 직접 나서서 찾아야 했던 것이다. "자, 출발!" 주작 단장 헌준의 외침과 함께 내가 탄 가마가 번쩍 들려지더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헤에, 가마 타는 것도 꽤 재미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타봐야지." 좌우로 흔들흔들거리는 데다 위아래로 출렁출렁거리는 느낌이 어쩐지 바다 위에 작은 보트를 띄워놓고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율동적인 느낌을 한창 느끼고 있는데 침착하고 저음의 낯선 전음이 들려왔다. [은 소저, 제갈 소저가 있는 방향으로 맞게 가고 있습니까?] 갑자기 들려온 전음에 '웬 놈에냐?'란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으나 곧 전음을 보낸 사람이 주작단장인 헌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마가 흔들리는 느낌이 재미있어 그 느낌에 취해 있느라 마법진을 형서앻 좋지도 않고 있다가 허둥허둥 재빨리 손바닥 위헤 만들어놓은 다음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아.. 음... 그러니까... 대충 방향은 맞게 가고 있네요. 이대로 쭈욱 가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무림맹에서 예측했던 제갈준희와의 거리가 절반에 넘게 줄어들었을 때였다. 비록 약간씩 꼬불꼬불거리긴 했지만-아마도 도시의 길을 따라가다 보니 직선으로 가지 못하는 거겠지만-어긋나지 않게잘 가고 있는데 갑자기 방향을 옆으로 틀어서 가고 있는 거였다. 처음에는 또 다른 집이 가로막고 있어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아째 가도 가도 방향이 다시 원위치할 생각을 않고 있는 거였다. 결국 의아함을 참다못한 나는 내 앞을 가리고 있는 가마의휘장을 옆으로 젖혔다. 그러자 가마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유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돌아보았지만 나는 유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의 반대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왜 자꾸 어긋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뒤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앞쪽으로는 약간 과장을 보태 끝이 안 보이는 담벼락이 쫘악 이어쪄 있었던 것이다 '와우! 우리 세가 장원도 꽤 큰 곳이라 알고 있었는데 뉘 집인지 몰라도 울 세가만큼 크잖아? 아냐. 혹시 더 클지도 몰라.' 앞장서서 가고 있을 주작단장 헌준이 어느새 가마 옆으로 오더니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설명해 줬다. "하남상단의 장원입니다. 우리 무림맹의 협력을 아끼지 않은 상단 중 하나죠." "장원이 꽤 큰 것 같은데요? 상단이 큰가 보죠?" 주작단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묻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위치를 바라보는 상단이라고 말할 수 있죠. 자, 이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가? 이렇게 가마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위험합니다." '쳇, 딱딱거리긴.' 속으로는 그렇게 꽁알댔지만 나느 별말없이 순순히 가마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지내면서 알게 된 거지만, 그는 실력도꽤 있고 나쁜 사람은 아닌데 너무 원칙적으로 굴어서 문제였다. 엄청 긴 담장을 보니 이 장원을 돌아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아아... 가마도 오래 타고 있으니 지루하네. 이렇게 재미없을 불 알았다면 민이랑 같이 오는 건데. 하기야 민이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어른들이 순순히 보내줄 리도 없겠지만.' 어차피 보고 있는 사람도 없으니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손바닥 위의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이미 방향과는 한참이나 어긋나 있었지만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돌아가는 것이니 염려할 것은 없었다. '아... 심심하다. 이럴 때 휴대용 오락기라도 있었으면, 나 예전에 한국에 있었을 때 테트리스 무지 잘했는데. 음, 어쩜 마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라나? 돌아가면 할아버지한테 한번 말해 봐야겠다. 마법으로 만든 오락기라... 훗, 가능할지도 몰라.' 너무 심심한 나머지 그런 쓰데 없는 생각까지 하며 온몸을 비비꼬다 못해 가마의 흔들거림에 취해 솔솔 찾아드는 잠에 몸을 맏겨 한창 꾸벅꾸벅 잘 졸고 있을 때 내 단잠을 깨우는 유의 전음이 날아왔다. [주군, 제가 보기에는 이 장원 뒤에는 제갈 소저를 가두고 있을 건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이곳에 제갈 소저가 있는 것이 맞습니까?] 우려가 가득 담긴 그의 전음에 퍼뜩 깨어보니 가마는 전진을 멈추고 따엥 내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휘장이 걷히고는 염려스러운 표정의 유와 의심스러운 표정의 주작단장이 얼굴을 드러내었다. "은 소저, 우리가 제대로 온 것이 맞소?" 주작단장이 물어왔지만 마법진을 보고 있지 않았으니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잠시만 비켜주시겠어요?" 그러나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가마에서 천천히 내리면서 얼른 손바닥에 마법진을 형성시켰다. 그리하여 내가 가마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필 수 있을 즈음에는 이미 내 손바닥에 마법진이 형성되어 제갈준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가마는 하남상단 자원의 뒷문으로 보이는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 쪽으로는 성병이 있는 곳까지 잡풀만이 무성한 공터가 위치해 있었다. 나는 그런 주위를 둘러보면서 손바닥 위의 마법진이 표시하고 있는 제갈준희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어쩐지 제갈준희의 위치가 이상했다 '흐음... 왠지 뭔가가... 준희 언니는 성 밖으로 다시 옮긴 건가? 으응? 아닌데? 이런, 지나쳐 왔잖아!' 내 손바닥 위의 마법진에서 깜박거리는 제갈준희의 위치는 분명 우리가 지나온 방향에 있었다. "저...지나쳐 왔는데요?" 내가 졸고 있느라 지나치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건 내 실책이었다. 그랬기에 내 목소리는 약간의 미안함이 섞여 기가 죽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말에 주작단장 헌준의 얼굴이 굳어지며 눈썹이 약간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통은 치지 못한 채 다시 정중히 물어왔지만 분노는 참을 수 없었는지 그 말투가 마치 씹어 내뱉는 듯했다. "얼마나 지나쳐 왔습니까?" "에...그렇게 많이 지나쳐 오지는 않았군요. 조금만 뒤로 가면 되겠는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마법진에 나타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손을 들어 가리키려다가 힘없이 다시 손을 내리고 말았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내 시선이 가는 방향을 따라 같이 시선을 돌리다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가마에 내릴 때 곁에 와 있던 청룡단장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설마.. 저 장원 안에 제갈 소저가 있다는 소리입니까?" 하남상단은 무림매에 지원을 아까지 않는 상단 중의 하나라고 했으니 그가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진에서 깜빡거리는 표시에 의하면 분명 제갈준희가 있는 곳은 바로 하남상단의 장원 안이었다. 물론 장원 안의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난 이거 하나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예, 준희 언니는 분명 저 안에 있어요." 내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얼굴로 청룡단장은 주작단장을 바라보았다. 청룡단장의 시선을 받은 주작단장은 '나라고 별수있겠느냐'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선 맹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갈 소저가 하남상단 장원 안에 있다고 하니 보고는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던 일행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무리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분위기들이 쫘악 가라앉은 것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적이 있다는 산을 향햐 줄기차게 올라 갔다가 다 올라가서는 대장의 '흐미,이산이 아닌가베...'란보리를 들은 쫄병들 모습 갔았다. '이거이거, 분위기를 보아하니 무림맹에서도 내 말을 안 믿어줄 것 같은데?' 그냥 내 말을 믿기 힘들어하는 반응은 그나마 양호했다. 성질 급한 XX는 내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애 말을 믿다가 제갈준희를 그들의 손에 넘겨줬다고 펄펄 뛰었고, 그보다 더 아주 모오오오~옷된 XX들은 나보고 사악한 주술을 쓸 때부터 알아봤다느니, 귿르이 첩자가 분명하다느니 말들이 많았다. 그 XX들은 모두 무림매의 장로들로서 잠깐무림매의 제일 윗시스템을 설명하자면 무림 맹주가 제일 위에 있고 그바로 미텡는 9대 문파와 8대세가, 그리고 1방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말로는 맹주를 제일 위라고 치지만 무림맹이라는 것이 큰 무뉴ㅏ들은 중심으로 한 연합이다 보니 맹주 말을큰 비중으로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맹주 또한 그들이 거대 문파를 뒷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함부로 무시하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이건다 들은 이야기이다). 그러니 맹주가 하고 싶어도 장로들이 반대하면 못하는 거고, 맹주가 하기싫어도 장로들이 빡빡우기면 하는 시스템이니 무림맹주라는 무림상 최고의 자리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날 앞에 두고 무림맹주를 가운데 앉히고 좌우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노임들이 바로 그 무림매의 장로들인데, 안타까운일은 9대 문파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회희를 빙자한 말싸움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9대 문파와 맞서는 8대 세가들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5대 세가 출신의 장로들이 거의 참석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씨 세가는 원래 장로 직을 울 할아버지가 가주 자리와 같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저 자리에 참여하지 못한 채 내 옆에 있었고, 단목세가는 전에 그 약 먹은 낭인 무사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나서 참석 못했고, 모용세가는 봉문을 선언했었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참여한 세가는 남궁세가와 사천당가뿐인데 그들과 나머지 세 세가의 사람들을 합쳐 봤자 겨우 다섯. 그냥 싸우더라도 밀릴 숫자인데 그들 또한 내 말을 신용하지 못하는 눈치였기에 아주 일방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하남상단이라는 곳이 20여 년전에 처음 새겨 착실히 번창하여 지금의 상황에 이른 상단인데, 이 상단이 처음 생길 때부터 무림맹에 많은 자금을 대주고 있었고 무림맹 또한 이 상단을 지원해 주는, 이른바 돈과 무력의 상부상조 관계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유지해 온 상단이라고 했다. 그런데 갑작이 어린 계집애-그들 눈으로 보기에는- 하나가 나타나서 그 상단이 본래는 무림매을 적대시하는 적의 본거지라고 주장하니-비록 난 주장은 안 했지만... 말인즉 그렇다는 거다-믿기 힘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회의를 방자한 말싸움이 8대 세가 쪽의 완벽한 패배로 끝나지는 않았다. 9대 문파의 사람들이 나를 꼬투리 삼아 8대 세가를 다 싸잡아 깎아내리는 데에 화가 난 사천당가의 장로 당월교가 탁자를 치고 일어나며 외친 것이 방향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마로 제갈 소저가 그곳에 있으면 어쩔 것이오? 제갈 소저가 그곳에 정말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옛말에 하던 짓도 멍석 펴놓으면 안 한다고, 당월교의 그 말에 9대 문파의 장롣르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에 말할 기회를 얻었는지 그동안 입을 다물고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무림맹주가 말을꺼냈다. "저확히 하자면 은소저는 그곳에 제갈 소저가 있다고만 했지 그곳이 적의 본거지란 말은 하지도 않았소. 그렇게 따지자면 적들이 자신들의 본래 목적을 속이곤 평소 상단과 가까이 하고 있다가 이번에도 우리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그늘 밑으로 잠시 몸을 피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소?" 맹주 헌원패의 말이 끝나자 8대 세가 쪽은 지극히 옳은 말이라는 듯 희색을 띤 얼굴로 고개들을 끄덕거리고 있었고 9대 문파들은 꼬투리 잡을 걸 일헥 되었기 때문인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종남파의 출신 장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맹주의 말씀이 옳다고 해도 증거가 없지 않소이까?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친분을 쌓아온 그 당산에 무작정 가서 '은씨 세가의 소저 한 명이 이곳에 제갈 소저가 있다고 했으니 조사 좀 하겠소이다'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아주 말 한마디에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구구절절이 매어 있는 말투였다. 하지만 맹주의 입장상 '그 입다물라!'라고 소리칠 수도 없었던 터였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나타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말씀도 옳소. 하나 제갈 소저를 찾는 방법이 꼭 우리가 무사들을 이끌고 가 상단 안을 샅샅이 뒤져보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럼 또 무슨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지금 맹주는 야밤에 몰래 무사들을 침투시키기라도 할 작정이시오?" 인상을 팍 찡그리며 이번에는 곤륜파 장로가 시비조로 물었다. "물론 그러지는 않을 것이외다. 난 단지 은 소저가 제갈 소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하니 은 소저를 상단 안으로 들여보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오." "무슨 방법으로 그런단 말입니까?" "그걸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않겠소이까?" 그러자 9대문파 장로들 중 그나마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적을 짓지 않고 있던 하산파의 장로가 나섰다. "맹주께선 은 소저의 말대로 제갈 소저가 하남상단 안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오?" 그의 질문에 맹주는 우리 쪽을 한번 힐끔보더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본좌는 은 소저가 허엄을 했다고 생각지 않을 뿐이외다. 하나 하남상단이 적의 본거지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니 우선은 확인해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외다." "확인은 무슨 확인! 까딱 잘못했다간 하남상단과의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 무림맹이 어린 계집의 말 하나를 듣고 움직였다는 소리를 듣고 싶으신 게요? 나는 이런 일로 의논 한다고 우리 장로들을 모집한 맹주도 이해가 가질 않소이다. 척보면 모르시겠소? 저 아이가 잘못 안 게 아니오? 어린 계집애 하나를 믿고 호남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청룡단이나 주작단이나... 그냥 얌전히 제갈 소저나 무림맹으로 데려올 것이지, 뭐하러 일을 이렇게 벌려놔서... 에잉, 우리 무림맹이 언제 이렇게 가볍게 변했단 말이오? 내참, 한심스러워서," 무당파의 장로였다. 첫인상부터 나를 되게 깔보는 듯해 보이더니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꼬투리 하나를 잡더니 아주 까아 뭉개고 있었다. 요즘 무당파가 마공 비급 조작을 지킨 몇 안 되는 문파 중 하나가 되더니만 그거 믿고 더 날뛰는 것 같았다. 하기사 아까 말싸움할 때도 저 사라이 제일 앞장서서 우리를 비난했었다. '그래, 너, 나한테 찍혔어!!' 속으로 그렇게 이르 빠드득 갈면서 분을 삭이고 있는 주엥 맹주의 말이 다시금 들려왔다. "하나 이번에는 걿게 쉽게 단정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 개방의 정보에 의하면 은 소저가 적들이 이곳 남양에 들어왔다고 한 날에 수상한 마차가 하남상단의 뒷문으로 몰래 들어갔다고 하더이다. 떳떳했다면 대낮에 정문이 활짝 열여 있었을 텐테 뭣하러 남들 눈을 피해 뒷문을 이용했겠소이까?" "글쎄, 뭔가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 사저이 제갈 소저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허어, 어린 계집의 말도 모자라 이제는 거지의말 때문에 움직이자는 겁니까?" "뭐시여? 이 말코 도사놈이! 아니, 거지 놈 말은 말도 아니라는 거냐?" 그동안 입을 딱 다물고 앚아만 있던 거지 차림의 장로가 탁자를 치고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오치자 무례한 말을 했던 무당파 장로는 무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마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태도였다. 물론 개방의 장로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았지만 내가 보기에 무당파 장로의 개방에 대한 태도는 우리 세가를 대하는 태도보다 더 무례했다. 솔직히 내가 이곳에 들어왔을때부터 맹주를 비롯한 소수의 몇몇만이 개방의 장로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개방의 장로가 아예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방은 이곳에 있는, 아니, 전 무림을 통틀어 가장 많은 문도 수와 거대한 조직망을 가지고 있다 알려져 있지만 그들을 조직한 이들이 거지라는 이유 때문에 제일 큰 문파임에도 불구하고 중소 문파 취급을 받고 있다 했다. 무림뱅에서도 개방의 빠르고 방대한 정보망 때문에 무림맹 장로 직의 한 자리를 주었을 뿐 그 외에는 무림맹 안의 다른 요직에는 개방의 문도가 없었다. 단지 장로 직속에 몇몇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지금은 그나마 장로로 앉아 있는 개방의 원로가 현 무림 5대 고수 중 한 명인 광견추노개 노원이었고, 그의 별호에서 봤듯이 그의 성격이 뭐뭐 같았기에-한번 뒤집히면 엄청난 피해가 생겼기에-에의를 지키는 시늉이라도 하지, 사파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뒤 무림맹을 바롯하여 각각의 문파만이 고유 정보망이 생겨 더 이상 전적으로 개방의 정보에 의지하지 않게 되자 개방의 위치는 점점 하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뭐, 그나마 아직까지는 개방의 그래도 대접은 받고 있다고 하지만. 개방 장로의 걸걸한 말로 인하여 좌중에 다시 침묵이 감돌자 그동안 내 옆에 묵묵히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이곳에 들어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내손녀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이니, 만약 제갈 소거가 하남 상단에 없다면 무리 세가가 책임을 지고 제갈 소저를 찾아서 무림맹으로 데려오도록 하겠소이다." 그러자 종남파의 장로가 나섰다. "당연히 은씨 세가에서 책임을 져야 하외다. 하나 지금은 가주께선 제갈 소저가 왜 중요한지 잊고 계신 것 같소이다. 제갈 소저는 제갈전 가주의 인질이 도기 때문에 중요하단 말이외다. 한데 이번 일로 제갈 소저를 잃어버려서 나중에 은씨 세가에서 그녀를 되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제갈 전 가주에게 협박이 된다면 그건 어찌 책임을 지시겠소이까?" 그의 말에 할아버지가 뭐라 한마디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맹주가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맹주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럼 맹주께선 하남상단에 은 소저를 들여 보내어 살펴보게 할 좋은 생각이 있으신 게요?" 희의를 빙자한 말싸움을 종식시키고 이번 안겐에 대하여 회의를 진행시키는 훌륭한 발언이었지만 소림사의 말을 들은 8대 세가 쪽 장로들은 뭐 씹은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림사 장로의 발언은 8대 세가 쪽 장로들이 맹주의 말로 인하여 그 동안 밀리고 일렸던 말싸움에서 드디어 승리를 잡아 9대 문파의 장로들에게 반박을 하려는 찰나 교묘하다고 할 만 큼 그들의 말을 막아 버리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회희를 한 단계 더 진행시켜 버렸다, 이제는 그 일로 박박할 기회도 영영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9파 장로들의 일방적인 말싸움이 진행되는 동안은 말리지 않았다가 이제 와서 말리는 걸 보면 그 의도가 참으로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말싸움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고, 회의는 끝나지 전에 멈추지 않는 법이었으므로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착착 의논되었다. 뭐, 그 방법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은 아니고 아빠와 배숙부가 하남상단을 방문해 그둘을 쫓아간 내가 지루한 사업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상단 안을 구경하러 다는 척하면서 제갈준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는 거였다. 설사 금지된 구역에 잘못 들어갔다 하더라도 세가의 여식이니 함부로는 못할 것이라는 걸 계산하여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번에 작전(?)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민이는 또 한 번부루퉁했지만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말리는 통에 또 한 번 단념해야 했다 [에혀, 한번 잡혀갔다 왔다고 너무 감싸고 도는 거 아냐?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답답해.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잡혀줬어] 이번에도 가지 말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덕분에 서운함이 많이 쌓였는지 하남상단에 가려고 준비하는 나에게 와서 자신의 심정르 토로했다. 물론 엄마가 내 준비를 도와주는 바람에 메시지로 보냈지만 하지만 나는 민이의 그런 어리광 같은 마음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건 분명히 말해 두지만 전에 민이의 버릇없는 행동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안 풀린 건 절대 아니었다. 그때 일은 벌써 깨끗이 잊었으니까. [웃기고 있네. 내가 너 잡혀간 뒤로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얼마나 숨이 막혔는 줄 알아? 너도 그런 분위기를 한번 당해봐야 해! 이 정도로 그렇게 답답해하다니.... 내가 숨죽으로 산 거에 비하면 이건 약과야. 약과!] [우웅...너무해. 누나. 그렇더라도 누나까지 그렇게 매정하게 외면할 거야? 나 같은 인재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놛는 건 낭비라고!] [어이구, 됐네! 솔직히 이번 일도 나 혼자서도 충분해. 내 마법이면 장땡인데, 아빠랑 배숙부가 달라붙어서 더 번거롭다구.] [에에... 우나 아빠랑 배숙부는 몰라도 나는 도움이 되면 됐지 절대 혹은 아니다 뭐.] [몰라. 그래도 네 도움은 별로 필요없어. 나중에 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마.] 준비를 끝낸 나는 엄마의 시선을 피해 민이에게 혀를 한번 쏘옥 내밀어 보인 후 재빨리 아빠와 배 숙부에게로 향했고, 민이도 내 뒤를 따라오면서 민이가으로 투덜거리는 메시지를 날렸다. [체엣.... 그래. 누나 혼자 잘해봐라.] 하남상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 아는 사이든 모르는 사이든 하남상단과 거래를 하려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씩은 정문을 드나들었으므로 들어가는데엔 별다른 제지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은씨 세가란 명함은 꽤나 큰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었기에 정문을 지나 손님 접대를 담당하는 남자에게 말하자마자 우리는 일반 손님들을 모시는 건물을 지나쳐 좀 더 안쪽에 있는 건물로 안내될 수 있었다. '흐음, 덕분에 제갈준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군.' 꽤나 화려하게 장식된 접대실에 앉아 내어준 차를 채 반도 마시기전에 염소수염을 기른, 40대쯤으로 보이는 만자가 빠른 발걸음으로 접대실에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배대협, 은대협. 오신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요."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는 그를 향해 배 숙부가 우리 대표로 한 걸음 나서서 포권을 취해 보이며 답했다. "별말씀을, 아무런 연락 없이 엃게 불쑥 찾아온 우리를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의를 따진다면 사전에 용무와 방문 날짜를 통보해야 할 터이나 저희가 남양에 온 것도 에상에 없었던 일이라 이리 무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오히려 접대가 소홀할까 걱정입닌다. 자. 그럼 상주께서 기다리시니 자세한 이야기는 그곳에 가서 하실까요?" 그가 가자는 똣으로 팔을 문 쪽을 향해 뻗어 보였는데, 아빠가 그러한 그를 살작 제지하며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실행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아, 그전에 이쪽은 내 딸인데 우리가 하남상단에 간다는 말을 듣고 그 위명이 쟁쟁한 상단에 가고 싶다고 졸라서 데려오긴 했습니다만 사업 이야기를 얌전히 듣고 있을 아이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괜찮다면 상단내를 구경하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거절하면 환영 마법을 써서라도 몸을 빼내고 상단 안을 뒤져보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크게 어려운 이로 아니라는 듯 쉽게 고개를 끄덕여 흔쾌히 허락했다. "아이고, 제가 아가씨를 미처 배려 못해 드렸군요. 물론입니다. 아, 처음오시는 분은 상단 안을 복잡하게 보시니까 제가 안내인을 하나 붙여들지요."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빠, 배 숙부와 헤진 채 시녀 차림을 하고 있는 어떤 아가씨의 안내를 받아 상단 안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녀는 단아하게 새겨 남자들의 시선을 끌 것 같아 보였는데 상단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런지 되게 상냥하고 사그나근했다. 몸매도 늘씬한 편이어서 그녀의 가는 팔로는 힘껏 때린다 해도 아플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곳에 제갈준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여자라해도 방심하지 않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내공의 살펴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내공이 거의 유와 비슷한 양이었따. 척 보기에 그녀는 많아봐야 20대 중반이나 후반쯤인 듯한데 자신보다 10년즘 연상인유와 비슷한 내공 수위인 것이다. {와우~ 유, 덕, 조심해야겠는걸? 저 여자 내공이 유와 비슷해!} 비록 유가 무척 뛰어하다는 말은 듣지 못해도 꽤 한다는 소리는 듣는 수준인데, 그런 유와 비슷한 내공을 가지고 있다면 저 여자는 어쩜 무공 실력이 유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따. '그냥 안내만 해주는 시녀의 무공이 왜 저리 높아? 내가 돌아 다니는 거슬 주의하는 거야, 아니면 원래 다 이상단의 사람들은 시녀까지 저리 무공 실력이 좋은 거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이곳이 정말 만만치 않다는 것만은 틀림 없었기에 나는 더욱더 긴장의 끝을 조였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빠, 배 숙부와 헤어진 뒤 나는 만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위에 마나를 퍼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손바닥의 마법진을 유지하며 가끔가다 힐끔힐끔 보랴, 대기에 퍼진 마나가 보내주는 자극의 정보(?)를 분석하랴, 내 앞에 가면서 계속애서 이야기를 놀어놓는 그 시녀의 이야기에 맞장구쳐 주랴 정신이한다도 없었다. '으읏... 이럴 줄 알았으면 민이를 데리고 오는 건데. 유나 덕이에게 이 여자를 상대하라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나는 모습을 숨긴 채 우리를 은밀이 따라다니는 세명의 기운을 감지했다. 처음에는 하도 사람들이 많아 왔다 갔다 거려서 눈치못 챘지만 곗ㄱ 도라다니다 보니 떨어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끝까지 따라 붙는 마나덩어리들의 기운이 수상하고 대기에 퍼뜨린 내 마나가 쿡쿡 찔러 왔던 것이다. '뭐야, 나라서 경계하는 거야, 아니면 구경 다닌다고 돌아 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경계하는 거야? 어쨌든 이렇게 예민하게 구근거 보면 뭐가 있긴 있어.' 그렇게 상단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와주에 나는 좀 놀라운 광경을 하나 목격했다 장원안에 떡하니 동산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아마 산책로로 만들어놓은 돗 잘 꾸며진 정원 한가운데 있는 인공 호수에 흘러 들어가는 작은 폭포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와우~" 도대체 무슨 재주로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동산의 앞쪽이라면 동산의 뒤쪽은 다른 건물과의 경게를 짓는 담벼락과 맞붙어 있었다. 내가 놀라움과 감탄을 숨기지 않자 나를 안내하는 시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했다. "이곳은 상주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또 손님들게 자랑으로 보여 주시는 곳이지요, 시실 제 생각에도 이처럼 멋있는 정원이 또 있을까 싶네요." 그녀의 말대로 나는 장원 안의 정원 주에 동산에 폴포까지 만들어 놓은 정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대단해요. 폭포까지 만들어 놓다니 신시하네요." 그리고는 시녀에게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해 다시한번 살짝 손바닥의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아까부터 제갈 소저가 있는 곳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 주위만 맴도는 것 같아 조금씩 h조해 지고 있던 참이어서 뭔가 다른 수를 강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동안돌아다는 곳은 항상 우리 일행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에 같이 있었기에 뭘 하려고 해도 그들 때문에 실행에 옳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상주가 아끼는 정원이라 그런지, 아님 때를 잘 맞췄는지 우리와 우리를 은밀히 뒤따르고 있는 세명의 정체 불명의 사람들뿐이었기에 일을 벌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죽이는 건 아니었고 내가 제갈준희가 잇는 장소를 찾아내고 돌아오는 동안만 정신을 잃게 한 뒤 나중에 내가 돌아와선 기억을 조작할 생각이었다. 때마침 나에게는 울 아빠가 알려준 '순간 포착 필살 최면술'능력이 있었으므로 어려울 건 없다고 생각했따. 그런 계획을 유와 닥에게 말하기 전에 마법진을 살펴본 것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냥 한번더 확인하려는 별 생각없는 행동이었따. 하지만 그때 본 마법진은 당황스럽게도 제갈준희가 이 근처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여기란 말이야? 하지만 어디?' 마법진에 표시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쪽에는 동산이 떡한 버티고 있었다. '동산?' 거기까지 알아낸 나는 우리를 안내하는 시녀에게 물었다. "저기, 동산위에 한번 올라가 보면 안 될까요?" 그 위로 올라가 보면 좀 더 혹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었다. "동산이요/ 저기요?" 약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와 동산을 번갈아 바라보며 묻는 시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따. "예. 아, 혹시 올라가지 못하게 되어 있나요?" "아, 아뇨. 저 위에도 길은 나 있습니다. 그럼 한번 가보죠." 그곳에 뭔가가 있을 것 같아 나는 시녀가 못 올라가게 하거나 아니면 조금은 놀라기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양 순순히 안내해 주는 그녀의 등을 보면서 내가 잘못 짚은 건 아니지 의심이 들었다. '뭐, 어쨌든 올라가 보면 알겠지.' 동산에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T자형으로 오솔길이 나 있었다. 만약 동산과 담장이 맞붙어 있지 않았다면 十식의 길이 나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 길 양옆을 따라 사람의 무릎종도 으는 관목들이 주르르 심어져 있었고 간간이 닿는 곳은 오솔길의 양 옆뿐인 듯 그 너머로는 일반 산들처럼 여러 가지 나무들과 풀들이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자라난고 있었다. 뭐., 키 큰 나무들은 처음에 일부러 가져다 심어놓은 것 같지만, 그 나무들과 풀들이 제법 무성하고 일부러 가져다 심어 S호은 것 같지만 공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만들어지 지 꽤 오래된듯했다. 그 위에 난 길을 천천히 따라 올라가면서 설펴보았지만 사람들이 꾸준히 가꾼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 이상한 점을 찾아 볼수가 없었다. '으음.... 역시 동산은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며 시녀의 시선을 피해 다시 한 번 손바닥 위의 마법진을 살펴보는순간 웬걸, 제갈 소저를 나타내는 점은 바로 내가 서 있는 곳과 일치하고 있었다. '이곳? 이곳이란 말야? 그렇다면 혹시... 동산 속?'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동산 주변에는 동산 속으로 들어가게끔 만들어진 입구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동산부터 시작도니는 잘 꾸며진 정원이 Dt을 분이었다. '뭐야, 그럼 비밀장치라도 있다는 거야? 으음... 혹시 인공 폭포속인가?' 동산에 붙어진 장치라면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보니 보통 영화에서 보면 폭포 뒤에 비밀 문이라든지, 아니면 동굴 같은 장치가 있는 경우가 많았었다. '에... 그럼 혹시 여기에도?' 분명 살펴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저 시녀가 보고 있는 와중에 폭포속으로 뛰어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흐음, 일을 벌일 시간이 되었어.' 처음에는 유와 덕이에게 계획을 설명하여 같이 움직이려고 했지만 일일이 다 설명하자니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마법 한 방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이럴 때 마법을 안 써먹으면 어쩨 써먹겠어? 어차피 이 주위에는 우리밖에 없으니까 슬립 마법 정도면 괜찮을 거야. 어디보자...우릴 쫓아온 사람들까지 범위를 설정하고, 유하고 덕이까지 잠들면 안 도니까둘에게는 마나가 미치지 않게 하고... 에혀, 이것도 꽤 까다로운 작업이네.' 그렇게 기초 작업을 끝내고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 이 정원안에는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중얼거렸다. "슬립." 이들이 제갈준희를 데리고 간 적들과 한패라면-아마 거의 확실한 것 같지만- 재가 주술 쓴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잠재우는 마법도 있다는 것은 무를 테니 이런 마법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였을 것이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날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시녀는 곧 눈에 초점이 사라지면서 그대로 옆으로 쓸져 잠이 들고 말았다. 덕이와 육 어릳ㅇ절한 표정으로 쓰러진 그녀를 살피는 동안 나는 우리를 쫓던 그 정체 모를 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 그들이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유와 덕이를 시켜 우리를 안내한 시녀와 그들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기게 했다. 그리고 나는 곧장 가장 수상했던 인공폭포쪽으로 가봤다. 하지만 기껏 거친 물살을 헤치며 들어간 폭포 뒤쪽에는 탄탄한 바위벽만 있을 뿐 내가 생각했던 동산 안으로 들어가는 입루는 어디에 보잊 않았다. 혹시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바위 벽만 있는 것처럼 꾸며 놓은 건 아닌가 싶어 두드려도 보았지만 이런 데 전문 지식이 있는게 아닌 나로서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유가와써 살펴보았지만 그도 바위만 있을 분 입구는 없는 것 같아고 했다. {으음, 준희언니는 이 안에 있단 말이야.} 폭포에 입구가 없는 것 같자 나와 유, 덕이는 셋이 흩어져서 동산주위를 맴돌며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입구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안 보이자 덕이가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전음을 보냈다. {에롭네요잉(어렵네요)~ 입구가 어딘관데 암만 봐도 안 보인다요? 기냥 뽀사 버릴 수도 없고} {으음, 분명히 입구가 있을 텐데... 도대체 어디다 어떻게 만들어 놓은 거야? 시간도 별로 없는데...} 마법진에 표신된 방향만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치자 되게 난감했다. 마법진은 단지 방행과 거리만 가르쳐 줄 뿐 제갈준희가 갇혀 있는 건물의 무형도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잉, 돌아가면 할아버지께 이것도 한번 말해 봐야겠어. 길까지 가르쳐 주는 방법 없나? 그렇다고 제갈준희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이니조 모르는데 무턱대고 공간 이동할 수도 없고.' 나와 덕이가 한숨만 푹푹 쉬며 애꿏은 동산만을 째려보고 있는 데 우리가 투덜대는 동안 아무 말없이 묵묵히 있던 유가갑자기 전음을 보냈다. {저기에 있는 담 말입니다. 동산과 딱 붙어 있군요. 그리고 그 담 바로 앞에는 단층건물이 바로 붙어 있고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담과 건물은 붙어 있지 않느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유는 그 담 가까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심해, 유. 그 건물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단 말야.} {괜찮습니다} 내 걱정스러운 말에 유는 걱정말라는 몸짓을 해 보이고는 담에 딱 붙어 섰다. 그러자 그렇게 높게 여겨지지 않았던 담이 유의 키를 훨씬 넘어버리는 거였다. 장원 전체를 둘러싸는 담이면 몰라도 장원안의 건물과 건물의 경계를 짓는 담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거나 넘더라고 2m까지는 안 되는 게 보통이었다. 유가 가까이 가보지 않았더라면 동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게 보여 전혀 몰랐을 거였다 {어떻습니까, 굉장히 높죠? 저정도의 높이라면 어지간한 입구는 담 속에 충분히 들어갈 것 같지 않습니까?} 유는 단지 담의 높이를 보여주고 싶었을 뿌인 듯 덕이와 내가 담의 높음을 알아차리자 곧바로 담에서 떨어져 우리 곁으로 다가와 전음을 보냈다. {이상하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저렇게 딱 붙어 있다가 동산에서 흙이라도 흘러내리면 그냥 건물 지붕 위로 떨어져 내릴텐데, 그런 걱정은 안 하나 보군요.} 동산과 맞붙어 있는 높이가2m를 넘는 담. 그리고 그 담과 그대로 붙어 있는 단층건물. {그러니까 유의 말은 저 건물이 동산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다는 말이지?} {예 보통 단충건물은 일반 잡동사니 창고로 많이 쓰이지 않습니까? 그렇데 이 상단에서는 저 창고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봐요. 아가씨께서 저 건물에는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꽤 많아. 바깥에도 건물을빙 둘러서서 5명이나 지키고 있고 안에도 3명이나 더 있어} 덕분에 그 사람들이 우리 목소리를들을까 봐 우리는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 바고 있었다. {유의 말대로 수상하네. 알아봐야겠어} 내가 즉시 그족으로 몸을 움직이려 하자 유가 나를 말렸다. {다음 기회로 미루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더 이곳에 있다가는 저들이 수상히 여길 겁니다} {아, 그것도 그렇군, 좋아, 그럼 다음에} 오늘 밤 민이와 둘이 같이 펴들어 올 것을다짐한 나는 몸을 돌려 그 시녀와 수상한 세 사람 쪽으로 갔다. 이제 그들을 깨워 기억을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기억 조작은 간단하게 끝났다. 우선 정체 불명의 세 사람을 깨워 그들이 잠드러 있었다는 것을 지우고 그 다음 시녀를 깨워 기억을 지웠다. 나에 비해 내력이 적은 그들인데다 잠에서 덜 깬 상태였기에 최면술에 쉽게 걸려들었고, 유과 덕이는그 모습에 무지 놀라워했다 "흐미~ 주군은 별별 재주를 다 가지고 게시네요잉~"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정원을 빠져나가다 슬쩍 물러본 바에 의하면 담 너머에 있는 건물은 상우의 자식이 살고 있는 별채라고 했다. '흥, 그런데 창고가 있나?' 아빠와 배 숙부가 끌어주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는지 시녀가 우리를 안내하여 들거간 건물안에는 상주로 보이는 중년으 남자와 아빠, 배 숙부가 한가롭게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진아, 어서 오너라. 구경은 잘 했느냐?" 아빠의 의미있는 질문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빠. 특히 이곳 정원은 굉장했어요. 동산도 있는 데다 거기에서 폭포도 떨어지던걸요?" 그러자 상주로 보이는 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껄껄, 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정원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하긴 그곳을 보신 모든 분들이 감탄을 하지요. 그곳을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거든요" "정말 멋있었어요. 감탄이 절로 자오더군요." 그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하자 그는 기분이 좋은 돗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몸짓을 신호로 앉아 있던 세 사람은 일제히 일어났다. 그리고 배 숙부가 대표로 상주에게 작별을고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두분께는 얼마든지 시간을 내드려야지요." "그럼 저희는 이만." "안녕히 가십시오. 업무로 인하여 멀리 배웅은 못해 드리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상단 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때쯤 아빠와 배 숙부는 나에게 물어왔다. "그래, 제갈 소저는 거기 있더냐?" 아까 내가 환히 웃어 보인 탓인지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갈준희를 직접 보지 못한 탓 때문이다. 나야 내 마법에 대해 무지 자신있지만 무림맹의 장로들, 특히 9문파 출신의 장로들은 내 실력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으니 문제였다. "언니가 어디 있는지는 찾아냈어요. 상단 안의 정원에 있는 동산 속에 있어요. 제 생각에는 그 동산을 인공적으로 만들고 그 속에 어떠한 시설을 해놓은 듯싶어요.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경비가 심했거든요. 그래서 들어가 언니를 직접보지는 못했어요." 내 말에 아빠와 배 숙부는 서로 마주 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 받았다. "흐음...그거참." "하나 만약 그곳에 제갈 소저가 감금 도어 있는 것이라면 진이가 쉽게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문제는 그걸로 또 9문파 출신의 장로들이 꼬투릴 잡으려 들 거라는 거지." "차라리 오늘 밤에라도 제가직접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두눈으로 제갈 소저를 직접 보고 온다면 그들이 뭐라 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렇게 성급하게 굴었다가는 자네까지 잡힐 이험이 크네. 자네는 상단안의 위치도 잘 모르는 데다 진이가 말한 그 동산 속의 질도 모를 거 아니가?" "후우, 답답하군요." 배숙부의 말이 옳았기에 아빠는 뭐라 더 말하지 못했다. 우리가 상단에서 돌아오자 곧 맹주의 명에 의하여 장로 회의가 소집되었다. 아빠와 배숙부는 직접 가봊 사람이었으므로 할아버지와 함께 그 회희에 참여하였다니마 나는 오가는 이야기가 뻔할 것 같아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민이의 방에 가서 오늘 밤 계획에 관하여 의논하기 시작했다. 뭐, 의논이라고 할 것은 없고, 그냥 일방적인 통보를 한 후 게획에 참여할 것인지 빠질 것인지 민이의 의견을 듣는 것뿐이었지만. [오늘 밤에 상단 안으로 침입하자고?] [그래, 솔직히 내 생각에는 오늘밤도 너무 늦은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야. 제갈 언니가 이곳에 들어온 지도 오늘이 벌써 3일째니까. 만약 그곳에 제갈 전 가주가 있다면 벌써 협박하기 시작하고도 남았을 거야.] [흐음... 그래서 누나랑 나둘만이 가자고?] [그래 너. 요즘 어른들이 싸고 돌아서 갑갑했다며? 그러니이 기회에 갑갑함도 푸로 어디 디 특별 수련(?)한 성과도 나에게 좀 보여봐.] [그런데 누나,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훗, 어른들에게 혼나는 건 이제 이골이 났다. 게다가 넌 납치됐다 돌아왔으니 크게 혼냊는 않을 거야.] [좋아. 그럼 오늘 밤 자정?] [그래, 내가 네 방으로 갈게 준비하고 있어] [알았어] 희의엥 갔었던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아빠와 숙부는 저녁 늦게 돌아왔다. 저녁이 되기 한참 전에 회희 하러 갔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 회의도 엄청나게 길어진 듯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희의 내용에 대해 민이와 나에게 한마디 말도 안 해주는 거였다. 단지 나에게 그동안 수고했고 내가 할 일은 이제 끝났다고 하는 거였다. "에... 그럼 제갈 누민을 찾는 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설마 상단 안에 제갈 누님이 없다고 결론난 건 아니겠지요?" 민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어봤지만 회희에 갔다온 세 사람은 괜히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돌렸다. "허허.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란다. 내일 또다시 히희를 할 거야. 그런데 너희들, 저녁은 먹었느냐?" "아직 안 먹었어요. 세 분이 안 오셨는데 어떻게 먼저 먹겠습니까? 그나저나 할아버지. 회의를 내일 또 한다고요? 그럼 상단으로 안 쳐들어가는 건가요?" 그래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민이를 향해 이제는 엄마가 나섰다. "저런. 민아. 할아버지께서 막 회의를 끝내고 오셔서 피곤 하실텐데 자꾸 그러면 못써요. 어련히 너에게 말씀 안 하실까 봐? 아직 완전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하시잖니. 결론이 나면 말씀해 주실거야." 그러자 배 숙부도 얼른 맞장구쳤다. "그래그래. 얘들아. 오랜 시간 동안 회의하느라 좀 피곤하구나. 미안하지만 나는 간단하게 먹고 좀 자야겠으니 식사는 같이 못하겠다." 그렇게 배 숙부가 식사에 빠지겠다고 하자 아빠와 할아버지도 모습에 민이가 의아해했지만 내 제지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만 해/ 어차피 우리가 오늘 상단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면 결론은 나는 아냐? 그냥 우리끼리 먹자. 배고파 죽겠다.] [누나는 아까 간식 먹었잖아.] [에혀, 도대체 드래곤의 배는 얼마나 큰 거야?] [너네 용보다는 클걸? 척 보기에도 너네는 뱀이고 우리는 도마뱀이잖아] [허, 그거 말 돼네] 그날 밤, 마치 도덕처럼 남들 모르게 조용히 내방을 빠져나온 나는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민이의 방에 도착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민이와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인지 방문을 잠겨 있지 않아 쉽게 열렸다. 물론 불은 켜 있지 않았지만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빝 덕에 방 안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어이, 준비됐어?] 자는 척하고 있는 건지 침대 위에 웅쿠리고 있는 민이를 향해 메시지를 보내자 얻뚱하게도 민이는 침대 밑에서 빠져나오며 대꾸했따. [물론이야. 누나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그 모습에 황당해진 나는 침대 및에서 빠져나오는 민이와 침대위에서 웅크리고 누워 있는 형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 저건 뭐야? 난 네가 위에 있는 줄 알았잖아.] 그러자 민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위에 누워 있는 형상을 다시 한 번 매만지며 대꾸했다. [훗 보시다 시피 눈속임이지. 혹시라도 엄마나 아빠가 내 방에 들어와나 자는지 확인하면 끝장이잖아]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따. [민아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지 엄마나 아빠라면 직접 방문을 여는 대신 밖에서 네 기척이 느껴지나 안 느껴지나를 알아볼 것 같은데 말이지 저건 눈속임은 되지만 기척 속임은 안 되잖아?] 내 말에 민이는 행동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전혀 소용없잖아?] 그러면서 그 형상을 치우려고 하는 걸 내가 말렸다. [야야, 그냥가자 그거 언제 또 치우고 가냐?] [그럴까? 하지만 기껏 만들었는데 소용없다고 생각하니 열받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이는 기어코 이불을 벅겨내고 그 안에 똘똘 뭉친 베개를 치워버렸다 [이으그. 그냥 가자니까.]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마법을 시전했따. [레비테이션!] 그냥 단순 부유 마법으로 낮은 서클의 마법이라 지금의 나로서는 마나의 파동을 아주 적게하고도 사용할 수 있었기에 사용했다. 내 마법에 의한 마나의 파장 때문에 우리가 몰래 나가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건물 지붕을 지나 한참 위로 올라가 있으려니 곧 민이가 뒤따라 날아왔다. [자 그럼 갈까?] [좋아!] 방향은 낮에 상단을 다녀온 내가 알고 있었기에 내가 앞장을 섰고 민이가 뒤를 따랐다. 상단에서 돌아올 때부터 이럴 결심을 하고 방향을 자세히 알아놨기 때문에 헤매기 않고 곧장 상가 쪽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니 상가 장원의 중앙 쪽에 있는 동산이 쉽게 눈에 띄었다. [저기야?] 낮에 내가 상단 갔다 온 이야기를 민이에게 했기에 민이도 그 곳을 보자마자 곧 알아차렸다. [응. 그리고 유가 말한 담이 바로 저거야.] [아하, 역시 동산이랑 붙어 있는담 바로 뒤에 건물이 있네.] [그치?] 낮에는 나도 담에 가로막혀 있고 지키는 사람이 있어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기껏해야 10평도 안 돼 보이는 건물이었다. 칸이 두 개 있고 개수대가 있는 약간 널찍한 화장실만하다고나 할까 (비유를 들어도 꼭....)? 그 건물 위로 조금 고도를 낮추며 내려와 살펴본 바의 의하면 낮에 알아낸 것과 갚은 수의-밖에는 다섯 명, 안에는 세명-인원이 여전히 그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누난 어떻게 들어갈 거야?] [글세... 투명화 마법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아무도 없는데 문이 열렸다 닫히면 저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그냥 다 재우고 들어가면 어떨까?] [하지만 누가 와서 그걸 보면 어떡해?] [그러니까 안 자는 것처럼 세워놓고 들어가야지] [아냐, 차라리 정지 마법을 걸어 놓고 들어가는게 낫겠다] [아, 아, 그럴 거면 내가 혈을 짚을게. 나 그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좋아. 그럼 밖에 있는 녀석들은 네가 처리해. 안에 있는 녀석들은 내가 그냥 재워놓지 뭐] 그렇게 결정한 뒤로 막 움직이려는 찰나, 나는 좀 더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야, 야, 민아, 잠깐만.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솔직히 이렇게 몰래 침입할 때는 복면을 쓰는 거잖아. 그래야 들켜도 누가 침입했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우리는 복면을 쓰지 않았으니 우리 오랜만에 본래 모습으로 하구 쳐들어가지 않을래? 그럼 들켜도 누군지 모를 거 아냐?] 생각만 해도 무지 재미있을 것 같아 나는 입이 저절로 벌어져 피식피식 웃었다. 그걸 본 민이가 한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으이그... 솔직히 말해 봐.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걸 걱정한 것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러자는 거지?] [훗, 겸사겸사. 어차피 저들이 우리 정체를 모르는 이상 맘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잖아. 안그래?] 그러자 민이도 귀가 솔깃한 모양이었다 [흐음... 하긴 나도 내 모습으로 한 번쯤은 돌아가 보고 싶기도 했어] [그치, 그치? 좋아, 그럼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간단했다. 나야 다시 한 번 폴리모프하면 땡이었고 민에게는 마법 해제를 해주면 만사 오케이였다. [호오.. 청명아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모습이 변하자 곧바로 호칭까지도 바뀌었다. [그러게. 지금 보니까 누나 모습은 확실히 화려하다. 빨간 머리에 빨간 눈이라니... 옷까지 빨간색으로 갖춰 입어보지 그래?] [쳇, 내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줄 알았으면 빠간 옷을 입고 왔을거다. 자, 그럼 시작하자] 청명이가 먼저 앞장서서 밑으로 내려가 밖에서 지키는 사람들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지붕 위로 내려가 누가 오지는 않는지, 근처에 누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누나, 끝났어] 하지만 10분도 채 안 돼 청명이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나는 땅으로 내려가야 했다. 밖에서 지키는 사람들도 유 못지않은 내공을 가진 자들이었는데, 비록 기습을 한거지만 그런 자들을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다섯이나 처리한 민이, 아니, 청명이의 실력에 나는 새삼 놀라웠다. [이야, 너, 정말 제법이다? 저 사람들을 순식간에 처리하다니 말야.] 그러자 청명이가 잘란 체하는 표정을 징며 씨익 웃었다. [누나, 잊고 있나 본데 난 용이라고. 대기와 물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거 몰라? 수련을 했더니만 좀 멀리 있는 사람도 대기를 이용해 혈을 짚을 수 있게 됐어] [호오, 대단한걸? 자, 그럼 내 차례인가?] 청명이의 잘난 체를 슬쩍 받아 띄워주면서 나는 건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기 전에 안에서 지키고 있을 그들을 잠재울 생각이었다. 건물 전체를 내 마나로 둘러싼 다음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슬립" [자, 그럼 들어가 볼까?] 건물은 창고처럼 위장하기 위함이었는지 약간은 낡아 있었고 문도 보통의 나무 문이었다. 평소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잠겨 있는지는 않았는지 슬쩍 밀었는데도 손쉽게 문이 열렸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창이 하나도 없어서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아 나는 다시한번 마법을 시전했다. "라이트!" 내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빛의 구체가 형성되어 주위를 환하게 밝히자 막 문을 닫고 들어오던 청명이가 화들짝 놀라서 날 바라봤다. [누나, 뭐 하는 짓이야? 들키면 어쩌려고?] 하지만 나는 태연했다. [뭐 어떠냐? 이 주위에는 우리에게 제압당한 사람들뿐이고, 창문도 없어서 너무 어둡잖아. 게다가 들켜봤자 여차하면 공간 이동으로 튀면 되는 거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니까 마음까지 대담해지는 건지왠지 나는 마음이 들떠 막 나가고 있었다. 지금 같아서는 적들에게 들켜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누나, 왠지 막 나가는 것 같아. 하지만 뭐... 괜찮겠지] 청명이가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지만 자식도 약간 흥분이 되는지 곧 걱정을 지우고는 눈을 빛내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분명 건물 안에는 내 마법에 의하여 잠들어 있는 사람이 세 명이 있을 텐데 금방 눈에 뜨이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숨어서 지키고 있었던 듯 싶었다. 건물 안에는 텅 빈 창고처럼 바닥에는 짗과 겨 같은 것만 조금 싸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호오, 사람들 저기 있네? 저러다 떨어지지는 않을까?] 청명이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천장에 있는 대들보 역할을 하는 나무 위의 여기저기에 세 남자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훗, 저기들 있었군. 어쨌든 상관없어.어서 가기나 하자고] 나는 곧 그곳에서 시선을 돌리고 건물의 뒤쪽, 그러니까 담이 있고 동산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되게 지저분하고 낡아 보이는 긴 천이 벽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치우자 이번에는 제법 단단해 보이는 나무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 주먹만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당연하겠지만 잠겨 있었다. [흐음... 잠겨 있네] 내가 그것을 보고 피식 읏을 때 청명이가 청명검을 빼어 들고 나섰다. [비켜봐. 내가 잘라낼게] 그러나 나는 그런 청명이에게 자리를 비켜주기보다는 그 자리에 서서 청명검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야, 너, 그 검 가져왔냐?] [당연하지. 그럼 여기 침입하는데 아무런 무기도 안 가져왔게? 누나도 검 가지고 왔네] [그게 아니라 네가 청명검 가지고 있다는 건 이들도 알고 있을 텐데. 그거 휘두르면 네 정체가 탄로나잖아? 그걸 생각해야지] [아.....!] [으이그. 이리줘봐. 내가 보통 검처럼 보이게 환영 마법을 걸어줄게] 청명이가 건네준 청명검에 내가 가볍게 환영 마법을 걸자 그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 보검이 아니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검집에 강철로 만들어진 보통 장검일 뿐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 자물쇠를 자르게 좀 비켜서 봐] 뜨다시 보통 장검처럼 보이는 청명검을 빼어 들고 청명이가 나섰지만 나는 이번에도 비켜주지 않았다. [기다려. 그냥 내가 간단하게 열 테니까] 그리고는 손을 자물쇠 위로 가져간 나는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언록!" 그러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쎠다. [어라? 어라? 이런 주술도 있었어?] [훗훗훗. 내가 있던 곳은 주술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고 했잖아. 별의 별 주술이 다있어.] 청명이의 놀란 모습을 보자 괜히 흐쓱해진 나는 실실 웃으면서 열린 자물쇠를 빼낸 다음 문을 여고 들어갔다. 그곳은 어른 두셋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통로였는데 길이를 보아하니 우리가 드디어 동산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통로는 그렇게 길지 않아 우리는 곧 새로운 문앞에 당도했다. 이번 문은 철로 만들어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맊을 내다볼 수 있는 자그마한 창이 있었다. 그걸 보아하니 아마 철문 바로 뒤에는 누군가가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잠까만...] 나는 그 즉시 마나를 플어 그 뒤에 몇 명이나 있는지. 그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딱 한명의 기운만이 느껴지는 거였다. 하지만 동산 속 시설 전체에 마나를 퍼뜨린 것도 아닌 데다 저 철문 뒤의 형태가 어떻게 돼 있는 건지 몰라 철문을 열지 않고 뒤로 물러나 청명이를 돌아보았다. [에... 단 한 명이 있긴 한데 도대체 구조가 어떤 구조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러자 청명이가 자신있게 나섰다. [잠시만, 내가 한번 알아볼게] 그리고는 철문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가만히 눈을 감는 것이었다. 혹히 투시술이라도 펼치는 줄 알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몸 주위를 약한 바람이 휘감고 있었다. 청명이는 그 상태로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곧 철문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방이 있는데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입구에 문은 없고 뚫려 있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는 것 같아] [그래? 그곳에는 사람이 있어?] [몰라.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거든] [알았어 비켜봐. 이젠 내가 해볼게] 청명이가 비켜준 철문에 다가간 나는 청명이가 했던 그대로 청문에 손을 얹고 마나를 풀었다. 그냉 놀면서 마나를 풀어도 되는데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도 의아해했지만 지금 이 행동을 풀면 그것도 웃글 것 같아서 그냥 그대로 눈을 감고 마나가 보내주는 감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으음... 있네, 꽤 멀리에 하나, 둘... 음... 다섯? 아니, 아니다. 일곱인데?] 더 훑어봐도 그외에는 없는 것 같아 나는 철문에서 손을 떠고 청명이를 돌아보았다. [일곱이나 있느데 어쩌지? 그냥 박차고 들어갈까?] [으음... 그보다도 누나, 제갈 누님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어때? 지금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도 확인 안 했잖아?] [아, 맞다. 잠깐만] 오랜마에 본모습으로-물론 잔짜 모습은 아니지만-돌아와 마법도 마음대로 쓰며 활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해서는 이곳에 온 진성한 목적은 까맣게 잊고 있다 청명이 덕에 이제야 생각났던 것이다. [에혀~ 내 정신하고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손바닥에 마법진을 형성시키자 곧 익숙한 제갈 준희의 위치를 나타내는 및이 깜빡이고 있었다. [음. 역시 준희 언니가 여기 있네. 제대로 왔어] [그럼 조심스럽게 들어가야 하지 않아? 우리가 철문 바로 앞의 사람을 처리하는 동안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쳐들어온 것을 알아채고 제갈 누님을 인질로 삼으면 큰일이잖아] [에, 하지만 지금 우리 모습은 은씨 세가의 은지, 은민이 아니잖아. 그러니 저들이 우리가 준희 언니랑 관련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냥 쳐들어가는 것이..] [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무나 잡고 인질로 세울지 어떻게 알아? 우선 조심스럽게 철문 앞에 있는 사람부터 처리하고 보자] 뭘 그리 걱정하는 모르겠는지만 그래도 청명이의 신중설이 더은 것 같아 나는 그냥 내 의견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하지만 내가 철문을 마법, 아니, 주술로 조용히 연다고 해도 바로 앞의 사람을 처리 못하면 말짱 도루묵 아냐? 그냥 마법으로 잠재울까? 아. 아니다. 방법이 있지, 훗훗] 나는 의미 심장하게 뭇으면서 철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 가운데에 난 자그마한 창문이 열리고 두 눈이 빼꼼 나타났다. "뭐야?" 하지만 그 두 눈은 철문 밖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자 황당함에 물들어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그의 눈앞으로 얼굴을 쓱 들이민 후 아빠에세 배운, 일명 '순간 포착 필살 최면술'을 시행했다. 두 눈에 마나를 듬뿍 담아서 힘을 팍 주며 속으로 '걸려들어라, 걸려들어라'라며 주문을 외우는 사이 잘되었는지 철문 중간에 나타난 두 눈이 흐리멍덩해지기 시작했다. '오케이!!'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나느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너는 이제부터 내 뇨예다. 알겠느냐?" 그러자 남자 목소리가 느린 템포로 흘러나왔다. "예, 주인님,,,," "좋아. 너에게 명령한다. 이 철문을 조용히 열도록 해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예" 그 대답과 함께 두 눈이 사라지며 창이 닫히는가 싶더니 곧 철컥하는 소리가 들리고는 철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마 평소에 관리를 잘해 놓은 듯 그 무거워 보이는 철문이 열리는 데도 불구한고 소음이 거의 나지 않았다. [오, 누나, 대단한데?] [홋홋홋, 울 아버지가 가르쳐 준 거야. 제법 써먹을 데가 많더군]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이제 내 노예가 된 사람이 열어준 문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곳은 과연 청명이의 말대로 작은 공간이 있었고 철문과 90도로 마주 보는 벽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뚫려 있었다. 미록 문은 달려 있지 않았지만 철문과 수평이 아니었고, 그 뒤로 복도가 있어 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들어오는지 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들어온 우리도 그 너머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좋아. 이제 가볼까?] 내가 씨익 웃으면서 청명이를 돌아보자 청명이도 마주 웃어 보였다 [훗, 과연 어떠한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척은 자신이 알아서 감추기!] [알았어!] 예전에는 내가 마법으로 녀석과 내 기척을 함께 감췄는데, 이제는 저렇게 자신있게 대답하는 걸 보니 녀석 스스로 기척을 감출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내가 앞장설까?] 청명이가 무지 그러고 싶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푸핫, 그래그래. 이번에는 네가 앞장서라] 그리고 나는 나의 노예가 된 자에게 한 번 더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올 때까지는 암도 들여보내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아차피 작은 공간에 불을 밝히고 있었고 북도에도 간간이 횃불이 결려 있는 모양이었기에 내가 만들어낸 빛의 구는 필요없었다. 청명이가 자신의 검을 빼어 들고 조심스레 다른 곳으로 통하는 복도로 들어가자 나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 뒤를 따랐다. 몰론 내 조예가 된 자는 그곳에 두고 말이다. 그에게 이 너머에 무엇이 있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청명이와나는 묻질 않았다. 아마 둘 다 자신감에 차서 간뎅이가 부은 탁인 듯했다. 복도에 횃불이 걸려 있는 걸 보니 아마 밖에서 공기가 들어올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복도를 따라 쭈욱 걸어들어가자 다시 직각으로 꺾이면서 복도가 끝나고 대신 복도 양 옆 벽으로 하나씩 문이 나 있었다. 두 문은 둘 다 나무문이었는데 무척 튼튼하고 두꺼워 보였다, 이게 방음 장치도 되는지 우리가 발소리르 죽이고 걸어 왔음엥도 불구하고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이지 않았다. [흐음.. 요즘 시대에도 방음 장치가 있었다니.. 어디로 가지?] 청명이를 돌아보면서 청명이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봤다. [어디긴 어디야, 제갈 누님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아, 맞다. 자꾸 깜빡하네] 나는 또 한번 손바닥 위의 마법진을 지고 있었다는 걸 순순히 시인하면서 마법진을 들여다봤다. 그랬더니 마법진에서 발짝이는 제갈준희의 위치가 아까와는 정반대 쪽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쪽이야] 오른쪽 문을 가리키면서 말하자 청명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안에 몇 명이 있는지 알 수 있겠어?] 청명이의 질문에 그 문 안쪽으로 마나를 흘려 보내며 집중을 하자, 아까 내가 느꼈던 7명의 느낌이 고스람히 느껴졌다. 그리고 뭔가 다른 생명체가 있는 듯 아주 자그마한 마나들도 느껴쪘지만 정확히 몰랐으므로 그냥 무시해 버렸다. [7명, 아까 내가 느낀 사람들이 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이었나 봐] [어쩔까? 몰래 들어가 몰까?] [몰래는 무슨... 쳐들어가자! 문 부수는 것은 너에게 양보할게!] 내가 흥분된 어조로 말하자 청명이도 씨익 웃어 보였다. [좋아 그럼간다!] 청명이도 솔직히 한 번은 날뛰고 싶었던 거다. 그는 빼 들고 왔던 청명검을 치켜들더니 가볍게 검기를 형성하여 문을 향햐 휘둘렀다. 쉬익~ 서걱, 서걱. 그러자 꽤나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보록 나무로 되어 있지만- 문이 마치 가위에 종이 잘려 나가듯 나가떨어졌다. 청명이와 나는 그 네조각난 나무를 박차고 들어갔고, 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어느 여인의 찢어지는 듯 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습격하려고 뛰어들어 간 나와 청명이가 화들짝 놀라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그제야 나는 그 방 안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아마도 고문실이었는지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고, 습한 벽과 바닥에는 곱팡이가 피어있었다. 벽마다 공간을 밝히려는 횃불이 걸려있었지만 그 횃불이 자아내는 진한 그림자들 때문에 방 안이 더욱 음침해 보였다. 그래고 한쪽 탁자에는 고문 기구들로 보이는 도구들이 주르를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청동 화로가 있었다. 그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숯 속에 찔러 넣어진 것들도 아마 고문 도구들이리라. 그리고 그 옆벽에는 고문을 당하고 있던 듯한 사람이 쇠사슬로 벽에 결바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보두난발된 머리카랑이 -비록 피와 먼지로 뒤범벅되어 있었지만-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는 꼼짝 못하도록 결박된 상태에서도 마구 몸부림을 치며 다 쉰목소리로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그 널찍한 방 안의 중앙이었는데 그곳에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구덩이가 파여 있어쏙, 그 안에는 한 여자가 꼼짝 못하도록 묶인 채 떨어져 있었다. 한데 그 여자를 향해 한 떼의 징그러운 뱀을 달려들고 있었다. 비명은 그 여자가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다급한 상황에 나는 나도 모르게 용언으로 외쳤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죽을 줄 알아!!] 그런데 다급한 마음은 청명이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나와 동시에 용언으로 외쳤다. [멈춰라!] 그러자 거의 여자의 몸에 다달았던 뱀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딱 멈추더니 문가에 서 있던 청명이와 나에게 보일 정도로 부르르 떠는 거였다. 그 모습에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안 청명이는 다시 한 번 용언으로 소리쳤다. [그 여자에게서 떨어져라!] 그의 명에 따라 뱀들이 마치 파도가 밀려 나가듯 주르르 밀려나 여자가 있는 곳 반대 편에 벽에 가서 뭉치더니만 서로 여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지려고 뒤엉킨는 것이었다. [헤에~ 네 동족이라서 그런지 네 말 되게 잘 듣는다?] 일단 발등의 불을 꺼드려서 그런지 나는 청명이에게 농담을 던졌는데 이 녀석이 날 보지도 않은 채 달려가면서 말했다. [지금 농담할 때라고 생각해?] 방 안에 있던 피해자를 제외한 가해자 다섯 명이 우리르 향해 누구냐고 소리쳤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전히 무시하고 있자 화가 나서 검을 빼어 들고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니란 거 알아/. 야, 공중으로 날아올라!] 청명이는 갑작스러운 내요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그들에게 달려가던 그대로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나는 청명이가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타임을 맞춰 외쳤다. "스네어!" 그러자 우리에게 달려오던 다섯 남자 모두 주르르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잃고 허둥댔다. 하지만 그들은 유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좀 낮거난 높은 내력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미끄러진 것에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몸을 다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가엽게도 그들은 내 마법에 걸린 상황이었기에 발을 땅에 딛고 서려고 하는 족족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이 색목인 계집애갸, 도대체 무슨 사술을 쓴 거냐?" 자꾸만 미끄러지자 이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한 남자가 외쳤지만 내가 친절하게 '스네어라는 미끄러지게 하는 마법을 썼답니다'라고 이야기해 줄 리 만무했다. 단지 비웃음을 날리며 녀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가운데 구덩이에 뻐져 있는 여인에게 달려갔다. 비록 머리가 뒤엉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녀의 마나 기운이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재가 건 마법의 기운이 풍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준희언니!!' 라고 외치며 달려가 그녀의 감격과 고마움에 뒤엉킨 표정을 모고 싶었지만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단지 달려가서 그녀를 묶고있던 포박을 풀어주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달려들다가 내 마법에 걸려 제대로 서서 걷지도 못하는 남자들은 내가 또 나서지 않아도 청명이 혼자 잘 해결하고 있었다. "풍!" '기특한 것, 많이 컸다니까.' 속으로는 흐뭇함을 느끼며 제갈 준희를 부축하여 그 뱀으로 가득찬 구덩이를 빠져나오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상처는 없는 것 같았지만 뱀 떼가 달려들던 것 때문에 너무 놀라서 그런지 제대로 걷지도 못해 나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 걸음을 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말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도 얼결에 대답했다. "예,예......" 구덩이를 다 빠져 나오자 그녀는 곧바로 벽에 쇠사슬로 결박되어 있는 그 노인에게 향하려고 하면서 중얼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역시 저 사람이 제갈 전 가주였군' 비록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 상황에서 척 하면 착이었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가만히 있어요, 제가 가서 풀어들리게요." 제갈준희의 목소리는 무지 안타까웠지만 그녀 자신도 제몸 하나 가누기 힘든데 할아버지에게 데리고 가려면 내가 귀찮았기에 나는 그녀를 구덩이 곁에 두고 처참한 모습으로 벽에 결박당한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제갈 전 가주는 처참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경계 어린 눈빛으로 날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거였다. "소저는 누구니? 누구길래우리를 도와주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날 경계하는 그가 우습기도 하고 또 축은하기도 해서 그냥 싱긋 웃어 보였다. "훗, 그냥 지나가는 과객... 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음... 정의의 사도라고나 할까요?" 그러자 저쪽 구석에서 그 다섯 남자를 다 처리하고 이쪽으로 오던 청명이가 비웃음을 날렸다. "누나 정의의 사도는 저번에도 써먹은 거 아냐?" "시꺼! 몇 년 전에 한 번 써먹은 거 가지고." 제갈 전 가주의 모습은 처참했다. 우선 무공을 못 쓰게 제압하려고 양 어깨의 소골을 쇠꼬챙이로 뚫어놓은 데다 피투성이가 도니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서 드러난 피부는 찢겨지고, 소금 뿌려지고, 지져진 몰골이 그대로 나타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무공을 가진 사람은 단전만 파괴당하지 않은면 내력이 스스로 몸을 보호하기 때문에 웬만한 고문에는 목숨을 일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금방 죽지 않고 오랜 시간 그러고 있는게 잔인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무공을 가진 사람을 고문할 때는 무공을 쓰지 못하도록 쇄골만 제압할 뿐 내력이 담긴 다전은 그대로 놔둔다고 한다. 오래 살려두기 위해(단전을 파괴당한 무인은 내력으로 힘을 내던 것이 내력을 다 잃게 도기 때문에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어 약해진다고 한다,). "으음.. 보기 안 좋네, 우선 결박을 풀어드린 뒤에 치료해 드릴게요, 청명아~" 결박 풀어준다고 해놓고선 손도 안 대고 뒤의 동생을 부르자 제갈 전 가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나늘 경계하는 것 같았다. 청명이도 의아한지 나에게 다가서며 물어왔다 "왜? 안 풀어드리고 뭐 해?" "그게, 이분이 쇠사슬에 묶여 계시잖니, 쇠사슬 좀 끊으라고," "쳇, 누나도 할 수 있으면서 뭐 하러 날 불러?" 청명이는 그렇게 궁시렁궁시렁대면서도 청명검을 사용할 수 있어서 기분 좋으지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검을 들어 제갈 전 가주를 벽에 붙게 하고 있는 쇠사르을 아치 식칼로 무 자르듯 싹둑 싹둑 잘랐다. "훗훗, 역시 잘한다니까." 쇠삿ㄹ이 다 잘려져 앞으로 고꾸라지는 제갈 전 가주를 받아 안으면서 은근히 청명이를 띄어주자 청명이는 그다지 삻지는 않은지 피식웃으면서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동안 나는 제갈 전 가주를 바닥에 반듯이 눕히고는 우선은 쇄골을 꿰뚫고 있는 두 쐬꼬챙이를 뽑아낸 다음 몸을 감고 있는 쇠사슬을 풀러낸 뒤 마법을 시전했다. "우선 회복 마법부터... 리커버리!" 제갈 전 가주의 감슴에 손바닥을 올려놓자 그가 놀라 움찍거렸지만 그에 상관하지 않고 시동어를 중얼거리자 내 손바닥으로부터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그의 몸을 감싸다가 서서히 스며들어 갔다, 제갈 전 가주는 계속해서 긴장하고 있었지만 빛이 자신의 몸으로 스며든 후 몸에 기운이 돌자 의아한 모양이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도와줬는데 '짓'이라니....' 기분이 별로 였지만 돕던 걸 그만둘 수 없었기에 나는 다음 주문을 외웠다. "워터!" 치유 주문을 외워야 했지만 그의 몸에 소금이 뿌려져 있는데다 혜전에 흘러나온 피들이 곧어져 달라붙어 있었고, 간간히 고름이 나오는 데도 있었기에 먼저 씻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갈 전 가주가 호희를 베푸는데도 자꾸 경계를 하고 잇어서 기분이 안 좋아져 있었는데 그게 마법의 효력에 반영되었는지 욕조에 가득 담긴 물의 양 정도 되는 것이 그의 몸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버렷다. "어푸푸~! 어푸푸~!" 제갈 전 가주는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물벼락을 고스란히 받고는 허둥대며 몸을 일으켰고, 그 모습에 청명이와 저쪽에 주저앉아 있던 제갈 준희이 눈이 뚱구레 졌다. "누나.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은. 치료해 드리기 전에 씻겨 드린 것뿐이야." 솔직히 씻는 것만 한다면 그냥 깨끗하게 하는 '클리어' 주문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 깨끗해지고 소금기도 지워진 그를 바라보며 나는 이번에야말로 치유 주문을 외웠다. "힐링!" 그러자 그의 몸에 나 있는 보기 안 좋은 흉터들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빠르게 아물어갔다. 덕분에 앉은 상태에서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이 아무는 장면을 목격한 제갈 전 가주는 입이 떠억 벌어져서는 나를 보라보았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게요?" 너무 놀라서 경계하는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단지 씨익 웃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다른데 가 볼까냐?" 그러자 청명이가 다시 어벙벙하게 물어왔다. "어딜?" "어디긴 어디야. 다른 방이지.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었어? 여기에 잘 감춰놓은 보물들을 찾으러 온 거잖아. 청.명아." 그렇게 엉뚱한 말을 하며 나는 청명이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우난히 그의 이름을 강조해서 무른 탓인지 청명이는 내가 한 말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우린 지금, 진이, 민이 모습이 아니었기에 딴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온 척했던 것이다. "아, 그렇군. 거기 두 분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목적을 달성한 뒤 이곳에서 날 때 같이 나가도록 하죠." 그러자 제갈 전 가주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급하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우리도 같이 갑시다." 하지만 그렇게 습하게 일어난 그는 곧 얼굴이 붉어져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거의 걸레 조각이나 다름없이 찢겨진 것을 걸친 채였는데 그게 아까 내가 주르르 흘러내린 거였다. "옷부터 입으셔야겠네요." 청명이가 그렇게 친절하게 말하며 그가 제압한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잡아 그가 입은 장포를 벅겨 건네주자 제갈 전 가주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감사를 표했다 "아, 아... 고, 고맙소." 그리고는 후닥닥 그 장포를 걸쳐 몸을 가렸다. 그모습을 피식피식 바라보던 나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자, 이제 가볼까요?" 아직 다리가 풀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제갈준희는 제갈 전 가주가 부척을 하고 나와 청명이는 그들을 보호하는 형식으로 그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안에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청명이나 나나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생각했기에 거리낌은 없었다, 어차피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이지만. 하지만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마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인지 2인용으로 보이는 침대 두 개가 양벽에 붙어 있었으며 벽에는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고 침대위에는 이불들이 뫃여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온 문 맞은편에는 또 다른 문이 있는 거였다. "어? 문이 또 있네? 저건 어디로 통하는 거지?" 그러자 우리 뒤를 따라왔던 제갈 전 가주가 대답했다. "저긴 우리가 같혀 있던 지하감옥으로 통하는 길이오." 아마도 감옥에서 죄수들이 탈출할 경우 금방 알아차리고 대응하기 위해 간수(?)들이 머무는 곳이 그 입구에 잇는 듯 했다. 이게 효과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 그럼 이곳에는 보믈창고가 없다는 말인가요?" 나는 일부러 약간 과장되게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그러자 제갈 전 가주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이곳은 보물을 숨겨두는 비밀 장소가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을 무림맹 몰래 가둬두는 비밀 감옥이라오. 하나 당신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오. 이곳을 나가는 즉시 우리 세가에서 당신들에게 충분한 포상을 해줄 것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그레서 부탁이 있는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우리를 바라보자 청명이가 나섰다. "뭔데 그러세요? 포상까지 해주신다는데 쉬운 부탁 한두 개쯤은 들어드리죠." "고맙소, 사실은 우리처럼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이 또 있다오. 몇 명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도 구해주지 않겠소?" "어려운 것도 아니니 그렇게 하도록 하죠." 청명이는 쉽세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지하 감옥으로 가는 문으로 향했다. 그 문도 자물쇠로 잠겨 있었기에 내가 나서서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보다도 먼저 청명이가 검을 들어 자물쇠를 싹둑 잘라버렸다. "에? 워야,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러자 청명이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검을 들어 보였다. "뭐, 누나까지 나설 필요 있어? 그냥 내가 한 번만 쓰윽 하면 되는데." "쳇" 하지만 문을 열고 밑으로 내려가려니 내가 다시 한 번 나서야 했다, 그곳은 죄수-비록 스들이 정말 죄를 짓고 갇힌 건 아니지만-를 위한 배려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 감옥 안을 밝히는 불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라이트!" 물론 맨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고, 내가 만들어낸 빛의 구를 청명이의 머리 위로 보내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제갈 전 가주와 제갈준희를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놀란 표정으로 나와 빛의 구를 번갈아 바라보던 제갈 전 가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정말 몇번이나 놀라게 되는군." 밑으로 내려가니 기다란 복도가 있었고 복도의 한쪽으로는 감옥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문이 달려 있었는데 간격이 그다지 넓지 않을 걸 보아 감옥 안은 독방으로 사용될 정도로 작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작은 감옥도 10개 남짓 밖에 없었다. 하기사 동산 안에 있는 시설로 동산을 내리누르는 무게를 버티게 하기 위해 벽과 천장을 튼튼히 지어야 했을 테니 안의 시설이 그렇게 넓을 수는 없을 터였다. 청명이는 내가 만들어준 빛의 구를 머리 위에 올려놓은 채 각 감옥의 문을 모조리 잘라서 열어젖혔다. 의아하게도 감옥은 안아에 아무도 가두어놓지 않았어도 모두 자물쇠로 문을 잠가 놓고 있었기에 일일이 자물쇠를 잘라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문을 열어본 결과 복도 맨 끝의 감옥과 그 다음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래 같혀 있었는지 엄청 꼬질꼬질하고 머리는 뒤엉키고 떡이 져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따. 게다가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는지 두 사람 다 뼈 위에 가죽 한 꺼풀만 덮어씌운 것 처럼 빼빼 말라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냄새도 엄청 고양했지만 그들 앞에서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들에게도 물벼락을 한번 내리면 어떨까 싶었지만 그들이 너무 빼빼 말라서 톡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았기에 그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클리어'를 사용하자니 아까 제갈 전 가주에게는 그마법을 안 써주고 그냥 물벼락을 내린 것이 걸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클리어'를 써주는 건데...' 다행인 것은 그들을 직접 부축하지는 않아보 된다는 거였따. 이곳을 나갈 때를 대비하여 청명이와 내가 자유로워야 했기에 그둘은 청명이가 자신이 부리는 대기를 이용하여 허공에 둥둥 띄운 뒤 날았(?)다. 다시 위층으로 올라와 간수(?)들이 머무는 방을 지나 복도로 나가자 그 맞은 편 방 안에 제압해 둔 다섯 명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음... 저 사람들은 어쩌지?" 그러자 청명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냅둬. 혈도를 짚어서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나중에 자기 동료들이 와서 구해주겠지 뭐." 제갈 전 가주와 제갈준희가 황당해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그들은 우리의 의견에 아무런 이의도제기하지 못하고 가만있었다. 복도를 지나 이곳으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왔었던 철문 바로 다음 방에서는 나의 노예가 된 자가 충성스럽게도 누군가가 철문을 쿵쿵 두드리고 발로 차고 있는데도 굳게 잠근 채 열어주지 않고 있었다 "훗, 청명아, 벌써 우리가 온 게 들킨 모양이다?" "하기야, 안 들키면 그게 이상한 거지. 밖에서 지키고 있던 자들을 혈도만 짚고 내버려 뒀으니까. 내가 나설까, 아니면 누나가 나설래?" 청명이가 나에게 그렇게 묻기 는했지만 자기가 나서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나서고 싶었기에 나는 이렇게 제안했다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좋아, 그럼 진 사람이 문 열어주고 이긴 사람이 밖에 있는 사라들 처리 하는거다." "당근이지. 자, 감, 만, 보!" 내바 보, 청명이가 주먹을 냈다 "앗싸~ 그럼 내가 처리한다. 청명이 네가 문 열어." 문은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으므로 청명이로서는 문을 당겨서 열어야 했다. 절목 열다가는 벽과 문 사이에 낄 위험이 큰 작업이었다 "첼, 이럴 줄 알았으면 가위를 낼걸." 청명이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문을 굳게 잠그고 있던 잠금쇠를 풀고 나를 바라봤다. "셋에 문 연다. 하나, 둘, 세엣!" 청명이의 숫자가 끝나고 문을 여는 동시에 나는 밖에 있는 자들을 한꺼번에 날려 버리기 위하여 바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주먹을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급히 마법을 멈추기 위하여 입을 다물다 혀를 깨물고 말았다. "윈디 위더 피...으갸갸갸..." 어쩐지 전에도 한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밖에는 다급한 표정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유와 덕이가 떡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공격을 하겠는가. 밖에 있던 사람들도 문이 열리자마자 급하게 뛰어들어 왔지만 우리가 떡 버티고 서 있는 걸 보고 어리둥절하여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런 대치 상태에서 청명이는 문 뒤에 있다가 내가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자어리둥절 했는지 슬그머니 나오다가 자신으 바로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놀라서 녀석답지 않은 실수를 해 버렸다. "힉? 어, 어머... 합!"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미처 '어머니'란 소시를 다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엄마의 고개가 청명이에게 휙 돌아가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청명이의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민이니?" 어머니는 우대하다라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그 한마디에 기겁을 한 나는 청명이게게 한마디 던지고 그대로 뒤돌아서 달렸다 "야, 튀어!" 청명이가 뒤따라서 같이 달렸지만 곧바로 엄마의 매서운 음성이 날아왔기에 우리는 복도도 채 다 달리지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지금 안 돌아오면 너희들 집에 가서근신할 줄 알아!" "젠장, 이렇게 빨리 들키다니...." 나는 투덜투덜대면 돌아서서 다시 진이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고 청명이도 민이의 모습으로 변하게 해 준 뒤 터덜터덜 그 방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엄마가 눈이 매섭게 치켜 올라간 채로 광선이라도 내뿜을 것 처럼 노려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있어서 그런지 이 한마디만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너희들, 돌아가서 보자." "에게~ 죽었네..." "그러게" "근데... 이번에는 좀 재밌지 않았냐?" "쿡쿡쿡... 맞아. 동감이야." 다시 민이와 진이가 된 우리는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크게 혼나지는 않을 거라 여기곤 농담을 주고받으며 부모님의 뒤를 따라 그곳을 나왔다. 그렇데 밖의 상황은 민이와 나의 농담이 쏘옥 들어가게 할 정도로 살벌하고 급박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우리를 찾으려고 상단을 습격했음인지 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허름한 건물 앞에는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무림맹에 왔던 은씨 세가 무사들과 청룡한, 주작단 전체가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상단의 무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우리 팀은 건물을 사수하기 위하여, 그리고 상단의 무사들은 이 건물을 탈취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에고.. 이건 좀 심각한데?"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새악ㄱ보다 일이 커졌다는 생각에 민이와 찔끔해져서는 말을 주고받으며 뒤에 가만히 서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와 같이 있던 제갈 전 가주와 제갈준희를 봤는지 크게 소리쳤다 "봐라, 하남상단 사람들이여! 이곳에 제갈 전 가주가 갇혀 있지 않았느냐! 너희는 밖에서 무림맹의 무사들이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음.., 주작단장의 목소리군.'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 편 사람들 사이에서 밤하늘 높이 신호탄이 쏘아져 올라갔다.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다!" 다시 한 번 주작단장의 말이 울려 퍼지고, 그 말을 상단 무사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는지 그들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윗사람은 그렇지 못했는지 그들 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자들의 말을 믿지 마라! 밖에는 아무도 없다! 저들은 지금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망설이지 말고 쳐라!!" 그 목소리에 힘입어 상단 사람들이 다시 공격을 히생하려 할 때 내 옆에서 다 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비록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막 공격이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려는, 그러니까 사방이 시끄럽지 않은 차였기에 그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 덕분에 양 방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멈칫거리자 쉰 목소리로 외쳤던, 그러니까 우리가 지하 감옥에서 구해냈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ㅇ 중 한 사람이 민이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좀..... 나좀 앞으로 나가게 해주시오." 지금 그는 민이가 허공에 둥둥 띄우고 있는 상태였기에 자신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민이가 그를 앞으로 밀어주자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눈이 뚱그레져 민이와 그를 바라보았다. "서, 설마... 허공섭물(내공을 이용하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물건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수법, 내공이 믾은 고수들이나 할 수 있다)?" 그렇게 공중에 떠서 앞으로 나간 그는 상단 사람들을 향하더니 다시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아, 진아... 여기 있느냐?" 그러자 상단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놀란 기색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약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로 보는 남자였는데 비단 옷을 입고 고급스럽게 장식된 검을 가진 걸 보니 지위가 높은 사람인 듯했다. "누, 누구십니까? 어떻게 제 아명(어릴 때 부르는 이름)을 아시는 겁니까?" 앞으로 나선 그는 허공에 둥둥 뜬 상태에세도 어떻게든 그 남자에게 다가가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안타깝게 입을 열었다. "나를 모르겠느냐? 날 못 알아보겠느냐? 진아. 네 아버지도 못 알아보겠느냐?" 그 사람의 말에 상단 사람들은 크게 동요했다. 진아라고 불린 그 젊은 남자도 크게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내 아버지라니? 내 아버지는 뒤쪽에 계시오!" "그는 가짜다. 그는 가짜야. 나를 저기에 가둬둔 놈이란 말이다. 진아, 날 모르겠느냐?" 앞으로 나선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절실하게 말했지만 젊은 남자각 믿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자 남자는 다시 고개를 휘휘 돌리더니 원하는 사람을 찾았는지 그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 대협, 사대협, 당신은 나를 알아볼 수 있겠지요? 내가 누구인지 말 좀 해주시구려." 상산 사람들 사이로 또 다른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40대 중반에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인데 균형 잡힌몸에 절도 있는 걸음걸이,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걸로 보아 제법 실력있는 무사인 모양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는 걸음걸이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가오더니 침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주... 이시오?" 그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웠는지 허공에 둥둥 뜬 남자는 다짜고짜로 사 대협이라는 사람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역시, 역시 사 대협은 나를 알아보시는구려, 나를 알아봐..." 그러자 옆에 놀란 얼굴로 서 있던 젊은 남자가 사 대협이라는 사람을 보고 물었다. "스승님,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이 시람, 아니, 이분이 제 아버지란 말씀이십니까?" 그 질문에는 상주라는 사람과 함께 구출되었던 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그분은 주인님이 맞으십니다, 도련님. 주인님께선 저곳에 오랜 시간에 갇혀 고초를 당해서 그렇게 변하신 겁니다. 이늙이도 그렇구요." 그자를 본 사 대협이라는 남자는 그가 누구인지도 알아맞혔다 "총관이셨군." 젊은 남자의 커다래진 눈이 한번 더 커다래졌다 "총관이라고? 그. 그럼 저쪽에 있는... 서, 설마...." 젊은 남자는 상단 쪽 사람들을 헤치고 뒤쪽으로 달려갔고, 그 뒤를 몇몇 남자들이 따라 달려갔다. 덕분에 싸움은 완전히 중지되었고, 양쪽 진영의 사람들은 그 틈을 타서 부상자를 치유하고 시체를 수습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며 다음 싸움에 대한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참 뒤에 그 젊은 남자가 얼빠진 표정으로 달려옴으로 인하여 사태는 종결될 수 있었다. 민이와 나는 사건이 종결되는 기미가 보이자마자 그대로 끌려갔기에 뒤처리 과정은 그 자리에서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어찌 된 연유인지는 들을 수 있었다. 민이와 내가 지하 감옥에서 구출했던 자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진짜 하남상단의 상주와 총관임이 밝혀졌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 그 동산 밑에 있는 시설은 상주가 비밀 금고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7년전 상주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하고 가짜 상주가 대신 상주 노릇을 할 때 비밀 감옥으로 개조된 것이고, 감옥으로 개조되자 제일 먼저 그곳에 갇힌 것이 진짜 상주였다고 한다. 총관은 갑자기 상주가 자신과 의논도 안 하고 신분도 불분명한 사람들을 대량으로 고용하는 한편, 자신과 함께해 오던 금전 관리의 절반 이상이나 되는 분량을 자신을 제외한 새로 고용한 사람들과 처리하게에 수상쩍게 여기고 몰래 상주를 감시하고 있던 와중 상단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중 엄청난 양을 이상한 곳으로 빼돌리는 증거를 확보하여 상주의 아들과(그 진아라고 불리던 젊은 청년, 원래 이름은 포혁진이다) 사대협(이름은 사문소로 하남상단 무사들의 대장인데다 포혁진의 무공 스승이다)에게 알리려다가 드들에게 들켜서 잡히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총관도 가짜가 활동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총관만이 상주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사문소라는 사람도 상주와 총관을 미심쩍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단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들이 가짜라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뭐, 그덕분에 진짜 상주가 나타났을 때 아들은 못 알아봐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던 거겠지만. 게다가 고수들은 얼굴을 때가 두텁케 깔려 있어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뭐, 민이는 원래 상주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나는 가짜 상주 얼굴을 보기야 했지만 관심도 없었으니 몰랐던 거지만. 돌아온 상주는 그동안 자심이 비밀금고에 모아두었던 비싼 보물들과 7여 년 동안 상단의 엄청난 돈들이 싸그리 그들 손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거품을 물고 기절한 뒤로 한 달 내내 끙끙 앓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가 변한 것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지하 감옥에 갇힌 뒤로 식사를 하루에 한 끼, 그것도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줬기에-물론 그가 삐쩍마른 걸 보고 짐작은 했지만- 난생처음 심한 굶주림에 시달려 본 그가 배고픔의 처절함을 알아씨 때문인지 그 뒤로 가뭄이나 홍수로 인하여 굶주리는 난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서서 돕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재미있는건 거지는 절대로 안 도왔다고 한다. 뭐, 전에도 안돕기는 했지만. 그래서 아들이 왜 난민은 도우면서 거지는 안 돕느냐고 묻자 상주가 하는 말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였다고 한다. 뭐, 이건 훗날의 여담이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내가 말한, 제갈준희가 하남상단 안에 있다는 것을 잘못 안 것이라는 둥, 어린 계집아이의 말을 왜 듣느냐는 둥 믿지도 않고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 그걸 꼬투리 잡아 8대 세가를 까아뭉개려고 했던 9대 문파의 장로들은 입이 쏘옥 들어갔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내기라도 해서 제갈 준희가 그곳에 있을 경우 그들 전체가 열 손가락에 장이라도 지지겠다는 선언을 받아둘 걸 그랬다. 그리고 내 덕분에 8대 세가의, 특히 울 할아버지의 어깨에 힘이 쫘악 들어갔다는 사실! 게다가 이번 일 덕분에 하남상단과 우리 은씨 세가 사이가 전보다 더욱더 돈독해졌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그 일이 있던 밤이 밝자마자 끌려오다시피 은씨 세가로 와서 근신이라는 벌을 받고 있던 중에 들은 거였다 [엄마도 참 냉정하시지...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공을 세운 거 아니냐? 근데 왜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 이걸 근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이와 나는 내 방에 갇혀서 단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2주일 내내. 특히나 나는 요상한 주술을 사용해서 몰래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들키는 날에는 기간이 한 달로 늘어날 것이라는 협박을 받은 뒤였기에 얌전히 내 방에 콕 처박혀 있었다. 하지만 민이와 만나지는 못해도 대화는 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동감이야, 다도 솔직히 우리가 없어졌다고 부모님이랑 할아버지께서 세가의 무사들을 모땅 이끌고 상단으로 쳐들어올 줄은 몰랐어. 그거 보고 무척 놀랐다니까?] [체엣, 이렇게 벌받는 중에도 왜 수련은 중단하지 않는 건데? 수련까지 중단한다면 2주간 잠이나 잘 텐데.] [수련뿐이야? 나는 근신 중이라 또 소가주로 발표되는 것이 미루어 졌지만 일은 지금부터 배워야 한다고 해서 그것까지 하고 있단 말야] [너만 하냐? 나도 하고 있다. 윽! 또온다. 이번에는 아마 세가의 일거리일 거야] [행운을 빌어, 누나.] [너도] =================================================================== 하지만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민이와 나는 일주일 하고 하루가 지나자 근신령이 풀렸다. 이유인즉슨 다시 짐을 싸서 무림맹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거였다. 뭐, 이유야 어찌 됐든 벌을 다 받기도 전에중도에서 멈췄다는 사실에 민이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근신을 중단하고 무림맹으로 갈 채비를 하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옆에 서 있던 엄마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놓고 기뻐하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면서 슬금슬금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에...엄마가 왜 저렇게 기분이 안 좋으신 거지?" 그 방을 나와 멀리까지 걸어오자 그제야 나는 민이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라도 그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했다간 할아버지나 부모님 귀에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표정 때문에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내도 된다는 걸 깜빡하고 있을 정도였다. "글쎄, 혹시 우리가 2주일을 다 채우지도 않고 근신을 그만둬서 그런 걸까?" "설마..그거 가지고 쩨쩨하게 그럴까?" "걱정되어서 그러시는 걸 겁니다." 민이와 나의 대화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인물은 예성구였다. 아까 우리가 근신 중단을 선언받은 곳에 총관이랑 같이 있더니만 우리가 나올 때 같이 따라온 모양이었다. "걱정? 아, 또 일 저지를까 봐 그러시는 건가?" 내 말에 예성구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아직 소식을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이번에 무림맹에 가는 것은 비단 저희 세가뿐만이 아니라 9대 문파와 8대 세가를 비롯하여 웬만한 중소 문파가 모두 갈 겁니다. 무림맹첩이 돌았거든요." "무림맹첩?"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민이와 내가 예성구를 쳐다보자 예성구가 알아서 처음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림맹첩이라는 것은 맹주의 직인이 찍힌 공문으로 아주 중요하고 급할 때만 정파에 소속된 문파와 세가에 전달되지요. 협조를 구하는 차원이긴 하지만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나 세가에서는 무시하지 못한답니다." "흐음..그럼 그 무림맹첩이 왜 왔는데?" 내 질문에 예성구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심각하고 잔뜩 낮춘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곳에 적혀 있그를, 그동안 숨죽이며 지내왔던 사파들이 우리처럼 연합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 요즘 정파 중에서도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9대 문파와 8대 세가에서 안좋은 일들을 겪자 우리들의 힘이 약해진 것이라 생각한 거겠지요." "뭐야, 그럼 이 시점에서 무림맹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는 건 사파가 일어나는 것을 대비해 정파 쪽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거야?" 민이의 말을 뒤이어 나도 덧붙였다. "뻔하지 뭐. 하여간 어떻게 보면 어른들도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니까, 그렇게 얕보이기 싫어하는 걸 보면. 게다가 이 기회를 통해서 모여든 정파들도 자신의 문파가 다른 문파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보이기 위해 애를 쓸걸? 어차피 진정한 힘은 그렇게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법인데." 그러자 예성구가 난처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하.하.하..그거야 이 세계를 움직이는 기준이 아무래도 힘이다 보니..." "그래그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너무 힘을 나타내 보이는 데 집착하는 게 웃긴다는 거지." "그럼...이번 무림맹에 안 가실 겁니까?" 내 말이 너무 힐난조였는지 예성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 줬다. "무슨 소리! 내가 그런 재미있는 구경을 놓칠 것 같아? 당연히 가서 구경해야지." 무림맹첩에 되도록 빨리 와달라고 적혀 있기라도 했는지 무림맹에 갈 채비는 빠르게 착착 진행되어 우리의 근신이 풀린 바로 다음날 출발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어찌 된 것이 전에 민이와 제갈준희를 교환하러 갈 때보다 좀 더 적은 인원이 무림맹을 향했다. 민이를 구하러 갈 때 동참했었던 배 숙부는 이번에 세가 내에 남게 되었고 대신 예철이 같이 가게 되었다. 그렇게 그때보다는 같이 가는 세가의 무사 수도 10여 명이나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항상 같이 갔던 희여송은 이번에도 같이 갔고, 그의 사제인 지원과 포능곽, 그리고 예썽구도 합세했다. 하지만 무림대회에 같이 갔었던 예은과 예필은 이번 무림행에서 빠졌다. 이번 무림맹첩이 사파 연합이 생기는 것을 대비하여 '무림맹의 결속을 좀 더 단단히 다지고 힘을 기르자.' 뭐, 이런 취지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그냥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너무 많은 인원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세가를 나섰는데 웬걸, 무림맹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 세가에서 온 사람들은 다른 9대 문파와 8대 세가에서 온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은 숫자인 것이다. 게다가 그곳은 각지에서 몰려온 중소 문파를 다 수용하지 못해 곳곳의 빈터에다 천막을 치고 그들을 머물게 하고 있었는데 무슨 전쟁이라도 할 생각인지 분위기가 살벌한 데다 여기저기에서는 가볍게 몸 풀기 태련을 하거나 무기를 손질하는 모습을 흔히 볼수가 있었다. "허참, 이거 도대체 무슨 일이애? 설마 사파가 연합한다니까 그들 연합하고 한판 붙으려는 건 아니겠찌?" 그 모습을 둘러보며 내가 질린 듯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민이가 대답했다. "누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에휴...너무 성급한 거 아냐?" 내 말에 같이 있던 예성구가 대답했다. "물론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래도 이번에 사파들에게 본때를 보여준다면 그들이 다시 연합할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잡초는 싹이 날 때 뿌리째 뽑아버려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우리 정파들의 사이도 새로 다질 수 있겠지요." "그래, 뭐...물론 그 말도 옳긴 하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솔직히 우리가 전에 준희 언니 일 때문에 이곳에 왔을 때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걸로 봐서 아무래도 사파 연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건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직 그들이 정말로 연합한다는 증거는 물론 그들의 전력이 얼마인지, 누가 주동인지 하는건 전혀 모르는 상태 아니야? 그런데도 연합한다는 소식이 있자 다짜고짜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한바탕하려고 하다니.." "에이, 누나도 다 생각하는 걸 무림맹의 어른들이 생각 못할까? 아마 그런 정보들은 극비이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겠지. 적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칠 생각부터 하겠어?" 민이의 말에 나를 제외한 우리와 같이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는 민이의 말에 동의 여부를 떠나 그의 말에 들어간 한 단어가 맘에 안 들었다. "민아, 다 좋은데..왜 거기서 '누나도'란 말이 나오냐? 앙?! 너, 그거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내 눈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자 민이가 얼른 발뺌을 했다. "아니, 그게..그러니까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라는 거지." "근데 그 상식적인 말을 하는데 왜 내가 비유로 들어가느냔 말이지. 꼭 내가 그 늙은이들보다 못하다는 것처럼 들리잖아?!" "아니지, 왜 누나가 그들보다 못하겠어? 더 잘났으면 잘났지. 나는 그냥 그전에 그 말을 한 게 누나다 보니 그냥 나온 것뿐이야."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혹시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거 아냐?" "아니라니까." "진짜야?" "그러엄~!!" 그렇게 나와 민이가 투닥이면서 길을 가느데 우리는 마주 오던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우리를 먼저 봤는지 아는 체를 해왔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은씨 세가 분들이 아니십니까?" 아린이야기 40화 사파연합 (1) 나머지 부분 번호:340 글쓴이: 『∑。발랄꼬마소녀♀。』 조회:56 날짜:2002/09/06 14:51 .. 누구길래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들 일행을훑어보는 도중, 나는 그들 중에 아주 아아아아~주우우우~ 잘 아는인물을 한 명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라? 저 지지배가 여기는 왜 있는 거야?' 누구인고 하니, 내 옆구리에 칼침 놓은 지지배로 모용세가의 딸 내미이자 나와 같은 무림화 중의 한 명인 모용소소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모용세가의 봉문으로 인해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사형 모용소취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눈인사를 해왔다. "이거 모용세가의 분들이 아니십니까? 역시 모용세가에서도 오셨군요." 우리를 이끌고 있던 예철이 앞으로 나서서 답했다. 아마 맨 먼저 나선이가 현 모용세가의 가주 바로 밑의 동생인가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저번 결혼식 날에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했던 그 신랑은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예. 무림맹첩이 왔는데 근신 중이라고는 하나 가만히 있을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모용세가가 정파에서 얼마나 든든한 기둥인데 이런 시기에 빠지신단 말입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하하하, 과찬의 말씀을. 은씨 세가야말로 정파의 든든한 기둥이 아닙니까? 가주님을 비롯하여 이번에 제갈 전 가주님과 제갈소저를 구출하난 데 크나큰 공헌을 한 두 남매가 있으니 말입니다. 가주님께서 정말 든든해하시겠습니다." "하하하, 그 이야기를 벌써 들으셨습니까?" <어이구~ 서로의 얼굴에 금칠해 주는군. 이럴 거면 어디 들어가서나할 것이지, 뭐 하러 이렇게 길거리에 서서 저런담?> 예철과 모용세가의 아들내미와의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는 듯하자 뒤에 가만히 서 있는 나는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해서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동감이야. 아무래도 이번에 9대 문파와 8대 세가의 패싸움이 있을 것 같으니 8대 세가끼리는 친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이해하겠는데 좀 심한 것 같군.> <좀이 아니야, 좀이. 너무한 거라고.> 아까 민이와 투닥거렸던 것은 벌써 다 잊고 둘이서 호박씨를 까고 있는데 아까부터 조금씩 따끔따끔거리는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점점 더 따끔따끔거리는 거였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있었는데 자꾸신경이 쓰여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모용소소가 눈에 불을 켜고 날노려부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노골적인 비웃음을 싸악 지어 보이더니 전음을 날려왔다. [훗, 나에게 찔린 옆구리는 이제 괜찮으신지? 다음부터는 찔리지 않게 조심하길 바래.] '저게 언제 나랑 친했다고 반말이야?' 이대로 당할 수 없던 나는 곧장 맞받아쳐 줬다. [뭐야, 내가 뒤돌아설 때까지 검도 뽑지 못했던 주제에 잘난 척은. 이번에는 비겁하게 등 뒤에서 난리 치지 말고 내 앞에서 검이라도 뽑아 무라도 썰어보길 바래.] 그러자 모용소소의 눈이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가더니 분노로 인해 파들파들 떨렸다. 하지만 곧 진정하고 다시 전음을 날렸다. [그러지. 이번에는 네 앞에서 네 잘난 면상을 날려주겠어.] [가능하면 해봐라, 기꺼이 기다려 주지. 단, 내가 죽기 전에는 해 주길 바래.] 그러면서 씨익 웃어 부이자 모용소소의 눈썹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꽉 쥐어진 주먹까지 파들파들 떨렸다. [그래, 좋아! 어디 두고 보자. 요즘 공 좀 세웠다고 잘난 척하는데, 그게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 두고 보겠어!] [두고 봐! 누가 보지 말랬나?] [그래, 지금은 얼마든지 잘난 척해봐라.] 살살 약 올리는데도 검을 빼어 들고 달려들기보다는 꾸욱 참는 걸 보니 이번에 뭔가 결심을 단단히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라고 생각한 나는 그냥 무심하게 넘어갔지만 말이다. 모용소소와나의 대화가 그렇게 끝날 즈음 드디어 예철과 모용세가의 그 아들내미의 대화도 끝났는지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하하, 예 대협,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나 술이라도 한잔하십시다." "그때를 기대하지요. 자, 그럼." "예, 그럼."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아빠와 엄마만이 우리를 반겨줄 뿐 아까 무림맹 장로 회의에 간 할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림맹에 온 뒤로 벌써 3일째 계속 회의만 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의견이 안 맞아서 계속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림맹 장로 회의를 엿보고 싶긴 했지만 회의가 항상 낮에만 이루어지는 데다 그때는 우리 곁에 항상 누군가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어 궁금증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안 오셨어요?" 민이의 질문에 아빠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래, 오늘도 회의가 길어지시나 보다." "그렇게 의견 조율을 못 맞출 거면 차라리 의견 조율을 다 맞춘 뒤에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이지 너무한 거 아냐? 사람들은 계속 모여드는데 아직까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니." 내가 낮은 목소리로 투덜대자 엄마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치며 말했다. "이런이런, 말버릇 하고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돼? 게다가 이번 회의가 무척 중요하니까 함부로 결정 할 수가 없어서 심사숙고한다고 생각하면 되잖니." "그래도……." 내가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지 않고 있자 엄마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기다리기 지루하면 세가로 돌아갈래?" 나는 화들짝 놀라서 입을 열었다. "엄마는, 내가 언제 지루하다고 했어요? 단지 회의에서 의견 차가 안 좁혀지는 것 같으니까 답답하다고 한 거지." "호호호, 그런 거였어?" "예, 그런 거였어요." '왠지… 아까 민이와의 상황이 다시 재현된 것 같은 기분이…….' 할아버지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무공의 고수이다 보니 오랜 시간 회의를 하고 돌아왔지만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오늘도 회의 결과가 안 나왔음인지 무척 기분이 안 좋으신 모양이셨다. 덕분에 세가의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눈치만 살피면서 할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내온 차만 홀짝홀짝 마시면서 도통 입을 안 열자 참다못했음인지 아빠가 조심스레 물었다. "회의를… 오늘도 끝내지 못하셨습니까?" 그러자 할아버지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찻작을 내려 놓더니 길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니다, 오늘로써 모든 사항이 결정되었다." "그렇습니까?" 할아버지의 대답에 아빠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지금에 와서야 이야기하는 거지만 나는 우리 세가에 온 무림맹첩의 내용을 몰랐다. 단지 예성구가 여기저기에서 엿들은 것을 종합해서 말해 준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곳에 와서 사파 연합과 한바탕할 분위기라서 그것도 무림맹첩의 내용인가보다라고 가만히 추측해 볼 뿐이었지만. 덕분에 할아버지가 참석하는 무림맹 장로 회의도 주제가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 대충 짐작할 뿐 정확하게는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마도 그에 대한 내용은 할아버지와 아빠만 알 뿐 아직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니 아빠가 약간 어두운 얼굴을 하자 민이와 나는 어리둥절 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할아버지와 아빠가 계속 대화하기를 기다렸다. "어리석어… 어리석어……. 아무리 사파가 몇십 년 동안 우리 정파에게 눌려 숨죽인 채 살아왔다고 하지만 그들이 약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우리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아무런 말 없이 차만 홀짝홀짝 마신 것은 답답해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행동이었던 듯싶다. 그러다 아빠와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다시금 그 답답한 마음이 치솟았는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은 가만두질 못하시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앞뒤없이 중간만 드러난 할아버지의 말에 우리는 도통 뭔 소리인지 어리둥절해하는데 아빠만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럼… 결국은 사파들이 모여드는 곳을 치게 된 것입니까?" "그래, 모두들 공을 세우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더구나. 참내, 9대 문파와 8대 세가가 한목소리, 한마음이 된 걸 정말 오랜만에 다시 봤다."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그들의 세력이 50여 년 전 정사대전 때보다 현저히 약해졌다고는 하나 자신들이 연합한다는 정보를 우리 쪽에다 흘린 데다 드러내 놓고 사파들이 그쪽으로 이동한다면 그만큼 우리들의 시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일 텐데 말입니다. 섣불리 그들을 잘못 건들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 말이 바로 그것이다. 아직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없어. 단지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사파의 무리들이 섬서지방으로 이동을 하는 데다 그동안 멸문했다고 알려지거나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갔던 사파들까지 나타나 그쪽으로 향했다는 보고가 있어. 그렇다는 건 사파를 연합하는 주동자가 사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게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 너무 꺼림칙해. 짐작조차 가는 인물이 없으니……." "다른 무림맹 장로들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사파들이 연합하는 곳을 쳐보면 자연스레 주동자도 알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야 그렇겠지만 너무 무모해. 자신의 힘을 자만하다간 그대로 붕괴될 수도 있는데 말야."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무림맹에서는 사파들이 섬서지방으로 모여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쪽으로 조사대를 파견했다고 하더군. 지금 지속적으로 그들에게서 소식이 들어오고 있지. 그걸 토대로 우선은 무림맹의 5개 단과 일반 문파와 세가에서 얼마의 사람들을 뽑아 그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선봉이지.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로 본대를 이루어 그 뒤를 치기로 했지." "언제 사파들이 연합한다고 합니까?" "2주 후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일 당장 선봉대를 보내고 그 다음날에 본진이 출발하기로 했다." "저희 세가에서도 선봉에 세울 무사를 뽑아야 합니까?" "훗, 그럴 필요는 없다. 선봉의 지원자는 차고 넘치니까. 후우, 특히나 그동안 세력이 많이 켜졌으나 '대' 자를 붙이지 못한 문파나 세가에서는 이번 일로 어떻게 해서든 9대 문파나 8대 세가 축에 끼어들려고 기를 쓰겠지. 하기사 우리 8대 세가에서는 모용세가가 봉문을 했고 단목 세가는 거의 멸문 지경에 이르렀으니 양씨 세가와 곽씨 세가에서 8대 세가 중 한자리를 차지하게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더구나. 우리뿐만이 아니다. 9대 문파 중 공동파는 파문된 제자가 침입하여 문파를 쑥대밭으로 만든 덕에 엄청난 피해를 보았지. 거기에 화산파도 지금 위축된 상태고, 청성파와 점창파도 피해는 없었지만 위신에 흠을 입었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 만회하려고 벼르고 있지. 훗, 섬서 쾌도문, 해남파는 9대 문파 자리를 노리고 있고. 어쨌든 이번에는 사파와 싸우는 싸움도 싸움이지만 우리 정파 내에서 자리 다툼도 치열할 둣해. 그러다 분열이 일어나 지리멸렬하지나 않을지." "그럼 저희 세가는 그냥 본진에 참여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우리 세가는 모두 본진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엄마가 나섰다. "저어… 그럼 진이와 민이는 어떻게……." 엄마의 걱정스러운 말에 그동안 잔뜩 굳은 표정으로 아빠와 대화를 하고 있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간만에 부드럽게 풀렸다. "물론 데리고 가야지. 아아, 너무 걱정 말거라. 이번에 우리 세가는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본진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지만 무림맹첩까지 나온 뒤라 발을 빼기는 어려우니 그냥 참여하는 시늉만 할 생각이다. 진이와 민이에게는 물론 이번 우리 세가 제자들에게는 훌륭한 경험이 될 것이다." "저… 아직 애들에게는 좀 이른 경험일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조금 더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저애들을 믿는단다. 게다가 저애들은 미래에 우리 은씨 세가를 이끌어갈 아이들이야. 내가 왜 네 맘을 모르겠니? 나도 너처럼 저애들을 항상 내 그늘 아래 안전하게 두고 싶단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저 아이들 곁에 있어줄 수는 없는 법. 그때까지는 난 내가 시킬 수 있는 교육과 경험은 다 시킬 생각이란다. 이해해 주겠지?" "그렇습니까?" 할아버지의 조용조용하고 부드러운 말투에 엄마는 조금 안심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을 수 없었는지 우리를 돌아보며 한마디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나는 먼저 선수 쳐서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절대 위험한 짓은 안 할게요. 이번에는 정말 얌전히 엄마랑 아빠 곁에만 있을 거예요. 그치, 민아?" "예, 누나 말이 옳아요. 게다가 이번에는 엄마랑 아빠는 물론 세가 사람들도 같이 있는데 어떻게 경거망동하겠어요? 저희가 날뛰다간 세가 사람들이 무척 힘들어진다는 것 뻔히 아는데요." "그럼요, 그럼요. 저번에 준희 언니를 구할 때의 일로 반성도 많이 했다고요." "저도요." 이제 얼마 있으면 한 사람의 성인이라고 불릴 나이가 되었는데도 엄마 앞에서는 언제나 민이도 나도 어린애가 되는 듯했다. 그렇게 민이와 내가 번갈아가며 다짐에 다짐을 하자 엄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너희들을 믿으마." 우리 세가 측이야 본진에 합류하여 무림맹의 지휘를 따라가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정작 무림맹 측으로서는 이 모든 일이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문파와 무가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아 그들을 이끌고 사파의 사람들을 친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계획과 배려의 돌발 상황을 생각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충봐도 2천여 명은 훨씬 넘는 숫자 같았다. 오랜만에 있는 큰 사건이다 보니 이번 기회를 통하여 뭔가 해보려는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무림맹에서는 그들을 수용하는 일만도 벅차 보였다. 그런 이들 중에서 우선은 이름이 있는 문파와 세가에서 정예들을 추리고 추려 500여 명을 선발대로 뽑았다. 섬서에서는 우선 9대 문파 중 하나인 화산파가 자리하고 있었고, 섬서 쾌도문, 그리고 이번 사파들이 모여든다는 난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충남파가 있었다. 이들이 이번 선봉대의 주도권을 가지게 될 터었다. 선봉대는 오늘 남양을 출발하여 섬서로 들어가 제일 먼저 충남파로 향하게 되었다. 그곳이 남양에서 난정과의 직선 거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리 되었던 것이다. 섬서에있는 그 세 문파들은 무림맹이 먼저 파견한 수색대에 협조를 하느라 이번 무림맹에 많은 인원이 오지 못했다. 그 수색대와 선봉대는 충남파에서 만나 나중에 올 본진을 위하여 사파 연합을 칠 기틀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본진은 3진으로 나누었다. 무림맹에서는 이번 사파 연합과의 싸움에-물론 그들이 싸움을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침략하러 가는 것이지만-많은 힘을 기울였는지 무림맹 산하 5개의 단 중 4개의 단을 투입하였다. 수색에 가장 능한 백호단이 사파 연합 정황을 알아보려는 수색대로 이미 파견되어 있었고 나머지 청룡, 주작, 현무단은 각각 제1본진, 제2본진, 제3본진에 합류하여 진 구축의 중심이 될 예정이었다. 본진 전체를 이끌 역할을 할 제1본진에는 무림맹주를 비롯하여 군사 역할을 담당하게 될 현 제갈 가주도 참여하여 지휘를 맡았고 제2본진은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덕분에 은씨 세가 전체는 제2본진에 끼게 되었다. 그리고 제3본진의 지위는 이번에 많은 무승을 이끌고 달려온 소림사 방장인 정원이 맡았다. 덕분에 제1본진에는 중소 문파가 많이 끼게 되었고, 제2본진에는 8대 세가의 사람들이, 그리고 제3본진에는 9대 문파의 사람들이 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많은 인원이 있는 곳은 제1본진이었다. 뭐, 그곳이 전체 본진을 통괄하는 역할도 겸하였으니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2본진은 8대 세가의 사람들이 모두 집합했다 하더라도 세가의 대부분 힘을 잃어버린 단목세가는 참여하지 못한데다 남궁세가와 사천당가 사람들 또한 마공을 지키기 위함인지 참여하지 않아 그들의 빈자리를 양씨 세가와 곽씨 세가에서 맡게 되었다. 이 두 문파는 창으로 유명한 데다 오랜 세월 동안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문파였는데 50여 년 전 정사대전 때 몸을 조금 사리는 바람에 세력이 약해졌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번 기회를 통해 입지를 넓히려는 듯 많은 제자들을 보내왔다. 3본진에 참여한 9대 문파들 중에서는 무당파가 빠졌다. 아무래도 그들은 마공을 지키기 위해 경비를 철저히 하느라 참여하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섬서에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화산에서도 선봉대에는 참여시켰지만 본진에는 참여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곤륜파와 공동파에서는 마공을 잃어버릴 때 문파에 피해가 꽤 있던 탓인지 많은 제자들을 참여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그들의 자리를 해남파와 풍운방에서 메우게 되었다. 뭐, 이런 이야기를 들어봤자 솔직히 나와는 별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왜 하필 같은 8대 세가 사람이라고 나와 같은 본진에 모용소소를 끼어야 했는지 심히 안타까울 뿐이었다. '저 지지배는 실력도 없는 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 것이지 왜 본진에 참여한 거야?' 많은 무리가 모이게 되자 낮에 이동할 때는 모르지만 밤에는 남녀를 구분했다. 그러다 보니 본진에 참여한 사람들 중 여성의 비율이 극히 낮았으므로 나는 모용소소와 자주 마주쳐야만 했다. 물론 나는 엄마랑 항상 같이 있었으므로 그녀와 칼부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얼굴만 봐도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나 나나 서로를 무시하고 지내긴 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밤에는 거의 내내 붙어 있는 처지였고 주위에서는 그녀와 나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 혹시나 뭔일 안 벌어지나… 하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는데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꽤나 기분 나쁜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모든 일은 무시하면 그만 이었으므로 나와 그녀는 별 탈 없이 섬서의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린이야기 40화 사파연합 (2) 번호:341 글쓴이: 『∑。발랄꼬마소녀♀。』 조회:31 날짜:2002/09/06 17:52 .. 사파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곳은 난정이라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섬서의 맨 남쪽에, 그러니까 사천과의 경계선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성읍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사파들의 연합 장소로 가기 위해 거치는 마을 중 가장 맨 마지막에 있는 마을이었을 뿐 이곳에서 연합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연합이 벌어지는 곳은 섬서와 사천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대파산맥의 한 자락을 담당하고 있던 산인 것이다. 하지만 난정에도 사파의 사람들이 쫘악 깔려 있는 바람에 우리는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그보다 조금 멀리 떨어진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 선봉대와 합류하여 진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정파 무림맹 사람들이 참으로 미련한 짓을 한 거였다. 솔직히 우리가 우위인 입장이었으니 사파 사람들이 우리의 움직임에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사파 사람들의 연합을 방해하러 가면서 드러내 놓고 사람들을 몰아쳐 들어갔으니 이건 '몇 날 몇 시에 습격하겠다'라고 통보하고 정말 그때 습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론 그때도 이걸 알긴 했지만 정파 무림에선 사파 문파들의 힘을 너무나 얕보고 있었기에 이러한 점들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갈 테니 반항할 수 있으면 해봐라' 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국에서 봤던 모 CF처럼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마음이련가? 어쨌든 무림맹에서 진을 치자 다시 한 번 작전 회의가 벌여졌다. 하지만 그 작전 회의는 무림맹에서 출발하기 전에 열렸던 무림맹 장로 회의가 3일에 걸쳐 열렸던 것에 비해 너무 허무하다 할 정도로 금방 끝나 버렸다. 비록 엄마 곁에 있느라 직접 보고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이번에도 모두들 그냥 쳐들어가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반대 의견이 있는 사람들은 말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작전은 세워져서 회의는 끝났다. 선봉대와 추적대의 조사에 의하면 산에 모여든 사파의 인원은 대충 천여 명 정도로 우리의 절반가량의 인원이었다. 아마 그래서 무림맹 사람들이 더욱더 용기백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난정에 남아 있는 사파 인물도 약 4,500가량. 비록 적은 숫자라 하나 우리가 산으로 올라갔을 때 이들이 우리의 뒤를 친다면 그것도 귀찮은 일이었기에 제1본진이 남아 그들을 상대함과 동시에 산 입구를 막아 먼저 내려오는 사파의 인물들이나 혹시 나중에라도 올 사파의 지원군을 막기로 했다. 아마 싸움은 난정의 성읍에서 벗어난 곳에서 이뤄질 것이다. 아무리 명나라의 관아에서 무림의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반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싸움을 벌여 백성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관이 나서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봉은 난정을 통과해 그대로 지나쳐 사파인들을 성읍 밖으로 유인해 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제1본진에게 그들을 맡기고 곧바로 사파의 연합이 벌어진다는 산으로 달려 올라가기로 했다. 그리고 제2본진과 제3본진은 난정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져 선봉대를 중심에 둔 채로 뒤쪽과 양 옆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멋진 작전이라고 감탄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우리가 그들에게 선전 포고를 한 다음 양쪽에 진을 쳐놓고 맞대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연합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르르 달려가 깽판 놓으려는 건데 기습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동안 달려온 것도 백일하에 다 드러나는 행동이었지만-이렇게 대놓고 달려가는 작전이 성공할는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너무 간단한 거 아냐? 솔직히 나 같으면 이렇게 우르르 쳐들어오면 정면 대결을 하기보다는 산에다가 온갖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겠다.> <그것도 좋은 작전이긴 한데 이번에는 그런 건 없는 모양이야. 수색대에서 미리 확인해 봤다더군.> <뭐야, 그럼 저 사파들도 정면 대결을 하기로 결심한 거야? 미쳤군. 설마 우리가 오는 걸 모르고 띵까띵까 하고 있는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생각들인지 원.> <두고 보면 알겠지.> 그 다음날 아침, 식사를 든든히 한 후 각 본진별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우선 제1본진이 난정 성읍을 돌아 그 성읍과 대파산맥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그 뒤에 선봉대가 난정을 향하여 출발할 것이다. 제2본진과 제3본진의 출발은 그 다음이었다. 출발 지점은 같았지만 진행하는 경로는 현저히 달랐고 어쩌면 도착 지점까지 달라질지도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번 일을 오랜만의 행사쯤으로 여기던 사람들도 막상 코앞에 닥친 오늘은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제2본진에 소속된 사람들의 긴장을 풀고 사기를 도우려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왠지 아주 익숙한 문장을 서두로-가만 생각해보니 저 말은 결혼식 주례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이었다-시작된 말은 우리를 사악한 무리를 토벌하기 위한 정의의 용사들로 포장을 한 뒤 맨 마지막은 '정의는 이긴다'로 장식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오늘, 이제 힘찬 발걸음을 내디딥시다!!" "와아∼!!" 할아버지의 열정적인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환호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대어 내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우리 쪽의 소리가 잦아들을 즈음 저쪽에서 고함 소리가 다시 한 번 질러지는 걸 보니 제3본진도 연설이 막 끝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저런 면이 있었다니…….> 출발하려고 단상에서 내려오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내가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보낸 것에 비해 민이의 메시지는 제법 심각했다. <으음… 하지만 사람들을 이끄는 위치에 선 사람에게는 저런 모습 또한 필요할 것 같아. 나도 연설하는 것 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풋,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생각해 봐, 누나. 난 은씨 세가의 소가주라고. 언젠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리 세가를 이어받으면 하다못해 세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할 일이 있지 않겠어? 그때 멋들어지게 해서 나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보여줘야지. 으음, 역시 가주의 자리란 편한 자리가 아니라니까.> <헐…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연설을 위한 임시 단상에서 내려와 제2본진의 맨 앞에 서자 우리 본진은 출발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리 본진의 목적은 선봉의 지원 역할이었으니 급하게 서두를 것은 없었다. 선봉이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그들은 난정을 한바탕 헤집어 사파들을 이끌고 나오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그들의 시간에 맞춰주려면 너무 빨라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우리 본진은 난정 성읍을 좀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너무 천천히 움직여서도 안 되었다. 이래저래 그냥 그런 작전 같았지만 이번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공과 뒤에서 지원하는 제2, 3본진과의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필수였다. 그 때문인지 척후병의 보고를 자주 받으면서 우리가 산 밑에 도착할 즈음에는 마침 선봉대가 우리보다 한발 앞서 산 위로 진격한 뒤였다. 이제 우리도 선봉대처럼 산으로 진격해야만 할 시기였다. 그러자 그동안 할아버지 옆에서 묵묵히 따라오기만 했던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갑자기 할아버지에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은 가주. 부탁이 있는데……." "응?" 할아버지가 돌아보자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우리 모용세가에게 앞장설 기회를 주겠는가?" 선봉이 아니라 뒤에서 받쳐 주는 본진에서라도 맨 앞에 선다면 선봉을 도와 공을 세울 기회가 그만큼 많아지는 법이었다. 모용세가는 많은 세가의 사람들을 데리고 왔음에도 가장 많은 공을 세울 선봉에 세가 사람들을 보내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걸 노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기사 비록 선봉대가 공을 세울 기회가 많다 하나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이상 익숙하지 않은 이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익숙한 자신의 세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게다가 본지의 맨 앞에 선다면 선봉대만큼이나 공을 세울 기회도 많고 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미처 허락의 뜻을 나타내기도 전에 같이 가던 혁련세가와 하북팽가를 이끌고 온 사람들도 나섰다.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 혁련세가가 앞장서겠습니다." "허어, 혁련세가에서는 선봉대에 많은 제자들을 투입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본진의 맨 앞은 우리 하북팽가에게 맡겨주시구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모용세가가 맨 앞을 맡는 것이 가장 온당하지 않겠소이까? 우리 세가의 인원이 가장 많은 데다 선봉대에는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자 모용세가 가주의 동생도 나섰다. <난리군, 난리야.>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민이가 피식 웃으며 대꾸해 왔다. <아무래도 모두 단단히 결심을 하고 온 것 같으니까.> "자자, 그만들두시오. 그렇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겠소. 우선은 맨 앞의 오른쪽은 모용세가가 맡아주시고 왼쪽은 혁련세가와 하북팽가에서 같이 맡아주시오. 혁련세가와 하북팽가는 선봉대에 많은 제자들을 보낸 상태이니 모용세가와의 균형을 맞추려면 그래야 하지 않겠소? 만약 싫으시다면 말씀하시오. 다른 세가와 교체해 드리겠소!" 할아버지가 처음에 이야기할 때는 세 곳에서 앞을 같이 맡아야한다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려 했지만 맨 마지막 말에 할아버지가 특히 힘을 주어 강조하자 세 가문의 지도자들은 입을 꾸욱 다물고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가운데나 뒤로 빠지느니 차라리 다른 세가와 같이 있더라도 맨 앞이 좋은 모양이었다. 뭐, 게다가 같이 있는 세가들의 실력도 상당해 공을 조금 적게 세우더라도 마음은 든든할 테니 그것 또한 수용할 만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맨 앞에 있던 우리 은씨 세가 사람들은 본진의 중앙에 위치하였고, 대신 나머지 세 가문의 사람들이 앞쪽으로 이동하더니 곧바로 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선봉대를 지원하기 위함이었기에 우리는 먼저 올라간 선봉대를 따라잡기 위해 각자 경공을 발휘해 빠르게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봉대 또한 경공을 사용한 채 올라가고 있는지 우리가 한 시간여 동안을 빠르게 올라가도 그들의 끝머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앞장선 세 가문에서는 초조함이 더해졌는지, 아니면 서로 간의 경쟁이라도 붙었는지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전개를 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그들과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뒤쪽에 있는 사람들도 속도를 높여야만 했다. 싸우기도 전에, 아니, 그 사파 사람들이랑 마주치기도 전에 산을 뛰어오르다가 힘 다 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저 멀리서 싸움이 일어났는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봉대다!!" 그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먼저 소리치자 맨 앞에 있던 세 가문의 사람들은 전속력으로 뒤따라갔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또한 뒤쪽에서 따라가던 이들 중에서도 내력이 달려 지친 사람들이 뒤로 처지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뒤쪽에서 따라가는 이들에게 그들을 따라가는 대신 속도를 늦추게 하여 뒤처지는 사람들과 같이 속도를 맞추게 했다. 그리고 우리 본진의 후미를 맡은 주작단에게 먼저 달려간 세가문의 지원을 부탁하며 앞서 보냈다. 덕분에 우리는 먼저 달려간 세 가문과 주작단과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지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으므로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할아버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누가 있소. 조심!" 나는 엄마의 옆에서 붙어 다니느라 전혀 주위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았기에 못 알아차렸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말에 조금 긴장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찰나 몸을 숨기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숲의 그림자로부터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누구나? 무림맹 연합 무사들이라면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예철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불쑥불쑥 모습을 나타내는 그들이 우리를 향해 아무런 말도 없이 병장기를 꺼내어 겨누는 것으로 보아 같은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긴장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는 그들이 모습을 다 드러내자 한순간 허탈함과 함께 긴장이 빠져 피식거렸다. 우리가 비록 반으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원이 몇백 명인데 비해 나타난 이들의 숫자는 대충 50여 명쯤으로 보였던 것이다. "뭐야, 사파의 사람들인가?" 우리 쪽 사람들은 숫자적인 우세함 때문인지 나타난 이들을 깔보는 채로 앞으로 나섰다. "조심하시오. 저들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오." 할아버지가 그들이 너무 방심한 채 나서는 것을 보고 황급히 경고하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웃으면서 할아버지를 안심시키려 했다. "핫핫핫, 은 가주께선 걱정도 많으십니다. 걱정 마십시오. 비록 우리가 은 가주님에 비해 한가닥 하는 재주는 없으나 이들을 처리할 순 있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쉬고 계시면 우리가 금방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선 사람은 하남예방 사람이었다. 하남예방은 다른 8대 세가 사람들과는 달리 공을 세우기 위해 앞으로 나서기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선봉에 제자들을 보내지 않았기에 저들도 우리 세가처럼 이번 싸움에서 공을 세우려는 마음이 별로 없거나 아니면 신중한 줄 알았더니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먼저 출발했던 세 가문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자기 세가의 사람들이 없는 탓인지 우리 세가가 있는 사람들 쪽으로 물러났고, 대신 우리와 같이 움직였던 양씨 세가와 곽씨 세가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만 해도 벌써 하남예방, 곽씨 세가, 양씨 세가, 이렇게 세 가문의 사람들이었으므로 우리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보다 훨씬 넘는 숫자인데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 외에 더 이상의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아 할아버지도 조금은 안심한 채 그들이 나서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마음을 놓은 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달려나갈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킨 채였다. "자, 덤벼라!!" 호기있게 외치며 달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던 우리는 곧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 보다 두 배는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달려드는데도 거의 표정변화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들의 눈 흰자위가 점점 빨갛게 물이 들더니만 그 눈에 광기까지 맴돌기 시작하는 거였다. "할아버지, 뭔가 이상해요!" 민이도 이상함을 알아챘는지 할아버지에게 다급하게 외쳤고, 할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다급하게 외쳤다. "물러나시오! 그들은 뭔가 이상하오! 빨리 뒤로 빠지시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외칠 때 사파 사람들이 우리 쪽을 향하여 몸을 날려 덤벼오기 시작했으므로 막 앞으로 달려나갔던 세 가문의 사람들은 뒤로 몸을 빼기가 여의치 못해 그대로 그들과 맞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그들과 싸우지 않고 몸을 돌렸다간 그들에게 등을 보이는 꼴이 돼버리기 때문이었다. 챙, 챙, 채챙! 저 멀리서 들리던 것과 비슷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겉보기에는 우리 쪽 사람들이 두 배나 많았으므로 우리 쪽이 훨씬 월등해 보였지만, 그렇게 보이는 건 잠깐이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사람들이 쓰러지며 사상자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건 대부분 모두 우리 쪽 사람들이었다. 척 보기에 우리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파 사람들은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면 광소를 터뜨리는 거였다. 그 모습에 나는 예전의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단목세가 침입 사건!"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단목세가를 침입한 사람들은 세가의 무사들보다 훨씬 실력이 떨어지는 낭인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상한 자들이 지급한 약을 먹고는 마치 광인이 된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고 했다. 더욱이 검에 찔려도 통증을 못 느껴 팔다리가 잘려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계속해서 움직인다고 했다. 지금 눈 앞에서 마구 검을 휘두르는 사파의 사람들은 단목세가에서 들었던 그때의 상황을 재현시켜 주는 듯했다. 너무나 일방적인 상황에 나는 뭔가 그들을 도와줄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적과 아군이 한곳에 너무 밀집된 데다 뒤엉켜 있어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쪽도 괜히 이름만 높은 무가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상자가 많아지자 이대로는 당하기만 할 것이라는 걸 깨달은 그들은 재빨리 각 세가의 지도자들의 지휘를 받으며 뒤쪽으로 무사들을 이동시켜 세가별로 자신들이 익숙한 진형을 짜서 그들을 대항하기 시작했다. 비록 숲 속이라 방해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아까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뒤쪽에서 가만히 지켜보려 했던 나머지 무사들도 속속들이 달려들어 부상자를 구해오는 한편 부상자로 인하여 빈자리를 메워 나가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쪽이 승기를 잡고 그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해도 통증을 느끼지도, 죽지도 않을 것 같던 그들이 하나둘 쓰러져 가기 시작하자 우리 쪽 사람들은 용기백배하여 더욱더 거세게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전세는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우리 쪽이 부상자와 사상자가 더 많았지만 결국 승리는 우리 쪽으로 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풀피리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를 들은 사파 사람들은 갑자기 싸움을 멈추더니 번개가 무색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몇몇 우리 편 무사들이 그들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그들을 쫓아갔다간 또 뭔 일을 당할지도 몰랐기에 할아버지는 뒤를 쫓으려는 걸 제지했다. "멈추시오! 지금은 먼저 간 본진과 합류하는 것이 더 중요하오. 자, 그들이 다시 올지도 모르니 빨리 부상자를 수습하고 출발합시다." 아마 앞서 간 선봉대나 제2본진 사람들도 저들에게 습격당했을게 틀림없었다. '뭐? 함정이 없어? 이거 순 함정투성이네!' 가벼운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스스로 일어서 걸었지만 부상이 심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만들어진 임시 들것에 실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같은 세가의 사람들이 그의 유품을 수거해 준 뒤 급하게 땅에 묻어주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이렇게 대충 장례를 치르지만 일이 다 끝나면 시신을 수거하여 본 세가로 보내져 다시 정중히 장례를 치러줄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같은 세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무사들은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더욱더 긴장하며 주먹을 꽈악 쥘 뿐이었다. 아마 울어주는 것은 이 싸움이 끝난 뒤에 해줄 듯했다. 그렇게 대충 상황을 정리한 뒤 먼저 간 사람들이 있을 곳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번에는 경공을 사용하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걸어 약 30분쯤 전진하였을 때 넓은 공터에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선발대와 먼저 간 세 세가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도 한차례의 습격을 받았는지 부상자를 치료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도 습격을 당한 모양이군. 누군지는 알아냈는가?" 우리가 오는 모습에 제일 먼저 일어나 반기는 모용세가의 전 가주에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아니, 알아내지 못했네. 아마 약을 먹은 듯하이. 선봉대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부랴부랴 달려와 막 싸우는 장소에 도착하자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만 그들이 싸움을 멈추고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네. 뒤를 추적할까 했지만 자네 쪽과 거리가 벌어진 것도 마음에 걸리고, 또 그들을 쫓아가다 어떤 함정을 만날지 몰라 이렇게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잘했네. 아마 우리가 습격당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군." 할아버지의 말에 모용세가의 전 가주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뭐라고? 그럼 자네 쪽을 습격한 이들도 약을 취한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그래. 아무래도 단목세가를 습격한 낭인 무사들이 먹은 것과 비슷한 약인 듯싶어. 증상이 그때 단목세가의 총관에게 들은 것과 같거든." "허어… 거참……." "그뿐만이 아닐세. 저들은 우리의 행동을 손바닥 보듯 훤히 보고 있는 것 같아. 제2본진이 둘로 나뉠 때를 기다렸다가 우리 쪽을 습격한 것 하며, 자네 쪽이 선봉대가 싸우는 곳에 막 도착할 때 놈들을 뒤로 물리게 한 것 하며… 아무래도 생각보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아." "어쨌든 더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하세나. 선봉대 쪽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앞으로의 일을 의논할 것 같아." 상황이 생각보다 안 좋다면 나 같으면 되돌아가서 상황을 정비한 다음 다시 덤비든지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계속 전진한다는 거였다. 예전 신라 시대에 화랑에게 있어 다섯 가지 계율 중 하나가 싸움에 임하면 뒤로 물러나지 않는 것이더니만, 이곳에서도 싸우다가 중간에 뒤로 물러나는 걸 되게 수치로 여기고 있었다. 싸우다 죽을지언정 절대 적에게 들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깡다구인지… 죽으면 수치고 뭐고 다 소용없는 일인데 말이다. 강호 사람들은 너무 목숨을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한다면 지금 돌아가는 것은 이곳에 온 보람이 없는 거였다. 우리의 목적은 어쨌든 사파들이 연합하는 곳을 깽판 놓는 것이었으니 그들이 연합하는 곳까지는 가서 뭐라 한마디 하고 와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중한 부상자들은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제1본진으로 옮기기로 하고 우리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올라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선봉대와 제2, 3본진이 다 같이 올라가기로 했다. 기실 제3본진도 할아버지가 선봉대를 이끄는 사람들과 한창 회의를 할 무렵 부상자들을 이끌고 우리가 휴식을 취하는 곳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들도 습격을 받은 모양이었는데 조금 억울하게도 제3본진 쪽이 우리 쪽보다 피해가 좀 경미했다. 같은 편이 덜 피해를 받았으면 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어야 할 터인데 그동안 9파 사람들에게-특히 무림맹 장로들에게- 쌓인 게 많다 보니 참 고깝게 느껴지는 거였다. 더구나 9파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우리 쪽의 피해가 더 많은 걸 알아채고는 은근히 으쓱해하는 것 같자 더욱더 기분이 나빴다. 어쨌든 심각한 부상자들을 실력이 조금은 달리는 사람들 손에 의지해 내려보내고 우리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다. 우선 선봉에는 여전히 선봉대가 섰고 그 뒤를 9대 문파 사람들로 이루어진 제3본진이, 그리고 우리 8대 세가 쪽 사람들이 가장 후미를 맡았다. 사람이 1/3가량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천여 명은 넘는 숫자였으니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에는 또다시 습격당할 때를 대비해 아까처럼 경공은 펼치지 않고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가기는 했지만 그대로 제법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 아린이야기 40화 사파연합 나머지 부분 번호:342 글쓴이: 『∑。발랄꼬마소녀♀。』 조회:44 날짜:2002/09/06 17:54 .. 사파가 연합을 한다는 장소는 제법 깊은 깊은 골짜기에 자리해 있는 큰 건물이었는데, 건물의 두쪽도 양 옆도 아주 높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따. 그러니 그 건물은 마치 절벽으로 만들어진 분지 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는 형국이었따. 우리가 지금 앞ㅔ 두고 있는 길만 막으면 저 건물로 갈 수 있는 길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길뿐인, 어떻게 보면 천연 요새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었따. 이적도 거의 없는 이곳에다 중장비 같은 것도 없고 마법도 없는 이시대에 어떻게 저런 큰 건물을 지을 수 있었는지 참으로 미지수였따. 게다가 이곳까지 올 동안 오솔길도 없는 완전 산속이던데 어떻게 생활 칠숲ㅁ을 조달하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그 건물로 가자면 양쪽이 가파른 골짜기로 되어 있는 길을 가야 했다. 그 길은 그래도 꽤 넓어서 사두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길 양 옆으로 병풍처럼 버티고 서 있는 골짜기가 문제였다. 이전까는 길이 없는데 이 앞에는 일부러 닦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길이 있다니. 의아하긴 했지만 아무튼 이곳을 지나다가 위에서 어떠한 공격이라도 받으면 밑에 있는 우리는 크게 당할 게뻔했다. 그렇다고 이 위에 있을 것이 분명한 적들을 치며 가자니 골짜기를 지나서는 눈앞에 있는 저 거대한 건물에 도착할 길이 없었기에 다시 이쪽으로 내려와 이길을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 희생을 그냥 감수하고 간다면 우리가 저 건물 안에 들어갔을 때 우리의 배후를 칠 수도 있기에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었다. "흠.. 어쨌든 이곳을 다 정리한 다음 지나가는 게 좋을 돗하니 둘로 나누어 양쪽 골짜기 위를 치도록 합시다." 지형을 쭈욱 살펴본 제3본진을 이끌고 있던 노스님이 말했다. 이 사람도 '정'자 계열의 방장과 같은 서열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과 직접 인사를 한 적도 없고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않아 법명은 모르겠다. 단지 소림사에서 무승을 이끌고 달려와 제3본진을 이끄는 역을 맡은 만큼 실력도 있는데다 지혜로워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노스님의 말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기꺼이 찬성을 했고 둘로 나누는 데 기준을 당연하겠지만 제2본진과 제3본진을 정하였따. 그리고 선봉대는 우선 계곡 가운데 길로 달려가 계곡에 있을 적들을 기습하는 걸 도왔다가 다 처리된 다음 그 길로 곧장 계곡 가운데 나 있는 길을 따라 사파인들이 모여 있을 건물로 진격하기로 했다. 저들은 우리의 행동을 꿰뚫어 보고 있으니 계곡 위에 사람들을 배치해 놓고 있다고 해도 건물 주위에도 틀림없이 매복을 해놨거나, 아니면 뭔 함정을 설치해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걸 선봉대에서 담당하겠다는 거였다. 지금 우리는 계곡과 그 안쪽에 있는 건물이 얼핏 보이는 곳의 수풀에 숨어 있는 상황이었다. 동전을 던져 누가 어느 쪽을 공격 할 것인가를 정했더니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내가 소속된 제2볹ㄴ이 건너 쪽의 계곡을 맡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뒤쪽으로 더 이동한 뒤에 저들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건너편으로 넘어간 다음 다시 숲을 이동하여 계곡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우리가 계곡 밑에서 진격할 준비를 마치면 선봉대가 몸을 숨기고 있는 수풀에서 뛰어나와 곧장 계곡 안으로 들어가서 시선을 끌 것이다. "자, 그럼 조용히 이동하라!"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사사삭 거리는 정도의 소리만을 내며 미리 지정해 놨던 대로 건너편 계곡 밑에서 다시 집결하고는 숨을 죽이며 선봉대들이 다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우리가 정해진 위치에 도착했다는 것을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에게 수신호로써 알리자 잠시 후에 와아~!하는 큰 함성과 함께 미리 약속도니 대로 선봉대가 숲 속에서 뛰쳐 나와 계곡 사이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선봉대와는 달리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계곡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선봉대가 계곡의중간 지점까지 진입하자 역시나 계곡 위에서 준비된 듯한 돌과 화살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쯤에는 우리도 계곡 위쪽으로 거의 다 올라온 상태였기에 고함을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고함을 지른 것은 우선 예치 못한 공격을 받을 적들을 당황하게 만들려는 거였고, 두 번째로는 미텡서 돌과 화살세례를 받고 있을 선봉대에게 우리가 담당할 테니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나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우리가 막 공격해 들어갈 즈음, 건너편의 계곡 위에서도 우리쪽과 비슷한 고함성이 들려왔다. 제3본진도 계곡 위에 있는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거였다. 아마 제2본진 사람들이나 제3본진 사람들 모두 건너편을 공격하는 다른 본진보다는 먼저 처리하려는 생각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공격해 들어가는 본진 사람들은 전에 없이 살기 등등하고 매섭게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나와 민이는 유와 덕이에게 붙잡혀 본진 뒤쭉에서 구경만 해야 했고 그 옆에는 희여송과 엄마가 호위를 해주고 있었다. [이럴 필요는 전혀 없는데 말야. 난 적이라고 해도 사람을 공격하고픈 마음은 별로 없다고. 지킬 필요까지는 없단 말야] 유에게 잡혀 있는데다 팔자에도 없는 호위까지 받게 되자 내 자신이 왠지 처량해지는 것 같아 민이에게 투덜댔다. [에휴, 나누 맘이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믿어주겠어? 아마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우리 곁에 없다면 우리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공격의 맨 앞에 설 거라고 생각할걸?] [아니, 솔직히 그동안 내가 먼저 사람을 공격한 적은 없다고. 몰래 침입한 적은 있었지만. 왜 일허게 인식이 된 거지?]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말라는 말을 전혀 안 듣는 걸로 인식이 되어 있는 거야. 솔직히 적진에 침입하는 거나 이런 데서 공격하는 거나 둘 모두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니까. 이번에도 저 공격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을 안 들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체엣, 나는 솔직히 이렇게 맞대놓고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것에는 흥미없는데 말야. 음... 뭐, 마법, 아니, 주술 싸움면 몰라도.] [헤에... 역시 누나는 검술에는 별로 흥미가 없나 보지?] [역시? 네가 그렇게 티를 내고 나녔나? 뭐, 흥미가 아예없는 건 아닌데, 나는 차라리 주술이 더 재밌다. 그것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걸까? 검술에는 그렇게 특출난 재능도 없는 것 같고 말야] [누나가 검술을 배우기 전 주술에 능통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러나까 검술을 배울 때 다른 의지하는 게 있으니까 그다지 필사적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지금도 급하면 검보다는 주문이 먼저 튀어나오지?] [헤에, 역시 그게 문제인가 보다. 희 사형도 너랑 같은 말을 했거든. 하지만 나도 열심히 하느라 했는데 말야... 그래도 역시 필사적으로 하게 되지는 않더라] 민이와 내가 뒤에서 하릴없이 잡담을 주고받는 동안 계곡위의 상황은 거의 정리되고 있었다. 처음에 우리가 달려들었을 때는 적들이 그렇게 크게 당황하지 않고 일부가 우리에게 맞서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이 계곡 밑에 있는 선봉대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해댔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우리 은씨 세가가 계곡 미테부터 올라온 쪽을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부어대는 도안 다른 세가의 사람들이 적의 뒤쪽으로 돌아가 다른 쪽에서 공격을 해댔기에 적들은 계곡 끝에 몰려 포위되어 버렸다. 이것은 적이 우리보다는 숫자가 적었던 데다 이들이 전에 우리를 공격한 사파 사람들처럼 약에 취하지 않은, 그냥 평범한 무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께름칙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질 걸 미리 예상일도 한 듯 자신들이 포위되어 패색이 짙어지자 냉큼 병기를 버리고 항복해 버리는 거였다. 그 모습에 우리 쪽 사람들은 황당해했지만 항복하는데 죽일 수도 없었는지 우선은 혈을 눌러 제압을 해놓고 할아버지만 쳐다봤다. "참 황당하군요. 역시 사파 사람들이라 항복도 쉽게 할 수 있는 걸까요?" 제압한 사람들은 한곳으로 모아놓은 뒤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주작단장이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글세.. 하지만 너무 쉽게 항복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 마치 미리 정해높은 것처럼 말이야" "이들이 뭔가 알지도 모르니 고문을 한번 해볼까요?" 곁에 있던 혁련세가의 사람이 물어왔지만 할아버지 대신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소용없을 걸세. 은 가주가 말한 대로 미리 정해놓은 거라면 항복할 이들에게 이 작전 외에 뭔가 다른 걸 알려주지는 않았을 걸세. 그리고 미리 정해놓은 게 아니라 이들이 목숨 잃은 것을 두려워해 항복한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지. 이런 곳에 매복시킨 이들이라면 정예는 아닌세. 그런 이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줬겠는가? 아마 저들이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사람들일 걸세." "흐음... 일리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추궁을 해도 소용없겠군요. 어쩍까요? 그냥 죽여 버릴까요?" 하남예방 사람이 정말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 검을 빼 들며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자 주작단장이 그를 말렸다. "일부러 피를 볼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잠시 후에 적의 정예를 상대해야 할 테니 검을 아끼시지요. 게다가 저들은 제압당해 앞으로 두세 시진은 꼼짝 못할 테니 뭔 짓거리를 할 걱정도 없고요." 주작단장이 말리자 하남예방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듯한 시선으로 돌아보자 할아버지도 주작단장의 편을 들었다. "꼭 죽일 필요는 없지. 중요한 아닌데 괜히 검만 무디게 할 뿐인 것 같군."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하남예방 사람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검을 내렸다 "여러분들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자, 그럼 결정되었으면 빨리 계곡 밑으로 내려가십시다. 벌써 선봉대가 진격을 하고 있군."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하는 말에 나도 얼른 밑을 바라보니 위에서 내려오는 공격을 피하느라 잠시 계곡을 벗어났던 선봉대가 다시 계곡 안으로 돌격해 이제거의 계곡 끝에 다가서고 있었다. "선봉대 뒤를 받쳐 주려면 서둘러야겠군. 자, 그럼 우리가 먼저 실례하겠소." 혁련세가를 아끌고 왔던 자가 뭐가 그리도 급하지 밑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손을 들어 우리에게 인사차 싱긋 웃어 보이더니만 그대로 몸을 날려 계곡의 가파른 경사를 미끄럼 타듯 달려갔다. 그러자 그 뒤를 혁련세가의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 내려갔다. 혁련세가는 아마도 선봉대의 틈에 끼어 공을 세우고 싶었나 보다. "우리도 서두르자!" 주작단자의 외침에 주작단원들도 서둘러 계곡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다른 세가의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건너편을 보니 제3본진 사람들도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에잇!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사람들 앞에서 그럴 수도 없고] [투덜대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누나 말에 지극히 동감이야] 나와 민이는 맨 뒤쪽에서 사람들을 따라 계곡을 타고 내려가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제2본진 사람들과 제3본진 사람들은 서둘러 내려오자마자 계곡 밑에서 뒤섞여 그대로 선봉대 뒤를 따라 내달았다. 우리가 계곡 끝까지 도착하고 그와 동시에 선봉대가 건물에 거의 도착하는데도 건물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 건물 중앙에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정문이 꼭꼭 닫혀 있었고 그 옆에 난 창문들까지 꼭 닫아놔 방문객을 거부하는 의사만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고이 돌아갈 방문객들은 아니었기에 선봉대는 닫힌 정문을 부수고 달려들 테세로 돌격했다. 그런데 막 선봉대의 맨 앞에 선 사람이 정문에 닿을 찰나 갑자기 정문 바로 위쪽, 그러니까 아마도 2층쯤으로 되는 듯한데 그곳에 나 있는 창문이 열리더니 시커먼 구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구름은 허공으로 나오자마나 왱왱거리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발하며 허공을 점점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검은 구름이란 엄청난 수의 벌 떼 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벌떼들을 조종하는 듯한 피리 소리가 건물로부터 흘러나오자 벌때는 다짜고짜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독벌이다!" "설마... 묘강에서?!" "크윽! 빨리 피해라!!" 묘강이란 운남 지방에서 지금까지 꿋꿋이 버티고 있는 거대 사파중 하나였다. 뭐, 꿋꿋이 버틴다기보다는 정파 쪽에서 어쩌지 못하는 거겠지만. 운남 지방은 지금의 베트남 바로 위족에 있는 지방이다. 베트남을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그곳은 무더운 데다 습해서 정글이 많이 발달된 곳이다., 그리고 묘강은 그런 정글에서 발생하는 많은 독뱀과 독충 등등을 길러 무기로 사용하는 문파였다. 독문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볼수 있겠지만, 독문에서는 독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묘강에서는 독을 가진 생물체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게 다르다.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독을 가진 생물체였으니 묘강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굳 제일 앞쪽에 선 선발대 사람들은 독벌에 둘러싸이기 시작했고, 그들을 둘러싸고도 남을 독벌들이 뒤쪽에 있던 제2,3본진 쪽으로 덤벼왔다. "발리 뒤쪽으로!!" 유과 덕이가 재빨리 민이와 나를 붙잡고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나와 민이는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이번에는 우리가 나서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시 우리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런 그들의 손길을 피해 앞으로 내달았다. 은씨 세가 사람들이 당황하며 우리를 막으려 들었지만, 우리가 있는 곳이 제2,3본진 사람들이 뒤로 이동하고 있는 터였기에 쉽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런 틈을 타서 민이와 나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뒤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머리와 어깨를 밟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비록 그게 실례인 줄은 알지만 민이와 나도 밑에서 달려가자니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곧 얼마가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을 벗어나독벌 떼와 맞닥뜨린 민이와 나는 땅에 내려서면서 외쳤다. "바람이여, 내 의지를 받들어 휘몰아쳐라!" "딤 윈드!" 말은 달랐지만 민이와 내가 원한 건 강한 바람이었고, 나의 마법과 민이의 신력이 결합된 너무나 강한 돌풍이 불어 닥쳐와 우리에게 달려는 독벌을 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민이와 내가 용의 기운을 내뿜으면 저 벌들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겠지만, 민이와 내가 원하는 건 우리 쪽 사람 모두를 구하는 거였다. 또한 그동안 내 주위에는 곤충들이 몰려들지 않았던 탓에 곤충들에게 용의 기운을 써본 적도 없는 데다 이 벌들은 사람이 키워 훈련시켰기 때문에 용의 기운이 이 벌들에게 얼마나 먹혀들지 몰라서 직접 바람을 생성한 거였다. 하지만 너무 강했는지 우리가 불러일으킨 돌풍은 막 돌벌에게 휩싸여 몸부림치는 선봉대들까지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선발도니 사람들답게 천근추-내력을 사용하에 자신의 몸무게를 엄청 무겁게 만드는 수법. 빠른 물살이나 이번 같은 강한 바람에 휩쓸려 가는 걸 막을 수 있다-를 사용하여 하나둘 밑으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독벌에 휩싸이기까지 했는데도 별다른 피애가 없어 보였다. "헷, 역시 실력이 있다 이건가? 아마 내력을 온몸에서 뿜어내 벌들이 몸에 붙지 못하도록 막은 것 같은데? 저봐, 몸에 붙은 것처럼 보이는 벌들이 바람에 쉽게 떨어져 나가잖아." "그러냐? 그나마 다행이네. 자, 빨리 뒤쪽으로 와요!" "이쪽으로 오세요!" 민이와 나는 바람을 조종하여 독벌이 우리 뒤쪽으로는 가지 못하게 막는 한편, 우리의 앞쪽 허공에 모이도록 했다. 우리가 그렇게 바람을 조종하는 동안 건물 안에서 들려오던 피리 소리의 음률이 급박하게 바뀌고 소리 또한 높아지며 벌들을 어떻게든 종하려 했지만, 아무리 숫자가 많은 벌 떼라고 해도 민이와 내가 같이 일으키는 돌풍에 저항하지는 못했단, 그리고 그사이 허공으로 날려 올라간 선발대들이 모조리 땅으로 내려와 우리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뭐, 간간이 못 내려와 계속 공중에서 날려 다닌 사람도 몇 있었지만, 그건 민이가 다른 바람을 조종하여 땅으로 끌어내렸다. "야, 다 됐냐?" 민이가 사람들을 모조리 끌어 내리길 기다렸다 내가 묻자 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사람이 마지막이야!" "좋아, 그럼 네 바람을 거둬바. 내가 다른 주술을 사용하게." "알았어. 셋 세면 거둔다. 하나, 둘, 셋!" 민이가 셋을 세는 것에 맞춰 나는 다시 마법을 외웠다. "파이어 볼!" 커다란 불덩어리가 독벌들이 모여 있는 곳 가운데로 날아가 터지자 그 불길에 휩싸인 독벌 대부분에 불이 붙어 재가 되어 떨어져 버렸다. 그 가운데서 살아남은 아주 극소수의 벌들은 건물안 으로 돌아갔지만 뭐, 그 정도는 살려줘도 괜찮겠지. 그렇게 민이와 내가 벌 떼들을 해결하고 나자 벌때를 피해 계곡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또다시 우르르 몰려왔다. "고맙네, 두 지수. 덕분에 살았네." 제일 먼저 제3분진을 이끌고 있던 노스님이 다가와 우리를 치하하자 민이가 나서서 겸손하게 화답했다 "뭘요, 단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뒤로 할아버지가 다가와 우리의 어깨를 특특 두르리며 잘했다고 칭찬했고, 우리는 그 다음에 진이 빠진 듯한 엄마의 품에 안겼다. 아마 엄마는 엄청 놀라고 긴장했다가 우리가 잘 해결하는 걸 보자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이 녀석들... 엄마를 놀라게 하고 있어." "에헷헷....." "진이의 주술은 다시 봐도 놀랍구나. 정말 대단한 실력이야." "뭘요." 선봉대에 소속된 사람들도 우리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살짝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고 백호단장은 나죽에 와서 정식으로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자, 그럼 이 여세를 몰아 저 사악한 무리들을 칩시다!" 덕벌로 인하여 흐트러졌던 대열이 다시 원상 복귀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3본진을 이끌고 있던 노스님이 강하게 외쳤고, 사람들은 그에 화답하는 고함을 지르면서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사파 쪽에서는 독벌을 많이 믿고 있었던 모양인지 우리가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다. 건물 정문은 붉은 칠이 되어 있는 단단해 보이는 나무 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당연하게도 그 정문이 단단히 잠겨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파 쪽 사람들이 그 문을 열어줄 리는 없으니까 부수고 들어가자는 것에 의견을 모은 다음 창을 들고 있던 누군가 한 사람이 그 나무 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보기 위해 앞으로 나서서 모두가 숨죽이고 보고 있는 가운데 창대로 힘껏 그문을 내리쳤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그 문은 창대에 부딪침과 동시에 아무런 소음 없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었다. "뭐, 뭐야?!" 잠긴 줄 알고 창대를 힘껏 내려친 그 사람이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창대와 문을 번갈아 보다가 우리를 돌아보며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 당당히 걸어가 손으로 그문을 열어졎혔다. 그러자 문은 우리를 환영하기라도 하는 듯이 활짝 열렸고, 아직 날이 밝은데도 불고하고 빛이 없어 어두워 보이는 통로를 드러내었다. 아까는 이 건물 전체를 부술 것처럼 달려들던 사람들은 막상 정문이 손쉽게 열리고 어두컴컴한-아무도 목도인 듯한-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아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갑가지 주춤주춤거리면서 들어가길 꺼려했다. 하긴 아무리 생각없는 사람이라도 그동안 사파의 습격을 생각한다면 이 앞에 무슨 함정이 있을거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을터였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이 사람들의 발결음을 잡아두고 있었다. 만약 저문이 굳게 잠겨 있어 우리가 어렵사리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면 사람들은 안쪽이 아무리 어두어도 주저하지 않고 우르르 막 달려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에 함정이 있는 것이 뻔한데 사람을 들여보내기도 그렇고, 자신들이 나서자니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으끄는 팀이 다른 팀들에게 뒤처질 것 같아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이럴 때 지원자라도 있어줬으면 좋겠지만, 평소에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바치겠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다니던 정파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입을 딱 다물고 발을 묶어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공을 세우려고 앞장서려고 했으면서... 그때는 목숨을 안 걸었나?' 결국 이 답답한 상황을 참지 못했던 나는 손을 번쩍 들며 나섰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자 은씨 세가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시주가... 괜찮겠소?" 그래도 노스님은 날 먼저 보내자니 양심에 찔렸는지 되게 미안한 표정으로 주저하며 물어왔다. "괜찮아요. 검술은 딸리지마 제 주술 실력이라면 별 피해는 없을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한 걸음 내디디려 하자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보다도 먼저 주작단장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럴 수는 없소. 은 소저는 아까 큰 주술을 썼기 때문에 지쳐 있을 거요. 게다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아직 어린 소저에게 선봉을 밭길 수는 없소이다. 이번 선봉은 내가 맡겠소!" '호오, 고지식맨!' 참으로 그다운 말이자 행동이었다. 하지만 왠지 이 순간은 평소 그에게 느꼈던 답답한 보다는 약간은 멋져 보이는 것이었다. 그가 나서자 그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다른 이들도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아지오, 이번 일은 우리 모용세가에서 맡겠소이다." "무슨 소리. 선봉대는 우리였소이다.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는 없소." "아니오. 당신들은 아까 독벌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소? 이번 선봉은 우리 화산파에게 맡겨주시오." "기습에는 우리 섬서 쾌도문이 우리하오이다!" '워야, 이사람들. 아까는 나서고 싶었는데 아무도 안 나서줘서 지가도 못 나서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나는 유와 덕이에게 끌려서 뒷전으로 밀려났고 사람들은 서로 자신들이 선봉을 밭겠다고 정문 앞에서 우겨댔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고 잇다가 어두컴컴한 복도 안쪽에서 날아온 임기세례를 밪고 말았다. 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 그 암기들은 우리가 안으로 들어설 때 던지기로 했을 거엿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지는 않고 싸울고 있으니 신경질이 난 데다 우리가 안쪽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온통 싸우는 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니 그냥 던져 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딴데 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사화을 진정시켜 보려 노력하고 있던 노스님이 미처 암기가 나오기도 전에 그러한 기색을 아아채고는 몸을 날려 사람들 앞을 막아서고 가사를 멋어 공력을 주입한 채 휘둘러 댔다. 그러자 그 가사가 넓게 펼쳐지며 날아오는 암기들을 대부분 휘감아 땅으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한꺼번에 날아오는 암기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게다가 이 암기들이 계속해서 날아왔기에 노스님의그런 멋진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사를 교묘하게 빠져나간 암기들이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을 맞혀 쓰러뜨렸다. "조심하시오!" 그리고 공력이 주입된 노스님의 가사도 점점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하자 모용세가의 전가주와 울 할아버지가 나서서 노스님을 뒤로 빼내고 정문을 닫아버렸다. 덕분에 날아오던 암기는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나무에 곳이 박히는 듯난 다다닥걸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위험할 뻔했소이다."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노스님을 돌아보며 말하자 노스님이 모용세가의 전 가주와 할아버지에게 감사를 표했다. "두 시주님들게 감사들이오." "별말씀을. 대사가 아니었다면 많은 사상자가 났을 것이오. 정말 탁월한 행동이셨소이다." 할아버지의 말에 모용세가의 전 가주도 동의했다. "그렇소이다. 정말 대단하셨소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외다." 그렇게 서로 치하가 끝나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걱정이 담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정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이까? 저러한 암기세례라면 무사히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 것이외다."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제일 먼저 문제점을 지적하자 할아버와 노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편 사람들 중 가장 배분이 높은 사람이 바로 그 세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무지 사람들은 지금 그 세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관건은 누군다가 저 암기의 빗속을 뚫고 들어가 암기를 날리는 자들을 처단해야 하는 것이데... 저 안의 암기의 세례말고 다른 것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느니..." 할아버지의 말에 셋은 또 한 번 약속이라도한 듯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결연한 어조로 노스님이 입을 열었다. "역시 우리가 나서야 할밖에 도리가 없는 것 같소이다," 그의 말에 할아버지와 모용세가의전 가주가 동의했다. "옳으신 말씀." "이럴 때 안 나서면 언제 나서겠소이까?" 물론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 세상에서 내가 사라졌다고 난리칠 울 할아버지면 몰라도 이쪽(?) 할아보지는 모내기가 불안했다. 비록 할아버지가 나보다 검술 실력이 훨씬 훠어어얼씬~ 좋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검술보다는 마법이 더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법을 전혀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위험한 저곳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반대하며 나서기도 전에 세 노인들은 자신들끼리 의견이 일치하자마자 그대로 닫힌 정문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놀란 내가 뒤따라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엄마와 아빠가 내 한쪽 팔을 잡아 제지했다. 아마 내가 할아버지 뒤를 따를 걸 눈치 채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동안 세 노인들의 신형은 잠기지 않은 정문을 쉽게 열고 그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최소한의 시간 안에 일을 끝내려는 듯 경공을 최대한으로 전개하면서 말이다. 내가 나를 잡아 제지하는 엄마와 아빠의 손길을 뿌리치려 몸을 바트는데, 그런 내 옆쪽에서 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튀어나오더니 할아버지가 들어간 바로 그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 뭐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금방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나는 의문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옆에 있는 유와 민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곳에는 응당 있어야 할 민이 녀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설마 하는 새악에 급하게 고개를 돌리려는데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아빠가 다급하게 외치며 그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민아~!" 그걸 기회로 은씨 세가 사람들은 빠르게 아빠의 뒤를 쫓았고, 그와 함께 모용세가 사람들과 소림사 무승들도 앞을 다투어 세 노인들이 사라진 정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 치사한 민이 녀석 같으니라고! 나만 두고 자기 혼자 가다니!" 비록 그안쪽이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민이라면 별 탈 없이 할아버지를 구할 수 있은 것이라 믿었기에 걱정은 안 되었다. 다만 내가 부모님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는 기회를 타 자기만 슬쩍 빠져나갔다는 것에 화만 났을 뿐이다. 그리하여 날 붙잡고 있던 아빠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날 붙잡고 있는 손길이 약간 허술해진 틈을 타서 얼른 그 손길을 떨쳐 버리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내가 한순간 엄마의 손길을 떨쳐 버리느라 잠시간 지체하고 있는 사이, 아빠의 뒤를 따르던 우리 세가 사람들와 모용세가 사람들, 그리고 소림사의 무승들이 나보다도 먼저 정문 안쪽으로 뛰어들어 갔기 때문에 나는 그들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뛰어들자 내 곁에 있느라 미처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은씨 세가 사람들이 우르르 뒤따라왔고, 그러자 선봉대와 나머지 본진의 사람들도 자신들만 가만 있을 수는 없었던 지 뒤따라 몸을 잘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문 안은 바깥에서 본 것처럼 햇빛이들어오는 곳도, 공간을 밝히는횃불도 없어 무척 어두웠다. 단지 빛이라면 우리 뒤쪽에 열린 정문에서부터 들어오는 빛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빛만으로도 안을 둘러보기에는 충분했다. 정문 바로 뒤에는 일직 선상의 복도가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천장이 보통 건물보다 돞아서 답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긴 복도가 끝날 때까지 다른 길로 가는 통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저 단단해 보이는 벽만이 쭈욱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이런 구조에서 아까 암기를 던질 때는 복도에 사람들이 나와서 던졌는지 우리가 막 달려 들어간 복도에는 우리들 외에는 사파의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우리를 공격하는 암기들도 전혀 없었다. 복도를 다달려 맨 끝에 난 커다란 입구를 동해 들어간 곳은 엄청나게 넓은 원형의 홀이었다. 천장은 복도보다 더욱 높이 있엇는데, 그 높이가 어림짐작해도 5,6m는 훨씬 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은 복도와는 달리 공간을 밝혀주는 횃불이 둥근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달려 있었는데, 높은 곳에 달려 있어서 아래에 있는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게다가 약 2층의 높이에는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가운데를 뚫은 형식으로 발코니가 도넛 형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허리까지 올듯한 높이의 튼튼한 난간이 그곳에 달려 있었다. 홀은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무척 넓어서 천여 명이 넘는 우리 쪽 사람들이 다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공간이 널널하게 남았다. 이홀에는 입구인 듯한 곳이우리가 들어온 곳까지 합하여 8곳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다. 아마 8방위를 따라자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수상하게도 우리가 들어온 입구를 제외한 나머지 입구는 모두 단단하게 막혀 있었다. "함정인 것 같소이다. 모두 다시 나가시오!" 제일 머저 이곳에 들어온 세 노임이 사방을 둘러보고는 다급하게외쳤지만, 사람들이 막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참이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입구가 막힌 꼴이 되어버려 나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가시오! 뒤쪽에 오시는분들, 들어오지 마시고 나가주시오! 나가요!!" 들어온 사람은 못 나가고, 바깥에 있던 사람들만 자꾸 들어오자 누군가가 입구 근처에 가서 복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에 이쪽으로 달려오던 사람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멈칫거리며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데 갑자기 낚시술이 팽팽히 당겨지며 울리는 듯한 핑, 핑~! 소리가 들리며 이쪽으로 딸려오는 일행의 맨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암기다!' "젠장, 어느새 뒤로 간 거야?" "빨리 안쪽으로!!" 덕분에 홀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낭패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고, 맨 처음 이안으로 들어온 세 노인들은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이런, 역시 함정이었소이다. 저들은 우리가 이곳에 모이도록 유도한 것이도." "허어.. 이를 어쩐다. 하지만 암기가 날아들고 있는 상태에서 뒤로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소이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다 들어오는 즉시 우리가 같장서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소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으로 모이길 원하던 사파 사람들이 기껏 우리가 이 안으로 다 들어왔는데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었다. 맨 뒤에 있던 사람이 홀 안으로 들어오고 막 세 노인들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천둥이 치는 듯한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 위쪽에서 철문이 빠른 속도로 내려와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를 단단히 막아버렸다. "이런 젠장!!" 할아버지가 마음이 급했는지 검에 검기를 잔뜩 주입한 채로 그 철문을 르대로 내려쳤다. 그런데 캉!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불똥까지 튀겼건만 그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작은 흠집만 났을 뿐이었따 "이, 이건 ... 현철?" 그 모습에 할아버지가 놀라서 두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현철이란 철이긴 철인데 석탄처럼 까망고 다이아모드처럼 단단하다고 한다. 뭐, 여기서는 금강석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강호에서 다니는 무사라면 현철로 만들어진 병기를 가지는 것은 꿈에서나 이룰 수 있는 소원이었다. [뭐야, 현철은 무지 휘구한 데다 다루기도 힘들어서 엄청 비씨다고 하고 구하기도 힘들다고 하던데, 이 사파 사람들은 돈이 얼마나 많기에 저 커다란 문을 현철로 만든 거야?] 그 모습에 나도 놀라움을 드러내며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민이도 놀라운 눈으로 그문을 바라보며 대답해 왔다. [모르지 뭐, 혹시 겉에만 현철로 감싼 거 아닐까?] [그래도. 그런데 엄청 단단히기는 단단한가 봐. 할아버지의 검기라면 웬만한 철은 싹둑 잘릴 텐데 흠집만 조금 났을 뿐이라니] [할아버지가 내력을 별로 안 넣어서 그런게 아닐까? 아마 할아버지의 강기라면 부술수 있을지도 몰라] 할아버지도 민이와 같은 생각인지 갑자기 엄청난 내력을 손에 들고 있는 검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검에서부터 검기가 형성된다 싶더니만 검의 끝에서부터 약30cm정도 되는, 검 모양의 내력덩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바로 검강이었다. 사람들은 그쉽게 볼 수 없는 모습에 지금의 상황을 잠시 잊어버리고 감탄사를 터뜨리며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검강이 형성된 검을 들더니 심호흡을 한번 하고 현철로 된 문을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내려치련느 순간 피융~ 하는 미새한 소리가 내 귀에 포착되었거, 그와 함께 할아버지는 문을 내려치려는 검을 거두고 뒤로 철쩍 뛰어 물러났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서 계시던 바로 그 자리에 퍽! 소리가 나면서 무엇인가가 박혀 버린는 거였다. 그것은 내 검지손가락만한 길이와 좁은검신을 가진, 마친 은장도만한 칼이었는데 바닥은 네모반듯한 돌들이 촘촘히 깔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미차 못이 무속에 박히듯 수욱 박혀 버렸다. "누구야?"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호통을 치며 그 칼이 날아노 듯한 장소, 그러니까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어진 위층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검은 장포를 걸친 남자가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정말 흑단 같이 새카맣고 긴 머리를 아루런 조치 없이 그대로 늘어떠려 얼굴을 살짝 가린 데다가 눈과 코 주위를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수가 없었다. 하지만 드러난 턱과 빰의피부는 마치 아깇럼 희고 고왔으며 입술은 도톰하고 붉었다. 그것만 보면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행각할 수 있겠으나 어깨가 넓고 키가 큰 체형을 보아하니 남자가 분명했따. 어쩌면 순정 만화에 주인공 같은 미남자일지도 몰랐다. 그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아주 상큼하게 싱긋 웃어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철주야하고 여기까지 와주신 여러분들의 수고에 보답하기위한 조촐한 환영회를 마련했는데 그냥 가신다면 너무 서운하지요. 적어도 저희가 준비한 환영회는 보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소리까지 좋았다. 노래까지 잘 부를지도 몰랐다. 그가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역시 이곳에는 함정이 준비도닉 서이 틀림없어 보였다 '쩝.... 아쉽네. 잘생긴 것 같은데 적이라니...' 내가 이렇게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 노스님이 앞으로 나서서 침착하게 물었다 "젊은 시주는 뉘신가? 뉘신데 이곳에 있으며,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그러자 그 온통 까만 차람을 한 남자가 다시 한 번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훗, 그렇게 물어보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것이 인지상적이겠으나, 제가 누구인지 밣히고 싶었다면 얼굴을 가리고 나왔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누구라고 대답해도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찌아시겠습니다? 아지만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는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수고에 답하기 위해 조촐한 환영회를 준비했다고. 기억력이 나쁘시군요. 하긴 나이가 많으시니 그럴 수도 있죠. 제가 이해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환영회를 보여 드리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거랍니다. 그리고 못을 할지는 여러분 모두가 이제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아주 경쾌한 어조로 막힘없이 대답한 그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 마자 슬그머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동작이 신호인지 그자 서 있는 2층에는 어디서 나왔느지 모를 여자들이 우를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충 봐도 2백여 명은 넘는 그아가씨들은 나폴나폴거리는 초록빛의 예쁜 옷을 똑같이 맞춰 입고 머리도 똑같은 창식품을 같은 방식으로 착용하고 있었다. 마치 오케스트라나 함창단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을 예로 든 이유는 모습을 드랜 그 아가쓰들의 손에는 각기 악기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비파, 어떤 이는, 피리, 어떤 이는 작은 북, 어떤 이는 해금 비스무리한 악기 등등... 물론 악기를 들지 않은 아가씨들도 있었다. 그러한 아가쓰들이 아래층을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구멍을 빙 불러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가씨들이 그렇게 자리를 잡지 그 남자는 다시 우리에게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이들이 바로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이들입니다. 부디 여러 분의 마음에 들기를 발겠습니다! 풍악을 울려라!" 남자의 외침에 여자들은 자신들의 악기를 고쳐 잡았고 곧 이어 음악을 연주가 시작했다 띠리링띵~ 띠리링띵~ "에헤이이이~~" "뭐야, 뭘 하겠다는 거야?" 이쪽 세계의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많이 알지도 못하는 나로서는 그들이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른 채 약간 황당해져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았다. 그러자 그들도 어리둥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함정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난데 없이 예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와서 음악을 연주해 주니 당연 할지도 몰랐다. 음악과 노래는 상당히 좋은모양이었다. 처음에은 잔뜩 강장한채 그여자들의 주시하던 사람들도 음악기 계속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그 음악게 빠져 발로 박자를 밪추기도 하고 고개도 끄덕뜨덕하며 음악을 감상힉 시작했따 "첫, 나는 별로인데." 홴지 나 혼자만 왕따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라도 이곳을 나갈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리저리 기웃거리 시작했따 그러기를 10여분 정도 지났을까? 잘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음악의 박자가 점점 드려 지며 노랫소리 도한 점점 낮아지고 부드럽게 흘러간다 싶은 순간 갑자기 아가씨들이 가지고 있던 현악기들이 일제히 끊어지든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낸 것이었다. 따랑~! 그러자 음악에 심취해 듣고 있던 살마들 중 일부-아마도 우리들 중 내력이 약한 사람들일 것이다-가 갑자기 울컥하며 이벵서 피를 토해내며 휘청거리는 거였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선혈을 입으로 토내해며 휘청러리는 거였다. 놀라서 주위를 불러보니 선혈을 입으로 토해내지 않더라도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였따. "뭐, 뭐야! 이것도 공격이야?" 생각지도 못하고 경어보지도 못한 상황에 내가 당황해서 어쩔줄 모라 하는데 모용세가의 전 갖가 내력을 담아 크게 외쳤다 "견디기 힘든 사람들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하시오! 이건 음공이외다1" 음공이란 소리를 이용한 무공을 말하는데 SF에서 나오는 미래형 무기들 주에 음파를 사용하는 무기처럼 내공으로 음파를 조절하여 사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도 하고 싶마현 죽일 수도 있는 무공이었다. 아마 저들은 처음에는 멋진 음악으로 사람들을 심취하게 한 뒤 느리고 부드러운 음악으로 긴장이 출어지게 만든 다음 그 틈을 타서 아까 그 현이 끊어지는 긋한 소리로 공격을 한 모양이었다. "헤에, 살다 보니 음공도 다 겪어보고 말야. 비록 당한 건 아니지만." 나는 내 내력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음악을 제대로 안 듣고 딴짓(?)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단지 아까 날카로운 음에 귀가 좀 따가웠을 뿐이다. 악기를 연주하면 노래르 부르던 여자들은 그 날카로운 음을 신호로 그 뒤로는 날카로운 고음의 악기 소리와 노래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소리는 노래를 잘 듣고 있지 않는 나에게도 귀가 따갑고 가슴이 약간 답댑해지며 파도가 철썩이는 것 처럼 둔중한 무언가가 가슴을 자꾸 두드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음공의 공격인 듯 했다. 모용세가의 전 가주의 말에 의해 견디기 힘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않아 운기를 하고 있었고 견딜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음공을 둟고 자리를 박차고 이층까지 뛰어올라 음악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음악을 연주나느 여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층으로 날아올라 공격하려 하지 음악을 연주하는 여자들 뒤에서 있었던 듯한, 이번에는 노란 색 옷을 입는 여자들이 나타나 그 공격을 제지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떠한 진법에 다른 때는 좀 머리 떨어져 있던 세 여자가 날아와 공격을 막고 공격을 해댔다. 그 여자들에게는 음공의 피해가 없는지 음악이 연주되는 곳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우리 쪽 사람들은 밑에 있으면 견디다가도 위층으로 뛰어으면 코피를 흘리거나 입에서 피를 토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 위층으로 올라가면 음공의 공격이 더 강하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은 여전히 날카롭게 울려왔고 운기하던 자들 중 버티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둘피를 토하며 픽픽쓰러지자 노스님이 안 되겠던지 내력을 담아 크게 되쳤다. 바로 사자후라는 것이었다. "멈추시오!" 그의 말에 음악을 연주하던 여자들 몇몇이 휘청거리고 심한 아가씨는 코피를 흘렸지만 꿋꿋이 버티며 계속 연주나는 데 반해 사자후를 터뜨린 노스님은 그 즉시 코피를 흘리며 신형을 휘청거리다가 결국 버티지 못했는지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역시 아무리 내력이 높은 자라 하더라도 200여명이 넘는 자들의 내력은 한꺼번에 감당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스님의 행등으로 인하여 저들에게 어떻게 대항하면 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동안은 지나가는 식의 이야기로만 몇 번 들어봤던 음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기만 했던 것이다. '훗, 이에는 이로 대항하면 되는 것이구나. 이거 완전히 내공 싸움이었는걸?' 하지만 그 노스님처럼 계속 고함을 지르기는 뭣해서 나도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참으로 우습게도 나는 그동안 항상 가지고 다니던 홍옥 피리의 존재를 이 순간 까맣게 잊은 채 그냥 노래로써 저들에게 대항했던 것이다. 나중에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순간 홍옥 피리로 저들에게 대항했다면, 보물을 써먹기도 하거니와 피리 부는 실력을 저들에게 알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나는 피리를 까맣게 잊은 채 2층에 있는 여자들을 바라 보며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마나를 가득 담아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기뻣어요. 당신이 웃어주었어요. 모든 걸 녹이는 미소로 봄은 아직 멀어서 차가운 땅속에서 싹트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령 힘든 오늘이라해도 어제의 상처가 남아 있다해도 믿고 싶은 마음으로 풀어 나간다면 다시 태어나는 것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변해갈 수는 있으니까 Let's Stay Together 언제나 -후르츠 바스켓- 나는 정말 정성을 다해서 노래를 불렀다. 원래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이유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사용해서 대결(?)을 하는데 좋아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에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악기의 현이 끟어지거나 예쁜 아가씨가 선혈을 입에서 뿜어내며 휘청거리는 모습 또한 과히 보기는 좋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일 절만 부르고 입을 다물었는데 이상하게도 얼굴이 되게 따끔따끔 거리는 거였다. 의아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다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예요?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요? 내가 그렇게 음치예요?" 물론 난 내 스스로 생각해도 어느 정도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음장 박자를 ath 맞추는 음치가 불렀다고 해고 그렇지, 나 때문에 저들의 음공 공격이 멈췄으면 응당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왜 저렇게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의아해 하고 있는데 운기조식을 다 끝마쳤는지 바닥에 양반다를 하고 앚은 채 눈만 말똥말똥-노인에게 정말 안어울리는 표현이지만- 뜬 채 날 바라보고 있던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피식피식 웃더니만 할아버지를 보며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허... 이거 참. 이보게, 은가주. 비록 상황이 참으로 안 따라주지만 말 안할 수가 없겠구만. 그래, 손주 사위는 언제 볼 예정인가?" '잉? 갑자기 웬 손주사위?' 느닷업는 그의 말에 더욱더 어리둥절해 있는데 엄마의 묘~한 눈초리와 함께 황당한 전음이 날아들었다 [어머, 지인아아~? 도대체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낭군님이 생긴거니? 비록 진이가 그럴 나이가 되기는 했지만, 엄마에게 말도 안 해주다니 참으로 서운하구나아~!] [예에에에~? 아니, 그게 무슨소리예요?] 하지만 엄마의 전음을 듣기도 전에 아번에는 아빠의 전음이 날아왔다 [우리 진이는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그래, 네가 맘에 두고 있는 정인은 언제 소개시켜줄 작정이냐?] {허거걱? 잠깐 잠깐마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예요? 정인이라니? 누가? 혹시 저 몰래 정략 결혼 건수라도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들에 나는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다. 그러자 엄마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니, 뭘 rfjgrp 놀라는 거니? 네가 방금 노래로 너에게 정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지 않니? 엄마는 네 노래의 주인공이 참으로 궁금하구나.} {노, 노래?} 그러고 보니 내가 부른 노래는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부르는 노래였다 '허걱! 잘못 선택했다!' 그제야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챈 나는 허털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노래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깜빡한 내 잘못이었던 것이다. "핫핫, 학, 에고. 그거 아무 생각없이 부른 건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볼을 긁적이며 허마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내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껄걸 웃었다 "아무렴. 우리 진이가 이 할아비에게 말도 안 하고 그럴 리는 없지. 암, 암, 나도 그런줄 진작에 알고 있었느니라. 헛헛헛...." 그런데 왠지 할아버지의 웃음은 안도감에서 흘러나온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아빠도 슬쩍 몸을 돌리더니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는 것이 아닌가? '뭐야, 뭐! 아까는 당장이라도 결혼시키려는 분위기더니만 지금에 와서는 왜 안도하는건데? 그럴 거면 차라리 그 노무시키가 누구냐고 펄펄 뛰기라도 할 것이지.. 쳇, 하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서 그러지는 못하겠구나.' 이렇게 우리가 잠시 상황에 안 맞는 해프닝을 벌이고 있을 때 맨 처음 나타났다가 음악이 시작되자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 온몸을 검은 복장으로 휘감고 있던 남자가 나타났다. "아 아, 역시 준비가 너무 미흡한 것 같군요. 이거 참 죄송스럽습니다. 여러분들을 제대로 만족시켜 드리지 못해서 말이죠 그래서 그걸 사과하는 의미에서 이걸 준비했습니다만, 너무 급하게 준비해서 이것마저도 마음에 안 드실 수 있겠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 남자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자 우리가 긴장한 채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음악을 연주하던 여자들이 뒤로 물러나 모습을 감추고 대신 굵고 커다란 서궁을 든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 석궁에는 당연하겠지만 우리를 향한 화살이 장전되어 있었다. "헉! 저건 강노!" 강노라는 건 화살촉과 대가 모두 강철로 되어 있는 화살을 말한다. 게다가 화살촉에는 일반 화살촉과는 달리 자그마한 갈고리 같은 것이 달려 있어서 사람이 맞으면 살 속을 파고들어 살을 꽉 물고 놔주질 않는다. 그래서 살 속에 박힌 화살을 뺄 때에 살이 한 움큼 뜯겨져 나오게 되어 있다는 좀 잔인한 무기이다. 게대가 화살의 촉과 대가 다 강철로 되어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화살보다는 몇 배 강하여 웬만한 고수의 호신강기(몸을 실드처럼 내력으로 둘러싸 보호나는 것. 내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강하다)조차도 뚫을 수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경악에 싸여 어떻게든 몸을 피할 곳을 찾으려고 했지만, 공간이 넓다고는 해도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탓에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데다 위층에서 내려다볼 때에는 아래층의 구석구석이 다 뵈는 구조로 되어 있었기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첫 번째 강노들이 발사되어 허공을 가르고 우리엑게 쏘아져 왔다. 실력있는 사람들은 검을 들어 날아오는 강노를 쳐 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강노를 맞고 쓰러져 갔다 "이런이런,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외다."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씹어 내뱉듯이 말했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역시 저 문을 부숴야 할 것 같소이다. 엄호를 해주시겠소?" 할아버지의 말에 모용세가의 전 가주와 노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강을 형성하여 문을 내려치는 건 현 시대의 최고 고수라고 일컬어지는 할아버지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위에서 할아버지가 그러도록 그냥 내버려 둘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올까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듯 모용세가의 전 가주와 노스님이 할아버지의 등 뒤를 막아서자 갑자기 집중적으로 그쪽으로만 강노를 날리는 거였다 강노의 세례는 암기세례도 두렵지 않는 노스님과 모용세가의 전 자구도 어쩌질 못하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할아버지가 검강을 만들어 문을 부술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했지만, 단 한번 쏟아진 강노의 세례에 결국 모용세가의 전 가주는 허벅지와 어깨를 노스님은 복부를 밪고 맥없이 물러나야 했다 "허어... 결국 우리는 이곳에서 끝을 봐야 하는가..." 모용세가의 전 가주와 노스님이 부상을 당하자 검강을 형성을 포기한 할아버지는 그 둘을 이끌고 강노세례를 피한 뒤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바로 민이와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훗훗훗, 역시 우리는 정의의 사도라니까] [누나, 그만 장난치고... 정말 무슨 방법이 있는 거야? 현철을 부술수 있겠어?] [아, 두고 보면 알아. 너는 대 등 뒤를 잘 보호해 주기만 하면 돼] 말은 긇게 했지만, 내가 나선다고 한 곳은 현철로 된 문이 버티고 있는 곳 바로 앞이 아니라 그와는 좀 떨어진 곳이었기에 위층의 시선을 끌지 않아 그중 공격은 받지 않고 있어 민이가 특별히 따로 보호해 줄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맞을 확률이 극히 미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재수 없으면 누군가가 맞지 않기 위해 쳐낸 강노가 엉덩이에 꽂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나 그 상태가 일어날까 봐 민이에게 부탁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느 다시 한 번 위를 슬쩍 바라봐 내가 시선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목적한 곳에 가서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워터~!" 내가 목적한 곳은 철문 옆에 있는 벽이었다. 이곳 너머는 아마도 복도일 것이다. 철문 크기가 복도의 너미와 같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벽들은 네모로 자른 돌들을 층층이 쌓아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 돌들 틈으로 물이 새어 들게 하려는 것 이었다. 그쪽에 충분히 물이 새어 들어간 것 같자 나는 철문을 중심으로 반대 편에 있는 벽으로 달려가 또한 번 벽에다가 물이 새어들게 만들었다. 철문 위쪽에는 내가 직접 할 수 없어서 물을 마음먹은 대로 조종할 수 있는 민이에게 부탁했다. 혹시 신께서 이곳에서는 정령을 불러낼 수 없으니까 대신 민이를 붙여주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민이는 물과 바람을 참 잘 다루었다. 그렇게 철문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있는 벽들을 물로 흠뻑 적시자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반 레일!" 이것은 손가락에서 거미줄과 같은 실을 뽑아내어 얼리고 시은 물체나 상대에 닿게 하여 꽁꽁 얼려 버릴 수가 있다. 효과 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은밀하게 행동해야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단지 단점이 있다면 이 실에 닿는 모든 것을 얼기 때문에 실 조종에 주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벽에 등을 가까이 댄채 손을 뒤로 돌려 등과 벽 사이에 노고 실을 길게 빼 내어 철문 주위의 벽을 둘러싸도록 조종했다. 그 벽들은 물에 흠뻑 젖어 있어서 실에 닿자마자 금방 얼어붙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누나, 하려면 빨리 해. 벌썸 많은 사람들이 당하고 있다고.] [조금만 기다려. 나도 빨리 하려고 노력 중이야. 그렇다고 우물에서 숭늉 찾을 수는 없잖아.] [그래도 서둘러] [알았어, 알았어] 민이의 재촉이 없었어도 나는 상황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혀연이었으므로 스스로도 조급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얼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계획은 간단했다. 철문을 직접 부수려면 그것이 현철이라 부수기도 어렵거니와 그 철문을 부수려는 눈치만 보이면 강노의 집중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러니 철문이 아니라 철문을 지탱하고 있는 돌벽을 무너뜨리면 자연적으로 철문이 뒤로 넘어갈 테고 입구도 더 커져 좀 더 낫지 않을 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벽을 부수는 방법은 돌틈 사이에 물을 흠뻑 적신 다음 그 물을 얼려 버리면 돌틈 사이에 생긴 얼음 때문에 돌들이 허술하게 될 테고 그때 큰 충겨을 주어 넘어뜨리려는, 일명 과학과 마법이 적절하게 조화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됐어. 이제 충격만 주면돼!] 나는 벽이 꽁꽁 얼어붙은 것을 확인하자 재빨리 철문에서 떨어진 다음 마지막 단계를 실행했다 "윈디 위더 피스트!" 그러자 바람으로 형성된 거대한 주먹이 철문을 강하게 때렸다. 꽝! 너무 세세 때렸는지 엄청 큰 소리가 났다. 덕분에 홀에서 강노를 쏘는 궁수들이나 밑에서 강노에 맞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나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추고 모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를 했나요?" '에거, 오늘은 내가 시선 집중당하는 날인가 보네.' 철문 앞에는 바로 나밖에 없었기에 내가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실없이 웃으며 슬쩍 뒤로 시선을 돌려보니 거기에는 여전히 그 철문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이거 왜 안넘어가?' 그렇게 큰 소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자 나는 슬슬 불안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거, 안 넘어가면 지금이라도 파이어 에로우를 확 쏴버릴까?' 그런데 그때였다. 철문 주위의 얼어붙은 벽에 천천히 금이 가기 지삭한 것이다 우직, 우직, 우지지직! 그리고 그 금은 마치 나무가 가지를 뻗어가듯이 좌우로 뻗어가듯이 좌우로 뻗어가며, 그 뻗어가는 속도를 더하더니만 결국은 다 부서져 내렸고, 덕분에 철문이 지탱할 곳을 잃어버려 뒤로 넘어가 버렸다 꽈당! "오우 예! 그럼 그렇지 지가 안 넘어가고 배겨?"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폴짝폴짝 뛰며 이제 커다랗게 생긴 입구를 통해 복도로 내달았다. 그러자 뒤에서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입구를 통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나는 그 사람들의 물결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려 달렸다. 비록 여전히 횃불이 하나 없는 복도였지만, 뒤쪽에서 희미한 빛이 비춰주고 있ㄲ었으므로 괜찮았다. 그런데 그 빝에 의지해서 보니 복도 끝에 있는, 우리가 들어올 때는 잠겨 있지 않았던 정문이 떡하니 잠긴 채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훗, 이거나 먹어라, 매직 애로우!" 내가 손을 휘두르며 소리치자 다섯 개의 마법 화살이 나타나 정문에게 달려들어 폭발하였다. 덕분에 정문은 산산조각나서 내가 정문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를 막아서지 못했다. "우싸, 일차다! 오~ 밝은 태양, 너 참 아름답다~!" 밖에서는 이제 막 지려 하는 태양이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하여 서편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 밖과 이곳을 벗어나는 길목인 계곡 위에는 다행히 아무런 공격도 없어서 우리는 무사히 산 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제1본진과 조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죽어서 아침에 출발할 때의 그 활기 찬 모습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우리가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건물을 샅샅이 뒤져 보지는 못했지만, 저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함정을 판 것을 보아 그곳에는 사파 연합의 모임이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단지 우리 정파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하여 그런 말을 퍼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의도대로 이곳으로 쳐들어와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가게 생겼으니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었을 것이다. 우리 쪽은... 아마도 이제 무림맹으로 돌아가면 지도자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위하여 싸우느라 엄청 바빠질 것 같았다. 뭐, 그래도 하나 위안이 되는 것은 이번 일로 정파 사람들도 크게 혼났을 테니 사파를 너무 깔보고 얕보는 시선이 조금은 고쳐 졌을 거라는 거다. 아, 글고 본격적으로 싸움에 돌입하기 전에 그렇게나 나에게 신경 쓰이게 하던 모용소소는 하도 정신이 없는 상황만 겪다 보니 깜빡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맨 처음 습격당할 때와 독벌 떼에 공격당할 때에는 운이 좋게 무사했지만 건물안에서 음공에 공격받고 강노에 허벅지를 찔려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녀 정도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곳에서의 일로 목숨을 잃거나 다시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의 부상을 당한 사람도 많았으니까 말이다. 아린이야기 41화 굴러가는 눈덩이? 번호:344 글쓴이: 『∑。발랄꼬마소녀♀。』 조회:86 날짜:2002/09/07 17:53 .. 오타가 쬠 이써드 봐쥬시구여~ 쫌 보기 어려울 수도 잇겟네여. 그래드 걍 보세여~ ================================================================== 제 41화 굴러가는 눈덩이?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길은 침울 그 자체였다. 뭔가 이익을 얻을까 싶어 호기 있게 이 싸움-비록 우리가 일방적으로 침입해 들어간 거였지만-에 참여한 중소 문파들은 어차피 자신들에게 돌아올 콩고물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무림맹까지 갈 것도 없이 그곳에서 곧바로 자신들의 문파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 세가 사람들도 괘 많이 부상을 당했으므로-다행히도 우리세가 사람들 중에는 사상자가 없었다. 그들 모두를 지키기 위해  와 예철, 희여송은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민이까지 여러모로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뭐 하고 있었느니-무림맹에 가야 할 할아버지와 아빠, 희 사형, 그리고 몇몇 호위무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부상자가 너무 많았기에 우리끼리 갈 수는 없어서 가까운 표국에 의뢰를 하기로 했다. 다행인지 우리 세가뿐만이 아니라 이번 일에 참여한 대부분의 문파와 세가에서 부상자를 옮기기 위해 표국을 이요하려 했기에 우리는 그들과 같이 표국을 찾으러 나섰다. 그런데 좀 우습게도 우리가 진을 친 곳에서 표국이 있을 만한 가장 가까운 성읍이 바로 난정이었던 것이다. 그곳은 사파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선봉대가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 한바탕 소란을 부렸던 성읍이었는데 이긴 것도 아니고 왕창-...인지는 모르겠지만-깨져 놓고 부상자의 운송을 부탁하기 위해 그 성읍으로 들어가는 것을 여간 내켜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곳은 사파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만큼 그곳에 있는 표국이 사파들이 운영하는 것 아닐까 싶어 여간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따. 하지만 우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의 근방에는 그 성읍밖에 없었고, 만약 다른 성읍을 찾으려 하다면 성한 몸으로도 일주일은 넘게 가야 하는데 그러한 길을 성한 사람보다는 부상자가 더 많은 상태에서 갈 수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좀 더 큰 성읍인 시안까지만 옮겨달라고 하기로 하고 난정으로 들어갔다. 시안은 이곳보다 두 배는 큰 성읍으로 정파의 세력하에 있는 표국의 지점이 있을 터였고, 또한 그곳에는 황하강 줄기가 있었기에 부상자들을 편하게 운반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참으로 공교롭게도 난정은 지리상으로 한쪽이 산맥으로 막힌 데다 그 앞에는 태백산 이라는 커다란 산이 버티고 있는, 섬서의 구석진 자리라서 원활한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 곳이라 표국이 있기는 하지만 자그마한 곳이라 이번에 우를 몰려간 우리들의 주문을 다 수용하기에는 시설도 인원도 턱없이 부족한 곳이었다. 난저에 있는 표국은 모두 3곳. 그러나 그곳 모두가 크지 못하여 이번에 생긴 부상자의 절반도 옮기기 힘들었다. 결국 우리는 급한 부상자들에게 그 표국을 이요하게 하고 나머지는 난정에서 치료를 받으며 몇몇의 사람을 뽑아 직접 시안에 가서 표국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세가로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사파를 습격한 날로부터 거의 두 달이 다 된 날이었다. 참으로 슬픈 일은 그 두달사이에 민이와 나의 생일이 끼어 있는 바람에 올해 우리의 생일 파티는 호공으로 떠버렸다는 것. 뭐, 마침 황하강 위에 떠 있는 상황이라서 조촐하게 생일 축하를 받기는 했지만 덕분에 영향력 있는 문파와 세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민이가 소가주임을 발표하는 일은 또 한 번 뒤로 무한정 미뤄져 버렸다. 그러면서 간절히 바란 것은 다음부터 이러한 큰 싸움을 벌일 때는 큰 표국이 근처에 있는곳에서 싸웠으면 하는 것이었따. 하지만 싸움이란 그런데서 싸우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것인가?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우리가 세가에 도착하지 예 총관을 비롯한 세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따스하게 맞아줬다. 뭐, 항상 그렇게 따뜻하게 맞아주기는 했지만 뭐랄까... 다른 때보다 기분이 남달랐다고나 할까? 그냥 편하게 여행 갔다온 거와 고생고생하다 돌아올 때의 기분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면서 느낀 거지만, 역시 집이 최고다 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저쪽 세계에 있을 할아버지와 아빠를 떠올랐다. '흠...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저쪽 세계로 돌아가는 법을 찾아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만약 돌아간다면 세이몬과 류미르하고의 여행을 잠시 뒤로 미루고 할아버지랑 아빠랑 좀 지내야겠군.' 세가에 머물면서도 나는 얼마 동안은 조용히 지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세상일이란 내 맘대로 되는 법이 없다고 우리가 세가로 돌아와서도 자꾸만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이었따. 누가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무림 세계에서는 정보가 엄청 빠른 것인지 우리가 난정에서 사파를 습격하려 했다가 되려 깨졌다는 소문이 세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 무림에 퍼져 있는 거였다. 물론 세가로 돌아오면서 무림맹이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문이 생각보다 엄청 빠르고 엄청 불려져 있었다. 뭐, 정말 있는지도 없는지 모를 사파 연합장에게 무림맹주가 다시는 습격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했다느니, 9대 문파와 8대세가가 5년간 봉문을 하겠다고 약조를 했다는니 정파의 5대 고수가 사파의 고수들에게 몽땅 깨졌다느니, 정파의 어느어느 문파는 이번에 사파에게 굴복하여 사파 쪽으로 돌아섰다느니, 어느어느 문파는 멸문했다느니 등등...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소문을 들으면 정파가 완전히 멸망한 줄 알았을 거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사파의 힘이 많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었고 이 틈을 이요하여 그동안 숨족여 지내왔던 많은 사파들이 기지개를 켜듯 당당하게 현판을 걸고 문파를 드러내었다. 정파 쪽 문파들이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파의 문파들으 가장 먼저 이번 습격으로 많은 피해를 본 중소 문파들을 습격하여 그들의 세력권을 빼앗아 자신들의 세력으로 만들어 버려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러한 모습들 때문에 강호에 떠도는 소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사실처럼 인식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게 우리가 난정에서 세가로 돌아오는 기간에 발생한 일들이었다. 게다가 이건 남의 일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 은씨 세가의 세력권인 호광지방에서도 사파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게다가 황당하게도 바로 우리 세가가 있는 장서지방에도 커다란 사파의 문파가 갑작스레 현판을 걸고 나타났다. 이름은 촌시럽게도 '흑운방'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흑운방에서 우리의 영향력 아래에 엤는 상당놔 표국의 영업을 자꾸 방해하는 거였다. 표국이 표물을 운반하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여 표물을 빼앗는다든지 상단이 운영하는 상점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린다든지 하는 아주 치사한 수법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방법은 아주 효과를 봐서 상단에서는 매출이 떨어지고 표국에서는 표물을 자꾸 잃어버려 엄청난 보상금을 물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받아 흑운방에 따지러 가면 그들은 오리발을 내민다고 한다. 그들은 일을 할 때, 예를 들면 상단이 운영하는 상점을 방해 할 때는 주변의 난봉꾼들을 동원하는 데다가 표물을 운반하는 표국을 습격할 때도 절대 증거를 남기지 않아 우리가 항의하러 갈 때 증거를 내놓으라고 딴지를 걸면 할 말이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거라곤 표물을 운반할 때 같이 도와준다거나 상점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무사가 끼어 있을 때는 어떻게 알고 절대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잠복하는 식으로 세가의 옷을 입지 않고 표국의 제복이나 상가의 점원 차림을 하고 있어도 그들은 정말 귀신같이 알아낸다는 거였다. 그러나 우리 세가의 무사가 철수하면 또 그러고. "정말 미칠 지경입니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그렇다고 정파인 우리가 직접 그 흑운방이라는 곳을 습격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들의 실력은 우리 세가에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데 그런 녀석들을 어떻게 건드릴 수가 없으니 원." 예 총관은 그동안 쌓인게 많았는지 우리에게 그동안 세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울분을 토해놨다. 이럴 때는 정파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사파라면 남들의 눈 같은 건 좀 덜 의식해도 될 텐데 말이다. 정파는 너무 격식과 명예와 자존심을 따져서 문제다. 하지만 예 총관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 흑운방이라는 곳에서 우리 세가를 너무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예 총관은 장서 내에서는 우리 세가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발붙이기도 힘들 텐데 어떻게 그렇게 꿋꿋이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문파나 무가에서도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상단이나 표국 같은 데서 자금을 받지 못하면 운영해 나가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들은 이 장서 내에서 자금 받는 곳이 아무 데도 없을 텐데 지금까지 흑운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의아스럽다는 것이다. 설마 뒷골목의 깡패처럼 지나가는 행인들의 돈을 뜯어서 유지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 그것도 조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생긴 지 얼마 안되는 시기여서 아직 단서를 잡은 것이 없다고 한다. 예총관의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뭔가 단서를 잡기만 하면 그들을 가만 안 내버려 둘 모양이었다. [헤에, 예총완이 화가 나도 단단히 났나 보네. 흑운방들 걸리기만 하면 아작나겠는걸?] 나는 예 총관이 저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봐 신기하다는 생각에 장난 삼아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돌아온 민이의 메시지는 예 총관만큼이나 분노에 찬 것이었다. [흥, 예 청관만 벼르고 있는 줄 알아? 그때가 되면 내가 앞장서서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감히 그렇게 비열한 짓을 하다니... 소가주로서 절대 가만있을 수 없어!] 의외의 반응에 나는 황당하기도 해서 피식 웃으며 민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허... 야, 뭘 그렇게 화를 내냐?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겪고 지런 일도 겪고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기도 하는 거지] 그러자 민이는 이런 내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뭐야, 누나는 화도 안 나? 우리 은씨 세가를 괴롭히는 녀석들이 있다잖아! 그것도 아주 비겁한 수단을 써서 말야. 그런데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할 수 있어?] [어라? 왜 화를 내고 그래? 누가 나랑 상관없다고 했냐? 내 말은 필요 이상으로 그렇게 흥분해서 날뛰어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선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거지. 이럴 때일수록 진정해야 하지않겠어?] 내 말이 너무 천하태평이었는지 민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날 쏘아보다가 몸을 홱돌려 걸어가며 마지막 메시지를 날렸다 [내가 보기에는 누나는 침착한 것이 아니라 남의 일 구경하는 것 같아] '알, 어라, 정말 화 많이 났네' 식식대며 걸어가는 민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슬며시 웃었다. 물론 민이가 봤으면 더 화냈겠지만 등 돌리고 있으니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와 덕이는 민이가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나에게 말해 주길 바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그들에게도 피식 웃은 뒤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 한마디만 하고 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일찍 잘래." '훗, 그래야 오늘 밤에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민이는 내가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 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은씨 세가의 일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특히나 오늘 그와 같은 일을 들은 이상 흑운방은 그와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후훗,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것도 아주 비싼 이자까지 쳐서 말이냐.' 아마 방금 흑운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갑자기 오한이 들고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그날 밤, 자정이 지나고 이곳의 시각으로 축시 (새벽 1시부터 3시사이)라는 것을 알리는 소리가 났을 때 나는 내 방 창문을 열고 조용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자, 그럼 어디 한번 가볼까나?' 흑운방을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큰돈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장서 내에서 우리 세가만큼이나 큰 장원을 가지고 있는데다 그 장원의 정문에 '흑운방'이라는 금박을 입힌 편액이 걸려있었으니 어디 잇는지 몰라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호오, 여기서 흑운방이렷다?' 찔린 일을 많이 한 탓인지 새벽인데도 장원 내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경계를 철저하게 세우고 있었다. 역시 때린 사람은 다리를 쭉 펴고 못 잔다더니 옛말 그른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으음... 모두 자고 있는 게 훨씬 재미있을 텐데 말야. 하지만 뭐 하는 수 없지.' 나는 조용히 내 마나를 대기에 풀었다. 이번에는 아주 큰 마법을 사용해야 했기에 평소에 사용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마나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 혹운방의 장원 전체를 덮었다. '흐흠, 마나는 준비 완료. 자, 그럼 그대들의 명복을 빌면서....' 그리고 곧 시동어가 내 입에서 조용히 흘러나왔다. "메가 브랜드." 그와 동시에 마치 수십개의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흑운방 장원 전체의 땅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허공으로 엄청난 흙과 먼지의 혼합 구름을 터뜨렸다. 꽈과과광~! '음... 역시 밤에는 흙먼지보다는 화려한 폭죽쪽이 구경하기에 좋은 것 같아. 여기 있는 동안 내가 불꽃놀이할 수 있는 마법을 한번 개발해 볼까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세가의 내 방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 혹시나 마나의 파동을 들킬지도 모르겠지만 흑운방 장원의 허공에 떠 있던 내 모습을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후후후, 역시 복수란 달콤한 것이야.' 다음날 아침, 은씨 세가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흑운방 장원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거리에 나갔다 온 무사가 들은 말에 의하면, 흑운방의 장원 근처에서 살고 있는 모모씨는 한밤중에 갑자기 수십개의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가보았으나, 천둥이 치면 응당 있어야 할 번개는 커녕 비 한 방울도 안 오고 깜깜한 밤에 보이는 것도 없어 어리둥절한 채 그냥 들어갔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크던 흑운방의 건물들이 싸그리 무너져 있더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일이 산신령께서 노하셔서 벌어진 일이라고 강력히 주자하다나 어쩐다나.... 지금 그 난리에서 살아난 흑운방의 사람들이 건물 속에 깔린 사람들을 구조하느라 엄청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허어... 거참, 제 평생에 이렇게 놀랍고 황당한 일은 처음입니다. 멀쩡하던 장원이 하룻밤 사이에 와르르 무너졌다니요." 예 총관은 연신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러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아닌가? "뭐예요? 왜 날 보는데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난 분명히 어제 일찍 잤다고요. 그치, 유?" 시침 뚝 떼며 유를 바라보자 유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제 피곤하시다면서 일찍 들어가 주무셨습니다." 그러자 예 총관이 다시 허허거리며 웃었다 "허허허, 그러셨습니까? 허허허, 뭐 어쨌든 이걸로 세가의 골칫덩어리가 사라진 셈이로군요. 제도 한시름 놓았습니다." 오랜만에 먹는 세가의 풍성한 아침 식사를 기분 좋게 마치고 아침 수련을 준비하려고 내 방으로 가는데 민이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옆구리를 꾹 찌르며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지? 누나가 그런거지?] 하지만 나는 시침 뚝 떼고 되물었다 [뭘?] [뭐긴 뭐야, 흑운방 폭파사건 말야. 누나가 그런거지? 그 큰 장원을 단 한 순간에 폭파시킬 수 있는 자가 누나밖에 더 있어?] [글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 그런 건 아무도 장담 못하는 거야.] [장담이고 뭐고 간에 누나가 한 거 맞기?] [훗.... 글쎄다. 세가의 일을 남의 일처럼 보는 내가 과연 그런 수고스러운 일은 할까나?] [뭐야,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화난 거야?] [어머, 화가 난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니?] [뭐야, 누나. 장난치지 말고 말해줘. 누가 한 거 맞지?] [그래, 어제 힘 좀 썻다. 됐냐?] [쳇, 그러거면 나랑 같이 가지 누나 혼자 가냐?] [핏, 네가 가서 뭐하게?] [음... 누나가 땅을 폭발시켰으니 나는.... 천둥 번개라도 내려줄 걸 그랬어. 진짜 하늘이 노여워서 그런 것처럼 보이게 말야.] [푸핫,그것도 좋네. 어쨌든 증.거.만 안남으면 되는 거니까.] 나는 솔직히 이 정도에서 일이 마무리도리 줄 알았다. 얼마 후면 무림맹에서도 지루한 말싸움의 회의가 끝날 것이고, 그러면 할아버지와 아빠, 희여속이 되돌아와서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나쁜일은 연달아 생긴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흑운방에게 보복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흑운방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싸그리 사라져 버렸고, 장서 내에서는 다시금 평화가-이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찾아왔다. 우리와 헤어져 무림맹으로 간 할아버지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무림맹에서의 싸움이 길어지나 보다라고 여기고 있는 와중에 새각지도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에엑? 사파연합? 그건 무림맹을 끌어내기 위한 헛소문이 아니었어요?" 나의 놀람에 찬 질문이 마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예총관을 바라보았다. 예총관은 자신도 당황스러운지 조금 침착성을 잃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이..남리혜지방에서 정식으로 선언되었다고 합니다." "남리혜지방이라고? 거긴 섬서와는 정반대의 지방이잖아요?" 민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엄마를 향해 확인차 묻자 엄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그곳은 바다와 맞붙에 있는 곳이지. 그리고....." 엄마의 말을 뒤이어 예총간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남궁세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무림맹에서 날아온 급보에 의하면 그들은 우리 정파 무림맹이 아무 죄도 없는 사파의 한 문파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힌것에 대해 정파 무림의 한 기둥을 치겠다고 선전 포고해 왔답니다." "설마... 그 정파의 한 기둥이라는 것이...." 예철의 약간 긴장된 말에 예총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 집안 식구들의 입에서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습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남궁세가를 도우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민이의 말에 예 총관은 고개를 가로로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만... 도련님, 저들이 남궁세가를 치겠다고 통보한 날짜는 바로 3일 전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가 뭔지... 그럼 지금 남궁세가는 어떻게 되었죠?" 민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짓다가 힘없이 물었다. "그게... 무림맹에서 온 급보에는 남궁세가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파 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저희 세가로 급보를 보내준 듯합니다. 알아내는 즉시 다시 연락이 올 겁니다." "허어... 이거 참, 마치 잘 짜여진 각본 속에서 우리 정파 무림맹이 놀아난 것 같군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예헌이 허탈한 듯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으니 나는 머리 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모산파의 도사가 없었네요." 뜬금없는 내 말에 모든 이들의 의아한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나? 모산파의 도사가 없다니." "아니, 생각해 보니까 이번에 우리를 섬서지방으로 몰려오게 했을 때 말야, 엄청난 준비를 하고 이릴 기다리고 있었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단목세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람들아고 같은 편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뭐, 사람을 광인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 흔한 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내가 지금까지 그런 약이 있다는 소리를 못들은 걸로 보아 그들이 한패거리일 확률이 높아. 게다가 그들은 모용세가와 우리 세가를 습격한 강시들을 만든 사람들과도 한패거리고 말야. 한마디로 그들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거지. 그런데 우리에게 큰 피해를 주고 싶었다면 왜 강시들을 동원하지 않았지? 우리가 그 수상한 건물 안에서 음공에 의한 공격을 당하여 도망칠 때 건물 밖에 강시를 대기시켜 놓았더라면 우린 아마 꼼짝없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텐데 말야. 아주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혹시 다른 사용할 곳이 있었던 건 아닐까?" "뭐야, 그럼 누나는 그 강시들이 남궁세가를 습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그렇다면 정파 무림맹을 꼬득여 그 사파의 건물을 습격하게 한 건 남궁세가를 칠 빌미를 잡으려 했다고 봐야 하는데... 음...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손에 넣으려고 할 만큼 남궁세가가 가치가 있는 걸까?" 정파 무림맹과 남궁세가를 놓고 볼 때 정파 무림맹 쪽이 훨씬 무게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내 생각은 좀 논리적이지 못한 것 같아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끝맺느데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예 총관이 새하얗게 질리며 중얼거였다. "설마...." 그 모습에서 뭔가 힌트를 얻었는지 민이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혹시 마공 비급의 조각을 얻으려고 그랬던 걸까? 사파도 양지로 이끌어내고 남궁세가에 보관 중인 마공의 비급도 얻어내고 말야. 이건 일석이조네?] "음... 하지만 남궁세가로 쳐들어간 것이 강시가 아니라면 내 논리는 완전히 틀린 게 되는 걸요. 뭐, 어쨌는 지금은 남궁세가가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그렇겠군요. 그럼 무림맹에서 또 소식이 오면 즉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 총관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민이는 거의 나와 같이 생활을 했으므로 나와 함께 우리의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총관을 비롯한 집안 식구들과 헤어지고 오는 동안 내내 생각에 골몰한 채 걸음만 옮기던 녀석이 갑자기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누나 말이 맞다면 마공 비급의 조각을 모으려는 일당이 사파 연합이라는 소리네?] 민이와 내가 마공 비급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나와 민이 둘만의 비밀이었기에 우리를 따랑는 예성구를 비롯한 유와 덕이가 못 듣게 하려는 의도였다 [모르지. 그들이 사파 연합을 주도한 사람들인지, 아니면 사파 연합의 일부분인지, 아니면 그 자체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하지만 그들과 사파연합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건 거의 확실하지 않을까 싶어.] [그렇다면 남궁세가로 쳐들어간 이들이 강시들이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거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소리지. 내 생각은 사파연합이 마공 비급의 조각을 모으는 일당들이라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는 거거든. 하지만 남궁세가를 친 이들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사파 연합과 마공을 모으는 일당들은 완전히 다른 세력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차피 그 두 세력 모두 정파 무림맹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으니 협력 관계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뭔 소리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들이 한패거리란 소리잖아] [뭐, 말하자면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거지] [그럼 간단하게 한패걸라고 말하면 도지 뭘 알아듣지도 못하게 장황하게 늘어놔?] [아니, 뭐... 난 이럴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뭐, 하지만 그들이 한패거리든 아니든 문제는 남궁세가가 과연 자신들의 세가를 지킬 수 있을 건인가 하는 건데... 만약 남궁세가가 사파연합의 손에 들어간다면 남리혜지방이 사파의 영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 [그래 봤자 정파의 영역에는 갑자기 양지로 드러난 사파의 문파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거 몰라? 우리 세가만 해도 얼마 전까지 흑운바이라는 사파의 문파 때문에 얼마나 귀찬았냐?] [음... 그렇긴 하군. 헤에... 그렇다면 바로 지금 시대가 정파의 수난 시대란 말인가?] [맞아. 아마 지금 무림맹은 엄청 골치가 아플 거야. 사파들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려 하지 않을걸?] [한순간의 판단 미스로 문제가 점점커지고 있군.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면서 순식간에 커지듯 말야.] [지금 이 상황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정말 그렇게 될걸? 사파가 지금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정파에 비한다면 그 세력이 너무 미약하거든. 정파의 세력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건 아직 소문에 불과하니까. 아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제대로 정리 못한다면 그 소문은 사실이 되고 말거야] 우리가 기다리던 남궁세가의 소식이 무림맹에서 전해지는 대신, 일주일 후에 할아버지가 약간 다급함이 담긴 얼굴로 갑작스레 돌아왔다. 온다는 전갈도 없이 정말 갑작스레 들이닥친 거라 세가 사람들 모두 어리벙벙하여 다급하게 할아버지를 맞았다. "죄송합니다. 마처 연락을 받지 못하여 마중 나가지 못했습니다." 예 총관이 제일 먼져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건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기 전에 왜 연락도 안 했냐고 책망하는 듯했다 "자네가 미안할 건 없지. 내가 연락을 안 한 것이니까. 급하게 오느라 미처 연락을 하지 못했네." "무림맹에서의 일은 모두 해결 된 것입니까?" 이번에는 배 숙부가 물었다. 배 숙부는 사파 연합을 치러 갈 때 우리와 같이 가지 않고 세가에서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무림맹에 갈 때도 같이 동행을 하지 못했었다. 무림맹에서의 일은 나도 무척이나 궁금했기에-과연 사파 연합을 치러 갔다가 패하고 돌아온 데 대한 책임을 누가 지게 될것인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할아벚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는 듯한 긴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결은 무슨... 회의를 미처 끝내기도 전에 정신없는 소식들이 계속 전해져서 지금 무림맹은 완전 쑤셔진 벌집 꼴이 되어 있지." 그런 상황인데도 세가로 돌아온 할아버지가 의아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그런 우리의 시선을 느낀 듯 할아버지가 재차 입을 여셨다. "예 총관, 우리 세가로 손님이 오기로 했네. 아마 내일이나 모레 쯤이면 도착할 게야. 그들이 오기 전에 먼저 세가에 도착해 있으려고 엄청 서둘렀지. 그러니 자네가 손님 맞을 준비 좀 해줬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저희 세가를 방문하시는 겁니까?" "흐음..사천당문에서 올 걸세. 가주가 직접 온다니까 손님을 맞이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주게나." "사천당문에서 갑자기 왜 저희세가를 방문하는 건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민이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불쑥 묻자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그들은 날 만나려고 오는 거란다. 그래서 내가 세가로 달려온 것지. 그들이 무림맹까지 오는 것보다는 나와 그들이 우리 세가에서 만는 것이 훨씬 빠를 테니까." "음... 급박한 상황인가 보죠? 할아버지가 상황이 안 좋은 무림맹을 벗어나실 정도니까." 이번에는 내가 묻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나도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른단다. 그들이 와보면 알게 될 게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그 다음날 정오가 좀 넘은 시각 사천당문의 사람들이 우리 세가에 들이닥쳤다. 그렇게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장가을 따라 배를 타고 천천히 편히 왔을텐데 얼마나 급했으면 -원래 뱃길이 조금 느리다-말을 타고 사천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모양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급히 달렷는지 막 우리 세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은 거품을 물고 뻗기 일보직적으로 보일 만큼 지쳐 있었다. '뭐야, 뭐가 저리 급한 거야?' 사천당문의 가주는 그 급한 여세를 몰아 그들을 맞기 위해 달려나온 우리 세가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만 할아버지를 끌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급히 사라졌다. '뭔진 모르지만 급하기는 엄청 급한가 보네.' 민이와 나는 할아버지와 사천당가의 가주가 사라지자 얼른 시선을 교환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어차피 사천당가의 가주와 같이 온 수행원들의 대접은 우리의 윗서열인 아빠와 배 숙부가 맡아서 할 테니 인사를 끝낸 우리는 슬쩍 빠져도 상관없을터였다. 뭐, 우리와 같은 서열인 당연화와 당세민, 당세운도 그 일행의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폼으로 보아하니 대접을 받기보다는 방에서 쉬기를 더 원하는 것 같아서 '쉬시고 나중에 이야기하죠'란 말만 건네고 헤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그 자리를 빠져나온 민이와 나는 서둘러서 내 방으로 뛰어갔다. 엄청 급하게 달려온 사천당문의 가주와 할아버지가 대화하는 것을 엿보기 위해서였다. 문론 할아버지가 나중에 우리에게 말해 줄수도 있겠지만 마공에 대한 이야기처럼 당분간은 말 안해 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사 말해 줄 만한 내용이라고 해도 한 다리 건너서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훨 낫지 않겠는가? 유와 덕이도 떼어놓고 민이와 단둘이 내 방으로 뛰어들어 온 나는 빠르게 결계를 치면서 민이에게 투덜댔다 [야, 너도 용인데 결계하나 못치냐? 이렇게 바쁠 때 네가 결계를 쳐주면 내가 할 일이 절반으로 줄어들잖아!] 그러자 민이가 미안한지 머쓱학 웃어 보였다. [미안, 누나. 하지만 난 누나처럼 기의 파장을 숨기는 결계 같은 건 칠줄 모르는 걸. 내가 만들 수 있는 결계는 결계 자체가 기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 거야. 대신 내가 이렇게 창문도 맏고 앉을 자리도 준비하잖아.] [야. 그정도 하는 건 당연한 거지. 같이 보면서 너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있느면 돼?] 나는 민이에게 그렇데 톡 쏘아붙이고는 민이가 끌어당겨 놓은 의자에 앉으면서 허공에 화면을 떠오르게 했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사천당문의 가주가 우리에게 낯익은 장소에서 막 자리를 잡으며 앉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다 [어, 저긴 할아버지의 서재 아냐?] [맞네. 하긴 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우리도 함부로 못 들어가니까 조용히 이야기 하기에는 적당한 장소지.] 민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우리가 서두른 보람이 있었어. 할아버지의 서재는 누나 방보다 훨씬 가까우니까 말야. 조금만 늦었어도 앞부분을 놓칠 뻔했네.] [쉿, 이제 말하려고 한다] 당가주에게 차를 따라준 할아버지는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라한 모금 마시더니 힐끔 눈앞에 앉은 당가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마셔달라고 유혹하고 있는데도 마실 생각은 않은 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한동안 할아버지의 서재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아마 할어버지는 당 가주가 직접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당 가주가 도통 입을 열 생각을 안 하자 결국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허어, 급한 일이라고 바쁜 사람 무림맹에서 불러놓고 뭐 하고 있는 건가? 지금 도 닦고 있나?> 그러자 당가주가 할아버지를 힐끔 보더니 피식 웃었다. <바쁘긴... 모르긴 몰라도 그곳에서 제일 한가하게 있었을걸? 무림맹 장로랍시고 개폼잡고 있는 노친네들 말싸움을 재미있게 구경하면서 말야, 모르지, 혹시 그 자리에 땅콩이라도 까먹으면서 구경했을지> 저 당 가주도 무림맹 장로 회의를 안 좋게 보는 모양이었다. '호오... 개폼이라 그보다 더 적당한 표현은 없는 것 같군.' <그래, 땅콩 까먹으며 재밌는 구경하고 있던 날 불러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다 늟어 빠진 자네 얼굴이나 보여주려고 날 불렀어?> 할아버지의 농담에 당가주는 다시 한번 픽 웃었지만 그건 잠시뿐 그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폼을 보아하니 바야흐로 본론이 나오려는 모양었다. <에휴.. 자네, 내 셋째 놈 알지? 아직 까지 결혼 안 하고 혼자 설치면서 말썽만 불러일으키는 놈.> <물론 알지. 아니, 그런데 왜? 또 뭔일을 저질렀어?> 할아버지의 질문에 당 가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질러도 아주 큰일을 저질렀지. 이휴, 내가 늘그막에 얻었다고 오냐오냐 키우는게 아니었는데... 이놈이 지가 한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고나 있을지...> <왜? 이번에는 또 뭔일이냐? 어디 딴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라도 한 대?> 할어비지의 말을 보아하니 할아버지도 그 당가주의 셋째 아들에 대해 잘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잠깐, 사천당문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 세가는 철저하게 혈족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세가처럼 재능있은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여 세가의 일원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 세가의 핏줄이 아니면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세가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식솔들(집안일을 해 주느 사람들. 하인, 하녀 등등)마저도 당씨 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가문의 무공이 밖으로 누출되는 것을 극히 꺼려하여 출가외인이 될 딸에게는 절기를 전수하기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절기를 전수받으려면 죽을 때까지 당씨 집안의 사람이 될 수 있게 독신으로 살거나 데릴사위를 얻어 사위에게 당씨 성을 받게 했다. 그러한 집안이나 자신의 잡안에 데릴사위가 되는 건 절대 못 봤기에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추측은 빗나간 모양이었다. 당가주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자네에게 달려오지도 않았네. 그것보다 훨씬 큰일이야.> <허어... 이 사람 참 답답허이. 나에게 달려온 걸 보아하니 내 도움이 필요한 모양인데 말을 해야 내가 도와주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당가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을 굳힌 듯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내 셋째 놈이 그걸 가지고 튀었어.> <콜록, 콜록.....> 하필 할아버지가 답답한 목의 갈증을 풀려고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중이었든데,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랐는지 사례가 들려버렸다. <이런, 자네 괜찮은가?> 당 가주가 할아버지의 모습에 자신도 놀라 할아버지의 등을 두드려 주려는 듯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할아버지가 손을 내저어 말리면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콜록~ 난... 콜록, 캑캑.. 하아, 이제야 진정되었군. 커흠,.... 난 괜찮네. 아니, 그런데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자네 셋째 놈이 그걸 가지고 튀었다니?> 당가주는 다시 잘에 엉거주춤 앉으며 차마 할아버지를 바라볼 수 없었는지 시선은 저 머나먼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말 그대로네.그걸 가지고 도망쳤어> <설마... 그걸?> <그래, 그걸.> <미치겠군, 그놈에게도 그게 뭔지 알려줬어?> 할아버지가 이마를 짚으며 묻자 당가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그놈은 그게 타 문파의 절기인 줄로만 알아.> <그 녀석에게는 숨긴 곳을 알려주지 말지 그랬어?> <말안했어.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녀석의 잔머리 회전이 얼마나 빠른가? 자신이 숨긴 장소를 추측해서 알아낸 뒤에 빼간 거야.> <허참.... 아니, 그놈이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또 가르쳐 달라는 절기를 위험하다고 안 가르쳐 줬어? 아님, 달라는 거 안 줬어?>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 글쎄 그놈이 천독절명침통을 달라는 거야. 자네 같으면 그 위험한 걸 그놈에게 주겠나? 그래서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불가하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놈이 그걸 가지고 튄 거야.> <뭐어? 그놈이 천독절명침통을 달라고 했다고?허어... 참....> [천독절명침통? 그게 뭐야?] 내가 민이를 돌아보며-민이가 나보다는 무림에 대해서 아는 게 많다-묻자 민이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암기인 것 같은데... 이름을 보니 되게 위험한 건가 봐] <우리가 독문에서 빼앗아 보관하고 있다는 걸 그놈이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당가주가 한숨을 축축 내쉬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허어... 큰일났군. 그래, 그놈은 못잡았겠지? 한번 숨었다 하면 찾기 힘든 놈이니까.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냈나? 혹시 우리 지역이라면 내 세가의 전 무사를 풀어서라도 같이 찾음세> 그러자 당가주가 다시 한 버 푹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이지... 또 다른 문제가 끼어 있는데, 요즘 그놈이 웬 여자하고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 청기방의 기녀라서 그냥 젊은 날의 바람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기녀하고 같이 사라졌더군. 그래서 좀 알아보니까 그 기방에서도 그 기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더라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기녀로 채용해 달라고 사정했다는 거야. 용모도 반반하고 가무 실력도 괜찮아서 기용했더만 아, 다른 손님을 일체 받지 않고 오로지 내 셋째 놈에게만 접근하더니 녀석을 휘어잡았다더군. 그리고 그래도 둘이 같이 사라진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셋째놈이 얼마나 말썽을 부렸나?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사천지방에 우리 세가의 정보망이 쫘악 깔렸느데 도통 꼬리가 잡혀야 말이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도대체 종적을 잡을 수가 없어.> 당 가주의 말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음인지 할아버지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그거... 혹시...> 당가주도 할아버지가 뭘 마하고 싶어하는지 알아챈 듯 할아버지가 다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생각도 같아. 아마 그쪽에서 일부러 셋째 놈에게 접근해서 바람을 넣은 것 같아. 후우, 이제 어쩌면 좋겠나? 젠장, 그동안은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 세가에서그런 일이 생겨버리다니.... 그것도 하필 이런시기에....> 당가주가 무지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었지만 할아버지의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 듯 머리를 감싸며 자신만의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도 별 뾰족한 수가 없는지 무지 착잡한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 할아버지의 서재안은 또다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그 침묵을 깬 건 당가주도 할아버지도 아닌 갑자기 서재 안으로 들이닥친 예총관에 의해서였다. 그는 평소의 침착성은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허둥거리는 모습으로 예의를 잊어버린채 -들어오기 전에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것-무작정 서재의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들어와 할아버지를 불러댔다. <가주님! 가주님-!>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민이와 나는 그 뒤의 상황을 볼 수없었다. 왜냐하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유와 덕이가 내 문을 거칠게 두드렸기 때문이다. "주군, 안에 계십니까? 주군?" "아따, 주군? 안들리신다요? 큰일이 생겨부렸는디...." 그에 나는 허둥지둥 화면을 끄고 방 안의 결계를 해제시켰다. 그동안 민이는 원래대로 내 방 창문을 열고 내가 결계를 해제시키자 마자 문을 열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도련님, 주군께선 안에 계십니까?" 그러나 유가 민이에게 대답은 안 하고 나만 찾자 민이 뒤에 서있던 내가 나섰다. "나 여기 있어. 왜 그런는데?" "아따, 주군. 무림맹에서 무사들이 쳐들어왔당게요! 주군과 가주님을 잡으로 왔다카는데...." 덕이는 무지 급한 표정으로 막 떠벌렸으나 그의 말은 유의 제지에 의해 끝을 맺지 못했다 "잡으어 온 게 아니야. 무리맹으로 급히 모셔 가려고 온 것이다." "뭔 소리야? 무림맹에서 우리를 데려가려고 무사들을 파견했다고? 그냥 빨리 와달고 전갈만 보내면 갈 텐데 뭐 하러 귀찮게스리 무사들까지 파견했대?" 그러자 유가 약간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들이 주군을 찾고 있습니다. 어저 가보시지요." 유의 재촉에 고개를 갸웃하며 민이와 같이 본관으로 갔더니 그곳에 익히 잘 아는 주작단과 청룡단이 와서 우리 세가의 무사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사천당가의 사람들은 우리세가를 도와 주려는 건지 우리 세가 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폼을 보아하니 우리를 '모시러' 온 것이 아니라 덕의 말대로 '잡으러'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익히 나와 사이가 안 좋은 그 '청명검' 사건 때의 청룡단장 5인방 중 한명인 화예검 혁진아가 날 발견하고는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며 말을 건넸다 "아하, 이제야 등장하셨군. 저 잘났다고 혼자 날뛸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역시 사파들과 한패거리였어. 난 그럴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지." 뜬급없는 그의 말에 '뭔 소리래요?'하는 시선으로 그곳에서 대치하고 있는 우리 세가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우리 세가 사름들 보다 먼저 주작단장이 나서서 그를 꾸짖었다.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가주님과 은 소저를 모시러 왔을 뿐이다." 그러자 상린공자 목우령이 피식 비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저 계집을 감싸줄 필요는 없습니다. 밝혀진 게 없다니 무엇이 밝혀지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미 저 계집의 죄는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는 청룡단장의 한마디에 풀이 죽어 뒤로 물러나야 했다 "닥쳐라!" 그리고 그때 즈음에 당 가주와 함께 할아버지가 그곳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흐음. 무림맹의 주작단과 청룡단이 우리 세가를 방문하셨군. 하니 보아하니 좋은 일로 방문한 것이 아닌 듯한데?" 그러자 청룡단장과 자작단장이 앞으로 나서서 할아버지에게 포권을 휘해 보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저희는 무림맹주의 명을 받고 가주님과 은 소저를 모시러 왔습니다. 그러니 동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날 데리러왔다? 그래. 자네 둘이 수하들을 이끌고 온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할아버지는 어디까지나 담담하게, 그러나 날카롭고 위엄있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 둘은 나처한 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워낙 급비인 사안이라 저희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림맹으로 가신다면 자연 모든 일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허어. 이유도 모른 채 자네들과 동행하란 말인가? 허허헛," 할아버지는 기가 차다는 듯하늘을 보며 웃음을 흘리더니 갑자기 엄청난 내력을 일으켜 그들을 쏘아보며 매섭게 물었다. "무림맹은 우리 세가를 그렇게 우습게 여기고있단 말인가?" 그 둘은 할아버지의 내력이 감당하기 버거웠는지 새파랗게 질리며 신형을 휘청였지만 뒤로 물러나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은 채 버텼다. 그리고 우선 먼저 청룡단장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크윽... 저희는 단지 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모습에 할아버지는 내력을 거두며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거부한다면 어쩌겠는가? 자네들이 비록 수하 모두를 이끌고 왔다하나 날 데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그러자 주작단장이 청룡단장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림맹주께서는 만약 저희와의 동향을 거부하신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아버님께서는 필시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이니 부디 오셔서 오해를 풀어지시길 간곡히 비탁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공적으로는 무력을 써서라도 할아버지와 날 데려오라고 하긴 했지만 그 개인적으로는 그러길 언치 않는다는 거였다. 공적인 입장과 사적인 입장의 차이라고 할까?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조금은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그래? 흐음... 또 뭔 일이 있었나 보군. 그런데 만약 내가 세가의 무사들을 이끌고 간다면 어쩌겠는가?" "그건 좋을 대로 하라 하셨습니다. 저희는 다지 두분만 모셔가면 됩니다." 그러자 예 총관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출전을... 명할까요?" 할아버지는 예 총관에게 대답하는대신 날 바라보며 물었다. "진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물음에 나는 생긋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는 궁금하네요. 하지만 무림맹은 이걸 잘 알아둬야 할걸요?" 그러면서 나는 이번에는 청룡단과 주작단의 모든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살짝 마법을 사용했다 "이모션 엔센트먼트 피어(원하는 상대에게 원하는 감정을 심어줄 수 있다. 지금 나는 공포의 감정을 심어준 것)!" 그리고 드래곤 피어를 아주 사알짝 섞어서 또박또박 말했다. "난 원래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만약 무림맹에서 할아버지의 피를 보려 한다면 할아버지의 피 한방울방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질 거라는 걸." 그러다가 민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그냥 무림맹르 싹 쓸어버릴까? 그게 훨씬 간편할 것 같은데." 그러자 민이가 피식 웃으며 내 말에 응수했다. "무림맹이 나쁜 게 아니라 그에 소속된 문파들이 나쁜거 아냐? 괜히 불쌍한 무림맹은 건들지 말고 그 문파들이나 쓸어버리는게 어때?" "귀찮게 일일이 쫓아다니며 하나씩 손을 봐줘?"' "나도 도와줄게. 그럼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던 민이는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딱 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러지 말고 우리 내기할까? 만약 그런 일이 생가면 누나랑 내가 누가 더 많은 문파를 처리하는지 겨루는 거야. 내기니까 뭔가 하나를 걸어야겠지?" 그러면서 살짝 윙크를 지어 보이는 민이에게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오, 그거 괜찮겠다." 그러자 꼴에 자존심이 상하는지 상린공자 목우령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헛소리!!" 그 모습에 나와 민이는 쿡 웃으며 말했다. "헛소리인지 아닌지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데... 한번 볼래?" "한 가지 충고를 해주자면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면서 말하면 상대에게 안 먹힌다고요." 그는 지금 내 마법에 걸린 상태여씩에 몸을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며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할아버지도 쿡 웃으며 예 총완에게 말했다. "뭐. 다 갈 것은 없겠고... 나랑 저 두 강아지 하고, 강아지들을 제어 할 수 잆는 며느리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군." 그러나 예 총관은 그걸로 안심이 안 되었는지 할아버지와 나, 민이, 엄마, 거기에 엄마의 반쪽인 아빠와 배숙, 배숙분의 세 제자와 예성구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르는지 은영의 후계자이자 배 숙부의 친구인 담동에게 수하들을 이끌고 은밀히 쫓게 했다. 물론 이건사관 할아버지가 말해 준 거다. 그리고 우리 세가를 방문 했던 사천 당문 사람들도 어차피 무림맹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와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우리 세가를 도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예 총관은 혹시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민이는 두고 가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예 총관에게 말하길, "자네가 뗄 수 있다면 한번 떼어보게."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예 총관은 순순히 단념했다나? 아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한번 시도라도 해볼것이지 왜 그냥 포기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우리가 출발할 때 청룡단의 싸가지 5인방이 우리세가 사람들 무기를 압수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겼다고 했다. 그러자 청룡단장이, "죽고 싶으면 그냥 장강 강물에 뛰어들게나. 장강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네." 라고 했단다. 뭐, 이러저한 우여곡절 끝에 무림맹에 도착하자 참으로 우습게도 그곳에는 9대 문파에서 불러들인 자파의 정예 부사들이 진을 친 채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을 견제하고 우리를 도우려는 의도 인지 8대세가의 무사들도 막 달려와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풋, 누가 보면 싸움난 줄 알겠네.] [잘됐지 뭐. 귀찮게 일일이 찾아다니지 말고그냥 여기있는 사람들만 싹 쓸어버리면...] 내 말에 민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더 귀찮게 될걸? 문파에 남아 있는 이들이 목수하겠다고 우리 세가로 쳐들어 올거야.] [아니, 그러니까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오는 사람만 처리하면 되는 거잖아] [풋,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게 우리가 도착하여 8대 세가의 무사들 사이로 들어가 9대 문파의 무사들과 대치를 하자 긴장감은 점점 높아졌다. 그런데 그 긴장감을 무마시키려는 건지 아니면 더 긴장시키려 유도하는 건지 우리가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은듯한 무림맹주가 9대 문파와 8대 세가 출신의 장오들을 데리고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오셨소이까?" "다시 뵙소이다. 맹주.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오게 하려고 호위까지 보내준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외다." "그건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자, 은 소저, 그대도 같이 와주겠나?" '청하는데 거절할 수야 없지.' 나는고개를 끄덕이고는 민이를비롯한 세가 식구들에게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당겨오겠습니다아~!" 할아버지와 내가 그들과 함께 간 곳은 예전에 한번 와본 적이 있는 장로 회의실이었다. 그곳에서 예전에 앉았던 자리에 앉자 9대 문파 쪽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꼬투르리를 잡으려는 듯한 시선으로, 그리고 8대 세가 쪽에슨 그런 9대 문파 장로들을 저지하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당 가주는 비록 장로는 아니었지만 가주의 신분이었기에 이곳에 참석할 수있었다. 게다가 비록 성과는 없었던 사파 여합의 습격에 참여한 덕분에 봉문이 풀어졌는지 모용세가 출신의 장로와 모용세가의 전 가주고 와 있었다. 사람들이 다 자리를 잡고 앉자 무림맹주가 할아버지와 날 바라보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렇게 갑작스레 오리사고 한 것은 무림맹에 또 한번 다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은 소저와 관련이 있어서 은 소저도 함께 오게 한 것입니다." "그건 짐작하고 있는 일이외다. 도대체 그 일이 무엇이란 말이오?" 할아버지의 '별거아니면 가만 안 있을 거야'란 어투의 말에 청성파의 장로가 이죽거렸다 "잠시후에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으면 좋겠소이다." 할아버지의 눈썹이 분노로 인하여 꿈틀거렸다.그러자 무림맹주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다름 아닌 전에 은씨 세가에서 구출했던 제갈 전 가주에 대한 일입니다." 뜻밖의 사람이 거론되자 할아버지는 분노도 잊고 무림맹주를 미라보며 다시 되물었다. "제갈 전 가주?"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은 소저가 구한 제갈 전 가주가 무림맹이 소란함을 틈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거기까지 말한 무림맹주는 슬쩍 나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우리 무림맹에서 보관하고 있던 중요한 비급을 가지고 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눈썹이 놀랐다는 것을 나타내려는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소리요? 왜 그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거요?" 그러자 이번에는 종남파의장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뻔한 것 아니겠소? 은 소저가 구출했답시고 데리고 온 자는 가짜라는 고요. 나원 참, 그래 놓고 생색 내기는...." '우리가 언제 생색을 냈다고... 자기네가 못했으니까 괜히 찔려서 어쩔줄 몰라 했던 주제에.' 물론 그건 속으로만 말할 뿐이었다. 만약 할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제9대 문파 사람들은 저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거다. 이때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우리를 도우려고 함인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은 소저야 제갈 전 가주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착각했을 수도 있다지만. 그대들이야 제갈 전 가주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아니오? 그런데 그대들은 제갈 전 갖가 돌아왔을 때 왜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소이까?" 그러자 종남파의 장로가 할 말이 없는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험험험." '그런데 그자가 가짜였다고? 그럼 제갈준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처절하게 울부짖은게 연기였단 말야? 으음... 되게 실감나에 울부짖었는데.. 제갈준희도 그를 보고 할아버지라 했고 말야. 그럼 제갈 준희도 못 알아봤다는 건가?' 내가 이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지금 우리가 가짜 제갈 전 가주를 데리고 왔으니 그 책임을 지게 하려고 이렇게 부른 것이만 말이오?" 그러자 무림맹주가 얼른 도리질을 치며 입을열었다. "무슨 말씀을... 은 소저가 없었더라면 제갈 소저가 어디 있는지도, 그리고 하남 상단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도 우리는 몰랐을 것이외다. 은 가주를 갑작스레 모신 것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를 의논하지 위하여...." 할아버지는 무림맹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럼 내 손녀은 왜 오라고 한 것이오?" "그거야 혹시 제갈 전 가주를 구할 때 뭐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를 물어보기 위하여 보자고 한 것이외다." 그러자 화산파의 장로가 비아냥거렸다. "물론 묻기 위해 오게 한 거지." 그러면서 그는 날 보고 날카롭게 추궁했다. "사실 전에도 그렇고 은 소저의 공은 충분히 크네. 하나 나는 궁금한게 몇 가지 있어서 말이지." "제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가 아니라면 뭐라 말하겠는가? 그는 내 대답이 끝나자 물었다. "제갈 소저가 같혀 있었던 곳은 우리로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지. 우리도 그 점은 인정하네. 그런데 그렇게 알기 어려운비밀 감옥에 가짜를 가둬뒀다는 것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마치 우리가 그 감옥을 알아낼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듯이말일세." "그렇군요. 그건 저도 어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내 대답을 듣더니 피식 웃으면 말했다.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잇지. 내 생각은 이렇네. 그들이 자네가 비밀 감옥을 찾아내리라는 것을 이리 예측하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그는 거기서 말을 살짝 끌더니 날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들과 자네가 가짜 제갈 전 가주를 구출하기로 합의르르 했을 수도 있지." 한마디로 내가 그들과 내통하지 않았느냐는 소리였다. "그렇군요.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군요." 재가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순순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화산파의 장로가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아마도 날 위협하려고 그런 말을 한 듯했다. '풋, 날 위협할 수 있을라나?' 그러나 8대 세가 사람들이 가만히 당하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이번에 제갈 전 가주-비록 가짜이지만-와 제갈 소저를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은 소서의 주술덕이라고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맨 처음 제갈 소저를 데리고 간 이둘 중에는 모산파의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모산파 또한 주술에는 능통한 자들, 혹시 그들이 은 소저의 주술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소이다." 그것 또한 확실히 논리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내 마법을 그들이 알아차린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곳 주술도 물론 마나를 이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추적 마법은 마법의 기운이 거의 안 느껴지기 때문에 따로 마법의 기운을 탐지하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못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이곳은 주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아서 태연했던 건데 내가 너무 얕봤던 걸까? 이곳에도 주술이 사용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알아내는 주술이 있었던 걸지도 몰라.' 멀리 있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제갈준희의 위치와 누군가가 내가 걸어놓은 마법을 해제시키느냐 하는 거였다. 단지 마법을 걸려 있느냐 아니냐를 알아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거이거... 얕보다가 한 방 먹었는걸.' 하지만 9대 문파의 장로들은 혁련세가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내가 사파랑 거래를 하거나 손을 잡은 쪽으로 연결시키고 싶어했다. 덕분에 치열해진 공방 속에서 내가 사용하는 주술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내가 은씨 세가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파의 주술 -아예 그렇게 말이 바뀌었다-을 익혔으니 엄마나 아빠 또한 사파 사람이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그들의 말로는 주술은 사파들만이 쓰는 것인데 내가 주술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것이었따. 그러자 할아버지가 의히심장하게 씨익 웃으며 9대 문파의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지금 당신들은 내 손녀가 사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렇다면 나도 사파 사람이고 우리 은씨 세가도 사파이겠구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러자 공동파의 장로가 맞섰다. "뭘 그렇게 비약하는 것이오? 은씨 세가는 50여 년 전 정사대전 때 가장 앞정서서 사파의 간악한 무리들을 처단했다는 건 이곳에 오민 모든 이들이 아는 사실이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건 은 가주의 눈에 발견되기 전에 사파의 무리들이 가주의 손녀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거요." '헐... 그렇게까지 비약이 될 수도 있다니..' 그들은 아무리 비약을 심하게 해도 절대 할아버지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결코 사파가 아니라고 두두내 주어 어떻게 보면 나와 할아버지, 좀더 나아가서는 울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떼어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호오... 우리가 오기 전에 아주 준비를 철저히 했나 보네. 이렇게 나오는 것은 무엇이냐... 은씨 세가의 힘을 깎아내리고 싶긴 하지만 할아버지의 힘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려나?' 어느새 8대 세가의 사람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었겠지만 울 부모님과 나와 민이가 세가로 들어온 건 전적으로 할아버지의 판단에서였으니 그 책임도 할아버지 몫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할아버지가 내가 세가로 들어가기 전 사파의 손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아마 엄마와 아빠가 추궁을 당할 것이다. '흐음.... 아마도 거짓 자백을 하도록 강요당하겠지만....' 그러나 할아버지가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고 버틴다면 부모님은 아무도 손을 못 대겠지만 한번 표면으로 떠오른 희혹은 어제까지나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그럼 행동에 제약도 많을 거고 이래저래 우리만 손해인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게 돼버려군. 역시 튀면 귀찮네. 비록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괜히 할아버지한테 미안한걸?' 할아버지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말은 알아듣겠소. 하지만 그대들에게서 우리 세가의 일이 거론되는 건 참 불쾌하구려. 만약 내 손녀가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우리 세가는 당분간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겠소. 무림맹의 일은 물론 무림의 일에도 절대 간섭 안 할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그대들도 안심할 수있지 않겠소이까?"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할아버지가 좌중을 향해 당당히 선언했다 "우리 세가는 지금 즉시 무림맹을 떠나 세가로 돌아가겠소. 가자, 진이야." 불만은 없었던 터라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당황대서 웅성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회의실을 나왓으므로 그들이 뭔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갔기에 나는 할아버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단지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할아버지를 쫓아갈 뿐이었다. 할아버지의 선택이 기쁘기는 했지만 솔직히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괜히 나서가지고 할아버지를 곤란함 속에 빠뜨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9대 문파를 한 번씩 선회하면서 혼내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압지가 우뚝 서더니 날 돌아보았다. "진이야." 아주 진지하게부르는 목소리에 약간 긴장한 채 할아버지를 보았다. "예" "너 말이다, 네 부모나 민이에게는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말거라. 아마 엄청 걱정할 게다." "풋, 민이는 괜찮을 거예요. 아마 9대 문파를 가만 안 두려 할걸요?" 할아버지의 말은 이해하지만 부모님은 몰라도 민이에게는 이야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개를 저은 채 내 머리를 살짝 톡톡 두렸다. "그런 놈들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 정파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세력의 확대에만 급급한 썩은 녀석들은. 내 예상이 맞다면 곧 있음 사파 연합과 정파 무림맹 사이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 때 조금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그 싸움에 참여하지 않나요?" "그래, 9파에서 그런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난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8대 세가도 있잖아요." "그들이 참여한고 해서 내가 일부러 도울 필요는 없지. 빌고 친한 세력이긴 하지만 그들이 직접 도움을 요청해 오지 않는 한 내가 먼저나서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내가 나서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니 그들이 참여한다는 건 그들스스로의 선택을 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어찌 보면 냉정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그쪽 의사를 존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세가가 참여 안한다고 저족도 참여 안학를 바라지는 않으니까-헷갈리지만, 이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세가와 문파간의 일이다 보니 약간의 냉정함은 필요한 것 같았다. 우리가 장로 회으실이 있는 건물을 나오자 그곳에는 여전히 8대 세가와 9대 문파의 무사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어이구, 인내심이 많기도 하지. 회의실에 있었던 게 대충 한시간즘 되는데 그동안저러고 있었단 말야?' 할아버지도 조금은 한심했는지 그 모습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은씨 세가의 무사들을 불러 모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주작단장인 헌준이 할아버지 쪽으로 달려왔다.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걸 보니 장로 회의 내용을 대충 알고 있는 듯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은 가주님." "내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가?" 할아버지는 그에게 별로감정이 없는지 그가 부르는 대로 선선히 기다려 주었다가 그 앞에 도착하자 물었다 "예, 비록 제가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 같습니다면... 정말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까? 당신은 정파 무림맹의 든든한 기둥이십니다."' "칭찬 고맙네만 난 내 손녀늘 험담하려는 자들과는 같이 있고 싶지 않다네." 할아버지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말하고 돌아서려 하자 헌준이 약간 다급한 어조로 속삭였다. "사실은 방금 사파 연합에서 정식으로 통보가 왔습니다. 만약 자신들을 정파 소속의 문파와 같이 동드앟게 인정해 주지않는다면 무력으로라도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장소는 정파의 기둥들 중 하나인 무당파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할아버지는 멈칫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허... 결국 하나만 남기고 그들 손에 다 들어갔다는 건가? 그리고 마지막까지 손에 넣어보겠다는 것이군." 헌준은 그게 무슨 말이지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해했지만 나는 즉시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사실은 할아버지가 당 가주와 하는 이야기를 몰래 엿들은 데다 방금 장로 회의에서 오가는 이야기도 다 듣고 있었기에 가짜 -장말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제갈 전 가주가 가지고 사라졌다는 것이 무림맹에서 보관하고 있던 마공 비급의 조각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땆자면 장파에서 보관하고 있던 조각들은 모두 저들 손에 넘어가고 이제 마직막으로 단 하나, 무당파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만이 남은 것이다. 게다가 제갈 전 가주까지 그들 손 안에 있었으니 무당파만 점령하면 저들은 완전한 마공 비급을 손에 얻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파 무림맹의 윗분들이 하나같이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니 대단하기는 무지 대단한 것 같다. 할아버지가 다시 한 번 멈칫거리자 헌준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를 관심을 끈 것이라 생각했는지 아주 간절히 말했다. "지금 정파 무림맹의 힘은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무림맹첩이 모든 정파의 문파들에게 발송될 것이긴 하지만 저번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은 가주님마저 무림맹의 일에 관여 안 하진사면 정파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자네는 정파의 저력을 너무 얕보고 있군. 비록 지금은 그 정신이 많이 약화되었다 하나 우리 정파는 오랜 세월 동안 그 명맥을 유지시켜 왔게. 그러한 전통은 한순간 무너지지 않아. 설사 이번 사파와의 싸움에 정파가 패한다 하더라도 정파는 사라지지 않을 걸세. 오히려 역경을 겪으면 더욱 강해지는 것이 정파의 정신이니까." 할아버지는 9대 문파는 싫어하는 듯하지만 자신이 정파라른 것에 정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으음... 훌륭한 자세야. 저런 사람이 있기에 세가가 발전하고 무림이 발전하고, 더 나아가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지. 암, 암,' 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가 이번 싸움에서 뒤로 빠지는 것은 변하지 않을 듯했다. 그러자 이번데는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서 할아버지의 발목을 잡았다. "자네, 정말 이대로 가버릴건가?" 모용세가의 전 가주의 목소리였다, 그에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모용세가의 전 가주와 사천당가의 가주가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자네도 날 막으려고 하는 겐가? 미리 말하자면 난 내 손녀를 험담하는 녀석들과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아." 친우의 앞이라서 그런지 할아버지는 헌준을 대하는 것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무슨 소리. 우리도 그런 녀석들과는 상종도 하기 싫어. 하지만... 하지만 말일세, 이번일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지 않은가?" 아마도 마공 비급 조각을 빼앗긴 일에 대해서 말아는 것 같았다. 그 말이 할아버지에게 먹혀들었는지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안 했고, 그렇다고 돌아갈 기색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 모용세가의 전 가주와 당 가주는 서로 미소를 교환하더니 다시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입을 열었다. "아차, 자네에게는 아직 말을 못했는데 지금 이쪽으로 남궁세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오고 있는 중이라네." 거기까지 말한 모용세가의 전 가주는 약간 슬픈 기색을 띠고는 말을 이었다 "남구이-할아버지의 친우로 남궁세가의 전 가주. 세가 안에서 은거하느라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음-는.... 그곳에서 명을 달리했다는군. 세가의 사람들을 대피시킬 때 그 녀석하고 몇몇 장로들이 남아 시간을 끌어 덕분에 절반 정도의 사람들이 그곳을 탈출하다가 급히 달려간 무림매의 현무단과 백호단을 만나 위기를 모면했다는군." "그랬나? 허허... 또 한명이 가버렸군." 할아버지가 슬쩍 하늘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당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그런거지 뭐, 게다가 세가의 핏줄을 단절시키지 않은 데가가 손자까지 봤으니 원은 없겠지. 무인이 싸움터에서 죽었으니 그또한 무인다운 죽음이고 말야. 그런데 잔존한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목수를 하겠다고 이번 싸움에 기필코 참여하겠다더군." "게다가 단목이 녀석도 참가하겠다고 연락이 왔어. 미친놈, 아, 무사가 몇이나 남았다고 이 씨움에 참여한다는 건지... 남아 있는 이들 몽땅 끌고 온다더군.." 당가주의 뒤를 이어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말하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가네." "그래그래, 우리가 왜 이해 못하겠어? 다 같은 처지인데 말야." 당가주가 맞장구치며 할아버지를 슬쩍 쳐다보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뭐냐, 그래서 나도 참가하라고?" "그래, 이놈아. 9대 문파 녀석들은 우리가 나서서 입을 콱 막아 놓고 왔다. 너 그렇게 나가고 모용이 녀석이랑 나랑 우리 세가들도 빠지겠다고 하니까 놈들이 혼비백산하더군. 헛헛, 녀석들... 괜히 우리의 힘이 크니까 질투해서 말야. 역시 사람은 능력이 있고 봐야 한다니까." 당가주의 말에 모용세가의 전 가주가 얼른 그 뒤를 이어서 계속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번만 더 그따위 짓거리를 하면 가만 안 둔다고 엄포를 단단히 놨지. 그러니까 알았다고 하더라구. 그러니 걱정말고 나서. 너 나서도 아무도 암말 안 할거다." "허섯헛, 그랬냐?" 그 두사람을 보는 할아버지의눈이 촉촉이 젖어 잇었다. "그래, 이놈아. 이제 넷만 남았는데 뭘 그렇게 혼자 감당하려고 그래? 우리가 우리 세가에 피해가 갈까 봐 널 외면할줄 알았냐? 네까짓 놈 도와줘도 우리 세가는 멀쩡해, 임마." "아무렴. 그깟 네놈 세가 도와줬다고 오랜 전통을 꿋꿋이 버텨온 우리 사천당문이 무너질까 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더 서운하다, 이놈아." "그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얕봐서 미안하다." '헤에... 멋진 우정이네. 그래, 사라은 저런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지. 암,암, 할아버지도 차암... 아까는 조금 냉정하다 싶게 군 것도 친구들의 세가에 피해 안 가도록 하기 위해서였구나.' 할아버지는 장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올 때와는 달리 활짝 핀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세가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무지 걱정하고 있던 세가 사람들은 모용세가의 전 가주와 사천당문 가주와 같이 오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안심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의 말은 안 듣고 장로 회의에서 있었던 일과 세가 사람들에게 돌아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모조리 민이에게 말해줬다. 어차피 할아버지에게 말 안 하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고 부모님에게는 말 안 할 테니까 괜찮았다. 그리고 민이가 이 이야기를 드고 너무 분해서 날뛸 녀석도 아니고 말이다. 뭐, 속에 꽁꽁 감춰놨다가 나중에 자신이 가주가 되었을 대 9파를 향해 토해낼지는 모르지만. 단지 민이는 내 말에 한가지 점을 너무나 서운해했다. [아니, 제갈 누님을 구헐 간 건 누나 혼자가 아니라나도 같이 했고 활약도 많이 했는데 왜 사람들은 제갈 누님을 구한 걸 누나 혼자라고 생각한 거지? 이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야?] -------------------------------------------------------------------- 제 42화 마지막 결전 무당파는 예전 이름으로 호북지방, 지금(명나라)의 명칭으로는 화광지역의 북쪽에 있는 무단산,혹은 태화산이라고 불리는 산에있다. 이산은 도교에서는 성지로 추앙받고 있었고 그 산에 자리한 무당파 역시 도교 문파이다. 무당파는 소림사와 함께 정파의 태산북두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소림사가 권법과 곤법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면 이곳은 장법과 검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현 무당파의 장문인인 춘방 태허 도사는 현 무림의 5대 고수중 한 명이었다. 그러한 무당파에는 지금 정파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들고 이유는 단 하나, 사파 연합이 이번에 침략(?)하겠다 통보해 온곳이 바로 이 무당파였기 때문이다. 원래는 사파 연합에서 자신들의 사파를 하나의 문파로 인정해 달라고 했고, 이를 거절할 시 무력 시위도 불사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을 정파 무림맹에서는 단호히 거절해 버렸기에 이렇게 된 것이다. 사실 사파도 무림의 일부분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그렇게 인정해 주기 삻어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사파 연합에서는 무림맹에서 거절할 줄 알고 있었기에 무당파를 치기 위한 꼬투리를 잡으려고 그런 공문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파의 자존심이 아닌가 싶어. 사실 정파는 50년 전의 싸움에서 이긴 후로 무림을 거의 차지한 채 지금까지 지내왔잖아. 그런데 그걸 사파와 나누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계속 사파와 티격태격할 텐데 그걸 원하겠어? 그러니 지금 단호하게 자르려고 하는 거겠지.] 내 질문에 가까운 메시지에 민이가 자신의 의견을 말해왔다. [그래, 그렇긴 한데.... 지금 정파 무림맹은 사파 연합을 더무 얕보는 거아냐? 저번에도 크게 당해놓고 말야. 이번에는 이길 거라고 착학하는 건 아니겠지? 사파 연삽에는 강시들도 있고 그 사람을 광인으로 만들 수 있는 약도 있단 말야. 전에는 강시가 몇백명 정도 였지만 지금 얼마나 불었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사람을 광인으로 만드는 약 또한 그것만 있어도 그쪽이 승리를 장담할 것 같은데?] 민이와 나는 무당파를 벗어나 무당파가 보이는 산봉우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도 무당파로 향해 다가오는 무사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에 그렇게 댕했는데도 불구하고 무림맹첩이 돌자 중소 문파에서도 다시 한 번 무사들을 보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솔직히 무당파를 빼놓고 다 마공의 조각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겠따고 빠질 일은 없어서 정예란 정예는 다 모인 것 같았다. 무림맹에서도 무림맹주가 직접 5개의 단을 일부분만 남겨놓고 모두 이끌고 왔고, 우리 5대 세가도 싸그리 달려왔다. 비록 단목세가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예들뿐이라서 아주 든든한 아군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게다가 독과 암기에 능한 사천당문도 정예들이 달려왔고 말이다. 하지만 사파 연합에서도 모산파, 독문, 묘강처럼 기기묘묘한 무공을 쓰는 문파를 비롯하여 여러 사파의 문파가 모였을 터였다. '으음... 그러고 보니 전에 음공 공격을 받기 전에 봤던 그 서커먼 가면 쓴 남자를 다시 볼지도 모르겠네, 훗, 아번에는 그 사람의 얼굴을 꼭 한번 봐야지.' 왠지 모르게 은근히 기대가 되고 있었다. 사파연합에서는 아주 친절하게도 앞으로 3일 뒤에 공격해 오겠다고 알려왔다. 그때 총공격이 될지, 아니면 탐색전이 이어질지는 무르겠지만 첫 싸움에서 질 수는 없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이 침입이나 습격이 아닌 정정당당하게 날짜를 통보하고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었기에 진법이나 병법 같은 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저 일대 일로 싸우든 다수 대 다수로 싸우든 정정당당히 맞짱 뜨는 방법밖에 없었기에 더둑더 긴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좀 맘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사파 쪽에서 마공 비급을 빼낼 때 아무도 모르게 빼내곤 했잖아. 물론 단목세가는 직접 침입해 들어갔지만 소림이나 사천당가의 경우처럼 집안 사람을 이용해 몰래 빼개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잖아.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대놓고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이해가 안 돼. 그들이 아무리 우리보다 실력이 높다 하더라도 무당파를 손에 넣으려면 피해가 많을 텐데 말야. 게다가 우리가 마공조각을 가지고 도망간다면 무당파를 손에 넣어도 말짱 꽝이잖아.] [도대체 사파 연합은 이번에 무슨 수를 쓰려고 하는 걸까? 오랜 세월 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약점을 찾아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비록 적이지만 감탄스럽긴 해] [훗, 솔직히 나도 그들이 이번에는 무슨 방법을 쓸지 무지 기대하고 있어.] 우리가 이렇게 따로 노닥거리는 동안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동안 정파 사람들은 회의 끝에 작잔을 하나하나 착착 세워가고 있었다. 우선 이번 선봉은 9대 문파에서 맡기로 했다. 9대 문파는 화산파나 소림사, 곤륜파나 무당파 대부분이 산속에 위치해 있었기에 산에서의 싸움에아주 익숙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이번 소림에서는 4대 금강과 함께 108나한을 보내왔다. 이 108명은 18나한을 다시 6당위로 두어 짠 108나한진을 구축하는 인원인데, 이들이 펼치는 108나한진은 소림의 오랜 역사상 깬 사람이 몇 안되는 오래되고 전통있는 진으로 유명했다. 사실 내가 소림에서 민이를 구하려 했으나 소림의 무승들이게 가로막혀 못 움직였던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당한 것이 18나한진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108나한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제일 먼저 소림이 나서기로 했고 그 뒤를 청룡단과 백호단이 받치기로 했다. 솔직히 무림맹 산하 5대긔 단끼리도 알력 싸움이 심한데 기실 그건 청룡단과 백호단은 9대 문파 출신들로만 이뤄져 있고 현무단과 주작단은 8대 문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 사이의 알력은 상충한다는 의미로 반반씩 섞어 놓은 중앙단이있긴 하지만 그렇게 큰 효용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9대 문파에서 선봉을 밭았기 때문에 무림맹에서 보내진 5개 진에서도 청룡단과 백호단이 선봉대에 석일 수 있었던 것이다. 대신 무당파는 자신의 문파를 맡는다는 이유로 선봉대에서 빠졌다. 그렇게 소림사를 중심으로 두 개의 단이 받쳐 주고 그 뒤를 나머지 9대 문파에서 받쳐 주기로 되었다. 그 다음이 우리 8대 세가와 나머지 두 개 단이었다. 우리는 지원 부대 역을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9대 문파 사람들까지 투입되었어도 밀리다면 지원으로 투입되거나, 아니면 그들이 오랜 싸움에 지치는 기색을 보이면 선수 교체를 한다는 식으로 투입되기로 했다. 물론 남궁세가 쪽은 자신들을 선봉대로 써달라고 펄펄 뛰었지만 그걸 들어줄 9대 문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번에 기필코 승리를 쟁취하여 9대 문파의 위명을 드높이려는 생각인 듯했다 .. 그리하여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날씨는 이제 막 초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라약간 쌀쌀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았고 하늘은 쾌청했다. 이런 날싸움이나 해야 하다니, 강호인이라는 운명이 약간 처량하게 느껴졌지만 그 렇게 느끼는 건 나뿐인 듯 모두들 싸움 전의 긴장으로 인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림의 4대 금강과 무림맹주를 선두로 무당파의 정문을 나서서 서파 연합과의 싸움 장소로 선정된 곳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저 멀리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바 야흐로 사파연합의 우두머리를 작접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약 100m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오옷! 두근두근거려. 과연 사파 연합에서는 어떻게 나올것인가? 그 냥 다짜고짜로 공격해 올건인가, 아니면 먼저 대화를 청할것인가?"] 내가 흥분과 기대감에 차서 민이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민이가 일순간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지금 시써?"] ["훗,민아,시라소 하기보다는 그냥 아나운서나 내레이터라고 말해 주 자 않을래?"] ["뭐?아나운서는 뭐고 내레...머시기? 그건 또 뭐야?"] 아무리 뜻과 뜻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라고 해도 민이가 있던 곳 에서 존재하지 않는 단어는 그 뜻이 전달되지 않는 법이었다. 민 이가 있는 곳에서는 미래의 한국에 있는 아나운서나 내레이터라 는 것이 ㅇ벗을 테니 그가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했다. ["넌 몰라도 돼.어쨌든 너무 흥분된다."] 사파연합에서는 우선 대화를 해보려는 듯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할아버지보다는 좀 젊어 보이는 ,대충 60세쯤 보이는 남자였는데 제법 키도 크고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는 데다 얼굴 도 괘나 남성적으로 잘생긴 사람이었다.금룡이 수놓아진 검은 장 포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위엄있는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우리쪽에서는 무림맹주가 앞으로 나서서 그와 마주 섰다. "본좌는 정파 무림맹의 맹주 직을 맡고 있는 일검 경천 헌원패 라고 하외다. 그대는 누구시오? "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본인 갈천성이라 하외다. 미력하나마 사파 연합의 장의 자리 를 맡고 있소이다." 그의 소개가 끝나자 우리 쪽 나이 많은 어른들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무리 음지의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파 연합이라고 해 도 수좌의 자리에 앉은 이의 이름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사파에서 도 이름을 날리는 고수들이 많은데 하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자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 의아했나 보다. 우리 쪽 사람들의 의아함을 알아챘음인지 그가 피깃 웃으며 자 신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본인은 예전에 녹의비객이라는 별호로 불렸던 적이 있었소이다." 그러자 그제서야 사람들이 탄성을 내지르면서 그를 놀란 눈으로 바 라보았다. 그 '녹의비객'이라는 별호가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유까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에 나는 유에게 전음으로 물었 다. (유,저 사람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야?) 유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본 채 천천히 도개를 끄덕 였다. (예,그는 예전에 제가 몸담고 있던 살수 세계에서 전설이라고 일컬어지던 자엿습니다. 30년 전에 갑자기 나다나 정파 인물들을 암살한 자죠.무림맹에서 그를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놓치고 만 자입니다. 그는 항상 녹색 옷을 입는다 하여 녹의비객이라고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녹색 옷을 입은 비밀스러운 손님이라는 뜻이죠. 그의 방문을 받은 사람은 모조리 죽었으니 당연한 것이겠습니다 만.10년 후에 갑자기 사라져 의아했었죠.사람들은 암살을 실패한 채 죽은 것이다,은거한 것이다 말이 많았지만 지금에서야 저렇게 당당하게 나타나다니요.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뭐야,지금은 녹색 옷을 안 입었는데?그런데 그때는 그가 어 떻게 녹색의 옷을 입고 다녔다는 걸 안거야? 그걸 알 정도면 잡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저 사람이 암살을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어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그러나 그도 사람 이다 보니 최초로 실수를 저질렀지요. 자신이 암살한 자의 손에 자심이 입고 있던 옷 조각을 남긴것 입니다.그게 바로 녹색의 옷 감이었지요. 그다음부터는 그는 일부러 자신이 암살한 사람 옆에 녹색의 천 조각을 남겼다고 합니다.그래서 녹의라고 불린것 입니 다.왜 일부러 조각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호오,그래? 꽤 유명한 사람이었네.하지만 저 사람도 살수였단 말이지? 헤에,그럼 잘생긴 살수였겠네.) (그,그렇겠죠) .. 유와 내가 그렇게 속닥거리는 동안 사파 연합의 장인 녹의비객 갈천성과 정파 무림맹의 맹주 일검경천 헌원패의 이야기는 계속이어졌다. "왜 우리 사파연합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당신들이 인정을 받고 싶으면 우리를 꺾어보시오." "훗,좋소이다. 어디 정파의 힘을 우리에게 보여워 보시오." 뭐, 대충 이런 정도였지만 그것을 끝으로 갈천성이 몸을 돌리자 헌원패도 몸을 돌려 우리쪽으로 돌아왔고, 그러자 양 진영 사이의 긴장감이 점점 강해졌다. 그런데 그순간 사파 쪽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저번에 만났던 바로 모산파의 도사가 앞으로 쓰윽 나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놋으로 만든 종을 흔들었던 것이다. 딸랑, 딸랑. 종소리가 조용히 퍼지자 그 소리를 들었음인지 사파 사람들 뒤쪽에서 한 떼의 무리가 앞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바로 내가 그렇게 걱정하던 강시의 무리였다. "호오...결국 나타났네." 민이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강시의 수는 우리 세가를 침햑했을 때의 숫자처럼 300에 달했다. "저게 강시의전부일까, 아님 또 있을까?" 민이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해 보고는 대답했다. "우리 세가를 저들이 쳐들어 왔을 때 쓰러뜨린 숫자도 많았거든. 하지만 아마 저들은 또 만들었을 거야. 그러니 저게 다가 아니겠지." "하긴." 그러는 동안 우리 쪽에서도 미리 이야기된 대로 소림사의 108나한이 앞으로 나섰다. "나한진을 펼쳐라!" 우렁찬 4대 금강의목소리에 그들은 하나같이 힘찬 기합을 지르며 발 빠르게 움직이더니 곧 이어 나한진을 펼친 채 강시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나한진을 다 펼칠 때까지 느긋하게 바라보던 모산파의 도사는 나한들이 자리를 잡고 자신쪽을 쳐다보자 그제야 종을들어 한번 더 흔들었다. 딸랑~! 그게 아마 신호였던지 그 소리를 듣자 강시들이 일제히 나한들에게 달려들었다. " 침착하게 나한진을 따라 대응하라." 4대 금강은 강시들이 짓쳐오자 자신들도 몸을 날려 나한진 사이사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유연하게 돌아다니며 나한들을 격려했다. 역시 나한진은 대단했다. 강시들을 맞이하여 마치 한 치의 틈도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며 강시들을 상태하였다. 한 사라밍 짓쳐들어오는 강시를 막으면 그 옆에 있던 두 사람이 강시를 공격하였다. 강시가 맨 처음 자신을 막은 사람을 내버려두고 그 두사람의 공격을 막으면 다시 그 뒤에 있던 또 다른 사람과 맨 처음 공격을 막은 사람이 강시를 공격하였다. "와우~ 역시 대단해. 내가 저 진에 당했다는 것, 그렇게 부끄러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아마 지금 나한진을 상대하고 있는 이들이 맞았을 때 아픔을 느끼는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정말 큰 효과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검기가 아니면 상처조차 낼 수 없고, 또한 아픔도 못 느끼는 강시들이었다. 게다가 일반 무인보다 2,3배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내력 또한 1갑자였다. 그것만 해도 솔직히 약간은 막막한데 숫자도 108나한보다 두 배는 많았다. 나한진은 6명이서 한조, 그 한조가 16,혹은 17구의 강시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숫자가 나온다. 상대가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나한진은 커다란 효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강시를 상대로 하자 버티는 것도 겨우였다. "역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군. 고통을 느끼지 않으니까 뒤에서 후려쳐도 별다른 반응이 없잖아." "그러게." 게다가 강시들은 검기로써만 상처을 낼 수 있었기에 나한들은 처음부터 봉에 기를 주입한 채 싸워야 했다. 비록 나한들이 소림에서 뽑히고 뽑힌자들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내력이 1갑자를 조금 넘는 정도였기에 기를 주입한 채 싸운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듯 보였다. "청룡단과 백호단은 나서라!" 무림맹주가 안 되겠다 싶은지 큰 소리로 호령하자 그동안 나가고 싶어 안달난 것처럼 보였던 그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그 싸움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파 쪽에서는 강시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누나는 누가 이길 것 같아?" 민이가 넌지시 물어온 말에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모르겠어. 지금 이 상태라면 청룡단과 백호단까지 투입된 우리쪽이 유리하지 않을까? 아무리 강시들이 고통을 못 느낀다고 해도 같은 내력을 가진 이들보다는 느려서 실력이 떨어지거든." "하지만 저 강시들에게 독이 지급되어 있다면 승리를 장담하긴 어렵지 않을까?" 독?" "응, 저 간시들 손톱이랑 무기에 독이 묻어 있는것 같아. 저기 쓰러진 우리편을 좀 봐. 얼굴색이 새파랗게 변하지 않아?" 민이가 가리키는 사람을 보니 정말이었다. 얼굴은 새파랗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 검은 옷을 입고 갓만 쓴다면 저승사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도 자신이 독에 당한 것을 눈치 챘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외치며 주의를 주고 있었다. "조심해! 독이다! 독이 묻어있어!" "세상에.......!" 나는 우리 세가를 침략했던 때의 그 강시들과 같을 러가 생각 했지 설마 독을 뭊히는 수법을 사용할 것라는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똑 사람들도 그제야 눈치 챘는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00"동요하지 마시오. 다음 진 사람들은 해독약을 먹고 즉시 나한들과청룡, 백호단을 지원해 주시오!" 해독약이란 사천당문에서 지급해 준 약은 웬만한 독은 해독시키고 막아주는 약이었다. 비록 이름 모를 독에 당했다 하더라도 이걸 먹으면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어는 정도 독을 중화시켜 주거나 독이 퍼지는걸 늦춰주기 때문에 미리 먹어두고 있으면 좋았다. 하지만 지급받았다 하더라도 설마 지금 독이 사용될 줄은 아무도 몰랐는지 사람들이 그제야 해독약을 먹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먹어두시오. 저들이 공중에 독을 풀어왔을지 모르는 일이오." 아마 사파 쪽에서는 강시들의 무기에 독을 묻힌 이상 우리가 쉽게 상대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청룡단과 백호단이 투입되었어도 느긋하게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쉽게 볼 상대가 아니라니까. 강시 하나에도 이렇게 쩔쩔매는데 말야." "누나, 지금 지는건 우리편이라고." 내가 너무 태연하게 말했음인지 민이가 나에게 눈치를 줬다. 상황은 9대 문파 사람들이 투입되자 훨씬 나아졌다. 강시들의 무기에 독이 묻어 있다는걸 안 사람들이 단 일 격에 강시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검기고 그들의 급소만을 집요하게 공격했던 것이다. 게다가 9대 문파 사람들까지 투입되자 우리쪽 수가 강시들의 수를 훨씬 넘어서 버려 강시 한 명을 상대로 두세 명이 달아붙었기에 전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진 않았다. 그렇게 여유가 생기자 맨 처음 강시들을 상대했던 108나한들이 4대 금강의 지휘를 받아 부상자들을 이끌고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강시들을 물리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들에게 부상당한 자들을 놔둔다면 독이 퍼져 나중에 손을 쓸 도리가 없었기에 그들 먼저 뒤로 빼내 사천당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먼저 강시들을 상대한 나한들 또한 해독제를 복용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뒤에 들어온 9대 문파들이 강시들을 상대하는 게 훨씬 안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불리해지는 건 사파 쪽이었다. 아주 필사적으로 강시들을 쓰러트리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9파 사람들을 당할 수 없었던지 강시들은 한마디로 말해 바람에 낙엽 쓸려가듯 우수수 쓰러져 갔다. 처음에 나한진을 상대했던 것과는 완전 반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나한진이 약한 건 아니었다. 단지 나한들이 강시를 상대한 적이 없었던데다 강시들의 숫자가 나한들의 두 배는 더 많았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은 우리 쪽이 강시의 두 배이니 당연히 그 반대의 상황이 올 수밖에 그러자 사파 쪽에 있던 모산파의 도사가 안 되겠던지 들고 있던 종을 마구 흔들어 강시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부적 10여개를 하늘 높이 던지더니 허리에 찬 목검을 번개같이 빼어 들어 부적들을 향해 휘두르며 외쳤다. "뢰!" 그러자 부적들이 목검에 의해 두 조각으로 잘리더니 갑자기 불타올라 재로 화해 바람에 날려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갑자기 하늘이 어두컴컴해 질 정도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파지직파지직 하며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민이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며 나에게 빠르게 말했다. "번개를 치게 하려는 거야. 누나 어떻게 좀 해봐!" 그래서 나는 재빨리 시동어를 외쳤다. "워터! 윈디실드!" 그러자 땅에서부터 물기둥이 치솟아올라 우리 쪽 사람들 머리 위에 흩뿌려진다 싶더니만,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그것을 자신의 몸에 머금은 채 우리 쪽 사람들 주위에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러니까 물과 바람을 섞어 실드를 친 것이다. 그리고 실드가 쳐지자마자 하늘에서부터 우리 쪽으로 수십개의 번개가 내리쳤다. 꽈과과광! 꽈과과과광~! 쾅!쾅! 그 번개들은 방어막에 있는 물기를 타고 내려와 따응로 스며들었다. 전기가 물에 잘 통한다는 걸 깨닫고 방어막에 물기를 머금게 한 내 선택이 탁월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번개가 치자마자 저마다 철로 된 자신의 무기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옷으로 감싸거나 바닥에 꽂아놓고 엎드리는 바람에 이런 내 멋진 작품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가 끝나고 조용해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일도 없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 .. 그리고 그동안에 강시들은 계속해서 모산파 도사의 인도에 따라 뒤로 물러나 싸움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호오, 역시 대단한 실력이군, 은소저. 내 뢰의 공격을 막아내다니말야." 모산파의 도사는 내 실드를 봤는지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건냈다. 그에 나도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해줬다. "훗, 이것이 바로 과학과 마법의 만남이라고 할수 있게쑈." "후후후, 뜻 모를 소리만 해대는군, 어쨌든 다시한 번 대결할수 있어서 즐거웠네." "뭡니까? 벌써 공격이 끝난 거에요? 주술 공격은 딱 한번으로 끝나나디 좀 시시하군요." "후후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더 상대해주고 싶지만 나도 한 단체에 매인 몸이라서 개인 행동은 불하가거든." "헤에, 그럼 물러나는 건가요?" 그러자 이번에는 모산파의 도사 대신 사파 연합의 수자인 길천성이 대답해 줬다. "오늘은 간단하게 인사만 한 것이라오. 은소저, 그러니 이만 물러가고 내일 다시 뵙도록 하죠. 내일은 은소저가 아닌 다른사람이 우리의 공격을 상대해 줬으면 좋겠군. 어째서 우리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람은 은 소저 뿐인지 모르겠소. 꼭 은 소저 혼자만 상대하는것 같군." "어머, 전 마무리가 전공이거든요. 시작은 다른분이 다 해결해 주시잖아요." "훗, 그런가? 어쨌든 내일 만나지. 내일 다시 봅시다. 정파 무림맹주." 갈천성은 무림맹주에게 작별 인사를 남기고는 무리들을 이끌고 사라져 갔다. 그렇게 그날 하루의 싸움은 막을 내렸지만 돌아가는 길에 나는 마음치 편치 않았다. 갈천성의 말은 마치 자신들을 막을수 있는 것은 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처럼 말을 해놔서 기껏 싸우고 부상을 입은 9대 문파 사람들의 기분을 망쳐 놓았던 것이다. 맨 마지막 모산파 도사의 공격을 막은 건 나인데 그걸 고맙게 생각하긴커녕 되게 아니꼽게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말에 이런말도 튀어나왔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다 갖는다.' 생각해 보면 되게 기분 나쁜 말이었다. 아니, 내가 공을 세웠다고 으스댄 것도 아니고, 비록 처음부터 나서서 그들을 상대한 건 아니지만 자신을이 위험할 때 나서서 막아준 건데 고맙다는 말은 커녕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게 상당히 기분 나빴다. "우이씨, 뭐야? 그럼 내가 그때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했단 거야 뭐야?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한 절반은 번개에 그슬려 새카메졌을걸? 그랬다면 또 할 수 있었는데 가만히 있었네 어쩌네 하면서 말들이 많았을 거 아냐? 쳇,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냅둬,냅줘,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들의 말에 신경쓰면 뭐 해?" 민이가 옆에서 위로차 말을 해줬지만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몰라. 하여간 인간들이란... 누가 자기들 위해서 방어막 쳐웠는줄 아나? 우리 세가 사람들 때문에 산건 생각 못하고.... 에엥, 맘에 안들어." 갈천서잉 돌아갈 때 한 말때문에 그 다음날에도 맨 앞의 선봉대에 설 9대 문파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어차피 자신들이 몸 아끼지 않고 열심히 싸워봤자 공은 나에게로 돌아가는데 뭐 하러 자신들이 나서야 하냐는 거였다. 무척 어리석은 것들이었다. 갈천성이 그렇게 말했다고 진짜 나에게 공이 돌아가는것도 아닌데 - 어차피 자기네들 출신 장로들이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였다 - 갈천성의 말에 휘말려서 자신들이 공을 세울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신네 문파 출신의 장로들이 빠득빠득 우겨서 겨우 얻은 선봉대 자리었는데 말이다. 9대 문파를 이끄는 사람들은 그 사실에 한탄했지만 한번 일어난 여론은 쉽게 사르가들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다음날 선봉대는 우리8대 세가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8대 세가는 소림사처럼 108나한 같은 조직이 없었기에 각 세가별로 그룹을 나누어 선봉을 뽑았는데 그곳에 우리 세가도 뽑혔다. 아무래도 8대세가 사이에도 나로 인한 영향력이 있었던것 같았다. 내가 너무 거기에 신경을 쓰니까 나랑 항상 같이 있는 이들이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주군. 우리 세가가 제일 큰 피해가 없으니까 맡게 된것 아닙니까?" 유가 먼저 입을 열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얼른 덕이도 유를 거들었다. "하면이라(그렇지요). 유 행님 말씀이 옳당게요. 거시기 우리가 저번 전투에서 딴 데는 거시기 해도 우리는 그들에 비해 거시기 하니까 우리에게 맡겨진게 아니다요?" "그래요, 아가씨. 모용세가나 혁련세가 모두 저번 전투에서 우리 세가보다 많은 피해가 있었잖습니까? 게다가 우리 세가에는 현 무림의 5대 고수중 한 분이신 가주님까지 계시고 말입니다." 예송구도 빠지지 않고 날 위로해 주자 민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누나. 누나의 명성은 거기에 쪼끔 더해진 것뿐이야. 솔직히 아무리 누나가 있어도 세가의 무사들이 받쳐 주지 않으면 말짱 꽝이라고." "그럼요, 그럼요. 은 사제의 말이 옳습니다." 희여송까지 위로하려 했지만 그래도 영 찜찜한 기분은 떨쳐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찜찜한 기분 때문에 우리 세가 사람들이 선본을 서는데 나만 빠질 수는 없었다. 이럴수록 내가 나서서 전에는 보호해 주니 못한 몫까지 더 많이 보호해 줘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이 너무 나에게만 신경쓰니 않도록 나는 풀린 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에이, 그래... 까짓고 남들이 뭐라 하든 난 내 맘대로 할꺼야. 지들이 그런다고 나에게 떡이 생겨 꿀이 생겨? 떠들고 싶으면 떨들라고해!" 내가 그렇게 떠들자 주위사람들이 그제야 조금 안심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야 누나답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주군. 그런 사람들의 말에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하먼이라." 그리하여 그 다음날 선봉에는 9파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우리 세가 사람들이 맡게 되었다. 그날은 싸움 두 뻔쨰 날이라 그런지 갈천성과 헌원패가 나서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곧바로 공격해 들어왔기에 우리 세가 사람들도 달려나가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를 상대하러 나온 사람들은 어제 그 강시들이 아닌 약을 먹은 듯한 광인들이었다. 강시라면 사람이 아니기에 내가 마음 놓고 상대를 할 수 있겠는데 저들을 약을 먹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었으니 마음대로 강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ㅣ. "에잇, 젠장... 왜 저런 놈들이 걸리는 거얏!" 내가 막 화를 내며 외치자 사파 사람들 속에 있던 갈천성이 조용이 웃음 짓는게 눈에 들어왔다. '뭐,뭐야, 저 인간? 오늘 내가 선봉으로 나올 걸 알고 있었던건가?아아, 그야 어제 자기가 그런 말 해놓고갔으니 예상은 했겠지만. 허.. 내가 사람 공격하는걸 꺼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거야? 헤헤, 철저한 놈이네. 훗, 하지만 네놈이 모르는게 하나 있는데... 그건 내 마법으로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다는 거지.' 그의 웃음을 본 덕에 차갑게 식어진 머리로 나는 광인이 외어 우리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다행이도 우리 세가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무림맹에 데리고 온 사람들 말고도 세가에 연락하여 배 숙부가 사람들을 더 이끌고 왔었기에 광인들과 숫자는 거의 비슷했다. '훗, 좋았어!' 속으로 의미있는 웃음을 지은 나는 잽싸게 경공을 발휘하여 세가 사람들의 앞쪽으로 달려나가며 외쳤다. "할이버지, 제가 선봉에 섭니다!" "조심해라!" 할이버지도 내 주술 - 그러니까 마법 - 실력을 믿고 있음인지 크게 말리지는 않았다. 나는 생극 웃으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우선 내 몸 주위에 실드를 쳤다 혹시라도 맨 앞에서 마법을 사용할 때 공격을 당하면 내 스스로가 날 보호할 수 없었기에 미리 보호하는 겋이었다. 그런 다음 막 우리를 행햐 달려오는 광인들을 향해 외쳤다. "타임!" 자신이나 내가 원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마법. 나는 그 마법으로 광인들의 시간을 현저히 늦춰놓았기 때문에 갑자기 잘 뛰던 광인들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세가 사람들이 어리둥절했지만 내가 뭔가 했거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직 저들에게 다다가지 마요. 또 다른 주술을 사용할 거야. 홀드!" 그렇게 외치자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이쪽으로 달려들던 광인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땅바닥에 얼굴을 박거나 아니면데굴데구 ㄹ굴렀다. " 자, 지금이에요. 저들을 제압하세요!" 우선 상대방의 속도를 늦워놓은 다음 홀드 마법으로 그들의 발을 묶었기에 그들이 달리던 상태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땅바닥과 조우했던 것이다. 내가 제일 먼저 달려가 그건 그들의 혈을 짚으려 할 때였다. 앞쪽에서 현이 튕기는 듯한 피잉~ 소리가 들리면서 뭔가 나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어차피 내 주위에 실드를 쳐놨기 때문에 나는 그리 당황하지 않은 채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아, 어느새 앞으로 나섰는지 사파 사람들 사람들 쪽에는 예전에 봤던 그 강노를 쓰는 궁수들이 2줄로 선 채 이쪽을 향해 활을 날리고 있는 거였다. 이게 참 무슨일인지, 하필이면 광인들이 내 마법에 의하여 모두땅바닥에 눕혀진 상태였기에 그들이 쏘는 강노는 광인들의 몸위를 지나 정확히 우리 세가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챙!챙! 다행이도 우리 세가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앞쪽에 있었기에 날아오는 강노를 별 탈없이 쳐낼수 있었지만 광인등르 넘어뜨리자마자 나타났던 궁수들 모습에 나는 가슴 한쪽이 싸늘하게 식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이것도 예상한걸까? 내가 저 사람들을 쓰러뜨릴 때를 대비하여 강노를 쓰는 궁수들을 준비한 건가?' 하지만 언제까지 생각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던 나는 그들을 행햐 시동어를 외쳤다. "어스 모우!" 이것은 내 시야에 있는 사람 중 내가 원하는 대상의 발 밑에 함정을 만들어 빠뜨리는 주문이었다. 마법사의 실려과 원하는 정도에 따라 함겅의 깊이는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깊이를 5m로 조정하여 외쳤다. 그러자 내 시동아가 끝나자 마자 그들이 갑자기 땅속으로 쑥 꺼져 들어갔다. '후우...제발 또 다른 짓거리를 하지 말기를.' 나는 그렇게 진심으로 빌면서 눈앞에 쓰러진 광인들으 ㄹ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 마벚이 풀릴 시간은 멀었기에 그들은 아지 느려 터진 몸 동작으로 발이 묶인 채 버둥대고 있었다. '내가 드래곤이길망정이지 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마법을 3개나 써버렸으니... 에휴,예전에 흑운방 장눤 폭파시킬 때보다 더 많은 마나를 쓴것같아.' 만약 갈천성이 또 다른 대비를 하여 내가 또 많은 사람들에게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면 나느 마나를 많이 써 벼러서 그 다음에는 마나를 아끼느라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갈천성은 내가 궁수를 저리 처리할 줄은 몰랐는지 그 다음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아 난 광인들을 다 제압할 떄까지 다른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 또한 갈천성이 생각한 또 다른 함정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핫핫핫, 역시 은소저는 대단했습닏. 은 가주님은 무척 좋으시겠군요. "정말 기분 좋은하루였습니다. 냉리도 은씨 세가에서 선봉을 서준다면 우리정파 무림맹의 승리는 확정된 것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은 가주님, 당연히 내일도 선봉에 서주겠지요. 우리는 은씨 세가만 믿겠습니다." 너무 수비에 이겨서인지 그날 무당파로 돌아온 우리는 완전히 사파 연합을 다 이긴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우리 은씨 세가는 완정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서고 싶어서 나선 것도 아닌데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게 너무나 맘에 안들었던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내 방으로 돌아왔다. 사파 연합은 우리가 광인들을 제압하자 그대로 물러나 버렸기에 오늘은 우리의 승리로 끝을 맺을수 있었다. 그들은 치사하게 도 제압당한광인들을 모두 내버려두고 저희들끼리 갔기에 그들은 현재 무당파의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래도 예전 단목세가를 침입했던 그 낭인 무사들이 먹었던 약보다는 약간 개조가 된것인지 시간이 지나 근육이 모두 파열되어 죽는다거나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처럼 사림이면서도 말을 못하고 마치 아픈개처럼 낑낑대며 불안해하거나 아니면 경계하듯이 으르렁 거리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감옥안에서 미쳐서 날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간 모두들 조금도 움지이지 못하게 꽁똘 묶어 놔야 했을 것이었다. '후우... 이래저래 맘에 안드는 날이었어.' .. 졸립지도 않았는데 일찍 침대에 누우며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록 이기긴 했지만 정말 찜찜한 날이었다. 특히나 내가 광인들을 맞이하러 나가기 전에 화를 내다가 우연찮게 봤던 갈천성의 그럴 줄 알았다는 미소는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렸다. '정말 기분 나쁘다니까. 도대체 그 미소의 의미는 뭐였지? 내 행동이 예측된 대로 움직여줘서 그랬던 거야? 에잇.... 몰라몰라, 빨랑 이곳 싸움을 끝내고 돌아갔으면 좋겠어. 이런 데 연관되는커 정말 기분 별로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 일부러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다 정말 잠이 얼핏 들었는지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서 잠이 깨었을 때는 시간이 뙈 지나 새벽2시경이었다. "뭐, 뭐야?" 잠결에 깬 거라 약간은 멍한 눈으로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으려니 내 방문을 누가 거칠게 막 두드리며 날 불렀다. "주군! 주군! 안에 계십니다?" "아, 유...나 일어났어.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는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뭔 일이 난 사람처럼 옷을 입고 검까지 차고 들어온 거렸다. 그 모습이 되게 다급해 보여 나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런 차림이야?" 유가 챙겨주는 겉옷을 입으며 내가 묻자 유가 빠른 어조로 대답했다. "큰일 났습니다. 무당파 감옥에 가둬둔 광인들이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하게도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예, 지금 사람들이 그들을 포위한 채 제압하려 하지만 너무 날뛰는 바람에 그것도 쉽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 유의 안내를 받으며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모여 있었다. 그래도 지금이 위급한 상황이라 많은 고수들이 몰려 있어 큰 피해 없이 그들을 착실하게 제압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아까까지는 풀이 죽은 것처럼 얌전히 있더니 갑자기 이렇게 날뛰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 "뭐야, 덕분에 잘 자던 사람들이 놀라서 다 뛰어나왔잖아!" 내가 나갈 무렵에는 날뛰던 광인들이 거의 다 제압되는 분위기라 난 앞으로 나서지 않고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가 잠시 후에 그냥 숙소로 향했다. "누나,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 갑작스러운 소동에 민이도 깨어 나왔는지 숙소로 돌아가는 날 보고는 물어왔다. "유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제압해서 가둬놓은 광인들이 풀려나서 날뛰었 다는 거야. 아까는 얌전하더니만 지금은 왜 저리 포악해졌는디 모르겠네." "아니, 포악해졌다 하더라도 이렇게 감옥에서 빠져나온 거야?" "모르지 뭐, 나도 방금 소동 때문에 일어나서 유에게 들은 거야. 하지만 대충 제압은 된 것 같더라. 이럴 때는 고수들이 많은 게 편하다니까." "그럼 다 해결된 거야?" "그런 것 같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그건 앞으로의 일을 예고하는 소동에 불과했다. 이른 아침, 어제 새벽에 깨어 다시 잔 탓에 약간 찌뿌둥한 기분으루 눈을 뜨는데 민이가 나보다도 먼저 일어났는지 문을 두드리며 날 불렀다. "누나, 아직 자?" "후아아암~ 아냐, 이제 막 일어났어." 기지개를 켜며 대답을 하자 민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민이뿐만 아니라 유와 덕이, 그리고 성구까지 같이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얼른 눈을 비벼 눈에 있을 눈곱들을 떼어내며 물었다. "아니, 아침부터 무슨 일이 또 있어? 내 방으로 우르르 다 몰려 오게." 그러자 민이가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누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긴 있나봐. 예 사형이 그러는데 아까 무림맹 사람이 와서 할아버지를 모셔갔대." "뭐? 아니, 왜?" "모르겠어. 혹시 어젯밤에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설마요. 그들은 금방 제압했는걸요." 유의 말에 예성구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혹 어떻게 된 것인가에 대한 의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피해가 어느 정도이며, 그들은 어덯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보고도 듣고요." "에이, 그건 아닌 것 같아. 그게 뭐 그리 다급한 일이라고 이런 아침부터 할아버지를 불러 가겠어?"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예성구는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뇨,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요. 게다가 잠시후면 또다시 사파 연합과 재림해야 하니 이런 사안은 미리미리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그러는걸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민이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음, 예사형 말도 맞는 것 같네." 하지만 잠시 후 전원 집합령에 무당파의 커다란 연무장으로 나가보니 무림맹주를 비롯한 9대 문파와 8대 세가의 지도자들 분위기가 장난 아니게 긴장되어 있었다. 뭔가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사파 연합과 대립한 지 비록 3일째이긴 하지만 그동안 무당파 내를 지켜야 한다 해서 우리들 모임에는 끼지 않았던 무당파 제자들까지도 지금 집합령에 포함되었는지 다들 긴장한 모습으로 나와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 모이자 무림맹주가 단상으로 알라서서 우리를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얼토당토않은 빌미로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온 저 사파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소이다. 그러나 어제오늘 사파는 시간만 끌고 있소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가 의논한 결과 저들에게 이끌려 가지 말고 우리가 직접 주도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났소이다. 오늘은 우리가 저 간교한 사파 무리에게 정파의 힘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시다! 모든 정파인들이여. 우리 모두 떨치고 일어나 사파 무리가 더 이상 우리를 우룡하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줍시다! 자, 모두들 무기를 드십시다!" 그러면서 무림맹주가 먼저 자신의 검을 들어 흔들자 단 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에 동조하여 자신들의 무기를 하늘 높이 쳐들고 무당산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질러댔다. "와아아아~!!" 난데없는 전원 동원령이었다. 무림맹주는 사람들을 각기 문파와 세가대로 몇 개의 조로 나눈 다음 무당파 밖으로 내보냈다. 사파들을 발견하는 즉시 신호를 하고, 그리하면 모든 이들이 달려가 사파와 맞서 싸운다는 단순 무식한 작전이었다.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조심스러워하더니 왜 갑자기 오늘 이러는 거지?" 오늘이야마로 정파인들 모두가 사파 연합과 크게 싸우게 도리 것 같자 사람들은 모두 흥분과 긴장으로 뒤범벅이 된 채 무당파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와 민이도 한 조에 소속되어 마치 밀려나듯 무당파 밖으로 나가게 되자 나는 어리둥절하여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동안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둣하던 민이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누나, 뭔가 좀 이상해." "그래, 나도 이상한 것 같아. 갑자기 왜 이렇게 조급히 사파들을 치려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 또 당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민이는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말을 자르면서 말했다.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번에 무당파 사람들도 대거 참여했다는 거야. 이상하지 않아? 그들은 무당파에서 보관하고 있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당파를 떠나지 말아야 하잖아. 그런데 그런 그들이 무당파를 벗어나 사파인들을 이 잡듯이 찾고 있다는 것은...." 그제야 민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챈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허걱!" 내가놀란 채로 민이를 바라보자 민이는 내 생각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 줬다. "어제 탈취당한 거야. 어제 무당파 감옥에 가둬놨던 광인들이 갑자기 난동을 부려 시선이 온통 그곳에 쏠려 있을 때." 그제야 나는 어제 그 난동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개달았다. 만약 잠겨져 있어야 할 현관문이 활짝 열린 채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잘 있는지 확인하려 들 터였다. 사파 연합은, 아니, 갈천성은 그걸 노리고 있었던 거였다. 광인들이 난동을 부린다면, 마지막 남은 마공 조각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무당파 사람들은 제일 먼저 그 마공 비급 조각이 안전한지 확인하려 할 것이다. 사파 사람들은 단지 그 무당파 사람의 뒤를 따라가 그가 조각이 안전하게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한 틈을 타 그 사람을 처리하고 마공 비급 조각을 회수하여 몰래 빠져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광인들이 날리치는 곳으로 쏠려 있을 테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렇게 다지자면 갈천성은 처음부터 광인들을 무당파 안으로 들여보내려고 날 선택한 거야.' 생각할수록 괘심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가 없었다. 폼을 보아하니 그는 내가 될 수 있으면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일부러 9대 문파 제자들을 자극하여 내가 선봉에 서게 하고, 그때 광인들을 보내어 내가 그들을 죽이지 않고 단지 제압만 하게 만들어 무당파 내로 들어가게 했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민이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말 대신 메시지로써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말로 하다가 누가 듣기라도 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구나. 하기, 감옥 문을 열어 광인들을 풀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야. 중소 문파의 무사로 잠입했다면 얼마든지 무당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 테니까. 누군가 무당파로 잠입한 사람이 감옥 문을 열어 광인들을 풀어줬던 거야."- -"그래그래, 생각할수록 이가 빠드득 갈려. 그 사람, 너무 치밀하지 않니? 나는 그동안 그 녀석이 계획한 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던 거야. 윽....생각만 해도 열받아."- 누가 계획한 대로 내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건 정말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된 듯한 기분이랄까? -"누나,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우리가 빠리 사파 연합의 무리들을 찾아야 해. 무림맹주가 왜 사람들을 다 풀어서 사파 연합을 찾으려고 하겠어? 그들은 지금 마공 비급의 조각을 다 가지고 있다고. 늦는다면 그들은 마공을 완성시킬지도 몰라!"- -"젠장. 젠당, 젱장! 일이 왜 이렇게 꼬여 버렸지? 그것도 꼬인 중심에 하필이면 내가 있다니... 으윽! 절대 용서 못해! 그 갈천성이라는 놈, 내가 기필코 그놈의 계획을 망쳐 버리고야 말겠어! 두고 봐!"- -"한데 어쩌지? 그들을 어떻게 찾아? 이 넓은 산 어디에 그들이 있는 줄 알고? 정파 사람들 다 풀어도 그들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거야. 마공 비급 조각을 다 모았는데 그들이 여기 있겠어?"- 민이의 비관적인 말에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냐 분명히 방법은 있어.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책임을 져야 해. 분명히 무슨 방법이 있을 텐네..."- 그러던 중 내 머리에 떠오르는 마법이 있었다. 비록 그 마법을 사용해서 찾는 건 좀 무식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민아, 마공이란 분명히 무공의 하나일 테니 내공을 움직이는 거겠지?"-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민이는 약간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대답을 갈구하는 눈으로 쳐다보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렇겠지? 게다가 할아버지를 비롯한 정파의 머리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하니까 엄청난 거겠지?"- -"그렇겠지."- -"그렇다면 엄청난 내공이 움직이는 거겠지? 그렇다면 마법 기운을 지하는 감지하는 마법에도 걸릴 수 있을 거야."- 나는 나 혼잣말을 메시지로 보내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의 생각에 만족해하며 하늘로 높이 떠올랐다. "비젼 앤드 센스 에너미!" 비젼이란 마법은 시력을 마치 망원경을 보는 것처럼 확대시켜 주는 마법이었다. 그들이 내가 있는 곳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잇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마법까지 사용하는 것이었다. '어딨지? 어디 있냐....제발 나타나라...." 무당산에는 사파 사람들을 찾는 정파 사람들의 모습만 보이고 간혹 경공을 전개하느라 센서 에너미에 걸리는 사람만 있었다. "뭐야, 뭐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머릴 떨어진 곳에 있지 않았다. 시선을 약간 돌려 무당산 전체를 훑는 와중에 그들이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도망갈 생각은 별로 없었는지 무당산 초입의 공터에 자리하고 있었다. "찾았다!" 나는 그대로 민이 옆으로 내려와 그를 이끌고 다짜고짜로 경공을 전개하며 뛰었다. 우리와 조가 되어 같이 다니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따라 뛰는 것도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빨랑 와! 그들을 찾았어!' "그래? 어디 있는데?' "무당산 초입!" 내 대답을 듣자 민이는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에게 눈짓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곧 일행 중 한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향해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신호탄을 쏘아 보냈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찾았으니 이쪽으로 모이하는 신호였다. 아마 우리가 사파 연합이 모여 잇는 곳으로 가면 또다시 신호탄을 쏠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갈천성을 어떻게 처리해 줄지를 고민하며 열심히 발을 놀리는데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민이가 물어왔다. -"누나, 우리끼리만 그들을 상대할 거야?'- -"왜? 누가 또 필요해?"- -"아니, 그게 아니라....누나가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몰라, 별 생각 없어. 난 단지 그의 계획을 완전히 망쳐 놓고 싶을 뿌니야. 녀석, 날 이용해 먹어서 엄청 기분이 좋았겠지? 훗, 하지만 그 계획은 나로 인해 망쳐질 거야!"- 다시 한번 하늘 위로 신호탄이 쏘아 올라져 갔다. 이제 한 번만 더 신초탄이 쏘아 올라가면 나는 사파 연합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숨어서 마공을 완성시키리라 생각하고 있던 길청성은 내 예상을 깨고 사파 무리들이 모여 있는 바로 그곳의 제일 앞에 서서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날 싱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당신. 설마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 모습에 또 원 일을 꾸미고 있늕 몰라 경계하며 그를 향해 묻자 그가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이런, 예쁜 아가씨에게 거친 말토는 안 어울리는데. 날 만나러 온 거라면 정말 아쉽지만 난 선약이 있어서 말이지. 아, 저기 오는군." 그가 아주 반갑다는 것이 내 뒤쪽에다 시선을 주며 말하자 나는 자연스레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무림맹주를 비롯한 9대 문파 장로, 장문인들과 8대 세가의 장로, 장문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갈천성은 너무나 기쁘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오, 여러분들 정말 반갑습니다! 저를 보시기 위해 이렇게 달려와 주시다니, 이 갈 모 정말 몸 둘 바를 무르겠군요. 정말 잘 오셨습니다!" 꽁지 빠져라 도망가야 할 녀석이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경계 어린 표정으로 내 주위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무림맹주 또한 나처럼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녹의비객 갈천성,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마공은 바로 네가 가져간 거겠지?" 그러자 갈천성은 하늘을 향해 너무나 통쾌하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 그러다가 갑자기 뚝 그치고는 우리 쪽을 바라보며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물론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나? 자그마치 50여 년이야. 50여 년. 그동안 난 너희 정파를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모으고, 모으고, 모으고, 또 모았다. 그래서 드디어 이날이 온 거야.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그런 그가 서 잇는 곳의 뒤쪽에는 광인들과강시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막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 강한 마나의 기운이 풍겨져 나오는 걸 보니 아마 마공이 완성되고 잇는 모양이었다. 그걸 느낀 듯 무림맹주가 다급하게 물었다. "갈천성, 뭘 하는 거지? 설마 마공을 완성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미친짓이야!" 그러나 갈천성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훗, 미친 짓? 그래, 난 미쳤는지도 몰라." 계속 기쁜 듯 웃음을 짓고 있던 그가 갑자기 매서운 살기를 풀풀 날리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눈압에서 가족들의 죽음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내가 정상이길 바래? 난 미쳤어. 암, 미쳤고발고. 내 가족과 식솔들이 몰살당하던 날, 난 미쳤다! 미치기로 결심했지. 저 거대한 정파 놈들에게 복수를 하러면 미쳐 있어야 하지 않겠어?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날 이렇게 만든 건 다 너희 정파 놈들이야!" 우리 쪽을 손가락질 하면서 외치는 그의 눈은 분노로 인함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광기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공을 세우기 위해 미친놈들! 그게 너희 정파 놈들의 실체지! 그리고 힘없는 우리 집안은 그럼 네놈들의 야욕에 의해 철저하게 부서졌다. 뭐? 정의를 실현해? 네놈들이? 하! 저슴에 있을 우리 집안 식구들이 몇십 년은 웃을 이야기지! 50여 년 전 정파에게 싸움을 건 것은 사파가 아니었어! 단지 마교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마교는 제일 먼저 사파에 싸움을 걸어 자신에게 복속시켰지. 정파와 싸우고 싶지 않은 이들까지도 말야. 한데 정파가 그런 사파를 도와줬나? 천만에! 같은 정파가 아니라고 철저하게 외면했지. 그래, 그건 좋아. 그리고 정파는 이겼지. 아~ 정의의 승리야. 아주 좋지. 그런데 마교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며 정파롸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사파들은 왜 몰살시켰지? 단지 사파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다! 그게 바로 너희 정파라는 놈들이야!" 그러자 곤륜파의 장로가 날카롭게 외쳤다. "닥쳐라! 이제 보니 너는 그때 살아남은 사파의 잔당이로구나! 그래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게로군!" "푸핫! 그래, 난 그때 살아남은 사파의 잔당이다. 어쩔 테냐? 그때처럼 또다시 몰살시킬 테냐? 훗, 그러지는 못할걸? 나는 그때 마교의 교주와는 다라. 제일 먼저 마고을 사용했으면 너희 정파놈들을 싸르기 쓸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은 좀 심약했던 모양이야. 다 죽어갈 때 마공을 사용하다니 말야. 큭큭큭큭...하지만 난 그런 실수는 저리즈리 않을 테다!" 갈천성의미친 듯한 말에 무림맹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너야말로 바보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그게 어떤 마공인줄 아냐? 그걸 사용하면 아군이고 적군이고 구분없이 사이좋게 죽는 거란 말이다!!" "사이좋게? 오, 그거 좋기. 사이좋게라...정파와 사파가 사이좋게... 큭큭큭...극 좋지." 그가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킬킬대며 웃는 와중에도 마나의 기운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 마공이 완성되었는지 막사가 바람에 흩날리듯 심학 펄럭거리고 있었다. "오....이럴 수가...결국은 그 저주스러운 마공이 드러났어...또다시 그 비극이 일어나다니..."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나을 보호하려는 둣 감싸며 절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즈음에는 신호를 보고 달려온 정파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 그때 즈음에는 신호를 보고 달려온 정파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호라~! 드디어 완성되고 있구나! 크하하하! 좋아, 좋아. 관객이 이리 많은곳에서 완성된 모습을 볼수있다니,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은 날이로구나!!" 갈천성의 맛이 간 말을 들으며 나는 긴장한 채 막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리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마공이 도대체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하고, 과연 내가 막을 수 있을지도 걱정되었다. 심하게 펄럭거리던 막사의 천장이 결국 터지듯이 쫘악 갈려졌다. 그곳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퍼져 나오더니 허공에서 뭉치고, 또 뭉쳐서 지름이 약2m가 조금 넘어 보이는 검은 구체를 만들었다. "뭐, 뭐야, 저게!" "오오.... 결국은 또 그런 비극을 보게 되는 것인가! 진아, 어서 도망치거라! 민이를 데리고 어서!" 할아버지가 날 감싸고 있던 팔을 풀며 민이가 서 있는 곳으로 밀었지만, 민이도 나도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계속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크하하하! 나오너라! 나와라, 내가 기다리고 있노라!! 으하하하~!!" 미친 득한 갈천성읠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그 검은 구체 안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쑥 나왔다. 처음에는 마치 여인의 것만 같은 희고 긴 손이, 그리고 그에 달린 팔.. 그리고... 얼굴...... "잉? 얼굴?" 드디어 나타난것은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아름다운 은발, 하얀 피부에 대리석 조각 같은 외모, 호박 빛으로 빛난는 눈, 그리고 뾰족한 귀이이이~? "어, 어라라라?!" 게다가 그의 붉은 입술 사이에는 뾰족한 송곳니가 살짝 삐져 나와 있었다. 구체 안에서 그가 다 빠져나오자 그 뒤를 따라 풀쩍 뛰어나오는 생물체가 있었다. 엄청 커다란 흑표범이었는데 두 눈은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였고 이마 정중앙에는 마름모꼴의 붉은 돌이 박혀있엏다. 게다가 그 표범의 등에는 커다란 피막 날개가 달려 있었다. "어미미미~!" 검은 구체 안에서 빠져나온 인물이 기지개를 쫙 켜는 동시에 손가락마저도 쫙 펴자, 그의 손톱이 길어지며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안으로 뾰족하게 굽어졌다. "하아....."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모두들 넋을 놓고 있을 때 제일 먼저 정신 차린 건 갈천성이었다. 그는 이세상에서는 보지 못할 흉악하고 무서운 괴물들이 줄줄줄 쏟아져 나올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괴물은 아니고 웬 희한한 한 명이 지 애완동물처럼 보이는 날개 달린 표범 하나를 달랑 데리고 나오자 황당했던 모양이다. "이봐, 넌뭐냐? 왜 여기서 나온거지?" 그러자 은발의 남자는 그를 나른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 그대인가, 날 부른자가?" 하지만 갈천성은 무지 화가 난 것인지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막사가 있는 쪽을 향하여 외쳤다. 완전히 그 남자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이기 어떻게 된거냐! 왜 나오라는 그 괴물들은 안 나오고 이런 희한한 놈이 나온는거야!" 그러자 막사 쪽에서 두명의 사람이 나타나더니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데 나타난 사람 중 한 사람을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림맹에서 마공이 비급조각을 가지고 사라졌던 바로 그 제갈 전 가주였던 것이다. "제갈 전 가주!!' "이럴수가........." "아니, 거기서 뭘 하시는 겝니까?" 우리 쪽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구는 놀라서 경악성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에게 소리 높여 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제갈 전 가주는 정파 사람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무시한채 갈천성의 앞에 부복한 채로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주군. 하지만, 의식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봐,이봐." 은발의 남자가 갈천선을 불렀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은발의 남자를 무시한 채 제갈 전 가주에게만 소리쳤다. "그런데 왜 이런 놈이 나타나는 거야?!" "그게 저도 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냐? 무림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네 녀석이 모른다면 누가 안다는 것이나? 으득! 쓸모없는 놈! 애써서 네놈의 정신을 제합한 보람이 없지 않느냐?" "허걱" 다시 한 번 정파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내가 구한 사람은 진짜 제가 가주였던 것이다. 단지 그의 정신이 제압당해 있었을 뿐인... 그러니까 내가 그를 구해왔을 때 그가 마공 비급의 조각을 가지고 사라질 때까지 이상하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갈천성은 너무 분노한 나머지 자시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은발의 남자에게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위험한 기운 또한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가 태도를 보아하니 미쳐서 상황판단이 안 되는 건지도.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내가 저럴 줄 알았지.' 불쌍한 갈천성은 채 화를 다 내기도 전에 몸과 목이 분리되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뒤는게 그의 잘려진 목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는 분노에 찬 은발의 남자가 팔을 든 채 서 있었다. " 뭐 이런 자식이 다있지? 전혀 예의를 모르는 놈이로군.!" 은발 남자의 분노에 찬 말에 나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지는 느낌이었다. '네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어쩐지 너무 무시하더라니....'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리 예상으 못했는지 당황하는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에 뭘 어지하기 보다는 숨죽이고 가만히 사태를 주시했다. 단 한 사람만이 그 모습에 놀라 부르짖으며 달려왔다. "주군!" 그는 바로 나와 많이 대결했던 모산파의 도사였다. 그는 갈천성의 차갑게 식어져 가는 시신을 부여 잡으며 부르짖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가 대답할 리 만무했다. 한참동안이나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던 그는 시신의 목을 가져다 제자리에 놓고 시신의 몸 또한 가지런히 놓아주더니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났다. 그의 몸은 분노와 슬픔으로 인함인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은발의 남자를 마치 씹어 먹을 것 처럼 무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이놈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발악을 하듯이 외치며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놋으로 만든 좋을 흔들자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강시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은발의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한 번 흔들었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곁에 있던 날개 달린 흑표범이 한 번 크게 울부짖은 후 그 강시들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앙~! 처음에 봤을 때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표범은 진짜 강했다. 검기로만 상처를 낼 수 있는 강시들도 표범이 한 번 휘두른 앞바에 허리가 두동강이 나고 한 번의 날개짓에 힘없이 저 멀리 날아갔다. 표범에가 물린 머리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들은 표범의 몸에 상처하나 낼 수 없었다. 그만큼 표범이 어찌 저리 빠를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잘빠진 표범의 몸매를 보면 것도 꽤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 표범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장시들을 모두 처리한 건 채 몇십분이 지나지 않아서 였다. 그 모습에 모산파의 도사는 너무 놀랐는지 입을 떠억 벌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러자 은발의 남자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한번 힐끔 바라보다 귀찮다는 듯 팔을 한번 휘둘러 그의 목을 잘라 버렸다. "허,허걱! 뭐지, 저 남자는?" 사람의 목숨을 마치 파리 목숨처럼 취급하는 그의 모습에 정파사람들이 경악할 때에 그 남자의 시선이 우리쪽을 향했다. "뭐냐, 네놈들은? 너희들도 나에게 덤빌 테냐?" 그 남자의 말에 달개 달린 표범이 자시이 먼저 덤비겠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 표범이 정파 사람들에가 덤비기 저에 나는 재빨리 손을 들었다. "저기요~ 잠깐만요!" 은씨 세가 사람들이 경악하며 날 말리려 했지만 난 그들의 손을 교묘하게 빠져 나가며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오랫만이죠? 처음에는 잘 못알아봤네." 그러자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넌 누구지? 날아나?" 이 남자는 아무래도 날 기억 못하는 듯했다. 하기사 나도 이 남자를 처음엔 기억 못했으니 당연할지도, 우리들의 만남은 너무도 짧았으니 말이다. "물론알죠. 타자시나 마족." 그 마공이란 아마 마족을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이 적혀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전 마교의 교주는 그걸로 마족을 불러내어 마물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얻은 모양이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마족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물을 부린 것이 정파와의 싸움에서 결판이 날 때 즈으에 사용한 데다가 그 걸 사용하자마자 정파 사람들에게 죽은 걸 보아하니 계약할때 뭔가를 잘못했었나 보다. 마족과 계약할 때 계약내용을 정확하게 해놓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타자시나 마족은 내가 자신을 알아보자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호오, 날 아는구나. 그런데 우리가 언제 만났더라?" 그래서 난 이제 진정한 채 그의 발치에 나른하게 눕는 날개 달린 표범을 가르쳤다. "저녀석이 당신 소유가 되는나에요." 타자시나 마족은 표범과 날 번갈아 보다가 깊은 생각에 잠긴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음...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그곳에는 사람들이 꽤 많긴 했지. 그래, 이녀석을 만들어준 마법사와의 계약이 끝난느날이라 그 마법사의 친구들이 많이 몰려왔었어. 그중에 있었나보지?" "예,음...아마 당신이 아벨리안 마족을 만나신건 기억하시나요? 그애가 제 친구인데." 내 말에 타자시나 마족이 생각난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따 쳤다. "아하, 그 덜떨어진 마족? 그 녀석이 네 친구인가?" "예, 지금은 잠시 헤어져 전 여기 있고 그애는 딴 인간세계에서 놀고 있어요." "그래그래, 그렇군. 그런데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는 아무래도 난 기억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때 나는 빨간 머리에 빨간 눈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 그게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날 슬쩍 밀어내었다. "그게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만 기다려라. 이곳에 있는 녀석들을 처리한 다음에 천천히 들어줄 테니." 나도 이곳에 같이 있었는데 나는 빼놓고 일을(?) 벌이려는 태도를 보아하니 내가 자신을 알아주니까 나만은 살려주려는 모양이었다. 타자시나 족이 허영심이 많다던데 그것 때문이려나? 하지만 나는 얌전히 뒤로 물러나는 대신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 막으며 배시시웃었다. "아... 그게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제 동료거든요." 내 말에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는 자신의 길고 구부러진 손톱을 슬쩍 펴 보이면서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그으래에~? 그렇다면 넌 날 불러놓고 계약은 하지도 않은 저 오만방하한 놈과 한패거리란 말이지?" 마족과의 계약은 철저한 얘절 속에 이루어진다고 알고있다. 하지만 만약 서로 원하는 것이 달라 계약이 이우러지지 않는다면 그순간 마족을 불러낸자는 마족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마족과의 계약은 참으로 위험하고 조심스럽다고 했다. 지금 이 타자시나 족은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지 때문에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앗! 그게요.. 당신은 두 세력이 대립하는 사이에 떨어지신 거에요. 저는 당신을 불러내고 계약을 하지 않은 사람과 대립하는 세력편이죠." 이것만 올림 에필로그임...... 아린이야기 42화 마지막... 번호:355 글쓴이: 『∑。발랄꼬마소녀♀。』 조회:36 날짜:2002/09/10 21:03 .. "흥,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네. 내눈에는 다 똑같은 인간이니까." 그러면서 그가 팔을 들어 올리는 폼이 아무래도 정파 사람들 또한 화풀이 대상으로 삼으려는 듯했다. "잠시만요, 저랑 계약하시면 안될까요? 어차피 계약하러 오신거니 계약자만 바뀌는 것이잖아요." 그러자 그가 솔깃한 듯 잠시 멈칫거렸다. "그래? 너와 내가 계약할 마음이 있다는 거지? 그래, 넌 나에게 무엇을 줄테냐?" 나는 재빨리 예전에 세이몬에게서 들었던 타자시나 족에 대한 내용을 떠올려 훑어보았다. "음.... 당신은 보석을 좋아하시 않으세요? 저에게 드워프가 만든 멋진 목걸이가 있는데......." 하지만 그는 내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잘라버리며 말했다. "흥, 목걸이는 흔한거지." "오오, 그냥 일반 목걸이가 아니에요. 제가 전에 있던 세계에서 100가지 안에 드는 보물중 단 세 개밖에 없는 목걸이라고요." 그제야 타잣나 마족은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호오, 너에게 그런 목걸이가 있단 말이지?" "물론이죠,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면 어쩜 들어보셨을지도 몰라요,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와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라고...." 그러자 타자시나 마족의 눈이 휘둘그레 떠졌다. "뭣이라? 너에게 그 두 목걸이가 있단 말이냐?" "아,아세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정말이냐? 정말 너에게 있단말이지?" 재차 확인하는 타자시나 마족의 태도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좋아. 계약조건은 됐고, 그럼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지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리지요." 타자시나 마족이 태도를 180도 바꾼 채 나에게 물어왔다. 이것이 바로 마족들이 계약할때의 태도인가 보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이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며 시건을 돌리다가 저쪽에서 초초하게 날 바라보고 있는 은씨 세가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보자 나는 그들처럼 날 생각해주고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떠오랐다. 그순간 나는 결정을 내리고 타자시나 마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드래곤과 엘프가 있고, 드워프가 있으며, 마법사와 기사가 있는 세계를 아시겠지요? 소드르 왕국이 있고, 테아칸 왕국이 있는 세계말입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나는 그곳을 잘 알지요." "그렇다면 저를 그 세계에서 소르드 왕국의 재상 저택으로 데려다 주세요. 이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내가 돌아갈 때인 듯했다. 생각해보면, 이곳의 은씨 세가와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었던 것같다. 게다가 원래 세계에서 날 기다릭 있을 할아버지와 아빠가 너무 보고 싶기도 했다. 류미르와 세이몬이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궁금했고, 그리고... 그 애쉬 녀석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했다. 비록 이곳 은씨 세가 사람들과 엄마 아빠에게도 정이 들었지만, 역시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나는 처으부터 인식한 채,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쭈욱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것 같았다. 아무래도 민이처러 세가의 일에 열심이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일지도 몰랐다. "당신이 원하는것은 그것 하나뿐?"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이것들을 들어주신다면 제가 가진 테아칸왕비의 목걸이와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중 하나를 드리지요. 단, 둘 중 무엇을 가지실지는 당신이 직접보고 결정하십시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의 손바닥을 내밀어주십시오." 내가 순순히 손바닥을 내밀자 그가 자신의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손바닥을 살짝 찔러 피를 낸 다음 그것을 자시의 손등위에 올려놓고 뭐라뭐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손등 위에 떨어진 내 피가 그의 하얀 손등 위로 스며들어가는 것이었다. 주문을 마친 그가 보여주는 손등 피부속에는 내 피라고 생각되어지는 붉은 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그대와의 계약을 어길시 가시가 되어 나의 심장을 지를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나와의 계약을 어길 시에 난 그 보답을 당신께 직접할 것입니다."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손을 잡고 말했다. "이것으로 당신과 나 사이의 계약기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서 나에게 물었다. "자, 그럼 언제 데려다 줄까?" 그말에 나는 잠시 갈등을 했지만 고민을 길지 않았다. "지금요, 하지만 저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은 주실래요?" "그러지뭐, 하지만 너무 길게 하진 마라. 난 오래 기다리는 건 질색이니까." 나는 그에게 그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나와 타자시나 마족을 바라보고 있는 은시 세가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내가 아무 일 없이 달려오자 엄마가 안심한 표정으로 날 꼭 끌어안았다. "진아~ 넌 엄마를 너무 놀래키는구나. 도데체 저 이상한 사람이과 무슨 이야기를 한거냐?" 엄마가 못 알아듣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읷에 있는 사람 어느누구도 그와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위해 저쪽 세계의 소르드 왕국언어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난 엄마 품에서 빠져나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 나 저사람과 같이 가기로 했어요." 그러자 엄마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대신 놀란 할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진아,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저 사람이랑 같이 가겠다니?" "할아버지, 만약 제가 저 사람과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저 사람은 아마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였을 거에요. 그것보다는 저 하나만 여기서 사라지는게 낫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저런 사람 하나 가당 못할 것 같으냐?" 할이버지는 호언장담햇지만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저 사람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건 할아보지도 알고 계실거에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할아버지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제가 할아버지 엄청 사랑하는 거 아시죠? 보고 싶을꺼에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떨리는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인석아... 잃었던 손녀를 이제야 되찾았다 싶었는데 널 또 잃게 만들셈이냐?" 그 말에 양심이 무지 찔렸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난 지금이 아니라 하여도 언젠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할 몸이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그리고 이번에는 민이가 안가잖아요. 아마 민이는 할아버지 곁에서 계속 있다가 은씨 세가를 계승할 거에요." 그러자 뒤에있던 아빠가 불쑥 끼어들었다. "넌 언제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구나." "에헷헷헷, 죄송해요, 아빠. 하지만 전 정말 가야만 하는걸요." 그때 머리 속으로 조용히 들리는 메시지가 있었다. "본래...세계로 돌아가는 거야,누나?" "그래" "생각보다 일찍 가네. 좀더 있을줄 알았는데..." "훗, 동감이야.하지만 지금 가야해. 그래야만 할것 같아.' 지금 안가면 언제 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헤어지는건 슬프지만 그래도 이 기히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잘가. 그동안 즐거웠고...다시 만날수 있을까?" "글쎄 ...네가 이곳에서의 일을 접고 내가 이쓴 세계로 올 수 있으면 한번 와봐라." "훗, 가능하면 꼭 찾아갈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따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유와 덕에게는... 괜히 미안한 마음만 들어 그냥 미안하다고만 하고 그둘을 민이에게 맡겼다. 유는 내 작별인사에 고개만 끄덕이며 내 얼굴을 보지 않았고, 덕은 내 손을 한번 꼭 잡았다 놓으며 덩치에 안어울리게 눈물까지 보였다. 그모습에 가슴 한쪽이 아려옴을 느낀 나는 나머지 세가 사람들을 향해 이루러 활짝 웃으며 활달하게 소리쳤다. " 자,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구요~!!" 그렇게 한꺼번에 인사를 끝낸 나는 기다리고 있는 타자시나 족 에게 달려갔다. "이제가요!" "그러지" 그의 손짓에 아까부터 계속 허공에서 머물러 있던 검은 구체가 점점내려오더니 우리의 앞에서 그 시커먼 입구를 벌리고 있었다. 이제보니 이건 내가 이 세계로 떨어질 때 봤던 차원의 문과 비슷했다. '돌아가면 차원의 문을 여는 방법부터 배워야겠다.' 타자시나 마족이 내 손을 잡고 먼저 그 구멍으로 들어가자 나도 곧 뒤따라 그곳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그동안 엮었던 많은 인연들을 뒤로한채 날 기다리고 있을 원래 세계를 그리면서 말이다. 드뎌 아린이야기 에。필。로。그。 .. 타자시나 마족의 손에 이끌려 차원의 문으로 들어간 후 금방 햇빛을 보게 된 나는 너무 당황스러운 모습을 발견했다. "자 여기가 맞나?" 너무 놀란 나는 타자시나 마족의 물음에 대답은 못하고 겨우 고개만 끄덕이고는 부리나케 달려야만 했다. 타자시나 마족은 나와의 계약을 정말 정확하게 이행하여 내가 온 곳은 소르드 왕국의 아빠 저택의 뜰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는 엄청 분노한 할아버지가 아빠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있었고 , 그런 할아버지를 류미르와 세이몬이 막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 할아버지와 아빠 주위에는 두 분이 뿜어대는 마나의 자기장 영향으로 인하여 돌풍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마이터와 죠슈아는 그런 돌풍으로부터 기사들을 지키느라 방어막을 쳐 버티고 있었다. " 하아..제대로 돌아왔네. " 하지만 기쁨보다는 다급한 기분을 먼저 느껴야 한다는 것이 조금 처량할 뿐이었다. " 이노오오옴~! 도대체 뭘 망설이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아린을 찾으러 가야 할 께 아니냐! " " 글쎄, 조금 진정하시지요. 지금 이렇게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 아빠는 멱살을 잡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 진저어엉~? 지금 내가 진정하게 됐어? 네놈이 안 가니 내가 간다는데 왜 나까지 막고 난리냐? 엉? " " 무작정 차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신다면 목표가 없는 이상 칸 시스파슈타인님이라도 차원의 틈에 끼인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 아빠도 정신이 없기는 없나 보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렸는지 할아버지의 본명을 그대로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 차원의 틈이고 뭐고 아린이 그곳에 있단 말이다! " " 글쎄,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가시는 건....... " " 닥쳐라, 이놈아! 난 갈테다. 가서 아린을 찾아야......! " 나는 한숨을 한번 폭 내쉰 뒤 지체없이 달려가 폴짝 뛰어 할아버지의 등을 매달리며 속삭였다. " 할아버지, 지금 뭐 하세요? " 그리고는 그대로 할아버지의 등에서 폴짝 내려와 한 걸음 물러났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등장한 나 때문에 어찌 반응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 응, 아린이냐? 잠시만 기다려라. 내 이놈을 혼내주고...잉? "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나에게 대꾸해 주시던 할아버지는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상황을 깨닫고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을 홱 돌리다가 양 팔에 매달린 세이몬과 류미르, 두 녀석의 무게 때문에 신형을 크게 휘청거렸다. " 아이고, 이놈들아 당장 떨어지지 못해? 왜 나한테 매달려 있는 것이냐? " 나에게 대하는 것과는 달리 매섭게 그들을 노려보아 그들을 움츠러들게 만든 할아버지는 그대로 먼지 털듯 둘을 털어버린뒤 한걸음에 달려와 날 끌어안았다. " 아이고~ 아린아, 아린아, 어디 갔다 왔니? 이 할아비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 " 아하하하...죄송해요. 많이 걱정하셨죠? " " 걱정했다마다. 네가 혹시나 차원의 틈에 끼어 헤매고 있는건 아닌지 얼마나 걱정한 줄 아니? 어디 보자, 어디 다친 덴 없니? " 그러면서 그제야 날 떼어내고 찬찬히 살펴보던 할아버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 아니..아린아, 왜 그런 모습으로 있니? 게다가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옷차림이냐? " " 훗훗훗, 할아버지, 신기하죠? 저도 무척 놀라워요. 이상한 세계로 떨어졌었거든요. 그런데 그곳에서 십년이나 넘게 있다가 온거 아세요? 말씀드리자면 무척 길어요. 그런데 여긴 대충 몇 시간즘 지난 것 같네요. 너는 한 몇 년쯤은 지날 줄 알았는데...... " " 뭐? 그럼 다른 차원으로 떨어진 게냐? 어이구, 그나마 다행이구나. 차원의 틈으로 떨어졌다면 빠져나올 구멍을 찾기 힘들었을텐데 말이다. 천년감수 했다. " 좀 과장스런 몸짓으로 할아버지가 가슴을 쓸어 내리자 나는 활달하게 웃으며 맞장구 쳤다. " 그런가요? 와~ 전 정말 운이 좋았군요. " 그렇게 내가 할아버지와의 대화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내 등을 톡톡 두드리기에 돌아봤더니 깜빡 잊고 있었던 타자시나 마족이 그곳에 서 있었다. " 에헴, 대화를 방해하는 건 정말 미안한데, 이젠 그쪽이 계약을 이행해 줬으면 좋겠는데? 난 빨리 목걸이를 받고 돌아가고 싶거든. " 그런데 내가 말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놀라서 나에게 물었다. " 마족? 아니, 아린아. 마족이랑 계약한 거냐? 도대체 계약의 조건으로 내건 것이 무엇이니? 마족이란 계약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데 함부로 계약을 하는 게냐? " " 후후후, 할아버지,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 하나를 주기로 했거든요. " 안심하라는 듯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건만 할아버지는 오히려 더욱더 의심드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 그게 정말이냐? 정말 목걸이 하나뿐이야? 이 할아비에게 말해보렴. 할아비가 다 해결해 주마! " " 아니, 정말이에요. 맹세코 제가 가진 목걸이 중 하나예요. 할아버지, 이 마족 기억 안 나세요? 예전에 저 도와주러 같이 가셨다가 만났잖아요. 류미르랑 세이몬하고. " 그러자 곁으로 와 있던 류미르와 세이몬이 타자시나 마족을 보더니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예전에 만났던....." "맞아, 키메라를 연구하던 그 괴상한 마법사랑 계약을 맺은 마족이었어." "아. 저기 그때 애완 동물 있다! 여전히 멋진 자태인데?" "아하... 그때 그...그렇군. 그래. 그랬었어." "할아버지, 잠시만요. 계약은 이행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말한 나는 타자시나 마족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약 10년 만에 다시 보는 저택이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감회가 새로었다. 그렇게 내 방을 찾아가는 길에 나는 궁금했던 점을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나는 그 세계에 있은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곳은 단지 몇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네요?" "차원이 다르면 시간의 흐름 또한 다를 수 있지. 뭐, 시간의 흐름이 비슷한 곳도 있긴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이 세계의 시간의 흐름보다 네가 갔다 왔다던 그 세계 시간의 흐르이 더 빨랐던 모양이군." "흐음... 역시 그런가요? 그럼 마계와 이 세계의 시간 흐름에도 차이가 있나요?" "아니, 마계와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비슷하지.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근소한 차이가 나니 그렇게 많이 틀리지는 않을 거야." "그럼, 시간의 흐름이 똑같은 차원도 있나요?"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난 알지는 못해. 내가 아는 것은 수많은 차원 중의 일부분일 뿐이니까." 기억을 더듬어 마족을 데리고 내 방으로 가자 그곳에는 아빠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날 보더니 다짜고짜 폭 안아버렸다. "에구~ 내 새끼...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냐? 조슈아가 날아와서 다짜고짜 네가 차원의 틈새에 떨어졌다고 했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하하하.... 정말 죄송해요, 아빠. 걱정 많이 하셨죠? 그리고 할아버지를 말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많이 고생하셨을 텐데." 내가 무지 감격했다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자 아빠가 그 특유의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부볐다. "훗훗훗, 당연한 게 아니냐? 나중에 네가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가 안 보이면 네가 날 얼마나 원망하겠냐?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말렸지." "정말 너무 고마워요, 아빠. 역시 아빠가 최고예요!" 그러자 다시 한 번 타자시나 마족이 내 등을 콕콕 찔렀다. "저기... 목걸이는 언제 보여줄 건데?" "아구구...맞다. 내가 정신이 없어요. 잠시만요. 거기 침대에 앉아 계세요."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내 침대도 약간 낯설어 보였다. 그래도 다행히 얼마 헤매지 않고 나는 금방 내 마법 주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자, 여기요." 그에게 내민 것은 파라 비로드로 감싸인 네모난 상자 두 개. 하나는 테아칸 왕비 목걸이가 들어 있는 상자였고 다른 하나는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가 들어 있는 상자였다. 비록 보존 마법을 걸어놓지 않아 약간 오래된 티가 나기는 했지만, 그게 오래된 보물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두 목걸이의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는 여전했다. "오오, 정말 아름답군. 예전에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는 단 한 번 볼 기회가 있었지. 그 뒤로 얼마 동안은 눈에 밟혀서 마음 고생이 심했는데 이렇게 내 손에 들어올 줄이야... 아, 하지만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도 너무 우아하군. 으윽! 이러면 갈등 생기는데... 도대체 뭘 가져야 하지?" 그는 테아칸 왕비의 목걸이에 손을 가져가다 다시 레스틴 여왕의 목걸이에 손을 가져가다 또 옮기고 다시 옮기고 그리기를 수차례. 결국 결정짓지 못했는지 그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또 다른 소원 없어? 그거 들어줄 테니까 이거 두 개 다 나 주면 안 될까?"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저는 다른 소원은 없거든요." 그러자 그가 너무 안타깝다는 눈으로 목걸이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하아~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건 나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야. 차라리 한 목걸이만 보여줄 것이지......" 그러더니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나에게 말했다. "저기, 그냥 네가 나에게 하나 골라주지 않을래? 난 도저히 고를 자신이 없어." 그래서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두 목걸이 상자를 덮고는 몇 번 위치를 바꾼 뒤 타자시나 마족에게 눈을 뜨게 했다. "자, 이 두상자는 모양이 똑같지만 안에 담긴 건 달라요. 둘 중에 당신이 하나를 고르세요.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아요." 타자시나 마족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만 손가락으로 몇 번 두 상자를 번갈아 콕콕 찔러보더니 결국 하나를 골랐다. 아마 내가 보기에 손가락으로 '어느 것을 고를까요?'를 한 듯했다. 그는 자신이 고른 상자를 품에 꼬옥 안은 채 내가 가지고 있는 상자를 안 보려는 듯 시선을 돌리면서 아주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혹시... 혹시라도 나중에 마족과 계약할 일이 있으면 부디 날 불러주길 바래. 내가 만사 제쳐 놓고 달려올 테니까. 알았지? 난 타자시나 마족에서도 유월이야. 꼭 기억해 줘." 그는 몇 번이나 더 신신당부를 하더니만 차원의 문을 열고 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내 방에서 나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긴장된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아빠가 그가 사라지자 내 곁으로 오더니만 내 머리를 툭 쳤다. "아까는 그 마족이 있어서 아무 말 없이 있었다만, 위험한 일을 했구나. 마족과 계약을 한다는 건 우리 드래곤으로서도 꺼리는 일이라는 걸 모르니?" "훗훗, 그래도 그가 없었으면 전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이상한 세계에 빠졌는데 차원의 문을 여는 마법을 제가 몰랐거든요. 만약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곳에서 살아야 했는지도 몰라요. 다행히 예전에 타자시나 마족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있어 보석을 가지고 거래했더니 잘 먹혀들었네요." "그래그래, 그리고 부탁이데 이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으련? 네 기운은 느껴지는데 다른 이의 모습으로 있으니까 이상하구나." "호호호, 보낼 세계로 돌아왔으니 당연히 보낼 모습으로 돌아와야죠. 폴리모프." 내가 낮게 중얼거리자 내 몸을 붉은 빛이 감싸더니 잠시 후에 사라졌다. 그러자 그런 날 바라보던 아빠가 다시 한 번 꼬옥 껴안으면서 말해따. "어서 오너라." 그래서 나도 대답했다. "다녀왔습니다아~!!" 잠시 후 할아버지와 또 한 번의 해우를 마친 나는 겨우 세이몬, 류미르와의 대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난 그들에게 할아버지를 말려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그리고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뭐어? 여행을 잠시 미루자고?" 세입몬이 무척 섭섭한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세이모온,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내가 말했다시피 난 그곳에서 십여 년을 있다 왓다고. 그러니까 잠시만 할아버지하고 아빠랑 같이 지내고 싶어." 다행히 류미르는 이해해 준 듯이 고갯를 선선히 끄덕여 줬다. "이해해. 네 두 혈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세이몬, 네가 이해해 주는 것이 어때?" 그러자 세이몬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많이 기대했는데......" "에이, 세이몬, 그러지 마. 그럼 내가 넘 미안해지잖아." "맞아. 그리고 아예 안 가는 것도 아니고 한 한 달 정도만 미룬다는 거잖아. 그때까지 여행 준비를 좀 더 한다 치지 뭐." 류미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세이몬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더니만 결국 끝에 가서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린 할아버지는 너무 무섭단 말야." 아무래도 내가 없는 몇 시간 동안 할아버지에게 엄청 시달린 모양이었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아참, 그리고 얘들아, 나 거기에서 검술을 배웠다? 아마 너희들이 처음 보는 검술일걸?" 내 말에 세이몬과 류미르의 눈이 놀라움으로 뚱그래졌다. "아린, 네가? 정말?" "우와~ 별일이네. 귀찮은 건 질색인 네가 검술을 배우는 그 인내의 시간을 감수했단 말이야?" "시끄러, 이것들아! 나도 검술은 배우고 싶었단 말이야. 어쨌든 내일 한번 대결하자. 나 내 검술이 너희들에게 얼마나 적용될지 한번 보고 싶단 말야." 내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류미르와 세이몬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 둘은 서로 마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그래. 아린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구." "에헤헷, 아린, 내가 봐주면서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우쒸...너희들 정말~!"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녀석들을 노려보자 녀석들이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날 피해 달아났다. "아린, 내일 봐~! 우리는 이만 갈 테니까 푹 쉬어." 류미르가 먼저 내 방문을 열고 쏘옥 빠져나가며 작별 인사를 하자 세이몬이 그 나간 문을 붙잡고 나가려 하며 날 바라보았다. 그는 장난을 치려는 듯 싱긋싱긋 웃었으나 곧 그 웃음이 잦아들면서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린, 내일은 어디 가면 안 돼! 여행은 우리 셋이 같이 가기로 했잖아." "뭐야, 세이몬. 난 일부러 간 게 아니라고. 그리고 다음 여행은 너희들과 꼭 같이 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아린 검술 기대할게." "훗, 그래. 보고 놀라지나 말아라." 세이몬까지 내 방을 빠져나가자 나는 일어난 김에 침대로 걸어가 그곳에 풀썩 누웠따.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침대의 천장이 보이고 그 옆에는 하늘하늘한 침대 휘장이 보였다. "후... 드디어 돌아왔구나. 내일은 애쉬 녀석에게나 한번 가볼까나? 할아버지랑 아빠와 같이 있는 동안은 시간이 좀 있을 테니까 녀석이랑 데이트를 한번쯤 해보는 것도... 에...하지만 내가 벌써 찼으니까 그거는 불가능하려나? 그럼 그냥 세이몬이랑 류미르하고 여행 가는 데 같이 끼워줄까나? 그건 좀... 그렇겠지? 훗훗. 뭐, 시간이 좀 있는 김에 여왕이 된 루실 언니도 한번 만나봐야지. 훗, 비록 이곳을 떠난 지는 몇 시간 안 된 것이긴 하지만 나는 정말 오랜만에 온 것이니까... 아마 감회가 새로울 거야." =================================================================== 흑 드뎌 아린이야기가 끝나버렸슴다.... ㅠ.ㅜ 이젠 뭘 보고 살아갈까나.... 1권부터 한번 다시 봐볼까나.... 그나저나 오늘 참 오지게 올렸다. 이것으로 아린이야기는 종을 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