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브. Opening : 00 “젠장! 먹고살기 힘드네!” 개미란 녀석들은 죽은 벌레나 작은 곤충 같은 것을 떼지어 공격하여 집으로 가져가는 습성이 있다. 또한 코딱지 만한 녀석이 힘도 좋다. 자기 몸의 몇배나 되는 것도 간단하게 운반한다. 하지만 개미는 작은 곤충이다.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간혹 살갗을 물리는 정도랄까? 하지만, 크림슨 앤트라고 하는 저 황소만한 크기의 개미는 저 두꺼운 턱으로 같은 크기의 황소나 말은 단번에 반으로 나눠버릴 수 있다. 게다가 녀석은 인간정도 크기의 생물은 간식거리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인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 “뛰어! 미친 듯이 뛰어!” 붉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생의 끝자락에 선 얼굴로 우리는 달렸다. 정말 미친 듯이 달렸다. 옆에서 드레스 입은 귀족 처녀 마냥 로브자락의 끝단을 잡아 올리고 달리고 있던 라이트가 외쳤다. “젠장! 먹고살기 힘드네!” “시끄러워! 네놈이 그 녀석 다리만 안 밟았어도 우린 편하게 나올 수 있었어!” 내가 악을 써대자 뒤따라오던 녀석들도 덩달아 악을 써댔다. “치르르르르르! 치르르!” 사사사삭! 저 뒤로는 모래폭풍이 불어오는 것 같다. 난 잘라낸 크림슨 앤트의 이빨들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등에서 석궁을 뽑아들었다. “뒈져라!” 탱탱탱! 드워프제 자동석궁이다. 비싸게 주고 샀지만, 아쉽게도 녀석들의 딱딱한 외피는 뚫지 못했다. 웬만한 갑옷도 뚫는다고 해서 샀는데. 삶이 우울해지는 순간이었다. “치르르륵!!” “망할! 라이트! 마법사잖아! 뭐 좀 없어?!” “없긴 왜 없어! 하하하!” 언제나 유쾌한 라이트는 달리다말고 뒤로 돌아서 주문을 외웠다. 난 녀석을 내버려두고 저 앞에 보이는 바위산으로 달려갔다. 등뒤로 라이트의 비명이 들려온다. “런닝 파이어 볼!” 쾅! 쾅! 쾅! 쾅! 쾅! 파이어 볼이 약간 느린 5연사로 발사됐다. 퍼펑! 콰아앙! 쿠웅!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 같더니 모래 먼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달려간 나는 서둘러 바위산 안쪽에 숨겨놓은 와이번을 찾았다. 녀석은 그늘에 앉아 느긋하게 쉬고 있다가 내가 달려오자 눈을 꿈벅이며 고개를 돌렸다. “바보 마법사가 죽게 생겼어! 가자!” 녀석의 고삐를 붙잡은 나는 곧바로 안장에 뛰어올라 녀석을 재촉했다. 화악! 화악! 내 맘을 아는지 녀석은 느릿한 날개 짓을 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곧바로 모래먼지 속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모래먼지 안쪽에서 섬광이 번쩍거린다. 쾅! 쾅!? “치르르르르!” “라이~트!” “아악! 사람 살려! 난 죽기엔 너무 잘생겼어!!” 갑자기 팔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죽음을 앞에 두고 저런 헛소리가 나오지? 한 손으로 와이번의 고삐를 잡은 나는 수백여발의 매직미사일을 난사하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손을 내밀었다. “잡아!” “오! 나의 기사님!” 팔의 근육이 두 배로 부풀어올랐다. 흡! 무겁다! 어쨌든 와이번은 하늘로 다시 날아 올랐고 와이번의 비행으로 휘몰아친 바람에 드러난 지면에는 크림슨 앤트들이 고개를 쳐들고 괴성을 울려댔다. “하하하하! 약오르지! 개미들아!” “화 돋구지마! 병정개미들은 하늘도 날수 있단 말야! 얼른 도망가야해!” 뒤에 앉은 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에 매고 있던 내 가방을 뒤적여 이번 일에 쓰려고 준비해둔 스크롤-주문서-들을 끄집어냈다. “죽고 나면 아무쓸모도 없어! 이별 선물이다! 체인 라이트닝! 일레트릭 필드! 클라우드 킬!” 돌아가면 되팔려고 했는데. 아까워라~! 콰콰콰쾅! 모래먼지가 엄청나게 솟아올랐다. 제발 병정개미가 쫓아오지 않길 빌며 난 최고속도로 구름 속을 향해 날아올랐다. 뒷자리에 앉은 라이트가 외쳤다. “아싸! 한 건했다!” =============================================================================== 슬레이브, 시작합니다. Running Fire: 01 “나 아직 처녀야.” “흐아. 죽는 줄 알았다.” “하하하! 살았으니 됐잖아?” “염병. 시끄러워. 네 녀석 때문에 내 명이 10년은 짧아졌어. 알아?” “이런, 안 돼지.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벌써 죽으면 섭하겠지.” 대여업자에게 빌린 와이번을 되돌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라이트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난 은근히 녀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여자 있다고 자랑하는 거지?” “누구? 아세리? 설마, 엘프를 상대로 뭘 느끼라는 거야? 동거 중이긴 하지만 난 그런 감정 없어.” 유쾌한 라이트는 이 바닥에서는 꽤 실력 있는 마법사다. 하지만 어딘가가 조금 결여 되어있는 것 같다. 그렇게 아름다운 엘프 노예랑 같이 살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니. 만약 나였다면…… 으흐흐흐…! “왜 그래? 콜트? 어디 아파?” “아, 아무것도 아냐. 가자. 돈 받으러. 집에 갈 때 아세트 씨 좋아하는 거 사가야지?” 라이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콜트는 어깨동무를 하며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모험가는, 보통 자신을 위하 여 모험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것도 직업이다.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위험한 일을 대신 해주는 것, 그게 바로 모험가란 직업이고 그 모험가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 주는 곳이 모험가 길드는 라는 곳이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모험가 길드는 언제나 조용하다. 전쟁이나 몬스터 토벌이 있지 않은 바에야 이곳에 죽치고 있는 모험가들은 드물다. 4층 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 모험가 길드의 1층 홀에는 커다란 책상하나만 놓여져 있고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아, 책상을 지키는 길드직원이 하나있긴 하다. 언제나처럼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긴 하지만, “크흠! 실례합니다.” “어? 으, 응 아하아암! 무슨 일로 오셨죠?” 목숨걸고 뛰어다니며 겨우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저런 식으로 반기면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하지. 하지만 예쁜 사람이니까 용서하기로 할까? 20대 후반의 아가씨 하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난 당당하게 그녀에게 가죽 자루를 내밀었다. 그녀가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 콜트, 라이트. 돌아왔구나. 그럼 이건 그 개미 이빨이겠네?” “예! 크림슨 앤트라고 불리우는 창조신의 실패작! 잔혹한 마물! 떼거지로 덤비면 드래곤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바로 그 크림슨 앤트의 이빨이올습니다! 하하하하!” 라이트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난 헛기침을 조금 한 다음 당당하게 말했다. “다들 실패할거라고 하셨죠?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어머나. 진짜네? 대단한걸?” 그녀는 자루 속에 든 개미 이빨을 만져보며 말했다. 우리들은 의기양양해졌다. 방그레 미소를 지어준 세이라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루를 들고 뒤쪽 문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비슷한 크기의 자루가 들려있었는데. 아까보다 좀 무거워하는 것 같았다. 세이라 씨는 힘들어하는 모습도 너무 예쁘다. 철크럭! “수고했어. 사례금이야. 3000만 루나. 이걸로 뭘 할거야?” “맛난 거 사먹으면서 게으름을 피워 볼 겁니다!” 라이트의 말이었다. 돈을 챙겨든 나는 그것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미리 하나 빼돌린 것을 그녀에게 슬그머니 내밀었다. 세이라 씨의 눈이 커졌다. “어머?” “서, 선물입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등뒤에서 라이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얼굴이 화끈거려서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밖에서 잠시 기다리자 라이트가 나왔다. 녀석은 내 허리를 찌르며 말했다. “이야. 콜트 다시 봤어. 멋지던걸?” “이, 세이라 씨는… 뭐래?” 녀석은 혐오스럽게도 마법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부끄러워 하기는, 빨개지는 게 귀여운걸? 고맙다고 전해 줘.” 난 헤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원체 내가 모험가가 된 것도 그녀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유부녀에게 그런 선물을 하는 것은 불륜의 가능성이 높다고 봐.” “하아…. 내버려둬. 늦었지만 자기만족이라도 느끼게 해달라고.” “첫사랑의 실연은 아픈 법이지. 아암. 자, ……콜트. 내 품에 안겨서 맘껏 울도록 해.” 녀석은 다시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어찌나 똑같은지 몸에서 소름이 돗을정도 였다. 라이트에게 이단 옆차기를 선보여주던 나는 문득 길드 건물의 창가에 기대어 서서 손을 흔들어 주고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좀 놀랐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외쳤다. “빌어먹을! 잘먹고 잘사세요!” 빙그레 웃은 그녀는 뭐라고 입을 방긋방긋 거렸다. 아무래도 고마워,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옆에서 지켜보던 라이트가 또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 달은 우려먹을 것 같다. “아아~ 아련한 첫 사랑의 시련이여!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이루어질 수 없는 아름다운 유부녀와의 사랑이… 켁켁?!” “닥쳐!” 녀석의 목을 붙잡은 나는 그것을 앞뒤로 흔들어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킥킥 웃고 있었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라이트! 넌 너무 유쾌해서 불쾌해!” “켁…! 칭잔… 코, 코마워!?” 한탕 크게 번 돈으로 시장에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산 우리들은 라이트의 집으로 향했다. 시내 외곽에 위치한 작은 집은 짠돌이 라이트가 안락한 노후를 고려하여 필살의 의지로 5년을 꼬박 저축한 돈을 몽땅 털어 장만한 곳으로 집을 마련한 이유는 바로 이 아가씨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어허~!” 라이트가 그녀에게 눈치를 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아세트는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 어서 와요. 라이트.” 라이트 녀석은 그제서야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덩달아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세트 씨.” “예. 어서 오세요. 콜트 님.” “어흐음!” 이 놈이 아까부터 왜 이래? “아, 저. 어서 오세요. 콜트 씨.” 다시 고개를 꾸벅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난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라이트 녀석, 아세트의 입버릇을 고치려고 저러는 건가보다. 나는 들고 온 짐을 부엌으로 가져가 테이블에 올렸다. 아세트가 놀라서 달려왔지만 라이트가 말렸다. “놔둬요. 저 놈은 소처럼 부려먹어야 한다구요.” “하, 하지만….” “뭐라 그랬냐 이 놈아?” 스르릉! 언젠가 내가 아세트를 위해서 시퍼렇게 날을 갈아준 부엌칼을 도마 위에서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라이트는 말로하자며 아세트의 등뒤로 숨어버렸다. 쓴 표정을 지어준 나는 칼을 놓고 부엌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라이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종이봉지에서 갖은 야채들과 함께 딸기를 꺼냈다. 아세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건 딸기 좋아하는 아세트 선물,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 먹어요.” “아, 고, 고맙습니다.” 얼굴을 붉힌 아세트가 고개를 숙였다. 라이트는 히죽 웃었다. 아세트는 노예다. 손등과 어깨에 노예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나라인 그랜퍼스에서는 아직 노예제도가 남아 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노예를 소유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그렇다 뿐이지. 요새는 이웃나라에서의 압박과 같이 살고있는 이 종족의 수장들이 계속해서 탄원서를 넣고있는지라 나라에서도 점차 노예제도를 없애려는 추세로 나가고 있다. 덕분에 노예는 엄청나게 비싸다. 제일 싼 일꾼노예가 거의 1200만 루나에 이른다. 보통 가정의 몇 년 생활비를 간단하게 넘어선다. 게다가 아세트 씨 같이 외모가 출중한 여자 노예. 거기다 이종족일 경우에는 값은 천문학적인 단위로 올라간다. 듣기로 아세트의 몸값은 3억 4000만 루나 라고 했다. 요즘 같은 경우에는 개인에게 이종족 노예를 파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아세트 같은 엘프노예들은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저 녀석은 마법사라는 자신의 직업과 그 엄청난 돈을 가지고 노예 소유자격을 따냄과 동시에 그녀를 산 것이다! 난 아세트가 만들어준 야채 고기 볶음과 야채 드레싱을 팬케익에 싸서 먹으며 앞에 앉아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는 라이트를 노려보았다. “어? 왜?” “아니, 그냥 부럽다 싶어서.” “뭐가?” 라이트가 말하는 도중에 옆에 앉아있던 아세트가 튀긴 햄을 포크로 찍어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라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받아먹었고 난 슬슬 머리가 아파 오는 그것을 느꼈다.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지?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먹여주는데 말야. 실제로 여자노예는 거의 남자들이 산다. 이유는 뻔하다. 한동안 데리고 놀기 위해서다. 하지만 비효율 적이다. 근처 홍등가에 간다면 여자는 질리도록 볼 수 있다.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후자가 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라이트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엘프를 안고 싶었냐고, 라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인간이랑 결혼 할거야.” 그럼 대체 왜? 단순히 재미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법사인 네가? “불쌍하잖아.” 기가 찼다. 우연찮은 기회로 노예시장에 갔었던 라이트는 경매장에 올라서서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사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사버렸다고 했다. 나는 의미 없는 짓이라고 말해줬다. 그러자 녀석은 이렇게 대답했다. “돌려보낼 거야. 그녀의 고향과 집을 찾아서 반드시 돌려 보낼거야. 왜냐면 나는 마법사니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법사인 라이트가 그렇겠다고 한 이상, 반드시 그럴거다. 하지만 그래서 맘에 안든다! 돌려보내겠다는 라이트나! 그러든 말든 라이트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세트도! “으음. 차향이 썩 좋구만.” “밖에 피어있던 민트로 만들어봤어요.” 라이트는 씩 웃었다. 아세트도 빙그레 웃어주었다. 두 사람의 사이좋은 남매 같은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진절머리가 나버렸다. 여기만 오면 꼭 나중에는 이렇게 된다. 왜 이럴까? 더 참지 못한 나는 가방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라이트 몫을 떼어주었다. “이야. 짭짤한걸? 다음에도 부탁해.” “오냐. 마법사가 필요하면 다시 오지. 난 이만 갈란다. 잘 살아라.”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매어놓은 매끈한 단검을 풀어서 아세트에게 내밀었다. 아세트가 귀를 바짝 세우며 날 바라보았다. 나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밤에 저 놈이 흑심을 품고 침대로 기어들어 오면 가차없이 쑤셔 버리십쇼.” “예? 하, 하지만.” “제발 받아주세요. 그건 당신을 향한 제 마음입니다.” 마음씨 착한 아세트는 그것을 받았다. 난 그녀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쳐 준 다음 문으로 몸을 돌렸다. “간다. 잘 지내라. 네 녀석의 마음, 변하지 않기를 빌겠다.” 문 앞까지 따라나온 라이트는 그제서야 내가 아세트에게 칼을 쥐어준 의미를 깨달고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리치도 거짓말은 하지 않아. 왜냐면 마법사이기 때문이지. 하여튼 고맙다. 잘 가라. 친구.” “오냐! 아세트 씨 건강하십쇼!” “안녕히 가세요.” 손을 흔들어준 나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어느새 어두워진 도로를 걸어 장기투숙하고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문 위에 매달아놓은 불빛에 나방과 벌레들이 이리저리 꼬이는 것을 힐끔 쳐다본 나는 시끌벅적한 여관 안으로 발을 올렸다. “어서옵쇼!” “아, 나왔다.” “아! 콜트 오빠다!” 여관 일을 돕고있는 이 집 딸내미가 소반을 들고 손님들 사이에서 손을 흔들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던 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때 여기 주인장 벡터 아저씨가 날 불렀다. “어이~! 콜트! 저녁은 먹었나?” “먹고 왔습니다. 오늘은 일찍 자려구요.” “그럼 이거 갖고 가 필요할거야.” 그가 던진 것은 반정도 남아있는 와인병이었다. 요리하다 남은 건가? 뭐, 어때. 그에게 손을 흔들어준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2층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이 집 큰딸과 마주치게 되었다. “콜트. 어디 갔다왔어?” “황소 만한 개미 이빨 자르러.” “허어. 예나 지금이나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그런 미친 짓을 잘도 해대는군.” “칭찬 고마워요. 제미니양. 마실레?” “아니, 됐어. 일하는데 술 마시면 곤란해. 설탕이랑 소금이랑 헷갈리거든?” 나와 동갑내기인 제미니는 느릿하게 말하며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를 빼고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아까부터 복도에 자욱하던 연기는 그것 때문이었군? 탕탕. 담뱃대를 벽에 두드려 안에 재를 빼낸 그녀는 담뱃대를 비녀처럼 사용해 긴 머리를 틀어 올리더니 음식국물 자국이 가득 묻어있는 앞치마를 맨 다음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뒤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건 생각해봤어?” “어, 아. 아니. 아직.” “그래? 뭐, 느긋하게 생각해도 상관없겠지. 아직 젊으니까.” 그렇게 말한 제미니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도 술병을 입에 대고 기울이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제미니의 말이 내 귀를 잡아당겼다. “아, 그렇지. 콜트?” 고개를 돌려 계단 앞에 서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아직 처녀야.” “푸흡!? 커억! 콜록콜록!” 입과 코로 와인이 쏟아져 나왔다.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하던 나는 문가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미니는 없었다. 대신 그녀의 웃음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망할 계집애! 무슨 엄한 소릴!” 문 밖으로 짧은 욕설을 날려준 나는 침대로 걸어가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뒤로 쓰러졌다. 아까 제미니가 한 말이 귓가로 맴돌고 있다. 난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고민이네.” 새 아침이 밝았다. 아으…….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제미니랑 결혼하면 매일 일찍 일어나야겠지? 그건 싫어. 찌부드드한 몸을 가지고 침대 위를 뒹굴던 나는 결국 좀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홀로 나가자 몇몇 사람들이 앉아서 맥주를 마시거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하품을 하며 말했다. “여기 아침 줘.” “예! 뭘 드릴까요?” “빵하고 우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용!”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방금 전 나에게 귀엽게 웃으며 주문을 받아간 15살 소녀는 제미니의 동생 제이미다. “여어. 이제야 일어난거야?” “어, 벡터 아저씨.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요.” 대머리 벡터 아저씨가 껄걸 웃으며 내 등을 후려쳤다. 그는 내 앞자리에 앉아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래, 어제는 무슨 모험을 했는고?” “황소 만한 개미의 이빨을 잘랐지요.” “황소 만한 개미라면 크림슨 앤트?! 야하! 대단한데? 크린슨 앤트는 드래곤을 잡는 녀석이잖아? 좀더 자세히 해봐.” 하지만 그는 내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살벌한 큰딸의 협박 때문이었다. “장작은 다 패셨어요? 아. 버. 지.” “어, 오, 조, 좀 쉬러온 것 뿐이야. 하하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듣지.” “언제든지요.” 벡터 아저씨는 다시 뒤뜰로 나가셨다. 그리고 내 앞에는 제미니가 앉았다. 빵과 우유를 담은 소반을 내려놓은 그녀는 틀어 올리고 있던 머리를 풀고 꼿고 있던 담뱃대에 담배를 채워 불을 붙인 다음 그것을 입에 물고 깊이 빨아들였다. 그러자 제미니의 커다란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멍한 시선으로 그녀의 가슴을 쳐다보던 나는 헛기침을 하며 우유 잔을 들었다. 후우~! 내 얼굴로 매캐한 담배연기가 쏟아졌다. “나 요즘 밤에 잠을 못 자고 있어. 몸이 뜨거워서.” “푸흡?!” 입에 머금고 있던 우유의 절반을 제미니의 얼굴로 뿜어냈다. “으윽! 미, 미안해. 제이미! 여기 수건 좀……!” “됐어.” 제미니는 혀를 날름 거르며 입술을 타고 흐르는 우유를 핥은 다음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그러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빨리 좀 결정 해줬으면 좋겠어. 나도 슬슬 남자를 가지고 싶단 말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담뱃대를 다시 입에 물었다. 이건 명백한 협박으로 나는 꼼짝 달싹하지 못하고 있다. 제미니는 의외로 집요해서 한번 잡은 것은 기필코 손에 넣고야 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슬픈 일은 그녀가 나에게 반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처음 이곳에 들렸을 때의 일 때문일 거다. 젠장! 그때 그냥 갔어야 했는데! 고개를 들어 제미니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제미니는 부엌떼기답지 않게 하얀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고 키도 나만큼 크다. 게다가 몸매도 굉장히 잘 짜여 있다. 더군다나 그 미모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이런 지저분한 여관의 부엌에서 요리에서 잡일까지 도맡아하는 주방장답지 않은 외모를 자랑한다. 그 덕분에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고, “그게 말야.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이고, 그리고….” “아직 미련이 있나보네? 솔직히 말해봐. 남 주기는 아깝고 네가 가지자니 부담스럽지?” “뭐, 그렇지.” 난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제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테이블에 툭툭 두들겨서 꺼트리며 말했다. “좋아. 나도 매번 재촉하긴 싫으니까. 알다시피 우선권은 네게 있어. 그러니 내가 기다려주지. 우리 나이 23살이야. 그러니 딱 3년 조용히 기다려 줄게.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2년 후부터는 처녀성을 보장 못해. 알았어? 앙~!’ “윽?!” 귀를 살짝 깨물어버린 제미니는 씩 웃으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얼굴이 후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으아! 미치겠다! 아침의 일을 잊기 위해 점심 무렵 나는 밖으로 나갔다. 여관에서 좀더 쉬고 싶었지만 제미니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온 건가? 젊은 날의 행복한 고민을 총각으로 늙어버린 나에게 풀려하다니 자네도 참 못됐군.” “……수련사들이 들으면 망령 났다고 할겁니다. 하이 프리스트.” 힐링포션의 구입과 함께 외상값을 갚으러 희망과 절망의 신 델린저의 신전에 들린 나는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신도들의 고민과 포션 판매직을 맡고 있던 하이 프리스트는 껄걸 웃으며 말했다. “꽤 듣기 좋군. 망령난 하이 프리스트. 음, 어감이 괜찮은데?” “…외상값은 얼마이니까?” 얼른 외상값이나 갚고 그만 돌아가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하이 프리스트는 내 맘을 몰라주고 장부를 뒤적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떠벌리기 시작했다. 어느 집 아가씨가 시집을 갔네. 목장의 소가 난산일 때 프리스트가 달려가서 새끼를 받았다는 둥, 난 이마를 찌뿌리며 델린저에게 오늘 내로 당신의 프리스트가 외상값을 찾아내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러던 중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잠깐만요. 뭐라고 하셨죠? 전쟁이라니요?” “응? 아, 자네도 모험가인 만큼 캐슬린과 베레타 사이에서 암암리에 비공식 전투가 자주 벌어진다는 거 알고 있을거야. 상권 때문에 사이가 그렇게 좋지 못한 나라들 중 하나니까. 그런데 이번에 캐슬린 군부에서 병력을 국경선에 집결시키고 있지.” “왜요?” 하이 프리스트는 장부를 넘기며 말했다. “음, 저번 캐슬린 쪽에서 베레타로 평화사절단을 파견 한 적이 있었는데. 베레타로 가는 도중에 도적 떼의 습격인지 뭔지를 받아서 사절단이 전멸 당했거든?” 헤? 겨우 그런 일로? “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난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게다가 도중에 당했다면서요? 증거도 없잖아요?”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야. 꿈을 꾸고 상상을 펼칠 줄 알지. 섯부른 추측이란 무서운 거라네. 하지만 무엇보다도 캐슬린에서 무력 도발을 감행하는 이유는… 아! 여기 있군. 320만 루나네.” 꼭 이렇다. 뭔가 들을 만 하다고 생각하면 꼭 이렇게 중간에서 끊어버린다. 화가 났다는 의미로 코를 벌렁거렸지만 하이 프리스트는 허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누가 신전 정보관 아니랄까봐. 하지만 웃돈을 얹어주고 방금 전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다. 보시다시피 나에겐 현찰이 생겼으니까. 이걸로 은행에 예금하고도 일주일은 한가롭게 살수 있을 거다. 쓸모없는 고민거리를 돈주고 사고 싶은 생각은 없답니다. 하이 프리스트, “그거 안타깝게 됐군. 자네라면 좋아할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이 프리스트는 이런 식으로 정보를 팔곤 한다. 70년 프리스트 외길에서 신전의 살림을 위해 쌓은 노하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상값을 치르고 힐링포션을 몇 병 구입한 다음 다시 시내로 내려가 무기 점에 들렸다. “어서 옵쇼.” “이거 좀 봐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자동석궁을 주인장에게 내밀었다. “드워프 아저씨한테 샀는데. 별로 신통치 않더라구요.” “제품은 정상인데요. 손님. 뭐에 대고 쏘셨길레 신통치 않다고 하시는 겁니까?” “크림슨 앤트에게 쐈는데 까딱없던걸요.” 그러자 무기점 주인은 쓴웃음 지으며 말했다. “크림슨 앤트라구요? 허허, 붉은 사막에 갔다 오셨나 보군요. 원, 그런 놈들은 껍질이 단단해서 왠만한 화살은 잘 먹히지 않습니다. 더구나 연사기능을 추가하느라 관통력이 낮아진 이런 자동석궁의 콰렐(Quarrel)은 두말할 것도 없죠. 이런 건 단거리, 그것도 피부가 약한 인간형에게 쏴야 재미 보실 겁니다. 음. 리미터가 걸려있으니 그것만 해제 해드리죠.” 호오, 그런 거였구나. 확실히 이런 자동석궁은 처음 만져봐서, 무기점 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자동석궁을 맡기고 은행으로 향했다. 그리고 용돈으로 쓸 만큼을 제외한 나머지 돈을 그곳에 맡기고 시장에 들려 제미니와 제이미 옷 한 벌씩을 사서 여관으로 돌아가려 했다. “자자! 빨리 내려라!” 엄격한 호령이 골몰 길에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주위를 두리번거린 나는 대로 근처의 커다란 건물 앞에 세워진 짐마차에서 손과 다리에 쇠사슬이 매여진 노예들이 하나둘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서서 보기드문 노예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노예들은 특기나 외모별로 등급을 나누게 되는데. 뭔가 하나라도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하면 1급. 아무 기술도 없지만 외모가 출중하면 2급.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외모도 그저 그런 식이면 3급이다. 하지만 이종족 노예들, 그러니까 엘프나 드워프 혹은 트롤이나 오크 같은 노예라면 무조건 특급노예로 분류한다. 흐음, 지금 내리는 사람들은 2급 노예들인가? 간단한 모직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과 바지 하나만 입은 남자들은 보기드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마차 주변에 몰려있던 소녀들은 조금 위험한 상상을 하며 마차에서 노예들이 내려 올 때마다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와아! 너무 예쁘다! 인형 같아!” “저 남자 날보고 웃었어!? 봤니? 봤어?” …뭐, 이런 식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아가씨들은 못 말린다니까? 구경꾼의 틈에 끼에 있던 나는 그들의 모습을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만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아악?!” 여자의 비명소리가 내 귀를 잡아당겼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다리에 하고 있는 사슬이 엉겨서 마차에서 내리던 여자노예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떨어지면서 까진 무릎에서는 빨간 피가 흐르고 있다. 울먹거리는 얼굴로 다리의 상처를 살피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에 몰려서 있는 구경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동료와 나누던 대화를 중단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나도 그녀와 시선을 맞추게 됐다. 정신이 멎는 기분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쳐다본 다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로 딱딱한 표정의 간수가 다가왔다. 그러자 여자노예는 몸을 움츠렸다. 간수는 으레 이야기에서처럼 채찍질이나 몽둥이질을 하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녀는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숨을 크게 들이킨 나는 뒤로 좀 물러선 다음 몸을 돌렸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두근거림은 뭐냐? 쿵쾅거리는 심장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뒤를 한번 더 돌아보았다. 노예들의 수송을 마친 마차는 이제 건물에서 떠나고 있었다. 아까 그녀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올랐지만, 관두기로 했다. 만나서 뭘 어쩔건데? 현실을 바라봐야지. 책임지지 못할 행동은 안하는게 나아. “으아! 날씨 한번 우라지게 좋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어떤 눈길로 보던 말던, 나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우와! 오빠 고마워!” 제이미는 내가 선물한 원피스를 받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난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담뱃대로 머리를 틀어 올린 제미니가 서서 내가 사온 옷을 몸에 대어보고 있었다. “기특한걸?” “…기특하다니.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해야하는 거야.” 제미니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평소 모습과는 틀린 부드러운 미소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여울까나?” “그만둬, 항상 신세지는 게 미안해서 그러는 것 뿐이야.” 옷을 갈무리한 제미니가 물었다. “저녁까지는 멀었는데 어쩔래? 좀 이르지만 밥 줄까?” “아니, 됐어. 잘 거야.” 난 그대로 2층 객실로 올라갔다. 그때 홀에 서있던 제미니가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콜트.” “응?” “고마워.” 대답대신 씩 웃어주었다. 그러자 제미니도 씩 웃어 보였다. 객실로 올라온 나는 침대로 달려가 드러누웠다. 털썩~! 담요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려는데 아까 보았던 그 여자 노예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 똑똑하게 보아서 그런지 기억에 인상이 깊게 박혔나 보다. “젠장… 너무 예뻤어.” 한숨을 폭 내쉰 나는 담요를 끌어안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또 다시 아침이 밝았다. 이틀을 쉬었더니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머리에 검정색 손수건을 뒤집어 쓰고 여관 뒷마당으로 나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베고 뒤로 베고 옆으로 베고 다시 뒤로 도약하여 검을 지팡이 삼아 이단옆차기, 착지하자마자 대각선 베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3살 때부터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냥꾼 폴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배운 기본 검술이지만, 워낙 많이 휘두르다보니 이제는 그럭저럭 형태가 잡혀서 실전에서도 꽤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정규교육을 받은 기사가 보면 어린아이 삽질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야. 아니나 다를까. 여관에 창문에서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한 남자가 자신의 검을 들고 내려와 나에게 대무를 신청했다. 난 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검집을 쒸운 채로 칼을 들고 서로에게 맞섰다. “본인은 베레타 제 3 기사단의 리스크 바이퍼 라고 합니다.” “콜트 슈발츠입니다. 모험가 길드 소속의 모험가입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기사님.” 나는 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리스크라는 젊은 기사양반은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나와 그의 검이 움직였다. 팍팍팍!? 팍! 퍼억?! 빠른 속도로 칼질을 주고받은 나는 칼을 지팡이 삼아 그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가슴을 맞은 기사는 뒤로 밀려났고 난 그가 반격할 틈을 주지 앉기 위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머리를 내려치고 그 다음 어깨, 허리, 다리, 이제 찌르기로 들어가서, 아랫배, 명치, 가슴, 목, 얼굴, 정신 없을 틈을 이용해 가까이 다가가 옆차기! 퍼억! 내 검을 무난하게 막아대던 기사는 또 다시 발차기를 맞고 뒤로 물러섰다. 다리를 거둔 나는 헛기침을 조금 한 다음 말했다. “몬스터를 상대로 한 실전 위주의 기술입니다. 당황하지 마세요.” 드디어 상대 기사의 얼굴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기사치고는 너무 젊다고 생각했지. 수련기사인가? 난 다시 검을 세웠다. “합!” 기사가 먼저 달려들었다. 아까 와는 다른 속도와 힘으로 밀어붙이던 그는 마지막에 내가 했던 것을 흉내내어 옆차기를 시도해왔지만, 따라한다고 금방 된다면 이 세상에 영웅은 없을 거다. 검으로 그의 다리를 막은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한바퀴 반을 돌아 착지한 내 앞으로 다시 그 기사가 달려들었다. “그만!!” 우렁찬 소리. 나와 리스크라고 했던 기사의 고개가 여관 뒷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반백의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늙은이가 서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를 알아보고 찔끔한 기사는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나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리스크! 함부로 대무를 걸지 말라고 했거늘! 게다가 저 사람은 척봐도 모험가이지 않으냐!” “죄, 죄송합니다. 대장.” 난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리스크에게 대장이라 불린 늙은이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게 됐소. 젊은이가 이해해주구려.”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고개를 꾸벅여주자 중늙은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주고는 리스크의 귀를 잡아서 여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웃기는 사람들이야.” “동감이야.” “어라?”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처럼 단발머리를 기른 남자가 나에게 인사를 건내고 있었다. “게렉터?” “여어, 오랜만이야.” “왠일이야? 일은 잘 끝났어?” “응. 잘 끝났지.” 게렉터는 이곳에서 나와 나이가 비슷한 몇 안되는 모험가 중에 하나다. 저번에 꽤 멀리 갔었다고 했는데 돌아왔는가보다. 우리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현재 이곳 영주의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당 많이 줘?” “응, 그럭저럭. 목숨 위협받으며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안정적이지. 게다가 이쁜 아가씨들도 많고 말야. 참, 깜박할 뻔했군. 너 요새 쉬고 있다면서? 그럼 우리 일 좀 도와주지 않을래?” “뭔데?” “어, 간단한 거야. 내일 이곳에서 노예시장이 열리는데.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에 대비하려는 거지.” 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 경비병과 영주님의 사병들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 조금 머뭇대던 게렉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며칠 전에 경고장이 하나 날아왔어. 노예시장의 영업을 중단하고 노예들을 석방하라는 내용이었지.” “그거 참 맘에 드는걸? 용사를 꿈꾸는 사람들일까?”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사람들일수도 있겠지. 하여튼 도와줬으면 해. 대가는 괜찮게 쳐 줄테니까.” “아르바이트라. 뭐, 나야 좋지.” “그럼 하는 거다? 준비하는 데로 시청으로가. 내가 불렀다고 하면 할 일을 가르쳐 줄 거야.” “어? 내일 하는 거 아냐?” 게렉터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맥주잔을 깨끗하게 비우며 말했다. “일은 오늘부터야. 야밤에 침투할지도 모르거든?” 일리 있는 대답이기에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게렉터는 맥주한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가에서 배웅 삼아 대로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음식을 나르러 부엌에서 나왔던 제미니가 내 뒤로 바싹 달라붙었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등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내가 놀랐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녀가 두 손을 관능적으로 움직이며 내 엉덩이를 만지작대고 있다는 거다. “으으악!? 이 변태! 무슨 짓이야!” “엉덩이 살집 좋은데? 장가가면 마누라한테 귀여움 좀 받겠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야.” 내가 악다구니를 해도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려버린다. 큰일이다. 진짜 큰일이다. 이대로 가다간 1년도 못돼서 저 변태한테 먹혀버릴지도 몰라. 가게 안의 손님들은 배를 잡고 낄낄 웃어댔다. 내가 노려 봐줬지만 헛수고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세면장으로 가서 좀 씻고 방으로 올라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강판을 댄 롱부츠와 정강이와 무릎을 보호하기 위한 철갑, 이어서 가죽으로 만든 라이트레더, 기사들이나 끼고 다니는 강철 건틀릿을 손에 낀 나는 검을 허리에 차고 잡다한 물건이 든 작은 가방을 등에 맨 채 여관을 나서려 했다. 홀로 나가니 부엌에서 제미니가 내 꼴을 보고 외쳤다. “어디가?!” “돈 벌러간다!” “오빠! 오빠! 선물 잊지마!” 제이미가 맥주를 나르다가 말고 손을 흔들어 댔다. 난 씩 웃어주며 여관을 나섰다. 시청에 가는 길에 무기점에 들린 나는 맡겨놓은 자동석궁과 예비 드럼탄창을 두 개 더 구입해서 등에 매고 시청으로 향했다. 허리에는 나이프와 롱소드, 등에는 자동석궁. 이 정도면 꽤 중무장이다. 이 흉흉한 모습 덕분에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지나가던 어린아이도 날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앙!” 잠시 울고 있는 꼬마를 노려보고 있으니 아이 엄마로 짐작되는 사람이 달려왔다.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아이를 데려가려 했다. 난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씁~! 어딜 가려고 그래?! 거기 안서!” Running Fire: 02 “그럼 날 사줘요.” 여자가 딱딱하게 굳었고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난 매서운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가 근처라 잡상인들이 많았고 내가 찾는 사람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솜사탕 장수에게 특대 솜사탕을 주문한 나는 마침내 완성된 거대한 솜사탕을 들고 그 꼬마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야아! 코찔찔이! 안 닥치지!?” “우아앙!~ 히끅?! 히끅?!” 꼬마는 울다말고 내 기백에 놀라 울음을 멈췄다. 녀석의 작은 손에 솜사탕을 쥐어준 나는 몸을 돌리고 최대한 불량스러운 걸음걸이로 대로를 걸으며 손에 든 솜사탕을 핥아먹었다. 음, 맛있군. 주위 사람들이 얼빠진 눈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진짜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솜사탕을 핥으며 시청에 도착한 나는 시청 직원의 안내를 받아 노예시장 준비로 한창 바쁜 건물 안으로 안내되었다. 예전에는 광장에서 노예 시장이 열렸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이렇게 실내에서 조용히(?) 진행된다. 물론, 그래도 올 사람은 다 찾아오지만. “콜트 씨는 오늘 이곳의 경비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안내되어진 곳은 하필 노예들이 지내고 있는 방이었다.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데 맡으면 안됩니까?” “안됩니다.” 무척 깐깐하게 생긴 시청 직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콜트 씨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당신은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왜요?” “맛있는 것은 항상 마지막을 위해 남겨두는 법이거든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저녁 때 까지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테니 경비에 만전을 기해주십시오.” “여보쇼!” 내가 홧김에 소리를 지르자 시청직원은 씩 웃기만 하고는 나가버렸다. 쳇! 뭐야.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나 하고, 재미없게. 방은 여관이나 감옥의 그것처럼 하나의 복도에 방문이 죽 늘어선 모양으로 배치 되어있었다. 문은 쇠창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안의 모습을 간수가 훤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있었으며 방안에는 대형 범선에서나 사용하는 다층 침대가 놓여있어서 노예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워있거나 했다. 복도 끝에는 벽이 있고 그곳에는 책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감시용인가보다. 그럼 들어올 곳은 각방의 좁은 환기구와 창문을 제외하면 저 앞의 문뿐인가?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앉아있기를 2시간, 결국 나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심하다. 차라리 덤불 속에서 오크가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게 훨씬 났겠다. 이건 뭐, 너무 조용하잖아. 풀벌레 소리나 새소리도 없고, 이마를 지뿌리며 복도를 왔다갔다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앞에서 5번째 방에 있는 남자 노예였다. “이봐요. 간수님. 시끄러우니 가만히 좀 계세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간 나는 쇠창살은 두 손으로 붙잡았다. 철크럭! 강철장갑이기 때문에 쇳소리가 온방으로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방안의 노예들이 뒤로 물러섰다. 좁은 쇠창살 사이에 얼굴을 들이민 나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놀아줘.” “…예?” 황당했던지 방안의 노예들이 얼빠진 얼굴로 날 노려보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복도에 주저 앉으며 말했다. “이런 거 정말 싫어. 심심해. 누구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있으면 좀 불러봐. 그럼 내가 사줄지도 몰라.” 다음 순간, 나는 방안으로 울려 퍼지는 각양각색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깜짝 놀라서 얼른 그들의 노래를 멈추게 했다. 겁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뭐야 이거? 그때 내 등뒤의 방에 앉아있던 젊은 노예가 말을 걸어왔다. “간수님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어서 빨리 팔리고 싶어한답니다.” “어? 왜?” 그러자 그의 옆에 앉아있던 노예가 말했다. 흡사 여자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조금 놀랬다. “왜냐면,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하거든요. 중간에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어서 빨리 주인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죠. 좋은 주인을 만나면 노예라고 해도 얼마든지 편하게 지낼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거든요? 특히 여자 노예들이 그렇죠.” 자리를 옮긴 나는 반대편 쇠창살을 붙잡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하나같이 예쁜 아가씨들이 각자의 침대에 앉아 나에게 화사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어갔다. 제미니가 봤으면 뭐라 그랬을까? 하지만 그래도 난 그녀들에게 물었다. “진짜 그래…요?” 존대가 튀어나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다. “예. 막말로 주인님 하나 잘 만나서 그분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노예신분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믿고 따르는 주인님이 있다면 훨씬 든든해지죠. 주인이 없는 노예는 슬퍼요. 어디서 맞고 들어와도 하소연할 대도 없고, 아파도 치료해줄 사람이 없죠.” 난 더듬대며 말했다. “하,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좋은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라구…요. 막상 주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새디스트면 어쩔거요?” 노예들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늘씬한 노예아가씨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선 그녀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내밀어 내 턱을 들어올리더니 매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매조키스트가 되겠어요. 그래서 새디스트인 주인님의 매를 황홀하게 맞겠어요. 그러다가 죽어도 한번만, 한번만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따스하게 안아준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죽어도 좋을 거예요.” “말도 안돼! 그게 무슨 사랑이고 행복이라는 거야? 그건 단지 당신들을…!” 울컥해서 외쳤지만 여자노예는 내 말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이봐요. 간수오빠? 우리는 노예랍니다. 가족과 연인에게 버림받고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쓰레기들이에요. 우리들 중에 가슴 아픈 사연 하나 없는 이들은 없어요. 처음 노예가 되면 죽고싶어져요. 하지만 조금 지내다보면 주인님들의 따스한 시선에 사랑을 느끼죠. 노예가 아니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걸요. 그래서 그냥 이대로가 좋아져 버리는 거예요. 애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관심과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애써서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우습죠?”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이럴수가…. 내가 생각해오던 거와는 틀리잖아? 여자는 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응?”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때 왠 아가씨가 뽀르르 달려오더니 쇠창살을 잡고 말했다. “간수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어, 콜트 슈발츠라고 하는데요.” “돈 많아요?” “굶지 않을 정도는.” “그럼 날 사줘요.” “엥?” 금발의 예쁘장한 아가씨는 쇠창살에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노예는 자격만 되면 할부로도 살수 있어요. 일단 사주기만 하면 돈은 제가 벌어서 보탤게요. 어때요? 저요. 빨래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침대시중도 아주 잘해요!” “커억?!” “와아. 네네 벌써 작업 들어가네?” “피! 언니들은 예쁘니까 찍어둔 사람들이 있지만 네네는 아직 없다구요! 이제 내일이 경매 날인데 어떻게 해요. 아앙! 혼자 남는 건 싫어.” 뒤에서 남자 노예들이 낄낄 웃어댔다. 심호흡을 한 나는 금발의 아가씨에게 물었다. “저, 나이가 어떻게?” “18살인데요.” “원래부터 노예?” “아뇨? 몰락한 귀족이라고 하면 알아들으실려나? 가슴아프니까. 과거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우리.” “아, 미, 미안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나는 등에서 자동석궁을 꺼내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끼릭 철컥! 나와 얼굴을 마주대고 있던 금발머리와 노예아가씨들이 내 얼굴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섰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던 나는 석궁을 들어 겨누며 말했다. “누구냐? 참고로 이 석궁은 문짝도 뚫으니까. 도망가지 말고 얼굴을 보여라.” “아, 저, 시.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까 날 안내해주었던 시청직원이었다. 난 석궁을 내리고 인상을 풀었다. “뭐요? 저녁시간 외에는 들어올 일이 없다더니?” “아, 조금 늦게 도착한 분들이 계셔서요. 얼굴을 좀 보여드리고 싶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꽤 많은 수의 남자들과 부인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옷차림새를 보아하니 귀족인가? 난 들고 있던 석궁을 다시 등에 매고 복도 끝으로 가서 섰다. 그러자 시청직원이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노예들을 소개했다. 대략 한시간 동안 노예들을 구경하고 대화를 나눈 귀족들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시청직원은 문을 닫고 나가며 말했다. “잠시 후에 저녁이 올 겁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알았수, 아, 아니. 잠깐!” 시청직원을 불러 세운 나는 그에게 다가가 돈을 좀 쥐어주며 어떤 것을 부탁했다. 그는 처음에는 안된다고 했지만 돈을 좀더 쥐어주자 얼굴이 바뀌었다. 문 잠그는 소리를 듣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복도 중앙에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말했다. “어땠어요들? 미래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본 소감은?”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귀부인들은 하나 같이 젊고 아름다우시더군요. 으흐흐!” 이름이 린세스 라고 했던 여자 같은 얼굴의 남자 노예는 그렇게 말하며 음흉하게 웃어댔다. 고개를 돌린 나는 여자노예들을 바라보았다. 금발 노예아가씨 이름이 네네라고 했던가? “네네양? 당신은 어때요?” 이름이 불리자 네네는 놀라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V로 만들어 보였다. “아까 30대 중년 아저씨가 날보고 음흉하게 웃었어요. 취미가 좀 이상해 보이지만. 뭐, 잘생기도 돈도 많아 보이니까. 네네는 봉 잡은 거죠! 오하하하!” 어이구, 좋기도 하겠다. 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잠시 후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난 시청직원을 쳐다보았고 그는 수레 안에 숨겨온 와인 상자를 보여주었다. “식당 수레는 내일 찾아가요. 식사는 내가 나눠 줄테니까. 문 꼭꼭 잠그고 이 근방으로 아무도 접근시키지 마쇼.” 급식을 위해 따라온 주방장은 시청직원을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각방의 노예를 다 합치면 대략 30여명. 와인은 세 박스, 대략 30병. 이 정도면 진탕 취해서 빌어먹을 세상살이 같은 건 잠시 잊을 수 있겠지? 쇠창살에 나있는 공간으로 빵과 스프를 담은 그릇을 인원 수 대로 넣어주며 돌아다닌 나는 의자에 앉아 남은 빵과 스프로 저녁을 때운 다음 수레 안에 든 박스는 꺼냈다. 쾅! 챠라랑! 노예들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건 당신들이 좋은 주인을 만나 평생 살 먹고 잘 살기를 기원하며 이 콜트 슈발츠가 사는 거다. 술 마시고 싶은 사람?” 노예들의 얼굴로 진한 감동의 미소가 번졌다. 난 낄낄 웃으며 각방에 사람 수만큼의 술병을 넣어주었다. 여자같이 생긴 린세스가 술병을 받아들며 말했다. “콜트 씨라고 했죠? 고맙습니다. 내 평생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봐요!” 네네와 내 턱을 잡고 매혹적인 미소를 보여주던 밀라노도 술병을 껴안고 황홀해 했다. “간수오빠 최고야!” “하하하! 그래! 마셔라! 취해라! 잊어라!” 방안으로 술병을 넣어주자 남자 노예는 물론이고 여자 노예들도 꺅꺅거리며 좋아했다. 다 돌리고 보니 마지막 한 병이 남았다. 누구 안 받은 사람 없나 하고 돌아다니는고 있는데 유독 혼자서 방을 쓰고 있는 여자 노예가 방구석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게 보였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않았는데. 왜 저러는 거래? 난 쇠창살 앞에 앉아서 그녀를 불러보았다. “이봐요. 이리 와서 한잔해요.”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쇠창살 앞에는 빵과 스프 그릇이 그대로 있었다. “안 먹어요? 배 안고파?” 움직임이 없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술병을 기울이던 밀라노가 말했다. “그 아이는 온지 얼마 안돼서 그러는 거예요. 좀더 자기혐오와 불공평한 세상에 빠져있도록 내버려둬요.”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방구석에 쭈그려 앉아 이제는 훌쩍이기까지 하는 여자노예를 한심한 듯이 쳐다보다가 말했다. “노예들도 교육을 받는다고 하던데. 진짜입니까?” “물론이죠. 노예는 다방면에서 우수해야해요. 3급 짜리 일꾼들도 최소한 글 읽는 법과 쓰는 법을 알죠. 더군다나 우리들의 경우엔 귀족들에게 팔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절이나 인사법 같은 걸 교육받아요.” “주인에겐 무조건 순종하도록 하는 교육도 받는다던데?” “그건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에요. 그런데 그건 뭐하러 물어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들고있던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를 이빨로 뽑아냈다. 향긋한 술 냄새가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방안의 여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말했다. “야. 거기서 궁상떨지 말고 이리와.” “…….” 여자 노예는 대답이 없었다. 단지 떨림을 멈춤 것뿐이었다. 난 명령의 강도를 좀 강하게 했다. “쓰읍~! 빨리 안오지!” 역시나. 노예는 어쩔 수 없는 노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강압적으로 외치자 그녀는 후다닥 내가 있는 곳으로 기어왔다. 하지만 난 그녀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당신…?” “훌쩍… 예에?” 분명하다. 다리의 저 상처, 어제 마차에서 굴러 떨어진 그녀다. 내가 다리를 쳐다보자 그녀는 얼른 치맛자락으로 그것을 가렸다. 엉겁결에 술병을 입에 기울인 나는 병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술 못해요….” 그래서 다시 말했다. “마셔.” “흐윽, 예에에.” 그녀는 훌쩍이며 술병을 받아 들이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도 넘기지 못하고 기침을 하며 토해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네네와 밀라노가 조소를 흘렸다. “술도 못하는 흠침한 아이와는 놀지 말고 이리로 와요. 멋진 오빠.” “좀 있다가 갈게요.”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거린 그녀는 흘린 술을 닦으려 했지만 여긴 닦을 만한 게 없었다. 당황하던 그녀가 담요를 가져오려는 것을 말렸다. “됐어. 내버려둬. 다리 좀 보자. 어제 멋지게 넘어지던데. 괜찮아?” “아, 괘, 괜찮습니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다리를 감추려고 했다.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손수건을 풀어낸 나는 다친 다리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난 눈썹을 세웠다. “이리 안와? 맞는다?” “때, 때리지 마세요.” 그녀는 다시 다가왔다. 노예가 되지 않았더라도 좀 힘들게 살 것 같은 아가씨다. 치마를 두 손으로 잡고 죽어도 안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갖은 협박과 회유를 동원하여 겨우 치마를 걷어내고 무릎에 난 상처를 볼 수 있게 된 나는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지었다. “곪았군. 노예는 치료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냥 죽어버린다는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아.” 뒤에서 듣고 있던 밀라노가 그것 보라는 듯이 웃어댔다. 술병의 술로 그녀의 상처를 소독한 나는 손수건을 그녀의 무릎에 감아주었다. 그리고는 술병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마셔. 취기가 오르면 쓰라림은 사라질 거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눈 딱 감고 술을 입안에 부어넣었다. 그리고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겨우겨우 그것을 삼켰다.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술병을 들고 있느라 방어가 허술해진 그녀의 치마를 슬쩍 들춰보았다. 하얀 속옷이 보인다. “꺄악?!” “와하하하~!”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봤다~! 나는 봤다~! 낄낄낄!” 복도를 달려간 나는 하얀 속옷을 주제로 멋들어진 노래 한 곡을 즉석에서 만들어 불러 젖혔다. 취기가 오른 노예들은 깔깔 웃어대며 혼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갔다. 노예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와 앵콜을 받아가며 노래를 마친 나는 다시 복도 끝 방에 혼자 쭈그려 앉아있는 여자노예에게로 가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더니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엄청난 미인임에도 불구하고 저러는 걸 보니 상당히 귀엽다. 난 쇠창살을 앞에 두고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번만큼은 보여줄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으로 치마를 꾹 누르며 내 시선을 피했다. “어이, 귀여운 아가씨. 이름이 뭐야?” 대답하지 않는다. 이것은 노예들에게서 있어서 일종의 거대한 반항 같은 거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고, 312번인가? 313번째 물었을 때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백기를 흔들었다. “…스피릿 입니다.” “오, 반가워요. 스피릿 양. 그대의 미모만큼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그런데 머리색이 참 특이한걸?” 난 바닥에 늘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집어들었다. 희한하게 머리카락이 회색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가? 손에 끼고 있는 강철 장갑 때문에 감촉은 느끼지 못했지만 얼굴에 비벼본 결과 매우 부드럽고 향기도 좋은 것 같다. “그,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은근히 잡아당기는 그녀였다. 눈치봐가면서 조심조심 반항하는 게 정말 귀엽다. 나도 드디어 변태가 되어 가는 건가?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해? “나는 콜트, 콜트 슈발츠, 모험가고, 지금은 아르바이트 중이야. 그건 그렇고. 스피릿 양은 무지하게 예쁘네? 나한테 시집 안올래?” 스피릿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네와 밀라노는 은근히 속마음을 내 비춰와서 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 사주면 서비스 정말 잘해줄 수 있는데.” “그러게. 저 정도 마스크와 마음씀씀이를 가진 주인님은 드물다구. 아~ 시집가고 싶어라~!” 주변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난 하하 웃으며 외쳤다. “빌어먹을!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있겠지. 그때까지 다들 건강하라구!” 그러자 얼큰하게 취해있던 노예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환호를 올렸다. 술기운에 긴장이 풀렸는지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복도 중앙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정문을 노려보고 앉아있었다. 지리한 시간이 흘러갔다. 천장에 있는 라이트 볼은 여자 노예들의 흐트러진 모습을 여실히 비춰주고 있었지만 난 그녀들의 속옷색깔이 무슨 색인지 확인하는 것 보다 더 심각한 주제를 안고 고민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큰 함성을 질렀는데도 경비병이 오지 않았는가? 빌어먹을, 뭐가 오긴 왔나본데. 그때였다. “누구세요?” 스피릿의 음성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달려간 나는 그녀의 방 창문에 올라와 있는 사람의 그것을 발견하고는 등에서 뽑은 자동석궁을 난사했다. 퉁퉁퉁퉁퉁!~ 퍼퍼퍽! 쨍그랑!? “꺄악?!” “시끄러! 담요 덥고 엎드려 있어!” “예! 예!” 그녀는 얼른 침대 위에 있는 담요를 끌어내려 뒤집어썼다. 그때를 같이하여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건을 뒤집어쓴 괴한들이 들어왔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다시 복도를 달려간 나는 복도 중간에 세워놓았던 식당수레를 발로 밀어버렸다. 그러자 문 앞에서 달려 들어오던 복면의 괴한은 그것에 치여 도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몸놀림을 보아하니 이놈들은 초짜다. 그것도 정의에만 불타는 초짜. “네놈들의 정의는 맘에 들지만, 여기서는 내가 악역이야. 날 쓰러뜨리기 전에는 아무도 못 데리고 간다!” 문으로 들어선 사내는 내 말을 듣자마자 단검을 뽑아들고 돌진해왔다. 난 자동석궁을 든 손을 들어 녀석에게 난사했다. 투투투퉁! 챙챙챙?!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 “쾅!” “으악?!” 발차기로 가슴을 얹어 맞고 뒤로 밀려난 나는 석궁을 등에 매고 허리의 검을 뽑아들었다. “으랴차! 간다!” 놈은 숙련된 격투가다. 정공법이나 변칙기로는 힘들다. 그렇다면!? “속임수다!” 냅다 롱소드를 집어 던진 나는 복도에 그대로 있는 의자를 밟고 뛰어올라 롱소드를 피하는 녀석에게 자동석궁을 겨눴다. 투투투퉁! 퍼억?! 퍽?! “아악!” “여자?!” 털썩?! 바닥에 떨어져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녀석에게로 다가간 나는 놈의 복면을 벗겨보았다. 여자다. 그것도 엘프! 횡재했다! 가 아니지! 염병! 골치 아프게 됐군. 만일을 대비해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목걸이를 풀어 이빨로 깨물었다. 그리고 그것을 여자 엘프의 옷깃을 벌려 가슴속에 밀어 넣었다. 파아악! 엘프여자는 텔레포트 해버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다시 검을 주워 들고 세 번째 녀석을 맞이했다. “덤벼덤벼! 우라질 놈들아!” “으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녀석에게 이단옆차기를 먹인 다음그대로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 어깨에 박아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그 와중에 뒤쪽을 벽을 부수고 난입한 녀석이 쇠창살을 뜯어내고 있었다. 우지직! 우직! 텅! 터텅! 어찌나 힘이 센지 녀석이 움켜쥔 쇠창살은 엿가락처럼 휘어지더니 급기야 끊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놈!” “고렘이다. 에레나를 어떻게 했나?”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 나이프를 꼿은 녀석을 부축하던 복면사나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이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 손가락을 들어 녀석을 가르켰다. “너 이 새끼. 뭐야? 인간이지?” 그러자 녀석은 과감하게 복면을 벗었다. 과연 인간의 얼굴이었다. 대략 30대 초반의 얼굴을 가진 녀석은 다시 말했다. “에레나를 어떻게 했나?” “삶아먹었다. 어쩔래? 엘프까지 동원하다니 치사해. 보나마나 여행중이 엘프에게 접근해서 당신네 동료들이 납치되었을지도 모르니 우리 힘을 합쳐 비인도주의적인 인권침해를 와해시켜보세~! 라는 문구로 끌여들였을 테지? 그러다가 멋지게 노예들을 구출해낸 네게 홀딱 빠지게 해서 재미 좀 보려고 말야. 어때? 정확하지?” “이놈! 헛소리 마라!” 그러자 녀석은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며 당장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난 그걸 보고 얼른 등에서 자동석궁을 꺼내들었다. 녀석은 움찔하며 멈춰섰다. 지금 이 행동으로 녀석은 자기 목숨을 아끼는 녀석으로 판명이 나버렸다. 난 혐오스럽다는 듯이 외쳤다. “너 같은 놈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위선자라고 불러. 네가 이 30명 불쌍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어?! 집과 가족을 되찾아 줄 수 있어!?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돈 몇 푼 쥐어다가 염병할 세상에 내던지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못해! 웬 줄 알아!? 이 사람들은 이 사람들만의 행복과 삶이 있기 때문이야!”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녀석은 당당하게 외쳤다. “그건 궤변이다. 이들은 진정으로 자유를 바라고 있어! 그래서 내가 왔다! 나는 이들을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런 미친 새끼! 너! 여기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눠봤어? 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봤냐는 말이다! 제기랄! 이왕 올 거라면 난 좀 더 제대로 된 목적을 가진 놈이 오길 바랬어. 하지만 넌 아냐. 너 같은 놈들에게 이 사람들의 우울한 미래를 맡길 수는 없어. 오늘 나는 이곳에서 악역이다. 날 쓰러뜨려라. 그러면 30여명 노예들이 네 가슴속에 타오르는 정의감을 채워 줄 거다.” 뒤에서는 여전히 멍청한 고렘 놈이 쇠창살을 벌리는 작업중이다. 하지만 자유를 찾아 달아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맛좋은 와인 때문이지. “정의는 무엇이고 자유는 무엇이냐? 덤벼라. 우리 같이 확인해보자.” “너를 꺽고 이들에게 자유를 선물하리라!” “염병! 지랄하지마!” 달려간 나는 녀석의 단순한 찌르기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강철 건틀릿 덕분에 이 정도 날은 간단하게 잡을 수 있지. 놈의 얼굴로 당황이 번졌다. 나는 왼팔을 힘껏 올려 단번에 녀석의 턱을 박살내버렸다. 뻐어어억! “카알!” 고렘의 등에 올라타서 잠들어있는 노예들을 깨우려던 괴한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그런데 목소리가 꼭 10대 소녀의 목소리 같다. 아!~ 열받는걸? 이놈이나 저놈이나, 돼먹지도 않은 정의에 불타올라서는!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든 나는 한창 쇠창살을 뜯어내는 중인 고렘의 팔을 타고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녀석의 등에 보자기 같은 것으로 매달려 있던 복면이 나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난 들고있던 나이프로 녀석의 등을 그어버렸다. “꺄아악?!” “싸우러온 주제에 갑옷도 하나 없고 말야. 자신 있었나 보지? 꼬마 마법사님? 집에 가서 엄마 젓이나 더 먹고 와!” 난 녀석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복면을 벗겨버렸다. 동시에 고렘의 팔이 날 붙잡아 힘껏 벽으로 집어 던졌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날아가기 직전에 보았던 꼬마 계집애의 찡그린 얼굴이었다. “으억!?” “괘, 괜찮으세요?!” 잠에서 깨어난 나는 무릎을 꿇고 옆에 앉아서 있던 스피릿을 봐주고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이곳은 노예시장의 스피릿이 있던 방이었다. 마땅한 곳이 없어서 여기다가 눕힌 모양이군. 사태는 마무리 된 건지 아닌지 경비병들과 사람들이 바쁘게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아는 얼굴을 발견하게됐고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게렉터! 우흡! 콜록콜록!” “괜찮으세요? 무리하시면 안돼요.” 스피릿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그녀에게 게렉터를 불러달라고 했다. 기침이 좀 진정됐을 무렵 게렉터가 쇠창살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콜트! 깨어났군, 괜찮아?” “으, 응. 그런데 어, 어떻게 된거야? 놈들은?” “다들 달아났어. 노예들도 무사하고, 다들 네 안부를 걱정하더군.”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게렉터는 다시 바쁘게 달려갔고 난 좀더 쉬기 위해 침대에 드러누웠다. 옆에 있는 스피릿은 연신 손수건으로 내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그거, 내가 묶어준 손수건이잖아.” “지금은 저보다 당신이 상처가 심하세요.” “헤, 헤헤. 고마워. 하지만, 나 괜찮아. 이대로는 안 죽어.” 그러고도 한참을 씩씩 숨을 몰아쉰 나는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스리핏이 말렸지만 난 필사적으로 쇠창살을 향해 걸어갔다. 결국엔 보다못한 스피릿이 날 부축해주었다. 숨을 크게 들이긴 나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노예들에게 말했다. “이봐들! 우흡! 쿨럭쿨럭!”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난 계속 말했다. “미안해! 너희들을 구하러온 녀석들을 쫓아버려서. 사실은 돌아가고 싶었지? 자유를, 콜록콜록! 당당하게 태양을 노려볼 수 있는 그런 자유를, 바라고 있었지? 저, 정말 미안하다!” 네네가 씁쓸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마. 어차피 따라갔어도 다시 돌아와야 했을 걸? 이미 이쪽으로 틀어진 인생이라서.” 난 무릎을 꿇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왜 그래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쇠창살을 붙잡고 아까의 전투에서 내가 했던 헛소리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도 여기서 나가고 싶어 했는 줄도 모른다. 그것을 내가 막았던 건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동물은 개개인의 생각이 다 다르고 틀린 법이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도 제대로 일치시키지 못하는 불완전한 동물이니까. 스피릿과 다른 노예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동안 용서를 빌다가 그대로 실신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거고, 새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노예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다시 돌아온 게렉터에게 듣기로 추적은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하지만 노예시장은 예정대로 열릴 것이며 이번 일은 극비에 부칠 거니까. 미리 알아두라고 해줬다. 그리고 끝까지 임무를 완수한 나에겐 여기 입실론의 시장이 특별히 추가 위로금을 준다고 했다. “그런 거 없어도 되니까. 누가 포션이라도 좀 사다줬으면 좋겠다. 아파서 못 움직이겠어.” “그렇게 많이 아프세요?” “응.” 스피릿은 내 옆에 꼭 붙어 앉아서 날 간호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의 간호를 받다니 아~ 행복하여라. 그녀의 손길에 구름 위를 떠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난데없이 간수가 들어왔다. 그는 쇠창살을 두드리며 외쳤다. 땅땅! “지금부터 목욕과 몸단장을 할거다! 다들 준비해라!” 스피릿은 그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내가 준 손수건을 다시 다리에 묶더니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잠시동안이었지만, 꽤 재미있었어요.” “어. 가는거야?” “예.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죠?”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우울하게 웃었다. 거참,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그때 반대편 방에서 네네와 밀라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콜트 오빠! 일어났어요?!” “어~!” 난 자리에 누운 채 팔을 흔들었다. “우리가요! 잘 지내세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요!” 그 말을 들은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스피릿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수를 불렀다. 간수는 내 부탁에 따라 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복도를 걸어다니며 하룻밤만에 친구가 되어버린 노예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다들, 잘먹고 잘살아야해.” 모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나는 손을 흔들며 뒤로 돌아섰다. 씁쓸한 싸움이고 이별이군. 노예들을 인수하기 위해 온 간수들에게 노예들을 인도한 나는 장비를 챙겨서 그만 돌아가려고 했다. 방에서 나온 모두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나도 그들에게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그들은 간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때 맨 뒷줄에 서있던 스피릿이 처음 봤을 때의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다가 간수의 재촉에 서둘러 달려가 버렸다. “가슴 두근거리게 왜 저러는 거야?” 고개를 갸웃한 나는 장비와 사례금을 챙겨서 그만 시청에서 나왔다. 머리 위의 햇살은 뜨듯했고 눈이 부셨다. 대신 등이 좀 아팠지만.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고 한가득 미소를 지은 나는 시장으로 들어가 선물을 사서 여관으로 돌아갔다. 아침 준비를 하고있던 제미니가 절뚝거리며 여관으로 들어오는 날 보더니 놀라서 달려나왔다. “뭐야?! 왜 이래!” “일하다가 다쳤지. 이거, 선물. 이건 제이미 줘. 아, 난 좀 자야겠다. 잘자. 제미니.” 방으로 올라가려던 나는 다리가 꼬여 계단에 머리를 처박아버렸다. 덕분에 제미니가 비명이를 지르는 사태가 있은 다음 나는 벡터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방으로 올라가 누울 수 있게 됐다. “어떻게 된거야?!” “고렘한테 맞았어. 좀 가서 때려 줄테야? 씁~ 아파라.” 제미니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에게 악을 써대는 대신 부엌으로 내려가 꿀물을 한 컵 타 가지고 왔다. “마셔! 바보자식. 또 한번 망가져 왔단 봐. 다리를 분질러버릴거야.” “고마워.” 꿀물을 맛있게 들이킨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시 일어난 시간은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창가의 수납장에서 힐링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몸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다. 한 병에 100만 루나짜리 포션을 깨끗하게 비워버린 나는 어깨를 펴고 점심을 먹기 위해 홀로 내려갔다. 제미니가 도끼눈을 하고 나를 맞이했다. “뭐야? 다 나은 거야?” “포션 마셨어.” “그거 몸에 안 좋은 거 아냐?” “모험가로서 움직일 수 있는 나이는 끽해야 40대 중반까지야. 그 다음부터는 몸이 따르지 못하지. 그러니 몸이 좀 상하더라도 벌 수 있을 때 벌어둬야 한다구.” 제미니는 콧방귀를 뀌더니 부엌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돈이 좋으면 돈더미에 파묻혀서 죽으면 되겠네.” 피식 웃은 나는 식당음식이 나오는 창문으로 걸어가 요리에 한창인 제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사다준 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하긴, “뭐, 어쨌든 목숨 값이라도 벌어야 여자친구 선물이라도 꼬박꼬박 사다주지. 아무거나 좋으니까 먹을 거 좀 줘.” 제미니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의 반응에 낄낄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려니 제이미가 음식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부엌을 힐끔 쳐다보고는 나에게 속삭였다. “언니 지금 얼굴 새빨갛다?” 입가가 슬며시 올랐다. 한번보고 싶어지는데. 제이미가 돌아가고 한창 점심을 먹고 있는데 관문으로 라이트가 들어왔다. “여기 콜트 있나?” “어라? 네가 여기 왠일이야? 아세트 씨한테 쫓겨났어?” Running Fire: 03 “주인님. 괘, 괜찮으세요?” “어라? 네가 여기 왠일이야? 아세트 씨한테 쫓겨났어?” 그러자 라이트는 인상을 찌뿌리며 나에게 다가오더니 밥 먹고 있는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리며 말했다. “오냐. 쫓겨났다 이놈아.” “발 안 내리지? 밥 먹고 있는 거 안보여 이놈아?” 그는 내 귀를 붙잡아 당겼다. 난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고개를 기울이게 됐고 곧 라이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여자 누구냐?’ ‘무슨 여자?’ ‘어제 저녁에 네놈이 우리 집으로 날려보낸 그 엘프 여자 말야.’ 그제서야 생각이 난 나는 부랴부랴 점심을 입안에 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가 올게.” “부탁이니 죽을상으로 기어들어 오진 말아 줘.” 부엌에서 들려온 말이었고 난 설마 또 그러겠냐는 듯이 손을 흔들어주고는 라이트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깜짝 놀랐어. 한참 자는 도중에 왠 엘프 아가씨가 내 침대로 떨어져서.” “아세트 씨 안놀라든?” “이놈이? 내가 놀랐다니까? 오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엘프 아가씨가 내 위에 올라타서 신음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해봐.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더라.” “아세트 씨는?” 그러자 라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움받았어. 자기 외에 또 노예를 들여왔다면서. 엘프는 의외로 질투가 심하더라? 아아,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장로님에 연락해서 빨리 데려가라고 해야겠다.” 라이트는 아는 엘프 촌장에게 부탁해서 아세트의 가족과 고향을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그 때문에 요 근래 그의 씀씀이가 헤퍼지고 있는 거고, 힘내라고 말해준 나는 오히려 화가 난 라이트에게 목을 졸리는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다. 잠시 후 녀석의 집에 도착한 나는 정말로 볼이 부어있는 아세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충격이다. “몰랐습니다.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시는 군요.” “…어서 오세요.” 아세트는 딱딱하게 말하며 내가 들어가자 문을 쾅 닫았다. 아직 문 밖에는 라이트가 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거, 약간 책임감이 드는데? 아세트의 안내를 받아 라이트의 방으로 들어간 나는 그곳에서 가슴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엘프 여자를 발견했다. 역시, 어제 그 계집애다. 어쨌든 아세트의 오해부터 풀기로 한 나는 대략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눈을 깜박이며 내 이야기를 듣던 아세트는 다시 질문했다. “정… 말인가요?” “예. 분명히 어제 제가 잡아서 텔레포트 시킨 엘프여자입니다. 라이트와는 관계없습니다. 그 증거로 이 아가씨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절 잡아먹으려 들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었다. 자기 집인데도 들어오지 못하고 우울하게 문에 기대어 앉아 세상을 부정하고 있던 라이트는 그녀가 문을 벌컥 여는 바람에 앞으로 꼬꾸라졌다.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괜찮으세요.” “어, 응. 뭐. 괜찮아요. 오해는 풀렸나보네.” 아세트는 라이트를 일으켜 세우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방을 썼다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거예요. 한번도 안아주지 않으셨잖아요.” 저건 여자엘프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거의 도발에 가까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되려 흥분한 내가 주전자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라이트의 느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세트 양? 미안하지만 난 그럴 수 없소. 왜냐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마법사라서. 아~ 나도 이 운명이 슬프오.” 제기랄! 주전자의 주둥이 씹어버린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기 위해 느끼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다가 막 깨어난 엘프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으윽…! 너, 너 이 자식!?”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죽이겠다고 외쳐대며 침대에서 내렸다. 하지만, 두어 걸음 걷기도 전에 마룻바닥에 이마를 찍고 말았다. “아윽!” “아프겠다. 괜찮아요? …이 정의감에만 불타는 멍청한 엘프 계집애야.” 그녀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증오로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엘프 말로 뭐라고 중얼댔다. “왜 우리 부모님을 욕하고 그러지?” “아악?!” “이, 임마! 콜트!” 라이트가 말렸다. 아세트는 내 모습에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그의 등뒤로 숨었다. 엘프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 나는 그녀의 허리 벨트를 붙잡아 침대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당장 죽을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뱀처럼 몸을 까뒤집기 시작했다. 난 라이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포션 있지? 내놔봐.” “뭘 하려고?” “어서 갖고 와.” 내 으르렁거림에 아세트가 후다닥 달려가서 포션을 들고 왔다. 포션을 뚜껑을 딴 나는 쓰러져 있는 여자엘프의 코를 붙잡아 입을 벌리게 하고 포션을 부어넣었다. 병을 다 비운 나는 얼른 뒤로 물러서서 허리춤에 꼿아두고 있는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물러서.” 라이트는 아세트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엘프여자가 으르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너…!” “덤벼. 함부로 인간을 믿은 죄가 얼마나 큰지 내가 가르쳐주마. 멍청한 엘프 계집애야!” 자리에서 일어난 금발의 엘프 여자는 붕대가 감겨있는 가슴을 좀 만져보더니 내 뒤에 서있는 라이트와 아세트를 번갈아 본 다음 말했다. “이유가 뭐지?” “뭐?” “이유가 뭐지?” 대가리에 똥만 참 멍청한 계집애는 아닌 것 같은데? “솔직하고 착하기만 엘프들이 인간들의 거짓말에 놀아나 내 뒤에 선 아가씨 같은 경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덤벼.” “어떻게 너희들은 싸움밖에는 할 줄 모르는 거냐? 나쁜 녀석, 숙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그러면서 여자는 다시 침대에 가서 앉았다. 상처가 쓰라린 다는 듯이 가슴을 만져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마르다. 물 좀 줘.” 무의식적으로 살기가 사라진 것을 감지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칼을 다시 허리에 꼿았다. 아세트가 부엌에서 물 컵을 들고 와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엘프 여자가 아세트를 보더니 이채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쉬누마 게리온 트라이?” “네, 네이크노 셰리단. 엘리클.” 고개를 끄덕인 엘프여자가 물었다. “내가 찾던 종류의 사람이군. 주인은 누구지?” “전데요.” 라이트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라이트와 무슨 이야기를 한참동안 주고받더니 서로 웃기까지 했다. 젠장. 사이 좋구나. 방금 전까지 적이었던 주제에. 돌아가려던 나는 마침 생각난 것이 있어 그들 이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음! 콜트 슈발츠라고 합니다. 모험가입니다. 직분에 충실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당신에게 상처를 입혀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제 함께 온 자들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멀뚱히 날 쳐다보던 그녀가 라이트를 보며 말했다. “이 친구는 낯이 굉장히 두꺼운데?” 라이트는 웃어버렸고 난 화가 좀 났다. “나는 에레나 스파이크. 어제 그 사람들은 내 여행동료들이었어. 노예시장을 습격해서 노예들을 풀어줄 거라고 하길레 우리네 동족이 혹시 있을까 싶어 돕는다고 따라왔던 거지.” “이종족 노예의 포획은 작년 부로 폐지됐습니다. 거래는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지만 더 이상의 공급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모르고 있었습니까?” “어, 몰랐어.” “멍청하시군요. 그러니까 그 느끼하게 생긴 변태 자식에게 이용당하는 겁니다.” 에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았다. 난 당당하게 팔짱을 하며 말했다. “엘프로서 부끄러운 줄 아십쇼.” 고개를 돌린 나는 라이트와 아세트를 바라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 알아서들 하겠지. 난 몸을 돌렸다. “간다.” “잠깐만.” “또 뭡니까?” 에레나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내가 다 잡아먹었습니다. 친구는 좀 잘 사귀십쇼.”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라이트가 따라나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만둬, 23살이나 먹어서 고치기도 힘들어져버린 성격이라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말하며 문을 나서려는데 라이트가 중얼거렸다. “너, 어머니 때문에 그러는 거지?” 머릿속으로 벼락이 치는 것 같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버렸다. “라이트, 아세트에게 잘해줘라. 울리면 죽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나는 꿀꿀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하염없이 대로를 걸었다. 온갖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웃으며 대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가 저리도 좋을까? 젠장.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옛 기억을 지우기 위해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돌아다니던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저곳은……. 어제 저녁에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피릿이라고 했던가? 워낙에 보기 드문 미인인지라 한번 더 보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다. 어쩌지? 에라! 문을 지키고 서있는 경비병들에게 모험가 자격증을 보여준 나는 간단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서 한창 노예 구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화장을 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녀 노예들이 한 명씩 나와서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무대 한쪽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라? 스피릿? 다른 노예들은 맘에 드는 주인에게 다가가 직접적으로 나를 사달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녀는 뭐가 부끄러운지 오도카니 서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결국 노예들이 다 주인을 찾아가고 마지막에 그녀 혼자만 남게되었다. 사회를 맡은 간수는 그녀가 부끄러움을 잘 탄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손을 잡아끌었다. 슬금슬금 반항하던 그녀는 결국 무대 중앙으로 와서 간수의 억센 손길에 의해 고개를 들려졌고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당장 여기저기서 가격이 불려졌다. “8000만!” “8500만!” “9000!” 가격이 올라가고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구매자가 가격을 부를 때마다 그녀의 얼굴로는 울상이 그칠 줄 몰랐다. 그러다가 구매자들이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대자 간수는 고개를 저으며 진행요원들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다시 무대로 올라와서 외쳤다. “양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구매자여러분들의 경쟁이 너무 치열한데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올라가면 저희나 구매자 여러분들이나 차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지도 모르니 노예로 하여금 직접 주인을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선택되신 분께서 9천 900만 루나를 지불하실 수 있으시다면, 저희는 그분께 노예를 양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저곳에서 야유가 쏟아졌지만 대부분은 찬성했다. 난 그녀가 누굴 선택할지 궁금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약간의 두근거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간수에게 설명을 들은 스피릿은 치마를 잡고 계단을 내려와 구매자들의 사이를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렇게 시끄럽던 사람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이유는 스리핏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뭐, 그 비슷한 것 때문이라고 난 생각했다. 다가오면 껴안아줄 거라며 낄낄거리던 험상굳은 사내들도 막상 그녀가 다가가자 넋이 빠져 입을 다물어버렸다. 화려한 드레스에 아름다운 얼굴, 높으신 귀족 가의 영애 같은걸? 그 순간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란 나는 내 옆에 앉아있는 사내의 머리를 붙잡아 얼굴을 가렸다. 화를 내는 사내에겐 나중에 술 한잔 사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가 앉아있는 곳으로 거침없이 다가오더니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구경오셨나 봐요?” 어제는 덜덜 떨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더니 많이 좋아졌네. 주변에서 우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 “상처는 괜찮으세요?” “응, 포션을 마셨거든. 괜찮아. 그러는 스피릿이야 말로 어제보다는 더 예뻐진 것 같아. 드레스, 잘 어울리는걸?”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간혹 아세트가 저렇게 웃는걸 본적 있는 것 같은데. 불가사의하다. 주위를 조금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모험가라고 하셨죠?” “응. 좀 위험하지만 목숨 값은 비싸니까.” 한참을 머뭇대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조, 조수하나 필요 없으세요?” “뭐?”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듣지 못했기에 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은 해주지 않고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저, 절 사주세요!” “엥?” 주변에서 우리들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야유와 환호를 보냈다. 고개를 푹 숙인 스피릿은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고 있었고 난 기가차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때 간수들이 달려왔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콜트씨로군요? 하여튼 축하드립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사시겠습니까?” 갑자기 스피릿이 고개를 쳐들더니 처음 봤을 때 그 표정을 지었다. 어미 잃은 새끼사슴의 표정, 비오는 날의 대로 가에 버려진 강아지의 표정, 문 앞에서 떨고있는 고양이의 표정들이 합쳐진 얼굴은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트 녀석의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아. 게다가 나에게 있어서 노예는 비효율적이라구. 그렇기에 난 고개를 저으며 싫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짜고자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사주세요. 제발. 원하시는 거 다해드릴께요.” 그 다음 순간, 나는 뭐에 코가 꿰어버렸는지 사겠다고 말해버렸다. 주변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왜 박수를 치는지는 알 수 없다. 앞에 선 간수는 뭐가 그리 좋은지 현명한 판단이며 탁월한 선택이고 동시에 합리적인 구매라고 씨부렁대며 나를 데리고 관리사무소로 가더니 내 모험가 면허증과 시민증등을 빼앗아 서류를 작성했다. 그러더니 노예 관리서, 주인 증명서, 노예양도 매매증을 나에게 내밀더니 평상복으로 갈아 입힌 스피릿과 함께 뒷문으로 내보냈다.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모험가 면허증과 시민증은 선금을 지급하러 오시면 그때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잔금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5개월 할부로 해뒀으니 매달 28일에 시청으로 납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철문을 닫아버리는 그를 보고 난 말을 하지 못했다. 옆에서는 약간은 겁은 먹은 것 같으면서도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던 스피릿이 두 손을 맞잡고 다소곳이 서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난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비틀거리며 벽으로 걸어가 울분을 터트렸다. “내, 내가 무슨 짓을…!! 돌아가면 제미니에게 담금질 당할지도 몰라….” 벽을 붙잡고 부엌칼로 배를 찔리면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미친 짓거리의 결과물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주인님. 괘, 괜찮으세요?”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싸안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자 스피릿이 움찔하며 말했다. “주인님이라고…….” “한번 더 말해봐.” “주인님.” 허, 이거 미친 짓 벌인 거 치고는 기분 괜찮은데? 하지만 갑자기 내 머릿속으로 제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2년 전,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 가게 안에서 술에 취한 모험가에게 겁탈 당할 뻔한 걸 우연히 내가 지나다가 발견하여 구해준 뒤로, 그녀는 상당히 노골적으로 나에게 접근해왔다. 하지만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른 걸 알면 정말 가만 안 있을 텐데. “하아, 어쩌나?” “저, 저어 저 때문에 무슨 않좋은 일이라도…?” 한숨을 내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턴 다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스피릿은 주춤거리며 내 손을 잡았고 난 그녀를 데리고 근처 여관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된 이상! 들키기 전에 이 마을을 떠나야해! 쾅! 문을 닫은 나는 방안에 서서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스피릿에게로 다가갔다. “아, 주, 주인님. 이, 이러시면…. 저, 저는 아직 준비가….”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 나는 얼른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촤악! 그리고 그녀를 침대로 끌고 가 앉혔다. 반항하던 그녀는 치마를 다리사이에 우겨 넣고 잉잉거리며 내 가슴에 불을 당기고 있었다. “이봐, 스피릿. 자꾸 그렇게 징징대면 네가 상상하는 거 진짜로 해버린다?” “히끅~! 히끅~!” 놀란 스피릿은 딸꾹질을 하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더니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지금 널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일단 지금은 이 마을에서 떠나는 게 더 급해. 넌 어디가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어. 알겠지? 밥은 주인장에게 말해놓고 갈 테니 배고프면 먹으러 내려가.” “주, 주인님은 어디 가시는데요?” “말했잖아. 도망가야 된다고, 제기! 널 산게 알려지면 난 산채로 가죽을 벗기게 된지도 몰라. 어쨌든 떠날 준비하고 아침까지는 여기로 올 테니 어디가지말고 기다리고 있어. 만약 도망가면 잡아다가 되 팔아버릴 테니 알아서해.” 인상을 구기며 잔뜩 겁을 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러자 그녀도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내 뒤를 따랐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하, 하지만 누, 누가 들어오면….” “에이! 시끄러워. 아무도 안 들어온다니까? 걱정되면 문 단단히 잠그고 있으면 되잖아! 다시 말하지만 도망가면 그냥 안둬!” “아! 주인님!” 뒤에서 그녀가 부르던 말던 난 복도를 달려가 안면이 있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얹어주며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부탁했다. 그리고 은행으로 달려가 내 통장에서 시청의 계좌로 스피릿의 몸값을 입금시키고 여행자금을 찾았다. 으아! 피 같은 내 돈! 주인님이라는 한 마디에 4500만 루나를 한방에 갖다버리다니! 젠장!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내고 말테야! 은행에서 발급 받은 입출금 영수증을 들고 시청으로 달려간 나는 모험가 면허증과 시민증을 돌려 받은 다음 그 길로 무기점과 모험가 길드를 돌면서 부서져서 정비를 부탁한 장비를 되찾고 다른 마을의 길드로 이적을 절차를 밟았다. 길드의 서무를 맡고 있는 세이라씨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워라. 떠나는거야? 언제 돌아오는 거니?” 그녀의 앞에 의자를 가져다 앉은 나는 서류에 지장을 찍으며 말했다. “한 2년? 그 정도 걸릴 거예요.” “갈곳은 정했어?” “아직, 지금으로서는 셰리단에 가볼까 생각 중인데요.” 서류를 내밀자 그녀는 커다란 도장을 몇 개 찍으며 말했다. “그럼 가까운 곳의 샤먼에 가지 그래? 그곳에 있는 모험가 길드에서 요새 일거리가 넘쳐서 처치 불능이라고 실력 있는 모험가들 있으면 좀 보내달라고 편지가 몇 번 왔었는데.” “그것도 좋죠.” 세이라씨는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이적 서류를 내밀었다. “받아. 어디서든 등록만 하면 돼.” “미안합니다. 말도 없이 바로 떠난다고 해서.” “으응, 아냐 괜찮아. 원래 모험가라는 직업이 일 찾아서 떠돌기 마련이니까. 그럼 다음에 올 때 선물 사 가지고 오는 거 잊지마.” “알겠습니다. 그럼.” 서류를 챙겨서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한동안 정들었던 길드는 떠나려 했다. 그러는데 세이라 씨가 날 불렀다. “아참, 콜트? 혹시나해서 말해두는데 선물은 두 개 사와야 해.” “예?” “하나는 내 꺼, 하나는 우리 아기 꺼.” 순간 머리가 어질 해졌다. 난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외쳤다. “임신하신 겁니까?!” “응. 이제 2개월이야. 나 꼭 닮은 딸이면 좋겠다. 아들이면 그이가 자기 뒤를 잇게 할거라고 하더라구.” 커억!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말하는 세이라 씨를 바라보며 난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길드 장 지금 사무실에 있습니까?” “아니, 몇일 밖에 나갔는데. 이틀 후에나 돌아올거야.” 겁나서 미리 도망갔구나! 난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잡고있던 손을 놓았다. “밤길 조심하라는 말만 해주십쇼. 앞으로 노리는 사람이 꽤 많아질 거라는 말도.” 세이라 씨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난 임신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길드를 나섰다. 뭐,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나 이외에도 그녀의 추종자는 많으니까. 밖으로 나오니 슬슬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이 불타고 있다. 난 가슴속에 있는 고민을 서쪽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모두 집어던졌다. 그래, 어차피 이리저리 치이는 인생이다. 고민한다고 달리는 것은 없겠지. 한숨을 크게 내쉰 나는 지는 태양을 등지고 라이트의 집으로 향했다. 몇 안돼는 내 친구이기 때문에 적어도 인사는 하기 위해서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자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하지만 내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아세트였다. 그녀는 딸꾹질까지 해가며 날 반겼다. “이거.” 일할 때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거나 적에게 잡히는 것을 막으려고 항상 쓰고 다니는 검정색 두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세트는 그것을 받아 코를 풀더니 나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흐윽, 훌쩍. 드, 들어오세요.” “그놈이 때렸습니까?” “차라리 때려 주셨다면 좋았을 거에요. 아아앙~!” 아세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엉엉 눈물을 흘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석양의 마력을 받아 빨간색으로 물들어 색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나는 가방에서 새로 주문한 강철 건틀릿을 꺼내 양손에 끼고 녀석의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라이트와 에레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녀석이 씩 웃으며 반겼다. “야아! 콜트! 어서 와! 저녁 먹으려고 왔어?” “아니, 작별인사 하러 왔는데. 아세트 씨 울고 있더라?” 그렇게 말하며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울렸어?” 녀석은 밖에서 꺽꺽 거리며 울고 있는 그녀를 힐끔 쳐다본 다음 말했다. “에레나 씨가 그러는데. 자기네 마을에서는 노예가 됐던 엘프들도 잘 받아준다더라. 언제까지 내가 데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돌려보내겠다?” “응.” 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충격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는군. “넌 마법사였지. 약속을 잊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그럼 점에서는 진짜 맘에 들어.” 라이트는 하하 웃었다. 난 에레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엘프 마을에서 따돌림 같은 건 없습니까?” “가슴 아픈 일을 당한 사람은 안아주고 달래줘야 해요. 우릴 당신들과 같은 관념으로 보지 말아요. 불쾌하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어 새 건틀릿의 파괴력을 시험했다. 대상은 라이트의 낯짝. 콰앙! 우당탕! 의자에 앉아있던 녀석은 턱이 돌아가는 충격에 옆으로 쓰러졌다. 에레나가 인상을 찌뿌렸다. 라이트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욱신거리는 볼을 감싸쥐고 날 쳐다보았다. 그때 거실에서 울고 있던 아세트가 달려와서 바닥에 쓰러져있는 라이트를 부축했다. “라이트! 라이트!? 괜찮아요!?” “아, 예. 괘, 괜찮기는 한데.” 아세트가 고개를 돌리더니 앙칼지게 외쳤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왜 때려요! 나쁜 사람!” 난 손목을 좀 흔들며 말했다. “마법사로서는 맘에 들어. 하지만 남자로서는 맘에 들지 않는다. 여자는 울리는 게 아니라고 어머니에게 배웠어. 그리고 아세트 씨, 저런 비실비실한 녀석말고 좀 제대로 된 엘프남자를 물어요. 힘도 없는 놈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질질 짜는 겁니까? 내 참.” 말을 마친 나는 그만 몸을 돌렸다. 문밖의 석양은 최고조에 달해 세상을 완전히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 나는 내일 떠난다. 한 2, 3년 동안은 돌아오지 않을거야. 그러니 잘 먹고 잘 살아라.” 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라이트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에레나와 아세트가 말렸지만 그는 바닥에 엎드려 미친 듯이 웃어댔다. 녀석을 힐끔 쳐다본 나는 고개를 돌리고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올트!!” 고개를 뒤로 돌렸다. 퍼억!? 정신이 아찔해지는 순간이다. 매직 미사일?! 허리를 뒤로 젖힌 나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코에서 흐르는 찝찔한 액체를 혀로 핥았다. 멀리 녀석의 집에서 하얀 로브를 입은 라이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물이다! 잘 가!” 작별인사 치고는 좀 매섭지만 나도 한 대 때렸기 때문에 불만 없이 몸을 돌렸다. 물론, 손을 흔들어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여관에 도착한 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제미니에게 인사를 건냈다. “나 왔어.” “어, 늦었네? 어디서 뭐하다가 온거야?” “아,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배고프다. 밥 줘.” 다행히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제미니는 좀 기다리는 말을 하고는 내가 앉아있는 곳으로 직접 저녁을 가지고 왔다. 별일이네. 손님이 이렇게 많은데. “많이 먹어.” 짧은 한마디를 하며 내 앞에 놓고 간 것은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평소에는 귀찮다고 아무거나 해주더니. 혹시, 뭔가 알아챈 거 아냐? 설마. 만약 알아챘다면 부엌칼을 들고 나왔을 거다. 수많은 고민을 했지만 날 만족 시켜주는 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일단 주린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저녁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방으로 올라간 나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짐을 챙겼다. 장기투숙을 하다보니 짐이 굉장히 많다. 결국 나는 여행에 필요한 것만을 골라 따로 챙기기로 했다. 큼직한 여행가방 위에 걸터앉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관에서는 새벽에 일찍 나가면 되고 말과 식료품은 새벽시장에서 구입하면 되니까. “그렇지. 편지를 써야지.” 서랍에서 종이와 펜을 꺼낸 나는 이 집사람들 앞으로 편지를 썼다. 대략 갑자기 여행을 떠나게 됐으니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벡터 아저씨에서부터 잡일을 거드는 종업원들에게까지 편지를 쓴 나는 마지막으로 제미니의 편지를 끝으로 펜을 놓았다. 으아!~ 손가락 아프다. 오랜만에 펜을 쥐어서 그런가? 바닥에는 실패한 종이들이 뭉치들이 뒹굴고 있고 창 밖에는 어느새 달이 떠올라 있었다. 대략 시간이….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보았다. 11시쯤인가? 슬슬 다들 잠자리에 들 시간이로군. 나도 좀 쉴까? 시계를 챙겨 넣은 나는 침대로 걸어가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아아, 한동안 침대도 안녕이로군. 슬픈데.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처음엔 잠결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들려왔기에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누구세요?” “나야. 문 열어.” 헉! 헛바람이 절로 쉬어졌다. 제미니다?! 이 밤중에 왜!? “빨리 안 열면 열고 들어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열쇠고리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 머리를 풀고 한 손에 촛대를 든 제미니는 잠옷을 입은 채로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촛대를 들고 방안에 있는 촛대에 다시 불을 붙이다가 내가 써 놓은 편지를 발견했다. 악! 그건! “그, 그건 안돼!” “안되긴 뭐가 안돼? 어머, 나한테 쓴 것도 있네.” 그러더니 그것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근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왔고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뭐라고 읽는 거야?” 그녀는 편지에서 어떤 단어를 가르켰다. 어렸을 때부터 부엌에서 일을 거들었기 때문에 글을 몰랐던 그녀는 2년 전부터 내가 틈틈이 가르쳐줘서 웬만한 글은 무난하게 읽고 쓸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완전치는 않아서 간혹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물어오곤 했다. 하지만 하필 이럴 때…! 글을 가르쳐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절망하고 있는데 그녀가 재차 질문을 해왔고 난 눈 딱 감고 그녀가 모르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건 이별이라고 읽는 거야.” “으응, 그렇구나. 음, 이별이라구.” 가슴 찌르는 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마침내 편지를 다 읽고는 편지를 수납장 위에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떠난다고? 2년에서 3년 정도 있다가 돌아온다고?” “어, 응. 그렇게 됐어. 미안해.”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하! 제기, 노예를 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따져 물으려고 온 건데 황당한 말을 들어버렸네.” 역시! 알고 있었구나! 다 들켰다는 사실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있는데 내 장비들을 만지작대던 제미니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돌아오기는 오는 거야?” “으, 응. 일단은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리고 너도….” “시끄러워. 망할 자식아, 제기, 미리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 우리가 너한테 그 정도 밖에 안됐어? 이런 식으로 배신당하다니 정말 실망이야. 이 나쁜 놈.” 가슴이 뜨끔거린다. 아세트 와는 다르게 그녀는 담담하게 나를 질타했다. 어쩌면 이게 가장 제미니 다운 것일 지도 모른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겨우 입을 열고 그녀에게 잘못을 빌었다. “미안해.” “닥쳐.” 물론 간단히 무시당했지만. 그녀는 낮게 말했다. “이렇게는 못 보내. 손가락 하나 잘라 놓고 가.” 그녀는 내 장비에서 꺼낸 나이프를 앞으로 내밀었다. 칼 쓰는 법으로 따지면 그녀는 나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식은땀과 침을 꿀꺽 삼키며 난 뒤로 물러섰다. “노, 농담이지?” “아니, 진담이야. 키스도 한번 안해주는 몹쓸자식, 손가락이라도 하나 잘라내야지 맘에 편할 것 같아.” 으윽! 한번도 그럴 기회를 안 줬으면서! “아, 그전에 하나 붙자. 아까 네가 어떤 여자랑 여관으로 들어갔다는 걸 본 사람이 있어. 노예시장에서 산 여자겠지? 희망과 절망의 신 델린저의 이름을 걸고 솔직히 말해. 잤어?” 여기서 잤다고 말하면 그녀는 진짜 내 손을 자를 꺼다. 난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아, 아냐! 안 잤어! 정말이야! 난 억울하다구!” “정말이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도 좋아.” 그러자 제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칼은 치우지 않았다. “좋아. 그럼 손가락 대신 다른걸 받을 게. 벗어.” “…뭐?” “안들려? 벗으라고.” “그러니까 옷을?” “장난해? 내가 찢어 발겨줄까?” 그녀는 진담을 하고 있었다. 난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벗었다. 상처투성이의 23살 청년의 가슴이 드러났다. 제미니는 촛불에 비친 내 몸을 뚫어져라 보더니 위험하게도 침을 꿀꺽 삼키며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황당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바, 바지도 벗어.” “제미니! 뭐 하자는 거야!” “시끄러워! 나쁜 놈아! 매일 밤 방문을 열고 자는 처녀의 마음을 네가 알아? 벗으라면 벗어!” 하지만 난 내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야했다.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 난 그녀에게 칼을 뺏기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제미니는 칼로 나를 위협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 스르륵, 커다란 셔츠 같은 옷이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히익?! 깜짝 놀란 나는 뒤로 물러섰다. 나체의 제미니는 가슴과 아래를 가린 모습으로 얼굴을 벌겋게 만들더니 신경질을 부렸다. “뭐해! 빨리 안아 줘! 부끄럽단 말야!” “어?! 으, 응!” 난 얼른 달려가 그녀의 몸을 안아주었다. 그리고 내 바보스러움을 저주했다. “제, 제미니이?!” 제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가슴에 안겨들고 있었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머리가 혼란스럽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 줘. 너라면, 날 맡겨도 좋아.” 그러면서 키스를 해오는 그녀였다. 혀와 혀가 뒤엉키고 뜨거운 숨결이 쏟아지는데 제정신을 유지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건 사내가 아닐거다. “후우….” 매케하지만 따스한 담배연기가 방안을 가득 매웠다. 제미니는 침대에 앉아 담뱃대를 입고 물고 있다가 그것을 누워있는 나에게 내밀었다. “줄까?” “…나쁜 계집애, 그렇게 억지로 하는 게 어딨어.” “자기도 좋아한 주제에 앙탈은.” 곱게 날 흘기던 그녀는 담배를 다 피우고 그것을 침대 바닥에 그냥 던져버렸다. 불티가 번졌다. “그러다 불나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불은 이쪽에서 먼저 날거니까. 한번 더 하자.” 제미니는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옆자리에 눕더니 담요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윽?! “제, 제미니이?” “여왕님이라고 불러라. 노예야.” 신이여! 살려주세요! 제미니는 아침이 올 때까지 날 괴롭히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덕분에 난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다. 한숨도 못 잤어. 젠장, 이런 식으로 순정을 빼앗기게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좋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인 것 같다. 옷을 주워 입고 장비를 챙기고 배낭을 꺼내 문을 나서려는데 제미니가 핏자국이 여기저기 뭍은 담요로 몸을 가리고 일어나 앉았다. “가는 거야?” “응.” “꼭 돌아와 해?” “응.” “기다릴 거야.” “안돼. 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이야. 한 5년 기다려도 안 오면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 “처녀의 순결을 빼앗아 놓고는 그런 소릴 하다니. 웃기네. 그리고 나 같은 여자 누가 데려간다고 그래? 너라도 있으니 그나마 한 시름 놓았지. 생과부 만들고 싶지 않으면 꼭 돌아와.” 젠장. 난 잡혀 버린게야. 몸을 돌린 나는 떠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한참 후 입술을 떼어내자 진득한 타액이 그녀와 내 혀를 잊고 있었다. 눈이 풀려버린 제미니가 내 팔을 잡았다. “…한번만 더 하고 가면 안될까?” “나 옷 입었어. 그리고 이제 그만….” “으으응~. 한번마안…!” 일찍 떠나려고 했던 나는 처음 들어본 제미니의 콧소리에 20살의 혈기를 억누를 수가 없어서 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참 후 비틀거리며 여관에서 나온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침 공기를 들이쉬었다. 하아, 너무 늦었어. 이래서야 야밤도주가 아니잖아? 그만 대로를 따라 스피릿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창가에서 누가 날 불렀다. 제미니였다. “젊은 날의 외도 정도는 용서해줄게. 대신 날 생과부로 늙게 만들지만마.” “그냥 날 잊어 줘.” “자꾸 그따위 소리하면 콱 임신해 버릴거다? 참, 네가 무슨 생각으로 노예를 샀는지 모르지만, 돌아올 때는 그 여자노예 정리하고 와. 난 삼각관계 같은 거 아주 싫어해.” “이, 이봐.” “그럼 네 이야기는 내가 대충 둘러댈게. 돌아올 때 선물 잊지마.” 그녀의 말빨에 밀려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린 나는 결국 손을 좀 흔들어주고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또 그녀가 불렀다. “아참, 콜트.” “왜에 또.” 창가에 기댄 제미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봐.” “사, 사람들이 들어어.” “아무도 없잖아?” 좀 머뭇대던 나는 결국 커다랗게 사랑한다고 고함을 질러준 다음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 버렸다. 흐윽! 나 요새 왜 이렇게 된거야?! 젠장! 대로를 달려가며 운명의 신을 저주하던 나는 얼마가지 않아 스피릿을 맡겨(?) 놓은 여관에 도착했다. 그때쯤 슬슬 사람들이 밖으로 나다니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홀에는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이 도시락이나 식사를 주문하기 위해 많이 앉아있었다. 식당에서 바쁘게 아침 준비를 하는 여관주인장에게 인사를 건낸 나는 곧바로 그녀가 있는 방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나야! 문열어.” 잠시 후 뭔가 구르는 소리가 나더니 짤깍하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난 조금 놀라고 말았다. 헤어진 지 겨우 하루 지났는데 스피릿은 상당히 초취해져 있었다. 게다가 날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더니 와락 안겨드는 것이 아닌가? 애가 왜 이러지? “아아앙! 엉엉! 버리고 가신 줄 알았어요.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설마? 9천 900만 짜리를? 난 그녀의 머리를 슬슬 쓸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키가 제미니 보다 작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제미니는 키가 커서 거의 나와 대등하니까. 윽,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생각이 나네. 머리를 좀 흔들어서 제미니의 신음소리를 잊으려 애쓰던 나는 볼이 쑥 들어간 그녀를 보다가 물었다. “밥은 먹었어?” 도리도리. 난 인상을 구겼다. “왜?” “누, 누가 끌고 가버리면 어떡해요.” “그래서 어제 저녁부터 쫄쫄 굶었다고?” 스피릿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그녀의 배에서 쪼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하고 전혀 안 어울리는 모습이다. 젠장. 방안에 배낭은 던져 올린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홀로 내려갔다. “뭐 좋아해?” “아, 아무거나.” “주인장! 빵하고 우유 2인분!” 메뉴가 간단하다 보니 음식은 곧바로 나왔다. 스피릿은 잘생긴 청년이 가져다 준 빵과 우유를 단숨에 해치우고 가슴을 두드려댔다. 우유잔을 그녀에게 밀어주고 고개를 돌린 나는 누구든 홀딱 반할만한 아가씨가 단숨에 빵을 삼키는(?) 장면을 보고 충격에 빠져있는 청년에게 음식 더 주문했다. “천천히 먹어.” “으읍...! 예. 예!” 그녀는 손가락을 빨면서 닭요리를 으적으적 씹어댔다. 대체 몇 일을 굶은 거야? 식사를 마치고 알게된 사실인데. 그녀는 대략 3일 정도 굶었다고 했다. “밥 안주디?” “마차를 타고 올 때는 늦었다면서 간수들도 식사를 거르고 달려왔어요. 그리고 시청에 있을 때는 처음 온 곳이라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먹었구요.” “넌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못 살겠구나?” 스피릿은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한가보지? 뭐, 옛말에도 노예는 치료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냥 죽는다고 하니까. 반은 내 책임일까? 주인장에게 도시락을 부탁한 나는 방으로 올라갔다. 스피릿은 어미 뒤를 따르는 오리 새끼 마냥 내 뒤를 졸졸 따랐다. 밤새도록 제미니에게 시달린 나는 눈을 좀 부치기 위해 침대로 몸을 날렸다가 한가지 몹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1인 실이라 침대가 하나뿐이라는 거고, 스피릿이 어제부터 초조하게 날 기다리느라 잠도 제대로 못잤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 배가 빵빵해지니 잠이 쏟아진다는 듯이 스피릿의 눈꺼풀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졸립단 말야. 결국 나는 한가지 묘안을 짜내야 했다. “여기 누워.” “예? 아, 아뇨. 전 괜찮아요. 주인님도 피곤하신 것 같은데 어서 쉬세요.” “꼴깝 떨지 말고 누워.” “히잉~! 예에에.” 스피릿은 침대와 관련된 말이라면 먼저 몸을 움츠리고 본다. 하지만 말야. 지금의 난 그쪽방면으로 전혀 힘을 쓸 수가 없거든? 난 자리를 손바닥으로 나누며 말했다. “자, 여기가 선이다. 넌 거기서, 난 여기서 자는 거야. 노예고 나발이고 여자를 바닥에서 재우라고는 안 배웠다.” 스피릿은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보기 좋은걸? 난 별말하지 않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스피릿도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새우잠을 자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창가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꽤 골아 떨어졌었나 보다.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보니 벌써 오후 1시다. 이런, 오늘은 천상 노숙해야 겠는걸? 스피릿을 깨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세면장으로 내려가서 좀 씻겼다. 나도 옆에서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홀로 나갔다. 시원한 냉수를 마신 나는 그녀에게도 얼음이 든 잔을 내밀었다. 그것을 들이킨 스피릿은 머리가 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홀에 점심을 먹기위해 들어왔던 사람들은 스피릿의 모습을 보고 입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야. 미인인데? 우리 도시에 저런 아가씨가 있었나?” “어, 정말 그런걸? 보기 드문 미인이야. 횡재했는걸?”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군.” 뭐, 이런 식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스피릿은 내 뒤에 숨거나 나에게 바싹 달라붙어서 걸었다. 어지간히 겁이 많은가보다. 노예들은 다 이러나? 마저 점심을 먹고 여관을 나선 우리는 마시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주변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야.” “예.” “어쩔거야? 네가 너무 예쁘니까 다들 쳐다보잖아?” “죄, 죄송합니다.” 스피릿은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 인양 고개를 숙였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잖아. 그녀에게 농담이라고 말해준 나는 사과의 표시로 그녀를 옷 집으로 데리고 가서 치마대신에 여행복을 몇 벌 사 입혔다.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 뭘 입혀도 잘 어울린다. 눈도 즐겁고. 치마대신에 검은색 바지와 하얀 브라우스, 그리고 검정색 조끼를 사서 입힌 나는 여벌의 옷이 든 가방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선물이다. 아, 그리고 그 머리카락은 이걸로 묶어라. 말 타고 달리면 헝클어질꺼야.” 난 검은색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내 주었다. 스피릿은 정중하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나에게서 그것들을 받고는 당장 그 자리에서 머리를 묶어 올렸다. 머리를 뒤로 묶으니 인상이 확 바뀌는데? “잘 어울려. 시집가면 사랑 받고 살겠다.” “아, 가, 감사합니다.” 난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다시 마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탈 것이기 때문에 웃돈을 좀더 얹더라도 크고 힘이 좋은 녀석을 골라야한다. 하지만 너무 크면 또 안된다. 그런 녀석들은 자기 무게 때문에 장거리나 속도 전에서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스피릿을 배낭 위에 앉혀놓고 한참동안 상인과 씨름한 끝에 이마에 하얀 십자무뉘가 박혀있는 녀석을 살수 있었다. 초원의 나라 캐슬린에서 직수입한 녀석으로 튼튼하고 긴 다리와 탄탄한 몸매를 가진 녀석이다. 아아, 자꾸 제미니의 몸매가 생각나는 건 뭘까? 더불어 탠덤이 가능한 안장을 구입한 나는 그 자리에서 말에 안장과 짐을 올리고 말에 올랐다. 그리고 부드러운 눈길로 말의 볼을 쓰다듬던 스피릿을 불러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9천 900만 루나를 네게서 뽑아내고 말겠다. 각오해 두는 게 좋아.”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고 뒷자리에 올라앉았다. 폼을 보니 많이 타본 솜씨 같은데? 말을 출발시킨 나는 시장으로 들어가 식료품을 좀 구입한 다음 그대로 성문을 나서버렸다. 하늘의 잠자리는 높았고 덩달아 구름은 달콤하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Running Fire: 04 “어떻게 노예인줄 알았수?” “아~! 아아, 안돼요. 이, 이러시지 마세… 아아!” 스피릿이 신음을 흘리며 몸부림을 쳤다. 난 기가차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모닥불에 장작을 좀 던져 넣은 다음 말했다. “잠꼬대 한번 요란하네.” 그렇게 말하며 검집을 들어 내 머리를 후려갈겼다. 번쩍하면서 별이 보이고 더 이상 스피릿의 신음이 제미니의 신음과 겹쳐서 들리는 일은 없었다. 불에 구운 도마뱀을 으적으적 씹으며 지도를 펼친 나는 날짜를 계산했다. 세이라 씨가 말했던 샤먼까지는 입실론에서 대략 사흘 거리. 도중에 마을은 없으니까 앞으로 이틀은 더 노숙을 해야한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나올 몬스터의 종류는…. 으음, 왠만한건 거의 다 나오는 군. 그만두자. 내가 지도를 집어넣고 있는데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악!” “미안해. 혼자 먹어서, 구운 도마뱀 좋아해?” 식은땀을 흘리던 스피릿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더니 곧바로 고개를 숙여댔다. 재미있는 반응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악몽 꿨어?” “아, 예. 항상 같은 꿈을 꿔요.” “무슨 꿈인데? 턱수염이 가득 난 지저분한 남자들이 홀딱 벗고 쫓아오는 꿈?” 그러자 스피릿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도 그런 표정 지을 줄 아는구나?” “…죄송합니다.” “치워, 그런 식으로 고개 꾸벅이는 거. 노예면 어때?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라고 말하라구. 난 그런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좀 머뭇대던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수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소개를 못했구나. 나는 콜트 슈발츠, 23살이고 목숨 값으로 살아가는 모험가야.” “아, 저는 스피릿 애쉬드 라고 합니다. 나이는 21살이구요.” “21살? 오빠라고 불러 볼래?” “오, 오…빠.” 하,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데? 스피릿은 두 손으로 수통을 붙잡고 물을 마신 다음 수통을 내게 건냈다. 뚜껑을 닫고 수통을 배낭에 던져놓은 나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스피릿은 어쩌다가 노예가 됐어?” “그, 그건 저….” 좀 머뭇대던 그녀는 더듬더듬 자신의 과거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캐슬린 에 있는 한 귀족의 딸이었는데. 어느 날 반역자의 누명에 부모님은 사형 당하고 자신들은 국외로 추방당하여 노예로 팔려졌다는 것이다. 그럼 외국인인가? “꽤 고생했겠구나?” “예, 예….” 스피릿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더 묻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질문을 그만두고 일찍 자라고 이야기 해줬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는커녕 뭔가 할말이 있는지 우물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난 작대기로 불을 쑤시며 말했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난 간수가 아니라 네 주인이야. 바라는 게 있으면 말을 해야 들어준 다구?” “저, 저… 화, 화장실 가고 싶은데요.” “가.” 그러자 그녀는 당장 울상을 지었다. 불가에서 멀어지면 뭐와 마주칠지 모르는 이런 노지에서의 야영을 처음 하는 사람이라면 좀 겁이 나겠지. 그만 놀리고 슬슬 따라가 주려고 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좀 따라 가주세요. 주인님. 무섭단 말예요.” 으윽! 애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녀가 잡아끄는 통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근처 숲 풀 앞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보, 보시면 안돼요.” “알았어.” 난 돌아서서 팔짱을 하고 기다렸다. “주, 주인님 거기 계세요?” 귀여워라. 돌아간 줄 아나봐? “응. 아직 있어. 걱정마지 말고 마저 일봐.” 난 속으로 낄낄 웃어댔지만 한편으로는 좀 충격이었다. 잘만 꾸며놓으면 이웃나라 공주님이라고 해도 믿어줄 정도로 단아하고 아름다운 용모인데. 하는 짓은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으니, 하지만 그래서 더 귀여운 맛이 있는 게 아닐까? “꺄아아악! 주인님!” 조건 반사적으로 고개가 먼저 돌아가고 몸을 돌아갔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라가 자동석궁을 뽑아들었다. 숲에서는 뛰어나온 히끄무레한 것은 뛰어나오다 말고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스피릿! 무슨 일이야?!” “괴, 괴물이! 괴물이이!” 숲 속으로 달려들어간 나는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저 앞에서 뭔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달려오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크르르….” “퀘! 퀘에!” “크응! 킁!” “크~! 인간!” 오크다! 난 석궁을 들고 외쳤다. “더러운 오크 새끼들! 꺼져!” “퀘! 너야말로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져라! 죽여버리기 전에! 퀘!” “크응! 그 엉덩이가 예쁜 계집애는 놔두고 가라. 볼일이 있거든?” 난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새끼들이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이 계집애는 내 거다! 가져가려면 덤벼!” “퀘! 좋다! 죽여라!” 놈들이 글레이브와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 난 녀석들이 더 가까이 오기 전에 자동석궁의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무차별로 갈겨댔다. 투투투투퉁! 투퉁! “퀘엑! 화살을 쏜다!” “피해라!” “이 놈들아! 어딜 도망가!?” 검을 뽑아든 나는 뛰어나가서 달아나는 녀석들의 등에 칼질을 해대고 콰렐을 박아 넣었다. 놈들은 싸움을 못하는 녀석들만 골라서 나왔는지 혼자서도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쓰러진 오크들의 숫자를 확인하던 나는 갑자기 스피릿이 걱정되어 서둘러 그녀가 넘어졌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까 변태오크가 했던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스피릿의 엉덩이는 뽀얗고 동글동글한게 상당히 예뻤다. 제미니 보다 좀 작은 게 흠이지만, 윽! 무슨 망말이냐. 겁에 질릴 데로 질려서는 바지 올리지도 못하고 엎드려있는 스피릿을 불쌍하게 여긴 나는 헛기침을 좀 하며 말했다. “스피릿? 괜찮아?” “어, 훌쩍. 주, 주인님?” “아까 녀석들 쫓아버렸어. 걱정하지말고 바지나 좀 올려. 상당히 예쁘긴 한데 그런 건 아무한테나 보여주는 게 아냐.” “아앙! 무서웠어요! 흐윽!”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바지를 올릴 생각도 하지 않고 나에게 매달려 엉엉 울어댔다. 아~ 정말. 이 아가씨 너무 겁이 많은 것 같아. 결국 그날 밤 스피릿은 내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행여 놈들이 또 습격해올지 몰랐기에 난 신경을 바짝 세우고 경계를 하며 간간이 꾸벅꾸벅 졸았다. 이렇게 라도 해야지 안 그럼 내일 움직이는데 지장이 많아진다. “아하암!”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잘 잤어?” 남은 불씨를 살려서 프라이팬을 올리고 간단한 아침을 만들고 있던 스피릿은 대답대신 빙그레 웃어주었다. 신기한 게 날이 갈수록 표정이 많아지는 것 같다. “요리도 할 줄 알아?” “예. 쉬운 거 몇 가지뿐이지만.” 팬 케익과 포크를 올린 접시를 내미는 그녀를 바라보며 난 좀 묘한 기분을 느껴버렸다. 이거, 상당히 편리한걸? 얼굴도 예쁘고 요리도 잘하고 말야. “기특해라. 뽀뽀해줄까?” “아, 아뇨… 저기….” 당황한 스피릿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난 깔깔 웃어버렸다. 스피릿은 볼을 부풀리며 날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팬 케익을 계속 굽기 시작했다. 토라졌나? 귀여워라~ 별걸 다 할 줄 아네? 빙글빙글 웃으며 아침을 먹은 나는 마지막 팬 케엑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숲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스피릿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뒤를 따랐다. “그냥 여기 있어도 괜찮는데.” “하, 하지만 혼자 있으면 무서운 걸요.” 좋을 대로하라고 하며 어제 밤에 쓰러뜨렸던 오크 놈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 나는 쓰러진 녀석들의 소지품을 뒤졌다. 돈도 꽤 나오고 여행자들에게 빼앗은 물건인지 나이프도 멋진게 몇 개 나왔다. “우엑~! 오엑오에엑!” 찌뿌린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이 바닥에 주저앉아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하긴. 내장이 다 터져 나와있는데 보기 좋은 꼴은 아니지. “이봐, 아가씨. 그러지 말고 근처에 이 녀석들 짐 같은 거 없나 한번 찾아봐.” “우윽~! 예에에!”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스피릿은 얼른 달려가 버렸다. 조금 한심한 기분을 느끼며 놈들의 시체에서 건질 만한 건 다 건지고 있는데 스피릿이 날 불렀다. “주인님! 여기 짐이 가득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정말로 배낭 같은 것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여행중인 녀석들이었나? 나는 그 자리에서 배낭을 열어 내용물을 쏟아냈다. 넝마 조각 같은 옷가지들과 썩은 고기 덩어리들이 후두둑 쏟아졌다. 나머지 배낭도 마찬가지였다. 쓸만한 건 별로 없어 보이는군. 그만 돌아가려는데 바닥에 쭈그려 앉아 무슨 종이조각을 읽고 있던 스피릿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며 말했다. “주인님! 이거 보세요!” “응?” 난 그녀가 내미는 종이조각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편지였다. 내용은 암호로 적혀져 있어 알아보는데 힘들었지만 그 아래에 찍혀있는 도장만은 선명했다. 난 당장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오크들의 짐 더미에 뿌려버렸다. 스피릿이 물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그랜퍼스 왕실의 문장이야. 이 놈들이 편지를 운반할 일은 없고 다른 누군가가 가지고 가던걸 훔쳤거나했겠지.” “그, 그럼 원래대로 돌려줘야죠.” 난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는 그녀의 부드러운 회색 머리를 슥슥 매만져 주었다. “왕실의 문장이 박힌 문서는 함부로 다루는 게 아냐. 비밀 누설이 어쩌고 하면서 죽을 때까지 감방에 가둬두는 경우도 있다구. 그만 가자. 건질 건 다 건졌으니까.” 스피릿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따랐다. 짐을 챙겨 말에 오른 우리들은 이틀을 달려 늦은 저녁 무렵 국경도시 샤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인님 배고파요.” “좀 참아봐. 나도 배고프고 이 녀석도 배고프다구. 마을에 가면 맛있는 거 많이 사줄테니까.” “예에.”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내 등에 달라붙어서 얼굴을 비벼댔다. 사흘동안의 노숙으로 그녀는 이제 말도 더듬지 않고 할말이 있으면 당당하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둘만 있을 때 그렇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그녀는 또 입을 꾹 다물고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 도중에 상단을 만나 하룻밤 신세졌을 때도 그랬다. 슬슬 말이 트여서 재잘재잘 말도 잘하고 노래도 곧잘 불러주고 하던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내 옆에 바싹 붙어 있기만 했다. 뭐,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늦은 시각 성문을 지나 도시로 들어간 우리는 일단 잠자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샤먼은 그리드와의 국경에 위치하여 국경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상단과 보따리상의 주머니 돈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여관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덩달아 일거리도 많겠지. “저기 가자.” “저, 저긴 너무 큰걸요? 비쌀텐데.” “괜찮아. 요전에 오크들이 가지고 있던 돈이 꽤 짭짤했거든? 가자. 맛난 거 사줄게.” 난 말을 몰아 5층짜리 여관으로 향했다. 그러자 호객꾼이 당장 달려들었다. “모험가님! 모험가님!? 다른데 가지 마시고 저희 여관으로 오십쇼. 서비스 기가 막히게 해드립니다!” “어떤 서비스를 해주는데?” “예. 룸서비스 시키시면 아가씨가 공짜구요. 맥주도 세 잔 마시면 한잔 공짜로 드립니다. 일주일이상 장기 투숙하시면 방 값 할인혜택도 드리구요.” “스피릿, 룸서비스 시켜먹을까?” 그러자 스피릿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난 낄낄 웃으며 먼저 말에서 내린 다음 스피릿의 허리를 잡아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러자 호객꾼이 감탄했다. “이야. 노예가 굉장한 미인이군요. 회색머리라니? 즐거우시겠습니다?” 겁을 먹은 스피릿이 내 뒤로 숨었다. 난 말 고삐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어떻게 노예인줄 알았수?” 그러자 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노예는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약간 겁먹은 눈이나 허둥대는 몸놀림은 금방 티가 나게 마련이거든요. 조심하십쇼. 손님. 이 마을은 꽤 거칠어 놔서 저런 미인노예라면 잡배들이 많이 꼬일 겁니다.”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싸움이 생기면 송장이나 잘 치워주쇼. 아, 하룻밤 묵을 거니까. 짐은 방으로 옮겨주고 저 녀석 여물도 좀 신경 써줘요.” 10만 루나짜리 은화를 던져주자 그는 당장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더니 무슨 구호를 여관 안으로 외쳤다. 그러자 젊은 사내가 달려나오더니 우리 짐을 들고 가버렸다. 스피릿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좀 쳐다본 다음 홀로 들어갔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험상 굳은 사내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앉아서 음식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스피릿은 내 뒤에 숨어서 졸졸 따라왔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빈자리에 앉은 나는 저녁을 주문했다. “스테이크 곱빼기. 야채 드레싱 2인분하고. 스피릿? 술 마실 줄 알아?” “예. 조금.” “그럼 맥주하고 와인 한잔씩 추가. 더 먹고 싶은 건?” “그 정도만 해도 배부를 것 같아요.” 점원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맥주와 와인을 먼저 가지고 나와 우리 앞에 놓아주었다. 맥주를 마시며 좀 더 기다리자 음식이 나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다란 스테이크와 야채 드레싱.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한창 칼질을 하고 있는데 스피릿이 말했다. “이, 이거 다 못 먹겠는데요?” “먹고 남겨, 내가 먹어 줄테니까.” 고기를 입안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린 스피릿은 능숙하고 조심스럽게 칼질을 하더니 고기를 조금씩 떼어내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먹다간 하루종일 걸리겠다. 나는 주방장이 좋아하는 손님의 올바른 식사매너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그 커다란 스테이크를 단 3번의 칼질로 끝장내버리고 포크를 야채 드레싱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피릿은 우아함 동작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써가며 스테이크를 조금씩 자르고 드레싱을 야금야금 씹어댔다. 허허, 참. 전직 귀족처녀 아니랄까봐. 예쁘게도 먹네. 그녀가 채 반도 먹기 전에 음식을 쓸어버린 나는 맥주를 마시며 그녀가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칼질과 포크의 놀림이 정말 기가 막히다. 그때 내 시선을 의식한 스피릿이 고기를 큼직하게 썰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드실레요?” “합.” 음, 맛있는걸? 스피릿은 내 모습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씩 웃어주었다. 그렇게 내 평생 가장 행복한 저녁을 먹고 있는 도중, 난데없이 방해꾼이 나타났다. 오호라, 마침 한 건 하려고 했었는데 잘됐다. “실례 좀 합시다. 휘이~! 예쁜데? 어이, 아가씨 손 좀 볼까?” “꺄악!” 지저분한 머리의 사내는 다짜고짜 스피릿의 손을 잡아 올렸다. 스피릿은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난 포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외쳤다. “이것 봐! 노예야! 내가 이겼지?” 콰앙! “우왁?!” 사내는 턱이 돌아가 바닥으로 굴러버렸다. 주먹을 내린 나는 포크로 녀석을 가르키며 말했다. 겨우 풀려난 스피릿은 얼른 내 뒤로 숨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거 몰라?” “헤, 헤헤. 형씨. 주먹 좀 쓰는데?” 남자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 다리가 풀려 쓰러지고 말았다. 낄낄거리며 야유를 보내던 사내들은 자기네 친구가 바닥에 쓰러져서 토악질을 해대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피릿은 내 어깨를 꽉 부여잡고 울상을 지었다. “어, 어떡해요. 어떡해요오.” “나만 콱 믿어. 어차피 이름 날리려면 한번쯤 일을 벌려야했으니까.” 난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일부러 머리를 세게 때렸어. 뇌진탕 기운이 있을걸? 그러게 주인 있는 노예에게는 찝적대는게 아냐.” 대 여섯명의 사내들이 험악한 말을 쏟아내며 주먹을 쥐고 나에게 다가왔다. “이런 망할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까부는 거야?” “오늘 그 계집애를 엉망으로 만들어주지. 각오해.” “말로만 하지말고 어서 덤벼.” 그때였다. “그만들 하세요. 시끄럽잖아요!” “이건 또 뭐야?”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고개를 돌리니 웬 빨간머리 아가씨가 음식을 먹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수저를 들고 사내들을 가르키며 말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동업자인 것 같은데? “당신들만 여기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좀 닥치라구요!” “뭐야?! 이 년이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오냐! 이 지저분한 것들아. 한번 해보자.” 그녀는 허리에 매고 있던 채찍을 꺼냈다. 사내들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채찍은 다루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능숙한 사람에게는 막강한 전력이 되는 무기다. 길이도 자유자재로 늘어날 뿐 아니라 그 파괴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잘못 맞으면 즉사니까. 게다가 그녀의 뒤에서서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는 저 남자도 한가락 할 것 같은 인상이다.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서 그런지 점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물건을 부수면 변상시키겠다는 말과 함께 나가서 싸우라는 말로 우리들을 회유했다. “따라나와.” 붉은 머리 아가씨가 먼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내 밥그릇을 뺏어가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던 나는 제발 참으라고 매달리는 스피릿을 끌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노상에 선 우리들은 싸움 전의 의식으로 정겨운 욕설을 주고받았다. “이런 미친 년,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닥쳐. 지저분한 것들. 면도나 좀 하고 다녀라.” “지면 넌 저 노예 년이랑 같이 우리랑 밤을 지새우는 거야. 어때?” 난 웃기지 말라고 말해주려 했지만 빨간머리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좋아. 맘대로 해.” 그렇게 말하며 날 쳐다보는 그녀였다. 난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며 말했다. “하지만 스피릿은 절대로 못 줘. 데려가려면 날 죽여라.” “어렵지 않지!” “주인님! 조심하세요!” 문 앞에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스피릿이 외쳤다. 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나이프를 들고 달려오는 녀석에게 날아들어 그 머리를 붙잡고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으득!! 코뼈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옆에서는 빨간머리와 그의 동료인 것 같은 남자가 덩치 큰 사내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이대로 넘겨 줄 수는 없어! 이를 악문 나는 내 모든 능력을 펼쳐 보이며 뒷골목 건달패 수준에 지나지 않은 친구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폴 아저씨에게 배운 기본기와 뒷골목을 싸움으로 전전하며 쌓은 실전 변칙기술들이 빛을 발했다. 무릎과 팔꿈치를 이용한 격투기로 3명의 사내를 거꾸러뜨린 나는 피가 섞인 침을 탁 뱉으며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기 한 대 맞았어. “뭐야? 너도 붙을래?” 두 주먹에 멋진 너클을 낀 사내는 대답대신 고개를 돌려 도망가는 사내의 다리를 채찍으로 휘감아 넘어뜨리는 빨간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를 쳐다본 나는 빨간머리에게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씁! 뭐야? 당신들은! 왜 남의 싸움에 흙발로 들어와?!” “어머나? 우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당신도 꽤 상처를 입었을 텐데? 지금도 봐요. 한 대 맞았으면서.” “웃기지마! 당신들 때문에 급하게 싸워서 그런 것 뿐이야!” “헤에?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한번 해보자는 거지?” 내가 악다구니를 쓰며 앞으로 걸어가자 그 남자가 나를 가로막았다. 탄탄한 체형에 상당한 전투훈련을 받은 자다. 제기랄! 그래서?! 난 실전으로 다져진 몸이야! 난 강철 건틀린을 낀 주먹을 들고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꺄악?!” “스피릿!” “이, 이런 망할 새끼들! 내 친구들을 어떻게 한 거야? 가만 안 둔다!” 문 앞에 서있던 스피릿을 덥썩 껴안은 녀석은 나이프를 그녀의 목에 대며 외쳤다. 난 두말하지 않고 등에 매고 있던 자동석궁을 뽑았다. 철컥! 찰칵!? 접혀져 있던 활대가 펴지며 자동으로 콰렐을 장전했다. 옆에 서있던 남자도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팔을 뒤로 당겼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바짝 긴장했다. 퍼석?! 갑자기 여관 안에서 왠 남자가 걸어나오더니 술병으로 사내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녀석은 그대로 쓰러졌고 스피릿은 얼른 그에게서 떨어져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부서진 병의 주둥이를 잡고 선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거 변상하셔야 합니다.” 여관 앞에서 호객을 하던 남자였다. 한숨을 내쉰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문 밖에 굴러다니는 시체(?)들의 처리를 위해 100만 루나짜리 금화를 쥐어주었다. 사내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았다. “이건 너무 많은데요?” “일종의 사례금이라고 생각하쇼. 우리 아가씨 구해줬잖아.” 그러자 사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피릿을 데리고 자리로 가서 앉은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괜찮아?” “아. 예, 좀 놀랬지만 괜찮아요. 앗? 주인님 입에 피가 나요.” “엉? 아, 쓰읍! 아까 한 대 맞아서 그런가?” “어디봐요.” 스피릿은 주머니에서 검은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것으로 내 입가를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이거, 위험한데. 너무 예뻐 보이잖아? “어머, 보기 좋아라.” “쓰~ 뭐요?” 고개를 돌리니 빨간머리 여자가 씩 웃으며 맥주 잔을 들어 보였다. 아까 그 남자도 함께였다. “보아하니 동업자 같은데. 합석해도 되죠?” “안돼요.” “고마워요.” 빨간머리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거 봐! 안된다고 했잖아! “…당신. 상당한 고단수 인데?” “칭찬 고마워요. 오!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미인인데? 아가씨 몇 살?” “…….” 내 입가에 뭍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던 스피릿은 처음 보는 상대가 말을 걸어오자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얼른 내 옆자리로 와서 바싹 붙어 앉았다. 빨간머리는 그것을 보고 단번에 그녀의 정체를 파악했다. “아항~ 노예구만?” 나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우리 애는 부끄럼을 잘 타니까 계속 말 걸지 마쇼.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뭐요?” “아니, 뭐. 그냥 잘 지내보자는 거죠.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랄까?” 머리가 뜨거워진다. 이 바닥에서는 경쟁자에게 조금이라도 밑 보이면 일하기가 힘들어진다. 때문에 자기 밥그릇은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거다. “지랄하네. 이 동네 커뮤니케이션은 밥그릇 뺏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당신도 모험가라면 알고 있겠지? 모험가는 이름과 실력이 증명 되야 일거리가 잘 들어온다는 거. 남이 기껏 여론을 조성해놨더니 끼어 들어서 뭘 어쩌자는 거야?” 빨간 머리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갑자기 눈매가 달라졌다. “솔직히 말하면 경쟁자 죽이기랄까? 일거리는 많지만 덩달아 어중이떠중이들도 많지. 실력 없는 것들에게 일거리를 뺏기기는 싫었어.” 염병할, 난 욕설을 퍼부어 주는 대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여기 모험가 길드 소속이야?” “응. 오늘 등록했어.” “그래? 그럼 앞으로 자주 보겠군. 누가 진짜 실력 있는 모험가인지 한번 해보자구. 스피릿? 가자.” “예에!” 난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여자가 불렀다. “나는 첼시아 발렌타인. 당신은?” “콜트 슈발츠다.” 고개를 끄덕인 첼시아는 고양이처럼 웃으며 부디 악몽을 꾸라고 말했다. 난 그녀에게 웃기지 말라는 듯이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준 다음 방으로 올라갔다. 점원이 안내해준 방은 도시의 야경이 잘 보이는 …1인실 이었다. “어째서야?” “예? 저희는 당연히 같은 침대를 쓰실거라 생각했는데요? 따로 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돌린 나는 테라스로 나가서 시원한 밤바람에 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스피릿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됐어. 어차피 하루 묶을 거니까.” “예.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아, 여기 욕탕있어?” “지하에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에게 동전하나 던져주고는 문을 닫고 스피릿을 불렀다. 그녀는 말 잘 듣는 강아지 마냥 쪼르르 달려왔다. “사흘동안 세수만 했었지? 목욕하러가자.” 목욕이란 말을 듣자마자 스피릿이 갑자기 흥분했다. 그녀는 얼른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준비해서는 내 앞에 서더니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씻는걸 굉장히 좋아하나 보네. 그녀가 챙겨준 수건과 속옷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니 멋진 욕탕이 우릴 반겼다. 그래봤자 촛대로 조명을 하고 커다란 통 수십 개가 널려있는 정도였지만 뜨거운 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피릿은 아주 좋아했다. 커다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통 안에 들어가 느긋하게 몸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스피릿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 아앙! 이, 이러지마세요! 안돼요오! 아아! 주, 주인니임!” “뭐야?! 뭐야?! 스피릿!” 수건으로 아래를 가리고 통에서 뛰어 나간 나는 칸막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충격적인 것을 보고 말았다. 스피릿이 들어가 있는 목욕통 안에 또 다른 사람이 들어가 그녀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변태의 얼굴은 익히 본 사람의 것이었다. “너, 너어! 첼시아!” “야아. 스피릿양 가슴이 참 예쁜걸?” 순식간에 분노 폭발이다. “아아앙! 으앙앙앙! 엄마아~!” “울지마. 겨우 가슴 좀 만진 것 같고 뭘 그래?” 침대에 엎드려 엄마를 찾고있던 스피릿이 고개를 들었다. 매우 앙칼진 눈빛이다. “가, 가슴 좀 만진 것 같고 라뇨?! 겨우 가, 훌쩍! 가슴이 아니에요! 나, 난 처녀란 말예요! 하, 한번도 이런 일 없었는데. 나 이제 어떡해요! 시집 못 가요! 으아아앙!” 그러면서 또 담요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대기 시작했다. 거 참, 황당하네. 노예로 팔려왔잖아? 게다가 혈기왕성한 남자가 옆에 앉아있는데 가슴 좀 만진 것 같고 시집 못 간다고 울어대다니. 더 큰일 당하면 죽는다고 난리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차가운 이야기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 “그 변태 계집애는 오빠가 내일 기필코 복수 줄 테니까 이제 그만 울어. 21살이면 알건 다 아는 나이잖아? 동글동글하게 생각하라구.” “훌쩍… 도, 동글동글하게요어? 훌쩍… 에츄!” 재채기를 하며 몸을 떠는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준 나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까 목욕탕에서 홀라당 벗은 첼시아를 차마 건드릴 수 없었던 나는 바닥에 있던 몇 개의 물 양동이 가져다 모조리 그녀들에게 부어버렸다. 양동이에는 뜨거운 물의 온도를 맞추기 위한 찬물이 가득 담겨져 있었고 10월의 찬물은 상당한 치사율을 자랑했다. 다섯 번 정도 찬물을 부어대자 결국 참지 못한 첼시아가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후다닥 달아나 버린 것이다. 오늘밤은 꽤 추울걸? 낄낄낄~! “에츄!” “추워?” 이제야 겨우 울음을 그친 스피릿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느끼하게 말해버렸다. “안아줄까?” “아뇨.” 작은 한숨이 나왔다. 쓰게 웃어준 나는 그만 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바쁠테니까. 일찍 자야지. “난 먼저 잔다. 잘 때 불끄고 자는 거 잊지 말고.” 여분의 배게를 제미니 대신 끌어안고 잠을 청하던 나는 후! 하는 소리와 함께 눈가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기분이 들었다. “스피릿?” “어, 조, 조금만 이렇게 있을 게요.” 스피릿은 추웠는지 내 등에 바싹 달라 붙어왔다. 안기기는 솔직히 무섭다 이거지? 뭐, 상관없나? 나도 그만 눈을 감았고 우리는 그렇게 따스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꼬끼오오오! 꼬고덱!” 새 아침이 밝았다. 여관 근처에 닭을 키우는 집이 있는지 나는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사람은 일단 잠이 들면 본능적으로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등에 붙어 자던 스피릿이 내 가슴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추웠긴 추웠나보지? 예전 같으면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할 수 없어서 이대로 그녀를 덮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제미니에게 특훈(?)을 받은 몸, 이 정도의 유혹은 거뜬하게 참아낼 수 있다. “으으음….” “어, 일어났어?” “예에. 하아암.” 옷을 갈아입으며 그녀가 하품을 하는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이제 소드벨트를 매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소드벨트는 보통의 벨트보다 훨씬 튼튼하고 두껍다. 그래서 따로 매는 법이 있을 정도인데, 대부분은 귀찮아서 그냥 칼을 매단 채로 버클을 채운다. 그런데, 이게 꽤 힘들다. 잘못해서 벨트 버클이라도 떨어뜨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매번 벨트 버클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수전증이냐? 젠장, 또 떨어뜨렸어. 이럴 땐 정말 싫다. 줍기도 그렇고 다시 매기도 그렇고, 팔을 뒤로 돌린 상태로 어떻게 버클을 주우려고 하는데 침대에 앉아있던 스피릿이 쪼르르 달려와서는 그것을 줍더니 말했다. “제가 매어 드릴께요.”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오, 고마워.”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되요.” 스피릿은 베시시 웃으며 소드벨트를 매어주고 건틀릿과 나이프들을 챙겨서 나에게 내밀었다.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뽀뽀해줄까?” “아뇨. 참아주세요.” 기특하게도 드디어 내 농담을 받아넘기기 시작했다. 난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껴안아 주고는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침 먹고 길드에 가볼 건데. 넌 좀더 잘래?” “아뇨! 저도 데려가 주세요.” 스피릿은 서둘러 바지와 브라우스를 갈아입고는 내 뒤를 따라왔다. 문을 잠그고 홀로 내려가자 아침 식사를 위해 사람들이 꽤 많이 나와있었다. 그곳에서 간단하게 빵과 우유로 아침을 해결한 우리는 여관 주인장에게 물어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우와! 예쁘다!” “정말이네.” “혹시 엘프아냐? 그런데 저 옆에 남자는 누구지?” “칼을 차고 있는 걸 보니 호위무사인가? 인상이 꽤 더러운데?” 난 고개를 돌리고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내 인상이 그렇게 더러워?” “아뇨? 주인님 얼굴은 어디 내놔도 90점은 무난하게 받을 수 있어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잘생기셨어요. 미남이시라구요.” “…나머지 10점은 뭐야?” 내가 어눌하게 묻자 그녀는 뭘 그런 걸로 신경 쓰냐는 듯이 대답을 외면하다가 집요하게 답을 요구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주인님은 눈매가 무서워요. 그러니까. 좀 순한 양처럼 보이게 해보세요. 눈에 힘빼시구요.” 힘을 빼라고? 순한 양처럼? “이렇게?” “푸흡!?” 억지로 얼굴 근육을 움직여 순한 양처럼 보이려고 했던 내 노력은 스피릿의 폭소로 헛수고로 돌아갔다. “너, 너어!” “꺄아! 죄송해요!” 스피릿이 두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난 그녀의 겁먹을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려주었다. 움찔하던 스피릿은 살짝 눈을 떠서 날 쳐다보더니 이내 기분 좋은 얼굴로 헤헤 웃으며 내 팔을 두 손으로 붙잡고 매달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귀여운 여동생이 하나 생긴 기분이야.” “예?” “아무것도 아냐. 어서 가자.” 대로와 골목길을 걸어 샤먼의 모험가 길드에 도착한 나는 입실론의 길드와는 사뭇 다른 길드의 분위기에 약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여긴 시장바닥이야? 일을 받기 위해 모험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고 책상에 앉아 서류작업을 하던 남자는 간혹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는 말을 외쳐대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등록은 해야지. 스피릿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책상 앞으로 가서 서류작업중인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모험가 등록하러 왔는데요.” 그러자 사내는 당장 얼굴을 구겼다. 뭐야? 왜 그러는 건데? “신규등록이십니까?” “이적인데.” “어디서 오셨죠?” “입실론.” 갑자기 사내의 얼굴이 확 펴졌다. “혹시 세이라 씨의 추천으로 오신 겁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는 이거 반갑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난 준비해온 면허증과 이적서류를 그에게 내밀었다. 로토라고 했던 사내는 그것을 받아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경력은 얼마 안되지만 실적이 꽤 화려하시군요?” “입실론에는 마법사 길드가 있으니까. 뭐, 그럴 수밖에.” 그렇다. 입실론에는 마법사 길드가 있다. 그 덕분에 내가 붉은 사막까지 날아가서 염병할 개미새끼들의 이빨을 잘라와야 했던거고! 그때 주변의 사내들이 책상 근처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이야, 고것 참 이쁘네?” “이쁜이 남자친구 따라왔어?” “한가하면 오빠랑 놀까?” 여긴 왜 이렇게 느끼한 놈들이 많은거야? 스르릉! 콰득! 허리에서 칼을 뽑은 나는 그것을 바닥에 꼿았다. 돌바닥이 깨지며 날이 깊숙이 박혀 들었다. 로토를 비롯한 사내들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내 노예를 건드리면 너희들 내장을 꺼내서 구이를 해먹을 거다.” “…….” 스피릿은 나에게 바싹 다가와 붙었다. 녀석들에게 으르렁거려 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로토가 바닥에 박혀있는 검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 어떻게?” “마법사 길드에서 달아난 스톤고렘 몇 마리 잡으러 다녀봐. 이런 장비나 기술은 간단하게 익힐 수 있을걸?” 모두는 입을 딱 벌렸다. 시간이 널널한 것도 아니고 이런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던 나는 로토에게 서류나 빨리 끝내 달라고 했다. 로토는 오랜만에 진짜배기가 왔다면서 후다닥 이적 서류를 꾸미더니 나에게 모험가 면허증과 길드원 증명서를 내주었다. “다됐습니다. 이걸로 당신은 샤먼길드 소속이 됐습니다.” “어? 실력평가나 뭐 그런 건 안해?” “아, 그건 신규등록 시에만 하는 겁니다. 콜트씨의 실적증명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 그렇구나.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일은 언제부터 할 수 있는 건데?” “당장도 가능합니다. 골라보시겠습니까?” 로토는 그렇게 말하며 등뒤의 책장에서 두꺼운 장부를 꺼내어 내밀었다. 난 그것을 몇장 넘기다가 귀찮아서 도로 덮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을 불렀다. “하나 골라봐.” “예?” “괜찮으니까. 하나 골라봐.” 스피릿은 머뭇거리면서 장부를 펼치더니 손가락으로 아무거나 하나를 찍었다. 난 그것을 하겠다고 했다. 로토는 두말 않고 그 일에 관련된 서류를 뽑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무르기 없기입니다.”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면 나온 나였지만, “스피리잇! 너 일부러 그런거지?!” “아앙~! 잘못했어요. 주인님.” 길드에서 나온 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서류를 열어본 나는 입을 딱 벌렸다. Running Fire: 05 “주인님은 믿을 수 있으니까.” 접수번호 제 3124호 위험도 : 랭크 A 의뢰인 : 샤먼 상단 조합. 접수인 : 모험가 길드. 의뢰비 : 두당 1200만 루나. (현찰지급.) 의뢰내용 : 국경근처 에레파인 고개에 출몰하여 상단과 여행객을 습격하는 늑대인간의 포획 및 사살. 손이 덜덜 떨린다. 늑대인간이라니! “제, 제가 잘못 골랐어요?” “스피릿. 늑대인간 본적 있어?” 스피릿의 얼굴이 당장 흙빛이 되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무, 물리고 다른 거 해요. 예?!” “안돼. 무르기 없기야. 게다가 첫 일거리를 물리면 앞으로 일거리 받기 힘들어. 아까 사무실에서 어슬렁거리는 녀석들 봤지? 자기 편한 일만 찾다보면 어느새 그렇게 되는 거야. 이 바닥에서는 힘들지. 잘 들어. 모험가는 목숨 값으로 돈을 벌어. 그래서 부자지.” “아앙!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늑대인간이라구요! 잘못하면 죽어요!” 난 몸을 돌리며 약간 삔이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목숨 값이야. 으흐흐~!” “주인님 바보오!” “이제 알았냐? 가자. 할 일이 많다.”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스피릿은 잉잉거리며 나에게 끌려왔다. 시청으로 가서 스피릿의 노예 거주지 등록을 마친 나는 서무를 보는 사내에게 물었다. “여기 조용하고 깨끗하며 더불어 음식솜씨도 깔끔한 여관은 혹시 없을까요?” 키가 크고 강마른 사내는 스피릿의 용모에 넋을 잃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대로 근처의 샤먼의 노래라는 여관을 찾아가 보십시오. 썩 괜찮을 겁니다.” 고맙다고 말해준 나는 그 길로 여관을 찾아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간단하게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샤먼의 노래는 3층 짜리 여관으로 주인장이 굉장히 크고 험악하게 생겼지만 그 집에서 일하는 남녀 점원들은 상당히 예의바르고 언행도 고왔다. 물론 스피릿 만큼은 아니지만, “일주일 단위로 장기투숙할건데. 방 있습니까?” “물론이죠. 몇 개 드릴까요?” 난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2인실 하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일주일치 방 값과 식비는 선불로 20만 루나 되겠습니다.” 난 점원의 손에 은화 두 개를 올려주었다. 청년은 고개를 꾸벅이며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3층에 있어서 전망하나는 기가 막혔다. 괜찮은데? 창문에서 고개를 돌린 나는 피곤했는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헥헥 대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피곤해?” “아뇨. 괜찮아요.” “그래? 그럼 밥 먹긴 전에 짐이나 옮겨 놓을까?” “아으윽….” 스피릿은 신음을 흘리며 죽을상을 지었다. 난 낄낄 웃으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래그래, 좀 쉬었다가 하자.” “…감사합니다아.” 난 좀 웃어주고 말았다. 그러다가 침대에 몸을 기울였다. 푹신한 게 매트리스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스피릿이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왜?” “좋은 사람.” “응?”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은 빙그레 웃고있었다. 난 방금 그게 무슨 소리냐며 그녀를 간지럼 태우기 시작했다. 스피릿은 깔깔거리며 웃어댔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축 늘어진 그녀가 혼자 놔두고 가면 울어버릴 거라고 협박을 해대는 바람에 우리는 좀 늦게 점심을 먹고 짐을 옮겨올 수 있었다. “여기 얼마나 계실거에요?” “응. 한 일주일 지내보고, 벌이가 괜찮다 싶으면 9천 900만 벌 때까지 있을 거야.” “9천 900만 루나요? 그거….”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네 몸값이야.” “하, 하하하~!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가자. 저녁 먹기 전에 또 할 일이 있어.” 이번에 스피릿을 데리고 간 곳은 무기점이다. 그곳에서 나는 늑대인간을 잡기 위한 장비를 주문했다. 바로 대 라이칸스롭 퇴치용 은제 무기들이다. “자동석궁의 활촉을 은으로 바꿔주세요. 그리고 은도금 롱소드 하고 나이프도 필요합니다. 급하니까 내일까지 준비해주쇼.” 무기점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마법상점에 들린 나는 폭발성 주문이 담긴 스크롤과 마법재료로 많이 사용하는 수은등을 주문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간단한 인사말로 거래를 끝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가게 안의 의자에 앉아서 졸고있었다. 마법상점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손님의 노예인가요? 오늘 좀 피곤했나 보군요. 너무 화내진 말아요.” “노예인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상점의 주인인 40대 여 마법사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노예는 왼쪽 손등과 오른쪽 어깨에 마법으로 각인을 새겨두죠. 레벨 6단계 문장제거방지 탭이 걸려있어서 마법사라면 다 알 수 있어요. 그나저나 저 노예 아가씨는 정말 아름답군요. 보기 드문 미인인데. 맘에 들었나 봐요?” 글세? 맘에 들었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샀겠지. 나도 내 본심은 모르니까. 황금빛 햇살에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은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여 마법사가 응근한 어투로 말했다. “여자노예의 운명은 뻔해요.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의 품에 안기게 되죠. 어때요? 저 아가씨, 영원히 당신만의 것으로 곁에 두고 싶지 않나요?” “자주 옵니까? 노예의 문장을 제거하려는 사람들.” 여 마법사는 들켰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무서운 법이죠. 당신은 어떤가요?” 난 고개를 돌렸다. 40대의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은 색기를 몸에 감고 있는 중년의 여 마법사는 매혹적인 시선으로 날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들리겠죠. 다음에 뵙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나는 졸고있는 스피릿을 조심스레 등에 업고 상점을 나섰다. 문은 저절로 닫혔다. 색유리로 치장된 문 넘어에는 여 마법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주인님?” “깼어? 저기 좀 봐. 석양이 참 예쁘지?” “저,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어요. 내려주세요.” “안돼.” “하지만.” “주인님 말 들어.” 스피릿은 한숨을 폭 내쉬며 내 등에 기대었다. 대로를 걸어가는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혹은 야유를 보냈다. “주인님.” “왜?” “진짜 좋은 사람.” “뭐?” “몇 일 전 만해도 전 어떤 사람이 내 주인 누가 될까 하는 생각에 굉장히 무서웠어요. 이런 사람이면 어떡하나. 저런 사람이면 어떡하나 하구요.” 이게 무슨 소리야? 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날, 기억나세요? 노예시장에서요. 주인님을 봤어요. 처음엔 여자치마나 들추는 변태인줄 알았는데. 우리를 구하러온 사람들을 쫓아버리고는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용서를 비는 그 모습이 참 대단했어요. 서약을 한 기사들도 그렇게는 못할거에요. 그런데 제 주인님이신 콜트씨는 그렇게 하더라구요. 멋있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 날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물어 버린거야?” 웃는 것 같다. 그녀의 가슴이 울렁거리는 게 느껴진다. “신이 주신 기회 같은 거였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절망적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멀리 콜트 씨가 보이는 거예요. 이거다 싶었죠. 그래서….” “독니로 콱?” “예, 독니로 콱 깨물어버렸어요. 죄송해요. 짐이 되어서. 마을에서도 도망나오시구.” 멀리 여관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난 짓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몸으로 갚아.” “…농담이시죠?” 좀 세게 나가볼까? “넌 내 노예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냐? 데리고 잘 것도 아니라면 뭐 하러 샀겠어? 그렇지. 오늘밤 어때? 처녀니까 부드럽게 해줄…!?” 그 순간, 나는 평소 내가 장난이 꽤 심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흐, 흐으아아앙! 엄마~! 엄마아아아! 콜트 씨가! 훌쩍~ 주인님이 날…! 아아앙~!” 주변의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오! 신이여! 당황한 나는 그녀를 업은 채로 여관으로 전력으로 뛰었다. “콜트 씨가 날…! 아아앙! 모, 몸으로 갑으… 엄마! 나 어떡해! 흐아아앙!” “저런 난봉꾼 같은 자식!” “엄마 난봉꾼이 뭐야?” “그건 여자를 울리는 짐승이란다. 애야 보지 마라. 옮을라.” “이 빌어먹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경멸 적인 눈빛을 받으며 여관으로 달려들어간 나는 상냥한 점원들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스피릿의 업은 채로 방으로 뛰어 오르기 바빴다. 3층! 더럽게 높구나! 쿠당탕! 덜컹! 방으로 들어가 스피릿을 침대로 던져버린 나는 문을 닫고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너, 너! 거기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흐아앙! 잘못했어요! 그러지 마세요!” “뭘 그러지 말아! 너 지금 연극하는 거지?! 그렇지!” “엄마아아!” 스피릿은 엉엉 울면서 침대를 기어 벽에 등을 기댔다. 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에 이를 드러내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딸꾹질을 하던 스피릿은 내 눈빛에 겁을 먹었는지 울음을 그치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얄미운 계집애! 가지가지 하는구나. 문을 걸어 잠근 나는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리와.” “히끅! 히끅!” 스피릿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 아까 말은 농담이야. 다시는 그런 말하지 않을 테니까. 이리와.” “저, 정말이요? 히끅?” “그래. 건방진 노예녀석아.” 그제서야 스피릿은 히끅 거리며 슬금슬금 기어왔다. “여자로 태어난걸 다행으로 알아라. 남자였으면 넌 반쯤 죽었어.”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머리! 머리를 식혀야해! “맥주 주쇼!” 맥주를 단숨에 비운 나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머리도 식힐 겸 스피릿이 힘들어해서 내일로 미뤄두었던 늑대인간의 자료수집과 함정 설치에 필요한 장비 준비를 위해 대장간을 돌아다녔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다. 대충 저녁을 시켜먹고 방으로 올라간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열어보았다. 스피릿은 아까 그대로 침대에 앉아서 멍청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내일도 할 일 많으니까. 일찍 자.” 딱딱하게 말해준 나는 스피릿이 보건 말건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올라가 돌아누웠다. 이 기회에 저 어린애 같은 성격을 좀 고쳐봐야겠어. 마음을 다부지게 먹은 나는 그녀가 훌쩍이던 말던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자 스피릿도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한 방안에 스피릿이 훌쩍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거, 신경 거슬리네. “시끄러워.” “훌쩍… 죄송해요.” 하지만 또 훌쩍인다. “시끄럽다니까?” “흐윽… 죄송해요.” 말은 죄송하다고 하는데 별로 낳아지는 것은 없다. 혹시 이거 고도로 꾸며진 연극이 아닐까? 날 놀리는 거 아냐? “스피릿.” “흐윽… 예.” “울지마.” “하, 하지만….” “자꾸 울면 팔아버린다.” “…….” 신기하게 훌쩍임이 그쳤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일 뿐이었다. “흐으아앙~! 아~앙앙!” 그녀는 아예 대 놓고 울기 시작했다. 그만두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배게로 귀를 막았다. 한참 그렇게 있었지만 울음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 이러다가 옆방에서 누가 소리 지르는거 아냐? 그런 걱정이 살풋 들 무렵, 뭔가가 내 침대로 기어 들어왔다. “뭐야?” “흐윽! 아앙… 주인, 히끅! 주인님 잘못했어요…. 다, 다시는 안그럴께요… 훌쩍…! 저, 파, 팔지 마세요오. 이이잉.” 스피릿이었다. 그녀는 내 침대에 기어 들어와서는 내 등을 껴안고 엉엉 울면서 말했다. 21살짜리 여자가 엉엉 우는 거, 이거 그렇게 좋은 모습 아니다. 난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모습일지는 대략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알았으니까 좀 닥쳐 줘.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 갑자기 불이 켜졌다. 눈을 찌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상상대로 스피릿은 콧물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스, 스피릿?” “훌쩍… 흐윽! 끅, 처, 처음이니까. 거칠게 하지 마세요.” 스피릿은 상의와 속옷을 벗고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난 인상을 찌뿌렸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하고 싶은 대로하세요. 대신, 훌쩍. 대신 팔아버리겠다고는 하지 마세요! 저, 전 주인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가면 분명히 가축 취급을 받을 거예요! 그런 건 싫어요! 흐으아앙!” 그러면서 나에게 안겨드는 스피릿이었다. 오 맙소사! 난 내 장난이 이렇게 심한 일을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반성해야겠어 젠장! 일단 그녀를 떼어냈다. 하지만 스피릿은 나에게 안겨들려고 버둥거렸다. “내, 내가 잘못했어. 그만해!” 짹짹짹~! 참새가 새 아침을 물고 날아든다. 에헤야디야~! 벌겋게 충열된 눈으로 발코니에 쪼그려 앉은 나는 고개를 돌리고 유리문을 넘어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벌겋게 충열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다. 트롤이 보면 누님이라고 불러야 할 용모였다. 하아~! 창문에 입김을 불어넣자 하얀 김이 서렸다. 난 그것에 글자를 그렸다. 내가 다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럴 게. 그만 둬. 그러자 반대편에 앉아있던 스피릿이 하아~! 하면서 나와 같은 방법으로 글자를 그렸다. 웃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서는 말 안 듣는 노예라고 간수들에게 고자질하고 팔아버릴 거면서. 그럴거라면 차라리 어제 말했던 대로 절 데리고 자요. 대신 팔지 마세요. 매일매일 자줄 테니까. 팔지마세요. 팔지마세요. 팔지마세요 팔지마세요. 팔지마세요. 자리가 모자라자 그녀는 다시 입김을 불고는 글자를 그렸다. 똑같은 글자다. 팔지마세요. 팔지마세요. 염병! 끈질기네! 후아아! 난 너 같이 가슴 작은 계집애는 싫어. 내 취향이 아냐. 그러니까. 그만둬. 절대로 안 팔게. 약속할게. 내 글을 읽은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더니 이미 써 있는 글을 지우고 다시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삑삑 거리며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써나갔다. 제기랄! 10월이라 그런지 되게 춥다. 이 정도면 크지 않아요? 모양도 예쁜데. 그만하고 들어오시죠? 추울텐데. 21살 처녀의 뜨거운 가슴에 안겨봐요♡ 하트를 그리는 손가락을 쳐다보던 나는 이를 악물고 입김을 불어 글을 썼다. 부끄럽지도 않냐?! 어서 옷 입어! 이 정신 나간 계집애야! 답변은 다음과 같다. 어차피 다볼건데 뭘 그러세요? 팬티도 내릴까요? “크아아아! 이 망할 녀석! 가만 안둔다!” 잠궈 놓았던 발코니 창문을 연 나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스피릿을 넘어뜨리고 그녀의 두 손을 붙잡은 채 외쳤다. “이 정신나간 계집애! 왜 이러는 거야! 잘못했다니까! 안 판다니까! 절대로 안 판다니까! 그러니까 그만 좀 해!” “결국엔 파실 거잖아요.” 그녀와 싸우며 하룻밤을 꼴딱 새느라 흔들거리던 삔이 그녀의 한 마디로 홀랑 빠져버렸다. 울컥한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기! 알았어. 원하는 데로 해줄게.” 어쩌다가 이렇게 됐다지? 난 그대로 스피릿을 끌어안고 키스를 해버렸다. 당황한 그녀가 팔로 내 가슴을 밀며 반항을 해왔지만 난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혀가 아플 때까지 키스를 해버린 나는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던 스피릿이 눈물을 흘리며 날 쳐다보았다. 담요를 끌어당긴 나는 그걸로 그녀의 몸을 가려주었다. “그만 하자. 바보 같다.” “훌쩍… 왜, 왜요? 다 하시지 않구서.” 악에 바친 듯이 중얼거리던 스피릿이 담요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한숨을 쉬었다. 이러면 안돼. 제미니를 배신할 수는 없어. 나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모른 척 할 수는 없단 말야. 그래서 나는 끝까지 뻣대 보기로 했다. 처량한 내 신세야. 노예하나 잘못 만나서 별 짓을 다하는 구나. “하면 울 거면서.” “안 울어요.” “울 거잖아.” “안 운다니까요!” “스피릿 화났나보네. 노예가 주인에게 화를 내다니. 이래가지고 서야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라고 할 수 있어?” 스피릿은 할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긴 회색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마룻바닥으로 쏟아졌다. 난 그녀의 머리를 슥슥 매만지며 말했다. “안 팔아. 이렇게 귀엽고 예쁜걸 어떻게 팔아?” 그리고는 담요를 두르고 앉아있는 스피릿을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스피릿은 차츰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성공이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앙앙앙~!” “어이구. 그래. 울어라 울어.” 너무 심한 장난은 심신에 해롭다는 교훈을 가슴깊이 새겨둔 나는 밤을 새느라 밀려드는 피곤함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다시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잠옷으로 사용하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던 스피릿이 고개를 돌렸다. “주무시게요?” “밖에서 밤을 샜더니 춥고 졸려. 잘란다.” “저, 주인님. 저도 같이 자면….” “응?”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이 두 손을 만지작대며 침대 가에 서있었다. 안된다고 하면 또 울면서 바락바락 대들겠지? 그래서 허락했다. 스피릿은 좋아라 하며 침대를 기어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네 자리는 뒤쪽 아니었냐?” “오늘부터 앞쪽이에요.” “어째서?” “주인님은 믿을 수 있으니까.” “그거 너무 계산적이야. 잊고 있나본데. 너랑 난 주종관계라구, 게다가 남녀 사이야. 내가 아까처럼 다시 합리화를 시도하면 어쩔꺼야?” 스피릿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바보 같다면서 그만 두셨잖아요. 하지만 너무 그러면 욕구불만이 될 테니까. 키스 정도는 언제든지 받아 드릴께요.” “나 말야. 지금 속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구 들어.” “착각이세요. 착각. 안녕히 주무세요.” 멋지게 당했다. 아까 그 눈물도 연극이었을까? 설마?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아아,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되는 기분이야.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하품을 좀 한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가 씻고 올라왔다. 그 동안 스피릿이 일어나 있었는데. 그녀는 방안을 서성이며 안전부절 못하고 있었다. “뭐 잃어버렸어?” “하아…. 다행이다. 주인님 도망간 줄 알았어요. 저 버려 두고요.”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난 킁하는 콧소리를 내고는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는 창가로 걸어가 테이블에 올려둔 가죽바지와 셔츠를 입고 장비를 챙겼다. “내려가서 씻고 와.” “예? 저 혼자서요?” “이상한 사람들은 없으니까 걱정말고 다녀와. 빨리 안오면 먼저 가버린다.” 난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무기들을 장비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뭔가가 복도를 달려오더니 내 앞에서서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하악! 학! …정말 먼저 가실 생각이셨어요?” “응.” “아앙~ 주인님 나빠요!” “시끄러. 옷이나 빨리 갈아입어. 아침 먹고 갈 데가 많아.” “이이잉!” 스피릿은 얼른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문을 닫아준 나는 홀로 내려가 빵과 우유를 주문했다. 식사가 나올 때쯤 스피릿도 내려왔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기다려 주지도 않고 먼저 내려간 내게 불만을 떽떽 거리려다가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는 걸을 깨달고는 볼을 부풀리며 내 옆에 앉아서 긴 머리카락으로 손가락으로 다듬어댔다. 빗 하나 사줘야겠군. 아침을 먹는 나는 뒷마당으로 나가서 미리 여관 주인에게 빌려둔 짐마차에 올랐다. “타라.” “오늘은 이거 타고 다니는 거예요?” “그래. 다리 아프다고 비실거리는 이쁜 노예님을 위해서 내가 특별히 준비했다.” 스피릿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를 몰고 대로를 느긋하게 달리는데 스피릿이 물었다. “오늘은 어디로 가세요?” “늑대 잡으러. 오늘은 노숙 할거니까. 여관에 돌아가면 야영 할 때 쓸 물건들 준비해둬.” 스피릿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댔다. 난 그녀의 겁먹을 모습을 바라보며 낄낄 웃었다. 대장간과 무기상, 마법상점을 돌며 주문한 장비를 모두 마차에 실어 올린 나는 다시 여관으로 행했다. 그리고 주문해둔 도시락과 야영할 짐을 챙겨서 마차에 실고 어제 수집한 정보대로 알파인 고개로 향하려했다. 그때 덩치 큰 여관 주인장이 마차에 오르는 나에게 말했다. “늑대인간을 잡는다고 했는데. 괜찮으시겠소? 쓸만한 아이들이 있는데 붙여드릴까?” “필요 없습니다. 삼일이나 이틀 정도 후에 올테니 짐이나 좀 봐주십쇼.”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오.” 난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대로를 신나게 달린 우리는 성문을 통과하여 에레파인 고개를 향했다. 에레파인 고개는 캐슬린의 국경부근에 있는 곳으로 그랜퍼스의 국경수비대를 통과한 상단과 여행객들이 샤먼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하는 고개다. 반나절을 달려서 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고개 아랫부분에 있는 전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여, 여기서 늑대인간이 나온다는 거에요?” “응. 아마도 떠돌아다니던 늑대인간이 흘러 들어온 모양이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다는군. 그러지 말고 거기 가방 좀 내려.” “예.” 나와 스피릿은 마차에서 장비들과 짐을 내리고 곧바로 함정 설치를 시작했다. 함정이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구덩이지. “삽으로 파는 거예요?” “응.” “우리 둘이서요?” “아니, 너 혼자. 열심히 해.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여자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천벌을 받을 것 같으니 내가 할게.” 얼굴을 창백하게 만든 스피릿은 엥엥 거리며 제발 그만 놀리라고 말했다. 난 낄낄 웃으며 웃옷을 벗고 커다란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거 언제 다 파요?” “잠자코 보기나 해.” 삽으로 구덩이를 팔 땅의 넓이만큼 도랑을 판 나는 그곳에 마법상점에서 산 물건을 가지고 와서 뿌렸다. “예쁘다.” “반짝반짝하지? 비취가루야. 이걸 여기다가 뿌리고. 그리고, 스크롤을….” 도랑에 비취가루를 가득 뿌려둔 나는 멀찍이 물러서서 가방에서 꺼낸 스크롤을 구덩이를 팔 자리로 던졌다. “디그!” 쿠콰쾅!! 후두둑!? “엄마야!?” “뭐하고 있어?! 엎드려!” 난 얼른 스피릿을 넘어뜨리고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안았다. 등으로 흙먼지가 쏟아졌다. 기침을 좀 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피릿을 살폈다. “괜찮아?” “예. 그런데 주인님 마법도 쓰실 줄 아세요?” “응? 설마, 그냥 스크롤을 좀 사용한 것 뿐이야. 되게 비싸지.”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얼굴과 머리에 뿌옇게 쌓여있는 흙먼지를 털어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저녁이 될 때까지 몇 개의 구덩이를 더 팠다. 그리고 깨끗하게 파여진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대장간에서 만들어온 작살을 꼿아놓았다. 흐흐흐, 여기 떨어지면 그대로 죽음이지. 늑대인간이니 좀 버티려나? 살벌한 빛을 발하는 작살을 좀 바라본 나는 밧줄을 타고 위로 기어올랐다. 깊이가 내 키의 세배는 될 것 같다. 스피릿이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근처의 전나무로 기어올라간 나는 나뭇가지를 잘라다가 구덩이를 덮고 낙옆으로 위장했다. “다됐다.” “수고하셨어요. 여기 물.” 스피릿은 기특하게도 수통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이걸로 끝이에요?” “아니, 상대는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가진 늑대인간이야. 이걸로는 택도 없어. 아, 그래서 말인데. 스피릿, 너한테 부탁할게 있어.” “뭔데요?” “아주 쉬운 일이야.” Running Fire: 06 “그, 그럼. 앞으로 말 자, 잘 들을 거야?” 함정을 파 놓은 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우리는 다음날 아침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내게 저주를 퍼붓고 있다. “으앙! 주인님! 나쁜 놈! 내려줘요!” “나중에 상금타면 맛난 거 많이 사줄게!” 오전까지 숲 속에 수십 가지의 함정을 설치한 나는 마지막으로 스피릿을 데려다가 그물에 싸서 커다란 전나무 가지에 매어놓았다. “으아아앙! 내려줘요오~!” “미안해! 오늘 하루만 그렇게 있어!” 몸을 돌린 나는 작업에 사용하던 말도 데려다가 함정 중간에 매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오크 통을 가져다가 함정 주변에 내용물을 뿌렸다. 당장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렇게 하면 냄새가 섞여서 함정이 있는 줄 모르지. 이미 내가 온걸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할건 해야하니까. 피를 뿌린 나는 통을 치워버리고 한숨을 내쉰 다음 전나무 숲의 관광을 시작했다. “어디가 이 나쁜놈아아!” “사랑해 스피릿~! 더 크게 외쳐줘.” “으아앙! 주인님 돌아와요! 내려 달란 말예요!” 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준 다음 몸을 돌렸다. 저 정도 높이라면 어느 정도 안전할거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스르릉~! 은도금 롱소드가 햇빛에 반짝인다. 젠장,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 “크르르르….” “이히힝힝힝~!” 깜짝 놀란 말이 비명을 질렀다. 그건 스피릿도 마찬가지였다. “주, 주인님?!” “어때 스피릿? 늑대인간 멋지게 생겼지?” “캬르르르…!” 쿠웅! 쿵! 얼마나 무거운지 걸을 때마다 소리가 들린다. 2000파운드? 3000파운드는 되겠다. 난 고개를 꺽어 놈을 올려다보았다. 엄청 크다. 대낮이라 아직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키 큰 전나무 덕분에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제기, 어차피 칼은 뽑았다. 난 당당하게 검을 들고 놈을 겨누며 말했다. “지금부터 널 죽이겠다. 덤벼.” “크르륵?! 캬아!” 쾅! 녀석은 다리를 들어 날 걷어차려고 했다. 뒤로 뛴 나는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들었다. 끼릭 찰칵! 퉁퉁퉁퉁퉁퉁퉁! 퍼퍼퍽?! “캬아악!!” 늑대인간이 괴성을 질렀다. 놈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뒤로 물러서며 계속해서 화살을 쏴댔다. 그러자 녀석은 손으로 몸에 박혀드는 화살을 뽑아대며 나에게 돌진해왔다. 챙!? 촤아아악! “크윽!” 롱소드를 들어 녀석의 대거 같은 손톱을 막았다. 팔이 부러지는 느낌이다. 뒤로 날아간 나는 커다란 전 나무에 부딪혔다. 그런 나에게로 달려온 늑대인간은 나무 째로 내 몸을 두동강을 내버리려는지 팔을 휘둘렀다. 얼른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면 지금쯤 내 머리가 바닥을 뒹굴고 있을거다. “하하하! 두근두근 하는데!” 다시 몸을 일으켜 검을 들어올린 나는 나무에 박혀있는 녀석의 팔을 베어버렸다. 취이익!? 붉은 피가 내 얼굴로 쏟아졌다. 덜렁거리는 팔을 붙잡은 녀석은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질렀다. “캬오오오!” 놈이 한눈을 판 사이에 후다닥 달려간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석궁을 들어 놈의 등에 대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갈겼다. 투투투투투투퉁! 퍼퍼퍼퍽?! 치이이이~!! 화살촉이 은이기 때문에 늑대인간의 상처는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타올랐다. 꽤 아팠는지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질러대던 녀석은 팔을 등으로 돌려 화살을 뽑으려다가 이빨을 드러내더니 나에게 달려왔다. 씹어 삼키겠다는 듯이 벌린 저 입은 정말 멋지다고 밖에는 할 수 없겠다. “하하하하~! 컴온! 베이비!” 나는 스피릿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스피릿은 피에 흠뻑 젖어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그물을 붙잡고 외쳤다. “괘, 괜찮으세요?!” “물론이지! 콜트 슈발츠 아직 안 죽었다 이거야! 이리와라! 아가야!” 퉁퉁! 화살을 두어 발 쏜 나는 의식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석궁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내 연극에 넘어간 늑대인간이 포효하면서 달려들었다. 스피릿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주인님!!” “케륵?!” 갑자기 달려오던 늑대인간이 사라졌다. 함정에 빠진거다! “얼씨구나!” 낄낄 웃으며 함정으로 달려간 나는 석궁의 남은 화살을 모조리 그 안에 퍼부었다. 투투투투투투퉁! 투투퉁! “캬아악?! 캬악!” 가슴과 배에 작살이 꼿힌 늑대인간이 비명을 질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몸을 돌린 나는 나뭇가지로 숨겨놓은 짐 속에서 조그만 오크통 하나를 들고 와서 녀석에게 집어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퍼석?! 취이이이이이~!!!!!! “캬아아아아아아~!!” 오크통이 박살나며 쏟아져 나온 것은 수은이었다. 하얀 연기가 함정에서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난 마지막으로 묵직한 스피어를 들어 함정 안에 던져버렸다. 퍼억! “허억! 헉! 이, 이 정도면….” “아우우우~! 우우우우~!” 커다란 하울링이 숲 속으로 울려 퍼졌다. 난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연기 속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제 숨넘어가는 소리뿐이었다. 늑대인간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울부짓는다고 하더니 진짜였구나.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스피릿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주었다. “주인니임….” 사흘을 더 머무르면서 우리가 잡은 늑대인간의 수는 3마리 정도다. 수은과 폭탄 스크롤을 동원하자 처음보다는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건 마찬가지라서 죽을 뻔한 적도 많았다. 덕분에 나는 매번 스피릿에게 걱정을 끼쳐야 했다. 죽기 직전 늑대인간이 휘두른 발톱에 등을 맞은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한참동안 신음을 흘리다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녀를 내려주었다. 스피릿은 그물을 헤치고 달려오더니 막 쓰러지려는 날 부축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으, 윽, 아파, 거기 만지지마.” 등에 난 상처를 보며 스피릿은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난 덜덜 떨리는 팔로 실과 바늘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조, 좀 꿰매줄레?” “흐윽… 아프시더라도 참으세요.” “으응.” 난 머리에서 쓰고있던 손수건을 벗어 입에 넣고 꽉 깨물었다. 대략 한시간 정도 지나자 스피릿의 바느질이 끝냈다. 피범벅이 된 그녀의 손을 쳐다보던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너도 쓸모가 있구나.” “훌쩍, 예쁘기만 한 건 아니라구요.” “그래그래. 어, 저, 저기 가방 좀 가져와 봐.” 그녀는 얼른 달려가 짐 더미에서 가방을 가지고 왔다. 난 가방에서 초록색 액체가 담겨진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낄낄 웃으며 말했다. “스, 스피릿, 느, 늑대인간이 왜 생기는 줄 알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약병의 뚜껑을 따며 말했다. “늑대인간은, 늑대인간은 일종의 전염병이야. 나, 나도 잘은 모르는데. 어떤 병에 걸린 늑대가 사람을 물게되면 그 사람은 늑대인간이 되어버리지. 크, 큭큭큭. 그, 그리고… 늑대인간은 생식기가 없어서 자식을 만들지 못해. 대, 대신 녀석에게 물리거나, 어, 바, 발톱에… 사, 상처를… 입으면, 늑대인간이 돼지. 쿨럭쿨럭!” “주, 주인님! 괜찮으세요?!” 난 필사의 의지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머리가 후끈거린다. “내, 내가 늑, 대가 되면, 도, 도망가? 아, 알았지…?” “으아앙~! 싫어요! 안가요! 같이 있을 거에요! 아앙!” 스피릿은 내 팔을 안고 매달렸다. 아아, 이러다가 늦겠다. 난 씩 웃으며 속삭였다. “그, 그럼. 앞으로 말 자, 잘 들을 거야?” 스피릿은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받아낸 나는 서둘러 약을 입에 부었다. “크으윽!” “주인니임!” 제기, 늑대인간 사냥할 때는 항상 이거 때문에 싫어. 난 몸이 갈갈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한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쿨럭쿨럭~! 크르르르…. 스피리이잇…!” 옆에 앉아있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스피릿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기겁을 했다. 난 그녀의 하얀 얼굴을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달달 떨고있었다. “뽀뽀해주면 안 잡아먹지.”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한참동안 날 쳐다보다가 속았다! 하는 표정을 지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아아아! 정말 이제 그만해요! 그만! 순진한 노예 노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이 바보 주인님아!” 반은 진짜였지만 난 잠자코 낄낄 웃으며 얌전히 그녀의 작은 주먹에 맞아주었다. 포션을 마시고 어느정도 몸을 회복시킨 나는 늑대인간이 또 오기 전에 서둘러 짐을 꾸렸다. 함정에 빠진 두 녀석은 머리를 자르고, 함정에서 기어 나왔던 녀석은 그 시체를 어렵사리 마차에 실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왜 이걸 가져가시려는 거예요?” “머리만 가지고 가만 선전효과가 줄어들잖아.” 난 씩 웃으며 말해줬다. 첼시아라고 했던가? 두고보라구! 챙길 수 있는 건 모조리 챙긴 우리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출발했다. 그리고 서쪽하늘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저녁 무렵 국경도시 샤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 경비병과 약간의 말싸움 끝에 겨우 도시 내로 들어간 우리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마차와 스피릿을 밖에 세워두고 땀과 피에 절은 얼굴로 길드 안으로 들어간 나는 로토를 불렀다. 왠 모험가들과 말싸움 중이던 로토는 내가 부르자 얼씨구나 하며 달려나왔다. “바쁜거 아냐?” “괜찮습니다. 쉬운 일거리 찾는 초보 모험가들인데. 여기가 무슨 아이들 장난하는데 인줄 알고 있어서요. 따끔하게 한마디 해줬죠.” “내가 봤을 때는 당하고 있는 것 같던데.” 로토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좀 나와봐.” 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스피릿은 이제 꽤 익숙해졌는지 회색빛깔 늑대인간의 가슴에 다리를 세우고 쪼그리고 앉아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늑대인간의 여신과도 같은 모습에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난 그녀를 예쁜 노예이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스피릿, 뭐하는 거야. 내려와.” “예.” 스피릿은 조심조심 늑대인간의 털을 붙잡고 내려왔다. 마차에서 뛰어내리려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바닥에 내려준 나는 뒤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로토와 할 일 없는 모험가들을 바라보았다. “잡아왔어. 돈줘.”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로토는 길드 안으로 들어가서 돈을 가져오는 대신에 골목길로 달려가더니 한참 후에 돌아왔다. 그동안 인근의 시민들이 몰려와 우리가 잡아온 늑대인간의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했다. 로토는 웬 늙은이를 데려오더니 말했다. “샤먼 상단조합의 현직 보스이신 피가로 파라디온 이십니다.” “안녕하쇼?” 상당조합의 보스라는 영감은 체면불구하고 늑대인간의 거대한 체구를 정신 없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피곤한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연신 하품을 하는 스피릿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로토를 바라보았다. “돈 언제 줄꺼야?” “예. 아, 잠시만요.” 길드 안으로 들어간 로토는 한참 후에 커다란 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는 그것과 함께 명세표를 내밀었다. “두당 1200만 루나에 3마리이니까. 합쳐서 3천 600만 루나 되겠습니다. 세어보시겠습니까?” “숙소에 가서 세어 볼 꺼야. 한푼이라도 모자르면 가만 안 둬. 아, 그리고 말인데. 수레는 빌린 거라서 가져가야 하거든?” 그러자 잠자코 옆에 서있던 상당보스가 끼어 들었다. “수레 값을 줄 테니 두고 가시오. 그런데 남은 녀석들의 몸은 어디 있소?” “그거 들고 오기 힘들어서 그냥 놔두고 왔는데. 몸뚱아리는 에레파인 고개 아래 전나무 숲에 있습니다. 그런데 뭐 추가금 같은 거 없습니까? 힘들여서 한 놈은 멀쩡하게 가져왔구만. 이거 박제를 해도 500만 루나는 족히 받겠는데 말야.” 고민하던 보스는 시원하게 외쳤다. “좋아! 두당 추가금 200만 루나 더 얹어 주지!” “앗싸~! 합이 600만! 돈 벌었다!” 난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하며 보스의 손을 잡고 흔들어주었다. 그는 일단 현찰대신 나에게 샤먼 상당조합의 약속어음을 끊어주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가지고 오면 돈으로 바꿔주겠다는 것이다. 어음을 받고 히히덕 거리며 말을 풀어서 장비를 싣고 있는데 어디서 짜증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이게 뭐래? 무식하게 누가 이런걸 여기다가 갖다 놨다니?” 스피릿은 얼굴을 붉히며 내 뒤로 숨었다. 첼시아와 그녀의 동료가 웬 녀석과 함께 내가 잡아온 늑대인간을 보고 있었다. 로토가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야! 마침 첼시아 씨도 오셨군요. 성공하셨습니까?” “물론이죠. 봐요. 저게 그 희대의 살인마야. 상당한 미남이죠?” 로토는 히죽 웃고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를 보더니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재 수 없게도 첼시아와 내가 시선이 마주쳤다. “어머, 더러워라. 무슨 피와 땀을 그렇게 많이 흘려? 곧 죽으려나봐?” “염병. 웃기지마. 죽긴 누가 죽어.” 그녀를 무시한 나는 마저 장비를 말에 올렸다. 첼시아는 스피릿에게 손을 흔들어주다가 어느새 아이들이 올라가 놀고있는 늑대인간을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당신이 잡은거야?” “응, 부럽다고 말해볼래?” 스피릿을 부른 나는 그녀를 말에 올렸다. 그리고 나서 말고삐를 잡고 첼시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헤에, 얼마짜린데?” “4천 200만 루나야. 부럽지?”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하지만 첼시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가소롭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어머, 난 또 뭐라고, 겨우 그거 받고 그렇게 좋아라 한 거니?” 이거 뭔가 이상하다. 난 허리를 펴고 고개를 삐딱하게 만들고는 그녀가 데려온 희대의 살인마인지 뭔지 하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저 새끼는 얼마짜린데?” 그때 로토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고 왔다. “여기 명세표와 6천 800만 루나입니다. 죄수는 길드 내의 유치장에 가둬두고 가십시오.” 6, 6천 800만!? 으아! 이번엔 첼시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럽지?” 크아아아! “젠장! 나쁜 계집애! 아으! 분해!” 침대 위를 뒹굴 거리며 짜증을 부리고 있으려니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던 스피릿이 말했다. “참으세요. 세 번 참으면 살인도 참는데요.” “오, 그래? 참자. 참자. 참자. …별로 달라지는 거 없는데?” “…주인님.” “에라이! 그 고생을 했는데 사람 두어 명 죽인 놈 보다 못하다니! 너무 억울해!” 스피릿은 한숨을 내쉬며 내 옆에 앉았다. “다음 번에는 우리도 비싼 일 잡으면 되잖아요. 진정하세요.” “으윽~! 그래, 너밖에 없다.” 난 그렇게 말하며 스피릿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꺄하하~! 간지러워요~!” 스피릿은 깔깔 웃으며 침대로 쓰러졌다. 씩 웃은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에 넣어둔 돈주머니를 가져와서 침대 위에 쏟아부었다. 촤르르륵~! 종이와 펜을 가지 온 나는 계산을 시작했다. 장비와 마법물품 대금을 제외하고 치료비와 기타등등 잡비를 빼면… “3천 7백 21만 5천 800루나 인데요.” “헤?” 난 입을 딱 벌렸다. 침대에 앉아서 동전을 세고 있던 스피릿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셈을 좀 할 줄 알거든요?” “대단해. 스피릿. 뽀뽀해줄까?” 주변을 좀 두리번거리던 스피릿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볼을 가르켰다. “여, 여기다가 해주세요.” …농담이었는데. 어쨌든 해달라니 살짝 입을 맞춰줬다. 스피릿은 헤헤 웃으며 좋아했다. 어제 흐트러졌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뭐, 상관없나? 잔돈을 정리한 나는 스피릿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 손.” “예?” “손.” 스피릿이 손을 내밀었다. 난 그녀의 작은 손바닥에 조그만 가죽 주머니를 올려주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예요?” “수고비다. 넣어둬. 나중에 맛있는 거 사먹어라. 그리고 넌 문장만 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노예인줄 모르니까. 겁먹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해. 계속 그렇게 굽실거리면 누가 봐도 노예인줄 안단 말야. 알아들어?” 스피릿은 그것을 가슴에 꼭 안고는 감동 받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허어~ 애가 왜이래? “주인님 뽀뽀해드릴까요?” “관둬. 그런 농담 너한테는 안 어울려. 그만 불끄고 자자. 내일은 치료하러 신전에 가야하니까. 일찍 일어나야 돼.”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등의 상처가 따가워서 바로 눕지는 못하고 옆으로 누워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때 코앞에서 스피릿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 뽀뽀해드릴까요?” 그 날밤, 난 하마터면 제미니와의 약속을 어기고 사고를 칠 뻔했다. 또 아침이 밝았다. 이젠 지겹다. 일찍 일어난 나는 하품을 좀 하다가 등에서 올라오는 짜릿함을 느끼고는 정신을 차렸다. 신전에 가야지. 아으~ 쓰라려라. 창문으로 걸어가서 커튼을 열고 쇠사슬로 감아놓은 창문을 열자 시원한 아침공기가 들어왔다. 으흣~! 벌써 쌀쌀하네? “아으…! 주, 주인님. 추워요오.” 자기 침대 놔두고 내 침대에서 자고있던 스피릿이 담요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침대로 걸어간 나는 반쯤 일어나 앉아 있는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잡아 올렸다. 어느나라 공주님이라고 해도 믿어줄 것 같은 예쁜 얼굴이다. 난 그녀의 졸린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빨리 일어나세요. 노예아가씨. 늦으면 아침 굶길 테야.” 스피릿은 베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나 역시 등을 돌린 채 옷을 갈아입고는 아래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홀로 나갔다. “아침 주쇼.” “빵하고 우유요?” “아니, 빵하고 주스. 2인분.” 내 나이대의 점원 아가씨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접시를 테이블에 올리고 주위를 좀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어제 늑대인간을 잡아오셨다는 분 맞으세요?” “그렇소만?” 소문이 빨리 퍼지는군? 여자 점원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것저것을 물어댔다. 어디서 왔느냐? 얼마나 묵을 거냐? 늑대인간은 어떻게 잡았느냐? 여자친구는 있느냐? 난 그녀의 물음에 착실하게 대답해줬다. 마지막 한가지 빼고, “안! 녕! 하! 세! 요!” “아, 예. 안녕하세요. 맛있게 드세요. 호호호~.” 여점원은 그렇게 말하며 멀어졌다. 고개를 돌린 나는 도끼눈을 하고 여점원을 노려보는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우울한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제가 벌써 질리신 거예요? 너무하세요.” “컥?! 쿨럭쿨럭!” 주스를 마시던 나는 사례가 들려버렸다. “뭐, 뭐라고?” “어제 키스… 열심히 노력한 건데….” 얼굴을 붉게 물들인 스피릿이 고개를 숙이고 웅얼웅얼 거렸다. 어젯밤의 일 때문에 덩달아 얼굴이 뜨거워진 나는 절대 그런 거 아니라며 현실 도피를 시도하려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애써야했다. 아침을 먹은 우리는 샤먼에 있는 은행으로 행했다. 가지고 있는 돈이 너무 많으니 맡기기 위해서다. “차르륵!” “좀 맡깁시다.” 은행원은 상냥하게 웃으며 통장을 개설하고 돈을 맡아주었다. 난 그녀에게 통장개설에 필요한 시민증과 모험가 면허증 그리고 통장의 입출금 내역이 표시된 금속판을 돌려 받았다. 미스릴로 만들어 마법으로 쓰고 지우기 때문에 복제가 불가능하고 한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나는 이제 신전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스피릿이 물었다. “제가 듣기로 모험가는 돈을 벌면 흥청망청 쓴다고 하던데 주인님은 다르시네요?” “틀린 건 아냐. 모험가 중에서도 가족이 없는 녀석들은 돈을 벌면 술집이나 홍등가에서 거의 대부분 탕진해버리지. 쾌락만능주의라고나 할까?” “왜 목숨 걸고 번 돈을 그렇게 함부로 쓰죠? 전 모르겠어요.” 옆에서 걷고있는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머리카락을 산발한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날 바라보고 있었고 난 천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젠장,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예쁜걸? …제미니 미안해. 나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라. 은행에서 발급 받은 금속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통장이야. 은행에서는 모험가들의 돈을 맡을 때 상속인을 따로 정해두지. 왜냐면, 우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거든?” 그제서야 뭔가를 깨달은 스피릿이 자리에 멈춰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난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냥 앞서서 걸어가 버렸다. 그녀를 기다려주면 죽은 나를 기다릴 것 같아서 말이지. “아앙~! 주인님, 저 이거 받기 싫어요~!” “안돼. 주인님 명령이야. 가지고 있어. 그리고 빨리 안 오면 두고 간다. 좀 뛰어봐.” 스피릿은 잉잉거리며 뛰어왔다. 저걸 어떻게 버리고 가지? 아~ 고민이네. 샤먼에는 생명과 죽음의 신. 글록의 신전이 있었다. 글록의 프리스티스는 내 상처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바느질 솜씨가 매우 정교하군요. 누가 꿰맸죠?” “제, 제가 했는데요?” 프리스티스는 환자를 앞에 두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 굉장히 아름다운 자매 분이군요. 바느질 솜씨도 탁월하고, 결혼하면 사랑 받겠어요.” “가, 감사합니다.” “…수다는 그만하고 상처나 좀 봐주십쇼. 젠장.” 침대에 엎드린 채로 불만을 토하자 프리스티스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남자친구인가요? 어떻게 된거죠?” “…예에. 늑대인간 잡으러 갔다가 발톱에 맞았어요.” 순식간에 프리스티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내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죽으려고 작정했군요. 자매님. 그래서 해독제는 마셨나요?” “마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거 아닙니까? 부탁인데 귀 좀 놔요. 깡패 프리스티스님!” 금발에 롤빵같이 동글동글한 머리모양을 가진 30대의 프리스티스는 귀를 놓고 곧바로 신성치료를 시작했다. “어? 약부터 먹이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조용히 하세요. 웨어울프의 저주는 해독제 한병 마시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거의 1시간동안 신성치료를 받고 곧바로 병실에 감금됐다. 이게뭐야?! “치료는 끝났으면 보내줘요!” “일단 치료는 끝났지만 경과를 지켜봐야 해요. 게다가 등의 상처도 심하잖아요? 바느질이 워낙 잘돼있어서 따로 봉합은 필요 없겠지만 그래도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여기 있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프리스티스는 밖으로 나갔다.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야 이거?” “좋게 생각하세요. 주인님 어제 무리 하셨잖아요. 이번 기회에 푹 쉬시라구요.”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느긋한 성격이 못돼서 말야. 일주일이상 놀면 좀이 쑤셔, 하지만 독실이고 상처도 좀 심하니까 몇일 정도는 편히 쉬어볼까? 그렇지. 스피릿? 오빠랑 재미있는 거 하면서 놀까? 으흐흐.” “신전에서 불장난 벌이면 천벌 받아요. 주인님.” “으흐흐. 괜찮아. 오빠 믿지? 스피릿. 오늘 너무 예뻐 보여.” “그렇게 웃으시면 싫어요.” “으흐흐.”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물론 장난이다.-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내 등의 상처를 꼬집었다. “아으아아아…!” “천벌이에요. 배고프시지 않으세요? 도시락 사올께요.” “으, 으윽… 기다려, 이 나쁜… 아야야.” 문 앞에 선 스피릿은 혀를 빼물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허어, 요새 들어 행동력이 넓어졌는걸? 주인님 상처도 꼬집을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이 오면 뒤에 숨기 바쁘더니. 일단 보기 좋으니 넘어가자. 느긋하게 하얀 병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한 이틀을 병실에서 얌전히 지냈을까? 좀이 쑤신 나머지 난 병실 밖을 지나가는 프리스트 한 사람을 납치해와서 강제로 신성치료를 부탁했다. “상처도 잘 꿰매져 있고, 이대로도 괜찮은데요? 몇 일만 더 쉬시면 신성치료 없이도 완쾌 되실텐데.” “이거, 약소하지만 글록의 신전에 헌금하겠습니다.” 난 금화 두 개를 프리스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그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하~! 급한 일이 있으신가보군요. 바로 치료하죠.” 실을 뽑고 프리스트의 강력한 디바인파워로 상처를 치료받은 나는 치료가 끝나자 당장 옷을 갈아입고 신전을 나섰다. 내 뒤를 따라오던 스프릿이 말했다. “몇일 더 계시지.”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해. 또 일해야지. 그래서 많이 벌어둬야지.” “주인님은 일밖에 몰라요.” “목숨걸고 번 돈으로 술을 퍼마시거나 여자랑 자는데 뿌리는 것보다는 났지 않아?” 스피릿은 할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바싹 끌어당겼다.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내 돈은 네 돈이 되는거야.” “우웅!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전 주인님이 필요해요! 절대로 죽으시면 안돼요!” “귀여워라. 말이라도 고맙다.” 스피릿은 볼을 부풀리며 내 허리를 꼬집어 댔다. 그것마저도 맘에 드는 나였다. 시내로 들어간 나는 일단 모험가 길드로 가서 새 일거리를 찾으려 했다. “아! 콜트씨!” “응?” 로토가 날 반겼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숙소에 찾아갔더니 신전에 입원하셨다고 하던데.” “뭐, 좀 나아졌는데. 왜? 새 일거리라도 들어왔어?” 로토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은 그는 장부를 뒤적이며 말했다. “요전에 신세진 샤먼 상단 조합에서 이번에 캐슬린으로 대규모 상단을 파견한다고 합니다. 요즘 전쟁 소문 때문에 그쪽 치안이 불안정하거든요? 호위무사 일이 몇 개 있는데. 생각 있으십니까?” “캐슬린으로? 쓰읍, 상단 호위무사는 오래 걸리고 돈도 적게 줘서 싫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경만 넘으면 시장은 금방이니까 기간은 보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답니다. 의뢰비도 1500만 루나면 짭짤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상당에서는 콜트 씨가 동행해줬으면 하는 눈치였습니다. 좀 편한 일거리로 돈도 벌고 부상도 치료하는 게 어떻습니까?” 고민인걸? 상단 호위무사는 편하고 다칠 걱정은 없지만 들어오는 돈이 적어서 싫은데. 한 참 고민하던 나는 의외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스피릿. 너 고향이 캐슬린이라고 했었지?” “어, 예.” “오랜만에 고향 땅 밟아보고 싶지 않아?” “아, 아뇨. 괜찮은데요.” 스피릿은 손을 저었다. 하지만 나도 외국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관광 삼아 갔다오는 것도 괜찮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맡을게. 출발은 언제야?” “이틀 뒤에 출발입니다. 자세한 것은 상단 조합에서 가서 물으시면 알려줄 겁니다. 이거 받으십시오.” 그는 나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쇳뿔도 당긴 김에 뽑으라고, 난 스피릿을 데리고 상단 조합을 찾아갔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조합원에게 소개장을 보여주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어떤 방으로 안내하더니 내 이름과 모험가 면허증 번호등을 물어보고 출발 날짜와 시각, 준비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 해주었다. 도중에 몇 장의 서류를 나에게 내밀던 그는 내 옆에 앉아서 우아하게. -흡사 귀족들이 티타임을 가지는 것처럼.- 차를 마시는 스피릿을 보고는 물었다. “동료 분입니까? 아니면….” “전 이분의 노예입니다.” 스피릿이 당당하게 말했다. “노예는 데리고 가면 안됩니까?” “아니오. 오히려 이쪽에서는 환영입니다. 노예증명서 있습니까?” 난 가방에서 증명서를 꺼내 보였다. 노예증명서 같이 중요한 서류는 훼손과 복사의 방지를 위해서 마법금속으로 만든다. 게다가 노예 증명서 같은 경우는 오직 한번만 발행하기 때문에 잃어버리면 노예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항상 갖고 다니는 거지. 조합원은 그것을 보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진품이군요. 됐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아, 그리고 내일 저녁에 예비소집이 있으니까. 꼭 나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 저번에 늑대인간의 추가금으로 받은 약속어음이요.” “아, 그렇지.” 난 가방에서 여기 보스가 써준 약속어음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사내는 그것을 꼼꼼히 확인하더니 곧바로 돈을 가져다 주었다. 상인조합에서 나온 나는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스피릿, 너 나한테 시집 안올레?” “생각해 볼게요.” 나와 그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은 다음 이왕 시내에 나온 김에 흥청망청 돈을 뿌리기로 했다. “사고 싶은 거 다 골라! 오빠가 쏜다!” “주인님. 진정하세요.” “아냐. 죽고 나면 아무 쓸모도 없는 쇳조각들이야. 이 기회에 한번 왕창 써보자.” 난 스피릿을 끌고 온 시장바닥을 누비며 옷과 머리핀, 리본은 물론이고 여행에 필요한 물건까지 벼라별 것을 다 사버렸다. 그리고 내친김에 드레스도 몇벌 사서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자 나중에 가서는 스피릿이 울상을 지었다. “이거 어떻게 들고 가실거에요?” 그녀는 산더미 같은 물건을 가르키며 말했다. 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까부터 우리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짐꾼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왔다. 난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여관으로 배달을 부탁했고 그들은 두말하지 않고 그것을 들어다 나르기 시작했다.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 굉장해요.” “사람 사는 이치와 돈만 조금 있으면 못하는게 없는 빌어먹을 세상살이지.” “이런 세상에서 주인님을 만난 건 행운이에요.” “나에겐 불행일지도.” “주인니임!”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내 가슴을 톡탁였다. 하는 짓이 정말 귀엽다. 20살까지 필사적으로 기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내가 연애를 거의 못해본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난 스피릿을 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목숨 값으로 즐겁게 놀고 여관으로 돌아간 우리는 저녁 먹을 때까지 방안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행에 쓸 것은 한쪽 구석에 쌓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은 차곡차곡 정리해서 방을 채워나갔다. 그러다가 화려한 드레스가 나왔다. 난 그것을 들고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싫다고 했지만 내가 한번만 입어 달라고 사정을 하자 마지못해서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됐어?” “아뇨. 혼자 입으려면 시간이 걸려요. 그때까지 뒤돌아보지 마세요.” 발코니에서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스피릿이 말했다. “이제 보셔도 돼요.” 뒤를 돌아보았다.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린다. 눈을 몇 번 떴다 감은 나는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예쁘다.” 스피릿은 빙그레 웃었었다. 하얀 레이스와 프릴이 많이 달려있는 파란색 드레스는 스피릿의 회색 머리카락과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녀의 주위를 몇 바퀴 돌던 나는 마침내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손을 내밀었다. 스피릿은 약간 쓴웃음을 지었지만 고맙게도 두 손으로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다음날, 느긋하게 여행준비를 하던 우리는 저녁 무렵 약속한 대로 상단 조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꽤 많이 도착해 있었다. 아무리 말이 트이고 당당해진 스피릿도 여기서는 내 뒤로 숨을 수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주인님. 저 사람들이 느끼한 눈으로 절 노려보고 있어요! 어떡해요!” “괜찮아. 가까이 오면 내가 박살내 버릴게.” 그때였다. 몇몇이 정말 내 쪽으로 다가왔고 난 건틀릿을 쥔 손을 방만하게 늘어뜨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뭐요?” “혹시, 콜트 슈발츠 씨 되십니까?” “그런데?” 사내들은 험악한 인상과는 다르게 대단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내게서 떨어질 콩고물을 바라고 달라붙는 것 같아 기분 나빴지만 최소한 적의는 없는 것 같아 그냥 통성명만 하고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런데 내 의도에도 불구하고 또 한 무리가 다가왔다. 빨간머리의 변태여자였다. “너무 하잖아. 빨간머리의 변태라니.” “그럼 아냐? 멀쩡한 처녀 가슴이나 만지는 주제에 무슨, 당신은 여기 뭐 하러 왔어?” 그러자 첼시아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내 등뒤에 숨어있는 스피릿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녀? 웃기네. 저런 미인을 사내들이 가만 내버려 둘 것 같아? 당장 주인인 너도 그래.” “처녀 맞는데.” “뭐?” “…지, 진짜예요.” 스피릿까지 거들자 첼시아는 정말이냐는 듯이 스피릿을 쳐다보다가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다시 나에게 화살을 날렸다. “너 불구냐?” “이야아! 난 정상이야! 아니 그보다! 왜 거기서 그 말이 나오는 건데!” 첼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게 아니면 가만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혹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냐? 우리 퍼피 소개시켜줄까?” “차, 참아주십시오. 마스터….” “에잇 닥쳐! 이딴 이야기는 죽어도 못하겠다!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이 있어! 그래서 안 건드리는 거야! 됐냐?! 알아들었으면 꺼져.” 그렇게 말해준 나는 스피릿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첼시아는 어깨를 으쓱일 뿐 쫓아오지는 않았다. 약간 소란이 있은 후 우리는 잠시 후에 나타난 상단보스에게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각자의 이름과 직책을 호명 받았다. 이를테면 출석 같은 거다. 나는 상당의 외곽 경호를 맡게 되었다. 상단이 야영을 하거나 하면 그 주변을 돌며 도둑 떼나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임무다. 스피릿이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겠군. 이름과 직책 호명이 끝나자 우리는 상단보스와 함께 커다란 음식점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게되었다. 앞으로 함께 일할 사이니 얼굴을 익혀두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당신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야 하는 거지?” “어머.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들끼리 있는 게 좋잖아? 안 그래? 스피릿.” “예, 예.” “호호호, 가슴 만진 거 때문이라면 사과할게. 화풀어. …그런데 진짜니?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다는 거.” 스피릿은 벌게진 고개를 숙였다. “예에.” 첼시아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날 바라보았다. 또! 또! “불능?” “아냐!” 화가 난 나는 스피릿이 건내주는 물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런 자리에서 술은 안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시 첼시아도 그걸 아는지 주스만 마셔댔다. 난 그녀의 옆에 앉아있는 사내를 보았다. 퍼피라고 했나? “이봐. 당신. 실력도 좋아 보이는데 왜 이 여자 따라다니는 거야? 약점 잡혔어? 내가 도와줄까?” “이분은 제 마스터입니다.” “당신도 노예야?”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첼시아를 바라보았다. “멋지군. 나도 이 친구 가슴이나 주물러볼까?” “할 수 있다면 해봐. 퍼피는 나도 못이긴다구.” “그래? 파이터는 비쌀텐데. 얼굴도 반반하고, 얼마 줬어?” “스피릿? 넌 얼마짜리니?” 그녀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9천 900만이요.” “우와. 비싼걸? 우리 퍼피는 7천 900만 주고 샀어.” Running Fire: 07 “하룻밤 모시도록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9천 900만이요.” “우와. 비싼걸? 우리 퍼피는 7천 900만 주고 샀어.” 난 빵을 뜯어먹으며 퍼피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시선에 눈을 아래로 깔았다. 괜찮은 친구 군. 그때 누군가가 술잔을 들고 우리 자리로 왔다. 상단 보스였다. “콜트 씨 여기 있었소? 자자, 내 잔 받으시오.” “감사합니다. 보스.” “콜트 씨가 함께 해주니 고맙구려. 요새 강도들이 많아서 걱정이 많았는데 한시름 놓게 됐어. 어이구 이게 누구야? 첼시아! 퍼피 군! 반가우이. 내 잔 받게나.” “안녕하세요. 보스.” 첼시아도 보스와 안면이 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잔을 돌렸다. 난 그에게 받은 술잔을 어쩔까 하다가 옆에 앉아있는 스피릿을 보았다. 스피릿은 식은땀을 흘리며 내 시선을 피하려다 결국 내 잔을 마셔야했다. “으으… 써.” “난 취하면 안돼서 그래. 이해해 줘.” “예에.” 스피릿은 입가심을 위해 연신 음식을 먹어댔다. 상단보스가 다른 테이블로 가고 슬슬 파장분위기가 되어 가는데 왠 사내가 또 왔다. 뭐야. 계속, 귀찮게스리! “안녕하십니까. 콜트. 첼시아.” “우릴 알아요?” “물론이지.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한 사람들인걸? 난 휴거 잭슨. 같은 상단의 호위무사로서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주겠다는데 무시 할 수는 없다. 난 잔을 내밀었고 그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술병을 들고 걸어나왔다. 20대 초반의 스피릿과 비슷한 나이 대를 가진 짧은 금발머리의 미인이었다. 머리카락을 좀더 기르면 훨씬 보기 좋겠는데? 그녀는 나와 스피릿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휴거의 옆으로 가서 섰다. 휴거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둘 다 노예를 데리고 있지? 나도 그래. 소개하지. 루시아라고 해.” “스피릿이야.” “퍼피라고해요.” 예의상 각자의 노예를 소개해주자 휴거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참 떠벌거리다가 상단보스의 마지막 인사말을 듣기 위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식사와 인사가 모두 끝난 우리는 아까 그 남자가 다시 오기 전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문을 나서기 전에 딱 걸리고 말았다. 아, 젠장. 재수도 오지게 없지. “우리들은 이대로 다른 곳으로 가서 더 마실 생각인데. 같이 가겠어?” “우린 안갈거요.” “저희도요. 그럼 이만.” 첼시아는 퍼피를 데리고 유유히 걸어가 버렸다. 나도 가려했지만 휴거는 날 놓아주지 않았다. 정말 짜증나게 하네~!? 그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피릿이라고 했나? 정말 예쁜걸? 고거 볼수록 탐나는데. 이봐, 어때? 오늘 하룻밤 바꿔 보는 건?” 난 고개를 갸웃했다. “뭐?” “내 루시아와 네 스피릿을 하룻밤 바꿔서 즐겨보자는 거야. 루시아는 기술이 좋으니까 색다른 경험이 될걸?” 머리가 뜨겁다 못해 차가워졌다. 고개를 돌려서 그의 옆에 서있는 루시아라는 노예아가씨를 쳐다보았다. 아직 10대 소녀의 인상이 남아있는 그녀는 잘 부탁한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눈빛이 차갑다.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는 노예로군. 난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스피릿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싫어. 요새 우리 스피릿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단 말야. 말은 고맙지만 안돼겠어.” “아깝군. 그럼 다음에 보자구.” 스피릿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준 휴거는 루시아를 데리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스피릿이 내 팔을 꼭 안으며 말했다. “고, 고맙습니다.” “어때? 주인 잘못 만난 노예의 모습은?” 스피릿은 내 팔을 더 힘껏 껴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한순간의 판단 미스로 자신도 저렇게 될 뻔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휴거의 노예인 루시아의 행복을 빌어주며 여관으로 돌아갔다. 이것저것 준비를 해가며 다음날을 보낸 우리는 이튿날 새벽. 말을 타고 여관에서 나섰다. 험상굳은 주인장이 우리를 배웅해줬다. “잘 다녀오시오.” “방안에 우리 물건들 그대로 있으니까. 잘 부탁합시다.” “걱정 마시오.” 간단한 인삿말을 주고받은 우리는 말에 올라서 어두컴컴한 대로를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군데군데 켜져 있는게 을씨년스러웠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보기 좋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고 있으려니 뒤에 앉아있던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 고향에 연인이 있으세요?” “뭐?” 그런 건 또 어디서들은 거지? “응. 널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도 그녀가 속상해 할까봐 그런거야.” 게다가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 말야. 스피릿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동안 난 말을 몰아 출발장소인 광장으로 향했다. 그때 스피릿이 내 허리를 꽉 안았다. “저 열심히 할게요.” 뭘 열심히 하겠다는 걸까? 난 대답대신 뒤를 돌아보며 씩 웃어주었다. 출발장소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상단은 꽤 대규모였다. 4두 마차가 20여대. 상단 조합원이 80여명. 호위무사를 맡은 모험가들이 30여명. 게다가 그들은 대부분 말을 타고 왔기에 출발장소인 샤먼 시내의 광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난 모험가들의 출석을 받고있는 조합원에게 가서 도착신고를 했다. 장부를 뒤적이던 조합원은 13번 마차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13번, 13번, 13번 마차가 어디있지?” 대담하게도 뒷자리에 올라서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 13번 마차 저쪽에 있어요.” “우리 귀여운 스피릿은 눈도 좋아.” “헤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말을 몰아간 나는 내가 소속된 13번 마차에 도착했다. 각 마차에는 대부분 4명의 조합원이 짐의 관리와 마차의 운행을 위해 배치되었는데 내가 있는 마차에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조합원만이 나를 반겼다. “왜 여기는 3명 뿐이요?” 인사 대신의 물음에 나처럼 손수건을 머리에 뒤집어 쓴 여자가 스피릿을 가르키며 말했다. “거기 노예아가씨가 있잖아요? 머릿수를 맞춰야하기 때문에 인원편성을 이렇게 한거에요. 게다가 콜트 슈발츠 씨 정도면 마차에 사람이 많이 붙을 필요도 없죠. 여행 중에는 한 명이 또 빠질거예요.” “날 아쇼?” “늑대인간의 시체를 통째로 가지 온 굉장한 모험가의 인상착의를 들었거든요. 알아보니 항상 검은 색 두건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슈발츠라 불린다더라구요.” 왠만한 상단이라면 정보력은 빠삭 하니까. 개인의 뒷조사정도는 간단하겠지. 난 말에서 내렸다. 그동안 여자가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세이라 헤즐럿이라고 해요. 그리고 왼쪽에서부터 마리온 리드. 슈니르 헤이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소개를 받은 사내들이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까딱여왔다. 스피릿의 허리를 잡아 말에서 내려준 나도 인사를 했다. “콜트 슈발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분의 노예인 스피릿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젠 자기 소개도 잘하잖아? 아유 이뻐. 난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쓸어주었다. 하지만 스피릿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자 슬금슬금 내 뒤로 숨어버렸다. 세이라가 말했다. “예뻐라. 꼭 인형 같아요.” “부끄럼을 잘 타니까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쇼. 그래서, 출발은 아직 입니까?” “예. 뭐, 이제 다됐어요. 콜트 씨는 말 타고 가실거죠?” 푸르륵 거리며 고개를 흔드는 녀석을 쳐다봐 준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조합원들이 출발 준비를 끝내는 동안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어디서 짜증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피릿. 숨자.” “…어딜 숨으려고 그래? 친구가 인사를 건내는데 받아주지도 않고 말야.” 난 고개를 팩 돌렸다. “친구? 우리가 언제 그런 미적지근한 사이가 됐지?” 첼시아는 너무 그렇게 따지지 말라면서 호호 웃어댔다. 어으~! 고개를 돌리니 옷을 좀 바꿔 입은 퍼피가 고개를 까딱이고 있다. 가만히 보니 첼시아도 허리의 채찍 외에 레이피어를 들고 있었다. “뭐야? 어디 전쟁 나가?” “요새 떼강도가 기승이라는 소문이야. 무장은 제대로 해야지. 그리고 당신이 그런 말을 해도 돼? 뭐야 그 무장은? 자동석궁은 무기개조 제한 품목이잖아. 허가는 받은 거야?” “그런 걱정일랑은 마. 합법적인 거니까.” 우리가 그렇게 떠들어대는 사이 출발 준비가 끝났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잠시 후에 출발하니까 호위무사들은 소속 마차로 합류하시오!” 고개를 돌리니 13번 마차의 세이라가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있었다. 다됐군. 난 그들에게 가려다가 첼시아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마차로 안 돌아가?” “아, 우리 마차는 저기 있어.” 뒤를 돌아보니 14번 마차의 사내들이 첼시아를 부르고 있었다. “첼시아 씨! 준비됐습니다!” “가요~! 그럼 나중에 또 봐.” “별로 보고 싶지 않아.” 첼시아는 호호 웃으며 마차로 돌아갔다. 예의바른 퍼피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우리들도 소속마차로 향했다. 잠시 후 상단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상당히 몸이 좋은 조합원들을 데리고 인원점검을 하러왔다. 거친 턱수염과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매를 가진 50대의 사내는 탄탄한 체구를 살짝 숙이며 의례적으로 말했다. “이번 상단 운송의 책임자인 루노 파라디온입니다.” “호위무사 콜트 슈발츠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예절에는 예절이다. 루노 씨는 세이라에게 몇 가지 보고를 듣고는 몸을 돌리다가 스피릿을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살짝 일그러졌다. “당신의 노예입니까?” “그렇습니다만?” 그의 시선이 무서운지 스피릿은 내 뒤로 숨었다. “아름다운 노예군요. 조심하시오.” 루노 씨는 그 말을 남기고 사내들과 함께 14번 마차로 향했다. 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인 다음 스피릿을 불렀다. “이거 받아. 맘에 안드는 놈이 있으면 쑤셔버려.” “예?!” 세이라와 남자들이 피식 웃었다. 난 그녀에게 인체의 급소를 가르쳐주며 찌르는 방법까지 소상히 알려주었다. “싫어요. 이런 거, 주인님이 지켜주시면 돼잖아요?” “지켜주지 못할 때도 있을 거야. 결국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되는 거라구. 그리고 입장을 바꿔서 네가 나를 지켜줄 수도 있고 말야. 저 퍼피를 봐. 저 녀석은 자기 주인보다 실력이 더 좋아. 그래서 자기 주인을 지켜주지. 하지만 네게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스피릿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것을 두 손으로 잡고 날 올려다보았다. 난 그녀의 귀밑머리카락을 만지며 씩 웃었다. “좋은 강철로 만든 거라 요리재료 다듬는 거에서부터 널 덮치려는 놈의 배떼지를 쑤시는 용도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을거야. 뽑아볼래?” 스피릿은 엉성하게 칼자루를 잡고 뽑았다. 늘씬하고도 그로데스크 한 물결무뉘 칼날이 아침햇살에 부딛혀 반짝였다. 주문 제작한 거라 칼날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믿음, 이제는 사라진 그 어떤 것을 위하여. 떱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보던 스피릿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 만들지 않으셔도 되는데.”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런 거 밖에는 안 떠오르더라. 그냥 부담 갖지 말고 가져버려.” 그제서야 스피릿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때를 같이하여 출발준비 신호가 울려 퍼졌고 나와 스피릿은 말에 올랐다. 잠시 후 상단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쪽하늘에서는 완전히 떠오른 태양이 우리들을 배웅했다. 워낙 규모가 크다보니 상단은 그렇게 빠른 속도를 내지 못했다. 겨우 말의 속도로 트롯 정도일까? 아무리 빨라도 캔터를 넘지 않는다. 으아~ 지루해! 샤먼을 떠나온지 반나절이 조금 넘게 지났다. 점심식사를 위해 멈춰선 곳은 에레파인 고개 아래로, 얼마 전에 늑대인간을 잡은 곳이었다. 점심은 상단에서 나눠준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저녁부터는 마른 음식으로 때우거나 아니면 직접 해먹어야한다. 여행이 다 그렇지 뭐. 13번 마차의 상단대원들과 호위무사가 돈독한 우정을 쌓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데 일단의 사내들이 끼어 들었다. “여기 콜트 슈발츠씨 계십니까?” 스피릿이 내미는 물 컵을 받아 마시고 있는데 다들 몸이 좋은 사내들이 우리 주변을 애워 싸고는 날 찾았다. 인상을 찌뿌린 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난데.” 아, 그러십니까? 로 인사말을 대신한 사내들은 어떻게 늑대인간을 잡았는지에 대해 질문을 해댔다. 난 대답대신에 손을 들어 숲속을 갈켰다. “이 안쪽으로 10분 정도 들어가면 구덩이를 판 곳이 있을거요. 정 궁금하면 그거라도 보던가.” 사내들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숲으로 달려들어갔다. “점심시간은 1시간뿐일텐데. 힘들지도 않은가 봐요?” 스피릿이 말했다. 난 웃으며 마저 도시락을 비웠다. “남의 기술을 자기 걸로 만드는 건 어려운 거야.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게 이 바닥이거든? 그럼 점에서 저 사람들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있지. 별로 나쁘지는 않아. 나도 그랬으니까.” “슈발츠 씨 도요?” 내가 있는 13번 마차의 상단대원 중에서 가장 젊은 슈니르가 끼어 들었다. 아무리 봐도 20살로는 보이지 않는다. 잘 쳐봐야 19살? “물론, 난 20살까지 아는 사냥꾼을 따라다녔거든? 그래서 모자란 실력이나마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거지. 탱자탱자 놀면서 모험가 면허증도 없이 모험가라고 으스대는 놈들하고는 비교하지 말아 줘.” 잠자코 듣고 있던 세리아가 끼어 들었다. “모험가 면허증? 그런 것도 있어요?” “이래뵈도 국가고시 자격증입니다. 왕도 캘버린에서 매년 가을마다 치지요.” “쉬워요? 그거?” 슈니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도시락을 다 비운 나는 스피릿이 내미는 물컵을 받아 죽 들이킨 다음 말했다. “어려워. 보통 사람은 힘들지. 그리고 따고 나서도 별로 혜택은 없어. 있으나마나지만 길드에서 이걸로 용병과 모험가를 구분하니까 합법적인 모험가로 있으려면 꼭 따야돼.”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꼭 나오게 마련이다. 스피릿이 살그머니 내 귀에 대고 물었다. “그게 뭐가 달라요?” 나도 살그머니 그녀의 귀에 대고 대답해주었다. “용병은 돈만 주면 뭐든지 해. 살인이든 납치든, 또 그런 사람들은 대게 거칠어서 의뢰인과 마찰이 많아. 하지만 모험가는 합법적인거라 그런 게 없고 실력이 좋으면 나처럼 경력이 적어도 쉽게 인정을 받을 수 있지. 간단하게 말하면 용병은 불법. 모험가는 합법. 알아들어?” “오, 아, 응.” 귓속말을 들은 스피릿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세이라가 말했다. “굉장히 사이가 좋은 노예와 주인님이군요? 남매 같아요.” “다른 사람은 어떤데?” 세이라는 인상을 살짝 지뿌리며 말했다. “뭐, 대부분 비슷비슷하죠. 강요와 순종의 표본이라고 할까?” 그렇게 말하며 세이라가 가르킨 것은 근처에서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9번 마차였다. 휴거가 그곳에 있었는데. 사내들 사이로 루시아가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것도 보였다. 재미있는 건 그녀가 돌 때마다 옷가지가 하나씩 벗겨진다는 거다. 난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너도 저렇게 출 수 있어?” 슈니르와 세이라에게 냉차를 따라주고 있던 스피릿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전 한 사람하고만 춤춰요. 절 아껴주는 사람하고만.” 약간 감동이다. 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스피릿 뽀뽀?” “…참아주세요.” 옆에서 지켜보던 세이라와 슈니르가 깔깔 웃어댔다. 그때 9번 마차에서 휴거 녀석이 손을 흔들어댔다. 놀러 오라는 거였다. 난 점잖게 무시했고 잠시 후 그들에겐 상단 책임자인 루노씨의 훈계가 떨어졌다. 워낙 인상이 차갑고 고지식해서 그런지 용병들도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한다. 어쨌든 휴식 시간이 끝나고 상단은 에레파인 고개를 넘어 국경 수비대로 향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출국심사를 받아야했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하루를 묶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게 됐다. 한참 맛있게 자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보다 육체가 반응했다. 순간적으로 눈이 떠진 것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상단대원들이었다. “1시간 뒤에 출발입니다. 일어나십시오.” 나를 포함한 몇몇 사내들이 발딱발딱 일어났다. 담요를 대충 감은 나는 그것을 등에 매고 문을 나섰다. 국경수비대에서는 손님이라고 봐주는 게 없었다. 군대의 그것과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사내들은 하나 같이 방을 나서며 한마디씩 불평을 토했지만 우리가 자는 동안 불침번을 서 주었던 경비병은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민간인들이 뭘 알겠냐 이거지? 칫, 할말은 없다. 어쨌든 마굿간으로 가서 말을 찾아 모포를 올린 나는 마당으로 나갔다. 슬슬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운동대신으로 가슴을 쫙 펴고 목을 좌우로 흔들고 있는데 하품을 하며 마차를 살피러 가는 세이라가 보였다. 아, 그렇지. 스피릿을 깜박했다. 다시 수비대 건물로 들어간 나는 어제 저녁 수비대장이 불미스러운 사태를 방지한다는 명목아래 반강제적으로 여자들만 다른 방으로 격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첼시아나 세리아는 모르지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없는 스피릿 같은 노예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주인이 직접 찾으러 가야한다. 노예의 특권과 주인의 의무 같은 거랄까? “성함이?” “콜트 슈발츠입니다. 스피릿이라고 하는 회색머리 노예의 주인인데요.” 여자들이 지내는 방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몇 개의 침대가 놓여져 있고 여자들이 앉아있거나 했다. 그때 왠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스피릿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달려왔다. “주인님!” “어, 잘 잤어? 그런데 당신 뭐야?” 휴거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느끼하니 웃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루시아를 데리러 와보니 널 기다리고 있더군. 그래서 찾으러 올 동안 내가 지켜주고 있었어. 참, 저번에 내가 한 이야기 생각해봤나? 루시아도 널 맘에 들어하는 눈치던데.” 고개를 돌려 침대에 잠시 앉아있는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의식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저게 날 맘에 들어하는 눈치냐? 그때 마치 돌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의외로 굉장히 아름다운 음성이다. 스피릿도 놀라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대사는 별로 아름답지 못했다. “하룻밤 모시도록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다음 기회에.” 난 스피릿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등뒤에서 휴거 녀석의 조소가 들려왔지만 대꾸를 해주기엔 내 자신이 너무 못나게 느껴졌다. 마당으로 나온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젠장. 하마터면 그렇게 하자고 말해 버릴 뻔했어. 나도 아직 멀은 것 같지?”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그럼 그걸로 된거에요.” 무릎을 짚고 바닥을 내려다보던 나는 허리를 펴고 그녀의 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주인님 위로도 할 줄 알고 우리 스피릿 다 컷네.” “…주인님.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요.” “볼 테면 보라지.” 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서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스피릿은 내 허리를 붙잡고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정말 행운이에요. 주인님 같은 분을 만나서.” “에이. 쑥스럽게 무슨 소리야.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주변에서는 많은 사내들이 부러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예쁘지? 귀엽지? 아름답지? 자그만치 9천 900만 짜리야! 국경수비대 취사병의 만행이라고 불러도 좋을 몰지각한 군용식사를 맛본 우리는 마차의 짐이 확인되는 대로 곧 출발했다. Running Fire: 08 “마음씨 좋은 주인님이네?” 다각다각…. 덜커덜컹~! “여기서부터 캐슬린인가? 세이라. 마을은 얼마나 더 가야합니까?” “가장 가까운 국경 도시까지는 이틀이 더 걸려요. 아마도 캐슬린 국경수비대에서도 하루 묶어 가야할걸요?” 긴 마차 행렬을 따라 말을 몰아가던 나는 세이라의 말을 듣고 절망했다. 지겹다. 정말 지겹다. 이래서 내가 호위무사를 싫어했던 거야. 외국으로 나왔다는 사실로 이 지겨움을 좀 타파하려했지만 초원의 나라 캐슬린에는 그 말대로 드넓은 초원과 산이 있을 뿐 우리나라와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내가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조금만 참아보세요. 마을에 도착하면 생각이 좀 달라지실 거예요. 일단 건축양식도 다르니까.” 뒤에 앉아있는 스피릿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앞쪽에서 난데없이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루시아의 노래였다. 흥겨운 곡은 아니지만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축 쳐진 기분이 좀 살아나는 것 같다. “상당히 잘 부르는데?” “기분이 좋아지는 게 프리스티스의 사이렌을 듣고 있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프리스티스 중에는 특별히 성음이라고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말 그대로 그녀들의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데. 그것도 아무노래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신전에서 특별히 작곡한 곡이어야 성음이 그 힘을 발휘한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거나 혹은 상처 입은 사람의 심신을 달래는데 사용되는 곡들이 대표적이며 그런 종류의 노래를 사이렌이라 부른다. 연달아 두어곡이 부르자 루시아도 지쳤는지 더 이상 노래는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가 아쉬워하며 다시 느릿하고 꿋꿋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안에 마을에 들릴 수 있을까? 심심한데 만만한 도적 떼라도 안 달려드나? 그런 잡생각을 하며 말을 몰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노랫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청난 성량이다! 깜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탠덤시트에서 일어난 스피릿이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굉장한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뭐라고 말을 하려 했던 나는 그녀의 노래에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뭐, 뭐야? 이거? 말들도 거친 투레질을 하며 속도를 높여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맑으면서도 힘이 있는 그녀의 노래는 잠시 후에 그쳤다. 스피릿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와중에 두 아가씨의 노래로 분기탱천한 80여명의 상단대원들이 목소리를 합쳐서 흥겨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 머리에 쓰고 있던 손수건을 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뭘 한 거야?” “저도 노래 잘 부른다는 거 주인님에게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아니, 그래도 이 노래는?” 스피릿은 들켰다는 듯이 혀를 살짝 빼물고는 말했다. “어렸을 때 신전에 자주 들렸는데 거기서 사이렌을 몇 곡 배웠어요. 방금 전에 곡은 군대에서 쓰는 진군가와 비슷한 거예요. 어때요? 막 힘이 나지 않으세요?” 난 입을 딱 벌리고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스피릿 대단해. 싸움말고는 못하는 게 없구나.”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싱긋 웃었다. 상단조합원의 합창을 들으며 걸어간 우리는 그 날 저녁 야영을 결정하고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자리를 잡았다. 워낙 대규모 인원이라 야영자리 찾기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짐마차를 동그랗게 만들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외부침입에 방비를 한 우리들은 각 마차 별로 저녁 식사를 하고 야영지 주변의 일대를 한번씩 돌아본 다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가을이라 해도 빨리 지고 노상이라 별로 놀 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동그란 마차열의 중앙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타고 있고 불침번들과 함께 일찍 잠이 오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도 별로 잠은 오지 않았지만 재수없게 새벽에 불침번이 있는 관계로 마차바퀴에 기댄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머 보기 좋아라.” “방해하지 말고 가서 디비져자.” 지나가던 첼시아가 우리 모습을 보며 한 말이었다. 그녀는 뒤에 서있는 퍼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퍼피이~ 우리도 저렇게 자볼까? 굉장히 편할 것 같은데.” “사람들이 마스터를 이상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노예….” “노예를 침대로 쓰겠다는데 뭔 상관이야? 이리와.” 첼시아는 퍼피의 손을 잡아끌고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다. 시끄러움이 사라지자 난 고개를 숙여 보았다. 낮에 노래를 부르느라 지쳤는지 스피릿은 지금 내 가슴에 안겨서 곤히 잠들어있다. 주인님을 침대로 쓰는 몰상식한 노예지만 오늘은 봐주기로 할까? 난 숨이 쉬어지지 않아 볼을 부풀리는 그녀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코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일어나요. 콜트 씨. 콜트 씨.” “어, 응?” 눈을 뜨자 12번 마차의 상단대원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며주며 말했다. “새벽 2시부터 3시까지 한시간 불침번입니다. 주변 순찰 잘하시고 수고하십시오.” “아으으…. 알았수.” 난 아직도 내 위에서 자고있는 스피릿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혀준 다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이라와 슈니르는 이미 일어나서 중앙의 모닥불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노예아가씨는?” “내버려둬요. 좀 더 자게.” 무장을 챙기며 말했다. 세이라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마음씨 좋은 주인님이네?” “그래서 스피릿이 날 좋아하나 봐.” 자동석궁을 등에 맨 나는 모닥불가로 가서 불을 좀 쬔 다음 두 사람에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찰을 좀 돌고 오리다. 무슨 일 생기면 큰 소리를 질러요.” “조심해요.”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모포를 덥고 바닥에 누워 잠들어있는 스피릿을 좀 살펴 본 다음 마차를 넘어 보름달빛에 비춰진 아름다운 초원의 모습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굉장한걸? 그랜퍼스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야. 그때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분 좋은걸? 이국적인 모습이란게 이런거구나. 고개를 끄덕인 나는 주머니에서 검은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썼다. 머리카락이 날리는 기분도 좋지만. 버릇이 돼서리. 그대로 소리 없이 걸으며 마차를 한바퀴 돌아본 나는 좀 멀리까지 나가보았다. 초원이라 그런지 몬스터의 낌새는 없었다. 늑대 몇 마리가 왔다갔다하는 정도일까? 돌을 던져 녀석들을 쫓아버린 나는 이제 야영중인 상단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조용히 걸었다. 그냥 산책하면서 걸었다가는 혹시 숨어있는 놈들에게 들킨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한 10분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숨어가며 움직이던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신음소리? 누가 있나? 몸을 숙이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간 나는 점차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신음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여자들뿐이기 때문이다. 아, 제기 뭐야? 복잡한 상상을 하며 나무그림자에 선 나는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스르르릉. 저번에 늑대인간을 잡기 위해 은도금을 한 롱소드다. 달빛에 비치는 검광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난 그 차가운 칼날에 후끈한 볼을 가져다댔다. 눈앞의 광경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하아~ 아, 아아! 아앙~!” “빨리 해. 다음은 나야.” “다, 닥. 쳐. 으, 으윽~!” “킥킥킥, 토끼냐? 빠른데?” 저속한 농담이 오고 갔다. 이게 뭔 상황이지? 달빛에 검광이 비치는데도 놈들은 신경도 안 쓰고 있다. 그래서 결국 직접 나서기로 했다. “달빛 한번 휘엉청 밝구나. 어? 당신들 누구야?!” 난 한 손에 검을 그리고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들었다. …쏴버리고 모른 척 할까? 그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는 척을 해봤다. “어어, 쏘지마 나야. 나. 휴거.” 씹새끼. 그래 넌 줄 알았다. 난 석궁을 다시 등에 매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칼은 집어넣지 않았다. “안자고 여기서 뭐 하는거요?” “아, 잠이 안와서 말야. 친구들이랑 같이 달구경 나왔지.” 이게 달구경이냐? 난 다리를 벌린 채 모포를 깐 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옷은 찢어버렸는지 완전 넝마조각이다. 난 휴거와 너댓명의 사내들을 바라보며 씹어서 뱉듯이 말했다. “요새 달구경은 계집애를 엎어놓고 하는가보지?” “색다른 경험이지 자네도 낄 텐가?” 방금 말을 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복장을 보니 상단대원이다. “…나잇살이나 처먹고 딸 같은 계집 데리고 놀면 재미있냐?” 그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달빛 때문에 눈에서 불이 쏟아지는 게 잘 안보일텐데 밤눈이 좋은가보군. 칼을 아래로 내린 나는 찢겨진 옷 조각을 걸어서 루시아의 다리를 가려주고 다시 칼을 올렸다. 그리고 휴거를 쳐다보았다. 녀석의 목에는 은도금 롱소드가 들이밀어졌다. “왜, 왜 이러는 거야?” “그래, 물론 네 녀석이 네 노예를 가지고 뭔 짓을 하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냐. 하지만 말야. 데리고 자려거든 여관이나 뭐 그런데서 분위기 좀 잡고 거짓말이라도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안아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이게 뭐야? 남들 다 보는 노상에서, 그것도 다른 놈들까지 끌어들여서 꼭 이래야 했어? 혼자 하려니까 겁이나디? 그래서 자는 사람 깨워서 데리고 간 거야? 아니면 여럿이서 한 여자 강간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가? 음, 이 찢어진 옷가지로 볼 때 후자에 가능성이 많은 것 같군. 하지만 아무리해도 내 상식으로 이건 좀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 부탁인데 날 이해시켜 주겠어? 아앙?” 롱소드를 슬쩍 움직였다. 녀석의 목에서 피가 스르륵 나왔다. 휴거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혀, 협박당했어.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다.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하는거야? 주변의 사내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난 칼을 내려 그의 반쯤 열려있는 셔츠와 풀려있는 벨트를 툭툭 건드렸다. “그럼 이건 왜 풀린거야? 이것도 협박당해서?” “그, 그래.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갑자기 머리가 띵해진다. 난 칼을 쳐들었다. “씹새끼. 협박당했다고?! 지랄하지마! 지켜줬어야지! 네 놈의 노예잖아! 너만 바라보는 노예잖아! 그럼 주인으로 지켜줘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이 쓰레기 같은 놈! 그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한번 보자!” 이런 놈은 살려둘 수 없다. 입이야 돈으로 막아버리면 돼! 사람하나 묻어버리기로 작정한 나는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러다가 중간에 멈추고 말했다. 넝마조각으로 몸을 가린 루시아가 휴거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다. “…주인이나 노예나 다 미쳤구나.” 검을 든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다가 몸을 돌려 여행지로 행했다. 제기랄! 이 딴 3류 소설 같은 이야기는 정말 싫어! 야영지 도착해서 얼굴을 잔뜩 찌뿌리고 모닦불을 노려보고 있는데 휴거 일행이 슬그머니 돌아왔다. 난 그들을 무시해버렸다. 불침번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스피릿을 바라보며 아까의 일들을 생각했다. 얼굴이 후끈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주인님 안녕히… 아? 주인님 눈이 빨개요?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밤을 좀 샜더니 그런가보다.” 호들갑을 떠는 스피릿에게 대충 둘러준 나는 9번 마차를 쳐다보았다. 루시아와 휴거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짐을 정리하고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한 신을 저주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 일이 있고 대략 3일이 지났다. 우리는 캐슬린의 국경을 넘어 외곽 국경도시인 체이스 라는 곳에서 하루를 머무르게 되었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 따로 호위무사들을 불러서 이 나라에 있으면서 주의해야 할 것을 알려주던 루노 씨는 마지막으로 이제부터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에 좀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노상강도나 산적들이 출몰할지 모르기 때문에 만반의 태세를 기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캐슬린의 도시는 건축양식이 다르다는 스피릿의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우리네 나라의 집들의 지붕이 빗물이 잘 흐르도록 경사를 주는 것과는 다르게 이 나라는 그냥 평면이었다. 그래서 옥상이라는 개념이 일반 가옥에 적용되어 있었다. 커다란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신전이나 커다란 저택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가옥들의 지붕이 평면으로 되어있었다. “옥상이라. 신기하네. 어? 저건 뭐야?” “아, 저건 각 도시의 시청이 있는 곳에 세우는 관측대에요. 도시에 불이 나거나 혹은 마을로 접근하는 적군의 침입을 살피기 위해 세워놓은 거예요. 꽤 높죠?” 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것저것을 물어댔다. 스피릿은 친절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세이라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아? 여기 온 적 있어?” “제 고향이 캐슬린 이거든요.” 세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의 복장도 신기하여 정신 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약간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못 알아듣겠네.” “여기는 외국이라서 사용하는 말이 달라요. 지금 저 사람들은 오랜만에 상단이 들어왔다면서 신기해하고 있는 거구요.” “저걸 알아 듣거야?! 아, 스피릿 여기가 고향이라고 했지?”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였고 난 매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허리와 목이 좀 아팠다. 상단의 마차를 마을의 광장에 주차시킨 우리는 미리 연락이 되어있었는지 마중을 나온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여관 같은 곳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아무래도 여관 몇 개를 통째로 빌린 모양이다. 그리고 나와 스피릿이 안내되어진 곳은… “또 1인실이야? 이거 왜 이래!” “누쉬 이라마 호루쉬? 네하라 슈크라. 네라크 누로이스 도나미안 네하르.” 연신 솰라솰라 거리는 점원을 인상을 찌뿌리며 노려보던 나는 울상을 지으며 짐 정리를 하고있는 스피릿을 불렀다. “스피릿~! 이 사람이 나 괴롭혀!” 얼른 달려온 스피릿은 옅게 웃으며 그 점원과 같이 솰라솰라 거리더니 그를 돌려보내고 문을 닫았다. “연인 사이인줄 알고 1인 실을 준비했다고 하는군요. 방을 바꿔 드릴까요 라고 묻기에 괜찮다고 말해줬어요.” 난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너의 소중함을 깨달았어. 한동안 내가 많이 속썩였지? 용서해줘, 앞으로는 더 잘해줄게.” 스피릿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작게 웃음 짓다가 내게서 떨어져서 마저 짐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더니 말했다. “주인님. 자유시간은 있다고 해요?” “응. 저녁 먹기 전 까지 하고 싶은 거 하라더군.” “그럼 우리 목욕가요!” “목욕?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꽤 꽉 들어차 있을걸?” “아뇨. 캐슬린에는 공중 목욕탕이라는 게 있어요. 거기가면 자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가요!” 아까 대충 씻고 온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려다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면 스피릿이 슬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릿을 데리고 공중 목욕탕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이 내가 가진 돈도 여기서 사용할 수 있었다. 스피릿의 도움을 받아 값을 지불하고 욕탕으로 들어간 나는 이상한 문자가 씌여진 두 개의 문을 발견했다. “뭐야 이거?” 그렇게 말하며 오른 쪽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굉장한 구경을 했다. “꺄악! 헤레인테이!” “주인님!!” “우왁?!” 스피릿이 구하러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화가 난 처녀들의 손에 의해 얼굴에 밭고랑이 날 뻔했다. …하지만 좋은 구경이었어. 캐슬린 처녀들은 다들 몸매가 좋은 걸? 스피릿은 욕탕 안의 아가씨들에게 사과를 한 다음 다시 나와서 나에게 설명했다. “여기 씌인 글은 남, 여, 라고 하는 거에요. 조심하세요.” “응응응~.” 고개를 끄덕인 나는 왼쪽의 문을 가르켰다. “난 여기 들어가면 되는 거야?” “예. 깨끗이 씻으세요.” 스피릿은 고개를 꾸벅이며 여탕으로 들어가려 했다. 난 못내 아쉬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스피릿이 고개를 갸웃하며 날 쳐다보았다. “연인들끼리 들어가는 곳은 없어? 혼탕이라든가?” “…없어요.”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팩 돌린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탕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킥킥 웃은 나는 남탕으로 들어가 탈의실의 바구니에 옷을 벗어두고 여닫이문을 열었다. 촤아악! 촤악! 물 붓는 소리가 들리고 몇몇의 사내들이 커다란! -내 평생 그렇게 커다란 목욕물통은 처음 봤다!- 탕 안에 함께 들어가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오, 같이 들어가는 건가? 기분이 좀 묘하긴 하지만 아픈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난 뜨거운 물이 계속 나오는 수도꼭지를 마냥 신기한 듯이 쳐다보다가 그것으로 대충 씻은 다음 탕 안을 들어갔다. 뜨듯한 기운이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기분 좋은데? 느긋하게 탕안에 다리를 펴고 앉아 있으려니 어디서 안면이 있는 사람이 탕안으로 들어왔다. “퍼피?” “콜트 님?” 퍼피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더니 탕안에 앉았다. 난 그에게 물었다. “널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잠깐. 그럼 첼시아도 온거야?” “예. 마스터도 함께 오셨습니다.” 제기, 또 스피릿이 울면서 안기겠군. “아아앙! 주인님! 흐아앙! 첼시아 씨가 제 엉덩이 만졌어요!”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과 얼굴을 하고 나에게 안겨드는 스피릿의 등을 톡탁여준 나는 분노의 시선으로 첼시아를 노려보았다. “넌 뭔데 내가 건드리지도 않은 걸 계속 건드리는 거야?!” “순수한 관찰자의 입장으로서 호기심이 동했을 뿐이야.” “무슨 호기심이길레 여자애 가슴이랑 엉덩이를 더듬는 거야?! 이 변태!” 첼시아는 호호호 하고 웃더니 퍼피를 가르켰다. “그럼 너도 우리 퍼피 가슴 만질래?” “…기분 나쁜 소리 그만해. 언젠가 이 복수는 하고 말거야. 알겠어?!” 그녀는 퍼피를 데리고 목욕탕을 나서며 말했다. “기다릴테니 언제든지 덤벼.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저게…!” 첼시아는 깔깔 웃으며 걸어가 버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난 여자는 잘 못 때려.” “으으응. 훌쩍, 괜찮아요.”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며 다시금 복수를 다짐한 나는 일단 저기압인 스피릿부터 달래기 위해 가까운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하지만 난 이곳의 말을 할 줄 몰랐다. “…스피릿 이 사람이 나 괴롭혀.” 내 말에 스피릿은 결국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녀의 도움으로 캐슬린의 전통음식을 맛본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도시 관광을 다니다가 저녁시간이 지나서야 여관으로 돌아갔다. 내일 아침 기상시간과 출발 시간을 들은 우리는 지루한 여행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나라 여관의 1인실 침대보다 좀 좁긴 했지만 그럭저럭 오랜만에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막상 잠을 자려고 하니 사방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려오는 거다. 갑자기 아까 낮에 여관 홀에서 상단사람들과 몇몇여자들이 흥정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게다가 나도 사내인지라 가슴에 안겨서 잠을 청하고 있는 스피릿을 보고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스피릿, 키스해 줘.” “예.”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든 스피릿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을 맞춰왔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옆자리에 누워있는 스피릿을 보았다. 뽀얀 피부와 하얗고 예쁜 가슴이 보인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담요를 걷어보았다. 다행히 잠옷바지는 입고 있다. 침대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은 나는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를 저주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사고 치겠다! 격리수용이 필요해! 그러고 있는데 스피릿이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더니 약간 발게진 얼굴로 아침인사를 건냈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으, 응.” 그렇게 말하며 스피릿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침대에 앉은 채 말했다. “스피릿, 미안해….” “예? 아뇨. 괜찮아요. 제 주인님이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옷을 입고 짐을 챙기는 그녀였지만 난 용납할 수 없었다. 제미니와의 약속을 지켜야해. 그럴러면 스피릿을 온전한 상태(?)로 정리해야 한다. 한숨을 크게 들이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가지 다짐을 했다. 앞으로 그녀에게 키스 같은 건 요구하지 않기로, …이것도 얼마나 갈까 의문이지만, 하는데 까지는 해보고 싶다. 제미니 미안해! “주인님 왜 그러세요?” “응? 아, 아무것도 아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출발 준비로 여관은 시끌벅적했다. 식당이 작은 관계로 아침을 먹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는 것을 빼면 우리는 그럭저럭 제 시간에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광장의 마차들이 출발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출발한 우리들은 체이스의 성문을 넘어 광활한 농지를 지나 아무것도 없는 산과 초원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몬스터들 때문에 마을 근처의 땅을 제외하고는 농지경작이 힘든 게 지금 우리네 현실이다. 상단의 마차를 따라 가는 도중에 스피릿에게 물었다. “여기도 몬스터가 많아?” “예.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초원의 나라다 보니 꽤 많다고 해요. 그리고 도적 떼도 많구요.” “여행자를 노리는 건가?” “그런거죠.” 반나절을 걸은 상단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자리에 멈춰섰다. “이대로 1시간 휴식!” “이대로 1시간 휴식!” “이대로 1시간 휴식!” 각 마차의 조장들이 선두마차의 호령을 따라하며 마차를 정지시켰다. 우리마차의 조장은 세이라.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고는 마차를 세우고 곧바로 점심 준비를 시작했다. “도시락이군.” “마른 음식보다는 났잖아요?” “하긴.” 고개를 끄덕인 난 여관에서 싸준 도시락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입안에 쓸어 넣기 시작했다. 스피릿도 옆에 앉아서 야금야금 도시락을 먹어댔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마차아래나 위로 올라가 남은 시간동안 좀 졸기로 했다. 풀 바닥에 드러누워 자려는데 스피릿이 우물쭈물하며 옆에 앉는 게 보였다. “왜?” “…화장실 가고 싶어요오.” “가.” “주인니임~!” “아~ 알았어. 알았어.”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상단에서 멀어졌다. 다행이 가까운 곳에 숲이 보였다. 스피릿은 덤불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고 난 팔짱을 한 채 기다려주었다. 요 근래 들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녀는 이럴 때마다 내 손을 잡아당기곤 한다. 솔직히 귀찮기는 했지만 여긴 변태들이 많기 때문에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시원한 나무 그들에 앉아있으려니 스피릿이 후다닥 나왔다. “기다리셨죠. 매번 죄송해요.” “괜찮아. 예쁜 노예를 가진 주인의 의무랄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상단으로 향했다. 스피릿은 얼른 다가오더니 나와 팔짱을 했다. 베시시 웃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피릿, 시원해?” 스피릿은 살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아무리 얕은 농담을 하고 짓궂은 장난을 치더라도 스피릿은 절대로 그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가끔 내 장난에 휘말려 꺅꺅거리긴 해도 조금만 지나면 금세 조용해졌고 전날 밤 키스와 애무로 거의 정신이 녹아버렸을 때도 그녀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을 넘지 않을 수 있었던 거고, 잘은 모르겠지만 타고난 성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전직 귀족이기 때문 일까나? 무표정하게 숲 속을 걷던 그녀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응? 아냐. 스피릿이 너무 예뻐서.” “아이~ 주인님도.” 스피릿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씩 웃어주며 나무 사이를 지나 상단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여어. 콜트.” “휴거냐?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여기서 뭘 하냐? 예쁜 노예까지 데리고 말야. 혹시…?” “닥쳐. 날 너희들과 비교하지마. 스피릿. 가자.” “예, 예에.” 스피릿은 내 팔을 꽉 붙잡으며 바싹 달라붙었다. 나무 그늘을 찾아왔었던 건지 모르지만 휴거와 녀석들의 패거리는 상단이 보이는 나무 그늘에 앉아서 카드를 돌리고 있었다. 제기, 재수도 없구만. 힐끔 보니 그들 사이에 루시아도 끼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인사성은 밝은 아이야. 난 스피릿은 데리고 상단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어떤 놈이 스피릿의 다리를 걸었다. “아악!?” “헤헤헤, 비명소리가 듣기 좋은데? 이봐 형씨. 얼마면 되겠어?” 얼른 스피릿을 일으켜 세우던 나는 그녀를 부축하다 말고 인상을 구겼다. “뭐?” “하룻밤에 얼마야? 이쪽은 10만 루나거든? 그쪽은 상당히 예쁘니까 20만 정도면 될까?” 오호라~! 고개를 돌려 휴거 놈을 노려보았다. 녀석은 씩 웃고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칼을 차고 있다. 자신 있다 이거냐? 스피릿을 뒤로 물러서게 한 나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앉아있는 녀석들을 쳐다보았다. “난 누구처럼 푼돈에 노예를 팔아서 용돈을 버는 사람이 아냐. 욕구불만이라면 오른손과 상담하시지.” 오른손을 들고 멍청한 표정을 하던 사내는 한참 후 이해가 됐는지 킥킥 웃기 시작했다. 버 러지 같은 놈! 지금 내가 도발한 거라구! 그런데 웃어?! 휴거가 말했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 묻자. 그럼 얼마면 되겠어? 100만, 200만?”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관심 없다는 투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휴거를 쳐다보았다. “네놈 목숨을 어떨까?” “…이 새끼가.” “닥쳐, 염병할 자식. 놀음판에 걸 돈이 있으면 노예 옷이나 한 벌 사줘라.” 말을 끝마친 나는 스피릿을 데리고 상단으로 돌아갔다. 잠시 쉬고 있으려니 휴거와 패거리들이 날 노려보며 상단으로 복귀했다. 나도 녀석들을 노려봐 주었다. 스피릿은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울상을 지었다. 상단은 다시 출발했다. 스피릿을 뒤에 태운 나는 오후 동안 상단을 따라 달리다가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마차를 몰던 슈니르가 말했다. “콜트. 스피릿을 20만 루나에 판다는 게 정말이에요?” “뭐?” “슈니르!” 세이라가 말렸지만 난 슈니르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아까 점심시간 때부터 소문이 쫙 퍼졌요. 콜트 씨가 데리고 있는 미인노예를 하룻밤에 20만 루나에 판다는.” “휴거, 이 새끼!” “주인님! 참으세요! 안돼요! 지금은 여행중이라구요!” 뒤에 앉은 스피릿이 날 말렸다. 게다가 잠자코 듣고 있던 세이라도 날 말렸다. 하지만 난 무시하고 9번 마차로 돌격을 감행했고 세이라는 밧줄을 꺼내더니 내 말의 목으로 올가미를 던졌다. 귀신같은 솜씨다. “이힝힝힝~!” 깜짝 놀란 말이 상체를 들어올렸다. 겨우 녀석을 진정시킨 나는 세이라에게 외쳤다. “무슨 짓입니까?!” “참아요! 지금 여행중이라는 소리 못 들었어요? 사소한 싸움으로 대열이 흐트러지면 안된다구요! 당신은 우리 호위무사라는 걸 잊지 마세요!” “에이! 빌어먹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등뒤에서 스피릿이 모기 만한 목소리로 참으세요. 참으세요.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난 보복을 다짐했다. 이 자식이 일부러 그랬어! 한참을 벼르고 있는 동안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왔다. 덩달아 상단도 다시 야영을 시작했다. 식사 도중에 남은 여정에 대하여 질문하자 세이라는 목적지까지 이틀은 더 가야 한다고 귀뜸해 주었다. 스피릿이 끓인 건어물 스프를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세이라에게서 고개를 돌려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기사는 상대에게 물을 끼얹으면서 결투를 신청하는데 캐슬린의 기사는 어떤 식으로 결투를 신청하지?” 갑자기 화목하던 식사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세이라는 대놓고 말리기 시작했고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난 그녀에게 계속 질문했다. 고개를 푹 숙인 스피릿은 결국 내 질문에 대답했다. “…장갑으로 상대의 뺨을 때려요.” “그거 맘에 드는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무장은 한 상태로 9번 마차로 향했다. “주인님! 어디가세요?!” “복수하러. 세이라. 좋은 구경시켜 줄테니 이 녀석 좀 맡아줘요.” 난 스피릿을 세이라에게 맡겨두고 9번 마차로 향했다. 세이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젖고 있었다. 야영 때면 항상 마차를 동그랗게 만들어 세우기 때문에 저쪽에서도 내가 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식사 도중이던 휴거 놈에게 걸어간 나는 캐슬린 기사 식을 따르기로 했다. “야, 휴거 새꺄.” “뭐야?” “네놈이 소문 퍼트렸지? 스피릿 20만 루나에 판다고.” “허어~ 증거 있나? 그리고 말인데. 아직 한참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에게 그렇게 버릇없이 구는 거 아냐. 나 너보다 나이 많다구?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라. 염병할 꼬마 놈아.” “지랄하네. 나잇살 많이 처먹은게 대수냐? 일어나 새꺄.” 이마를 찌뿌린 휴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에서 보니 놈은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좀 컸다. 하지만 늑대인간보다는 작다. 손에 끼고 있던 강철 건틀린을 벗은 나는 그것으로 녀석의 뺨을 후려갈겼다. 퍽! 놈은 턱이 돌아갔다. 고개를 돌리고 턱을 좀 만져보던 휴거는 화가 났는지 다짜고짜 칼을 뽑으려 했고 어느새 주변에 있던 상단대원들이 달려와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면서 히히덕거렸다. “캐슬린 기사 식으로,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씨발 새끼! 지랄하네. 아주 요절을 내주마.” 스르릉! 나도 검을 뽑았다. 주변의 사내들은 자리를 피했다. 총총거리며 달려가는 루시아를 쳐다보던 나는 검을 바로 세우고 녀석의 심장을 노렸다. 막 둘이 맞붙으려 하는데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어흐흠!” 루노 씨였다. 휴거가 말했다. “젠장. 말리지 마쇼. 내 오늘 저놈의 자식을 베어버리고 말테니까.” “바라는 바다. 이 개새끼. 어디 남의 노예를 건드리려고 그래?!” 루노 씨가 우릴 정중히 타이르며 말리려고 했지만 우리는 이미 불이 붙은 상태였다. 그래서 화해 같은 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결국 그는 한가지 묘안을 내놓았다. “당신들의 불화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아니오. 하지만 상단으로서는 언제 도적 떼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데 이런 일로 호위무사를 읽을 수는 없소. 그래서 상단의 총책임자로서 당신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사상자를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베어너클을 건의하는 바이오.” 베어너클! 맨주먹! 오호라! 그거 좋지! 난 날카롭게 웃으며 휴거 놈을 노려보았다. “보스 의견에 찬성합니다.” 피식 웃은 휴거는 검을 다시 검 집에 꼿더니 소드 벨트를 풀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개새끼. 박살 내주마.” 난 낄낄 웃으며 무기들을 풀어서 바닥에 내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검은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썼다. 물론 손에 끼고 있는 건틀릿도 벗었다. 스프릿이 걱정스러운 듯이 외쳤다. “조심하세요!” 대답대신 주먹을 들어준 나는 루노 씨의 요구에 따라 상단 중앙으로 갔다. 커다란 모닦불이 피어있는 곳에선 나는 주먹을 쥐고 히죽 웃었다. “날 이기면 내 노예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아. 덤벼.” “이 자식, 안 그래도 그렇게 말할 참이었다! 죽어!” 휴거는 곰처럼 달려들어 날 붙잡으려했다. 하지만 그 정도 태클은 꽤 많이 당해봤는지라 난 맞서서 달렸다. 그리고 풀밭에 미끄러지면서 녀석의 다리를 걷어찼다. 휴거는 쓰러졌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공중 제비를 넘으며 무릎으로 녀석의 가슴을 노렸다. “죽어라!” “이익!” 휴거는 몸을 굴려 내 공격을 피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놈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돌려차기를 날렸다. 쾅! 휴거의 고개가 꺽였다. 하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놈은 그 큰 덩치와 맷집으로 내 공격을 받아내며 날 붙잡아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내 얼굴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막은 나는 오랜만에 전해지는 충격에 낄낄 웃어댔다. “흥분된다! 더 때려봐! 그것뿐이냐?!” Running Fire: 09 “악당이라면 끝까지 악당으로 남아야 멋진거야.” “흥분된다! 더 때려봐! 그것뿐이냐?!” 오른 발로 바닥을 지지하고 왼발을 위로 올려 내 가슴에 올라타 주먹을 난사하는 휴거의 목을 걸어 당겼다. “컥?!” 녀석을 바닥으로 굴렀고 난 벌떡 일어나 녀석의 허리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코에서는 피가 흐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하하하~! 죽어라. 버러지야!” 퍽퍽! 녀석의 허리를 발로 걷어찬 나는 다리를 쫙 뻗어 올렸다. 서커스에 나오는 여자 무용수의 그것처럼 다리가 수직으로 머리위로 올라갔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상단대원들과 모험가들이 입을 딱 벌렸다. 쾅! 다리를 내려찍었지만 휴거는 몸을 돌려 피한 상태였다. 덕분에 발뒷꿈치가 엄청 아팠다. “이 자식!” 휴거가 두꺼운 다리로 내 가슴을 걷어찼다. 뒤로 넘어진 나는 핸드 스프링으로 일어났다. 그러자 휴거 놈이 달려와서는 어퍼컷을 쳐 올렸다. 쾅! 턱이 아프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스피릿의 비명을 들었다. 애처로운 소리다. 젠장. 저 예쁜걸 헌신짝 다루듯이 할 수는 없잖아? “주인님!!! 일어나세요!” 알았어. 일어난다구. 턱이 꽤 아프다. 이거, 봐주면서 하려니 내가 죽게 생겼는데? 장난은 이제 그만. 다시 핸드 스프링으로 일어나니 휴거가 달려오고 있었다. 놈은 다시 내 턱에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그는 내가 예상했던 거 보다 훨씬 실력 있었다. 동네 깡패보다는 났구나. 하기사 그러니까 모험가를 하고 있는 거겠지만. “주우욱어어라아아아!!!” “흥, 웃기네.” 빠각?! 퍼억! 쾅! 힘껏 내지른 녀석의 팔을 팔꿈치와 무릎 사이에 넣어 찍어버린 나는 다시 다리를 내려 바닥을 지지하며 왼쪽 팔꿈치로 녀석의 명치를 찍어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허리를 비틀어 이번엔 오른쪽 팔꿈치로 녀석의 턱을 깨버렸다. “…커억?!” 철퍼덕! 휴거는 바닥에 쓰러져서 실신해버렸다. 암암리에 내기를 했던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판돈을 쓸어댔고 난 피가 섞인 침을 탁 뱉으며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루시아가 타박타박 걸어나오더니 휴거의 곁에 앉아서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내기 같은 거 하셨나요?” 난 등을 돌리며 으르릉 댔다. “조금 있다가 내가 있는 마차로 찾아와.” “예.” 그녀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그의 상처를 돌봤다. 몸을 돌린 나는 얼른 달려온 스피릿의 부축을 받았다. “아앙, 주인님 코에서 피가 나요.” “괜찮아. 이걸로 이제 찝쩍대는 놈들은 없겠지?” 울상을 지은 스피릿은 대답대신에 내 얼굴에 난 피와 상처를 닦아냈다. 흥분한 슈니르가 말했다. “대단해요! 콜트 씨!” “별로, 먹고살려고 배운 거니까.” 마차바퀴에 기대어 앉아 한숨을 내쉬자 어디서 약통을 들고 온 스피릿이 내 앞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상처 좀 보여주세요.” “아, 괜찮다니까.”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난 약간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러자 스피릿은 겁을 먹고 훌쩍이기 시작했고 난 얼른 그녀를 진정시켜야했다. “알았어알았어~! 자자~!” 상처가 난 곳을 들이밀자 스피릿은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고는 얼른 약통을 열어 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에 상단대원들과 호위무사들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려고 했다. 대충 덕분에 돈을 땄다거나 혹은 좋은 구경했다는 의미의 것들이었는데 난 그들의 말을 듣기만 할 뿐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대신 싸늘한 눈매로 노려 봐주었다. “할 일이 그렇게들 없냐?” 주눅이 든 사내들은 모두 자리로 돌아갔다. 상처의 치료를 끝낸 스피릿이 약통을 닫았다. 그녀는 불에 데운 수통에서 따끈한 차를 따라 나에게 내밀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뭔가가 걸어나왔다. 자세히 보니 루시아였다. 스피릿이 흠칫하며 날 바라보았다. 난 그녀에게 자리에 앉도록 했고 루시아는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네 주인은 어떠냐?” “팔뼈에 금이 갔지만 포션으로 치료했습니다. 그 외에 근육통이 좀 있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히스테리도 있었군?” 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뺨이 발갛게 물들어있다. “네 주인이 때리디?” “예. 패한 것이 분하다며 화풀이로 저를 때렸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스피릿이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세이라와 슈니르는 인상을 구겼다. 난 은근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가서 때려 줄까?” “안됩니다.”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주인이십니다. 그 분께 이 이상 치욕을 안겨주지 말아 주세요.” 기가 찼다. 그리고는 팔을 뻣어 루시아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바닥에 앉아있던 루시아는 반쯤 끌려오다시피 하며 나와 얼굴을 마주 댔다. 옆에서 앉아있던 스피릿이 움찔했다. “억울하지 않냐? 그렇게 당하고도?” “그래도 제 주인입니다. 저를 지켜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시는.” “지랄. 주인 없는 노예들도 너보다는 인간답게 살겠다.” 갑자기 루시아가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웃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착각하지 마세요. 노예는 인간이 아닙니다. 가축보다 못한 어떤 존재일 뿐이지요.” “넌 좀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좋으실 대로.” 나는 그녀의 멱살을 놓아주고 불에 데운 수통을 집어 들었다. 옆에서 스피릿이 말렸다. 그녀의 손길을 뿌리친 나는 눈을 질끈 감고있는 루시아에게 뜨거운 찻잔을 내밀었다. “…밤엔 꽤 쌀쌀하지? 이거, 차나 한잔 마셔라.” 찻잔을 받은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날 쳐다보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이전에는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노예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따뜻한 차나 한잔하고 돌아가라.” 한참동안 날 쳐다보던 루시아는 눈을 내리 깔더니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거기 때문에 그녀는 후후 불어가며 조금씩 차를 마셔댔다. 그리고 나도 그녀를 바라보며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컵을 기울였다. “잘 마셨습니다.” “내일도 오랬다고 네 주인에게 전해라. 그리고 불만 있으면 직접 와서 따지라는 말도.” “알겠습니다. 그럼.” 루시아는 사박사박 걸어서 돌아갔다. 그때 언제 왔는지 스피릿의 옆에 앉아서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던 첼시아가 말했다. “야아,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콜트씨 멋진데?” “넌 언제 온 거야?” “박살난 얼굴이나 보러왔지. 그럭저럭 괜찮은 모양새로군? 그렇지. 스피릿? 언니가 용돈 좀 줄까?” 그렇게 말하며 첼시아는 주머니에서 꺼낸 동화 몇 개를 스피릿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 돈으로 야한 잠옷 같은 거 사서 쑥맥인 주인님을 홀려버려. 남자는 다 똑같으니까 간단하게 넘어 올 거야.” “이봐,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첼시아는 호호호 웃으며 일어나더니 말했다. “고마워, 이겨줘서. 덕분에 꽤 땄어. 마을에 도착하면 한턱 쓸게.” “너 설마?!” “오호호호호~!” 한 손에 찻잔을 든 첼시아는 기분 나쁘게 웃으며 자기네 마차로 가버렸다. 난 이마를 찌뿌리며 말했다. “크으~! 남 좋은 일 시켰어.” “이겼으니까 됐잖아요. 진정하세요. 주인님.” 어쨌든 일도 마무리되고 내일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슬슬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세이라는 마부석에서 슈니르는 짐더미 위에서 그리고 나와 스피릿은 마차 바퀴에 모포를 깔고 기대어 잠을 청했다. 그때 내 옆에 바싹 붙어 있던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 “왜?” “고마워요. 이겨주셔서.” 난 피식 웃었다. “주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 뿐이야. 신경 쓰지마.” 잠시 후 스피릿이 모포 밖으로 팔을 꺼내 내 목을 감았다. 그리고는 뜨거운 눈으로 말했다. “…노예로서 주인님께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럼 요기다가 뽀뽀해 줘.” 난 볼을 가르켰다. 하지만 스피릿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대며 말했다. “여기다가 해드리고 싶어요.” “안돼.” “주인니임. 살짝 할께요오.” “어허~!” 결국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스피릿은 내 볼에 입을 맞춰야했다. 못내 아쉬워하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긴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별빛이 참 곱지?” “…안녕히 주무세요.” 입술을 빼죽 내민 스피릿은 고개를 내리고 내 가슴에 기댄 채 눈을 감아버렸다. 난 그녀의 긴 회색 머리카락 한줌을 잡아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빙글빙글 웃었다. 자신과의 약속만큼 지키기 힘든 건 없지. 내 다짐이 얼마나 갈지 의문이긴 하지만, 지금 이대로 계속 그녀와 나의 관계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딱 사이좋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말야. “거 참, 여기 밤하늘도 멋진걸?”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 북적거리는 소음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하품을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를 보니 스피릿은 이미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좀 깨워주지 그랬어.” “피곤하신 것 같아서요. 좀 더 주무시라고.” 스피릿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짐 정리가 끝난 마차 사람들과 함께 마른 음식으로 아침을 때웠다. 스피릿이 요리를 하려 했지만 세이라가 말렸다. “요리는 시간이 많이 걸려요. 출발이 늦어질 수도 있어요.” 아침 식사가 끝나자 상단은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나도 마지막 짐을 말에 올린 다음 말에 올랐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스피릿의 손을 잡아 당겼다. 스피릿은 이제 익숙한 동작으로 말에 올라서 내 뒤에 앉았다. “샤먼 상단 출발! 오늘이 10월 12일이니 늦어도 15일 까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다들 힘내도록!” “벌써 10월 12일 이냐? 좀 있으면 겨울이네.” “겨울에도 일하세요?” “응. 놀고 먹을 수는 없잖아?” 스피릿은 후아~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씩 웃으며 말해주었다. “겨울에는 이렇게 밖으로 나다니는 일은 없어. 대부분 도시 내에서 일을 하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마.” “예에.” 스피릿은 내 등에 바싹 붙어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싱긋 웃으며 그녀를 뒤돌아보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을 몰아갔다. 간간이 세이라와 시장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슈니르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걷고 있는 도중.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뭔가가 숲 속에서 반짝반짝거리는 것이었다. 세이라에게 말하고 천천히 상단에서 떨어진 나는 우리가 다니는 대로 근처의 숲으로 말을 몰아 가보았다. 그러다가 뭔가가 후다닥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발견했다. 조짐이 안좋다. 달리는 속도와 나무사이를 달려가는 궤적을 볼 때 저건 인간이다. “상단이 지나가는 대로 근처의 숲 속에 숨어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신호를 받는 사람은 누굴까?” “도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가능성은 높아.” 상단으로 복귀한 나는 이 사실을 세이라에게 알렸고 세이라는 호루라기를 세차게 불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에서 말을 탄 사내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세이라는 내가 본 거에 대해서 그에게 알려주었다. 상단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아침부터 따라오던 자들입니다. 혹시 모르니 전투 준비를 하고 계속 전진하라는 보스의 명령입니다.” 나와 세이라 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 뒤에 앉아있던 스피릿이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으며 말했다. “싸, 싸움이에요? 싸움하는 거예요?” “폼 나게 전투라고 하죠.” 슈니르가 마차의 짐 더미 안에서 롱소드를 꺼냈다. 녀석은 그것의 번쩍이는 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로 사람을 베어본지 얼마나 됐더라? 으흐흐~!” “주인님. 슈니르 씨가 주인님처럼 웃고 있어요.” “으흐흐~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군. 캐슬린 경비대 일을 좀 거들어 주기로 할까?” “아앙~ 주인님. 그렇게 웃지 마세요. 기분 나빠요.” 슈니르를 쳐다보던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내 허리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세이라가 우리들을 진정시켰다. “재수 없는 소리들 말아요. 정말 도적떼가 나타나 습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 정도 대규모 상단을 위협하려면 두 배 이상의 전력이 필요해요. 게다가 그 정도 병력이면 꼼짝없이 당하는 거나 마찮가지라구요.”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입가의 미소는 지우지는 않았다. 아, 잠깐. 그런데 이 녀석은 어떻게 하지? 난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이 당황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한참 그녀를 숨길 곳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상단 마차 행열이 멈춰섰다. 앞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난 세이라를 바라보았다. “호위무사들을 부르고 있어요. 가보세요.” “젠장. 도적떼들인가? 스피릿 내려.” “예에?!” 난 대답대신 상체를 뒤로 돌려 스피릿의 허리를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마차의 짐더미 위로 올려주었다. “주인님!” “조심할게! 세이라! 슈니르! 스피릿을 부탁합니다!” 말을 몰아가며 외쳐준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 왠 무리들이 서서 마차를 가로막고 서있었다. 상단에 고용된 호휘무사 30여명이 앞으로 달려나가자 왠 사내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도적 떼입니다. 통행료를 내라고 협박중입니다.” “통행료? 헹! 여기 길이 자기들 건가?” 그렇게 말하며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난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 앞에는 계곡을 건너기 위한 커다란 돌다리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지금 대략 40여명의 사내들이 그곳을 막고 서서 상단 보스 루노씨와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어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옆에 있는 상단대원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상단대원은 그 흥정에서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욕설과 위협용 문장들을 제거하고 정중한 언어로 정갈하게 재해석하여 우리들에게 들려주었다. “귀하의 상단은 우리 초원의 갈매기단이 관리하는 대로를 허가도 없이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좋으니 통행세와 벌금을 함께 납부한다면 우리는 귀하의 상단에 대하여 의리와 우정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하지만 만약 벌금을 낼 수 없다면 우리 초원의 갈매기단은 귀 상단의 인명과 재산을 모조리 강제압류 하겠으니 피차 상호간에 불미스러운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말을 다 들은 상단 보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상단대원의 해석센스에 배를 잡고 웃고 있던 우리들은 그것도 해석을 부탁했다. 그 상단대원은 씩 웃으며 말했다. “지랄하네.” 루노 씨의 엄숙한 인상과 평소언행과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고 그래서 우리들은 좀 짓궂게 킥킥 웃었다. 그러자 반대편 도적 때의 수령이 노호성을 지르더니 외쳤다. “키요리인! 샤테이마아!” 당장 루노 씨가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도적 떼를 만난 이상 대응은 하나뿐이다! 전원 전투 준비! 각자의 짐과 동료의 목숨을 지켜라!” 그러자 마차에 앉아있던 상단대원들이 일시에 롱소드와 롱보우를 뽑아들었다. 스르르릉~! 스르릉! 두령의 외침에 따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도적 떼의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주머니에서 검정 색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루노 씨가 외쳤다. “호위무사! 당신들의 힘이 필요하오! 싸워주시오!” “하하하하~! 안 그래도 나갈 참이었수!” 창을 뽑아든 사내가 말을 몰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나도 질세라 손수건을 질끈 묶은 다음 그의 뒤를 따랐고 나머지 호위무사들도 분기탱천하여 뒤따랐다. 그때였다. 막 그들과 맞붙기 직전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상단마차가 서있는 근처 숲속에서 일단의 도적 떼들이 쏟아져 나왔다. 적게 잡아도 40명은 될 것 같았다. “염병! 협공이야! 호위무사 돌아와!” 하지만 이쪽은 지금 바쁘다구! 검을 뽑아든 나는 앞에서 달려드는 도적 떼의 팔을 잘라버렸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낙마했다. 고개를 든 나는 마상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낯설어 보인다 싶으면 모조리 머리를 내려치거나 혹은 등을 찔러버렸다. “콜트! 위험해!” 촤아악! “컥?!” 창을 랜스처럼 세우고 나에게 달려오던 도적의 목으로 채찍이 휘감겼다. 놈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난 고개를 돌렸다. 첼시아가 채찍을 회수하고 있었다. 난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들었다. 퉁퉁퉁~! “커억?!” “아악!” 날아간 화살은 첼시아에게 달려들던 도적의 목과 머리에 꼿혔다. “갚았다! 쌤쌤이야!” 첼시아는 손에 키스를 하여 나에게 날렸다. 그때 왠 사내가 그녀가 탄 말의 엉덩이로 착지했다. 하마터면 다시 화살을 쏠 뻔했다. 퍼피였다. 날 힐끔 쳐다본 그는 다시 말에서 뛰어오르더니 말과 말 사이를 뛰어다니며 도적 떼의 등과 머리를 너클이나 크로 암으로 내리 찍었다. 기가 막힌 솜씨다! 그때 뒤에서 공격당하던 상단대원들이 외쳤다. “호위무사! 도와줘!” 뒤를 돌아보니 상단대원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엔 일반인이라 이건가? 하지만 놈들은 우리들이 저들을 돕도록 쉽사리 내보내주지 않았다. 난 머리에 쓴 손수건을 바로 잡으며 외쳤다. “콜트 슈발츠가 퇴로를 뚫는다! 가서 저 새끼들 죽여버려!” “이봐! 제정신이야?!” 누군가가 내지른 우려의 외침을 무시하며 난 검과 자동석궁을 들고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비켜라!” 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 퍼퍼퍼퍽?! “커억?!” “아악!” “이네 크마!?” “으하하하하하~!!” 촤아악! 푸쉬이이이! 몸을 한껏 숙이고 갤럽으로 달려나간 나는 화살을 피해 벌어진 틈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검을 휘둘러 접근하는 녀석들의 다리를 찌르거나 혹은 그가 탄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힝힝힝~!” “으아악!” 경동맥이 잘려서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는 말이 마지막으로 앞다리를 들어올리고 포효하며 쓰러졌다. 기수는 바닥에 깔려버렸다. “이네 크마! 누에르!” 방금 전의 전투로 난 몇 가지 단어의 뜻을 알아버렸다. 지금 저 말은 너 이 자식 죽어! 라는 거다. 난 씩 웃으며 장창을 들고 달려드는 두 도적을 향해 자동석궁을 겨누며 외쳤다. 놈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이네 크마! 누에르!” 퉁퉁퉁퉁퉁퉁퉁퉁퉁~!! 퍼퍼퍼퍼퍼퍼퍽?! “크아악!” “이히히히힝~!” 달려들던 말과 기수는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그리고 퇴로가 뚫렸다. 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시간없어! 뛰어! 첼시아! 퍼피!” “이랴아! 하!” 뒤에서 퍼피를 태운 첼시아가 하얀 백마를 타고 돌진해왔다. 여기저기서 튄 적들의 피 때문에 적마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대략 반수 정도의 호위무사들이 약탈을 자행하고 있는 도적 떼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곧 퇴로는 막혔고 난 놈들을 붙잡기 위해 남았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도적 떼들이 눈을 흡뜨며 날 쳐다보았다. 내 옆에 서 있는 장창의 호위무사는 주머니에서 무슨 포션을 꺼내더니 마셨다. 다른 모험가들은 매서운 눈으로 칼을 들어올렸다. “캬하하하하~! 나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너희들에게 부여하겠다! 물론 대가는 너희들의 목숨이야! 덤벼!” “킬킬킬~! 맘에 드는걸? 컴 온 베이비~!” 거의 다 쓰러지고 10명도 채 안남은 도적 떼들은 우리들의 외침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것들이 사람이야 라는 표정이군. 저런 표정 많이 봤지. 난 등에서 다시 자동석궁을 뽑았다. 놈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화살통을 새것을 교체한 나는 그것을 들고 외쳤다. “화살통의 콰렐은 1000발이다! 너희를 전부 고슴도치로 만드는데는 충분 할거야!” 투투투투투퉁퉁퉁퉁~!! 난 화살을 난사했다. 그때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화살은 내 어깨에 박혀버린 뒤였다. “큭?!” 놈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난 화살을 꼿은 채로 숏보우를 든 녀석에게 화살을 갈겼다. 얼굴로 수십 발의 콰렐이 박혀든 녀석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도적 떼들은 움찔하면서 쓰러진 녀석들을 쳐다보더니 슬금슬금 뒤로 둘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우리들을 내버려두고 상단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앗! 저 자식들이 마차로 간다!” “적당히 들고 튈 속셈이야! 잡아! 죽여!” “크아아~!” 난 화살을 뽑아서 땅바닥에 내팽겨졌다. 그때 휴거가 말을 몰고 오며 외쳤다. “이봐! 괜찮아!?” “걱정 마! 이, 이 정도는 문제없어!” 화살이 뽑힌 곳으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난 그것을 손으로 막고는 말을 몰아 놈들에게 달려갔다. “크악!” “아악!” 사방에서 사내들의 비명과 고함이 울려 퍼졌다. 도적 떼들은 의외로 난전을 격자 값나가는 물건만 가지고 달아나려는 속셈으로 짐마차로 뛰어올랐다. 난 말에 오른 채로 녀석들의 머리를 내려치다가 마차의 짐 더미 위에 서로 칼질을 하다가 상단대원을 찔러버리고 물건을 풀어 어깨에 매는 녀석을 발견하고는 말에서 뛰어올라 짐 더미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외쳤다. “이네 크마! 누에르!” “이슈크나?!” 난 뒤돌아보는 녀석의 턱을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턱뼈가 으스러지는 기분이 짜릿하게 느껴진다. 두 손으로 턱을 붙잡은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짐 더미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악?!” 하마터면 스피릿인 줄 알았던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놈들이 어깨에 매어 올린 여자는 루시아였다. 휴거를 부를 틈도 없이 녀석들은 숲 속으로 달려들어가 버렸고 난 욕설을 쏟아내며 놈들의 뒤를 따랐다. “거기서 이 씹새끼야!” 어깨에 루시아를 올리고 있기 때문에 자동석궁은 안된다. 지리한 추격전 끝에 내가 쫓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챈 녀석들은 짐을 내려놓고 검을 들었다. “케슈나리, 로 하비안 누리키트 쉬 이크나!” “뭐라고 씨부렁 대는거야? 이 미친 새끼들! 만국 공통어는 이런 게 아니겠어?!” 그렇게 외치며 내가 뽑아 든 것은 예전 입실론에 있을 때 돌고렘을 자르기 위해 마법처리를 한 롱소드였다. 시커먼 검신의 모습에 이를 악물고 있던 놈들이 칼을 들고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도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챙챙!? 쾅! “커억!” 동시에 날아드는 두 자루의 칼을 검과 강철 건틀릿으로 막아낸 나는 힘 겨루기가 들어오기 전에 얼른 오른쪽에 있던 사내를 발로 걷어 차버렸다. 왼쪽에 있던 녀석은 내가 양손으로 검을 막아내자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자유로워진 오른손 주먹을 맞고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역시 강철 건틀릿이야! 최고라구! 고개를 내린 나는 반항하다가 뺨을 얻어맞고 입가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 루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에 움찔하며 뒤로 기어서 몸을 숨기려했다. 하긴,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사내의 모습은 그렇게 멋진게 아니지. 고개를 돌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놈들의 앞으로 검을 들이밀었다. “누, 누카이라! 샤네이쿠노!” “샤, 네이쿠노!” 살려달라는 말인가? 난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손에 죽어간 수많은 여행객들에게 그렇게 빌어봐.” 그리고는 검을 내리쳤다. 주변의 풀밭으로 피가 튀겼다. 옆에 있던 사내는 동료의 머리가 쪼개지자 바지를 적시고 눈물을 흘려댔다. 그는 내 다리를 잡았다. 어, 이러면 안돼는데. 고개를 가로 저은 나는 등에서 자동석궁을 꺼내 그의 등에 갈겨버렸다. 퍼퍼퍽! “커어억!” “빌어먹을 것들, 죽기 전에 그런 모습 보이지마. 설령 악마가 죄를 묻더라도 죄 앞에서 당당해져야지. 악당이라면 끝까지 악당으로 남아야 멋진거야.” 이미 죽은 녀석의 머리를 걷어 찬 나는 그만 고개를 돌렸다. 겁에 질린 루시아가 훌쩍이며 말했다. “아, 아앙~! 죽이지 마세요! 살려주세요!” “어이, 누가 잡아먹는데?” 손수건을 벗은 나는 그것을 루시아에게 던져주었다. “그걸로 터진 입술이나 좀 닦아. 쥐잡아 먹은 것 같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이 근처에 숨어있어. 알겠지?” 루시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단과 스피릿이 걱정되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때 내가 들어온 곳으로 휴거 놈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싸우고 오늘 처음 말을 나누는 건가? “루시아! 괜찮아?” 루시아는 대답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하고는 딴판이구나. 그녀를 살피던 휴거는 날 보더니 말했다. “고맙다. 네가 구해준거냐?” “그래. 입가가 터졌다. 치료해줘라.” 할말만 하고 등을 돌린 나는 이제 상단으로 향하려 했다. 그 순간 등으로 짜릿한 감각이 퍼졌다. 푸쉬이이이! 피가 터져 나왔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검을 내려친 휴거 놈이 씩 웃고 있었다. 루시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외쳤다. “주인님?! 무슨 짓이에요!” “시끄러워!” 짜악?! 또 뺨을 맞은 루시아는 풀밭으로 쓰러졌다. 난 검으로 바닥을 지지하며 말했다. “너, 이, 자식.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별로, 눈엣가시 같은 놈을 처리하는 중이라고 하지.” “너 이 새끼….” 털썩~! 바닥이 풀밭이라 그런지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귓가로는 휴거 놈의 중얼거림이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온몸의 근육이 나른해지며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다. 상처의 고통도 점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죽는 건가? 젠장. 일어나려 해보았지만 이상하게 살아남겠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때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으로 피가 쏟아진 바닥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저렇게 작은 것도 저렇게 살려고 저렇게 발버둥치는 나란 놈은…. “주인님 나빠요! 비겁해요! 치사해요! 더러워요!” 순간적으로 다시 귀가 열리고 눈이 떠졌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보니 루시아가 휴거에게 악을 써대고 있었다. 휴거는 입술을 씰룩이더니 그녀의 뺨을 다시 때렸다. 루시아는 다시 넘어졌지만 또 일어나고 있었다. “너 지금 반항하는 거냐? 노예상에서 비싸게 주고 데려나온 이 주인님에게 반항하는 거냐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루시아가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반항하는 거다! 이 개새끼야! 쓰레기 같은 놈!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했는데 이제 지겹다는 이유로 날 그런 지저분한 것들에게 단돈 10만 루나에 팔아 넘겨? 그러고도 네놈에 내 주인이야?! 이 더러운 놈아! 왜 죽였어! 차라니 네놈이 죽어야 했어! 알아!” “이 년이!” 루시아의 머리채를 붙잡은 휴거는 그 무지막지한 주먹으로 그녀를 때려버렸다. 퍼억! 쓰러진 루시아는 기절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휴거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때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일으킨 루시아가 한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흐으윽, 죽여줘. 훌쩍! 더, 더 이상 이런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아. 죽여줘~! 흐아앙!” 숲을 나가려던 휴거가 검을 뽑아들고 다시 몸을 돌렸다. “오냐! 어차피 그 놈의 노예를 가지면 되니까 넌 필요없어! 바램대로 해주마!” “…내 노예를 어쩌겠다구?”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졸린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움찔한 휴거는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 이 좀비 같은 자식! 몇 번이라도 죽여주마!” “좀비는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그렇게 말하며 난 몸을 기울였다. 무섭게 찔러 들어온 녀석의 칼은 살짝 비켜 지나갔다. 고개를 돌린 나는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는 휴거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죽어.” …서걱!? “커어…?!” 돌고렘을 베기 위해 다마스커스 강철로 만든 검신에 마법으로 샤프 처리를 한 롱소드는 정확하게 휴거의 목을 꿰뚫었다. 칼을 당기자 녀석의 목은 당장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진 휴거는 꺽꺽 거리며 루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겁에 질린 루시아는 비명을 질러댔다. 다시 검을 들어올린 나는 녀석의 목을 완전히 잘라버렸다.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끔 아직 살아있는 신경들과 근육이 움찔거릴 뿐, 칼에서 피를 털어낸 나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리 오만하게 굴어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목이 잘리면 그냥 죽어버리는 한심한 생물일 뿐이야. 우습지?” Running Fire: 10 “넌 오늘부터 내 거다. 마구마구 부려먹을 테니 각오해.” “아무리 오만하게 굴어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목이 잘리면 그냥 죽어버리는 한심한 생물일 뿐이야. 우습지?” 대답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 그냥 몸을 돌렸다. 루시아는 그냥 저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차피 도망도 못갈테니까. 도망간다고 쫓아갈 사람도 없지만, 숲을 나서보니 아직도 도적 떼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고개를 가로 저은 나는 자켓의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냈다. 엘릭서라고 부르는 고가의 회복 포션인데 한 병에 500만 루나나 하는 거다. 아깝지만 당장 죽을 판이니 어쩔 수 없다. 퐁~! 코르크 마개를 뽑고 씁쓸한 파란색 액체를 삼킨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당장 등에 난 칼자국과 자잘한 상처들이 하얀 연기를 내며 아물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올린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이제 약값을 벌어볼까?” 호위무사들의 활약과 상단대원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도적 때들은 모두 달아 나버렸다. 우리들은 도적 떼들을 쫓으려고 했지만 상단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부상자들부터 챙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을 집어넣고 부상자들을 들어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매우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스피릿!” “뭐? 이봐 콜트!? 어디가!” “미안해! 뒤를 부탁한다!” 부상자를 옮기다 말고 나는 얼른 13번 마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슈니르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는 세이라를 보고 외쳤다. “스피릿은! 우리 스피릿은 어디 있습니까?!” 그때 슈니르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짐 사이에 있는 좁은 공간에서 스피릿을 끌어냈다. “콜록콜록~!” “스피릿!” “아, 주인님! 괜찮으세요?” “숨길 데가 마땅치 않아서요.” 난 슈니르와 세이라에게 스피릿을 살려줘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세이라가 말했다. “나도 여잔데 말야. 좀 속상했던 거 있지?” “에이~! 누님은 제가 지켜줬잖아요? 하지만 스피릿은 그래 줄 사람이 없는데 어떡해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연신 감사의 인사를 해대자 세이라는 웃어버렸다. 내 몸의 상처를 살피던 스피릿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해요. 주인님, 칼에 베인 자국하고 핏자국은 많은데 상처가 하나도 없어요.” “아, 미안. 나 엘릭서 먹었어. 잠시 후면 쓰러질거야.” 스피릿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세이라가 외쳤다. “엘릭서요?! 어떤 상처를 받았길레?” 난 그녀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목에서부터 허리 끝까지 커다란 칼자국을 본 세이라와 슈니르가 입을 딱 벌렸다. “다, 당신?!” 난 대답 대신 웃어주었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된거냐고 울상을 지으며 매달리는 스피릿에게 부상자들의 상처를 돌봐주도록 하고 나는 상단대원들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 놈들이 도망가면서 버려둔 짐을 가져왔다. 상단에서 운반하는 짐은 소금이기 때문에 무거워서 많이는 훔쳐가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없어진 것들도 근처의 숲 속에서 거의 대부분 찾아올 수 있었다. 대략 정리가 끝나자 상단대원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각 마차에서 사라진 물건들과 부상자들을 정리해서 조사했다. 세이라에게 들은 바로는 꽤 큰 습격이지만 피해는 적었다고 한다. 사망 7명. 부상 30여명. 사라진 소금 두 상자가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이란다. 사망자는 상단대원 6명과 호위무사 1명이라고 했다. 호위무사는 휴거 놈이겠지. 내심 찔리긴 했지만 난 시침 뚝 떼고 모른 척했다. 그리고 주인이 죽어서 거취가 불확실해진 루시아는 다른 모험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서로가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현명한 상단보스는 그런 일은 일단 자리를 옮긴 다음 해결해도 된다고 말하며 이동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있다간 다시 돌아온 도적 떼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체들은 가매장하여 돌아올 때 다시 꺼내 가기로 했다. 출발을 위해 말에 오르던 나는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엘릭서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휘청휘청거리자 스피릿이 달려왔다. “주인님!” “어, 이런, 제기, 스, 스피릿….” 스피릿이 날 부축했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행복해야해….” 그리고는 기절해버렸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어둑어둑해진 저녁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보니 어느새 그곳에서 벗어났는지 전혀 낯선 곳이었다. 그때 스피릿이 외쳤다. “아! 일어났다! 주인니임! 걱정했어요! 아앙!” “어, 으으억. 삭신이야.” “그깟 도적들을 상대로 얼마나 밀렸으면 엘릭서까지 먹었을까?” 고개를 돌리니 첼시아와 퍼피가 있었다. 난 인상을 찌뿌렸다. “문병을 왔으면 먹을 거라도 좀 가져와야 하는 거 아냐?” 첼시아는 킥킥 웃기만 했다. 그때 나에게 무릎베개를 해주던 스피릿이 내 볼을 잡아당겼다. “이 바보 주인님! 기절하면서 왜 그런 말을 해서 순진한 노예 걱정하게 만들어요!? 놀랬잖아요!” “어, 으, 하하하. 그, 그저 장난삼아.” “어머, 노예에게 당하고 사는가봐? 벨도 없니?” 옆에서 보고 있던 첼시아의 말이었다. 난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봐 주었다. 그때 뜨거운 스프가 담긴 냄비를 들고 오던 슈니르가 말했다. “어, 깨어나셨네요? 이거 좀 드세요.” 스피릿은 날 자리에서 일으켜 주었다. 첼시아와 퍼피는 자기네 마차의 상단대원들이 모두 다쳐서 드러눕는 바람에 밥줄 사람이 없다면서 우리들 사이에 꼽사리를 끼었다. 서로 악담을 주고받으며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놓은 곳에서 루노씨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주목해 주시오! 나는 샤먼상단조합의 부조합장이자 이번 출정의 총책임을 지고있는 루노 파라디온이라하오! 당신들 사이에서는 루노 씨나 보스라 불리고 있지. 다름이 아니라 이번 출정에서 가장 우려했던 일인 도적 떼와의 전투로 인해 우리는 가장 절친한 친구들을 잃었소!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 부탁과 함께 어떤 문제를 하나 해결 해볼까하오! 루시아. 이쪽으로.” 루노씨의 부름에 기다리고 있던 루시아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모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루노씨가 다시 말했다. “이 아가씨는 죽은 휴거 잭슨씨의 노예오! 현재 그의 절친한 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아가씨의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나로서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소! 국가 노예법에 따르면 주인을 잃은 노예는 국가노예관리원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합법적인 자격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에 그 소유권을 의탁해야 하오! 하지만 본 상단에서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소. 이유는 본 상단이 소속된 샤먼 시에서 실직자 구제를 위해 상단의 노예소유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오!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그녀를 국가노예관리원으로 보내는 것과 개인에게 의탁하는 방법뿐인데. 루시아는 관리원으로 가는 것을 거부했소! 그러므로 노예에게 주어진 특권인 선택의 자유에 따라 본 상당의 책임자는 그녀가 우리 중에서 새 주인을 직접 선택하도록 해주려 하오!” 그때 일단의 사내들이 달려나왔다. 전에 휴거와 자주 어울리던 자들이다. 그들은 다짜고짜 휴거씨에게 따지려고 들었지만 말도 하기 전에 덩치 좋은 상단대원들에게 가로막혔다. 낮의 전투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들은 주저 없이 검을 뽑아들고 살벌하게 으르렁댔다. 사내들은 찔끔하며 뒤로 물러섰다. 루노씨는 그들을 힐끔 쳐다본 다음 말했다. “본 상단에서는 불법노예소유를 방관할 수 없소! 이점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차후 노예의 재등록시에 보증인은 본 상단이 서도록 하겠소! 그럼 모두에게 행운을 기원하리다! 루시아. 이제 네 새 주인을 선택하거라.” 루시아는 먼저 루노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그 타박거리는 걸음걸이로 상단마차를 따라 빙 돌았다. 모두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과 몸매도 수준 급인 미인노예가 거의 공짜로 자신의 소유가 되는 거다. 침을 흘리지 않을 자들이 있겠는가? 하지만 난 그녀보다 100배는 더 예쁜 노예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빵과 스프로 저녁을 먹고 스피릿이 따라주는 뜨거운 차를 훌훌 불어 마시며 이왕이면 좋은 녀석을 붙잡아서 행복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램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녀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슈니르?” “예에?!” 깜짝 놀란 슈니르가 입을 딱 벌렸다. 세이라가 인상을 찌뿌리며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시아는 슈니르를 보고있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 한잔 주시겠어요? 주인님.” 나와 스피릿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녀가 따라주는 차가 넘쳐 바지를 적시는데도 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사기예요! 주인님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어, 그게 그러니까.” 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 앞에는 루시아가 앉아서 차를 후루룩 마시고 있다. 근처에는 함께 불침번을 서고 있는 세이라와 슈니르가 나에게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어주고 있다. 지금은 대략 새벽 4시. 루시아가 나를 그녀의 새 주인으로 선택하고 대략 5시간이 지났다.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나에게 붙어서서 루시아를 쳐다보고 있다. 같은 노예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항의의 말도 못하고 나에게 떼를 쓰고 있는 거다. 루시아는 스피릿을 힐끔 쳐다보더니 찻잔을 내밀었다. “한잔 더 주시겠어요?”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고 주전자를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워주었다. 아~! 머리 아프다! 왜 이렇게 된거야?! 아까 그녀가 날 선택하자 상단대원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같은 모험가인 호위무사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미 노예를 데리고 있는 사람을 다시 선택하다니. 말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잘 타일러서 다른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보시다시피 짐 덩어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그랬다. 노예가 둘이든 열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난 입을 딱 벌렸다. 호위무사들이 불만을 터트렸지만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 루노씨는 거창한 헛기침을 좀 한 다음 말했다. “나도 딸을 키우는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소. 그녀가 이미 노예가 있는 사람을 선택한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 일거요. 그 사람이 성품과 외모가 맘에 들었거나 하는 등의. 어쨌든 이게 노예의 선택이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시오?” 한참을 고민한 내가 내놓은 대답은 간단했다. “난 두 명이나 먹여 살릴 재주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나를 선택했으니 일단 귀국할 때까지는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노예관리원에 조언을 구해 해결하겠습니다.” 내 대답은 루노씨와 루시아를 만족하게 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가슴에는 불평과 불만을 만들어버렸다. 스피릿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아까부터 울상을 지으며 나에게 항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방관자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는 세이라는 이제 혼자서 주인을 독점할 수 없게된 노예의 반항이라고 단정지어주었다. “아아앙! 주인니임!” “아~! 시끄러! 다른 사람들 다 깨잖아! 조용히 해!” 스피릿은 내 고함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불만 섞인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젠장. 나도 차 한잔 줘.” “예에.” 스피릿이 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라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으며 루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빨간 눈으로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 왜 나야?” “잘 생겼으니까요.” 이 말에 세이라와 슈니르가 풋하고 웃어버렸다. 난 그들을 좀 째려봐 준 다음 차를 훌훌 불어 마셨다. “스피릿, 나 잘생겼니?” “…눈코입은 제대로 붙어있으니 됐죠. 뭐.” “쓰읍~! 너 자꾸 그럴래?” 찌릿하게 노려보자 스피릿은 이잉 거리며 내 등에 달라붙었다. 루시아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눈매는 올라가 있지 않지만 눈빛이 좀 날카롭고, 코는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얼굴과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됐고, 입술은 약간 도톰했으면 좋겠지만 그 정도면 오히려 키스하는데 좋으니 됐어요. 치열도 고르고, 그리고 강점이라고 하면 여자 같이 갸름한 얼굴선, 아가씨들에게 인기 만점이죠.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도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 거예요.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뭐라고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추악한 속마음과는 다르게 아름다움에 목매고 추종하는 빌어먹을 존재들이라서, 일단 겉모습이 좋으면 속마음 같은 것은 잘 따지지 않지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을 거라는 편견이라고나 할까?” “미안하군. 사실 난 변태야. 새디스트고 매조키스트지.” 그러자 루시아는 찻잔을 후르륵 기울이며 말했다. “주인님에게 엉덩이를 맞으면 정말 기분 좋을 거예요.” 오! 신이여~! 헛기침을 한 나는 애써서 그녀를 노려보려 애쓰며 말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냐. 왜 나냐구. 얼굴이 잘생겼네 어쩌네 하는 말은 집어치워. 마음씨가 고와서 어쩌구도 하지마. 네가 얼마나 날 봤다고 그래? 그리고 말야. 애초에 주인하나에 노예가 둘이라는 게 말이 돼냐?” “주인 하나에 노예 셋도 봤어요. 만약 지금 있는 노예가 걸리시는 거라면 걱정하시지 마세요. 조금만 지나면 좋아하실 테니까.” “시끄러워서 짜증이 먼저 나겠다. 무슨 헛소리를….” 루시아는 잔을 내렸다. 요염한 모습으로 풀밭을 기어 내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무릎과 손바닥으로 바닥에 엎드린 모습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나 보다는 둘이 더 즐거울 걸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루시아는 히죽 웃었고 뒤에서 팔로 내 목을 감고 있던 스피릿은 볼을 잡아 당겼다.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아, 어, 응.” 루시아는 스피릿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심호흡을 한 나는 다시 평상심을 유지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솔직하게 말해봐. 왜 날 선택한거야?” 묵묵하게 나와 눈을 맞추고 있던 루시아는 세이라와 슈니르를 힐끔 바라보고 무릎으로 일어나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스피릿이 경계태세를 보였다. 하지만 루시아는 상관도 하지 않은 채 내 어깨를 붙잡고 귀에 입을 가져다대더니 작게 속삭였다. “…당신이 휴거를 죽였잖아. 그러니까 그의 부채를 이어받아야지. 아까 날 관리원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어? 웃기지마. 그럼 난 내 주인을 죽인 사람이 당신이라고 까발릴거야. 아무리 정당방위라고는 하지만 당신은 사람을 죽였어. 여기다가 내가 고춧가루만 조금 뿌리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노예를 빼앗기 위해 살인과 협박, 사기를 자행한 중범죄자가 되는거야. 징역살걸? 아무리 모험가라고 해도 5년은 살고 나올거야. 모험가 인생 5년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 어때? 이래도 날 받아들이지 않을거야?” 아찔한 기분이 느껴진다. 전투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건 정당방위지만 여기에 노예가 끼이게 되면 상당히 복잡해진다. 게다가 루시아처럼 뒤집어씌우면 꼼짝도 하지 못한다. 의외로 그런 일이 많기 때문에 법정에서도 이런 건 전적으로 노예 말을 듣고 처리해 버린다. 그때 루시아가 내 턱을 손가락으로 만지작대며 말했다. 몰랐는데 그녀는 상당히 영악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 마. 나, 당신이 꽤 맘에 들었거든? 관리원 대신에 시청으로 가서 재등록을 해주면 깨끗하게 잊어줄게. 그리고 나 아직 19살 밖에 안됐어. 앞으로 10년은 더 데리고 놀 수 있을거야. 구미 당기지 않아? 단단한 이 몸, 내가 녹여줄게.” 쪽. 윽?! 움찔한 나는 서둘러 몸을 뒤로 뺐다. 입술을 살짝 맞춰준 루시아는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뭔가가 내 목을 졸랐다. 윽?!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루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덕분에 내 목을 감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던 거고, 그녀들의 불꽃튀는 접전을 모른 척 하며, 난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마차바퀴에 기대어 졸다가 일어난 나는 양옆에서 내 팔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두 아가씨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먼저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난봉꾼. 노예를 둘씩이나 데리고 자다니. 좋았겠다?” “시끄러. 이거 별로 좋은 거 아냐.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됐다냐.” 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덩달아 잠이 깬 두 노예아가씨들이 하품을 하며 일어나더니 무의식적으로 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첼시아는 씩 웃으며 말했다. “행복한 고민이야. 젊은 날의 치기라 생각하고 즐기라구. 상관없잖아? 일단 결혼하면 여자노예는 관리원에서 바로 강제매입 해버리는데.”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나만 보고 쫓아다니는 녀석들인데 어떻게 떼어보내?” 첼시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있던 퍼피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둘 중에 하나 데리고 어디 다른 나라로 가서 아들딸 낳고 잘살던가. 둘도 괜찮지. 케어릭 같은 데는 일부 다처제가 있으니까.” 아침부터 속을 벅벅 긁은 첼시아는 손을 흔들고 자신의 마차로 돌아가버렸다. 퍼피도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리니 두 아가씨가 날 바라보고 서있었다. 덕분에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을 먹고 다시 출발한 상단은 하루 종일 걸어서 시드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세이라의 말을 듣기로는 이곳이 캐슬린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업도시라고 한다. 덕분에 도시도 엄청나게 크고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무려 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법으로 만든 가로등이 아름다운 건물이 가득 들어선 도시 곳곳을 밝히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우와~! 멋지다아.” “여긴 수도와 가까워서 가로등도 컨티뉴얼 라이트로 만든 거예요. 빛이 곱죠?” “응, 그리고 사람도 많아. 우와, 스피릿! 저 아가씨 드레스 가슴 판 것 좀 봐! 죽이는… 아윽?!” “…가슴이라면 이쪽에도 있어요.” “내, 내가 잘못했어.” 내 뒤에 앉아있던 스피릿이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었다. 덕분에 마차를 몰고 있던 세이라와 슈니르가 킥킥 웃었다. 하지만 마차의 짐 더미 위에 올라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루시아는 별로 웃지 않았다. 그저 힐끔 우리 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도시 내로 들어와 미리 연락이 닿아있는 다른 상단조합과 접촉한 우리들은 그들의 안내를 받아 상단 물류창고로 안내되어졌다. 하역작업은 시간이 늦어져 내일 하도록 하고 마차만 모두 그곳에 정차시키는 걸로 일을 마무리했다 세이라에게 듣기로 이곳이 상단의 마지막 목적지라고 했다. 가져온 소금을 여기서 모두 처리하고 다른 물건을 구입하여 그랜퍼스로 돌아가면 일은 끝난다고 한다. “그럼 얼마나 머무는 겁니까?” “대략 3일 정도 여기 머무를 거예요. 그동안 여러분들은 시내 관광이라도 하시면 되요. 안내원은 붙여 드릴테니까.” “오오.” 상단의 호위무사들은 반가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정차가 모두 끝나고 우리들은 루노씨에게 한바탕 감사의 인사를 빙자한 연설을 들은 다음 숙소로 안내되어졌다. 역시나 저번 체이스와 마찮가지로 여관 몇 개를 통째로 빌려서 숙소를 대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는지 여관에는 이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왁자하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틈에 끼어 저녁을 먹고 방으로 안내되어진 나는 여관 점원의 멱살을 붙잡을 뻔했다. “왜 자꾸 1인실이야!” “누, 루카이란 쉐이크 노라 하이먼. 나자라.” 제복을 입은 젊은 아가씨는 당황하여 뭐라고 마구 솰라솰라 거렸다. 난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보다가 스피릿을 불렀다. “스피릿! 이 아가씨가 나 괴롭혀!” “프흡?! 큭큭큭~!” 그때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루시아가 벽을 짚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웃겨?! 뭐가! 스피릿도 살짝 웃으며 다가와서는 점원과 함께 솰라솰라 거리더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저, 3인실은 없다는데요? 친구들 같은데 함께 들어가면 안되겠냐고 하는데. 더블 침대라 넓을 거라면서….” “뭐가 어째?! 여기서는 다 큰 남녀 여럿이 친구라고 찾아오면 1인실을 내주고 그러냐?! 젠장, 2인실이나 4인실은 없냐고 물어봐.” 스피릿은 다시 그녀와 솰라솰라 거렸다. “4인실은 이미 다 찼고 2인실이 몇 개 있다고 하는군요.” “쳇, 융통성 없는 아가씨로군. 그거라도 달라고 그래.” “난 여기 좋은데. 침대도 넓고, 셋이서 뒹굴기엔 딱 인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루시아가 들어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코를 좀 벌렁거린 나는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가 루시아를 들어 어깨에 올리고 나왔다. “작작 좀 해라. 이 버릇없는 노예야.” 루시아는 노예답게 얌전히 내 어깨에 올려져 나왔다. 점원 아가씨는 방긋방긋 웃으며 우리를 2인실로 안내했다. 루시아를 침대에 내려준 나는 짐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지저분한 면바지와 셔츠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뭐야 안 갈아입어?” “옷이 없어요.” “염병, 빌어먹을 휴거 자식. 자기 노예 옷도 안 사주냐? 스피릿. 옷 좀 빌려줘.” 스피릿은 얼른 짐에서 여벌의 옷을 꺼냈다. 난 그것을 루시아에게 안겨주고는 그녀들을 이끌고 지하 욕탕으로 향했다. 피곤했지만 내 노예들은 여자들이기 때문에 그냥 재울 수는 없다. 자기 노예가 지저분한 얼굴에 머리카락도 꼬질꼬질하다고 생각해 보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다. 게다가 여기엔 여자노예가 스피릿과 루시아 뿐이라서 조심하지 않으면 난 몇 사람 더 묻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넓은 욕탕은 한산했다. 시간이 새벽에 가까워서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른 게으른 사내놈들은 씻지도 않고 그냥 침대로 몸을 날릴 게 뻔하다. 물론 나도 그냥 자고싶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여자노예들은 자주 관리해줘야 된다. 안 그럼 눈뜨고 못 본다. 욕탕은 남녀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다행이 벽은 머리 하나 높이에서 열려있었다. 그래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천장에서 빛을 발하는 컨티뉴얼 라이트의 환한 불빛을 받으며 난 욕탕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녀들을 세워놓고 말했다. “혹시 빨간머리 변태가 난입할지 모르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알았지?”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스피릿은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을 목욕탕으로 밀어넣고 남탕 안으로 들어가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있으려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몸에 물을 끼얹고 있는 게 보였다. “퍼피?” “아. 콜트 님. 씻으러 오셨습니까?” 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런 젠장.” “아아아악! 주인님! 살려줘요!” 비명을 듣자마자 제자리에서 점프를 한 나는 후다닥 벽 위로 기어올라갔다. 여탕에서 벌어지고 있을 성추행을 상상하며 인상을 찌뿌린 나였지만 실제 사건현장을 본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어버렸다. 아무도 없는 여탕에는 커다란 목욕통이 있고 그 안에는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오들오들 떨고있는 스피릿과 한 손에 나무 바가지를 들고 그녀를 가리고 선 루시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앞에는 웃기지도 않는 농담처럼 빨간머리의 익사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노예에게 맞아보기는 처음인데.”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는거야? 이 변태야.” 욕탕에서 나와 아무도 없는 홀의 테이블에 앉은 우리들은 자기 전에 맥주를 한잔씩 했다. 물론 내가 마시자고 건 아니고 변태로 오인 받아 루시아에게 바가지를 얻어맞은 첼시아가 노예관리소홀로 신고하기 전에 알아서 하라는 것에 분통을 터트리며 반항하다가 결국 내가 산 거다. “장난 좀 친 거 갖고 말야. 그 무식한 바가지로 머리를 후려갈기다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내 양옆에 앉은 루시아와 스피릿이 고개를 숙였다. 첼시아는 그것을 보고 흥하는 콧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고 난 이를 드러냈다. “…장난도 그 정도면 범죄라고 생각하는데.” “어머, 내가 좀 만지면 어때서 그래? 콜트씨는 매일매일 만지면서? 그건 범죄 아냐?” “난 애들 주인이니까! …윽. 지금 유도심문 한 거지?” 첼시아는 테이블에 엎드려 깔깔 웃어댔다. 너무도 간단하게 넘어간 내 자신이 혐오스럽다. 젠장. 그때 퍼피가 자리에서 슬쩍 끼어들었다. “마스터. 늦으셨습니다.” “음? 이런 벌써 두시네? 슬슬 자러가야겠다. 아, 거기 금발. 다음에 만나면 알아서 준비하라구. 알겠어?” 루시아가 날 쳐다보았다. 난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당신 노예 가슴이나 만져. 한번 더 우리 애들 건드리면 그땐 정말 가만 안있을거야.” “좀 만진다고 닳아? 우리 퍼피 가슴은 너무 딱딱하단 말야. 난 말랑말랑한게 더 좋다구.” 방으로 올라가는 첼시아에게 악몽이나 꾸라고 말해준 나는 옆에 앉아있던 두 아가씨를 일으켰다. “우리도 가서 자자.” “예.” 스피릿과 루시아가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왔다. 노예가 둘이나 되니 영 기분이 이상하다. 한편으로는 좋은 것 같기도 한데 전체적으로는 짐 덩이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다. “너희들은 저기서 자.” “함께 자면 안돼요?” “서로 내 옆에 있을 거라고 싸울 거잖아. 난 그 꼴 못 봐.” 스피릿과 루시아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보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난 침대 옆 수납장에 올려둔 촛대를 훅 불어 끈 다음 말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자도 되니 일찍 일어날 필요 없어.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들의 인사를 받으며 난 침대로 올라가 드러누웠다. 꼼짝없이 걸렸다. 어떻게 한다. 제기…. 말로만 듣던 여난이라는 게 이런거냐? 아, 난 한 여자면 족해. 제미니 보고 싶어. 우울하게 잠을 청하고 있는데 묵직한 뭔가가 내 허리 위에 걸터앉았다. “뭐야? 아니, 누구, 흡?!” 루시아인지 스피릿인지 모를 시커먼게 고개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내 입술을 훔쳤다. 덕분에 난 그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루시아다! 난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어났다. “루시아지? 그만해.” “어떻게 아셨어요?” “주, 주인님?” 스피릿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린다. 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루시아는 내 목을 감고 매달리며 뜨거운 신음을 흘려댔다. 아~ 정말! 이러지마! 내 인내심은 그렇게 길지 않다고! 그때 눈가가 환해졌다. 스피릿이 초에 불을 붙였다보다. 예상대로 내 목에 매달려 있는 것을 루시아였다. 그녀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을 안고 싶어요.” “말을 하는 입장이 묘하게 바뀐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만해.” “루, 루시아! 당신! 주, 주인님한테 뭐하는 거예요!” “노예로서 주인님께 봉사하는 건 당연한 의무지. 그렇지 않아?” “하,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떠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양보 못해. 오늘밤은 내가 모실거야. 새 주인님이니 만큼 내가 얼마나 쓸모있는 아이인지 가르쳐드리고 싶어.” “으… 주인님!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갑자기 뒷골이 마구 땡겨온다. 으아…! 신이여! 왜 이러는 거예요! “스피릿, 루시아. 두 사람 저기 침대로 가서, 자.” “안아주시기 전까지는 안가요.” “자꾸 그러면 화 낼거다!” 그러자 루시아가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말했다.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안아주지 않으면 휴거 죽인 사람이 주인님이라고 소문내고 다닐거에요. 살인자로 남고 싶으세요?” 난 이를 드러내고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루시아는 슬금슬금 내 허벅지에서 내려오더니 침대에 앉았다. “뭘 그렇게 따지세요? 스피릿이 실망할까봐서? 아니면 고향에 두고 온 연인 때문에?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에요. 스피릿은 신경은 쓰지 말아요. 조금만 있으면 오히려 주인님께 관심을 얻으려고 나처럼 매달릴걸요? 그리고 남겨두고 온 연인도 지금은 접어둬요. 그 사람은 당신이 뭘 하는지 몰라요. 예쁜 여자 노예들이랑 대낮부터 침대에서 뒹굴어도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단지 주인님의 양심만 좀 깍아내면돼요. 동글동글하게 생각하세요. 사람까지 죽인 마당에 뭐가 그렇게 겁나요?” 나와 스피릿은 말도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뭐라고 대꾸를 하려는데 스피릿이 달려왔다. 그녀는 내 목을 와락 끌어안더니 말했다. “주, 주인님은 제거예요! 키스도 안돼요! 물론 그, 그것도 안돼구요! 아앙~! 주인님!” “아냐, 정정해야지. 이제부터는 우리 거야.” 난 어깨를 축 내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깨어보니 눈부신 햇살이 창가로 쏟아지고 있었다. 머리맡에 올려둔 시계를 들어 뚜껑을 열어보니 오후 2시를 가르키고 있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세 사람이 한 침대에서 자기엔 퍽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한숨이 나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내가 앉아있는 침대의 양옆에는 스피릿과 루시아가 꼭 붙어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홀에 나가봤지만 사람은 없었다. 부엌을 지키고 있는 점원에게 물어보니 다들 시내관광을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커다란 홀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스피릿과 루시아가 말끔한 얼굴로 걸어나왔다. 어제 저녁, 안아주지 않으면 밤새도록 괴롭히겠다는 걸 우기고 우겨서 키스로 타협을 한 나는 루시아를 상대로 하마터면 속옷을 적실 뻔했다. 또한 그녀와 내가 입을 맞추고 있는 동안 내내 훌쩍이던 스피릿까지 키스해달라고 매달려서 난 거의 이성을 상실할 뻔했다. 물론 무력까지 동원해서 완강하게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태의 악화를 불러올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그녀들을 멀리하기엔 내 정신과 육체는 너무도 건강했다. 오! 조물주여! 왜 인간에게만 이런 왕성한 성욕을 선물하신 겁니까아?! 한순간이었지만 난 어제 신을 저주했다. “주인님. 무슨 생각하세요?” “아, 아무것도 아냐. 뭐 먹을래?” “전 주인님 드시는 걸로요.” 신기한 일이지만 어제일 이후로 두 사람은 사이가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사람은 동글동글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랬냐? 젠장, 난 부엌에다 대고 빵과 우유를 주문했다. 그리고 스피릿을 보며 말했다. “밥 먹고 루시아 옷도 살 겸 시내 관광 나가자. 스피릿 부탁해.” “예.” 스피릿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게 우유와 빵으로 식사를 대신한 우리들은 곧바로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캐슬린의 상업도시라고 하는 시드의 골목길을 누비며 옷집을 찾았다. 이곳의 옷가게는 거의 대부분이 대형점포를 가지고 있었다. 스피릿의 말로는 도매와 소매를 동시에 하기 때문이라는데. 어쨌든 옷이 많아서 좋았다. 나는 두 아가씨들에게 맘대로 골라보라는 말을 하고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서 그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모습을 구경했다. 당장 입을 옷만 골라왔던 그녀는 몇벌 더 가져오라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더요?” “그래. 내 노예 예쁘다고 자랑하고 다닐 거다. 더 골라와. 스프릿? 데려가서 좀 골라줘.” 스피릿은 그녀를 이끌고 옷이 가득 쌓여있는 곳으로 가더니 이것저것을 그녀에게 대어보기 시작했다. 이걸로 좀 더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둘이서 떽떽 거리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구. 한참 후 스피릿과 루시아가 묵직한 옷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스피릿은 기특하게도 내 옷도 몇벌 골랐다고 했다. 옷가게에서 값을 치르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괜찮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음식을 시켜 놓고 있으려니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던 루시아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주인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여비는 충분하세요?” “어이구, 지금 걱정해 주는 거야? 걱정 마. 아까 옷 집 정도는 통째로 살 정도로 가져왔으니까.” 루시아는 헤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피릿이 물었다. “루시아의 전 주인님은 옷 같은 거 별로 안 사주셨어요?” “흐음… 옷 같은 건 입을 게 없으면 그때그때 생색을 내면서 사줬어. 그리고 식사도 장기 투숙하는 여관에서 하루 두끼만 먹었고, 일이 없을 때는 항상 방안에 처박혀 있어야 했지. 아~ 나도 팔자가 펴려나보다. 새 주인님은 돈도 많고 마음씨도 고우니까. 단지 시대에 뒤떨어진 순정을 지키려고 애써서 좀 속상하지만.” “…미안하다. 로맨티스트라서.” =============================================================================== Running Fire: 11 “이거 다 드릴테니 절 콜트 슈발츠씨 밑으로 재등록 시켜주세요.” “…미안하다. 로맨티스트라서.” 루시아는 빙그레 웃었다.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때마침 식사가 나왔다. 처음 먹어보는 요리라서 난 스피릿에게 조언을 구해야했다. 어설프고도 웃음 넘치는 식사가 끝나고 갑자기 스피릿이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난 기다려 줄테니 천천히 나오라는 말을 하고는 와인과 맥주를 주문했다. “술 마실줄 알지?” “예.” 시원하고 맛이 좋은 흑맥주에 홀딱 빠져 있는데 와인 잔을 만지작대던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참 좋은 사람 같아요.” “나 그 소리 스피릿에게도 들었어. 좋은 사람의 기준은 뭐야? 남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 루시아. 그런 사람은 없어. 난 그저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나도 모르는 내 속마음에 이끌려 이러는 것뿐이라구.”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자기 감정에 솔직하니까.” “킥, 웃기는 소리. 내 감정에 솔직했다면 난 어제 키스만으로 끝내지는….” 늦었다. 요새 들어 자꾸 이러네. 정신 수양이 부족해. 루시아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당장 어때요? 화장실에서, 예?” “으흠! 맥주맛이 참 좋군. 이봐요! 한잔 더 주쇼!” “칫, 빼기는.” “방금 뭐라고 그랬냐? 이 에로티스트야.” 루시아는 대답대신 살짝 웃으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나도 맥주잔을 기울이며 스피릿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루시아가 일어나 화장실로 가보았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화장실에 아무도 없어요!” 처음엔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피릿이 없어? 도망갔나? 잘됐군. 짐 덩이가 하나 줄었어. 하지만 맥주잔을 내려놓은 내 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자그만치 9천 900만 짜리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누가 채간 거 아냐?! 당장 바에서 컵을 닦고 있는 웨이터에게 달려간 나는 그에게 스피릿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키는 이만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회색 머리카락에 첫인상이 상당히 예쁜 20대 아가씨 못봤습니까? 화장실 간다고 갔는데.”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내는 소반을 들고 걸어가는 여점원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를 가르켰다. 그러자 여점원이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엉성한 우리말로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랜퍼스 인이신가요?” 여긴 캐슬린이었지. 젠장! 난 조바심을 느끼며 그녀에게 최대한 쉬운 말로 스피릿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그녀는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머리색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봤어요. 혼자서 나가시던 걸요?” “젠장! 어딜 간 거야?!” 고맙다는 인사를 한 나는 밖으로 나가보았다. 사방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데 나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당장 외따로 떨어진 기분이 든다. “직접 찾으시려구요?” “당연하지!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다시 올지도 모르니까!”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난 이를 악물고 스피릿의 이름을 부르며 사람들의 사이를 뛰어다녔다. 주변에서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난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스피릿! 스피릿 애쉬드! 어디있어?! 이 망할 계집애야!” 대로 끝에서 대로 끝까지 달려간 나는 불안한 마음에 온갖 상상을 하며 상업도시라 가뜩이나 큰 시드의 골목길과 대로를 미친 듯이 들쑤시고 다녔다. 어디 골목길에서 건달패들에게 몹쓸 짓이나 당하지는 않는지. 아니면 대로에서 길을 잃고 날 부르고 있는 건 아닐지. 심장은 터질 것 같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지만 난 멈출 수 없었다. 돈 문제를 넘어서 그 불쌍한 것이 내 이름을 부르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잉잉거리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는 천천히 서쪽으로 꺼져서 저녁이 되어가고 가로등이 켜졌다. 그리고 결국은 밤이 왔다. 불빛 아래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갔지만 상냥한 어른의 미소를 지으며 귀여운 어린아이의 투정을 부리던 회색머리의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광장에서 새벽 0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를 들으면 내가 지른 고함이었다. 풀이 죽어버린 나는 터벅터벅 걸어 루시아가 있는 가게로 향했다. 다행이 식당은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에서 컵을 닦고 있는 웨이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날 보더니 눈으로 식당 안을 가르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루시아와 스피릿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한숨이 나왔다. “속썩이는군 정말….”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스피릿이 후다닥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저, 주인님 아까….” 짜악!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 스피릿은 다리가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눈물 같은 건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우울한 표정으로 한 손으로 벌겋게 변한 볼을 감싸쥐고 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허리를 숙인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스피릿은 숨이 막히는지 연신 켁켁거렸다. “어디 갔다왔어?” “아, 으윽…. 그, 그게….” 짜악! 바닥에 쓰러진 스피릿은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어댔다. 바에서 힐끔거리던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더 이상의 폭력은 지켜보지 않겠다는 주인의 선언이었고 난 그의 정중한 권유를 받아들였다. 몸을 돌리며 말했다. “루시아. 가자, 스피릿, 넌 이제 필요 없어. 따라오지마.” “주, 주인님?!” 난 주머니에서 100만 루나짜리 금화 두 개를 꺼내 그녀의 앞에 하나를 던져주고 나머지 하나를 식당 주인이 있는 바에 올려둔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루시아가 얼른 뒤따라 나왔다. 한밤중이라 사람이 별로 없는 조용한 밤거리를 걷고 있는데 루시아가 슬쩍 말을 걸었다. “저, 주인님. 스피릿은….” “누가 잡아가든, 어디서 죽어버리든 이제 내 알바 아냐. 빌어먹을 녀석….”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루시아는 계속 뭔가 말하려하는 눈치였지만 난 그녀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각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계속 스피릿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와 처음 키스했을 때, 그리고 잉잉거리며 매달리며 아양을 떠는 모습과 나와 농담을 주고받는 그녀의 모습들이 내 머리를 들쑤셨다. 빌어먹을 녀석! 염병할 녀석! 바보 같은 녀석! 멍청한 녀석! “에에이! 잘못했다고 빌면서 좀 잡고 매달리면 안되는 거야!? 이런 젠장!”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기억을 더듬어 식당을 찾아간 나는 아직 불이 켜져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덜컹! “허억! 허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바의 웨이터가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식당 안을 가르켰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훌쩍…, 흐윽….” 바닥에 주저앉은 채 훌쩍이는 스피릿의 모습이 보인다. 난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러자 스피릿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시뻘겋다. 잔뜩 인상을 지뿌린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또 그러면 팔아버릴 거야.” “흐으아앙~!! 주인님! 주인니임~! 흐으윽!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으아앙! 용서해주세요. 앙앙~!” 스피릿은 얼른 내 손을 잡고 일어나더니 두 팔로 날 끌어안고 엉엉 울어댔다. 거창한 한숨을 내쉰 나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준 식당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나는 울다 지쳐서 쓰러져버린 스피릿을 등에 업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흐윽… 죄송해요.” “시끄러. 멍청한 녀석아. 너 앞으로 내 침대에 들어올 생각하지마. 알았어?” “흐으응….” “어허~! 대답 안하지?” “예에에….” “그런데 어디 갔다가 온 거야? 혼자서 나갔다면서.” “어, 저, 여, 여기에 친척이 살고 있어요. 그, 그래서 한번 만나보려고, 흑, 죄송해요. 노예주제에 함부로 행동해서. 훌쩍….” 젠장, 그런 거라면 미리 말해주면 좋았잖아. 난 등에 업은 그녀를 한번 추슬러 올린 다음 다시 길을 걸었다. “계집애. 살만 찌웠냐? 뭐가 이렇게 무거워, 그래서. 뭐라고 하디?” “예?” “친척 말야. 만났을 거 아냐. 노예가 돼버렸는데 도와주겠다는 말 같은 거 않하더냐고.” “그게, 작위와 재산을 모두 박탈당하고 숨어 계신 분이라. 그런 말씀은….” “좋다가 말았겠구나.” “아.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절대….” “웃기는 소리 마. 그런 생각이 있었으니까 만나 봤을 거 아냐. 어쨌든 앞으로 한번 더 아무말없이 도망가면 그땐 진짜로 팔아버릴 테니까 알아서해. 알겠지?” “예에. 으응! 주인님 고마워요.” 스피릿은 내 목을 꽉 껴안으며 말했다. 여관으로 돌아가자 루시아가 우릴 반겼다. 그녀는 웃으며 스피릿의 손을 잡고는 돌아와서 기쁘다는 식으로 말했다. 날 가지고 싸우기는 해도 결국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던 거다. 이른 아침, 누군가가 쳐다보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스피릿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날 쳐다보는 게 아닌가? “으윽… 뭐야. 왜 그래?” “이, 일어나셨어요.”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누운 채로 기지개를 펴다가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루시아가 요염한 자세와 눈빛으로 내 가슴과 배를 더듬고 있다. “주인님, 어제 밤에 그냥 잤는데 지금이라도….” 스피릿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난 슬쩍 루시아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약오르지?” “아아앙! 주인니임! 그러지 마세요!”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훼방을 놓았고 난 낄낄 웃었다. 어제 걱정시킨 벌로 침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빈 침대에서 혼자 자고 나와 루시아는 한 침대에서 밤을 지새웠다. 물론 스피릿의 실종사건 직후였기 때문에 루시아는 얌전히 잠이 들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침이 되자 금세 달라졌지만. “저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우리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이이잉~!” 난 빵을 씹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여기서 지낼 때까지 만으로 봐줄게.” “흐윽… 너무하세요.” “너무하시긴 개코다. 너 때문에 어제 내가 얼마나 뛰어 다닌 줄 알아? 사람이 염치를 알아야지.”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께요. 그러니까 한번만 봐주세요. 예?” 난 고개를 저으며 남은 빵을 입안에 던져 넣고 우유를 마셨다. 울상을 지은 스피릿은 고개를 떨구고 빵을 먹어댔다. 옆에서 보고 있던 루시아가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거죠?” “어, 내일까지. 모레는 다시 여행길에 올라야지.” “주인님은 길드 내에서 꽤 유명하던데. 귀국하면 바로 일거리 있겠죠?” “응.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놀 수는 없어. 무슨 짓이든 해서 벌어야해. 그래야 예쁜 노예들 옷이라도 한 벌씩 사줄 거 아냐.” 루시아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주인님 멋쟁이.” “나도 그게 고민이야.” “주인님 용서해주세요.” “그건 안돼.” “이이잉~!” 응근슬쩍 끼어 들었던 스피릿은 콧소리를 내며 나에게 매달렸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시내 관광을 나섰다. 내일은 다시 여행 준비에 바쁠테니 놀 수 있을 때 놀아둬야 한다. 제미니와 제이미 가져다줄 기념품도 사고 캐슬린의 무기점에 들려 신기한 무기들과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하루종일 여행준비에 바쁜 시간을 보낸 다음, 난 씻고 올라온 두 아가씨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잔뜩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이제 내일이 출발이야. 준비는 다됐지?” “예. 여관주인에게 부탁해서 말의 편자를 새로 갈았구요. 짐도 다 꾸려 놨어요.” 스피릿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헛기침을 한 나는 천천히 말했다. “내일은 다시 그랜퍼스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선택은 지금 뿐이야. 난 너희들에게 일생에 단 한번 있을지 모르는 기회를 주고 싶다. 어떠냐? 노예가 아닌 새 삶을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이곳에서.” 침대에 앉아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두 노예아가씨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갑자기 루시아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봐요. 주인님. 이제와서 뭘 어쩌라고요? 14살 때부터 구겨져 버린 인생이에요. 새 출발? 말도 안돼요. 난 이 나라말은 물론이고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구요. 그런데 여기서 살라구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창가의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네.” 난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울하게 말했다. “저도 주인님이 필요해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젠장. 너희들은 비겁해.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못한다고 포기하다니. 그래서야 언제 자기 발로 일어서고 자기 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겠어? 에이~! 귀여운 것들, 이리와.” 두 팔을 벌리자 루시아와 스피릿이 얼른 안겨들었다. 어이구 무거워라. 침대로 쓰러진 나는 그녀들을 가슴에 안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예쁜 것들을 등에 업게 됐을까?” “업보라고 생각하세요.” “맞아요. 어디서 들었데. 전생에 원수였던 사람들이 후세에 연인이나 친한 친구가 된대요. 주인님과 우리도 혹시 그런 인연이지 않을까요?” “전생에 원수? 그것도 가능성이 높군. 윽! 루시아! 어딜 만지는 거야!?” 그대로 불끄고 좁은 침대에 누워 한참동안 악담을 주고받으며 떠들어댄 우리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성공리에 흥정과 매입을 마친 샤먼 상단을 따라 다시 그랜퍼스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번 도적 떼가 출몰했던 곳을 지나쳤지만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듣기로 우리가 지나간 이후 세력이 약해져서 경비대에게 토벌 당했다고 한다. 가매장했던 사람들의 시체를 꺼내 마차에 올리고 다시 여행길에 오른 우리들은 떠난 지 딱 보름이 되는 날 그랜퍼스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에 왔다는 마음에 한밤중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국경수비대를 지나 국경도시 샤먼에 도착한 우리들은 잠자고 있는 마을 사람들 다 깨어나라고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댔다. 상단대원들이 부르는 노래는 의외로 흥겨운 곡들이 많았다. 음정박자를 무시한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낄낄 웃던 나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았다. 새벽 3시, 좀 늦긴 했지만 어쨌든 도착했다.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가 최고라니까. 상단본부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이곳 상단조합의 보스가 무사히 돌아온 우리들을 격려하며 식사가 준비된 연회장으로 모두를 불러들였다. 새벽이라 좀 출출했던 우리들은 쾌재를 올리며 그릇을 착실히 비워나갔다. 마지막으로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상단보스의 인사를 받은 우리들은 서서히 해가 떠오를 무렵, 준비된 급료를 받고 각자의 잠자리를 찾아갔다. 연회장 문 앞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앉아서 호위무사들의 급료를 챙겨주던 세이라와 슈니르가 줄을 서서 나오던 나에게 인사를 건냈다. “콜트씨, 수고하셨어요. 덕분에 이번 출정은 성공적이었어요.” “나야 따라다니기만 했는걸. 짐을 지킨 건 당신들이지.” 두 사람은 씩 웃었다. 세이라가 가르키는 서류에 서명하자 슈니르가 돈자루를 내밀었다. 허어, 놀면서 받은 것치고는 묵직한걸? 그들에게 앞으로도 장사 잘하라는 말을 남겨주고 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슈니르가 루시아를 불렀다. “예?” “휴거씨의 급료가 있어요. 여기 서명하고 받아가세요.” “어, 그래도 되나요?” 세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니 휴거 잭슨씨는 친척은 물론 가족도 없더군요. 그렇다고 친구라는 사람들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죠. 정당한 봉사의 댓가라고 생각하고 받아가세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 서있던 루시아는 내가 어깨를 툭 치자 얼른 달려가 그녀가 가르키는 곳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슈니르가 내미는 돈 자루를 받아왔다. 갑자기 꽤 큰돈을 받게되자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 것 같다. 나도 첫 일거리를 마치고 사례금을 받았을 때 저런 표정이었지. 스피릿이 말했다. “어머, 루시아 좋겠어요. 얼마에요?” “어, 그, 글쎄.” “급료는 거의 비슷하니까. 대충 1000만 루나 정도 일거야.” 루시아는 입을 딱 벌리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돈주머니를 쳐다보았다. 하품을 좀 한 나는 여기까지 우리는 싣고 오느라 지친 말의 고삐를 잡고 푸르스름한 새벽의 도시를 걸어 여관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샤먼의 노래 주인장은 빗자루를 들고 가게앞 마당을 쓸다가 나를 보고는 묵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돌아오셨군.” “방은 아직 있죠?” “물론이오. 올라가서 쉬시오.” 주인장은 내에게서 말고삐를 넘겨받으며 말했다. 짐을 풀어내린 나와 스피릿, 루시아는 방으로 올라갔다. 방안의 모습은 떠나올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침대는 2개, 스피릿과 루시아는 피곤했는지 한 침대에 쓰러졌고 나도 하품을 하며 오랜만에 혼자서 침대를 차지하고 드러누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좀 늦게 일어난 나는 하품을 하며 홀로 내려갔다. 세수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여점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돌아 오셨나봐요? 캐슬린으로 갔다고 하시더니.” “어, 응. 이거, 선물.” 그녀는 내가 내미는 손수건을 풀어보았다. 그러더니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다 저 주시는 거예요?” “아니, 가게안 사람들에게 하나씩 돌려요. 그리고 시원한 냉차 세잔 주쇼.” 여 점원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가 가져다 준 냉차를 마시고 있는데 스피릿과 루시아가 후다닥 내려왔다. 그녀들은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어서 큰소리로 따지려든 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깨워주시지 않구.” “노예가 주인을 깨워야지 주인이 노예를 깨우냐? 차나 마셔라.” 스피릿은 그래도 불만 섞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너무 오냐오냐 해준 것 같아. 아침을 시켜서 먹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장비들을 챙겨서 무기점으로 향했다. 검은 내가 손질해도 돼지만 자동석궁은 정밀기계라서 꼬박꼬박 무기점에서 정비를 해야한다. 그래야 실전에서 믿고 쏠 수 있지. “그래서 다음에는 어디로 가실 건데요?” “관리원에 갈까 시청에 갈까 고민중이다.” 그러자 루시아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어제 슈니르에게 받은 돈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다 드릴테니 절 콜트 슈발츠씨 밑으로 재등록 시켜주세요.” “나 따라 다니는 거 힘들어. 쉬는 날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킬지 몰라. 스피릿에게 안 들었어? 난 늑대인간을 잡으려고 노예를 미끼로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람이야.” “그래도 좋아요. 골방구석에 주저앉아서 술 먹고 들어온 주인님께 얻어맞는 것보다는 백만 배는 인간답잖아요.” “칫, 짜증나네.” 머리를 벅벅 긁은 나는 그녀들을 내버려두고 대로를 걸어 시청으로 향했다. 뒤에서는 스피릿과 루시아가 졸졸 따라오고 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시청직원에게 루시아의 노예등록증을 내민 나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노예 재등록 부탁합시다.” 내내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던 루시아의 얼굴로 미소가 번졌다. 등록이 끝나고 시청에서 나온 나는 새로 발급된 노예등록증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루시아가 보인다. 난 인상을 찌뿌리며 말했다. “넌 오늘부터 내 거다. 마구마구 부려먹을 테니 각오해.” “감사합니다. 루시아 루시앤 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주인님을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많이 모자라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주세요.” “됐어. 네 돈이야. 필요 없어.” “노예에게 이렇게 큰돈은 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쓸 일도 없구요. 대신 앞으로 좋은 옷, 맛있는 음식 많이 사주시면 되잖아요?” 고개를 숙여 갑자기 말투가 예의바르게 바뀐 루시아를 바라본 나는 그녀가 내미는 돈주머니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열어 금화를 몇 개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네 전 주인과는 다르게 난 목숨을 걸고 일한다. 그래서 부자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 그러니 가지고 있어라. 언제는 쓸모가 있을지 몰라.”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쥐어준 돈을 받아들었다. 찜찜한 기분으로 돈주머니를 갈무리한 나는 그녀들을 이끌고 이제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오랜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일을 받기 위한 사내들로 북적거렸다. 내가 들어가자 당장 사내들의 시선을 날아들었다. 미인노예를 둘이나 데리고 있기 때문일까? 로토가 있는 책상으로 가려는데 덩치 좋은 사내들이 인상을 찌뿌리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스피릿과 루시아는 얼른 내 뒤로 숨었다. 난 고개를 들어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뭐요?” “휴거의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너 같은 놈이 그 녀석의 노예를 데리고 있는 거냐?” “아, 그 사람은 상단과 상단대원을 지키려고 숭고한 생명을 바쳤지. 위대한 희생정신이었어. 멋있었지. 나도 거기 있었거든? 그리고 루시아에 대해선 별로 할말이 없어. 주인이 없어져서 곤란해하는 노예에게 운 좋게 내가 새 주인으로 선택 된 것 뿐이야. 불만 있으면 그녀에게 새 주인을 찾아준 상단 조합의 루노씨에게 가서 따지라고.” “웃기는 소리!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그 녀석은 우리에게 빗을 졌어! 그러니 그 노예라도 데려가야겠다! 이리 내놔!” 난 머리를 좀 긁었다. 뒤를 돌아보니 평소 나에겐 어디 때리려면 때려보란 듯이 거만하게 굴던 루시아가 스피릿의 손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면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보나마나 놀음 빛이지?” 루시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을 대비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매듭을 꽉 맨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슥 만지며 말했다. “루시아 루시앤는 콜트 슈발츠의 밑으로 재등록을 마쳤기 때문에 이제부터 내 노예다. 미안하지만 노예법상 재등록을 마치면 전 주인이 가지고 있던 부채는 노예에게 미칠 수 없어. 그래도 데려가고 싶으면 날 눕혀라. 덤벼.” “이놈이!” 사내들이 주먹을 움켜쥐고 나에게 덤벼들었다. 난 깔깔 웃으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가장 앞서서 덤벼드는 녀석의 무릎을 밟고 뛰어올라 녀석의 턱을 걷어 차버렸다. 멋진 공중제비를 넘어 바닥에 착지하자 턱이 깨진 사내는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졌다. 난 낄낄 웃으며 다리의 주머니에서 강철 건틀릿을 꺼내 손에 끼었다. “미안하지만! 웬만큼 하지 않는 이상 주먹싸움으로는 절대 날 못 이겨! 하하하~! 컴 온! 베이비~♡” “이, 이 자식이~!” 단 한방에서 동료가 쓰러지자 남은 사내들은 덤빌까말까 고민하는 듯이 주저했다. 하지만 난 그들을 선택의 기로에 잠자코 내버려두기 싫었다. 히죽 웃으며 다가가자 갑자기 어떤 사내가 외쳤다. “그만!!” 길드 안에 있던 할 일없는 모험가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웬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보통체격에 턱수염을 기른 사내는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나 여기 길드장이오. 시끄러우니 조용히 좀 하시오.” 길드장의 출연에 길드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헤에, 저게 길드장이야? 난 좀더 젊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내가 있던 입실론의 길드장인 알렉스는 나이가 31살이다. 대체로 모험가 길드장은 4년에 한번 가장 좋은 실적을 쌓은 모험가가 맡기 때문에 대체로 젊은 편이지만 여기 길드장은 좀 나이가 있어 보인다. 마흔? 쉰? 그러고 있는데 길드장이란 사람이 아래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자리를 비켜주었고 난 주먹을 쥐었다. 길드 장이라고 나쁜 마음먹지 말라는 법은 없다. 뒷짐을 진 길드장은 허리를 기울여 내 뒤에 서있는 두 아가씨들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자네가 콜트 슈발츠인가?” “어떻게 아십니까?” “굉장한 미인 노예를 데리고 다니는 정신나간 애송이 모험가가 가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늑대인간으로 첫 실적을 올렸다며?” “먹고살자고 하는 짓거리 일뿐입니다. 볼일 없으시면 비켜주시죠? 전 길드장님이 아니라 저기 로토에게 볼일이 있거든요.” “그러게. 나야 길드에 자네 같은 젊은 피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길드장은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덕분에 다른 모험가들도 끼어 들지 않아서 좋았다. 생각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 하지만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꺄악?! 주, 주인님!” “뭐야?”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후다닥 나에게 매달렸다. 그 뒤를 따라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아가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린 채 종종 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스피릿이 잉잉거리며 말했다. “저, 저분이 제 엉덩이를….” “이 변태 영감이?!” “허허허~ 노예들이 참 예쁘군. 즐겁겠어. 로토군. 상단조합에 갔다올테니 수고하게.” 길드장은 바로 몸을 돌리더니 문을 나서버렸다. “어딜 도망가!” 쫓아가고 싶었지만 어느새 달려온 로토와 상단 호위무사 일을 할 때 얼굴을 익힌 몇몇 안면 있는 모험가들이 날 말렸다. “참으세요. 길드 장이십니다.” “길드 장이면 노예들 엉덩이 주물러도 돼?! 응?! 그런거야!” “원래 저 영감이 좀 그래. 늙으면 주책이라잖아. 네가 참아.” 고개를 돌려보니 상단 호위무사 때 핼버드로 도적 떼를 쓸어대던 사내가 서있었다. 이름이… “슬러스터 판. 맞지?” “잊어먹지 않고 기억해주니 기쁘군. 일 받으러 왔나봐?” “손에 돈 좀 쥐었다고 으스대며 놀고 먹을 수는 없어. 열심히 해야지.” “아무렴. 자넨 부양할 가족이 둘이나 딸려있으니까.” 내 허리와 어깨를 붙잡고 바싹 붙어있던 스피릿과 루시아는 내가 눈치를 주자 정색을 하고 떨어져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슬러스터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 다음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받을 건데?” “그건 봐야 알지. 로토?” 로토는 이미 자신의 책상으로 달려가 다른 모험가들의 일거리를 봐주고 있었다. “저 친구도 바쁘구만.” “그러지 말고 줄서지? 일 받아야 할거 아냐.” 난 슬러스터의 뒤를 따라 줄을 섰다. 단기 호위무사 일을 맡았던 모험가들이 돌아오면서 길드는 새 일을 받기 위한 모험가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책상에 앉아있는 로토의 얼굴을 본 것은 1시간 정도 줄을 서고 난 뒤의 일이었다. Running Fire: 12 “원하는 것을 얻고 돌려 받고 다시 빼앗으려면 싸워야지. 목숨을 걸어서라도 말야.” “…젠장. 먹고살기 힘들구만.” “그래도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쳇, 말은 쉬워. 받아.” 난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갑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로토가 그것을 받으며 말했다. “뭡니까?” “기념품이다. 캐슬린에서 사온거야.” 종이갑 안에는 질 좋은 펜촉이 가득 들어가 있다. 로토는 즐겁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난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스피릿과 루시아를 앉혀두고는 말했다. “일거리 좀 줘. 상단호위무사 같은 건 편하긴 한데 지겨워서 못하겠더라. 좀 더 단기간에 끝나는 걸로 부탁해.” 새 펜촉을 펜대에 끼워 보던 로토는 장부를 펼치더니 말했다. “그럼 단기 경호직은 어떻습니까?” “…설마 버릇없는 귀족가 아가씨들의 투정을 받아주는 일은 아니겠지?” “비슷합니다.” “차라리 드래곤 레어에 들어가서 보물을 훔쳐 나오는 게 훨씬 났겠다.” “죄송하지만 저희 샤먼에는 그렇게까지 정신 나간 일을 의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입실론에는 간혹 있었어.” 로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법사 길드가 있는 곳은 다르군요.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드래곤 레어까지는 무리더라도, 좀 스펙타클하고 익스트림한 일거리는 없을까? 거기에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스릴도 있으면 더 좋겠어.” 그러자 로토는 피식 웃으며 펜대를 손가락으로 돌렸다. 그는 내 옆에 앉아있는 두 노예를 가르켰다. “보아하니 저 아가씨들 일하는데 데리고 다니시죠?” “그렇지. 떼어놓으면 질질 짜니까. 할 수 없어.” “그럼 안됩니다. 모험가는 목숨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목숨 지키기도 힘든데 짐 덩이까지 챙기려면 죽기 십상입니다. 이야기하나 들려드릴까요? 2년 전 저희 길드에 꼭 당신 또래의 모험가가 있었습니다. 실력도 지금의 콜트씨와 비슷했죠. 그리고 그 성격도, 그런 그는 항상 목숨을 거는 일거리를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할부로 산 노예의 몸값도 어서 갚고 예쁜 옷이라도 많이 입혀주고 싶다고 자주 말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자기 노예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저기 스피릿 양만큼 예쁜 노예였거든요? 어쨌든 그 모험가는 일할 때에도 노예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아니, 데리고 다닐 수밖에는 없었지요. 노예도 마음씨 고운 주인을 맘에 들어 했었거든요. 위험한 일이라고 해도 억지를 부려서 따라다녔죠.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트롤을 잡으러 갔다가 달아나는 도중에 노예가 붙잡힌 거죠. 모험가는 그대로 달아났다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험가는 그녀를 구하려고 달려갔고 그래서 노예와 함께 트롤에게 산채로 잡아 먹혔죠. 여기는 벼라별 일이 다 들어오는 모험가 길드입니다. 드래곤의 레어를 터는 황당한 일거리는 아니더라도 위험천만한 랭크 S급의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길드장님의 명령에 따라 죽을상이 뻔히 보이는 일거리는 주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할 일 없는 모험가들이 많은 거로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과 루시아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집보낼 때까지는 데리고 있어야겠지. 알았어. 쉬운 걸로 하나 줘.”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거 받으시고 오늘 저녁 6시까지 갈포드 후작가로 가십시오.” 그가 내미는 서류봉투를 받은 나는 두 아가씨들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로토가 불렀다. “콜트씨?” “왜?” “선물 감사합니다.” 난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길드를 나섰다. 스피릿이 후다닥 달려와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주인님. 저희들 때문에 좋은 일거리 못 받으신 거죠?” “좋은 일거리? 아냐. S랭크는 까딱하면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라구. 굉장히 위험해. 로토 녀석이 말 잘했지. 내 등에 업혀서 나만 바라보고 사는 노예들을 깜빡하고 있었어. 혼자서라면 얼마든지 몸을 빼낼 수 있지만 둘 이상이면 힘들지. 그것도 소중한 것들이라면야.” 난 그녀의 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스피릿은 헤헤 웃으며 내 팔을 꽉 끌어안았다. 좀 떨어져있던 루시아도 곁으로 다가와 내 옷자락을 슬며시 붙잡았다. 난 피식 웃어주었다. 대로를 조금 걷다가 잠시 쉴 겸해서 광장의 벤치에 앉아서 서류를 열어 새 일거리에 대한 정보를 읽어보았다. 접수번호 제 3467호 위험도 : 랭크 C 의뢰인 : 에르반테스 후작가. 접수인 : 모험가 길드. 의뢰비 : 3000만 루나. (경호성공일 경우에 한함. 실패할 경우 의뢰비 지급 불가.) 의뢰내용 : 단기 요인경호. “이거 뭐야? 요인경호에 무슨 돈을 3000만 씩이나 내놓지?” “왜 그러세요?” 10월의 늦가을 반짝 더위에 광장에서 파는 빙수를 사 가지고 온 스피릿과 루시아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난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단기 요인경호에 3000만 루나를 내놨거든. 이상하다 싶어서 말야. 랭크도 낮은데. 요인경호에 이렇게 많은 돈을 걸 이유가 있을까 몰라.” 스피릿이 종이컵에 담긴 빙수를 조그만 티스푼으로 떠서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아먹은 다음 말했다.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해. 3000만 루나 라니. 뭔가 있는 것 같아.” “위험한 일도 없고 돈도 많이 벌면 좋은 거 아닌가요?” “물론 좋긴 하지. 하지만 좀 켕긴단 말야. 어쨌든 일을 맡았으니 물리기 없기야. 가자. 슬슬 준비하고 높으신 귀족님 댁에 가봐야지.” 스피릿과 루시아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좀 느낌이 좋지 않기에 난 될 수 있는 한 중무장을 하고 가기로 했다. 무기상에서 자동석궁을 찾고 마법상점에 들려 스크롤도 몇 개 구입한 나는 여관을 나서기 전 손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묶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루시아가 감상을 말했다. “어디 전쟁하러 가세요?” “삶은 곧 전쟁이라고 하신 분이 계셨지. 너희들은?” 귀족가에 가기 때문에 예쁜 원피스나 치마를 입을 거라 기대했던 나는 그녀들의 단정한 정복바지에 좀 실망해야 했다. 루시아가 말했다. “귀족가엔 의외로 성도착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거든요. 치마 입고 갔다간 무슨 추행을 당할지 몰라요.” “성도착증? 그게 뭐야?” “이성과의 성교에서 절정에 이르려는 본능을 말하는 거예요. 이게 심한 사람을 성도착자라고 하죠. 이것도 병이에요. 귀족가엔 그런 사람들이 많지요.” 스피릿이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난 그런 병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 무기점에서 찾아온 단검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받아. 내가 지켜주긴 하겠지만 결국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는 거야. 알겠지?”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주인님.” 루시아는 스피릿과는 다르게 내 말을 잘 알아들었다. 여관 밖으로 나가자 주인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은 준비됐소. 잘 다녀오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난 루시아를 데리고 말에 올랐다. 스피릿이 말을 탈줄 안다고 했기에 빌린 말은 그녀의 차지가 되었다. 시계를 보니 4시 반이다. 5시쯤엔 도착하겠군. 셋이서 말을 타고 간 곳은 샤먼에 몇 개 없는 귀족저택으로 갈포드 에르반테스 라는 이름의 후작 소유의 것이다. “크다.” 뒤에 앉아있던 루시아가 저 멋진 저택의 총체적인 감상평을 내놓았다. 아마도 여기에 저 저택의 건축을 감독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울분을 터트렸을 거다. 저 정도 건축물을 그저 크다라고 평가하다니. 5층짜리 여관 5개를 합쳐놓은 것 같은 크기의 저택은 저택의 웅장한 모습도 볼만했지만 대문에서 본관까지 말을 타고 족히 10분은 걸리는 거대한 정원이 압권이었다. 게다가 타고난 정원사인 엘프가 봐도 감탄할 정도로 정원손질이 잘 되어있었다. 나와 루시아는 연신 감탄을 해댔다. 스피릿이 말했다. “갈포드 에르반테스 후작이라면 그랜퍼스의 귀족원에서도 꽤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들 중에 하나라고 들었어요. 여기는 그분의 본가인가 보죠?” 황급히 서류를 꺼내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어떻게 알았어?” “이웃나라의 귀족이니까. 이런 건 꽤 알고 있어요.” 스피릿은 혀를 살짝 내밀며 헤헤 웃었다.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무도회장에서 각 나라의 귀족자재들과 사소한 담소를 나누며 댄스를 즐기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해서 절망하다가 다시 이곳을 찾은 기분은 어떨까? “별다른 느낌은 없어요. 그냥 안타까울 뿐?” “안타까워? 뭐가?” “만의 하나 갈포드 에르반테스라는 분이 누명을 써서 국가 반역죄인이 된다면 그분의 식솔들은 모두 처형당하거나 저처럼 암암리에 노예로 팔려 버릴거에요. 그게 안타까울 뿐이죠. 저는 이렇게 좋은 주인님을 만나서 호강하고 살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언제 노예가 되어서 어떤 사람과 환경을 만나게 될지 모르잖아요?” 난 쓰게 웃었다. “호강은 무슨, 내가 뭐 잘해준 거 있다고.” “아니에요. 주인님은 제가 만나본 어떤 사람보다 다정하고 상냥하신 분이에요. 그리고 노예를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이시기도 하구요. 이런 주인님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줄 몰라요.”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루시아가 내 등을 꽉 껴안으며 말했다. 이거, 쑥스러워지네. 낯부끄러운 말은 잘 할 줄 몰랐기에 난 대답대신 서둘러 말을 몰아 본관 정문으로 향했다. 대문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사병을 대동한 멋진 중년의 사내가 우리를 맞이했다. “저는 갈포드 후작가의 집사를 맡고 있는 에이케이 부스터라고 합니다. 모험가 길드에서 파견했다는 콜트 슈발츠 님이십니까?” 막 대답을 하려는데 스피릿이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눈치를 살짝 주었고 난 루시아와 함께 얼른 말에서 내려 그에게 인사를 했다. “모험가 길드 소속 콜트 슈발츠입니다. 의뢰하신 일 때문에 왔습니다만.” “그러시군요. 무장은… 아닙니다. 그냥 들어오시죠.” 내 몸에는 모기에도 흉측한 수십 가지 무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지만, 돈도 많이 주는데 어떻게든 성공해야지 않겠는가? 실패하면 땡전 한푼 없다는데.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말을 넘겨주고 으리으리한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겉과 마찬가지로 으리으리했다. 갈포드씨는 돈을 꽤 잘 버는가보지? 저녁이라 복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 촛대가 아니라 컨티뉴얼 라이트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제 뭐가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해버리게 되었다. 몇 개의 복도를 지나 우리가 안내되어진 곳은 서재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스물 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 책을 보고 있다가 우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몇 번 이런 일을 해본 결과 귀족가에서는 겉치레를 많이 따진 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양옆에 선 스피릿과 루시아도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집사가 우리들을 소개했다. 아, 정말. 확실히 돈을 많이 벌긴 하지만 평민 출신인 나로서는 이런 예의범절이 좀 어색하다. “모험가 길드에서 파견된 콜트 슈발츠 님이십니다. 도련님.” “그러십니까? 고개를 드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베리온 에르반테스. 이번 일을 의뢰한 의뢰주입니다.” 성이 같은 걸 보니 아들쯤 되겠다. 그러나저러나 무슨 일이 실까? 잘생긴 도련님. 그는 먼저 우리들을 자리에 앉혔다. 그는 눈을 살짝 뜨며 스피릿과 루시아를 보더니 말했다. “굉장한 미인들이시군요. 동료이십니까?” “일을 돕기 위한 노예들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건드리면 죽어! 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자 베리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아름다운 노예를 둘씩이나 데리고 다니시다니 솔직히 좀 부럽군요. 어쨌든 콜트씨도 노예를 가지고 계시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어요. 집사. 카이와 스컬드를 데려와요.” “예. 도련님.” 집사는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그러자 베리온이 허리를 조금 숙여 스피릿과 루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아. 콜트씨, 노예에게 잠시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러자 스피릿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베리온과 눈빛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말했다. “스피릿입니다.” “성은?” “주인님 이외의 분에게 제 성을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베리온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린 그는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넌 이름이 어떻게 되지?” “루시아입니다.” 루시아도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베리온은 그러고도 나이와 고향을 대해 묻얼어댔고 난 팔짱을 한 채 가만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걸 성도착증 환자의 초기 증상이라고 해야하나? 거참, 되게 물어보네. 그러는 도중 집사가 잘 차려 입은 두 아가씨를 데리고 들어왔다. 굉장히 놀라운 건 그녀들이 엘프라는 거다. 난 그녀들이 13~4세 밖에 되지 않은 소녀들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대충 어떤 일인지 짐작이 간다. 노예법으로 이 종족 노예들의 포획은 중지됐다지만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구나. 베리온이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녀들을 소개했다. “카이와 스컬드입니다. 둘은 자매로 제 노예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염병할 성도착자 새끼. 할 수만 있다면 녀석의 얼굴을 휘갈겨주고 싶지만 꾹 참았다. 난 모험가고 지금은 일을 하러 온 거다. 케케묵은 감정을 끄집어내서 일을 망칠 필요는 없어. 베리온은 나를 부른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설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충 이해했습니다. 동족들이 찾으러 왔었군요?” 베리온은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다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불평이 많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이 아이들을 지켜주시겠습니까?” “단기 고용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예고장 같은 것이 왔었습니까?” 내 예측은 정확했다. 베리온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역시 경력 있는 모험가답군요! 어제 편지가 왔었습니다. 소녀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직접 데리러 오겠다고 하더군요.” 이제 들을 건 다 들었다. 난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말했다. “노예들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물론 있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베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도 밖으로 나갔다. 한숨을 좀 내쉰 나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쉬리트 택트. 네네파라 하라스.” -자리에 앉아라 궁금한 게 있다. 내가 엘프 말을 하자 두 소녀는 입을 딱 벌리고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난 그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에리키?” -나이는? “네, 네하르.” -14살. “쉬리하르.” -15살. “쟈미이쿠소 나레트 마라하지카?” -자매라고 하던데 정말이냐? 그녀들을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좀 내쉰 나는 바로 앉으며 물었다. “쉬이카 누쿠라소 마라아샤?” -어떻게 된 거지? 두 자매는 서로의 손을 잡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셰리단 근처의 그림자의 숲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숲 속을 헤매던 여행자를 발견하고 숲 밖으로 돌려보내 줬단다. 그런데 이놈의 여행자가 딴 마음을 먹고 사례를 하겠다며 그녀들을 마을로 데리고 와서는 노예상에 팔아 넘겼단다. 그리고는 암시장을 거쳐서 삼일 전에 이곳으로 온 거고,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다시 물었다. “히케 나리마크 누쉬하리카. 네케 하네트.” -기뻐해라. 너희 부모님들이 너희를 찾으러왔다. 두 엘프 소녀의 얼굴로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난 날카롭게 웃으며 말했다. “슈레, 하나크 나라이마 돈 하레트 하케 나라쉬 이이샤혼케 스카하라트. 카라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을 데리러오는 부모님을 퇴치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다. 잘 부탁한다. 다시 그녀들의 얼굴로 절망의 빛이 감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문을 열었다. 집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헛기침을 좀 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방을 하나 준비해주시고 소녀들과 함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구출대의 확실한 퇴치가 있기 전까지 제 시야에서 벗어난 단독행동은 불가합니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집사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었는지 빈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엄청나게 큰 방안은 화려한 침대가 놓여있고 값비싼 장식품들이 즐비했다. “…여긴 누구 방입니까?” “카이와 스컬드의 방입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식당에서 먹지요. 물론 소녀들도 함께.” 고개를 끄덕인 집사는 마침 식사시간이라며 우리들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공교롭게도 베리온과 이 집안의 귀족가족들이 다 모여있었다. 어, 난 이런걸 생각한 게 아닌데. 노예와 주인은 따로 먹지 않나? 식당으로 들어가자 카이와 스컬드라는 엘프 소녀들이 쪼르르 달려가 베리온에게 매달렸다. 베리온은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잘대해 줬나보지? 어쨌든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그들의 틈에 끼어 저녁을 먹었다. 귀족이라고 우리들과 다르게 먹지는 않았다. 대신 음식이 좀 화려하다고 해야할까?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온 나는 베리온과 소녀들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작업을 시작했다. 이 놈의 방은 창문도 많아서 내가 가져온 스크롤이 모자랄 지경이다. 각 창문에 스크롤을 붙이는 작업을 마치자 집사가 하인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주문하신 것 가지고 왔습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하인이 가져온 것은 멋진 의자로 상석에 놓는 것이었다. 그냥 앉을 만한 것을 가져오면 되는데.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두 엘프 소녀들과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치고 있는 베리온을 쳐다보았다. 대체 뭐냐? 나잇값 좀 해라.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지들 좋아서 저러는데 내가 뭐 할말이 있나. 어깨를 으쓱 인 나는 의자를 방 가운데 놓고 자리에 앉았다. “스피릿, 루시아. 거기 소파에 앉아서 좀 쉬어라.” 내 노예들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예고장을 보낸 이상 언젠가는 온다. 준비는 다됐으니 이제는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그동안 내 인내심이 버텨줄지 고민이다. “와하하~! 거기 서라~!” “까르르르~! 이쉬네마~!” -잡아보세요. “베리온 이쉬네토~!” -베리온 나 잡아봐라.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어린시절 못 다했던 술래잡기를 계속하려는지 베리온과 엘프 소녀들은 연신 깔깔대며 방안을 뛰어다니다가 급기야 내가 앉아있는 의자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이구~! 잘들 논다. 저 계집애들은 자기들이 잡혀왔다는 것도 잊어버렸나?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하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고딕드레스를 입은 내 또래의 아가씨가 얼굴을 살짝 구기며 들어왔다. 베리온의 여동생이라는 멜리사 세르반테스였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오라버니. 수업시간입니다. 세라토 선생이 기다리세요.” “아, 이런. 시간이 벌써. 알았어. 카이, 스컬드. 내일 보자?” “예! 어, 여, 열심히 공부, 하세요.” “수고오!” 카이와 스컬드가 더듬대며 말하자 베리온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들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녀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다시 손을 흔들어준 다음 문을 나섰다. 고딕드레스의 아가씨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죄송합니다. 철없는 오라버니 때문에 수고를 끼쳐드려서.” “별말씀을, 저희들에겐 이게 일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해준 나는 꺅꺅거리며 배게 싸움을 즐기고 있는 두 엘프소녀에게 고개를 돌리고 낮음 음성으로 외쳤다. “쉬카네프! 택트!” -조용히 해! 앉아! 두 엘프소녀들은 움찔하더니 당장 배게를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멜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프들의 말을 할 줄 아세요?” “예.” 그녀는 당장 방안에 있는 하녀들을 밖을 내보내더니 문을 닫게 했다. 그러더니 작게 말했다. “저 아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침을 꿀꺽 삼킨 멜리사가 말했다. “그, 그럼 오라버니하고 같이 잤는지 물어봐 주세요.” “성관계를 가졌는지 말입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허~ 알거다알면서 내숭은. 고개를 돌린 나는 소녀들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대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들은 스스럼없이 대답했고 난 들은 데로 말해주었다.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고 키스를 몇 번 하긴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답니다.” 멜리사는 얼굴을 심하게 붉히더니 가슴에 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 다행이다. 아직은 괜찮은 거로군요. 전 오라버니가 이런 어린애들에게까지 몹쓸 짓을 한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요. 전혀 괜찮지 않아요.” 고개를 돌리니 루시아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있는 엘프 소녀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멜리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천한 노예입니다만.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멜리사는 주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신랄하게 말했다. “이건 계획적인 적응기간입니다. 아이들이다 보니 강제로 그런 짓을 하면 미움을 받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두고 가벼운 스킨쉽부터 시작하려는 거예요. 그럼 아이들도 그게 당연한걸 줄 알고 받아들이게되죠.” 과연, 그런거였군. 역시 성도착자. 집요한 구석이 있구려. 멜리사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엘프소녀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지, 지금 이일이 아버님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집안이 발칵 뒤집힐 거예요. 가뜩이나 오라버니의 바람기 때문에 골치를 썩고 계신데. 아앙, 어떡해에~!” 갑자기 머릿속으로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오호라~! 이거 잘 됐군. 난 킬킬 웃으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문을 닫고 나가는 멜리사의 모습을 쳐다보던 스피릿이 나에게 와서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난 돈과 칭찬을 함께 받고 싶어.” “힘드실텐데요.” 루시아가 말했다. 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낄낄 웃었다. “괜찮아. 몸 하난 튼튼하니까. 그리고 요 꼬맹이들에게도 인간은 그렇게 믿을 만한 것들이 아니란 교훈을 심어줘야겠어.” 바닥에 앉아서 눈을 꿈벅거리던 두 엘프 소녀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그날 밤새도록 경계를 펼쳤지만 습격은 없었다. 이거, 계속 이러면 꽤 힘들 것 같은데. 스피릿이 주방에서 만들어온 체력포션(?)을 마시던 나는 하품을 좀 한 다음 말했다. “오늘밤이군.” “예?” 하룻밤 같이 자서 그런지 엘프소녀들과 사이가 좋아진 스피릿이 고개를 돌렸다. 난 꾸벅꾸벅 졸면서 말했다. “만약 내 딸들이 이런 곳에 잡혀있다면 난 안절부절하지 못할 거야. 하물며 엘프들의 자식사랑이 얼마나 지극 정성인데 이런 곳에 더 놔두고 싶어 할 것 같아? 그 사람들 아마 편지를 보낸 날부터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걸? 하지만 인원이 적다보니 강제진입은 꿈도 못꾸고 내내 기회만 살피고 있겠지.” “그걸 알 수 있어요?” “물론 추측이야. 한 시간만 잘 테니까 아이들 좀 잘 봐줘. 어디 내보내지 말고, 누가 들어오면 나 깨우고.” “예. 걱정말고 주무세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참 졸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무의식적으로 의자에 기대어 놓았던 자동석궁을 들어올렸다. 눈을 뜬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아, 쏘, 쏘지 마십시오.” 집사와 베리온이다. 난 석궁을 내리며 하품을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침 오전 수업이 끝나서, 식사 전에 다과나 함께 하려고 왔습니다.” 다과라. 집사와 하녀들이 들고 들어온 소반을 잠시 쳐다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에서 한번 미끼를 던져보자. 난 스피릿을 보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있었지?” “40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됐어. 도련님? 날씨도 좋은데 야외에서 다과를 즐기시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노는 것도 웰빙으로 즐기시는 우리의 도련님께서 내 권유를 거부할 리가 없다. 쾌히 승낙한 그는 카이와 스컬드를 데리고 정원에 있는 나무그늘로 향했다. 그곳엔 하얀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는데 차를 마시려고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베리온과 카이, 스컬드가 자리에 앉고 맞은 편에는 내가 앉았다. 그리고 내 옆에는 루시아와 스피릿이 앉았다. 집사는 우아한 손동작으로 차를 따라서 각자의 앞에 내밀었다. 홍차인가? 맛이 좋구만. 조용히 차를 마시며 주변의 기척을 느끼려고 하는데 이 눈치 없는 도련님께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콜트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스물 셋입니다.” “그러십니까? 전 스풀 다섯입니다. 비슷한 또래를 만나서 기쁘군요.” 난 씩 웃어주었다. 귀족가의 도련님께서 파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친구를 만들기는 쉽지 않지. 어디 평민과 어울리려고 들겠어? 난 그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스르릉~! 검을 뽑은 나는 나무가 울창한 정원으로 들어갔다. 나뭇가지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히죽 웃으며 외쳤다. “쉬라크 나에테 아라히크마 폰 그라시엘 이쉬두르하칸 델라마 루카에데! 샤 카케에르프!” -자식새끼들이 인간에게 겁탈 당하는 걸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나와라! 이 변태 엘프들아! 와사사삿! 갑자기 나뭇잎이 떨어져 나렸다. 난 씩 웃으며 외쳤다. “집사님! 도련님과 노예들을 저택안으로 들이시고 사병들의 출동을 부탁합니다!” 노련한 집사께서는 이미 베리온과 노예들을 이끌로 저택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난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 나무 숲으로 무차별 발사했다. 퉁퉁퉁퉁퉁퉁퉁퉁~! 우수수수~! 와사사삭! 부서진 나뭇가지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나무에서 생겨난 것치고는 좀 색다른 것도 떨어졌다. “…쉬, 나라스 하케 나레마?” -당신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건가? “물론 할 줄 알아. 하지만 빠르게 발음이 안돼. 혀가 꼬이거든? 당신들, 왔으면 어서 나올 것이지 뭐 볼게 있다고 내내 구경만 한거야? 귀여운 아이들이 엉망으로 찢어발겨져서 윤간 당하는 걸 그렇게 보고 싶었어? 별난 취미로군.” “닥쳐. 이 벌레 같은 녀석들! 우리아이들은 어디 있어!” 새로 떨어진 나무열매가 말했다. 화사한 금발에 20대 여성의 그것을 가지고 있는 늘씬한 엘프 아가씨였다. “당신이 저 아이들을 낳았어?” 여자는 대답대신 눈썹을 곧추세우며 활을 들었다. 옆의 사내가 그것을 막았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사람 같은데. 도와줄 수는 없겠는가? 사례는 하겠다.” “이거 참 미안해, 잘생긴 엘프 양반. 난 당신네 자식새끼들을 데려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여기 도련님이 고용한 칼잡이야. 말로 하지마. 오만하고 건방진 인간과의 대화 방식은 그런 게 아냐. 우리와 제대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가슴속에 두근거리는 심장과 두 손안에 쥐어진 칼자루로 하는 거라고.” 드디어 저 온화한 엘프사내의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는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그는 엘프 말로 상스러운 욕설을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허리에 매고 있던 롱소드와 망고슈를 뽑았다. 지켜보던 여자엘프가 말렸지만 그는 막무가네였다. “말 한번 잘했다. 지금 당장 너를 박살내고 내 아이들을 데려가마.” 난 씩 웃었다. “그래야지. 원하는 것을 얻고 돌려 받고 다시 빼앗으려면 싸워야지. 목숨을 걸어서라도 말야.” 때를 같이하여 손에 검을 뽑아든 사병들이 달려왔다. 난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았다. “덤벼라 엘프부부. 세상살이가 얼마나 험난한지 이 콜트 슈발츠가 몸소 가르쳐주마.” 벌떼같이 몰려온 사병들도 날카롭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꿀리지 않는다는 듯이 엘프부부는 검을 들고 우리에게 덤볐다. “흡?!” 챙! 발이 빠른 사병이 달려나가더니 엘프 사내와 검을 나눴다. 챙챙~! 퍽! 하지만 간단하게 쓰러졌다. 상대는 인간의 10배 이상의 삶을 살아가는 비상식적인 세포구조를 가진 생물이다. 그 만큼 전투경험도 많고 노련하며 게다가 풀만 먹고사는 주제에 빠르기까지 하다. 이런 상대와의 전투에서 접근 전은 바보짓이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친애하는 우리 바보 사병들은 자기 동료가 쓰러지자 격분하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는 엘프다! 물러서!” 뒤쪽의 여자 엘프가 엄호사격을 하면 양손에 검을 든 엘프 사내가 엄청난 빠르기로 병사들에게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덕분에 그 짧은 시간에 사병의 반수 이상이 쓰러졌다. “젠장! 섣부르게 덤비지 말라니까! 침착하게 대응해! 그럼 충분히 잡을 수 있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된 나는 겉옷의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헤이스트!” 눈앞에서 노란 불빛이 반짝이고 시야가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했다. 스크롤에 담긴 헤이스트의 스펠파워는 지속시간이 300초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안에 쓰러뜨릴 수 있을까? “으랴차~! 비켜!” 사병들을 밀치고 달려간 나는 당장 엘프사내를 상대로 검을 휘둘렀다. 챙챙챙챙?! 쾅! 검을 지팡이 삼아 바닥을 짚고 그의 가슴에 이단 옆차기를 먹여준 나는 도움닫기를 하며 뛰어올랐다. 그리고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하하하하하~! 애새끼들을 구하고 싶거든 나를 꺽어봐라!”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엘프사내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분노한 아버지의 그것을 하고 있었다. 콰쾅~! 콰지직! 굳게 닫혀진 정문을 박살내고 들어간 나는 홀을 대굴대굴 굴러서 커다란 괘종시계에 등을 부딪혀 겨우 멈췄다. 젠장, 죽겠다. “콜록콜록!! 커억~!” 심하게 기침을 하니 폐가 찢어질 것 같다. 그때 스피릿이 달려왔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거, 걱정말고. 비켜,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마!” 그녀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등에서 새 칼을 뽑았다. 스르릉! 찢어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소매로 닦은 나는 부서진 문으로 들어온 엘프부부를 쳐다보았다. 사병들과 난전을 벌여서 그런지 엘프 여자는 군대군대 옷이 찢어지고 어깨에 화살도 박혀있었다. 하지마 엘프 사내보다는 났다. 그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고 등과 가슴에는 내가 쏜 화살도 몇 개 박혀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와 증오에 타오르는 눈빛을 지우지 않고 있었으며 질끈 쥔 두 손에는 피묻은 검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두근두근 하는데? 스피릿을 밀어낸 나는 오른손에 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커먼 검신이 피를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헤헤헤, 어쨌든 난 악역이니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엘프사내는 잠시 내 모습을 보더니 손에 묻어있는 피를 살짝 핥았다. “인간의 피는 너무 뜨겁군.”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생이야. 그러니 있는 힘껏 타올라야지.” 순간 엘프사내의 얼굴로 미소 비슷한 것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내 아이들은?” “여기 있어. 하지만 못 준다. 데려가려면 나를 쓰러뜨려라!” 검을 비스듬히 내린 나는 그것을 들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피를 너무 흘린 나머지 한가지 까먹고 있었던 사실이 있는데. 엘프는 칼도 잘 다루지만 활을 더 잘 다루는 종족이다. 그리고 도저히 애를 둘씩이나 낳은 아줌마라고 믿기 어려운 저 엘프여자는 나도 다루기 힘든 롱보우를 들고 있었다. 퉁~! 퍼억! 엄청난 운동에너지를 가진 화살이 소리도 없이 날아와 내 어깨에 박혀들었다. 잘만 쏘면 갑옷도 뚫어버리기 때문에 긴 화살은 내 어깨를 반 이상 관통해버렸고 나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철퍼덕! “히익… 히익…!” 숨소리가 피리소리 같다. 역시 엘프와 육탄전을 벌이는 건 너무 도박성이 짙었어. 사병들이 많아서 괜찮을까 했더니만. 제기…! 천장에 매달린 샹드리에가 너무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스피릿이 쪼르르 달려와서는 날 끌어안았다. “아앙! 주인님! 주인니임!” 나는 덜덜 떨리는 팔을 움직여 다시 일어났다.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이러지 않으면 모험가로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많아진다. “…들어가서 나올지 말랬잖아.” “주인님! 그만하세요! 그만… 꺄악?!” 눈을 흡뜬 나는 스피릿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엘프사내를 보았다. “이 자식! 그거 안놔!?” Running Fire: 13 “주인님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 “이 자식! 그거 안놔!?” 스피릿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엘프 사내는 스피릿의 머리를 잡은 채로 옆으로 밀어버렸다. 운동신경이 둔한 그녀는 비틀비틀 달려가다가 픽 쓰러졌고 난 지옥에서 기어올라오는 망자의 신음을 흘리며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엘프사내는 내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검을 발로 차버렸고 난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아, 젠장. 이대로는 안되겠는데. 그거 쓸까? “당신은 뭐지?” 엘프사내의 음성. 고개를 돌리자 두 팔을 벌리고선 루시아의 등이 보인다. 오 마이갓! 너희들 왜 이러는 거야?! “제 주인님이십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하셨으니 더 이상의 폭력은 자제해 주세요.” 바닥에 쓰러져 훌쩍이는 스피릿을 쳐다보던 엘프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날 가르켰다. “당신들, 이 남자의 노예인가? “그렇습니다.” 엘프남자는 갑자기 경멸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신의 다리로 일어설 수 없어서 남의 등에 업혀 다니는 사람들과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비켜라.” “안됩니다.” 엘프남자는 더 이상을 입을 열지 않았다. 뱀이 먹이를 잡는 동작으로 그녀의 목을 붙잡은 엘프남자는 어깨근육을 두 배로 부풀리며 루시아를 들어올렸다. 이놈이! 난 일부러 쓰지 않고 있던 스크롤을 꺼냈다. 그때 짧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윽?!” 고개를 들자 바닥에서 떨어진 루시아가 켁켁거리며 숨을 몰아쉬고는 후다닥 스피릿이 있는 곳으로 물러섰다. 자세히 보니 엘프사내의 가슴에 내가 선물한 단검이 박혀있었다. “단테!” 놀란 엘프여자가 달려왔다. 이건 기회다! 들고있던 몇 개의 스크롤을 한번에 찢은 나는 순서에 상관없이 외쳤다. “힐링! 스트라이킹! 햄프업!” 눈앞으로 색색의 빛이 번쩍이며 온 몸으로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솟아올랐다. 넌 이제 죽었어! 이빨을 꽉 깨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박혀있던 화살을 뽑아냈다. “내 노예를 건드렸지?!” 날 힐끔 쳐다본 엘프 남자는 가슴에 박혀있던 단검을 단숨에 뽑아내며 있는 힘껏 외쳤다. “카이! 스컬드! 이케 쉬리이마!!” -카이! 스컬드! 당장 이리나와! 엄청난 성량이다. 창문이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다 두 손으로 귀를 막은 나는 칼을 들고 앞으로 달려나가려다 뭔가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카이와 스컬드가 단테의 부름에 달려나온 것 같다. 하지만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달려가는 녀석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나는 아이들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아, 아아앙~! 아아앙! 마미~! 파프~!” “너, 너 이 자식!” “헤헤헤, 미안하지만 이대로는 못 줘. 아줌마 당장 활 버려. 안 그럼 당신 아이들 귀가 잘려 버릴지 몰라.” 분노에 치를 떨던 엘프여자는 순순히 활을 버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달려나온 집사와 하녀들에게 아이들을 맡긴 나는 들고있던 칼을 버렸다. 그리고 맨손격투 자세를 잡은 다음 건틀릿을 낀 손을 까딱였다. “컴 온 베이비~!” 화가 날대로 난 엘프사내가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보이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챙! 내려쳐지는 칼을 건틀릿으로 붙잡은 나는 무릎을 들어 그의 배를 찍어 올렸다. 예상 밖의 숨넘어가 가는 소리가 들린다. 역시, 그쪽도 슬슬 체력의 한계였군. 힘을 모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랫배에서 막대한 충격이 생기면 아무리 엘프라고 해도 몸에 흐르는 힘의 분배가 엉망이 되어 근육의 수축이 저하되는 법. 난 그가 방심한 틈을 노려 칼을 빼앗아 멀찍이 던져버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단테가 왼손에 든 망고슈로 내 배를 쑤시려고 들었다. 몸을 돌린 나는 무릎과 팔꿈치를 이용하여 그의 팔을 찍어버렸다. 땡그랑. 킬킬킬, 이쪽은 보조마법으로 일시적이나마 체력을 회복한 상태라구! 왼손을 앞으로 내민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시야를 가림과 동시에 앞으로 뛰어 오른쪽 팔꿈치로 그의 잘생긴 얼굴을 힘차게 찍어버렸다. 빠각! “어때! 짜릿하지?!” “단테!” 사병들과의 전투로 겨우 남아있던 체력을 나와의 몸싸움에서 모두 소진한 단테는 힘없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변하지 않았다. 분노한 아버지의 눈, 쓰러지려는 그의 멱살을 붙잡은 나는 뒤를 돌아보며 약간 정신나간 사람처럼 웃으며 외쳤다. “도련님! 기뻐하십쇼! 잡았습니다. 엘프 전사입니다~! 세뇌해서 경호원으로 쓰시면 딱 안성맞춤일겁니다! 이히히하하하~!!” 꽤 멀리 떨어진 복도입구 근처에 사병들과 함께 서있던 베리온은 내 모습을 보고 대답대신 하하 웃어주기만 했다. 멱살을 잡고 주먹을 든 나는 단테의 얼굴을 쾅쾅 때리며 외쳤다. “카이! 스컬드! 유로! 케리트 마라 혼 세이크마 네레하드 쉬크로 파프 이쉬리히리!” -카이! 스컬드! 봐라! 이게 너희를 구하러온 바보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입술이 터진 단테의 얼굴에서 피가 쏟아졌다. 집사와 하녀에게 잡혀 있던 카이와 스컬드는 내 모습을 보고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오들오들 떨어댔다. 녀석들을 힐끔 쳐다본 나는 주먹을 뒤로 당겼다. 그때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스크롤이 결국 찢어져서 서서히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동어를 외치면 단번에 전개되겠지만 그러면 내 바램이 허사가 될테니 스크롤의 스펠파워가 최고조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빛이 나는 내 주먹을 쳐다보았다.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은 엘프여자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슨…?!” 난 대답대신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쳐버렸다. 번쩍! 스펠파워가 내 주먹에서 터져 나와 단테의 몸으로 옮겨갔다. 단테는 피를 쏟아내며 양탄자가 깔린 홀 바닥에 쓰러졌다. 씩씩거리며 그를 내려다본 나는 이제 엘프여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등뒤에서는 카이와 스컬드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너무 많을 걸 알고 있군. 입다물게 해주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의식적으로 외쳤다. “베리온 도련님! 이 엘프여자도 잡아 드릴테니 추가금 얹어주시겠습니까?”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베리온은 카이와 스컬드가 쓰러진 단테에게 매달려 엉엉거리는데도 불구하고 남자인 내가 봐도 소름돗는 얼굴로 엘프여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 성도착자! 내가 제대로 봤지! “쉬아나. 나에르 파비하레어 샤크루만서. 하케 샤레온 네카 아리온마라스. 유레카 마리아리아나 포스. 마케 이시리드리 파리스,” -당신 남편에게 힐링을 걸었다. 내가 쓰러지면 바로 달아나라. 그리고 부탁인데 아이들 단속 좀 잘해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엘프여자는 완전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프답게 상황파악은 금세 끝났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네, 네에카 쉬마르.” -당신의 이름은? “콜트 슈발츠다. 죽을 때까지 잊지 마라.” 그때였다. 루시아와 스피릿이 동시에 외쳤다. “주인님! 조심하세요!” “엘프가 일어났어요! 뒤!” 일부러 기운이 떨어졌다는 몸짓을 하며 고개를 돌린 나는 무섭게 달려온 단테의 주먹에 얼굴을 맞고 멋지게 허공을 날아 바닥을 굴러버렸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화려한 연출인 것 같다. 철퍼덕~!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눈앞은 노랗고… 손은 피에 젖어있고… 다리는 조금씩 떨려오고…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보조마법의 지속시간이 끝난 것 같다. 이대로라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겠어. 필사적인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고개를 든 나는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에게 말했다. “…내 노예 건드리면, …죽어.” 할말을 끝내자 이제 남아있던 힘이 다 빠져버려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할 만큼 했어, 이대로 기절이다. “쓰으읍… 아프다.” “좀 어떠세요?” “응. 괜찮아. 어, 그거 나주려고 가져 온 거야?” 루시아가 씩 웃으며 광장에서 파는 과일주스를 나에게 내밀었다. 볼이 부어서 입에 대고 마시지는 못하고 나무줄기로 만든 빨대로 주스를 쪽쪽 빨고 있는데 스피릿이 조심스레 상처를 만져보며 말했다.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이렇게까지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 “적당히 하면 들통 났을거야. 게다가 몇 대 맞고 기절했으면 성의 없다고 돈 못 받았을지 모르잖아? 동정표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라구.” 난 가방에서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냈다. 내 연극은 멋지게 성공했다. 스피릿에게 듣기로 내가 기절한 직후 엘프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베리온이 울상을 지으며 사병들을 불렀지만 사병은 물론이고 고용된 모험가까지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쓰러진 마당이라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못했단다. 몇 시간 뒤, 내가 깨어났을 때 베리온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멜리사가 대신 의뢰비를 챙겨주었다. 원칙상으로는 경호에 실패했기 때문에 의뢰비를 받을 수 없지만,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에 의뢰비의 3분의 1인 1000만 루나를 받을 수 있었다. 또 그녀는 특별 위로금이라며 2000만 루나를 더 내밀었다. 도합 3000만 루나를 받게된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상처 입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옆에 앉아서 주스를 쪽쪽 빨고 있던 루시아가 말했다. “하루 쉬고 가라고 했는데 그냥 자고 오시면 될걸. 그럼 신전 입원비 굳혔을 텐데.” “무슨 소리. 난 그렇게 낯이 두꺼운 인물이 아냐. 그리고 범인은 범행장소에서 최대한 빨리 떨어져야해. 시치미 떼고 있다간 잡힐 수도 있거든.” “주인님 너무 약삭빨라요.” “칭찬 고마워.” 고개를 꺽으며 하하 웃다가 어깨의 상처가 덧나서 비명을 좀 질러댔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내 뒤에 섰다. 흠칫한 나는 자동석궁을 뽑아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대등할 정도로 붕대와 각종 반창고를 몸에 붙인 사내는 아까 봤던 엘프남자였다. “단테.” “기억하고 있군. 고맙다는 말을 해주려고 왔다.” “애써 찾아와서 그런 말할 시간이 있거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귀여운 아이들 엉덩이나 좀 쓰다듬어주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헌데, 인사를 하기 전에 궁금한 게 있다. 너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사람은 누구지?” 한 손에 자동석궁을 든 나는 귀를 후볐다. 대답하기 싫다는 투였지만 그는 눈치가 없는지 계속 질문을 해댔고 난 하는 수없이 말해줬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는 엘프셨어. 어렸을 때 곧잘 당신네 말을 가르쳐주셨지.” “성함은?” “…왜 내가 그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해?” “성함은?” 단테는 집요했다. 입을 우물거리던 나는 작은 희망을 걸어 거의 5년 만에 그분의 이름을 발음했다. “레이철, 레이첼 와이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어쨌든 고마웠다. 행여 네 어머니를 만나면 인사를 해두지. 잘 있어라.”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광장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 어머니를 만나면 인사를 하겠다고? 하하, 글쎄. 힘들텐데. 머리를 흔들어 옛 기억을 지워버린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려다가 이상한 눈빛들을 발견했다. “뭐야? 왜 그래?” “헤에, 몰랐어요 주인님이 하프엘프셨을 줄은, 그런데 전혀 엘프 같지 않은 걸요?” “…난 그랜퍼스 798년 산 토종이야. 하프엘프 같은 게 아니라고.” 스피릿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엘프가 어머니란 소리는?” “키워준 부모님이겠지. 엘프들은 간혹 버려진 인간 아이들을 주워서 기르곤 한다고 들었어.” 루시아가 말했다. 그러자 스피릿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위 아래로 쳐다보았다. “주인님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 “…자꾸 이상한 소리하면 저녁 굶긴다. 난 하프엘프도 아니고 다리 밑에 버려진 아이도 아냐. 단지 키워준 어머니니가 엘프라는 것 뿐, 특별한 건 없어. 가자. 배고프다.” 검을 지팡이 삼아 절뚝이며 길을 걸었다. 몸이 이 꼴이라 말에도 오르지 못한다. 그런데 노예라는 것들은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너무 특별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인데. 안 그러니?” “동감이야. 저 정도 상처를 입고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어떻게 보통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어?” “칵! 빨리 부축 안해주지!” “예에~!” 스피릿과 루시아가 얼른 달려와서 날 부축했다. 두 팔을 그녀들의 어깨에 올린 나는 불량스럽게 말했다. “요즘 계속 오냐오냐 해주니 버릇이 없어졌어. 아앙~! 자꾸 말 안 들으면 콱 잡아먹어 버린다. 요것들아.” “헤에, 오늘밤? 하지만 다쳤는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세요?” 응근이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루시아의 얼굴을, 난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일단 여관으로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신전으로 간 나는 담당 프리스트의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으며 신성치료와 포션을 몸에 바르고 병실침대에 드러누웠다. 돈도 생겼으니 다음 일거리를 위해 몸뚱아리를 치료해야지. 모험가에게 있어서 최대의 도구는 건강한 육체니까. “그런 몸을 원한다면 최소한 한 달은 요양해야 해요. 지금 이런 몸은 건강한 육체라고 할 수 없어요.” “이 정도 상처로 무슨 한달 동안 놀라는 겁니까? 그랬다간 길드에서 잊혀질 겁니다.” “그럼 직업을 바꾸시죠.” “배운게 도둑질이라 이거말고는 할게 없는데. 그리고 재들도 있고.” 병실 간이침대에 앉아 프리스티스의 디바인 파워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노예아가씨들을 가르 켰다. 어느새 내 주치의가 되어버린 롤빵머리 프리스티스는 자신의 이름을 엘리제라고 밝혔다. 그녀는 스피릿과 루시아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한 명 늘었군요. 하렘이라도 만들 생각이에요?” “…프리스티스가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엘리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디바인 파워를 거뒀다. 몸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다. 붕대와 가위 등을 챙기며 그녀가 말했다. “다 됐어요. 내일 아침에 치료 한번 더 하고 퇴원시켜 줄테니까. 도망가지 말아요. 알겠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엘리제는 몇 번을 그렇게 다짐하고는 루시아와 스피릿을 불렀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몸에 무리가 많이 따라요. 모험가들이 단명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죠. 주인님의 사랑을 오래 받고 싶으면 어떻게든 푹 쉬도록 하게 하세요. 무리하게 하면 안돼요. 아셨죠?” “…정말 프리스티스가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당신도 그래요. 오래 살고 싶으면 몸에 좀더 신경 쓰라구요.”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고 총총히 병실 문을 닫았다. 못하는 말이 없어. 불량 프리스티스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 홀딱 넘어가 버린 사람이 있었으니 스피릿이었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몸에 감은 붕대를 만져댔다. “오, 오래 살지 못한다구요? 주인님!” “난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 거야! 그러니까 저런 불량 성직자 말 믿지마!” 그래도 스피릿은 웅얼웅얼 거리며 내가 누워있는 침대 근처를 서성였다. 못 말려. 신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엘리제에게 신성치료를 받은 나는 곧바로 퇴원했다. “부탁이니 살살 좀 굴러다니세요.” “…내가 굼벵이 입니까? 굴러다니게?”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거기 자매 님들, 어제도 말했지만 주인님 무리하게 만들지 마세요.” “예.”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기가차서 손을 흔드는 롤빵머리 프리스티스에게 말했다. “성직자면서 그렇게 말하지 좀 마세요. 신도들 보기 부끄럽지 않습니까?” “부끄럽다? 아뇨. 이것도 우리들의 삶인걸요.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 해요. 어쨌든 몸조심하고 다시는 볼일이 없기를 글록께 기도할게요.” “젠장. 안녕히 계십쇼.” 몸에 붕대를 감은 나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신전의 대문을 나섰다. 스피릿이 말했다. “좋은 말씀을 들었어요.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좋은 말은 무슨. 단지 사람 사는 모습을 멋진 미사여구로 바꾼 것 뿐이야. 성직자들이 잘하는 거잖아. 주인님, 배고파요. 맛있는 거 사줘요.” 루시아가 내 팔을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몰랐는데 루시아는 가슴도 꽤 크다. …기분이 좋긴 한데 옆에서 노려보는 스피릿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젠장, 확실히 노예 둘은 커버하기 힘들군. 가끔은 내 성격이 동글동글하고 여자를 좀 밝혔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제미니 생각 같은 거 하지 않고 예쁜 노예들과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을 텐데. …윽! 이건 너무 위험하다. 티격대는 두 노예를 이끌고 고급식당을 찾아간 나는 배가 빵빵해 지도록 먹이고 먹었다. 그리고 길드로 가서 새 일거리를 받으려 했지만 두 아가씨들의 절대적인 반대에 부딪혀 여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너희들이 뭔데 남의 장사를 방해하는 거야?!” “프리스티스가 그러셨어요. 주인님에게 오래 사랑 받으려면 무리하게 일 시키지 말라고. 그러니까 좀 쉬고 하세요.” “칫! 그럼 오늘 하루만 더 쉬고 내일은 일 받으러 갈 거다.” 그녀들과 티격대며 여관으로 들어가니 바에 앉아 접시를 닦고 있던 험악한 주인장이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시오. 콜트씨. 손님이 왔는데.” “손님이요?” 그는 굵은 손가락으로 홀의 한 구석을 가르켰다. 그곳엔 하얀색 바탕에 붉은 색 줄무늬가 들어간 로브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난 그의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기울였다. “뉘쇼?” “아! 콜트씨?”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콜트 슈발츠 인데? 당신은?” 후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상처가 거의 없다. 마법사로군. 그는 나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전 수도 캘버린의 마법사 길드에서 온 아레프 왓슨이라고 합니다.” “거, 마법사 길드에서는 초면에 인사 할 때 후드 쓰고 합니까?” “아! 이,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레프라고 했던 마법사는 후다닥 후드를 벗었다. 1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어 줄 것 같은 동안에 선량한 외모의 사내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있다. 난 호기심에 물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만 몇 살이쇼?” “올해 22살입니다. 이, 일단 앉으시죠.” 켁, 연하잖아. 그의 권유에 자리에 앉은 내 등뒤로 스피릿과 루시아가 와서 섰다. 그녀들의 미모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아레프는 내 부름에 고개를 내렸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좀 칠칠맞네. “그래서, 왕도의 마법사 길드에서 날 찾아온 이유는? 난 별로 당신네 길드와 인연이 없는데.” “아, 모르시겠지만 콜트씨는 마법사 길드 내에서 꽤 유명인입니다. 입실론 마법사 길드에서 있었던 폭주고렘 탈주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입실론에 있을 때 어떤 마법사가 실험 중이던 고렘들이 집단으로 자아붕괴를 일으켜 길드를 박살내고 마을을 뒤집어 놓았던 사건이다. 그때는 모험가 길드뿐만 아니라 경비대까지 합세해서 녀석들을 잡으러 다녔는데. 왜 하필 내가 유명해 졌지? “그때 난 별로 한 거 없는데.” “급조된 마법 검 하나 들고 혼자서 고렘을 쓰러뜨렸지 않습니까.” 보조마법을 있는 대로 건 상태였긴 하지만, 확실히 혼자서 잡긴 했었으니까. 난 깍지낀 손에 턱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신지?” 그는 다짜고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저 좀 도와주세요.” 눈썹을 세운 나는 그의 손을 점잖게 뿌리치고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아레프는 마법사답게 차근차근 말했다. 그는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고시 중에 가장 어렵다는 마법사 능력 시험을 단 한번에 통과한 수재 중의 수재로 수도의 마법사 길드에 개인 용도의 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마법사가 길드 내에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다는 건 상당히 유능하다는 증거다. 그 좋은 예로 내 친구 라이트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 길드 내에 방을 얻지 못하고 집을 사서 일거리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마법사가 촌구석 깡촌까지 내려온 이유는 연구 재료로 사용할 드래곤 본의 채취를 위해서라고 했다. 여기까지 들은 나는 손바닥을 들어 그의 말을 막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아와 스피릿의 어깨에 팔을 올린 다음 유유히 방으로 올라갔다. “잠깐만요! 아직 제 이야기가!” “돌아가쇼. 드래곤의 레어라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그런데 이 마법사는 좀 끈덕진 데가 있는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옷자락을 붙잡는게 아닌가? 쓰~! 귀찮게스리~! 뒤를 돌아보았다. 아레프는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 이야기,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스프릿과 루시아의 어깨에서 팔을 내린 나는 가까운 테이블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아레프도 얼른 맞은 편에 앉았다. 탕~! 팔을 탁자에 올린 나는 낮게 말했다. “이야기 끝나고 한 대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해보쇼.”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야기를 마저 했다. “저 역시 살아있는 드래곤에게서 뼛조각을 얻으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버려진 레어에 있는 죽은 드래곤의 뼈입니다. 그리고 고대문헌을 뒤져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수 천년 전에 버려진 드래곤 레어가 있답니다.” “셰리단에 있는 노아의 레어?” 아레프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알고 계십니까?” “30년쯤 전에 노아의 산맥을 오르던 여행자들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갖은 모험가들과 마법사들이 다 거쳐간 곳인데. 뭐가 더 나올려구. 나도 가봤지만 거기 드래곤 본 같은 건 없었어.” “가보신 적이 있다구요?!” “좀 관심 있다는 사람들은 한번씩 다가봤지. 드래곤 레어라니 신기하거든? 하긴 당신 같이 길드 내에 처박혀서 연구만 해대는 사람은 몰랐겠지만.” 아레프는 입을 꾹 다물고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스피릿과 루시아를 자리에 앉히고 맥주를 주문했다. “당신은 뭐 마실거요?” “아, 우유 마시겠습니다.” “쿡쿡….”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아레프는 금발의 미인 노예가 자신을 보고 웃자 얼굴이 뻘게져서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허, 하는 짓이 참 귀엽군. 총각, 루시아에게 주의를 좀 준 나는 우유도 주문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그래서, 드래곤 본으로 무슨 연구를 할건데?” “…그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나는 손가락 세 개를 펴들었다. “이렇게 합시다. 만약 내가 당신의 연구목적을 맞추면 난 이대로 일어날 거요. 대신 내가 맞추지 못하면 당신 일을 도와주지. 물론 수고비도 받을 거요. 공짜는 없으니까. 알겠지?”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키메라 합성. 사자소환. 마신강림.” 아레프의 인상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한참동안 날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것은 마법사가 절대로 행해서는 안되는 금기입니다.” “마법사의 맹약을 걸고, 아니야?” “아닙니다.” 아레프는 단호하게 말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사악한 리치가 되었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실제로 리치가 거짓말을 하는 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마법사의 맹약이 어떤 것인지 한 예로 나타내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점원이 가져다 준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래서 얼마 줄테야?” Running Fire: 14 “노예도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안되는 겁니까?” 수고비와 날짜를 약속하고 착수금 500만 루나를 미리 받은 나는 방으로 올라왔다. 스피릿이 나 궁금한 거 있어요~! 라는 얼굴로 말했다. “금기는 뭐고 마법사의 맹약은 뭐예요?” 겉옷을 벗고 침대에 누운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키메라 합성. 사자소환. 마신강림. 이 세 가지는 마법사가 하면 안 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나열한거야. 키메라 합성은 서로 다른 생물들로 전혀 다른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내는 걸 말하는 거지. 현재 우리나라 그랜퍼스에서는 이론이 체계화된 군용 키메라 단 한 종을 제외하고는 허가받지 않은 불법 키메라 합성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상태가 불완전한 것들이 많은 데다 어떤 마법사는 인간을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거든? 그리고 사자소환은 죽은 자를 되살리는 거고, 마신강림은 말 그대로 악마나 천사를 현실세계로 불러내는 것을 말하지. 앞의 것들은 그나마 수습이 가능하지만 마신강림은 한번 불러내면 생명력이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아. 나라하나 박살나는 건 순식간이지.” 루시아와 스피릿은 매우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루시아가 말했다. “그럼 마법사의 맹약은?” “마법사의 맹약은, 뭐 설명할 것도 없어.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아. 죽어도 말이지.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온 마법사들의 보수주의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해야할까?” 루시아는 흐응~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마친 나는 그녀들에게 자유시간을 주고 낮잠을 청했다. “자유시간이요? 그러지 말고 속옷이나 좀 사주시지.” “에이~! 지금 그것 때문에 자유시간 주는 거잖아! 대낮에 나보고 동네 아닥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속옷가게에 가서 여자 속옷을 사오란 말야?! 난 못해! 너희들끼리 갔다와!” 침대에 앉아서 열변을 토하는 나를 지긋한 눈으로 쳐다보던 루시아가 말했다. “주인님 부끄럼쟁이.” “칵!” 내가 얼굴을 붉히며 이빨을 드러내자 스피릿이 물었다. “하지만 누가 예쁘다가 업어가면 어떻게 해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그래. 이 근방에서 나나 너희들 얼굴은 상당히 알려져 있으니까.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도와줄 거야. 안 그러면 날 부르러 오던가. 옷가게는 여관 뒤에 있잖아? 창문에서도 보인다구.” 창문 밖 시장 골목을 쳐다보던 스피릿은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밖으로 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올 때 맛있는 거 좀 사와라. 참, 돈은 있어?” “예. 금방 올게요.” “천천히 놀다와.”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나는 하품을 하며 침대에 기댔다. 문밖에는 스피릿과 루시아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 얼마 만에 조용한 나만의 시간이냐? 약간은 묘한 기분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한 스피릿의 음성을 들었다. “주인님!” 젠장! 하여튼 이놈의 동네는! “뭐야?!” 하얗게 질린 스피릿이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내 앞에 서있었다. 머리채를 잡혔었군. 침대에 서서 말을 더듬고 있는 그녀를 재촉했다. 스피릿이 겨우 말했다. “오, 옷가게에서 나오는데 나, 남자들이 오더니 시, 시비를 걸면서, 머리를 잡아 당겼….” “젠장! 루시아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스피릿이 외쳤다. “모, 모르겠어요! 옷가게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데 루시아가 절 밀면서 얼른 주인님을 불러오라고!” 빌어먹을! 맨발로 문으로 달려가려던 나는 몸을 돌리고 창문으로 뛰었다. “주인님!?” “으랴챠! 거기 비켜~!” 3층 창문에서 뛰어내린 나는 근처 노점의 천막으로 몸을 던졌다. 찌이이익! 콰앙! 다행히도 떨어진 곳은 옷가게라 충격은 적었다. 가게주인이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는 가운데 난 밖으로 달려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있었지만 루시아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염병! 루시아!” “…예.” 잉? 고개를 돌려보니 얼빠진 얼굴의 루시아와 수도에서 온 젊은 마법사 아레프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평상복을 입고 손에는 장바구니를 든 아레프가 말했다. “대, 대단하시군요. 3층에서….” “루시아?! 너 괜찮아?” 루시아는 맨발로 달려오는 날 보더니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이 히히덕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따갑다. “고마워요. 주인님.” “…이, 일단 돌아가자.” 여관으로 돌아와서 자초지정을 들어보니 동네 건달들이 주변에서 소문이 자자한 예쁜 노예들을 발견하고 추파를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스피릿이 되려 겁을 집어먹고 움츠려들자 건달들이 물고늘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단다. 맥주를 들이키던 나는 잔을 씹어버릴 뻔한 다음 말했다. “주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아?!” “안 도와주던데요.” “…이 빌어먹을.” 스피릿이 날 부르러 가고 혼자 남게된 루시아는 건달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로 끌려가다가 다행이 지나가던 아레프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개를 돌린 나는 여전히 우유를 마시는 아레프에게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제 노예를 구해주셔서.”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뭘, 그런데 여기는 치안이 좀 허술하군요.” 이때 험악한 인상의 여관 주인장이 웬 사내의 멱살을 끌고 여관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레프의 말을 듣고 내 대신 대답했다. “국경도시이다 보니 죄를 짓고 갈곳이 없는 뜨내기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말이지. 이봐 아가씨들, 이 놈들이 맞나?” 꽤 얻어맞았는지 눈가가 시퍼런 사내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스피릿이 움찔하며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루시아가 대뜸 말했다. “예. 그 사람이에요.” “미안하게 됐소. 가끔 정리를 하곤 하는데. 어느새 또 새로 왔는가보군.” 험악한 주인장은 그 사내의 목을 붙잡고 이번엔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부엌 안에서 사람잡는 괴성이 울려 퍼졌고 상냥한 미소의 점원들이 각 테이블을 돌며 주인장이 건달을 고문중이니 놀라지 말라는 말을 하러 다녔다. 이왕 시간도 됐고 저녁이나 먹고 올라갈까 하고 있는데 아레프가 우유잔을 내리며 말했다. “앞으로 함께 여행할텐데. 답례로 하기엔 뭣하지만 아가씨들 이름 좀 알 수 있을까요?” 루시아가 제일 먼저 말했다. “루시아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스피릿입니다.” 아레프는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에게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젠장. 일터를 옮기던가 해야지. 이거 불안해서 못살겠네. 노예한테 맘놓고 심부름 정도는 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흑,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좋아. 이번 일 끝나면 이사가자.” “어디로?” “그건 차차 생각해봐야지.” 침대에 앉아 칼을 갈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잠옷바람으로 나가려 했다. “어디가?” “화장실이요.” “이거 갖고 갈레?” 난 자동석궁을 내밀었다. 루시아는 쓰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어요. 여긴 무서운 곰 아저씨가 있으니까 안전해요.” “곰 아저씨? 아, 주인장 말이구나.”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내 옆에 앉아있던 스피릿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칼을 가는 내 손을 붙잡았다. “응?” “주인님. 키, 키스, 해도 돼요?” 엥? 난 약간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피릿은 불안한 듯이 자꾸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하, 루시아 때문이구나. 자리 지키기 같은 건가? 자기가 버림받을 거라고 생각하나보지?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주인님.”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칼을 갈려고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루시아가 말했다. 내가 뭔 짓을 하던 고향에 있는 여자는 모른다고, 대신 자기 양심만 좀 깍아내면된다고. 흠, 제미니도 젊은 날의 외도는 눈감아 준다고 했어. 양심 좀 깍지 뭐.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키스해 줘.” 스피릿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입을 맞췄다. 문이 열릴지 모른다는 걱정은 스릴로 바뀌고 23살의 뜨거운 피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나는 결국 그녀의 가슴에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하지만 스피릿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약간 겁에 질린 눈으로 날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관뒀다. “…조, 좀 더 하셔도 괜찮은데.” 스피릿의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대답대신 그녀를 끌어당겨 가슴에 꼭 끌어 안아주었다.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때 문이 열렸다. 루시아는 침대에 앉아있는 우리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바뀌어 버렸다. “나만 빼놓고….” 기분 나쁘게 웃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루시아를 난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이튿날은 여행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버려진 레어가 있는 노아의 산맥은 굉장히 높고 춥기 때문에 등반 장비와 방한 장비는 필수다. 게다가 스피릿과 루시아가 죽어도 따라가겠다는 입장을 밝혀왔기에 그녀들 몫의 장비까지 구입하느라 더 시간이 걸렸다. “함께 데려 가실 겁니까?” “물론, 산이 좀 높긴 하지만 몬스터는 없으니까. 게다가 여기는 불량배가 많아서 놔두고 가기엔 좀 껄끄러워서.” 그래서 아레프도 승낙했다. 방한복과 각종 장비를 구입한 우리는 짐을 싸놓고 그날 저녁 여행경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드디어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무서운 곰 아저씨가 우리를 배웅했다. “잘 다녀오시오.”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모두 말에 오른 우리들은 아직 새벽기운이 완연한 대로를 달려 버려진 드래곤의 레어가 있는 셰리단으로 향했다. 싸늘한 바람이 10월의 끝자락을 알려주는 가운데 하루종일 켄터 정도의 속도로 달린 우리들은 노상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다행이 근처에 개울가가 있어 말들에게 줄 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나와 아레프가 장작을 모으고 주변에 몬스터들이 지나는 흔적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동안 스피릿과 루시아는 돌을 모아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했다. 숲속을 헤매는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맛있는 냄새. 환장하겠네. 몬스터들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찾아오겠지?” 옆에서 걷고 있던 아레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숲속에서 나가니 그녀들이 우릴 반겼다. “어서오세요. 배고프시죠?” 저녁은 팬케익과 크림스프다. 야외에서 이 정도면 잘 먹는 거지. 수도에서 여기까지 혼자서 왔다는 아레프는 그녀들의 만든 식사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울 기세였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전혀 마법사답지 않게 팬케익을 우걱우걱 씹으며 하는 실없는 소리에 두 노예 아가씨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난 컵에 담긴 스프를 훌훌 불어 떠먹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볼일 볼 거면 근처에서 봐. 이 근방에 아레프와 내가….” 뻐버벙! “꺅?!” 가슴을 울리는 폭음과 불꽃이 숲에서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두 아가씨는 무의식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안겨들었다. 아레프에게 매달렸던 루시아는 얼른 떨어져서 그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레프는 괜찮다며 두 손을 흔들어댔다. 난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떨어질 줄 모르는 스피릿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함정을 좀 설치했다. 까딱하다가 걸리면 황천길이니까. 조심하도록. 미리 말해주면 안됐냐고 따지는 그녀들을 진정시킨 나는 마저 먹던 저녁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숲으로 향했다. 스피릿이 물었다. “어디가세요?” “볼일 보러.” 스피릿은 아레프를 의식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나에게 달려왔다. 그러더니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도….” 난 피식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갔다. 다시 돌아오니 루시아가 침낭을 꺼내고 있었다. “내일도 달려야 할텐데. 일찍 주무세요.” “불침번 서야지. 먼저들 자.” “예.” 두 아가씨는 각자의 침낭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고 난 바닥에 앉아 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레프. 당신도 좀 자둬요.” 책을 보고 있던 아레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좀있다가 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불가에서 등을 돌리고 어두운 숲과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는데 아레프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콜트씨?” “왜요?” “저 아가씨들은 당신의 노예죠?” “그런데?” 잠시 대답이 없다가 다시 들려왔다. “노예는 대략 가격이 얼마나 합니까?” 고개를 돌린 나는 아레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시선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길드 내에 쳐박혀서 마법만 판 것 같은데. “이봐 당신, 친구 없지?” “예?” “미리 말해두지만 노예를 친구나 연인으로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저쪽은 당신의 노예가 되어주는 대신 당신의 등에 업혀 생계를 보장받는다구. 더더군다나 이성노예라면 애정까지 생기게될지 몰라. 그럼 안돼. 나중에 피차 힘들어져. 장난삼아 벌이는 불장난이 필요하다면 괜찮은 홍등가를 소개시켜줄 수 있어. 하지만, 노예를 상대로 우정이나 사랑을 키우지 말아줬으면 해. 노예는 주인의 등에 업혀있을 뿐이야. 주인이 힘들어하면 다른 사람의 등에 업히려 하지. 그게 노예야. 알아들어?” 솔직히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난 내 소유의 노예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한다. 이유? 여자니까. 게다가 나만 바라보고 사는 녀석들인데 어떻게 학대한단 말야? 적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 남지만, 내 등에 업혀 잉잉거리는 노예들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나도 참, 모질지 못하지. 그래서 노예시장에서 스피릿을 사고 루시아를 받아들인 건지도 모른다. 동정심일까? 아레프가 말했다. “그럼 안됩니까?” 스피릿을 쳐다보던 나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레프는 책을 덥고 날 바라보며 말했다. “노예도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안되는 겁니까?” “…안될 필요는 없겠지. 아마?” 긍정하고 말았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하품을 한 다음 개울에서 세수를 하고 갈라질 것 같은 얼굴을 스피릿이 내미는 수건으로 닦았다. 루시아와 아레프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는데 스피릿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세수를 하다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무, 물이 너무 차가워요.” 난 낄낄 웃으며 그녀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출발준비를 끝내고 아침을 먹은 우리는 다시 말에 올라 셰리단으로 출발했다. 아침저녁으로 꽤 추워진다. 입김이 보일 정도다. 겨울이 다가오는군. 그런 그렇고 노아의 산맥에 올라가면 더 춥겠는걸? 그렇게 찬바람을 하루종일 달린 우리들은 늦은 저녁, 겨우 노아의 산맥을 끼고 있는 셰리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을 통과하여 여관 골목을 찾은 우리는 콧수염이 멋진 사내가 가르쳐준 여관으로 향했다. 잘생긴 청년이 우리를 반겼다. “어서옵셔! 뭘드릴까요?! 식사? 목욕? 침대?” 겨우 말에서 내린 스피릿이 콧물을 들이키며 내게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따, 따뜻한 물에 씻고 침대로 들어가고 시퍼요오.” “저도 좀….” 아레프도 파랗게 질린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저 상태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나도 좀 씻고 누웠으면 좋겠다. 그때 유독 말을 탈줄 모른다는 이유로 내 등에 달라붙어 있던 루시아만이 쌩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배고파요.” 하지만 나의 협박과 스피릿과 아레프의 무언의 눈빛이 좀 작용한 다음 그녀도 일단 씻는 쪽을 선택했다. “으으~! 너무 추웠어. 뼈가 얼은 것 같아.” 씻고 방으로 올라온 우리들은 고맙게도 벽난로에 불을 붙여준 여관 종업원에게 축복을 내리며 앞다투어 불가에 모여 앉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스피릿, 루시아. 노아의 산맥은 이거 보다 더 춥다. 눈사태도 간혹 일어난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는 건 어떠냐?” “싫어요. 몬스터도 없다면서요. 따라 갈레요.” “저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드래곤 레어에 들어가 보겠어요?” “…말도 지지리도 안 듣는 노예 녀석들 같으니라구. 주인하나 있는 거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얌전히 불을 쬐던 아레프가 갑자기 쿡쿡 웃었다.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내 등뒤에 달라붙어 있던 스피릿과 루시아가 혀를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주인님을 능멸해?! “이 녀석들!” “꺄아~! 주인님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크아~! 가만 안 둔다!” 4인실이라는 커다란 방을 뛰어다니는 말만한 처녀들의 뒤쫓던 나는 그만 기력이 다 빠져버려 아무침대에나 쓰러졌다. 난 침대에 누운 채로 말했다. “우으윽… 피곤하다. 아레프, 내일 아침에 올라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십쇼.” “예.” 그의 대답을 달으며 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일어나 보니 스피릿이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다. 우왁?! 아레프가 보면 어쩌려고?! 자리를 바꾸려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문이 열리고 아레프와 루시아가 목에 수건을 걸고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준비하시죠.” 아레프는 점잖게 웃으며 우리의 모습을 외면해 주었지만 루시아는 달랐다. 그녀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거참, 보기 좋군요. 주인님. 또 나만 쏙 빼놓고.” “아, 아냐. 이건….” 내 변명은 애초에 그녀에게 먹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왜 노예에게 변명 따위를…. 이래저래 우울한 아침을 맞이한 나는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짐을 꾸려 일행을 이끌고 등반을 시작했다. 말은 여관에 맡겨 놓고 왔다. 산맥을 넘는 등반로는 말도 지날 수 있긴 하지만 드래곤 레어가 있는 곳은 길이 없기 때문에 갈 수 없다. 그래서 꼭 필요한 짐을 각자가 등에 매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스피릿과 루시아는 씩씩하게 따라왔다. 반정도 올라왔을까?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한다. 만년설이 있는 산 정상까지는 아직 반이 더 남았지만 저기까지 가려면 두 배는 더 힘들거다. “하아~ 하아~ 아직도 멀었어요?” “겨우 반 왔어. 이젠 돌아가지도 못해. 발 조심하고 따라와.” 스피릿과 루시아는 헉헉대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뒤를 따랐다. 끝에는 아레프가 눈을 반짝이며 드래곤 레어가 이런 곳에… 어쩌구 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잘도 쫓아왔다. 고산증을 호소하는 두 아가씨의 입에 준비해온 알약을 넣어주며 겨우겨우 드래곤의 레어가 있는 노아의 산맥 8부 능선에 도착한 나는 오래 전, 최초로 노아의 산맥을 넘어간 한 여행자의 발자취를 따라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과 손에 의해 만들어진 등반로를 넘어 그 어떤 길도, 그 누구의 발자국도 찍혀 있지 않은 만년설을 밟았다. 뽀드득. 이래서 탐험가란 직업이 생긴 건가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각을 느끼며 능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대의 탐험가가 박아놓은 말뚝을 찾아서 그곳에 가져온 밧줄을 연결한 뒤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말뚝을 발견하면 또 밧줄을 감는 식이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스피릿과 루시아를 선두로 아레프가 천천히 줄을 잡고 눈밭을 걸어오고 있다. “이대로 미끌리면 저 아래 보이는 셰리단의 대로까지 내려갈지 모르니 조심들 해.” “아앙~! 겁주지 마세요! 무섭단 말예요.” “어어, 그리고 큰소리도 내지마. 눈사태 일어날라.” 난 두꺼운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르켰다. 위태위태한 만년설이 보인다. 스피릿과 루시아가 울상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고 난 고개를 돌리며 낄낄 웃었다. 선대의 탐험가들이 매어놓은 말뚝과 기억을 더듬어 레어를 찾은 지 2시간 가량 지났을까? 결국 난 눈밭에 귀퉁이만 조금 드러나 있는 비석하나와 거대한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을 치워내자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씌여있었다. 노아의 레어. 이름 없는, 어떤 위대한 자의 무덤. “그게 뭡니까? 하아, 하아~!” 어느새 스피릿과 루시아를 데리고 도착한 아레프가 하인 김을 뿜어내며 물었다. 난 비석을 짚고 일어나며 말했다. “최초발견자의 특권이랄까? 갑시다. 생각보다 늦게 올라왔어. 잘못하면 여기서 하룻밤 자야 할지도 모릅니다.” 난 그들을 동굴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춥지 않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안쪽은 그렇게 춥지 않아. 아레프, 라이트 몇 개 만들어 보쇼.” 고개를 끄덕인 아레프는 라이트 주문을 외우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다섯 개의 빛 구슬이 떠올라 사방을 밝혔다. 난 손을 들어 안쪽을 가르키며 말했다. “안쪽으로 좀 들어가면 커다란 방이 옵니다. 거기가 드래곤의 레어지. 갑시다.” 천장에 여기저기 열려있는 커다란 고드름을 정신없이 구경하는 스피릿과 루시아를 재촉하며 동굴을 걸어들어 간 나는 전에 왔을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커다란 방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아레프는 몇 마디 주문을 더 외우더니 라이트 볼을 사방으로 퍼지게 했다. 엄청난 공간이었다. 이렇게 보니 더 커 보이는군. 아레프가 두근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단하군요. 여기가 바로 드래곤의 레어란 말이죠?” “탐험가들이 가져갈 수 있는 건 다 가져가 버려 남은 게 하나도 없지만. 모양은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레프는 봄날에 꽃밭을 뛰노는 망아지처럼 달려 드넓은 방은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난 라이트 볼이 있는 곳에 짐을 내리고 스피릿과 루시아를 쉬게 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마법진이 그려진 동그란 강철판을 꺼내 바닥에 놓고 그곳에 물주전자를 올렸다. 스피릿과 루시아가 신기한 듯이 쳐다보다 물었다. “뭘 하시는 거예요?” “어, 노예 분들에게 주인님이 뜨거운 차라도 한잔 대접하려고.” “불도 없는데요?” “글쎄, 보면 알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잠시 기다리자 하얀 김이 주전자에서 솟기 시작하더니 물이 보글보글 끓었다. 스피릿과 루시아가 신기한 듯이 쳐다보는 가운데 차잎과 설탕을 붇고 휘휘 저은 다음 컵을 꺼내 부어서 내밀었다. “설탕차야. 마셔두면 몸에 힘이 좀 생길거다.” “주인님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 그 판은 뭐예요?” “히트버너라고 하는 건데 마법상점에서 파는 거야. 1회용이고 비싸지만, 이럴 땐 도움이 되지. 루시아? 저 친구에게도 좀 가져다 줘.” 두 손으로 후후 뜨거운 차를 불어 마시던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내미는 컵을 들고 경비대 연병장 보다 더 큰방을 가로질러 아레프에게 달려갔다. “여기 얼마나 있을 거죠?” “생각 같아서는 오늘 내로 내려갔으면 싶은데. 모르지, 저 친구는.” 난 뜨거운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돌아온 루시아에게 그가 뭘 좀 찾았는지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스피릿이 가방에서 꺼내준 건육을 우걱우걱 씹으며 시계를 꺼낸 나는 인상을 구겼다. 벌써 오후 2시를 가르키는 시계바늘이 미워지는군. “몇시예요?” “오후 2시.” “얼마 안됐네요?” “무슨, 아까 그 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그리고 날씨도 좋을지 의문이야. 노아의 산맥은 정오가 넘어가면 눈보라가 치거든? 멋모르고 나갔다가 눈밭에서 미끄러져서 비명횡사한 사람도 꽤 많았어. 특히 너희들이 걱정이다.” 따라오겠다고 우기던 스피릿과 루시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들의 머리를 툭툭 만져준 나는 아직도 발굴 작업중인 아레프에게로 향했다. “뭐 좀 나온거 있수?” “아직이요. 하지만 정말 흥미롭군요. 아직까지 고정된 마나가 있는 곳이 여러 군데 느껴져요.” “오늘 내로 끝낼 수 있을까?” 아레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힘듭니다. 일단 여기 온 이상 최소한의 성과를 가져가야 하니까.” “젠장. 알았수. 천상 하룻밤 머물러야겠군. 그래, 뭐 도와줄건 없을까?” “그럼 레어를 돌아다니시면서 뭔가를 좀 찾아 주십시오.” 난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가 뭐요?” “드래곤 본은 일반 뼈처럼 안 생겼습니다. 색은 백색에 가깝지만 약간 붉은 빛을 뛰고 있고, 언뜻 보면 이상하게 생긴 붉은 색 돌 같은 겁니다. 그런 게 있으면 절 불러주십시오.” “어렵지 않군. 스피릿! 루시아!” 내가 부르자 그녀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난 아레프에게 들은 설명을 그대로 들려준 다음 그녀들과 함께 흩어져서 드래곤 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는 걸?” 1시간 동안 헤매던 끝에 내린 결과다. 하지만 저쪽의 아레프는 포기도 모르고 레어 바닥을 다 뒤지겠다는 듯이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흙을 까뒤집고 있었다. 거참, 천년만년 걸리겠다. 잠시 쉬기 위해 자리에 앉은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스피릿?! 스피릿이 안보여! 루시아! 아레프!” 난 레어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스피릿의 행방을 묻는 내 말에 루시아는 겁에질린 얼굴로 말했다. “모, 모르겠어요. 방금 전까지 저쪽 근방에서 움직이는 걸 봤는데?” 난 그녀가 가르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빌어먹을! 스피릿~! 어디 간거야?!” 그때 아레프도 내 옆으로 달려와 주변을 살피더니 말했다. “이 근방에 마나가 고정된 곳이 있어요. 아무래도 드래곤이 마법을 걸었던 장소인 것 같습니다.” “젠장! 찾을 수 있어?!”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아레프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더니 외쳤다. “디텍트!” 두 팔을 벌리고 한참동안 서있던 아레프가 말했다. “있다! 여기, 이, 이 근방입니다.” 그가 가르킨 곳은 레어의 바닥 면이다. 밑으로 꺼진거야?! “빌어먹을! 꺼내줄게! 기다려!” 난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아레프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파이어 볼?! 안됩니다! 그랬다간 매몰 될 수도 있어요! 게다가 위치만 잡았을 뿐 깊이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를 악문 나는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렇게 어떻게 하라고! 당신 마법사잖아! 뭘 하든 좀 해봐!” 하지만 아레프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드러낸 나는 내 식으로 하기로 했다. 난 짐을 쌓아놓은 곳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아무도 움직이지마!” 가방을 챙겨든 나는 다시 달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발자국을 찾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발자국이 찍혀있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확실히 최근 찍힌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여기서 스피릿의 부츠 사이즈를 따지면… “찾았다! 이거야! 여기서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다가, 여기서 멈췄어! 그리고….” 발자국이 사라졌다. 난 이를 악물고 그녀가 사라진 곳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차가운 흙먼지만 손아귀에 들어왔다. 아레프와 루시아가 서글픈 눈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찾아야해! 그렇게 1시간을 헤매고 다니는 내 모습이 처량했는지 아레프와 루시아가 말리기 시작했다. “주인님, 좀 쉬세요.” “그래요. 제가 다시 한번 찾아볼테니.” “시끄러워. 조용히 해.” 결국 그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레어 안을 기어다니다시피 한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유령인가? 검은색의 해파리 같은 뭔가가 바닥 위를 낮게 떠다니는 게 보인다.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든 나는 그것을 들고 조심스레 녀석을 쫓아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녀석이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녀석이 사라진 곳으로 가보았다. 츠팟!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어디론가로 떨어졌다. 바닥이 만져지고 차가운 것을 보니 확실히 현실 세계다. 주위는 어둠으로 꽉 차있어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켓 안주머니에서 수십 장에 다다르는 스크롤을 꺼내든 나는 잠시 몇 번째부터 라이트 주문인지 생각해보고는 스크롤을 넘겨 한 장을 꺼내 입과 손으로 찢었다. “라이트.” 팟! 역시! 정확해! 머리 위에서 불빛이 켜졌다. 스크롤을 갈무리한 나는 불빛에 비춰진 동굴을 두리번거렸다. 얼마나 큰지 빛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아까와 거의 맞먹는 공간인가?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외쳤다. “스피릿!” 메아리가 울리는 정도로 봐서, 상당한 공간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나는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소리가 들린다면 찾아올거다. 하지만 몇 번을 더 불러봐도 그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찾아 나서기로 했다. 어두운 공간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걷던 나는 뭔가가 발에 치는 것을 발견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쩍 마른 미이라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누워있었다. 예전에 여기로 떨어졌던 탐험가로군. 표정 멋진데?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중간중간 돌기둥 같은 것들이 세워져 있고 머리 위에는 무슨 복잡한 구조물도 보인다. 여긴 어디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여기 들어온 지 2시간이 지나있었다. 어두우니 시간관념이 사라지는 군, 난 다시 한번 스피릿을 불러보려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흐윽… 흐윽….” 등으로 소름이 좍 돋았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입을 꾹 다물고 울음소리를 찾아간 나는 반가움에 미소를 지어버렸다. “스피릿!” 갑자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이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스피릿은 불빛 때문에 처음엔 날 몰라보다가 눈이 익자 반색하고 달려들었다. “으아아앙! 주인니임~!!” 덥썩 안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난 기분 좋게 웃었다. 어쨌든 울먹이는 그녀를 달래어 떼어낸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지?” “흐윽~! 알고 싶지도 않아요.” 스피릿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고 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간다?” 고민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피릿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이며 날 따라왔다. “거기 있어.” “으으응~!” 고래를 절래절래 저으며 스피릿은 내 팔을 끌어안았다. 겁먹었구나. 난 별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염병할 동굴 탐험에 나섰다. 하지만 별로 발견되는 게 없었다. 젠장!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서려나온다. 아까보다 더 추워지는 것 같다. “추운데. 하긴 슬슬 밤 일테니까. 스피릿, 배고프지?” “예.” 우리는 다시 짐을 내려둔 곳으로 향했다. 난 건육을 씹으며 말했다. “다리는 괜찮아?” “좀 접지른 것뿐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주인님. 구하러 오셔서. 흐윽, 전 여기서 죽는줄 알았어요. 무서웠어요. 으으응~! 잉잉” 스피릿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고 난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좀 힘들었어. 그런데 넌 여기 어떻게 들어 온 거야?” “훌쩍, 몰라요. 갑자기 휙 하더니 어두운데로 떨어져서, 처음엔 라이트 마법이 꺼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없고….” 그런 내가 본 그 해파리 같은 건 뭐지? 난 고개를 좀 갸웃하다가 뭔가가 생각나서 가지고 있는 라이트 스크롤을 모두 꺼내 찢었다. “라이트!” 파파파팍! 순식간에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스피릿이 눈이 부시다는 듯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난 그것을 하나씩 붙잡아 우리가 있는 공간 여기저기로 던져보냈다. 그러자 점차 동굴의 윤곽이 드러났다. 동시에 엄청난 것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수가….” Running Fire: 15 “노예주제에 주인님에게 까불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지.” “이럴수가….” 난 우리가 앉아있던 곳이 백골이 된 거대한 드래곤의 앞 발톱이라는 것을 깨달고 입을 딱 벌렸다. “드, 드래곤 본. 이렇게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남아있었다니.” 위에 있는 레어와 거의 맞먹는 크기의 방에는 거대한 백골 드래곤이 몸을 웅크린 자세로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쩍 마른 미이라들도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스피릿은 가까운 곳에서 미이라는 보고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매달렸다. “여기 떨어진 사람들이었나 보군?” “으아앙! 주인님 무서워요!” 난 그녀의 등을 톡탁이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일단 밝아지니 훨씬 편했다. 스피릿도 좀 나이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라이트 볼의 제한 시간은 기껏해야 10시간 정도인데. 이래 가지고서야. 빠져나갈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3시간만에 포기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스피릿이 잔뜩 웅크린 채 날 반겼다. “어, 다, 다녀오셨어요?” “응. 많이 춥지?” “아, 아뇨. 괜찮아요.”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무릎 위에 고개를 내렸다. 한숨을 좀 내쉰 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기는, 당장 얼어죽겠다는 표정인데. 이리와.” 어깨를 잡아당기자 스피릿이 슬쩍 기대어왔다. 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내 쪽으로 좀더 끌어당겼다. 그렇게 해서 체온을 나눠 보려했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으으, 추워죽겠다. 스피릿이 말했다. “뭐, 좀 찾으신 거라도 이,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없더라. 미이라 양반들이 바닥에 써놓은 유언정도?” “유, 유언이요?” “나가고 싶다. 여기로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나가고 싶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족이 보고 싶다. 길이 없다. 살고싶다. 기타등등.”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럼 우리도 여기서 저 사람들처럼…?” “그럴 수도 있겠지.” 이제 스피릿은 눈물을 흘릴 기력도 없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나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끝난 건 아냐. 죽기 전에 할 것 해보고 죽어야지.” “뭘 어쩌실건데요?” 대답대신 주머니에서 꺼낸 스크롤을 찢으며 외쳤다. “파이어 볼!” 화르르르륵~! 스크롤이 타버리며 어른 머리 만한 불덩이가 내 손바닥위로 나타났다. 후끈한걸? “으라차!” 있는 힘껏 파이어 볼을 집어던진 나는 폭발 충격에 대비해 바닥에 앉아있는 스피릿을 안고 바닥에 엎드렸다. 쿠콰아앙~!! 쿠구구구…! 동굴이 쩌렁쩌렁 울린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나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 멀쩡했다. 파이어 볼이 폭발한 천장은 상처하나 없었다. 돌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먼지들이 후폭풍에 밀려 동굴을 뿌옇게 만들었다. “어째서?! 이거 진짜라구! 한 장에 150만 루나짜리란 말야!” “…마법도 소용 없는가봐요.” 스피릿이 힘없이 일어나며 말했다. 난 웃기지 말라는 듯이 가지고 있던 공격 마법을 모조리 천장에 퍼부었다. 쿠쿵! 콰콰콰쾅~!!!! 뻐버벙!! 산이 울고 동굴이 흔들렸다. 귀도 멍하다. 하지만 이놈의 천장은 무슨 조화가 부려졌는지 작은 틈 하나 생기지 않았고 결국엔 나도 절망했다. “에이~! 젠장! 몰라!”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팔짱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온다. 입을 꾹 다문 나는 다시 추위가 엄습해 오자 스피릿이 걱정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 괜찮…?!” 드래곤의 앞 발톱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스피릿이 자리에 쭈그려 앉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 엄청난 폭발이 있었는데도 저렇게 가만히 있는 다는 건…! “스, 스피릿?” 난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밀어보았다. 스르륵… 털썩! 이런 젠장! “스피릿!” 쓰러진 그녀를 얼른 안아 올렸다. 하지만 스피릿은 느릿하게 숨만 쉬어댈 뿐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난 얼른 그녀의 이마와 목에 손을 대어 보였다. 차가웠다. 염병! 저체온증이잖아! “추우면 춥다고 말을 하란 말야! 이 바보야!” 배낭에서 침낭을 꺼낸 나는 그것을 바닥에 깔고 스피릿을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두꺼운 외투를 벗긴 다음 몸을 주물려댔다. “자지마! 일어나! 자면 죽어!” 멱살을 붙잡고 뺨까지 갈겼지만 스피릿은 묵묵무답이었다. 몰랐다. 이 정도로 몸이 약했을 줄은! “젠장! 안돼! 돈도 다 못 벌었잖아!” 난 계속 그녀의 몸을 주물렀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호흡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고 맥박은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심장박동수가 너무 낮다! 난 필사적으로 응급처치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을 떠올렸다. “체온을 다시 높여야 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하늘에 맡긴다.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는 거야! 가방을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낸 나는 1회용 히트버너를 주워들었다. 모두 5개. 원판의 중앙에 붙어있는 봉인을 뜯어내고 히트버너가 가열되는 시간 동안 나는 바닥의 흙을 걷어내고 서서히 가열되는 히트버너를 일렬로 놓은 다음 다시 흙을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침낭과 입고있는 방한복을 벗어서 올린 다음 스피릿을 데려와 눕혔다. 호흡이 아까보다 더 가늘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난 무슨 흉악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내처럼 거친 손길로 그녀가 입고있는 옷을 벗겼다. 방한복은 벗겨서 침낭 위에 올리고 내의는 침낭 안에 넣었다. 위아래 속옷만 입은 그녀는 상당히 뇌쇄적이었지만 퍼렇게 질려 있어서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일단 그녀를 침낭 안에 밀어 넣은 다음 나도 옷을 몽땅 벗고 침낭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차가운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얼음장같아. 손으로는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주물러댔다. 하지만 아무리해도 얼음장같은 몸은 데워질 줄 몰랐다. …아닌게 아니라 이대로 두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파리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차가운 가슴을 주무르며 애무를 했다. 여자라곤 제미니가 처음이었던 나는 스피릿의 몸을 탐하며 긴장감과 죄의식이 뒤섞여 제 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나는 그녀의 속옷 안까지 손을 집어넣고 말았다. 인간의 몸이란 참 솔직하다. 그래서 혐오스러울 지경이다. 방금 전까지 차가웠던 내 몸과 그녀의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을 그녀의 속옷에서 꺼냈다. 진득한 뭔가가 손가락 가득 묻어 있었다. 난 약간 떨리는 표정으로 상기된 스피릿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그녀는 체온이 올라가 호흡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대로 안아주고 있기만 하면 얼마 후에 정신이 돌아올거다. 하지만, 내 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젖어버린 속옷을 벗겨낸 나는 그녀의 하얀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허리를 가져가 천천히 밀어 올렸다. 아찔한 기분이 전해져온다. “으윽….” 스피릿이 이마를 찌뿌리며 작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난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생각해보려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다면 난 프리스트가 됐을거다. “하아… 아… 으응….” 추한 모습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데 내가 움직일 때마다 느릿하게 한숨을 쉬어대던 스피릿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약간 정신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윽… 주, 주인님? 무슨…. 하앙!” “스피릿… 미, 미안.” 난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행위를 계속했다. 스피릿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아. 이, 이러지 마세, 아윽… 주, 주인니이임. 아앙.” 가슴속이 뜨거워지고 대신 머리는 차가워졌다. 죄책감과 죄의식이 마구 들기 시작했지만 내 몸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 아앙. 아아~! 뜨, 뜨거워~!” 절정에 달한 스피릿이 팔과 다리를 들어 내 등과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잠시 후 힘이 빠져 축 늘어진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흐으윽. 이, 이러면 안되요. 안된단 말예요. 으아앙~!” 뭐라 해줄 말이 없는 나는 그저 그녀를 꽉 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훌쩍….” “너무 그러지 마. 나, 나도 어쩔 수 없었단 말야.” 정신이 들자마자 옷을 주워 입고 내게서 떨어진 그녀는 통나무 같은 드래곤의 앞 발톱 뒤로 돌아가 그곳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계속 훌쩍여댔다. 차마 그녀를 달래러 갈 수 없었던 나는 맞은편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이 따위로 인간을 만든 조물주가 저주스럽고 그거하나 참지 못한 나도 한심스럽다. 미안해, 스피릿. 용서해 줘.” 스피릿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그녀의 대답을 원하지 않았기에 침묵은 계속됐다. 그러다가 난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또 그녀가 쓰러졌을까 하고 걱정됐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든 순결을 잃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어요. 훌쩍, 이상하게 보일까봐 연극까지 했어요. 그랬는데… 흐윽.” 다행이 아직 멀쩡한 모양이다. 그녀는 볼멘 목소리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계속 말했다. “그랬는데. 당신이, 당신이 감히… 흐윽… 나, 나 이, 이대로는 이제 집에 못가요. 모두가 화낼거예요. 어떡해요… 이이잉~! 흐으윽.” 손바닥과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그녀를 바라보며 난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군,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 노예가 주인해서 해서는 안되는 말이긴 했지만, 나에게 말했다면 돌려 보내줬을 거다. 이번에 여행을 나온 것도 그녀를 정리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입맛이 너무 씁쓸하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사람은 살렸으니 이제 출구를 찾기 위해서다. 저주의 욕설이든 참회의 매든, 잘못의 죄는 일단 살아있어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고 터벅터벅 걸어간 나는 미이라들이 써놓은 유언을 살펴가며 출구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유언은 의례 자기후회만 번듯하게 적어놓았을 뿐, 이후에 떨어진 후임자들을 위한 친절함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미이라였는데 놀랍게도 그는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나는 벽에 써놓은 글을 발견했다. 대략 글의 내용은 이곳이 숨겨진 레어이며 자기들은 죽은 드래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생명을 빼앗겼다는 것과 함께 탈출을 위하여 마법사의 금기인 마신소환을 시도했었지만 소환된 악마조차도 이곳의 방어결계는 깨뜨리지 못했다고 씌여져 있었다. 방어 결계. 그래서 공격마법에도 천장이 부서지지 않았던 거로군? 제기랄~! 나갈 방법은 없는 거냐? 완전히 체념하며 마법사 미이라의 앞에 주저 앉아있는데 뒤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은 나는 매서운 눈길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방한복을 껴입은 스피릿이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얼른 드래곤의 갈비뼈에 해당하는 기둥 뒤로 숨었다. 난 단검을 내렸다. “스피릿? 거기서 뭐해?” 스피릿은 우물쭈물 하다가 절뚝이며 걸어오더니 내 옆에 천천히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머, 멀리 가지 마세요. 무섭단 말예요.” 아까는 내가 밉다고 잉잉 짜더니, 고개를 돌린 나는 그녀의 다리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아직도 아파?” 그러자 스피릿은 얼른 다리를 우므리고 등을 돌렸다. “마, 만지지 마세요!” “…어, 그, 그래.” 충격이 큰 것 같다. 한숨을 내쉰 나는 그 마법사 미이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형씨. 나 요새 힘들어. 부탁인데 상담 좀 해주겠어? 아, 얼마든지 들어주겠다구? 고마워, 글쎄 내 노예가 말야….” 그러자 스피릿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뭘 하시긴. 신세한탄 중이지.” 난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스피릿은 드디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지 겁에 질린 얼굴로 딸꾹질을 하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젠장, 아무리 찾아봐도 길이 없어. 우리도 여기 사람들처럼 말라죽을 상황이라구.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스피릿. 너무 그렇게 울지마. 처녀귀신으로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났잖아? 따지고 보면 나도 저체온증으로 죽어가는 널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그랬던 거라고, 게다가….” 팔을 뻗은 나는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내 가슴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안긴 스피릿은 눈을 질끈 감고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나는 한결 수월하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일 수 있었다. “…기분, 꽤 좋았잖아?” “우…!” 스피릿이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덜덜 떨었다. 말을 마친 나는 그녀의 하얀 귓불을 살짝 깨물어준 다음 손을 놓아주었다. 스피릿은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며 바닥을 기어 내게서 떨어졌고 난 그런 그녀에게 살짝 웃어준 다음 마법사 미이라를 바라보며 몸을 돌렸다. “어차피 죽을 마당에 뭐가 부끄러워?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나도 너 안았을 때 기분 좋았어. 죄의식이 가슴과 머리를 채웠지만 그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정말 세상이 뒤바뀌는 것 같았지. 참, 그러고 보니 너 신음소리 귀엽게 내더라.” “죽더라도 인간답게 죽고싶어요! 주인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너무 하세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있는 대로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게진 스피릿이 자리에서 일어나 날 내려다 보고있었다. 마치 더러운 짐승 보는 듯 하는구나. 하기사 별 수 있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런 짓을 해버렸는데. 노예라고 해도 좀 심하긴 했지. 하지만 이왕 죽을 마당에 뭐가 미안하고 두렵겠는가? 난 끝까지 그녀에게 뻣대 보기로 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은 결국 가장 동물적이게 마련이다. 작은 난쟁이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지.”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절망이 손짓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라.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인간의 구원에 나오는 말이에요.” 난 박수를 쳤다. “우리 스피릿은 아는 것도 많아. 뽀뽀해줄까? 아니지. 이제 알 거 다 아니까. 다른 걸로….” 짜아악! “이, 이 더러운 놈! 네가! 감히 네가 나에게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우리나라로 돌아가면 교수대에 매달아버리겠어!” 뺨을 맞은 나는 의외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오! 말도 안돼! 나 매조키스트였던 거야? 난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피릿은 예전처럼 놀라거나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닌 당당하고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볼을 내밀었다. “또 때려봐라.” 짜아악! 고개가 돌아갔다. 몸을 바로 세운 나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뭐야. 이거밖엔 안돼? 기절할 정도로 때려보란 말야. 이렇게.” 짜아악! 내게서 뺨을 맞은 스피릿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난 쓰러진 그녀의 턱을 잡으며 말했다. “노예주제에 주인님에게 까불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지.” “읍?!” 입을 맞춘 나는 반항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서 끌어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반항이 사라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이 들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말라고 씨부렁거린 주제에! 아주 작정한 나는 가슴을 만지던 손을 내려 그녀가 입고 있던 바지춤 아래로 집어넣었다. 스피릿의 눈이 커졌다. “아윽?!” 다시 손을 빼내자 끈적한 애액이 혈흔과 함께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그녀를 놓아준 나는 손을 보여주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은 결국 가장 동물적이게 마련이라고 했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수치심으로 잔뜩 찡그린 표정을 하고있던 스피릿은 조금씩 울먹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앙~! 앙앙앙~!” “인간도 결국엔 동물이야.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었냐? 죽을 때는 인간답게 죽고 싶다고? 어떻게 죽는 게 가장 인간다운 건데? 그런게 있으면 나도 좀 가르쳐 줘.”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홧김에 벽에 기대어 있는 마법사 미이라를 발로 걷어찼다. 수분이 완전히 증발해버린 미이라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굴러가 버렸다. 침을 바닥에 뱉어버린 나는 엉엉 울고 있는 그녀를 버려 두고 걸어갔다. 젠장! 여기 이상해! 자꾸 열 받은 일만 생기잖아! 한참을 걸어가던 나는 은근히 스피릿이 걱정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엉엉거리며 울고 있었다. “제기…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난 죽어서 아마 지옥에 갈 거다. 고개를 돌리고 한참동안 서있던 나는 결국 발걸음을 돌려 스피릿에게 향했다.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퀘……!” “쿠루루루…….” 뭐, 뭐야?! 갑자기 미이라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허리에 매고 있던 은도금 롱소드를 뽑아들고 스피릿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걷어찬 마법사 미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피릿!!!” 스피릿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젠장! 나라는 인간에게 진절머리가 난 건 알지만! “조심해!” 급한 대로 검을 집어던졌다. 퍽! 날아간 칼은 일어나던 미이라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당장 매케한 연기가 쏟아졌다. 칼자루를 잡고 미이라를 걷어차 칼을 뽑아낸 나는 바닥에 앉아있는 스피릿을 일으켜 가슴에 안았다. 하지만 스피릿은 반항했다. “이거 놔! 이 짐승!”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 저거 안보여!?” 스피릿은 그래도 반항을 해왔다.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구나. 벽에 등을 기댄 나는 스피릿을 가리고 서서 칼을 들었다. 자동석궁을 두고 왔어! 젠장! “빌어먹을! 죽더라도 그냥은 못 죽는다! 덤벼!” -그렇지. 그게 가장 인간답게 죽는 방법이다. 뭐야?! 귓가로 맑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잡아먹으러 다가오던 미이라들이 마른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때 바닥에서 작은 해파리 같은 것이 둥둥 떠오더니 말했다. -나는 아몬. 아몬 이쉬리히트 번 자작이다. 잘 부탁한다. 인간. 인간? 아몬 자작? 설마?! 난 마법사가 벽에 적어놓은 글귀를 다시 쳐다보았다. 마신소환! “악마? 말도 안돼! 어떻게 아직까지?!” -충분히 말이 된다. 저 마법사는 날 소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지. 그리고 애통하게도 내 능력으로 저 결계는 깨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나는 힘이 고갈되어 저 인간들처럼 되는 것을 막으려고 본체를 봉인하고 사람들을 기다렸지. 여기에 사람이 들어온 건 꼭 10년만인가? 어쨌든 반갑다. “잠깐, 아까 날 부르러 나온 거 당신이었지?” -그래. 사람이 떨어진 건 반가웠지만 내가 원한 건 저런 능력도 없는 계집이 아니다. 그래서 너를 불렀다. 마침 여자를 찾아서 바닥을 기어다니길레 길을 알려 준거지. 바닥에 쭈그려 앉아 현실도피중인 스피릿을 힐끗 돌아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고 해야하나? 난 칼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알고 있을 텐데. 이 빌어먹을 곳에서 탈출이다. 나를 도와주면 너를 데리고 나가주겠다. “약속하는 거지?”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받아들이지. 그래서 뭘 해주면 될까?” -저 드래곤 본을 타고 올라가서 목뼈에 있는 드래곤 하트를 뽑아라. 그것만 해주면 된다. 나는 약속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다. “드래곤과 악마의 맹약?” -그렇다.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당장 짐을 놔둔 곳으로 달려갔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잡동사니 중에서 로프를 찾아내어 그것을 몸에 감고 끝을 단검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앞발 뼈를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해파리 모양의 아몬자작이 따라오며 응원했다. -부탁이니 저 밑의 바보처럼 떨어져서 죽지 말아다오. “으윽! 이익!” 그러고 보니 아까 갈비뼈 부근에 머리가 으깨진 미이라가 한 구 보였었다. 난 팔의 근육을 있는 대로 부풀려 드래곤 본을 타고 기어올랐다. 중간중간 미끄러질 뻔해서 얼굴도 모르는 악마씨에게 욕을 좀 얻어먹긴 했지만 살고자 하는 필사의 의지로 말미암아 결국엔 드래곤의 어깨뼈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이쪽에서부터 목뼈인가? 몇 번째 목뼈야?” -네 눈에도 보일꺼다. 저기 6번째 목뼈다. “우와, 까딱하다간 떨어져서 죽겠는데?” -저것만 뽑아준다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겠다. “여기서 꺼내만 준다면 그런 거 필요없어!” 난 손바닥에 침을 뱉어 문지른 다음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조심조심 기다란 목뼈를 걸어 6번째 목뼈에 도착하자 거대한 동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아래에는 스피릿이 고개를 쳐들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손을 좀 흔들어준 다음 아몬자작에게 물었다. “어떤거야?” -거기 목뼈 틈새로 들어가라. 그럼 중앙에 검은색 돌이 있을 거다. 그의 말대로 거대한 목뼈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정말로 검은 돌덩어리가 목뼈 중앙에 박혀있었다. 아니, 돌이라고 하기엔 어감이 좀 이상하군.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생긴 건 꼭 흑요석 같은데. “찾았어!” -칼로 찍어 뽑아내라. 챙! 챙! 챙! 칼로 찍어 밀기를 반복하기를 1시간, 진이 빠져 있는데 아몬 자작이 말했다. -조금만 더하면 된다. 힘내라. “쉬었다가 하면 안될까?” -여기 계속 있고 싶나? 고개를 가로 저은 나는 단검으로 드래곤 하트라고 하는 어른 머리 만한 돌덩어리의 가장자리를 찍어 힘껏 밀었다. 그러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뽑혔다. “뽑았어!” -축하한다. 이제 그걸 밖으로 던져라. 그리고 살고 싶으면 조심해서 내려와라. 뽑아낸 드래곤 하트를 목뼈 틈으로 내던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해파리 같은 아몬자작은 사라져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나는 조심조심 목뼈에서 나와 갈비뼈로 점프를 시도했다. “아악~!” 스피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날 걱정하는 소리 같은데? 화가 풀렸나? 허공에 뜬 나는 거의 기둥 같은 드래곤의 갈비뼈에 찰싹 달라붙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쓰읍~! 아야야. 가슴이 아픈데.” 그때였다. 갑자기 바닥에서 뭔가가 몸을 일으켰다. 사람이었다. 등에 검은 날개를 매달고 칠흑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먼지 속에서 짧은 한숨을 좀 내쉬더니 밖으로 걸어나왔다. 신기하게도 입고 있는 옷가지에는 흙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날 힐끗 보더니 터벅터벅 걸어서 스피릿에게로 향했다. 왜 저러는 거지? 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아몬이라고 짐작되는 인물은 스피릿에게 다가가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인간 여자. 너 처녀인가? “예?” 겁에 질려있던 스피릿이 얼빠진 말을 하며 그를 쳐다보다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좀 도와달라는 눈빛이었고 난 서둘러 그녀의 앞으로 달려갔다. “뭘 하려는 거요?” 아몬 자작이 말했다. -지금 인간 여자에게 묻고 있다. 끼어 들지마라. 여자. 대답해라. 처녀인가 아닌가? 나도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스피릿은 내 어깨를 꽉 잡으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이젠 아니에요.” -아깝군. 처녀였다면 회복에 꽤 도움이 됐을 텐데. 뭐야?! 잡아먹으려 했던거야?! 인상을 잔뜩 찌뿌리고 있는데 아몬 자작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짐을 챙겨라. 떠난다.” 나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장비들을 챙겨왔다. 훌훌 버리고 떠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 당장 밖에서 얼어죽는다. 이상보다는 현실이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법이지. 물론 바닥에 떨어진 드래곤 하트도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예도 챙겼다. “자.” 손을 내밀었다. 스피릿은 주저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내 손을 붙잡았다. 난 그 손을 잡아 당겨 그녀를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다됐습니다.” -간다. 아몬 자작은 날개를 좍 펼치더니 그것으로 자신의 몸과 우리를 감쌌다. 다시 날개가 펴졌을 때 우리는 지상 레어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루시아와 아레프는? 그러고 보니 짐도 없네?” -아래쪽은 결계의 영향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너희가 떨어지고 대략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났을 거다. 일주일씩이나? 고개를 끄덕인 난 동굴 밖으로 나가려다 멍청히 서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안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스피릿은 그제서야 날 따라왔다. 그녀로서는 입장이 난처하겠지.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때 아몬 자작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라. 도움을 받았으니 사례를 하고 싶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라. 난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별로 없는데. 그냥 돌아가세요.” -안된다. 작위를 가진 악마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도움을 받다니. 천계천사들이 들으면 우스워 할거다. 고민이네. 난 스피릿에게 물었다. “스피릿.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스피릿은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회피했다. 아, 젠장. 화가 단단히 났나본데. 고민하던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럼 우리들을 마을로 데려다 주십쇼.” 잠시 날 쳐다보던 아몬 자작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팍! “우왁?!” 갑자기 배경이 바뀌는가 싶더니 우리는 대로 셰리단의 대로 한복판에 서있었다. 이럴수가! 이거 너무 편리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스피릿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아몬자작이 팔짱을 하며 골치 아픈 소릴 해댔다. -이런 건 서비스로 쳐주마. 빨리 소원을 말해라. “…글세, 그런 거 필요 없대도요.” 그러자 점잖은 얼굴로 날 쳐다보던 아몬자작이 눈썹을 꿈틀대더니 말했다. -이 놈! 인간이면서 빌 소원이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내가 직접 찾아주마. 아몬 자작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내리며 말했다. -모험가였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언젠가 목숨의 위협이 생겼을 때 내가 한번 도와주마. “그거 좋군요.” 아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개를 펼쳤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비춰진 피막 날개는 천사의 그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잘 있어라. 착한 인간들아. Running Fire: 16 “…설득 당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멍청하게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사람들이 몰려왔다. 난 두말 할 것 없이 스피릿의 손을 잡아끌고 잽싸게 자리를 내뺐다. 정신없이 대로를 달려 여관에 도착해 보니 홀에 시무룩한 얼굴의 아레프가 앉아있었다. “여어.” “콜트씨?!” 난 씩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레프와 루시아는 다음 날까지 우리들이 돌아오지 않자 그냥 산을 내려왔다고 한다. 이후로 계속 올라가 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그래서 슬슬 포기하고 떠나려 했단다. “그나저나 일주일이나 기다려주다니 고마운걸?” “저 때문이니까요.”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는 문득 생각 난 것이 있어 물었다. “그런데 드래곤 본은 찾았수?” “그게… 일주일 동안 계속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난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그거 말야. 꼭 드래곤 본이 아니라도 상관없나?” “예?” 난 주머니에서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내밀었다. 아레프가 입을 딱 벌렸다. “이, 이건!”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나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으며 또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아레프는 당장 산으로 달려 올라갈 태세였지만 내가 말렸다. “그만 둬, 그곳은 어떤 이름 없는 위대한 자의 무덤이야. 그냥 이걸로 만족하라구.”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2층에서 루시아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나에게 인사를 꾸벅하고는 타박타박 걸어서 아레프의 옆으로 가서 섰다. 어라? 왜 아레프의 옆이지? “루시아? 왜 거기로….” 루시아는 내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은 그렇다 치고 루시아는 또 왜 이러는거야? 멍청히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당황한 아레프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루시아의 눈치를 받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마를 테이블에 박아버렸다. 쾅! 어허~! 맥주 쏟아지겠다. “죄, 죄송합니다! 콜트씨! 절 용서하세요!” “엥?” 난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든 아레프는 루시아를 힐끔 쳐다본 다음 죽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루, 루시아양을 제게 넘기시면 안되겠습니까!?” “에엥?” 사정은 이러했다. 우리가 갑자기 사라지자 제일 걱정한 사람은 루시아로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우리를 찾아댔다고 한다. 보다 못한 아레프가 그녀를 마을로 데려다 놓고 매일매일 산을 올라 우리가 돌아왔는지 확인했지만 이렇다할 수확은 없었고 루시아의 절망은 커져만 갔다. 그러다가 우리가 사라진지 닷새 째 되는 날 밤, 루시아가 아레프에게 자기를 맡기러 왔단다. 아레프는 다시 테이블에 머리를 찍으며 말했다. 쿵~! “…설득 당했습니다.” 잠시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나는 아레프의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님과 스피릿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레프씨는 지쳐 보였고, 저는 주인님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하지만 이제 돌아왔잖아?” 짧은 한숨을 내쉰 나는 맥주를 한잔 더 주문했다. 아레프가 말했다. “제발 그녀를 제게 파세요. 콜트씨!” 맥주가 나왔다. 난 그것을 단숨에 비워버린 다음 말했다. “후아, 전에 말했었지? 노예를 상대로 사랑을 느끼지 말고 우정을 키우지 말라고, 그때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노예도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안되는 겁니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데려가. 행복하게 해줬으면 좋겠어.” “콜트씨….” 감동한 아레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이제 네 주인은 저 사람이야. 참, 그렇지. 해줄 말이 있어.” 걸음을 돌린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순진해 보이니까. 독니로 콱! 알겠지? 루시아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잘해보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준 나는 좀 쉬어야겠다는 말을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여니 스피릿이 침대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날 힐끔 쳐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슥 돌려버렸다. 말도 하기 싫다는 투였다. 약간 분했지만 내가 잘못했으니 백보양보하고 그녀에게 먼저 사과하기로 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 스피릿은 대답이 없었다. 난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빗던 그녀는 손수건으로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다음 침대로 기어 들어가 담요를 덮었다. 하지만 난 그 정도로 포기하지 않았다. 난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노예에게 고개 숙이는 주인은 나 밖에 없을거야~! 스피리잇! 제발 화풀어어~! 내가 책임져 줄게! 책임져 주면 되잖아? 죽을 때까지 네 곁에 있을게~! 제발! 스피리이잇~!” “혼자 있고 싶으니까 조용히 해줘요.” 얌전히 일어날 수밖에는 없다. 한숨을 내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언제쯤이면 화가 풀릴까? 하지만 그녀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만 보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결국 출발하는 날까지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사이 좋은 연인처럼 되어버린 루시아와 아레프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말을 몰고 오는 그녀를 뒤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움받고 있나? 젠장, 그래, 그만두자구. 나도 이제 지쳤어. 이제부턴 제미니만 생각 할 테야. 수고비와 드래곤 하트 조각의 대금을 받기 위해서는 나도 수도로 가야했다. 이유는 현재 아레프에게 대금을 치를 돈이 없기 때문이다. 아레프는 은행송금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수도에 아는 얼굴들도 있고 해서 그냥 그를 따라 상경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들은 먼저 샤먼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시아의 재등록을 위해서다. 가는 길은 오는 길과 같았다. 덕분에 우리는 저번에 야영했던 곳에서 다시 야영하게 됐고 몇일 밤새에 굉장히 가까워진 두 사람 때문에 눈꼴신 장면을 꽤 많이 보게되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스피릿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꺄르르~! 신기해요. 또 보여주세요.” 아레프는 루시아가 예뻐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부탁대로 또 다시 이상한 불꽃을 만들어 보였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그것들은 상당히 기괴한 모양이었지만 색깔이 너무도 화려해서 내가 봐도 꽤 신기했다. “댄싱 라이트라는 겁니다. 신기하죠?” “예. 그런데 주인님. 말씀 놓으세요. 전 노예고 아레프 씨는 제 주인님이시라구요.” “아, 그게, 잘 안돼…요. 노력해 볼께요.” 루시아는 수줍어하는 그 미소가 보기 좋은지 빙글빙글 웃으며 그의 목을 껴안고 볼에 키스를 했다. 아레프는 얼굴을 붉혔고 덕분에 내 야유를 좀 샀다. “어허~! 거, 그림 참 조오타.” “콜트씨.” 아레프가 씩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난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말들을 보러 갔다. 스피릿은 현재 나와 냉전중이라 대화가 거의 차단 되어있다. 물론 스킨쉽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의 상태와 편자의 소모도를 확인한 나는 다시 돌아와 불가에 앉았다. 저녁도 먹었고 할 일도 별로 없으니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볼쌍사납게스리 한 침낭 속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던 나는 되도록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너도 그만 자. 피곤할거 아냐.” “예.” 이상, 화기애애한 우리들의 대화되겠다. 이것도 많이 나아진거다. 우습지도 않게 말이지. 다들 잠자리에 드는 것을 확인하고 밤하늘에 뜬 별의 개수는 얼마일까 하는 망상에 젖어 고개를 들고 있으려니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짧은 한숨 소리와 쪽쪽 대는 소리. …미치겠군. 고개를 내리니 아레프와 루시아가 들어간 침낭이 꿈틀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어흐흠~! 먼길 갈 건데. 일찍들 자지?” 침낭이 약간 크게 움직이는 것 같다가 이내 조용해 졌다. 거참, 밖에서 이런데 숙소에 도착하면 불나겠군. 난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최근에 생긴 버릇이다. 스피릿의 눈치를 살피는 거지. 나도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스피릿도 날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는 거다. 침낭 밖으로 눈 부분만 슬쩍 내밀고 있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침낭지퍼를 있는 대로 끌어올리고 반대로 돌아누웠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계속 그런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모포를 가져다가 침낭 위에 덮어주었다. 그녀의 침낭이 꿈틀거렸다. “그냥 있어. 침낭 위에 모포를 덮으면 좀 더 따뜻할 거야.” 당연하겠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루시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희도 모포 덮어 주세요.” 칵! 신경 긁는 거야?! 난 다시 불가에 앉아 장작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필요 없어. 그냥 자!” 불만이 들려왔지만 난 점잖게 무시했다. 아침이 밝아오자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샤먼에 도착한 우리는 무서운 곰 아저씨가 있는 여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오랜만이지요?” 험악한 인상의 주인장은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하고는 방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 쪽은?” “1인실 주세요.” 루시아의 목소리였고 난 바닥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뒤를 돌아보니 아레프가 시뻘게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딱 보니 잡혔어. 정말이다. 성격이 순하고 사람이 좋은 아레프는 루시아 같이 기가 센 아가씨를 만나면 평생 끌려 다닐 타입이지. 나는 어떠냐고?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건 힘든 일이야. 하지만 노예에게 쩔쩔 매는 걸 보니 나도 별수 없는 거 같다. 내일 재등록을 하기로 하고 방으로 올라간 우리는 좀 씻고 자기로 했다. 여기서 스피릿은 혼자 욕실에 갔다오는 당당함을 선보여 내 시선을 잡았다. 예전엔 볼일 보러 갈 때도 무서워서 날 끌고 갔었는데. “먼저 잔다.” 침대에 올라 담요를 덮으며 말했다. 창가 침대에 앉아서 긴 회색 머리카락을 빗고 있던 스피릿은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래그래, 잘 자라고, 좋은 꿈꾸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걷어내려는데 스피릿이 담요를 걷어차고 잠옷만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그녀를 내려다보던 나는 아래로 내려간 담요를 끌어올려 주었다. 그때 스피릿이 눈을 떴다. 그녀는 마치 징그러운 짐승을 쳐다보는 것처럼 하더니 몸을 잔뜩 움츠렸다. 난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이상한 생각하지마. 나 싫다는 건 나도 싫어. 담요가 내려가서 덮어주려던 것 뿐이야. 몸도 약한 주제에 감기 걸려서 죽는다고 하지 말라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나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홀로 나갔다. 시원한 냉차로 잠을 깨고 있는데 아레프가 졸린 눈으로 걸어나왔다. “푹 쉬셨습니까?” “당신은 별로 못 잔 것 같은데.” “하, 하하하. 그렇게 보이나요?” 아레프는 힘없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냉차를 마시던 나는 그의 목을 가르키며 물었다. “벌레한테 물렸어? 목에 그 빨간 건 뭐야?” “아, 저, 그게….” 아레프는 손으로 목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고 난 됐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뻔하지 뭐, 루시아 녀석, 경쟁자가 없으니 주인을 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어버리는 구나. 고개를 저은 나는 아침을 시킨 다음 말했다. “루시아 깨워서 데리고 나와요. 아침 먹고 재등록하러 갑시다. 아, 그리고 스피릿도 좀 불러줘요.” “예.” 아레프는 방으로 올라가서 루시아와 스피릿을 데리고 나왔다. 스피릿은 무표정하게 자리에 앉았고 루시아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레프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보기 좋은데?” “가, 감사합니다.” 아레프는 머리를 긁적였고 루시아는 요염하게 웃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넌 내 것이라는 표정이다. 아픈 과거이니 만큼, 잘 지냈으면 좋겠다. 힐끗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에 반응하여 살짝 쳐다보기만 할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련하시겠어. 어깨를 으쓱인 나는 식사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한 다음 모두를 이끌고 시청으로 향했다. 시청에서 노에매매증을 작성하고 루시아의 재등록을 끝마치자 노예증명서가 내밀어졌다. 그것을 받은 나는 관례대로 루시아에게 전했다. 증명서를 받은 루시아는 그것을 다시 아레프에게 내밀었고 아레프는 쑥스럽게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죽을 때까지 행복해라.”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람 속은 알 수 없어서 언젠가 아레프도 그녀를 다른 놈에게 팔아 넘길지 모르고, 루시아도 그를 떠날지 모른다. 그렇게 주인과 노예를 바꿔가며 살아가는 게 염병할 우리들의 사는 모습이지. 약속? 결심? 믿음? 사랑? 우정? 다 개 같은 소리다. 천년만년 지나도 우리의 수준은 이대로 머무를 거다. 저 우아하고 고귀한 엘프들 마저도 잡아다가 우리네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마당에 무슨 인격향상을 바라고 자아성취를 바라는 건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그리고 신이 될 그릇도 못된다. 그저 몇 가지 욕구만 충족되면 그만인 인간일 뿐이다. 우라지게 슬프게도 말이야. 제기, 괜히 기분 나빠지네.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은 나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수도로 출발하는 건 내일 합시다. 오늘은 여행준비도 해야하고, 할 일이 있으니까.” 루시아의 손을 잡은 아레프가 말했다.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마법 상점에 스크롤 구하러.” 마법상점이라고 하니 아레프는 자기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외따로 떨어진 마법상점을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점 주인이 우리를 반겼다. “어머, 어서와요.” “안녕하십니까. 마담.” 마담이라고 불러주자 그녀는 싱긋 웃었다. 거의 내 어머니뻘이라 누님이라고 부르기엔 뭣하니까. 그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상당히 젊은 마법사군요. 레벨은 7단계 정도? 그 정도라면 사랑하는 노예의 문장 정도는 자기 손으로 지워버릴 수 있을텐데. 왜 여기를 찾아왔을까?” 아레프는 입을 딱 벌렸다. 헛기침을 좀 하며 말했다. “절 따라온 겁니다.” 마담은 싱긋 웃으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대뜸 진열장에 있는 약병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사랑의 묘약. 이거라면 노예의 마음을 되돌릴수 있을 거예요.” 스피릿이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헛기침을 심하게 한 나는 약병을 도로 물렸다. “짓 굳으시군요. 스크롤을 좀 보러왔습니다. 다 써버려서요.” “1000만 루나어치의 스크롤을? 콜트, 당신은 낭비벽이 있군요.” “어쩔 수 없어요. 먹고살려면,” 마담은 상냥하게 웃으며 스크롤이 가득 담긴 통을 나에게 내밀었다. 난 그 안에서 보조마법위주로 스크롤을 골라냈다. 공격마법은 한 두개 정도만 있으면 된다. 원체 파이어 볼 같은 공격 마법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는 데다 가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번에 말씀 하셨던 거, 되겠습니까?” 마담은 그 정도만 들어도 내 의도를 짐작했다. 그녀는 스피릿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가능해요. 그런데, 이대로 괜찮나요?” “상관없습니다. 해주십쇼. 스피릿?” 난 스피릿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그녀는 이마를 찌뿌리며 날 쳐다보다가 말했다. “뭐, 뭘 하시려는 거예요?” “따라가 보면 알아.” 마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피릿에게 손을 흔들었다. “거기 앉아서 좀 기다리세요. 단골이니 특별히 시민증은 공짜로 해드리죠.” “감사합니다.” 난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마담의 손에 이끌려 어떤 방으로 들어가던 스피릿은 연신 날 쳐다보았다. 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레프가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노예 문장의 제거, 불법이지만 노예가 일반평민이 될 수 있는 방법이지.”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스피릿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밖으로 달려나왔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날 쳐다보더니 이마를 잔뜩 구겼다. “너, 너무해요! 이대로 절 버리려고 하다니!” “버리긴 누가 버린다고 그래? 문장을 지우려는 것 뿐이야. 노예보다는 일반 시민이 쪽이 났잖아?” “어머, 도망가면 안되요. 주인님이 모처럼 큰 맘 먹고 노예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데.” 나긋나긋한 음성이 들리며 마담이 걸어나왔다. 스피릿은 움찔하더니 얼른 내 옆으로 달려왔다. 난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답례라고는 뭣하지만, 널 다시 가족에게 돌려 보내주마. 이제 다른 사람 앞에서 쩔쩔 매지 않아도 돼. 보통 사람이 되는 거라구.” “이, 이대로! 이런 몸으로 어딜 돌아가라는 말이에요! 이제 집에 못가요. 아무대도 못가요! 나, 나는 이제… 나는 이제 진짜 당신의 노예가 되어버렸단 말예요. 흐윽….” 스피릿이 울먹이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한숨을 좀 내쉰 나는 그녀의 등을 톡닥이며 말했다. “마담, 부탁합시다.” “조금 따끔거릴 거예요.” 마담은 빛이 나는 손을 들고 다가왔다. 스피릿이 몸을 틀었다. “아악! 안돼! 안돼요! 하지 마세요! 흐으윽! 문장을 지운 다음에 버리려고 그러죠? 그런거죠! 주인님 나빠요! 못됐어요! 나, 나를 이런 몸으로 만들어놓고서는…! 훌쩍! 일을 저질렀으면 끝까지 책임지란 말예요!” 가슴이 뜨끔거린다. 옆에서 마담이 고개를 돌렸다. “이일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노예가 문장 제거를 거부하다니.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강제로라도 할까요?” 등뒤의 스피릿은 내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려 히끅히끅 거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대로 그녀를 업어 올렸다. 마담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언제든지.” 마담은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멍청하게 서있던 아레프와 루시아도 얼른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내 뒤를 따랐다. 입을 꾹 닫고 그녀를 업은 채 여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스피릿이 잔뜩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주인님 저 안 버리실 거죠?”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버린 거지? …나도 참.” 불평 섞인 내 말에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목에 감고 있는 팔을 꽉 끌어당겼다. 여관에 도착한 우리는 방으로 올라갔다. 스피릿을 침대에 내려줬지만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면서 말했다. “도망 안 갈테니 이거 좀 놔.” “으으응….” “그 얼굴로 콧소리 내지마. 안 어울려.” 스피릿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려했다. 스피릿이 물었다. “어, 어디가세요?” “이것저것 준비할게 많아. 같이 가면 귀찮으니까. 넌 여기 있어.” 스피릿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난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리고 네 짐은 너무 많아서 배달시킬거니까. 나 올 때까지 다 챙겨 놔. 알겠지?” “제 짐이요?” “그래. 네 짐. 저걸 다 어떻게 수도까지 가지고 가?” 수납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옷과 드레스는 그야말로 엄청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사준 것 같다. 스피릿은 환하게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댔다. 어떻게 저렇게 얼굴을 뒤바꿀 수 있지? 하여튼…. 고개를 내저은 나는 장거리 여행을 대비해 주인장에게 말의 편자를 갈아달라고 부탁하고 무기점에 들려 맡겨놓았던 자동석궁과 화살통을 찾아왔다. 그리고 우체국에 들려 수도에 있는 지인들에게 편지도 몇 통 보냈다. 조만 간에 올라 갈테니까 목 닦고 기다리란 내용으로, 이래저래 일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모험가 길드를 찾아간 나는 이적서류를 부탁했다. “예에~! 떠나신다구요?!” “그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빨리 이적서류 만들어 줘.” “…생각을 바꿔보실 의향은 없으신지?” “없는데.” 로토는 울상을 지으며 몇 장의 문서용지를 꺼내 서류를 꾸몄다. “하아, 요새 들어 일은 계속 넘쳐나는데 실력자는 자꾸만 줄어가고 정말 재미없군요.” “실력자가 줄어?” “뭐, 그렇죠. 요 근래 베레타와 캐슬린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군대에서 용병을 모집하고 있거든요? 몬스터 잡는 것보단 사람을 상대 하는게 더 쉽다면서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첼시아 씨도 어제 부로 이적서류를 챙겨 다른 곳으로 떠났지요.” 첼시아도? 흐응, 보기 드물게 괜찮은 실력의 여 전사였는데. 뭐,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만나겠지. 어쨌든 이적서류를 받고 로토와 작별인사를 나눈 나는 저녁시간이 다되어 갈 즈음 여관으로 돌아갔다. 스피릿이 방을 깨끗하게 치우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응. 이거,” 난 시장에서 사 가지고 온 솜사탕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스피릿은 헤헤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겉옷과 장비들을 근처 테이블 위에 올리고 보니 나무상자 몇 개가 보였다. “저거냐?”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우체국에 들려서 가져가라고 해야겠다. 준비시간은 언제나 피곤해. 난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저녁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 쉬기 위해서였다. 스피릿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무시게요?” “그래 주무시련다. 8시에 깨워 줘. 사람 많은데 너 데리고 내려가서 눈치 밥 먹기 싫으니 사람 없는 시간에 먹자. 알겠지?” “예쁘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뭐? 예쁘게 태어나서 죄송하다고? 몸을 돌려 누운 나는 킥킥 웃었다. 옆에 앉아있던 스피릿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봉 잡았군. 이렇게 예쁜 노예가 내 거라니. 지지리도 말을 안 들어서 탈이지만.” “이젠 말 잘 들을게요.” “이제 화가 좀 풀린거야?” 고개를 든 나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어른의 미소였다. 거참, 그렇게 웃으니까 영 기분 이상해지네. 난 누운 채로 옆자리를 두드렸다. “말 잘 듣겠다고 했지?” 스피릿은 옆자리에 누웠다. 난 팔로 몸을 일으켜 스피릿의 위로 올라갔다. “그럼 키스해도 돼?” “노예가 아닌 여자로 절 책임져 주신다면 이쪽도 괜찮아요.” 그녀는 다리를 살짝 벌리며 말했다. 입고있던 원피스 안에서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23살 인간남자의 몸은 정말 솔직하다. 빌어먹을 조물주는 왜 이렇게 강한 성욕을 인간에게 줬는지 모르겠다. 최소한 엘프나 드워프처럼 Sex Season이라는 개념이라도 있었다면 성범죄가 좀 줄었을지 몰라.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제미니냐 아니면 스피릿이냐? 이거 문제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단추를 풀어 앙가슴을 드러낸 스피릿이 천천히 팔을 들어 내 목을 감아왔다. 그녀는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조금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키스 해주세요.” 그래. 지금 이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고민쯤으로 생각하자. 스피릿이든 제미니든, 언젠가는 둘 중하나를 선택하게 되겠지. 아니면, 또 다른 제 3의 여인이라든가?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벗어날 수도 없으니까. 물론 벗어나고픈 생각도 없다. 머리 아픈 고민은 그만 둔 나는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하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뜨거운 키스를 시작했다. 스피릿도 이제는 반항 같은 거 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들어 내 목과 등을 꽉 끌어안으며 날 받아들여줬다. “으음… 음… 주, 주인님….” 키스를 하다가 고개를 든 나는 이제 그녀의 뽀얀 가슴을 만지작대며 혀로 애무했다. 그리고 손을 아래로 내려 스피릿의 속옷 속에 집어넣었다. 결국 우리는 이 정도 레벨의 존재일 뿐이다. 연인에게서 느끼는 사랑과 애정? 하! 그건 건강하고 아름다운 상대의 유전자를 받아 더 강한 후손을 남기기 위한 지독하고 더러운 이기주의적 산물이며 동시에 살고자 하는 본능의 추악한 단편이라고 해야 맞다. 하지만 말야. 그래도 우리는 그 이기주의와 추악한 본능을 가슴 한 구석에 끌어안고 살아야해. 왜인 줄 알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아앙… 하아… 하아, 예에에?” 그녀의 다리사이에서 머리를 든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고있던 셔츠를 벗어 입가를 닦은 다음 단아하고 청순한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채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양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스피릿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처음 느껴보는 이성의 애무에 거의 정신이 녹아버린 그녀는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숨을 몰아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녀의 눈가에 맷혀있는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사랑해 스피릿, 바보인데다 말도 막하는 못된 주인님이지만, 이런 나라도 좋다면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훌쩍… 주, 주인님….” 난 울먹거리는 스피릿을 가슴에 꼭 안아 주었다. 지쳐서 침대에 쓰러져있던 스피릿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화, 확실하게 저 책임져 주셔야해요. 아셨죠?” 담요를 끌어올려 가슴에 바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하얀 어깨를 덮어주던 나는 스피릿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손가락에 휘감기는 회색 머리카락의 감촉이 너무 부드럽다. “물론이야. 너만 바라보고 살게. 죽을 때까지 등에 업고 다녀줄게.” 그렇게 말하며 꼭 안아주었다. “사랑해 스피릿.” “…훌쩍, 고맙습니다.” 난 씩 웃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하얀 목에 키스를 했다. 스피릿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아아, 아파요.” “입술도장. 넌 이제 내 거야. 나중에 루시아 만나면 자랑해.” 스피릿은 목을 만지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견딜 수가 없게 된 나는 슬쩍 담요를 들어 그녀의 알몸을 훔쳐보았다. “스피릿, 너무 아름다워.” “아앙.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꺅~! 거기 만지지 마세요.” 난 다시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반항하지 못하게 두 팔을 붙잡아 침대 위에 누르자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다리를 오무렸다. “싫어요. 주인님. 자꾸 이러시지 마세요. …이, 임신하면 어떡해요~!” “괜찮아.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 도망가서 아들딸 낳고 잘 살면 되잖아?” 진심이었다. “스피릿, 나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거 네가 처음이야. 내 기분을 알아줘.” 이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좋아할테니까. 별로 힘든 것도 아닌데 거짓말 좀 하면 어떠냐? 그래도 안된다고 계속 고개를 흔들던 스피릿은 결국 내 애무와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아, 아프게 하지 마세요.” “기분 좋게 해줄게.” 스피릿은 부끄럽다는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예뻐라~! 망할 조물주가 부여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피 때문에 우리는 한참 후에야 늦은 저녁을 먹으려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마침 그곳엔 아레프와 루시아가 있어서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며 내일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루시아가 우리의 관계를 눈치채고 말았다. 그녀는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옆에 앉아있는 스피릿의 몸에 코를 가져가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그제서야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고 스피릿은 그만 얼굴이 시뻘게져서 울상을 지어버렸다. 그리고 나도 루시아의 고양이 같은 미소를 피해 헛기침을 하며 음식 언제 나오냐고 애꿎은 주방장을 닦달해야 했다. 아침해가 떠올랐다. 무의식 적으로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옆자리 누워 곤히 잠들어있는 스피릿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펑퍼짐한 파자마와 셔츠를 입고 누워있던 그녀가 우웅 거리며 일어난다. 침대에서 내려간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겼다. “…어디가세요?” “어디 가시긴, 수도에 가야지. 옷 갈아입고 내려와.” “같이 가요.” 짐을 들고 나가려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옷을 입던 그녀가 말했다. “먼저가지 말고 거기서 기다리세요.” “응.” 난 얌전히 침대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스피릿은 여행복을 갈아입고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앞에 섰다. 한쪽 다리를 들어 침대를 밟으며 허리를 숙이고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내 턱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사랑하는 주인님.” “…주인아. 잘 잤느냐? 라고 하지 그래?”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은 스피릿은 호호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잠시 기다리니 아레스와 루시아가 나왔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여관주인장에게 작별인사를 한 다음 각자의 말에 올라 여관을 나섰다. “이제 성문으로 나가는 거예요?” “아니, 이른 아침이라 성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을 거야. 우체국으로 가자.” 도시를 나서기 전에 우체국에 들린 나는 우체국 직원에게 샤먼의 노래라는 여관을 가르쳐주며 그곳에 놔두고 온 짐을 수도로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짐의 수신자와 배달비를 치르고 우체국에서 나가니 스피릿이 다짜고짜 내 손을 붙잡으며 어디론 가로 끌고 갔다. 난 얼빠진 음성으로 물었다. “어? 왜에?” “저거, 저거 사주세요! 주인님!” “엥?” 그녀가 가르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우체국 근처 대로에 줄을 지어 앉아있는 노점상이 보였다. 보통 노점은 아니고 떠돌이 유랑민들인데 수공으로 직접 제작한 장신구를 바닥에 펼쳐놓고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잘 살펴보니 루시아와 아레프도 그곳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만져보며 웃고있었다. 난 스피릿을 보았다. 안된다고 하면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알았어. 가자.” 스피릿은 금세 표정을 밝히며 내 손을 잡아끌고 노점의 앞을 어슬렁대며 맘에 드는 것을 찾았다. 그러다가 5번째인가, 6번째 노점상의 앞에 쭈그려 앉으며 덩치 좋은 사내가 벌려놓은 좌판을 정신 없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상당히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사내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모두 순은으로 만든거라 좀 비쌀지도 모르지만, 맘에 드시는 것이 있다면 골라보세요. 싸게 드리겠습니다.” “이, 이거 전부 은으로 만든 거예요?” 스피릿은 약간 더듬대며 그에게 물었다. 샤먼의 노래에 있는 주인장과 거의 맞먹는 덩치를 자랑하는 사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의 등뒤에 서서 그녀가 고르는 것들을 구경했다. 스피릿은 귀걸이나 반지 같은 것을 한번씩 해보다가 슬슬 시계를 바라보며 헛기침하는 내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반지 두 개를 들었다. “이거요. 이거 사주세요.” “응? 반지?” 그녀가 손바닥에 들어 보인 것은 찬란한 은빛에 두 개의 선이 기괴한 모양으로 꼬여 링을 이루는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만든 사람이나 그것을 고른 사람이나 상당한 센스가 엿보인다. 난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얼마요?” 가격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저쪽에서 아레프와 루시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스피릿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응?” “주인님. 손.” 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스피릿은 고개를 저었다. “왼손.” “여기.” 왼손을 내밀자 그녀는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러더니 이제 나에게 반지를 쥐어주었고 난 그녀가 끼워준 반지를 멍청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스피릿의 성화에 방금 했던 것과 같이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러자 스피릿은 두 손을 감싸쥐어 가슴에 앞에 모으고 캐슬린 어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발돗음을 해서 멍청히 서있는 내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말했다. “꿇으세요.” “뭐?” “진정으로 스피릿을 사랑한다면 무릎을 꿇으세요.”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던 나는 노상에서 모두가 지켜보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피릿은 단검을 꺼내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유키르 캐슬린 프레세티하 나이크미 나르쉬키하마스.” 뭐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굉장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서 난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행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주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지만 스피릿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단검을 검 집에 넣고는 거창한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했다. “이제 일어나셔도 되요.”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뭘 한 거냐고 물어도 돼?” “캐슬린 기사 임명식을 좀 흉내내봤어요. 주인님은 이제 나만의 기사예요. 물론 저도 주인님만의 레이디이구요. 아셨죠?” 기사? 레이디? 무슨 말인지는 잘 몰랐지만 난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때 저쪽에서 말에 오른 아레프가 외쳤다. “어서 오세요! 성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언덕 위에서 천천히 열리는 성문을 바라보며 나는 말에 올랐다. 그리고 위아래 검은색 가죽 자켓과 바지를 입고 긴 회색 머리카락을 검은 손수건으로 묶은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방금 낀 은빛반지가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답다. “가시죠. 레이디.” 스피릿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Running Fire: 17 “생명존중이고 나발이고 살려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보통 장거리 여행은 단체로 하는 게 정상이다. 왜냐하면 많은 종족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보니 남이 잘되는 꼴은 못 보는 놈들이 많기 때문이다. “잘 못 들었는데. 다시 한번 말해보지?” “귀가 먹었냐? 여자, 돈, 말, 옷, 아니지. 그냥 네 몸뚱이 하나 남겨두고 다 내놔라. 그럼 목숨은 살려주마.” 고개를 돌린 나는 내 옆에 꼭 붙어서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스피릿, 저것들이 내가 가진 거 다 내놓으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지저분한 건 딱 질색이에요.” “들었지? 이 덜떨어진 것들아. 가서 면도나 좀 하고 달려들어라.” “뭐가 어째?! 이 놈들이 죽으려고 작정했나!! 야! 쳐!” 맨 앞에 있던 사내가 외쳤다. 그러자 주변에 몰려있던 놈들이 칼과 활을 뽑아들었다. 나는 손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스피릿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조심하세요.” “물론이야. 아레프 엄호 해주쇼.” 아레프는 이미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달려드는 산적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앞으로 뛰었다. 하필 야영하는데 습격해오다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아, 그리고 한가지. 모험가든 평범한 사람이든,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이나 몬스터 정도는 우습게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무장한 산적 열둘은 좀 버겁지만 뒤에는 든든한 마법사가 후원을 해주고 있으니 용기백배다. “이 콜트 슈발츠에게 덤빈걸 후회하게 해주마! 으라차!” 달려간 나는 맨 앞에 창을 들고 달려오던 녀석의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샤프마법이 걸려있기 때문에 그리 큰 힘들이지 않고도 턱 윗 부분을 잘라낼 수 있었다. 피와 뇌수가 쏟아졌다. 쓰러지지 않고 있는 놈의 몸을 발로 걷어찬 나는 그대로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았다. 철크럭! “하하하~! 지옥에나 가버려랏!” 퉁퉁퉁퉁퉁~!!! 퍼퍼퍽! 퍼퍽! “크악! 으윽!?” “자동석궁이다! 활! 활을 쏴!” “웃기지 마라!” 검을 들고 달려들려는데 아레프가 외쳤다. “콜트! 엎드려요!” 난 바닥에 납작 업드렸다. 슈슈슈슉~! 뭔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쓸쓸한 밤의 어둠을 수백 개의 빛줄기들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매직미사일! 놈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매직미사일의 파괴력은 성인 남자가 힘껏 내지른 펀치력과 같다. 아마 정신이 없을 걸? “우흐흐흐흐~!”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비틀거리는 놈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쏘고 베고 찌르고 차기를 반복하여 최단 시간에 놈들을 쓰러뜨렸다. 배를 붙잡고 헥헥거리는 사내의 목을 검으로 내려친 나는 달아나는 놈들의 등으로 화살을 갈겼다. 퉁퉁퉁퉁퉁~! 퍼퍽! 퍽! “아악!” “크윽!” 다 쓰러뜨렸나? 바닥에 쓰러진 녀석들의 숫자를 세어보니 대략 열명, 사지가 잘려나간 녀석까지 합하면 열 하나, 난 칼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한 놈이 부족하구만? 우흐흐흐….” “가, 가까이 오지마! 이 괴물!” 고개를 돌려보니 왠 사내가 아레프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난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뭐 하자는 거야?” “무기를 버려!” 칼을 버리는 대신 다시 허리에 꼿고 자동석궁을 등에 맸다. 놈은 아레프의 목에 댄 칼을 흔들며 말했다. “베, 벤다!?” “할 수 있을테면 해봐라. 멍청한 놈.” 경악한 루시아가 외쳤다. “주인님!” “왜 부르죠?” 아레프는 산적의 손에서 간단히 빠져나와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산적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굳어버린 몸을 내려다보았다. “뭐, 뭐야 이거?” “뭐긴 뭐야. 마법이지. 자 어떻게 해줄까? 거시기를 잘라서 불에 던져버릴까?” 좀 위험하게 웃으며 단검을 뽑으니 스피릿이 말렸다. “그만두세요. 주인님. 아무리 산적이라지만 너무 하시는 것 같아요. 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엥? 지금 날 나쁜 놈으로 모는 거야? 이건 너무 한데.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어, 스피릿, 주인님을 흉악범으로 모는 거야? 싫은데. 그리고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냐.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아야지. 이 놈들이 얼마나 악랄한 것들인데 그래. 여행자들을 습격해서 반항하는 사내들은 죽이고 노예나 여자들은 강간하고 돈이 될만한 건 다 훔치는 쓰레기들이라구.” 놀란 스피릿이 입을 살짝 벌렸다. “돈만 가져가는 거 아니에요?” “그랬다면 산적이 아니고 의적이겠지.” “아, 아냐! 아냐! 사람은 죽이지 않았어! 우린 돈만…!” “닥치지 않으면 목을 베어버린다.” 칼을 녀석의 턱에 들이대고 으르렁대자 산적은 금세 조용해 졌다. 스피릿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산적을 쳐다보았다. “사실이에요?” 고개를 돌린 산적은 아무 대답도하지 않았고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물론, 모험가 자격이 없을 때 용병으로 자주 마을 경비대를 따라 토벌을 다녔거든? 그런데 이 녀석들 아지트에서 뭐가 나오는 줄 알아? 그걸 보면 인간이라는 동물이 굉장히 혐오스러울 걸?”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마침 생각난 게 있어 난 녀석의 목에 칼을 대고 물었다. “네놈들 소굴이 어디냐?” 산적은 처음엔 반항하다가 말했다. “남쪽으로 약 5Km 정도가면 동굴이 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아레프를 보았다. “이봐. 마법사. 어때? 우리 착한 일 좀 할까?” 아레프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거 좋죠.” 난 일단 녀석의 마법을 풀어 달라고 했다. 아레프는 마법을 풀었고 그러자 녀석은 금세 반항을 해왔다. 약간의 몸싸움 끝에 녀석을 바닥에 매다 꼿은 나는 놈의 팔을 꺽으며 말했다. “제기, 억센데. 어떻게 죽이는 것보단 생포하는 게 더 힘들어. 이봐, 죽이지 않을테니 아지트로 안내해.” “우, 웃기지 마라! 알려줬잖아! 알아서 찾아가! 이 빌어먹을! 아아악?!” “팔뼈 부서지는 소리가 듣고 싶은 가보지?” 으드득…! 팔을 심하게 꺽어 올리자 사내는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스피릿과 루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 뭔가 생각하던 아레프가 끼어 들었다. “콜트씨 잠깐.” “왜?”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잠시 비켜보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놈이 도망갈까봐 내심 걱정했지만 그의 연이은 부탁에 별수 없이 놈을 풀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러자 놈은 팔을 붙잡고 죽어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 봐. 도망간다구. 어쩌려고 그래?” “보면 아실 겁니다. 하하하~!” 순한 얼굴로 기분 나쁘게 웃던 아레프가 지팡이를 들며 외쳤다. “폴리모프 아더!” 마법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하면, 공기중의 압력을 조절해서 물리적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의 공격무기로 만들거나. 혹은 멀쩡한 손바닥에서 불길을 일으켜 사람을 숫덩이로 만든다던지. 또는 지저분한 턱수염의 산적사내를 예쁜 여자로 만들어버릴 정도다. “꺄아악!” 달려가던 사내는 갑자기 여자가 되어서는 바닥으로 뒹굴었다. 얼른 달려간 나는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리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뭐, 뭐야?! 어떻게 한거야?” “모습을 바꿨습니다. 이쪽이라면 훨씬 다루기 쉽겠지요?” 신기한 듯이 달려온 루시아와 스피릿도 바닥에 주저앉아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가슴을 만지작대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대단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레프, 굉장하다. 그럼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도 가능해?” “가능합니다. 폴리모프 아더 스펠은 사람을 새나 개구리로도 만들 수 있어요.” 난 대단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내, 아니 산적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아레프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건 없어졌습니다. 마법을 풀기 전까지는 안 돌아올거예요.” 바지춤을 붙잡고 절망의 나락에 선 얼굴을 하고 있던 20대 여성이 울먹이며 고개를 돌렸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나는 팔을 들어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뺨을 두어대 갈겼다. 짜작! 짝! 산적여자는 간단하게 늘어졌고 루시아와 스피릿이 어깨를 움찔하며 겁에 질려버렸다. “닥치지 않으면 네가 여자들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주겠어.” 한 손으로 벨트 버클을 흔들며 말하자 산적여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레프가 헛기침을 좀 하고 스피릿이 볼을 부풀리며 당당하게 걸어오더니 내 귀를 잡아당겼다. “방금 한말 다시 한번 해보세요.” “…잘못했습니다. 노예님. 한번만 봐주세요.” 스피릿은 코를 조금 벌렁거린 다음 손을 놓았다. 산적여자는 겁에 질려 엉엉거리며 안내하겠다고 했다. “사내자식이 울기는, 꼴사납게스리. 뚝 그쳐!” “내버려두세요. 정신은 남자의 그것이라도 몸은 보통여자입니다. 심장 박동수, 성호르몬, 체중분포, 혈압, 근육의 수축력,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보통남자와 달라요. 같은 인간의 몸이라도 틀린 부분이 꽤있거든요? 그래서 저러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지만요.” 난 신기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서 걷고있는 산적여자의 작은 등을 쳐다보았다. 야밤에 습격을 당해서 전투를 벌였다면 전투가 끝난 후 즉각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 첫째는 추적하는 전당들 때문이고 둘째는 야식거리를 찾아 밤의 숲속을 헤매는 몬스터 때문이다. 키 큰 전나무 숲을 지나 1시간 정도 걸어가니 멀리 불빛이 보였다. 난 기가 차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환장하겠군. 너희는 상식도 없냐? 이런데 불을 피워놓으면 다 보이잖아?” “…밤에 길 잊어먹지 말고 잘 찾아오라고 해놓은 건데요.” “시끄러! 바보녀석들! 지리정도는 외워둬야지! 그래야 민병대나 관군이 몰려오더라도 따돌릴수 있을 거 아냐!” 산적여자는 과연~ 하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고개를 좀 흔들어준 나는 산적여자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은 다음 근처 나무에 꽁꽁 묶어버렸다. 스피릿이 말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데리고 갔다가 지들 동료라고 소리 지르면 어떻게? 그렇다고 여자를 죽일 수는 없잖아? 있다가 남자모습으로 돌아와 있으면 목에다가 칼이나 꼿아줘야지.” “읍읍읍~!” 산적여자가 울먹이며 도리질을 쳤다. 난 그녀의 머리를 붙잡아 나무에 짓누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네 맘 알아. 죽고 싶지 않겠지? 나도 널 심판할 명확한 이유는 없어. 넌 네게 빛을 지지도 않았고 상처도 입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넌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하고 배신하는 녀석이야. 그렇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도 그러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 왜냐하면 넌 오늘밤 우리들을 습격했으니까. 만약 우리들이 평범한 여행자들이었다면 네놈들은 어땠을까? 똑같은 말을 했을거야. ‘여자와 돈을 두고 꺼져라.’ 물론, 이 말을 곧이들을 사내들은 없을거고 우린 택도 없이 덤볐다가 죽임을 당했겠지. 그리고 우리 아가씨들은 네놈들에게 끌려가 욕을 당했을 거야. 후회? 용서? 자비? 웃기지마. 살려주면 살인과 강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또 다시 도적질을 반복할거야. 안 한다고는 못하겠지? 먹고살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하는 세상이니까. 그러고 보니 세상은 공평하고 신은 더할 나위 없이 자애로우셔서 세상만물에게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주신다고 델린저의 프리스트가 말했지. 하지만 지랄하는 소리야. 우리네 세상은 더럽고 치사한 세상이야. 바로 너 같은 놈과 나 같은 놈이 있음으로서 증명이 되지. 야 이 개새끼야! 넌 몇 명이나 죽이고 몇 명이나 강간했냐? 그리고 얼마나 빼앗았어? 그렇게 하니 기분이 좋디?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겠지? 언젠가는 실력 있는 것들을 만나 되려 자기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야.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그만뒀어야 했어. 이제와서 용서를 빌겠다고는 말하지마.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도 말하지마. 너희들은 악질이야. 우발적인 살인자와는 그 격이 틀려, 그러니 네 손에 죽어간 사람들을 대신해서 내가 너희들을 죽여버리겠다. 결단코 죽여버리고 말 테니 네가 악당이라면 담담하게 죽어가라. 그리고 먼저 지옥에 가서 네가 죽인 사람들에게 사과해.” “읍읍읍~! 흐으으으읍!!!!!” 산적여자는 눈물과 콧물을 철철 흘리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난 그녀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방금 살려달라고 했지?” 산적여자가 희망의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씩 웃으며 몸을 돌렸다. “네가 칼로 머리를 내려친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을 거야.” “……….” 아무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겨우 그깟 말 좀 듣고 자기혐오에 빠져들다니. 우습지도 않군. 난 피식 웃으며 멍청한 얼굴로 서있는 아레프와 스피릿, 루시아에게 걸어갔다. 아레프는 날보고 감동 받은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쳐댔다.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레프는 마법사였지. 스피릿이 물었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가 있으셨어요?” 고개를 내린 나는 나 보다 조금 작지만 루시아보다는 키가 큰 스피릿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갸름한 턱을 잡아 살짝 들었다. “바보주인님이 강도들에게 반항하다가 죽고 너희들은 끌려가서 갖은 방법으로 욕을 당했으면 좋겠어? 아니지? 그렇지?”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스피릿이 화가 난 투로 말했다. 난 씩 웃으며 그녀의 오똑한 코끝에 살짝 입을 맞춰준 다음 손을 내렸다. “나도 그래. 가자, 좀 졸리겠지만 참아 줘. 아레프? 혹시 전투가 벌어지면 아가씨들 부탁해.” “알겠습니다.”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빛을 보고 30분을 더 걸어 들어가자 커다란 동굴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동굴 앞에는 화톳불이 놓여있었지만 경비는 없었다. 오호라. 이거 편하게 됐군. 난 씩 웃으며 강철 건틀릿을 끼고 단검을 뽑아들었다. “먼저 들어 갈테니 신호하면 조심해서 따라와.” “아,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아레프가 두 손을 들어 뭐라고 주문을 외우더니 나를 가르켰다. “실드.” 가슴 앞으로 반투명한 방패 같은 것이 생겨났다. 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바위와 그림자에 몸을 숨겨가며 동굴입구의 측면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단검의 칼날을 이용해 동굴 안의 상황을 살피고는 나무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손짓을 한 다음 잽싸게 안으로 진입했다. 뒤를 돌아보니 새끼 오리마냥 마법사와 노예아가씨들이 졸졸 따라오고 있는 게 보인다. 동굴은 사람하나 설 수 있을 정도로 낮고 좁았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불빛이 환한 방이 보였다.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칼날을 거울처럼 이용해서 보니 몇몇의 사내가 테이블에 엎드려 졸고 있는 게 보인다. 이봐, 도대체 긴장감은 어디다가 팔아먹은 거야? 동료들이 일하러 나갔으면 경계라도 좀 하고 있으라고, 하지만 함정일지도 모르니 신중하게 석궁을 뽑아든 나는 재빨리 벽 밖으로 팔과 석궁을 내밀었다. 투투투투투투퉁~!! “윽?!” “크악!” “우윽!” 초당 5발을 연사하는 자동석궁의 활대가 빠르게 움직였다. 엘프가 컴포짓보우를 잡았더라도 이런 속사는 힘들거다.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진 사내들을 확인하던 나는 동굴 밖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뭔가가 헐레벌떡 뛰어오기 시작했다. “버, 벌써 끝난 겁니까?” “이거 덕분이지.” 난 등에 매고 있는 자동석궁을 보여주었다.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불법 아닌가요?” “합법적인 겁니다. 입실론의 마법사 길드에서 보증을 섰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안쪽 방으로 좀 더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뿌렸다. 방에는 긴 터널이 나있었는데 그곳은 옆 벽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굵은 나무작대기를 꽂아 감옥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각 감옥 안에는 생기 없는 표정의 사람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나무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런 감옥이 7개나 되었으며 모조리 여자들이었다. “스피릿, 봐라. 이런 짓을 저지르고 또 저지를 놈들이야. 생명존중이고 나발이고 살려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내 등뒤에서 경악한 표정을 짓고있던 스피릿은 대답하지 않았다. 샤프 처리된 칼을 뽑은 나는 감옥의 문을 그어버렸다. 나무토막들이 바닥을 뒹굴고 안의 여자들이 깜짝 놀라서 날 쳐다보았다. “나와요.” 루시아가 감옥 안의 여자들을 불러내고 아레프는 제대로 된 옷가지를 찾아 도적 떼가 쌓아놓은 잡동사니를 뒤적였다. 팔을 휙휙 휘둘러 감옥 문을 잘라내며 걷던 나는 마지막 7번째 문을 잘랐을 때 조금 놀라고 말았다. 밧줄에 꽁꽁 묶여있는 엘프여자가 날 반겼기 때문이다. 복장도 그렇고 얼굴에 난 상처를 봐도 잡혀 온지 얼마돼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날 보더니 여상스럽게 물었다. “누구시죠?” “콜트 슈발츠.” 그렇게 대꾸해준 나는 검을 들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그레이프라고 하는 엘프 여행객으로 바로 어제 동료들과 함께 이곳을 지나다가 산적들에게 포위되었다고 한다. “동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당신만 남았수?” 밧줄을 잘라주며 묻자 그레이프는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달아났습니다. 절 이들에게 넘기고.” “거 참 싸가지 없는 것들을 동료로 두셨구려.” “아니오. 저희 일행은 용병으로 상인들과 여행객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임산부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적 떼는 저만을 원했고, 임산부가 다치면 안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구하러 오겠다는 약속도 있었습니다.” “당신 돌았군? 그걸 믿었어?” 밧줄을 풀어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프라 그런지 키가 꽤 크다. 거의 나만하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레이프도 피식 웃어버렸다. “아니오. 여행을 나오기 전에 당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은 거의 포기한 수준이었죠.” “이대로 무슨 일이 일어 날 건지도 알고 있었수?” 난 허리를 숙여 감옥의 문을 나서며 말했다. 그레이프는 뒤따라 나왔다. “듣기로는 성욕이 왕성한 인간 남성들의 욕구해소를 돕게되거나 혹은 노예시장으로 팔려가게 될거라더군요.” “누가 그래요?” “마을 장로님과 친구들, 그리고 옆방의 아가씨가 알려줬습니다.” 난 황당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걸 알면서 거기 앉아있었던 거요?” “아니오. 정령으로 보초들을 재우고 탈출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오시더군요.” 아까 놈들이 퍼질러 자던 건 그것 때문이었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가보니 동굴입구는 여자들로 바글바글했다. 아레프와 루시아 스피릿은 거의 반라 수준인 아가씨들에게 옷과 담요를 나눠주며 불안해하는 그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사정을 설명했다. “여러분들은 구출된 겁니다. 이제 자유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레프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여자들에게 하면 안되는 거다. 예상대로 아가씨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나 이제 어떡해에에!” “엄마아아~!” “아앙앙앙~!!” 숲이 떠나라 이 지경이다. 난 귀를 막으며 말했다. “에이~! 시끄러워. 젠장.”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밝았다. 그레이프에게 물어본 결과 산적들은 우리가 쓰러뜨린 놈들이 전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았다. 바로 여자들의 거취였다. 그녀들에게 물어본 결과 대부분이 이 근처 마을에서 이웃마을로 잠시 일을 보러가던 도중에 붙잡혀왔다고 했다. 입맛이 쓰다. 언제나 그렇지만 구하는 것 보다 돌려보내는 게 더 힘들어. 여자들을 바닥에 앉힌 나는 숨을 크게 들이킨 다음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여행자들로, 여러분을 구해드리긴 했지만 가족의 품으로까지 돌려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의 마을에 도착하면 여러분을 경비대에 인도할 생각합니다. 그럼 거기서 가족이 있는 분은 가족에게로, 연인이 있는 분은 연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여자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산적들에게 붙잡혀 갖은 몹쓸 짓을 당했을테니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다. 이웃과 연인에게 의심의 눈빛과 혐오의 목소리를 듣게 되겠지. 아니면 이별을 당하거나, 뻔한 이야기다. 더군다나 심각한 것은 그녀들이 이제 사람을, 아니, 인간이라는 짐승을 대하는 눈이 달라지게 될 거란 사실이다. 그녀들은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믿지 못하게 될 거다. 아레프와 그레이프가 그녀들을 위로하기 위해 몇 마디 말을 건냈지만 그녀들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연신 훌쩍이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산적 놈들이 쓰던 짐마차를 수리하던 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장을 집어들었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날 도와주던 스피릿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제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더러운 세상과 인생을 저주하다가 술집과 사창가를 전전하며 살아가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도 맘먹기에 달린거야. 아, 거기 망치 좀 줘.” 스피릿이 망치를 내밀며 말했다. “맘먹기요?” “그래, 마음먹기. 우리들의 피는 뜨겁거든? 그래서 맘먹기에 따라 빌어먹을 과거를 태워버리고 새 미래를 시작할 수도 있겠지.” Running Fire: 18 “비키세요. 싸움쟁이 주인님하고는 같이 안 자요.” 한창 마차를 고치고 있는데 루시아가 나에게로 타박타박 걸어왔다. 거 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루시아는 걷는 모습이 정말 귀여워, “콜트씨. 롱소드 좀 빌려주세요.” “뭐하게?” 내가 물었지만 루시아는 그냥 웃기만 할 뿐이다. 마차 위에 올려두었던 롱소드를 검 집채로 그녀에게 내밀자 루시아는 상당히 무겁다는 듯이 그것을 두 손으로 잡고 여자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레프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아?” “주인님. 비켜보세요.” 스르르릉~! 퍼억! 힘겹게 검 집에서 칼을 뽑아낸 그녀는 은빛 찬란한 롱소드를 그녀들의 앞에 꽂았다. 여자들이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검 손잡이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린 루시아가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들, 세상 끝난 것 같은 표정은 그만둬, 당신들의 우울한 기분은 나도 알아. 연인에게 키스한번 허락해주지 않았는데 쓰레기 같은 것들에게 순결을 빼앗기니 죽고 싶어지지? 하지만 당신들은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무는 것보다는 추악한 세상 속에 살아남은 쪽을 택했어. 그렇지? 살고싶으니까 살아있는 거잖아? 그럼 살아야지. 그렇게 울고 있으면 뭐가 나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이대로라면 가족과 이웃의 비난과 이별이 당신들을 기다릴거야. 험한 꼴 당한 것도 억울한데 사람들의 흉흉한 눈빛을 받고 싶어? 경험자로서 말해주지. 주위사람들이 당신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동정은 위선이야. 속으로는 더러운 년이라고 욕하고 손가락질 한다구, 조언하겠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 같은 건 애초에 바라지마. 이 악물고 혼자서 일어서, 그리고 걸어가. 이 더러운 세상 앞에 당당하게 서서 당신들을 욕하는 것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줘버려.” 여자들은 입을 헤벌리고 루시아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나와 스피릿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히야~! 말 잘하는걸? 루시아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말야.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거야. 마을은 얼마든지 있어. 잘생긴 남자들도 많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당신이 말하지 않는 이상 당신이 어디서 뭘 하고 왔으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 알겠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도저히 고향마을에서 살 자신이 없거든 다른 마을로 넘어가 괜찮은 남자하나 콱 깨물어서 호강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방법이겠지. 나처럼.” 고개를 돌린 루시아는 내 옆에 서있는 아레프를 쳐다보았다. 여자들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헤벌쭉 웃고있는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빙그레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린 루시아는 이제 롱소드의 칼자루를 내려다보며 말을 맷었다. “하지만 도저히 무섭고 겁나서 그렇게 못하겠다는 사람이나, 혹은 수치심에 사람들의 앞에 떳떳이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말만해. 고통 없이 죽여줄게.” 여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루시아는 검을 바닥에 꽂아놓은 채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칼은 떠날 때까지 저대로 둬도 될까요?” “응, 상관없어. 그나저나 루시아 굉장히 말 잘하는 걸?” 그녀는 싱긋 웃으며 아레프에게 걸어가더니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던 아레프는 그제서야 뭔가를 깨달고는 그녀를 조심스레 앉아주었다. 루시아는 화사하고 귀여운 웃음을 지었다. 나도 씩 웃으며 다시 마차 바퀴를 손보기 시작했다. 그레이프가 동굴에서 자신의 짐을 찾아 나오며 말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다른 이의 조언을 듣고 선택하나요?” “길도 먼저 간 사람이 잘 안다고, 간혹 그러기도 하죠.” 엘프와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을 위해서. 잠시 후 마차의 수리가 끝났다. 나는 두 마리의 말을 데려다가 마차에 묶고 여자들을 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전에 그녀들에게 소정의 위로금(?)을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레프는 도적 떼가 모아놓은 귀중품 중에서도 특히 비싼 것들만을 골라 조그만 주머니에 담아서는 그녀들의 손에 하나씩 쥐어주었다. 루시아가 옆에서 그의 일을 거들었다. “더러운 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받아둬요. 의외로 쓸데가 많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시아는 살짝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동굴에서 걸어나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마부석에 앉으니 스피릿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여관비라도 좀 건져볼까 했는데. 아무것도 없더라. 내심 이걸 노리고 있었는데 말야.” 그랬다. 동굴 안은 이제 쓰레기들만 가득했을 뿐 돈이 될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제기~! 그때 귀중품을 모조리 쓸어다가 여자들에게 나눠준 염병할 아레프가 말했다. “이번 여관비는 제가 내겠습니다.” “돈도 없는 주제에 무슨.” 따끔하게 쏘아주자 아레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루시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루시아 돈 가진 거 있어요. 주인님. 이거.” 그녀는 저번에 내가 돌려주었던 돈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아레프는 그것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 안돼요. 그 돈은 루시아 거니까. 루시아가 필요할 때 쓰도록 해요.” 루시아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그 돈주머니를 아레프의 로브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제는 우리 거예요.” “루시아….” “아, 배고프다. 주인님. 마을에 도착하면 맛있는 거 사주세요.” 아레프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온몸에 돋아 오르는 소름을 손으로 벅벅 긁다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확실히 남들 사랑이야기는 재미있긴 하지만 좀 소름 돋는 구나. 내 옆에 앉은 스피릿이 아침의 태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 발로 세상을 살기란 참 힘들군요.” “넌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죽을 때까지 등에 업고 다녀 줄 테니까.” 날 쳐다보던 스피릿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멋쟁이.” “요즘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야. 고마워.” 난 씩 웃었다. 그때 루시아가 끼어 들었다. “숲에 묶어 놓고 온 그 산적남자는 어떻게 할거예요?”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면 살아 날거고 그렇지 못한다면 이 근처를 배회하는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히겠지. 내버려둬.” “주인님 못됐어요.” “스피릿 사랑해에.” 난 낄낄 웃으며 스피릿의 작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스피릿은 내가 너무 잔인하다고 불평을 터트리긴 했지만 날 밀어내거나 그를 풀어 주러가자 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이 망할 세상이 돌아가는 사이클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내 탓일까? 식료품이 다 떨어져 아침은 물론 점심도 먹지 않고 강행군으로 레이스라는 이름의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식당을 찾아가 주린 배를 채웠다. 그리고 경비대로 가서 도적 떼의 소굴을 소탕하고 데려온 여자들을 인도했다. 레이스의 경비대장은 직접 현상금을 가져다주며 귀찮은 녀석들을 없애줘서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해왔다. 모두의 시선에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나는 현상금을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아까워라~! “현상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그 아가씨들이 이곳이나 혹은 다른 마을에서 잘 생활 할 수 있도록 경비대장님이 뒤를 좀 잘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어렵지 않소.” 경비대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미덥지 않았기에 난 여기에 약간의 협박을 가미하기로 했다. 서재의 책상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며 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착각하시나 본데. 지금 이건 헌금이 아닙니다. 경비대장에게 드리는 뇌물입니다. 2500만 루나에 저 불쌍한 아가씨들이 나락의 길로 떨어지지 않도록 잘 좀 봐주십사 하는 겁니다. 대신 단 한 명에게라도 안 좋은 소문이 들리면 뇌물수수혐의로 고발할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거래 조건이지 않습니까?” 당장 경비대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나와 한참동안 눈빛을 주고받은 그는 나직하게 물었다. “같이 들어갈텐데?” “저는 한낱 모험가 나부랭이일 뿐입니다. 만인의 존경을 받으며 명예를 위하여 국가에 봉사하시는 어떤 분과는 틀리지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늙은 경비대장은 돈주머니를 집어들더니 자기 책상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알겠소. 나도 딸 가진 아버지요. 당신의 선물은 잘 받아들이지.” 우리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경비대에서 조사차 물어오는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해주던 우리는 저녁때가 가까워져 왔을 무렵에야 그곳을 나설 수 있었다. 지쳐 쓰러질 것 같다는 표정의 스피릿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서쪽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예뻐라….” “난 스피릿이 더 예뻐.” 붉게 타오르는 석양에서 고개를 돌린 스피릿이 베시시 웃었다. 아레프가 말했다. “정신 없는 하루였습니다. 어쨌든 저 아가씨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군요.” “자기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어디서든 잘먹고 잘살겠지.” “그건 너무 무신경한 발언인데요.” 아레프와 팔짱을 하고 걷던 루시아가 말했다. 난 그녀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꼽았다. “이봐, 무신경한 발언이라니. 잘 보라구, 목숨 구해줬지. 돈도 쥐어줬지. 그리고 경비대장에게 뇌물까지 안겨주며 뒤까지 봐달라고 했는데 뭘 더 이상 신경 써? 이젠 자기들 의지에 달렸어. 꿋꿋하게 과거를 버리고 다시 일어난 아가씨는 좋은 남자 물어서 행복하게 살 거고 그렇지 못한 아가씨는 술집과 사창가를 전전하겠지. 아~! 난 이제 몰라! 난 내 등에 업힌 것만 챙겨주기도 힘든 몸이란 말야!” 그러자 스피릿이 히죽 웃으며 내 팔에 매달렸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그레이프가 끼어 들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되찾도록 해줬으면서 왜 루시아와 스피릿은 그대로 남겨두는 거죠? 이해 할 수 없군요. 위선인가요?” 나와 아레프는 뒤를 돌아보았다. 붉디붉은 석양의 마력에 물들어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던 그레이프가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이 아름다운 엘프여성을 바라보며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위협과 가능성을 담아 말했다. “사랑하는 내 노예이니까.” 그레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쳐다보기만 했다. 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내 친구 중에 당신네 종족아가씨를 데리고 있는 녀석이 있습니다. 라이트라고 하는 마법사인데. 지금 그 녀석은 그 엘프아가씨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골머리를 썩고 있지요. 당신도 알 겁니다. 마법사라는 생물이 어떤 녀석들인지. 그 녀석은 엘프노예를 샀지만 자기는 불쌍한 엘프아가씨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돌려보내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불쌍한 건 그 엘프노예인데. 그녀는 어렸을 적에 잡혀왔기 때문에 정신이 완전히 인간의 그것으로 오염되어버렸어요. 그래서 그녀는 안아주지 않는 주인에게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소리를 듣고는 울어버렸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노예의 반항에 내 바보 친구 놈은 고민하고 있죠. 우습지 않습니까?” 그레이프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스피릿이 내 손을 잡아왔다. “전 주인님이 좋아요.”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로를 걷던 우리는 여관골목을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섰다.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는 그레이프 때문이다. “당신은 어쩔 겁니까?” “아,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저는 지금 성인식 때문에 캐어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듣자니 캘버린으로 가신다던데. 수도까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캐어릭이면 이웃나라 베레타의 항구에서 밖에 배가 없을 텐데. 꽤 먼데까지 가시는 구랴?” 그때 아레프가 물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119살입니다.” 저 얼굴로 근 120년을 살았다고?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난 고개를 삐딱하게 만들며 물었다. “동료들에게 배신당했다면서 또 동행을 구하는 겁니까? 그것도 인간을 상대로 말요.” “아무리 엘프라지만 여자혼자 유랑하는 것은 위험하지요.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전 아직 짝이 없기 때문에 혼자서 캐어릭까지 가야합니다. 그러니 이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그레이프는 미소를 지었다. 엘프의 미소는 사람 힘 빠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모두의 의견을 받았다. 대찬성이었다. 큰언니 같은 분위기가 보기 좋다나? 난 좋을 대로하라고 하며 적당한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항상 그렇지만 이곳 여관도 저녁시간이 되자 몰려든 주당들과 모험가들로 귀가 따가울 정도의 소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유인 즉 슨 늘씬한 엘프아가씨와 함께 들어서는 루시아와 스피릿 덕분이다. 보는 눈은 다들 붙어있어서 기쁘군. 난 최대한 험악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점원이 테이블을 하나를 마련하여 우리를 안내했다. 젊은 사내가 싹싹한 어투로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 “와인 4잔 맥주 한잔, 1인실 3개. 그리고 이 집 정식메뉴, 참 목욕탕은 쓸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저녁식사가 끝나신 후 씻으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점원은 얼른 다른 테이블의 주문을 받으러 가버렸다. 난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젠장. 어제 잠을 설쳤더니 졸리네.” “내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차피 늦게 가나 일찍 가나 야영해야 한다는 건에는 변함이 없으니 점심 먹고 출발합시다. 참,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못했군, 각자 새로 들어온 동료 분께 자기소개. 나는 콜트 슈발츠라고 합니다. 모험가요.” 나를 시작으로 그레이프에게 정식으로 소개를 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말했다. “그레이프 D 라이언입니다. 엘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희야말로.” 아레프가 대표로 인사했다. 그때 술이 나왔다. 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씻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놈의 개 같은 인간관계는 날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레이프양!?” 뭔가 덩치 큰 것이 쿵쾅쿵쾅 달려오더니 그레이프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그레이프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몇 마디 인사를 건냈다. “아, 포우씨. 잘 돌아가셨습니까?” “말도 마십시오. 그놈들이 추적대를 보내와서 마을까지 도망친다고 고생 꽤나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아, 이분들의 도움으로.” 자리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맥주를 홀짝이던 나는 그레이프와 이야기를 나누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산만한 덩치 때문에 등에 매고 있는 바스타드가 오히려 작아 보인다. 예전 동료인가? 그나저나 참 얼굴 두껍군. “나도 저만큼 얼굴 두꺼워봤으면 좋겠다. 그럼 옆에서 보던 말던 스피릿에게 뽀뽀할텐데.” “주인님. 사람 많은데서 그런 소리 마세요. 부끄럽잖아요.” 우아한 모습으로 와인 잔을 기울이던 스피릿이 얼굴을 붉히며 낮게 말했다. 그때 그레이프가 인사하라고 날 불렀다. 인사? 저런 놈이랑?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도 영 맘에 들지 않는 눈치다.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될 것을 솔직하지 못하긴. 너 오늘 잘 걸렸다는 식으로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스피릿이 내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더니 귓속말을 했다. 싸움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그럼 그레이프씨 방에 가서 잘 거예요. …노예에게 협박당하는 주인은 나 밖에 없을 거다. “반갑습니다. 콜트 슈발츠라고 합니다.” “포우 판트입니다. 저희 그레이프 양을 구해주셨다고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용병이십니까?” “아니오 모험가입니다.” “아하~! 그러십니까? 저희는 직업용병입니다. 요전번에 상인들을 호위하고 가다가 산적을 만났는데 그레이프양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지요.” 이후로 저녁식사가 나올 때까지 꾹 참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포우는 히히덕거리며 자기네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난 커다란 스테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포크로 찍어 덥썩덥썩 베어먹으며 말했다. “저런 자식은 정말 맘에 안 들어. 같은 인간으로서 엘프인 그레이프 보기 부끄럽다구!” “하지만 싸움하시면 미워 할거예요.” “스피릿, 너무해…. 착한 주인님을 협박하고.” “주인님 아~.” 스피릿은 말을 돌리기 위해 상냥하게 웃으며 스테이크를 잘라 나에게 내밀었다. 난 눈물을 머금고 그녀가 내민 것을 덥썩 받아먹었다. 젠장젠장! 지켜보던 아레프도 말했다. “어차피 하루 묵고 떠날 거니까 좀 참아보세요. 콜트씨는 다른 사람 말도 잘 들어주는 상냥한 사람이면서 의외로 다혈질이라 구요.” “내 성격 싫어. 노예에게 협박이나 당하구. 제기, 콱 달려가서 저 돼지 새끼 아가리를….” “주인님 아~.” 텁! 그녀가 내민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나는 슬픔을 억눌렀다. 하지만 그것도 식사가 끝나고 방을 배정 받은 다음 욕탕으로 내려갔다가 오는 길에 터져 버렸다. 먼저 올라가던 그레이프가 웬 사내들에게 둘러 쌓여있는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스피릿은 없었다. 그녀는 루시아와 함께 나중에 아레프와 같이 욕탕에서 올라오겠다고 했다. “찬스!” 난 얼른 그레이프에게 다가갔다. “그레이프? 씻었으면 올라가지 여기서 뭐합니까?” “그게, 이 분들이 저를….” “뭐야? 새 동료인가?” “그러가 본데?” 사내들이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세히 보니 여자도 두어명 섞여있는데. 보아하니 노예나 뭐 그런 것 같다. 아까부터 그레이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포우가 나섰다. “아, 콜트씨 오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이제 그만 그레이프양을 데리고 갔으면 싶어서요. 이 여관은 이제 방이 없어서 저희들은 다른 여관을 잡아야 되거든요?” “그럼 당신들끼리 가지 왜 엘프아가씨는 데려가려 난리지?” “우리 동료니까요.” 젊은, 아니. 어린 사내가 말했다. 세상에~! 샤먼 상단의 슈니르보다 어려 보인다. 저런 것도 용병 짓을 하냐? 가죽갑옷을 입고 등에 칼을 두 자루 매고 있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억울해! 나는 저 나이 때 산 속을 헤매고 다녔다구! 천천히 손을 내민 나는 그레이프의 어깨를 붙잡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녀는 내 뒤로 물러섰다. 사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난 팔짱을 하며 말했다. “파티리더는 탈퇴의지를 가진 여행동료를 강제적으로 제재 할 수 없다. 그쪽이 용병이라면 파티의 구성원이 지켜야할 10계율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 첫 번째 조항으로 묻겠으니. 이봐요. 그레이프. 당신 이 친구들 따라갈 겁니까?” 그레이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오.” 난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들었수? 그만 돌아가쇼. 이쪽은 내일 출발로 일찍 자야 됩니까.” 사내들이 당장 불만을 터트렸다. 대부분 말도 안되는 말들이라 난 귀를 막고 싶어졌다. 그때 그 어린 사내 -많이 잡아도 18살 정도인- 가 짧은 욕설을 하며 다짜고짜 그레이프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어린놈이 까불지마.” 콰앙~! “후시드!”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주먹질 한방에 코뼈가 으스러진 어린 사내는 바닥에 쓰러져서 기절했다. 그 정도 맷집으로 용병을 한다고? 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파티리더로서 여자 동료가 버릇없는 애송이에게 추행 당하는 것을 막았을 뿐, 별다른 감정은 없었어. 억울하면 경비대 갈까?” 포우가 외쳤다. “그레이프! 당신 정말 이럴 겁니까?”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수도로 향합니다. 당신들과는 길이 달라요. 그리고 동료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과는 별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싶지 않군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요! 알잖아요?!” 포우는 끈질기게도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옆에서 가만히 보니 황당할 지경이군. “아아~! 시끄러워. 당신들이랑 안간다잖아?! 꺼져꺼져, 훠이훠이~!” “너나 닥치고 꺼져!” “네놈들이야말로 시끄러우니 제발 돌아가 줘. 이게 무슨 민폐야? 돼먹지도 않은 소리로 사람 귀찮게 하지마. 너희들, 사실은 무서워서 구하러 오지 않았던 거지? 나 같으면 미안해서라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네놈들은 뭐야? 엘프 계집애가 그렇게도 갖고 싶었냐? 당장 안 꺼져? 맞을래?” 4명의 사내들이 화가 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때 파이프를 입에 물고 조용히 우리들을 쳐다보던 여관 주인장이 나직하게 말했다. “늦은 시간이요. 다른 손님들 깰지도 모르니 밖에 나가서 해결하시오.” “들었지? 어서 나가자. 나가서 나에게 너희들의 그 못된 버릇을 고쳐 줄 기회를 다오. 이 돼지 새끼들아.” 난 먼저 그들의 사이를 지나 문가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러자 사내들은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신종 욕설을 구사하더니 내 뒤를 따랐다. 간간이 참지 못한 녀석들이 앞서가는 내 다리를 차거나 뒷통수를 때리는데. 여관 주인을 위해서 몇 대 참고 맞으려니 상당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개새끼들. 멀리 갈 것도 없어. 덤벼. 박살내주마.” 그러자 저쪽에서는 마구 욕설을 해댔다. 이 동네 싸움은 처음 서로간의 욕설로 전투의지를 다지나? “에이, 시끄러워! 덤비지 않으면 이쪽에서 덤벼주마!” 난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녀석들도 욕설을 하며 주먹을 들었다. “저도 끼어도 될까요?” “쌈 잘합니까?” “전부터 인간을 한번 때려보고 싶었어요.” 구경하러 나온 점원들과 함께 달빛 밝은 여관의 문 앞서 있던 그레이프가 말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간다.” 그리고는 그레이프와 함께 척척 걸어갔다. 놈들은 마구 욕설을 해대며 검을 뽑으려 했다. 웃기는 구만. 이 개념 없는 놈들! 홧김에 달려간 나는 막 검을 뽑는 사내의 칼을 피해 그의 턱을 팔꿈치로 올려쳤다. 빠각! 옆에서 쳐다보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노예인가? 고개를 돌린 나는 다른 사냥감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 죽어!” 이 녀석은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 놈인지 주먹으로 덤볐다. 난 그 예우를 받아들여 그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밀어내고 주먹으로 맞대응했다. 쾅! 쾅쾅! 퍼억! 턱을 몇 대 때리고 목을 붙잡아 무릎으로 가슴을 찍어 올리자 사내는 기절해버렸다. 그때 내 머리위로 그림자가 졌다. 검집을 쒸운 칼이 휘둘러진 것이다. 얼른 몸을 돌린 나는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를 피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달빛 밝은 밤하늘을 한바퀴 돌고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본 것은 키 큰 엘프 아가씨가 인간 남자의 멱살을 붙잡고 따귀를 때리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무섭게 때리는지 보는 내가 다 아플 지경이다. 짝짝짝~! 퍼억! 마지막으로 사내의 아랫배에 그 멋진 다리로 옆차기를 먹여준 그레이프는 고개를 돌리고 하나 남은 사내에게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흑발이 달빛을 받아 묘한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는데. 염병. “그, 그레이프양. 예, 옛정을 생각해서….” 그레이프가 뒤로 물러서는 포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같은 인간으로서 콜트씨 보기 미안하지 않으세요?” 말을 마친 그레이프의 멋진 다리가 하늘에 뜬 달을 향해 쭉 뻗어 올랐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발뒷꿈치로 포우의 이마를 찍어버렸다. 포우는 단번에 쓰러졌고 입에 거품을 문 채 부들부들 떨었다. 싸움이 끝나고 우리는 여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자 여관 주인장이 말했다. “처리비는 따로 받을 거요.” 말을 마친 주인장은 옆에 있는 점원들에게 말했다. “시체를 치워라.” 죽은 거 아닌데. 주인장의 센스에 헛웃음을 지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레이프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쪽이야말로.” 나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저 정도 전력이라면 이쪽에서는 대환영이다. 수도까지는 아직도 머니까. “싸움하셨죠?” 방문을 여니 펑퍼짐한 잠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있던 스피릿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난 하하 웃으며 변명하려 했지만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베개를 챙겨들었다. 난 방문을 막으며 말했다. “어, 어디가아?!” “비키세요. 싸움쟁이 주인님하고는 같이 안 자요.” “스피리이잇~! 잘못했어. 한번만 봐줘. 으응?” “어맛! 왜 이러시는 거예요! 바지 내려가요! 놓으세요!” 그녀의 바지자락을 잡고 매달렸지만 스피릿은 매정하게도 나를 뿌리치고 나가버렸다. “스피릿~! 가지마, 네가 필요해.” “좋은 꿈꾸세요.” 탕! 문 닫히는 소리가 이렇게도 클 줄이야. 예전엔 몰랐다. 스피릿이랑 뽀뽀하고 싶었는데. 커다란 한숨을 내쉰 나는 오랜만에 혼자 침대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던 나는 연신 하품을 하며 이른 아침 다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재미있는 걸 발견한 소녀처럼 재잘거렸다. “몰랐는데. 엘프도 잠꼬대를 하더라구요? 몸부림도 치고, 재미있었어요.” “그래? 난 별로 재미없었어. 흑, 스피릿 나빠. 너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어.” 갑자기 스피릿이 인상을 구기며 몸을 돌리더니 허리를 숙이며 내 볼을 잡아당겼다. “밝힘쟁이 주인님에게 하나 알려드리는데. 건강한 여성은 한 달에 한번 생리라는 것을 해요. 언제라도 아기를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하던 자궁벽의 세포들과 난자들이 일정 기간이 지나 활동을 중지하고 새로 생겨나는 세포와 난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떨어져 나오는 것을 말하죠. 이건 항상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나는데 이럴 때 건강한 여성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요. 생리 때는 배가 아프거든요? 피도 나오죠. 그래서 이런걸 하고 다니게 되는 거예요.” 몸을 돌린 스피릿은 자기 짐을 뒤적이더니 아이들이나 하는 기저귀 같은 것을 꺼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을 시뻘게져 있었다. 윽, 화났다. 어떡하지? 다시 침대로 돌아온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와의 접촉을 피하게 되죠. 이럴 때 성행위를 하게 되면 여러모로 않좋거든요?” 침대바닥에 엎드려 그녀에게 절을 한 나는 장중하게 말했다.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에게 홀딱 빠져버린 바보 주인을 용서하십시오.” “몰라요!” 스피릿은 후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담요로 가리며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화가 나서 되는 대로 말을 해대는 것 같더니 꽤 부끄러웠나보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네가 허락할 때만 할게.” “…정말이요?” “응.” 잠시 대답이 없다가 부츠를 신고 있는데 담요 속에서 다시 말이 흘러나왔다. “…임신은 절대로 안돼요.” “어, 알았어.” 갑자기 내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왜 이러냐? 아으~! 더워라. “머, 먼저 나갈게.” “…예에.” 부끄러워 침대에 기어 들어가 있던 스피릿과 나와의 은밀한(?) 약속은 그렇게 끝났다. 이런 식의 대화 두 번은 못하겠다. 홀로 내려가 자리를 하나잡고 있으려니 그레이프와 아레프, 루시아가 내려왔다. “아레프는 갈수록 마르는 것 같아.” “마, 많이 먹어야겠군요. 하하하하.” 실없는 소리를 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루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손가락으로 V를 만들어 보였다. …무슨 의미야? 늦잠을 자서 그런지 우리가 일어난 시각은 거의 정오가 가까워져 왔을 무렵이었다. 점심을 먹고 여관을 나선 우리는 시장에 들려 식료품을 구한 다음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그때 시간이 오후3시.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우리는 다시 노상에서 저녁을 맞이하게 됐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태양을 쳐다보던 루시아가 말했다. “수도까지는 앞으로 얼마나 남았어요?” “일주일하고 조금 더 가야할까?” 나무 장작을 들고 오던 아레프가 말했다. 돌을 모아 모닥불을 만들고 있던 나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보며 이야기했다. “도착 예정 날짜는 11월 2일쯤, 앞으로 9일은 더 달려야해.” “노숙은 몇 번 더해야해요?” 그레이프를 따라 하루종일 달려준 말들을 이끌고 풀밭을 찾아다니던 스피릿의 물음이었다. 난 지도를 몇장 넘겨본 다음 말했다. “수도까지 도시가 3개 있으니까. 6번 정도 노숙하면 돼.” “흐으응. 노숙은 싫어요.” “나도 싫어. 하지만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수단이 별로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잖아? 직접 걸어가야지.” “캐러반이 있잖아요.” 아.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운송마차들? 난 손을 저었다. “오, 노노~! 캐러반은 안돼. 편하긴 하겠지만 귀찮은 일이 많아. 더구나 스피릿처럼 예쁜 노예를 데리고 타봐. 당장 물고늘어질 걸?” 한가롭게 풀을 뜯는 덩치큰 말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스피릿이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돌렸다. “가끔은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요.” “그런 말하지마. 이쪽은 고마울 지경이라구.” 말들을 돌보고 있던 그레이프가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작은 실소를 머금었다. 나도 씩 웃어주며 지도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돌을 쌓아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하고 그 안에 나무를 모아놓은 다음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딱! 화르륵!? 쌓아놓은 나뭇가지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루시아와 내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해요.” “편리하군.” “보통사람들이 마법사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평가들이죠.” 아레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레이프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위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냄비를 걸며 말했다. “아레프. 실례하지만 당신의 마법 레벨은 얼마나 되시나요?” “7단계 익스퍼트입니다.” “대단하시군요. 아직 젊어 보이시는데.” “철이 들 때부터 마법만 파온 결과죠.” “저, 그럼 굉장히 무례한 부탁입니다만. 제가 몇 가지 스펠에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데. 조언을 구할 수 있을 까요?” 아레프는 쾌히 승낙했고 그레이프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뭘 배우던 간에 일단 저녁부터 먹고 하시죠.” 나는 짐을 풀어 물통과 음식재료를 꺼내 저녁을 준비했다. 스피릿이 달려왔다. “아. 제가.” “아니, 이번엔 내 실력을 보여주지.” 난 스피릿을 자리에 앉혀두고 모험가들의 영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콜트식 팬케익과 육포스프를 끓였다. 이제 저녁을 먹은 사람들의 총체적인 평가를 들어보자. “스프에서 뭔가가 씹히는데요? 이게 뭐죠?” “건포를 잘게 썰어 넣었습니다. 맛있죠?” “맛없어요. 짜기만 하구.” “으응? 뭐야 스피릿, 너무해.” “이야. 이건 새로운 감각이로군요. 스프의 건더기가 이렇게 쫄깃하다니! 모험가들은 이렇게 먹나봐요? 그럼 내일 아침은 정통 마법사식으로 하는 게 어떨까요? 길드 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제 요리를 맛보게 해드리죠.” 루시아가 호들갑을 떠는 아레프를 말렸다. “…주인님. 참아주세요.” “괜찮아요. 루시아. 제 요리 보기는 흉해도 맛있다구요.” 마법사가 요리를 하면 뭐가 만들어질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갑자기 원인 모를 소름이 돋았다. 스피릿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음식은 자고로 여자가 하는 거예요. 두 분은 앞으로 이런 거 하지 말아주세요.” 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도 먹었겠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나와 아레프는 숲 속으로 들어가 몇 가지 부비트랩과 방법용 마법을 설치한 다음 돌아왔다. “내일도 달려야 하니까. 일찍 자.” “주인님은요?” “난 이거 좀 손질하고 잘 거야.” 허리에서 칼을 뽑아내며 말하자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프마법이 걸려있다고는 해도 날은 자주자주 손질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녹이 슬어버리기 때문이다. 불가에 자리를 잡고 단조로운 동작으로 숫돌을 움직여 날을 손질하는데 모닥불 건너편에서는 아레프가 그레이프를 앞에 앉혀놓고 뭔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있다. 루시아가 지루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그의 등에 바싹 달라붙어 있다. 그때 스피릿이 내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수도에 도착하시고 난 다음에는 뭘 하실 생각이세요?” 난 검의 날을 살펴보며 말했다. “수도에는 사람이 많아. 그래서 일도 많지. 거기서 한동안 일을 잡아 볼 생각이야. 또 그곳이라면 노예들도 맘놓고 돌아다녀도 되거든? 아무래도 왕도이다 보니 치안이 안정돼있으니까. 뭐, 사람 사는 곳이 뭐가 다르겠냐 만은.” “그럼 저 때문에 수도로 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돈도 받을 겸.” 난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이야기 도중에 고개를 돌린 그는 씩 웃어 보였다. 스피릿이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 “고마워요. 주인님, 신경 써주셔서.” “이렇게 예쁜 노예인걸? 이 정도 고생은 감수해야지.” 그녀의 턱을 올린 나는 살짝 입술을 맞춰주었다. 스피릿의 얼굴 한가득 미소가 번졌다. 아레프의 등에 찰싹 붙어있던 루시아가 말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이쪽에서 해주고 싶은 말이야.” Running Fire: 19 “이봐, 주인님을 너무 거칠게 다루는 거 아냐?”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이쪽에서 해주고 싶은 말이야.” 난 스피릿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검도 다 갈았고 달도 머리위로 떠올랐다.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열변을 토하던 인간마법사와 엘프아가씨도 서로의 승부를 다음으로 미루고 낮의 피곤함을 감추지 못한 채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난 스피릿의 옆에 누우며 불안한 듯이 말했다. “괜찮을까?” “괜찮습니다. 알람마법을 추가로 더 깔아놨거든요. 누군가가 오면 소리가 울릴 겁니다.” “타고난 레인저라는 엘프로서 한마디 해보십쇼. 정말 그냥 자도 되겠습니까?” 침낭에 앉아있던 그레이프는 아레프에게 말했다. “알람을 너무 많이 깔아놓은 거 아닌가요? 게다가 공진스펠을 베이스로 걸어놓아서 하나라도 잘못 발동하면 큰일나겠어요.” “그러니 걱정말고 푹 쉬어요. 뭐가 오든 놀라서 달아나게 될 테니까.” 그레이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낭으로 기어들어갔다. 나도 내심 불안했지만 스피릿이 침낭 안에서 계속 손을 잡아끄는 통에 아레프의 알람마법만 믿고 잠자리에 들었다. 침낭 안으로 들어가자 스피릿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가슴에 안겨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침낭 속이었지만 그녀의 손길과 목소리는 제대로 들렸다. “…주인님. 키스해주세요.” 약간 헤맨 끝에 그녀의 입술을 찾은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입을 맞췄다. 스피릿은 두 팔로 내 목을 감았고 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몇 번이고 키스를 나눴다. 속된말이지만 세상에 그 어떤 여자라도, 설령 이웃나라 공주님이라고 해도 불끄면 다 똑같다. 우습지도 않지? 땡땡땡땡땡땡땡~!!!! 귓가를 울리는 엄청난 종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침낭에서 고개를 들고 얼른 기어 나왔다. 그리고 옆에 세워두었던 검을 붙잡았다. 한꺼번에 울린 종소리가 얼마나 큰지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뭐야?! 이거!” 아레프도 침낭 안에서 부리나케 일어났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소리와 함께 밤 그림자 속에 서있던 정체불명의 사내는 갑자기 들려온 시끄러운 종소리에 약간 주춤하는 모습이었지만 물러서지 않고 뭔가를 찾는 듯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던 여행객이 불빛을 보고 찾아들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 복장과 장비는 아무리 봐도 자객이나 암살자의 그것이었기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난 일단 칼자루를 붙잡은 채 외쳤다. “당신 누구야!” “…….” 땡땡땡땡~! 너무 시끄러워서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아레스에게 알람소리를 없애라고 고함을 질러 대고 있는데 복면을 뒤집어 쓴 사내가 뒤로 조금씩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사내의 동작이 더 빨랐다. “앗! 이봐! 거기서!” 냅다 뒤로 돈 사내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를 악물고 쫓아가 봤지만 어찌나 빠른지 얼마 못가서 놓쳐버렸다. 다시 야영지로 돌아가니 알람소리는 멈춰있고 스피릿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반겼다. “왜 따라가신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그녀의 등을 살짝 두드려준 나는 고개를 돌리고 아레프에게 물었다. “혹시 또 뭔가 찾아오지 않았어?” “아니오. 아무것도, 아까 그 사람은 어떻게됐습니까?” “놓쳤어. 되게 빠르던걸? 뭐지? 추적자인가?” 그때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고 돌아온 그레이프가 말했다.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최근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거나?” 아레프와 루시아, 스피릿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그들의 행동에 동참하지 못했다. 난 씩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날 노리는 걸까나? 이래저래 원수진 일이 많았는데.”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이쪽도 만만치는 않은 걸요?” 아레프는 그렇게 말하며 전에 내가 준 드래곤 하트를 꺼내 보였다. 그레이프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 드래곤 하트?!” “콜트씨가 노아의 산맥에서 구한 겁니다. 그걸 제가 샀죠. 이것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쳐도 당신이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레프는 드래곤 하트를 다시 천에 싸서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수도에서 제가 들렸던 모험가길드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일을 모험가나 용병들에게 의뢰하려했어요. 그런데 지원자가 없어서 제가 직접 나섰던 거죠. 게다가 같은 길드 내에서 제가 하는 연구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밑져야 본전인 거지요. 드래곤 본을 구하러 레어를 찾으러 떠났던 한 마법사 애송이가 돌아오고 있는데. 먼지라도 털어 볼 욕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는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면서….” 루시아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레프는 그녀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할 건 다해요.” 그의 주장에 루시아는 볼을 부풀렸으며 그레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런 거라면 이거 꽤 심각하다. 아레프는 저게 조각만 있는 줄 알지만 내 가방 안에는 온전한 드래곤 하트가 고이 모셔져 있으니까. 수도에서 이걸로 한밑천 단단히 잡아보려고 했는데. 조심해야겠군. 시치미를 뚝 뗀 나는 나중에 스피릿에게도 입막음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겁먹은 얼굴로 침낭 안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많이 놀랐나 보다. “괜찮아?” “…예. 조, 좀 놀란 것뿐이에요.” 옆에 앉아서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주고 있는데 아레프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레이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했던 거보다 더 대단한 분들이셨군요.” “별로 대단하다고 할 것까지는….” 아레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레이프는 손바닥을 펴서 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셨죠?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간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어요. 어쨌든 여러분들의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다시 올까요?” 내가 봤을 때 그녀는 순종 엘프다. 드래곤 하트라는 보물을 앞에 두고도 전혀 욕심을 부리지 않다니, 난 스피릿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글세, 자기네 동료들을 부르러 간걸 수도 있고, 일단 물러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함부로 판단하기는 힘들겠지.” “게다가 이런 밤에 이동했다간 금세 따라잡힐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그래서 우리는 이 일대에 각종 대인트랩을 있는 대로 깔았다. 그레이프도 합세하여 1시간 반만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조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해놓고 보니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 이 정도라면 오거도 가까이 못 오겠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쪽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동감이에요.” 아레프와 그레이프의 말에 공감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모닥불을 주변으로 깔려진 수십 개의 트랩이 언제라도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내고 있다. 겉보기엔 낙서에 지나지 않지만 저거 잘못 밟으면 죽을 수도 있다. 불침번을 돌아가며 이튿날의 아침을 맞이한 우리는 긴장한 탓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가장 먼저 근방에 설치한 트랩을 해제했다. 작업을 끝내니 스피릿과 루시아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는 식사를 마치는 대로 다시 출발했다. 세 마리의 말들은 다각다각 거리며 길을 걸었다. 한가롭게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황금빛 벌판을 걷고 있으려니 뒤에 앉아있는 스피릿이 내 등을 두드렸다. “응?” “저, 주인님.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응, 만약에. 나 그거 좋아해. 그래서 만약에 뭐?” 하도 지루했던 터라 그녀의 질문을 반 농담으로 되받아주자 몇 마디 웅얼거리던 스피릿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주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 참, 할말 있으면 할 것이지. 그때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아레프의 뒷자리에서 루시아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 들었다. “…혹시 임신이라고 말하려는 걸 차마 못하고 있다거나?” “루시아아!” 스피릿이 외쳤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번개가 쳤다. 말고삐를 내던지고 안장에서 거꾸로 몸을 돌린 나는 스피릿을 바라보고 앉으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 정말이야?! 스피릿! 정말 임신하거야!”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아! 낳아! 낳아서 기르자! 내가 책임질게! 너 꼭 닮은 딸도 좋고 나 닮은 아들도 좋아! 아, 그전에 노예문장부터 없애야 등록이 되겠구나! 아레프! 노예문장 팔 줄 알지?! 오오~! 스피릿 사랑해! 고마워~!” “이 바보 주인님! 대체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욧!” 스피릿에게 볼을 심하게 꼬집힌 다음에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시무룩하게 물었다. “어때요?” 내 성화에 말을 바싹 붙여와 스피릿의 손목을 잡아보던 그레이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군요.” 스피릿과 나는 서로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프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내 말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하지만 심장이 좀 약한 것 같아요. 나중에 여관에 도착하면 몇 가지 약재 이름을 알려드릴테니 먹이도록 하세요.” 난 스피릿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병이 있었어?” “아, 예. 어릴 때부터 심장이 좀 약했어요.” “그런 건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스피릿은 고개를 슬쩍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아.” 콧김을 킁 내뿜어준 나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말해주고 다시 몸을 돌려 앉았다. 말의 목에 걸쳐있는 고삐를 주워들고 있는데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 “왜에 또.” “저 지켜주신다고 했죠?” “물론. 내가 너보다 늦게 죽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 잊으시면 안돼요. 제가 주인님을 떠나더라도 꼭 찾으러 오셔야 해요. 아셨죠?” 난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햇살에 비치는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난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응, 걱정하지마. 꼭 되찾으러 갈 테니까. 내 스피릿을 다른 녀석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시무룩한 음성의 스피릿에게 듣기 좋으라고 해준 말이었지만 스피릿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입가만 슬쩍 올렸을 뿐이었다. 스피릿도 저렇게 웃을 줄 알던가? 고개를 갸웃한 나는 다시 몸을 돌리고 말을 몰아갔다. 마을까지는 앞으로 하루를 더 가야한다. 어디쯤에서 노숙을 하면 도착 시간을 앞당길 수 있을 지 생각하고 있는데 뒤따라오던 그레이프가 말했다. “추적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오는데요?” “예?” 우리 모두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프는 옆의 숲을 가르켰다. “저쪽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수효는 대략 5명 정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군요.” “저게 보입니까?” 그레이프는 먼 곳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프가 말을 몰아왔다. “달릴까요?” “그럽시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으면 한판 붙을 각오를 해야될테니 모두 준비 단단히 하고 천천히 속도를 높여가면서 달려요.” 그레이프와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 다음 말고삐를 흔들며 다리로 녀석의 배를 두드렸다. “이히히힝!” “따라올테면 따라와 봐라!”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며 내 허리를 붙잡고있는 스피릿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전력으로 달리는 도중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그레이프의 말대로 놈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떨궈낼 수 있으려나!? 젠장!” 두두두두~!!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아레프가 말들이 지칠 때마다 연속해서 스트렝스를 건 결과 우리는 겨우 녀석들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난 아직까지도 미친 듯이 속력을 뽑아내는 말의 등에 앉아서 외쳤다. “따돌렸어! 아레프! 굉장해! 말들이 미쳤어! 와하하하!” “허억! 학! 스, 스트렝스입니다! 슬슬 주문이 바닥나고 있었는데 잘됐군요!” 숨을 몰아쉬던 아레프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외쳤다. 잠시후 스트렝스 효과가 사라지고 말들이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췄다. 그레이프의 요구대로 잠시 쉬어가기로 한 우리는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빵과 육포를 꺼내 점심을 때우며 말했다. 난 육포를 뜻으며 말했다. “끈질기네.” 아레프가 딱딱한 빵을 씹으며 말했다. 당연하겠지만 그것을 베어준 것은 루시아다. “대체 이유가 뭘까요? 원한일까요? 아니면 드래곤 하트일까요?” “기다렸다가 물어볼까?” 수통을 들어 물을 마시던 그레이프가 말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저는 무가치한 전투를 피할 수 있는 이쪽을 더 맘에 드는군요.” 나와 아레프는 씩 웃어주었다. 스피릿이 내미는 수통을 받아 마시고 있는데 그레이프가 말에게 물을 줄 때 사용하는 물통을 꺼내 바닥에 놓더니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땅바닥에서 물이 솟아올라 통을 채워나갔고 말들은 자기 물통에 입을 박고 물을 쭉쭉 들이켰다. 내가 입을 딱 벌리고 있으려니 아레프가 말했다. “정령술입니다. 엘프는 타고난 정령사거든요?” “당신은 저렇게 못해?” “저는 마법사입니다.” 아레프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잘 몰랐는데. 엘프가 일행이니 여러모로 편리하다. 저번에 그 놈들이 왜 억지를 부리며 그녀를 데려가려 했는지 알겠다.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들은 다시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거리를 떼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틀동안 정체불명의 괴한들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 우리들은 점심 무렵, 보급과 정비를 위해 설정한 수도 근방 첫 번째 도시 바리안트에 도착하자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헤엑! 헥! 여, 여기까지는 못 쫓아오겠지?” “그래준다면 고맙겠군요. 아흐, 새벽부터 일어나서 달렸더니 굉장히 피곤하네.” 아레프가 로브자락을 치마처럼 흔들며 말했다. 먼지가 풀풀 날려서 루시아가 기침을 조금했다. 그레이프가 말했다. “일단 숙소를 잡고 좀 쉬도록 하죠. 도시 내에서는 설령 만나더라도 난동을 부리지는 못할테니.” 우리는 그녀의 의견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경비대에서의 검문이 끝나는 대로 적당한 여관을 찾았다. 대머리 주인장에게 말을 맡기고 방으로 올라간 우리는 일단 좀 자기로 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나는 스피릿의 잔소리에 못 이겨 평상복을 입은 다음 침대에 드러누웠다. 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피릿… 미안해. 좀 자고 씻어 줘.” “전 괜찮아요. 주인님이야말로 편히 쉬세요.” 스피릿은 내가 벗어 던진 옷을 정리한 다음 자신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예의로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쳤다. 아무것도 못하겠어. 그 미친놈들 말은 주인과 같이 미친 건가? 어떻게 떼어내도 계속 따라붙을 수 있지?” “말은 바람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기수는 우리를 쫓아왔어도 그들이 탄 말들은 바람을 따라 달린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뛸 수 있는 거예요.”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이 내 옆에 앉았다. 살풋 미소를 지은 그녀는 내 이마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수고 하셨어요. 주인님.” “…상 같은 거 없어?” “어머, 지치셨다면서요? 노예를 안아줄 힘은 있으신가봐요?” 스피릿은 요염한 눈빛으로 내 가슴을 더듬으며 말했다. 난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틀어대다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꺄악~!” 침대에 스피릿을 눕힌 나는 말 그대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머리카락에 올라오는 향긋한 향을 맡으며 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어정쩡한 거 싫어. 이대로 좀 쉬었다가… 응?” 스피릿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난 그녀의 회색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난 옆에서 자고 있는 스피릿을 깨워 욕탕으로 내려가 좀 씻은 다음 모두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어떻게 생각해들? 우리 뒤를 따라붙는 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대한 효과적인 퇴치 방법에 대해서 좋은 의견 있으면 좀 내놔봐.” “먼저 출발하거나. 아니면 숨어 있다가 우리가 떠났다는 판단을 내리게 하거나.” 루시아가 말했고, 난 빵에 쨈을 발라 옆자리에 앉은 스피릿의 입에 물려주며 말했다. “요컨대 기만 전술이로군. 적을 속이자?” “그런거죠.” 루시아는 빵에 쨈을 발라 옆자리에 앉은 아레프의 입에 물려주며 말했다. 대답을 하려니 스피릿이 내 입에 잘 구워진 스테이크 조각을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아먹으며 말했다. “진부해. 턱없이 진부해. 좀더 상큼한 의견은 없나?” “승용물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요? 좀더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으로.” “미안하지만 내 말은 캐슬린 산이야. 캐슬린 산보다 더 빠른 말은 없어.” 아레프는 빵에 스프를 찍어 자기 입에 가져가려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루시아의 입에 물려주었다. “제 말도 캐슬린 산입니다. 말을 바꿔보자는 말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승용물을 바꿔보자는 거죠. 와이번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긴 한데. 와이번에는 한번에 두 사람만 탈 수 있다구.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그거 몰 줄 알아?” “아니요. 기수도 같이 빌리면 되잖아요?” 그것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려 하는데 루시아와 스피릿이 손을 들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저도.” 그래서 기각됐다. 노예들을 가방에 넣어가면 어떨까하는 되먹지도 않은 발언을 해대던 아레프는 루시아와 스피릿의 짜릿한 눈빛을 받으며 침몰 당했다. 그때 조용히 식사에만 전념하던 그레이프가 말했다. “와이번의 대여료는 상당히 비쌉니다. 게다가 군용이 아닌 민영업자의 손에 운영되는 와이번은 그 수가 적어요. 한번에 6마리씩이나 빌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루시아양이 제시한 의견에 동의합니다. 도시는 넓어요. 하루 정도 숨어 있다가 새벽에 떠난다면 간단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문이 닫혀있을 텐데요?” “어딘가에 돈을 받고 내보내 주는 샛길이 있을 거예요. 성벽이 타원형이 아니니 뒷산을 이용해도 되고요.” 나와 아레프는 서로의 얼굴을 조금 쳐다보다가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기로 했다. “별 수 없군. 좀 진부하지만 따르기로 할까? 생각 같아서는 한판 붙고 싶지만 평화주의자들의 잔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니… 아으~!” “제가 잘못 들었거든요? 여기다가 대고 말씀해보시죠? 평화주의자가 어쨌다구요?” “아, 아파, 놔줘. 내가 잘못했어.” “싸움쟁이 주인님 같으니라구.” “아으윽?!” 스피릿은 꼬집은 볼을 몇 번 비틀어대다가 놔주었다. 눈물을 머금으며 후끈한 볼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루시아가 말했다. “이봐, 주인님을 너무 거칠게 다루는 거 아냐? 그러다가 버림받을 지도 몰라.” “괜찮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죠? 밝힘쟁이 주인님?” “어허흠! 으흐흠!”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때 루시아가 피식 웃으며 옆자리 앉은 아레프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올렸다. “주인님은 말야. 그렇게 거칠게 다루면 딴 생각을 가져. 부드럽게 다뤄야 한다구. 그래야 나만 바라봐 주지. 안 그래요? 주인님?” “하, 하하하하, 아하하하. 저, 저녁 다 먹었으면 올라가죠. 예?” 아레프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나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프 보기 부끄러워서 더는 못 앉아있겠다!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레이프가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일찍들 주무세요.” 시뻘게진 얼굴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하며 조금 허둥대던 나와 아레프는 얼른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레이프으으! 당신까지! 이렇게 된 건! “전부 너 때문이야.” “하, 하하. 주인님 용서해주세요.” 벽을 따라 걷던 스피릿은 막다른 곳에서 나에게 잡혀버렸다. 그녀의 하얀 목을 혀로 애무하던 나는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오늘밤 각오해. 그냥은 안놔줄거야.” “우으응….”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새디스트적인 충동이 일어난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Running Fire: 20 “뜨거워야지. 불타는 심장을 가지고 있는데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아침이다. 창 밖에서 노니는 참새들의 모습이 귀엽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옆에서 하얀 스피릿의 나체를 발견하고는 얼른 담요를 끌어올려 그녀의 몸을 덮었다. 이제와서 뭐가 부끄럽겠냐 만은 그래도 늑대의 매너라는 게 있다. 스피릿이 깨지 않도록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옷을 주워 입고는 그녀의 속옷도 조심스레 챙겨서 침대 귀퉁이에 올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스피릿이 깨어났다. “으응, 어디가세요?” “어, 어. 좀 밖에. 잠시….” “새벽에 출발하신 다고 들었는데 늦잠 자면 안되요?” “상관은 없어. 단지….” 스피릿은 대담하게도 침대에 앉아 몸에 감고있던 모포를 열었다. 당장 그녀의 하얀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보인다. 고개를 기울인 스피릿이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예쁜 노예랑 뒹굴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어서 와요. 나의 주인님.” 여기서 문을 닫고 나간다면 그건 사내가 아닐거다. 오 신이여~! 잠시 절규한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스피릿은 벌리고 있던 팔을 접어 날 껴안고는 침대로 쓰러졌다. “스, 스피릿….”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줘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는 잠시가 아니라 영원이라도 이대로 있어줄 수 있다고 가슴속으로 다짐했다. 한참 후 날 안고 있던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 어떡하죠?” “응?” 스피릿은 고개를 숙이며 날 쳐다보았다. 그녀는 예전의 그 어른스러운 미소를 다시 지어 보이고 있었다. …어린애가 된 기분이 든다. “사랑은 마음으로 시작해서 몸으로 이어진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몸부터 시작한 사랑이 마음으로 이어지는 건 대체 뭘로 설명해야 할까요?”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건 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스피릿도 싱긋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주인님을 사랑해요. 아무런 애정 없이 몸부터 시작한 사랑이지만 그래도 당신을 믿고 싶어요. 곁에 있고 싶어요. 안아주고 싶어요. 야한 계집애라고 놀리셔도 좋아요. 버릇없는 노예라고 하셔도 좋아요. 이런 제 마음 받아주세요.” 순간 머릿속으로 제미니의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망설였지만 난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응. 잘 받을 게. 고마워.” 난 그렇게 말하며 스피릿의 입술에 키스했다. 제미니, 미안해. 나 정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11시가 다될 무렵까지 늦잠을 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웃어준 다음 손을 잡고 홀로 내려가 보았다. 뭍 남정네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차를 마시던 그레이프가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차 드시겠어요?” 난 홍차를 주문했다. 그레이프가 말했다. “아직까지 별다른 낌새는 없어요. 되도록 외출을 삼가하고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저도 좀 있다가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럼 시장은 저녁에 봐야 할까요?” “그러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때 홍차가 나왔다. 그리고 내려온 김에 아침 겸 점심도 시켜먹은 우리는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낮잠을 자거나 혹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우리는 창 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여행복으로 갈아입고 홀로 내려가는 대신 그레이프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레프의 방문이 더 가까웠지만 차마 무서워서 두드리지 못했다. 그레이프가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시죠?” “지금부터 시장을 보러 다녀올 생각인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그레이프는 고개를 그떡이며 조심하라는 말도 남겨주었다. 그녀에서 손을 흔들어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우리들은 여관 주인에게 물어 시장을 찾아갔다. “밀가루 세 봉지하고. 그리고 거기 말린 고기도 줘요.” “예예, 감사합니다. 손님.” 싹싹한 말투의 사내는 내가 말한 것을 골라서 종이 봉투에 담았다. 스피릿의 손을 잡고 이웃의 야채가게로 넘어간 나는 스튜를 끓일 때 넣을 야채도 조금 골랐다. 그레이프를 위해서다. “아줌마. 거기 신선한 야채 좀 골라서 담아주세요.” “어머나 새 신랑이 신부 데리고 장보러 나왔네? 그래그래, 내가 싸게 줄게.” 이 아줌마가! 어떤 신랑신부가 무장을 하고 장보러 다니냐?! 내가 따지려 들었지만 스피릿이 말렸다. “어머, 여보. 왜 그러세요?” 난 입을 딱 벌리고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후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빵집에 들려 빵까지 모두 구입한 우리는 잠시 시장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즐기기로 했다. “스피릿! 이거 해봐. 예쁘겠다.” 그녀를 불러 세운 나는 노점상에서 가지고 온 리본을 그녀의 머리에 묶어보았다. 회색 머리카락에 파란 리본이 정말 잘 어울렸다. 난 스피릿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 스피릿, 정말 잘 어울린다. 너무 예뻐, 천사 같아.” 스피릿도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리본을 만지작댔다. 돌아오는 길에 안 들어도 된다고 했지만 스피릿은 바락바락 우겨 빵 봉지를 받아들었다. “주인님을 부려먹은 못된 노예라고 사람들이 욕한단 말예요.” “누가 그래? 누가? 우리 스피릿 욕하는 놈들은 내가 가만 안둘거야.” 스피릿은 싱긋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어주었다. 둘이서 이렇게 시장을 보고 걸어가니까 정말 신혼부부가 된 것 같다. 한참 시장골목을 걷는 도중에 마차가 들어와서 길이 막혀버렸다. 시장 상인과 마부가 소리를 지르며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바라보던 우리는 골목길로 해서 나가려 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들어선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했다. “스피릿, 나한테 시집올래?” “예?” 그래. 지금 나는 스피릿에게 청혼하고 있는 거다. 제미니가 봤다면 슬퍼하겠지. 하지만 난 그녀를 이대로 노예로 만들어두고 싶지 않다. 더 가까운 사이로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내 기대와는 틀리게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쿡쿡 웃어댔다. “어어? 농담아냐? 나 지금 너한테 청혼 한거라고!” “큭큭큭. 아, 알아요. 주인님. 하지만 그… 큭큭, 그 뭐랄까. 정말 주인님답다고 해야할… 킥킥킥.”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한참동안 웃어댔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흠, 생각해 볼께요.” “왜에?” “주인님 하는 거 봐서요.” 난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스피릿~! 장난치지 말고오. 나 심각해!” “아하하하~! 주인님에게 청혼 받았어요. 나쁘지 않은데요? 좋아라~!” 스피릿은 소녀처럼 웃으며 골목길로 뛰어갔다. 나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꺄아아악!” “스피릿?!”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그녀가 들어간 곳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인상을 구겼다. 이 자식들! 바닥에는 스피릿이 들고 가던 빵 봉투가 터져서 갓구운 빵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고 스피릿은 왠 복면의 사내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난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뭐야?! 네놈들은?! 스피릿을 놔줘라!” 놈들은 대답이 없었다. “주인님! 주인님! 달아나세요! 어서요!” “뭐?” 스피릿이 엉엉 울며 외쳐댔다. 난 웃기지 마라는 듯이 외쳤다. “시끄러워! 자기 노예가 붙잡혔는데 어떤 미친 자식이 도망을 가! 조그만 참아! 구해줄테니까! 이 새끼들! 그냥은 못 보낸다! 덤벼!” 그때 스피릿을 붙잡고 있던 복면 사내가 고개를 까딱였다. 굵고 짧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여.” 스르릉~! 한 사내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날 상대로 1대1 이라고? 염병! 난 들고 있던 봉지를 녀석들에게 집어던졌다. 사내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러 종이 봉투를 베었다. 각종 야채들과 건포들이 흩어졌다. 오른손으로는 허리의 검을, 왼손으로는 등의 자동석궁을 뽑아든 나는 검을 든 사내에게 석궁을 난사했다. 퉁퉁퉁퉁~! 녀석은 생각지도 않은 반격에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검은 든 나는 쓰러지는 녀석을 뒤로하고 달려나갔다. “스피릿을 내놔! 그녀는 내 거야!” “주인님! 안돼요! 그러지 마세요!” 저쪽에서도 두 녀석이 검을 뽑아들고 달려왔다. 한 손에 칼과 석궁을 든 나는 두 녀석을 상대로 고전하긴 했지만 뒤에 녀석들이 몸을 돌리기 전에 쓰러뜨렸다. “허억! 헉! 어딜 도망가! 이 새끼들아. 놔줘. 그 여자는 상관없잖아? 네놈들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스피릿의 팔과 어깨를 잡고 있던 사내가 그녀를 옆의 사내들에게 인도했다. 스피릿은 반항도 하지 않고 울면서 놈들의 손에 넘겨졌다. 그때 내 앞으로 나선 사내가 검을 뽑으며 중얼거렸다. “보통인간을 상대로 이걸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혼잣말은 하지마! 이 자폐증 환자 자식아! 날 보고 말해!” 난 검을 들고 녀석에게 덤볐다. 그러자 녀석은 침착하게 칼을 들어올리더니 내 검을 막았다. 챙?! 파지직?! 뭔가 엄청난 것에 부딪혀 뒤로 튕겨 나갔다! 이, 이건 뭐야!? 검을 몇 번 휘두른 복면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난 이를 드러내며 뒤로 물러섰다. “이봐! 그거 칼라미티 소드잖아! 다른 사람들까지 죽이려고 작정했어?!” “다행이군. 뭐에 맞아 죽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겠어.” 놈은 한 손에 불길한 기운을 이글이글 뿜어내는 마검을 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100년 전에 일어났던 베레타 독립전쟁이 캐슬린과 그랜퍼스가 끼어 든 세계대전으로 바뀌어버리자 베레타에서는 자신들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종래의 무기체계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한 무기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저것을 만들었다. 칼라미티 소드, 혹은 마검으로 불리는 저 검은 검안에 마신소환으로 불러낸 악마나 천사의 힘을 강제적으로 봉인하여 사용하는데 그 파괴력은 가히 재난에 가깝다. 칼라미티라는 이름은 일종의 별명인 셈이다. 콰콰콰쾅~!! “이,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장난삼아 휘두르는 식이었는데도 골목길 근방의 집들이 자욱한 먼지구름의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바싹 엎드려있는 내 모습을 힐끗 쳐다보던 사내는 검을 들어 바닥을 찔렀다. 쿠르르르릉!~! 쿠아앙! 쿠앙! 골목길 바닥으로 돌기둥이 솟아오른다! 염병!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돌기둥의 반동으로 하늘로 솟아올랐다. 모든 것을 잊은 표정으로 저 아름다운 별자리를 바라보던 나는 다시 인상을 찌뿌리며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시장에 있던 사람들이 구경꾼으로 돌변하여 몰려들고 있었다. “뭘 보고 있어! 어서 도망가!” 자동석궁을 든 나는 검을 든 녀석에게 활을 갈겼다. 퉁퉁퉁퉁퉁~! 챙챙챙?! 퍼퍽! 맞았다! “아무리 법칙을 무시하는 능력을 가졌다지만 그건 칼의 능력일 뿐이야! 그걸 휘두르는 사람은 인간이라고!” “으윽…! 잘 아는군!” 어깨에 화살을 맞은 복면의 사내는 한 손으로 검을 잡고 떨어지는 나를 겨냥해서 칼을 휘둘렀다. 공간이 흔들리며 그 충격파가 나에게 날아왔다. 저거 맞으면 죽는다! 석궁을 던져버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공격 주문 스크롤을 꺼내든 나는 급한 김에 그것들을 모조리 찢어버렸다. “파이어볼! 매직미사일! 콜라이트닝!”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파란 번개와 수백개의 매직미사일, 그리고 너댓개의 파이어 볼은 무서운 기세로 칼라미티가 만들어낸 충격파로 날아들었다. 멋진걸? 불꽃놀이 같아. 그리고 나는 마법을 발사하면서 발생한 반작용을 이용해서 몸을 기울여 바닥에 착지를 시도했다. 그때 머리 위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쿠콰콰쾅~! 후끈한 열기와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무너진 가옥의 파편 위에 떨어진 나는 공기를 진동시키는 충격파에 가슴이 울리는 느낌을 받으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녀석들에게로 달려갔다. 놈들은 밤하늘을 밝히는 휘황찬란한 불꽃을 피해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이야압!” 충격파를 피해 몸을 숙이고 있던 복면은 내 고함 소리를 듣고서 얼른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급한 대로 다시 칼라미티를 들었지만 난 내 앞에서 또 이런 재난이 발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챙~! 카라락! 퍼억! 쿠구구구~!!! 내 칼을 맞고 날아간 칼라미티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그 강대한 힘 때문에 주위의 땅이 솟아올라버렸다. 마치 검을 꼿아 놓은 제단 같다. “내 스피릿을….” 빈손으로 검을 놓친 사내의 멱살을 붙잡은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다시 당겼다. 빠각! “어쩔 셈이냐!” “크으윽?!” 칼라미티를 휘두르던 복면은 코뼈가 내려앉았는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코를 감싸고 허리를 숙였다. 일종의 방어본능이라고 해야할 거다.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때 허리를 숙이는 행동은, 하지만 봐주지 않는다! 쾅! 난 녀석의 턱을 무릎으로 찍어 올렸다. “커윽!” 뒤로 쓰러진 녀석은 기절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돌린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스피릿의 머리를 감싸주고 있는 놈들을 노려보았다. 뭐지? 레이디 퍼스트 인가? 하는 짓은 상당히 맘에 드는걸? 놈들은 자기네 동료를 다 쓰러뜨린 나를 쳐다보며 경악 섞인 표정을 지었다. 복면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저 믿을 수 없다는 눈은 똑똑히 보인다. “그 여자를 넘겨. 안 그럼 죽어.” 난 두 손으로 검을 들었다. 은빛 찬란한 롱소드가 달빛에 빛나고 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검광이다. “훌쩍… 주인님….” 스피릿이 연신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복면의 사내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쉬라나하우! 이케리 아케나 이데하스!” 갑자기 검을 뽑아 든 채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날 노려보던 복면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스피릿을 감싸고 있던 복면에게 외국어로 말했다. 응? 이거 캐슬린 어(語)잖아? “나이. 이케르 하다크! 샤이파마!” 스피릿은 안고 있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말을 마친 복면이 고개를 돌리고 칼을 세우며 나를 향해 걸어나왔다. 그는 시선이 잠시 내 뒤에 꼿혀있는 칼라미티에게 향했다. 난 칼을 든 손을 앞으로 뻣어 그의 길을 막으며 말했다. “어딜, 칼라미티 잡으려고 그러지? 어림도 없어. 피차 어렵게 하지말고 스피릿을 풀어 줘. 그럼 당신들 그냥 보내 줄게.” 복면은 눈을 부릅뜨며 날 노려보았다. 그때 뒤에 서있던 사내가 스피릿을 안고 슬금슬금 골목 밖으로 나가려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을 끌면 달아날 속셈이었나? 난 급한 김에 들고있던 롱소드를 집어 던졌다. 날아간 롱소드는 벽에 박혀 그들의 길을 막아버렸다. 콰직! “도망가면 쫓아가서 죽여버린다.” “하아압!” 말하는 도중 나와 대치 중이던 사내가 덤벼들었다. 검을 버린 벌로 난 복면이 휘두르는 검을 피하며 이리저리 뛰어 다녀야했다.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정말 대단한 솜씨다. 칼질이 정말 예술이다. 게다가 급소를 정확히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칼날을 볼 때 아무래도 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군인 같다. 군인들의 동작은 일반 모험가나 용병들과는 다르게 체계가 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침없는 기술로 상대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지만 반대로 기술이 단순하기 때문에 다음 동작을 적에게 읽히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미안하지만 군사격투술이라면 이쪽도 조금은 알고 있다구! 계속 공격을 피하며 녀석의 패턴을 읽은 나는 오른팔을 들어 내려쳐지는 그의 칼날을 직접 붙잡았다. 강철 건틀릿이 아니면 꿈도 못꾸는 행동이다. 그러자 상대의 검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텝을 밟고 있는 다리가 꼬이는 거다. 이걸 노린거야! 쾅! 콰직?! 검을 회수하기 전에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찍어버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과 복면이 없다. “윽! 도망갔어! 스피릿!” “저, 저쪽으로 도망갔어요!” “고맙수!” 몸을 돌린 나는 골목길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방향으로 달렸다. 스피릿의 털끝하나 손대면 손목을 잘라버릴테야! 어두운 골목길을 달려가던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스피릿을 발견했다. 복면이 그냥 풀어줬는지 그녀는 엉엉 울면서 혼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 큰 처녀가 엉엉 우는 모습은 정말 보기 흉하다. “어으어어엉~! 주인님~! 으아앙~!” 달려간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스피릿은 그래도 엉엉거리며 울어댔다. 스피릿을 꼭 껴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다시 가슴에서 떼어낸 다음 그녀의 몸을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흐윽~! 으응, 괜찮아요! 엉엉엉~!” 다시 팔을 끌어당긴 나는 그녀를 가슴에 껴안고 한참동안 서 있다가 구경꾼이 하나 둘 서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녀왔습니다. 당신이 말했던 그 괴한들은 경비대가 출동하기 전 동료들이 와서 데려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좀 어떻습니까?” “치료는 다 끝났어요. 고맙습니다. 그레이프.” 그레이프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회수해온 자동석궁과 검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레프가 스피릿의 상처를 돌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좀 긁힌 것뿐이에요.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습격했는지 알아내셨습니까?” 그레이프도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어. 군사격투술을 사용하고 캐슬린 말을 써대던 놈들이었는데. 뭘 노리는지는 말하지 않더군.” 아레프가 인상을 살짝 찌뿌렸다. 그레이프가 벽에 기대어 서며 팔짱을 했다. “피해규모가 상당하던 걸요?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복면을 쓴 사람이 검을 휘두르자 그렇게 됐다는데. 아무리 봐도 그 검은 칼라미티 소드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레프가 입을 딱 벌렸다. “칼라미티 소드요? 그 베레타의 군용 마검까지 등장했다는 겁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레프에게 치료받은 어깨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베레타의 마검 칼라미티 소드가 등장했건 그랜퍼스의 전투 키메라 훈트가 등장했건 지금 내가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그것 뿐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당신들끼리 해, 우리는 좀 쉬어야겠어.” 난 그렇게 말하며 아레프와 그레이프는 방에서 쫓아냈다. 아레프는 뭔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밖으로 나갔다. 그레이프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예정대로 새벽에 출발할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여기 좀더 있다간 여관이 박살나겠지. 알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레이프는 푹 쉬라는 말을 하고 물을 닫았다. 문 앞에 서서 짧은 한숨을 내쉰 나는 팔의 상처를 좀 만져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서 딸꾹질에 여념이 없는 스피릿이 보였다. 터벅터벅 걸어 침대로 가서 앉은 나는 두 손으로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스피릿은 훌쩍이며 고개를 돌렸다. “무서웠지?” 스피릿은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난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지켜줄게. 안아줄게. 업어줄게. 그러니 이제 울지마.” “흐윽… 주인님. 훌쩍, 무서웠어요.” 내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부비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나는 고민에 빠졌다. 대체 어떤 놈들이지? 드래곤 하트 때문일까? 아니면 내게 원한이 있는 녀석들? 심하게 대했던 놈들이 꽤 있었지만 그래도 저 정도의 암살자를 보낼 놈들은 없어. 그래서 아레프에게 촛점을 옮겨보았다. ‘드래곤 본을 구하러 떠났던 마법사가 돌아왔다. 뭐가 나오든 털어 볼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드래곤 본이나 드래곤 하트는 마법사에게 있어선 굉장한 보물이니까. “주인님….” 정신을 차려보니 스피릿이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 눈빛과 입술의 모양은 아무래도 나에게 뭔가 바라는 것 있는 것 같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훌쩍이던 스피릿은 팔을 들어 내 목을 감으며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달콤한 키스로 불안함을 감추려한다고 나는 감히 그녀의 생각을 짐작해 보았다. 달이 떠올랐다. 새벽이다. 내가 벌인 일 때문에 북새통을 이루던 시장골목도 어느새 조용해져 있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범인을 찾기 위해 경비대원들이 여관을 뒤지고 다니겠지. “부탁했던 거요.”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던 여관 주인장이 식료품이 든 가방을 내밀었다. 나는 점원들의 입을 단속하고 우리를 숨겨준 여관 주인장의 손에 100만 루나짜리 금화를 쥐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평소 같았으면 경비대에 찔렀겠지만. 엘프가 있으니 한번 봐주는 거요.” 그레이프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뚝뚝한 주인장은 금화를 튕기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홀에서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던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좀 바라본 다음 말에 올랐다. 아무도 없는 새벽의 도시를 걸어 여관 주인장에게 미리 들어두었던 길을 따라 마을 뒷산으로 올라간 우리는 그곳에서 샛길을 발견했다. 밤눈이 좋은 그레이프가 우리를 인도했다. 어두운 숲속을 한참 이리저리 걷던 우리는 다시 성밖의 대로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레이프, 당신이 엘프라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동료이지 않나요?”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달빛아래의 엘프란, 상당히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조야하게 비유해서 아름다운 석상의 모습이라고 할까? 아름답긴 하지만 석상은 석상일 뿐 애정을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 지금 그레이프의 모습이 딱 그렇다. 하지만 보기에는 좋군. 어머니의 모습이 그녀와 겹쳐지는 기분이다. 스피릿이 추운지 두 팔로 내 허리를 꽉 껴안으며 바싹 달라붙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어주었다. “좀 있다가 해뜨면 야영 할거니까. 그때 따뜻하게 안아줄게.” “어머, 뜨거워라.” 루시아가 끼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난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다. 당당하게 어깨를 편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뜨거워야지. 불타는 심장을 가지고 있는데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말의 고삐를 잡아당긴 나는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스피릿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사랑해요. 주인님.”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대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을 멈추고 적당히 야영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좀 쉬기로 했다. 추적자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우리는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몬스터가 내려오면 어쩌지?” “그러니 불침번을 서야죠. 수고하세요.” 아레프는 그렇게 말하며 침낭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마를 살짝 찌뿌린 나는 그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제가 먼저 불침번을 서도록 하겠습니다. 쉬시죠.” “마법사는 메모라이즈 라는 걸 한다면서요? 그레이프도 사양하지 말고 쉬세요. 이런 건 몸으로 때우는 나에게 맡기고.” 몇 번 사양하던 그레이프는 결국 내 협박에 못 이겨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너도 좀 자.” “주인님하고 같이 잘래요.” 주위를 좀 두리번거린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 여기서 하자구?” 내내 시무룩한 표정이던 스피릿의 눈썹이 당장 위로 솟아올랐다. “이 변태 주인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하하하, 농담이야. 거봐. 울상인 것 본다는 그편이 훨씬 보기 좋다.” 스피릿은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등을 좀 쓸어준 나는 자동석궁을 꺼내 기름을 뿌리고 상태를 점검했다. 스피릿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워서 멍하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왜?” 입을 우물거리던 스피릿은 몸을 돌리고 담요를 끌어당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피릿, 싱겁다.” “예. 전 싱거운 여자예요.”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내 오른손을 붙잡아 안대 대신으로 사용했다. 눈이 부셔서 잠이 오질 않나? 그런데 이렇게 하면 나 아무것도 못하는 걸? 좀 버벅대던 나는 스피릿이 잠이 들 동안 그대로 있기로 했다. 잠시 그러고 있는데 스피릿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왜 가만히 계세요?” “응?” “지금 바쁘시잖아요. 손 치우고 다른걸 덮어줘도 될텐데. 왜 그냥 계세요?” 난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스피릿이 자고 있는걸? 잠드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좀 기다리면 돼.” 입을 꾹 다물고 날 쳐다보던 스피릿이 나에게 좀더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버릇없는 이 노예를, 주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고민하지 마시고 솔직한 마음으로 말해보세요. 절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하얀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따뜻했다. “사랑해 스피릿. 널 만난 건 내 평생 행운일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던 스피릿은 갑자기 거창한 한숨을 내쉬더니 내 팔을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주인님만 모시고 살게요. 대신 저 버리시면 안되요?” “응.” 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니 아레프의 가슴에 붙어서 자던 루시아가 깨어났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던 그녀는 눈을 좀 비빈 다음 말했다. “불침번 교대 해드릴께요. 눈 좀 부치세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프가 메모라이즈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항상 그의 불침번은 루시아가 대신 서곤 했다. “수고해.” “예. 아, 숲 속에서 불장난은 삼가 해주세요. 산불 날수도 있으니.” 루시아의 말에 나와 스피릿은 악담을 좀 해준 다음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난 약속대로 스피릿의 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내 가슴에 폭 파묻힌 그녀는 숨막히는 소리를 좀 내다가 말했다. “…으윽, 행복해요. 주인님” “으응. 나도 행복해. 사랑해 스피릿.” 난 더 힘껏 그녀를 안아주었다. 불침번을 교대하고 잠이 들었던 내가 깨어난 시각은 점심 무렵,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나는 머리를 좀 긁은 다음 먼저 일어난 스피릿과 루시아가 만들어준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한참을 달리다가 말을 쉬게 할 겸 다시 천천히 걷고 있는데 머리위로 뭔가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화악~! 하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레이프가 고개를 들고 외쳤다 “와이번!” 나도 고개를 들었다. 후화아아학! 엄청난 광풍이 휘몰아쳤다. 머리 위를 스치고 날아가는 새끼드래곤 같은 녀석을 올려다보던 나는 이를 드러냈다. “빌어먹을! 또 그 놈들이다!” 공중을 선회하는 와이번의 등에는 안장이 매어져 있고 그곳에는 무장한 사내가 복면을 쓰고 있었다. 말안장에서 자동석궁을 뽑아든 나는 달아드는 와이번을 겨냥해 활을 갈겼다. 퉁퉁퉁퉁퉁퉁~! 하지만 어찌나 빠른지 화살은 놈이 지나간 곳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슈화아아악~! “꺄악!?” 스피릿과 루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주문을 외우던 아레프가 외쳤다. “매직미사일!” 투바바바바바바바~! 수백여발의 초록빛줄기가 파란 하늘에 어지럽게 그려졌다. 하지만 저 와이번은 매직미사일보다 더 빠른 속도로 비행하여 미사일을 모두 다른 곳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적과 아군을 떠나서 저 정도까지 기동력을 발휘하는 와이번과 기수는 본적이 없을 정도다. “퀘에에에에~!!” 와이번의 포효를 들은 말들이 겁에 질려 발버둥을 쳤다. 그레이프가 외쳤다. “우리를 잡아 놓고 추격대를 기다릴 속셈입니다! 모두 달려요! 아레프! 스트렝스!” “스트렝스!” 아레프가 오른손을 위로 들고 외쳤다. 갑자기 말들이 투레질을 몇 번하더니 거친 숨을 토해내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스피릿! 꽉 잡아!” “예, 예!” 허리를 잡고 있는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말고삐를 한 손으로 붙잡은 나는 뒤쫓아오는 와이번을 향해 자동석궁을 있는대로 쏴댔다. 투투투투투투투퉁~! “퀘에에에에~!” 맞았다! 하지만 와이번은 자동석궁의 콰렐 몇 대 맞은 걸로는 까딱없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쪽에서 공격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핏보니 저쪽의 기수도 석궁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꿍꿍이지? 그때 약간은 느릿한 속도로 우리를 따라오던 와이번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변했다. 부력을 상실했는지 천천히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와이번과 기수가 날개를 퍼덕였지만 와이번의 몸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고 말았다. 그레이프가 외쳤다. “와이번 주변의 실프를 잠시 물러나도록 했어요! 오래 못가니까 서두르세요!” 엘프는 타고난 정령술사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이랴! 하! 달려라!” “약오르지?! 바보 도마뱀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바닥에 내려와 있는 와이번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주인님! 뭐하시는 거예요?! 그만 두세요!” 씩 웃어준 나는 다시 몸을 돌리고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전력으로 달린 우리들은 그레이프의 안내에 따라 근처 숲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나무에 기대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와인번이 날아갑니다. 모두 움직이지 마세요.” 우리는 그녀의 말에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기거나했다. 저 하늘에 검은 점 같은 것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며 일단의 무리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우리가 숨은 숲 주변을 스쳐지나갔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아레프가 말했다. “야아. 두근두근 하는데요. 설마 이런 추격전이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즐거워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주인님.” “아, 괜찮아요. 지나갔는걸 뭐.” 아레프가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레이프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왜 저들이 우리 뒤를 쫓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대로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아직 다음 마을까지는 하루나 더 남았는데.” “여기서 헤어지죠. 방금 전의 그 와이번 기수는 우리들의 얼굴을 똑똑히 봤을 겁니다. 잘못 나갔다간 금세 발견돼요. 그러니 이대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각자 따로 마을로 향하는 겁니다. 밤을 새워 달린다면 내일 아침 무렵에는 루카스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요?” 내 등뒤에 숨어있던 스피릿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레이프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우리는 동료들입니다. 쉽게 헤어질 수는 없어요. 루카스에 도착하면 시청 앞 광장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죠. 그런 다음 좀 규모가 큰 캐러반이나 상단에 섞여서 다음 마을로 향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세요.” 나와 아레프는 동시에 말했다.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레이프는 밤이 될 동안 나무에 기댄 자세로 잠시 눈을 부쳤다. 아레프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대체 누굴까요? 그 사람들?” “글세. 물어봤지만 대답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던걸? 무슨 비밀결사대도 아니고 말야. 군사격투술에 칼라미티 소드까지…. 뭣 때문이지? 이봐, 당신 드래곤 본으로 무슨 연구를 하려 했던 거야? 그거 금기는 아니지만 법에 걸리는 거 아냐?” 아레프는 머리를 좀 벅벅 긁다가 말했다. “나라에서 비밀리에 시행하는 거지만 불법은 아닙니다. 오히려 합법적인 거죠. 게다가 제가 만들고 있는 물건의 유용도를 따지고 볼 때 어떤 경로로 제 연구목적을 알아챈 다른 나라에서 와이번까지 동원한 추적대를 보낼 이유는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언제는 길드 내에서 당신이 찾아 가지고 오는 드래곤 본을 탐내서 그럴 수도 있다며?” “예, 물론 둘 다 추론이니까요. 그래서 양쪽 모두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쪽에서 목적을 밝히지 않는 이상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쫓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고려해볼 때 최소한 저를 노리고 오는 자들이 맞는 것 같군요.” 입술을 빼죽 내민 나는 아레프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자 루시아가 얼른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날 지긋이 쳐다보았다. 칫, 자기 주인님이라고 감싸기는. “수도에 도착하면 추가금 받을 거야. 알았어?” 아레프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린 우리는 그날 저녁 각자 다른 방향을 잡아 루카스로 향했다. 원래는 느긋한 여행길을 생각했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날 벼락이야? Running Fire: 21 “시, 시끄러워! 누, 눈이 가는 걸 어쩌란 말야! 난 심신 건강한 23살 남자라고!” “그럼 다들 붙잡히지 말고 잘들 찾아와요. 제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먼저 말에 올라있던 아레프와 그레이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출발 시켰다. 나도 말에 올라서 스피릿의 손을 당겼다. “슬슬 가볼까?” “예.” 달도 뜨지 않은 그믐의 저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까 아레프가 걸어준 인플라비젼의 효과로 어느정도 사물을 인지할 수 있었다. 세상이 초록색으로 보이니까 기분 묘한걸? 말에게도 마법을 걸었기 때문에 나는 별 어려움 없이 말을 몰아 달릴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멈춰서서 다시 하늘의 별을 보고 방향을 잡은 다음 말을 몰아가려는데 스피릿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주인님. 괜찮을까요?” “걱정하지마. 우린 이대로 그놈들을 따돌리고 수도로 갈 거니까. 수도에 가면, 겨울이 지날 동안 살집을 구하자. 둘이서 오붓하게 저녁도 해먹을 수 있는 그런 집을 말야. 여관에서는 우리 스프릿이 너무 예뻐서 귀찮은 벌떼들이 너무 많이 달려드니까. 그리고 나도 집을 한번 가져봤으면 했었어.” 뒤에 앉아있던 스피릿은 내 허리를 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요리는 잘 못하지만, 노력할게요.” 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스피릿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응. 행복하게 해줄게.” 고개를 든 스피릿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내 노예는 너무 예쁘고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 천사나 하프엘프쯤 되지 않을 까하는 우습지도 않은 망상이 간혹 들곤 한다. 정말 스피릿을 만나게 된 건 내 평생 행운인지도 몰라. 고개를 돌린 나는 말을 몰아 다시 어둠을 달렸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비취 들어오는 부엌에 앞치마를 하고 서서 날 위해 저녁을 준비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밤을 새워 달린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별탈 없이 루카스의 거대한 외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성문은 곧게 닫혀있어서 열릴 동안 잠시 기다려야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보았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없었다. 뭐, 여기말고도 성문은 더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경비병의 검문을 받은 다음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에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도시는 계속 커지는 느낌이다. 루카스는 종전의 레이스보다 눈이 뛸 정도로 커보였다. 오랜만에 들린 도시의 모습을 두리번거린 나는 시청 앞 광장으로 말을 몰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우리가 제일 처음이다. “다른 분들은 아직 안오신 것 같은데요. 괜찮을 까요?” 상당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스피릿이 물었다. 말의 고삐를 붙잡고 벤치에 앉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때 저 멀리서 아레프와 그레이프가 동시에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도착했구나! 걱정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스피릿도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온 루시아의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아레프와 그레이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기서 아레프는 좀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새벽길을 따라 달려가는데 저 앞에서 어렴풋이 뭐가가 보이더란다. 그래서 잠시 멈춰서 보니 그 와이번이 길바닥에 엎드려 자고 있었고 사내들도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앉아서 야영을 하고 있더란다. 그런데 그때 불침번이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레프가 순간적인 기지로 인비지빌리티를 걸어 몸을 숨기지 않았다면 들통났을 거라고 했다. 역시 마법사! 대단하다고 고개를 끄덕여주는데 루시아가 이마를 찡그리며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마법을 건 채로 야영지로 숨어들어 갔던 이야기는 왜 하지 않으세요?” 우리는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왕 투명마법을 건 것, 그는 잠에 빠져있는 복면의 야영지로 당당하게 걸어갔단다. 루시아가 말렸지만 아레프는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들이 자는 곳을 돌아다니며 뭔가 이들의 정체를 밝혀줄 물건을 찾던 아레프는 뜻밖의 수확을 건지고는 부리나케 도시로 달려왔다고 했다. “그래서 무슨 수확인데?” 내가 묻자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어떤 문장을 꺼내 보였다. 아레프가 말했다. “이건, 캐슬린 그림자 기사단의 문장입니다. 그림자 기사단은 말이 기사단이지 요인암살이나 특공임무, 정보수집을 위주로 하는 특수부대로 좀더 알기 쉽게 말하면 다른 나라에 숨어들어가 정보를 수집하는 간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꽤 험악하게 돌아가는데. 간첩이라고? 캐슬린 간첩이 왜 우릴 따라오는 거야?” 아레프는 들고 있던 문장을 그레이프에게 보여주며 씩 웃어보였다. …저 미소는 라이트 자식과 비슷한 것 같다. 녀석만 그런 줄 알았더니 마법사는 다 그런거였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하고있는 그 연구 때문인 것 같아요.”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좀 해봐. 어차피 이렇게된 거 국가기밀이고 나발이고 좀 알아둬야 할거 아냐.” 아레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른 아침이라 직장으로 출근을 위하여 대로를 걷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광장 벤치에 앉아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들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레프는 헛기침을 조금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이건 국가기밀이니 만큼 그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라는 경고 문구로 시작된 그의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랜퍼스의 군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반 병사들의 무장을 강화시킬 병기를 강구하다가 캐슬린과 베레타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불똥이 이쪽으로 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서둘러 국방력을 강화하기로 하고 마법사 길드에 이 건을 의뢰했습니다. 저도 길드에 소속된 마법사로서 그 계획에서 연구비를 받아 병기개발을 시작했습니다만 갑자기 군부에서 연구개발 기간을 1년 이내로 단축해버리더군요. 이유는 얼마 전에 있었던 평화사절단의 습격 사건 때문으로 두 나라사이에 언제 전쟁이 반발할지 알 수 없으니 병기 개발을 서두르게 된거죠.” 국가 간의 갈등관계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자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는데 그레이프가 물었다. “훈트가 있잖아요? 그들로는 모자라다는 말인가요?” “훈트는 대인 공격 유닛입니다. 게다가 일반 병사가 아니죠. 그 수도 적고, 게다가 일단 전투가 생기면 훈트는 적들만을 공격합니다. 다친 병사나 민간인을 구하는 인간적인 마음씀씀이를 기대할 수 없죠. 그래서 일반병사들의 무장을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왔던 겁니다. 에, 이야기가 좀 빗나갔는데. 다시 이어보면, 연구개발기간이 단축되자 저는 그때까지 연구하던 신무기 개발을 그만두고 종래의 무기를 개량할 생각을 하다가 어떤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그게 바로 베레타에서 군용으로 사용하는 마검 칼라미티 소드에 대한 것이었죠.” 우리는 입을 딱 벌렸다. 아레프는 계속 말했다. “어떻게 해서 제 연구를 알았는지 모릅니다만 캐슬린에서는 그 때문에 저를 쫓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 캐슬린에는 칼라미티 소드와 맞먹는 결전병기가 없어?” “물론 캐슬린에도 아이언 고렘이라는 주력병기가 있습니다만 아무리 절대 방어력을 가진 아이언 고렘이라도 인간 병사들이 몰살당하면 그들은 기계인형에 불과합니다.” 그레이프가 이마를 찌뿌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엄청난 일에 휘말렸군요. 그럼 저 캐슬린 기사단이 노리는 게 당신의 연구라는 겁니까?” “그렇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론은 완벽히 정립했습니다. 아무리 칼라미티 소드의 제조방법이 극비라고 해도 결국엔 인간이 만들어낸 겁니다. 같은 인간이 비슷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요. 또한 제가 짠 이론의 칼라미티 소드는 일반적인 베레타의 마검과는 그 에너지원이 틀리기 때문에 성공하면 손쉽게 대량생산이 가능할겁니다.” 그레이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꺼번에 엄청난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머리가 띵하다. 그때 스피릿이 말했다. “아레프 씨는 사람을 죽이는 병기를 만들고 계셨군요.”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피릿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잠시 쳐다보던 아레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주인님과 친구들이 적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났지 않습니까?” “내가 살자고 적을 죽여야 하는 건가요? 정말 그래야 하는 거예요?” 아레프는 말문이 막혔는지 날 쳐다보았다. 난 팔짱을 하며 말했다. “그럼 어쩌란 말야. 이것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야. 넌 네 가족이 적병의 칼에 맞아 죽는걸 보고 싶어? 이건 세상의 진리이며 대대손손 내려온 역사의 반복이야. 그래,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해. 그래야 살아남아서 고향에서 기다리는 연인을 안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수 있지. 물론 위선자라고 해도 돼. 비겁하다고 해도 돼. 하지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법이야. 사랑도 할 수 없고 자식도 가질 수 없지. 네가 생명의 존엄성을 들먹이며 아레프를 비난해도 어쩔 수 없어. 그도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이 짓을 하는 거야. 그가 만든 마검은 전사들의 손에 쥐어져 그의 나라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친구를 지키고, 그리고 예쁜 노예도 지켜 줄 거야.” 아레프는 옆에 서있는 루시아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웃었다. 스피릿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프가 말의 고삐를 잡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늑대가 양을 동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스피릿, 잘 생각해 보세요. 자, 이야기가 끝났으면 어서 여관을 찾아서 좀 쉬도록 하죠. 밤새 달렸더니 피곤하군요.” 우리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짐을 챙겨 광장 근처의 적당한 여관을 찾은 우리는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골아 떨어져버렸다. 다시 깨어난 시간은 정오 무렵, 스피릿은 아직도 자고 있다. 무척 피곤했는가보다. 욕탕으로 내려가 좀 씻고 올라오니 아레프와 루시아가 홀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 맥주 한잔 주쇼. 그런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던 거요?” “마을을 떠날 때 상단이 좋을까 캐러반이 좋을까 루시아에게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루시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상단을 따라가자고 했어요. 캐러반은 좀 거친 사람들이 많으니까.” “예쁜 노예를 데리고 가면 꼭 이상한 것들이 꼬이기 마련이지. 둘 다 비슷할테지만 그나마 상단 쪽이 좀 나으려나.” 루시아가 팔꿈치로 아레프의 허리를 쿡 찔렀다. 어느새 연인 같은 사이가 되어버린 모습이다. “그것 보세요. 제 말이 맞죠?” “내가 올 때는 캐러반을 따라왔는데. 그때는 괜찮던데.” “그때는 주인님이 저 같은 노예를 데리고 있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여행자로 취급했겠죠. 하지만 지금 저 정도 노예를 데리고 가보세요. 당장 인기폭발 일걸요?” “그 정도인가요?” “물론이죠. 아무래도 천한 노예이니까. 건드려보고 싶은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에요.” 아레프는 루시아를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니까. 주인님이 절 지켜주셔야 한다구요.” “우리 루시아는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할거예요. 언제까지고 내 옆에 둘 거예요. 맹약을 걸어도 좋아. 그러니 루시아는 이제 그런 걸로 겁먹지 말아요. 알겠지?” 아레프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루시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난 그들의 모습에 약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남의 이야기는 닭살 돋아. 그때 맥주와 그레이프가 나왔다. “모두 나와있었군요. 아, 저도 맥주 주시겠어요?” 맥주를 들고 나오던 사내는 그레이프의 모습에 입을 딱 벌렸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레이프는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식사를 하고 콜트씨는 저와 함께 카미르로 향하는 상단 편을 알아보러 가시죠.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우리들끼리 나간다면 발각될 수 있으니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모이자 아레프는 점심 식사를 시켰다. 나는 스프릿을 깨우러 윗층으로 올라갔다. “세상에 주인이 노예를 깨우러 가야 한다니. 이건 말도 안돼.” “저도 가끔 루시아 깨워요. 식사 나오기 전에 빨리 내려오세요.” 아레프가 위로한답시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를 좀 노려봐 준 나는 방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스피릿은 그때까지도 베개를 안고 침대에 누워 졸고 있었다. “잘도 잔다. 일어나, 점심 먹어야지?” “으응… 졸려. 조금만… 더 자게 해줘….” 얼씨구, 이제는 말도 막하네? 코를 벌렁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본 나는 잠옷바지를 입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두드렸다. 그러자 스피릿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얼른 일어났다. “어, 어마! 주인님! 어딜 때리시는 거예요?!” “눈꼽이나 좀 떼고 말해라. 잠꾸러기 노예야.” “우응. 숙녀 엉덩이를 그렇게… 주인님 못됐… 아하아암….” “…그렇게 말하면서 무릎 배고 자지마.” 두 손으로 눈을 부비던 스피릿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눕더니 배게 대신에 내 무릎을 베고 잠을 청했다. 머리를 좀 긁적인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스피릿, 졸려?” “으응. 예에….” “우리 점심 먹을 건데.” 스피릿은 끙~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시트 위에 어지럽게 쏟아져 있던 회색 머리카락이 딸려 올라왔다. 잠이 덜 깬 얼굴을 나에게 들이댄 그녀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해댔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아…?!” 잠옷바지를 벗고 가죽바지를 껴입으려고 용을 쓰던 스피릿이 갑자기 다리가 걸려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려 했다. 난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붙잡아주었다. “으응… 고맙습니다아.” “됐어. 그냥 자라. 아무래도 잠이 덜 깬 애를 데리고 나갔다간 내가 창피할 것 같아.” “죄소옹해요오….” 눈을 반쯤 감은 얼굴로 스피릿은 내 얼굴에 볼을 비벼댔다. 간지럽다고 말해준 나는 그녀는 안아들고 침대로 걸어가 눕혀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입다가만 가죽바지가 하얀 다리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입은 것도 벗은 것도 아닌 모습이기에 난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붙잡아 당겼다. 그러자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그것을 잡고 매달렸다. “아, 아앙~! 주인님~ 하지 마세요! 대낮부터 이러시면 안돼요!” “이 바보가?!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스피릿은 내가 다리에 걸려있는 바지를 벗겨내려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고는 얼른 그것을 벗고 담요로 하얀 다리를 가렸다. 그녀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챙길 것은 챙기는 성격이라고 난 생각했다. “저 주인님, 거기 옷 좀….” “여기 있다. 게으름뱅이 노예야.” “너무 그러지 마세요. 밝힘쟁이 주인님.” “내가 왜 밝힘쟁이야?” “…엉덩이도 마구 때리시구, 제 속옷 보면서 침도 삼키시고 그러시잖아요.” 얼굴이, 얼굴이 갑자기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더 이상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된 나는 얼른 몸을 돌리고 벽을 노려보며 외쳤다. “시, 시끄러워! 누, 눈이 가는 걸 어쩌란 말야! 난 심신 건강한 23살 남자라고!” 말을 마치고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담요로 몸을 덥고 있던 스피릿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변태.” “윽! 이게!” 몸을 돌린 나는 침대로 날아가 그녀의 겨드랑이를 공격했다. 스피릿은 깔깔거리며 내 손길을 피해 버둥거리다가 잠시 후 축 늘어졌다. “아으으… 주인님. 배아파요.” “시끄러. 잠이나 자. 잠깐 나갔다가 올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문 꼭 잠그고.” “예에.” 지쳐서 할딱이는 스피릿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나는 마침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스피릿양은?” “졸립다고 하길레. 그냥 좀 더 자라고 해줬어.” 그러자 루시아가 얼른 아레프의 팔을 잡아당겼다. “주인님 저도 졸려요.” “밥 먹고 올라가면 무릎베개하고 자장가 불러줄게요.” “아응~ 주인님 밖에 없어요.” “…둘 다 그만두지 못해?” 그레이프가 웃어주는 가운데 말다툼을 벌이며 식사를 시작한 우리는 잠시 후 시원한 냉수를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올라간 나는 어느새 골아떨어져 있는 스피릿을 발견하고는 살짝 웃어주며 조심스레 옷을 갈아입고 무장을 챙긴 다음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전에 스피릿의 이마에 키스를 남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음냥 거리며 몸을 뒤척이는 모습에 킥킥 웃어준 나는 문을 닫고 열쇠로 잠궜다. 안에서는 열 수 있으니까 걱정은 없다. 밖으로 나가자 그레이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동색 가죽바지에 하얀 브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여관집이 아니라 자기 집 거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연스러운데? “기다렸습니까?” “아뇨. 방금 나왔어요. 이제 가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여관 주인에게 물어 이곳에 있는 상단 조합을 찾아갔다. 대로를 걸어가니 주위 사람들이 다들 쳐다본다. 나도 출세했다. 세상에 엘프와 같이 대로를 걷다니. “왜 그러시죠?” “아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아는 사냥꾼 아저씨 밑에서 이것저것 배울 때 언젠가는 나도 아저씨처럼 엘프와 함께 대로를 걷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모험가를 꿈꾸는 소년의 작은 소망이었죠. 당신들은 내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레이프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사냥꾼 아저씨란 분은 엘프들과 사이가 좋았나 보죠?” “예. 저 북부 케나린에 살고 계신데. 엘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인이죠. 부업으로 인간 사냥을 좀 하셨거든요.” 그레이프가 입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 “혹시 케나린의 히트맨?” “헤? 잘 아시는군요? 그렇게 불리곤 했어요. 엘프마을로 숨어 들어가서 어린 아이들을 납치해오는 사냥꾼을 사냥하기 때문에 주변의 사냥꾼들 사이에선 공포의 대상이긴 했지만, 당신들에겐 꽤 좋게 보였나봐요.” “아! 그분이라면 저도 몇 번 뵌 일이 있어요. 농담을 좋아하시는 분으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정정 하신가요?” “너무 정정해서 탈이죠. 그런데 언제 봤어요?” 그레이프는 좀 이채로운 시선으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7년 전 겨울 케나린에 잠시 들린 일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마을 장로님들과 함께 오두막에서 그분을 뵀는데 눈빛이 매서운 소년이 함께 있었던 것 같은….” 7년 전이면 내가 16살 때인가? 한창 아저씨 밑에서 짐승 잡는 법을 배울 때인데. 자리에서 멈춰선 나는 그레이프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도 자리에 멈춰서서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 해보려했지만 아저씨의 오두막에 놀러오던 엘프들의 모습이 워낙 비슷비슷해서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만 고개를 돌린 나는 상단조합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레이프는 방긋 웃으며 내 뒤를 따랐다. “전 어렴풋이 기억나는 걸요? 많이 자랐군요? 7년의 시간이 소년을 어른으로 바꿔 놨어요.” 난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엘프는 나이를 천천히 먹는다. 그래서 7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이지만, 인간은 7년이면 아이가 소년이 되고 소년이 어른이 된다. 그레이프는 푸근한 미소만 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엘프의 마음씀씀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거다.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감사했다. 날 그때의 어린아이로 봐주면 곤란하단 말이지. 상단조합으로 들어가자 직원인 것 같은 사람이 우리를 반겼다. 모험가 자격증을 내밀며 카미르로 향하는 상단에 대해 문의하니 서무를 보던 행정직원이 고개를 꾸벅이며 내일 새벽 6시에 마을광장에서 출발한다고 알려주었다. “동행하실 겁니까?” “아. 요새 세상이 험악해놔서. 이웃마을에 갈 때도 이런 식으로 몰려가지 않으면 비적이나 산적들에게 털리기 십상이거든요.” 상단의 행정직원은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치며 몇 명이나 동행할건지 묻고 전투원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일행은 5명, 전투원은 나와 여기 엘프아가씨. 그리고 마법사 하나가 있는데.” “마법사가 있다구요?!”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사내는 후다닥 서류를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동행료는 무료입니다. 모쪼록 저희 상단과 동행해 주십시오.” 난 고맙다고 말해준 다음 상단을 나섰다. 상단에서는 한번 출정할 때마다 항상 호위무사를 고용해서 데리고 나간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상단을 노리는 도적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호위무사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돈이 꽤드는 지라 이것을 상단을 따라 이동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동행료를 받아 부담을 줄이곤 한다. 그래서 실력 있는 모험가나 마법사가 상단을 따라 동행하려 한다면 쌍수를 들고 반기는 거다. 물론 동행료도 받지 않는다. 대신 도적들과 만나면 호위무사들과 함께 싸워야 하지만. “콜트와 함께 오길 잘했어요. 상당히 편리한걸요?” “뭐, 이래뵈도 모험가니까. 뭔가 고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쇼. 케나린 히트맨 영감의 얼굴을 봐서 얼마든지 도와줄테니까.”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살짝 웃은 그레이프는 그러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길에 무기점과 마법상점에서 자동석궁용 화살통과 스크롤을 구입한 우리는 시장에 들려서 식료품도 좀 구한 뒤 여관으로 돌아갔다. 다행이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복면 놈들은 그만 떨어진 건가? “…이 잠꾸러기 같으니.” 방으로 들어가 보니 스피릿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한심한 표정을 지은 나는 담요를 걷어차고 잠들어있는 그녀에게 담요를 다시 덮어준 다음 사 가지고 온 장비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검과 장비들을 모조리 꺼내 정비를 시작했다. 동백기름을 천에 묻혀서 검을 닦고 숫돌을 이용해서 날을 갈고, 자동석궁도 이참에 정비를 맡기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내 손으로 대충 정비했다. 처량하구나. 민간용으로는 최초로 허가받은 자동석궁이 이런 대접을 받다니, 한숨을 내쉬며 석궁의 활대를 천으로 닦고 있으려니 뭔가가 내 등에 매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스피릿이 잠이 덜깬 얼굴로 내 등에 매달려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스피릿, 입가에 침 흐른 자국이 너무 매혹적이야. 눈에 낀 그 왕 눈꼽도 그렇고,” “어, 어머나.” 스피릿은 부랴부랴 손등으로 눈가와 입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린 나는 검을 검집에 꼿으며 말했다. “사람 별로 없으니까. 얼른 내려가서 씻고 와.” “예에.” 자리에서 일어난 스피릿은 목에 수건을 걸고 밖으로 나가다가 금세 올라왔다. 눈 깜짝할 새에 다녀온 그녀를 바라보며 난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갔다 온거야?” “예.” “고양이처럼 얼굴에 물 만 바르고 온 거지?” 스피릿은 헤헤 웃으며 수건으로 촉촉하게 젖은 얼굴을 닦고 있었다. 쓴 표정을 지은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장비 점검을 마무리했다. 의자를 가져가 옆에 붙어 앉은 스피릿이 말했다. “이제 마을 하나만 더 거치면 수도네요.” “그래, 어느새 여기까지 왔나 싶다. 그렇지. 스피릿, 이거 파줄까?” 난 그녀의 왼손을 붙잡아 보았다. 하얀 손등에는 노예를 뜻하는 문장이 박혀있다. 스피릿은 부끄럽다는 듯이 내게서 손을 빼내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뇨. 좀 더 이대로 있고 싶어요. 이게 없어지면 전 주인님의 노예가 아닌걸요.” “무슨, 그게 없어지면 더 자유로워 질 거야. 마음대로 쇼핑도 다니고,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남자친구 헌담도 할 수 있어. 그리고 널 대하는 내 태도도 달라질지 모를걸? 또 한가지 노예자격이 사라지면 너와 난 동격이 되므로 네가 나에게 평소 가지고 있던 불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결 할 수 있다구.” “…조건 중에 상당히 매력적인게 있지만, 조금만 더 이렇게 있을래요. 최소한 주인님이랑 같이 있을 때만이라도.” 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스피릿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앙~! 주인니임. 저 배고파요. 밥 사주세요오.” 스피릿은 엥엥거리며 내 등에 달라붙었다. 덕분에 일을 마치고 좀 쉬려고 했던 나는 그녀를 데리고 홀로 나가서 조금 이른 저녁을 먹여야했다. 올라가는 길에 그레이프의 방에 들려 내 대신 아레프와 루시아에게 내일 일정을 설명해줄 것을 부탁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고 창 밖을 내다보니 이제야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다. 남들 저녁 먹을 시간에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오다니, 잠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디 가서 좀 놀다가 올….” 문을 걸어 잠근 스피릿이 어느새 내 뒤에 서있었다. 그녀는 벌겋게 된 얼굴로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나, 낮에 너무 자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는데 저, 저기… 안아주시면 안될까요?” “응? 뭐라고?” 난 귀를 그녀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그러자 스피릿은 두 손으로 내 옷자락을 꾹 잡아당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안아주세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나는 약간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졸라서 한 적은 있어도 그녀가 부탁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약간의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니 스피릿은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돌렸다. 부끄러운가 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지? 난 두 말없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키스를 시작했다. 스피릿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목을 감고 매달렸다. 서로의 몸을 핥고 귀를 깨물거나 하며 애무를 즐기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로 쓰러졌다. 아침이 밝았다. 새벽 5시에 스피릿이 깨워서 일어난 나는 세면장으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스피릿은 이상하게도 기운찬 모습으로 짐을 꾸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난 의외로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왜 이러지? 홀에 앉아 아침을 주문하고 있으니 아레프와 루시아. 그레이프가 각자의 힘을 가지고 방에서 나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스피릿이 모두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레이프가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레프는 졸린 눈을 비비느라 손만 좀 흔들어주고 말았다. 그때 루시아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옆에는 얼굴을 시뻘겋게 만든 스피릿은 입을 우물거리며 날 힐끔거리고 있고, 왜 저러는 거래?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아침이 나왔다. 빵과 우유다. 간단해서 좋잖아? 아침을 먹고 말에 올라 마을 광장으로 달려가니 때마침 상단이 출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동행 허가증을 보여주자 그들은 깍듯이 인사를 하며 우리에게 3번 마차를 따라 움직일 것을 부탁해왔다. 마차를 따라 움직이라고? 보통은 상단의 맨 뒤를 따라 가는 게 정석인데. “아무래도 일행에 마법사가 있어서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군요.” 그레이프의 말에 우리는 모두 잠이 덜 깬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우리는 점잖게 그를 무시했다. 잠시 후 마차가 출발했다. 상단 대원들이 우리를 연신 힐끔거렸지만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법사에 엘프아가씨, 그리고 예쁜 노예들과 온통 시커먼 복장의 음침한 표정의 모험가는 함께 농담을 나눠가며 여행을 할 상대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도 별로 이런 표정을 짓고 싶지는 않지만 몸이 좀 피곤해서 말이지. 어제 일 때문일까? 힐끔 뒤를 돌아보니 스피릿은 상단행렬을 구경하느라 정신 없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기운이 넘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어제 그녀는 정말 무서웠다. 제미니와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전부 내 탓이겠지. 할말은 없다. 우리가 속한 상단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마차 10대 정도에 호위무사 10여명 정도? 하지만 동행을 얻어 상단 뒤를 따라오는 마차들과 말들까지 합하면 꽤 된다. 그래도 예전 샤먼상단의 해외 출정 때보다는 적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마차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되었다. “1시간 휴식!” “1시간 휴식!” 맨 앞의 마차에서부터 끝까지 마부의 고함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상단은 멈췄고 우리는 각자 가지고 온 도시락이나 음식을 꺼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여관에 주인장이 새벽잠을 깨고 나와 불평을 해대며 싸준 도시락을 먹고 있으려니 갑자기 상단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퀘에에에에~!” “뭐야? 무슨 소리야?” 엘프식으로 싸준 도시락을 들고 여관 주인장에게 고마워하던 그레이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뿌렸다. “그때 그 와이번입니다.” 루시아와 스피릿이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 그 와이번이 우리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그냥 밖으로 나왔다간 꼼짝없이 잡혔겠군. 덩달아 말발굽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루카스 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난 도시락을 먹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지?” “경비병까지 함께 군요. 이대로 달아날 수는 없겠습니다.” 아레프가 낮게 말했다. “저번처럼 인비지빌리티를 걸어버리면?” “아니요. 상단의 인명록을 뒤지면 우리의 부제가 드러나게 되니 그건 안됩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루시아의 말을 들으며 그레이프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닫는 곳에는 아레프가 앉아있었다. “폴리오프 계열의 주문 아무거나 있습니까?” 아레프는 금세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우리는 각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내 경우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것은 잠시 후로 미루기로 했다. 상단 책임자와 경비병을 대동한 사내들이 검문검색을 위하여 우리 쪽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경비병이 경례를 하며 말했다. “수배자 검문을 위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 책임자가 앞으로 나서서 이름을 불렀다. “그레이프 D 라이언씨.” “예.” 두꺼운 목소리. 그레이프가 손을 들었다. 그레이프는 폴리모프 아더로 자신의 몸을 건장한 남자 엘프의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은 그래도 잘 어울린다는 거다. 자세히 보면 여자였을 때의 모습이 약간 남아있어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녀의 남동생이라고 해도 믿어줄 용모다. 상단 책임자는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루시아씨.” “예!”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모습이 된 루시아가 기운차게 손을 들었다. 체형을 좀 작게 하고 머리도 짧게 만든 다음 눈을 좌우로 북 찢어버리자 루시아는 단번에 팔팔한 소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대게 그렇듯이 소년과 소녀는 혼동하기 쉽다. 그러고 보니 연극도 잘하는군. 다음으로 부른 사람은 스피릿, 그녀는 남자의 모습을 죽어도 싫다고 거부해서 그냥 머리색을 금발로 바꾸고 얼굴에 주근깨를 뿌린 다음 체형을 꼬마 루시아 정도로 바꿨다. 그러자 아름다고 고귀한 인상의 스피릿은 단번에 새침떼기 주근깨 소녀가 되어 귀여운 몸짓으로 경비병들의 시선을 피하려했다. 너무 파격적인 변신이라 들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상단 책임자는 동행자들에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무덤덤하게 다음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콜트 슈발츠씨. 아레프 왓슨씨.” “아, 예에에….” “제가 아레프 왓슨이에요! 어머나~! 경비병님, 수고하시네요. 따뜻한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한가지 잊고 있었던 게 있는데. 폴리모프 아더는 놀랍게도 입고있는 옷까지 변형시켜버렸다. 그래서 스피릿과 루시아는 체형에 맞는 반바지와 원피스를, 아레프는 나와 같은 여행용 자켓과 가죽바지를 입고 있다. “근무중입니다.” 긴 갈색 머리를 한 줄로 땋아내린 여행 복의 아가씨가 방글방글 웃으며 말을 걸자 경비병은 헛기침을 하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일단의 제복 입은 사내들 중 한 사람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그들은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다른 동행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때 한 경비병이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내게 걸어왔다. 그는 고압적으로 날 쳐다보다가 신분증을 요구했다. “예, 예? 시, 시민증이요?” “예. 신분을 밝힐 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아뿔사~! 이를 까득 깨문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시민증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내가 내미는 시민증을 받아든 경비병은 잠시 그것과 내 모습을 대조해보다가 말했다. “콜트 슈발츠씨 맞습니까?” “예, 예 맞는데요오….” 잠시 내 모습을 쳐다보던 경비병은 시민증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협조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아, 저의 누나가 사실은요. 요즘 생리 중….” “루시아아!!” 난 냅다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목소리가, 목소리가아~! 가련하지만 약간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내 목소리, 아~! 죽고싶어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나는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쳐다보던 경비병들이 킥킥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 앞에 서있던 경비병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꾸벅이더니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레이프의 충고에 따라 시민증의 성별을 미리 바꿔두지 않았다면 들켰을 거다. 경비병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눈앞에 들어보았다. 오, 오 마이갓! 남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능과 외관을 가진 예쁜 손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껏 쌓아온 내 인생의 경험들이, 주먹에 박힌 못과 손등의 상처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으아! …약간의 허탈감이 밀려왔다. 다시 봐도 티끌하나 없는 정말 백옥 같은 손이다. 그 손을 한참 바라보던 나는 울상을 지으며 이제 내 가슴을 만져보았다. …풍만했다. 그것도 상당히, 어렴풋이 짐작하건데. 이 정도라면 제미니보다 더 클 것 같다. “어무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슬프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당장 옆에 있던 루시아와 아레프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프가 딱딱함 음성으로 말했다. “쉿! 아직 저들이 검문 중에 있습니다. …당신의 상실감은 알겠지만, 조그만 더 참아 주세요.” 그레이프가 상실감 어쩌고 말할 때 나는 바지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끄아아아~! 울고싶어라~! 고개를 떨군 나는 눈앞을 부옇게 흐리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울어? 내가? “어? 어라?” 아레프가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전에 같은 인간이라도 남자와 여자의 몸은 다르다고 했었지요? 감정에 조금만 기복이 있더라도 곧바로 몸이 반응해요. 자, 이걸로 닦고 …거울 좀 보시겠어요? 콜트씨 여자가 되니 너무 예뻐요. 스피릿양과 좋은 대비… 켁켁~!” 그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는 대신 내 몸을 이따위로 만들어버린 변태 마법사의 목을 한 손으로 잡고 덜덜 떨리는 주먹을 뒤로 당겼다. 루시아가 앵앵거리며 달려드는 통에 주먹질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이건 너무해!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주인님. 괜찮으세요?” 마차바퀴에 등을 대고 쭈그리고 앉아 훌쩍대고 있으려니 스피릿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개를 든 나는 가느다란 두 팔을 앞으로 내밀어 스피릿의 작은 몸을 와락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은 지금 작아져있다. 끽해야 13~15세 정도? 난 스피릿의 작은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먹였다. “우… 눈물이, 콧물이, 멈추질 않아.” “아윽~ 주인님 숨막혀요~! 자, 괜찮아요. 손수건으로 눈물 닦고요. 와~! 주인님. 진짜 예뻐요.” 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피릿이 베시시 웃으며 작은 손바닥을 흔들어댔다. 한참이 지난 후 경비대와 복면사내로 짐작되는 사내들이 돌아갔다. 협조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코를 훌쩍인 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준 3번 마차의 상단 대원의 손에 50만 루나를 더 쥐어주었다. “어, 아까 만으로도 충분한데.” “이걸로 죽을 때까지 입 다물어 주세요. 아셨죠?” 3번 마차의 상단 대원들은 내가 여자로 변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상단 대원 자존심을 걸고 비밀은 지키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자리로 와서 앉으니 루시아가 콜트 슈왈츠 갑부설을 주장했다. “콜트 누나는 굉장히 돈 많은 가봐요? 물쓰듯이 펑펑이네?” “누나라고 하지마 요 땅꼬마야.” 루시아는 깔깔 웃으며 얼른 아레프의 무릎으로 기어올라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루시아는 화아~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두 손으로 만지작댔다. “우와~! 주인님! 엄청 커요~!” “음, 루시아의 것을 참고로 했으니까요. 아, 그리고 말인데, 윽, 너, 너무 그렇게 만지지 말아줘요. 아프니까.” 갑자기 루시아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가슴을 주물러댔다. 그레이프가 점잖게 말하지 않았다면 계속 그러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 폴리모프 셀프는 외워두지 않으셨죠? 이쪽이 더 쓰기 편한데요.” “얼굴 바꿀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폴리모프 셀프는 외워두지 않아요. 요전의 산적 사건 때 일도 있고 이쪽이 더 쓸모가 많거든요?” 그레이프는 산적 사건의 일을 따로 루시아에게 전해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 나는 대뜸 물었다. “그, 그럼 그레이프는…?” “예. 전 가슴만 없다뿐이지. 생식기는 그대로예요. 목소리도 원래대로 바꿀 수 있고요. 흠흠~! 아아~! 자, 어때요?” 생식…. 엘프의 성 개념은 아이를 만드는 행위와 기관으로만 인식하고 있어서 이런 쪽으로는 좀 둔한 감이 있다. 아니, 오히려 인간 쪽이 더 문란하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단어 활용법보다는 저 마법활용법에 더 신기함을 드러냈다. 건장한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아름다운 본래 음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별로, 저 얼굴에 그런 음성이라 약간 언밸런스 하다. 그레이프도 내 의견과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해 남자 목소리로 되돌렸다. 그렇다! 한번 제대로 사람들에게 얼굴이 밝혀진 이상! 우리는 이제 꼼짝 할 수 없이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이대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오오~! 신이여! 내가 절규하는 사이 휴식이 끝나고 재출발 신호가 울려 퍼졌다.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익숙하지 않은 팔 다리를 움직여 힘겹게 말에 오르고 스피릿을 올렸다. 스피릿도 갑자기 짧아진 다리와 팔 때문에 말에 오르는데 여간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제기. 이건 너무 한데. 이봐 아레프, 여자 팔다리로는 몬스터와 산적이 나타났을 때 대처할 수 없다고.” 말에 올라 루시아를 태우던 아레프가 고개를 돌리더니 활짝 웃었다. 우욱! 저 예쁜 얼굴이 본래는 남자라고 생각하니 팔에 소름이 돗아 버렸다. 안돼!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콜트처럼 단련된 사람은 운동만 조금해서 몸이 익숙해지면 금세 본래 실력이 되살아날 테니까.” “어, 그래? 이대로 운동신경이 죽어버린 건 아니구?” “아니에요. 원래부터 운동신경이 없는 보통사람은 모르지만 콜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은 금세 본 실력이 되살아나요. 마법도 인과율을 법칙을 따르고 있거든요? 모양은 변해도 알맹이는 변하지 않아요. 그 증거로 우리는 여자로 변했지만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꺅!”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 그만 말해!” 안장주머니 속에 쑤셔 박아두었던 깨진 숫돌을 꺼내 아레프에게 집어던진 나는 계집애처럼 비명을 지르는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다가 고개를 팩 돌렸다. 익숙하지 않은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손을 뒤로 돌려 매달려 있는 뭔가를 집어 든 나는 한없는 슬픔을 느꼈다. “이건 또 언제 생긴 거래?” 누구 건지는 모르지만 윤기가 좔좔 흐르는 밤색 머리카락이 덜덜 떨리는 손에 붙잡혀 있었다. 그때 엄청나게 가늘어진 내 허리를 안고 있던 스피릿이 고개를 내밀었다. “주인님 머리카락이 길어요. 제가 땋아드릴까요?” “…부탁해.” 눈물을 머금은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스피릿은 흥얼흥얼 노래를 중얼거리며 빗을 꺼내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난 더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발견했다. 안장에 다리를 걸치고 나서 알게된 사실인데. 다리사이에 있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니 왠지 모를 상실감과 함께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웃기는 현실이었다. Running Fire: 22 “같은 이성이라 마음이 놓여서 그런 거예요. 동성연애라는 말 아세요?” “흐압! 익! 합!” 짧은 호흡을 하며 빠르게 몸을 움직이던 나는 약간 상쾌함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돼서 그런가? 갑자기 속도가 올라간 느낌이다. 스텝을 밟는 다리도 가볍고, 하지만 불만도 꽤 있다. 먼저 조금만 뛰어도 이 가슴이 마구 출렁거린다. 미치겠다. 그리고 무게 중심이 가슴과 엉덩이로 옮겨져서 그런지 중심잡기가 꽤 힘들다. 또 남자일 때보다 펀치력이 줄어든 것 같다. 주먹이 작아서 그런가? 그래서 지나가는 상단 대원 중 몸이 좋아 보이는 사람을 데려다가 팔씨름을 해본 결과 팔 힘이 좀 약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팔씨름을 한 사내가 괴물이라는 폭언을 서슴치 않는 것으로 보아 근육은 그대로인 것 같다. 대신 팔의 굵기가 줄어서 원래 힘이 나오지 않은 것뿐인가? 2단 돌려차기를 하고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상쾌한 하늘에 키스를 하고 내려오니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와 내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와~! 서커스인가?” “휘이익~! 아가씨 멋있어! 한번 더 보여줘!” 그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힘찬 도움닫기를 한 나는 더 높이 뛰어올랐다. 원 트위스트에 섬머솔트를 곁들여 뒤로 돌아 착지한 나는 다리가 접질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하 웃으며 나를 가르켰다. 쑥쓰러워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니 사람들을 헤치고 스피릿이 달려왔다. “주인…, 언니!” 난 지금 스피릿의 언니로 되어있다. 코앞에 주저앉은 15살짜리 소녀는 얼른 내 몸을 살피다가 외쳤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다친다구요!” “괜찮아. 괜찮아. 사람들이 좋아하잖아?” “그래도요.” 스피릿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준 나는 구경꾼들에게 손을 좀 흔들어 준 다음 야영자리로 돌아갔다. 샤먼 상단과 마찬가지로 여기 상단도 동그랗게 마차를 정차시켜 야영지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얼핏 듣기엔 방어하기 딱 좋은 모양새라나? 3번 마차의 바퀴 살에 기대어 있는 일행들에게 걸어간 나는 잘 생긴 엘프청년의 인사를 받았다. “어때요? 몸 상태는?” “파워가 줄어든 대신 속도가 오른 느낌이에요. 이 정도면 그럭저럭 격투기는 할만한 것 같은데. 칼은 어떨까? 아레프? 라이트 좀 만들어봐.” 어느새 잠들어버린 루시아를 가슴에 안고 있던 부드러운 눈매의 갈색머리 처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팟! 하고 빛 덩이가 솟아올랐다. 그대로 검을 뽑은 나는 그것을 들고 칼춤을 추어대기 시작했다.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말렸다. “조, 좀 쉬었다가 하세요. 그러다가 몸 상하겠어요.” “아냐. 지금 할 수 있는 건 지금 해둬야 해. 뒤로 미루다간 낭패를 본다구. 흠! 좀 걱정했었는데 별로 무겁지는 않군.” 롱소드를 땅에 박아 넣은 나는 샤프마법이 걸린 검정색 검신의 롱소드를 뽑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한창 저녁식사 무렵일 텐데도 넋을 잃고 칼춤을 추어대는 내 모습을 구경했다. 쳇! 그렇게 보지 말라고! 부끄럽단 말야! 롱소드를 잡은 팔을 멋지게 벌려 동작을 마무리한 나는 이번엔 바닥에 꼿혀있는 은도금 롱소드까지 두 자루를 붙잡아 휘둘러댔다. 사방으로 아름다운 검광이 퍼져나갔다. 스피릿과 아레프, 그레이프가 입을 작게 벌리며 내 모습을 구경했다. “얍!” 한참 신명나게 칼을 휘두르던 나는 두 손에 쥐고 휘두르던 검을 하늘로 던져버렸다. 모두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퍼퍽! 내 앞으로 다시 떨어진 롱소드는 그 날카로운 검신을 파르르 떨며 콜트 슈발츠식 댄싱소드의 마무리를 장식했다. “후우~! 쓸만하군.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소매로 땀을 닦으며 검을 뽑아들고 있으니 주변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검 좀 쓴다는 상단 호위무사들도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난 그들에게 하하 웃으며 손을 흔든 다음 검을 챙겨서 일행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인상을 찌뿌리며 말했다. “내가 남자였다면 야유가 쏟아졌겠지? 빌어먹을…!” “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주인님.” 스피릿은 수건을 들고 와서 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레이프가 말했다. “멋진 실력입니다. 잘 봤어요. 그 정도면 검도 상당히 잘 쓰시는데요?” 난 손을 흔들었다. “노노노, 아니에요. 처음엔 몰랐는데 한참 휘두르니까 손목이 좀 아프더라고. 이래서는 장기전을 무리, 전투가 일어나면 속전속결로 베고 다녀야겠어요.” 첼시아가 왜 채찍을 이용하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다. 스피릿이 내미는 차를 홀짝이고 있으려니 웬 사내들이 우리 쪽으로 몰려왔다. 상단 호위무사들과 동행자로 보이는 여행객들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이름과 나이 같은 사소한 것을 묻거나 혹은 여행동료를 자청하고 나섰는데 이게 영 귀찮은게 아니었다. 화를 내봐도 끈덕지게도 달라붙었다. 남자였다면 주먹을 날리고 대판 싸움을 벌였겠지만 가녀린 아녀자의 몸으로 그런 짓을 하려니 약간 켕겨서 꾹참았다.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잖아? “그러지 말고 저희랑 같이….” “아, 글세 싫다니까요? 저리가요. 저리! 이제부터 잘 거예요!” “그럼 저희 일행이 보호를….” “어허~! 이 사람들이 속보이는 소릴!” 이렇게 말하면 낄낄 웃는다. 당해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너무너무 느끼하고 불쾌하다! 크악! 때려주고 싶어! 내가 욕망을 참기 힘들어하자 그레이프와 아레프가 나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레이프가 헛기침을 좀 하며 바닥에 깔리는 것 같은 저음으로 말했다. “시간이 늦었는데. 이런 시간에 레이디에게 동행을 요구하는 것을 상당히 무례 되는 모습이군요.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시죠?” 점잖은 목소리로 잘생긴 엘프사내가 타이르자 그들 중 몇몇 개념이 있는 사내들은 나에게 사과하고 그만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남은 남자들은 끝까지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 놈들은 그레이프의 말을 무시한 채 이제 아레프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고 있었다. 막 보다못한 그레이프가 화를 내려고 하려는 찰나 그들은 얼른 고개를 꾸벅이고 몸을 돌렸다. 우리는 후끈한 열기를 느끼며 아레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파이어 볼을 만들어서 어디다가 던져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아, 피곤하다. 내가 이런 말하면 우습겠지만 여자들의 마음, 좀 알 것 같아.” 그레이프가 피식 웃었다. 여자였다면 싱긋 웃었겠지만 남자의 모습이라 피식이다. 아레프는 잠들어있는 루시아의 몸을 일으켜 품에 안으며 말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몰라요. 입장이 바뀌어봐야 알죠.” “큭큭, 재미있는 말이야. 인정해.” 아레프는 싱긋 웃으며 바닥에 깔아놓은 침낭 속에 소년의 몸을 가진 루시아를 눕히고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갔다. 그레이프가 그들의 침낭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당신은 안잡니까?” “잘 거예요. 스피릿, 이리와.” 바닥에 침낭을 깔고 마차바퀴에 짐을 쌓아 자리를 만든 나는 편안하게 앉은 자세로 스피릿을 불렀다. 15살 정도라곤 해도 그렇게 작지 않다. 오히려 가슴에 안기엔 크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내 가랑이 사이에 앉아 기대게 했다. 그녀의 등과 내 가슴이 밀착되어 따스함이 전해져온다. “동행자에겐 보초도 세우지 않으니 누워서 자면 편할텐데요.”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알 수 없잖아요? 그레이프? 이 주변으로 알람 마법을 좀 걸어줘요.” 그레이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야영하는 곳으로 돌을 쌓아 알람을 걸었다. 그리고 그녀(?)도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슬슬 잠을 청하려는데 스피릿이 눈을 꿈뻑이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안자? 몸이 작아서 넌 더 힘들잖아?” “아뇨. 별로 힘든 건 없어요. 그렇게 작아진 것도 아니고, 그런데 주인님. 몰랐는데. 주인님 정말 예뻐요.” “칵! 그 소린 하지 말랬지?” “하지만, 정말 예쁜걸요? 아름답다고 해도 되겠어요. 같은 여자로서 부러울 정도라구요.”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거울 있어?” 스피릿은 베시시 웃으며 거울을 꺼냈다. 준비하고 있었구나! 요 맹랑한 녀석! 떨리는 손으로 작은 손거울을 든 나는 그것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그렇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눈매의 매력적인 아가씨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꺅?!” 작은 비명을 지르며 손거울을 접었다.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만져보았다. 최악이다! 스피릿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예쁘지 않으세요?” “…징그럽다! 내 얼굴은 이런 귀족 미망인 같은 게 아냐! 내 얼굴은! 내 얼굴으은…!” “지금 주인님은 아름다워요. 굉장히, 남자일 때와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귀족 미망인 같은 거와는 전혀 틀리다구요.” “그, 그래?” 오늘 처음 깨달았는데. 난 귀가 얕은가보다. 스피릿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얼굴을 앞에 솟아있는 두 개의 산(?)을 잠시 쳐다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주, 주인님.” “응?” “…가슴 좀 만져봐도 돼요?” 으윽…. 내가 잠을 깬 시간은 새벽 무렵이었다. 벌써 부지런한 사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시간, 난 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으윽… 이, 이거 뭐야?” 남자인 내가 느낀 여성의 배설욕구는 매우 독특했다. “모, 못 참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뭔가가 걸렸다. 알고보니 스피릿이 밤새도록 내 가슴을 만져댔는지 셔츠자락은 단추가 몇 개 풀려있고 그 사이로 작은 손이 들어가 있었다. 같은 여자주제에 너무 밝히는 거 아냐?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시간을 꽤 걸린 나는 그레이프가 알람을 걸어놓은 부분을 피해 상단야영지에서 벗어나 근처 숲속으로 들어갔다. 돌을 몇 개 던져서 산짐승과 몬스터의 유무를 확인한 나는 얼른 숲속으로 들어가 적당한 곳을 찾아서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 …처참하다 “이, 빌어먹을.” 고개를 푹 숙이고 일을 마무리한 나는 바지춤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있었다. 스르릉~! “누구냐?!” “어, 어, 콜트님?” “루시아?” 반바지 차림의 루시아가 바지춤을 붙잡고 나왔다. 그녀(?)는 아주 희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마주했다. “다, 당신도야?” “너도?” 내 물음에 루시아는 약간 흥분한 듯이 바지 속을 가르켰다. “이거, 이거, 진짜 신기해. 아침이 되니까 막 커지는 게 느낌이… 우읍?!” “…돌아가자. 변태 꼬마야.” 난 그녀의 입을 가로막고 질질 끌어당겼다. 아무리 성이 뒤바뀌었지만 그래도 내 쪽이 키도 크고 팔 힘도 세다. 그렇게 나는 처참한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했다. 사람들을 깨우고 되는 대로 아침을 해먹고 출발준비를 마친 우리는 말에 올랐다. 스피릿이 등뒤에서 속삭였다. “주인님. 어젯밤에 최고였어요.” “엥?” 뒤를 돌아보니 스피릿이 약간 이상한 눈으로 손을 쥐었다폈다하며 말했다. “주인님 가슴이 너무 좋았… 아윽!” “요즘 왜이리 변태들이 많아졌을꼬, 말세다.” “으응~! 주인님 왜 때리시고 그래요?” “시끄러워, 나락의 길로 접어드는 노예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뿐이다. 그만 하고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 출발하니까.” “예.” 그렇게 상단을 따라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얼른 고개를 내려보니 하얀 손이 내 허리와 가슴을 마구 만지작대고 있는 게 아닌가? “스피리이잇!” “아아, 주인님 너무 좋아… 아으?!” 그녀의 머리에 주먹을 갈겨준 나는 한번 더 그러면 나도 네 가슴 만져버리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스피릿은 헤헤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피릿이 이상하다 왜 이러지? “같은 이성이라 마음이 놓여서 그런 거예요. 동성연애라는 말 아세요?” “으헉?!” 난 깜짝 놀라서 내 옆에 앉아서 말린 고기와 빵을 씹고 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스피릿도 덩달아 놀라서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아레프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친구는 자주 여자로 변하는가 보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행동하는 걸 보니. “비슷한 것끼리는 잘 뭉친다고, 보통 사람은 이성보다는 동성에 더 친밀감을 느끼죠. 왜 학교 같은데 가면 남자아이들끼리, 여자아이들끼리 놀고 그러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말도 안돼!” “말이 돼요. 같은 동성끼리 느끼는 애정을 우리는 우정이라고 부르고 이성과의 애정은 사랑이라고 하며 일정한 선을 유지하고 그것을 넘나들어요. 이 애정이 심하면 집착이 되고 사랑이 되죠.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동성끼리의 사랑은 좀 무섭잖아요? 반대로 당사자들에겐 두려움이 없죠. 항상 곁에 있던 사람이니까. 언제나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대이니까. 같은 남자. 혹은 같은 여자가 위안이 되어 애정이 생기고 사랑이 싹트는 거예요. 대체로 이런 증상은 이성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던 사람에게서 많이 나타나죠. 스피릿, 남자가 무서운 일이 있었나요?” …있었지. 난 다시 드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스피릿이 얼른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 아뇨. 절대로 그런 일 없어요.” 스피릿…. 난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피릿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날바라보았다. 아레프는 간단하게 말을 끝냈다. “그렇다면 자신과 같은 성으로 뒤바뀐 주인님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서 그러는 걸 거예요. 남자였을 때에는 간단한 애정표현 같은 것도 부끄럽거나 쑥쓰러워서 피하다가 갑자기 동성이 되어버리니 그런 거리감이 줄어든 거죠. 순간을 즐기세요. 어차피 원래 몸으로 돌아가면 사라져버릴 감정들이니까.” 스피릿과 나는 응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스피릿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슴 만져볼래?” “푸흡?!” 물을 마시던 스피릿이 분수처럼 물을 뿜어내며 기침을 해댔다. 그녀의 등을 톡탁여주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외쳤다. “주인님 바보! 변태!” “이게? 애써서 생각해 주니까 날 변태로 몰아? 너 어제 밤새도록 내 가슴 만지고 잤지? 그러니 오늘밤엔 네 가슴 만지고 잘 테야. 기다리고 있어.” 이제 스피릿은 자신의 작은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울상을 지었다. 난 호호 웃으며 물잔을 기울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걸은 우리들은 늦은 오후에 멈춰섰다. 상단이다 보니 그렇게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서 우리는 하루를 더 노숙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일 점심 무렵에는 도착할거예요.” “빨리 남자로 돌아가고 싶어.” “난 남자도 괜찮은데.” 루시아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레이프는 내 손을 들어주었다. “저도 빨리 이 몸에서 벗어나고 싶군요.” 하지만 아레프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것 같다. 불가에 쭈그려 앉은 그녀(?)는 방글방글 웃으며 주전자에 차 잎을 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사람도 있군.” 그레이프가 무언으로 동의했다. 마차를 동글게 만들고 야영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뿜빰뿜빰~! 그러자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비상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휘리리리릭!! “습격이다! 홉고블린이다! 여자와 아이들은 안쪽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검을 들어라!” “이런 염병! 스피릿! 루시아! 아레프 옆에 붙어있어! 아레프! 두 사람 부탁합니다!” “염려 말아요!” 아레프는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상단 대원들의 안내를 받아 마차중앙으로 산발한 갈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달려갔다. 나와 그레이프는 각자 활과 검을 뽑아들고 마차를 뛰어넘어 밖으로 나가보았다. 해는 이미 졌지만 서쪽하늘에 남아있는 붉은석양 덕분에 근처 숲에서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고 쏟아져 나오는 홉고블린들의 흉측한 모습은 아주 잘 보였다. 거의 오크 만한 크기의 홉고블린은 손과 다리에 날카로운 칼날을 붙인 모습으로 네발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원숭이 같아서 가슴속으로 어떤 살해본능을 솟아올랐다. 난 저런 유인원계열의 몬스터를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고블린이나 홉고블린, 트롤 같은 경우엔 보는 족족 사냥해버린다. 이유는? 글쎄, 굳이 정의 내리자면 정체성의 문제랄까? 인간은 신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나는 학계에서 주장하는 진화론 쪽에 더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면 요컨대 인간은 저런 원숭이 같은 모습에서 점차 진화를 해서 마침내 이런 모습이 되었다는 거다. 여기서 신기한 건 저런 홉고블린의 얼굴과 손발의 모습 등이 놀랄 만큼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걸 보면 그 진화론이란 것의 신빙성을 느끼지만 가슴 한 구석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혐오감과 맹렬한 살해본능이 일어난다.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어서 일까? 하지만 다른 유사인종, 이를테면 오크나 엘프, 드워프등은 봐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직 아직 모양이 덜 잡힌 건 같은 저런 유인원만 보면 살해욕구가 생긴다. 아마도 더 이상 유사인종을 늘리고 싶지 않다는 비열한 인간적 정체성에서 빚어진 일종의 자리 지키기 같은 거라고 생각된다. 우리도 참… 우스운 존재다. “이야아아압!” 칼을 머리위로 들어올린 나는 있는 힘껏 달려오는 유인원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퍼석! 뇌수와 피가 쏟아졌다. 하얀 이빨을 들어낸 나는 저쪽에서 몰려오는 홉고블린들에게 자동석궁을 난사했다. 투투투투투퉁~! 짐 더미 위에서 컷포짓 보우를 들고 엄청난 속사능력과 정확한 명중률을 선보이며 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들을 엄호하던 그레이프가 외쳤다. “서쪽 마차가 뚫리려고 합니다. 그쪽으로 막아주십시오!” 호위무사들은 그(?)의 말을 듣고 서둘러 서쪽 마차로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시뻘겋게 물든 세상으로 더 시뻘건 불덩이들이 솟아올랐다.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오른 수십여발의 파이어 볼은 완만한 탄도를 선보이며 바닥에 떨어져 폭발을 일으켰다. 쿠왕! 쾅! 뻐벙! “퀘에에!” “캬아악!” 사방으로 흙먼지와 나뭇가지들, 그리고 홉고블린의 시체가 날아다녔다. 덕분에 신이 난 나는 덤벼들은 홉고블린 사이를 빠르게 뛰어다니며 롱소드로 목을 긋거나 혹은 자동석궁으로 정면에서 덤벼드는 녀석의 얼굴에 화살집을 만들어버리는 식으로 놈들을 착실히 쓰러뜨려 나갔다. 그러다가 괴성을 지르며 유난히 덩치가 큰 녀석이 내게로 덤볐다. 몸을 옆으로 살짝 비튼 나는 오른손에 쥐고있는 롱소드로 녀석의 목을 베어버렸다. 검에 샤프처리가 되어있기 때문에 여자의 몸인 내가 휘둘러도 홉고블린의 목은 간단하게 잘려나갔다.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피를 뒤집어쓰며 난 이를 드러냈다. “덤벼라! 인간 계집애 하나 못 이겨서 어디 산적 질 해먹고 살겠냐?! 이 뭔가 되다가만 녀석들아!” “이야하아아!” 내 외침을 따라 호위무사들과 모험가, 상단 대원들이 노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끝없이 덤벼들던 홉고블린들이 움찔하며 멈춰섰다. 난 자동석궁을 들었다. “달아나지마! 아직이야! 아직! 달아오른 내 몸을 식혀줘! 오하하하하~!” 퉁퉁퉁퉁퉁퉁~! “캬하르르륵!” 뒤로 물러서던 녀석이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홉고블린은 하나가 겁을 먹으면 모두가 겁을 먹는다. 난 좀더 녀석들을 벨 요량으로 검을 들고 녀석들에게 달려갔다. 그때 파이어 볼이 날아다니던 하늘로 이번엔 수천 개의 초록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매직미사일?! 엄청난 양이다! 불꽃놀이 같아? 솟아오른 매직미사일들은 고블린을 향해 날아갔다. 퍼퍼퍼퍼퍼퍽!? 퍼퍽?! 사방에서 뭔가에 두들겨 맞는 소리와 고블린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놈들은 곧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케르륵! 케륵!” “쿠아악! 캬아아아!” “어딜 도망가 이놈들아!” 쫓아가려 했지만 놈들이 너무 빨라서 난 뒤만 바라보아야 했다. 잠시 후 슬슬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몸을 돌린 나는 짐 더미 위에서 빈 화살통을 버리고 있던 그레이프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마차안쪽으로 향했다. 스피릿이 얼른 달려왔다. “꺅! 주인님 얼굴에 피가~!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스피릿이 호들갑을 떨며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주었다. “스피릿, 다친데는 없지?” “예. 전 괜찮아요.” “그럼 됐어.” 난 싱긋 웃었다. 그러자 스피릿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계속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냈다. 그때 아레프가 다가와서 말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콜트는 항상 싸우면 피가 묻어요.” “밥벌이 실력은 있다는 증거야.” 난 스피릿에게 손수건을 받아 이마에 뭍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이 일이 끝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례하겠소. 난 여기 상단 책임자 듀포 게일이라는 사람인데. 혹시… 콜트 슈발츠양?” 양…. 그렇지. 지금 내 몸은 여자였지. 난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붙잡고 흔들어주었다. 듀포는 나에게 여자의 몸으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며 내 손을 두 손으로 잡아주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 거기 엘프 님도 정말 고맙소.” 그레이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그는 아레프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법사 아가씨. 큰 도움이 됐소.” “어마~! 호호호호~! 별말씀을~!” 아레프는 호들갑을 떨며 그의 두꺼운 손을 잡고 흔들어주었다. 아레프와 듀포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인상을 찌뿌리고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니 꽤 많은 사내들이 몰려와서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눈빛들이 하나 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으…! 싫어! 저런 눈빛! 침을 흘리며 날 쳐다보는 남자들의 시선에 갑자기 온 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이 나에게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전투 중에 외친 문제의 발언 때문이라고 한다. 크악! 홉고블린의 시체를 처리하고 보니 어느덧 어두컴컴해졌다. 끔찍한 사내놈들의 지저분한 추파와 시선을 물리치고 야영자리로 돌아온 우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레프가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거칠게 굴지 마세요. 그럼 남자들이 싫어 한다구요.” 눈을 사납게 뜬 나는 팔을 앞으로 뻣어 아레프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남은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꽉 움켜쥔 나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당신 원래 남자잖아? 안 그래? 성(性) 정체성을 잊지 말자구. 앙?” “아앙… 그렇게 잡지 말아요. 아파요. 아아~!” 아레프가 신음을 흘려대자 갑자기 등으로 오한이 들었다. 징그럽다는 듯이 그녀(?)를 밀어낸 나는 손을 좀 흔들어댔다. 루시아가 끼어 들었다. “안돼요. 콜트누나. 여자는 부드럽게 다뤄야 한다구요. 이렇게….” 루시아는 아레프의 무릎에 앉아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당장 아레프가 얼굴을 물들이며 신음소리를 흘려댔다. 낄낄대는 루시아를 보고 기가 찬 나는 주먹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아윽~!” “…이 변태 꼬마야. 그만두지 못해?” “아… 난 괜찮은데….” 얼굴이 발개진 아레프가 새끼손가락을 입에 물고 요염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눈살을 찌뿌린 나는 허리에 찬 검을 흔들어댔다. 철크럭 철크럭~! “부탁이니 우리들의 정체성을 잊지 말자. 응?”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고 순간을 즐겨요. 어차피 사라질 모습이에요. 뭐 어때요?” “몸이 여자가 됐다고 정신까지 여자가 될 수는 없단 말야! 난 남자라구! 지금도 난 이 수박 만한 가슴 때문에 숨쉬기도 불편해! 알아?!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런 정체성 상실은 보이지마! 불쾌해! 남자 주제에 여자가 됐다고 신음소리라니! 으아! 이건 말세야!” 아레프와 루시아는 물끄러미 날 쳐다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담요를 끌어당겨 몸과 얼굴을 덮었다. …딴에는 생각해서 그런 것 같은데 슬프게도 속닥대는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온다. “루시아. 이대로 한번 해볼까요?” “어머, 주인님. 너무 밝히시는 거 아니세요? 처음하면 아파요.” “크악!”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그들이 숙덕거리고 있는 담요로 몸을 날렸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꺅~!” 그레이프가 말리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그녀들을 잡아먹겠다고 날뛰고 있을 거다. 두 사람을 자리에 앉혀놓은 그레이프가 말했다. “저도 콜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런 몸이 되었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켰으면 좋겠어요. 정체성을 무시하고 벌이는 행동은 엘프로서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아시겠지요들?” “예에.” 아레프와 루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코를 좀 벌렁거린 나는 침낭을 들고 멀찍이 떨어져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스피릿.” “예~!” 스피릿이 달려왔다. 난 그녀를 침낭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루시아가 날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자기는….” “추워서 안고 자려는 것 뿐이야. 당신들과 비교하지 말아 줘.” 아레프가 베시시 웃었다. 난 스피릿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빨리 남자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럼 눈치 안보고 안아 줄 수 있을 텐데.” “전 이대로도 좋은 걸요?” “스피릿, 너까지 그럴꺼야?” 스피릿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내 가슴을 만져보며 말했다. “나보다도 커요. 와아.” “그만둬. 간지러워.” 스피릿은 쿡쿡 웃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한 30분 지났을까? 주변도 조용해 졌고 나도 거의 잠이 들려고 하는데 뭐가가 내 입술에 닿아 있었다. 깜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스피릿이 키스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스, 스피릿? 무슨 짓이야?” “주인님, 주인님이랑 키스하고 싶어요.” “어, 야. 나, 나 지금 여자라고, 목소리 들어보면 몰라?!” “…그래서 더 해보고 싶어요. 주인니임.” 스피릿은 두 팔로 내 어깨를 잡아당기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몸이 바싹 붙어있는 상황에서 난 어떻게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입술을 내주고 말았다. 몇 번 반항을 하며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스피릿은 뭔가에 홀린 듯 끝까지 달라붙었고, 결국 나는 그녀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우울하게 세상을 부정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날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선에 일일이 대답을 들려줄 만큼 기분이 좋지가 못했다. 그렇게 앉아있는데 짐을 싸던 루시아가 이런 날 보고 쪼르르 달려와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나에게 물었다. “왜 아침부터 그런 얼굴이에요?” “내 얼굴이 어떤데?” “사랑하는 연인에게 억지로 순결을 빼앗긴 처녀의 얼굴이네요. 아아! 아파요~!” 눈썹을 세우고 그녀(?)의 볼을 꼬집은 나는 스피릿이 말려주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하고 있었을 거다. “으앙~! 콜트누나가 꼬집었어~!” 루시아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가에 바르더니 엥엥거리며 아레프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스피릿을 힐끗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이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정체성을 잊지 말자고 그렇게 떠들어댄 주제에, 약속하나 지키는 못하는 내 자신이 굉장히 싫어졌다고 말하면 넌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 중이야.” 스피릿은 쓴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한 그녀는 날 달래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마침내는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키스하고 몇군데 좀 만졌다고 너무 그렇게 울상 짓지 마세요. 그럼 허락도 없이 주인님에게 순결을 빼앗긴 제 기분은 어땠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우울해 하는 거 아냐. 처음 알았어. 여자들의 이 더러운 기분. 빌어먹을 정체성? 쳇! 이제 될 대로 되라지. 난 15살짜리 소녀에게 바보같이 순결을 빼앗긴 얼치기 자식이야.” 다리를 세워 무릎 위에 턱을 올리려고 했지만 이 수박 만한 가슴 때문에 턱이 무릎 위에 닿지 않는다. 묘한 기분이다. 그래서 바닥에 퍼질러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보고 있으니 스피릿이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귓가로 아레프와 스피릿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레프씨. 다음 번에 마을에 도착하면 하루만 남자로 바꿔주세요.” “왜요?” “바보 주인님에게 진짜 절망감과 상실감이 어떤건지 가르쳐 드리려구요.” 윽!?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나는 아레프에게 달려가 스피릿을 붙잡았다. “내, 내가 잘못했어! 안그럴께!” 하지만 스피릿은 악마적인 카리스마가 엿보이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녀를 알고 처음 보는 미소였다. “늦었어요. 제가 당한 고통, 그 기분, 전부 돌려드릴께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난 절망에 찬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설득하려했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얼마 후 출발 신호가 울렸고 난 마을에 도착할 때쯤이면 잊어버리겠지 라는 마음 편한 생각을 하며 나 자신을 달랬다. 한편으로는 스피릿이 남자가 되어 날 덮치려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섬뜩한 생각도 했다. …갈수록, 중증이다. 난 어떻게든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획을 세우며 마상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반나절을 더 걸어가자 우리는 수도 캘버린의 위성도시 카미르에 도착했다. 수도의 인구밀도를 낮추고 주택난을 해소하고자 수도에서 마차로 하루거리에 조성된 위성도시 카미르는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그 웅장한 위용으로 몸소 보여주었다. “수도 가까이에 있다보니 확실히 마을이 커지는 구나. 도시조성도 잘되어 있고.” “여기서부터는 수도까지 하루거리인데다 레인저까지 돌아다니기 때문에 상단 편을 이용하지 않아도 돼요. 몬스터도 없고 도적 떼도 없으니까.” “그거 다행이네요.”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광장에서 상단과 헤어진 우리는 말에서 내려 도시를 구경해가며 숙소를 찾았다. 안내는 아레프가 맡았다. 대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확실히 큰 도시다보니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은 것 같아. 대처 저걸 어떻게 사람이 쌓았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탑과 신전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주변에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을 의식하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시선도 우리가 여자니까?” “물론이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랄까?” “…그거 지금 비유라고 하는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며 아레프의 멱살을 잡아당기자 주변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던 아가씨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 멋져!” “큰언니 같은 사람이야. 역시 모험가일까?” “아아~ 한번 안겨보고 싶어.” …뭐, 안기고 싶어? 갑자기 무서워진다. 내 얼굴은 사내들만이 아니라 저런 아가씨들에게도 관심이 생기는 종류의 것이었나? “모르셨어요? 지금 주인님 얼굴은 남자는 물론이고 저런 아가씨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라구요.” “어째서야! 지금 이 몸은 여자라구!”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 사람의 가치관마저도 바뀌게 되죠. 그리고 가치관이 바뀌면 그 가치관의 정의한 미인의 관념도 바뀌고요. 아시겠어요? 지금 주인님의 몸매나 얼굴은 남자는 물론 여자들에게까지 좀 위험한 애정을 불러 일으킨다구요.” “윽! 싫어!” 난 스피릿은 손을 잡아끌고 사람들의 시선이 닫지 않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오던 아레프가 말했다. “저기요. 저기 보이는 여관이 괜찮아요. 여관이 작아서 손님이 별로 없는 대신 음식도 맛있고 저 집에서 서빙하는 아가씨가 특히 예쁘거든요?”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얼른 그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사람들 한번씩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따갑다! “어서오세요. 뭘 드릴까요?” 스피릿 만큼 예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제 겨우 1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조그만 소녀였다. 고개를 돌린 나는 아레프를 좀 쳐다본 다음 외쳤다. “1인실 방 3개!” “저 따라 오세요.” 방으로 올라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서는 아레프를 잡아끌고 왔다. “자. 이제 원래대로 해놔.” “디스펠 매직. 폴리모프 아더.” 마을 마친 아레프는 다시 밖으로 나가려했다. 난 그의 어깨를 잡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이봐! 아직 바뀐 게 없잖아?! 목소리도 그대로고 손도 바뀌지 않았어!” “미안해요. 콜트. 스피릿양이 하도 부탁해서. 나로서는 약속을 지켜야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설마?! “아….” 뒤를 돌아보니 스피릿은 원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긴 회색 머리카락, 하지만 좀 이상하다. 브라우스에 솟아올라와 있어야할 가슴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저 단단한 어깨선은 뭐냐? “어머나…?” 굵어진 손가락과 팔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그녀는 바지를 풀더니 안의 모습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복수의 감정은 다른 모든 감정을 짓누르는 법. 그녀는 헛기침을 좀 하더니 놀라움보다는 복수에 매진했다. 이제 그가 된 그녀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아, 스피릿?! 이러지마. 이럼 안돼. 난 네 주인이라구!” “허락도 없이 제 순정을 빼앗은 게 누군데 그러세요? 이리 오세요. 처음이라 잘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볼테니까.” “아, 안돼! 저리가!” 패닉에 빠져든 나는 문으로 달려가 손잡이를 잡았다. 열리지 않는다?! 이런 망할! “아레프! 죽인다! 문 열… 히익?!” 그때 뭔가가 내 등에 바싹 달라붙었다. 스피릿?! 그녀는 내 가슴을 만지작대며 귓불을 깨물었다. 윽…?! “어때요? 기분 좋으세요? 후우….” 흥분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녀는 이제 내 허리를 끌어당겨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반항하려 했지만 이게,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잘 안된다. 스피릿이 이렇게 무서워진 건 오늘이 처음이다. Running Fire: 23 “물론이죠. 주인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갈 거예요.” “…나쁜 계집애.” “제가 이렇게 된 건 다 주인님 책임이에요.” 코를 훌쩍인 나는 침대에 누워 손을 들어보았다. 해가 지자 몸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남자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해지기 전의 기억과 느낌은 그대로 몸에 남아 날 괴롭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징그럽고 더러운 기분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옷을 주워 입었다. 스피릿은 이런 일을 벌였는데도 불구하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담요를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부끄럽지 않아? 너 샤먼에 있을 때하고는 달라진 것 같아.” 바지를 입고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물었다. 스피릿은 얌전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흐음, 글쎄요. 저와 주인님의 관계가 사창가 손님과 창녀의 그것이었다면 별다른 감정이 없었겠죠. 강간당한 처녀와 색마의 관계였다면 화가 나고 치욕을 느꼈을 거예요. 어쩌면 이대로 칼을 뽑아들고 주인님을 찌른 다음 혀를 깨물거나 했겠죠. 그리고 그저 그런 주종관계일 뿐이었다면 주인님 말대로 부끄러워했겠죠. 실제로 한달 전까지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관계는 그런 게 아니에요.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어요. 그래야 이런 제 행동이 용서 될 테니까.” 뒤를 돌아보았다. 담요로 몸을 가린 스피릿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지금 전 기뻐요.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는 만큼 안을 수 있으니까.” 몸을 돌린 나는 터벅터벅 침대로 걸어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스피릿은 내 가슴에 이마를 박고서 얼굴을 비벼댔다. 이렇게 된 이상, 난 그녀를 확실하게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야. “뚝, 울지마. 행여 내가 다른 생각 품고 있지 않은가 하는 망상은 그만둬. 스피릿은 내가 책임져 줄 거야. 그러니까 안심해. 알겠지? 사랑해 스피릿.” 스피릿은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씩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자. 어서 옷 갈아입어. 밥 먹고 야시장 구경가자.” “예.”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인 스피릿은 날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홀로 내려가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레이프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음식을 시켜놓고 그녀와 함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아레프와 루시아가 나왔다. 그런데 아직 마법이 걸린 채였다. “뭐야? 그 모습은? 안바꿀꺼야?” “좀 있다가 바꿀거예요.” 멱살을 붙잡고 왜? 라고 물으며 가슴을 주물러 주고 싶지만 내 코가 석자기에 그냥 입다물고 있어 주기로 했다. 게다가 지금은 남자로 돌아왔기 때문에 여자가슴을 만지는 건 좀 무리이지 싶다. …아무리 상대가 변태마법사라도 말이지. 저녁을 먹은 우리는 기분전환을 위해 잠시 야시장 구경을 나갔다. 겸사겸사 시장도 좀 보고, 그레이프도 따라왔다. “전 무기점에 들려서 화살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레이프 이거 해봐요. 이거!” 난 파란 리본을 사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은 파란 리본을 좋아하시나 봐요?”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자주 하고 다니셨거든?” “선물로 받아들이죠. 감사합니다.” 그레이프는 내가 준 리본으로 머리를 올려 묶었다. 항상 산발하고 다니던 사람이 머리를 올리면 갑자기 인상이 바뀌는 것처럼, 그레이프도 소녀 티가 묻어나는 얼굴이 되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와 스피릿은 입을 살짝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119살입니다.” “어디가서 귀만 가리고 19살이라고 하면 다들 믿어주겠어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참고할게요.”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갈색 머리카락을 파란리본으로 묶은 예쁘장한 아가씨가 나에게 윙크하고 있는 게 보였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사람이 점점 친해지니까 이상하게 변하는 것 같다. 아니, 이게 마법사의 본성이라는 건가? 덜덜 떨리는 주먹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보기 흉하니 그만 두라고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아레프는 깔깔 웃으며 달려가 버렸다. 쫓아가서 때려주고 싶은 욕망을 꾹 참은 나는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틈틈이 시장을 봤다. 내일도 여행을 해야하니까, 하루 밖에 안 남았지만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지. “스피릿? 이거 좀 들고 있어줄…? 스피릿?”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스피릿이 보이지 않는다. 어? 어디 갔지? 이전에 캐슬린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 한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처에서 놀고 있는 아레프와 루시아에게 그녀를 물었지만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다트를 들고 표적지를 맞추던 그레이프가 말했다. “아까 마실 것 사러 간다면서 저쪽으로 갔는데요? 아, 저기 오는 군요.” “주인님!”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이 종이를 접어 만든 컵에 과일 주스를 담아서 들고오고 있었다. 후다닥 달려간 나는 그녀가 들고오는 것을 받아들며 말했다. “어디 간다면 말하고 좀 가. 걱정했잖아?” “흥정 방해하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레이프에게 말하고 갔는걸요?” “쯧, 놀랬잖아.” 난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스피릿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괜찮다고 말해주려는데 저 뒤쪽에서 웬 사내들이 우리 쪽을 한참 쳐다보다가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누구지? “아, 아까부터 제 뒤를 졸졸 따라 오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방금 전에 주인님을 크게 불렀죠.” “어이구, 우리 스피릿은 너무 예뻐서 혼자 어딜 못 보내겠어요. 어쨌든 다행이다. 수도 근방이라고는 해도 예쁜 아가씨들은 밤길 조심해야겠구나.” “어마. 그래요. 요새 들어 밤길이 얼마나 무섭다구요.” “…슬슬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어?” 아레프는 깔깔 웃으며 루시아의 손을 잡고 솜사탕 가게로 달려갔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때 그레이프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신병자가 되기 쉬운 직업이 고위 마법사라고 하더군요. 아레프씨, 확실히 레벨 7급짜리 마법사니까….” 난 지금 웃어야 할지 아니면 그녀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야시장에서 돌아온 우리는 하루를 여관에서 묶고 다음날 아침 출발을 서둘렀다. 잠이 덜깬 스피릿이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려는 내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하루만 더 쉬어요오오, 주이니이임~! 졸려요요….” “미안해 스피릿, 그 복면 쓴 괴한들이 또 언제 따라붙을지 모른단 말야. 그러니까. 한시바삐 수도로 들어가야 해. 그리고 요새 지출이 너무 많았어. 다시 또 벌어야 한단 말야. 응?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 줘.” 난 그녀의 볼을 살살 매만져주며 말했다. 볼을 부풀린 스피릿은 우웅~! 거리는 음성을 토해내며 한동안 침대에서 굴러다니다가 내가 준비를 다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그제 서야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준비 끝나는 대로 홀로 내려오라는 말을 하고 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언제나처럼 그레이프가 아무도 없는 홀에 앉아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와요. 차 드시겠어요?” “어허~! 오늘은 날씨가 더 쌀쌀해 진 것 같은 데요?” “이제 11월이니까요.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아까 주인장에게 들었는데 캐슬린과 베레타에서 벌이던 평화회담이 무산됐다고 해요.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고 하던데.” “이거, 전쟁은 싫은데. 그레이프는 마을로 돌아가야겠군요?” “그건 모릅니다. 판단은 저 같은 어린 엘프가 아니라 장로님들이 하시는 거니까. 일단 캐어릭에 도착하면 다른 지시가 있을 거예요.” 그레이프를 잠시 쳐다보던 나는 그녀의 의아한 시선을 받고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물이라도 하나 줘서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점점 라이트 놈을 닮아가는 아레프와 루시아가 걸어나왔다. 루시아는 오랜만에 원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소년의 모습도 좋지만 난 이쪽이 더 보기 좋아. 간단하게 아침을 주문한 우리는 스피릿을 내버려두고 아침을 먹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식사가 끝나고 한참 후에 내려온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내가 따로 챙겨놓은 우유병과 방금 구운 따끈한 빵을 두 손에 들고 야금야금 빵을 씹으며 말했다. “너무해요. 좀 기다려 주시지도 않구. 음음.” “노예야. 사랑하는 내 노예야. 감히 주인님에게 기다려 달라고 그랬느냐? 요새 늦잠도 마구 자고 이 주인님에게 못되게 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기합이 부족하구나. 오늘밤 채찍이라도 몇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그러자 스피릿이 눈을 매섭게 뜨고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주인님 변태. 어디 그러시기만 해봐요. 관리원에 변태폭력 주인님으로 고발할거예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대충 짐작이 간다. 빨리 먹어라 게으름뱅이 노예야. 좀 있다가 출발한거니까.” 내 말을 들은 스피릿은 빵과 우유를 단숨에 해치운 다음 손을 탁탁 털었다. 고개를 좀 저어준 나는 동료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헛기침을 조금 한 다음 말했다. “자, 이제 하루만 더 달리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각자 오늘 하루만 더 힘냅시다. 그리고 여기 그레이프 양께서는 아직 여정이 끝나지 않았으니 그녀의 앞길에 희망과 절망의 신 델린저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감히 출발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 봅니다.” “와하하~! 콜트 말 잘하시는 걸요?” 아레프가 박수를 쳤다. 그레이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배낭을 들었다. 문밖에는 여관의 말구종이 우리들의 말을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가자. 귀족과 기사의 도시 왕도 캘버린으로.” “주인님 나레이션 멋있어요.” 스피릿과 나는 킥킥 웃으며 말에 올랐다. 다른 동료들이 말에 오르는 동안 말구종에게 팁을 주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던 나는 우연하게도 스피릿이 대단히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튕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팅그르르~! “이걸로 맛난 거 사먹으세요.” 싹싹한 미소의 소년은 손바닥에 떨어진 1만 루나짜리 동화를 받아들고 넙죽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걸로 맛난 것 사먹으세요?” 스피릿은 내 등에 이마를 박고 킥킥 웃다가 말했다. “주인님이 자주 쓰시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모르네요? 제가 노예인거?” “당연하지. 마법사가 아닌 이상은 손등과 어깨의 문장을 보이지 않으면 노예인지 아닌지 몰라. 자신감을 가져.” 아레프의 말에 탄 루시아의 조언이었다. 스피릿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다짐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말을 몰아 서서히 열리는 성문으로 향했다. 그때 내 허리와 가슴을 더듬던 스피릿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주인님 여자 몸이었을 때는 참 좋았는데. 허리고 가늘고 가슴도 빵빵하고.” “시끄러, 다신 여자 몸 되고 싶지 않아. 기분 나쁘다구.”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난 혼절하고픈 기분을 느꼈다. 스피릿은 내 귓가로 입을 가져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어제 밤 주인님 신음소리 정말 최고였어요.” 커억…. 봄의 느즈막에 태어나 여름의 끝자락까지 청춘을 불사르고 가을의 초입에 죽음을 예견하여 자식을 남긴 다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잔혹한 겨울을 맞이하는 산과 벌판을 하루종일 달린 우리들은 저녁 무렵, 거대한 빛 기둥을 하늘로 쏘아올리는 왕도에 도착했다. “기분 같아서는 저 성문 앞에 주저앉아 돌 바닥에 키스하고 만세를 외치고 싶어.” “남들 보는 눈도 있으니 그건 제발 참아주세요.” 옆에 서있던 아레프가 하하 웃어댔다. 그레이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덕분에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벌써 끝난 것처럼 말하지 마십쇼.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자~! 오늘은 어떤 여관에 들려서 무슨 음식을 먹을까?” “광부의 노래라는 여관에 들려서 애플파이를 드십시오.” 엥? 고개를 돌리니 멋진 갑옷의 사내가 우리들에게 약식 경례를 해왔다. “왕도 캘버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행자이십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시민증과 스피릿의 노예 등록증을 내밀었다. 우리들의 신분증을 모두 확인한 경비병은 다시 경례를 마치며 말했다. “노예들이 참으로 아름답군요. 예. 신분증의 하자는 없습니다. 통과하십시오. 참, 애플파이 맛있으니까. 꼭 한번 드셔보십쇼.” 우리는 그러마하며 손을 흔들어주고 성문을 통과하여 수도 내로 들어갔다. 수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위성도시 카미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대신 상당히 거대했다. 왕의 성이 있어서이기 때문일까? 가로수와 가로등이 번 갈아가며 심겨져 있는 대로를 따라 가니 밤인데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와~! 사람 많다.” “뭐, 그렇죠. 수도니까. 어쩔까요? 이대로 마법사길드에 먼저 들릴까요?” “그레이프도 있으니까 하루 묵고 가면 안될까? 밤에 찾아가기도 뭣한데.” 아레프는 새벽에 찾아가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며 내 의견에 따라주었다. “저도 환영식으로 시달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럼 하루 쉬고 가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광부의 노래라고 하는 여관을 물어 그곳으로 향했다. 광부의 노래는 5층 짜리 여관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달려나온 말구종에게 말을 맡기고 안으로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다가 새로 들어온 우리들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스피릿은 얼른 내 뒤로 숨었고 난 허리에 매달린 롱소드를 의식적으로 흔들거리며 점원이 안내해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스피릿이 내 옆으로 바싹 의자를 붙여 앉으며 말했다. “어, 여관 분위기는 여느 곳이나 거의 비슷하네요? 수도라서 좀 다를까 했는데.” “사람 사는 곳이 어디 틀리겠어요? 이봐요! 주문 받아요!” “예 손님! 뭘 드릴까요?” “하루 묶을 1인실 방 세 개하고 맥주 다섯 잔, 그리고 애플파이 좀 가져와봐요. 수도경비대원이 자랑하던데 여기 애플파이가 맛있다고.” 아레프의 말에 화려한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아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나온 맥주와 애플파이가 나왔다. 수도경비대원이 말했던 것처럼 확실히 맛있었다. 몇가지 음식을 더 시켜 저녁을 먹은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고 욕탕으로 내려가서 좀 씻었다. 욕탕은 캐슬린 공중목욕탕처럼 커다란 탕에 들어가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화의 교류란 바로 이런 건가보다 하고 생각하며 생판 처음보는 남정네들과 뜨거운 욕탕 안에 들어가 앉아있으려니 새로운 멤버가 수건으로 아래를 가리고 탕 안으로 들어왔다. 아레프이겠거니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퍼피?” “아? 콜트 님?” 오랜만에 만난 그와 나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윗부분이 뚫려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꺄아악! 안돼요! 안돼요! 이거 놓으세요! 으앙! 주인님 살려줘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밤이 깊어지자 하루 일을 끝내고 맛있는 애플파이와 시원한 맥주로 피곤을 달래려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욕탕에서 나와 한산한 홀에 앉은 나는 앞에 앉아있는 빨간머리 아가씨를 노려보았다. “사과해. 이 변태야.” “흥, 노예에게 무슨 사과는? 그나저나 얼굴에 손바닥 도장 멋진걸?” “쓰으읍… 자꾸 속 긁지 말고 좋게 말할 때 사과해. 한두번도 아니고 이게 몇 번째야?” 첼시아는 스피릿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흠칫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첼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노예에게 사과하느니 혀 깨물고 죽겠다. 대신 당신에게 사과하지. 예쁜 노예 때문에 고생이 심하신걸?” “이게….” “주인님 참으세요.” 스피릿이 얼른 날 말렸다. 자리에 앉은 나는 한 손으로 벌겋게 물든 뺨을 만지작댔다. 처음엔 적당히 무시하려했지만 스피릿이 죽는다고 고함을 질러대기에 난 얼른 바지만 입고 여탕으로 난입했다. 그리고 변태로 오인 받아 웬 아가씨에게 멋지게 뺨을 얻어맞았다. 무식하게 팔 힘도 좋지. 제기, 맥주를 들이키고 있으니 마침 아레프가 목욕하러 내려가다가 우리에게 걸어왔다. “어? 그분은 누구세요?” “처음 보는 사람이….” “어머, 안녕하세요. 첼시아 발렌타인이에요. 콜트의 모험가 친구죠.” 아레프는 그녀의 거짓말에 홀딱 속아넘어가 몇마디 인사말을 나누고는 루시아를 데리고 욕탕으로 내려갔다. 첼시아가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루시아랑 같이 목욕탕 가는 저 사람은 누구야?” “아레프라는 수도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야. 난 돈 받으러 따라 올라온 거고. 루시아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에게 넘겼어.” 말을 마친 나는 스피릿의 손을 잡아끌고 그만 올라가려 했다. “어허,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가려고 하네? 루시아 과거를 저 샌님 마법사에게 불어버릴….” 쾅! 테이블에 다리를 올린 나는 무릎 위에 팔을 얹으며 첼시아를 노려보았다. “루시아는 좋은 주인을 만나서 행복해하고 있어. 방해하면 네 노예를 박살내 버리겠다.” “헤에, 할 수 있겠어?” 난 주머니에서 스크롤 뭉치를 꺼냈다. “골든피크라고 알아? 보조마법 100개를 몸에 걸면 나타나는 현상인데 일단 걸리면 오우거 하고도 맞설 수 있지. 지금 여기서 보여줄까?”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퍼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을 잘 따르는 노예구나. “마스터, 맞섭니까?” “…앉아.” 퍼피는 자리에 앉았다. 금세 표정을 바꾼 첼시아는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고춧가루 뿌리는 거 나도 싫어한다구. 아하하하.” 잠시 그녀를 쳐다본 나는 스크롤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 앉았다. 상대가 먼저 고개를 숙이면 밟지 않는 게 예의다. “여긴 뭐 하러 왔어?” “겨울나러 왔지. 수도만큼 겨울 보내기 좋은 곳도 없으니까.” “일거리 많아?” “짭짤하지. 끼워줄까?” “자리 남으면, 이왕이면 노예하고도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 첼시아는 스피릿을 바라보며 말했다. “푹~ 빠지셨군?” “…다치면 아프다고 앵앵거리니까.” 하지만 첼시아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스피릿에게 물었다. “어때? 요새는 주인님이 좀 안아주니?” 스피릿은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첼시아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응원해 줄 테니 잘해봐. 아참, 스피릿. 그거 조심해.” 첼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고 스피릿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임신 말야. 노예가 허락 없이 주인님의 아이를 가지면 처녀가 임신한 것보다 더 큰일이라고.”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아!” “괜찮아요. 허락은 이미 받았으니까.” 스피릿은 생글생글 웃으며 첼시아를 쳐다보았다. 첼시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정말이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후끈거리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러자 첼시아는 갑자기 사납게 킥킥 웃어대며 나와 스피릿을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달콤한 꿈속을 헤매는 바보들을 구원하기 위해 난 이 말을 해야겠어. 둘 다 환상에서는 그만 깨어나는 게 좋을 거야. 잘못하면 가슴아파 질 수도 있으니까.” 첼시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퍼피는 우리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난 그녀의 말을 듣고 우울해져 있는 스피릿의 손을 붙잡았다. “이게 환상이라면 난 죽을 때까지 바보가 되어 꿈에서 깨지 않을 테야.” 스피릿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보석처럼 매달려있는 저 눈물만 아니라면 정말 보기 좋은 미소였다. 하루를 여관에서 보낸 우리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마법사 길드를 찾아갔다. 그레이프는 하루 더 쉬고 출발하기로 하고 소문의 마법사 길드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왔다. 대로를 따라 한참 걸어간 우리는 시 외곽지역에서 거대한 높이의 담장을 가진 탑을 발견했다. 아레프의 말로는 저게 마법사 길드라는 곳이란다. “엄청난 규모인데? 저거 대체 몇 층이야?”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오른 탑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중간쯤에는 구름이 스쳐 지나고 있다!- 아레프가 문지기에게 마법사 길드원 증명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총 300층. 레벨이 높은 마법사가 높은 층수의 방을 가지게 되죠. 그래서 제방은 14층에 있답니다.” 루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올라갈 때 다리 엄청 아프겠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베이터가 있으니까.” 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적당히 넓은 잔디마당이 있고 무슨 조각상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그레이프가 뭔가를 발견하고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저거, 혹시 훈트 아닌가요?” 훈트?! 그랜퍼스 최강의 군 전투용 키메라?!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담장 근처에 커다란 개집이 지어져 있고 그곳에 하얀 털에 늑대같이 생긴 개가 한가롭게 누워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모양만 개다 뿐이지 그 어깨 높이는 거의 3미터에 육박한다. 꼬리까지 치면 길이는 대략 8미터! 진짜 훈트다. 난 그것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아레프가 말했다. “길드장님과 지고하신 마스터들께서 처음 훈트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 시험용으로 만든 녀석인데 요새는 여기 담장을 지키고 있죠. 성격도 좋아요. 어이! 엑셀! 나왔어!” 그러자 그 엄청난 덩치의 개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아레프를 쳐다보았다. 루시아는 겁에 질려 그의 허리를 붙잡고 안겨들었고 스피릿은 내 등뒤에 숨었다. 하지만 그레이프는 까딱하지 않고 훈트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본을 찾으러 간다고 하더니, 찾은 건가?” “마, 말을 한다?” “훈트는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요. 워낙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시겠지만.” 그때 훈트가 말했다. “호오, 손님들인가? 예쁜 인간도 있군. 엘프도 있고, 친구들인가?”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우리를 소개시켜 주었다. 난 처음으로 훈트와 이야기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받았지만 스피릿과 루시아는 겁만 잔뜩 먹어서 이름만 대답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이쪽은 그레이프양. 엘프지. 여행동료인데 길드에 와보고 싶다고 해서.” “엘프? 오랜만에 보는군, 이리 가까이.” 그레이프는 훈트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훈트는 시커먼 스폰지 같은 코를 내밀어 스피릿의 가슴부분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잠시 후 말했다. “좋은 향기가 난다. 엘프는 이래서 좋아. 그레이프, 그대의 여행길에 상쾌한 아침 햇살이 가득하기를.” “감사합니다. 엑셀씨.” 내 팔뚝만한 이빨이 가지런히 정렬된 입을 씩 올린 훈트는 그 큰 머리를 다시 바닥에 내리며 말했다. “그만 가보도록, 바쁜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 같군.” “수고해.” “아아.” 훈트는 다시 눈을 감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너무 강렬한 인상이다. 전투 키메라 훈트, 이제 아레프는 우리를 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은 입구에서 맞은편 벽에 놓여진 커다란 책상과 안내원으로 보이는 아가씨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장식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그저 동그랗고 넓은 방이었다. 느긋하게 책을 읽고있는 아가씨에게 인사를 건낸 아레프는 우리를 모두 중앙으로 모이게 한 다음 말했다. “언젠가 저를 찾아올 일이 생기시면 저기 앉아있는 슈양에게 부탁하세요.” 그러자 슈라고 불린 아가씨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치레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모여서 있던 원형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어?!” “놀라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흔들리는 건 없을 테니까.” 루시아는 얼른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갑자기 바닥이 움직이자 좀 당황했지만 그건 호기심을 바뀌었다. 그레이프가 말했다. “역시 마법사 길드군요. 기대했던 것 이상이에요.” 아레프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판이 정지했다. 우리가 서있는 곳 주변으로는 네 개의 방문이 있었는데 각 문에는 이름이 씌여진 명패가 붙어있었다. 아레프는 그 중에서 자신의 이름이 있는 문을 열고 우리를 안으로 인도했다. “정리가 좀 안돼서 지저분할지는 몰라도 여기가 제 방입니다.” 방안은 엄청나게 넓었다. 탑의 넓이를 계산해봐도 이건 말도 안되는 용적이다. 그레이프가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공간왜곡 사용하고 있군요?” “잘 아시는 군요. 방이 좁다보니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살림살이가 다 들어가질 않아요. 저기 앉아 계세요. 차라도 한잔 대접 할 테니.” 아레프가 가르킨 곳은 양탄자가 깔려있고 몇 개의 소파가 놓여져 있었다. 유일하게 이곳만 깨끗하군 그래? 잠시 기다리니 아레프가 소반에 차를 들고 왔다. 루시아가 그것을 받았다. “이런걸 절시키세요.” “앞으로는 그럴게요. 여러분, 차 드세요. 그리고 콜트, 이거 약속한 대금입니다.” 아레프는 그렇게 말하며 묵직한 자루를 내밀었다. “세어봐서 한푼이라도 적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환영합니다.” 난 피식 웃어주었다. 차를 마시고 그의 연구실을 좀 구경한 우리는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그레이프는 좋은 구경했다며 다음에 한번 더 들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언제든 환영합니다. 솔직히 저도 마법의 기초를 엘프에게 배웠으니까요. 궁금한 거 있으면 놀러오세요.” “감사합니다.” 그레이프가 고개를 숙였고 아레프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여주었다. 엘프식 인사법이었나? 원판 위에 서서 간단히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루시아가 방문과 원판 사이에서 우물쭈물거렸다. 그것을 본 아레프는 살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이 서있는 방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루시아는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루시아는 갑자기 훌쩍이며 아레프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그때 천천히 원판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시아가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안녕히 가세요!” 내려가는 원판 위에서 나와 스피릿은 자신을 아껴주는 주인을 만나 행복해하는 루시아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법사 길드에서 나와 말에 오른 우리는 엑셀의 배웅을 받아가며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괜찮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슬슬 각종 등록을 하기 위해 말에 오르니 그레이프가 할 일도 없으니 우리를 따라다니겠다고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들텐데요. 내일 여정을 위해서라면 푹 쉬시는게….” “저녁에 일찍 자면 됩니다. 인간 여러분들의 생활을 좀더 엿보고 싶어서요. 안될까요?” 난 고개를 저었다. “안될 것까지는 없지. 따라오십쇼.” 그래서 나는 인간 생활상이 궁금하신 엘프 아가씨와 스피릿을 데리고 시청에 들려서 노예 거주지 등록을 마치고 서무를 보는 사람에게 물었다. “집을 사려면 어디서 문의해야 합니까?” “제게 하시면 됩니다. 어느 정도의 집을 원하시는지?” 사내는 목록을 꺼내 펼치며 말했다. 스피릿을 힐끔 쳐다본 나는 헛기침을 조금하며 말했다. “…신혼부부가 살만한 작은 집이요.” 제복을 입은 사내는 스피릿을 정확히 쳐다보고는 살짝 웃었다. 그는 목록을 다시 덮으며 말했다. “내일 다시 저를 찾아오십시오. 집은 직접 가서 보는 편이 좋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시청을 나서서 이제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이곳의 모험가 길드는 꽤나 멋진 건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수도에 있는 모험가들의 실력은 어떤가 궁금하네. 주눅들지 않기 위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들어간 나는 흡사 시청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꽤 많은 수의 아가씨들이 책상에 앉아 의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뢰하러 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일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모험가들이 거의 없다는 거다. 그때 상냥한 미소의 아가씨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신규 등록하러 왔는데요.” “그러세요? 이적서류하고 면허증 주세요.” 난 그녀가 달라는 것을 내밀었다. 그동안 스피릿과 그레이프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이적 서류를 넘겨보던 아가씨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성함이…?” “콜트 슈발츠인데요.” “본인이세요?” “본인인데요.” 그러자 그녀는 하하 웃으며 얼른 서류를 정리하고 면허증을 돌려주었다. “길드원 증명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가더니 금박을 입힌 증명서를 가져와 나에게 내밀었다. 으아~! 이게 뭐야?! 번쩍번쩍 하잖아? “꼴사납게 이걸 어떻게 들고 다녀요?” “그래도 꾹 참고 가지고 계세요. 저희 길드에는 몇 없는 C클래스의 마스터 급이시니까.” 뭔 클레스 마스터? 원 참 복잡하게도 해놨네. “이걸로 끝?” “예. 그런데 일을 받으실 주소는?” “여기서는 일을 보내주나?” “예. 길드 회원님들의 편의를 위해서 의뢰는 자택으로 배달해드리고 있습니다.” 난 입을 살짝 벌렸다. 수도에 있는 길드라 뭔가 틀리긴 틀리구나. 수도에는 모험가 시험치러 한번 와봤던게 다였는데.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수. 난 직접 받으러 올 테니 그리 아쇼.” “아니, 그래도….” 손을 흔들어준 나는 그레이프와 스피릿에게로 다가갔다. 스피릿이 일어나며 말했다. “다 끝나신 거예요?” “응. 이제부터 바빠질거야. 따라올 수 있겠어?” 스피릿은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주인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갈 거예요.” 슬레이브 Running Fire: 24 “무슨 생각하세요? 음흉한 표정으로?” “잘 가세요. 몸 조심하시구요.” 그레이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아침,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여관 밖으로 나온 나는 하품을 좀 한 다음 말했다. “동료들은 좀 괜찮은 것들로 잘 고르쇼. 안 그럼 험한 꼴 당하게 될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그녀는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흔들어 천천히 출발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행복하세요.” “다시 만날 때 우리는 꼬부랑 늙은이가 되어 있을 걸? 하여튼 잘 가쇼.” 그레이프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스피릿이 내 팔을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친구들이 모두 죽거나 늙어 있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대로 저편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나는 그만 여관 안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처참하겠지. 하지만 엘프니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거야. 저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오래 사는 것도 힘든 일이네요.” “아무렴. 힘들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실제로 이건 나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인데. 그 사람은 젊었을 적에 저주를 받아서 나이를 먹어도 몸이 늙지 않게 됐지. 처음엔 이게 웬 횡재냐고 생각했대.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끔찍한 저주임을 실감하게 된거야 언제나 아름다울거라 생각했던 아내는 점차 늙어가고 친구들도 늙거나 죽어가고, 손자녀석이 자신과 동년배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거지.”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으며 스피릿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를 들어 네가 그 저주에 걸렸다고 치자. 넌 탱탱한 20대의 늘씬한 아가씨 그대로인데 남편되는 사람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 밤마다 흐흐흐 웃으며 침대를 기어오면 기분이 어떨까?” “무, 무섭겠죠?” 스피릿은 약간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난 킥킥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무섭기만 한 건 아니지. 혐오스러울거야. 도망가고 싶겠지. 자기는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데 상대는 이빨이 몇 개 빠진 늙은이라면 당연하지. 솔직히 말해서 그렇잖아? 누가 그런 늙은이랑 침대 위에서 뒹굴고 싶겠어?” 고개를 숙인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고 눈만 위로 떠서 날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방안을 휘적휘적 걸어 침대로 걸어간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좀 한 다음 아직도 따스한 기운이 남아있는 담요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인간이란 100년도 못살지. 그걸로 된 거야. 만약 이 성격에 엘프 만큼의 수명이 있었다면 우린 자멸했을 거야. 하지만 그전에 수명의 벽에 부딛혀 죽게되지. 다행스러운 일이야. 조물주의 축복이지. 오래 산다는 거. 네 말대로 힘든 일이야. 참고로 아까 이야기했던 그 사람은 자살을 취미로 삼고 엘프들의 마을을 지키며 질긴 생을 연명하고 있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자살을 취미로 삼은 거야. 웃기지?” 스피릿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겼다. 스피릿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 이러시지 마세요. 아침부터….” “이빨 빠진 늙은이보다는 이쪽이 났잖아?”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긴 나는 스피릿을 침대에 눕히고 입을 맞췄다. 내 가슴을 밀어내며 반항하던 스피릿은 잠시 후 내 목에 팔을 감고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스피릿. 갈수록 예뻐지는 것 같아.” 내 가슴을 혀로 애무하고 있던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때문이에요.” 난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스피릿은 내 손을 찰싹 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흐트러진 셔츠를 바로 하고 단추를 잠궜다. “주인님 바보! 변태!” “너무 그러지 마. 너도 좋아했잖아?” “윽!” 그녀는 이를 살짝 드러내더니 다짜고짜 배게를 들어 날 때리기 시작했다. “악! 내가 잘못했어. 그만해!” “시끄러워요! 대낮부터 순진한 노예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변태 주제에!” 한참을 그녀에게 두들겨 맞은 나는 약간 덜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며 홀로 내려갔다. 세수하고 머리 감고 홀로 나가 앉으니 스피릿이 볼을 잔뜩 부풀린 모습으로 나왔다. 사과를 겸해서 그녀의 손을 잡아보려 했지만 원천봉쇄 당했다. 찰싹! “아파.” “제 허락 없이는 만지지 마세요. 그러시겠다고 했잖아요.” “그야 그랬지만….” 난 시무룩하게 말을 끌었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 테이블에 앉았다. “사랑싸움이야?” “상관하지마.” 첼시아는 호호 웃으며 부엌에 대고 외쳤다. “여기! 빵하고 우유 2인분 추가.” “예에!” 부엌에서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렇게 싸워?” “그걸 당신이 알아서 뭐할건데?” “아침부터 절 침대로 끌어들이려 하셨어요. 변태!” 난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우유를 마시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스피리잇! 너, 너어!” 스피릿은 고개를 팩 돌렸고 첼시아는 테이블을 두들기며 웃어댔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으려니 우유와 빵이 나왔다. 첼시아는 우유를 들어 한 모금 마신 다음 말했다. “좋은 일이잖아? 주인님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 할 수 있는 거니까.” “하,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프하하하하하~! 뭐라고? 다시 말해 줘. 시도 때도 없이? 꺄하하하~!” “시끄러워, 둘 다 닥쳐!” 스피릿은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첼시아는 여전히 웃어댔다. 으아~! 퍼피 보기 민망해지네. 한참 웃은 첼시아는 눈가의 눈물을 닦은 다음 말했다. “그게 건강하다는 증거야. 좋은 거니까. 싫다고 너무 빼지마. 그럼 주인님이 너 미워한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우리 주인님은 밝힘쟁이라서.” 스피릿은 은근히 날 흘기며 말했다. 고개를 숙인 나는 딴청을 피우며 얌전히 우유나 마셔댔다. 노예가 주인님을 놀려?! 복수할테다! 식사가 끝나고 첼시아와 퍼피는 모험가길드에서 받아온 일거리를 처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나와 스피릿도 옷을 갈아입고 집을 보기 위해 시청으로 향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걷고 있으려니 등뒤에서 스피릿이 내 셔츠자락을 붙잡았다. “같이 가요.” “시끄러. 따라오기나 해.” “주인님 토라지셨어요?” 고개를 확 돌린 나는 새실새실 웃고있는 그녀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화나셨어요? 라고 해야지. 요 버릇없고 앙큼한 노예야.” “아으응~! 아파요.” 그녀의 귀를 놓아준 나는 고개를 돌리고 먼저 대로를 걸어가 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문득 뭔가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스피릿이 없었다! 이런 염병! 어디 갔어?! 깜짝 놀란 내가 서둘러 왔던 길을 돌아 달려가니 저 멀리 스피릿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우두커니 서서 히죽 웃고 있는게 보인다. …당했다! “어서오세요. 그러길레 같이 가자니까요? 혼자가시면 싫어요.” 스피릿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씩씩대는 내 팔을 잡아당겨 팔짱을 하며 걷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걸으며 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 너 말야. 늑대와 양치기 소년 이야기 알아?” “몰라요. 그런 이야기.” 인상을 팍팍 구기며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스피릿은 까딱하기 않고 빙글빙글 웃으며 걷고 있었다. 아침에 대한 복수냐? 젠장! 하지만 이건 너무 기분 나빠! 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린 나는 예쁜 노예와 팔짱을 끼고 어기적어기적 불량스럽게 걸어 시청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제 만났던 직원이 소개 시켜준 40대 아줌마의 뒤를 따라 빈집을 찾아 온 캘버린 시내를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한가지 불만은 이 아줌마가 말이 많다는 거다. “총각은 나이가 얼마죠?” “스물 세살인데요.” “이쪽 새색시는?” 새색시라는 말에 스피릿은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스, 스물 한살입니다.” “어머나. 딱 좋을 때네? 깨가 쏟아지겠다. 그래, 가족 계획은 세웠어?” “예? 아, 아뇨. 아직….” “아직? 어머, 그럼 안돼. 그런 건 신혼 때 꼭 세워둬야 한다구. 생각없이 그냥 생기는 데로 아이를 낳아버리면 어느새 집안에 난장판이 돼버려요. 게다가 내가 볼 때 색시는 몸이 좀 약해 보이니까. 하나 내지는 둘만 낳아 기르는 게 딱 인 것 같아. 요새 나라에서 출산을 장려하긴 하지만 그래도 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어져. 애들은 울지. 남편은 밥 달라고 하지. 이건 정말 시장바닥이 따로 없다니까?” “…아줌마가 그런가보죠?” “어머? 어떻게 알았어? 호호호호~! 젊었을 때 남편이랑 좀 타올랐거든. 그래서 집에 가면 네쌍둥이가 날 반겨. 처음엔 기르는데 얼마나 힘들었는 줄 몰라. 하지만 애들이 좀 크니까 말도 곧잘 듣고 재롱도 부리는게 얼마나 귀엽다구? 막내가 이제 6살인데… 아, 다왔다. 저기야. 보이지? 저기 여관 사이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돼.” 귀를 막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대로를 걸어가던 나는 그녀가 가르키는 골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줌마와 함께 골목길로 들어간 스피릿이 말했다. “좋은데요? 깨끗하고.” “그렇지? 지은 지 3년 밖에 안된 집이야. 근처에 시장도 가깝고 경비대도 지척이라구.” 집은 1층 짜리로 커다란 창문이 상당히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집만을 보면 꽤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단지 집 주변에 몰려있는 여관을 제외하고는, 스피릿과 부동산 중계업을 한다는 아줌마가 집을 구경하는 동안 나는 집 주변을 살폈다. 대로에서 골목길로 좀 들어간 곳에 위치한 집은 대낮인대도 불구하고 근처의 커다란 건물들 덕분에 그림자에 가려 약간 어두운 곳에 있었다. 게다가 골목의 으슥진 곳마다 쏟아놓은 저 토사물은 뭐냐? 인상을 찌뿌리고 있는데 스피릿이 부동산 아줌마와 함께 나왔다. “괜찮던걸요? 어떠세요?” “맘에 안들어. 여긴 밤 되면 무법천지가 될 것 같아. 저기 쏟아놓은 것들 보여? 딴데 가자. 아줌마. 다른데 좀 보여줘요.” “어머나~! 총각 날카로운 데가 있었네? 맞아. 확실히 여긴 밤이 되면 좀 시끄러운 곳이지. 게다가 채광이 안 좋고, 주변 건물들이 너무 높거든?” “그런데는 미리 좀 빼주쇼. 조용하고 햇빛도 잘 들고, 신혼의 기분을 만끽 할 수 있는 뭐 그런데를 보여달란 말요. 이런데 말고.” 부동산 아줌마는 호호 웃으며 우리를 다른 곳으로 끌고 다녔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점심 무렵이 될 때까지 캘버린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닌 우리는 몇 개의 집을 더 봤지만 하나도 맘에 드는 곳에 없었다. 괜찮다 싶은 곳을 찾으면 이웃이 좀 불량스럽다거나 혹은 이웃이 좀 괜찮다 싶으면 집이 헐어 있는 식으로 맘에 들지 않는 곳이 꼭 하나씩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입에 문 이쑤시개를 으적으적 씹으며 어기적어기적 대로를 따라 걷던 나는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부동산 아줌마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뿌렸다. 게다가 스피릿도 그녀와 죽이 맞아 뭔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계속 주고받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인 나는 시계를 꺼내 뚜껑을 열어보았다. 12시 반…. 짐도 찾아야 하는데, 짜증이네. “집은 말야. 느긋하게 골라야해. 급하게 아무거나 잡고 막상 이사를 들어가면 실망하게되거든?” “그래요?” 꼭 나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한숨을 짧게 내쉰 나는 인상을 좀 펴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주변의 풍경이 좀 바뀌는 것을 느꼈다. 어라? “시내에서 좀 떨어지는 것 같은 데요?” “요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그림 같은 집이 하나 있어. 한번 봐.” 잠자코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부동산 아줌마가 말하던 그림 같은 집을 발견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집을 본적 있다. 어디서였더라? 난 손바닥을 쳤다. 라이트의 집! 맞다! 딱 그렇게 생겼어. 인적이 드문 언덕 위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집. 문 옆에는 그렇게 크지 않은 창문이 달려있고 집 주변에는 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늦가을 바람에 작은 꽃잎을 흔들고 있었다. 멍청히 그 집을 쳐다보고 있는데 부동산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은 지은 지 2년도 안된 새 집이야. 하지만 방도 하나 뿐이고, 게다가 이 집 주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빈터가 많아.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해도 여기서 한참 걸어가야 해. 경비대도 멀고, 시장도 멀지만 그럭저럭 총각이 제시한 조건과 비슷할 것 같은데. 어때?” “한번 봅시다.” 난 처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집이 작다보니 집안도 작았다. 여관 방만한 부엌 겸 거실 하나에 달랑 방 하나. 그리고 욕실 하나. 벽난로, 외따로 떨어진 화장실 등등,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네?” “저도 여기 맘에 들어요. 주인님. 여기로 해요? 예?” 나도 맘에 들어하고 있던 중이다. 집도 깨끗하고, 이 정도면 살만 하겠어. 난 부동산 아줌마를 바라보았다. “진작 좀 이런 걸로 보여주시지. 얼 맙니까?” “다른데 더 안 돌아봐도 되겠어?” “다른데 가봐도 다 비슷비슷할 것 같은데 뭐, 여기로 할 랍니다.” 잠시 우리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화사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서류가방에서 집문서를 꺼내더니 말했다. “알았어. 그럼 가격은 1200만 루나야. 하지만 일시불로 내면 1000만 루나로 깍아 줄 수 있어.” 그녀가 내민 서류를 쳐다보던 나는 펜을 꺼내 즉석에서 사인했다. “일시불로 하지요. 언제까지 돈 내면 됩니까?” “일주일 이내로 시청에 와서 수속을 밟으면 돼요. 고마워요. 한 채 팔아줘서.” 그 외에 몇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을 일러준 부동산 아줌마는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시청으로 돌아갔다. 방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스피릿이 다가왔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그나마 탁자 같은 거라도 하나 있었으면 싶었는데.” “좋게 생각해. 이제부터 채워 넣을 수 있잖아?” “그도 그래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스피릿은 바싹 달라붙어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가슴에 머리를 기댄 그녀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주인님.” “아까는 변태 주인님이 어쩌고 놀렸으면서.” “자꾸 삐져계시면 싫어할 거예요.” “좋아. 그럼 뽀뽀해줘. 그럼 용서 해줄게.” 그러자 스피릿이 고개를 들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제가 왠지 손해보는 기분인데요?” “그럼 내가 할게. 어때?” 잠시 고민하는 척 하던 스피릿을 볼을 내밀었다. 난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다가 하면 안될까?” “안돼요. 자꾸 그러면 제 입술의 희소성이 떨어진다구요.” “그런 게… 있어?” 스피릿은 날 끌어안은 채로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자꾸 입술에 키스하면 그게 당연한 줄 안다구요. 지금에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 그렇게 헤픈 여자 아니에요. 아셨어요?” 눈을 깜빡이며 잠시 그녀를 쳐다본 나는 해달라는 대로 볼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는 다짐을 했다. 이 앙큼한 녀석! 제발 키스해달라고 매달리게 해주겠어! “무슨 생각하세요? 음흉한 표정으로?” “아, 음,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짐을 들여놓기 전에 청소부터 좀 해야겠는데? 가자. 오늘 오후는 할 일이 많아.” 집을 나선 우리는 그 길로 은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집 값과 더불어 살림살이를 위한 돈을 찾았다. “…에, 통장에 잔금이 12억 7천만 루나.” “우와! 주인님 돈 많으세요.” “응? 아냐. 나보다 많은 놈도 얼마든지 있다구. 자기 양심에 신경 안 쓰면 돈벌이는 널렸어. 자, 이제 살림살이 사러 시장에 갈까?” “예!”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어 시장을 찾아간 우리는 먼저 생필품을 구하기 시작했다. 냄비세트, 그릇세트, 접시세트, 찻잔세트, 주전자, 수저, 포크, 나이프, 물통, 삼발이, 그리고 이제 집안 장식물로 넘어가서 테이블, 의자, 수납장, 촛대, 여벌양초, 옷걸이, 담요, 배게 등등. 생각나는 데로 충동구매를 벌인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짐꾼들에게 맡기고 시장을 나서려다가 깜빡한 것을 발견했다. “침대는?” “잊고 있었네. 가요!” 이상하게 흥분한 스피릿의 손을 이끌려 간 곳은 아까 테이블과 수납장을 샀던 가구점으로 각종 침대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어떤게 좋을까?” “생각해 볼 거 있으세요? 아저씨? 저거 주세요.” 스피릿이 가르킨 것은 더블 침대로 두 사람이 누워도 넓은 것이었다. 난 약간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피릿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하지만 허락 없이 넘어오면 물어버릴 거예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고 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침대를 사서 배달시키니 어느덧 하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어디가세요?” “여관에 가서 짐 찾아와야지. 집이 생겼으니까 오늘부터 거기서 지내자구.”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뒤를 따랐다. 여관은 벌써 시끌벅적하게 변해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런가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우리들을 쳐다본다. 스피릿은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바싹 달라붙었고 난 최대한 인상을 더럽게 구기며 테이블을 지나 방으로 올라가려 했다. “꺅?!” “이야, 아가씨 엉덩이 참 탱글탱글한데?” 주위 사람들이 낮게 웃어댔다. 난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 “어떤 새끼가?!” “이야. 안녕?” “…첼시아.” 맥주와 애플파이를 테이블에 올리고 있던 첼시아가 씩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난 저녁도 먹을 겸해서 그녀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있으니 첼시아가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잘 보니 좀 취한 것 같은데? “어디 갔다와?” “집 사러.” “집? 집을 샀어? 왜?” “왜긴 왜야, 따뜻한 겨울을 더 따뜻하게 보내려고 샀지.” 그러자 갑자기 첼시아가 은근히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예쁜 노예랑 좀 더 뜨겁게 타오르려고 싶어서 그러지?” “뭐, 부인은 않겠어. 너희는 여기서 장기 투숙할거지?” “그야. 이쪽이 싸게 먹히니까.” 첼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음식이 나왔고 나와 스피릿은 저녁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간다.” “어, 우리도 그만 일어나야지. 퍼피야아~!” 그러자 앞에 앉아있던 퍼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첼시아는 약간 비틀거리며 그에게 기대었지만 얼마나 마셔댔는지 제대로 걷지를 못했고 그래서 퍼피는 그녀를 단숨에 안아 올렸다. “아유. 우리 퍼피는 힘도 좋아. 히끅~!” “무슨 일 있었냐? 웬 술을 그렇게 퍼마셨어?” “오늘 일하는 도중에 옛친구 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퍼피!” “죄송합니다. 마스터.” 첼시아의 호령에 퍼피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럼.” 그들은 앞서서 방으로 올라가더니 자기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스피릿이 나에게 물었다. “첼시아씨 저렇게 취한 거 처음 봐요.” “뭐, 옛 남자를 만났거나 그랬겠지. 하지만 남의 일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아.”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린 나는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겼다. 점원을 불러 여관비를 계산하고 있으니 퍼피가 부엌에서 냉수를 들고 나오다가 나와 마주치고는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는 별말 없이 방으로 올라갔다. “퍼피씨는 부지런해요.” “노예니까. 당연하잖아?” “저는 어때요?” 여관을 나서서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대로를 걸어가고 있으려니 스피릿이 내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난 대답대신 발걸음을 재촉했고 결국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난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무서운 사람들만 보면 등뒤에 숨기 바쁘고, 기분 좀 나쁘면 주인님을 놀려먹지만 그래도 난 네가 좋아.” “주인니이임.” 스피릿은 감동 받은 표정을 지으며 내 팔을 꽉 끌어안았다. 글쎄, 그렇게 감동 받을 필요까지는 없는데. 짐을 실은 말을 이끌고 어두컴컴한 대로를 한참 걸어가자 저 멀리 우리 집이 어렴풋이 보인다. “다 왔다.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야.” “예.” 스피릿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서 짐을 내리고 녀석을 집 근처에 묶어둔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가 촛대와 양초를 찾아서 불을 붙이고 집안을 살펴보았다. 시장에서 배달시킨 물건이 거실 가득 쌓여있어서 발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대충 이것저것 정리를 해보려 했지만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스피릿이 나섰다. 그녀는 시장에서 산 빗자루와 먼지털이를 가지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먼지를 털고 빗자루 질을 하더니 나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우물가에서 양동이 가득 물을 떠다주니 스피릿은 안쓰는 옷가지를 꺼내 찢어서는 걸레로 만들어 그것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닦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보고 있기도 뭐해서 나도 그녀를 거들었다. “아, 주인님은 그냥 쉬고 계세요.” “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걸레질을 하고 있는 노예의 작은 등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깨끗하게 하라고 욕설을 쏟아내는 주인님 역은 난 못해. 때문에 그 부탁은 못 들어주겠는데.” 그렇게 말해준 나는 양동이에 시커멓게 변한 걸레를 집어넣어 씻은 다음 물기를 짰다. 뭔가가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스피릿이 내 등에 얼굴을 비벼댔다. “주인님, 나의 주인님. 으으응~! 고마워요.” “갑자기 왜 그래?” 어깨 넘어로 고개를 내민 스피릿은 베시시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나는 방으로 들어가 걸레질을 해댔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집안 구석구석의 청소를 끝내자 양동이 안의 물은 구정물이 되어 있었다. 스피릿은 지쳐서 테이블에 엎드려 헥헥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흡!” “저, 저도 도와드릴게요!” “윽! 안돼! 거기 잡지마! 비켜!” 내가 침대를 혼자서 들어올리자 깜짝 놀라서 달려온 스피릿이 거들려고 했다. 혼자서 중심을 잡고 있다가 그녀가 갑자기 힘을 더하자 뒤로 넘어질 뻔한 나는 그녀에게 비키라고 외치며 침대를 방안으로 들고 들어가 창가부근에 놓았다. 쿵~! 침대를 벽에 붙이고 땀을 닦고 있으려니 스피릿이 매트리스와 시트를 가져와 침대에 올렸다. 한숨을 좀 내쉰 나는 그것을 시작으로 테이블과 수납장을 가져다가 적당한 곳에 놓고 식기들을 부엌으로 가져가 정리했다. 그러는데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제가 할게요! 그냥 두세요.” “저기 못 박힌 데에 옷걸이나 좀 걸어라.” 고개를 돌린 스피릿은 옷걸이를 가져다 벽에 걸어두고는 다시 달려와서 제발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앵앵거렸다. “시킨 거 다됐어?” “다했어요! 이제 정리할거 없어요! 주인님~! 이런 건 제가 할테니까… 어, 어마?!”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집어넣고 번쩍 들어올린 나는 그녀를 데려다 의자에 앉혔다. 스피릿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시계를 열어보니 11시다. 청소하고 정리하다보니 시간이 좀 늦었구나. “저녁 만들고 있으니까. 이거 먹고 자자.” 어느새 얌전해진 스피릿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헤, 한번 들어주니까 고분고분해지네? 자주 써먹어야겠다. 여행가방에서 남은 식료품으로 만든 팬케익과 스프로 저녁을 해결한 나는 식기를 부엌에 가져다 놓으려다가 스피릿의 제재를 받았다. “제가 할게요! 손대지 마세요.” 그녀는 얼른 빈 접시와 그릇을 부엌에 올리고는 물통에 담궜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테이블이 하나 더 있어야겠구나. 거기 개수대에 있는 펌프도 좀 손을 봐야겠고.”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거지를 하여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등을 돌리고서서 개수대의 물통에 손을 집어넣고 식기를 달그락거리고 있는 스피릿의 등을 감싸안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천천히 더듬었다. 스피릿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고개를 돌렸다. “히익?! 주, 주인님?” “…스피릿? 설거지는 내일하고 일찍 자자? 응?” “아, 안돼요. 이건 오늘….” “펌프가 고장나서 물도 안나오잖아? 내일 내가 고쳐놓을 테니까. 나 졸려. 스피리잇~.”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참 머뭇대던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손을 닦은 다음 방으로 들어갔고 나도 촛대를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방으로 들어가니 스피릿이 침대에 앉아서 애꿎은 손바닥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자자니까 엉뚱한 생각하고 있나봐? 킥킥, 귀여워라. 두꺼운 여행용 셔츠를 벗은 나는 가벼운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스피릿?” “예, 예?” 얼굴을 불덩이 같이 달아오른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옷 안 갈아입어? 가죽바지 입고 침대에서 자긴 좀 그럴텐데.” “예?” 스피릿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래도 얼른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나는 자리를 피해 잠시 밖에 거실에 나가 문단속을 하고 들어왔다. 방에 들어가 보니 스피릿은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도 은근히 바라면서 내숭은, 어쨌든 되도록 부드럽게 웃으며 표정관리를 한 나는 침대로 올라가 담요를 덥고 자리에 누웠다. 아, 그전에 촛불을 끄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구멍이 뚫린 곳으로 별빛에 비치는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도저히 지금 스피릿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워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참지 못한 스피릿이 천천히 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 스피릿?” “주인님. 사, 사랑해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꼭 끌어안는 그녀였다. 이전까지는 그녀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반쯤 미쳐(?)서 그대로 안아버렸지만 지금은 다르다. 후후후~! 이대로 넘어가 줄 수는 없어. 변태 주인님이라고?! 버릇을 고쳐주지! 그녀를 가볍게 안아준 나는 애써서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으음, 스피릿, 나도 사랑해. 오늘 너무 피곤하거든? 하아암~! 잘자….” “아, 예…. 뭐. 아, 안녕히 주무세요!” 스피릿은 당황스러운 듯이 말을 좀 더듬더니 얼른 나에서 떨어져 몸을 돌려 누웠다. 속으로 좀 웃어준 나는 하품을 좀 한 다음 잠을 청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피곤하다. 오늘 집 산다고 여기저기 꽤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가? 슬레이브 Running Fire: 25 “에헴~!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예쁘기만 한 건 아니라구요.” “으윽…!” 창가에서 햇살이 비치는 곳을 잡고 침대를 놓은 죗값으로 난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며 고개를 돌린 나는 옆자리가 좀 허전하다는 생각을 하며 거실로 나가보았다. “스피릿?” “…아, 일어나셨어요.” 아침을 만들고 있던 스피릿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좀 피곤한 얼굴이었다. 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뭐야? 어제 못 잤어? 눈밑이 시커매.” “하, 하하. 좀 고민이 있어서… 씻고 오세요. 아침 드셔야죠.”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수건을 어깨에 매고 밖으로 나가 우물의 물을 퍼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우와~! 머리가 깨지는 기분이다! 그나저나, 장난이 너무 심했나? 어제 하나도 못 잔 얼굴이던데.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집안으로 들어가보니 스피릿이 테이블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바치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테이블을 사각사각 긁고 있었다. 뭔가 잔뜩 고민이 있는 얼굴로, …저거 꽤 중증이다. “어디 아파?” “아, 아뇨. 식사하세요.” 난 그녀가 만들어준 음식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그래봤자 재료가 없어서 팬케익과 스프가 다였지만. “오늘은 일도 좀 받고, 식료품이랑 이것저것 더 사야겠어. 빨리 올테니까. 넌 집에서 쉬지 그래? 피곤해 보이는데.” “아뇨. 저도 따라 가겠어요.” 몇 번을 쉬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네였다. “그러다 쓰러진다.” “그럼 주인님이 또 업어주시겠죠.” 코를 좀 벌렁거린 나는 식사를 마치고 자켓을 걸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말을 데려다가 안장을 올리고 재갈을 물린 다음 녀석의 위에 올랐다. 뒤에 탄 스피릿이 말했다. “오늘은 어디로 가세요?” “먼저 모험가 길드. 이번 일거리를 받아야지.” 아침이라 북적거리는 대로를 걸어 모험가 길드로 가니 막 출근해서 하품을 하던 직원이 날 반겼다. “하아아암~!” “거, 입 찢어지겠수.” “꺅?! 누, 누구세요?!” 난 길드원 증명서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 이런 사람인데.” 금박을 입혀 번쩍거리는 증명서를 보여주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상냥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오호, 엽업용 미소란 게 저런 건가? “어, 어머나 C클래스 마스터시네요? 성함이…?” “콜트 슈발츠라고 하는데. 뭐 돈 될만한 일거리 없을까 싶어서.” 증명서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뒤적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저께 등록하셨군요? 어쩐지 초면이다 했어요. 그런데 주소를 가르쳐 주시면 직접 찾아오실 필요 없이 길드에서 일을 자택으로 직접 보내드리는데.” “난 집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성격이 못돼서. 어쨌든 일이나 주쇼.” 좀 머뭇대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더니 다시 돌아왔다. “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말단 직원이라서 상사에게 물어봐야 하거든요?” “알았수. 알았으니까. 빨리 일이나 주쇼.” 좀 건들건들 거리며 말하자 그녀는 상당히 버벅거리며 서류를 뒤적이더니 말했다. “어, 어떤 일을 드릴까요?” “랭크 A에서 B급으로 아무거나 부탁합시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랭크별로 분류한 서랍을 뒤적였다. 힐끔 보니 B급 랭크의 서랍은 비었고, 그래서 A급 랭크 서랍을 열어 안에 든 서류를 나에게 밀었다. 접수번호 제 1457호 위험도 : 랭크 A 의뢰인 : 수도 경비대 민원 접수과. 접수인 : 모험가 길드. 의뢰비 : 두당 500만 루나. 의뢰내용 : 스피아페루 다리 부근 숲 속에 죽음의 땅이 열렸음, 그 영향을 받아 출몰하는 좀비의 퇴치. 증거로 좀비의 머리를 잘라와야 함. “왜 이런 지저분한 일이야? 다른 건 없어?” 서류함을 뒤적이던 여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어, 없는데요. 여기는 수도라 C클래스 일은 자주 생기지 않아요.” “잠깐 혹시 그 C클래스란 게 몬스터 사냥 뭐 그런 쪽이요?” 여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맥이 탈 풀리는 기분이다. 이런 일이 드물다고? “다른 쪽 일은 뭐가 있는데?” “대충 설명하면… 에,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준다거나 혹은 어떤 물건의 배달, 상단 호위 및 여행객 호위, 아니면 귀족 호위무사도 있고요. 또 좀 위험하지만 마법사 길드에서 들어오는 마법 재료 수집….”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린 나는 이상을 구겼다. 으아~! 겨우 이런 일 뿐이야?!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고 살기 좋은 동네인데 웨어울프나 트롤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다던가 하는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칫~!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세요. 일이 적긴 하지만 C클래스는 의뢰비를 많이 받는다구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여직원을 쳐다보던 나는 몸을 돌렸다. 좀비가 두당 500이면 꽤 비싸긴 하지. 한 열 놈 잡아와야겠다. “알았수. 이거 내가 맡을 테니 그리 아쇼.” “아, 안녕히 가세요.” 등을 돌린 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준 나는 대기석에 앉아서 졸고 있는 스피릿을 깨웠다. “일어나. 스피릿.” “음…. 끝나셨어요?” “뭐 한다고 잠도 안잔거야? 일어나. 집에 데려다 줄테니까.” “으응. 싫어요. 주인님 따라 다닐테야….” “입가에 흐르는 침이나 좀 닦고 말해라. 칠칠맞게스리. 고개 돌리말고 그대로 있어.” 스피릿은 내 손을 붙잡고 매달렸다. 난 머리에 쓰고 있던 손수건을 벗어 그녀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주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한 나는 시장에 들려 점심과 저녁때 먹을 찬거리와 식료품을 사고 무기점에 자동석궁의 정비를 맡긴 다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을 위해 장비도 주문하고 하려면 시간이 없지만 딱히 시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점심 먹고 난 다음부터 하기로 하고 일단은 버릇없는 노예부터 좀 재우고 봐야겠다. 스피릿을 업고 집으로 들어간 나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담요를 덥었다.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고개를 숙인 나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디비져자.” “…예. 죄송해요.” 스피릿은 담요를 덮으며 말했다. 고개를 돌리고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스피릿이 발딱 일어났다. “저만 여기두고 나가시려고 그러죠?” “아냐.” “거짓말. 두고 도망가려고 했으면서.” “이게! 아니라니까!”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이 시무룩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리오라는 거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냐? “저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어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해?” “제 주인님이잖아요?” “젠장.” 침대로 걸어간 나는 그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스피릿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어오더니 내 무릎을 베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잠시 기다리니 스피릿은 금새 잠에 빠져버렸다. 피곤했나? 그때 갑자기 그녀의 예쁜 얼굴에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윽!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버린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들어 베개를 받쳐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시장에서 사온 물건을 정리하고 점심을 준비했다. 아니, 그 전에 저 펌프부터 좀 손을 봐야겠다. 연장이 없어서 나이프와 쇠꼬챙이 하나 달랑 가져다 펌프를 붙잡고 꿈지럭거린 나는 결국 1시간만에 펌프를 고치는데 성공했다. 끼익! 끼익! 푸확! 푸학! 쏴아아~! “아자~! 나온다. 고쳤어.” 개수대의 구멍을 막고 펌프로 물을 채운 나는 이제 음식재료를 다듬어 점심을 준비했다. 오늘 점심은 팬케익하고 야채 스튜로 할까? 예전엔 야영하면서 곧잘 음식도 해먹고 했던 지라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화로에 불을 붙이고 냄비를 올려 음식을 준비했다. 시계를 보니 대략 11시. 냄 비가 끓을 동안 집안정리를 좀 한 나는 테이블에 앉아 좀비 잡을 때 사용할 물건에 대해서 꼼꼼히 정리했다. 그러는 동안 냄비가 끓어올랐고 부리나케 재료를 집어넣고 요리를 시작했다. 팬케익까지 굽고 나니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한 손에 프라이팬을 들고 마지막 케익을 굽고 있으니 뭔가가 내 등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스피릿이었다. “잘 잤어?” “…예. 죄송해요. 하아암…”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키스? 헹, 그렇게 쉽게 내 입술을 허락할 수는 없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니 스피릿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낄낄 웃으며 고개를 돌린 나는 마지막 팬케익을 접시 올린 다음 비싸게 주고 산 꿀병을 꺼내 팬케익에 뿌렸다. “어머, 꿀은 언제 사셨어요? 비쌀텐데.” 스피릿이 손가락을 병에 넣었다가 빼서 입에 물었다. 접시와 꿀병을 식탁에 올린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목숨걸고 돈버는 직업이니까. 이 정도 사치는 괜찮아. 자! 점심 먹자.” “잘먹겠습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본 스피릿이 눈을 크게 뜨며 감상을 말했다. “맛있어요. 주인님 요리 잘하시는 걸요?” “혼자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실력이 오른 것 뿐이야. 아, 설거지는 네가 해.” “예.” 수저로 스튜를 떠먹던 스피릿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나고 스피릿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밖으로 나가 말의 여물을 좀 봐주고 편자를 살폈다. 말도 이래저래 관리해줘야 잘 달린다. 그러고 있으니 스피릿이 나왔다. 외출복 차림이었다. “오후에는 어디로 가실거에요?” “신전, 무기점, 친구집.” 잠시 아방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던 스피릿이 가까스로 말했다. “차례로 들리실 거예요?” “응. 넌 여기 있을래?” “아뇨. 몇 일은 더 주인님 따라 다닐거예요. 혼자 집에 있으면 무섭단 말예요.” “거참, 어디가서 집 지키는 펫이라도 몇 마리 사다가 길러야겠구나.” 그러자 스피릿이 두 손바닥을 마주 대며 말했다. “아! 그래주셔도 되고요.” “알았어. 오는 길에 시장에도 들리자. 쓸만한 놈이 있을까 모르겠다만.” 스피릿은 기분 좋게 웃어댔다. 다시 말에 오른 나는 스피릿의 손을 붙잡아 탠덤시트에 올렸다. 그리고 대로를 천천히 걸어 먼저 신전을 찾아갔다. 듣기로 수도에는 혼돈과 질서의 신인 인피니티의 신전을 제외한 4개 종파의 대신전이 모두 몰려있다고 한다. “그럼 인피티니의 신전은 어디에 있는데요?” 이 물음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프리스트 대신 잠자코 내 옆에 서있던 스피릿이 대답했다. “인피니티의 신전은 120년 전에 있었던 일렉스트라 반란사건 때 반란군을 도와 승병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수도에서 쫓겨났어요. 그래서 그랜퍼스 수도에는 인피니티의 신전이 없는 거죠.” “자매님은 역사학에 박식하시군요. 예. 말 그대로입니다.” 프리스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 사냥에 필요한 성수와 해독제의 제조시간 동안 프리스트와 간단한 잡담을 나누던 나는 스피릿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정말 아는 게 많구나?” “에헴~!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예쁘기만 한 건 아니라구요.” 난 귀엽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프리스트가 헛기침을 해서 조금 쓸어주다가 말았지만, 그때 하얀 로브를 입은 프리스티스가 나무상자를 끙끙거리며 들고 왔다. “주문하신 겁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마침 재고가 떨어지는 바람에.” “아니요. 괜찮습니다. 얼마죠?” 큼직한 상자 안의 약병을 살펴보던 프리스트가 좀 머뭇대다가 말했다. “380만 루나입니다. 아시다시피 성수와 언데드 계열 해독제는 만들기도 힘들고 재료값도 많아서 가격이 비쌉니다. 원하신다면 할부도 가능….” “헤에? 380만? 싸네? 여기요.” 철그럭! 동전을 세어 그들의 앞에 놓아주자 당장 프리스트와 프리스티스가 입을 딱 벌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도에는 언데드 퇴치용 성수라든가 해독제를 찾는 사람이 적어서 가격이 낮은 거라고 한다. 일시불로 돈을 지불해준 대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며 마당 앞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는 프리스트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말을 몰아 무기점에 들려 맡겨 놓았던 자동석궁과 은제무기를 몇 개 구했다. 수도라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값이 대단히 저렴했다. 지나는 길에 잠시 광장에 들린 우리는 가까운 벤치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자리에 앉아 장비를 살펴보고 있으니 광장에서 군것질 거리를 가져다 파는 노점상으로 달려갔던 스피릿이 종이컵을 들고 왔다. “이거 드셔보세요.” “뭔데?” “따뜻한 꿀차예요.” “슬슬 추워지니까 이제 이런 게 나오는 구나. 음, 맛있다.” 스피릿은 내 옆자리에 앉아서 종이컵을 후후 불어 입에 기울였다. “그런데 주인님 수도에 친구 분이 계셨어요?” “어어.” 입에 컵을 물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동석궁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무기점 주인이 관통력을 올리기 위해 활대를 바꾸고 프레임을 보강했다고 하더니 모양이 좀 변한 것 같아. 손을 들어 입에 물고 있던 컵을 붙잡은 나는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렸을 때 케나린에서 알게된 녀석이야. 독학으로 마법을 공부하던 녀석인데 수도로 올라가 마법상점에서 일하면서 시험준비를 했었지. 몇 년 전에 만나서 나랑 같이 국가고시를 봤는데 난 붙었지만 녀석은 떨어져버렸어. 그때 이후로 4년만인가? 그 사람도 잘 있으려나 모르겠군.” “그 사람?” 꿀차를 단번에 마셔버린 나는 쓰레기통에 빈 컵을 던져 넣으며 장비를 챙겼다. “친구 놈이 있는 마법상점의 주인,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는 마귀할멈인데. 시험기간동안 수도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염치불구하고 친구 놈 가게에 잠시 얹혀 지냈었어 그런데 은근히 나랑 내 친구 놈을 노리는 거 있지? 목욕할 때 훔쳐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야. 이래뵈도 19살 땐 나도 꽤 미소년이었거든?” “주인님이 나이를 얼마나 먹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지금도 충분히 미청년이라구요. 제가 홀딱 빠질 정도로….” 우물거리며 말을 맷는 그녀를 얼빠진 얼굴로 쳐다본 나는 하하 웃으며 그녀를 꽉 끌어 안아주었다. “귀여운 녀석, 빈말이라도 고마워.” “아이, 주인님도, 사람들이 봐요.” “볼 테면 보라지. 으음.” 난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그때 저쪽에서 광장을 지나던 아가씨들이 꺅꺅거리며 야유를 보내왔다. 스피릿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난 당당하게 웃으며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를 선보였다. 다시 말에 오른 나는 기억을 더듬어 대로와 골목길을 좀 헤맨 다음 겨우 예전의 그 마법상점을 찾을 수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주변의 풍경 정도일까? 예전에는 근처에 음식점이 많았는데. 이제는 잡화점이 많이 들어서 있군. “저기예요?” “응. 저 다 떨어진 간판을 보니 옛날 생각난다. 이보쇼. 그거 한봉지 싸줘요.” “예~! 감사합니다. 여기 있어요. 3000루나입니다.” 좌판에 주황색으로 잘 익은 오렌지를 가득 쌓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던 사내는 내가 한 봉지 달라고 하자 얼른 종이봉투를 펴서 잘생긴 것들로 슈슈슉~! 골라 담아 내밀었다. 예사롭지 않은 손동작을 멍청하게 쳐다보던 나는 그에게 손이 빨라서 오크 배때지는 기가 막히게 잘 쑤시겠다는 살벌한 농담을 건내며 주머니를 뒤져 1천 루나짜리 구리동전을 찾았지만 나오질 않았다. 아쉽게도 1만 루나짜리 동화도 없었다. 그렇다고 10만 루나짜리 은화를 내밀긴 뭐한데… 오렌지가 가득 담긴 봉지를 들고 좀 머뭇대고 있으니 스피릿이 끼어들었다. “여기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아가씨.” 내 또래의 젊은 청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난 스피릿에게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원래 주인님 거잖아요.” “원래 자기 것이란 건 없어. 돈이든 사람이든 모두 뺏고 뺏으며 돌고 도는 거니까. 하지만 너만큼은 다른 놈에게 못 넘겨, 넌 죽을 때까지 내 거야.” 스피릿의 어깨를 팔로 감싸안은 나는 마법상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피릿은 싱긋 웃으며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따라 걸었다. 딸랑~! “주인장 계쇼?! 10초안에 안나오면 아무거나 가지고 그냥 텨버릴거야!” “주, 주인님 말씀에 어폐가….” “누구십니까?” 말을 끝내자마자 시계를 보고 초를 세고 있으니 깔끔하게 생긴 청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자처럼 긴 금발머리를 뒤로 돌려 묶어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잘생긴 미 청년은 날 보더니 코를 벌렁거리며 얼굴을 엉망으로 구겼다. “콜트!” “하하하! 세리카! 오랜만이야!” 세리카는 카운터를 훌쩍 뛰어넘어 나오더니 내 가슴을 툭툭 때리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스피릿은 약간 떨어져서 우리의 재회를 바라봐주었다. 녀석의 손을 잡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잘 지냈어? 4년만이지? 어때. 시험 붙었냐?” “오기가 생겨서 작년까지 응시 해봤지만 계속 떨어지더라. 게다가 20살이 넘어가면 제대로 된 마법사는 힘들다고 아내가 충고해서 말야. 그래서 관뒀어. 지금은 이 가게와 아내에게 내 청춘을 불사르고 있지.” “아내? 너 결혼했어?” 세리카는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야아~! 축하해! 청첩장 보냈으면 왔을 텐데. 너무하잖아?” “어, 아내가 사람들 부르는 거 싫어해서 말야. 그냥 우리끼리 간소하게 했어. 아, 참. 그러고 보니 너 우리 집에 짐 부쳤어?” 그는 손가락으로 가게 한 구석에 쌓여있는 나무상자를 가르켰다. 스피릿이 그곳으로 총총 다가가 살펴보더니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도착했어요.” 세리카가 물었다. “누구야?” “어, 내….” “노예인 스피릿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려고 했는데. 세리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팔을 잡아끌고 가게 구석으로 가더니 귓속말을 했다. “너 이 자식! 노예를 사다니? 미쳤구나! 제 정신이야?!” “나도 그때는 잠깐 미쳤을지 싶다. 하지만 후회는 없어. 게다가 저 정도면 내 인생 걸어도 괜찮지 않겠어?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의 녀석이라구.” “그래도 바보 녀석아. 노예를 몰라? 배신한다구! 네 어머니처럼!” 인상을 찌뿌린 나는 세리카를 노려보았다. 녀석은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사과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됐어. 아이 셋 정도 낳으면 도망 못 가겠지.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배신한 게 아냐. 억울하게 잡혀간거라구.” 세리카는 말이 안 통한다는 표정으로 잠시 날 쳐다보다가 가게 안의 물건을 신기한 듯이 구경하는 스피릿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굉장한 미인이구나. 얼마 줬냐?” “9천 900만 루나.” “이런 미친 자식, 그 돈이면 웬만한 아가씨 열 명은 휘어잡고도 남겠다.” “모르는 소리 마. 우리 스피릿이 얼마나 말을 잘 듣는데. 그 정도는 안 아깝다구.”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세리카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말을 잘 들어?” “응. 볼래? 스피릿. 이리와봐.” “예.” 스피릿이 총총 다가왔다. “앉아.” 영문을 모르고 쳐다보던 그녀는 내 말대로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 “일어서.” 그러자 스피릿이 뭐가 가닥을 잡은 얼굴로 상냥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다음엔 뭘 할까요? 주인님.” “어때? 굉장하지? 하하하하~!” 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쳐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스피릿은 한 손을 뒤로 돌려 내 등가죽을 슬며시 꼬집었다. 윽…. 노예에게 잡혀 사는 얼치기는 나뿐 일거야. 세리카는 대단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피릿에게 몇 마디를 질문을 했다. 스피릿은 예의바르게 대답했고, 세리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노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영 어색하네. 보세요. 스피릿양? 여기서는 그냥 편하게 지내세요. 구박하는 사람은 이 친구 외에는 없으니까.” “예. 감사합니다.” “수도에는 노예가 많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아냐 임마. 노예가 어디 좀 비싸? 있는 사람들이 노예를 산다구. 게다가 자기가 노예라고 말하는 노예는 없어. 나도 실제로 노예는 오늘 처음 본다. 이리 들어와. 오랜만에 왔으니 차라도 한잔 마시자.” 난 씩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 그대로네? 하나도 안 바뀌었어.” “어, 나름대로 가게를 좀 바꿔보려 했는데. 아내가 이대로가 좋다고 해서 말야. 그래서 그냥 두고있지. 자, 이거 들어요.” “감사합니다.” 스피릿은 세리카가 내어주는 차를 받아서 내 앞에 한잔 놓고 자기 앞에 한잔 놓았다. 그러다가 난 깜박 잊고 있던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 잊고 있었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좀 샀어.” “언제 주나했다. 거기 바구니에 올려.” 난 낄낄 웃으며 빈 바구니에 오렌지 봉지를 쏟았다. 그러자 금세 번듯한 손님 대접용 과일이 바구니가 만들어졌다. “혹시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거야?” “응.” 세리카는 씩 웃으며 다리를 꼬고 그 위에 깍지낀 손을 올렸다. 손님 대접이 부실하다고 쏘아준 나는 오렌지를 하나 집어들어 껍질을 까서 한 조각 떼어내 옆에 앉아서 가는 손가락으로 두꺼운 껍질을 까려고 노력중인 스피릿에게 내밀었다. “스피릿, 아~.” “아, 아뇨. 제가….” “스피릿, 아~.” 내가 꿈쩍도 하지 않고 말하자 세리카의 눈치를 좀 살피던 스피릿은 얼른 오렌지를 받아먹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슬쩍 딴 곳을 쳐다보던 세리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노예 아가씨와 상냥한 주인님이구나. 그런데 캘버린에는 어쩐 일이야?” “아.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수도에서 지낼 것 같아.” “그래? 잘됐네. 우리 가게 매상 좀 올려 줘.” “킥,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아, 그런데. 그 사람은?” 퀘퀘한 가게 안을 가득 채운 향긋한 오렌지 냄새를 맡으며 그 사람에 대한 것을 묻자 세리카가 약간 쑥쓰러운 얼굴을 했다. 바로 그때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군침 도는 냄새가 나네~?” “여보? 왜 나왔어요? 누워 있으라니까.” 세리카가 일어나더니 약간 어두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안쪽은 방이 있는데 그의 아내가 나오고 있는가 보다. …아니 잠깐. 여보? 그 사람 목소리인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 사람, 즉, 세리카의 마법스승이자 이 가게의 주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상당히 경악스러운 모습이었다. “루루씨?!” “오~! 이게 누구야? 개망나니 콜트군 아냐?” 오랜만에 만났는데. 개망나니라니. 내가 뭘 어쨌는데. 그것보다 저 배는 뭐냐? “당신이야말로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4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20대 젊은 아가씨 모습의 루루씨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오렌지 하나를 띄어 올려 붙잡았다. 루루씨는 이곳 캘버린에서 꽤 이름 있는 마법사다. 지금은 비록 배가 불러 저런 모양이지만, 세리카가 말했다. “임신했을 때는 마법 쓰면 안된다고 그랬잖아요.” “하지만 먹고 싶은데 어떻게 해? 배 때문에 허리가 숙여지지 않는다구.” 세리카는 그녀에게서 오렌지를 넘겨받아 두꺼운 껍질을 까서는 오렌지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루루씨는 시큼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오렌지를 삼키더니 세리카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손짓에 자리에 앉은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세리카를 노려보았다. “야 임마. 너 루루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한테 그러지마. 이렇게 된 건….” “어머? 나한테 뒤집어 쒸울 작정이야? 자기도 좋다고 그랬잖아?” “당신이 먼저…! 아니, 그만둬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세리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뭐야? 이 사태는? 루루씨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놀랐지? 사실은 말야.”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렇듯 그녀도 남자랑 연애할 시간보다는 마법스펠 연구에 빠져있을 때가 많아서 젊을 날을 모조리 날려버린 불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실력있는 마법사가 되어 마법전서에 자신이 만든 마법을 기록하고야 말겠다는 부푼 꿈을 꾸던 루루씨는 결국 자신의 청춘을 바쳐 스스로 만들어낸 마법을 5개나 학회와 협회의 인증을 받아 모든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전서에 기록하는 영애를 이루게 되었지만 막상 꿈을 이루고 나니 가슴속이 텅 비어 좀처럼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고 그래서 고민한 결과 꿈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거하고 8개월은 족히 되어 보이는 배하고는 무슨 상관입니까?” 세리카의 도움을 받아 오렌지를 야금야금 먹던 루루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나이 이제 221살이야. 연구를 위해 협회에 승인을 받아 재구성한 이 몸에도 슬슬 한계가 왔지. 늙어 죽을 때가 됐어. 남은 시간은 50년? 잘해야 60년 정도 뿐이야. 이 정도 시간이면 스펠 몇 개는 더 만들어 마법전서에 기록시킬 수 있겠지만 이젠 필요 없어. 대신 남은 수명을 날 위해 쓸 거야.” “그러니까. 그거하고 이거하고 무슨 상관이냐구요.” “이 싸움밖에 모르는 망나니 녀석, 넌 어째 아직도 머리가 그 모양이니?” “뭐요?! 이 마귀할멈이!” “내 아내다. 마귀할멈이라고 하지마. 임마.” 세리카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움찔해서 몸을 뒤로 빼자 루루씨가 세리카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가 그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200년이 넘도록 마법사로 일했어. 그러니 남은 시간 정도는 여자로서의 날 위해 쓸 거야. 처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18살짜리 소년이 소개장을 들고 혼자 내 가게에 찾아왔었지. 괜찮은 남자더라? 뭔가 꿈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에 귀여운 얼굴이 맘에 들었어. 아직 솜털을 벗지 않아서 좀 켕겼지만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지.” “…그래서 6년의 시간 동안 교육을 빙자한 연애질을 한 겁니까?” “응. 이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 재미있었어. 행복했지. 아, 콜트 네가 왔을 때는 좀 망설였어. 이이와는 전혀 틀린 성격과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신선했거든?” “…목욕하는 거랑 운동하는 거 훔쳐본 게 우연이 아니었군요.” 루루씨는 킥킥 웃더니 말했다. “아~ 그때는 정말 두근거렸어. 열혈미소년과 지적미소년 사이에서 머뭇거렸을 때는 꿈 많은 처녀로 돌아간 것 같았지. 그러다가 네가 시험에 합격해서 떠날 때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어. 그때부터 타오르기 시작했거든? 세리카라는 멍청한 제자 놈이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거야.” 시선을 돌린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리카를 쳐다보았다. “너 이 새끼, 아무리 그래도 네 스승님이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면목 없다. 처음엔 강제로 겁탈 당했던 것 같아. 몇 번 당하다가 보니 어느새 스승님이 여자로 보이더라.” “아, 그때는 노골적으로 유혹해도 넘어올까말까 하는 게 너무 한심해 보였거든? 그래서 몰래 약을 타서… 우후후~!” 입을 딱 벌린 나는 멍청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건의 발단과 원흉은 당신이었군! “무서운 분이군요. 어떻게 제자를 잡아먹을 생각을 다하셨습니까?” “나도 조금은 반성하고 있어. 하지만 말야 청혼은 이쪽에서 먼저 했다구? 솔직히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건 날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 그렇지?” 세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사랑하게 됐어.” “…불쌍한 녀석.” 세리카는 고개를 숙였고 루루씨는 그런 그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베시시 웃었다. 뭔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피릿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의 꿈과 여자의 행복을 모두 잡으셨군요! 대단하세요!” “그렇지. 넌 뭔가 알아주는 구나.” 루루씨는 화사하게 웃으며 스피릿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루루씨가 그녀의 손을 잡아 소매를 슬쩍 걷어올리며 말했다. “역시, 노예였구나. 굉장히 예쁜데. 콜트, 네거니?” “예.” “녀석, 아무것도 모르던 녀석이 엄청난 사고를 쳤는데? 스피릿, 네 주인 많이 밝히지?” 스피릿은 날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심심하면 키스해달라고 졸라대세요.” “어머나. 우리 그이하고 똑같네? 오하하~!” 얼굴이 벌게진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세리카, 스크롤 몇 장 팔아라.” “…어, 이쪽에 있어. 따라와.” 세리카를 따라간 나는 갖은 잡동사니를 쌓아놓은 선반에서 루루씨가 직접 만든 스크롤을 뒤적여 이번 일에 쓸 것을 골라내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 집에 돌아가면 버릇을 고쳐놓을 테야.” “좋겠다. 나도 그래봤으면 싶은데.” 뭔가 그렇게 우스운지 깔깔 웃고있는 루루씨를 힐끔 쳐다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둬. 루루씨는 힘들어.” “역시 그렇지? 솔직히 말하면 나 잡혀 살아.” “힘들겠다. 그나저나 23살에 애 아빠라니. 좀 무섭다야.” “묻지마. 19살 때부터 4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렸어. 왜 지금에야 아이를 임신했는지 이상할 정도라구.”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 나는 골라낸 스크롤을 그에게 내밀었다. “힘내 임마. 자주 찾아올게.” “고맙다.” 스크롤을 계산하던 세리카가 갑자기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싫지만은 않아. 저래뵈도 꽤 귀여운 데가 있어.” “…221살 먹은 아줌마인데?” “나이를 많이 먹어도 인품이 좋아지거나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는 건 아냐. 경험이 많아서 실수가 좀 줄어들 뿐이지. 생각하는 건 우리랑 다를 바가 없어.” “예를 들면?” 주판을 두들기며 계산을 하던 세리카의 손을 잠시 멈췄다. 그는 약간 쑥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틀 정도 키스 안 해주면 토라져. 귀엽더라.” “그런 얼굴로 그렇게 말하지마. 소름 돗는다.” “어라? 넌 그런 거 못 느껴? 저렇게 예쁜 노예랑 같이 지내는데?” “산지 얼마 안됐어.” “그래? 그럼 내가 말한 대로 해봐. 재미있으니까.” 안 그래도 하고 있는 중이시다. 계산을 끝낸 그에게 값을 지불한 나는 웃으며 이야기중인 그녀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왜? 좀더 있다가 가지.” “늦었습니다. 준비해서 내일은 좀비 잡으러 갈거라구요.” “그래? 너도 힘들겠다. 예쁜 노예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 밥벌이한다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그럼 갑니다.” “그래, 잘 가렴. 다음에 또 놀러오고.” “안녕히 계세요.” 문 앞에서 스피릿이 고개를 꾸벅였다. 루루씨는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난 세리카의 도움을 받아 소포로 부쳤던 짐을 말 위에 올려 밧줄로 동여맸다. 8개월짜리 배를 안고서 밖에 나와있는 루루씨를 잠깐 돌아본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말의 고삐를 잡고 앞서서 걸었다. 뒤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스피릿이 얼른 달려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악~ 학! 같이 가세요.” “겨우 그 정도에 헥헥 거리면 어떡해? 너 나 따라다니려면 뛰는 연습 좀 해야겠다. 뒤에서 몬스터가 쫓아오면 어쩔거야?” “주인님이 안고 뛰시면 되잖아요?” 고개를 돌린 나는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주인님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냐?? 이렇게 무거운걸 어떻게 안고 뛰어?” “예에?! 제가 어디가 얼마나 무거운데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린 나는 옆에서 걷고 있는 그녀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여기.” “꺅!? 주인니임!”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짓궂게 웃으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화가 난 스피릿이 내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날뛰는 소동이 있은 다음 우리는 다시 한가롭게 대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전에 약간 웃지 못할 보복을 당해야 했지만. “사람들 보는데서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해요! 창피하단 말예요. 정말~! 주인님 변태!” “사랑해 스피릿.” 내 헛소리에 할말이 없어진 스피릿은 볼을 부풀리고 있다가 대뜸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쨌든 엉덩이 이리 대세요. 남자 엉덩이는 얼마나 탱탱한지 저도 한번 만져봐야겠으니까.” “엥?” 슬레이브 Running Fire: 26 “시끄러, 겁쟁이 바보 노예야.” 집으로 돌아와 준비를 끝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어제 저녁에 빌려다 놓은 수레에 이것저것 장비를 올리고 출발 준비를 했다. 말 타고 가도 상관없지만 스피릿도 함께 하니까 어쩔 수 없다. 한사람이 늘어 난 결과로 필요해진 수레랄까? 돌아올 때 좀비 머리를 올려둘 곳이 부족하니까. “스피릿. 끝났으면 어서 나와!” “아침은 먹고 가야죠.” 손에 프라이팬을 든 스피릿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도시락으로 만들어. 가면서 먹게.” “아침 거르면 속 상한단 말예요. 주인님도 참~.” 입술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린 그녀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도시락을 준비할 동안 말을 데려다가 수레에 묶었다. 서서히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짧아진 기분이 확실히 느껴지는군. 그때 여행복 차림의 스피릿이 도시락을 들고 나왔다. “다됐어?” “예. 문은 다 잠궜고요. 화로도 꺼트렸어요.” “잘했다.” “그럼 요기 뽀뽀해주세요.” 수레에 올라앉은 스피릿이 입술을 가르키며 말했다. 난 그녀에게 키스해주는 대신 씩 웃으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슬슬 돈벌러 갈까나?” 아랫입술을 삐죽내민 스피릿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호라~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나봐? 속으로 킥킥 웃어준 나는 천천히 열리는 성문을 나서서 동부 지방에서 수도 캘버린으로 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안 고갯길로 말을 몰아갔다. 마차를 타고 반나절 정도 걸어간 곳에 위치한 자리안 고갯길은 고갯길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산 능선에 걸쳐져 여행객과 그 승용물의 굳건한 정신과 육체를 시험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경사도를 자랑했다. 게다가 고갯길 주위로는 거대한 스피아페루 강이 흐르고 있어서 돌아가는 길도 없다. 때문에 수도에 가려면 어금니 꽉 깨물고 이 자리안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거다. “우와~! 저걸 넘어가야 해요? 이슈리 다리 아프겠다.” 이슈리는 스피릿이 붙인 말의 이름이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가 저길 넘을 일은 없어. 저기 다리 보이지? 나무로 만든 거. 저길 건너서 고갯길이 끝나는 부분 숲 속 어딘가에 있을 좀비 몇 마리 퇴치하면 되는 거야.” 스피릿은 응응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리 근처에 가서는 고개를 저었다. “전 못가요! 으앙!” “괜찮아. 드워프가 만들어서 꽤 튼튼하다구.” “하,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가다가 끊어지면 어떻게 해요…?” 스피릿은 거대한 절벽의 날카로운 끝과 끝을 위태위태하게 연결하고 있는 흔들다리를 쳐다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매달렸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준 나는 한가지 묘한을 짜냈다. “저, 정말 괜찮은 거예요?” “물론이야. 그러니까 이거 좀 놔줄레?” “싫어요. 꺄아~! 흔들렸어요! 지금 흔들렸다구요!” “켁켁~! 스피릿 목 조르지마!”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내 옆에 바싹 붙어있던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내 목을 끌어당겼다. 덕분에 숨이 쉬어지지 않아 좀 난감했지만 난 겨우겨우 말이 당황하지 않도록 하며 다리를 건너는데 성공했다. “너 집에 가면 손톱 좀 깍아라.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할퀴어? 아~! 쓰, 따가워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무서웠단 말예요.” 아직도 오들오들 떨어대는 그녀의 힐끗 쳐다본 나는 목과 얼굴에 생긴 밭고랑을 좀 만져보다가 손을 내렸다. 젠장, 언데드 사냥하기 전에 상처 입으면 감염될 수도 있다구. 하지만 저 불쌍한 게 뭘 알겠냐. 고개를 가로 저은 나는 다시 마부석에 올라 스피릿을 불렀다.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마차로 올라온 그녀는 아직도 떨리는지 몸을 웅크리고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고소공포증이 꽤 심하구나?” “어, 어렸을 때 탑에서 떨어진 적이 있어서….” “겨드랑이 빌려줄까?” 처음에 이해를 못하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다가 얼른 머리를 끄덕였다. 왼팔을 든 나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 내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스피릿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기대어왔다. “이, 이러고 있으니까 좀 안심이 되요.” “다행이구나.” 피식 웃어준 나는 오른손으로 고삐를 흔들어 마차를 몰아 고갯길이 끝나는 곳으로 향했다. 고갯길에서 다리가 있는 곳까지는 땅이 평평하고 길도 잘 닦여 있어서 마차가 지나는데 별 어려움은 없지만 숲으로 들어가자니 꽤 힘들 것 같았다. “잡목이 너무 많은걸? 굴곡도 심하고, 이래서야 마차를 끌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사냥하기엔 힘들겠어. 그렇다고 마차를 두고 가자니 누가 가져갈 것 같고….” “그, 그렇죠? 그냥 여기 있어요. 예?” 숲 속에서 풍겨오는 으스스한 기운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던 스피릿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별수 없겠다. 쓸만한 기술이라고는 꼬집기하고 응석부리기 밖에 할 줄 모르는 노예를 사지로 끌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몇일 머무르면서 숲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들이나 사냥할까?” “예! 그래요!” 스피릿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난 킥킥 웃었다. 마차를 한구석에 고정시킨 나는 짐을 풀어서 장비를 정리 한 다음 정육점에서 사온 오크통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통 안의 내용물을 근방에 숲에 철철 흩뿌리며 밖으로 나왔다. 점심을 준비하던 스피릿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낚시 전에는 미리 떡밥을 뿌려둬야 하는 거야. 그래야 고기가 많이 몰려들거든?” “하지만 그건 피잖아요.” 난 피가 가득 담겨있던 오크통을 숲속으로 던져버리며 말했다. “사람이나 동물에겐 거의 본능에 속하는 3가지 욕구가 있어. 스피릿은 머리가 좋으니까 알겠지? 한번 말해 볼래?” 잠시 머뭇대던 스피릿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음…. 먹는 것, 자는 것, 에, 나머지 하나는 딱히 떠오르는게 없는걸요?” 고개를 돌린 나는 마차 옆에 앉아서 프라이팬을 들고있는 스피릿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턱을 한 손으로 잡아 위로 들었다. 스피릿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본다. “내가 가르쳐주지. 마지막은 성욕이야. 아름답고 건강한 이성을 상대로 자신의 피를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표현이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스피릿은 내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래서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그런 본능적인 욕구를 가진 인간이나 동물이 언데드가 되면 오직 한가지 욕망을 가지고 죽은 몸으로 일어나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그 욕망을 표현하려 애쓰지. 자, 여기서 문제. 언데드, 특히 좀비나 구울이 가진 욕망은 무엇일까요? 정답을 맞추시는 분께는 콜트 슈발츠표 입술 박치기 1회 무료권을 선물로 드립니다.” 스피릿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서, 성욕이요? 세상에~! 좀비에게 그런 욕망이 있었어요? 꺄아~! 싫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한심한 듯이 쳐다본 나는 헛기침으로 그녀를 진정시킨 다음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허연 안개가 깔려있는 숲 속을 쳐다보았다. 이승에 열린 저승의 땅. 저것이 왜 열리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속설엔 분노와 증오의 염이 강한 사람이 죽은 곳에 죽음의 땅이 열린다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다시 스피릿에게 고개를 돌린 나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성욕보다 더 강렬한 욕구가 있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욕구는 의외로 간단해. 식욕이야.” “윽…!” 스피릿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가방에서 성수를 꺼낸 나는 그것을 천에 묻혀 검에 바르며 말했다. “먹고자 하는 의지. 죽어서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는 주체할 수 없는 식욕에 사로잡혀 살아있는 것을 찾아다니지.” “무, 무서워요.” 스피릿이 오들오들 떨면서 말했다. 고개를 든 나는 하하 웃으며 얼굴을 폈다. “괜찮아. 배경이 좀 살벌하다뿐이지 녀석들은 힘도 없고 의외로 잘 죽는다구. 스피릿은 걱정하지말고 주인님만 콱 믿어.” “예에.” 스피릿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구운 베이컨과 버터를 바른 빵으로 점심을 해결한 나는 물대신 성수를 한병 따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물통에 부어. 그리고 절대로 이 근방 개울이나 뭐 그런데서 세수하지마, 마시지도 말고.” “예? 왜요?” “좀비도 병의 일종이야. 물가에 좀비 시체가 쓰러져 있으면 어쩔래? 떠날 때까지는 수통의 물을 수건에 적셔서 세수를 하고 물통에 있는 물만 마셔.” “그, 그럼. 말은요?” “양동이에 물을 떠서 성수 한 병 부어서 마시게 해. 성수는 많이 준비했으니까.”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완료되고 해가 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니 옆에 앉아있던 스피릿이 말했다. “주인님. 추워요.” “추우면 저기 불가에 앉아있어. 여기 올라와 있지 말고.” “땅속에서 좀비가 솟아오르면 어떻게 해요?” “머리를 밝아버려. 아, 깨지면 돈 못 받으니까 살살.” “…토할 것 같아요.” “저기 숲에 가서 토해.” 건성으로 대답해주니 스피릿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심심한데 우리 뽀뽀나 한번 할까요?” “난 안심심해.” 끝까지 뻣대자 스피릿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수레바닥을 손가락으로 긁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괜찮다고 …어제도 등 돌리고, …그랬는데. …잤으면서… 우응…. 주인님 바보.”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은 확실히 들었다. 숲을 노려보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일하는 중이잖아. 응석은 집에서 부려.” “…예.” 그녀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그렇게 말 없이 앉아있으려니 해가 넘어가고 슬슬 밤이 왔다. 스피릿이 눈에 뛰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본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스크롤 뭉치를 꺼냈다. 그 중에서 라이트 스펠을 찾아서 찢었다. “라이트.” 팟! 밝은 빛 구슬이 머리위로 떠올랐다. 수레에서 일어난 나는 근처 숲을 돌아다니며 주워온 장작을 모닥불에 던져 넣어 불길을 살렸다. 그리고 창과 검을 꺼내 바닥에 꼿았다. “뭐가 나와도 울지 말고 놀라지 말고 거기 꼼짝 말고 있어야해. 알겠지?” “예, 예! 뭐, 뭐가 나왔어요?” 난 대답대신 어두워진 숲 속 안쪽에서 스멀스멀 움직이는 것을 가르켰다. 와사삭…! 와사삭…! “퀘레레레….” “꺄악! 엄마야?!” “스피릿! 얌전히 있지 못해!” “흐으응~! 예에~!” 스피릿이 울상을 지었다. 하반신을 동료에게 먹혔는지 쏟아진 내장을 질질 끌며 숲 속에서 기어 나오는 좀비를 발견한 나는 등에 매고 있던 자동석궁을 꺼내 녀석에게 두어발 쐈다. 정확히 머리를 노려서. 퉁퉁퉁~! 퍼퍽! 치이이이~! “캬르르르~!!” 한발은 빗나가고 두발이 명중했다. 머리에서 연기를 뿜어내던 좀비는 뱀처럼 몸을 까뒤집다가 이내 뻗어 버렸다. 휘적휘적 숲으로 들어간 나는 검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잘라냈다. “새끈하게 500만 벌었네.” “으앙~! 주인님 저 무서워요! 빨리 오세요!” 수레에 주저앉은 스피릿이 잉잉거리며 날 불러댔다. 좀비머리를 양동이에 담은 나는 그것을 들고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스피릿은 양동이를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반응에 킥킥 웃어준 나는 잘라낸 좀비 머리를 준비해온 나무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렇게 무서워하지마. 언젠가는 우리도 이렇게 될 운명이라구.” “저, 저는 죽은 몸을 이끌고 돌아다니는 거 싫어요! 행복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죽을 거라구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죽어도 깨끗하게 죽어야지. 옮은 말이야. 아! 저기 한 놈 또 온다. 이번엔 제법 온전한 놈인데? 스피릿?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예에, 조심하세요!” “걱정 붙들어매!” 창을 뽑아들고 고개를 돌린 나는 히죽 웃으며 두팔을 앞으로 내밀고 절뚝거리며 오는 녀석에게 걸어갔다. 그 날밤 대략 5마리 좀비를 사냥한 나는 새벽이 밝아오자 졸린 눈을 비비며 마지막 좀비 머리를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뒤에 바싹 붙어있던 스피릿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저, 저는 이런 일 싫어요. 무섭기만 하고….” “하지만 짭짤하잖아? 벌써 2500만 루나라구.” “주인님~!”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너무 겁먹지는 마.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야. 나비 애벌레를 무서워하던 소녀가 어른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닭의 목을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손질하여 맛있는 닭고기요리를 연인에게 내미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 익숙해질….” “흡~!? 오엑~!” “으악~! 어디다가 토하는 거야?!” “하, 하지만 주인님이… 닭 잡는… 생각해 버렸…! 오에엑~!”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은 정말 위액을 쏟아내고 있었다. 너무 긴장되서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않더니 그런가보다. 하지만 내 등에 쏟아낼 필요는 없었잖아?! 머리에 쓰고 있던 손수건을 벗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준 나는 가죽 자켓을 벗어 위액을 닦아냈다. 건더기가 없어서 천만 다행이다. “킁킁… 으와, 스피릿 위액 냄새 이상해.” “아앙~! 왜 냄새 맡으시는 거예요~! 주인님 변태~!” 스피릿이 앙증맞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두드렸다. 낄낄 웃어준 나는 주변 정리를 끝내고 불가에 앉았다. 밤새도록 피워놓았던 불은 아직도 그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래서 손쉽게 불을 살릴 수 있었다. 불 위에 삼발이를 설치하고 냄비를 걸고 있으니 스피릿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제가 할게요.” “됐어. 그냥 앉아있어.”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 종이봉지 안에 든 스프가루를 부글부글 끓는 냄비 안에 부어넣은 나는 국자로 그것을 좀 젖다가 스프가 만들어지자 컵에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별로.” 스피릿은 눈만 빼꼼이 떠서 날 훔쳐보고는 뜨거운 스프를 후후 불어 마셔댔다. 한손에 컵을 들고 말린 육포를 뜯던 나는 문득 하늘을 보았다. 이거, 않좋은데? 스프 한 컵을 비운 나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더 드시지.” “더 먹을 거야. 잠깐 할 일이 생각나서 일어난 거지.” “무슨 일인데요?” “몰라도 돼.” 고개를 돌린 나는 검을 뽑아들고 근처 숲 속의 나무를 보이는 대로 잘라왔다. 엘프가 보면 뭐라고 하겠지만 죽은 자의 땅에서 별 쓸모도 없는 나무를 좀 베겠다는데 그들도 할말 없을 거다. 육포를 씹으며 나무를 다듬어 뼈대를 세우고 나뭇가지를 가져다 지붕을 올리고 벽을 세우자 1시간도 안돼서 훌륭한 움막이 완성되었다. 그제서야 구름 때문에 햇님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된 스피릿이 고개를 끄덕이며 움막으로 다가와 이리저리 살폈다. “우와~! 대충대충휙휙척척 하시더니 금세 이런 게 만들어지네요? 주인님은 마법사 같아.” 대충대충휙휙척척? 피식 웃어준 나는 다시 불가에 앉아 스프를 마셨다. “마저 밥 먹고 짐 옮기자.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으니….” “꺄악!” 빠르게 고개를 돌린 나는 어느새 숲속에서 기어나와 스피릿에게 다가가는 좀비를 발견했다. 이런, 빌어먹을! 구름 때문에 기어 나왔구나!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내며 외쳤다. “스피릿! 엎드려!” “캬아아아…! 꾸르르!” “…아, 안돼…, 다, 다리가아… 주인님 사, 살려…!” 스피릿이 질린 얼굴로 다리를 덜덜 떨어댔다. 그동안에 좀비는 스피릿의 코앞까지 다가가서는 다 빠지고 몇 개 남지 않은 이빨로 그녀의 살을 뜯어먹으려 했다. 속으로 욕지기가 솟아올랐다. 뒤늦게 달려가며 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엎드리라니까! 이 병신아!” “으, 으아아…!” 석궁은 힘들다. 엘프가 아닌 바에야 스피릿 때문에 생긴 사각으로 좀비를 맞출 수 없어! 이를 드러낸 나는 최악의 경우 스피릿과 함께 좀비를 걷어차 버릴 생각으로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쉬이익! 퍽…!? “캬르륵…?” 허리에 기다란 창을 맞은 좀비가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찌나 빠르게 날아왔는지 창은 바닥에 쓰러져 꾸물꾸물 움직이는 좀비의 허리를 절반 이상 꿰뚫고 있었다. 후다닥 달려간 나는 허리에서 검을 뽑아 쓰러진 녀석의 목을 잘라버렸다. 좀비는 머리가 박살나면 움직이지 못한다. “허억! 헉!” 평소에는 반 장난으로 사냥하던 좀비가 이렇게까지 무서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의 뺨을 후려갈기려 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내 가슴을 껴안고 엉엉 울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팔이 닿지 않는구나, 젠장! “으아아앙~! 주인님!” “시끄러! 닥치지 못해!? 엎드리라고 그랬잖아!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죽으려고 작정했냐!” “앙앙앙~! 주인님! 주인니임~!” 가슴에 붙어있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밀어내 고함을 질렀지만 엉망이 된 얼굴로 훌쩍이던 스피릿은 내가 하는 말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 가는 팔로 안간힘을 쓰며 다시 안겨들려고 했다. 젠장, 이 상태에 무슨 훈계냐. 정신차리면 다시 해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나는 좀비의 허리에 박혀있는 장창을 누가 던졌는지 찾아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을 발견한 나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사내가 좀비가 우글거리는 숲에 서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덩치다. 나보다 머리하나는 더 클 정도다. 그때 숲 속에 가만히 서있던 거한이 두 손을 들었다. 공격하지 말라는 건가? “괜찮으니 이리 나오쇼.” 난 손을 흔들어 그를 불렀다. 위아래 나처럼 가죽바지와 철갑을 댄 롱부츠, 그리고 두꺼운 셔츠와 자켓을 걸친 사내는 긴 머리카락을 여자처럼 뒤로 묶어두고 있었으며 대단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트롤과도 견줄 것 같은 그 어깨 넘어로는 스피어로 보이는 창 몇 개가 삐죽 솟아올라있었다. 허리에는 롱소드도 하나 차고 있고, 오른쪽 어깨에 하고 있는 것은 방패인가? 저 덩치에는 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자 스피릿은 울음을 그치고 내 뒤로 몸을 숨겼다. 난 그를 올려다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모험가입니까? 어쨌든 제 노예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묵묵히 나와 내 뒤의 스피릿을 쳐다보던 거구의 사내는 고개를 돌려 마차와 그 위에 실려있는 짐들을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성수나 해독제 있소?” 차갑고 고저가 없는 저음이지만 놀랍도록 미성이다. 신전의 성가대에서나 들을 법한 목소리에 난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찾으러 갈 필요도 없이 미리 챙겨놓았던 성수병과 해독제를 허리에 맨 가방에서 꺼냈다. 그러자 사내가 그 멋진 목소리로 말했다. “값은 얼마든지 치르겠으니 그거 나에게 팔면 안되겠소?” “그냥 드리지요. 제 노예를 살려주신 목숨 값입니다. 야, 숨어있지 말고 나와서 인사해.” 고개를 뒤로 돌리며 으르렁대자 스피릿은 잠깐 나와서 그에게 고개를 꾸벅이더니 얼른 내 뒤로 돌아가 옷자락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어이구~! 그때 사내가 말했다. “아이니아.” “예.” “엥?” 사내가 워낙 덩치가 커서 보이지 않았는데. 그의 등뒤에서 웬 아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상당한 미인이다. 스피릿이 멋모르는 공주님이라면 저 아가씨는 모든 역경을 딛고 왕좌에 앉은 여왕님 같은 분위기랄까? 나이는 대충 20대 후반쯤으로 보인다. 나에게 약병을 받은 사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아이니아라는 아가씨를 무릎에 앉혔다. 남자가 워낙 크다 보니 저렇게 해도 그리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니아라는 아가씨는 좀비에게 상처를 입었는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사내는 그녀의 붕대를 풀어 성수를 뿌리고 해독제를 내밀어 그녀에게 마시게 했다. “저 같은 거 보다는 주인님이 드시는 게….” “그런 말하지 말고 어서 마셔요.” 아이니아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사내도 만만치 않게 뜯긴 자국이 팔 여기저기 보였다. 거참, 신파극의 한 장면이로세. 난 주머니에서 해독제를 한 병 더 꺼냈다. “이봐요. 이거 줄테니 이상한 분위기는 그만 벌이시죠?” “어머, 정말 받아도 될까요?” “해독제는 또 있으니 사양말고.” 그러자 아이니아가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며 얼른 약병을 받았다. 두 사람이 해독제와 성수로 상처를 소독하는 동안 난 질질 짜면서 매달리는 스피릿을 달랬다. “그만 짜지 못해?! 좀비에게 시집 보내버린다?!” “으아아앙~! 싫어요!” 긁어 부스럼이냐? 젠장. 잠시 후 스피릿이 눈물을 닦고 내 옆에 앉았다. 아이니아는 여전히 그 사내의 무릎에 앉았다. 내가 볼 때 저 사내가 그녀가 흙바닥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자리에 앉은 나는 그 자세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콜트 슈발츠입니다. 덕분에 바보노예가 좀비에게 뜯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쪽이야말로 덕분에 해독제까지 얹었습니다. 고맙소.” “별 말씀을.”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았다. 그리고 숲에서 어어어~ 우루루~ 캬아아~ 하며 걸어나오는 썩은 시체들에게 은화살을 날렸다. 투투투투투퉁~! 머리 부분에 대고 화살을 흩뿌렸기 때문에 놈들은 걸어오다 말고 픽픽 쓰러졌다.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덩치에게 물었다. “실례하지만 그쪽은 성함이?” “템, 템 하슬러라고 합니다. 그냥 여행객일 뿐, 모험가는 아니오.” 하슬러(Hostler)? 마부라고? 그런 성도 있던가? 난 스피릿을 바라보았고 스피릿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구나. 고개를 돌린 나는 그의 무릎에 앉아있는 아이니아를 바라보았다. “이쪽 분은?” “제….” “노예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템이 말하기 전에 아이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템의 얼굴이 이상하다. 입을 꾹 다문 그는 잠시 땅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등에서 스피어를 뽑아서 내 머리위로 집어던졌다. 엄청난 근육의 힘을 받아 거의 음속에 가깝게 날아간 스피어는 걸어오던 좀비의 목을 정확히 관통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템은 아이니아를 무릎에 앉혔다. 그러면서 스피릿을 가르켰다. “그쪽 아가씨도 노예입니까?” “예. 뭐, 예쁘죠? 스피릿 인사 안 해?” “스피릿이라고 합니다. 이분의 노예입니다. 아까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템이 대뜸 말했다. “아가씨도 노예가 되기 전에 귀족이었나?” “예?” 스피릿은 당황하여 나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허리에 매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성수병을 꺼내든 나는 마개를 뽑아 말에게 집어던졌다. 그러자 녀석에게 접근하던 좀비가 비명을 지르며 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너울너울 춤을 춰댔다. “이히히힝!” 빠각! 놀란 말에게 뒷발굽을 얻어맞은 좀비는 머리가 떨어지는 끔직한 사고를 당하고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겁먹은 스피릿이 달래고 있으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템이 말했다. “우리는 동부 캔버스 지방에서 오는 길인데. 여기는 뭐요? 웬 좀비가….” 템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스피어를 투척했다. 또 좀비 목이 날아갔다. 귀신같은 솜씨와 힘이다. 자리에 앉는 그를 바라보며 난 손을 흔들었다. “이 근처에 죽음의 땅이 열렸거든요. 그래서 좀비가 생겨나는 겁니다. 이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 여행자들이지. 불쌍하고 멍청하게도 허약한 좀비에게 잡혀서 이런 꼴을 당하는 거고.” “주인님 악당 같아요. 위로는 못해줄 망정….” “시끄러, 겁쟁이 바보 노예야.” 스피릿이 웅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를 뒤적인 나는 성수병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까 마셔둬. 좀 짭짤하겠지만 남기면 안돼.” “주인님….” 약간 감동 받은 얼굴로 날 쳐다보던 그녀는 성수병을 두 손으로 잡고 입에 가져갔다. 난 템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대답을 잠시 머뭇거리던 템을 대신하여 아이니아가 말했다. “조용한 곳을 찾고 있어요. 주인님과 노예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요.” 말을 참 동화적으로 하시네? 그때 눈썹을 찡그린 템이 어눌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이제 그 주인님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당신은 누가 뭐래도…!” “저는 템 하슬러라는 분을 주인님으로 모시는 보통 노예일 뿐이랍니다.” 템은 입을 다물고 난 고개를 갸웃했다. 뭐? 아가씨이? 석궁을 든 나는 숲에서 기어 나오는 좀비를 한 마리 잡은 다음 그들을 잠시 쳐다보았다. 템은 내 시선에 무뚝뚝한 시선으로 마주하다가 끙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롱소드를 뽑았다. 그의 시선이 닫는 곳에 좀비가 있었다. “아가씨. 잠시 여기 계십시오. 무슨 일 있으면 부르시구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기 싫다는데 애써서 이야기 해달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은도금 롱소드를 뽑았다. 번쩍이는 블레이드에 스피릿와 아이니의 얼굴이 비춰졌다. 저렇게 놓고 보니 잘 어울리는데? “예상보다 일찍 끝날 것 같다. 스피릿. 아이니아 씨하고 마차 위에 올라가 있어. 좀비가 가까이 다가오면 이걸로 쏴버리고.” 자동석궁을 꺼낸 나는 그것을 스피릿에게 내밀었다. 두 손으로 석궁을 받아든 스피릿은 당장 훌쩍거리며 말했다. “주인님~! 무서워요.” 고개를 돌린 나는 인상을 찌뿌렸다. 스피릿은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만약 내가 몬스터에게 잡혀 죽으면 넌 어떻게 할거냐? 엉엉 울면서 따라서 죽을래? 주인님, 저도 따라갈게요. 하면서? 바보짓 하지마. 살고 있으면 살려고 노력해. 언제까지나 널 업고 다니겠다고 약속했지만 나도 가끔 넘어질 때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란 말야.” 입을 꾹 다물고 날 쳐다보는 스피릿과 아이니아를 데리고 수레로 간 나는 그녀들을 수레 위로 오르게 했다. “수레는 지면보다 높으니까 좀비의 운동성으로 볼 때 침착하게만 대처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야. 무섭다고 울면서 주저앉지 말고, 알겠지?” “흐윽, 예에. 하, 하지만 위험 할 땐 도와주셔야 해요?” “물론.” 난 씩 웃어주었다. 수레에 올려져 있는 스피어 몇 개를 들고 몸을 돌리니 저쪽에서 템이 무서운 솜씨로 롱소드를 휘둘러가며 좀비들의 목을 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좀비가 많이 나오는데? 스피어를 들고 달려간 나는 말에게 덤벼드는 좀비의 가슴에 스피어를 박아 땅에 매다 꼿아버렸다. 그리고 은도금 롱소드로 녀석의 목을 쳤다. 치이이이~! 매케한 연기가 솟아오른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나는 허리를 펴고 롱소드를 치켜들었다. 숲에서 일단의 좀비 떼가 으르렁거리며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 “이승에 무슨 한이 남아서 죽은 몸으로 산 자의 땅을 밟고 다니는 거냐! 대가리에 썩은 궤변만 잔뜩 담은 짐승의 주검들아! 덤벼라! 하늘에게 버림받아 지상을 방황하는 너희들에게 내가 안식을 주리라! 으흐하하하!” Reload Running Fire: 01 “아까 주인님이라고 부르던걸?” “퀘레레~!” “캬르르륵! 캬아아!” “어어어어…! 어어!” 산짐승들에게 뜯어 먹히고 피부가 썩어 여기저기 근육과 뼈를 드러낸, 그로데스크의 절정을 달리는 좀비들은 절망의 신음을 토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저주를 받아 신에게 버림받고 지상을 헤매는 저런 존재들은 불쌍해서라도 묻어야한다. 난 검을 들고 좀비들에게 뛰어갔다. “으라차!” 다시 살아난 시체라는 점 때문에 보통사람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언데드 몬스터는 생각보다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에 요령만 있으면 떼거지로 몰려와도 충분히 퇴치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가슴속에 들어찬 공포심을 지우지 않고 어줍잖게 좀비들에게 맞선다면 스피릿과 같은 사태에 처하게 된다. “꺄아아아~! 주인님 살려주세요! 어엉~! 무서워요~!” 한참 좀비의 목을 따는 작업을 하다가 찢어지는 비명에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수레 위에 올라앉은 스피릿과 아이니아가 서로의 몸을 껴안고 주저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다행이 좀비들은 수레위로 올라간다는 개념이 없어서 괴성만 좀 지르며 팔을 뻣어 그녀들을 잡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둬도 상관없겠지만 저러다가 패닉에 빠져서 살짝 맛이 가버리면 큰일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줬는데 뭘 들은거야!? 이 바보!”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고 풀 스윙으로 앞에서 걸어오는 좀비 목을 잘라버린 나는 뒤로 돌아 달려갔다. 수레가 지척에 이르자 난 다리 근육을 부풀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원 트위스트로 몸을 비틀어 좀비 머리위로 날아가니 아래쪽에서 스피릿과 아이니아가 입에 헤벌리며 날 올려다보았다. 두 팔을 벌린 채 균형을 잡은 나는 그대로 좀비의 어깨를 발로 짓밟으며 떨어졌다. 으드득! 근육과 뼈가 썩어서 그런지 날 받아낸 좀비는 그대로 척추뼈가 등을 뚫고 나오며 부러져버렸다. 수레주변에 몰려있던 좀비들은 자기 동료가 으스러졌는데도 눈길하나 돌리지 않고 아가씨들에게 마수를 뻗고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남자들이다. 이런~! 평소행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군. “썩은 자식들! 꼴에 남자라고 이쁜이들에게 덤비는 거야!” 은도금 롱소드 들어올린 나는 녀석들의 몸을 삼등분 해버렸다. 아이니스가 외쳤다. “콜트씨! 뒤!” “캬르르륵!” 좀 빨리 이야기 해주지! 뭔가가 등에 달라붙더니 내 어깨를 씹었다. 썩은 내가 진동한다.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는 은도금 롱소드를 든 나는 그것을 겨드랑이에 집어넣고 힘껏 찔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칼자루를 위로 베어 올렸다. 당장 좀비의 어깨가 쩍 벌어졌다. 반쯤 썩은 내장과 구더기가 쏟아져 나왔다. 물러선 나는 그래도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좀비를 걷어차 목을 쳤다. 소매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드니 저쪽에서 템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럭저럭 다 끝났나? “이봐요. 괜찮….” 이런, 기절했군. 죽은 자가 일어나 산 자에게 손을 내 뻗는 모습에 울고불며 간혹 토악질도 서슴지 않던 두 아가씨는 내가 좀비의 몸을 대각선으로 잘라내는 것까지는 봐주더니 안에서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자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버렸다. 꽤 차분해 보이는 아이니스양도 기절해 있는 모습은 볼품 없다. “아가씨!?” “노예 아니었수?” 좀비의 독 때문에 시커멓게 얼룩이 져버린 은도금 롱소드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그러자 템은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헛기침을 조금 하며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서 아이니스와 스피릿에게 덮어주었다. 몸이 크다보니 입고 있는 옷도 대단히 커서 두 사람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맞는 옷 찾기 힘들겠군요.” 템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친구 같으니라고, 머리를 휘휘 저으며 수레로 걸어간 나는 상자를 뒤져 안에서 해독제와 성수를 꺼내 마시고 상처에 뿌렸다. 그리고 그에도 성수병을 하나 던져주었다. “해독제는 아까 먹었으니 됐고, 이거나 하나 더 마셔두쇼.” “고맙소.” 템은 고개를 까딱였다. 어깨를 으쓱한 나는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던 순수건을 벗어서 어깨상처를 질끈 묶은 다음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좀비 대가리 수집에 나섰다. 아이니스와 스피릿을 돌보고 있던 템이 물었다. “뭘 하는 거요?” “뭘 하는 것처럼 보이슈?” 템은 또 입을 다물었다. 거, 재미없는 친구네? 좀비의 머리를 잘라 상자에 담고 있던 나는 한숨를 내쉬며 허리를 폈다. “아까 들었겠지만 난 모험가요. 지금은 돈벌이 중이지.” 내 이야기를 들은 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도움을 받아 좀비 머리 수집을 끝내니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이제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 아가씨들은 비가와도 잘 자네.” “어제 길을 잃고 숲을 지나오는데 좀비를 만났소. 그래서 노숙도 마다 않고 밤을 새워가며 걸어서 꽤 지쳤나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어제 밤 새웠지. 나야 간간이 졸면서 눈을 붙였지만 스피릿은 그런 기술이 없으니까. “어허~! 아까보다 더 많이 오는데? 템이라고 했지요? 나 좀 도와줘요.” 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도와 수레를 붙잡고 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수레를 움막 안으로 집어넣는데 성공한 나는 움막 안에 아가씨들과 템을 내버려두고 다시 밖으로 나와 숲을 돌아다니며 나뭇가지를 잘라왔다. 그리고 움막을 하나 더 세웠다. 11월 초순에 내리는 비는 차갑다. 말이 감기라도 걸리면 수도까지 짐을 끌고 가는데 지장이 많아지지. 움막을 완성하고 말을 데려온 나는 녀석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수레를 넣어둔 곳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푸하~!” “이걸로 좀 닦으시오.” “고맙수.” 템이 내미는 수건을 받는 나는 머리를 좀 닦은 다음 옷을 벗어서 수레위에 널었다. 스피릿과 아이니스는 이제 서로의 몸을 껴안고 자고있었다. “되게 잘 자네.” “원래 여자들은 잠이 많은 법이니까.” 혼잣말하는 것처럼 템이 중얼거렸다. 난 피식 웃으며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 바닥에 내려놓은 상자에 앉았다. 그러자 템이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컵을 내밀었다. 어라? 불은 없… 고개를 내리니 바닥에 히트버너가 있다. 고맙다고 말해준 나는 컵을 받아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쏴아아아아~! 움막밖에는 계속해서 비가 쏟아지고 있다. 겨울비다. 이제 날이 추워지기 시작할거다. 그런데 이 남자랑 있으니 영 대화가 되질 않는군. 심심한데. 스피릿이나 깨울까? 자고 있는 스피릿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템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노예요?” “그렇소만?” “아름답구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맙수.” “그런데 그 노예아가씨. 전에 귀족이었소?” 뜨거운 차를 마시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수?” “…….” 아~! 정말! 대화하기 힘드네! 한참 후 템이 입을 열었다. “말투나 행동거지가 평민이나 보통 노예는 아니더군.” “…대화를 좀더 스피디하게 진행해보지 않겠습니까? 대답하나 들으려면 3박4일 기다려야겠네.” 템은 날 조금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그런 식이면 노예가 재미없는 주인님이라고 생각할 거요.” “나는 그녀의 주인 같은 게 아니오!” 갑자기 템의 언성이 올라갔다. 난 고개를 갸웃하다가 기절을 구실로 속 편하게 자고 있는 아이니스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아까 주인님이라고 부르던걸?” “……!” 템이 고개를 숙였다. 내 것도 아니지만 넉살좋게 히트버너 위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는 주전자를 든 나는 컵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템의 잔에도 차를 따라주었다. 후르륵 뜨거운 차를 마시며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나본데. 마침 비도 오고 좀비도 나오지 않으니 괜찮으면 들어봅시다. 고민이 있다면 내가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을지 모르잖수, ” 그러자 한참 머뭇대던 템이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보기엔 상당히 우직하게 생겼는데 쌓인 고민이 많았는가보다. 템 하슬러라고 이름을 밝힌 이 여행자를 가장한 용병 같은 사내는 실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저 남쪽에 위치한 베레타(國) 사람으로 몇 년 전 만해도 어느 베레타에서 꽤 영향력있는 귀족가에 얹혀서 집안 대대로 마부를 해왔다고 한다. Reload Running Fire: 02 “부러워요. 두 분.” “성이 하슬러인 것은 그 때문이군?” “그렇소. 베레타에서는 가문을 따지는 편인데 이중 우리 하슬러가(家)는 대대로 귀족가의 마부로서 그 대를 잊고 있었소.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나는 프테리크스가의 마부였었지. 그런데….” 그런데 이 프테리크스가의 당주 프테리크스 파브닐 공작이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투옥 당했단다. 베레타의 강력한 왕권을 등에 업은 간신배들의 모략 때문이라고 템은 열변을 토했다. “베레타의 국왕폐하는 멍청하게도 그자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소! 빌어먹을! 선대에서부터 왕가에 충성을 바쳐온 프테리크스가와 파브닐 공작님을 그토록 쉽게 버리시다니!” “선대에서부터 이어왔다면 영향력도 만만치 안찮수? 국왕도 선대부터 보아온 가문과 당주를 신용했을 텐데?” 템은 씹어서 뱉듯이 말했다. 컵을 든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작년에 즉위한 현 베레타 국왕폐하의 나이는 13살이오. 어려서인지 매사를 좋고 나쁘고로 판단하지. 그자들이 국왕폐하께 역모를 고발하자 앞뒤 가리지 않고 기사단을 동원해 프테리스크 가문을 멸절시켰소. 선대에 있었던 반란 사건 때 왕비전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신 거라고 하지만, 나는 용납할 수 없소. 가끔은 그 작은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할 정도요.” 상당한 살의를 내비치는군. 난 컵 안에 든 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13살짜리 코흘리게 국왕이 간신들의 감언이설에 홀딱 빠져 프테리크스 공작가의 멸절을 명령하자 간신배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단을 동원해 당주와 그의 식솔들 잡아들이고 대대로 쌓아온 재산과 토지를 압류했단다. 그리고 반란사건을 공식적으로 발표해서 국민들의 의심을 없앰과 동시에 당주는 물론이고 그의 식솔들을 비롯한 종속가문들을 입을 막는다는 이유로 모조리 참수시켰다. …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렇게 발표 됐지만 죽은 것은 공작님과 도련님들뿐이었소. 나머지는 다른 가문에서 비밀리에 사갔소.” “사갔다고?” “노예제도는 그랜퍼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법적인 제도만 없다뿐이지 사람을 가축 취급하는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소. 그런 자들이 와서 사갔지. 하인이나 마부들은 부역을 위한 일꾼으로, 하녀나 영애들은 침대에서 쓸 노리개로.” “과연, 사람 사는 곳은 별반 다를 게 없구나.” 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은?” “나도 일꾼으로 팔려갔소. 하지만 친구들을 설득해서 함께 탈출했지. 내 청춘을 광산 같은데서 버리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이리로 온 거요?” “그렇소. 종속가문이라고는 하지만 반역자 딱지가 붙어있어서 베레타에서는 제대로 살수가 없었소. 친구들과 헤어지고 반 년 정도 떠돌아다닌 나는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왔소. 마부로 일할 때 그랜퍼스에서 온 친구에게 이 나라말을 조금 배운 것이 인연이 되었지.” 하지만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기에 그는 무작정 산으로 들어가 사냥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실력도 쌓였고 간혹 산 속을 돌아다니는 엘프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었단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그는 근방에서 꽤 알아주는 사냥꾼이 되어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새 인생의 시작이었지. 나름대로 보람도 느꼈던 것 같소. 아이니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산 속의 오두막에서 산짐승과 몬스터를 잡으며 유유자적하게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알고 지내던 엘프친구가 급히 찾아왔다. 자신의 딸아이가 다른 사냥꾼에게 납치되어 노예상에 팔아 넘겨졌으니 함께 구하러 가자는 것이었고 평소 아버지를 따라 자신의 오두막에 자주 놀러 오던 엘프소녀를 귀엽게 여기던 템은 얼른 무장을 챙겨 그를 뒤를 따랐다고 한다. “아이를 팔아 넘긴 사냥꾼 녀석을 붙잡아다 다그쳐서 노예상의 위치를 알아낸 다음 바로 쳐 들어갔소. 그런데, 거기 아이니아가 있더군. 솔직히 말해서 좀 놀랐었소.” “왜? 전에 아는 사이였수?” 템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니오. 내가 모시던 파브닐 공작님에겐 네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아이니아 아가씨는 막내따님이셨소. 공작영애지. 반란죄로 잡혀있을 때 어떤 귀족 자식에게 노리개로 팔려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3년 만에 타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 거요.” 오호라. 그렇게 된거였군. 왜 노예에게 말을 높이나 했더니. 난 어느새 식어버린 차를 입안에 털어 넣은 다음 말했다. “그래서 들고 튀셨다?” “나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소. 어떻게든 그녀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녀를 데리고 나왔소. 그런데 아가씨가 다음날부터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요.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더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요.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난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템은 어눌한 음성으로 나에게 하소연을 해댔다. 내 착각인지 모르지만, 한동안 속에만 넣고 앓던 것을 이제야 겨우 쏟아내는 그의 얼굴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빈 컵을 바닥에 내린 나는 수레 위에서 곤히 잠자고 있는 아이니스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참 기구한 운명이로군.” 말을 마치고 얼굴이 벌게인 템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 덩치로 부끄러워하는 거야? 킥킥. “내가 정리 해볼 테니 들으쇼. 대략,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감시 쳐다 볼 수도 없었던 주인 아가씨를 다시 만났는데 빌어먹을 세상에 휩쓸려 다니다보니 그녀는 노예가 되어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닌다. 나는 당신의 주인이 아니라고 해봤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래서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다. 주인집은 망해버렸고, 반역자의 딱지가 찍혀 그녀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이 철없는 아가씨는 자꾸만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안겨들려고 한다. 정말 죽고 싶다. 뭐, 이거 아뇨?” 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씩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입장이 뒤바뀌어 버렸군. 그토록 도도하고 우아하던 공작영애가 마부였던 남자의 노예가 되다니. 이걸 보고 인생역전이라고 하는 건가?” “무슨 헛소리요?” “헛소리라면 헛소리 일수도 있겠지. 이봐요. 템, 당신과 아이니스양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염병할 조국은 잊어버려요.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당신과 그녀의 입장과 과거도 지워버려요. 아이니스는 이미 마음을 정하고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는데 당신은 그런 그녀에게 그녀가 지워버린 공작영애라는 짐을 씌우려하고 있군. 그만둬요. 안 그래도 힘없는 아이니스 더 힘들어 할거야. 불쌍하지 않수? 어느 날 갑자기 반역자의 오명에 집안은 박살나버리고 부모님은 죽고 자기는 못된 놈들에게 끌려가 험한 꼴을 당했는데 운 좋게 만난 당신이라도 그녀에게 힘이 되어줘야 할거 아뇨. 안 그래요?” “하, 하지만 나는 아가씨의 마부일 뿐이란 말이오!” “그거 관뒀잖아요. 지금은 그냥 사냥꾼이잖아.” 템은 뭐라고 대꾸하려했다. 난 손바닥을 펴서 그의 말을 막았다. “불쌍한 아이니스는 무섭고 힘들어서 혼자 많이 울었을 거야. 그러다가 차츰 세상과 타협하게 됐겠지.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야. 우리 스피릿도 처음 봤을 때 방구석에 처박혀서 잉잉 거렸거든? 어쨌든 지금 당신은 그녀의 마부가 아니고, 아이니스도 당신의 노예일 뿐 공작영애가 아니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과거가 당신과 아이니스를 붙잡을 힘이 없으니 맘놓고 앞으로 달려가요. 그래도 망설임이 생겨서 자기설득이 힘들면 아이니스 손잡고 여관에라도 들어 가든가. 침대에서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템이 입을 딱 벌리며 날 쳐다보았다. 난 움막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손을 가져가며 쓰게 웃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양심의 가책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하는 거지. 괜찮아요. 그 양심만 좀 깍아내면되니까. 아, 그렇지. 당신 나이가 서른이라고 그랬지? 나이도 있으니 이참에 아이니스를 임신시켜서 아내로 삼아버리는 건 어때? 아이니스도 좋아할 것 같은데.” “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템이 외쳤다. 난 그를 바라보며 낮고 차갑게 말했다. “당신 밀입국자라 우리나라 시민증 없잖아.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니스도 정식으로 데려온 거 아니라며? 등록도 안되어 있을 거 아냐. 하지만 문장이 있을 테니 노예는 노예지. 경비대나 관리원에 들켜서 아이니스 뺏기면 어쩔꺼야? 꼼짝없이 내줘야 할거 아냐. 하지만 임신시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현행 노예 관리법상 27살이 넘는 노예가 임신해서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그 노예는 노예로서의 능력을 상실하게 돼. 요컨대 노예는 노예라도 아무도 사가지 않는 노예가 되는 거야. 누가 그런 노예를 사가?” 난 계속 말했다. “잘 들어요. 위조시민증 하고 노예문장을 전문적으로 파주는 사람이 있는데. 원한다면 소개시켜줄 용의도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지. 보아하니 노예상에서 아이니스를 찾으려해서 있던 곳을 등지고 여행을 나선 것 같은데 어차피 갈 곳도 없고 받아 줄 곳도 없을 거 아냐. 그럼 아이니스가 하자는 대로해요.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그편이 훨씬 생각하기 편 할거야. 이럴 땐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 말을 마친 나는 고개를 돌려 비 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템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니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는 다음날 새벽에야 그쳤다. 밤새도록 템과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섰지만 좀비는 두 마리 더 나오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 더 이상 내보낼 좀비가 없는가본데.” “그럼 이제 끝이에요?” 어제 내내 자고 저녁에 잠시 일어났다가 밥 먹고 또 자는 필살기를 보여주던 스피릿이 나에게 물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냐. 죽음의 땅은 언제 닫힐지 모르거든? 시체만 공급되면 좀비는 계속해서 생겨나지. 하지만 한동안은 조용 할거야. 우리가 다 잡았으니까.” “그래도 무서워요. 숲 속에 이런 게 생기다니.” “무섭지. 하지만 덕분에 우리 같은 사람도 먹고사니까. 일단 고맙다고 해둘까?” “이런 끔찍한 재해를 돈벌이로 생각하시다니 주인님, 너무 못되셨어요.” “뭐야?”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마구 간지럽혀 주었다. 스피릿은 몸을 비틀며 웃어대다가 나에게 덥썩 안겨들었다. 헥헥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 있으니 어디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 다 됐수?” “…대략 30구 정도 되더군.” “그럼 저쪽으로 피해 있어요. 스피릿, 너도.” “예.” 총총 달려가는 스피릿을 쳐다보며 씩 웃어준 나는 기름통을 가져다 움막 안에 쌓여있는 목 없는 시체더미에 한 통을 다 부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파이어 볼!” 스크롤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어른 머리 만한 파이어 볼이 만들어졌고, 난 그것을 움막 안에 집어던졌다. 쿠쾅! 화르르르!! 폭발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불붙은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날렸지만 비가 온 직후라 산불의 위험은 없을거다. 후끈한 열기에 뒤로 물러선 나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부석에 앉은 템이 말했다. “이걸로 된 거요?” “다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불꺼지면 매장하고 갑시다.” 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까지 수레를 태워주는 대가로 그는 잠시 내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횡재했다. 좀비 머리가 32개라니. 이게 다 얼마야?” “1억 6000만 루나네요.” “스피릿 사랑해.” “어마~! 뭐, 뭐하시는 거예요.” 스피릿을 끌어안고 볼에 키스해주고 있으니 아이니스가 살폿 웃었다. “부러워요. 두 분.” 그때 템이 헛기침을 했고 아이니스는 더욱 짙게 웃었다. 두시간 후, 거센 불길에 백골이 되어버린 좀비시체를 디그 스펠로 타다 남은 나무들과 함께 통째로 땅속에 묻어 버린 나는 마차를 타고 다시 수도로 향했다. 시체를 태워서 매장한다고 점심 무렵에 출발했더니 거의 저녁시간이 다되어서야 도착했다. 아직 해는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성문 경비병에게 모험가 길드에서 받아온 서류와 좀비머리가 가득 담긴 상자를 열어 보이며 결재를 요구하자 성문 경비대장을 비롯한 경비대원들이 우루루 달려나와 좀비머리를 구경하더니 날이 거의 어두워져서야 돈을 지불해 주었다. Reload Running Fire: 03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 1억 6000만 루나요. 그런데 죽음의 땅은 어떻게 됐소?” “좀비는 거의 퇴치했지만 죽음의 땅은 아직 그대로입니다. 간간이 레인저를 보내서 확인해야겠던데요?”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사람은 적고 일거리는 많다보니 전부 관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소. 그래서 말인데, 혹시 생각 있으면 경비대에 들어오지 않겠소? 고수익에 평생 직장 보장하리다.” 히끗히끗한 머리카락에 멋진 콧수염을 가진 수도 제 3경비대장의 권유에 난 킥킥 웃으며 손을 저었다. “죄송하지만 길드 쪽이 돈 더 많이 주는데요.” “하지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잖은가. 거기 예쁜 아가씨를 과부로 만들고 싶소?” 스피릿이 움찔하며 날 쳐다보았다. 경비대장은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그만 두고 싶지 않아요. 모험가가 되면 꼭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거 아직 못했거든요.” 난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끌어당겼다. 경비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더니 그 멋진 콧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요새 레인저가 부족해서 말야. 자네 같이 실무경험이 많은 사람은 언제든 환영이니 생각나면 꼭 들러주게.” “그러죠. 스피릿. 가자.” “예.” 돈 자루를 어깨에 매고 스피릿과 함께 복도를 걸어나가려니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대원들이 눈을 휘둥그래 뜨고 날 쳐다보았다. “방금 봤어? 어깨에 매고 가는 거 돈 자루지?! 대단한걸? 나도 저만큼 벌어봤으면 좋겠다.” “좋긴 개뿔, 모험가는 목숨걸고 하는 직업이야. 너나나나 반쯤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사람들 하는 짓은 도저히 못해.” 이상, 등뒤에서 들려오는 경비병들의 근무간 잡담되겠다.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걸어나가니 스피릿이 얼른 물었다. “정말 모험가는 아무나 못하는 거예요?” “아니, 몸 건강하고 머리만 좀 있으면 아무나 할 수 있어. 단지 어떻게든 살아남아 삶을 즐길 각오가 필요할 뿐이지.” “삶을 즐길 각오요?”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를 돌린 나는 오른팔을 뻗어 옆에서 걷고 있는 스피릿의 허리를 감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스피릿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 주인님?” “돈 좀 벌어보겠다고 돌아다니다가 쉽게 죽어버리면 이렇게 예쁜 노예를 귀여워 해줄 수도 없잖아? 등에 스피어가 박혀도 일어나야지. 그래서 살아야지. 삶을 즐기려면 나름대로 각오가 필요한 법이야.” “그, 그만 놔주세요. 저기서 경비대 아저씨들이 쳐다봐요.” “볼테면 보라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춰준 나는 그만 그녀를 놓아주고 몸을 돌렸다. 스피릿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좀 만져보고는 얼른 내 뒤를 따라왔다. 계단을 따라 반 지하에서 올라가니 성문 한 귀퉁이에 템와 아이니아가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나오세요?” “예. 오래 기다렸죠? 갑시다.” 스피릿을 데리고 수레에 걸터앉으니 템이 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대로를 따라 굴러가는 수레에 앉아 캘버린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갑니까?” “가까운 여관으로 갑시다. 당신들 내려줘야 할거 아뇨.” 그러자 템은 고삐를 흔들어 말을 재촉했다. 그때 스피릿이 바싹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주인님. 집에 아직 목욕통이 없는데요.” “아, 그랬었지. 그럼 여관에서 저녁 먹는 김에 목욕도 하고 가자.” 스피릿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우리는 외곽의 한산한 여관에 도착했다. 목욕물을 부탁하고 저녁을 시켜 먹은 우리는 욕탕으로 내려갔다. “허, 당신 제법인데?” “…어딜 보는 거요?” 템은 수건으로 몸을 가리며 얼른 목욕통으로 들어갔다. 부끄러워하기는, 피식 웃어준 나는 이틀 간의 노숙으로 끈적끈적해진 몸을 통에 담궜다. 그나저나 어쩌지? 저 친구 덕분에 돈을 꽤 많이 벌었는데 말야. 좀 떼어 줄까나? 수지타산을 세우며 통 안에 앉아있던 나는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수건으로 동여맨 스피릿이 템과 아이니스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반겼다. 젖은 모습이 너무 예쁜데? “뭐하시느라 이제 나오시는 거예요?” “생각할게 좀 있어서. 템. 잠깐 나 좀 봅시다. 당신 방 어디요?” 템은 선선히 나를 그들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테이블을 끌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그를 앉게 했다. 의자가 두 개 밖에 없어서 아이니스와 스피릿은 각자의 주인 뒤로 가서 섰다. 두 손을 깍지낀 나는 내 앞의 덩치를 잠시 쳐다보다가 묵직한 가방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돈주머니를 꺼냈다. “모험가는 공짜 일을 하지 않아. 일 한 만큼 대가를 받지. 덕분에 어제 생각보다 좀비를 많이 잡았수. 이건 그 사례금이요. 도와줘서 고맙수.” 그리고는 10개씩 동전을 쌓아 그의 앞에 놓았다. 번쩍이는 6개의 동전 탑을 내려다보며 템과 아이니스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스피릿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오게 해서 그 자리에서 샤먼에 있는 마법상점의 이름과 주소를 쓰고 마담에게 보내는 간단한 메모를 더해 그에게 내밀었다. “샤먼의 마법상점에 가서 이걸 보여주면 위조 시민증과 노예 문장을 파줄 겁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니까. 그 돈 아껴뒀다가 마담이 달라는 대로 주쇼. 그리고 아까 수도 제 3 경비대장이 실무경력이 많은 사람을 레인저로 뽑는다던데 정 일자리가 없으면 거기로 가봐요. 고수익에 평생직장 보장해준다니까. 그럭저럭 사는데는 지장 없을거요. 그럼, 나는 이만.” 말을 마친 나는 돈 자루를 가방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그러다가 깜빡 잊은 것이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잘먹고 잘사쇼.” 그리곤 재빠르게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안타깝게도 당황에서 깨어난 템이 서둘러 날 붙잡았다. 아~! 젠장. 바로 나갈걸, 딱 걸렸네. 돈 적게 줬다고 그러는 건가? 제에기~! 떱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니 템이 딱딱한 얼굴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잘 대해주는 거요?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거라면 그만 두시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나는 다시 테이블로 걸어가 그 위에 올려져있는 동전으로 손을 뻗었다. “별로, 내 일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일 뿐이요. 싫으면 말….” 턱! “가,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이니스가 앞으로 나오더니 얼른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고 나도 씩 웃어주었다. 하지만 템은 이마를 찌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색을 한 아이니스는 얼른 내 손을 놓아주고는 옆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손을 매만지다가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기회가 왔어요. 그러니 잡고 싶어요. 테, 템, 나, 나 이제 과거 같은 건 상관하지 않아요. 그러니 나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아요. 예? 평생 나만 안아준다면 죽을 때까지 당신만 보고 살게요. 예에…? 흐윽… 나, 난 당신 곁에만 있고 싶어요. 이제 다른 사람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긴 싫단 말예요. 훌쩍… 흐윽, 으윽…!” 말을 마친 아이니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는 훌쩍이며 울어댔다. 스피릿과는 전혀 딴판으로 우는군. 고개를 돌려보니 템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니스, 울지마.” 침대의 담요를 가져다 그녀의 어깨를 덮어준 템은 어색하게 말했고 눈물로 엉망이 된 아이니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 안겨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뭐 하시는 거예요? 분위기 파악 좀 하세요. 얼른 나와요. 얼른!” 스피릿에게 손을 잡힌 나는 끌려가다시피 방에서 나와야 했다. “의외로 재미있던데. 좀 더 놔두지.” “주인님!” 스피릿이 도끼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아직 뭘 모르는 구나. 연애는 당사자들 보다 주위사람의 눈에 더 재미있게 보이는 법이야. 어디어디….” 문에 귀를 대고 안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니 뭔가가 내 귀를 잡아당겼다. “아아아~! 아파!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놓지 못해?!” “남의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에 관심을 쏟는 것이 일반론이에요. 이 바보 주인님아. 따라와요.” “이거 놓고 말해! 아, 아파아~!” 스피릿에게 귀를 잡혀서 여관을 나선 나는 연신 투덜거리며 수레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어두운 대로를 한참 가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스피릿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아까 멋있었어요.” “뭐가?” “있잖아요. ‘잘먹고 잘사쇼.’ 할 때요.” 스피릿이 어색하게 내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난 킥킥 웃으며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남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더라? 그래서 좀 도와줬지.” “주인님 멋쟁이.” 스피릿이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아 당기며 말했다. 난 씩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Reload Running Fire: 04 “죄, 죄송해요. 하지만 주인님이 인질로….”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짐 정리를 내일로 미루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스피릿이 문을 잠그고 방으로 들어오자 서랍장 위에 올려둔 촛불을 훅 불어 끈 나는 크게 하품을 한 다음 잠을 청했다. “잘 자.” “저기, 주인님? 그냥 주무세요?” “응?” 어두워서 그녀가 보이지 않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귀는 열려있어서 스피릿의 엄청난 말을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러지 말고 욕구불만인 노예를 좀 안아주세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긴거야?” “단순히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1회용이지요. 아세요? 저 지금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고 얼굴이 후끈거려요.” “그럼 그렇게 말하지마. 헤픈 여자 같아.” “주인님은 그런 말 할 자격 없으세요.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윽, 할말 없다. 침대로 기어올라온 스피릿은 누워있는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말했다. “보세요. 남자가 책임진다고 한번 말했으면 애프터 서비스는 기본으로 보장해 주셔야죠. 요새 키스가 부쩍 줄었어요. 잘 때도 등돌리고 자고, 왜 그러는 거예요? 주인님 주제에 노예에게 반항하는 거예요? 이봐요. 주인님. 듣고 계세요?” 그녀의 건방진 말투에 그만 울컥해진 나는 낮게 으르렁댔다. “듣고 있다. 이제 말 다했냐?” “아뇨. 아직 끝난 거 아니에요. 모르세요? 저 지금 농성 중이라구요. 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시면 내일부터는 단식투쟁은 물론 부분 파업에 들어갈 거예요.” 기가 찬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나는 스피릿이 있음직한 부분을 노려보며 말했다. “부분파업? 어떤 종류인데?” “아침에 늦잠 자고 식사준비 안할거예요.” “그리고?” “노예로서 주인님에게 제공하는 일부 서비스를 중단 할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서비스?” “엉덩이나 가슴 못 만지게 할거예요. 주인님 키스 할 때 제 가슴 만지시죠? 꼬집을 거예요. 귀엽다고 엉덩이 쓰다듬으시죠? 치한이라고 소리 칠 거예요. 하지만 그 외 가벼운 스킨쉽은 연중 무휴 서비스중이니 언제든 환영이에요.” 속으로 좀 웃어준 나는 애써서 진지하게 말했다. “이봐, 그건 너무 하잖아? 엉덩이 정도는 빼 줘.” “안돼요. 그건 범죄에 가까운 애정표현이라구요. 지나가는 경비대원이 보면 풍기문란으로 주인님하고 저 잡아갈지도 몰라요?” “오호, 그렇군. 몰랐어. 그래서, 파업철회 요구조건이 뭐냐?” “최소한 하루 세 번 키스 보장해주세요. 뺨이나 이마에 하는 거 말고 입술에 하는 걸로,” “알았어. 그럼 이제 자자.” “어머, 주인님 넉살도 좋으시네요? 아직 끝난 거 아니에요.” “더? 또 뭔데?” “가벼운 스킨쉽은 언제든 환영이지만 아까 언급했던 가슴하고 엉덩이는 단 둘이 있을 때만으로 제한 해주세요. 다른 사람들 얼굴보기 민망하단 말예요. 그리고 어, 음….” 스피릿은 잠시 머뭇대더니 말했다. “최,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은 저와 관계를 가져주세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말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들어? “부, 부끄럽죠. 당연히…. 아으으.” 스피릿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에, 그리고 잘 때 등 돌리고 자지 마세요. 숨막혀 죽어도 좋으니 꼭 안아주세요. 물론 팔베개는 기본 사양으로 제공해주셔야 해요. 그리고….” “또 있어?” “어, 일단 지금 제게 필요한 건 이 정도예요. 그 외에 생활여건이나 저에 대한 주인님의 마음씀씀이는 지금으로도 만족하니까요. 자. 이제 협상하죠.” “잠깐, 지금 네가 내건 요구조건은 너무 개인주의적이지 않아? 나한테 득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주인님?” “그래, 말해봐.” 스피릿은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 노예예요. 그리고 노예는 주지 않아요. 받기만 할 뿐이지.”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지나갔다. 그래, 노예는 받기만 한고 주지 않지. 왜냐면 주지 않는 대신 빼앗기니까. 짧은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일 리는 없겠지만. “잊고 있었어.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자, 협상하죠? 제 요구받아 주실건가요?” 고개를 든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보았다. 가까운 곳에서 스피릿의 가슴이 만져졌다. “어마?! 주인님~! 부분파업이에요. 이러시지 마세요.” 스피릿이 내 손등을 꼬집었다. 어쨌든 그녀가 있는 곳은 알았으니 됐어.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나는 내 쪽으로 끌어당겨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더듬어 내려가 잠옷바지와 속옷을 함께 벗겨 냈다. “히익~! 주인니임?!” “알았어. 네 말 다 들어줄게. 대신 나중에 나한테 시집오는 거야? 알겠지?” “…예, 예에.”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내 목을 팔로 감아 당겼다. 수치심과 부끄러움, 화끈거림과 두근거림을 모두 덮어주는 친절한 어둠의 배려 속에서, 그녀와 나는 꽤 오랜만에 진한 키스를 나눌 수 있었다. “스피릿 나왔어.” “아. 이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스피릿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좀비사냥을 다녀 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한 이틀 쉰 다음 바로 일을 하려 했지만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는 것 같더니 눈이 쏟아져서 꼼짝없이 발이 묶여버렸다. 이웃사람이라고 하기엔 좀 어폐가 있지만 근방에 사는 사람에게 듣기로 이곳 캘버린은 북방과 가까워서 추위가 일찍 찾아온다고 그랬던 것 같다. 덕분에 난 일주일동안 집에만 있게 되었다. 혼자였다면 너무너무 심심해서 억지로라도 일거리를 받으려 눈밭을 헤치고 나갔겠지만 스피릿과 함께라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 발에 묻은 눈을 털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시장에서 봐온 물건을 부엌 쪽의 커다란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 스피릿이 얼른 와서 옷을 받아주었다. “으아~! 너무 추웠어.” 몸을 조금 떤 나는 얼른 벽난로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때 내가 사온 물건을 정리하던 스피릿이 담요를 가져오더니 내 어깨에 올려주었다. “많이 추우세요?” “응, 북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추운 건 싫어해서. 아, 이러니까 따뜻하다.” “어마, 주인님~!” 난 스피릿의 손을 잡아 당겨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푸근한 기분과 함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좋다…. 천국에 온 기분이야.” “으응~ 이러지 마세요. 저 물건 정리해야해요. 놔주세요.” “으응~!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아.” 스피릿은 쿡쿡 웃으며 팔을 들어 내 머리를 감싸안았다. “주인님은 너무 노골적이세요. 질리지 않으세요?” “미인은 3일만 보면 질린다는 소리가 있지. 그거 거짓말이야.” “아이, 거기 만지지 마세요.”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나는 그녀의 보드라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스피릿이 날 곱게 흘기며 팔을 잡아서 빼내려 하는데. 그런 행동이 더 내 가슴을 불태웠다. “스피릿, 나 키스하고 싶어.” “싫어요. 대낮부터….” 스피릿은 몸을 틀어대며 반항했다. 아으~! 귀여워라!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막 그녀의 입술을 훔치려고 하는데 스피릿이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내 어깨를 밀어 나에게서 벗어내려고 했다. “왜 그래?” “주, 주인님 그만 놔주세요. 저기 창문에 누가 봐요.” “뭐!?” 난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얀 서리가 끼어있는 창문에 정말 사람 머리가 붙어서 우리들의 애정행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내가 후다닥 스피릿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 누구야?!” 그러자 창문에 붙어있던 변태가 도망가지도 않고 창문에 낀 서리를 이용하며 글을 적기 시작했다. 삑삑…! 어머, 뜨거워라~♡ “…첼시아.” 창가에 서있던 변태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걸어간 나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우와~! 시원하다기엔 너무 차가운 바람이야! 창밖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은 첼시아와 처음 보는 아가씨가 서있었다. 난 대뜸 인상부터 구기며 말했다. “어떻게 찾아 왔어?” “시장에서 네 모습을 봤지. 그래서 뒤를 밟았어. 그나저나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는 게 당신네 집 인심이야? 어어이~! 스피릿! 얼른 문 안 열어!? 추워죽겠다!” “예에!” 깜짝 놀란 스피릿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열지마!” 내 고함 소리에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멈춰섰다. “하, 하지만.” “이 녀석들은 밖에…!?” 말하는 도중 창문으로 다가온 첼시아가 내 멱살을 붙잡더니 힘껏 잡아당겼다. 무슨 여자 힘이 이렇게 세?! 난 창 밖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두 팔로 몸을 지탱했다. 첼시아는 한 손으로 내 멱살을 잡아당긴 채로 씩 웃더니 남은 손을 들어올렸다. 하얀 눈덩이가 들려있었다. “오! 안돼! 무슨 짓이야!?” “스피릿, 빨리 문 안 열면 사랑하는 네 주인님 셔츠 안에 이걸 집어넣겠어.” “안돼! 열지마!” 하지만 스피릿은 이미 문을 연 뒤였다. 첼시아는 잽싸게 날 놓아주고는 집안으로 난입했고 난 그들에게 뜨거운 차와 벽난로를 내주어야했다. 옆자리에 앉은 스피릿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주인님이 인질로….” “됐어. 잘했다.” Reload Running Fire: 05 “그러니까 저도 주인님을 귀여워하고 싶어요.” 화를 내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뜨거운 우유를 마시던 첼시아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머, 언제나 상냥한 주인님이시네?” “시끄러워. 뭐 하러 왔어?” “춥고 배고파 갈곳이 없어 골목길을 헤매는데 문득 콜트씨가 생각나는 거 있지? 봄이 올 때까지 여기서 좀 지내면 안될깡?” 난 첼시아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나보다 돈 잘 벌면서 헛소리하지마.” 첼시아는 깔깔 웃더니 고개를 돌려 이제 스피릿에게 이빨을 들이댔다. 그녀는 스피릿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건드렸다. “처음 봤을 때는 얌전하고 조신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아까보니 주인님한테 꼬리치는 게 은근히 색기가 넘치더라? 보는 내가 다 흥분되던걸?” “…….” 고개를 숙인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었다. 난 인상을 쓰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내 노예보고 자꾸 뭐라고 하지마.” “어머, 일거리 주려고 눈밭을 마다 않고 찾아온 사람을 협박하는 거야?” 난 고개를 갸웃했다. “일거리?” “응. 좀 짭잘한 거리야. 생각 있어?” 난 은근히 기대하는 눈으로 첼시아를 쳐다보았다. 스피릿과 함께라 심심하진 않았지만 일주일동안 집안에 있으려니 슬슬 좀이 쑤셔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추운 날에 눈밭을 기어다니는 건 질색인데. “이렇게 추운데 할 일이 있어?” 첼시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그리고 그렇게 추운 곳에서 하는 일도 아냐.” 그녀는 입고있던 옷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접수번호 제 1652호 위험도 : 랭크 A 의뢰인 : 오르니트 셰퍼드가(家) 접수인 : 모험가 길드. 의뢰비 : 기본금 8000만 루나. (상황에 따라서 추가금 지급.) 의뢰내용 : 현재 캘버린에 출몰하고 있는 뱀파이어의 마수로부터 가문의 영애들과 그 구성원을 호위. 호위기한은 뱀파이어가 사라질 때까지이며, 그에 따른 추가금은 상호간의 합의 후에 결정. 추가조건 : 영애들의 안정과 가문 내의 풍기를 위해서 20세 이상의 여성 모험가에 한함. 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게 뭐야? 뱀파이어?” “어머, 요즘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몰라?” “아. 난 일주일 정도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윽, 뭔가 이상한데? 서류에서 고개를 드니 첼시아가 음흉하게 웃으며 스피릿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쁜 노예랑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는다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무심하셨다? 뭐, 이해할 수 있지. 그런데 뭐하면서 일주일을 보냈을까?” “어흐흠! 스피릿, 차 좀 더 줘.” “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피릿이 얼른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갔다. 고개를 돌린 나는 첼시아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한번 더 그 딴 소리하면 꽁꽁 묶어서 스피릿에게 가슴을 만지도록 할 꺼야.” “헤에? 그럼 우리 퍼피가 가만있는데?”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퍼피? 안 데리고 왔으면서 무슨 소리야? 미리 말해두지만 그 친구 없으면 당신 정도는 간단하게….” “저 여기 있습니다.” 예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나는 멍청한 얼굴로 아까부터 말없이 앉아있는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19살? 20살? 난 첼시아를 쳐다보았다. “누구야?” 갑자기 첼시아의 얼굴로 잔인한 미소가 흘렀다. 그녀는 옆에 앉아있는 아가씨의 어깨에 팔을 척하니 걸쳐 올리며 말했다. “퍼피야. 예쁘게 변했지?” “뭐…?” 난 퍼피라고 했던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청순 가련한 모습에서 전의 그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노예 파이터를 찾아보려 했지만 무리이지 싶다. 난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퍼피를 가르켰다. “당신, 정말 퍼피야?” “…예.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퍼피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옆에 앉아있던 첼시아는 싱글벙글이다. “에이, 뭐 어때? 몸이 바뀌니까 신선하지 않아?” 퍼피가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 만큼이나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최악이다. 퍼피는 볼멘 음성으로 대답했다. “마스터, 가슴 때문에 숨쉬기가 불편합니다. 원래 모습으로 돌려주십시오.” “안돼. 이렇게 추운데서 돈벌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니? 겨울에는 몬스터든 사람이든 다들 집안에 쳐 박혀있기 마련이야. 덕분에 우리 같은 모험가는 돈 될 일이 적지. 모처럼 들어온 일이야. 포기할 순 없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모르니?” 퍼피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첼시아가 고양이처럼 웃더니 그녀(?)의 가슴을 만져대기 시작했다. “우와, 나보다도 커. 퍼피, 가슴 정말 최고야.” “이, 이러지 마십시오. 마스터….” “예쁜 아가씨가 말투가 그게 뭐야? 말끝에 요를 붙여. 요를, 되도록 귀엽게.” 고개를 푹 숙인 퍼피는 떱떠름하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이렇게요오?” “그래, 아유 귀엽다. 퍼피,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 “마, 마스터어~!” 퍼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첼시아를 바라보았다. 첼시아는 킥킥 웃어댔고 갑자기 한심스러워진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퍼피는 왜 이렇게 만든 거야? 불쌍하게시리.” “왜긴? 거기 안 적혀있어? 추가조건에 20대 여자 모험가만 된다고 그러잖아?” 서류를 든 나는 그녀가 언급한 구절을 찾았다. 그때 스피릿이 차를 가져왔고 난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말했다. “너무 하는군. 돈 좀 벌어보겠다고 멀쩡한 남자를…. 음!? 잠깐! 뭐야! 그럼 나도 여자모습으로 바꿔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어때. 할거야 말 거야?” “안해! 젠장, 돈 때문에 내 정체성을 팔 수는 없어. 못해!” 첼시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겨울 내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거야? 몸 굳어질걸? 그리고 이 바닥에서는 간간이 이름 알려놔야 편하다는 것도 모르니? 잊혀지고 싶어?” “다른 일 찾으면 돼. 나 더러 또 여자가 되라구? 싫어.” “응? 바꿔본 적이 있어? 잘됐네. 적응기간 필요 없이 바로 갈 수 있겠다.” “글세 안 한다니까. 차나 마시고 돌아가.” 고개를 휘휘 저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많이 마셨더니 소변이 마렵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니 첼시아와 퍼피는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고 스피릿이 테이블을 치우다가 얼른 나에게 달려왔다. “주인님~!” “왜?” “이번일 해요? 예? 첼시아씨가 그러는데 저택에는 노예도 같이 들어 갈 수 있대요. 그리고 저 주인님의 그 모습 또 보고 싶어요.” “…결국엔 그거 때문이야?” “아앙~! 주인니임~! 보고 싶단 말예요~! 그리고 일주일동안 집에만 있어서 저도 심심하다구요~! 주인니임~! 일 해요~! 예에~?” “아으~! 안 한다고 했잖아!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해!” 두 손으로 귀를 막은 나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스피릿은 방안까지 따라 들어와서 날 괴롭혔다. “주인님~! 저 주인님 여장한 거 보고 싶어요~! 예에~? 뭐든 들어주신다고 했잖아요~!” “…그전에 내 등에서 내려와.” “일 받는다고 하시면 내려갈게요.” “그건 싫어.” “아앙~! 주인님.” 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내 등에 앉아있던 스피릿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로 미끄러졌다. “에이! 안 한다니까! 너 내가 여자로 변하면 좋아라 가슴하고 엉덩이 만질거지?! 그렇지!?” “예.” 기가찬다. 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이봐, 너무 속보이지 않냐?” “가끔은 저도 주인님 엉덩이랑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 난 가슴을 들이밀었다. “자.” “이것도 좋지만 전 좀 색다른걸 만져보고 싶어요. 예에?” “그럼 네 거 만져.” “주인니임~! 자꾸 그러시면 저 또 파업 할거예요?!”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미천한 노예주제에 감히 지금 하늘같은 주인님을 협박하는 거냐?” “예. 협박하는 거예요. 가끔은 노예에게도 여흥거리를 제공에 주세요. 맨날맨날 부려먹기만 하잖아요.” “귀여워해 주잖아?” “그러니까 저도 주인님을 귀여워하고 싶어요.” “넌 내 노예야. 난 네 주인이고, 우린 엄현히 주종관계라고? 방금 네 발언은 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앞에 앉아있는 스피릿의 턱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스피릿은 눈썹을 세우며 내 손을 밀어내더니 도로 내 턱을 붙잡아 위로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장차 아내가 될 사람에게 감히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자, 사랑한다고 말해보시죠. 콜트씨?” Reload Running Fire: 06 “여자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여우가 될 수 있답니다." 멍청히 스피릿의 얼굴을 쳐다보던 나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으윽, 사, 사랑해.” “일 받는 거예요. 알겠죠?” “응.” 스피릿은 좋아라 하고 웃으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춰주었다. 크흑… 잡혀버린게야. 난 잡혀버린게야아! “그래서 여기 오셨다구요?” “아아. 부탁합시다. 비용은 얼마요?” 아레프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료로 해드리죠!” 이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아닌데. 괜히 왔나? 그때 오랜만에 보는 루시아가 찻잔을 들고 왔다. “이거 드세요.” “아, 고마워.” “뭘요.” 루시아는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걸? 보아하니 아레프가 잘해주고 있나보다. 그때 스피릿이 입을 열었다. “방이 전보다 깨끗해진 것 같은데요?” 확실히, 거의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던 아레프이 방이 모든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점잖은 마법사의 연구실로 바뀌어 있었다. 아레프가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하. 루시아가 열심히 치워줬거든요.” “주인님이 연구 때문에 계속 방을 어질러서, 정리한다고 처음엔 고생했어요.” 루시아는 아레프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아레프가 말했다. “루시아. 주인님이라고 하지 말랬잖아요.” “으응, 죄송해요. 하지만 버릇이 돼서,” 고개를 꾸벅 숙인 루시아가 의문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를 보고는 살짝 웃으며 자신의 손등을 보여주었다. 스피릿이 입을 딱 벌렸다. “문장이?” “제가 파줬습니다. 불법이지만 노예문서도 없애버렸구요. 지금 루시아는 보통 평민 아가씨입니다.” 그러자 루시아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아레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레프는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좀 쓸어주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 이 참에 스피릿양의 것도 파드릴까요? 콜트씨에겐 여러모로 신세진 게 많으니까.” 난 고개를 돌려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스피릿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 이대로 조금만 더 노예로 있고 싶어요. 문장을 파면 저는 더 이상 주인님의 등에 업힐 수가 없거든요?” 나와 아레프는 멍청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루시아가 끼어 들었다. “그건 너무 감상적이야. 현실은 꿈과 틀리다구. 콜트 씨 당신이 정말 스피릿을 사랑한다면 억지로라도 파버리세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가 조금만 더 노예로 있고 싶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주인님을 괴롭히는 노예의 특권을 계속 누리고 싶어서 그러나? “안 그래도 여름이 오기 전에는 파버릴 거야.” 스피릿이 우울하게 날 쳐다보았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노예문장을 지우면 곧바로 네게 청혼 할 테니까.” “주인님….”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나는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서 그녀의 눈가에 맷혀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새삼스레 뭘 울고 그래? 바보 같이.” “으으응…. 직접 들으니까 맘이 놓여서요. 고마워요. 주인님.” 난 대답 대신 싱긋 웃어주었다. 그때 아레프가 루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아. 우리 아이 몇이나 낳을 까요?” “아, 잊고 있었는데. 전 25살 때까지는 아이 안 가질 거예요.” “어어? 왜요?” 루시아가 매혹 적인 시선으로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신혼의 특권을 질릴 때까지 느껴보는 거예요. 어때요? 우후후.” 아레프의 얼굴이 갑자기 벌개졌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고 난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닭살 돋는 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폴리모프나 걸어 줘. 돌아가는 길에 몇 사람 더 만나야해.” “어머? 그 닭살 돋는 소리 먼저 한 게 누군데 그러세요?” 쓴웃음을 지은 나는 뒤늦게 생각난 것이 있어 아직도 빨개져 있는 아레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때? 그때 그 사람들 아직도 당신 쫓아다녀?” “누구를 말하는…? 아! 그 복면사내들 말이죠? 하하하! 아뇨. 수도에 와서는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낮은 음성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이 봐서 그러는데. 어때? 여기로 직접 들어올 가능성은?” “불가능해요. 길드 건물은 방범마법이 굉장히 많이 걸려있거든요? 게다가 경비용 훈트가 있어서 침입은 불가능해요. 엑셀이 밤낮으로 길드 건물을 지키거든요?” “…아까 보니 자고 있던데?” 아레프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는 척 하는 거예요.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면 금방 대꾸할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레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폴리모프 시켜드리죠. 일어나서 저쪽에 서세요.”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앞 양탄자가 펴진 곳에 가서 섰다. 그러자 헛기침을 조금한 아레프가 뭐라고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폴리모프 아더.” “이, 이봐? 그렇게 갑자기? 어, 어라?” 몸의 근육이 내 통제를 벗어나 따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가슴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엉덩이 쪽이 부푸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가랑이 사이가 허전해질 때는 참을 수 없는 상실감을 다시 맛보아야 했다. 으윽… 이것 때문에 여자가 되기 싫었던 거야! 벌레가 온몸을 기어다니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드니 가만히 서서 날 쳐다보던 아레프가 갑자기 배를 잡고 소파에 주저앉으며 낄낄 웃기 시작했다. 거기에 스피릿은 눈을 반짝이며 침을 꼴딱꼴딱 삼켜댔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으니 루시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거울을 들고 왔다. “변함 없이 아름다우시군요. 가슴도 빵빵하구.” “욕하지마.” 목소리도 가늘게 변했다. 으윽, 스피릿의 협박과 회유로 허락하긴 했는데 막상 변하니까 또 기분 더럽다. 조심스레 거울을 들고 심호흡을 한 뒤 눈을 뜨자 20대 후반의 귀족미망인 같은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니 아이니스와 비슷한 분위기 같기도 하군. 여왕님 스타일이야. 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은 스피릿의 뜨거운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아레프를 바라보았다. “이봐. 이 얼굴은 당신이 임의로 만드는 거야?” “아니요? 체형은 모르지만 얼굴은 순전히 랜덤으로 만들어진답니다. 술자가 변형시키고자 하는 얼굴의 베이스를 설정하면 눈, 코, 입의 배치와 크기, 모양 등의 세부설정은 자동으로 조절되죠. 그렇지 않고서야 상상력만으로 이 정도 미인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아요.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니 그때 생각이 나는데요?” “몇 일이나 지났다고 그때 생각이야? 그것보다 이 수박 만한 가슴 좀 어떻게 해봐. 너무 크고 무거워. 이래서야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단 말야. 저번에 홉고블린하고 싸울 때 덜렁거려서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왜요? 잘 어울리는데.” 인상을 찌뿌린 나는 그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레프는 알았다고 말하며 스펠을 외우려 했다. 그때 무아지경에 빠져 길어진 내 머리를 다듬어 한 줄로 땋고 있던 스피릿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끼어 들었다. “아, 안돼요! 그만 두세요. 전 이대로가 좋단 말예요~!” “이봐, 이건 내 몸이야.” “하지만 전 싫어요!” 스피릿과 티격대고 있는데 루시아가 끼어 들었다. 그녀는 내 몸을 위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모든 것에는 균형이 있어요. 어떤 사물이든 형태를 구성하는 균등한 균형이 무너지면 대체로 보기 흉하게 되죠. 여자로 변한 콜트씨를 볼까요? 지금 당신은 여자치고는 상당히 키가 커요. 얼굴도 몸매에 맞게 어른스럽게 짜여있고 덕분에 전체적 스타일은 흔히들 언급하는 큰언니? 여왕님 타입과 비슷하죠. 그런데 여기서 가슴을 줄여버린다? 딴에는 활동하기 편하게 하려고 그런 다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무게중심이 맞지 않아서 당장 움직이기 힘들어 질거예요.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이상하게 보일 걸요? 키도 크고 얼굴도 미인인데 가슴이 절벽이라니, 꼭 생기다가 만 것 같잖아요?” 난 쓴 것을 삼킨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아레프가 슬쩍 끼어들었다. “시험삼아 한번 줄여볼까요?” “…됐어. 좀 크긴 하지만 이 몸에 맞는 거라니 그냥 내버려 둘레.” “잘 생각하셨어요!” 쓴 표정을 지으며 스피릿을 좀 쳐다봐 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폭과 체중 이동에 익숙해지려고 천천히 마법사의 연구실을 돌아다녔다. 루시아가 물었다. “뭐하세요?” “걷는 연습 중이다. 가슴하고 엉덩이가 무거워서 걸음이 영 어색해. 젠장.” “주인님 힘내세요.” 스피릿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응원했다. “그래, 이제 속이 시원하냐? 예쁜 주인님을 가지고 놀 생각을 하니 가슴이 막 두근거리지?” “어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주인님은 일 때문에 몸을 바꾸신 거잖아요.” “이제는 잡아떼기까지 하네? 잉잉거리며 졸라댈 땐 언제고,” “전 모르는 일이에요.” 딱 잘라 시치미를 떼는 그녀는 은근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으니 우리 옆을 지나 부엌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향하던 루시아가 말했다. “여자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여우가 될 수 있답니다. 가슴에 새겨두세요.” “…조언 고맙군.” “별말씀을, 스피릿? 점심값 벌게 해줄테니 나 좀 도와줘.” Reload Running Fire: 07 “잘했어. 뒷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말고 차나 마셔.” 그러고 보니 슬슬 점심때다. 그나저나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까? 여긴 마법사의 집인데? 하지만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스피릿은 얼른 그녀를 따라 부엌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염치 불구하고 식탁에 앉은 나는 좀 놀라고 말았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음식이 나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여 내 앞에 올려져 있는 딸기케익과 닭고기 스프, 마늘빵 등을 잠시 바라보았다. 집에서 스피릿이 해주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래서 좀 충격이었다. 수저는 든 나는 조심스레 스프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눈을 흡떴다. “맛있어!” “간단한 요리잖아요? 소금대신 설탕으로 간을 맞추지 않는 바에야 맛있을 수밖에.” 식탁중앙에 메인요리로 놓여진 구운 소시지를 접시에 덜어 먹기 좋게 잘라서 아레프의 입에 넣어주던 루시아가 말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나는 마법사의 식사라고 하면 으레 괴물 눈알 스프와 오크십이지장 케익을 생각했었거든?” “주인니임!” 스피릿이 당장 눈치를 주며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윽!? 뭐, 뭐야? 겨우 꼬집혔는데 이렇게 아파? 그때 아레프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법사도 사람이에요. 그렇게 먹지는 않는데요.” 하지만 루시아의 생각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아니, 몇 일전에 주인님이랑 친분이 있는 다른 마법사님의 방에 저녁식사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었는데,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에 비하면 우리 주인님의 요리센스는 양반이지.” “…어, 어떤 요리였는데?” “자세한 건 비밀이랍니다.”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입안 가득 마늘 빵을 씹어댔다. 내가 끈질기게 대답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묵비권을 주장하며 식사에만 전념했다. 그녀의 옆에 앉은 아레프는 마법사의 요리는 좀 험악한 재료를 쓰긴 해도 맛은 괜찮다고 말하며 하하 웃어댔다. “이거, 갈수록 마법사라는 생물에 대한 진취적인 탐구심이 불타오르는 걸?” “이상한 소리는 그만하고 다음에 오실 때는 선물도 좀 사오고 그러세요.” 식사를 끝내고 잠시 쉬었다가 슬슬 나서려는 우리를 배웅하던 루시아의 말이었다. 난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올 때는 그러지. 그럼 이만 간다. 잘먹고 잘살아요들.” “예. 콜트씨도 잘먹고 잘사세요.” 아레프와 루시아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나는 책상을 지키고 앉아있는 슈양에게 인사를 하고 길드를 나섰다. 스피릿이 말했다. “헤에. 주인님. 슈씨가 놀라서 쳐다보고 있어요.” “당연하지. 남자가 여자로 변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있겠냐?” 쌀쌀맞게 대꾸해준 나는 어기적거리며 눈이 치워진 밖으로 나갔다. 스피릿은 내가 화를 내던 말던 아양을 떨며 내 팔을 붙잡고 걸었다. 으이그… 미워할 수가 없어요. 길드건물의 경비를 서고 있던 사내에게 가려는데 하얀 눈밭에 훈트가 업드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고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잠시 멈춰서서 그를 쳐다보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어이, 정말 자는 거야?” 그러자 커다란 훈트의 고개가 들어올려졌다. 깜짝 놀란 스피릿이 내 등뒤로 숨었다. 코를 조금 킁킁거리던 녀석은 다시 머리를 바닥에 내리며 말했다. “콜트라고 했었지. 할말이 있나?” “아, 아니. 별로.” 우, 우와! 정말 깨어 있잖아? 이름이 엑셀이라고 했던 훈트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장난으로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사색에 방해된다. 볼일 끝났으면 돌아가 보도록.” 사색? 무슨 주제로? 묻고 싶긴 했지만 점잖게 대화를 끝내는 그에게 애써서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내 쪽은 단순히 흥미위주였는걸? 고개를 끄덕인 나는 놀라서 굳어있는 스피릿을 달래어 길드를 나섰다. 대로는 경비대원들과 시민들이 지나다니며 눈을 치워놓아서 말이나 마차가 다닐 수 있었지만 골목골목에는 아직도 가득 눈이 들어차 있거나 했다. 이래서야 세리카 놈을 놀려먹으러 갈 수 없겠는걸? 고개를 좀 가로 저은 나는 곧바로 첼시아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뭘 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안으로 드시죠.” 16살 정도 되어 보이는 말구종은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더니 얼른 말고삐를 붙잡고 여관 뒤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눈밭에 미끄러졌다. 녀석의 모습을 쳐다보며 혀를 차고 있으니 스피릿이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주인님이 너무 예뻐서 그러는 거예요. 아까 넉 놓고 있던 모습 보셨어요?” “난 널 보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어머, 주인님도 참.” 스피릿은 베시시 웃으며 나와 팔짱을 꼈다. “이러지마. 누가 보면 이상한 사이인 줄 알겠다.” “그렇게 보라고 그러는 거예요. 가요.” 스피릿이 날 이끌었다. 여관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홀을 메우고 있었다. 눈이 온다고 사람들이 집안에만 틀어 박혀있을 거라고 짐작했던 것이 멋지게 빗나간 것이다. 아으, 얼굴을 따가워라. “…거, 시선이 따가운데.” “인기폭발이에요. 부러운데요?” “시끄러.” 점원에게 물어 첼시아가 있는 방으로 올라갈 때까지 나는 주당들의 따가운 시선에 몸둘 바를 몰라야 했다. 내가 남자인걸 알면 어떻게 될까? “목을 졸라 죽이려 들지 몰라요.” “쫑알쫑알 말도 많네. 자꾸 그러면 뽀뽀해버린다?” 스피릿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으려니 앞서서 걷던 여점원이 흠칫하며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크… 되는 일이 없구나. 헛기침을 조금 하여 그녀의 시선을 물린 나는 점원이 안내해준 문 앞에 섰다. 여점원이 문을 두드려주었다. 똑똑똑. “첼시아씨 계세요? 손님이 오셨어요.” 한참 후 문이 열리더니 멋진 드레스를 차려입은 퍼피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누구시죠?” “네 주인이 내 노예에게 성추행을 해서 말야. 그래서 따지러 왔는데 지금 있냐?” “…콜트님 이시군요.” “문이나 열어.” 난 가슴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퍼피는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다. 내 쪽이 월등히 크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허, 약간 존재감을 느끼는데? 방안은 의외로 잘 꾸며져 있었다. 여기서 장기투숙하고 있나보군? 방에는 침대가 두 개 있고 창가에 가져다 놓은 테이블에 첼시아가 앉아서 책과 장부를 몇 개를 펴놓고 인상을 찌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음? 누구?” 성큼성큼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간 나는 첼시아를 쳐다보며 녹아들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윽~! 내 목소리지만 정말 소름 돋는다. “안녕하세요. 모험가 길드원의 동계 위로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이벤트입니다. 한가하시면 지금부터 저와 함께 놀아 보실까요?” 외투를 벗으며 요염한 자세를 만들어 보이니 첼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스피릿과 퍼피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들통나고 말았다. 칫, 놀려먹을 수 있는 거리였는데. 일단의 소동이 있은 다음 나는 그녀가 권해준 자리에 앉았다. “최고야! 정말 몰라보겠어! 가슴한번 만져봐도 돼?” “만약 그래봐. 네 노예가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남자였을 땐 껄끄러워서 관뒀지만, 지금이라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덤빌거야. 가끔은 스피릿 말고 다른 아가씨의 가슴을… 아윽!” 뒤에 서있던 스피릿이 내 등가죽을 비틀었다. “아파아~!” 스피릿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았다. “눈 돌리지 마세요. 가만 안둬요.” “헤에~ 주인님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노예는 요즘 들어 보기 드문데. 역시 잘대해 주나봐?” 첼시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고 난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귀엽다고 오냐오냐 해주니 기어오르는 것 뿐… 아윽~!” 얼마나 세게 꼬집어대는지 눈물이 핑 돌 정도다. 그런데 겨우 이 정도로 눈물이 나다니 여자 몸은 약해 빠졌어. 스피릿을 노려봐 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걸로 됐지? 일은 언제부터야?” 첼시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갈아입을 옷하고 짐 챙겨서 내일 아침에 와. 안 그래도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냥 넘겨버릴까 하던 참이었거든? 정말 고마워.” “나도 할 일이 없던 차였으니까. 피차 좋은 게 좋은 거지. 참, 보수는 어떻게 나눌거야?” “푼돈 가지고 싸우는 건 질색이야. 5:5로 하자.” 난 한숨을 탁 쉬며 말했다. “8000만 루나가 푼돈이야?” “그것도 큰돈이긴 하지만 반으로 나누면 4000만 루나잖아? 어디 가서 현상범 몇 명 잡으면 그 정도는 간단하게 나와. 당신도 그렇잖아?” 확실히 큰돈이긴 하지만 못 만질 정도는 아니긴 하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이 열리며 어디 있는 집 영애처럼 보이는 퍼피가 소반에 찻잔을 담아서 가져왔다. 첼시아가 말했다. “벌써 갈 거야? 저거 마시고 가.” 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밖은 춥고 급하게 할 일도 없으니까. 소반을 내려놓던 퍼피가 첼시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성가신 일에 휘말렸습니다.” “응? 어떤 일인데?” “홀에 몰려있던 주당들이 추운 겨울에 할 일이 없어 무료해 하는 것 같아 제가 심심치 않게 해줬습니다.” 차를 마시던 첼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알아듣기 쉽게 말해봐.” “예. 차를 가지고 올라오는데 주당들 중 하나가 제 엉덩이를 만졌습니다. 그래서 좀 때려 줬습니다.” 첼시아는 피식 웃으며 잔을 내렸다. “잘했어. 뒷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말고 차나 마셔.” 퍼피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두 손으로 머그 컵을 붙잡고 핫 밀크를 홀짝였다. 헤에, 멋진 주인님인걸? 하지만 내가 저런 말을 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왜냐면 복수하러 직접 내려가야 하니까. 차를 다 마신 나는 약속장소와 시간을 잡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Reload Running Fire: 08 “…시무룩하게 말하면서 가슴 만지지마. 이것아.” “내일 봐. 참, 혹시 모르니까. 콜트가 입을 치마 같은 것 있으면 좀 사둬.” 난 인상을 찌뿌렸다. “뭐?! 치마 입는다는 말은 없었잖아?” “그야 그렇지만 이것저것 따지기 좋아하는 게 귀족이라서 티타임이나 식사시간에서는 정장입고 나오라고 할지 몰라. 하나 사두면 좋잖아? 일 끝나고 심심하면 입어볼 수도 있으니까.” “내가 변태인줄 알아?” “하여튼 준비하고 내일 보자구.” 남자가 되는 악몽이나 꾸라고 악담을 해준 나는 몸을 돌리고 퍼피가 열어준 문으로 나갔다. 스피릿을 데리고 홀로 내려가니 한바탕 난장판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피해당사자인 사내들은 맞아서 부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구기기는커녕 저마다 킥킥 웃고 있거나 맥주 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이상해요. 다쳤는데도 아프지 않은가 봐요?” 그녀의 말을 듣고 정말 의문이 생긴 나는 말구종이 말을 내어오는 동안 잠깐 생각에 빠졌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주당들의 느끼한 시선을 무시하려고 딱딱한 표정을 만들고 있던 스피릿에게 물었다. “아까 퍼피 드레스 입고 있었지?” “예.” “그거 입고 발차기 하면 속옷 보이지 않을까?” 스피릿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난 킥킥 웃으며 말했다. “좋은 구경했겠네? 부러운걸?” “…주인님도 똑같아요. 변태.” “넌 그 변태를 사랑하잖아?” “윽…!” 스피릿은 갑자기 말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하기 위해 버벅거렸고 난 깔깔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서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런데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영 달갑지 않은걸? 그러고 있는데 때마침 말구종이 말을 가져왔다. 말에 올라서 여관을 나선 우리는 무기점에 들려서 자동석궁의 예비탄창을 가득 채우고 시장에 들려 저녁에 해먹을 음식재료를 샀다. 그리고 정말 가기 싫었지만 옷가게에 들려서 스피릿이 골라준 속옷과 근사한 치마와 브라우스도 한 벌 샀다. 옷가게 대머리 주인의 느끼한 시선을 받으며 부리나케 가게를 나선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을 먹고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한 다음 잠을 자려고 하는데 스피릿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시장에서 산 치마와 브라우스를 들고 왔다. 스피릿이 30분 동안 가게 안을 뒤지다가 우연히 찾아낸 그 옷은 그녀의 말을 빌어보면 무슨무슨 브랜드의 옷인데 시장바닥에서 찾아 낸 것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걸 나보고 어쩌라고?” 허리가 부쩍 가늘어져 평소에 입던 잠옷이 맞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데 스피릿이 화사하게 웃으며 옷을 들어보였다. “좀 입어보시라구요.” 잠시 스피릿을 쳐다본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불꺼라 자자.” “아앙~! 주인님~!” “아으~! 시끄러워! 어차피 입게 될건데 뭘….”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하니 스피릿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칫~! 귀찮게 하네. 정말! “알았어! 알았어! 입으면 돼지? 입으면 될 거 아냐.” 스피릿은 얼른 얼굴을 펴며 옷을 나에게 내밀었고 난 주섬주섬 잠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스피릿은 침대에 앉아서 내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구경해댔다. “…눈 좀 돌리면 안돼? 알 거 다 아는 사이지만 개인 프라이버시 정도는 지켜 줘.” “같은 여자끼린데 뭐 어때요?” “젠장. 이건 불공평해. 난 안보는 데 넌 보잖아?” “그럼 저 옷 갈아입을 때 주인님도 보세요.” “거짓말하지마. 정말 보면 소리지르고 때릴거면서.” 이마를 찌뿌리며 말하자 스피릿은 베시시 웃어댔다. 한숨을 내쉬고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프릴과 레이스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달려있는 옷을 들어 보았다. 보기 좋은 것을 빼면 정말 무의미한 디자인이다. 갑자기 한심해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이 얼른 입어보라고 손을 흔들었다. 결국 나는 눈을 딱 감고 그것을 입었다. “이제 됐냐?” “너, 너무 예뻐요.” 스피릿이 감동 받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요구에 따라 한바퀴 빙 돌아 보인 나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다시 옷을 벗으려 했다. 스피릿이 말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몰라? 벗으려고 그런다.” “조금만 더 그렇게 게시지. 머리만 올리면 정말 보기 좋을 것 같은데….” 반쯤 단추를 풀던 나는 고개를 들고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긴 다리를 놀려 성큼성큼 걸어간 나는 허리를 숙여 앉아있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앙가슴이 드러나서 그런지 스피릿의 눈이 아래쪽에 고정됐다. “옷 갈아 입히는 놀이는 어렸을 때 마론인형이랑 했어야 되는 거 아냐?” “이쪽이 더 두근거리는 걸요?” “두근거려? 너 변태… 힉?! 무, 무슨 짓이야? 치마에서 손 안빼?” 영악한 미소를 입에 건 그녀는 내 다리를 더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주인님 가슴이 두근거려요.” “시, 시끄러. 떨어져~! 떨어지라구! 꺄악?!” 스피릿은 날 침대로 넘어뜨렸다. 그러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내 팔을 짓누르며 키스를 퍼부어 댔다. “그, 그만둬! 이 나쁜 계집애. 결국은 이럴려고 그랬던 거지!?” 내 위에 올라탄 스피릿은 늘어진 회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무서운 말을 꺼냈다. “색다른 경험이잖아요? 헤헤헤. 평소엔 제가 주인님의 노예였지만 오늘은 주인님이 제 노예가 돼주셔야 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치마를 풀어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온몸으로 식은땀이 흐르며 등으로 오한이 돋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꺄아아악?!” “주인님! 주인님! 그만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약속시간까지 얼마 안남았다구요!” 침대에 누운 나는 베개를 눈물로 적시며 말했다. “시끄러워.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노예에게 순정을 빼앗긴 나 같은 바보는 그냥 뒈져버려야해. 흑….” 세상을 부정하고만 싶다. 아아아~! 사랑과 증오의 신 미티어여~!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러고 있으니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스피릿이었다. 그녀는 실실 웃으며 내 귓가에 입을 가져왔다. 그리고 남자의 정기를 빠는 몽마 서큐버스 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기분, 꽤 좋았잖아요?” “윽…!” 가슴속으로 참을 수 없는 치욕과 수치심이 밀려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스피릿을 노려보았다. “너, 너어….” “방금 그 말은 셰리단의 드래곤 레어에서 믿었던 주인님에게 억지로 순결을 빼앗기고 절망에 찬 노예에게 주인님이 매정하게 들려줬던 말이에요. 어때요? 치욕과 수치심이 배신감과 함께 마구 밀려오죠? 눈앞에 있는 상대의 뺨을 마구 때려주고 싶죠? 그건 바로 제가 느꼈던 기분이에요.” “으윽….”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그녀를 노려봐 준 나는 이를 드러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쁜 계집애.” “이렇게 만든 건 주인님이세요.” “이제부터는 잠자리에서 살려달라고 말하게 해줄 거야. 제기, 옷이나 가져와.” 스피릿은 방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기대할게요.” 윽! 충격이다. 어떻게 그런 대답이 나올 수가 있어?! 갈수록 스피릿이 무서워지는 것 같다. 기분 탓일까? 옷을 입고 아침을 먹은 나는 밖으로 나가 임시로 만들어놓은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말에 안장을 올리고 있으니 스피릿이 들어왔다. 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 말똥 밟을라.” “그 정도는 저도 보여요.” “밟고 나서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 이, 빌어먹을….” 물컹한 느낌이 부츠 뒷굽을 타고 올라와 전신으로 퍼졌다. 이를 살짝 들어내며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스피릿이 마굿간의 문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덩달아 말도 이빨을 드러내며 날 조롱했다. 난 눈썹을 꿈틀대며 중얼거렸다. “…오, 오늘 일진은 꽤 사나울 것 같군.” 부츠에 뭍은 말똥을 닦기 위해 잠시 소동이 있은 다음 겨우 출발 준비를 마친 나는 스피릿을 뒤에 태우고 백색으로 치창된 도시를 향해 말을 몰았다. 아침이라 사람들이 부산하게 대로를 돌아다니고 있어서 꽤 이채로운 시선은 받았다. “거, 얼굴 뚤리겠네. 왜 저렇게 쳐다본데?” “여자가 말을 모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니까요. 게다가 기수와 동승자가 미인이고,” “호오, 처음인 것 같아. 네가 예쁘다는 걸 인정하는 건. 아니, 두 번째 인가?” 앉은키가 좀 낮아졌는지 스피릿이 내 어깨 넘어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요즘 들어 제가 정말 예쁘다는 걸 알았어요. 누구누구가 목메고 안겨드는 걸 보면 확실해요.” “…그 누구누구는 누구야?” “글쎄요. 누굴까요?” 슬쩍 고개를 돌린 나는 손가락으로 스피릿의 이마를 튕겨주었다. “아윽~! 왜 그러세요?” “너 요즘 너무 건방져. 난 네 주인님이라고, 알아? 노예문장 파서 일반인이 되기 전까지는 지킬건 지켜.” “흑, 예에에.” “…시무룩하게 말하면서 가슴 만지지마. 이것아.” 마상에서 스피릿과 툭탁거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관에 도착했었다. 이놈의 말구종은 왜 그렇게 헬렐레냐. 뽀뽀라도 해주면 죽겠군.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을 넘겨준 나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마침 첼시아와 퍼피가 아침을 먹고 있다가 우리를 반겼다. Reload Running Fire: 09 “오호, 과연 그렇군.” “일찍 왔네? 식사는 했어?” “먹고 오는 길이야. 젠장. 주인장! 여기 맥주!” “귀족 집에 가는 데 술 먹고 갈 셈이야?” “에이! 핫 밀크! 두 잔!” 잠시 후 첼시아와 퍼피의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짐을 챙긴 다음 각자의 말에 올라서 여관을 나섰다. 대로를 따라 걸으며 난 오만상을 찌뿌려야 했다. “…왜 다들 쳐다보는 거래?” “글세. 보기 드문 미녀 모험가들이 말을 타고 눈덮힌 시가지를 걷는다.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지 않아?” “그리고 속된 말로 눈요기감도 되지요.” “…과연, 하지만 나와 퍼피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지?”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첼시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매우 잔인하게 살해 당할거야.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이 졸려 질식사 한 다음 멍석말이 당해서 마을 어귀에 버려진다거나?” “사실화시키지마. 기분 나쁘니까.” 그때 얌전히 그녀의 뒤에 앉아가던 퍼피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꽤 귀여운 목소리인걸? “주인님, 일 끝나면 바로 원래모습으로 돌려주십시오.” “요는 어디다가 빼먹었어? 요는? 그리고 말할 때 귀엽게 하라고 그랬지? 만약 거기 가서도 아저씨처럼 말하면 컨티뉴얼 스펠을 걸어서 평생 내 노리개로 쓸 거야. 알아들어?” 반 장난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그녀의 어투에는 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제력이 들어있었고 그래서 퍼피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으아, 난 저렇게 못할 것 같아. 그때 스피릿이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 “…콜트씨 같은 분이 제 주인님이라서 너무 행복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씩 웃으며 대꾸해준 나는 앞서가는 첼시아의 백마를 뒤따랐다. 동네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대로를 걸어간 우리는 두시간 정도 후 멀리 왕성이 보이고 집집마다 대문 앞에 사병이 배치된 곳에 다다랐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민가나 상가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이유는 이곳이 바로 그랜퍼스의 귀족가문들의 저택이 모두 밀집되어있는 이른바 귀족주거구역이기 때문이다. 몇 개 이름 있는 저택은 다른 곳에 따로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웬만한 귀족 저택은 이곳에 다 몰려있다. “불평등이야. 귀족들만 좋은 곳에서 살고.” “좋은 곳? 글쎄. 법적으로 이곳에 평민이 집을 지어 살아도 아무 하자는 없어. 같은 동네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능력이 된다면 말이지.” 기라성 같은 저택을 바라라보며 난 쓴 표정을 지었다. 첼시아는 말을 몰아가며 말했다. “물질은 노력의 산물이야. 하고 싶으면 하면 돼. 단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처량한 신세를 한탄을 한다는 게 슬플 뿐이지.” “…내가 잘못했어. 그만해.” “후훗, 다 왔어. 저기야.” 첼시아는 후후 웃으며 첨탑마다 하얀 눈이 얹어져 있는 4층 짜리 대저택을 가르켰다. 그런데 웃기는 것이 있다면 다른 집들은 다들 모양이 기본적으로 사각형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 저택은 남달랐다. 첨탑이 있고, 캘버린 방어장벽에 비하면 볼품 없지만 성벽과 도개교에 해자까지 붙어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멋진데? 웬만한 전투용 성하고 맞먹겠어?” “아. 이 집 당주가 군사매니아 라더군. 직책도 그랜퍼스 제4 군단 소속 강습돌격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고 되어있어.” 난 입을 딱 벌렸다. “강습돌격기사단의 기사단장? 여타 군단장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직책이잖아?” 서류를 내리던 첼시아가 물었다. “그거 대단한 거야?” “물론이지! 군의 전투 키메라 훈트알지? 그 훈트가 소속되어 있는 부대가 강습돌격기사단이라는 곳이야. 친구가 군에 있어서 들었어. 우와, 이거 긴장해야겠는데?” 첼시아가 응응응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성문에서 멋진 철제갑옷을 입은 경비사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르니트 셰퍼드가(家)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삼일 전에 귀 가문께서 모험가 길드에 의뢰하셨던 의뢰의 실행을 위해서 길드에서 파견되었습니다. 여기 서류.” 첼시아가 서류를 내밀자 딱딱한 표정의 경비병은 서류를 보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고는 고개를 꾸벅였다. 세상에, 일개 저택 경비사병 무장이 뭐 저렇게 험악하다냐? 롱소드와 핼버드는 기본에 라운드 실드와 다리에는 나이프, 등에 맨 저건 꼭 접이식 석궁처럼 보이는데? 내가 입을 살짝 벌리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딱딱한 얼굴의 경비사병은 그제서야 내 시선을 알아채고는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거, 무장 한번 끝내주네요. 멋진걸요?” 그제서야 경비사병은 씩 웃었다. “저희 후작님께서는 좀 유별나신 데가 있거든요. 연락 받았습니다. 들어오시죠.” 경비사병의 안내를 받아 성문(?)으로 들어간 우리는 한창 제설작업중인 사병들과 하인들의 사이를 지나 성이라고 불러야할 저택으로 안내되었다. 저택에서부터는 이곳의 집사라는 사람의 안내를 받았다. 백발에 주름이 가득 한 집사는 저택 복도를 장식하고 있는 장식물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으며 스피릿와 첼시아는 정신 사나우니 가만 좀 있으라는 조언을 해댔다. “하지만 너무너무 멋진걸~!” “…어디가요?” 스피릿의 한심스러운 말이었다. 이런이런, 남자의 로망을 모르는군! 퍼피도 은근히 첼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정신 없이 장식물의 모습을 구경했다. 입구에서부터 시작해서 1층의 모든 복도에는 각종 무기들이 전시되어져 있었다. 작은 나이프에서부터 거대한 그레이트 엑스까지! 행복하여라~! 한참 그렇게 정신없이 무기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집사가 어떤 방 앞에 서서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때 마침 후작 님께서 계실 때 오셨군요. 이쪽으로 드시죠.” 그렇게 말하면 문을 열어주는 집사였다. 난 약간 어색해하며 들어갔지만 스피릿과 첼시아는 별로 그런 게 없었다. “어서 오시게. 첼시아양과 콜트양이라고 했던가?” 미리 연락을 받았군. 나와 같은 짙은 밤색머리카락에 새치가 히끗히끗있는 사내가 우리를 맞했다. 나이는 50대 후반? 하지만 몸은 30대의 그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크군, 자신을 오레스 오르니트 셰퍼드 후작이라고 소개한 양반은 우리를 자리에 권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더니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해왔다. 나이, 경력, 기타등등. 이거, 이러다가 남자인 거 탄로나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후작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됐어. 아, 그리고 나중에 제설작업이 끝나면 내 직접 자네들의 실력을 평가할 생각이니까. 준비 단단히 해두게.” 나와 첼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실력평가요?” “이런 서류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지. 하지만 실력은 속일 수 없어.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만 나는 내일부터 휴가가 끝나 군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내 딸들을 이왕이면 실력있는 자들에게 맡기고 싶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주게.” “…십분 이해하겠습니다.” 첼시아가 대표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임시로 방을 하나 얻었다. 귀족 집이라고 해서 무조건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있는 방이 그렇다. “생각보다는 검소하게 사네?” “설마? 여기는 여기 가문의 하인들이 생활하는 방이야. 잠시 준비를 하라고 내 준거겠지. 당신도 그렇게 멍하니 방 구경만 하지말고 어서 무장 챙겨. 보기보다 깐깐한 후작 아저씨 같아.” 첼시아가 손가락이 드러나는 민 장갑을 꺼내 끼며 말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침대에 앉아서 멍하니 우리만 쳐다보고 있는 스피릿과 퍼피를 가르켰다. “애들은 어쩌지?” “음. 아까 후작 아저씨의 태도로 볼 때 아마 우리 모두의 실력을 알아보려고 할 것 같아. 그러니 퍼피도 무장 챙겨.” “저, 저는요? 저는 싸울 줄 모르는데….” 스피릿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첼시아는 날 바라보았고 난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내 등에만 업혀있으면 돼. 걱정하지마.” 날 가만히 쳐다보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볼 때 적어도 스피릿은 자기 능력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역할이 뭔지 정확히 알고있고 무리하려 들지 않으니까. 자기능력과 역할도 모르고 혈기만 믿고 덤비는 열혈바보는 현실 세계에서는 살아가기 힘든 법이다.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사람을 피곤하게 하니까. 뭐, 시끄러워서 좋긴 하지만. 스피릿에게 머리를 땋아달라고 부탁한 나는 사이즈를 조금 줄인 강철건틀릿을 손에 끼고 은도금 롱소드를 허리에 맷다. 그리고 스크롤도 몇 개 챙겼다. 그걸 보고 첼시아가 쏘아댔다. “어디 전쟁 나가?” “이런 평가는 화려한 쪽이 좋아. 멋진 불꽃놀이를 보여주지.” 첼시아는 맘대로 하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퍼피가 가죽바지를 입고 손에 너클을 끼고 있었다. “후후후후, 그래 화려한 쪽이 좋겠지. 퍼피?” “예.” 퍼피가 고개를 돌렸다. 첼시아는 그녀(?)에게 어떤 주문을 했다. 퍼피는 노예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주인에게 반항을 시도했다. 그래서 첼시아는 갖은 협박과 회유를 통해 그녀(?)를 설득했고, 결국 성공했다. 잠시 후 집사가 아닌 사병이 우릴 데리러왔다. 그를 따라 눈이 깨끗하게 치워진 정원으로 나가니 무슨 경기장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후작의 허락에 따라 눈을 치우는데 동원되었던 사병들과 하인들이 정원 한쪽에 몰려서서 우리들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택의 창문에서도 하녀들로 보이는 메이드 차림의 아가씨들이 신기한 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관중을 불러들인 후작님의 정확한 의도를 알고 싶은데.” “추운 겨울 지루한 일과에 지친 하인들에게 베푸는 이곳 당주의 여흥거리 정도일까?” “오호, 과연 그렇군.” 옆에서 우리를 호위하던 사병이 씩 웃었다. 그의 미소를 증거로 첼시아의 추론을 긍정한 나는 강철장갑으로 턱을 잡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널직한 정원 반대편 끝에서 검과 방패로 무장한 갑옷덩어리가 걸어나왔다. 그러자 사병들이 일제히 빳빳한 차렷자세를 잡았다. 군대냐 여긴? “아아. 됐어. 편하게 구경들 하게. 자, 이쪽으로 나와 보시겠나? 모험가 아가씨들.” 우리는 그의 부름에 따라 앞으로 나갔다. 약간 웅성거림이 있긴 했지만 야유나 환호는 들려오지 않았다. 왜냐면 높으신 분이 계시는 귀족저택이니까. “규칙은 없네. 그냥 내가 그만 하자고 할 때까지 한번씩 싸워주기만 하면 돼. 나는 갑옷을 입고 나왔으니 부담 갖지 말고 전투에 임하게. 자, 누가 먼저 덤비겠나? 모두 덤벼도 무방하이.” Reload Running Fire: 10 “그렇군, 슈발츠. 무슨 뜻인지 기억나는군.” 나와 첼시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깐의 논의 결과 먼저 나선 것을 첼시아로 다음 퍼피, 그 다음 나, 이런 순으로 결정되었다. “거기 은발의 매력적인 아가씨는 왜 싸우지 않지?” 스피릿은 버벅 댔고 그래서 내가 나섰다. “그녀는 제 노예로, 전투를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녀의 몫만큼 보충 할 테니 허락해 주십시오.” 스피릿과 나를 잠시 쳐다보던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먼저 첼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채찍을 바닥에 늘어뜨린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첼시아 발렌타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오르니트 셰퍼드가의 12대 당주, 오레스 오르니트 셰퍼드일세.” 그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첼시아가 선공을 펼쳤다. 짝! 촤라락! 날아간 채찍은 후작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린 다음 그가 들고있는 검에 휘감겼다. 첼시아는 이를 드러내며 채찍을 당겼다. 하지만 후작은 힘으로 버텼고 나중에 가서는 첼시아가 그에게 끌려가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파악한 첼시아가 채찍을 놓으려하자 그것을 눈치챈 후작이 먼저 칼을 놓아버렸다. 덕분에 그녀는 뒤로 넘어졌고 후작이 방패를 세워들고 돌진해왔다. “칫!” 고양이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첼시아는 뒤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넘고는 허리 뒤에서 다른 채찍을 하나 더 꺼내 휘둘렀다. 바닥에 착지했을 때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2번째 채찍은 후작의 팔에 감겨있었으며 그녀의 왼손에는 큼직한 에스터크 뽑혀져 있었다. 그걸 본 후작이 그만 손을 들었다. 첼시아는 팔을 놓았고 사병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괜찮군. 하지만 채찍을 포획이 아니라 타격용으로 썼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갑옷 입은 상대에게 채찍은 효과가 없습니다. 무기를 빼앗아서 공격을 못하게 한 다음 이걸 박아 넣는 게 재미가 쏠쏠하죠.” 송곳처럼 날이 삐죽 솟은 에스터크를 허리에 꼿아 넣으며 첼시아가 말했고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합격이야. 자, 다음으로 날 즐겁게 해줄 친구는 누군…?” 고개를 돌린 후작은 자신의 앞에 나와있는 멋진 드레스의 아가씨를 쳐다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물었다. “그대로 싸울 건가?” “예. 잘 부탁드립니다.” 첼시아가 끼어 들어 설명했다. “저 아이는 제 노예입니다. 하지만 전투기술을 가진 1급 노예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치마를 입힌 이유는 여성의 핸디캡이 적용되어도 남자만큼 잘 싸운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확인해보지.” “퍼피입니다. 성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여기 집 주인이네. 덤벼보시게.” 검을 주워든 후작의 말이었고 퍼피는 첼시아가 가르쳐 준 데로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잡아 살짝 들어올리며 무릎을 굽히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날아올라 화려한 공중기를 펼쳤다. 검정색 천으로 베이스를 만들고 거기에 하얀 프릴과 레이스, 리본을 달아 대비색을 강조한 그녀(?)의 드레스는 눈이 나풀나풀 떨어지는 하늘을 배경삼아 정말 멋지게 휘날렸다. 후작도 그녀 엄청난 점프력과 드레스를 입고 전투에 나선 미소녀라는 이미지의 이질적인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그때 거꾸로 뜬 상태로 날아가던 퍼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후작에게로 고정되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그녀가 갑자기 직선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스피릿이 입을 딱 벌렸다. “저, 저게 가능해요?” “아마 신고 있는 신발에 어떤 스펠을 박아뒀겠지.” “퍼피가 신고있는 부츠는 바운드 스펠이 걸려있어. 5000만 루나 주고 샀지. 그래서 저 정도의 점프와 이동이 가능한 거야. 당신 것도 그렇잖아?” “바운드 스펠이 걸려있다고? 돈도 많아. 난 겨우 점프 스펠정도인데.” 첼시아는 호호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퍼피양은 가녀린 손에 낀 무지막지한 너클을 뒤로 당기며 후작의 정수리를 목표로 했고 후작은 부리나케 뒤로 물러섰다. 쾅! 바닥에 깨지고 돌가루가 날렸다. 너클로 바닥의 포석을 깨버린 퍼피는 부풀어오른 치맛자락 덕에 속옷을 살짝 보여주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너클을 낀 두 주먹을 몇 번 휘두르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이건 정말 이질적이다. 예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너클을 낀 주먹을 들고있는 모습이라니, 그때 옆에서 스피릿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멋지다아….”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 느낀 건데 그것은 그녀의 생각뿐이 아닌 듯하다. 그녀의 옆에 서있던 경비사병도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다들 눈빛이 위험한데?” “상관없어. 다른 녀석들이 뭔 상관을 하던 저 녀석은 이미 내거니까.” 첼시아의 말이었고 난 머리를 좀 가로 저어주었다. 그동안 열이 오른 후작과 퍼피는 정말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 후작이 접근 전을 막기 위해 방패로 그녀의 접근을 막자 퍼피는 몇 번의 주먹질과 발차기를 방패에 쏟아 부어 후작의 팔을 흔들리게 한 다음 마지막으로 치마 속 다리를 쭉 뻗어 올리며 방패를 차올렸다. 결국 후작의 방패는 위로 들렸고 퍼피는 그 틈으로 파고들어 후작의 갑옷을 두들겨 댔다. 그나저나 아까 올려차기 할 때 하얀 다리와 속옷이 적나라하게 들어 났는데 부끄럽지도 않나? 그 주인 되는 사람을 쳐다보니 음흉하게 웃고있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노리고 시킨 거지?” “물론.” 난 쓴 표정을 지었다. 쾅~!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서둘러 앞을 바라보니 인파이팅을 벌이다 방패로 호되게 얻어맞은 퍼피가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있었다. 바닥에 눈이 깔려있지 않았다면 굴러버렸겠지. 죽 밀려나다가 겨우 멈춰선 그녀는 X모양으로 교차시키고 있던 팔을 내렸다. 잠시 후작을 노려본 퍼피는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두 개의 큼직한 대거를 뽑았다. 그것도 보통대거가 아니고 날아드는 칼을 붙잡을 수 있도록 보조칼날이 옆으로 펼쳐지는 망고슈 형태를 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암살자처럼 거꾸로 쥐고 다시 달려가려는데 후작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동작을 알아본 퍼피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후작은 몸을 돌려 우리 쪽으로 다가와 첼시아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멋지군! 노예라고 했지? 저 아가씨 나에게 팔지 않겠나? 얼마를 줬든 두 배 주지!” 고개를 돌린 첼시아는 대거를 갈무리해 치마 안에 집어넣고 총총히 달려오는 퍼피를 쳐다보고는 점잖게 그의 부탁을 물렸다. “죄송합니다. 제겐 가족 같은 아이라서.” 후작은 그 직위답게 제발 팔라고 재차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아깝다는 얼굴로 첼시아의 옆으로 와서 다시 치마를 살짝 들어보이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의 개인경호원으로 삼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다음에 혹 생각나면 우리가문으로 찾아오게. 비싸게 매입해 줄 테니.” “감사합니다. 후작님.” 다시 퍼피에게 고개를 돌린 후작은 하얀 수염아래 입을 씩 올렸다. “멋진 솜씨야. 퍼피양, 늙은이를 상대해줘서 고맙네. 오랜만에 재미있었어.” 퍼피는 얼른 눈을 내리 깔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태도가 맘에 들었는지 기분이 좋아진 후작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지막 한 사람 남았지? 누군가?” 철크럭! 난 강철장갑을 낀 주먹을 서로 부딪히며 전의를 불태웠다. “접니다. 후작님.” “이리 나오게.” 일행에서 좀 떨어진 나와 후작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 집의 바깥양반일세.” 아까부터 자기소개 멘트가 품위를 잃어 가는 것 같아. 난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콜트 슈발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슈발츠?” 후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허리를 편 나는 안주머니에서 까만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러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슈발츠. 무슨 뜻인지 기억나는군.” “먼저 갑니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고 난 곧바로 달려나갔다. 검은 달려가면서 뽑았다. 스르릉~! “하압!” 챙!? 확실히 가벼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쪽이 더 빨라진 기분이야. 순식간에 달려가 검을 내려치자 후작은 자신의 검을 들어 내 검을 받아냈다. 하지만 나는 칼 들고 용쓰는 체질이 아니라 다리를 들어 힘껏 후작의 가슴을 걷어찼다. 쾅! 남자였더라면 밀려났겠지만 무게가 줄어서 후작은 약간 비틀거리고 말았다. 젠장! 강단하나 죽이는데?! 뒤로 물러선 나는 다시 검을 들고 달려들어 후작과 멋진 칼싸움을 벌였다. 챙챙챙~!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밀리기 시작했다. 역시! 노장은 나이를 거저 먹은 게 아니군! “흡!” 기합소리와 함께 검의 옆면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올린 나는 그것을 막았다. 하지만 근력의 차이로 검은 내 쪽으로 밀렸고 결국 나는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로 했다.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으로 칼날을 붙잡은 나는 허리힘을 이용해 그의 검을 밀어냈다. 검을 맞대고 있던 후작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뒤로 밀려나더니 내 장갑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먼저 선재 공격을 해왔다. 어깨로 내려쳐지는 검을 뒤늦게 발견한 나는 왼손을 들어 칼날을 붙잡았다. 손목이 좀 아팠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그의 아랫배를 향해 찔러 넣었다. 그러자 후작이 당황한 얼굴로 나에게 잡혀있는 검을 억지로 빼내서 내 검을 쳐내버렸다. 촤라라락! 퍼억! 날아간 롱소드는 바닥에 박혀 찬란한 은빛을 뿜어냈다. 칼은 날아 가버렸지만 아직 나에겐 어머님 물려주신 일격필살의 결전병기가 남아있었다. 두 주먹을 든 나는 칼을 휘두르느라 비어버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갑옷을 입고 있었고 그래서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하는 짓은 하지 못했다. 대신 어깨 관절부를 찍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별이 보였다. 퍼피 때와 마찬가지로 후작이 방패로 견제를 해왔던 것이다. 주르륵 뒤로 밀려난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는 안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스크롤을 꺼냈다. 그것을 살짝 찢어낸 나는 재빨리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안으로 뜨거운 기운이 퍼져들었다. 그때 후작이 검을 내리며 손을 들려고 했다. 이런, 아직이야.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았다구! 난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점프했다. 퍼피 만큼은 아니지만 2000만 루나를 주고 부츠에 박아 넣은 점프스펠의 도움으로 4, 5미터 정도로 솟아오른 나는 붉은 빛을 뿜어내는 주먹을 뒤로 당겼다. 뭔가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한 후작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뒤로 피했다. 그래서 나는 원래 의도대로 그가 서있던 바닥을 내려쳤다. 그리고 낮게 외쳤다. “파이어 월!” 푸화르르르륵~! 펼쳐진 손바닥으로 스펠파워가 폭발하듯 해방되어 쏟아져 나왔다. 마법의 불꽃은 내 주위로 커다란 원을 만들며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덕분에 주변의 눈들은 물이 되어 녹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저쪽의 후작 아저씨가 입을 딱 벌리고 불길 속의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난 씩 웃어주었고 그도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합격이란 소리다. ========================================================================== 으음~! 합격. 듣기 좋은 말이지요. Reload Running Fire: 11 “센스가 꽝 인 아버지네.” “주인님~! 괜찮으세요? 화상 입으신 거 아니에요?” 불길이 걷히자마자 얼른 달려온 스피릿이 내 몸을 살피며 호들갑을 떨었다. 난 울먹이는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살짝 윙크를 해줬다. “이 정도 불길은 날 태우지 못해.” 스피릿은 잉잉거리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사람이 많아서 가슴에 안겨들지는 못하는 가보다. 그때 후작 아저씨가 걸어왔다. 스피릿은 얼른 내 뒤로 숨었고 후작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멋진 기술이었네. 스크롤을 이용한 건가?” “뭐, 그렇습니다.” “그리고 군사격투기를 좀 사용하는 것 같던데. 군인이었나? 어느 부대에 있었지?” 난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군대에 친구가 있는데 휴가 나왔을 때 연습하는 걸보고 흥미가 생겨 조금 배웠던 것일 뿐입니다.” “호오, 그렇게 갸륵할 데가, 휴가 나와서 군사격투기를 연습했다구? 그 친구의 이름과 소속부대는 뭐지? 포상이라도 하나 내려줘야겠군.” 어,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난 좀 머뭇대다가 말해버렸다. “이름은 레미 제라블. 격동의 8군단 소속 흑기사라는 것 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 그 정도면 됐네. 그나저나, 혹시 남자친구 되는가? 부러운 걸? 이렇게 미인에다 실력이 높은 아가씨라니.” 커억~! 난 눈을 부릅뜨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후작의 눈에는 확인 사살로 밖에는 비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젠장! 사람 말을 들어! 바보같이 허허 웃지만 말고! 어쨌든 확인평가가 무사히 끝나고 정식으로 일을 맡게된 우리는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가문을 방문한 손님들을 위하여 준비한 객실이었다. 이거야. 아까 하고는 천지 차이인걸? 새로 배정된 화려한 객실의 모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나는 우리를 안내해온 메이드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뭐요? 방금 말했던 거 다시 한번 말해봐요.” “아, 아! 예. 점심식사 전에 티타임이 있을 예정이니 옷을 갈아입고 나오시라는 주인마님의 분부가…….” 고개를 좀 갸웃한 나는 메이드 아가씨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메이드는 약간 주춤하다가 뒤로 물러섰고 그러다 보니 잠시 후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게되었다. 그리고 나는 거리의 무뢰배처럼 그녀가 서있는 벽에 손을 짚고 불량스러운 시선으로 메이드를 내려다보았다. 내 쪽이 훨씬 키가 크니까. “이거 봐요. 방금 전까지 여기 괴팍한 당주님과 난투극을 벌인 우리들을 좀 쉬게 해주지도 않고 티타임으로 불러내다니 이거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게다가 내가 가장 혐오하는 치마를 입고 말야.” “으, 아… 제, 제게 그런 말씀 하셔도….” 대답대신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내 시선을 의식해서 혼자서 이래저래 당황해하던 메이드는 급기야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허, 스피릿하고는 색다른데? 그때 뭔가가 내 등을 꼬집었다. “꺅?! 뭐야?” 눈썹을 위로 세운 스피릿이 우울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더니 메이드를 내보냈다. 그리고는 내 볼을 잡아 좌우로 늘이며 말했다. “감히 지금 어디서 바람을 피우시는 거예요?” “아으으으~! 미, 미안해. 놔줘.” “헤에, 노예에게 잡혀사네?” “시, 시끄, 아으으으~! 잘못했어. 놔줘어.” 스피릿은 그제서야 겨우 얼굴을 놔주었다. 아으 볼이야. 얼굴을 만지고 있으니 퍼피의 도움을 받아 첼시아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 보였다. 난 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거, 말이라도 좀 하고 갈아입지?” “여자 몸 처음 봐? 무슨 호들갑이니? 자기도 여자면서. 어서 옷이나 갈아입어.” 윽…! 이를 들어낸 나는 그 자리에서 셔츠와 바지를 벗고 짐을 뒤져 어제 산 옷을 꺼내 혼자서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등뒤에서 첼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마, 콜트씨는 엉덩이가 참 예쁘네?” “칵! 닥쳐!” 고개를 돌리고 으르렁거려준 나는 얼른 치마를 올리고 끈을 묶었다. 옷을 다 입고 뒤를 돌아보니 굉장히 화려하게 차려입은 첼시아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스 색이 붉은 색이라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지만 너무 도발적인 것 같아. “호, 그렇게 차려입으니 몰라보겠는데? 그런데 좀 심하지 않아? 가슴도 너무 파였고.” “일부러 고른거야. 초반에 기를 죽여놔야 지루한 티타임에 나오라고 하지 않지. 그런데 당신은 꽤 센스 있는 옷인데? 스피릿 네가 골라줬니?” 아무렇게나 벗어버린 바지와 자켓을 주워서 곱게 개고 있던 스피릿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첼시아가 말했다. “그런데 넌 그러고 갈거니?” “예? 저도 가요?” “말이 티타임이지. 이건 상견례야. 얼굴을 익혀둬야 일하는데 편하지 않겠어? 옷 가져온 거 있지? 적당히 꾸며 입어.” 스피릿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져온 짐을 뒤졌다. 잠시 스피릿이 옷을 갈아입을 동안 기다린 나는 퍼피를 바라보았다. “넌 그 옷 그대로 나갈거야?” “예. 치마는 이것뿐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스피릿이 옷을 다 입었다. 회색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회색 치마에 두꺼운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그 아름다운 얼굴로 말미암아 상당히 서민적이고도 유행을 받지 않은 고풍스러운 멋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군, 옷도 잘 어울려야 옷이군.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들이 우리를 홀로 안내했다. 여긴 집이 크다보니 홀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어 있었다. 거참, 밖은 전투용성이면서 안은 여느 귀족들과 다를 것이 없군. 홀은 여관의 그것보다 더 넓었다. 게다가 바닥은 전체적으로 양탄자 같은 것이 깔려있고 벽에는 화려한 그림액자들과 가문의 문장들이 걸려있고 벽 한켠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설치되어 방안의 공기를 훈훈하게 만들고있었다. 그렇게 화려한 방안에는 역시 화려한 테이블이 놓여져 있고 그곳에는 아까 노익장을 과시하던 후작 아저씨와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루루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는 두 개 비어있었다. 나와 첼시아의 자리 같다. 높으신 분께서 노예들과 함께 앉고 싶진 않으실 테니까. 번쩍이는 수레를 테이블 근처에 가져다 놓고 차를 끓이고 있던 집사가 우리를 소개했다. “이쪽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분은 첼시아 발렌타인양으로 이번 의뢰로 길드에서 파견된 모험가이십니다. 그리고 그 옆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분은 콜트 슈발츠양입니다. 역시 같은 모험가 길드 소속이시며 매력적인 전투실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당주님께서 크게 칭찬하실 정도입니다.” ‘양.’ 나이 어린 여자를 높여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빌어먹을, 나는 ‘군.’ 으로 불리고 싶어! 어쨌든 소개에 따라 인사를 했다. 우리를 소개받는 쪽은 저기 어린 아가씨들 같으니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그냥 고개를 까딱여줬다. 나이 지긋한 귀부인도 보였지만 후작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제외도 좋다. 귀족들과의 예절습관은 거의 가물가물한데? 이 다음에 어쩌더라? 그때 첼시아가 자리에 앉기 전 인사를 했다. “첼시아 발렌타인입니다. 모험가이며 이쪽은 제 노예, 퍼피라고 합니다.” 퍼피는 주인에게 배운 대로 치맛자락을 잡고 다리를 구부렸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첼시아와 비슷하게 말하며 스피릿을 소개했다. 저쪽 후작 옆에 앉아있는 청년은 물론이고 아가씨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아무렴, 돈으로 따지면 9천 900만 루나짜리 미인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는 반응이지. “제 노예인 스피릿이라고 합니다.” 스피릿은 그야말로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리를 빼내어 내가 앉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윽고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우리들의 앞에 놓았다. 몇 년동안 반복한 동작인지 모르지만 떨림 하나 없다. 만약 저 손에 진 주름의 세월동안 티스푼이 아닌 나이프를 들었다면 나는 항복을 선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공작이 자신의 가족을 소개했다. 금발을 멋지게 틀어 올리고 수십가지 핀으로 고정시킨 귀부인 아줌마는 후작의 아내로 나르쉬 오르니트 셰퍼드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으로부터 막내 실비아 오르니트 셰퍼드 나이는 12세라고 했고 성격은 막내둥이의 그것을 답습할 것 같다. …날 보고 웃음짓는 저 천진난만한 미소를 볼 때 딱 그럴 것 같다. 그 옆으로 셋째 라뮤르 오르니트 셰퍼드, 나이는 18세 얼굴에 주근깨가 살짝 엿보인다. 화장으로 가린다고 가린 같은데 이쪽은 밤에 오크 글레이브 반사광을 찾아내는 게 주된 업무인지라 그 정도는 눈감아도 보인다. 내 판단으로 볼 때 사춘기의 고민에 휩싸인 아가씨라 좀 신경질 적으로 보인다. 억지로 티타임에 나왔다는 얼굴이군, 주의해야겠어. 그리고 둘째이자 장녀인 엘레인 오르니트 셰퍼드, 셋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마스크의 소유자이며 나이는 20세. 몇일 후에 있을 성년식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며 누구에게 한 건지 모르지만 윙크를 살짝 했다. 요주의 인물이다. 왜냐면 돌도 씹어먹는다는 한창나이니까. 그나저나 누구에게 윙크를 한 걸까? 시선의 방향을 볼 때 나는 아닌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첫째이자 이 가문의 장손인 베이어 오르니트 셰퍼드, 나이는 23세로 나와 동갑이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꽤나 시원한 마스크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은 얼굴이 반을 표현한다고 짐작하건데 호쾌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줄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지만, 소개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담소가 이어졌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막내 실비아양이 나에게 물었다. “저, 저, 슈발츠씨는 어떤 모험을 하셨어요?” 아, 젠장. 여자 이름 한번 살벌하네, 가명이라도 하나 만들걸 그랬나? 난 표정관리를 한 다음 말했다. “상당히 아크로바틱하고 스펙타클하며 익스트림한 모험을 했지요. 이야기가 듣고 싶으세요?” “와아, 예, 듣고 싶어요. 하나면 들려주시면 안될까요?” 후작을 살짝 쳐다보니 그도 심히 궁금 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으세요?” “어, 익스트림한 모험이야기요!” “음, 그런 거라면 절벽에 매달려 하피의 알을 훔치러갔을 때 이야기가 좋겠네요.” 그리하여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서 달랑 밧줄하나 의지하여 마법재료로 쓸 하피알을 훔치러갔던 이야기를 간결하게 들려주었다. 너무 세세하게 말하면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실비아는 좋아했고 난 살짝 한숨을 내쉬며 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때 불량스럽게 -내지는 버릇없게-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받치고 있던 둘째 라뮤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콜트 슈발츠… 왠지 남자 이름 같아.” 머릿속으로 번개가 쳤다. 찻잔으로 얼굴을 가린 나는 다시 표정관리를 하며 잔을 내렸다. “나, 남자이름을 가지면 아이가 튼튼하게 자란다는 속설이 있어서 아버님이 그렇게 지으셨답니다. 호호호….” “센스가 꽝 인 아버지네.” “라뮤즈, 손님 앞에서 버릇없이 굴지 말거라.” 사는 것 자체가 불만인 사춘기 소녀의 말이었기에 난 웃는 것만으로 화를 삭였다. “괜찮습니다. 후작부인. 그리고 라뮤즈 아가씨. 그냥 콜트라고 불러주세요.” 라뮤즈는 흥하며 고개를 돌렸다. 거, 짜증나는 계집애구나. 눈썹을 꿈틀대고 있으려니 첫째 엘레인이 말했다. “저, 발렌타인씨의 노예는….” “으흠!” 첼시아가 살짝 헛기침을 했다. 이런 자리에서 노예를 거론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아가씨에게 알려준 것이었고 엘레인은 하하 웃으며 대신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나이는 몇이냐. 무슨 일을 해왔느냐 등등. 첼시아는 요조숙녀처럼 얌전히 대답하며 간간이 차를 마셨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고 찻잔의 잔을 두어 번 정도 비웠을 때야 티타임이 끝나는 분위기에 저어들었다. 상견례까지 겸하고 있는 것이라 시간이 꽤 걸리는군. 하지만 그것도 나만의 착각,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이 집 장손께서 입을 열었다. ========================================================================== 저도 장손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12 “예. 필사적으로 연습하고 공부했어요." “알다시피 최근 들어 수도내의 귀족가문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끊이질 않습니다. 덕분에 아버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 독단으로 이 방면으로 가장 뛰어난 여러분들을 고용한 것입니다. 이유는 제 여동생들은 물론이고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맡기기 위함이구요. 물론 밖의 경비사병들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행여 있을지 모르는 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준비한 카드이지요. 어쨌든 한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굉장한 미인 분들이 네 분이나 오셔서 저로서는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귀여운 여동생들 덕분에 밝은 집안이 더 근사해지는 기분이군요.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오르니트 셰퍼드가의 장남인 베이어 오르니트 셰퍼드입니다. 아랫사람들 사이에서는 통칭 도련님으로 통하고 있지요.” 거부감이 없는 목소리와 어투에 나와 첼시아는 그나마 좀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난 기분이었다. 게다가 자기 호칭까지 알려주니 예의도 바르군. 통칭 도련님이라고? 큭큭. 그와의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티타임을 끝내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 그전에 의뢰주와 일에 대해 자세한 상의를 나누는 것을 잊지 않았다. 덕분에 모두가 나가고도 우리는 도련님과 함께 자리에 남아 경호방식과 몇 가지 세세한 사항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뒤늦게 나타난 경비책임자에게 현 경비체계의 운영방법을 전해 듣고 거기에 우리가 보완해야 할 것을 몇 개 제시하고 그것을 채용하는 것으로 대략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점심식사 이후 경비책임자와 따로 만나서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그만 방으로 돌아갔다. “아, 아으….” “스피릿? 왜 그래?” “다, 다리가 아파요오.” 방안으로 들어오자마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스피릿의 말이었고 난 쓴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퍼피가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는 반복하며 다리를 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스피릿은 약해서 말야. 난 스피릿을 안아 올렸다. 몸이 여자가 됐다지만 이 정도는 가뿐하다. 스피릿 푹신한 침대 위에 올린 나는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주인님. 이러시지 마세요. 누가 봐요.” “보라고 그래. 다리 아파서 잉잉거리는 노예의 다리 좀 주물러 주겠다는데 누가 뭐래?” 그렇게 말하며 슬쩍 치마를 들춰 보려했지만 스피릿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짝! 난 손을 절절 흔들며 말했다. “아파아. 연중무휴서비스라며?” 스피릿은 옆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신기한 듯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변태를 눈짓으로 가르키며 얼른 다리를 접어 오무렸다. 난 인상을 쓰며 첼시아에게 말했다. “뭐야? 뭘 봐?” “응? 언제는 보라면서? 야. 이거 재미있다. 계속해봐.” “…심심하면 네 노예나 가지고 놀아. 방해하지 말고,” “어, 그럴까? 퍼피? 언니하고 재미있는 거 하면서 놀까?” 다리를 풀고 있던 퍼피는 그 소리를 듣고 갑자기 얼굴을 새파랗게 만들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하지만 첼시아는 기분 나쁘게 웃더니 직접 퍼피의 손을 잡아끌고 와서는 침대에 던져 올리고 자기도 올라갔다. 그리고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실성한 사람처럼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간히 퍼피의 울음섞인 비명도 들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괴성을 지르며 그들의 침대로 달려가 양손으로 담요를 잡고 들췄다. “무슨 짓이야! 남의 집 침대에서 그것도 대낮에 게다가 여자끼리! 어억…!” 담요를 들춰보니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암담한 사건현장을 경비대식 문체로 서술해보자면, 먼저 욕구불만에 쌓인 가해자 첼시아가 그녀의 마수에 붙잡힌 불쌍한 피해자를 강제로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걸터앉아서는 양손으로 피해자의 옷깃을 붙잡아 윤간을 목적으로 벗겨 내고 있었으며 피해자 퍼피는 주인의 횡포에 겁에 질려 반항할 기색도 없이 그저 눈만 질끈 감고 가해자의 윤간 대상이 될 앙가슴을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었다. “내 노예 데리고 재미 좀 보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가서 예쁜이 다리나 주물러 줘.” 안타깝게도 그녀의 대답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허리를 숙인 첼시아는 여봐란 듯이 퍼피의 하얀 목을 징그럽게 혀로 핥아 올린 다음 먹이를 노리는 트롤 같은 눈동자로 속삭였다. “퍼피이? 가슴 좀 만져보자? 으응?” “으, 으으윽!” 퍼피는 고개를 흔들어댔다. 으윽… 이런 건 정말 싫어. 이윽고 점심 시간이 됐다. 옷을 갈아입은 우리는 가죽바지와 셔츠, 자켓등을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염병스럽게도 잠시 기다리니 후작의 가족들이 들어왔고 우리는 쓰게 웃으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불행하게도 점심시간 내내 막내와 셋째 아가씨가 나에게 갖은 태클을 걸어와서 심히 고역스러웠다. 밥을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첼시아도 둘째 아가씨의 수다에 약간 불쾌한 표현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엘레인은 그녀의 살기 어린 시선을 못 본 것 같다. 무사히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아가씨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얼른 경비책임자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첼시아도 진절머리를 내며 뒤따랐다. “예상은 했었지만 아가씨들의 관심이 장난이 아닌걸?” “엘레인이라고 했었지?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퍼피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가질 거 다 가진 아가씨가 이제 보디가드라는 악세사리가 맘에 들었나보지. 내버려둬. 자기 좋을 대로 상상하게. 그런데 경비책임자 사무실이 어디였더라?” “1층 복도 끝이라고 했는데. 여기가 아닌가?” 때마침 메이드가 지나갔다. 몸을 돌린 나는 메이드를 벽에 밀어붙여 길을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벌게진 얼굴로 날 올려보다가 길을 가르쳐주었다. “경비대장님 집무실은 바, 반대편 복도 끝인데요?” “고마워요. 귀여운 아가씨.” 난 싱긋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메이드는 후다닥 복도를 달려가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팔짱을 하고 옆에 서있던 첼시아가 말했다. “당신도 만만치 않은데?” “응? 뭐가?” “됐어. 반대편이라고? 어서 가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복도를 걸어 경비책임자의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그가 앉아 있다가 우리를 반겼다. 40대 후반의 나이를 가진 경비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도련님 앞이라 하지 못했던 자기 소개를 하며 우리를 자리에 앉게 했다. “멜 크루즈요.” “첼시아에요. 이 아가씨는 콜트.”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아까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그러니까. 어렵게 현 경비체계를 임의로 바꿀 필요 없이 내외부 경비는 우리에게 맡기고 당신들은 독자적으로 내부 경비와 함께 아가씨들의 개인 경호를 하는 걸로 합시다.” “하지만 서로간의 상호협력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쪽이 더….” “여러분들의 실력은 충분히 봤소. 그 정도라면 일을 어렵게 하지 않아도 되겠더군. 그렇지 않소? 물론 저택 내부에 침입자가 발생하면 사병 50명이 5분 이내로 모조리 투입 될 거요. 여러분이 할 일은 그 5분의 시간만 벌어주면 됩니다.” 확실히 그의 주장대로 하는 쪽이 더 일하는데 편하긴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5분 이내에 50여명의 사병이 이 저택으로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전제하의 일이었다. 첼시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 사병의 출동준비태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5분 이내에 전 사병을 저택 내로 배치 한다고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해요?” 잠시 우리를 쳐다보던 멜은 커다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긴 그렇군. 우리 쪽 실력도 보여줘야 그쪽 분이 믿고 일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서랍을 뒤적거린 멜은 이상하게 생긴 목걸이 같은 것을 하나 꺼내더니 그것의 뚜껑을 열고 엄지손가락으로 속의 뭔가를 비벼댔다. 그리고는 그것을 우리에게 건냈다. “스크롤의 일종이오. 본관에서 떨어진 경비대 건물에 그려진 알람 스펠과 연동되어 있어서 건드리면 알람이 울리지. 저택의 하인 하녀들은 다 하나씩 가지고 있소. 시계가 있으면 꺼내보시오. 지금부터 5분 이내에 문이 벌컥 열리며 긴장한 사병이 달려들어 올 거요.” 행여 하는 마음에 난 시계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시계바늘을 바라본지 정확히 5분이 지났을 때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벌컥! “전 병력 배치 완료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훈련상황이다.” 정말 5분 이내에 배치가 끝난거야? 나와 첼시아는 입을 딱 벌렸다. 경비대장 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를 이끌고 저택 곳곳에 완전무장을 하고 서있는 사병들의 모습을 구경시켜주었다. 창문과 문은 물론이고 저택 내부에까지 사병들이 들어와 상당히 험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비대장은 보란 듯이 말했다. “시가지 전투 방법을 조금 바꿔서 적용했소. 계단이나 모퉁이에서 사병들을 만나더라도 놀라지 마시오.” 복도 모퉁이를 돌다가 갑자기 나타난 중무장의 사내를 보고 흠칫하고 있던 나는 앞서서 걷고 있는 경비대장을 좀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 메이드와 하인들이 안보이네?” 내 말을 들은 멜은 복도를 걷다말고 가까운 곳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막내 실비아와 메이드 몇몇이 테이블이나 침대에 앉아있었다. 실비아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한참 큰 멜을 올려다보며 볼을 부풀렸다. “또 훈련하세요?” “예. 막내 아가씨. 번거롭더라도 잠시 참으십시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실비아는 별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날 보고는 후다닥 달려와서 다리에 매달렸다. “으아? 아가씨?” “콜트 언니라고 불러도 돼죠? 저도 따라 갈레요.”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내 입장으로서는 경호인을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멜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첼시아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죽을상을 지은 나는 그녀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견학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우리는 경비대장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따로 방법대책을 마련해야 할 경우엔 미리 알려주시길 바라오. 이쪽의 병력 배치를 조정 할 테니까.”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방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경비경호 건으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따라왔던 실비아는 일 이야기만 해대는 우리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대신 침대에 앉아있는 스피릿과 퍼피에게 달라붙었다. “우와~! 정말 예쁘다아?” “감사합니다. 실비아 아가씨.” 실비아는 싱긋 웃더니 퍼피를 바라보았다. “아까 아빠랑 싸우는 거 봤어. 나도 그거 배울 수 있어?” “물론입니다.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노력해야 합니….” 갑자기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첼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퍼피, 딱딱하게 말하지 말랬지?” 퍼피는 움찔하더니 자기 무릎 위에 앉아있는 실비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무, 무슨 일을 하시려면 최소한 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해요. 단순히 하고싶다고 해서 단번에 할 수 있는 건 없답니다. 아시겠죠?” “응응. 그럼 퍼피도 열심히 연습해서 그렇게 된 거야?” 퍼퍼는 상냥하게 웃었다. 자연스러운 미소다. “예. 필사적으로 연습하고 공부했어요. 최소한 제 몸 하나는 지키기 위해서요.” ========================================================================== 하아~ 퍼피군처럼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다면 지금의 저도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혹시 여러분도? ^^ Reload Running Fire: 13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잖아? 헤어지면 끝이라구.” 뭔가 무게가 담긴 말이었지만 어린 실비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첼시아와의 이야기를 끝낸 나는 침대로 몸을 날려 잠시 피곤한 몸을 쉬게 했다. 첼시아는 반대편 침대에 앉아서 퍼피에게 어깨를 주무르게 하고 있었다. 나도 스피릿에게 안마를 부탁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경호인과 놀아주느라 나의 요구에 순응하지 못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둘째 엘레인이 들어왔다. 그녀를 본 나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어머,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닙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시죠?” 엘레인은 스피릿의 무릎에 앉아있던 실비아의 귀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까부터 요 녀석이 보이지 않아서요. 선생님이랑 찾고 있었어요.” “선생님?” “예. 가정교사 님이시죠. 실비아는 겨울 방학중이지만 밀린 학업이 있어서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우에에엥~! 스피릿 살려줘~! 콜트 언니~!” 실비아는 끌려가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와 스피릿은 어떡해 줄 방도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속으로는 손수건을 흔들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실비자아가 끌려나가고 나는 스피릿에게 한가지 명령을 내렸다. “아까부터 시달렸지? 좀 쉬어.” “역시 주인님뿐이세요.” 스피릿이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기대었다. 난 씩 웃으며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 있는데 다시 문이 열렸다. 나와 스피릿은 얼른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누가 분위기를 깨나 했더니 엘레인이었다. 그녀의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저,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방법장치를 달려고 했거든요? 대신 아가씨들과 방을 좀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처음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엘레인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안내했고 난 울상을 지어 보이는 스피릿을 달래서 경호인들의 방의 창문에 방법용의 알람스펠과 스파크 스펠을 붙이고 다녔다. 의자를 가져다가 창틀에 스크롤을 붙이는데 옆에서 쳐다보던 엘레인이 말했다. “콜트씨, 가죽바지가 참 멋있어요.” “아니요. 엘레인 아가씨의 드레스가 훨씬 아름다운 걸요?” 엘레인은 고개를 저으며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가끔은 저도 바지를 입어보고 싶어요. 승마 때 이외에는 입지 못하게 하셔서, 그런 이유로 약간 작은 사이즈의 가죽바지는 최고예요. 특히 퍼피, 허벅지와 엉덩이 라인이 살아있는 게 너무…. 치마입고 싸울 때와는 색달라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지나가던 퍼피가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꾸벅였다. 헤에, 계산된 행동이야. 나에게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지나가던 퍼피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다니 대단한 걸? 퍼피에게 질문 공세를 펼치는 엘레인을 쳐다보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음은 어디지?” 퍼피에게 뭔 짓을 하던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로 작업을 하던 첼시아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도련님의 방이야. 중앙계단에서 다섯 번째 방이라고 하는데. 위치를 모르겠군.” 고개를 돌리며 엘레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퍼피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엘레인이 하하 웃으며 우리들을 안내해주었다. 그래도 성격이 좋아서 다행이다. 으레 귀족가의 영애라고 하면 자기만 알고 떽떽거리는 아가씨가 대부분인데, 우리 앞에 선 셋째 라뮤즈처럼. “왜 남의 방에 허락없이 들어와서 이런걸 붙여 놓은 거야!” “그건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서….” “시끄러워요! 언니! 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그랬잖아!” “라뮤즈~! 무슨 말버릇이 그러니! 그것도 손님에게!” “손님은 무슨, 밥이나 축내러 온 싸구려 모험가 주제에.” 머리가 빡 도는 기분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스피릿이 말렸지만 난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며 라뮤즈에게 다가갔다. 라뮤즈는 물러나지도 않고 서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뱀파이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자존심이 높은 뱀파이어는 보통 사람을 물지 않습니다.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의 목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어 동맥의 신선한 피를 빨아먹지요. 그런데 여기서 귀족 아가씨가 순결한 처녀라면 피를 빨린 직후 뱀파이어가 됩니다. 라뮤즈 아가씨. 사춘기의 고민으로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으시죠? 그럼 밤에 주무실 때 창문을 열어 놓고 주무세요. 당신에게 영생을 안겨줄 사람이 찾아올 겁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가족의 얼굴과 태양을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게 싫으시면, 아가씨의 응석을 받아줄 남자친구를 하나 사귀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구요.” 얼굴이 벌게진 라뮤즈는 입을 꾹 다물고 날 노려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저는 이미 후작님께 이곳에서 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불만이 있으시거든 후작님께 따지시길.” 어깨를 으쓱인 나는 복도를 걸어나갔다. 스피릿이 얼른 뒤따랐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첼시아와 퍼피도 따라왔다. 마지막으로 엘레인도 동생을 매정하게 져버리고 따라왔다. “위로해주면 오히려 화를 내요.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서, 혼자 내버려 두는게 상책이에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도련님의 방은 다른 아가씨들의 방과 다르게 검소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인에 비하면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했지만, 방안에 방법스크롤 처리를 하고 오후동안 저택을 돌아다니며 건물의 내부도를 익힌 우리는 적 침입 예상경로까지 설정하여 스크롤을 붙여뒀다. 그렇게 작업을 끝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마무리 작업 도중에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 집사에게 붙들린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끌려갔다. 이번엔 스피릿과 퍼피도 함께 갔다. 점심은 후작의 초대로 그들의 가족과 함께 했지만 저녁부터는 아래층의 메이드와 하인들이 모여 앉은 곳에서 같이 먹게 되었다. 내 생각뿐인지 모르겠지만 분위기는 이쪽이 훨씬 좋았다. 식사도중에 집사의 배려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게 된 우리는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녁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2층으로 올라가 마저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스피릿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얼른 나에게 왔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무 말씀도 없이.” “아까 하던 거 마무리하러.” 첼시아가 말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고개를 숙인 스피릿은 다음부터는 어디 갈 때 자기도 꼭 데리고 가라고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예뻐서 슬픈 일이 있었지.”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을 추궁했다. 그리고 이 집 도련님이 그녀를 붙잡고 이것저것을 물어댔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런 망할 자식이 좀 괜찮다고 생각했더니만….” “남자가 다 그렇지 뭐. 그렇지 않은 척을 해도 예쁜 여자만 보면 안달이라니까?” 입술을 삐죽 내민 나는 스피릿을 데리고 씻으러 내려갔다. 돈 많은 귀족가문이다 보니 지하에 커다란 욕탕이 만들어져 있었다. “으아…! 너무 좋다.”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가린 스피릿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여자다 보니 이런 특전도 주어지는 구나. 난 히죽 웃으며 스피릿에게 다가갔다. “스피릿, 같이 목욕하는 건 처음이지? 기념으로 뽀뽀나 한번 할까?” “예? 하, 하지만….” “여자니 남자니 하는 정체성은 개나 줘버리고 눈앞의 두근거림에 순응하자구. 그리고 아무도 없잖아?” 스피릿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좋아라 웃으며 그녀의 어깨와 손을 잡고 키스를 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스피릿의 숨소리만이 귓가로 들어왔다. 남자였다면 이대로 일을 저질렀을 거야. “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고개를 들어보니 문이 열려져 있고 라뮤즈와 메이드들이 서있었다. 그녀들은 놀라움으로 얼굴을 붉히며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에게 안겨있던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 이거 들켜버렸네.” “…후작 님께는 알리지 않겠습니다만. 모쪼록 다음부터는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집사니임~! 지금 그냥 넘어가시겠다는 거예요?!” 집사는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아가씨가 한발 양보해주십시오. 어제도 에페른 백작 가의 영애가 실종되는 괴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각 가문에서 급히 이 방면 전문가를 고용하는 지금에 와서 콜트씨를 해고한다고 하면 다른 가문에서 오히려 좋아 할겁니다. 게다가 이 정도 되는 실력자를 다시 찾기는 힘들지요. 취미가 좀 위험하지만, 이번엔 경고로 그치기로 하죠. 하지만 두 번은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집사의 말에 반항할 줄 알았지만 라뮤즈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오호, 의외로 집사 말은 잘 듣는 아가씨로군? 집사가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뭐.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보십시오.” 나는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스피릿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집사가 잠시 기다려 보라 하더니 책상을 뒤져 서류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아까 부탁하신 겁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세 아가씨들의 스케줄이 잡혀있는 일정표입니다. 조정되는 것이 있으면 차후에 따로 알려드리지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것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메이드들과 하인들의 시선이 따가운 가운데 옆에서 걷고있는 스피릿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스피릿,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마.” “우… 하, 하지만 주인님이랑 키스하는 거 다 보였을 거란 말예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요?” 에구, 괜히 미안해지는데?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니 첼시아가 킥킥 웃으며 손을 들었다. “오! 이제 오는 거야? 변태아가씨?” “닥치지 못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이 입술을 우물거리는 스피릿을 달래어 침대에 앉힌 나는 첼시아에게 서류를 건냈다. “아가씨들 일정표래.” “그런가? 앞으로 이거보고 따라다니면 되겠군. 그나저나 조심하지 그랬어? 소문 쫙 퍼졌다? 콜트씨가 목욕통 안에서 노예랑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는….” “제기, 시끄러워.” 퍼피가 불쌍한 듯이 침대에 앉아 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첼시아가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가서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노예나 좀 달래주지? 당신 잘못이잖아.”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스피릿의 옆에 앉은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쳐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걱정하지마. 어차피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큰일도 아니구만. 뭐,” “…문제는 여자끼리 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 아녜요.” “어차피 벌이진 일이야. 앞으로 잘하면 돼. 누구나 실수 하나쯤 하는 법이야. 저 엘프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고 드워프들도 실패작을 만든다구? 이 모양이 된 세상에서 잘못에 대한 용서는 자기반성이면 충분해. 남의 이목까지 일일이 신경 쓰면 내일이 힘드니까 신경 꺼.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잖아? 헤어지면 끝이라구.” ========================================================================== 맞습니다. 등돌리면 끝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14 “어, 놀리는 거 아냐. 대단했다구.” 난 그렇게 말하며 스피릿을 달랬다. 이윽고 고개를 든 스피릿이 날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건 잘못된 말이에요. 자기만 반성하면 된다니….” “궤변이면 어때? 우리 스피릿의 걱정거리만 조금 덜어지면 그걸로 됐어. 에구, 미안해. 많이 부끄러웠지? 미안해. 내일부터는 주인님이랑 얼굴에 철판 깔자? 알았지?” “철판이요?” “응. 이상한 주인님과 노예라고 소문이 나버렸으니 내일 아침부터는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시선으로 봐도 얼굴 붉히거나 울면 안돼.” 스피릿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주인님 때문이에요. 키스하고 싶다고 하시는 바람에 이렇게 된거잖아요.” “그래서 사과하잖아. 미안해.” 난 그녀를 꼭 끌어 안아주었다. 언제 왔는지 옆자리에 앉아있던 첼시아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아. 말 잘하는데? 맘만 먹으면 공주님도 문제없겠어?” “…당신은 언제 왔어?” “본디 연애는 당사자들 보다 주위사람의 눈에 더 재미있게 보이는 법이지.” 난 이를 드러냈다. 그때 내 가슴에 안겨 있던 스피릿이 중얼거렸다. “템씨와 아이니스의 방을 나설 때 주인님이 하셨던 말이네요? 뿌린 대로 거두세요. 주인님은.” 윽…! 고개를 숙인 나는 스피릿의 머리를 내 수박 만한 가슴에 밀착시켜 호흡을 곤란하게 만들어주었다. 잠시 소동이 있고 나서 일정표를 확인한 나는 침대에 올라 하루의 피곤함을 달랬다. 그 동안 첼시아와 퍼피는 옷을 갈아입고 외출준비를 했다. “아가씨들 불침번이야. 나중에 와서 깨워 줄게.” “알았어. 수고해.” 첼시아는 아까 하던 거 마저 하라는 악담을 해주었고 난 웃기지 말라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이밀어줬다. “피곤해서 졸려 죽겠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침대로 누워버렸다. 스피릿은 부츠를 벗고 자리로 올라와서는 내 팔을 옆으로 벌리고 그것을 배게 삼아 내 옆에 달라붙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 주무르지마.” “이렇게 하면 잠이 잘 와요.” “난 안온 단 말야. 아까 하던 거 마저 해버린다?” 난 그렇게 말하며 스피릿을 덮쳤다. 그녀는 꺄르륵 웃으며 날 밀어냈다. 침대 위에 서로의 겨드랑이를 마구 간지럽해주던 우리는 결국 체력이 다해 서로의 몸에 기대에 골아 떨어졌다. “아아암~! 졸려요….” “그러게 바로 잘 것이지 말이야.” 불침번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스피릿을 침대에 누워 쉬게 하고 첼시아를 깨웠다. 오늘부터 경호를 목적으로 스케줄에 따라 아가씨들의 일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뱀파이어는 밤에만 나오는 생물이지만 낮이라고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림자만 있으면 어디든 숨어드는 게 뱀파이어라는 생물이니까. 첼시아의 침대로 걸어간 나는 담요를 들어 단번에 들어올렸다. 순간 쓰러질 뻔했다. 첼시아가 반쯤 벗겨진 퍼피를 가슴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 장난감이군. 남자였을 때도 저랬을까?”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첼시아의 엉덩이 찰싹찰싹 때렸다. “이봐 일어나~! 아가씨들 경호하러 나가야 할거 아냐!” 첼시아는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퍼피를 흔들어 깨우고 하품을 하며 엉덩이를 좀 만지작댔다. “아파라…. 누가 내 엉덩이 때렸어?” “아니, 남의 여자 엉덩이를 어떻게 때려? 어서 씻어.” 첼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걸어갔다. 퍼피가 대야와 물병을 꺼내 세면대를 만들어주었고 첼시아는 그곳에 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좀 상쾌해진 얼굴로 잠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메이드가 간단한 아침을 가져왔다. 첼시아가 말했다. “거기 놓으세요. 아, 오늘 아침에 아가씨들 예절 수업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하죠?” “3층 좌측 복도 5번째 방입니다.” “고마워요.” “아니요. 그럼….” 메이드는 나가는 도중에 날 힐끔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 되게 이상하게 눈빛이네. 메이드가 나가고 스피릿이 울먹이며 몸을 일으켰다. “보셨어요? 방금 메이드씨 시선이요.” “응, 봤어. ‘어머나, 저 사람들이 그 소문의 변태들이야?’ 하는 눈빛이더군.”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고 난 하하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아. 언니만 믿고 따라와. 죽을 때까지 호강시켜줄게.” “…주인님 바보.” 그때 자리에 앉아 우유와 샌드위치를 먹던 첼시아가 우리를 불렀다. “문제의 발언은 그만 두고 와서 아침이나 먹어 둬.” “먹고 자면 얼굴 붇지 않아?” “어머, 어차피 얼굴 팔렸는데 좀 부으면 어때?” “뭐가 어째?” 나와 첼시아는 아침부터 악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우리들을 말렸지만 퍼피는 나와 첼시아가 칼을 뽑고 싸우더라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이 얌전히 주린 배를 채웠다. 아침을 먹고 한시간 정도 침대에 누워 졸린 눈을 붙인 우리는 메이드의 도움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헝클어진 내 머리를 대충 다듬어 묶으니 스피릿이 고개를 저으며 다가와서는 내 머리를 다시 풀어서 곱게 빗질을 하여 틀어서 올려주었다. “솜씨 좋은데?” 스피릿은 빙그레 웃어주었다. 나도 그녀에게 뭔가 해주려고 그녀를 앞에 앉혔지만 안타깝게도 머리는 땋을 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빗질만 좀 해주고 말았다. 오늘에서야 느낀거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정말 부드럽다. 향도 좋고. “비누대신 뭘 또 써?” “허브 잎을 따서 머리를 다듬어요. 그래서 결이 좋고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향이 나는 거죠.” 난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알았어. 난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보석도 다듬어야 아름답게 변하는 법이요. 나름대로 가꿔야 여자도 예뻐지는 거랍니다.” 몸을 돌려 앉은 스피릿은 내 안주머니를 뒤져 검은 손수건을 꺼내더니 리본 대신에 묶었다. “머리핀이랑 리본 사줬잖아. 그건 안 해?” “전 이쪽이 좋아요.” 살짝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시계를 꺼내보았다. 슬슬 아침 예절 수업이 끝나고 둘째 아가씨가 신부수업을 위해 메이드장의 집무실로 향할 시간이다. 스피릿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나는 복도에서 느끼한 눈으로 우릴 쳐다보는 하인을 발견하고 살벌한 시선과 고압적인 어투로 그를 붙잡아 메이드장의 방을 알아냈다. 으레 이런 하인들은 그런 어투와 시선에 약한 법이다. 이래서 개인 사업이 좋다니까. 메이드들의 야릇한 시선을 무시하며 메이드장의 방을 찾아간 나는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40대 중반의 나이를 가진 중년의 메이드 장은 우릴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딱딱한 얼굴을 했다. 얼굴에 철판을 깐 나는 당당하게 그녀에게 수업참관을 요구했다. 물론 경호를 위해서이지 지루한 이야기는 이쪽에서 사절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아가씨는 아직이니 잠시 기다리실까요?” 그녀가 가르킨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문이 벌컥 열리며 엘레인이 들어왔다. 숨이 차서 씩씩거리고 있는 것이 참 불쌍했다. 운동이라도 좀 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우릴 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고 나도 씩 웃으며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메이드장은 얄짤없이 지각한 그녀에게 따가운 훈계를 내린 다음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의 수업 주제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무슨 신부수업이 이러냐? 하지만 잠시 후 나는 메이드장의 수업에 빠져들어 질문까지 서슴치 않는 성실한 학생이 되어 버렸다. 나름대로 알고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충분히 내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 여자를 곁에 두고 있는 이상 들어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처음엔 귀찮게 여기던 메이드장도 엘레인에게 대놓고 설명하지 못했던 것을 나를 상대로 쉽게 풀어냈다. 그래서 수업은 메이드장이 나에게 상세한 설명하고 그것을 얼굴이 발그레해진 엘레인이 열심히 듣는 방식이 되어버렸다.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을 위해 메이드장의 집무실을 나서려는데 옆에서 걷고 있던 엘레인이 거창한 한숨을 내쉬며 달아오른 얼굴을 만져댔다. 그러더니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뭐가요?” “덕분에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들었거든요. 오늘 신부수업의 과제는 좀 부끄러운 거라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고마워요. 콜트씨.” “그냥 콜트라고 불러요.” “하지만 남자 이름을 막 부르는 것 같아서 이상한데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콜트란 사람이 있는데.” 엥? 고개를 돌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연이네. 누구죠?” “에르반테스가에 친구가 하나 있어요. 요즘은 지방에 있는 본가에 내려가 있어서 만나지는 못하지만 편지는 자주 주고받죠. 그런데 하루는 편지에 굉장한 모험가를 만났다면서….” 에르반테스가? 설마 멜리사인가? 이거, 기막힌 우연일세. 아무것도 모르는 엘레인은 이른 아침 창틀에 앉은 참새 마냥 잘도 재잘거렸다. “어쨌든 그 모험가의 이름이 콜트라고 했어요. 성은 잘 모르겠지만.” “지방에서 콜트란 남자이름은 흔하니까 동명이인이겠죠.” 그렇게 얼버무려주자 엘레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수업은 사회학. 그랜퍼스의 역사에서부터 각 나라의 사회구조까지 심층탐구를 해대는데.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부들부들 떨어댔지만 스피릿과 엘레인은 그 지겨운 이야기를 잘도 들어댔다. 그러다가 여기 가정선생이라는 사람이 스피릿에게 장난삼아 방금 배운 이야기를 가지고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스피릿은 정확하게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여 엘레인과 가정선생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그녀를 칭찬하는 가정선생의 말에 스피릿이 한 대답이었다. “예쁘기만 한 건 아니랍니다.” “주인님. 놀리시지 마세요.” “어, 놀리는 거 아냐. 대단했다구.” 엘레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현 시장경제의 경기변동과 경제정책을 그토록 간단하게 요약정리해서 대답할 줄은 몰랐거든요? 아까 들은 이야기만으로 대답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배웠어요? 이전 주인님에게서?” 고개를 돌린 스피릿은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경호가 끝나고 저희가 떠나는 날 알려드리죠.” ========================================================================== 다 아시죠? Reload Running Fire: 15 “절 굴복시킬 자신은 있으세요?” 엘레인은 궁금한 눈치였지만 어쨌든 승낙했다. 그녀가 방에 들렸다가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는 것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첼시아와 퍼피가 앉아서 우리를 반겼다. “으아.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무슨 수업이 그렇게 지루해?” “나도 그래. 막내아가씨 가정교사가 나에게 산수문제를 내서 말야. 칫, 졸고 있는 게 그렇게도 꼴사나웠나?” 난 낄낄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퍼피가 대신 대답해줬지.” 난 그녀의 옆에 앉아 야금야금 빵을 먹고 있는 퍼피를 바라보았다. 먹다가 죽은 귀신이 붙었나? 먹을 거만 앞에 두면 얌전해지네. “한순간 노예의 소중함을 느꼈군?” “그렇지.” 첼시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데 첼시아가 불렀다. “이봐이봐, 좀 쉬자구.” “경호의 기본은 밀착이야. 지금 이것도 귀족이라서 많이 생략된 거지만 원래는 같이 붙어 다녀야 한다고, 일어나. 날씨가 개어서 오후에는 승마를 한다고 집밖으로 나간다고 했어.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어. 여기 집사가 귀뜸해줬는데 승마장에서 둘째 아가씨 친구들이 그녀를 자주 괴롭힌다나봐. 그래서 자꾸 삐뚤어지는 거라더군.” “그래서 우리가 어쩌자고.” “경호원의 진면목을 보여줘야지. 버릇없는 아가씨들을 상대로 말야.” 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어떤 것들이 그런 귀여운 짓을 하는지 확인 해봐야겠군. 방으로 올라간 우리는 나름대로 준비를 한 다음 집사에게 말을 부탁했다. 눈은 이제 그쳐서 시리도록 맑은 겨울 하늘을 오랜만에 보여주고 있었지만 바닥의 눈은 아직 녹지 않은 채였다. 이 추위에 승마를 한다니! 미쳤군! “아니에요. 영애들의 경우에는 봄과 여름에 땀이 많이 흐른다고 운동을 하지 못해요. 그래서 가을과 겨울에 이렇게 자주 나가는 거라구요.” 의외의 사실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말은 고개를 휘저으며 우리들에게 달려왔다. 말을 데려온 말지기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말지기를 하면서 이렇게 하얀 백마는 처음 봅니다. 캐슬린 산이지요?” 말의 목을 쓰다듬던 첼시아는 기분 좋은 듯이 싱긋 웃었다. 쳇, 우리 쪽은 누렁이라 미안하군.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이 말의 볼을 쓰다듬으며 화사하게 웃고있었다. 징그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말지기를 얼른 쫓아내고 있으려니 마차가 와서 저택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후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세 아가씨가 마차에 올랐다. “막내 아가씨도 가세요?” “예!” 실비아는 기운차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웃어준 나는 말을 끌고왔다. 승마를 위해 가는 길이라 그런지 아가씨들이 다들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어깨를 으쓱한 나는 손을 아래로 내려 스피릿을 끌어올렸다. 탠덤시트가 달린 안장이라 뒷사람을 위한 등자가 하나 더 달려있어서 스피릿은 그것만으로도 간단하게 말에 올랐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말에 오른 첼시아는 퍼피를 태우지도 않고 마차 옆을 따라 달려왔다. 퍼피는 어쩌고? 스피릿이 깜짝 올라서 내 옷깃을 잡아 당겼다. “주, 주인님. 저것 보세요!” 고개를 돌리니 파란 겨울 하늘위로 검은 가죽바지를 입은 퍼피가 긴 갈색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멋지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바운드 스펠이 부츠에 새겨져 있다고 그랬지? 원 트위스트의 간단한 재주를 부리며 정확하게 첼시아의 뒷자리에 착지한 퍼피는 주위에서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는 하인들과 사병들의 시선에 얼른 얼굴을 돌려버렸다. 마차 안의 아가씨들도 퍼피의 재주에 대단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첼시아와 함께 좌우로 마차를 호위해서 시내의 귀족자재들만 이용하는 승마장으로 향했다. 듣기로 원칙상으로는 일반평민도 이용할 수 있다지만 회비가 비싸기 때문에 집이 부유한 아이들이 아니면 이런 곳에서 말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엘레인의 말 타는 솜씨를 구경하던 나는 팔짱을 하며 콧김을 내뿜었다. “킁~! 나는 흙 밭에서 먼지 마셔가며 말을 배웠는데 말야.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동감이야.” 벤치에 앉아있던 첼시아의 말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심한데 나도 아가씨들처럼 말이나 좀 몰아봐야겠다.” “온실 안의 화초들에게 야생화의 무서움을 가르쳐 줘.” 내 응원에 첼시아는 싱긋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때 스피릿이 나에게 머뭇거리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았어. 갔다와.” “어, 예?!” “달려보고 싶은 거 아냐? 그럼 허락할 테니 다녀와.” 스피릿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주인님이 한창 놀고 싶어하는 나이의 노예에게 제공하는 약간의 여흥이라고나 할까? 조심하고, 맘껏 달려봐.” 스피릿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갑을 끼고 울타리에 묶어 놓았던 말고삐를 풀어서 입구로 달려갔다. 어이구, 그냥 타고 가면 될 것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고있는데 휴게실에서 뜨거운 차를 소반에 담아 가지고 나오던 퍼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콜트님. 마스터와 스피릿양은 어디로 갔어요?” 고개를 돌린 나는 20대 초반이지만 대체로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입구에서 무슨 경주를 벌이듯이 하얀 백마를 몰고 무섭게 질주하는 빨간머리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은 대형마를 몰고 그 뒤를 추격하는 회색머리 아가씨를 가르켰다. 그것을 보던 퍼피는 나에게 소반을 내밀었다. 하얀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찻잔이 보였다. 하나 집어든 나는 그것을 후후 불어 마시며 말했다. “퍼피.” “예.” “우린 사내자식들이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고마워. 잊고있었어.” 퍼피도 한숨을 내쉬며 소반을 테이블에 올렸다. 그때 약간의 소란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휴게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나와 퍼피는 서로를 쳐다본 다음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뭔가에 쩔쩔매는 라뮤즈 아가씨가 보였고 그래서 생각할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어쩔거에요! 아버님이 선물하신 거란 말예요! 후작영애면 다세요?!” “아, 아니. 그게….” 보아하니 대략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승마를 끝낸 영애와 도련님들이 테이블에 앉아 차와 간단한 다과를 즐기며 사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라뮤즈가 뭔가를 잘못해서 저 금발아가씨의 멋진 승마복에 차를 쏟았나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라뮤즈는 그렇게 운동신경이 둔하지 않아 보이던데. 누가 다리를 걸었나? 그때 퍼피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그녀(?)가 가르킨 곳에는 라뮤즈를 바라보며 킥킥 웃고있는 남녀 패거리들이 있었다. 어딜 가나 남 괴롭히기 좋아하는 새디스트는 있는 법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헛기침을 하며 쩔쩔매고 있는 라뮤즈에게 걸어갔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상관 마세요!” 아무것도 아니시긴. 쩔쩔매고 있었으면서, 원래 이런 다툼에는 아랫사람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여기 휴게실에 어른이라고 불러야할 사람이 없는 거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하인이나 하녀가 아니고 또한 집사의 귀뜸이라는 묵인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끼어 들게 된 것이다. 그때 맞은 편에서 바락바락 대들던 어느 귀족 영애가 고개를 들더니 나에게 외쳤다. “뭐야?! 예절도 몰라! 감히 하녀주제에 영애들의 문제에 끼어 들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썩 나가지 못해!” 난 시큰둥하게 말했다. “영애께서 속한 가문에서는 나이가 많은 아랫사람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하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전에 스피릿에게 들은 건데 귀족에게는 아랫사람에게도 지켜야할 예절이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나이가 많은 아랫사람에게 오랜 시간 가문에 봉사해온 것을 감사하며 존대를 붙여주는 것으로서, 그 예로 현재 오르니트 셰퍼드가에서 집사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후작이외에는 없다. 후작부인 조차도 그에게 존대를 붙이는 실정이다. 내 말에 갑자기 말문이 탁 막혀버린 영애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라뮤즈 아가씨. 그렇게 쩔쩔 매지 말고 잘못했다고 말하고 세탁비 물어주겠다고 하세요. 뭐가 걱정이에요?” 라뮤즈는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퍼피가 헛기침을 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봤자 여자 목소리라서 별로 위협적으로 들리지 못했지만, “거기 도련님, 그만두시죠.” 고개를 돌려보았다. 롱소드를 든 도련님하나가 라뮤즈의 엉덩이로 검을 내밀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애초에 우리말 같은 건 듣지도 않고 롱소드로 라뮤즈의 엉덩이 쿡 찔러버렸고 라뮤즈는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안겨들었다. “꺄악~!” 그러자 휴게소 안에 모여있던 아이들에게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에게 안긴 라뮤즈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부들부들 떨어댔다. 어린것들이 더 무섭다니까? 한숨을 조금 내쉰 나는 부엌에서 잡일을 보고 있는 주방장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여긴 무법지대냐? 고개를 가로 저은 나는 라뮤즈를 퍼피에게 맡기고 검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찔러댄 녀석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나이는 대략 19살 내지는 20살 정도일까? “뭐야?” “검을 보니 어디 무관가문의 자제 같으신데. 기사 시험 준비하셔야 할 때 아닌가요? 왜 이런 곳에 계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 혹시 그 나이 되도록 아직 승마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셔서 그런 것인가요? 어머나~ 안타까워라! 나이는 찬 것 같은데 실력이 모자라 아직도 이런 승마장에서나 어슬렁거리시다니, 상심이 크시겠군요. 그런데 다른 가문의 영애 엉덩이나 건드릴 시간 있으면 밖에 나가서 승마술이나 연마하시죠? 그래야 기사작위 시험 날 긴장하더라도 말에서 떨어지진 않을 거 아닙니까?” “큭큭…!” 조용한 휴게실 안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도 이 녀석이 휙 고개를 돌리자 이내 묻혀 버렸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키는 커서 거의 나만했다. 하지만 녀석은 무슨 여자 키가 이렇게 크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분 나쁘게 군침을 삼키더니 유들유들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슈트론 세퍼 그레네이드. 세퍼 그레네이드 공작가를 세 번째 아들이다. 나에게 누명을 씌우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하지만 여자가 한 말이니 그렇게 심하게 대하지는 않겠어. 물론 내 자존심을 건드린 너를 그냥 용서하겠다는 건 아냐. 오늘밤 모임이 있는데. 거기에 같이 가줘야겠어. 후후후.” 그가 웃자 같이 앉아있던 영애들이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기가 차는군,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것들이 쓸데없는 것만 일찍 배웠어. 배가 불러서일까? 난 피식 웃으며 가슴 아래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가슴을 위로 올려 도발적인 자태를 보이며 말했다. 근처에 있던 영애들이 내 가슴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도련님 몇 살?” “20살이다.” “어머, 어엿한 성인이시네? 전 23살이에요. 절 굴복시킬 자신은 있으세요?” ========================================================================== 저도 이런 말은 한번 들어왔으면…!? XXX: 심의! 컥~! Reload Running Fire: 16 “그렇게 있지 말고 일어나. 좋은 소식이 왔어.” 녀석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부드럽게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옆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찻잔을 들어 그의 얼굴에 뿌려 버렸다. “촤악!” “결투를 받아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콜트 슈발츠, 현재 오르니트 셰퍼드가에 고용된 호위무사입니다. 고용인으로서 고용주가 받은 모욕을 결투로 씻으려 하니 이의가 없다면 저를 따라나오시죠.” “이, 이 빌어먹을 년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찻물을 소매로 닦아낸 녀석이 괴성을 지으며 날 따라나왔다. 그리고 덩달아 영애들과 다른 도련님들도 구경 삼아 나왔다. 라뮤즈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퍼피의 손에 이끌려 나와서 내 뒤에 섰다. “정식 결투로서 참관인이 필요합니다. 괜찮다면 그쪽에서 지정하시죠.” “그런 거 필요 없어! 덤벼!” 녀석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괴성을 지르며 먼저 검을 뽑았다. 진검이군. 허가증은 있나? 그때 몇몇 영애들이 나서서 참관인을 자청했다. 난 그녀들에게 고개를 까딱여주고는 건틀릿을 꺼내 손에 꼈다. 여자 손이라 그런지 좀 헐겁군. “자신이 없다면 대리인을 세워도 좋습니다.” “웃기지마!” 공작 도련님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지저분한 놈, 전투자세를 잡은 나는 녀석이 내려치는 녀석의 검을 손으로 붙잡았다. 이런 결투에서는 부상의 방지를 위해서 검의 옆면으로 때리는데 화가 나니 앞뒤 가리지 않는구나. 어떤 무리에서나 꼭 한 명씩은 이런 쓰레기가 끼어 있는 법이지. 붙잡은 검을 흘려버리고 가슴으로 파고든 나는 팔꿈치로 녀석의 명치를 찍어버렸다. 갑옷이 없기 때문에 충격은 그대로 전해졌고 공작도련님은 뒤로 쓰러졌다. 근처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녀석을 내려다본 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절했군. 마부나 호위병은 어디…?” “도련님!” 어디서 괴성이 들리더니 호위병으로 보이는 사내들과 마부가 달려왔다. “퍽도 빨리 온다.” 후다닥 달려온 사내들이 내게 얻어맞아 쓰러진 녀석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하지만 녀석은 깨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분노의 시선을 날렸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 도련님께서 내가 모시는 후작영애께 무례와 치욕을 안겨주셨고, 참을 수 없게된 나는 법적으로 인정되는 결투조약에 따라 공작 도련님께 결투를 신청했고, 도련님은 내 도전을 받아들이셨고, 그래서 이 모양이지. 참관인도 있어요?” 호위무사는 참관인을 자청하고 나서는 영애들을 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으나 공작도련님의 개인 호위무사로서 이번 일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소!” “그래서?”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주위에서는 보는 눈이 많기에 차마 욕설을 하지 못했지만 녀석은 날 어떻게든 때려눕히고 싶다는 얼굴로 주먹을 들었다. “이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가녀린 여자에게 주먹을 들다니 너무 하잖아.” “지랄 마! 이 요망한 것!” 개인 호위무사가 달려들었다. 상대에 대한 예우로서 주먹을 든 나는 그의 공격을 되받아 쳐버렸다. 퍼퍽! 무릎과 팔꿈치로 턱과 배를 찍어버리자 상대는 그대로 쓰러졌다. “흐아아아~! 다음!” 가슴속으로 차가운 겨울공기를 가득 들이킨 다음 그것을 다시 뜨거운 증기로 바꾸어 입과 코로 뿜어냈다. 덤벼드는 개인 호위무사를 단번에 쓰러뜨리자 상대측 도련님의 보호자들(?)이 주먹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봐요. 말로 하자구요. 영애들도 많은데 창피 당하고 싶어요?” “뭐가 어째?! 착각하지마! 뒈지는 건 너야!” 고개를 저어주고 있으려니 퍼피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또 다른 응원군이 주변에 몰려든 영애들을 헤치고 달려왔다. “워워워~! 뭐야? 무슨 일이야?!” “푸르르륵~! 이히히히힝~!” 승마장에서 쓰는 사역마와는 덩치부터 틀린 말 두 마리가 다가와 투레질을 해대자 영애들과 도련님들이 입을 헤에 벌렸다. 상대가 늘어나자 맞은편 무사들이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물러서려 고는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쪽의 피해가 더 크니까. 퍼피에게 자초지정을 들은 첼시아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채찍을 뽑았다. “저기 귀여운 도련님께서 우리 아가씨의 엉덩이를 지저분한 손으로 만졌다 이거지? 명문가문 주제에 버릇없는 개망나니로군. 꼴좋다.” “감히! 그런 말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는군! 후작가 주제에 감히 공작가에게 대드는 것인가?! 이번 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쉽게 넘어가든 말든, 먼저 잘못한 건 그쪽이라면서? 게다가 참관인까지 세우고 결투를 벌였다며? 그럼 할말 다했지.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야?” “뚫린 입이라고 감히…!” 화가 난 사내들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난 씩 웃으며 팔짱을 풀고 주먹을 들었다. 그때 내 옆으로 뭔가가 쌩 지나가더니 뜨거워진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라뮤즈였다. “그, 그만 두세요! 겨우 그런 일로 양 가문 사이를 벌리고 싶지 않아요!” “비켜주십시오. 후작영애. 이것은 이미 영애의 사과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맞아요. 하지만 사과는 그쪽에서 해야지. 나는 정당하게 결투로서 고용주의 치욕을 씻었다구,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그렇게 계속 떠들어대면 가만 않았을 거야.” 난 라뮤즈를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때 첼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촤아악! 채찍이 바닥을 때리자 눈가루가 솟구쳤다. “미리 말해두지만 여자라고 얕보지마. 허약한 사내놈 몇쯤은 간단하게 박살낼 수 있으니까.” “뭐가 어째?!” 그래!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거야! 공작가라고 고개 숙이고 뒤로 빼기만 하면 안된다. 그럼 저쪽에는 자기네가 최고인 줄 알지. 간혹 머리가 서늘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정신차리고 버릇없는 자식과 아랫사람 교육을 똑바로 시키니까. 게다가 이깟 일로 강습돌격기사단의 기사단장을 적으로 돌리고 싶어할 가문을 없을 테니 뒷일도 걱정 없다. 난 깔깔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오하하하~! 높으신 가문이라 조그만 가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가 보지?! 덤벼! 박살을 내주마!” 그때였다. 갑자기 말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우리들의 사이로 난입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엘레인이 입을 꾹 다물고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두지 못해요! 모두 부끄러운 줄 아세요!” “뒤로 물러서시오!” 동시에 뒤따라 온 무장 경비병들이 우리들을 물러서게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첼시아가 씩 웃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엘레인이 불러온 경비병들에게 체포된 우리들은 공영승마장의 업무방해 혐의로 경비대로 잡혀가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풀려났다. 오르니트 셰퍼드가에서 우리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슨무슨 공작가라는 사람들도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 그들은 어디 두고보자는 식으로 우리를 노려보았지만 나와 첼시아는 싱긋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니 가장 먼저 집사가 우리를 불러들였다. 책상에 앉아서 잠시 쳐다보던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됐습니다. 이걸로 감히 세퍼 그레네이드 공작 가의 도련님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그의 호위무사를 때려눕힌 벌과 훈계는 끝났습니다. 이제 나가도 좋습니다.” 우리는 고개를 꾸벅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으려는데 집사가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차후의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난 씩 웃어주었고 집사는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베이어 도련님의 방으로 그곳에는 엘레인과 경비대장이 함께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더니 대뜸 어떤 종이조각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방금 전 세퍼 그레네이드 공작 가에서 보내어온 공작부인의 친필 사과문입니다. 멋진 일을 벌이셨더군요.” 우리는 한소리들을 각오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라뮤즈를 위한다고 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집사의 경우에는 합리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쪽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내 걱정은 중간에 그치고 말았다. 베이어는 싱 글벙글 웃으며 다시 편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략 요약하면 버릇없는 아들놈을 때려주셔서 고맙다고 적혀있군요. 가문 내에서도 어떻게 하지 못했던 망나니였다는데 이번 기회에 제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서도 누가 나서서 그 망나니의 버릇을 좀 고쳐줘야 한다는 말이 많았거든요. 어쨌든 잘하셨습니다.” 엘레인이 볼을 부풀리며 끼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자칫 잘못했으면 양 가문 사이가 나빠질 뻔 했다구요. 아까부터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이에 경비대장이 우리를 거들고 나섰다. “아니요. 저는 도련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잘못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걸로 라뮤즈 아가씨도 다른 가문의 영애들에게 약하게 보이지는 않겠지요.” “이거, 한 소리 들을 각오하고 왔는데. 너무 선선히 넘어가는 것 같아서 기분 이상한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오. 정말 잘한 일이니까. 솔직히 우리 애들은 그 도련님을 어떻게 할 수가 없소. 왜냐하면 우리는 오르니트 셰퍼드가의 아랫사람이기 때문이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 가문의 사람이 아니지. 그저 잠시 머물고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경호무사일 뿐이요. 이런 케이스라면 얼마든지 얼버무릴 수 있소. 아마 알고 있으셨을 테지?” 나와 첼시아가 히죽 웃었다. 엘레인은 입을 딱 벌리며 그럼 일부러 그런 짓을 벌인 거냐고 따져 물었고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강습돌격기사단의 기사단장님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것만 콱 믿었지요.” 엘레인은 볼을 부풀렸고 경비대장과 베이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첼시아가 말했다. “라뮤즈 아가씨는 어떠시죠?” “지금 방에 있어요. 사과편지가 왔다는 걸 알려주려 갈 참인데 같이 가시겠어요?” 첼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나도 따라갔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어서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엘레인이 문을 두드려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열쇠를 가져오라고 시키려는데 첼시아가 나섰다. “퍼피? 열어.” “예.” 앞으로 나온 퍼피는 문 앞에 앉아서 열쇠구멍을 유심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첼시아가 말했다. “머리핀 빌려줘?”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문고리를 잡고 어떻게 살짝 들어서 돌리더니 찰칵하며 열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엘레인과 메이드들이 깜짝 놀랐다. 첼시아가 말했다. “퍼피에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퍼피를 보는 엘레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빛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퍼피가 옆으로 비켜섰다. 깜짝 놀란 엘레인은 얼른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라뮤즈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엘레인이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있지 말고 일어나. 좋은 소식이 왔어. 세퍼 그레네이드 공작 가에서 사과편지를 보냈다구.” “…….” ========================================================================== 편지. 군대 있을때 처음 써봤더랬지요. Reload Running Fire: 17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나오시죠. 아가씨.” 하지만 라뮤즈는 대답이 없었다. 언니인 엘레인이 무슨 짓을 해도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수단으로 담요를 걷어내려 했지만 그건 내가 말렸다. “그만 두세요. 엘레인 아가씨. 그건 라뮤즈 아가씨의 자존심이라구요.” 내 말뜻을 알아들은 엘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있던 담요자락을 놓았다. 그때 첼시아가 나섰다. 그녀는 넉살 좋게도 라뮤즈가 있는 침대에 걸터앉더니 몸을 기울여 라뮤즈의 귀가 있음직한 부분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아아~! 이제 어쩌지? 자기가 안되니까 비겁하게 호위무사를 불러들였다고 생각할거야. 틀림없이 다들 날 따돌릴 거라구~! 앙앙앙~! 아빠 나 어떡해요~! 둘째 딸내미는 이제 끝났어요~! 바보에 머저리 호위무사들 때문에 끝났다구요~!” “프흡~?!” 엘레인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담요에 비춰진 라뮤즈의 몸이 움찔움찔거렸다. 첼시아는 피식 웃으며 몸을 바로 하더니 말했다. “이봐요. 후작영애.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아요. 이번 일로 적어도 영애를 우습게 보는 것들은 사라졌잖아요? 마음 독하게 먹고, 다른 영애들이 후작영애를 따돌리면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줘요. ‘흥! 네깟 것들이 나랑 안 놀아주면 어쩔거야?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놀 수 있다구!’ 그리고 다른 친구들을 찾아요. 파티는 자주 열리잖아요? 거기 가서 당신을 이해해줄 친구들을 사귀어요. 뭐, 좀 더 나아가서 멋진 귀족도련님 하나 낚으면 더 좋구요.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이야기할게요.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버리세요. 그게 친구든 연인이든 간에, 쓸모 없는 걸 끝까지 부둥켜안고 있으면 생기는 건 가슴 안의 멍울뿐이에요.” 말을 마친 첼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모두를 데리고 그녀의 방을 나섰다. “저대로 내버려두세요. 사춘기 때는 혼자서 고민할 때도 필요하니까.” 그녀의 말에 감동한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녀에게 말 잘한다고 이야기 해줬다. 첼시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지.” “헤에, 당신이 저런 고민을 했다구? 믿기지 않는데?” “이거 왜 이래? 나도 순수했던 적이 있었다구. 그나저나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우리는 그녀의 의견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오르니트 셰퍼드가에 머무른 지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내 일상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야간에는 아가씨들의 방이 있는 2층 복도를 첼시아와 돌아가며 불침번을 선 다음 그녀들이 상쾌한 아침에 맞이함과 동시에 방으로 돌아가 새벽에 교대 후 꿈나라로 떠난 첼시아를 깨운다. 그리고 메이드가 가져다준 간단한 아침을 함께 먹은 다음 1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정표에 따라 아가씨들의 수업을 따라다닌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야간 불침번의 준비하고, 이것의 반복이 요즘 내 일상이다. 너무 지루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간간이 흡혈사건 소식이 들려와서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스피릿이 좀 힘들어하는 것 같다. “아아아암~!”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졸려요….” 점심을 먹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스프릿이 내 어깨에 기대어왔다. 저번에 키스 사건 때문에 사람들 보기 민망하다고 부끄러워하던 그녀는 이제 어느 정도 수근거림은 거뜬하게 커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머,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절 주인과 같은 후안무치(厚顔無恥)와 비교하지 마세요.” “후안무치?” “얼굴이 두꺼워서 남들의 손가락질 정도는 간단하게 무시하는 걸 말하죠.” “주인님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이 귀여운 녀석.” 난 스피릿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고 스피릿은 몸을 비틀어대며 꺄르륵 웃어댔다. 그때 첼시아가 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어머나. 보기 좋은걸?” “사이좋은 주인님과 노예랄까? 그런데 좀 늦게 끝났네?” “마지막 수업 때 실비아 아가씨가 지각하는 바람에 수업이 조금 연장 돼버렸어.”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으니 막 빵을 입에 넣으려던 첼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 집사님을 만났는데. 내일 저녁에 수도 광장에서 성인식행사가 있으니 준비하라고 했어.”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입고 나갈 옷 찾는다고 난리부릴 거 아냐? 빡세겠는데.” 내 예상은 적중했다. 모든 수업이 끝나는 오후5시가 되자 그녀들은 어떤 방으로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전직 귀족처녀인 스피릿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파티나 행사 때 입는 고가의 드레스를 따로 보관해 두는 곳이라고 했다. “그럼 스피릿도 파티 때는 언니 동생들이랑 저렇게 옷을 가지고 싸워댔어?” “아, 저는 위로 오빠들만 있는 막내딸이라서 파티 드레스 가지고 고민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대신 오빠들이 서로 자기가 가져온 것을 입어야 한다고 싸워대긴 했지만.” 스피릿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괜한걸 물었군. 고개를 돌린 나는 드레스를 하나를 가지고 엘레인과 말다툼을 벌이는 라뮤즈를 바라보았다. 라뮤즈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상당히 활달하게 변했다. 언제 신경질을 부려댔냐는 듯이 상냥하게 웃어댔다. 듣기로는 그게 본 모습이라고 한다. 그 날 첼시아의 말이 꽤 도움이 된 것 같다. 팔짱을 하고 그녀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방관하고 있으려니 라뮤즈가 나에게 달려와서 외쳤다. “콜트언니! 이것 좀 봐주세요. 이 드레스 내 쪽이 더 잘 어울리지 않아요?” 콜트언니…. 그녀가 나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친근해서 좋긴 한데 기분은 영 아니군. 쓰게 웃어준 나는 드레스를 한번 본 다음 말했다. “전 바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건 잘 모르겠는데요? 스피릿? 네가 볼 땐 어때?” 라뮤즈와 엘레인의 번쩍이는 눈이 스피릿에게 돌아갔다. 좀 머뭇대던 그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볼 때는 그 드레스 엘레인 아가씨 쪽이 더 잘 어울려요.” “들었지? 그것 봐!” “아냐! 난 양보 못해.” 그녀들이 다시 싸움을 시작하자 난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스피릿이 목소리를 좀 크게 해서 라뮤즈를 부르더니 드레스 몇 개를 골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미천한 노예의 안목으로 고른 옷입니다만, 괜찮으시다면 그것 중에서 맘에 드는 걸로 골라보세요. 제가 볼 때 라뮤즈 아가씨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드레스예요.” 고개를 돌린 라뮤즈는 스피릿이 내민 드레스를 한번보고는 그것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성년식을 받는 사람은 엘레인 뿐이었지만 식후행사로 가장 무도회가 준비되어 있어서 아가씨들이 극성을 부리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 라뮤즈가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때쯤 실비아의 드레스를 봐주었던 첼시아와 후작부인까지 이곳으로 들어와 있어서 라뮤즈는 상당히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후작부인이 말했다. “어머, 못 보던 드레스인데 잘 어울리는구나?” “동감이에요. 어떤 남정네라도 한방에 가겠는데요? 특히 잘록한 허리 라인을 강조한 게 맘에 들어요. 라뮤즈 아가씨는 가슴이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얼굴하고 잘록한 허리 라인으로 승부를 봐야해요.” “호호호, 첼시아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담이지만, 첼시아와 후작부인은 상당히 죽이 잘 맞아서 심심하면 붙어 다니고 있다. 라뮤즈는 좋아라 하며 스피릿의 손을 잡고 꺅꺅거렸다. 그때 딸아이의 드레스를 봐주고 있던 후작부인이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예?” “아이들의 호위를 하려면 여러분들도 성년식에 참가해야 하지 않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드레스를 입고 싶지는 않다. 움직이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내 변명을 용서치 않았다. 그녀는 메이드를 불러 강제로 옷을 벗기려 했고, 난 거의 반 강제로 드레스를 걸쳐야 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나는 애꿋은 스피릿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눈 반짝거리지마!” “주인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름답기는 개뿔! 으아악! 이 가슴 판 것 좀 봐. 이런 걸 입고 어떻게 밖을 나다녀? 내 모습에 후작부인과 아가씨들이 입을 딱 벌렸다. 내가 입고있는 드레스는 가슴과 등을 거의 다 들어내는 대담한 디자인이라서 여름에 입으면 퍽 시원하긴 하겠지만 착용자가 고개를 숙였을 때 가슴은 물론이고 아슬아슬하게 젖꼭지까지 보인다는 구조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이걸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너무 부끄러워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쥐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첼시아가 탈의실에서 나왔다. “이봐요들, 나 좀 봐주세요.” 모두의 고개가 첼시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입을 딱 벌렸다.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는 식의 요염한 자세를 잡고 있던 그녀가 입고 나온 드레스는 가슴부분이 내 것과 비슷해서 앙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치마 부분에서 속이 비친다는 크나큰 단점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긴 다리에 신고 있은 검은 망사스타킹을 비롯해서 그것을 잡고 있는 가터 밸트와 속옷이 훤히 보일 지경이다. 그녀의 모습에 모두는 말을 못했다. 그 틈에 나는 후다닥 바지와 브라우스를 주워들고 탈의실로 달려들어갔다. 잠시 그녀들의 넉을 빼놓고 있던 첼시아도 들어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가니 후작부인이 감상을 말했다. “둘 다 굉장한데요? 모험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예요. 어때요? 괜찮다면 좋은 사람 소개 시켜줄 수 있는데.” “…지금 중매 서시는 겁니까?” 후작부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점잖게 사양했다. 첼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시집가서 잘먹고 잘사는 것도 좋지만 아직은 이런 야인 쪽이 더 좋아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후작부인.” “시집가고 싶을 때가 되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알겠죠?” 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인이 물었다. “그럼 두 분은 드레스 안 입고 가실 거예요? 아까 좀 야하긴 했지만 정말 예뻤는데.” “드레스입고 뛰어다닐 수는 없잖아요? 명색이 호위무사씩이나 돼서 치마입고 싸울 수는 없어요.” 첼시아의 말에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깝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후작부인은 고개를 돌렸다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우리들에게 어떤 부탁을 해왔고 나와 첼시아는 쾌히 승낙했다. 퍼피가 울상을 지으며 반항했지만 첼시아가 커버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오후,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성년식은 오후 2시부터 시작됐다. 마차를 타고 도시 광장으로 향한 우리는 행사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마차를 임시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로 근처에 세워두고 마차에서 내렸다. “후아~! 오늘은 날이 꽤 포근한데?” “나 성인식 때는 눈이 내렸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퍽 좋은걸?” 고개를 돌린 나는 고동색 군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첼시아를 바라보았다. 잘못 보면 진짜 군인인줄 알겠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이것은 후작부인의 배려로, 후작 아저씨와 그의 부관이 자주 들리면서 여벌로 가져다 놓은 것을 허리를 줄여서 우리들에게 입도록 했다. 명색이 후작영애들의 호위무사인데 좀 멋지게 입고 가는 것이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확실히 치마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시선을 너무 끄는데? 주변에서 행사장으로 들어가던 청년들과 아가씨들이 입을 헤벌리고 서서 우리들을 구경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나오시죠. 아가씨.” ========================================================================== 그렇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가집시다. 전국의 구직자 여러분!!!! Reload Running Fire: 18 “레이디. 저와 한 곡 추실까요?” 내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엘레인과 라뮤즈가 베시시 웃으며 마차에서 걸어나왔다. 그녀들이 모두 나오고 마지막으로 퍼피와 스피릿이 나왔다. 퍼피의 드레스 입은 모습은 몇 번 봤지만 스피릿은 단 한번 밖에 못 봤었다. 오늘까지면 두 번째인가? 별 장식이 없는 새하얀 드레스였지만 스피릿에게는 더 없이 잘 어울렸다. 너무 아름답다…. 멍청히 그녀를 보고 있는데 라뮤즈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어째 스피릿이 더 튀는 것 같지 않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아냐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러지마~!” 라뮤즈가 당황해하며 손을 흔들어댔다. 짧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노예랑 대화하기 너무 힘들다고 중얼거렸다. 씩 웃어주고 있으니 같은 군 제복을 입은 마부들이 내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들도 나이가 20살이라고 했다. “저, 행사장 안에는 무기를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검은 두고 가셔야겠는데요?” “그래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풀어 마차 안에 던져 넣었다. 그래서 소드벨트만 허리에 맨 이상한 모습으로 행사장으로 향했다. 도시는 거의 축제분위기였다. 갖은 잡상인들이 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사방에는 젊은 청년들과 아가씨들이 오늘을 위해 준비했을 옷과 드레스를 입고 한껏 멋을 부린 모습으로 대로나 행사장 안에 모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주위 청년들과 아가씨들이 한번씩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큭, 이런 시선 달갑지 않아. 뭔가가 내 팔을 잡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이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내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겁먹지 말라는 듯이 싱긋 웃어주었다. 잠시 기다리니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지금부터 제 139회 성년식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성인이 된 분들은 중앙분수대로 모여주십시오.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젊은이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처에 함께 서있던 마부가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시작합니다. 가시죠.” “어머, 제이커도 참, 여기서는 그냥 엘레인이라고 불러.” 이 파격적인 대우에 제이커라는 마부청년은 얼떨떨해 하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한데는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성인식 참가자는 식이 끝날 때까지 신분격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특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늘 하루만큼은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주최측에서 배려한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가 이상론이고, 일반론은 그렇지 않다. 차별 없이 어울리자는 취지와는 다르게 귀족은 귀족끼리, 평민은 평민끼리 모이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가장 무도회라는 것을 끼워 넣어 어떻게든 무리의식을 희석시키려 하는 거고,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양옆에 동갑내기 하인들의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엘레인을 바라보며 난 손을 흔들어주었다. 첼시아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방금 마부청년들 얼굴 빨게 지는 거 봤어? 귀엽더라?” “나이는 같지만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아가씨께서 이름을 불러주며 상냥하게 웃어주니까. 천국에 온 기분이겠지.” 하얀 드레스의 스피릿이 응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도중 난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라뮤즈가 어떤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호오~! “호오, 저 남자가 맘에 드셨어요?” “히익?! 코, 콜트 언니?” 라뮤즈의 어깨 넘어로 고개를 내민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뮤즈는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얼버무렸고 난 히주욱 웃었다. 라뮤즈는 무섭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망설이세요?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다른 아가씨들이 채 갈지 몰라요?” “오호라, 꽤 깔쌈한데? 근처에 호위무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군. 기사단 소속의 장교일까?” “응? 어디어디.” 첼시아의 말에 나도 고개를 돌려보았다. 20대 초반의 꽤 시원한 마스크를 가진 사내가 새하얀 기사 제복을 입고 성년식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의 주변에 구경하러 온 사람으로 위장한 몇몇 사내들이 보였다. “일단 평민은 아니니 부담 가질 필요는 없겠어. 자! 행복한 내일의 발돗음과 두근거리는 소녀의 뜨거운 심장을 위해서! 행동력을 보여주는 거예요. 라뮤즈 아가씨! 저 사람만 붙잡으면 라뮤즈 아가씨에게도 청춘의 달콤한 꽃이 피는 거예요!” “…주인님 갑자기 흥분하신 것 같아요.” “예?! 아니요! 저, 저는… 그게….”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요컨대 마음은 있지만 부끄럽다는 말이군. 자발적 동기부여를 위해 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럼 제가 가서 붙잡아 올까요? 가장 무도회 때까지 기다리면 늦어요. 다른 아가씨들이 채어 간다구요.” “윽! 아, 아니요! 제, 제가, 제가 할게요!” 라뮤즈는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씩씩하게 그에게 걸어갔다. 이런이런, 저래서야 싸움 걸러 가는 모습이잖아? 파이팅을 외쳐주며 따뜻한 눈길로 바라 봐줬건만 그녀는 반도 못 가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뭐,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한숨을 내쉰 나는 두근거리는 소녀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숙련된 조교 앞으로.” 첼시아가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와서는 라뮤즈에게 남자 낚는 법을 가르쳤다. “먼저 가소롭다는 듯한 시선으로 목표를 위아래로 쳐다본 다음, 최대한 귀엽고 색욕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이는 거예요. 헤이~ 귀여운데? 언니랑 놀아볼래?” “…무슨 짓이야? 그만 둬, 이쪽은 심각하다구.” “응? 이게 어때서? 내가 자주 쓰던 방법이야. 정말 넘어온다니까 그러네?” 나와 첼시아가 다투고 있으니 스피릿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저, 날씨 이야기를 해보세요.” “날씨?” “그게 가장 심플하고 확실해요. 간단한 이야기로 대화를 열고 그리고 여기에 온 목적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튼 다음 이름과 나이를 묻고 답하세요. 그 다음부터는 저쪽에서도 같은 것을 물어 올테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질 거예요.” “어, 저, 정말 이렇게 하면 돼?” “밑져야 본전이에요. 라뮤즈 아가씨. 힘내세요.” 스피릿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용기백배가된 라뮤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씩씩하게 걸어갔고 나와 첼시아는 잠시 스피릿을 쳐다본 다음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남의 연애는 재미있어.” “동감이야.” “저, 자기 사랑에 신경 쓰는 게 보통 아닌가요?” 나와 첼시아는 스피릿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는 도중, 남자에게 다가간 라뮤즈가 드디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 더듬거리던 그녀는 시간이 지나자 웃기까지 하며 잘도 이야기를 나누더니 급기야 그를 데리고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라뮤즈는 기분 좋게 웃으며 우리들을 소개했다. 간단하게 고개를 까딱여주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수도기사단 소속의 스테인 스턴 더글라스라고 합니다.” 잠시 우리와 함께 몇 마디 나누던 그는 임무 중이라는 말을 남기며 다시 자리를 떠나갔다. 난 라뮤즈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예. 좋은 사람이었어요. 말도 잘하고 마음씨도 곱고요. 나중에 가장 무도회 때 같이 춤춰주겠다고 약속까지 받았다구요!” 적잖이 흥분하며 말하는 그녀에게 첼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라뮤즈 아가씨.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후한 점수를 주면, 상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좀 더 오래 사귀어 그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믿지 마세요. 이야기를 나눌 때도 저 남자는 아가씨 속옷 색깔을 궁금해할지 몰라요.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아시겠죠?” 산통 다 깨는 말에 라뮤즈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첼시아는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꼭 그렇게 말해야해?” “이런 건 미리미리 새겨둬야 가슴 아플 일이 없어.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이지만.” 약간은 무거운 듯한 그녀의 음성에 나는 어깨를 으쓱여주었다. 성년식은 한 시간 정도 후에 끝났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음? 술 드셨어요?” 엘레인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첼시아가 설명했다. “성년식라고 별거 없어. 성에서 나온 높으신 분께 덕담 몇 마디 듣고 포도주 한잔씩 마시는 걸로 끝나지. 당신 해본 적 없어?” “난 스승님이 따라주는 술 한잔 마신 게 다야.” “조촐한 성년식이었네요?” 난 쓰게 웃어주고 말았다. 성년식은 무슨, 어쩌다가 날이 맞아서 술 한잔 같이 하게된 거겠지. 이 영감탱이는 지금쯤 숲 속에서 겨울잠이라도 자고 있으려나? 그러는 중에 갑자기 흥겨운 음악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나오더니 광장으로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가장 무도회가 시작되겠습니다. 무도회에 참가하실 분은 행사요원에게 가면을 받아주십시오.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커다란 상자를 든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가면을 나눠주고 있었다. 일행중의 마부청년이 잽싸게 달려가더니 사람 수만큼 가면을 가지고 왔다. “나도?” “가장 무도회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춤춰주시겠습니까?” 나에게 가면을 내밀던 마부 청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모두가 입을 헤에~ 벌리며 그와 나를 쳐다보았다. 한숨이 나온다. 이봐. 당신 번지수를 잘못 잡았어. 난 남자라구,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지만 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손을 흔들었다. “난 춤출 줄 몰라요. 아가씨 경호도 해야하고.” 그러자 마부청년은 쓰게 웃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엘레인은 그들에게 자유시간을 선물했다. 아가씨 모시느라 생에 한번뿐인 성년식을 우울하게 보내지 말고 이참에 아가씨라도 하나 붙잡으라는 그녀의 배려에 마부청년들은 몸둘 바를 몰라했지만 부리나케 달려 가버렸다. 첼시아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타는 청춘인가?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누가 들으면 오십 줄 먹은 아줌마라고 알겠어. 그만둬.” 첼시아는 킥킥 웃어댔다. 이윽고 음악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더니 가면을 쓴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 안으로 모여들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추는 댄스는 귀족들이 사교모임에서 고상을 떨면서 추는 것이 아니라 흥겨운 리듬을 타고 조금 빠름 템포로 스텝을 밟는 포크댄스에 가깝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첼시아가 헛기침을 하더니 가면을 얼굴에 쓰고 앞으로 나가 엘레인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레이디. 저와 한 곡 추실까요?” ========================================================================== 얼마나 잘추나 봐줍시다. Reload Running Fire: 19 “당신, 처녀인가?” 엘레인은 꺄르륵 웃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들어갔다. 난 팔짱을 하고 씩 웃어주었다. 그때 내 옆으로 뭔가가 달려나갔다. 자세히 보니 실비아가 퍼피의 손을 잡고 달려가고 있었다. 좀 어색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퍼피도 바지를 입혀서 올 것 그랬나? “레이디.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엥? 이건 또 뭐야?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라뮤즈와 이야기를 나눴던 청년이 정말로 찾아와서 라뮤즈에게 댄스를 신청하고 있었다. 라뮤즈는 기절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얼른 가면을 쓰고는 조심스럽게 치마를 살짝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둘도 떠나버렸다. 잠시 말을 잃고 둘의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순간 본연의 임무를 기억해냈다. 실비아, 퍼피가 돌볼 거다. 엘레인은 첼시아가 붙어있으니 걱정 없고, 하지만 라뮤즈는 아무도 없군. 그녀는 내 차지인가? 하지만 다들 춤추고 있는데 뻘쭘하게 서있기는 뭐하니까. 헛기침을 조금 한 나는 들고있던 가면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보니 스피릿이 내심 기대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를 숙인 나는 그녀에게 댄스를 신청했다. “레이디. 한 곡 추실까요?” “영광입니다.” 스피릿은 기다렸다는 듯이 치맛단을 살짝 올리며 무릎을 구부렸다. 그녀의 손을 잡은 나는 라뮤즈가 들어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보는 남정네와 춤바람이 난 그녀를 발견한 나는 스피릿의 손을 잡고 천천히 스텝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텝이 점점 익어가자 옛 기억이 떠오른 나는 스피릿의 허리를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한바퀴 빙글 돌았다. “와~! 주인님 잘 추시네요?” “너야말로.” 싱긋 웃어준 나는 그녀 몰래 라뮤즈를 확인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스피릿?” “예.” “아까 라뮤즈에게 남자에게 말 거는 법 가르치는 거 보니 꽤 상당하던데. 난 몇 번째야?” “아으~! 주인님~! 꼭 이럴 때 그런 거 물으셔야 겠어요?” “악! 하이힐 신고 바, 발 밟지마~! 아퍼어!” 눈물을 찔끔하며 그녀와 두 손을 잡고 스텝을 밟고있는데 스피릿이 날 보며 말했다. “아시잖아요? 제겐 주인님이 처음이란 거, 그리고 라뮤즈 아가씨에게 이야기했던 건 언젠가 만나게될 기막힌 운명적 사랑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몰래 공부해뒀던 거예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의 단꿈에 젖어있었거든요? 뭐, 이제는 쓸모 없게 되버렸지만.” “어, 미안해. 이렇게 만들어버려서.” “아니요? 전 오히려 주인님께 감사하고 있는걸요? 어렸을 적 꿈꿔왔던 위험한 상상을 모두 현실로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스텝에 따라 옆으로 빙글 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와중에 라뮤즈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위, 위험한 상상? 이거, 묘하게 책임감 느끼는데?”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주인님이랑 가슴 뜨거운 연애를 즐기는 노예는 저 밖에 없을 걸요?”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매일 느끼는 거지만 그래도 너무 예뻐, 계절은 겨울이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것 같다. “윽?”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보통 같으면 인상을 구기며 쳐다봐 줬겠지만 지금은 여자의 모습이다. 게다가 스피릿과 댄스를 즐기던 중이었고 난 쓴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죄송합… 엥?” “어라?” 내 눈앞에는 잘 차려입은 아레프와 루시아가 있었다. 스피릿이 반갑게 웃으며 루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루시아!” “우와~! 콜트씨 그렇게 입으니 정말 멋있는데요? 군 제복 아니에요?” 날 보자마자 아레프가 한 말이다. 언제나 자기 감정에 솔직한 친구로군. 난 대답을 해주려다가 춤에 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벤치에 앉아 나에게 자초지정을 들은 아레프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가문 내 젊은이들의 성인식때문이라구요?” “그러는 댁들은 여기 뭐 하러 왔어?” “저야 루시아가 어제 날짜로 20살이 되어서 여기에 왔지요. 이제 그녀도 성인이랍니다.” 스피릿과 이야기를 나누던 루시아가 고개를 돌리더니 씩 웃었다. 맞다. 19살이라고 했었지. 어제가 생일이었나 보군. 나는 아레프를 쳐다보았다. “호오, 매일 로브 차림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 꽤 색다른데?” 아레프는 하얀 롱코트를 입은 모습으로 씩 웃었다. “루시아가 골라줬어요. 괜찮은가 봐요?” 난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챙겨주는 노예하나 얻더니 사람이 바뀌어버렸군. 아니, 이제는 보통 아가씨가 됐지? 그 순간 나는 깜빡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윽! 잊고 있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라뮤즈를 찾으려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보이질 않았다. 옆에서 아레프가 일어나며 물었다. “누굴 찾아요?” “어, 내가 호위하고 있던 아가씨를 잊어버렸어. 으윽~!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내가 스피릿을 맡겨놓고 그녀를 찾으려 하는데 아레프가 말렸다. “잠깐만요. 그 아가씨 얼굴 기억하고 계시죠?”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는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로케이트 오브젝트.” 눈을 감고 가만히 있던 아레프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음, 찾았어요. 중앙분수대 방향이에요. 어떤 남자랑 이야기 하고 있군요.” “좋았어! 고마워 아레프! 스피릿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스피릿은 치마를 손으로 들어올리고 종종 걸음으로 날 따라왔다. 그러다가 잊고 있던 것이 있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루시아! 생일 축하해!”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아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중앙분수대로 가서 데이트 신청 받았다며 좋아하는 라뮤즈를 발견한 나는 그녀를 호위하여 약속장소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이미 모두가 모여있었다. 춤도 지루할 만큼 추었고 슬슬 돌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아가씨들은 오랜만에 시내에 나왔다며 축제분위기인 상가를 좀더 돌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나와 첼시아는 해가 질 때까지 그녀들을 따라다녀야 했다. “으아~! 죽겠다!” “많이 피곤하세요?” “응.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야.” 아슬아슬하게 귀가시간을 엄수한 우리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좀 씻은 다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굉장히 흥분한 라뮤즈가 광장에서 낚은(?) 멋진 남자와 함께 했던 이야기를 공작부인과 자매들을 모아놓고 재방송하는 동안 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야간 불침번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거 왜 이래? 불침번을 서는 건 우리라구?” “새벽에는 교대하잖아? 아~ 정말, 이거 너무 싫어. 그냥 오크나 좀비 때려잡는 게 더 편할 것 같아.” “추운 겨울에 그런 일거리가 있을 것 같아? 이런 거 하나 건진 것 만해도 감지덕지지. 딴 짓 하지말고 일찍 쉬어둬.” “딴 짓? 어떤 종류를 말하는 거야?” 내가 인상을 구기며 묻자 첼시아는 고양이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알면서~?” “알긴 뭘 알아?! 당장 나가지 못해!” 난 배게를 집어 던졌다. 첼시아는 깔깔 웃으며 잽싸게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피릿이 배게를 주워오며 말했다. “그러게 평소에 잘하시면 놀림 같은 거 받지 않잖아요.” “…모두가 나를 성도착자로 몰아가도 넌 내 편을 들어줘야 되는 거 아냐?” “어머, 제가 왜요? 전 밝힘쟁이 주인님 때문에 여러모로 고통받고 있는 불쌍한… 꺄하하하~!” “에잇~! 뭐가 어째?!” 침대에 올라앉은 그녀를 붙잡아 간지럼을 좀 태워준 나는 지친 몸을 움직여 침대에 누워 버렸다. 스피릿도 오늘 꽤 지쳤는지 별말 없이 내 곁에 달라붙어 조용히 잠을 청했다. 눈을 살짝 뜨고 스피릿의 머리카락을 좀 만져보던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몸이 좀 힘들긴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자 몸이 아니고 남자였다면 좀더 가슴 뿌듯했을 텐데. 난 그렇게 생각하며 잠든 스피릿의 고운 이마를 좀 쓸어주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땡땡땡땡~!” 종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서둘러 옷을 껴입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귀를 울리는 종소리에 깜짝 놀란 스피릿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스피릿! 장비 챙겨서 가지고 와!” 달려가며 바지 벨트를 채우며 한 말이었고 스피릿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에도 종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고 난 심장이 조여오는 기분을 느꼈다. 도둑이 아닐까? 아니면 정말로 뱀파이어가?! 중앙복도를 달려 불이 환하게 켜진 2층 복도로 올라간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첼시아!” “왜,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아윽, 아파라.” 첼시아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가 가르킨 곳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등골에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불이 환하게 켜진 복도 중간에는 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사내가 음산한 얼굴을 하고 서있었는데 치켜올린 그의 손에는 익숙한 몸매의 아가씨가 들려있었다. “퍼, 퍼피를?!” “생각보다 엄청나.” “칫! 예고도 없이 오다니! 너무 한거 아냐?! 이건 핸디캡 매치라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무기가 될 만 것을 찾았다. 때 마침 바지주머니에 건틀릿이 들어가 있었고 난 그것을 손에 낀 다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첼시아의 레이피어를 주워들었다. “이봐, 잘생긴 오빠. 축 늘어진 것보다는 팔팔 쪽이 났지 않아?” 그러자 뱀파이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생긴 것 답지 않게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잘 때리는 취미는 없는데.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물려주면 안될까?” “웃기지 마. 나더러 뱀파이어가 되란 말이야?” 그러자 뱀파이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당신, 처녀인가?” ========================================================================== 예. 총각이올습니다. Reload Running Fire: 20 “에, 엘릭서요?!”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뭐라고 해야하나? 이 모습으로 남자와는 잔 적은 없으니 처녀라고 해야하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 처녀다! 어쩔래! 처녀의 피맛 본적 있어?! 덤벼!” 가만히 날 쳐다보던 밤파이어는 들고있던 퍼피를 집어던졌다. 쿵~! 날아간 퍼피는 벽에 부딕혀 한참 구르다가 쓰러졌고 첼시아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것을 쳐다본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퍽! “헉?!” 내 앞에 서있던 뱀파이어가 주먹으로 배를 올려쳤고 난 순식간에 다리가 풀리는 기분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크윽~! 이, 이거 너무 하잖아?! 보통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냐! “여자주제에 너무 팔딸거리지마. 사내놈들에게 일찍 먹힌다구.” “다, 닥쳐…!” 가까스로 검을 휘둘렀지만 녀석은 다시 뒤로 피한 뒤였다. 눈을 꿈벅거린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순간이동인가? 쳇, 골치아프게 됐군. 경비대가 종소리를 듣고 올 때까지는 5분 걸린다. 하지만 자다가 일어날테니 넉넉잡고 10분! 어떻게든 10분을 벌어야해! 주머니에서 스크롤 꺼낸 나는 그것을 찢으며 외쳤다. “어디 이것도 피해봐라! 매직 미사일!” 좁지만 않지만 그래도 제한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복도를 수백 발의 매직미사일이 가득 매웠다. 덕분에 복도 끝에 있는 창문은 박살이 나버렸다. 손바닥을 내린 나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외쳤다. “맛이 어떠냐? 헤헤헤.” “글세. 겨우 스크롤에 담은 매직미사일 갖고 뱀파이어 정도나 되는 상급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등뒤?! 퍽! 또다시 한 대 맞은 나는 복도를 나뒹굴었다. “크으…!” “혹시 착각하는 것 같아 이야기하는데. 나를 보통 인간으로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쾅! 녀석의 주먹질에 벽이 뚫려버렸다. 주먹을 뽑아낸 뱀파이어는 뚫린 구멍으로 눈을 들이댔다. 엘레인이 있는 방이다! “오호라~ 이런 곳에 계셨군? 귀찮은 아저씨들이 오기 전에 식사나 끝내고 빨리 돌아…?” 촤라락! 채찍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뱀파이어의 등으로 달려든 퍼피가 단검을 박아 넣었다. 첼시아가 외쳤다. “헤, 헤헤헤! 아직 끝난 거 아냐! 콜트!” “이야아아아!” 약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뱀파이어를 바라보며 자리에 몸을 일으킨 나는 검을 휘둘려 녀석의 목을 베어버렸다. 언 데드는 머리가 떨어지면 죽어! “터텅~!”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검으로 힘겹게 몸을 지탱했다. 그때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렸다. 짝짝짝. “이야. 대단해. 반격을 받아본 것 처음인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뱀파이어 놈이 서있었다. “그, 그럼 이건 뭐야?!” “밀러 이미지야. 그리고… 영차~!” 놈은 말하다 말고 등에서 퍼피의 단검 두 개를 뽑아냈다. 그런데 사람의 팔이 저렇게도 움직이나? 관절이 없는 거 아냐? 팔을 뒤로 돌려 단검을 뽑아낸 뱀파이어가 말했다. “이거, 거기 귀여운 레이디 건가?” 갑자기 목소리가 깔린다. “이런 빌어먹을! 퍼피! 도망가!” 난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를 뒤적여 헤이스트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눈앞에 빛이 번쩍이며 시간이 흐려졌다. 서둘러 달려간 나는 어느새 퍼피의 목을 잡아 올리고 그의 배에 단검을 박아 넣으려는 뱀파이어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우당탕! 퍼피와 내가 바닥에 쓰러졌지만 뱀파이어는 없었다. 그는 어깨가 결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주물러댔다. “적당히 하고 포기해. 당신들이 날 이길 가능성은 없어.” “웃기지 마! 그렇게 쉽게 죽어줄 것 같아?!” 헤이스트로 가속된 상태로 달려간 나는 녀석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지만 놈의 반응 속도는 엄청났다. 그걸 피해?! 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그를 맞추려고 했지만 녀석은 잘도 피해 다니더니 갑자기 나에게 돌진해왔다. 퍽? 뒤로 날아간 내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내 등에 뱀파이어 놈의 다리가 올려진 뒤였다. “아윽!” “잠시 기다리고 있어. 처녀인지 아닌지 확인해 줄 테니까.” 놈은 이제 첼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니 뱀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야? 비켜.” 피를 철철 흘리며 첼시아를 감싸고 있던 퍼피를 붙잡아 밀어낸 뱀파이어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목에 첼시아의 단검이 박혔다. “커…! 커억?!” “됐어! 지금이야! 퍼피!” 쓰러진 퍼피가 고개를 들더니 주머니에서 꺼낸 스크롤을 찢었다. “파, 파이어… 볼!” 화르르륵! 찢어진 스크롤이 불타오르며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퍼피는 그것을 목에 박힌 단검을 붙잡고 비틀거리는 뱀파이어에게 던졌다. 쿠콰아앙~! 폭발이 일어나며 복도로 불길이 쏟아졌다. 얼른 엎드린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상황을 살폈다. 첼시아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꺄하하하하~! 잡았어! 우리가 뱀파이어를 잡았다구! 하하하하~!” 나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쯤 중앙복도로 병사들이 달려 올라와 우리를 부축했다. 서둘러 달려온 경비대장 멜이 달려왔다. “괜찮소?!” “보시다시피. 엉망이에요.” 난 킥킥 웃으며 홀라당 타버린 복도를 가르켰다. 경비대장은 고개를 저으며 우리를 옮기도록 하고 겁에 질려있는 아가씨들을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때였다. “누구냐! 으악!?” 우당탕~! 사병하나가 장난감처럼 던져져 천장에 부딧히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깨진 머리에서 뇌수와 피가 부글부글 흘러나왔다. 아가씨들은 비명을 질렀고 모두는 복도 끝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고통스러워하며 죽어라! 클라우드 킬!” 몇 군데 그을린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뱀파이어는 손바닥을 내리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초록빛 구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비대장이 외쳤다. “독구름이다! 모두 위로 피해!” 모두가 뒤로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주머니를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하는 거야! 죽고 싶어!” 옆에서 부축하던 경비사병이 내 팔을 잡아 끌며 외쳤다. “에이! 시끄러워! 살려고 발버둥치는 거 안보여?!”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찍어 기절시켜버린 나는 다시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저번에 쓰다가 남겨둔 거스트 오브 윈드 스크롤을 찾았다. 여기어디 있었는데…! 독구름을 빠르게 밀려왔고 결국 나는 몸을 돌리고 달려가며 스크롤을 뒤졌다. 그러다가 겨우 스크롤을 찾아냈다. 자리에 멈춰선 나는 그것을 찢으며 외쳤다. “거스트 오브 윈드!” 푸화악! 화아아아아! 엄청난 바람이 내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왔다. 반동으로 손이 들리는 것을 반대 손으로 꽉 붙잡으며 독구름을 모두 쓸어낸 나는 숨을 씩씩 들이쉬며 외쳤다. “하, 하하하! 겨우 이것 뿐…?! 아아아악!” 갑자기 나타난 뱀파이어에게 칼질을 당한 나는 솟구쳐오르는 피를 바라보며 뒤로 쓰러졌다. 천장과 바닥이 거꾸로 보이는 기분이다. 뱀파이어는 그것도 모자라 날 걷어차 버렸고 볼품 없이 바닥을 굴러간 나는 중앙계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커, 커억… 끄르륵….” 가슴을 제대로 맞았다. 이러다간 죽을 거야.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주마등이 보인다. 오~! 이런 염병! 난 아직 이런 거 보고 싶지 않아! “아하! 하아아! 캬아아악!” 혀가 꼬이고 있어 발음이 안된다. 어쨌든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더니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이대론 얼마 못 버틴다. 어쩌지? “꺄아아악! 주인님?!” 신이 나를 도우시는 건지 때마침 복도를 걸어나오던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단숨에 계단을 달려 올라왔다. 이제야 나오는 거야? 주인님은 죽어가고 있는데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혀가 굳어지고 있어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곁에 주저앉은 스피잇은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갈라져 피를 쏟아내는 나를 보며 징그럽다는 표정과 겁에 질린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사람 가슴이 갈라지는걸 자주 볼 수는 없으니까. “으아앙~! 주인님, 이, 이거 어떡해요?! 예?” 스피릿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손을 덜덜 떨어댔다. 난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그녀가 들고 온 가방을 가르켰다. “에…, 에릭… 커억~! 끄르륵! 에릭서….” “에, 엘릭서요?!” 용케 내 말을 알아들은 스피릿은 가방 안을 거꾸로 흔들어 내용물을 쏟아내고는 병을 찾았다. 혹시 몰라서 병에 이름을 써놓았기 때문에 그녀는 쉽게 엘릭서를 찾았다. “그… 이, 입….”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릭서의 병뚜껑을 따고 내 입에서 흘려 넣었다. 하지만 숨쉬기도 힘든 마당에 그것을 삼키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난 기침을 하며 그것을 토해내기 일수였다. 그러자 스피릿은 그것을 내 입에 흘려 넣는 대신 자기 입에 털어 붇고는 내 코를 붙잡고 고개를 숙여 나와 입을 맞추었다. “우읍…! 끄르르륵…!” ========================================================================== 속이 메스꺼우시다면 죄송합니다. Reload Running Fire: 21 “호오! 행운의 여신은 나 같은 것에게도 미소를 지어주는 건가?” 입안에는 엘릭서가 가득하고 숨은 쉬어지지 않자 나는 질식사를 눈앞에 두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스피릿은 끝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꿀꺽….” 치이이이…! 엘릭서를 삼키는데 성공하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가슴의 상처에서 연기가 솟아나며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입술을 떼어내고 고개를 든 스피릿이 걱정스러운 듯이 날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모두 아물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포션을 한 병 더 마시고 장비를 챙겼다. “주, 주인님?! 어쩌시려는 거예요?!” “콜록콜록~! 하악~! 헉! 벼, 별수 없잖아? 이, 이대로 라면 저 위에 있는 사람 다 죽어. 콜록콜록~!” “하지만 주인님이 죽어요!” 난 쓰게 웃으며 내 다리를 잡고 매달리는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면 살수 있을, 있을 지도… 크으윽! 모, 몰라.” “주인님! 제발! 전 주인님이 필요해요! 가지 마세요! 예?! 가시면 안돼요!” “위의 사람들도 도움이 필요할거야. 걱정 마. 너도 버리진 않을 테니까. 어딘가에 숨어있어.” 난 기어코 스피릿을 떼어내고 계단을 올라갔다. 등뒤에서 그녀의 울음 섞인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주인님! 바보! 미워요!” “헤헤헤, 사랑해, 스피릿.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주인님이 죽어도 행복해야해. 알겠지?” 훌쩍이며 고개를 팩 돌린 스피릿은 대답이 없었다. 씩 웃어준 나는 몸을 돌리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사병의 시체가 즐비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3층으로 올라간 건가? 계단을 뛰어올라가던 나는 때 마침 층계참에 쓰러져 있는 퍼피를 발견하고 녀석의 입에 포션을 흘려 넣어주었다. 겨우 그녀가 눈을 떴다. “코, 콜트…?” “정신이 드냐? 몸이 나아지면 올라와. 돈벌어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퍼피가 내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주, 주인님을, 주인님을 부탁….” “자기 주인님은 자기가 지켜.” 그렇게 말해준 나는 스크롤 뭉치를 그의 앞에 던져주었다. “혹시 골든 피크(Golden Peak) 라고 알아?” 순간 퍼피의 눈이 매섭게 살아났다. 설명해줄 필요 없겠군. 앞서서 계단으로 올라가니 일대다수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뱀파이어 혼자서 사방에서 덤벼드는 사병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은 가히 초인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방에서 저번에 쓰다가 남는 성수병을 꺼낸 나는 그것을 뱀파이어에게 뿌려버렸다. 치이이이이이! “크아악?!” 성수를 맞은 부분에서 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그러자 사병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덤벼들어 칼질을 해댔다. 하지만 그의 몸은 안개가 되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죽지 않았었나?” “나는 불사신이거든.” 철컥! 퉁퉁퉁퉁퉁퉁퉁퉁! 자동석궁을 뽑아든 나는 뱀파이어의 심장을 겨누고 화살을 쏴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뒤로 조금씩 물러나던 뱀파이어는 다시 몸을 안개화 시켰다. 때를 도린 나는 석궁을 던져버리고 준비해둔 스크롤 뭉치를 단숨에 찢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심장이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경비대장 멜이 외쳤다. “고, 골든 피크(Golden Peak)?! 모두 물러서라! 공간을 벌려!” 사병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몸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검은 손수건을 꺼내 머리를 질끈 묶으며 외쳤다. “뜨거운 피를 빨고 싶다고 했지? 덤벼!” 갑자기 목소리가 굵어졌다. 어라? 하지만 코앞에서 뱀파이어가 달려드는 마당에 내 몸을 살필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으랴차!” 쾅! “크억!” 몸을 옆으로 틀고 허리를 비틀어 팔꿈치로 놈의 뒷통수를 갈겨준 나는 허리에 샤프 롱소드를 뽑았다. 탁한 검정 색 검신(檢身)이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절단을 내주마!” 역시! 잘은 모르겠지만 남자로 돌아온 것 같다! 골든피크 때문에 폴리모프가 깨진 건가? 그럼 이쪽에서는 환영이지! “넌 이제 죽었어!” “벌레 주제에 까불지 마라!” 뱀파이어 놈이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것을 건틀릿으로 붙잡은 나는 뒤로 당기고 있던 샤프 롱소드를 앞으로 찔러 넣었다. 푸욱! “으음~ 이 감촉, 죽이는데? 킬킬킬~!” “커… 너, 너 이 자식?” 펑~! 뱀파이어의 몸이 다시 안개로 변했다. 난 낄낄 웃으며 놈이 다시 실체화되기를 기다렸다. 녀석은 갑자기 내가 나타나자 놀랐는지 서둘러 몸을 피했다. 하지만 다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쾅! 여기저기 부상을 입고 있던 첼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퍼피?!” 온몸이 나와 같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퍼피가 으르렁거리며 너클을 낀 주먹을 들었다. "인간 손에 죽어봐라 이 기생충 같은 새끼야!“ 퍼피의 저런 모습 처음 보는 거 같다. 주인이 다쳐서 흥분했나? 난 두 손으로 롱소드를 들어올리며 외쳤다. “주마등이라는 거 본 적 있나!? 없다면 내가 보여주지!” 내가 말을 마치자 퍼피가 먼저 덤벼들었다. 나도 뒤를 놓치지 않고 달려갔다. “이야아압!” “으라차!” 골든 피크는 상성이 맞는 보조마법 100장을 동시에 시전 했을 때 일어나는 일종의 과다 현상으로 모든 보조마법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육체에 작용하게 된다. 동체시각, 반응속도, 근육수축력, 반사신경을 비롯한 청각, 후각, 시각등, 전투에 관련된 모든 능력이 일시적으로 최고 치까지 올라감과 동시에 스크롤 100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막강한 스펠파워 때문에 과도한 마나의 흡수와 재배치가 일어나 몸은 황금빛으로 물들게 되며 주변 일대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거다. “파이어 볼…!!?” “하하하하하~! 마법을 사용하려고?! 멍청하군! 오래 살면 뭐해! 대갈통에 똥만 차서 아는 게 없는데! 골든피크가 두 번이나 시전 됐어! 파이어 볼을 생성할 마나가 있을 것 같아?!” 달려간 나는 놈의 어깨로 롱소드를 휘둘렀다. 앞에도 말했지만 이 롱소드에는 샤프 처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돌고렘도 반으로 절단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형 괴물의 팔 한 두개 정도 잘라내는 것은 우습다. 서걱?! “크악!” 급하게 회피하던 뱀파이어는 오른팔이 절단 나는 피해를 입고 달려온 퍼피의 발길질에 중앙복도의 계단으로 날아가 버렸다. 퍼피가 서둘러 쫓아갔고 난 경비대장에게 외쳤다. “경비대장! 최대한 붙잡고 있을 테니 가까운 신전에 가서 터닝이 가능한 프리스트를 모셔와요! 첼시아! 당신은 이 집안에 있는 성물을 모조리 가져다가 창문과 문을 막아! 도망 못가게 해야해!” 말을 마친 나는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골든 피크의 지속시간은 1시간, 그 안에 끝장을 봐야 한다! 내려가는 도중 2층 층계참에서 맞붙어 싸우고 있는 두 마리의 맹수를 발견했다. 뱀파이어 쪽은 상당한 격투기를 익혀놨었는지 퍼피와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골든 피크를 이용해도 겨우 뱀파이어와 대등할 정도뿐인가? 그렇다면 머릿수로 밀어부쳐야지! “잘생긴 청년! 날 좀 보세!” 계단 위에서 뛰어내린 나는 고개를 돌린 뱀파이어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숙여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벽에 박힌 롱소드를 뽑으려고 하는데 뱀파이어가 나에게 발차기를 시도했다. “크윽!” 뒤로 밀려난 나는 벽에 등을 부딪혔다. 쿠웅~! “이 정도로 끝날 것 같아!?” 건틀린을 낀 주먹을 단단히 움켜쥔 나는 퍼피와 함께 놈에게 달려들었다. 2대 1로 치고 받으니 확실히 우리 쪽에 승산이 있었다. 스피릿이 인질로 잡히기 전까지는, 나와 퍼피의 공격에 밀려 계단에서 떨어진 녀석은 1층 층계참에 주저앉아있는 스피릿을 발견하고 그녀를 붙잡았다. “꺄아악!” 저 바보가?! 난 주춤거리며 외쳤다. “놔줘! 밤의 귀족이라면서 자존심도 없냐?!” “둘이서 덤비는 네놈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나?” 갑자기 짜증이 난 나는 스피릿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이 멍청한 계집애야! 왜 거기 주저앉아 있어!?” “흐, 흐윽~! 살려주세요~! 주인님! 아아앙~!” 스피릿을 붙잡고 뒤로 물러서던 뱀파이어는 스타일 구겼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잘라낸 팔은 어느새 회복되어 있었다. …제기, 밀리고 있으면서 너무 럭셔리하게 구는 거 아냐? “이봐, 그 계집앤 처녀도 아냐. 입맛만 버린다구. 그냥 풀어 주는 게 어때?” 인질을 잡고 대치 중이던 뱀파이어는 고개를 내려 스피릿을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별로? 이 정도라면 처녀든 아니든 상관없겠는걸?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레이디가 죽음 직전에 흘리는 신음소리는 정말……!?” 말을 하던 뱀파이어가 갑자기 이마를 찡그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보던 놈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호오! 행운의 여신은 나 같은 것에게도 미소를 지어주는 건가? 이거 기막힌 우연… 으윽?!” ========================================================================== 그 미소 저도 한번 봤음 싶군요. Reload Running Fire: 22 “이놈들…! 산 채로 씹어 죽이겠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얌전히 붙잡혀 있던 스피릿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턱을 잡고 있는 흡혈귀의 손을 깨물었다. 뱀파이어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던져버리는 대신 얼굴만 조금 구겼다. 하지만 그 정도의 주의를 끌어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이 자식! 감히 내 노예의 목을 깨물려고 했지! 이빨을 뽑아주마!” “스피릿! 고개 숙여요!” 퍼피와 호흡을 맞춰 뱀파이어의 잘생긴 얼굴에 더블 이단 옆차기를 날려버린 우리는 그대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 현관 벽에 부딪혔다. 재빠르게 일어나 복도 벽에서 장식용으로 걸어둔 단검을 가져온 나는 정신을 잃고 헤롱거리던 녀석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캬아아아아아아~!” 갑자기 놈이 발광을 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퍼피가 외쳤다. “뱀파이어의 심장을 부수려면 나무 말뚝으로 해야합니다!” “빌어먹을! 여기서 나무 말뚝을 어디서 찾아?!” 후다닥 달려간 나는 현관문을 부수고 나가려는 뱀파이어의 멱살을 붙잡아 난타전을 시작했다. 쾅쾅쾅쾅쾅~! 으득! 콰직?! 피와 살점이 튀기며 놈의 얼굴이 박살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서 콰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짝을 박살낸 퍼피가 끝이 뾰족한 나무 조각을 들고 달려왔다. 난 멱살을 붙잡고 있던 놈을 벽으로 밀어붙였고 퍼피가 녀석의 가슴으로 나무말뚝을 박아 넣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으악!” “크윽!” 우당탕! 콰지직!? 괴성을 지르는 뱀파이어가 휘두르는 팔에 맞은 나는 뒤로 날아가 어떤 방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잔뜩 겁에 질린 메이드들이 잠옷을 입고 모여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꺄아아악!” “조용히 해!” 그렇게 외쳐주고 있는데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문 앞으로 그려졌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눈이 시뻘겋게 불타는 뱀파이어가 서서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잔뜩 쉰 음성으로 말했다. “…피… 피가… 모자라… 나에게 피를…!” 가슴에 단검과 나무 말뚝을 박고 비틀거리며 피를 요구하던 뱀파이어는 옆에서 날아온 퍼피의 드롭킥을 맞고 복도를 굴러가 버렸다. “콜트님!” “간다! 조금만 버텨봐! 어이! 아가씨들! 디바인 마크나 성물이 있으면 줘봐!” “예, 예에!?”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함을 지르자 곱슬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메이드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장을 미친 듯이 뒤져 조그만 약병을 꺼내 주었다. “서, 성수도 괜찮아요?” 이런 기특할 데가! 메이드의 머리를 붙잡고 이마에 키스 해준 나는 그녀가 가져다 준 성수병을 들고 복도로 달려나갔다. 1층 복도 끝에서 퍼피가 녀석을 괴롭히고 있었다. “퍼피! 그 자식 붙잡아!” 퍼피가 비틀거리는 녀석의 등뒤로 돌아가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붙잡았다. 놈의 앞으로 달려간 나는 손아귀에 쥐고 있던 성수병을 놈의 입안에 밀어 넣고 주먹으로 턱을 갈겨버렸다. 쾅! “캬아아아~!” 취이이이이이익~! 입안의 성수병이 깨지며 하얀 연기가 뱀파이어의 얼굴에서 쏟아져 나왔다. 퍼피가 얼른 내 옆으로 와서 섰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허억! 헉! 쓰러뜨린 겁니까?” “아니, 뱀파이어는 영생의 권능을 가지고 있어. 이제부터 제 3라운드야.”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커어……!” 퍼피가 잔뜩 긴장하여 전투 자세를 잡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놈은 바로 덤벼들지 않고 가슴에 박혀있는 나무 말뚝과 단검를 뽑아내더니 몸을 안개화 시켜버렸다. “이 자식! 이대로 도망갈 셈이야!” 검은 안개는 창문 틈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 같았다. 멍청히 그것을 보고 있는데 퍼피가 외쳤다. “마스터!” 창 밖에서 첼시아가 씩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자세히 보니 창문 바깥에 디바인 마크가 걸려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희열에 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히히하하하~! 자~! 어디로 가시렵니까?! 기생충 양반!” 검은 안개는 내 웃음소리에 반응하여 위로 떠오르더니 천장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와 퍼피는 그것을 따라가며 낄낄거렸다. “퍼피! 부엌에 가서 은제 나이프랑 포크를 가지고 와!” 퍼피가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나는 열심히 놈을 쫓아갔다. 중앙계단을 타고 올라간 안개는 2층으로 올라가더니 어느새 불이 꺼진 복도로 몸을 숨겼다. 아찔한 생각이 든 벽에 장식용으로 걸어놓은 검을 빼서 집어던졌다. 그러자 동작을 감지한 천장의 라이트 볼이 자동으로 불을 켰다. 팡팡팡~! 하나 남은 검을 빼서 들고 다시 고개를 돌린 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다. “으드득… 으득… 쩝쩝….” “…이봐, 당신은 산사람의, 그것도 예쁘고 젊은 여자의 피만 빠는 거 아냐?” 바닥에 주저앉아 죽은 병사의 가슴을 찢어 심장을 꺼내 씹고 있던 뱀파이어가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반쯤 씹어먹은 심장을 옆으로 던지더니 손가락을 빨며 중얼댔다. “이렇게까지 몰린 이상 나도 가만있지 않는다. 한소리 듣겠지만 이 집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여놓겠어.” “자기가 벌인 추태를 감추기 위해서 그걸 본 사람을 없애 버리겠다니,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럴 필요 없이 당신 식생활만 좀 개선하면 될 것 같은데.” “닥쳐!” 녀석이 다시 달려왔다. 마법을 쓰지 못하니 접근 전으로 날 죽이려는 심산인가본데. 어림없지. 이쪽은 골든 피크가 걸려있다구! “으랴차! 그 고생을 했으면 좀 배우는 게 있어야지 않겠어?!” 검을 든 나는 뱀파이어의 발차기를 피하며 검으로 그 다리를 쳐버렸다. 피가 솟구치고 뱀파이어가 비명을 쏟아냈다. “으하하하! 더 크게! 더 크게 질러! 그래 가지고서야 죽은 사람들의 원한이 풀려질 거라고 생각해? 어림도 없어!” 뱀파이어의 다리는 아쉽게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녀석은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쓰러졌고 난 검으로 놈의 배때지를 쑤시려했다. 콰득! “피하면 단 줄 알아?!” 몸을 굴려서 검을 피한 놈에게 부츠에 무거운 철판을 댄 까닭을 가르쳐주었다. 퍽퍽! 허리를 걷어차 주자 녀석은 신음을 흘려댔다. 그러다가 세 번째 발길질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벽을 걷어찬 나는 발가락의 아픔을 참으며 외쳤다. “도망가지 말고 이리 나오지? 날 쓰러뜨려야 일이 편하다구?” 하지만 놈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를 드러낸 나는 일단 3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일단의 병사들이 외쳤다. “누구냐?!” “당신 편이야! 아가씨들은 어딨어?” “성물로 결계를 친 방에 몰아넣고 병사들이 지키고 있소.” 경비대장이 어떤 방을 가르켰다. 방문에 커다란 디바인 마크가 붙어있었다. 모양을 보니 전쟁과 평화의 신, 캘리버의 디바인 마크다.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에 다시 밑으로 향했다. 거의 날아가다시피 계단을 달려간 나는 퍼피와 난전을 벌이고 있는 뱀파이어를 발견했다. 바닥에는 잠옷을 입은 여자가 쓰러져 발발 떨고 있었다. “콜트님!” “간다!” 달려간 나는 무릎으로 녀석의 명치를 찍어버렸다. 내가 놈을 붙잡고 있는 동안 퍼피는 바닥에 널려있는 은제 식기를 주워다가 뱀파이어의 가슴에 박아넣었다. “캬아아아아!~!” “닥쳐! 편식쟁이야!” 엄청난 힘으로 반항하는 녀석의 턱을 팔꿈치로 있는 힘껏 때려주자 놈의 고개가 옆으로 꺽여 버렸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가공할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아! “거기 있는 거 주워서 놈에게 박아! 어서!” “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도중 다시 은제포크와 나이프를 한 움큼 쥐고 온 퍼피가 놈의 가슴에 부딪혔다. 뱀파이어는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 “영생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를 마셨냐! 개새끼! 다 토해내!” 녀석의 목을 붙잡고 근육을 있는 대로 부풀려 벽으로 밀어 부친 나는 놈의 팔을 붙잡아 벽에 올리며 외쳤다. “퍼피!” “갑니다!” 내 의도를 눈치챈 퍼피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은촛대를 주워들고 달려와 놈의 손바닥에 박아 넣었다. 골든 피크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근력은 보통 사람의 수십 배가 넘는다. 그 덕분에 은촛대는 절반이상 뱀파이어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가 벽에 박혔다. 괴성을 지르며 괴력으로 반항하는 괴물의 반대편 팔과 양 허벅지에 같은 방법으로 촛대를 박아 넣은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허억, 헉! 부, 붙잡았습니다.” 퍼피가 긴장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산 채로 벽에 박혀있는 뱀파이어를 쳐다보았다. 은은 성스러운 금속이기 때문에 언데드가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저 놈이 억지로 뽑지 못하고 있는 거고, “캬아악! 샤아앗! 캬아아아! 이놈들…! 산 채로 씹어 죽이겠다!” 괴성을 지르며 몸을 마구 뒤틀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 킥킥킥! 이히히하하하~! 깔깔깔~! 허억허억! 으윽! 프하하하하~!” ========================================================================== 웃어봅시다. Reload Running Fire: 23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꽤 즐거우신 것 같은데요?” 허리를 숙이고 숨이 차도록 웃고 있으니 퍼피가 날 살폈다. 난 배를 잡고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뱀파이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날 노려보았다. 겨우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든 나는 벽에 박혀있는 놈의 얼굴을 보고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 파하하하하하하~!” “캬아악! 이놈! 네 살을 찢게 해다오!” “꺄하하하하하하하~! 헉허억~! 수, 숨이… 푸하하하하하~!” 부축하던 퍼피를 밀어낸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음을 멈추려 애썼다. 하지만 그때마다 뱀파이어가 욕설을 퍼부었고 내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뱀파이어를 붙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첼시아와 일단의 병사들이 우루루 들어왔다. 디바인 마크로 저택의 창문이란 창문은 다 막고 다녔다는 그들은 산채로 붙잡은 뱀파이어를 구경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퍼피가 첼시아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들었는데 퍼피의 나이는 이제 겨우 18살이라고 했다. “말도 안돼! 그 얼굴로!?” “퍼피는 캐어릭(國) 태생이야. 그쪽 아이들은 빨리 커, 10대 후반이 되면 거의 어른이야. 어이구~ 주인님 걱정했어? 그래그래, 난 이렇게 무사하니까. 이제 그만 울어.” 퍼피는 꺽꺽거리며 첼시아를 끌어안고 눈물을 그치려고 애썼다. 못 봐주겠군…! 난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퍼피를 외면해버렸다. 사병들이 뱀파이어를 잡았다는 소식을 알리자 가문내의 모든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그리고는 벽에 박혀있는 놈을 구경했다. 사내들은 분노와 증오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메이드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들은 연신 한숨을 쉬어대며 벽에 못 박힌 가련한 그의 모습을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잘생긴 적군 뱀파이어는 여자들의 눈에 매우 위험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것도 경비대장이 내려옴으로서 원천봉쇄 당했다. “그만! 여자들은 물러서라! 뱀파이어는 이성을 트랜스 상태로 빠뜨린다!” “남자에게도 걸 수 있는데.” 뱀파이어가 히죽 웃으며 말하자 경비대장은 헛기침을 하며 모두를 물러서게 만들었다. 혹시 몰라서 녀석의 앞에 갖은 성물들과 디바인 마크를 가져다 놓고 지키고 있으니 뒤늦게 서야 신전에서 프리스트가 도착했다. 때를 같이하여 우리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골든 피크도 사라졌다. 현장에 도착한 프리스트들은 실물 뱀파이어를 보더니 무턱대고 디바인 마크부터 꺼내들고 경전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심한 표정이 된 뱀파이어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어이, 좀 도와줘.” 콧방귀를 뀌어준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주었다. 안전하게 뱀파이어를 포획하기 위해서 프리스트들은 신전에 지원을 요청했고 새벽 무렵에 몇 대의 마차가 더 도착했다. 확실히 이번에 도착한 프리스트들은 뭔가 좀 달라 보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포획 준비를 하는 동안 뱀파이어와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목마른데 마실 것 좀 가져다 주면 안될까?” “뭘 드시고 싶은데요?” “당신, 맛있어 보여. 프리스티스로 썩기엔 아까운걸? 나와 함께 영생을 즐겨보지 않겠어?” 마법진을 그리다 말고 잠시 그를 쳐다보던 프리스티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보세요. 여기 성수 한병 가져다 주시죠?” 어쨌든 포획준비가 끝났다. 달아날 수 없도록 벽 주변에 결계를 설치하고 그 주변을 디바인 마크를 꺼내든 프리스트들이 감싸고 다시 그 뒤를 사병들이 은화살을 장전한 석궁을 들고 섰다. 중년의 하이 프리스트가 점잖게 바닥에 결계 안에 가져다 놓은 관을 가르켰다. “박혀있는 것을 뽑아 줄테니 얌전히 관으로 들어가라.” 놈은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관을 힐끗 쳐다보다가 말했다. “관이 맘에 안 드는데. 좀 고급스러운 건 없어? 아니면 심심하지 않게 거기 프리스티스를 같이 넣어주던가.” 뱀파이어에게 지목을 받은 프리스티스는 아까 농담을 주고받던 그녀였다. “심심하시면 이걸 함께 넣어 드릴테니 읽어보시겠어요? 재미있답니다.” 그녀가 들어 보인 것은 두꺼운 성서였고 뱀파이어는 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이 프리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하고 있던 사병들이 촛대에 묶어놓은 밧줄을 동시에 잡아당겼다. 퍼퍼퍼퍽! “크으윽!” 촛대들이 뽑혀 나왔고 뱀파이어는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프리스트들은 일제히 긴장하며 터닝을 준비했다. 그 뒤에선 사병들은 석궁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도 여차할 때를 위해 헤이스트 스크롤과 검을 들었다. 상처를 회복시킨 뱀파이어는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까지 럭셔리로군. “제기, 그냥 달아나는 거였는데. 재수도 없지.” “어서 관으로 들어가시오.” 하이 프리스트가 강압적으로 말했다. 뱀파이어는 알았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손을 들어 날 가르켰다. “이봐들. 그래, 거기 너희들 말야. 이름이 뭐야?”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퍼피에게 주목되었다. 난 팔짱을 하며 말했다. “콜트 슈발츠다.” “퍼피.” 고개를 끄덕인 뱀파이어는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을 힐끔 바라본 다음 관으로 들어갔다. 관뚜껑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휘리릭 날아올라 관을 덮었다. 그때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킬이라고 한다. 다음에 또 보자.” 묘하게 여운을 남기는 말에 난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관을 쳐다보았다. 그간 각 귀족 가문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뱀파이어 사건은 사병들이 관에 못질을 해대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관을 마차에 싣는 동안 전쟁과 평화의 신 캘리버의 프리스트들은 우리들에게 뱀파이어를 잡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신전 지하에 봉인 시켜뒀다가 태워버릴 생각입니다.”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쨌든 프리스트들도 모두 돌아가고 다시 상쾌한 아침이 밝았다. “아~ 밤새도록 싸웠더니 배고픈걸? 밥이라도 좀 먹을까나?” “그 전에 미뤄뒀던 이야기를 좀 할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집사를 비롯한 이 집의 구성원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나와 퍼피는 서로를 쳐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첼시아가 나서서 사정을 설명했지만 집사의 결단은 단호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외간 남자들에게 계속 아가씨들의 호위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큰일을 하셨으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가 주십시오. 의뢰비는 떠나실 때 지급하겠습니다.” 첼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마친 집사는 경비대장에게 시체를 치우도록 부탁한 다음 메이드와 하인들로 하여금 부서지고 박살난 저택의 청소와 정리를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는 좀 씻고 상처를 치료한 다음 식당으로 들어가 요리장에게 뱀파이어와 목숨걸고 싸워준대 대한 보답으로 테이블이 부러질 것 같은 음식을 대접받았다. 한참 음식을 입안에 쓸어넣고 있는데 후작부인을 비롯한 이 집 아가씨들과 도련님이 함께 들어섰다. 우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식사 도중에 불쑥 찾아와서, 경비대장에게 들으니 골든 피크인가 하는 것 때문에 오늘 자면 몇 일은 일어나지 못 할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미리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왔어요.” “아닙니다. 후작부인. 저희야 말로 속여서 죄송합니다.” 후작부인은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비아가 쪼르르 달려나오더니 내 다리를 붙잡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이제 콜트 언니 아니야?” “앞으로는 콜트 오빠라고 불러주세요. 실비아 아가씨.” 자리에 무릎을 꿇은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때 약간 볼멘 음성으로 라뮤즈가 입을 열었다. “…여자끼리 키스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거 사과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쓰게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엘레인은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냐고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퍼피에게만은 유독 상냥했다. “퍼피~! 고마워, 우릴 지켜줘서, 나 너 싸우는 거 봤다? 대단하던걸?” “아, 가, 감사합니다.” 퍼피는 예쁜 귀족 아가씨가 방글방글 웃으며 손을 잡아주자 얼굴이 벌게졌다. 그의 옆에선 첼시아가 헛기침을 하자 엘레인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좀 만져보는 것도 안돼요?” 엘레인과 첼시아가 티격대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데 베이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 모습일 때가 더 좋았는데요.” “그렇게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시면 저 화낼 겁니다?” 베이어는 한방 먹었다는 듯이 웃어대고는 내 손을 잡고 흔들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동생들과 저희들을 구해주셔서.” 난 씩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집사가 와서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후작부인이 다시 한번 식사도중에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는 모두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창 밖을 내다보던 첼시아가 말했다. “밖이 꽤 시끄러운걸? 저 사람들이 손님인가?” 아직까지 나가지 않고 있던 집사가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도시를 공포에 떨게 했던 뱀파이어가 저희 오르니트 셰퍼드가에서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아까부터 귀족가문과 경비대에서 방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친분이 두터운 이웃저택에서는 예고도 없이 벌써 찾아오셨구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벌써 소문이 퍼졌어?” “아까 왔었던 프리스트들이 새벽예배를 드리러 온 신도에게 이야기를 해줬겠지. 말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건 눈 깜짝할 사이라고.” 집사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덕분에 청소도 못하고 있습니다. 경비대와 여타 귀족가문에서 싸운 흔적을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죠.”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꽤 즐거우신 것 같은데요?” “아, 아니요. 무슨 말씀을, 그럼 편히 쉬십시오.” 내 말에 집사는 헛기침을 좀 하더니 몸을 돌렸다. “집사 아저씨.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황급히 나가는 집사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리니 첼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자기 가문이 유명해 지는 거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어? 한동안 좀 시끄럽긴 하겠지만 말만 잘하면 오르니트 셰퍼트가의 사병들은 뱀파이어도 우습게 때려잡는 막강한 전사들로 다시 태어나게 될 거라구.” ========================================================================== 얼마나 때리면 뱀파이어를 잡을 수 있을까요? Reload Running Fire: 24 “주, 주인님! 어서 가요!” 고개를 돌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용감하긴 했지만 그래도 보통인간은 뱀파이어를 때려잡을 수 없어. 이쪽은 골든 피크까지 일으켜서 2대 1로 싸워 겨우 붙잡았단 말이야.” “그래서 정보조작이라는 말이 있는 거야. 모르니?” 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뭐 달라지는 게 있어? 의뢰비도 준다고 그랬고, 우리도 목숨 건졌잖아?” “아니,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 이를테면 입막음 대가로 의뢰비+@ 라든가?” 첼시아의 음흉한 미소에 나도 욕망의 눈을 떴다. “…할 수 있어?” “물론, 우리도 유명해지면 좋지만 든든한 귀족 가문 하나 알아두는 쪽이 더 비싸게 먹히지. 나만 믿어. 너희들이 자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협상이 끝나있을 테니까.” 첼시아는 고양이처럼 웃으며 웃어댔고 나도 따라 웃어주었다. 후후후~ 생각보다 많이 벌게 생겼는걸? 음식을 마저 먹고 방으로 돌아가니 스피릿이 침대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뭐야? 어디 갔냐 했더니 여기 있었어?” “예, 전 별로 도움도 안되고, 또 인질로 잡힐까봐 방에 숨어있었어요. 죄송해요….” 난 빙그레 웃어주며 스피릿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냐. 잘했어.” 크게 한숨을 내쉰 스피릿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몸이 돌아오셨네요?” “응, 아까 뱀파이어랑 붙어서 싸울 때 골든 피크를 일으켰거든? 그래서 마법이 풀렸나봐.” “골든 피크?” “순간적으로 힘을 올리는 거야. 대신 부작용이 만만치 않지만.” “어, 어떤 부작용인데요?” 그때 퍼피가 쓰러졌다. “아악?! 퍼피! 거기서 쓰러지면 어떡해!” 첼시아가 끙끙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퍼피를 들어서 침대에 올리려고 했다. 스피릿을 그녀를 도와야 할지 망설이다가 날 쳐다보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놔둬. 주인님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날뛴 녀석이니까. 그 주인님이 저 정도는 해줘야지. 그리고 너도 좀 있다가 할 일이 있어.” “예?” 슬슬 시작될 때가 됐는데…. 숨을 고르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척추에서 시작된 통증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비틀거리던 나는 스피릿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침대로 걸어가다가 반도 못 가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스피릿이 달려와 날 받쳤지만 그녀의 힘으로 내 몸무게를 지탱하기엔 무리이지 싶다. “아으으으~! 주, 주인님!? 꺅?!” 꾸당! 날 지탱하던 스피릿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찍고는 뒤로 쓰러졌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박게 됐고,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스피릿의 품에서는 좋은 향이 나는 것 같아. “이, 이거 그냥 기절하기엔 너무 아까운데… 으… 좀 잘게… 부탁해….” 말을 마친 나는 엘릭서의 후유증과 골든 피크의 부작용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졸도해버렸다.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4일이 지난 뒤였다. “일어나셨어요?” “어, 으응. 하아아암~!” 하품을 하고 잠에서 깨어나니 먼저 심한 공복감이 들었다. 난 스피릿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 내가 몇 일 동안 자고 있었지?” “4일이요.” 자리에서 일어난 스피릿이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나에게 내밀었다. 4일씩이나? 내가 그렇게 오래 잤었던가? 골든 피크라고 해도 많이 자봐야 3일 정도… 어라? 스피릿이 내미는 컵을 받으려던 나는 그녀의 덜덜 떨리는 손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스피릿?” 스피릿은 덜덜 떨리는 손을 보고 있다가 얼른 몸을 돌렸다. 잔을 받아든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떤 놈이 너 괴롭혔어?” “어, 아니에요. 그냥…, 주인님이 깨어나신 게 너무 기뻐서….” 다시 고개를 돌린 스피릿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지은 나는 손에 들고있던 컵을 비우며 말했다. “별게 다 기쁘다. 그럼 내가 죽을 줄 알았어?” “아, 아뇨. 하지만 걱정했어요. 일어나셔서 기뻐요.” 물끄러미 스피릿을 쳐다보던 나는 방을 좀 두리번거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담요를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들어올래?” 스피릿은 얼른 침대위로 기어올라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머리를 좀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걱정 많이 했어?” “으으응~! 예에에~ 깨어나지 않으시는 줄 알았어요.” “주인님 걱정도 해주고, 아유 귀여워라~.” 싱긋 웃어준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직 식지 않은 사랑을 그녀에게 확인시켜주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뭐야? 스피릿 어디 갔…?” 첼시아?! 이런 젠장! 오지마라! 제발~! 눈이 반쯤 풀린 스피릿을 가슴에 끌어안고 숨을 죽이고 있는데 후다닥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담요가 확 들취졌다. “오하하하~! 깨어났구나!” “크악! 그냥 좀 무시해주면 안돼?!” 자리에서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첼시아는 싱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들고있던 담요를 다시 침대에 던져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 몸은 어때?” “칫, 네가 담요 들추기 전까지는 좋았어.” “그렇지. 예쁜 노예랑 재회의 키스도 나누고 말야.” “내가 뭔 짓을 하던 무슨 상관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스피릿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 감쌌다. 첼시아는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깨어났으면 됐어. 좀 더 쉬어둬.” 첼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문으로 나가려 했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퍼피는?” “어제 깨어났어. 지금 밖에서 몸 풀고 있지. 나중에 보게 될거야.” 그녀는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스피릿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못했던 거 다시 할까?” “주인님도 참…. 꺄르르~! 간지러워요.” 스피릿을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나는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좀 더 쉬었다가 가라는 오르니트 셰퍼드 가의 부탁을 거절하고 짐을 꾸린 우리는 다음날 아침, 저택을 나섰다. 아, 그전에 의뢰비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와 퍼피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첼시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집사는 의뢰비와 기타 치료비 명목으로 1억 2000만 루나를 내놓았다. 거의 밀가루 포대 만한 돈 자루를 바라보며 난 입을 딱 벌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우후후~ 글쎄? 정당한 노력의 대가랄까?” 첼시아는 웃기만 했다. 돈은 나중에 여관에 가서 나누기로 하고 우리는 오르니트 셰퍼드 가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라뮤즈가 당당히 나오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색하게 웃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어 주었다. “기사가 아니라서 손등에 키스는 못 해드립니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깝게 됐네요. 어쨌든 고마웠어요. 잘가시구요. 가끔 들려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집사와 경비대장과도 악수를 나눴다. 바로 옆에서는 엘레인이 퍼피의 손을 붙잡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퍼피는 여기서 살지 않을래? 내가 귀여워 해줄게.” “아, 저, 저는….” 퍼피는 다시 얼굴이 벌게졌고 덕분에 첼시아의 기침은 더욱 커졌다. 엘레인은 이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하하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콜트도 그냥 여기서 살지 않을래요?” “……!” 그러자 스피릿이 입을 꾹 다물고 내 팔에 달라붙었다. 그녀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엘레인은 농담이라며 손을 흔들어댔다. 그리고는 스피릿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스피릿은 그녀의 손을 맞잡는 대신 고개를 꾸벅 숙여주었고 엘레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부인의 손을 잡고선 실비아가 손을 흔들어주는 가운데 우리는 각자의 말에 올랐다. 그때 뒤늦게 우리 소식을 전해들은 베이어가 달려왔다. “이, 이런. 하마터면 늦을 뻔했군요.” 잠시 시내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왔다는 그를 위해서 우리는 다시 말에서 내려야했다. 하지만 베이어는 이 집의 장손답게 그저 악수나 하자고 우리를 말에서 내리게 하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선물입니다. 가져가셔서 풀어보십시오.” “감사합니다. 도련님.” “천만에요. 첼시아양.” 베이어는 스피릿과 퍼피에게도 작은 꾸러미를 하나씩 쥐어주었다. 그와의 작별인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말에 올랐다. 그런데 스피릿이 조금 머뭇대고 있었다. “스피릿?” “어, 주, 주인님. 잠시만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쳐다봐 주자 스피릿은 어색하게 고개를 들고는 엘레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슈니케 라마스 니케 하라이트 사테하라 논 베리아트. 쉬 세이리 바리아트. 니케라마 쉐이크 두디스카 이르하디스.” 엘레인과 집사, 라뮤즈, 경비대장, 베이어, 후작부인이 입을 딱 벌렸다. 저 사람들은 캐슬린 말을 알고 있는가보다. 말을 마친 스피릿은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말에 뛰어올랐다. “주, 주인님! 어서 가요!” ========================================================================== 자! 파이팅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Reload Running Fire: 25 “아, 고마워. 제미니.” 뭔지 몰랐지만 스피릿이 불안해하는 눈치라 난 얼른 말의 배를 두드렸다. 그리고 후다닥 저택을 빠져나왔다. 한참을 대로를 달리던 도중에 전투용성 같은 저택을 바라보던 첼시아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녀도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스피릿. 너, 귀족이었다는 게 사실이야?” “예에.” 스피릿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첼시아가 다시 물었다. “아니, 어쩌다가….” “그만. 내 노예에게 이것저것 묻지마.” 고개를 돌린 첼시아가 날 바라보았다. 잠시 나와 시선을 마주하던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만 두지. 하지만 좀 충격인데? 귀족영애였다니. 얌전하고 예절발라서 난 어디 귀족가문에 있었나보다 했지 뭐야?”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게 세상살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남의 아픈 과거를 단순히 흥미위주로 파헤치는 것보다 그 사람의 앞을 봐주자구. 그게 올바른 일이야.” 말문이 막혀버린 첼시아는 알았다는 듯이 손을 흔들고는 고개를 돌렸다. 작게 한숨을 내쉰 스피릿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주인님 밖에 없어요.”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말을 몰아 첼시아가 묶고 있는 여관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곧바로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았다. 내 앞에는 얼굴을 잔뜩 굳힌 첼시아가 마주 앉았다. 이윽고 스피릿이 엄숙한 동작으로 식당에서 차를 가지고 올라왔다. 소반에서 잔을 들어 앞에 놓아주는 그녀의 손길이 무거운 분위기에 억눌려 조금씩 떨렸다. 첼시아가 먼저 차를 마셨다. 난 깍지낀 손을 탁자 위에 올리며 말했다. “퍼피.” 찰칵~! 문 앞에 서있던 퍼피가 문을 잠그고 첼시아의 등뒤로 가서 섰다. 잠시 첼시아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베이어 도련님이 싸준 선물을 풀어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 돈 안줄 거야?” “돈? 무슨 돈?” 조그만 종이 상자안에든 브로치를 꺼내 매달어보던 그녀가 무슨 소리 하냐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순간 머릿속이 헝크러지는 기분이다. 입술을 씰룩이며 그녀를 쳐다본 나는 퍼피를 불렀다. 녀석의 손을 붙잡은 나는 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럼 이 녀석이라도 데리고 가겠어.” “마, 마스터?” 당황한 퍼피가 뒤를 돌아보며 주인을 불렀고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첼시아가 후다닥 퍼피를 끌어안았다. “장난 좀 친 것 갖고 너무 그렇게 몰아 붙이지 마.” “장난? 이쪽은 피곤하단 말이야. 빨리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어. 그러니 돈 내놔.” “알았으니까 일단 애 손이나 좀 놔.” 순순히 퍼피의 손을 놓아준 나는 자리에 앉아서 팔짱을 꼈다. 첼시아는 퍼피에게 가방에 넣어온 돈 자루를 테이블 위에 올리도록 했다. 자루를 풀자 번쩍이는 금화가 촤르륵~ 쏟아져 나왔다. 나와 첼시아는 침을 꼴딱 삼켰다. 일단 우리는 돈을 세어보기로 했다. 퍼피와 스피릿까지 가세하여 100만 루나 짜리 금화를 열 개씩 쌓아올리자 모두 12개의 동전탑이 만들어졌다. 첼시아가 그중 절반인 6000만 루나를 내 쪽으로 밀었다. “수고했어. 받아둬.” “정확한 거겠지?” “같이 세어봤잖아? 정확히 1억 2000만 루나였어. 집에 가져가서 세어보고 모자르면 찾아오라구. 후작가에 따지러 가면 되니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동전을 가죽 주머니에 담아서 스피릿에게 내밀었다. “예? 왜 제게?” “오늘부터 내 회계담당은 너야.” 아직 무슨 소리인지 몰라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던 스피릿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얼른 주머니를 가방에 집어넣고 날 따랐다. 자리에 앉아있던 첼시아가 은근히 말했다. “노예를 너무 믿는 거 아냐? 들고튀면 어쩔거니?” 그녀의 말에 스피릿이 움찔했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쫓아가서 붙잡아야지.” “그리고?” 첼시아가 그게 다냐는 듯이 물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을 바라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임신시켜 버릴 거야. 애를 한 셋쯤 낳으면 엉덩이가 세배로 불어날걸? 그럼 다시는 도망간다고 하지 못 할거야. 죽도록 나만 보고 살겠지.” 내 계획을 듣자 첼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파하하하하하~! 아유 배야~! 깔깔깔~! 머, 멋진. 하하하하~! 정말 멋진 계획이야~! 하하하!” 첼시아를 좀 쳐다보던 나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문을 나섰다. “이만 간다. 잘 있어.” “수고 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십… 마, 마스터?” 퍼피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주인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어댔다. 문을 닫아준 나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스피릿을 발견했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자 스피릿이 음산하게 말했다. “도망가면 어쩌시겠다구요?” 헛기침을 한 나는 대답대신 스피릿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자.”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따르던 그녀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주인님, 오늘밤에 저랑 이야기 좀 해요. 세상에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하고 계신 줄을 꿈에도 몰랐어요.” 노예에게 붙잡혀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에 들려 점심과 저녁에 해먹을 고기와 야채를 좀 사고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오랫동안 잠궈놓았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약간은 쌀쌀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놓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후아. 역시 집이 최고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아아~! 주인님! 그냥 방에 들어가려고 하지 마시고 벽난로하고 화로에 불붙이는 것 좀 거들어 주세요.” “아으으~! 피곤해, 그런 건 네가 하면 안돼?” 그러자 스피릿이 고개를 삐딱하게 만들더니 눈썹을 좁히며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자꾸 그렇게 나오시면 실수를 가장해서 집에 불을 놔버릴 수도 있어요.” “아, 알았어. 내, 내가 해줄게.” 말도 안 되는 협박을 이기지 못한 나는 하는 수없이 그녀를 도와야 했다. 장작을 가져다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거기서 불씨를 가져다 화로에 불을 옮겨주자 머릿수건을 한 스피릿이 냄비를 얹고 프라이팬을 들더니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좀 내쉰 나는 벽난로에서 나오는 온기에 방안이 훈훈해지자 겉옷을 벗고 테이블에 앉아서 스피릿의 뒷모습을 가만 히 쳐다보았다. “한가하시면 이거 좀 저어주세요.” “어, 응.” 커다란 그릇에 밀가루와 물을 부어온 스피릿이 그것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밀가루 반죽을 해야했다. 잠시 후 점심 준비가 끝나자 앞치마를 푼 스피릿이 내 앞에 앉았다. “설거지는 주인님이 하세요.” 스튜의 맛이 기가 막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마를 찡그려야 했다. “야, 너 노예주제에 주인님을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앙? 애교도 정도가 있지 말야.” “…노예가 도망가면 붙잡아다 임신시켜서 엉덩이를 세배로 불려버릴 잔인무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 말이 많으시군요? 밥 먹기 싫으세요?” 윽~! 인상을 구기고 있던 나는 뭔가 내 쪽이 불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억지를 부리며 밀고 나가면 겁쟁이 노예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장차 아내가 될 노예에게 너무 까불지 마시라고요. 아앙?” …뭐, 이렇다. 제기. 난 너무 물렀어. 입을 꾹 다물고 그녀가 만들어준 스튜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버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스피릿이 붙잡았다. “설거지는요?” “오, 옷 갈아입고 할 테니까 나둬.”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장에서 봐온 물건을 정리했다. 방으로 들어가서 가죽바지와 자켓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다시 거실 겸 부엌으로 나와서 식기를 가져다 개수대에 담그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달그락달그락….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렸다지? 접시를 닦으며 내가 줄곧 생각했던 물음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릇을 헹궈서 정리하고 있는데 뭐가가 내 등에 달라붙었다. 뒤를 돌아보니 스피릿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윽! …바, 바지에서 손 안빼?” 손을 집어넣어 내 엉덩이를 만지작대고 있던 스피릿은 우후후 하고 웃더니 말했다. “손 많이 시렵죠? 으응~! 불쌍한 내 주인님.” “알고 있으면 손이나 빨리 빼. 마저 정리해한단 말야. 아악~! 왜 꼬집어?!” “으응~ 그런 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 저랑 같이 놀아요.” “뭐?”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스피릿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이참, 가끔은 순순히 노예를 따라오는 거예요.” 방으로 날 밀어 넣은 그녀는 문을 걸어 잠궜다. 갑자기 인상이 변한 스피릿은 침을 꼴딱 삼키며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주인님만이 제 욕구불만을 풀어주실 수 있어요. 아시죠?” “어, 야. 야~! 정신차려~! 스피릿~!” “처녀의 순정을 억지로 빼앗은 주제에 이제 와서 빼지 마세요.” 가슴 뜨끔한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은 그녀는 날 침대로 몰아붙여 힘껏 밀어서 쓰러트리더니 내 가슴 위에 올라탔다. 난 그녀에게 반항하며 외쳤다. “이, 이건 강간이야! 겁탈이라구! 나, 난 아직 준비가…. 아, 안돼~! 그만둬!”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창가로 저녁노을이 서서히 지고 있을 때였다. 멍청히 창문을 쳐다보던 나는 이상하게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집이라곤 가지지 않았는데. 여관인가? 일단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자는 생각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생각했는데 내 앞에서 나타난 것은 일반 가정집의 조그만 거실 같은 모습이었다. 주위를 좀 두리번거리던 나는 테이블을 발견하고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잠이 덜 깨서 흐리멍텅한 정신을 수습하려 애썼다. 그런데 잠시 후 누군가가 내 앞에 따뜻한 차를 올려주었다. 누구지? 아직 정신과 눈앞이 가물가물하던 차였기에 난 쉽게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버렸다. “아, 고마워. 제미니.” ========================================================================== 충격고백. 제미니양의 이름은 XXXXX의 제미니 양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Reload Running Fire: 26 “정말~! 하루 정도는 그만 두셔도 되잖아요?” 눈앞의 그녀가 움찔하더니 조그만 주먹으로 테이블을 후려쳤다. 쾅! “…제미니가 누구에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으르렁거리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나와 함께 사랑을 속삭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웃고있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 했다. “어, 어어. 스, 스피릿. 그게 말야.” “제미니가 누구예요?” “아니, 그건….” “그 계집애가 누구냐니까!” 그녀가 내 멱살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랑 같이 다니면서 스피릿도 많이 격해졌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린 나는 결국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제미니는 저, 전에 고향에 놔두고 왔다는 애인이야.” “으윽…!” 부들부들 떨며 손을 놓은 스피릿은 두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괘, 괜찮아?”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이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하~! 나, 나도 참 잊고 있었네. 주인님? 방금 전까지 누구랑 방에 있었어요?” “너, 너랑.” “그때 절 꼭 껴안고 뭐라고 하셨죠?” “사, 사랑한다고….” “됐어요. 이 승부는 제가 이긴거라구요. 오하하하~!” 의기양양하게 웃어젖히던 스피릿은 다시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내렸다. “할 짓 못할 짓 다해버린 지금에 와서 옛날 애인을 잊지 못하니 어쩌니 하면 가만 안둘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녀의 기백에 짓눌린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스피릿은 싱긋 웃으며 내 얼굴을 붙잡고 뜨거운 키스를 하더니 다시 착하고 말 잘 듣는 노예로 돌아왔다. “후아…. 으음, 저녁 드시겠어요? 아니면 씻으실래요?” 난 내 무릎 위에 올라앉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푹신하고 좋은 향이 났다. 아아~ 만약에 죽는다면 이렇게 죽고 싶어. “어마? 주인니임. 이러지 마세요.” “으응,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창문을 힐끔 쳐다본 스피릿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작게 속삭였다. “스피릿 사랑해. 지금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지만, 나 지금 너무 행복한 것 같아.” “저 같은 것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눈을 지긋이 감은 스피릿은 작게 미소지으며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그 모습이 꼭 어머니의 그것 같아 난 얼굴이 좀 달아올라버렸다. 그로부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나간 일주일의 시간은 내 생애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고 자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릿이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전직 귀족처녀였던 그녀와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웃지 못할 일이 꽤 있었지만 반강제적으로 함께 붙어 다니다보니 점차 연정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느새 거기에 애정이 물들면서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가 됐다. “주인님! 주인님! 일어나세요! 벌써 아침이라구요!” “아으으… 졸려죽겠다….” “아무리 요양중이라지만 너무 하세요! 아침에는 좀 일어나고 그러세요~! 맨날 저만 부려먹으시면 나중에 주인님한테 시집가서 바가지 복복 긁을 거예요?!” 끔찍한 협박을 자행하는 그녀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한 나는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다. 으아~! 찬물에 감았더니 머리가 아파~! “하지만 잠이 확 깨잖아요?” 스피릿이 빙긋 웃으며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머리를 닦고 있는데 스피릿이 아직까지 내 앞에 서있었다. 그래서 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당겨서 와락 안아버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하얀 볼을 내 얼굴을 비벼댔다. “아으~! 귀여워라.” “아앙, 따가워요. 주인님! 면도 안 하셨죠?” 스피릿이 내 가슴을 두 팔로 밀어내며 말했다. 그녀를 놓아준 나는 턱을 좀 쓸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을 시작하는 기분으로 키스하고 하면 안될까?” “안돼요. 면도하고 오세요.” “스피릿~.” “안돼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버린 나는 세면장으로 들어가 마저 면도를 하고 나왔다. “이제 됐어?” 아침을 준비하던 스피릿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노예를 감정하는 관리원 간수의 엄격한 손길로 낸 턱과 이를 검사하더니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합격.” “…그래서, 키스는?” 스피릿이 갑자기 요염하게 웃더니 테이블로 날 데리고 갔다. 음식접시가 올려져있는 식탁 위에 걸터앉은 그녀는 두 팔을 벌리며 야릇하게 웃어댔고 군침을 꿀꺽 삼킨 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모닝키스라기엔 너무 뜨거운 것을 해버렸다. 덕분에 키스를 끝낸 그녀의 입가는 타액으로 지저분해졌다. 나도 그렇겠지만…. 테이블에서 내려온 스피릿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약간 골이 난 표정으로 날 흘겼다. “으응… 아침부터 그렇게 거칠게 하시는 게 어딨어요? 놀랐잖아요.” “어, 미안해. 네가 너무 예뻐 보여서 말야.” 어색하게 웃으며 말해주자 스피릿은 이제 내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여자는 사랑을 하면 예뻐진대요. 그래서 그런 걸 거예요.” “오~ 그거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데? 더 예뻐지게 만들어볼까?” 난 스피릿의 가는 허리를 감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딱 감고 거부했다. “안돼요. 좀 있다가 첼시아씨가 오신다고 했단 말이에요.” 최근 나와 그녀의 시간과 즐거움이 줄어드는 원인이다. 내년 봄까지 계획을 잡고 있던 귀족가의 경호 일이 뱀파이어를 붙잡으면서 무산되어버리자 할 일이 없어진 그녀가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집에 놀러오는 거다. 덕분에 낮 부끄러운 장면도 몇 번 보이고 그랬지. 어휴~! 인상을 좀 구기고 있던 나는 스피릿이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보자 얼른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별수 없지 뭐. 그럼 아침 먹고 길드에 나가서 일이나 받아볼까나?” “예? 일 받으시려구요?” 난 식탁에 앉아 좋은 냄새를 풍기는 스테이크를 바라보며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응. 이제 일주일이나 쉬었잖아? 슬슬….”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스피릿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긁고 있었다. 저건 뭔가 불만이 있거나 하면 나오는 스피릿의 버릇이다. 사각사각…! “…으응, 주인님. 이제 저랑 있는 게 지겨워지신 거예요? 으으응~ 몇 일만 더 있다가 하시면 좋을 텐데… 아직도 밖은 추운데… 으응….” 이거, ‘그럼 그렇게 하자.’ 라고 하지 않으면 토라질 기세인데? 쓰게 웃어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었다. 왜냐면…. “그럼 그렇게 하자. 날씨가 좀 풀리면 일 받지 뭐.” “와! 정말요?! 주인님~! 고마워요~!” 후다닥 달려온 스피릿은 내 무릎 위에 올라앉아서 볼에 뽀뽀를 해댔다. 아으~ 평소엔 얌전히 있다가도 기분 좋은 일만 있으면 이런 다니까? 스피릿은 내 무릎에 앉은 채로 고기를 썰어 입에 넣어주었다. “왕도 부럽지 않은 기분이야.” “…그러시면서 엉덩이 쓰다듬지 마세요. 주인님 변태.” 포크를 내 입에 물려놓은 스피릿은 손을 내려서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고 있는 내 왼쪽 손등을 꼬집었다. 좀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오른손을 들어 포크를 입안에서 빼낸 나는 썰어놓은 고기조각을 찍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 “아~ 음! 맛있어요. 그렇죠?”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찌뿌드드한 몸을 풀기 위해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스피릿이 얼른 외투를 가지고 왔다. “주인님~! 뭐라도 입고 나가세요~! 어제 눈이 와서 꽤 춥다구요. 아무것도 안 입고 나가시면 감기 걸려요.” 싸나이가 겨우 추위를 두려워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을 해준 나는 문을 열었다. 휘이이잉~! 살을 애는 듯한 추위가 불어닥쳤다. 하지만 나가야 한다! 자기에게 관대해지면 안돼! 으아아~! 춥다! 이를 악물고 밖으로 나온 나는 문을 닫고 집 앞마당에 나무말뚝을 몇 개 박아놓아 수련장 비스무레하게 꾸며놓을 곳으로 향했다.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스피릿과 속닥거리며 놀고 있지만 그래도 틈틈이 몸이 굳어지지 않게 해둬야 한다. 언제라도 실전에서 뛸 수 있게 만들어놓아야 밥벌이를 하지. 저렇게 예쁜걸 쫄쫄 굶길 수 없잖아? 뒤를 힐끔 돌아보니 스피릿이 서리가 가득 낀 창가에 서서 글을 쓰고 있었다. 주인님 바보! 얼어죽을 거예요! 당장 돌아와요! “땀날 때까지만 하고 들어갈게~!” 그러자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스피릿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 추위에 땀은 무슨… 꺄아~!” 탕~!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에 기겁한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창문을 닫았다. 낄낄 웃어준 나는 검을 들고 운동을 시작했다. 오전에 3시간, 오후에 3시간이다. 내가 알고있는 모든 격투기 동작을 하나하나 반복 연습하여 굳어진 몸을 풀고, 메인 트레이닝으로 가상의 적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이미지 파이트를 시작한 나는 찬바람 부는 데서 웃통 벗고 1시간 동안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 다음,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서리가 낀 시계는 11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오늘도 제꼈다! 우당탕! 쾅! “어어어~! 거, 시, 시원하구나~!” “…그렇게 시원하면 아랫도리까지 벗고 나가서 하시지 그러셨어요?” 고개를 돌리니 도끼눈을 한 스피릿이 팔짱을 하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쓰게 웃어준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벽난로 앞에 앉았다. 스피릿은 내 뒤에 서서 등에 난 땀을 닦아주었다. “정말~! 하루 정도는 그만 두셔도 되잖아요? 바람도 많이 부는데.” “오, 안돼. 자기에게 관대해지면 수련이고 뭐고 말짱 꽝이라구. 그리고 이렇게 몸을 풀어둬야 언제라도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래야 예쁜 노예에게 예쁜 목걸이나 귀걸이도 사줄수 있지.” ========================================================================== 전 언제나 밥벌이 할수 있을까요? Reload Running Fire: 27 “우리 스피릿에게 무슨 짓을 시킬 셈이야?!” 그러자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좀 조심해서 몸을 다루세요. 안 그러면 전 생과부가 된단 말예요.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곤 주인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등에 몸을 기대어왔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은 훌쩍이며 내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노예는 주인의 등에 업혀서 살뿐이다. 라고 했던가? 쓰게 웃어준 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달랬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알았어. 앞으로 일 나가면 조심할 테니까. 울지마.” “훌쩍, 정말이죠?” “그럼그럼, 이렇게 예쁜 노예를 두고 죽을 수는 없잖아? 아직 못 본 것도 많은데 말야.”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난 킥킥 웃으며 말했다. “네가 문장을 파서 보통사람이 되면 어떤 표정과 말을 가장 먼저 할 것인지 보고싶어. 그리고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아이가 생길지. 아니면 아이가 생기고 나서 부랴부랴 결혼할 건지도 궁금해. 그 아이가 사내일지, 계집아이일지, 아니면 쌍둥이 일지도 알고싶어. 아기를 가슴에 안고 젖을 물리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싶어. 울고있는 아기를 달래는 당신의 모습도 보고싶고, 아기를 달래며 좀 도와달라고 화를 내는 당신의 모습도 보고싶어. 우리를 닮은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도 보고 싶어. 또 그 녀석이 다 커서 여자친구나 혹은 남자친구를 데리고와서 소개시켜줄 때는 꼭 그 자리에 함께 있고 싶어. 그리고 결혼해서 손자나 손녀를 데리고 오는 모습도 보고 싶어. 그리고 이빨 몇 개 빠진 호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된 당신과 내 모습도 보고 싶어. 어, 말이 좀 길었나? 어쨌든 난 손자 볼 때까지는 안 죽을 거야.” 난 어색하게 말을 맷었다. 중간에 말실수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스피릿을 ‘당신’이라고 해버리다니… 이거 참, 그때 스피릿이 내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약간 기분 좋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제, 제가 주인님의 아기 꼭 낳아드릴게요. 그때가 되면 또 ‘당신’ 이라고 다정하게 불러주시는 거예요?” 풋하고 웃어버린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등에 매달린 스피릿은 장난스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점심시간이 다되었기에 스피릿이 다시 솜씨 발휘를 했다. 테이블에 앉아 그녀가 맡기는 밀가루 박죽과 요리재료를 다듬고 있던 나는 문득 벽에 걸어놓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첼시아가 늦는데. 혹시 저번처럼 또 점심 얹어먹으려고 일부러 늦게 오는 거 아냐?” 스피릿은 나에게서 밀가루 반죽을 받아가며 상냥하게 웃었다. “점심은 좀 많이 만들어놔야겠어요.” “쳇~! 오면 식비 받을 거야.” 내 말에 스피릿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핫케익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누구지? 첼시아라면 으레 창문을 먼저 두드리는데? 혹시 몰라서 문에 체인을 걸고 옆으로 서서 문을 열었다. 칼이 들어와도 피하기 위해서다. “누구요?” 체인이 걸려진 문 틈새로 보이는 것은 약간 창백한 얼굴을 가진 20대 후반의 미남자였다. 처음 보는 사내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야. 문 열어 줘.” “실례하지만 누구?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사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겨울바람에 휘날리는 검정 롱코트가 상당히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문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대며 작게 속삭였다. “잊어먹었나? 나야. 킬.” 킬? 누구지? 어디서 들었…!!!!? 쾅! 문을 닫아버린 나는 얼른 벽난로 위에 올려놓은 검을 붙잡았다. 스르릉! “스피릿! 내 뒤에 숨어! 어서!” “예?! 무, 무슨 일이세요?” 핫케익을 뒤집던 그녀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설명할 시간 없어! 어서 이리 오라니까!” 콰드득! 쾅! 문짝이 박살나며 차가운 겨울 바람이 따스한 방안으로 매섭게 쏟아졌다.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프라이팬을 집어 던지고 내 등에 달라붙었다. 날카롭게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온 뱀파이어 킬은 정말 춥다는 것처럼 손을 매만지며 벽난로가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겨울 바람에 벽난로 안의 불길이 어지러운 춤을 춰댔다. “너무 하잖아? 손님을 밖에다가 세워두고.” “빌어먹을! 너 그때 잡혀갔잖아! 신전으로!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나온거야?!” 그러자 녀석은 머리카락을 좀 쓸어 넘기며 손가락을 튕겼다. “윈드 실드.” 순간 부서진 방문을 타고 들어오던 찬바람이 뚝 그쳤다. 킬은 어지럽게 변한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하며 말했다. “이제야 좀 났군.” 태어나 처음으로 머리가 쭈볏 서는 기분이다. 뱀파이어와 한집에 있다니! 나는 머리를 고속으로 회전시켰다. 어쩌지?! 어떻게 저 자식을 쓰러뜨리지?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지?! 스피릿만이라도 살려야해! 어떻게! 어떻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서 저놈을 쓰러뜨릴 방법이라고는 기껏해야 골든 피크뿐이다. 빌어먹을! 나는 벽난로 위로 올려놓은 장비들을 쳐다보았다. 저 위에 골든 피크 발생용 스크롤이 들어있다. 하지만 녀석이 앞에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염병! 그때 킬이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이 움찔하며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나는 복수 같은 걸 하러 온 게 아냐. 누굴 좀 모셔가려 온 거지.” “누구를!” 물어보나 마나 한 것이지만 그래도 난 물어보았다. 킬은 손을 들어 나를, 정확히는 스피릿을 가르켰다. “네 뒤에 서서 발발 떨고 계신 분을 모시러왔다.” “빌어먹을! 누가 보내준다고 했어?! 스피릿은 내 거야! 건드리면 가만 안둬!” “설마 내가 그녀의 피를 원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바보 같은 녀석.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그분은….” “아, 안돼요! 말하지 마세요!” 순간 이상한 것을 느꼈다. 뭐냐? 이 전개는? 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스피릿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거실을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잘 꾸며놓고 사시는군요. 당신이 하신 겁니까? 전(前) 캐슬린 제 1왕녀. 스피릿 애쉬드 캐슬린 전하.” “전하아?!” 갑자기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이 주마등이 되어 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캐슬린 비밀정보부 소속의 에이젼트, 킬이라고 한다.” “…요새 국가 정보부에서는 뱀파이어도 쓰나?” “시대가 바뀌면서 정보전도 상당히 과격해지고 그에 따라 고도의 능력을 가진 요원을 필요로 하게 됐지. 하지만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나선거다. 나는 그 첫 번째 주자라고 할 수 있겠지. 욕구충족 대 정보. 나쁘지 않은 거래 조건이었거든? 약간의 특혜도 있고, 염병할 신전에서 풀려난 것도 그 덕분이지.” 이를 드러내며 녀석을 마주보던 나는 갑자기 어깨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우울한 얼굴의 스피릿이 내 시선을 피했다. 제기….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난 떨어지지 않은 입을 겨우 열었다. “저, 정말 공주전하 이십니까?” “주인님~!” 깜짝 놀란 스피릿이 내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그녀의 팔을 붙잡아 떼어낸 나는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스피릿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정말, 공주 전하이십니까?” “아니에요! 저는, 저는 콜트 슈발츠씨의 노예라구요~! 고, 공주 같은 거 이제 아니에요!” 행여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놈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 지금부터 대략 10여년 전에 캐슬린 왕성에서 반란이 있었는데. 그때 왕이 바뀌었거든? 그녀는 이전 왕의 막내공주였어. 반란이 성공하고 왕족들이 모두 처형달할 때 그녀는 근위병이 어디론가로 빼돌려서 자취를 감췄지. 정보대로라면 그 근위병의 시골집으로 도망가 지내다가 트레즈 대장이 찾아서 데려오려하자 달아나서는 행방불명되어버렸다더군.” 스피릿이 움찔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호, 혹시. 당신… 트레즈 근위대장이 시켜서… 대, 대체 왜 날 데려가려는 거예요? 애쉬드 캐슬린 왕조는 이미 끝났어요. 이젠 레이스 캐슬린. 그 사람들의 시대라구요. 그리고 스피릿 애쉬드 캐슬린은 죽었어요. 8년 전 그날 죽었다구요. 이제 그만 날 내버려둬요!” “오~! 이런이런, 공주님. 모르시는 소리 마세요. 귀족원이나 원로원에는 현 캐슬린 왕권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답니다. 10년도 채 안되는 왕권이기 때문에 이런 고비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 와중에 트레즈 같은 사람이 슬쩍 이야기를 꺼내자 몇몇이서 자기들의 힘으로 나라를 바꿔보겠다는 꿈을 안고 동조하고 나선거지요. 정보부도 그 사람들의 임깁이 닿아있어서 암암리에 지원을 하고 있고요. 내가 당신을 찾아 이 먼 나라에까지 오게 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뭐, 중간에 놀다가 당신을 만난거긴 하지만.” “뭐야?! 자기들끼리만 속닥대지 말고 나한테도 이야기해줘!” 내 외침에 스피릿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내 등뒤로 숨으며 말했다. “예. 이, 이야기 해드릴께요. 제가 10살이 조금 넘었을 때 반란이 일어났어요. 그때 국왕폐하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정정해야요. 공주님. 그때 당신의 아버지는 상당한 공포정치를 하셨습니다. 그 양반 때문에 애꿋은 사람 여럿죽었어요.” 그의 말에 스피릿은 슬픈 얼굴을 했다. “그래도 비 전하께서 돌아가시전까지는 성실한 국왕이셨어요.” “그렇긴 하죠. 자! 그만하고 이리 오십시오. 공주님, 이미 연락이 다되어 있습니다. 얼마 후면 그 양반이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 이 나라에 들어올 겁니다.” 킬이 팔을 앞으로 내밀며 걸어왔다. 내가 검을 들고 으르렁거리자 녀석은 팔을 움츠리며 빈정댔다. “어이쿠, 열받은 사냥개가 있었지.” 대략 상황을 정리한 나는 놈을 노려보며 물었다. “내가 정리해볼게. 스피릿은 이제 공주가 아니야. 맞아?” “예. 전 당신의 노예로 족해요.” 난 검을 들어 싱글벙글 웃고있는 킬을 가르켰다. “들었지?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제 마음 잡고 잘 살려는 공주님을 왜 데려하는 거야? 이 기생충아.” “넌 아직 그녀의 가치를 모른다. 반란으로 멸절당한 왕족의 공주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지. 이를테면 차후에 왕위 빼앗았을 때 그 뒤를 이을 왕자를 생산한다던가 말야.”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난 이빨을 드러내며 외쳤다. “우리 스피릿에게 무슨 짓을 시킬 셈이야?!” “난 관심없지만,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다시 한번 캐슬린을 뒤집을 생각인 것 같다. 반란으로 전 왕을 몰아내고 현 왕위를 차지한 사람들이니 다시 한번 뒤집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곳에서 전공주의 역할은 매우 크다. 그녀를 데리고 있으면 반란으로 왕에 오른 현 왕의 몰아낼 대의명분이 생기는 셈이거든? 빼앗긴 왕좌를 되찾는다. 뭐 그런 식으로 말야.” ========================================================================== 어색한 설정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서부터 수정이 가해졌습니다. Reload Running Fire: 28 “죽어라!” 여기까지 들으니 그 트레즈라는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스피릿을 찾아대는지 알 것 같다. 잠시 검을 내린 난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공주님이 되고 싶어?” 스피릿은 내 팔을 꼭 안으며 말했다. “폐하와 가족들이 모조리 처형당하고 저만 살아남아 지내면서 한동안 힘들기도 했지만 결국엔 살았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살기로 했어요. 그냥 보통 시골처녀처럼 살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제 과거가 현재를 쫓아왔어요. 주인님. 이, 이제 제겐 당신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요. 도와주세요.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그런 곳으로는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저, 저는 그냥 주인님하고만 있으면 된다구요.” “이런, 사랑에 빠진 공주님이라 각오가 대단하시네. 하지만 끌고가면 어쩔거지?” 킬이 팔짱을 풀며 말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나는 검을 들었다. “누가 보내준데?” “말로 안되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가야겠다. 그리고 너는 공주님의 순결을 빼앗은 대가로 그녀가 보는 앞에서 목매달아 주마. 어차피 살아있어도 언젠가는 암살자들의 손에 죽게 되겠지만.” “하~! 자신 있으면 덤벼봐. 이 기생충.” 난 손을 까딱였다. “애처롭군. 힘없는 인간을 상대….” 갑자기 킬의 모습이 사라졌다. 젠장! 너무 빨라! 난 헤이스트 스크롤을 찢으며 외쳤다. “스피릿! 옷 두껍게 입고 밖으로 나가! 어… 으윽!?” 퍼어억! 우당탕! 식탁을 박살내며 뒤로 굴러간 나는 부엌의 개수대에 머리를 박았다. 배와 등에서 짜릿한 고통이 올라온다. 다리로 내 배를 걷어찬 킬은 다리를 든 채 차갑게 웃었다. “…해야하다니 말이야.” “아앙~! 주인님!” “그는 더 이상 당신의 주인님이 아닙니다. 공주님. 그의 등에서 그만 내려오시죠. 인간은 자기 발로 걸어야 멋있답니다.” “이, 이놈이…!” 눈앞에서 노란빛이 반짝거린다. 후다닥 달려와 날 부축하는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일어나는 날 올려다보았다. 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외쳤다. “뭐하고 있어! 빨리 밖으로 나가!” “하, 하지만 주인님이…!” “여기 있다간 다쳐! 빨리 나가! 이야압!” 헤이스트 스펠에 의해 가속된 나는 킬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워 면에서는 아직까지 많이 딸린다. 퍼억! 녀석의 주먹에 맞고 뒤로 날아간 나는 방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피가 섞인 침을 뱃고 있으니 킬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호오, 여기가 두 청춘남녀가 밤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행위를 벌이던 곳인가? 상당히 아담한걸?” 고개를 든 나는 검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킬의 어깨 넘어로 스피릿이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제기! 부끄럽게 노골적으로 말하지마!” “조물주는 현명하신 분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어떤 종의 번식을 위해서는 종족보존이라는 개념이나 의지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것이 필요했지. 괘씸한 창조물 중에서는 별로 자신의 2세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도 더러 있었거든? 그래서 성교 때에 쾌감을 느끼도록 하시어 욕망의 이름으로 번식을 촉진 시키셨지. 크하하하하~! 어때? 같은 남자끼리 솔직히 털어놔 보라구, 침대 위에서의 공주님은 어떠셨지? 그녀의 신음소리를 어땠나? 심히 궁금하군!” 으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다. 칼을 세워든 나는 앞으로 달려갔다. 헤이스트 덕분에 녀석과의 거리는 단숨에 줄일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변태 자식! 우리의 감정을 그딴 식으로 요약하지마!” 놀랍게도 녀석은 내 검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건틀릿을 꼈을 때 내가 자주 쓰던 짓이다. 하지만 지금 녀석은 맨손, 게다가 은도금 롱소드라 녀석의 손은 천천히 타기 시작했다. 난 씩 웃어주며 그를 쳐다보았다. 킬은 마주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녀석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저 고아하고 아름다운 엘프가 짝짓기 때에 내는 무의미한 신음소리를 들어본 적 있나? 공주님의 한숨 소리는 그것과 비슷했을까?” “너! 너어! 이 자식!! 그만 두지 못해!” “흐하하하! 뭐가 부끄럽지? 그것도 사람 사는 모습이야! 감히 공주님을 아내로 삼을 거라며?” 녀석은 다리를 들어 내 가슴을 걷어찼다. 난 다시 뒤로 굴러가 벽에 뒷통수를 찍었다. 스펠의 힘 덕분에 스피드는 비슷하지만 파워 면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빌어먹을, 저 변태괴물을 쓰러뜨리는데는 골든 피크뿐이냐? 그때 녀석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문 앞에 선 녀석은 어느새 불덩이를 하나 만들어서 던지고 있었다. 윽! 파이어 볼?!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그건 보통 파이어 볼이 아니라서 움직이면 그럼 바로 쫓아간다구.” “윽…!” 녀석의 말은 진짜인 것 같다. 머리 높이로 날아온 파이어 볼은 내 앞에 가만히 서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움직이면 조금씩 따라온다. 눈을 위로 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킬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번 일에 대한 복수를 갚는 것도 괜찮겠지만, 나는 좀더 강렬한 복수극을 원해. 이를테면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기고 우울해하는 남자의 모습이라거나?” 녀석은 낄낄 웃으며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놈의 등을 노려보던 나는 우연치 않게 스피릿이 웬 사내들에게 붙잡혀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 자식! 돌아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절망해라! 울면서 저 높은 하늘을 저주해라! 하지만 신은 너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 양반은 자신의 피조물들의 고통을 즐기는 아주 못된 취미를 가지고 있거든?! 으후하하하~!” 킬은 두 팔을 벌리고 웃으며 부서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당장 달려가 녀석의 뒷통수를 박살내고 싶지만 눈앞의 파이어 볼이 자꾸 눈에 거슬린다. 빌어먹을!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때였다. “주인니이임! 살려주세요! 주인님! 아아아앙~! 이거 놔요!” 스피릿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는 엉엉 울면서 집으로 달려오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사내의 손에 배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해져왔다. “내 노예에게 손대지마! 이 빌어먹을 것들아!” 헤이스트 스펠파워의 지속 시간은 300초! 내 운을 시험해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눈앞에 떠있는 파이어 볼을 바라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뻐어어엉~! 멋진 폭발이다. 그동안 스피릿과 내가 함께 지내오던 작은 집이 박살나며 파편이 불꽃과 연기에 뒤섞여 사방으로 휘날렸다. 바닥에 앉아있던 나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먼지와 연기를 날려보내고 스피릿을 붙잡고 있는 놈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골든 피크다!” “모두 조심…!?” 콰아앙!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의 턱을 후려갈겼다. 놈은 뒤로 날아가 눈밭에 뒹굴었고 기절했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난 주먹을 든 채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내 노예를 때렸지?” “이런이런, 너무 날뛰지 않는 편이 좋을텐데? 이쪽에는 인질이 있다구.” 킬이 기절한 스피릿의 목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꽤 군침 도는데?” “이 기생충 같은 뱀파이어 자식. 내 노예 건드리지마. 이빨을 뽑아버리겠어.” “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면.” 두 자루의 검을 들었다. 오른쪽은 은도금 롱소드, 왼쪽은 샤프처리 롱소드, 지지 않는다. 난 눈을 부릅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킬이 뭐라고 말하자 사내들이 멀찍이 떨어졌다. 녀석은 한 손에 롱소드를 들고 나왔다. “이 저주받은 생명을 끓어 줄 수 있다면 공주를 넘겨주마.” “노력해 보지.” 말을 마치자 녀석이 달려들었다. 나도 녀석에게 덤벼들었다. 챙챙챙~! 수십 번의 칼질이 오고 갔다. 번쩍이는 롱소드의 검광이 미치도록 아름답게 보인다. “으하하하! 제법이구나! 골든 피크를 일으켜서라도 되찾고 싶었나보지?” “당연한 걸 대단한 것처럼 말하지마! 이 기생충아!” 다리를 든 나는 녀석의 가슴을 차버렸다. 킬은 눈밭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난 곧바로 달려가 녀석의 팔에 검을 휘둘렀다. 서걱! 뱀파이어의 팔이 잘리는 느낌은 일반 생물과는 좀 틀린 것 같다. 킬은 자기 오른팔이 떨어져도 깔깔 웃기만 했다. 은도금 롱소드를 뒤로 당긴 나는 그의 머리를 조준했다. “그 안에 든 뇌수가 상쾌한 바람을 쐬도록 해주지!” 캉! 왼팔로 내 검을 막은 녀석은 다리를 들어 내 가슴을 차버렸다. 그러더니 쫓아와서 뒤돌아 베기를 시도했다. 목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난 얼른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하지만 아래쪽에서 올라온 것은 놈의 무릎이었다. 뻑!? “이, 이익! 내가 이 정도로…! 컥?!” 녀석이 내 목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오른손은 어느 틈에 재생되었는지 바꿔 잡은 검을 뒤로 당기고 있었다. “이대로 꼬지를 만들어주마.” “웃기지마!” 양손에 든 검을 버린 나는 내 목을 잡고 있는 녀석의 팔을 감싸쥐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 있는 힘껏 차버렸다. 무릇, 인간형의 생물은 팔보다 다리가 더 긴 법이다. 퍽?! 킬의 머리가 옆으로 꺽임과 동시에 놈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나는 숨을 좀 고른 다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좀 만지던 킬이 말했다. “이거이거~ 능력이 비슷해 놓으니 간단하게 해서는 이대로 결판이 안나겠는걸?” “스피릿을 내놔! 그럼 조용히 돌려보내 주지!” “오~! 그건 안 돼지.” 킬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저쪽 그의 동료들이 있는 곳에서 뭔가 작대기 같은 것이 날아왔다. 녀석은 들고 있던 검을 나에게 집어던지더니 뒤로 달려가 그것을 붙잡으려 했다. 순간 머릿속으로 번개가 쳤다. 설마?! 날아오는 검을 쳐낸 나는 놈의 뒤를 따라달렸다. “안돼! 이 자식!” “하하하~! 안타까우면 나보다 먼저 잡아 보라구!”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하지만 거리 차가 너무 심하다. 골든 피크 상태라도 저건 잡지 못한다. 빌어먹을!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를 드러낸 나는 검을 붙잡는 대신 롱소드를 든 팔을 뒤로 당겼다. “죽어라!” ========================================================================== 기뻐하십시오.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Reload Running Fire: 29 “혹시 사랑싸움이라도 한 거야?” 두 배로 부풀어오른 어깨근육의 수축력으로 말미암아 가공할 속도로 날아간 은도금 롱소드는 정확하게 검을 붙잡고 고개를 돌리는 킬의 등 짝에 명중했다. 퍽!? 치이이이이~! “크어억!?” “하하하하! 낮과 밤도 구분 못하는 바보 뱀파이어 자식! 그대로 뒈져라!” 그렇게 외쳐준 나는 기절한 스피릿에게로 달려갔다. 뱀파이어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등에 은도금 롱소드가 박혔으니 단 몇 분 정도는 벌 수 있을 거야. 스피릿을 구해서 시가지로 들어가면 놈들도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겠지! 여기까지가 1차 도피계획이었고 서서히 기절한 스피릿의 얼굴과 그녀를 데리고 있는 괴한 놈들의 긴장한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오자 난 성공을 확신했다. “내 노예를 내놔!” “킬씨가 쓰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막아!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 으악!” 쾅!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불끈 쥔 나는 눈밭을 굴러가는 남자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시간을 벌어? 보통 인간이 골든 피크 상태의 인간을 붙잡는 건 무리야. 자, 얌전히 내 귀염둥이를 내놓으실까?” 하지만 나는 녀석들이 그녀를 내놓을 때까지 기다려 줄만큼 참을성이 많지도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대략 3명 정도 때려눕히고 스피릿을 다시 빼앗은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번 내려다 본 다음 얼른 시가지로 숨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흡?! 크어… 으아…?!” 아찔한 기분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보니 내 가슴에 안겨있는 스피릿의 하얀 얼굴로 붉은 핏방울이 튀어 에로틱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수대에서 솟아오르는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 뜨거운 피는 소복이 깔린 깨끗하고도 순결한 이미지의 눈밭을 미치도록 아름다운 붉은 빛깔로 물들였다. 뜨거운 피에 반쯤 녹아 내리던 눈은 매서운 바람에 다시 얼어붙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커… 어억! 너, 너 이, 이자식…!!”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고 내 등을 찌른 킬이 히죽 웃어 주었다. 놈의 손에는 은은한 붉은 빛을 발하는 롱소드가 들려있었다. “베레타에서 직수입한 칼라미티 소드다. 아무리 물리방어력이 최고조에 달한 골든 피크 상태라도 이걸로 맞으면 뚫려.” “콜록콜록! 커억!?” 폐가 상했나보다. 심하게 기침하며 피와 체액을 토해낸 나는 가슴 앞으로 삐죽 나와있는 칼날에 스피릿의 얼굴이 상처 입지 않도록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하지만 등에 칼이 박혀있는 상태라 조심스럽게 내려주지는 못했다. 거의 떨어뜨리다시피 한 덕분에 그녀가 깨어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눈밭에 쓰러져 있던 스피릿이 눈을 찌뿌렸다가 천천히 실눈을 떴다. 그리고는 커다랗게 뜬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커윽…! 스피릿…! 보, 보지마….” “꺄아아아악! 주인님!” 스피릿이 후다닥 달려와서는 나에게 매달렸다. 그녀에게 쓰게 웃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내 가슴에 나와있던 칼날이 사라졌다. 푸쉬이이이~! 칼날에 찢어진 혈관이 개방되며 극심한 내외출혈이 시작됐다. 골든 피크는 양날의 검이다. 일단 발동되면 물리방어력과 공격력을 순간 상승시키지만 부주의로 저런 괴물 같은 검에 조그만 상처라도 입게 되면 치명상으로 이어진다. 그 이유는 육체의 신진대사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심장이 평소보다 두세 배 이상 빨리 뛰기 때문이다. “크아아아!” “꺄악! 주인님!” 스피릿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밀어버린 나는 비틀비틀 걸으며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그녀의 예쁜 얼굴을 내 피로 더럽힐 수 없었다. 날씨도 추운데 그랬다간 피부가 상할 거야. “키이이일…!!” 어느새 내 목소리는 지옥에서 울부짓는 망자의 그것과 비슷하게 변해있었다. 킬은 어깨에 검을 맨 방한만 자세로 입을 열었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너희들의 피는 너무 뜨거워. 버러지 같은 인간 놈아.” “이, 이 기생충 같은 새끼… 가… 커억?!” 피를 너무 쏟아내 다리가 풀려버린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까이 다가온 킬이 머리 위로 칼라미티 소드를 들어올렸다. 내 앞에 선 놈을 노려보고 있으니 스피릿이 사내놈들에게 끌려가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앙~! 주인님! 주인니임!” “한 때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서 그들을 부리던 공주가 사랑에 목메는 노예로 바뀌어버리다니. 이건 정말 의외의 사건이로군.” “콜록~! 콜록콜록! 크아! 허억! 헉! 이 자식…! 죽여버린다…!” “후후하하하하~! 이 상큼한 바보 녀석! 골든 피크 상태에서 상처를 입은 주제에 아직도 헛소리냐?” 칼라미티 소드로 내 머리를 내려치려던 킬은 검을 내렸다. 필사의 의지로 자폭할 생각까지 하고 있던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킬은 칼라미티 소드의 피해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사내들을 불러들인 다음 킥킥 웃으며 말했다. “자기 여자를 나쁜 놈들에게 빼앗긴 것을 비통해하며 천천히 죽어가시게. 아, 그녀는 걱정하지 말아. 고향으로 데리고 갈거니까. 하지만 그 사람이 그냥 데리고 가려나 모르겠군. 하루 빨리 아기가 태어나야 왕위를 탈환했을 때 왕좌에 앉힐 수 있거든?” 눈을 부릅뜬 나는 놈을 노려보았다.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피가 더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에게 손대면 고스트가 돼서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기필코 네놈을 죽여버릴 거야!” “미안하지만 원령에게 괴롭힘을 당할 정도로 난 약하지 않아. 죽기 전에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면 모를까? 하하하하~! 그럼 이만 가네. 오랜만에 재미있었어. 잘 죽어.” “크… 어어…! 이, 이 자식…!?”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방금 전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고함을 질렀더니 혈압이 급속히 낮아져서 그런가보다. 털썩…! 바닥에 쓰러져 하얀 눈밭에 후끈거리는 볼을 대고 있으려니 귓가로 스피릿의 울음소리와 킬의 웃음소리가 섞여서 이상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졸음이 밀려온다. 고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왜 이리 피곤하지…? 눈을 깜빡거린 나는 따스한 천장을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얀 로브를 입은 아가씨가 내 곁을 지나며 뭐라고 중얼대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천천히 입을 연 나는 한참동안 폐에서 공기를 빼내려 애쓰며 혀를 움직였다. 저, 저기,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 “……?” 여기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 “……!” 뭐라구요? 잘 안 들려요. “……?!” 글세. 안 들린다니까? 한숨을 좀 내쉬어준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혼자서 호들갑을 떨던 하얀 로브의 아가씨는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느껴진다. 지금이 겨울인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좀 늦은 시간이었다. 창문이 꺼멓게 보인다. 밤인가? “어때요? 괜찮아요?”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지금은 잠들어있어요.” 아, 나 지금 깨어났는데. 당장 궁금한게 생겼어. 당신은 누구고 여기는 어디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 꽤 낯익은 얼굴이 아래쪽에서 올라왔다. 20대 초반의 얼굴이지만 실제 나이는 18세라는 애늙은이 퍼피군이었다. “마스터. 깨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 어디 보자. 어이. 친구, 정신이 들어?” 첼시아. 내가 언제부터 너와 친구가 됐지?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지 말아 줘. 부끄러우니까. “뭐야?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지 말고 대답을 하라구.” “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거의 죽었다가 깨어나는 상태니까요.” 뭐? 그럼 나 이제 말 못 하는 거야? 오~! 안돼!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있단 말이야! “에? 그럼 벙어리가 되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몇 일만 쉬면 됩니다.” 다행이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다시 뜨고 말았다. 첼시아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집은 박살이 나고 당신은 피투성이가 돼서 눈밭에 쓰러져 있고, 게다가 또 스피릿은 어디갔어? 이봐 듣고 있는 거야?”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쳤다. “크으으…?!” “안돼요! 상처가 덧날지 모르니 진정하세요!” 하얀 로브의 아가씨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날 자리에 눕히려 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해서 잠시동안 몸싸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보다못한 퍼피의 난입으로 난 다시 침대에 눕게 되었다. “일어나지 마세요! 이것 보세요! 상처에서 피가 베어 나왔어요!” 하얀 로브의 아가씨가 손바닥에 뭍은 붉은 액체를 보여주며 떽떽거렸다. 으윽!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스피릿이! 스피릿이이! “아… 아아… 크으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염병! 인상을 찌뿌리고 있으니 첼시아가 다가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끄덕끄덕. “퍼피? 종이하고 펜 좀 빌려와.” 첼시아! 고마워! 지금이라면 친구라고 해도 좋아. 깨어 난지 얼마 안 되는 중환자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하얀 로브의 아가씨가 볼을 부풀렸지만 우리는 무시해버렸다. 잠시 후 퍼피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글을 쓰려 했지만 그것도 힘들었다. 극심한 근육통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고 문장을 완성하자 첼시아가 그것을 보고 답해주었다. “여긴 미티어의 신전이야. 정확히 5일 전에 저녁 얻어먹으려고 당신 집으로 가니 집은 박살이 나있고 당신은 눈밭에 파묻혀 있더군. 그래서 여기다가 입원 시켰어.” 이런 제길! “동감이야.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어? 혹시 사랑싸움이라도 한 거야?” 잠시 그녀를 노려봐 준 나는 팔이 아파 왔기 때문에 최대한 간결한 문장으로 그 날의 상황을 써나갔다. 그것을 읽은 첼시아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더니 방안을 서성이는 하얀로브의 아가씨를 밖으로 내보냈다. 내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며 완강히 저항하던 그녀는 퍼퍼의 강제적인 데이트 신청으로 밖으로 끌려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방안에는 첼시아와 나만이 남게 됐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말도 안돼! 스피릿이 10년전 반란으로 몰살당한 전 캐슬린 왕족의 공주님이라고?!” ========================================================================== 뭐, 그렇습니다. 제 머리는 이 정도가 한계인 듯, 쩝…. Reload Running Fire: 30 “처음 가졌던 내 집이었는데. 젠장….” 말이 되든 안되든 일단 스피릿이 국가비밀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킬이라는 뱀파이어에게 잡혀갔다는 거야. 그것도 공주님이라고 불리면서 말이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첼시아는 그만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는지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 이마를 가리고 있는 빨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면서 약간 겁에 질린 어투로 말했다. “그, 그럼 나는 공주님의 가슴이랑 엉덩이를 만져 댄 거야? 어쩌지? 왕족모독죄로 잡혀가는 거 아냐?” 이전 공주님이야. 누가 잡아갈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난 교수형이나 화형이겠군? 글을 읽은 첼시아는 풋하고 웃더니 좀 깔깔거렸다. 난 아픈 팔로 다시 글을 써서 내밀었다. 어쨌든, 사태가 이 지경이 됐으니 난 그녀를 되찾아야겠어. 그래서 말인데. 좀 도와주지 않겠어? 사례는 할게. 첼시아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요새는 별로 할 일도 없으니까. 그래서 얼마 줄 건데?” 섭섭하지 않게 쳐줄게. 일단 캐슬린 왕성의 트레즈 근위대장에 대한 최근 행방에 대해서 알아봐줘. 그 놈이 사건의 원흉인 것 같아. “다른나라 왕성의 근위대장에 대한 정보를 캐내라구? 신전 앞마당에서 금광을 찾는 게 났겠다.” 정보료는 걱정하지말고 도둑길드 같은 곳에 의뢰해서 찾아봐줘. 그런 쪽으로는 빠삭한 친구들이니까. 잘 알고 있을 거야. “거기 아는 사람 있어. 걱정 마. 그리고 또 뭘 해주면 돼?” 잠시 생각하던 나는 가슴에 감겨있는 붕대를 좀 만져본 다음 글을 적었다. 힐링 포션이나 에릭서 부탁해. 이대로 완쾌될 때까지는 너무 늦어. “이거 알아? 포션은 쓰기엔 좋지만 수명을 조금씩 깍아 먹는다구.” 이봐. 당신 남자친구가 변태들에게 붙잡혀 갔어.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야? 첼시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변태가 되어 돌아오면 나야 좋지.” 할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 봐주자 첼시아는 깔깔 웃으며 농담이라고 손을 흔들어댔다. 몇 가지 필요한 것을 더 알려주고 돈은 내 은행계좌에서 빼가라고 말해준 나는 첼시아를 돌려보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병실의 불은 컨티뉴얼 라이트라 꺼지지 않기 때문에 난 불을 켠 방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이 켜져 있어서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스피릿이 관련된 갖은 위험한 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젠장…! 이를 드러낸 나는 담요를 뒤집어 써버렸다. 금세 이튿날이 밝았다. 새벽에 겨우 잠이든 나는 프리스티스가 가져다 준 아침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점심 시간쯤에 퍼피가 가지고 온 사식(?)을 받았다. 포션은 위급환자가 아니면 신전병원에서 사용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프리스티스가 잠시 프리스트의 부름을 받아 나간 사이 난 퍼피가 가져온 상자 안에서 포션 병을 꺼내 입이 들이부었다. 3병을 한꺼번에 들이키자 가슴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은 고통이 전해져왔다. “으으윽…!” 치이이이…! 상처가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고 난 이를 악물고 고통을 억눌렀다. 에릭서라면 훨씬 빠르게 회복됐을 테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서 잘못했다가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에 자제하기로 했다. 포션을 마시고 얌전히 신전병원에 앉아 있은 지 5일째 되는 날 첼시아가 찾아왔다. “알아냈어?” “목소리가 돌아왔네?” “포션 마시고 좀 지나니까 나오더라. 하지만 여기 프리스트는 모르니까 조심해. 알면 날 산채로 볶아댈거야.” 고개를 끄덕인 첼시아는 퍼피에게 망을 보도록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다른나라 정보이다보니 시간이 꽤 걸렸어. 그리고 이래저래 소개비랑 정보료를 내다보니 1억4000만 루나를 써버렸어. 미안해. 짜식들이 좀 깍아주지도 않더라.” “그래서 알아냈어?” 첼시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지고 온 지도를 펴더니 말했다. “당신이 말한 그 캐슬린의 트레즈라는 근위대장 말야. 알아보니 정보부 고위 관료들이랑 휴가를 떠났대. 목적지는 그랜퍼스의 동쪽 울버린 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하레이. 그곳 영주가 그의 사촌 동생이 된다나봐.” “그럼 스피릿은 그곳 영주의 성에 있겠군.” “트레즈의 최근 행방으로만 알아낸거야. 스피릿이 거기 있을 지는 알 수 없어.” “스피릿과 놈의 말을 들어보건데. 가능성은 높아.” 난 낮은 음성으로 으르렁 거렸다. “여기서 마냥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잖아? 어떤 놈이든 간에 내 노예를 건드리는 녀석은 산채로 심장을 꺼내서 보여 줄 거야.” 첼시아는 어련하시게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쨌든 내가 알아낸 건 이게 다야. 정보료에 비하면 좀 적은 감이 있긴 하지만.”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장비는?” “당신 장비는 그대로 찾아뒀어. 하지만 자동석궁은 좀 부서져서 무기상에 맡겼는데 세상에 수리비로 300만 루나를 달라고 하더라? 그거 맞는 거야?” “활 대가 상했나 보지. 그거 미스릴 합금으로 만든 거라 꽤 비싸. 그래서 찾아뒀어?” “응. 포션 하고 스크롤 종류도 주문한대로 모두 구해뒀어. 그래서… 총 소모비용은 1억 7천 800만 루나야.” 스피릿의 몸값은 9천 9백만이었지만, 어쩌다보니 나에게 그녀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존재가 되버렸다. 원래는 그녀를 정리하려고 나온 여행인데. 이래저래 복잡하게 되어버렸구만. 침대에서 내려간 나는 수납장에 숨겨두었던 옷을 꺼내며 말했다. “출발하기 전에 2000만 루나 줄게.” “우와~! 심부름 값치고는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냐?” “다음에 나한테 심부름 시키려면 그 정도 줘야 할거야.” 그러자 첼시아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가져다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말했다. “바로 갈거니?” “응. 오늘을 기다렸어. 다시 뺏으러 가야지.” “아주 푸욱~ 빠졌구나?” 첼시아가 병실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자켓을 걸친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돌렸다. “언젠가는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다짐한 녀석이야. 그렇게 쉽게 버릴 수는 없어.” “공주님이라서가 아니고?” 잠시 입을 다문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라도 백성도 없는 공주님이니 내가 데리고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첼시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침대에 간단한 메모와 입원비와 치료비를 올려둔 나는 퍼피와 첼시아의 도움을 받아 신전병원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도중에 프리스티스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콜트씨!?” 난 서둘러 말에 올랐다. 내가 입원해 있는 내내 간병을 해주던 프리스티스가 후다닥 달려왔다. “어딜 도망가는 거예요!? 상처도 아직 다 안나았으면서!” “포션 마셨습니다! 치료비는 병실에 두고 갑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앗! 거기 서요!” “튀어!” 난 말을 몰아 서둘러 신전의 대문으로 달려갔고 첼시아와 퍼피는 덩달아 내 뒤를 따랐다. 등뒤에서 프리스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오면 각오하세요!” 대답대신 손을 흔들어준 나는 그 길로 첼시아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서 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잠시 짬을 내어 밥을 시켜 먹고 있는데 내 앞에 앉아있던 첼시아가 말했다. “우리도 따라갈까?” 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추가비용 달라고 안하면.” “어이~ 너무 하잖아? 겨울 여행인데 좀 써.” “뭐, 좋아. 급한 건 나니까. 1000만 줄게.” “아냐, 우린 두 사람이야. 2000만은 줘.” “뭐야? 수고비 넉넉히 줬잖아?” “수고비는 수고비고, 이건 이거야.” 고개를 돌린 나는 얌얌거리며 빵을 씹어먹는 퍼피를 쳐다보았다. “첼시아는 몰라도 퍼피는 끌리는데….” “…뭐가 어째?” “좋다. 인심썼어. 1800만 어때?” “여기서 1850 달라고 하면 어쩔거야?” 난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다른 사람 찾을 거야.” “알았어. 좋아. 1800만에 노예구출작전에 가담해주지. 하지만 선불이에요. 의뢰인님.” 난 궁시렁거리며 주머니를 뒤져 금화를 테이블에 올렸다. “1000만 먼저. 나머지는 일이 끝나고야.” “철저하네?” “기본이다!” 악을 써준 나는 그들에게 잠시 나갔다 올데가 있다고 말하며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릴까?” “응. 3시쯤에는 돌아올테니 준비하고 있어줘.”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나는 그들에게 밥정도는 사라고 쏘아주며 여관을 나섰다. 하늘은 금방 눈이라도 올 것 같이 우중충하다. 제길! 스피릿, 조금만 기다려. 얼른 구해줄게. 약간 허전한 기분을 느끼며 겨울하늘을 올려다봐 준 나는 머리를 좀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버린 다음 부서진 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라질, 다 박살 나버렸군.” 집은 뼈대만 남기고 다 부서져 있었다. 그나마 여기가 아담한 집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남아있는 기둥과 벽은 군데군데 시커멓게 그을려 흉물스럽게 변해있었고 뒤쪽의 마굿간은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을리고 부서진 것은 매한가지였다. 잠시 마당에 서서 저번 싸움으로 완전히 박살난 우리의 보금자리를 한숨을 내쉬며 쳐다본 나는 파편이 널려있는 눈밭을 걸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스피릿은 항상 여기 테이블에 앉아서 날 맞이했는데. 이제는 박살난 테이블만이 남아서 나를 반겼다. 제기, 처량하구나. 걸레조각이 된 수도펌프와 부엌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던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폭발 때문에 조그만 창문이 있던 벽은 온데 간데 없고 갈기갈기 찢어진 침대가 한쪽 구석에 놓여있었다. “처음 가졌던 내 집이었는데. 젠장….” ========================================================================== 어차피 정들면 고향이에요 콜트군. Reload Running Fire: 31 “입실론에 있는 라이트라는 이름의 마법사를 불러줘.” 이를 뿌드득 갈아댄 나는 침대를 들어내고 마룻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곳의 나무판을 몇 장 드러냈다. 안에는 귀중품을 넣어둘 정도의 작은 공간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큼직한 상자를 꺼냈다.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보자 안에는 드래곤 하트가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다행이구나. 내가 물 쓰듯이 돈을 써대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녀석의 존재 때문이다. 당분간은 아레프에게 맡겨둬야겠군. 드래곤 하트를 챙겨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미련이 생겨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작지만 그래서 더 좋았는데….” 환상일지는 모르지만 한순간 부서진 집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창문으로 스피릿과 내 모습이 비춰졌다. 행복한 모습이다. 쓰게 웃어준 나는 그만 환상에서 고개를 돌려 현실을 바라보았다. 까짓 집이야 새로 지으면 된다. 중요한 건 그 집에 스피릿이 있느냐 없느냐지. 반드시 그녀를 다시 되찾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한 나는 대파되어버린 집을 추억에 묻어두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을 몰아 이번엔 은행으로 향했다. 스피릿과 퍼피가 동행한 이상 분명히 나더러 식비를 떠받길테니 여행자금은 좀 넉넉하게 찾아두었다. 그리고 은행에 온김에 송금도 조금 하기로 했다. 광장 근처에 위치한 은행으로 들어간 나는 준수하게 생긴 은행원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통장하나를 내밀었다. “얼마나 들었습니까?” “3억 9200만 루나 입니다. 찾으실 건가요?” “5000천만 루나정도 주세요. 그리고 남은 금액은 계좌번호 입실론 901-XXX-XX로 모두 이체 해주쇼.” “예. 알겠습니다.” 은행원 바쁘게 서류를 적고 하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체 받으실 분의 이름이 제미니 리그펜타인씨가 맞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미안해 제미니. 아무래도 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좀 치사하지만 이걸로 날 잊어줘. 은행원이 끙끙거리며 들고 온 돈 자루를 챙겨든 나는 이제 마법사 길드로 향했다. 커다란 개집 안에 들어가 졸고 있는 엑셀에게 인사를 건내며 탑으로 들어간 나는 길드 안내 원인 슈에게 부탁해 아레프에게 손님이 왔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위에서 연락이 왔다. “올라오시라는 군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예. 좋은 시간 되세요.” 슈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도착한 나는 아레프의 이름이 적힌 문을 두드렸다. 루시아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전보다 머리가 길어진 것 같군. “안녕?” “어서오세요~! 주인님! 콜트씨 오셨어요!” 루시아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간 나는 저번보다 더 깨끗해진 연구실 겸 주거공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매일 청소 하나봐?” “헤헤헤, 주인님이 자꾸 어질러서요. 따라다니면서 정리하는 게 요새 일이에요.” “루시아. 자꾸 주인님이라고 하지 마요. 당신은 이제 어엿한 보통사람이라구요?” “입버릇 때문이에요. 하지만 듣기 좋잖아요?” 거대한 책장이 있는 곳에서 가슴 가득 책을 들고 나오던 아레프는 그것을 근처 테이블에 올리고는 언제나처럼 맑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여! 오랜만이군요! 그간 잘 지냈습니까?” 아레프는 날 데리고 손님접대용 소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동안 루시아가 부엌에서 차를 끓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얼굴은 잔뜩 굳히시고는?” “아. 몇 가지 부탁할게 있어서 말이야. 그나저나 요즘 연구는 잘돼?” 그렇게 시작된 내 이야기는 루시아가 차를 들고 나왔을 때 절정을 맞이했다. 루시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스피릿이 납치 당해요?!”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렇지. 이봐 아레프, 저번에 우릴 따라왔던 그 괴한들 있지? 캐슬린 그림자 기사단이라는?”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 하나의 가설을 설명했다. “내 생각에 그 사람들은 당신을 쫓아온 게 아니고 스피릿을 데리러온 게 아닌가 싶어.” “예?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녀를 잡아간 뱀파이어 놈이 스피릿을 보고 전 캐슬린 제 1왕녀라고 했거든?” 아레프와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前)?” “응, 전 캐슬린 왕족의 공주님이었대. 10년 전이라던가? 반란이 일어나서 쫓겨났다더군. 그후로 그냥 평범하게 살았다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누군가가 그녀를 찾아서 다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다나봐.”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할 시간을 그들에게 배려한 나는 헛기침을 하여 그들의 눈을 붙잡은 다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난 지금부터 그녀를 구하러 갈 거야. 아까 말했던 거 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결전병기는 국가차원에서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암시장에서도 구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마법사 길드란 게 있잖아? 어때? 여기에는 없을까?” “으음. 그러고 보니 길드 장님이 우리와 자매결연을 맷고 있는 베레타의 마법사 길드에서 우정의 표시로 한 자루 선물 받았던 적이 있긴 했어… 어, 어디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문으로 향했다. “길드 장은 꼭대기 층에 산다고 했었지? 지금 당장 담판을 지어야겠어.” 후다닥 달려온 아레프가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만두세요! 외국의 길드에서 선물 받은 칼라미티 소드를 사겠다니. 말도 안됩니다. 게다가 그런 물건은 선물 받은 입장에서 절대로 팔려고 하지 않는다구요.” “글세. 대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난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약간 붉은 기운이 감도는 돌 조각 꺼냈다. 저번에 아레프에게 주려고 드래곤 하트를 두드렸을 때 함께 떨어져 나온 조각이다. 큰 쪽이라 남겨놓고 있었는데. 이거라면 바꾸겠지. 손수건에 싼 드래곤 하트 조각을 본 아레프는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주춤거리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해서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 이거 어디서 난 거예요?” “저번에 노아의 레어에 들렸을 때 챙겨 둔 거지. 그때 당신에게 준 건 작은 쪽이었어. 어때? 이거라면 바꿀까?” 하지만 아레프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군침을 꿀꺽 삼키며 드래곤 하트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을 볼 때 루시아랑 맞바꾸자고 말하면 꽤나 고민 할 것 같다. 마침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다시 소파에 앉혀둔 다음 루시아에게 외쳤다. “루시아! 문 잠궈요! 아무도 못 들어오게!”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루시아는 문으로 쪼르르 달려가 용도를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잠금 장치를 일일이 손으로 돌리고 걸기 시작했다. 약간 당황하고 있으니 연구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던 아레프가 검 한 자루를 들고 다시 달려왔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 이거, 제가 만든 칼라미티 소드예요. 아직 실험단계에 있는 프로토 타입이라 야전용은 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쓸만할 겁니다. 어때요? 이거랑 그거 바꾸지 않으시겠어요?” “이야. 완성했잖아? 축하해. 그런데 화력은 어때?” 아레프는 약간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를 알고나서 처음 보는 미소다. 그는 칼라미티 소드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리지날에서 화력으로 밀린다면 칼라미티라는 별명을 붙이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였을 겁니다. 조심하세요. 일반 하급천사와 악마를 봉인 한 것 보다 조금 더 셀 테니까.” 그의 말에서 어떤 자신감을 느낀 나는 두말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다. 결국엔 자동석궁에 이어 칼라미티 소드까지 가지게 되는구나. 검을 든 나는 가드 부분에 있는 검정색 보석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안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이거, 안에 이상한 게 들어있는데?” “그건 개구리 심장에 드래곤 하트의 조직배열과 키메라 합성법을 응용해서 만든 특수엔진이에요. 강제로 흡수한 마나를 충격파로 바꿔서 공격에 사용하죠. 단점이라면 마나를 강제흡수하기 때문에 한 장소에서 너무 많이 사용하면 마나고갈로 인해 충격파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프로토 타입이라서 충격파가 기본적으로 최대치로 설정되어 있으니까. 기물파손용으로는 사용하되 절대 가까이에 있는 목표나 보통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마세요. 가까이에 있는 목표라면 함께 날아버릴 수도 있고 목표가 사람이라면 뼈도 추려내지 못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사용할 때가 아니면 절대로 검집에서 뽑지 마세요. 여타 칼라미티는 최고 3번까지 재사용이 가능하지만 이건 1회용입니다. 한번 검집에서 뽑아 마나 흡수를 시작하게되면 멈출수가 없어요. 그러니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호기심에 검을 뽑으려 했던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한번 뽑으면 멈출수가 없다구?! 개구리 심장에 드래곤 하트의 조직 배열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상당히 위험한 물건을 손에 쥔 것 같다. 물론 휘둘러보기 전에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꽤 든든하겠어. “그런데 키메라 합성은 금기 아니었어?” “자아와 특정욕구를 가지지 않은 무의식 무개념의 키메라 합성이라는 전제로 일부 실험을 허가받았지요.”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꽤 대단한 것 같아.” 아레프는 싱긋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대인용으로 화력을 조절하는 방법까지 소상하게 가르쳐주었다. 그의 설명을 잘 기억해둔 나는 롱부츠의 점프 스펠을 바운드 스펠로 강화를 부탁했다. 값을 치르려고 했지만 아레프는 서비스로 해줬다. “앞으로 콜트씨에겐 모든 마법문제상담 및 의뢰비를 무료로 해드리죠.” “그래서 장사가 돼?” 아레프는 씩 웃으며 드래곤 하트를 눈가에 들어 보였다. 낄낄 웃어준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어? 벌써 가시게요?” “스피릿이 납치 당했어.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짐을 챙기고 있으니 아레프가 말했다. “마법사 하나 필요 없으세요?” “왜? 도와주겠다구?” “너무 값진걸 받아서요. 무상 서비스 차원에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스피릿양이라면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난 손을 흔들었다. “아니, 생각 같아서는 데리고 가고 싶긴한데. 그 마음만 받을게. 난 루시아에게서 소중한 사람과 따스한 집을 빼앗고 싶지 않아.” 어느 틈에 다가온 루시아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레프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봐 주었다. 그때 마침 생각 난 것이 있어 그에게 물었다. “참, 마법사끼리는 서로 통신이 가능하다던데 그거 지금 될까?” “예. 길드에 등록되어 있다면 부를 수 있어요. 누굴 찾으실건데요?” 난 반신반의로 말했다. “입실론에 있는 라이트라는 이름의 마법사를 불러줘.” ========================================================================== 라이트 등장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32 “꽤 짭짤했어.” 고개를 끄덕인 아레프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루시아에게 수정구의 소재를 물었다. 창고로 달려간 루시아는 꽤 무겁다는 듯이 그걸 가지고 왔다. 테이블에 수정구를 올려놓고 한참 누구랑 이야기를 해대던 그가 나에게 손짓했다. “…예.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콜트씨! 입실론의 라이트 알트론씨 입니다.” “뭐? 어디어디?” 수정구로 얼굴을 들이미니 동그랗게 일그러진 사내가 날 쳐다보다가 반색을 했다. -우와~! 콜트! 이게 얼마만이냐?! 수도엔 언제 간거야? “오랜만이야 라이트. 잘 지내지?” 그는 하하 웃으며 자신의 일상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소릴 들었다. “아세트를 돌려보냈다고?” -응, 보냈어. 난 마법사잖아. 울면서 안가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보냈어. 방이 좀 지저분하지? 녀석은 하하 웃으며 지저분해진 자신의 방을 보여주었다. 이 자식~! 한대 때려주고 싶은데 수정이라서 참았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 하자. 어때? 마법사가 하나 필요한데. 나 좀 도와주지 않겠어?” -무슨 일인데?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만나자. 울버린에 있는 하레이 알지? 입실론에서라면 얼마 안걸리잖아? 거기로와.” -돈 많이 줘? “…매사를 돈으로 결정하는건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해.” -하하하~! 좋아. 가줄게. 그래, 어디서 기다리면 될까? “서로간의 연락이 거의 불가능 하니까. 하레이 시청에 부탁해서 내 이름으로 메모를 남겨둬. 도착하는 즉시 찾아갈테니까.” -알았다. 그럼 거기서 만나자. “그래.” 통신이 끝나고 아레프를 부르니 그도 라이트와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다음 수정구를 치웠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통신이 가능할 정도의 분이라서.” “급수는 낮지만, 그래도 실전 경험이 많은 녀석이라 할줄 아는게 많아.” “그래요? 한번 만나 뵙고 싶군요.” “스피릿을 데리고 올 때 기회가 되면 같이 데리고 올게. 아, 그동안 이거 좀 부탁해.” 난 가방에서 드래곤 하트가 든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하지만 그전에 아레프에게 맹약을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절대로 열어보지 않겠다고 맹세해 줘.” “안에 뭐가 들었는데요?” “사람 머리 같은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하여튼 제발 부탁이니 열어보지마. 루시아도 마찬가지야.” 상자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던 루시아가 나에게 혀를 빼물었다. 상자를 받은 아레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열게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게 되나봐요?” “응. 저주가 내릴 거야. 탐욕이라는 이름의 저주가.” 아레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열어보지 않겠다는 마법사의 맹약을 그에게서 받아낸 나는 한숨을 좀 내쉰 다음 가방과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레프와 루시아가 따라나왔다. “몸조심하세요.” “노력해 볼게.” 원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며 난 씩 웃어주었다. 아레프와 루시아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내려다 봐주었다. 출세했군. 생판 모르는 곳에서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생기고, 슈에게 인사를 해주고 길드를 나선 나는 시리도록 맑은 겨울 하늘을 조금 올려다보다가 여관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준비를 마치고 날 기다리고 있는 첼시아와 합류해서 장비를 점검한 다음 바로 성문으로 향했다. 밤낮으로 달린다면 까짓 하레이 정도야 닷세면 충분하다. 하지만 시기가 겨울이다 보니 눈이 많이 와서 노면이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걸어서 가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는 짜증요인이 작용했고 이것은 평소 내 혈압을 대략 20~ 30 정도 더 상승시켰다. “빌어먹을! 이 정도로 내가 포기 할 것 같아?! 다 덤벼! 얼마든지 덤벼라구!” “꺄악! 무슨 눈이 이렇게 쏟아지니!? 사람 죽겠다!” 말의 고삐를 붙잡고 푹푹 꺼지는 눈밭을 걸으며 나와 첼시아가 외친 말이다. 어째 출발부터 매끄럽지 못하구만, 그렇게 캘버린을 출발한지 이틀 뒤, 나는 까끌까끌하게 난 수염을 좀 만져보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목도리로 얼굴을 감아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첼시아는 의외로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꺼운 외투로 완전무장을 하고 눈만 내놓고 다녔다. 난 죽는다고 떽떽 거릴줄 알았는데. “어허~ 이거 왜 이래? 이쪽도 산전수전 다 격은 모험가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구.” 그녀의 말에 난 피식 웃어주었다. 하룻밤 야영에 사용했던 눈 집에서 기어나온 나는 찌뿌드드한 허리를 펴고 시계를 봤다. 아침 6시다. 죽어라 달리면 내일저녁에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겠군. 망할! 눈만 없었으면 반 정도는 주파했을 텐데. 스피릿 미안해.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푸르륵~! 꽤 피곤했는지 누워서 자던 말 녀석도 눈 집을 박차고 기어 나왔다. 음, 스피릿이 이 녀석을 뭐라고 불렀더라? 이슈리라고 했던가? 이처럼 짜증나는 겨울여행에는 말과 주인의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 밥 달라고 푸르럭 거리는 녀석의 콧잔등을 쓸어준 나는 배낭에서 여물자루를 꺼내 눈밭에 부어버렸다. 이슈리는 하얀 눈과 여물을 섞어서 씹어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나는 딱딱한 빵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씹으며 목이 막힌다 싶으면 눈 집의 귀퉁이를 뜯어서 물대신 씹었다. 그러고 있으니 어제 저녁 나와 퍼피가 매서운 바람을 받으며 쌓은 눈집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오던 첼시아가 허리를 펴고 깔깔 웃었다. “파하하하~! 우웩~! 그거 맛있어?” “시원한데? 퍼피 좀 먹을래?” 퍼피는 먹는 것이라면 뭘 권해도 잘 먹는다. 첼시아가 눈덩이와 빵을 씹어대는 퍼피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날 만나기 전에 아사할 뻔한 일이 있어서 아무거나주면 먹으려고 들어. 자꾸 그렇게 주지마! 애 배탈나면 당신이 책임 질거야?” “튼튼하기만 하구만 배탈은 무슨놈의 배탈.” 난 그러면서 눈덩이를 씹었다.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고개를 숙이고 큭큭 웃던 첼시아는 결국 허리를 숙이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눈밭에 쭈그려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나와 퍼피가 거지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파하하하하~! 정말이야. 거지 같아!” “이히히힝~!” 이슈리도 따라 웃는다. 콧김을 킁 내 뿜어준 나는 목도리를 잘 여민 다음 짐을 챙기고 말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눈밭을 걸어나갔다. 퍼피는 헥헥거리는 주인을 챙겨서 뒤따랐다. 겨울의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행객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들도 백색악마가 지상으로 내려온 시점에서는 영업을 중단하고 각자의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물론 인간도 마찬가지고, 혹한기는 뜨거운 피를 가진 생물에겐 여러모로 고역인 기간이다. 하지만 이럴 때도 하얀 눈밭에 어색한 발자국을 찍으며 밖으로 나오는 녀석들이 있다. 가을에 비상식량을 비축해두지 않은 게으른 녀석들이지. “케르륵! 인간이다!” “오~! 인간! 케륵! 킁킁~! 남자 둘에 여자 하나인가?” “덩치큰 말도 있다! 한 달은 먹을 수 있겠다!” 오크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눈 속에 들어가 있던 놈들이 우리가 다가가자 갑자기 튀어나왔다. 가죽으로 옷을 해 입긴 했지만 추위가 추위다 보니 녀석들도 꽤나 움직임이 둔해 보인다. 네 다섯 마리 정도인가? 소규모 집단이군. 이 근처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강도질을 해가며 사는 것 같은데. 현상금은 있을까? “퀘! 인간! 가진 거 다 내놔라! 오늘 따라 인간남자 고기가 굉장히 맛있어 보인다! 평소엔 질겨서 안 먹지만, 특별히 먹어주도록 할까? 케케케케~!” 말 위에 앉아서 녀석들을 내려다보았다. 목도리에 두꺼운 방한복까지 입고 있어서 말에서 내려 놈들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많지 싶다. 퍼피가 움직이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니 이것들이 겁먹을 줄 알고 자기들끼리 히히덕 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옆에 서있던 첼시아가 날 힐끔 쳐다보았다. “어이, 대장. 저것들 어쩔꺼야?” “귀찮아.” 작게 중얼거려준 나는 말안장에 매어놓았던 자동석궁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장전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릭~! “케~! 겨우 석궁 하나 가지고 우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케케케! 쏴라! 하지만 그 다음 너희는 죽는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오크 놈이 자기 가슴을 탕탕 치며 외쳤다. 콧김을 뿜어낸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퉁퉁퉁퉁퉁퉁퉁~! “케엑! 켁! 이, 이게 뭐야!?” “케르륵~!”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석궁은 고장한번 없이 깔끔하게 작동했다. 대략 50발정도 난사하니 놈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끙~!” 퍼석~! 뽀드득! 뽀드득! 힘겹게 말에서 내린 나는 놈들의 시체를 확인했다. 웃기는 놈들이다. 겨울사냥에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니지? 쓸데도 없으면서. 놈들의 옷가지와 짐을 뒤져 돈을 찾아내고 있으니 퍼피가 두꺼운 가죽모포를 찾아내 그것을 잘 갈무리했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있던 첼시아가 그걸 보고 시큰둥한 음성으로 말했다. “뭐야? 콜트씨처럼 돈이나 좀 주울 것이지 그런건 뭐하러 챙기니? 지저분한 모피 같은 건 버려.” “아니요. 밤에 잘 때 춥습니다. 마스터. 이거면 노숙할 때 꽤 따스하게 잘 수 있어요.” 첼시아는 자신이 밤마다 안아주는데도 그게 부족했냐며 퍼피를 몰아세웠고 퍼피는 울상을 지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퍼피 불쌍하다. 주인이 저런 변태라니. 말을 안해서 그렇지 첼시아는 요전 노숙 때 퍼피를 가지고 놀다(?)가 나에게 한번 들켰었다. 세상에 그 추운데서 애을 반쯤 벗겨놓고 마구 더듬어대다니,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첼시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녀석의 등에 달라붙어 그의 가슴을 더듬으며 목과 귀를 연신 깨물어댔다. 네가 너무 시끄럽게 구니까 콜트씨가 깨어났잖아. 라는 둥의 헛소리를 해대며. …결국 민망해진 내가 신경끄고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사건은 무마됐지만 말이다. “하, 하지만 따뜻할 겁니다.” “에이, 알았어. 가지고와.” 첼시아는 마지못해 허락하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에 올랐다. 그리고 놈들에게서 빼앗은 돈주머니를 들었다. “꽤 짭짤했어.” “잘됐네. 다음 마을에서는 그걸로 여관비 내면 딱이겠다.” 순간 기분이 나빠져서 난 그걸 도로 오크들에게 던져줄 뻔했다. 우리는 다시 눈밭을 출발했다. 뒈져버린 오크시체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늑대들이 처리해 줄 거다. 현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미친 듯이 하레이로 달려가야 하지만 지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겨울 여행을 즐기고 있다. 마누라가 될지 모르는 여자가 악당들에게 잡혀갔는데도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간단하다. 첫째. 그녀는 어쨌든 공주님이다. 그렇게 심하게 다루지는 않을 거다. 둘째. 이런 겨울여행에서 스피릿을 찾아야한다는 맹목적인 목적만 가지고 미친 듯이 달려간다면 중도에 얼어죽기 십상이다. 그럼 스피릿을 되찾기는커녕 그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쓸쓸하게 늑대 밥이 될 거다. 그러긴 싫다. …물론 머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심장은 그렇지 못하다. 깨어난 이후 계속해서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초조함과 불안함이 밀려온다. 최근 들어 푹 자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 또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 겨울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참고로 저는 눈을 무척 싫어합니다. 왜냐구요? 군대 한번 가보세요. Reload Running Fire: 33 “경험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 “젠장. 스피릿, 살아만 있어 줘. 부탁해.” “걱정마. 당신 노예는 지금쯤 벽난로 가에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있을테니까. 그래도 공주님이었으니까 험하게 다루진 않을 거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스피릿은 추운 거 싫어한단 말야.” 옆으로 와서 하얀 눈을 물대신 베어먹는 첼시아를 쳐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오크 시체들을 뒤로 하고 다시 하얀 눈밭을 걸어나갔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동쪽 울버린 지방이기 때문에 여기보다는 눈이 적을 거다. 그럼 말도 달릴 수 있을 테니 하레이까지 단숨에 돌파할 수 있어. 그리고 마을에 도착하는 즉시 라이트와 만나고 준비를 마친 다음 밤에 몰래 영주의 성으로…. “하, 나도 참.” “왜 그래?”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첼시아의 물음에 고개를 저어주었다. 스피릿과 관련된 온갖 해괴한 상상을 잊기 위해 전부터 짜놓았던 추적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며 길을 눈밭을 걷던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계집애 하나 때문에 어디까지 와버린 거냐? 빌어먹을… “아아~ 속썩이는 바보 노예보다는 담배피는 미인 주방장이 더 보고 싶은걸?” “미인 주방장? 설마! 고향에 숨겨둔 여자인거야?” 나는 대답대신 씩 웃어버렸다. 첼시아가 추궁해왔지만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이 말을 스피릿이 들었다면 울상을 지으며 매달렸을 거다. 제미니도 마찬가지겠지. 식칼을 들고 달려왔을 거야. 고개를 숙이고 좀 킥킥 웃어준 나는 점심도 마상에서 해결하며 저녁때까지 지루하게 걸었다. “푸르르륵!” “아악! 이제 더 이상 못 걸어! 쉴거야!” “그래 쉬 자. 오늘도 수고들했다.” 말에서 내린 나는 안장에 올려두었던 짐을 마저 풀어내렸다. 그리고 몇 개 남지 않은 말 여물자루를 꺼내 고운 눈밭에 뿌려주었다. 녀석은 게걸스럽게 그것을 씹어먹기 시작했다. 첼시아가 그걸 보고 말했다. “역시 말은 캐슬린 산이야. 보통 말은 이렇게 해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낄낄 웃어준 나는 퍼피를 불러 어두워진 들판을 쏘다니며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한덩이, 두덩이 세덩이… 거의 열덩이 정도의 눈을 뭉쳤을 때 나와 퍼피는 녹초가 되어있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이걸로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뭉친 눈덩이를 둥글게 놓고 그 위에 다시 눈덩이를 얹으면 첼시아가 눈으로 빈틈을 매꿨다. 마지막으로 퍼피가 천장과 입구를 담요로 가리자 훌륭한 바라크가 완성됐다. “멋지군. 오늘도 불침번 걱정 없이 편히 잘 수 있겠어.” “매번 수고가 많아.” 첼시아가 히죽 웃으며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어이어이. 가끔은 좀 거들어.” “퍼피가 내 몫까지 하잖아? 그리고 나도 일 거들었다구?” “겨우 눈 구멍 조금 막은 것 가지고 생색내지마.” 내가 짐을 들고 눈으로 만든 바라크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자 먼저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던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 혀를 길게 빼물어주었다. 한숨을 내쉬며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주자 퍼피가 들어오더니 낮에 오크들에서 빼앗아온 가죽담요를 바닥에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탄성을 지르며 냉큼 그위로 올라간 첼시아는 환하게 웃었다. “이야~! 꽤 괜찮은데? 폭신폭신하다?” “그렇지요?” 퍼피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램프를 꺼내 불을 붙인 나는 밖으로 나가 말들을 끌고 들어왔다. 말도 추위를 타는데다 추운 바라크 안의 공기를 데우기 위해서다. 게다가 눈집을 일부러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말 두 마리 정도는 들어와도 상관없다. “갑자기 마굿간에 들어온 것 같아.” “얼어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있어.” “설마? 이렇게 껴안고 잘건데 얼어죽어?” 첼시아는 옆에서 저녁으로 먹을 뜨거운 스프를 끓이던 퍼피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버둥거리던 퍼피는 울상을 지으며 축 늘어졌다. 꽤 익숙한 것 같다. “퍼피 불쌍하다. 주인님이 너무 변태스러워.” “하~! 변태면 어때? 노예는 자길 사랑해주는 주인님을 좋아해. 그렇지 퍼피?” 곰인형 마냥 혀를 빼물고 그녀에게 안겨있던 퍼피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쩝, 그래, 그런데로 잘 어울린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옆에 스피릿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인지하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중증이군. 미치겠다. 이럴 때는 그저 많이 먹고 푹 쉬는 게 최고야. 램프 불빛에 의지하여 배낭에서 빵과 쿠키를 꺼내 우걱우걱 씹어대던 나는 마침 목이 말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이 있는 눈 벽을 뜯어내 한입 베어 물었다. 시원하고도 차가운 얼음이 입안에서 촤르르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 뿐이지. 실제로는 입안이 얼얼하다. “…어떻게 그걸 뜻어먹을 생각을 다했니?” “위기에 몰린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하는 법이거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내밀던 첼시아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거 나 웃기려고 한 말이야?” “설마, 이건 내 일상이야.” 갑자기 첼시라는 폭소를 터트렸다. 그녀의 옆에 바싹 붙어낮은 퍼피는 말들에게도 빵을 던져주었다. 피곤했던지 개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바닥에 누워 우리가 밥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녀석들은 빵조각이 날아들면 머리를 드래곤의 그것처럼 휙휙 움직여 떨어진 것들을 낼름낼름 잘도 주워먹었다. 으음, 배가 고팠던 게야. 한바탕 크게 웃은 첼시아가 그걸보고 말렸지만 난 괜찮다고 해주었다. “내일이면 마을에 도착하니까. 이 정도 사치는 괜찮지 않을까?” “그래? 내일이면 마을이야? 아으으~! 이 생활 언제 끝나니?” “따라오겠다고 한게 누군데? 돈 받았으면서 내빼기만 해봐. 현상금 걸어버릴거야.” “칫~! 못된 의뢰인이네.” “당연하지.” 피식 웃어버린 나는 다시 빵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쿵~! 사사삭?! “크아아아아~!” 쿠웅~! 윽! 뭐냐!? 오크?! 트롤?! 뭔가가 부딧혔는지 바라크가 충격을 받아 벽이 조금 흔들렸다. 긴장한 우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각자의 무기를 뽑아드니 이제 근처 벽에서 뭔가가 파고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삭삭삭! 놀란 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퍼피가 램프를 들고왔다. 난 양손으로 검을 잡고 벽을 파고 들어오는 놈을 주시했다. 트롤은 아니군! 오크인가? 퍼억! 뿌드득?! 마침내 눈 벽이 뚫리고 뭔가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난 칼을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추워서 달려든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난 오크와 밤을 샐 생각이 없어! 요절을 내주마!” “아! 자, 잠깐만 기다리게!” 굵직한 목소리. 이게 뭐야? 퍼피가 램프를 가까이 들이대니 회색 수염을 가진 탄탄한 몸의 드워프가 하얀 눈을 잔뜩 뒤집어쓴 수염과 머리를 하고서 두 손을 흔들어댔다. 첼시아가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드워프으?” “그, 그래. 그러니 칼 좀 내리고 말하세.” 난 일단 칼을 내렸다. 하지만 집어넣진 않았다. 드워프 강도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만 있는 바라크에는 뭔 일 이슈? 드워프 영감님?” “허? 바라크? 이 움막에 붙인 이름인가?” 나와 퍼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내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남이야 나뭇가지로 움막을 만들어서 통나무집이라고 이름을 붙이던 눈 집을 쌓아서 바라크라고 부르던 무슨 상관이요? 용건만 간단히 하고 빨리 나가주쇼. 댁이 벽에 구멍을 뚫어버려서 찬바람 들어오니까.” “젊은 놈이 말버릇 한번 고약타!” “짧지 않은 인생. 살아온 나날이 순탄치 않다 보니 좀 삐뚤어지게 됐수다. 영감님 아들놈 아니니 상관없지 않수?” 드워프 영감은 그냥 콱 받아버릴까 하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뭔가 퍼뜩 생각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수염과 머리카락에 붙은 눈을 털지도 않고 말했다. “내 정신 좀 보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봐! 자네들. 나는 네모 가네프라고 하는 드워프 일세. 자네들은 이름이 뭔가?” 남의 이름을 알고자 할 때는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예의다. 게다가 나보다 훨씬 연상인 어르신이 먼저 소개하는 데야 계속 싸가지 없게 굴 수는 없지. 난 팔짱을 끼며 건들건들하게 대답했다. “콜트 슈발츠라는 인간이요.” “첼시아 발렌타인입니다. 이쪽은 제 노예 퍼피.”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그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마주 고개를 끄덕여준 드워프 영감은 이렇게 말했다. “사정은 나중에 설명하겠네. 그보다 갑작스럽겠지만 거기 처녀에게 필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자네 혹시 애 받아본 적 있는가?” “어머나?” 짐을 정리해서 네모라는 이름의 드워프 영감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우리가 만든 바라크보다 10배는 더 좋아 보이는 눈 집이었다. 진짜 바라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주변의 눈이 싹 치워져 있는 것을 보니 근방의 눈을 죄 긁어다 저걸 만들었나보다. 손재주는 드워프를 따라올 종족이 없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보군. 어쨌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바라크의 가장 안쪽에 웬 20대 아가씨가 하얀 다리를 드러내고 바닥에 누워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들춰진 원피스 안에 보이는 속옷은 터져 나온 양수 때문에 붉은 색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하얀색인 것 같다. 헝크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와있는 눈은 절망과 공포로 적절히 물들어 희망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깜짝 놀란 첼시아는 서둘러 자신의 배낭을 들고 가서 여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그녀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린 나는 드워프 영감의 멱살을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애 아빠요?” “이놈이?! 말이면 단 줄 아느냐!” 화가 난 드워프 영감이 주먹으로 내 턱을 치려했지만 난 잽싸게 그의 멱살을 놓고 밀어버렸다. 그래서 네모는 헛손질을 하며 으르렁댔다. 첼시아가 응금처치를 하는 동안 난 간단하게 설명을 요구했다. 듣기로 그는 급한 일 때문에 광산으로 가는 도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눈밭에서 쓰러져 있는 어떤 여자를 발견했는데 그녀는 임신 중이었고, 그래서 서둘러 눈과 추위를 피할 곳을 만들어 옮겨놓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양수가 터져 버렸다고 한다. “그거 왜에는 다른 건 없나요? 이를테면 저 여자의 이름이라든가 하는 거.” “없어. 아까까지 기절해 있다가 갑자기 깨어나더니 진통을 호소했더군. 그런데 어떤가?” “얼어죽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첼시아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씩씩 한숨을 내쉬는 여자를 쳐다보며 마주 한숨을 내쉬었다. “칫~! 일단 살려놓고 보자. 첼시아 일어나. 퍼피, 담요하고 히트버너 꺼내라.” “뭘 하려는 거야?” “자리를 새로 만들려는 거야. 저래 가지고서야 치료는커녕 다른 것도 못하겠다.” 고개를 돌린 나는 가지고 온 물건들을 꺼냈다. 여자는 침낭으로 보이는 것에 눕혀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차단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퍼피가 야삽으로 땅을 판 곳에 히트 버너를 던져넣은 다음 흙을 덥고, 그 위에 다시 오크들에게서 뺏어온 가죽모포를 깔았다. 그리고 다시 침낭을 올린 나는 모두와 함께 그곳에 여자를 눕혔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요.” “어머, 콜트씨 대단한 걸? 어떻게 땅에 히트버너를 묻을 생각을 다했어?” “경험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 ========================================================================== 사실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34 “꺄아아악?!” 헛소리를 좀 지껄여준 나는 우리가 서있는 바라크의 용적을 가늠해보고 퍼피에게 밖에 세워놓은 말을 안으로 끌고 들어오라 시켰다. 네모가 인상을 찌뿌렸다. “여기가 마굿간 인줄 아냐?” “실내 공기가 너무 차가워요. 공간도 넓은데 뭐 어때요? 저쪽은 산모라고요. 산모!” 내가 산모를 언급하자 그는 할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퍼피가 말을 안에 들여놓는 동안 나는 여자가 누워있는 곳으로 가서 그녀의 원피스를 걷어올렸다. 여자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추위에 굳어버린 그녀의 몸을 주무르고 있던 첼시아가 반색을하며 날 쳐다보았다. 음, 아까보다 양수가 더 많이 나오고 있다. “당신! 지금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무슨 짓이야?!” “에이~! 시끄러, 조용히해. 어이 영감님. 여벌옷이나 수건 있으면 좀 줘봐요.” 옆에서 첼시아가 시끄럽게 떽떽 거리는 것을 무시한 나는 드워프 영감을 쳐다보았다. 그는 얼른 자기 짐에서 큼직한 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잘 접어 양수와 피가 흐르는 여자의 엉덩이 아랫부분에 댄 나는 그녀가 입고 있던 속옷을 칼로 찢어 벗겨내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어, 어이 뭘 알고나 있으면서 그러는 거야?” 내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던 첼시아가 식은 땀을 흘리며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왔던 퍼피는 내가 웬 아가씨의 치맛자락을 들추고 이것저것을 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가 첼시아가 이상한 얼굴로 뒤돌아보자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안해져서 벽을 쳐다보고 있던 네모가 말했다. “허, 흠. 잘 모르겠지만 꽤 능숙한데. 자네 아이 받아본 경험이 있는가?” “아니, 애인 속옷은 많이 벗겨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에요.” 그러자 네모가 벽에서 고개를 돌려 눈을 부라리며 날 노려보았고, 그의 옆에 앉은 첼시아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발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영감님이 받으실라우?” “…수고해주시게.” 이마를 찌뿌린 네모는 고개를 돌리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고 난 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어이, 아가씨. 오늘 처음 만났는데 다짜고짜 치마를 걷어올리고 속옷을 벗겨내서 미안하게 됐시다. 이렇게 눈밭에서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잘 부탁합니다. 얼떨결에 아가씨의 중요한 곳을 보게된 이 불초한 소생은 콜트 슈발츠라고 하는 모험가입니다. 눈밭에서 야영하다가 쿠키 냄새를 맡고 찾아온 저기 드워프 영감님에게 끌려왔지요. 영감님은 네모 가네프라고 하는 드워프인데. 눈밭에 쓰러져 있는 당신을 발견해서 바라크를 지어서 옮겼어요. 나중에 고맙다고 하십쇼. 자세한 것은 일이 끝난 뒤에 하기로 하고 일단 이름이나 좀 압시다. 아가씨 이름이 뭐요?” “하악, 하악….” 얼굴을 구기며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눈을 떴다.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그녀는 맑은 초록색 눈동자에 밝은 금발을 가지고 있는 꽤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였다. 그런데 일찍 결혼을 해서 그런지 자세히 보니 좀 어려 보인다. “아, 안젤라….” “안젤라? 안젤라가 당신 이름입니까?” 여자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거이거, 궁금한 게 너무너무 많지만 일단 애부터 받고 봐야겠군. 그런데 애를 어떻게 받더라? 잠시 생각에 잠긴 나는 고개를 돌리고 첼시아를 바라보았다. “어머! 처녀를 무슨 그런 눈으로 쳐다보니!?” “아니, 같은 여자니까 말야.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아이 낳아본 적이나 받아본 적 없어?” 첼시아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아이라니! 당치도 않다구! 물론 받아본 적도 없어.” “그럼 이제부터 경력을 쌓아보는 건 어때? 늙어서 모험가 일 못하게 되면 산파로 전업하는거야. 안그래도 노인들의 취업이 힘든데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게 좋은 생각이지 않아?” “…차, 참관으로 만족할래. 나 여자 엉덩이에서 아기가 나오는 모습을 보면 놀라서 기절할지도 몰라. 처음보는 여자 속옷도 아무렇지 않게 마구 찢어발기는 간 큰 콜트씨가 좀 맡아줘.” “칫~!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었는데 말야.” “미안하게 됐시다요.” “저, 제, 제가 받을까요?” 네모를 비롯한 나와 첼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얼굴이 핼쓱한 퍼피군이 서서 바닥에 누워 헥헥 거리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코를 조금 벌렁이며 손을 저어흔들었다. “됐어. 너도 이 아가씨 엉덩이가 두배로 커지면서 아이가 나오는 모습을 보면 기절할 것 같아. 그냥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내가 받을란다.” 주변 동료들의 도움을 포기한 나는 어디서 주워들었던 것을 대충 끼워 맞춰 그녀에게 적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우리끼리 해야 한다. “이봐요. 안젤라? 아무리 봐도 당신 초산 같은데. 좀 힘들겠지만 우리 힘을 합해서 이 난관을 극복해 봅시다. 자,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해요. 사람의 몸이란 머리가 몰라도 몸이 알아서 할 건 다 하니까. 당황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어요. 알겠죠?” “예…. 예.”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성이 참 곱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들의 사투는 시작됐다. 첼시아에게 히트버너로 뜨거운 물을 끓이도록 지시한 나는 그것을 산모에게 조금씩 먹여가며 그녀의 분만을 유도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잘 되지 않았고, 그래서 힘들었다. 우리들은 처음 아이를 낳는 입장과 처음 아이를 받는 입장이 되어 정말 눈물나게 고생했다. 그러다가 거의 새벽 무렵, 밤을 새우는 진통과의 사투 끝에 결국 그녀는 순산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내 두손 위에 올려진 조그만 핏덩이가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거다. 게다가 숨도 쉬지 않았다. 몸은 벌써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 이게… 이게 뭐야?!” “뭐야? 왜 그러나?” 안젤라가 신음을 흘리면 마치 자기 아내인양 깜짝깜짝 놀라며 걱정을 해대던 네모는 눈에 뛰게 당황했다. 사람의 자식인지도 모를 핏덩이를 가슴에 안은 나는 녀석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다. 그래서 그 조그만 입술에 대고 인공호흡도 해보고 작은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러도 봤다. 하지만 남은 것은 입가와 손에 묻은 핏자국뿐이었다. 거의 30분 동안 정신없이 아기를 안고 미친 짓을 하던 나를 보다못한 첼시아와 퍼피가 말리기 시작했다. “그만둬. 그 아기는 이미….” “이거 놔! 살려야해! 어떻게 태어난 녀석인데! 퍼피! 너 이 새꺄! 그런 표정하지마! 죽여버린다!? 씨발! 포션 가진거 내놔봐! 얼른!” 옆에 주저앉아서 울상을 하고있는 염병할 노예녀석의 멱살을 붙잡고 욕설 내뱉고 있는데 그때 안젤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 아기는…?” 순간 바라크 안으로 무서운 정적이 흘렀다.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아기를 바라는 산모의 젖은 눈이 저렇게 무서운 것인줄은, 턱을 딱딱 부딪히며 한참 머뭇거리고 있는데 첼시아가 나서서 내 품에 안겨있던 핏덩이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핏덩이를 수건에 싸서 그녀의 옆에 놓아주었다. 아이를 낳은 직후라 그런지 안젤라는 정신이 없어서 아이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손가락으로 녀석의 얼굴을 만져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퀭한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볼과 눈이 쑥 들어간 네모가 힘없이 서서 날 쳐다보고 있다. 퍼피녀석은 아랫입술을 부들부들 떨다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던 첼시아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노예의 불성실한 행동을 그저 녀석의 등을 쓸어주는 것으로 눈감아주던 첼시아도 그렇게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뭔가 이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본 것 같다. 고개를 돌린 나는 그나마 사람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네모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영감님. 오늘 나 내 인생 중에서 가장 엄청난 경험을 했는데.” 네모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자네 탓이 아냐. 미숙아로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산달이 더 남은 것 같은데. 아이를 낳아버렸어.” “씨발, 남편 되는 새끼는 뭐 하는 자식이길래 자기 여자를 이런 곳에 버려 둔 거야? 더구나 임신한 여자를 말이야.” “여행을 나왔다가 겨울 몬스터들에게 당한 것은 아닌가 짐작하고 있네만.” “습격을 당한 흔적이 있었습니까?” 네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없었네. 내가 발견 한 거라곤 저 아가씨 손등에 있는 문신일 뿐이야.” 갑자기 가슴이 뜨끔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나는 네모를 올려다보았다. “문신?” “노예들에게 박아두는 문신 말일세.” “문신이라고?” 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보니 첼시아가 안젤라가 누워있는 곳으로 기어가 털가죽 담요를 들어서 그녀의 손을 살폈다. 그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조그만 등을 부들부들 떨더니 잠시 후 가면을 쓴 것 같은 쌀쌀 맞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딴에는 고생했는데 노예라구? 아~ 뒷골 땡겨, 바람 좀 쐬고 올게. 퍼피, 따라와.” 퍼피는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을 훔쳐보다가 주인의 부름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담요로 바람을 막아 문으로 삼고 있는 곳을 걸어나가는 그들을 쳐다보던 나는 머리가 슬그머니 아파온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담요밖으로 나와있는 하얗고 작은 속에는 정말 네모 말대로 노예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를 까득 깨물고 담요를 다시 덮어준 나는 안젤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한 양 같은 얼굴이다. 한때 노예였던 루시아가 약간 독기에 찬 눈빛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안젤라는 세상에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아직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아 그녀가 어떤 성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첫인상을 볼 때 그렇다. 물론 이것도 내 가치기준에 따른 섣부른 판단에 지나지 않지만, …제발 부탁이니 내 상상이 틀렸으면 좋겠다. “이봐. 왜 그러나? 알아낸 게 있으면 좀 가르쳐 주게.” 갑자기 쌀쌀 맞은 표정을 지으며 나가버리는 첼시아를 쳐다보던 네모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고개를 푹 숙인 나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 정확한 건 아니니까. 나중에 이 아가씨 깨어나면 그때 말씀드리죠.” 네모는 입맛을 쩝 다시고는 반대편 벽으로 가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지. 사과해야겠군. 갑자기 끌고 와서 미안하게 됐네. 난 아기를 받을 줄 몰라서 말야.” “됐시다. 인연이 있어서 만나게 된 여행자들이니 언젠가는 다시 헤어지겠지. 서로 통성명만 한 걸로 족합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젊은 놈이 싹수가 노랗구나. 너 이놈, 친구 없지?” “싹도 틔우지 못한 버러지 같은 놈은 아니지 않수? 참견 마십쇼. 그나저나 슬슬 자두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네모는 말도 하기 싫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지만 수면까지 방해하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바닥에 앉은 채로 선잠을 잤다. 이렇게 라도 자두지 않으면 내일 행동하는데 지장이 많기 때문이다. 첼시아와 퍼피는 알아서 들아올거다. 자기들이 목숨걸고 살리려던 것이 노예라서 그런 행동을 보인건가? 모르겠다. 옛날에 배신이라도 당했었나보지. 깊게 생각하니 머리 아프다. 그냥 잠이나 자자. 그대로 한 4시간 졸았을까? 내심 참새의 지저귐으로 잠에서 깨어나길 원했건만 내 잠을 깨운 것은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꺄아아악?!” …봤군. 눈을 뜬 나는 하품을 크게 한 다음 고개를 돌려보았다. 노예주제에 가장 상석에 자리를 잡은 안젤라가 아기를 넣어두었던 수건을 가슴에 안고 눈물 콧물 다 짜내며 엉엉 울고 있었다. 내 옆 자리에서 담요를 덮고 노예의 가슴에 안겨 따스하게 잠들어있던 첼시아도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하지만 질질 짜는 녀석에게 차마 험한 말을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 첼시아는 자기 노예를 침대로 사용합니다. Reload Running Fire: 35 “그러니 그건 모두 잊어.” “이런 경우 한두번 보는 것도 아니잖아? 신경꺼.” “예, 예에….” 고개를 돌리고 절망하는 그녀를 안스러운 듯이 쳐다보던 퍼피는 우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기 가슴에 안겨 잠을 청하는 주인을 위해 아래로 쳐진 담요를 들어 그녀의 어깨위로 덮어주었다. 아까는 걱정되서 죽을 것다는 얼굴이더니 이제는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이구나. 뭔일이 있긴 있었나 본데? 눈을 반쯤 뜬 부스스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던 나는 거창하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300년은 족히 묵어 보이는 드워프 영감이 비지땀을 흘리며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보는 바와 같이, 각 종족에는 약간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엘프가 적을 친구로 만드는 상냥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드워프는 정에 약한 면을 보인다. 특이나 그들은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 그게 처음 보는 이종족의 여자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다. 사생아를 낳아버린 산모의 슬픔은 깊디깊은 심연의 터널을 램프와 곡괭이에 의지해 나아가는 노장 드워프의 두꺼운 마음의 벽도 단숨에 녹여버린 것이다. “으아아앙~! 앙앙앙~! 아아앙~! 내, 내 아기가…! 내 아기가아!” “이, 이보게 처녀. 울지마. 이 녀석은 죽은 게 아냐 지, 지금, 지금… 아, 그래 그냥 자, 자고 있는 거야. 그래 자고 있는 거라구.” 어색한 거짓말에 엉망이 된 얼굴로 울고 있던 안젤라는 훌쩍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모는 자신의 거짓말이 먹혔다는 것에 혼절하고픈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잃은 산모는 필사적인 거다. 거짓말도 믿어버릴 정도로, “훌쩍…. 어, 저, 정말이죠? 정말 자고 있는 거죠…?” “무, 물론이지.” “멍청하긴, 그게 어디 자는 걸로 보여? 보면 몰라? 죽었어. 당신 아기는.” 네모가 고개를 돌렸다. 난 처음으로 드워프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욕설을 내뱉지 못했다. 왜냐면 죽은 아기의 시체를 끌어안고 목을 놓아 울어버리는 안젤라 덕분이다. “으아아앙! 엉엉엉~!” 나에게 화를 내려던 네모는 움찔하며 안젤라를 돌아보았다. 난 그의 어깨를 붙잡아 엄지손가락으로 밖으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 이럴 때 윽박질러 봤자 귀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스피릿 녀석에게 당하면서 배운 거지. 밖으로 나온 네모는 담배쌈지를 꺼내더니 파이프에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쑤셔 넣고 불을 붙였다. 구수한 담배연기가 입김과 섞여 하얀 벌판에 뿌려졌다. 제미니에게서 나던 담배냄새가 그리운데. “네놈. 왜 그런 말을 대 놓고 말한 거냐?” “그럼 돌려서 말해요? 어제 죽을 고생을 해서 낳은 아기가 사생아였다는 걸?” 고개를 돌려보니 첼시아가 담요를 뒤집어 쓴 채로 걸어나오고 있다. 네모는 이마를 구겼다. 난 팔짱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첼시아는 눈썹을 세우며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노예 주제에 되게 시끄럽게. 무슨 벼슬했다고 아침부터 지랄이야? 자기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 잠도 못자게.” “좀 봐줘. 죽은 아기를 낳았다구.” “어차피 주인이랑 뒹굴다가 생긴 녀석겠지. 흥. 바보 같으니. 그건 노예 잘못이야.” 첼시아의 말에 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스피릿도 만약에 나 없이 눈밭에서 아기를 낳으면 저런 소릴 듣게 될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네모가 버럭 화를 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게야! 자네들은 불쌍하지도 않아!? 죽은 아이를 껴안고 우는 저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해요? 뭐가? 저건 노예라구요. 노예, 무슨 짓을 당하든 주인이 아닌 이상 나와 상관없다구요.” “으어억!” 남자였다면 주먹이 날아갔지만 여자니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네모는 몸을 돌리고 괴성을 질러댔다.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어버렸다. 첼시아의 옆에 서있던 퍼피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옆에 서있었다. 자기도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긴한데 노예주제에 주인의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유없이 사람이 사람을 미워할리는 없다.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서 물어보도록 하고,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바라크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꽤 따스해져서 그런지 그가 만든 바라크가 서서히 녹고 있었다. “오래가진 못하겠군. 그나저나 어쩔 겁니까?” “뭘 말이냐?!” 혼자서 발악을 하던 네모가 으르렁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난 아직도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등뒤의 바라크를 엄지손가락을 가르켰다. “물에 빠진 사람 살려냈으니 보따리 찾아줘야 할거 아뇨?” “이놈이! 지금 나에게 덮어 쒸우겠다는 말이냐?! 네놈도 옆에 있었잖아! “아기 받아줬으면 된거 아뇨?” “크악! 이놈 말하는 것 좀 보게! 어이! 처녀! 자네도 뭐라고 말 좀해봐!” “난 몰라요. 바보 같은 노예 년 하나 얼어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첼시아가 계속 삐딱선을 타고 이야기를 해대자 결국 네모가 폭발했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우리들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야! 이 놈들아! 네놈들 어머니는 이런 너희를 낳고도 미역국을 드셨더냐?! 아버지는 예쁜 아들딸년 낳았다고 온 동네 자랑하러 다니셨고! 네 녀석들 부모님의 얼굴이 궁금하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들아!” 그를 잠시 쳐다봐 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나 낳다가 죽어서 미역국은 구경도 못했을거요. 아버지는 13살 때 몬스터 잡으러 갔다가 뒈지시고, 그때까지 날 키워준 엘프노예는 아버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노예상에 팔아넘긴 뒤로는 소식이 끊겼수. 더 궁금한 거 있으쇼?” 이어서 첼시아가 팔짱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난 빈민가 출신 고아에요. 부모는 모르겠어요. 키워준 사람들 말로는 사창가에서 간혹 아기를 버리러 오는 일이 종종 있어서 나도 그런 종류가 아닌가 하던데. 그래도 딴에는 어린 마음에 어디 귀족집에서 날 찾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꿈도 꿨었죠. 하지만 16살 겨울에 너무 배가 고파서 지나가던 남자에게 처음 몸을 판 이후로 그런거 신경쓰는 짓을 그만 뒀어요. 까짓 출생이 무슨 상관이에요?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아니에요? 에이~! 씨발, 아침부터 기분 X같네. 나 머리 좀 식히고 올게.” 첼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서려있었다. “퍼피! 이리와!” 한참 멀어진 곳에 쭈그려 앉아있던 그녀가 고함을 빽 지르자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퍼피가 후다닥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눈바닥에 퍼질러 앉아있던 첼시아는 그런 퍼피를 덥썩 끌어안고 움직이질 않았다.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한숨을 조금 내쉰 다음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그를 쳐다보았다. “만족하십니까? 우리들도 그렇게 편하게 세상을 살아온 것들이 아니랍니다. 영감님.” 네모는 황망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쯤 바라크 안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기지개를 켜고 목을 좌우로 좀 흔드는 걸로 아침 체조를 마무리한 나는 바라크 안으로 들어갔다. 네모는 그때까지 첼시아들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좀 복잡하겠지. 그러니 함부러 남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돼. 아무생각 없이 살 것 같은 녀석들에게도 자기 삶이 있고, 방식이 있고, 생각이 있고, 추억이 있거든?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구. 그렇지. 오랜만에 훈훈한 인심의 고향에나 돌아가 볼까? 복수나 할 겸 말이야. 안으로 들어가니 안젤라는 벌겋게 변한 얼굴로 이제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주저앉은 나는 배낭을 끌어와 빵을 꺼내며 말했다. “아주 골고루 하는 구나. 주제 넘는 짓 그만하지 못해?” 손에 든 빵을 반으로 쪼개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안젤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손을 뻣은 나는 그녀의 가슴에서 강보에 싸인 아기 시체를 빼앗았다. 안젤라가 빠르게 반응했다. “아! 아아~!” “손놓지 못해?” 짜악! 눈 딱 감고 뺨을 한 대 갈겨주자 안젤라는 금세 훌쩍거리며 겁먹은 강아지의 시선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딱딱한 표정을 지은 나는 손에 들려있는 강보를 내 다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강보자락을 풀어내 밖으로 나와있는 아기 얼굴을 덮어버렸다. 안젤라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기어와서는 나에게 매달렸다. “아~! 안돼…! 안돼요! 내, 내 아기! 내 아기를 돌려주세요!” 이빨을 드러낸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내 가슴을 붙잡고 매달리는 그녀의 고운 이마에 박아버렸다. 꿍! “아악!” “지랄하지 말고 가서 누워. 이 병신아. 골반도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은 주제에 어디서 나서는 거야? 죽고 싶어?” 하지만 쓰러진 안젤라는 이마를 붙잡고 훌쩍이기만 할 뿐 자리로 가서 누우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단검을 뽑아 강보에 들이댔다. “눕지 않으면 아기 목을 따버린다.” 눈을 커다랗게 뜬 안젤라는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때 안으로 들어온 네모가 커다랗게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이놈! 당장 돌려주지 못해?!” 여차하면 손에든 도끼로 내 머릴 쪼개버릴 기세다. 하지만 안젤라의 인생이 걸린 문제다. 이쪽도 만만하게 나갈 수는 없지. 고개를 돌린 나는 흉흉한 기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드워프 영감님, 이건 우리 종족 일이니까 나서지 말고 거기 앉아서 조용히 계십쇼.” “뭐야?! 상관하지 말라고? 웃기지 마라!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이 염병할 인간 놈아!” “염병할 인간 놈의 미친 짓을 지금부터 보여드리죠. 안젤라. 내 이야기를 들어라. 그리고 내 질문에 대답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새끼를 다리에서부터 썰어버린다.” “아, 아기를 살려주세요.… 죽이지 마세요오….” 이미 죽어있어. 미친년아. 이렇게 말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안 된다. 한숨을 내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네 손등의 문신을 봤다. 너 노예지? 주인은 어디 있냐?” “……!” 안젤라의 얼굴색이 갑자기 바랬다. 난 계속해서 물었다. “주인이 어디에 있냐고 묻고 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아기는 죽는다.” “…마, 마을에 있어요. 여기서 대략 사흘거리에 있는 페이크라는 도시에….” 사흘거리의 페이크라는 이름의 도시, 사흘거리, 그렇군. 극도의 안정을 취해야할 임신부가 사흘을 쉬지 않고 달리면 미숙아를 사산하는 것쯤은 간단하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강보에 들이대고 있던 칼을 내렸다. 그리고 아기를 싼 강보를 내 무릎 위에 올렸다. 미숙아라 그런지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단검을 바닥에 꼿은 나는 팔짱을 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탈주노예로군?” 안젤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왜 도망 나왔지? 아니, 물어볼 것도 없나? 주인님의 폭행과 추행을 견디지 못한 거겠지? 그리고 이 아기는 노예를 상대로 자행된 추악한 욕구해소의 산물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한 나는 그녀에게 반으로 나눈 빵조각을 내밀었다. 안젤라는 눈물이 섞인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괜찮아. 이걸로 됐어. 나는 널 때리고 강간하던 주인에게 다시 돌려보내지 않아. 걱정하지마. 더구나 네 과거의 슬픔과 치욕과 수치, 분노, 증오의 결과물이자 증거물이었던 아기도 이렇게 죽어버렸어.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제부터 넌 너만을 아껴주는 새 주인님을 만날 수도 있고 다른 삶을 시작 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자, 여기 내가 주는 빵을 받아서 씹어 삼켜라. 대신, 네가 받은 죄악의 결과물인 이 가엽고 불쌍한 녀석은 나에게 주는 거다. 그리고 욕망에 사로잡혀 네게 못된 짓만 일삼던 빌어먹을 주인과 사람들의 멸시, 굶주림도 내가 갖겠다. 그러니 그건 모두 잊어.” ========================================================================== 악마적 선행이라고 할까요? Reload Running Fire: 36 “내 방식과 내 정의대로 행동할거야. 참견마.” 나는 반으로 나눈 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안젤라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흡사 악마라도 보는 것처럼 나를 대했다. 나는 여전히 빵을 든 채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레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기를, 제 아기를 돌려주세요. 흐윽, 제발….” “살아남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차가운 눈밭을 달릴 때는 뱃속의 아기 생각은 하나도 하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상황이 좀 나아지니까 아기를 걱정하는 거야? 안젤라. 현실을 똑바로 바라봐. 이 녀석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살기 위해 버릴 수 있었던 거야. 제발 부탁이니 그게 아니라고 헛소리는 지껄이지마. 눈밭을 달리면서 너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겠지?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거란 거 말야. 하지만 그래도 달렸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틀려?” “아, 아니에요! 절대로 나만 살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 그 사람들이 아기를 빼앗아가려 했다구요! 내 아기를! 그래서! 그래서 달아난 거예요! 저는 아기를 낳고 싶었어요! 원하지 않은 아기였지만 그래도 내 배에서 태어난 내 자식이에요! 그래서! 어흑! 훌쩍…! 끅, 그래서 달아난 거라구요! 나, 난 내 아기를 버리지 않았어요! 아아앙~! 엉엉엉~! 으아아앙! 버, 버린게 아니라구요!” 난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들?” 한참 울던 안젤라는 내 물음에 더듬대며 대답했다. “흐윽… 훌쩍! 제, 주인님들이에요.” 내 고개가 옆으로 더 꺽였다. “주인님, …들?” 안젤라는 망설였다. 그러다가 내가 바닥에 꼿은 단검으로 손을 가져가자 얼른 대답했다. “훌쩍! 흐윽…. 노예시장에서, 끅, 저, 저를 살 때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여럿이서 돈을 나눴다고 했어요. 그래서, 훌쩍, 저, 저는 여, 여덟 명이나 되는 주인님들을 모시게….” “…됐어. 그만 닥쳐.” 고개를 숙인 나는 욕설을 내뱉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안된다. 참아야 한다. 적어도 그녀가 내가 내미는 빵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받을 때까지는, 그래서 나는 다시 빵을 내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이걸 먹어. 하지만 명심해. 네 아기는 잊어버리고 과거는 태워버려야 해. 죽은 과거를 끌어안고 귀신처럼 살다가 죽을 거냐?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가지고? 이봐. 안젤라. 살자고 도망 나온 거잖아? 빌어먹을 세상살이지만 그래도 살아야지 않겠어?” 아무래도 안젤라는 천사인가보다. 그녀는 내 유혹에 넘어오지 않았다. 배 아파서 겨우 낳은 자식이 사생아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지도 모르는 개뼈다귀 같은 놈이 빵 한 조각 내밀면서 죽은 아기와 과거를 내놓으라고 강요하니 기가 차겠지. 하지만 곪은 상처는 좀 아프더라도 빨리 잘라내는 편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성한 곳까지 병을 도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다지? 상관도 없는 노예 계집애 때문에 말야. …이후에 알게된 사실인데. 이 당시에 나는 주변에 있는 노예들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에 곤란에 처한 안젤라를 그냥 버리고 갈 수가 없었었지 싶다. 훌쩍이던 안젤라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내 말 같은 것은 애초에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단 말이냐? 갑자기 한심해 지는 기분이다. “으아아앙~! 앙앙앙~! 아, 아기를 돌려주세요! 내 아기를 돌려줘요! 엉엉엉~! 아악!?” 갑자기 머리에서 삔이 나가버린 나는 손을 앞으로 뻣어 앞에 주저앉아 목놓아 우는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끌려온 안젤라는 나와 이마를 마주 대고 눈을 마주치게 됐다. 난 이를 드러내고 크게 외쳤다. “시끄러워! 닥쳐! 닥치란 말야! 애초에 임신한 네가 잘못이야! 노예라면 이런 일은 각오했어야지! 네가 살려면 애를 떼어버렸어야 했어. 알아! 이 병신아!” “끄윽… 흐윽… 어, 어떻게 아기를 죽여요. 저, 전 그런 거 모, 못해요오….” “그럼 같이 죽으려고 했냐?! 아니잖아! 주인들이 아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 나왔다고 했지? 침대에서 데리고 노는 노예년이 임신을 했으니 당연히 네 주인 새끼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 그런 발정난 개새끼들의 대가리 속에는 그짓 하는 거 밖에 들어있지 않아! 모두 네 잘못이야! 애초에 네가 아기를 가지지 않고 그 놈들을 잘 구슬렸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뒤져내자 겁을 집어먹은 안젤라는 이제 패닉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손을 뿌리치거나 반항하지는 못했다. 병신 같은 계집애! 이러니까 그런 짓을 당하고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 뭐? 아기와 같이 도망을 나와? 지랄하지마! 그 다음엔 어쩔건데! 눈밭에서 사이 좋게 얼어서 뒈질거냐?! “잘 들어! 이 멍청한 계집애야! 이 개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독해져야해! 독해지고 독해져서! 원수 같은 놈이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독해져야 빌어먹을 세상에서 다른 것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잡아먹히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거야! 알아!? 알아들었으면 이거나 빨리 처먹어! 씹어서 삼켜! 뱉기만 해봐! 사랑하는 연인과 달콤한 키스도 못해본 그 혀를 잘라 버릴 테니까!” 잔뜩 질려버린 안젤라는 엉엉 울면서 내가 입에 물려준 빵을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두 팔은 덜덜 떨리고 있고 겁을 먹은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련이 남는지 연신 내 무릎 위에 올려진 강보를 쳐다보았다. 눈살을 구긴 나는 손을 뻣어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어딜 쳐다보는 거야? 이 빌어먹을 년아. 빨리 삼켜. 하나도 남기면 안돼. 넌 나와 계약을 하는 거야. 아버지도 모르는 이 아기는 내가 갖겠다. 더러운 과거도 내가 태워주겠어. 대신 너에겐 희망을 주마. 저 하늘 꼭대기에 앉아서 불쌍한 피조물들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딜레마와 머릿속을 갉아먹는 패러독스를 나몰라라 하는 무관심한 양반이 이렇게 착하디 착해서 남에게 당하기만 하는 멍청한 계집애에게 내리는 기적을 바라느니 내가 가진 능력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너를 구원해 주겠어! 뭘 원해?! 새 삶을 원해!? 너만을 바라보고 너만을 사랑해주는 새 주인님을 원해!?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무서워서 남의 등에서는 내려올 수조차 없는 이 병신 같은 계집애야! 내가 다 들어줄게!!!!” “흐윽…. 어흐윽…!” 빵을 씹어 삼키며 안젤라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멍청한 년 같으니라구! 용서 할 수 없어! 이렇게 바보같이 착한 녀석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른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빵은 인간인 내가 같은 인간인 네게 주는 기회다. 짐승의 먹이사슬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인간관계에서 신 따위는 생각하지마. 너와 네 손에 잡혀있는 한 자루 날카로운 나이프만 믿어. 빈틈을 보이는 놈이 네 눈앞에 알짱거리면 가차없이 찌르고 냉정하게 잡아먹는 거야. 그러다가 세상은 공평하고 평화로운 것이라고 지껄이는 놈을 발견하면 지랄하지 말라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워 줘버려. 세상은 불공평하고 부조리가 가득해. 하지만 그걸 잘만 이용하면 누구처럼 잘생긴 사내 놈을 노예로 부릴수도 있어. 절대로 잊지 마. 알겠냐?!” 제대로 알아듣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다 잊어먹어도 좋으니 마지막 말만은 꼭 기억해다오. “뭘 힐끔힐끔 쳐다봐? 빵이나 빨리 처먹어!”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그녀는 내 무릎 위에 올려진 강보를 쳐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빵을 씹어댔다. 그녀의 눈빛이 보기 싫어 강보를 배낭 안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이게 죽은 자식과의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르는데 매정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 식사가 끝나면 아기강보는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질 거다. 쓸데없이 짐이 될만한 건 애초에 없애 버리는 게 나아. 되지도 않은 머리를 가지고 헛소리를 지껄여서 그런지 머리가 띵하다. 고개를 숙인 나는 반대편 손에 들려있는 남은 반쪽의 빵을 발견했다. 안젤라에게 주고 남은 거다. ‘신이 인간에게 천벌을 내리지 않아서 인간이 인간에게 벌을 내렸다. 신이 인간을 구원해주지 않아서 인간이 인간을 구원한다.’ 언젠가 술 먹고 잔뜩 취한 스승님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쏟아내던 헛소리의 한 구절이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인간이 인간을 구한다. 신의 기적은 프리스트가 있을 때만 작게나마 실현 된지. 그리고 나는 무신론자다. 신을 믿지 않아. 하지만 웃기는 것은 이런 나도 순전히 내 실력으로 목숨의 위협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간혹 신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는 것이다. 으아~! 죽을 뻔했어! 하느님, 살려줘서 고마워요! …뭐 이런 식으로, 정말로 웃기지도 않은 현실이다. 그런 주제에 안젤라에게는 그따위 소릴 지껄이다니. 나도 아직 한참 멀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 헛소리와 강제력으로 말미암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사람하나 살리는 꼴이 될 거다. 나중에 스피릿을 구해내면 술이나 한잔 마시며 들려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반쪽짜리 빵을 입에 넣으려다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지켜보는 드워프 영감과 첼시아를 발견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빵을 나눴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고 나와 같이 부채를 나눠 가집시다. 저 하늘 위에 점잖게 앉아서 개 같은 세상을 굽어보시는 어떤 양반의 곁으로 가게 내버려 뒀어야할 여자를 이 염병할 세상에 붙잡아 놓은 당신도 책임이 있는 거니까. 거절하지 마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줬으니 보따리도 찾아줘야 한다고? 쳇! 더러운 세상이구나.” 걸죽한 욕설을 뱉어낸 네모는 내 손에 들려있는 빵조각을 빼앗아들더니 입안에 던져 넣고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첼시아는 그것을 거부했다. “난 됐어. 당신 이야기는 꽤 감동적이었지만 저런 멍청한 년에게 내 관심과 시간을 할예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다음에 술 한잔 살테니 네 이야기를 들려줘.” “어렵지 않지.” 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퍼피녀석을 힐끔 바라보았지만 첼시아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녀석에게 그녀의 목의 빵을 내미는 짓은 그만두었다. 그리고 남은 빵조각을 눈 딱 감고 입에 물었다. 스피릿! 조금 늦어질 것 같아! 하루만 나에게 허락해 줘! 사람을 하나 살렸는데 보따리도 찾아줘야 해! 난 그녀에게 기도했다. 마음씨 착한 스피릿이라면 이 정도 부탁은 너그러이 들어줄 거다. 아기를 감싼 강보를 그녀의 눈에 비치지 않게 조심스레 배낭 안에 집어넣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목마르지?” 결국 빵을 다 먹어버린 안젤라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으드득~! 불량스럽게 쭈그려 앉아 눈으로 만든 바라크 벽을 뜯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가 네모에게 머리를 맞았다. 퍽! “야 이놈아! 산후 조리도 모르냐? 얼음덩이를 뜯어주는 멍청이가 어딨어?!” “이거 시원해서 갈증해소에는 그만인 뎁쇼.” “웃기지마! 내가 보는 한 그런 건 안돼!” 그러더니 그는 내 배낭을 뒤져 히트 버너를 꺼냈다. 난 이마를 찌뿌리며 말했다. “남의 짐을 그렇게 막 뒤져도 되는 거요?” “뜨거운 거라도 좀 먹여야지. 그런데 이렇게 비싼걸 잘도 가지고 다니는 구나? 젊은 놈아.” “콜트라고 부르쇼. 영감님.” 네모는 킁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봉인을 뜯은 버너 위에 주전자를 올리더니 뜨거운 차를 끓여 모두에게 돌렸다. 으어, 뜨거운 게 속에 들어가니 좀 살 것 같구만. “이제야 울음을 좀 그쳤구나. 안젤라 라고 했지? 나는 네모 가네프라고 한단다. 이거 마셔라.” “아, 가, 감사합니다.” 안젤라는 얼른 그가 내미는 컵을 받았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네모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보이는 미소보다는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보이는 미소에 가까운 것 같다. 가는 길에는 할 일이 많겠군. 안젤라의 보따리도 찾아 줘야하고, 암울한 과거도 태워버려야지. 다시는 기억나지 않도록 아주 새하얗게. “콜트씨는 상냥하네? 처음 보는 노예도 신경을 써주고 말야. 지금 한시가 급한거 모르니?” “그럼 저걸 그냥 눈밭에 버려두고 갈까? 마음씨 착한 스피릿이라면 하루 정도는 용서해줄거야. 어떤게 가장 인간다운 건지 정의 내리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 그러니 내 방식과 내 정의대로 행동할거야. 참견마.” ========================================================================== 좋은 말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37 “여, 열일곱살이에요.” 첼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옆에 앉아서 코를 벌렁이던 네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마셨으면 일어나라. 할 일이 있다.” 컵을 배낭에 던져둔 나는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주전자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주전자 안에 있는 거 다 마셔. 알았어?” “…예.” 고개를 숙인 안젤라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바라크 밖으로 나가니 두꺼운 가죽 바지와 부츠, 자켓을 입은 멋쟁이 드워프 아저씨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거,. 자꾸 제미니 생각나게 만드네. “네놈 이야기는 잘 들었다. 퍽 괘씸하게 들리더구나.” “23년 세상을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익힌 것을 토대로 재구성한 개똥철학의 일부분입니다. 듣기 거북하셨다면 어쩔 수 없군요.” “확실히 드워프인 내가 듣기엔 좀 그랬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말이니 참견하지는 않으마. 그런데 이제부터 어쩔거냐? 난 이대로 저 아가씨를 가까운 마을로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봤자 이 주변에 마을이라고는 페이크 밖에는 없지만.” 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산을 해서 가뜩이나 정신과 몸이 쇠약해져 있을 텐데 이대로 있다가 합병증이라도 걸리면 큰일입니다. 그리고 페이크에서는 저희 여행물자의 보급을 해야하고 안젤라의 보따리도 찾아줘야 하거든요? 아, 그리고 더러운 그녀의 과거도 깨끗하게 소각처리 해야 하구요.” “…소각처리?”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어땠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잠시 후 네모는 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끼워주지 않겠나? 장작은 태우기 전에 다듬어야 하는 법이지. 그럴 땐 도끼가 제격이야.” “계약의 증거를 나눠먹은 사이 아닙니까? 당연하죠.” “저도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퍼피가 나와서 우리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는 어눌하게 말했다. “노예가 주제 넘게 참견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제게도,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마스터 앞이라 아무말도 할수 없고,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지만, 저도 남자입니다. 참을 수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녀석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삐딱하게 그를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 주인에겐 비밀이다.” “예.” 퍼피는 처음으로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는 즐거움이 아니라 분노였을거다. 나와 네모가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말이지. “그런데 어르신,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제 와서 무슨 존대냐? 치워라. 넌 아까 그 싸가지 없는 말투가 더 잘 어울려.” “아, 그래요? 고맙수.” 고개를 돌린 네모는 날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맘에 드는군. 다른 놈들하고는 좀 틀린 것 같아.” “취향 특이하시네. 나 같은 인간 말종과는 상종하지 않는데 자아성립에 도움이 될거요. 영감님.” “내 나이 올해 314살이다. 자아성립은 무슨 오크 풀 뜯어먹는 소리냐? 헛소리는 그만 하자. 따라와라 할 일이 많다.” “그럽시다. 뭘 할건데?”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은 나는 그의 뒤를 총총 따라갔다. 근처 숲을 찾아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눈 덮힌 나무를 뒤져 쓸만한 것을 몇 개 골라내서 잘라내더니 그걸 나와 퍼피에게 나르게 했다. 재료 수집이 끝나자 그는 눈밭에 대략의 도면을 그려 이제 뭘 만들건지 설명했고 난 쾌히 승낙했다.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우리는 대략 반나절이 지난 후 꽤 쓸만한 눈썰매를 만들 수 있었다. “부서지진 않겠구려.” “같이 만들어 놓고서 무슨 헛소리냐? 만약 부서지는 곳이 있다면 거긴 네놈들의 손길이 닿은 자리야. 뭐해? 끌고 가자.” 나와 퍼피, 네모는 눈썰매에 저녁에 쓸 나무장작을 실어 바라크로 끌고 갔다. 그때쯤 슬슬 날이 저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젠장! 주변에 산이 있어서 날이 일찍 저무는군, 재료 찾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어.” “어차피 안젤라 때문에 강행군은 무리니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합시다.” 네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크에 도착하니 첼시아가 밖에 나와있다가 우릴 반겼다. “세상에 여자들만 남겨두고 남자들끼리 어디 갔다가 온거야?” “자네 여자였나? 허, 몰랐었군.” “…뭐라구요?” 네모의 질문에 첼시아가 눈썹을 삐죽세웠다. 아무래도 그녀가 안젤라는 대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 저러는 건가보다. 아버지와 딸 같은 사람들이 툭탁이는 것을 무시하고 바라크 안으로 들어가니 안젤라가 뭔가를 보다가 후다닥 뒤로 감췄다. 안 봐도 다 안다.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은 나는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뭐, 뭘요?” “되지도 않은 시치미 떼지마. 등뒤로 돌린 거. 내놔. 내가 바본 줄 알아?” 안젤라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그 정도 반항으로는 포기하지 않는다. “계약위반이야. 넌 그 녀석을 나에게 주고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 하지만 그건 강제로….”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쉰 나는 자리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위로 들었다. 안젤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랄 마. 아무리 협박과 회유를 동원했다지만 넌 제대로 반항도 하지 않고 내가 준 빵을 먹었어. 아기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조그만 반항이라도 했어야했지. 하지만 넌 하지 않았어. 도와주겠다는 말에 내심 귀가 솔깃했던 거야. 어쨌든 계약은 성립됐고, 그러므로 이제 그건 네 아기가 아니다. 당장 내놓지 않으면 강제력을 동원하겠어.” 난 손바닥을 위로 들었다. 뺨을 때릴 자세였고 덜덜 떨던 안젤라는 다시 훌쩍이며 아기 강보를 내밀었다. “바보 같은 계집애.” 강보를 받아든 나는 그것을 배낭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바라크 입구에 팔짱을 하고 서서 가만히 보고 있던 네모가 슬쩍 끼어 들었다. “꼭 그래야 했냐?” “노예는 맞아야 말을 들어요.” “넌 정말 나쁜 놈이야.” “칭찬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쁜 놈이라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녀석이 있다구요.” “설마 여자냐?” “당연하죠. 아주 예뻐요.” “그 정신 나간 아가씨는 불쌍하게도 눈에 콩깍지가 쒸여버렸군.” 항상 귀여운 웃음과 아름다운 미소로 나를 대하던 그녀의 모습을 잠시 떠올린 나는 쓰게 웃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식량 주머니를 꺼내들고 밖을 나간 나는 썰매에 싣고 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얻어 솥을 걸고 따뜻한 저녁을 끓였다. 그래봤자 딱딱한 빵조각과 말린 고기를 깨끗한 눈과 함께 넣고 푹 삶은 거지만 그래도 의외로 맛은 좋았다. 첼시아가 말했다. “우와~! 맛있어! 콜트씨는 정말 못하는게 없네? 어때? 첼시아에게 장가들지 않겠어요?” “칵! 실현가능성 없는 소린 하지도 마!” “어머? 왜 실현 가능성이 없어? 이 정도면 예쁘고 잘빠졌지 않니? 유혹하면 당신이 안넘어올 것 같아? 그리고 내가 콜트씨에게 홀짝 빠졌다고하면 어쩔테야?” “조용히 못해! 국자로 때린다!?” 국자를 들고 으르렁거려주니 그녀는 꺄하하 웃어대며 퍼피의 뒤로 숨어버렸다. 그 와중에 네모가 스튜를 먹어보고는 감탄을 해댔다. “허! 괜찮은데?” 꿀꿀이 죽이라고 하려다가 한 대 맞을까봐 두려워 콜트식 빈티지 스튜라고 말해준 나는 그것을 큼직한 그릇에 퍼담아 바라크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려했다. 그러다 퍼피가 스튜를 먹다가 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제가….” “됐어. 널 시켰다간 네 마스터에게 밤새도록 시달릴 것 같다야.” 퍼피는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첼시아가 도끼눈을 하고 퍼피를 노려보고 있었다. 퍼피에게 자기 말고 다른 년에게 눈길 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한소리를 해대는 첼시아는 무시하고 바라크로 안으로 들어가니 얌전히 자리에 누워있던 안젤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가 내미는 그릇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러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거 너무 많은데요?” “배고파서 군침 꼴딱꼴딱 삼키는 주제에 내숭떨지마.” 얼굴이 빨개진 안젤라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에 수저를 쥐어준 나는 자리에 앉았다. “먹어봐. 색깔이 좀 이상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할거야.” 조금 머뭇대던 안젤라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수저로 떠서 후후 불어 입안에 넣었다. 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어때? 맛있어?” “흐윽….” 갑자기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수저를 든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 그녀는 훌쩍이며 코를 한번 들이킨 다음 다시 수저를 놀렸고 난 씩 미소를 지었다. 배가 고팠던지 안젤라는 단숨에 그 많은 스튜를 끝장내버렸다. 잘 먹는구나. “더 먹을래?” “아, 아뇨. 배불러요.” 그릇을 받아든 나는 그것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라 이런 것 뿐이야. 잘먹어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내일 마을로 출발할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페, 페이크로요?” “응.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거기니까.” 안젤라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날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거긴….” “거기 있는 네 주인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걱정하지마. 노예 하나 사는데 여럿이서 돈을 모아야 할 정도라면 잘해야 용병이나 아니면 건달 정도겠지. 속이 빈 쭉정이들은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어. 그런 건 나에게 맡기고 넌 네 엉덩이나 걱정해. 산후 조리 잘못해서 보기 흉하게 커져버리면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다?” 난 손을 흔들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 생각난 것이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지. 어이 안젤라. 난 23살인데. 넌 몇 살이냐?” “여, 열일곱살이에요.” ========================================================================== 열일곱이면 제가 오토방타고서 학교 다니던 시절이군요. 그때까지 저 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잘하는게 없다고 생각하는 청소년 여러분, 저도 한 때는 폭주족이었답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특기를 찾아보세요. 분명히 하나 씩은 있을 겁니다. 빠이팅? 빠이팅! Reload Running Fire: 38 “희망을 가지게 되겠지.” 역시. 그 정도 일거라고 생각했다. 소녀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얼굴을 하고 있거든? 고개를 끄덕여주고 밖으로 나가려니 등뒤로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감사합니다. 저 같은 걸 도와주셔서….” “울면서 말하지마. 난 우는 여자 싫어해.” 안젤라는 어색하게 웃으려 애썼고 난 그녀의 행동에 못 말리겠다는 쓴웃음을 지어주었다. 쌀쌀한 밤을 지새운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안젤라를 썰매에 올리고 이슈리와 첼시아의 말인 바이퍼 녀석에게 썰매를 끌게 했다. 급조한 썰매는 정말 잘 달렸다. 말을 타고서라도 이틀은 충분히 걸리는 거리를 하루하고 반나절만에 주파하게 된 것이다. “후와~! 이거 진짜 재미있다!” “촐싹대지말고 말이나 잘 몰아 이놈아!” 얼굴로 쏟아지는 차가운 겨울 바람도 내 질주본능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난 하얀 입김을뿜어내며 말했다. “마차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요? 뭐야? 첼시아는 왜 그렇게 얼굴이 굳어있어? 재미있지 않아? 하하하하! 이랴! 더 빨리!” 옆에 앉은 퍼피의 팔를 껴안고 스쳐지나는 풍경을 구경하던 첼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찬바람 때문인지 코가 빨갛다. 킥킥킥~! “별로, 셋이서 이걸 만들었다며? 잘 가다가 멈출 것 같아서 괜히 불안해.” “이런이런, 좀더 포지티브한 사고방식을 길러야겠어. 드워프가 설계하고 만든건데 어디가 고장날 것 같아? “그런게 아니지. 드워프의 실력에 인간들의 조잡스런 손재주가 섞인 것이 내심 불안한 게야.” “아니 뭐요?! 우리 손재주가 어때서!” “어허~! 야 이놈아! 말이나 잘 몰아!” “어? 우왁?! 이 놈들아! 어딜 들어가!?” 쿠르르르르~! 말을 몰다말고 딴데 눈을 판 대가로 썰매는 길에서 벗어나 자갈 위를 미끄러졌다. 썰매가 덜컹거리며 요동을 치긴했지만 그래도 아무 이상없이 잘 굴러갔다. 대신 탑승자들의 불안에 찬 원성을 좀 사긴했지만, 드워프와 인간의 비명을 들으며 말들을 다시 길 위로 올라가도록 말을 몰아간 나는 진동이 잦아들자 잠깐 고개를 돌려 안젤라에게 물었다. “안젤라. 괜찮아?” 가죽 모포를 둘둘 감고 썰매 뒷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안젤라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부터였을 거다. 그녀가 웃기 시작한 것은, 하지만 안젤라의 포근한 미소도 점심 무렵 페이크에 도착하고부터 사라져 버렸다. 안젤라의 노예증명서를 요구하는 성문 경비대원들에게 타고 왔던 썰매를 선물하자 그들은 쌍수를 반기고 환영했다. 안젤라를 등에 업고 대로를 걷던 나는 옆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짠돌이 같이 굴지 마쇼. 어차피 대로에 눈도 다 치워져서 쓰지도 못할 건데.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작품을 경비대 놈들에게 공짜로 넘겨버리다니. 갖다 팔았으면 꽤 나왔을 거다.” “뭐, 안젤라의 통행료쯤으로 기부했다고 생각합시다. 증명서가 없는 노예를 데리고 다니는 건 불법이란 말요. 걸리면 귀찮다구.” 네모는 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끌고 뒤따라오던 첼시아가 물었다. “여기가 그곳이야? 안젤라의 못된 주인님들이 있다는?” 등에 얌전히 업혀있던 안젤라가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첼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이 찌뿌드드 하다는 듯이 깍지낀 손을 목뒤에 대고 고양이 마냥 허리와 엉덩이를 치켜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두껍게 껴입은 옷깃이 벌어져 잘록한 허리선이 살짝 엿보인다. 헤에~ 저렇게 보니 첼시아도 꽤… 어흐흠! 진정하자. 요새 왜 이러냐? “으드드드~! 하루종일 썰매 타고 왔더니 몸이 쑤시네. 어이 대장. 어쩔거야? 밥 좀 먹고 강행이야?” 난 안젤라를 추슬러 올리며 다시 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어쩔까? 빠삭하게 해치우고 새벽에 출발할까? 아니면 그냥 하루 쉬어갈까?” “오~! 첼시아는 쉬어간다에 한표! 퍼피까지 두표!” 첼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옆에서 말을 끌고오는 퍼피의 손을 잡아올렸다. 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쳐다봐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수결에 따르기로 했다. 그때 등에 업혀있던 안젤라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찮아. 어차피 너 말고도 해결해야 할일이 많으니까. 그런데 안젤라? 너 엉덩이가 참 조그맣다? 애를 낳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는데?” “아, 아으으… 그, 그러지 마세요….” “어마~ 변태스러워라. 콜트씨 여자 엉덩이 만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저자 골목에서 지나가는 아가씨들 치마나 들추며 낄낄 거리는 무뢰배 같아.” 난 대답대신 불량스럽게 낄낄 웃어주었다. 안젤라는 얼굴을 심하게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고도로 꾸며진 연극이 아니라면, 내 등에 업혀있는 소녀는 천성이 선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녀석이다. 귀여운데? 약간 힘이 없는 듯하면서 서글서글한 얼굴이 스피릿하고는 다른 맛이 있는 걸?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녀의 조그만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네모가 도끼 자루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허억?! 아프잖아요! 왜 때려요!” “이 놈! 너야말로 그게 무슨 짓거리냐! 그게 네놈 엉덩이야?!” “닳는 것도 아닌데 좀 만져보면 어때서 그러슈? 그렇지? 안젤라.” 안젤라는 떱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서 지켜보던 드워프 영감은 괴성을 지르며 폭발했다. 잠시 대로에서 짐승털가죽을 겉옷 대신에 걸친 여자를 등에 업은 청년과 험상굳은 얼굴로 도끼를 빼든 드워프간의 사소한 말싸움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의 옆에서 일행으로 보이는 빨간머리 여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잡고 깔깔 거렸고 두 마리의 말 고삐를 양손에 붙잡은 예의바르게 생긴 청년은 연신 수군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여댔다.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를 따지며 한바탕 투닥거린 나와 네모는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고는 헛기침을 심하게하며 퍼피가 손깃하고 있는 신전으로 서둘러 달려들어갔다. “안젤라의 요양을 위해 신전병원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군. 기특하다. 퍼피. 그나마 자네가 이 중에선 가장 정상인답군. 싸가지 없는 것들과는 달라. 음! 맘에 들어.” “아닙니다. 어르신.” “질문 있는데요. 어르신 말씀에 들어가는 그 ‘것들’ 이란 단어에 저도 포함되는 거예요?” 고개를 돌린 네모는 하얀 수염을 조금 쓸어내린 다음 고개를 돌렸다. “뭐, 아닐세.” “…어머, 그런데 왜 이리 기분이 나빠지는 걸까나?” 첼시아가 눈썹을 세우며 그에게 이빨을 들이댔다. 콩을 볶아먹든 감자를 구워먹든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신전 정원으로 들어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계십니까?” 그러자 마당에서 눈을 쓸고 있던 프리스트가 고개를 돌렸다. “아, 어서 오십… 안젤라!?” 빗자루를 팽개치고 달려오는 프리스트를 경계하던 나는 등에 업혀있는 안젤라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냐?” “아, 예. 제, 제가 주인님들에게 맞아서 울고 있으면 항상 제 상처를 치료해주시고 돌봐주시던 분이세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앞에 서있는 프리스트를 쳐다보았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조용하고 선한 눈매를 가진 사내는 나와 안젤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입고 있는 로브를 보니 그는 델린저의 프리스트다. 희망과 절망의 신. 델린저, 지금 안젤라에게 꼭 필요한 신이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행자인 콜트 슈발츠라고 합니다. 이쪽은 같은 일행인 네모 가네프라고 하고요. 그 옆으로 첼시아, 퍼피입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저는 절망과 희망의 신 델린저의 프리스트, 하빈 크로우라고 합니다.” 일행의 소개를 하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고 병실의 안내를 부탁했다. 프리스트 하빈은 내 등에 업혀있는 안젤라를 한번 살펴보고는 후다닥 병실을 마련했다. 그것도 1인실로, 우리는 모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지만 안젤라양께서는 걱정이 좀 되셨나보다.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깨끗한 침대에 앉은 그녀가 약간 머뭇대며 말했다. “저, 여, 여기 입원비 비쌀텐데요…?” 첼시아가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 “그럼 몸이라도 팔아서 돈 보태주던가. 하지만 그 걸레짝 같은 몸 누가 사줄라나 모르겠네?” “씁~! 첼시아!”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아 한 마디 쏘아주니 첼시아는 귀족 신사마냥 정중히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몸을 돌려 병신을 나가버렸다. 퍼피가 한숨을 내쉬며 나직히 말했다. “제가 오기 전에 데리고 계시던 노예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사정은 모르겠네만 그래도 너무 몰아세우는 군. 불쌍한 계집아이가 처량하지도 않은가.” 창가에 기대어서서 두꺼운 팔짱을 하고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있던 네모의 말에 퍼피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후다닥 몸을 돌렸다. “퍼피! 주인님 쓸쓸해!” “예! 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왕이면 방으로 들여보내지마.” 내 말에 퍼피는 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나가고 난 시무룩한 표정의 안젤라가 앉아있는 침대로 걸어가 그녀의 턱을 손가락을 붙잡아 올렸다. 매번 당했던 것인지 그녀는 반항 한번하지 않고 선선히 예쁜 얼굴을 들어주었다. 고거 참~ 제법 귀여운데? 난 씩 웃으며 말했다. “돈 걱정은 말고 넌 네 엉덩이가 커지지 않을지나 걱정해. 지금이 딱 좋으니까. 그 상태를 유지 할 수 있도록 말야. 그래야 늘씬한 몸매에 혹한 사내들이 널 업어가지 엉덩이 엄청 커지면 아무도 않… 아윽! 자꾸 왜 때리는 거요! 머리 나빠져요!” “대가리 속에 썩은 치즈가 들어간 녀석! 신성한 신전의 병실에서 무슨 그런 망측한 소리냐! 프리스트도 계신데!” “아, 저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존재감 없이 서있던 프리스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모와 나는 정말 그를 상관하지 않고 서로의 입심을 겨뤘다. 한참 후 참다못한 프리스트의 성스러운 헛기침 소리에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안젤라를 가르키며 말했다. “경황스러워 무슨 말을 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요.” “무난한 질문으로 하나 골라서 해보세요.” “어떻게 된 겁니까?” 상당히 센스 있는 질문이었고 난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네모가 눈밭에서 죽어 가는 그녀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사산한 미숙아를 내가 빼앗은 이야기를 정갈하게 들려주자 하빈의 얼굴은 당장 딱딱하게 굳어져버렸다. 그는 한창 꿈을 찾아 뛰어다닐 나이의 17살 처녀가 노예로 전락하여 아버지도 모르는 아기를 임신하고 사산해버린 이야기를 듣고 한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자신의 감정을 단 한마디로 설명했다. “…그렇군요.” 전체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자 다시 화가 도진 네모는 자신의 입으로 말한 신성한 신전의 병실에서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여 버렸다. 하얀 담배연기가 우울한 안젤라의 얼굴로 흘러가 그녀의 눈물을 가려주었다. 침대 근처의 간병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나는 한숨을 좀 내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100만 루나 짜리 금화를 꺼내 하빈의 손에 쥐어주었다. “입원비와 각종 의료지원비를 미리 선불로 드립니다. 아기를 사산한 정신적 충격과 육체적 고통에 힘들어하고 있으니 수고스럽겠지만 모쪼록 잘 대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가지 충고하겠는데. 이 더럽고 불쌍한 계집애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창녀 어쩌고 하는 녀석이 있으면 오만하게 하늘을 받치고 있는 그 머리를 쪼개버릴 거라고 주변 분들에게 전해주십쇼.” 날카로운 눈으로 말한 나는 창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그것을 왈칵 열어 젖혔다. 그리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 수련자들과 신도들을 쳐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설사 악마라고 할지라도, 고개를 숙이고 신전을 찾아와 목숨을 구걸하면 기꺼이 그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고 제가 아는 하이 프리스트께서 간혹 말씀 하셨습니다. 그분이 지금 형씨들의 행동을 보면 참으로 슬퍼하시겠구려.” 말을 마친 나는 찬바람이 들어올까 다시 창문을 닫았다. 뒤늦게 달려온 프리스트들이 신도들과 수련자들을 야단치는 소리가 창문 넘어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린 나는 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빈을 좀 쳐다봐 주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대에 앉아있는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너 꽤 유명인이구나?” “어, 아. 예, 예에….” 침대로 걸어간 나는 안젤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염병한 도시로군. 하지만 네 엉덩이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묵어야겠다. 내가 좋은 곳에 데려다 줄 테니 여기서 몇 일만 더 지내는 거야. 알겠지?” “좋은 곳이요?” “그래, 좋은 곳. 너 같은 아이도 마음대로 밖을 나다닐수 있는 그런 곳. 그런 곳에 데려다줄게. 그러니까 그만 울어. 예쁜 얼굴 망가진다.” 그러자 안젤라는 다시 그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킥킥 웃어준 나는 하빈에게 그녀를 좀 봐달라고 부탁하고 병실을 나섰다. 그러는데 안젤라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 어디가세요?” “밖에 좀 나갔다오마. 어디가지 말고 여기 있어. 영감님. 갑시다.” 안젤라가 좀 불안해했지만 난 네모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문 밖에는 첼시아가 팔짱을 하고 벽에 기대어 서있다가 우릴 따라왔다. 신전의 대문을 나서니 첼시아가 물었다. “이 정도 해줬으면 됐잖아? 나머지는 지가 알아서 하라고 그러고 그냥 가자.” “안돼. 과거를 태워주기로 약속했어. 좋은 곳에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싸나이가 한 입으로 두 말은 못하지.” “여기서 싸나이가 왜 나와? 바보 같기는, 그래서는 스피릿도 못 구해. 험한 꼴 당하고 질질 짜는 거 보고 싶니?” 고개를 돌린 나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려주었다. “여자라서 한번 봐준다. 하지만 한번만 더 내 앞에서 그딴 소리하면 목을 비틀어버릴 거야.” “칫! 지 노예 욕했다고 기분 나빠하기는, 그래서 어쩔건데? 멍청한 대장님아. 묘안이 있으면 좀 들어보자?” “하룻밤 안에 그녀의 과거를 태워버린다. 첼시아는 필요없으니 이번 일에 상관 말고 나중에 스피릿 구할 때나 힘써줘.” “알았어. 내 입장을 고수하지. 닥치고 있을테니 당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여줘.” “좋아. 영감님. 아무래도 이번 일은 우리 둘이서 해야 할 것 같소. 도와주실거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뻑뻑 피워대던 그는 불퉁한 표정으로 나에게 눈을 돌리더니 하얀 담배연기와 함께 말했다. “물론이다. 그런데 아까 네가 안젤라를 데려다 주겠다는 그 좋은 곳은 어디냐?” “아직 생각해 놓지 않았어요.” “뭐야? 아무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이 계획성이라는 눈꼽만큼도 없는 녀석아!” 두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나는 대로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입을 열었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쇼. 그렇게 말해주면 안젤라가 좋아할 거 아뇨? 자기도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떠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겠지.” “너, 너 이 놈….” 옆에서 걷고있던 네모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점잖게 무시한 나는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저 불쌍하고 예쁜 계집아이의 잃어버린 보따리를 어떻게 찾아줄까하는 고민을 해보았다. ========================================================================== 아직 끝난거 아닙니다. 하아아안차아아암 남았습니다. 진정한 조아라의 팬이시라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끝장을 보시리라 감히 믿겠습니다. …그리고 특전, 아직 안나왔습니다. XXX: 심의!! Reload Running Fire: 39 “이키리히니트 어쩌구는 무슨 뜻입니까?” “입을 분의 키는 어느 정도지요?” “에… 이만 하던가?” 손바닥으로 내 가슴 밑을 두드리자 옷가게의 젊은 여주인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여자친구에게 줄건 가 봐요?” “예?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여주인은 후후 웃으며 두꺼운 스웨터와 모직치마를 골라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마음씨 좋게 생긴 여주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어, 그러고 보니 속옷도 좀 사야겠는데.” “사이즈는?” “으음, 가슴 사이즈는 모르겠고, 엉덩이가 요만 하던가?” “크흠! 난 나가 있으마!” 인상을 찌뿌린 네모는 고개를 돌리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웃음지은 여주인은 속옷을 찾기 위해 좌판을 뒤적였다. 옷을 모두 구입하고 밖으로 나가니 네모가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그 옆에는 첼시아가 군것질을 하며 날 불만스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잡화점에 들어가 안젤라가 신을 부츠와 슬리퍼를 비롯해서 병실에서 지낼 동안 사용할 잡다한 물건을 모조리 구입했다. 물가는 비교적 싸서, 저번에 오크들에게 빼앗은 돈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가니 퍼피가 달려와서 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첼시아의 분노가 폭발했다. “배고파! 밥 안사먹을 거니!?” “저런걸 누가 데려갈까 모르겠네 알았어알았어. 인상쓰지마. 밥 사줄께.” 잠시 첼시아가 계약이고 나발이고 밥 대신 날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소동이 있은 다음 우리는 시장 한켠에 위치한 여관겸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은 북적거렸다. 식사와 맥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니 곧바로 맥주가 나왔다. “헤, 빠른데? 아가씨. 이거 팁이야.” 필수생활용품을 사고남은 동전을 튕겨주자 맥주를 나르던 소녀는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던 네모가 말했다. “돈을 너무 헤프게 쓰는 거 아니냐?” “괜찮아요. 어차피 오크한테 빼앗은 돈이니까.” “…결국엔 내돈 아니라는 소리잖아?” “되게 참견이네. 첼시아, 너 안젤라 일이라면 너무 신경질적으로 나오는거 아냐?” “그래 맞아. 난 그런 노예년에게 신경쓰는 콜트씨를 이해할 수 없어. 뭐가 아쉬워서 버려진 걸 주워다가 희망이라는 걸 안겨주는 거야? 콜트씨는 성인군자야?” “이해할 수가 없어?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나 만큼 이해하기 쉬운 남자가 어디있다고 그러는 거야?” 맥주를 한모금 마신 나는 잔을 내리며 대답했다. “불쌍하잖아? 그게 다야.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줘. 못마땅해도 지켜봐. 난 주변 친구들의 조언이 필요할 정도로 약한 신념과 정의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아. 알아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던 첼시아는 한순을 폭 내쉬며 두손을 들었다. 항복한다는 표시인가? “퍼피를 데려오기 전에, 난 모험가 일을 해서 모아둔 돈으로 처음으로 노예를 샀어. 그 당시에는 여자 혼자 모험가 일을 하려니 밑보이고 험한 꼴도 당하고 해서 말야.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거든? 그러다가 보니 어느 순간 이러다간 정말 믿음 한번 주고받지 못하고 죽을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항상 믿을 만한 친구가 옆에 있어줬으면 했어. 힘이 없어도 좋아. 내가 지켜줄수 있으니까. 그냥 나만 믿고 따라와줄 사람이 필요했었지. 그래서 노예를 샀어. 저금한 돈 몽땅 털어서 말야. 지금 신전에 있는 안젤라만큼 귀엽고 스피릿만큼 머리좋은 아이로 기억해.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주인님~ 주인님~ 그러는데, 정말 귀엽더라. 당신도 그 기분 알지? 처음 노예가 눈을 깜빡이며 주인님이라고 불러줄 때의 느낌말야.” 난 맥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피릿이 나에게 주인님이라고 불러줬을 때는 정말 좋았더랬다. 첼시아는 계속 말했다. “난 어린 마음에 녀석을 콱 믿어버렸어. 통장도 다 맡기고 숨겨둔 비밀 같은 것도 다 까발렸지. 그런데 이 녀석이 나중에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아? 내 전재산을 들고 튀어버렸어. 그것만이라면 말도안해. 고앙큼한 계집애가 서류를 조작해서 날 자기 대신 노예관리원에 팔아넘긴 것 있지? 아마 그날 부터였을 거야. 내가 노예를 믿지 않게된 건.” 씁쓸한 맥주를 다 마시니 식사가 나왔다. 난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알맞게 익은 고기를 슥슥 자르며 말했다. “그럼 지금 당신 옆에 앉아있는 노예는 뭐야?” 고개를 돌린 첼시아는 퍼피를 지긋이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퍼피는 내 노예가 아냐. 귀여운 장난감이지.” “콜록! 콜록!” 옆에서 듣고 있던 네모 아저씨가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그는 마구 고함을 지르며 첼시아에게 요조숙녀로서의 자세를 요구했지만 첼시아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서 그런 건 흉내도 못낸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옆에 앉은 퍼피는 장난감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지 얌얌거리며 열심히 음식을 주워먹기 바빴다. 첼시아는 그런 녀석을 지긋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 이 정도 이유야. 어쨌든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까. 앞으로는 조용히 있어줄게.” “흠, 알아줘서 고맙군.” 난 큼직하게 썬 고기를 입안에 쑤셔 넣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첼시아도 그제서야 원래 표정으로 돌아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고 그녀들은 바로 이곳에 방을 잡아버렸다. “우리는 여기 묶을 게.” “그럼 그러든가. 출발은 내일 아침이니까. 늦잠자지 말고 준비하고 있어.” “알았어. 그럼 저녁에 뭔 짓을 하던 몸 조심해. 난 신경 끌테니까. 하지만 추가금 얹어주면 나가 줄 수도 있어.” “…됐어. 돈 아까워.” 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그녀는 짠돌이 어쩌고 하더니 혀를 빼물어주고는 퍼피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첼시아의 도움까지도 필요없다. 까짓 나 혼자서도 충분해. 방으로 올라가는 그들에게 내일보자고 손을 흔들어준 나는 밖으로 나가려다 기다리고 있던 늙다리 드워프 아저씨에게 붙잡혔다. “왜요? 아저씨는 따라오지 말고 쉬고 있어요. 저녁에 데리러 올테니 그때….” “그게 아니다. 네놈에게 묻고 싶은게 있어서 그런다. 거기 좀 앉아봐라.” 난 그의 손짓에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주문한 그는 먼저 한모금 마신 다음 코를 벌렁이며 나에게 물었다. “아까 첼시아와 하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만, 나는 좀더 확실한 대답이 필요하다. 네놈, 그 아이에게 뭘 원하는 거냐?” 안주로 나온 잘 구워진 소시지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으니 무시무시한 눈을 한 드워프 영감이 날 노려보았다. 난 소시지를 한입 베어물며 대답해주었다. “엥? 갑자기 무슨 헛소리요? 알아듣게 이야기 해봐요.” “왜 그렇게 잘 대해 주는 거지? 아까 말했던 대로 단순히 불쌍하고 보기 안타까워서 그런 거라기엔 내 눈에 네 호의가 너무 지나쳐 보인다. 너희들, 여행자라고 하지 않았냐? 바쁘지 않아? 불쌍한 노예에게 적선을 베풀 만큼 한가한 거냐?” 그렇지는 않지. 이쪽은 미친 척 겨울바람을 헤치고 달려가야 하는 몸이야. 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그렇지 않아요. 나도 바쁜 사람이라구요. 그나저나 요약 잘하시는군요. 안젤라나 첼시아에게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결국엔 안타까워서 그런거죠. 맞아요. 부인하지 않아요. 나도 내 등에 업혀서 나만 바라보는 예쁜노예가 있으니까. 짬을 내서 이런 일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데 아저씨는 뭐요?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관계에 끼어 들려고 하는 거요?” “나도 바쁘신 몸이다. 이대로 떠나버려도 상관없어. 하지만 이렇게 붙어있는 것은 네놈들의 행동이 너무너무 괘씸해서이기 때문이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홧김에 맥주를 단숨에 비워버린 그는 커다란 잔으로 테이블을 후려치며 외쳤다. “맥주 한잔 더 가져와! …아무 힘도 없는 그런 불쌍한 계집아이를 번갈아가며 윤간할 수 있단 말이냐. 더러운 놈들! Sex Season이 없어서 언제고 어느 때고 상관없이 생식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종족들에게 자랑이라도 할 셈이었냐? 안 그래도 인간을 제외한 종족들의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는 판국인데…!” “우리들의 출산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해야 말이 되겠지요.” 내 말에 네모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는 새로 나온 맥주를 죽 들이켰다. 잔을 내린 그는 거품이 뭍은 수염을 손등을 닦아내며 말했다. “어쨌든 그냥은 못 간다. 그 빌어먹을 자식들의 이키리히니티를 마카크 나케테 시켜버리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드워프 말도 좀 배워두는 건데. “이키리히니트 어쩌구는 무슨 뜻입니까?” “나중에 알게 될 거다.” 네모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투로 고개를 돌렸다 대략 살건 다 샀고. 슬슬 해도 지는 것 같아서 난 그만 신전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럼 난 여기서 묶으마.” “아, 저녁에 쓰레기 태우러 나갈거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있으쇼.” ========================================================================== 저도 가끔 집에서 쓰레기 태웁니다. Reload Running Fire: 40 “쓰레기는 태워 버려야해. 깨끗하게.” 네모는 날카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그만 짐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점을 나서서 신전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틈에 섞여 대로를 걷고 있으려니 붉은 태양이 하늘을 불태우며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음, 멋지군. 그나저나 이놈의 세상은 왜 이딴 식으로 밖에 굴러가지 못한다냐? 씁쓸하다. 우리 같이 못된 놈들이 잘 사는 세상이라니. 참 지랄 맞다. 침울한 얼굴로 태양을 쳐다보던 나는 잠시 현재 나에게 닥친 문제점들을 되세긴 다음 그걸 다시 행동으로 옮겼다. “오래 기다렸지?” “아, 다녀오셨어요.” 불안하게 손톱을 깨물고 있던 안젤라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로 걸어간 나는 그녀의 앞에 시장에서 사온 물건을 쏟아냈다. 안젤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 그러니까 귀여운데? “이건 뭐예요?” “선물.” 난 그렇게 말하며 아까 잡화점에 들렸을 때 산 파란 리본으로 그녀의 금발을 묶어보았다. “이야~! 잘 어울린다.” 안젤라는 머리카락 끝단에 묶여있는 파란 리본을 보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낄낄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나는 침대 옆에 있는 수납장에 물건을 정리하고 새 옷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배고프지? 저녁 가져 올 테니까 그때까지 갈아입어.” “아, 예. 예.” 새 옷을 가슴에 끌어안고 날 쳐다보는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준 나는 신전병동에 딸려있는 식당을 찾아가 저녁을 받았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프리스트 하빈과 마주쳤다. 병동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저녁 예배를 드리러 신전 본관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했다. “저녁은 안 먹고?” “아, 식사는 예배 뒤에 합니다.”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주위를 좀 두리번거려 보았다. 때마침 병동 복도엔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난 충분히 분위기를 잡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개인 카운셀링 같은 것도 들어줍니까?” “물론입니다. 성직자로서 신도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하지요.” “내가 요새 고민이 많아서 그런데. 오늘 시간 나십니까?” “으음, 오늘은 좀….” 난 약간 으르렁대며 말했다. “어어이~ 거, 좀 부탁합시다아? 헌금 많이많이 할테니까.” “…하는 수 없군요. 그럼 저녁 식사가 끝나고 8시에 예배당에서 뵙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그를 보내고 병실로 달려갔다. 여닫이문을 발로 밀어여니 옷을 갈아입고 있던 안젤라의 모습이 보인다. 속옷과 스웨터를 입고 마지막으로 치마를 올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기대했던 거와는 달리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약간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치마를 올렸다. 샀을 때는 몰랐는데 치마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팬티가 그렇게 가슴을 설레게 할 줄은 몰랐다. 식판을 테이블 위에 올린 나는 안젤라가 서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팔짱을 하고 그녀를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그렇게 입으니까 예쁜데? 나한테 노예가 없었으면 널 업어 가버렸을 거야.” “가, 감사합니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와서 느낀 거지만 안젤라는 상당히 순하다. 부끄럼도 잘 타고, 귀여워라~! 여복이 터진 건가? 행복하군. 씩 웃어준 나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저녁 가져왔어. 배고프지? 밥 먹자.” “예.” 테이블로 가서 식판을 들어올리자 안젤라가 어기적거리며 다가왔다. 아, 그렇지. 손바닥으로 이마를 좀 두드린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안젤라를 번쩍 안아올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두팔로 내 목을 감았다. “아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꼭 싸움 거는 모습으로 이상하게 걸어오지 말고.” 얼굴이 빨개진 안젤라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짓이 정말 귀여워서 미치게 하는군! 애써서 표정을 관리한 나는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선반을 앞으로 당겨서 그곳에 식판을 올려주었다. “먹자.” “저… 주인, 아, 아니 코, 콜트씨는요?” “난 여기서 먹을 거야.”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온 나는 그곳에 앉아서 식판에 올려져 있는 빵을 들어 스프에 찍은 다음 우걱우걱 씹어댔다. 잠시 내 모습을 쳐다보다가 살짝 웃은 그녀는 조심스레 빵을 가져가 조금씩 뜯어먹기 시작했다. 병원 밥이라 그런지 맛은 없었지만 안젤라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정말 안 먹을 거야?” “예, 저, 전 그렇게 딱딱한 거 잘못 씹어요.” “내 노예는 잘만 씹어먹던데?” “전 이가 약해서….” 병원음식으로는 도저히 배가 채워지질 않아 여행 때 식사대용품으로 사용하는 말린 쇠고기 육포를 꺼내 그녀에게 권했지만 안젤라는 옅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야 겨우 진정 된 것 같은 얼굴이구나. 그때 안젤라가 처음으로 내게 질문했다. “저, 콜트씨는 모험가세요?” “으응. 목숨을 걸고 목숨 값을 받는 모험가지. 지금은 겨울 여행중이야.” “노예가 있다고 하셨는데. 어디에 있어요?” “글세, 지금쯤 최고급 침대에 누워 실크로 짠 담요를 덥고 훌쩍이고 있지 않을까?” 안젤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 “으응. 아무것도 아냐. 녀석은 지금 다른 곳에 잠시 맡겨뒀어.” 고개를 끄덕인 안젤라는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좋겠어요. 이런 분의 노예는….” “엥? 별로 좋지 않아. 난 나쁜 놈이야. 밤낮으로 부려먹기만 한다고 그 녀석이 때리고 꼬집는 다구.” “…때리고 꼬집어요? 노예가?” “넌 안 그래? 이전 주인들에게 한번이라도 귀여움 같은 거 받아본 적 없어? 응석을 부린다거나?” 잠시 어두운 얼굴을 하던 안젤라는 고개를 숙인 채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어요. 부모님은 모르겠어요. 14살 때 일하던 저택에서 다른 곳으로 팔려 그때부터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어요. 근 4년 가까이 여러 곳을 거치고 여러 주인님을 만나봤지만, 진심으로 귀여움을 받는다거나. 주인님에게 응석을 부려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쳐서 신전병원에 입원한 건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이렇게 깨끗한 침대에 누워본 것도 처음이구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미움받는 신데렐라의 심정 같은 거야?” 안젤라는 킥하고 웃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서는 고개를 돌렸다. “아,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 난 네 주인이 아니니까. 맘대로 웃고 떠들어도 돼. 뭐, 내 노예라고 해도 그런 걸로 트집잡는 짓은 죽어도 못하겠지만.” 시계를 보니 슬슬 8시가 다 되어 간다. 약속시간이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식판을 챙기며 말했다. “식당에 좀 갔다가 올게.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아, 아뇨.” “에이, 그렇게 빼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차 같은 거 공짜로 얻어 마셔 보겠어? 핫 밀크? 핫 초코? 홍차? 잊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노예의 특권이잖아? 어떤 조건 하에서라면 노예는 주인도 선택할 수 있어. 자, 정말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은 거야? 난 지금 핫 밀크가 마시고 싶은데. 혼자 차를 마시는 건 죄악이야.” 머뭇대던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하, 핫 초코요….” “그래, 잘 생각했어.” 씩 웃어준 나는 식판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 결국 선택은 자기가 하는 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선택받거나 남이 해주길 바래서는 안돼. 식당으로 내려가 한창 설거지 중인 주방대원(?)들에게 설거지거리를 추가시켜준 나는 그들의 증오의 눈빛을 피해 본관 신전에 마련되어있는 중앙 예배당을 찾아갔다. 저녁 예배가 끝나고 다들 식사하러 갔는지 한밤의 신전은 고요했다. 그리고 차갑다. 딱딱하고, 어둡다. 지상의 인간들이 뭔 짓을 하던 상관하지 않겠다는 냉철한 신의 차가운 속마음이 내비쳐지는 것 같다. “염병, 못된 놈은 그렇다 쳐도 불쌍한 사람 정도는 돌봐 줄 수도 있는 거 아냐?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믿음만 강요하지 말라구. 치사해. 당신.” “예?” 예배당 안쪽의 거대한 여신상을 바라보며 삐딱하게 중얼거리고 있으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하빈이었다.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보았다. 정확히 8시다. “제때 맞춰왔군. 자, 이제 내 고민을 들어줘요.” “예. 이쪽으로 오시죠.” 그는 예배당 왼쪽 벽면을 따라 줄지어 붙어있는 문중 하나의 문을 열고 나를 들어가게 했다. 좁은 방안에는 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거기 앉으니 벽에 붙어있는 작은 창문 같은 것이 열리며 하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조명이 너무 어두운데.” “…감정이입을 위해 일부러 어둡게 해놓은 거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가슴에 쌓여있는 고민을 털어놔 보세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숭고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희망과 절망의 여신 델린저여. 제 곁에 있는 한 어린양이 겨우 절망에서 벗어서 희망의 빛을 보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 속의 망령이 다시 기어 나와 그녀의 발목을 잡아 챌 것을 생각하니 심히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데. 지금 당장 안젤라를 괴롭히던 악마들의 이름과 서식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한참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다가 나중에 가서야 옆방에 있던 하빈이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할 겁니까?” 콧김을 킁 하고 내쉰 나는 기도를 올리던 손을 풀고 방만하게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낮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쓰레기는 태워 버려야해. 깨끗하게.” “살인은 안됩니다. 프리스트로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봐요. 누가 죽이겠데? 좀 때려주고 말 거야. 일이 커지면 이쪽 여행에도 차질이 생긴다구요.” 17살 소녀가 격었던 생지옥을 맛 보여주겠다.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엔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할거야.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벽 넘어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필터, 캔, 루카스, 쉐이플, 노이스만, 헬리컬, 베벨, 슈트만. 이 8명이 안젤라의 주인들입니다. 항상 함께 몰려다니는 데다가 성격까지 거칠어서 경비병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두절미하고, 어디가면 볼 수 있습니까?” ========================================================================== 으음, 저는 훈련병때 가스실에 들어갔다가 처음으로 생지옥이라는 것을 느꼈더랬지요. Reload Running Fire: 41 “그럴 수는 없어. 계약을 했거든.” 하빈은 다시 대답을 주저했다. 피식 웃은 나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기다렸다. “내가 알기로 희망과 절망의 여신 델린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절망과 희망을 나눠준다고 하더라구요. 보세요. 신의 지팡이 양반? 안젤라는 이제 희망을 받을 차례입니다. 그녀의 절망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야지. 오늘 저녁 나는 감히 델린저의 지상 대행자가 되어보려 합니다. 그녀의 절망의 화살을 받을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윽고 단호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중앙광장 근처 골목길에 ‘일렉트라의 폭풍.’ 이라는 주점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하빈이 앉아있는 방안에서 낮은 음성이, 뚜벅거리는 발소리 때문에 묻혀버릴 것 같은 작고 낮은 음성이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천벌을, 그들에게 천벌을 내려주시오. 델린저의 절망의 화살을 당신이 대신 받아 그들의 가슴에 박아주시오.”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야. 히죽 웃은 나는 그대로 예배당을 걸어 병동으로 돌아갔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차가운 겨울바람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의 보름달이 애절한 음성으로 인간들의 이해관계를 저주하고 있었다. “여어~! 오래 기다렸지?” 주방에 들려 뜨거운 핫 초코와 핫 밀크를 가져온 나는 침대에 앉아있는 안젤라에게 핫 초코를 내밀었다. 그녀는 조금 놀란 얼굴로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머그컵을 보다가 약간 울먹이며 날 바라보았다. “정말 좋으신 분이세요. 저 같은 거에게도 이렇게 신경써주시구….” “허, 쑥스럽게 무슨 부끄러운 말이야? 오늘은 일찍 자자. 난 내일 떠나야 하니까.” “예? 떠… 나요?” 컵을 들고 침대에 앉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급한 볼일이 있거든? 그래서 여기 오래 머무를 수 없어. 하지만 걱정하지마. 약속대로 네 보따리는 확실히 챙겨 주고 갈 테니까.” 안젤라가 우울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손에 들고있는 머그컵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팔을 뻣은 나는 안젤라의 코를 살짝 잡아당겼다. “아응….” “이봐요. 귀여운 돼지 코 아가씨. 지금 이런 생각했지? ‘좋은 곳에 데려다 준다는 약속은 어떻게 하고, 이 거짓말쟁이.’ 맞지?” “아, 아니요! 이렇게 구해주신 것 만해도 고마우신 분께… 그런….” 당황한 안젤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코를 놓아준 나는 낄낄 웃으며 따뜻한 우유로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마. 머리 아픈 일은 내가 다 처리해 놓고 갈 거니까. 만약에 경비대원이 찾아와서 뭐라고 그러면 넌 죽어도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 돼 알겠지?” “자, 잡아떼요? 제가요?” 어리숙한 그녀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뿌린 나는 고개를 돌리고 안젤라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깜짝 놀란 그녀가 들고있던 컵을 떨어뜨렸다. 차가운 신전 바닥으로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졌다. 코앞에 있는 안젤라를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려 주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해.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는 없어. 생각 같아서는 데리고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널 여기다 잠시 맡겨 두고 가겠다는 거야. 노예라고는 해도 인간인 이상 최소한의 생활력은 있을 거 아냐? 떠나기 전에 모든 물밑 작업과 포석을 다 깔아놓을 테니 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여기 버티고 있어야 해. 알아들어?” “예…! 예에!” 겁에 질린 안젤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손을 놓아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그컵을 주워들었다. 용케도 깨지지 않았구나. 수건으로 컵을 닦은 나는 내 핫 밀크를 반 따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미안하다. 입도 못 댄 것 같은데. 이거라도 받아.” “도, 돌아오시는 거죠? 꼭 돌아오시는 거죠? 저, 절 이대로 버리시지 않으실 거죠?” 안젤라는 내가 내미는 컵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순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필사적인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에 난 피식 웃어주었다. “좋은 곳에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잖아?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거야.” “흐윽….” 안젤라는 결국 눈물을 머금었다. 못 말리겠군. “훌쩍,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그런 거 필요 없어. 난 네 죽은 아기를 받고 과거를 태워주기로 계약했다. 이제 넌 희망을 받을 차례야.” 죽은 아기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당장 얼굴을 굳혔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내 배낭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어흐흠! 피곤 한데. 일찍 잘까?” “어, 예….” 안젤라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침대에 누울 동안 나는 배낭을 챙겼다. “뭐하세요?” “어둠을 등지고 절망의 화살을 쏘러 가야지. 넌 잠이나 자. 아침이면 다 해결되어 있을 거다.” 깜짝 놀란 안젤라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침대로 걸어가 반쯤 일어난 그녀를 다시 밀어서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볼에 살짝 입술을 맞춰주었다. 안젤라가 커다랗게 눈을 떴다. “사례금은 이 정도로 받겠어. 그럼 갖다 올게. 문 잠그지마. 아마 새벽에 들어올 거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귀여운 표정으로 키스한 볼을 만져보던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조, 조심하세요!” “오~ 걱정해 주는 거야? 고마워.” 불안한 눈의 안젤라가 날 바라보며 걱정스레 외쳤고 난 웃으며 병실의 문을 닫았다. 탁! 확실히 현실적으로 따지고 보면 지금 내 행동은 이래저래 손해다. 하지만 말야. 살면서 이 정도는 착한 일을 해둬야 나중에 지옥에 가서도 염라대왕에게 밀리지 않고 따질 수 있지 않겠어? 하하하~! 낄낄 웃으며 고개를 돌린 나는 신전 본관 건물을 바라보았다. 자~! 슬슬 물밑 작업을 해볼까? 어두워진 병동을 걸어 간 나는 을씨년스러운 신전의 정원을 걸어 본관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프리스트를 붙잡아 하이 프리스트의 소재를 물었다. “중앙예배당에서 교리 연구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두들 이곳으로 오시는 중입니다. 아, 저기 오시는 군요. 어깨에 붉은 견장이 있는 분이 하이 프리스트입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근엄한 늙은이 하나가 한 손에 성서를 들고 프리스트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의 소재에 대해 물었던 프리스트가 달려가더니 나를 소개해 주었고 난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하이 프리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주제넘게도 이곳의 하이 프리스트를 맡고 있는 늙은이라오. 그래, 날 찾는다는 길 잃은 어린양이 당신이오?” 주변에 함께 서있던 프리스트들이 킥킥 웃으며 고개를 돌리거나 했다. 나도 씩 웃으며 그에게 머리를 까딱였다. “예. 하이 프리스트, 밤늦게 노상에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내일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가기 전에 헌금을 좀 하려고요.” “가난한 신전의 살림살이에 보탬을 해주시려 하다니. 이거 정말 고맙소.” 배낭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낸 나는 그것을 프리스트에게 내밀었다. “배운 게 없어서 예절도 모르는 용병 놈이 귀 신전에서 목숨을 구원받아 이렇게나마 사례를 하려고 합니다. 형식도 절차도 없지만, 제발 받아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며 돈주머니를 내밀자 근처에 몰려있던 프리스트들이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당연하지. 돈하고는 친해져서는 안 되는 게 신전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 프리스트는 내가 들고있던 돈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아들며 말했다. “고맙소, 안 그래도 의약품 재고가 떨어져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마련할 수 있겠소.” 그가 돈주머니를 받아드는 것을 보며 히죽 미소지은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아, 그리고 제 동료 중 하나가 부상이 심하여 한동안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제가 돌아올 때까지만 신변의 안전을 부탁드립니다.” ‘신변의 안전’ 어쩌구 하는 말을 듣게 되자 하이 프리스트는 한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신전 내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공권력이 들어올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그녀가 신전의 보호아래 있는 이상 경비대나 관리원에서 안젤라를 데려갈 수가 없게되는 거지. 주변에 서있던 프리스트들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뿌리며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그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길어야 보름, 한달? 그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하이 프리스트는 헛기침을 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군. 다쳐서 입원해 있는 사람을 야속하게 대할 수는 없으니, 그럼 자네 동료의 이름을 좀 들어보도록 할까?” “S-102호실에 입원해 있는 불쌍한 계집아이입니다. 이름은 안젤라 라고 하고요. 이제 막 절망에서 벗어난 아이이니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쇼. 하이 프리스트.” 안젤라의 이름이 나오자 하이 프리스트를 비롯한 프리스트들의 얼굴로 약간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만인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프리스트로서 한순간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고개를 저은 나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그 아이에게 희망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 대답을 들은 생각 같은 것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 길로 신전을 나선 나는 대로를 걸어 시장 근처에 있는 여관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상점가에서 마법상점을 하나 발견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든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 가게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주인장이 서있는 계산대에 방만하게 기대어 서서 은화 한 닢을 올려주었다. “어떤 놈들의 정보를 사고 싶은데.” “손님. 저희 가게에서는 그런 거 취급하지 않는데요. 요 앞 주점에 가셔서 마스터를 부르시면….” “아니, 당신도 알고 있는 놈들 일거요. 에 이름이 뭐라더라? 필터, 캔, 루카스, 쉐이플, 노이스만, 헬리컬, 베벨, 슈…?” 놈들의 이름을 외워주자 당장 마법상점 주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날 보더니 말했다. “누구요? 당신.” “델린저의 부탁으로 절망의 화살을 쏘려온 사람이라고 해둘까?” “복수요?” “그렇지.” “관두쇼.” “그럴 수는 없어. 계약을 했거든.” “당신 용병이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의뢰인의 부탁으로 놈들을 태워버리려고 왔수. 정보 팔 거요 말 거요?” 딱딱한 얼굴로 날 쳐다보던 주인장은 계산대위에 올려둔 은화를 집어들며 입을 열었다.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별별 나쁜 짓은 다 하는 인간 말종 같은 놈들이요. 게다가 놈들 모두 실력있는 용병이라서 경비대에서도 사실 두 손들었지. 오죽했으면 우리 상가조합에서 더 이상 손님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조건으로 놈들에게 노예까지 사줘야 했소. 덕분에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얼마 전에 노예가 도망을 갔다면서 상가로 몰려와서 난동을 부리더군.” ========================================================================== 못된 놈들이죠? Reload Running Fire: 42 “낯뜨거운 소리?” 사줬어? 노예를? 이런 빌어먹을! 여럿이서 돈을 모았다는 것은 이걸 두고 한 소리였구나! 가게 주인은 계속해서 놈들의 생김새를 나에게 주절거렸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나는 인간과 짐승의 차이가 뭔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이 나왔다. 아무 차이도 없다. 아니, 인간 쪽이 좀 더 솔직하지 못할까? “녀석들은 광장 근처에 있는 주점 겸 여관 일렉트라의 폭풍에 있소. 이제 그곳도 더 이상 가게가 아니라 마을 뜨네기들의 소굴이 되어버렸지만.” “잘 알았시다. 그럼 이제 스크롤 하나 파쇼.” 주인장은 상당히 협조적으로 나왔다. 그는 묵직한 나무 상자를 꺼내오더니 그것을 열었다. “대인 공격형 스크롤이요. 특별히 반값만 받겠소.” “이런 거 말고, 정신계열 스크롤은 없수?” “예를 들면?” “한방에 정신이 나가버려 바보가 될 정도의 지독한 것으로 으음, 스케어(Scare)정도면 될까?” 주인장은 날 보며 말했다. “아까는 태워버리겠다면서?” “이봐요. 주인장? 죽이는 건 너무나도 쉬워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내 의뢰인의 원한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말씀이야. 평생을 생지옥 속에서 살다가 죽게 하고 싶어. 내 말뜻을 이해하시겠어?” 잠시 날 쳐다보던 마법상점의 주인은 목 뒤를 조금 주무른 다음 상자를 닫아서 진열장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붉은 색 봉인이 찍힌 검정색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단순히 겁만 주는 게 아니라 정신붕괴까지 일으키는 스케어 스크롤이요. 가격은 200만 루나이지만 특별히 100만으로 깍아 드리리다.” 난 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 올려주었다. “어허, 깍아준다니까?” “나머지는 입막음이우. 경비대에서 찾아오면 죽어도 모른다고 잡아떼쇼.” “어차피 취급금지 품목을 불법으로 들여온 거니 걱정하지 마시오.” 씩 웃어준 나는 장사 잘하라고 말해주고 그만 가게를 나서려고 했다. “손님. 촉매를 잊고 가셨소. 이거 없으면 스케어 스펠은 아무짝에서 쓸모가 없다오.” 그가 작은 나무상자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안에는 사람의 뼈로 짐작되는 물건이 들어가 있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촉매라면 이쪽에도 한 녀석 있으니까.” 고개를 돌린 나는 마법상점의 문을 닫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에 섰다. 휘이잉~! “슬슬 가볼까?” 고개를 돌린 나는 배낭을 올려 매고 대로를 걸었다. 그리고 시장 입구에 있는 주점으로 가서 네모를 찾았다. 때마침 그는 홀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가 날 반겼다. “일찍 왔구나?” “늦게 먹는구려?” “아까 좀 피곤해서 잤었다. 이제 깨어난 거지.” 그의 앞자리에 앉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갑시다. 쓰레기 태우러. 한 다리 끼워 줄테니까.” “고얀 놈, 말버릇 한번 걸작이로구나. 주인장! 계산!” 네모는 반이나 남은 큼직한 스테이크를 단숨에 처치하고는 돈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쿵쾅쿵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윗층에서 퍼피가 달려내려왔다. 녀석은 우리들의 앞에서 옷을 껴입으며 말했다. “저,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에잉~! 젊은 것들이란! 나 먼저 나가 있으마!” 퍼피를 쳐다보던 네모는 못마땅한 듯이 몸을 돌렸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해하던 퍼피는 나에게 그 고개를 돌렸다. 난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봐주었다. “어, 왜, 왜 그러시는지….” “첼시아는?” “마스터는 지금 방에서 주무시고… 윽….” 퍼피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쓰게 웃은 나는 녀석에게 목에 나있는 그 키스자국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해주며 몸을 돌렸다. 화들짝 놀라서 목을 만져보던 퍼피는 급한대로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고 우리들을 쫓아왔다. “주인에게 사랑받는 노예라. 그거 참, 기준이 애매모호 하로세.” “저, 저는 그….” “내가 스피릿을 데리고 있는 거랑 같은 거겠지? 됐어.” 난 손을 흔들어주며 길을 걸었다. 퍼피는 의미 없는 한숨을 잠깐 내쉰 다음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시각이 10시 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이 몸을 침대에 눕힐 시간이다. “그래서 놈들은 어디에 있다고 했느냐?” “광장 근처 골목길을 찾아서 들어가면 일렉트라의 폭풍이라고 하는 주점이 있대요.” 네모와 퍼피를 데리고 광장을 돌아다닌 나는 어렵지 않게 일렉트라의 폭풍이라는 이름의 주점을 발견하게 됐다. “겉은 상당히 멀쩡한 술집 같은데?” “동감이다. 그나저나 습격할거라면 얼굴을 가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무슨 말씀을,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퍼피는 들어가자마자 문 앞을 지키고 서서 가게 안에 있는 놈들이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알겠냐? 그것만 해주면 된다.” 퍼피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너클을 꺼내 손에 꼈다. 옆에서는 네모가 도끼를 뽑아들고 으르렁 거렸다. “그래까짓! 현상금이 걸려도 이 마을에만 오지 않으면 되니까 상관없다! 가자! 더러운 놈들! 이 몸이 모조리 박살 내주지!” 네모가 먼저 당당하게 가게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도끼를 가지고 무식하게 문을 찍어서 부숴 버렸다. 고개를 설래설래 저은 나는 그가 만들어놓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가게 안에는 꽤 많은 수의 사내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뭐야! 손은 뒀다가 국 끓여 먹을거야! 왜 멀쩡한 걸 부수고 지랄이야?! 문짝 물어….” 으득?! 도끼머리에 앞 이빨이 왕창 나가버린 사내는 게거품을 물고 바닥으로 쓰러져 비명을 질러냈다. 약간 어두운 배경의 실루엣을 가진 네모는 내 허벅지 만한 두꺼운 팔뚝으로 거대한 도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시뻘건 눈으로 외쳤다. “이 버러지들! 오늘 네놈들의 버릇을 고쳐주러 왔다!” 그의 외침에 더불어 추운 겨울 운동부족을 호소하며 가게안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사내들이 쾌제를 지르며 각자 흉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 이거, 내가 원했던 건 이런게 아닌데. 실실 웃으며 배낭을 풀어던진 나는 강철 건틀릿을 끼고 앞으로 달려갔다. “으랴차! 얌전히 뒈져라! 이 쓰레기들!” 콰앙! 맨 앞에 달려오던 녀석은 내 팔꿈치를 맞고 코뼈가 부러져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테이블을 박차고 날아올라 각목을 휘두르는 녀석을 발견한 나는 뒤돌려차기로 놈을 날려버렸다. 옆에서는 도끼를 든 네모 아저씨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놈들의 가슴이나 얼굴에 도끼를 가져다댔다. 드워프 싸우는 모습은 오늘 처음보는데. 햐아~ 키가 작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덩치에 비해서 정말 빠른 걸? 게다가 쏟아지는 각목과 무수한 발길질에도 한점 흔들림없는 맷집이라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콰앙~! “끄아아악~!” 도끼 면으로 얼굴을 얹어맞고 하얀 옥수수를 흩뿌리며 사내들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잔뜩 충열된 눈을 부릅뜨고 성난 멧돼지마냥 달려간 그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녀석들의 거시기(?)를 짖밟았다. “계집애로 만들어주마!” 퍽퍽퍽~! “꺄아아아아악!” 사내들은 두손으로 가랑이를 붙잡고 여자처럼 비명을 질렀고 네모는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미친 듯이 날뛰어댔다. 으윽~! 낮에 했던 말은 저걸 뜻하는 거였구나. 아프겠다. 그때 내 옆으로 퍼피가 날아와 근처의 사내들을 순식간에 때려 눕히고는 다시 문으로 달려가 도망가려는 놈들을 놈들을 두들겨팼다. 얌전히 있기는 심심했었나보다. 뭐, 나야 내 말만 잘 따라준다면 저런건 애교로 봐줄수 있다. “끼요옵!” 깨진 술병을 들고 달려들어 내 얼굴을 찢어발기려던 녀석의 팔을 붙잡아 꺽어버린 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놈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무릎에다가 대고 찍어버렸다. 쾅! 쾅쾅쾅! 여러번 찍어대자 놈은 핏투성이가 되어 축 늘어졌다. 난 괴성을 지르며 녀석을 힘껏 집어던져 버렸다. 날아간 사내는 기침을 좀 해대다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무섭게 덤벼들던 놈들이 슬슬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모쓸놈들! 너희는 이런 거 달고 있을 자격이 없어! 내가 떼어주마!” “사, 살려줘어! 으아아악!” 사내의 가랑이 사이에 있는 것을 무지막지한 손아귀 힘으로 움켜쥔 네모는 입에 거품을 물고 방광하는 사내의 턱을 커다란 주먹으로 올려쳐버렸다. 두손으로 다리사이를 붙잡고 쓰러진 사내는 죽었는지 움직이질 않았다. …으아, 정말 아프겠다. “크아아아! 다음은 어느 놈이냐!” “우, 으아악! 튀어!” 무서운 눈으로 고개를 돌린 네모는 핏줄이 돗아난 팔을 들고 허옇게 질려있는 사내들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그걸보고 낄낄 웃어준 나는 주머니 안에서 검은 손수건을 꺼내 들고 머리에 질끈 묶으며 외쳤다. “어딜 도망가 이 자식들아! 힘없는 계집에게만 덤비다보니 나 같은 놈에게 덤비는 방법은 다까먹었냐?! 칼로 찔러도 좋아! 활을 쏴도 좋아! 날 멈추게 해봐! 이 개자식들! 으하하하!” “이 새끼가!?” “죽여! 각목 갖고와! 에릭! 부엌에 가서 식칼 들고와!” “이 놈들! 그런 걸로 이 몸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날 죽이려면 도끼나 대도를 들고와랏!” “우왁?!” 아래층에 있던 놈들은 정말 뜨네기들인지 주먹질도 익숙하지않아 보이고 뻔히 보이는 공격에도 알아서 맞으러 올 정도였다. 간단하게 놈들을 때려눕힌 나는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는 네모를 바라보았다. “맞았수?” “방심하다가 한 대 맞았다.” “이런, 아직도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그러시면 안되지.” “이놈이?!” 낄낄 웃으며 양손을 흔들어준 나는 퍼피에게 아래층을 지키라고 말했다. 따라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놈들이 도망갈지 모르니 밧줄을 찾아서 녀석들을 묶어두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인 퍼피는 준비해 온 밧줄로 녀석들을 끌어다 한곳에 묶기 시작했고 난 윗층으로 올라갔다. 네모 아저씨가 내 뒤를 따랐다. “나도 가겠다. 윗층에서 낯뜨거운 소리가 들려오는구나.” “낯뜨거운 소리?” ========================================================================== XXX: 시이이임으으의의!!! Reload Running Fire: 43 “알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끝을 봐야지.” 내가 되묻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도끼를 어깨에 걸쳐 맸다. 난 피식 웃으며 부끄럼을 타는 그의 어깨를 바라봐 주었다. 그때 네모가 난장판인 홀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신음을 흘리는 놈들을 가르켰다. “저 중에 안젤라의 주인 놈이 있더냐?” “아뇨. 아까 마법 상점에 스크롤 사러 갔다가 거기 주인장에게 자세한 생김새를 들었어요. 살펴봤는데 여기엔 없더군. 윗층에 있나봐.” “그러냐? 가자. 윗 층에도 꽤 있어 보인다.” “어떻게 아쇼?” “나는 드워프다. 인간하고는 그 가청음(可聽音)이 달라!” 음음음~! 가청음이라. 들을 수 있는 음향의 크기를 말하는 거던가? 고개를 갸웃한 나는 서둘러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막 층계참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뭔가 번쩍하더니 롱소드 같은 것이 날아왔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공격이라 거의 무의식적인 반사신경으로 그것을 붙잡아야했다. 카락!?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사실 덕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젠장! 뜨네기 소굴이라고 방심했다간 꼴사납게 되겠는데? 난 앞에 서있는 네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영감. 덕분에 목숨 건지셨소?” “이놈!” 꾸직?! 쿠당탕~! “끄아아악!” 2층 층계참에 앉아서 올라오는 우리들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던 사내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드워프가 휘두른 도끼의 옆면을 맞고 얼굴이 완전히 으깨졌다. 저건 아무리 치료를 잘해도 원래대로 만들 수 없겠다. “알아보기 힘들게 그러지 마쇼. 놈들을 찾을 수 없잖아?” “흠, 주의하마.” 고개를 돌린 나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며 뱀처럼 몸을 까뒤집고 있는 녀석의 배를 걷어 차버렸다. 그러자 놈은 개구리 마냥 쭉 뻗어버렸다. “이제야 잠잠하군. 어디보자… 갈색 머리, 해골 귀걸이. 오, 이놈은 아마 쉐이플이라고 했던 놈인 것 같구만. 아저씨. 한 놈 잡았수.” “그러냐? 죽은 건 놔두고 마저 잡으러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2층의 아무 방이나 뒤지려 했다. 하지만 아저씨가 말렸다. “부탁이니 네놈이 저 방에 들어가라. 아마 다섯 놈 정도 있을 거다.” “응? 왜 영감이 먼저 들어가지 않구서?” 네모는 무섭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내가 들어가면 저 방안에 있는 자식들 다 죽여 버릴지도 몰라.” 아하~!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그가 그 귀신같은 청각으로 사람이 있는 방문을 골라 박차고 난입하는 것을 보며 몸을 돌렸다. 이거, 나도 이상한 장면 같은 거 보면 괜히 흥분해서 큰일 벌일지도 모르는데. 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좀 한 나는 지극히 신사적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등뒤에서는 분노한 드워프의 외침이 들려왔다. “크아아아!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이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 쓰레기라…. 쓰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네모가 싫어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얼른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정말, 나도 피끓는 사내란 말야. 좀 평범하게 카드놀이 같은 거 하고 있으면 안되나? “하아~! 아~! 하앙~! 아아아~!” 불을 꺼서 그런지 방안은 좀 어두웠다. 안의 녀석들도 나를 자기들 동료로 생각하고 있는지 바로 공격해오지는 않았다. 아니, 저 상태라면 내가 적인지 아군인지 인지할 정도의 정신은 남아있어 보이지 않는군. 넓은 방안에는 4개의 침대가 다다닥 붙은 커다란 원 배드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위에 대략 남녀 8명이 올라가 난교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는 사람은 기분 좋을지 모르겠는데. 보는 입장으로서는 욕설이 나오는 걸? 그때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야, 밖에 뭐야? 왜 이리 시끄러워? 집중을 할 수 없잖아?” “뭘 모르는군, 밝은 조명이 있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구?”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내 나는 그것을 찢으며 말했다. “라이트.” 팍! 자그만 빛 구슬이 터져 나오며 방안이 환하게 밝혀졌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놈들은 각자 얼굴을 돌리거나 눈을 감았지만 난 이미 마법불빛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무난하게 그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여자는 두 명뿐이었다. “이런 한심한 자식들, 너희들 변태냐? 제대로 된 성관계는 1대 1이여야 황금비율 라고.” “으악! 너, 넌 뭐야?!” 정신을 차린 놈들이 하나 둘씩 날 바라보며 비명을 질러댔다. 어찌된 영문인지 여자들은 실실 웃으며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약을 먹였나? 그러고 있는데 동작이 빠른 한 녀석이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와 바지를 주워 입기 시작했다. 빨간 머리, 20대 후반. 어깨에 악마문신. “어이, 캔. 난 옷 입어도 좋다고 말한 적 없어.” “뭐?! 이 자식! 어떻게 내 이름을…?! 으악!” 달려간 나는 놈의 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바지를 입고 있던 녀석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쓰러져서는 화가 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녀석을 힐끗 내려다본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놈이 홀라당 벗은 모습으로 검을 뽑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은머리, 30대 초반, 마른 얼굴, 왼쪽 손에 흉터. “이 자식! 요절을 내주마!” “미친 새끼. 너 루카스지? 홀라당 벗고 별 지랄을 다 하는구나.” “으아아! 이 자식!” “알몸의 사내는 징그러워. 싫어, 가까이 오지마.”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걷어차서 홀라당 벗고 그것을 흔들며 달려오는 녀석에게 날려주었다. 턱을 직통을 맞은 녀석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그때 담배 냄새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아주아주 거만하게 생긴 놈이 감히 내가 제미니에게 선물한 것과 같은 담뱃대를 입에 물고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볼 것도 없군. 저놈이 노이스만이구나. “어이 친구, 누가 보내서 왔지? 7번가 클레멘 녀석들이 보냈나?” “아니, 난 개인에게 고용된 용병이다.” “누구에게 고용됐는데? 우리한테 불만은 가진 사람은 별로 없을 텐데?”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꺽은 나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아, 그전에 옷 입다가 쓰러진 녀석의 배를 걷어차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중에 뒤를 노리고 덤벼들지 모르는 녀석은 애초에 밟아두는 게 좋다. 퍽! “커으윽~!? 이, 이 자식…!” “이 자식? 누구에게 한 말이야?” 퍽퍽퍽퍽~! 콰득! 퍽퍽퍽! 으드득?! 미친 듯이 놈의 배를 걷어찬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허리를 밟아버렸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거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신음을 흘리는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재수없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는 노이스만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이봐, 그것도 물건이라고 자랑하는 거야?” 순간 그의 이마로 핏줄이 돋아났다. 남은 놈들도 이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옷도 없는 놈들에게 밀릴 만큼 난 약하지 않아. “여기까지 올라온 걸 보면 실력이 꽤 되는 것 같은데 말야. 어때? 의뢰를 접어 준다면 얼마를 받았던 그 세 배를 주지. 물론 방금 한 말도 용서해 주겠어. 날 위해 일하지 않겠나?” 기가 찬다. “야이 미친 새꺄. 잊어먹었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더러운 일을 하는 용병이라도 일단 돈을 받았으면 의뢰인을 배신하지 않아. 불문율이라구. 지금 나더러 그걸 어기라는 소리야?”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거 아닌가?”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염병할 놈아. 하지만 배짱이 맘에 든다. 옷 입어. 그리고 덤벼. 무기를 들어도 좋아. 날 이겨봐. 그럼 네놈이 하라는 데로 해주마.” 사실은 옷도 없는 징그러운 사내 놈들의 몸에 손을 대기 싫어서였다. 움직일 때마다 가랑이 사이에서 덜렁거리는 것도 보기 흉하고, 어쨌든 내가 뒤로 물러서 주자 녀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주워 입고 검을 뽑아들었다. “오라! 덤벼! 안젤라의 복수를 해주마!” 순간 녀석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멍청한 것들! 달려간 나는 가장 앞에 있는 녀석의 가슴을 팔꿈치로 찍어 버리고 밀어낸 다음 그 뒤에서 달려오는 녀석의 검을 붙잡아 당기며 가랑이 사이를 걷어차 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눈을 크게 뜬 노이스만이 보였다. 비틀비틀 일어나려는 녀석들의 배와 허리를 걷어차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하는 거야? 제대로 덤벼, 듣자니 당신들 전부 실력 있는 용병이라며? 그렇게 불쌍한 계집애를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돌려가며 윤간하던 놈들의 실력은 결국 이 정도뿐인 거야? 이 발정난 개새끼 같은 놈들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니 노이스만이 이를 드러내며 검을 휘둘렀다. 놈의 검은 덩치에 비해 상당히 빨랐지만 붙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자식!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반칙이면 어때? 이기면 장땡 인거야!” 놈의 손아귀에서 검을 빼앗아 뒤로 내 던진 나는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녀석을 머리를 붙잡고 양 무릎을 번갈아가며 놈이 쓰러질 때까지 찍어댔다. 퍼퍼퍼퍼퍼퍽~! “큭! 억?! 어억?! 컥!” 쿠웅…! 얼굴이 피투성이가된 노이스만이 넘어갔다. 다람쥐처럼 놈에게서 떨어진 나는 녀석이 기절 한 것을 확인하고는 가죽바지를 살폈다. “에이 젠장. 더러워 졌네.” “미친 녀석, 그렇게 찍어대는데 성할리가 있냐? 바지에 뭍은 이빨이나 좀 털어 내라 꼴사납다.” 뒤를 돌아보니 네모가 서있었다. 그는 방안의 모습을 살펴보다가 침대에 쓰러져 있는 여자들을 발견하더니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팍 돌렸다. “다 때려잡은 것 같은데. 이제 어쩌지?” “일단 한 곳에 모읍시다. 이제부터 저주를 걸 거니까.” “저주?” “물론, 좀 때려주자고 쳐들어 온지 아쇼?” 손으로 바지에 붙어있는 이빨들을 툭툭 털어 낸 나는 침대로 걸어가 여자들을 살폈다. 팔과 어깨에 노예문장 대신 창녀문장이 박혀있었다. 창녀도 노예다. 노예로 이리저리 팔리다가 상품 가치가 없어진 노예는 이렇게 사창가로 들어가 창녀가 되는 거다. 성의 상품화, 반인륜적 행위에 썩어빠진 국가 정책이 어쩌고 해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은 이게 한계인 거다. “뭐 하는 거냐?” “아니요. 자, 놈들을 아래층으로 옮깁시다. 도와줘요.” “알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끝을 봐야지.” 네모는 쓰러진 놈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들의 옷가지를 챙겨서 그녀들과 함께 담요로 둘둘 말았다. 그리고 양어깨에 하나씩 매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일단의 작업이 시작됐다. 나와 퍼피가 2층에 있던 놈들을 하나씩 아래층으로 끌고 내려가면 네모가 빠른 손놀림으로 녀석들을 꽁꽁 묶었고 그 작업은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다. 인원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간이 일찍 깨어나는 녀석들이 있으면 한번씩 걷어차 다시 기절시켜야 했다. ======================= =================================================== 기절 해보셨습니까? 저는 안타깝게도 그 좋은 걸 한번도 못해봤습니다. 한번 해봤으면~! Reload Running Fire: 44 “영감님 말 탈줄 모르잖아요?” “자, 다됐어요. 이제 놈들을 깨웁시다.” “어떻게?” “발로 차거나 해요.” “…아까 차서 기절시켰는데?” “그럼 뺨을 때리던가.” 뭔가 고민이 생겨버린 네모를 남겨둔 나와 퍼피는 기절한 사내들을 발로 차거나 뺨을 때리거나 해서 다시 깨웠다. 그러자 안 그래도 신음소리가 많은 방이 더 시끄러워졌다. “아~ 시끄러워 닥치지 못해?” 스르릉~! 허리에서 은도금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시리도록 날카로운 반사광에 놈들의 입이 저절로 닫혔다. 이빨이 박살나고 얼굴이 엉망이 된 녀석들은 두려운 기색으로 나와 검을 바라보았다. “이봐, 방금 전 여자들과 침대에서 뒹굴며 흘리던 잔인한 미소를 어디로 간 거야? 이제 와서 그런 온순한 표정이라니, 어울리지 않아. 자신이 저지를 죄 앞에서 당당해 지라구.” “우,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난 기가 차서 고개를 돌렸다. 갈색머리, 제법 잘생긴 얼굴, “이봐. 헬리컬,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그래! 모르겠다! 씨발~! 이거 안풀어?!” 녀석은 자다가 끌려온 놈이라 그런지 상당히 기가 드셌다. 난 킥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만나게 될 네 아들에게 물어봐.” “무슨 헛소리야!?” 허리를 펴고 낄낄 웃어준 나는 고개를 죽 돌리며 팔과 다리가 꽁꽁 묶여서 옹기종기 앉아있는 사내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필터, 캔, 루카스, 쉐이플, 노이스만, 헬리컬, 베벨, 슈…? 아, 그래 슈트만. 미안하군 외운다고 했는데. 요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말야. 헷갈렸어. 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 왜 내가 이런 놈에게 얻어맞고 묶여 있어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심도있는 토론을 벌여볼까? 누가 먼저 질문 하겠어?” 네모에게 따로 붙잡힌 놈들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고개를 들었다. 놈들의 증오에 씩 웃어준 나는 문 앞에 놓아둔 배낭에서 배게 같은 것을 꺼냈다. 네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거 혹시….” “예. 맞아요.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몇 일 내버려두니 썩기 시작해서 말이지.” 냄새가 나지 않도록 감아두었던 담요를 모두 풀어내자 수건으로 감싼 어린 아기의 반쯤 썩은 시체가 모습을 들어냈고 8명의 죄인들을 비롯한 사내들은 그게 뭐냐는 식으로 눈살을 찌뿌렸다. 가게 안으로 서서히 역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귀여움을 받았어야 했을 녀석을 잠시 내려다본 나는 강보를 얼굴 앞에 들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인사들 나눠. 당신들의 아들이야. 어때? 모두와 꼭 닮았지?” “무, 무슨 짓이야! 냄새나는 시체를 들고 와서는! 빙빙 돌리지 말고 어떤 놈이 시킨 건지나 말하고 꺼져! 틀림없이 클레멘 녀석들이 보낸거지?! 빌어먹을! 자객을 고용해서 보내다니! 지금부터 전쟁이야! 가만 두지 않겠….” 짜아악! 혼자서 떠들어대는 헬리컬의 뺨을 후려 갈겨준 네모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으르렁댔다. “이 염병할 인간 놈! 대체 이 속에는 뭐가 들었느냐! 자기 자식도 몰라보다니!” 그러자 헬리컬이 이상한 눈으로 내 두 손에 들려있는 아기 강보를 바라보았다.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모두의 고개가 그에게 돌려졌다.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냐. 내 아이일 리가 없어!” “이봐. 이 아기는 이 친구만의 아기가 아냐. 아까 말했다시피 당신들 모두의 아이라구. 은근 슬쩍 남에게 떠넘기지마.” 모두는 수군거리며 자신의 과거를 뒤집기 시작했다. 그때 한 친구가 말했다. 마법상점 주인이 알려주었던 대로라면 필터라는 녀석이다. “보쇼. 그럼 애 엄마는 누구….” “안젤라 라고 하는 불쌍한 아가씨입니다.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문앞에 서 있던 퍼피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녀석을 힐끗 쳐다본 나는 고개를 돌리고 놈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맞아. 너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안젤라의 자식이다. 운 좋게도 사산했지. 그리고 이 녀석의 아버지는 너희 모두인 거야.” “염병! 지랄하지마! 노예 좀 갖고 논게 뭐가 어때서! 다들 그러잖아?! 노예의 존재이유가 뭔데? 결국엔 주인의 필요에 의해서야! 빌어먹을! 다들 똑같은 주제에 우리만 나쁜 놈 취급하지 마! 그러는 네놈은 노예를 데리고 있어본 적 없어? 앙?! 정의의 사도처럼 꼴깝 떨지마! 똑같은 놈들끼리 대체 뭘 하자는 거야?!” 헬리컬의 외침이었다. 퍼피가 울컥해서 나서려는 것을 말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긍정했다. “물론 나도 노예를 가지고 있다. 막말로 심심해지면 침대로 끌여들여서 데리고 놀기도 해. 솔직히 그런 생각 없으면 그건 성인군자겠지? 하지만 말야. 네놈들은 도가 지나쳤어. 자기 노예라면 적어도 지켜주고 아껴줘야 해. 머리 한번 쓸어주면서 기분 좋게 웃어주는 게 그렇게 힘든 거였냐? 그래서 아버지도 모르는 불쌍한 아기를 임신한 녀석이 눈밭으로 달아나게 만들어야 했어? 이 버러지 같은 놈들아. 너희들은 인간말종에 쓰레기야. 하지만 한번이라도 자기가 쓰레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겠지? 물론 그걸 알았다면 이런 짓을 못했을 거야.” 놈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들의 처지와 내 행동의 불합리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잘못과 정당성을 따지면 정말 할 말이 없는 이 세상에서 애초에 선악의 구분은 모호한 것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오직 먹히는 것이 있다면 자기 주장을 진실로 만들 힘 정도일까? 새삼 약한 놈은 살 수 없는 너무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린 나는 가슴에 안아든 부패한 아기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저씨. 퍼피, 문 앞에 있는 여자들 데리고 밖으로 나가쇼.” “이 빌어먹을 자식! 그년이 네게 뭘 해줬길레 이러는 거야! 같이 자줬냐?!” “이거 풀어! 다시 붙어보자! 박살을 내주마!” “이건 억울해! 노예 좀 가지고 논게 뭐가 나빠?! 앙! 원래 그러라고 있는 녀석들이잖아? 안그래?!” “야 이 새끼야! 너도 네 노예랑 그 짓 해봤다면서 너무 하는 거 아냐! 말 좀 해봐! 너도 우리와 다를게 없는 놈이잖아!” 여자들을 어깨에 짊어진 퍼피가 고개를 돌리고 서슬퍼런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니요. 저분은 당신들과는 틀립니다. 저는 노예라 아무말도 할 수 없지만, 이것하나 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분은 노예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봐주시는 몇 안되는 분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노예를 사랑해주는 분입니다. 노예를 인간 이하로 보고 절망과 슬픔만 안겨주는 당신들과는 전혀 틀린 종류의 사람입니다. 말 조심하십시오.” “건방진 놈! 너 같은 노예 놈에게 그딴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주인 데려와!” “이 자식아! 거기서! 이거 풀어!” 퍼피는 그들이 뭐라고하던 고개를 돌리고 나가버렸다. 녀석의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던 나는 괜히 쑥쓰러운 기분을 느끼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는 녀석들을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드워프가 묶은 거라 관절을 빼거나 흔들어도 안 빠질거야. 헛수고하지마.” “이, 이 자식…! 노예 따위의 부탁을 들어주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글쎄? 비록 좀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안젤라는 나름대로 귀엽던데? 너희들보다 약 100만 배는 더 인간답고 말야.” 어깨를 으쓱여준 나는 안고 있던 아기 강보를 녀석들의 앞에 내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검은색 스크롤을 꺼냈다. 끝 부분을 살짝 찢어낸 나는 그것을 강보 안에 넣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이 자식!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지마! 복수하겠다. 어디 숨어있든지 반드시 찾아내서 엉망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그 년에게 전해! 물론 네놈도 살아남지 못 할거야! 알아들어?!” 배낭을 주워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스케어(Scare).” 파지직~! 아기 강보에서 시커먼 기운과 함께 스파크가 튀겼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난 나직하게 말했다. “아이야. 인사하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네 아빠란다.” ……응에…! 응에…! 아아앙…! “무, 무슨 짓을…?! 뭐야?! 뭐…!!! 으, 으아악! 저리가! 저리가아!” “우와아악?! 저, 저게 뭐야!?” 탕! 뭔가를 보고 경악하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서둘러 문을 닫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모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헬슥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냐? 무슨 짓을 한 거야?” “스케어 스펠을 썼습니다. 죽음에서 돌아온 사자(死者)는 산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로 다가오지요. 1시간 이상 저걸 당하고 있으면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은 하기 힘들걸?” “너, 너 이놈…!” “확실히 죽이는 것보다는 났지 않습니까? 낄낄낄~!” 내 미소에 네모와 퍼피는 질린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뒤로는 사내들은 공포에 찬 괴성과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거나 가게 안을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하던 놈들이다 보니 이웃들에게 버림 받았나보다. 이런 짓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던 퍼피가 나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내놓았다. “당신은 주윗사람에겐 자상하지만 적에게는 아주 잔인하시군요. 멋지십니다.” “그거 칭찬이야?” “예. 칭찬입니다. 당신은 제 마스터에게 믿음을 받고 있는 몇 안돼는 사람중의 하나 입니다. 왜 그런지 지금에야 알 것 같습니다.” 퍼피가 날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마주 웃어준 나는 정신을 잃은 여자를 어깨에 올리고 네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읏차! 자, 그만 갑시다. 저런 놈들하고는 애초에 상종하지 않는 게 올바른 인생관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돼요.” “프허허허허~! 뭐? 인생관 확립에 도움이 돼? 웃기지 좀 마라 이놈아!” 네모는 내 배낭을 대신 받아들며 기분 좋게 웃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겨울밤의 별자리가 예쁘게 빛났다. 슬슬 새벽이구나. 아무도 없는 도시의 새벽을 후다닥 달려간 우리는 가까운 경비대 초소를 발견하고 여자들을 골목에 내렸다. 어떻게해서 경비병을 불러내어 이 여자들을 넘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퍼피가 묘안을 짜냈다. 손바닥에 침을 뱉아 비빈 네모가 도끼를 들어 있는 힘껏 초소 건물을 후려쳤다. 쿵…! 흡사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초소 건물이 울렸고 경비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와 대로에 몸을 던져댔다. 나와 퍼피, 네모는 그걸보고 낄낄 웃으며 어두운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네 덕분에 분풀이도 잘했고, 꽤 재미있었다. 이제 어쩔거냐?” “뭘 어떻게 해요? 오늘은 자고, 내일은 여행을 떠나야죠. 바쁘거든요?” “그러고 보니 어디까지 가는지 안 물어 봤군? 난 케이노 산맥으로 간다. 거기 드워프 광산이 있거든?” “어? 케이노 산맥에는 드래곤 레어가 있어서 광산을 만들 수 없다고 아는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 일 때문에 가는 거다. 자세한 건 비밀이라 말해줄 수 없구나. 그런데 네놈들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레이로 갑니다.” “뭐야? 오! 이렇게 반가울 데가! 같은 길로 가는군? 동행하세.” 나도 그럴까 생각했다. 하지만 드워프가 동행이라니. 좀 버거운데. “영감님 말 탈줄 모르잖아요?” “뒷자리에 좀 얹혀 가면 돼지. 여비대신 여관비는 내가 낼테니까. 부탁함세.” ========================================================================== 노인공경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45 “그건 다음에 네 진짜 주인에게 말해.” 뭐, 이슈리 녀석이 좀 힘들긴 하겠지만 드워프 하나 알아 놓으면 여러모로 편할테니까.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보기로 하고 그와 퍼피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 신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밤이 되니 신전의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낮이야 누가 오든 받아주지만 밤이 되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아무래도 신전에는 돈이 될만한 것들이 많다는 사람들의 오판에서 생긴 일이다.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있을 프리스트를 부르는 대신 신전의 담을 훌쩍 뛰어넘은 나는 정원으로 숨어 들어가 주변을 좀 살펴본 다음 엄폐물과 은폐물 사이를 사사삭 움직여 병동으로 달려갔다. 확실히 바운드 스펠을 박아뒀더니 점프력이 올라갔어. 제법 괜찮은데? 음, 안젤라는 상당히 말을 잘 듣는 걸? 행여 잠겨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문은 열려있었다.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음산한 기운이 밀려왔다. 쯧쯧~! 이래서야 안과 밖의 차이가 없잖아. 젠장. 병실에도 벽난로 같은 거 만들어주지. 자다가 얼어죽겠네. 배낭을 바닥에 내린 나는 두 팔을 쭉 올리며 기지개를 편 다음 안젤라가 누워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잘 자고 있는 것 같다. 아하하, 이 콜트 슈발츠도 염라대왕에게 자랑할 만한 착한 일을 했다고. 씩 웃어 보인 나는 허리를 숙여 침대 아래에 있는 낮은 간병인 침대를 꺼냈다. 담요가 없는 게 좀 아쉬웠지만 누워서 잘 수만 있다면야 어디든 상관없다. 부츠와 자켓을 벗고 침대로 올라가 누운 나는 자켓을 담요 삼아 잠을 청했다. 그때 갑자기 덜덜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코, 콜트씨?” “엥? 뭐야 안자고 있었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말하니 위에 있는 침대에서 안젤라의 머리가 슬그머니 나왔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놀랐어요. 전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 싶으면 비명을 질러. 그게 상식적인 행동이야.” 침대 밖으로 늘어지는 그녀의 긴 금발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말해줬다. 안젤라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하, 하지만 전 노예인걸요?” “노예면 아무나 만져도 되는 거냐? 웃기지마. 아무리 노예라도 그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손 댈 수 없어. 게다가 주인에게는 자기 노예를 지켜줘야 할 의무도 있다구. 뭐, 몇몇 병신 같은 놈들이 되먹지도 않은 일을 저지르긴 하지만 내 상식으로 볼 때는 그래.” “예에….” 그만 그녀의 머리카락을 놓아준 나는 두 팔로 머리를 받치며 눈을 감았다. “아, 그리고 네 과거는 태워버렸다. 이제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못 할거야.” “저, 정말요?” “그래, 이제 누가 나 잡으러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버려. 미리 손을 써놨으니까 아무도 널 찾아오지 않을 거야.” 난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누웠다. “으윽… 피곤하다… 난 그만 잘 테니까. 내일보자… 으음….” 막 잠이 들려는데 안젤라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어? 응? 왜? 화장실 가고 싶어?” “아, 아뇨. 저, 저, 거, 거기서 주무시면 추, 춥지 않으세요? 여기 따뜻한데…. 올라오시면….” 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눈을 비비며 씩 웃었다. “내가 늑대가 변해서 널 덮치려고 하면 어쩔 거야?” “…소, 소리 지를 거예요.” 그녀의 어색한 대답에 난 피식 웃어버렸다. 안 그래도 발이 시려워서 부츠를 신고잘까 했었는데. 어쩔까나? “여기 따뜻해요. 오, 올라오세요.” 안젤라의 떨리는 목소리. 으음~! 에라! 양심 좀 깍지 뭐! 스피릿, 미안해. “그럼 실례.” 침대로 기어올라간 나는 안젤라가 비워준 자리에 누웠다. 환자 침대는 상당히 푹신푹신하고 따뜻했다. 오오~ 이래서 방안에 벽난로가 없었던 거로구나? “으아… 따뜻하다.” “그, 그러세요?” 원래 1인용이라서 그런지 자리를 잡고 누우니 안젤라의 얼굴이 내 어깨에 올라왔다. 그런데 저 자세로 자기엔 좀 힘들겠다. 뭐, 어차피 같은 침대에 누웠는데 선만 안 넘으면 되는거 아냐? 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나는 어깨를 돌려 안젤라에게 팔 베개를 해주었다. “그러지 말고 여기 기대.” “어, 저, 그, 그래도….” “그럼 이 좁은 침대에서 떨어져서 자려고 생각했어? 어색하게 있지 말고 이쪽으로와. 아무 짓도 안할테니까.” 안젤라는 좀 머뭇대다가 내 가슴에 안겨들었고 나도 팔을 들어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평소 같으면 머릿속이 헝클어졌겠지만 이미 난 갈 때까지 가본 몸이라 여자랑 같은 침대에 이렇게 바싹 달라붙어 있어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동생이랑 누운 오빠의 기분이랄까? “이렇게 있으니까 정말 따뜻하다….” “저도 그래요.” 안젤라는 거의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비누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하던 나는 약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으읍?” 눈을 뜬 나는 내 입술을 훔치고 있는 안젤라를 발견했다. 뭐, 뭐하는 거야? 난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입안으로 들어왔던 그녀의 혀가 뱀의 그것처럼 밖으로 빠져나갔다. 진득한 타액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난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으읍?! 뭐, 뭐하는 거야? 안젤라!” “당신에게라면… 다, 당신에게라면 무슨 짓을 당해도 좋아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지금…. 읍?!” 안젤라는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더니 다시 입술을 맞춰왔다. 입안으로 뱀 같은 것이 들어오는 기분이다. 스피릿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야.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나는 겨우겨우 안젤라를 밀어내고 막혔던 숨을 다시 몰아쉴 수 있었다. 안젤라도 억지로 키스를 했던 것인지 잠시 기침을 해대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내 오른손을 두손으로 꽉 붙잡아 그것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그녀의 행동과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충격을 받은 나는 사고가 멈춰버리는 기분에 손을 빼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을 못하고 있었다. 으아… 저, 젖어 있어?!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안젤라는 훌쩍이며 내 가슴에 이마를 댔다. “죄송해요. 제, 제가 당신에게 해드릴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에요. 하, 하지만 저, 저도 이제 좋은 분을 만나서 귀여움 받고 싶어요. 주인님께 장난도 쳐보고 싶고, 으, 응석도 부려보고 싶어요. 흐으… 끅! 훌쩍. 그, 그러니까. 제, 제 주인님이 되어주세요. 이, 이렇게 부탁드려요. 할 줄 아는 건 이런 거 뿐이지만… 그, 그래도 전 당신의 노예가 되고 싶어요.” 아찔한 정신을 간신히 수습한 나는 그녀가 다리사이에 가져다 대고 있는 손을 억지로 빼냈다. 진득한 무언가가 손가락 가득 묻어 나왔다.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앉으며 말했다. “내 등은 좁아서 한 사람 밖에는 업을 수 없어. 미안하지만 네 주인은 되어주지 못하겠다.”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내려가려 했다. 따뜻하긴 했지만 같이 잤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젤라는 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후다닥 일어난 그녀는 내 허리를 꽉 붙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흐어엉~! 아아앙~!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끅, 제, 제 주인님이 되어주세요~! 예에? 엉엉엉~!훌쩍! 바, 받아만 주시면 무슨 일이든 할게요! 끄윽, 흑! 데, 데리고 계신 노예와도 사, 사이 좋게 지낼게요. 그, 그러니까 제발 주인님이 되어주세요. 예에에? 저, 저는 이대로 당신을 놓칠 수 없단 말예요! 아아아앙~! 제 아기까지, 끅, 아기까지 빼앗아 가셨으면서 너무 하세요! 흐아아앙~!” “이, 이거 놔…!? 우악!” 안젤라의 팔을 풀려고 하던 나는 되려 침대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함께 넘어진 안젤라는 연신 훌쩍거리면서도 내 가슴을 찾아서 파고들었다. 너무도 계산 밖의 행동에 당황한 내가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려고 해봤지만 안젤라는 내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고 있었다. 으악! 보따리까지 찾아줬잖아! 나더러 뭘 더해 달라는 거야?! 스피릿! 살려줘! “음… 응….” 창문에서 쏟아지는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따스한 침대 속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 기분을 설명해 보라면 글쎄? 푹신하고 따스하고 기분 좋은… 천국에 온 기분이랄까? 빌어먹을 세상살이 다 끝장난 기분이다. 난 포근한 그녀의 가슴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으응… 스피릿….” 그러자 그녀는 손을 들어 내 이마와 얼굴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스피릿이 자주 해주던 행동이었고 그래서 난 그녀를 되찾은 것 같은 환상을 꿈꾸게 되었다. 천천히 눈을 뜬 나는 내 눈앞에서 예쁜 미소를 머금고 있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우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은 스피릿과 닮긴 했는데. 어딘가 좀 앳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 색을 보았을 때 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아, 안젤라?” “깨셨어요?” 안젤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옆자리에 누워있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세우고 있었다. 어, 어제 어떻게 됐더라?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난 필사적으로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안젤라가 이상한 차림으로 -위에는 하얀 스웨터, 아래는 핑크빛 속옷- 병실을 걸어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물 주전자와 컵을 가지고 오는 모습을 보고는 정신의 혼미함을 느꼈다. 난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여기 물.”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드니 안젤라가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아드는 대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예. 하지만 주인님 어제 그… 저, 정말 최고였어요.” “어, 어이.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어…?” 얼굴을 살짝 붉힌 그녀는 좀 머뭇거리다가 컵에 든 물을 마셔 버리고 그것들을 침대 옆 선반에 올렸다. 그리고는 침대로 걸어와 걸터앉더니 슬쩍 내 팔을 껴안았다. “기, 기억 안 나세요? 주인님의 등은 좁아서 어, 하, 한 사람만 업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게다가 이미 누군가를 업고있어서 그… 더, 더 업을 수가 없다고.” 아, 이제야 기억난다. 울면서 매달리는 안젤라를 달래려고 그런 말을 했었지. 고개를 돌려보니 안젤라는 살짝 웃으며 안고 있는 내 팔을 들어 자신의 하얀 볼에 부벼댔다. “하지만… 하지만, 손은 얼마든지 잡아 줄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 그래서 언젠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때까지 제 손을 잡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해주셨어요. 나, 나쁘지는 않았어요. 전 주, 주인님의 따뜻한 과, 관심을 조,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어요.” 고개를 든 안젤라는 머리를 기울여 내 볼에 살짝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약간 발개진 얼굴로 말했다. “제 주인님이 되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그건 다음에 네 진짜 주인에게 말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벗어 던진 셔츠를 주워 입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자국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가슴 곳곳에 이상한 반점들이 있네?” ========================================================================== 뭘까요? XXX: 크아아악! 심의!! Reload Running Fire: 46 “어윽~! 자꾸 염장 지를거야?!” 안젤라의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안아주진 못하지만 키스는 얼마든지 라고 하셔서 그래서, 어. 저, 저도 좀… 그, 러니까. 키스를….” “했다?” 안젤라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음을 잘 타네? 귀여워라~ 피식 웃어준 나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그대로도 보기 좋지만 말야. 뭐라도 입는 게 좋지 않겠어? 좀 있으면 프리스트들이 들어올텐데.” “아, 예. 예!” 안젤라는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벗어둔 치마를 주워입었다. 난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스피릿이 이걸 보면 날 죽이려 들겠는데? 하아…. 그렇다고 떼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환장하겠네. 아직 회복이 덜된 안젤라를 침대에 눕혀두고 밖으로 나온 나는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을 받아왔다. 식판을 들고 복도를 걷던 나는 이 일을 스피릿이 알게 됐을 때의 반응을 생각해보았다. 루시아 때의 일도 있었으니 어떻게 잘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가져봤지만 그녀는 이제 신분이 탄로 났기 때문에 그 신분을 앞세워 이전보다 더 날 잡으려 들거다. 아아~! 어쩌지? 그러던 중에 난 안젤라가 있는 병실 앞에 도착했고 그래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좋아! 일단 스피릿부터 구하고 보자!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한 나는 표정을 바꿔 쾌할하게 웃으며 병실 문을 열었다. “안젤라! 밥 먹자!” “이제 오냐?” “응?” 병실의 테이블에 늙다리 드워프가 앉아서 파이프를 피워 물고 있다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네모 아저씨 왔구려?” “오냐. 너 데리러 왔다.” “첼시아와 퍼피는?” “그 녀석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여기 들어오기 싫다더군.” 창밖을 내다보니 분수대 있는 곳에 퍼피와 첼시아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간간히 첼시아가 퍼피의 가슴을 앙증맞은 주먹으로 툭툭 때리는 것을 보니 어제 우리가 벌린 일에 대한 건가보다. 들킨건가? 바보 같은 녀석. 그만 창가에서 고개를 돌린 나는 침대에 앉아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난 그녀의 손에 빵을 쥐어주며 말했다. “뭘 그렇게 울상이야? 걱정하지마. 버리고 도망가진 않을 테니까.” “예, 아, 알고 있어요.” 침대에 붙어있는 선반을 꺼낸 나는 그 위에 그녀의 식판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침은 먹었어요?” “그래 먹고 왔다. 음, 하지만 좀 적게 먹어서 출출한 걸? 여기 식당이 어디냐?” 식당의 위치를 가르쳐주자 네모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곧 떠날 텐데. 잘 달래줘라.”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고 나와 안젤라는 말없이 아침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 난 식판을 정리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짐을 정리했다. 그러는데 안젤라가 울음섞인 어투로 말했다. “꼭 돌아오시는 거죠? 저 데리러 오실거죠?” 짐 정리를 하다말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불안한 얼굴로 연신 질문을 해대는 안젤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를 쓰러뜨렸다. “아?! 주, 주인님?” “가만있어.” “읍?!” 울먹이는 안젤라의 팔을 꽉 잡은 나는 그녀의 입술을 훔쳐버렸다. 작게 반항하던 안젤라는 천천히 몸에서 힘을 빼기 시작했고 난 좀 편하게 그녀의 몸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한참 후 입술을 떼어낸 나는 손으로 연신 주무르던 그녀의 앙가슴에 키스마크를 새겼다. “아앙… 아파….” “이걸로 넌 내 거야. 네게 다른 놈이 생기기전 까지는 아무에게도 안줄 거야. 알겠어?” 안젤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죽 웃은 나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어 주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짐을 뒤져 나이프 하나를 꺼냈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슴에 새겨진 키스마크를 만져보던 그녀는 내가 고개를 돌리자 얼른 셔츠를 여몄다. 그래, 볼 것 다 본 연인이나 부부 사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그 수줍음 정말 맘에 든다. “이거 받아.” “이, 이게 뭐예요?” “나이프지 뭐긴 뭐야? 그걸로 네 몸을 지키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꼴을 보니 남에게 상처 입힐 만큼 간이 크진 않아 보이니까. 그냥 가지고 있어. 내 노예라는 증표 같은 거야. 과일 같은 거 깍아먹는데 쓰면 되겠네.” 무슨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것처럼 나이프를 들고 있던 안젤라는 증표라는 말에 그것을 자기 아기처럼 가슴에 꼭 안았다. 피식 웃어준 나는 배낭에 챙겨 넣어놨던 돈을 좀 꺼냈다. 어제 그 놈들의 아지트를 습격했을 때 지갑을 뒤져서 빼돌린 거다. 수고비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어차피 지금의 녀석들에겐 그저 반짝이는 쇳조각 이상의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나쁜 놈이라도 욕해도 좋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자구. 난 돈 주머니를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이건…?” “돈이야. 가지고 있어. 나중에 수련사 하나를 네 간병인으로 붙여달라고 말할테니까.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 녀석에게 부탁해. 알겠지?” “예.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짐을 챙겼다. 등뒤에서 안젤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 그런데 하나 무, 물어봐도 돼요?” “뭘?” “주인님이 데리고 계신다는 노예, 이름이 스피릿이라고 해요?” 짐을 정리하던 나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자, 잠꼬대하시는 걸 들었어요.” “헤에, 좀 가슴 아팠겠구나? 네 이름을 안 불러서?” “아, 아뇨! 저, 전 오늘에야 주인님의 노예가 됐는걸요….” “다음 잠꼬대에서는 네 이름도 불러 줄게. 그럼 됐지?” 안젤라는 서글서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구, 이제 마음이 놓여? “그런데. 그, 저, 궁금해서 그러는데, 스, 스피릿이라는 아이는 어때요? 예뻐요? 주, 주인님께 잘해요?” “음. 글쎄. 잘한다? 그건 잘 모르겠어. 반강제적으로 나랑 같이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된 거라서 말야. 본심은 나도 몰라. 아마 지금쯤 몇 일이 지나도록 찾으러 오지 않는 주인에게 신물이 나서 지금 찾아가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꺼지라고 말할지 몰라. 뭐, 그래도 난 할말이 없는 놈이지만.” “노, 노예가 주인님께 그런 말을 해요? 저, 저는 믿을 수가….” “그 녀석, 꽤 예쁘거든? 얼굴값을 하는 거지. 때리고 꼬집어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이젠 도망간다고 협박해도 꼼짝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지.” 사실 도도한 이웃나라의 전직 공주님이라서 말야. 씁쓸한 표정을 지은 나는 정리가 끝난 배낭을 들어 테이블에 올렸다. 안젤라는 처음으로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저, 저는! 주인님만 보고 있을 거예요! 꼬, 꼭 데리러 와주세요!” “아이구~ 안젤라~! 요 귀여운 녀석.” 두 팔을 벌리며 침대로 걸어간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꼭 안으며 등을 쓸어주었다. “갔다 올게. 잘 지내고 있어야해?” “예에에.”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그녀는 낮게 말했다. 싱긋 웃으며 머리를 좀 쓰다듬어준 나는 뒤로 물러서서 허리에 매어둔 검을 뽑았다. 번쩍이는 은도금 롱소드다. 안젤라는 움찔하며 날 쳐다보았다. 씩 웃어준 나는 그 검을 방 중앙에 박아 넣었다. 바닥이 나무라서 간단하게 박혀들었다. “널 지켜 줄 거다.” “주인님….” 사실은 검을 세 자루나 들고 가기에 좀 힘들어서 말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안젤라는 이미 감동을 받아버린 뒤였다. 그렇게 쳐다보지마. 쑥스럽잖아.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린 나는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갑시다.” “…어, 끝났냐?” 문 밖에 서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부끄럼쟁이 드워프 영감이 고개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안젤라는 그가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것을 깨달고 얼굴을 붉혔다. 네모도 헛기침을 하며 어서 나가자는 듯이 몸을 돌렸다. 막 안젤라에게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녀가 네모를 불렀다. “저, 저 아, 아저씨.” “음?” 고개를 돌린 네모는 골반의 고통을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허리를 숙이는 안젤라를 보고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드워프에겐 별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보기 좋았다. 그녀에게 푹 쉬라고 말해주고 병실을 나선 나와 드워프 영감은 각자의 짐을 매고 밖으로 나갔다. 병원 입구에는 하빈이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프리스트와 모험가가 저지른 발칙한 천벌 흉내는 이번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서 다닐 수 있을 때까지 안젤라에게 간병인을 붙여주십쇼. 추가 입원비와 기타 잡비는 돌아와서 지불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잘 가십시오.” 인사를 받은 나는 씩 웃어주었다. 그러자 하빈도 씩 웃어 보였다. 프리스트의 밝은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간에. 신전 마굿간에 가서 말을 찾은 나는 스피릿 대신 늙은 드워프를 뒤에 태우고 신전을 빠져나갔다. 퍼피를 뒤에 태운 첼시아가 내 옆으로 말을 몰아왔다. “여어, 어제 활약은 잘 들었어. 감히 순진한 내 노예를 정의감에 불타오르게 만들어선 끌고 나가다니 말야. 콜트씨 보기보다 음험한 데가 있어? 그럼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무슨 소리야? 지가 따라가겠다고 한거라고. 난 몰라.” 그러면서 난 퍼피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뿌렸다. 바보자식! 어쩌다가 들켰어?! 퍼피는 울상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새벽에 돌아가니 기다리고 있었어요. …젠장, 첼시아도 보통이 넘는군. “날 물로 보지마. 어쨌든 남의 노예를 부려먹었으니 대가는 확실하게 챙겨줘. 알겠어? “에이~! 젠장! 알았어. 챙겨준다. 챙겨줘!” 퍼피는 연신 나에게 고개를 꾸벅여댔고 첼시아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짜고 저러는 거 아냐? 그런 의심마저 들고 있는데 첼시아가 물었다. “어? 그런데 뭐야? 안젤라는 안 데리고 오니? 놔두고 가는 거야?” “잠깐 맡기고 가는거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쓰지마.” “물론, 신경은 안써. 저번에 약속했잖니? 그런데 기대되는 걸? 스피릿에게는 어떻게 설명하려나?” “어윽~! 자꾸 염장 지를거야?!” 이를 드러내고 그녀를 노려봐주니 첼시아는 깔깔 거리며 먼저 말을 몰아 대로를 달려가버렸다. 그녀의 뒤를 쳐다봐준 나는 한숨을 조금 내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 눈이 오려나? 우중충하네 “거 참, 한 몇 일 여기서 머무른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사람하나 살렸으니 된 거 아니냐?” “그러고 보니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구려? 살맛나는 세상살이요.” ========================================================================== 아무렴요. 재미있는 세상이지요. Reload Running Fire: 47 “이야~! 콜트! 반갑다! 이제 온거야?” 난 고개를 숙이고 킥킥 웃었다. 뒤에 앉아있는 네모에게 재수 없으니 그렇게 웃지 말라는 조언을 받은 나는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신전을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안젤라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언제 파이프를 입에 물었는지 네모의 중얼거림이 담배연기와 섞여 귓가로 들려온다. “옛말에 버러지는 다친 동료를 잡아먹지만, 사람은 다친 동료를 감싸준다고 했다. 버러지와 사람의 차이점이지.” “그럼 우리는 보편 타당한 보통 사람이란 말이네요?” “그래. 정에 약하고 눈물에 약한, 그저 보통 사람일뿐이다. 뭐, 불만 있냐?” 난 씩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첼시아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것을 신호로 쭉 뻗은 대로 끝 언덕 위에 위치한 거대한 성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불만 같은 게 있을 수 있을 같아요? 기도하는 프리스트 보다는 현실적이고, 동족을 잡아먹는 버러지보다는 정의로운 보통 사람이 난 더 맘에 들어요.” “허헛! 명언이로다.” 낄낄 웃어준 나는 말을 몰아 활짝 열린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대로라면 늦었다고 스피릿에게 꼬집힐 거야! 가자! 이랴!” “이히히힝~!” 하루 푹 쉬었던 이슈리는 거친 투레질을 하며 대로를 질주했다. 뒤에 앉은 네모는 천천히 가라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내겐 더 빨리 달리라는 목소리로 들렸다. “아하하하하! 빨리! 더 빨리!” 하레이는 수도 캘버린에서 동쪽으로 일주일 정도 내려가면 있는 항구도시이자 케이노 산맥을 뱃길을 따라 우회하여 베레타로 수출입무역을 벌이기에 무역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육로가 있는데 뻔히 해상교역을 하는 까닥은, 두 나라사이의 경계를 나누고 있는 케이노 산맥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기 때문이며, 덩달아 몬스터까지 많아서 산을 넘기에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 왔다!” “그래, 다왔네. 으음. 조금 졸린다아.” 내 옆으로 말을 몰아온 첼시아가 피곤했던지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비벼댔다. 하는짓이 정말 고양이 같다. 하지만 그녀는 불평한마디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돈 벌려고 따라왔는데 그런 걸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나저나 하레이는 오랜만이구나. 베레타로 도망가려는 현상범 잡으러 자주오곤 했는데. 자, 이제 어디로 가면돼?” “시청으로가서 친구놈의 메모를 확인해야해. 정보수집은 내가 할테니 두 사람은 좀 쉬어둬.” “어머, 혼자서 피곤하지 않아?” “스피릿의 엉덩이를 다시 만질 수 있다면야 이런 것 쯤 아무것도 아니야.” “욕망에 달아오른 주인님의 모습이 몰상식 할 정도로 뜨거운데? 스피릿이 좋아하겠다?” 첼시아의 짓굳은 말에 난 악을 조금 써주었다. 그때 등뒤에서 담배냄새가 풍겨왔다. 제미니의 입에서 나오는 담배냄새는 달콤하던데. 늙다리 드워프 영감님의 담배냄새는 좀 찜찜하다. “거, 사람 뒷통수에 대고 담배연기 뿜어내지 마쇼!” “시끄럽다. 넌 졸리지도 않냐? 이 무식한 놈아. 보급도 없이 사흘 밤낮을 달려온 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 “여기 있잖수?” “에이~! 젠장! 관둬라!” 잠을 자지 못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네모는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댔다. 그리고 우리를 태우고 있는 이슈리 녀석도 거친 투레질을 해댔다. 페이크에서부터는 눈이 별로 내리지 않아서 도로 사정이 좋았기 때문에 난 그간 잃은 시간을 보충하고자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강행군을 감행했다. 낮에는 1시간 달리고 10분 휴식, 저녁이 되면 스트렝스 스펠을 말에게 건 다음 아침까지 걷기, 이것을 사흘 반복하자 우리는 겨울 석양의 끝자락에 위치한 거대한 항구도시의 전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휘이이잉~! 해안가라 그런지 바람이 심하게 분다. 매서운 바람에 실려온 비릿내는 태양을 삼키고 있는 저 거대하고 시뻘건 불구덩이가 바다임을 증명하고 있다. “냄새 좋은데?” “비릿내에서 대체 무슨 낭만을 찾는 거냐? 어서 가자 이놈아. 네놈 때문에 졸려 죽겠다.” “태초의 위대한 어머니를 눈앞에 둔 사나이의 로망을 모르는 영감님이네. 알았시다. 보채지 마쇼.” “사나이의 로망? 아하하~.”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첼시아는 깔깔 웃으며 먼저 말을 몰아 언덕 길을 내려갔다. 뒤따라 고삐를 당기며 말을 배를 살짝 두드리자 이슈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알아서 내려가도록 내버려둔 나는 거대한 항구도시에서 영주의 성을 찾아보았다. 고개를 좌우로 몇 번 움직이자 그리 어렵지 않게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건물을 하나 발견했다. 시청을 저렇게 만들지는 않을 테고, 신전이라면 탑 꼭대기에 깃발대신 디바인 마크가 있을테니 저건 틀림없는 영주의 성이다. 하하하하~! 내가 왔어 스피릿! 좀 있다가 구해줄게! 기다려! 피곤도 잊은 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은 나는 석양에 불타는 거대한 성을 연신 훔쳐보며 마을로 들어갔다. 성문에서 간단한 검문을 받고 마을로 들어간 우리는 가장 먼저 깨끗한 여관으로 달려가 방을 잡았다. 여기서 피곤에 지친 이슈리가 날 물어뜯으려 한 기막힌 사건이 발생했다. 깜짝 놀란 말구종이 녀석을 고삐를 잡고 비명을 질러댔고 가게 안의 점원들이 달려나와 발광하는 덩치큰 말을 붙잡고 매달렸다. 놈을 피해 후다닥 짐을 들고 여관으로 달려들어가니 문 앞에 서서 파이프를 피워 문 후줄그레한 모습의 드워프 영감이 눈을 내리깔고 계단을 올라오는 날 내려다보았다. “하찮은 미물에게 미움을 받는 기분은 어떠냐?” “좀 당황스러운 데요? 하하하….” “저 모습을 엘프가 봤다면 혀를 찼겠다. 평소에 좀 잘대해주지 그랬니? 우리 바이퍼를 봐, 얼마나 얌전해?” 그녀와 퍼피를 태우고 달려온 하얀 백마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말구종을 따라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젠장, 똑같은 캐슬린 산인데 왜 내 말은 저렇게 성질이 못된거야?! “주인의 못된 성깔을 닮아서 그런게야.” “아니 뭐요!?” “어허~! 이 놈 눈깔 좀 보게! 잘하면 사람 치겠다?!” “칵! 이 영감탱이가?!” 드워프 영감과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으르렁 대고 있으니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대머리 아저씨가 다가왔다. 첼시아가 날 대신해서 방을 잡았고 우리는 일단 방으로 올라갔다. “왜 내가 네놈이랑 같은 방이냐?” “같은 침대에서 잘 것도 아닌데 너무 틱틱 거리지 마쇼.” “으으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드워프를 피해서 잠시 방안을 뛰어다닌 나는 얼빠진 얼굴로 문앞에 서있는 점원에게 다가가 은화를 쥐어주었다. 팁으로는 꽤 많은 액수였기에 그의 눈이 커졌다. “항구도시는 처음이라 관광을 좀 하고 싶은데. 말 한 마리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 됩니다. 언제까지 준비해드릴까요?” “지금 바로 준비해주세요.” 난 방의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양은 이제 절정을 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투철한 서비스 정신을 가진 점원의 발걸음은 바빠졌다. 짐을 그대로 방안에 던져 놓은 나는 무장만 챙겨들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스크렝스 스크롤을 꺼냈다. “그거 몸에 나쁜거 아니냐?” 침대에 벌렁드러누워 헥헥대던 네모가 말했다. 난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찢었다. “이대로 나 편한 데로만 하면 아무것도 못해요. 조금은 무리를 해야 이후의 결과가 빛난 답니다. 스트렝스!” 눈 앞으로 초록색 불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으로 뚝 떨어졌던 체력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커다란 한숨을 들이킨 나는 빈 스크롤 조각을 던져버리고 방문을 나섰다. 홀로 나가니 욕탕으로 들어가려던 첼시아와 마주쳤다. “친구 놈을 데려올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친구? 당신도 그런 게 있어?” “카악~! 누굴 성격파탄자로 몰아가는 거얏?! 혼자서 영주의 성으로 쳐들어가려고 생각 한건줄 알아? 쓸만한 마법사가 있어. 먼저와서 기다린다고 했으니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거야. 데려올게.” 첼시아는 입을 작게 벌리고 날 쳐다보다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마법사라고? 호오~ 남자니? 잘생겼어? 결혼은?” “몰랏! 나중에 데리고 오면 물어봐!” 내 또래 마법사라는 말에 묘하게 호감을 표시하는 그녀에게 빽 고함을 질러준 나는 말구종에게 시청의 위치를 물어보고 얼른 말을 달리게 했다. “가자! 이랴! 하!” 대로를 달려 시청을 찾아가 내 이름 앞으로 온 메모를 확인하자 운좋게도 라이트 녀석이 남기 것이 있었다. 아득한 새벽. 12월 7일. 라이트 알트론. 간단한 메모다. 녀석 답다. 그나저나 일찍도 왔네. 사흘 전이잖아? 시청직원에게 물어 아득한 새벽이란 이름의 여관을 찾아간 나는 그곳에서 다시 라이트란 이름의 투숙객을 확인했다. “라이트 씨는 낚시한다고 부둣가에 나가셨는데요?” “얌전히 방에서 잠이나 잘것이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거야? 에이~! 부둣가는 어디로 갑니까?” 여점원의 설명을 들은 나는 곧바로 말에 올라 고삐를 잡아당겼다. 늦은 오후 해가 지기 전에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 부둣가로 향한 나는 천천히 사그라드는 석양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묵직한 로프 뭉치를 어깨에 짊어지고 길을 걸어가는 뱃사람을 붙잡아 바닷가 근처에 마치 별장처럼 솟아있는 건물을 가르켰다. 이왕 사람이 많은 곳에 나온 김에 정보수집도 겸하기 위해서다. 확인한 결과 저곳이 이곳 영주라는 그랑디 폰 하레이 남작의 성이라고 했다. 내참, 저택도 아니고 성이라니, 요상한 취미다. 뭐, 권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변두리 영지의 영주가 되어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적어도 자기 영지 내에서는 왕이나 마찬가지니까. “평판을 어떻습니까?” “뭐, 그럭저럭 괜찮소.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거나 세금도 심하게 물리지 않고, 흉년이면 세금을 적게 걷거나 혹은 감면 시켜주는 융통성도 가지고 있으니까.” 흐음, 주위 평판은 좋다는 말이군? 몇 가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쪽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그를 놓아주었다. “혹시 몇일 전부터 이 근처에서 낚시를 즐기는 젊은 남자 못봤습니까?” “글쎄, 난류 때문에 이 계절에는 고등어가 많이 올라와서 말이오. 젊은 낚시꾼들이 한둘이어야지. 저기 북쪽 부둣가에 가면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테니 한번 가보시요.”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부둣가를 돌아다니며 낚시질에 여념이 없을 라이트 놈을 찾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물고기 낚는게 뭐가 그렇게 재미 있어서 이 엄동설안에 부둣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거야? “앗싸~! 또 잡았어!” “오오, 저 친구 또 잡았군. 꽤 큰놈인데? 농어잖아?” 주변 낚시 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하며 펄떡이는 고기를 붙잡고 깔깔거리는 밀짚모자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엉겁결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 자가 그 놈이었다. “라이트!”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달라가자 물고기의 입에 걸려있는 바늘을 빼내던 라이트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이구 저 얼굴 좀봐. 뱃사람 다됐구나. 녀석은 고기를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달려왔다. “이야~! 콜트! 반갑다! 이제 온거야?” “그래 임마. 추운데 여기서 뭐하는거야? 좀 찾기 쉽게 여관에 붙어있던가 할 것이지. 찾아다녔잖아.” “늦게 온 주제에 그런 소리마.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심심해 죽겠는데 뭘 어쩌라고? 어쨌든 다시 보니 반갑다. 이번엔 무슨 일이길레 이 몸을 출장까지 오게 만든거야?” “그건 어디 따뜻한데 좀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넌 춥지도 않냐?” ========================================================================== 전 추운거 보다는 더운걸 끔찍하게 생각합니다. Reload Running Fire: 48 “저, 저건 뭐냐?! 피해!” 제법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야기하니 녀석은 자기가 잡은 물고기를 들어보이더니 푸하하 웃었다. “아니, 재미있던데. 그냥 이쪽으로 나갈까봐.” “어이구, 그럼 그러든가. 어서 가자. 춥다.” 난 그를 데리고 라이트가 묶고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낚시 장비와 묵직한 바구니를 점원에게 건내준 라이트는 따스한 차를 방으로 배달시키고 위로 올라갔다. 녀석의 방으로 들어간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스피릿을 도둑 맞았어.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해.” “스피릿이 누군데?” “아, 내 노예.” 옷을 갈아입던 라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노예에?! 너, 노예를 데리고 있었어?!” 난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어쩌다보니 그 녀석을 사버렸어. 제미니가 알면 산채로 회를 뜰 것 같아서 정리해버리려고 데리고 나왔던 건데. 어쩌다보니 그게….” “그리하여 콜트는 자기 노예와의 위험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기분 나쁘게 이상한 나레이션 넣지마.” 라이트는 씩 웃어버렸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며 여점원이 차를 가지고 왔다. 그녀를 돌려보내고 문을 닫은 라이트는 나에게 차를 권했고, 난 그것을 한모금 마신 다음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녀가 캐슬린의 전 공주님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라이트의 얼굴이 급변했다. 그는 손을 들어 내 이야기를 막고는 몇마디 주문을 외운 다음 다시 말했다. “혹시 밖으로 들릴지 몰라서 소리를 막았어. 계속해봐. 그래서 어떻게 됐다구?”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납치해간 뱀파이어가 캐슬린에서 어떤 놈이 그녀를 찾고 있다고 했어. 그녀를 등에 업고 다시한번 나라를 뒤집어버릴 속셈이라고 하더라. 근위대장이라고 했는데. 이름이 뭐라더라? 트레….” “트레즈 엑서 유니코트. 캐슬린 황실 근위대장.” 난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래 맞아! 그런데 어떻게 알아?” “몇일 전부터 여기 영주의 성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야. 간혹 부둣가랑 시내 관광을 하러 다니는 걸 본적있어. 관광을 빙자해서 이웃나라의 무역항구를 둘러보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딴 속셈이 있었던 것구나? 생각보다 큰 건인데. 그래서, 얼마 줄거야?” “얼마 원해?” “출장비까지 합해서 2500만은 줘.” “지금 그만한 현찰이 없어. 대신 이거 줄테니 먹고 떨어져라.” 탁! 주머니에서 조그만 검정색 돌을 꺼내 올리자 라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만지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는 구나. 그래서 난 그것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당장 라이트가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악?!” “짜릿하지?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야. 이번 여행에서 건진거지. 자, 도와줄거야 말거야?” 숨을 헐떡이며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검정 돌맹이를 쳐다보던 라이트는 얼른 고개를 꾸벅숙이며 외쳤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주인님!” 배를 잡고 좀 웃어준 나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차를 입안에 탈탈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신기한 듯이 만지작대던 라이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침투는 언제 할거야?” “침투? 무슨 소리, 지금 난 급해. 녀석이 거기서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이 정신으로 침투는 불가능이야. 습격이다. 오늘 새벽에 들어가서 성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단, 절대로 우리가 했다는 증거가 남아서는 안돼. 그 쪽으로는 네게 맡기겠어.” “좋아. 나만 믿어. 그런데 지금 어디에 묶고 있어? 이왕이면 같이 있는 쪽이 움직이는데 편할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짐 챙겨서 따라와.” 라이트는 간단하게 자신의 가방과 짐을 챙겨들고 날 따라왔다. 여관비를 계산하려 했지만 요몇일 동안 그가 재미로 잡아다둔 고기가 하도 많아서 주인장이 공짜로 해주었다. 자기 말에 오른 라이트는 기분좋게 웃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주인이 좋은 양반이라서 다행이다. 돈이 좀 모자라서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고기라도 잡아다 줄까하는 생각으로 낚시대 들고 나선거였어. 뭐,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지만,” “킥~! 추운데서 고생 많았겠다. 그런데 너 돈 많잖아? 그거 다 어쨌냐?” “아, 우리 아세트 잘 부탁한다고 데리러온 엘프들에게 탈탈 털어줬어. 지금 난 거지야. 네가 일거리 주지 않았으면 나 아마 이 녀석까지 팔아야 했을지 몰라.” 라이트는 연신 미소지으며 타고 있는 말의 갈기를 쓸어주었다. 그걸 보고 난 핏잔을 줬다. “짠돌이 라이트, 노예하나 때문에 완전 폐인 다 되셨군?” “어어? 네겐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은데? 노예 구하려고 겨울여행을 마다 않고 이제는 성을 박살내려는 사람이 말야.” 그도 그렇구만.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가 묶고 있는 여관에 도착하자 모두는 이미 잠이 들어버린 뒤였다. 사흘을 쉬지 않고 달렸으니 피곤하기도 했겠지. 그래서 소개는 뒤로 미루고 우리도 조금 쉬기로 했다. 그래봤자 나는 벽난로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어떻게 그녀를 빼내 올건지를 생각하기 바빴지만, 그런데 스피릿을 되찾으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이히히~! 드래곤 하트야. 드래곤 하트, 이 정도면 레벨 8클래스 까지는 구현할 수 있어, 내거야. 내거라구. 흐흣~! 색깔도 참 곱구나야… 으히히히…! 내 보물이야. 보물…!” 라이트는 빈 침대에 쪼그려 앉아서는 음침한 얼굴로 손바닥 위에 올린 드래곤 하트를 쓰다듬으며 연신 히히덕거리고 있다. 정말 나만 없으면 혓바닥으로 핥아 맛이라도 볼듯한 모습이다. 내 참, 아무리 마법사의 성격이 괴팍하다지만 정말 멋진데? 아세트가 지금 저걸 봐야하는데 말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린 나는 벽난로 안에서 불타오르는 장작더미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피릿은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밤 10시경. 늦은 저녁식사를 위해서 잠에서 깨어난 모두에게 라이트를 소개했다. “라이트 알트론입니다. 이번 일에서 마법지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꽤 잘생겼다? 예의도 바르고, 라이트씨 애인있어요?” “첼시아. 적당히 해둬.” 내가 점잖게 그녀에게 제재를 가하자 라이트가 손을 들었다. “현재로서는 홀몸입니다. 음흉하고 음험하고 괴팍스러운 마법사에게 관심있으시다면 서로간의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으심이 어떠신지? 마법사는 정신병자가 되기 쉬워서 아가씨들이 꺼려하는데 그쪽분은 참 적극적이시네요.” 녀석의 이야기를 들은 첼시아는 호호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해버렸고, 라이트는 하하 웃으며 아쉬워했다. 헛기침을 하여 잡담을 환기시킨 나는 마저 라이트에게 일행을 소개하고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겨울여행 내내 구상했던 작전을 설명했다. 뭐, 그래봤자 별거 없지만. “자, 다들 알았겠지? 각자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면 우린 무사히 목적을 달성하고 나올 수 있다.” “뭔가 거창한 걸 기대했더니만 겨우 이거니? 좀 빈티난다.” “그럼 뭘 더 바래? 땅굴이라도 파서 들어갈까? 단순하고 심플한게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이야. 난 그런 방식을 사랑하지. 복잡하게 살지 말자구.” 내 말에 첼시아는 귀엽게 혀를 빼물었다. 그때 옆에서 느긋하게 닭고기를 뜻으며 식후 맥주를 홀짝이던 네모가 말했다. “듣자니 영주의 성으로 잠입하려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러나?”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그럽니다. 아저씨도 좀 거들어 주시겠수?” 네모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뭘하면 되는데?” 익일 새벽 3시 반. 영주의 자택 200m 지점. 숲속. 사사삭~! “다들 자기 임무는 알고 있지?” 내 말에 얼굴에 복면을 한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움 속의 숲속 넘어로 보이는 영주의 저택을 쳐다본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좋아. 가자! 라이트, 올 서포트 매직.” “예스 마스터.”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복면의 사내는 라이트의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 주문을 중얼중얼 외우더니 우리들의 몸에 보조마법을 몇 개씩이나 걸었다. “파워 게이지! 헤이스트! 스트렝스! 스트라이킹! 실드! 햄프 업! 인비지 빌리티! 링크! 딜레이드 밀러 이미지!” 연달아이어지는 마법의 향연에 첼시아는 완전히 놀라버렸다. “으와~! 보조마법을 몇 개씩이나 거는거야? 이러다가 골든피크 일어나겠다.” “골든피크는 스펠파워 수치 100이상을 넘겨야 합니다. 이 정도로는 발생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정도라도 보통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 할 수 있죠. 골든피크 보다는 지속시간이 좀 짧다뿐일까? 그리고 인비지 빌리티의 제한시간은 10분입니다. 그 이상 움직일 경우 인비지 빌리티는 사라지고 자동으로 밀러이미지가 시전 될거예요. 밀러이미지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제가 지정한 모습으로 나타내 줄 겁니다.” “요컨대 보는 눈에는 우리 모습이 다른 사람으로 비친다는 거죠? 복면했는데 그 정도까지 필요가 있어요?” “보험입니다. 체형을 보고 사람을 찾아내는 현상금 사냥꾼이나 레인저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것도 제한시간이 있으니 가급적 복면은 벗지 마세요.” “뭘로 보이게 하는데?” 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르켰다. “세 사람 다 누가 보든 내 모습으로 비취질거야.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는 폴리모프 셀프로 몸을 바꿀 거니까 들킬염려는 없어. 이 정도면 완전 범죄에 가깝지. 자, 이제 슬슬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을 공주님을 모시러 가볼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인비지 빌리티가 걸려 보이지 않는 첼시아와 퍼피를 데리고 나무에서 나무사이로 숨어가며 영주의 성으로 달려갔다. 성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지만 성문 위로는 경비병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근처에서 첼시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호라~ 근무 중 이상 무라 이건가?” “쉿~! 조용히! 일단 문이 열리면 얼른 들어가서 스피릿을 찾아. 라이트 녀석이 시간을 끌테니까.” “좋아.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구경시켜 줄지 한번 볼까나?” 첼시아가 기대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잠시 기다리자 숲속에서 큼직한 뭔가의 빛덩어리 같은 것이 하늘로 떠오르더니 천천히 성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뭐, 뭐냐 저건?! “라이트?!” “엄청난 연출이잖아! 우와!” 라이트가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그것은 사방 10여미터 정도의 거대한 빛덩이였는데. 자세히 보면 중앙에 사람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언뜻언뜻 보였다. 드래곤하트의 마력을 저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멋진데? 저거라면 정말 시선끌기엔 딱이겠다. 녀석은 성문 높이 정도로 공중에 뜬 상태로 천천히 움직여댔다. 유령사촌 쯤으로 보이는 빛덩이가 성으로 다가오자 경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난 쾌제를 지르며 녀석의 뒤를 따랐다. 그때 갑자기 허공에 뜬 빛덩이 속에서 파이어 볼 몇 개가 튀어나와 성문으로 날아갔다. “저, 저건 뭐냐?! 피해!” 쿠콰콰콰콰쾅~!!! ========================================================================== 프로토스의 아콘이 모티브입니다. 쩝, ㅠ.ㅠ XXX: 저작권! Reload Running Fire: 49 “이 자식, 뭘 마신거냐?” 커다란 성문이 박살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라이트가 길을 만들어 준 것이리라 생각한 나는 낮게 외치며 뛰어 나갔다. “투입!” “간다! 퍼피! 헤메지 말고 잘 따라와!” “예스 마스터!” 각종 보조마법을 걸고 인비지 빌리티까지 건 우리들은 빠른 속도로 대로를 달려 영주의 성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하늘 위에서는 거대한 빛덩이가 수천발의 매직 미사일을 난사하며 경비병들의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저 녀석은 지금 드래곤 하트의 성능시험을 하고 있는 걸꺼야. 뭐, 쉬지 않고 마법을 날려대면 이쪽이야 좋지만. 흩어진 우리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본성으로 침투를 시도했다. 쨍그랑~! 땡땡땡! 뭔가가 창문을 깨고 난입하자 알람이 울려댔다. 으음, 첼시아나 퍼피겠지.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내 찢은 나는 몸에 실드를 걸면 이런 미친 짓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 정문으로 냅다 달려들었다. “하하하하! 비켜비켜비켜! 너클 인 파이어 볼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우왁! 창문이 저절로 깨졌어?! 유, 유령?!” “미친! 귀신 같은게 아냐! 침입자다! 저기 마법을 쏘아대는 빛덩이랑 한패야! 막아! 정문으로 침입자가 들어온다!” “활! 활을 쏴!” “으랴압!” 뻐벙! 스크롤을 거머쥔 주먹으로 정문을 때리자 폭발이 일어나고 나무 파편과 연기들이 밤하늘로 솟아올랐다가 정원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제로거리에서 파이어 볼에 직격한 정문은 주변의 벽들과 함께 완전히 박살나서 너덜거렸다. 자욱한 연기를 헤치고 달려들어간 나는 어두운 홀에 잠시 멈춰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때 뭔가가 내 옆으로 지나갔다. “무모하지만 멋집니다.” 퍼피구나. 보일리는 없겠지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미리 짜둔대로 1층 복도를 달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같은 방법으로 퍼피는 2층, 첼시아가 3층이다. 인비지 빌리티를 건 상태에서 마구 헤매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건설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지. 복도에서 맨 처음 보이는 방을 부수고 들어간 나는 그곳에서 똑같은 잠옷을 입고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에 몰려서서 하늘에 떠있는 괴물체를 정신없이 구경하는 아가씨들을 발견했다. “꺄아악!? 저, 저절로 문이 열렸어! 유, 유령?!” 으음, 귀신이라. 안보이니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군. 창가에 몰려서서 와들와들 떨고있는 아가씨들을 쳐다본 나는 가장 앞에 있는 여자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내가 목을 조르자 켁켁거리며 죽는 소릴 해댔다. 남은 아가씨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붙들려 고통을 당하는 동료를 보며 비명을 질러댔다. “꺄아악?! 제니퍼!” “귀신이야! 귀신! 아아아앙!” “시끄러워! 난 귀신 같은 게 아냐! 동료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내 질문에 답해! 회색머리여자! 회색머리 여자 어디있어!” “어, 엄마야~! 사람살려! 경비대! 살려줘요!” 하지만 여자들은 울며 창문을 타 넘거나 내 옆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거참, 못말리는 여자들이네. 잡고 있는 여자를 놓아주고 도망가는 아가씨들의 발을 걸거나 잠옷을 잡아당기며 한바탕 난리를 부린 나는 양 겨드랑이에 여자들을 끼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아가씨의 등에 다리를 올린 모습으로 으르렁 거렸다. 그래봤자 남이 볼 때는 두 아가씨가 허공에 떠있고 바닥에 누운 여자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는 묘한 모습이지만, “닥쳐! 조용히 못해 이것들아!” 그제서야 조금 조용해졌다. 난 다시 물었다. 그러자 날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인비지 빌리티?” “호오, 말이 좀 통할 것 같군. 자, 말해. 얼마 전에 여기로 온 회색머리의 여자 어디있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아주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될거야.” “그녀는 지금 2층 귀빈실에 묶고 계시다.” “킬 님!” “이봐, 괴한 씨. 나의 피앙새들을 그만 괴롭히지 않겠어?” 잽싸게 고개를 돌린 나는 문 앞에 기대어 서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킬!?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고 있다가 두 눈사이를 집게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쳇~! 적외선 시각은 눈이 따가워서 싫어. 그런데 넌 누구냐? 어디의 누가 보낸거지?” “그녀를 처리하러 왔다. 또 다시 왕실을 뒤집게 내버려둘지 않았냐?” “네놈, 귀족원에서 보낸 거냐?” “그걸 말해줄 생각은 없는데.” “꺅?!” 인질로 잡고 있던 여자를 놈에게 밀어낸 나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와장창~!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간 나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고 점프를 시도했다. 바운드 스펠이기 때문에 건물 2층 높이 정도는 간단하다. 와장창~! 2층 창문 앞에서 직각으로 운동방향을 바꾼 나는 다시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난입했다. 옷안에 라이트 레더를 받쳐입지 않았다면 유리조각이 파고들었을 거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니 복도에 서있던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창문…! 크악!” “시끄러워. 좀 조용히해.” “치, 침입자다!” 퍽! 검집으로 호들갑을 떠는 경비병의 머리를 때려버린 나는 등뒤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기분에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았다. 부서진 창틀에 올라서서 박쥐 날개마냥 망토를 펼친 킬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차갑고도 고아해서, 난 하마터면 전투도중에 한 눈을 판 대가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파파팍! 내가 선 곳으로 나이프가 날아왔다. 뒤로 굴러서 으르렁대니 놈이 입을 열었다. “어딜 도망가? 내 피앙새들을 괴롭힌 대가를 치뤄야지?” 지칙!~ 지칙! 그때쯤 내 몸을 숨기고 있던 인비지 빌리티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킬은 반갑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만지며 말했다. “제한시간이 다됐군. 다행이야. 무리하게 적외선 시각을 쓰느라 눈이….” 츠팟~! 놈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며 검을 움켜잡았지만 놈은 코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쾅! “으윽!” “…아팠었는데 말야.” 놈의 주먹에 뒤로 나가떨어진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제길! 이놈을 잡지 않으면 스피릿을 되찾기는 커녕 살아서 나갈 수도 없겠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나는 아주 작정을 하고 대뱀파이어 사냥용으로 가져온 아레프제 칼라미티 소드를 뽑아들었다. 칼라미티 소드라고 뭔가 좀 특별할 줄 알았지만 일반 검과는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검을 뽑고 얼마지나지 않아 뭔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칼라미티 소드의 번쩍이는 검신에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글자가 순간 빛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손잡이를 제외한 블레이드 부분이 용광로에서 달구어지는 쇳조각처럼 천천히 짙은 붉은 색을 띄기 시작하는 것이다. 뭐, 뭐야 이거? 그때 손잡이 부분에 박혀있는 동그란 보석 같은 것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심장이 뛸 때 느껴지는 두근거리는 느낌 말이다. 깜짝 놀란 나는 잠시 당황했다가 이것을 만든 아레프를 믿기로 했다. 그때 고개를 갸웃하며 나와 내 손에 들린 검을 지켜보던 킬이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칼라미티 소드까지 준비했군? 철저한데?” “네놈을 죽이겠다. 뱀파이어.” “그래, 정말로 나를 죽여준다면 네게 축복을 내려주지.” “이익?!” 녀석의 손에서 쏟아지는 나이프를 피해 복도를 구른 나는 엉겁결에 검을 휘둘렀다. 칭! 쉬 이케니리히! 케리안 탁스! 쿠콰쾅! 검을 휘두른 방향으로 번쩍이는 빛이 직선으로 그어지더니 창문과 벽이 통째로 날아가버렸다. 사방으로 파편이 날리는 바람에 바닥에 납작 업드린 나는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우왁?! 뭐, 뭐야 이거?!”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성벽이 있는 곳에서 일단의 폭발이 일어나고 있다. 콰콰쾅! 고개를 돌린 나는 내 손에 들려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검신의 붉은 기운이 처음부터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뭐, 뭐 이런 개떡 같은 칼이…. 어, 그렇지! 화력조절! 출력을 낮춰야해! 전에 아레프에게 들어두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낸 나는 서둘러 검의 가드부분에 있는 수정구의 눈금을 MAX에서 1로 맞췄다. 그러자 수정구 안의 개구리 심장의 박동수가 눈에 뛰게 줄어들었다. “이야~! 굉장한 파괴력이군. 피하지 않았다면 허리가 잘리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을 거야. 좀 무서운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익?!” 눈금을 맞추다말고 고개를 도려보니 킬 놈이 내 옆에서 팔짱을 하고 박살난 성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를 드러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놈에게 다시 검을 휘둘렀다. 칭! 이케리나 샤케네! 콰직! 으드득! 출력을 최대로 낮추어서 그런지 칼라미티에서 나오는 검광은 발톱으로 죽그어버린 자국만이 남았다. 하지만 저것도 그대로 맞으면 죽을거야. 세상에! 아레프! 이게 어떻게 최저 출력이야? 벽이 다파여버렸는데! 검광을 피한 킬은 출력이 줄어들자 신기한 눈을 했다가 다시 모습을 감춰버렸다. 블링크! 이런 염병! 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느니 냅다 뒤로 뛰어버렸다. 그러면서 라이트에게 주문했던 포션을 꺼내마셨다. 크아! 쓰다! 쨍그랑! 길쭉한 실험관이 깨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자리에 멈춰선 나는 온몸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등 뒤! “이얍!” 허리를 돌린 나는 등뒤에서 나타난 녀석을 걷어차버렸다. 가슴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진 놈은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쓱 닦으며 눈을 매섭게 떴다. “이 자식, 뭘 마신거냐?” “각성제의 일종이다. 신경의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거지. 부작용이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먹고 살려면 이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 해! 내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깍는 거다. 알겠냐?!” 칼라미티는 너무 위험하다. 잘못했다가 벽이라도 뚫어서 재수없게 스피릿이 다치면 나만 손해야! 그래서 등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든 나는 그것을 들고 놈에게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은 칼라미티가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듯이 맨손으로 내 칼을 붙잡으려 했다가 손바닥에 깨끗하게 잘려버리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놈을 걷어차버린 나는 놈이 굴러간 방향으로 다시 칼라미티를 휘둘렀다. “죽어!” 칭! 콰쾅! 콰드드득! 킬은 몸을 굴려 옆으로 피했다. 애꿋은 벽이 드래곤의 발톱에 할퀸 것처럼 되어버렸다. 복면 아래로 이를 드러낸 나는 놈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녀석도 검을 뽑아 나에게 휘둘렀고 우리는 미친 듯이 검을 나누어댔다. 보통 사람이라면 설사 칼라미티를 들었다고 쳐도 뱀파이어와는 대등하게 싸우지 못한다. 나도 전투 직전에 라이트가 보조마법을 걸어주지 않고 각정제를 마시지 않았다면 놈과의 정면대결은 무조건 피했을 거다. 젠장, 그러고보니 완전히 약물 중독자가 다되어버렸군. “저기있다!” “난 상관하지 말고 활을 쏴라! 어서!” ========================================================================== 이런 것을 보고 살신성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Reload Running Fire: 50 “이런 빌어먹을! 뒈져버렷!” 킬이 그들에게 외쳤고 난 이를 드러내며 다리를 들었다. 그러자 놈도 다리를 들었고, 우리는 서로의 가슴을 걷어차며 떨어졌다. 하지만 근력으로 따지면 놈이 좀더 우위인지 난 어떤 방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굴러 들어가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려보니 귀빈을 대접하기 위해 화려하게 장식한 객실인 것 같은데 스피릿은 없었다. 그때 경비병들이 문앞으로 달려와 활을 쏘아댔다. 팍팍팍~! 슁슁~! “에이! 빌어먹을! 그만 두지 못해!” 칭! 바닥으로 엎드리며 그들에게 칼라미티를 휘두른 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경비병들을 뒤로 하고 가까운 곳의 다른 문을 박차고 난입했다. 빈방이다. 복도뿐만 아니라 객실과 객실도 따로 문으로 연결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 같은 놈이 들어올 때를 대비한 대피용인가? 반대편 벽에 또 다른 문이 보인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괴성에 욕설을 내 뱉으며 문으로 달려간 나는 드롭킥으로 단단히 잠겨있는 문을 박살내고 굴러들어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웬 사내가 벽난로 앞에서 가운을 입고 있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새치가 섞인 머리를 멋지게 뒤로 넘기고 매우 근엄하게 생긴 사내였는데 그는 복면을 쓰고 칼을 두자루나 들고있는 나를 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범한 중년아자씨 인걸? 난 손가락을 입에 갖다 세우며 천천히 문으로 향했다. “임무 이외에 애꿋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 움직이지 마라.”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경멸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눈빛이 마음에 안들어 한대 때려주고 나가고 싶었지만 옆방에서 경비병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서 관두었다. 그때 침대에서 뭔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꺄아악!” 여자? 이런 염병맞을~! 혹시 스피릿 아냐?! 눈이 뒤집어진 나는 이를 악물고 침대로 달려가 여자가 누워있는 침대의 담요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8세? 많으면 20살로 보이는 긴 금발의 여자는 침대가에 서있는 흉악범을 보고 연신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중요한 부분들을 가렸다. “아아악!” “닥쳐! 가만 있지 않으면 목을 잘라버린다!” 억지로 여자를 붙잡아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녀를 다시 놓아주었다. 스피릿이 아니다. 여자는 이제 살려달라며 울기 시작했고 난 고개를 돌려 사십은 족히 넘어보이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근엄한 얼굴로 계집질이라니, 생긴거 하고는 영 딴판이군. 딸년 같은 계집하고 침대에서 뒹굴면 재미가 있나? 집에서 마누라가 당신 이러는 거 알고있어? 콱 꼰질러버릴까?” 콰쾅! “움직이지 마랏!” 객실의 정문과 내가 부수고 들어온 문으로 경비병들이 난입했다. 그중에는 킬도 섞여있었다. “면목없습니다. 트레즈씨. 나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트레즈? 이 놈이 바로 그 트레즈야?! 트레즈는 됐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 건 됐다. 움직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니 뱀파이어를 능가하는 실력자가 아닌바에야 보조마법이나 약물을 사용한거겠지. 게다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자가 들고있는 검은 칼라미티로 보이는데. 이봐, 너는 누구냐? 어디의 누가 보냈지? 베레타인가?” “글쎄. 내가 누굴 것 같아?” 이미 경비병들이 방안으로 들어와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땐 잠시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는 쪽이 났다. 당황해서 덤벼들거나 투앙하는 건 초보나 하는 짓이지.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가자 불쌍해진 것은 내가 아니라 아무것도 입지 않고 침대에 쭈그려 앉아있던 금발의 여자였다. 그녀는 트레즈의 눈빛에 바짝얼어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침대에 쪼그려 앉아 수치심에 훌쩍거리며 오들오들 떨기만했다. “불쌍하군. 이거나 걸치쇼.” 검 끝으로 바닥에 던져버린 담요를 걸쳐올려 그녀에게 건내자 조금 머뭇대던 여자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서 후다닥 몸을 가렸다. 그리고는 연신 훌쩍이며 오들오들 떨어댔다. 난 검을 지팡이 삼아 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니 보내주지? 아버지 뻘이나 되는 늙은이에게 당한 것도 억울할텐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터지 꼴로 다치거나 죽으면 불쌍하잖아? 안그래?” “알았다. 이쪽으로 보내라.” 트레즈는 얼굴을 찌뿌리며 날 노려보았다. 킬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난 여자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녀는 날 힐끔 바라보았고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모기만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는 도도도 달려 기다리고 있던 경비병들에게로 향했다. 킬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로맨티스트로군? 적이 아니라 친구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우린 이야기가 통했을지도 몰라.” “심심하면 깨무는 습관을 가진 뱀파이어와 친구라고? 지랄마. 이 쪽에서 사양이야.” 킬은 자기 이름으로 웃으며 검을 들었다. 그런데 놈의 검이 아까와는 좀 틀리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검신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실전배치된 오리지날이다. 아까처럼 밀리는 일은 없어.” “칫!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아. 어이~! 살고 싶은 사람은 달아나!? 죽어도 난 모른다고!” 눈금을 건드려 출력을 올리고 막 검을 휘두르려는데 내 앞으로 트레즈가 나섰다. 그러고 보니 덩치가 꽤 크다. 이런 놈이 감히 내 스피릿을 아까 그 여자처럼 침대에 눕히려고 했단 말이지?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다. “질서를 지켜. 당신차례는 아직 멀었다구!” 트레즈는 인상을 찌뿌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너는 달아날 수 없다. 어디의 누가 보냈는지 말해라.” “호오, 그럼 뭘 해줄건데? 고통없이 죽여줄거야? 무릇 가진 자라면 말야. 가진 자로서의 자세를 가져. 아무것도 나눠주지 않을 거면서 그런 식으로 사탕발림 정말 치졸해. 알아? 생긴 것만 근엄한 중늙은이야.” “입이 참 더러운 놈이군. 끝까지 입을 다물겠다는 것이냐?”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시킨 것인지는 밝힐 수 없지만 왜 들어왔는지는 알려줄 수 있어. 여기 스피릿이라는 회색머리 여자있지? 난 그 아가씨를 해치우러 왔어. 안그래도 베레타와의 사이가 않좋은 판국인데 전(前) 왕가의 공주를 찾아다가 또 반란을 일으키려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거 아냐?” 새빨간 거짓말에 홀딱 넘어간 트레즈는 눈을 흡뜨고 날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건데? 난 검을 방만하게 늘어뜨렸다. 휘두를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칼라미티는 피를 달라고 울부짓고 있었다.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다니. 조금 어이가 없군. 미안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킬, 일단 붙잡아라. 어디의 누가 보낸 것인지는 알아내야겠다.” 킬이 앞으로 나서고 경비병들이 석궁을 들었다. 난 검을 들어 그들을 견제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기는? 킬의 존재가 그녀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구. 게다가 당신의 태도도 은근히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는 걸? “그 계집애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 모두 날아가는 거야!” 시스카 케라뎀! 최대출력을 준비한 칼라미티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그때였다. 창문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와 트레즈와 킬, 경비병들을 물러서게 했다. 눈에 손가리개를 하고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빛덩이가 창문 앞에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중앙에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들어가 있다. 그때 머릿속으로 녀석의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뭐하고 있어? 도와줄까? “이, 이건 뭐야?” -메시지 스펠이야. 생각해. -어, 그래. 이렇게 하는 거구나. 지금 포위당한 상태야. 저 남자 보이냐? 위대한 반란을 꿈꾸시는 트레즈 근위대장이란다. 그런데 스피릿은 어때? -아직이야. 뭐 알아낸거 있어? -뱀파이어가 2층 어딘가에 있다고 하더라. 퍼피와 첼시아를 이쪽으로 보내서 찾도록 해줘. -서둘러, 마을에서 경비대가 출동했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거야. 참, 선물을 줄테니 엎드려. 그 소리를 듣고 바닥에 납작 업드렸다. 그러자 창문으로 수천발의 매직 미사일이 쏟아져 들어와 경비병들을 때려눕혔다. 하하하~! 멋진데! 콰장창~! 쉭쉭쉭~! 퍼퍼퍼퍼퍽! “으으악!” “컥?!” “뭐, 뭐냐 저건?! 매직 미사일을 쏘잖아?!” “엎드리십쇼!” “으윽!” 한바탕 매직 미사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쓰러진 사내들의 사이를 뛰어다니며 트레즈를 찾았다. 그러다 몇몇 사내들에게 감싸여 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를 발견했다. “이노옴…!” 트레즈는 이를 뿌드득 갈며 고개를 들었다. 눈살을 잔뜩 찌뿌린 나는 그의 얼굴에 자동석궁을 들이대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모두를 위해서 당신 같은 사람은 사라져야해.”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트레즈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경비병들을 밀어내며 외쳤다. “킬! 어디 있는 거냐! 저 놈을 잡아!” 챙!? 그의 외침과 동시에 킬이 나타나 검을 휘둘러 날 물러서게 만들었다. 트레즈를 가리고 선 킬은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하시긴, 난 내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구.” 투투투투투투투퉁! 그에게 자동석궁을 난사하자 킬은 안개가 되어 화살을 모두 벽으로 날아가게 했다. 석궁을 등에 맨 나는 바닥에 꼿어두었던 검을 뽑아 들고 몸을 재구성하는 녀석에게 달려들어 막 재구성된 킬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하지만 내가 검을 휘두를 때 녀석은 다시 허리를 안개화시켜 검을 통과 시켰다. 그때 옆에서 칼이 날아왔다. 챙~! “윽! 이게 뭐야?!” 허공에 둥둥 떠있는 검에는 사람의 손이 붙어있고 그 아래부분은 시커먼 안개로 한창 재구성중인 킬의 몸퉁이와 연결되어있었다. “신기하군! 뱀파이어는 이런 것도 되나보지!?” “그럼, 이런 것도 할 수 있단다! 하하하하! 죽어봐라!” “크르르!! 컹컹!” “으아아악!” 놈의 오른팔이 개의 머리처럼 변형되어 내 어깨를 씹었다. 난 비명을 지르며 샤프처리 마법검을 집어던지고 칼라미티를 뽑아 휘둘렀다. 칭~! “캥?!” 어깨를 물고 늘어지던 녀석의 팔은 개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다가 다시 안개가 되어 녀석의 몸으로 날아가버렸다. 이를 빠드득 간 나는 홧김에 칼라미티의 수치를 3으로 맞추고 검을 휘둘렀다. “이런 빌어먹을! 뒈져버렷!” 키리둠! 쉬스카아! =========================================================================== 칼라미티가 내 뱉는 외계어는 프로토스의 목소리가 모티브 입니다. XXX: 저작권! Reload Running Fire: 51 “캬하하하하하하! 아프지!? 아파서 미칠 것 같지!? 죽을 것 같지!” 쫘아아아악! 콰드드득! 맞은편 벽면이 뭔가에 의해 가로로 찢어지며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검을 방패삼아 날아온 파편을 막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려보았다. 방안에는 몇몇 운없는 경비병들이 아직 신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킬과 트레즈는 보이지 않았다. “잽싸게 도망갔군!” “누가 도망갔다고 그러지?” 재빨리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달려드는 킬을 발견했다. 투투투투투투퉁~! 자동석궁을 뽑아 그에게 냅다 갈겨줬지만 결국 나는 그의 발길질을 맞고 맞은편 문을 부수고 안으로 굴러들어갔다. 기침을 하며 일어나니 양손에 검을 든 킬이 달려들어왔다. 칼라미티를 찾았지만 그것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제길! 마지막이다! 등에서 따로 준비한 롱소드를 뽑아든 나는 그것을 들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캉캉캉~! 챙챙~! “이거나 먹고 떨어져랏!” 그와 검을 나누던 중에 빈틈을 이용해서 왼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칼라미티?! 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덤블링을 넘어 바닥에 머리를 감싸고 엎드렸다. 콰쾅! 벽이 박살나고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때 트레즈로 의심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킬! 적당히해! 성을 무너뜨릴 속셈인가!?” “적은 칼라미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맞서려면 그에 대등한 힘이 필요하단 말이오!”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자넨 뱀파이어야! 겨우 칼라미티를 손에 쥔 애송이 하나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되나! 이 이상 무리가 가면 성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적당히하고 경비병들과 합세해서 녀석을 몰아! 알아낼 것이 있으니 절대로 죽여서는 안돼!” “이 빌어먹을!” 몸을 굴려 침대로 향한 나는 칼라미티를 집어들며 말했다. “상관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겠군?” 킬은 허리를 펴더니 이를 부득부득 갈며 칼라미티를 검집에 집어넣고 일반 검을 주워들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박진감 넘치는 전투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당신 사정을 받아 줄 것 같아? 난 계속 요거 쓸거야.” “마음대로 해라.”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고개를 숙인 나는 아래쪽에서 솟아올라오는 킬과 그의 주먹에 턱을 얹어맞고 고개를 꺽었다. 으억?! 하지만 킬은 이번 기회에 상사에 대한 울분을 풀 생각을 했는지 다리를 들어 날 걷어 차버렸고 난 다시 한번 문짝을 부수고 복도로 굴러갔다. “제길! 나만 당하니까 억울 하잖아!?” “꼼짝마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려보니 수십명의 경비병이 서서 창과 검을 들이댔다. “헹~! 그런걸로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쇼?” “뭐, 뭐야?!”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든 나는 주변에 몰려있는 사내들에게 그것을 난사해버렸다. 그러자 미리 방패를 준비하지 않았던 경비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나갔고 멀찍이서 그것을 지켜보던 트레즈가 노호성을 질렀다. 호오라, 그런 곳에 계셨나? 근위대장이라면서 칼들고 좀 나서지 않구서 계속 부하들만 부리네. 제복 않입고 싸우면 폼이 안나서 그럴까나? “이럴수가! 자동석궁이라니?! 킬! 뭐하고 있나!” “어이, 킬. 당신 상사가 부르는데?” “신경 긁지마라!” 나에게 외친 것인지 트레즈에게 외친 것인지 고함을 버럭지르며 방안에서 뛰쳐나온 그가 나에게 덤벼들었다. 자동석궁을 든 나는 천장으로 뛰어오른 킬에게 화살을 퍼부어주고는 칼라미티를 휘두려다가 어이없는 것을 목격했다. 쿠르르르… 쫙! 쫘좍! 벽과 천장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젠장! 몇 번 휘둘렀다고 벌써 금이가?! 완전 부실공사 아냐 이거! 재수없게 건물이라도 무너질 때는 이래저래 괴롭겠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칼라미티를 내렸다. 그러고 있으니 몸을 재구성하여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낸 킬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칼을 들어올렸다. “그렇지. 이제야 할 맛이 나는군.” “빌어먹을! 컴 온 베이비다!” “아무렴, 가주지! 크하하하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킬은 낄낄거리며 달려왔다. 맞붙자마자 거의 막상막하로 검을 휘두른 우리는 발로 차고 검으로 찍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방과 방으로 장소를 이동했다. 까드드드~! “이얍!” 검과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다 내 쪽에서 검을 빼버리자 킬의 몸이 기울여졌다. 그때를 노려 다리를 쭉 뻗은 나는 킬을 걷어차버렸다. 뒤로 밀려난 그는 어느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죽어랏!” 팍팍팍! 카랑! 캉! 복도를 가로질러 날아온 스피어와 화살들은 벽에 박히거나 아니면 내가 쳐냈다. 신경이 극에 달하고 각종보조마법으로 신체능력을 향상시키니까 반응속도가 거의 골든피크 수준이다. 그나저나 경비병들 활 정말 못쏘내. 창질도 못하고, “활이라면 이 정도는 쏴야지.” 투투투투투투퉁~! “우왁?! 엎드려!” 대충 도망갈 정도로 쏴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킬이 여기 어디 있을텐데? 숨어있나? 방은 일반적인 귀빈용 객실로 여기저기 화려한 장식에 방안 구석에는 비단 커튼이 드리워진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었다. 지붕 달린 침대라니, 저런건 처음본다. “으르르! 컹컹!” 그때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아까 팔을 변형시켜 만들어 내 어깨를 씹어댔던 사냥개의 머리다. 눈을 가늘게 뜬 나는 검을 두손으로 잡고 그것을 후려쳤다. 캥~! 녀석은 단번에 나가떨어져 하얀 연기를 뿜어댔다. “어디 숨어있어?! 빨리 나오지 못해!” “여기다.” 고개를 돌리니 놈이 문밖에 서있었다. 방만하게 검을 잡은 그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를 부득 간 나는 손에 들고있던 자동석궁을 난사했다. 투투투투퉁! “하하하! 그런 걸로는 날 죽일 수 없어. 나에겐 영생의 권능이 있다구. 약오르지?!” 그렇다. 뱀파이어에겐 영생의 권능이 있다. 오로지 죽일 수 있는 방법이라곤 관에 박아넣어서 오랫동안 방치하여 미이라로 만든 다음 불에 태우는 것 뿐인데. 그렇게 만들기는 퍽 어렵다. 아쉬운대로 움직이게 못하게라도 만들어야 할텐데 말야. 그럴려면 저놈의 가슴에 나무 말뚝을 박아넣어야 하는데. 그럴려니 보조마법의 제한시간이 다되어가고 스피릿도 찾아야하는데 큰일이다. 만일을 대비해 가져온 스크롤뭉치들을 만져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었다. 젠장, 퍼피하고 첼시아는 어디가서 아직 않오는 거야? 그때 창밖에서는 거대한 빛덩이가 돌아다니며 수십명의 경비병들을 괴롭히고 있는게 보였다. 저쪽도 바쁘군. 조금있으면 마을에서 경비대가 들이닥칠텐데. 이거 정말 시간이 없어. 그러던중 내 눈에 뭐가 이상한 것이 발견됐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줄기가 침대를 잠깐 비췄는데. 누군가가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으로 이곳에 들어온 주목적을 되새긴 나는 문 앞에 서있는 녀석을 힐끔 쳐다보다가 냅다 뒤로 달려 침대로 향해보았다. 그러자 몇걸을 떼지도 않았는데 녀석이 눈 앞에 나타났다. 딱 걸렸어! 이놈의 자식! 감히 날 속히려들어!? 난 턱으로 침대를 가르키며 물었다. “공주님이지?” 킬의 얼굴이 엉망으로 찡그려졌다. 오호라~!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아~ 너무 자책하지는 마. 당신이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난 달려가서 확인했을거야. 이쪽은 전투보다 임무완수가 주된목적이거든? 어쩔수가 없었다구. 그러니 말인데. 이정도로 하고 얌전히 비켜주지 않겠어?” “빌어먹으을…. 웃기지마랏!” 부들부들 떨리는 킬의 어깨넘어로 실크커튼이 드리워진 커다란 침대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스피릿의 존재를 알아챈 나는 검을 들고 다시 한번 으르렁댔다. “좋게 말할 때. 비켜.” “나도 한물 갔군. 인간에게 이 정도로 휘둘리다니.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오기로라도 뻗대야겠다. 공주는 줄 수 없어. 날 꺽고 데려가면 모를까. 참, 아까 뭐라고 했었지? 컴 온 베이비?” “이 자식! 당장 비키지 못해?!” 놈에게 달려든 나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킬은 그것을 착실하게 받아내며 간간히 블링크를 사용하여 내 허를 찌르려 했지만 각성제 덕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녀석의 위치정도는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오른쪽! “지금의 나에게 그런 건 안통해!” “크윽!” 발차기를 맞고 바닥으로 쓰러진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녀석을 한번더 걷어차줄 요량으로 달려갔지만 놈은 브링크를 써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머리 위?! “이전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는데 말야. 서로 능력이 비슷해 놓으니 쉽게 판가름이 나질 않는군.” “동감이다!” 건물이 무너지던 말던 칼라미티를 뽑아든 나는 천장에 매달려있는 녀석에게 검을 휘둘렀다. 콰쾅~! 샹드리에가 박살나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먼지에 가려 놈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난 신경을 곤두 세웠다. 그때 다시 머리 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검을 똑바로 세우고 떨어져 내리는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커다랗게 뜬 놈의 붉은 눈이 그렇게 겁나보일 수가 없었다. 이런 젠장! 늦었어!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마주 검을 들어올리고 있으니 갑자기 녀석의 몸이 이상하게 꺽여버렸다. 뭔가에 묶여 끌여당겨진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진 녀석은 자기 다리에 묶여있는 채찍을 보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쉭쉭 거렸다. 문앞에는 정말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복면의 괴한이 서서 채찍을 감고 있었다. “안녕? 잘생긴 오빠. 3대 1로 다시 붙어볼까요?” 킬은 이빨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를 맞이 한 것은 퍼피로 짐작되는 사내의 이단 옆차기였다. 어처구니 없는 공격을 당하고 날아간 킬은 기침을 조금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를 쓸어넘기며 멋쩍게 웃어버렸다. “하하하, 이, 이거 슬슬 화가 나려는데. 어이. 이봐, 그러지마, 더 이상 날 열받게 하면 안돼. 큰일난다구?” 입을 꾹 다문 나는 두말하지 않고 녀석에게 달려들어 몇 번 검을 나누다 외쳤다. “너클! 싸워!” 퍼피가 달려와서는 나를 거들었다. 킬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과 주먹, 다리등을 막고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외쳤다. “이 놈들! 그만하지 못해?!” 팔로 퍼피의 다리를 붙잡은 킬이 검을 들어 내 머리를 쪼개려했다. 기회다! “채찍! 잡아!” 휘리릭! 기다리고있던 첼시아가 채찍을 휘둘러 칼을 든 놈의 팔을 싸잡아 매었다. 덕분에 내 머리를 노리고 있던 검은 삐딱하게 떨어져 내렸고 그틈을 노려 난 그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캬아아아아아아!” “캬하하하하하하! 아프지!? 아파서 미칠 것 같지!? 죽을 것 같지!” =========================================================================== 가끔 어쩌다 이런 놈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나 싶습니다. 후회막심…! Reload Running Fire: 52 “꺄아아아아아아!!” 두손으로 가슴에 반이상 들어간 롱소드를 붙잡고 비명을 질러대던 킬은 비틀비틀 거리며 창가로 걸어갔다. 난 그틈을 노려 칼라미티를 뽑아 휘둘렀다. 흐느적거리며 서있던 녀석은 피하지도 않고 그걸 맞더니 창문을 박살내고 나가 떨어져버렸다. 퍼피가 놈의 생사유무를 확인하러 가는 동안 나는 후다닥 침대로 달려가 커튼을 걷어내고 담요를 붙잡아 천천히 당겼다. 담요를 걷어내는데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가 없었다. 담요 아래에서 회색머리카락이 나타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담요를 완전히 걷어냈다. 고맙게도 잠옷만 입은 스피릿이 몸을 웅크리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슴 속으로 뭔가 해냈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그녀의 몸을 살피던 첼시아가 말했다. “탈진상태야. 전 공주님을 이런식으로 대하다니 여기 사람들도 너무한데?” “지금 그게 급한게 아냐. 어서….” “으아아악!” 퍼피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웬 사내가 퍼피의 목을 붙잡아 들어올리고 있었다. 시뻘건 눈으로 고개를 든 녀석은 다름 아닌 킬이었다. 뭐, 뭐야 저 모습은? “캬아아악!” 퍼피를 집어 던진 녀석이 손에 쥔 칼라미티를 들어올렸다. 제 정신이야?! 스피릿까지 죽는다고! “무슨 짓이냐! 그녀가 다친다 그만둬!” 그때 경비대원들을 이끌고 들어온 트레즈가 외쳤다. 고개를 팩 돌린 킬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거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닥쳐! 대가리 속에 든 거라곤 탐욕 뿐인 욕심쟁이 녀석!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주니 나 뱀파이어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더냐!? 들고있는 검과 타고있는 말의 상태도 모른채 달리고 휘두를 줄만 아는 놈이 왕이 된다면 안봐도 뻔해!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무, 무슨 짓을!” 킬은 칼라미티를 휘둘렀다. 내가 볼때 오리지날 칼라미티에는 출력을 조절하는 기능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검을 휘두르자 문이 있던 벽이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벽돌과 파편을 날렸다. 파편 중에는 사람의 일부였던 것들도 대다수를 차지했다. 스피릿이 제정신이 아닌게 천만다행이다. 머리 위로 떨어진 트레즈의 부서진 머리를 손으로 밀어버린 나는 침대넘어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놈이 우리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제길! 이를 까득 깨물고 있으니 스피릿을 안고있던 첼시아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퍼피는? 우리 퍼피는 어떻게 됐어?” “잘 모르겠어. 첼시아. 내가 막을테니 넌 밖으로 나가서 라이트 녀석과 합류해.” “뭐? 무슨 소리야?” 첼시아는 고개를 내밀었다가 가까이 다가온 녀석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꺅!?” “젠장! 보조마법도 떨어져가는데 환장하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스크롤 뭉치를 꺼내 그것을 찢었다. 다 찢어진 모습으로 검을 들고 다가오던 놈이 멈춰섰다. 아까와는 틀리게 망토도 찢어지고 상당히 후줄근해진 모습이었지만 적어도 저 두 눈만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어, 무서운데?” “죽여버린다. 이 버러지.” 파지직! 골든피크가 발생됐다. 난 황금빛으로 물든 손으로 복면을 벗으며 말했다.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어. 저 자식들을 대신 죽여줘서. 덕분에 손안대고 코풀게 됐거든?” “네놈이었군.” 화가 난 킬은 내 얼굴을 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단 한마디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젠장. 살아서 다시 스피릿의 엉덩이를 쓰다듬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난 칼라미티를 들었다. 엄지 손가락으로 화력은 최대로 맞추었다. “응. 사랑에 빠진 것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거든. 무섭지?” 킬은 한번 피식 웃었다가 다시 눈을 부릅뜨며 검을 휘둘렀다. “족종번식을 위해 치장한 감정 따위 나는 모른다! 죽어라! 이 버러지!” 쿠콰콰쾅! 천장이 폭발을 일으키며 벽돌이 쏟아졌다. 첼시아가 비명을 질러댔고 난 이를 까득 깨물고 커다란 침대를 들어올려 파편을 막았다. 으억~! 이건 돌로 만들었냐?! 젠장! 팔과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다! “으그극! 어, 어서 도망가!” “꺄악! 사람살려!” 첼시아는 비명을 지르며 스피릿은 안고 달려나갔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 들고있던 침대를 놈에게 집어던졌다. 하지만 녀석은 그 커다란 침대를 반으로 나눠버리며 나에게 덤벼들었고 우리는 서로의 칼리미티를 부딧히며 포효했다. “이야아아아아!” “캬아아아아악!” 쿠콰콰콰콰콰쾅!!! 성의 옆구리가 폭발을 일으켰다. 창문을 박살내고 파편들과 함께 정원으로 볼품없이 떨어져 내린 나는 검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부서진 건물에서 놈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리 내려와! 생사람 잡지말고 둘이서 결판을 내자! 기생충 놈아!” 칭! 콰쾅! 칼라미티의 검광에 성 꼭대기에 있는 첨탑이 잘려나가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정원에서 라이트의 빛덩어리를 쫓아다니며 창질을 해대던 경비병들이 그걸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라이트의 빛덩이는 반딧불마냥 움직이며 떨어져 내리는 첨탑을 피했다. 쿠쾅! 엄청난 진동이 땅을 울렸다. 잠시 진동을 피하고 있으려니 내 옆으로 놈이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챙~! 가까스로 그것을 막은 나는 이를 부득 갈며 땅속으로 파고드는 한쪽 다리를 들었다. 쾅! 놈은 뒤로 밀려나가버렸고 난 풀스윙으로 녀석을 향해 다시 칼라미티를 휘둘렀다. 칭~! 푸화아아악!? 엄청난 풍압과 함께 정원의 나무들이 후두둑 잘려나가쓰러졌다. 주변에 서있던 경비병들은 재빨리 바닥에 엎드려 끔찍한 재난을 피했지만 몇몇은 그대로 허리가 잘려 나가버렸다. 미안하게 됐어. 죄는 지옥에 가서 받지. 녀석도 허리가 잘려나가 컥컥거렸지만 이내 몸을 재구성해서 다시 일어났다. “쿨럭쿨럭! 너 이 새끼! 버러지 주제에 까불지 마라!” 킬은 귀신같은 목소리로 외치며 칼라미티 소드를 휘둘렀다. 콰콰콰쾅! 내가 서있는 곳으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난 엉겁결에 먼지 구름을 뚫고 그 자리에서 점프했다. 저 아래쪽에 있던 킬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칼라미티를 들어올렸다. “자세좋고, 거기 그대로 있어라.” “이런 망할!” 그때 정원 저편에서 라이트의 지원사격이 날아왔다. 수천여발의 매직 미사일과 파이어 볼에 정신이 팔린 킬은 허공에 떠오른 나에게 반격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그 기회의 앞머리 채는 내가 다시 붙잡았다. 아무래도 이번 승리의 여신은 내 편인가보다. “스피릿을 놔두고 이대로 자빠질 수는 없어! 저 놈을 죽이자! 칼라미티!” 이케리나 샤케네! 굵직한 목소리의 거친 외침! 어느 나라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날카로운 발음이 정말 듣기 좋다. 허공에서 놈의 머리를 겨냥한 나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이야아아아아!” 칭칭칭칭칭칭칭~! 쿠콰콰콰콰콰콰쾅~! 뻐어어엉! 쿠구구구구…!!! 충격파에 충격파가 더해지자 엄청난 폭발이 솟구쳐 올랐다. 덕분에 내가 있는 곳까지 그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최초 도약했던 것 보다 더 높이 날려가 버렸다. “우와아아악?!” 운동의 정점에 다다른 나는 중력의 영향으로 다시 낙하운동을 재개했다. 쏜살같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불행이 겹쳐서 저 아래에서는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킬이 칼라미티 소드를 들고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 폭발 속에서도 멀쩡하다니! 이 괴물! “캬아아아아악!!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서 석달 열흘 잘근잘근 씹어주겠다!” “시끄러워! 그렇게 자신 있으면 덤벼! 뱀파이어의 긍지와 자존심을 인간에게 팔아버린 이 더러운 기생충 같은 자식아!”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떨어지는 가속도를 이용하기로 작정한 나는 아레프제 칼라미티 소드를 뒤로 당겼다. “빌어먹을! 누가 더 오래 살 운명인지 확인해보자!” 이빨을 드러낸 나는 아래에서 칼라미티 소드를 당기고 있는 킬 녀석에게로 직격했다. 쿠콰콰쾅!! 사방으로 파편이 날리며 흙먼지가 자욱했다. 볼품 없이 바닥에 쓰러진 나는 심한 기침을 해대다가 눈을 떴다. 나, 내, 내가 살아있는 거야? 어디 부서진 데는 없고?! 그때였다. 티티틱… 티틱! 쩡~! “우왁?!” 폭발 충격으로 놓쳐버렸는지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뒹굴고 있던 칼라미티가 갑자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칼날이 깨져버렸다. 뭐, 뭐야?! 칼자루를 주워들고 자리에 앉아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땅울림에 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놀렸다. 또 뭐냐?! 쿠쿠쿠쿠…! 근처의 땅이 제단의 그것 마냥 솟아올랐다.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킬이 들고 있던 칼라미티 소드가 꽂혀있었다. 어, 뭐야? 이긴 거야? 얼떨떨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가까운 곳에 걸레조각이 된 킬이 보였다. 슬금슬금 걸어간 나는 녀석의 등을 발로 슬쩍 건드려보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발로 녀석을 힘껏 밀어보았다. “윽….” 끔찍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녀석의 가슴에서부터 시작해서 배 부분이 싹 사라져 있다. 마치 요리를 위해 내장이 깨끗하게 도려내진 생선 같다고 해야할까? 오래보고 싶은 장면은 아니군. 그러고 있으니 라이트의 빛덩이가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괜찮아? “안괜찮아. 이놈을 이제 어쩌지? 놔두면 다시 재생할텐데.” -기다려봐. 퍼피가 관을 찾아서 오고 있어. “퍼피? 살아있어? 참, 스피릿하고 첼시아는?” -다들 무사해. 네가 뱀파이어와 싸우는 걸 보고 관을 찾아오라고했지. 도와주려고 왔더니 빨리도 끝나버렸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경비병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썹을 지뿌린 나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지명수배 같은 거에 걸리면 귀찮아져. 그러고 있으니 부서진 건물에서 퍼피가 커다란 관을 짊어지고 나왔다. 킬의 것인가보다. 뚜껑을 열어 놈을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상당히 빠르게 재생이 시작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충격파의 영향으로 일시정지 했던 몸의 기능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인 것 같다. 치이이이~! “다시 움직입니다!” “일어나게 놔둘까보냐?!” 근처에 굴러다니는 큼직한 나무조각을 주워든 나는 그것으로 심장과 중요 장기를 재생중인 녀석의 가슴에 대고 주먹으로 박아 넣었다. 푸슉! 녀석의 눈이 번쩍 뜨여지더니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세웠다. “캬아아아아~!!!” 날카로운 이빨을 세운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시뻘게진 눈으로 노려보며 어떻게든 관에서 일어나려고 애쓰는 녀석을 쳐다보던 나와 퍼피는 온몸으로 소름이 돗는 것을 애써서 참으며 가슴에 박아넣은 나무 말뚝을 더세게 찔러넣었다. 하지만 그래도 녀석은 편하게 누우려고 하지 않았다. 끈질긴 몸싸움 끝에 겨우 녀석을 관속에 눕히는데 성공하자 퍼피가 너클을 낀 주먹으로 말뚝을 두들겼다. 쾅쾅쾅! 캬아아아악! 놈은 고통에찬 비명을 질러댔다. 결국 말뚝은 관을 관통하여 놈을 구속시켰다. 잽싸게 관 뚜껑을 주워 질기게 반항하는 녀석의 손가락과 발을 밀어 넣으며 뚜껑을 덮어버리자 관속에 갖힌 놈이 비명을 질러댔다. “꺄아아아아아아!!” ========================================================================== 킬 군은 트렌스젠더 였던 것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53 “무슨 짓이야! 거기서 이 자식아!” 들썩덜썩~! 쾅쾅쾅~! “닥쳐! 염병할 기생충아!” 못과 망치의 중요성을 느낀 나는 급한 대로 관 위로 올라가 녀석이 뚜껑을 밀지 못하도록하고 자동석궁을 뽑아들었다. 웬만한 문짝 정도는 간단하게 뚫을 수 있으니까. 이거라면…. 퉁퉁! 퉁! 투투투투투투투투퉁! 파파파파파파팍?! 내심 괜찮을까 걱정하며 슬그머니 관에서 내려와봤지만 안쪽에서 관을 두들겨대도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튼튼하게 고정 된 것 같다. 한숨을 폭 내쉰 나는 주변을 좀 두리번거려보았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성은 한쪽이 거의 무너져 내리다시피 했고 정원에는 대략 직경 20미터 깊이 8미터 정도의 거대한 폭심지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던 관목들과 화단은 여기저기 잘려나가고 대파되어 볼썽사납게 되어버렸다. 뭐, 어차피 내 것도 아니고 귀찮은 뱀파이어 놈 하나 붙잡았으니 됐지. “캬아아아아~!!!” 고개를 돌린 나는 들썩이는 관을 잠시 바라보다가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대로 나갔다가는 백방 붙잡힌다. 그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경비병들이 잔뜩 독이 올라서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마을에서 지원병력이 도착했는지 성문으로 수십개의 횃불을 들어오고 있다. 난 고개를 꺽어올리며 외쳤다. “목표 탈취 성공. 이제 도망가자. 도주계획 C!" 머리 위에 떠있던 거대한 빛덩이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내 앞에는 복면을 한 라이트와 첼시아 그리고 담요 싸인 스피릿이 나타났다. 스피릿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걱정스러운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첼시아가 핀잔을 줬다. “지금 그런 표정하고 있을 때가 아냐. 이제 어쩔거냐구! 경비병들이 떼거지로 몰려왔는데!” 시간이 없어서 침투계획만 들려주고 도주계획을 미리 설명해주지 않았더니 첼시아가 연신 불안해하며 정신을 잃은 스피릿을 안아 올렸다. 라이트가 걱정말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걱정말아요. 바람과 함께 사라질테니까. 콜트. 내가 신호하면 이걸로 우리 주변에 원을 그려. 퍼피에게 부탁하려 했지만 지금은 네가 제일 몸이 빠르니까.” “알았어.” 라이트가 내미는 가죽 주머니를 받았다. 안에는 비취가루가 들어있었다. 라이트가 외쳤다. “거스트 오브 윈드!” 푸화아아아아아악! 엄청난 바람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덕분에 사방으로 거대한 먼지 구름이 만들어졌다. 안그래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데 먼지로 연막까지 쳐버리자 당장 경비병들의 고함소리만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바람을 멈추게 한 라이트가 외쳤다. “모두 한곳으로 모여! 콜트! 움직여!” “간다!” 가죽자루의 목을 붙잡은 나는 반짝이는 비취가루를 바닥에 뿌리며 재빠르게 원을 그렸다. 원이 완성되자마자 라이트가 날 불렀다. 자루를 던져버리고 후다닥 원안으로 달려들어가니 라이트가 손가락을 튕기며 웃음지었다. “좋았어. 새끈하게 한탕했군. 텔레포트 워프.” 츠팟! 갑자기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텔레포트는 몇 번 해봤지만 매번 할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훈훈한 온기가 가득한 방안에는 드워프 영감이 테이블에 앉아 담배와 맥주를 즐기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와라. 무사히 돌아왔군.” “어, 어머. 여긴 어디레?” 첼시아가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스피릿을 안아올려 침대에 눕히고 있으니 네모아저씨가 말했다. “어디긴 어디야? 자네들이 묶고 있는 여관이지.” 천장의 벽지와 가구의 배치를 살펴보던 첼시아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아… 먹고 살기 정말 힘들구나. 오늘은 특히 더 힘들었어. 아이고 어깨야.” “수고하셨어요.” 라이트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다 방안에 그려져있는 비취가루 마법진을 지우며 말했다. 네모는 코로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도와주지 못하니 망이라도 봐줘야지. 그건 그렇고 어디 한번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침대로 다가오더니 스피릿을 지긋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코를 조금 벌렁이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런 도둑놈!” “…왜 그렇게 되는 건데요?” “시끄럽다. 이렇게 좋은 처녀가 어디 눈이 삐어서 너 같은 놈을 좋아한단 말이냐?! 필시 무슨 꽁수를 쓴게 틀림없어!” 꽁수라니?! 비록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계기가 되긴했지만 그녀는 분명히 날 좋아해주고 있단 말야! 이마를 찌뿌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으니 첼시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퍼피! 왜 그래 많이 다쳤어?” “아, 아니 괜찮습니다… 으읍! 콜록콜록!” 퍼피는 기침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라이트가 그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런, 아까 폭발에 말린 것 때문에 내상을 입은 것 같아요. 힐링을 걸테니 침대로 옮깁시다.” 나와 네모가 그를 들어 침대에 올렸다. 첼시아는 걱정을 하며 따라 붙었다. 덕분에 라이트가 바빠졌다. 퍼피에게 힐링을 끝낸 그는 내 성황에 스피릿도 살폈다. 옆에서 파이프를 입에 물고 구경하던 네모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영양실조에 탈진이 겹쳐있구만. 울면서 단식투쟁이라도 벌였나보지?” “햐아. 정확하시네요. 어떻게 아세요?” “갱이 무너져서 깔린 드워프들을 구해내면 자주 저런 모습을 보이곤 했지. 마실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니까.” 라이트가 힐링을 걸며 네모와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된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 그럼 뭐요?! 괜찮은거죠? 예? 괜찮은거죠!” “이놈아! 매달리지마! 마법사가 치료하고 있잖아. 치료가 끝나면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먹여라. 그러다 체력이 회복되면 깨어날게다. 그럼 많이 먹이고 푹 재워. 이런 건 치료법이 따로 없다. 알아듣겠냐?” 난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첼시아는 퍼피의 치료법도 물어보았고 졸지에 의사가 되어버린 네모아저씨는 이마를 지뿌리며 말했다. “폭발에 휘말렸다고 그래지? 그럼 충격파에 내장과 중요 장기들이 놀라서 그런게야. 외상은 없으니 십중팔구는 그거지. 푹재워둬. 그럼 나을거다.” “저, 정말 그거면 되는 거예요? 약 같은 거 않먹여도 돼요?” “괜찮아. 안죽는다. 내일이면 펄펄 뛰어다닐게야. 그냥 둬.” 첼시아는 내심 불안한 얼굴로 스피릿의 치료를 끝내고 땀을 닦는 라이트의 팔을 끌어다 한번 더 퍼피를 봐달라고 그랬다. 라이트는 힘든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그를 치료해주었다. 그때 맥주를 홀짝이던 네모 아저씨가 뭔가를 가르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건 뭐냐? 무슨 놈의 관짝이 저렇게 살벌해?” “예?” 고개를 돌리니 들썩거리는 킬의 관이 보였다. 으악! 저게 왜 여기 있어!? 라이트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내가 가져왔어. 그냥두면 다시 풀려나와서 우릴 찾으러 다닐 것 같아서 말야.” “그, 그래도 뱀파이어의 관이라니, 풀려나면 어쩌려고요?” “괜찮아요. 그럼 우리 콜트 시켜서 다시 붙잡게 하면 되니까.” “칵! 누굴 뱀파이어 사냥꾼으로 보는 거야?! 저런 괴물과는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트는 나에게 관을 옮기도록 부탁했다. “사람 눈에 뛰면 안돼. 구석에 숨겨.” “어쩔건데?” “그건 내일 생각해 보자. 오늘은 너무 피곤해.” 난 그의 의견에 적극적인 찬성을 보냈다. 관을 방구석에 옮겨놓고 라이트가 몇가지 안전장치를 만든 다음 침대로 몸을 날렸다. 그때 쯤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골든피크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질거린다. “어… 왜, 왜 이러지?” “왜 이러긴? 각성제에 골든피크까지 덮어쓰고 그 짓을 벌였는데 당연하지. 푹자. 당신이 깨어 났을 때쯤이면 아가씨도 일어나 있을거야.”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비틀거리며 스피릿의 침대로 걸어가 쓰러졌다. 느릿하게 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이 코앞에 보인다. 손을 든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조금 쓰다듬었다가 히죽 웃어버렸다. “…헤, 헤헤 겨우 되찾았어. 스피릿, 넌 내 거야.” “하하하하! 피! 피를 내놔라! 순수한 처녀의 피를!” “보세요. 전 처녀가 아닌데요. 나쁜 주인님이 절 겁탈했어요.” 이빨을 드러낸 킬에게 붙잡힌 스피릿은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중얼댔다. 난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스피릿은 날 힐끔 쳐다볼 뿐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어째서?! 그때 킬이 외쳤다. “와하하하하! 상관없어! 너 정도의 미인이라면 내 마누라겸 노예로 삼겠다!” “뭐! 안돼! 스피릿은 내거야!” “아무나 이기세요. 전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칼라미티를 들어 돼지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놈을 격추시키려 하니 트레즈가 자기 머리를 들고 나와 나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 올려진 트레즈가 중얼거렸다. “저 여자는 너무 독해. 그냥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게 어떤가?” “그래요. 안젤라 있잖아요? 내심 절 대신할 사람으로 준비해둔거 아닌가요? 고향에 있는 요리사도 있고요. 어마, 콜트씨 그러보니 여자 관계 복잡하시네?” 스피릿이 고개를 내밀어 날 쳐다보며 말했다. 난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아냐아냐! 난 정말 너만 있으면 돼!” “고마워라. 하지만 각오하는게 좋을거예요. 우리의 첫 부부싸움 주제는 결혼전의 여자관계에 대한거니까. 전 날마다 당신 바가지 복복 긁을테예요.” “이익! 노예가 주인님을 괴롭히는게 어디있어! 넌 내 노예야! 널 괴롭힐수 있는 건 나뿐이라구! 어딜 도망가?!” 울컥한 내가 욕설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날아간 검광은 킬이 타고가는 돼지를 격추시켜 커다란 로스구이를 만들었다. 땅에 떨어진 로스구이에는 속옷만 입은 스피릿이 애교스러운 몸짓으로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주인님. 어서오세요. 스피릿은 주인님을 갖고 싶어요.” “으하하하! 잘먹겠습니다!” “넌 뭐야 이 자식! 저리 꺼지지 못해?!” 킬의 머리를 걷어차버린 나는 머리가 없는 트레즈 놈이 스피릿을 업고 냅다 뛰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괴성을 질렀다. “무슨 짓이야! 거기서 이 자식아!” ========================================================================== 꿈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54 “재미있었어. 대마법사가 된 기분이야.” “으악!” 뻑! “꺄악! …아으윽!” 악몽을 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날 내려다보던 누군가의 이마를 들이받아버리고 다시 침대로 쓰러졌다. 크으… 머리가 쾅쾅 울린다. 누구야? 이렇게 단단한 머리를 가진 사람은?! 두손으로 이마를 붙잡고 끙끙 거리다가 고개를드니 웬 아가씨가 한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날 쳐다보고 있다. 눈가의 그렁거리는 눈물 방울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스피릿!” “주인님 깨셨어요? 아으으, 머리야… 어, 어마? 으응! 주인니임~! 숨막혀요.” 그녀를 덮썩 껴안아버린 나는 그녀는 작은 등을 쓸어대며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가슴에서 떼어낸 나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장난삼아 치마속을 들췄다가 스피릿에게 호되게 가슴을 얹어맞은 나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부벼댔다. “으아! 틀림없는 스피릿이구나! 하느님 감사합니다! 스피릿! 돌아와줘서 고마워!” “아으으~! 주, 주인니임~!” 스피릿은 연신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래도 날 밀어내거 하진 않았다. 잠시 후 내가 어느정도 진정하자 스피릿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이 미천한 노예를 구하러 와주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주인님. 스피릿은 감동했어요.” “그런 말은 하는게 아냐. 난 네 주인님이잖아? 주인은 자기 노예를 지켜줘야 하는 거라구. 아이구, 다친데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몸은 괜찮은 거지?” 스피릿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그녀를 껴안고 오랜만에 키스를 하려고 하니 스피릿이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눈으로 어딘가를 가르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첼시아와 라이트가 바로 옆 침대에서 머리만 내밀고 신난다는 얼굴로 우리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야~! 두근두근한데요?” “쉿~! 이제부터 클라이막스에요. 조용히해요. 자! 콜트씨 우리들에게 식지 않은 주인님의 사랑을 보여줘.” “칵! 무슨 짓이야! 이것들아!” 라이트는 낄낄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첼시아는 침대에 앉으며 볼을 부풀렸다. “아까운데. 모처럼 좋은 구경하나 했더니. 스피릿, 보기보다 내숭이야. 그때는 주인님 사랑해요~! 하면서 꽉 끌어안고 쓰러져야지.” “…조언 감사합니다. 첼시아 씨.” 스피릿은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를 까딱였다. 라이트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고개를 절절 저은 나는 침대에서 내려갔다가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하고는 스피릿의 걱정을 샀다. 첼시아가 내 팔을 붙잡아 일으켜주었다. 침대에 앉으니 스피릿이 침대를 기어와서 내 등에 달라붙었다. “괜찮으세요?” “어, 응. 다, 다리가 이상하네?” “무리하지마. 방근 전에 깨어났으면서 무슨 짓이니? 그리고 스피릿 너도야. 바보 주인님 간호한다고 그 몸을 돌아다니지 말고 좀더 쉬어둬. 그래야 나중에 주인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내지. 안그래?” “어, 예에….” 라이트가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뻘게진 고개를 숙였다. 첼시아에게 악을 써대니 그녀는 호호 웃으며 몸조리 잘하란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버렸다. 하지만 라이트는 나가지 않고 의자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난 방안을 두리번 거리다가 물었다. “여긴 어디야? 전에 있던 여관은 아닌 것 같은데?” “아, 내가 자주오는 단골집. 여기라면 누구도 찾지 못해.” 그의 설명에 따르면 내가 정신을 잃고 다음날 아침 영주의 성에서 급파된 사람들이 경비병을 이끌고 수상한 자들을 찾아 여관을 들쑤시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래도 들킬 것을 염려한 라이트는 모두를 데리고 곧바로 여관을 나와 한적한 골목길에서 게이트를 열어 이곳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난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우리 현상수배야?” “응. 이거.”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단지를 내밀었다. 난 쓴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크으윽~! 조심한다고 했는데.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평생 도망자 신세잖아. 난 그렇다 쳐도 첼시아나 라이트는… 엥? “이게… 뭐야?” 라이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깔깔 웃어버렸다. 스피릿이 내 어깨 넘어로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전단지를 살펴보았다. 수배전단지에는 다름아닌 킬의 얼굴과 복면을 쓴 사람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웃음을 그친 라이트 녀석이 이내 정색을하고 헛기침을 좀 하더니 품속에서 몇장의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전략, 그랜퍼스의 하레이에서 있었던 영주저택 습격사건과 트레즈 엑서 유니코트. 캐슬린 황실 근위대장의 실족에 대해서 캐슬린 국정 대변인은 본국의 고위인사가 타국에서 원인모를 사건으로 사망한데 대해 그랜퍼스에 심심한 유감을 표명하며 정확하고 냉철한 수사를 위해 그랜퍼스에 캐슬린 왕실수사단을 파견을 하였으며 이에 그랜퍼스는 사건의 조속한 사실확인과 원인규명을 위해 본국 정보국과 지방 경비대에 대한 무제한 사용권한을 캐슬린 왕실 수사단에 지원하기로 했다. …중략, 그랜퍼스의 전폭적인 협력을 받아 수사에 착수한 캐슬린 왕실 수사단은 칩입자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칼라미티 소드의 일부와 몇점의 증거품을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와 함께 본국으로 전달했지만 그에 대해 자세한 사항은 발표하지 않고있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의 성명에 따르면, 발견된 칼라미티 소드의 파편과 무기들은 대부분 베레타제로 보이며 이번 사건이 캐슬린과 베레타 두나라 사이를 악화시키려는 무장집단의 고의적인 요인암살 기도인지, 혹은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시대의 비극은 아닌지에 대하여 현재 수사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에 대해 베레타에서는 왕실 대변인 성명을 통해 사실무근이라고 공작원 파견이라는 세간의 어불성설을 전면부인하고 나섰으며 주변 국가들과 공국들은 과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두 강대국 사이에 어떠한 파장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세심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편 캐슬린 왕실 수사단에서는 증인들의 증언을 토태로 작성된 습격자들의 몽타주를 작성해 각도시에 배포하고 실종된 캐슬린 정보국 킬 요원이 이번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증인으로 보고 그를 찾기위해 현재 그랜퍼스 관계당국의 협조를 얹어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다.”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본 나는 머리를 좀 벅벅 긁은 다음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에게 내밀었다. “응? 뭐라고?” “다시 읽어줄까?” 스피릿이 말했다. “괜찮아요. 주인님. 우리 이야기는 없어요.” “어, 그럼 다행인가?” “우리들 개인으로 보자면 다행이지. 하지만 국가적 이야기로 따지면 글쎄… 잘 모르겠는걸? 스피릿양. 당신이 사건 당사자이고, 또 전 공주님이시니까. 이 어이없는 여론 발표에 대해서 한번 정리 해보시겠어요? 요 방정맞은 주둥이가 함부로 떠들기엔 너무 엄청난 내막이 있는 것 같아요.” 라이트의 말에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이트 씨가 들려주신 여론 발표는 제가 봤을 때 조작 된거예요. 절 납치한 트레즈 근위대장은 자신의 입으로 나라를 바꾸겠으니 제게 힘을 빌려달라고 그랬어요. 에, 뭐,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그가 원한 것은 전 왕조에게서 빼앗지 못한 피의 인장과 함께 제 배에서 태어난 자식이지만요. 아시다시피 무력으로 왕권을 바꾸는 건 쉽지만 다른나라의 압력도 있고, 일단 시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거든요? 그래서 대의명분이란 건 상당히 중요해요. 어쨌든, 제 경험을 돌이켜봐도 혼자서는 절대로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킬 수 없어요. 누군가가 도와줘야해요. 사랑하는 나의 주인님. 전에 제가 뱀파이어에게 잡혀가던 날 기억하세요? 그날 그 사람이 했던 말, 들으셨죠?”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어, 현 캐슬린 왕권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이야기?” “예. 맞아요. 불만이 있지만 앞으로 나설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트레즈라는 저돌적이고 음험한 행동파는 도화선이 되는 거예요.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에게 힘을 빌려주고 암암리에 자신들의 일을 추진해 나갔겠죠.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트레즈 근위대장이 죽어버렸으니 깜짝 놀란거예요. 당연하잖아요? 잘못해서 사건의 전말이 밖으로 새어 나갔다간 자기들의 목이 달아나니까요. 반란죄는 어디서나 극형으로 다스린 답니다.” 입을 헤 벌린 나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피릿은 계속 말했다. “에, 그래서 트레즈 근위대장을 밀어주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숨기기 위해 국가 정보국을 움직여 정보조작을 시도한거예요. 모든 죄와 잘못은 불특정 단체에 뒤집어 쒸우고요. 물론, 그들이 비공식 채널로 흘린 정보 때문에 그 불특정 다수는 결국 베레타를 암시하는 결과는 낳게 되죠.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 사람들의 계획은 더 완성하기 쉽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 난 잘 모르겠는데.” 천천히 손을 들며 말하자 라이트는 한숨을 내쉬었고 스피릿은 이런 거 몰라도 사는데는 지장 없다고 날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날 버리지 않았다. 라이트는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며 외쳤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가르쳐주지! 여길봐! 칼라미티 소드의 파편이라고 씌여있지?! 이 칼이 누구거라고 생각해? 바로 우리가 흘리고 간거야! 정확히는 네놈이! 어이구! 멍청아! 하필이면 이런 걸 거기 두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깨졌으면 주워왔어야지! 안그래도 국가간의 분쟁으로 번질지 모르는 사건 현장에서 칼라미티 소드 같은게 나왔으니 얼씨구나 했을거 아냐! 완전히 남 좋을 일 해버렸잖아!” 녀석의 외침에 나는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난 멱살을 붙잡힌 채 불안한 눈으로 되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되는거야? 정보국 요원들이 쳐들어와서 우리 다 잡아가는 거야?” “뭐, 그런 건 아냐. 사이코 메트리를 사용하면 사물의 잔존사념을 불러낼 수도 있지만, 피를 잔뜩 먹은 칼에다가 그런 걸 걸어봤자 나오는 건 네가 죽인 몬스터들이나 사람들의 원념뿐이야. 죽음 직전에 걸린 사념은 아주 강력해서 정신이 예민한 마법사는 도저히 그걸 하나하나 버텨낼수 없어. 그래서 아주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살인도구에 그런 거 잘쓰지 않지.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하면, 네놈이 버려두고 온 칼 때문에 한동안 좀 시끄럽겠지만 그 덕분에 우리들은 완전히 잊혀졌어.” “그거 좋은 거지?” 내 물음에 라이트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눈앞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좋은 거야. 신분증도 무사하고 통장도 그대로고 친구들고 그대로야. 현상금 사냥꾼이 따라붙을 일도 없지. 경비대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도 욕만하지 않으면 잡아가지 않는다구.”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피릿과 라이트가 웃어버렸다. “젠장. 사람 가지고 놀지 말란 말야. 난 상관 없지만 나 때문에 여러사람 고생할 걸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하더라고.” “호오~ 다른 사람 생각도 할 줄 알고 기특하구나. 너 이제 사람된 거 같다?” “염병, 다른 사람 걱정은 무슨 얼어죽을. 나 때문에 잡혀가면 욕하고 저주하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건 뿐이야.” 라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네놈이 그럼 그렇지라는 소리를 중얼댔다. 그래, 난 이거 밖에 안된는 놈이다. 어쩔테냐? 녀석은 문을 나서며 입을 열었다. “잠시동안 여기서 묶을 거니까. 몸조리 잘해. 참, 콜트. 이거 고마워. 덕분에 이번 일도 아주 재미있었어. 대마법사가 된 기분이야.” 그는 자신의 드래곤 하트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난 손을 흔들어주었다. “됐어. 오히려 내가 고맙다. 그 힘으로 날 도와줘서.” “우린 친구잖아?” ========================================================================== 푹푹푹푹~! 고, 고마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 (그만해라. 많이 먹었잖아.) 경상도인이지만 가끔은 저도 못 알아듣는 사투리가 있습니다. 공부를 더 해야 할듯. 퍼퍼퍼퍼퍽~!!! 컥~! Reload Running Fire: 55 “어, 그래. 미안하다. 아저씨가 잘못했어. 그런데. 넌 누구냐?” 난 킥킥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트도 씩 웃으며 쉬라고 말해주고 문을 닫았다. 잠시 그가 나간 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 “아앙~! 주인니임~!” 라이트가 닫고나간 방문을 쳐다보던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씩 웃어준 나는 스피릿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럼 그냥 스피릿이라고 부를까?” 볼을 잔뜩 부풀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토라진 그녀를 쳐다보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은근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은근한 동작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스피릿을 침대위에 넘어뜨려 그녀의 위에 몸을 올렸다. 스피릿은 내가 하는데로 가만히 따라주었다. 결국 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공주님. 뽀뽀 한번 해도 돼?” “예.” 난 기다렸다는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스피릿은 내 등을 꽉 끌어당겼고, 나도 그녀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키스를 마치고 스피릿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스피릿. 나 너무 밝히는 거 같지? 아무래도 난 변태인가봐. 우리 스피릿만 보면 참을 수가 없어.” “괜찮아요. 주인님은 저만 밝히시면 돼요. 전 주인님이라면 변태든 뭐든 상관없어요.” “그, 그럴까?” “그럼요.” 스피릿이 은근한 눈으로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이런 눈빛은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금욕적으로 생긴 아가씨가 뜨거운 눈으로 ‘당신이라면 뭐든 상관없어요~!’ 라니. 아, 가슴 두근거려. 하지만 난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안젤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 스피릿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주인님.” “응?” 한참 머뭇대던 그녀는 갑자기 날 자기 가슴에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떨어져서 침대에 주저 앉더니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저, 저어. 거, 거기서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나는 좀 힘겹지만 무릎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아 밀어서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곤 한 팔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다리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스피릿이 깜짝 놀라서 다리를 오무렸지만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불러주자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다리에서 힘을 뺐다. 천천히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한쪽 무릎을 놓은 나는 이제 스피릿의 위로 몸을 올리고 업드린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스피릿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스피릿 살이 좀 빠진 것 같아. 고생이 심했구나. 미안해, 빨리 구하러가지 못해서.” “주, 주인니이임….” “아무일도 없었지?” 내 물음에 스피릿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주, 주인님께 부끄러운 일은 절대로 없었어요! 미, 믿어주세요.” “믿어. 내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내 노예를 누가 믿어줘? 어이구, 울지마. 괜찮으니까.”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스피릿은 아랫입술을 떨며 날 올려다보았다. “저, 정말 믿어주시는 거예요? 정말요? 이, 이거 거, 거짓말일지도 몰라요?” “난 믿어. 우리 스피릿이 나만 좋아한다는 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춰준 나는 이제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오늘 주인님이 스피릿 한번 안아봐도 될까?” “흐으으응… 예, 예에. 저, 전 당신만의 노예이니까….” 그녀는 연신 훌쩍이며 내 등을 꽉 끌어당겼다. 어이구, 설마 내가 의심할까봐 무서웠던 거야?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그녀의 회색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겨준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일단 이번 사건은 요걸로 일단락 됐군. 스피릿도 다시 찾았고 귀찮은 것들도 사라졌으니 일단 안심. 간단하게 그 간의 고생을 정의내린 나는 이제 그 달콤한 대가로서 내 귀여운 노예의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난 나는 식사를 들고 들어온 퍼피와 첼시아에게 네모 아저씨의 소재를 물었다가 편지 한 장을 받게되었다. “그 드워프 아저씨의 그곳에 남았어. 일단 우리와는 여행목적부터 틀린 사람이니까. 아, 이거 전해주라더라.” 편지를 펼쳐보니 멋들어진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져 있었다. 친애하는 염병할 바보 인간 놈에게. 네놈과 함께 한 여행은 정말 악몽이었으며 나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시련이었다만은, 그래도 이미 멸종한 줄 알았던 진짜 인간 같은 놈을 만나서 꽤 즐거웠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건강하거라. 추신. 안젤라를 잘 부탁한다. 편지를 다 읽은 나는 어깨 넘어로 스피릿이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편지를 후다닥 접어 봉투에 넣었다. 스피릿이 눈꼬리를 내리고 날 쳐다본다. 자긴 다 못봤다는 얼굴이다. “어, 어허! 뭘보는 거야? 이 편지에는 사나이들 간의 로망이 담겨져 있어. 여자들은 봐도 이해 못한다구.” “어머, 그러니? 별다른 내용도 없던데?” “칵~! 먼저 읽어보는게 어디있어!?” 스피릿이 의문을 표시하기 전에 첼시아에게 화살을 돌렸다. 젠장, 이놈의 영감탱이 안젤라 이야기는 외 써놔가지구서! 안까먹으니까 걱정하지 말란말야! 아침을 얻어먹은 나는 스피릿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내려가 조금씩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왜요? 저랑 침대에 있는게 싫으세요?” “이 녀석 말하는 것 좀보게? 다른 사람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거야?” 스피릿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중얼거렸다. “…같이 있고 싶어요. 한동안 주인님하고 떨어져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주변에는 딱딱한 얼굴의 사람들만 가득했다구요.” “오오, 그래서 밥도 안먹고 잉잉거리다가 영양실조에 탈진까지 해버린거야? 바보같아. 적당히 상황을 봐가며 잉잉거렸어야지. 먹을 건 먹고 말야.” “주인님도 참…. 그런 건 바보가 아니라 지조를 지키려는 노예의 참되고 바른자세로 봐주시는 거예요.” 뭐? 지조 있는 노예의 바른 자세? 배를 붙잡고 좀 웃어버린 나는 절뚝이며 걸어가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잔뜩 부풀어오른 그녀의 볼을 눌러대다가 그녀의 입에 까득 깨물리고 비명을 좀 지른 다음 말했다. “쓰으읍… 아야야. 뭐, 어쨌든 고마워. 나만 생각해줘서.” “…억지성이 좀 있긴했지만 그래도 주인님은 제 첫남자예요. 저로서는 정절을 지키고 싶었단 말이예요.” 입을 살짝 벌리고 그녀를 바라봐준 나는 침대로 픽 쓰러져 고개를 돌리고 앉아있는 스피릿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종아리에 볼을 부비며 말했다. “으윽… 그렇게까지 말해주다니. 스피릿. 나 감동했어.” “꺄악~! 뭐, 뭐하세요오~! 아앙~ 따가워요!”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며 장난을 쳐대던 나는 마침 생각난 것이 있어 몸을 일으켰다. “참, 그런데 스피릿은 공주님이잖아. 이거, 말을 올려야하는 거야?” “아뇨. 공주라곤 해도 10살 정도까지 였어요. 부담갖지 말시고 보통처럼 대하시면 되요.” “그래? 그럼 부담없이 엉덩이나 가슴 만지고 아무 때나 껴안아도 돼?” “…그런 건 좀 부담을 가져주세요.” 그녀의 엄숙한 말에 난 하하 웃어버렸다. 작은 한숨을 내쉰 스피릿은 이마를 만져보다가 이내 자리에 누웠다. 그녀는 내 무릎을 베며 말했다. “조, 좀 누울게요. 머리가 어지러워요.” 탈진은 그럭저럭 나아졌지만 영양실조는 꽤 오래 가고있다. 잘 먹인다고는 해도, 스피릿은 원래부터 몸이 좀 약하고 워낙 적게 먹다보니 다 나아지려면 요양을 꽤 해야 할 것 같다. “스피릿.” “예?” “너 말야. 아이만 낳고 그냥 죽어버리면 저주할거야.” 내 엉뚱한 말에 스피릿은 푸근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손자는 보고 죽을 거예요.” 싱긋 미소지은 나는 그녀가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봐 담요를 끌어다 덮어주었다. 오늘 운동은 이걸로 끝낼까? 잠시 그녀가 잠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이 스르륵 열리며 뭔가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난 첼시아나 퍼피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응? 꼬마잖아?” 그러자 깜짝 놀란 아이가 얼른 고개를 숨겨버렸다. 열고 나가버린 문으로 탁탁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를 들어봐서는 10살 전후의 꼬마다. 집주인의 아이인가? 그러고 있으니 또 이 녀석이 우리방으로 찾아와 문틈새로 고개를 내밀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심심한데 운동도 할겸 저 녀석이나 데리고 놀까? 히죽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녀석을 못본채 하며 벽난로로 걸어가 장작을 넣는 척했다. 그리고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허리를 비틀며 외쳤다. “우왁!” 꾸당! “아아아앙!” 깜짝 놀란 꼬마는 엉덩방아를 찍고는 복도를 달려가버렸다. 낄낄 웃고 있으니 얼마지나지 않아 이 녀석이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내 눈이 잘못됐나? 왜 같은 녀석이 둘로 보이지? “당신이야?! 우리 오빠 울린게!” “엥? 오빠아?” “그래! 당신이 우리 오빠 울렸지? 왜 울렸어! 나쁜사람!” 허리에도 미치지 않을 것 같은 조그만 꼬마에게 한소리 들은 나는 잠깐 어이없는 기분에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 틈새에서 쫑알거리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나이는 대력 10~11세. 조그만 꼬마인데도 불구하고 말을 참 잘한다. “사과해!” “어, 그래. 미안하다. 아저씨가 잘못했어. 그런데. 넌 누구냐?” “나? 난 마야. 이 집 귀한 딸래미야. 그리고… 아이 참! 오빠 어디가! 이리와 봐!” “아, 아으. 나, 난 됐어어.” 긴 금발을 산발해 늘어뜨린 꼬마아가씨는 옆에서 머뭇거리는 아이의 팔을 끌어서는 문 틈새로 들이밀었다. “우리 오빠야. 이름은 마유. 나랑 똑같지? 쌍둥이다?” …무서우리만치 똑같다. 마유가 머리를 뒤로 돌려묶지 않았으면 못알아보겠어.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괜찮으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돼. 엑셀 아저씨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는거 아니레. 그리고 엄마하고 아빠도 손님 귀찮게 하면 안된다고 그랬어.” ========================================================================== 마유&마야. 누구의 자식들일까요? 세계관을 떠나 그냥 재미로 즐겨 주십시오. 일종의 특전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56 “그런데 다들 몸은 좀 어떠세요?” 이미 귀찮게 하고 있어 이 녀석들아.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호, 그래서 문 틈새로 이야기하는 거야?” “아니, 난 지금 우연하게 반쯤 열린 문 앞에서 혼잣말 하는거야. 아저씨에게 말하는거 아니니까 손님 귀찮게 하는거 아니지? 그리고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사람 따라가는 것도 아냐. 마야는 아빠랑 엄마랑 엑셀 아저씨랑 한 약속 어기지 않았다?” 우와~! 쪼그만게 머리 정말 좋다! 난 파하하 웃으며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그런데, 마야. 친구 없어? 밖에 나가서 놀지 않고 이런데서 처음보는 아저씨랑 농담따먹기 해도 돼?” “밖에 나가도 친구없어. 숲에 들어가면 엄마하고 아빠 화내. 아빠는 괜찮은데 엄마는 화나면 무서워. 그래서 마야는 오빠하고만 놀아. 하지만 오빠는 부끄럼이 너무 심하고 잘 울어. 엑셀 아저씨랑 놀면 재미있지만 아저씨는 자주 오지 않아. 루나 언니는 서재에서 공부중이야. 엄마는 언니 공부 가르쳐주고 있어. 들어가면 혼나. 아빠는 일하러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그리고 라이트 오빠랑 처음보는 빨간머리 누나랑 딱딱한 오빠가 있는데. 라이트 오빠는 우리랑 놀아주기 싫어서 날아서 도망갔어. 빨간머리 누나랑 딱딱한 오빠는 아침 먹고 방안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아. 딱딱한 오빠 아프다고 쉬는가봐.” 오호~ 이거 상당히 아스트랄한 언어인데. 그래도 그럭저럭 정보수집은 끝났다. 마유의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 오빠 누나를 합해 다섯명이고 그 외에 엑셀이라는 이웃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엑셀이라니, 아레프의 탑을 지키는 그 훈트인가? 아니면 동명이인? 라이트는 귀찮아서 도망갔고, 첼시아와 퍼피는 방안에 들어가서는 나오지 않고 있단 말이군. “그래서, 문틈새로 발견한 아저씨에게 관심이 동했다는 거야?” “아냐. 아저씨가 우리 오빠 놀래켰잖아. 그래서 따지러 온 것 뿐이야. 그래! 우리랑 놀아주지 않을테야? 그럼 오빠 놀래킨거 용서해줄게.” 상당히 앙큼한 제안이다. 쪼그만 녀석이 말빨이 굉장한데? 어린애라고 우습게 봤다간 큰코 다치겠어. 다리가 아파서 놀아주지 못한다고 말해주자 녀석은 혀를 내밀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댔다. 이거 난감하네. 어색하게 웃고 있는데 스피릿이 깨어나 눈을 비벼댔다. “으응… 왜 그러세요?” “어, 미안 나 때문에 깼구나? 일어나지 말고 쉬어.” 마유와 이야기하기위해 의자를 끌어다 앉아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피릿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있으니 문이 조금 크게 열리며 마야와 마유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녀석들은 입을 딱벌리며 말했다. “예쁘다아….” 녀석들, 보는 눈은 있어 기쁘군. 스피릿이 아이들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예요?” “집 주인 아이들인가봐. 조심해. 말빨이 작살이야.” “으응. 주인님도, 아이들 있는데서 그런 말은 함부러 쓰지 마세요.” 난 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스피릿이 침대에서 내려가려 했지만 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아이들을 불렀고 녀석들은 문을 열고 쪼르르 달려왔다. 갑자기 배신감 느껴지는데. “…내가 오라고 했을 때는 안된다고 그랬잖아?” “예쁜언니는 괜찮아. 왜냐면 우리 엄마도 언니만큼 예쁘거든?” “멋진 이단 논법이구나 네 어머니가 그렇게 예뻐?” 마야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피릿은 머뭇거리는 마유의 손을 끌어다 얼굴을 만져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와아~ 너무 귀여워라. 이름이 뭐니? 언니는 스피릿이야.” “마, 마유예요.” “마유? 언니가 한번 안아보면 안될까?” 녀석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피릿은 꺅꺅거리며 마유를 안아올리고는 귀엽다는 듯이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녀석은 부끄러운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모습으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어이구, 부끄러워하는 거야? 귀엽네. 킥킥 웃어주던 나는 환하게 웃고있는 마야를 보고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고통을 삭히며 무릎을 꿇은 나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버렸다. “마야. 너 눈이…?” “어, 이거? 오드아이야. 신기하지? 페이샤 아줌마가 그러는데 하프엘프라서 그런거래.” 하프엘프? 말도안돼! 그게 가능하단 말야?! 입을 딱벌리고 있으니 똑똑하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들! 손님 방에는 들어가지 말랬잖아!” 고개를 돌린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허리과 다리의 통증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다, 다크엘프으?!” “왜요? 다크엘프 처음봐요?” 첼시아 정도의 키에 다갈색의 피부와 칠흑의 머리카락, 기다란 귀를 가진 그녀는 톡쏘는 듯이 말하고는 후다닥 달려와 다리에 매달리는 마유와 마야를 쓰다듬었다. 소문대로 엄청 예쁘다. 으윽! 스피릿에겐 미안하지만 정말 그녀보다 쪼금 더 예뻐! 아니, 이건 예쁘다. 아름답다의 수준을 넘어서 거의 여신을 보는 수준인데. 입을 딱벌리고 말을 못하고 있으니 스피릿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아니, 사과는 이쪽에서 해야해요. 라이트가 푹쉬도록 해달라고 그랬는데 욘석들이 방해를 했거든요.” 따닥! 마야와 마유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는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루나 로즈마리라고 소개했다. “콜트입니다. 모험가구요. 이쪽은 제 노예인 스피릿.” “안녕하세요.” 루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스피릿을 턱으로 가르켰다. “노예?” 스피릿은 방글방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이제 나에게 그 날카로운 눈을 돌렸다. 확실히 예쁘긴한데. 저렇게 드세보이는 아가씨는 좀 싫다. 잡혀살 것 같아. 뭐, 지금도 충분히 그렇지만. 그때 밖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다. 아이들은 아빠가 왔다고 꺅꺅거리며 달려가버렸고 뭔가 말을 하려던 루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녀석들의 뒤를 따랐다. “뭐, 나중에 이야기 하지. 푹 쉬세요. 손님들.” 탕! 루나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사라락 거리는 그녀의 머릿결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으으악! 안돼! 머리를 좌우로 흔든 나는 옆에 주저앉아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다가 날 쳐다보며 말했다. “후와~ 정말 예쁜사람이었어요. 그렇죠?” “아냐아냐. 우리 스피릿이 더 예뻐. 훨씬 예뻐!” “아이~ 주인님도 참.” 그녀의 옆에 주저앉은 나는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을 했더니 가슴이 아프다. 스피릿 미안해. 그렇게 몇일 동안 그곳에서 요양을 하며 알게된 사실인데. 이곳의 여주인은 엘프였고 바깥양반은 인간이었다. 어떻게해서 인간과 엘프가 가정을 이뤄살고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법한 상황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런걸 대놓고 물어보기엔 너무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베레타와 그랜퍼스의 국경근처에 위치한 거대한 숲속의 한 가운데라고 했다. 창밖에 펼쳐진 넓은 숲을 보고 어디 도시 근처에 있는 산장이나 별장이겠거니 했던 내 생각은 무참히 박살났다. 도대체 장사가 되지 않을 법했지만 이들 부부들은 그래도 이곳에 집을 지어 여관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손님이 오긴 합니까?” “간혹 숲으로 들어와 길을 잃고 헤메는 모험가들이 찾아오곤 해요. 그중에는 라이트처럼 단골이 되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꽤 있죠.” “이런 정신 나간 녀석이 또 있다구요?”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아무도 없은 커다란 홀에 앉아서 차를 홀짝이던 라이트가 히죽 웃으며 잔을 내렸다. 녀석은 두 팔을 벌리며 시를 읊듯이 말에 음율을 실었다. “커다란 숲속에 커다란 여관하나 덩그러니, 시끄러운 소리도 없고, 귀찮은 사람도 없고, 일상에서 벗어나기엔 좋은 곳이지. 음식은 일류 레스토랑 뺨칠 정도로 맛있고, 여관 마스터와 하나뿐인 점원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워, 간간히 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지. 난 여기만 오면 너무너무 행복해. 아아~ 행복한 로맨스여~!” “…우리 이놈은 제껴두고 이야기 합시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찻잔을 비우던 스피릿이 입을 가리고 푸웃 웃어버렸다. 팔짱을 끼고 벽난로 옆에 기대어 서있던 루나가 한숨을 폭 내쉬며 다가왔다. “완전히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버렸네. 어이. 라이트. 정신차려.” 라이트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맷었다. “그래서 전 이곳을 최상의 도피처로 생각하고 있지요. 여름 휴가도 이곳에서 보내곤 한답니다.” 나와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여기 여주인께서 입을 열었다. 금발에 황금빛 눈동자라는 특이한 매치의 엘프 여주인은 고아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피릿이 나이를 좀더 먹으면 딱 저렇게 될 것 같다. 이름이 르네라고 했던가? “전에 함께 왔었던 아세트양은요?” “아세트는 돌려보냈습니다. 아마 지금쯤 마을에서 새 친구들을 사귀고 있지 않을까요?” “당신은 진짜 마법사로군요.” 라이트가 씩 웃는다. 그때 부엌에서 키가 꽤 큰 사내가 앞치마를 벗으며 걸어나왔다. 상당히 선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화가나면 꽤 무서울 것 같은 인상이다. 여주인이 그에게 손짓을 하더니 우리들에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마당에서 몸을 풀고 있으면 간간히 도끼를 짊어지고 나무하러 나가는 걸 훔쳐보곤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는 처음인 것 같다. 우리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그는 무려 아내의 귀가 보통 사람보다 커다랗다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지 귀엽다는 듯이 그녀의 귀를 만져보고는 빙글빙글 웃으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물어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디가냐는 상냥한 아내의 물음에 그는 엑셀이라는 친구 집에 간다고 했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아아.” 엘프여인의 인간남편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멍청한 눈으로 뭔가 굉장히 가정적이며 평화롭고 드라마틱한 장면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관 마스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다들 몸은 좀 어떠세요?” “아, 마, 많이 낳아졌습니다. 참. 첼시아는?” “밖에, 퍼피 운동하는거 도와주고 있던데.” 헛기침을 조금 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우리가 여기 있은지 얼마나 지났지? “여기도 좋지만, 슬슬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야.” “나도 그런 생각했었어. 너만 괜찮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떠났으면 하는데 말야.” “벌써 가려구? 좀더 있다가지?” “나도 그러고 싶지만 집에 두고온 나의 사랑하는 만드라고라가 잎이 마르도록 기다려서 말야. 아세트 보내고 나 요새 그거 키우는 재미로 살아. 물주는 사람이 없는데 죽지나 않았나 모르겠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 난 것이 있어 라이트에게 물었다. “잠깐. 그러고보니 킬의 관은?” ========================================================================== 어디에 있을 까요? Reload Running Fire: 57 “그거 참 인간다운 걸?” “여기에 있지.” 라이트가 꺼낸 것은 큼직한 가죽 자루였다. 난 고개를 갸웃하여 그것의 용도를 물었다. 라이트는 음침하게 웃으며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속에는 회색 밀가루 같은 것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인사해. 킬이야.” “에엥?! 그, 그럼 설마 그거….” “뱀파이어의 골분이야. 여기 왔을 때 르네씨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었지. 관짝을 들고다니면 불편하잖아?” 난 무섭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걸로 어쩔건데?” “뱀파이어의 골분은 라이칸스롭을 만들 때 들어가는 최고급 재료야. 비싸게 팔린다구. 으후후후~! 조금 나눠줄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은 처녀나 동정의 피를 뿌리면 다시 재생한다는….” “됐어. 필요없어 그딴 거 너나 가져.” 난 꿈자리가 사납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루나와 첼시아가 그것을 상당히 탐냈지만 라이트는 거절했다. “왜?” “루나는 처녀잖아? 운없게 피라도 조금 튀어봐. 시커먼 안개가 낄낄거리면서 ‘마스터어~ 분부만 내리십쇼잉~.’ 하면서 나타날거야. 보름달만 뜨면 피를 쪽쪽 빨면서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구. 안돼, 난 루나의 친구로서 그런거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 욕심이 많은 건지 루나는 그런 소릴 들어도 대단히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이트가 갈무리하는 가죽자루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하며 투덜거렸다. “칫~ 아니면 좀더 놀다가던가. 두 꼬맹이는 자기 장난감이 줄어버리면 나한테 이빨을 들이대고 앵앵 대면서 달려든다구.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나도 이참에 확 여행이나 나가버릴까?” “그건 허락할 수 없어요. 저번에도 혼자서 여행나갔다가 큰일 당할 뻔했잖아요?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꼼짝없이 끌려갔을 거예요.” 아랫입술을 내민 루나는 고개를 돌리고 너무 가둬두려고 하는거 아니냐고 투덜대긴 했지만 따져 묻지는 않았다. 라이트는 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떠나는 걸로 하고, 요 꼬마들이랑 조금 놀아줄까나?” “아이들은 밖에 있어.” 루나는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르켰다. 녀석의 뒷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린 나는 가만히 날 쳐다보는 엄청난 외모를 가진 아가씨(?)들의 시선에 주눅이 들어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나, 나도 잠깐….” “잠깐만. 괜찮다면 나 당신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고개를 돌려보니 벽난로가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다크엘프가 짜릿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흐으음, 엄청난걸, 위화감 드는데. 다시 자리에 앉으니 그녀가 스피릿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당신은 저 아가씨 어떻게 생각해?” “노예.” “그거 뿐이야?” 난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것 뿐만은 아니지만 그런 걸 왜 묻는 겁니까?” 내 또래로 보이지만 엘프는 나이를 천천히 먹으니 일단 존대를 붙여주기로 했다. 게다가 다크엘프 아닌가. 이 정도 대우는 아깝지 않다. 루나는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 난 당신네 나라의 노예제도 맘에 안들어. 사람이 사람을 아래에 두고 발로 짖누르며 부린다는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리야? 그리고 그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또 뭐야. 자기 발로 걷기 싫으니 남의 등에 업혀서 다니겠다는 거야? 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다들 기분 나쁠거야. 하지만 그래도 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어. 이봐. 거기 노예 여자. 당신, 정말 그걸로 좋아? 만족해? 매번 다른 주인의 등에 업혀 다녀도 좋은거야? 그리고 당신! 고개 돌리지마. 여기 남자가 당신 밖에 더 있어? 당신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속편하게 세상을 돌아다니지 못하고 그런 고생을 해야하는거야! 이 아가씨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는거고, 알아!” “루나. 그건…” 여주인이 헛기침을 조금하며 제재를 했지만 내가 말렸다. “아, 괜찮습니다. 놔두세요. 어이, 까무잡잡한 아가씨. 듣자하니 노예와 그 주인들에게 불만이 많은가본데. 뭐, 내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든 알아듣지 않을거야. 그러니 우리 노예 말 좀 들어보자구. 스피릿? 집에 돌아갈래? 돌려보내줄까?” “아뇨. 전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어차피 이젠 갈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걸요?” 루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난 킥킥 거리며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이며 눈을 위로 치켜떴다. “들었지? 노예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리 하는게 아냐. 노예는 억지로 끌려간 사람들만 있는게 아니라구. 가족과 친구들에게 배신당하고 쫓겨나 갈 곳 없는 불쌍한 이들도 있어. 그런 사람들을 주인의 등에서 끌어내려 자유를 안겨줘봐. 뭐가 어떻게 될 것 같아? 결국 적응을 못하고 또 다른 주인의 등을 찾아 다닐거야. 속된 말로 노예근성이라는 거지. 하지만 그거 밖에 모르는데 어떡해? 혼자서 걸으려고 해도 웬만한 의지가 없으면 어려워. 더더군다나 주위에서는 도와주지도 않지. 말로는 노예들이 불쌍하네 어쩌내 우는 소릴 해도 결국 문제를 떠안기면 입을 다물어버리는게 현실이지. 게다가 한번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게 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들 줄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어.” 루나는 고개를 돌려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스피릿은 내 목에 두 팔을 감고 바싹 몸을 끌어당기며 시무룩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실이에요. 루나씨. 전 이제 주인님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나무라셔도 좋아요. 하지만, 그래도 전 이 사람 곁에있어서 행복하답니다.” “…말도 안돼. 그건 자기 기만이야. 본심은 그럴 리 없어.” “이제 그만하세요.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사랑이 있고, 100가지 슬픔이 있고 100가지 행복이 있다고해요. 자기 생각과 맞지 않다고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요. 루나. 덕분에 오늘 좋은 공부했잖아요?” “칫! 이런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아!” 루나는 고개를 팩 돌리고 계단 옆의 문을 열고 들어가버렸다. 쾅~! 허어~ 다크엘프라고 좀 틀릴줄 알았더니만 우리네들이랑 다를게 없네? “다크엘프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그것과 비슷해요. 자기 정의에 반하는 것이 생기면 설사 그것이 정답이라고 해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하죠. 자~ 운동하는 사람들 좀 불러오시겠어요? 우리 남편이 딸기케익을 구워둔게 있는데 아주 맛있어요.” 이 여주인은 참 소녀처럼 사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얼굴도 어딘가 좀 앳되어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으음, 엘프니 몇백년을 살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고개를 끄덕여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밖으로 나가려다 루나가 사라진 방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신의 정의와 잣대로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한다. 뭐, 나름대로 귀여운 생각이었어.” “으응~! 가는 거야? 좀 놀다가면 안돼?” “어머나. 우리 마야 우는거야? 걱정마. 이렇게 좋은 곳을 알았으니 다음에 또올게.” “정말?” “그러엄~ 정말. 에구구, 요 귀여운 녀석을 떼어놓고 어찌 떠나가누….” 할망구처럼 중얼거린 첼시아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야를 껴안고 얼굴을 부벼댔다. 옆에서는 라이트가 마유의 조그만 손을 잡고 흔들어 주었다. 퍼피와 함께 말에 짐을 올리며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코를 벌렁이며 쏘아주었다. “아직 출발준비도 못했구만 벌써부터 작별인사 나누지마아!” “어머나, 콜트씨는 요 녀석들이랑 헤어지는게 슬프지도 않은 가봐? 매정해라~.” “칵~!” “꺅~! 못된 원숭이가 우릴 잡아먹으려해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려주니 첼시아는 마야를 끌어안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걸보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낀 나는 절래절래 고개를 저으며 마저 짐을 맨 다음 아이들과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라이트와 첼시아를 끌어당기며 여관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여관비는 얼마입니까?” “일인당 하루 2만 루나에 다섯 분이 일주일 숙식이니까. 70만 루나입니다.” 하루 2만이라니 상당히 싼 걸? 고개를 끄덕인 나는 100만 루나짜리 금화를 그녀에게 건냈다. 주인이 잔돈을 거슬려주려는 것은 두손을 내밀어 막았다. “아뇨. 그동안 치료 받은 약값도 있고, 말도 돌봐주셨으니 잔돈은 필요없습니다.” “아니 그럴수는….” 긴 머리카락을 가죽 끈으로 묶은 사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옆에 선 여주인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자 윽하는 표정을 지으며 떱떠름하게 웃었다. 허어~ 잡혀사시는군? 따라 웃어주고 있으니 몸에 짝 달라붙는 가죽 옷에 검을 차고 기다리고 있던 루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죽바지 멋진데? 나중에 스피릿에게도 한번 입혀볼까? “어이, 안갈거야?” “다됐수다. 스피릿. 이리와.” 스피릿의 손을 끌어당긴 나는 그녀를 말에 올리고 고삐를 끌었다. 루나는 흥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와요.” “여기서 만큼은 조심하지 않아도 돼. 가요. 숲밖까지 바레다 줄테니까.” 난 고개를 돌려 라이트를 쳐다보았다. “안내를 받아야 할 정도인거야?” “응. 몬스터가 많은데다 숲이 거의 미로에 가깝거든? 안내인이 없으면 한참을 헤메다가 이곳으로 돌아오게돼.” 고개를 끄덕인 나는 손을 흔들어주는 꼬마들에게 마주 손을 들어주었다. “오빠오빠! 다음에 또와아!” “안녕히 가세요!” “응. 다음 번엔 선물 사가지고 올게.” 아이들은 꺅꺅거리며 좋아했다. 인간남자와 함께사는 엘프여인도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고개를 꾸벅이고 숲으로 들어가니 첼시아가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내 평생 저런 가족은 처음봐.” “그래서 감상은 어때요?” 첼시아는 푸근하게 웃었다. “나쁘지는 않네. 동화속 이야기 같지만 덕분에 좋은 걸 많이 봤어. 다음에 퍼피 데리고 또와야겠다.” 지루한 숲속 길이라 라이트는 잠시 후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다시 오겠다고는 했지만, 난 두 번다시 이곳에는 안올거야.” “왜?” 앞서서 걷던 루나가 별안간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저런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이야 얼마든지 자기가 만들 수 있어. 그런걸 일부러 보려고 이곳에 오다니. 난 싫어. 난 내 노예랑 저런 일상을 즐길거야. 그러니 다시 올일은 없지.” “그거 참 인간다운 걸?” 루나는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덕분에 나와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있던 라이트와 첼시아는 입을 딱 벌렸다. 언젠가 다크엘프의 미소는 신의 미소와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내가 지금 그걸 본 것 같다. …가능하다면 한번 더 보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녀에 대한 나의 희소가치가 떨어질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난 이 회색머리 아가씨의 웃는 모습이면 충분해. “그렇지?” “예? 아, 예.” “무슨 말인지 알고나 고개 끄덕이는 거니? 주인이나 노예나 하나 같이 바보구나.” “바보면 어때? 망할 세상을 등지고 기분좋게 웃을 수 있으면 된거 아냐?” “어머, 멋진 말이네. 그거 다시 한번 들려줘.” ========================================================================== ^^ Reload Running Fire: 58 “캬아아아아! 맥주맛 조오오타아아!” 첼시아의 말에 난 낄낄 웃어버렸다. 숲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끝도 없구만. 점심을 먹고도 한참을 걷고 있으니 라이트가 루나에게 물어서 가르쳐주었다. “웬만한 공국정도의 크기라는데?” “…망할, 그래서 오늘 하루안에 여기서 나갈수 있어?” “나갈수 있어. 그러니 씨부렁대지 말고 잘 따라오기나해.” 씨부러엉~!? 입술을 씰룩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뭔가가 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난 움찔하며 자동석궁을 뽑았다. 트롤? 아냐. 저건… “엄마야! 웨어 울프잖아?! 콜트, 당신 전공 나왔는데? 잡을 수 있겠어?” 첼시아의 말에 난 이를 드러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잡으라니! 불가능에 가깝다. 몬스터가 많다더니만 저런 것도 나오는구나!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웨어울프 주제에 녀석은 아래위로 간단한 바지와 셔츠를 입고있는 것이다. 첼시아도 그걸보고는 입을 빠끔거리기 시작했다. 별안간 스피릿이 입을 열었다. “멋쟁이 늑대인간이네요…?” 어이없다는 눈으로 잠시 그녀를 쳐다봐준 나는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았다. 지금이라면 쏴서 도망가게 할 수 있다! “그래, 어서 쏴버려. 이 숲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저런 변태 늑대인간은 사라져야해.” “어어이! 꼬마야아!” 내 옆으로 와서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루나는 인상을 확 찌뿌렸으며 나와 첼시아, 퍼피 스피릿은 입을 딱벌렸다. “말을 했다!?” 우리의 놀라움은 안중에도 없는지 루나가 두손을 입가에 대고 맞고함을 질렀다. “꼬마라고 부르지마! 이 뵨태야아!” “코흘리게 주제에 어른에게 꼬박꼬박 대들지마라!” 입을 커다랗게 쩍쩍 벌리며 가지런한 이빨을 들어내보이던 늑대인간은 그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걸어 금세 우리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이 겁을 집어먹고 발광을 하는걸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으니 그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스피릿 떨어뜨리면 네놈 다릴 부러뜨릴거야! “마을에 가는 길이지? 마침 잘됐다. 심부름 좀 해다오.” “내가 당신 딸래미야? 그런 건 자기가 직접 해.” “건 블레이드 훔쳐가서는 고철로 만들어버린 녀석이 어디의 누구였지? 르네씨에게 수리비 청구해버리는 수가 있다.” 루나는 이를 드러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늑대인간은 낄낄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여 종이 쪽지 몇장과 돈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거기 적혀 있는거 사오면 된다. 잔돈으로는 막대사탕이라도 사먹어라. 그런데 저 인간들은 누구냐?” “가게 손님이야. 볼일 다끝났으면 돌아가!” 늑대인간은 허허 웃더니 우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 라이트도 있군, 네 친구들이냐?” “예.” 라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잘됐다는 듯이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루나가 버릇이 좀 없긴하지만 그래도 착한 녀석이야. 어디 노예시장이나 못된 놈들에게 붙들려가면 구해주시게. 이렇게 못생긴 녀석이 뭐가 그리 좋은지 한 눈을 좀 팔면 금방 잡혀가 버리거든? 사례는 톡톡히 하지.” “무, 무슨 헛소리야! 빨리 꺼져!” 화가나서 그런지 부끄러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루나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늑대인간은 간지럽다는 듯이 낄낄 웃더니 이내 몸을 돌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한참동안 그가 사라진 숲속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첼시아가 호들갑을 떨며 라이트에게 물었다. “뭐, 뭐예요? 방금 그 늑대인간?” “여기 숲속에 사는 사람이에요. 이름은 엑셀이라고 해고, 루나의 좋은 이해자죠.” “누가 이해자야?!” 루나가 발끈해서 외치자 라이트는 하하 웃으며 그녀에게 두손을 흔들어댔다.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엑셀? 마유와 마야가 말하던 그 이웃집 아저씨?” “오! 그렇지. 이웃집 아저씨. 바로 그 사람이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엑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걸 봐서 마법사와 인연이 있는 것 같아. 보통 늑대인간이 인간의 말과 사고방식을 가질수는 없잖아?”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엑셀이라는 이름이 마법사와 인연이 있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그때 루나가 빨리오지 않으면 버려두고 간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없으면 몬스터들이 달려들기 때문에 우리들은 부랴부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라이트는 걸으면서 설명했다. 숲은 길고 따로 흥미가 거리가 없으니 첼시아와 퍼피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도에 마법사 길드에 가봤다면 그곳에 있는 훈트의 프로토 모델을 봤을거야. 녀석의 이름도 엑셀이지. 사실 그 이름은 몇백년 전 마법사 길드 연구기록 데이터 뱅크에 등록된 한 실험체의 이름이야. 따지고보면 최초의 결전병기였지. 살아있는 늑대에게 약물과 생체실험을 해서 인위적으로 싸움을 위한 도구를 만들었지만 단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였어. 결국 연구는 중단됐고, 그 실험체는 한동안 가디언으로서 마법사의 곁에 있다가 어떤 사건 이후 사라져버렸다고 해. 그 이후로 엑셀이라는 이름은 전투용으로 계획되고 만들어지는 모든 실험체에게 붙는 코드네임이 되었지. 못다이룬 선대의 바램을 이루고자 하는 후학의 열정이랄까? 신기하지? 나도 처음에 그 늑대인간의 이름을 듣고 놀랐었어. 길드에서 공부한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실험체의 코드네임이니까. 그래서 난 혹시 그가 몇백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그 최초의 결전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해. 사실인지 아닌지는 해부를 해보면 알겠지만 그랬다간 루나가 싫어할테니 별 수 없지.” “누가! 그런 변태늑대는 배를 갈라서 자갈을 쏟아넣고 꿰매 버려야해!” “…두분 말이 너무 살벌하세요. 제가 볼땐 좋으신 분 같던데.” “내버려둬. 다크엘프와 마법사잖아. 우리랑은 사는 세계가 틀려.” “동감이야.” 나와 첼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글벙글 웃는 마법사와 그의 멱살을 붙잡고 으르렁거리는 다크엘프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숲속을 걸었을까? 해가 거의 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숲속에서 나왔다. 루나는 우릴 바래다주고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도중에 이웃의 늑대인간을 만나 그의 심부름을 해주느라 늦게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집에 도착하면 새벽이겠다. 젠장.” 손수건으로 머리를 묶은 그녀가 예쁜 입으로 험한 말을 툴툴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연신 수군거리며 우리들을 쳐다본다. 일행에 예쁜 아가씨들이 많아서 그런가? 지은 죄가 많아서 내심 주변을 경계하며 길을 걸은 나는 루나를 따라 시장으로 들어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그러다가 루나에게 용돈 좀 벌게 해주겠다며 그녀 대신 물건들의 값을 놓고 상인과 흥정 벌이는 라이트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불꽃튀는 접전 끝에 구입한 물건들을 살펴보던 라이트의 팔을 잡아끈 나는 녀석의 귀에대고 속삭였다. “…이봐. 어렵게 이러지 말고 드래곤 하트로 슉슉 날아가면 안돼?” “안돼. 이게 얼마나 귀한 물건인데. 게다가 텔레포트는 6급짜리야. 마력소모가 큰 주문이라고, 그런 걸 마구 써댔다간 몇 년 못가서 드래곤 하트는 증발해 버릴거야. 아껴서 쓸거니까 짧은 거리는 그냥 걸어. 튼튼한 다리 뒀다가 국끓여먹을 거냐?” “으윽! 이 짠돌이!” “요새 듣고 싶었던 말이야. 고마워.” 라이트의 말에 드래곤하트 본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줄까 생각했지만 나역시 그건 아껴뒀다가 평생 써먹을 것이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배고프다고 노래를 부르는 첼시아를 데리고 여관을 찾고있으니 루나가 우릴 데리고 어떤 곳으로 향했다. “아는 사람 여관 있어요. 이리와요.” “나한테는 말 놓으면서 왜 첼시아에겐 말 높여?” 루나는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거만한 눈빛이다. 으윽~! “당신은 노예를 괴롭히는 못된 사람이니까.” “그걸 걸로 따지면 첼시아가 더…! 으악?!” 첼시아가 내 등을 꼬집었다. 그녀는 내 어깨를 밀어 뒤로 보내버리고는 루나에게 다가갔다. “오호호호~! 아무렴 어떠니? 자, 루나씨 바보는 내버려두고 어서가요. 거기 음식 맛있어요?” “음, 우리집 만큼은 아니지만 먹을만해요.” 재잘거리며 걸어가는 두 여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꺽어 말에 앉아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으윽, 스피릿. 나 무시 당했어.” “괜찮아요. 주인님. 신경쓰지 마세요.” 스피릿은 괜찮다는 듯이 날 얼래고 달래주었다. 도착한 곳은 내 사랑 어쩌구 하는 웃기는 이름의 여관으로 밖은 낡았지만 안은 최근 내부공사를 했는지 신축 건물같은 깨끗함을 자랑했다. 그 안에서 짧은 빨간머리를 가진 내 또래 청년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어서옵쇼! 어? 네가 웬일이야? 또 집 나왔어?” “매상 올려주려 온 사람에게 무슨 헛소리야? 그리고 내가 용돈 안올려준다고 집 뛰쳐나올 쪼다로 보이니? 흥~! 여러분 이 집 맛없어요. 우리 다른데 가요.” “어허어허~!” 후다닥 달려와 문을 가로막은 빨간머리 청년은 하하 웃으며 모두를 안으로 안내했다. “농담 좀 한거 같고 너무 그러지마.” “난 그런 농담 싫어해. 앞으론 하지마. 그리고 내 짐 배달 부탁해. 난 이만 가봐야 하니까.” “거 참, 공짜로 차 한잔 줄테니 그거나 마시고 가라.” “오, 짠돌이 조나단이 왠일이니?” “난 짠돌이 아냐. 자자자~ 여러분 앉으세요. 뭘 드시겠어요?” 잠시 그를 쳐다보던 첼시아가 말했다. “당신, 나랑 같은 빨간머리네? 염색이야?” “아뇨. 오리지날인데요.” “헤에, 같은 머리색을 보니 반가워라. 좋아! 배도 고프니 잘됐다! 상다리 부러지게 가져와! 어차피 계산은 콜트씨가 할거고 음식은 우리 퍼피가 밤을 새워서라도 먹어줄거야!” “어이어이, 자기만 요리조리 샥샥 잘도 피해가는데. 웬지 좀 불합리 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어머, 남자 주제에 쩨쩨하게 여자에게 돈내라고 그러는 거니? 나머지 돈이나 빨리주고 그런 말을 하셔?” 이를 뽀드득 갈고 있으니 스피릿이 잉잉거리며 내팔을 끌어안았다.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주인니임.” “으윽! 스피릿이 네 목숨 살렸어!” “어머, 그건 내가 할 소리다? 그거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거야? 듣자니 뒷일까지 잘 끝났다면서? 그럼 이제 집에 가야지 않아?” 그때 맥주가 나왔다.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 흑맥주다. 루나와 스피릿, 퍼피에겐 따뜻한 차가 나왔다. 퍼피는 술을 못한다고 했던가? 맥주를 한모금 마신 나는 상당히 맛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잔을 내렸다. “말안해도 그럴 생각이야. 오늘은 쉬고 내일 바로 수도로 돌아… 아, 그전에 페이크에 들려야겠다. 볼일이 좀 있어.” 갑자기 안젤라가 생각나서 말을 중간에 끊으니 이 눈치 9단 빨간머리 변태가 냉큼 끼어들었다. “안제….” “캬아아아아! 맥주맛 조오오타아아!” ========================================================================== 제 최고 주량은 소주 한병. 그리고 맥주 한병 반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59 “안젤라가 누구예요?” 탕! 맥주잔을 들고 괴성을 질러버린 나는 그것을 벌컥벌컥 입안에 들이 부안 다음 충열된 눈으로 고양이처럼 웃고있는 첼시아를 쳐다보았다. 크으윽! 너 정말! 그녀는 입을 벙긋거렸다. 입술을 모양을 읽으니 다음과 같다. 내 입막음 대가로 추가금 200만 루나. 너무 비싸! 그럼 100만. 이것도 많이 봐주는 거다? 오늘 스피릿이 안젤라 이야기를 듣고 거품 물고 쓰러지는거 보고 싶니? 아앙~ 주인님이 바람피웠어요! 라면서 말야? 크아아악! “거기 두사람 말야. 아까부터 왜 붕어마냥 빠끔빠끔 거리는 거야? 어디 아파?” 첼시아를 노려보고 있던 나는 루나와 스피릿의 이상한 시선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훔쳐본 라이트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그때쯤 음식이 나왔고 난 주변의 의문섞인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먼저 포크와 나이프를 주워들고 꾸역꾸역 먹어댔다. 먹을 땐 개도 안건드린다지? 으으, 그나저나 안젤라는 어떻게 한다? 머리가 아프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들이 방으로 올라가려하니 루나는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 여관의 부사장(?) 이라는 빨간머리 조나단이 손을 흔들었다. “자고 가지? 예쁘다고 누가 어두운데서 덥치면 어쩔거야?” “작정하고 달려드는 떼거지 용병놈들이라면 모를까. 지나가는 양아치들쯤은 간단하게 처리 할 수 있어. 그리고 일단 숲속에만 들어가면 든든한 보디가드들이 널렸으니 걱정마.” “그럼 마을에서 나가는게 문제인가? 내가 따라가주고 싶지만 장사해야하니 안돼겠다. 키릭, 폰, 네이트. 누님 좀 바래다 드려.” 그의 말에 가게 한 구석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같이 곰같은 덩치에 험악한 인상이다. 루나는 우리들과 인사를 나누다 말고 인상을 찌뿌렸다. 이제야 느끼는 거지만 루나는 인상쓰는 모습이 더 예뻐보인다. 대로에서 만나면 아마 나라도 추근 거릴 것 같아. “저런 거 필요 없는데.” “데려가. 좀 험악하게 생겼지만 속은 부드러운 남자들이야. 도둑길드장과 소꿉친구인걸 다행으로 알라구. 저번 일 기억 안나? 밤에 혼자 돌아다니다가 웬 마법사한테 붙들려서 고생했잖아.” 루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를 쳐다보다 몸을 팩 돌렸다. 조나단은 팔짱을 하고 씩 웃어댔다. “이만 가요. 모두들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러더니 나에겐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다음에 만나면 마구 비웃어주겠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그딴 소리 할 여력이 되나 보자구.” “왜? 할말 있으면 지금 하지 않구서? 까무잡잡한 아가씨야.” 팔짱을 하고 코를 벌렁거리며 그녀를 쳐다봐주자 루나는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지금은 안돼. 왜냐면 당신이 더 강하니까. 실력이라든가. 경험이라든가. 그리고 가지고 있는 정의와 잣대 같은 것들이 나보다 훨씬 단단하고 논리적이라 지금의 나는 당신을 꺽을 수가 없어. 하지만 두고봐.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의 정의가 잘못됐음을 시인하게 만들테니까.”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시 만날 일은 없겠군?” 루나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뒤를 힐끔 쳐다보다가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다크엘프는 도망가지 않아. 찾아서라도 따지러 갈테니 그때 보자구. 그리고 그때도 당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저 노예인지 두고 보겠어.” 난 좋을대로 하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가 나가고 고개를 돌린 나는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다시 찾아오면 따뜻한 차라도 한잔 대접해 줘야 겠는데?” 두손을 잡고 머뭇대며 서있던 스피릿은 얼굴을 가득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총총 달려와 매달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내 팔을 안고 자는 스피릿의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어떻게하면 스피릿에게 안젤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생각해보았다. 덕분에 그날 저녁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들었지만 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 왜 그러니? 얼굴이 말이 아니다?” “남의 사생활에 상관마.” 첼시아는 히죽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간 밤에 좀 타올랐어?” “크아아아악! 아침부터 신경 긁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첼시아는 깔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으윽~! 저건 동료가 아니라 웬수야! 첼시아와의 말타툼으로 상쾌한 아침을 열고 있으니 라이트가 목에 수건을 걸고 나왔다. 그를 부른 나는 모두를 자리에 앉혀놓고 지도를 꺼내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페이크에는 왜 들려야 하는 거야? 그럴려면 빙둘러서 가야한다구. 안젤라는 또 누구고?” “그게 사정이 있어.” “무슨 사정이데?”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인상을 찌뿌리며 고개를 돌리니 첼시아는 히죽이죽 웃으며 라이트에게 안젤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라이트는 별 동요없이 간단하게 수용했다. “어쩔수 없군요. 그런 상황이라면 도와줄 수밖에 없어요. 불쌍하잖아요?” “헤에, 콜트씨 친구 아니랄까봐 당신도 천사표에요?” “천사표고 뭐고, 보통사람이라면 그런 걸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첼시아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버렸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럼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불행에 처한 사람을 도와줄거라고 믿는 거예요. 당신?” “물론입니다. 보통사람이라면 말이죠.” 그의 단호한 의지에 조금 부끄러워진 첼시아는 볼을 긁적이며 날 쳐다보았다. “어머, 그럼 난 보통사람 아닌가봐?” “당연하지. 당신이 어디봐서 보통사람이야? 보통사람을 등쳐먹는 악당… 끄아아악…!?” “…잘 안들리니까 다시 한번 말해볼래?” 등을 꼬집은 첼시아의 팔을 뿌리친 나는 테이블에 엎드려 고통을 조금 삭힌 다음 입을 열었다. “당신이나 나나, 우린 보통사람이 아냐. 자기욕심을 위해서라면 사람도 우습게 죽이는 모험가를 빙자한 악당들이지. 틀리다고 말하지마. 자기 손은 깨끗하다고 말하지마. 그건 루나의 말대로 자기 기만이야. 우린 악당이야. 서로를 도와가며 사는 평범한 보통사람과는 틀려, 그런 사람들은 비오는 날 대로가에 버려진 새끼고양이를 불쌍하게 여겨 거두어 가지만 우린 아냐. 실제로 난 그런 고양이나 개를 보면 무시해왔어. 이런 내가 왜 안젤라를 살렸다고 생각해? 나도 딱히 정의내릴수는 없어. 전에 네모 아저씨가 나에게 왜 안젤라를 도와주냐고 물었을때 난 그냥 내 노예를 보는 것 같아 불쌍하다고 말해버렸지. 하지만 실제로는 나도 몰라. 왜 그녀를 도와주었는지. 까놓고 말하면 스피릿을 구하지 못했을 때를 대신할 녀석으로 쓸려고 그랬는지도 몰라. 난 보통사람 아냐. 나쁜 놈이야. 악당이지. 최저야. 위선자야. 죽일 놈이라구.”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던 첼시아는 파하하 웃은 다음 내 코를 손가락으로 툭치며 조그만 입을 열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우리 콜트씨는 자학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따지면 라이트가 말하는 보통사람은 세상에 몇몇 없겠다. 그리고 자기욕심을 위해서 사는게 뭐 어때서 그러니?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게되는 세상이야.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고 선행을 베풀면 천국에 간다고? 누가 가봤다니?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한번뿐인 인생 얽매며 살지마. 죽어서 지옥에 가든 천국에 가든 그런 건 나중 문제라고 생각해. 악당이 되든 성자가 되든 자기 방식대로 자기 인생을 살아 보는 거야. 그 결과가 죽어서 지옥행이든 천국행이든, 살아있을 때 텅 빈 대가리를 꽉 채우고 가슴속의 조그만 심장을 멋지게 불살랐다면 그걸로 된 거지. 안 그래?” “동감입니다. 여기, 따뜻한 밀크티 입니다. 드시죠. 레이디.” “어머~ 고마워라. 잘 마실게요.” 도둑길드의 마스터라는 빨간머리 총각은 빙그레 웃으며 소반을 들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말에 한숨을 조금 내쉰 자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에라! 나도 몰라! 어차피 그게 사람사는 모습이라면 나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생각나는 데로 살아버릴거야!” “뭐, 재고의 여지가 보이는 주장이지만, 요즘 세상에선 어쩔 수 없으니까.” 라이트의 긍정에 한숨을 내쉰 나는 세면장을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아직 잠이 덜깬 스피릿이 앉아 눈을 비비고 있다가 내가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주인님. 거기 계셧… 아하아암….” “입찢어지겠다. 씻고 나와. 아침먹고 출발이야. 이제 집에 가야지?” “예.”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목에 걸린 수건을 가지고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고있으려니 이 변태가 또 끼어든다. “아아~ 안젤라. 조금만 기다려. 주인님이 곧 갈… 으읍!?”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나는 암살자의 그것처럼 재빠르게 첼시아의 입에 그것을 쑤셔넣고 그녀의 팔을 비틀어 당겼다. 꼼짝하지 못하게 된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2층계단에서 뭔가가 뛰어 내렸다. 잠이 덜깬 얼굴의 퍼피였다. 녀석은 자기 주인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했는지 의식적으로 두 주먹을 들고 날 쳐다보고 있다. 별수 있나? 놔줬다. 녀석은 바로 주인에게 달려가 그녀를 추스렸다. 첼시아는 목을 켁켁거리며 장난 좀 친거 같고 사람죽이겠다는 식으로 화를 냈지만 난 귀를 막는 것으로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길레 사람 신경 긁는 거 아냐. 가뜩이나 그거 때문에 고민인데. 불난집에 기름뿌리지 말라구.” “칫~! 두고봐. 아주 두고두고 씹어 줄테니까!” 난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자꾸 그렇게 나오면 돈 안준다.” “…치사해. 콜트씨.” 갑자기 저자세로 나온 첼시아는 돈 않주면 사기죄로 고소하니 어쩌니 헛소리를 해대며 연신 투덜거렸다. 아침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니 머리를 감아 산뜻한 모습의 스피릿이 머리에 수건을 감고 밖으로 나왔다. 내 옆에 앉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는데 그녀가 날 쳐다보며 물었다. “안젤라가 누구예요?” “푸흡?!” “꺅! 수건수건! 어디다가 토하는 거야!?” 차를 마시던 나는 그것을 토하고 연심 기침을 해댔다. 스피릿은 가만히 날 쳐다보고 있었고 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댔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침착했다. “머리 감고 있으니 다 들리던 걸요?” “그, 그래서 우리 이야기 다 들은 거야?” “예. 상황은 대충 알겠어요. 하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나요? 전 노예일 뿐이니 주인님이 하자는 대로 할 수 밖에요.” “어, 저, 다, 다 들었다면 말야.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거… 에이~! 잠깐 이리와.” ========================================================================== 으으으으으으으음~! 올리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군요. Reload Running Fire: 60 “장난 좀 쳤지. 어때. 아까 그 노예 돌아왔어?” 난 그녀의 손을 잡아 끌고 방으로 올라갔다. 옆에 사람들을 두고 그런 이야기 하기엔 너무 쑥쓰러웠기 때문이다. 문을 닫고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은 방안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옷한벌 사줘야겠다. 구해냈을 때 옷 그대로잖아. 스피릿은 벽난로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는 머리를 풀어 수건으로 닦아 말리기 시작했다. 난 그녀의 뒤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 그러니까 말야….” “괜찮아요 주인님. 당황하지 마세요.” “그, 그래?” “예. 이제 실증이 난 주인님이 절 버리더라도 스피릿은 아무말도 할 수 없답니다. 아시죠?” “어,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아? 너 말고도 다른 여자를 또 구해줘야 하는데.” “주인님은 절 믿어줬어요. 그러니 이젠 제가 주인님을 믿어줘야죠.” 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피릿은 여전히 나에게 등을 돌리고 말하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니 스피릿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세요?” “너 화났지?” “제가요? 노예가 어떻게 주인님께 화를내요?” “거짓말하지마. 얼굴은 그게 아닌데 뭐, 스피릿. 혹시 내가 고생고생해서 널 구해줬다는 부담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그만둬, 오로지 순종만 하는 노예처럼 행동하지마. 전에 말했었지? 난 자기 할말 다하고 챙길건 챙기는 녀석을 좋아해. 순둥이 같이 불만 있어도 말 안하고 뒤에서 욕하는거 난 딱 질색이야. 자, 화났으면 화났다고 말해. 화났지?” 윽…. 괜히 말했나? 스피릿은 흡사 루나의 그것처럼 매섭고 거만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면 그녀에게서 잊혀진 공주의 카리스마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으윽~ 내가 건드린 여자가 공주님이었다니~! 지나간 일을 가지고 절망에 빠져 있는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조금만 화낼게요. 주인님 바람둥이! 아아~ 후련해요.” 뺨이라도 한대 각오했지만 그녀는 버럭 한마디 하고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어라? 이상한데? 그녀는 이제 내 허리 벨트를 붙잡아 끌어당기더니 발돗음을 해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눈이 지금 스피릿의 눈가에 서려있다. 으윽, 스피릿이 아닌 것 같아. 그녀는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주인님은 저보다 그 여자가 좋아요?” “아, 아냐! 난 스피릿 너 뿐야! 진짜야! 안젤라는 어쩔 수 없었어!” “정말?” “정말!” 스피릿은 방긋 미소를 머금으며 내 입술을 키스를 해왔다. 쪽….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는 기지개를 좀 켜고 다 마른 머리카락을 리본으로 묶으며 말했다. “주인님을 믿어요. 가요. 배고파요.” 이, 일단 이걸로 끝난거야? 거창한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첼시아와 라이트는 진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날 보더니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렸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닌지라 적당히 하지 않으면 화낸다고 으름장을 놓아주고 아침을 먹었다. 여행의 경로를 정하고, 짐을 챙긴 우리는 바로 여관을 나섰다. 가는 길에는 옷가게에 들려서 옷도 몇벌 구입했다. “싫어요. 그런거 전 안어울려요.” “어아~! 스피리이잇~!” 내 성화에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내가 고른 옷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한참 있다가 나왔다. 첼시아가 말했다. “헤에, 잘어울린다?” “부, 부끄러워요. 이런거….” 몸에 짝 붙는 가죽바지를 입은 그녀는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더니 날 쳐다보았다. 난 입을 딱벌리고 있었다. 스피릿의 몸매가 저렇게 좋은 줄은 몰랐어. 밤에만 봐서 그런가?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힐끔 거리며 쳐다보자 그녀는 울상을 짖더니 다시 탈의실 안으로 달려들어가 간단한 면바지와 브라우스, 여행용 자켓만 입고 나왔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내가 가죽 바지랑 자켓 사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두팔 걷고 날 말렸다. “안돼요! 전 그런거 못입어요! 어, 엉덩이랑 가슴 다 드러나잖아요오! 부끄럽게 그런거 입고 어떻게 다녀요? 안돼요오!” “그럼 나중에 나한테만 보여줘.” “아아아! 주인니임!” 스피릿은 버럭 고함을 질러댔고 난 결국 가죽바지와 자켓을 내려야 했다. 그걸 첼시아가 냉큼 주워들더니 말했다. “그럼 내가 입어야지. 사이즈도 딱 맞네. 스피릿은 좀 외골수야. 주인님이 좋아하는데 그걸 못해주니?” “하, 하지만 제 몸을 허락한 사람은 주인님 뿐인 걸요. 다른 사람에겐 어렴풋이라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열녀나셨군? 콜트씨 좋겠다?” 그녀의 말에 감동한 나는 스피릿을 껴안고 얼굴을 비벼대고 키스를 해줬다. 옆에서 라이트가 못봐주겠다는 듯이 헛기침을 심하게 해댔지만 난 신경쓰지 않았다. 어쨌든 옷도 산 우리들은 그길로 성문을 나서서 안젤라가 있는 페이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우연히 노숙을 함께했던 상단에서 듣게 된 이야기인데 요즘 세간에 베레타와 캐슬린 사이에서는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는 것이다. “어, 3분의 1쯤은 죄책감 드는데?” “뭐요?” 상단의 동행자 중에 어쩌다가 우리와 노숙을 함께 하게된 보부상인이 이야기를 하다말고 날 쳐다보았다. 난 하하 웃으며 혼잣말이라고 해주었다. 가이거라고 했던 상인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시장이 엉망이요. 물가는 계속 치솟고 있고, 상품은 품절을 일으키고 있소. 아무래도 전쟁 소문이 상인들의 사재기를 부추겨서 그런 것 같은데. 이거, 잘 해결되지 않으면 고생꽤나 하게 될 것 같시다.” “베레타와 캐슬린은 왜 그렇게 사이가 나빠졌답니까?” 가이거는 스피릿이 내미는 찻잔을 감사히 받고는 그것을 훌훌 불어마시며 라이트의 대답에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 결국은 상권 문제 때문이라오. 지도를 보면 베레타와 그랜퍼스 사이에 캐슬린의 끝부분이 이렇게 끼어있는데. 그곳의 육로를 이용하는 베레타와 그랜퍼스간의 무역에 캐슬린이 관세를 많이 붙이면서 다툼이 시작되었지. 뭐, 실질적인 불화의 씨앗은 이전 캐슬린 반란 사건이나 최근에 발생한 평화사절단의 유리에 공주의 실종이 베레타의 사주로 그런 것 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때문이지만.” 반란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모닦불가에 앉아서 음식을 하는 스피릿을 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썹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담담하네? 아니면 이제 잊어버린 건가? “식사준비 끝났어요. 드세요.” “어이구, 처녀 미안해요. 계속 얻어먹기만 하네.” “덕분에 좋은 이야기 들었으니 부담갖지 말고 많이 드세요.” 라이트의 말에 가이거는 사람 좋은미소를 지었다. 음식을 맛본 그는 요리도 잘하고 예뻐서 주인님에게 사랑받겠다는 둥의 소릴 해대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잠깐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녀가 만든 스튜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왠 사내들이 야영중인 상단 근처에서 노숙을 하는 우리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 세명이었는데. 난 빵을 스프에 찍어먹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어엉? 뭐요?” “요 앞에서 야영하는 사람들인데. 이야기 좀 합시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 컵에 담긴 스튜를 수저로 떠먹던 첼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내들은 좀머뭇대다가 말했다. “거기 회색머리여자. 누구의 노예요?” “내 노예인데?” “팔 생각 있소?”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 정말. 누구야? 자기 노예에게 아르바이트 시키는 녀석들은? 겁을 집어먹은 스피릿이 후다닥 달려와 내 등뒤에 숨었다. 고개를 든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팔아.” “흠, 알겠소.” 사내들은 의외로 간단하게 돌아갔다. 와들와들 떨고있는 스피릿의 어깨를 보듬어주고 있으니 한참 빵을 씹어대던 첼시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음음음~ 스피릿은 정말 주인님 잘 만난거야. 보통은 여행경비 마련하겠답시고 상단을 따라다니며 자기 노예를 팔고 그런다? 콜트씨 같이 노예를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애 한테 쓸대 없는 거 들려주지마.” “뭐 어떠니? 모르는 것 보다는 아는게 좋잖아? 자기 주인님이 얼마나 자길 아껴주는지 알아야 한다구. 어, 저기봐. 파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지?”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어떤 사람이 자기 노예를 그들에게 인사시키고 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이트가 어눌하게 말했다. “앉아 네가 뭘 어쩌려고?” “화장실 간다. 상관마.” “주, 주인님.” “걱정말고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테니까.” 첼시아가 말했다. “콜트씨는 정말 참견쟁이야.” “화장실 가는 거라니까? 이상한 생각하지마.” “음? 정말이야?” “그래!” 버럭 외쳐주고 숲으로 걸어간 나는 소변을 다 본다음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아무도 없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린 다음 강철 건틀릿을 꺼냈다. 콜트식 정의사회구현이다. 이 철없는 것들은 어디있지? “우어어어엉~! 캬르르륵!” 갑자기 숲속에서 거대한 짐승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등줄기에서 소름이 쫙 돗는다. 한두마리가 아니다! 정의사회 구현이고 나발이고 뒤로 돌아 후다닥 야영지로 돌아갔다. 그곳도 지금 난리가 아니었다. “전원 경계태세! 습격이다!” “아아앙! 주인님!” 훌쩍이며 안겨드는 스피릿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첼시아가 외쳤다. “뭐야?! 이거 무슨 소리야! 콜트!” “빌어먹을! 트롤 울음소리야! 하지만 아직 겨울잠에서 깰 때가 아닌데?!” 상단에서도 경계태세가 발령되고 대원들이 무기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가이거는 자신의 짐을 챙겨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라이트 놈은 혼자서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는 차를 홀짝이고 있다. 어이없는 얼굴로 녀석을 쳐다봐주니 라이트가 고개를 들더니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뭐야? 너 설마….” “장난 좀 쳤지. 어때. 아까 그 노예 돌아왔어?” 고개를 돌린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반쯤 벗겨진 셔츠를 여민 채 후다닥 달려온 여자노예가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를 껴안고 엉엉 우는 것을 발견했다. 노예를 샀던 사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는 낄낄 웃어버렸다.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딱히 해줄말이 없어서 난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때 놈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콜트.” “왜?” “잘해줘라. 그 아가씨 울리면 널 심험동물 대신으로 써버릴거야.” ========================================================================== 라이트 군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지도 모릅니다. Reload Running Fire: 61 “넌 거기 있어.” 이전에 아세트를 데리고 있을 때 내가 해주던 말이었다. 이 자식. 멋지게 한방 먹어버린 나는 쓰게 웃어줘버렸다. 라이트는 간간히 울음소리를 계속해서 들리도록 했고 소동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됐다. 잠에서 깨어나보니 스피릿은 아직 내 겨드랑이에서 조용히 자고 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첼시아가 날 반겼다. 라이트는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어제 그 노예와 주인을 쳐다보는지 모를 시선으로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때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냐.” “어.” “그럼 이제 가자. 내가 끼어들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콩을 볶아먹든, 감자를 구워먹든 난 이제 몰라. 사이좋은 주인님과 노예 만들기 동기부여는 이걸로 족해.” “너 오늘 꽤 멋있어보인다?” “난 마법사잖아?” 라이트는 히죽 웃어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준 나는 스피릿을 깨워서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몇일간의 노숙과 여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결국 페이크에 도착했다. 페이크는 별로 바뀐 것도 없었다. “그들의 가슴은 각자 다른 이유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아,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주체할수 없는 바람기의 소유자 콜트씨가 저지른 또 다른 불행의 덩어리가 이제 그들의 앞에 나타….” “작작해!” 차마 머리는 칠수 없어서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때려주자 첼시아는 비명을 지르며 곧 죽는 다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기가찬다는 듯이 그녀를 노려봐주니 이젠 퍼피를 앞세워 날 매도했다. “퍼피이~! 콜트씨가 나 때렸어! 주인님 맞았는데 가만 있을거야?” 퍼피는 울상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난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적당히 하지 않으면 정말 화낼거다?” “재미없네. 알았어. 그런데 어쩔거야? 바로 찾아갈거니?” 난 스피릿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돌렸다. “…여관에 방부터 잡자.” 첼시아는 뭐가 그리 좋은지 킥킥거리며 가까운 여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신전병원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젠장. 맘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데려올수 있겠다. 그러나저러나 어쩌지? 둘씩이나 데리고 다니면 눈치 보이는데. 적당히 데리고다니다가 루시아처럼 떠넘길까? 고개를 돌려보니 괜찮은 녀석이 하나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라이트. 그 아가씨 네가 좀 데리고 있지 않겠어?” “내가? 오, 싫어. 난 이제 아름다운 솔로의 삶을 즐길거야. 노예는 한동안 받지 않아. 그리고 사고 친건 너잖아? 그럼 네가 책임을 져야지.” “사람을 불안당으로 몰아가지마! 난 아무짓도 안했어!” “그건 본인의 입으로 들어보면 알겠지. 자. 방도 잡았겠다. 밥도 먹었고, 슬슬 데리러가야지? 미리 말해두지만 우린 한가한게 아니라고?” “제기~! 알았어! 간다 가!” 난 악다구니를 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두가 우루루 날 따라왔다. 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야? 왜 따라 오는건데?”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전 주인님과 함께 그 아가씨의 얼굴을 볼 의무가 있어요.” “당신 당황하는 모습을 꼭 보고싶어.” “칵! 첼시아 당신은 오지마!” “어머, 매정하여라~.” 첼시아의 화법은 처음에 들으면 귀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계속 듣고 있으면 뭔가 놀리는 것 같아서 화가난다. 어쨌든 그들을 이끌고 델린저의 신전으로 찾아간 나는 프리스트 하빈을 찾았다. 예배당에 있다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후다닥 달려온 그는 깜짝 놀라서 날 쳐다보았다. “다, 당신. 정말로 다시 찾아왔군요?!” “예. 약속은 약속이니까. 안젤라는?” 프리스트 하빈은 우리를 안젤라가 있는 병실로 안내했다. 방안을 두리건 거리던 첼시아가 물었다. “아무도 없는데?” “아, 잠깐 나갔나봅니다. 요즘은 성격이 많이 좋아져서 간혹 혼자서 산책도 나가고 그러죠. 찾아오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좀 기다리지요. 그런데 이건 아직도 그대로네. 다행이군.” 방안으로 걸어들어간 나는 방 중간에 꼿혀있는 은도금 롱소드를 만져보았다. 아직이야. 아직은 뽑으면 안돼. 나중에 안젤라 데리고 나갈 때 뽑아야 한다. 그것을 보고 있던 모두는 신기하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그건 왜 꼿아둔거야?” “이런 거라도 안남겨주고 그냥 가버렸으면 질질 짤 것 같았거든? 믿음에 대한 증표랄까?” 첼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신 좀 로맨틱한 구석이 있는데?” “주인님은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세요.” 스피릿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난 피식 웃어주며 날 믿어주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프리스트 하빈이 우리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저, 그 아가씨는?” “제 노예입니다. 이 녀석을 데리러 가느라 안젤라를 이곳에 맡겨뒀던 거지요. 뭐, 못생기진 않았죠?” “스피릿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빈은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리며 하얀 수련사 복장의 아가씨가 들어섰다. 문앞에 선 그녀는 방안에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라?” “주인님!” 문앞의 수련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치며 나에게 달려와서는 내 허리를 부퉁켜안아버렸다. 다큰 처녀가 달려와 매달리는 통에 하마터면 쓰러질뻔한 나는 겨우 중심을 잡고 내 가슴에 파고드는 수련사를 쳐다보았다. 안젤라 같기는 한데? 아닌 것 같기도? 그때 그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흐윽…. 저, 정말 돌아오셨어요. 주인님.” 으윽, 안젤라 맞구나. 그녀는 연신 훌쩍이며 무슨 내용인지 알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려댔다. 대충 내가 돌아와서 기쁘다는 내용인 것 같다. 그녀를 잠시 어르고 달래어 준 나는 안젤라를 침대에 앉혔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덕분에 애를 좀 먹었다. 믿을 수 없지만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고요한(?) 분위기의 수련사 아가씨가 안젤라라고 한다. 옆에서 은근히 느껴지는 스피릿의 눈빛을 애써서 무시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 너 정말 안젤라야? 안젤라는 좀더 동글동글한 얼굴이었는데?” “임신했을 때의 붓기가 빠져서 그래요.” “그래? 못알아봐서 미안. 난 이렇게 예쁜 얼굴이었는지 몰랐어.” “아뇨 괜찮아요. 주인님이 다시 돌아오신 것으로도 전… 전… 흐으윽….” 안젤라는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고 난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달래야 했다. 첼시아는 꼴좋다는 듯이 날 쳐다보고 있었으며 라이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참 재주도 좋다는 이야기를 연신했댔다. 프리스트 하빈과 퍼피는 말없이 서있기만 했고, 그 와중에 스피릿은 나를 도와 안젤라를 달래는 것을 거들었다. 거참, 기분 묘하네. 화를 내도 할말 없는 마당인데. “울지 말아요. 아가씨. 자 눈물 닦고….” “어, 흐윽, 흑… 예에.” 어른스러운 얼굴과 행동에 안젤라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얼른 눈물을 그치고 엉망이된 얼굴을 추스렸다. …그게 아니면 스피릿이 고의적으로 의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피릿은 겉으로 보면 엘프만큼이나 아름답고, 또한 상식적이며 어른스러운 생각을 가진 머리좋고 도도한 아가씨 같지만 좋아하는 사람앞에서는 어리광도 부릴 줄 알고 떼도 쓰는 순하고 귀여운 면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사실일 뿐이고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전직 공주님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상당히 음험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일부러 안젤라에게 접근해서 거리감을 좁히다니, 그녀는 나 같은 놈만 만나지 않았다면 자기 힘으로 나라를 되찾는 일에 일조했을 지도 모른다. 대략 상황이 정리되고 난 그녀에게 스피릿을 소개해 주었다. “전에 내 노예가 누군지 궁금했었지? 스피릿이야.” “잘 부탁해요. 안젤라.” “아, 예. 예에.” 안젤라는 고개를 꾸벅이며 내 옆에 바싹 붙어선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안젤라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모기만하게 입을 열었다. “괴, 굉장히 예쁘세요. 주인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어마, 아니에요. 주인님은 저 더러 호박이라고 자주 놀리시는 걸요?” 호박…! 내가 언제?! 라는 식으로 쳐다봐주었지만 스피릿은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자기 한테 맡겨 달라는 건가? 으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옆에 서있는 하빈 크로우를 쳐다보았다. “그간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데려가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이런 말은 안해도 되지만 예의상 해야한다. 저쪽에서도 딴에는 신경 많이 쓴 것 같으니까. 하빈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 하지만 저로서는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가겠다면 당신에게 맡길 것이고, 남겠다면 델린저의 프리스티스로서 희망과 절망 양쪽에서 모두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습니다.” 양쪽에서 벗어나? 아, 그렇지. 델린저의 프리스트는 신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델린저가 나누어주는 희망과 절망의 그늘에서 벗어난다고 입실론의 하이 프리스트가 자주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구만, 지금 수련사 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녀도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름대로 생각한 것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안젤라와 이야기중인 스피릿의 어깨를 두드려 첼시아와 퍼피, 라이트와 함께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게 했다. “주, 주인님?” “넌 거기 있어.” “예에에?!” 나도 문가로 걸어가서 섰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건강한 것을 보니 기쁘다. 생각보다는 나름대로 잘 생활하고 있었던 것 같아.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야. 밑도 끝도 없이 이상한 소릴하는 날 탓해도 좋아. 하지만 질질 끄는건 성격상 안맞거든? 지금 우린 바빠. 그래서 네게 더 이상 신경쓰고 있을 시간이 없어. 안젤라. 그러고보니 수련사 복장이 잘 어울리는 구나. 프리스티스의 성복을 입으면 더 예쁠거야. 내가 볼때 넌 여기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델린저의 프리스티스가 되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고민을 풀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보여. 아직도 나 따라갈 생각있는 거야? 나 따라오려면 각오해 두는게 좋아. 너보다 예쁜 노예가 곁에 있어서 많이 신경써주지도 못하고 돈 벌러 다닌답시고 위험한데로 막 끌고 다닐수도 있어. 또 만에 하나 내가 죽어버린다면 넌 다시 노예로 팔려다니면서 고생할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다면 거기 있는 롱소드 뽑아가지고 요앞 분수대로 나와. 절대로 누군가가 도와줘서는 안돼. 네가 뽑아가지고 나와야해. 아니면 선물로 남겨 줄테니 가지고 다니면서 절망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구해줘. 직접 구해주지는 못해도 너라면 좋은 이야기 정도는 해줄 수 있을테니까.” ========================================================================== 눈 아프시죠? 아직 많이 남았는데. 쉬었다가 보심이? Reload Running Fire: 62 “노예가 아닐때도 당신만 바라볼 수 있는 결심이요.” 손을 흔들어준 나는 문을 닫으며 말했다. “딱 1시간 기다려 줄게. 네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잘 생각해봐. 그리고 프리스트 하빈. 안젤라를 잘 부탁합니다.” “주인님! 저, 저는…!?” 탁! 문을 등지고 선 나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보고있던 첼시아는 박수를 치고 있었으며 라이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먼저 몸을 돌리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서 스피릿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화가 좀 난 것 같다.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당신만 기다려온 사람에게.” “나만 기다렸다면 그건 멍청이야. 정신이 썩은 병신이라구.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건 바보야. 아무리 믿을 수 있다고 해도 최악의 경우는 생각해 두고 있어야지. 안젤라는 다행스럽게도 내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난 기회를 준 거야. 노예의 특권인 선택의 기회를 말이지.” “콜트 이제보니 멋진데?” “난 원래 멋진 놈이야. 뭐야? 주인님 방식이 맘에 안들어? 네가 안들면 어쩔거야? 이리와. 넌 나 싫다고 해도 안놔준다.” 뚱한 표정을 하고 있던 스피릿을 끌어당겨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쳐올리고 있으니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무 불쌍해요. 이건 자기 앞날을 선택하는 거나 마찬가지 않아요. 그냥 데리고 나오셨으면 그런 고민 않해도 될 텐데. 안젤라도 수긍 했을 거예요.” “불쌍하긴 개코다. 스피릿, 넌 내가 안젤라하고 뽀뽀하는 거 보고 싶어?” “그,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냐. 솔직히 그런 생각도 없는 건 아냐. 난 안젤라가 여기 있었으면 싶어.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리고 불쌍한 안젤라를 위해서.” “주인님….” 스피릿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그래. 이건 결국 나 좋으라고 하는 것 일수도 있다. 안젤라만 없으면 속편하게 스피릿이랑 즐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말야. 난 노예에게 최소한의 선택의 자유는 보장해주고 싶다. 물론, 스피릿에겐 그런거 없다. “너무하세요.” “시끄러워. 신전에서 키스당하고 싶어?” 그녀의 어깨를 바싹 끌어당기며 말하자 스피릿은 아랫입술을 삐죽내밀고 고개를 돌렸다. 낄길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좀 쓰다듬어준 나는 정원에 있는 중앙 분수대로 내려가 그곳에 있는 벤치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라이트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보고 있었다. 첼시아가 물었다. “몇시에요?” “5분 남았습니다.” “그냥가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피릿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1시간 기다린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잠시 그녀를 쳐다본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쯤 해는 거의 져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난 스피릿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미련이 남은 눈이었지만 안젤라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인생은 그녀가 선택한거다.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하다. 나 같은 놈 따라다니며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고생은 우리 스피릿만 하면 족해.” “으응, 주인님은 저만 괴롭히세요.” “응. 난 스피릿이 괴로워 할 때의 얼굴이 제일 좋아. 울 때는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고, 화낼 때는 껴안주고 싶을 정도야. 나 좀 어딘가 이상한 것 같지?” “새디스트네?” “아니, 정확히는 메조키스트죠. 아마 스피릿이 때리면 더 좋아할걸요? 아아~ 좀더~! 좀더어!라는 식으로.” 안젤라가 있는 병원건물의 창문을 올려다보던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신전에서 이상한 소리들 하지말고, 이제 돌아가자.” “아으으으~! 배고프다. 저녁은 콜트씨가 사는거야?” “내가 왜? 가끔은 당신이 사!” “어머, 돈이 있어야 사지? 빨리 남은 돈이나 줘. 그럼 밥 살께.” “크으윽! 준다! 안 떼어먹어! 걱정마!” 가까운 거리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타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신전의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는데 퍼피가 뒤를 돌아보더니 이채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콜트님.” “왜?” “안젤라가 옵니다.” “뭐?” 나를 비롯한 모두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분수대가 있는 곳에 안젤라가 서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정문으로 향하는 우릴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주인님~!” 스피릿은 살짝 웃으며 날 쳐다보았지만 난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마침내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안젤라가 내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학학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그녀의 머리를 내려보고 있던 나는 어눌하게 말했다. “10분 늦었어. 따라오지마. 돌아가.” 안젤라가 번쩍 고개를 들더니 내 칼을 두손으로 들어보이며 잉잉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손가락에 저 물집 잡힌 것 좀봐. “카, 칼이 너무 세게 박혀있어서 저 혼자 뽀, 뽑아오기 히, 힘들었단 말이예요! 주인님~!” “약속은 약속이야. 잘있… 어윽?!” 옆에 서있던 스피릿이 팔꿈치로 허리를 있는 힘껏 찍어댔다. 두손으로 허리를 감싸고 스피릿을 노려보며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안젤라가 어눌하게 물었다. “안젤라 버리고 가려고 그러시는 거죠? 흐윽….” “콜트. 아가씨 울잖아. 어떻게 좀 해봐. 지나가는 사람들 다 쳐다본다. 이거 민폐라구.” “떼어두고 갈 건지 데리고 갈 건지 빨리 결정해. 아이 배고파.” 눈을 부릅뜨고 스피릿을 쳐다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안젤라가 들고있던 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허리에 차고 있던 빈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훌쩍이던 안젤라는 스피릿의 말에 고개를 들고는 두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고 난 그렇게 그녀의 손을 잡아 끌고 신전을 나섰다. 여관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방에 앉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요걸 이제 어떻게 하지? “차 드세요.” 문이 열리며 스피릿이 들어왔다. 그녀는 나와 안젤라의 손에 큼직한 찻잔을 내밀었다. 안젤라는 스피릿을 볼 때마다 어깨를 아래로 축 내렸다.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스펙이 높다는 것을 느끼는 건가? 으음…. 애가 순해서 루시아처럼 독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은 아니구나.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좀 편해지는데 말야. 지금 확실이 그녀와 내 관계를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앞으로 여러모로 불편하고 힘들거다. 이전에 루시아가 있을 때는 나와 스피릿이 관계가 좀 위험한 여동생과 오빠 사이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연인의 입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잠깐. 오빠? 여동생? 오호라! 이거 잘하면 문제가 쉽게 풀리겠는데? 고개를 돌린 나는 내 앞에 앉아서 눈치를 봐가며 후르륵 차를 마시는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안젤라 너 몇 살이라고 그랬냐?” “17살이요.” “그래? 난 23살이야. 내년이면 24살이지. 오빠라고 불러볼래?” “오, 오빠?” “그래!” 무릅을 탁 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 스피릿에게 내밀고는 억지로 그녀를 끌고 라이트의 방으로 들어갔다. “라이트!” “응? 남자 혼자있는 방에 아가씨들 데리고 쳐들오다니 자랑하는거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거 할수 있어?” “그거?” 난 안젤라의 손등에 박혀있는 노예문장을 보여주었다. “문장 팔수 있냐고.” “주문은 알고 있지만 레벨이 낮아서 스펠파워가….” “내가 준 거 있잖아.” 라이트는 안젤라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수있을 거야. 그래서, 안젤라양의 문장을 파달라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절망을 빼앗고 희망을 주겠다고 약속했어. 좋은 곳에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어. 하지만 지금 내 주제에 그런건 힘들어. 하물며 나한테 시집오려고 벼르고 있는 노예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마당에 안젤라에게 주인님으로서의 관심은 제한적일 수밖엔 없어. 애가 좀 간도 크고 겁이 없으면 그럭저럭 데리고 다니는데 어려움 없겠지만 안젤라는 너무 순해서 그게 안돼. 그래서 말야.” “문장을 파버리고 가족으로 삼아버리겠다? 음, 나이가 있으니 여동생 쯤이 되려나?” “그렇지! 스피릿, 네 생각은 어때?” 내가 고개를 돌리고 물어보자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죠.” “좋았어. 그럼 된거야. 라이트. 파줘.” “아니, 잠깐. 당사자의 의견도 물어야 하는거 아냐?” 라이트는 손가락을 들어 내 손에 끌려온 안젤라를 가르켰다. 스피릿도 그래야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난 얼굴을 있는대로 구겨 가장 험악한 인상을 지은 채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움찔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네 까짓게 싫다고 그러면 어쩔건데. 얌전히 내 동생이 되는거야. 싫다고만 했단봐. 약속이고 나발이고 이대로 신전으로 던져버릴테다.” “주인님! 안젤라 울어요~!” “헹! 울던웃던 난 몰라. 다른 놈이 데려가기 전까지 이 녀석은 내 노예야. 주인이 자기 노예 가지고 뭘하든 무슨 상관이야. 어이 마법사!” “불쌍한 안젤라양. 강제로 이런 놈의 동생이 된 것을 진심으로 동정합니다만 전 돈만 받으면 된답니다.” “아, 저, 저는… 저는….” “시끄러워. 나 따라오겠다고 했었지? 그럼 가만 있어. 이제와서 신전으로 돌아가서 프리스티스가 되니어쩌니 헛소리는 하지마. 넌 이제 도망못가.” 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바싹 끌어당겼다. 그리고 셔츠의 양 소매를 찢어버려 어깨를 드러나게 만들었다. 노예는 왼쪽 손등과 오른쪽 어깨에 마법으로 각인을 새겨두고 레벨 6단계 문장제거방지 탭을 걸어놓아서 보통 마법사는 제거 할 수 없다. 최소한 레벨 7단계 이상은 되어야 제거가 가능하다. 라이트의 마법레벨은 5단계. 하지만 드래곤 하트가 있으니 8단계까지의 마법은 가능하다고 들었다. 배낭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안젤라의 손등에 벽난로에서 꺼내온 숫조각으로 그림을 몇 개 그리더니 주문을 외웠다. 안젤라가 외쳤다. “주, 주인님. 저, 저는, 전 이대로도…!” “닥쳐!” 매섭게 외치며 그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줬다. 겁에질린 안젤라는 훌쩍이며 손등과 오른쪽 어깨에 있는 문장을 제거 당했다. 그렇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으니 당했다고 해야지. 녀석의 손을 꽉 붙잡은 나는 이제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싫어요.” “아직 말 않했어.” “이 참에 같이 지우자고 하실거잖아요? 안돼요. 전 이대로 있고 싶어요. 문장은 조금만 있다가 결심이 서면 그때 주인님께 지워달라고 부탁드릴게요.” “결심? 무슨 결심?” “노예가 아닐때도 당신만 바라볼 수 있는 결심이요.” “뭐? 어어이, 스피릿?” ========================================================================== 하지만 여자 마음은 갈대랍니다. Reload Running Fire: 63 “어머, 콜트씨 너무 매정한데?” 스피릿은 뒷짐을 진 채 빙글빙글 웃으면 먼저 나가버렸다. 내심 불안한 눈으로 그녀의 뒤를 쳐다보던 나는 쫓아가서 그녀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것 보다 더 급한 현실을 돌이켰다. “그래, 아직 요 녀석이 남아있었지?” 안젤라를 끌어당겨 앞에 놓은 나는 허리에서 나이프를 꺼내 그녀에게 들이댔다. 훌쩍이던 그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의 팔을 붙잡은 나는 엄지손가락에 날을 들이대 그어버렸다. “아윽…!” 당장 시뻘건 피가 바닥을 뚝뚝 흘렸다. 그것을 쳐다보던 나는 이제 내 엄지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빨간피가 솟아올랐다. “이리와.” 안젤라를 끌어당긴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내 혓바닥에 대고 슥 문질렀다. 찝찔한 피맛이 전혀진다. 반대로 안젤라에게 혀를 내밀게 한 나는 그녀의 핑크빛 조그만 혓바닥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이건 엘프들이 의형제를 맷을때 사용하는 의식이야. 뭐, 의남매를 맷을때 쓴다고 해서 별탈은 없겠지. 자, 안젤라 손 이리내.” 얼굴을 찡그리며 피묻은 혀를 입안으로 집어넣은 안젤라는 내가 시키는대로 손을 내밀었다. 생체기가 나서 피가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내 엄지 손가락을 가져다 댄 나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로서 너와 나의 피가 섞였으니 이제 우리는 남매다. 내 이름은 콜트 슈발츠. 너는?” “…….” 안젤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계속해서 물었고 안젤라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저, 전 당신에게 노예로서 귀여움 받고 싶었어요.” “난 지금 업고 있는 노예만으로도 벅차. 그런데 둘씩이나 데리고 다니라고? 등골휠지도 몰르겠다. 너 내 여동생하기 싫어? 노예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많이 귀여워해줄게. 그리고 이 다음에 좋은 사람 생기면 시집도 보내줄테니까 내 동생해라? 응? 자, 네 이름은?” “…저, 전 당신 아기를 가지고 싶었다구요.” 옆에서 이채로운 시선으로 쳐다보던 라이트가 그 소릴 듣고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난 얼빠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봐주다가 다시 물었다. “뭐, 뭐라고?” “제게서 아기를 빼앗아간 남자의 아이라도 가지고 싶었어요. 그, 그랬는데. 절 이런 식으로 떼어놓으시다니 너무하세요.” “에, 에잇! 시끄러워! 지나간 일 들추지마! 빨리 말해! 내 여동생 할거야 말거야!” 안젤라는 슬슬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에 결국 자기 이름을 말했다. “안젤라. 안젤라 리버마운트.” “안젤라 리버마운트. 콜트 슈발츠. 이 두사람은 사랑과 증오의 신. 미티어의 이름을 빌어 다른 배에서 태어난 자식끼리 남매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다됐다.” 그녀와 마주대고 있던 손을 떼어낸 나는 안주머니에서 검은 손수건을 꺼내 생체기를 입은 안젤라의 손가락에 조심스레 감아주었다. “넌 이제 내 여동생이야. 참고로 우리 가족사항에 대해 말해줄게. 어머니는 나 낳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13살 때 트롤 잡으러 갔다가 저녁식사거리가 되어버렸어. 갓난아기때부터 키워준 엘프노예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네 사람들이 마을회관 짓는다고 팔아버렸지. 참 따뜻한 고향인심이지? 그래서 난 혼자야. 친척도 없어. 혈육이라곤 여동생인 너 하나 뿐이야. 자, 오늘부터 네 성은 리버마운트가 아니고 슈발츠야. 안젤라 슈발츠. 어디가서 오빠가 누구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말해. 콜트 슈발츠라는 정신나간 모험가가 우리 오빠라고 말야. 자, 오빠라고 한번 불러볼래?” 가만히 날 쳐다보던 안젤라는 어색하게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오, 오빠.” “그래. 어이구 귀엽다. 우리 여동생.” 안젤라를 끌어안는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두들겨주며 말했다. 안젤라가 조금 놀랬지만 오빠랑 여동생 사이가 된 마당에 뭐 거리낄게 있겠냐? “그건 좀 위험한 생각인 것 같아. 근친상간이라고 아냐?” “시끄러. 내 나름대로 여동생에 대한 애정표현이야. 안젤라? 오빠가 뽀뽀해줄까?” “아, 어, …예에.” “응이라고 해야지?” 안젤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맣게 응이라고 대답했고 난 싱긋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안젤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쳐다보았지만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손을 내밀었다. 안젤라는 부담없이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그렇게 스피릿이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저 회색머리 아가씨는 오빠노예야. 예쁘지? 스피릿이라고 하는데. 배가 고프면 주인님 등에 매달려서 밥달라고 으르렁 거리니까. 안젤라가 지켜줘야해.” “…이젠 절 무슨 몬스터로 취급하시기에요?” 난 낄낄 웃으며 스피릿에게 안젤라를 소개했다. “잘부탁해. 숨겨놓았던 내 여동생이야.” 안젤라와 몇마디 주고 받던 그녀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늘 밤은 나에게 자릴 비켜달라고 했다. 덕분에 난 그날밤을 라이트의 방에서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자야했지만 좋게 마무리 된 것 같아 마음은 편했다. “식구를 점차 불리는군? 목표는 하렘이야?” “하렘아냐. 안젤라는 특별 케이스라구.” “그래서 이제 어쩔건데?” “뭘 어떻게해? 여동생처럼 데리고 있다가 적당한 사람 데려오면 시집보내야지.” “아까처럼 너랑 같이 산다고 안간다고 그러면?” “그럼 별 수 없는거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워버려야지. 그렇지. 네가 데려갈래?” 벽난로 앞에 모포를 깔고 누워있던 내가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침대에 앉아 달을 보고 있던 라이트가 킥킥 웃었다. “뭐, 좋아. 어차피 마법사에게 시집오겠다는 간 큰 아가씨는 없으니까. 전직 노예라는 핸디캡은 감수해야지. 데려가는 사람 없으면 내가 보쌈해갈테니 그리 알아.” 라이트의 농담에 난 낄낄 웃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 일어나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는데 스피릿과 안젤라가 함께 나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응? 안젤라 잘잤어?” “응. 오, 오빠는?” 스피릿의 눈빛에 어색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난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때 첼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안젤라를 보고 멍청한 표정을 했다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되물었다. “에엥? 오빠? 어떻게 된거니?” “여동생 삼아버렸어. 왜, 꼽냐?” “미쳤구나? 적당히 데리고 있다가 치워버릴 것이지 아예 동생으로 삼았다구?! 무슨 짓이야? 콜트씨 돈 그렇게 잘버니? 둘이나 먹여살리게?! 충고하는데 동정도 적선도 아량도 정도 것 하라구. 너 계속 왜 그러니? 나중에 가서 골치아파진다?” “그럼 어쩌라고? 내가 뿌린 씨앗이야. 내가 거둬야해. 데려가 달라고 질질 짜는데 그걸 버리고 가냐? 난 그 정도로 매정하지 못해. 아침부터 열받긴 하지만 그 정도는 조언으로 받아주지. 어차피 모험가는 목숨값으로 벌어먹고 사는 거니까 돈 걱정은 않해. 안젤라? 스피릿? 아침먹고 옷사러가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스피릿과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첼시아는 내 행동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시큰둥한 얼굴로 팔짱을 하고 있다가 말했다. “노예들 옷 사줄 돈 있으면 잔금이나 빨리 줘.” “안떼어먹어. 아침먹고 은행에 들렸다가 가자. 돈 찾아 줄테니까.” 첼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라이트가 내려오고 아침을 시켜먹은 우리는 준비가 끝나는 대로 은행을 찾아갔다. 그리고 남은 통장에서 돈을 찾아 첼시아의 잔금을 치러주었다. “약속했던 입막음 100만 루나는 안주니?” “…네 입방정 때문에 입막음이고 뭐고 다 들킨거 생각안나?” 그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으르렁 거려주니 첼시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짠돌이 어쩌고 중얼거렸다. 은행에서 나와 옷가게로 가려니 첼시아가 말했다. “그럼 돈도 받았겠다. 이 쯤에서 헤어지자.” “뭐? 수도까지 갈거 아냐?” “아냐. 거기만 사람 사는 데니? 여기도 사람 사는데야. 사람사는 곳이면 우리같은 사람들의 돈벌이도 꽤 있는 법이지. 요렇게 한가한 지방도시는 도망자들이 숨어지내기 딱 좋은 곳이거든? 우린 한동안 여기서 영업할 생각이야. 벌써 우리가 있던 여관에서도 먹잇감을 봐뒀다구.” 첼시아는 안주머니에서 몇장의 현상수배전단지를 꺼내 뒤적거리다가 한 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강도살인범 현상금은 500만 루나. 이름은 잭 필드. 헤에~? 짭짤하다? 두당 500이야?” “그건 싼놈이야. 사람 대여섯 죽이면 값은 더 올라가지.” “호오~ 나도 여기서 현상금 사냥꾼으로 전업할까?” “안돼. 같은 업종에 동업자가 많으면 돈벌이가 안돼. 당신은 몬스터나 잡으러 다녀.” “칫~! 아까운데.” 첼시아는 고개를 돌려 라이트와 인사를 나눴다. “이왕이면 수도까지 함께 했으면 싶었는데. 여기서 헤어지는군요. 아쉬워요 첼시아.” “어머, 그건 이쪽에서 하고 싶은 말이에요. 마법사는 우리쪽에서도 요긴하게 쓰인다구요. 어때요? 저기 여자 밝히는 친구보다 우리랑 같이 다니는게?” 라이트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이번에 수도 마법사 길드에서 레벨 승격시험도 있어서 수도엔 꼭 한번 들려야해요. 그래서 이놈 바래다 주는 김에 같이 가려고요.” “그럼 시험보고 오면 되겠네. 우리가 여기서 기다릴테니까.” “어? 정말 그래도 되요?” 라이트는 첼시아와 죽이 맞아서 차후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댔다. 음, 그러고 보니 난 어쩌지? 수도에 가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가려니 막막하다. 집은 박살나버렸지. 수도에서는 나 같은 괴물퇴치 전문은 할 일이 별로 없던데. 으음… 일단 수도에 가서 생각해 볼까? 여긴 안젤라에게 여러모로 않좋은 기억이 많은 곳이니까. 그러고 있으니 첼시아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동안 즐거웠어.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겠지.” “도와줘서 고마워. 하지만 다시는 만나지 말자 우리.” 첼시아는 킥킥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머, 콜트씨 너무 매정한데?” “시끄러. 어서가버려.” 손을 놔준 첼시아는 이제 안젤라와 스피릿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다. “불쌍한 안젤라.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니? 저런 몰상식하고 개망나니와 의남매가 되어버렸으니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지내렴. 콜트씨는 생각외로 좋은 사람이야. 매정하지 못한게 흠이긴 하지만. 그리고 스피릿, 앞으로 주인님의 사랑을 받고 살려면 저 바보가 앞으로 다른데 한눈 못팔게 만들어야해. 알겠지? 이 이상 사람이 늘어나면 괴로운 건 너뿐이라구.” “조언 감사합니다. 첼시아님.” “어머, 전 공주님께서 그러시면 안돼. 그냥 첼시아라고 불러.” ========================================================================== 첼시아의 이름은 내마엘에서 따왔습니다. Reload Running Fire: 64 “안녕히 주무셨어요?” 스피릿은 살짝 미소를 지었고 첼시아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코를 벌렁거리고 있던 나는 퍼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잘 데리고 다녀. 몇일 굼기면 노예 잡아먹겠다고 덤벼들지 모르니까.” “…예. 잘알겠습니다.” 퍼피는 첼시아의 은근한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첼시아는 라이트에게 다음에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몸을 돌려 걸어가버렸다. 잠시 자기보다 큰 키의 노예와 팔짱을 끼고 한가롭게 대로를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 생활 계속하다보면 또 만나겠지. 가자. 우린 우리대로 할일이 많아.” 스피릿과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으윽, 두사람이라니 부담된다. 옆에서 보던 라이트가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총각, 자네는 여난의 상이 보이는군.” “빌어먹을, 정작 피끓는 나이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왜 이제 쏟아져 나오는 거야?” 내 으르렁거림에 두 아가씨는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스피릿이 은근슬쩍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기회는 만인에게 평등하대요. 문제는 사람의 의지가 약해서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끝까지 거머잡지 못한다는 것에 있지만, 주인님은 끈질기게도 그 기회들을 잡고 늘어지신 덕분에 이렇게 복 받으시는 거죠.” “복? 불행이 아니고?” 그러자 왼쪽에서 걷고 있던 안젤라가 내 남은 빈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오, 오빠는 제가 불행으로 보여요?” “으윽…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니 가슴이 아픈데. 안젤라. 오빠야가 농담 좀 한거 같고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줘.”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안젤라는 희미하게 웃어버렸다. “오, 안젤라가 웃었어. 아주 예쁜데?” 난 낄낄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안젤라는 눈을 꾹 감고 내가 머리를 만져주는데로 가만히 있었다. 성문으로 가는 길에 시장에 들려 안젤라와 스피릿이 입을 옷을 사고, 여행에서 먹을 식료품도 구입한 우리는 그 길로 성문을 나서서 수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겨울 바람을 맞으면 달린지 사흘 째 되는 날밤. 우리는 결국 수도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푸에췻~!” “콜록콜록~!” “일행 분들이 감기에 걸리셨군요?” “아, 어제 비올 때 노숙을 했거든요.” 라이트가 우릴 대신해서 검문을 받았다. 스피릿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맹맹~.” “저, 저두요오… 콜록콜록~!” 옆에 서있던 안젤라도 코가 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있으니 라이트가 경비병들에게 인사를 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모두를 이끌고 성문을 통과해 수도로 들어갔다. 대로로 들어가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돌리고 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라이트는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나중에 안젤라 시민증 만들어줘야겠다.” “그럴생각이야. 문장만 지웠다뿐이지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니까. 어, 으, 에췻!” “주인님 괜찮으세요?” “어, 응. 괜찮아. 어흐~! 춥다. 일단 어디 좀 들어가자.” 옆에서는 안젤라도 연심 기침을 해댔다. 아까는 연극이 아니라 정말 감기에 걸려있었다. 젠장, 안젤라는 겨울여행 처음이니 그렇다치고, 난 왜 걸렸지? 자다가 비온다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그런건가? 푸에췻~! “어, 저기 여관 있다. 가자.” “누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훌쩍, 어, 별로 변한건 없구나. 여기는.”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쉽게 변하지 않지. 어서가자.” 가로등이 켜져있는 대로를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라이트가 날 불렀다. 스피릿의 부축을 받아 그를 따라간 나는 방을 잡자마자 바로 침대로 쓰러졌다. 보통은 2인실 두개를 얻어서 남자여자 따로 썼지만 이번은 환자가 있기 때문에 4인실을 빌렸다. 난 침대에 얼굴을 박고 중얼거렸다. “어으… 이젠 열까지 나네. 염병.” “하레이에서 뱀파이어랑 싸운다고 좀 무리했냐? 저녁은 가져다 줄테니 푹 쉬어.” “오, 그래 고맙다. 스피릿, 그러지 말고 너도 내려가서 씻고 밥먹어. 안젤라도.” 내 부츠와 옷을 벗기던 스피릿은 마저 벗기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옆에는 안젤라도 거들겠답시고 내 자켓을 붙잡고 용을 쓰고 있다. 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여동생도 하나 생겼고, 예쁜 노예도 얻었고, 부자가 된 기분이야. 지금이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어머, 벌써 그런 말씀하시면 싫어요.”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에츄~!” 난 큭큭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아~ 힘빠진다. 깜빡 잠이들었나보다. 깨어나보니 옷을 갈아입은 스피릿과 안젤라가 날 일으켜 세워 음식을 떠먹여주었다. 그때 라이트가 들어오더니 조그만 실험관을 스피릿에게 내밀었다. 거, 색깔한번 멋지네. 난 인상을 찌뿌리며 말했다. “…감기약이지? 안 먹어.” 스피릿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약이에요. 왜 안드겠다는 거예요?” “아냐, 독약일거야.” “기껏 생각해서 약 만들어오니까 이 놈이 신경긁네. 몸살이잖아? 약 안먹으면 고생 좀 하게 될 걸?” “싫어. 그거 저번에 먹었던 감기약하고 같은거지? 안먹어. 그냥 아프고 말거야.” 이 전에도 감기에 걸려 고생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라이트는 저런 실험관에 약을 담아가지고 왔었다. 약을 먹고 그날 밤 내가 격어야 했던 것은 상상이상의 고통이었다. 이 나쁜놈, 내가 실험동물이야? 그런 검증도 마약을 먹이게? 내가 안먹겠다고 버티자 라이트는 병든 닭마냥 힘없이 움직이는 안젤라에게 같은 약병을 권하고 있었다. 으악! 안돼! “감기약이에요. 그런 몸으로 간호한다고 버티지 말고 푹 쉬어요. 당신은 이제 노예가 아니니까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어요. 게다가 이젠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구요. 당신에겐 이제 챙겨줄 주인님이 없다는 걸 알아요. 뭐, 멍청한 오빠가 하나 있을 뿐이지만 그것도 별 쓸모는 없으니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아요.” 누가 별 쓸모가 없다는 겨!? 이 바보 마법사가?! “아, 예. 가, 감사합니다. 라이트씨.” “어허~! 나이 차도 많이 안나는데 아저씨처럼 부르지 말아요. 전에 가르쳐줬잖아요?” 라이트가 헛기침을 하며 그녀를 쳐다보자 안젤라는 고개를 돌리고 조그맣게 라이트 오빠라고 불러주었다. 라이트는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다. “아, 안돼… 그거 먹으면… 아, 안젤라아아.” “에잇! 가만히 좀 누워계세요! 어딜 일어나시는 거예요?” “으윽, 스피릿~! 저, 저거 말려~! 큰일나아.” “히끅~!” 하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실험관에 든 약을 꿀꺽 삼킨 안젤라는 갑자기 딸꾹질을 한번 하더니 연신 히히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라이트의 품으로 쓰러졌다. 아뿔사~! 스피릿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라이트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효과는 좋지만 부작용이 있어요. 약에든 환각제 성분 때문에 아마 지금쯤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기분일 겁니다.” “이, 이이… 내, 내 여동생에게 감히 향정신성의약품을 먹이다니… 용서못해!” “우울한 세상살이를 감기약의 환상으로나마 좀 등져보게 해주겠다는데 너무 그러지마. 스피릿, 중독성은 없으니까 걱정말고 약은 꼭 먹이세요. 그럼 전 좀 씻고 오겠습니다.” 라이트는 안젤라를 침대에 눕혀주고 방을 나갔다. 스피릿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팔과 다리를 까딱이는 안젤라를 걱정스러운 듯이 쳐다보고는 물었다. “저, 정말 괜찮을까요?” “아이고… 삭신이야. 어, 응. 한번 먹어봐서 알아. 효과는 좋아. 하지만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아. 그 약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구.” “뭔데요?” 난 낯뜨겁다는 얼굴로 대답을 회피했다. 스피릿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런데 좀 의외에요. 주인님이 병에도 다 걸리시구.” “난 뭐 강철로 만든 사람인 줄 알아? 어… 에췻~!” “예, 전 주인님이 강철로 만든 사람일거라고 생각했어요. 늑대인간의 발톱에 맞고 좀비에게 물리고 뱀파이어와 싸우고 해도 전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못해봤거든요? 언제나 제 곁에서 익살스럽게 웃고 계실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오늘보니 주인님도 사람이세요. 감기 같은 거에도 걸리고, 아파서 우는 소리 하시는걸 보니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어버렸다. “귀여울 나이는 이미 지났는데.” “저도 그런 나이는 지났어요. 하지만 주인님은 절 귀여워 해주시잖아요?” “그거랑 이거랑은 틀리다고… 에췻~! 어, 훌쩍, 생각해. 어이구 머리야. 웅웅 울린다.” “많이 아프세요?” “으응… 내일은 못움직이겠어. 아으으.” 그러고 있으니 스피릿이 안젤라의 침대를 쳐다본 다음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슬쩍 다리를 들어 내 허리 위에 걸터앉더니 날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주인님, 요새 주인님이랑 저랑 대화가 좀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엉?” 이런 각도로 보는 그녀는 꽤 오랜만이었기에 난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두근 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스피릿을 올려다보았다. 가슴앞으로 늘어지는 회색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와 입술을 맞췄다. 두 팔을 들어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더듬으려 하고 있는데 혀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윽…. 이, 이건…. 이윽고 스피릿이 고개를 들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내 코를 붙잡았다. “후후후. 깜빡 속으셨죠? 입안에 있는거 전부 삼키세요.” “으으읍! 꿀꺽… 으, 으아~ 나, 날 속였어! 이 거짓말쟁이!” “예. 저도 주인님 사랑해요. 자, 삼키셨으면 이제 입가심으로… 히끅!? 어, 어머?” 딸꾹질을 한 스피릿은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눈 앞이 핑핑 돈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윽! 바보! 자기도 그걸 먹으면 어떻해?! 이윽고 스피릿은 내 가슴위로 쓰러져 정신나간 사람처럼 헤헤헤 웃어댔다. 그리고 나도 점점 머리가 도는 기분을 느꼈다. 라, 라이트으으! 이걸 감기약이라고 만든거야?! 정신나간 마법사 같으니!! …그나저나 녀석이 들어와서 스피릿이 내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으윽….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머리가 한결 맑은 기분을 느낄수 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효과는 좋다.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이 조용한 표정을 지으며 내 가슴 위에서 잠들어있다. 으음, 그대로 잠들었나보네? 그녀의 등에 담요가 덮여있는 것으로 보아 라이트 놈이 덮어줬나보다. 고맙긴 한데 좀 쑥스럽군. 고개를 돌려봤지만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갔는지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안젤라는 아직 잠들어있고, 좀더 자고싶었지만 만약에 안젤라가 지금 우리 모습을 본다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훌쩍 댈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스피릿을 밀어 몸을 빼냈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그녀가 깨어나버렸다. 스피릿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나에게 아침인사를 건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응.” ========================================================================== 향정신성의약품은 심신을 해롭게 합니다. 작품에는 그냥 재미로 등장시켜 봤습니다만, 재미로 그런거 하지 마십시오. Reload Running Fire: 65 “주인님 아~ 해봐.”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 기지개를 켠다음 배낭을 뒤져 갈아입을 속옷을 찾았다. 스피릿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뭘 찾으세요?” “어, 응. 그, 뭐냐. 소, 속옷. 좀 젖어버렸거든?” 그렇다! 망할 라이트 놈의 감기약은 처음엔 천국과 같은 환상을 보여주다가 나중에 가서는 꼭 망측한 꿈을 꾸게하여 몽정을 일으킨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녀석에게 따지러 갔지만 녀석은 그게 바로 건강한 증거 아니겠냐고 깔깔 웃어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땐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몰라. 젠장. 그나마 스피릿이라서 다행이다. 안젤라가 뭘 찾냐고 물었다면 꽤 설명하기 힘들었을 거야. 어색하게 속옷을 찾아 꺼내고 있으니 스피릿이 두 다리를 모아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저, 주인님 그, 제, 제것도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엉?” 스피릿은 얼굴을 좀 상기시키며 나와의 시선을 피했다. 으윽~! 저 표정, 설마? 스피릿은 부끄럽다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대며 중얼거렸다. “꾸, 꿈에 주인님이 나오시더라구요. 그, 그래서….” 그녀의 몸짓에 가슴이 뜨거워져 버린 나는 그녀의 속옷까지 찾아서 가져다 주었다. 이, 이거 참, 알거 다아는 사이인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보시면 안돼요?” “어, 응.” 방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나와 스피릿은 서로의 등을 돌리고 속옷을 갈아입었다. 기분 묘했다. 그냥 뒤로 돌아 덮쳐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등뒤에 안젤라가 침대에 누워있는 마당에 그랬다간 완전히 찍혀버릴 것 같아 자제를 했다. …음, 하지만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저, 저는 언제든지 좋아요.” 스피릿이 내 허리를 꽉 껴안으며 말했고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나는 정말 키스만 하자는 다짐을 하며 뒤로 돌아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침대로 쓰러졌다. “주인님. 나의 주인님, 조, 조금만, 조그만 더 세게 안아주세요. 으윽~!” “스피릿… 사랑하는 내 노예. 으음….” 담요를 뒤집어쓰고 오랜만에 그녀와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는데 끼릭하며 문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윽~! 누구야?! 라이트? 으악! 이런 거 정말 싫어어! 난 움찔하며 그녀를 끌어안고 호흡을 멈췄다. 내 목을 껴안고 있던 스피릿도 입을 꾹 닫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라이트의 얼빠진 음성이 들려온다. “어? 뭐야? 아직도 않일어났나? 어어이~ 나 잠깐 길드에 다녀올게. 어디가지 말고 여기 있어?” 라이트는 잠결에라도 들으라고 이야기 해준 것 같은데 하마터면 알았다고 말해줄 뻔했다. 탕…! 문이 닫혔다. 스피릿은 킥킥 웃으며 내 가슴을 콕콕 찔러댔고 난 담요 밖으로 눈만 조금 내밀어 동정을 살핀 다음 풀어헤친 그녀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꺅~! 주인님 간지러워요어~! 후후후~!” “으응~! 스피릿 오랜만이잖아? 도망가지 말고 이리와. 한번 안아보자.” “안돼요. 안젤라 깰지도 몰라요? 그래서 오늘은 키스만이에요.” “어, 그럼 내일은?” 내 가슴 위에서 몸을 일으킨 스피릿은 머릿수건 마냥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안젤라를 힐끔 살핀다음 입가에 손을 대고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했다. 아으으~! 이거, 스릴 만점이구만. “…상황 봐가면서요.” “난 지금 널 안고 싶어, 스피릿.”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난 그녀의 엉덩이와 허리를 만져댔다. 하지만 스피릿은 입가에 손가락을 세우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주인님께 안기고 싶어요. 하지만 안돼는 건 안돼요. 힘껏 참아보세요. 아셨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피릿의 입술을 느끼며 난 한순간이나마 안젤라가 이 방에 없었으면 하는 못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사람이라는게 참 줏대 없는 녀석이라는 것을 깨닳는 순간이었다. 나름대로 스릴 넘치는 순간을 즐기며 아침을 맞이한 그녀와 나는 홀로 내려가 아침을 먹고 좀 씻은 다음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스피릿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좀하기 위해서다. 감기약(?)의 약효는 내가 어제 몸살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말끔히 잊게 해주었다. 그래서 상쾌한 기분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맨 처음 보이는 것은 속옷을 반쯤 걸친 안젤라의 예쁜 엉덩이였다. “여어~! 안젤라 아직 자… 우왁?!” “어, 아으으~! 보, 보면 안돼요.”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돌린 나는 이마를 좁히고 더불어 눈썹을 꿈틀거리는 스피릿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알지? 이건 사고야.” “예. 뭐, 이해는 가지만. 좀 당황스럽네요. 호하하….”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안젤라 엉덩이는 얼마나 예쁘더냐고 내 볼을 붙잡아 좌우로 늘이며 물었다. 결단코 아무것도 못봤다고 뻣대고 있으니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난 헛기침을 하며 들어갔다. 안젤라는 자신의 배낭안에 뭔가를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뭐, 뻔하다. 속옷이겠지. 갑자기 라이트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오른다. “안젤라 괜찮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안젤라는 날 보더니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예. 괘, 괜찮아요.” “얼굴이 빨간데? 어디 아픈거 아… 어윽?!” 스피릿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팔꿈치로 쿡 찔렀다. 아프다는 듯이 그녀를 좀 쳐다봐준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안젤라 여기와서 앉아와. 오빠가 해줄 이야기가 있어.” “무, 무슨 이야기요?” 테이블에 앉은 나는 그녀에게 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냐?” 안젤라는 잠시 머뭇대며 나와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젤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안젤라, 안젤라 슈발츠요.” “그렇지? 넌 내 여동생이야. 가족이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날 대할 때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마. 그냥 친 오빠처럼 생각해. 그게 편할거야. 어차피 책임져주겠다고 했으니 거짓말은 안해. 알겠지?”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참에 스피릿에 대한 것도 그녀에게 못박아 두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나를 두고 그녀를 의식하고 있는 안젤라의 작은 희망까지 깨어질 것 같아 그냥 놔두기로 했다. 이젠 앞으로가 걱정이로구나.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라이트가 돌아왔다. “뭐하러 간건데?” “마법능력 갱신 및 레벨승격 시험보러.” “뭐? 그런 걸 그냥 막 보러가도 되는 거야? 뭐 정해진 날짜에 보러 가는거 아냐? 시험처럼 말야.” “으응, 상관없어. 정해진 기한 내에 보러가면 되니까. 어라? 아가씨들은?” “목욕하러 갔어. 어제 못했다고, 그런데 어땠어? 잘됐냐?” 이 물음에 라이트는 히죽 웃으며 면허증을 같은 것을 내밀었다. “쨔잔! 하하하~! 나도 이제 레벨 6급 마스터야. 하하하~!” “호오~! 딴거야? 대단한데?” 라이트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는 고개를 쳐들고 깔깔 웃어댔다. 녀석에게 듣기로 마법사의 레벨승격 방법에는 그 사람의 주문 습득방법에 따라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올마스터 시험으로 한 급수의 마법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의 주문의 활용도를 평가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런너 마스터라고 하여 각 급수의 수위를 마스터, 익스퍼트, 런너, 세 가지 단계로 정해놓고 알고 있는 단계까지의 주문에 대한 활용도에 대하여 평가하는 거라고 한다. 오오, 그럼 아레프는 후자 쪽의 런너 마스터인가? 라이트는 올 마스터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법사 길드에 널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던데. 만나봤어?” “누구? 아, 저번에 통신했던 그 친구? 아니, 못봤는데? 이왕 수도에 온거 나중에 한번 만나러 가자. 몸은 괜찮아졌지?” 난 얼굴을 찌뿌리며 말했다. “물론이다. 그런데 그거 않하게 만들면 안돼냐?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속옷이 젖어있으면 얼마나 찜찜한 줄 알아?” “하지만 꿈속에서는 죽여줬잖아? 않그래?” “이 변태 마법사 놈아. 솔직히 말해봐. 네가 마실려고 만든거지? 그렇지?!” 녀석의 목을 붙잡고 흔들고 있으니 스피릿과 안젤라가 들어왔다. 볼과 빨갛게 물든 그녀들은 날 보자마자 배고프다고 칭얼거렸고 난 한숨을 내쉬며 그녀들을 이끌고 홀로 내려갔다.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고 있으니 라이트가 물었다. “그래서 어쩔거야? 여기서 살거냐?” “뭐, 지금 생각 중이시다. 집만 박살나지 않았으면 그냥 살면 되는데 말야.” 스피릿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희 집이 박살 났어요?” “응, 박살 났어. 넌 그때 잡혀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구나. 밥 먹고 가보자. 안젤라? 오후엔 오빠가 마법사 길드 소개시켜 줄게.” “어, 예.”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머리를 좀 긁으며 말했다. “안젤라. 오빠한테는 반말해도 돼.” “예. 예에? 반말이요?” “쓰읍~! 하라면 해.” 설명하기 귀찮아서 강압적으로 말해주자 안젤라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그래. 안젤라 귀엽다.” 그때 스피릿이 냉큼 끼어들었다. “주인님 그럼 저도 말 놓으면 안돼요? 꼭 해보고 싶은데.”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그녀를 쳐다봐 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좋아. 안될게 뭐있겠냐. 그럼 오늘하루만 시험삼아 해봐.” “정말? 주인님 고마워.” 옆에서 지켜보던 라이트가 풉하고 웃더니 고개를 돌리고 연신 큭큭거렸다. 스피릿의 장난스런 말투에 안젤라도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당사자인 나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며 새실새실 웃고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점심이 나오고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스피릿에게 반말을 해도 좋다고하니 대강 이런 식의 식사 분위기가 펼쳐졌다. 그녀가 자기 소지시를 썰어서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주인님 아~ 해봐.” ========================================================================== 반말하는 노예, 신선하군요. Reload Running Fire: 66 “아, 루시아는 잠깐 시장보러 나갔습니다.” “어, 그래. 음.” “오, 오빠. 내 것도….” 내가 스피릿의 포크를 받아먹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안젤라가 대뜸 자기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잘라 내밀었다. 그녀의 용기를 무시할 수 없었던 나는 그것도 낼름 받아먹었다. 고기와 야채를 야금야금 씹으며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나는 라이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거 영 기분이 묘한데에?” “어머, 주인님 어딜보니? 이것도 먹어. 많이 먹어야 건강해지고 힘낸다?” 라이트는 뭐가 그리 웃긴지 밥을 먹다말고 푸하하 웃어버렸다. 안젤라는 귀여운데 스피릿에게 반말을 들으니 영 찜찜하네. 어쨌든 밥을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모두를 데리고 여관을 나서서 이전 우리들의 집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비가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도시는 청명했다. 햇빛도 따사롭고, 봄바람이 솔솔 불어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것이 마냥 기분 좋다. 뭐, 박살난 집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거다. 시청에서 치우긴 했는지 파편이 여기저기 모여있긴 했지만 그을리고 부서져 앙살한 뼈대를 드러낸 집은 그대로였다. 그걸 본 스피릿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어, 어머나….” “파이어 볼이 안쪽에서 폭발했구나. 다 박살 나버렸는 걸?” 역시 마법사. 라이트는 폐허가 된 집안으로 휘적휘적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의 발치에서는 안젤라가 쪼그려 앉아 깨진 그릇과 반쯤 탄 옷가지를 꺼내 들어보며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한숨을 조금 내쉬며 고개를 돌린 나는 우울한 얼굴로 내 팔에 기대어 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속상하지?” “예. 속상해요. 주인님과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는데. 정말 좋았는데.” “지나간 일은 잊어. 다 박살 나버렸는데 뭘 어떻게 해?” 그녀를 내버려두고 파편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간 나는 잔해를 뒤져 그릇과 옷가지를 찾아내고 있는 안젤라에게 물었다. “가져갈거냐?” “예? 아, 아뇨. 그냥, 주인… 아, 아니 오빠와 언니의 추억이 담긴 곳이라기에.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훔쳐보고 싶어서.” 난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안돼. 추억은 추억 속에 남겨둬야지. 그걸 현실로 꺼내면 마음만 아파. 그런 건 그냥 내버려둬, 우리들의 기억과 추억은 이제부터 만들면 되니까.” “우리 콜트는 언제나 명언을 한다니까?” 반쯤 타버린 옷장에서 말끔한 드래스를 꺼낸 라이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햇빛에 비춰진 파란 드레스는 예전에 내가 처음 스피릿에게 사줬던 거다. 라이트는 그것을 잘 갈무리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에 못박힌 듯이 서있는 스피릿에게 다가가 그것을 안겨주었다. “부숴졌으면 다시 만들면 돼요. 씁쓸하겠지만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이건 기념으로 가지고 있어요.” “아, 고, 고마워요. 라이트.” “별말씀을.” 빙그레 웃어준 라이트는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손을 흔들었다. “그만두고 돌아가자. 볼건 다 본 것 같으니까.” “뭐야. 추억에 좀 젖게 해주면 안돼?” “안돼. 자기 입으로 그런건 현실로 꺼내면 안된다고 말해놓고선 무슨 소리야? 그만두고 이리와. 서비스로 좋은 것을 보여주지.” 우리가 그에게 다가가자 라이트는 두팔을 벌리고 주문을 외워댔다. 그걸보고 스피릿이 외쳤다. “자, 잠깐만요. 부서진 건 고치면 돼잖아요? 식기는 골라내면 되고 옷을 세탁하면 돼요. 그,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옛기억에 매달리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나는 꿈 같은 이야기 말고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속삭여주었다. “…이곳은 전 캐슬린 왕가의 마지막 생존자인 네가 숨어 있다가 잡혀갔던 곳이야. 정보부에서 모를 것 같아? 차후에 나라를 뒤집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곳을 먼저 뒤지러 올텐데 버젓이 이곳에 살고 있어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스피릿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고 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주문을 마치고 삐딱한 자세에 한손을 허리에 얹고 서있던 라이트는 우리가 그의 옆을 지나치자 아래로 내려 두었던 팔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파이어 프레임.” 딱~! 푸화르르륵! 우리들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인근에 이웃이 없기 때문에 불이 옮겨붙을 걱정은 없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타오르는 우리들의 과거를 쳐다보았다. 구경꾼들의 사이를 지나간 나는 스피릿의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다시 만들자. 우리의 추억들, 우리의 기억들, 우리의 삶의 모습들, 전부 다시 만들자. 이번엔 한 사람 더 늘었으니까 이전보다 두배는 더 재미있을 거야.” 고개를 돌린 나는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보였고 그녀의 마음씀씀이에 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버렸다. 스피릿은 가슴에 안은 드레스를 꽉 껴안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이런 일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과거는 잊어요. 아름다운 회색머리 공주님. 지금 우리는 같이 있잖아? 그럼 그걸로 된거야. 나로서는 분에 넘치는 행복이라구. 이걸봐. 거의 고아로 자란 내게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여동생이 생겼어. 게다가 아름다운 공주님이 내 노예라니. 이거야말로 사나이의 로망이 아니겠어?” 뒤에서 따라오는 안젤라의 손을 잡아 끈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스피릿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조금 쳐다보았다가 나를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녀들의 미소를 바라보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꼈다. 하렘? 쳇~! 그래. 까짓 하렘이라고 불러. 우울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행복해지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 개 같은 세상살이 이렇게나마 잊어보자구. “오, 동감이야.” 옆에서 라이트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로 저 멀리서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가 지른 불인지 몰라도 참 잘 타는구나.” “그래 고맙다.” 히죽 웃는 얼굴을 돌린 라이트는 손을 내 저으며 말했다. “나는 마법사야. 마법사는 그런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지. 이래저래 말은 많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지나간 과거보다는 눈앞의 현실과 다가올 미래가 중요한 법이라구. 그래서 말인데. 안젤라. 정 데려갈 사람 없으면 나한테 시집와도 좋아요.” 난데없는 프로포즈에 안젤라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내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저, 전 오, 오빠랑 같이 살거예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던 라이트가 허허허 웃으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콜트, 같이 살겠단다. 어쩔거야?” 난 대답대신 푸하하 웃어버리며 대로를 걸었다. 덕분에 안젤라가 볼을 부풀리는 불상사가 발생했지만 대로가에서 파는 솜사탕 사다가 입에 물려주자 금방 풀어져버렸다. “헤, 이, 이런거 처음 먹어봐요. 아주 맛있어요.” “앞으로는 이가 다 썩을 정도로 사다 줄게.” 킥킥 웃으며 말해준 나는 아레프의 연구실로 가져갈 과일을 한봉지 사서 스피릿에게 내밀었다. 그때 라이트가 푸줏간에서 소의 넙적다리뼈로 보이는 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왔다. “…그건 뭐하게? 삶아먹으려고?” “내가 먹을 건 아냐. 이건 선물.” 선물? 아레프에게 가져다 줄건가? …저걸 좋아하려나 모르겠네. 몸을 돌린 우리들은 그길로 마법사 길드인 탑으로 향했다. 안젤라는 멀리서도 뚜렷히 보이는 그 엄청난 높이의 탑을 입을 헤에 벌려가며 올려다보느라 걸으면서 여러번 넘어질 뻔했다. 오랜만에 들려보는 마법사 길드는 별로 바뀐 것도 없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엑셀이 밖으로 나와서 햇살을 쬐고 있었다. 안젤라가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하는 일이 있었지만 스피릿이 잘 달래주었다. 하지마 그녀도 어깨를 조금씩 떨고 있었다. 허어, 말만한 처녀들이 뭐가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어? 난 그녀들에게 잘 보란 듯이 프로토 모델 훈트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여어, 엑셀 안녕?” 백색 갈기의 훈트는 한쪽 눈을 뜨고 날 쳐다보았다. “누구? 아, 너는 아레프의 손님이었던 자로군? 무슨 볼일인가? 그때 그 엘프는 어디갔지?” “우와? 날 기억하네?” 라이트가 내 옆을 지나쳐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엑셀은 한번 본 사람은 정확하게 기억해. 잊어먹는 법이 없지. 어이, 이거 선물이야.” “나에게 이런 걸 가져다 주는 건 라이트 너 뿐이다. 고맙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어.” 와드득! 까드득! 엑셀은 라이트가 내민 소의 넙적 다리뼈를 커다란 앞발로 붙잡고 이빨로 으드득으드득 씹어대기 시작했다. 녀석의 입가로 줄줄 흐르는 침을 토할 것 같이 쳐다보던 스피릿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머? 안젤라!” “콜트, 저거 봐라. 네 여동생 기절했다.” 뒤를 돌아보니 축 늘어진 안젤라가 스피릿의 품에 안겨있었다. 음, 괴물같은 크기의 말하는 개가 소뼈를 통째로 씹어먹는 걸 봐서 충격이 꽤 컷나보군. 그녀를 들춰업고 길드안으로 들어간 나는 홀을 지키고 있는 슈에게 아레프를 보러왔다고 말했다. 수정구를 통해서 연락을 주고 받은 그녀는 살짝 웃으며 홀의 중앙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원반 엘리베이터를 가르켰다. “올라오시라는군요.” “수고해요.” 고개를 끄덕여주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잠시후 환한 얼굴의 아레프가 날 반겼다. “콜트씨! 돌아오셨군요!” “어, 뭐, 오랜만이지?” 난 씩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라도 잡고 흔들어주고 싶었지만 기절한 안젤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그녀를 눕히고 있으니 아레프가 라이트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가 자기들끼리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따로 소개시켜줄 필요는 없겠구만. “라이트 알트론입니다. 소속은 입실론. 레벨 6급의 올마스터 입니다.” “아레프 왓슨입니다. 수도 마법사 길드 소속 레벨 8급의 런너 입니다.” 각자의 소개를 끝낸 그들은 자기들끼리 몇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급기야 깔깔 웃으며 친해져버렸다. 같은 직종의 사람들이라 그런가? 친해지는게 빠르네. 스피릿에게 과일 봉지를 받은 나는 아레프에게 말했다. “어라? 루시아는?” “아, 루시아는 잠깐 시장보러 나갔습니다.” “뭐야? 혼자 보내도 돼?” “따라겠다고 했지만 이젠 자기 혼자서 나가보겠다고 해서요. 호신용으로 스크롤도 몇 개 가져갔으니까. 별일은 없을 겁니다. 그나저나 당신을보니 일은 잘 됐나보군요. 이거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피릿 애쉬드 캐슬린 전 공주님.” ========================================================================== 전(前) 공주님입니다. 저도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에요. 양해를 구합니다. ㅠ.ㅠ Reload Running Fire: 67 “표시 나죠? 이, 이거 어떡해요오~!” 씁쓸하게 웃은 스피릿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폐하도 없고 따르는 백성도 없는데 공주가 있을 수 없죠. 저는 그냥 스피릿입니다. 거기 계시는 콜트 슈발츠님의 귀여움과 관심을 받고 있는, 그저 평범한 노예일 뿐이예요. 실제로도 공주였던 적은 10살까지였으니까. 부담갖지 말고 그냥 지금 그대로 봐주세요.” 아레프는 마법사답게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제 그는 소파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안젤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아가씨는?” 설명하기 귀찮아진 나는 팔짱을 끼고 고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해버렸다. “숨겨뒀던 내 여동생이다. 머리색이 다른 건 배다른 동생이라 그런거니 다른 건 묻지마.” 라이트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아레프였지만 한번 씩 웃을 뿐 꼬치꼬치 캐뭍지 않았다. 그러고 있으니 문이 열리며 루시아가 등장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펭귄마냥 뒤뚱거리며 들어온 그녀는 우릴 보더니 시장을 봐온 물건을 아레프에게 던져버리고 스피릿을 덥썩 끌어안았다. “스피릿! 돌아왔구나!?” 스피릿은 루시아를 바라보며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저런 미소는 나도 꽤 보기 힘들다. 호들갑을 떠는 그녀들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루시아가 던진 시장바구니를 가까스로 사수한 아레프를 쳐다보았다. “스피릿 얼굴도 보여줄 겸. 저번에 맡겼던 물건 찾으러 왔어.” “아, 물론 드려야죠. 기다려보세요. 차라도 한잔 대접할테니까.” 아레프가 바구니를 들고 부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자 이내 루시아를 따라들어갔다. “어머나. 스피릿 잠깐만, 우리 주인님은 소금병과 설탕병을 구분하지 못하거든? 아레프! 내가 할테니 그만둬요!” 잠시 후 루시아가 소반에 찻잔을 들고나왔다. 그때 쯤 안젤라도 깨어나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레프는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있는 곳을 뒤적이더니 내가 맡겨두었던 약간의 돈과 드래곤하트가 든 상자를 들고와 테이블에 올렸다. 난 그것을 쳐다보며 물었다. “열어봤어?” “아니요?” 그의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준비해온 빈 배낭에 그것들을 집어넣었다. 루시아가 물었다. “중요한건가 봐요?” “아무렴. 중요한거지. 내 사업 밑천이란 말야. 아레프 요새 별일 없지?” “예, 일주일 전쯤에 루시아와 크게 싸운 이유로는 별일 없었어요.” 아레프의 말에 루시아가 눈썹을 세우고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난 사랑싸움이라고 킥킥 웃어주며 차를 마셨다. 그러고 있으니 루시아가 물었다. “그런데 옆의 그 아이는 누구예요?” “내 여동생이야.” “거짓말. 머리색이 틀린걸요?” “배다른 동생이야.” 루시아는 질문이 막혀버렸다는 듯이 나와 안젤라의 얼굴에서 비슷한 점을 찾으려는 듯이 고개를 돌려가며 번갈아보았다. 덕분에 안젤라가 내 곁으로 바싹 달라붙었다. 아레프가 말했다. “단순히 궁금해서 그런건데 하레이에서 있었던 그 습격사건. 여러분들의 벌인거예요?” 라이트와 얼굴을 마주바라보며 씩 웃은 나는 그에게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어때요? 실전에서의 위력은?”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줄 몰랐지만 이내 그가 칼라미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나는 말도 말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아레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화력조절도 되고, 파괴력도 아주 좋아. 하지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뒤따른다고. 그런 건 정말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여 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기술은 계속 발전하기 마련이니까. 죽이는 기술이든, 살리는 기술이든 간에 말이죠. 뭐, 어쨌든 꽤 쓸모는 있었던 모양이군요? 다행이에요. 혹시나 위험할 때 고장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어이. 자기가 만든 물건이라면 조금 자신감을 가지라구.” 그렇게 대꾸해준 나는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만 돌아간다.” “예? 벌써요?” “일이 아닌 이상 한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아. 스피릿, 안젤라. 일어나. 이제 집 보러가야지?” 내 말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트가 말했다. “집을 보러가?” “응, 그래도 여기에 아는 사람이 제일 많으니까. 한동안 지내 볼란다. 자주 놀러올게. 괜찮지?” 아레프를 쳐다보며 말하니 잠시 멍뚱히 날 쳐다보던 그가 쌍수를 들고 환호했다. “그렇군요! 당신은 알아주는 몬스터 전문 사냥꾼이자 모험가였지요! 마침 잘됐어요! 하하하! 콜트씨! 지금 딱히 할 일이 없죠?! 겨울이라 수도에는 당신과 같은 능력의 모험가는 거의 할 일이 없을 겁니다. 레인저도 많고 치안도 좋아서 몬스터는 구경하기 힘들거든요? 그러니 우리 길드와 전속 계약하세요! 간혹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있긴 하지만 당신 실력이라면 거뜬히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수당도 상당히 짭짤합니다!” 그의 말에 귀가 혹한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일단 뭔 일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될거아냐. 나도 돈많은 부자 아니라고. 물론 드래곤 하트가 있지만 그건 최후의 보루다. “호오~ 지금 당신이 말하는 그거 마법사들이 각종 실험에 사용하는 재료들을 대신 수집해다주는 일이지? 흐음, 평소엔 귀찮아서 않하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자니 한번 해볼까? 그래서 수당은 얼마나 줘?” “그건 수집하는 재료의 위험도와 희소가치에 따라 틀리지만 그럭저럭 돈이 될거요. 물론, 당신이 예전에 하던 몬스터 사냥과 같이 한번에 목돈을 만지지는 못할 테지만.” “까짓 부업으로 두 탕씩 뛰면 되요. 계약합시다.” 이곳의 길드장이라는 대머리 영감은 히죽 웃으며 준비한 계약서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한번 죽 읽어본 나는 망설일 것 없이 서명란에 사인했다. 계약서를 받아든 길드장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과 같은 일류 모험가가 우리 길드에 소속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하오. 당신 말대로 일반 모험가 길드의 일을 하며 부업으로 이쪽 일을 해도 되니 크게 부담갖지 마시오.” “모험가 길드의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일이 없어요. 그럼 일거리는 언제 주는 거요?” “젊은사람이 성격이 급하시군. 천천히 생각하시오. 아레프에게 듣기로 수도에 올라온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 머무는 곳이 없다고 하던데. 여관에 장기투숙을 하거나 집을 장만하고 시청에서 거주구역 증명서를 떼어 다시 찾아오시구려. 그럼 일거리를 드리리다.” 거주구역 증명서? 아, 적당히 일하다가 도망갈까봐서 그런가보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길드장의 집무실 바깥 서재에는 아레프가 앉아있다가 날 반겼다. “어때요?” “계약했어. 거주 증명서 떼어서 다시 오래. 그래야 일을 준다나?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넓은 거야? 당신 방 세배는 되겠다.” “길드장님의 연구실이니까요. 전에 말씀 드렸죠? 레벨이 높은 사람이 높은 층을 사용한다구요. 방이 넓은 건 당연한 거예요.” “요컨대 실력이라 이거군?” 아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레프의 방으로 내려가자 스피릿과 안젤라가 초조하게 날 기다리고 있다. “다녀왔어.” “별일 없으셨어요?” “응, 길드장 머리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눈이 좀 부셨지만 그럭저럭 괜찮았어.” 뭔가가 웃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레프와 라이트가 배를 잡고 쓰러져서 깔깔 거리고 있다. 뭐야? 뭐가 그리 웃겨? 시큰둥하게 다시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과 안젤라를 데리고 그만 밖으로 나갔다. 루시아가 말했다. “그냥 가려구요? 좀 더 놀다가 저녁이라도 먹고 가시지.” “다음 번엔 아주 여기서 자고 갈테니 서운하게 생각하지마, 오늘은 바쁘다고.” 루시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나는 아레프의 도움으로 홀을 지키고 있는 슈에게 몇가지 서류등을 받을 수 있었다. “증명서류에요. 잊어먹지 말고 가지고 계세요.”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다음에 보자구.” “이왕이면 이 근처에 집 구해요! 자주 놀러가게!” 난 씩 웃으며 그러마 했다. 길드를 나서 곧장 시청을 찾아간 우리는 분양중인 주택을 살폈다. 뭐, 따로 할 일도 없고, 느긋하게 일을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시간이 있을 때 바로바로 처리하기로 했다. 마법사 길드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집을 구했지만 값이 너무 비싸고 셋이서 살기엔 너무 커서, 그냥 조금 멀지만 알맞은 크기에 적당한 가격을 가진 곳을 물색했다. “언제 보러가실 겁니까?” “쇳뿔도 당긴 김에 뽑는다고. 당장 갑시다.” 라이트는 같이 올 필요가 없는데도 수도관광을 빙자하여 우리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몇군데를 돌아다닌 다음 해가 질 무렵에 적당히 주변환경도 좋고 마법사 길드와도 가까운 곳으로 하나 구했다. 가격이 조금 비쌌지만 그건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고 부동산 담당 시청직원을 돌려보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주저앉았다. 스피릿이 내 옆에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수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희들 때문에 무리하시는거 아니에요? 차라리 장기 투숙을 하셨으면 집 사느라 그렇게 많은 돈쓰지 않으셨을 텐데.” “응? 무리? 아냐.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모험가라 언제 죽을지 몰라. 그래서 그전에 조금이라도 너희들과 재미있게 살아보고 싶은거야. 이를테면 욕망의 힘이랄까?”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말하니 스피릿은 푸훗하고 웃어버렸다. “욕망의 힘?” “응, 욕망의 힘이지. 이를테면 이런거….” 고개를 숙인 나는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스피릿은 반항없이 내 키스를 받아주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입맞춤이라 조금 설레이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내 입술로 타액의 끈이 이어졌다. 한숨을 조금 내쉬며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피릿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누웠고, 난 그녀의 위로 올라가 좀더 뜨겁게 그녀의 몸을 애무했다. 막 그녀의 벨트를 풀고 손을 집어넣으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콜트! 어딛는거야?! 도시락 사왔어!” “힉?!” 깜짝 놀란 나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고 스피릿을 제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소매로 입가와 목에 묻어있는 타액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그때 스피릿이 당황해서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자기 목에 난 키스마크를 가르키며 울상을 지었다. “표시 나죠? 이, 이거 어떡해요오~!” “으윽~! 이걸로 대충 묶어.” 발자국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고, 긴장에 긴장이 더해 심장이 터질 것 같음을 느낀 나는 급한대로 머리에 묶고 있던 손수건을 풀어서 그녀의 목에 매어주었다. 그러니 꽤 보기 좋았다. “뭐야? 여기 있었냐? 어? 두 사람 뭐해?” ========================================================================== 후후후후~ 뭘 했을까요? XXX: 허흐음! Reload Running Fire: 68 “…해줘.” 집을 보는 동안 안젤라를 데리고 시장으로 가서 먹을 것을 사온 라이트가 문으로 들어서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스피릿의 목에 손수건을 매어주던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하게 말했다. “어, 이렇게 하면 예뻐보일 것 같아서 말야.” “그래? 음, 괜찮네. 스피릿 이리와서 도시락 먹어요. 안젤라도 여기 앉고, 어. 이런 내 정신 좀 봐. 간식으로 푸딩사왔는데 말에 매어두고 왔네.” 스피릿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라이트가 말렸다. “여기 있어요. 내가 가져올테니까.” 녀석은 휘파람을 불며 밖으로 나갔다. 그걸 힐끔 쳐다본 안젤라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언니, 벨트 풀어졌어. 셔츠 올리면 속옷보이겠다.” 컥~! “어, 어머나?!” 스피릿은 정말 풀려있는 바지벨트를 보고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몸을 돌리고 그것을 바로맸다. 안젤라가 우울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가운데 난 식은 땀을 흘리며 라이트가 사온 도시락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든 새우튀김의 새우다리가 몇 개인지 세어보았다.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새집 장만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몇일 동안 나는 아가씨들을 이끌고 시장을 쏘다니며 집안을 채울 가구들과 물건을 사는데 시간과 돈을 허비했다. 노예가 많으면 많을 수도록 유지비가 많이 든다더니 사실인 것다. 대체 얼마나 쓴거냐? 아가씨들이 의기투합하여 옷가게를 점거한 사이 잠시 쉬면서 돈계산을 하고 있으려니 구경삼아 따라온 라이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너 정말 괜찮은거냐?” “괜찮아. 왜? 이상해보여?” “응, 돈도 너무 해프게 쓰고, 이래저래 내가 알던 콜트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 “네가 아는 콜트는 어땠는데?” 시장바닥에 나란히 주저앉아있던 라이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 머리에 씌여 있는 순수건을 벗겨내어 바닥에 깔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있던 콜트는 약삭 빠르고, 날카로우며 조금은 악당틱하면서 인정이라곤 개미 눈물만큼만 가지고 있는 남자야. 전투시에는 쓰러진 동료의 상처를 돌보기보다 그 동료의 상처를 만든 적에게 달려들어 10배로 되갚아주는 녀석이었지. 거기에 나름대로의 정의와 사상도 가지고 있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확연히 구분 지을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널 친구로 선택한거야. 마법사는 쭉정이들과는 사귀지 않으니까 그건 네가 더 잘거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한 사내가 우리 앞에 놓여진 손수건에 동전을 틱 던졌다. ‘불쌍하군, 인생의 패배자들. 하지만 너희같은 자들이 있었으니 나 같이 성공한 남자도 있는 거겠지. 당신들을 동정해. 이걸로 술이라도 한병 사서 우울한 세상을 잊어보도록.’ 라는 식의 얼굴로, 갑자기 울컥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유유히 사람들의 틈새로 걸어가는 사내에게 달려가려니 라이트가 내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덕분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픽 쓰러져버렸다. “이거 놔! 이 자식아! 어이! 거기 형씨!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안들려?! 서라니까!” “지금의 넌! 날카로움이 사라졌어! 개미 눈물 만큼만 있던 인정이 어느새 드래곤의 눈물만큼으로 늘어나 버렸어! 예전엔 안그랬잖아! 넌 오크기름 같은 녀석이었어! 불만 붙이면 화끈하게 타오르는! 그런데! 그런데~!” “아악! 너 혼자 떠들고 난 놔줘!” 녀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밀고 그의 팔을 비틀어 몸을 빼낸 나는 후다닥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주변에서는 구경하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이 놈의 자식! 일부러 그런거야! 일부러! 라이트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처녀마냥 바닥에 쓰러져서 나에게 손을 내밀며 외쳤다. “지금의 넌! 예전의 그 거칠었던 남자가 아냐! 악당처럼 웃으며 치사하게 적의 뒤를 갈겨서 친구의 목숨을 구하던 그 콜트가 아냐! 넌! 너어어언~!” “관둬! 관둬! 나 안해! 당신들도 빨리 집에가! 무슨 구경났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자 라이트가 시장바닥에 픽 쓰러지며 외쳤다. “아아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줘 콜트~! 겨우 사랑 때문에 그 멋진 모습을 버리지 말아달라구우~!” 털썩~! 으윽! 아주 생쑈를 하는 구나. 라이트 이 놈의 자식! 가만 안둔다! 넌 오늘 죽었어! 그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정신없이 구경하던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쳐댔다. 그중에는 옷가게에 들어갔던 스피릿과 안젤라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있었다. 어으~! 망신살이야! 쓰러진 라이트는 내가 전에 가르쳐둔 핸드 스프링으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댔다. 이윽고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나는 히죽이죽 웃으며 동전을 줍는 라이트의 엉덩이를 발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단검을 뽑아들고 네 놈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주겠다고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스피릿과 안젤라가 꺅꺅거리며 앞뒤로 날 붙잡고 말리는 통에 마법사의 가죽은 아쉽게도 벗기지 못했다. 라이트의 마수에 휘말려 벌인 소동 때문에 배가 고파진 나는 잠시 쇼핑을 중단하고 아가씨들과 함께 시장골목의 노점에서 파는 꼬지구이와 한잔의 맥주로 주린 배를 달랬다. 그러다가 옆에 앉아서 방금 전의 연극으로 벌어들인 동전을 세어보는 라이트에게 슬쩍 물었다. “내가 그렇게 변했냐?” 그는 잘구워진 큼직한 돼지고기 꼬지를 한입 베어문 다음 으적으적 씹으며 말했다. “그거? 신경쓰지마. 사람이라는게 한없이 변하기 마련 아니겠냐? 지금의 넌 지금의 너 대로 보기좋아. 개인적으로는 예전 모습이 더 좋았지만.” “내 예전모습?” 난 고개를 갸웃했다가 옆에서 토끼귀를 세우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스피릿, 나 처음 봤을 때 어땠어? 지금하고 많이 달라?” “어, 지금과 별로 다를 건 없었어요. 음,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상냥해 지셨다는 것 정도요? 하지만, 아까 라이트 말대로 치사하고 조금은 악당 같은 모습은 제가 볼 때 그대로인 것 같아요. 전에 안젤라의 노예문장을 파서 여동생으로 삼으실 때 기억나세요? 불만 있으면 어쩔건데?! 이제와서 너무 늦었어! 징징거리지말고 가만있어! 뭐, 이런 이미지였거든요?” “안젤라야. 오빠가 정말 그랬냐?” 커다란 꼬지구이가 입에 다 안들어가서 야금야금 베어먹던 안젤라는 내 질문에 움찔했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무서웠어요. 싫다고 말했다간 잡아먹힐 것 같았어. 어, 하지만 후회하고 있다는 건 아니에요. 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그랬던가? 흐음. 그녀의 머리를 쓰담아주고 있으니 라이트가 맥주를 마신 다음 말했다. “고민하지마. 넌 지금 모습으로도 족해. 예전에 처음 널 만났을 때 비겁하게 적에게 흙을 뿌리고 그의 등을 쳐서 동료의 목숨을 구하던 그때의 모습만 그대로라면, 난 네 친구라는걸 언제나 자랑스러워 할거야.” “…그런건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돼. 뭐, 이런 나라도 맘에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다행이다.” 내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옅은 미소를 지어버렸다. 쇼핑과 집안정리 및 꾸미기는 몇일 동안 반복되었다. 덕분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우리들의 새 집과 살림살이가 제 모습을 갖춰갔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은 2층인데다 그나마 방도 많아서, 셋이서 살기엔 좀 넓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여기말고 다른 집들은 너무 크거나 작아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단 집이 생기자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하고 마법사 길드와 계약한 일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덤으로 스피릿과 안젤라의 성격이 꽤 밝아졌다. 특히 안젤라는 이전의 어두웠던 성격이 아주 밝아져서 말도 더듬지 않고 급기야 이젠 나와 같이자겠다고 떼를 쓰기도 한다. “왜 안돼요?” “안젤라는 이제 어린아이도 아니잖아?” 안젤라는 고개를 삐딱하게 만들더니 내 은밀한 비밀을 까벌렸다. “스피릿 언니하고는 몰래 같이 자잖아?” 그 소릴 듣고 얼굴이 빨개진 스피릿이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 버렸다. 난 고개를 빳빳히 들고 쳐다보는 안젤라를 내려다보며 붕어마냥 입을 빠끔거렸다. “어, 그, 그건 말야….” “그 정도는 말 안해도 알아요. 오빠랑 스피릿 언니가 그런 사이인거. 하지만, 가끔은 한때 주인님의 노예가 되고 싶었던 여동생의 기분도 신경 써줘. 아무짓도 안할게. 정말 손만 잡고 잘게. 평생소원이야. 안젤라. 오빠랑 딱 하룻밤만 자고 싶어. 응? 앞으로 말 잘 들을게. 딱 하룻밤만 같이 자요? 으응?” 아으아으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상 닥치니 대책이 없다아! 그때 스피릿이 들어간 방의 문이 삐걱 열리며 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 전 괜찮아요. 주인님. 하, 하룻밤 정도는….” “안돼! 용납못해! 스피릿!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말려야 하잖아!” 그때 안젤라가 말했다. “나랑 자주면 오빠랑 언니의 관계를 인정하겠다고 했거든. 오라버니는 어때요? 더 이상 여동생 눈치 보면서 몰래 언니랑 만나고 싶진 않겠지?” 난 입을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를 드러냈다. “쪼그만게 어디서 까부는거야?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욱?!” 안젤라는 이제 내 허릴 붙잡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당황해하고 있으니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오늘밤 나랑 자겠다고 하기 전까진 안놔줄거예요. 이전에 나하고 한 계약 잊으시면 안돼요. 절망을 가져가고 희망을 주겠다고 했잖아요?” 으악~! 살려달라고 고개를 돌렸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이트라도 있었으면 도움을 청하는 건데 녀석은 길드에 수집한 마법재료를 가져다주고 실험을 견학하겠다며 오늘은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안젤라! 요 녀석! 노리고 있었구나~! “스피리이이잇! 주인님을 팔아먹고도 네가 편하게 지낼거라 생각해에!?” 굳게 닫힌 스피릿의 방문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하여, 어쩔수 없이, 나는 한때 내 노예가 되고 싶어했던 여동생과 한 침대에서 자는 위험을 감수해야했다. “손만 잡고 잔다니까요?” “…그걸 어떻게 믿어?” 잠옷에 배게를 가슴에 안고 들어온 안젤라는 지긋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이제 그녀는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의 불만을 상대방에게 표출하는 재주까지 습득했다. 덕분에 나는 찍소리 못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마냥 힘없이 침대로 올라가 그녀를 불렀다. 안젤라는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고 총총 달려오더니 내 배게 옆에 자기 배게를 놓고 올라와 앉았다. 난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아무리 오누이라지만 24살 오빠와 18살 여동생이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것이 말이 되냐?” “말 잘 듣고 착하게 지낸 여동생에게 상준다고 생각해.” 안젤라는 그렇게 말하며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두손을 모아쥐고 델린저의 이름을 부르며 모쪼록 그녀가 유혹을 걸어도 넘어가지 않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한 나는 한숨을 들이쉰 다음 촛대의 불을 꺼버렸다. 순간 밤의 어둠이 찾아왔다. 부스럭거리며 자리에 눕자 온몸의 신경이 곧두섰다. 첫날밤 침대에 누운 처녀의 기분이 이러할까? 잠시 그러고 있으니 갑자기 무언가가 내 팔을 덥썩 껴안았다. 난 비명을 지를뻔했다가 어둠속에서 빛나는 커다란 눈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안젤라의 것이라 판단하고 낮은 음성으로 외쳤다. “뭐, 뭐하는 거야?” “…해줘.” 숨이 넘어가는 것 같다. ========================================================================== XXX: 크아아아아악! 심의! Reload Running Fire: 69 “주인님도 참, 그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한번 소리였다구요.” “뭐, 뭘!?” “팔배게.” “응?” “팔배게 해줘.” “…여, 여기 있다.” 팔을 옆으로 내밀자 안젤라는 기분 좋은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내 팔을 베고 내 옆구리로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더니 대담하게도 한쪽 다리를 내 허벅지 위로 올려 날 완전히 껴안아버렸다. 갈빗대가 있는 부분으로 안젤라의 커다란 가슴이 느껴진다. 여동생이다. 여동생이다. 여동생이다아아!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녀를 쫓아버리고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싶다! 신경이 곧두서서 그런지 안젤라의 호흡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으윽… 이, 이건 고문이야. 그러고 있는데 안젤라가 내 몸을 스르륵 쓰다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짓이야아?! 손만 잡고 잔다며!?” “거짓말이었어. 좀 만져본거 갖고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말아요.”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젤라는 두 손으로 자기 볼을 조금 감싼 다음 눈을 위로 떠올리고 어서 누우라고 재촉했다. “너, 너어…!” “오빠 이상하게 흥분하는 것 같아. 좀 진정해. 누가 잡아 먹는데요?” 그녀의 충고에 바늘로 심장을 찔리는 충격을 받은 나는 한숨을 조금 내쉰 다음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래. 까짓거, 나만 정신차리면 되는거 잖아? 언제나 우울한 얼굴을 하던 안젤라가 이 정도로 밝아졌으니까. 그걸로 만족하자. 자리에 누우니 다시 안젤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팔을 베고 옆구리로 달라붙었다. 그러더니 다시 내 가슴과 허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당신이랑 이렇게 있으니까. 정말 꿈만 같아요.” “난 네 오빠야.” “응. 오빠양.” 안젤라는 콧소리를 내며 나에게 더욱더 바싹 달라붙어왔다. 잠시 그렇게 있으면서 느낀 사실인데. 결국 그녀도 정에 고프고 사랑에 목 말라했던 것 같다. 팔배게하라고 내준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싼 나는 안젤라의 이름을 불렀다. “불쌍한 우리 안젤라. 오빠 눈엔 아직 네가 여자로 보였던 것 같아. 미안해. 이제부터는 진짜 여동생으로 봐줄게?” 갑자기 엽구리가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금 울음 섞인 음성으로 고개를 그덕였다. “으, 으응.” 천장을 바라보며 씩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진짜 오빠가 되어주기전 잠깐이나마 주인님으로 돌아가 그녀의 조그만 몸을 가슴에 꽉 끌어안아주었다. 그녀는 숨막혀 하면서도 좋아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이윽고 잠이 들려하는데. 귓가로 안젤라의 짓굳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 오빠. 자?” “어, 으응? 아니….” 조금 머뭇대던 안젤라는 내 가슴 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나, 나 지금 젖어 있는데….” “칵! 침대 바닥에 자고 싶어?!” 두 팔로 그녀를 꽉 껴안으며 말하자 안젤라는 신음소리를 내며 연신 내 가슴을 꼬집어댔다. 아침이 밝았다. 이웃집 슈게른씨의 기합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니 천장에 스피릿의 얼굴이 매우 사실감 넘치게 그려져 있다. 그녀는 잔뜩 충열된 눈으로 날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난데 없는 그녀의 등장에 난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라? 스피릿, 네가 왜 여기에…? 안젤라는?” “안젤라는 지금 씻고 있어요. 주인님도 어서 일어나 씻으세요.” 기분나쁜 일이라도 있는지 쌀쌀맞게 몸을 돌리고 나가려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스피릿이 뒤를 돌아보았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신중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주인님을 믿어요.” “…그러면서 눈은 왜 시뻘게?” 스피릿은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신을 속이고 양심을 깍은 대가랄까요? 흠흠. 놔주세요. 프라이팬에 계란 프라이 올려두고 나왔어요.” 하마터면 그녀를 놓아줄뻔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막아서서 문을 닫았다. 스피릿이 물었다. “주인님?” “잠깐만 이리와봐.” “아, 안돼요. 이러지마세… 으읍?”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나는 키스를 하려 했지만 스피릿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강제로 벽에 몰아세우고 입술을 맞춰버렸다. 주먹으로 어깨를 톡탁이던 그녀는 입술을 떼어내자 커다란 한숨을 내쉬더니 시큰둥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볼을 부풀렸다. “몰라요. 갑자기 이러시는게 어디있어요? 인권침해에요.” “노예에게 인권이라는 게 있었냐?” 스피릿은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문을 열고 나가며 연신 쫑알거렸다. “어머, 그러믄요. 모르셨어요? 주인님은 이렇게 귀엽고 아름다운 노예의 소유주로서의 자각이 필요하세요. 자, 스피릿이 노예 관리법에 대해서 들려줄테니 잘 듣고 까먹지 마세요? 첫째, 부당한 이유로 노예를 폭행 또는 강간치사한 자는 일반인과 동일하게 처벌한다. 둘째, 마스터는 자신의 노예에게 최소한의 생활여건을 제공하여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관리원에서 강제매입한다.” 그런게 있었던가?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스피릿은 거실을 거쳐 부엌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말했다. “셋째, 3급 노예라도 근로기준법에 저촉될 정도의 심한노동은 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노동의 흔적이 관리자나 관리원에 적발될시에 업주나 개인은 그에 상응하는 벌금를 물고 동시에 추가 노동에 대한 대가를 노예에게 지불하여야 한다. 넷째, 노예를 다른 이에게 양도 또는 대여 하거나, 매춘또는 폭력을 강요, 사주하여서는 안된다. 적발시 노예는 강제압수, 마스터는 엄중처벌한다.” 화장실겸 세면장에는 안젤라가 먼저 들어가 있는지 문이 잠겨있다. 난 그녀가 나올동안 스피릿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깐 기다리기로 했다. 부엌으로 들어간 그녀는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튀겨지고 있는 달걀 후라이를 프라이팬을 멋지게 흔들어 뒤집으며 말했다. 그걸 보고 씩 웃어버렸다. 허어, 이제 완전히 살림꾼이 다돼셨네? 그녀는 찬장에서 새로 사온 양념통을 꺼내며 낭랑하게 말했다. “다섯째. 마스터를 잃은 노예는 선택의 특권에 따라 3일 이내에 새 주인을 찾거나 혹은 관리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정당한 이유없이 10일 이상 등록이 지연될 경우 불법 노예소유로 인정하여 합당한 벌금을 물게되며, 노예의 경우 마스터를 잃고도 관리원으로 복귀하지 아니하면 수배하여 엄중 처벌한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안젤라가 수건으로 하얀 얼굴을 닦으며 나왔다. 그녀는 날 보더니 아침인사와 함께 스피릿의 말을 이어서 대답했다. 어이어이~ 서로 짜기라고 한거야? “좋은 아침이에요 오라버니. 여섯 번째는 내가 가르쳐드릴게요. 탈주노예를 방관하거나 은닉, 또는 그에 협력한 자는 국법에 의거 엄중 처벌한다.” “…그때 널 관리원에 가져다 줬으면 난 천벌 받았을거야.” 안젤라는 대답대신 얼굴 가득 함박 미소를 머금었다. 난 그날 처음 안젤라의 꾸밈없는 미소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면장으로 들어가 하루의 가장 큰 행사를 치르고 세수와 머리를 감고 말끔해진 얼굴로 다시 밖으로 나가니 스피릿이 식탁에 접시와 그릇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일곱번째….” “그거 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어마. 가장 중요한 대목이에요. 귀 바짝 세우고 들으세요.”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고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쓴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어디 얼마나 중요한건지 한번 말해보라고 했다. “일곱 번째. 키스는 허락 받고 한다.” 풉하고 웃어버렸다. 스피릿도 부드럽게 웃으며 아침 준비를 마무리하고 앞치마를 벗었다. 그러더니 따끈한 아침이 차려진 식탁을 앞에두고 차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덟번째. 마스터와 노예는 서로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 이를 어긴 마스터에 대해서는 관리원에서 그 노예를 강제매입한다.” 싱글싱글 웃으며 이제 무슨 말이 나올까 기대하던 나는 싸늘한 그녀의 이야기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놀래라. 순간 뜨끔했다. 스피릿은 잠깐 고개를 돌려 안젤라에게 밥먹으러 나오라고 불렀다. 거실 저편 그녀의 방에서 금방 나간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피릿은 이제 나에게 어서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아홉번째. 만약 노예와 사랑에 빠졌을 경우 마스터는 노예를 버려서는 안된다. 이를 어긴 자는 사랑과 증오의 여신 미티어의 이름으로 천벌을 받는다.” 자리에 앉은 나는 깍지낀 팔을 식탁에 올리고 그위에 다시 턱을 올리며 씩 웃었다. “그래서 다음은 뭐야?” 살짝 거실을 쳐다본 스피릿은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열번째. 위 조항에 의거, 노예가 마스터의 아이를 임신했을 경우. 마스터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난 나는 테이블을 돌아나가 스피릿을 붙잡고 그녀의 배에 귀를 대어보는 어이없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녀를 올려다보며 임산한거냐고 호들갑을 떨어대자 스피릿은 난색을 표현하며 손을 흔들었다. 자기는 그냥 해본 소리였다는데, 난 좀처럼 그녀의 임신 의혹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아침을 먹고, 라이트 녀석이 돌아오자마자 녀석의 손을 잡아끌고 방으로 끌고 들어가 거의 협박하듯이 물었다. “…혹시 마법 중에 임신한거 맞출수 있는 마법있냐?” “왜? 스피릿 임신했어?” 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냥. 구, 궁금해서.” 연구견학을 하느라 밤샘을 했다는 라이트는 피곤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안젤라에게 설것이를 시켜놓고 홀에 앉아서 한숨 돌리고 있는 스피릿에게 당당하게 손목 한번 잡아보자고 말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기가찬다. 어이구! 저 바보! “예? 소, 손목이요?” 스피릿은 경계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내가 근처를 배회하며 헛기침을 하자 한숨을 내쉬며 그제서야 손을 내밀었다. “주인님도 참, 그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한번 소리였다구요.” “…구, 궁금하니까 그렇지. 어,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 눈을 감고 스피릿의 손목을 잡아보던 라이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안젤라에게 차 한잔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저분한 로브를 벗어던지고 간단한 셔츠와 바지차림이 되어서 자리에 앉더니 속을 태우고 있는 나와 은근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콜트, 좀 더 노력이 필요하겠어. 이 참에 같이 방을 쓰지?” “크아아악!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 임신이라…. 저는 해본 적 없습니다. Reload Running Fire: 70 “떠돌이가 빈집인줄 알고 찾아들었나본데?” 결국 폭발한 나는 녀석의 목을 붙잡고 흔들었다. 라이트는 켁켁거리며 임신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스피릿은 그것보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젤라를 거들어 주겠다며 부엌으로 총총 들어갔다. 시큰둥한 얼굴로 앉아있으니 안젤라가 소반을 들고 나왔다. 그러더니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아기 낳을 수 있어요.” “그런 위험하고도 무서운 소릴 하는 게 요입이냐?” 얼굴을 찡그리며 안젤라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좌우로 벌려주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계속 잡고 있으려니 안젤라가 우이잉거리며 스피릿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어니~! 오아오어~!” “그만두세요. 주인님은 저만 괴롭히시라구요. 애꿋은 여동생 울리지 마시고,” 안젤라를 놓아준 나는 툴툴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던 라이트가 벚어던진 로브에서 서류봉투를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그거 이번 일거리라더라.” “엥? 저번 일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일이야?” “마법사들이 어떤 인간인줄 알아? 일반 가정의 몇 년 생활비를 연구와 실험으로 날려먹는 사람들이야. 실력있는 모험가가 재료수집을 자청하고 나섰으니 평소엔 재료 구하기 귀찮아서 미뤄오던 연구를 끄집어 내기 시작한거지. 실례로 어제 연구도 우리 덕분에 한거라면서 마스터께서 고마워하시더라. 그 덕분에 견학을 할 수 있었던 거지만, 어쨌든 이거 꽤 괜찮은 일 같다. 공부도 되고 돈벌이도 되고 말야. 그래서 한동안 여기서 신세질테니 그리 알고 있어라.” 자리에 기대어 앉아 꾸벅꾸벅 조는 녀석을 손가락을 가르키며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오늘부터 이 놈 방세 계산해서 월말에 청구해.” “예.” 스피릿이 상냥하게 대꾸하자 라이트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비랑 방세는 꼬박꼬박 계산할테니 걱정들 마. 아~ 졸려. 좀 잘테니 조용히 해주시구랴. 특히 콜트. 너 말야.” “왜 나야?” “몰라? 너만 입 다물면 여긴 아주 조용해.” “칵~! 들어가서 잠이나 자!” 라이트는 모두에게 좋은 꿈 꾸라고 말해주며 2층 방으로 기어올라갔다. 고개를 돌린 나는 테이블에 있는 차를 한모금 마시며 서류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냉동 주문이 담긴 스크롤 몇장과 황송스럽게도 고급스런 양피지에 마법사 길드 로고가 큼직하게 찍혀있는 길드 공식문서가 들어있었다. “마법사 길드의 시커즈 일원이 된 것을 축하드리며 귀하의 성공적인 탐색으로 말미암아 고명하신 마스터의 연구가 성공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번 탐색에 대한 품목을 정리하였으니 기한까지 탐색을 완료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크 눈알 50개. 오크 심장 10개. 트롤 뇌수 세 점. 야생 만드라고라 3뿌리. 하피의 알 5개 이상. 그리고…. 어라? 둘다 왜그래?” “아, 아뇨. 재료를 들으니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서….” 난 씩 웃어버렸다. “먹고 살려면 더러운 일이라도 해야하는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은 걱정마. 내가 먹여살려 줄테니까.” “항상 주인님께 감사드려요.” “저도요.” 안젤라와 스피릿이 짐짓 고개를 꾸벅이며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쑥쓰러워진 나는 하하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안젤라는 오빠말만 잘들으면 되고, 스피릿은….” 허리를 기울여 옆에 앉아있는 스피릿의 귀에 입을 가져간 나는 작게 속삭였다. “…예쁜 딸 하나 낳아줘.” “아아아~! 주인니임~!” “하하하~!” 난 기분 좋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을 받았으니 장비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스피릿은 한동안 집에 있겠다고 했지만 안젤라는 날 따라다니겠다고 했고, 그래서 최대한 예쁘게 꾸며입고 나오라고 했다. “내 여동생 예쁘다고 자랑할거다. 잔말 말고 예쁘게 꾸며서 나와.”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에 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웃 집의 도련님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이 안젤라를 쳐다본다. 그래. 이걸 노렸지. 하하하~! 예쁘지? 맘에 들면 도전해 보시라고, “하지만 우리 안젤라 데려가면 나랑 싸워서 이겨야해.” “그럼 난 시집도 못가보고 늙어죽겠네요?”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농담에 난 크게 웃어버렸다. 봄바람이 사라락 불어와 옆에서 걷고 있던 안제라의 치마를 살폿 들췄다. 치맛자락을 다리사이에 밀어넣고 호들갑을 떠는 그녀를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은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쾌청한 하늘이 펼쳐져 있다. 으음~! 좋은데. 지금 이대로 계속이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내 바램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무기상과 마법상점을 돌아다니며 장비를 준비하고 남는 시간에 조금만 놀다가자고 칭얼거리는 안젤라와 데이트를 하고 해가 질 무렵에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스피릿이 저녁 준비를 하는지 굴뚝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온다. 으으~! 정말 이런 기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좋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거, 그리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날 기다리는 있다는 것, 여관에서 장기투숙하면서 일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앞치마를 두른 스피릿이 얼른 달려나와 날 반겼다. “다녀오셨어요?” 진한 미소를 머금은 나는 선물로 사온 각종 장신구와 화사한 참나리 한다발을 스피릿의 품에 안겨주고 덤으로 볼에 뽀뽀를 해줬다. 스피릿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주인님 오늘 기분 좋으신 것 같아요?” “응, 아주 좋아.” 질투심에 불타는 안젤라가 스피릿에게 키스했다고 등을 꼬집었지만 그것마저도 행복이라고 생각해버렸다. 저녁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데 라이트 놈이 외출준비를 하고 2층에서 내려왔다. “어디가?” “아, 입실론에. 꽤 오래 여기 머무를 것 같아서 말야. 필요한 거 몇가지 챙겨오려구.” “입실론? 이 밤에?” “텔레포트로 갈거야. 참, 콜트 너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무슨 중요한 이야기인지 밖으로 나가는 라이트의 뒤를 따랐다. 스피릿과 안젤라는 집안에서 기다렸다. 우리 집은 지대가 조금 놓은 곳에 위치해 있는지라 밤이되면 수도의 야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반짝이는 불빛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린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물어보는 걸 깜빡 잊고 있었는데. 너, 제미니는 어쩔거야? 오기 전에 한번 들렸는데 그 주방장 아가씨는 아직 너만 기다리고 있더라구.” 갑자기 눈앞의 행복이 사라지고 또 다른 불행이 내 가슴을 찢고 튀어나왔다. 난 당황하여 자기를 변호하듯이 말해버렸다. “어, 어쩔수 없잖아? 지금 내 모습을 보라구.” “알아.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너 일편단심 민들레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지? 제미니 어쩔거야? 그냥 죽었다고 이야기 해줄까? 예전에 아세트 건으로 한대 맞아던 나는 지금 네 녀석 대답을 꼭 듣고 싶어.”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잊어버리도록 내버려둘거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외쳐준 사람이다. 헌식 짝처럼 버릴 수는 없어. 고민하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같이 가자. 뺨을 맞고 욕을 먹더라도 난 제미니에게 잊어달라고 말해줘야해.” 라이트는 대답대신 이빨을 드러내고 씩 웃었다. 이거 참, 내가 생각해도 난 난봉꾼인 것 같아. 집으로 들어가 외출 준비를 하자 스피릿이 물어왔다. “어디가세요?” “고향에서 날 기다리는 아가씨에게 채이러 갔다올게. 미안해 스피릿. 늦을 지도 모르니까 먼저 자고 있어.” 옛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어깨를 움찔하던 스피릿이었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는 자켓을 들어 입는 것을 도와주며 말했다. “그 분을 만나면 무릎 꿇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세요. 아셨죠?” 콧끝이 찡해진다. 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넌 아마 천사일거야.” “주인님을 생각하는 노예일 뿐인걸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안젤라에게 문 꼭 잠그고 있으라고 이야기해줬다. 문 앞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선 나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라이트를 쳐다보았다. “모두들 날 못된 난봉꾼이나 여자 후리러 다니는 바람둥이로 알거야.” “사실이잖아?” 우울하게 라이트를 쳐다봐주자 그는 마당에 마법진을 완성한 다음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비취가루가 든 주머니를 잘 여며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는 경명스러운 시선으로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넌 나쁜 놈이야. 세상을 살면서 여자하나 울리는 것도 힘든데 넌 셋이나 울려버렸어. 넌 언젠가 미티어의 이름으로 천벌을 받을거야.” “면목없다.” “따라와. 널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데려다 줄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라이트의 손을 붙잡고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드래곤 하트를 꺼내 손에 쥐고 주문을 외우던 라이트는 그것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텔레포트 워프!” 마법진에서 빛이 솟아오르는 찰나의 순간. 난 창가서서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쳐다보는 두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츠팟! 주변의 배경이 좀 다르게 바뀌었다. 내가 서있는 곳이 라이트의 집 앞마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 라이트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라? 누구지?” “뭐?” 고개를 돌려보니 불이 꺼져 있어야할 그의 집에 환하게 불이 켜져있고 누군가가 왔다갔다하는 그림자가 엄핏보였다. 강철건틀릿을 꺼내 손에 낀 나는 라이트를 쳐다보았다. 그는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떠돌이가 빈집인줄 알고 찾아들었나본데?” “정리 좀 잘하고 살지 그랬냐?” 라이트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냥 열고 들어가면 될 것을 바보 같이…. 하지만 몇 번을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라이트는 문고리를 잡아 당겨보았다. 잠겨있는지 열리지 않았다. “부탁해.” 고개를 꺽으며 나선 나는 단번에 자물쇠를 분질러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십니까요? 안나오면 쳐들어 갑니…. 어라?” ========================================================================== 쿵짜라쿵짝~! <--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당신! …대단하십니다. Reload Running Fire: 71 “언니 안보구가?” 집안은 내가 처음 떠나올 때처럼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다. 이전에 수정구로 그의 방을 구경했던 나로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뒤따라 들어오는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라이트, 떠나올 때 정리하고 왔어?” “아니. 그냥 문만 잠그고 왔는데. 이거 참, 깨끗하네. 누군지 모르지만 괜찮으면 여기서 나랑 같이 살지 않겠냐고 제안해 봐야겠는걸?” 아무도 없는 집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살림을 차려놨는데도 불구하고 유쾌하게 웃으며 말하는 녀석에게 고개를 절절 흔들어준 나는 뭔가가 끓는 소리에 부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보았다. 화로에 불이 올려져 있고 조그만 냄비속에 야채 스프 같은 것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식탁에도 다듬다가만 야채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채식 주의자 인가보지?” 그때였다. 탁….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트는 누군지 모르지만 자기 책을 다 정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책장에서 책을 골라내느라 그 소리를 못들은 것 같다. 하는수 없이 나 혼자 라이트의 방 문을 박차고 난입했다. 생각대로 방안에는 뭔가가 창문을 넘으려 하고 있다! 급한대로 가까이에 있던 책을 들어 집어던지자 시커먼 그림자는 머리에 책 모서리를 맞고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낄낄 웃으며 달려가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은 나는 빛이 있는 거실로 녀석을 끌고 나왔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 이… 어라?” 내 손에 끌려나온 것은 아세트였다. 그녀는 머리를 두손으로 감싸고 있다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콜트씨.” “우왁?! 아세트?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아, 머리는 고의가 아니예요.” “아세트라고?” 고개를 돌리니 라이트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아세트는 그를 보고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로 숨었다. 멍청히 서있던 라이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세트,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저, 저는 주인님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아세트가 겁에 질린 얼굴로 슬그머니 내 등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걸 보고 라이트가 무섭게 얼굴을 찌부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저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 정신나간 엘프 계집애 같으니! 애써서 돌려보내줬더니 여기서 무슨 짓이야?! 당장 너희 숲으로 꺼지지 못해!” “자, 잘못했어요. 주인님! 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화, 화내지 마세요!” 깜짝 놀란 아세트가 얼른 앞으로 나가서 그에게 고개를 숙여댔다.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라이트는 그녀를 용서치 않았다. 아세트의 손목을 붙잡은 라이트는 안간다고 잉잉거리는 아세트의 손을 잡아끌어서는 문밖으로 내쳐버렸다. “꺼져! 집으로 돌아가! 여긴 너 같은게 있을 곳이 아냐! 알아들어!? 이 멍청한 년아!” “주인니임~! 주인님! 잘못했어요! 제,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열어주세요. 예에?! 주인님!” 탕탕탕~! 아세트가 연신 문을 두드려 댔지만 라이트는 문에 록을 걸어 잠궈 버렸다. 지글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화로에 올려둔 냄비에서 스프가 끓어넘치고 있다. 고개를 저으며 부엌으로 걸어가 화로에서 냄비를 내린 나는 주전자의 냉수를 한잔 따라서 마신 다음 라이트를 쳐다보았다. “너무 매정한거 아냐?” “이 정도는 해둬야 겁을 먹고 돌아가지. 바보 같으니. 뭐하러 온거야?” 방금 전까지 아세트를 잡아 먹을 듯이 화를 내던 라이트는 시무룩하게 뒤를 돌아본 다음 집안을 돌아다니며 아세트의 짐을 찾아가지고 왔다. 작은 배낭과 활, 화살통 하나가 다였다. 그는 그것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콜트, 부탁이 있어.” “뭔데?”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간 나는 앞마당으로 돌아나가보았다. 그곳에는 아세트가 문앞에 쭈그려 앉아 연신 훌쩍이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 밥이 나옵니까? 돈이 나옵니까? 엘프씩이나 되면서 질질 짜지 마십쇼.” 아세트가 고개를 들었다. 난 그녀의 앞에 짐과 화살을 던져주었다. 그녀가 날 올려다보았고 난 두 눈 딱 감고 잠시나마 악당이 되어보기로 했다. “꼴도 보기싫으니 돌아가랍디다. 아침해가 뜰 때까지 문앞에 앉아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대요.” 눈가에 가득 눈물을 머금은 아세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훌쩍여 댔다. “하, 한번도 귀여워해주지 않았으면서… 히끅, 그, 그래놓고서는 도, 돌아가라니. 너, 너무 하세요. 히끅… 저, 전 주인님이 필요하단 말이예요. 흐으윽~!” 그걸보고 난 입맛을 쩝쩝 다셨다. 고개를 드니 창가에 라이트가 서서 내게 응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어윽! 지금 이 모양을 스피릿이나 안젤라가 보면 울어버릴지도 몰라. 고개를 숙인 나는 아세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럼 나한테 와요. 내가 당신을 매일매일 귀여워 해주고 괴롭혀 줄테니까. 부담갖지 마세요. 나 이래뵈도 괜찮은 녀석이에요? 누구처럼 침대도 따로쓰고 키스도 한번 안해주진 않으니까. 자, 이리와요. 나랑 같이 가자구요.” 난 억지로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아세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다가 얼른 팔을 뺐다. 난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주인님이 필요하다면서? 내가 주인님 되어줄테니 나한테 와요. 당신 전 주인도 허락해줬다구요? 내가 당신 데려가도 좋다고.” “아, 아니야. 주, 주인님이 그렇게 말할 리가 없어요.” “없긴 왜 없어!? 이리와!” 늑대로 돌변하여 그녀의 팔을 매섭게 끌어당기자 아세트가 비명을 지르며 안겨왔다. 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날카롭게 웃었다. 이거, 스피릿하고는 촉감부터 틀린 걸? “이렇게 귀여운 녀석을 왜 마다하는지 모르겠어. 자, 이제부터 내가 네 주인이야. 언제나 유쾌하기만한 마법사는 잊어. 이제부턴 내가 널 업고 다녀줄게. 주인님이 바꿨다고 부담갖지마.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이잖아? 네 경우엔 좀 길겠지만 다를건 없겠지? 즐기면서 살자구. 나만 따라와. 주인님이 된 기념으로 오늘 밤 환상을 보여줄테니까.” “아, 아으으….” 몸을 덜덜 떨며 날 쳐다보던 아세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피식 웃으며 그녀의 턱을 붙잡고 입술을 빼앗으려 하는데 그녀가 날카로운 눈을 번쩍 떴다. “이거 놔!” “우왁!?” 아세트는 엄청난 힘으로 내 가슴을 밀어버리고는 후다닥 물러서서 문을 등지고 섰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활과 화살을 꺼내 날 겨눴다. 그녀의 눈은 분노와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그래! 그거야! 아세트, 역시 당신은 엘프였어! 하하하하! 난 더욱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야? 정말 쏘려구? 웃기네. 노예주제에 누굴 쏘려는 거야? 지랄말고 이리와. 좋아서 어쩔줄 모르게 만들어줄테니까.” “시, 시끄러워요! 가까이 오지마요! 쏘, 쏠거야!” “하하! 병신! 그래! 쏴봐! 쏴보라구! 하지만 그거 쏜 다음 넌 내 손에 엉망으로 망가지는거야. 헤헤헤. 엘프랑은 처음 해보는데. 기대되는 걸?” 속을 떠보라는 라이트 놈의 주문에 따라 나는 저속한 욕설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를 몰아세웠다. 그럴수록 아세트는 이빨을 드러냈지만 눈속에는 아직도 망설임이 보였다. 그걸로는 한참 모자라! 좀더! 좀더! 좀더 나를 미워하고 증오해! 화를 내라고! 엘프는 절대로 평화적인 존재가 아냐! 그렇다면 송곳니가 왜 있겠어?! 화를 내라고! 화를! 당신의 종족성를 증명해 보란 말이야! 다리를 한발 내밀었다. 그러자 결국 아세트가 비명을 지르며 활을 쏘았다. 다행히 가까이에서 발사된 것인지라 난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붙잡을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화살촉을 쳐다보던 나는 속으로는 한순을 내쉬며 겉으로는 히죽 웃었다. 아세트는 힉하는 숨소리를 내고는 얼른 허리를 숙여 바닥을 굴러다니는 화살통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허, 안돼지.” 발로 그것을 걷어찬 나는 그녀가 들고있던 활 마저도 빼앗아 등뒤로 던져버렸다. 이제 자신을 지킬 것이 없어진 아세트는 완전 무방비 상태로 나에게 붙잡혀버렸다. 두 팔을 벽에대고 팔안에 그녀를 가둬버린 나는 히죽이죽 웃으며 키스라도 할 태세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아아앙~! 주인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오! 아앙~! 주인니임! 라이트으! 살려줘요! 무서워요! 아아앙~!” 바닥에 주저앉은 아세트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라이트, 네가 졌어.” 그녀는 자신의 종족성을 자각하는 것보다는 노예로 남기를 원한 것 같다. 빌어먹을 노예근성 같으니라구. 훌쩍이는 아세트를 내버려두고 언덕길을 내려간 나는 어두운 대로를 걸어 제미니의 부친 벡터 아저씨가 운영하는 여관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췄다. 얼핏 안을 보니 한창 바쁠시간이다. 지금 들어가면 장사 방해되겠지? 한숨을 내쉰 나는 문닫을 시간에 다시 찾아가기로 하고 발길을 돌려 근처 골목길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시장에 들려서 여관사람들 가져다 줄 선물을 한아름 사고 골목길에 쌓여있는 나무 상자에 앉아서 제미니에게 할말을 연습하고 있으니 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렸다. 느지막한 시간까지 기다린 나는 주당들도 슬슬 자리를 파하고 일어날 무렵에 심호흡을 한다음 골목을나서서 여관으로 향했다. 제이미가 테이블에 의자를 올리고 청소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어서오세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식사는 좀 곤란한데요.” “밥은 먹고 왔으니까. 걱정마.” 가까운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의자를 하나 내린 나는 그곳에 걸터앉으며 들고 들어온 짐더미를 올렸다. 제이미가 날 알아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콜트 오빠!?” “여어. 잘 지냈냐?”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제이미는 큼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면이 있는 종업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제이미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옷가지와 장신구들을 보더니 군침을 꼴딱 삼키며 물었다. “오빠오빠. 이건 뭐야?” “뭘 것 같아?” “선물이야?!”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미는 기쁨의 비명을 질러댔다. 같이 일하는 여관 종업원들까지 불러서 맘에 드는 거 하나씩 골라가지라고 말해준 나는 원피스를 들어 몸에 대어보는 제이미에게 물었다. “제미니하고 아저씨는?” “아. 언니는 지금 욕탕에 씻으러 들어갔어. 좀 기다려야 할거야. 그리고 아빠는 오늘 도둑길드의 자크 아저씨가 찾아와서 같이 술 마셨어. 저기 코롱코롱 코골면서 자고 있는 곰 두 마리 보여?” 그녀가 가르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벡터 아저씨와 도둑길드의 길드 마스터 자크 영감님이 술병이 가득한 테이블에 엎어져서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낄낄 웃어준 나는 잠시 그들과 그간 쌓인 이야길 하다가 방으로 올라갔다. “언니 안보구가?” “청소하고 문 닫을 시간이잖아. 나 때문에 다들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제미니이 나오면 불러줘.” “콜트 오빠는 멋쟁이야! 마미언니, 세븐오빠는 저기 곰 아저씨들 감기 걸리지 않게 방에 좀 옮겨다 줘요! 자아! 나머지 사람들은 청소 시작! 난 콜트오빠 방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제이미는 나이답지 않게 능숙하게 사람들에게 청소를 지시한 다음 내 손을 잡아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전에 내가 쓰던 방은 그대로 비어있었다. “오빠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언니가 남겨 두라고 했거든?” ========================================================================== 특전이 코앞입니다. 조금 졸립더라도 보고 주무세요. Reload Running Fire: 72 “부끄러워?” 이거 참, 부담되게말야.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자켓을 벗고 자리에 앉아서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청춘이 어쩌다가 이렇게 복잡하게 됐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우울하게 마룻바닥을 보고 있으려니 문이 벌컥 열리며 머리카락에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제미니가 달려들어왔다. 그녀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후다닥 달려와서는 날 덥썩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마구 얼굴을 부벼댔다. “돌아왔구나!” “어, 그래.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제미니가 너무 좋아했기에 난 조금 뒤에 여기온 목적을 실행하기로 했다. 날 끌어안고 잠시 서있던 그녀는 내 손을 잡아 끌어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는 뭐라고 한참 더듬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밥은 먹었니?” 이거 참, 누가 주방장 아니랄까봐. 고마운 말을 다하네. 씩 웃어준 나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도 자기가 한 말에 웃어버렸다. “나 없는 새에 별 일은 없었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제미니는 쉼없이 재잘거리며 그간의 이야기를 해댔다.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데 제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어디 아프니?” “응, 아파.” 가슴이 아파. “어디가 아픈데. 많이 다쳤어?” 제미니가 얼굴을 굳히며 내 몸을 살폈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그녀의 어깨를 덥썩 잡아버렸다. 제미니는 깜짝 놀라서 날 쳐다보았다. “제, 제미니. 있잖아. 내가,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난 말야. 난 여기 돌아온게 아냐. 난 네게 해줄 말이 있어서 찾아온거야. 그말이 뭐냐면….” 눈을 질끈 감은 나는 결국 말하고야 말았다.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미니는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 “결국 그 노예랑 눈이 맞아버렸다는 말이야?” “어, 뭐, 그….” 짜아아악! 그녀의 따귀에 목을 돌아간 나는 얼얼한 뺨을 만지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미니는 입을 꾹 다물고 날 쳐다보다가 입고 있는 옷의 주머니를 뒤져 담뱃대와 쌈지를 꺼내 담배를 채웠다. 담배를 채우는 그녀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다. 가까스로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인 그녀는 하얀연기를 뿜어낸다음 날 쳐다보았다. “겨우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거야?!” “응, 채이러 왔어. 날 이제 잊어줘.” 제미니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손에 쥔 담뱃대가 부러질 듯이 떨렸다. 뺨 한두대는 각오했기 때문에 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조금 돌렸다. 온몸의 신경이 짜릿하게 반응해오고 있다. 으음, 늑대인간과 조우했을 때도 이런 기분 느끼지 않는데 말야. 그만큼 내가 긴장했다는 거겠지? 이윽고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제미니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어린아이 마냥 손에 든 담뱃대를 내던져버리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훌쩍… 끅… 이, 이이, 흐으응~! 끄윽… 나, 나쁜 자식. 흐윽…! 너, 너만 기다렸는데. 끅… 이제부터, 이, 이제부터라도 나만 바라봐주면 되는데에~!” 난 입을 꾹 다물고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제미니는 손등으로 누가를 매만지고는 몸을 돌렸다.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훌쩍…! 끄윽, 나, 남자가 너만 있는 줄 알아?! 질질 끄는건 딱 질색이야. 나 싫다는건 나도 싫어. 그러니 꺼져!” “고마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미안해.” 문으로 걸어나가려고 하니 그녀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제미니가 울먹이는 눈을 하고 날 쳐다보고 있다. “훌쩍… 끅, 집도 절도 없는 주제에 까불지마. 오늘 잘 곳은 있어? 밥은 정말 먹은 거니?” “나 생각해 주는 거야? 고마워라.” 몸을 돌린 나는 그녀의 하얀 볼을 조금 쓰다듬어주었다. 눈을 감고 내 손길을 느끼던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여기서 자고가도 돼.” “괜찮아. 나 같은 놈 빨리 사라져야 네 맘이 편할 거 아냐.” “자고가아!” 두 손으로 내 옷깃을 붙잡은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고함을 빽 질렀다. 어쩔 수 없게된 나는 결국 그녀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른 아침, 거의 새벽녘이 되었을 때 그녀의 품에서 잠을 깬 나는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제미니의 몸에서 떨어졌다. 밤새 자지 않았는지 눈을 떴을 때부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그녀가 반쯤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났어?” “어, 어, 으응. 미, 미안해. 이제 난 네게 아무것도 아닌데….” “괜찮아. 억지 부린건 난데 뭐.” 제미니가 가슴 앞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어색해진 나는 옷을 입다말고 담요를 끌어다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제미니가 풋하고 웃었다. “왜? 부끄러워?” “쑥쓰러워. 이제 남의 여자가 될 사람잖아. 소중히 해야지. 어, 내가 이런 말하면 천벌 받겠지만 말야.” “나 아직 남자 없는데?” “좋다고 쫓아다니는 녀석들은 있을 거 아냐? 쓸만한 녀석으로 하나 골라서 물어. 사랑주고 사는 건 힘들어, 사랑받고 사는 게 좋은거지.” “그래도 한동안은 힘들 것 같아. 어떤 나쁜 놈이 내 몸과 마음을 다 훔쳐가버려서 말야.” 난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살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제미니는 침대가에 걸쳐져 있는 셔츠와 속옷을 주워입고 몸을 돌려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가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어때? 그 계집애 나보다 예뻐?” “아니. 네가 더 예뻐. 스타일도 좋고.” “그럼 왜 그 년이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나랑 결혼해. 내가 너 먹여살려줄게.” 난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돼. 내가 없어지면 그 녀석들은 갈 곳이 없어.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는 녀석들이라구. 바로 길거리에 나 앉게돼.” “그래서 뭐? 노예잖아? 까짓 다시 관리원으로 보내버리면 되는 거 아냐?” 난 입을 다물었다. 요목조목 따지고 들어오는 그녀에게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내 모습에 그녀는 짜증난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버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제미니는 내 턱을 붙잡고 마치 노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진한 키스를 했다. 한계까지 날 몰아붙인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떼어냈다. 무언가 달콤한 것을 맛본 듯한 표정의 그녀는 혀로 입가를 낼름 핥은 다음 내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허리 위에 올라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바보 같은 녀석아. 솔직히 말해봐. 아깝지?” 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하~! 으, 응. 아까워. 한심하지? 이, 이렇게 멋진 여자를 놔두고 노예같은 거에게 홀려버리다니, 난 정말 멍청한 놈이야.” 정신이 어떻게 되버렸는지 난 그녀의 가슴을 더듬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인 제미니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제와서 사탕발림하지마. 넌 원래 멍청했어. 칫, 이렇게 귀가 얇은 녀석인 줄 알았으면 처음 봤을 때 확 덮쳐버리는 건데. 그럼 좀 더 즐거웠을거야. 널 놓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제미니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내 셔츠의 단추를 다시 풀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웃으며 허리를 숙인 그녀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순간 그녀가 서큐버스로 보인 것은 내 눈의 착각이었을까? “후후후…! 날 우습게 보지마. 네 까짓거 없어도 난 하나도 슬프지 않아. 까짓 사내가 너뿐인줄 알아?” “으, 으윽… 제미니.” 내 목과 가슴을 달콤한 혀로 애무하던 제미니는 결국 입고 있던 속옷을 다시 벗어버리고 날 몰아세웠다. “울어! 이 나쁜놈아! 내 순결을 빼앗은 불안당을 쉽게 보내 줄 수는 없… 으, 아윽… 으음… 어, 없어…!주, 주인님이라고, 불러… 하아… 내, 내 발을, 으음… 하, 핥아… 개, 개처럼 짓…! 읏~! 이, 이 노예… 아…! 콜트… 으, 으읏…!” 제미니는 내 위에 앉아서 몸을 움직이며 연신 신음소리를 흘렸고 난 머리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의 뜨거운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대체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머리가 텅비는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니 잠이 덜깬 제미니가 내 팔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그러고보니 오늘 하루종일 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장사는 어떻게 된거야?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올려주니 제미니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녀는 집어던진 담뱃대를 주워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하얀 담배연기가 석양의 빛에 섞여 어지럽게 방안을 맴돈다. “밖에서 걱정하지 않을까?” “불성실한 딸년이 애타게 기다리던 사내놈을 만나더니 방구석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는데 어쩌라구. 알아서 생각하겠지.” “제미니, 말을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냐?” 제미니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내 속옷을 잡아당겨 슬쩍 안을 들여다보더니 픽 웃어버렸다. “지금보니 꽤 귀엽다아?”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을 느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후다닥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깔깔 웃은 제미니는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걸치고 있던 담요를 벗어버렸다. 제미니의 알몸이 석양에 드러났다. 스피릿의 그것보다 훨씬 볼륨있다고 생각한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어색하게 옆으로 돌려버렸다. 제미니가 이런 날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부끄러워?” “…설령 결혼한 사람들이라도 그런 건 함부로 보여주면 안된다고 생각해.” 제미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내가 사람하난 잘 봤지. 내가 이래서 널 좋아했었어.” “…미안해.” “귀여운 녀석. 군침돌게하네. 누나랑 한번 더 할까?” ========================================================================== XXX: …시, 심의. 쿨럭~! Reload Running Fire: 73 “언제 돌아갈거냐?” 제미니가 나에게 다가와 귀를 만지막거리며 웃었다. 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가 뭘 요구하더라고 지금의 난 거부할 수 없다. 저번처럼 손가락하나 잘라달라고 한다면 그것도 해줄 각오가 되어있다. 물론 거부해도 된다.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적어도 내 정의와 잣대를 가지고 볼 때 그래서는 안된다. 개소리라고 해도 말할은 없다. 가슴 졸이며 기다린 녀석이 다른 여자랑 눈맞아버렸는데 간단하게 풀릴 기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죄 갚음이라고 해야 할까? “네 기분 풀릴 때까지 무슨 짓을 해도 좋아. 아까처럼 네 발을 핥아 줄 수도 있어. 손가락도 잘라 줄 수 있어. 미안해, 날 용서해줘. 미안해, 날 미워해줘. 미안해, 날 잊어줘.” 그녀의 발치에 꿇어앉아 고개를 조아리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입에 담뱃대 하나 물고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기지 말라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몸을 돌린 그녀는 던져버린 옷가지를 주워 입으며 말했다. “흥! 쪼다녀석,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와서는 아주 지랄을 떠는구나. 침대에서 좀 데리고 논거 가지고 간단하게 용서해줄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걸로는 어림도 없어. 지겨울 때까지 잡아놓을거야. 입실론의 제미니 리그펜타인을 우습게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라구. 콜트 슈발츠씨.” 난 입을 꾹 다물고 마룻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허리 뒤의 치마끈을 질끈 동여맨 제미니는 악마처럼 웃으며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제 요걸 어쩌지? 묶어놓고 심심할때마다 데리고 놀까? 그런데 이런 건 누가 가르쳐줬어? 이 배응망덕한 놈아.” 잠시 그녀를 올려다본 나는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가르쳐줬어. 내 노예, 널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바닥에 무릎 꿇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라고 하더라.” 이마를 툭툭 건드리던 제미니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난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그녀의 손이 내 턱으로 내려와 고개를 들게 했다. “…읍?” 향긋한 담배맛이 느껴진다. 제미니는 눈을 감고 나와 입술을 맞추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혀를 입안 깊숙이 집어넣은 덕분에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하고 있으니 그녀는 거만하게 날 내려다보다가 손등으로 입가를 슥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배고프지? 밥 가져올테니까 옷입고 기다려. 도망가면 길드 마스터인 자크 아저씨에게 네 암살을 사주할거야.” “아,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문을 닫고 사라지는 스피릿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엔 나도 노예가 되어버렸네.” 스피릿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어이없어 할거야.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옷을 주워입고 침대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커다란 소반을 든 제미니와 제이미가 들어섰다. 얼굴은 물론이고 귓볼까지 시뻘게진 제이미는 침대에 소반을 던지듯이 올려두고 도망치듯이 후다닥 달려나가버렸다. 이거참, 제이미에겐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어색하게 웃고 있으려니 소반을 테이블에 올린 제미니가 날 불렀다. “이거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접시와 그릇에 담겨있는 음식들은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젠장, 잊어먹지도 않고 있었네. “물론하지. 서방님이 될지 모르는 사람이 맛있다고 좋아해준건데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지. 어쨌든 이거 다 먹으면 보내줄게. 하지만 다 못먹으면 하루 더 나랑 같이 있어야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포크과 나이프를 들어 그녀가 만든 음식들을 꾸역꾸역 입안에 쑤셔 넣었다. 접시의 음식들이 차츰 자취를 감출 때마다 제미니의 얼굴을 굳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한참 후 내가 음식접시를 모두 비워버리자 그녀는 훌쩍이고 말았다. “다, 다 먹었어. 맛있더라….” “조금 정도는 남기지 그랬냐! 이 나쁜놈아!” 난 대답대신 씩 웃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그릇을 정리하던 그녀는 깜짝 놀라서는 후다닥 일어나서 문을 가로막았다. 당황해 하는 모습은 스피릿보다 제미니가 더 귀엽다. “왜? 지, 지금 나가려고?” “응.” “그래도 조금만 더, 차, 차라도 한잔하고….” “제미니. 보내줘.” 소매로 눈가를 문지른 제미니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문에서 비켜섰다. 그녀는 불안한 듯이 두 손을 매만지며 물었다. “돈은 있어?” “지금 네가 모아둔 것 보다 많아.” “그래?” 제미니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를 뒤진 나는 그저께 어두운 골목길에서 급하게 만든 반지와 목걸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이별 선물이야.” “뭔데?” “드래곤 하트로 만든 목걸이랑 반지야. 가지고 있으면 병도 안걸리고 잘 늙지도 않고 오래산데.” “그래? 너 돌아올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그건 아마 힘들거야.” 제미니는 쓰게 웃었다. 이제는 정말 떠나려고 문으로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다시 내 옷깃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린 나는 와락 안겨온 그녀에게 붙잡혀 도둑키스를 당했다. 날 벽으로 밀어붙이고 입을 맞추고 있던 제미니는 한참 후에야 떨어졌다. 그녀는 연신 훌쩍이며 말했다. “그, 그냥 여기 있으면 안돼? 노예 잊어버리고 나랑 있으면 안돼?” “미안해. 제미니, 정말 미안해.” “흐으윽…!” 그녀는 내 옷깃을 붙잡고 훌쩍이다가 떨어졌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서서 이내 몸을 돌렸다. “어서 꺼져! 이 나쁜놈아!” “건강해. 제미니. 잘 살아야해? 행복해야해?” 작별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잘가. 하지만 절대로 행복해하지마. 나 버리고 간 자식이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봐.” “응, 그럼 잘 있어.” 난 쓰게 웃어주며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직전 제미니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문앞에 멈춰선 나는 틈새로 새어나오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난 참 못되먹은 자식이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고 복도를 걸어간 나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있는 홀로 나갔다. 바쁘게 오가던 제이미와 여관 종업원들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서 날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씩 웃어주며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마친 나는 그만 몸을 돌리고 문으로 향했다. 그때 뭔가 덩치 큰 것이 내 앞을 막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미니의 부친 벡터 아저씨다. 코를 벌렁거리며 날 쳐다보던 그는 이내 쓰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켜줬다. “자넬 믿었어. 콜트.” “죄송합니다. 아저씨.” “됐어. 그만 가보게.” 어서가라고 손을 흔드는 그에게 고개를 꾸벅여준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도망치듯이 가게를 나서버렸다. 해가 지고, 찬바람이 씽씽불어와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우울하게 포석이 깔린 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으니 갑자기 누군가의 내 이름을 불렀다. “콜트!” 고개를 돌려보니 제미니가 창가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러고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싶다. 제미니는 처음 날 떠나 보낼 때와 마찬가지로 싱글벙글 웃으며 그때 했던 말을 또 말했다. “젊은 날의 외도 정도는 용서해줄게. 대신 날 생과부로 늙게 만들지만마.” “제미니. 이제 그만해.” “자꾸 그따위 소리하면 콱 임신해 버릴거다?” “아버지도 모르는 자식을 낳아서 뭘 어쩌려고, 안돼. 그만둬, 네 인생만 망가진다구.” 순간 제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난 여관 부엌떼기 인생일 뿐이야. 남편 같은 거 없어도 상관없어. 능력있는 남자 만나서 좀 편하게 지내보나 했더니 다른 년이랑 눈맡아 버리다니, 빌어먹을! 두고봐. 나 아이 생기면 이대로 낳아버릴거야. 그래서 그 아이에게 자기 아버지에 대한 못된 이야기만 해줘서 이 다음에 크면 복수하러 가게 만들거야. 기대해도 좋아. 이 못되먹은 자식! 감히 내 마음을 배신해?! 자기 자식에게 엊어맞으면서 날 버린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달래려던 나는 제미니의 눈이 웃고있다는 것을 깨닳았다. 반쯤은 농담인가? 이럴 땐 맞장구를 쳐줘야지. “좋아. 이왕이면 사내로 낳아. 그래야 싸울 맛이 나지.” 창가에 기댄 제미니는 장난스럽게 웃어버렸다. “이봐, 콜트.” “왜?” “떠나라곤 했지만, 그래도 쓸쓸해지면 찾아와. 안아줄게.” “칫~! 됐어! 그만두고 좋은 남자 찾아서 시집이나가.” “나도 그러고 싶어. 문제는 너만한 녀석이 없다는 거지.” 그녀에게 수준을 조금 낮춰보라고 이야기해준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사랑해 제미니, 행복해. 정말 행복하게 살아야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꺼져.” 자리에 멈춰서서 씩 웃어준 나는 냅다 뒤로 돌아 골목을 달려갔다. 그때 제미니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나도 너 사랑했어! 이 나쁜놈아!”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대로를 질주해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성문 근처 대로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팔을 들어올린 나는 그것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머리는 어질어질, 하늘은 빙글빙글, 귓가로는 아직도 제미니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젠장, 가슴이 아파.” “몸은 정상인데.” 어떻게 라이트의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멍청한 얼굴로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벽난로 앞으러 걸어가서 주저 앉았다. “아세트는 어디갔어? 돌아갔냐?” “아, 그게.”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에 담요를 올려주었다. 힘없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세트였다. 그런데…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머리는 왜 잘랐습니까?” 단발머리가 된 아세트는 생긋 웃어버렸다. 그녀의 옆에 서있던 라이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 때까지만 데리고 있기로 했어.” 엘프에게 있어서 귀는 종족성을 뜻하며 머리카락은 자존심이다. 아세트도 마음 독하게 먹었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라이트에게 물었다. “언제 돌아갈거냐?” ========================================================================== 따스한 봄이 오면~! Reload Running Fire: 74 “한잔 따라봐.” “너 오면 가려고 그랬어. 뭐 하느라 늦었는지는 묻지 않으마. 따라와. 아세트, 벽난로 불꺼뜨리고 당신도 밖으로 나와요.” 아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의 정령 언딘을 불러 별난로의 불씨를 꺼뜨렸다. 녀석을 따라 밖으로 나가니 마당에 이미 마법진이 그려져있었다. 잠시 후 큼직한 배낭을 손에 든 아세트가 문을 닫고 나왔다. 라이트는 집 전체에 록을 걸어버리고는 우리를 마법진 안으로 인도했다. 아세트는 그의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라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면목없다.” 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상관없지 않아?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야. 최소한의 기준만 지키고 나가자구.” “너 좀 이상하다? 어디아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한테 차였는데 별수 있냐? 빨리가자. 아가씨들 걱정하겠다.” 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텔레포트 워프.” 츠팟~! 배경이 바뀌었다. 고개를 든 나는 그랜퍼스의 수도 캘버린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불이 환하게 켜져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하루 집 비웠다고 누가 업어가고 그러진 않았겠지? 막 문을 열려고하는데 안젤라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와서는 내 허리에 매달렸다. “어서오세요! 언니! 오빠왔어!” “정말요? 어머, 주인님. 이제 돌아오셨어요?” 앞치마를 하고 집안에서 총총 달려나온 스피릿은 말 잘듣는 강아지마냥 헤헤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무뚝뚝하게 그녀를 쳐다보려 애썼지만 결국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래, 좀 늦었지? 잘 지냈어?” “예.” “뭐 하느라 이렇게 늦은 거예요 오라버니?” “으응.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아, 그렇지. 라이트, 아세트 소개 시켜줘.” 고개를 끄덕인 라이트는 안젤라와 스피릿에게 아세트를 소개시켜주었다. 스피릿은 엘프의 머리가 단발머리라는 사실에 깜작 놀라버렸고 안젤라는 엘프를 처음봐서 놀라버렸다. “아세트라고 합니다. 노예는 아니고, 에,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하나….” “아세트 폰 이노세피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이 사람과는 사정이 있어서 함께 지내고 있어요.” 스피릿과 안젤라는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를 환영했다.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건 말건 난 흐느적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침대로 몸을 날렸다. “아으으으… 제미니이~!” “오라버니 여기 있어요? 저녁은 먹었어요? 배 안고파요?” “오냐. 먹었다. 그렇지. 안젤라 심부름 하나 할래?” 침대에 누운 채로 안젤라를 쳐다보니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날 쳐다보았다. 잠시 후, 혼자서 근처 상점까지 술을 사러나갔던 안젤라가 무사히(?) 돌아왔다. 그녀는 무슨 엄청난 모험이라도 했다는 듯이 내 앞에 술병을 늘어놓고 잔뜩 흥분한 얼굴로 밖에 나갔다 돌아온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우리 안젤라는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다. 뭐, 나름대로 귀여우니 놔두자. 아세트와 라이트에게 저녁을 차려주느라 안젤라가 밖에 나갔던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스피릿이 문을 열고 돌아온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서 나에게 따져 물으러 왔다. “안젤라 혼자 그런거 사오라고 시키시면 안돼요. 주인님.” “시끄럿, 잔이나 가져와.” “주인님, 지금 제 말을….” “닥치라고 그랬지?”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고 날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소반에 안주와 빈 유리잔을 들고 들어왔다. “가져왔습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나는 이빨로 술병의 코르크 마게를 뽑아 잔에 부었다. 그리고 그것을 물 마시듯이 마셔버렸다. “후아, 화끈한데?! 자, 안젤라도 마실래?” 안젤라는 스피릿의 눈치를 보았다. 스피릿이 눈썹을 세우며 끼어들었다. “안돼요.” “안돼긴 뭐가안돼? 넌 가만히 있어. 안젤라. 술은 말야. 어린 녀석들끼리 호기심에 마시면서 배우는게 아니라 어른에게 제대로 배워야 하는거야. 아버지가 없으니 오빠가 가르쳐 줄게 잘 들어. 술을 맛있게 마시는 3단계 방법은 말야. 처음 코로 향을 즐기고, 입안에 머금었을 때의 맛을 즐기며, 삼켰을 때 목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즐기는 거야.” “예.” 그러면서 내가 주는 잔을 두손으로 받아든 그녀는 코로 냄새를 맡아보고, 입안에 머금어 볼을 커다랗게 부풀린 다음 그것을 끝끝내 삼키고는 기절해버렸다. “…이런, 우리 안젤라는 술이 약하네? 킥킥킥~!” 낄낄 웃으며 쓰러진 안젤라를 침대에 눕혀준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앞에서는 스피릿이 조금 화가 난 듯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왜 그러세요? 오늘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안마시던 술도 다드시고,” “스피릿, 나 오늘 하루종일 뭐 했는지 알아?” “뭐 하셨는데요?” 손을 흔든 나는 스피릿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 다음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제미니와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피릿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난 낄낄 웃으며 잔에 다시 술을 따라서 쭉 들이켰다. “후아~! 죽인다!” 눈앞이 핑핑돌고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다. 안젤라 녀석, 엄청난 놈을 가져왔잖아? 다음 잔을 마시려는데 스피릿이 그걸 빼앗아 가버렸다. “뭐야?” “…읍!?” 잔을 입에 대고 기울인 스피릿은 볼을 커다랗게 부풀렸다가 그것을 간신히 삼키고는 어질어질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킥킥킥~! 바닥에 굴러다니는 잔을 쳐다본 나는 그것을 주워서 술을 따랐다. 난 그것을 위로 올리며 외쳤다. “날 차준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건배! 캬!~ 심장이 녹아버릴 것 같아!” “하~! 쫌생이이이! 뭘 위해서 건배야아? 지랄하고 자빠졌네에. 히끅.” 난 눈을 곧추세우며 고개를 들어보니 술한잔에 얼큰하게 취해버린 스피릿이 술병의 코르크 마개를 뽑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앙?!” “시끄러어! 어디다 대고 큰소리야아!” 눈이 풀린 스피릿은 내게 맞고함을 지르더니 거꾸로 잡은 술병으로 날 때리기라도 한 모습으로 으르렁거리며 기어왔다. “다른 계집애한테 채이고 돌아온게 무슨 벼슬이라고 술쳐먹고 꼬장이야아?! 아앙! 나 같으면 미안해서 말도 못하겠다아! 끅!~ 이 바보 놈아아! 좀 예쁘면 아무여자나 끌어들이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어어. 안젤라 데리고 올때부터 알아봤다구우! 나만 좋아한다고 말해놓고선 어디서 저런 걸 데려와서 사람 바보로 만드는 거야아!? 나 하나로는 부족했니이? 히끅~! 어, 왜에? 이젠 고향에 있다는 그 년도 데리고 오지이?” “뭐!? 한번만 더 말해봐! 이 노예 계집애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뭐야? 그게 전부 내 잘못이란 거야아?! 그럼 그때 왜 날 샀어어? 다른 놈에게 가게 돌아설 것이지이! 왜 날 샀냐고오! 이거 뿐이면 말도 안해에! 헥헥~! 히끅~! 허, 허락도 안했는데 그 어두운데서 날 겁탈했잖아아! 적당히 데리고 다니다가 풀어줄 일이지 왜 그런 짓을 한거야아! 이 나쁜놈아아! 그 일만 없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당신에게 마음 주지 않았을 거야아! 알아아!?” “으씨! 몰라! 노예주제에 어디서 주제넘게 나서? 귀엽다고 오냐오냐 해줬더니 머리 끝까지 기어올라?!” “그래에! 때려! 때리보란 말… 아악!” 짜악! 술에 취한 내가 뺨을 후려 갈기자 스피릿은 바닥으로 넘어져버렸다. “칫! 노예주제에 너무 까불지 말란 말야!” 더러운 기분에 술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고 있으니 스피릿이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맞은 뺨을 감싸고 질질 짜면서 대들었다. “흐윽…! 왜 때려어? 네, 네가 뭔데 날 때려어?! 네가 내 아버지야아? 내 어머니야아? 오빠야? 가족도 아니면서 왜 때리는거야아?! 너, 너만 없었으면 나… 나는!” “주인님이다! 그리고 내가 없었으면 넌 사창가로 끌려가서 몸 팔고 있을거야! 그걸 몰라서 물어!?” 짝! 술김에 욱해서 한대 더 때려줬다. 두 대나 맞아버린 스피릿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놓아울어버렸다. 울던말던 난 계속 술을 퍼마셨다. 그러고 있으니 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라이트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어이~ 콜트군~ 조금 소란스러운데, 안에서 뭐해에?” “술마신다! 꺼져!” “우왁?!” 챙그랑~! 날아간 술병은 벽에 맞고 깨져버렸다. 내 술버릇을 아는 라이트는 얼른 문을 닫아버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팔을 들고 흔들며 스피릿에게 악을 써댔다. “닥쳐! 조용히 안해?! 맞는다!” “아아앙, 흐윽…! 흑…. 끄윽… 때, 때리지마아….” 그녀는 움찔하면서 몸을 웅크렸다. 에이씨! 오늘 왜 이렇게 기분 더러운 거야?! 난 홧김에 다른 술병을 뽑아서 입에 들이부었다. 스피릿은 콧물을 훌쩍이며 날 쳐다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나, 나도 그거 줘어. 히끅…!” 연신 딸꾹질을 해대는 그녀를 쳐다본 나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네가 뽑아마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해달라는거 다해주니까 이젠 이런 것도 날 부려먹는거야?” 내 눈빛에 움찔한 스피릿은 술병을 하나 집어들더니 코르크 마개를 뽑으려 안간힘을 써댔다. 난 그걸 보다가 화가나서 그녀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단번에 그걸 뽑아서 가슴에 안겨주었다. “넌 왜 이런 것도 하나 제대로 못해?! 이 병신아!” 술병을 입에 대고 한모금 마신 그녀는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 난 힘이 없는 걸? 히끅….” “어이구 속터져!”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마지막 남은 술병을 들어 입안에 쏟아부었다. 안젤라가 사온 술은 네 병뿐이었다. 독한 술이니 이 정도만 있으면 될거라 생각했나보다. 다음부터는 좀 많이 사오라고 해야겠네. 입맛을 쩝쩝 다시며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의 가슴에 안겨있는 술병을 쳐다보았다. 난 그녀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한잔 따라봐.” “싫어어. 내거야아. 나 혼자, 히끅~! 다, 다 마시고 죽어버릴거야아.” “칵~! 안따르지?! 맞을래?” “싫어어어!” 그녀는 술병을 껴안고 몸을 돌렸다.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다 옆으로 픽 쓰러졌다. “어랍쇼?” ========================================================================== 그냥 귀엽게 애교로 봐주십쇼. Reload Running Fire: 75 “싫어. 내가 왜? 노예가 먼저 숙이고 들어와야하는 거 아냐?” 비틀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킨 나는 오로지 그녀의 술병을 빼앗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는 스피릿에게 다가갔다. 그녀도 만취 상태였기 때문에 어디 도망가지는 못하고 병을 끌어안기만 했다. 그녀의 등을 껴안는데 성공한 나는 가슴에 꼭 껴안고 있는 술병을 붙잡아 당겼다. 그런데 신기하게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거다.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날 밀어냈다. “꺅! 이 변태에! 어딜 만져어!? 내 몸에 손댈 수 있는 건 상냥하신 우리 주인님 뿐이야아! 저, 저리가아!” “내, 내가 네 주인님이야. 임마….” 철퍼덕…! 바닥에 쓰러진 나는 숨을 헥헥 몰아쉬며 말했다. 너, 너무 마셨나? 하지만 더 마시고 싶어. 난 팔을 뻗어 그녀의 치마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 그거 좀 줘어~! 뚜껑 내가 따줬잖아아~!” “싫어어! 내거야아! 안줘어!” 스피릿은 병을 집어들더니 입에 대고 기울였다. 꼴꼴꼴거리며 유리병속에 든 무색투명한 액체가 그녀의 목으로 흘러들어간다. 침을 꼴딱 삼킨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다리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에서 병을 빼앗는데 성공했다. “헤헤헤~! 빼었다.” “어윽… 아, 안돼에. 다 못마셨어. 이, 이리줘어! 나쁜놈아. 아, 아무것도 모르는 걸 데려와서 몸도 마음도 다 빼앗아가버린 주제에 그것까지 훔쳐가는 거야아? 안돼에~! 이, 이 도동놈아아! 돌려줘어” “시, 시끄러. 너 나한테 시집온다고 그랬잖아? 그럼 내것도 니것이 되고 니것도 내것이 되는거야.” “누, 누가 너 같은 거 한테 시집을 가니이? 히끅…! 술병 돌려줘어!” 스피릿은 내 가슴에 매달리며 말했다. 술병을 입에 대고 기울였지만 한모금도 안나왔다. 제기, 요게 다 먹었구나. 난 병을 집어 던지고 바닥에 벌렁드러누웠다. 하하하~! 천장이 빙글빙글 돈다아~! 그러고 있으니 내 가슴을 기어올라온 스피릿이 빈병을 주워들고 울상을 지었다. “아앙~! 다 못먹었는데에~! 히끅! 네, 네가 다 마셨지이! 이 나쁜놈아!” “거, 다들 나보고 나쁜 놈, 나쁜 놈 하는데. 내가 대체 뭘 잘못했어? 언제 굶긴 적있어? 없지? 옷 없어서 더러운 옷 그대로 입다니게 한 적 있어? 없지? 저체온증에 걸려서 죽을 뻔한 것도 살려줬지. 어, 뭐, 그때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 대신 네가 반란분자들에게 잡혀갔을 때 목숨걸고 뱀파이어랑 싸워서 구해줬잖아? 그대로 뒀으면 넌 그 느끼한 것들에게 끌려가서 차기 왕위를 물려받은 왕자님을 낳아야했을거라구? 그것도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말야. 그거에 비하면 훨씬 났지 않냐? 히끅… 뭐, 한동안 고생이 좀 심하긴 했어도 요새는 좀 편하잖아? 일부러 집까지사서 멀리 안나다니고 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데 말야. 그리고 막말로 노예 말에 껌벅죽는 바보가 어디있냐? 그런 멍청이는 나 하나 뿐이라구. 어디 이렇게 노예 말 잘듣는 주인님있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천장을 바라보며 외쳐주자 진이 다 빠져 내 가슴위에 누워 단내가 풍기는 숨을 헥헥 내쉬던 스피릿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으으…! 히끅, 말 잘듣는 주인님이 노예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어? 입술 터졌어. 씨… 아파, 아프단 말야아. 밖에 나가서 바람피고 들어온 것도 속상한데 때리기까지해에? 너도 한번 당해봐.” “아아아악! 무슨 짓이야! 아악!” 내 위에 드러누운 스피릿은 두 팔로 겨드랑이를 꽉 꼬집어댔다. 하지만 술에 취해서 손에 힘이 잘들어가질 않자 이빨까지 동원해서 깨물어댔다.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밀어낸 나는 침대로 올라가려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스피릿은 날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윽? 우왁?!” 뭔가가 등에 달라붙었다. 비틀거리며 서있던 나는 앞으로 픽 꼬꾸라졌다. 쿠웅~! “아윽! 아이고 코야~!” “히끅…! 어,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 넌 아무대도 못가아. 평어엉생~! 죽을 때까지이이~! 히끅… 나만 업고 다녀야해에. 알아들어어?” 말을 마친 그녀는 내 목을 깨물었다. 애정이 넘치는 기분좋은 애무 같은게 아니다. 그녀는 토끼의 목덜미를 깨무는 살쾡이 마냥 정말로 내 목 가죽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우아악! 아파! 깨물지마아!” “그럼 앞으로 바람피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해. 난 한 남자만 쳐다보는데 넌 여러 여자들을 울리고 다닌다는게 말이되? 난 절대로 그 꼴 못봐. 앙…!” “아아악! 목 찢어져~! 그, 그만!! 아아아악! 라이트! 살려줘!” 투견 흉내라도 낼 참인지 스피릿은 내 목을 깨물고 늘어졌다. 등뒤에 달라붙어 있어서 어떻게 떼어낼 수도 없고 때려 줄 수도 없다. 최후의 수단으로 몸을 일으켜보았지만 돼지같이 먹고 살만 찌웠는지 무거워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겨우 두병 마셨는데 이 정도라니. 어지간히도 독한 녀석인가보다. “우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지만 스피릿은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잔인무도하게 내 등가죽을 꼬집고 여의치 않으면 입으로 마구 깨물어댔다. 덕분에 난 눈물이 날 지경에까지 몰려가버렸다. “내, 내가 잘못했어! 다 잘못했어! 미안해. 용서해줘! 다, 다시는 안그럴께! 앞으로는 절대로 술 안 마시고 안 때릴께! 아아악! 도, 동굴에서 있었던 일도 사과할게. 그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 그만… 안돼! 그만 둬! 아아아악!?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을게! 용서해줘어어! 놔줘~! 정말 아프단 말야아아!” 내 외침이 닿았는지 목을 물고 늘어지던 스피릿이 입을 뗐다. 헉헉 거리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내 등에 달라붙어 있던 스피릿의 멍청한 음성이 귓가로 들려왔다. “히끅, 어라? 이봐.” “씨이… 뭐, 뭐야. 이 못되먹은 노예년아. 끄윽… 넌 내려오면 가만안둬.” “녀언? 죽어볼테야? 앙….” “아아아아아악! 그만둬! 그만둬! 안그럴께! 안그럴께에에!” 반대쪽을 깨물던 그녀가 입을 떼고 고개를 들더니 젖어있는 내 목을 손으로 슥 문지른 다음 내 눈앞에 가져다 댔다. “바보 주인아. 이거 무슨 색이니?” “빨간 색인데?” “그래? 네 목에서 피난다?” “뭐어?! 우왁!” 손으로 목을 만져본 나는 손바닥을 적시는 핏물에 눈을 까뒤집고 비명을 질렀다. “죄송해요오….” “쓰으… 나가. 너 같은 거 필요없어. 당장꺼져.” “너, 너무하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저, 저도 술에 취해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단 말예요.” “너무해에? 그럼 30군데가 넘게 깨물리고 찢어진 자국은 뭘로 설명한걸데?” 오늘은 어제의 다음 날이다. 테이블에 앉은 나는 아세트의 도움으로 목과 등에 붕대를 감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옆에서 스피릿의 터진 입술을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던 라이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조용히해. 기분 나빠서 무시하려고 했는데 옆집 아저씨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와서 도와준거야 알아?” “예. 면목없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하니 아세트가 내 어깨넘어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됐어요.” “감사합니다. 아세트님.” 아세트는 풋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 스피릿의 얼굴을 치료하던 라이트가 그녀의 얼굴을 가르키며 외쳤다. “야! 너 임마! 정신 나갔냐? 어떻게 여자 얼굴을 이렇게 만들 수 있어? 앙!” 스피릿은 눈가가 시퍼렇게 멍들고 입가가 터져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 쩝… 할말 없다. 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 “나한테 말고 스피릿에게 말해.” “그건 못해.” “뭐가 어째?! 안돼겠다. 너 오늘 좀 맞자.” 위이잉~! 푸화르륵! 라이트가 손바닥으로 불길을 일으키며 외쳤다. 소반에 차와 쿠키를 담아가지고 나오던 안젤라가 신기한 눈으로 그걸 지켜보았다. 난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못해. 안해! 저 녀석은 내 등을 이렇게 만들었다구. 그러니까 쌤쌤이란 말야!” “닥쳐! 쌤쌤이는 개뿔이다! 어떻게 계집애 얼굴을 저 따위로 만드냐? 너 미쳤어? 사과해. 못하겠다면 강제로 시켜주지.” 할테면 해보라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스피릿이 나서서 말렸다. “라이트, 그만 두세요. 저 사람은 바보라서 그런 협박은 안통해요.” “바보오?! 그게 주인님에게 할 말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으르렁거리자 날 가만히 쳐다보던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팩 돌렸다. “흥~! 주인님이랑 말 안해요.” “이게…!” “가만 있어! 넌 화낼 자격없어!” “난 저 녀석 주인이야! 저 녀석은 네 노예고! 억울해!” “그럼 난 페미니스트다. 더 할말있냐? 약 지어줄테니 먹고 쉬어. 그래 가지고서는 당분간 일하러도 못나가겠다. 그리고 스피릿도 그래요. 어떻게 주인 등짝을 저렇게 만들어요? 목은 다섯 바늘이나 꿰맷다구요. 어서 저 바보한테 사과하세요.” 라이트가 하는 말에 연신고개를 꾸벅인 스피릿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바보님 죄송합니다.” “…너희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친구고 노예고 다 잡아먹겠다고 난동을 부리던 나는 안젤라와 아세트가 붙잡고 말리는 통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뜨거운 머리를 식혔다. 상처가 상처인지라 라이트가 지어준 약을 얹어먹은 나는 오전동안 방에누워 쉬다가 점심시간이 다되어갈 무렵 배고픈 멧되지마냥 툴툴 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라이트와 아세트는 어디있는지 보이질 않고 거실에서 멍든 눈을 계란으로 문지르고 있던 스피릿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러니까 정말 못봐주겠다. 전혀 공주님 같지 않아. “누구 노예인지 모르지만 참 못생겼네. 너구리냐?” “어떤 노예의 주인님인지 모르겠지만 엄청 뜻겼네.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저랬을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경전을 벌인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팩 돌렸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안젤라가 식사준비를 하고 있다가 날 반겼다. “아, 오라버니 나오세요? 등은 괜찮아요?” “응. 안괜찮아. 그런데 왜 네가 설것이 하는 거야? 저기서 놀고있는 노예시켜.” “안돼요. 점심은 제 당번인걸요? 그리고 나중에 언니가 안젤라 시집살릴지도 모른다구요. 이럴 때 잘봐둬야해요.” “시집을 살려? 무슨 말이야?” “그런게 있어. 그런데 오라버니, 계속 이렇게 있을 거예요?” “뭐가?” “화해하세요. 주인님하고 노예는 싸워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구요.” “싫어. 내가 왜? 노예가 먼저 숙이고 들어와야하는 거 아냐?”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안젤라는 한숨을 내쉬며 식사준비를 계속했다. 고개를 돌렸다가 거실에 앉아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난 눈살을 찌뿌렸고 스피릿은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저게… 볼썽사나운 우리들의 냉전은 밥먹을 때 폭발해버렸다. ========================================================================== 자아~ 이제 화장실 다녀오세요. Reload Running Fire: 76 “예비역이든 뭐든! 왜 하필 이럴 때 전쟁이냐구! 아! 젠장!” “야.” “왜요?” “거기 소금좀 줘.” “직접 집어가시죠.” “너 자꾸 이럴래?! 나가! 너 같은 거 필요없어!” 자리에 앉아 빵을 먹던 스피릿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안젤라가 안절부절하지 못했지만 난 콧방귀만 뀌어댔다. 노예주제에 너무 뻣뻣하게 굴어. 이번 기회에 아주 버릇을 고쳐주마. “오, 오라버니 너무 심하세요오. 빨리 나가서 데려오세요. 예에?” “싫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창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선 나는 마당 한켠에 있는 바위에 한가롭게 앉아있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그때 문득 그녀가 고개를 돌리더니 날 쳐다보았다. 입가에 상처가 있고 오른쪽 눈 아랫부분에 멍이 좀 들어있긴 하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지 평화로운 얼굴이다.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던 나는 커튼을 쳐버리고 거실의 자리에 앉았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머리를 벅벅 긁어버리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제미니에게 고백하러 갔었는데. 왜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한거였는데. 방으로 들어가 스피릿의 자켓을 들고 나온 나는 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해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바람은 씽씽 불어와 볼을 때렸다. 독한 계집애. 꽤 추울텐데 떨지도 않냐. “좀 울면서 매달리면 안되냐?” “제가 왜요? 잘못은 주인님이 하셨잖아요.” 아랫입술을 빼죽 내민 나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다가가 자켓을 무릎위에 던져주었다. 스피릿은 그것을 받자마자 껴입었다. 춥긴 추웠나보다. “고맙다고 안해?” “고맙습니다.” 건성으로 고개를 꾸벅인 스피릿은 자리에서 일어나 언덕길을 내려가려 했다. 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어디가?” “어서가라고 옷도 가져다 주셨는데 이제 사라져야죠. 주인님 안녕히 계세요.” “사랑해 스피릿.” 스피릿이 자리에 멈춰섰다. 그녀는 날 쳐다보며 말했다. “저도 당신 사랑해요.” “네가 필요해. 가지마.” “예. 주인님.”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며 얼른 언덕길을 다시 올라왔다. 그 모습에 난 피식 웃어버렸다. 스피릿은 내 앞으로 와서 섰고 난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 주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회색 머리카락이 아주 차갑다. 몸도 와들와들 떨고 있고, 난 한숨을 내쉬며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바보야. 왜 떽떽거려? 눈 딱감고 잘못했다고 그랬으면 나 금방 풀렸을거야.” “하지만 전 잘못한거 없어요. 잘못은 주인님이 하셨다구요. 자기만 쳐다볼 줄 알았던 주인님이 바람을 피고 들어온 것도 억울한데 얻어맞기까지 했으니 기분 좋을 리가 있어요?” “끙, 미안해. 술김에 그만….” “아니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많이 아프셨죠? 노예주제에 감히 주인님께….”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말이다. 고개를 든 스피릿은 두 손으로 내 볼을 매만지며 우울하게 속삭였다. 순식간에 가슴속 응어리짐이 풀어져버린 나는 너무나 예뻐보이는 그녀는 꼭 안아준 다음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아니요. 그 전에 해드리고 싶은 말이있어요.” “뭔데?” “제 부탁이면 뭐든 들어주신다고 하셨죠?” “응.” “노예문장을 지워주세요.” “뭐? 그, 그럼 스피릿 너….” 스피릿은 화사하게 웃었다. 비록 나한테 맞아서 얼굴에 상처가 좀 나있긴 했지만 그녀의 미소를 가릴 정도는 아니다. “이제야 결심이 섰어요. 주인님, 아니 콜트씨, 부족하지만 절 아내로 맞아주시겠어요?” 입장이 뒤바뀌긴 했지만 난 그녀를 앞에 두고 펄쩍 뛰어오르며 환호를 질렀다. 스피릿은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날 바라봐주었다. 제미니에겐 미안하지만, 결국 난 스피릿은 선택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스피릿의 프로포즈에 은근히 볼이 부어있는 안젤라를 달래고 있는데 외출했던 라이트와 아세트가 돌아왔다. 그에게 막 스피릿의 문장을 파달라고 부탁하려는데 그가 다급한 얼굴로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모험가 길드에 이적 등록하러 갔다가 받았다. 각설하고 일단 읽어봐.” 그의 얼굴을 쳐다본 나는 그것을 죽 읽었다. 눈이 엄청나게 커져버렸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쉿! 조용히해!” 라이트가 손가락을 세우며 외쳤다. 입을 꾹 다문 나는 마저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병력동원강제소집통지서 그랜퍼스 모험가 등록번호 : GLPS 818-3145972301 주소 : 그랜퍼스 캘버린 동부지구 461-2번지. 본명 : 콜트 슈발츠. …전략. 이에 대하여 우리 그랜퍼스는 중립을 선포하려하였으나 우방인 베레타의 적극적인 파병요청으로 말미암아 오는 3월 10일 예정되어있는 베레타와 캐슬린 정규군간의 공식교전에 베레타의 우방으로 우리 그랜퍼스도 참전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동시에 예비역 강제징집을 실시하오니 모험가 및 용병 여러분들께서 한분도 빠짐없이 국가를 위하여 힘을 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제소집날짜는 오는 1월 30일이며, 입영부대와 시간은 본지 좌측하단에 기재되어 있으니 착오없으시길 바랍니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길드나 시청, 가까운 경비대로 문의하시면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난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무슨 개소리야?! 왜 우리가 가야하는 건데! 군대는 뒀다가 국 끓여먹을 거냐?!” “제대로 안읽었지? 거기 씌여있잖아. 우린 예비역이야. 수적으로 열세인 군병력을 보강하기위해서 함께 싸우는 거라구.” “예비역이든 뭐든! 왜 하필 이럴 때 전쟁이냐구! 아! 젠장!” 이웃의 베레타와 캐슬린이 강제징집을 하는데 반해 우리나라 그랜퍼스의 징병제도는 자원입대를 원칙으로 하고있다. 하지만 전시가 되면 일반징병제가 전시특별법으로 전환되어 특정직업을 주축으로 제일먼저 강제징집을 시작한다. 그 특정직업이 바로 마법사, 모험가. 용병들 같이 전투를 생업으로 삼고있는 사람들이다. 군대에 가서 젊은 날을 희생하며 나라를 지키지 않는 대신 우리같이 핏값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전시에 군대로 강제소집되어 정규군과 함께 싸워야하는 거다. 물론, 강제징집된 경우엔 용병으로 등록되어 매 공식전투가 끝날 때마다 수고비 명목으로 일정량의 돈을 주기 때문에 그나마 반발은 적은 편이다. 오히려 반기는 자들까지 있다. 아마 이전의 나였다면 쌍수를 들고 좋아했을 거다. 한목 단단히 잡을 수 있는 기회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과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전쟁이라니요?” ========================================================================== 창밖을 보세요. 해가 뜨고 있나요? Reload Running Fire: 77 “어이구~! 이걸 두고 어찌가누우~!” “싫어요어~! 아앙~! 싫어어! 오빠아아아!” 안젤라는 울상을 지으며 나에게 매달렸다. 거창한 한숨을 내쉰 나는 허리를 끌어안고 울면서 매달리는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마. 돌아올게. 반드시 돌아올게. 저번에도 약속 지켜줬잖아? 으응? 안젤라아~!” “그래도 싫어어! 전 오빠랑 같이 있을 거예요!” 팔짱을 끼고 옆에서 쳐다보던 에리카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오누이 간의 생이별을 씁쓸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오늘 날짜는 1월 30일. 강제소집 통지서를 받은지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두 사람은 남겨 놓고가고 싶었지만 이아가씨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 일주일 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잠시 뒤돌아보자. “안돼요! 못가요! 이잉~! 오라버니 가서 죽으면 어떻해요오어~!” “…여기 봐. 강제소집이라고 적혀있지? 국가가 도와달라고 부르는데 안가고 버티다가 붙잡히면 어떻게 되는 줄알아? 시민증을 박탈당하고 해외 추방이야. 그럼 너희들만 여기에 남겨지는 거라구. 공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그리고 안젤라. 오빤 안죽어. 죽여도 안죽어. 걱정마아.” 옆에서 라이트가 박퀴벌레 같은 생명력이 어쩌고 해대다가 나와 안젤라의 눈빛공격에 침몰당했다. 안젤라는 연신 울먹거리며 나에게 들러붙었다. 어떻게 달려보려고 해도 막무가네 였다. 그때 통지서를 보고 있던 스피릿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예는 어떻게 되요?” 내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라이트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같이가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아니, 그쪽에서 오히려 반기죠.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지만, 그… 뭐시냐. 사기충전을 위해서 랄까요?” “칵! 쓸데 없는 소리마! 스피릿! 너도 남아! 따라오면 죽어!” 내 강제 소집장을 눈여보던 스피릿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보다가 흥하는 콧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좋은향기의 회색머리칼이 나부낀다. 으윽! 이게 아냐! “애타는 마음으로 전장으로 떠난 연인을 기다리는 처녀역은 사양하겠어요. 이거 보이세요? 저는 아직까지 합법적으로 콜트 슈발츠 씨의 노예랍니다. 주인님이 가시려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요.” “뭐어?! 제정신이야! 따라가서 어쩔건데! 되먹지도 않은 소리 하지말고 너도 남아! 라이트! 저 녀석 문장파줘! 어서!” “아아앙! 오빠아아~! 가지마요어~ 잉잉~!” 징징짜는 안젤라를 허리에 매달고 고개를 돌린 나는 손등의 노예 문장을 들어보이는 스피릿에게 악다구니를 써댔다. 하지만 내가 붙잡으려 하자 그녀는 총총 뛰어 내 손길을 피해다녔다. “아~! 정말! 아까파달라고 그랬잖아아아! 그러니 얌전히 나 돌아올때까지 집에서 기다려엇!” “…싫어요. 전쟁터에서 바람피우면 어떡해요? 전 두 번째는 용서못해요. 감시하러 따라갈거예요.” 난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거기 가면 죽는단 말야!” 스피릿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날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가요. 거기서 주인님이 죽으면 따라 죽을 거예요. 저는 다른 사람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당신은 내거야. 절대로 놓아주지 않아. 내거야. 내거라구! 알아들어! 도망 못가!” 히익! 그녀의 기백에 눌린 나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스피릿이 저렇게 화내는 건 처음보는 것 같다. 그녀의 고함소리에 라이트는 질려서 뒤로 물러섰고 징징거리던 안젤라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거창한 한숨을 내쉰 스피릿은 소집장을 반으로 접어서 바지주머니에 집어넣더니 말했다. “그래서, 저도 함께가요.” “스, 스피리이잇….” “이잇! 이번만큼은 제 맘대로 할거예요. 강제로 떼어놓고 갈 생각은 버리시는게 좋아요. 억지로라도 쫓아갈테니까. 추한꼴 보고 싶지않으면 조용히 모셔가요.” 스피릿이 눈을 부라렸다. 입이 막혀 말을 못하고 있는데 이젠 안젤라가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잉잉거리기 시작 한 것이다. 덕분에, 결국 난 폭발하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너희들 자꾸 왜 이래! 죽는단 말야! 전쟁터가 어디 소풍나가는데 인줄 알아?!” 어떻게 일주일이 지나간줄 모르겠다. 날 볼때마다 쪼르르 달려와서 징징거리는 안젤라는 필살기(?)를 써서 어떻게 달랠 수 있었지만 스피릿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이렇게 옆에서 있는 거다. 한숨이 나온다. 어이구~! “훌쩍… 꼭, 꼬옥 돌아오시는 거죠? 안젤라 버리고 가는거 아니죠?” “아냐아냐아냐. 귀여운 여동생을 어떻게 버리고 도망가? 걱정말고 기다려. 꼭 데리러 올테니까. 난 우리 안젤라 시집가는 건 보고 죽을거야.” “흐으윽… 오라버니이이~!” 안젤라는 연신 훌쩍이며 내 가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스피릿이 옆에서 시계를 힐끗 꺼내보다가 헛기침을 해왔다. 시간이 다됐다는 것이다. 그때 안젤라가 퉁퉁 부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아래위 시커먼 가죽옷을 껴입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 언니. 우리 오빠 잘 부탁해요. 흐으윽…! 꼭 돌아와야해요오?” “그럼. 꼭 돌아올거야.” 겨우 내게서 떨어진 안젤라는 이제 스피릿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고 잉잉거렸다. 옆에서 쳐다보던 에리카가 나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몰랐어. 너 한테 저런 여동생이 있었냐?” “응, 우리 아버지의 숨겨둔 로맨스랄까? 미안하다.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서.” “괜찮아. 안그래도 아르바이트 생하나 필요했거든? 아기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가게 움직이기 여간 힘들었어.” 고개를 돌린 나는 강보에 아기를 안고 서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있는 루루씨를 쳐다보았다. “이거, 바쁘게 사느라 루루씨 순산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뭐라고 좀 사오는 건데. 어,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요.” “후후후~ 괜찮아. 그런데 저 아가씨는 데려가는 거니?” 안젤라를 달래고 있는 스피릿을 힐끗 쳐다본 나는 거창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데려가지 않으면 그간의 악행을 관리원에 고발한다나요? 일주일동안 피를 말리는데… 하는 수 없었습니다.” “어지간히 주인님이 맘에 들었나보구나?” 난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주었다. 루루씨는 빙그레 웃으며 칭얼거리는 아기를 달래며 빙글빙글 웃었다. 난 세리카를 쳐다보며 톡 쏘아주었다. “편지한번 해주는게 그리 어렵더냐? 이런 경사를 혼자서만 즐기고 말야.” “그런 소리 마. 네놈이 어디 한곳에 자리잡고 사는 놈이야? 이리저리 떠도는 주제에 말야.” “아냐. 이젠 나도 정착했다구? 집도 있어.” “시끄러. 장가도 안간 떠돌이 모험가 놈을 어떻게 믿어? 다음에 올때는 우리 아들 선물이나 좀 사와라. 그리고 이거 부탁했던 거다.” 녀석이 내미는 나무 상자에는 수십장의 스크롤이 담겨 있었다. 그는 나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이거 만드느라고 우리 루루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아껴서 써.” “우리 루루우~?” 녀석의 코앞에 충열된 눈을 들이밀며 말하자 세리카는 피식피식 웃으며 루루씨의 어깨를 감쌌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루루씨는 귀엽게 웃으며 녀석의 애정표현에 얼굴을 붉혔다. 못볼걸 본 것 같다. 저 루루씨가. 철혈의 마법사 루루 클레멘타인이…. 어윽… 편투통이야. 그때 세리카가 히죽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부럽지?” “시, 시끄러엇!” 녀석에게 악다구니를 써댄 스크롤 상자를 배낭안에 갈무리했다. 그러고 있으니 안젤라가 꺽꺽거리며 다가왔다. “오라버니이~!” “그래그래, 오빠 여기있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안젤라는 연신 훌쩍이며 날 쳐다보다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꼭 돌아오세요? 꼭이요오?” “아무렴. 꼭 돌아와야지.”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주머니를 뒤적여 번쩍이는 멋진 단검을 하나꺼내 내밀었다. 안젤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물이야. 못된 놈이 우리 안젤라 엎어가려 하면 이걸로 쑤셔버려. 할수 있지?” 이전의 안젤라였다면 그런짓 못한다고 도리질을 쳤을 거다. 하지만 안젤라는 변했다. 그녀는 연신 훌쩍이면서도 내가 내미는 단검을 받으며 눈물을 닦았다. “예. 할수 있어요.” “어이구~! 이걸 두고 어찌가누우~!” “이잉~! 오라버니이.” 가슴이 움찔해서 녀석을 한번 꽉 끌어안아주자 안젤라는 숨이 막힌다는 듯이 한숨을 쉬어댔지만 기쁜 얼굴이었다. 그때 그녀가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돌아오시면 …약속 지켜주시는 거예요? 꼭이예요? 겁많은 안젤라는 주인님만 믿고 기다려요.” ==================================================================== 어떤 약속일까요? Reload Running Fire: 78 “그, 그럼 언제 같이 있어요?” 으윽~! 죄책감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린다. 그녀를 놓아준 나는 안젤라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씩 웃으며 끄덕여주었다. “물론이야. 꼭 셋이 다시 그곳에서 살게될거야. 걱정말고 기다려. 데리러 올게.” “예.” 말 잘듣는 안젤라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녀석의 어깨를 잡아 내쪽으로 끌어당긴 나는 세리카와 루루씨를 바라보며 그녀를 다시 한번 소개했다. “안젤라 슈발츠입니다. 제 여동생입니다. 다시 돌아올 때 까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안젤라, 오빠 친구내외분들이야. 인사해야지?” “안젤라 슈발츠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세라카와 루루씨는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손수건을 손목에 묶어준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갔다올게.”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훌쩍, 언니도요.” 스피릿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울듯한 얼굴로 훌쩍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등을 돌린 나는 걸음을 옮기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안젤라.” 훌쩍이던 안젤라는 루루씨의 부름에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우리 집 아직 그대로니까. 간간히 들려서 청소도 좀 하고 그래. 알겠지?” “예에. 흐윽! 그, 그럴께요! 꼬, 꼬옥 돌아오세요어~?!” 난 씩 웃으며 반드시 그러겠다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대로를 한참 걸어간 다음 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안젤라를 달래어 가게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거창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이제 라이트와 아세트가 우리들의 앞에 섰다. “우린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이 놈의 전쟁이 인연 여럿 끊게 하는 구나. 너희는 마법사 길드로 가지?” 라이트는 씁쓸하게 웃으여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 녀석은 길드로 가서 약간의 교육을 받은 다음 곧바로 군으로 보내어 진다고 했다. 녀석의 손을 잡고 좀 흔들어준 나는 옆에 서있는 아세트를 보고 물었다. “아세트 양도 같이 갑니까?” “예.” “어디 맡기고 갈 곳도 없고, 그랬다간 다시 찾으러 올테니까. 이 참에 데리고 다니면서 마법이나 좀 가르쳐 줄려고 그래. 어쨌든, 난 이만 간다. 스피릿 몸 조심하세요. 다시 만나자 콜트.” “예. 라이트 씨와 아세트도요.” “잘가라. 몸 조심하고.” 말에 오른 라이트는 뒤에 아세트를 태우고 다각다각 길드로 향하기 시작했다. 입맛이 쓰구만. 운 좋으면 전쟁터 한가운데서 다시 만나겠지. 맡길사람 맡기고 떠나보낼 사람 다 떠나보내고 나니 한숨을 폭 나온다. “하아~ 정말이지. 빌어먹을 전쟁 때문이 이게 뭐냐? 어쨌든 그나마 하나라도 떨어뜨린게 다행이야. 안젤라가 들으면 또 울겠지만.” “…죄송하네요. 따라가겠다고 바락바락 우겨서.” 스피릿을 힐끔 쳐다본 나는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죽을 지도 몰라. 넌 싸울 줄 모르잖아? 지금이라도 돌아가지?” “제게도 최후의 수단이 있어요. 걱정마세요. 캐슬린 군과의 전투에서라면 제 몸 정도는 혼자서 지킬수 있으니까. 그리고… 제가 없으면 우리 주인님 쓸쓸해서 어떻게 밤을 보내요?” 스피릿은 요염하게 웃으며 날쳐다보았다.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그녀를 쳐다본 나는 킁하는 콧방귀를 뀌면서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런 유도심문에는 넘어가지 않아. 그리고 넌 색기가 없어서 그런 표정 지어도 안 어울려.” “어머,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스피릿은 후다닥 따라와서는 내 팔을 껴안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예상대로 꽤 많은 수의 무장한 사내들의 모습이 보인다. 몇몇은 나처럼 노예를 대동하고 걷고 있었다. 칫~! 나처럼 정신 나간 놈들이 저기 또있네.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도한 공주님 일적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스피릿은 겉으로 보면 굉장히 아름답긴 하지만 색기가 없어. 인상이 부드러워서 그럴까? 분위기가 말야. 나이 많은 여자들의 그것 같은 모습이야. 그래서 섹시한 미소와 눈짓으로 남자들 홀리기는 글렀지. 하지만 벗겨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져, 이젠 익숙해질 법도 됐는데 매번 부끄러워서 얼굴 발갛게 물들이고 있는 거 보고 있으면 얼마나 귀여운 줄 알아? 마구마구 괴롭혀주고 싶어. 뭐, 나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으흐음! 어흠! …사, 사람들 많은데서 그런 말하지 마세요오.” “당신이 먼저 물었잖아요? 공주님.” 스피릿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내 허리를 꼬집어댔다. 킥킥 웃어준 나는 소집장소로 씌여있는 도시 광장으로 한가롭게 걸어갔다. 그러고 있으니 스피릿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럼, 주인님은 제게서 어머니의 그것 같은 기분을 느끼신다는 거네요? 음, 맞아요. 어젯밤에도 잠결에 제 가슴 만지면서 엄마라고 하신 것 같아요.” “칵~! 요런 건방진! 입술이 팅팅 불 정도로 키스해버린다?!” “꺅?! 주인님! 잘못했어요~! 하지마세요~! 사, 사람들이 봐요오!” “볼테면 보라지! 난 이 버릇없는 노예의 버릇을 고쳐줘야겠어!” 흥분한 내가 그녀를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자 스피릿은 꺅꺅거리며 내 품에서 벗어나 먼저 광장으로 달려가버렸다. 네가 도망가면 어쩔건데?! 바로 뒤쫓아간 나는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겨드랑이를 간지럽혀주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혀를 차거난 고개를 흔들었지만, 까짓,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침울하게 있을 바에는 난 노예랑 노는 편을 택하겠어. “그리고 최소한 발버둥이라도 칠수 있잖아? 가서 죽을 생각으로 온거라면 어디 숨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피해다니라구.” 스피릿의 손을 잡아끌고 마을 광장에 도착하자 무장한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렸다. 그 중에는 긴장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침울해 있는 사람도 있었으면 호쾌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이 거대한 싸움을 즐기고 있는거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피가 뜨거운 인간들의 가슴을 더 뜨겁게 불태우는 것 같아. 하여튼, 어쩔수 없다니까? “오래 못사니까요. 우리들은. 그래서 아주 뜨겁고 격렬하게 살고 싶은 거예요. 싸움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구요.” “…노예주제에 함부로 나불대지마. 엉덩이 만져버린다?” 스피릿은 쿡쿡 웃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계속 말했다. 우리들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힐끗힐끗 거리며 쳐다본다. 내 노예 예쁘지? 건들면 오른손 잘라버리겠어! 라는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봐주었다. “그래도 전 무서워요. 겁나요.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요. 언제나처럼 주인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잠들고 싶고, 언제까지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즐기고 싶다구요.” “말 한번 잘했다. 가자. 아직 안 늦었어. 세리카 집에 데려다 줄게.” “아, 아이~! 주인님 제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오.”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스피릿은 엉덩이를 뒤로 쑥빼고 안가려고 버텼다. 그녀는 헥헥 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할래요. 전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단 말예요. 살면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요.” “무서운 소리마. 네가 죽어도 난 안죽을 거야. 난 안젤라도 돌봐야 한다구.” “어마, 주인님 매정해요~! 거짓말로라도 그렇게 한다고 해주시면 좀 좋아요?” 스피릿은 잉잉거리며 날 쳐다보았고 난 애초에 그런 소린 하는게 아니라고 해주며 그녀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때려줬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잠시 기다리니 군 제복을 입은 사내가 미리 만들어둔 단상위에 가볍게 뛰어올라가더니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주변에 설치된 증폭장치들이 쩌렁쩌렁한 소리를 냈다. -아아! 흠! 국가 비상령에 따른 강제소집에 응해주신 예비역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지금부터 출석자 체크를 시작하겠습니다. 광장에 모이신 분들은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각 접수처에서 출석 및 접수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마치신 분들께서는 등록증과 군번줄을 받으신 다음 10여명 단위로 부대에서 지원하는 수송마차를 타고 수도외곽에 설치된 기초 훈련소로 곧바로 이동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접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외 주의사항으로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스피릿의 손을 잡아끌고 가까운 접수처로 향했다. 커다란 테이블에 병사 앉아서 접수를 받고 있었으며 그런 것이 광장에 10개 정도 되었다. 사람이 꽤 많이 밀려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매달렸다. “왜그래?” “아, 아뇨. 뒤에서 누가 제 엉덩이를….” 눈썹을 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웬 놈들이 징그럽게 웃으며 내 옆에 바싹 붙는 스피릿을 쳐다보고 있다. 중간에 녀석이 말했다. “이야. 촉감 좋은데? 좋겠어? 이렇게 예쁜 녀석을 데리고 말야. 돈 많은 가보지?” “당신들 아까부터 봤어. 제길, 정말 보기 좋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노예나 사는건데.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같이 잘 수도 있고 시도 때도 없이 만질 수 있고 말야. 으윽~! 정말 좋은 것 같아.” “시끄러워, 누구냐? 내 노예 엉덩이 만진 녀석이.” “어이, 왜 그래. 노예 엉덩이 좀 만진 것 같고 말…?!” 빠각! 다리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차버렸다. 주변에서 사내들이 우하고 물러서며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쓰러진 동료들을 부축하던 녀석들은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방에서 개떼같은 병사들이 몰려든 것이다. “싸움은 전장에서 적과 하십쇼. 아군끼리의 전투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거놔! 이놈들아! 너 이자식! 거기서! 아작을 내주마!” “헹~! 내가 해줄 말이다. 멍청한 놈들아.”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주며 혀를 길게 빼물자 녀석들은 날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었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처벌은 없었다. 대신 노예 관리를 잘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어쨌든 내 차례가 왔다. 아까 책상을 밟고 뛰어올라 날 말리던 젊은 병사가 내 이름을 물었다. 그러고보니 여군이다. 허어~! 참 머리카락이 &#51686;아서 남자인줄 알았더니만, 투구를 쓴 여군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며 물었다. “뭘 그리 쳐다보십니까?” “아니, 여군이라 신기해… 아윽?! 왜 꼬집어!” 스피릿이 아랫입술을 내밀고 딴청을 피워댔다. 여군의 딱딱한 얼굴에서 미소 비슷한 것이 피어났다. 헛기침을 조금한 그녀는 내 이름을 물었다. “콜트 슈발츠요. 모험가 등록번호 GLPS 818-3145972301.” “그쪽의 아가씨는 노예입니까?” “노예인데.” “함께 데려가실겁니까?”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지가 따라겠다고 했수다. 어쩔수 없었다구.”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명부에 펜으로 뭔가를 끄적거린 다음 나에게 사인을 요구했다. 사인을 해주고 노란딱지를 받은 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광장 한구석에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마차를 타고 도시 외곽에 있는 임시로 만들어진 기초 훈련장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좀 어이없는 소릴 듣게 되었다. 훤칠한 키에 제복을 입은 여군이 나와서는 노예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으더니 이렇게 말해주었다. “훈련장에서 노예와 마스터는 각각의 테스트와 교육이 끝나는 동안 격리됩니다. 이점 양해에 주십시요.” 뭐? 떨어져 있는다구? 이건 예상 못했는데. 그때 한 사내의 옆에 바싹 붙어있던 여자 노예가 당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그럼 언제 같이 있어요?” “퇴소시부터 함께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2급 노예들은 간단한 교육훈련만 받으며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습니다. 대신 취사나 의무같은 간단한 소일거리를 돕게 됩니다.” “뭐?! 그런 말은 애초에 없었잖아! 난 우리 프리카 손에 물 한번 묻히게 하지않았어! 강제동원에 순순히 따라줬으면 이런 건 좀 봐줘야 하지 않아?” ==================================================================== 으으으음~! 졸립니다. Reload Running Fire: 79 “그럼 우리 노예는 어떻게 됩니까?” 나와 같이 전쟁터에 노예를 데리오는 멍청한 우를 범한 사내가 여군에게 대들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조금 한 다음 말했다. “아무리 노예라고는 해도 최소한의 전투지식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국가 비상령이 선포되어 강제동원된 이상, 노예뿐만 아니라 당신도 최소한의 노동은 각오해주셔야 합니다. 용병이라고는 해도 군인은 군인입니다. 군법에 회부되어 처벌받고 싶습니까?” 그녀의 말에 사내는 눈썹을 세우고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역시나 노예가 말렸다. “주인님~! 그러지 마세요. 참으세요.” “프리카! 이익! 젠장! 당신들! 우리 프리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아군 손에 병신 될 줄알아!” “아앙~! 주인님! 참으세요오! 안돼요! 저번처럼 또 싸우시면 프리카 싫어요!” 대략 15~6세 정도 되는 어린 노예소녀가 사내의 허리를 껴안고 말려댔다. 내가 볼때 마스터가 저렇게까지 노예를 감싸고 도는데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나처럼 콩깍지가 낀 것이고, 둘째는 사내의 취미가 유별나기 때문이리라. 그 사내 말고도 몇 명의 모험가나 용병들이 항의를 하긴 했지만 결국엔 다들 노예들을 그들에게 맡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스피릿, 조심해. 알지? 여자라도 이상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것들은 이걸로 쑤셔버려.” 그녀의 손에 단검을 쥐어주며 말하자 스피릿은 안젤라를 기억했는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몇몇 사내들도 나 하는걸 보고는 자기 노예에게 단검을 쥐어주거나 했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여군들이 서있는 곳으로 걸어간 나는 그녀의 노예등록증을 보여주고 서류를 작성한 다음 그들이 발급해준 의탁 증명서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여군들을 쳐다보며 으르렁 거려주었다. “힘들고 귀찮을 줄 알지만, 나도 한마디 합시다. 뭐, 어차피 노예라는게 부려먹으라고 있는 것들이라 어쩌다보니 전장에까지 데려오게되었지만 이중에 몇몇은 노예가 정말 소중한 녀석이라서 위험을 감수하고 데리고 올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런 종류요. 어디 맡겨두고 오자니 좀처럼 안심이 되어야지. 어쨌든 관리 잘하쇼. 않좋은 소문이 들리거나 하면 당신들은 물론이고 이곳 자체를 쓸어버릴거야. 농담아냐. 골든피크 들어봤지? 나 그거 일으킬 수 있는 체질이야.” 여군들은 아마 내 말을 잘 알아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들 뻣뻣하게 서서는 나에게 잘알았으니 걱정말라고 마구 화를 냈으니까. 씩 웃어주고 뒤로 물러난 나는 스피릿에게 손을 좀 흔들어주고 제복의 사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인님! 힘내세요!” “오냐. 걱정마라. 자, 갑시다. 이제 뭘 하면 되는거요?” “노예를 반납하신 분들은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우리 안내되어진 곳은 큼직큼직하게 만들어진 수십개의 천막중의 하나로서 지붕에 5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이전 국경수비대에서 보았던 침상이 조잡하게 만들어져 대략 40명 정도가 함께 자도록 되어있었다. “염병, 거지 소굴 같구만.” “야전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습니다. 참고 지내주십시오. 짐을 풀고 잠시 대기하십시오. 식사시간에 여러분을 부르러 올 것입니다.” “알았수다! 허, 푹식푹신 한데? 일반병사들도 이런 곳에서 자나?” 바닥에서 무릎 정도 높이에 있는 침상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말해주자 우릴 안내해준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밖으로 나갔다. 뻣뻣하기는, “이거, 원, 잘 때는 침낭이 필요하겠는데.” “빌어먹을! 우리 프리카 감기 걸리면 어떡하지? 혼자서 재워본 적은 없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의 사내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이런, 저 친구가 나랑 같은 곳이었나? “쓰발… 조용히 좀 합시다.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귀여운 노예 있다고 자랑하지 말란 말야.” “뭐?” 프리카라는 이름의 노예를 둔 사내가 인상을 찌뿌리며 고개를 돌렸다. 덩치가 꽤 크고 건들건들한 사내가 그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욕설을 시작했다. 주변의 사내들은 낄낄 거리며 돈을 걸어댔다. 아아~! 이젠 난 몰라. 싸우든 말든, 알아서들 하라구, 결국 싸움이 났다. 시끄러워서 귀를 막고 밖에 나가 있으니 어디서 들었는지 병사들이 우루루 달려와서는 천막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거의 마을 하나와 맞 먹는 수십개의 천막집단을 구경하던 나는 뒤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헤, 빨리도 오는데?” 나중에서야 막사로 돌아가보니 싸움은 프리카의 주인이 이긴 것 같다. 어떻게 알았냐구? 돈을 딴 사내들이 낄낄 웃으며 그에게 얼마를 쥐어줬기 때문이다.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에 식사는 우리 천막이 가장 늦게 됐다. 이런 염병, 이건 좀 맘에 안드는데? 기다리는 시간 동안 검을 갈고있으니 웬 사내가 시비를 걸어왔다. “시끄러워. 밖에 나가서 갈아.” 잠시 그를 쳐다본 나는 잠깐 생각해보았다. 싸웠다고 식사 순번을 늦게 정하는 녀석들이다. 한번 더 싸웠다간 밥 안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됐다지? 어쨌든 배를 굶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밖으로 나가서 검을 갈았다. 그런데 프리카의 주인이 따라나와서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왜?” “아까 당신 봤어. 그 정도로 아름다운 노예 데리고 있다면 어느정도 실력도 있을거야. 노예 데리고 다니는게 보통 일이 아니니까.” 적당히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뭐라고 하든 검을 가는데만 집중했다. 아레프에게 주문해서 새로 만든 샤프처리 마법검이다. 아, 그리고 아레프는 길드 소속 마법사라서 강제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운도 억세게 좋은 녀석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바닥에 주저앉은 사내는 자기 이름을 케이서라고 소개했다. “풀 네임은 케이서 케니지. 나이는 25살이다. 잘 부탁해. 아까 받아버리지 왜 그냥 나온건지 물어봐도 되나? 널 얍잘아볼지도 모른다구?” 연상이야? 젠장, 형님이라고 불러줘야 하나. 검을 든 나는 그것으로 하늘을 비춰보았다. 베레타산 강철검을 사려고 했는데 전쟁 때문이라 그런지 질 좋은 검들은 모조리 씨가 말라버렸다. 젠장. 입소문에 민감했으면 괜찮은 것들로 구했을 텐데. 어쨌든 케어릭산도 제법 괜찮으니까. 음, 날은 고르구만, 검을 내린 나는 그것을 검집에 집어넣고 자리에 일어났다. “내가 그 자식 때렸으면 우린 오늘 밥 굶었을지도 몰라. 어, 이제 우리 차례인가본데? 밥 먹으러 가자. 나는 콜트, 콜트 슈발츠.” 사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슈발츠?! 그 검은 두건의 몬스터 사냥꾼?!” “날 알아?” 케이서는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음, 몰랐는데 난 꽤 유명인이었군. 듣기로 그는 모험가중에서도 고대 유적이나 숨겨둔 보물을 찾아다니는 트레져 헌터라고 이야기했다. “도굴꾼이네?” “어허~! 도굴꾼이라니! 트레져 헌터라니까?!” 낄낄 웃어준 나는 알았다고 말해줬다. 데리러온 병사들의 인솔에 따라 어슬렁거리며 식당이라고 천막을 쳐서 만들어놓은 곳에 가니 저쪽에서 노예들도 줄을 서서 식사를 받고 있는게 보였다. 그러자 이 친구가 당장 자기 노예를 찾아서 고개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프리카! 어디있어! 프리카아!” “아~! 정말 시끄럽네!” “내버려 둬라. 자기 노예에게 어지간히 빠져사는 친구 같으니까.” 사내들은 낄낄 웃거나 고개를 흔들며 그를 외면해주었다. 케이서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노예를 불러댔고 결국 각양각색의 노예들의 틈에서 프리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주인님!” “아이고~! 우리 귀염둥이~! 음식 거르지 말고 많이 먹어둬야해? 알았지? 그리고 누가 괴롭히면 주인님 찾아와! 박살을 내줄테니!” “제 걱정은 말고 주인님이나 몸조심하세요! 싸우지 좀 하지마시구욧!” 조그만 소녀는 자기 주인에게 떽떽거리며 말해줬다. 어려서 그런 것일까? 주위에 안내와 경비를 위해 서있던 병사들도 그들의 대화를 듣자 끼어드는 걸 관둬버렸다. 어윽~! 닭살 돗아. 나도 저렇게는 말 못한다. 그러고 있으니 등뒤에 서있던 케이서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혹시 거기 콜트 슈발츠씨 노예는 없나?! 콜트 슈발츠으으!” “칵! 닥치지 못해?! 왜 나까지 끌어들이는 거야! 이 자식! 요절을 내주마!” 눈썹을 곧추세운 내가 녀석이 반항하기도 전에 그의 팔을 꺽고 몸을 돌려 목을 졸랐다. 주변에서 못마땅한 내지는 쓴 웃음을 지으며 구경하던 사내들과 병사들이 내 기술을 보고 입을 딱벌렸다. 군사격투술이라서 그런가? 눈치 없는 자들은 낄낄 웃으며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그러고 있으니 스피릿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아악! 주인님 뭐하시는 거예요! 사람 죽어요! 병사님! 제 주인님 좀 말려주세요! 저러다 사람 잡겠어요!” “이익! 너까지 왜 그래에?!” 고개를 돌리고 고함을 빽 질러줬다. 내 손에서 풀려난 케이서는 숨을 좀 몰아쉬다가 외쳤다. “켁켁~! 어윽! 프리카! 그 아가씨하고 붙어다녀! 알겠지! 아가씨!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인데 우리 프리카 좀 데리고 다녀줘요! 대신 당신 주인님은 내가 잘 돌볼테니까.” 주변에서 폭발적인 웃음이 터져버렸다. 심상치 않은 내 몸놀림에 입을 딱벌린던 병사들과 사내들도 웃어버렸다. 으아아아~! 이 자식이!? 점심이고 나발이고 네놈부터 박살내주마! 결국 식전운동을 좀 험악하게 해버린 나와 케이서는 따로 식판을 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서로 으르렁거리며 점심을 먹어야 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들은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 각자 무장을 챙겨 간단한 테스트를 받았다. 교관에게 물어보니 실력을 가늠하는 거란다. “그래서 어쩌는데요?” “훈련기간을 결정하는 겁니다.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일주일간의 단기 교육만을 받고 그대로 부대에 배치합니다. 하지만 수준이하의 실력이라면 한달의 정규교육을 받은 다음 부대에 배치하는 것이지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케이서가 손을 들었다. “그럼 우리 노예는 어떻게 됩니까?” “그쪽 교육은 일주일간의 단기 교육뿐입니다. 따라서 이번 테스트에서 실력이 모자라 정규교육훈련을 받게 된다면 노예는 교육을 마친 다음 강제로 이곳에서 소일을 하며 마스터의 교육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우리들 중에 노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흐으음~! 이게 말로만 듣던 투지라는 것인가? 아마 다들 같은 마음지지 싶다. 누가 땀내나는 사내들과 한달씩이나 있고 싶겠냐? 자기만 쫓아다니는 예쁜노예랑 같이 있고 싶지. 테스트는 대기하고 있던 5명의 조교들와 대무 하는 것으로 실시되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분기탱천한 우리들은 한번도 빠짐없이 다 통과했다. 교관에게 듣기로 노예를 가진 모험가나 용병들은 대체로 실력이 좋아서 이런 테스트쯤은 다들 통과한다고 나중에서야 이야기 해줬다. 어쨌든 그렇게 일주일간의 교육훈련이 시작되었다. 싸움에는 다들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 전투교육은 거의 없고 대신 전투시에 알아야할 수신호와 계급, 적인원 장비 식별법, 간단한 전술과 전략, 작전에 대해서 이론 수업을 듣고 평가 받았다. 으음, 이렇게 수업듣는 것은 폴 아저씨에게 들은 이후로 처음인데. 머리 아프긴 매 한가지구만,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교관의 이야기를 듣고 암기한 것을 종이에 적어서 낼때는 전쟁하러 온 것이 아니고 어디 학교다니는 기분까지 들었다. “으아아아~! 이게 뭐야! 난 전쟁하러 온거란 말이다!” ==================================================================== ^^ Reload Running Fire: 80 “부끄러워? 뭐가? 자기 노예에 귀여워 해준건데?” 점심 시간, 내 옆에 앉은 케이서가 순가락으로 테이블을 후려치며 외쳤다.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던 헝크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형님. 그만 좀 하쇼. 겨우 일주일 못참아서 안달이요? 내참. 모레면 퇴소구만 뭘 그래요?” 헝크는 처음 왔을때 케이서와 대판 싸움을 벌였던 친구다. 나이가 우리 천막에서 가장 어린 20살이며 노예는 없다고 했다. 난 일주일 내내 같은 음식만 나오는 저주스러운 식판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젠장, 이놈의 으깬감자는 몇일 째 나오는 거야? 난 입이 고급이라 이런 거 사흘 이상은 못 먹는단 말야.” “고급아니라도 사흘이면 꽤 많이 참았지. 부대가서도 이런 걸로 나오면 탈영을 고려해봐야 겠는데.” 묵묵하게 치츠를 씹고 있던 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사람으로, 나이는 우리보다 훨씬 많다. 서른 몇 살이라고 하던데. 집에 케이서의 노예 만한 딸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케이서와는 별로 친하지 않다. 그래도 배가 고팠던 지라 그것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데 케이서가 자리에서 벌떡일어 나더니 손을 흔들어댔다. “스피릿! 여기야 여기!” “칵! 남의 노예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쇼!” 악다구니를 했지만 케이서는 듣고 있지 않았다. 헝크와 켄을 비롯한 우리 소대 사람들이 또 시작이라며 낄낄 웃어댔다. 그렇다. 이 활달한 성격의 케이서와 같은 친구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천막 사람들은 사이가 꽤 좋다. 우리 소대의 교육을 담당하는 샤크 교관에게 듣기로 자기가 아는 천막소대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며 전투력도 높다고한다. 다른 곳은 툭하면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쁘다나? “어머~! 주인님 거기 계셨어요? 얼굴 좀 보여주세요.” “모레 지겹게 볼건데 뭘 봐?” 뒤를 힐끔 바라보며 말하자 이틀 만에 보는 스피릿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댔다. 옆에서 으깬감자를 뜨던 헝크가 그녀의 미소를 보고 수저를 떨어뜨렸다. “…케, 켄 영감. 오늘 오후에는 뭐 한다고 합디까?” “글쎄. 진검 대결이라고 했지? 최종 시험이라던가?” “그래? 그럼 나 오늘 만점 받을 것 같아. 우리 스피릿 양의 웃는 모습 봐버렸어.” 난 고개를 팩 돌렸다. “내 스피릿이야! 언제 ‘우리’ 스피릿이 됐냐!?” “어쩜 저렇게 고울까? 내 뒷골목 돌아다니며 여염집 처자들 치마끈 여럿 풀어봤지만 저정도로 아리따운 숙녀는 처음보네.” “칵~! 저 호박이 무슨 아리따운 숙녀야?! 다들 눈독 들이지마! 가만 안둔다!” “어머! 제가 어디 호박이에요? 헝크씨. 우리 주인님 좀 때려 주세요.” “예이!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얌전히 나의 검을 받으쇼! 콜트 슈발츠!” 헝크 놈이 자기 이름을 불려졌다고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휴~! 너도 저기서 자기 노예 엉덩이 만지고 있는 케이서 놈이랑 똑같아! 입술을 삐죽 내민 나와 헝크 놈은 서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불꽃튀는 칼싸움을 벌여댔다.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오후의 최종점검도 용병부대 최고의 실력으로 끝마친 우리들은 다음날 각자의 부대를 배속 받고 군번줄과 함께 그랜퍼스군의 제복을 받았다. 어깨엔 정규군과 틀린 그랜퍼스 용병대의 문장이 들어가 있다. “여러분들은 각자 배속된 부대로 이송되어서 그곳에서 정규전에 따른 부대의 훈련을 받을 것입니다. 긴장하시고, 이곳에서 한 것 만큼만 하시면 충분하실거라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오후는 자유시간이니 푹 쉬십시요.” “질문 있는데요.” “예. 케이서씨.” “노예와의 면회는 안됩니까?” 케이서 답다. 천막안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던 사내들이 고개를 돌리고 낄낄 웃어버렸다. 샤크 교관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용병부대 최고 성적을 기록한 소대인데 안될 것도 없겠지요. 제가 허락하겠습니다. 단, 숲속에서의 밀회를 가진다거나 하는 것은 안됩니다. 아마 그쪽도 오후엔 쉴테니 데려와서 대원들에게 소개라도 시켜주십시오. 저 역시 당신 노예가 어떤 아가씨일지 궁금합니다.” 밀회를 금지한다는 소리에 좋다가 말았다는 얼굴을 하는 케이서는 주변에서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변태 어쩌구 하는 소릴 듣고 나처럼 악다구니를 써댔다. 흠~! 고소하군. “난 아직 우리 프리카하고 키스 밖에 못해봤다! 이것들아!” “우&#50939;~! 거짓말!” 어깨를 으쓱인 나는 전투복을 대충 가방안에 쑤셔 박은 다음 군번줄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헝크 놈이 물었다. “어? 어디가쇼?” “스피릿 만나러. 노는데 않찾아가면 꼬집을 거야.” “그래요?! 그럼 여기 데려와요! 얼굴 좀 가까이서 봅시다!” 난 손을 흔들어주며 천막을 나섰다. 헝크는 꼭 데려오라고 성화를 부려댔다. 저만치 가고 있으니 케이서가 헐레벌떡 쫓아왔다. “같이가자 임마!” “빨리 좀 와요.” 잠시 기다린 나는 케이서와 함께 여자 노예들이 지내고 있는 천막을 찾아갔다. 남자들이 지내는 곳과 여자들이 지내는 곳은 한참 떨어져 있어서 밤에 몰라 찾아간다던가 하는 일은 애초에 꿈도 못꾸게 되어있다. 내참, 살다보니 별 희안한 일을 다 당하네. “뭐야? 왜 그렇게 툴툴대?” “군에 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수다.” “그래? 난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있었는데?” 그를 힐끔 바라본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해주었다. “난 별로 세상은 안 살아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후의 수단으로 군대에 들어갈 생각은 못해봤수.” “…너 지금 나 비꼬는 거지? 이걸로 맞는다?” 눈을 게슴츠레뜬 케이서가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우&#50939;~! 더럽다고 가까이 오지말라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으니 여자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꺄아아악!” 장난질을 벌이던 나와 케이서가 그 소리에 즉각 반응했다. 뭔가 덜 익은 듯한 목소리다. 여기서 어린 여자는 내가 알기로 하나 뿐이다. 케이서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프리카!” “이익! 같이 좀 갑시다!” 지휘관 숙소로 사용하는 커다란 천막을 돌아나가니 당장 프리카를 비롯한 몇몇 아가씨들이 꽤 많은 사내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흥분한 케이서가 달려들었다. “네놈들 뭐냐?! 죽을래?! 프리카!” “아앙~! 주인님!” 웬 사내에게 손을 잡혀있던 프리카가 환하게 얼굴을 폈다.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뺨을 감싸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회색 머리카락이다. “스피릿?” 사내들의 다리 사이로 회색머리 아가씨가 고개를 들었다. 스피릿이었다. 딱딱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든 스피릿은 나와 시선을 맞추자 당장 입술을 파르르 떨며 울상을 지었다. “주인님~ 저 뺨 맞았어요. 아파요. 으응…!” 이를 드러내고 고개를 들자 놈들이 히죽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본적이 있는 것들이다. 첫날 우리 스피릿 엉덩이 만진 변태 놈들이구나! “네놈들 오늘 다 죽었어!” “헤에? 뭐야? 이 많은 사람들 혼자 상대하겠다고? 자신 있나보지?” “감히 우리 프리카 몸에 손을 대에!?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케이서가 난입했다. 나도 질새라 녀석들에게 덤벼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녀석들과 신나게 주먹을 나누고 있으니 노예들은 꺅꺅거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들은 출동한 병사들에게 싸그리 체포당하고 말았다. 제길~! 여기선 어떻게 맘놓고 싸우지도 못해! 가까운 막사로 끌려들어간 우리들은 간단한 조사와 훈계를 받고 풀려났다. “생각 같아서는 징계라도 내리고 싶지만 내일이면 퇴소이니 모두 그냥 보내 주겠소. 하지만 부대 배치 받고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꽤 힘들거요.” “어, 뭐. 반성하고 있습니다.” 중대장 쯤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에게 고개를 꾸벅인 우리들은 이제 나가도 좋다는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곧 다시 신경전을 벌였다. “이 자식들, 다음에 또 우리 노예들 건드리며 죽어.” “닥쳐. 노예 하나 있는 것 같고 눈꼴시게 재지말란 말이야. 콩 한쪽도 나눠먹는 전우애도 몰라? 쫀쫀한 놈들.” 케이서가 흥분해서는 외쳤다. “뭐, 뭘 나눠먹어?! 이 자식들이! 오늘 정말 사람하나 묻어버릴까?!” “주인님! 싸우지 마세요!” 막사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노예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케이서는 허리에도 오지 않을 것 같은 프리카에게 붙잡혀서는 쩔쩔매고 있다. 그걸 보고 이 놈들이 또 비아냥 거리다. 케이서가 눈썹을 삐죽 세웠다. 한숨을 조금 내쉰 나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보아하니 욕구불만이 쌓여서 그런가본데. 우리 애들은 파는 애들 아니니까 고민이 있으면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오른손과 상담해.” “뭐…?” 옆에서 엄숙한 얼굴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돌리고 킥킥 웃어버렸다. 그제서야 내 말을 이해한 놈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아댔지만 무장한 병사들이 노려보고 있어서 덤벼들지는 않았다. “두고보자!” “헹~! 우린 내일 퇴소다. 두고보긴 뭘 두고봐.”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혀를 빼물어주자 놈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병사들이 막아주었다. 킥킥 웃은 나는 후다닥 달려서 그들에게서 눈에서 멀어졌다. 케이서는 연신 투덜대면서도 프리카를 안아올리고는 내 뒤를 따랐다. “뭐야? 왜 도망가?” “충분히 때려줬잖아요? 돈도 않생기는 싸움은 싫수다. 그나저나 우리 스피릿은 어디 있지?” “여, 여기요.”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이 헥헥 숨을 몰아쉬며 손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를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기고는 그 자리에서 키스해버렸다. “망 좀 봐주쇼.” “…읍?! 주, 주인님 이러시… 으읍….” 스피릿은 주위사람들이 다 쳐다봐서 그런지 부끄럽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간간히 반항하는 그녀의 팔목을 잡고 키스를 나눈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스피릿은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며 중얼거렸다. “사, 사람들 있는데서 갑자기 이러면시면 어, 어떡해요오….” “부끄러워 하기는, 같은 여자들 끼리인데 뭐가 부끄러워? 안그래 아가씨들?” 고개를 돌리거나 손으로 눈을 가리고도 힐끔힐끔 우릴 쳐다보던 그녀들은 얼굴을 발그래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씩 웃어주고 있는데 귀까지 빨개진 케이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 이 놈의 자식… 부끄럽지도 않냐? 사람 다 보는데서…!” “부끄러워? 뭐가? 자기 노예에 귀여워 해준건데?” ==================================================================== 저도 노예가 있으면 귀여워해주고 하고 싶습니다. Reload Running Fire: 81 “작작 좀 해라! 저건 내 노예야! 여신 같은 게 아니라고!” 스피릿은 이제 얼굴을 들지도 못했으며 케이서는 말을 못했다. 낄낄 웃어준 나는 모두를 이끌고 우리들의 막사로 향했다. “그런데 왜 그놈들에게 붙잡혀 있던거야?” “예. 프리카가 주인님을 보고 싶다고 졸라대서요. 마침 자유시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주인님을 만나러 가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서 나와봤던 거예요. 반도 못찾아와서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붙잡혔지만.” “프리카?! 정말이야? 정말 주인님 보고 싶었어?” 케이서와 나란히 걷고 있던 프리카는 그의 팔을 꽉 끌어안으며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미소에 케이서는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아댔고, 난 못볼 것을 봤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사에 도착하자 우릴 다라온 노예 아가씨들은 자신의 주인님을 찾아갔다. 주인들의 반응은 다들 색달랐는데. 어떤이는 잘 찾아왔다고 칭찬해주고, 어떤이는 뭣하러 찾으러 왔냐고 화를 내거나, 또는 찾으러 갔다가 없어져서 걱정하다가 노예가 자길 찾으러 왔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며 케이서처럼 호들을 떨어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노예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연신 고마워했다. 뭐, 노예 쪽에서 먼저 주인님을 보겠다고 찾아온 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는 눈감고도 알 것 같다. 모두가 각자의 천막으로 자기 노예를 소개 시켜주러가고 나도 우리 천막으로 들어가 헛기침을 한 다음 스피릿을 소개했다. 우연잖게도 그곳에는 담당교관까지 앉아 있다가 스피릿의 인사를 받게 되었다. “흠흠, 동지들, 소개하지. 이쪽은 내 노예인 스피릿이야. 뭐, 예쁘지?” “콜트 슈발츠씨의 노예인 스피릿입니다. 저희 주인님이 좀 바보같고 못되먹었지만 그래도 속은 좋은 분이세요. 모쪼록 부족한 주인님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동안 정적이 흐르고 스피릿은 가만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내 헝크가 비명을 지르며 환호를 올렸고 그것은 곧 막사 전체로 전파되었다. “으, 아아…! 너, 너무 아름다워~! 스피릿양. 제, 제발 그 발로 나를 짓밟아주세요! 제발~!” 헝크 놈이 침상바닥을 엉금엉금 기와서는 황홀한 듯이 말했다. 난 그녀 대신 녀석의 등을 밟아주며 말했다. “…나쁜 병균이 옮으니까 이런 놈하고는 놀지마 스피릿.” 이어서 케이서의 프리카와 다른 몇몇 친구들이 자기 노예를 소개시켰다. 프리카가 고개를 꾸벅숙이며 인사를 하자 몇몇 음침하 사내들이 눈을 빛내며 비상한 관심을 표현해서 케이서가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어쨌든 천막 안에서 하나 같이 빠지지 않는 외모의 아름다운 노예들은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일주일동안 여자들을 못봐서 그런지 몰라도 평소 같으면 눈치를 주고 무시했을 노예들에게도 사내들은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칫~! 그건 위선이야. 이 위선자들… 으읍!” “주인님.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게 아니에요.” 스피릿이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막 안에서 이래저래 노래도 불러주고 침을 질질 흘리는 사내들에게 시달리는 스피릿을 보다못한 내가 조금만 더 있다가 보내도 되지 않냐며 징징거리는 놈들을 무시하고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저쪽에는 다른 녀석들도 자기 노예를 데리고 나와서 자리에 앉아있거나 했다. 하지만 냄새(?)를 맡고 우르르 몰려온 병사들이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어서 모종의 밀회는 원천봉쇄당했다. 어차피 맘놓고 뽀뽀도 못할 바에야 다시 막사로 데려다 줄 요량으로 그녀를 데리고 걸으며 물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어?” “응, 괜찮아요. 주인님은요?” “난 건강빼면 시체잖아. 그런데 너희는 뭘 가르쳐 주디? 우린 내내 머리아픈 전술전략이야기만 하던데.” “저희들도 별로 다를 것은 없어요. 어, 적인원장비 식별하는 방법, 간단한 응급처치법과 호신술. 유사시에 취사병을 대신해서 밥하는 것이라든가… 에, 그리고….” 스피릿은 손가락을 꼽으며 일주일 동안 배웠던 것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뭐?” “…에, 피, 피임하는 법도 배웠어요.”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헤에, 하지만 그런 건 이제 너한테 필요 없잖아?” “어, 어마! 아니에요. 그, 그거 보기보다 꽤, 어, 저. 으음, 피, 필요한거라구요. 이, 이번에 아주 확실하게 배운 것 같아요. 아으으….” “부끄러워?” “하우우~! 자꾸 물어보시지 마세요오.” 스피릿은 두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며 후아후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헤벌쭉 웃었다. 머리에 열이있는가 하고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가 그녀에게 손을 깨물릴 뻔하고는 물었다. “왜에?” “아뇨. 일주일만에 주인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안심이 되서요.” “별게 다 안심이다.” 난 피식 웃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매만져 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꺅꺅거렸을 텐데 지금은 싱긋 웃기만 한다. “다행으로 아세요. 사람보는데서 그랬으면 꼬집어줬을 거예요.” “아이구~ 무서워서 이젠 노예 엉덩이도 못 만지겠네?” 스피릿은 내 팔을 꽉 껴안으며 싱글벙글 웃어댔다. 그녀가 지내는 노예천막에 도착한 나는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한번씩 쳐다보았다가 인상을 찌뿌리며 고개를 돌렸다. “칫, 작별키스해주려고 했는데. 무서운 아저씨들이 있어서 안되겠네.” “내일 또 보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넌 남자 맘 몰라. 어쨌든 푹 쉬어라. 내일 보자.” “예. 아, 주인님 잠시만요.” “응?” 손을 흔들어주고 몸을 돌리려는데 스피릿이 자시 손가락에 입술을 맞춰서는 내 입술에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간접키스. 이거면 괜찮은 거죠? 병사님들?” 무뚝뚝한 병사들은 스피릿의 애교에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감히 주인님을 놀리는 발칙한 노예라고 주먹을 좀 흔들어준 나는 그녀에게 얼른 들어가라고 말해주고 몸을 돌렸다. 스피릿은 어디가는 것도 아닌데 손을 흔들어댔다. 어이구. 그래그래, 그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니 헝크를 비롯한 몇몇 사내들이 침울한 얼굴로 침상을 기어서 나에게 다가오더니 누운 채로 말했다. “아아~! 나의 공주님은 어떻게 하시었소! 콜트씨이이! 다시 데려오시요옷!” “그래! 다시 데려와! 그런 천사를 너만 독점하다니! 말이 돼?!” “캘리버여~! 이건 불공평해요! 어떻게 저런 재수없는 뱁새눈에게 그런 미인을~! 우오오!” …이놈들이 아까부터 왜 이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나는 팔꿈치를 들고 침상으로 뛰어올랐다. “으&#47045;! 엘보!” 몸을 날린 나는 두명을 깔아뭉개고 마지막 헝크의 등짝에 팔꿈치 엘보를 작열시켰다. 헝크를 비롯한 스피릿의 추종자들은 죽는다고 고함을 질러댔지만 난 봐주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마지막 날이 지나고 퇴소일이 밝았다. 아침일찍 일어나서 짐을 싸고 그랜퍼스 용병단의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들은 연병장이라고 만들어둔 곳에 가서 대충대충 줄을 맞춰섰다. 여기 사람들도 용병들에게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지 반대쪽의 정규군들이 벌이고 있는 서커스까지는 시키지 않았다. 젠장, 자로 잰 듯이 짝짝 맞춰서서 돌덩이처럼 서있는 저것들이 대체 사람이냐? 나라면 10분도 저렇게 못있을 거다. 함정 파놓고 기다리는 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말야. 잠시 그러고 있으니 곧 백발의 영감이 나와서 자기를 이곳 기초 훈련소의 사단장이라고 소개하며 한참동안 정신없는 말을 늘여놓고는 마침내 수고했다고 말해줬다. 그래, 당신 말 들으면서 졸지 않으려고 땀 좀 뺐지. 뒤쪽에 도열해있던 군악대가 갑자기 빵빠레를 불어 우릴 조금 정신없게 만든 다음 다시 부대표창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자잘한 시상식까지 마친 다음에야 모든 행사가 끝났다. -자! 이제부터 각 부대별로 해산합니다. 노예를 맡겨둔 마스터들은 노예막사로 가서 자기 노예를 데리고 아침에 알려준 번호의 이송마차를 찾아가도록! 정규군들은 여봐란 듯이 줄 딱딱 맞춰서 연병장을 돌아나갔지만 우리야 뭐, 용병들이니 저런 것까지 할 필요 없다. 자리에 앉아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케이서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뭐해? 가자. 아가씨들 기다리겠다.” “에이~! 떼어놓고 오는건데 정말 여러모로 귀찮게 하네~!” “웬 신경질이야?” 케이서가 물었다. 난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케이서는 왜 노예를 데려왔어요?” “응? 나야. 집도 절도 없는 모험가라서 말야. 우리 귀여운 프리카를 안심하고 맡겨둘 곳이 없었거든? 그래서 데려왔지.” “혹시 잘못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해봤수?” “야야. 이제와서 뭘 그런거 따지냐. 그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노예가 된 것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야. 까짓 죽더라도 주인님 품에서 죽게해줘야지. 안그래?” 칫~! 난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서 이러는 거라구! 입술을 씰룩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연신 투덜거리며 노예들이 있는 막사로 찾아갔다. 막사 앞에는 처음 그 여군들이 책상을 가져다 놓고 앉아서 접수증을 받고 노예들을 찾아주고 있었는데, 그 뒤로는 노예들이 천막의 창문이나 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자기 주인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하나 같이 예쁘기만 한걸? 천국에 온 것 같아.” “뭐, 다들 2급 노예니까 당연하지가 아니고, 뭐야 임마, 넌 또 왜 따라왔어?” 고개를 돌려보니 헝크 놈이 헤벌쭉 웃으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 어차피 가는 길에 아가씨들 구경이나 하러왔지. 우와~! 죽이는데? 어디 홍등가 아가씨들보다 예뻐! 다들 끝내주는데?” “생각 있으면 하나장만 하든가. 막말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같이 자주기도 하니까. 아가씨들 꼬실 자신도 없고, 용기도 없고, 벨도 없는 녀석들에겐 노예가 딱 잘어울리지.” “거, 콜트 형님은 말을 참 이상하게 하네. 그럼 노예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런 종류의 불쌍한 인간이란 말요?” “그럼 아니냐? 경고 하는데. 나중에 골치 아프고 싶지 않으면 노예 같은 건 그냥 구경하는 걸로 끝내. 절대로 호기심에 사면 안돼. 그 증거로 나는 노예 하나 잘못 구해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하고 깨졌어. 알겠냐?” “헤에~! 형님도 참, 그럴 땐 과감하게 양다리를 걸치셔야지? 맘이 약하셨… 커억?!”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면 진지하게 들어! 이눔아!” 녀석의 목을 졸라대고 있으니 케이서가 프리카를 데려왔다. “주인님 기다렸어요!” “어이구~ 그래그래, 귀여운 녀석. 요기다가 뽀뽀 해줄레?” 프리카는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베베 꼬다가 얼른 그의 볼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케이서는 좋아서 이제 곧 죽는다는 표정을 지어댔다. 그걸 보고 인상을 찌뿌리고 있는데 스피릿이 날 불렀다. “주인님!” “어, 그래. 잠깜만 기다려.” 잠깐 기다린 나는 증명서를 보여주고 스피릿을 데려왔다. 그녀는 방글방글 웃으며 아까 프리카가 했던 것처럼 내 볼에 입술을 도장을 찍어왔고 난 피식 웃어버렸다. 그때 헝크가 비명을 지르며 칭얼거렸다. 크악~! 덩치는 곰만한 놈이 저러니 정말 징그럽다! “안돼! 더 이상은 내가 용납 못합니다! 스피릿양!” “어머, 왜요?” “다, 당신은! 우리의 여신… 우억?!” “작작 좀 해라! 저건 내 노예야! 여신 같은 게 아니라고!” 몸을 날린 나는 녀석의 목을 졸라댔다. 스피릿이 말라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거다. 그때 케이서가 물었다. “으음,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어이. 자네들은 몇 번 마차야?” “나? 7번 마차요” “그래? 나는 9번인데.” “제길슨! 콜트 형님을 따라가야 스피릿양의 좀 더 보는 건데! 아까워라!” ==================================================================== 제길슨은 오타가 아닙니다. 의도적인 것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82 “으응. 주인님하고 데이트 하고 싶어서 따라나온건데….” 징징대는 녀석에게 다행이라는 말을 해준 나는 스피릿의 손을 잡아끌고 8번 마차를 찾아가며 손을 흔들었다. “뭐야? 잘별인사도 않하고 그냥 가냐?” “기회가 닿으면 또 만나겠지. 인사치례는 이 정도만 하고 그만 갑시다. 빨리가서 자리 잡아야 할거아뇨. 서서 가고 싶수?”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듯, 케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프리카를 안아올렸다. 프리카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언니 잘가요~! 고마웠어요! 행복해요!” “으응, 프리카도 잘지내야해?” “&#52197;! 노예만 아니면 누님이라고 모실텐데. 하여튼 잘가십쇼. 형님, 스피릿양.” 헝크의 말에 스피릿은 함박웃음을 지어주었고 헝크는 발걸음이 가볍다는 듯이 총총 뛰어서 자기 마차를 찾아가버렸다. 어이구~! 저 쓸개 없는 놈. 다신 만나지 말자. 난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말해줬다. “몸조심하라고 해주는게 더 좋지 않냐? 우린 전쟁터가는 거라구.” “어마, 주인님도 참, 그런 말 한마디에 상대가 내내 가슴 졸이면서 지내는거 보고 싶으세요? 주인님은 가학적인 취미가 있으세요. 정말 못됐어요.” “칫~! 주인님 몰아세우지마. 내 취미는 너 뿐이야. 일주일 만이지? 오늘 밤에 힘낼… 으읍!” “그, 그런 말씀 아무데서나 좀 하지마세요오~!” 스피릿은 두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낄낄 웃으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준 나는 이윽고 8번 마차를 찾아서 올랐다. 다행히 7번 마차는 한두대가 아니어서 우리는 빈자리가 많은 곳을 찾아서 앉아 갈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마차안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정규군들 뿐인지라 좀 어색했지만, 그래도 버릇없는 용병들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저, 저희야 말로.” 분대장쯤으로 보이는 젊은사내는 얼굴을 붉히며 노예인 스피릿의 인사에 고개를 꾸벅였다. 피식 웃으며 그의 모습을 외면해준 나는 덜컹거리는 마차안에서 이틀동안 고생한 후에야 내가 배속된 부대에 도착했다. 우리 스피릿이 자는 모습에 홀딱 빠져버린 분대장 친구에게 물어보니 제 3군단이라고 했다. 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잠들어있는 스피릿을 조심스레 안아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어이없는 우연이 펼쳐졌다. “어어라?! 형니임!” “끄으악!” 곰 같은 것이 나보고 형님이라고 부르며 쫓아왔다. 난 스피릿은 안은 채로 도망갔지만 녀석은 끝까지 쫓아왔다. “에에잇~! 네놈이 왜 여기있어?!” “글쎄. 듣기로 5번에서부터 10번까지의 마차들은 모두 같은 부대로 온 것 같다.” 고개를 돌려보니 켄이 하품을 하며 내 옆에 서있었다. “뭐야? 켄 영감. 당신도 여기로 온거요?” “영감영감 하지마. 이놈아. 나잇살 얼마 차이난다고 영감이야?” “안녕하세요 켄씨.” 가까운 마차에서 케이서의 손을 잡은 프리카가 다가와 고개를 꾸벅이자 켄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저 사람들까지 온거야? “꼬마 아가씨보면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몇 살이야?” “15살이요.” 고개를 든 켄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케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까칠한 턱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이거, 내 딸이랑 동갑인데?” “으흐흠! 그, 그래서 뭐요?! 내 노예니까 뭘 어떻게하든 내 맘이요!” 케이서도 상식이 제대로 박혀있는지 아는 사람의 딸이 자기 노예와 나이가 같다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젠장, 결국엔 다 같은 곳으로 왔군. 연병장으로 보이는 곳에서 잠시 머뭇대고 있으니 군 막사로 보이는 건물에서 제복을 갖춰입은 한개 소대가 우리들에게로 다가왔다. 그 중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좀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3군단에 오실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훈련과 정비를 담당할 로템 소령입니다. 피곤하실테니 일단 짐을 풀고 쉬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교관들의 안내에 따라 숙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별수 있나.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은 소시장에 끌려온 황소들 마냥 눈만 데룩데룩 굴리며 그들의 안내에 따라 숙소에 배정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노예를 가진 사람들은 각방을 제공해 줬다는 것이다. 뭐, 그래봤자 커다란 창고에 칸막이를 여러장 쳐서 벽과 문을 만들고 완성된 좁은 방에 조잡하게 만든 나무 침대 하나씩 놓아둔 거 뿐이지만 그대로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방에 짐을 풀고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이 친구들이 또 우릴 불러냈다. “젠장, 얼마나 이 짓해야 하는거야? 아직 시작도 않했는데 슬슬 실증이날 것 같아.” “최소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걸?” 제기랄. 전쟁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고? 난 못해. 적당히 구르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스피릿 데리고 튀어버릴거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다시 연병장으로 불려나간 우리들은 그곳에서 여기 무슨무슨 연대장이라는 사람에게 대략적인 앞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앞을 예정된 공식교전까지는 앞으로 한달, 그 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전시훈련을 받고 개전 2주 전에 베레타의 군대와 합류하여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실질적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고 했다. 뭐, 결전병기가 판을 치는 곳에서 우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저녁을 먹고 좀 씻은 다음 숙소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당담 장교들이 일찍 자라고 불은 강제로 꺼버렸다. 젠장! 난 절대 군대 체질이 아냐. “아아~! 죽겠다. 빌어먹을 또 훈련이야?” “보통사람이 실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연습은 해둬야 해요. 주인님 힘내세요.” “얄미워. 너희는 뭐 한다냐?” “모르겠어요. 아마 여기 허드렛일을 도울 것 같던데요?” “칫~! 거봐, 뭐하러 따라오겠다고 떼를 써서 이 짓이야? 바보 같이. 그냥 안젤라랑 집에 있을 것이지.” 달빛 속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다듬고 있던 스피릿은 헤헤 웃으며 내 가슴을 껴안았다. “우응~ 전 당신하고만 있으면 어디든 좋아요.” “넌 바보야. 이리와, 훈련한답시고 굴러다니면 피곤해서 제대로 안아주질도 못할텐데 오늘이라도 찐하게 한번 안아보자. 하지만 옆방에 사람들이 있으니까. 소리는 내면 안돼?” “응, 노력해 볼게요. 자아. 노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사랑해 스피릿. 이젠 너뿐이야.” 셔츠의 단추를 푼 나는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을 정신없이 애무하며 키스를 시작했다. 꿈 같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이튿날부터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다. 불만이 이래저래 쌓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쟁에서 살아남아서 스피릿을 지켜주고 안젤라와 다른 친구들의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입 꾹 다물고 시키는데로 배우고 뛰어다녀야 했다. 그리고 말이지. 언제 이런데서 정식교육을 받아보겠냐? 우리같은 사람들은 이런 거 배워 놓으면 다 피가 되고 살이된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해야지. 이놈의 군 장교들은 노예들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왜 이런 전쟁터에 그녀들을 데리고 와도 좋다고했는지는 저녁마다 응급처치법을 연습한다고 축늘어져 있는 내 몸을 가지고 연습을 해대는 스피릿의 모습을 보고 대충 짐작했다. “자, 오늘은 인공호흡법을 연습해야해요. 주인님 도와주세요.” “…나 지금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너 하고 싶은데로 해.”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내 몸을 바로 눕히고 무슨 말을 연신 중얼거리며 목뒤에 베개를 받치더니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는 입을 크게 맞추고 숨을 불어넣었다. “으읍! 헙~! 으읍! 뭐, 뭐야?! 이 바보가?!” “어어, 움직이면 안돼요. 가만 계세요. 자, 이제 손바닥을 이렇게 만들고 가슴을 힘껏 누른다….” 컥~! 헉~! 스피릿은 두 손바닥에 전 체충을 실어 내 가슴을 눌러댔고 난 하마터면 그녀의 가사회생법에 희생양이 될뻔 했다. “에라이~! 내가 진짜 인공호흡을 가르쳐주마!” “어마, 주인님 아직… 으읍!?” 스피릿은 작은 반항을 하며 내 가슴을 두드렸지만 난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쨌든 훈련도 계속 받다보니 적응이 되어서 이젠 다음이 궁금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교육을 담당하는 장교들은 우리들의 불타는 교육열에 감동하여 몰래 군사격투기까지 가르쳐주곤 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가고 드디어 공식교전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어디서 하는 겁니까?” 예정된 마지막 훈련이 끝나고 해산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말에 질문하기 좋아하는 케이서가 우리 교육담당 장교 파이크에게 물었다. 험악하게 생겼지만 마음 씀씀이는 좋은 파이크가 선선히 대답했다. “장소는 베레타와 캐슬린 사이의 국경지대에 있는 비무장지대에서 양국의 장수가 나와서 개전의식을 시작함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는 양국의 전 군대가 공식교전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통상적인 땅따먹기식 전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난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 케이서가 질문했다. “민간인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교전이니 만큼, 국경도시에 살고있는 민간인들은 모두 피난했을 겁니다. 누가 공식교전에서 승리하던 간에 그 다음에는 국경수비대를 위시한 공성전이 시작될 겁니다. 그저 승패에따라 공수의 입장만 바뀔 뿐이지요. 그리고 공선전에서도 승리하게 되면 그때부터 치고들어가는 겁니다. 대략 어떤 양상으로 싸움이 전개 될지는 짐작이 가실 겁니다.” 우리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크는 한마디 덧붙였다. “나중에 또 듣게 되시겠지만 민간인은 함부로 폭행, 강간, 사살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적발된다면 군법에 따라 처분 될겁니다.” “대략 어떻게?” “정규군이든 용병이든 모두 즉결심판입니다. 집 잃고 피난가는데 불쌍하지 않습니까? 웬만하면 건드리지 마십시요.” 우리는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훈련이 끝나자 한달동안 수고했다고 부대에서 다음 날은 쉬는 날로 해주었다. 우리가 있는 3군단은 베레타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가까운 곳에 라이거라는 국경도시가 있다. 보급 때문인지 그리 멀지도 않았기에 용병들이 외출허가를 받아 우르르 쏟아져 나갔다. 이곳에 용병으로 배속된 사람들은 대략 80여명 정도인데 거의 대부분이 나가버렸다. 물론, 나도 거기에 포함된다. 부대에서 지급한 마차를 얻어타고 마을에 도착한 우리들은 오후5시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헝크는 안된다고 발악을 하는 켄을 끌고 근처 홍등가로 달려가버렸다. “나중에 봅시다!” “이, 이거 놔라! 마누라가 알면 나 죽어. 임마!” “하하하~! 뭘 빼고 그러쇼?! 얌전히 따라오쇼!” 그들의 모습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던 케이서는 어리지만 조숙한 노예에게 이끌려 여관이 밀집한 거리로 들어가 버렸다. 하품을 하며 그것을 쳐다보던 나는 무기상에나 가볼까하고 발길을 돌렸다. 스피릿이 쫄래쫄래 다가왔다. “어디가세요?” “응? 무기상에, 이거 활줄이랑 화살 사러.” 난 자동석궁을 보여주었다. 교관들과 장교들이 이렇게까지 개조된 녀석은 처음본다고 제발 자기들에게 팔라고 애원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내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팔 것 같아? 이 참에 정비도 맡기고 화살통도 넉넉하게 사둬야겠다. 무장은 대체로 자유니까. “으응. 주인님하고 데이트 하고 싶어서 따라나온건데….” ==================================================================== 데이트라, 그러고 보니 한번도 해본적 없군요. 갑자기 왜 이렇게 비참해지지? Reload Running Fire: 83 “어? 스피릿 너 지금 화 내는 거야?” 스피릿이 뒤따라오면서 칭얼거렸다. 난 눈을 게슴츠레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제 밤에 몰래 내 입술 훔친 걸로는 부족했던거야? 요 밝힘쟁이 노예야. 자는줄 알았겠지만 그때 나 아직 깨어 있었어.” 얼굴이 빨게진 스피릿은 자긴 모른다고 잡아땠다. 난 낄낄 웃으며 몸을 돌렸다. 무기상에 들려 자동석궁을 정비하고 예비화살통을 서너개 사는 것으로 마을에서의 볼일은 마무리한 나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자, 뭐하고 싶냐? 말해봐. 주인님이 다 들어줄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그녀는 내가 계속 부르자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다가와서는 소매를 붙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여관이 밀집한 곳으로 날 데려갔다. “저, 전 이제 감정에 솔직해 지기로 했어요.” “…그렇게 말해도 설득력 없어. 솔직히 욕구불만이라고 말해봐.” 그녀의 귓가에 대고 악마처럼 웃으며 속삭여주자 울상을 지은 스피릿이 자꾸 놀리지 말라며 내 가슴을 마구 때려댔다. 난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가 이끄는데로 따라갔다. “자, 이제 날 어쩔건데?” “잡아먹을 거예요.” 침대에 앉아있으니 그녀가 문을 잠그고 나에게 다가왔다. 스피릿은 첫날 이후로 한번도 자길 안아주지 않았다고 볼을 부풀리며 내 가슴에 안겨들었다. 하지만 낮에는 훈련 뛴답시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데 그럴 힘이 어디있어? 스피릿은 내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히고는 가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군침을 한번 꼴딱 삼킴 다음 고개를 숙여 키스를 해왔다. “으읍… 스피릿 너무 밝히는 거 아냐?” “익! 그래요! 주인님 말대로 저 욕구불만이에요. 흐응~! 제가 꼭 이런 말까지 해야해요? 주인님 바보!” “그, 그래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토라지지마.” 애무를 하다말고 화가 난 듯이 외치고는 옆으로 팩 돌아눕는 그녀의 등을 껴안은 나는 스피릿의 가슴과 목을 만지고 핥아주었다. 그러자 냉큼 몸을 돌린 그녀는 얼른 내 입술을 훔치며 바싹 달라붙었다. 한달동안 피곤하다고 그냥 자서 그런가? 스피릿이 이렇게 나올때고 다 있고 별일이네. 물론, 전직 공주님이라는 사실과 평소 금욕적인 언사와 행동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이렇게 정욕적으로 매달려오는 그녀에게 배신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바보냐? 성인군자라도 그녀의 행동에는 할말 없을거다. 그래도 왜라는 의문이 생긴다면 그건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세상에 그냥 태어났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주인님. 저 지금 기분 너무 좋아요. 아아….” 내 키스와 애무에 기분이 풀어졌는지 상체를 들어올린 그녀는 타액으로 지저분해진 입술을 혓바닥으로 낼름 핥더니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내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으으응~! 주인니이임~ 가슴이 뜨거워서 못 참겠어요~!” 난 머리가 뜨거워 미칠 것 같아. 한참이 지난 후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하얀 등과 귀여운 엉덩이를 드러내고 침대에 누은 그녀는 숨을 몰아쉬다가 손을 내밀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그러자 스피릿이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대로 임신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전쟁이 끝나면 바로 결혼하자. 보통 사람처럼 울고 웃고 싸우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죽자.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쏙 빼닮은 아기를 낳자. 많이, 아주 많이.” “예. 꼭, 꼭 그렇게 해요. 우리.” 스피릿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시간이 다되어 다시 부대로 돌아간 우리들은 다음날 짐을 싸서 이동하는 군대를 따라 베레타의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베레타의 발파로스라는 이름의 군대와 합류하여 개전 장소인 국경의 비무장 지대로 향했다. 발파로스 군의 기사들은 우리 용병단에 여자들이 있다는 것에 대단히 신기해했다. 세계사에 박식한 우리 노예에게 물어보니 베레타에서는 여자가 집밖으로 나돌게 내버려 두지 않는 다고 했다. “그래서 베레타에는 여자 모험가, 여자 용병, 여기사는 물론이고 여관이나 시장가게에도 여주인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바깥 일은 무조건 남자들이 다 하고 여자들은 육아와 집안 일에만 전념하죠.” 그녀의 말에 나와 용병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카가 말했다. “우와~! 언니는 모르는게 없네? 저번에는 베레타 기사와 이것저것 이야기도 했었지?” 정말이냐고 물으니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령부를 물어보길레 가르쳐줬어요.” “우와~! 스피릿양은 다른나라 말도 할줄 알아요?” “예. 복잡한 건 무리고 간단한 회화정도는 할 수 있어요.” 헝크의 물에 스피릿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지금 그랜퍼스 말도 아주 유창하게 잘하는 거다. 원래 캐슬린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지금 캐슬린이랑 싸우러 가는건데 괜찮은가 모르겠네. 그래서 점심시간에 볼일보러 가는 거 따라가주면서 물어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버림 받았는 걸요? 이제 제겐 공주의 부채가 없어요. 그러니 상관없어요.” “그래도 조국이잖아? 고향이잖아?” 스피릿은 상냥하게 웃으며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렀다. “어마, 제가 혹시 심란해 할까봐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기뻐라.” “그렇다고 하고, 정말 괜찮은거야?” “예.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정들면 거기가 고향이고 조국이에요. 잡아먹으려 달려드는데 무슨 고향이에요? 전 그렇게까지 착한 여자 아니랍니다.” 그녀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스피릿은 별걸로 다 고민한다고 내 엉덩이를 만져댔다. “칵~! 노예가 주인님 엉덩이 만져도 되냐?!” “뭐 어때요? 아무도 없는데. 주인님 우리 뽀뽀 한번하고 가요.” “안돼. 난 밥 먹으러 갈거야. 배고파.” “아아앙~! 주인니이임~! 뽀뽀오~!” 스피릿이 칭얼거리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그래서 난 마지 못해서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해줬다. 잠시쉰 다음 부대는 다시 출발했다. 그랜퍼스 3군단 2300과 베레타의 발파로스 군단 2000. 합해서 4300명의 대인원이 움직이다보니 움직임이 상당히 느리다. 그래서 말타고 3일 거리를 닷세만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싸우는 거요?” “아니요. 전투 지점은 이곳에서 조금 더 가야 합니다. 이곳은 우리군의 전초 전진기지로 사용될 것입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지나가는 병사에게 물으니 그는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장교들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그곳에서 막사로 사용할 천막을 세우고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며 공식교전 날짜를 기다렸다. 전투 개시 3일전, 우리 용병단으로 임무가 하나 떨어졌다. 지형정찰이라는데 정규군보다는 우리가 훨씬 그런 쪽의 지식이 많으니 이쪽으로 임무가 떨어진 거라고 했다. 그래서 거의 산책삼아 지형정찰을 나갔던 우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심상치 않아서 후다닥 돌아와 장교에게 알려주니 캐슬린 정규군이 도착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 밤부터 경계태세를 강화한다! 전력의 열세를 느끼고 공식교전을 무시하고 기습을 시도할수 있으니 조심하도록! 중사! 장교들 전부 대대장 막사로 모이게 해! 쉬린은 베레타 상황실에 이 정보를 전하도록, 아, 그리고 자네들은 그만 돌아가도 좋네. 수고들 했어.” 부산을 떨어대는 장교의 말을 듣고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긴 나는 가도 좋다는 말에 스피릿을 찾아갔다. 그런데 우리 용병단이 지내는 천막 근처에서 처음보는 기사들이 노예 아가씨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비롯한 헝크와 켄이 인상을 마구 찌뿌리며 다가가자 마침 그곳에 있던 스피릿이 후다닥 나에게 달려왔다. 그걸보고 작은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빠지는데 없이 골고루 걸리냐? 스피릿이 내 뒤에 숨자 기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이 잡혀있었다는 사실에 흥분한 헝크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당신들 뭐야? 그 아가씨들 가만 놔두지 못해?” “헝크씨이이이~!” 여자들이 콧소리를 내며 우릴 반겼다. 젠장, 다른 녀석들은 아직 정찰에서 돌아오지 않았구나. “어, 그 여자. 다, 당신 노예?” 뭐지? 발음이 어색하다? 스피릿이 말했다. “베레타의 기사들이에요.” “왜 추근대는 건데?” “…주인님 전 아무래도 너무 예쁜 것 같죠?” 스피릿의 말에 난 대충 상황을 정리하고 그들에게 안꺼지면 동맹이고 나발이고 두들겨 팬다는 의사표현을 해줬다. 베레타의 기사들은 알았으니 화내지 말라고 말하며 순순히 돌아갔다. “허우대는 멀쩡한 것들이 말야. 남의 노예 넘보는 거 아니라고.” “주인님 고마워요. 헝크씨와 켄씨도요.” 스피릿이 환하게 웃었다. 헝크 녀석은 예쁜 노예아가씨들에게 둘러쌓여 그녀들의 감사와 하소연을 들어주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뭐하러 나와있어?”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주인님 무장에 수를 놓고 있었어요. 보세요 예쁘죠?” 스피릿은 화려한 불새의 수를 검은 손수건에 놓아 그것을 다시 검집이나 소드벨트에 덧대고 있었다. “오, 예쁘다. 언제 이런 걸 배웠어?” “어렸을 때요. 불새는 불사신과 부활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낮은 음성으로 속닥거렸다. 난 헝크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는 노예 아가씨들을 쳐다보았다. “저 아가씨들은?” “아, 제가 놓고 있느니 가르쳐 달라며 하나 둘 찾아왔어요. 자기 주인님에게 해드릴거라면서요.”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손바닥을 부딧히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스피릿, 궁금한게 있는데. 공식교전이라는거 말야. 그거 단순한 개전의식일 뿐인거야? 무시해도 상관없어?” “예, 엄현히 따지면 공식교전이라는 건 단순히 전쟁의 개전을 알리는 행사일 뿐이예요. 막말로 무시해도 크게 상관은 없죠. 하지만 그래도 이 공식교전을 고집하는 이유는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승패를 판가름 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따로 장소를 정해놓고 싸우는 거라서 민간인이 다칠염려도 없죠. 그러니까 공식교전은 일단 서로의 전병력을 약속장소에 모아두고 제한 시간동안 싸우는 거예요. 어려운 작전이나 전술은 필요없어요. 숨거나 도망갈 곳도 없어요. 오로지 싸우면되죠. 그래서 심한 경우엔 공식교전 한번으로 승패가 판가름 나는 경우도 있어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공식교전에서 이기면 다 이긴거나 마찬가지네?” “아뇨, 공식교전이 끝나고 상대국가로 진격해 들어가면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되는 거예요. 공성전이나 시가지전을 하다보면 밀려나오는 수도 많거든요? 공식교전은 규모가 큰 전초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으세요?” “응, 지형정찰 나갔다가 저어기서 캐슬린 군을 발견해서 장교에게 알려줬거든? 그러니까 행여 공식교전을 무시하고 저녁에 기습할지 모르니까 경계 잘하라고 호들갑을 떨어서 말야.” 그러자 의외로 스피릿이 눈살을 찌뿌리며 말했다. “착각하지 말라고 그러세요. 캐슬린 기사단은 절대 그런 짓하지 않아요.” “어? 스피릿 너 지금 화 내는 거야?” ==================================================================== 주인을 때리기까지 하는 막가는 노예인데요? 그 정도는 기본이지요. Reload Running Fire: 84 “어허어허~! 손등에 키스 좀 한 거 갖고 뭘 그러쇼!” “어머나, 아, 아뇨. 무슨 말씀이세요. 저 화 안내요?” 그때 헝크가 끼어들었다. “와아~! 멋진데? 제길슨~! 난 누가 이런 거 만들어서 달아주지? 형님은 좋겠수?” “…이놈은 사사건건 방해야. 너 오늘 좀 맞을래?” “주인님 왜 그러세요? 헝크씨. 헝크씨도 검하고 가지고 나오세요. 제가 수 놓아드릴게요.” “우와! 정말요!” 스피릿이 빙글 웃으며 말하자 헝크는 날 듯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장비를 가져왔다. 그런데 칼이 아니고 핼버드다. “여기 날이 시작되는 부분에 장식 대신 달면 되겠네요. 이리 주세요.” 헝크가 그녀에게 핼버드를 내밀었지만 스피릿은 어머나하며 그것을 놓쳐버렸다. 헝크는 히죽이죽 웃으며 자기 핼버드를 다시 주워들었다. “꽤 무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프리카가 켄에게 다가왔다. “켄씨. 이거요.” 입에 담배 파이프를 문 채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던 켄이 고개를 내렸다. 프리카는 두 손을 높이 들어서 제법 멋지게 수 놓은 검은 손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뭐냐?” “선물이요.” “난 노예에게 그런 건 않받는다.” “그럼 딸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켄의 눈이 커졌다. 그는 한참동안 방긋방긋 웃고있는 프리카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버렸다. “뭐, 잘쓰마.” 프리카는 그것을 보고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용병들이 모두 모이자 장교가 찾아와서 우리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브리핑을 해줬다. 앞뒤 빼고 본론만 말하면 양국가의 모든 전력들이 단숨에 맞붙는 공식교전이니 만큼, 이번 전투에서 적의 기를 꺽어놔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내일 본국에서 훈트와 마법사들이 도착할거다. 그들이 전초전을 장식하면 그 직후 여러분들과 정규군들이 함께 나가 백병전이 시작한다. 무운을 빈다.” 케이서가 손을 들었다. 장교는 그를 가르켰다. “만약 제가 죽으면 노예는 어떻게 됩니까?” “전투가 끝날 때까지 군에서 보호하다가 관리원으로 보낼 것이다. 다른 질문.” 개소리다. 아마 장교들의 노리개가 될거다. 뻔하지. 뭐, 케이서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질문을 끝냈다. 그날 밤 나는 애꿋은 장교놈이 해준 이야기 때문에 정신이 심란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에이~! 염병~! 잠이 안오네!” “겁쟁이군?” “…그러는 당신은 왜 안자고 있는데?” 고개를 돌리고 말해주니 케이서가 램프를 들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 난 불침번이잖아.” 코를 좀 벌렁여준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서 잠이 오질 않는다. 아아~ 스피릿, 네가 필요해에! “힘들면 노예한테 갔다와. 모른 척 해줄테니까.” “…됐수다. 난 그 정도까지 아뇨.” “이런, 생각보다 강단있잖아? 그럼 나만 겁쟁이가 되는건가?” “무슨 소리요?” 케이서는 담요를 걷어차고 코를 골고있는 헝크 놈의 담요를 덮어주고는 놈의 얼굴에 배게를 올렸다. 으음, 이제야 조용하군. 그는 조용히 잠들어있는 천막안의 사람들을 주욱 살펴보며 말했다. “손이 계속 떨려서 프리카한테 갔다왔어. 녀석, 자다 일어나서는 주인님 겁먹었다고 달래주더라.” “뭐라고 합디까?” “겁이 안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미친 사람이래. 하지만 나는 무서워하고 있으니 정상이라고 그러더라. 그리고 자긴 끝까지 기다릴테니까 죽지말고 꼭 돌아오라고 말해주던데.” “기특한 노예네.” “아무렴! 게다가 얼마나 착하다구. 18살이되면 내 신부 삼을거야.” “…이거 아쇼? 당신과 프리카는 주종관계인데다 나이도 10살이나 차이나요.” 케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건 문제가 아냐. 싫다고 떠나는 여자 같은 것보다는 이쪽이 백만배는 더 나아. 난 나만 바라봐주는 노예면 족해. 뭐, 겁쟁이라고 욕해도 할말은 없다만.” “별로. 난 아무것도 안들었수다.” 눈을 감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서.” “뭐냐?” “이 다음에 날짜 잡으면 편지하쇼. 얼굴이나 좀 봅시다.” 케이서의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고 난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장교가 말한대로 본국에서 마법사들과 훈트들이 도착했다. 혹시 라이트 놈이 없나하고 살펴봤지만 다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좀처럼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훈트의 하역작업이나 마저 끝내기로 했다. “거기! 조심해서 들어.” “에잇~! 되게 무겁네!” 짐마차에서 커다란 상자를 가져다 바닥에 내려놓으면 공병들이 달려들어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커다란 상자안에는 검정색 털에 황소만한 크기의 개과 짐승이 웅크리고 있었는데 햇빛을 조금 쬐게해주자 그 자세에서 눈을 번쩍뜨고는 가벼운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기로 가사상태에 들어가면 몇 년 정도는 그 상태를 유지한단다. 역시, 저 정도는 되야 전투용 키메라지. 깨어난 녀석들은 장교들의 부름에따라 줄을 맞춰 걸어가더니 한쪽 공터에 오와 열을 맞춰섰다. 덕분에 우리들은 꽤나 신기한 구경을 했다. 줄을 맞춰서는 황소만한 크기의 개떼라니. 조금 웃기기도했지만 일단은 멋있었다. 병기가 가지는 그로데스크적인 멋이랄까? 양산형 훈트들은 수도 마법사 길드에 있는 실험용 훈트보다 배는 작았다. 그래도 황소만한 크기면 거의 말과 같은 높이다. 우리부대에 배속된 훈트는 모두 20여마리. 조금 적은 듯하지만 장교의 말로는 이 정도만 되도 한개 군단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다고 한다. “대체 어떤 놈들이길레? 불이라도 뿜어냅니까?” “자세한 것은 기밀이오. 모레 공식교전에서 직접 확인하시오.” 훈트를 가지고 온 장교에게 물었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칫~! 그래 알았어. 저 놈들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 이 두 눈으로 알아봐주지. 작업을 마친 우리들은 이제 막사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는 장교들에게 대략적인 브리핑을 들었다. 아무 작전없이 그냥 맞붙어도 상관 없을 것 같지만 이것도 의외로 고난이도의 전술과 작전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음 날도 하루종일 장교들에게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우리들은 결국 결전의 아침을 맞이했다. “제길~! 결국 한숨도 못잤다.” “뭐가 긴장되서 한숨도 못자요? 내참.” “네놈 코고는 소리 때문에 한숨도 못잤어!” 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헝크녀석의 목을 졸라서 흔들어줬다. 조금 툭닥거리며 삶에 마침표를 찍을지 모르는 하루를 맞이한 우리들은 깨끗한 제복으로 갈아입고 각자 자신들의 무장을 챙겼다. 정규군은 직책에 따라 무기와 갑옷이 똑같지만 우리들은 무장에 대해 자유로워서 각자의 무기와 갑옷을 걸쳤다. 한참 옷을 입고 있는데 스피릿과 노예아가씨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도와드릴게요.” “어, 뭐하러 왔어?” “이런 건 여자들이 해줘야해요.” 스피릿은 내 소드벨트를 매어주며 말했다. 옆에서 헝크가 부럽다는 듯이 칭얼거렸고 켄은 자신의 단검과 자동석궁을 챙기며 피식 웃어버렸다. 내 장비를 다 챙겨준 그녀는 다른 사내들의 것도 도와주었다. 노예가 없는 사람들은 그녀들의 마음씀씀이에 고마워했다. 마지막으로 스피릿이 어제 하루종이 손가락에 쥐가나도록 수를 놓았다는 손수건을 받았다. 검정색 손수건에는 커다란 붉은 불새가 날개를 펼친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색실구하기도 힘들었을텐데. &#52197;… 조금 감동이다. “뽀뽀해줄까?” “돌아와서 해주세요.” 스피릿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머리에 묶었다. 켄이 웃으며 말했다. “멋지군, 머리에 불새가 피워올랐어.”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스피릿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때 케이서가 프리카를 끌어안고 키스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사내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참후에야 프리카를 놓아준 케이서는 그녀에게 받은 불새 자수가 놓여진 방패와 롱소드를 등에 매며 말했다. “돌아오면 이 다음 걸 하자.” “…예, 예에. 주인님.” 프리카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사내들은 야유를 넘어서 조롱을 보냈으며 헝크는 그걸보고 배를 붙잡고 야전침대 위로 픽 쓰러지더니 끙끙 앓는 소릴냈다. …이유는 배가 아파서, 케이서의 행동으로 조금 머뭇대던 마스터들이 용기를 가지고 자기 노예에게 키스를 하거나 포옹을 해줬다. 난 씁쓸하게 웃으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막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스피릿이 따라나왔지만 난 그녀를 막았다. “더 이상 따라오지마.” “예.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됐어. 만약에 나 죽으면 말야….” 이번엔 스피릿이 내 입을 막았다. 그녀는 평상시와 똑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것 쯤은 말하시지 않아도 알아요. 신경쓰지마세요.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럼 다행이구. 갔다올게. 저녁에 보자.” “예. 다녀오세요.” 스피릿은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빙글 웃으며 말했다. “헝크씨도 조심하세요.” “예! 물론입니다! 아, 저기 부탁있는데요….” “뭔데요?” 헝크는 내 눈치를 보더니 그녀에게 속닥거렸다. 조금 머뭇대던 스피릿은 뭘 어떻겠냐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놈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춰버렸다. 그걸보고 순간 핀이 빠져버렸다. “크아아악! 무슨 짓이야! 이 자식! 너 가만 안둬! 죽인다! 거기서!” “어허어허~! 손등에 키스 좀 한 거 갖고 뭘 그러쇼!” “닥쳐! 너 오늘 내 손에 죽었어! 그리고 스피릿! 너 돌아오면 가만안둘 줄 알아! 감히 주인님이 보는 앞에서 바람을 피워?!” ==================================================================== 흠흠~ 바람이라면 콜트군도 적잖이 피웠지요. Reload Running Fire: 85 “뭐라고 하는 거야!?” “예. 돌아와서 절 괴롭혀 주세요. 기다릴게요.” 새실새실 웃고있는 그녀를 좀 노려봐준 나는 서둘러 이 곰 같은 헝크놈을 쫓아갔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이동하는 부대를 따라 약속된 장소로 향하니 드넓은 평야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휘를 맡은 장교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잡고 줄을 맞추고 있는데 옆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젠장, 이래서야 숨을 곳은 물론이고 저것들이랑 붙으면 어떻게 피할 곳도 없겠구만.”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반대편에서 먼지 구름과 함께 말에 탄 기사단을 비롯해서 기병, 중장기병, 보병, 중장보병, 궁수에 마법사는 물론이고 창병과 창기병들이 우르르 달려와 우리들과 대략 100여미터 정도 앞에 섰다. 엄청난 위용이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무슨 사람이 저렇게 많냐? 제기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고 있으니 저쪽에서 한 사내가 말에서 내려 걸어왔다. 그러자 우리쪽에서도 한 사내가 걸어서 나갔다. 이윽고 두 사내가 중앙이 되는 곳에 멈춰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난 옆에 서있는 켄을 팔꿈치로 툭치며 물었다. “누구요?” “아, 여기 총사령관이라고 하더군. 베레타 쪽의 사람이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이야기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이 갑자기 검을 뽑아들고는 몇 번 검을 나눴다. 챙챙~! 그와 동시에 나팔소리가 들리더니 진격이 시작됐다. 뿌아아아앙~! 동시에 우리들의 지휘를 맡은 그랜퍼스군의 백부장 테이머가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다들 알겠지! 적 보병을 돌파하여 후방을 돌아 중장보병의 뒤를 쳐서 길을 만든다! 우리는 그것만 하면 돼! 이후는 각자의 재량에 따라 각개격파에 임한다! 제한 시간은 한 시간! 사람이 아니고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죽여라! 전원 돌격!” “으하하하! 먼저 갑니다!” 헝크가 핼버드를 휘두르며 달려나갔고 나도 잇소리를 내며 검을 뽑았다. “가자! 후회와 고뇌는 일단 살고 난 다음에 술 한잔 걸치면서 하자구!” “그거 좋은데!” 케이서가 달려가며 외쳤고 나도 깔깔 웃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두두두두두~! 거의 1만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뛰기 시작하자 땅이 울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저 앞의 상대의 얼굴이 더 크게 보인다. 투구를 쓴 얼굴이 어렴풋이 보인다. 좀더 달리자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눈은 안젤라와 같은 초록색이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는지 조금 까무잡잡하다. 아마 저 친구도 집에가면 사랑하는 연인이 있을거고 소중한 가족이 있을거다. 혹시 결혼을 빨리 했다면 귀여운 자식이 아빠가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갈갈이 찢어 없애야한다. 왜냐고? “이야아아아~!!!!! 나도 살고 싶어서 이 짓을 하는거야!” 상대가 메이스를 들어올리는 동안 비어버린 가슴으로 파고든 나는 달리던 가속을 이용하여 전 체중을 어깨에 실어버렸다. “커억?!” 사내는 뒤로 넘어져버렸고 처음보는 사내들의 틈새로 굴러들어간 나는 후다닥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선두는 전투보다는 뒤따라들어오는 아군에게 깔리지 않기위해 앞서서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넘어뜨린 사내는 아마 뒤따라 들어온 수천명의 발에 치여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을거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결국은 이런 게 인생 아니겠어?! 비켜라! 아가들아! 다칠라!” “뉘리카?! 세이트으!” “누에르!” 내가 달려들어가자 깜짝 놀란 캐슬린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난 그들을 무시하고 쭉쭉 달려들어갔다. 멈췄다가는 바로 칼을 맞거나 뒤따라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인간파도에게 깔리게 될거다. 아군 발에 채여죽는 것 만큼 바보 같은 것도 없겠지?! 그때 저 앞에서 활을 든 사내들이 뚫고 들어가는 우리들을 발견하고 활을 들었다. “샤케!” “지랄마!”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든 나는 앞에서 얼쩡거리는 병사들에게 무차별로 쏴버렸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퉁~! 순식간에 놈들이 쓰러지고 침입로가 확보되자 난 사양하지 않고 그곳으로 파고들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다. 중간에 어떤 놈이 휘두른 칼에 맞았는지 어깨에서 피가 철철난다. 하지만 덕분에 긴장이 풀리고 아주 상쾌하다! “에이! 막지말고 비켜!” 활을 당기는 녀석들에게 자동석궁의 연사력을 선보여준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달려나갔다. “내가 일등이다!” 뒤를 돌아보니 베레타군과 캐슬리군이 맞붙어서 밀고당기기를 반복하고 있다. 폭발을 비롯해서 불길과 충격파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것을 봤을 때 마법사들과 칼라미티를 뽑아든 베레타의 마법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때 돌파에 성공한 용병단이 보병의 틈새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내 뒤를 따라오던 백부장이 외쳤다. “아직이다! 날 따라와! 지금부터 중장보병을 뚫어서 길을 만든다!” 잠시 방황하던 우리들은 서둘러 앞서 달리는 테이머의 뒤를 따랐다. 지금 우리는 캐슬린 군의 등뒤를 달리고 있다. 저 바보들은 밀어붙이는데 바빠서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는가보다. 조금 달려가던 우리들은 말에 앉아서 병사들이 피터지게 싸우는 것을 느긋하게 구경하는 캐슬린 장교를 발견했다. 테이머가 외쳤다. “죽여!” “기다렸습니다!” 나와 켄이 자동석궁을 들어 그를 겨눴다. 사내는 갑자기 적군이 나타나자 당황해서는 말머리를 돌리려했지만 그 전에 고슴도치가 되어서 바닥에 떨어졌다. 도망가는 말을 쳐다보던 나는 낄낄 웃으며 석궁을 집어넣고 샤프처리 롱소드를 뽑았다. “성능시험을 해볼까나?!” “중장보병이다! 가자!” “으라챠! 비켜라!” 주머니에서 파이어볼 스크롤을 뽑아든 나는 그것을 입과 빈손으로 찢어버렸다. 콰콰콰콰쾅~! “으하…? 어라?” “멍청하기는! 중장보병의 갑옷에는 간단한 공격마법 정도는 무효화시키는 스펠이 새겨져 있다! 그런 공격은 쓸모없어! 오로지 칼로 찔러라!” “젠장! 스타일 구겼네!” “하하하! 형님 바보 되셨소?!” “시끄러!” 검을 뽑아든 나는 옆에서 핼버드를 들고 달려가 중장보병을 갑옷째로 찔러버리는 녀석에게 고개를 흔들어주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케이레에! 펀트!”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달려가서 굼뜬 갑옷바보의 틈새에 검을 찔러넣은 나는 그것을 뽑아들고 다른 목표를 찾았다. 그때 문언가가 내 등을 발로 걷어찼다. 뒤를 돌아보니 중장기병이 도끼를 들어올리고 있다. “으럇!” 쾅~! 달려온 케이서가 중장기병을 받아버렸고 난 넘어지는 녀석의 목을 찔러버린 다음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쓰며 시체를 밀어버렸다. 난투극을 벌이는 사내들의 틈새로 검을 휘두르는 케이서가 보인다. “빌어먹을 신세졌다!” “목숨값 빛진거다?!” “살아나면 술 한잔사지!” 몸을 돌린 나는 뒤에서 치고들어가는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괴성을 지르며 도끼와 투핸드 소드를 휘두르는 중장기병을 몰아붙이려했지만 애초에 이건 싸움이 안된다. “제기! 이것들을 어떻게 뚫어?!” “조금 있으면 우리측 기마대가 들어올거다! 그때까지 최대한 길을 만들어야해!” “으랴! 헝크! 가자! 일단 뚫고보는 거야! 백부장! 길은 만들테니 부대원들 끌고 들어와요!” “좋시다! 켄 영감! 엄호 부탁해요!” “알았다! 달려!” 나와 헝크가 괴성을 지르며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등뒤에서는 켄이 자동석궁을 들고 쿼렐의 난사하고 있다. 덤벼드는 놈들을 걷어차고 검으로 찌르고 하면서 달려나가다보니 저앞에 기마대가 보인다. “어어이! 여기야!” “시끄러워서 안들려! 헝크! 놈들 가까이 못하게 붙잡아!” “알았시다!” 헝크는 핼버드를 머리위로 들어올리고 빙글빙글 돌렸다. 윙윙윙~! 어찌나 빠른지 바람소리가 나는 것 같다. 저번에 세리카의 가게에서 거금을 들여 사온 스크롤을 뒤적인 나는 어렵지 않게 파이어 프레임 스크롤을 꺼냈다. 아무리 무적인 갑옷이라도 틈새가 있어! 그리고 그 안에 든건 사람이라구! 난 스크롤을 찢으며 외쳤다. “아하하하~! 통구이로 만들어주마! 파이어 프레임!” 푸화르르륵~!!!!! “으갸아아악! 우왁?!” 거대한 불길이 쏘아져나가자 중장기병들이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바이저의 틈새나 팔과 다리부분의 틈으로 불기운이 쏟아져 들어갔으니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헝크! 달려!” “으하하하!” 핼버드를 뒤로 당긴 헝크가 앞으로 달려나가 비실거리는 녀석들을 어깨로 받아버렸다. 나도 검으로 베기보다는 발로 차거나 밀어서 놈들을 넘어뜨리기 시작했고 뒤이어 달려온 용병대도 작업을 거들었다. 이윽고 기마대가 우리를 보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좋았어! 200여기나 되는 전투마들이 우리가 만들어놓은 길로 쏟아져 들어가 주변의 적군들을 짓밟아댔다. 그중에는 간간히 훈트의 모습도 보였는데. 녀석들은 그 커다란 덩치로 병사들을 뭉게고 들어가 입에서 불을 뿜어내거나 아니면 온몸에서 칼날과 촉수를 뽑아서 근방의 적병을 단숨에 사살했다. 우와! 엄청나잖아? 젠장! 저런 놈이 적이 아닌게 천만 다행이다. “이제부터는 백병전이다! 적당히 몸사려가며 싸워!” “우헤헤~! 이걸 기다렸소!” 백부장 테이머의 고함소리에 헝크는 낄낄 웃으며 가까이에 있는 적군을 걷어차서 핼버드로 머릴 내려쳤다. 난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 가까이에 있는 적병들에게 난사했다. 그러고 있으니 화살이 날아와 등에 박혔다. 으억?! “이~! 빌어먹으으을! 어떤놈이야?! 내 등에 화살을 쏜게!!” 투투투투투투퉁~! 몸을 뒤로 돌리고 활을 든 놈들에게 자동석궁을 난사한 나는 등에 박혀있는 화살을 뽑아서 던져버렸다. 갑옷을 입고있어서 망정이지 안그랬다간 스피릿 얼굴도 못보고 뒈졌을거다! 다시 검을 뽑아든 나는 덤벼드는 녀석들을 베어넘기기 시작했다. 한달동안의 훈련으로 내 실력은 이전보다 월등히 좋아져서, 이젠 웬만한 기사하고 검으로 붙어도 밀리지 않는다. “그 정도로 난 죽지 않아! 날 죽이려면 공성병기를 들고오라고! 매직 미사이일!” 허리 뒤에 매고 있는 작은 스크롤 가방에서 스크롤 한 장을 뽑아든 나는 그것을 북 찢으며 외쳤다. 수백발의 초록빛 궤적이 내 눈앞에 서있는 수천의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부끄럽게도 그 당시 나는 공포에 미쳐 이성을 상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콜트! 위험해!” 누군가가 내 이름을 외쳤다. 고개를 든 나는 눈앞으로 떨어지는 롱소드를 보고 손을 들었다. 카락?! “뮤카! 이카네스!?” “뭐라고 하는 거야!?” ==================================================================== 이 글에 나오는 외국어는 되는대로 그냥 적어내는 것입니다. 별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니 해석하지 마세요. ^^; Reload Running Fire: 86 강철 건틀릿이기 때문에 손바닥만 조금 아프고 말았다. 칼날을 단단히 움켜쥔 나는 다리를 들어 적병을 걷어차버리고는 검을 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상대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빼앗은 검을 집어던진 나는 덜덜 떨리는 검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살려주면 다시 싸울거잖아!? 그렇지? 그러니 지금 죽여서…!!” 쿠와쾅쾅~! “우왁?!”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며 내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순간 천국에 온 것 같았다. 하늘이 저렇게 파랗던가? 짜릿한 고통과 함께 내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제길~! 고개를 들어보니 근처에 베레타의 마법기사들이 칼라미티를 들고 마법사들과 박빙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개 자식들! 아군 있는 거 안보여!!!” 욕설을 해주며 몸을 일으킨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려보았다. 심하게 다친곳은 별로 없지만 동료들과 떨어진 것 같다. “이야아아!” 앞에서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사내가 보였다. 그걸보고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어낸 나는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 쏴버렸다. 투투퉁~! “아아악!” “누소오온! 이이이! 카케 뉘리마아아! 쉬이케!” “아, 당신 친구였나? 미안해, 날 죽이려고 해서 말야.” 쓰러진 동료를 보고 분노한 기사가 검을 들고 덤볐다. 검을 뽑아든 나는 기사가 휘두르는 검을 받아내고 주먹으로 턱을 깨버렸다. “크억!” 내가 손에 끼고 있는게 뭐냐? 강철 건틀릿 아니겠냐? 쓰러진 기사의 가슴에 석궁을 박아주고 있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내 앞에 섰다. 엄청 크다! 사람이냐? 내 앞에 선 풀플레이트 메일의 기사는 키가 대략 3미터 정도에 도저히 인간답지 않은 어깨와 팔을 가지고 있다. 녀석은 투구사이로 보이는 시뻘건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거대한 그레이트 엑스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쿠와왕! “쿠왁?!” 가까스로 피했다! 땅이 울린다! 게다가 빨라! 덩치가 커서 움직임이 굼뜰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갭이 없어! 도끼자루를 들고 날 가만히 쳐다보던 녀석은 다시 허리를 펴더니 머리카락과 살점이 잔뜩 묻어있는 흉측한 도끼를 땅바닥에서 뽑아 투구 위로 들어올렸다. 으윽~! “염병~! 내 피를 그렇게 더러운 데다 묻힐 것 같아?!” 퉁퉁퉁퉁퉁퉁퉁~! 자동석궁을 뽑아서 쏴댔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화살이 하나도 갑옷에 박히지 않고 다 튕겨나간다. 세상은 넓고 나보다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우리 사부가 항상 그랬다. 직감적으로 나보다 강한 상대라로 인식한 나는 냅다 뒤로 돌아서 달아났다. “이런데서 뒈질 수야 없지!” 쿵쿵쿵~! 그런데 이놈이 날 쫓아오기 시작하는 거다! 우라질! 머리 위에서 도끼가 떨어진다.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한 나는 땅바닥에 드러누운 자세로 급한데로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뽑아 찢었다. “죽어라!” 화르륵!! 콰쾅~! 녀석의 투구에 파이어 볼이 직격했다. 불티와 연기가 날리며 놈이 뒤로 두어발자국 물러섰다. 그렇지! 제깟놈이 사람인 이상 파이어 볼을 정통으로 맞고도 버틸 수 있겠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놈이 다시 움직였다. 말도안돼! 머리를 직격했는데! 연기를 헤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온 녀석은 투구 안에서 벌겋게 타오르는 눈으로 정확하게 날 노려보았다. 그런데 두개였던 놈의 눈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그걸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뭐, 뭐야 저건?! 외눈박이 괴물로 변해버린 놈이 다시 도끼를 들어올렸다. “젠장! 사람이 아냐!” 핸드 스피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달려가려는데 앞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아이언 골렘이 출현했다! 훈트!” 고개를 들어보니 그랜퍼스의 기마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제기랄! 반갑긴한데 저기에 치였다간 죽겠다. 쿠웅~! 떨어지는 도끼를 피하고 제자리에서 점프를 한 나는 놈의 어깨를 밟고 전장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진작에 이렇게 도망칠 걸! 아래쪽에서 놈이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았다. 녀석은 위험하게도 도끼를 집어던질 자세를 취했고 난 욕설을 하며 운동방향을 바꾸려 했다. 그때 놈의 앞에서 황소만한 덩치를 가진 시커먼 놈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더니 놈의 얼굴에 불을 뿜어내고는 촉수를 뽑아서 녀석을 붙잡아 넘어뜨렸다. 하지만 녀석은 그 촉수를 붙잡아 끊어버리며 어이없게도 핸드 스프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훈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촉수를 회수한 훈트는 자세를 낮추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더니 도끼를 주워드는 놈에게 저돌적으로 덤벼들었고 나는 두 마리의 괴물이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을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저런 덩치들로 어떻게 저런 움직이 가능한거냐?! 허공에 뜬 그 &#51686;은 시간 동안 녀석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적병 중에 동작이 빠른 사내들이 나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최소한 땅바닥에 발이 닿을 정도까지 봐주면 안되냐?!” 이를 드러낸 나는 자동석궁을 뽑아들고 놈들을 겨냥했다. 공식교전에 임한 베레타군과 캐슬린군은 박빙의 전투를 벌이며 밀고당기기를 반복했다. 1만이 넘는 인간들이 오로지 눈앞의 적을 섬멸하기위해 병장기를 부딧히는 모습은 가히 압도적인 연출을 자아냈다. 사람들은 싸우기위해 일부러 전쟁을 일으킨다고들 생각하지만, 난 이런 거 보다는 스피릿하나만 괴롭히고 사는 쪽이 더 맘에 든다. “으랴야아아아아!” 눈앞의 사내가 검을 휘두른 검을 손바닥으로 잡아낸 나는 뒤로 당기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 뻣었다. 그때였다. 뿌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투의 종결을 알리는 뿔나팔소리가 허공의 전장을 가득 매웠다. 그러자 미친 듯이 불타오르던 사내들이 점차 동작을 멈추기 시작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무튀튀한 검날을 목에 들이대고 있던 기사가 침을 꼴딱 삼키며 날 쳐다보았다. 전투전에는 꽤 곱상할듯한 얼굴이 지금은 땟국물과 핏물이 섞여 볼썽 사나운 얼굴이다. 검을 내찌르고 있던 자세로 요걸 죽일까 살릴까 고민하던 나는 착한 일 한번 하기로 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선 다음 검을 내렸다. 기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을 방만하게 늘어뜨린 모습으로 사내를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때 기사가 날 불렀다. “마, 마카크 카레네!” “난 캐슬린 말 할줄 몰라. 이 씹새야.” 검을 흔들며 그렇게 말해준 나는 어느정도 떨어졌을 때야 몸을 돌렸다. 기사는 무슨 이유때문인지 연신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나를 불러댔지만 난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보니 난 꽤나 적진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주변에는 아군보다 적군이 더 많아 보인다. 사내들은 지친 얼굴로 바닥에 앉아있거나 했지만 다시 싸우려는 기색은 없었다. 장교들은 모르겠지만 직접 싸우는 병사들의 경우엔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을 테니까. 그리고 이걸로 끝나는 것도 아닌데 죽으려고 용쓸 필요는 없지. “어어어이~! 여기 그랜퍼스 말 할줄 아는 사람?!” 고함을 빽 질러주자 등 뒤에서 뭔가가 날 불렀다. “할 줄 안다.” 반가워서 뒤를 돌아보니 전투 키메라 훈트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익…! 아군인데도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아까 싸우는 모습을 봐서 그런가? 날 부른 훈트 녀석은 몸 곳곳에 검과 화살을 꼿고 있는등, 보기에 험악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곧 쓰러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키메라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복귀할 참인가? 부탁이니 나를 마법사에게 데려가라.” “어? 응? 왜?” “캐슬린 마법사와의 전투 중에 블라인드에 걸렸다. 눈이 보이질 않는다. 상관은 없지만 방해물이 많아서 걷기 불편하군. 아군 부상병을 밟아도 상관없는가?” 저 덩치를 봤을때 몇천파운드는 우습게 나올거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녀석을 데리고 마법사를 찾았다. 사방에서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선 나는 두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와 흙먼지가 강철 건틀릿에 잔뜩 묻어 더러워져 있다. 난 피식 웃어버리며 검을 어깨에 맷다. “살아남았어. 기분 좋은데?” “축하한다.” 등 뒤에서 높낮이가 없는 훈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녀석 덕분에 유쾌하게 웃어버린 나는 훈트를 마법사들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부상병들을 추스르는 일을 거들었다. 장교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는데 우리전투는 초반에는 거의 막상막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리 용병대가 보병을 뚫고 들어가는 작전이 성공하자 그때부터 캐슬린 군의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더니 얼마지나지 않아 각개전투가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이미 전투의 승패는 결정된거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어째서야?” 나와 함께 들 것으로 부상병들을 나르던 병사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까보셨다시피 저희는 양쪽으로 중장기병을 배치하여 그들을 애워싸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용병단이 보병을 뚫고 들어가 후방에서 다시 중장보병 사이에 길을 만들어 중장기병을 불러들였지요. 처음엔 바늘 구멍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길이 만들어지고 난 뒤부터는 중장기병과 훈트들이 난입하여 방어형태를 뛰고 있던 캐슬린군을 양단하고 지휘계통이 끊어진 부대는 우리군에 격파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마대와 훈트의 파괴력이 어느정도인지는 아실겁니다. 그들의 압도적인 파괴력에 말미암아 캐슬린군의 전열은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각개전이 전개된 것입니다. 제가 볼때 이 전투는 저희의 승리입니다. 캐슬린 군의 부대는 너무 일찍 무너졌어요. 게다가 어째서인지 마법사들과 결전병기의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아마 이대로 계속 싸웠다면 우리 군의 압승이었을 겁니다.” “…무슨 소리인지 난 잘모르겠는데.” 부상병을 의무대원들에게 맡긴 병사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싱긋 웃었다. “몰라도 상관 없습니다.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전투가 끝나고 각자의 부상병들을 수용하고 하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버렸다. 캐슬린 쪽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번 전투의 패배를 시인하는 성명을 전장에서 바로 발표해버리더니 잽싸게 부상병들만 추슬러서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적군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용병단은 사상자가 몇몇있긴 했지만 많이 다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는 얼굴도 그럭저럭 다들 살아남았다. 켄의 경우는 죽은 캐슬린 기사를 깔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찾아서 데려왔고 헝크는 기절해서 쓰러진 것을 시체인줄 알고 처분했다가 정신이 들어서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사람을 멋대로 죽이지 마쇼!” “아깝군. 떠벌이 하나 없앨수 있었는데.” 분노한 헝크가 켄의 멱살을 붙잡고 주먹다짐을 하는 것을 무시한 나는 케이서를 찾았다. “이 양반은?” “글쎄 안보이는데?” “뭐, 살아있다면 좀 있다가 어디서 보겠지. 다들 이리와요. 다친 사람들 좀 옮깁시다.” 부상자들은 마차를 이용해서 본대로 옮겼지만 시체는 그냥 내버려둬야했다. 이유를 들어보자. “죽은 시체까지 가지고 갈 정도로 한가한 전투가 아니다. 나중에 따로 지원부대가 와서 회수할거다. 그러니 형제나 친구가 있다면 찾을 수 있도록 표식을 남기도록.” 장교는 그렇게 말하며 인식표를 꺼내더니 이빨사이에 꼿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게 가장 확실하고 편리하다. 그럼, 준비가 끝나는데로 다들 본대로 복귀하도록, 수고 많았다.” ==================================================================== 사실입니다. 이빨 사이에 끼우지요. Reload Running Fire: 87 “글쎄 안보이는데?” 오호~ 왜 두개씩 주나 했더니 그런 용도였군? 고개를 끄덕인 우리들은 적당히 부상병을 추스린 다음 마차를 타고 본대로 복귀했다. 본대도 쏟아져 들어오는 부상자들 때문에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우리 노예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어떤 놈이 우리 스피릿 데려간거야!” 알고보니 노예들은 다들 의무대로 불려가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것을 돕고 있다고 한다. 항의하고 싶었지만 부상병들이 하도 많아서 관뒀다. 부대를 재정리하고 부상자를 옮긴다고 정신없이 시간은 보내자 금방 저녁이 되었다. 막사로 돌아가니 인원 점검을 한다고 난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장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몇사람이 비어. 아무래도 실종자 같은데.” “뭐요? 혹시 본 사람이 있을지 모르까 이름 불러봐요. 아직 다들 돌아오지 않았잖수.” 내 말에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 부대에서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잭 플레이어. 스팅 우드맥. 케이서 케니지. 혹시 이 친구들 본 사람 없나?” “잭은 아까 의무대에서 봤습니다. 자기 노예랑 잘 돌아다니던 데요?” “스팅과 케이서는?” 잠잠하다. 어라? 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본 사람 없어?” 그때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좀 딱딱한 얼굴이다. “케이서는 내가 봤어.” “어디서?” “전장에서, 이거 받아.” 사내가 집어 던진 것은 반짝이는 인식표였다. 조그만 금속 쪼가리에 케이서의 이름이 적혀있다. 헝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갑자기 편두통이 엄습한다. “제기랄… 프리카가 들으면 울겠는데.” 케이서의 다른 친구들이 그의 시체를 찾으러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장교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왜?!” “저녁이다. 밤에 부대 밖으로 나갔다가는 적군으로 오인되어 사살될 수도 있다. 안된다. 내일 캐슬린으로 진격 때 그 근처를 지날테니 잠시 시간내어 살펴보도록.” 그때 군번줄을 던진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만둬, 내가 봤어. 내가 확인했어. 내가 녀석의 이빨에 그걸 꼿았다고. 죽었어. 그만둬.” “빌어먹을! 케이서 형님이 죽을 리가 없어! 잘못본거 아냐?!” 헝크가 화를 내며 그 남자의 멱살을 붙잡았다. 하지만 사내는 되려 화를 내며 그를 밀어냈다. “적당히해! 이런다고 죽은 놈이 돌아오는 줄 알아?! 의심나면 말리지 않을테니 가봐! 시체를 쌓아둔 곳에 있을거야!” 바닥에 주저앉은 헝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녀석의 인식표를 갈무리한 나는 프리카가 찾아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악~! 학! 콜트씨! 우리 주인님 못 보셨어요? 으응, 않보이세요~!” …네 주인님은 죽었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자기 주인을 찾는 프리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은 나오질 않고 그냥 혼절하고만 싶다. 부상병들을 치료하다가 우리들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고 짬을 내어 달려온 노예아가씨들 중에서 프리카가 케이서를 찾다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입을 뻐끔거리다가 어색하게 주머니에서 그의 인식표를 꺼냈다. 그때 켄이 나를 밀어내고 그녀의 앞에 섰다. 켄은 입에서 담배파이프를 빼어내고는 자리에 앉아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주인님은 죽었다.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 네 주인의 주검을 봤다는 녀석이 있어. 발칸!” 헝크 만큼이나 덩치큰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헤헤거리는 프리카를 바라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카, 케이서는 죽었어. 내가 확인했다.” 켄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인식표를 그에게 건내었고 켄은 그것을 프리카의 손에 쥐어주었다. “케이서의 인식표다. 가지고 있어라.”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던 프리카가 결국 어색하게 울먹이며 물었다. “어? 어어? 거, 거짓말이죠? 거짓말이죠오?” “사실이다. 케이서는 죽었어.” 헤헤 웃으며 울먹이던 프리카는 끝내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버렸다. 무지막지한 용병들도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예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주인을 잃지 않은 노예들은 자기 주인의 팔을 꼭껴안고 울면서 뛰쳐나가는 프리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비어있는 야전침대에 걸터앉았다. 켄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씁쓸하군.” 담배연기와 함께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다. 그렇다. 씁쓸하다. 스피릿이라도 있으면 달래라고 보내고 싶은데 그녀는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함께 오지못했다고 한다. 칫, 못된녀석, 주인님이 이렇게 자길보고 싶어하는 줄도 모르고 다른 놈들이나 돌보고 있다니. 그냥 내가 찾아갈까? 별다른 명령이 없을 때까지 어디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난 스피릿을 보고 싶어서 의무대를 찾아 가기로했다. “딴짓하지 말고 빨리 와.” “…걱정마쇼.” 켄에게 툭 쏘아준 나는 스피릿을 찾으러 갔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의무대는 북새통이었다. 다친사람이 그렇게 많았나? “으아아악!” “거기잡아! 붕대!” 의사로 보이는 사내가 다리가 잘려나간 병사를 붙잡고 고함을 지르자 노예로 보이는 아가씨들이 붕대를 가져가 환자의 다리에 담았다. 새삼 다리가 붙어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날 알아보고 물었다. “저, 콜트님 아니세요?” “맞는데, 아가씨는 누구요?” 고개를 돌리니 빨간 단발머리를 가진 아가씨가 방긋 웃었다. 용병단에 있는 프릭스라는 사람의 노예라고 자신을 소개한 빨간머리 아가씨는 나에게 스피릿을 찾으러 온게 맞냐고 물었다. “어디있는지 알아요?” “물론이죠. 안내할게요.”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워있는 부상병들의 사이를 한참 걸어들어가는데 이 아가씨가 은근히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참 자상한 주인님이세요. 노예를 만나러 직접 찾아오시구.” “다른 녀석들은 다 찾아오는데 이 녀석은 주인님은 우습겨 여기고 안와서 말이지. 괴롭혀주려고 가는거요.” “저도 주인님이 괴롭혀주러 찾아오셨으면 좋겠어요.” 그거 별로 좋은거 아니라고 말해준 나는 그녀의 안내로 스피릿을 만날 수 있었다. 스피릿은 다친 사내들을 치료해주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가 밖에서 손을 흔드는 날 보더니 얼굴을 환하게 만들며 달려와서는 안겼다. “와아~! 주인님! 저 보러 오신 거예요? 기뻐라~!” “…피 묻는다. 떨어져라.” 피가 잔뜩 묻은 앞치마를 하고 있었던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으응~! 너무하세요!” “시끄러. 내가 널보러 와야겠냐? 뭐한다고 그렇게 바빠?” 스피릿은 뒤를 가르켰다. 그곳에는 프리스트로 보이는 사내들이 잠시 앉아서 쉬고 있다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저분들을 돕느라 어쩔수 없었어요. 지금은 부상자가 줄어서 잠시 쉬고 있지만 아까는 얼마나 많이 왔었다구요. 팔이 없는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 배가 찢어져서 내장이 흐르는 사람….” “기분 나빠지니까 그만 쫑알거려. 그런데 잘도 버텼구나? 토악질 안나오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처음엔 그랬지만 좀 있으니까 익숙해졌어요. 그리고 환자들 앞에서 그런거 하면 얼마나 미안한 줄 아세요?” “어이구~ 그래그래~ 우리 착한 스피릿 착하다~.”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자 스피릿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마, 주인님~! 프리스트도 계신데 이러시면 안돼요!” “손잡고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려다 많이 봐준거야. 어디 안다치고 살아서 돌아온 게 쉬운 일인줄 알아? 마스터가 죽고 다친 노예들도 여럿있다구.” 프리카를 생각하며 그렇게 중얼거려주자 스피릿은 그제서야 내 몸을 살폈다. 그러더니 팔에 난 상처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마?! 이게 뭐예요? 주인님~! 다쳤으면 치료 받으셨어야죠! 이리로 오세요. 얼른!”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으니 의사가 일어나며 물었다. “샤라카나 하케뉘?” “마에, 하테 이스테.” 스피릿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의사는 바늘과 실만 가져다 내밀었다. 베레타 사람인가? 그러고 있는데 스피릿이 내 옷을 벗기고는 어깨의 상처를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살짝 베이고 말았어요. 소독하고 봉합만 하면 되겠어요. 좀 아플테니까 꾹 참으세요?” “너 한테 꼬집히는 것만 하겠냐? 잔말 말고 꼬매기나해.” 스피릿은 싱긋 웃으며 집개와 바늘을 이용해서 내 상처를 기우기 시작했다. 바느질 솜씨 하나는 기가막히기 때문에 그녀는 금새 내 어깨에 난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아줬다. “다됐어요. 심하게 움직여도 터지진 않을 거예요.” “원래는 상처가 나을 때까지 안정을 취하세요~ 라고 말해주는거 아냐?” 스피릿은 샐쭉 웃어버렸고 난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어디 더 다친곳은 없냐고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언제 끝나?” “급한 사람들은 전부 치료했지만 내일 부상자들을 본국을 이송하기 전까지는 돌봐야줘야 해요. 그래서 언제 끝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럼 뭐, 하는 수 없지. 환자들에게서 백의의 천사님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나 살아있다고 알려줬으니 됐어. 그럼 내일보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좀 만져주고 몸을 돌렸다. 의무대를 나와서 천막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누군가가 날 불렀다. “주인님~!” “어라?”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가지 말고 끝장을 보아 주십시오. Reload Running Fire: 88 “젠장… 우라지게 잘 어울리는 한쌍이네.” 스피릿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뭐야? 부상병들 돌봐야 한다며?” “잠시 눈 좀 붙이고 오겠다고 말했어요. 하악! 학~!”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더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겐 그 사람들보다 당신이 더 중요하다구요.” 콧끝이 찡해져서 난 그녀를 와락 안아버렸다. 잠시 이야기도 나눌겸 근처 천막에 기대어 주저앉아버린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케이서가 죽었어, 프리카 울더라.” 취사병에게 동전 몇 개 쥐어주고 얻어온 뜨거운 설탕차를 후루룩 불어마시던 스피릿이 깜짝놀라서는 날 쳐다보았다. “사실이에요?” “응, 아직 확인은 안했지만 시체를 봤다는 사람이 있어. 어때? 주인님의 소중함이 마구 느껴지지 않아?”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은 한숨을 폭 내쉬며 날 바라보았다. “살아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주인님. 다음에도 죽지말고 스피릿의 품으로 돌아오세요.” “안죽어. 요렇게 예쁘고 귀여운 걸 두고 어떻게 죽어?” “주인님….” 스피릿은 내 팔을 꼭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진 나는 주위를 좀 두리번거리고 천막을 들춰보았다. 안에는 병기고 같은데 아무도 없었다. “스피릿, 이리 들어와.” “어마~! 주인님. 그러시면 안돼요. 들키면 큰일난다구요.” “까짓 욕 좀 얻어 먹는게 대수냐? 이젠 정말 언제 죽을지 모른단 말이야. 너라도 실컷 안아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잔말 말고 따라와.” 어두운 천막 안으로 기어들어간 나는 스피릿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어두침침한 곳에 그녀를 던져놓고 정신없이 옷을 벗겨대자 스피릿은 내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칭얼거렸다. “아앙~! 주인님, 그, 그러시니까 너무 무서워요. 아윽… 처, 천천히 벗기세요 아파요. 아…! 안돼요. 주인님 소, 속옷은 찢으시면 안돼요. 제, 제가 벗을게요.” “가, 가만있어! 나, 난 말야. 난 네 주인이야. 널 사랑하는 하나뿐인 주인님이라고, 그리고!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몰라서 겁에 떠는 멍청한 녀석이기도 해. 제기…. 이렇게 예쁜 걸 두고 어떻게 죽냐? 이, 빌어먹을….”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를 납치해다 못된 짓이라도 벌이는 무뢰배마냥 정신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던 나는 불쌍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뿌드득 갈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스피릿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보듬어왔다. “다행이에요. 역시 당신은 제 주인님이 맞으세요. 걱정마세요 주인님, 다 잘될거예요. 주인님은 안죽어요. 제가 지켜줄테니까.” “스피릿….” 스피릿은 따뜻하고 기분좋은 그 가슴에 날 꼭 끌어안고 등을 톡닥이며 두드려주었다. 반쯤 벗겨진 노예의 품에 안긴 나는 10살 이후 처음으로 무서워서 울어버렸다. 까짓, 나 같은 건 죽어도 아무 상관없다. 세상도 잘돌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 후에 남겨질 녀석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만약 내가 죽으면, 스피릿이랑 안젤라는 누가 돌봐주지? 다른 놈들이 데려가서 마구 괴롭히는 거 아냐? 이런 불안 때문에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결국 사람이 계속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이런 인연의 끈 때문인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 몸을 사리게 된다더니 이걸두고 한 말인가봐.”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천막에서 나온 나는 스피릿과 함께 막사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직은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었다. 간혹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나 잠이 오지 않아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만이 눈에 뛸 뿐이다. 봄이라도 저녁이 되니 꽤 춥구만. 옆에서 내 팔을 껴안고 따라걷던 그녀는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쟁 끝나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요. 우리.” “그래, 문제는 이놈의 전쟁이 아직 초반부라는 거야. 젠장.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눈치 않보고 따뜻한 침대에서… 아윽~! 왜 꼬집어어~!” “사람들 있는데서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부끄러운 줄 아세요?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면 주인님 엉덩이에 점이 몇개 있는지 친구들 한테 다 말해버릴 거예요?” 친구들? 아아, 노예 아가씨들 말하는 거구나. 난 그녀의 귀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스피릿의 귀는 이렇게 생겼구나. 귀여워라. 깨물어줘볼까? “요 에로노예야. 나랑 잘 때 그런 것만 봤냐?” “으응~ 주인님 엉덩이는 너무 귀여워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게 얼마나 가슴 설래게 하는 줄 아세요?” “뭐야. 여자들 한테도 그런게 있어?” “물론이죠. 저희는 뭐 아무것도 안 느끼는 줄 아세요? 남자들 예쁜 엉덩이 보면 다들 넘어간다구요. 아, 그렇지. 혹시 다음에 남자들끼리 목욕하러 가실 일이 있거든 브리드씨의 엉덩이 한번 살펴보세요.” “왜?” “그분은 엉덩이에 노예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두셨대요. 엘렉트라예요. 아셨죠? 꼭 한번 보세요. 사실인지.” “…목욕탕에 가서 남의 궁뎅이를 살펴보란 말야?” 내 말이 우스웠던지 스피릿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런 건 어디서 들었냐고 물으니 스피릿은 노예들끼리 이야기하는데서 들었다고 한다. 거참, 짓굳은 노예 아가씨들이로세. 스피릿을 천막에까지 바래다주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불렀다. “주인님!” “응? 왜?”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스피릿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런데 손과 옷에 피가 잔뜩 묻어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녀의 손에 이끌려 달려간 곳은 여자 노예들이 사용하는 천막이다. 노예들은 20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조그만 천막 안에서 다들 함께 지낸다. 여자들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안은 깨끗했다. 하지만 제대로 살펴볼 시간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이 램프를 들고와서는 안을 비췄기 때문이다. 추워서 한개의 침대에 두 사람씩 누워 따스하게 잠들어있는 평화로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바닥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스피릿을 쳐다보니 그녀는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가, 갑자기 미끄러져서 손을 들어보니까….” 다시 편두통이 도지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내가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프리카라고 하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파리한 얼굴로 누워있는 프리카를 쳐다보다가 그녀가 덥고 있는 모포를 걷어냈다. 그녀의 하얀 내의는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끔찍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황급히 그녀의 목을 만져보았다. 하지만 이내 손을 떼고 말았다. 피부가 차갑다. 맥박은 꺼져버린지 오래다. 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 앉아버렸다. “아아아악! 프리카아아!” 주인을 따라죽다니. 농담내지는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프리카를 쳐다보았다.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바르게 누운 그녀는 아주 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죽음 직전에 주인님의 환상이라도 본 것 일까? 스피릿의 비명소리에 깨어난 여자 노예들은 프리카의 죽음을 보고 말을 잊지 못했다. 그것은 노예들의 울음소리에 놀라서 달려온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이 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군장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노예의 주검을 살펴보더니 하나같이 인상을 찌뿌리며 나가버렸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그랜퍼스 용병단의 백부장 테이머 대위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케이서의 이야기는 들었어. 불쌍하군. 누군가 매장해주게.” 그때 문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달려나가보니 장교 하나가 헝크에게 멱살을 붙잡혀있었다. “뭐라고 했어! 새꺄! 다시 말해봐! 뭐라고? 아까워? 뭐가 아까운데! 아무리 노예 라지만 너무 한거 아냐?! 말을 꼭 그따위로 해야겠어?! 아앙!” 주먹다짐을 하려는 장교들과 용병들을 한심한 듯이 쳐다보던 백부장 테이머는 무섭게 호통을 치며 그들을 나무랐다. “당장 그만 두지 못해!!” 헝크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테이머 대위의 연이은 호통에 장교를 놓아주었다. “콜록! 콜록! 으익! 이, 이 자식들! 너희들이 그런 소리 할 자격이 있어?! 노예를 가축 취급하는…!” “델피노 소위! 말 조심하라!” 백부장의 호통에 장교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죽어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얼굴이다. “내 참, 장교나 용병이나 똑 같은 것들끼리 잘하는 짓이네. 비켜요! 사람 좀 지나 갑시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프리카의 주검을 담요로 감싸면서 그들의 작태를 구경하던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밖으로 걸어나가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비키게 했다. 등뒤에서는 프리카의 주검을 안아든 켄이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난 백부장을 보며 말했다. “대장, 매장하고 오겠습니다.” “어디로?” “주인따라 죽은 바보녀석인데 주인이랑 같이 묻어줘야겠지. 발칸, 안내해.” 켄의 말에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던 덩치큰 사내가 걸어나왔다. 테이머 대위는 정오에 이동할 계획이니 빨리 다녀오라고 덧붙이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주인님….” “걱정말고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웃으며 말하자 스피릿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게 무장을 챙기고 발칸의 안내에 따라 어제의 격전지를 다시 찾았다. 시체와 병장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군데군데 폭심지가 만들어진 무지막지했던 전투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지워질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결국 그의 주검을 만나고 말았다. “빌어먹을… 어이, 케이서. 왜 여기 자빠져 있는거요? 조금만 더 악착같이 살 것이지 말야. 젠장….” “다행이군.” 고개를 돌린 나는 켄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용한 얼굴로 잠들어있는 케이서의 주검 옆에 프리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만약 녀석이 살아돌아와서 아끼던 자기 노예를 찾으면 뭐라고 대답해 줄거냐? 그런 말은 어제 한번 할 걸로 족해.” 난 씁쓸하다는 표정을 그에게 지어주었다. 커다란 무덤을 파서 두 사람을 함께 눕혀준 나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게 해주었다. 밖에서 삽을 들고 내가 하는 짓을 쳐다보던 켄이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너도 참….” “나는 로맨티스트라오. 켄 영감님.” 밖에서 흙이 날아왔다. 난 비명을 지르며 두 사람의 공간에서 달아났다. 무덤 밖에 선 나는 반쯤 흙에 덮여있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어버렸다. “젠장… 우라지게 잘 어울리는 한쌍이네.” “동감이다.” 옆에서 켄이 말했다.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몸을 돌린 우리들은 다시 부대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스피릿이 나 죽으면 따라 죽겠다는 소릴 자주 하던데 정말 그렇게 하면 어떡하지? 평소엔 농담으로 받아넘겼는데 정말로 그렇게 하는 노예를 보고나니 내심 걱정이 된다. ==================================================================== 디카를 샀습니다. 신기하군요. Reload Running Fire: 89 “뭘 보고 있어! 이쪽에도 온다!” 부대로 돌아간 우리들은 정오에 있을 부대이동을 위해 짐을 정리하고 출발직전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 있으니 백부장이 찾아왔다. “매장은 잘해줬나?”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줬다. 마주 고개를 끄덕인 백부장은 이번 전투에서의 성과금이 나왔다고 찾아가라고 했다. “돈이 나왔어요?” “일단 귀군들은 용병이니까. 이제부터 매회 전투가 때마다 소정 금액이 현찰로 지급 될거다. 가지고 다니기 힘든 사람들은 금액만 확인하고 본인 계좌번호를 적어두도록. 그럼 언제라도 은행에서 되찾을 수 있고, 전사하더라도 가족들이 찾아갈 수 있다. 지금 보급부대의 행정실에서 기다리고있을테니 서두르도록.” 다들 각자의 직업에 몸 담고 있던 사람들이라 돈 준다는 소리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다닥 점심을 해결하고 그랜퍼스 군의 보급부대를 찾아가니 어여쁜 여군이 책상에 앉아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우릴 맞이했다. “다음, 콜트 슈발츠씨.” “저요.” “여기 사인하세요.” “얼마 줍니까?” “첫 전투이니까. 대략 500만 루나 정도입니다.” “겨우?” 여군은 빙그레 웃었다. “다음 전투에서 부터는 조금씩 더 드리니까. 힘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금화 하나만 가지고 나머지 금액은 은행에 입금을 부탁했다. 계좌번호를 적어주고 나오니 헝크가 손짓을 했다. 동전을 튕기며 걸어가니 스피릿도 거기 있었다. “어? 왜 그거 뿐이요?” “들고 다녀서 뭘하게? 여차하면 몸만 가지고 튀어야 한단 말야. 요거면 충분해.” 조그만 돈 주머니를 들고 와서 안의 금액을 꺼내보던 헝크는 그래도 돈은 세는 맛이라며 낄낄 거렸다. 겨우 동전 다섯 개 가지고 뭘 세겠다는 거야?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을 보았다. “좀 피곤해 보이는데?” “아, 방금 부상자들을 마차에 실어주는 걸 도왔거든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야. 우리 스피릿 오늘 착한 일했네? 주인님이 용돈이라도 줘야겠다. 자, 이거 받아.” “어마? 주인님.” 그녀의 손에 반짝이는 금화를 올려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가지고 다니다가 맛있는거 사먹어.” “전쟁통이라 마을도 없는데 뭘 사먹어요. 주인님 바보.” 하지만 스피릿은 그래도 고맙다고 날 안아줬다. 옆에서 지켜보던 헝크가 자기도 한번 안아달라고 그랬다가 나에게 얻어맞고는 연신 툴툴 거렸다. “그럼 손이라도 한번 잡아 봅시다.” “자꾸 헛소리 할래?” “칫~! 저 쪽에서는 자기 노예 파는 사람들도 있단 말요.” 고개를 돌려보니 확실히 그런 부류들이 모여 있긴하다. 바로 어제까지 만에도 애지중지 하더니, 칫~! 돈 앞에서는 정 같은 것도 없는 거냐? 바로 오늘 아침에 자기 주인을 따라 죽은 프리카는 대체 뭐가 되는 건데? 아무것도 느껴지는게 없냐고! 이 빌어먹을! 흠흠~! 좀 흥분했나보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되는데 말야. “나도 똑 같은 놈이니까. 욕하면 벌 받겠지.” “잘 아시는 구랴.” “하지만 그래도 안돼. 스피릿은 내거야. 아무도 안줘.” 난 옆에 서있는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그때 스피릿이 고개를 들고 날 올려다보았다. “그 정도는 괜찮은데요.” “…한번 더 그런 소리하면 코를 깨물어버린다.” “손은 괜찮은데에….” “칵!” “괜찮다잖아요. 형님은 너무 쫀쫀하쇼.” “칵!” “좋시다. 손 한번 만져보는데 100만 드리지. 어떻수? 별로 이상한 짓도 않하고 그냥 손만 좀 만져볼께요.” “…커으윽.” 선택의 여지가 보인다. …괘,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미쳤지!!! “아아아~ 행복해~.” “얼굴 부비지마! 이 변태 놈아!” “어허~ 100만 짜리인데 너무 그러지 마쇼.” 크윽~! 하지만 헝크 놈 뿐이야. 다른 녀석에겐 절대로 허락 못해! …이런 식으로 자기 설득을 했지만 그래도 영 찜찜하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스피릿이 헤헤 웃으며 등에 달라붙었다. “주인님 보세요. 돈 벌었어요. 100만이요. 100만~!” “…시끄러. 에이 젠장, 한순간 혹했지만 이거 영 기분 더러워서 못참겠다. 다시는 이런거 안해. 스피릿 이리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고 있는데 헝크 놈이 낄낄 거리며 옆에서 다가왔다. “아아~ 100만이 아깝지 않수다. 너무너무 보드라웠어~ 이 기분 난 죽어도 못잊을 거야~! 흐으음~ 손수건 향기 주우욱이이느으는데에에에~!” “닥쳐! 맞을래!” 막사로 돌아가며 악을 써댔지만 녀석은 100만에 손 한번 만지게 한 것이 미안해서 스피릿이 선물로 준 손수건을 코에대고 숨을 쉬며 낄낄 웃어댔다. 성질 같아서는 그대로 받아버리고 싶었지만 스피릿이 신경쓰지 말라고 달래줘서 겨우 참아냈다.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자 부대는 서서히 이동을 시작했다. 부상병들을 모조리 본국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에 병력이동에 사용할 마차가 부족하여 우리들은 목적지까지 걸어서 가야했다. “어디로 가는데요?” 말을 타고 걸어가던 테이머 백부장이 말했다. “하루정도 걸어가면 캐슬린 국경선이 나온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른 곳의 부대와 합류, 공선전을 준비한다.” 헤에, 이번엔 공성전인가? 몸사려가면서 해야겠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스피릿의 손을 잡고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때 저 앞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리들의 옆을 걷고 있던 백부장이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인가!” “적군의 기습입니다! 오른 쪽을 보십시오!” 뭐! 기습!? 용병들과 뒤따라오던 병사들이 당황하여 산만하게 움직였다. 말을 타고 달려온 장교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지평선 넘어에서 뭔가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걸 본 켄이 황급히 외쳤다. “백부장!” 허리 춤에서 비싼 망원경을 꺼내 살피고 있던 테이머 백부장이 잇소리를 내며 망원경을 내리더니 외쳤다. “빌어먹을! 기병과 아이언 골렘이다! 전원 전투태세! 응전한다!” “젠장! 뭐하자는 거야! 예고도 없이!!! 스피릿! 이리와!” 그녀의 손을 잡아 끈 나는 마차뒤로 돌아가 그곳에 엎드려 있게 했다. “고개 들지 말고 숨어있어! 알겠지?!” “예, 예에~!” “부상자들과 노예들은 마차 뒤나 엄폐물에 숨어라! 적이 돌진하면 기수보다는 말을 공격하도록! 그 편이 휴율적이다!” 나는 이를 들어내며 한손에는 검을 뽑아들고 나머지 손에는 파이어볼 스크롤을 몇장 꺼내 쥐었다.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매로 식은 땀을 닦은 나는 적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올때까지 기다렸다. 두두두두두두두~~!! 쿵쿵쿵쿵쿵쿵쿵~! “저, 저 자식들은 뭐야?!” 헝크가 외쳤다. 달리는 적 기마대의 사이에서 이상한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봐도 갑옷을 입은 기사인데 키가 5미터를 넘어보인다. 게다가 놈들은 말도 없이 자기 다리로 전력으로 질주하는 말을 앞지르고 있었다! 쿵쿵쿵쿵쿵쿵~!! 땅이 울리는 소리는 저 놈들이 내는 거였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캐슬린의 결전병기다! 아이언 고렘이야!” “아이언 골렘 G형이다! 절대 방어력을 가진 놈들이야! 마법사! 마법사! 아무거나 좋으니 놈들의 시야를 가려! 훈트들은 마법사의 공격이 끝난 다음 돌격해서 놈들을 넘어뜨린다! 약점은 알고 있겠지? 오른쪽 가슴의 코어를 노려라! 절대로 저것들이 이쪽으로 오게 내버려두면 안돼!” 한 장교의 외침에 여기저기에서 파이어 볼이 발사됐다. 뒤따라 훈트들이 달려나갔다. 쾅~! 슈화아아아악~! 퍼버버버버벙~!  마법사들의 파이어 볼은 모두 지변을 때려서 흙먼지를 만들어냈다. 곧이어 망토를 펄럭이며 달려나온 거대한 아이언 골렘들은 기다리고 있던 훈트들의 촉수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했지만 어떤 놈은 그것을 피해 하늘에서 재주를 넘더니 다시 우리들에서 달려들었다. 뭐, 뭐저런 놈들이 다 있냐?! “형님! 한방 쏴요!” “알아!” “부탁한다! 격추시켜!” 사이즈가 달라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헝크와 용병들이 외쳐댔고 난 그들의 응원을 받아 파이어볼 스크롤을 모두 찢어서 녀석들에게 발사했다. “뒈져라! 파이어볼!” 투콰콰콰쾅~! 20여발이 넘는 불덩이가 연기를 날리며 날아갔다. 맞고 죽어버려랏!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외쳐줬지만 녀석들이 왼팔에 붙어있는 방패를 들어올려 파이어 볼을 막아내더니 먼지를 찢고 달려나왔다. 콰쾅쾅쾅! 퍼펑! “말도안돼! 그 많은 걸 맞고도 멀쩡하다니?!” “절대 방어력이라는 거다. 저 놈들은 모든 종류의 물리적 공격을 막아낸다고 하더군.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데.” 옆에서 켄이 파이프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담배맛이 나요?!” “물론이지. 죽음과 직결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이럴 때 안피우면 언제피워? 온다. 모두 알아서 피해라.” 놈들 중 발이 빠른 녀석 하나가 벌써 아군 쪽으로 난입하여서는 마차를 걷어차버렸다! 말이 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으며 마차는 두동강이 나버렸다. 또한 실려있던 부상자들도 하늘을 날아 땅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펄럭! 휘이이잉~! 놈이 두른 붉은 망토가 펄럭거리며 커다란 갑옷처럼 생긴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놈은 귀찮다는 듯이 팔로 망토를 걷어내며 오른손에 든 거대한 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다부진 투구 위로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엄청난 위압감에 다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빌어먹을!미치도록 멋지잖아! 콰쾅~! 녀석의 칼질 한번에 근방의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마차가 두동강 났다. 입을 딱벌리고 그걸 쳐다보고 있는데 발칸이 내 어깨를 잡아 당겼다. “뭘 보고 있어! 이쪽에도 온다!” ==================================================================== 국방과학 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인간형 병기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내렸답니다. 기억나는대로 적어보겠습니다. 전장 10m 내외의 2족 보행 병기는 만들어 봤자 실전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다. 먼저 덩치가 크다는 단점 때문에 눈에 잘뛰며, 일단 발각되면 로켓포 공격으로도 격파 가능할 것이다. 초밤아머? 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 120활강포로 몇발 때리면 언젠가는 부숴진다.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거대(?) 병기의 경우 병사들에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단 개인화기 같은 것은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며 적군에게 아군 군사기술력이나 병기의 그로데스크성을 위시한 공포감을 조성 시킬 수 있다. 만약 차후 정말로 2족보행 병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타는 것이 아닌 입는 것, 즉. 갑옷의 개념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합니다요. Reload Running Fire: 90 “주인님. 다됐어요. 어서 이리로 오세요.” 쿵쿵쿵~! 등줄기로 소름이 쫙 돗아났다. 고개를 돌리자 폭발로 찢어진 망토를 걸친 녀석이 검을 비껴들고 우리들에게 덤벼들었다. 세상에! 어떻게 5미터짜리 강철괴물이 휘두르는 3미터짜리 칼을 막아?! 순간 아까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후다닥 달려가 마차뒤에 엎드려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여기 있으면 죽어! 이리와! 당신들도 어서 피해! 저 자식 마차부터 걷어 찰거야!” 내 경고는 너무 늦고 말았다. 스피릿의 팔을 끌어당기고 있으니 곧이어서 놈의 다리가 날아와 마차를 걷어차버렸다. 마차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갑자기 등뒤에 있던 마차가 사라지자 스피릿은 얼굴을 하얗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로 붉은 핏물이 뿌려져 에로틱하게 흘러내렸다. “이 빌어먹을! 스피릿 눈 감아!” 그녀를 가슴으로 끌어당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늘에서 두동강난 마차와 박살난 사람의 머리나 다리, 혹은 팔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퍼억…! 으직…?!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까지 살아있던 사내는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져 즉사했다. 땅바닥에 부딧히기 직전에 보았던 남자의 살려달라는 얼굴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다시 고개를 든 나는 다리가 풀려 움직이질 않는 스피릿을 질질 끌고 난동을 부리는 놈들을 피해서 물러섰다. 하지만 뒤를 이어 적기마대가 달려들었기 때문에 난 최후의 선택을 해야 했다. “꺄아악!? 주인님!” “거기 있어! 고개 들지마!” 스피릿은 작은 바위뒤에 던져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달려오는 기마대를 노려보았다. 거인고렘들이 날뛰며 난동을 부리는 통에 지금 부대는 완전히 개판이다. 명령체계도 엉망이 되어버렸고 병사들은 한 곳에 모여 응전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어다니다가 고렘들에게 밟히거나 그 커다란 검에 맞고 허리가 잘려나갔다. 이래서야 싸움이 안되잖아! 미치겠군! “이 씨발! 여기서 죽을 것 같아?! 난 저 녀석 입덧하는거 볼 때 까지는 반드시 살거야!” 팔을 들어 바위 뒤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고있는 그녀를 가르키며 버럭 외쳐준 나는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두건에 새겨진 불새에게 목숨을 맡긴 나는 한손에 검을 뽑아들고 자세를 잡은 다음 달려드는 기마대를 노려보았다. “내 이름은 콜트 슈발츠! 버림받은 공주의 흑기사다! 덤벼! 이 우라질 놈들아!” 이히히히힝~! 기마대의 말들이 포효를 울리며 달려들었다. 앞으로 내지른 랜스가 내 심장을 노리고 있다. 투구를 꾹 눌러쓴 기수의 얼굴이 보인다. 캉~! 검을 휘둘러 놈의 랜스를 쳐낸 나는 그대로 자세를 낮춰 옆을 달리는 말의 다리를 베어버렸다. 우지직! 꽈득!?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말이 땅바닥으로 머리를 쳐박았다. 그위에 앉아있던 기수는 가속도 때문에 앞으로 날아가다가 말과 같은 꼴을 당하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굴려 앞에서 달려드는 말에게 자동석궁을 난사하자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기수를 떨어뜨리고는 옆으로 쓰러져 무섭게 굴러버렸다. 두두두두두두~! 엄청난 양이다! 먼지 구름이 눈앞을 가린다. 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자동석궁의 빈 화살통을 떼어내고 새것을 끼워넣은 나는 장전손잡이를 당긴 다음 다시 놈들에게 난사했다. 한두마리가 넘어지기 시작하면서 바리케이트를 치자 녀석들은 이제 내쪽으로 달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결 수월하게 놈들에게 화살을 쏘아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카케이! 누리카!” 어떤 기수가 나에게 장검을 휘둘렀다. 검을 받아내고 멀어져가는 녀석에게 석궁을 갈겨대고 있으니 어떤 놈이 내 등을 검으로 후려쳤다. 스카악! “끄아아아!”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내지른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내 등을 치고 도망가는 녀석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거기서 이 자식아!!” 퉁퉁퉁퉁퉁퉁퉁~! 두두두두~! 놈이 마지막이었는지 기마대는 더 이상 달려오지 않았다. 그때 스피릿이 바위뒤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엉금엉금 기어서 나에게 다가왔다. 도망가는 놈들에게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대던 나는 끝끝내 화살 한통을 다 쏴버렸다. 머리가 어질어질 거린다. “허억~! 헉! 크아아아악!” “아앙~! 주인님! 주인님!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오! 프리스트! 하에 샤레 이트마아아아! 프리스트!” 스피릿이 날 끌어안고 엉엉 울면서 베레타의 프리스트를 불렀다. 하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신의 은총을 받고있는 프리스트께서는 다들 신의 품으로 돌아갔을 거다. 전쟁은 직업 가리면서 죽이지 않으니까. 그때 귓가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우와아아아아~!” 이번엔 또 뭐야? 보병?! 눈을 몇 번 깜짝여보자 저기 뒤쪽에서 엄청난 숫자의 보병들이 달려오고 있다. “이, 이 비, 빌어먹으으을!” “아, 안돼요! 움직이지 마세요! 주인님! 상처가, 상처가 너무 심해요어어~!” “닥쳐! 으, 으아! 지, 지금은 나보다 네가 위험해!!” 실제 전쟁에서 적군 여성병사의 존재는 병사들의 울분을 달랠 노리개 정도 밖에는 안된다. 지랄마! 우리 스피릿을 저런 놈들에게 줄 것 같아?! 빌어먹을! 주위를 살펴보니 저 앞에 꽤 많은 수의 아군들이 달려오는 적보병들을 보고 재빨리 후퇴하고 있다. 하지만 이쪽에서 쫓아가기엔 너무 멀다. 이쪽은 거의 궤멸상황이라 방어진을 짤 장교도 그의 명령을 따를 병사들도 모두 뿔뿔히 흩어져 있거나 부상을 입고 있는 상황이란 말이다. “으아아아악! 빌어먹을! 그래! 덤벼! 다 덤비란 말이야아아!” 허리뒤의 작은 가방을 뒤적인 나는 그 안에서 파란색 액체가 담긴 길쭉한 실험관을 꺼냈다. 입구를 막고 있는 코르크 마게를 이빨로 뽑아낸 나는 그것을 꿀꺽 삼키고는 비명을 지르며 자동석궁을 뽑아서 달려드는 놈들에게 쏴버렸다. 퉁퉁퉁퉁퉁퉁퉁~! “으억?! 컥! 억~!” 검을 들고 달려오던 놈들이 화살을 박고 자빠져 나갔다. 허리를 숙인 나는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약기운 때문에 머리가 짜릿하다. 치이이이이~! “으, 어, 주, 주인님…? 사, 상처가!” “엘릭서를 마셨어. 스피릿 미안해. 나 이제 널 못지켜 줄 것 같아. 하, 하지만 그냥 죽게하지 않아! 살길은 반드시 열어줄게. 주인님이 널 살려줄게!” 나오는대로 지껄이며 고개를 돌린 나는 아군들과 각개전투를 벌이다가 먹이를 발견한 들개마냥 우리들에게 달려오는 적병사들에게 자동석궁을 연사했다. 퉁퉁퉁퉁퉁퉁퉁~! “으랴아아아아~!!!” “꺄아아악! 주인님!”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내 다리를 붙잡고 앉아있던 스피릿이 어떤 몹쓸 놈에게 머리 채를 붙잡혀 끌려가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나를 무시하고 그녀를 잡아간다. 왜 그럴까? “뻔하지! 이 개자식! 그 더러운 손 놓지 못해!?” “끄아악!”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집어던져 녀석의 가슴을 뚫어버린 나는 바닥에 쓰러진 스피릿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자동석궁을 들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고개를 돌리자 5미터짜리 강철괴물이 검을 들어올리고 달려왔다. 그러자 주변에 몰려있던 적병들이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빠르게 물러서기 시작했다. 순간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와 피가 묻어 더러워진 스피릿의 회색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검을 들고 달려오는 그 괴물같은 쇳덩어리의 망토도 멋지게 펄럭였다.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옛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그림 같은 모습과 기분에 젖어있을 상황이 아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나는 구석에 몰린 늑대새끼마냥 으르렁거리며 빠르게 눈을 돌려 사방을 경계했다. 달아나야한다! 퇴로는?! 어디로 가면 마을이 나오지?!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무서우리만치 차갑다. 이내 냉정한 판단을 내린 나는 왼손을 빠르게 제복의 안주머니로 집어넣었다. 그 순간부터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순간 다가온 강철의 거인이 우리들의 앞에 서서 검을 휘둘렀다. 휘이이잉~! “이 빌어먹을!” 골든피크를 일으키려다 도저히 시간이 맞지 않아 냅다 스크롤을 던져버린 나는 스피릿을 끌어안고 바닥을 구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 스피릿이 내 어깨를 붙잡고 버티더니 검을 내지르는 아이언 골렘에게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펄럭~! 펄럭~! 두꺼운 망토가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덜덜 떨며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의 머리 위에 멈춰선 커다란 검을 바라보며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억지로 뒤로 물러서니 놈이 다시 움직였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녀석은 양손에 잡은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그리고는 투구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저건 검을 든 기사가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서 하는 인사다. 그런데 어째서? 멍청히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다시 눈을 날카롭게 뜨고 우리 주변을 서성이는 적병들을 노려보았다. 그들도 이 골렘의 행동에 의문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은 적이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퉁퉁퉁퉁퉁퉁퉁퉁퉁~!! “으아악!” 방심하고 있던 놈들을 자동석궁으로 모조리 쓸어버린 나는 스피릿을 와락 안아들었다. “스피릿 꽉 잡아!” “아, 아뇨. 주인님 잠깐만요.” 막 달리려는데 스피릿이 날 말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자세를 잡고 있는 강철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스르륵 잠이 오는 것 같다. 아, 정말 기분 좋은데. 이대로 낮잠이라도 한숨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그림자가 나타나 기분 좋은 햇살을 가려버렸다. 어이어이~ 누구야? 이건 일조권침해라구. “주인님. 다됐어요. 어서 이리로 오세요.” 그녀의 부축에따라 시체 흉내를 내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이며 아이언 고렘이 쌓아놓은 부서진 마차의 파편 더미로 들어갔다. 막 그곳으로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다닥다닥~! 이힝힝힝~!! “쉬에 파이트가 누리한 트리마!” 아름다운 은빛 갑옷을 걸친 기사가 외치자 가만히 우리가 숨어있는 곳을 지키고 있던 아이언 고렘이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돌렸다. 쿠웅…! 쿠웅…! 골렘을 돌려보낸 기사는 뒤따라오고 있는 병사들에게 무슨 명령을 내리더니 말을 타고 언덕을 넘어가는 골렘의 뒤를 따랐다. 돌아가는 건가? 스피릿의 몸을 끌어안고 파편더미 속에 숨어 신경을 바싹 곤두새우기를 한시간,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병장기 소리와 비명소리가 어느순간 멎어버렸다. ==================================================================== 으윽~ 조금만 더!!!!!!!!!! Reload Running Fire: 91 “그만하시고 이것 좀 드세요.” “으익….” “주인님 조심하세요.” “쉿~! 조용히해.” 입구를 막고 있던 시체와 상자를 밀어낸 나는 조심스레 밖을 내다보았다. 철수했는지 적군은 더 이상 보이질 않는다. 잠시 밖으로 나와 언덕위까지 조심스레 달려갔다온 나는 저 멀리 평원을 달려 철수하는 캐슬린 군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파편더미로 돌아와 스피릿을 끌어내니 그녀는 후줄근한 모습으로 날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세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전 괜찮아요.” “그럼 나도 괜찮아.” 그녀는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았다. 방금 전의 전투로 쓰러진 시체들이 즐비하다. “젠장, 기습이라니. 상상도 못했어.” “필사적인 거예요. 두 강대국이 손잡고 공격을 해오니까. 정공법으로는 무리인거죠.” 큼직한 나무 상자위에 걸터앉아서 얼굴의 핏자국을 닦고 있던 스피릿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예전 같으면 무섭다고 질질 짤텐데 이젠 별로 안 무서운가봐?” “어마. 주인님이 있으니까 그나마 이 정도로 버티는 거예요.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섭다구요?” 코를 좀 벌렁거려준 나는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서 턱을 잡았다. 스피릿은 말 잘듯는 강아지 마냥 고개를 들어 내눈을 맞췄다. “아까 그 쇳덩어리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해 보실까? 왜 네 말을 들은 거지?” “그건 제가 캐슬린의 공주이기 때문이에요.” “10년 전에 사라진 왕족의 공주인데?” 내 손을 밀어내고 고개를 든 스피릿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린 시절, 캐슬린 전 왕족 때에는 결전병기를 이용한 군사 쿠데타를 &#47562;기위해서 모든 결전병기들에게 맹약을 걸었어요. 피의 인장을 가진 사람을 보호하도록, 그 덕분에 강철의 기사들은 왕족의 피에 반응하여 유사시엔 왕족의 명령을 최우선적으로 실행하게 되었죠.” “그래서 네 말을 듣는 거다?” “예.” 스피릿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10년전 반란이 성공한 이유는 피의 인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어 가장먼저 살해해버렸기 때문이에요. 결전병기들은 피의 인장을 직접보지 않는 한은 말을 듣지 않거든요? 게다가 이전 캐슬린 폐하의 폭정을 두고 볼수 없었던 신하들은 미리 궁내에서 근위용 결전병기들을 모두 치워버렸지요. 그래서 반란이 성공했던 거예요. 왕족을 제외하고 궁내의 모든 사람들이 혁명을 원한다면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어요.” “어, 그렇다면 말야. 현 캐슬린 왕족들에겐 그 피의 인장이….” “예, 없어요. 이것도 제가 마지막이에요. 피의 인장을 가진 사람들은 실질적인 왕가의 직계자손 뿐이었는데. 모두 살해 당했거든요? 저는 어떻게 운이 좋아서 살아난거죠.” 담담하게 옛이야기를 해대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맛을 다셨다. “미안해. 주인님이 이상한거 물어서 속상하지?” “아뇨. 괜찮아요. 저야 이젠 공주도 뭣도 아니거든요? 오직 당신과 강철의 기사들만이 저를 공주로서 봐주지요.” 난 입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냐. 스피릿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라는 되찾는 일쯤은 간단하겠네?” “이전에 트레즈 근위대장이 저를 데려다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것도 피의 인장이 가지는 힘 때문이었죠. 하지만 전 이제 그런 욕심 버렸어요.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죽고 싶어요. 10년 전 어린 소녀가 보았던 어른들의 욕심은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거든요? 전 다시 그런 곳에서 살고싶지 않아요. 그냥 제 가족들만 보살피면서 살면 그걸로 족해요.” 따스한 봄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의 손길을 느끼는 것 같다. 태양에 비춰져 아름다운 은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잠시 쳐다보던 나는 허공의 전장으로 내려온 여신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어버렸다. “나 같이 못된 놈에게 붙잡힌 널 동정해.” “어마, 그런 말씀 마세요. 전 당신과 함께 있어서 충분히 행복하니까.” 스피릿이 눈을 뜨고 날 쳐다보며 말했다. 갑자기 쑥쓰러워진 나는 그저 씩 웃어주는 것으로대답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주위를 한바퀴 돌아봤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간간히 신음을 흘리는 녀석들이 있긴했지만 가망이 없어보인다. “그러니까 내버려둬.” “하, 하지만….” 다 죽어가는 병사를 발견하고 안절부절 못하던 스피릿이 울상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쓰다는 표정을 지은 나는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었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사내가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며 제발 가지말라고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 우리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마당에 남의 죽음을 봐줄 여유는 없다. 그리고 가슴이 저렇게 난도질 당하고 배에 창과 검이 꼿혀있는데 치료를 해도 살아날 가망성은 없어 보인다. “주인님 못됐어요! 어, 어떻게 살려달라고 말하는 사람을 버리고 가요!” 스피릿이 내 손에 끌려오며 고함을 빽 질렀다. 자리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니 스피릿이 연신 훌쩍이며 날 쳐다본다. “그래, 난 못된 놈이야. 하지만 나에게도 내 나름의 정의와 개념이 있어. 어차피 죽어! 저런데 살 것 같아?! 내버려두고 우리 살 길을 먼저 찾아야…?! 으윽…?!” “아악~! 주인님!” 다리가 풀려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스피릿이 울먹이며 날 부축했다. “이, 이런 젠장. 엘릭서 때문인가?” “괜찮으세요? 주인님!” “안괜찮아. 제길~! 아, 아까 우리 숨어있던 대로 가자. 어서.” 스피릿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날 부축해서 골렘이 숨어 있으라고 만들어 놓고간 마차의 파편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안이 비좁긴했지만 두사람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젠장! 시간이 지날 수록 버티기 힘들다. “사, 상황이 이러니, 네, 네가 좀 고생해야겠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고 그대로 해.” “예, 예에. 뭐든 말씀만 하세요.” 잔뜩 겁을 먹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일단 그녀에게 파편과 시체를 가져다가 우리가 숨은 곳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위장시키도록 했다. 원래는 내가 하려했지만 부장용이 빨리 나타난 이상 어쩔수가 없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끙끙거리며 시체와 나무상자등을 끌어다 입구를 막고 밖에서 보이는 곳을 가리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는 저렇게 힘든일을 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힘이 빠져 옆으로 픽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니 아직 해가 하늘에 떠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은 보이지 않는다. 어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하품을 조금 한다음 봄바람에 나부끼는 입구의 천조각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시체가 흩어져 있는 벌판에서 뭔가를 줍고 있던 스피릿이 날 보고 후다닥 달려왔다. “주인님~! 깨어나셨어요!” “어, 응. 그런데 이건 뭐야?” 뒤집어 쓰고 있는 넝마조각을 가르키며 묻자 스피릿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다니면 들킬까봐서요. 위장용이에요.” 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척후병이 왔었어?” “…어제 저녁하고 오늘 아침에 왔다 갔어요. 걱정마세요 들키지 않았으니까. 스피릿이 낮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얼굴을 잔뜩 굳히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니 스피릿이 손을 흔들었다. “방금 전에 언덕 위에서 살펴봤지만 근방에 별다른 조짐은 없어요. 걱정마세요.” “정말이야?” “예. 저 이래뵈도 눈 좋아요.”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을 내려다보았다. “스피릿.” “예.” “키스해주고 싶어.” 그녀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녀에게 듣기로 난 하루 정도 잠들어있었다고 했다. “어제 밤에는 정말 무서웠어요.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었거든요. 그래서 주인님만 꼭 껴안고 있었죠.” 지금도 꽤 무서운지 평소 답지 않게 연신 쫑알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잘했다고 칭찬해주자 스피릿은 기분 좋은 듯이 헤헤 웃었다. “그런데 방금 저기 쪼그려 앉아서 뭐했어?” “아, 이거요.” 그녀가 내민 것은 잡초 같은 풀들이었다. “으으응~! 잡초 아니에요. 봄나물이라구요. 스프로 끓이면 맛있어요.” “배고프면 어디 식량 같은 거라도 찾을 것이지.” 스피릿은 볼을 부풀리며 나에게 보여주었던 나물 자루를 다시 여몄다. “하지만 별로 먹을게 없던 걸요? 부서지지 않은 상자가 몇 개 있었지만 못질을 해둬서 제 힘으론 열수도 없었다구요.” “그럼 저건 어때?” 반 농담삼아 죽어쓰러진 말을 가르켰다가 스피릿에게 맞아죽는줄 알았다. 어쨌든 어제 저녁때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배에서 꼬르륵 소릴 내는 아가씨를 데리고 아지트(?)로 돌아간 나는 입구를 막는데 사용했다는 나무상자를 살펴보았다. 커다란 글자로 G-F-A라고만 씌여 있다. 으음, 뭘까나? 강철건틀릿을 찾아서 손에 낀 나는 그것으로 상자의 중앙을 때려부쉈다. 옆에서 쳐다보던 스피릿의 입이 딱 벌어졌다. “와아~! 주인님 힘 엄청세요!” 나무 상자안에는 빨간 사과들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상자 안에서 사과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어주자 스피릿은 환하게 웃으며 크게 한입 베어물어서는 아삭아삭 씹어댔다. 시체가 즐비한 전장 한가운데서 방글방글 웃으며 사과를 먹고 있는 처녀의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다. 이런, 요새 내가 너무 감상적이 되어가는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다른 상자를 부수자 안에는 날이 시퍼런 장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기상자인가? “호오~ 쓸만한데?” “그만하시고 이것 좀 드세요.” 그녀가 사과를 들고와 내 입에 물려주었고 일단 식후경이라고 생각한 나는 사과를 3개를 단숨에 해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검을 꺼내 사과를 깍고 있던 스피릿이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았다. “좀더 드시지않구….” “적당히 먹자. 지금 한가롭게 먹을거나 챙기고 있을 때가 아냐. 아무리 봐도 아군은 후퇴한 것 같고, 적군이 언제 여기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구, 그러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해.” ==================================================================== 사과, 아담과 이브가 먹었다는 지혜의 열매이자 선악과라고 하지요. …먹어봤지만 별로 머리가 좋아지는 효능은 없더라는, Reload Running Fire: 92 “이제 알겠냐? 그러니까 아무나 믿지….”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서 가죽 자루를 하나 주워오더니 사과를 주워담기 시작했다. 난 무기 상자에서 검을 몇자루 꺼내 등에 맸다. 각자의 짐을 챙긴 우리들은 손을 맞잡고 언덕을 넘어 아군이 후퇴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을 걸었지만 아군부대는 물론이고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어두워서 잘 모르겠는 걸요?” 스피릿은 숲속을 두리번 거리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요?” “어떻하긴 뭘 어떻게해? 날도 어두워졌으니 이만 쉬자.” 아무렇게나 자리에 앉으려니 스피릿이 춥다고 칭얼거려서 결국 불을 지펴야 했다. “에이~! 지나가던 척후병 찾아오면 네가 알아서해! 난 몰라!” “헤헤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노예를 위해서 이렇게 불도 피워주시잖아요. 주인님 사랑해요.” “시끄러. 귀찮으니 들러붙지마.” 툴툴 거리며 불을 피우고 있으려니 스피릿이 부츠를 벗고 발을 꺼내보았다. “어디봐.” “어, 어마. 이러시지 마세요 주인님.” “시끄러, 가만 있지 못해?” 부끄럽다고 몸을 틀어댔기에 가만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아주며 그녀의 작은 발 여기저기에 잡혀있는 물집을 살폈다. 씁쓸하군. “바보 같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알 것 아냐. 이 쪼다야!” “…아프다고 하면 업고 가실 거잖아요. 그러다가 주인님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해요? 저번에 주인님 약 먹고 쓰러지셨을 때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 줄 모르시죠?” “바보 같으니. 그런다고 이런 발로 헤헤 거리며 걸어다녀? 병신.” 울컥한 나머지 그녀에게 욕을 해준 나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가까운 곳에 피어있는 약초를 찾아서 뜯어왔다. “그게 뭐예요?” “약초다. 따끔할거야. 참아.” 나이프로 물집을 터트린 나는 약초를 입안에 우겨 넣고 잘게 씹어서 손바닥에 뱉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손수건에 싸서 그녀의 발에 대고 묶어주었다. “이거 씹어.” “아따따따…. 으윽, 뭐, 뭔데요?” “네가 좋아하는 봄나물이다.” 스피릿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그것을 입으로 받아 얌얌거리며 씹기 시작했다. “우엑, 써요…!” “뱉기만해봐. 엉덩이 때려준다.” “우응…. 주인님 못됐어요.” “시끄러. 쫑알거리지 말고 주인님 하라는데로 해.” 연신 웅얼거리며 약초를 씹어삼킨 그녀에게 입가심으로 사과 한조각을 물려주고 잠시 있으니 스피릿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와~! 아프지 않아요?” “파인페라는 풀잎인데, 극상 진통제의 원료로 쓰는거야. 내일 아침에 조금 더 찾아다 줄테니 걷다가 아프면 먹어.” “주인님 대단하세요. 이런 재주 많으신 분이 제 주인님이시라니, 너무 행복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달라붙지마. 또 뽀뽀하려고 그러는거지?” “노예가 가끔 게슴츠레한 눈으로 다가오면 아무말없이 안아주시는 거예요. 주인님 바보.”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내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려고 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외쳤다. “거기 누구냐?!” “히익~!” 스피릿이 깜짝 놀라서 날 쳐다보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은 나는 바스락 거리는 숲속을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뭔가가 나뭇가지를 걷어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제복을 보니 그랜퍼스 쪽 병사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는게 여러종류가 있어서 말야. 검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들이 먼저 손을 들었다. “아, 거, 겁먹지 마시오. 우, 우린 그랜퍼스 병사들입니다. 당신들도 우리와 같은 부대의 사람인 것 같은데….” “그랜퍼스 군은 맞긴 한데. 아군인지 적인지는 아직 모르지. 당신들은 왜 여기있지? 어디 소속이야?”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병사들은 모두 세명으로 다들 하나씩 어디를 다쳐있는 부상자들이었다. 그걸 발견한 스피릿이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을 불가에 앉히고 치료를 시작했다. “어, 어이! 스피릿! 아직…!” “그만하세요! 같은 옷에 같은 말을 쓰잖아요! 게다가 다친 사람들이잖라구요!”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사내들은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는 스피릿을 보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검을 들고 흉흉한 표정을 하고 있던 나는 잠시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될대로 되란 듯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치료를 받은 사내에게 듣기로 그들은 베레타의 록스터 군단과 함께 캐슬린으로 진격하던 그랜퍼스 제 2군단 소속의 병사들로, 어제 캐슬린 군의 기습을 받아 본대와 떨어져 버린 탈영병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딜 가는 중인데?”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말에 마음씨 착한 스피릿이 몇 개 남지 않은 사과를 그들에게 전부 나눠줬다. 그래서 나와 이야기 중이던 병사는 입안에 한가득 넣어두고 있던 것을 삼킨 다음에야 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었다. “후퇴한 아군을 찾기위해 헤매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뭐, 이제 이틀만 더 가면 국경도시가 나올테니까 부대를 찾지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요.” “이틀만 더 가면 국경이라고?” 사내는 해 뜨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그랜퍼스의 국경도시 샤먼이 나올거라는 말을 해줬다. 어, 뭐야? 샤먼? “그럼 우린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내려 온거잖아? 원래는 출발했던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 라이거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위치거리 상으로는 거기보다는 샤먼이 여기서 더 가깝습니다. 거기에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니까 굳이 멀리갈 필요는 없지요.” 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샤먼이라. 오랜만에 가보겠군. 그러고 있는데 병사들의 상처를 모두 봐준 스피릿이 내곁으로 와서 앉았다. 그녀를 보고 사내들이 물었다. “당신의 노예입니까?” “뭐, 그렇수다. 3군단 용병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당신들처럼 되어버렸지.”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동안 동행하기로 결정한 우리는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내가 먼저 불침전을 서겠다고 했지만 사내들이 자기들이 받은 도움도 있으니 불침번은 자기들에게 맡기고 푹 쉬라고 이야기했다. 머리를 좀 긁적인 나는 그럼 그렇게 하라고 말하며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스피릿은 곁에 꼭 달라붙어서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인지 다시금 일깨워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 어마?!” “이리왓!” 눈을 뜨고 고개를 드니 내 머리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그것을 붙잡자 내 앞에 서있던 사내가 깜짝 놀라서는 팔에 힘을줘서 검을 빼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왜 이러세요?!” “가만있어!” 한 사내가 스피릿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며 날 쳐다보았다. 난 목을 조금 좌우로 꺽은 다음 입을 열었다. 뭐,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왜지?” “시, 시끄러!” 한 사내가 검을 들고 나에게 덤볐다. 그걸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절름발이 주제에….” 그가 휘두르는 검을 붙잡아 팔을 꺽어버린 나는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진 팔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는 사내를 힘껏 걷어차버렸다. 굴러간 사내는 움직이질 않았다. “자. 똑바로 말해봐. 왜 그런거야?” “우, 움직이지마! 노예 목에 구멍나는거 보고 싶어?!” “적하고 아군도 구분 못하는 그런 멍청한 노예년 따위는 필요없어. 찌르고 싶으면 찔러. 그런데 묻자. 왜 그런거야? 쪽수로 밀어붙이면 멍청한 용병놈의 노예년 같은 거 쉽게 빼앗아서 즐길 수 있을거라 생각한거야?” 히죽이죽 웃으며 걸어가니 스피릿이 죽는다고 울면서 비명을 질렀다. “주인니이임~!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아아앙~!” “시끄러워. 노예주제에 아무나 믿더니 꼴 좋다. 주인님만 믿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어이, 그딴 계집 이젠 필요없으니까. 마음대로해.” 검을 꼬나들고 있던 병사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다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그들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노, 농담하지마!” “어어? 못 믿는거야? 사실이라니까? 돈 받고 팔기도 하는게 노예인데 이제와서 뭐가 겁나? 자, 난 옆에서 구경할테니까. 한번 마음대로들 해보시라구. 봐, 칼도 집어 넣었잖아?” “아아앙~! 주인님! 제, 제가 잘못했어요오! 사, 살려줘요!” “시끄러워. 조용히해. 귀여워서 오냐오냐 해줬더니 어딜 기어올라? 넌 험한 꼴 한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거야. 어이! 뭐해? 안해? 이런 기회 자주 오는 거 아냐? 그럴 생각으로 덥친 거잖아?” 두 사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그게 사실인지 어떻게 알아?” “해보면 알 수 있겠지. 지금이라도 좋아. 가슴한번 만져 볼래?” “아아아앙! 그, 그만둬요! 싫어어! 주인님 아니면 싫어어어~!” 스피릿이 두손으로 자기 가슴을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놈들이 군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잽싸게 손을 뒤로 돌린 나는 단검을 꺼내 던졌다. 퍼퍽~! “윽!” “억!” 단말마의 비명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거야. 스피릿은 징그러운 사내들이 목에 칼하나씩 꼿고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자 흠칫해서는 내쪽으로 다가왔고 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그녀를 쳐다봐주었다. “이제 알겠냐? 그러니까 아무나 믿지….” 짜아악! “…마. 쓰으읍~! 으이! 왜 때려! 이 바보 노예야!” “이 나쁜 사람! 나, 나 하나 뿐이라고 해놓고서는! 나만 좋아한다고 해놓고서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게 어디있어요! 어, 얼마나 무서웠는데에!” “팔긴 누가 팔아? 딴에는 자길 구하려고 노력한건데! 감히 주인님의 뺨을 때려!? 어으! 이걸 그냥…!” ==================================================================== 메조키스트적 분노가 마구 솟구치지 않습니까? 말않듣는 노예는 채찍으로 때려줍니다. Reload Running Fire: 93 “뭐, 별로, 참. 그렇지. 군대로 돌아갈거야?” 스피릿은 눈물을 글썽이며 어디 때릴려면 때려보란 듯이 노려보았다. 짜증이나서 한대 때려주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후환이 두려워서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 “크으윽… 제가 잘못했습니다. 노예님. 용서하세요.” “훌쩍…! 용서못해요.” 스피릿은 그렇게 말하며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시체들도 처리해야 하는데 자꾸 귀찮게 구네. 떨어지라고 말하려 했지만 무서워서 와들와들 떨어대는 걸 도저히 억지로 떼어낼 자신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뒀다. “멍청하고 착하기만한 계집애 같으니.” “…훌쩍.” 그렇게 시체를 곁에 두고 하룻밤을 지샌 나는 아침 일찍 스피릿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돈이라도 건질까 싶어 녀석들의 주머니를 뒤적였건만 아무것도 없었다. “헛고생만 했네. 젠장, 이젠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틀을 보내지?” “죄송해요오.” 걷다가 말고 자리에 멈춰선 나는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오는 스피릿을 은근히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안전부절 못하다가 결국 훌쩍이기 시작했고 난 그녀의 손을 붙잡아 당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이그~! 잘하는 거라곤 우는 거하고 칭얼대는 것 밖에 모르지? 뚝!” “…뚜욱….” “가자.” 스피릿은 한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내 손을 붙잡고 따라왔다. 아기 낳아서 울보면 네 책임이라고 으름장을 놓아주자 그녀는 울면서 헤헤 웃어댔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던데 확인해 볼까?” “프흡~!” 얼씨구? 급기야 스피릿이 웃기 시작했고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기 위해서 아군까지 죽여가며 사흘을 걸었다. 그중 이틀은 상냥하고 예의바르며 자애로우신 우리 노예님 덕분에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를 씹으며 걸어야 했다. “정말 거지가 따로 없구나. 팻~! 살다살다 풀뿌리는 처음 씹어본다야.” “죄송해요….” “시끄러. 마을에 도착하면 네가 밥사. 알았지? 나 지금 돈 한푼도 없으니까.” 국경수비대에 먼저 도착할거라 생각했는데 중간에 산열매 따먹는다고 숲속을 좀 헤메고다녔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수비대보다 마을이 먼저 나왔다. 젠장, 지금 굶어죽을 판인데 뭐가 겁나냐? 그래서 일단 마을에 먼저 들리기로 했다. “…부랑자로군. 그냥 들어가시오.” 경비병이 잠시 우리 몰골을 보고 자기들 마음대로 부랑자로 만들어서 통과시켜주었다. 부랑자들은 대부분 시민권이 없고, 책임을 물리기도 귀찮아서 그냥 보내주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다. “하지만 화나는 걸?” “…주인님 화낼 힘이 있으신가 봐요? 전 배고파 죽겠어요.”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우우웅….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구요. 이제 그만 하세요.” “알았으면 돈이나 꺼내봐. 있지? 저번에 용돈하라고 준거.” 이 전에 우리가 장기 투숙하던 샤먼의 노래를 앞에두고 스피릿을 재촉했다. 넝마조각을 망토대신 뒤집어 쓰고 있던 스피릿은 잠깐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깜짝 놀라서는 넝마를 집어던지고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댔다. “어, 어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다뒤지다가 겨우 동전 하나를 찾아냈다. 반짝이는 100만 루나짜리 금화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한숨이 다 나온다. “…한 순간이었지만 아까 경비대원의 말이 사실이 되는가 했다.” “하, 하하하~! 어, 어서 들어가요 주인님. 제가 밥 사드릴께요.” 그녀의 손에 억지로 여관으로 들어가니 여관을 가득 매우고 있던 사람들이 우릴 맞이했다. 전쟁이네 어쩌네 했지만, 여긴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군. “뭐지? 거지인가?” “내참, 여긴 저런 부랑자도 올수 있는 거야?” “어이~! 마스터! 이상한 것들이 들어왔어! 저것들 쫓아내요!” “아냐, 잠깐만. 저기 회색머리 거지는 꽤 예쁜데?” “뭐? 우엑~! 예쁘면 뭘해? 땟국물 줄줄 흐르는 거지인데. 자네 그렇게 안봤는데 너무 하는군. 오늘 물 좋은 곳에 한번 데려가 줄까?” 할일 없는 주당들과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던 스피릿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제 모습이 정말 땟국물 줄줄 흐르는 거지 계집아이 같아요?” “밥 먹기 전에 좀 씻을까?” 내 말에 스피릿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몸은 솔직했다. 꼬르륵~! 스피릿의 얼굴이 벌개졌다. 한숨을 내쉰 나는 어느새 우리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쇼.” “안녕하시오.” 험상굳은 곰아저씨는 우릴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긴 지금 우리가 보통 몰골이냐? 그래서 나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하고 몸에 걸치고 있던 넝마를 반쯤 열어보이며 말했다. “돈은 있으니 식사와 방, 그리고 목욕을 부탁합니다.” 내가 입고 있는 구질구질한 제복을 알아본 주인장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두말없이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주당들이 거지를 데려간다고 말이 많았지만 그의 눈빛 한방에 모두 침몰당했다. 방으로 올라가 잠시 기다리니 음식이 나왔다. 오랜만에 제대로된 밥상을 받은 우리는 감동을 눈물을 흘리며 음식접시를 번갯불에 콩볶듯이 뚝딱 해치웠다. 음식을 가지고 들어온 여종업원은 우리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난 포크를 휘두르며 주문을 더했다. “풀코스로 2인분 추가!” “…아,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는 종업원의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푸하하 웃어버렸다. 스피릿이 그 조그만 입에 음식을 마구 쓸어넣으며 물었다. “우에 그에오오?” “틀림없이 운 좋게 큰 돈을 줍거나 적선 받아서 배나 채워보려고 찾아온 부랑자들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렇지?” “흥~! 깨끗하게 씻은 다음 어떻게 변하나 보여주면 돼요.” “호와, 우리 스피릿 열받은거야?” 스피릿은 이제 스튜를 퍼먹으며 말했다. “음음, 물론이죠. 내 모습은 이게 아닌데. 그걸 모르고 우습게만 보니 기분 나쁘지 않을 수 있어요? 용서 못해요. 음, 이거 안드실 거면 제가 먹을 거예요.” 난 낄낄 웃으며 그녀의 입에 구운 햄을 물려주었다. 풀코스 4인분을 먹어치운 우리는 주인장에게 갈아입을 옷을 부탁한 다음 목욕탕으로 내려갔다. 욕탕을 앞에둔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스피릿의 손을 붙잡았다. “같이 들어가면 안될깡?” 스피릿은 가만히 날 쳐다보다가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저런 미소는 별로 어울리지는 않지만, 내 가슴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안돼요.” “어? 왜에?” “다른 사람있다구요.” 그러고보니 바구니에 다른 사람의 옷이 담겨져 있다. 에이~! “좋다가 말았네.” “주인님. 그런 멘트는 둘이서만 있을 때 하세요. 다른 사람 있을 때면 저 부끄럽다구요.” “칫~ 너무해. 나름대로 애정표현인데 말야.” “가끔은 그 애정표현이 범죄에 가깝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세요. 물론 둘이서만 있을때는 무슨 짓을 하셔도 되지만요.” “정말?” 스피릿은 목욕탕으로 들어가며 살짝 웃었다. “…정말.” 아아으으으~! 귀여워라~! 그녀에게 먼저 나와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해준 나는 김이 잔뜩 서려있는 욕탕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궜다. 으으아~! 좋다. 느긋하게 탕안에 앉아있으니 반대편에 있던 다른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에 수건을 감고 있던 사내는 휘적휘적 걸어서 물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자세히보니 어깨에 노예 문장이 박혀있었다. 허, 노예인가? 남자 노예는 오랜만에 보는…. “어라? 퍼피?”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퍼던 사내는 내 어이없는 목소리에 그제서야 고개를 들더니 눈을 동그렇게 떴다. “…콜트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아니 잠깐, 그럼 첼시아도 여기 있다는 거야?” “예. 지금 탕안에 계실겁니….” 그가 막 말을 마치려는 찰나 스피릿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꺄아아악~! 누구세요?! 안돼요! 이러지 마세요! 주인님~! 아아앙~!”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어째 변한게 하나도 없어. “야아~!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두 사람 오랜만이지?” “…예에에.” 스피릿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첼시아는 뭘 그런 것 가지고 토라지내고 깔깔 거렸지만 스피릿은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다. 첼시아는 그녀가 화를 내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에게 말했다. “옛날 기억이 살아나는 것 같지? 우연도 이 정도면 필연이야.” “우연은 무슨 우연, 이건 악연이라구. 그런데 여긴 뭐하러 나타났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칫, 몰라서 물어? 요새 베레타와 캐슬린이 전쟁 중이잖아? 그랜퍼스도 참전하고 있다구. 우린 강제징집이다 뭐다해서 끌려 왔다가 부대가 궤멸 되는 바람에 졸지에 미아가 되버렸어.” “어머, 불쌍해라~! 젊은 날을 듣도보도 못한 싸움터에서 끝내게 생겼네? 아아~ 여자로 태어나서 천만다행이야.” “칵~!” 첼시아는 농담이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어댔다. 그때 스피릿이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고개를 돌리자 홀에서 술을 퍼고 있던 사내들이 우리쪽을 연신 힐끔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하~! 때 빼고 광 내니 사람이 달라보이지? 스피릿과 내가 씩 웃고 있으려니 첼시아가 물었다. “뭐가 그리 좋아서 실실 웃어?” “별거아냐. 그런데. 당신은 진짜 여긴 뭐하러 왔어?” “뭐, 별로, 참. 그렇지. 군대로 돌아갈거야?” ==================================================================== 다시는 안갑니다. Reload Running Fire: 94 “사내 녀석이 아침부터 무슨 한숨이니?” 고개를 돌린 나는 스피릿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뜻에 따르겠다는 표정이었고 모처럼 잡은 자유를 난 조금더 만끽하고 싶었다. “요 몇일 전쟁 때문에 험한 일 격었으니까. 일단 좀 더 생각해 보고.” “하기사. 요런 귀염둥이를 업고 다니면서 할 정도로 한가한 일거리가 아니지. 좋아, 그간의 친분이 있으니까. 내 크게 인심써서 당신들 조기전역시켜 달라고 군 관계자 한테 부탁해볼까?” “군 관계자? 군대에 아는 사람이 있어?” 첼시아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물론~! 하지만 대가로 우리 일을 도와줘야해. 어때? 해볼 생각 없어? 크게 한탕 뛰고 지긋지긋한 전투에서 발 빼는 거야.” 생각하고 자시고 할게 있냐? 난 당장 하겠다고 말했다. 첼시아는 공짜로 가드맨과 시녀를 구했다고 즐거워 하며 우릴 2층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굵직한 자물쇠로 잠궈 놓은 문을 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난 고개를 갸웃했다. “뭐 대단한게 있다고 그런 것까지 문에 달아놨어?” “대단한거지. 아무렴.” 끼릭~! 찰칵! 문이 열리고 퍼피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들이 들어갔다. 방안은 평범한 여관 방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창문을 닫아놔서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뿐. “뭐가 이렇게 어두워? 창문 좀 열어.” “좀 참아. 금방 익숙해 질테니까. 퍼피. 문 막아.” 그때 방구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아요. 갑갑한데, 창문이라도 좀 열어주면 안될까요?” 어라? 가장 안쪽의 침대에서 누군가가 일어나고 있다. 고개를 돌린 나는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도도한 표정과 날카로운 눈매. 이런 누추한 여관 방에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드레스를 입은 어여쁜 아가씨가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색이 스피릿의 그것과 같은 회색빛깔인 것 같다. 그녀의 앞에선 첼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참으세요.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 놓은 거니까. 라이트.” 스크롤을 꺼내 찢어버리자 여관방의 천장으로 빛구슬이 떠올랐다. 젠장, 촛불이 아니라 라이트 볼을 사용할 정도의 사람이라는 거야? 방안이 밝아지자 아가씨는 한결 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첼시아가 그녈 우리들에게 소개했다. “반년 전쯤에 캐슬린에서 베레타로 파견되었던 평화사절단의 실족 사건 기억하지? 그때 함께 실종되었던 루나마리아 레이스 캐슬린 전하님이야. 이번 전쟁이 일어나게된 실질적인 원흉이시지.” “원흉?”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공주께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인상을 구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무엄하다.” “어, 아, 예. 죄송합니다.” 뭔가 카리스마적인 압력이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리자 스피릿이 파리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스피릿은 반란으로 부모와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자신을 이런 밑바닥 인생으로 까지 몰아버린 반란자의 자식을 코앞에서 보는 기분은 어떨까? 이거이거, 복잡하겠는데.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 예. 괜찮아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내가 볼때는 심각해보인다. “그런데 공주님이 왜 여기 계신거지? 난 그녀가 그때 실종됐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구.”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몰랐어? 하긴, 저렇게 예쁜 노예랑 같이 있으니 어디 세상 돌아가는데 관심이나 있었겠어? 노예 엉덩이나 더듬으며 세월아 내월아 했겠지.” “칵~! 헛소리말고 왜 공주님이 여기 계신지나 이야기해!” 내 성화에 첼시아는 입을 꾹 다물고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공주님을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공주님을 의뢰자에게 인도하는 것, 그것이 내가 맡은 일이야. 그리고 당신들은 공주님과 함께 의뢰자를 따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면 돼.” “당신은?” 첼시아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난 그녀를 보내주고 돈만 받으면 끝이야.” “…웬지 얄미운데?” “전쟁터에 나가서 노예 걱정하다가 싸움도 제대로 못하고 죽고 싶니? 아니잖아? 새끈하게 한탕하고 전역해버려. 당신 이야기는 내일 의뢰자를 만나면 잘 이야기 해둘게.” 쓴 것을 삼킨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니 한마디 더 덧붙였다. “참, 잊을 뻔했네. 당신 노예 단속 잘해.” “…다 알고 있으면서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 않냐?” “어머? 먼저 하겠다고 했으면서 무슨 말이야? 게다가 난 소중한 친구들을 되먹지도 않은 전쟁으로 잃고 싶지 않아서 일을 제안한거라구.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어깨를 으쓱이는 첼시아의 등뒤로 도도한 표정의 공주가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다. 칫~! 귀찮게 됐군. 이런 일이라면 차라리…. 그때 스피릿이 내 팔을 꼭 잡았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제 걱정 마세요. 주인님. 전 괜찮으니까.” “전혀 괜찮지 않아보이는데?” “정말 괜찮아요. 가끔은 절 믿어보시라구요.”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며 한숨을 조금 내쉰 나는 조금 쉬겠다고 말해주고 방으로 돌아갔다. 스피릿은 한숨을 폭 내쉬며 침대에 주저 앉았다. 걱정하지 말라고는 해도, 저런 걸 보고 있자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잖아? 목뒤를 좀 주무른 나는 문을 닫고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스피릿은 멍청한 얼굴로 벽을 쳐다보다가 내가 어깨를 감싸주자 스르륵 기대어왔다. “주인님….” “10년 전의 일이야. 용서하지 못한다면 잊어버려. 바보같이 끙끙 앓고 있지말고, …뭐, 내가 이렇게 말하면 쓸데없는 참견 같겠지?” 스피릿은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내 가슴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절 안아주세요. 과거의 기억 따위는 주인님 말씀대로 깨끗하게 잊고 싶어요.” “정말이야? 정말 이대로 괜찮은거야? ‘내가 죽은 줄 알았지?!’ 라고 외치면서 뺨이라도 한대 때려야 속 시원 할 것 같지 않아?” 스피릿은 큭큭 웃어버렸다. 따라 웃어준 나는 그녀를 침대에 넘어뜨리고 담요를 뒤집어써버렸다. 피곤해서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나보다. 깨어보니 아침이다. 하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스피릿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방금전에요. 내려가서 씻고 오세요. 첼시아씨에게 들었는데 오늘 의뢰인을 만나러 갈거래요.” “그랴아?”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여 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1층 세면장으로 내려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상쾌한 기분으로 수건을 목에 걸고 밖으로 나가니 한가한 여관의 홀에 스피릿과 첼시아가 앉아서 차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잘 대해주란 말야. 사촌 동생이라며?” “…예. 알겠습니다.” “뭘 알겠습니다야? 내 노예한테 또 무슨 소릴 했어? 앙?” “별거 아냐. 그런데 콜트씨 머리 좀 길어졌다? 헤에, 귀여운걸?”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말라고 손을 흔들어준 나는 눈앞으로 늘어지는 머리카락을 만져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갑자기 스피릿이 흥분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주인님은 머리가 길어지니까. 그, 꼭 10대 소년 같아요.” “10대 소년? 어머나? 그렇고 보니 우리 콜트씨는 동안이네? 몰랐어. 헤에~ 스피릿은 어린 남자 취양인가봐?” 스피릿은 두손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며 몸을 베베 꼬았다. 우웩~! 이 아가씨들이 아침부터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만 하지 못하겠냐고 쏘아주고 있으니 퍼피가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회색 머리카락을 한줄로 땋아내린 날카로운 눈매의 그녀는 하얀 모직 원피스에 안에 붉은 비단을 댄 고급 검정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으음, 돌아다닐 때는 후드를 씌워서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그러나? 어쨌든 잘 어울린다. 이 다음에 스피릿에게 한벌 사줘야겠어. 그러고 있으니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우리들의 앞에 섰다. 주위를 조금 두리번 거린 첼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제 얼굴만 조금 보셨죠?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앞으로 당신을 호위해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안내 해줄 가드맨과 그의 노예입니다. 당신을 돌봐줄거예요.” “흥! 적국의 볼모로 잡혀가는데 무슨 호위씩이나 붙이는 거죠?” “아,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이들은 당신을 지키기 위해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위해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공주님.” 첼시아의 말에 공주께서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반갑습니다. 공주님. 앞으로 당신을 호위하게된 콜트 슈발츠 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노예인 스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피…? 이상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봐주자 스피릿은 나에게 윙크를 살짝 해보였다. 아, 그렇지. 진짜 이름을 숨기려고 하는구나. 알아볼수도 있으니까. 공주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예의상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첼시아는 어색하게 서있는 우리들을 모두 자리에 앉게 하고는 식사를 주문했다. “왜 내가 당신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나요?” “볼모면 볼모답게 따지지 말고 주는대로 먹어요.” “당신, 그 얼굴을 기억해요. 이 치욕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어요.” “어머나 무서워라. 우리 공주님 밴댕이 속알딱지네?” 말은 정답게 하는데. 어째 분위기가 험악하다. 결국 퍼피가 조심스레 끼어들어서 별 사고 없이 아침을 끝낼수 있었다. 옷이 없어서 퍼피의 바지와 자켓을 빌려입은 나는 나중에 꼭 옷한벌 사주마 하고 녀석의 손을 잡아줬다. “나는? 나도 스피릿 옷 빌려줬는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그녀를 보다가 스피릿을 바라보았다. 자기 말고 회색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는 공주에게 머리카락을 만져보도록 하고 있던 그녀는 언젠가 에 내가 권했던 몸에 딱 붙는 가죽 바지와 자켓을 입고 대단히 부끄러워했다. “일부러 저거 입혔지?” “그래, 고맙다고 해볼레?” “…감사합니다.” 첼시아는 고개를 쳐들고 호호호 웃어댔다. “그런데 그 의뢰인이라는 사람 어디에서 만나?” “아, 요앞 광장에서 기다리기로 했어. 어머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서가자.”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 첼시아가 모두를 일으켰다. 여관 주인장에게 돈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가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끝나려나? 에휴~! “사내 녀석이 아침부터 무슨 한숨이니? 들어오던 복도 달아나겠다. 어서가자.” “간다. 가.” ==================================================================== 한숨쉬면 그렇다더군요. 그래서 담배를 피나 봅니다. Reload Running Fire: 95 “이거 다쓰고 또 뭘하면 돼?” 어기적 어기적 걸어가는데 뒤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니 공주님이 스피릿과 죽이 맞아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같은 또래의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 같은데. 공주님, 그 노예는 당신의 아버지가 밀어낸 전 왕가의 마지막 생존자 이올시다. 쩝, 스피릿도 복잡할거다.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라지만, 나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아. 그렇게 우울한 심정으로 대로를 걷고 있으니 공주님이 헛기침을 하며 날 불렀다. “예.” “…어, 주인님이라고요?” “예.” “갑자기 실례인 줄 알지만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요.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뭘로 설명할 수 있죠? 주종관계 말고.”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봐주고 있으니 공주께서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너무 빤히 봤나? 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 앞에서 서로 팔짱을 하고 걸어가는 첼시아와 퍼피가 보인다. 뭐, 첼시아가 녀석의 팔을 안고 가는 거라 좀 억지스러움이 보이지만, 그럭 저럭 보기는 좋다. “으음, 주종관계를 빙자한 강제적인 연인 관계? 뭐, 그 정도로 확대 해석할 수 있겠군요. 어느 한쪽이 강제로 상대의 말에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거니까.” 으음, 이상론이상론. 공주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스피릿과 몇마디 주고 받은 다음 나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 노예와 사랑에 빠질수도 있다는 거군요?” 이 아가씨가 왜 이런걸 궁금해 하는거지? 난 머릴 좀 긁다가 입을 열었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노예는 개인이 소유하는 재산일 뿐이며 그런 감정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막말로 욕구해소의 도구일뿐이죠. 그래서 평소엔 끔찍이 아끼면서도 궁지에 몰리면 노예를 버리거나 혹은 적당히 돈을 받고 팔기도 합니다. 뭐,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얼치기 바보 놈이라면 공주님이 말씀하신 로맨스가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스피릿은 살짝 웃었으며 눈을 동그랗게 뜬 공주는 입을 헤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참, 연애도 한번 못해봤나? 왜 이런데 관심을 가진데? 그 외에도 그녀는 나에게 몇가지 질문을 더했다. 거의 쓸모 없는 것들이었기에 난 건성으로 대답하며 대로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노예를 당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고개를 돌리고 공주를 쳐다보았다. 언젠가 샤먼에 있는 마법상점의 마담에게서 들은 말과 같은 것이다. “방금 뭐라고….” “이봐! 뭐해?! 빨리 와!” 그때 앞서서 걷던 첼시아가 팔을 흔들며 우릴 불렀다. 이상한 여운은 남기는 말에 난 고개를 갸웃하며 공주를 쳐다보았다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아침이라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으며 그중에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사내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옆에 서있는 두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둘다 훤칠한 키에 볼륨있는 몸매와 같은 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매라고 해도 믿어줄 정도의 매치로군. 어느새 손까지 맞잡은 두 아가씨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린 나는 첼시아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맞긴 한거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내 참. 딴에는 늦는다고 빨리 나왔구만, 이 사람들은 아직 오지도 않고 있네? 아! 저기 온다!” 분수대의 난간에 걸터앉아 투덜거리고 있던 첼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딘가를 가르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롱코트를 입은 하얀 머리카락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와 우리들의 앞에 섰다. 난 눈을 찌뿌리며 말했다. “…넌 또 뭐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네놈이 여기에 있지?” “어라? 뭐야.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니?” 첼시아가 호들갑을 떨며 끼어들었다. 지금 내앞에 서있는 이 백발의 재수 없게 생긴 사내는 레미 제라블이라는 녀석으로 어렸을 적에 폴 아저씨의 집에서 만나게 된 녀석이다. “악몽의 시작이었지.”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첼시아. 이 놈은 왜 데리고 온겁니까?” “어머, 그건 사정이 있어서 말야.” 첼시아는 녀석에게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미 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럼 지금 탈영병이라는 말이군?” “칫~! 시끄러워,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부대가 궤멸 당하는 설움을 딧고 다시 일어선 나에게 그런 식의 오명은 어울리지 않아.” “탈영병이 아니라면 부대로 돌아갔어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마을에 있다는 건 설득력이 없어.” “그래서 어쩔건데?” 난 팔짱을 끼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잠시 뭔가 생각하던 녀석은 공주와 손을 맞잡고 있는 스피릿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나에게 물었다. “저 아가씨 네 노예냐?” “그런데?” “그래? 잘됐군. 안그래도 공주님의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했는데. 좋아, 첼시아의 부탁도 있고 하니 내가 좀 도와주기로 하지. 따라와라.” 듣고 있자니 은근히 화가 나려고 한다. 그때 첼시아가 공주를 그에게 인도했다. “그랜퍼스 특수 8군단 상사 레미 제라블이 루나마리아 레이스 캐슬린 전하를 뵙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공주님.” “당신들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자, 이제 날 어디로 데려가실거죠? 납치해서 신전에 쳐박아 뒀을 때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거잖아요?” 공주께서 턱을 들고 도도하게 입을 열었다.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던 레미가 허리를 들자 마차가 달려와 그의 뒤에 섰다. 호오~ 일행이 있었군? 꽤 멋진 연출이잖아? 레미는 한손으로 마차의 문을 열며 말했다. “일단 타시죠. 이후 당신에 대한 거취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주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흡떠서 재수없게 웃고 있는 레미를 쳐다보고는 스피릿의 손을 잡아끌며 마차에 올랐다. 첼시아가 말했다. “돈은?” 레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덩치큰 사내가 가죽 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퍼피가 앞으로 나서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약속했던 대금입니다. 현금으로 10억 루나. 나머지 대금은 나중에 우리들에게 필요한 증언을 해주시면 그때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이후 접선장소는 저번 방법과 같은 식으로 차후 통보하겠습니다.” 머릿속으로 번개가 쳤다. “얼마라고오!” “10억.” 고양이처럼 웃은 첼시아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고 난 그만 흥분하고 말았다! 끄으어어어~! 그리고 내가 절규하는 동안, 첼시아는 깔깔 거리며 퍼피를 데리고 후다닥 달려가버렸다. “그럼 콜트씨~! 다음에 봐!” “거기서!” 내가 꽥꽥거리며 소릴 지를 때마다 첼시아는 더욱 크게 웃어댔다. 뒷골이 당겨서 손으로 목을 주무르고 있는데 마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탕~! “두고 가기 전에 빨리 올라와라.” 창문으로 놈이 얼굴을 내밀었다. 콱 한대 치고 싶지만 꾹 참고 마부석에 앉았다. 그런데 마부도 어디서 많이 본 인물이다. “어라?” “오랜만이오.” “템!” 이전에 좀비 머리를 따러 갔을 때 아이니스를 데리고 나타났던 바로 그 템이다. 그는 여전히 묵묵한 얼굴로 고삐를 흔들더니 말을 출발시켰다. 그러다가 광장을 지나 대로로 나서자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사람 애간장 태우는 건 여전하군 그래? “신이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군.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소. 덕분에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됐어. 나는 지금 이곳에서 마차운수겸 용병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소.” “아이니스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갑자기 말을 몰던 템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그게. 그녀는 당신이 소개해준 샤먼의 마법상점에서 일을 돕고 있는데. 그, 최근 그녀가, 이, 임신을, 한 것 같소. 결혼도 안한 처녀가 임신을 했다고 상점의 마담이 성화를 부려서 이번 일이 끝나면 가, 간소하게 식을 올릴 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잠시 쳐다본 나는 와하하 웃으며 축하한다고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템은 기분 좋은 듯이 웃어가며 말을 몰았다. 한참동안 달리던 마차는 그대로 성문을 지나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이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유?”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르오. 의뢰인은 일단 국경수비대로 가자고 하던데.”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마차의 지붕 위로 기어올라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렸다. 안에서 뭔가 이야기를 주고 받던 그녀들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꺄악! 주인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안 떨어지니까. 어이, 백발.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국경수비대에 잠깐 들렸다가 캐슬린의 국경 근처에서 교전중인 있는 특수 8군단으로 향할거다. 그런데 넌 어째 바뀐 것이 없냐? 장난 그만하고 이리 들어와라. 네놈이 이제부터 할일에 대해 설명해 주마.” 입술을 삐죽 내민 나는 마차 지붕 끝을 붙잡고 재주를 넘어 창문으로 들어갔다. 공주님과 스피릿이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러댔다. 건들건들하게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은 나는 레미 놈이 알려주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대답해줬다. 뭐, 내 임무는 종전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할줄 아는 것이 싸움밖에 없어서 인지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전투에서 공주님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것. 중요한건 그뿐이다. 마차는 신나게 달려서 해질 무렵 국경수비대에 도착했다. “날이 저물었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추가 호위병력을 받아서 캐슬린으로 향합니다. 템은 내일도 잘 달릴 수 있도록 마차와 말을 정비하고, 스피 양은 공주님을 모시고 저 사람들을 따라 가세요. 욕탕으로 안내 해줄겁니다.”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주님을 모시고 멋들어진 제복을 차려입은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들을 맞으러 나온 사내들이 고개를 돌려 가죽 바지에 비취진 그녀의 멋진 뒷 모습에 정신이 팔려버리는 것을 보고 거창하게 헛기침을 하고 있으니 레미가 말했다. “그리고 네놈은 날 따라와.” “뭐야?” “일단은 부대를 잃고 방황하던 놈을 내가 주워다가 데리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를 해야 뭘 시켜 먹을 수 있을 거 아냐. 솔직히 너 같은 건 필요없지만 스피 양 때문에 산 줄 알아.” “아이구~ 거추장스럽게 따라다녀서 미안하게 됐수다.” “알면 얌전히 따라와. 이 난리통에서 발빼기가 쉬운 줄 아냐?” 레미는 내 어깨를 잡아끌고 건물안으로 들어가더니 몇몇 높으신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행정병들에게 부탁해서 서류 몇장과 종이와 펜을 쥐어주었다. “이거 다쓰고 또 뭘하면 돼?” 장교들과 이야기중이던 레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거 다 쓰고 나면 특별할건 없으니 너 하고 싶은데로 해. 아, 그렇지. 아가씨들 목욕하는데 변태들이 난입할지 모르니 가서 문앞을 지켜라. 네 첫 번째 임무다.” ==================================================================== 저라면 되려 엿볼 듯… Reload Running Fire: 96 “저는! …저는 더 이상 당신의 사촌 언니가 아닙니다.” 젠장, 눈꼴시긴 하지만 빌어먹을 전쟁에서 발 빼려면 별수 없다. 꾹 참자. 평생 도망다니며 사는 것보다는 떳떳하게 사는 쪽이 났잖아? 옆에서 행정병이 가르쳐 주는대로 서류를 끝내자 레미 놈은 어디로 갔는지 장교들과 사라지고 없었다. 높으신 분들에게 인사라도 하러 갔나?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행정병에게 목욕탕의 위치를 물어보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할일 없이 욕탕앞을 기웃거리는 사내들을 쫓아버리고 그 앞에 뒷짐을 지고 서있으니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라?” “사, 살려줘, 살려줘요~! 으아앙~!” 쿠당~! 콰장장!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니 문 넘어에서 뭔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뿔싸! 깜짝 놀라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탈의실에서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여닫이 문을 열고 안개속으로 난입했다. “뭐, 뭐야?! 누구냐! 공주님! 스피릿!” “아아앙~!” 그때 목욕탕의 안개 속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공주님께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왁!? 날 와락 끌어안은 그녀는 내 등뒤로 몸을 숨겼다. “으아앙! 살려줘요. 저, 저 좀 살려주세요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누가 쫓아온다고….” 공주께서는 잔뜩 겁에 질려서 말을 하지못하고 있었다. 그때 목욕탕안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물을 뒤집어 썼는지 축축하게 젖어버린 스피릿이었다. 한손에 단검을 뽑아든 그녀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우리를, 정확히는 내 등뒤에 숨어서 와들와들 떨어대는 공주를 쳐다보았다.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한숨을 내쉰 다는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스피릿을 날 힐끔 바라보고는 자리에 멈춰섰다. “무슨 짓이야? 이 거짓말쟁이야.” “사람의 마음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해요. 죄송해요. 주인님. 이젠 잊버리겠다고 했는데, 용서한다고 했는데, 막상 원수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게 잘 안되요.” “일단 칼부터 내려 놓고 이야기 하자. 쓸대없는 짓 하지 말고 이리와.”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고 날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 앞으로 어기적어기적 다가와서는 칼을 든 손을 내밀었다. “바보 같으니 무슨 짓이야? 그냥 뺨이나 한대 때려주고 말것이지.” “폐하와 오빠들을 잃고 나라에서 마저 도망나와야 했던 제 슬픔은 그정도로 끝날 것이 아니었어요. 주인님 죄송해요.” “괜찮… 으억!?”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을 받아들려는데 스피릿이 팔을 돌리더니 내 손목을 붙잡고 비틀었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당황하고 있는 사이 스피릿은 내 옆으로 돌아나가 비어있는 내 옆구리을 두 손으로 밀어버렸다. 평소에 그녀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줬던 것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 올 줄이야! 노예라고 방심한 대가로 보기 좋게 바닥으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지만 스피릿은 이미 단검을 들고 공주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구겨졌다. 우왁! 이런 염병! “루나마리아아아!” “아악~! 어, 언니 스피릿 언니 내가 잘못했어어! 지, 진정해!” “숙부님의 뒤에 숨어서 폐하와 오빠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뭘 느꼈어? 살려 줄수도 있었잖아? 신전에 유폐시키는 방법도 있었는데 왜 다 죽였어! 왜! 으윽…! 요,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못해에에!” 짜아악! 공주의 뺨을 때린 스피릿은 바닥에 쓰러진 공주의 위에 올라타 양손에 든 단검으로 그녀의 목을 찌르려했다. 가까스로 그녀의 팔을 붙잡은 공주는 울먹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스피릿의 눈은 이미 짐승같이 변해버려서 그녀의 말 같은 것은 전혀 들어주질 않았다. “나, 난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단 말야아~! 언니 살려줘!”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 하지마! 이 나쁜 년아! 나, 내가! 내가 폐하와 오빠들을 잃고 나라까지 빼앗긴 채 추위와 굶주림에 울먹이면서 타국을 떠돌고 있을 때 넌 뭘했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따듯한 벽난로 가에서 티타임을 즐겼을 거야! 그렇지! 한 나라의 공주가 된걸 기뻐하면서!” “아, 아냐! 아냐아~! 나, 난 절대로…! 아악! 도, 도와주세요어!! 살려줘요!” 공주가 막 일어서는 날 보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때 스피릿도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피릿은 두손으로 검을 잡고 체중을 실으며 애가 타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주인님. 저, 저 좀 도와주세요? 예에? 제, 제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신다고 했잖아요? 그, 그럼 으윽…! 이, 이 계집애를 죽이도록 도와주세요. 워, 원수를 갚고 싶…!?” 퍼어억! 스피릿의 유혹을 들으며 걸어간 나는 그녀의 배를 걷어차버렸다. 옆으로 넘어진 스피릿은 꺽꺽거리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 동안 목숨의 위협을 받던 전라의 공주께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더니 후다닥 바닥을 기어 이제 내 등뒤로 몸을 숨겼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가씨가 더러운 마룻바닥을 기어다니는 모습,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눈이 풀려버린 스피릿이 으르렁거리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셔츠의 단추를 푼 나는 옷을 벗어서 등뒤에서 와들와들 떨고있는 공주에게 내밀었다. 공주께서는 후다닥 그것을 받아 가슴을 가렸다. 난 두팔을 벌리고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둬.” “콜록콜록…! 제, 제 원수예요. 죽여버릴 거예요. 비켜주세요.” “주인님한테 명령하는 거냐? 칼 이리내.” 스피릿이 울컥하며 외쳤다. “루나마리아! 보여! 나, 난 이렇게 주인님이 있어! 노예가 되어버렸다구! 공주였다가 노예로 전락한 내 기분을, 내 기분을 네가 알아아! 이이익!” 이를 드러낸 스피릿이 검을 세우고 나에게 덤벼들었다. 내 참, 가르쳐 줄때는 비슷하게 따라하지도 못하더니 언제 이렇게 실력을 키워 놓은거지? 스피릿은 내 가슴을 파고들더니 칼을 겨드랑이 사이로 집어넣어 등뒤에 숨은 공주를 찌르려 했다. “꺅~!” “괜찮습니다. 공주님. 뒤로 물러서십시오.” 나지막하게 중얼거려주니 공주는 도리질을 쳤다. 어지간히 겁먹은 얼굴이다. 이거 안돼겠는데. 한손으로 스피릿의 허리를 붙잡아 꽉 끌어안은 나는 남은 손으로 그녀가 휘두르던 검을 붙잡은 채 고개를 꺽었다. 분노에 떨고 있는 스피릿이 보인다. “스피릿. 이제 칼놔.” 등뒤에 숨어서 훌쩍이는 공주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고 있던 스피릿이 고개를 팩 돌리더니 이빨을 드러내고 내 손에 잡힌 칼을 다시 빼앗으려 했다. 그러다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비명을 질렀다. “아악! 주인님~! 소, 손에서 피가!” 화들짝 놀라며 칼은 놓은 스피릿은 두팔을 들어 단검을 쥔 내 손을 붙잡아 당겼다. “괜찮으세요? 주인님! 소, 손 좀 보게 해주세요어~! 아앙~!” 방금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만, 그녀의 성화에 팔을 내려주니 스피릿은 울상을 지으며 조심스레 손에서 단검을 빼내고 손수건을 감아주었다. 그러더니 엉엉 울며 내 가슴을 끌어 안았다. “죄, 죄송해요! 마, 많이 아프시죠? 으아앙~! 주인님 죄송해요~!” 쯧~ 이러니 어떻게 화를 낼수가 있나. 그녀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해준 나는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붕어처럼 입을 벙긋 거리는 그녀는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이거이거, 골치아프게 됐는데. 아무리 그래도 거의 암살 미수에 준하는 사건인지라 일이 크게 벌어질거라 생각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공주님이 먼저 이 일에 대해서 함구 할 것을 요청하셔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여차하면 부대를 뒤집어버리고 도망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뭐, 다행이다. “운 좋은 줄 알아.” “…죄송해요오.” 스피릿은 지금 나와 같은 방에 앉아있다. 아가씨들의 목욕이 끝났음을 알리자 장교들이 오더니 방을 안내해 주었는데 남자들은 모두 한방이고 여자들은 각방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까의 일도 있고 해서 잠시 그녀의 방에 숨어 들어온거다. 스피릿을 자리에 앉히고 가만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구급상자를 빌려다 손의 치료를 끝내고 한참 나와 눈을 맞추고 있던 스피릿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난 붕대를 감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너 한테도 그런 모습이 있는 줄은 몰랐어. 꽤 아팠다구. 이거 어쩔거야?” “죄송해요….” “제길, 믿어도 된다고 그랬잖아.” “흐윽, 죄송해요….” 그녀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겠어. 스피릿 칼쓰는 솜씨가 여간 아니던걸?” 스피릿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쓴 웃음을 지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스피릿은 아무말하지 않고 침대에 앉았다. 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주인님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아주 버릇을 고쳐주겠어.” “주인님….” “시끄러, 넌 내 노예야. 불평하지마.” 낮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목에 키스했다. 스피릿은 내 가슴을 두손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난 그녀의 반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가만 있어. 이 정도에 용서해주는 걸 다행으로 알라구.” “우우윽….” 입을 꾹 다문 그녀는 힘없이 팔을 내렸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공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칫~! 탕탕탕~! “시, 실례합니다.” “좀 할만하면 이런다니까. 기다려보십쇼.”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니 스피릿이 내 옷깃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만나기 싫어요. 또 죽이려고 들거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몰라? 게다가 네가 벌인 일이잖아. 네가 수습해야지.” 침대에 일어나 앉은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여니 단정한 원피스로 갈아입은 공주께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를 맞이한 나는 안으로 안내했다. 스피릿은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공주를 자리에 앉힌 나는 스피릿을 번쩍 안아서 테이블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스피릿은 얼굴이 벌겨져서는 테이블을 쏘아보았고 루나마리아 공주는 나를 잠깐 이채로운 눈으로 쳐다봐주었다가 스피릿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어, 어, 언니….” “저는! …저는 더 이상 당신의 사촌 언니가 아닙니다. 저는, 숙부님의 손에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나라마저 빼앗긴, 멍청하고 갈곳 없는 계집아이일 뿐입니다. 우연히 저를 거두어주신 분이 계셨기에 이렇게나마 당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만, 이전의 슬픔을 당신에게 풀기엔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습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현 캐슬린 국왕전하를 용서합니다. 그러니 아까의 무례와 더불어 저를 잊어주십시오. 저는 이제 주인님의 말에 죽고 못사는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스피릿 애쉬드 캐슬린은 없습니다. 한 사람의 노예가 있을 뿐입니다.” ==================================================================== 벼, 벽이 일그러져 보입니다. 오오오~! 이것이 말로만 듣던 VDT증후군?! Reload Running Fire: 97 “주인님, 하, 한번 들어보기라도 하세요.” 공주께서는 말을 잊지 못했다. 그저 두손으로 입을 가리고 울먹였을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피릿은 그녀의 눈길을 피해서 침대로 걸어가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곤 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절절 저으며 한숨을 내쉰 나는 공주님을 모시고 일어나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힘 없이 테이블에 앉은 공주는 한숨을 쉬어대기만 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방문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그녀가 전 왕가의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자리에 멈춰선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머리가 좋은 공주님이니 이정도만 해줘도 잘 알아들을 거다. 문을 닫고 나가니 언제왔는지 레미 놈이 문 앞에서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었냐? 분위기가 왜 이래?” “별일 없었다. 궁금한게 있으면 공주님에게 물어봐.” 대충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가려니 녀석이 날 불렀다. “…네 방은 이쪽인데.” “여긴 내 노예의 방이야. 그러므로 난 여기서 잘거야. 이의 있어? 없으면 잘자. 내일 아침에 보자구.” “어, 어이, 야. 야, 임마!” 문을 안에서 걸어잠그고 고개를 돌리니 스피릿이 여전히 벽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공주님은요?” “자리에 앉아서 테이블 바닥을 쏘아보고 계셔.” 그러면서 침대에 걸터 앉으니 스피릿이 고개를 돌리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그래그래,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우울해. 주인님이 다 용서해줄게.” “감사합니다. 저, 주인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뭔데?” “안아주세요.” “엥?” 스피릿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더니 내 목을 감싸안고 끌어당겼다. “이젠 정말 고민 같은 거 다 잊고 싶어요. 주인님….” 그녀의 애원에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응해줬다. 별수 없다. 불결하니, 문란하니, 산만하니 어쩌니 해도, 그녀는 내 노예니까. “전 이제 갈때까지 간 노예라서 이런 편법도 사용할 수 있지만 루나마리아 공주님은 참 힘드실 거예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전 사촌언니가 이렇게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으니까.” 스피릿이 속옷을 주워입으며 말했다. 멍청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뭔가 요새 힘이 빠진다는 망상을 하며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나름대로 생각이 많은 것 같으니까. 심란하게 이상한 말 같은 거 하지마.” “알고 있어요. 참, 주인님?” “응?” “사랑해요.” 난 핏 웃으며 말해줬다. “나도 사랑해.” 옷을 다 입은 그녀는 언제 자기가 사람을 죽이려 했었냐는 듯이 헤헤거리며 내 품에 안겨서는 수줍은 키스를 해왔다.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간 우리는 공주님의 방으로 향했다. 어제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그녀의 수행원들이니까. 공주님의 방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릴 맞이했다. “마침 부르러 갈 참이었는데 와주시는 군요. 공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우릴?” “정확히는 거기 뒤에 있는 아가씨를요. 들어가 보시죠.” 스피릿을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별일 있겠냐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준 나는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옷갈아입으려고 그러시나 보지. 들어가서 도와드려.” “…예에.” 스피릿은 내심 불안한 얼굴을 하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리고 템이나 레미 놈을 찾아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등뒤에서 병사들이 불렀다. “왜요?” “공주님께서 주인님을 부르세요.” 스피릿이 문을 살짝 열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공주님이 날 부른다고? 머리를 좀 긁적이며 그녀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가니 공주께서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테이블에 앉아 계셨다.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자 공주님은 마주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하고는 날 불러 자리에 앉도록 했다. “절 부르셨다구요.” “예.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공주께서는 스피릿의 눈치를 조금 살핀 다음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제게 이런 만남을 주선해 주신 신께 감사드려요. 시간이 없으니 단도 직입적으로 말하죠. 콜트 슈발츠씨. 날 구해주세요.” 방안을 좀 두리번 거린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되물었다. “…최근 누구가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계십니까?” “주인님. 공주님께서는 지금 진담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스피릿이 옆에서 거들었다. 알고 있다고 손을 흔들어준 나는 삐딱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젠장, 갑자기 그러면 나더러 어쩌라구. 지금 우리 코가 석자인데! “뭐, 저도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볼모로 잡혀 간다는 것. 하지만 왜 내가 당신을 구해줘야합니까? 이쪽도 살길이 막막한 지경이라구요.”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들 뿐이에요. 이런 말도 안되는 전쟁이 더 이상 계속 되어서는 안돼요. 그럴려면 사건의 진상을 알고있는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 탕탕~! “공주님. 레미 제라블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깜짝 놀란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망토를 입기 시작했고 스피릿이 그녀를 도왔다. 그리고 뻘쭘히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스피릿이 계속 눈치를 주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오, 그래. 문안 인사 드리러 왔냐. 어서와라.” “…왜 네놈이 여기 있지?” “왜긴 왜야. 수행원으로서 할일을 한 것뿐이지. 경비병들이 안 가르쳐주디?” 레미 녀석은 눈썹을 세우고 날 쳐다보다가 문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옷을 다 갈아입은 공주님이 그를 바라보며 몸을 돌렸다. “준비 다됐어요. 출발인가요?” “예. 식사 후 바로 출발 합니다. 나오시죠.” 공주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스피릿의 손을 꼭 붙잡고 레미를 따라 문을 나섰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아무래도 공주에게 코를 꿰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제 일에 대해서 피해자인 그녀가 먼저 함구 할 것을 부탁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콱 꼰지를 수도 없고 골치 아프네. 이대로 협박조로 나오면 재미 없어지는데 말야. 회색 머리 아가씨들은 다들 속에 너구리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코를 벌렁거리며 몸을 바로 세운 나는 그녀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공주님은 레미와 함께 귀빈실로 가고 나와 스피릿, 템은 따로 준비해놓은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먼저 마차로 나가서 기다렸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레미 녀석이 공주님을 호위하여 몇몇 장교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럼 이제 출발 하겠습니다. 마차에 오르시죠 공주님.”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피릿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팔짱을 하고 있던 나는 공주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오르는 레미 놈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뭐야?” “호위대다.” “달랑 4명? 칫, 한 나라의 공주님을 모셔가는데 좀 팍팍 쓰면 안돼는 거야?” 그때 마차에 오른 사내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두두두하는 땅울림이 들리는가 싶더니 건물뒤에서 수십기의 기마대가 쏟아져 나오더니 마차의 앞뒤로 정렬했다. 레미가 웃으며 말했다. “기마대 40기 정도면 부족할까?” 십부장들이었군.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린 나는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템이 스피어 한 다발을 마차 지붕 위에 묶고 있다가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마대가 40기나 따라가는데 그런건 뭐하러 가져왔어요?”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거라오. 레미씨, 출발합니까?” “물론이외다. 목적지는 어제 설명 한대로고, 지리는 선두의 기마대를 따라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아서 고삐를 쥐었다. 그러고 있으니 선두의 십부장 하나가 마차로 다가와 뭐라고 이야기를 한 다음 기마대를 출발시켰다. 팔짱을 하고 자리에 앉은 나는 아까 공주님이 한 말을 되새겨보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보라구. 어떻게 정규기마대 40기를 상대로 여자 둘을 빼내냔 말야. 이건 애초에 무리야 무리.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공주님의 제안을 적당히 무시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공주 전하는 끈질겼다. 그날 저녁, 벌판 한가운데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레미 놈이 날 불렀다. “왜?” “기사 몇 명 붙여 줄테니 잠깐 따라갔다와라.” “어딜?” 레미는 등뒤에서 헛기침을 하고 있는 공주님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내 귀에 대고 모종의 생리현상애 대해서 속삭였다. 머리를 좀 긁적인 나는 스피릿과 함께 공주님을 모시고 근처의 숲속으로 향했다.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려요.” “예.” 공주님의 명령에 기사들은 야영지와 숲속에서 중간 쯤 되는 곳에 뒷짐을 진채 섰다. 나는 어쨌냐고? 공주님과 스피릿이 들어간 숲속의 입구에 뒤돌아서서 팔짱을 한 채 멀찍이 서있는 기사들과 눈싸움을 했지.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숲속에서 공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때요?” “늦으시는군요. 큰 일니까?” “푸흡~!” 스피릿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공주님은 거창한 한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큰 일은 큰 일이죠.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군요? 내가 이대로 베레타로 넘어가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세요?” “그런거 모릅니다. 관심도 없구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진실을 알려드리죠.”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일 끝났으면 빨리 나오시….” “고개 돌리지 말아요!” 윽…. 움찔해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만약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날 있었던 사건을 레미씨에게 말해버릴거예요.” 결국 협박이냐?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스피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하, 한번 들어보기라도 하세요.” “너까지 감염된거야? 공주님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넌 공주님과 원수지간이라구. 저번 일을 돌이켜 봐도 그렇게 쉽게 용서 될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 물론이지요. 하지만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랍니다. Reload Running Fire: 98 “…레미 제라블.” 스피릿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애쉬트 캐슬린가의 마지막 생존자인 스피릿 애쉬드 캐슬린을 감히 노예로 삼고 있는 당신은 이 이야기를 들은 자격과 이유가 있어요.” 어떻게 구슬렸는지 모르지만 원수까지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공주님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라고 해줄려다가 참았다. 그러고 있으니 공주님께서 계속 이야기를 하셨다. 레미 녀석에겐 공주님이 변비에 걸리셨다고 해줘야겠군. “베레타와 캐슬린이 이렇게까지 전투를 벌이게 된 이유는 결국 캐슬린 평화사절단과 루나마리아 공주, 바로 저의 실족이었어요. 그런데 아세요? 사실은 평화사절단을 습격한 자들이 그랜퍼스의 정보국 요원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반년 전에 실종된 제가 어디에 있다가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아요? 우연히 모험가가 찾아낸 것으로 조작해놓았지만 사실 전 그랜퍼스 외곽에 있는 인피니티의 신전에 유폐되어 있었어요. 생각해보세요. 캐슬린은 결전병기를 보유할 정도의 국방력을 가진 나라예요. 그런 나라를 구석까지 몰아붙이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베레타는 그랜퍼스와 연합을 이뤘으니 지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양국은 그야말로 파국으로 달려가게 될거라구요. 그럴수록 전쟁을 부추긴 그랜퍼스에서는 이익이죠. 계속 양국에 전쟁 물자를 팔면 되니까. 물론 그랬다간 양국의 비난을 받아 자신들의 계획이 탄로날 수 있으니 적당히 단물만 빨고 끝내려고 숨겨두었던 저를 베레타 쪽에 보내서 의도적인 강화를 이끌어내도록 하려는 거예요. 그래도 자국으로서는 이익이니까. 아시겠어요?! 그랜퍼스의 멍청한 상인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같잖은 잔머리를 굴릴 결과가 결국 이런 싸움을 부른거라구요! 용서 할수 없어요! 이 치욕은 반드시 갚겠어요! 감히 우리나라를…!” 공주님은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이전 공주님이 옆에 있으니까. 자기 욕심대로 말할 수가 없었겠지. 입맛이 쓰다. 공주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우리 나라가 돈 좀 만져보려고 양국의 싸움을 붙인 꼴이란 거잖아? 끄으음~! 갑자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되니 머리가 아픈데? “그래서 공주님이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물론이죠. 본국으로 돌아가 우리가 속고있다는 것을 알릴 거예요. 그래서 이런 바보 같은 전쟁을 그만 두게 할거예요. 그랜퍼스는 두 나라를 이간질한 혐의을 부인할 수 없을 거에요. 벌은 반드시 받게 될거예요. 하지만 무력 충돌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그리고 원한다면 당신과 언니에게 작위와 영지를 내려 캐슬린에 정착하여 함께 살 수 있도록 해드리겠어요. 어때요?” 웃음이 다 나오는군. “탈출에 성공하여 당신이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렇다는 거겠지요?” 공주께서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숲속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지나가며 말을 이었다. “물론이에요. 도와줘요. 콜트씨. 큰 아버지와 사촌오빠들을 죽이면서까지 언니에게서 빼앗은 나라에요. 어떻게든 지켜내지 않으면, 그렇지 못하면 죽어서 그분들을 다시 볼 면목이 서질 않는다구요.” 갑자기 가슴 속의 뭔가가 뜨끔하는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옆을 걸어가는 공주의 눈을 바라보는 실수를 저지른 나는 그만 못볼 것을 보고 말았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지켜만 봐야 하는 공주의 우수에 젖은 표정과 애처러운 눈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그녀의 처절한 거짓말과 고도로 꾸며진 연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실감 나는 것 같아. 남자라는 생물은 대체로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고 하더니 사실인 건가? 아니면 공주님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와 호소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중요 한 것은, 한심하고 지랄맞게도 거짓말일지도 모르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내 마음이 움직였다는 거다. “빌어먹을…! 아직은 몰라요. 하지만 좀더 기다려 봐요. 기회가 오면 들고 튀어 줄테니까. 대신 의뢰비는 톡톡히 챙길 겁니다. 알아서 준비 해놓으쇼.” 공주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을 앞세우고 걷기 시작하는데 스피릿이 내 곁으로 다가와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고마워요. 주인님.” “시끄러워.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입 싹 닦은 거야? 그날 했던 바보 짓은 대체 뭐냐구.” 스피릿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어요. 10년 전의 일이고 다 지나갔으니 잊으라고, 전 주인님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노예랍니다.” “…자꾸 구름잡는 소리 할래?” 저 앞에서 기사들이 천천히 다가오자 스피릿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어요. 어떤 식으로 말하더라도 듣지 않기로 했어요. 하지만 그게 잘 안돼더라구요. 공주님이 용서를 빌고 자길 도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 전쟁을 막지 못하면 캐슬린이라는 나라는 주변국들의 이용만 당하다가 마침내는 쓰러져 먼지처럼 사라질거라고 했어요. 상황을 되짚어봐도 그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전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했어요. 비록 이제 내 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제대로 발악 한번 못해보고 표표히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지켜볼 수 없어요. 죄송해요 주인님. 전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그게 거짓말이 되어버렸어요.” “칫~! 자기 의지를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지 말란 말야.” “뭐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외다.” 기사들은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공주님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기사들에게 말해주었고 나를 쳐다보던 그들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야영지로 돌아간 나는 마차 지붕에 드러누워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큰 일이야. 아주 큰 일이야.” “뭐가 큰 일이라는 말이오?” 뜨거운 컵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온 템이 물었고,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어주었다. “8군단 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두번 정도 더 노숙하면 도착 할겁니다.” 그럼 내일 저녁이구나. 빌어먹을, 기마대가 40기나 된다. 앞뒤 생각 할 것 없이 골든피크를 써서 달려야겠는데. 어디 몬스터가 좀 습격하러 와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저 정도 전력을 상대할 정신 나간 것들은 없을 거다. 제길~! 화장실 간다고 할때 데리고 튀어야겠어? 주머니를 뒤적여 남아있는 스크롤을 확인한 나는 거창한 한숨을 내쉬며 마차 지붕에 들러누웠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큰 일이 휩싸인거지? 에잉~! 따뜻한 침대에서 스피릿 엉덩이나 주물렀으면 천국이 따로 없을 텐데. 괜히 공주에게 밑보여서는… 나도 어쩔수 없는 놈이다. 두두두두두~! 다음날, 신나게 달리는 마차 위에 앉아서 오만상을 찌뿌리고 있던 나는 마침 생각 난 것이 있어 템에게 일러뒀다. “템, 부탁인데. 만약 싸움이 일어나면 당신은 나서지 마쇼. 무사히 돌아가서 아이니스랑 식 올려야 할거 아뇨?” 의아한 표정을 지은 템이 마차를 몰다 말고 쳐다보았다. 잠시 나와 시선을 맞추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됐어. 한결 났구나. 뭐, 레미 놈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파지직~! “뭐, 뭐야?! 골든피크라니! 어, 어이! 무슨 짓이야!” “방해하지 말고 비켜!” 투투투투투투퉁!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 멀찍이 서있는 기사들에게 난사해준 나는 곧바로 몸을 돌리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아가씨들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사나이 가는 길에 망설이지 말자구! 둘다 이리와!” “꺄악~!” “어, 엄마야?!” 엄마야라니. 다큰 공주님께서 말야. 두 아가씨를 어깨위에 짊어진 나는 이를 드러내고 미친 듯이 숲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시집 갈 때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얼굴 가리쇼!” “꺄아아악?!” 나뭇가지를 박살내며 달려나간 나는 숲밖으로 내동대이 쳐지듯이 뛰쳐 나갔다. 등뒤에서 땅울림이 들려온다. 올것이 왔구나! “스피릿! 스크롤 찢어서 던져!” “예, 예에에!” 스피릿은 내가 쥐어주었던 스크롤을 뭉텅이로 찢어서 집어던졌다. “매직 미사일! 파이어 볼! 일렉트릭 필드! 라이트닝 볼트!” 쾅쾅쾅쾅쾅~! 파지지직! 파지직! 뻐버버벙~! “이히히힝~! 푸르륵!?” “우왁?!” “잡아! 반드시 잡… 으으악!?” 등 뒤로 섬광이 번쩍거리고 말 울음 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를 드러낸 나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으니 골든피크가 끝날 동안만 미친 듯이 달리면 적당히 멀어질 수 있을거다! 그 뒤에 숲속에 숨으면 게임 끝이야! “으랴아아아아~! 뭐하고 있어! 붙잡히면 쓸모도 없어! 전부 찢어버렷!” 스피릿은 비명을 지르며 쥐어준 스크롤을 북북 찢어서 달려오는 기마대에게 던져댔다. 고개를 돌린 나는 나오지도 앉는 젖을 입에 물고 용을 쓰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정말 젖먹던 힘까지 내면서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마 골든 피크가 끝나고도 30분 정도 더 뛰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악…! 하악! 나, 나 이제 더… 더는 못 뛰어. 허억! 헉!”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앞드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집어 던져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찍은 스피릿이 다가와 날 추슬러주었다. “괜찮으세요? 주인님.” “하악! 학…! 마, 말시키지마! 헉! 허억!” 산소부족으로 머리가 띵하다. 염병~! 한참 그러고 있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우리가 달려온 곳을 바라보던 공주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스크롤에 담긴 마법중에 지연성능을 가진 것이 있나요?”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더니 여전히 쿵쾅거리며 폭음을 터져나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의문을 표현했겠지만 곧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숨을 몰아쉬는 데에만 전념을 다하기로 했다. 어느정도 숨을 고른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들을 데리고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여, 여기 있다간 들킬지도 몰라.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숨어야해.”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시, 시끄러워. 나 아직 안죽었다구.” “그래? 내 눈엔 곧 죽을 듯이 보이는데.”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롱코트 자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서있었다. 녀석의 손아귀에는 붉은 빛을 머금은 롱소드가 들려있었는데 그것이 피 때문인지 아니면 칼이 뿜어내는 오오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옆에서 날 부축하고 있던 루나마리아 공주님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레미 제라블.”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런데 참 서투르시군요. 저는 공주님이 좀더 차분하고 신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군요. 하지만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어요. 저는 캐슬린으로 돌아가야해요. 그래서 당신네 나라가 꾸미고 있는 음모를 알리고 이 의미없는 전쟁을 막아야 한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꼭 저런 놈에게 부탁을 하셔야 했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쉽게 잡히는 거라구요. 그리고 너도 그래, 이 바보 녀석아. 생각한게 겨우 이런거냐? 좀 치밀하게 계획하지는 못하는거야?” ==================================================================== 반성중입니다. Reload Running Fire: 99 “우리 말야. 정말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거지?” 듣자듣자 하니 날 아주 가지고 놀고 있잖아? 이를 드러내고 몸을 돌린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세워주며 놈에게 다가갔다. 스피릿이 팔을 붙잡았지만 뿌리쳐버렸다. “닥쳐, 이 염병할 놈아. 네가 공주님의 절박함을 알아? 그녀의 울분을 알아? 돌아가야 한다고 울먹이는데 어쩌라고, 사촌을 상대로 반란까지 일으켜서 지독하고 악랄하게 빼앗은 나라를 이렇게 말아먹을 수는 없다고 울면서 매달리는데 그럼 어쩌라고오!” “하지만 그녀를 돌려보내면 우리나라가 욕을 당하게 된다. 그래도 좋으냐?”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놈은 깔보는 웃음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난 입을 꾹 다물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이다! 애초에 국가간의 분쟁에 개인이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거였어! 에이 젠장!” 몸을 돌린 나는 스피릿의 손에 들려있는 자동석궁을 빼앗아 녀석에게 겨눴다. 투투투투투투투퉁~! 부츠에 스펠을 박아 뒀는지 녀석은 단번에 나무 위로 숫구쳐 올랐다. 이런 젠장! 고개를 꺽어 녀석을 찾은 나는 아가씨들의 등뒤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석궁을 겨눴다. “꺄악~! 주인님~!” “물러서!” 찰칵! 방아쇠를 당겼지만 화살은 나가지 않았다. 쿼렐이?! “하하, 신은 내 편인가보다. 그만 항복하지?” 고개를 돌린 나는 검을 뽑아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칼도 나눠보지 못하고 녀석에게 막혀서 보기좋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멍청한 녀석, 골든피크까지 쓴 주제에 누구에게 덤비려는 거야.” “우, 우리 주인님 때리지 마세요!” 뭔가가 내 앞을 가로막더니 팔을 벌렸다. 떨리는 고개를 돌려보니 스피릿의 작은 등이 보인다. 하하, 노예의 치마폭에 감싸이기나 하고, 나도 이제 갈 때까지 간거냐? 그런데 레미 놈의 반응이 좀 이상하다. 녀석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어, 어마?” 옆에서 보고 있던 루나마리아 공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녀를….” “예. 알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스피릿 애쉬드 캐슬린 전 공주전하.” 스피릿이 움찔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레미는 팔짱을 하며 말했다. “이전에 캐슬린의 근위대장이 벌인 소동을 기억 하실겁니다. 그때의 일을 조사하면서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요. 캐슬린 이중간첩을 우습게 보시면 안됩니다?” 이, 이중… 뭐? 기절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공주님이 레미 녀석을 얼싸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이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언젠가 처럼 마차에 실려가고 있었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깨어나셨군요?! 주인님!” “어, 으으응.” 스피릿이 날 껴안고 꺅꺅거리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앞자리에 앉아있던 레미가 톡 쏘아줬다. “일어났군. 바보놈.”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세요. 딴에는 절 돕기위해서 그러신 거라구요.” “예.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깨어났으니 기쁘다 이 바보놈아.” “쓰읍… 자꾸 바보바보 할거야?” 스피릿과 공주님이 우릴 말리지 않았다면 또 한판 붙었을 거다. 레미 놈에게 듣기로 녀석은 그랜퍼스에서 파견된 캐슬린의 이중간첩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쉽게 말하면, 그랜퍼스에서 파견되었다가 캐슬린에 매수당해서 본국에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캐슬린에는 자국의 정보는 제공하는 간첩을 말해요.” 스피릿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며 쏘아줬다. “이거 완전 매국노잖아?” “…좋을 대로 생각해라. 쪼다놈아.” 어쨌든 그는 그랜퍼스에서 받은 명령에 따라 공주를 찾아서 8군단으로 이송하는 일을 맡았지만 사실은 단독으로 그녀를 캐슬린으로 돌려보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기마대는 따로 써먹을 데가 있었는데 네놈이 나서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져버렸어. 어떻게 책임 질거야? 앙?” “이거 왜 이러셔? 그런건 나 말고 공주님에게 따지라고.” “죄송합니다. 레미씨. 제가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레미는 호들갑을 떠며 그녀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코를 벌렁이며 두 사람을 쳐다보던 나는 스피릿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하루하고 반나절이요.” “그럼 꽤 왔겠네? 여긴 어디야?” “캐슬린의 메이라 지방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목적지인 페이커 요새에….” 녀석이 말을 하는 중간에 마차가 정지했다. 레미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말했다. “왜 그러는 거요?” “앞에 군대가 있소. 전투 중 같은데?” “뭐요!?” 레미 놈이 창문으로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나도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마차가 언덕 위에 올라 있어서 전망이 꽤 좋았다. 보아하니 저 멀리 성 같은 것이 있고 그 앞으로 수천의 병사들이 몰려서서 공선전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폭음과 비명소리가 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아스라이 들려온다. 그때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어이가 없어서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봐! 뭘 어쩌려는 거야?! 그냥 보내 줄거라고 생각해?!” “저 앞에 있는 부대에는 베레타의 발파로스 군단과 헤이버 군단이 있어! 내가 알아서 알테니 입다물고 따라와!” 레미 녀석은 자신 있는지 외쳐댔다. 고개를 돌린 나는 멀뚱히 날 쳐다보는 아가씨들을 보고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인데. 그녀들은 레미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들었기 때문에 마차가 베레타 군으로 달려갔을 때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의 베레타의 정권은 두개로 나눠어져 있다고 한다. 하나는 주화파. 나머지는 주전파를 가장한 혁명파. 웃기는 것은 주화파가 현재 전투를 벌이고 있는 베레타 군부이고, 주전파는 자국에서 실질적으로 전쟁을 관장하고 외교적으로 캐슬린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귀족원과 원로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강력한 왕권을 가졌지만 나이가 어려 공사를 분간하지 못하는 국왕을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새 국왕을 세우려는 반란자들이기도 하다고 내 앞의 대머리 아저씨가 말했다. “폐하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전투를 벌어긴 했지만 이건 뻔히 보이는 싸움이오. 결전병기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녀석을 보유한 강대국을 상대로 전면전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뭐가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반란 일줄은 꿈에도 몰랐소. 돌아가면 내 기필코 귀족원의 멍청이들을 요절 내버릴 것이오! 그리고 놈들의 부탁에 따라 우리들과 캐슬린이 싸우도록 부추긴 망할 그랜퍼스 장사치들도 절대로 가만 놔주지 않을 것이고!” 지금 우리들은 발파로스 군단의 사령관 실에 모여 있다. 그랜퍼스 군으로 갔다면 꼼짝없이 붙잡혔을 테지만 지금 있는 곳은 사령관이 주화파이기 때문에 괜찮은 거라고 한다. 그나저나 발파로스 군이면 그랜퍼스 3군단이랑 연합하던 부대인데. 용병단 사람들은 다들 살아있으려나 모르겠군. 찾으러 가고 싶지만 그랜퍼스 쪽으로 같다간 바로 붙잡힐테니 그냥 눈 딱 감기로 했다. 그때 흥분해서 머리가 벌겋게 달아오른 쿤 사령관이 헛기침을 좀 한 다음 레미를 쳐다보았다. “당신들의 부탁은 기꺼이 들어주겠소. 우리쪽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할 상황이니까. 더군다나 국왕폐하까지 밖으로 나와 계신 이상 잘못 되었다간 더 큰일이 발생할 수 있소.” “감사합니다. 쿤 사령관님.” “아닙니다. 공주님. 저희야 말로 죄송할 따름이오.” 자리에서 일어난 쿤 사령관은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사과했고 루나마리아 공주님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결국 눈물을 머금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스피릿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삐딱하게 기울인 고개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스피릿.” “예.” “내가 지금 머릿속에 아주 복잡해서 그러는데. 정리를 한번 해볼테니까 맞는지 봐줄레?” 착한 스피릿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정리해 보면, 최초 평화사절단으로 베레타로 향하던 루나마리아 공주님과 사절단이 실족했다. 강도내지는 도둑들의 소행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랜퍼스 정보부 소속의 요원들이 자행한 일이며 공주는 근처 신전에 유폐되고 베레타에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을 비공식 채널로 캐슬린에 퍼트려졌다. 그 이후에 캐슬린 근위대장이 그랜퍼스에서 사고사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발견된 베레타제 무기들을 가지고 억측을 만들어 그들간의 감정을 악화시켜 급기야 이렇게 전쟁이 터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랜퍼스에서는 겨우 돈 좀 벌어보자고 일부러 전쟁을 부추긴 것이 아니고 국가전복을 꽤하는 베레타의 귀족원으로 부터 일부러 전쟁을 일으켜 쿤 사령관과 같이 예민한 사람들의 눈을 돌리도록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전투동안 상대국에 무기와 병력을 파병하여 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고 또한 반란이 성공하면 여러 가지 이익을 약속 받을 수 있으니 그랜퍼스에서는 고민 끝에 그 일을 승낙하고 성공시킨 것이며 베레타에서는 전시의 혼란을 틈타 예정대로 남겨둔 군단들을 이용해 국가전복을 준비하는 중이다. 그리고 여기서 공주님의 존재는 반란이 성공한 뒤 전쟁를 종결 지을 열쇠로서. 물론, 사실을 알고있는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꿈에도 없고, 그녀를 볼모로 캐슬린과 의도적인 강화를 맷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계기로 인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된 전장의 사령관들은 염병한 귀족원을 박살내기 위해 군대를 돌리려고 본국으로 이송할 루나마리아 공주를 캐슬린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그들에게 임시휴전을 요청한 것이다. …이게 맞아?” “그렇소.” 고개를 돌리니 쿤 사령관과 레미, 공주님까지도 천막의 구석진 곳에서 노예를 상대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쑥쓰러워진 나는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쿤 사령관은 헛기침을 조금 한 다음 입을 열었다. “공주님과 레미 군은 나와 함께 이번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도록 합시다. 그 외 나머지 분들은 숙소에서 잠깐 쉬도록 하시오. 부관!” 사령관이 고함을 지르자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달려왔다. 쿤 사령관이 그에게 베레타 말로 뭐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들을 그리 떨어지지 않은 천막으로 안내해 주었다. 베레타식 천막의 내부 인테리어는 우리내와 많이 달랐다. 우리들은 그냥 맨땅에 야전침대 하나만 놓고 생활하는데 이 사람들은 희안하게 천만 안에 모닥불을 피우고 무려 양탄자를 깔아놓고 있었다. “여, 여기서 쉬도록 하시오. 나중? 아니, 조금 후에. 다시, 오겠다.” 어색한 그랜퍼스 말로 우리들을 천막안으로 들여보낸 베레타 장교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건 뭐야? 그냥 바닥에 앉으면 되는 거야?” “원래 유목민들이라서 이렇게 꾸며 놓은 거예요. 거기 방석 위에 앉거나 하시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잠시 방석에 앉아있다가 다리에 쥐가 나는 것을 느끼고 그냥 스피릿의 무릎을 베고 벌렁 드러누웠다. 불가에 앉아있던 템이 못볼 것을 봤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지만 난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숭 떨지마쇼. 집에서 아이니스 무릎 한번도 안베어 봤수?” 어이없는 듯이 날 쳐다보던 템은 고개를 절절 흔들더니 맘대로 하란 듯이 몸을 돌렸다. 그의 넓은 등을 힐끗 쳐다본 나는 스피릿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노예아가씨.” “예.” “우리 말야. 정말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거지?” ==================================================================== 바보 작가 때문이지요. 미안해요 콜트 군. 스피릿 양, 고의는 아니었어. Reload Running Fire: 100 “으악~! 난 안간다니까요!”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그녀는 살폿 웃으며 하얀 손으로 내 얼굴을 만져주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언제나처럼 평화롭게 살아요. 그때가 되면 전 더 이상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테니까.” “뭐라고 부를건데?” “콜트씨라고 불러드릴게요.” “난 주인님이 더 좋은데.” “안돼요. 전 주인님 바가지 복복 긁고 싶단 말예요.” “지금도 자주 긁고 있잖아?” 스피릿은 풋하고 웃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템만 없으면 키스라도 해주고 싶은데. 꾹 참자. 잠시 그러고 있으니 레미와 공주님이 돌아왔다. “…뭐하는 거냐?” 공주님의 이채로운 시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나는 머리를 좀 긁적이며 손을 흔들었다. “어, 뭐, 그냥 푹신하길레 좀 베고 누워있었어.” 이마를 찌뿌리고 날 쳐다보던 레미는 막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이 스피릿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대체 어쩌다가 이런 놈을 만나시게 된겁니까?” “어마, 우리 주인님이 어때서 그러세요? 전 세상에 어떤 남자들을 데려와도 우리 주인님보다 좋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레미는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난 감동에 젖어 그녀를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공주님이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두 사람 보기 좋아요.” “공주의 직위에서는 느낄수 없는 특권이라고 이랄까요?” “…그래서 조금은 부러워요. 언니.” “언니라고 하지 마세요. 공주님.” 스피릿이 손가락을 흔들어주었고 루나마리아 공주님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템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레미가 거창하게 헛기침을 하며 우리들의 시선을 잡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페이크 요새로 숨어들기로 했다. 미리 페이커 요새로 전령을 보내 새벽에 들어간다고 해뒀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쓸만한 마법사와 병사들도 빌려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여러분 나름대로 준비를 해두도록. 그리고 템, 계약이 조금 변경됐지만 보수는 세배로 쳐줄테니 마차를 부탁합니다.” “알겠소.”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 무렵에 천막을 나서서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서 그냥 무기고에서 쓸만한 장검과 화상통만 몇 개 구한 다음 마차를 정비하는 템을 돕고 있는데 부탁했던 마법사들과 병사들이 도착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이다. “어라아? 저기 단발머리 엘프 아가씨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예? 어마?! 아세트!”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던 아세트가 우릴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두분 다 여기 계셨군요? 정말 오랜만에요. 다친 곳은 없으시죠?” 잠깐 우리들의 몸을 살펴보던 아세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우리들의 손을 한번씩 잡아 주었다.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건 그 놈도….” “어어어어라아아아아아?!” 고개를 돌리니 웬 변태가 로브를 치마처럼 붙잡고 달려오고 있었다. 라이트는 기적적으로 연인을 찾아낸 처녀마냥 날 덥썩 끌어안았고 난 비명을 지르며 녀석을 떼어내느라 좀 애를 먹어야 했다. “너무 하는 걸? 전쟁과 평화의 신 캘리버의 도움으로 사랑하는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말야. 좀더 기쁘게 맞아주면 안돼?” “…요새 마법사는 신도 믿냐?” 라이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렴. 이런 곳에서는 신의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으면 살기 힘들거든?” “마법사 주제에 이상한 소리마. 그나저나 다시 만나니 반갑다. 어떻게 된거야?” “우리들은 마법사 길드에서 기본 교육만 받고 바로 부대에 배치되었어. 너희들이랑 같은 곳에 떨어지게 해달라고 밤마다 기도했는데 아무래도 내 신앙심이 부족했나보다.” “마법사 주제에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마.” 전장에서 다시 만난 라이트는 끝까지 그 유쾌함을 유지한 채 다시 만나 반갑다고 낄낄 거렸다. 그와 그간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니 십수명의 병사들이 우루루 사령실이 있는 천막앞으로 몰려왔다. 무장이 제각각인 걸 보니 용병들인가보다. 그들을 인솔해왔던 장교가 사령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데 용병 중에서 웬 곰 같은 것이 달려나오더니 이렇게 외쳤다. “형님!” “에엥? 우왁?!” “으허어엉~! 형님 살아있었수까!?” “뭐, 뭐야 당신 누구야아! 이거 놔!” 날 와락 끌어안고 엉엉거리는 사내를 쳐다보며 악을 써대니 그가 고개를 들어보였다. 땟 국물이 줄줄 흘르는 얼굴인데다 어두워서 잘 알아 볼수는 없었지마 낙이 익은 얼굴이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에 주저앉아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녀석을 쳐다보다가 심이 깊은 우려를 담아 입을 열었다. “잠깐… 혹시, 헝크냐?” “그렇수! 나 헝크요! 콜트 형님~! 살아있었다니이이! 정말 다행이야! 으아아~! 신이여 감사합니다아!!” “시끄러우니 조용히 좀해!” 녀석을 윽박질러주고 있으니 어디서 담배연기가 흘러나왔다. 헝크의 머리를 때리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게슴츠레 눈을 뜬 사내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서있었다. “살아있었구나. 다행이다.” “어라? 켄 영감?” “허, 그 소리 오랜만에 들어보는걸?” 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때 헝크 놈이 날 놓아주더니 비명을 지르며 누군가에게 달려갔다. 아뿔싸! “스피리이이잇~!” “허, 헝크씨? 어맛~!” “당장 놓지 못해!” 헝크가 스피릿에게 뽀뽀를 하려는 것을 억지로 막아내느라 긴장을 했더니 식은 땀이 다 배어나온다. 우라질~! 숨을 씩씩 들이키고 있으니 나에게 맞은 곳을 쓰다듬고 있던 헝크가 물었다. “살아있었으면 우리 찾으러 왔어야지 말이야. 형님 너무 하셨수.” “시끄러워. 너희들이 어디 있는 줄 어떻게 알아? 난 오늘 도착했단 말야. 그런데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군?” 켄이 대답했다. “그날 기습을 받았을 때 너희를 비롯해서 부대의 반수 이상을 잃어버렸어. 뿔뿔히 흩어져 있는 것들을 겨우 모아서 여기까지 왔지. 놈들이 아이언 골렘을 앞세워서 여기저기서 기습을 해대는 통에 우리 딴에는 고생도 많이 했다. 너희들은?” “정신을 차려보니 스피릿하고 나 뿐이더이다. 별수 있수? 왔던 길을 되돌아 무작정 마을로 향했지. 어찌어찌 하다보니 다시 돌아온거요. 어쨌든 살아서 다시 만나니 반갑소.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은데 힘들겠어.” “왜?” “난 오늘 다른 곳으로 가야하거든?” 헝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어딜 가는데!” “그간 비밀이라서 못 가르쳐 줘. 중요한 임무라는 것 밖에는.” “으악~! 말도 안돼!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스피릿! 아니 누님! 이번에 헤어지면 아마 다시는 못 만날거요! 이전 용병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제 우리들 뿐이란 말요오~! 우잉~! 친구들을 또 이런 식으로 떠나보낼수는 없수다!” “허, 헝크씨.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스피릿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훌쩍이며 매달리는 녀석을 달래기 시작했다. 눈살을 찌뿌리며 녀석을 쳐다보고 있으니 켄이 물었다. “저기 마법사님들도 같이 가는 거냐?” “…잠깐, 라이트, 너 여긴 어쩐 일이냐?” “어, 발파로스 군에서 내가 있는 1군단으로 쓸만한 마법사 있으면 보내 달라고 했었어. 뭐라더라? 페이커 요새를 공략하기 위한 특수 임무때문이라나?” 이런 젠장. 그럼 이 친구들이 우릴 따라올 병사들이란 거야? 왜 하필이면 죄다 그랜퍼스 군에서 데려온거지? “당연하지. 너 같으면 위험한 일에 자기네 병력 쓰겠냐?” 사령실의 천막에서 레미가 걸어나왔다. 그랜퍼스 대령급의 제복을 멋들지게 빼입은 녀석은 헛 기침을 한 다음 장교에게 병사들의 소개를 부착했다. “3군단 용병대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자들입니다.” 레미 놈이 일행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켄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싸움 좀 하시오?” “그걸로 밥 벌어 먹고 사는 뎁쇼.” “좋소. 어차피 만일을 대비해 데려가는거니까. 그런데 꼴이 그게 뭐요? 류크 중사.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모르니 이 사람들 깨끗하게 씻기고 새 제복으로 갈아입혀서 23시 까지 이 자리에 다시 집합시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용병대는 전원 날 따라오도록.” “어? 뭐, 뭐야? 마지막 전투라니?! 설마 특공인거야! 난 싫어! 좀 더 살거야! 아직 장가도 못갔는데 뭔 개소리얏!” “어, 어마. 헝크씨~!” 헝크가 스피릿의 허리를 끌어안고 안가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다른 사내들도 좀 불편한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장교가 주춤하며 그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걸 보고있던 나는 팔짱을 하며 말했다. “어이, 켄 영감.” 켄과 용병들이 날 바라보았고 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번 작전에는 스피릿도 갑니다. 잔말 말고 따라오쇼. 노예 계집도 가는데 뭐가 그리 무섭수? 뭐, 정 오기 싫으며 안와도 좋지만 대신 가랑이 사이에 있는 거 떼어버리시구랴.” 그러자 용병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켄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빼내어 재를 털었다. “어이 장교님. 아무래도 특공 같은데. 돈은 많이 줍니까?” 레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성공하면 평소에 받는 급료에서 10배 주지. 그리고 내일 당장 전역 시켜드리겠소.” “오호~! 좋은데? 들었지? 10배 란다. 게다가 집에도 갈 수 있어. 목숨이 아까운 녀석들은 구질구질한 막사로 돌아가고, 나랑 같이 팔자 한번 고쳐 볼 사람은 장교님 말씀 들어라. 그리고 넌 이리와.” “으악~! 난 안간다니까요!” “닥쳐~!” ==================================================================== 헝크는 바이오하자드2 제 4생존자의 그 헝크에서 따왔습니다. Reload Running Fire: 101 “어라? 저게 뭐지?” 퍽퍽! 징징거리는 헝크의 머리를 쥐어박아준 켄은 녀석의 팔을 끌어당기며 장교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고 수근 거리던 용병들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하나 둘씩 발걸음을 옮겼다. “기특하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일을 했어.” “…지랄마.” 피식 웃은 레미는 고개를 돌리고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난 한사람만 부탁했는데?” 그러자 라이트 놈이 느끼한 얼굴을 하고 옆에 서있는 아세트의 허리에 팔을 감아 와락 끌어안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라, 라이트?” “그녀와 나는 한 몸이오. 그래서 어디를 가든 함께요.” “…아, 그러시오?” 레미는 좋도록 하라고 손을 흔들어주곤 날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하는 이야기 들었다. 네 친구들은 다 저러냐?” “마법사잖아. 그냥 자기 좋을대로 하게 내버려둬.” 어깨를 으쓱인 레미는 모두를 데리고 사령실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공주님과 쿤 사령관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들을 맞이했다. “그래, 병사들은 어떠셨소?”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공주님과의 이야기엔 진전이 있으셨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에 회담장에서 해야겠지만. 지금으로선 별다른 합의점이 없구려.” 공주님이 말했다. “아무리 전쟁을 부추겼다고 해도 이후에 그랜퍼스를 침공하자는 것은 너무 도가 지나칩니다. 물론 이 의미없는 전투로 부하들을 잃으셔서 주화파이신 쿤 사령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만, 최초 그들을 사주 한 것은 베레타 본국의 사람들이 않습니까?” 쿤 사령관은 끙하는 소리를 내더니 손을 흔들었다. “알았소. 자세한 이야기는 회의장에서 합시다. 공주전하께서 이 전까지의 제 말을 꼭 캐슬린 국왕전하와 귀족원에게 알려주시길 간절히 바라겠소.” “그 점은 걱정하시지 마세요. 저희 나라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번 전투의 진상을 알릴테니까.” 공주전하란 말이 나오자 옆에 서있던 라이트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머리회전이 빠른지 자신이 뭣 때문에 이곳으로 불려온건지 알아챈 것 같다. 쿤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우리들을 불렀다. “당신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오. 쉬운 임무이긴 하지만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주의하시오. 기필코 그녀를 페이커 요새로 들여보내야 합니다. 요새에는 미리 전령을 보내어 공주님을 보내겠다는 사실을 알렸으니 공격하지는 않을 거요. 그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나머지는 당신에게 위임하겠소. 잘 부탁하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발파로스 로이 쿤 사령관님.” 레미가 고개를 숙이자 쿤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밖으로 나간 우리들은 한참 후 새 제복을 입고 나타난 용병들을 모조리 천막 안에 몰아넣고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는 결계를 친 다음 작전에 대한 브리핑 시간을 가졌다. 까놓고 말해서 사실 작전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암암리에 공주를 데리고 가겠으니 공격을 하지 말라고 서신을 보낸 이상, 전면전보다는 경호를 위주로 시체가 가득한 전장을 통과해서 성문으로 가면 된다. 성문이 열리는 시각은 새벽 2시. 그런데 문제는 10분 후에 성문이 닫힌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 시간에는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출발은 새벽 01시 30분. 만에 하나 까지 고려한다면 우리가 전장으로 나간 시간에 그랜퍼스나 베레타의 반란분자들이 마차를 막기 위해 공격을 할지 모른다. 만약 교전이 발생한다면 절대로 당황하지 말고 응전하도록, 어떻게 해서든 마차를 페이커 요새 안으로 들여보내야 한다.” “질문 있는 뎁쇼.” “뭐지?” 깨끗하게 씻고 새 제복을 입어서 말끔해진 헝크가 손을 들었다. “마차 안에는 누가 있수?” “너구리가 있다.” “에엥?” 모두가 인상을 찌뿌리며 레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직접 보았던 나와 라이트는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프하하~! 공주님이 너구리란다~! 녀석은 계속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운반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제군들에게 알려줄 수 없다. 단지 코드네임이 너구리라는 것과 이것이 제대로 페이커 요새로 전달됐을 때 전쟁이 끝난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맡은 임무가 이 전쟁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는 각자의 방법으로 놀라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아서 천막안이 후덥지근 하구만. 레미가 알아서 떠들도록 내버려두고 천막을 나가니 앞서 나간 라이트가 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있다가 씩 웃으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덥지?” “오냐. 땀내나는 사내놈들만 우글거리니 꽤 덥더라. 아가씨들은?” “저쪽 천막에 있어. 그런데 난 아직도 실감이 않나. 우리나라가 그런 일을 꾸몄다는게.” “어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릴하는 거야? 그리고 까놓고 말하면 원흉은 따로 있다구.” “아차차. 그렇지. 미안. 잊고 있었어. 그나저나 이번 일만 끝나면 우리 집에 가는 거지?” “그래, 살아서 집에 가는 거라구. 여기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어? 안 그래?” 라이트는 히죽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들에게 가보려는데 녀석의 목소리가 내 귀를 찔렀다.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말야….”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뒤를 돌아보며 물었지만 녀석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기만 했다. 이런 싱거운 녀석. 추운데서 궁상 떨지말고 천막 안에 들어가라고 말해준 나는 아가씨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실례합니다요.” “어머, 주인님. 어서오세요.” 천막 안에 깔린 양탄자 위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던 아가씨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들을 보던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얼빠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 지금 꽃밭에 들어온 것 같아.” 아가씨들은 베시시 웃어 주었다. 자리에 앉으니 공주님이 나를 바라보았다. “콜트씨. 캐슬린에서 살지 않겠어요?” “전 캐슬린 말 못하는데요?” “배우면 돼지요. 언니에게 물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던걸요?”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어때요? 작위와 영지까지 드릴테니 저희와 함께 사는 것이, 한번씩 찾아갈게요. 예?” “그건 안돼겠는데요 공주님. 전 그냥 그랜퍼스에서 살겁니다. 물론 내 노예도 함께.” 이렇게 말해주자 공주님이 눈썹을 좁히며 날 쳐다보았다. 흠, 그러고 보니 너구리를 닮긴 했어. 큭큭큭~! “지금은 당신의 노예라지만 그녀는 전 왕가의 공주였어요.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구요.” “언젠가 킬이라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란으로 멸절당한 왕족의 공주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구요. 대의명분이 생기는 셈이라던가요? 빼앗긴 왕좌를 되찾는다. 뭐 그런 식으로 쓰일수 있다고 하더군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해주자 공주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전에 정말 한번 그런 일을 격었기 때문에 조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는 남편의 집에서 함께 사는 거랍니다.” 스피릿의 손을 잡으며 말해주자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스피릿이 눈을 반짝이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보는 눈이 많아서 뽀뽀는 힘들겠다. 잠시 후 천막의 문이 열리며 레미 녀석이 고개를 내밀었다. “시간 됐습니다. 슬슬 준비를… 이놈아. 넌 왜 자꾸 이런데 있는 거야?” “솔직히 부럽지?” “크악!” 레미가 날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너구리 배달 작전은 착착 진행되었다. 마차에는 스피릿과 아세트, 그리고 공주님과 레미가 타고, 템과 나는 마부석에 앉았다. 지붕에는 라이트와 헝크를 비롯한 3명의 용병들이 깔끔한 제복에 무장을 하고 앉았으며, 나머지 용병들은 준비 되어진 말에 올라서 우리들의 뒤를 따랐다. “말은 또 어디서 구했어?” “사령관님이 그랜퍼스 기마대에서 하룻밤 빌려다주셨다. 뭐, 가져다 줄 필요도 없으니까.” “수완이 좋은 분이시네.” “헛소리 그만하고, 자! 현시각 01시 25분. 다들 준비 됐지?” 모두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데서 소릴 지르면 다 들리니까. 기밀유지라는 거다. 잠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레미 놈은 한숨을 좀 쉰 다음 출발을 지시했다. “출발. 최대한 조용히 전장으로 들어간다.” 다각다각…! 어두운 부대로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간단하고 쉬운 작전이지만 내 몸은 바짝 긴장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감이 좋지 않아. 꼭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 진지에서 벗어난 우리는 야간 경계를 펴고 있는 임시 검문소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장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에 세워놓은 바리케이트를 치워 주었다. “…무운을 빕니다. 조심하십시오.” 한 장교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용한 밤의 전장은 매우 을씨년스러웠다. 낮의 함성과 비명은 다 잊혀져 있지만 그 상처는 남아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방해했다. 덜컥~! “무슨 일이오?” “바퀴에 시체가 걸렸습니다.” “뒤따라오는 용병들 경계시켜. 헝크. 이리와.” 마차에서 내려 아래를 보니 앞바퀴에 시체가 걸려있다. 쓴 표정을 지은 나는 시체의 다리를 붙잡고 끌어냈다. “어때?” “온통 시체 밭이야. 꽤 걸리겠는데?” “30분 일찍 출발했으니까 그럭저럭 시간은 맞출 수 있을거다. 지붕위에 있는 용병들은 모두 내려와서 도보로 마차를 호위하며 걷는다. 그리고 방해물이 있으면 즉각 처리하도록.” 사내들은 암살자의 그것 같은 몸놀림으로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렇게 반 정도 마차바퀴에 걸리는 시체와 방해물을 치우며 걷고 있는데 밤하늘 위로 뭔가가 솟아올랐다. 헝크가 이마에 손을 대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저게 뭐지?” “불화살 같은데. 뭐가 신호를…!!? 젠장! 레미!” “뭐야?” “뭔가 신호가 올랐다! 용병들 불러!” 꼭 이런다니까?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갑자기 전장의 좌우측에서 기마대가 쏟아져나왔다. ==================================================================== 하아아아암~! Reload Running Fire: 102 “그 전에 질문이 있는데.” “매복이다! 템! 달려!” “빌어먹을! 용병! 습격이야! 정신 바짝 차리고 응전해!” 마차에 매달리며 외쳐주자 그들은 이를 뿌드득 깨물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 마차를 호위하기 시작했고 템은 채찍으로 말들의 등을 때리며 외쳤다. 짜악! 짜! 이히히히힝! “달리겠소! 꽉 잡으시오!” “우왁!?” 지붕 위로 오르는 사내들의 팔을 잡아주던 라이트가 벌렁 뒤집어졌다. 아직은 거리가 있다! “마법사! 저것들 어떻게 해봐!” “런닝 파이어 볼!” 쾅쾅쾅쾅쾅~! 전장의 밤하늘이 번쩍이며 연속으로 파이어볼이 솟구쳐 올랐다. 라이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마법을 구사하여 달려오는 기마대를 공격했지만 마차가 너무 덜컹거려서 정확도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러고 있으니 마차의 창문으로 수천발의 초록빛 매직 미사일이 쏟아져 나와 기마병들에게 날아갔다. 장관이다! 고개를 내려보니 창틀에 아세트가 걸터앉아서 팔을 내밀고 있다. 라이트가 가르쳐 줬나보구나! 하지만 두 사람의 마법 공격으로는 놈들을 다 처리하지 못했다. 몇몇 기마병이 지근거리로 달려오더니 랜스를 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마차 안에 누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녀석들이다! 어디지? 그랜퍼스? 아니면 캐슬린? “어느 쪽이든 알게 뭐냐! 가까이 오지마 이것들아! 집에 좀 가자!” 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 자동석궁에서 발사된 쿼렐이 달려오는 녀석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놈들은 방패도 들지 않고 갑옷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난 이를 드러내며 레미에게 외쳤다. “중장기병이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레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용병! 응전하시오!” “12시가 넘었어! 이젠 용병이 아니야! 우린 오늘부터 모험가들이다! 돌격!” 이히히힝!! 한손에는 바스타드를, 다른 손에는 말의 고삐를 잡은 켄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가자 나머지 사내들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검과 창을 비껴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템이 나에게 고삐를 내밀더니 마차 지붕위로 올라갔다. “잠깐 마차를 부탁합니다.” “어, 어이! 이보쇼!” 한손으로 고삐를 잡은 나는 자동석궁을 연사하며 그를 불렀다. 지붕으로 올라간 템은 한켠에 묶어 놓았던 스피어를 풀어내더니 달리는 마차의 지붕위에서 그것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내 머리를 가로지른 스피어는 쏜살같이 날아가 랜스를 들고 달려오는 중방기병의 가슴을 뚫어버렸다. 헝크가 그걸보고 통쾌한 비명을 질렀다. “이히아우우우!” “지랄말고 너도 거들어!” “하고 있소! 으랴! 죽어랏!” 지붕 위에 올라선 사내들이 템을 따라 스피어를 던지기 시작했으며 한 사내는 라이트를 붙잡아 넘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덕분에 자세를 확보한 라이트가 자신의 필살기를 써버렸다. “루나틱 런닝 파이어 애로우!”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으우악!” 그를 받치고 있던 사내가 반동으로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마법은 성공이었다. 하늘로 솟구쳐 오른 수십발의 불화살은 달에서 하나로 모였다가 일시에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쾅! 화륵! 펑펑펑~! “으하하하! 마법사 양반 멋진데!” 기마대를 상대하던 모험가들이 적에게만 떨어지는 파이어 애로우를 보고 환호를 올렸다. 라이트는 낄낄 거리며 손을 흔들어댔다. 라이트와 모험가들이 분투한 덕분에 마차는 전장의 시체를 밟으며 미친 듯이 달려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절대로 도망 못간다아아!” 그랜퍼스인?! 고함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기마대의 잔존 병력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 창문에서 다시한번 아세트의 매직 미사일이 날아갔지만 중장기병들은 방패를 꺼내 그것을 막아냈다. 젠장! 안티 매직 쉘을 방패에 그려놓은 거구나! 아세트에게 놈들이 타고 있는 말을 노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교전 때문에 예정시간보다 일찍 열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저, 저게 뭐야?!” “설마 아니겠지? 우릴 도우려고 그러는 거겠지? 어이! 장교님! 저거 어떻게 되거요!” 나는 입을 딱 벌리고 커다란 성문이 비좁다는 듯이 걸어나오는 놈을 쳐다보았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레미 놈이 신음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저, 저건 캐슬린의 T형 아이언 골렘이잖아? 어째서?!” T형인지 뭔지! 성문을 통해 달려나오는 놈은 보통의 아이언 고렘과는 모양이 조금 달랐다. 크기는 이전 우릴 공격했던 놈과 비슷했는데 특징이라고 한다면 다리가 4개라는 것이며 두개의 팔이 일반적인 손이 아니라 거대한 집개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젠장! 저기에 걸렸다간 단번에 팔다리가 두동강 날거야. 투구를 돌린 녀석은 4개의 눈으로 우리들을 노려보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괴물같은 놈이 달려들자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내 명령을 따르지 않고 마차를 돌려버렸다. “우왁! 빌어먹을! 라이트! 어떻게 좀 해봐!” “알아!” 라이트가 보통의 것보다 몇 배는 커다란 파이어볼을 만들어 쏘았지만 녀석은 그걸 맞고도 잘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뭐,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달아나는 말을 뒤쫓아가 그 커다란 집개다리로 기수와 함께 반으로 나눠버리는 녀석에게 욕설을 퍼붇고 있으니 뒤에서 따라오는 녀석들이 깔깔 거렸다. “하하하하! 순순히 마차를 멈춰라!” “지랄마! 헝크! 저 자식 죽여!” “형님이 시끄럽다잖아! 이놈들아!” 마차 위의 사내들이 뒤따라오는 기마대에게 스피어를 집어던졌다. 그때 아이언 골렘이 다시 우리들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들고있던 자동석궁을 집어던진 나는 고삐를 붙잡고 말을 모는데 전력하며 악을 썼다. “어떻게 좀 해봐! 너 칼라미티 있잖아 임마!” “바보냐?! 절대 방어력을 가진 놈이야! 한 두번의 충격파로는 어림도 없어! 이런 빌어먹을! 어째서 우릴 공격하는 거지?! 이럴 수는 없어!” “템씨! 절 올려주세요!” “으악! 스피릿양! 무슨 짓입니까?!” 등뒤에서 스피릿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창틀에 앉아서 지붕으로 기어오르려 했다. 그렇지! “템! 스피릿 마차 위로 올려줘요! 어서!” 템은 일단 그녀를 마차 위로 올려주었다. “주인님! 마차를! 마차를 세우세요!” “뭐?!” “절 믿으세요? 그럼 세우세요!” “에잇! 빌어먹을!” 고삐를 당긴 나는 마차의 브레이크를 잡아당겼다. 바퀴로 불꽃이 튀고 지붕위에 앉은 사람들이 앞으로 넘어졌다. 레미가 외쳤다. “야 임마! 무슨 짓이야!” “시끄러워! 스피릿! 난 널 믿어!” “고맙습니다. 나의 주인님, 절 믿어주셔서.” 밝은 달이 뜬 전장의 하늘을 배경으로 은빛 머리카락의 여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마냥 그녀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중장기병은 물론이고 그 이상하게 생긴 아이언 골렘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스피릿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4개의 다리를 이용해 달려오는 놈을 바라보았다. 불안하게 놈이 집개 팔을 뒤로 당겼다. 믿자. 내가 그녀를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어?  “멈춰.” 촤아아아악! 쿵…! 쿵…! 쿵! 놈의 동작이 일시에 멈췄다. 녀석은 네 개의 다리로 바닥을 지지해 촤아악 미끄러지더니 마차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두개의 팔로 바닥을 지탱하며 허리를 숙여서 완전히 멈췄다. 덕분에 녀석은 마차를 감싸안고 스피릿과 시선을 마주 보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스피릿은 녀석의 불타오르는 투구 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공주님을 불렀다. “나오세요.” “예? 저, 저도요?”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들이 막고 있긴 하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기마대도 도착할거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나는 문을 열고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레미가 막았지만 스피릿이 말렸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힘을 계승하는 의식의 증인들이 되실 거예요. 레미씨.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세요.” “예, 예? 무슨… 서, 설마?! 피의 인장을!” 공주님은 깜짝 놀라버렸고 스피릿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미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 마차에서 내려 모두에게 공격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기마대가 우리를 포위했다. 더 이상 그들을 막지 못하고 밀려온 모험가들이 서둘러 달려와서 마차를 감쌌지만 숫적으로 이미 우리가 열세였다. 하지만 레미는 오히려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잡혔군. 용병들은 뒤로 물러서시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수다! 저분은 캐슬린의 공주님 아니오!! 그녀만 돌려보내면 이 전쟁을…!” “시키는대로 하쇼.” 내가 낮게 으르렁 거려주자 말을 탄 켄 영감이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으며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모험가들이 뒤로 물러섰다. 기마대의 중장기병들은 랜스와 검을 꼬나들고 우리들을 노려보았다. 그중 금빛 갑옷을 입은 자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더니 커다란 투핸드 소드로 레미의 목을 겨눴다. “레미 제라블. 그랜퍼스와 캐슬린의 이중첩자. 당신의 행동은 이전부터 감시되고 있었소.” “호오, 그렇다면 왜 이제와서 나서시는 거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거든? 게다가 아직은 쓸모가 있었기에 계속 지켜보았던 거요. 그것도 오늘로서 끝나버렸지만, 공주님은 예정대로 우리가 데려가겠소.” “그 전에 질문이 있는데.” “뭐지?” 레미는 엄지손가락을 돌려 우릴 사로잡은 모양새로 움직이지 않고있는 아이언 골렘을 가르켰다. “혹시 저 골렘이 왜 그녀를 잡으려 들었는지 물어도 되겠소?” ==================================================================== 글쎄, Reload Running Fire: 103 “으이이이익! 질까보냐!” 중장기병은 입술을 씩 올리더니 검을 그의 목에 바싹 들이댔다. 뒤에 있어서 보이진 않지만 날이 선 검이라면 목에서 피가 날거다. 꽤 아프겠는걸? “캐슬린에서는 그녀의 존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자들이 꽤 있더군. 이번 전쟁을 이용해서 실권을 줘어주겠다고 약속했더니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걸?” “이런, 베레타 뿐만 아니라 캐슬린까지? 그럼 이번 전쟁은 세 나라의 야심가들이 아주 작정을 하고 일으켰다는 거로군?” 레미가 능청을 떨자 중장기병은 피식 웃으며 팔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녀석의 목이 떨어지려는 찰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템이 스피어를 날렸다. 쉬익! 퍼억! “커…!?” 철크렁~! “대장!” “이놈들! 무슨 짓을! 공주만 빼고 모두 죽여!” 레미가 목을 감싸며 뒤로 물러섰는데 자세히보니 녀석의 목에서 피가 흐른다. 그나저나 이 두 아가씨는 언제까지 저렇게 있는 거지? 슬슬 한계인데 말야. 서로의 이마를 마주댄 두 사람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들고 우왕좌왕거리는 놈들에게 다가가며 안주머니에서 골든피크용 스크롤을 꺼냈다. “정말, 이거 많이 쓰면 오래 못사는데 말야. 아가들아. 그냥 돌아가라. 형님 힘들다.” “덤벼라 이 잡것들아. 아주 쓸어주마.” 피를 봐서 그런지 화가난 녀석이 허리에서 칼라미티를 뽑았다. 쳇~! 징징거리며 쓰질 않더니 이제야 꺼내는 거냐? “카, 칼라미티?!” “그거라면 이쪽에도…!?” 그때였다. 막 골든피크 스크롤을 찢으려는데 헝크가 우릴 불렀다. “혀, 형님!” 고개를 뒤로 돌리자 라이트가 얼빠진 얼굴로 스피릿과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머리카락이 찬란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의식이 시작된 것 같다. 스피릿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스피릿 애쉬드 캐슬린이 루나마리아 레이스 캐슬린에게 피의 인장을 나눕니다. 그대. 강철의 거인과 왕가의 기사들이여. 이 의식의 증인이 되어주세요.” 루나마리아 공주님이 따라서 노래했다. “루나마리아 레이스 캐슬린이 스피릿 애쉬드 캐슬린에게 피의 인장을 나눕니다. 그대, 강철의 거인과 왕가의 기사들이여. 이 의식의 증인이 되어주세요.” 칭! 아이언 골렘의 투구에 있는 바이져가 위로 열리고 그 안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페이커 요새에서도 몇 개의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는 것을 보니 의식이 동시 다발적으로 골렘들에게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뭐, 뭐야?! 마법인가! 막아라!” “허튼 수작하지마 씹새들아!!!!!!!! 모두 싸워! 의식을 방해하면 안돼!” 행여 골든피크가 방해가 될지 몰랐기에 스크롤을 도로 넣은 나는 오로지 검과 주먹으로 놈들에게 덤볐다. 뒤를 따라 모험가들도 달려왔고 그렇게 우리들은 아름다운 두 아가씨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육탄전을 벌였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중장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릴 때 괴성이 들리더니 머리 위로 뭔가가 날아왔다. “우왁?!” 방금 전까지 투구안에서 빛을 뿜어내던 골렘이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서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루나마리아가 명령했다. “의식의 증인을 제외한 모두를 죽여라.” 쿵…! 쿵…! 쿵…! 찰칵! 찰칵! 골렘이 집게손을 열었다가 닫으며 천천히 다가가자 기마대의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아났다. 골렘은 그런 녀석들을 쫓아가기 시작했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차가운 얼굴로 마차의 지붕에 서있는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발치에 스피릿이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스피릿!” 후다닥 마차로 달려올라가 그녀를 안아들자 스피릿은 숨을 몰아쉬며 날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괘, 괜찮아요.” “그만, 이제 성문을 부숴라.” 멀리서 기마대를 잔인하게 박살내던 고렘은 나지막하게 말한 그녀의 말에도 즉각 반응했다. 저 멀리서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녀석은 투구를 돌려 성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엄청난 폭음과 함께 성문에 몸을 쳐박는 골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루나마리아 공주는 레미에게 이동할 것을 지시했고 템이 서둘러 마차를 몰아 성으로 달려갔다. 그 동안 공주께서는 스피릿의 몸을 살피며 훌쩍였다. “나, 나 한테 이런 힘을 줘도 저, 정말 괜찮은 거야? 으응? 언니이….” “괜찮아. 네 마음을 알아. 너를 믿어. 정의는 힘과 함께해야 한다고 선대의 폐하께서 자주 말씀하셨잖아? 루나마리아. 이제 네게 나의 캐슬린을 주겠어. 앞으로 잘 부탁해.” “흐윽! 그, 그럼 언니는…? 언니는 그럼 뭘 가진 거야? 가, 가족도, 친구도, 다 우리에게 빼앗기고 아무것도 없잖….” 스피릿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옆에 주저앉아있는 라이트를 바라보고 그를 돌보고 있는 아세트와 지붕에서 아무말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는 용병들을 쳐다본 다음 울먹이는 공주에게 고개를 돌리고 방긋 웃었다. “아냐. 난 많은 걸 가졌어. 연인을 가졌고, 가족을 가졌고, 친구를 가졌어. 너보다 많이 가졌어. 부럽지?” 가슴이 울컥한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은 정말…. 결국 루나마리아 공주님은 그녀를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렸고 난 두 아가씨를 가슴에 안은 꼴을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마차 지붕에 앉은 사람들은 푸근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공주님.” 템을 바라보았던 레미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들자 성문에서부터 병사들과 수십기의 강철기사들이 일렬로 도열한 채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매로 눈을 닦은 루나마리아 공주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을 빽 질렀다. “나는 루나마리아 레이스 캐슬린! 그대들의 첫 번째 레이디이자 이 나라의 주인이다! 사리사욕에 빠진 야심가들의 손에 유폐되었다가 힘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으니! 나를 따르는 강철의 기사들은 모두 내 말을 들어라!” 쿵…! 쿵…! 쿵…! 쿵…! 쿵…! 적을 맞이한 듯한 흉흉한 모습으로 서있던 아이언 골렘들은 망토를 펄럭이며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투구를 숙였다. 병사들도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공주님은 마차에서 내려 책임자를 불렀다. “아직은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알고 있어요. 레미 씨 그리고 여러분, 날 지켜주세요.” 여기저기 다친 모험가들은 맡겨만 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난 스피릿을 부축하여 공주님의 옆에 섰다. 그때 도열한 기사들의 반대편 끝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밤바람에 망토를 멋지게 휘날리며 다가온 그 중년의 기사는 공주님의 열걸음 정도 앞에 멈춰서서 자신을 이곳의 책임자인 페이커 샨 터크 후작이라고 소개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주전하.” “페이커 후작. 고개를 드세….” 쿵…! 쿵…! 쿵…! 쿵!! 도열해 있던 아이언 골렘중 몇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개를 든 페이커 후작이 망토 안에서 자동석궁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공주전하. 신의 불충을 용서하시오.” “페, 페이커 후작…?” “빌어먹을! 함정이다! 공주님을 감…!?” 레미가 쓰러졌다. 페이커 후작이 그에게 겨눴던 자동석궁을 돌렸다. 순간 스피릿이 비명을 지르며 루나마리아 공주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머릿속이 차가워진다. “무슨 짓이야! 이 병신아!” “꺄아악!” 퍼퍼퍼퍼퍼퍼퍽?! 지금은 밤인데. 하늘이 노랗다. 헤헤헤헤, “콜록…! 콜록…!? 카아악!” 뱉어낸 타액에 피가 섞여있다. 이런, 평소엔 까짓 화살 정도야 몇 대 맞아도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야. 고개를 내려보니 가슴에 몇십개의 화살이 박혀있다. 이정도 되면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야 하는데. 우리질~! 심장이 어떻게 됐는지 박동이 이상하다. “카아악! 콜록콜록!” “자, 잠시만 참… 윽!?” 라이트가 달려왔지만 그도 움찔하더니 내 가슴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세트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부축했지만 라이트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등에는 커다란 롱보우의 화살이 박혀있었다. 라이트! 제길!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포션과 엘릭서를 꺼내고 있는데 아세트가 비명을 질렀다. “감히 내 주인님으을!!!!!”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파!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자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수천발의 매직 미사일이 날아갔다. 앞에 서있는 페이커 후작에게도 몇발 날아갔지만 그의 앞에서는 뭔가의 방해를 받아 사라져버렸다. “…안티 매직 쉘?!” “아아, 덕분에 꽤 비싼 망토라오. 엘프 아가씨.” 페이커 후작이 그녀에게 자동석궁을 겨눴다. 빈 포션 병을 깨뜨리며 고개를 든 나는 급한대로 쓰러진 레미의 허리 춤에서 칼라미티를 뽑아서 페이커 후작에게 휘둘렀다. 파지직! 화려한 검광이 날아갔지만 방패를 든 골렘이 나타나서 충격파를 막아냈다. 콰콰쾅!!!? 먼지가 걷히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양 다시 모습을 드러낸 페이커 후작은 손에 붉게 빛나는 검을 들고 나왔는데 아무래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 붉게 물드는 검이라면!? 이, 이런 염병! “칼라미티다! 모두 엎드려어어어!” “이미 늦었다! 새 시대를 위해서 죽어라!” 칭~! 징징거리는 스피릿을 밀어 넘어뜨린 나는 방어를 위해서 모두의 앞으로 달려나가 칼라미티를 들었다. 눈앞으로 섬&#52255;한 섬광이 날아들었다. 파지직?! “으이이이익! 질까보냐!” 충격파와 충격파가 부딪히자 엄청난 스파크가 일어나고 후끈한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터져나왔지만 다행이 등뒤의 사람들은 무사하다. 그런데 내가 든 칼라미티는 그 능력을 다해서 날이 뎅겅 잘리고 말았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내 몸 역시 그리 성치 않았다. “끄르륵…!?” ==================================================================== 배에서 나는 소리는 아닙니다. Last Fire: 104 “으랴! 덤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철퍼덕! 털썩! 혹시 이런 경험해본 사람 있을까? 자기 다리를 배고 눕는 경험 말이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는 것을 보니 잘려나간 것 같다. 바닥으로 뜨거운 것이 흥건하다. 내 피겠지? 젠장, 상황이 여기까지면 엘릭서고 뭐고 다 쓸모 없잖아. 정신을 차린 스피릿이 바닥을 기어다가왔다. “주인님?! 주인님!” “스, 스피릿… 콜록콜록! 나, 보, 보기 흉하지…?” “아아아아아악! 주인니이이임!” 천천히 눈이 감긴다. 순간 그녀가 처음 나에게 주인님이라고 불러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잊지 못할 기억이야. 노아의 레어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나도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주는 건데. 그런데 이거 주마등인가? 나 이대로 죽는 거야? 아직은, 조금은, 더 살고 싶은데…. 죽지 않는다. 걱정마라. 흐릿한 눈으로 날개를 가진 사내가 팔짱을 하고 서있는 것이 비춰진다. 스피릿, 안보여? 네 뒤에 이상한 녀석이 서있어! 라이트! 저, 저거 안보여?! 긴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입을 열었다. 약속을 지켰다. 이걸로 인간과의 인연은 끝이다. 잘못하면 또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도록. 자, 잠깐만! 다, 당신은 누구요!? 인간에게 두 번 씩이나 내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 나지막하게 말한 사내는 순간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온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하더니 하얀 연기가 내 몸을 가렸다. 치이이이이~! “히이익~! 허, 허리가!? 상처가!” “으, 으어어어…! 끄르륵~?!” 잘려나간 허리에서 쏟아져나온 내장과 장기들이 스멀스멀 움직이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근육조직이 살아있는 것처럼 자라나서 잘린 내 허리와 다리를 찾았다. 이런, 누가 내 허리 좀 바로 맞춰 줬으면 좋겠는데.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재, 재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스, 스피릿 잠깐 비켜봐요.” 헝크 놈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내 다리와 허리를 바로 잡아주었고 재생은 순식간이 이루어졌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피릿과 공주님, 그리고 앞에서 다가오던 페이커 후작까지 입을 딱 벌리고 날 쳐다보았다. 허리를 좀 흔들어보니 이전 만큼 잘 움직이는 것 같았다. 따끔따끔 거리는게 좀 걸리긴 하지만 말야. “네, 네놈은 뭐냐?!” “글쎄올시다. 나도 잘 모르겠는뎁쇼?” 제길~! 어떻게 몸만 붙여주고 그냥 가냐? 저것들이나 좀 싹 쓸어줄 것이지. 울컥해서 애꿋은 페이커 후작에게 건들건들하게 쏘아주고 있으니 바닥에 주저앉아서 연신 내 상처를 매만지던 스피릿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호, 혹시. 그때 그 악마….” “그런 것 같아. 방금전에 네 등뒤에 서있었거든? 자! 영감탱이! 다시 한번 붙어 봅시다! 왜? 칼라미티 맞고 허리가 잘린 놈이 다시 살아나니 겁이 나쇼?” “이, 이 괴물 놈! 뭐하나! 죽여!” 움찔해서 뒤로 물러서던 페이커 후작은 칼라미티를 집어넣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웅장한 소리가 들리더니 뒤에 서있던 5m짜리 G형 아이언 골렘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레미를 비롯해서 몸 곳곳에 화살을 꼿고 있는 동료들들 쳐다본 나는 공주와 스피릿을 쳐다보며 저놈 좀 막아보라고 외쳤다. 다행이 제 정신을 차린 공주가 비명을 지렀지만 녀석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움직이지마아아아!!” 쿵! 쿵쿵쿵쿵~!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더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밤하늘로 솟구쳐 오른 망토가 미치도록 아름답게 펄럭인다. 어째서야?! 아깐 잘만 듣더니! 스피릿과 공주님을 가슴에 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캉~! 바람이 쏟아지는가 싶더니 뭔가 머리 위에서 불꽃이 튕겼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우리들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강철의 기사가 일어나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 덤벼드는 녀석의 칼을 받아내고 있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거지? 캉~! 캉! 카라랑! 쿠쿠쿠쿠쿵! 두 녀석이 무식한 칼싸움을 벌이다가 옆 건물로 넘어졌다. 사방으로 파편이 날렸지만 중년의 노 기사는 그 모습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동석궁의 탄창을 갈아끼우며 앞으로 나섰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아이언 골렘들이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형제들과 맞붙기 시작했다. 쾅~! 쿵! 콰쾅! “근래에 만든 아이언 골렘에겐 왕가에게 전해 내려오는 피의 인장이 통하지 않소. 인장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당신들의 시대는 끝났소. 순순히 죽어주시오. 공주.” “어째서죠?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거죠? 나는, 나는 당신들의 레이디가 아니었나요?” 팔에 화살을 맞아 출혈이 심한 루나마리아 공주가 내 어깨를 짚고 일어나 꼼짝않고 앉아있는 캐슬린 기사들을 쳐다보며 울먹였다. 등 뒤로 고렘들이 자기들끼리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이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무릎을 꿇은 채 바닥만 쏘아보고 있다. 이윽고 페이커 후작이 석궁을 들었다. “자랑스러운 캐슬린의 기사들을 더 이상 현혹시키지 마시오.” “안돼! 절대로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이 나라는 10여년전 나의 아버지가 자신의 형님을 죽이고 빼앗은 나라야! 사촌오빠들과 언니에게서 빼앗은 나라야! 절대로! 절대로 이렇게 잃을 수는 없어! 그 분들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수는 없단 말이야! 나는! 나는 이 나라를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어!” “미안하지만 당신에겐 그럴 힘도, 기사도 없….” “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너희들은 벨도 없냐! 이대로 힘없는 공주님이 쓰러졌으면 좋겠어!? 그러고도 자랑스러운 캐슬린의 기사라고? 지랄마! 자기들의 레이디가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대도 구경만 하다니! 그런 기사는 필요없어! 나가서 뒈져버렷! 공주님! 저런 놈들을 믿을 바에 차라리…?!” 퍽! 퍼퍼퍽?! “어?” 공주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쓰러지고 있다. 머리가 아찔해진다. 그걸보고 라이트가 괴성을 지르며 마법을 사용했지만 그의 손바닥에서 날아간 파이어 볼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인간 크기의 아이언 골렘들이 방패로 막아버렸다. 콰쾅!!!! 슈슈슉! 먼지를 뚫고 또 화살이 날아왔다. 다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모험가들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것을 맞고 쓰러졌으며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리에 박힌 화살을 뽑아 던지며 외쳤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데! 스피릿! 아이언 골렘을 불러! 저 자식부터 먼저 죽이게 해!” “하하하! 소용없다! 피의 인장은 왕가의 것! 보통 사람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어대던 그녀가 내 호통에 고함을 빽 질렀다. “저, 저 사람을 쓰러뜨려!” 그녀의 명령에 반수 이상의 골렘들이 전투를 하다말고 페이커 후작에게 다가가려했고 나머지 녀석들은 그것을 막기에 급급했다. 좋았어! 이틈에 도망을! “어, 어째서?!” “그 이유는 이분이 캐슬린 전대 왕가의 마지막 생존자이기 때문이지요.” 스피릿을 껴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놀랍도록 차분한 라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공주님을 돌보고 있던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반듯하게 누운 그녀의 가슴에 하얀가루를 뿌리고 있다. 들고있는 가죽 자루가 눈에 익다. 뭐지? “…심장이 형체가 없어. 살려내지 못해. 이건 정말 최우의 수단이다. 공주님의 사생활이 깨끗하기를 빌자구.” “무, 무슨 소리야?!” 그때였다. 치이이이이~! 갑자기 검은 연기가 피가 잔뜩 흐르고 있는 그녀의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라이트는 그걸보고 갑자기 미칠듯한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고 사내들의 상처를 치료하던 아세트가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하지만 라이트 놈을 쳐다볼 여유는 없었다. 녀석의 폭소와 함께 음산한 웃음소리가 귓가로 섞여 들어왔기 때문이다. “파하하하하하! 이히하하하하하! 나에게 피를! 나에게 정욕을! 나에게 산 자의 비명과 고통그리고 영생을!” 뱀파이어! 그, 그럼 아까 라이트가 뿌리던 것은…!? “프하하하하! 콜록콜록! 하, 하하. 가, 가루로 돌아간 뱀파이어는 자신을 깨워준 처녀와 동정에게 그들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봉사한다고 들었어! 게다가 계약자가 된 사람은 뱀파이어의 권능에 대한 영향을 받아서 웬만한 상처 같은 건 바로 치료가 돼지! 저, 정말 다행이야. 공주님이 처녀라서….” “라이트! 라이트!” 그때 안개 속에서 킬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과 하나도 바뀌지 않은 럭셔리한 젊은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걸보고 페이커 후작이 숨을 들이켰다. “네, 네놈은 누구냐?!” 누구냐는 말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준 킬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더니 검을 들어올렸다. “깨어나자마자 반겨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야. 그런데, 네놈이냐? 내 아름다운 계약자를 이렇게 만든게?” “설마?! 너는!!?” “나는 킬. 이제부터 널 죽일 거다.” 트르르르륵! 대답대신 무스한 화살이 쏟아졌다. 이런 빌어먹을! 내 자동석궁이 있었으면! 하지만 화살은 우리쪽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킬이 자신의 몸을 안개화시켜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막아낸 것이다. “이히하하하! 겨우 그런 공격 뿐이야?” “우, 웃기지 마라!” 스르릉~! 페이커 후작이 칼리미티를 뽑았다! 그때 킬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이, 콜트군.” “뭐, 뭐야?” “생각 같아서는 네놈과 재회의 만남을 가지고 싶은데. 상황이 여력지 않군. 내 계약자를 부탁한다. 털끝 하나라도 상하면 네 노예의 목을 깨물어버릴테니 알아서해.” 알았다고 외쳐주려는데 라이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크롤 다발을 내밀었다. “노, 놀면 뭘해? 너, 너도 나가서 싸워…! 임마.” “라이트 너…!?” “헤, 헤헤헤~! 나, 난 안죽어…!” “라이트!” 아세트가 잉잉거리며 그를 끌어안았고 난 재빨리 스크롤 다발을 찢었다. “헝크! 살아있냐!” “어, 왜, 왜요?!” “공주님을 마차로 모셔! 템! 칼 하나 빌려 주쇼!” 팔을 심하게 다친 템이 자기 롱소드를 풀어서 나에게 던져주었다. 검을 뽑아내자마자 온몸으로 황금빛 기운이 퍼져 나왔다. “같이 가자. 나도 저 영감에게 할말이 많아.” “그럼 멍청한 쇳덩이들을 부탁하지. 가슴의 코어가 약점이다.” 그 말을 하고 킬은 사라졌다. 페이커 후작은 사방을 경계함과 동시에 우리를 가르키며 외쳤다. “명령이다! 일어나서 저 놈들을 죽여!”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덤빌테면 덤벼! 하지만 그들은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기들의 입장을 지키는 건가? 똑부러지는군. 기사들의 배반에 분노한 페이커 후작이 노호성을 지르며 칼라미티를 휘두르려 했지만 그 순간 킬이 나타나 그를 상대하기 시작했고 나에겐 인간형 아이언 골렘 몇기가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 달려왔다. 크게 한숨을 내쉰 나는 주머니에서 불새의 문장이 그려진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 썼다. “고마워. 이거 덕분에 또 살아났어.” “반드시, 반드시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주인님.”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녀에게 씩 웃어준 나는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검과 방패를 들고 덤벼드는 강철의 기사들을 노려보며 난 주먹을 뒤로 당겼다. 아무렴! 돌아가야지! “으랴! 덤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 다음편은 꼭 보아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Slave Ending : "부럽지?"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전경 좋은 테라스의 바깥에 펼쳐진 평화로운 한 여름의 도시는, 내 가슴을 푸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전에 비해 머리를 길어 이제 허리까지 내려오는 화사한 빨간머리의 아가씨가 테이블에 턱을 올리며 날 바라본다. 꽤 오랜 은둔 생활 때문에 익살스러운 미소는 많이 희석되었지만, 저 장난기 가득한 눈은 예전 그대로다.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그러니까….” 루나마리아 공주가 페이커 요새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캐슬린 군부측에서 약속대로 임시휴전을 발표했고, 베레타 군은 그들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국으로 군대를 돌렸다. 이후 전해지는 소식에 따르면 베레타에서는 심각한 내전을 격으며 엄청난 사람들이 국가 반역죄로 숙청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랜퍼스는 다시 돌아온 루나마리아 공주의 증언에 의해 전쟁조작설이 밝혀지면서 곤욕을 치뤘지만 그것이 베레타의 사주에 의한 것과 캐슬린 귀족원도 일부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스피릿의 말에 따르면 어떤 이유에선지 일부러 여론의 정보를 조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끄럽긴 매한가지인 것 같다. 저자거리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위로금을 지급하고 수출입 품목에 관세를 물리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시키는데 의견이 몰리고 있다지만 외교적인 문제가 꽤 되기 때문에 섣부르게 판단 할 수는 없다고 한다. 뭐, 살림살이는 이전과 크게 변함 없는 걸 보니 아직은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너구리 배달 작전에 참가했던 모험가들은 캐슬린에서 수여하는 훈장에 상금까지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템도 무사히 아이니스의 품으로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몇몇 사람들이 죽긴 했지만, 어차피 한번은 죽는 것이며 그것은 시간 문제라고 켄은 씁쓸하게 웃어버렸다. 페이커 후작의 화살에 맞고 쓰러진 레미 제라블은 라이트가 치료한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최근 온 편지에 의하면 요즘 녀석은 캐슬린 왕성에서 공주님을 도우면서 악몽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에 올려진 유리잔의 얼음이 햇살에 반짝여 스르륵 녹아내리고 있다. 으음, 집에 갈 때 얼음과자라도 좀 사가야겠어. 스피릿이 좋아할거야. “맞아. 고생하고 있지. 그 사람 원래 이중간첩이었잖아. 이번 일로 얼굴이 드러나는 바람에 간첩질은 못하고 그림자속에 숨어서 공주님을 돕고 있지. 야아, 궁성은 대단한데더라? 겨우 한달 거기 있었지만 정말 갖가지 음모가 판을 치는 곳이었어. 레미씨하고 그 뱀파이어가 없었으면 공주님은 그랜퍼스의 전쟁조작설도 밝히지 못하고 어디서 묻혀버렸을걸?” “호오~ 그렇게 심한 곳이었어?” “그렇지. 당신이 몰라서 그래. 어머나, 내가 이야기를 끊었지? 계속해. 들으니까 허리가 댕겅 잘렸다더니 멍쩡하네?” 아무래도 한번 죽었다가 다시 깨어 났기 때문에 페이커 요새에서 요양을 좀 한 다음 상처를 다 치료하고 스피릿과 라이트, 아세트, 그리고 웬 혹까지 하나 달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리카의 마법상점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이제나저제나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안젤라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내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비명을 지르며 울면서 매달렸다. 현재 우리들은 이전에 살았던 집에서 모두 같이 살고 있는데. 최근 라이트 놈과 아세트가 입실론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왜? 여기 좋다면서? 공부도 되고 돈벌이도 된다면서 말야.” “그것도 좋긴 하지만, 아세트가 사람 많은 걸 싫어해서 말야. 그냥 입실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봐. 두 사람 눈 맞은 거 아냐? 요새 매일 같은 방 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으르렁거렸지만 라이트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놈의 반응을 보고 코를 벌렁인 나는 지나는 가는 안젤라에게 내 너클 어쨌냐고 물었다. “그건 뭐하려고요?” “저 자식 강냉이 좀 털어주게.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소파에서 후다닥 몸을 날린 나는 진열장에 넣어놓은 너클과 건틀릿을 양손에 끼고 놈에게 덤볐다. “야이 자시가아! 마법사 주제에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지, 진정해! 나도 사람이야! 남자라구!” “닥쳐! 어디서 인간 행세야?! 넌 인간이 아냐! 마법사야! 마법사!” 달아나는 놈의 로브자락을 붙잡고 주먹을 뒤로 당기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아세트가 나왔다. 그녀는 은근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들었다. “놓으시죠.” “예.” 별수 있냐? 순순히 놓아줬다. 라이트는 아세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돌아갈거다. 여러모로 신세 많이 졌어.” “…약속은? 맹약은 어쩔건데?” 미련이 남아서 음울하게 녀석을 노려보자 라이트 놈은 정말 할말 없다는 듯이 얼굴을 긁적였다. “나 좋다고 저렇게 쫓아다니는데 아무래도 그냥 보낼 수가 없어. 머리가 다 자라면 돌려보내겠다고 했지만 그때가 되면 아세트는 다시 머릴 자르고 내 옆에 있을 거라고 할거야. 악순환이라구.” “…그래서 어쩔건데?” “겨, 결혼….” “닥쳐! 난 반대야! 감히 인간 마법사 놈이 엘프랑 결혼을 한다구?! 그게 말이 되냐! 그 사실이 알려지면 넌 마법사 인명록에서 제외 될거야! 몰라서 하는 소리야?!” 녀석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상관없어. 그런 거.” “으으으악! 너 이 자식!” 은근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아세트가 헛기침을 하고 끼어들었다. “그만하세요. 전 이 사람이 좋아요. 그래서 같이 있을 거예요. 엘프와 인간이 그러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이 사람은 처음으로 저를 엘프로서 봐준 사람이에요. 하다못해 그가 죽을 때 까지만이라도 곁에 있고 싶어요. 그리고, 콜트씨. 적어도 당신은 그런 말 하실 자격 없어요.” “…어째서유?” 아세트는 무슨 일인가 싶어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어보는 스피릿과 싸우는 건가 싶어 우울한 얼굴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안젤라를 가르켰다. 고개를 돌리고 잠시 그녀들을 쳐다보던 나는 거창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는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는 놈이었지. 알았습니다. 좋을대로 하십시오.” 그렇게해서 라이트와 아세트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입실론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의 일은 나도 모르겠다. 깨라도 볶으면서 잘 살고 있겠지. “헤에~! 라이트가 엘프랑 그랬단 말이지?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말야. 좀 의외의 사건이야. 참, 그럼 콜트씨네 집에 빈방 남아 있겠네?” “라이트가 쓰던 방이 있어. 지금은 창고지만. 그런데 왜?” “이 참에 나 거기로 들어가면 안될까? 어차피 여기 온지도 얼마 안돼서 살곳도 마땅찮거든?” 뭐 어떻겠냐. 어차피 요새 스피릿이 저기압인데 첼시아 같이 시끄러운 사람 하나 있으면 좋지. “마음대로 해. 하지만 식비랑 숙박비는 꼬박꼬박 받을거야.” “좋아 정했다! 그럼 한 동안 나도 얹혀 살게. 퍼피도 좋지?” 첼시아의 등뒤에 뒷짐을 진채 선 퍼피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퍼피는 정말 하나도 변한게 없는 것 같아. 예전하고 똑 같은데? “캐어릭 사람들이 좀 그래. 빨리 크지만 잘 늙지 않아. 여장시키면 얼마나 귀여운줄 아니?” “마, 마스터어.” 한참 분위기 잡고 서있던 퍼피가 울상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녀석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내려 첼시아를 보았다. “고딕 드레스에 너클 끼고 휙휙 날아다니던 그때 그 모습 한번 보고 싶은데.” “으, 으윽~!” 위협을 감지한 퍼피가 뒤로 물러서며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난 파하하 웃으며 농담이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 첼시아가 손가락을 튕기며 물었다. “그렇지. 그 안젤라는 어떻게 됐어? 같이 살고 있다고 그랬지?” “어, 그게 말야.” 최근 안젤라는 외출을 기피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 밖을 나다니는 성격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요샌 시장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콕 쳐박혀 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여 추궁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어, 어떤 사람이 계속 따라다녀요.” 누구냐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몇일이 지난 후 그녀를 따라다니는 녀석의 정체를 알아내고는 분노가 폭발했다. “너 이자시익~!” “혀, 형님.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요~!” “닥쳐! 너 같은 놈에게 내 여동생을 줄 것 같으냐?!” 가슴 가득 꽃을 사들고 찾아온 헝크 녀석을 문전 박대하고 있으니 스피릿이 한숨을 폭 내쉬며 끼어들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헝크씨? 들어와서 차나 한잔하고 가세요.” “이야! 역시 누님 뿐이우.” 헝크 놈은 낄낄 웃으며 날 밀어내고 집으로 총총 달려들어갔다. 그러다가 부엌에서 소반을 들고 나오는 안젤라를 보고는 헤죽 웃으며 손을 흔들어댔다. 안젤라는 답례로 고개를 까딱여주고 얼른 소반을 테이블에 올리곤 부엌으로 도망가버렸다. 헝크는 그 모습도 참 귀엽다는 듯이 히죽이죽 웃어대는데. 으아~! 침을 질질 흘리는 놈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맹렬한 살해욕구와 함께 등줄기로 소름이 돗아버렸다. 어윽! 저 자식을 그냥! 이후에 자세한 이야기 들었는데. 언젠가 그녀가 혼자 시장을 보러갔다가 건달들에게 붙들린 적이 있었단다. 그때 백마탄 왕자님은 아니고 술에 만취해서 우연히 같은 골목길에 쓰러져 있던 헝크가 그녀를 알아보고 구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헝크 놈은 그것을 빌미로 내 귀여운 여동생에게 달라붙려고 하는 거고. “절대로 못준다. 듣고 있냐?” “어허~ 거 돼게 빡빡하게 구시네. 젊은 청춘남녀의 연애감정을 그렇게 막으시는게 어디 있수?” “시끄럽다. 어쨌든 안돼. 안젤라. 너도 그렇지?” 하지만 안젤라는 내 대답을 회피했고 헝크 놈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서는 푸하하 웃어대더니 오늘은 이 정도 수확만 가지고 그만 가보겠다며 발걸음도 가볍게 우리 집을 나섰다. 창문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녀석을 은근히 노려보던 나는 떱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젤라. 너, 너 말야. 혹시 저 놈이 마음에 들었다던가….”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앉아있던 안젤라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때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남긴 말을 난 아직도 잊을수 없다. “돌아오면 나와 한 약속 지켜주겠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오빠랑은 이제 말 안해. 안젤라는 삐뚤어질거야.” 컥…! 그,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여기서 스피릿의 반응도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내 귀를 잡아 당기며 물었다. “그래, 무슨 약속을 하셨는데요?” “아, 아니 그게 말야.” 그 이후로 안젤라는 간혹 헝크 놈과 놀러다니며 내 속을 긁어 놓았고 결국 난 그녀에게 항복하고 말았지. “우울한 눈 밭에서 죽은 아기 끌어안고 징징거리던 아가씨가 그렇게 밝아졌단 말이지? 잘됐네 뭐, 이젠 노예도 뭣도 아닌데다가 가족도 있고,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까지 있으니 천국이 따로 있겠어? 여기가 바로 천국이지. 좋은 곳에 데려다 주겠다던 안젤라와의 약속을 콜트씨는 지킨거야. 그래서 그 울보 아가씨는 요새 뭐해? 그냥 집에만 있어?” 이런, 그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거야? 쑥스럽구만. 반쯤 녹은 아이스 티를 조금 홀짝인 다음 시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니, 마법상점에 아르바이트 하러 나가곤 했는데. 요새 스피릿이 무거워져서 말야. 안젤라가 집에 있으면서 거의 대부분의 가사를 전담하고 있지. 덕분에 오늘 식사 당번은 나야.” “응? 무거워 지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허허 웃다가 머리를 좀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스피릿 임신했어. 이제 8개월이야.” “뭐어?!”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은 사건은, 바로 스피릿의 임신발견이었다. 하루는 그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다가 의문이 생겨 물었다. “스피릿.” “예?” “우리 이렇게 같이 잔지 얼마나 됐지?” 내 팔을 껴안고 있던 스피릿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요염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한 500번 쯤?” “그렇지? 일년 넘게 같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말야. 저, 나보다는 역시 네가 더 잘 알 것 같아서 물어보는건데. 임신 말야. 그거, 어떻게 하는 거래?” 멀뚱히 날 쳐다보던 스피릿은 몸을 돌려 눕더니 연신 큭큭 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속옷을 주워입으며 입을 열었다. “왜요? 아기 가지고 싶으세요?” “뭐, 응. 그래. 솔직히 말하면, 가지고 싶어.” “으응~ 아기 낳으면 저 엉덩이 커질지도 모르는 데요? 그리고 불감증에 걸릴지도 모른다구요. 잠자리에서 제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으면 이상하잖아요?” “부, 불감즈응?” 아래 속옷만 입고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브라를 찾아서 방안을 배회하던 그녀는 의자에 걸려있는 것을 집어서 가슴에 매더니 셔츠를 껴입고 단추를 잠그며 침대로 올라와 내 팔을 베고 다시 누웠다. “응. 불감증. 아무것도 못느낄 수 있단 말이예요.” “으윽… 스피릿, 그런 말하고도 차, 창피하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던 그녀는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어마, 귀여워라. 부끄러워 하시는 거예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리자 스피릿은 꺄르륵 웃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 그러더니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아이도 낳아드려야겠죠? 왜냐면 전 당신의 노예이니까.”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문장 말야. 역시 없애버리는 편이….” “으응~! 싫어요. 손등의 문장이 없어지면 전 더 이상 당신의 노예가 아니게 된다구요. 게다가 이름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역시 이쪽이 더 듣기 좋잖아요? 안그래요? 주. 인. 님?” 빙그레 웃음 지은 그녀는 내 가슴 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러더니 단추를 다시 풀면서 날 내려다보았다. “주인님? 저랑 아기 만들어요. 전 아들 낳고 싶은데. 힘 내실 수 있죠?” 으, 아, 아이고오~! 괜히 말을 꺼냈나아? “하, 하하하~ 다, 다리에 힘이 없어.” “무리하시지 마세요.” “…날 이렇게 만든게 누군데?” 거실로 나가서 소파에 주저앉으며 말하니 스피릿은 오호호 웃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안젤라는? 아직 안온거야?” “헝크씨 만나러 간다면서 나갔어요. 저녁 먹고 온다고 하던데요?” “크으윽~! 통금시간 어기면 다리 몽둥일 분질러 버린거야!” “너무 그러지 마세요. 한창나이 잖아요? …물론 우리들도 그렇지만.” 스피릿이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며 나에게 윙크를 해보였다. 에구, 귀여워라.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는 그녀의 애교가 늘어난 것 같다. 가만히 앉아있기도 뭐해서 오랜만에 그녀를 도와 저녁을 만들고 있으려니 문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안젤라가 돌아왔다. 앞치마에 플라이 팬을 들고 거실로 나간 나는 힐끔 시계를 보았다. 시계바늘이 8시를 가르키고 있다. 딱 맞춰서 들어왔군. “운좋았구나. 1분만 늦었어도 용돈 짤리는 줄 알아.” “30초 전이에요. 바보 오빠.” “뭐가 어째? 너 요새 오빠 한테 말 버릇이… 어쭈~! 이젠 집에까지 바래다주고 그러냐?! 이놈아! 거기서!” 플라이 팬을 들고 소파를 뛰어넘어 문으로 달려나갔지만 헝크 놈은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가 쏜살같이 골목으로 달려들어간 후였다. “또 늦게 보내면 넌 내 손에 죽어! 알아 듣냐?!” “거, 우리 너무 힘들게 살지 맙시다!” “닥쳐!” 플라이 팬에 굽고 있던 팬 케익을 녀석에게 집어 던져주자 녀석은 요령있게 그걸 받아내더니 얌얌 먹으며 외쳤다. “오~! 역시 누님 솜씨야! 잘 먹겠다고 전해 주십쇼! 참, 형님! 내일 일하러 가는 거 잊지 않으셨지?” “뭐? 무슨 일?” “어허~! 아무리 상금을 많이 탔다지만 그래도 일은 해둬야 한다고 자기 입으로 해놓고선 그걸 까먹고 있었단 말요? 마법사 길드에서 의뢰받은 재료 수집 간다고 했잖수! 내일이 약속한 날이니까. 아침먹고 찾아가리다!” “오지마! 임마!” “으하하하~! 난 아무것도 못들었수다!” 녀석에게 악을 써댔지만 놈은 낄낄 웃으며 골목길로 달려들어가버렸다. 어윽~! 저 능글 맞은 놈이 뭐가 좋아서 허구헌날 만나러 다니는 거야아~! “오빠랑 비슷한 사람이에요. 항상 웃고 다니고, 여자 말이라면 신탁이 내린 것처럼 생각하고 들어줘요. 처음엔 그냥 오빠 놀리려고 만났었는데. 의외로 재미있고 좋은 사람 같아.” “지금 누구 앞에서 남자친구 자랑이냐? 아앙?” 안젤라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주자 그녀는 비명을 지으며 웃어대다가 날 덥썩 끌어안고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쯧~! 바보 녀석. 이제야 날 오빠로 봐주는 거구나.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으니 스피릿이 나와서 물었다. “저녁은 먹었니?” “아뇨, 언니. 고지식한 보호자 분께서 통금시간 어기면 감봉에 다리몽둥일 분질러버리겠다고 협박을 해대서 그냥 왔어요. 배고파요. 같이 먹어요.” “…고지식해서 미안하게 됐구나야.” 안젤라는 아하하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우리가 돌아오고, 질투심에 헝크를 만나러 다니고 하더니 굉장히 밝아졌다. 이전에 비한다면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해야할 정도야. “뭐 만들었어요?” “오늘의 메뉴는 야채 스튜와 팬 케익, 그리고 닭고기 감자 조림이에요.” “그리고 콜트식 육포 스튜도 있다. 색깔이 요상하지만 그럭저럭 맛은 있어.” 안젤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러지? 아차차! 까먹고 있었어! 언젠가 안젤라를 눈밭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해줬던 음식이 바로 이거였지. 내가 몸둘바를 몰라하며 그녀를 바라보자 안제라를 방긋 웃으며 수저를 들더니는 그것을 조금 덜어서 맛을 보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맛있어요. 그리고 옛날 생각나. 오빠 처음 만났을 때.” “어, 그, 그러니?” 안젤라는 정말 맛있게 스튜를 먹어댔다. 다 못먹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릇 하나를 다 비우고는 한 그릇 더를 외쳐댔고 난 그만 웃어버렸다. 그러던 중에 스피릿이 자기도 먹고 싶다고 그래서 그녀 몫도 담아줬다. 이런, 그러고보니 내가 먹을 게 없는데? 하하하! 그때 예기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콜트식 육포 스튜를 입으로 가져간 그녀가 갑자기 눈을 흡뜨더니 개수대로 달려가 입안의 것을 게워내지 않겠는가? 그걸보고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기분이다. “욱~! 우엑~!” “어, 어라? 내 으, 음식이 그, 그렇게 맛이 없었… 나?”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봐요. 내놓은게 하나도 없어요.” “콜록콜록~! 읍!” 설마? 설마? 하면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니 스피릿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 조금 속이 않좋아… 읍~!” “이, 입덧이지? 그렇지?! 입덧이지!? 이야호! 그, 그렇지 의사! 의사 불러올게!” “오빠! 아,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에요!” 안젤라가 날 불렀지만 난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어서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못했다. 내 아이를 가졌어. 그녀가 드디어 내 아이를 가졌다구! “나도 이제 아빠야!~ 푸하하하~!” 가을의 문턱으로 접어드는 여름의 밤길을 미친 듯이 달려간 나는 앞뒤 볼 것도 없이 마법사 길드로 가서 아레프의 손을 잡을 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때?! 임신이지?! 그렇지!” 송구스럽다는 듯이 스피릿의 배에 손을 대어보던 아레프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스피릿을 껴안고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질러댔다. “스피릿! 아이구! 이쁜 것! 음음음~!” “어, 어마. 그, 그만하세요.” 아레프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에, 한 2개월 조금 못되어보이던데. 축하드려요.” “언니 축하해요.” 너무 좋아서 거의 착란증세까지 일으킨 나는 스피릿과 함께 약간 어눌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안젤라를 와락 안아버렸고 결국 그녀는 연신 즐거워 하는 내 모습을 보고 못말리겠다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루시아가 들어왔다. “하악~! 학! 나, 나만 떼어놓고 가시면 어떡해요!” 뒤늦게 도착한 루시아는 스피릿의 임신 소식을 접하고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더니 이내 아레프의 손을 은근히 잡아끌며 눈치를 주더니 차 한잔 마시고 일찌감치 돌아가버렸다. 그녀를 돌려보내고 난 호들갑을 떨다가 그녀에게 외쳤다. “먹고 싶은 게 뭐야?! 가지고 싶은 게 뭐야?! 말만해! 내가 다 사줄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식 올리고 싶어요. 우리 아직 결혼식 안 올렸잖아요.” 그러고보니 샤먼에 있는 템도 아이니스가 임신하고 나서 부랴부랴 식을 올렸다고 했다. 이, 이런~! 까맣게 잊고 있었어! 어쩌지? 어쩌지?! “내일 당장 올리자!” “그래서? 뭐야. 결혼식 올린 거야? 우리한텐 왜 청첩장 안보냈어?” “당신들 공주님 유괴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 받았다가 이제야 풀려났잖아? 어쩌라구.” “그거 이름만 빌려준거야. 나머지는 레미 씨가 알아서 다 했지. 우리들은 그때 행여 그랜퍼스 쪽의 정보원들이 잡으러 올까와 숨어 지내고 있었다구. 아까워라~ 연락했으면 왔을 텐데. 말야.” 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냐, 왔어도 우리 결혼식 못봤을거야. 신전에서 둘이서만 조촐하게 올렸다구. 하객들 부를려고 했지만 스피릿이 둘이서만 하자고 해서 말야. 안젤라도 떼어놓고 정말 단 둘이서만 아무도 없은 성당에서 하이프리스트 한분 달랑 모셔놓고 올렸지. 뭐, 그것도 나름대로 좋더라. 드레스 입은 스피릿은 정말 무지하게 예뻤어.” 첼시아는 입을 헤에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두 팔을 머리위로 올리고 기지개를 쫙 펴며 외쳤다. “아으으으으~! 나도 시집 가고 싶어라아!” “좋은 남자 소개 시켜 줄까?” “응? 누구?” “킬.” “칵~! 맞아 볼테야!?” 난 낄낄 웃으며 그녀의 앙증맞은 주먹질을 피했다. 언젠가 레미의 편지를 가지고 왔던 사람이 다름아닌 그였다. 킬은 공주님을 계약자로 맞이하여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함께 있을 거라고 하며 나에게 공주님과 레미의 편지를 전해주고 돌아갔다. “계약자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이대로 원한을 풀었을 텐데. 아깝게 되었군. 부디 나의 계약자께서 무병장수하시길 빌어라. 그녀만 사라지면 곧바로 네놈의 목을 뽑으러 다시 찾아오겠다. 늙은이라도 봐주지 않아.” 그를 돌려보내고, 나는 조만간에 드래곤 하트 조각을 그녀에게 가져다 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쪽에서도 한번 보고 싶다니 되도록 빨리 가봐야겠어. 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짓고 있으니 첼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첼시아 발렌타인. 앞으로 잘 지내보자구. 모험가 동지.” “동업자를 만나 기쁘기 그지 없군. 나는 콜트 슈발츠. 모험가이며, 유부남이다. 잘 부탁해.” 첼시아는 깔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제 배가 빵빵하게 부른 노예공주님을 보러가볼까? 그런데 콜트씨는 요새는 무슨 일해?” “으음, 돈되는 일이면 뭐든 다해. 하지만 요새 스피릿이 아기를 가져서 말야. 위험한 일은 피하고 있지. 참, 내일 유니콘 잡으러 갈건데 같이 갈래? 당신 채찍이 좀 필요한데 말야.” “돈 많이 주니?” “5대 4 어때?” “뭐, 좋아. 대신 이번달 숙박비는 제하는 걸로 하자.” “뭐?!” “랄라라~ 퍼피! 뭐하니! 빨리 짐챙겨. 가는 길에 레몬이라도 좀 사갈까? 신거 많이 먹고 싶어 할텐데 말야.” “보통은 오렌지 사가지 않아?” “아냐아냐, 여자들은 자극적인 걸 좋아한다구. 선물로 레몬하고 얼음과자 정도 사가면 좋아하겠네. 어서가. 스피릿 얼굴 보고 싶다. 분명히 임신 붓기 때문에 통통하게 변해 있을거야. 놀려줘야지. 오하하하~!” “내참, 애라도 낳아 봐어? 그런건 어떻게 알아?” “어머! 처녀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여왕님 소리 나올 때까지 채찍으로 좀 맞아볼래?” “어어~! 뭐야! 퍼피! 네 주인님이 나 때린다! 좀 말려봐!” “많이 맞다 보면 기분 좋아집니다. 콜트님.” “…뭐가 어째? 첼시아, 너 자기 노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단순히 취미 정도랄까? 숨어 있을 때 좀 심심했거든? 그래서 퍼피 데리고 놀았지. 그래서 애가 좀 묘한 구석이 생겨버렸어. 어쨌든 내일부터 이 첼시아가 다시 부활 하는 거야. 가는 길에 내 새 이름으로 모험가 등록해야겠어.” “새 이름?” “우린 캐슬린에 붙어서 그랜퍼스가 공주를 유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거든? 결과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사람들이야. 그래서 이렇게 머리도 기르고 이름도 바꿔야 했다구.” “오호~! 그래서 얼마 더 받았어? 저번에 현찰로 10억 받았지?” “전부 30억 루나 받았어. 부럽지? 아아~ 이 돈으로 뭘 할까?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그 정도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내다니 첼시아도 아직 멀었어. 그리고 당신보다는 내 쪽이 더 많이 벌었다구.” 테라스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나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방안에서 짐을 꾸리던 퍼피가 허리를 펴고 시원한 바람에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숨을 폭 내쉬는 모습이 보인다. 좀 도와줄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팔을 걷어올리며 낄낄 웃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가족을 얻었거든? 어때? 부럽지?” ==================================================================== 끝입니다. 끝까지 읽으시느라 참 수고 하셨습니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글이었습니다. 기다려 주신 분들께는 이런 정도로 밖에 만들어내지 못해 죄송스러움을 금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끝났습니다. 그간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며, 이후에 좋은 작품으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P.S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 다음을 클릭해주세요. 특전입니다. Bonus Fire : 01 “내 이름은 아이안 리그펜타인.” “닭고기 요리하고 돼지고기 파이 2인분!” “야채 스튜하고 쇠고기 조림 나왔다. 빵하고 갔다줘.” 빨간 머리카락을 담뱃대로 틀어올린 아가씨가 음시접시를 내던지듯이 내놓았다. 그럼에도 음식 국물하나 튀기지 않았고 난 그것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손님들의 성화에 얼른 접시를 들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쇼잉?” 허리에 검을 찬 사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앞에 후드를 눌러쓰고 앉은 사람은 노예인가? 거참, 노예제도가 폐지 된지 3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있단 말야? “와인은 서비스입니다요.” 잔을 가져다 두 사람의 앞에 놓고 따라서 내밀었다. 사내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노예로 보이는 사람은 후드 안에서 하얀손을 꺼내 잔을 받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고, 고마워요.” 이야~ 목소리 정말 예쁜데? 히죽 웃고 있으니 부엌에서 빨간머리 아가씨가 날 불렀다. “아이아아안! 바빠 죽겠는데 어디서 농땡이야! 엄마한테 맞을래!” “우리 가게를 찾아준 손님에게 서비스 좀 해주고 있는데 뭐가 농땡이우?!” “하하하~! 아이안, 제미니하고 또 싸우는 거야? 이제 철좀 들지 그래? 18살이면 다 컸잖아?” “칵~! 아무리 단골이라지만 계속 놀리면 맥주에다 소금을 풀어서 줘버릴거요! 그리고 제미니가 뭐야! 저래보여도 당신들 보다 나이가 많단 말야!” 막 가게 문으로 들어서던 큼직큼직한 사내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온몸에 흉흉한 병장기를 차고 자기네 집인양 아무렇게나 식당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저 치들은 모험가 길드의 모험가와 용병들인데. 우리가게 단골이다. 왜 단골이 됐는지는 묻지마라. 사연을 말하면 골치 아프다. “항상 먹던 걸로 가져다 줘. 배고프다.” 일행의 두목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검을 풀어놓고 말했다. 저건 일종의 예의로서 밥먹을 때는 싸우지 않겠다는 선포다. 죽어도 칼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우리가게에서 만큼은 검을 놓는다. 이유는 제미니양 때문이다. “빨리 움직이지 못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퍽! 윽~! 국자가 날아왔으니 다음엔 식칼이야! 후다닥 부엌으로 뛰어간 나는 밀린 접시들을 한번에 들고 다니며 배고픈 멧돼지 같이 툴툴거리는 사내들에게 나눠줬다. “많이들 쳐먹고 피터지게 싸워! 그래서 돈 많이 벌어다가 외상값이나 좀 값아!” “사랑해요. 제미니양~!” “시끄러워! 난 모험가 놈은 취미 없어!” 부엌에서 날아든 큼직한 식칼이 식탁에 꼿혀서 파르르 떨었다. 사내들은 그녀의 솜씨에 치를 떨면서도 부엌에서 한참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에게 징그러운 시선을 날렸다. “어허어허~!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이나 먹어!” “거 참, 눈요기도 못하냐?” “우리 제미니 양은 당신들 눈요기 감이 아냐!” 버럭 외쳐 주자 부엌에서 국자가 날아와 머리를 때렸다. 아으윽~! “엄마라고 불러 욘석아. 장난 그만하고 홀에 나가서 맥주나 좀 돌려. 제이미 오늘 쉬는 날이라서 바쁘다구.” “그럼 부엌 서빙은 누가 해?” “쯧~! 방에 올라가서 페이 좀 불러와.” “페이? 그 사람에게 일 시킬 생각이야? 엄밀히 따지면 그 사람 우리 손님이라구?” “그럼 오는 손님 내 보낼거야? 방값 깍아주면 돼니까 빨리 불러와! 엄마말 안듣지?!” “씨이~!” 제미니양이 손에 식칼을 들고 죽일 듯이 날 노려보았다. 목숨의 위협을 받은 나는 얼른 몸을 돌리고 밖으로 나가서 2층 객실로 달려올라갔다. 우리 가게에는 벌써 3년째 장기 투숙 중인 모험가가 하나 있다. 페이 블랙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나이는 나보다 두어살 정도 많지만 실력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내이기도 하지. 그 능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샤먼의 그 전설적인 몬스터 사냥꾼과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늑대인간 정도는 아니지만 페이는 어제 대형 육식거미인 아나크네를 산채로 잡아가지고 왔을 정도니까. “페이! 페이 블랙! 자요?! 문 좀 열어봐요!” 쾅쾅쾅!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자 얼굴을 가득 찌뿌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자다가 일어났는지 눈꼽도 껴있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그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한참 맛있게 자는 사람 왜 깨우고 난리야아…. 어어? 아가씨는 뉘쇼?” “칵! 아이란이오! 한 지붕 아래에서 산지 몇 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얼굴을 기억 못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쳐다보던 그는 머리를 좀 긁적이다가 그제야 손가락을 튕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으으! 이 붕어 같으니! 그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다음 물었다. “그래서? 왜 자는 사람 깨워? 밀린 외상값이랑 방세는 어제 다 갚았다구.” 어떻게 이 인간을 데리고 내려간다? 도와달라고 하면 자긴 손님이라고 뻣댈텐데? 그렇지! “엄마가 당신 보고 싶데요!” “왜? 맨날 보는 얼굴인데?” “글쎄. 따라와요!” 그의 손을 잡아 끌고 부엌으로 내려가자 때마침 주문이 엄청 밀려서 할아버지까지 나와서 접시를 들고 다니다가 우릴 보고는 반갑다는 듯이 외쳤다. “오! 페이 밥 먹으러 왔나? 손자! 넌 나가서 홀 주문 좀 받거라!” “이예이! 제미니양! 페이 데리고 왔어요!” “누님이 저 부르셨다던데….” “오! 페이! 내 사랑! 일단 거기 접시들 좀 들어서 옮겨!” “예? 예? 어, 이, 이거요?” 천성이 선한 페니는 군말하지 않고 접시를 나르기 시작했고 난 킥킥 웃으며 홀로 달려가 맥주와 차를 손님들에게 날랐다. “어어이~! 아이안! 손님 말 좀 받아줘!” “에잇~! 그건 말구종인 당신 일이잖아!” “그럼 맥주나 대신 좀 날라주던가!” 가슴 가득 맥주잔을 들고가던 말구종 릭이 나에게 악을 써댔다. 됐다고 손을 흔들어준 나는 후다닥 달려가 손님의 말을 받아서 마굿간에 묶어 둔 다음 다시 홀로 향했다. 아이고~ 정신 없어! 왜 우리 가게로 다 몰려오는 거야! 적당히 다른 곳에 갈 것이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다보니 식사를 하러 우리가게를 찾았던 손님들이 하나 둘 일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들은 저녁시간까지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제미니양~ 나 배고파아~.” “귀찮게하지말고 아무거나 주워먹어.” 긴 빨간머리를 산발한 매력적인 20대 아가씨가 부엌의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담뱃대를 입이 물고 한숨을 쉬다가 쌀쌀맞게 쏘아댔다. 쳇~! 어제 밤에 나 없으면 못산다고 징징 거렸으면서, 솔직하지 못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제미니 양의 나이는 올해 41살이다. 그런데 나이에 비해 엄청나게 젊다. 제이미 이모의 딸인 미노를 데려다 같이 놓으면 두 사람을 언니 동생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 입실론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다. 41살인데도 20대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우스갯소리로 언젠가 마법사에게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라이트 형에게 물어본 결과 저주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본인 역시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아직까지 불가사의에 쌓여있다. 하지만,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어? 저렇게 젊고 탱탱한 사람이 나의 어머니라니.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 게다가 좀 예쁘냐? 입실론에서 날고긴다는 아가씨들 다 데리고 와도 우리 제미니 양보다 예쁜 사람은 못봤다. 아! 라이트 형 집에서 살고 있는 아세트 누나가 있지만 그녀는 제외해야한다. 왜냐구? 엘프와 인간을 비교 한다는게 말이 되냐? 한가한 틈을 타서 부엌에 있는 제미니 양에게 농을 걸고 있으니 페이가 소반을 들고 돌아왔다. 군소리 한마디 않고 일해줘서 고맙긴 한데. 한편으로 불쌍하다. 좀 바보 같기도 하고, “빈 맥주잔 가져왔습니다. 참, 그런데 하실 말씀이란게 뭐죠?” 속았다는 것을 모르는지 이 바보 같은 페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제미니 양을 쳐다보았고 난 그녀가 어떤 식으로 속여 넘길 것인지 제 3자의 입장을 고수하며 대화를 경청했다. “어머나. 미안해 페이 군. 힘들었지? 도와줘서 고마워. 당신을 부른 건 말야. 오늘 저녁에 나 물건 사러 가는데 같이 좀 따라가 줬으면 해서 그래. 잠깐이면 돼니까. 부탁해. 응? 대신 맛있는 거 사줄께.” “저야 상관은 없습니다만. 뭘 사실 건데요?” “어머, 아이들 있는데서 어떻게 말해? 나중에 가르쳐 줄게.”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머리에서 핀이 빠지는 느낌이다. 나, 나의 제미니 양이 저, 저렇게 간드러지게 말하다니! 그것도 다른 남자에게! 끄아아아악! 용서 못해! 남편도 없이 18년 동안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당신 기분은 이해하지만!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페이는 이제 겨우 22살이야! 당신 아들이랑 거의 같은 또래라구! 아무리 늙지 않는 몸을 가졌다지만 너무 하는 거 아냐!? 나이차이가 거의 19살이나 난단말야! 으으악! 난 반대야! 막 그렇게 입을 열려는데 몸이 붕뜨는 기분이다. “어, 어랍쇼?!” “이야아. 페이 좋겠는데? 제미니와 데이트라니.” “아, 알렉스씨. 상단 출정 나갔다고 하더니 돌아왔나봐요?” “그렇지. 제미니! 당신 아들 좀 데리고 놀아도 되지?” 싱글벙글 웃고 있던 제미니 양은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다치게 하면 안돼. 내 초유의 작품이니까.” 식당에서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던 모험가들이 낄낄 거리며 웃어댔다. 어머니 보다 10살은 어리지만 그래도 주름살 하나 없는 그녀에게 누님이란 소린 도저히 못한다며 대놓고 이름을 부르는 알렉스는 날 끌고 뒤뜰로 나갔다. 왜 매번 식후 운동으로 날 상대해야 하는건데! 아동보호법도 몰라! 으악! 살려줘! “아아악! 엄마! 아들 죽어요!”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수련을 쌓으렴 아들아. 그래서 이 다음에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는거야. 이봐! 놀지말고 내 아들 수련 좀 거들어줘. 지금 마시고 있는 맥주 공짜로 줄테니까.” “오오! 역시 누님이오!” “프하하하! 오늘 아이안 녀석 좀 주물러 줄까나?” 험상굳은 모험가들이 우루루 따라왔다. 망할~! 날 등에 매달고 뒤뜰로 나간 알렉스는 한켠에서 기침을 해가며 솥에 물을 끓이고 있던 종업원 누나에게 부지깽이를 빌려다가 나에게 던져주었다. “얼마나 늘었나보자.” “우라질! 가만 안둘거야!” 부지깽이를 들고 선재공격을 감행한 나는 몸을 낮춰 그의 정강이를 때리려 했다. 깡?! “깡이라니?!” “바보야! 보호대 차고 있다구! 전에 가르춰 줬잖아? 찌를 때는 정수리에서부터 수직으로, 칠때는 좌우 허리를 기본으로 아래 위로 벤다는 느낌으로 때려!” “아냐아냐! 어깨로 받아버리고 몸을 빼면서 단검을 박아버려! 그게 더 깔끔해!” “이봐! 지금 칼 싸움이야! 격투기가 아니라구!” “지랄마! 기사들 결투도 아닌데 뭘 따져? 이기면 장땡이라구!” 이내 모험가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어이가 없었던 나는 무식한 알렉스의 차기를 겨우 막아내고 바닥을 좀 구른 다음 발딱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에에이! 시끄러워! 조용히들 못해?! 집중이 안돼잖아! 집중이!” 그때 알렉스가 다시 달려왔다. 부지깽이를 거꾸로 잡고 뒤로 돌린 나는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이기면 네 엄마랑 결혼 할거다! 으하하! 아빠라고 불러보려무나. 아이아안!” “우이익! 웃기지마! 덤벼! 가랑이 사이에 있는걸 박살내준다!” 구경하던 우리가게 종업원 누나들이 꺅꺅거리며 웃어댔다. 어허~ 이 아가씨들이 순진한 줄 알았더니 모르는게 없네?! 그렇게 모험가들과 돌아가면서 몇 번을 싸웠는지 모르겠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산에서 해가지고 있었다. “…죽었니?” “우라질….” ==================================================================== 제미니가 임신해서 아이 낳았습니다. Bonus Fire : 02 “엘프들은 부모하고도 결혼하고 그런데.” 담뱃대를 입에 물고 옆에 쪼그려 앉아 툭툭 건드리는 제미니 양의 손가락을 치운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서 먼지가 가득한 옷을 털어내고 팔을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어이구 삭신이야. 제길, 어떻게 좀 봐주지도 않고 마구 때리냐? 제미니 양은 아들은 너무 혹사시켜. 용돈도 쥐꼬리 만큼 주면서 말야. 이거보여 이거? 피 난다구.” “어디 봐.” 자리에서 일어난 제미니 양이 다가와서 내 팔을 붙잡았다. 신경질을 부리며 어떻게 빼내려 했지만 어떻게 된게 나보다 힘이 좋다. 으윽~! 연륜인가? “엄마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이런, 좀 까졌네?” 히이익?! 제미니 양은 내 까진 손등을 혀로 낼름낼름 핥아댔고 난 침을 꿀꺽 삼키며 후다닥 팔을 뺐다. “어, 어어이~! 이보쇼! 너, 너무 선정적이잖아?! 난 18살 이라구!” “잘 때 엄마 엉덩이랑 가슴 만지는 녀석이 무슨 헛소리야? &#53739;~! 자, 손 이리내.” 입안의 모래를 뱉어낸 그녀는 주머니에서 검정색 손수건을 꺼내 내 손등에 묶어주었다. 저녁 노을에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으아~ 차, 차라니 내가 양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캘리버여! 제게 왜 이렇게 늙지도 않는데다 예쁘기까지한 어머니를 주셨나요? 그러고 있으니 제미니 양이 내 볼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뭐하니? 가자. 한창 바쁠 시간이야.” “어, 응. 가요.” 집에서 여관을 하다보니 난 학교 같은 데는 가지도 못하고 10살때부터 집안일을 거들었다. 교육이라고 해봐야 저녁마다 라이트의 집에서 배우는 글과 역사, 그 외 약간의 교양 같은 것뿐이며 싸움은 아까 봤겠지만 여관에 들리는 단골 모험가나 용병들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익히게 되었다. 몬스터가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에 살다보니 학식보다는 육체적 전투력이 더 필요했기에 가끔은 내가 먼저 한수 가르쳐 달라고 한다. 귀찮다고 손을 흔들어대도 맥주한잔 주겠다고 하면 백에 백은 다 작대기 하나 들고 나와서 날 두들겨 패준다. 처음엔 울면서 배웠었지 싶다. 그래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처녀적에 못된 놈하나 잘못 만나서 몸과 마음을 망쳐버린 불쌍한 내 어머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그 자식을 잊지 못하는지 18년동안 재혼도 하지 않고 남자친구 같은 것도 없이 아들하나 있는 것만 보면서 살아왔으며 가끔은 잠꼬대를 하면서 그 자식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는 그녀는 아름답고 도발적인 미인 과부라는 딱지 때문에 험하고 모진 일도 여럿 격었다. 그때마다 빨리 자라서 그녀를 지켜줘야지 하는 다짐을 했었기 때문에, 난 정말 필사적으로 싸우는 법을 배웠고 그 덕분에 18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장정이나 술에취한 모험가 정도는 어렵지 않게 때려 눕힐 수 있다. 물론, 아까 같은 경우는 핸디캡 매치라고 해야 옳다. 알렉스는 차기 모험가 길드장으로 추대받는 인물이며 그와 함께 날 두들긴 사내들도 꽤 이름 날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기랄~! 적당히 싸우다가 그만두자고 하는건데. 바쁜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고 주린 배를 부엌에서 가지고 나온 치츠와 빵으로 때우고 있는데 제미니 양이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밤 8시다. “그렇게 차려입고 어디가?” “데이트.” “윽!” 울&#52988;하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자 옆에서 내 상처에 약을 발라주던 누나들이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하지만 난 꿋꿋하게 버티며 외쳤다. “어, 어떤놈이랑!” “헤에~ 우리 아들 질투하는거야? 좋아라. 엄마는 너무 행복해.” 앙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제미니 양이 도저히 부엌떼기라고 할수 없는걸음걸이로 우아하게 다가오더니 내 턱을 붙잡고 입술에 쪽하고 키스를 해줬다. 한가한 시간이라 내 몸을 돌봐주던 누나들이 꺅꺅거리며 소란을 떨었다. “어마, 마스터어~ 아드님에게 너무 심한거 아니에요?” “뭐 어때서 그래? 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아들이라구. 장가 갈 때 까지는 안놔줄거야.” “윽! 난 제미니 양하고 결혼할거야! 다른 여자는 필요없어!” 고함을 빽 질러주자 내 주변의 아가씨들은 물론이고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손님들이 푸하하하 거리며 웃어댔다. 그래 웃어! 웃으라구! 난 진심이란 말이다! “어이구~ 이렇게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보내지?” 날 와락 끌어안은 제미니 양은 엉덩이를 두드리며 연신 볼과 이마에 키스를 해왔다. 그러고 있으니 2층에서 페이가 헐레벌떡 내려왔다. 이 자식! 이렇게 아름다운 분과 데이트인데 감히 그런 몰골로 나오는 거야?! 흉흉한 전투복을 입은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가요. 메이라, 2시간 정도 있다가 들어올테니까. 뒷일 부탁해.” “예. 다녀오세요 언니.” 여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메이라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안, 엄마 데이트 갔다올게. 자지 말고 기다려?” “칫~! 늦으면 가만 안둬!” 누나들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고 제미니 양은 페이의 손을 잡아끌고 밤거리로 나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뒤를 밟지 않을 수 없…. “어디가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말구종 릭이 히죽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도 누나들의 팔이 날아왔다. “아이안, 우리도 이렇고 싶지 않지만 어쩔수가 없어. 언니를 봐, 아무리 나이가 있다지만 저렇게 젊고 탱탱한데. 재혼을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니? 18년 동안 참았으면 정말 열녀라구, 그 정도라면 네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도 할말 없을 거야. 그러니까….” “우이익! 뭘 참아! 그리고 내 앞에서 그 자식 소리 하지마! 이 개새끼! 나타나기만 하면 목을 비틀어서 죽여버릴거야! 절대로, 절대로 용서 못해!” 내 외침에 누나들이 겁을 먹고 물러섰다. 그틈을 노려 후다닥 달려나갔지만 뒤쫓아온 릭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우라질! 발 한번 정말 빠르네! “이, 이 자식아. 이대로 네 엄마가 쓸쓸하게 살다가 가길 바래? 아니잖아. 막말로 나 죽기 전에 마스터 시집가는 거 좀 보자 페, 페이 씨 정도면 괜찮잖아! 나이 차가 있지만 그건 마스터 취향이니까 네가 이해하라구!” “우리 엄마가 왜 시집을 가는데! 우아악! 이거놔!” 결국 릭에게 붙집힌 나는 몰려나온 누나들에게 끌려 방안에 감금됐다. 이런 염병! 한참 난동을 부리다가 결국 현실을 깨닳고 방구석에 쭈그려 앉아 세상을 부정하고 있으니 제미니 양이 돌아왔다. “뭐하니?” “어, 돌아왔수? 일찍 오셨구랴.” “응 페이 씨 덕분에 생각 했던 것보다 일이 빨리 끝났거든?” “…무슨 일?” 드레스는 벗던 제미니 양은 눈썹을 삐죽 세우고 날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하는 거냐? 이 멍청한 아들놈아.” “뭐, 별로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제미니 양이 문을 막아버렸다. 그녀는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 찌르며 말했다. “무슨 이상한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네 엄마야. 넌 내 아들이고. 이 점 명심해.” “알고 있어요. 어머니.” “그럼 됐다. 이리와서 엄마 옷 좀 벗겨줘.” 제미니 양께서는 몸을 뒤로 돌리고 치마의 단추를 풀어달라고 했다. 정말, 아들한테 너무 심한거 시키는 거 아뇨?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아들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진 그녀는 편한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더니 침대에 앉아서는 날 불렀다. “이리오렴 아들아.” “왜요?” “왜긴 왜야? 엄마가 아들 좀 데리고 자려는 것도 죄니? 그리고 네 방은 여기야.” 그렇다. 내 나이 열여덞이지만 아직도 엄마랑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에서 잔다. 왜냐면 그녀의 고집때문이다. “어이구, 우리아들~! 벌써 이렇게나 커버렸어. 징징 짜면서 매달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으, 그렇다고 바지안에 손넣지 마요.” “으으응~! 엉덩이 좀 만져보자아~! 이리와.” 제미니 양은 날 와락 끌어안고는 침대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연신 키스를 해대기 시작했다. “가, 간지러워요. 그만해요.” “가만있어. 이렇게 젊고 탱탱한 엄마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행운을 즐기라구. 에구, 우리아들, 아까 많이 아팠지? 또 다친데는 없어?” “응응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촛불을 끄고 몸을 돌린 그녀는 다시 날 끌어안았다. 보통 이런 식으로 어머니에게 귀여움 받으면 징그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18년 동안 계속 되어온 일이라면? 게다가 상대가 20대의 젊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아무래도 갑자기 이런 일을 격으면 나 정도의 사내녀석은 금새 흥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18년 동안 이 일을 격었으며, 게다가 상대가 젊고 탱탱한 어머니라서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물론, 두근거림도 없다. …아니, 가끔, 아주 가끔은 두근거리도 한다. 그 외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이성이라지 않는가.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소유욕은 여느 신화 속에서도 가끔 나온다. 내 경우는 그 사실판이랄까? “으으음…! 엄마~ 나한테 시집오면 안돼?” “꺄르륵~ 가슴 빨면서 말하지마. 욘석아. 간지러워.” “나 제미니양 다른 놈에게 넘겨주기 싫단 말야. 그러니까 나한테 시집와.” “헤에~ 18살 이나 먹은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네. 이거 근친상간이다?” “엘프들은 부모하고도 결혼하고 그런데.” “너 엘프니?” “엄마아아~!” “아들 녀석에게 청혼 받는 엄마는 나 뿐일걸? 아하하~ 기분 좋은데?” 잘 보이지 않지만 제미니 양은 히죽이죽 웃으며 내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에 이마를 가져다 댄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칫~! 왜 보통 엄마들처럼 늙지 않은거야. 그럼 엄마한테 장가겠다고 떼쓰는 일도 없었을거야. 그리고 이제까지 남자친구 같은 것도 하나 없이 내내 혼자 살고 있는것도 그래. 나 철들기 전에 괜찮은 남자 잡아서 시집갔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애가 못하는 말이 없네. 욘석아. 안 늙는걸 어쩌라구. 그리고 남자친구? 흥~! 어정이 떠중이 같은 놈들은 다 필요없어. 난 네 아빠 같은… 으흠! 마, 말이 헛나왔네. 어쨌든, 남자 친구야 여기 이렇게 있잖아? 으응~! 귀여운 우리 아들~!” “…아직도 그 자식 못 잊고 있는 거야?” ==================================================================== 제미니의 자식 사랑은 좀 유별난데가 있습니다. Bonus Fire : 03 “나랑 그렇게 많이 닮았어?” 순간 나에게 가슴을 내주고 있던 그녀가 버럭 화를 냈다. “그 자식이라니! 그 사람은 네 아버지야! 널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분이라구! 잘못했다고 말해! 어서!” “…하지만 책임지지도 못할 일만 벌이고 도망간 빌어먹을 자식이잖아. 개 자식!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하룻밤 데리고 놀고 도망가다니, 난 절대로 용서 못해. 그 새끼 죽여버릴거야.” “아이안!” 제미니 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촛불을 켰다. 셔츠를 여민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이 녀석! 빨리 잘못했다고 말 안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나쁜 자식 아니면 순진한 여관집 처녀 꼬셔다가 재미보고 나 몰라라 도망가도 되는거야?” “이 녀석이!” 짜아악!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어머니에게 뺨을 맞은 건,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깜짝 놀란 그녀가 후다닥 날 끌어안았다. “어, 어머나!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아이안 괜찮아? 응? 괜찮니?” “예 괜찮아요. 잘못했어요 엄마.” 날 꼭 끌어안고 훌쩍이던 제미니 양은 결국 울기 시작하더니 이젠 그 자식의 욕을 해댔다. “이, 이이! 나쁜 콜트 자식! 다 그 자식 때문이야! 흐으아아앙~! 아이안~!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많이 아프지이이?” “괜찮다니까. 엄마, 뚝, 이제 울지마요.” 난 그녀의 등을 톡탁이며 달래기 시작했다. 제미니 양은 날 끌어안고 한참 훌쩍이다가 결국 지쳐서 잠이 들었고 행여 떨어질새라 꼭 붙어있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니 한숨을 절로 나왔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아들이 귀엽다지만 시퍼런 18살 사내 자식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아무리 아들이라도 이 나이때 놈들은 좀 위험하단 말야. 바보 같은 엄마야. “으으응…. 콜트….” 제미니 양의 입술에서 그 자식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가설이 맞는 것 같다. 제미니 양은 내게서 그 자식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거다. 아들은 아버지를 닯는다니까. 만약 내가 계집아이였다면 보통 어머니 이상으로는 대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내가 아들이고, 게다가 그 자식을 닮았으니까.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거지. 그러지 않으면 징그러운 18살 아들 놈을 곁에 둘리가 없잖아? “세상에, 아직까지 제미니와 같이 자는 거야? 부럽다. 아으윽! 왜, 왜 꼬집어요~!”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 못하는 말이 없으세요. 아이안 군.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괜찮죠?” 라이트 형의 등을 꼬집은 아세트 누님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난 머리를 저었다. 뭐시냐. 그녀쪽이 훨씬 편하긴 한데. 좀 쑥스럽단 말야. “남자들끼리 하고 싶은 이야기라서요.” “어머, 그래요? 하는 수 없군요. 그럼 차를 준비하죠.” 아세트 누님은 그렇게 부엌으로 걸어가버렸다. 듣기로 그녀는 라이트 형의 노예였다는데 3년전에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동거인으로서 함께 살고 있는 거란다. 난 되도록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이, 형씨. 엘프랑 같이 살면 어때? 좋아?”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녀석이 별게 다궁금하구나?” 라이트 형은 눈썹을 꿈틀대며 내 볼을 잡아 당겼다. 아우우~! 라이트 형은 우리 엄마와 동갑이라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아무리봐도 저 익살스러운 얼굴은 40대 아저씨로 보이지 않아. 엄마도 그렇고, 이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을 격었던 거야? “그래서, 궁금하다는 게 뭐야? 빙빙 돌리지 말고 이야기해. 형은 오늘 일하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 바빠.” 형. 그렇다. 나이는 40대 아저씨지만 몸은 20대라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무지에서 비롯된 오판이라고 해야할까? 테이블에 깍지낀 손을 올린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콜트 슈발츠라는 사람 말야. 나랑 그렇게 많이 닮았어?” “푸흐흡! 콜록콜록! 우에엑!” 아세트양이 가지고 나온 차를 홀짝이던 그는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으음, 이걸로 대답은 됐어. 닮긴 닮았나보군? 지랄맞네. “그, 그건 말야….” “됐어. 이제 다음 질문, 그 사람 어디 살아? 이것만 대답해주면 나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 “…그건 알아서 뭐 할건데?” “형이랑은 상관 없잖아? 자식이 아버지를 찾고 싶어하는게 뭐가 나빠?” 내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던 그를 머리를 벅벅 긁다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샤먼으로 간다는 소릴 들었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그렇다면 유도 심문이다. “그래? 뭐, 좋아. 알았어. 난 이만 가볼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마치 방금 생각 났다는 듯이 그에게 말했다. “아참, 나중에 편지 써줄테니까. 형 수도에 갈 때 그 사람에게 전해주지 않겠어?” “어, 어, 그래 알겠다. 콜트 말이지?” 푸하하! 이 바보! 손을 흔들어주고 밖으로 나가니 등뒤로 라이트의 비명소리가 전해졌다. 낄낄 웃으며 유유히 언덕길을 내려간 나는 이제 가게로 돌아갔다. 오늘은 한달에 두번 가게가 노는 날이라서 안은 한산했다. 하지만 그래도 방에서 투숙하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당번을 서지. 뺄래바구니를 들고 걸어가는 누나를 붙잡고 물어보니 제미니 양은 예상대로 방에 틀어박혀 자고 있다고 했다. 노는 날이니까. 푹 쉬고 싶겠지. 수고하라고 말해준 나는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역시~! 제미니 양은 간단한 브라우스 하나만 걸치고 침대에 누워서 꿈속을 헤메고 있었다. 잠깐 그녀의 하얀 속살을 구경하던 나는 이마를 툭 치고 침대 아래에 손을 넣어 나무상자를 꺼냈다. 안에서 조그만 가죽 주머니를 꺼낸 나는 히죽 웃으며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들이 가득 들어가 있다. 자그만치 10년 동안 모아온 돈이다. 이 다음에 멋진 검하나 장만하고 나머지 돈으로 우리 제미니 양 예쁜 드레스 한번 사줄려고 모아둔 돈인데. 드레스는 좀 미뤄야 할 것 같다. 살금살금 돈을 들고 나가려는데 그녀의 잠꼬대 소리가 날 붙잡았다. “으응… 기분 좋아… 콜트으….” 이런, 꽤 듣기 거북한 소리인데. 콜트 씨. 기다리쇼. 내가 금방 당신 작살내러가리다! 막 방문을 나서던 나는 페이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손에 멋들어진 롱소드 하나를 들고 문앞을 서성거리다가 날 보더니 마침 잘됐다는 듯이 다가왔다. “야아, 나중에 전해줄까 했는데. 다행이다. 아이안, 이리와.” “어? 왜요?” 날 데리고 홀로 걸어간 그는 대뜸 손에 들고있던 검을 나에게 내밀었다.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받아들고 그를 쳐다보니 페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뽑아봐라.” “어, 나주는 거예요?” “응. 사실은 어제 그거 사러 갔었어. 제미니 누님이 말씀하시길, 너도 이제 18살이니까. 자기 몸은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면서 말야.” 제미니 양이? 정말? 아으으~! 이렇게 기특할데가! 입을 딱 벌리고 검을 뽑아봤다. 스르릉! 으아아! 살을 애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밖으로 나온 검신은 희안하게도 시커먼 흑색을 하고 있었다. 내심 번쩍이는 블레이드를 원했는데 조금은 실망이야. “아, 그건 검에 샤프 마법을 건거야. 웬만한 건 서걱서걱 잘리지. 실험해 볼래?” 무슨 말인지 몰라 그가 시키는대로 맥주잔을 툭내리치자 테이블까지 단번에 두동강이 났다. “우으악?! 뭐, 뭐 이런게 다있어?!” “어차차~! 조심해서 다뤄. 말했잖냐. 샤프 마법을 걸었다고, 웬만한 건 다 잘려버릴거다. 검도 좋은 거야. 베레타산 강철로 만든거니까 손질만 잘해주면 꽤 오래 쓸수 있어. 블레이드에 네가 상처입지 않도록 조심해서 사용해. 그건 그렇고 네 어머니도 참 극성이시다. 어쩌자고 애한테 이런 걸 사주시나 몰라.” “피의 복수를 위해선 이 정도는 필요한 법이외다.” “응?” “아무것도 아니예요. 고마워요. 페이!” “뭘, 그런데 아직 소지증이 안나왔으니 조심해라.” 낄낄 웃으며 칼을들고 밖으로 나온 나는 기분좋게 웃으며 검을 만져댔다. 으음~! 촉감 좋은데? 이대로 친구 녀석들에게 자랑하고 싶지만 꾹 참았다. 무릇 이런 살인병기는 장난삼아 가지고 노는게 아니라고 귀에 못이 막히도록 들었거든? 어쨌든 검은 구했으니 제미니 양의 드레스가 살아났군. 발걸음도 가볍게 내가 찾아 간 곳이 어디냐면 바로 전당포다. “어이, 아이안. 네가 왠일이냐? 아, 오늘 노는 날이야?” 전당포집 아들 듀플레가 날 맞이했다. 푸하하하~!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맞춰보라! “전에 우리가 가지고 놀다가 네 아버지에게 혼났던 바운드 부츠 말야. 아직도 있어?” “응, 그거 아무래도 장물 같아. 처리하려고 했지만 울 아버지는 아직 10년 안됐다면서 창고에 처박아 두고 있어. 그건 왜?” “그거하고 장기간 주인이 찾아가지 않는 갑옷들 중에서 좀 쓸만한 거 나 잠깐 빌려주면 안돼겠냐?” “뭐? 안돼 임마! 들키면 나 죽어!” “어허, 야. 친구 좋다는게 뭐냐?”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의 테이블 위에 금화를 올렸다. 100만 루나 짜리다. 우리들 수준으로 이 정도면 한달은 펑펑 쓰고도 남는다. 그걸 보고 눈을 커다랗게 뜬 듀플레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고 난 인심써서 한개 더 올려주었다. “…기, 기간은?” “길어야 한달이야. 어때? 한달 정도면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게다가 주인이 찾으러 올 일도 없는 물건이고 말야. 손해 볼 일은 전혀 없다구. 야아~ 200만 루나에 한달 장비 대여료면 너무 많은 것 같지 않냐? 좀 깍자?” 침을 꿀꺽 삼킨 듀플레 녀석은 후다닥 동전을 챙기더니 날 안으로 불렀다. 오예~! 성공이다! 낄낄 웃으며 녀석을 따라 창고로 내려간 나는 녀석이 망을보는 동안 마음만 먹으면 3층짜리 건물도 단번에 뛰어오를 수 있는 바운드 부츠와 경량화 체인메일, 강철 건틀릿등을 챙겼다. 무장은 이 정도면 됐고, 또 뭔가 쓸만한 것이 없나 하고 살피고 있는데 엄청난 물건이 눈이 들어왔다. “야, 이. 이거 뭐냐?!” “구시대 자동석궁이야. 그런데 그거 못써. 프레임이 나가서 고치려면 꽤 줘야 한다고 했거든?” “그럼 나 줘!” “좋아. 서비스로 쳐줄게. 너 가져라. 그런데 뭘 하려고 그러냐?” “어, 손봐줄 녀석이 있어서. 빌려줘서 고맙다.” 큼직한 가죽 자루에 장비를 담은 나는 듀플레 놈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후다닥 집으로 돌아갔다.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은 집에 다있으니까. 걱정없다. 문제는 자동석궁인데 말야. “이거 고칠수 있어?” “응? 우왁?! 이거 자동석궁이잖아?! 임마! 이건 불법무기야! 가지고 다니다가 걸리면 잡혀간다구! 어디서 구했어?” “괜찮아요. 나도 이제 18살이야. 시민증도 있고, 합법적으로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라구, 책임은 내가 지겠어. 릭. 당신이라면 할 수 있지? 고쳐줘요. 돈 줄게.” 릭은 원래 우리 여관에서 부리는 종업원이 아니다. 그는 요 앞에 있는 대장간의 견습생으로 우리네 여관으로 파견되어 평소엔 말구종으로 일하다가 손님들의 급히 무기수선을 요구하면 그걸 들고 대장간으로 가서 고쳐다주는 무기정비사가 본업인 것이다. 일종의 협력관계인 셈이지. “하지만… 이건 프레임도 나갔고, 활대도 없고, 아예 새로 하나 사는게 났겠는데?” “오래 쓸건 아니니까. 적당히 나갈 수 있게만 해줘요.” “이걸로 뭘 할건데?” “사람을 죽일 거야.” “…누구?” ==================================================================== 당연히 그 놈이지요. Bonus Fire : 04 “그때는 내 생각이 좀 바뀔지 모른단다. 아이안.” 나보다 두어살 많은 릭은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고 난 씹어서 뱉듯이 말했다. “우리 제미니 양을 건드려서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장본인을 죽일 거야. 생각해봐요. 나 같은 녀석이 맨손으로 어른을 상대할 수 있을거 같아요? 제대로 된 무기라고 하나 있어야 한다구.” 입을 꾹 다물고 날쳐다보던 그는 한숨을 폭 내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다. 나도 그 사람은 맘에 들지 않으니까. 내일까지 고쳐놓으마. 수고비는 됐고, 재료값만 다오. 네가 잭 아저씨네 무기상에 화살통 사러 들어가면 바로 마스터가 알아 챌 것 아냐. 그것까지 사다주마.” “형 뿐이야. 고마워요.” 그의 손에 금화 몇 개를 쥐어주자 릭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웬 금화냐? 너 마스터 지갑에서 훔쳤지?” “어허~! 어린 소년의 가슴에 못질하지 말아요? 그거 내가 모은거라구요.” “정말?” “정말!” 릭은 피식 웃더니 자동석궁을 들고 자기 가게로 돌아갔다. 으음~! 석궁을 됐고, 이제 남은 건 여행물자인가? 하지만 말도 없이 혼자 가는데 많이 들고가면 너무 힘들다. 최대한 적게 가져가자. 필요한 건 그때그때 사서쓰면돼. 돈은 좀 있으니까. 그래서 내 여행 가방은 조그만 배낭하나뿐이었다. 갈아입을 옷 몇벌하고 적당히 먹을 식량 조금이 내용물의 전부다.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군. 아무리 그래도 18살 소년히 혼자 여행을 하는건데 말야. 만일의 사태에 처하면 어떡하지? 최악의 경우 내가 겁에 질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면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해. 또 상처를 치료한 포션 같은 것도 있어여 하고, 으음~! 고민한 결과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그날 저녁, 내일 장사준비를 하고 있는데 페이가 외출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페이! 어디가요?” “응. 잠깐 외출, 일도 끝났고. 적당히 벌었으니 적당히 써야지.” “헤에~ 홍등가에 가는 거야? 좋겠다?” “헤에~ 데려가 줄까? 오늘 우리 아이안 어른이 되어볼래?” “꺄아악! 페이씨! 아직 어린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페이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에이~ 좋다가 말았군. “뭘요. 녀석도 이제 18살인데. 교육삼아 한번….” “페이 씨!” 가게 누나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를 매도하기 시작했고 페이는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노, 농담입니다. 전 그냥 친구 집에 술마시러 가는 거라구요.” 그의 변명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그래서 페이는 진절머리를 내며 가게를 나섰다. “어이! 늦게 들어와요? 문 열어 놓을까?” “아니, 오늘은 다른데서 자고 올거야. 그냥 잠궈.” 럭키~! 누나들은 느긋하게 대로를 걸어가는 페이를 쳐다보며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직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상관없잖아? 발걸음도 가볍게 몸을 돌린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장사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새벽 무렵, 모두가 잠이 들었을 때 암살자의 그것처럼 객실을 달린 나는 준비해둔 열쇠로 페이의 방을 열고 들어갔다. 호오~ 정리는 상당히 잘해놓았는데? 남자 방 같지 않군. 덕분에 내가 찾던 것도 쉽게 발견했다. 작은 가방이 매달린 소드벨트였는데 열어보니 각종포션과 함께 종이조각이 가득 들어가 있고 꼬리표에는 뭐가 뭔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그래! 이거야! 우히히히히~! “어머~! 이게 뭐니?” “선물이예요.” “나 주는 거야? 아이구~! 우리 아들 귀여워라~!”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발 당일. 제미니 양은 내가 선물한 새하얀 드레스를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그 자식 때문에 결혼식 같은 거 구경도 못했을 테니 일부러 하얀 색을 골랐다. “무슨 돈이 생겨서 엄마에게 이런걸 사줬을까?” “어허, 제미니 양 지갑에는 손 안댔으니 걱정마요. 어렸을 때부터 꼬박꼬박 모아온 걸로 샀으니까. 안심해도 좋아요.” “정말?” “정말!” 에에이! 왜 내 말은 다 못믿는 거래? 제미니 양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드레스를 보고는 그것을 옷걸이에 잘 걸어두었다.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어? 왜 안입어봐요?” “나중에, 나중에 입어 볼거야. 나중에.” 제미니 양은 씁쓸하게 웃으면 순백의 드레스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생각 정도는 눈에 보인다. 그래, 나중에 그 자식이 돌아오면 입을 거라고? 꿈깨시지요. “좋을 대로 해요. 아아~ 피곤하다. 제미니 양 우리 이제 자요.” “응~! 그래. 자자.” 씩 웃으며 고개를 돌린 그녀는 촛불을 훅 불어 끄고는 침대로 올라와 날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키스를 해댔다. 오늘은 옷을 사줘서 그런가 한층 더 심한 것 같아. “거, 거긴 만지지 마요오오~!” “에이~ 어때서 그래? 얼마나 자랐는지 한번 보자니까?” “어허어허~! 안&#46080;다니까아아~!” 겨우 그녀의 손을 뿌리친 나는 헉헉 거리며 가슴에 얼굴을 파뭍었다. 비릿한 냄새 같은게 느껴지는데, 그리 좋은 냄새는 아니지만 충분히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향기다. “아하하하! 간지러워 욘석아. 이 녀석! 엄마가 좀 만져보자니깐 안된다면서? 그러면서 넌 엄마 가슴 만져도 되는 거야?” “…응 난 그래도 돼요. 왜냐면 당신 아들이니까.” 가슴에서 고개를 든 나는 어렴풋이 보이는 그녀의 입술을 훔쳐버렸다. 내가 당한 일은 수십번이지만 이렇게 저질러 본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제미니 양의 입술에서는 달콤한 담배맛이 나는 것 같아. 어쩐 일인지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데? “음? 아이안?” “나, 날 남자로 만들어줘요. 제미니.” 한참 조용하던 그녀가 이마에 입술을 맞춘 다음 날 가슴에 꼭 껴안았다. “안돼.” “왜? 나, 나도 이제 다 컸어. 이제 당신을 가지고 싶단 말야.” “아들이 어떻게 엄마를 가져? 웃기는 소리마렴. 그리고 설령 그렇다 쳐도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볼 것 같아? 어머니와 맷어진 아들? 그런게 가능할 것 같으니? 정신차려 욘석아.” “치~! 맘대로들 하라고 그래! 난 당신만 있으면 된단 말야!” 그녀의 가슴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제미니 양의 두팔을 침대에 꽉 누르고 달빛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가, 가슴이 두근거려서 미치겠다! 한참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 “정말. 하지만 조건이 있어.” “뭔데?” “엄마라고 불러봐. 제미니 양이라고 하지 말고.” 윽! 당했다…. “으윽. 어, 엄마… 씨이…. 너무해.” “엄마를 강간하려는 아들은 너무하지 않고?” “강간아냐!” 그녀의 위에서 내려 온 내가 침대에 주저앉아서 빽 외쳤다. 그러자 제미니 양은 히죽 웃더니 내 손을 잡아 끌어서 가슴을 만져보게 했다. 크다. 말랑거리고…. “왜, 왜요?” “두근두근 거리지 않아?” “어, 어어라?” 제미니양은 핏 웃더니 날 꽉 끌어안고 귀를 앙앙 깨물어댔다. “요녀석! 감히 엄마를 놀래켜?” “아아악~! 잘못했어요! 살려줘요오~! 안돼! 깨물지마아! 아악!” 한참 그녀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나는 남자고 뭐고 힘이 빠져서 침대에 늘어져버렸다. 으윽… 이러다가 제 명에 못죽겠다. 여행도 못가는 거 아냐? “귀여운 내 아들. 이젠 정말 다 큰 것 같아.” “큰 것 같은게 아니고 다 컷어요. 이제 내년이면 19살이고 그 후년이면 20살이라구. 알아요?” 옆에 누워서 내 엉덩이를 매만지던 그녀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들 궁뎅이가 그렇게 좋은가? “엄마가 왜 늙지 않는 줄 아니?” “몰라요.” “알고 싶지 않아? 가르쳐 줄까?”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보통 사람처럼 죽긴 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죽을 땐 죽어.” “다행이군. 나 늙어 죽을 때까지 엄마가 탱탱하게 살아있으면 정말 슬플 거예요.” 제미니 양이 귀를 꼬집었다. “엄마가 죽길 바라는 어투다?” “에에이~! 그럼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길 바래요?! 아따따따따~! 잘못했어요! 놔줘요오!” “풋~! 아하하하하~!” 갑자가 웃기 시작한다. 왜그러지? “큭큭큭~! 어, 화내지 말고 들으렴. 넌 어째 그 사람하고 말투가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니?” “…아들이니까. 뭐, 당연한거 잖아요?” “그래, 아들이니까. 귀여운 녀석. 넌 정말 그 사람을 쏙 뺐어. 아마 그래서 엄마가 널….” “응? 그래서요?” 제미니 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내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왜, 왜그래요. 내일 일 해야하는데 너무 괴롭히지 마요.” “잔말 말고 이리와 욘석아.” “…읍!?” 정신이 아찔하다. 언제나 당하던 그런 키스가 아니야. 정신이 거의 녹아버렸다. 입술을 떼어낸 제미니 양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가 풋 웃으며 말했다. “어머, 벌써 녹아버리다니 너무 한거 아니니?” “…으, 어, 엄마….” “잘 들으렴. 네 인생은 네거야. 한번 살다가 죽을 거라면 네 식대로 살다가 죽는 편이 좋은 거란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 20년 정도 살 수 있을 거야. 운 좋으면 30년은 살겠지. 지금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난 멍청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제미니 양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달콤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넌 아직은 내 아들이야. 하지만 네가 멋진 남자가 되어도 계속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다면, 그때는 내 생각이 좀 바뀔지 모른단다. 아이안.” 제미니 양은 다시한번 입을 맞춰주었고 난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새벽 무렵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조용히 잠들어있었다. 차라리 가지않고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했지만 그녀가 날 아버지 대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었다. ==================================================================== 제미니와 아이안은 친 모자지간입니다. 참 위험하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모티브는 에,,, 무슨 신화였는데 까먹었습니다. ^^; Bonus Fire : 05 “어딜 도망가 새끼들아!” “그 사람을 만나고 올게요. 그러니까. 울지 말고 있어요?” 그녀는 편안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편지까지 써놓았으니 별 걱정은 없을 거다. 조심스레 밖으로 나온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미리 준비해놓은 옷을 갈아입고 체인 메일에 소드벨트를 차고 검을 걸었다. 자동석궁은 릭의 조언대로 등에 걸었다. 한손으로 검을 쓰다가 여차하면 뽑아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음, 괜찮은 걸? 마지막으로 가벼운 배낭과 두툼한 망토를 걸쳤다. 멋이 아니고 후드를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입은거다. 아는 사람 만나면 큰일이니까. 어두컴컴한 새벽의 문을 열고 나가며 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당연하지. 후다닥 대로를 달린 나는 미리 알아봐둔 입실론 상단 연합으로 향했다. 여기서 새벽에 수도로 향하는 캐러반이 출발한다고 한다. “새벽 4시에 수도로 향하는 캐러반을 이용하려는데요?” “이쪽으로 오시오.” 커다란 사내의 뒤를 따라가자 대기실 같은 곳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날 안내해준 사내는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곧 출발 안내를 한다고 했다. 으음, 내가 탈 마차는 저건가? 주위를 힐끔힐끔 살펴보니 건들건들한 사내들이 꽤 보인다. 자! 이제 시작이다! 아이안 리그펜타인! 정신바짝 차려! 대기실 구석에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기다리니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몰려와서 이름을 부르며 마차에 태웠다. 마차에는 모두 10명씩 앉아서 가도록 되어있었는데. 내 옆에는 커다란 덩치에 험악한 사내가 앉았지만 팔짱을 하기만 할뿐 별말은 없었다. 대신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한시도 입을 쉬지 않고 동료와 알 수 없는 소릴 계속 주절거렸다. 에에이~! 시끄러워 죽겠다. 그러고 있으니 드디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짝 긴장한 나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누가 내 코 베어가지 않나살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한 삼일 정도 마차를 타고 다니다보니 이동 중에 꾸벅꾸벅 졸기 바쁘다. 그리고 마차의 사람들과도 꽤 친해졌다. 몇몇을 빼면 다들 좋은 사람들 같다. “정차! 휴식! 점신시간이므로 간단한 중식을 제공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차장에게 문의하십시오!” “야아~! 식사 시간인가? 안그래도 배가 고팠어.” 이 떠벌이 아저씨는 모카라고 하는데 수도에 있는 친구집에 간다고 한다. 너무 시끄러워서 그와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햇빛을 바라보며 선 저 커다란 아저씨의 이름은 카알이며 생기거와는 다른게 사람들을 잘 도와주고 마음씀씀이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캐러반에 고용된 호위무사라고 했다. 마차에서 내려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케이트와 미리네라는 이름의 누나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각각 19살과 20살의 이 아가씨들은 보따리상으로 여자 속옷이나 화장품 같은 것을 수도에서 싼 값에 사다가 지방에 내다 판다고 했다. “아이안~! 같이 점심 먹자!” “싫어. 난 혼자 먹을 거야.” 마차 바퀴에 쭈그려앉아서 차장 영감이 나눠준 빵과 햄덩어리를 꾸역꾸역 씹어삼키고 있으니 케이트가 못말라겠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왜 자꾸 빼고 그래? 우리랑 같이 있기 싫어?” “응, 싫어.” “어어~! 왜에?” 그러니까 달라붙지마! 은근슬쩍 내 팔을 끌어안으며 말하는 그녀의 손길을 마치 뱀의 그것처럼 쳐내자 미리네가 꺄르륵 웃었다. “네가 자꾸 그러니까 케이트가 재미있어서 그러는 거야. 콱 안아줘버려.” “칵! 이상 소리 말고 나 좀 내버려둬!” “아이안~!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으응?” 나이를 속였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20살이다. 아무래도 18살이라고 하면 우습게 볼 것 같았거든? 그래서 최대한 어리게 보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중이지만,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는데 웬 사내가 걸어오더니 미리네 누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얼마야?” “20만 루나예요.” “뭐야? 너무 비싸잖아?” “그럼 사지 말든가.” 그때 사내를 따라온 친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당기며 타일렀다. “그만둬, 오늘 저녁엔 마을이라구, 뭐하러 돈 낭비해?” “알았어. 쳇! 잘먹고 잘살아. 이 노예년야.” “닥쳐! 내가 노예인지 아닌지 너희들이 어떻게 아냐? 이 되먹지 못한 돼지들아.” 방금 무슨 대화가 오고 갔지? 입을 딱 벌리고 있으니 옆에 착달라붙어있던 케이트가 항상 쓰고 있는 내 후드를 벗겼다. “오와~! 아이안 이렇게 보니까 더 귀엽다? 왜 쓰고 다녀? 벗어. 갑갑하지 않니?” “우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난 후다닥 후드를 뒤집어 쓴 다음 케이트에게 엄포를 놓았다. “한번 더 가까이오면 정말….” “오크다! 승객들은 모두 마차로 피하시오!” “오크 있진 않겠어! 어, 어라? 뭐야?” 주위를 살피던 첨병이 비명을 지르며 롱보우를 꺼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숲속에서 글레이브와 숏소드로 무장한 지저분한 땅딸보 녀석들이 달려나오고 있었다. 뭐, 뭐냐?! 팔짱을 하고 있던 카알이 말했다. “오크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검을 뽑아라. 그리고 여자들은 숨도록.” 케이트와 미리네 누나들은 후다닥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가 엎드렸다. 그때 카알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년. 싸울 수 있는가?” “윽… 아, 알고 있었어요?” “변성기가 막 지난 18살 꼬마 목소리는 구분하기 쉽지. 허리에 매고 있는 거 아무래도 검인 것 같은데 쓸 수는 있는 건가?” 난 대답대신 망토를 벗고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카알은 내 무장을 보더니 제법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검을 뽑았다. 그때 난생 처음 보는 오크들이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퀘헤헤헤헤! 돈과 여자와 돈과 목숨을 내놔라!” “흡!” 카알이 앞으로 달려나가 달려든 녀석의 머리를 검을 쪼개버렸다. 사방으로 피와 뇌수가 퇴기는데 하마터면 토할뻔 했다. “소년! 마차 쪽으로 간다! 막아!” “우라질! 난 아이안이에요!” 고개를 돌리자 발이 빠른 놈들이 마차아래에 숨은 케이트와 미리네를 잡으려 했다. “우후헤헤~! 이리와 귀염둥이들~! 퀘! 오빠가 귀여워 해줄게에에~!” “꺄아악! 싫어! 저리가!” “어이! 오크 제군!” 검을 머리 위에 들어올리고 놈을 부르자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을 노린 나는 눈 딱 감고 검을 내질렀다. 촤아악!! “꺄아악!” 케이트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안! 뒤!” 우, 어. 내, 내가 이 녀석 죽인거야? 멍청하게 서있던 나는 미리네의 외침에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오크 중 한놈이 나에게 스피어를 던졌다. 컥?! “쿼! 뭐, 뭐냐?! 스피어가 튕겨?” 으따따따~! 젠장, 체인메일 아니었음 벌써 죽었어. 죽으면 제미니 양 다시는 못봐! “그건 안돼! 난 기필고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구!” 등에서 자동석궁을 뽑아든 나는 릭에게 배운대로 안전장치를 해체하고 손잡이의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서 당겼다. 투투투투투투투투퉁~! “으우악!?” 반동으로 팔이 들리는 바람에 하늘에다 대고 몇발 쏴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에게 창질은 했던 녀석은 배에서부터 화살이 일렬로 박혀죽었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으음, 누구야? 저런 심한 짓을 한 사람이? “소년! 조심해라!” 뭐? 휭휭휭~! 이번엔 글레이브와 숏소드가 날아왔다. 검을 휘둘러 하나를 튕겨낸 나는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두 번째를 피했다. 바운드 부츠이기 때문에 난 단번에 하늘로 솟아올랐고 의외로 상쾌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차츰 뭔가가 내 안에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랴차!” 서걱! 삭! 츠칵! 어떤 오크든 내 앞에서 3초를 넘기지 못했다. 휘두르는 족족 쓰러져 나갔다. 이야~! 이거 정말 재미있다?! 이 놈들은 허수아비인가? 그렇지! 여기서 실전 연습을 해둬야 그 자식에게 이길수 있을 거야.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을 한 나는 장난삼아 하던 짓을 그만 두고 오크 한놈을 베더라도 정성(?)을 다해서 검을 휘둘렀다. “케에에엑! 후퇴해라!” “어딜 도망가 새끼들아!” 소드벨트의 가방안에 손을 넣어서 스크롤을 꺼냈다. 꼬리표에 매직 미사일이라 씌여있었고 난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찢으며 외쳤다. “매직 미사이일!” 츄화아악! 수백발의 붉은 빛 궤적이 하늘을 수놓았다. 우와~! 어, 엄청나다! 날아간 매직 미사일은 도망가는 오크들의 뒷통수에 작열했고 그것에 맞은 놈들은 예외 없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오크들이 물러가고 수건으로 대충 피와 오크들의 살점을 떼어낸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모두가 날 쳐다보는 것이다. 어, 이, 이런 눈에 뛰면 안되는데. 너, 너무 설쳤나? 쑥스럽게 고개를 돌린 나는 바닥에 던져둔 망토를 주워서 후다닥 걸치고는 후드를 눌러쓰고 구석에 가서 몸을 숨겼다. 그러고 있으니 카알이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수고했다. 혼자 여행을 나온 것 같은데. 조언하나 해주마. 지금 그 겸손을 잊지 말거라. 괜히 실력 조금 있다고 설치면 빨리 죽는다.” “아, 알고있어요.” 조그맣게 중얼거려주고 고개를 돌렸지만 카알은 없었다. 그곳에는 눈을 반짝이는 케이트와 미리네가 있을 뿐이다. “아이아안! 너무너무 멋있었어!” “최고야! 대단해! 누구들이랑은 차원이 달라!” 으으악~! 조용히 좀해! 지금 그 누구누구들이 나 쳐다본단 말야! 하지만 이랬다간 더 놀림 받을 거야. 그래서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줬다. 누군가 그랬다. 조용히만 있으면 2등은 한다고, 연신 떠벌거리면 사람이 가볍게 보이고 접근하기도 쉽지만 말을 아끼면 뭔가 무게가 있어보이고 말을 걸기도 힘들다. 난 지금 그걸 노린건데. 이 아가씨들은 그것도 몰라주고 끝까지 달라붙네. 아으으~! 제미니 양! 보고 싶어! ==================================================================== 아이안 군은 마마보이입니다. Bonus Fire : 06 “어, 그, 그럼 나도! 나도 주인님이 필요해.” 그렇게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투가 끝나고 마차는 수도에서 이틀 거리에 있다는 관문도시에 도착했다. 태어나서 한번도 입실론을 벗어나 본적이 없던 나는 거대한 도시의 모습에 입을 벌려야 했다. 케이트가 설명해줬다. “크지? 여긴 루카스라는 도시인데. 수도의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제일 처음 조성된 곳이지. 그래서 꽤 커.” 열렬히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을 대답을 대신했다. 마을로 들어간 캐러반은 내일 아침 출발하는 시간을 알려주고 모두를 여관으로 안내했다. “내일 아침 7시에 소집이 있을 겁니다. 6시엔 기상하셔서 출발 준비를 마쳐주십시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나에게 배정 받은 방으로 올라가서 문을 열었다. 4인실인데. 방안에는 모두 한 동료들이 인 것은데 나만 따로 인 것 같다. 뭐, 그래도 어떠냐? 잠만 자면 그만이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으니 그중 한 사내가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어이, 미안한데. 방을 바꿔주면 안될까?” 대답대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서른은 되어보이는 남자는 자기 아내가 다른 방에 있는데. 여기로 데려오고 싶다고 나에게 설명했다. “아내만 따로 떨어져서 말야.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어디죠?” 사내는 크게 반가워하며 날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자기 마누라를 데려가며 손을 흔들어주는 사내에게 고개를 까딱여주고 자리에 앉아 망토와 무장을 풀고 있으니 다른 멤버들이 씻고 올라왔다. 빨리도 씻고 오… “으악!” “어마! 아이안!” “어라? 여기 있던 아줌마는?” “남편이 방을 바꿔달리기에 바꿔줬어. 저, 그런데 케이트.” “으응? 왜 자기?” 케이트는 이제 대 놓고 내 팔을 껴안았다. 칵! 내 나이 밝혀버릴까? “…떨어져.” “으으응~! 이것도 인연인데 말야. 그런데 아까 정말 멋졌어. 대단하더라. 아이안 여자친구 있어?” “어어~! 케이트 작업 들어가네? 공짜 일은 않하는 거 아니었어?” “아냐. 난 남자를 좋아한다구. 게다가 이렇게 멋진 남자라면 돈 주고 살수도 있어. 아이안 오늘 나랑 같이 젊음을 불살라보지 않을 테야? 응? 피차 알거 다 아는 나이잖아? 나 오늘 너 맘에 들어버렸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게 느껴지는 것 같다. 뭐야?! 이 누나들은! 난 비명을 지르며 방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가, 가까이 오지마아!” “어머, 그러니까 마구 괴롭혀 주고 싶은걸?” “그만두지 않겠나? 아가씨들.” 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덩치의 카알이 자기 배낭을 등에 지고 문앞에 서있었다. 미리네가 물었다. “어머, 카알 아저씨가 웬일이세요?” “자리가 모자라서 이쪽으로 오게 됐어. 애송이는 건들지 말지 그래? 케이트.” “애송이라니요?” 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칼은 침대에 걸터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 18살이야. 혼자 여행길에 나선 것 같은데. 그만 괴롭혀.” “에엥~!” 두 아가씨가 눈썹을 세우고 날 쳐다보았다. 방구석에 주저앉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자, 잘못했어요!” 저녁을 먹고 좀 씻은 다음 방으로 올라온 나는 미리네와 케이트에게 붙잡혀 사정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여행의 목적이며 전부다 말해주자 그네들은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보는 양 신기하게 날 쳐다보았다. “헤에, 정말 이런 일이 있긴 하구나. 그래서 지금은 아빠 찾아 삼만리?” “칵! 아빠라니! 그 자식 찾으면 죽여버릴 거요!” “오호~! 대단한 열성인데?” 볼을 부풀리고 침대에 앉아있다가 시계를 보고는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누나는 왜 여기 있어요?” “응? 따뜻하잖아? 엄마 품이 그리우면 만져봐도 좋아.” 케이트는 자기 앙가슴을 가르키며 속삭였고 난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알 아저씨. 도와줘요오.” “케이트.” “칫~! 알았어요. 알았어. 털도 안벗겨진 애송이는 이쪽에서 사절이라구요. 흥~!” 케이트는 쌀쌀맞게 말하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러고 있으니 미리네 누나가 칼에게 물었다. “브랜디는 잘 크죠?” “이제 4살이야. 그런데 너희들은 언제 이 일 그만둘거냐?” “기한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입에 풀칠하려면 이짓 계속 해야죠. 우리 같은 노예년들은 주인님이 없으면 정말 살기 힘들다구요. 옛날에 노예폐지 정책이 시행됐을 때는 자유라고 좋아했는데. 이건 뭐, 노예만 풀어줬을 뿐이지 살길이 없잖아요. 그나마 아저씨 아니었음 꼼짝없이 홍등가로 들어갔을 걸요? 고마워요. 아, 그렇지. 메이 언니는 잘 지내죠?” “나 같은 녀석이 뭐 좋다고 따라왔는지 지금 브랜디 녀석 키운다고 고생하고 있지. 차라리 그때 보내버렸어야 했는데 말야.” “어마~! 아저씨도 참! 메이 언니는 복 터진 거라구요! 그런 말씀 자꾸 하시면 메이언니 울어요?” 험상굳은 카알 아저씨는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지? 그래서 케이트 누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쌀쌀 맞게 모른다고 잡아땠고 미리네 누나가 대신 대답했다. 그녀들은 3년 전까지 주인님이 있던 노예들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잘대해주던 주인님들을 버리고 관리원으로 가서 문장을 파고 자유의 몸이 됐는데 알고보니 그게 끝이 아니었단다. 그녀들을 맞이한 것은 따스한 봄바람이 아니고 차가운 멸시와 천대 였다고 그녀는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배고프고, 춥고 힘들었어. 노예들은 자기 발로는 걷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그거 사실이 더라? 어떻게 무슨 일을 해야 돈을 버는지 하나도 몰랐어. 주인님이 다 알아서 했었거든? 그때 난 그분에게 귀여움 받고 애교만 떨어주면 다된다고 생각했어. 어렸고, 몰랐으니까. 그런데 짧은 생각에 자유 하나만 보고 문장을 없애버렸더니. 이게 뭐래? 당장 주어진 거라곤 옷 한 벌 뿐이었어. 그때 정말 많이 울었지. 배고파서 몸 판 돈으로 빵 사먹다가 동네 건달들에게 끌려가 겁탈 당하면 어떤 기분인 줄 알니? 정말 세상 살 맛 안나더라. 그래서 꽤 많은 노예들이 자살했어. 하지만 머리 좋은 노예들은 주인님만 꽉 붙잡고 지내다가 운 좋으면 그 분께 청혼을 받아 시집가곤했어. 여기 칼 아저씨 노예였던 메이누나가 그런 케이스지. 나도 끝까지 주인님 곁에 붙어있을 걸 그랬나봐. 좋은 분이셨는데. 훌쩍…! 에이~! 눈물나네. 아씨! 너 때문이잖아! 이거 책임져!” “어, 으윽, 미, 미안해요.” “그럼 같이 자자. 오늘 하룻밤만 내 주인님이 되는거야.” “아악! 미리네 너무해!” “털도 안벗겨진 애송이는 싫다며? 난 그런 것도 좋아. 이리와요. 주인님.” “크흠, 장난치면 가만 않있을 거야.” 느긋하게 파이프를 태우던 카알 아저씨가 은근히 위협조로 말했지만 미리네는 혀를 빼물어버렸다. “걱정마세요. 정말 안고만 잘거니까.” “어, 그, 그럼 나도! 나도 주인님이 필요해.” 으윽~! 제미니 양이 아닌 다른 아가씨들과 한 침대에 눕는다는게 좀 거북스러웠지만 내가 지은 죄가 있으니 하는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은 신체의 자유를 박탈 당하고 주인들에게 끌려다니며 고생하기 때문에 다들 자유를 찾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전 미리네 누나의 말은 뭐지? 내 생각이 틀린건가? 으으음~! 나중에 라이트나 아세트 누나에게 물어봐야겠다. 윽…! 그런데 무사히 아침이나 맞을 수나 있을까 모르겠네. “…케이트, 거기 만지지마요.” 루카스에서 밤을 지새운 캐러반은 이튿날 수도 위성 도시를 경유해서 입시론에서 출발한지 닷세하고도 저녁무렵에 그랜퍼스의 수도 캘버린에서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엉덩이를 좀 주무르다가 수도의 휘황 찬란한 야경에 입을 딱 벌렸다. “우으와~!” “멋지지? 수도야 수도.” 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도의 엄청난 위용을 구경했다. 대단하다~! 역시 돈 많은 나라는 틀려! 라이트에게 배운대로라면, 우리 그랜퍼스는 무역수출입의 중심인 나라로서, 이웃의 베레타와 캐슬린간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도의 성벽은 엄청나게 높고, 밤거리는 기름램프가 아닌 컨티뉴얼 라이트로 빛나고 있으며 밤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사람들이 길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입을 딱 벌리고 그걸 구경하고 있으니 우릴 이곳으로 데려온 캐러반의 차장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 여객을 이용해주신 승격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울러 수도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좋은 만남 가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아, 그리고 왕복차편의 예매는 상시하고 있으니 언제라도 저희 상단으로 문의주시면 가장 가까운 날의 차편으로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돌아갈 때도 이곳을 이용할 생각이기에 상단의 이름을 잘 외운 둔 다음 고개를 돌렸다. 케이스와 미리네 누나가 서운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으음, 확실히 아까운 얼굴들이야.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데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생이 구겨져버렸어. 미리네가 손을 내밀었다. “잘가. 덕분에 즐거웠어.” “나도. 괴롭혀서 미안해. 하지만 재미있었어.” 그녀들의 손을 잡아준 나는 머리를 좀 벅벅 긁다가 그만 돌아서려는 그녀들을 붙잡았다. “어, 뭐, 나중에 떠돌다가 배고프고 그러면, 홍등가 같은데 들어가지말고, 입실론으로 와요. 촌구석이지만 덕분에 마음씨 고운 남자들 많아요. 에, 괜찮다면 내가 괜찮은 사람들 소개 시켜 줄 수도 있고요.” “뭐?! 정말!?” “예. 그리고 괜찮은 일자리도 있으니까. 이렇게 다리품 팔러다니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야~! 기특한 소릴 하잖아? 당장 갈게! 어디야?” “입실론에서 빨간머리 미인 주방장이 있는 여관을 찾아요. 요새 거기서 홀서빙하고 주방보조를 찾거든요? 생각 있으면 거기서 일하면서 순진한 남자들 꼬셔봐요. 말구종겸 무기정비사 릭은 좋은 사람이예요. 이해심이 많죠. 대장간 허브씨는 좀 험상굳지만 마음은 정말 비단결이고요. 약재상의 디스펠도 좋아요. 근면성실하죠. 그리고 여관에 장기투숙하고 있는 페이 블랙도 좋은 사람이예요. 모험가라서 돈도 잘 벌어요. 에에이! 괜찮잖아요! 바보 같이 떠돌아다니면서 아무 남자한테나 몸 팔지말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다치지 말고 그냥 적당한 곳에 정착해요! 정들면 거기가 고향이래요! 우리 마을에선 눈치주고 안그래요! 믿을 수 있다구요! 누나들 과거? 안캐물어요! 걱정마요! 주인님은 이제 떠나 갔으니 그만 찾아요! 당신들이 버렸잖아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걸 바라면서 떠돌지 마요! 다른 걸 찾으라구요! 다른 거! 누나들은 예쁘니까 데려갈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구요! 내 말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래도 환상을 찾는다면!! 이익~! 나도 안말려요….” 내 외침을 듣던 카알 아저씨가 파이프를 빼서 불을 붙였으며, 미리네와 케이트 누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우연찮게도 몇몇 사내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야아~! 케이트! 서방님 오셨다! 잘 지냈어?” “어효효~! 미리네도 있잖아? 오랜만이야? 돈 많이 벌어왔어? 오늘 같이 놀아볼까?” 눈을 부릎 뜬 나는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사내들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날 쳐다보았고 난 이를 드러냈다. “저리가요. 케이트랑 미리네는 내가 데려갈거야.” “뭐가 어째? 이 어린 놈이….” 쾅! 머리로 사내의 얼굴을 받아버리자 곧바로 싸움이 시작됐다 난 강철건틀릿을 낀 주먹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덤벼! 빌어먹을! 18살짜리 한테 한번 맞아보라구!” “야! 쳐!” 덤벼드는 사내들은 모두 20대 초반 같은데. 우라지게 약했다. 아니, 내가 센건가? 갑자기 날 지겹게 두들겨 패준 모험가 길드 아저씨들이 고마워진다. 나이프를 휘두르는 남자의 코뼈를 박살내버린 나는 괴성을 지르며 외쳤다. “이게 다야?! 더 없어! 더 데리고와! 더!” ==================================================================== 아이안 군이 어린 나이임에도 쎄게 나오는 것은 어쩔수 없습니다. 정의는 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희대의 악녀. 라크스 클라인.- Bonus Fire : 07 “헝크씨! 스칼렛 왔어요?!” “그만해 아이안.” “학~! 하악! 그럼, 누나들 우리 마을에 올거야?” 미리네와 케이트 누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알 아저씨다. 그는 검을 등에 매고 몸을 돌렸다. “아이안, 제미니 누님이 걱정하시니 그 사람 만나면 바로 내려가거라. 그리고 미리네와 케이트는 한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다음 차편으로 입실론으로 데려다주마. 너희들도 이제 마냥 떠돌 수는 없잖아? 안그래도 메이가 너희들 좀 도와주라고 부탁했었다. 잘됐구나.” 미리네와 케이트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걸로 나도 착한 일 하나 한건가? 그녀들이 같이 가자고 졸랐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할 일이 있어요. 난 그 사람을 찾아야 해요. 저, 카알 아저씨. 우리 제미니 양을 아는 것 같은데. 혹시 그 사람 어디 사는지 알아요?” “…우리 제미니 양?” “엄마 이름이에요.” “왜 그렇게 불러?” “이 다음에 그녀랑 결혼 할거니까.” 미리네와 케이트는 어이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그래, 웃을 테면 웃어라. 난 이제 신경 안쓴다. 카알 아저씨는 정말로 피식 웃더니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법사 길드의 아레프 왓슨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봐라.” “감사합니다.” 손을 흔들어주는 미리네와 케이트 누나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나는 바로 몸을 돌리고 수도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어 일단 적당한 여관을 찾았다. “어서옵쇼~! 뭘 드릴까요?” “어, 일인실 하나하고 저녁이요.” 커다란 덩치의 중년 사내가 잠시 날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실례하오만 몇 살이신가?” “20살인 뎁쇼.” “시민증 좀 까보겠소?” 윽…! 떱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 나는 몸을 돌리고 가게를 나서려했다. “여보! 왜 손님을 내 쫓고 그래요?” “아, 아니 그게 말야. 아무래도 어린아이 같아서.” “쩝, 18살이면 성인 인뎁쇼.” “아깐 20살이라며?” “거, 일일이 따지지 맙시다. 우습게 볼 것 같아서 나이 좀 속였습니다. 됐어요?” 고개를 돌리며 말하던 나는 여관주인장과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를 보고 머리를 좀 긁적였다. 사내는 30대 중반인데. 부인은 아무리봐도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이다. 결국 뻔한건가? “주인 아저씨도 남말할 처지는 못돼시는데요? 안주인 되시는 분이 이렇게 젊은데야. 손님 나이 좀 어리게 보인다고 민증까보라니 말이야. 에이~! 나 다른데 갈래.” “어마어마~! 손님 왜 그러세요. 여보! 헝크씨! 빨리 사과 안해요?!” “으윽! 미, 미안외다. 손님.” “에헴~! 식사는 방으로 배달해주세요.” 헝크라는 이름의 사내는 아랫입술을 삐죽 낼밀고 부엌으로 들어갔고 금발에 화사한 미소의 안주인께서 날 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저녁을 먹고 한숨 푹 잔 나는 이튿날 아침 아래로 내려가 숙박비를 치르며 물었다. “수도는 초행이라 그런데. 마법사 길드가 어딥니까?” “왜요? 누굴 찾으시나요?” “어, 거기 아레프 왓슨이라는 사람에게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그러세요? 그럼 대로를 쭉 따라 올라가다가 광장이 나오면 좌측으로 꺽어서 다시 올라가세요. 그럼 북부지구 표지판이 나오는데. 거기서 다시 우측으로 돌아서 야크 장군 동상이 보이시면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걷다가 육교가 나오면 거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꺽어서 골목길을 지나 상가건물이 밀집한 골목을 지나서… 에, 찾아가실 수 있겠어요?” “어, 예. 아, 아마도…. 그러니까 야크 장군 동상에서 오른쪽….”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손바닥을 딱 치더니 부엌에 대고 외쳤다. “헝크씨! 스칼렛 왔어요?!” “오! 지금 같이 마늘 까고있는데? 왜?” “잠깐 불러주세요.” 잠시 후 내 또래 소녀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 이거 뭐라고 해야하냐…. “저 불렀어요? 안젤라 고모.” “응. 이 분 마법사 길드에 좀 안내해드리렴?” 나에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힐끔 거리며 날 쳐다보다가 그 앵두같은 입술을 열었다. 으아~ 세상에 이런 여자아이도 있구나. 다크엘프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더구나 회색 머리카락이 가능한거냐? 혹시 저게 염색이라는 건가? 역시 수도는 뭐가 달라도 달라. “안내료 따로 주셔야해요. 괜찮으세요?” “아, 예. 무, 물론입니다. 어, 얼마죠?” “10만…. 아으윽?!” “아무것도 모르는 손님 등쳐먹지 말고 빨리 안내해드리고 오렴.” 안주인은 앙증맞은 주먹으로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아버렸다. 고모라고 한 것 같은데. 무섭구나.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든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아프잖아요. 으씨이~!” “용돈 받고 싶으면 제대로 일해. 오빠가 오냐오냐 해주니 애가 너무 귀하게 자랐어. 고모 앞에서는 그거 안통하니까 볼 부풀리지마.” “으이~! 고모부! 저 같다 올동안 양파도 다 까놓으세요!” “오! 안돼! 이건 너무 큰 시련이야! 차라리 오크 눈알을 빼라면 내가 멋진… 으악! 안젤라 내가 잘못했어~! 꼬집지마! 악악악~!” 안주인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사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뭔지 모르지만 여기 시끌벅적해서 좋다. 나중에 또 올까? “뭐해요? 따라와요.” “아, 예.” 대로로 나간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그녀가 걷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인사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여어, 스칼렛. 어디가니?” “심부름이요.” “스칼렛~! 좀 놀다가지 않을래?” “안돼요. 아저씨네 가게에 한발자국이라도 들어가면 저 아빠한테 맞아죽어요.” “스칼렛 안녕! 매상 좀 올려주렴.” “나중에요.” 별로 외우고 싶지 않아도 이정도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각인이 될 것 같다. 엄청난 인기인이잖아? 내 앞의 회색머리 아가씨, 그때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을 살짝 들췄다.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하얀 무릎이 조금 보인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가 고개를 팩 돌리더니 물었다. “봤어요?” “으허억~! 아, 아뇨? 아무것도 못봤어요.” “수상한데…?”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니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다. 스칼렛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긴장하지 마요. 농담이니까. 그런데. 손님 몇 살?” “여, 열 여덟인데요.” “난 열 일곱인데. 한살 차이네? 말놓자. 괜찮지?” “어, 응.”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손님은 이름이 뭐야?” “아이안 리그펜타인.” “호와? 남자 이름치고는 이쁘네. 난 스칼렛이야. 들었지?” “응. 스, 스칼렛 양은 꽤 유명하더라?” “스칼렛 양? 헤에, 듣기 좋은데? 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답고 예쁜거에 집착하니까. 희소가치라고 하지? 쳇~! 속은 더러운 흑심만 가득 찬 주제에 얼굴은 방글거리다니 토할 것 같아.” 우엑… 입이 참… 그렇구나. 하긴 저 정도로 예쁘면 성격이 모난다고 하더라. 우리 제미니 양도 평소에 쌀쌀 맞으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아이안은 혼자 온거야? 집은?” “입실론이야. 수도엔 만날 사람이 있어서 처음 올라왔어.” “우와~! 입실론? 대단하다. 거기서 여기까지 혼자왔다구?!” “응, 5일동안 캐러반 마차타고 왔는데 엉덩이 되게 아프더라.” 스칼렛은 첨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꺅꺅거렸다. 자기도 여행을 가고 싶은데 집안의 반대로 그럴수 없다는둥, 가끔은 이렇게 잘나게 낳아준 부모님이 원망스럽다는 둥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댔다. 뭐, 금방 만나고 헤어질 사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아니면 친구가 없다거나. “맞아 나 친구 없어. 따돌림이라고 하지? 젠장, 지들보다 좀 예쁘니까 이것들이 날 따돌려. 흥~! 따돌리면 어쩔꺼야? 난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논다구.” 삐뚤어진 이유가 따로 있구나…. 그러고 있는데 우리 앞으로 웬 패거리가 나타났다. 모두 우리 또래의 소년들인데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험상굳게 생겼다. 행여 어제 내가 때린 건달들의 동생이 아닌가 싶다. 형들을 때리면 동생들이 나와서 복수하는거야? 수도는 거꾸로네? “뭐야? 케인이니? 비켜 임마. 누난 너희들이랑 놀아줄 시간 없어.” “누나는 무슨! 하루 일찍 태어난 것도 누나냐? 그리고 말야. 내 부탁 왜 안 들어주는 건데? 너무 튕기지 말란 말야. 좀 예쁘면 다냐?” “어머~! 요녀석이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혼좀 나볼래?” “시끄러! 난 언제까지고 너한테 얹어맞던 그 얼치기 아니라구! 복수다! 야! 덥쳐서 벗겨버려! 오늘은 기필코 저 계집애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겠어!” “내 옷부터 벗겨봐라. 등신들아.” “어라? 이건 뭐야? 안비켜? 촌뜨기라서 모르나 본데! 우리 막나가는 것들이야? 계집애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만 사내 녀석들은 안봐줘!” 스칼렛이 속닥거리며 내 옷을 잡아당겼다. “어이어이, 그만둬, 저 녀석들 진짜 독한 놈들이야. 도망가야 한다니까?” “도망안가. 바보들아. 덤벼봐.” “이게!” 녀석들이 달려오더니 냅다 주먹으로 내 얼굴을 때렸다. 퍼억! “헤헤헤~! 맛이 어때…?!” 쾅! 입가로 흐르는 피를 낼름 핥은 나는 강철건틀릿으로 놈을 때려줬다. 녀석들은 내 주먹을 보고 욕을 해댔다. “야이! 씨댕! 그거 반칙이야! 너클끼고 때리는게 어디있어?!” “여기있다. 더 할거야? 계속 덤빌거야?” “제기! 이 새끼가?!” ==================================================================== “씨댕.” 군대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욕설입니다. 참고로 전 고참에게 저 욕을 듣고 여린 마음에 상처를 입었더랬습니다. Bonus Fire : 08 “아하아암…. 내가 콜트 슈발츠인데. 누구쇼…?” 한 녀석이 나이프를 꺼내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가만히 서있으니 대놓고 배를 찌르는게 아닌가? 우와~! 진짜 막가는 녀석들이네? “아프지? 헤헤헤~! 넌 이제 죽었… 어라?” 눈을 꿈벅거리며 녀석을 쳐다봐준 나는 망토안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르릉! “대.” 한마디 해주자 녀석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버렸다. 어이구 등신들~! 그러고 있으니 스칼렛이 내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며 외쳤다. “바보야! 너 무기 허가증은 있는 거야?! 저 녀석들 경비대 부른단 말야! 어쩔거야! 어서 가서 모두 때려잡아!” “어, 으, 응!” 영문도 모른채 놈들을 붙잡으러 달려갔지만 이미 녀석들은 골목길 안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다 쓰러져 있었다. “어라?” “으응?” 녀석들의 팔에 밧줄을 묶고있던 빨간머리 사내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반갑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오, 빨간머리네? 반가워.” “아예. 저도….” 엉겁결에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어주고 있으니 스칼렛이 헥헥 거리며 들어왔다. “여, 여기서 뭐… 어라? 첼시아 이모!?” “이야~ 스칼렛 잘 지냈어?” 이모? 끽해야 20대 후반인데? 아, 자세히 보니 주름이 살짝 보인다. 화장 때문인가? 대단히 젊어보이는군? 그녀는 스칼렛의 엉덩이를 슥슥 매만지며 인사를 대신했고 스칼렛을 꺅꺅거리며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으~! 이모오!!” “이야~ 엉덩이가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데? 엄마 닮아가나봐. 가슴은 얼마나 커졌을 까나?” “으야아아! 그만둬요! 소, 손님도 있는데에!” 첼시아는 그제서야 내 존재를 눈치채고는 베시시 웃으며 사과했다. “어쨌든 미안해. 짜잔하고 나타나서 구해주려고 했는데. 이 녀석들 붙잡는다고 가만 있었어. 고마워 총각, 한쪽으로 몰아줘서 덕분에 한꺼번에 다 잡았어.” “예? 아, 아뇨.” 고개를 가로 젖고 있으니 건장한 사내가 모두를 묶어버린 다음 그녀를 불렀다. “다됐습니다. 마스터.” “퍼피 아저씨는 언제까지 마스터라고 할 거예요? 다정하게 첼시아아~ 하고 불러보시란 말예요. 그 편이 이모가 더 좋아하는거 몰라요?” 스칼렛의 성화에 사내는 입을 좀 우물거리다가 끙하는 소릴내며 그냥 몸을 돌려버렸다. 스칼렛이 속이 터진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지만 첼시아가 호호 웃으며 말렸다.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러니까 그냥 나둬. 아무도 없을 땐 간혹 이름으로 불러주니까.” “피~! 하지만 보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구요. 한번이라도 퍼피 아저씨가 이모에게 다정하게 부르는 모습보고 싶어요. 노예든 뭐든 이제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구요. 어, 그런데. 이 녀석들 이번엔 꽤 큰 사고 쳤나봐요? 이모들에게 잡힌 걸 보면?” “뭐, 좀 심한 짓을 했지. 많이 알면 정신건강에 해로우니 다음에 이야기 해줄게. 우린 이만 가야겠다. 일어나! 이 이상한 쪽으로 머리가 튄 놈들아! 너희들은 콩밥 좀 먹어봐야 정신을 차릴거야. 스칼렛~! 이모가 저녁에 찾아간다고 엄마한테 맛있는거 해놓고 있으라고 그래.” “예. 7시 까지는 오셔야해요?” “으응! 걱정마! 선물 사갈게!” 모험가로 보이는 빨간머리 아가씨와 무뚝뚝한 남자는 녀석들을 질질 끌고 골목길을 나가버렸다. 스칼렛은 그들에게 손을 좀 흔들어주다가 몸을 돌리더니 삐딱하게 쏘아댔다. “어이, 총각. 싸움 좀 한다고 아무데서나 나서는 거 아냐? 세상은 넓고 자기보다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걸 기억하고 살아가라구.” 귀여운 얼굴로 영감님처럼 말하네. 뭐, 나도 잘한거 없으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스칼렛은 풋하고 웃더니 앞서서 걸었다. “시골에서 막 올라와서 그런지 아이안은 남의 말도 잘 들어주네? 도시 애들은 뭐라고 한마디 하면 끝까지 대드는데 말야. 자기 한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면 떽떽거리구.” 너도 그런 말 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말야. 하지만 애써서 다른 여자들이랑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살짝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한참 걸어갔더니 대로 끝에 거대한 탑이 세워져 있다. “저기가 마법사 길드야. 보통은 현자의 탑이라고 부르지.” “…어, 응, 돼, 돼게 놈다아?” 고개를 꺽어 들고 하늘 꼭대기까지 솟아있는 탑을 올려다보던 나는 스칼렛에게 질질 끌려 길드로 들어갔다. “오~! 스칼렛인가?” “안녕?” “흐이익?!” 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엄청나게 큰 개 같은 녀석이 누워서 날 내려다 보았다. 늑대인지 개인지 정확한 종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정말 크다. 세상에, 머리 크기만 2미터는 돼겠어! 사람 같은 건 한입에 삼키겠다. “아, 놀라지마. 훈트라고 들어봤지?” “후, 훈트? 그 결전병기!?” “그렇다. 나는 그 프로토 모델이지. 스칼렛. 누구냐? 이 촌뜨기는?” “응, 우리 손님이야. 아레프씨 만나러 왔데.” 훈트는 날 한참 쳐다보다가 그 거대한 머리를 살짝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으윽~! 저 가지런한 이빨 좀 봐. “이상하군. 누군가의 익숙한 냄새가 나는데. 다른 냄새와 섞여서 잘 모르겠다.” “헤에~ 감기 걸린 거 아냐?” 스칼렛은 겁도 안나는지 그 괴물 같은 놈이랑 농담따먹기를 하다가 날 안내해주었다. “리키 언니!” “어머, 스칼렛 왔네? 잘 지냈어?” 1층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꽤 넓은 홀과 함께 맞은 편에 책상이 있고 그곳에 웬 아가씨가 앉아서 우릴 맞이했다. 아, 정확히는 스칼렛이지만. 그때 그녀가 날 불렀다. “이봐. 아이안.” “어, 응.” “누굴 찾으러 오셨다구요?” 세상엔 예쁜 사람이 꽤 많구나. 헤에, 리키라는 아가씨를 잠깐 쳐다보던 나는 그녀가 재차 질문하자 깜짝 놀라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어. 아, 아레프 왓슨이라는 사람이요.” “용건은?”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상담이군요. 예. 46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올라가? 어디로? 여기어디 계단 같은 건 없는데? 그러고 있으니 스칼렛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아 당겼다. “저거 타고 가는 거야.” “뭐? 으으악?! 뭐, 뭐야!” 우리가 있는 홀의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지금 그곳으로 둥그런 원반 접시 같은 것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그걸보고 대단히 놀라워하자 스칼렛은 배를 잡고 깔깔 거렸고 리키는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 난 여기서 그만 헤어질게.” “어? 아, 그렇지. 고마워.” “뭘. 그럼.” 원반은 천천히 위로 오르기 시작했고 아래에 서있던 스칼렛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준 나는 고개를 들고 거대한 수직 터널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얼마 안남았어. 46층에 도착하자 주위에 있던 방문 중의 하나가 열리더니 웬 소녀가 날 마중했다. 척 봤을 때는 아무래도 내 또래 같은데. 자세히 보니 눈빛이 소녀의 그것이 아니다. 세상의 그늘진 곳은 다 본 사람의 눈이 저럴까? 입은 웃고 있어도 커다란 두 눈은 웃고 있지 않는다. 으윽~! 귀엽게 생겼지만 무서운 사람같아. “어서오세요. 아레프 왓슨씨께 상담을 요청하신 분이죠?” “아, 예.” “이리 들어오세요.” 마법사의 연구실이라고 해서 라이트 형의 그것과 뭔가 다르지 않을까 했는데 별로 다른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종이들이 날리고 실험도구에, 곳곳에 책들이 가득 쌓여있다. 그래도 꽤 정리 정돈이 잘돼어 있다는 느낌이야. 라이트 형의 지하 연구실에 들어가면 실험실인지 쓰레기장인지 분간이 안가는데 말야. 그녀가 권하는 자리에 잠시 앉아있으니 아레프라는 젊은 마법사가 나왔다. 그, 뭐랄까…. 상당히 선한 인상에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 줄 것 같은 사람? “아,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그래. 어떤 상담을 하려고 오셨나요? 저주? 아티팩트?” “차 드세요.” 앞에 올려지는 찬잣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콜트 슈발츠라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콜트씨요? 당연히 알죠. 길드를 나가서 5분만 걸으면 빨간 벽돌로 지어진… 아으윽!?” 안내를 해줬던 그녀가 아레프의 등을 꼬집은 것 같다. “그 분은 왜 찾는거죠?” 호,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이라고? 금화를 꺼내 테이블에 던져 준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 자식! 기다려라! 죽인다! “이, 이봐! 거기 서요! 그 사람을 왜 찾는 거냐구! 아레프! 막아요! 자객인 줄 모르잖아요?” 동전을 주워들던 그가 말했다. “자객이요? 저렇게 어린 사람이? 자살특공이라면 모를까. 힘들겠는데요?” “아레프으으!” “예이예이~! 잠깐만요. 손님. 거스름돈을 가져가셔야 하는데요?” 철컥! 화르르륵!  문이 열리지 않는다. 게다가 등뒤에서 익숙하지 않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슥 돌아보니 자리에서 일어난 마법사가 손바닥에 불길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옆에 선 여자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능력인양 씩 웃으며 팔짱을 했다. “나중에 콜트씨에게 받을 빛이 생겼네? 이봐. 당신 뭐야? 누군데 그를 찾지?” “나 그 사람 아들이야. 아버지를 만나러 왔어. 문 열어.” “…뭐?” 두 사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하악! 학!” 탁탁탁탁~! 길드에서 나선 나는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을 찾았다.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집이 보였다. 으이익! 코오올트으으! “실례합니다.” 탕탕탕! 잔뜩 메인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자 웬 아줌마가 나왔다. 마누라? 크아악! 우리 제미니 양 차버리고 선택한게 이런 볼품없는 아줌마라고오오!! “누구슈?” “…혹시 바깥양반 성함이 콜트 슈발츠 아닙니까?” “이잉? 우리 양반 이름은 듀크 헤이먼인데?” 이런, 잘못짚었나? 고개를 꾸벅이며 등을 돌리려는데 아줌마가 날 붙잡았다. “그러고보니 저기 윗 마을에 사는 사람중에 콜트란 젊은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 어라? 총각?” 그 놈이다! 맹수의 그것처럼 몸을 날린 나는 가파른 계단을 미친 듯이 달려 올라갔다. 멀지 않은 곳에 빨간 벽돌집이 보인다! “으랴아아아아!” 원래라면 저 아래쪽으로 내려가 계단을 이용해야 하지만, 난 바운드 부츠를 믿어보기로 하고 있는 힘껏 달려가 몸을 날렸다. 발 아래로 지붕 몇 개가 빠르게 지나갔다. 쿠웅~! 촤르르륵! 착지를 잘못했는지 마당에 떨어져서 굴러버린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씩씩 숨을 골랐다. 그때 스칼렛의 그것과 같은 회색머리카락이 쏟아지더니 하얀 얼굴이 파란 하늘을 가리고 나타났다. “어마, 괜찮니?” 눈을 굴려보니 가슴 가득 빨래감을 안아든 새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룬 하얀 얼굴은 제미니 양에 필적하는 미모를 자랑했다. 나이는 20대 초반? 중반? 후반? 애매모호 하군. 짧은 스커트에 머리를 묶으면 19살이라고 해도 봐주겠는데?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자세로 그녀를 맞이한 나는 한숨을 크게 들이킨 다음 물었다. 정신 바짝 차리는 거다! 아이안 리그펜타인! 그 자식 딸인줄도 몰라! “저, 혹시 성함이…?” “나? 난 스피릿, 스피릿 슈발츠.” …슈발츠라고 했겠다. 난 누운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아이안 리그펜타인이라고 합니다. 바깥양반 지금 집에 계십니까? 급한 전갈을 가지고 왔는데요.” 그녀는 얼떨결에 내 손을 잡아주었다. 부드럽고 작은 손이다. 제기랄~! 그녀가 내 배다른 형제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겁고 머리가 복잡하다. “어, 응. 지, 지금 방에서 낮잠을….” “깨워주십쇼. 급합니다.” “아, 알았어. 기다리렴.” 그녀는 후다닥 집으로 달려갔고 난 핸드스피링으로 발딱 일어난 다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스크롤과 무장을 재점검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하지? “아하아암…. 내가 콜트 슈발츠인데. 누구쇼…?” 녀석은 20대 후반정도의 나이를 가진 사내였는데. 키는 조금 큰 정도고 머리는 밤색에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반쯤 감겨있는 눈은 검은 색이었으며 얼굴은 그다지 큰 특징이 없이 평범했지만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전체적으로 샤프한 이미지가 강했다. 게다가 저런 무방비 상태로 말을 거는 것을 보니 좀 얼빠진 구석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은, 무서우리 만치 닮아있다는 거다. 이 빌어먹을! 거울이냐? “…제미니 양. 저런 자식이 뭐가 맘에 들었던 거야? 완전 양아치 새끼잖아?” “뭐? 잘 안들려, 크게 말해봐.” 입을 꾹 다문 나는 저벅저벅 걸어 가다가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전력으로 달려가며 망토를 벗어던지고 건틀릿을 낀 주먹을 당겼다. “나는 아이안 리그펜타인! 당신이 18년 전에 버리고 간 여자의 자식이다아아!” “엥?” 이후의 이야기는 당신의 상상에 맡깁니다. 즐거운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우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피엔딩을 좋아합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하자는 말이 있습니다만 현실은 과정보다 결과가 중시 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 꿈속의 Fantasy에서 만큼은, 결과와 과정이 모두 즐거운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변태 작가의 한없이 부족한 이야기를 여기서 마칩니다. 즐거우셨습니까? ==================================================================== 단편을 이렇게 마무리 지은 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뒤가 궁금하신가요? 특전 슬레이브 Unique Bonus Fire : “노예의 하루.” 아침입니다. 하루가 밝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인님을 깨우는 일이 랍니다. 왜냐구요? 저희 주인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사람이란 말야.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야 하는 법이야. 할일이 없다고 퍼질러 자기만 하면 몸이 엉망으로 변해버린다구. 거울 앞에 섰는데 저 허리가 내 허리가 아니게 되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해. 서있으면 앉고싶고 앉아있으면 눕고싶고 누워 있으면 자고싶은게 못되먹은 인간의 성질머리지만 그걸 이길수 있어야 희망찬 내일이 빛나는 것이며 정신도 깨끗해지고 게을러지지 않지.” 뭐, 말은 번듯하게 하시지만 주인님은 새벽 잠이 많으세요. 그래서 깨우는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랍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으세요. “주인님~!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아침! 일하러 나가신다고 그랬잖아요!” 주인님의 등을 흔들어 봤지만 묵묵 무답입니다. 눈딱 감고 꼬집어 봤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없으세요. 좀더 꼬집어볼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주인님 몸에 피멍이 들기 때문에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저번에 한번 그랬다가 호되게 야단 맞았어요. “주인님~! 일어나세요! 주인니이임!” 약이 올라서 입고 계시는 잠옷을 반쯤 벗겨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주니 주인님이 눈을 뜨셨습니다. 에이~ 안깨어 나시면 좀 만져보려 했는데 아까워요. 우리 주인님 엉덩이는 굉장히 귀엽거든요? 입안에 고인 군침을 꿀꺽 삼키고 있으니 주인님이 하품을 하며 물어보십니다. “벌써 아침이야? 아하아아암. …그런데 왜 엉덩이가 이렇게 화끈거리지?” 주인님의 엉덩이는 제 손자국이 나있어요. 세게 때렸거든요? 하지만 들켰다간 똑같은 일을 당하기 때문에 입 꾹 다물고 표정관리 한다음 모른다고 잡아땠습니다. “기분 탓일 거예요. 잠 깨시고 일어나세요. 전 좀 씻고 식사 준비 할게요.” “으응, 부탁해. 스피릿.” 그렇게 말하며 다시 침대로 쓰러지십니다. 정말~! “오늘 일하신다고 그러셨잖아요오! 주인니이임!” “아, 알았어. 너무 그러지마아.” 침대에 얼굴을 박고 주인님은 그만하라고 손을 흔드십니다. 저도 이 정도로 끝내지 않으면 되려 주인님이 화를 내시기 때문에 한숨을 조금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가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습니다. “어마?” 맨 가슴이에요. 어떻게 된걸까요? 어제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혹시 그것 때문일까요? “…이거 찾아?” 침대에 누워계시던 주인님께서 히죽 웃으시며 담요속에서 제 브라를 꺼내 주셨습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어요. 후다닥 그걸 받아든 저는 몸을 뒤로 돌리고 옷을 갈아입으며 화가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이럴때는 확실히 화를 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절 너무 가볍게 보시거든요? “주인님. 너무하세요. 제 허락도 없이 막 벗기시면 어떻해요.” “만지고 싶은데 그럼 어떻게?” “우우우우우우우! 주인님 변태!” 바지를 입다말고 몸을 돌린 저는 주인님의 볼을 양손으로 잡아 좌우로 늘려 벌렸습니다. 주인님은 울상을 지으며 신음 소릴 내시더니 화끈거리는 볼을 두손으로 안고 침대에 쓰러져 잉잉 거리세요. 정말 어린애도 아니시고 말야. “우으으응~! 노예가 주인님을 때려어~!” “맞을 짓을 하셨잖아요! 주인님 바보!” 문은 열고 밖으로 나간 저는 한숨을 폭 쉬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의 주인님은 조금 변태 같아요. 하지만 때리거나 굶기는 등의 학대는 전혀 없으시기 때문에 그걸로도 전 만족한 답니다. 게다가 절 무척 아껴주시거든요? 좋은 사람이에요. 좀 밝히는 것 만 빼면 말이죠. 커튼을 열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확인한 저는 이제 세면장으로 가서 세수를 하고 아침식사를 준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가난한 주인님은 아니라서 좋아요. 루시아에게 들으니 씀씀이가 헤픈 주인님을 만난 노예는 고생이 말이 아니래요. 노예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다주면, 주인님이 하룻밤 술값으로 다 써버린대요. 만약 제 주인님이신 콜트씨가 그랬다면 정말 슬플 거예요. 말이 나온 김에 제게 돈 잘 벌고 마음씨도 고운 주인님을 내려 주신 신께 감사드려요. 뭐,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몸을 너무 심하게 굴리시는 건데. 돈도 좋지만 제발 어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번에 늑대인간 잡으러 갔다가 등을 긁혔을 때는 정말 무서웠거든요? 그렇게 한참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겨드랑이 사이에서 손이 나오더니 제 가슴과 허리를 감았어요. 어마? “아침 다돼가?” “예, 조금만 하면 돼요. 그런데 주인님. 손, 좀 놔주시면 안되요?” “키스 해주면 놔 줄게.” 주인님은 이렇게 귀여운 구석도 있으시답니다. 전 살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어요. 반쯤 졸린 표정의 주인님이 제 어깨에 턱을 올리고 계세요. 졸린 표정의 주인님은 꼭 장난 꾸러기 소년 같은 모습을 하고 계세요. 동안인가봐요. 귀여워요. “세수하고 오시면 해드릴게요.” “으응~! 싫어어. 키스 하고 싶어. 스피릿~ 내 노예잖아. 주인님 한테 뽀뽀 해주는데 너무 이것저것 시키는거 아냐? 자꾸 그러면 앞으로 방 따로 쓸거다?” 이렇게까지 말하시면 저도 할말이 없어요. 아직도 날은 추운데, 따로 자긴 싫거든요? 플라이 팬을 화로에서 내린 저는 이제 몸을 뒤로 돌리고 주인님을 바라봤어요. 주인님은 헤헤 웃으시며 제 가슴에 얼굴을 부비다가 고개를 들고 허리를 바싹 끌어당기시며 고개를 숙여오셨어요. 어마~ 키스 할땐 눈 정도는 감아 주시는 거예요! 주인니이임! 내심 창문으로 누가 오나 확인을 하던 저는 눈을 감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습니다. “으음….” 습관적으로 주인님은 제 가슴을 만지셨어요. 에,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셨다고 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이러시는 것 같다고 제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답니다. 한참 입술을 맞대고 키스를 나누는데 주인님이 제 허리와 다리를 잡고 번쩍 들어올리시더니 테이블위에 올려주셨어요. 그리고는 더 열정적으로 절 몰아 붙이셨습니다. 아으으~ 이러다가 또 사고 치는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어, 어머, 어쩌면 좋아. 주인님~! 이, 이러시면 안돼요~! “읍…! 주, 주인님? 히익….” 역시,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제 치마 안으로 손을 집어 넣으신 주인님은 히죽 웃으시며 셔츠를 풀기 시작했어요. 도리질을 치며 안된다고 했지만 이미 주인님의 눈은 풀려 버렸습니다. 이젠 막을 수가 없어요. 아으으으~!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거실의 테이블 위였습니다. 좀 피곤한 얼굴의 주인님은 그래도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절 와락 안아주셨어요. 뭐, 기분 나빴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하신 것 같아요. 세상에 아침부터 거실에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래서 따져 물었습니다. “…오늘은 좀 너무 하셨어요. 아무리 노예라지만 저도 감정이 있다구요. 인형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윽? 스피릿 화난 거야? 미안해. 너한테 빠져버린 주인님을 용서해줘. 응?” 주인님은 제 옷을 손수 입혀주시며 미안하다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셨습니다. 흐으으응~! 보통 같으면 꼬집어 줄텐데 오늘은 봐주기로 할까요? 나머지는 제가 입겠다고 말하고 주인님을 뒤로 돌아서게한 저는 치마를 바로하고 벗겨진 속옷을 주워서 입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만 언젠가 아이를 가지면 그때부턴 무시무시한 반격을 할거예요. 설마 자기 아이를 낳아준 노예를 내치기야 하시겠어요? 게다가 주인님 성격을 볼 때 임신했다고 하면 제 말에 목을 매다실 것 같아요. 헤헤헤헤~! 그때가 기다려져요. 제 노예가 될 주인님의 모습. “으음후후후후후~!” “스, 스피릿? 내가 뭐, 뭐, 잘못했어?” 어머나~ 주인님이 제가 음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신 것 같아요. 오하하~!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린 저는 이미 식어버린 아침을 주인님에게 대접했습니다. “너무 하잖아. 다 식어버렸는데 먹으라고?” “어머, 좀 전에 아침 하고 있는 절 잡아당긴 사람이 누구시더라?” 주인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절 바라보시다가 한숨을 내쉬며 식은 팬 케익과 스프를 드셨습니다. 뭐, 돌도 씹어 삼킨다는 나이니까. 좀 식었다고 별일이야 있겠어요? 아침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신 주인님은 바로 장비를 챙기신 다음 밖으로 나갔습니다. 전 화로의 불을 끄고 문을 잠그느라 조금 있다가 뒤따라구요. “어서와. 늦었어.” “주인님 때문이에요.” “커윽.” 콜트씨는 말에서 떨어질 것처럼 비틀 거리다가 다시 중심을 잡으시고는 제 손을 붙잡아 말위로 올려주셨습니다.남자들 등에 기대어 본적은 없지만 주인님의 등은 넓어요. 어깨에 턱을 올리고 물었습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세요?” “응. 간단한 일이야. 마법사 길드에서 재료 수집 부탁한게 있는데. 하루 안에 끝나.” “무슨 재료 인데요?” 주인님은 말을 출발 시키며 말하셨습니다. “오크 눈알 모으기.” “으아아앙~! 저 싫어요! 안갈래요오!” 주인님은 낄낄 웃으시며 농담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말에서 뛰어 내렸을 겁니다. 정말~! 주인님은 너무 짖굳으세요. 순진한 노예 놀려먹는게 그렇게 재미있나? “응, 너무 재미있어.” “주인님~!” “아, 그래그래. 알았어. 안할게. 에, 오늘은 만드라고라 라는 식물을 찾으러 가는 거야. 한뿌리만 채집해가면 돼.” “만드라고라? 그게 뭔데요?” “어, 사람처럼 생긴 풀이야.” 주인님의 말에 전 그냥 사람처럼 생긴 풀뿌리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걸요. 수도 외곽의 산속을 하루종일 헤메다가 발견한 만드라고라는 정말 사람만 했습니다. 다행이 이야기에서처럼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고, 대신 줄기를 휘저으며 가까이 오는 것을 잡아먹는다고 주인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에! 식물이 동물을 잡아먹어요?!” “저놈은 육식성이야. 처음보지? 삶아먹으면 맛있어.” 주인님과 함께 그 만드라고라에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저는 입을 딱 벌리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삶아 먹… 어요?” “응, 옛날 우리 사부가 생활력을 기른다며 단검 하나 쥐어주고 일주일 동안 숲속에 쳐박아 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거 먹어봤어. 그냥 먹으면 독 때문에 죽지만 삶아서 먹으면 괜찮아. 꽤 맛있어. 뭐라고 할까? 쫄깃쫄깃한게. 꼭 고기를 씹는 맛이….” “아앙~! 듣고 싶지 않아요오~!” 귀를 막고 도리질을 쳤지만 주인님은 히죽이죽 웃으며 생걸로 먹으면 어떻게 죽는지도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많이 먹으면 환상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웃게되지만 조금씩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 그래서 환각제로 꽤 비싸게 팔리지.” “마법사 길드에선 저걸로 뭘 하려는 건데요?” “무슨 실험을 한다던데 우리랑은 상관 없어. 자, 이거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주인님은 제게 밧줄을 쥐어 주셨습니다. 멀뚤히 바라봐드렸더니 이렇게 말하십니다. “자, 이제 가서 저 녀석 몸통에 이거 묶어.” “에엥~! 제가요오?” “응.” 울상을 지으며 두손에 밧줄을 들고 주인님을 쳐다보니 주인님은 낄낄 웃어 버리십니다. 아아~! 장난 좀 그만하셨으면 좋겠어요~! “저 녀석 줄기에 긁히면 퉁퉁 부어. 귀여운 내 노예에게 그런 걸 시킬 수야 없지.” “깜짝 놀랐잖아요. 주인님 바보. 으응~!” “앞으로는 좀 줄일께. 자, 내가 신호하면 이걸로 말 엉덩이 때려 알겠지?” 제 손에 회초리 같은 나무 줄기를 쥐어주신 주인님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시며 말하셨습니다. 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의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준비를 마친 주인님은 나뭇가지를 꺽어다 들고 오시더니 그것을 만드라고라에게 집어던졌습니다. 취리릭~! 취릭! 세상에, 덩굴줄기가 저렇게 움직이는 건 처음 봤어요. 훈트의 촉수처럼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나뭇가지를 붙잡아 엉기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주인님은 그때를 노려 쏜살같이 달려 나가셨습니다. 제 주인님이라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저희 주인님은 이럴 땐 정말 멋있으세요. “으라라랏~!” 요령있게 밧줄을 만드라고라의 몸통에 묶으신 주인님은 후다닥 빠져나가며 외쳤습니다. “스피릿!” “예에~!” 나무 줄기로 말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습니다. 말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고 그 반동으로 만드라고라가 땅속에서 뽑혀나왔습니다. 우와~! 정말 컸어요. 진짜 사람만 했던 거 같아요. 그때 주인님이 외쳤습니다. “이 바보야! 뭐해! 피해!” “예?” 취리릭~! 고개를 돌리자 밧줄에 묶힌 만드라고라가 제게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푸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지금 저희는 수도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만드라고라는 나무로 만든 들것에 실어서 말이 끌도록하고 있습니다. 죽었는지 촉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뒤에 앉은 절 힐끗힐끗 바라보시며 연신 웃음을 터트립니다. 아으으으~! 손을 들어 줄기에 쓸린 볼을 만져보았습니다. 입안에 뭔가를 가득 물고 있는 다람쥐 마냥 볼이 통통하게 부어올랐습니다. 아까 말에게 끌려가던 만드라고라가 제 곁을 지나면서 어쩌다 그 촉수에 얼굴을 쓸렸나 봅니다. “우웅~!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파하하하하~! 하, 하지만 아, 아이고 배야아~!” 콜트씨는 배를 잡고 깔깔 거렸습니다. 그렇게 우스운가? 두손으로 볼을 감싸보았습니다. 슬프게도 다 감싸지지 않습니다. 많이 부은 것 같아요. 아으으으~ “…웃지마세요.” “아야야야~! 프하하하~!” 등을 꼬집어 주었지만 주인님은 그래도 웃기만 바쁩니다. 정말~! 주인님이랑 이제 말 안해요! 저녁 무렵에 수도에 도착한 저희들은 마법사 길드로 가서 뽑아온 만드라고라를 넘기고 수고비를 받았습니다. 길드의 저명한 마스터들께서 구경삼아 나오셨다가 제 얼굴을 보시더니 대놓고 웃으십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말을 못하고 있으니 제 주인님이 으르렁 대시며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거, 웃지들 마쇼. 다친 것도 억울한데, 부끄러워 하잖아!” 마스터들 께서는 주인님의 말에 쓴 웃음만 지었습니다. 역시, 주인님 뿐이세요. 평소엔 놀리고 울리셔도 이럴땐 든든하다니까요? 그때 아레프 씨가 루시아와 함께 내려왔습니다. “야아~! 돌아왔군요! 성공이에요?” “만드라고라 잡아왔어. 돈내놔.” 아레프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홀의 책상에 있는 수정구에 대고 누구와 이야기를 하시더니 다시 우리쪽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절 보시더니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으셨어요. 분명히 제 얼굴을 보고 그러시는 걸거예요. 아으~! 부끄러워라…. “당신 지금 우리 스피릿 보고 웃은 거지?” “어, 음, 아, 아닙니다. 그저….” “오하하하~! 어머, 스피릿 얼굴이 왜 그러니? 복덩이 같아.” 루시아가 깔깔 웃으며 제게 다가와서는 볼을 두두렸어요. 으응~! 애는~ 건드리지마, 아파아. 두손으로 볼을 감싸고 고개를 돌리자 주인님이 절 등뒤에 숨겨주시며 말하셨습니다. “만드라고라 줄기에 좀 쓸렸다. 그래서 부었어. 그러니까 놀리지마. 참 해독제 있어?” “아,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스피릿양. 이쪽으로. 큐어 포이즌.” 아레프씨가 빛나는 손으로 제 볼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진통도 가시고 붓기도 많이 가셨어요. 주위에서 만드라고라를 구경하던 마스터들 께서도 제 얼굴을 보시고는 감탄을 하셨습니다. 어머, 그렇다고 그렇게 음흉한 눈으로 보시면 싫어요. 저 한테는 이렇게 멋진 주인님이 계시다구요. “어디보자. 다 낳은거야? 이제 않아파?” “예.” 두 손으로 제 볼을 만져보며 주인님이 물어왔습니다. 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드렸어요. 어디 또 흠짓 난 곳은 없나 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시던 주인님은 만족 하신 얼굴로 제 이마에 키스를 해주시곤 고개를 돌렸습니다. 헤에~ 좋아라. “돈은 언제 줘?” “예. 좀 있으면 마스터 께서 나오실거예요. 아, 저기 오시는 군요. 피에넬라님! 여기에요!” 고개를 돌려보았습니다. 하얀 수염을 기르신 분께서 걸어오시더니 만드라고라를 확인하고는 돈주머니를 꺼내 주셨습니다. “약속한 대금이요.”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 뭐에 쓰실 겁니까?” “내일 길드로 궁정 마법사 양반이 오는데. 접대용으로 내 놓으려고 그러오. 삶으면 꽤 맛있거든?” “이야~! 영감님도 이거 드셔 보셨습니까? 쫄깃쫄깃한게 맛있죠?” “으음? 자네 먹어 봤나?” 주인님이 제게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말하셨습니다. “들었지? 맛있다고 했잖아.” “하지만 전 절대 그런 거 안먹어요.” “스피릿은 편식쟁이.” “…편식쟁이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때 마스터께서 끼어 드셨습니다. “자네 뭘 좀 아는 군. 게다가 말야. 다들 잘 모르고 있지만 이게 정력에도 아주 좋다네. 이전에 손에 넣은 고문서에 있더라구. 어때? 한뿌리 떼어 줄테니 한번 확인해 보겠나? 노예 아가씨도 예쁜데 말이야.” 잠깐 말 없이 저를 바라보시던 주인님은 갑자기 히죽 웃음 지으셨습니다. 갑자기 왜 오한이 드는 걸까요? “한뿌리 주십쇼. 어르신.” 그 순간 홀에 모여 계시던 저명한 마스터들이 모두 짖굳은 미소를 지으시며 절 바라보였습니다. 아으으~! 부끄러워서 그만 혼절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이용해 주십쇼.” “안녕히 계세요.” 팔을 뒤로 돌린 저는 인사 하는 주인님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꼬집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스터들과 인사를 주고 받은 다음 선물로 받은 뿌리를 들고 나가려 했습니다. 그때 루시아가 제 주인님의 옷깃을 붙잡았습니다. “어? 왜?” “늦었는데 저녁 여기서 먹고 가세요.” “으응?” “그리고 그거, 제가 요리할테니 좀 나눠주시면 안돼요? 우리 주인님 요새 힘이 없는데.” 주인님과 아레프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참, 제 주인님은 의외로 부끄러움도 잘 타세요. 예를 들어 키스 같은 거 할때 제가 리드해서 들어가면 주인님은 당황해 버리신답니다? 그럴땐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귀까지 빨개지셔서는 웅얼거리신다니까요? 음! 오늘 그렇게 한번 해봐야겠어요. 아침의 복수예요. 결국 저녁을 먹고 가기로 하신 주인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레프씨의 연구실로 향했습니다. 이전과 다름없이 정돈이 잘되어 있어요. 저도 이런 곳에 있어봤음 싶지만 일이 많은 것 같아서 싫어요. 전 저와 잘 놀아주시는 지금 주인님이 더 좋다구요. 두 분을 자리에 앉혀둔 저희는 부엌으로 가서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루시아는 저보다 키가 조금 작은 것을 빼면 어느것 하나 빠질것이 없는 소녀예요. 말을 않해서 그렇지. 이전엔 주인님을 독점하려고 둘이서 많이 싸웠답니다. 지금이야 루시아가 아레프씨를 만나서 잘 살고 있지만요. 야채를 다듬고 있는데 루시아 이런 말을 했어요. “요새 어때?” “응?” “주인님 말야. 잘해?” “뭘?” 루시아는 제 귀에대고 익숙치 않은 말을 해왔습니다. 덕분에 좀 부끄러워져 버렸어요. “뭐, 뭐. 그, 그냥 그렇지. 나, 난 그런거 시, 신경 안써어.” “무슨 소리야? 그런거 신경 안쓰고 어떻게 잠자릴 같이 해? 마법사인데다가 마음씨도 고와서 좋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냐. 뭔가 파워가 부족하다구. 파워가! 으윽! 비상 사태야. 이거 먹여보고 효과 좋으면 내 용돈 탈탈 털어서 한뿌리 더 뽑아 달라고 콜트씨 부를거야.” “루, 루시아아? 너무 흥분 한거 같아.” 루시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왔습니다. “넌 내맘 몰라. 요새 내가 너무 무신경했어. 이제부터는 좋은거 많이 많이 먹여서 주인님을 가꿔야해.” “…뭐, 뭘 가꾼다구우?” “어이~! 밥 아직 멀었어?” 때마침 주인님이 저희를 불렀습니다. 우선 식사준비부터 끝내기로 한 저와 루시아는 각자 자신 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식탁에 올리고 주인님들을 불렀습니다. “오오~! 만드라고라 뿌리이~!” 제 주인님이신 콜트씨는 권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아무거나 덥석덥석 집어먹는 타입입니다. 저러다 이상한 거 먹고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어휴~ 그에 비해서 아레프씨는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 사람 같아요. 루시아와 아레프씨의 식사모습을 한번 보시겠어요? “주인님. 이것도 드세요. 그리고 이것도.” “한번에 그렇게 많이 못먹어요.” “안돼요. 앞으로 편식은 용납못해요. 다 드세요. 두 번 드세요.” 그러다 칼질을 잘못해서 음식국물이 루시아의 얼굴로 튀었습니다. 아레프씨는 당황해서 부산을 떨었지만 루시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손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아내고 아레프씨의 손에 묻은 것을 대담하게도! 혀로 낼름 핥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새 나이프와 포크를 들더니 대신 고기를 썰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정말, 주인님은 저 없으면 어떻게 사실거예요? 아~ 하세요.” “으음… 루시아 미안해요. 사랑해요. 아아~ 행복해요.” 아레프씨는 저희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는데도 상관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않았습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봐요. 누구누구랑 똑같네. 루시아는 킁하는 콧소리를 내고는 만드라고라 뿌리를 잘라서 그의 입에 밀어넣었습니다. “자아~ 많이 드시고 힘내세요. 세상에 주인님이 저보다 약하다는게 말이 되요? 운동도 좀 하시구요. 저기 콜트씨처럼 우악스럽게 되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남자라면 어느정도 가슴도 나와 있고 그래야 한다구요.” “우악스럽게? 그거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리야?” 루시아는 눈을 깜빡이며 콜트씨를 보다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지긋히 눌러보았습니다. 주인님이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자 그녀의 손가락은 다시 밖으로 밀려나왔습니다. 어마~ 신기해라. 전 왜 여태 저걸 몰랐을까요? 집에가면 해봐야겠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요?” “나야 몸으로 구르는 직업이라 이런거고, 아레프는 머리를 굴리는 직업이라 그런거야. 당연한거잖아? 아레프만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구.” “그래도 생활에는 기초체력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구요. 가르쳐줘요. 우리 주인님은 몸이 약해서 감기도 잘 걸리고 그런단 말이예요. 이러다 생과부 되면 어떻게해요?” 이런 말을 해도 아레프씨는 싱글벙글 웃기만 합니다. 우와~ 천사인가봐요. 루시아는 좋겠다. 우리 주인님은 한 소리하면 잡아먹으려고 그러시는데. 머리를 좀 긁으시던 주인님은 손가락을 내밀며 말하셨습니다. “아침마다 팔굽혀 펴기 30개씩만 해라. 그렇게 한달해보면 뭔가 좀 달라지는게 있을 거야.” “정말이죠?” “물론. 일부러 이런거 안먹여도 휙휙 날아다닐걸?” “우리 주인님은 이런거 안먹어도 휙휙 날아다녀요. 마법사 인걸요?” 루시아의 말에 주인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셨어요. 어쨌든 저녁을 다 먹고 주인님이 아레프씨와 이야기를 나눌 동안 저도 루시아와 그간의 소식을 주고 받았습니다. 물론, 노예가 주인님들과 같이 푸근한 소파에 앉아서 떠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그냥 설거지하면서 수다 떨었죠. 같은 또래와 속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정말 이럴 때 뿐인걸요?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해요. “그래서, 전에 내가 가르쳐 준 건 잘하고 있어?” “응? 뭐?” “피임.” “…우, 우리 말야. 좀 다른 이야기 하면 안될까?” “무슨 이야기? 옆집 아가씨가 시집을 간 이야기? 아니면 윗층 늙은 마스터가 나만 보면 힐끔거리는 이야기? 스피릿, 노예들이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어? 주인님의 아기를 가지기 전까지는 문장을 파고 보통 평민이 되어도 주인님 앞에서는 결국 노예는 노예일 뿐이야.” “헤에, 그럼 아기 가지면 뭔가 좀 달라지는 거야?” “물론이지. 우리같은 여자 노예가 팔자 고치는 일은 그거 밖에 없다? 다행이 우리네 주인님들은 다 마음씨가 고우니까. 아이만 생기면 더 이상 말 높이면서 굽실 거릴 필요가 없어. 자기 자식을 가졌는데 뭘 어떻게해? 하지만 그전에 나이가 있으니까. 즐긴건 즐겨야지. 안그래?” “아, 어, 그래.” 루시아는 아주 당당한 아가씨에요. 자기 주장과 정의가 또렷하죠. 존경스러울 정도예요. “주인님은 날 너무 놀리셔. 게다가 너무 밝히고, 오늘 아침에도 있지… 어마마~!” “헤에~ 좋았겠다아? 아침부터 주인님에게 안기고?” “루시아아~ 그, 그런거 아냐.” “괜히 빼지마. 조금은 부러워 스피릿. 우리 주인님은 간이 콩알만해서 좀처럼 먼저 안아주는 일이 없는데 말야. 가끔은 나도 주인님 손에 이끌려서 침대로 끌려가보고 싶어. 우리 아레프는 말야. 정말 착한 바보야. 독한 구석이 없어. 저번에 웬 늙은이가 내 엉덩이 만졌을 때도 아무말도 못하고 말야! 이 바보! 뭐, 그 선함이 매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콜트씨에게 눈이 가는 건 어쩔수 없어.” “코, 콜트씨는 내 주인님이야아~!” “어머~ 누가 훔쳐간다니? 그냥 해본 말이지. 그리고 아레프 싫었으면 내가 여기 있겠어? 버얼써 도망갔지. 난 그를 사랑해. 날 사람으로 봐준건 너희 주인님하고 그 사람이 처음이었거든? 첫 번째는 놓쳤으니 두 번째라고 꽉 잡아야지.” “루시아 우리 주인님 좋아했… 어?” “당연한 소리 하지마. 노예의 입장에서 봤을 때 네 주인님만큼 좋은 사람은 없어.” “…아냐 루시아. 넌 지금 뭔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는거야. 우리 주인님 별로 좋은 사람 아니야. 순진한 노예 놀리기만하고, 어른에게 말도 버릇없이 막하고, 게다가 아주 …밝혀.” “놀리면 같이 놀리면 되잖아? 콜트씨는 당당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어. 뭐, 그러다가 제풀에 못이겨서 화를 내면 키스 한번 해주면서 끝이잖아? 버릇없는 건 말투가 그런거니 신경끄면 되고, 그리고 밝힌다고? 스피릿 네가 아직 몰라서 하는 소리인데. 그건 말야. 주인님이 널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야. 넌 널 놔두고 주인님이 홍등가 같은데 쏘다면서 헬렐레 거리면 좋아?” “…그런건 싫어. 주인님은 나만 봐라봐줬으면 해.” “그렇지? 그거랑 같은거야. 그러니 너무 신경쓰지마. 안아주면 안아주는데로 안아줘. 남녀관계고 세상살이고 다 똑같은 거야. 적당히 즐기면서 살면돼. 어려울거 하나도 없어.” 저는 오늘 인생의 선배님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나이는 제가 두어살 위인데도 루시아 쪽이 훨씬 더 어른인 것 같았어요. 만약 아기를 가진다면 루시아는 정말 좋은 엄마가 될거예요. 저요? 전 잘 모르겠어요. 아기가 울면 따라 울지도 몰라요. 아하하~! 저녁 늦게까지 아레프씨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낸 우리들은 그만 마법사 길드를 나섰습니다. 밤의 대로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아마 겨울이라서 그런 것 같은데. 주인님은 그걸 노리고 계속 제 엉덩일 만지세요. “으으응~!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어떻게해요.” “아무도 없어. 그래서 말인데, 조금만 더 만져보면 안될깡?” “계속 그러시면 소리 질러서 경비대원 부를거예요. 그래서 변태 주인님이라고 일러줄거예요.” “정말?” “정말!” 그렇게 주의를 드렸는데도 제 변태 주인님께서는 이번엔 두 손으로 엉덩일 꽉 움켜 쥐셨습니다. “아아악~! 경비대…! 으읍?!” “으으악! 저, 정말 소리 지르면 어떡해!” 주인님은 걷다가 말고 후다닥 말에 오르시더니 급한대로 절 앞에 태우고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흐으음, 이제야 알았어요. 루시아 말대로 적당히 주인님을 데리고 놀면 되는 거로군요. 집에 도착한 우리는 저녁을 먹었기 때문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로 했습니다. “이익… 노예 엉덩이 만지다가 경비대 잡혀가는 얼치기가 어디 있어?” 콜트씨는 투덜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오늘은 꽤 여러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주무시려나 봅니다. 하긴 저도 따라다닌다고 지쳤어요. 램프를 들고 기다리고 있으니 주인님이 먼저 침대에 발랑 누워 버리십니다. 으음, 아까 일 때문에 토라진 것 같아요. 주인님은 밴댕이 속알딱지에요. 겨우 그런 걸로 삐지고 그러시다니, 노예 마음도 몰라주시고…. “훅~!” 램프를 끈 저는 더듬더듬 거리며 침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얌전히 누워있다가 슬금슬금 주인님의 곁으로 다가갔어요. 왜냐구요? 어머나~! 그런 건 물어보시는게 아니에요? 실례라구요. “주인니이이이임… 주인니이이임….” “…처녀 귀신처럼 그러지마.” “엉덩이 좀 못만지게 했다고 그렇게 꿍해 있으시기에요?” “그래, 나 밴댕이 속알딱지야. 놀리고 싶으면 놀려.” “으응~ 화푸세요. 어때요?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만지셔도 좋아요.” “싫어. 스릴이 없잖아.” “스릴은 없지만 애정이 있어요. 자요. 어때요? 따뜻하죠?” 그의 손을 잡아서 다리사이로 가져왔습니다. 얼굴이 화끈화끈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게 기분이 설레어요. 제가 이 정도면 아마 주인님은 깜짝 놀라서 얼굴이 시뻘게 졌을 걸요? 아까 루시아가 주인님의 앞에서 노예는 노예일 수 밖에는 없다고 했었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예요. 노예도 얼마든지 주인님과 동등해질 수 있어요. 어느때냐면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이죠. 전 주인님의 귀를 앙 깨물며 속삭였습니다. “뭐야? 빼는 거야? 아까 내 몸을 더듬을 때 그 뻔뻔함과 당당함은 어디로 갔어? 도망가지 말고 어서 덤벼보라구, 사랑하는 주인님아.” “스, 스피릿. 너, 너 갑자기 왜 그러는거야아?” “으후후후~!” 험난한 노예의 하루가 이렇게 끝났습니다. 자, 이제부터 주인님을 괴롭혀 볼까요? ==================================================================== 초필살 특전입니다. 소름돗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