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애야, 선애야 <프롤로그> "언니,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길 바래. 난 아직 죽고싶지 않아." 선애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러나 장난끼가 들어있다는게 다분히 느껴지는 어투로 제의를 해왔다. 짜슥,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는게 벌써 여러번이면서도 매번 내가 운전대를 쥘때마다 저 소리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가볍게 웃으면서 아빠와 자리를 바꿔 운전석에 앉았다. "냐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이래뵈도 면허 따고 여즉 무사고 아니냐? 나 면허가 녹색띠라고." "웃기지 마, 얼마전에 사고낼뻔 했던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선애의 날카로운 말에 나는 땀을 삐질 흘렸다.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었다냐...' "얘는... 그때는 뒤에 따라오는 차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던 바람에 못 봤던 거라고." 예전에 선애나 엄마 없이 아빠랑 단 둘이서 어딜 다녀오다가 차도 별로 없고 해서 내가 운전해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나는 직진을 해야 했는데, 앞쪽에 좌측으로 꺾어지려는 차가 신호를 받기 위하여 정지하고 있던 상태라 한칸 옆으로 차선을 바꾸려고 하다가 바로 내 옆에서 바짝 붙어 오던 차를 못 보고 접촉 사고를 낼 뻔 했던 것이다. 그 차가 있던 자리가 너무 교묘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그래서 백미러나 양 옆 미러로 보이지도 않아서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자연스레 핸들을 돌렸다가.... 핫핫핫... "불안해... 불안해..." 선애는 투덜 거리면서도 순순히 자리에 앉았고, 그 옆엔 엄마가 싱긋 웃으며 벌써부터 편안히 앉아 계셨다. 그리고 나는 히죽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고, 내 옆에는 아빠가 진심으로 불안한 시선으로 자 리를 잡고 계셨다. 하기야, 아빠는 항상 내가 운전대를 잡으면 나보다도 몇배는 더 긴장하고 초조, 불안해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 하려는 것인지, 날씨는 무척 좋았다. 오늘 새벽까지 내렸던 비 덕분인지 공기는 청명하고, 하늘은 극찬을 받는 가을하늘답게 구름 한점 없이 높고 푸르렀으며, 기온은 고향가는 모든 이들을 반겨주기라도 하는 듯 기분 좋을 정도로 따뜻했다. 그랬다. 지금은 바로 추석. 올해 추석 연휴는 정말 운이 좋게도 월, 화, 수. 원래 휴일인 그 전 토요일, 일요일까지 합치면 무려 연휴 기간이 5일이나 되는 것이었다. 우리집은 기독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주일은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이렇게 월요일 아침 일찍 고향을 향해 출발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에 모두 이동을 한 덕분인지, 고속도로 위는 너무나 한산했다. 그러니 면허 딴지 이제 겨우 1년이 좀 넘은 내가 고속도로 위에서 운전을 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고, 아빠도 운전대를 순순히 넘겨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전 벨트를 매고 막 엑셀을 밟고 출발 하려는 순간 경고하시는 건 잊지 않으셨다. "절대로 시속 100Km 는 넘지 않도록 해라." 작년 추석때도 운이었던지, 우리가 타고 가는 중앙 고속도로는 한산했었다. 하기야, 그때는 개통된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 사람들이 잘 몰랐었던 덕이었지만, 하여간 그때도 내가 잠깐 운전대를 잡아었는데, 면허를 딴지 몇달 안 된 주제에 겁도없이 처음부터 120 이상을 막 밟아댔었던 것이다. 나도 그때 내가 뭔 정신이었는지 모른다. 그저 앞차 쫓아가다보니 그랬던 것 뿐인데, 그때 아빠가 엄청 기겁을 하셔서... 아하하하... 그 뒤로 한참동안이나 아빠는 나에게 운전대를 넘겨주지 않으셨었다. 뭐, 하여간 그때는 그때고... 나도 또 한동안 운전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빠의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선애 녀석이 눈을 빛내며 앞쪽에 있는 두개의 시트 사이로 고개를 쑤욱 내밀더니 속도계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가 기꺼이 감시해주지." "조심할거라니까." 선애의 장난기 어린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드디어 차를 출발 시켰다. 그리고 1단 기어에서 2단, 3단, 4단, 그 뒤에 최후으 5단으로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아앗, 언니 속도 줄여. 벌써 100Km 라고." 선애의 말에 나는 흠칫 해서 엑셀에서 발을 떼었다. 덕분에 차 속도가 줄기는 했지만, 쫘악 뻗어 있는 고속도로를 눈앞에 두고 느릿느릿 가야 한다는 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심정은 나 뿐이 아니었는지, 어느새 다가왔는지 뒤에서 알짱알짱 대던 검은색의 무쏘가 신경질 적으로 옆으로 차선을 바꾼 뒤 속력을 내어 앞으로 쭈욱 달려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아빠가 내 삼정을 알아챈것인지 입을 여셨다. "천천히 가기로 했지? 쓸데없는 생각 마라." "엥... 그래도 다른 차 속도에 어느정도는 맞춰줘야..." 불만스러운 내 말은 끝까지 나가지도 않았다. "다른 차 생각은 할거 없어. 자기들이 답답하면 추월해서 가면 되지. 너는 네 속도나 신경 써라." 아. .. 이렇게 뻥 뚤린 고속도로에서 90Km 로 달린다는 건 너무 억울한 거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처음부터 약속을 그렇게 했으니, 입맛을 쩝쩝 다시며 나는 아빠와 약속한 속도에 맞추기 위해 노력 했다. 노.력... "언니, 100Km 넘었어." "쩝... 쪼금 넘은 건 봐주지 그러냐?" "하지만 120인걸?" "그, 그냐?" 한산한 고속도로라고 해도 아예 차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 또한 한산한 고속도로에서 신나게 달려왔다가 거북이 처럼 느릿느릿 달려가는 - 물론 시속 90Km 가 느린건 아니지만, 그들의 시선으로는... - 내 뒤에 도착하여 약간 머뭇대다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차선을 바꿔 앞으로 휙 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을 한숨만 쉬며 바라볼 뿐이었고... 그러던 중, 엄청 거대한 트럭이 어느새 뒤로 다가와 바짝 붙어버렸다. 1.5톤 트럭만큼이나 커다란 그 트럭은 내가 느리게 가자 참지 못하고 차선을 바꾸려고 했다. 그런데 참 운이 없게도, 아까까지만 해도 띄엄 띄엄 보이던 차들이 그때만큼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옆차선에서 차들이 줄지어 가는 바람에 트럭이 차선을 바꾸지 못하는 거였다. 결국 열받은 트럭이 앞을 가로막은 내가 짜증스러운 듯 몇번이나 경적까지 울려대는 거였다. 운전할때 주위에 자신이 운전하던 차보다 큰 차, 예를 들면 대형 버스라던지, 아니면 이런 트럭 같은게 있으면 괜히 무서워진다. 거기다 열받은 듯 경적까지 울리면 더더욱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래 나는 뒤에서 계속 왔다갔다 하다가 한참 뒤에야 옆 차선에 차들이 없자 그제야 차선을 바꾼 트럭이 화가 난듯 우리 차를 추월해 갈때 경적을 다시 한번 울릴때 나도 모르게 움찔 거렸다. 내 뒤에 있을때는 몰랐는데, 우리 차를 앞질러 가는 트럭은, 일반 트럭이 아니라 뒤에 아주 커다란 가스통을 짊어지고 있는, 가스 수송차였었다. 그 차가 점점 멀어지는 걸 보며 나는 다시는 그 차와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뭐야? 늦게 갈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경적까지 울릴 건 없잖아?" 가스 수송차가 하는 태도가 맘에 안든 듯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댔다. "것봐요 아빠, 그러니까 쪼금만 더 빨리 가도..." "안돼." "쩝..." 한숨을 쉬며 나는 백미러를 힐끗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양 차선으로 여러대의 차들이 줄지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맨 앞에 있던 차가 우리 차를 추월하여 휑~ 하니 가는 모습을 부러운 시선 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익~ 콰과과광~!! 살짝 휘어진 코스를 돌고 나자 언덕으로 가려져 있던 앞쪽의 상황이 보인다 했더니, 그와 함께 화려한 음향 효과와 함께 아까 날 추월해서 저 앞으로 나갔던 커다란 가스 수송차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앞으로 잘 가고 있던 몸체를 옆으로 방향으로 틀어 중앙 가로대를 들이받고 있었고, 방금 날 추월해 앞으로 잘 나가던 차가 그러한 가스 수송차의 뒷부분을 들이받고 있었다. "언니!" "멈춰!" 선애와 아빠의 다급한 소리가 아니라 해도 그 모습을 본 나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 끼이이익~~ 타이어가 아스팔트위를 미끌어지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러운 급정거로 인하여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한 차체가 빙글 돌았다. 하필이라고 해야할지, 새벽까지 내린 비로 인하여 아스팔트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상태라 한바퀴 돌고 멈춰질게 반바퀴는 더 도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브레이크를 계속 밟고 있으면서 핸들이 움직이지 않게 꽈악 붙들고 있는 것 뿐이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바로 앞에 일어난 충돌 현장에 차가 닿기 전에 멈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도 잠시, 우리 눈 앞에 길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커다 란 가스탱크의 모습은 다시금 내 얼굴에서 핏기를 가시게 만들었다. "빠, 빨리 내려!" 아빠의 다급한 외침에 나는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나 다급해서 이놈의 안전벨 트가 안 풀리는 거였다. 그러는 동안 뒷자석에 있던 선애와 엄마는 막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끼이이익~!! 콰과광~! 우리 뒤에서 달려오던 차는 나보다 훨씬 높은 속도로 달리고 있던 터라 사고를 보고 브레이크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이어 끄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날아와 우리 차를 들이받아버렸다. 그 충격으로 안전벨트를 풀려던 내 몸이 뒤로 크게 제쳐졌다. 어질어질 거리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던 내 뿌연 시야에 아까의 충격 때문인지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선애의 몸이 보였다. "선애야!" 아직 벨트도 풀지 못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양 나는 다급하게 동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필 선애가 튕겨져 나간 곳은 바로 가스 수송차가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수송차와 충돌한 다른 차에서 불길하게 파지직 하는 불꽃이 튀고 있어서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콰광~! 또 다시 차체에 강한 충격이 왔다 싶은 순간, 내 몸은 그 충격 덕분인지 차 밖으로 튀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할 시간도 없이 선애를 향해 달려갔다. "선애야?" 아스팔트위에 나동댕이 쳐 있는 선애는 그 충격으로 인하여 기절했는지 내 부름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선애야아?" 불안하게 불러봤어도 반응이 없다. 대신... 파지지직... 쿠과과광~! 콰광! 아까 불안하게 불꽃을 튀기던 차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그에 호응하듯 가스 수송차가 옆으로 쓰으윽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울어지는가 싶더니만 그대로 넘어지면서 탱크가 깨졌다. "맙소사..." 선애를 들고 튈 시간도 없을 것 같아 나는 무조건 선애 위로 내 몸을 던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리던 충돌음과는 비교도 안되는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온 세상이 붉게 보인다 싶었지만, 그 뒤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제발 선애만은....' 제 1화- [끄으응....] 정신이 들 즈음 가장 먼저 날 자극하는 건 밝은 햇볕이었다. 눈을 감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어떻게 된게 내가 직사광선 아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어서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껌뻑, 껌뻑... 정확하게 몇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따갑게 느껴지는 태양빛을 보니 정오거나 아니면 2, 3시 정도 된거 같았다. 그런 강렬한 햇빝에 적응이 안된 눈 때문에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처음 보는 곳이었다. 어디 야산 중턱쯤이나 되는 듯 바로 옆에 듬성듬성 붉거나 하얀 속살을 드러낸 낮은 언덕이 있었고, 내가 있는 근처에도 군데 군데 나무들이 선채 싱그러운 초록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감탄하기 전에 왜 내가 여기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하며 몸을 완전히 일으켜 앉으려던 나는 내 몸에 깔려 있던 어떤 존재를 눈치챘다. 옆으로 누운 채 여전히 미동도 없이 눈을 꼭 감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던 나는 다급히 선애를 바로 눕히고는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두근, 두근, 두근... 쌔액, 쌔액, 쌔액... [히유...] 다행이었다. 심장의 힘찬 박동 소리와 고른 숨소리가 들린거 보니 숨 넘어갈 상황은 아닌것 같았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동생이 어디가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찬찬히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도 제대로 붙어 있고, 이마와 손등에 좀 심하게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그것 외에는 크게 다친 부분이 없었다. 하기야, 이 정도에서 끝난게 정말 감지덕지다. 머리카락이 좀 그슬리고 온 몸 곳곳에 검뎅이가 묻지 않았다면 그 커다란 가스 수송차가 폭발하는 곳 근처에 있었다는게 꿈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흠, 그럼... 우리는 그 폭발로 여기까지 날려온 걸까? 선애가 안 다친게... 내가 감싼 보람이 있군.' 이 한몸 바쳐 동생을 구했다는 뿌듯한 심정에 씨익 미소를 짓던 나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 그런데... 선애야 내가 감싸줘서 안 다쳤다 치고... 나는 왜 아픈데가 없지?' 아무래도 너무 놀라는 바람에 통증을 못 느끼는가보다 싶어 조심스레 몸을 살펴보려 고개를 내리던 나는 보이는 광경에 굳어버렸다. '에...' 잘못 봤나 싶어 두 눈을 부비부비 하고 봐도,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떠도 날 놀라게 한 광경에는 변함이 없었다. [왜... 내가 깔고 있는 잡초가 이렇게 잘 보이는 거지?] 그랬다. 지금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된게 내 다리 아래 깔린 잡초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나의 다리에 깔렸으면 짜부러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거 아닌가? 그런데 이놈의 잡초들은 강철로 만들어진건지 그 가느다란 줄기와 연약해보이는 잎들이 멀쩡한 것이었다. [허.허.허...] 그러니까, 그 잡초들은 내 다리를 뚫고 꼿꼿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기가막힌 상황에 헛웃음을 흘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폈다. 나의 움직임에도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전혀 흔들림 없는 풀들을 바라보던 나는 손을 뻗어 그 고고한 잡초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마치 공기를 움켜쥔 듯 손에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잡초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몇번이나 잡초를 잡아 꺾으려 했던 나는 결국은 내 손짓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처를 받지 않는 잡초의 모습에 한숨과 함께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현실을 외면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고 누군가 그랬던거 같은데... [하.하.하... 나... 죽은 거야? 그럼 그렇지... 그 폭발 속에서 멀쩡하게 있는다는게 어디 가능하기나 하겠어? 하아... 선애나 무사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려나...]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아직 결혼은 커녕 연애 한번 못해봤는데 그냥 죽어버렸다는 둥의 처녀귀신 푸념을 늘어놓으려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홱 돌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선애를 바라봤다. [어... 그러고보니...] 아까 선애는 분명히 옆으로 누운 상태였기에 그 애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하여 내가 살짝 밀어 바로 눕혔었다. 그랬으니 내가 유령이 된 것을 한참이 지나도 못 알아챈것이지만... 나는 슬금슬금 손을 뻗어 선애의 손을 살짝 쥐고는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그랬더니, 이게 왠일? 선애의 손이 내 손에 잡혀 그대로 딸려 허공에 들려지는 것이었다. 황당했다. 다시 선애의 손을 고이 내려놓고 아까 그렇게 열심히 잡으려고 했던 잡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초는 여전히 손에 안 잡혔다. 인상을 찡그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우리가 있는 공터 여기저기를 나뒹굴고 있는 돌맹이를 주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손은 돌맹이를 그냥 통과해버렸다. 다시한번 선애의 몸을 찝적거려(?) 선애의 몸에는 내가 물리적인 행사를 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는 일어서서 근처에 있는 내 키의 두배나 되는 길이를 자랑하는 나무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이제는 내 손 뿐만이 아니라 내 몸 전체가 나무를 그냥 통과해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선애의 몸은 만질 수 있는데 주위의 모든 것은 만질수가 없으니 이제는 나랑 선애가 사이좋게 나란히 천국에 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럼... 선애도 죽은 건가? 하, 하지만... 심장은 뛰는 거 같은데... 게다가 우리가 죽었으면 우리를 인도할 천사나 하다못해 저승사자라도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본 바로는 선애에게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는 달리 내가 내 손목을 잡아본 바로는 맥이 뛰는 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하기야... 선애에게 깔린 풀들은 나에게 깔린 풀들과는 달리 확실하게 꺾이고 뭉개진 티를 팍팍 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나처럼 나를 투과하여 물체가 보이는 일도 없었고...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한참을 끙끙 거리던 나는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그냥 이렇게 되었다는 현실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선애라도 무사하면 다행한 일이고... 내가 선애를 너무 걱정하다보니 선애한테만 어떻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나보지.' 아주 오래전에 본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을 위하여 영혼인 주제에 물리적 행사를 할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그거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되려니... 하고 맘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죽은 거 아닌가? 그럼 왜 날 데리러 오는 천사나 저승사자는 없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것도 아리송했다. 물론, 영화와 현실이 같다고는 생각해볼 수 없지만서도 너무 비슷한 상황이라 비교해 보면 '사랑과 영혼'의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을 향해 오라고 손짓 하는 듯한 천국의 빛을 외면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거 비슷한게 보이질 않으니...' 하기야 지금 보였다 해도 그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동생을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니 외면했을터였다. '그래, 최소한 선애가 무사히 집에 가는 것까지만이라도 보고...' 그때였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마냥 반듯하게 누워 있던 선애가 강한 햇살때문인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다. "우웅..." [선애야!] 낮게 흘리는, 불만스러운 신음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선애 옆으로 가서 앉아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 들어?] 내 소리에 반응하듯 팍 찡그린 눈꺼플이 몇번 깜빡이다가 슬며시 떠졌다. 하지만, 곧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찡그려진 눈을 다시 감은 채 몸을 옆으로 굴렸다. [아, 일어날 수 있겠어?] [어, 어디 아픈데는 없냐?] 햇볕 때문에 몸을 굴려 엎드리더니 그 모습이 무지 만족스러운지 꼼지럭댈 뿐 도저히 일어날 기미가 없는 선애에게 나는 자꾸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녀석이 인상을 팍 쓰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조용히좀 해." [임마... 지금이 조용할때인 줄 알아?] 마치,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데 내가 심술궂게 깨운다는 듯한 불만 가득한 말에 나는 약간 어이없는, 그래도 멀쩡한 목소리가 다행이라는 이율적인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우씨... 왜에?" 어지간히 일어나기 싫었던지 선애가 눈을 가늘게 뜬채로 날 노려보며 물었다. 그 음성에는 별일 아니면 가만 안 있을거라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나는 싸악 무시하고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괜찮냐? 어디 아픈덴 없어?] 그러자 선애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뭔 소리야... 갑자기..." 그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아까 내가 처음 정신을 차렸을때 처럼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괜찮은 거 같으면 얼렁 일어나. 우선 엄마랑 아빠부터 찾아야지.] 그러고보니 선애한테만 신경을 쓰느라 잊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그 자리를 잘 피하셨나 모르겠다. 하필이면 그 폭발이 있던 곳에서 너무 가까이 있어 안전한 곳 까지 피하기가 어려웠을 거 같은데... 아직도 일어나기 싫어하는 선애의 어깨를 톡톡 쳐서 일어나기를 종용하고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여행하고 있던 고속도로를 찾으려는 거였다. 아무래도 선애가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여기까지 날려온거 같지만, 그래봤자 얼마나 멀리까지 날려왔겠는 가 싶었다. 기껏해야... 몇백미터정도? 조금만 살펴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어... 언니?" 당혹스러운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선애가 울려는 건지, 아니면 짜증을 내려는 건지 모를 묘~ 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 언니?" 당혹스러운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선애가 울려는 건지, 아니면 짜증을 내려는 건지 모를 묘~ 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서 있었다. 우리 꼬맹이가 ( 내 동생 )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짐작이 갔지만 나는 모르는 척 반문했다. [왜애~?] 평소같으면 징그럽다던지 안 어울린다던지 한마디 하지 않고는 못 넘어갔을텐데 지금의 선애는 그럴 정신도 없는지 나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니..." 그 모습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어주려고 했는데 내 맘대로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날 바라보던 선애의 얼굴이 좀더 찡그려지더니 주춤주춤 나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확인 하려는 듯한 그 손끝이 떨리는게 눈에 확연하게 보이고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선애가 흠칫 놀라더니 찌릿하고 날 노려보는 거였다. "가만 좀 있어봐." 그래놓고는 자신이 머뭇머뭇 거리며 한 걸음 다가오더니 차마 손을 올리지 못하고 어물어물대다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내 팔을 향하여 마치 때리듯 손을 날렸다. 찰싹~ 하고 선애의 손이 내 팔과 부딪혀 멈췄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선애의 손은 내 팔을 그대로 통과하여 지나가버렸다. "헉..." 그 광경에 선애의 눈이 커지며 몸이 굳어버렸다. [아.하.하.하... 저기... 있잖아...] 괜히 호탕한 척 웃으며 뭐라고 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래 머쓱하게 웃으면서 머리만 긁적이고 있는데 한참을 굳어 있던 선애가 갑자기 소리를 빽하니 질렀다. "뭘 웃고 있는 거야? 지금이 웃을때야?"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손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지 입고 있던 얇은 잠바 자락을 꽈악 쥐고 있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냐? 어우 야~ 뭘 이런걸 가지고...] "이런 거라니? 이런 거라니이이이~~? 우와아아아앙~~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오오오~~ 엉엉엉~~~"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꼬맹이의 모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뭘... 어떻게... 할 수나...] "시끄러워. 빨랑 몸 찾아와. 어쨌어? 몸 찾아 오라고오오~~ 엉엉엉~ 지금 뭐하는 거야? 어떻게 좀 해보란 말야아아~!" 거의 억지에 가까운 투정을 부리며 엉엉 울어대는 선애의 옆에 나는 묵묵히 쪼그리고 앉아 녀석이 실컷 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선애의 몸에 팔을 두르고 안아주려고 하자 선애가 냉정하게 탁 쳐내려다가... 자기 팔이 내 몸을 통과해 그냥 땅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더 울게 만들었다. 선애는 단 하나 뿐인 내동생이라 우리 집에서 막내인데다가 늦둥이라 나와 나이차이가 좀 많이 나는 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 태어났으니 말이다. 원래 아기들을 예뻐하는 나였기에 선애가 태어난 다음에 얼마나 예쁘다고 껴안고 비비고 했는지, 이 녀석이 나중에는 스킨쉽 공포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뭐, 근래에는 많이 나아져서 친구들은 물론 나와 다닐때도 곧잘 팔짱도 끼고 하지만 아직도 내가 팔을 잡거나 건드리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내 잘못으로 그렇게 된 거긴 하지만... 얼마나 서운한지... 지금도 거의 반사적으로 그러다가 내 몸을 터치할 수가 없자 더 서러워진 모양이었다. 짜식이,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언니라고 엉엉 울어주는 모습에 나는 감동을 먹느라고 이번에는 서운함도 느끼지 못하고 배시시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지칠때까지 엉엉 울고 나서 조금 후련해졌는지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퉁퉁 부운 얼굴을 소매로 닦던 선애는 내가 웃는 걸 본 모양인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휴... 너무 오냐오냐 해서 버릇을 잘못 들였다니까...] 너무 예뻐한 덕에 생긴 두 번째의 후유증인 - 첫번째는 스킨쉽 공포증 - 가끔은 언니인 나에게 너무 막 대할때마다 중얼거렸더니 이제는 아예 버릇이 된 것처럼 자연스레 흘러 나왔고, 선애도 한 두번 들은 것이 아니었던 탓에 평소처럼 얄밉게 대꾸할... 뻔 했다. "헹, 그러니까 나중에 언니 자식들 한테나.... 이씨..."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팍 숙이는 선애의 모습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풀죽은 꼬맹이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자,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나 하고... 우선은 돌아갈 궁리나 하자. 아마 고속도로랑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내 중얼거림에 선애가 반사적으로 손목시개를 들여다 봤다. "어라... 시간이 꽤 지났네. 지금 벌써 한시 반인데?" [많이도 지났다. 지금 사고 현장에 경찰들이 남아 있으려나 모르겠네. 하기야, 경찰들이 없다고 해도 고속도로에는 중간 중간 긴급 전화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애는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뭘 긴급 전화까지 찾냐? 핸드폰이 있는데... 아아, 이번달 무료통화 벌써 다 썼는데..." 쓰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선애의 표정에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럼 우선 쓰지 말아봐. 여기 어딘지도 모르잖아. 우선 고속도로나 찾고보자고.] "고속도로가 어느쪽에 있는데?" [거야 나도 모르지. 그래도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예상을 해도 사방에 고속 도로는 커녕 그걸 가르키는 표지판, 혹은 고속도로 위를 지나는 차 소리도 들리지 않아 선애와 나는 도통 어느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쪽으로 가야해?" [그, 글쎄...] "어우 쒸... 도대체 어디로 날려와 떨어진거야?" 인상을 찡그리며 사방을 둘러보던 선애는 투덜거리다가 우리 옆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가르켰다. "언니, 우선 저기 올라가보자. 높은데 올라가면 뭐 좀 보이는게 있겠지." [그려.] 그 언덕은 사람들이 다니질 않았는지 길이 없었지만,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사람이 못 다닐정도로 수풀이 우거져 있질 않아 올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뭐... 나야 그냥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느낄 수가 없어 더더욱 어려움은 없었지만... 길이 없어서 그런지 선애는 몇번이나 오르면서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렸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냥 잘 닦인 계단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이, 이게... 영혼만 있는 것의 장점인가?' 별로 가지고 싶지 않은 장점이었지만, 하여간 그 덕분에 선애보다 훨씬 편히 먼저 꼭대기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다시한번 머리를 긁적거렸다. [에... 여기가 어디지?]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살펴보고 있는데 선애가 호흡을 고르며 올라와 섰다. "하아... 찾았어?" [아, 그게 말이지... 우리가... 어디까지 왔었더라?] 나의 얼빵한 말에 선애는 눈을 흘기면서도 순순히 대답해줬다. "아니, 운전한 주제에 그걸 모르면 어쩐대? 많이는 안 왔을걸? 마지막으로 봤던 게 원주 들어가는 IC 였는데..." [그치? 나도 제천 표지판까지는 봤는데... 그럼... 저건 뭐다냐...] 내가 선애의 말에 맞장구 치며 한쪽을 가르키며 묻자 선애가 뭔데?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굳어버렸다. "어, 어라..." [우리... 언제 부산까지 내려왔었냐?] 선애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아주 넓고 넓어서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푸른 물이 있었다. "그, 그런데 언니... 저게 동해인지 남해인지 어떻게 알아? 차라리 동해에 왔다는게 더 타당하겠다." 한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애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있는 곳도 이상했다. 야트마한 언덕이 있는 평지인줄 알았는데, 언덕위로 올라와 보니 선애와 나는 어떤 높은 산 윗부분에 있었던 것이다. 띄엄 띄엄 있던 수목이 우리의 시야를 확실하게 차단하고 있었던지 언덕 밑에 있을때는 보지 못했던 산 봉우리와 산 아래 지형이, 그리고 그 산 너머에 바다 모습까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는 고속도로는 커녕, 일반 국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거였다. "언니... 여기 도대체 어디야?" [그, 글쎄... 나도 그걸 알고싶은데...] 나의 얼빵한 대답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선애는 눈을 흘기며 투덜댔다. "아니, 유령이 그것도 모르냐..." [.... 이봐... 유령이라고 그런거 다 알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냐?] "그게 아니라... 유령은 보통 그런거 다 알지 않나?" [.... 누가 그러던?] "누가 그러는게 아니라... 귀신 이야기 같은거 보면... 아닌가? 언니, 그런 이야기들 무지 좋아하잖아? 언니가 읽은 것들 중에 그런거 없어?" [.... 내가 좋아하는 건 호러물이 아니라 판타지랑 무협인데....] "그런데는 귀신 안 나오나? 아니, 그리고 언니는 귀신 이야기들 가끔 보지 않아? 언니는 소설 장르 같은 건 안 가리고 다들 잘 보잖아?" 우리 꼬맹이는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껏 보는 것이라고는 학교에서 독후감 써오라고 숙제를 내준 거라던지 수능에 자주 나오는 단편 소설 정도? [.... 퇴마록 같은 건 보기는 하는데... 유령은 뭐든지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못 본거 같은데...] "그래? 아니, 유령까지 되었으면서 뭔 도움이 하나도 안 되냐?" [..... 이봐... 너 아까까지만 해도 나 몸 잃어버렸다구 찾아 오라고 땡깡 부리지 않았었냐?]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이왕 된거 도움이 좀 되어보라고." [...........] '내 동생은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걸까나? 내가 그렇게 예뻐하면서 지금 이때까지 키워놨건만... 아아... 역시 자식은 키워봤자 소용이 없는 걸까' 한쪽에 쭈구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땅에다 그림을 그리며 꿍얼대는데 선애가 나를 불렀다. "언니, 언니. 그만 궁시렁 거리고 산이나 내려가보자. 여기 통화지역이 아닌지 핸드폰이 안 터지네. 우선 내려가면서 통화지역이나 찾아보자고. 운이 좋으면 다른 도로라도 찾을 지 어떻게 알아? 가자." [....녜....] 선애의 부름에 나는 우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꼬맹이가 버릇처럼 내 팔을 잡아 팔짱을 끼려 했는데, 당연하겠지만서도 그대로 선애의 손이 내 팔을 통과해버렸다. "아..." 아까는 유령은 이래야 한다느니 하고 쫑알쫑알 떠들어 대던 주제에 그 모습에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거였다. 그리고는 씁쓸하게 자신의 손을 한번 바라보고는 그냥 몸을 돌려 조심스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같이 가. 아앗, 조심해야지.] 그 모습에 황급히 뒤를 따르던 나는 선애가 흙을 잘못 밟고 미끄러지자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덕분에 선애는 넘어지지 않았는데 고맙다는 말 대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잡은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내 손은 반투명하여 그 손 너머로 선애의 팔을 감싸는 옷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말이다. "어라...? 언니는 나 잡을 수 있네?" [응? 아아... 나도 이상하게 여기긴 했는데... 다른 건 못 잡는데 이상하게도 넌 잡을 수 있더라.] 내 말에 선애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뭐야? 나는 언니를 못 잡는데 언니는 날 잡을 수 있다고? 그런게 가능한거야?" [그, 글쎄... 내가 이쪽 전문도 아니니... 나도 모르지.] "헐... 그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선애에게 나도 같은 표정을 지어주고는 선애의 팔을 놓고 밑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내려가지 못해 우리 자매는 다시한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서로를 마주봐야 했다. "언니... 저건 뭔지 혹시 알아?" [그, 글쎄...] "그럼 언니가 아는 건 뭔데?" [나보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너도 모르잖냐.] 산 밑으로 내려가다가 떡 하니 마주친... 키는 우리와 비슷비슷 하지만, 근육으로 뭉친 등치는 보디빌더 하시는 분들이 부러워 하는 걸 넘어 경악할 정도로 우락부락한 신비 생물체 다섯 명... 아니면 다섯마리.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걷고 한 손에는 너무 조잡스러운, 그러나 선애와 나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되는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게 그들은 맨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 몸을 두텁게 덥고 있는 시커멓고 지저분한 굵고 곱슬거리는 털들과, 늑대의 귀처럼 생겼지만 크기는 두세배 정도 더 큰 귀, 그리고 돼지가 보면 동족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들린 코, 마지막으로 호러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크고 날카롭고 누런 이빨들을 가지고 있었다. 황달기가 있는지 노란색과 갈색이 뒤석인 눈이 번들거리며 선애를 바라보는 모습은 오싹 소름이 끼치게 만들었다. 선애와 내가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서자 그만큼 정체불명의 그 놈들이 주춤 주춤 다가왔다. 여차 하면 덤벼들 기세인지 조잡하지만 위협적인 무기들을 꼬나들고 말이다. "왜, 왜 이러는 걸까?" [그, 글쎄다... 그래도... 일단은 튀고 보잣!] 나는 그 즉시 선애의 손을 잡고 위로 내달렸다. 밑으로 내려가고 싶기도 했지만, 그 시커먼 괴물들이 아랫쪽으로 감싸고 있었기에 위로 다시 올라가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10여분에 걸쳐 천천히 내려왔던 거리를 단 3여분 만에 주파하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록도 소용 없는 것이 선애와 내가 평소보다 훨씬 훠어어얼~ 씬 빠르게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커먼 괴물들은 우리의 스피드를 가뿐하게 따라잡는 것이었다. 그것뿐이면 좋았으련만, 저 사악하고 치사하고 나쁜 괴물 녀석들은 마치 쉬엄쉬엄 우리랑 놀아주는 양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나는... 당연한건지 모르겠지만 왠지모르게 팔팔해서 여전히 잘 뛸 수 있었지만, 문제는 선애였다. 그렇지 않아도 큰 충격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지 얼마 안 된데다가 어제 저녁 자기 전에 먹은 걸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 아침은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나나 선애나 안 먹은 상태였다. - 몸 상태가 안 좋은건 당연한 거였다. 그런 상태로 아까 올랐던 언덕을 이번에는 뛰어서 올라갔으니 몸이 버틸리가 만무했다. 겨우 겨우, 우리가 올라와 경악을 했던 언덕 꼭대기까지 오르자 거친 호흡과 함께 몸이 비틀거리는 거였다. 꼬맹이는 위급한 지금 상황을 생각하여 괜찮은 척 하려고 했지만, 몸이 안 따라주는 건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안돼겠다, 업혀라.] "뭐? 지, 지금..." 선애가 거부하려는 걸 무시하고 녀석의 팔을 끌어 몸을 등에다 걸치려고 할 즈음 -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급해서 정신이 없었다. - 선애가 멈춘 걸 보고 이제 다 도망쳤다 생각 했는지 우리 뒤에 와서 멈추는게 보였다. [튀자.] 그냥 선애에게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멈춰주는 녀석들에게 속으로 고맙다고 하면서 그대로 선애를 들쳐 업고 달리려고 하는데 이 말아먹고 볶아먹고 삶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시커먼 괴물 하나가 우리가 도망가는 거에 놀랐는지 그 등빨 좋은 몸을 그대로 던져 선애의 발 하나를 잡고 늘어지는 거였다. 한 괴물이 그렇게 몸소 시범을 보이자 다른 놈이 뭔가 깨닫는게 있었던지 몸을 날려 선애의 다른 한쪽 발을 잡고 늘어졌다. "아악!" 순식간에 양 발에 괴물 한마리씩 달게 된 선애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자, 마치 그게 신호인 양 뒤에서 머뭇대던 나머지 괴물 녀석들이 우르르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도 두 괴물의 무게는 장난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게 때문에 내가 휘청거리다가 선애를 떨어뜨릴 뻔 했다. 다행이 떨어뜨리지는 않고, 대신 땅에 내려놓는 동안 무기들을 꼬나쥔 괴물들이 목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언니~!" 선애가 겁에 질려 날 부여잡으려고 했지만, 선애의 손에 난 잡히질 않았다. 그런 선애를 내가 꽈악 안아주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선애의 등 뒤에서 내려쳐지고 있는 녹이 슬고 이가 군데 군데 나간 저 지저분한 검은 내가 아무리 선애를 감싸 안고 있어도 나를 통과해서 그대로 선애에게 내려치지리란걸...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다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도 공포나 절망이라는 감정보다는 오히려 찬 물에 세수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차분해지며 아까까지 들끓던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감정들까지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리고는 대신이랄지, 선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란 존재와 죄 없는 내 동생을 괴롭히는 저 보도 듣도 못한 시커먼 괴물 녀석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아났다. '네 놈들이 뭔데 내 동생에게에에~!!' 속에서부터 분노와 함께 뭔지 알 수 없는 아주 뜨거운 기운이 솟구친다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푸화화확~ 마치 크게 부푼 풍선의 입구가 열려 공기가 급하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선애와 내 주위로 뜨거운 공기가 몰아친다 싶더니, 그 자리에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꽤에에엑~~ 갑자기 솟아오른 불꽃은 그대로 선애에게 덤벼들던 괴물 녀석들에게 덥쳐갔고, 아무리 괴물이라 하더라도 불은 무시 못하는지 그 녀석들은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불을 피해 물러났다. 특히나 선애의 발을 잡고 늘어지다가 그대로 불에 휩싸인 녀석들은 지저분한 털을 엄청 그슬린 채 후다닥 선애의 발을 놓고 물러나야 했다.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괴물들이 물러나서 다행이기는 한데, 불이 괴물들에게만 위험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얼른 선애를 부축해 일으켰다. [여기 있다가는 화상 입겠다. 빨리 뒤로 물러나자.] 나의 부축으로 얼결에 일어난 선애는 주위가 온통 불바다인 것을 보더니 눈이 둥그래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왠 불?" [내가 아냐, 네가 아냐? 우선 피하기나 해. 안 뜨겁냐?] "안 뜨겁긴, 불이 당연히... 안 뜨거운데?" 주위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며 내가 부축하는대로 몸을 맡기던 선애는 문득 고개를 갸웃 거리니 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에 내가 기겁해서 말리려고 했는데, 이게 왠일? 불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선애를 보호하는 것 마냥 스르르 선애의 손길을 피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담해진 선애가 불쪽으로 다가가자 이 불들이 스르르 옆으로 비켜나며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어머나, 이게 왠일이라니...] 그 모습에 눈이 둥그래져서 바라보고 있는데, 도망가지 않고 불 밖에서 서성거리던 괴물들 중 하나가 이때다 싶었는지 덤벼왔다. [위험!] 놀라서 주춤대는 선애에게 다가가 재빨리 뒤로 끌어당기며 그 괴물을 노려보자, 마치 불꽃이 내 마음을 알았다는 듯 괴물 앞을 막아서며 강력하게 화르르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우와..." 선애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얼거렸다. [정말 우와다. 선애야, 저 불이 널 보호하나보다.] "훗훗훗, 이 몸이 좀 인기가 많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던 녀석이 금방 이렇게 원기를 되찾는 모습에 황당하기도 했지만, 그와함께 안심이 되기도 했다. 하기야,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동생은 사실 상상이 안 되었다. 이제서야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우리 꼬맹이가 다니는 학교 동아리 후배들 사이에서는 울 꼬맹이가 한 카리스마 하는 선배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선애가 눈길만 쓰윽 줘도 얼어붙는다나? 음홧홧홧홧~~ 누구 동생인지 너무 대단한 거 같다. 물~론, 겉 모습만 그럴 뿐 성격은 정 반대다. 꼬맹이 친구들도 처음에는 겉모습만 보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워 하다가 성격을 알고는 사기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단다. 훗훗훗, 내 동생 성격이 밝고 명랑하기는 하지. "언니, 뭘 생각하는데 그렇게 실실 거려? 빨랑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지." 선애의 황당하다는 말투에 나는 잽싸게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 지금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선애와 나를 감싸고 있는 불 덕분에 위험을 면했지만, 어떻게 된게 저 괴물들이 갑작스럽게 생긴 불을 보고 놀라서 도망갈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불이 두렵기는 한지 가까이 오지는 않았지만 불길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 알짱알짱 거리며 언제든 덤벼들 태세를 취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여기서 나가기도 어렵고, 또 가만히 버티고 있자니 이 불이 언제까지나 활활 타오를지도 모르는데다가 영원히 계속 된다고 해도 우리까지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꼬르르륵.... 그래, 우리 꼬맹이에게 뭐라도 먹여야 되는데... [배고프냐?] "당연하지.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단 말야." [큰일이네... 어떻게 할래? 다시 뛸까? 뛸 수 있어?] "뛸 수는 있는데... 오래는 못 뛸거 같아." 하기야, 몸 안 좋은 애를 뛰게 하는 것도 마음이 아프건만... 나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다가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인 괴물 놈들에게 원한에 찬 시선을 쏘아 보냈다. 애초부터 저 놈들이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안전하게 통화 가능 지역으로 가던지, 도로를 찾던지, 아니면 인가라도 찾을 수 있었으련만 저 놈들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여기에 죽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들 발 밑에서 불이 일어나 확 태워버렸으면 좋겠다.' 화르르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기는 진짜 그 괴물들 발 밑에서 불이 치솟아 올라 놈들을 구워버릴 줄은 몰랐다. 물론, 그 괴물 녀석들은 괜히 괴물(?)이 아니었던지 죽지는 않았다. 단지, 숯처럼 새카맣게 되기는 했지만 - 원래 시커매서 얼마나 탔는지는 모르겠지만 - 무사히(?) 도망칠 수는 있었다. "어, 어라? 이번에는 어떻게 된 거지?" [그, 글쎄...] 선애의 말에 얼결에 대답하면서도 나는 설마 내가 아까 저들을 태워버리라고 생각해서 불길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런데... 언니 이거 어떻게 하지? 불길이 전혀 사그라들지 않는데? 이거 이러다가 산불로 번지는 거 아냐?" [아, 그러게...] 주위에서는 여전히 선애한테는 피해가 가지 않는 불이 화르르 잘만 타오르고 있었다. "에... 요즘 산불 내는 사람에게 벌금이 올랐다던데... 몇십만원이더라? 설마, 지금 불이 나서 내가 방화범으로 찍히는건 아니겠지?" [며, 몇십만워어어언? 헉, 그렇게 벌금이 비쌌더냐?]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50만원... 이었던가?" [헉... 우리, 그냥 여기 빨랑 튀는게 좋지 않을까?] "여길 그냥 놔두고 어떻게 가? 그냥 나뒀다가 산불로 번지면?" 오, 내 동생은 역시 모범 시민이었다. 선애는 본격적으로 불을 끄려는지 겉에 입고 있던 얇은 잠바를 벗어드는 거였다. 사람 심정이 갈대와 같아 화장실 들어갈때와 나올때의 심정이 다르다더니 지금 내가 딱 그짝이었다. 아까는 그렇게 고맙게 여겨지던 불이 지금은 괴씸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이잇, 이제 할 일 다했으니 그만 사그라 들어줬으면 좋으련만...] 그래 원망조로 투덜거렸더니만, 마치 내 말을 들었다는 듯 그 즉시 스르르 사그라들어 꺼져버리는 거였다. 그리고 주위에는 불이 났었다는 것만 증명하듯 검게 그을린 흙과 불에 타고 남은 시커먼 재만 남았다. "..... 언니... 이 불... 언니가 일으킨 거였어?" [... 나, 나는 따로 한 거 없었는데...] "..... 언니... 이 불... 언니가 일으킨 거였어?" [... 나, 나는 따로 한 거 없었는데...] 선애도 당황했지만, 나도 엄청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언니가 꺼지라니까 꺼졌잖아." [우, 우연이 아닐까나... 싶은데...] "물이 우연히 팍 꺼졌다고?" 내가 말했어도 별로 신빙성이 있어보이지 않았다. 선애 역시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잘 생각해 봐. 아까 불이 갑자기 생겼을때 혹시 뭔가 한 거 없어?" 꼬맹이는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게 없었다. [없던 재주가 갑자기 생길리 없잖아?] 그러나, 우리 꼬맹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왜 그럴 수가 없어. 혹시 알아? 불을 다루는 능력이 갑자기 생겼을지도..."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을 하던 녀석이 갑자기 말 끝을 흐렸다. 아마도 그 뒤에 나올 말이 '언니는 유령이니까... ' 이었나보다. 아까는 그것 때문에 몸 찾아 오라고 떼를 쓰며 울던 주제에 지금은 기대에 찬 눈빛이라니... 하기야, 상황이 이러니 어쩔수가 없는 걸까? 녀석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못할 말을 했다 생각했는지 차마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쭈물댄다. 그런 녀석을 나 또한 보고 싶지 않아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자, 그런건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빨리 이 산을 벗어나던지 하자. 어차피 집에 돌아가면 불을 다루건 물을 다루건 하는 능력은 별로 필요가 없는 거잖아.] "으응...." 풀이 죽은 채로 얌전히 내 손에 딸려오는 녀석을 보자니... 예뻤다. 아무리 지금 꼬맹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해도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애로 보일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어린애... 푸흐흐흐... 나보고 팔불출 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예쁜 건 예쁜 거니까. 그 모습에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던지 부비부비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애 취급한다고 화를내며 펄펄 뛸 게 분명했기에 손이라도 고이 잡혀주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참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둑어둑해지는 하늘과 안색이 안 좋은 선애를 번갈아 바라봐야만 했다. 사실 선애 몸이 안 좋다는 건 알았지만, 힘들더라도 일찍 집이든 병원이든 가서 쉬게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이상한데로 날려왔던지, 아니면 곧바로 산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데를 헤매고 있는 건지, 다른때는 쉽게만 보이던 그 흔하던 도로는 커녕 샛길도 보이지 않는 거였다. 거기다가 아무리 핸드폰을 들여다 봐도 통화 가능을 표시하는 안테나에는 점 하나도 찍혀나오질 않았으니... "언니.. 나 힘들어." 자신도 빨리 가서 쉬는게 났다고 생각 했던지 지금까지 묵묵히 걷기만 했던 선애가 입을 열었다. [업어줄까?] "응, 그런데... 좀 춥다." 평소라면 다리가 아무리 아파도 나에게 업히는 걸 질색하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할 만큼 힘든거 같았다. 게다가 애가 춥다고 하니까 겁까지 더럭 났다.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선애 이마에 대었지만, 열이 있는지 없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선애가 피식 웃으며 위로하려는 건지, 아니면 사실을 말하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을 뿐. "아... 시원하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더 걱정이 되었다. 만약 나에게 육체가 있었다면, 내 체온 때문에 선애가 따뜻함을 느끼겠지만, 육체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업으면 따뜻하기는 커녕 추워서 더 열이 나게 할까봐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 제일 좋은 건 빨리 도움을 청할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선애를 업었다. [차겁더라도 조금만 참아라.] "응..." 애 목소리가 왠지 열에 들뜬 거 같아서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 선애를 업고 거의 뛰다시피 산을 내려갔는데,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달이 떠서 사방을 비출때까지도 나는 인적 하나 보이지 않는 산 속에서 헤매이고 있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이럴 때 산속에서 불빛을 발견해서 쫓아가다보면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라던지, 아니면 별장 같은 걸 잘만 발견하던데 여기는 사람 살기가 안 좋은 산인지 쓰러져 가는 초가는 커녕 깨진 기와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애 숨소리는 점점 안 좋아지고, 날은 어두워졌으니 기온은 더 떨어졌을 테고, 언니라고 하나 있는게 도움은 안되는 상황에 마음만 바짝바짝 타고 있는데... 업친데 덥친격, 설상 가상, 산넘어 산, 머피의 법칙 등등 지금 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단어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저 멀리서 왠 시퍼런 불빛 같은게 보여 혹시나 인가가 있는 건 아닌가 해서 그쪽으로 다가갔더니만 희미하게 하니인 것이 둘이 되더니 둘이 다시 넷이 되고, 넷이 여섯, 여덟, 열... [젠장...] 그것들은 야밤에 시퍼런 빛이 나는 눈을 가지고 있는 늑대들이었다. 그것도 보통... 늑대들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한 놈 한 놈의 크기가 내 어깨 높이까지 올라올 정도로 컸다. 불빛을 보고 좋아라 달려오던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불빛의 주인들이 엄청난 등발의 늑대들이라는 걸 깨닫고 뒤로 조금 물러나자 그 늑대들이 입은 다물고 입술만 들어올려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 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나란 존재의 특수성(?) 때문인지 함부로 덤벼 오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왜, 동물들은 인간들보다 영적 존재에 대해 엄청 민감하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함부로 덤벼오지 않는다 뿐이지 저 놈들은 물러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오히려 선애와 내 주위를 빙~ 둘러 쌌다. 바야흐로 유령과 늑대떼들의 대결이었다. '급해 죽겠구... 아니, 난 죽었지. 어쨌든, 바쁜데 왜 이런 놈들까지 나타나서 난리냐, 난리길...' 아무래도 내 앞에 오만하게 떠억 버티고 선 놈이 대장인 거 같았다. 그래 아까부터 잠이 들어 조용한 선애를 추슬러 잘 업고 그놈을 지지않고 노려봤다. '제발 좀 그냥 가라, 가. 네 놈들은 그렇게 할 일도 없냐? 어째 사람이 없다 했더니만, 이 놈들이 있어서 그런 건가? 하아, 오늘 정말 운 없는 날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이나 대치하고 있었더니 이 늑대 녀석들이 유령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모양이었다. 내가 대장이라 딱 찍은 놈이 가볍게 '컹~!' 하고 짖자 나를 둘러 싼 20마리는 훨씬 넘어보이는 늑대들 중 몇 놈이 뒤로 몇발짝 물러나더니만 몸을 낮추며 나를 바라보는게 도약하여 덤벼들 태세였다. 그 모습을 보자니 핏기가 싸악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으아아아~~ 이놈들이이이이~~!! 아, 아까 그 불덩어리는 뭐하는 거래애애애~~!!' 그러자, 마치 내가 불러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선애와 내 주위에 바람이 한번 휘감긴다 싶더니 우리 주위를 감싼 강한 불꽃이 화르르 치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헐... 역시... 아까 그 불도 내가 일으킨 것이었던가?' 선애의 말에 부정하기는 했지만, 나 또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된 이유도 가스 수송 차의 폭발에 휩쓸린 것이니까. 유령 나오는 책을 보니까 불에 타죽은 유령은 불을 일으킬 수 있었고, 물에 빠져 죽은 유령은 물가지고 난리를 칠 수 있던데, 내가 바로 그짝인 것 같았다. '이로써 나도 유령의 세계에 한 발자국 다가서는 것인가...' 나를 이런 당혹스러운 망상에서 빼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괴씸한 늑대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낮에 만난 그 정체 모를 시커먼 괴물들처럼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놀라서 잠깐 뒤로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낮의 괴물들과는 달리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달려들 태세를 취하더니만 정말 불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였다. 야생 동물이 불을 무서워 한다는 상식은 알고 있는 터라, 그 모습에도 설마... 하며 지켜보고 있던 나는 기겁했다. 그러한 나의 감정에 반응한 불꽃이 순간적으로 더욱 더 크게 치솟아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든 늑대들을 시커멓게 그을렸지만, 하여간 늑대들은 불의 장막을 뛰어넘어 선애와 내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와버렸다. [힉!] 그 모습에 내가 놀라 헛바람을 들이키자, 그와함께 불의 장벽을 뛰어 넘은 늑대들이 딛고 있던 땅에서 다시 불길이 치솟아 올라 늑대들을 한번 더 구워(?) 버렸다. 하지만, 그 장소가 선애와 너무 가까운지라 나는 안쪽에서 화르륵 치솟은 불길을 치솟을때처럼 재빠르게 꺼버렸다. 덕분에 아까는 드문 드문 멋진 은회색 털을 보이던 늑대들이 이제는 두 눈과 이빨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시커멓게 된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매서운 눈길을 보자니, 잘못 걸렸다는 암담한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그 늑대 녀석들의 꺾이지 않는 기개가 감탄스러웠다. 그래봤자 절대 예뻐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불의 장벽을 뛰어 넘은 다섯 마리의 늑대들 중 한 녀석이 비틀 거리는 와중에도 기어코 선애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거였다. [헉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선애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물체에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걸 잊어버리고 이제 내 코앞까지 다가온 늑대를 발로 냅다 차버렸다. - 손은 선애를 업고 있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 그러자 이게 왠일인가? 그 늑대가 내 발에 고스란히 차여 깨갱 거리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힘껏 찼는지 그 늑대는 자신이 애써 뚫고 온 불의 장벽 너머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어어...] 그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더 놀라 입을 벌렸지만, 계속 놀라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한 놈을 차서 날려버렸더니, 다른 한 놈이 이때다 싶었는지 또 다시 달려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늑대들의 두목이 정말 영악한 놈이었는지 한 놈을 차서 밖으로 내보내니까 새로운 다섯 마리의 늑대를 불의 장벽 안쪽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으아아아~ 이 치사한 녀석드으으을~~!!] 다가오는 다른 늑대를 발로 차서 날려버리며 외쳤지만, 놈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메아리였던지 귀 한번 쫑끗 안 하고는 선애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선애 옆에 버티고 있는 유령보다도 밖에서 버티고 있는 지들의 두목이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달이 지고 동녘 하늘이 어슴프레 밝아올 새벽 무렵까지 늑대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그 늑대 두목이란 녀석이 얼마나 끈질긴지 자신이 몰고 온 쫄짜(?) 들 모두가 나에게 그슬리고 한 방씩 얻어맞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덤벼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만큼 내 동생이 탐이 났나? 내 동생이 인기가 많긴 했지만 - 쿨럭...- 저런 놈들에게까지 인기를 끌 줄은 몰랐다. 간신히 새벽까지 버텨서 선애를 지켰지만, 늑대들이 물러갔을때에는 나도 모든 기운을 소진하여 선애와 내 주위를 둘러친 불의 장막은 내가 사그라들라는 말도 안 했는데 저절로 사그라들었고, 밤이 되어 좀더 진해졌던(?) 내 모습은 낮도 안 되었는데 낮에 봤을때보다 더욱 더 흐릿해졌다. 게다가 선애를 업고 있을 만한 힘도 없었는지 불이 사그러듬과 동시에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애가 바닥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물론, 바닥이 잡초도 무성했고, 그 아래에 있던 흙도 부드러워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선애가 뚝 떨어져 땅에 뒹굴때에는 정말 놀랬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애가 안 깨고 계속 잠들어서 깊이 잠이 든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해 했지만... 하여간 그렇게 힘을 잃은 나는 그래도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어서 선애를 거의 반은 끌고 반은 굴리고 해서 좀 평평한 곳에다 뉘여놓고 근처에서 나뭇가지들을 모아와 모닥불을 피웠다. 힘이 거의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골프공만한 불덩어리는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서야 나는 조금 마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언니이~ 언니!" 기력이 딸려서 잠시 쉬고 이는다는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 유령도 자는지 모르겠지만... - 그런 날 깨운 건 놀라움과 두려움에 찬, 선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왜에~ 왜 불러?] 유령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일때의 습성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건 아닌지 나는 정말 졸려움을 느끼며 잠에 취한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하는 꼬맹이의 목소리... "언니야? 어딨어?" 녀석의 말에 황당해진 나는 '얘가 지금 장난하나?' 하는 생각에 바라봤는데, 이 녀석이 더 황당하게도 자기 바로 옆에 주저앉아 있는 난 보이지 않는지 엉뚱한 곳만 두리번 거리고 있는 거였다. [장난하냐? 어딜 보고 있어? 네 옆에 있잖아?] 내 말에 겨우 내 쪽으로 시선이 돌아온다 싶더니만, 눈쌀이 팍 찡그려지는 것이 마치 시력 나쁜 사람이 안경 없이 물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 언니?" [왜 그렇게 봐? 어제도 보고서는 뭘 새삼스레...] 그 모습에 '뭐하냐?'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 뒤 선애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기에 그 말 대신 짐짓 장난스레 투덜댔는데, 오히려 선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거였다. "언니... 모습이 많이 흐려졌어..." [그래?] 어차피 잠들기 전에 모습이 많이 흐려졌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모습을 내려다봤다. 환한 햇빛 덕분인지 내 모습은 있다는 걸 모르면 찾지 못할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전날 밤에 쓴 기력이 다 회복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흠, 유령도 기력에 따라 모습이 진해지고 희미해지고 그러나보지?' 그렇게 나는 유령에 대한 새로운 사실 발견에 감탄하고 있었건만, 선애는 내 모습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다. "뭐, 뭐야... 벌써 가는 거야? 당분간 옆에 있어준다매? 왜 이렇게 빨리 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표정과 목소리에 꼬맹이를 얼른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 보다는 놀려주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나는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심술쟁이였던 모양이다. [홋홋홋, 섭하냐? 그러길래 있을 때 잘할 것이지...] 그런데, 성격 하면 내 동생도 만만치 않은 것이, 이 말로 인하여 불안에 흔들리는 눈동자는 금방 분노로 번쩍였다. "이씨... 시끄러워. 그래서 가는 거야 마는 거야?" 짜슥, 저도 평소에 나에게 못했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나는 킥킥 거리며 선애의 째림을 즐기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당분간 갈 생각 없다니까. 뭐, 나 데리러도 안 오는데 내가 가기는 어딜 가냐?] 내 말에 선애의 눈빛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 그런데 모습이 왜 그렇게 흐려?" [이게 다 이 몸이 널 지키려다가 이렇게 된 게 아니겠냐.] "뭐야, 밤 새 망 좀 봤다고 그렇게 된 거야?" 이 녀석, 한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더니만... 어제 그 난리도 모르나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업고 그 난리를 쳤는데 모를 수가... [망만 봤다 뿐이냐? 늑대ㅔ가 나타나서 새벽까지 째려보다 갔다.] "느, 늑대?" [그래, 아~ 정말... 도대체 여기가 어딘데 생전 처음보는 시커먼 괴물에다가 늑대에다가... 아, 그 늑대들도 엄청 큰 놈이더라. 야생 늑대들이 원래 그렇게 다 큰 건지는 모르겠지만.... 크기가 내 허리까지 오더라니까.] 내 말을 듣던 선애는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나 빨리 집에 가고 싶어." [그래, 그래. 나도 빨리 너 집에 보내고 싶다.] 선애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왠지 선애의 얼굴이 초최해 보였다. 하기야, 평범한 집에 태어나 막내로 예쁨 받으며 자란 녀석이 아무런 준비 없는 노숙을 했으니 당연한 건지도... 거기다가 아침도... [아, 맞다. 너 배 안 고프냐?] "고프다 못해 돌아가실 지경이야..." 앞에서 걷던 녀석이 힘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고보니 녀석의 걸음 걸이도 휘청이는 것 같고... [업어주까?] "됐어. 언니도 지금 상태가 장난이 아닌데 뭘..." 그러면서 휘적 휘적 앞으로 나가니 나는 쭐레쭐레 그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선애가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안에 이 산을 내려가던, 다른 사람들을 만나던 하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고를 당하고 나서 정신을 차린 후, 우리가 어떤 산 중턱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우리가 있던 산이 그렇게 높은 곳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냥, 빠르면 반나절 만에... 늦으면 하루 정도 걸리면 산 밑에 내려가거나 아니면 도로를 만나거나 운이 좋으면 인가라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왠걸... "헉, 헉, 헉... 이럴 줄 알았으면 등산 같은 거 자주 해보는 건데..." 우리는 하루 밤을 이 산 속에서 보내놓고도 또 날이 저물때까지 이 산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길을 잃어서 산 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헤매는 도중에 살구가 열린 나무를 발견했던 것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솔직히 살구를 먹어보기는 했고, 살구 나무를 보기도 했지만 살구 나무와 다른 나무를 가져다 놓으면 어느게 살구 나무인지 알아채지도 못할 나다. 그런데, 선애가 너무 피곤해 해서 잠시 쉬어가자고 기대앉은 나무에 바로 살구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살구 열매도 주렁주렁 달린게 아닌데다가 나뭇잎이 무성해서 그런지 살구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저앉아서 다리를 주물주물 하는 선애의 머리 위로 잘 익은 살구 하나가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예전에 외가에서 한 바구니 살구를 따서 보내줬을 때는 - 외가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 맛 없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녀석이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인 양 먹던 모습이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나는 장면이었다. 하여간, 그렇게 살구 나무를 만나자 그뒤에는 더 운이 좋게 자그마한 샘터를 발견해서 선애가 대충 씻고 목마름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가 지날즈음에는 물고기가 노닐 정도로 맑은 계곡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물고기는 잡지 못했다. 잡아서 구워먹는게 어떻겠냐고 선애한테 권유해 봤지만, 선애가 그거 어떻게 먹는 줄 아냐고 물었을때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노숙하면서 냇가에서 물고기 잡아 궈먹는 건 영화나 만화에서만 봤지 실제로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고기를 잡는 건 둘째치고, 구울때 비늘은 벗겨야 하는 건지, 내장은 그냥 둬도 괜찮은 건지... 게다가 가장 중요한건, 비늘을 벗겨내고 배를 따고 내장을 빼낼 도.구. 가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그냥 얌전히 포기할 수 밖에... 그나마 배는 채우고 목 마른 것도 해갈할 수 있다는 걸로 위안을 삼으며 열심히 산속을 헤맸지만, 무정한 해는 우리가 산을 벗어나기도 전에 서산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밤이 찾아오고, 운이 좋은 건지 그날 낮에도 밤에도 괴상한 괴물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날 밤 우리가 노숙을 한 곳은 야생 동물이나 괴물들이 나타나지 않는, 그러니까 우리는 거의 산을 다 내려왔었던 것이다. 어두운데다 낯선 지리다 보니 그걸 모르고 노숙을 한 거였지, 아는 사람이었다면 힘들더라도 조금 더 걸었지 노숙은 하지 않았을 거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던 곳에서 약 두 세시간 정도 더 걸어가면 아주 커~ 다란 도시가 떠억 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 여기... 한국 맞아?" [아닌거... 같지?] 솔직히... 아주 소오오올~ 직히 바다를 발견했을때까지는 우리가 한국에 있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생전 처음 보는 시커먼 괴물들을 발견했을때는... 설마... 했었다. 그래도... 그래도... 영화에서처럼 혹시나 비밀 연구소에서 연구 대상이 도망친 거라고,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 지금 생각하면 정말 황당무계한 생각이지만... 하여간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걸어도 인가는 커녕 한국의 전국 곳곳에 퍼져있는 그 흔한 국도도 보이지 않았을때도 비밀스런 연구단지가 있는 곳일테니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발견한 거라고, 여기는 한국이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았다. 그러나, 눈 앞에 보이는 장엄하다 못해 웅장한 고대 유럽식 성벽은 이런 나의 믿음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제 2 화 선애도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던지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웅장한 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아... 외국 관광을 나가보고 싶기는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아직 8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웅장한 성에 걸맞는 커다란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곳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끔은 말이 끄는 수레도 보였고, 마차도 보였다. 오랫동안이나 석상이라도 된 듯 굳어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선애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보자." 하기야, 지금에 와서 다른 선택사항은 없을 듯 싶었다. '참내... 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처음보는 곳이라? 이거야 완전 만화같은 이야기잖아?' 성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멀리서는 보지 못했던 광경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황당했던 점은, 성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뭐, 유럽 같이 이런 성이 있는 곳을 가본 적이 없어 요즘 시대에도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처럼 가슴과 어깨, 팔뚝과 정강이를 감싼 갑옷과 얼굴을 드러낸 투구를 착용한 채 창을 든 병사들이 지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건 선애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사람들 머리카락이 빨갛고 노란데다 눈도 파랗고 녹색인걸 보면 서양인 것 같았지만서도... "언니... 나 집에 갈 수 있을까?" [글쎄다...] 성문에서는 드나드는 사람들을 따로 검문을 하지 않아 선애가 들어설때도 그 곳에 있던 병사들은 한번 힐끗 눈길만 줄 뿐 곧바로 관심을 끊어버렸다. 성 안에 들어서니 잘 닦인 넓은 대로에 건물들이 주르르 서 있었지만, 확실하게 한국에서 볼 수 있었던 건물들은 아니었다. 일단 산속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오기는 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선애와 나는 길 한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글쎄다...] "언니는 글쎄다밖에 몰라?" 이런 상황에서 시원한 해결책을 내주지 못하는게 미안했지만, 나도 뭘 알아야 뭐라고 할 게 아니겠는가? [배는 안 고프냐?] "엄청 고파. 어제 먹은거라고는 물하고 살구 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그것도 없는 걸... 아, 그리고 언니.. 나 돈도 없어. 지갑은 가방 안에다 뒀거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지갑이 든 가방은 차 안에 있었고... [막막하군...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곳도 아니고... 이거 참... 뭐 팔거라도 없냐? 영화 같은데서는 이럴때 귀금속을 팔잖냐?]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는데 뜻밖에도 선애의 말이 들려왔다. "이걸... 팔까?" 선애가 자신의 귀를 만지작 거리며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작은 링 귀걸이가 달려 있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건 14K 짜리였다. 우리 꼬맹이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몰래 가서 귀를 뚫고는 구멍을 필사적으로 사수하며 다니더니만, 다 오늘 같은 날을 위하여 미리 미리 예비한 모양이었다. 그거 살때도 세일해서 2만원대에 산 거니 팔때 얼마 받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거라도 반가웠다. [좋은 생각이다. 내 집에 돌아가면 내 통장 비밀번호 가르쳐 줄테니까 팔아라.] "나 언니 통장 비밀번호 알아. 3123이잖아?" [헉... 그걸 어떻게...] "자기가 저번에 가르쳐 줘놓고서는..." 그 말에 굳어있는 날 냅두고 선애는 저벅저벅 지나가는 사람을 하나 붙잡았다. 아마도 귀걸이를 팔 수 있는 곳을 물어보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잠시 후 선애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서 말했다. "언니... 문제가 하나 더 생겼어." [뭐냐?] "말이... 안 통해..." [헉... 그게 뭔 소리? 너 영어 잘 하잖아?] 우리 꼬맹이는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다. 뭐, 서울대 의대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학교나 반에서는 상위권으로 서울에 있는 괜찮은 대학을 바라보는 성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근 영어도 나보다 훨~ 씬 잘할 뿐더러 영어 회화 과외도 받아서 손짓 발짓 까지 곁들면 외국인과 회화도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그런 애가 말이 안 통한다니 그럼 펜하고 종이를 구해서 손으로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불가능 했다. "여기... 영어를 안 쓰네... 내가 말하는 것도 못 알아 듣고 저쪽이 말하는 것도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 듣겠어." 그때였다. "/가만히 서서 뭐하는 거람?/" 어떤 바구니를 든 두 아가씨가 서로 이이기하며 지나가다가 미처 구석에 있는 선애를 보지 못했는지 살짝 부딪혔다. 그에 선애가 얼른 비켜서자 인상을 찡그리며 기분 나쁘다는 듯 한마디 던지고는 가버리는 거였다. 아니, 괜히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게 자기가 와서 부딪혀놓고 이런 경우가 어딨단 말인가? [뭐야, 자기가 부딪혀놓고 왜 남에게 뭐라고 그런대?] 그래 벌써 저마치 간 아가씨 등을 노려보며 내가 인상을 쓰는데 선애가 동의를 구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치? 못 알아 듣겠지? 도대체 어느나라 말이지? 스페인 어인가?" [저, 저기... 나는 알아듣겠는데?] "뭐?" 선애는 순간적으로 내 말을 이해 못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아, 그게... 나는 다 알아 들었다고.] "어떻게?"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아니.... 그냥... 다 이해가 되는 걸?] 선애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휙 뒤로 돌아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에 놀라서 얼른 꼬맹이의 뒤를 따라 붙자 선애가 씩씩 거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열받아. 이게 뭐야? 언니는 알아듣는데 왜 난 못 알아듣는 건데?" [유, 유령의 특권이 아닐까나...] 뒤를 따라가며 황급히 대답하자 선애의 걸음이 딱 멈췄다. "유령? 흠... 어쩌면 그럴지도..." 내 모습을 쓰윽 바라보며 납득한 표정을 짓는 녀석. "하지만, 그래도 열받아." [하.하.하....] "게다가... 언니가 알아들어봤자 소용 없잖아?" [거야... 그렇지...]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대화 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앞에 서있는 나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해.서. 가는 사람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 성에 들어와서 다시 확인하게 된 거지만, 내 모습을 보는 건 선애뿐인 듯 했다. 숲 속에서 늑대들도 내가 있다는 걸 단지 눈치챘을 뿐이지 날 볼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놈들은 무조건적으로 선애를 노렸었다. "뭐, 그래도... 아예 둘 다 못 알아 듣는 것 보다는 났잖아? 언니가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통역해줄 수도 있고 말야."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역~ 쉬 내 동생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탄도 잠시였다. 꼬르르륵~~ 하필이라고 해야 할지, 근처에 있던 자그마한 빵집이 마침 손님 맞을 준비를 위하여 갓 구운 빵을 가게 앞 진열대에 보기좋게 진열해 놓는 것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우리 꼬맹이의 표정은... 어흐흐흐~~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크흑흑흑... 미안하다... 언니가 능력이 없어서...] 통곡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처절하게 우는 날 힐끔 보던 선애는 고개를 획 돌리더니 중얼거렸다. "미안하면 음식이나 구해 오던가..." [음식...?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기둘려라, 선애야. 이 언니가 나서마.] 선애의 말에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내 널 위해서 뭔들 못하겠느냐?] 갑작스러운 내 태도 변화때문인지 황당하다는 표정의 선애가 날 바라봤다. "갑자기 뭔 의욕이 그렇게 불타? 뭘 하려고?" [훔칠라고...] "뭐?" [우리 돈도 없잖냐. 벋드... 내가 있단다, 동생아. 사람들은 날 볼 수 없잖니. 거기다가 어떤 벽이 가로막혀 있어도 통과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나는 이제 모든 물체를 잡을 수 있어요.] "언니가... 도둑질을 하게?" 선애가 약간 께름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자신때문에 내가 이런 결심을 했다는 것이 미안한 모양이다. 그 시선에 아까부터 쬐께 찔리는 양심을 단호하게 밀어내고 - 이래뵈도 나도 얼마 전까진 착실히 교회다니던 사람이었단 말이다. - 마음을 굳혔다. [오~냐. 주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것이다. 죄송합니다아~ 예수님.]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 게 아예 없어진 게 아니라 혼자 오버하고 있자 선애의 한심하다는 말투가 날아왔다. "그만 좀 해라.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할 것이지, 하나뿐이 없는 동생이 굶고 있는데 가만 있었냐?" [컥... 쿨럭....] '그래, 내 동생은 열린 사고방식의 소유자로써, 상황에따라 유동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크흑... 애 교육을 잘못 시켰어어어~~] "시끄럿, 훔쳐 올려면 빨리 좀 훔쳐와. 나 배고파 돌아가실 지경이란 말야." [....녜....] 해가 점점 동녘 하늘에서 떠오르자 그 만큼 성 안은 활기를 띄어갔다. 처음 성 안에 들어왔을때는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선애를 한번씩 힐끔 힐끔 보면서 지나갔다. 그만큼 선애가 예쁘다... 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선애의 모습은 서양인들만 있는 거리에 홀로 떨어진 동양인의 모습이었다. 그런 시선들이 부담을 느낀 것인지 선애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더니 나에게 툭 내뱉듯 말했다. "언니 혼자 갔다 와라. 나는 어디 적당한데에 있을래." 지금 우리는 적당한 음식을 훔쳐내기 위해 정찰을 하고 있었다. 이왕 훔치는거, 될 수 있는 한 조금 훔쳐도 피해가 없는 아주 큰~ 식당이나 여관 같은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곳에서는 빵 하나를 잃어버려도 큰 손해겠지만, 큰 식당 같은 경우에는 잃어버려도 잃어 버렸는지 아닌지 모를 경우도 있을테니 말이다. 상대방에게 될 수 있는 한 피해를 적게 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긴 했지만, 혹시나 들킬 경우에 선애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내 생각에 동의를 한 선애가 같이 돌아다녀 주기는 했지만, 한계였던 모양이다.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걱정어린 내 말에 선애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애냐?" 물론, 애는 아니지만 낯선 곳에 혼자 내버려 둔다는 건 굉장히 불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몰래 침투해 들어갈 건물 가까이에 선애를 데리고 가는 것도 불안해서 나는 선애를 두고 혼자 다녀 오기로 했다. [그럼,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야 해?] 인적이 별로 없는 골목길에 선애를 데려다 놓고 가기 전에 한번 더 당부를 하자 꼬맹이가 피식 웃었다. "낯선 남자가 사탕 준다고 해도 안따라 갈 테니까 걱정 마." [최대한 빨랑 올게.] "응." 선애가 씩씩하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빨리 행할 결심에 선애가 기다리고 있는 골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꽤 커 보이는 건물로 뛰어들었다. 다행이도 그 곳은 꽤나 고급스럽게 꾸며진 식당이었다. 규모도 꽤 되는 것 같고 말이다. '좋아.' 주방으로 들어가니, 식당에는 손님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명의 요리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게 보였다. 아마, 나중에 올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해 두는 것이겠지. 그 틈을 조심스레 비집고 들어가 이리저리 기웃 거리니 오옷, 다행이도 갓 구운 빵에 요리 재료인 듯한 과일에, 더 운이 좋게도 소시지도 보였다. '앗싸~' 그 모든 것을 선애에게 가져다 줄 생각에 기분 좋아진 나는 눈을 빛내며 준비(?)를 서둘렀다. 우선 사람들의 시선이 별로 닿지 않는 구석에 이 모든 것들을 담을 대로 엮은 듯한 바구니를 몰래 가져다 놓고, 그 곳에다 하나 하나 음식들을 담았던 것이다. 빵 두개, 복숭아 하나, 소시지 세개, 거기에 우유... 를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우유로 보이는 하얀 액체가 한두개가 아닌 고로 포기했다. 맛이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구분을 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니 혹시 아무거나 가지고 갔다가 엉뚱한 거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대나무로 만든 작은 물통에 생수를 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고 나니... 문제가 생겼다. 나야 벽을 그냥 통과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음식 바구니는 그러질 못하는 것이었다. 이 주방에는 식당으로 나가는 문 말고도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잠시 관찰을 해보니 누가 드나들기 전에는 꼭 닫아두는 것이었다. 거기다 문이 열리면 모든 이들... 까지는 아니더라도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가니 내가 나서서 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들어올때 나가려고 하면 허공에 동동 뜬 음식 바구니를 들킬 확률이 높았다. 높은 곳에 커다란 창이 있기는 했는데, 거기에는 도둑 방지용인지 굵은 나무 창살이 대어져 있어 바구니가 빠져나갈 틈을 막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 같은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기껏 음식은 마련했는데 가지고 갈 방도를 찾지 못한 나는 발만 동동 구르다가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아아... 이건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나갈 틈이 없다면, 그 틈을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다행이도 주방에는 그 틈을 마련할 재료가 많았다. 나는 다시 주방 한쪽 구석으로 이동하여 선반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기름통을 슬금슬금 이동시켜 선애의 음식 바구니가 있는 곳과 제일 떨어진 곳에다 조용히 기름을 뿌렸다. 그리고, 근처에 불에 약한 것들은 몇개를 기름에다 젹셔 놓은 다음 주위에 불이 크게 번지지 않게 조치를 해놓고는 불을 붙였다. 화르르~ 확실히, 기름에 적셔진 것은 불에 잘 탔다. "/불이야~!!/" "/물을 가져와라!/" "/안돼. 저건 그냥 꺼야 해!/" 효과는 죽였다. 주방에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생겨난 불길로 인하여 놀라 당황하며 우왕좌왕 하는 사이 나는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들고는 슬금슬금 움직여 문으로 다가갔다. 그때를 맞춰서 주방과 바깥을 연결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아무래도 주방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는 것에 놀라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틈에 슬쩍 나오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불때문에 너무 당황해서 그런지 허공에 동동 떠 있는 바구니 하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게다가 주방 바깥에서도 온통 신경이 주방으로 쏠려 있느라 벽을 따라 조심스레 이동하는 바구니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오오, 효과 죽이는데? 아아... 부디 불이 크게 번지지 않길...' 어차피 불이 붙자마자 사람들이 금방 알아챘으니 괜찮을 거다. 특히나, 그 주변에 불에 탈 만한건 다 치워놨으니 말이다. 그렇게 조심스레 바구니를 들고 그 곳을 빠져나온 나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가서 선애를 향하여 냅다 뛰었다. 선애는 땅에 주저앉은 채 지저분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학교 가기 전 매일 아침마다 늦었는데도 매직기로 끝까지 머리를 펴야 직성이 풀리고, 갔다 오면 샤워에 머리를 꼭꼭 감는, 어디 외출할때도 집에 있는 옷들과 악세사리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한바탕 뒤집어댔던, 멋쟁이에 깔끔쟁이였던 녀석을 생각할때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피곤함이 가득 담긴 지저분한 얼굴을 보니 이해가 갔다. 캠핑 도구도 없이 맨 몸으로 이틀간이나 노숙을 했으니, 잠을 잤어도 잔거 같지 않을테고 깨끗하게 씻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니 말이다. 거기에 먹는 것도 부실했으니... 그나마, 사람 사는 곳을 찾아서 드디어 제대로 먹고 씻고 잘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까지 와르르 무너진 상황에서야... [선애야!] 한숨 쉬듯 조용히 부르자 선애의 고개가 들리더니, 내 손에 들린 바구니를 보고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오, 성공 한 거야?" [그려, 어떻게든 가지고 왔다. 너무 많이 가지고 온 건 아닌가 싶었는데, 지금은 왠지 너무 적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뭐라고 중얼거리든 선애는 관심 없다는 듯 바구니를 채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야, 언니 대단한데? 이 빵 갓 구웠나봐. 아직도 따끈따끈해." 그 빵이 갓 구워진건 알고 있었다. 오븐으로 보이는 곳에서 막 꺼내 식히려고 내 놓은 것을 집어왔으니까. 빵의 온기를 기분좋게 느껴보던 선애가 소시지를 잡더니 나를 향해 내밀었다. "언니, 이것좀 궈줘. 이거 너무 차다." 아무래도 저장되었다 그냥 나온걸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오냐, 다 줘봐라.] 선애 옆에 주저앉아 선애가 빵을 먹는 동안 나는 작게 불을 일으켜서 소시지를 구웠다. 왠지, 휴대용 가스렌지가 된 기분이... "다 궜어?" [아, 대충 된 거 같은데, 먹어볼래?] 속에서 새어나온 기름이 자글자글 끓으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소시지를 하나 넘기자 뜨거워 호호 불면서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베어 물었다. "맛있다." [물 마시면서 먹어. 그러다 체할라.] 빵 하나에 소시지 하나를 눈 깜빡할 사이에 다 먹어 치운 선애가 새로운 빵과 소시지를 손에 쥘 때였다. "/헤에... 이게 뭐야?/" 낮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으니 이 골목에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긴 하겠지만, 별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나, 선애를 향해 기분 나쁜 시선을 보이고 있는 녀석들이라면... 맨 처음, 선애를 발견한 엄청 부시시한 노란 머리를 가진 녀석이 선애쪽으로 다가오자 그 패거리인 듯한 네 녀석도 선애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 서대륙인인거 같은데?/" "/갈 곳이 없는 거 같지?/" "저 녀석들 뭐라고 그러는 거야?" 말이야 못 알아 들어서 나에게 물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그 놈들이 좋은 의도로 접근한게 아니란것을 알아챈 듯 선애는 빵을 바구니에 잘 챙겨넣고 자리에 일어났다. "/헤에, 아가씨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부시시한 노란 머리를 가진 녀석이 기분나쁘게 히죽 웃으며 물었지만, 선애는 알아듣지 못했다. "뭐래?" [여기서 뭐 하냐고 묻고 있어.] "재수 없는 자식. 내가 뭐 하던 자기들이 먼 상관이래?" 우리 꼬맹이는... 말빨이 셌다. 학교에서 말싸움으로 진 적이 없을 정도로... 말빨이 센 만큼 말투도 장난이 아니었기에, 기분 나쁘면 험한 욕설이 파박 나온다. 집에서야 부모님은 물론 나까지 기겁을 하기 때문에 바르고 고운 말만 쓰려고 노력 하는 편이긴 하지만, 나한테는 가끔...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도 그럴때마다 기겁하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이번에도 나는 허걱... 하고 있었지만, 선애에게 '재수없는 자식'으로 불린 녀석들은 선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기분나쁘게 싱글벙글이었다. "/뭐래?/" "/내가 아냐?/" "/역시 서대륙인이지?/" "/우리 말을 못하나봐./" 그렇게 자기들끼리 쑥덕 거리던 중 지저분한 갈색머리 녀석이 선애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씨익 웃었다. "/이봐, 몸매는 제법 봐줄 만 하지 않아?/" "/몸매 말고도 흔치 않은 서대륙인이니 괜찮은 값에 넘길 수 있을 거야./" "/헤, 오늘따라 운이 좋은데?/" "이 자식들 뭐라고 그러는 거야?" [널 어디다 팔아넘길 생각인가봐.] "재수없어." 선애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평소라면 그 말투에 주의를 줬겠지만, 지금은 나도 같은 심정이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이봐 아가씨, 갈 데 있어?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 맛있는 거 사줄께./" [자기들이랑 같이 가면 맛있는거 사준대.] 지저분한 갈색 머리 녀석이 선애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고, 나는 그 즉시 통역해줬다. "저리 치워!" 내 말을 듣자마자 선애는 매서운 눈초리로 냉정하게 그 놈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호오, 이거 성깔 있는데?/" "/서대륙 여자들은 좀더 부드럽고 우아하다고 들었는데 말야./" 그 모습에 뒤에 있던 그 놈의 일행들이 키득키득 웃으며 지껄여댔다. 지저분한 갈색머리 녀석은 자신의 손을 한번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이 계집애가 곱게 봐주려니까.../" 그러면서 손을 다시 뻗는 거였다. 이번에는 자신의 손을 쳤다간 가만 안두겠다는 듯 선애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언니!" 하지만, 선애에게는 내가 있었다. [오냐!] 기다리고 있던 나는 선애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애와 그 녀석 사이에 끼어들어 인정사정 없이 놈의 얼굴에다 주먹을 꽂아버렸다. "/꽤엑~!/" 방심하고 있던 차에 당해서 그런지 놈은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하긴, 내가 팔 힘이 좀 쎄긴 하다. 살아있었을때 힘이 세면 유령이 되어서도 힘이 센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뭐야?/" 한 남자가 당황하면서도 나자빠진 녀석을 부축했다. 하지만, 나머지 남자들은 그 모습에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아마도, 선애가 그 남자를 후려친 걸로 오해한 모양이다. "/바보같군. 여자에게 당하다니 말이야./" "/아아, 볼만 했어./" 서로 사이가 좋은 건 아닌 듯, 비아냥 거리는 어조에 내 주먹 한 방에 넘어진 남자가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투덜거렸다. "/시끄러. 그렇게 네놈들이 잘났으면 네놈들이 해보던지./" 그 와중에도 나는 열심히 선애에게 통역해주느라 바빴다. 지저분한 갈색 머리 남자의 말에 부시시한 노란 머리를 가진 남자가 나섰다. "/잘 봐. 이렇게 앙칼진 계집에는 처음부터 기를 팍 죽여 놔야 한다고./" 그러면서 그는 다짜고짜로 지저분한 손으로 선애의 팔뚝을 잡아갔다. 그러나, 그걸 가만 둘 내가 아니었기에 나는 이를 한껏 드러내 그 녀석의 팔뚝을 물어버렸다. "/끄아아아~~!!/"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그 녀석이 입고 있던 지저분한 티 위로 약간 피가 배여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물렸으니, 부시시한 노란 머리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잽싸게 선애 팔을 놓고는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에게 물린 팔뚝을 잡고 제자리에서 몇바퀴나 빙빙 돌았다. "/끄으으... 뭐, 뭔가가 내 팔을 물었어어~/" 그제야 그 녀석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일이 수월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능글맞고 여유만만한 눈빛부터 사라지더니만, 이번에는 나에게 당하지 않은 세 녀석이 한꺼번에 선애 주위를 둘러쌌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사용하지 않은 히든카드가 있었으니... [어쩔까?] 선애를 바라보며 묻자 선애가 단호하게 대답해줬다. "구워버려!" [오케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 이것도 몇번 해봤다고 이제는 멋까지 부릴 수 있게 되었다 - 조심스레 선애에게 다가오려는 녀석들 발 밑에서 강한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끄아아아~~/" 세 녀석들이 한 마음 한 입으로 사이좋게 삼중창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자 뒤쪽에 나와 있던 녀석들이 황급히 그 놈들을 같이 뒹굴고 밟고 털고 하며 녀석들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시작했다. "/마, 마법사?/" "/제, 젠장. 잘못 걸렸다./" 어차피 처음부터 사람들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강하게 붙인 건 아니라, 그냥 놀라게 해주려고 한번 크게 피우고 금방 불을 껐기에 몸에 약간 붙어 있던 것도 몇번 바닥에 뒹굴자 금방 꺼졌다. 녀석들은 괜찮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그 자리를 황급히 피하려고 했고, 나도 더 이상 선애 옆에서 찝적대는게 아니라면 보내줄 생각이었기에 냅두려고 했는데, 단 한사람, 선애가 제지하고 나섰다. "언니, 저 놈들 막아." "언니, 저 놈들 막아." [에? 아, 응.] 뭔지는 모르겠지만, 선애의 말이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튕겼고, 그러자 녀석들이 도망치려고 했던 골목길 앞쪽에 또 다시 불길이 화르르 치솟아 올라 녀석들의 발길을 막았다. 강한 불길을 차마 뚫고 가지는 못하겠던지 굳어버렸던 녀석들은 자신들의 뒤에 선애가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 노려보자 재빨리 그 자리에 무릎꿇고 업드렸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미, 미처 마법사이신 줄 모르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어흐흐흐... 저는 집에 노부모에 처자식까지 있는 몸입니다./" 그들의 말을 열심히 통역해줬더니 선애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법사?" [그냥 그렇게 들렸는 걸. 아마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건가보지.] "뭐, 그건 그렇게 넘어가고... 웃긴 놈들이네. 내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자기들이 어떻게 해도 된다는 거야 뭐야?" [음음, 나쁜 녀석들이군.] 선애가 화가 났는지 삿대질까지 하며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역시, 선애가 성격은 쫌 에... 하여간 그런 면이 있어도 정의를 사랑하는 소녀였다. 그런 못된 놈들의 성격을 개조시키려고 나서다니... "게다가, 감히 이 몸에게 손을 대려 했겠다?" ..... 뭐, 어쨌든 나쁜 녀석들을 혼내주려 하는 건 하는 거니까.... "그럼 당연히 그만큼의 댓가는 내놔야지. 야, 너희들 지금 가진 거 다 내놔. 아쭈, 내 말이 말 같지 않다 이거지? 네 놈들이 내 말을 못 알아 듣는 척 한다고 해서 내가 물러날 줄 알아? 내가 이렇게 나오면 분위기로 척 하고 알아들어야지!" .....에.... 선애가... 돈을 좀... 좋아하기는 했다... 쿨럭... 선애의 말에 자신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두 눈 멀뚱멀뚱 뜨고 있는 녀석들이 마음에 안 든 듯 선애가 매섭게 노려보며 발을 구르고 손을 내밀자 그제야 아하~ 하는 표정의 녀석들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바디 랭귀지는 만국 공통 용어고, 돈을 내 놓으라는 분위기는 뒷골목 세계의 기본 용어란 말인가... 그들이 뒤지던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자 거기에는 갈색 - 아마 구리인 듯 - 동전 한 무더기와 그 사이사이 은색 동전이 섞여 있었다. "/이, 이게 다입니다./" [이게 다라는데?] 대표로 부시시한 노란 머리 남자가 말한 걸 통역해줬지만, 선애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흐음... 왠지 믿겨지질 않는데... 언니, 혹시 저 사람들 옷만 태울 수 없어?" [헉... 확인 사살까지 하려는 거냐... 미, 미안하지만 그런 능력까지는...] "그래? 에이 아쉽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놈들 홀딱 벗겨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면... 좀 위협을 해주는 건 어때?" [서, 선애야... 너 언제 이렇게 사악해졌냐... 그냥 이쯤에서 보내주지 그러냐? 적당히 해야지.] "아하, 그런가? 나도 이런 일은 처음 해봐서리. 뭐, 이정도에서 봐주지..." 생긋 웃으면서 그들이 내놓은 동전을 주섬주섬 챙기는 모습이 나도 평범해보이지 않는데 그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나... 선애가 그들이 내 놓은 동전들을 다 챙기는 걸 본 나는 그때까지 활활 타오르면서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던 불을 껐다. 그러자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녀석들은 반은 구르고 반은 뛰다시피 황급히 그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선애에게 찝적 대었으니 내 손으로 자근자근 밟아줘도 시원치 않을 녀석들이었건만, 그 녀석들의 뒷모습에 동정심이 생기는 건 왜인지... 그러는 동안 선애는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어온 동전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아, 어쨌든 돈이 생겼으니 여관에는 들어갈 수 있겠지." [너 말 못하잖아?] "괜찮아, 괜찮아. 언니가 있잖아? 게다가 왠만한 대화는 예, 아니오만 있으면 다 해결 될 수 있어. 난 지금 깨끗하게 씻고 푹 자고 싶다고." 그런데 그때였다. 짝, 짝, 짝... 갑자기 왠 박수 소리인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아까 녀석들이 도망간 곳과 반대쪽인 골목 그늘에서 한 사람이 박수를 치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키는 대략 봐도 180은 쉽게 넘어가는 장신의 키에 떡대는 아니었지만, 한 눈에 운동 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근육이 잡힌 몸매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여자들이 부러워할만한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찰랑거리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그 남자는 시원해보이는 파란 눈처럼 시원시원하고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꽤나 잘 생긴 미남이었다. 약간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씨익 미소를 짓고 있자 얼굴 만큼이나 성격도 시원시원해보여 호감이 갈 정도였다. 단지, 흠이라고 한다면... 왼쪽 눈이 안 보이는지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다. 아마 바다 위에서 봤다면 해적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야, 정말 멋진 아가씨로군. 감탄스러울 정도야./" 아까 그 녀석들과는 달리 옷차림도 꽤나 깨끗했지만, 방금 안 좋은 일을 당한터라 선애와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우리가 경계를 할 거라고 예상 했던지 우리와의 거리를 열걸음 정도 남겨놓고 멈춰서더니 무력을 행사할 의지가 없다는 듯 양 손을 내밀었다. "/자자,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라고 말해도 믿어주지는 않겠지? 흠, 우선... 내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어?/" 차분하고 여유있는 목소리때문인지 경계가 약간은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선애가 나를 한번 힐끗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기분 좋은 미소를 다시 씨익 하고 지어보였다. "/좋아. 그럼 협상할 여지는 있는 거군. 그런데 우리 나라 말은 할 수 없는 모양이지?/" 다시 한번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렇다면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게 질문을 하도록 하지. 우선 내 소개를 하는게 좋겠지? 나는 이 도시의 정보 길드 지부 부 지부장이라고 해. 이름은 휴. 하류층에서 굴러먹던 녀석이라 성은 없어./" "정보 길드가 뭐지?" [판타지에 자주 등장하는 건데... 쉽게 말해서 정보를 사고 팔고 하는 집단. 실제로 있는지 몰랐는데...] 나와 선애가 작게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는 차근차근 말을 하고 있었다. "/아까 우연치 않게 여길 지나가다가 아까 그 모습을 봤어. 아가씨가 그 녀석들을 멋지게 해치우는 모습을 보고 반해버렸다니까. 아, 우선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해. 나에게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으니까 말이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싱긋 웃어보이자 왠지모르게 나도 마주 웃어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선애도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내 통역을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 이해해줘서 고마워. 내가 반한 건 아가씨의 능력과 녀석들을 처리하는 성격이었어.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가씨에게 그 능력이 없었다면 이런 제안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어? 아가씨가 나에게 능력을 팔아준다면 내가 아가씨를 도와주겠어./" 한마디로 선애의 능력을 보고 고용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좋은 제안이기는 한데, 뭔 일로 고용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쉽게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그래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다 이해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신중한 점도 마음에 들어. 하지만, 당장 내가 불법적인 일은 시키지 않고 아가씨가 일을 거절하면 시키지 않겠다고 말을 해도 나를 믿을 수 없는 한 내 말은 믿겨지지 않을 거야, 안 그래? 지금은, 나를 따라오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말 외에는 할 수가 없겠군. 혹시, 아가씨 지금 갈 곳이라던지 도움을 청할 곳이라도 있어? 그런게 아니라면 눈 딱 감고 한번 나를 따라오지 그래? 아가씨의 능력을 대충 눈치채고 있는 이상 나도 서툰 짓은 못할 거야./" 번지르르하고 귀가 솔깃한 말을 늘어놓는 것 보다는 왠지 더 신용이 갔다. 어쩌면 그걸 노리고 이렇게만 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의지할 거라고는 단 둘뿐인 낯선 환경에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내밀어진 손길을 거절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어쩔까?" 선애도 무척이나 흔들리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냥 한번 가보자. 뭐, 정 뭣하면 내가 널 들고 튀면 되니까. 속는 셈 치고...] 나까지 거들고 나서자 선애는 그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이걸로 거래 성립./" 제 3화 자신을 휴라고 밝힌 은발머리 남자는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우리를 - 정확히 선애를 -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대로를 몇개 지나 커다란 골목 몇개를 통과하고 나자 번듯하고 깨끗한 건물은 하나 둘 사라지더니 그 자리를 허름하고 낡고 작은 건물들이 대신하기 시작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이 골목 여기 저기에서 놀고, 어떤 집은 빨래도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아 대충 중하류... 정도 되는 주택가인 듯 했다. 그래 이 사람도 여기에서 사는 건가 싶었는데,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 곳을 지나쳐 점점 인적이 사라지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뭐, 처음부터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으니 혹시나... 하던 의심이 확신이 된 거랄까? 처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우리가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기도 했지만,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쪽 눈을 가린 안대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말 나쁜 악당은 '어, 정말 저 사람이 그 악당이란 말이야? 생긴건 안 그렇게 생겨놓고서는...' 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멀끔하게 생긴 일이 많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저 휴라는 남자도 악당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건데, 이렇게 불안감을 가지면서도 조용히 뒤따라가는 것은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 우리가 만난 골목에서 '가자'하고 앞장 선 뒤로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걷기만 했던 것이다. 뭐, 선애가 따라가기 쉽게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시선은 커녕 한 마디 말도 없이 걷기만 하는게 '따라올려면 따라오고 말려면 말아라.'하는 듯 보였다. 선애가 끋가지 자신을 따라오리라고 확신하는 것 처럼 말이다. 선애의 발소리를 계속 확인하는 것도 아닌 듯, 자신의 뒤에서 세 걸음 정도 뒤쳐져서 가던 선애가 더 멀어져도 절대 멈춰서 기다려 주는 일도 없었다. - 선애도 혹시나... 싶었는지 몇번 정도 걸음을 늦춘 적이 있었다. - 그러니 의심이 커지다가도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노리고 그러는 거라면 정말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만약, 그가 선애 옆에서 걸으며 괜히 친한 척 자꾸 말을 걸거나, 자기를 따라가면 뭐가 있고, 뭘 할 수 있고, 뭐가 좋은지 등등에 대해 주절거린다든지, 아니면 앞서 갔다 해도 뒤에서 잘 따라오는지 가끔 확인이라도 했다면 난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선애를 데리고 도망갔을 거였다. 하지만, 내가 한 거라고는 여차 하면 튀려고 만반의 준비만 한 채 끝까지 쭐레쭐레 따라간 거였다. "/저기야./" 걷기 시작한 후로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휴가 드디어 선애에게 말을 건넨 것은, 인적이 드물다 못해 건물들도 모두 사라진 공터를 쭈우욱 지나 왠 언덕을 반쯤 올라가서였다.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언덕 ㅗㄱ대기로 오래되어 보였지만 제법 단정한 외관을 갖춘 꽤 큰 2층집이 서 있었다. "/조용하고 경치도 좋은 명당 자리지./" 주택가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확실히 주택가 소움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경치는... "와아..." 언덕 위에 다 오르자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그러고보니 산속에서도 한번 바다를 봤었지?' 그 동안 상황에 이리저리 휩쓸리느라 바다가 있다는 건 잊고 있었다. 하기야, 선속에서 한번 본 뒤로 지금이 두번째로 보는 거니 깜빡 할 만 했지만... 선애가 멀리 보이는 바다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자 휴가 씨익 웃었다. "/내 말이 맞지?/" 그리고는 대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가자 넓다란 마당 구석의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딱 일어나 그를 맞았다. "/어머나, 왜 다시 왔어요? 뭘 두고 가기라도 했어요?/" 일하던 중이라 흙이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다가오자 휴가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에 팔을 걸치고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나야 항상 내 마음을 여기에 두고 다니잖아./" 그 둘은 선애나 내가 벙쪄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구경꾼이 없어도 상관 없거나... 여자는 휴의 말에 살짝 그를 흘겨보는 시늉을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장난하지 말구요.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말에 휴는 그녀를 한번 껴안아 주고 나서 선애를 소개시켰다. "/당신이 맡아줬으면 하는 애가 있어./" 선애의 모습을 본 그녀의 녹색 눈이 놀라움으로 둥그렇게 떴지만, 그건 잠시였고 곧바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서와요./" 아무래도 이런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서대륙인? 이름이 뭐죠?/" 그녀의 인사에는 선애도 고개를 숙여 답했지만 이어지는 질문들에는 가만히 있었다. 대신 휴가 나서서 대답했다. "/아아, 그녀는 아직 우리말을 못해 대충 알아듣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저런... 이 곳에 온지 얼마 안 되었나보군요?/" "/나도 자세한건 몰라. 출근하던 길에 만난 거라... 아, 나 그만 가볼게.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도록 하지./"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다녀 오세요./" "/응, 나중에 봐. 너도 나중에 보지./" 그녀와 가벼운 키스를 나눈 휴는 선애를 향해서도 한마디 인사를 남기고 바삐 대문을 빠져 나갔다. "/들어가요. 아, 우선 씻을 물을 준비해 줄까요?/" 그녀가 선애에게 손짓하며 묻자 선애도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한 뒤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맨 처음 이곳에 온 사람을 상댕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라면, 정말 탁월한 선택인 것 같았다. 그녀는 미인 정도는 아니고 보통 깨끗하게 생겼다... 란 얼굴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경계심을 누그러뜨릴만큼 따뜻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곱슬곱슬 거리는 갈색 머리가 어깨에서 물결쳤고,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녹색 눈, 작지만 오똑한 코, 도톰한 분홍빛 입술은 콧등에 있는 주근깨와 함께 그녀에게 아직 소녀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다. 분위기상... 대충 20대 중반인 걸로 추측했지만, 얼굴로 보면 내 추측이 맞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소녀처럼 맑게 웃어 보일때는 아무래도 20대 초 아님 10대 후반? 하고 생각 하지만, 맏언니 처럼 따듯하게 웃기도 하는 모습에느 역시 20대 중반이나 그 이상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름은 자스민이라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며 선애의 이름도 물어서 알아낸 그녀는 친절하게 햇볕 잘 드는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손수 커다란 나무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져다 주고 목욕시중까지 들어주려고 하는 거였다. 당혹한 선애가 손을 휘저으며 그녀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내자 그게 또 재미있다는 듯 꺄르르 웃으며 순순히 물러 나더니만 선애가 옷을 벗고 탕 속에서 몸을 불리고 있을때 갑자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애를 놀래켰다. 그녀로써는 갈아입을 옷과 타올을 가지고 왔다는 아주 당당한 이유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일부러 그런거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다시 물 속에 몸을 담근 선애가 고개를 갸웃 하며 중얼거렸다. [뭐가?] "아니... 이 곳 말이야. 집이 꽤 큰거 같은데... 사람이 안 보이네... 설마 이 큰집에 자스민하고 휴하고 단 둘이 사는 걸까?" [헤에... 그럼, 내가 한번 돌아보고 올까?] "아냐, 그냥 있어.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텐데 뭐."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등이나 대봐. 등 밀어줄께.] 선애 말대로 잠시 후에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선애가 목욕을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즈음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선애를 데리러 왔던 것이다. 대충 선애 또래로 보이는 아이는 자스민처럼 친절한 웃음은 커녕 무뚝뚝하게 감정하는 시선으로 선애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내보였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넓다란 식당이었다. 그 곳에는 길다란 직사각형의 식탁이 있었고, 좁은 쪽에는 두개의 의자가, 넓은 쪽에는 10개의 의자가 놓여, 총 24명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미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의아한 것은 자스민을 포함하여 딱 세명만 빼고는 모두 선애 또래로 보였다. 자스민은 안내한 소녀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온 선애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이며 손짓했다. "/자, 이쪽으로 와요./" 그러면서 자신의 옆에 세운 자스민은 식탁에 조용히 앉아 바라보고 있는 소년 소녀들에게 선애를 소개시켰다. "/여러분, 이 쪽은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생활하게 된 아가씨예요. 이름은 선애입니다. 아직 이쪽 말을 잘 하지 못하고 여러가지로 낯설테니 여러분이 잘 도와주도록 해요./" [이, 이거... 마치 꼭 기숙사라도 들어온 거 같지?] 내 중얼거림에 선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마치'가 아니라 '정말' 기숙사였다. 그 곳은 휴가 속해 있는 정보 길드에서 미래의 길드원이 될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교육시키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의 관리자가 자스민이었고 말이다. 뭐, 그걸 알게 된 것도 나중 일이었다. 다음날 부터 선애는 이 곳의 말과 글을 배웠다. 담당은 자스민. 자스민은 회화 선생님 노릇을 굉장히 잘 했다. 그러고보니,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학생을 딱딱한 책상과 의자에 앉혀놓고 교과서와 칠판을 사용해가면 가르치는 선생님보다는 같이 떠들어주는 어린 아이가 훨씬 훌륭한 외국어 선생님이라고 말이다. 자스민은 딱 같이 떠들어주는 어린이 스타일의 선생님이었다. 선애를 항상 옆에 데리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말을 걸고, 정확하게 발음이 될 때까지 몇번이고 천천히 발음을 다시 해주곤 했다. 그리고 때때로 틈이 날때마다 이 곳의 글자를 익혀나갔다. 자스민은 이 곳의 관리인으로 있었기에 그녀와 같이 있자니 자연스레 그녀의 일을 같이 돕게 되었다. 뭐, 그녀가 관리인이라고 이 기숙사 전체의 가사일을 다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성격인건지 아니면 관리인이라는 직분 때문인지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가 빨래 할때 선애도 옆에서 빨래를 해야 했고, 설겆이를 해야 할때는 옆에서 같이 설겆이를 해야 했다. 집에 있을 때는 양말 한짝도 다 부모님이 빨아주고, 설겆이도 절대 안 해서 내가 다 해줘야 했는데,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여기서 그 일을 다 하는 걸 보니 쌤통인 듯 했지만, 그래도 동생 녀석이라고 한 쪽 가슴이 아릿아릿 했다. 하지만, 울 꼬맹이는 그러한 심정도 저 멀리로 날려 버렸으니... "언니, 심심하지? 물좀 퍼주지 그래? 이왕이면 설겆이도 해주고..." 자스민이 옆에 있을때는 착실하게 하는 '척' 하던 녀석이 자스민이 잠시 자리를 비우기라도 하면 모든 일을 몽땅 나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녜...] 그래도 하나뿐인 동생이라고 그 건방진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다 해주는 나도 문제였다. 거기다가... "언니, 심심하지?" 선애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에게 자신의 옆 의자를 가르켰다. [전혀 안 심심해.] "시끄러. 심심하잖아. 빨랑 이리 와." [안 심심하다니까.] "쓰읍... 안 와? 할 일도 없는 주제에 같이 공부좀 하자니까? 공부해서 남 줘?" [나... 글은 읽을 줄 알아.] "쓰지는 못하잖아?" [거, 거야...] "일루 와. 나 혼자만 공부하는 거 너무 억울해. 언니도 같이 해." 이러면서 자기랑 같이 강제로 글공부를 시키는 것이었다. 나쁜 녀석 같으니라구... 내가 학교 다닐때 영어를 제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크흑흑... 내가 유령이 된 덕분에 이 곳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글도 읽을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읽는게 아니라 뭔 뜻인지 알아내는 것 뿐이었지만... 예를 들어 'apple' 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게 '사과'를 뜻한다는 건 알지만 그 단어를 '애플' 이라고 읽지는 못했다. 게다가 쓰라고 하면 것도 불가능 했다. 하기야... 'apple' 는 무슨 뜻인지 알면서 그 단어를 조합하여 뜻을 나타내는 'a' 나 'p' 나 'l' 같은 기본 문자도 몰랐다. 그러니 글을 배운다면 선애처럼 기초부터 배워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혼자 공부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선애의 억지로 인하여... 그러나 선애의 만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느 햇볕 좋은 날, 점심 식사의 설겆이를 끝낸 뒤 잠시 시간이 생겨 선애와 나는 방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선애에게 배당된 방은 3층에 있었다. 이 방은 2인실이었는데, 여기서 머물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룸메이트가 있었기에 선애는 2인실을 홀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싱글 침대 두개와 침대 옆에 3층 서랍함, 그리고 침대 맡에 옷장 하나, 양 침대 사이에 놓인 탁자와 의자 두개인 단순한 가구의 방이었지만, 2인실이라 그런지 한국에 있는 울 집의 선애나 내 방의 두배는 더 커보였다. 날이 따뜻했는지 방에 있는 하나뿐인 커다란 창을 열어놓았는데, 그 곳을 통해 바람이 불어와 선애의 머리를 흩날렸다. 유령이 된 뒤로는 안타깝지만 모든 통각은 물론 미각, 촉각을 잃어버려 지금 불어온 바람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따뜻한지 알 수가 없었다. 유령이 된 뒤로 제일 서운했던 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반대로 생각하면 굶주림을 겪지 않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살아있을때는 먹는 낙도 크게 즐기던 몸이었는데, 그걸 한 순간에 못하게 된 서운함은 그래도 컸다. 다행... 이라고 한다면 여기서는 한식을 볼 수 없다는 걸까나? 만약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찌개나 김치찌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밥, 자글자글 하는 소리와 함께 노릇노릇 구워지는 삼겹살을 보게 된다면 나는 너무 억울해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서양식처럼 빵과 스프, 치즈 등등 그런 것이니 원... 난 토종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치즈는 좋아하지 않으며 피자는 아예 먹지 못했다. 그런면에서 보면 내 동생은 다행이도 김치 없어도 밥도 라면도 잘 먹고 치즈가 들어간 음식, 그 중에 피자는 광적으로 좋아했으니 먹는걸로 고생하지는 않았다. 옛날에는 김치를 싫어하는 걸 보고 한국인이 아니라고 한 마디 했었는데, 그 식성을 고맙게 생각할 날이 올 줄은 몰랐었다.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선애의 앞머리를 보고 이러한 생각에 푸욱 빠져 있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선애가 눈을 들었다. "왜?" [아니... 바람이 기분 좋냐?] 내 말에 선애는 '자다가 잠꼬대 하냐?' 란 시선으로 바라봤다. 지금 다시 생각하지만... 역시 동생 교육을 잘못 시켰다.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바람이 바람이지 뭐. 바람 몰라?" [바람도 여러가지잖아. 강한 바람, 약한 바람, 산들바람 등등... 지금 여기 불어오고 있는 바람이 어떤 바람인지 궁금해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진지하게 묻자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공.부.해. 그 단어 다 외웠어?" [쳇...] 이 녀석이 촉각을 잃어버린 내 모습을 보기 싫어서 외면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대답하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지 헷갈렸다. 선애의 잔소리에 탁자 위의 책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부터 한숨이 푹푹 나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이제 공부를 안 하며 살아도 될 줄 알았건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일로 인하여 공부를 하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공부는 역시 싫어.' 라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오늘 나에게 할당된 단어를 외우기 위해 끄적대다보니 어느새 종이 한장을 쌔카맣게 다 채웠다. 그래 그걸 옆으로 치워놓고 새 종이를 집어들려는데, 갑자기 창문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휙 하니 들어오더니만 내가 마악 잡으려는 종이를 내 손보다도 먼저 채 허공으로 솟구치게 만들더니 그대로 창 밖으로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아앗!] 그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이를 잡으러 창문으로 돌진했다. 여기는 한국과 달리 종이를 무척이나 중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다쓴 종이는 함부로 버리지 않고 불을 붙일때 사용한다던가 하는데 하물며 사용하지 않은 종이임에야... 다행이도 종이가 멀리 날아가기 전에 잡아챌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창틀을 밟고 올라가 몸을 밖으로 완전히 내민 채 잡았기에 나는 종이를 잡자마자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아아아악~!!] "괜찮아?" 다행이 얼른 손을 뻗어 창틀을 잡았기에 망정이 안 그랬으면 지상으로 추락할 뻔 했다. 선애가 얼른 창가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내 손에 쥐어진 종이를 뺏어갔다. "아... 사살 좀 잡을것이지... 다 꾸겨졌잖아?" [.... 야, 야....] 구겨진 종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고이 펴더니 그대로 들고 안으로 가려는 모습에 나는 얼이 빠졌다. [야아~ 그냥 가면 어떻게 해?] "에휴, 죽을까봐 걱정하기는..." 저 녀석 정말 내 동생이 맞는 건지 심히 의심스럽게 하는 대사였다. 선애 녀석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창가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에 얼른 녀석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선애가 손을 슥 빼는 거였다. "아, 언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한번 날아보지 그래?" [나, 날아? 야, 내가 새냐? 날고 싶다고 날게?] 황당한 요구에 내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선애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왜 못 날아? 영화에서 보면 유령들이 다 날 수 있지 않나? 한 번 해봐라. 어차피 떨어진다고 해서 죽지는 않을 거 아냐? 한번 죽지 두번 죽나?" 아주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면서 바라보는데... 이거 처음에 내가 유령이 되었다는 걸 알고 엉엉 울어대던 바로 그 녀석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될 정도였다. [이, 이봐... 너 정말 내 동생 맞냐?] "언니 솔직히 지금 힘들어? 창틀에 매달려서 금방 떨어질 사람 치고는 너무 여유만만하잖아. 언니의 그 거대한 몸무게가 느껴지는 거 맞아?" [잉? 어? 그러고보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불안한 것만 제외하면, 나는 창틀에 매달려 있으면서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유령이 되더니, 거의 매일 엄마와 선애에게서 잔소리를 듣게 하던 그 몸무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모양이었다. [어라... 안.. 힘들다.] "거봐, 유령이면서 그런것도 모르고 있었냐? 그러니까 한번 날아보라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는 꼬맹이의 모습이... 왜 글케 얄미워 보이는 것인지...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날 이렇게 내버려 둔 채 날아보라고 그러냐?] "한번 해봐." [싫어. 몰라. 어떻게 나는 지도 모르고, 감당 못해.] 진작 무게를 못 느낀다는 걸 알았으면 선애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내 스스로 올라올 수 있었을걸... 하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나는 바로 아랫층의 창문의 윗부분 중 약간 튀어나온 곳을 발견하고는 그 곳을 지지대 삼아 몸을 튕겨 올렸다. 그랬더니 너무나 가볍게 쑤욱 몸이 위로 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가볍게 발을 굴린 것 뿐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올라올 수 있는걸, 아까는 놀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선애를 불러댔던게 너무나 창피했다. '그래도 선애 녀석도 너무했지...' 창틀 위로 몸을 얹으면서 벌써 탁자로 돌아가 앉는 선애를 째려봤다. [야, 너 언니에게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너 필요할때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주제에...] "언니가 동생을 돕는 건 당연한 거지." [그건 어느 나라 법률이래니?] 뻔뻔스러운 선애의 말에 투덜대며 창틀 위에 내려서던 나는 마음과는 달리 창문 밖으로 다시 몸을 날려야 했다. 또 그 얄미운 바람이 들어와서는 이번에는 종이를 세장 씩이나 밖으로 날려 보냈던 것이다. [우와아악~!!] 이번에는 나도 너무 멀리 뛰었기에 창틀을 잡을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선애도 너무 놀라서 의자가 넘어지는 것도 모르고 창으로 달려왔다. "언니이이~!!" 아까는 날아보라더니 지금은 놀라서 창백해진 얼굴로 달려오는 꼴이라니...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떨어지는 중이었기에 그런 말 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땅에 떨어졌다. 착... 하고. '착?' 나도 내가 체조 선수가 10점 만점으로 착지한 것 처럼 착지할 줄은 몰랐기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선애가 위에서 소리치지 않았으면 한시간이고 그러고 서 있었을 것이다. "뭐 하는 거야? 놀랐잖아?" 위를 올려다보니 선애가 상체를 쑥 내밀고 날 내려다보고 있어는데 그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놀랐... 잖아..." 그렇게 울거였으면서 아까는 어떻게 날아보라고 한건지 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선애를 올려다봤다. 그래도 앞으로는 높은데서 떨어져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듯 했다. 그 뒤로 자신을 울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앙심이었던지 꼬맹이 녀석의 날아보라는 압력은 한동안 계속 되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자신을 울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앙심이었던지 꼬맹이 녀석의 날아보라는 압력은 한동안 계속 되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날 수는 없었다. 대신... 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선애의 그러한 억지스러운 닥달 덕분에 나는 얼마나 높든, 가파르든에 상관 없이 높은 곳에는 잘만 쑥쑥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무협에나 나오는 무공의 고수들 처럼 날렵한 고양이라도 두려워서 올라가지 못할 내 손가락 만한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있는 곳이라도 가볍게 잡고 올라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어떠한 벽도 나에게 장애가 될 수 없었기에 나는 우리가 지내는 저택 1층에서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 선애의 방인 3층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1층 천장이자 2층 밑바닥, 그리고 2층 천장이자 3층 밑바닥을 통과 하면서 말이다. [선애야아~ 이것 봐라아아~]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잘려고 침대위에 잘 개어놓은 시트를 펼치는 꼬맹이를 바라보며 창문 위 천장에 다리를 살짝 걸치고 거꾸로 매달려 선애를 부르자 녀석이 힐끔 보더니 고개를 홱 하니 돌렸다. "뭐 하는 거야? 귀신 같아." [쳇... 유령 맞잖아.] 선애의 냉정한 반응에 머쓱해진 내가 투덜대면서 창 밑으로 내려오다 우연히 밖을 보는데 그 날이 보름이었는지 평소 밤보다 무척이나 환한 것이었다. [헤에, 오늘따라 환하네...] 이 곳에 온지 이제 두달이 다 되어가는 시기였는데, 그 동안 여기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터라 밤하늘 한번 여유있게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문인지 오랜만에 밤하늘을 보려고 창문을 연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아아악~ 서, 선애야아아~!!] "왜, 왜?" 놀라서 나에게 다가온 선애에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창밖의 밤하늘을 가르켰다. "헉..." 의아한 표정으로 내 손길을 따라 밤하늘을 쳐다본 선애도 눈이 동그래진채 굳어 버렸다. 밤하늘에는 너무나 익숙한 새하얗고 둥그런 달과 그 달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 처럼 버티고 있는 아주 커다란 푸르고 아름다운 또 다른 달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우주에서 보는 지구와 똑같이 생긴... "언니...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온 걸까?" 한참이나 빤히 두개의 달을 쳐다보고 있던 선애가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그, 글쎄다... 그건 나도 알고싶은 거긴 하다만... 세상에나... 내가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오게 될 줄이야... 환상적이군...]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리듯 대답한 나는 여전히 홀린 듯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선애를 톡 쳐서 날 보게 만들고는 제안했다. [우리 지붕에 올라가서 볼래? 내가 예전에 좋은 자리 봐뒀거든.] "언니는 이게 낭만적인 일로 보여?"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선애는 순순히 내가 이끄는대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 저택은 3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3층의 벽을 지붕이 반 이상이나 덥고 있었기때문에 밖에서 보면 2층집으로 보였다. 그래서 선애가 있는 방의 창은 지붕으로 나 있었기 때문에 창만 열고 나가면 바로 지붕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붕 위에서 그나마 평평한 꼭대기 부근에 자리를 잡은 선애와 나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봤다. 두개의 보름달이 환한 빛을 빛내고 있으니까 별들의 빛을 가리워버렸는지 별들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달만 눈에 들어왔다. "언니... 저거 지구 맞지?" [아무래도... 그런거 같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고...] "그럼... 여기가 화성이나 목성인가?" [그건 아니다. 지구에서 볼때 화성이나 목성은 저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긴..." 그쯤에서 입을 다물고 하늘만 바라보던 선애가 한참 후에 갑자기 날 불렀다. "언니." [응?] "있지...." [왜?] 애가 평소답지 않게 머뭇머뭇대며 쉽게 입을 열지 못하더니만 한참 후에야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랑 아빠... 어떻게 되셨을거 같아?" [글쎄다...] 분명히 잘 살아 계실거라고 호언장담 하고 싶었지만, 엄청나게 커다란 가스 수송관이 폭발한 장소 가까이에 두분다 피하지 못하고 계셨으니... 아마 살아 계신다는게 기적일듯 싶었다. 그걸 잘 아니 차마 자신있는 장담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불분명하게 말끝을 흐리자 그것으로 잠시 또 대화가 단절 되었다. 그런데 또 한참 뒤에 선애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나...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것도 내가 분명하게 호언장담해줄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 글쎄... 음... 그래도 여기 올 수 있었으니 갈 수 있을 방법 또한 있지 않을까... 싶은데....] "흐음.... 그럼 나는 그 방법을 찾아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당연하겠지.'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왠지 선애의 어조가 시큰둥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동안이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요상한 곳에 떨어져 이 곳에 적응하기 위하여 휴를 따라와 신세를 지고 있기는 했지만, 사정만 된다면 신세를 갚으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서 돌아가야 하는게... 아닌가? 뭐, 나야... 내 사정상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하지는 않지만서도 나와 선애는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선애의 어조가 마음에 걸린 나는 뭐라 대답은 못하고 선애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이런 내 기색을 알아챈 것인지 하늘에 떠있는 지구랑 똑같이 생긴 달만 보고 있던 선애가 날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니 뭐... 그동안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그 동안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못 봤는데 언제 또 곰곰히 생각해 봤다는 건지... 그러나 내가 속으로 황당해하던 말던 선애는 심각한 모습 그대로 그 뒷말을 내뱉었다. "나... 꼭 한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빽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니, 그게 뭔 소리래?] 선애는 이런 내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도 한번 생각해봐. 내가 지금 한국에 돌아가야 할 필요성이라도 있어?" 선애의 말에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대학 가야지.] "헐..." 선애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에 나는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는 것을 깨닫고 쬐끔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해도 우리 꼬맹이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생이었으니 나는 지금이라도 선애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제일 먼저 대학에 들어가게 하려고 공부시킬 것 같았다. 그 동안 이를 빠득빠득 갈 정도로 싫어하던 시험에 좋은 성적을 내려고 아둥바둥 공부를 해온건 다 그때문이 아니었는가? 게다가 내 동생은 성적도 상위권이라 소위 알아주는 대학들의 좋은 과들을 바라보고 있었단 말이다. 뭐, 꼬옥... 그것때문에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내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선애가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기야... 나도 그 동안 죽어라 공부한게 안 아까운게 아니지... 그래서 나도 여기에 처음 왔을때에는 어떻게 하든 빨리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어떤...?] "돌아 가면 뭐하나..." [엥?] 이 애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선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돌아가면 뭐하냐니. 당연히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야지.] 정말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말을 꺼내는 날 빤히 바라보던 선애가 잠시 시선을 돌려 한번 피식 웃더니 내 눈을 똑바로 마주쳐왔다. ".... 나 혼자?" 의미심장한 녀석의 말에 내가 움찔하자 선애가 시선을 돌려 이제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두개의 달빛 덕분에 환히 보이는 마당을 내려다봤다. "한국에 돌아가면... 언니는 어떻게 될까? 여전히 그 모습으로 내 곁에 붙어 있을 수 있을라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있나? 게다가... 엄마랑 아빠가...." 거기서 잠시 한숨을 내쉰 선애가 빙 돌려서 말했다. ".... 멀쩡히 날 기다리고 계신다고... 장담하기 힘들잖아?" 녀석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묵묵히 시선을 돌려 선애가 바라보고 있는 죄없는 마당만 쏘아보고 있는데 잠시 후에 조용히 선애가 입을 열었다. "...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뭐하러 한국에 가나 싶더라고. 어차피 짧은 시간 안에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내가 내 청춘, 내 인생 다 바치면서 한국에서 꼬옥 공부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엄마나 아빠도... 그러니 차라리 여기서 사는게 났지 않을까 싶더라고. 여기에 있으면... 그래도 최소한 언니는 옆에 있어줄 수 있잖아?" 선애의 말에 나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뭐... 그래도 돌아갈 방법은 알아볼 생각이긴 해. 여기서 돈 많이 벌어서 떵떵 거리고 잘 산다면 몰라도 지지리 궁상맞게 못 살면... 그때나 돌아가면 되잖아? 흐음... 교육을 받는 와중에 틈틈히 여기서 돈 벌 궁리를 해볼까나?" 아까의 진지한 모습을 금세 지워버리고 눈을 반짝 빛내는 모습의 선애를 바라보며 나는 뿌듯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묘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뿌듯한 건 언제나 어린애로만 여겼었는데 어느새 저렇게 감정을 잘 추스르게 될 정도로 성장한 선애의 모습 때문이었고, 그래도 아직은 성인이 아닌 애를 이런 곳에 두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한 내 존재 때문에 안타까웠다. 그래도 단 한가지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돈... 그려... 잘 해봐라.] 울 꼬맹이가 한국에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 이유가 성공해서 돈 왕창 벌기 위해서였다. 그 녀석은 원래 목표가 대기업에 취직해서 능력을 인정받는 케리어 우먼이었는데, 울 나라에서 I.M.F. 가 터진 뒤 대기업에 있던 사람들이 줄줄이 명퇴당하자 곧바로 언제 어디서나 돈을 잘 번다는 치과 의사로 목표 변경을 했던 녀석이었다. 예전에 영화를 보는데... 제목이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내용이 평범한 집안 출신의 여대생이 (그래도 여주인공이 공부는 잘해서 이름 높은 대학에 다녔다.) 자신이 다니던 대학에 유학온 유럽의 어떤 왕자랑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는 신데렐라풍이었다. 그거 보고 꼬맹이보고 저런 로맨틱을 좋아하냐고 했더니, 저 왕자보다는 '파리의 연인' 에 나오는 박신양처럼 대기업의 후계자가 훨씬 좋다나? 둘 모두 대단한거 아니냐고 했더니 자신은 지위 보다는 돈이란다. "혹시 알아? 내가 여기에서 대기업을 하나 세우게 될지? 내가 만약 대기업을 세운다면 그 이름은.... 신선 기업이라고 할래." [시, 신선? 왜?] "언니하고 내 이름 하나씩 따서. 언니는 신애, 나는 선애. 그래서 신선. 뭔가 신선하지 않아? 내가 언니 이름 넣어준다니까 기쁘지?" 짜식이 그래도 언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 그 말에 굉장히 기특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라라, 혼자 여기서 뭐하는 거야?/" 선애를 여기다 데려다 놓고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휴가 자스민의 손을 잡고 지붕위를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 선애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달구경이라도 하고 있었나보네./" 자스민이 생긋 웃으며 선애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옆에 주저앉자 휴도 자스민 옆에 주저 앉았다. 휴가 선애를 데려온 첫날 자스민에게 보여준 행동으로 둘이 연인, 아니면 그 비스무리한 관계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과연 그 둘은 부부였던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금슬이 좋은 잉꼬부부로, 휴가 자신의 일이 바빠 자주 자스민과 둘만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다간 주위 사람들을 몽땅 닭으로 만들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를 뻔 했다. 그만큼 둘만 있으면 휴는 주위는 생각을 안 하고 얼마나 닭살스럽게 애정 행각을 벌이는지 몰랐다. 오늘도 오랜만에 일찍 돌아온 휴가 둘이서 달 구경 나온 모양인데, 우연치 않게 선애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바람에 데이트를 방해한 꼴이었다. "/이제 자려구요./" 아직은 많이 어색한 이쪽 나라 말로 선애가 배시시 웃으며 대꾸하자 자스민이 선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선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밤도 늦었으니 어서 자도록 해./" "/안녕히주무세요, 자스민, 휴./" 선애가 재빨리 밤인사를 하자 휴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얼른 인사를 해왔다. "/그래, 선애도 잘 자도록 해./" 혹시나 자스민이 선애를 잡아서 오랜만 오붓한 데이트를 방해받게 될까봐 걱정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인사를 하다니... 그 모습이 쫌 마음에 안들어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런 날 선애가 힐끔 보더니 방에 들어와서 킥킥 웃었다. "왜, 부러워?" [뭐가?] "뭐긴 뭐야. 어휴, 이제는 어쩌나? 쯧쯧, 그러길래 내가 좀 예쁘게 꾸미고 다녀서 남자좀 꼬시랬지? 이게 뭐야? 연애 한번 못해보고... 그냥 처.녀.귀.신이 되어버렸네?" [허걱...] 그랬다. 나는 연애 한번 못해보고 갑자기 유령이 되어버린 오리지날 처녀귀신이었던 것이다. 짝사랑 한번 못해봤으니... "언니, 아무리 그래도 행복한 연인들을 방해하면 안돼, 알았지?" 얄미운 꼬맹이 녀석이 낼름 혀를 내밀더니 쏘옥 침대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끄아아악, 너 오늘 잠은 다 잔줄 알아. 밤새도록 못 자게 괴롭혀줄테다아아아~~!!] "오호라, 이게 처녀귀신의 히스테리인가?" 그 지구를 닮은 푸른 달의 이름은 아일린이었다. 뭐 기품과 빛의 여신 이름이라나 어쨌다나... 역시 지구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봐도 아름다운가보다. 하여간, 여기서 아일린이라 불리는 푸른 달은 여름에는 사라졌다가 가을에 나타나 겨울을 지나 봄까지 있다가 여름이 시작될 무렵 사라진다고 한다. 어쩐지, 우리가 여기 올때에는 지구의 모습이 보지이 않더라니... 그 달이 눈이 부실 만큼 시린 푸른 빛으로 빛날때는 날은 점점 더 추워져 드디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렸다. 바다가 가까이에 있는 탓인지 첫눈부터 함박눈으로 펑펑 내렸다. 뭐, 내가 살았던 곳이 한국에서도 눈이 많이 온다는 강원도라서 별로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오는 건 많이 오는 거였다. 함박눈으로 펑펑 내린다 하더니만, 내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눈이 쌓였으면 애들하고 강아지들, 거기에 연인들은 좋아하겠지만서도... 기뻐할 수만은 없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선애가 거하는 저택의 사람들이어라. 눈이 그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도구를 들고 눈 치우러 나와야 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눈을 치우러 나왔는데 선애라고 빠질 수는 없는 법. 선애가 맡은 일은 저택의 부엌과 이어진 뒷문에서부터 뒤뜰에 있는 우물까지 길을 내는 것이었다. 사실 집안에는 펌프가 있었다. 펌프... 뭐, 우리 선애도 그거 보고 '이게 뭐더라?' 했으니 요즘 시대 애들은 모르겠지만, 펌프는 지하수를 수동으로 끌어 올리는 장치라고나 할까? 한국에서도 7, 80년대에는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수도 시설이 잘 발달됨에 따라 사라진건데, 지하수에 가느다란 관을 꼽고 그 관과 펌프를 연결하여 사람이 펌프에 달린 막대기를 위 아래로 한참 저으면 지하수가 끌어 올려져 뿜어져 나오게 된다. 펌프에 달린 막대기를 위 아래로 움직이는 걸 펌프질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아무나 위아래로 움직인다고 다 지하수가 끌어 올려지는게 아니라 요령이 있다. 옛날에 내가 또 한 펌프질을 했었는데... 하여간, 그러한 펌프가 저택 안 부엌 한 귀퉁이에 설치가 되어 추운 날에는 일부러 바깥까지 나오지 않아도 집안에서 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펌프는 집안에 단 하나밖에 없었고, 그것도 자그마한 거라서 많은 양의 물을 받으려면 좀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집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펌프는 부엌 일 전용으로만 사용하고 나머지 용도의 물은 뒷뜰에 있는 우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여름보다야 사용횟수가 적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용을 안 하는 건 아니라 우물까지의 길을 만드는 건 필수였다. 그러나, 이 추운 날 꼬맹이 녀석이 밖에 나와 덜덜 떨면서 눈을 치우려 하겠는가? 바로 날 나두고 말이다. 그래도 차마 남들 밖에서 일하는데 자기 혼자만 집안에 들어가기는 뭣했는지 밖에 오도카니 서서 높이 싸인 눈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뛰어 놀고(?) 있는 날 불렀다. "언니이이~? 부탁해." [이 지지배야, 그 말투가 부탁하는 말투더냐?] 하여간, 내가 동생 교육을 잘못 시켜가지고, 저녀석에게는 '부탁'이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을 뜻하는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참... 그놈의 언니라는게 뭔지... 아무리 얄미운 녀석이라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추위에 달달 딸면서 꼼지락거리는건 또 보기 싫었던 터라 나는 입으로는 투덜 투덜 대면서도 순순히 선애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부엌 뒷문하고 우물하고의 최단거리를 눈으로 대충 재본 내가 힘을 끌어올리자 내가 눈대중으로 그린 자리에 화르륵 하고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화려한 불길에 따라 눈이 사르르르 녹으면서 얼마 안되어 눈 사이로 멋진 길이 생겨버렸다. 그런데 참 황당하게도 간단하게 길을 만든 내가 '이 정도면 됐지?'하는 시선으로 선애를 돌아보니 녀석이 벙~ 쪄 있는 것이었다. [야? 왜 그래?] 하지만 내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여전히 멍~ 한 시선으로 나를 빤~ 히 바라보던 선애의 눈에서 점점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 맞아. 언니 불을 쓸 수 있었지. 그 동안 보지 못해서 그만 깜빡하고 있었지 뭐야. 맞아... 그랬었어. 호오... 맞아..." 저 녀석... 이 집에서 살게 된 후 별로 필요가 없어 한번도 내가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뭐냐.. 그럼 너 눈 치우라는게... 나보고 직접 눈을 쓸라는 뜻이었냐? 불로 녹이라는게 아니라?] 이... 이녀석이... 언니에게 육체노동을 하라고... 내가 기가막혀서 녀석을 노려보자 그 놈이 배시시 웃는다. "에헤헤헤... 언니는 추위 안 타자너... 에이, 언니 좋은게 뭔데..." 이럴때만 아양이다. 정말... 뉘집 딸내민지 너무 여우다. 이럴때 보면 이 녀석 빈 손으로 아무데나 보내도 나중에 부자되어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 뒤로는... 그 동안 깜빡 잊고 있느라 써먹지(?) 못하다는 게 너무나 아깝다는 듯 꼬맹이는 나를 참 살뜰이도 부려먹었다. 한국에서는 달동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수도가 없는 이 곳에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누리던 호사(?)의 반도 기대 못하고 모든걸 체념했던 선애에게 나는 마술램프의 지니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동양보다는 서양식에 가까운 이곳의 방을 따스하게 뎁혀주는 건 벽난로. 각 방마다 자그마한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고 저녁마다 일정량의 석탄과 (놀랍게도 석탄이 있었다) 나무가 배급되줄 뿐 누가 일부러 일일이 불을 피워주고 살펴봐주는게 아니었기에 따뜻한 방에서 자느냐 냉냉한 방에서 자느냐 하는 것은 각 방 주인의 역량에 딸린 일이었다. 그러나 선애나 나나 언제 벽난로를 한번 때 봤어야 말이지... 캠프에 가서 캠프 화이어 하는 건 단지 선생님들이나 캠프 교관들이 해주는거 멀뚱이 구경만 했을 뿐, 아궁이 불도 피워본 적이 없었다. 아니, 설사 아궁이 불을 피웠다 해도 한국에서는 라이터나 하나못해 성냥이 있었으니 어려운건 아니겠지만, 여기는 그런게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부싯돌... 그런데, 그런걸 언제 사용해 봤어야 말이지... 아무리 자스민이 몇번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앞에서 시범을 보여줘도 선애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지 못했다. 그래, 결국 자스민이 매일 저녁마다 불을 가져다 줘서 땠는데 그것도 벽난로를 피울때 요령이 있어야 하는지 선애는 곧잘 불을 꺼뜨리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방에 올라올때 얻어오는 등불과 종이를 이용해 불을 붙이고는 했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 곳에서는 종이가 흔한게 아니라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선애는 자스민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나에게 부탁하지 않고 자스민에게 도움을 청한게 내가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선애가 깜빡 해서였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이제 스스로 모든걸 해볼려고 하는 기특한 마음이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선에는 하도 불을 꺼뜨리니까 불이 잘 타오를때 다시 꺼뜨리지 않기 위하여 땔감을 좀 많이 넣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아침이 될때쯤에는 땔깜이 모자라 불을 피우지 못해 항상 서늘한 공기 속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이 곳에서는 따로 온수기가 없어서 각 방에 설치된 벽난로에 솥을 걸어놓고 거기에 각자가 알아서 물을 뎁혀서 쓰게 되어 있었는데, 아침에는 불이 꺼지니 선애는 거의 다 식은 물로 세수를 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사랑하는 동생을 위하여 얼마든지 물을 뎁혀줄 용의가 있었지만 난 촉감을 잃어버려 날이 추운지 물이 차가운지 알지 못했으니 선애가 부탁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는 거였다. 사실, 이것도 선애가 내가 불을 다룰 줄 안다는 걸 다시 깨닫고는 투덜투덜 늘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그 뒤로 선애는 벽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로 다시는 자스민을 귀찮게 하는 일이 없어졌고, 뜨거운 물이 별로 없는데다가 추워서 -아무리 각 방에 벽난로가 있다 하더라도 어디 21C 한국의 아파트만큼 난방이 잘 되겠는가 - 며칠에 한번씩 뜨문 뜨문 하던 샤워를 한국에 있을때처럼 거의 매일 매일 하게 된데다, 따뜻한 공기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벽난로를 지필 필요도 없이 필요하면 '언니야...'하고 부르면 되는데... 아... 정말... 그럴때마다 투덜투덜 대면서도 해줄 거 다 해주는 내가 그렇게 한심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어쩌겠는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그놈의 핏줄이란게 뭔지... 정말 이 세상의 첫째들은 너무 불쌍하다. 동생 녀석들은 자신들의 언니, 오빠, 누나, 형들의 이런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걸까? 아니면... 나만 이렇게 불쌍한 걸까나... 그렇게, 내 자신에 대해 다시한번 고찰해보는 겨울이 지나가고, 푸른 달 아일린이 시리도록 파란 빛에서 다시금 청자같은 은은한 빛으로 바뀔 즈음 봄이왔다. 한달에 두세번은 꼭꼭 함박눈을 뿌려대서 뭉게구름마냥 언덕 주변에 쌓인 눈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 사이사이에 따뜻해진 햇볕을 받아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그때, 선애와 내가 의탁하고 있는 집에도 몇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은 이 저택에 거하며 교육을 받고 있던 대부분의 애들이 5명만을 남기고 모두 저택에서 나갔고 그 자리에 나간 이들보다 좀 더 어린 이들이 대신 들어왔던 것이다. 마치 새학기가 되어 졸업생들이 학교를 떠나가고 신입생들이 새로 학교에 들어온 것 처럼 말이다. 뭐, 나간 애들과 선애간에 친밀한 교류는 커녕 소 닭보듯 하는 관계였기에 그들이 가든 말든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주 보던 얼굴이 사라지고 새로운 얼굴들이 보이자 마치 저택을 새로 인테리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함께 선애에게 수업에 참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참여가 아닌 참관. 그즈음, 선애를 따라 반 강제적으로 수업에 참관하게 되어 알게된 것이지만, 여기 교육은 참 독특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 수업은 무조건 선생님이 왕이었다. 뭐, 한국의 고등학교나 대학교도 그렇지 않겠냐 싶겠지만서도... 거기하고 여기하고는 차원이 틀리달까나? 우선, 수업시간 말인데... 이게 아주 웃겼다. 매주 몇번씩 몇시부터 몇시라고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과목 선생님이 오고싶을때 와서 하고싶은 만큼만 하고 가면 땡이었다. 그나마 나은 것은 선생님들이 수업을 끝낸 뒤 다음에 올 시간을 얼추 예고해주는 것이랄까? 그런데 만약 이때 다른 선생님과의 수업시간이 겹치면 학생은 수업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수업을 참여할 수 있는 건 그 선생님 마음에 드는 몇몇 애들 뿐이었다. 나머지 애들은 '참관' 즉,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애들의 진도를 봐주는 것도, 수업에 질문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이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몇몇 학생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수업에 '참여'하고 싶다면 그 선생님에게 자신이 이 수업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괜찮은 학생이라는 것을 '어필'해야 했다. 그런데 그 '어필'도 각각 선생님들의 다른 성격에 맞춰 해야하니 참 골치 아플 수 밖에 없었다. 여기 처음 들어오는 애들에게는 모두 선애와 같이 '참관' 자격만 주어졌고, 처음에야 뭐가 뭔지 모르는 애들이었으니 상황이 허락하는 한 모든 수업에 우르르 몰려 들어야 했다. 선생님들이야 자기들이 인정한 '학생'들에게만 맞춰 수업을 진행시켜 나가는 바람에 그 수업의 내용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 대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학생들에게는 모든것이 자유였다. 꼬옥 들으라는 수업이 없었고, 어떤 수업을 듣는다 해도 수업시간에 들어오던 말던 아무런 제제가 없었다. 기말고사나 중간 고사 같은, 정해진 시험 같은 건 더더욱이나 없었다. 단지, 각 과목 선생님들의 '인정'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인정'은 나중에 일을 할때 어느 분야를 맡게 될지에 대한 지표로 작용했다. 그러니까 그 '인정'이라는 것은 그저 그런게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선생님들도 자신들이 수업에 '참여'하도록 허락한 '학생'들은 철두철미하게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미래의 길드원에 대한 능력체크이겠지만서도... 그러한 수업 과목 중에는 정말 가장 기본적인 '읽고 쓰기' 과목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 조차도 들으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 는 방관적인 자세였다. 물론, 선애를 비롯한 모든 신입생들은 착실하게 그 수업을 '참관'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방관적인 자세니까 오히려 한국의 고등학교보다 애들이 더 필사적이었다. 담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선생님들의 허락을 받아 수업에 '참여'하게 된 학생들 이라도 과목 선생님들이 일일이 지도해주는 것도 아닌 듯 싶으니 모든 일들을 학생들이 알아서 익혀야 했으며 알아서 인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미래가(?) 달린 일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새로 저택으로 들어온 애들은 전부터 같이 있었던 사이는 아니었던 듯 마치 새학기 새 반에 모인 학생들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며 쭛볏대었다. 그러면서도 수업이 있으면 우르르 같이 몰려다니면서 서로를 탐색하기도 하고 용기 있는 자가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친해지려 하는 분위기 속에서 선애는 한 발짝 물러서서 상황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애들이 선애에게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 꼬맹이는 뭐랄까... 속은 전혀 안 그런데 입을 다물고 조용히 서있으면 왠지 뭔가가 있어보이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차가운 인상... 다시한번 말하지만 속은 전혀 안 그렇다. 그래서 울 꼬맹이와 친해진 애들이 한결같이 처음에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더니만, 겉모습에 속았다고 투덜댔었다. 오죽했으면 선애가 소속된 동아리 후배들이 선애가 입을 다물면 분위기가 싸해진다고 느끼며 무서워 했겠는가. 짜식, 뉘집 동생인지 한 카리쑤마를 가지고 있었다. 헷헷헷. 그때문인지 이번에도 애들은 선애를 바라보며 경계어린 표정으로 눈치를 살필 뿐 함부로 다가오질 못하는 것이었다. 선애도 낯선 애들에게 먼저 다가가 사근거리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 스스로는 소심해서 낯을 가린다고 하는데 나와 선애 친구들은 천만의 말씀이라고 입을 모은다 - 단지 관심 없는 표정으로 무리와 한발짝 물러서 있을 뿐이었다. 이런 선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자스민 뿐이려나? 하기야, 자스민은 선애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스스럼없이 다정했다. 마치 모든 이들의 맏언니인양 말이다. 모든 이들이 낯설기도 하고 서로 서로를 라이벌이라 생각해서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온도를 따스하게 뎁히는 그녀였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이들이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 뭐, 어쩌면... 그녀가 휴의 부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휴가 이 도시에 있는 길드의 부길드장이니 미래를 위해서도 잘 보여두는 편이 좋겠다 생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 4 화 우르르르~~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급하게 수업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머리 아프다는 듯 인상을 북북 써대고 있는 선애와 내가 느긋한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 정말... 반도 못 알아 듣겠어. 머리아파라..." 한숨이 가득담긴 선애의 푸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못알아 듣겠던데 뭘. 이 세계에 대해 하나도 아는게 없는데 이 나라는 요즘 어떻고 저 나라는 요즘 어떻다는 걸 알아 듣기나 하겠어?] 방금 우리가 끝마친 수업은 현 대륙의 정세에 관한 것이었다. 어차피 처음 공부하는 신입생들이 아닌 학생들 위주였기에 세세한 설명도 없는 걸 우리가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선애는 아무리 자스민에게 열심히 배웠다고 해도 대략 반년 정도 공부한 것 뿐인데 이 세계의 언어를 완전히 알아듣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쳇... 그래도 세계사 공부는 잘 했는데..." 투덜투덜 대며 앞으로 걸어 나가는 선애를 뒤에서 바라보자니, 확실히 밝은 계통의 머리색 사이에서 선애의 검은색 머리는 눈에 띄었다. 선애의 머리색은 보통 검은색보다 더 진한 색을 띄고 있어서 밝은 빛 아래에서 보면 푸르스름한 기가 비칠 정도였다. 숱이 많은데다가 머리결에 엄청 신경을 썼던 덕분인지 이 곳에 와서 트리트먼트를 못해 머리결이 많이 상했다고 투덜대지만 여전히 윤이 반짝반짝, 흔들리면 찰랑찰랑 거리는 머리결이었다. 여기 애들이 선애에게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선애의 성격과 정말 안 어울리는 첫인상 말고도 저렇게 튀는 외모도 한 몫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여기에서는 선애 혼자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한 모든 정황을 따져 봤을때 나오는 결론 딱 하나. [야, 넌 나랑 같이 안 왔으면 천상 왕따였겠다. 그러니 나한테 감사하도록 해. 나랑 같이 안 왔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선애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헐렉스... 그렇게 말하고 싶어?" [훗, 난 사실을 말한 건데... 짜슥, 사실은 감사하고 싶지만 쑥스러워서 못하는 거지?] "헐렉스..." 선애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린다. [뭐냐, 아까부터 자꾸 헐렉스, 헐렉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아, 이거? 후후, 내가 우리 반에 퍼트린 말이야. 그냥... 황당할때 말하는 감탄사라고나 할까..." [헐렉스...] "아따, 그렇다고 금방 따라하긴. 그런데 어감이 참 재미있지? 훗훗, 역시 난 대단한거 같아." [그려, 그려. 너 잘났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린거 같다. 이 녀석은 내가 없어도 혼자 잘 놀고 잘 살았을 듯 싶다. 허, 누구 동생인지.... "아아, 농담은 그쯤하고 우우... 도저히 안되겠어. 언니 우리도 도서관에 한번 가보자." [도서관?] "응. 차라리 나 혼자 책 보고 공부하는게 나을거 같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까 답답한 건 둘째치고 그 시간이 아까워." 여기는 학생들이 알아서 공부하라는 방임주의였기에 학생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다량의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애는 아직 이 곳의 글을 한글 읽듯이 줄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일고 쓰기' 수업을 집중적으로, 다른 수업들은 듣기 능력을 향상시키 위해 회화 테잎 듣는다 생각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일주일이 지나니까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다. 어차피 내가 말들은 알아 들으니 수업 끝나고 자신이 이해 못한 부분을 물어오는데, 이 세계 언어를 못알아 듣는 건 둘째치고 내용도 아예 모르는 이야기니 도저히 안되겠는 모양이다. 내용이라도 아는 것이라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듣기 능력이라도 늘텐데 말이다. 그렇게 혼자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다른 애들은 그나마 중간부터 들어도 뭔가 하나씩 배워가는 느낌이자 혼자 도태되는 것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너... 글은 다 읽을 수 있고?] 이 곳에 편리하게 사전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고, 설사 있다해도 한글 설명이 아닌 이 곳 언어로 설명이 되어있을테니 이해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선애는 아주 태연했다. "언니 있잖아." [그, 그랬군.... 내가 있었군...] 나도 선애랑 글을 하나 하나 익히고 있던 터라, 내가 완전한 문장으로 짜여진 글자는 읽을 줄 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물론, 글을 읽는게 아니라 그냥 뜻을 이해하는 거지만... "가자." 그렇게 해서 선애에게 이끌려 간 도서관 - 이라기 보다는 커다란 서재란 느낌이 더 강했다. - 에는 선애처럼 스스로 공부하려는 듯한 몇몇 애들이 이미 와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새로 저택에 들어온 애들 중 절반 정도는 어느정도는 읽고 쓰는게 가능했고, 그 중 대여섯명은 완전히 글을 익혀서 따로 '읽고 쓰기' 수업은 듣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애들이 바로 그 완전히 글을 익힌 애들이었다. 선애가 도서관 - 치고는 작고, 서재치고는 좀 큰 - 으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애들이 시선을 보내왔다. 그런 시선을 지금까지 계속 받아왔던 터라 선애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책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물론, 아는 글자는 읽고 모르면 손가락으로 슬쩍 가르켰다. 나보고 뭐라고 쓰여 있는 지 알려달라는 소리였다. 들어오기 전에 미리 이야기 해놓은 건 아니었지만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빤히 날 바라보는데 그쯤 눈치 못 채겠는가. 그렇게 선애가 자신을 향한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책들을 바라보자 몇 애들은 다시 자신들이 하던 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중에도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한명의 남자애와 한명의 여자애였다. 사실, 자스민에게서 이들 대부분이 15, 16세, 많아야 17세라는 걸 들었기에 선애보다 한두살 어리다 하지,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선애나 쟤네들이나 다 비슷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아니 어떻게 보면 선애가 동안이라서 그런지 선애보다 더 나이가 많아보이기도... 우리가 서양인의 겉 모습을 보고 나이 판별하기 어려워하는 딱 그짝이었다. 남자는 색이 약간 옅은 금발머리를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길이의 단발로 기르고 있었고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애는 등까지 닿는 짙은 밤색 머리를 하나로 따아 묶고 있었고 초록색 눈은 제법 총기를 가지고 반짝이고 있었다. 남자애가 호기심이 좀 많은 거에 비해 여자애의 시선에는 선애의 행동을 일일이 살펴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유명한 사람을 앞에 두고 왜 저사람이 유명한 것일까... 하고 그 원인을 탐색하는 시선 같달까? 뭐, 선애야 그들로 부터 등을 돌리고 있으니 모르겠지만... "언니..." 작게 속삭이는 선애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선애가 어느 책 제목에 손가락을 대고 날 보고 있었는데, 눈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랑 시선이 마주치길 좀 오래 기다린 모양이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재빨리 제목을 불러줬다. ['아벤티노 대륙의 역사 연대표'] 얇팍한 것도 마음에 들고 자세하고 지루한 설명 없는 '연대표'라는 것이 마음에 든 듯 선애가 주저없이 그것을 뽑아들었다. 아무리 연대표라고 해도 짧막짧막한 설명은 들어 있을테고, 그래도 모를때를 대비해 다른 역사서 하나를 더 가지고 가면 될테니까. 선애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 근처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알기 쉬운 대륙의 역사' 책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가지고 도서관을 나와 방으로 가려는데 누군가가 선애를 불렀다. "/저기요, 잠시만요./"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선애를 유심히 보던 일남 일녀였다. 말을 건 것은 남자였고, 그 뒤를 여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선애가 묵묵히 그들이 다가오길 기다리자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애가 싱긋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저기요... 아까 얼핏 봤는데.../" 얼핏 보긴, 빤히 쳐다보던 주제에... 내가 속으로 궁시렁 거리건 말건 남자애는 자신의 외모와 무지 잘 어울리는 미소를 - 혹시 이 넘은 저 미소를 지으려고 거울 앞에서 수십번 연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 계속 보이며 선애의 눈치를 힐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방금 대륙 역사 연대표 책 가지고 나가셨죠?/" 다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다니, 아무래도 성격이 안 좋은 녀석 같다. 선애가 자기가 들고 있는 책을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난처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 저희도 그 책이 필요해서 말인데요, 괜찮으시면 같이 좀 보면 안될까요? 저희는 잠깐 잠깐씩만 보면 되거든요./" 아니, 필요하다면 선애가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책을 찜했으면 될거 가지고 가만히 있다가 왜 지금에 와서야 그러는 거래? 나는 수상한 시선으로 그들, 특히나 그 남자를 째려봤지만 선애는 별로 그런 기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저, 저희는 지금 사용할 생각인데.../" 어차피 선애도 지금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책을 볼 생각이었으므로 거절하지 않았다. "/저도 지금 볼겁니다. 같이 보시죠./" 이렇게 해서 선애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친구라는 존재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남자애의 이름은 레리였고 여자애 이름은 시오나로 각각 17세, 16세였다. 선애에게 다가올때 같이 온 걸로 보아 친한 사이인가보다 했더니만,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고 했다. 그들이 글을 알고 있는 이유도 고아원에서 기본적으로 글을 가르쳐줬기 때문이었다. 다른건 다 몰라도 우선적으로 이 세계에 대해 선애보다 많이 아는 그들이었기에 선애는 그들에게 도움을 꽤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알게 된 이 세계에 대한 것은, 아벤티노 대륙 - 우리가 있는 곳을 말한다 - 에는 5개국이 존재한다는 거였고, 우리는 그 중에서도 바이런 이라는 국가의 2대항구 중 하나인 알파두르 항구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대륙 지도도 볼 수 있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사방으로 울퉁불퉁한 땅콩 껍질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대충 땅콩 껍질을 옆으로 눕혀 놓은 듯한 커다란 땅덩어리에는 허리 부근에 대륙 제일의 산맥이라는 커다란 산맥이 존재하여 대륙을 이등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절반 정도만 막은게 아니라 완전히 위 아래로 쭈욱 이어져서 완전히 막아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기준으로 동쪽은 아벤티노 대륙이라고 하고 서쪽은 서대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서대륙에는 선애의 모습을 한, 그러니까 동양인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지도에는 서대륙의 모습은 아벤티노 대륙을 그려놓은 것 처럼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고 대충 뭉뚱그려 세 나라로 나뉘어 있다는 것만 표시해 놓고 있었다. [헐... 그러니까 우리가 있던 곳에서의 동양이 여기서는 서양이었네.] 그래서 선애보고 서대륙인, 서대륙인 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서대륙이 그렇게 자세히 나와있지 않은 것은 그 동안 산맥에 막혀 있던 탓에 제대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100년 전쯔음 부터 겨우 조금씩 조금씩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란다. 지금도 교류가 꽤나 번성하고 있다고 해도 서대륙 쪽에서 완전히 개방한 것도 아니고,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그냥 무역이나 할 뿐 국가적으로는 별로 왕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서대륙 나라 이름도 웃겨. 한, 진, 수 나라라니. 이거 완전히 중국의 역사를 보는 기분이야." 서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있고 가장 큰 나라가 한, 그리고 동북쪽에 있는 나라가 진, 동남쪽에 있는 나라가 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는 세계가 달라도 사는 사람들이 비슷하니 이름도 비슷해지는 건가보다. 선애가 레리와 시오나의 도움을 받아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익힌 뒤로는 수업에서 알아듣는 이야기도 많아졌고, 이 곳 언어도 대화를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해서 그 런지 말하고 듣는 능력도 훨씬 나아졌다. 그러자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선애의 여러가지 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제일먼저는 입만 다물면 카리스마가 풀풀 풍기는 외모와는 전혀 매치가 안되 는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음... 완맛, 완맛!/?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바삭하게 잘 구워진 베이컨 한 조각을 먹고는 정말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씨익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왔군...] 녀석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선애의 옆에 앉아 있던 시오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봐다. ?/어, 언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완전히 맛있다고. 줄여서 완맛, 이거 정말 완맛이지 않아?/? 선애는 입맛이 좀 까다로왔는데, 그 대신이랄지 자신의 입맛에 따악 맛는 음식을 먹으면 무척 기쁘다 못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저절로 고개짓과 함께 어깨를 들썩거렸다. 보는 사람이 저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항상 하는 맛이 ?완맛.? 이게 선애가 자기 반에 유행시킨 건지, 자기 반에서 유행되는 말을 배워온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푸훗... 그렇게 맛있어?/? 선애가 행복한 표정으로 베이컨을 다시 한 입 베어물자 선애를 보고 있던 시오나가 풀썩 웃었다. ?/그럼 너는 안 맛있냐?/? ?/아니, 맛없다는게 아니라 언니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나는 언니가 굉장히 차가운 성격인줄 알았는데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 ?저 녀석이 그런 말을 많이 듣지.? ?/아아, 나 그런 말 많이 들어. 하지만 맛있는 것 어쩌냐? 음... 완맛, 완맛./? ?/풋... 맛 없는 음식이라도 언니가 그렇게 먹으면 굉장히 맛있게 느껴지겠어./? ?/어어, 아냐. 난 맛 없는 건 절대 안 먹거든. 와... 이 셀러드도 정말 완맛이다. 누군지 몰라도 정말 요리 잘 한다. 내가 여기 있다는게 다행스러워. 음.. 완맛, 완맛./? 선애의 수다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뜻밖의 사람에게서 답변이 들려왔다.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고맙군./? ?어라?? 대답한 사람은 보이는 모습 뿐만이 아니라 정말 성격도 무뚝뚝한 콜린이라는 소녀였다. 그녀는 신입생이 아니라 전부터 이 곳에서 공부하다가 이번에 나가지 않고 남은 몇 안되는 재학생(?)들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머리가 좋은지 이 곳에 가르치러 오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소녀였는데, 취미가 요리라서 이 곳에서 식사로 나오는 음식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선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자 그녀가 슬쩍 턱짓으로 샐러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내가 만들었거든./? 과연, 선애처럼 무척 기쁜 표정으로 먹어주면 만드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다. 그 사람이 무뚝뚝한 성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와... 그랬군요. 이거 정말 완맛이에요./? 선애는 먹을때 절대로 내숭을 안 떤다. 앞에 아무리 녀석이 좋아하는 잘생긴 남자가 있어도 먹는거에 있어서는 절대 내숭이 없다. 너무 솔직해서 탈이지. 그래도 콜린은 그게 마음에 드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그리고 그 식사 시간에는 원래 그 샐러드가 맛있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선애가 난리부르스를 떨어가며 먹어대서 그런건지 넉넉하게 만들어놨던 샐러드가 하나도 남김없이 동이나버렸고, 선애가 입에 달고 있던 ?완맛?이란 단어는 일주일이 채 가지 않아 그 저택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선애의 성격은... 여기서도 통했던 모양이다. ?/으아아아아~~ 그 자식 가만 안 둘거야. 두고봐. 기필코 그 콧대를 납~ 작하게 눌러주고 말겠어어~~!!/? 온 몸으로 화가 났음을 표현하느라 콧김은 씩씩, 이는 빠득빠득,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팔이 크게 휘둘러졌고, 발은 쿵쾅거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선애보고 뭐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선애가 화를 내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사건의 발단은, 방금 전 수업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이 곳에서 배우는 수업들 중 선애가 가장 자신 있는, ?수학? 시간이었다. 뭐, 여기서 가르치는 최종 단계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 사실 선생님 마음에 달린 거지만.. - 현재는 가장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덧셈뺄셈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마 이 수업도 읽고 쓰기 수업과 마찬가지로 신입생을 위한 수업이었던 듯, 재학생들은 처음 부터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고 수업도 1+1=2부터 시작했었다. 그리하여 지금 백단위의 숫자를 가지고 덧셈뺄셈을 하는 데까지 진도가 나가 있었는데, 선애의 입장에서 보면 참 별 의미 없어보이는 수업인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참여하는 이유는 이곳 수학 용어를 알기 위해서였다. 다행이도 더하기와 빼기, 그리고 부등호 - 아직 수학 기호가 그 정도 밖에 등장하지 않았다. - 등등의 수학 기호는 같았지만 용어는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나야 여전히 이건 더하기, 이건 빼기 등등으로 들렸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목표가 있었다 해도 더하기 빼기를 다시 배운다는 건 선애에게는 너무나 지루한 일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야 이 단어가 더하기를 뜻하고 저 단어가 빼기를 뜻하고 이건 부등호를 뜻하고 등등등을 열심히 익혔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쭈욱- 이어지겠는가? 그나마 한국의 고등학교처럼 일주일에 몇시간씩 하는게 아니라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다면 선애는 수업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책을 보고 혼자 익힐수도 있겠지만, 책 가지고 혼자 씨름하는 것과 선생님이 있는 것이 어디 같겠는가? 그래서 들어가긴 했지만 처음과 두 번째는 용어를 익히느라고 열심이었는데, 얼추 익힌 것 같자 슬슬 지루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진도가 언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지 몰라 수업에는 계속 참여해야 했다. 게다가 숫자의 발음과 일, 십, 백, 천 등등의 단계 발음등등도 계속 듣고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계속 참여하기는 했지만,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오늘 수업도 반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무심한 태도를 취했었다. 그런데 그게 선생님에게는 가만 둘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 당연하겠지만도. 그리하여 그 선생은 요즘 나가는 진도의, 그러니까 백단위에다 삼중의 덧셈 뺄셈의 문제를 내놓고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해 책상 앞에 앉지 못하는 선애에게 풀어보라고 했었다. 여기서 잠깐 수업실 환경을 설명하자면,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 교실에 당당이 차지하고 있는 흑판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다.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노트. 교과서도 선생님만 가지고 있음. 학생들은 무조건 그가 입으로만 떠드는 설명을 귀기울여 자신 있으면 뇌에다 박아 넣던지 아니면 필기를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필기 같은건 당연히 없고 말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내가 그 동안 비난했던 한국의 교육 환경을 복에 겨워 하는 헛소리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이들은 절실한 필요성에 의하여 쇠라도 녹일 뜨거운 학구열을 발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리하여 그 선생이 내준 문제는 당연히 칠판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선생의 입을 통해서 빠져 나왔고 선애는 그걸 노트에 받아 적어서 풀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그 동안 수업시간에 열심히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세계 언어를 새롭게 배우는 거였으니 잠시 착각할수도 있는 일이겠지만서도, 선애는 더하기를 빼기로, 빼기는 더하기로 착각해버렸던 것이다. 이 녀석은 수학 실력이 평.소.에는 좋은데 유독 시.험. 볼때만은 이상하게도 실수가 많았다. 그래서 매번 시험 볼때마다 수학 시험에 실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시험 성적이 높으냐 떨어지느냐가 갈릴 정도었었다. 이번에도 그 수학 시험 징크스가 발동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니 선애가 한번 검한까지 해서 자신있게 대답했다 해도 그 답이 맞을리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쪼잔한 선생은 그걸 가지고 마치 잘 걸렸다는 듯 선애를 대놓고 앞에서 비비꼬고 비웃어 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말이다. ?/너말이야 휴님께서 너의 후견자라고 너무 기고만장한거 아니야? 부지부장님이 아니라 길드장 님께서 네 후견자라고 해도 능력이 없으니 없으면 길드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해. 그걸 잘 기억하는게 좋을거다./? 그 선생은 그렇게 말을 끝내고는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그 앞에서 선애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무지 열받았다는 듯 꽈악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이 바로 선애가 분노를 토하는 원인이였던 것이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선애를 갈구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선생이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선애를 단단히 찍어 놓은 모양이었다. 선애는 식식대는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그 선생에게 이 원한을 갚아줄 수 있을까 궁리하는 모양이었지 만, 나는 그 와중에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가... 선애의 후견자라...?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있었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휴는 처음부터 선애의 능력을 이용하겠다고, 대신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한은 도와준다고 거래를 한 뒤에 선애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이니까 말이다. 그 선생이 대놓고 말한 것을 본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모르고 있었던 내가 바보인가? 어쩌면... 래리나 시오나가 먼저 선애에게 접근한 것은 그 덕분이 아닐런지... 처음에는 괜히 낯을 가려서 먼저 다가가지는 못하는 선애에게 다가와준 사교적인 그들에게 고마워 했는데, 이렇게 되고보니 그들의 의도가 수상하게 여겨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동안 그들이 선애에게 준 도움들을 생각해볼때 내가 쓸때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 머리아프다...] 복잡한 생각은 질색인 내가 결국 머리 굴리는 걸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는 동안에도 분이 안 풀린 선애가 방안을 뺑뺑돌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열받아. 얼마나 실력이 대단한지 한번 시험이라도 해봐? 인수분해 문제를 내놓고 풀어버리라고 해볼까보다. 아니야, 미분 적분 문제를 들이대버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저 녀석 수학 시험때마다 실수를 해서 그렇지 순수한 실력만 본다면 제법 수학은 잘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자신있는 과목 중 하나였으니까. [다 좋은데... 너 여기말로 인수분해나 미분 적분을 뭐라고 하는줄 모르는데 어떻게 풀어보라고 그럴거냐?] ?문제를 써서 주면 돼지.? [처음 보는 거라고 하면?] 내 말에 선애는 나를 한번 노려보더니만 방방 떴다. ?아으으윽~~!! 정말 재수 없어. 뭐야, 그자시이이익~!!? [그 사람 걸어다니는데 발이라도 걸어주랴? 아니면 궁뎅이에다 불꽃이라도 일으켜 주련? 아니면... 밤마다 그 사람 침실에 몰라 들어가 빨간 물감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줘도 되고...] ?그래, 그래. 좋은 생각이야. 다음 수업 시간에 그 사람이 걸어들어올때 발 걸어줘. 으흐흐흐~~ 애들 앞에서 창피좀 당해보라지. 크크크크...? 그 다음 일은... 당연하겠지만, 선애의 부탁을 받는 내가 선생이 들어오기도 전에 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척척 걸어들어오는 선생의 발목을 꽈악 잡아버렸고, 우당탕~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선생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애들이 대놓고 웃지는 않았지만 웃음기를 아예 감출 수는 없었고, 그 선생은 창피함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선생은 분노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바닥을 둘러보았지만, 뭔가 수상한 것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도 못알아보니 말이다. 결국 바닥에서 뭔갈 찾지 못한 선생이 분노한 눈길로 - 아마 학생들 중 누군가의 장난이라 생각한 모양 - 학생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더니만 선애하고 눈이 따악 마주쳐 버렸다. 그 순간 눈썹을 꿈틀 하는 것이, 범인이 선애가 틀림 없다고 - 맞긴 하지만.. - 지레 짐작해버린 모양이다. 그 선생은 싸늘해진 눈으로 그 수업시간 내내 선애만 붙들고 집중적으로 고난위도(?)의 문제를 냈다. 아무래도 저번처럼 한바탕 쏟아부을 수 있는 트집거리를 찾는 모양. 아무리 수업시간에는 선생이 왕이라고 해도 아무런 이유 없이 학생을 구박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번 당했던 선애가 어디 다시 당하겠는가? 게다가 앞에서도 몇번이나 말했지만 선애는 수학은 잘했다. 거기에 이번에는 혹시나 선애가 또 실수할까봐 내가 옆에서 열심히 통역도 해줬고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 선생은 울그락 불그락 한 채 수업이 끝났음을 통고하고 나가버렸다. 그 일로 인하여 선애의 수학 실력이 떠억 하니 드러 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전화위복 이라는 걸까나? 그러나, 한번 당했던 선애가 어디 다시 당하겠는가? 게다가 앞에서도 몇번이나 말했지만 선애는 수학은 잘했다. 거기에 이번에는 혹시나 선애가 또 실수할까봐 내가 옆에서 열심히 통역도 해줬고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 선생은 울그락 불그락 한채 수업이 끝났음을 통고하고 나가버렸다. 그일로 인하여 선애의 수학 실력이 떠억 하니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전화위복 이라는 걸까나? 그렇다고 그 선생이 선애를 인정한 건 아니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으랴만은, 쪼잔하게 보이더니만 성격 역시 쪼잔했는지 그 다음 수업에 들어오자마자 선애만 붙들고 늘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 쪼잔한 선생은 지지리도 운이 없었는지, 그 날부터 아이들에게 새로운 수학의 영역, 즉 곱셈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첫날이라 그런지 곱셈의 원리를 대략 설명해주더니 예를 들어야 쉽게 이해가 될 거라고 하더니만 -물론 맞는 말이었다. - 선애를 지목해서 곱셈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 문제들을 내는 것이었다. 물론, 그 예시 문제라는 것이 5를 여섯번 더한것은(5x6) 얼마냐, 7을 세번 더한 것은 (7x3) 얼마냐... 등등의 문제들이라 선애는 무난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단지 기수(일, 이, 삼...)와 서수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를 잘 알아듣지 못해 머뭇거렸지만, 그런건 내가 옆에서 해석을 해줬다. 그리하여 그날 수업도 결국 선생님이 분노하여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나가는 걸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평소 얼굴 보기 힘든 휴가 선애를 찾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순간적으로 혹시 수학 선생과의 일때문에 선애에게 뭐라고 하려는게 아닌가... 걱정했다. 선애도 마찬가지였던 듯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휴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가끔 손님을 맞을 때라던지, 아니면 어른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할때 종종 하용하곤 하는 작은 응접실이었다. 여기다 놓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건 아닐까, 만약 그랬다간 가만 두면 안되겠지만, 그러면 뒷탈이... 등등... 휴가 선애를 데리고 가는 곳을 따라 들어가면서 나는 머리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렸 다 지우고, 떠올렸다 지우고 있었다. 그런데, 응접실 안에는 누군가가 선애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여전히 이쪽 사람들은 얼굴만 봐서 나이를 짐작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중년이라는 건 알 수 있는 빼빼 마른 남자가 소파 앞에 서 있다가 선애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빤히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남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자들도 활동하기 편안한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중년 남자는 회색의 푸대자루 같은 펑퍼짐하고 소매도 펄럭이는 옷을 입고 있어 마치 딴 세상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선애를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펴보더니 - 그래도 다행히 기분 나쁜 눈초리는 아니었다. - 휴를 바라봤다. "/이 아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이해 못할 이야기를 던지고 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회색 푸대자루를 뒤집어 쓴 중년 남자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갑자기 어깨를 피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숨을 가다듬 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중년 남자의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눈에 보이는 건 아니었는데, 아지랑이 같기도 하고, 드라이 아 이스가 공기중에 녹으며 내뿜는 연기 같기도 하고 하여간 그런 묘한 느낌을 가진 기운 이 피어오르다가 요상하게 뭉쳐지더니만, 선애쪽으로 날아와 선애의 몸을 그대로 통과 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중년 남자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습니까?/" 휴가 기다렸다는 듯 묻자 중년 남자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흠... 모르겠군요. 특별히 마나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뭔 소리야..." 선애가 이해를 못하겠는지 작게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 보면 혼잣말을 하는 것 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나에게 해석을 해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도 뭔 소리인지 모르니... [나도 모르겠어.] 그러는 와중에도 그 중년 남자와 휴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그냥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저 애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을 일으켰단 말입니까?/" '불?' 중년 남자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휴가 선애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네 능력을 좀 보여줄 수 있을까? 불을 다루는 능력 말이야./" 그에 선애가 나를 쓰윽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쩝...' 나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한 뒤 그 위에 야구공 만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 둘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불꽃이 팍 하고 피어 오르니까 놀란 모양이 었다. 하지만 휴는 잠깐 흠칫 하고 말았는데, 중년 남자는 눈이 휘둥그래 뜨며 경악하는 표정을 보이는 것이었다. "/자, 잠깐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다시, 다시 한번만 해보겠나? 불을 껐다가 다시 일으켜보게./" 허공에서 불이 생겼으니 놀라는 건 당였하겠지만, 저 중년 남자의 놀라는 건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래 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이런 시선에도 아랑곳 없는 듯 선애를 재촉하기만 했다. "/어서, 다시 한번만 해보라니까./" 그에 선애가 다시 한번 나에게 눈짓을 보냈고,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불을 꺼트렸다가 다시 일으켰다. "/다, 다시한번만.../" "/다시 한번 더~/" "/다시이이~~!/" ...... '도대체 저 남자가 원하는 게 뭐야?' 나는 기가 막히면서도 그 중년 남자의 열광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다시!'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가 원하는 대로 몇번이나 불을 껐다가 일으켰다가, 껐다가 일으켰다 가를 반복했다. 한 열번 정도 했을까? "/이, 이럴수가... 모르겠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마나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이, 이건... 마법이 아니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불꽃을 일으키고 다시 들려올 '다시'의 주문을 기다리고 잇는데, 그 대신 중년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는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가서 는 선애를 붙잡고 외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가 선애에게 뭔 해꼬지라도 하는 건 아닌가 하고 놀라서 달려갈 정도로 그의 태도는 격렬했다. "/예? 무, 무슨 소리신지.../" 중년 남자의 어조가 거칠어서 그런지, 아니면 모르는 단어가 끼어 있어서 그런지 선애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날 힐끔 바라봤다. 옆에서 휴가 뭐라뭐라 설명해 주는 것 같았지만, 그거에 상관없이 나는 약간 떨떠름한 기 분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나도 금방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 그러니까... 내가 불꽃을 일으키는게 마.법.이. 아.닌. 거.였.냐.고 묻는데?] 선애는 다른 과목은 그래도 어느정도 자신있어 했지만, 단 한가지 굉장히 자신 없어 하 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국어. 수능으로 치자면 언어능력이었다. 내 말을 듣고 나 서 한참을 있던 선애가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불꽃을 일으킨게 마법이냐고 묻는 거야, 마법이 아니냐고 묻는 거야?" 나나 선애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선애와 내가 살던 한국에서는 마법이라는 건 없었으니까. 비슷한게 있다면... 눈속임을 하는 마술 정도? 뭐, 책이나 티비 같은데서는 있다고 떠들기도 하지만 직접 본적은 없으니 말이다. 그 러니, 내가 지금 한 것 같은 일을 보며 놀라면서 '마법이냐?'라고 물어야 정상적인 반 응이 아닐까 한다. 처음에 나도 그 중년 남자가 놀라서 말한게 '마법이냐?"라고 물은 건 줄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선애보다 유일하게 실력이 나은 내 언어 이해 능력으로 그의 말을 해석해 보 면 그 중년 남자는 허공에서 갑자기 불이 생기는게 '마법이라서' 놀란 것이 아니라 ' 마법이 아니라서' 놀란 거였다. 바로 그 점이 황당하다는 거였다. '마법 같은 일'을 보고 '마법이 아니다.'하면서 놀라니 말이다. 하지만 더 황당했던 점은 휴의 반응이었다. 선애에게 뭐라 뭐라 -선애나 나나 휴의 설명은 듣고 있지도 않았지만...- 설명을 끝낸휴가 여전히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중년 남자 에게 조심스레 한 질문이... "/선애가 한 일은 마법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휴는 선애가 불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보고 전혀 놀란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 그 때는 자신의 이익, 불이익 외에는 다른 건 상관하지 않는 성격인가보다... 라고 여 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휴는 한번도 선애에게 어떻게 불을 다루는 거냐고 물은 적 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자기 편이 되주면 뭐가 되든 상관 없는게 아니라 그것이 마법 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궁금증이 없었던 모양이다. '헌데 ... 마법이라면 더 궁금증이 생겨야 하는 거 아닌가?' 왠지... 상황이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는 것만 같았다. "/절대 마법은 아니야. 그건 내 마법사라는 이름에 대고 맹세할 수 있네./" "뭐?" 선애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리자, 나는 반 패닉 상태에 빠졌으면서도 반사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었다. [저... 중년 남자가... 마법사 라는데? 허.허.허... 마법사래...] 그 날을 기점으로 알게 된 것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마법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기야, 이 세계가 괴물도 있는 세계인데 마법이라고 없겠는가? '나중에는 혹시 요정이나 드래곤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나...'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자신을 마법사라고 말한 중년 남자와 휴의 대화는 계속 되 었고 선애가 못 알아듣는 내용이 있어 내가 간단 간단하게 계속 통역을 해줘야 했다. "/그럼 선애가 가진 능력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불술사?/" "/그것도 아닐세. 술사들이라해도 그들의 능력 또한 마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마나 가 움직이면 내가 모를리 없지. 이건... 글쎄.. 아마도 서대륙인이 가지고 있는 우리가 알 지 못하는 어떤 능력이 아닐까 싶네./" "/아...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서대륙인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능력이라...' 내가 본 몇몇 퓨전 판타지 소설을 볼때 주인공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외모가 그 세계 사람들처럼, 즉 서구식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 가끔 그런 소설책들의 내 용과 선애의 상황을 대비하면서 왜 선애는 그렇게 안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 요즈음에는 그게 오히려 잘된 듯 싶었다. 왜냐하면, 선애가 좀 묘하게 행동을 해도 그게 문화가 다른 서대륙인 이라서 그렇거니... 하고 사람들이 알아서 납득을 해주기 때문이다. 만약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그랬다면 무지 이상하게 볼거 아닌가? 특히나 지금처럼, 같은 세계 사람인데 그렇게 묘한 능력을 가졌으면 더욱 더 이상하게 생각해서 캐낼테고 말이다. 서대륙에도 나처럼 유령이 이런 능력을 가진 채 돌아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닐 확률이 더 높겠지?- 어쨌든, 이번에도 서대륙인의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능력 중 하나로 넘어가고 있었다. 마법사라는 중년 남자는 어떤 원리로 어떻게 작용하는 능력인지 알아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선애가 자신도 어떻게 된 건지 몰랐기에 - 선애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단 지 내가 죽을때 불에 휩싸여서 죽어서 이런 능력이 생긴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그 렇게 넘어가게 되었다. 뭐, 중년 남자는 거기에서 포기 안 하고 연구실에 같이 가서 연구해보지 않겠냐고 권유 해 왔지만, 선애 능력이 아닌 내 능력인데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휴가 선애 편을 들어줘서 그런지 몇번이나 권유하던 마법사는 무지 아깝다는 표정이 었지만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을 하라는 말을 남겼지만 말이다. 제 5화 시간은 한국에 있을때나 이 세계에 있을때나 공평하게 잘만 흘러가는 거 같았다. 그 수학 선생은 여전히 선애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본 마법사는 잊을만 하면 찾아와서는 나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조르거나 능력을 더욱 더 발전 시키고 싶지 않냐는 둥 말을 늘어놓으며 선애를 꼬시려 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우리 꼬맹이는 언니인 나를 알뜰하게 부려먹었고, 팔불출 같은 나는 꼬맹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하늘에서는 가끔가다 한국을 그리워 하게 했던 푸른 달이 점점 빛을 잃어 완전히 사라지며 여름이 다가왔다. 이런 몸이 되니까 좋은게 여름이 와도 덥지를 않고 겨울이 와도 춥지를 않다는 거다. 옆에서 선애가 덥다구 덥다구 투덜투덜 대면서 땀을 닦아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었던 덕분에 선애의 째림을 받았다. 작년 여름 한국에서 선애는 에어컨이 빵빵한 학교 교실에서 보충수업이나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한국의 교육 실태의 부조리 어쩌고 저쩌고 하며 불평을 했었는데, 어쩜 지금은 그때는 천국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아아... 완짜 완짜..." [뭐?] 손으로 부채질을 연신 하며 투덜거리는 선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내가 되묻자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며 해석해준다. "완전히 짜증 난다구." [난또 완자 말하는 줄 알았지... 누가 들으면 중국 음식 이야기하는 줄 알겠다.] "아~ 정말... 이래서 언니가 쉰세대라는 거야. 누가 요즘 그 말을 듣고 짜장면 생각을 하냐?" [짜, 짜장면이 아니라 완잔데...] "그거나 그거나." 가차없이 내 말을 씹어버리는 동생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속으로 동생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선애의 방문에 - 선애는 지금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선애의 대답 후에 문이 열리고 빼꼼히 시오나가 얼굴을 드밀었다. "/선애, 휴님이 찾으시는데./" [헤에, 휴가? 오랜만에 얼굴 보게 생겼네.] 휴는 여전히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꼬박 꼬박 밤 늦게라도 집에는 들어오는 것이 장하게 생각되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그는 꽤나 공처가였던 것이다. '아아... 자스민이 부러워. 이러니까 내가 너무 가엽잖아? 젠장, 연애 한번 못해보고 처녀귀신이 되어버렸으니...' 선애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면서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만약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내었다간 '그러길래 내가 언니 대학 다닐때부터 살도 빼고 멋도 좀 내고 다니랬지?' 등등의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언니라구 처녀귀신이 된게 속상하긴 한 모양이다. 시오나가 선애를 데리고 간 곳은, 저번에 마법사와 조우했던 그 자그마한 응접실이었다. 그 곳에서 휴는 여러장의 서류를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며 손짓으로 우리를 소파에 앉게 했다. 시오나가 나가지 않고 선애의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는 거 보니 시오나도 같이 부른 모양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휴는 아랫 사람에게라 해도 예의를 지킬 줄 알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면들을 볼때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잘 했다고 다시한번 생각하고 있었다. "/아, 불러놓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 예의바른 말에 잘 어울리는 예의바른 미소가 어째 다른때보다 약간 굳어 있는 것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 듯 다른때라면 그 미소에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을 선애나 시오나는 그 대신 긴장한 빛을 띄며 휴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는 그런 애들에게 한번 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소파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깍지낀 양 손등을 턱 밑에 가져다 대었다. "/흠... 사실 지금 둘을 부른 건 맡길 일이 있어서야./" "/... 저희에게.. 말입니까?/" 시오나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당혹스러워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사실 시오나나 선애나 아직 교육이 덜 끝난 상태였던 것이다. 보통은 이 곳에서 나가서도 수습기간을 거쳐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그제야 정식으로 길드원이 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습 기간의 길드원도 아니고 아직 교육을 끝내지 못한 둘에게 일을 맡기고 싶다고 하니 당혹스러워 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 교육을 끝내지 못한 이들에게 맡기는 거 보니 대단한 건 아닌 듯 싶지만... '아니... 혹시 아무것도 아닌 애들이니까 미끼로 써먹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미래의 길드원으로 키울려고 데리고 온 인재들이기는 하지만 길드원을 미끼로 쓰는 것 보다는 덜 아까울테니까...' 그런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봤던 휴에 대한 인식을 180도 바꿔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휴의 얼굴에서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아아, 그렇게 긴장할 건 없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맡길 수 있는 거지./" 그의 말 덕분에 애들 안색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하지 못한 표정으로 휴가 본론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런 애들의 반응이 마음에 든 걸까? 휴는 만족스럽게 씨익 웃으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빈스타인 후작가라고... 알지?/" '알기는...' 시오나는 그의 말에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선애는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하긴, 우리가 여기 온지 이제 1년이 다 되었다고는 하지만 휴와 자스민의 집에 들어와서 바깥으로는 나가지도 않았는데 뭘 바란단 말인가. 그런 선애의 표정을 이해했던 것인지, 휴는 '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선애는 아직 잘 모르겠군. 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루빈스타인 후작가는 이 아벤티노 대륙에서 첫번째로 손꼽히는 대상단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상업'의 필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요즘에도 귀족가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천시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선애와 나는 후작가가 이 대륙에서 첫번째로 손꼽히고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 그런걸 알게 되는 나중에도 이곳 귀족들을 한심하게 여길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지금도 휴의 너무나 간단한 설명에 그런가보다... 하고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자 물끄러미 선애를 본 휴가 작게 웃더니 더 이상 그에 대한 설명은 안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 대상단 주인인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저택이 이 항구 도시에 있거든. 이번에 그 저택에서 새로운 하녀들을 뽑는다더군./" '하녀어어~~?' 그 후작인지 뭔지 하는 저택에서 하녀를 뽑는거하고 우리 선애하고 뭔 상관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지마아아안.... "/그래서 너희 둘을 거기에 집어 넣을 거야./" '헉... 뭐야... 그대가 지금 감히 남의 집 귀한 동생보고.... 뭔 일을 시킨다는 거냐아아아~~~' 내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절규를 하던말던 휴의 말을 긴장한채 듣고 있던 시오나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외근... 입니까?/" '외근'은 정보 길드 내의 은어였는데, 말 그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정보 길드 바깥, 즉 현장에서 하는 일을 말하는데 정보를 얻기 위해 전국 각지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일하는 걸 뜻했다. 식당이나 술집 같은 곳에서 일하며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흘리는 정보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스파이 노릇까지. 시오나는 휴에게 선애와 자신이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저택에 하녀로 들어가는 것이냐고 붇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휴는 쓴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렇게 거창할 것 까지는 없고... 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래를 위한 투자랄까? 미리 이야기해두지만, 하녀가 되자마자 뭘 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야. 당분간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하녀 노릇을 해줘야 해./" 후작 저택에서 구하는 하녀들에는 연령 제한이 있었다. 15세 이상 18세 이하라니... 그러니 정보 길드측에서는 이런 교육원(?)을 졸업한 정식 길드원이나 임시 길드원이 아닌 시오나에게 맡기는 거지만 말이다. 그런 애들이 들어가니 처음에는 소소한 일거리들만 하게 될 듯 싶었다. 그런데 왜 하필 선애란 말인가.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어떻게 키운 동생인데 하녀 노릇을 하게 하다니... 휴가 뭔가를 생각했기에 일부로 이 집에 있는 많은 애들 중에서 시오나와 선애를 선택한 거겠지만, 별로 탐탁치 않았다. 선애도 별로인 듯 했지만, 휴가 처음부터 '할래?'가 아니라 '맡기겠다.'라고 나왔기에 항의는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시오나는 다른 이들보다 빨리 일을 맡게 되어 뿌듯한 표정이었지만... "/일주일 뒤에 저택으로 갈 거야. 어차피 너희들 말고 여러 곳에서 하녀들을 보내오기 때문에 탈락자들이 있지만, 난 너희들은 꼭 합격될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그 곳에 가기 전까지 최소한 상식적인 건 알아둬야겠지?/" "/일주일 뒤에 저택으로 갈 거야. 어차피 너희들 말고 여러 곳에서 하녀들을 보내오기 때문에 탈락자들이 있지만, 난 너희들은 꼭 합격될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그 곳에 가기 전까지 최소한 상식적인 건 알아둬야겠지?/" '다 좋은데... 이게... 상식이냐?' 휴가 말한 '상식'에 대한 교육은 그날 당장부터 시작 되었다. 그런데 내가 '상식'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휴가 '상식'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식이라는 것도 학문처럼 배우려면 끝이 없기야 하겠지만서도, 이건 어째 상식 공부를 한다기 보다는 대학교 와서 전공 과목 공부를 하는 것만 같았다. 바이런 대학의 루빈스타인과를 가는 것마냥 시오나와 선애는 장부 쓰기부터 시작해서 -이거는 그나마 쉬웠지만... - 루빈스타인 가문의 대략적인 역사와 지금 현재 그 가문 상회가 휘어잡고 있는 상품 종류, 그 가문이 한 나라, 혹은 이 대륙에 끼치는 영향, 그 상회와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상회들 까지... 대충 보니 양이 너무 방대해서 대충 중요한 것만 간추려놓은 것 같았다. 아마 전체적으로 대충 겉핥기 식으로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요점만 완전하게 익히게 하려는 것만 같았다. 그것 때문인지 일주일간 선애와 시오나는 저택에 머무는 모든 이들이 하는 집안일은 물론이거니와 듣고 있던 모든 수업들까지 중지하고 오로지 '상식'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선애의 억지때문에 덩달아 '상식'을 급히 머리에 쑤셔 넣느라고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해롱대며 선애를 부여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드디어 그 잘난 루빈스타인 후작 가문 저택의 하녀 면접을 보기 위하여 출발하는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우리가 정보 길드 밑에 있는 교육 기관(?)에 있었다는 건 비밀이었다. 대신 이 도시 어딘가에 있다는 무슨 고아원 출신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 그 고아원도 정보 길드에서 운영하는 것이겠지만서도... 그 고아원에서는 지금까지 이 도시 세가들에게 아이들을 하녀, 하인으로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런 세가에서는 하녀, 하인들까지 신분이 확실해야만 받아들였기에 예전부터 그런 줄(?)을 만들어 둔 기관 이름을 빌리는 것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마차 밖에서 마차를 모는 사람을 제외하고 마차 안에는 선애와 시오나, 그리고 오늘 처음 보는 중년 남자 한사람 뿐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선애와 시오나가 살았다고 되어있는 그 고아원 관계자였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많은 아이들을 대저택에 하인이나 하녀로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선애와 시오나를 향해 무척이나 진지한 어조로 말을 늘어놨다. "/합격하고 싶으면 얌전하게 보여야 하는 건 기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쑥맥처럼 보이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튀어 보이는 것도 곤란하지. 이건 너희들이 하녀가 되고 나서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거기서 둘을 번갈아본 그가 다시한번 강조했다. "/무엇이든지 적당히, 적당히, 적당히. 알겠느냐? 너무 멍청해서도, 너무 뛰어나서도 안되는 법. 멍청하면 멍청하다 버려지고 뛰어나면 뛰어난대로 이용당하기 쉽다. 그 저택에서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오래 버티고 싶으면 적당히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절대로 위의 일에 나서서 개입하지 말것. 잘 기억해 둬라./" 뭐랄까, 그의 말하는 어조를 보아하니 이건 그냥 교과서 적으로 익힌게 아니라 그가 직접 몸으로 체득한 삶의 지혜인 것만 같았다. 그도 저택에서 하인으로 일하다가 쫓겨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대로 안 하면 엄청 큰일 날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만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었던 듯, 시오나나 선애도 처음 마차를 탈때보다 더욱 더 긴장을 하는 바람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상태로 우리는 하녀를 뽑는다는 그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문이 아닌 뒷문인 듯한 문으로 들어갔기에 저택의 모습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시커먼 그늘이 진 뒷편에 도착하자마자 같이 타고 간 중년 남자의 재촉에 의해 거의 떠밀리다시피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건물안의 제법 넓은 방에는 우리 말고도 우리 또래의 소녀들이 10여명 정도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긴장해 있어도 쉽게 보지 못하는 서대륙인의 모습은 흥미를 끄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힐끔 바라본 이들의 시선이 놀라움과 신기한 빛을 띄더니만 선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소녀들과는 달리 한쪽에 떨어져서 서 있던 세명의 중년 남자들이 우리를 데리고 온 중년 남자를 보더니만 아는체를 하는 것이었다. 아는체라고 해서 반가워 한다기 보다는 얄밉다는 어투였지만 말이다. 마치... 경쟁 상대를 보는 것만 같다고나 할까? "/젠장할... 잘났군, 잘났어. 루빈스타인 후작가니까 서대륙인을 데리고 왔잖아?/" 중년 남자들 중 통통한 허리둘레에 김흥국 스타일의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제일먼저 투덜대자 그 옆에 있던, 다른 중년 남자들보다 키가 커서 머리가 불쑥 튀어나온 남자도 맞장구 쳤다. "/도대체 서대륙인 하녀는 어디서 구한 거람? 그 재주 나도 좀 가르쳐주지 그래?/" "/쳇쳇쳇, 두자리는 줄어버린 거와 마찬가진가?/" 나머지 한 사람도 못마땅한 기색으로 투덜거렸지만 우리를 데리고 온 중년 남자는 씨익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직 정해진 건 없지. 서대륙인 이라는 것만 가지고 채택 된다는 보장은 없으니./" 그들의 말에야 나는 휴가 왜 선애를 여기에 집어 넣으려고 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배운 것에 의하면 루빈스타인 후작가 상단은 바이런 국과 서대륙간 교역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그러면 당근히 거래를 하러 온 서대륙인들을 대접해야 할테고, 그때는 낯선 아벤티노 대륙인 보다는 익숙한 서대륙인이 시중을 들어주는게 더 좋을테니까... 인가? 하지만, 나 같으면 다른 나라에 일을 하러 갔는데 그 곳에서 가정부로 취업한 한국인을 보면 별로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뭐, 호텔 부지배인 정도의 지위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선애는 좋은 대접을 받을까나? 아니면, 당장은 그런 대접을 못 받겠지만 나중에 혹시나 써먹을 수 있을까... 해서 데리고 있을까나. 어쨌든, 이래저래 눈에 띄게 생겼다. 중년 남자가 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건 초반부터 어기게 되는 셈인가? 선애가 여기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주의해서 선애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봐야겠다. 중년 남자들의 대화도 시들해져서 끊기고, 그 방에 있던 소녀들의 선애를 향한 흥미로운 시선이 사라질 무렵, 우리가 들어온 문이 열리고 이 저택 관계자로 보이는 세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검은색 바지와 자켓을 단정하게 입은, '나 집사요.'라고 얼굴에 써붙인 듯한 중년 남자와 그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여성, 그리고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통통한 볼살을 가지고 있는 아가씨였다. 그들이 들어오자 오랜 기다림으로 인해 약간은 풀어졌던 방 안의 공기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졌다. 중년 남자들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맨 앞에 있던 '나 집사요.'라고 써붙인 중년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레샴 부집사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중년 남자들은 정중함을 너무 지나쳐서 비굴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레샴 부집사는 건성으로 고개만 까닥해줄 뿐 시선은 곧바로 방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서 있는 소녀들을 쭈욱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명 한명, 마치 주부가 마트에 가서 싱싱한 채소를 고르는 듯한 아주 진지한 시선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선애쪽을 향할때는 그의 시선에 약간 놀라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역시 너무 튀나보다... 라고 걱정을 하는데, 놀라운 빛은 잠시였고, 곧 처음과 다를 바 없는 진지한 시선으로 변한 채 다른 소녀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헤에, 부집사라 그런지 역시 뭔가 다른걸?' 부집사는 모든 소녀들을 살펴본 다음 초조하게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네 중년 남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좋아, 다 채용 하도록 하지./" "/예?/" 뜻밖의 말이었는지 통통한 허리둘레와 김흥국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남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당혹스러운 것은 다른 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설마 모든 아이들을 다 채용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왜? 싫은가? 싫으면 말 하게. 다른 사람에게 더 알아볼테니./"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좀 놀랐을 뿐입니다. 설마 모두 다 채용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다 채용해 주신다면 저희야 고마울 뿐이지요./" 통통한 허리둘레와 김흥국 콧수염의 중년 남자가 화들짝 놀라 손까지 저어보이자 그레샴 부집사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뭐, 그 동안 이 저택에서는 하녀들을 별로 채용하지 않았으니 놀랄만 하겠지./" 그레샴 부집사의 이해 한다는 듯한 말에 통통한 허리둘레에 김흥국 스타일의 콧수염 중년 남자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키 큰 중년 남자가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얼른 표정과 자세를 고쳤다. "/저희야 저희가 데리고 온 애들을 다 받아들여주신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통통한 허리둘레의 중년 남자가 표정을 관리하자 우리를 데리고 온 중년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그레샴 부집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랜 시간 알아온 사이 같더니 서로 아웅다웅 다투며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도 마음이 척척 잘 맞는거 같았다. "/나야말로 급히 하녀들이 필요했는데 이렇게 적당한 애들을 데려다 줬으니 고마워 해야지. 내 그 동안 자네들을 알아왔으니 따로 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그냥 다 채용해 줌세./" "/아이고, 그러믄요. 그 동안 그레샴 부집사님과 저희가 어떤 관계였는데요. 그냥 저희만 믿으시면 됩니다./" 키가 큰 중년 남자가 무척이나 기쁘다는 표정으로 굽실굽실 해보였다. "/물론이지. 자, 그럼 이 애들은 모두 채용할테니 자네들을 이만 가보도록 하게./" "/예? 아, 예./" 이번에는 김흥국 콧수염 중년 남자가 잘해보려고 했었는지 미리 대답하려고 나서 있었는데, 뜻밖의 말을 들었는지 놀란 표정으로 되묻다가 얼른 대답했다. "/밖에 게 누구 없느냐? 손님 나가시니 배웅하도록./" 그레샴 부집사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김흥국 콧수염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쪽을 향해 외쳤고, 그러자 바로 문이 열리며 왠 청년 하나가 척척 걸어들어왔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그레샴 부집사는 중년 남자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잘 가게.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뭐가 그렇게 급한건지, 거의 사람들을 내몰다시피 배웅을 하는 그레샴 부집사의 모습에 중년 남자들은 황당한 기색이었지만 여기서 그들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 없었는지 분분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들에게서 당혹한 기색을 읽었기에 혹시나 그들 사이에 뭔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을까 싶어서 슬그머니 그 뒤를 따랐다. [잠깐 저들좀 따라갔다 올게.] "빨리 갔다 와." "빨리 갔다 와." 작게 속삭이는 선애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 잽싸게 그들 뒤를 따라 나선 나는 얼마 안 있어 내 어리석음에 통탄할 수 밖에 없었다. 중년 남자들을 그레샴 부집사가 부른 사람이 인도하는대로 문으로 향하면서 한결같이 입을 꾸욱 다물고만 있었던 것이다. 하기사, 이 건물 안에서 이 집안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 할 수도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인데 나는 그걸 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지... 그래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주춤주춤 그들 뒤를 따라가고 있는 동안 중년 남자들은 밖으로 나왔다. '그냥 돌아갈까?' 끝까지 저들을 따라 가서 엿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 뒤에 여길 쉽게 찾아 돌아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이 곳으로 올때 마차 밖을 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잠깐 잠깐인데다가 이 곳은 처음 오는 것이라서 지리도 잘 기억이 안 났다. 뭐, 계속 헤매다 보면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겠지만서도 그걸 언제까지 헤매고 있겠는가?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인다면 물어 물어서라도 찾아올 수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말야. 그런데 그때 중년 남자들을 인도해온 청년이 그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어디론가 걸어가버렸다. 그러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 동안 거의 말 없이 조용히만 있던 중년 남자가 얼른 곁에 있던 키다리 중년 남자에게 속삭였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다른때는 우리가 데려왔어도 여기서 몇번이고 조사를 한 뒤에 채용했으면서 말이야./" "/쉿, 조용히. 귀는 어디에든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하지만..." 하지만 키다리 남자는 황급히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주의를 주었다. 그에 불만을 가진 중년 남자가 뭐라 말하려 하자 우리를 데리고 온 중년 남자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됐어. 신경쓰지 마. 우리의 일은 여기까지야. 나중에 무엇이 어떻게 되든 그건 여기 있는 애들 운명이겠지./" '뭣이라? 아니 그런 무슨 무책임한 말을!' 이라고 외치면서 방방 뜨고 싶었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책임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인데다가 그렇게 버려두는 듯한 말을 하면서도 굳어 있는 분위기는 무책임 운운하는 말을 목구멍 밑으로 쑤욱 내려가게 했다. "/하긴... 그 말이 옳지. 눈치 빠른 녀석들이니 지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키다리 남자의 말에 김흥국 콧수염 남자가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 잘난 줄 알고 너무 설치다가 날벼락이나 안 맞으면 좋을텐데.../" "/그러게나 말이야./" 마지막으로 조용히 있던 중년 남자까지 한마디 하고 마무리로 한숨을 내쉬는데 잠깐 사라졌던 청년이 돌아오는게 보였다. 그 뒤로는 네대의 마차가 줄줄줄 따라오고 있는 걸 보니 아마 중년 남자들이 타고 갈 마차를 재촉해서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의 모습이 보이자 네 중년 남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방금전의 과년한 딸 시집보낸 아버지의 우울한 모습을 벗어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태연한 표정으로 변화시켰다. "/마차가 왔군./" "/가야지.../" 마차가 온 이상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곧 떠날터이기에 나는 더 이상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뭐, 그래도 아무 소득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번 하녀 채용이 다른때보다 이상하게 설렁설렁 했다는 건 건졌으니 말이다. 그게 얼마나 가치있는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서두... 건물 내부가 크게 복잡하지 않았던 터라 나는 어렵지 않게 선애를 두고 왔던 그 방을 찾을 수가 있었다.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복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찾았던게 아니라 모든 방과 벽을 일직선으로 다 통과해서 찾은 거였지만 말이다. 유령이 되니까 또 이런게 좋은 거 같았다. 정말 타이밍이 좋게도 내가 선애 방에 도착하자마자 그 곳에 있던 이들은 마악 방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방을 나서는 선애의 표정이 불퉁한게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왜그래?] 분위기에 휩쓸려 '다녀왔어.'란 말 대신 질문을 꺼내자 선애가 주위를 힐끔 살펴 보더니 작게 꽁알거리는 말투로 투덜댔다. "옷갈아 입고 곧바로 일 시작하래." 오자마자 일을 하게 된 상황이 심히 마음에 안 든 듯 했다. 물론 이 곳에 일하는 하녀로 고용되기 위해 온 것이니 오자마자 일 시킨다고 불평할 수 없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결국 하녀로 일하게 된다니 나 또한 심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저 녀석 고생하면... 그 스트레스를 다 나에게 풀텐데... 그걸 어찌 다 받아준단 말이냐아아아.... 으으... 고생문이 훤하다...' 그레샴 부집사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이번에 새로 기용된 신입 하녀들을 인도하는 사람은 매부리코의 중년 여성과 볼살 통통한 아가씨였다. 그 둘은 소녀들을 3층으로 데리고 갔다. 3층까지 이어지는 계단과 정 반대쪽에 있는,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예전 티비에서 본 군대 '내무반' 이었다. 뭐,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비슷했던 것이다. 커다란 방에 여러명을 수용하는 식으로 방 한쪽 면을 온통 차지하는, 내무반에서처럼 사람들이 누울 수 있는 커다랗고 내 무릎 높이까지 오는 나무 마루가 깔려 있었고, 그 마루와 벽이 닿는 곳에는 개개인이 사용하는 듯한 작은 옷장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마루가 깔리지 않은 곳에는 낡은 검은 탁자들이 주르르 놓여 있었는데 탁자 밑에는 물을 담아 놓는 듯한 커다란 단지가, 탁자 위에는 대야와 물을 퍼 나르는 자그마한 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문과 반대편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보였다. 아마 겨울에 이 곳을 따뜻하게 해줄 유일한 난방도구인 듯 하니 벽난로쪽이 제일 명당 자리고 문쪽이 제일 안 좋은 자리일 듯 했다. "자, 여기가 너희들이 기거할 방이다. 여기 있는 에밀리가 너희들을 돌봐줄테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그녀의 말을 잘 듣도록 해라. 그리고 할 일이 많으니 빨리 자리를 정하고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도록." 매부리코의 중년 여성이 소녀들을 휘익 둘러보고 그렇게 말한 뒤 방을 나가버리자 그 동안 조용히 있던 통통한 볼살의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얼굴에 있는 주근깨와 볼살로 인상이 좋아보이는 그녀는 실제로도 성격이 그닥 나쁘지 않은 애였던지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여기서 조심해야 할 건 스카티 부인 - 아마 방금 나간 중년 부인을 말하는 듯 - 정도니까 말야. 뭐, 선배들 말도 잘 들어야 하겠지만... 안쪽부터 5번째 자리까지는 선배들이 맡아 뒀으니까 너희들은 나머지 자리를 사용하도록 해. 자리는.... 먼저 맡는 사람이 임자로.. 할까?" 마지막에 소녀들을 둘러보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의 그 긴장감들은 어디다가 내팽겨쳤는지 애들이 잽싸게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선애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 녀석, 평소 점심시간만 되면 빨리 급식을 타려고 수업 종 치자마자 달렸다더니 여기서 그 효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 에밀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오나의 손목을 잡고 달려 완전히 선배들 잠자리에 붙는 것도 아니고 문쪽을 붙는 것도 아닌, 적당한 중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얼마나 그 동작이 날쌨는지 선애에게 손목을 잡히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 옆자리를 맡게 된 시오나가 놀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선애야, 너 이런 일을 전에 많이 해봤니?/" 푸헐... 내 동생이지만 정말 대단했다. "자리를 정했으면 빨리 하녀복으로 갈아 입도록 해. 꾸물거렸다가는 스카티 부인께 찍힐거야. 그래서 좋을 건 없겠지? 소지품은 옷장 속에 대충 구겨 넣고 나중에 정리 하도록 해." 에밀리의 말에 옷장을 열어보니, 옷장 안은 세로로 양분 되어 있었는데 한쪽 밑에는 잠자리용인 듯한 이불이 잘 개어져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에밀리가 입은 것과 같은 회색의 하녀복 세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반대편 공간에는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여기다가 개인 소지품을 보관하는 듯 했다. 텅빈 공간 아랫쪽에는 서랍도 세개나 있었다. 하녀복은 색은 우중충한 하늘빛 같은 회색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원피스였다. 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넓지 않아지만, 그렇다고 좁은 것도 아니라 완전 활동 편하게 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게 딱 보기에도 티가 났다. 상체의 앞쪽에 거의 허리까지 일열로 쭈욱 내려오는 회색 단추를 잠그고 가슴 부분 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하얀 앞치마를 착용하고 머리에는 서양에서 부인들이 잠자리에 들때 쓰는 스타일의 하얀 머리 모자를 쓰면 옷차림은 끝이었다. '쳇... 별로 안 예쁘다...' 예쁜 하녀복은 코스프레에 나올 정도인데 이 하녀복은 영.... "하녀복이 별로 안 예쁘지? 너희들이 아직 본관 정식 하녀가 아니라서 그래. 본관 정식 하녀들 하녀복은 정말 예쁘거든. 운이 좋다면 빠른 시간 내에 본관 정식 하녀가 되어서 그 옷을 입게 될지도." 소녀들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이리저리 돌아보며 제대로 입었나 점검하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에밀리가 탄식하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럼 에밀리도 이 소녀들과 같은 하녀복을 입은 걸 보면 그녀가 말하는 '본관 정식 하녀'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에밀리와 소녀들이 입는 하녀복 중 틀린게 있었다. 소녀들이 입은 하녀복은 차이나 칼라처럼 되어 있어 칼라나 본 옷이나 색이 틀리지 않았는데 에밀리가 입은 하녀복은 하얗고 동그란 칼라가 접혀져 있고, 끝에 작은 레이스가 둘러져 있었다. 신입과 선배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 입었으면 어서 내려가자. 어서 어서 나가." 에밀리의 재촉에 문쪽 가까이에 있던 소녀들 부터 황급히 문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자아... 이제 일의 시작이던가...' 선애가 맡은 일은 펌프질이었다. 그냥 보면 운 좋게 쉬운 일을 맡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걸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몇시간 동안 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결코 그렇게 생각지 못할 것이다. 성인 남자 서너명은 들어가서 신나게 물장구치고 놀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커~ 다란 통에 물이 항상 차 있도록 계속 펌프질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선애 혼자 하는게 아니라 시오나와 같이 한다는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나? 커다란 통은 내 무릎보다 약간 높은 곳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통의 아랫쪽에는 벨브가 달린 관이 세개가 달려 있어 벨브만 열면 쉽게 통안의 물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수시로 사람들이 그 곳을 통해 계속 물을 받아갔던 것이다. 아마 그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사용되는 물을 충당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미리 물을 받아두는 통도 그렇게 크고, 그 통에 물을 채워넣는 펌프도 휴네 집에 있던 펌프보다 더 크겠지만.... 선애가 미리 휴네 집에 있던 펌프를 사용해본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힘든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통에 물이 반쯤 차 있는데다 물 받을 오는 사람들도 드물었기에 쉬엄쉬엄 해도 되었는데, 그로부터 약 한시간 정도 지나니까 세개의 관으로도 모자라 줄을 서서 물을 받아가니까 그 커다란 통인데도 물이 줄어드는게 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니 그때부터 시오나와 선애가 부랴부랴 펌프질을 시작하는데, 선애와 시오나 둘이서 펌프질로 하는데도 감당하는게 벅찰 정도였다. "젠장... 헥, 헥... 이럴 줄... 헥... 알았다면... 헥헥... 미리미리...헥헥... 잔뜩... 헥... 채워둘걸... 헥헥...." 힘들어서 잔뜩 상기된 뺨과 부들부들 거리는 팔, 거기에 헥헥거리는 꼬맹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부들부들 거리는 팔로 하는 펌프질로 물이 제대로 나올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시오나는 아직까지 괜찮은 듯 했지만, 선애가 제대로 못하니 혼자 저 많은 무리들이 원하는 물을 감당하려면 선애처럼 지치는 건 시간 문제인 듯 했다. [저... 도와주랴?] 조심스레 묻자 선애가 무지 원망스런 눈초리로 노려본다. "헉... 말로만.. 헉.. 하지, 헥... 말고... 헥... 도울 거면... 헥... 빨랑..." 눈초리에 점점 시퍼런 광선까지 줄기줄기 쏟아질 거 같자 나는 얼른 펌프대를 잡았다. 이래뵈도 초등학교때까정 펌프질을 해봤기에 하는 거는 문제 없었다. 선애가 하는 척 올려놓은 펌프대를 열심히 올렸다 내렸다 하자 잠시 헥헥 거리며 숨을 고르던 선애가 무지 원망스런 어조로 속삭였다. "진작 좀 해주지.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밌었어?" [아하하하... 미안하다...] 사실 전부터 돕고 싶었지만, 누군가 눈여겨 본다면 펌프질을 하는 '척'만 하는 건지 정말로 하는 건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기에 가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 하니까 거의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뭐, 이상하다... 생각 하는 사람이 있어도 내가 안보이는 이상 자기가 뭘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있고 말이다. 에... 이런 생각을 진작 하는 것이 선애에게 도움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시 선애가 제 물량을 회복하자 시오나의 템포가 한 박자 느려졌다. 선애 때문에 힘을 썼지 그녀도 좀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녀에게 선애가 되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안... 이제는 네가 좀 쉬엄 쉬엄 해. 잠시 천천히 했더니 회복했어./" "/하아... 그나마 다행이네. 솔직히 버티기 힘들었거든. 조금만 더 했더라면 나도 그냥 주저앉을 거야./" 빨갛게 상기된 뺨에 피곤한 기색을 띄운 시오나가 힘없이 웃어보였다. "/아아... 펌프질이 이렇게 힘든 걸 줄이야.../" "/그러게.../" 그나마 둘이 진이 빠져라 펌프질을 해대면서 열심히 버텨준 덕분인지 가장 물을 많이 쓰는 시간은 그럭저럭 넘긴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수가 차근차근 줄기 시작하자 선애가 시오나에게 속삭였다. "/조금 쉬고 있어. 당분간 나 혼자 할게./" "/그래도 될까?/" 반색 하면서도 미안한 기색을 비치는 시오나에게 선애가 사람 좋게 웃어줬다. "/괜찮아, 괜찮아./" [쳇... 내가 수고하는 건데 자기가 생색 내기는...] 열심히 펌프질을 하던 내가 투덜거리자 하는 척만 하던 선애가 시오나의 시선이 떨어진 틈을 타서 날 노려봤다. 다행이도 그날의 고비는 넘긴 모양인지 사람이 점점 줄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깜깜한 시간이 되어 오는 이 없이 통에 물만 채우고 있는데 에밀리가 왔다. "/수고했어. 저녁 먹어야지./" 그 말이 엄청 고마웠던 모양인지 선애와 시오나는 눈물을 글썽 거리며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겨우 겨우 펌프대에서 내려왔다. "/힘들었지? 나도 해봐서 아는데 처음이라 더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조금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요령도 생겨서 훨씬 편해질 거야. 물을 많이 쓰는 타임은 아침하고 저녁때니까 그때만 맞춰서 물이 안 떨어지게 하면 돼./" "/아아... 예./" "/그래도 너희는 그나마 편한 거야. 다른 애들은 다 감독하는 선배랑 일하는데 너희는 그런 건 없잖니./" 그렇게 종알 종알 거리는 에밀리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도착한, 30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식당의 식탁에는 다른 소녀들이 이미 와 앉아 있었고 선배들로 보이는 - 에밀리와 같은 복장을 한 - 사람들도 십여명 같이 착석하고 있었다. 앉아서 보니 다른 소녀들 역시 선애네 못지 않게 힘들었던지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선애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그때서야 음식 준비가 끝난 듯 식사가 하나 하나 날라져 왔다. 잠자리가 휴네 집보다 열악해서 혹시나 음식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 했는데, 다행이 그건 괜찮았다. 저녁으로 빵 하나와 커다란 소시지 하나, 간단한 샐러드가 나왔으니 말이다. 그거보니 오랜만에 빵과 소시지가 먹구싶어졌다. [그거... 맛있냐?] 내가 무지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선애가 씨익 쪼개며 슬쩍 노릇노릇하게 구어져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소시지를 툭 건드려보였다. "먹구싶지?" [응.] "하지만 못 먹잖아. 그러니까 대신 내가 맛있게 먹어줄께." [쳇... 치사한 녀석...] 음식을 하도 오랜 시간동안 먹질 못해 이제는 소세지 하면 모양은 떠올라도 맛은 어떤지 가물가물 했다. 그나마 배가 고프지 않아 식욕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 안 그랬다가는 나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음식이 먹고싶기는 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느끼는 기쁨이란... 크허.. 생각만 해도 황홀했다. 그걸 잃어버렸다는 건 정말 너무너무 아쉬웠다.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두패로 나뉘었다. 올라가서 드디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사람들과 아직 남은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들로. 그리고 참 안타깝게도 선애와 시오나는 남은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들 쪽이었다. "/힘들겠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지? 지금부터 통의 물을 완전히 채운다음에 자도록 해./" 라는 에밀리의 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선애와 시오나를 교육 시키는 건 에밀리가 맡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맛나게 저녁을 마친 시오나와 선애는 서서히 근육통이 생기는 팔을 부여잡고 다시 펌프장으로 가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전에 많이 채워놔서 선애와 시오나는 한밤중이 되기도 전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와서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힘든 일을 오랜 시간 한 결과 선애는 온 몸에 알이 배김과 함께 근육통 때문에 끙끙 앓았던 것이다. 휴네 집에서도 다 같이 집안일을 하기는 했지만 교육과 같이 병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많지 않았었다. 짬짬히 부지런이 하면 금방 금방 끝낼 수 있는 분량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애가 갑자기 거의 반나절동안 계속 펌프질을 해댔으니 근육이 온전할리가 없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파스라도 사서 붙여주고 온찜질이라도 해줬을텐데, 여기는 그런게 없으니 단지 주물러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럴때는 참 시오나가 안된 것 같았다. 선애는 나라도 있으니 팔다리라도 주물러주는데 시오나는 그럴 존재도 없으니 그냥 누워 잘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긴, 시오나 뿐은 아니었다. 힘든 일을 한 탓에 피곤에 지쳐 모두 깊은 잠에 든 상황에서도 방 안에서는 여기 저기서 가끔가다 끙끙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가서 주물러주기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한밤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기 몸을 만지는 것 만큼 기겁할 일도 없었기에 그냥 선애나 해주는 선애서 끝냈다. 그렇게 피곤에 지쳐 골아떨어진 애들 잠이라도 푸욱 자게 냅뒀으면 좋으련만... 이 곳에 온 이상 편하게 살기는 틀렸던지 동쪽 하늘이 히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하자마자 문이 기세좋게 열리며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 기사아앙~!!/" 아마 지금이 대충 새벽 5시쯤 된거 같은데 벌써부터 깨우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러나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쳐도 피곤에 지쳐 골아떨어진 애들이 쉽게 일어나지는 못했다. 그러자 성큼 성큼 들어온 에밀리는 - 그녀는 이 방에서 자지 않았다 - 못 일어나고 흐느적 대는 애들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자, 어서 어서 일어나. 일어날 시간이라구./" 이런 일에는 익숙한 듯 안쪽의 선배 다섯명은 후다닥 일어나 이불을 개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른 신입 하녀들과 마찬가지로 일어나지 못하는 선애를 흔들었다. [선애야, 일어나래.] "우우웅...." 원망스럽다는 듯 신음을 흘렸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아... 정말 이 세계에 있는 하녀들이나 지구에 있는,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하녀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을 보내고 싶었다. '너무 너무 힘들겠어요....' 눈도 채 못 뜬 채로 이불을 개고 흐느적 거리며 세수를 한 뒤 옷을 갈아입자 시오나와 선애는 휘청거리며 다시 펌프장으로 향했다. [[연재]] 제 5화 (5) 눈도 채 못 뜬 채로 이불을 개고 흐느적 거리며 세수를 한 뒤 옷을 갈아입자 시오나와 선애는 휘청거리며 다시 펌프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건만, 아침을 먹는 건 날이 완전히 밝고 좀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점심은 아예 에밀리가 샌드위치와 우유 한컵을 펌프장으로 가져다 주는 걸로 때우며 밤까지 펌프질을 계속 해야 했다. 며칠을 가만 지켜보고 가끔 에밀리가 이야기해주는 걸 종합해본 결과, 여기와서 첫날을 제외하고 콧빼기도 보지 못했던 그레샴 부집사가 왜 다른때와는 달리 십여명이나 되는 소녀들을 그냥 채용했는지 알거 같았다. 소녀들은 하녀들을 위한 하녀들로 고용된 것이었다. 원래 이 저택은 후작가에서 별로 사용하지 않는, 사용하더라도 가끔 들리는 별장으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게다가 후작가 사람들이 이 곳에 올때도 자신들의 전용 하녀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이 저택에서는 최소한의 하녀들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갑자기 본가쪽에서 연락이 날아왔단다. 후작가 사람들이 장기 체류하는데다가 중요한 손님들도 맞이할테니 준비하라고. 그리하여 대대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는데 하녀들이 턱없이 부족 하였기에 별관에 있던 하녀들을 대대적으로 본관 하녀로 승진 시켜야 했다. 그 곳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숙련된 자가 아니면 만지지 말아야 한다나 어쨌다나... 그렇게 대부분의 하녀들이 다 본관쪽으로 가버리게 되자, 그 하녀들이 하던 일, 또 이번에 대대적인 준비 작업으로 인하여 떨어지는 부수적인 일을 해줄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어 소녀들이 신입 하녀로 채용된 것이었다. 그러니 선애가 이번에 하녀로 뽑힌 건 서대륙인 용모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아무런 하등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신입 하녀들의 주된 일은 본관 하녀들이 후작가의 하녀들답게 보이도록 돕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하녀복 빨래... 본관 하녀들이 입는 검은색 하녀복과 그들이 착용하는 머리 수건과 앞치마에 얼룩 하나 없이 깨끗이 빨고 빳빳하게 다려놓는 것. 게다가 그들이 신는 구두까지... 물론, 하녀복 뿐만이 아니라 하인복까지 있다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이곳 하인 하녀들은 옷을 매일 매일 갈아 입는 것인지 매일 저녁마다 옷들이 이따~ 시만큼 날라져 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덤으로 침대 시트나 이불들이 덤으로 같이 오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덕분에 빨래 담당하는 애들은 하루라도 손에 물이 안 마르는 날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힘들텐데, 본관쪽에서 뭐라더라... 비단 다루는 애가 부족하다고 신입 애들 중 몇몇을 데리고 가버렸던 것이다. 가뜩이나 모든 애들이 빨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선애와 시오나는 펌프장 담당, 그리고 몇몇 애들은 이곳 식당 담당인데 말이다. 선애와 시오나를 비롯한 신입 하녀들이 머무는 이곳은 하녀들을 위한 숙소로 별관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직사각형을 옆으로 눕힌 듯한 모양의 3층 건물이었다. 그리고 본관은 그와 좀 많이 떨어진 곳에 떠억 하니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 주 커다란 5층짜리 정육면체형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딱 정육면체형이 아니라 정육면체의 기둥역할을 하는 네 모서리는 탑 형식으로 커다란 원기둥이 박혀있는 듯 했고, 그 원기둥 꼭대기는 파란색의 고깔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그 네 고깔모자 위에는 커다란 깃대가 있었고, 거기에는 후작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몸통쪽에도 우아한 지붕이 달려 있었고 말이다. 아, 하여간... 본관 하녀들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하녀들은 모조리 이 본관에서 머물지만 그렇지 않은 하녀들은 아무리 본관 하녀라고 해도 잠은 이 별관에 와서 잤고, 식사도 점심을 제외하고 여기서 해결했다. 그러니 식당을 담당하는 애들은 신입 하녀들 뿐만이 아니라 그 하녀들 몫까지 다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비록 아침 저녁 뿐이라고 해도 내가 살던 한국처럼 부엌 시설이 최첨담 장치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30여명 몫을 준비하려면 정말 장난이 아닐 것이다. 그런 애들에 비하면 선애와 시오나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처음 며칠동안은 익숙하지 않아서 정말 힘들어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에밀리의 말대로 요령이 생겨 쉬는 시간까지 알뜰하게 챙기면서도 바쁜 시간때를 무난하게 넘기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한산한 때에는 슬그머니 밖에 나가서 놀기도 했다. 뭐, 다른 하녀도 그러는 것 같지만서도. 소녀들은 바빠도 수다 떨 시간은 있다던가...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휴식 시간마다 마주쳤던 신입 하녀들은 서서히 하나 둘 친해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3층이라고 해도 어차피 신입 하녀들이 선배들의 눈을 피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기 마련인데다가 휴식을 취하는 시간들도 비슷비슷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이 가장 많이 화제로 삼는 것은 역시 선배들 이야기. 어떤 선배는 성격이 더러우니 조심해야 하고, 어떤 선배들은 그나마 성격이 좋고, 잘못해서 선배에게 걸렸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 풀어야 하는지 등등... 그러한 이야기들 중에 간간히 섞여 나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후작가의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후작가 집안의 하녀들이다보니 주인 집안에 흥미를 가지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관 출입이 - 정확히 말하면 별관과 허용된 몇몇 주위를 제외하고는 모든 곳에 출입 금지 상태다 - 금지된 신입 하녀들이니 선배들이 대화하는 걸 엿듣거나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주워 올리는 것 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마치 한국에서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주워 섬기는 연애인 이야기 마냥 눈을 빛내면서 종알종알대는데, 그런 거 보면 역시 소녀들은 어딜 가나 비슷비슷 하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얘얘, 너희들 그거 알아?/" 오늘도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각,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모인 소녀들이 수다를 떨던 중 한 소녀가 의기양양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뭔데?/" 그녀의 '너희들은 모를껄?'하는 표정에 다른 소녀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을 돌리자 처음 소녀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지금 본관에서 난리난리 치며 맞으려는 후작가 사람들 말이야. 그들이 오는 날이 내일 모래래./" "/헤에, 정말? 드디어 오는구나./" "/그렇다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번에 오는 사람들 중에 후작가의 후계자이신 자작님이 계신대./" "/어머, 어머, 정말?/" "/정말이지 않구. 그러니까 본관에 계시는 서클리프 집사 (이 저택 책임자. 신입 하녀들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이름은 알고 있다.)가 지금 난리래./" "/에이... 그건 아니다. 내가 듣기로는 후작가 분들하고 본가에서 집사님이 한분 오시기 때문이래./" 처음 소녀의 말에 이번에는 다른 소녀가 부정했다. "/뭐? 아니 본가에서 다른 집사님이 오시는데 왜?/" 한 소녀의 의아한 질문에 집사 이야기를 꺼낸 소녀가 피식 웃었다. "/왜긴 왜야? 본가 집사랑 별장 집사랑 어디 같겠니? 본가에서 집사님이 오시면 이 곳을 총괄하시던 모든 권한을 다 그분께 넘기고 서클리프 집사님은 그 집사님 밑으로 내려가야 하잖아. 그러니 어디 속이 좋겠어? 비록 본가에서 나온 집사라고 해도 말이지. 그래가지고 요즘 심기가 되게 안 좋으신가봐. 어제 왜 어떤 선배님 막 울면서 온거 못 봤어?/" 그녀의 말에 다른 소녀가 아는체를 해왔다. "/아아, 나 봤어. 그... 검은 머리 선배 말이지? 울어가지구 눈이 퉁퉁 부었더라./" 그러자 집사 이야기를 꺼낸 소녀가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맞아, 바로 그 선배 말이야. 요즘 본관 꽃단장 말고도 이번에 새로 본관 하녀가 된 선배들 행동교육 시키고 있잖아? 그런데 서클리프 집사님 심기가 안 좋으니까 작은 꼬투리를 잡아가지구 장난 아니게 갈구고 있다는 거지./" "/아아... 왠지 이해할 거 같아. 호랑이가 없는 산에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여우에게 어느날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주인 자리 내놓으라고 하니 여우가 얼마나 억울하겠어?/" "/깔깔깔, 그 비유가 정답인거 같다 얘./" 집사 이야기를 꺼낸 소녀가 까르르 웃자 맨 처음 후작가 이야기를 꺼낸 소녀가 뾰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쳇... 낭만없게시리... 멋진 뉴스가 하나 더 있었건만.../" "/왜? 뭔데?/" 그러자 그 동안 가만 있던 시오나가 물어주자 처음 소녀가 신나서 말했다. "/이번에 오신다는 자작님말이야 그렇게 잘생겼대. 거기다 아직 결혼을 안 하셨다고 하더라./" 눈을 빛내며 은근한 어투로 말하자 다른 소녀가 혀를 찼다. "/에잉... 난 또 무슨 이야기라고. 야, 그래봤자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 그 분이 잘생기셔봤자 우리가 얼굴 볼수도 없는데... 이건 그림의 떡이 아니라 유령 떡이다./" "/에이, 그래도 혹시 아니? 길을 잘못 들어 별관쪽으로 오셨다가 눈이 마주쳐가지고... 우리 중 누가 팔자를 피게 될지./" "/아아...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야. 그럼 이런 하녀 신분을 벗어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하녀를 거느리고 살게 될텐데..../" '허.허.허... 이건 한국의 평범한 고등학생들이랑은 좀 다른 거 같군.' "/까르르르... 꿈도 야무지셔. 네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어디 그분 눈에나 들겠니? 그분 정도면 엄청난 미녀들이 데쉬를 하고도 남았겠다./" "/혹시 아냐? 그분 취향이 특이하실지도./" "/본처까지는 안 바래. 첩 자리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허.허.허... 첩이래.... 쬐끄만 것들이 그런 이야길....' "/자자, 농담은 그만하고 슬슬 일어나자. 너무 오래 쉬었어./" 즐겁게 이야기를 듣던 한 소녀가 일어나며 옷에 묻은 풀 조가리들을 털며 말하자 다른 소녀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이제 난 다시 빨래를 하러 가야 하는 구나./" "/난 감자 깎으러 가야해./" "/어, 오늘 저녁 메뉴가 감자야? 아아, 나 감자 좋아하는데. 맛있게 해라./" 그 날로부터 이틀뒤. 그 대단하신 후작가의 사람들이 도착한다는 날이 되자 저택 안은 새벽부터 부산스러웠다. 그런 분위기가 그들이 도착하던 말던 아무런 상관 없는 별관의 신입 하녀들에게까지 미쳐서 덩달아 그녀까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괜히 부산스레 돌아다니기도 하고 후배들을 닦달하는 선배들의 분위기에 눌린거긴 하지만 말이다. "/어휴, 정말 너무 한거 아니야? 자기들도 본관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면서 왜 저렇게 부산스럽대?/" 그러나 그렇게 하녀들을 괴롭게 많은 후작가의 사람들은 아침을 지나 점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신입 하녀들은 그때까지 계속 닦달을 당했으니, 점심 시간이 지나 잠깐의 휴식 시간에 모인 소녀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아... 그러게 말이야. 우리랑 아무 상관도 없는 건데 왜 우리한테 난리람./" 평소 대화를 듣는 걸 좋아할 뿐 거의 끼어들지 않았던 소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먼저 나서서 투덜거리자 선애와 시오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소녀에게 속삭였다. "/야, 쟤 왜 저렇게 화가 났냐?/" 그러자 그 소녀와 같은 일을 하는 소녀가 피식 거리며 대답해줬다. "/아아... 재 아까 선배에게 하녀복이 지저분하다고 한 소리 들었거든./" "/에... 너무한다. 우리 옷이 좀 지저분하면 어때서? 지저분한게 어디 하루 이틀인감?/" 시오나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소녀가 맞장구 쳤다. "/그렇지. 오늘은 괜히 그런 거야. 그러니 저렇게 열받았지./" "/도대체 그 잘난 후작가 사람들은 언제나 온다니?/" "/낸들 아니? 온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오겠지./" "/아아... 이러다가 혹시 내일 오는 거 아니야?/" "/어우 야, 그런 끔찍한 소리 하덜덜 말아라. 이런 날은 오늘로 충분해. 내일도 이런다면 으으... 난 뛰쳐 나갈거야./" 한 소녀가 몸을 부르르 떨며 엄살을 피우자 소녀들이 와아~ 하고 웃었다. "/깔깔깔... 그냥 나가면 어떻게 해? 네 그 낭만적인 후작가의 후계자님 얼굴은 보고 가야지./" 그러고보니 그 소녀는 후작가의 후계자가 온다고 눈을 빛내던 소녀였다. "/아앗, 맞아. 이 몸이 뽀사지는 일이 있어도 자작님의 얼굴은 보고 가야해./" 그 소녀가 다시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자 주변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까르르르... 그래, 그래. 힘 내라. 응원해 줄게./" "/야, 그런데... 그 후계자분이 정말 그렇게 잘생겼어? 여기에 온 적이 없다는데 어떻게 알아?/" 시오나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묻자 다른 소녀가 어깨를 으쓱 거렸다. "/모르지 뭐. 선배들이 그렇게 수근 거리던데... 사실 선배들도 본관 하녀들에게 들은 이야기고, 본관 하녀들도... 그 무슨 부인이라더라? 왜 본관의 하녀장인 부인 있잖아? 그분 이야기를 들은 것 뿐이라더라./" "/에이, 그럼 사실이 아닐 수도 있잖아. 실제로는 짜리몽땅에 통통한 호박인 거 아니야?/" 시오나의 말에 소녀들이 다시 깔깔 거렸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어떻게 하니 얘? 그렇게 호박이면.../" 한 소녀가 후계자의 얼굴 보는 걸 소원하는 소녀에게 웃으며 말하자 그 소녀는 상관 없다는 꿋꿋한 표정을 지었다. "/상관 없어. 배경이 빠방하잖아? 내 드워프나 오크 얼굴이라도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어./" "/오옷, 대단한 순정!/" "/야야, 저건 순정이 아니라 욕심에 눈이 먼 거야./" 그렇게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오매불망하며 심심하면 잘근잘근 씹으며(?) 기다리는 후작가 사람들은 저녁 식사 시간이 다되도록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본관의 총집사가 좀더 기다려보자 해가지고 모두 저녁도 먹지 못하고 기다렸지만, 온다는 주인은 감감 무속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그냥 저녁을 먹자고 한 시간은 다른때보다 네시간 정도 늦어진 시각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기다린 덕에 덩달아 신입 하녀들까지 굶으면서 선배 하녀들이 올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말이다. "/오늘은 오지 않는가봐./" "/윽... 그럼 내일도?/" 아주 늦은 저녁 식사 시간, 새벽부터 일어나 주인을 맞을 준비를 했던 선배 하녀들이 기운이 쭈욱 빠진 채 식사를 하는 걸 보고 신입 하녀들이 작게 소근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작게 소근 거렸어도 식당 안이 분위기 때문에라도 조용했기에 큰 식탁 건너편에 있던 선배 하녀들의 귀에 들렸던 모양이다. "/거기, 밥 먹는 데 조용히 못해?/"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 하셨던 선배 하녀께서 날카롭게 한 소리 하자 소근대던 두 신입 하녀들은 끽 소리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기야, 온다던 주인들이 도착하지 않아 내일도 피곤한 건 신입 하녀들보다 저들이 더 하겠지. 그렇게 모든 이들을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뒤흔들어놨던 그 잘난 후작가의 사람들이 도착한 것은 모든 이들이 잠자리에 들어 꿈나라에 도착해서 한창 거기서 놀 시각인, 한밤중이었다. 요 근래 들어 내 도움을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선애 덕분에 힘이 남아돌던 나는 밤이 와도 잠이 안 와서 어제부터 이곳 저곳을 구경 다니고 있었다. 어제는 별관 주변을 기웃기웃 거렸지만, 오늘은 좀 더 반경을 넓혀보려고 본관쪽으로 접근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와 본관의 멋진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멋드러진 현관에 구르듯 뛰어 내리더니 고풍스러운 커다란 현관문을 마구잡이로 두들기는 것이었다. 쾅, 쾅, 쾅~! "/어이, 아무도 없어? 빨리 문 좀 열어줘!/" 너무나 다급하고 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고요한 저택에 멀리 퍼졌고, 그 소리에 화답하듯 잠시 후 안쪽에서 다다다 하는 뛰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이 시간쯤 되면 자다가 일어난 상태여야 할텐데, 밤이라도 지세울 참이였는지 나타난 하인은 멀쩡한 옷차림과 얼굴 표정이었다. "/거의 다 도착 하셨어. 조금 있으면 정문에 오실 테니까 빨리 빨리 안에다 연락해./" "/예? 오셨습니까? 집사니이이임~!!/" 주어는 빠져 있지만, 누구일지는 뻔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놀란 표정의 시종은 급히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쳐 불렀다. "/오셨답니다, 오셨답니다아~!/" 그의 외침이 저택안을 울리고, 그에 반응하듯 저택 1층에는 환한 불이 밝혀졌다. 여러 사람들이 급하게 뛰어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약한 등 두개만 켜져 있던 커다란 현관문이 활짝 열리고 밝은 불빛이 어두움을 밝혔다. 그리고 곧 다다다 하는 발걸음 소리들과 함께 깨끗하게 차려입은 10여명의 하인과 하녀들이 주르르 현관 앞으로 나와서 2열로 쭈욱 늘어섰다. 그들 사이로 딱 한번 본적이 있는 그레샴 부집사와 처음 보는 집사 차림의 - 아마도 비토 서클리프 집사인 듯 - 초로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현관 앞으로 이어진, 돌을 깔아 잘 다듬어놓은 넓은 길에서 다그닥 다그닥 하는 여러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 20여명 정도의 말탄 검사들에게 호위를 받은 커다란 두대의 마차가 현관 앞에 딱 멈춰섰다. 집사와 부집사가 마차에 다가가는 사이 뒷쪽에 있던 마차의 마부석에 있던 한 남자가 잽싸게 뛰어 내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리는 두 인물... 한 남자와 한 여자였다. 남자는 내리자마자 서늘한 눈길로 주위를 한번 쓰윽 바라본 것이 끝이었는데 여자는 내리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아아... 이제야 도착했네. 너무너무 지루했어. 이게 뭐야?/" 그녀가 투덜거리던 말던 다가온 집사와 부집사는 둘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아가씨./" 그들이 바로 말이 많았던 후작가의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후계자가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딸내미까지 같이 올 줄은 몰랐다. 여자는 선애보다 어려보였다. 대략... 15세나 16세쯤? 피곤해보이는 얼굴을 빼면 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였다. 둘로 나누어 귀 부근에서 묶은 길다란 밝은 갈색 머리가 찰랑거렸고, 제비꽃 빛 눈동자가 커다란 눈 속에서 도르륵 굴러다녔다. 그녀는 자신의 두배는 나이가 많은 집사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도 거들떠보지 않고 앞 마차에서 내린 중년 부인이 다가오자 칭얼거렸다. "/유모오~ 나 너무 피곤해. 배고프고 졸리고.../" "/기다리세요 아가씨. 금방 목욕물하고 간단한 식사거리를 준비하도록 시킬게요./" "/응응, 빨리 빨리./" 그 아가씨의 유모라는 여자가 아가씨가 재촉하자 그녀들에게 황급히 다가온, 또 다른 중년 여자에게 거만하게 물었다. "/아가씨께서 오실 줄 알았으니 당연히 준비가 되어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목욕물을 준비해 놨으니 얼른 들어가시지요. 목욕을 끝내실때 쯔음 드실 수 있도록 식사도 마련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여자들이 하녀와 하인들이 양 옆으로 나뉘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길을 휭하니 스쳐 지나가자 이제 앞에는 남자들만이 남았다. 후작가의 후계자라는 도련님은 꽤 키가 컸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180정도는 되는 듯 보였다. 상인 집안이라서 학자타입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는 완전히 내 상상과는 다른 존재였다. 떠억 벌어진 어깨하며 우아하게 움직이는 긴 팔다리에는 고급스러운 옷으로 감춰져 있었지만 안에 잘 짜여진 근육이 자리잡고 있을 것 같았다. 검은 머리에 냉정해보이는 회색 눈동자, 차가운 인상과 그의 몸매를 보면 잘 버려진 보검이 떠올랐다. 하기야 그의 온 몸에서 폴폴 풍기는 '나 강해요.' 라고 알리는 듯한 기운 역시 나에게 검을 떠올리게 했지만 말이다. 거기에다가 거만하기짝이 없는 그의 태도는 태어날때부터 남 위에서 남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이란 저런 거구나... 하게 생각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하인이나 하녀들은 그의 톡 건드리면 베일 것만 같은 차가운 분위기에 더 얼어서 경직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집사와 부집사는 나았지만, 그들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걸 아는지 그 도련님에게 다가온 한 남자가 분위기를 풀려는 생각인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저희도 들어가죠, 그랜트님. 저도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흥, 네가 그렇게 약한 것 같지 않은데./" "/어어, 이건 강하다 약하다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벌써 며칠째 마차를 타고 왔는데 안 피곤하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싱글 싱글 웃는게 별로 피곤해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랜트라 하는 도련님도 꽤나 미남이었지만 그 도련님과 친해보이는 남자도 꽤나 미남이었다. 하지만 둘의 이미지는 정말 상반되었다. 도련님이 차가운 얼음왕자라고 하면 이 남자는 화사한 꽃미남이었으니 말이다. 도련님 못지 않게 키가 큰 이 남자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단아한 얼굴선을 가지고 있었다. 씨익 웃는 모습이... 한국의 유명한 배우 '배용준'과 이미지가 비슷해 보이는게... 그렇다고 유약해보이는 건 절대 아니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그랜트님. 푹 쉬셔야 남은 일정을 진행하는데 무리가 없으실 겁니다./" 그 갈색 머리의 꽃미남의 말을 거들고 나선 건 나이 지긋한 남자였다. 그분이 아마 본가에서 후계자를 따라온다는 집사인 듯 집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은회색 머리에 八자 형 콧수염이 되게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고 있었다. 집사까지 그렇게 말하자 그랜트는 어깨를 한번 으쓱 거리고는 안으로 척척 걸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본가에서 온 집사가 그 뒤를 따라가자 얼른 저택의 집사와 부집사도 그 뒤를 따랐다. 가면서 저택의 집사와 본가의 집사가 뭐라 속삭이는 걸 들었지만, 저택 밖에 있던 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후작가의 사람들이 와서 본가의 집사, 부집사, 하녀, 하인들이 마중을 나왔지만 후작가의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한 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밑의 사람들이 지시를 내리면 내렸지... 그런거보면... 역시 하인 노릇이란건 힘든 거 같다. 역시 열받으면 출세해야 하는 걸까나? '아아... 선애도 저런 취급을 받을까봐 걱정인데....' 제 6화 * 이전 글 상의 " " 은 한국어 "/ /" 아란티아 대륙어였으나 앞으로는 "/ /" 를 한국말로 " " 는 아란티아 대륙말로 표시하겠습니다.* "꺄아아~~ 어떻게 해, 어떻개 해. 너무 너무 멋있었어어~~ " "어쩜 그렇게 잘 생기셨을까. 그 옆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리는게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니까." "나는 나는 엘리엇니임~! 나한테 말을 거시는데 어쩜 그렇게 목소리가 부드러우시니. 아~!" "난 맥님이 좋더라. 귀엽잖아." "맞아, 맞아. 넘넘 귀엽더라. 아까 식당에서 얼굴이 빨개지시는데..." "특히 웃는 거. 덧니가 살짝 보이는게 아~ 뒤로 넘어가게 귀엽더라니까." 조용했던 저녁 식사 시간이 후작가 사람들이 온 뒤로 이렇게 소란스럽게 바뀌었다. 다른때 같으면 식사 시간이 소란스러울 때 선배들이 주의를 줘서 좀 진정시키게 했겠지만, 떠드는 사람들이 모두 선배인 본관 하녀들이라 주의를 주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입 하녀들은 뭐 씹은 표정 반 부러움 반 표정으로 꾸역꾸역 음식을 먹으며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 다른 이야기들이었다면 '우리들이 떠들때는 조용히 하라고 하더니만 자기들은 더 떠들고 있어.'라는 불만을 속으로만 조용히 곱씹은 채 식사에만 열중하겠지만, 요즘 선배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대화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미남'이었던 것이다. 미남... 모든 연령의 여자들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10대 중, 후반의 소녀들은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때였다. 그게 미남이라면 더욱 더... 그런데 선배들은 본관을 드나들며 미남들로 실컷 눈보신을 하는데 반해 거의 별관에만 머물며 미남은 커녕 남자 구경을 하기도 힘든 신입 하녀들이었으니 선배들이 그날 본 미남들의 이야기를 떠들때 너무나 부러울 것이었다. 요즘 본관 하녀들 사이에서 샛별처럼 떠오르는 화제의 인물 '미남'은 모두 세명. 얼음 왕자와 부드러운 꽃미남, 마지막으로 큐티맨~ 얼음 왕자는 후작가의 후계자인 그랜트 루빈스타인 자작이었고, 부드러운 꽃미남이란 그랜트의 보좌관으로 알려진 엘리엇 제네비아였다. 그 둘을 처음 보자마자 각각의 개성을 가진 꽤 미남들이라는 생각이 들더니만, 역시나 본관 하녀들의 시선들을 화악 휘어잡은 모양이었다. 세번째 미남인 큐티 맨은 후작가 일행이 아니었다. 그는 그랜트와 엘리엇이 이 저택에 오자 드나들기 시작한 상회 사람 중 한명이었다.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는데, 마치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나 아니면 사회 초년생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풋풋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얼음 왕자나 꽃미남에 비하면 잘생겼다기 보다는 평범한 외모였다. 피부도 하얀 것이 아니고 약간 까무잡잡에 이마에는 여드름도 있고 말이다. 하나만 놓고 보면은 꽤나 멀끔하게 생겼다고 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적게 씨익 웃는게 마치 개구장이 소년처럼 너무 너무 귀여운 것이었다. 얼음 왕자나 꽃미남은 마치 티비 화면 저편의 스타들인 양 딴 세상 사람처럼 보인다면 그는 바로 옆집이나 같은 반의 인기인 처럼 쉽게 데쉬해 볼 수 있는 타입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하녀들 사이에서 그랜트와 엘리엇 다음으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항상 그렇게 쉽고 만만하게 보이는 건 아니고, 일할때는 완전히 엘리트 사원으로 변해서 척척 일하는데 사람이 평소와는 완전히 180도 바뀌는 것이었다. 하기야, 그러니까 실력을 인정받아 그랜트 곁으로 들락날락 하지, 안 그랬다면 진즉 상회에서 짤렸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아.하.하.하... 나도 여자인 이상 본관 하녀들이 '미남'이라고 떠들어대는데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얼음 왕자라는 후작가 도련님과 부드러운 꽃미남이라는 그의 보좌관은 봤지만 큐티 맨이라고 이름 높은 맥 루돌프 - 큐티 맨의 이름이다 - 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요 며칠 낮에 본관에 마실을 다녔었던 것이다. 덕분에 속 좁은 선애의 불퉁한 불만을 들어줘야 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감수할 만 했었다. '훗, 그 루돌프라는 녀석이 정말 귀엽긴 했어. 쿠쿠쿠...' 본관 하녀들의 흥분에 찬 대화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선애의 살벌한 눈초리가 날아왔다. 처음에 그의 성이 '루돌프'라는 것에 킥킥대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눈빛. "/치사하게 자기 혼자만 보고 오고 말이야.../" [냐하하하하~ 너는 불가능 한 일이잖아.] "/쳇.../"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빨래를 담당하는 하녀들 중, 빨랫감을 옮기고 다 빨아진 빨랫감들을 빨래줄에 널고 다 마른 빨래들을 수거하는 일을 맡은 하녀들이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높은 곳에서 빨래를 널다가 하녀가 물기때문에 미끄러져 떨어지다가 밑에 있던 하녀 두명을 깔아 뭉갠 것이었다. 다행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작은 부상이라도 무시하지 못했다. 우선 위에서 떨어진 하녀는 발목을 좀 심하게 삐어서 며칠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고, 밑에 있던 하녀중 한명은 손목을 심하게 삐었다. 나머지 한명은 약간의 타박상으로 그쳤지만 말이다. 그 정도면 며칠 쉬게 해줘도 좋으련만, 이 곳에서는 그 정도로는 쉴 수가 없는지 그 하녀들은 그날만 잠시 쉬고 다음 날부터 일을 해야했다. 이거 혹시 출산 휴가도 없는게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도 약간의 배려가 있어서 그 하녀들이 파트를 바꾸는 바람에 몇몇 하녀들도 같이 파트를 바꾸게 되었다. 그 중에는 선애와 시오나도 섞여 있었다. 타박상을 입은 하녀와 좀 더 심하게 부상을 입은 하녀 덕분에 주방 파트를 양보한 또 다른 하녀가 펌프장을 담당하게 되는 바람에 선애와 시오나가 빨래 파트로 밀려(?) 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펌프장에서 많이 멀어진 건 아니었다. 별관에 있는 빨래방(?)은 펌프실 바로 옆에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물을 많이 사용하기에 그런 배려를 해준 것 같았는데, 이왕 배려를 해줄 거면 차라리 빨래방에 펌프를 하나 설치해 주던지, 아니면 펌프장의 커다란 물통과 연결된 관이라도 하나 설치해 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곳 윗분들은 하녀들의 일터에까지 세세하게 신경써 줄 만큼의 여유가 없나보다. "/아아... 세탁기가 그립다./" 휴의 저택에서도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서도, 그 집에 살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산더미 처럼 쌓인 빨래 더미를 보고 있자니 선애가 그 말을 중얼거리는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내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생이 고생을 하는데 어찌 내 맘이 편하겠는가 말이다. 빨래하는 광경은, 마치 조선시대를 연상케 했다. 세탁기가 없으니 모든걸 손빨래로 해결 했는데 빨랫감을 물에 적셔서 비누를 칠해 거품을 내며 비벼 헹구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빨래를 커다란 솥에 넣고 푹푹 삶았다. 삶을때 물만 넣는게 아니라 내 팔뚝 만큼 굵고 길다란 요상한 걸 여러개 같이 넣고 삶는데 그게 비누 역할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삶아진 빨래를 꺼내 깨끗한 물에 여러번 행구면 참 신기하게도 때가 완전히 빠져 깨끗해져 있었다. 빨래를 삶는 솥은 바깥에 있었다. 아무래도 방 안에서 불을 때기는 어려운지 빨래방에 마련된, 나무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커다란 돌맹이 위에 올려진 솥단지 세개가 보였다. 그 솥단지 하나 하나가 내가 들어가서 목욕을 해도 될만큼 무척 컸다. 그런 커다란 솥이었으니 빨랫감이 엄청나게 많이도 들어갔다. 그래서 솥 안의 빨랫감들을 뒤집을때는 내 키만큼이나 길~ 다란 나무 주걱을 들고 휘저어야 했다. 그러한 이유로 솥 담당, 즉 빨래 삶는 담당이 또 따로 있었다. 한 솥당 둘씩. 그 솥에서 빨래들이 다 삶아지면 나무 통에 담겨져 빨래방 안으로 날라져 왔는데 그 안에서는 또 대기하고 있던 소녀들이 솥 못지 않게 커다란 나무통에다 빨래를 통채로 부은 다음 헹구기 시작했다. 헹구는 커다란 빨래통은 3개. 한 통에서 먼저 헹궈진 빨래는 바로 그 옆에 있는 빨래통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한번 더 헹궈진 다음 그 옆에 있는 빨래통에 다시 한번 더 마지막으로 헹궈지면 끝이다. 그렇게 세번 헹궈지고 물기를 뺀 빨래들은 또 날라져서 밖으로 나가 2층으로 되어 있는 높고 길~ 다란 빨랫줄에 차곡차곡 널리게 되는 것이다. 시오나와 선애가 담당하게 된 건 바로 두번째 빨래통. "/아아... 세탁기.. 세탁기가 그리워어.../" 그렇게 행구는 빨래통을 담당하는 날이면 하루종일 손을 물에 담근 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손이 팅팅 불었다. 세탁기는 커녕 고무장갑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부려먹는다는게 너무했다. 옛날 세탁기도 없고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 집안일을 하셨던 선조님들께 무한한 존경심을 보낼 뿐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손이 팅팅 붓는게 안쓰러웠던지 헹구는 일을 담당하는 하녀들과 그렇지 않은 하녀들과는 매일 매일 일을 교대했다. 덕분에 선애는 하루는 빨래통 담당을, 또 하루는 빨래나 물을 옮기는 일을 담당하고는 했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렇게 빨래나 물을 옮기는 날에는 나도 많이 도와야 했고 말이다. 그날은 선애와 시오나가 빨래 헹구는 물을 떠 나르는 당번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다른 소녀들과 친해지기는 했어도, 아무래도 같이 지낸 시간이 다른 애들과 다르다보니 시오나와 제일 친해서 이제는 아예 선애의 짝은 시오나로 정해져 있는 분위기였다. "펌프장이 바로 옆방이기는 하지만... 그냥 빨래방에 펌프를 하나 놔주지... 그게 훨신 났겠다, 안 그래?" "누가 아니라니. 그게 아니면 그냥 펌프장이랑 빨래방의 벽을 허물어줘도 좋으련만..." 선애와 시오나는 투덜대면서도 용케 물을 흘리지 않고 물이 가득한 물통을 조심조심 운반하고 있었다. 다다다다... 햇빛 잘 들어오는 넓직한 복도를 울리며 들려오는,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가는 발소리에 선애와 시오나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는 선배 하녀가 종이 뭉치를 손에 쥐고 마악 식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그 모습을 본 선애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별관에 있는 하녀들은 모두 언젠가는 본관 하녀가 될 예비 하녀들이었기에 틈틈이 행동거지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다. 건물 내에서는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거나 주인이나 손님들과는 눈을 마주쳐서는 안된다거나 등등인데 거기에는 건물 안에서 뛰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급한 일이 있는 경우에도 뒤는 대신 빠른 걸음으로 다녀야 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복도에서 뛴다는 것은 보통 급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선애가 의아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 모습을 선애와 같이 지켜보고 있던 시오나는 뭔가 생각하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흠... 그러고보니, 선배들이 어제 저녁부터 이상하더라." "에, 그랬어? 난 잘 모르겠던데." 선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리자 시오나가 피식 웃었다. "그게 선배들 모두 그런게 아니라 별관 선배들만 그런거 같았거든." "그래? 그럼 여기서 뭔 일이 있나?" "글쎄... 말을 안 해주니 우리같은 신입 하녀들이 알 수 있겠냐." "하기야..." 둘은 그렇게 대화를 하면서도 발걸음만은 분주히 움직여 빨래방 안으로 들어갔다. 부지런히 물을 떠 나르지 않으면 코치하는 선배에게 한 소리를 듣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두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때까지 계속 잔소리를 비롯하여 날카로운 눈총을 받기는 싫었을테니 말이다. 빨래방팀들도 점심은 빨래방에서 해결했다. 단, 펌프장과는 달리 빨래방은 바깥과 연결된 문이 있어서 날씨가 좋으면 모두 밖에 나가서 식사했다. 게다가 단 둘이서 먹던 것과는 달리 여럿이 시끌벅적하게 먹을 수 있어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만 같았다. 조용히 예절을 지키며 먹어야 하는 아침, 저녁 식사때와는 달리 신입 하녀들이 떠들어도 선배들이 점심시간엔 너그러이 봐줬던 것이다. 그날도 점심 시간이 되어 점심을 가져 온 선배의 '이제 좀 쉬자!' 라는 말에 신입 하녀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잽싸게 하던 일을 멈추고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평소 같이 식사하던 선배들이 오늘은 우리의 식량만(?) 건네주고 자신들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의아한 생각에 내가 복도로 나가보니 식당을 담당하고 있는 선배 하녀 한명이 기다리고 서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곧 빨래방 담당 선배 하녀들이 - 세명이었다. - 우르르 복도로 나오자 그녀가 고맙고 미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점심도 못 먹게 하고... 정말 미안하다." 그러자 빨래방 담당 선배 하녀 중 한명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미안해 해야지. 대신 나중에 근사하게 한 턱 쏴야 해." "그럼 그럼. 한 턱 쏘기만 하겠냐? 이 고마움은 두고두고 잊지 않으마." 기다렸다는 듯 식당 담당 선배 하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하자 다른 빨래방 담당 선배 하녀가 서둘러 걸어가며 재촉했다. "고마움이고 뭐고 제 시간 안에 못해내면 말짱 꽝인 거 알지? 빨리 가자. 점심시간은 길지 않단 말이야." 그녀의 말에 나머지 하녀들도 걸음을 재촉하며 뒤를 따르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오늘 정말 여기에 뭔 일이 있기는 있는가본데, 그게 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그녀들의 뒤를 따라가 볼까... 하던 나는 곧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별로 선애와는 관련이 없을 거 같아서였다. 알아두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휴가 시오나와 선애를 이 곳으로 보내면서 당분간 조용하게 지내라고 신신 당부한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뭐, 나야 아무 상관 없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알면 선애에게 숨기고 있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고 있는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신입 하녀들이 바깥 식사하기 좋은 자리에 마악 자리를 잡아 앉으려는 참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선배들이 없어 마치 휴식 시간처럼 무척이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모두 자기 자리에 앉고 각자 몫의 점심이 돌려지자 누군가가 '준비~ 시-작!' 이라고 지시를 내린 것 처럼 소녀들의 입이 열렸고 재잘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화두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선배들. "참 이상도 하지? 점심은 물론이거니와 간식까지 꼭꼭 챙겨먹는 선배까지 같이 사라지다니 말이야." "그러게... 아,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도 별관 선배들이 좀 이상하기는 했지?" "아아, 맞아. 특히나 스카티 부인하고 에밀리 선배는 표정부터 장난이 아니더라." 처음 이야기를 꺼내는 소녀의 뒤를 이어 줄줄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 소녀가 갑자기 번쩍 손을 들었다. "나 왜 그러는지 알아." "얘는, 알면 안다고 말을 하면 됐지 뭐하러 손까지 드냐?" 그 소녀의 태도에 옆에 있던 다른 소녀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하자 손을 번쩍 든 소녀는 멋적은 태도로 슬며시 손을 내렸다. "에잇,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왜 그런지 안다고." "그래, 그래. 그게 뭔데?" 키득키득 웃던 소녀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시오나가 그녀의 말을 막으면서 재촉했다. "오늘 아침 먹기 전에 스카티 부인이 에밀리 선배에게 말하는 걸 들었는데..."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소녀가 갑자기 어조를 낮췄기 때문에 듣고 있던 소녀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건 비밀이니까 너희들만 알고 있어야 해, 알았지? 내가 말했다고 하면 절대로 안됀다." 그녀의 말에 나는 허탈한 웃음이 났다. 비밀이라는 건 그렇게 해서 퍼지는 거지, 아마? 하여간 그 소녀의 다짐에 다른 소녀들은 마치 짠 것마냥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덕였다. "그럼, 그러엄. 어디 다른데다 말하지 않을테니까 얼렁 얼렁 말좀 해봐." '비밀'이란 소리에 소녀들의 눈이 더 반짝 반짝 빛이 났다. "있지, 스카티 부인이 말하는 걸 어쩌다 듣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그 동안 누군가가 후작가의 돈을 몰래 빼돌렸나봐." "어머머, 정말이야?" 그 소녀의 말에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말하자 소녀가 눈을 매섭게 부라렸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 "아, 미안..." 놀라움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던 소녀가 얼른 입을 가리며 사과의 말을 하자 '비밀'을 엿들었던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하여간 돈이 많이 빠져나간 것이 발견된 모양이야. 그래서 범인이 누군지 알려고 조사하는 모양이야." "그거하고 별관 선배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 이 별관에서도 그 동안 하녀들 월급도 주고, 하녀들이 먹고 산 것도 있고... 하여간 그렇게 살림한게 있을 거 아니니? 그 장부들을 다시 찾고 없는건 작성하고 그러는 모양이야." 그렇게 그 '비밀' 이야기가 끝나자 소녀들의 상체가 본래대로 쫙 펴졌다. "흠... 하기야... 그 동안 후작가 사람이 없었으니 그런건 설렁 설렁 했을 수도 있겠다." 한 소녀의 말에 다른 소녀가 막 생각 났다는 듯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쳤다. "어머나, 그럼 본관의 서클리프 집사님은 큰일나셨겠네." "어디 그분 뿐이겠냐. 그 분하고 부집사님하고 큰일나셨지." 아직 어린 소녀들이 이렇게 저택 내 사정에 밝고 논리와 추리도 뛰어난 것이 무지 신기했다. 척하고 사건을 들으면 착 하고 결론을 내니 말이다. 역시 하녀의 파워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인가?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뭔 일인지 선배 하녀들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식당 담당 선배 하녀가 부탁한 일을 아직 끝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신입 하녀들은 처음에야 휴식 시간이 길어지는 것에 좋아라 하고 희희낙낙 했었지만, 그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자 불안감을 느꼈는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일터로 슬금슬금 돌아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쉬면 몰라도 너무 많이 쉬면 선배들이 돌아왔을 때 크게 혼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뭐, 일은 단순 노동이었으니 선배들이 없다고 해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하여 선애와 시오나도 다시 빈 물통을 집어들고 옆방의 펌프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곳에서 펌프질을 하는 안면 있는 하녀들에게 인사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선애와 시오나가 처음 여기 왔을 즈음, 그러니까 후작가 사람들이 갑자기 온다고 연락을 보내오는 바람에 온 저택을 다 뒤집으며 그들을 맞을 준비 하느라 벌였던 대청소를 끝낸 뒤였기 때문에 전보다는 한가했다. 그러니 아까 점심 시간이 길어졌어도 신입 하녀들이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면서 선배들을 기다릴 수 있었던 거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일을 다시 재개하여 선애와 시오나가 물을 세번 정도 떠날랐을 때였다. 어차피 모두들 선배들도 없겠다, 일감도 별로 없겠다 천천히 느긋하게 하고 있던 참이었다. 선애와 시오나도 다르지 않았기에, 막 펌프장에서 물을 길어 나오던 시오나는 자신보다 약간 뒤쳐저서 자신을 따라오던 선애 쪽으로 완전히 몸을 튼 채 뒷걸음질로 걸어가면서 선애에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아... 나중에 또 담당 구역이 바뀐다면 난 식당에서 일하고 싶어." "헤에, 식당에서? 왜?" "그거야 식당의 가장 큰 장점은 갓 만들어진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거잖니. 게다가, 기억 안 나? 자랑은 아니지만, 나 파이는 제법 잘 만든다구." "맞아, 저번에 네가 만든 복숭아 파이는 정말 맛있더라." "복숭아 파이 뿐이냐?" 선애의 칭찬에 시오나가 생글 생글 웃으며 펌프장을 나가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몸을 화악 돌리는 찰나... "까악~!" "허억~!" 복도 벽을 따라 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던 선배 하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 시오나와 갑자기 튀어 나온 시오나를 피하지 못한 선배 하녀가 그대로 부딪힌 것이었다. 다행이 세게 부딪힌 건 아니어서 둘이 사이좋게 넘어진다거나, 시오나가 물통을 떨어뜨린다거나, 아니면 선배 하녀가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물속으로 떨어뜨린다 하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가볍게 튀어오른 물통 속에 있던 내 주먹 두개를 합친 정도 크기의 물폭탄이 선배 하녀의 복부로 날아가 장렬하게 폭발했던 것이었다. 촤악~! 덕분에 그녀의 옷은 물론이거니와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 뭉치까지 물을 뒤집어 쓰고야 말았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그 종이 뭉치가 무척 중요한 것인 양, 물을 뒤집어 쓴 선배는 자신의 옷을 흠뻑 적시고 있는 물을 털어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종이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어찌할바를 모르고 서 있는 건 선애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와 이야기하느라고 시오나가 선배 하녀가 오는 걸 보지 못했으니, 혼나게 되면 - 혼날 확률이 100%지만.. - 같이 혼나게 될터였다. 선배 하녀가 급히 종이의 물기를 털고 하나 하나 흩어 놓았지만, 그녀의 노력은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는지, 그녀가 물기가 없는 복도 바닥에 한장 한장 늘어놓는 종이는 이미 물기를 드문 드문 흡수하여 숫자를 써 놓은 잉크를 군데 군데 번지게 만들어놓고 말았다. 그 모습을 확인 한 선배 하녀는 '헉' 하는 기겁한 숨을 들이쉬더니 곧 새파랗게 날이 선 눈빛으로 시오나와 선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 줄 알기나 해? 곧 스카티 부인에게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처음에는 날카롭게 쏘아 붙이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울상인 표정으로 다시 그 망가진 종이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 저... 선배...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다시 쓰면 안되는 건가요? 급하면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시오나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선애도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지만, 선배 하녀에게는 그닥 좋은 제안으로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희가 도와준다고? 이게 뭐 보고 그냥 베끼는 건 줄 알아? 계산 결과를 쓴 거란 말이야, 계산 결과를. 너희가 숫자 계산을 할 줄이나 알아? 그렇지 않아도 스카티 부인이 떠넘기는 바람에 잘 모르는 걸 겨우 겨우 어찌 어찌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다 못했구만... 일거리를 키우다니... 너희들 나중에 가만 안 둘줄 알아." 이 곳의 일반 평민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재정적으로 좀 풍족하거나 운이 좋으면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야 있지만, 그렇지 못한, 즉, 어릴때부터 하녀로 일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거의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뭐, 이 곳 저택에서는 하녀들에게 글 정도는 가르쳐 주는데다가 자신이 노력만 하면 좀 높은 계급의 ( 하인, 하녀들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 사람들에게서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겠지만, 그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그러니 선배 하녀가 시오나나 선애에게 기대를 걸지 않고 나중에 앙갚음을 다짐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선애야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학생이었으니 그런건 기본이었고, 시오나 또한 미래의 정보 길드원으로 키워지기 위하여 길드에서 뽑혀 교육을 받은 (받던 중?) 소녀였다. "선배님, 선애는 숫자 계산에 무척 뛰어나요." 시오나의 말에 선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선애와 시오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시오나는 이해 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선애 얘가요,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어렸을때는 꽤 괜찮은 집안의 딸내미였대요. 그러다 집안이 망해서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만... 그 전까지는 교육도 받아서 숫자 계산을 아주 잘 해요. 저도 선애에게 배워서 좀 할 수 있고요. 아마 도움이 될 거에요." 시오나의 말이 그럴 듯 했는지 선애를 바라보는 선배 하녀의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뭐, 그래도 약간의 불신은 어려 있었지만... "얘 말이 사실이야? 너 숫자 계산 잘 해?" 선배 하녀의 질문에 선애는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이 원래 이렇게 겸손한 애는 아니었다. 다른때 같았으면 '쫌 해요.'라며 잘난 듯 말했을 거다. 이 녀석이 이과반인데다가 다른 과목도 잘하기는 했지만 수학은 더 잘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튀지 않게, 선배들에게 찍히지 않게 조심 조심 해야 하는 곳이다. "조금 배우기는 했는데요..." 선애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선배 하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선애를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잘 하기를 바란다. 지금은 별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너도 좀 한다고 했지? 너희들... 빨래방 담당이던가?" 그제야 깨달은 거지만, 그녀는 아까 점심 시간이 시작될 즈음 빨래방 담당 선배 하녀들을 불러냈던 바로 그 식당 담당 선배 하녀였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워 그대로 빨래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자신들 담당 선배가 오지 않은 상황에 다른 곳 담당 선배가 들어오자 눈이 휘둥그래진 신입 하녀들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선배 하녀는 그런 그들의 인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커다란 빨래통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 애들 둘은 내가 시킬 일이 있어서 좀 데려가야 겠어. 그러니 일은 너희들끼리 좀 알아서 해줄래?" 그녀의 느닷없는 말에 신입 하녀들은 벙~ 쪄서는 선배 하녀 뒤에 쭈뼛쭈뼛 서 있는 선애와 시오나를 바라봤다. "해줄 거지?" 하지만... 신입 하녀들의 운명이 어디 가겠는가? 선배 하녀의 다그침에 신입 하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반사적으로 끄덕였고, 그에 만족한 선배 하녀는 물통을 빨래방 안에 들여다 놓은 시오나와 선애를 반 강제적으로 끌고 나갔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한다." 이 한마디를 남겨 놓고서... 물론 선애와 시오나에게도 한 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너희들... 너희들이 말한대로 도움이 안 되면 정말 가만 안 둘 거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희들... 너희들이 말한대로 도움이 안 되면 정말 가만 안 둘 거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심스레 대답하는 - 우선 잘못은 했으니 당당하게 나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 시오나를 한번 째려본 선배 하녀는 복도에 늘어놨던 종이들을 주섬 주섬 챙겨들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들어가보니, 우리가 식사를 하는 그 커다란 식탁은 음식들 대신 종이더미로 꽈악 차 있었고, 식탁 의자에는 식당을 담당하는 선배 하녀들과 식당 담당 선배 하녀가 데려갔던, 빨래방 담당 선배 하녀들이 종이 더미에 파묻혀 낑낑 대고 있었다. 거기에 에밀리도 같이 끼여 있었다. 그녀는 별관 하녀 총 관리자인 스카티 부인의 하녀라서 아마 이 일을 담당하고 있을터였다. 그들이 얼마나 종이에 쓰여진 숫자들에 열중을 했는지 사람 셋이 들어갔는데 쳐다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단지 에밀리만이 고개를 들고 선애와 시오나를 데리고 온 선배 하녀를 바라봤다. "어라, 벌써 스카티 부인께 갔다 오는 거야? 빠르네..." 그러나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선애와 시오나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선배 하녀를 바라봤다. 에밀리의 시선에서 답을 구한다는 걸 안 선배 하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가다가... 물통과 부딪혀가지고 종이가 약간 젖어 버렸는데, 이 녀석들이 숫자를 계산할줄 안다고 자기네들이 책임지겠다고 해가지고 데리고 왔어." 그녀의 말에 에밀리의 시선이 다시 선애와 시오나에게로 향했다. "괜찮겠어?" "몰라, 할줄 안다고 했으니 시켜나 볼려고." 에밀리의 질문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한 선배 하녀는 선애와 시오나를 식탁의 빈 자리에 앉히고는 그들 앞에 자신이 들고 있던, 젖은 종이를 내려놨다. 시오나와 선애가 그녀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젖은 종이에 손을 뻗어 그 안의 내용들을 살펴보는 동안 선배 하녀는 식탁의 이곳 저곳에 쌓여 있는 종이들을 살펴보더니 그 중에서 한 뭉치나 되는 종이들을 추려내어 가지고 왔다. "자, 이게 그 종이에 쓰인 것들의 토대다. 알아서 잘 해봐.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보고. 명심할 것은, 저녁 식사 전에 끝내 놔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끝장 이라고. 거기다 너희들은 나한테서도 한번 더 끝장 나겠지만... 알겠어?" 어지간히 초조했는지 으름장을 늘어놓는 선배 하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래도 자료들을 몽땅 챙겨서 가져다주는데다가 모르면 물어보기까지 하라는 걸 보니 지금 걱정이 잔뜩 되어서 그렇다 뿐이지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세세하게 잘 챙겨주는 걸 보면 성격이 꼼꼼하고 다정한 사람인 듯... 거의 던지다시피 자료를 가져다 주고는 쉽게 물어볼 수 있게 선애와 시오나 옆에 자리를 잡은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다가 곧 식탁 건너편의 다른 선배 하녀가 부르자 곧바로 일어나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멀어지는 걸 보고는 반대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에밀리가 낮게 속삭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일이 많아서 신경이 날카로워진거지 평소에는 다정하거든. 하는 수 없지 뭐. 여기서는 달시가 제일 숫자 계산을 잘 하니..." 아무래도 선애와 시오나를 데리고 온 선배 하녀 이름이 달시인 듯. 에밀리의 다정한 말에 선애와 시오나는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종이는 그 동안 식당에서 사용한 돈에 대한 장부였다. 그게 장부라는 이야기를 듣고 좀 어리둥절 했었다. 왜, 보통 장부라고 하면 한 권의 책자로 되어 있어가지고 안의 종이들에는 출금 내용과 출금 액수, 그리고 총 액수를 적을 수 있는 칸이 주욱 그려져 있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여기는 그런게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하얀 종이에 출금 내역과 액수, 그리고 총 합계 같은 것들만 적혀 있었다. 나중에 이런 종이들을 일년치 묶어서 가죽 덮개를 씌우면 최종적으로 장부가 완성 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선배 하녀들이 머리를 싸매고 하고 있는 건, 몇년 전 본가에서 내려온 직원이 장부 검사를 하고 난 뒤의 때부터의 장부를 다시 검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주인이 없다보니 대충 대충 적고 일일이 계산 같은 것은 뒤로 미뤄놓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갑자기 주인이 들이닥쳐서 내놔라 했으니 - 뭐 누가 돈을 빼돌렸고 안 돌렸고의 이야기는 빼고서라도 말이다. - 난리가 안 날 수가 없을 거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우선 1년 건 대략 검사해서 틀린 건 고치고 총 합계를 해서 스카티 부인에게 제출하려고 가지고 가는 중에 물벼락을 맞게 했으니 달시가 화를 낸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아까 달시가 재빨리 조처를 해서 그런지 잉크가 물에 번져서 아예 못 알아볼 정도인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었다. 대부분은 그나마 대충 알아볼 수 있었고, 그래도 못 알아보는 것들은 또 자료들이 있었으니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달시가 엄청 선애와 시오나를 닥달하면서 걱정했던 것은 출금 합계 였다. 매달 사용한 출금 합계, 그리고 일년 동안 사용한 각 내역서별 합계, 그리고 총 합계 등등은 자료에도 없이 여기서 한번에 계산을 한 것들이었는데, 그 숫자가 지워졌으면 다시 처음부터 계산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럴 때 시오나와 선애가 숫자 계산을 잘 한다니 그거 하나만 듣고 둘을 데려온 것이었다. [이거... 우선 줄부터 그어서 칸이나 만들어야겠는걸...] 선애 옆에서 같이 낱장으로 떨어진 장부를 들어다보며 내가 말하자 선애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언제 줄을 긋고 있어.../" 일년치 장부였기때문에 양이 쫌 많았다. 종이가 약간 두껍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전체의 두께량이 내 검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였으니 말이다. [흠... 틀을 하나 만들어서 찍으면 딱일텐데...] "/그 틀을 어떻게 구하냐?/" 선애와 내가 속닥대고 있는 사이 나름대로 장부를 훑어 본 시오나가 선애에게 말을 건넸다. "선애야, 네가 나보다 숫자 계산을 더 잘 하니까 내가 새로 장부를 쓸테니 계산 하는 건 네가 맡아라." 계산 한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지워진 것만 하니까 간단하다 생각 된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때 때마침 자리로 돌아온 달시가 툭 끼어들었다. "아, 이왕 하는 거 계산이 맞았나 좀 볼래? 급하게 하느라고 틀린 것도 좀 있을 거야." "선애야, 네가 나보다 숫자 계산을 더 잘 하니까 내가 새로 장부를 쓸테니 계산 하는 건 네가 맡아라." 선애는 원래 글씨가 악필에 가까운데다가 여기에 와서 이곳 말과 글을 배웠기 때문에 글씨는 시오나가 훨씬 잘 썼다. 하지만, 계산은 선애가 더 빨랐으니 시오나의 제안은 나름대로 함리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장부에 쓰는 건 지워졌던, 안 지워졌던 것에 상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다 써야 했지만, 계산 하는 것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지워진 것만 하니까 간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선애도 그런 생각을 했던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때 때마침 자리로 돌아온 달시가 툭 끼어들었다. "아, 이왕 하는 거 계산이 맞았나 좀 볼래? 급하게 하느라고 틀린 것도 좀 있을 거야." '엑... 그런...' 그 말인 즉슨 선애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계산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정말 굳 타이밍 이라고 해야 할까나? 달시의 말에 뭐라 항의도 하지 못한 선애는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두번째 장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시오나가 첫장부터 시작하니 시오나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언니, 언니만 놀기 미안하지?/" [뭐야, 뭘 시키려구?] "/검산./" [쳇... 그래, 그래. 넌 날 써먹지 못해서 안달 났지? 네가 계산한 거 계산해서 맞나 안 맞나 볼테니까 시작해봐.] 한동안 식당 안에서는 사각 사각 거리는, 펜이 종이 위를 달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끔 가다가 선배 하녀들이 달시를 부르는 소리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도 분위기에 눌려서 그런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었기에 그 속에서도 펜이 슥삭 슥삭 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선애도 아무 말 없이 덧셈에만 열중해 있었다. 나도 선애의 뒤를 따라 더하기를 하느라 바빴고 말이다. 틀린 것이 있으면 지적해줘야 했지만, 뭐 아직까지는 틀린 걸 발견해지 못했기에 조용히 더하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선애야 몇몇 틀린 걸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몇몇개였다. 나 같아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실수 정도? 시간이 촉박한 가운데에서도 그 정도 실수라면 달시도 산수에 꽤 능숙한 편인 모양 이었다. 보아하니 에밀리 또한 능숙하게 샤샤삭 계산하고 있었다. 하기야, 명색이 스카티 부인 하녀인데 보좌관 역도 겸임하고 있겠지. 그런데 한창 고개를 숙인 채 장부 내역을 새로 쓰는데 열중해 있던 시오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 두리번 거리더니 달시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저어.. 선배님..." "왜? 못 알아보겠는게 있어?" "아니... 그게... 여기 좀..." 시오나가 조심스레 자신이 들고왔던 종이를 내밀자 달시가 들여다본다. "이게 왜?" "아뇨... 저 6월달 하고요 다음달 7월 감자 값 차이가 좀 많이 나는데... 게다가 3월에 냄비를 샀는데 5월에 또 냄비를..." 시오나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감자는 보통 6월과 10월에 수확을 하는데다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식품이기에 일년동안 크게 변동이 없다. 그런데 6월과 7월달의 감자를 구매하는 값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게 이상한 것 아닌가? 갑자기 7월달에 인원이 배로 늘어서 식량 소비가 두 배 정도로 늘어난게 아니라면 말이다. 게다가 보통 냄비는 한번 사면 좀 오래쓰는 것이 상식이 아니었던가? 한국에 있을 당시 우리 집에서도 냄비 하나 사면 몇년은 사용했는데 말이다. 그런, 한국 부엌에서 사용하는 것들 보다 더욱 더 튼튼해보이는 검은 커다란 냄비를 두달만에 못쓰게 만들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마 시오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잘못 적힌게 아닌가 싶어서 물어본 거였을텐데 돌아오는 반응이 참... 시오나의 말을 중간에 딱 끊은 달시는 시오나에게 아주 인자하게 생~ 긋~ 하고 웃어보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 넌 감사하러 나온게 아니라 도우러 온 거야. 가뜩이나 시간도 부족해 죽겠는데 쓸데없는 걸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지 않으련? 지워진게 아니라면 넌 그냥 그.대.로 쓰기만 하면 돼. 알았지?" "네, 네..." 하늘같은 선배가 그러라는데 더 뭐라고 그러겠는가? 그냥 얌전히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그걸 조용히 보고 있던 선애가 뭔가 불만 어린 표정이었지만, 한 마디 해봤자 자신에게만 불이익이 돌아올 뿐이니 그냥 가만히 자신의 일로 눈길을 돌릴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기는 이상하지?] 내 말에 선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러고보니... 아까 너희들 점심 먹을때 말이야 돈이 횡령되었다니 뭐라니 떠들지 않았었어? 혹시...] 수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선애가 슬며시 자기가 들고 있던 펜 대를 입술로 가져가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그들이 횡령을 하던 사기를 치던 선애한테만 피해가 안 오면 상관 없는 일이지. 그렇게 나름대로 납득한 나는 또 다시 선애의 뒤를 따라 숫자들을 부지런히 머리 속에 입력시켜서 더하기 시작했다. '에또... 385에다 248이면... 633이던가? 끄으응...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려 주산학원 다닐 때 암산 좀 부지런히 배워둘걸....' 선애만 있으면 몰라도 시오나에 다른 선배 하녀들까지 있으니 나는 선애처럼 종이에다 써서 덧셈을 할 수가 없으니 무조건 암산으로 덧셈을 해야 했다. 뭐,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 손으로 써서 계산해 버릇하던 나인지라 익숙하지 않은 암산으로 하려니 상당히 더딜 수 밖에 없는데다 머릿 속에서 주판을 튕기자니 머리가 쥐가 날것만 같았다. 그나마 덧셈뿐이라서 다행이지 곱하기나 나눗셈이었으면... 으으... 팔락... 또 한장이 넘어갔다. 식당 장부라서 그런지 장부 내역이 굉장히 많았다. 그냥 단순히 '야채'하면 얼마나 편하고 좋으랴만, 당근, 호박, 오이, 감자, 양배추 등등을 일일이 하나 하나 기록하려니까 장부 내역의 줄이 점점 길어지기만 했다. 그래서 보통 한 달 장부 내역이 그 커다란 종이로 적을때는 서너장, 많을 때는 일고 여덜 장씩이나 되는 것이었다. 힐끔 창 밖을 보니 슬슬 노을이 질려고 하는 기미가 보였다.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이다. 뭐, 저녁 식사 준비는 선배 하녀들이 없어도 후배 하녀들이 알아서 준비하는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그때까지 끝내지 못하면 저녁도 못 먹고 여기에 매달려 있어야 할 듯 싶었다. 저녁 못 먹었다고 나중에 따로 챙겨주는 것도 없을테고 말이다. 아니, 점심도 못 먹고 계속 이 일에 매달려 있는 선배 하녀들도 있으니 혹시 좀 챙겨 줄지도... 처음에는 일일이 꼼꼼히 다 계산을 하면서 지나가던 선애도 시간이 점점 흘러가자 마음이 급해졌는지 대충 대충 쓱쓱 넘어가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지워진 면이야 일일이 계산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은 한자리 숫자만 대충 계산해서 맞아 떨어지면 그냥 넘어갔다. 그러니까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처음에는 한장 한장 넘어갈때마다 나에게 틀린게 있냐고 물어봤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없어서 나도 대충 대충 하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장부 내역도 꽤나 엉터리인 듯 한데, - 아무래도 사용한 돈에 비해 내역이 잘 생각이 안 나 대충 대충 있는 거 없는 거 집어 넣은 듯 했다. - 계산 한 두개 틀렸다고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빠르게 넘어가다보니 시오나와 선애는 가까스로 저녁식사 전까지 모든 걸 끝낼 수 있었다. 그에 선애와 시오나는 드디어 일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저녁은 편하게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기뻐하는 그들 앞으로 한 뭉치의 종이들이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그 모습에 딱딱하게 굳어진 선애와 시오나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에밀리가 싱긋 웃으면서 서 있었다. "보아하니 꽤 잘 하던데 이왕 하기 시작한거 선배들 좀 더 도와주길 바래." "예에..." 하라면 해야지 신입 하녀가 별 수 있는감? 시오나와 선애가 새로 쓴 장부와 선배 하녀들 사이에서 마악 끝낸 또 다른 장부 하나를 더 들고 달시가 스카티 부인에가 달려가는 동안, 식당 담당 선배 하녀 두명이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커다란 쟁반을 날라왔다. "먹으면서 하자." 그녀들 뒤로 부엌쪽에서 커다란 쟁반을 든 신입 하녀들이 식당 밖으로 나가는 거 보니 아무래도 다른 신입 하녀들에게 저녁을 날라다 주려는 모양이다. 하기야, 식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종이더미들을 보니 그것도 이해가 되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해도 여기 있는 걸 어디다 치우며, 또 치웠다가 언제 다시 여기다 가져다 놓겠는가? 차라리 여기서 저녁 먹는 걸 포기하는 게 났지. 본관으로 출근하는 선배 하녀들은... 뭐, 여기 선배 하녀들이 알아서 해결을 봐 놨겠지. 그나저나 여기 선배 하녀들 점심도 못 먹고 일에 파묻혀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먹을 건 다 먹고 하고 있었나보다. 부엌에서 나온 선배 하녀가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샌드위치와 우유를 나누어주는 동안 에밀리는 선애와 시오나에게 장부 쓰는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장부 목록 쓰는 건 시오나고 선애는 다시 계산을 맡았다. "잘 봐. 여기 있는게 대략적인 목록이야. 그리고 여기 있는 건 그 달 사용된 비용이고. 영수증은 여기 있거든. 여기 써있는 목록들의 합계하고 사용된 비용이 틀리면 영수증을 뒤져보도록 해. 한 두개 빠진 목록들이 있거든. 만약... 그래도 찾지 못하면 대충 알아서 쓰도록 하고. 영수증도 제대로 안 챙겨져서 없는게 꽤 있을 거야." 그래서 두달에 한번씩 냄비를 새로 사고 감자 값이 불규칙 했던 건가? 하여간 정말 엉망이긴 엉망이다. 아마 이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도 본관 장부만 관리에만 힘쓰느라 바빠 별관 장부에는 크게 신경을 안 썼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엉터리지. "계산 하는 건 아까랑 같아. 여기 매달 사용된 비용하고 합계하고 맞추고. 일년어치 각 목록별 합계하고, 일년 총 합계... 자, 대충 다 알겠지?" 에밀리의 설명에 선애와 시오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늘 밤까지 끝내야 해. 이거 다 못하면 잠 못 잘거니까 최대한 빨리 해라." 에밀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시오나와 선애는 기겁을 하며 빠른 동작으로 펜과 종이를 잡고 일을 시작했다. 달시가 돌아오자 장부 목록을 적어 내려가고 있던 시오나까지 숫자 계산하는 것에 투입(?) 되었다. 알고 봤더니 그 많은 선배 하녀들 중 숫자 계산에 밝은 사람이 에밀리와 달시 단 둘 뿐이라서 둘이서 모든 계산을 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선배 하녀들이 하는 일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동안 장부 관리를 어떻게 한 것인지, 보통 장부하고 영수증은 같이 차곡 차곡 날짜별로 보관하는게 정석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건 장부도 양도 엄청난 주제에 월별, 년별로도 묶이지 않고 낱개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데다가 영수증도 아무데나 막 쑤셔박혀 있었기에 이 모든 걸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선애와 시오나가 왔을 즈음, 1년치의 장부 자료들(?)은 다 빠졌을텐데도 불구하고 그 커다란 식탁 위가 장난이 아니었으니 처음에는 얼마나 대단했을지 가히 상상이 갔다. 거기다 장부도 대충대충 적혀 있어서 빠진 것도 많고 중복 된 것도 많았다. 그러니 각자 날짜별로 장부하고 영수증 추리는 것도, 영수증하고 장부 목록 대조해보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으니 에밀리를 비롯하여 식당 담당과 빨래방 담당 선배 하녀들이 모조리 달려 들어 점심시간까지 할해 했어도 겨우 1년치 장부 정리만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애와 시오나가 투입 되어 그 둘이 망쳐버린 장부를 새로 썼을 무렵에는 대략적으로나마 날짜별로 분류가 될 수 있었다. 그걸 안 달시가 장부 목록 작성과 확인은 모두 그 선배 하녀들에게 맡기고 그들이 목록을 다 작성한 걸 넷이서 나누어 받아 계산만 하게 했던 것이다. 그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장부는 빠른 속도로 정리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하지만, 3년어치의 엉망이 된 장부는 양이 많았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낼 수가 있었다. 덕분에 밤 늦게 잠들었다가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했던 선애와 시오나는 충분한 숙면을 취하지 못해 팅팅 붓고 붉어진 눈으로 좀비처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내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숫물에 코 박고 죽으려는 사람처럼 세수대야 안에 얼굴을 처박다시피한 채 얼굴에 물을 묻히는 건지, 물에 얼굴을 묻히는 건지 모를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안에서도 조는 건 마찬가지. 그런 상황에서도 용케 음식은 입으로 나르는 걸 보니 인간의 먹는 욕구는 졸음조차도 이기는 위대한 것으로만 느껴졌다. 선애와 시오나의 그런 모습이 동료 하녀들에게는 무지 안되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그들이 대충 식사를 끝내고 일터인 빨래방으로 들어오자 하나 둘씩 그 둘에게 모여들더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난 또... 선배들에게 예쁨 받아가지고 오후 일은 쉬게 되는 건줄 알았더니.. 오히려 혹사를 당하고 온 모양이네?" "그러게.. 너희들 괜찮냐?" 아마 어제 선애랑 시오나가 불려가니까 편한 일을 하는 줄 알고 되게 부러워 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애들이 쾡~ 해서 돌아오니 그 마음이 180도 바뀌었는지 측은한 표정이었다. 선애와 시오나의 오늘 담당은 두번째 빨래통이었다. 그나마 앉아서 하는 일이라 사이 사이 재주껏 졸 수 있다는게 다행이었다. 만약 어제와 같이 물 나르는 일을 했다간 졸지도 못했을 테고,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물을 나르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일 테니 말이다. "후아아암..." "하아아암..." 시오나가 한번 크게 하품하자 그 뒤를 이어 선애도 하품을 한 채 눈물을 글썽 거렸다. "졸려라..." 멍 한 표정으로 빨래통의 빨래를 하나 휘릭 잡아서 주물주물 하며 시오나가 중얼 거렸다. 그러더니 대충 주물댄 빨래를 옆 빨래통에 던지는 게 아니라 다시 자기 빨래통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커억... 그게 아니라니까. 그건 빤거잖아? 야, 야, 저거 옆 빨래통으로 옮겨.] 선애를 툭툭 치며 말했지만 선애도 몽롱한 표정으로 성의없이 내가 가르킨 빨래를 집어 옆 통으로 던져 넣는다는 것이 그만 바로 옆의, 그것도 헹구지 않은 빨래를 집어 던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어이, 어이. 그게 아니야아... 이제 정신 좀 차려봐아...] 그래도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 빨래를 옆으로 던지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나... 에이, 그래도 한번 더 헹구니 괜찮겠지.' 그러나 이런 선애의 태도를 3번째 빨래통을 담당하는 동료 하녀가 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선애가 던져 넣은 빨래를 다시 건져 원래의 빨래통에 던지더니 자신의 손을 살짝 튕겨 그 손에 묻어 있던 물을 선애를 향해 뿌렸다. "앗... 차겁잖아..." 다른때 같으면 날카롭게 울려퍼질 투덜거림이었지만, 오늘은 멍한 정신때문인지 짜증기만 뭍어 있을 뿐 말도 길게 늘어졌다. 그에 선애를 향해 물을 튕긴 하녀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정신 좀 차리라고. 선배들도 오늘 정신이 없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넌 몇번이나 혼났을 거야. 제대로 헹구지 않아도 좋으니까 한번이라도 주물럭 거린 걸 넘겨. 저쪽 통에서 넘어온 거 그냥 넘기지 말고." [거봐, 내가 그게 아니랬잖아.] 그 하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옆에서 한 소리 했지만 선애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아... 미안..." 그러면서 아까 시오나가 주물럭 거린 빨래를 잡아 몇번 물에 휘휘 젓더니 대충 주물 거리고는 옆 빨래통에 집어 넣었다. [으휴... 안되겠다. 야야, 나한테 좀 기대봐.] 나는 선애와 빨래판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선애를 내 등에 기대게 하고 선애의 양 팔을 내 양 팔 위에 올려 놓게 했다. "/우웅... 편하다.../" [쯧쯧, 내가 빨래는 대충 해줄 테니까 알아서 재주껏 졸아라, 알았지?] "/우웅... 알써, 알써.../" 평소 같으면 남들에게 안 들리게 작게 속삭였을테지만, 지금은 그런 정신도 없는 모양이었다. 선애의 중얼대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같은 통을 담당하고 있는 다른 하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졸면서 잠꼬대까지 하냐?" '그런 말 들어도 싸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선애 대신 빨래를 헹구기 시작했다. 물론, 선애가 하는 척 대충 대충, 내 팔 위에 올려진 선애의 팔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반대편에서 역시 졸면서 빨래를 주물주물 하고 있는 시오나를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에휴... 미안하다 시오나. 내 능력이 없어서 말이다.. 하기야, 능력이 있어도 어떻게 너를 도와줄 수는 없었겠지만... 괜시리 미안하군.' 선애와 시오나는 점심 시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선애 녀석은 내가 자신 대신에 빨래를 했다는 걸 알고는 아주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게 아닌가?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 거렸고 머리 속에서는 빨간 불빛이 번쩍 거렸다. 그 녀석의 눈빛은 '아,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내 동생이 뭐라 하기전에 미리 선수쳐서 입을 열었다. [선애야, 너 이 노래 알지?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그랬더니 말빨이 뛰어난 내 동새 왈... "/괜찮아 언니,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거든./" [쓰읍... 넌 그렇게 언니를 부려먹고 싶냐?] "/언니라는 게 동생 좀 도와주면 어때서?/" [그래서 도와줬잖아.] "/그거 잠깐 가지고 되게 그러네./" [시끄. 사람이 말야 도와줬으면 고마운 줄 알고 은혜를 갚을 생각을 해야지.] 내 말에 선애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흥, 뭐야.. 그래서 도와주겠다는 거야, 안 도와주겠다는 거야?/" [.....도와주께...] 아아... 약한자여... 그대의 이름은 언니어라... 내가 다시 생각하지만... 동생 버릇 잘못 들여놨다. 누굴 탓하리요... 다 내탓인 것을...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렸을때 길을 잘 들어놀 껄, 껄, 껄...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지나간 버스였다. 그런 일이 있은지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평소처럼 모두들 아침 식사를 하러 모인 식당에 처음 보는 중년의 부인이 에밀리와 달시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모두 기립." 에밀리가 평소의 방글방글 웃는 표정이 아닌, 긴장으로 인한 듯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외치자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주목했다. 낯선 중년 부인은 우리의 모습을 쭈욱 둘러본 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부터 스카티 부인의 뒤를 이어 여러분을 담당하게 될 바네트 엠브라 라고 한다. 이제부터 이곳 별관의 모든 관리는 내가 담당하게 될 테니 그리 알도록. 아, 그리고 이번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만 둔 사람들이 있어서 약간 이동이 있게 되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자 에밀리가 잽싸게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를 엠브라 부인에게 넘겨 주었다. "흠... 어디보자... 지나, 셰리, 페리, 카렌, 버넷 이 다섯은 오늘부터 본관에서 일하도록. 아침을 먹고 나서 본관의 올리버 부인을 찾아가도록 해라." "네!" 엠브라 부인에게 호명된 다섯 선배들은 환한 얼굴이 되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관 하녀에서 본관 하녀가 되는 것은 하녀로써는 승진을 뜻하니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다. 그 다섯 중에는 현재 선애의 일터인 빨래방 담당 하녀들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본관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엠브라 부인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에밀리, 달시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에밀리와 달시가 베시시 웃고 있는 걸 보니, 아마 그녀들이 뒤에서 뭔가 언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 본관으로 배치되는 바람에 선배 하녀가 없게 된 빨래방에 한명의 선배 하녀가, 그리고 두명이 비게 되는 식당에 한명의 선배 하녀와 두 명의 신입 하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오나와... 뭐야, 이름이 스내? 서내?" 엠브라 부인이 발음이 어색한지 고개를 갸웃 거리자 옆에 있던 에밀리가 얼른 정정해 줬다. "선애라고 합니다." "흠, 그래. 선애... 어디보자..." 서류에서 시선을 들고 서 있는 소녀들을 쭈욱 둘러보던 엠브라 부인의 시선이 선애에게서 딱 멈췄다. "서대륙 출신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선애의 대답에 엠브라 부인이 잠시 신기하다는 눈길을 던졌지만, 곧바로 서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뭐... 너하고 시오나라는 애가..." "예, 제가 시오나입니다." 선애 옆에 있던 시오나가 얼른 대답하자 엠브라 부인이 힐끔 보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은 이제부터 에밀리와 달시의 조수로 일하도록 해라." "예." 엠브라 부인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선애나 시오나나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뭐, 얼마 전에 장부 정리를 같이 한 덕에 그 둘이 숫자 셈을 잘 한다는 게 밝혀지기는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둘이서 알아서 해왔으면서 갑자기 왜 조수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건 말이지... 일거리가 너무나 많아서 우리 둘이 다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아침 식사 후 에밀리와 달시가 선애와 시오나를 데리고 2층의 어떤 방으로 가더니만 뜬금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예?" 그에 어리벙벙한 둘이 한 목소리로 되묻자 달시가 씨익 웃으며 부가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궁금해 했잖아. 갑자기 왜 우리에게 조수가 필요한 건지... 미리 말해두는데, 너희들을 편애한 건 아니야. 아마 이전에 고생한 것 보다 앞으로 더 고생하게 될지도 몰라." "에... 저... 장부 정리는 이제 다 끝나지 않았나요? 그럼 일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시오나가 주저주저하며 묻자 에밀리와 달시가 허탈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장부 정리가 끝났다고? 얘, 얘, 너희도 장부 정리를 같이 했으면서 모르겠냐? 그렇게 엉터리로 해놓고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 "어... 하지만..." 장부 정리할때 목록이 이상하다고 의문을 표하려 한 시오나를 막았으면서 지금에 와서 저렇게 말하니 좀 황당했다. 그건 시오나와 선애도 마찬가지인 듯, 그 표정을 숨기지 않자 달시가 피식 웃어보였다. "뭐, 너희들이 황당해 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야, 야, 그러면 어쩌냐? 영수증은 없지, 장부는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 있지, 돈은 많이 비지, 어디다 썼는지는 모르겠지... 그러니 엉터리로 할 수밖에..." 달시의 푸념어린 설명에 에밀리가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밑에 있는 자의 서러움이지. 그렇게 해놓고서는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는게 말이나 돼? 그나마 그렇게 한것만으로도 다행이지." "맞아, 맞아. 그래놓고서는 우리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다니... 내 참 기가막혀서..." "난 그때 우리가 끝장 날 줄 알았어. 부디 살아서만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신께 빌었다니까." '뭔 소리야...' 선애와 시오나에게 설명하다가 갑자기 둘만의 대화로 빠져버린 둘을 선애와 시오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에밀리의 말처럼 밑에 있는 자의 서러움이란 거겠지. 그러나 그렇게 둘만의 대화에 빠져버린 것도 잠시, 금방 선애와 시오나의 의문 어린 시선을 느낀 둘은 배시시 웃고 다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아아, 그러니까... 에잇, 그래 어차피 우리가 입다물고 있는다고 해도 곧 알게 될 일이니 다 설명해줄게." 그러면서 달시와 에밀리가 번갈아 설명한 것에 의하면, 이번에 본가에서 내려온 집사에 의해 이루어진 감사에서 공금횡령으로 걸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거였다. 하기야, 뭐 몇년동안 아무런 감시 없이 큰 돈을 주물럭 거리고 있었으니 그런 비리가 쉽게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감사에서 걸린 사람 중에 스카티 부인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스카티 부인 뿐만이 아니지. 주방장의 뚱땡이도 같이 있었지. 그 뚱땡이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데도 그 뚱땡이 나에게 모든 걸 덥어씌우려고..." 달시는 갑자기 열이 받는지 이까지 빠드득 갈아댔다. 주방장의 뚱땡이란, 별관의 주방을 담당하는 중년 남자였다. 이름이... 암브러였던가, 암소였던가... 하여간 암... 으로 시작하는 무슨 이름이었는데 모든 이들이 주방장의 뚱땡이라고 불러서 이름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여간, 그 남자는 별관 하녀들 사이에서 평판이 되게 나빴다. 물론, 이곳에서 스카티 부인 다음으로 가는 상관이기는 하지만 하녀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는데다가 일부 하녀들에게 성추행까지 하는 굉장히 질이 나쁜 사람이었다. 처음에 선애와 시오나가 여기 왔을 때 그 둘에게도 질 나쁜 손길을 뻗치는 바람에 내가 며칠동안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녀들에게 추행하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방해를 해서 - 예를 들면 옆에 있던 물건을 던진다던지, 그를 밀어버린다던지, 넘어뜨린다던지 등등 - 버릇을 완전히 고치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선애나 시오나 앞에 얼굴을 거의 내밀지 않았었지만, 주방에 있던 하녀들을 계속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녀들이 열받아서 뚱뚱한 그의 몸을 빗대어 주방장의 뚱땡이라고 불렀었다. 그렇게 질이 나쁜 사람이었으니 공금횡령 하는 일에 빠질리가 없었다. 그가 이 별관에서 사용되는 모든 음식 재료 거래는 물론 주방과 식당 물품 담당이었으니 횡령하기에도 딱 좋은 자리였고 말이다. 원래 그의 하녀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이번에 신입 하녀들을 새로 모집할 때 본관으로 가고 달시가 새로 그의 하녀가 되었다고 한다. 뭐, 하녀라고 해도 거의 부관 비슷한 거겠지만서도... 그래 식당 장부를 쓰려고 하는데 그 주방의 뚱땡이가 아무것도 달시에게 맡기질 않고 다른 주방 담당 하녀들처럼 계속 주방일만 시키다가 이번에 갑자기 감사를 한다고 하자 모든 일을 떠넘기고는 자기는 쏘옥 빠졌다고 한다. 그런거 보면 그가 스카티 부인보다 더 질이 나쁜거 같다. 스카티 부인은 아예 에밀리에게 안 맡기고 자기가 알아서 혼자 장부를 처리했댄다. 아니, 그게 아니라 머리가 엄청 나쁜 것인가? 스카티 부인은 그래도 티 안나게 횡령하려는 노력이라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에밀리가 스카티 부인 밑에서 장부에 끙끙대지 않고 달시를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 티 안나게 하려 했던 스카티 부인이나, 머리가 나빠서 모든 걸 달시에게 덥어씌우려고 했던 - 그렇게 덥어지는게 오히려 이상한거겠지만... - 주방의 뚱땡이나 모두 감사에 걸려서 저택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별관에 자주 얼굴을 보이지 않는 스카티 부인인지라 쫓겨났는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리하여 대신 별관 담당자로 엠브라 부인이 오기는 했는데... 윗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짤려서 인사이동이 좀 많다보니 별관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엠브라 부인이 떡하니 맞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 엠브라 부인이 주방장 뚱땡이의 일까지 같이 맡게 되어 그 부인은 무지 난처했을 것이다. 뭐, 덕분에 그 동안 스카티 부인과 주방장 뚱땡이의 부관 역할을 맡고 있던 에밀리와 달시의 비중이 예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맡은 일도 많아지겠지만... "좋은 일이네요. 축하드려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시오나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에밀리와 달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기나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뭐, 그건 좋은데 말이지... 그와 함께 엄청난 일거리가 떨어진게 문제지." 그러면서 에밀리가 가르키는 탁자에는 엄청난 양의 서류가 쌓여 있었다. "아, 여기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스카티 부인의 관리실이었어. 뭐, 그 부인은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본관에서 했으니 여기는 거의 나 혼자 썼지만... 엠브라 부인도 당분간은 본관에서 하던 일을 마무리 지으시느라 별관에 오시지 못할 거래.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넷은 여기 처박혀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거지." 에밀리가 막 생각났다는 듯 설명을 했지만, 시오나와 선애의 시선은 산더미 처럼 쌓인 서류에 시선이 꽂혀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달시가 설명했다. "저거... 스카티 부인과 주방장의 뚱땡이를 족쳐서 찾아낸 서류들이래. 그들이 그 동안 얼마나 떼어 먹었는지, 이곳 별관에 사용된 비용은 정확히 얼마이며 어디에 사용 되었는지 다시 상세하게 정리해서 보고하라던데?" "저거... 몇년동안의 서류인데요..." 선애가 더듬거리며 묻자 에밀리가 창 밖의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글쎄... 아마 5년 정도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 순간 시오나와 선애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고 하면... 과장일까나? 그날로부터 며칠 동안은 좀 과장을 보태서 그 넷은 서류에 푸욱 파묻혀 살았다. 거기에 꼽싸리 끼인 나도....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해도 해도 끝이 안보이는 서류들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에밀리, 방금 엠브라 부인께 전언이 왔는데 너희들이 처리해야 할 서류가 더 생겼다고 본관 자기 방에 와서 가지고 가래." 별관에 남은 몇 안되는 선배 하녀중 한명이 관리실 문을 빼꼼히 열고 얼굴만 디민 채 전해준 말이었다. 그에 그렇지 않아도 질리게 서류만 보느라 허옇게 된 얼굴들이 이제는 노랗게 변했고 에밀리와 달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가위, 바위, 보오... 앗싸..." 에밀리는 가위, 달시는 보였다. 다른때 같으면 펄쩍 뛰어오르면서 기뻐했을 에밀리는 기운이 다 빠졌는지 축 처진 어조로 기뻐했고 달시는 아예 서류더미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으에... 우리보고 죽으라고 그래..." 그렇게 서류더미 속에 파묻힌 채 꼼지락 대던 달시가 몸을 일으키더니 시오나와 선애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거기 둘 중 한명은 나를 따라와. 설마 나 혼자 서류를 들고 오게 하지는 않겠지?" 달시의 말에 에밀리가 히죽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가위 바위 보 해, 가위 바위 보. 지는 사람이 갔다 오기." 그 말에 서로를 바라보던 시오나와 선애는 씨익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가위, 바위, 보!" "윽..." 시오나는 주먹, 선애는 가위였다. 선애가 울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달시가 선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에밀리와 시오나의 배웅을 받으며 관리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서류를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 때문인지 선애는 처음으로 본관에 가는 것이면서도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못했다. 하기야, 시오나도 그러니까 처음 본관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선애에게 양보(?)한 것이겠지만... 거기다가 저택의 위풍당당한 현관문을 기세좋게 열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뒷쪽의 하인, 하녀들 전용 문을 열고 들어간 거라서 현관은 커녕, 멋들어지게 꾸며진 복도나 계단도 보지 못했다. 하인, 하녀 전용 뒷문으로 들어가 하인, 하녀 전용 복도를 지나서 엠브라 부인 방에 들러 이따시만한 서류더미만 받아서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아... 이제 사흘 정도만 더 고생하면 되겠지... 했는데... 이걸 보니 언제나 끝낼지 아득하기만 하네요." 양 팔 가득 들고 있던 서류더미를 내려다보며 선애가 한숨을 내쉬자 달시도 같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동감이야. 이제야 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나... 싶었는데..." 밖으로 나오는 하인 하녀 전용 뒷문에 선 달시가 들고있던 서류를 한 팔로 지탱한 채 한 손으로 문을 열려는 순간, 밖에 있던 누간가가 먼저 문을 벌컥 열고 말았다. "어어..." 그 바람에 문고리에 가볍게 손을 얹고 있던 달시가 약간 비틀거렸고, 그와 함께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가 와르르 쏟아졌다. "아앗, 선배." 당황한 선애가 잽싸게 들고 있던 걸 거의 던지듯 내려놓고는 밖으로 날려간 서류들을 주우러 가자 달시도 잽싸게 자리에 주저앉아 흩어진 서류들을 모았다. "이런, 정말 미안해요. 있는 줄 몰랐거든요." 그러면서 같이 주저앉아 서류를 주워주는 이는... '오옷, 저자는 부드러운 꽃미남이잖아?'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에 달시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이 곳 하녀들 사이의 스타 꽃미남 엘리엇 제네비아가 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도와줄께요." '크허... 저런게 살인미소지.' 그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달시가 황급히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 예, 옛, 감사합니다." '오호라... 꽃미남 추종자가 한명 더 늘게 생겼네.' 달시의 당황하는 모습에 나는 씨익 웃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빨랑 가서 도와주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선애에게 뭔 소리를 들을지 몰라서였다. 그런데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선애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허걱, 저 자는 얼음왕자인 자작?' 선애는 자신을 도와 서류를 주워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바람에 흩어지기 전에 서류를 줍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에 옆에 있는 남자가 네가 그렇게 한번 구경해보고 싶어하던 그 얼음왕자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정신 없이 움직이는 선애를 방해하기도 그래서 뻘쭘히 옆에 선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대충 주변에 있는 걸 주운 선애가 더 없는지 살펴보는데 그 앞으로 얼음 왕자가 자신이 주운 서류를 쓰윽 내밀었다. 그러더니 한다는 소리가... "서대륙인?" '뭐냐, 저놈은... 내 동생을 봤으면서도 그 이야기 밖에 안 나오니? 네놈 눈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저렇게 예쁜 애를 앞에두고 그 말 밖에 못하다니...' "예에... 그런데요?" 하도 서대륙인, 서대륙인 소리를 들어서 이제 선애는 으례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래 이번에도 대답을 하며 서류를 받아드는데 얼음왕자가 갑자기 선애의 턱을 잡아채는 것이었다. '어헉, 저 놈이 감히 누구에게...' 그리고는 놀라서 둥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애의 얼굴을 빤~ 히 바라보더니 턱을 놔주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검은색 눈이라... 정말 신기하군." '크헉헉... 저, 저놈이... 야, 네놈의 회색 눈이 더 신기하다 이놈아. 누굴 신기한 애완동물 취급하고 있어?' 선애도 그런말을 듣고는 무지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러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는 녀석의 뒤로 몰래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인 걸 보면 말이다. "/뭐야, 저 인간... 사람을 뭘로 취급하구.../" [저놈이 바로 그놈이야. 하녀들 사이에서 화자 되고 있는 얼음 왕자. 후작가의 후계자 말야.] "/그래? 쳇... 잘 생기긴 했네.../" [저 안에 꽃미남도 있던데... 달시를 도와주더만?] "/뭐? 그런 건 진작에 이야기를 하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선애는 서류를 움켜쥔 채 쌩하니 안으로 들어갔지만, 거기에는 꽃미남은 간데 없고 달시만이 멍한 표정으로 안쪽만 - 아마도 그 꽃미남이 걸어간 방향 이겠지만... -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정말 살인 미소였어." "아앗, 선배 그 꽃미남이라는 사람 봤어요? 그렇게 잘 생겼어요?" 무지 아깝다는 듯한 표정의 선애를 향해 달시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무지 잘생겼더라... 나 본관에 오길 잘한 거 같아... 선애야, 이런게 바로 운명일까나?" '운명 까지야...' 제 7화 "나나 나나나 나나나나 나나..." 거울을 보며 흥얼거리는 달시의 모습에 에밀리와 선애의 시선이 마주치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본관에 갔다가 엘리엇과 마주친 날,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손바닥 두개를 합쳐 놓은 정도의 크기의 거울을 가지고 와 방에다 놓고는 틈만 있으면 들여다보기 시작한 달시였다. "빠졌군... 완전히 푸욱 빠졌어." 에밀리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전에는 하는 일의 양이 너무 많아서 거울 보는 것도 아주 가끔이었지만, 요즘에는 대충 일이 마무리 되어 여유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하도 그러다보니 이제는 나머지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이 저택에 그 엘리엇에 푹 빠져서 소녀의 순정을 품고 있는 하녀가 어디 한둘 이었던가 말이다. 그나바 본관 하녀들은 자주라도 볼 수 있었지만, 에밀리나 달시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본관에 가지도 못했다. 아마 그래서 에밀리가 달시의 저러한 태도를 그냥 보고만 있는지 모르겠지만... "달시, 네 마음에 상처를 주려는 건 아닌데... 네 라이벌이 좀 많은 것 같더라." "훗, 하는 수 없지. 엘리엇님이 너무나 잘나셨으니... 하지만, 괜찮아. 나는 할 수 있어." 자신있는 다부진 대답. 하기야, 그녀는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제법 귀엽고 단아하게 생긴 용모라 잘만 꾸민다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자신이 있는 거겠지만... 그녀의 대답에 선애가 슬며시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옆에 앉은 시오나를 바라봤다. 하지마 시오나는 선애의 눈길에 답해 줄 마음이 없었는지 멍~ 한 눈길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오나?" 선애가 의아하게 바라보며 부르자 시오나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으응? 왜?" "아니... 별 일은 아니고... 요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으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선애의 걱정스럽다는 질문에 시오나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어보이더니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거 같은데..." 선애가 슬쩍 나를 보며 중얼거리자 나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나가 요즘들어 갑자기 가을을 타는 건지 이상하게 말수도 적어지고 지금처럼 머엉~ 하니 있는때도 많았다. 선애의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을 들은 듯 투닥투닥 장난치던 에밀리와 달시도 시오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둘 또한 하루의 많은 시간을 시오나와 함께 보내는 사이였으니 시오나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선애 말대로 아무것도 아닌거 같아. 시오나, 너 확실하게 무슨 일 있는 거지?" 선 채로 놀고(?) 있던 달시가 시오나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에 양 손을 처억 올리고 직설적으로 묻자 또다시 멍~ 의 세계에 빠져 들려던 시오나가 현실 세계로 황급히 돌아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계속 그렇게 멍하니 있니? 누가 보면 사랑에 빠진 줄 알겠다." 시오나의 황급한 부정에 달시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에밀리도 한 마디 거들었는데 그게 정곡이었던 듯 에밀리의 말에 시오나의 몸이 움찔 거리더니만 얼굴이 빠알갛게 물드는 것이었다. 그에 놀란 건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던진 에밀리였다. "뭐, 뭐야... 정말 그랬던 거야?" "진짜야?" "시오나?" 에밀리 말고도 달시와 선애가 묻자 시오나가 더 빨개져서 아예 토마토 같이 된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싼 채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뭐야, 그럼 짝사랑이냐?" 달시의 말에 시오나의 고개가 푸욱 숙여지더니 모기만한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저도... 모르겠어요오..." "호오, 시오나가 드디어 첫 사랑을 하게 된 건가? 축하한다. 너도 이제 여자가 되었구나." 달시의 장난스러운 말에 푹 숙여진 시오나의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시오나의 가슴에 봄바람을 불어 넣은 사람은 누굴까아? 시오나아~ 당장 불거라아~" 에밀리까지 시오나에게 다가와 팔로 그녀의 목을 장난스럽게 조르며 물었지만 시오나의 입은 꼬옥 다물린채 열려지려 하지 않는 거였다. 그 모습에 달시가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얘, 너 혹시 엘리엇님에게 반한 거니? 그래서 나 때문에 말 못하는 거야? 어우 야, 엘리엇님께 반한 애들이 어디 한둘이니? 나 때문이라면 난 괜찮아." 그러자 시오나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엘리엇님이... 아니예요. 저는 그 분 얼굴도 보지 못한 걸요." "아, 그러고 보니 시오나는 본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 에에, 그럼 도대체 누구야? 여기서는 남자를 보기도 힘들텐데... 허걱, 너... 호, 혹시..." 고개를 갸웃 거리던 에밀리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자 우리도 덩달아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왜, 혹시 짐작 가는 인물이라도 있어? 누군데 그래?" 달시의 재촉에 에밀리가 설마 설마 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별관에서 볼 수 있는 분이라면... 그레샴 부 집사님, 아니 총 집사님이시잖아. 얼마전에도 한번 왔다 가셨으니까..." 설마...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그레샴 총집사는 선애가 이 곳에 들어올때는 부집사였다가 얼마 전에 일어난 대규모 감사때 총집사가 짤리고 그는 무사히 살아 남아서 지금 현재 총집사가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40대 후반의 남자였던 것이다. 생김새는... 뭐, 나쁘지 않은 생김새에다가 중년의 중후한 멋까지 풍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 아니예요오~~" 역시나 에밀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오나가 다급하게 얼굴까지 도리질치면서 부정했다. 그때 에밀리와 달시가 묘하게 씨익 웃으며 시선을 주고 받는 거 보니 아무래도 에밀리는 단지 장난을 치려고 한 거 같았다. 그리고 그걸 금방 끝내지는 않으려는지 달시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호라...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진짜인거 아니야?" "선배애애~~ 아니라니까요." 시오나가 다시한번 강력하게 부정했지만, 선배들의 음흉한 미소를 더욱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 "아아, 너무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돼. 그레샴 총 집사님도 은근히 인기 있거든. 중년의 중후한 멋이라나 하면서 말이지." "맞아, 맞아. 엘리엇님과 그랜트님이 오시기 전에는 인기도 상위권에 들었대." "아니예요오오... 선애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선배들이 도저히 자신을 믿어주는 것 같지 않자 시오나는 선애에게 도움을 요청 했지만... '시오나야, 넌 도움 요청할 곳을 잘못 골랐어...' 이미 선애의 입술도 재미있음으로 인하여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오호라... 그랬구나 시오나... 나는 정말 몰랐어. 앞으로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내가 힘껏 도와줄께." 그러자 울상인 시오나의 표정. 그 표정이 바로 '부르터스 너마저...'란 표정이겠지.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아아~~" 그 뒤로도 그 셋은 한동안 시오나를 데리고 장난 치다가 시오나가 부정하다 부정하다 결국 지쳐서 엎어지자 그제야 장난을 멈췄다. 참으로... 죽이 잘 맞는 셋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밀리와 달시야 원래 친구였으니 그랬다 치고, 울 꼬맹이는... '시오나야, 네가 선애와 친구가 된 다음 이렇게 되는 것이 네 운명이었단다...' 고등학교 올라와서도 친구 녀석들이랑 아이스께끼를 하고 노는 꼬맹이였으니... "정말 누군지 말 안해줄 거야?" 하루 일과를 대충 마치고 숙소로 올라가는 길에 선애가 시오나에게 속삭였지만, 낮에 신나게 장난에 당한 시오나는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흥... 몰라." "에게... 삐졌어?" "모른다니까." "으흐흐흐... 귀엽게 놀기는..." 내가 봐도 양 볼을 부풀리며 팽돌아진 시오나가 귀엽기는 했지만, 그걸 보고 웃는 선애의 모습은 정녕 나도 놀랄만 했다. "허걱... 선애야, 너 원래 그런 애였어?" 시오나 또한 놀랐는지 선애의 음흉한 모습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그냥 귀엽다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천연덕스러운 선애의 표정에 시오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부디... 다른데 가서는 그러지 말아라." "됐네요. 아, 그건 그렇고... 정말 말 안해줄 거야?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냐?" 다시한번 물어오는 선애의 질문에 시오나는 방금전과는 달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되게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서... 아아...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오호... 첫사랑의 미숙한 감정이란 말이냐?" "몰라..." "그래, 대상은?" 은근히 다시금 물어보는 선애에게 시오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안.가.르.쳐.줘! 흥~" 그러나... 시오나가 아무리 안 가르쳐 주려고 애를 써봤자, 행동 반경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신입 하녀의 짝사랑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건 조금만 신경 쓴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내가 옆에 있는 선애의 경우는... '시오나... 미안하데이...' 사실 선애의 부탁이 없었다 하더라도 내가 궁금해서라도 알아봤을 거였다. 다음 날 점심시간이 되자 시오나는 꽤나 맛있어 보이는 점심에느 눈길도 주지 않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이런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최소한 어제 점심시간이었다면 - 시오나가 세명에게 놀림을 당한 건 나른한 오후시간 이었으니... - 이 핑계는 먹혀 들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어제도 그제도 시오나는 핑계를 대고 점심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비웠었다. "저런, 심하면 약을 구해줄까?" 달시가 능청스럽게, 무지 걱정스럽다는 듯 묻는다. 목소리만 들으면 진짜 걱정하는 줄 알겠지만, 눈에서는 장난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뇨, 그렇게 심한 건 아니예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겠죠." 시오나가 조심스레 거절하자 이번에는 에밀리가 나섰다. "그래도 혹시 더 심해질지도 모르잖아. 혹시라도 모르니 약을 가지고 있는게 어때?" "정말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오나가 생긋 웃으며 대답한 뒤 나가려고 하자 이번에는 선애가 괜히 말을 건다. 평소에는 안 그런 주제에 갑자기 챙겨주는 척 하면서 말이다. "네 점심 챙겨놔줄까? 나중에라도 먹을 수 있게끔 말이야." "아냐, 고맙지만 괜찮아." 사양하며 얼른 움직이려는 시오나의 발목을 야속한 달시의 목소리가 다시 잡아챘다. "어머, 그건 안 좋아. 식사는 제대로 해야지." "그래, 나중에라도 배고플 수 있잖아." 에밀리까지 거들고 나섰다. 언제부터 이렇게 후배의 식사까지 챙겨주는 섬세하고 자상한 선배들이 된 것일까나. 시오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자꾸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지체되자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초조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럼, 부탁할게. 전 이만 실례..." 시오나는 더 이상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빠르게 말한 뒤 잽싸게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방 안에는 순간적으로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풋' 하고 새어나온 웃음을 막지 못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사악한 세 여자들은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려다. "푸하하하~~~" "아하하하하~~~" "키득 키득 키득..." 달시와 에밀리는 배를 부여잡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선애는 차마 선배들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는지 탁자를 부여잡고 숨죽인 웃음을 터트렸다. '쯧쯧... 사랑에 빠진 애 데리고 장난치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남? 뭐, 덕분애 재미있는 구경을 하기는 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시오나가 자리를 비운다고 하면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선선히 '그래.'라고 한 마디로 허락 했던 것이다. 그런게 어제 시오나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들키자마자 바로 행동을 180도 바꿔서 후배 놀리기에 나서다니... 될 수 있는 한 못 가게 잡아서 안달하도록 말이다. 황급히 걸어가는 시오나는 이들이 자신을 놀렸다는 걸 알라나 모르겠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사랑에 눈이 멀면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미리 짠 것도 아닌데 이리 손발이 척척 맞다니, 참으로 대단한 세명이 아닐 수 없어다. 그렇게 한바탕 웃어대던 셋이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진정하자 달시와 에밀리가 은근한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이젠 눈길만 봐도 척하면 착 하고 알아듣는 수준까지 도달했는지 그들의 눈빛에 선애는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자기 몫의 점심을 챙기는 건 잊지 않고 말이다. 선애가 점심을 들고 밖으로 나서자 에밀리와 달시가 한마디씩 던지면서 배웅했다. "덜키지 않게 조심해야 해." "부디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아와." "네에~!" 선배들에게 호언장담처럼 씩씩하게 대답한 선애였지만, 건물을 나오자 시오나를 따라갈 생각은 안 하고 인적 없고 경치 좋은 명당 자리를 찾아 앉더니만 챙겨온 점심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언니, 부탁해요~" [그려, 그려. 내 너에게 뭘 바라겠냐.] 이제는 그러려니... - 교육 잘못 시켰다고 푸념하는 것도 포기했다. - 하고는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선애가 이런 부탁을 할 줄 알았기에 아까 시오나가 나갔을 때 그녀가 가는 방향을 잘 봐두었던 것이다. 유령만큼 이런 일에 적합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벽도 다 뚫고 다닐 수 있으며, 바로 옆에 있어도 보통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하니 숨을 죽이기는 커녕 조용히 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007이 무지 부러워 할 능력이지... 단지 선애 외에는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뺀다면...' 입맛을 쩝쩝 다신 나는 시오나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잽싸게 뛰어갔다. 이곳 후작가 저택에는 거대한 본관 주위에 신입 하녀들용 별관 말고도 건물이 세개나 더 있었다. 선애가 머무는, 신입 하녀들을 위한 별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 내 걸음으로 대략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 - 곳에는 신입 하인들을 위한 별관이 있었다. 마치 기숙사가 여자 기숙사, 남자 기숙사로 나뉜 것 처럼 말이다. 하녀나 하인들이 허락 없이 상대방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밖에서 하인 하녀들이 교제 하는 건 딱히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봤자 신입 하녀들은 건물 바깥 멀리까지 나올 일이 없어 쉽게 옆 건물 남정네들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만나는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나는 시오나가 그쪽으로 향하기에 신입 하인용 별관의 누군가가 - 신입 하인용 이라고는 하나 신입 하인만 있는 건 아니니까 - 그 대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오나는 이런 내 예상을 그대로 가볍게 깨버렸다. 신입 하인용 별관쪽으로 잠깐 향하는 듯 하더니만 슬그머니 방향을 약간 틀어 멀찍이 그 건물을 돌아 지나치는 것이었다. 자신을 주의깊게 보는 사람이 없어 거의 뛰다시피 한 빠른 걸음으로 걷더니만, 그것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아예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신입 하인용 별관과 약간 떨어진, 나무들이 꽤나 울창하게 가꾸어진 곳이었다. 뭐, 울창하다고 해도 일반 야생 숲처럼 무질서한게 아니라 사람의 손길이 닿은, 단정하게 가꾸어진 인공 수풀이었다. 이 수풀은 위에서 보면 U자 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커다란 마굿간을 놓고 있었다. 많은 말들을 데리고 있으니까 아마 냄새도 좀 희석 시키고, 또 말들을 운동도 시킬때 사용하는 용도로 조성해놓은 듯 U 자형을 이룬다고 해도 그 수풀의 두께가 상당히 두터웠다. 사람 여럿 정도는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시오나는 바로 그 수풀 가까이에 오자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멈추더니만, 잽싸게 자신의 윤기나는 탐스러운 밤색 머리를 가리고 있는 볼품없는 머리쓰개를 벗어 버리고 이마에 송송 솟아나온 땀을 닦고 자신의 옷차림을 반듯하게 하는 등 깔끔을 약간 떤 다음에야 수풀 안으로 발걸음을 디밀었다. '오호라... 바로 이 속에서 사랑의 밀회를 나눈다는 것이렸다?' 달려오느라 그런 건지, 아니면 앞의 일을 기대하느라 가슴이 뛰어서 그런건지 모르지만 볼이 빠알갛게 상기된 시오나의 모습은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여자는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더니...' 그런 시오나가 조심스레 찾아간 곳에서는 그 울창한 숲에서도 제법 굵직하고 커다란 나무였다. 그 나무 또한 울창해서 장정 두 셋이 누워도 충분히 햇볕을 가려줄 그늘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그늘에는 마치 잔디가 깔린 것 처럼 자잘한 야생풀들이 솟아나 있어 더운 여름날 오후 같은 때 낮잠 자기 딱 좋은 명당자리로 보였다. 그러한 명당 자리에는 누군가가 이미 누워서 기분 좋은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적게 잡아도 180은 충분히 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우락부락까지는 아니더라도 단단한 근육이 잡힌 몸매를 가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마치 오늘 입대하는 사람처럼 굉장히 짧게 깎은 머리에 날카롭게 각이 진 얼굴은 얼굴에 흉터가 없어도 검은 정장만 입혀 놓으면 누구라도 '형님~'이라고 할 만한 인상이었다. '시, 시오나... 너... 이런 취향이었더냐?' 뭐, 여자들 중에 강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신경이 예리한 편이었는지 시오나가 조심스레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워지자 눈을 번쩍 뜨고는 시오나를 바라봤다. 눈을 뜨니까 사람이 한층 더 무뚝뚝해 보이는게 나 같으면 분위기에 쫄아가지고 쉽게 말도 못 붙일 것 같았다. 그런데도 시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아, 물론 미안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앗, 제가 깨운 건가요?" 그러자 남자는 팔배게를 하고 있던 팔을 쭈욱 펴 기지개를 한껏 키더니만 일어나 앉았다. "아냐,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 '무지 잘 자고 있던 거 같은데...' 그런데 시오나는 남자가 거짓말을 하던 진실을 말하던 상관 없던지 배시시 웃으며 그 남자 옆에 살포시 앉았다. 남자의 인상에 기가 죽어 있었던 바람에 몰랐던 남자의 옷차림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는데, 남자는 이 곳 하인 옷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거 보면 하인이 아닌 거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특징 있는 옷차림이 아니라 그냥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셔츠에 바지, 그것도 좀 오래 입고 다녀 약간 낡아 편하게 보이는 옷차림이라 뭔가 대단한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선배 하인인데... 시오나를 만나러 나오느라 하인 복을 갈아 입은 건가?' '그냥 선배 하인인데... 시오나를 만나러 나오느라 하인 복을 갈아 입은 건가?' 이러한 나의 궁금중에는 상관 없이 둘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점심은?" 남자의 질문에 시오나가 배시시 웃으며 얌전히 고개를 저어 보인다. '크허헉.... 시오나, 네가 언제 그리 얌전한 요조 숙녀 였드냐? 선애 못지 않은 왈가닥 이었던 거 같은데... 아무리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내가 속으로 놀라든 말든 남자는 시오나의 행동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옆에 준비해 둔 자주색의, 꼭 자그마한 조롱박 처럼 생긴 과일 두개를 집더니 시오나에게 하나 건넸다. "먹어라."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너무 무뚝뚝해서 있던 정도 얼어붙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라. 인상 험악한 사람이 무뚝뚝하게 말하는데... 사람이 얼굴 생김새 갖고 편견을 가지면 안되지만 나는 솔직히 한 순간 그 남자가 시오나를 협박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걸 보고 깨달았다. '인상이란... 분위기 까지 좌우하는구나...' 하기야, 생각해보면 부드러운 꽃미남이라 일컬어지는 엘리엇 제네비아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에 꽃을 ㅜ리는 것만 같이 않은가 말이다. 뭐, 보통 인상의 사람이라면 분위기를 좌지우지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데 시오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척이나 기쁘게 환히 웃으며 그 과일을 받아드는 것이었다. 벌써 그 남자에게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눈에 콩깍지가 씌워 남자의 무서운 분위기가 보이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오나는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말했다. "너무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의례적으로 내뱉는 것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시오나는 마냥 좋은 듯 싱글벙글 이었다. '으이구... 좋아 죽는구먼. 입이 아예 귀에 걸렸는데? 시오나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오게 했다. 그렇게 한본 웃고나니 왠지모르게 경직된 마음이 풀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총각은 원래 성격이 무뚝뚝한 것 뿐이지 인상처럼 무섭거나 거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다정한 성격인지도...' 시오나가 점심을 안 먹고 나올 것에 대비하여 먹을 것을 챙겨 온 것이라든지, 무뚝뚝 하기는 하지만 대답은 꼬박 꼬박 해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쩌면 그런 다정한 면이 시오나에게만 국한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흐응, 그럼 그게 시오나를 좋아한다는 증거가 되겠지?' 내가 지켜보는 동안에 시오나는 자색 열매를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하기야, 그 크기가 내 주먹만했으니 시오나의 먹는 속도가 약간 느리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남자 앞이라서 그런지 얌전 떠느라 먹는 속도가 느려진 것 같았다. '쯧쯧, 저 내숭이 언제까지 가려나...' 그러자 남자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알아챘는지 큼지막한, 버터와 잼이 발린 빵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에 시오나가 기꺼이 받으며 생긋 웃자 남자 또한 마주 웃어주느라 입꼬리를 올리는데... '에엥? 저게... 기분 좋게 웃어주는 거야, 아니면 비웃는 거야? 인상이 안 좋은 사람은 참 여러모로 손해보는 게 많은 것 같다. 다행이 시오나가 그걸 좋게 보아 넘기길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간 빵을 입 안으로 넘기기는 힘들었을 듯 싶다. 시오나는 평소에는 손에 쥔 빵을 입을 크게 벌려 커다랗게 한 입씩 뜯어먹는 주제에 이번에는 얌전을 떠느라 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뜯어 입에 넣어 먹었다. 그것도 입도 아주 자악~게, 작게 뜯어진 빵이 겨우 들어갈 만큼 작게 작게 벌려서 말이다. '푸하하하... 아... 나원 참... 시오나... 귀엽구나아...' 그렇게 먹어도 빵은 한계가 있는 것이라 어느새 다 먹고 말았다. 시오나가 아쉬운 듯 손에 뭍은 빵가루를 털자 남자가 힐끗 보더니 물었다. "더 줄까?" "아, 아니요. 배불러요." "배 안 부르면서 거절하지 말고. 더 있으니까..." "아뇨, 정말이에요." 남자의 말에 시오나가 두 손을 저어보이는 것도 모자라 고개까지 저어 보인다. '쯧쯧, 이 둔한 남자야. 여자의 마음을 몰라주다니...' 시오나는 남자가 더 먹으라고 권할까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잠깐 머뭇대다 여전히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저어... 이만 가봐야 겠어요." "그래." 아쉬움이 가득한 시오나의 말에 비하여 전혀 아쉬움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깔끔한 대답이었다. "내일도... 와도 돼요?" 머뭇대며 조심스레 묻는 걸 보아하니, 아직은 정식으로 사귀는 단계는 아닌 듯 싶었다. 아무래도 시오나쪽 감정이 더 큰 듯... '하기사... 별 대화 없는 데이트였으니...' 나는 데이트가 저리 단순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뭐, 사랑하는 사이라면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지만 말이다. "좋을대로." 역시나, 깔끔 담백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시오나는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얼굴 가득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은 저도 뭘 좀 가지고 올 게요. 그럼 내일 뵈어요." '어이, 어이... 시오나 너는 식당 부엌에 들어가지도 못할텐데 어떻게 음식을 마련하겠다고...' 그러나 내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시오나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뭐, 몇 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또또 돌아보고는 했지만, 시오나가 간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놀라 달리기 시작했다. 최소한 시오나 먼저 선애를 데리고 돌아가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비록 남자의 신상명세서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거야 나중에 내가 몰래 조사를 하던가 시오나를 닥달하면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시오나를 뒤에 두고 빠르게 달려가니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선애가 날 보고 반색을 했다. "/왔어? 만나는 거 봤지? 어때?/" 초롱초롱 눈을 빛내면서 묻는 걸 보니 피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선애도 로맨스를 좋아하는 10대 소녀였던 것이다. [저기 마굿간을 감싼 수풀 속에서 만나더라. 그런데 남자가 조폭처럼 생겼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그으래? 흐음... 시오나에게 잘 해줘?/" 선애의 눈빛에 약간 실망하는 기가 흐른다. 아마도 꽃미남이나 얼음 왕자 만큼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남자와의 로맨스를 바랬던 모양이다. 하기야, 나도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그런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잘 모르겠더라. 내일도 만난다니 그때 네가 직접 가서 봐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선애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는 거였다. "/에휴... 하기사, 언니는 연애 한번 못 해봤으니... 쯧쯧, 억울하지?/" '인석이 갑자기 사람 아픈데를 콕콕 쑤시다니...' [쳇, 누가 하기 싫어 안 했남? 인연이 안 닿으니 어쩔 수 없잖아.] "/으이그... 언니는 인연을 아예 찾을 생각도 안 했잖아. 그러니 있는 인연이라도 닿을 수나 있엇겠어? 에휴... 어디 몽달 유령이라도 없나?/" [시끄, 시끄, 됐네요.] 다음 날 점심시간, 시오나는 또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선애에게서 미리 언질을 받았던 달시와 에밀리는 오늘은 무슨 변명을 댈지 무지 기대 된다는 시선으로 시오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오나는 어제처럼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배들의 시선을 마주보며 씨익 웃는 것이었다. 그에 선배들도 영문을 모르고 같이 씨익~ 하고 웃어주자 시오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 저 데이트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변명을 대느라 진땀을 빼던 녀석이었는데 갑작스레 스트레이트로 직구를 날리자 달시와 에밀리는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었다. "어, 그, 그래라..." "잘 다녀와..."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시오나의 태도에 벙 쪄서 어제처럼 못 가게 붙잡아두는 장난도 못 치고 얼결에 허락하는 한 마디를 내뱉자 시오나는 선애를 향해서도 생긋 웃어보이며 인사하는 것이었다. "갔다 올게." 선애 또한 시오나의 직구에 한방 먹은 터라 풀린 표정을 채 수습하지 못한 채로 마주 인사했다. "어, 그래..." 시오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가버리자 두 선배의 놀라움이 담긴 시선애 선애를 향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시오나가 이미 너에게 다 털어 놓은 거야?" 달시의 추궁에 선애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아니에요. 저에게는 입도 뻥긋 안 했는 걸요." "그럼 우리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챘나? 너, 혹시 어제 미행 했을 때 들킨 거 아냐?" "설마요. 그럴 리 없어요." '맞아, 미행은 내가 했는 걸.' 선애의 부정에 에밀리가 달시를 돌아봤다. "어제 우리가 너무 놀렸나? 그래서 눈치 챘을지도..." "좀 심했나? 에이 재미없게시리... 오늘도 장난칠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는데..." 달시가 아깝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하는 수 없지. 그래도 뭐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잖아? 감히 선배들을 제치고 먼저 애인을 만들다니... 그 댓가를 치뤄야 하지 않겠어?" 에밀리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 에밀리도 은근히 사악한 구석이 있다. - 달시도 웃었다. "우흐흐흐... 당연한 말씀." 그런 둘의 모습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선애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도 자리를 좀 비울게요." 미행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하는 법. 시오나가 나가는 즉시 쫓아 나간다면 들킬 염려가 있었기에 일부러 약간 기다려 줬던 것이다. 어차피 그녀의 목적지는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선애가 어디를 가려하는지 알고 있는 선배들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선애를 배웅했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너무 가까이 붙으면 들킬 지도 모르니까 주의해." "네에~" 그런 선배들에게 선애는 여유있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며 너무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기대감으로 가득 차 반짝이는 선애의 눈동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선애는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기대가 되어가지구. 짜슥이 기특하게 이 언니를 제치고 선수치다니 말이야./" 별관 밖으로 나와보니 시오나가 저~ 멀리서 자그마하게 보였다. "/빠르네... 아무리 내가 느긋하게 나왔다지만.../" 그 모습을 보며 선애는 얼른 자신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옷, 나 여기는 처음 와봐./" 시오나가 사라진, 거대한 마굿간을 감싸고 있는 숲으로 조심스레 들어가며 선애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하기야 신입 하녀들 중 여기까지 와본 이는 아마도 시오나를 제외하고는 오늘 선애가 처음일 것이다. 그만큼 신입 하녀들의 별관에서 여기는 좀 먼 거리였던 것이다. [쉬잇, 이제 조용히 해. 여기는 인적이 별로 없어서 조금만 큰 소리를 내면 들킬 수 있단 말이야.] "/알았어./" 내 말에 선애가 작게 속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조심해서 오고 있어. 시오나가 어디 있는지 찾아볼테니까. 소리는 될 수 있는 한 내지는 말고.] "/응, 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시오나와 그 남정네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기야, 아무리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이라고 해도 시오나와 그녀의 애인일지도 모를 남자가 차지하고 있는 명당자리는 쉽게 발견되는 게 아닐터였다. [조심해서 따라와. 저쪽이야.] "/응, 응./" 숲에 들어오기 전에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선애의 입에서 므흐흐하는 웃음 소리가 나올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선애를 데리고 다시 시오나와 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레 다가가자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을 펼쳐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모습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좀 멀~ 찍이 자리를 잡고 관찰(?) 했는데 조용한 숲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자 -그들도 작게 속삭이고 있기 때문에... - 좀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조금만 가까이 가자./" [위험해. 그냥 여기서 봐.] "/조금이면 괜찮겠지./" 그러면서 선애가 다섯 발자국쯤 다가갔다. 하지만 그래도 들리지 않는 거였다. "/젠장, 조금 더 가야하나?/" [야, 야, 조심하는게 좋지 않아?] 내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선애는 시오나쪽에서 별 달리 눈치 챈 기색이 없어 보이자 조심스레 몇 발자국 더 다가갔다. 하지만 그래도 안 들렸다. [그만 다가가. 너무 가까이 간 거 같아. 차라리 내가 중간에서 통신기 역할을 해 주마. 나는 큰 소리로 말해도 괜찮잖아.] 그렇게 말한 나는 선애가 뭐라 하기도 전에 시오나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무표정하게 그냥 숲을 바라보던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지더니 똑바로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내 오는 것이었다. 약간 멍하던 시선이 날카로운 빛을 보내면서 말이다. 정확히 날 보는 건 아니고 내 뒤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선애가 정말 있는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선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을 찌푸리고 봐야 수풀 밖으로 약간 삐져나온 옷자락이나 나무 뒤에서 빼꼼이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겨우 볼 정도? 그런데도 그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그래 통신기 역할이고 뭐고 그대로 몸을 돌려 선애쪽으로 후다닥 뛰어왔다. "/왜, 왜 그래?/" 다급한 내 모습에 선애가 덩달아 긴장한 채로 작게 숨죽여 묻자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돌려 남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지금은 시선을 다시 돌렸지만, 아까 선애쪽을 정확히 바라보던 눈길을 잊을 수 없었던 나는 선애의 손목을 잡고 뒤쪽으로 이끌었다. [남자가 예리한 거 같아. 아까 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단 말야. 뭔가 눈치를 챈 건지도 몰라. 조금만 뒤쪽으로 가.] 선애는 뭐라 항의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팔을 잡아 끌자 어쩔 수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단지 몇 발자국 뿐이었기에 나는 이걸로도 괜찮을지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대충 얼굴도 봤고 어제도 점심 먹고 그냥 헤어지는 것 뿐이니 오늘도 그럴테구... 게다가 너도 점심 먹어야 하잖아.] 내 말에 선애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남자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단 말이야. 앉아 있어서 키가 얼마나 큰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더 이상 가까이 갈 수도 없는 걸. 왠지 저 남자 예민한 거 같단 말이야.] "/언니가 그냥 착각한 거 아냐?/" [그러면 좋겠지만... 그래도 가까이 다가가는 건 위험하다고 봐.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자.] 나는 재차 그냥 갈 것을 권유했지만, 선애는 여기까지 와서 제대로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냥 우연인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 볼까? 어차피 시오나도 우리가 눈치 챘다는 걸 아니까... 산책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걸로.../" 선애가 망설이는 동안 혹시나 남자가 또 이쪽을 볼까 싶어서 고개를 쭈욱 내밀고 살펴보던 나는 선애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산책을...] 그래 선애의 말의 맹점을 지적하며 고개를 돌리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선애는 이런 내 모습을 보지 못하고 혼자서 계속 말을 이었다. "/으음... 역시 그건 좀 말이 안되겠지? 평소 다니지 않던 산책을 나왔다는건 시오나가 믿지도 않을 거야. 차라리 그냥 대놓고 궁금해서 왔다고 하는게 나을 거 같은... 응? 왜 그래?/" 나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 날 쳐다보던 선애는 그제야 내가 굳어있는 걸 발견하고는 물었지만, 나 보다도 먼저 선애 뒤에 불쑥 나타난 존재가 선애에게 말을 걸었다. "혼잣말을 하는 게 취미인가보지? 그건 서대륙 언어인가?" 얼음 왕자였다. 운동이라도 한듯 가벼운 옷차림에 이마가 약간 땀에 젖은 그는 신기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잣말을 하는 게 취미인가보지? 그건 서대륙 언어인가?" 얼음 왕자였다. 운동이라도 한듯 가벼운 옷차림에 이마가 약간 땀에 젖은 그는 신기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모습에 선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입도 벙긋 못한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얼음왕자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으니까... 정말 흑진주 같군." '흑진주? 갑자기 웬... 설마, 선애 눈을 말하는 거야?' 그의 말에 그제야 정신 차린 듯 선애는 눈을 몇번 깜빡 거리더니만 느닷없이 허리를 숙이며 외치는 거였다. 말 그대로,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루빈스타인 도.련.님 아니시옵니까아~" 특히나 '도련님'자를 강조하며 말이다. 돌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번에는 그랜트 루빈스타인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선애는 계속 이어서 외.쳤.다. "도.련.님이 계시는 줄 모르고 감히 제가 돌아다녀서 정말 죄송하옵니다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사옵니다아~" 그러더니 허리를 살짝 숙인 상태에서 힐끔 뒷쪽으로 눈길을 주고는 더욱 더 그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그 상태로 냅다 뛰어서 순식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얼떨떨한 상황에서도 선애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선애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시오나에게 여기 그랜트 루빈스타인이 나타났으니 데이트는 후딱 치워 버리고 몸을 피하라고 경고를 해준 거였다. 조용한 숲속이었으니 선애가 외친 고함소리는 분명 시오나 커플에게 들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혹시나 싶기도 했고 확인도 해볼 겸 나는 여전히 황당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멍하니 서 있는 그랜트를 냅두고 시오나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랬더니 과연, 시오나와 그 남자는 잽싼 동작으로 주변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시오나는 무지 당황한 표정으로 흔적이 남겨졌을까봐 주변을 다급하게 훑어 보고 있었는데 반해 남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피식 피식 웃고 있었다. "아주 의리 있는 친구를 뒀군. 나중에 가면 고맙다고 전해줘." "예? 아..."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시오나가 순간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지만, 곧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 자신도 같이 피식 웃어보였다. "꼬옥 전할게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손을 들어보이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고 시오나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러나 서둘러서 그 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서두르는 시오나를 쫓아 하녀들이 사용하는 건물로 돌아가보니, 선애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건물 입구에서 서성 거리고 있다가 시오나의 모습이 보이자 반색하며 다가왔다. "시오나, 괜찮아? 무사히 돌아온 거야?" 그런 선애를 시오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보더니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다시피. 선애 덕분에 무사히 왔지. 아, 드렉이 고맙다고 전해달래." "드랙?" 처음 듣는 이름에 의아한 표정으로 선애가 되묻자 시오나가 비실비실 웃으며 설명해 준다. "방금 나랑 데이트 한 사람. 궁금해 했잖아. 날 미행 했으니 얼굴은 당연히 봤겠지?" "뭐... 보기는 했는데... 너무 멀어서 제대로 못 봤어. 아마 마주보면 못 알아 볼지도..." 미행 했다는 걸 다 들켰기 때문인지 선애는 순순히 사실대로 털어놨다. 아마 시오나가 남자의 이름을 가르쳐 준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음.... 사실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야. 나도 처음에는 인상만 보고 무지 놀라고 겁 먹었으니까. 말투도 무뚝뚝 하고... 그런데, 그러면서도 은근히 다정하고 꼼꼼히 챙겨주는 거 있지? 인상과는 다른 모습에 그냥 반해버렸지." '뭐... 꼼꼼히 챙겨주는 다정한 면이 있는 것 같기는 하더라만...' "뭐 하는 사람이야?" 시오나의 말을 듣던 선애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러자 선애는 주변을 슬쩍 둘어보더니 마치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선애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작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듣고 놀라지 마. 사실 그는... 견습기사야." '...그냥 기사도 아니고 견습 기사인데... 놀라야 하는 건가?' 나는 시오나의 말 보다는 그녀의 행동이 더 놀라웠다. 선애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시오나를 돌아봤다. "견습... 기사?" 그러나 시오나는 선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기분이 좋아서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응, 응, 그것도 내년 봄에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는대. 정말 대단하지 않니?" 지금이 여름이 완전히 끝나고 가을로 완전히 진입한 시기였으니 기사 작위를 받기까지는 얼마 안 남았긴 하지만... 그게 대단한 건지는 솔직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철저한 계급 사회인 곳에서는 평민이 기사 작위를 받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나 이 나라에서, 아니 대륙에서 알아주는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기사가 된다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라 계급 사회라는 건 책에서만 봤던 선애와 나였던 터라 시오나가 말하는 것 만큼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이 가슴에 와 닿지가 않았다. 뭐, 대충 대단한 거구나... 라고 여길 뿐. "정말 대단하네." 그러나 시오나가 너무 좋아했기에 선애는 시오나의 기분을 맞춰 주려는 듯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우고 그녀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렇지? 아아, 정말 대단해." '흠... 하녀와 기사의 사랑이라... 부디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우선 기사라고 하면 - 정식 기사든 견습 기사든 말이다 - 아무래도 검술에 뛰어나야 하고 그 실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을 쌓아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정식 기사에 비해 견습 기사는 아무래도 뭔가 허드레일이나 그 비슷한 일도 해야 할테고 말이다. 뭐, 드렉 암스트롱군은 견습 기사가 거의 끝나는 시점이라서 허드레일은 다른 견습 기사들에 비해 안 하는 편이라고 하지만 수련만은 적게 하면 안 될테니 데이트 하는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한다. 한국처럼 주말이나 휴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덕분에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점심시간 뿐이라고... 처음 미행하고 곧바로 들킨 선애는 그 뒤로부터 미행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드렉 암스트롱에 대해 밝힌 시오나는 그 뒤로 곧잘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아무래도 연애를 할때에는 속 마음에 있는 걸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한 거 아니겠는가? 비록 나는 연애 한번 못해봤지만, 내가 읽은 소설들이나 티비, 영화에서 볼때 다들 그랬었다. 즐거울때 흥분을 공유하거나 힘들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시오나는 그런 존재로 선애를 선택한 듯. 뭐, 선애 뿐만이 아니라 선배들에게도 이야기는 하지만 말이다. - 자발적으로는 아니고 반 강제적으로지만... -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러서 가을도 막바지에 돌입했다. 하늘의 푸른 달이 희미해지며 이제 얼마 있으면 사라질 거라는 걸 내비치는 즈음, 저택은 분주해졌다. 아무래도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곧바로 돌아올 겨울을 대비하는 계절이니 바쁜게 당연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이라면 더욱 더... 그의 영향으로 인하여 에밀리와 달시, 선애와 시오나도 덩달아 비상 사태에 돌입하고 있었다. 엠브라 부인이 별관 관리를 정식으로 내년부터 맡겠다는 선언을 해왔기 때문에 그 관리가 다 에밀리와 달시에게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뭐, 단지 관리 뿐이라면 크게 바쁠일은 없겠지만 문제는 주방의 일도 같이 맡겨졌기 때문이었다. 에밀리와 달시가 선애나 시오나보다 먼저 이 저택에 들어온 고참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4, 5년 정도였다. 현 신입 하녀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녀들이 제일 신참이었던 처지였다. 달시는 수 계산을 할 줄 안다고 해서 전 주방 담당 전속 하녀로 배정이 되었지만, 전 주방 담당은 공금횡령에 빠져 있느라 달시를 따돌리고 자신이 모든걸 알아서 했기 때문에 달시가 아는 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나은 건 에밀리였지만, 에밀리 또한 전 하녀 별관 담당인 스카티 부인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기 때문에 모든걸 담당해야 한다고 하자 제일 먼저 굳어 버렸다. 아무래도 밑에서 움직이던 사람이 갑자기 위쪽으로 올라오니 공포부터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 동안은 정리되지 못한 서류를 정리하는 것이었고, 별관 관리도 스카티 부인이나 전 주방 담당자가 미리 계획해 놓은 걸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처음부터 하나 하나 일일이 정해야 하니 겁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일 듯 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해온 일과 같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년도에 사용했던 자료들을 그대로 써먹기 위하여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만 어떻게든 하면 내년부터는 엠브라 부인이 맡아서 할거라는 걸 위안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저기... 우선은 식재료부터 하자. 그거 내일 모래까지 필요한 목록 제출하라고 했단 말야." 달시의 제안에 나머지 삼인은 반박할 생각도 없는지 다른 자료들은 모조리 치우고 그 동안 정리해 놨던 주방 재료 목록들을 꺼내 들었다. "시간이 별로 많지 않으니까 3년치만 보자." 에밀리의 제안에 달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가을 것만 보면 되니까. 그냥 5년치 다 보자. 아무래도 불안 하단 말이야." "그럼 그러던지. 5년동안 겹치는 목록만 우선 쭈욱 빼놓고 양은 평균적으로 하자고. 그리고 나중에 주방 담당 선배 하녀 한명 불러와서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보게 하지 뭐." 에밀리의 말에 달시는 고개만 끄덕이며 자료를 펼쳐 들었다. 에밀리의 말에 달시는 고개만 끄덕이며 자료를 펼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얼결에 같이 자료들을 쭈욱 훑어본 내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엉망이군.' 이었다. 뭐, 이 장부를 쓰는데 나도 일조를 했으니 다른 이들에게 뭐라 말하기 전에 나부터 반성을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장부를 쓸때는 너무 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무조건 끝내고 보자.'라고 생각한게 잘못이었다. 고생을 좀 더 하더라도 양식을 정해 그에 맞춰서 정리를 해야 했는데 말이다. 한국에 있을때 이런 장부 정리를 맡아서 한 적이 있어 좀 아는 건데, 이런 장부 정리를 할때 가장 명심할 것은 목록을 동일한 순서로 써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지금과 같은 일이나 연말 정산 할때 두서없는 목록 때문에 찾느라 고생한다는 거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에 한한 것이라 목록이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라는 거였지, 만약 일년 동안 걸 찾아야 했다면 이보다 몇배는 더 고생 했을 거였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목록은 순서를 정해서 기록하자고 해. 안 그러면 나중에도 또 고생하니까.] 목록 찾는 걸 도와주며 선애에게 잔소리를 했더니 선애의 인상이 팍 찡그려 진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잔소리는 나중에 해. 방해 할 거면 저리 가든가. 가서 혼자 놀아./" '이 언니의 금과옥조 같은 충고를 단순한 잔소리로 치부해버리다니...' 물론, 바쁠때 잔소리한 나도 잘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산에의 말투에 조금, 아주 조오금 삐져버린 나는 투덜대며 선애의 옆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시오나의 애인인 드렉이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는 - 마굿간을 중심으로 하인을 위한 별관 반대편에 기사들 기숙사 건물과 그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이 있었던 것이다. - 연무장에 가서 구경하다가 해가 질 즈음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그 넷은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5년 동안의 장부는 다 훑어 봤는지 이제는 주문(?) 목록과 양을 작성하고 있었다. 양을 산출하는 것도 꽤나 고민이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 동안보다 식구가 십여명이 팍 늘어났으니 말이다. 배정된 재정을 넘지 않으면서도 물품이 부족하지 않게, 거기서 좀 더 나으면 넉넉할 정도의 수량을 책정한다는 건 꽤나 어려울테니 말이다. 거기다 주방 재로 구입하는 책임이 에밀리와 시오나에게 넘겨지기는 했지만 그녀들의 위치가 아직 '머니'를 직접 다루지는 못하는 위치라, 혹시나 그녀들이 필요한 물품을 빼먹는다면 나중에 따로 구입하기 어려웠기에 목록 작성에도 많은 주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주의가 많이 필요하건 말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속이 좁다고 비난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아까 삐진 게 안 풀렸던 것이다. 그래 방해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와주기는 싫었기에 왔다는 인사도 안 하고 구석에 짱 박혀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연무장에서야 멋진 근육질 몸매의 남정네들이 멋드러진 검술을 보여 줬으니 그나마 눈요기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 방에 있는 익숙한 여인네 세명이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서류작업이었으니 말이다. 머리는 아플지 몰라도 구경하는 건 하나도 재미가 없는 그런 작업 말이다. 심심하면서도 삐진 마음에 선애를 절대 도와주기는 싫었던 나는 그리하여 딴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 훝어본 뒤 미련 없이 옆으로 미뤄뒀던 장부를 끌어다가 그거가지고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와서 말하는 거지만, 나는 대학 다닐때 통계학과였다. 그래서 이런 장부 같은 자료를 보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게 어떤 그래프가 이 자료와 잘 어울릴까.. 하는 거였다. 뭐, 어떤 목록이 몇 % 이고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말이다. '그걸 전공했다고 심심한 이때 그래프 그릴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의 생각에 피식 피식 웃으면서 그래프를 그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일을 할 정도로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이다. 남들이 보면 허공에서 펜이 스스로 움직이는 아주 신기한 광경이었을테지만, 모두들 자신들의 일에 바빠 한쪽 구석에서 벌어지는 그 신기한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식품 목록은 무지 많았지만, 그걸 간단히 곡류, 야채류, 과일류, 육류로 분리하여 매 년마다 각 분류의 소비량으로 원 그래프를, 5년 동안 소비 변화를 막대 그래프로 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기는 칼라 펜이 없고 오로지 검은 잉크 뿐인데다 자도 없어 깨끗하고 멋들어지게 그릴 수는 없었지만 심심해서 하는 거에 뭔 멋을 부리겠는가. 그리하여 대충 5년동안의 육류 소비량 변화의 막대 그래프를 그리고 있을 즈음 재빠르게 다가온 선애가 급히 속삭였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만 해./" 고개를 들어보니 시간은 꽤나 지나가 있었고, 나머지 셋은 일을 끝냈는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마 선애도 서류를 정리하다가 내 모습을 보고 남들 눈에 뜨이기 전에 잽싸게 말리러 온 모양이다. [끝났냐?] "/대충./"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원망인지, 아니면 쓸데 없는 일을 해서 자신을 기겁하게 한데 대한 원망인지 선애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그에 아까까지만해도 삐진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싸그리 사르져 버리고 오로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이게 뭐야? 웬 그래프? 이걸 그리고 있었어?/" [뭐... 심심해서리...] 선애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며 한심하다는 기색이 떠오르는 즈음 시오나가 다가왔다. "뭐해, 빨리 정리하고 가자. 나 피곤해." "어, 응." 선애가 나에 대한 눈길을 거두고 내가 그래프를 그리려고 슬그머니 가지고 왔던 장부들을 정리하자 시오나도 도우려 하다가 내가 그린 그래프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라... 이게 뭐야? 그림인가?" 원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를 들고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던 시오나가 선애를 바라봤다. "이거 선애가 그린 거야?" 그에 움찔한 선애가 슬그머니 나를 한번 노려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그냥 전에 심심해서 한번 그려본 거야." "이게 다 그린거야, 아니면 그리다 만거야? 뭘 그린건데? 안에 글씨까지 썼네?" '거야... 그래프 안에 목록은 당연히 필요하니까...' 고개를 갸웃 그리는 시오나를 보며 선애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리다 만거라니... 그래프를 그린거잖아. 몰라?" "그래프? 그게 뭐야?" 시오나의 말을 들은 선배들이 궁금증이 들었나보다. 슬그머니 다가와 시오나가 들고 있던, 원 그래프를 그린 종이를 가져가 본다. "육류, 곡류?" 달시가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에밀리는 막대 그래프를 그린 종이를 발견하고는 집어들었다. "호오, 이건 그냥 선이네..." "어... 그래프 모르세요? 그냥 자료들을 쉽게 볼 수 있게 간단히 그림표로 만드는 건데..." 선애의 설명에 세 사람이 신기하다는 듯 그래프를 들여다봤다. "그런 것도 있어? 헤에, 서대륙 사람들은 역시 신기하구나." "나 이런거 처음봐." "이거 서대륙 수리인가보지?" "뭐, 수리의 영역이긴 하죠." 그렇게 그래프를 들여다보던 세명은 곧 흥미를 잃어버리고 그걸 장부랑 같이 아무렇게나 탁자에 올려놓고는 선애를 재촉했다. "자자... 그래프고 뭐고 정리 다 했으면 나가자. 이제는 종이만 봐도 지긋지긋 하다." 달시의 말에 나머지 셋도 동조를 하며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오전에 전날 대충 정했던 목록표를 다시 한번 정리한 뒤 식당일 경력이 많은 선배 하녀들에게 도움을 받아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고 수량을 한번 더 정리하고 나서야 일이 완전히 끝났다. 물론, 주방에서 사용하는 물품 뿐이고, 별관 관리 물품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좋아, 이건 이걸로 끝이야. 이정도면 완벽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거 아니겠냐?" 완성된 목록표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달시가 선언하듯 외치자 옆에 있던 에밀리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했다. "그래, 그래. 그 정도면 괜찮아." 이미 수십번은 보고 또 봐서 거의 외울 정도의 목록표를 지긋지긋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방에 있는 다른 이들도 에밀리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에밀리가 본관에 갈 차례던가? 잘 내고 오길 바래." 엠브라 부인을 방문하러 본관으로 가는 건 당연히 선배들의 일이었다. 그러나 본관을 방문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에밀리와 달시는 번갈아 가며 가기로 했는데, 이번에는 에밀리가 갈 차례인 모양이었다. "알았어. 이왕 이렇게 된거 지금 당장 갔다 오도록 하마. 그래야 내일부터는 별장 관리 목록을 작성하지." '별장 관리 목록'이란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요 며칠간의 일을 다시 한번 하려니 그럴만도 했지만... 그런 그녀들에게 에밀리가 배시시 한번 웃어주고는 목록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 우리는 오늘은 이만 끝내도록 하자. 내일부터는 또 험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 최대한 쉴 수 있는만큼은 쉬어 두어야지." "네에~" 달시의 제안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는 듯 시오나와 선애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대답을 했다. 오랜만에 생긴 자유시간에 시오나와 선애는 따끈한 물로 목욕을 하기로 했다. 별관에는 하녀들을 위한 커다란 목욕탕이 있기는 하지만 하녀들 대부분 짬나는 시간이 비슷비슷 한데다가 선배 하녀들도 있으니 느긋한 목욕은 쉽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후다닥 하는 샤워 정도? 게다가 하녀들을 위하여 따뜻한 물을 항상 준비해 줄리도 없었기에, 만약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싶으면 하고싶은 사람이 스스로 물을 데워서 해야 했다. 그러니 하녀들에게 따뜻한 물로 목욕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걸 오늘 좀 시간이 남는 김에 하기로 한 것이었다. 저녁 시간 전인, 다른 하녀들이 일할 시간이었기에 목욕탕은 텅 비어 있어 완전히 전세 낸 목욕탕에서 단 둘이 뜨끈뜨끈한 물로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나온 시오나와 선애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둘을 맞이한 건 초긴장 상태인 에밀리와 달시의 모습이었다. "어, 왜들 그러세요?" 그 둘의 모습에 시오나가 의아해져서 묻자 에밀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기... 둘 다 본관으로 가야겠어." "예? 왜요?" 의아해서 되묻는 선애의 말에 달시가 약간은 차갑게 대답했다. "가 보면 알아." 그러면서 휙 하고 몸을 돌리는 모습에 선애와 시오나는 어벙벙하 채로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머리에 그대로 머리 수건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야 했다. 제 8화 달시와 에밀리의 무거운 분위기에 선애와 시오나는 괜히 움츠러들어 그 둘의 눈치만 조심스레 살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본관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에밀리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측은하다는 시선으로 선애를 돌아봤다. "선애야, 혹시 본관에 가서 무슨 질문을 들으면 무조건 솔직히 이야기 하도록 해. 그게 제일 좋은 거야." 뜬금없는 에밀리의 말에 선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그러나 에밀리는 설명을 해 줄 생각이 없는지 다시금 무겁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본관으로 앞서 가는 그녀의 어깨가 어째 점점 더 밑으로 처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달시가 어깨를 쳤다. "괜찮을 거야. 단지 오해 했을 뿐일수도 있잖아. 선애가 그런애도 아닐 거구..." "내 탓이야. 빨리 제출하고 돌아오려고 생각해서 가지고 간 걸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어. 그게 거기 끼어 있을 줄 누가 알았냐구..." '뭔 소리야...' 에밀리와 달시는 자기들도 암담한 상황에 빠졌는지 속 시원히 설명해 줄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는데다 두 선배까지 저러니 선애와 시오나도 무지 불안한 눈치였다. [괜찮을 거야. 넌 잘못한 거 없잖냐. 게다가 만약 뭐가 잘못되면 내가 들구 튈께.] 내 장담에 선애가 그나마 안심하는 표정이다. 이럴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정말 든든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언니에게 좀 고마움을 가져봐라 이 녀석아...' 본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곳에 있는 하인, 하녀 전용 문 앞에 엠브라 부인이 나와서 기다리다가 우리를 보고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도 긴장으로 인해 살짝 굳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뭔 일이 있기는 단단히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선애의 얼굴을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고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사무적인 어조로 내뱉었다. "따라 오너라." 엠브라 부인을 졸졸졸 따라서 도착한 곳은, 나는 예전에 한번 스쳐 지나가다 본 적이 있지만 선애들에게는 낯선 곳이었다. 크기도 크지만,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방 곳곳을 우아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벽면에는 커다란 액자 속에 멋드러진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침실과 응접실, 자그마한 서재로 나뉘어진 그 방의 응접실에서는 노년에 이른 두 남자와 두 잘생긴 젊은 남자가 있었다. 유일하게 소파에 자리를 잡고 편히 앉아 있는 남자는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후계자인 그랜트 루빈스타인 자작, 그 옆에서 샤방~ 한 미소를 띄고 서 있는 사람은 그랜트의 보좌관인 엘리엇 제네비아였다. 그리고 엘리엇의 반대편에 깐깐한 표정으로 정자세로 서 있는 노년에 이른 할아버지가 본가에서 왔다는 고든 켐벨 집사였고, 마지막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그 켐벨 집사 옆에 있는 사람이 라킨 그레샴 총집사였다. 그들까지 나타난 것은 의외였던 일인 듯 네 사람을 힐끔 본 에밀리와 달시가 헛바람을 내뱉으며 온 몸을 경직 시켰다. 그런 소녀들을 잡아먹을 듯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켐벨 집사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가지고 왔겠지?" '뭘?' 내 의문은 잠시, 미리 선배 하녀들에게 이야기가 된 듯 달시가 조심스레 종이뭉치를 엠브라 부인에게 건넸고 엠브라 부인은 그걸 켐벨 집사에게 건네 줬다. 분명 이 일의 원인이거나 아니면 깊은 관련이 있을 종이뭉치에 호기심이 담긴 난 막 종이를 펴보고 있는 켐벨 집사의 옆으로 가서 들여다봤다. 그건 내가 그린 그래프였다. [뭐야, 이거 그래프잖아?] 켐벨 집사는 그걸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랜트에게 넘기며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보십시오, 도련님. 이건 제 말이 틀림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랜트가 아무 말 없이 그래프를 받아 살펴보자 엘리엇도 슬그머니 그의 옆으로 다가가 같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켐벨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그린게 누구라고?" 그에 선애가 머쓱하게 서 있는 날 한번 째려보고는 나섰다. "제가 그렸습니다." "그래, 잘 말했다. 너는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아 이걸 그린 거지?" "사, 사주요?" 정말 황당하고 뜬금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선애가 뜨악한 표정으로 되묻자, 켐벨은 다시금 다그쳤다. "그래, 넌 분명 루빈스타인 가문을 음해하려는 다른 세력이 보낸 스파이가 틀림 없다. 솔직히 말햇. 이걸 누구에게 넘기려고 했느냐?" "그, 그런..." 이런 걸 바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혹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하는 거겠지? 도대체 그래프 몇개 가지고 그런 추측까지 할 수 있는 켐벨 집사가 경악스러울 뿐이었다. "그, 그건 그냥 단지 심심해서 한번 그려본 것 뿐인데요." [미, 미안해애...] 선애가 대답하는 사이 사이 날 노려보는데 나는 정말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정말 심심해서 그린 거 가지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거짓말 마라. 넌 이걸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고 한 걸거야. 이런 암호로 정보를 빼내려 한게 틀림 없으렷다!" 그래프를 가지고 암호라고 하는 사람은 또 처음 봤다. 선애가 기가 막힌 건지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래프를 살펴보던 엘리엇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참 재미있군요. 장부를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이걸 뭐라고 하는 거죠?" "그래프라고 합니다." "호오... 이 원 그림 말고 선 그림도?" "원 그림은 원 그래프라고 하고 선 그림은 꺾은 선 그래프라고 합니다." "이거말고 다른 것도 또 있나요?" "막대 그래프라고 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계속 질문하는 거 보니 엘리엇도 그래프를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대단하군요. 서대륙은 이런 걸 사용하나보죠?" "제가 있던 곳에서 배운 수학 교육의 한 분야입니다." "오오... 서대륙의 수리가 우리쪽 보다 무척 체계적인가보군요. 이거 대단히 유용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랜트님? 그냥 장부만 보면 너무 머리가 아프거든요. 몇몇 목록만 따로 추려내서 이렇게 그림으로 표시하면 보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훨씬 간편하고 좋을 것 같은데요." 엘리엇의 자자한 칭찬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가... 싶었지만, 이런 내 생각에 켐벨 집사가 찬물을 끼얹었다. "엘리엇, 자네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건 다 저녀석이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겠는가?" "어어... 하지만 집사님, 이건 집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암호라고 하기에는 누구나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걸요. 게다가 서대륙의 수리라잖아요." "멍청하기는... 그게 바로 저 계집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고. 일개 하녀 주제에 어떻게 수리를 배울 수 있겠는가 말이야." 켐벨 집사의 강력한 주장에 그 동안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던 그레샴 집사가 황급히 나섰다. "아닙니다. 저 소녀를 데리고 있던 고아원 원장이 말하기를, 저 소녀는 서대륙에 있을때 꽤 부유한 집안의 소녀였던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그 곳에서 교육을 상당히 받은 것 같다고 말입니다." "어허, 그 사람의 말을 어찌 믿는 단 말인가. 그도 매수 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설마요. 그는 꽤 오랫동안 왕래가 있던 사람으로써 제가 잘 압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그런 돈을 왕창 준다고 하면 안 흔들릴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프 하나 가지고 너무 심한 억측이었다. 그런데 그런 켐벨의 주장을 저지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만 됐네, 켐벨." "도련님." 그 동안 조용히 그래프만 살펴보고 있던 그랜트였다. "물론,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의 말에 켐벨은 그것 보라는 듯 씨익 웃었고, 소녀들은 죽상을 지었다. 만약 선애가 스파이로 몰리게 된다면 그녀와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같이 들어온 시오나는 물론이거니와 선애와 시오나를 별장 관리인으로 끌어들인 에밀리와 달시에게도 화가 미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나는 여기를 불을 지르고 도망쳐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그녀를 스파이로 몰기는 증거가 너무 빈약한 것 같군." "예에?" 잘 나가다 '하지만'이란 말이 붙자 켐벨의 의기양양함이 사그라들었다. 그의 되물음에 이번에는 엘리엇이 나섰다. "에이, 그렇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이건 단지 하녀용 별관의 장부일 뿐인데요. 그것도 장부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군요. 이걸 보면 남에게 넘기려고 한 거라기 보다는 저 서대륙 소녀의 말대로 그냥 심심해서 한번 작성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요. 게다가 정말 스파이라면 하녀용 별관에만 머무는 신입 하녀 주제에 뭘 벌써부터 정보를 빼돌리겠다고 설치겠습니까? 진짜라면 아마 지금 시점에선 조용히 있었을 겁니다." "끄응..." 조목조목 논리적인 말이라 반박하기 어려웠는지 켐벨 집사의 인상이 살풋 찡그려 졌다. 그런 그를 위로하려 함인지 그랜트가 입을 열었다. "내 자네의 우리 가문에 대한 충성심은 잘 알고 있네. 아마 이번 일도 자네가 우리 가문을 너무 염려하다보니 좀 지나치게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그런 자네가 있어 나는 너무나 든든하군." 얼음왕자는 무뚝뚝해서 전혀 상인 같지 않았는데, 지금 매끄러운 저 말솜씨를 보니 역시 상인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그 매끄러운 말에 홀딱 반한 것인지 켐벨이 감격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쯧쯧, 저 할아버지... 참으로 열혈 성격이구만. 깐깐해 보이는 인상인데 의외로 단순하군.' '쯧쯧, 저 할아버지... 참으로 열혈 성격이면서도 단순하군. 깐깐해 보이는 인상인데 성격은 인상과 틀리네.' 그러니까 그래프 하나 가지고 이렇게 사건을 확대시킬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다행이 그것도 저 얼음왕자나 엘리엇 덕분에 무난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특한 녀석들... 너그들 덕분에 그나마 선애에게 덜 시달릴 수 있겠구나아... 고맙다.' "그리고, 저 하녀는 당분간 엘리엇 자네의 보조로 일하게 하게." "예?"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에 엘리엇과 켐벨은 합창 하듯 되물었고, 소녀들과 엠브라 부인의 눈은 둥그렇게 커졌다. "아니, 도련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파인지 모를 저 소녀를 갑자기 엘리엇의 보조로 쓰다니요. 그건 너무 천부당 만부당 하신 말씀이십니다. 위험이 크다고요." "뭐, 저야 보조 인력을 주신다면 좋지만... 혹만 될 보조는 필요 없는데요." 엘리엇이 선애를 힐끔 바라보며 탐탁치 않다는 듯 반박했다. '뭣이라? 저넘이... 아까 기특한 녀석들이라고 말한 거 다 취소다. 넌 나한테 찍혔어.' 비록 원하지 않은 자리였다 하더라도 저런 거절을 받는 다는 건 기분 안 좋은 일이었다. 엘리엇의 반박에도 그랜트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했다. "아까 이 그래프라는 서대륙 수학 그림이 유용하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지? 그래서 자네를 생각해 채용한 건데... 그럼 앞으로 자네가 하는 말은 가볍게 생각 해도 되는 건가?" 그랜트의 말에 엘리엇은 항복한다는 건지 양 손을 치켜 올렸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제가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하겠습니까? 보조를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야~! 선애가 물건인 줄 알어?' 그 동안 자신의 의사에 관계 없이 자신의 거처가 정해지는 걸 눈 뜨고 보고만 있던 선애에게 그랜트의 시선이 향했다.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도록." '이놈아... 뭐가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거냐아아~~!!' 정말 힘 없는게 죄라고 선애가 하녀 신분이다보니 그랜트가 마이 페이스로 멋대로 일을 진행 시키더라도 뭐라 한 마디 뻥끗 할 수도 없어 대신 이번 일의 모든 원흉인 나만 열심히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랜트는 켐벨 집사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저 하녀는 이제 엘리엇의 보조가 되었으니 본관에 숙소를 마련해 주도록, 이상." 그랜트가 그렇게 말하자 켐벨 집사는 뭐라 말하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그랜트와 엘리엇만 남기고 모든 인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제 모두 나가라는 뜻도 있었던 모양이다. 켐벨 집사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선애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더니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너,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을테네 허튼 짓은 안 하는게 좋을 거다." '큰일이야... 이제 선애에게 계속 시달리게 생겼잖아? 에휴... 저 할아버지는 정말... 쓸데없는 말만 해가지구...' 켐벨 집사는 그렇게 말한 뒤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곧바로 그레샴 집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하녀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도록 하고 내일 아침에는 일찍 엘리엇 방으로 보내도록 조처하게." "알겠습니다." 그레샴 집사의 대답에 켐벨 집사는 선애를 한번 더 찌릿~ 하게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와는 반대로 그레샴 집사는 그 곳에 있던 여자들에게 손짓해 켐벨 집사와 반대쪽으로 걸어가 하인 하녀 전용 복도로 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죽는 줄 알았네. 하여간 영감탱이가 뭐가 저렇게 열혈 성격인지..." 그리고는 선애를 노려보는 것이다. "너는 또 왜 쓸데없는 짓은 해가지고 밤에 이 난리를 치게 하는 게냐?" "정말 죄송합니다..." 선애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자 나는 점점 더 걱정 되었다. '아이고... 난 정말 죽었다... 이제 우야노? 크허허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레샴 집사는 선애에게 정말 화가 난건 아닌 모양이었다. 단지 켐벨 집사의 난리에 자기까지 휘말렸던게 언짢았던 것 같았다. "에휴, 됐다. 솔직히 네 잘못은 아니지. 그냥 별거 아닌거 가지고 이 난리를 치는 저 영감을 상관으로 둔 운명일 뿐... 후우... 아, 올리버 부인에게 말해 놓을테니 넌 지금 빨리 가서 네 짐이나 싸서 올리버 부인을 찾아가거라. 늦으면 또 저 영감이 닥달할테니..." "예." 선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가려던 그레샴 집사는 다시 몸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 넌 죽었다 하고 지내. 저 영감에게 단단히 찍힌 거 같으니... 너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영향이 나에게 까지 미친다는 걸 명심하고." 전에 대대적인 감사를 했을 때 그레샴 집사도 좀 위험했다고 하더니만, 아무래도 몸 조심 하는 모양이다. 덕분에 선애를 신경써주게 되었으니 우리로써는 좋다고 해야 하나?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레샴 집사가 몸을 돌려 저 멀리 사라져 가자 네 여인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저는 진짜 뭔 일 나는 줄로만 알았어요." 에밀리가 제일 먼저 긴장된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아마 선애 빼고 가장 많이 긴장하고 있었을 사람이 바로 그녀였을 것이다. "어쨌든, 무사히 해결 되어서 다행이다. 모두..." 엠브라 부인이 에밀리의 말에 동의하며 말하다 선애를 힐끗 보더니 말을 흐렸다. 그러더니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이번에 무사히 넘어간 걸 다행이 생각해라. 그리고... 엘리엇님의 보조라니 어찌보면 더 잘된 거라고 볼 수 있어." "예." 너무 상투적인 위로였다. 엠브라 부인도 자기가 해놓고 너무 상투적이라 멋적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이더니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지만 내 보기에 아마 곁에 두고 보자는... 에... 의미도 있으니까 조심하는게 좋아. 무조건 시키는 것만 하고 다른 건 일절 하지 말아라. 오늘 같은 것 말이야, 알았지?" "예." 선애가 대답하며 힐끔 날 바라본다. '저 잘못한거 알았당께요. 다시는 안 할 거예요오오.. ' "그래, 그럼 이제 가봐라. 오면 올리버 부인 찾아가는 거 잊지 말고. 에휴, 타향까지 온 애를... 뭘 그리 크게 잘못했다고..." 엠브라 부인이 마지막으로 선애를 안됐다는 시선으로 힐끔 보더니 혀를 쯧쯧 차면서 가버렸고, 그제야 가만히 서 있던 네 하녀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좋겠네. 내 사랑 엘리엇님과 같이 일할 수 있다니... 이거 부럽다고 해야 하나?" 달시가 분위기를 좀 띄우기 위해 장난스레 말하자 그제야 딱딱하게 경직된 하녀들이 겨우 얼굴을 풀었다. 에밀리는 조심스레 선애의 얼굴을 살피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괜찮아요. 에밀리 선배 때문이 아닌 걸요." 선애가 웃으며 말하자 시오나도 선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 에밀리 부인 말대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해." "그래야지, 어쩌겠냐." 선애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에밀리가 얼른 거들었다. "심심하면 자주 놀러와." "예." 달시와 에밀리는 선애가 본관으로 가는게 자기들 때문인것 같아 무지 마음에 걸렸는지 숙소 안에까지 따라와서 짐 싸는 것을 도와주려 했다. 그래봤자 짐이 얼마 되지도 않아 시오나와 선애 선에서 끝냈지만... 그것도 마음에 걸렸는지 본관에 도착할때까지 배웅한답시고 시오나와 에밀리와 달시가 달라붙어 같이 가는 바람에 선애는 나에게 화풀이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게다가 본관에 도착하자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하인 하녀 전용 입구에 본관 하녀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선애지? 올리버 부인께서 널 도와주라고 하셨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 하녀에게 선애가 깍듯이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달시가 입을 열었다. "저어... 잠깐 작별 인사를 해도 될까요?" "좋도록 해." 보아하니 에밀리와 달시보다 선배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선선한 허락에 달시는 얼른 선애를 끌고 약간 떨어졌다. "선애야, 저 선배에게 잘 보여라. 제법 당차고 똑똑한 선배라서 마음에만 들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배울것도 많을 거구." "명심할게요." 자기를 생각해주는 달시의 말에 선애가 웃어보였다. "그래, 그래. 부디 조심해라." "예." 그 곳에서 셋과 작별인사를 하는 걸 보자니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하는, 선애가 어디 멀리라도 가는 것 같았다. 시간상으로는 겨우 1, 20분 거리에 있는데 말이다. 선애를 마중 나왔던 하녀는 선애를 데리고 5층으로 올라갔다. 본관의 꼭대기 층이었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이곳 가문에서 쓰는 거야. 우리 하인, 하녀들이 사용하는 층은 4층과 5층인데 4층에는 집사님들과 부집사님들, 그리고 부인들 방이 있고 나머지 하인 하녀들 방은 5층에 몰려있어." 하기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니 아무래도 아래쪽이 명당일 것이다. 그녀가 선애를 데리고 간 곳은 계단 바로 앞쪽에 있는, 복도 맨 끝에 있는 방이었다. 본관에 계단은 세개이다. 우선 가운데의 가장 크고 우아하게 꾸며진 계단은 이곳 주인이나 손님들이 사용하는 곳으로 1층부터 3층까지만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본관 양 끝의 비좁은 계단은 하인, 하녀 용으로 그것이 5층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선애의 방은 오른쪽에 있는(그쪽에 하녀용 별관이 있다), 5층까지 연결된 계단의 맞은편에 있었다.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때문에 가장 시끄러울 것만 같은 방이었다. 게다가 건물 맨 끝에 있어서 단열은 잘 되는지도 걱정이다. 아무래도 가장 신참이니 그 방이 주어진거겠지만... 열고 들어가니 2인실로 보이는 좁은 방이 나왔다. 싱글 침대 두개와 그 가운데 사람 둘이 겨우 겨우 다닐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시트깔고 같이 자던, 지금까지의 숙소보다는 훨 나은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침대 머리맡은 자그만한 창이 있는 벽과 붙어 있었고, 그 벽의 반대편에는 옷장과 세숫대야가 놓이 탁자가 있었다. "나는 이쪽을 쓰니까 너는 저쪽을 써." "어? 그럼... 선배가 저와 같은 방을 쓰세요?" 선애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다른 방에 있었는데, 올리버 부인이 널 좀 데리고 있으라고 하셨어. 너, 내일부터 제네비아님을 돕는다면서?" 그녀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제네비아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엘리엇 말야. 꽃미남...] "아아, 예. 어쩌다보니 갑자기 그렇게..." 내 설명에 선애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사람이나 높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하녀들이 엘리엇님, 엘리엇님 하고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만 그건 들키면 크게 경을 칠만한 일이었다. 일반 예법에도 상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타인인 상황에서 그 상대보다 지위가 높아도 상대가 허락한 경우나 가능했다. 뭐, 없는데서는 나랏님도 욕하는 법이라고 하녀들도 저희들끼리 있을때만 그럴 뿐이지만... 그는 그랜트의 보좌관의 역할을 하지만 특별한 직책이 없어서 성으로 불리는 것일 뿐, 일반 하인 하녀들은 성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녀 별관에서는 계속 엘리엇의 이름으로 들어오다가 갑자기 성을 들으니 선애게 어리둥절 한 모양이었다. "그 분 보기에는 무지 다정해 보이지만 일에 관련된 것에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허용 안 하시는 완벽주의자시거든. 내일부터 곁에서 모시려면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내일부터 나랑 같이 일하겠네. 나는 그분 거처 담당 하녀거든. 내 이름은 린이야." "예, 린 선배. 선애라고 합니다." "알아, 서대륙에서 왔다며? 솔직히 서대륙 사람은 처음봐서 좀 신기하기는 하다. 이 대륙에서는 검은 머리도 검은 눈동자도 쉽게 볼 수 없는데 그걸 둘 다 가지고 있다니 말야. 서대륙 사람들은 모두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라며?" 그렇게 말하며 하녀 모자를 벗는 그녀의 머리는 출렁거리며 등까지 내려왔다. 약간 짙은 갈색의 곱슬머리였다. 파마 머리인지 - 이 곳에 파마 기술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 천연 자연산인지 모를 정도로 무척이나 곱슬거렸다. 그에 초록 눈을 가진 그녀는 얼굴이 하트형이었다. 주근깨가 콧잔등과 양 뺨까지 퍼져 있었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는, 제법 예쁜 얼굴이었다. "예." "어쨌든, 이제부터 잘해보자. 네가 뭔가 특출난게 있으니까 갑자기 차출된거겠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본관에 와서 좋아진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아침 먹기 전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인 거 같았다. 별관에서 있었을때는 무척 이른 새벽에 선배 하녀들이 잠에 취한 신입 하녀들을 깨웠었다. 그런데 본관으로 숙소를 옮기고 처음으로 잔 다음 날,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어 신나게 잔 선애는 아침 먹을 시간즈음이 되어 깨어나 늦잠을 잔 걸 알고 하얗게 질렸다. "/헉... 어떻게 해... 언니 뭐 한거야? 왜 나 안 깨웠어?/" 허둥지둥 일어나 세수는 할 생각도 못하고 급하게 하녀복을 꿰어 입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제부로 선애와 룸메이트가 된 린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에 선애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깜빡 늦잠을 잤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선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린이 놀랐는지 잠시 멍청히 있다가 풋 하고 웃었다. "괜찮아. 너 늦잠 잔거 아니니까." "예?" "별관에서야 아침 먹기 전에 할 일이 있었을테지만, 여기서는 아직 네가 할 일이 없잖아. 그래서 나도 일부러 안 깨운 거고. 그러니까 다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해. 나도 슬슬 널 깨워야겠다 싶어서 온 거니까." 그녀의 설명에 그제야 선애의 얼굴에 안도감이 돌았다. "아... 그렇습니까?" "세수도 해. 설마 처음 네 상관을 뵈러 가는 날인데 세수도 안 하고 갈 생각은 아니었겠지?" "서, 설마요..." 그럴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남았는데 예정을 고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슬쩍 놀리는 듯한 린의 말에 선애는 얼굴을 붉힌 채 서둘러 세수를 했다. '에구... 그나마 다행이네. 저 린이라는 아가씨가 나쁜 아가씨는 아닌 것 같아서...' 그러고보니 이 저택에 들어와서는 딱히 성격 나쁜 사람을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중에서 꼽으라면... 전 별관 하녀 담당이었던 스카티 부인이나 주방 담당 뚱땡이 정도? 하지만, 그들은 하루에 한번 얼굴 보기 힘들었으니 성격이 더럽던 말던 별 상관 없었다. '후우... 부디 여기서도 성격 나쁜 사람과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아침을 먹고 난 뒤 린은 선애를 데리고 3층으로 내려갔다. 보통 하인이나 하녀들 중 윗자리를 가진 이들의 방이 4층인 것을 볼때 엘리엇은 그들보다 한단계 높은 대우를 받는 듯 했다. '그럼 그 엘리엇에게 반말을 하는 켐벨 집사는 더 높은 건감?' "여기가 제네비아님의 사무실이야." 본관 3층에 있는 방이라 그런지 문부터가 달랐다. 별관에 있는, 선애가 일하던 사무실은 문짝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엘리엇의 사무실은 커다란 문짝이 두개나 달려 있었다.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어 고풍스러움을 느끼는 큰 문짝에는 단순하지만 우아한 곡선 무늬까지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참내... 문짝에서부터 차이를 느끼는 구만...' 그 문을 린이 노크 하자 안에서 엘리엇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예." 문짝부터 차이를 느끼게 하더니만, 사무실 안은 더욱 더 큰 차이를 느끼게 했다. 선애가 일하던 곳보다 세, 네배 정도는 커보이는 그 곳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우아한 빌로드 커튼으로 꾸며진 커다란 아치형의 창이었다. 그 앞에는 엘리엇이 앉아 있는 커다란 책상, 문 옆에는 많은 책들이 빼곡히 꼽혀 있는 커다란 책장, 그와 직각을 이루는 벽에는 수많은 서류함이 있었다. 그 것 말고도 무지 폭신해 보이는 소파와 탁자라던지, 여러 종류의 술이 들어 있는 장식장이라던지 벽에 걸린 액자와 사무실 곳곳을 차지한 장식물들을 보면 이건 한국 대기업 회장 사무실로 써도 손색이 없을 듯 보였다. 엘리엇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린과 선애가 들어서자 고개를 들고 바라봤다. "말씀하신 하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린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선애도 얼른 그녀와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마워요. 린은 나가봐도 좋습니다." "예." 엘리엇의 말에 린이 나가자 선애 혼자 뻘쭘하게 서 있었다. 별관에서 하녀로써 교육받은 대로 차마 엘리엇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무지 초조한 모양이었다. 그런 선애에게 엘리엇이 책상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자,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서는 편하게 행동해도 좋습니다. 그래야 일의 능률도 오를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선애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서류함이나 책장 대신 장식장과 장식물들로만 꾸며진 벽쪽에는 웬 문이 하나 있었는데 엘리엇은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하나 지난 것 뿐인데 방금 전에 봤던 사무실과는 완전 딴판인 삭막한 사무실이 하나 나타났다. 전에 선애가 일하던 곳보다 약간 작은 듯한 공간이었는데, 그래도 혼자 일하기에는 충분히 넓은 곳이기는 했다. 하지만, 문 너머 사무실과는 비교가 너무 됐다. 우선 사무실 안을 꾸미는 액자나 장식물들은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 바닥에 천 조각 하나 깔려있지 않아 나무 바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엇의 사무실에 있는 무지 두터운 값비싸 보이는 초록색 양탄자는 고사하더라도 바깥 복도에도 붉은색의 양탄자가 깔려 있는데 말이다. 물론, 그 복도는 하인, 하녀 전용이 아니기는 했지만... 창에는 커튼도 없었다. 사무실에 있는 건 오로지 낡아 보이는 나무 책상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사무실 안에서 그나마 제일 좋아 보이는 좀 긴 장의자 하나와 낮은 나무 탁자 하나가 다였다. 엘리엇 스스로도 너무 비교가 되었는지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급하게 준비해서 너무 변변찮군요. 이 곳이 이제부터 당신이 일할 곳입니다. 부족한 건 말을 하면 곧바로 마련해 드리도록 하죠."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엘리엇이 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면서 선애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가 이번에 선애를 이끌고 간 곳은 그가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커다란 책상이었다. 그 곳에는 많은 수의 장부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는 한쪽으로 분리 된, 대략 봐도 3, 40 권은 되어보이는 장부들을 선애쪽으로 미뤄놨다. "이 것이 당신이 가지고 일할 장부입니다. 무슨 일을 할 건지는 대충 눈치채고 있었겠지요? 이걸 가지고 당신이 능력껏 어제 보여준... 그래프라고 했던가요? 그걸 그리면 됩니다. 물론 내가 그 그래프란 것을 잘 모르니 그리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그의 줄줄 나오는 말에 선애는 무조건적으로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대략 5년 동안의 자료입니다. 목록은 10여가지 밖에 없구요. 아침을 먹고 이 곳에 와서 시작하고, 제가 돌아가라고 할 때까지 일하면 됩니다." 아마 이것은 선애를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자, 그럼 그래프를 그리는데 필요한 것은요?" "종이와 펜, 그리고 색색의 잉크, 자가 필요합니다. 거기에... 혹시 원을 그리는 도구와 각도를 재는 도구가 있으면 같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애 옆을 계속 꿋꿋하게 지키고 있던 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해보라고 한 거였다. 콤파스하고 각도기 하면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설명조로 말해본 건데 역시나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원을 그리는 도구와 각도를 재는 도구? 그런데... 각도는 또 뭐죠?" "에... 그러니까 각도는... 원 하나를 360도라고 하고 그 절반은 180도라고 하는..." 갑자기 설명하려니 말이 꼬이는지 선애는 더듬거리며 대충 대충 겨우 겨우 각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못 알아 듣는 듯 엘리엇은 고개만 갸웃 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내 수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이 원을 그리는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각도라... 그건 잘 모르겠군요. 그들이 그것 까지 가지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만... 그게 꼭 필요한 겁니까?" "꼭 필요한건 아닙니다. 단지 좀 더 그래프를 깨끗하게 그리려고 한 것일 뿐... 그게 없어도 그릴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그 두가지는 없이 그래프를 그려줬으면 좋겠군요. 나머지는 빠른 시간내에 마련해주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언제까지 그려야 합니까?" "3일 정도면 되겠습니까?" 엘리엇의 말에 선애는 슬쩍 날 바라봤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그래프를, 그것도 손으로 일일이 그려보는 일이 없었던 나는 - 대학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했으니 말이다. -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장담 못하겠어.] 내 말에 선애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자르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더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빠른 시간 안에 보고 싶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장부를 들고 이제 자신의 사무실이 된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간 선애는 책상위에 장부를 내려놓자마자 날 째려봤다. "/이제 어쩔거야?/" [어우 야... 내가 이리 될 줄 알았남?] "/어휴... 몰라... 이건 완전 감옥에 갇힌 것 같잖아?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게 생겼어./" 그건 확실히 그랬다. 화장실 한번 가려면 엘리엇의 사무실을 거쳐 밖으로 나가야 하니 말이다. 아무래도 작정 하고 선애를 지켜보려는 것 같았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마련한 사무실이 여기겠는가 말이다. 선애가 여기서 왔다갔다 하면 엘리엇 자신도 불편할 텐데... "/으휴... 언니가 다 책임 져. 뭐야... 나는 수학 배울 때 통계가 제일 싫었다구. 그런데 그래프라니.../" [뭐... 너 그래도 그래프는 잘 그렸잖냐.] "/몰라, 몰라./" 입으로는 툴툴 대면서 선애는 장부들을 짜증스럽게 노려보더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걸 느꼈는지 한숨을 한번 푹 내쉬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해? 빨리 언니도 해. 이게 다 언니 때문이잖아./" [그려, 그려. 다 나 때문이다. 반성하고 있어...] '어휴... 그때 내가 그래프는 왜 그려가지고....' "/그래도... 아침에 잠을 좀 더 잘 수 있게 된 건 솔직히 반갑더라.../" 선애가 갑자기 내뱉은 말에 나는 선애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어쩐지 생각보다 선애가 덜 화를 내서 왠일인가.. 했더니만 오랜만에 늦잠을 잘 수 있고 앞으로도 그만큼 잘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많이 좋았던 모양이다. '히유... 그나마 다행이네...' [아아... 그래도 분석까지 안 해서 다행이야. 그랬다면 나는 꼼짝 없이 두 손 들었을 거야.] 엘리엇에게 받은 장부를 모두 다 펼쳐놓고 그래프를 그릴 목록별로 분류를 하며 말을 던지자 선애의 날카로운 시선이 찌릿 하고 꽂혔다. "/뭐시여, 지금 자기 잘났다고 자랑하는 거야?/" [아.하.하... 이야기가 왜 또 그렇게 돼냐? 그냥 그렇다 이거지. 대학 졸업한 지도 오래 되었구, 졸업한 뒤로 그런 건 하나도 안 해서 분석 공식 같은 건 다 잊어버렸거든...] 변명조로 중얼거리자 선애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만약 지금 대학생이었다면 할 자신은 있고?/" [거야... 당연히 없지... 쳇...] 분석 같은 건 보통 통계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그 공식은 다 배우지만 나는 대학교때 범생이는 아니라서 성적이 크게 좋지는 못했던 것이다. 뭐, 프로그램이야 그대로 자료만 잘 주입하면 지가 다 계산해서 그래프까지 좌르르 그려줬으니 말이다. 전공 점수는 낮았어도 해본 적이 있다고 그래프를 그릴 목록은 내가 만들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선애 일을 돕기는 해야 했을 테지만 말이다. [음... 각 년도별로 목록의 원 그래프하고, 각 목록별로 년도별 차이의 꺽은 선 그래프... 정도 그리면 될라나?] "/막대그래프는 안 그릴 거야?/" [글쿤... 그럼... 비슷한 목록 두개씩 비교하는 막대 그래프도 그리고... 아, 원 그래프 그리는 걸로 막대그래프도 같이 그려볼까?] "/그렇게 해./" [뭐, 그럼... 오래 걸리지는 않겠네. 3일이면 되겠는걸?] 엘리엇에게 말한 요구는 금방 들어져 장부를 살펴 보기 시작한 지 채 한시간도 안 되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린이 뭔가를 잔뜩 들고는 들어왔다. "여기, 펜하고 종이하고 자야. 이게 우선이고... 물감은 아직 마련하지 못해서... 잠시 후에 가져다 줄게." 색색의 잉크를 가져다 달라고 했더니만, 여기는 그런게 없는지 물감을 가지고 오는 모양이다. "물감이요? 에... 이 곳 물감은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데... 기름을 섞어 쓰나요, 물을 섞어 쓰나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종류별로 다 구해 올까?" 사용할 줄도 모르는 걸 구해달라고 하기는 미안한 일이었다. "에... 물감이라면 그냥 됐어요. 그냥 펜으로만 해보도록 하죠." [쩝... 여기는 칼라 잉크도 없나봐.] "그래? 그러던지... 더 필요한 건 없고?" "예, 없어요." "그럼 열심히 해라. 점심 먹을 때 데리러 올게." "감사합니다." 린의 신경써주는 말에 선애는 진심으로 고마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혼자 점심먹으러 갈 일이 좀 막막했던 모양이다. 선애가 본관에서 적응하는데는 정말 린의 도움이 컸다. 처음에는 올리엇 부인이나 켐벨 집사의 명으로 선애를 감시하기 위하여 붙여진 게 아닌가 의심을 하기는 했었지만, 며칠 뒤에는 그녀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정말 선애를 감시하던 말던 말이다. 게다가 어차피 선애는 잘못한 것도 없으니 꿀릴 것이 없었다. 비록, 선애가 정보 길드에서 여기에 집어 넣어진 것이긴 했지만, 아직 선애에게는 어떤 임무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기 들어올때 휴도 몇 년간은 아무 생각 없이 하녀 본분에 충실하라고 당부했었 으니 그가 말한 몇년간은 임무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정확하게 사흘 뒤 오전에 선애는 그래프가 그려지 종이를 당당하게 엘리엇에게 내놓을 수 있었다. 비록 검은 색으로만 그려졌다는 게 좀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서 그렸다. "다 그렸습니다." "그렇습니까?" 선애가 건네 준 그래프를 받아들고 하나 하나 쓰윽 훑어 본 엘리엇은 그 종이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오세요." 그러면서 엘리엇이 선애를 데리고 간 곳은 그의 사무실 바로 옆 방이었다. 똑, 똑~ 엘리엇이 두번 문을 두드리자 않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엘리엇의 사무실 보다 훨씬 크고, 훨씬 멋드러지게 꾸며진 그 곳에는 그랜트가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서류를 읽고 있었다. 그 곳이 그랜트의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태도만 보면 일하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듯한 방만한 자세로 보였지만, 냉정한 그의 눈빛과 잘생긴 그의 얼굴로 인하여 되게 멋지게 보였다. 그래서 얼굴이 잘 생기면 모든게 멋져 보이는 거라고 하는가 보다. 그랜트의 허락에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엘리엇은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물론 그랜트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지만... - 저벅저벅 그랜트에게 다가가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그래프가 완성되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제야 그랜트가 고개를 쓰윽 하고 들었다. 그는 엘리엇 손에 들린 종이를 받아들면서 한쪽에 멀쭘히 서 있는 선애를 한번 쓰윽 보더니 그래프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거참... 그냥 시험이라면 엘리엇 혼자 봐서 결정해도 되는 거 아닌감? 왜 이 녀석 손에까지 올라온 거야?' 뭐, 한편으로 생각하면 엘리엇 보조로 선애를 지목한 건 그였으니 그가 시험지를 채점(?)하는게 타당하다고 여겨지기는 했지만, 한갓 보조 하나 결정하는 거 가지고 이 곳에서 제일 정점에 서 있는 그가 움직이는게 맞는 건지 좀 의아스럽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속으로 고개를 갸웃 거리는 동안 탁자에 모든 그래프를 펼쳐 놓은 채 물끄러미 들여다 보던 그랜트가 선애를 향해 손짓해 가까이 오게한 후 막대 그래프하고 꺾은 선 그래프를 가르키며 물었다. "내가 보기에 이 두개는 같은 내용 같은데?" "맞습니다. 꺾은 선 그래프와 막대 그래프는 모양만 약간 틀릴 뿐 나타내는 분야가 비슷합니다. 그냥 모든 그래프를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두가지 그래프를 다 사용해 봤습니다." "흠... 그렇군. 그럼... 이 그래프는 어떻게 나타내는 거지?" 이번에 그가 가리킨 건 원 그래프였다. 처음에 그래프를 봤을때는 그래프에 관해 한번도 질문을 안 하더니 오늘 다 하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건 우선 나타내는 목록의 총 양을 100으로 생각해 봤을 때 각각의 양이 100중 얼마나 차지하느냐를 계산 한 다음 그 양을 각도로 환산한 것입니다." "각도라?" "제가 배운 것에 의하면 한 원은 360도이며 반 원은 180도입니다. 만약 한 목록의 양이 100중 50이라면 절반인 180도의 각을 차지하며, 한 목록의 양이 1/4인 25개를 차지하면 360도의 1/4 인 90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계산해서 그리게 됩니다." 그냥 설명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쉽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종이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원을 그려가며 설명하자 그랜트가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그에 선애와 내가 안도의 한숨을 - 이해 못하면 좀 더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 조용히 내쉬는데 선애가 설명하며 그린 종이와 그래프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랜트가 갑자기 날카로운 시선을 선애에게 던졌다. "그런데..." "예?" "내가 보기에 이거는 꽤 고난위의 수리 같은데... 서대륙에선 이런 걸 모든 이들에게 다 가르치나보지? 아무리 자네가 있는 집안의 여식이었다 해도 이런 걸 알고 있다니... 이쪽 상식으로는 신기한 일이군."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엄연히 계급 사회인데다가 남녀차별이 엄청 심했던 것이다. 뭐, 여자가 능력을 가져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교육의 기회 차별이 심하다고나 할까? 정보 길드에서야 정보를 얻을때 여자라는 것이 유리한 점도 있기에 여자 애들도 평등하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지만, 왠만큼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그리고 어려서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면 여자들이 고등 교육은 물론이거니와 초등 교육도 제대로 받기 힘들었다. 뭐, 없는 집안이라면 여자 남자 구별 안 하고 초등 교육도 받기 힘든 세상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꿀릴 것 없는 선애는 그랜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으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뭐, 좀더 솔직히 말하면 당당이라기 보다는 그의 말에 좀 열받은 것 같았지만... "서대륙 전체로써는 어떨 지 모르지만, 제가 있던 곳에서는 이 정도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이런 쪽에 관심이 있었기에 여기 말로 하면 수리의 고등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초등학교 졸업한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래프를 초등학교때 배웠는지 중학교때 배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하지만... 뭐, 중학교라고 해도 2000년도 한국에서는 거의 기본이라고 여겨지니 대부분의 애들이 기초로 배웠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호오, 그런 놀라운 세계가 있었단 말인가? 정말 믿기 힘들군." '너도 21세기 한국에 가봐. 그럼 알 수 있어.' 상체를 약간 탁자쪽으로 숙인 채 고개를 들어 선애를 쳐다보던 그랜트가 눈가를 실룩이더니 상체를 소파 등에 편안하게 기대더니 다시 물었다. "그러고보니... 정확하게 서대륙의 어디 출신이지? 내가 알기로는 서대륙에도 3개국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의 질문에 선애는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당당하게 대답했다. "/대한민국/의 /강원도 춘천/입니다." "뭐?" 한국말로 말했으니 못알아듣는게 당연했다. 의문 어린 시선으로 되묻는 그랜트에게 선애는 친절하게 다시 대답해줬다. "이 세계에서는 '한국'이라고 하더군요. 그 '한' 자 앞에 거대하다란 뜻을 가진 '대'자를 붙여 '대한'이라고 합니다. 그 '대한국'의 '강원도 춘천' 출신 입니다." 이쪽 '한국'에 '강원도 춘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선애는 거짓말은 안 했다. '한국'인인건 사실이니까. 휴네 집에서 배우길 서대륙에 대해서 알려진 거라곤 세 나라가 있다는 것과 그 나라의 이름, 그 나라 이름의 수도 정도 라고 했다. 그러니 그랜트가 선애가 말한 '강원도 춘천'이 이 세계의 '한국'에 있는지 딴 세계의 '한국'에 있는 지 알리가 없었다. "흠, 수도에서 살지 않았나보군?" "수도에서 약간 떨어진 중소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선애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녀석도 그랜트가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걸 재미있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서울에서 기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지. 네가 기차를 아냐?' 선애가 막힘없이 당당하게 대답을 했기 때문인지 그랜트는 뭔가 미심쩍어 하는 것 같으면서도 선애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대신 그래프에 대하여 몇가지 질문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수리의 고등 교육을 받은 건 분명한 거 같군. 그러고보니 별관에 있을 때 별관 관리를 도왔다고 했었지?" "예, 우연치 않게 선배를 돕게 되었다가 나중에는 정식으로 보좌를 했습니다." "그럼 장부도 쓸 줄 알겠군." 고개를 끄덕이던 그랜트가 엘리엇을 바라봤다. "어떤가?" 그러자 엘리엇이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무척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켐벨 집사님께서도 꽤 탐내시는 것 같던데..." '탐내는게 아니라 수상쩍은 점을 찾아내느라 혈안이 된 거겠지...' 본관에 있는 동안 거의 엘리엇 사무실 안에 짱 박혀 있느라 그를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선애를 노려보던 시선은 잊혀지지가 않았다. "뭐, 당분간 켐벨도 돕게 하도록 해볼까? 자네의 전속 보조로 임명하는 건 좀 더 뒤로 미뤄두도록 하지." "아쉽지만 하는 수 없겠죠." 별로 아쉬운 표정도 아닌 주제에, 아니 오히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엘리엇 녀석이 얄미워 보였다. 저 녀석은 아무래도 필요하다면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남의 뒤통수를 치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을 녀석인 듯 했다. 그랜트는 엘리엇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다란 창가 가까이에 있는 무지 큰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 책상 근처에는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굵은 붉은색의 줄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엘리엇의 사무실에도 저것과 비슷한 줄이 있는 걸 본적이 있었다. 희안하기는 했지만, 방 안을 장식하는 도구인가 했는데, 그랜트가 그걸 잡아당기는 걸 보니 단순한 장식품만은 아닌 듯 했다. 역시나, 잠시 후에 사무실 문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며 하인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켐벨 집사를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그 줄이 하인을 부르는 줄이었던 모양이다. '에, 그럼 엘리엇 사무실에 있던 줄도? 헤에... 엘리엇 사무실에 있는 걸 잡아당기면 린이 오는 건가?' 잠시 후, 켐벨 집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들어서자마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 한 뒤 드는 시선에 엘리엇과 선애의 모습이 보이자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도련님, 저 아이는..." 선애를 보며 뭐라 말하려는데 그걸 그랜트가 가로막았다. "아, 그래서 그대를 부른 거네." "예?" 의아한 듯 되묻는 켐벨 집사에게 그랜트는 손으로 선애를 가리켜 보였다. "저 애를 자네에게 맡기는게 어떨까 해서 말이야. 수리 교육을 정식으로 받았다니까 거기에다 자네가 잘만 가르친다면 괜찮은 인재가 될 거라고 생각해." "제가... 말입니까?" "응, 나는 켐벨 집사 자네를 믿으니까. 게다가 자네만큼 능력이 뛰어남과 동시에 우리 가문에 충성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사람을 곁들여주는 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데?" '저건 분명히 일부러 한 말일 거다. 켐벨 집사를 띄워주려고...' 역시나 그랜트의 말에 감동을 받은 듯한 켐벨 집사는 나이와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눈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도련님. 절 그렇게 밑고 맏겨주신다니 성심성의껏 가르쳐서 도련님께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말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봐요... 할아버지가 안 가르쳐 주셔도 선애는 뛰어난 애거든요?' 켐벨 집사의 힘찬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랜트는 탁자에 펼쳐 놓았던 그래프들을 모아서 집사에게 넘겨줬다. "그래도 이 능력은 지금도 나에게 꽤 쓸모가 있을 것 같으니 가끔씩은 저 애에게 일을 시키기는 할 걸세."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사용하십시오." '이것 보세요... 그 대답은 할아버지가 하실 대답이 아닌 것 같은데요...' 선애도 기가막인 표정이었지만, 이 상황이 자신이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지 입술만 앙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 잘 부탁하네. 그리고 이 그래프라는 건 자네에게도 꽤 쓸모 있을 것 같으니 자네도 한번 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랜트가 건네주는 그래프를 아주 정중하게 받아 든 켐벨 집사는 그 즉시 그에게 인사를 하고 선애를 이끌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켐벡 집사의 집무실은 놀랍게도 그랜트와 엘리엇 사무실과 같은 층에 있었다. 이 곳의 총 집사인 그레샴 집사의 집무실이 4층인것에 비교하면 파격적인 대우 였지만, 켐벨 집사는 본가에서 그랜트와 같이 내려온 집사인데다가 엘리엇보다 윗사람인 듯 한거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집무실이 엘리엇 사무실보다 좋게 말하면 청렴하고 나쁘게 말하면 초라한 것을 보면 오히려 그가 대우를 좀 못 받고 있는게 아닐까... 느껴지기도 했다. 하기야, 그 동안 그가 선애나 내 앞에 보인 행동을 보면 충분히 그래도 싸다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혹시 그의 성격이 청렴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엘리엇 사무실에 있는 거에 비하면 비싸보이지 않고 오래된 낡은 책상에, 책상만큼 낡아보이는 의자가 꽤나 고풍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기하학적 무늬가 들어가 있는 양탄자 위에 놓여진 소파는 꽤 괜찮은 것이었기에 내 생각은 무척 타당한 것으로 보였다. 그것 외에는 사무실의 분위기를 좀 더 좋게 만들기 위한 장식물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청렴한 성격이라면 또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앉아봐라." 켐벨 집사는 소파에 앉으며 자신의 맞은 편 자리를 가르키며 말하자 선애가 조심스레 가서 앉았다. "흠..." 그의 자켓 상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놀랍게도 외알 안경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안경, 그것도 외알 안경은 한국에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은 알았지 실제로 본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선애나 나는 신기한 마음으로 그가 외알 안경을 콧등에 걸치는 걸 뚫어져라 주시했다. 켐벨 집사는 우리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외알 안경을 걸치고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래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태도만 보면 그가 인맥 같은 걸로 그랜트의 보좌 집사가 된 건 아닌 듯 보이는데 말이다. "전에도 생각 했지만, 놀라운 그림이다. 이 내가 널 스파이라고 생각할 만 해. 특히나 어린 여자아인 네가 이런 걸 알고 있다는 건 더더욱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힐끗 맞은편에 앉은 선애를 바라보며 켐벨 집사가 묻자 선애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예..." "뭐, 네가 전에는 꽤 사는 집의 여식이었다니 네가 이런 고난위의 수리를 안다는 게 정말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고... 게다가 그렇다면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 어쨌든, 도련님의 말씀도 계셨고 하니 너는 당분간 여기에서 일하도록 해라." 한순간에 근무처가 이동이 되었지만 선애가 그걸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고로 그 녀석은 얌전히 '예.'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 옆에 쓸모가 없어 반 창고용으로 사용되는 방이 있는데, 네가 거기를 사용하면 되겠군." 그렇게 켐벨 집사가 내준 방은, 그의 말대로 반 창고용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온갖 자질구레한 잡동사니에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아 무척 지저분 했지만, 그래도 엘리엇이 준 방보다는 더 좋았다. 켐벨 집사의 사무실이 건물 한쪽 거의 끝 부분에 있었던 터라 그 옆인 선애의 사무실이 된 반 창고는 아예 건물 끝이었다. 그 앞에는 하인 하녀 전용 계단이 있어 여러사람이 다니느라 좀 시끄럽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랫층이나 윗층을 가기 위하여 복도를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서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엘리엇의 방보다 좀 더 넓었고, 창문도 두개였다. 90도 각도로 보는 창으로 인하여 한쪽에는 본관 앞쪽의 정원이 보였고, 그 옆쪽에는 하녀용 별관이 보여 경치도 좋았다. 제일 좋은 점은 복도와 바로 연결된 문이 있고, 켐벨 집사 집무실과 연결된 문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화장실 갈 때나 식사하러 갈때 괜히 켐벨 집사의 집무실을 통해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거다. 린과 선애, 그리고 켐벨 집사의 명을 받은 낯선 하인 둘과 하녀 한명이 더 도와 줘서 선애가 사용할 사무실은 그날 안에 정리될 수 있었다. 청소 하는 동안 콧배기도 보이지도 않던 켐벨 집사는 청소가 거의 끝날 무렵 엘리엇 사무실 안에 있는, 전의 선애 사무실에 있던 책상과 의자를 든 하인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뒷쪽에는 바닥에 깔 양탄자를 든 두 하인이 나타나서 날 기쁘게 했다. 비록 켐벨 집사의 집무실에 깔린 것 처럼 좋은게 아니라, 이곳 주인용(?) 복도에 깔린 붉은 색 양탄자였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싶었다. 게다가 그것 말고도 5단 서랍함도 하나 주고 가서 내 마음을 기쁘게 했다. 켐벨 집사가 그 동안 보인 면과는 달리 꼼꼼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면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선애는 본격적으로 켐벨 집사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랜트의 말에 의하여 엘리엇의 보좌로 일하게 될 줄 알았었지만, 뭐 이게 훨 나은 거 같았다. 아무래도 이건 내 생각인데, 엘리엇이 선애를 필요 없다고 말해서 선애가 켐벨 집사의 밑으로 이동된 듯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사무실 안에 따로 사무실까지 마련된 상황에서 갑자기 켐벨 집사 밑으로 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선애 능력이 떨어졌다거나 아니면 실수를 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말이다. [엘리엇 그 녀석... 처음에 얼굴이 잘 생겨서 호감을 가졌었는데... 점점 마음에 안 드네...] 그래프를 그리느라 받은, 남은 사무용품들을 정리하며 중얼거리자 선애가 대답했다. "/나는 별 생각 없었어. 잘 생기기는 했는데, 내 이상형이 아니거든./" [네 이상형? 흠... 하긴...] 선애의 이상형은 일명 '반항아'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나중에 자식 낳아 키울때 고등학교 가면 날나리로 만든다고 했을까? 그걸 보면서 조폭 영화의 영향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하여간 그 이상형은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그 후계자인지 뭔지 하는 도련님도 네 이상형은 아니겠네?] "/응. 난 그렇게 쌀쌀맞은 사람은 싫어. 나는 왜... 반항아 기질이 있으면서 속은 따뜻한 사람 있잖아? 그런 사람이 좋아./" [그냐? 흠...] 그렇게 해서 선애는 켐벨 집사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안 그래? 이건 정말 명목상으로만 켐벨 집사 밑에서 일하는 거라구...] 내가 투덜투덜 댔지만 선애는 종이에 그래프를 그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래. 여기 있는 건 명목상이야./" [야아, 좀 진지하게 내 말을 좀 들어보라고. 넌 열도 안 받냐? 나는 생각하면 할 수록 그 엘리엇이란 녀석이 너무 너무 얄미워.] 그 얄쌍하게 생긴 엘리엇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저절로 이가 빠드득 갈렸다. 선애가 켐벨 집사의 밑에서 일하게 된 다음부터 정말 우습게도 켐벨 집사가 지시하는 일은 거의 들어보지도 못했다. 선애에게 떨어지는 대부분의 일이 그랜트나 엘리엇으로 부터 나온 지시였던 것이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래프도 바로 오늘 아침에 엘리엇 녀석이 장부를 잔뜩 들고 와서 맡기고 간 일거리였다. [아니, 아무리 켐벨 집사가 얼마든지 일을 맡겨도 된다고 했지만, 이건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니냐? 이렇게 일을 계속 시킬 거였으면 그냥 자기 밑에다 두지 뭐하러 켐벨 집사 밑으로 보냈냐고.] "/그래도 일터는 여기가 더 좋아./" [아,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인데, 전에 일터 환경이 그렇게 극악 했던 것도, 엘리엇 녀석이 신경쓰기 귀찮아서 대충 만들라고 그랬던 거 같아." "/어쩌면.../" 선애의 대답은 계속 시큰둥 했지만, 나는 내 생각을 말하는데 정신이 빠져서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게다가 널 켐벨 집사쪽으로 보낸 것도, 네 능력은 필요하면서도 네가 별로 미덥지 못해 보여서 그런거 같아. 교육을 시키는 것도, 혹시 뭔가 잘못되면 책임지는 것도 모두 켐벨 집사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슬쩍 빠지기 위해서 말야.] "/그럴지도.../" 한번 더 시큰둥하니 대꾸하던 선애는 커다란 종이에 그래프를 그리느라 선 채 허리만 90도로 구부리고 일하던 몸을 폈다. "/에구.. 허리야... 언니, 그렇게 투덜대는 건 좋은데. 다음 그래프 목록이랑 수치 작성은 하면서 투덜대는 거지?/" 몇번 허리를 두드리던 선애는 가늘게 뜬 눈으로 멈춰있는 내 손을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하고 있어.] "/언니가 그렇게 얄미워하는 엘리엇 녀석이 이거 내일까지 해놓으라고 한 거 잊지 않았겠지?/" [알아, 안다고. 그 녀석 정말 못된 거 아니야? 어떻게 가면 갈 수록 기간이 점점 짧아지냐구. 이러다가 나중에는 하루도 안 줄지도... 그러면 컴퓨터를 사 놓으라구 할까보다.] 나는 투덜대느라 멈췄던 계산을 다시 재개하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선애의 한심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가 말하면 그 녀석이 들을 수 있기나 하대?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그런거 말할 처지가 못돼./" [알어, 안다구.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 "/애초에 누구누구가 쓸데없는 일만 안 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걸?/" 선애의 따끔한 말에 나는 찔려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쳇...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거 다 했어?/" 선애의 물음에 나는 기가 죽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쫌만 더 하면 돼.] "/그럼 혼자 좀 하고 있어. 나는 배고파서 밥좀 먹고 올래. 나 올때까지는 다 끝낼 수 있지? 아, 그리고... 혹시 나 안 오면 그래프도 좀 그려주라./"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는 선애의 모습에 나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우웅....] 어쩌랴? 잘못한건 나니 알아서 길 수밖에... 어차피 와서 또 할거라 선애는 별로 정리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게다가... 여기서 일 시킬거면 정식 하녀로 승진이라도 시켜 주던가... 계속 신입 하녀로 해놓고서 월급도 안 주면서 부려먹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신입 하녀는 월급이 없다. 월급을 받으려면 정식 하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별관에서 일하느냐 본관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차별을 두기 때문에 별관에 있는 하녀들이 모두 본관에서 일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애는 본관으로 불려와 이 저택에서 유일한 지식으로써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도 신입 하녀라는 이유로 월급도 주지 않는 거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상황이란 말인가. '그러니 내가 투덜대지 않게 생겼어? 으윽... 얄미운 놈들. 엘리엇도 얄밉지만 그랜트 녀석도 얄미워.' 왜 거기에 그랜트까지 끼어 있는가 하면, 이번 일을 시킨 건 엘리엇이 아니라 그랜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장부를 잔뜩 들고 나타난 엘리엇이 말하기를 내일 점심시간때까지 끝내서 그랜트에게 넘기라고 했으니 말이다. '도대체가 말이야, 엘리엇 녀석은 그랜트의 보좌관이잖아? 그럼 하나로 통일해서 모두 다 엘리엇에게 주라고 하던지, 아니면 켐벨 집사도 있잖아? 왜 매번 가져다 줄 사람이 바뀌냔 말이야. 밑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다니... 그럼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구.' 괜히 죄 없는 장부만 째려보며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일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걸 빨리 끝내 놓지 않으면 밤에 고생하는 건 나였기 때문이다. '으휴... 내 신세야...'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는지 선애와 나는 다음 날 점심시간 직전에야 겨우 겨우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아, 다행이다. 점심은 별관에 가서 먹을 수 있겠어./" 그래프의 마지막 선을 그린 선애가 들고 있던 자와 펜을 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거의 대부분 이 방에서 일만 하는데다가, 나가서는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 뿐이다보니 선애의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옆에 내가 있다 해도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나는 언니보다는 친구들이 더 필요할 시기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선애는 본관으로 들어와 적응하느라 바빴던 데다가 끊임 없이 일거리가 주어졌기 때문에 한 번도 별관으로 놀러간 적이 없었다. 여기에도 주말이나 휴일이 있었다면 그 날을 틈타 놀러가기라도 했겠지만, 이 곳에는 그런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오늘 엘리엇이 점심때까지 제출하라고 했던 일거리 외에는 다른 일거리가 없어 잽싸게 제출하고 잠깐 별관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것때문에 내가 밤에 다른 사람 몰래 사무실에 와가지고 혼자 일까지 했었더랬다. 별관에 가서 시오나를 비롯하여 에밀리와 달시를 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오랜만에 선애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빨리 가자. 빨리, 빨리./" [그래, 그래.] 선애의 기분이 좋아지자 나 또한 기분이 좋아져다. 그 동안 선애의 가라앉은 기분은 나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잠시나마, 아니면 당분간은 그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기분이 나쁠리가 없었다. 기분이 좋아지니 몸의 행동도 재빨라졌다. 빠른 손놀림으로 이틀간의 노력 결과물과 장부들을 정리하여 챙긴 선애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똑, 똑 노크 소리도 경쾌했다. "들어와." 안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선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에는 그랜트 혼자 있는게 아니었다. 책상에 살짝 엉덩이를 걸친 채 서 있는 그랜트와 그의 팔에 거의 매달리다 시피 있는 그의 동생, 그리고 그 동생의 하녀, 거기에 켐벨 집사까지 같이 있었다. 그의 동생인 미란다 루빈스타인이 본관에 머문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는 건 정말 오랜만 이었다. 오늘은 머리를 양쪽을 따아 위로 꼬아 올린 스타일로, 얼굴이 제법 괜찮으니 무척 귀엽게 보였다. 어디 외출 하려는 건지 초록색의 나풀거리는 레이스형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도 같은 색 리본을 매고 있었다. 네 명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에게 쏠리자 선애가 좀 당황했는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아... 저... 지시하신 그래프 그려왔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미란다는 흥미를 잃고 자신의 오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빠, 빨리 가지 않으면 복잡할 거야." "잠깐만, 미란다. 우선 이것부터 확인하고 가자꾸나. 기껏 가지고 왔는데 확인은 해줘야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미란다란 꼬맹이가 오빠에게 뭔가를 조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랜트는 미란다에게 잡힌 팔을 부드럽게 빼내며 선애가 건네는 그래프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왠지 선애를 향하는 미란다의 눈초리가 사납다. 마치 '왜 하필이면 지금 온 거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오빠, 그건 나중에 하면 안돼?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면 되잖아." "잠깐이면 돼. 금방 하니까, 응? 잠깐만 앉아 있어. 우리 미란다 착하지?" 냉정한 얼굴에 성격을 가진 이 녀석도 동생에게는 보통의 오빠인 모양이었다. 그랜트의 달래는 듯한 말에 미란다는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이더니 순순히 물러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만, "거기 하녀, 가서 차좀 가지고 와. 오빠를 기다리는 동안 한잔 마셔야 겠어." 기가 막히다 못해 코까지 막혔다. 자기 직속으로 보이는 하녀가 바로 옆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왜 차 심부름을 선애에게 시킨단 말인가? "저, 저요?" 갑작스러운 지시에 선애가 당혹스럽게 자신을 가리키자 미란다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쬐그만게 괜히 근엄한 척 호통을 치는데 오히려 버릇 없는 소녀처럼 보였다. "그럼 내가 누구에게 말한 것 같아? 너 하녀로써 교육이 잘 못 되어 있구나? 누가 널 교육했지?" '얘야, 내 생각에는 네가 차 심부름 시킬 상대를 잘못 고른 거 같은데?' 선애 또한 기가막힌 표정이었지만, 뭐라 하지는 못하고 켐벨 집사만 바라봤다. 그러자 그 시선을 느낀 듯 켐벨 집사가 얼른 나섰다. "아가씨, 이 아이는 아직 차를 제대로 끓이지 못합니다. 제가 오랜만에 아가씨께 차 한잔을 대접해 드릴까요?" '오오... 열혈 할아버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능수능란한 면까지?' 역시 괜히 집사 옷을 입고 있는게 아니었다. "뭐어? 나이가 있어보이는데 그런것도 제대로 못해? 하기야... 옷차림을 보니 아직 신입하녀인가? 그런데 되게 건방지네?" '뭐 이런게 다 있노? 얘 뭐야?' 그 동안 별 관심이 없어서 지켜보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자기 배경만 믿고 설치는 철없는 애송이였을 줄은 몰랐다. 제 9화 "미란다, 곧 나가서 점심 먹을 건데 차를 마시면 어떻게 하니? 빨리 끝낼 테니 그냥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괜히 선애에게 시비를 거는 이 얄미운 꼬맹이를 달래려는 것인지 그랜트가 끼어들었다. 그 뒤 곧바로 선애에게 손짓해서 부르는 걸 보니, 꼬맹이가 자꾸 방해를 하는 걸 막은 모양이다. "네에~." 그 나이 또래답게 밝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그랜트의 곁으로 다가가는 선애를 바라보는 눈초리는 웃고있지 않았다. 그걸 알아챈 듯 켐벨이 남몰래 작게 한숨을 쉬는 것도 보인다. '이거... 어째 불안한 듯... 혹시 이 꼬맹이 브라더 콤플랙스가 아닐까?' 그 동안 그래왔던 것 처럼 그랜트가 선애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고 선애가 대답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미란다의 눈초리는 점점 사나워지기만 했다. 그 모습에 내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졌지만,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째... 여기와서는 좋지 않은 만남만 생기는 것 같군. 별관에서는 다들 괜찮은 사람들 뿐이었는데... 엘리엇 녀석이나 저 미란단지 미랜단지 하는 꼬맹이나... 걱정이네... 아, 생각난김에 오늘 별관에 갈때 달시에게 엘리엇 녀석이 좋은 녀석이 아니라고 말해주라고 해야지.' 그랜트의 질문은 다른때보다 좀 짧아서 금방 끝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옆에 동생이 있는게 그랜트에게도 좀 걸렸던 모양이다. "/별관으로 가자./" 그러나 그랜트의 사무실을 나온 선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작게 속삭이고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야, 야. 너 괜찮냐?] "/뭐가?/" [뭐가라니? 저 꼬맹이 말이야. 그랜트의 동생이라는 미란단지 미랜단지 하는...] "/괜찮지 않으면 어쩌라구?/" 그제야 나는 선애가 무지 열이 받은 상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미란다에게 신경을 쓰느라 미처 눈치를 못 챘던 것이다. '하기야, 열 안받으면 그게 이상한 거였겠지...' "/젠장, 나보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말이야. 뭐가 잘났다고... 그게 만약 우리학교 후배였으면 내 가만 안 뒀다./" 씨근씨근 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던 선애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더니 나 째려본다. "/이게 다 언니 때문이야./" [그려, 그려. 다 내탓이다.] 내가 체념조로 중얼거리자 고개를 홱 하고 돌리고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으드드득... 별것도 아닌 계집애가 지 배경만 믿고 까불구 있어. 뭐? 내가 건방지다고? 웃기고 있네. 젠장... 다 뒤집어 엎어버릴려다가 참았다./" [그래, 그래. 잘 했어.] "/아... 정말 기분 드럽네.../" 그렇게 왕창 구겨진 얼굴은 별관에 도착해서도 펴질 줄 몰랐다. 그에 선애가 왔다는 것에 반가움을 표하던 세 명도 선애의 잔뜩 구겨진 얼굴을 보고 어리둥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야야, 표정이 왜 그래? 여기 온게 그렇게 기분 나빠?" 막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던지 그들 앞에 점심 식사거리가 놓여 있었다. 덕분에 시오나는 선애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선애의 점심을 챙겨 오겠다며 서둘러 방을 나서야 했다. 그 사이 에밀리가 조심스레 선애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던 것이다. "어후, 몰라요. 아, 선배 혹시 미란단지 미랜단지 하는... 그 얼음왕자 동생 알아요?" "미란다 아가씨 말이야?" "아가씨는 무슨..." 선애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대자 달시가 얼른 다가와 곁에 앉았다. "이것아, 본관에서는 그 어디에서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벽에도 귀가 있고 천장에도 귀가 있는 법이야. 잘못 말이 새어나갔다간 크게 경을 친다구." 달시가 무지 진지한 어조로 충고해주자 선애도 얼굴 빛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제가 여기가 아니면 어디가서 이렇게 투덜대겠어요? 아아... 정말 본관에서는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구요. 사방이 다 어려운 사람들 뿐이니..." "그랬겠지. 정식 하녀도 안되었는데 갑자기 너 혼자 달랑 본관으로 갔으니... 그래, 버틸만 하냐?" 에밀리가 안쓰러운 얼굴로 묻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지낼만은 해요. 참, 달시 선배가 안다는 그 린 선배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럼 다행이네. 하지만 조심해. 그 선배는 마음에 안 들어도 겉으로는 되게 친절하게 굴수 있는 사람이란 말야. 항상 조심, 또 조심해." 선애의 고마움이 담긴 말에 달시가 다시한번 충고한다. "예, 정말 명심할께요. 아, 린 선배 이야기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달시 선배... 그... 부드러운 꽃미남 아직도 좋아하세요?" "꽃미남? 아아... 엘리엇님 말이야? 당연하지. 그 분은 이 각박한 세상에서 한줄기의 단비 같은 분이랄까?" 선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곧바로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달시였다. 아마도 엘리엇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선배...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만 두는게 좋을 거 같아요." "왜? 경쟁자가 많아서? 나는 그런거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니까." 달시가 자신만만하게 싱긋 웃어보이자 선애가 손을 저어보였다. "설마요. 그런거 뿐이라면 제가 이러겠어요? 그 엘리엇이란 분 성격이... 린 선배 성격이랑 비슷한거 같더라구요. 웃으면서 남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이번에 그런거 알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아세요?" "뭐야, 그럼 벌써 한 대 맞은거야?" 그 소리는 윗쪽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작은 쟁반을 든 시오나가 그 곳에 서 있었다. 걱정스러운 시오나의 표정에 선애가 싱긋 웃어보였다. "무지 가볍게 정도... 하기야, 나는 아직 신입 하녀일 뿐인데 이런 나에게 뭘 어쩌겠어?" "하긴..." 시오나가 그제야 표정을 풀며 쟁반을 가져다 놓았다. "본관에 가서 어째 고생만 한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얼굴색도 별로 안좋아진 거 같구..." 선애의 점심식사가 도착하자 그제야 에밀리와 달시가 자신 몫의 식사에 손을 뻗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거기 가서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더라구요. 거기다 일은 좀 많아야 말이죠. 혼자 하는데... 아아... 다시 이쪽으로 오고 싶어요. 여기 있으면 그 지지배 얼굴도 안 봐도 될텐데..." "그 지지배라니?" 시오나가 나가있는 동안 오고갔던 이야기라 당연히 모르는 시오나가 되물었다. "누구냐면... 본관에 있는 후작가 영애 말이야. 이름이 미란단지 미랜단지 하는 애... 아아, 오늘 처음 만나기는 했지만, 이렇게 얄미운 녀석이 또 있을까?" 비록 본관에서 멀리 떨어졌다 하지만 후작가의 영애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당연하다는 듯이 얄밉다는 말을 하자 시오나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러고보니 달시와 에밀리도 흠칫 흠칫 하는게 보인다. "인석아... 제발 말좀 조심해라. 어휴, 너 이렇게 막말하는 애였니? 가슴 떨리게시리..." 달시가 투덜거리며 주의를 주었지만 선애는 의아한 얼굴이다. "뭐, 옆에 없는데 어때요?" "그래도." "예에... 주의할게요." 계급 사회에 살았기 때문에 그럴까? 하기야, 옛날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서울과 멀리 떨어진 산골 벽촌이라 할지라도 국왕에 대해 이야기 할때는 항상 공손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었다니 말이다. 한국에선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 이야기를 할때도 그가 옆에만 없으면 막말로 대하거나 심지어 욕도 하는데 말이다. 이게 계급사회와 평등 사회의 차이일까나? 평등 사회에도 재력이나 권력 같은 것으로 눈에 안 보이는 계급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마음 편하게 욕은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무슨일인데?" 시오나의 질문에 선애는 방금 있었던 일을 투덜대며 설명했다. "글쎄...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선애가 설명을 끝내며 투덜거리자 달시와 에밀리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큰일이구나. 하필이면 미란다 아가씨께 그렇게 찍히다니..." "그러게... 고생 좀 하겠구나. 부디 조심 또 조심해야해." "도대체 왜 선애에게 그런 걸까요? 오늘 처음 봤다는데..." 시오나의 질문에 달시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내 본관 하녀애들에게 듣기로는... 아가씨가 오빠를 그렇게 따른댄다. 그래서 원래 여기에 도련님만 오시는 거였는데 조르고 졸라서 따라온거라던데?" "선애가... 도련님의 하녀 비슷한 거라서 화가 난걸까요?" "어쩌면... 내 듣기로 도련님을 시중드는 사람들은 하녀가 아니라 모두 하인 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갑자기 선애가 나타났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네..." 에밀리까지 한 마디 거든다. [역시... 브라더 콤플랙스였어.] "선애야... 안됐구나..." 시오나가 선애를 바라보며 말하자 선애가 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 여기로 돌아오면 안되려나?" 그래도 그 다음 날 당장 미란단지 뭔지 하는 애가 나타나서 선애를 괴롭힌 건 아니었다. 푸념을 늘어놓으며 점심을 먹고 어느정도 기분을 회복한 선애가 본관으로 돌아 왔더니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켐벨 집사가 자신이 처리하는 장부들을 내놓았던 것이다. 뭐, 켐벨 집사는 그래프가 필요한게 아니었기에 단순히 장부 정리와 조사를 도우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장부를 선애가 일하는 방으로 가지고 가서 하는게 아니라 켐벨 집사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기에 며칠간은 켐벨 집사와 같이 일을 해야만 했다. 다행이 켐벨 집사는 인상처럼 그렇게 크게 까탈스러운 성격도 아닌데다가 사무실을 계속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하는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일도 어려운게 아니었고 말이다. 선애가 장부 정리를 척척 해내자 오히려 켐벨이 선애의 능력에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켐벨 집사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무난하고 순조로운 시간이 흘러가는 어느날이었다. 며칠 미란다의 얼굴을 안 보게 되니 그녀에 대한 괴씸한 마음도, 그녀에게 선애가 찍혀 큰일났다는 걱정도 많이 옅어질 즈음, 오랜만에 엘리엇 녀석이 일거리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래봤자 많지 않은 양인데다 켐벨 집사의 일을 하고 있던 중이라 켐벨 집사의 허락을 맡아서 그의 사무실에서 엘리엇이 가지고 온 일을 했는데, 양이 정말 많지 않았던 터라 하루 일과를 끝마칠 즈음 엘리엇이 맡긴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이왕 끝낸 거 완벽하게 하기 위하여 저녁 먹기 전 잠시 엘리엇의 사무실에 들려 그 일거리를 돌려주려고 했는데, 이게 왠 재수없는 일이란 말인가. 같은 층에 있는 엘리엇 사무실에 가는 중에 하녀 한명을 대동한, 마악 3층으로 올라 오고 있는 미란다와 따악 마주친 것이었다. 이런 걸 바로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는 것이겠지? 미란다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선애는 재빨리 복도 한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속 마음이야 어쨌든 선애는 하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미란다 녀석은 그냥 지나갔으면 좋았을 걸 선애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에구, 저 녀석이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왠지 불안해지는 마음을 부여잡은 채 지켜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미란다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어라, 넌 오라버니의 하녀가 아니니?" 언제 친했다고 건네는 말투가 무척이나 다정하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사나운게 진심으로 반가워서 말을 거는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해. 또 뭔 수를 쓸거 같아.] 내가 조심스레 알려주자 선애가 고개를 숙인채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켐벨 집사님의 하녀입니다." "뭐? 오라버니의 하녀인 줄 알았는데... 그럼 왜 그때 오라버니에게 찰싹 붙어 있어던 거야?" 자기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거의 반사적인 듯 미란다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어투도 날카로워졌다. '아니, 언제 선애가 그 녀석하고 찰싹 붙어 있었다는 거야?' 정말 가만히 듣고 있자니 기가막혀 왔지만, 지금은 계속 상황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전 제네비아님(엘리엇 녀석) 심부름으로 서류를 가져다 드렸던 것 뿐입니다. 도련님께서 절 부르신 건 서류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선애의 말에도 미란다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기분 나쁘다는 듯 눈쌀이 찌푸려졌다. "방금 넌 자신이 켐벨 집사의 하녀라고 했던 거 같은데... 왜 엘리엇의 심부름을 네가 했을까? 너 내가 바보인 줄 아니? 대충 둘러대면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어?"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선애가 뭘 대충 넘어간단 말인가? 말하는 꼴을 보니 전에 자기 오빠의 하녀들을 괴롭혔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선애가 거짓말을 해서 그 사실을 숨기려 한다고 생각하지. "제가 처음 켐벨 집사님 밑으로 들어갈 때 제네비아님 일도 같이 도와드리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제네비아님 일을 거들고 있었던 참입니다." "거짓말 마. 엘리엇이 얼마나 까다로운 녀석인데 네까짓게 엘리엇의 일을 거든다는 거야? 네가 그렇게 대단해?" '대단하지 그럼. 내 동생인데...' 정말 억지에 가까운 미란다 꼬맹이의 질문에 선애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녀석이 이죽거렸다. "하긴, 대단한가 보지. 그러니 켐벨 집사랑 엘리엇의 일을 동시에 도와준다는 거 아니겠어? 어머, 그러고보니 대단한 신입 하녀양? 내가 깜박 잊고 내 방에서 부채를 안 가지고 나왔거든. 그것 좀 가져다 주지 않겠어?" '쬐끄만게 부채는 무슨 부채!!' 부채가 필요 없게 확 태워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선애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제네비아님께 가는 중이라..." 하지만, 선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오늘 저 꼬맹이 녀석이 단단히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어머, 제네비아의 심부름이 내 심부름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야?" "하지만, 전 아가씨의 방이 어디있는지도 모릅니다. 본관에 온지 얼마..." "그거야 내가 친절하게 가르쳐 줄게. 내 방은 이층 중앙 계단으로부터 오른쪽 두번째 방이야." '방이 이층이면 거기서 놀 것이지 왜 삼층에는 올라온 거냐?' 선애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앙다물고 있자 의기양양해진 미란다 꼬맹이는 생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내 부채는 화장대 위에 있어. 아, 향나무로 만들어진 갈색 부채니까 그걸로 부탁해." '네 뒤에있는 하녀는 장식이더냐?' 이가 빠드득 빠드득 갈렸다. [확 태워줄까?] 그러나 선애는 내 말에는 대꾸도 안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침착하게 대답 하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엘리엇의 사무실을 지나쳐 중앙 계단으로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뒤에 키득대는 나쁜 녀석 둘을 남겨두고 말이다. [서, 선애야?] 척척 걸어가는 선애의 뒤를 졸졸 쫒아가며 나는 불안해진 마음에 조심스레 불렀다. 이 녀석의 성격상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역시나, 대답하는 녀석의 어조가 퉁명스러웠다. [너 괜찮냐? 왜 저런 애를 그냥 나두는데? 내가 혼내주겠다니까...] "/됐어./" [에에?] 나는 정말 진정으로 놀랐다. 내 동생이 하루아침에 뭘 잘못 먹어서 개과천선한 건 아닐텐데 됐다니... [저, 정말?] "/그래./" [진짜로 정말?] 선애의 대답에 믿을 수가 없어진 내가 다시금 묻자 냉정하게 굳어져 있던 녀석의 인상이 팍 찡그려진다. "/그럼 진짜로 정말이지 가짜로 정말이냐?/" [아니... 네가 왠일인가 싶어서... 절대로 가만히 둘 녀석이 아닌데 말야.] "/당연히 절대로 가만 안 두지. 내가 왜 가만 두냐?/" 뜻밖의 말이었지만, 하루 아침에 성격이 변한 건 아니구나... 싶어서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의아한 면 또한 있었기에 나는 계속 물었다. [에에, 그럼 왜 내가 혼내주겠다고 했을때 가만 있었어?] "/그거야... 그 정도로는 절대로 분이 안 풀리니까. 게다가 그랬다간 그 영향이 나에게까지 미칠 거 아니야. 이 원하는 두고두고 나중에 내가 손수 몇배로 갚아 주고야 말 거야. 어디, 한번 멋대로 놀아보라지./" 이까지 빠드득 갈고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나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던 미란다가 순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건 정말 잠시뿐이고 곧바로 자업자득이란 말이 떠올랐다. '훗... 그럼 그렇지... 얘야, 넌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선애가 그 미란다란 꼬맹이의 방에 도착하는 동안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서 누구 하나 선애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있었다 해도 꼬맹이의 심부름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손에 장부와 서류를 들고 있는 모습이 좀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겠지만서도... 혹시나 그 꼬맹이가 머리를 좀더 굴려 없는 부채를 가지고 오라고 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도 그건 아니었다. 미란다가 말한 그 부채는 그녀가 말한 대로 화장대 위에 얌전하게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선애에게 심부름 시킬 걸 급히 생각하다보니 아예 없는 걸 시켜서 골탕 먹이려는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은 걸 수도 있겠지만, 선애에게는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선애가 사용하는 세숫대야을 올려놓는 탁자보다 다섯배정도 커다랗고 나뭇결이 그대로 보이면서 그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우아한 조각이 새겨진 화장대였다. 거기에는 선애 키의 절반만한 진짜 비싼 은거울까지 달려 있었다. "/헤에... 역시 아가씨의 방이라 다르긴 뭔가 다르군./" 선애의 사무실, 아니 엘리엇 녀석의 사무실보다 훨씬 크고 우아하게 꾸며진 방을 휘익 둘러보며 선애가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나 이런 방에서 한번 살아보나.../" 약간 부러운 말투로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멋진 방을 둘러본 선애가 밖으로 나오는 그때였다. "여기서 뭘 하지?" 어째 본관에 와서 자주 만나게 되는 얼음왕자였다. 그를 보자마자 선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너에게?" 의아한듯 되묻던 그가 선애의 모습을 살피더니 약간 당혹스러운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서류까지 든 채로?" "제네비아님 사무실에 가는 길에 아가씨와 만나게 되어서..." "그 애가 뭘 시켰지?" 그의 질문에 선애는 서류 위에 올려 놨던 부채를 보여줬다. "이 부채를 가지고 오시라고..." "미란다는 어디 있느냐?" 자연스레 손을 뻗어 부채를 가져간 그랜트가 다시한번 물었다. "3층 복도에 계십니다." "이건 내가 가져다 줄테니 넌 엘리엇 사무실에나 가보도록 해라." "예." 그 일을 그랜트가 맡아준다니 선애는 말릴 권리도 없었지만, 말릴 의향도 없었기에 얼른 대답하고 그 곳을 떠났다. 그랜트가 있으니 중앙 계단을 사용할 수가 없어 복도 끝에 있는 하인, 하녀 전용 계단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빙 돌아가게 생기긴 했지만, 그 꼬맹이 녀석을 안 볼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라고 생각하는 듯 선애의 얼굴은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엘리엇의 사무실로 간 것까진 좋았는데... 참, 정말 상황이 웃기게도 하필 그 사무실 안에 엘리엇은 물론이거니와 그랜트와 미란다까지 같이 있는 거였다. 그것도 미란다는 뭔 이야기를 들었는지 볼이 퉁퉁 부어서는 들고 있는 부채를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쥐고 있다가 선애가 들어오자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매섭게 노려보는 것이었다. '또 왜 저런대... 오호라, 아까 선애를 괴롭히려고 했던 게 수포로 돌아가서 저렇게 된 거로구만.' "그럼." "알겠습니다." 선애가 들어갈때까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던 그랜트가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는 뒷편에 가만히 서 있던 선애를 힐끗 한번 본뒤 뾰루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미란다를 불렀다. "미란다, 그만 가자꾸나." 그러자 뾰루퉁해 있었던 주제에 쪼르르르 자기 오빠에게 달라붙는다. 그렇게 그랜트와 같이 방을 나가려는 찰라 고개만 돌려 안을 들여다보던 미란다가 다시 한번 선애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낸 뒤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뭐냐 저 녀석...' 그러나 선애는 무덤덤하니 엘리엇에게 들고 있던 걸 건넬 뿐이었다. "지시하신 그래프입니다." "수고했어요." 평소와 다름 없는 미소 띄운 얼굴로 선애가 건네는 장부와 그래프를 받아 든 엘리엇은 장부는 내려놓고 그래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항상 그래프를 살펴보고 혹시 모르는 거나 의아한 것이 있으면 질문 했기에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그가 그러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엘리엇이 시선은 그래프쪽을 향한 채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파문을 일으키면 상당히 피곤할텐데요." "예?" 정말 뜬금없는 말에 선애가 당황했는지 되묻자 그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랜트 녀석 못지 않은 차가운 무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괜한 풍파 일으키지 말란 말입니다. 제법 눈치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단순히 그랜트님께 뜨이고 싶어서 안달하는 멍청이 였습니까?" 미란다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이 녀석까지 더하려 하자 선애도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곳에서는 숨기려 했던 녀석의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당당하게 맞섰다. - 한마디로 선애도 표정을 굳혔다는 이야기. 선애도 정색을 하면 무섭다.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말입니다. 방금 그랜트님께서 당신 일로 아가씨께 한 마디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그랜트가 부채를 가져다 주면서 뭐라 한마디 했던 모양이다. "아가씨 방에서 나오던 절 도련님께서 발견하신 거였습니다." 선애의 말이 변명으로 들린 모양이다. 엘리엇 녀석의 얼굴에 명백한 비웃음이 서린다. "아가씨와의 일 조용히 처리했으면 좋겠군요.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구요." 이놈... 분명히 그 미란단지 마란단지 하는 꼬맹이가 선애를 괴롭히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용히 처리하라면... 그냥 당해주란 말인가? 이놈 이놈 점점 마음에 안 드네.' 선애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제가 한 행동이 마음에 안 드신 모양이신데, 그럼 아가씨의 지시를 받았을때 제가 어찌하란 말씀이십니까? 저는 아직 신입 하녀라 그런거 잘 모르겠군요." "훗, 그런 걸 일일히 설명해드려야 한단 말입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그랜트님께 인정 받을 정도면 그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인정 받고 싶은 적 없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별관으로 가서 조용히 있고 싶군요. 부디 제네비아님께서 그렇게 조처해 주시겠습니까?" 선애는... 언어능력 점수는 낮아도 말발은 무지 쎘다. "그거 참 미안하군요. 저는 힘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럼 뭐라고 하지 마시지요. 저도 머리가 좋지 못해서 아가씨의 지시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모르겠으니까요. 그걸 가르쳐주시지 않으실 거면 저에게 뭐라 하실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선애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오히려 따지고 들자 비웃음 가득하던 엘리엇의 인상이 찌푸려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그래프를 큰 소리가 나도록 세게 책상위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선애를 노려보며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손을 들어 선애의 목줄기를 부여잡는 거였다. 그리고는 놀라서 둥그래진 선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지 낮은 어조로 협박했다. "죽고싶지 않으면 그 혀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랜트님께 꼬리를 흔드는 계집이 당신 하나뿐인 줄 아십니까? 그랜트님께서 당신께 호기심을 느꼈다 해서 자만하며 분란을 일으켰다간 제 손으로 직접 이 목을 부러뜨려 드리지요." 하지만 그 놈은 모를 것이다. 그 순간 자기 뒤에서 내가 양 손으로 그 놈의 감싸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 것을 볼 수 있는 선애는 분노에 찬 내 눈과 마주치자 그제야 침착함을 되찾으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 전에 제네비아님 목을 조심하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이래뵈도 저에게는 든든한 백이 있거든요." 이렇게 친절하게 경고를 해줬건만, 엘리엇 놈은 선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픽 하고 비웃음을 날리며 천천히 선애의 목을 잡았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랜트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걱정 안 해도 되겠군요. 이제 당신 얼굴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당신의 능력은 높이 사고 있었는데 좀 아쉽군요." 도대체 선애 백 이야기에 그랜트 이름이 나오는 걸까. 기가막히다는 듯 선애가 엘리엇을 바라봤지만, 엘리엇은 이미 고개를 돌린 후였다. "어쨌든,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나가보시지요. 저녁을 드셔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순식간에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다정하게 말하는 놈이었다. 그의 순간적인 표정 변화를 보고 있자니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놈이라는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선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처럼 덤덤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마자 나는 선애 옆에 따라붙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냐? 아아... 저 놈이 저런 놈이었을 줄 누가 알았냐? 정말 기분 나쁜 놈이었어.] 그런데 선애가 평소처럼 별관이나 식당 쪽으로 향하는게 아니라 곧바로 숙소가 있는 윗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 속으로 쏘옥 들어가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기 시작했다. [서, 선애야.] 내가 놀라서 부르자 녀석의 눈에서 더 많은 눈물이 쏟아지더니 급기야 엉엉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흐어어엉~~... 엉엉엉, 나쁜 자식. 내가 뭘 어쨌다구... 엉엉엉.../" [야아...] 아까 그 놈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괜찮아, 언니가 그 놈 혼내주께. 울지마, 응?] 선애를 안아주고 토닥거려도 선애의 울음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으허어엉... 그 자식도 가만 안 둘꺼야... 꺼이 꺼이.../" [그래, 그래. 내 밤에 찾아가서 밤새 못 자도록 괴롭혀주던지 불에 태워주던지 할께.] 저녁도 안 먹고 울어대던 선애는 그대로 잠이들어버렸다. 하도 울어서 퉁퉁 부운 눈으로 잠든 녀석의 얼굴을 보자니 너무나 안쓰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래도 가만 있을 수는 없어서 선애의 옷을 벗기고 얼굴도 차가운 물로 적신 수건으로 닦아주자 녀석이 움찔 거리면서도 시원한게 기분 좋았는지 거부하지 않는다. '에휴...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이노무 엘리엇 자식. 오늘 밤에라도 찾아가서 괴롭혀주고 말리라.' 선애를 편하게 누이고 시트를 덥혀주고 굳은 결심을 하고 있는데 방 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선애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린이 들어왔다. '오옷, 린 너구나. 너라면 선애에게 좋은 충고라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선애의 이런 안쓰러운 모습을 보고서도 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한번 힐끗 보더니 그냥 나가버린다. 그모습에 나는 기가막혀 한동안 입만 벌리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친절하고 다정하게 선애가 본관에서 지내는 걸 도와줬으면서, 이런 모습에도 저렇게 덤덤할 수 있는 걸까? 그제야 선애가 본관으로 옮겨온 뒤 처음 별관으로 놀러 갔던 날 달시가 진지하게 충고한게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은 그 충고가 무섭게 가슴을 짖누르고 있었다. '여긴... 정말 무서운 곳이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엘리엇에 대한 분노로 충만해서 밤중에 그 놈 침실에 쳐들어가 복수를 해주려고 했었는데, 린의 행동에 머리와 가슴이 서늘해지며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곳에 선애를 절대로 혼자 두고 싶지가 않았다. 다음 날, 선애는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켐벨 집사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제 녀석이 잠든 사이 열심히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찜질해준 보람이 있었는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부은 얼굴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꼬맹이 녀석은 그렇게 밤새도록 수고한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다. '치사한 녀서 같으니라구.' 아침에 일어나서 같이 식사를 한 린은 언제나와 같이 친절하고 다정했다. 단지, 어제 밤에 선애가 울며 잠들었던 걸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엘리엇이나 린에 비하면 차라리 열혈 성격을 가져가지고 그래프 몇개 가지고 일을 크게 벌린 켐벨 집사가 훨씬 훠어얼~씬 나은 거 같았다. 그래서 난새 처음으로 엘리엇 녀석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 녀석 밑에 선애를 두지 않고 켐벨 집사 밑으로 보내줘서 말이다. 엘리엇 놈도 린과 마찬가지로 그 뒤로 선애를 봐도 평소처럼 부드러운 꽃미남의 모습을 유지했다. 물론, 선애도 만만치 않게 담담하게 대했지만... 그걸 보고 엘리엇 놈의 눈에 감탄한 기색이 살짝 나타나기도 했다. 아무래도 '만만치 않겠군.'이라고 생각한 것일테지. 그리고, 그 미란다라는 꼬맹이 녀석은 자기가 사랑하는 오빠에게 뭐라 한 마디 들었다더니 그 뒤로 선애를 보면 째려보기만 할뿐 달리 뭘 어떻게 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꼬맹이 또한 이렇게 순순히 가만 있을 것 같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계속 조심스레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는 동안 무척 바쁜 계절인 가을이 지나가고 첫 눈이 내렸다. 선애가 이 세계에 와서 맞이하는 두번째 겨울이자 이 저택에 들어와 처음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겨울이 되어도 선애는 여전히 신입 하녀였다. 봄이 되면 본관 하녀로 승진이 되던가 그게 아니면 그래도 한 단계 올라가 월급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다른 애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어가지고 지네들이 실컷 써먹으면서 월급도 안 준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여기에 노동법이라도 있었으면 미성년 착취로 고발했을 거다. [아, 역시 한국이 좋은 나라야.] 그 생각을 하니 한국이 그리웠다. 그래서 중얼거렸더니 선애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본다. "/갑자기 왠 헛소리야?/" [아니, 그냥 생각나서...] "/헛소리 하지 말고 빨랑 가자. 오늘 점심 같이 먹기로 했단 말이야./" 그러고보니 별관에 있는 시오나는 겨울이 되어 데이트를 제대로 못하는 듯 했다. 날씨도 춥거니와 그 견습 기사인 애인이 봄에 정식 기사가 되니까 그때까지 실력을 올리겠다고 특훈에 들어갔단다. 그래서 얼굴 보기도 힘드니까 선애나 붙잡고 하소연이나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애도 날이 추우니까 전과는 달리 별관으로 향하지 않다가 며칠 전 그 얄미운 엘리엇 녀석이 내준 일을 오늘 끝낸 기념으로 오랜만에 별관에 가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려, 그려.] 뭐, 원래 선애가 엘리엇 녀석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녀석이 선애를 협박한 그 날뒤부터 겉으로는 괜찮은 척 지내고 있었지만, 사실 선애는 그 녀석 가까이 가는 걸 무척이나 꺼려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뒤에 버티고 있으니 괜찮은 척 할수 있는 것 같았다. 혹시나 내가 없으면 그 녀석 앞에 설때 두려워 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 뒤로는 될 수 있는 한 선애 곁에 붙어 있으려고 했다. 뭐, 계속 그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에는 가끔 심심하면 혼자 산보를 갔다 오곤 했었는데 그 낙을 아예 포기했던 것이다. '나는 그 정도로 자기를 생각해 주건만... 인석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줄라나 몰라...' 복도는 바깥 기온보다 따뜻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쌀쌀한 편이었다. 이 나라에서 알아주는 후작가의 저택이라 난방이 빵빵하기는 하지만, 그 난방이 복도까지 이어지는 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선애는 어깨를 움츠린 채 품에 있는 서류를 꽈악 끌어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두명의 하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 3층 복도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들이었기에 어쩌다 가끔 마주쳐 안면이나 알고 있는 관계였다. 이 추운 날에도 청소할때는 물걸레질을 해야 했던지 그녀들은 손에 각각 물과 물걸래가 담긴 작은 나무통을 들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 안에 든 물은 따뜻했겠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추운 날 물걸레질 하는 그녀들의 손을 보호할 수는 없었는지 그녀들의 손이 빨갰다. 그 모습이 안되보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내 동생이 저런 일을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뭐, 만약 선애가 이 겨울에 물걸레질을 해야 했다면 다 나에게 떠넘겼을테지만 말이다. 선애와 그녀들의 거리가 가까워져 오자 선애는 선배에 대한 예의로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한편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들이 그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주며 지나치려는 찰나, 선애쪽에 서 있던 하녀가 미끄러졌는지 갑자기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거기서 끝나면 좋았으련만, 그녀의 팔이 크게 위로 튕겨져 오르는 바람에 그녀가 들고 있던 물통의 물이 위로 튀어 그대로 선애에게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꺄악, 어떻게 해. 너 괜찮니?" 같이 있던 하녀가 호들갑을 떨며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고 얼른 다가와 자신의 앞치마로 선애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물을 쏟은 하녀도 당황하며 사과해 왔다. "정말 미안해. 괜찮아?" 선배들이 그렇게 당황하며 사과를 하는데 후배인 주제에 어떻게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걸레 빤 지저분한 물을 추운 날 뒤집어 썼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실수인 듯 한데... "괜찮아요. 하지만... 옷이 젖어서 빨리 가봐야겠어요." "그래, 어서 가봐. 여기는 우리가 치울테니까." 자기가 엎질렀으니 당연한 건데, 그걸 왜 선심쓰는 것 처럼 말한 것일까나... 하지만, 선애는 그에 감사를 표하고는 얼른 켐벨 집사 옆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옷을 갈아 입었으면 좋겠지만, 그 보다도 서류를 살펴보는 것이 먼저였다. 그 자리에서 호들갑떨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거의 뛰다시피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니 과연... 옷이 흠뻑 젖었는데 품에 있었다고 해도 종이가 안 젖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안쪽에 있는 장부는 안 젖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장부 다음에 자리잡고 있었던 그래프를 그린 종이는 부분 부분 젖었지만, 다시 그려야 했다. 엘리엇 녀석, 일할때는 정말 완벽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괜찮겠지...' 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젠장... 처음부터 다시 다 그려야 하잖아?/" 어차피 계산은 다 되어 있는 거라서 금방 새로 그릴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전부 다 그리는 건 시간이 걸렸다. 별관에는 저녁에 갈 수 없었다. 저녁은 별관에서 묵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같이 식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과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달시, 에밀리, 시오나처럼 친한 건 아니었기에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냥 옷만 갈아입고 별관에 다녀 오던가. 그러면 그 동안 내가 그려놓을 테니까. 어차피 엘리엇 녀석도 점심을 먹어야 할테니 차라리 점심시간 끝나고 가져다 주는게 좋지 않겠어?] 내 말에 선애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내가 다시 그려주겠다는 말이 제일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런 수고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왠지 운이 없는 동생을 위로할 때는 인심을 팍팍 써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나는 점심을 안 먹어도 되니까 말이다. "/알겠어. 그럼 부탁할께./" [오냐, 가서 점심이나 먹으면서 기분이나 풀고 와라. 그냥 오늘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응응./" 그러나 그게 단순한 재수가 없었다는 게 아니었다는 걸 나나 선애는 몰랐다. 그렇게 그 복도 담당 선배 하녀들의 연기가 21세기 한국 유명 배우들 뺨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맛! 어머머... 미안해." 하루 일과를 끝마친 선애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하여 하인, 하녀 전용 계단을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윗층에 있던 선배 하녀 한명이 선애 앞을 가로막아 서더니 미끄러진 척 하며 부딪혀 온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아까 낮에 보여준 선배 하녀들에 비해 형편없었기에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게다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 선애는 거의 밀쳐지다시피 뒤로 넘어갔다. 내가 뒤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다. 이번 하녀도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엘리엇 녀석이 선애에게 협박을 하기 전까지는 심심하면 자주 이곳 저곳 산보를 나왔던 나였다. 그래서 선애보다는 대충 이 곳 하인, 하녀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미란다의 시중을 드는 하녀였다. 미란다는 본가에서 내려올 때 자신의 하녀들 몇몇을 데리고 왔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랐던지 이 저택 하녀들까지 몇명 붙었는데 그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 동안 주의한다고 주의했었지만 미란다가 잠잠하게 있어서 어느새 경계심을 흐트러뜨리고 말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랬다고 하지만 이렇게 치사한 수를 쓰다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의협심이 강한 대협도 아니라 쉽게 화내고 자기만 생각하는 속좁은 사람이었다. 선애가 넘어지지 않고 얼른 벽을 짚고 균형을 잡은 걸 - 내가 안 보이니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거다. - 힐끗 본 그녀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빠르게 내뱉고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는 거였다. 그래 열받아서 그녀의 뒤를 쫓아간 나는 그 아랫층이 두어계단 남았을때 뒤에서 그녀의 발을 차버렸다. 주륵~ 쿠당! 계단을 디딜 발이 허공을 짚어 버렸으니, 그녀는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심하게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꺅!" 소리가 큰 걸 보니 고통도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이 팍 찡그려졌다. "어머나, 선배 괜찮으세요?"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듯 선애가 얼른 내려오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마침 그 계단을 오르려 곁에 있던 하녀도 그녀를 부축해줬다. "괜찮아? 미끄러진 거야?" "아아... 아그그... 괘, 괜찮아아아..." 하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는 걸 보니 엉덩이가 심하게 아픈 것 외에는 다른 데는 다친 곳이 없는 모양이었다. 선애가 내려와 들여다보자 그녀는 아파서 설설 기면서도 화들짝 놀라며 얼른 그 자리를 뜨려고 어기적 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헹, 고소하다.] 그러나 선애는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살펴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날 째려보기 시작했다. [왜에?] '설마 너무 극악한 방법이었다고 뭐라 하려는 걸까? 하지만 저 녀석 성격 상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이런 저런 생각에 선애의 눈치를 살피는데 선애의 입이 벌어지며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언니 바보지? 아무 생각 없이 그러면 어떻게 해? 그때 만약 다른 하녀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도 없었으면 꼼짝없이 내가 그런 걸로 되어버리잖아. 그 녀석이 내가 그랬다고 빡빡 우기기라도 하면 어쩔라구? 나는 후배고 걘 선배잖아?/" [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그냥 열받아서 행동 한 건데... 역시나... 선애가 너무 극악했다고 뭐라 할 리가 없었다. "/'아'가 아니야 '아'가. 복수를 하더라도 확실하게 해야지.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그런 애들은 네가 직접 안 하고?] "/내가 직접하기는 뭘... 분명히 시키는 대로 하는 걸텐데... 그런거 어떻게 일일이 상대해?/" [알았어. 그럼 내가 확실하게 복수를 해주지.] 사실 미란다가 선애를 미워해서 하녀들을 이용해 괴롭히려고 해도, 선애는 명목상 켐벨 집사의 하녀인데다가 그랜트와 엘리엇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대놓고 선애를 괴롭히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이 행하는 것이라고는 실수를 가장한 괴롭힘이었는데, 그것도 선애가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도 적었기에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까... 왠지 그 하녀들이 안됐다고나 할까... 내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확실한 복수를 결심하자마자 처음으로 걸린 하녀들을 혼내준 다음 나는 왠지 약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선애에게 푸념을 늘어놨다. 그 다음 선애를 괴롭힌 방법은, 오랜만에 목욕하러 들어갔는데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와서 뜨거운 물을 모조리 가져가 버리는 거였다. 갑자기 아가씨께서 필요하시다나 어쨌다나... 별관에서는 목욕하고 싶은 사람이 직접 물을 데워야 했었지만, 본관에서는 뜨거운 물이 일정량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물이 남으면 목욕까지 할 수 있는 거였고, 별로 없으면 간단하게 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뭐, 선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그걸 모르는 하녀들이 그 점을 노린 것이었다. 아예 씻지도 못하게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모조리 가져가는 그 악의에 선애는 기가막히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지만, 난 그렇지가 못했다. 고생하는 건 나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 방법을 써서 선애보다 내가 훨씬 화가 났는지도... 그리하여 다음 날, 그녀들이 미란다의 방을 청소할때 방에 숨어들어가 벽난로 근처에 불을 일으켜버렸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벽난로에서 이물질이 들어간 나무가 불에 타다가 튀어 불씨가 튀어나온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미란다가 얄밉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을 홀랑 태울 수는 없어서 벽난로 근처만 태웠는데, 그 일로 저택이 발칵 뒤집혔었다. 하기야, 아가씨 방에서 불이 났으니 당연하겠지만서도... 그리하여 미란다는 그 방이 수리될 때까지 그 보다 작은 손님방으로 옮겨가야 했고, 그때 방을 청소하고 있던 하녀들은 모조리 별관 하녀로 강등되어 별관으로 쫓겨가야 했다. "/뭐, 불을 일으킨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겨울에 번졌으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자나깨나 불조심, 몰라?/" [조금만 혼내주려고 했는데... 어차피 크게 번지려고 했어도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걸. 하지만... 생각외로 소동이 크긴 컸지? 다음번에는 불 가지고는 하지 말아야겠어.] "/그렇게 해. 사실 원흉은 그들이 아니라 미란다라는 그 꼬맹이 녀석이잖아./" [응응.] 그렇게 해서, 그 다음 장부와 서류더미를 잔뜩 들고가는 선애를 밀어 넘어뜨릴 뻔 했던 하녀는 식당에서 슬쩍 발을 걸어서 앉아서 식사 하고 있던, 하녀장 올리버 부인의 머리 위에 들고 있던 뜨끈뜨끈한 스프를 쏟게 만들었고, 선애의 깨끗하게 빨린 하녀복을 가져오다가 실.수.로 찢어지게 만든 하녀는 이 저택 하인, 하녀들 사이에서 성격이 더럽기로 소문난 부집사 앞에서 넘어뜨려 그 부집사까지 같이 넘어지게 만들어버렸다. 그 뒤로 그 하녀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그녀들도 안됐어. 주인 하나 잘못 만나가지고.../" [그러게. 하긴, 미란다가 시키는 걸 거부할 수는 없었겠지?] 미란다의 밑에 있던 하녀들이 자신들의 실.수.로 인하여 별관 하녀로 강등당하자 미란다 진영(?)에서 병사(?)를 바꾸었다. 아무리 미란다라고 해도 처음 보는 하녀에게 '저 애가 내 맘에 안드니까 저 애좀 괴롭혀.'라고 지시를 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동안 그녀의 그런 지시를 따를 만큼 안면을 익힌 하녀들이 모조리 별관으로 쫓겨가고 새로운 하녀들로 물갈이 되자 그녀들과 안면을 익힐때까지 기다리기 싫었던지 미란다가 본가에서 직접 데리고 온 하녀가 나섰던 것이다. 그녀는 미란다와 본가에서 왔다는 이유로 일반 본관 하녀들보다 한단계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치사하게도 그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우연히 - 정말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 계단을 올라가던 그녀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선애와 부딪혔던 것이다. "뭐야, 똑바로 보고 다니지 못해?" 짜악~!! 크게 넘어진것도 아니고 살짝 부딪혔을 뿐인데 그녀는 크게 화를 내며 - 아마도 속으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 갑자기 손을 올려 선애의 뺨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 눈에서 불꽃이 튀는 줄만 알았다. [너, 너, 너어어... 네가 감히이이~!!] 부딪힌 것도 자기가 일부러 선애에게 접근해서 부딪힌 거면서...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금새 선애의 뺨에는 붉은 손자국이 새겨지는 거였다. 순식간에 얻어맞은 선애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멍 하니 있는 사이 그녀는 한마디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흥, 다음부터 조심해." 아무리 미란다의 비호(?)를 받는 그녀라고 해도 사방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하녀, 하인들의 눈초리를 감당할 수는 없었나보다. 그녀가 사라지자 마침 근처에 있던 본관 하녀가 잽싸게 다가왔다. 그 본관 하녀는 별관에 숙소를 가진, 달시와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 선애와도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머, 너 괜찮니? 뺨이 장난이 아닌데..." "아, 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선애가 뺨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아팠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뗐다. "뭐야... 저 여자... 뭐 그런거 가지고 뺨까지 때린다니... 어머, 붓기 시작하는데... 찬 물로 식혀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지금 집사님이 부르셔서요." "어떻게해... 쯧쯧..." 선애의 말에 그 본관 하녀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며 멀어져 갔다. 그녀의 모습이 거의 사라질 즈음 선애가 이를 빠드득 갈며 나에게 속삭였다. "/언니... 이번에는 강하게 부탁해./" [오냐. 그렇지 않아도 내 단단히 마음 먹고 있느니...] 선애의 말대로 지금 선애는 켐벨 집사의 부름을 받고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뺨을 식힐 틈도 없이 그대로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라고 해야 할지, 켐벨 집사의 방에 그랜트하고 그 얄미운 엘리엇까지 같이 있는 것이었다. 선애의 뺨을 본 켐벨 집사의 눈이 둥그래졌지만, 그랜트의 앞이라서 그런지 아무 말도 못하고 헛기침만 했다. 그 갈아먹고 삶아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엘리엇 녀석은 선애의 모습을 힐끗 보더니 피식 한번 웃어보이는 거였다. 그에 '저 놈에게도 복수를...' 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데 뒤늦게서야 선애의 뺨을 본 듯한 그랜트 녀석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뺨이... 왜 그러지?" [네 놈 동생때문이잖아, 임마.] 따지고보면 미란다 녀석이 선애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것도 다 저 그랜트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나에게 그랜트가 곱게 보일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에게나 막말을 할 수 있는 나에 비하여 선애는 그러지 못한 처지였으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거 같은데?" 선애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듯 그랜트가 되물었지만, 거기다대고 뭐라고 말하리오. 나 혼자 가슴이 답답해 주먹으로 가슴을 칠 뿐이었다. 기실, 선애의 뺨은 아까는 단지 빨간 자국만 남아 있었을 뿐인데 그게 지금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으아아아... 제기랄, 그 지지배 정말 가만히 안 둔다.] 그랜트 녀석이 선애에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선애의 턱을 잡아 들어올리고는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으갹, 이놈아 지금 뭐하는 겨?] 그랜트 녀석 뒤통수를 한대 때려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그랜트가 선애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이랬지?" [누구긴 누구야? 네 놈 동생이 그랬다니까!] 그러나 나와는 달리 선애는 입만 꾸욱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랜트도 계속 묻지는 않고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만 물러가라. 일은 나중에 집사에게 듣고 우선 뺨이나 식히도록." "예."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저 녀석이 미란다의 오빠라는 걸 생각하면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선애가 집사의 집무실을 나오자 나는 즉시 선애에게 속삭였다. [저기, 엘리엇 녀석에게도 복수를 할까? 아까 너 보고 피식 웃던데...] "/그 녀석은 나중에. 아까 그 계집이 우선이야./" 선애의 말은 살기가 들어있는 듯 매서웠다. [알았어. 그럼 나는 그쪽으로 가볼테니 조심해라.] 복수를 하려면 미리 상대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럴려면 어쩔 수 없이 선애의 곁에서 떨어져야 했는데, 그 사이 선애가 또 뭔 일을 당할까 걱정이었다. 물론, 무슨 일을 당하면 그 만큼 복수를 해주겠지만, 이런 일은 안 당하고 안 하는게 좋은게 아니겠는가? 그래도 요즘에는 미란다 주변에 있던 본관 하녀들이 한번 쫘악 물갈이가 되었으니 당분간 본관 하녀들에 대해서는 조금은 안심을 해도 되겠지만... '으휴... 빨랑 갔다와야지.' 나는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바닥 밑으로 스르르 가라앉았다. 이런 몸이 된지 일년이 지나니까 이제는 바닥을 통과해 아랫층으로 그대로 떨어지는 것에 별 위화감이 없다. 그 하녀는 미란다의 직속이었으니 분명 미란다와 같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우선 미란다가 이번에 새로 옮긴 방으로 가봤다. 과연, 미란다는 방에 있었는데 마침 내가 찾던 그 하녀가 미란다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란, 바로 선애에 관한 것이었다. "뭐? 그 계집애의 뺨을 때려줬다고?" "예에, 그렇다니까요. 있는 힘껏 때렸으니까 지금쯤 잔뜩 부풀어 올랐을 거예요." "까르르르... 아이 고소해라. 멍은 안 들었을까?" "글쎄요... 그 정도로 멍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칫, 아쉬워... 하지만 하는 수 없지. 아, 조금 있다 그 계집이나 찾아가 볼까?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보고싶어." [허, 허, 허, 넌 죽었어.] [허, 허, 허, 넌 죽었어.] 더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를 빠드득 빠드득 갈며 손을 뻗었다. 그 하녀는 미란다의 머리를 고데기 같은 것을 이용하여 웨이브를 지게 만들고 있었다. '고데기'하면 요즘 애들이 알아 들을지 모르겠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둥근 원형통 모양을 하고 있는 매직기라고나 할까? 예전에 홈쇼핑에서 그 비슷한 것을 판매하는 걸 얼핏 보기는 했는데, 그걸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나 어렸을때에는 요즘같이 좋은 시설이 안 좋아서 커다란 전기 보온통에 그 고데기를 달구어서 머리 모양을 내었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전기 보온통 같은 것도 없으니 옆에 자그마한 화로를 가져다 놓고 거기다가 고데기를 달구어서 사용 하고 있었다. 미란다가 뜨겁지 않게 조심스럽게 하면서도 제법 예쁜 모양이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하녀의 실력이 제법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가씨의 머리를 만지는 것도 오늘로 끝이다, 짜샤.] 내가 이렇게 뒤에서 이를 득득 갈고 있는 걸 모르는 하녀는, 들고 있던 고데기가 다 식었는지 옆에 있던 화로에 파묻힌 고데기를 집어 들었다. 화로에 파묻힌지 좀 오래 되었는지 철로 된 고데기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자 그걸 그 옆에 있던 물통 속에 살짝 담궈 식힌 뒤 미란다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어쩜... 미란다 아가씨는 머릿결이 이렇게 좋으실까..." 슬그머니 아부성 발언을 흘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고데기가 미란다의 머리카락 한 웅큼을 휘어감을때였다. 지지직~ 머리카락 타는 소리와 함께 그 곳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 올랐다. "꺄악~!" 그 불꽃에 놀란 하녀가 비명을 올리며 얼른 고데기를 떼어내려고 했는데, 머리카락이 타면서 고데기에게 눌러 붙어 오히려 미란다의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긴 꼴이 되고 말았다. "아앗! 뭐 하는 짓이야? 아프잖아?" 미란다가 통증에 의해 버럭 화를 내었지만, 그 하녀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 힘으로 인하여 아직 꺼지지 않은 자그마한 불꽃이 계속 미란다의 머리카락을 태우고 있는 걸 본 그 하녀가 옆에 있던, 고데기를 식히는 물통을 들어 그대로 미란다의 머리 위로 쏟아 부었던 것이다. "꺄아아악~! 너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덕분에 홀딱 젖게 된 미란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었다. "그, 그게..." 쫄딱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내 주먹보다 약간 큰, 불에 그을린 머리카락을 힐끔 힐끔 살피면서 하녀는 우물쭈물 거렸다. 하지만 그 하녀의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듯 미란다는 신경질을 내며 그 방에 있는, 하녀를 부르는 줄을 잡아당겼다. "정말... 방금전까지만 해도 기분 좋았는데, 이게 다 뭐야?" "아, 아가씨... 저기 있잖아요..." 하녀가 조심스레 불렀지만, 미란다는 듣지 않았다. "시끄러워. 넌 조금 있다가 봐."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말한 미란다는 역시나 신경질 적으로 머리에 있는, 물에 쫄딱 젖은 리본을 풀러 화장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며 미란다의 유모로 보이는 중년 여인과 미란다의 직속 하녀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 어머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몰라." 중년 여인이 미란다의 꼴을 보고 호들갑을 떨며 부지런히 하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서 목욕 준비를 해라. 아가씨께 타올도 가져다 드리고.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요?" 그리고는 미란다에게 다가와 옷을 벗기려던 중년 여인이 다시한번 놀랐다. "아니, 아가씨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 "내... 머리? 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긴...' 나는 사악하게 키득키득 웃었고 중년 여자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머리를 만진 하녀만 노려볼 뿐이었다. 그에 미란다는 답답함을 참지 못함인지 작은 거울을 가져오게 해 그것과 화장대의 큰 거울을 이용하여 자신의 뒷머리 부분을 살폈다. 그리고는... "이,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 머리, 내 머리가 왜이래?"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울먹이며 자신의 머리를 만져준 하녀를 노려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뒤통수 부분에서 약간 왼쪽으로 비껴진 곳에는 내 주먹보다 약간 큰, 검게 탄 자국이 멋드러지게 나 있어던 것이다. '내 솜씨란다, 냐하하하~~' 지금은 머리가 온통 물에 젖어 축 늘어져 있어 조금 작게 보이는 것이지, 머리가 마르면 더욱 더 크게 보일 것이다. 그 모습에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선애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언니 바보지? 돈은 뒀다가 뭐하나? 가발을 사서 쓰면 땡이잖아. 게다가 머리카락은 또 자라고 말야./" 선애의 말대로였다. 비록 그 하녀는 뭔 처분을 받았는지 다음날 부터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만, 미란다는 그날 저녁까지 신나게 난리 친 뒤 그레샴 집사가 급히 저택을 나가 구해온 고급 가발을 쓰고 당당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랜트가 동생의 기분을 풀어줄려고 여러가지 패션 가발 세트에다가 목걸이 팔지 귀걸이 한 세트를 사줘서 오히려 기분이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쳇...] 그리하여 반대로 열받은 나는 그랜트와 미란다가 저녁식사를 하는때를 노려서 예쁘게 차려입고 오빠가 빼준 의자에 앉기 위하여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꾸욱 밟아 주었다. 쿠당탕~!! "꺄악!!" "괘, 괜찮냐?" 그랜트가 후다닥 달려와 미란다를 부축했지만, 미란다는 빨개진 얼굴을 푸욱 숙이고 있느라 차마 오빠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다. '아프지는 않을 거다.' 왜 길에서 넘어지면 쪽팔려서 통증도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여기서는 내가 서비스로 치마 자락까지 화악 걷어줬으니... '캬캬캬캬~~ 빨랑 선애한테 가서 알려줘야징~ 에잉, 좀 더 인심을 팍팍 써가지고 가발도 벗겨줄걸 그랬나?' 그날 미란다는 저녁도 안 먹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사흘 뒤,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다. 똑, 똑~ 선애가 자신에게 배당된 사무실에서 한창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뭐, 갑작스레 켐벨 집사나 엘리엇 녀석이 찾아오는 일이 자주 있었기에 선애도 별달리 놀라는 일 없이 입을 열었다. "예."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건 하녀 둘을 대동한 미란다 녀석이었다. 설마 여기까지 찾아 올 줄은 몰랐기에 선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맞이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선애의 말에 사무실 안을 휘이 둘러본 미란다가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되게 좁네... 거기다가 이렇게 삭막하다니... 이런데서 넌 잘도 일하는구나?" 열받는 내용이었지만, 말하는 투가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말하고 있는 거라 선애도 풀썩 웃어넘겼다. "어쩔 수 없지요. 저에게 배당된 방이 여기니까요." "그래? 하긴..." 다시 한번 둘러보며 선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미란다가 드디어 선애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이거 너 줄께." "예?" 뜬금없이 불쑥 내미는 미란다의 손에는 팔찌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 팔찌란, 얼마 전에 머리가 엉망이 되어 우울해 있는 미란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그랜트가 사준 거였다. 팔찌, 귀걸이, 목걸이가 한 세트인 것으로 가운데에 커다란 루비가 하트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고, 그 주위를 자그마한 다이아몬드들이 촘촘히 둘러싸인 팬던트를 중심 디자인으로 한, 미란다 나이의 소녀에게는 꽤나 잘 어울리는 발랄, 경쾌한 디자인이었다. 그리하여 팔찌에도 중심에 하트 모양의 커다란 루비와 그 주위를 감싼 다이아몬드가 있었고, 그걸 팔에 걸 수 있게 백금이 두께는 얇고 넓이는 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의 링을 형성 하고 있었다. 가격도 엄청나겠지만, 자기가 지극히 좋아하는 오라버니에게 받은 물건인데 이걸 내미는 미란다의 의도가 무지하게 의심스러웠다. [야야, 그거 며칠 전에 그랜트 녀석이 미란다에게 선물한 거야.] 나의 말에 선애는 경계어린 눈초리로 미란다를 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걸... 왜? 굉장히 귀중한 물건인 거 같은데요..." 그러자 미란다 녀석이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 그렇게 웃으니까 뭔 꿍꿍이가 있다는 걸 더욱 확실하게 느끼겠다. - 대답하는 거였다. "으응. 그 동안 내가 너에게 너무 심했다 싶어서... 그래서 이건 사과의 선물. 이제부터는 안 그럴게." 수상했다.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저 미란다란 꼬맹이 녀석이 갑자기 그걸 깨달을 까닭이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고 해도 선물이 지나치게 과하지 않은가? 옛말에 지나치면 아니한 만 못하다고 했으니. [수상해, 수상해. 받지 마라.] 내 생각에 선애도 동의하는 듯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가씨가 저에게 사과 하실 일도 없는데요 뭐. 그러니 저는 받을 수 없어요." "내가 준다니까 그러네. 이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다른 거 줄까?" 선애가 자꾸 안 받는다고 거절하자 미란다의 표정에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선애에게 이걸 받게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니에요. 너무 과분한 걸요. 안 주셔도 돼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시 한번의 거절. 그러자 미란다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시끄러. 내가 준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받으라면 받아." 이제는 아예 명령조로 떠넘기려고 한다. "저는 괜찮은데요?" "받으라니까." "받을 수 없어요." 계속되는 거부에 결국 미란다가 화를 냈다. "뭐얏? 네가 뭔데 내 말을 거역한다는 거야? 하녀 주제에. 당장 받아." 그러면서 척척 다가와 거부하는 선애의 손을 강제로 펴서 팔찌를 쥐어주는 거였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선애가 돌려줄 것을 대비하여 얼른 뒤로 물러나는 거였다. "아가씨, 저는 받을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이미 준 거야. 나도 받을 수 없어." 선애의 눈썹이 꿈틀한다. 하녀라는 직분상 예의를 지키려고 인내하고 있지만, 그것도 드디어 한계인 모양이다. 아마 성질대로 한다면 벌써 그녀 특유의 독설이 나오고도 남았을텐데 말이다. "가지고 가세요." "싫~어~" 넘겨준 미란다는 이제 여유만만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선애의 사무실 문이 슬그머니 열리고 한 하녀가 안쪽에 다급히 속삭였다. "아가씨, 오세요." 그 말을 들은 미란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미란다는 두 하녀를 데리고 서둘러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게 뭔 일이래?' 자연스레 선애는 그 팔찌를 돌려주려고 가지고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멀쩡하게 잘 있던 미란다의 하녀들이 새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어머머머, 이럴 수가..." "저건 아가씨의 팔찌... 너 이제보니 도.둑. 이었구나아?" "어머머머, 아가씨... 쟤가 아가씨의 팔.찌. 를 훔.쳤.어요오~!!" 주변에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치는 하녀들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미란다의 계략을 깨달았다. 어쩐지 그 귀중한 팔찌를 선물이다 뭐다 하면서 주려고 하더니만, 그걸 가지고 선애를 도둑으로 몰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얄팍한 수작이었지만, 한번 걸리면 끝장인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준비는 그것만이 아니었던 듯, 복도 저쪽에서 어리둥절한 얼굴의 그랜트와 엘리엇, 켐벨 집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까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 있던 하녀가 온다고 하더니만, 저들이 온다는 걸 말하는 거였나보다. '이거... 걸려도 단단히 걸렸는걸?' 제 10화 "내보내라." "도련님?" "옛? 진심이십니까?" "오라버니이이~!!"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한 바탕 난리가 있은 뒤 그 자리에서 가장 가까웠던, 켐벨 집사의 집무실로 사람들을 우르르 몰아 데리고 들어간 그랜트가 잠시 동안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한숨을 내쉰 뒤 한 말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만 바라보고 있던 세 인물에게서 각각 다른 대답이 튀어 나왔다. 켐벨 집사는 놀라서 당혹한 얼굴이었고, 엘리엇 녀석은 희색이 만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벌인 원흉인 미란다 녀석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역시나, 그 녀석은 자신의 불만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오라버니, 어쩌면 그러실 수가 있어요? 그냥 내보내라뇨? 저 계집은 도둑이라고요, 도.둑! 제가 엄청 아끼는 팔찌를 훔쳐가서는 당당히 가지고 있었다니까요. 제가 그 팔찌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오라버니도 아시잖아요. 그런데 그걸 훔쳐간 저 계집을 따끔히 혼내주시지는 못할 망정 그냥 내보내라니요?" 저 이야기는 벌써 몇번째 반복을 하는지도 몰랐다. 하기사, 그 이야기밖에 할게 없긴 하겠지만... 그랜트의 얼굴을 보자마자 냉큼 조르르 달려가 선애를 손가락질 하면서 자신의 팔찌를 훔쳐갔다고 우기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그랜트의 얼굴이 굳기에 나는 뭔 일 나는 줄 알았다. 뭐, 부록으로 미란다의 하녀들도 열심히 그녀의 말에 맞장구 치고 말이다. 그래 뭔가 하려 하면 이 저택을 몽땅 태우리라는 각오하에 지켜보고 있었는데, 한참 뜸을 들이던 그랜트의 말에서 나온 '내보내라'는 말은 나도 좀 뜻밖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녀가 주인 집 물건, 것도 꽤나 비싼 걸 훔쳤는데 이렇게 고이 내보내는 것으로 끝내지는 않을터였다. 한국에서도 당장에 경찰에 넘기고도 남을 일인데, 철저한 계급 사회인 여기서는 귀족의 물건을 훔친 평민의 처분은 더욱 더 심할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긴장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냥 내보내라는 말에 턱~ 하고 막힌 숨이 나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짜슥... 그려, 내 이 저택 전체를 태우지는 않으마.' "오라버니이~~" 내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쨍알대던 미란다가 자신의 오빠가 듣는 둥 마는 둥 하자 화가난 모양이다. 그래 한톤 높여 부르자 그랜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미란다... 이제 그만해라." "하, 하지만..." "미.란.다." 불만이 가득한 그녀가 뭐라 또 하려고 했지만, 그랜트의 한자 한자 또박또박 부르는 이름에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동생을 지긋이 바라본 그랜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쯤에서 끝내려는지 알거라고 믿으마. 그럼 넌 이만 나가보거라." "네에..." 그랜트도 이 일이 미란다가 꾸민 거라는 걸 눈치 챘던 모양이다. 그러니 선애에게도 너그러운 처분을 내린 것이겠지. 하기야,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선애가 그녀의 팔찌를 훔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정말 훔쳤다면 그렇게 당당히 사무실에 가지고 가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미란다도 자기 오빠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힐금힐끔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사무실 안은 침묵이 감돌았고, 그랜트의 시선이 처음으로 선애를 향했다. 선애는 미란다가 자기 오빠를 보고 난리를 칠때부터 아무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했었다. 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이 지가가 나서서 뭐라 한다고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사무실 한 구석에서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 조용히 아무도 없는 곳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런 선애의 분위기가... 뭐랄까... 체념하고 있다기 보다는 왠지 폭풍 전야의 고요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나는 함부로 말 걸기도 무서웠다. 잘못했다가 선애의 분노가 폭발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그런 선애를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던 그랜트는 선애에게 뭐라하는 대신 자신 옆에 있는 켐벨 집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켐벨, 섭섭지 않게 해서 내보내도록." 켐벨은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랜트를 잠시 머뭇거리며 바라보고 있다가 결국 어쩔 수 없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좋아." 켐벨 집사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지 고개를 끄덕인 그랜트는 그 뒤로 선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서 켐벨의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의 엘리엇 녀석이 선애를 한번 힐끔 보고는 따라 나갔다. 그 둘이 나가고 나자 켐벨 집사가 무지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나도 정말 유감이구나." 그래도 선애는 입만 꾸욱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어떻게 해석한지 모르겠지만, 켐벨 집사는 이해 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선애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쳤다. "나 또한 정말 아쉽게 생각한다. 네가 생각 외로 능력있는 아이라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네가 원한다면 추천서를 써주도록 하마." 그의 말에 선애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아무래도 속에서 들끓는 열화를 이제야 진정시킨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신경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냐? 뭐...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그럼 내 여비라도 섭섭지 않게 챙겨줄테니 너는 짐을 챙겨서 내려오너라." "예." 내보내랬다고 오늘 당장 내보내는 모양이다. 하기야, 여기 더 있어봤자 눈치 보면서 있을 것 빨리 나오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이 추운 겨울날에 사람을 내쫓다니 너무하는 것 같다. 선애가 집을 챙기겠다고 밖으로 나오길래 얼른 쫓아나왔다. [저기... 괜찮은 거야?] 조심스레 묻자 선애가 휙 몸을 돌리더니 날 째려봤다. "/언니는 내가 괜찮은 걸로 보여?/" [아니...] 내가 기가 죽어 대꾸하자 다시 몸을 휙 돌려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직도 모든 화를 완전히 가라앉힌 건 아니었는지 걸음걸이에 상당히 힘이 들어가있었다. "/젠장, 그 꼬맹이 녀석... 끝까지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훗, 이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꼬맹아.../" 선애가 대충 대충 짐을 싸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린이 들어왔다. 그녀는 선애가 짐 싸는 걸 빤히 보고 있더니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나간다며?" "예? 아, 예." "그래... 그럼, 잘 가라." 마치 옆집 애가 소풍을 간다고 하자 잘 다녀 오라고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았다. 아주 친절하게 방긋 웃으면서 '잘가라.'니... 선애도 그녀를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곧 꾸뻑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예,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애가 원래 착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지키는게 아니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지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거지. 하지만, 저 린이라는 여자도 황당했다. 그래도 몇개월이나 같은 방을 썼는데 하다못해 예의상이라도 아쉽다던지 서운 하다던지 하는 말 하나 없었다. 그 동안의 친절은 정말 순전히 가식이었을 뿐일까나? 린이 너무나도 예의바른, 예의에 맞춘 인사만 하고 나가버리자 선애가 갑자기 쓰고 있던 하녀 모자를 벗어 거칠게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아씨... 그렇지 않아도 열받는데 별게 다 사람 더 열받게 하네.../"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며 흘러내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던 선애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나에게 물었다. "/언니... 내가 그렇게 인간 관계가 안 좋았나? 나 한국에서 학교 다닐때는 친구도 많았는데... 여긴 도대체 왜 이러지?/" [친구도 많았지만, 적도 한반에 한명 이상은 꼬옥 있었잖냐.] "/아, 어쨌든. 참내... 학교에서처럼 시비 걸어오면 대놓고 뭐라고 해주겠는데, 저건 저렇게 예의는 철저하게 지키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어휴, 저게 더 고단수잖아?/" 이만 빠드득 빠드득 갈더니 이제는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래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선애개 내팽겨쳐 놓은 짐을 들어 대신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소지품이라고 해봐야 이 저택에 들어올때 가지고 온 것 몇개 밖에 없었다. 저택에서 내준 하녀복은 도로 내놓고 가야 할테고, 이 저택 안에서는 평상복을 입을 일이 없어 새 옷도, 심지어 악세사리 하나 산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옷이나 갈아입어. 어차피 여기 나갈건데 여기서 인간 관계가 안 좋으면 뭐 어때? 다시 볼 일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냥 다 잊어버려.] "/쳇.../" 옷을 던져주며 재촉하자 칫칫 그러면서도 일어나 꾸물꾸물 옷을 갈아입는 꼬맹이었다.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놀랍게도 문 밖에 린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녀가 나간 뒤 그녀에 대해 떠들어댔던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지만, 곧 우리가 한국어로 대화했음을 깨닫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선애도 순간적으로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씨익 웃어보였다. 아마 따지고 들면 자신도 맞대응 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린은 평소처럼 미소를 띄우며 다정하게 말을 꺼낼 뿐이었다. "내가 아까 깜빡 잊고 전해주지 않았는데, 켐벨 집사님께서 후문으로 나오라고 하셨어." "그래요?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애가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녀석도 방긋 웃으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럼 난 전했으니 이만 가볼께." "예." 멀어져가는 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르 절래절래 저었다. '상황만 보면... 예의를 가르치는 교과서에 나올만한 말이요 태도인데 말이야...' 린이 전해준대로 이 저택의 후문으로 걸어가니 그 곳에는 켐벨 집사 말고도 에밀리와 달시, 그리고 시오나가 눈물을 글썽글썽 거리며 서 있었다. 그 셋은 선애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조르르 달려와 얼싸안고 흐느꼈다. "선애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라니?" "어쩌면 좋아... 너 본관에 들어갈때 왠지 무지하게 걱정이 되더니만..." "너 괜찮니? 아무 일도 없지?"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나는 제일먼저 안도의 한숨이 푹~ 하고 새어 나왔다. '아... 선애가 여기서 인간 관계가 아주 극악했던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애에게 모두 냉담한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에 찬바람이 휑~ 하고 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려, 저 사람도 있었지?' 겉으로는 깐깐한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켐벨 집사였지만, 성격만은 인상과는 정 반대였던 사람. 그도 지금 꽤나 안쓰럽다는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고 있어, 맨 처음 그래프 사건으로 선애를 스파이로 몰았을때 생각했던 괴씸한 마음이 모두 사르르 녹아들었다. 켐벨 집사는 선애가 나머지 세명과 이야기가 끝날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와서 자그마한 가죽 꾸러미를 건넸다. "자, 이걸 가져가거라. 내 생각해서 넉넉하게 넣었으니 봄이 올때까지는 충분히 여유있게 생활 할 수 있을 게다. 그리고..." 돈이 들어 있는 듯한 주머니를 선애 손에 쥐어준 켐벨 집사는 품에서 종이 봉투를 하나 꺼내들었다. "이건 추천장이다. 네가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다른 큰 저택의 하녀로 들어갈때 필요할지 몰라서 내 한장 썼다. 좋은 말만 썼으니까 가지고 가거라." '오옷, 켐벨 집사... 당신 정말 마음에 드는군.' 선애도 감동 했다는 표정으로 집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시다니..." "뭘 이런걸 가지고. 에휴... 제법 잘 키우고 있었다고 생각 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정말 아쉽구나. 하지만 너라면 어디에 가서든 잘 살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조심해서 가거라. 나는 이만 들어가보마." 아마도 마지막 배웅은 친했던 세 명이 편히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려는 것 같았다. 선애의 진심어린 정중한 인사에 그는 손을 휘휘 저어보이고는 휘적휘적 안쪽으로 사라졌다. "세상에... 되게 깐깐한 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네." "그러게. 본관 하녀 애들은 무서워서 쉽게 접근하지도 못한다고 하던데... 인상하고는 다르신 분이구나." 에밀리와 달시가 멀어져가는 켐벨 집사를 바라보며 그렇게 속삭였다. "그렇죠? 사실 처음에 제가 본관에 가게 된 것도 다 저분 때문이었잖아요. 저를 스파이로 몰아가셔가지고... 그래서 되게 걱정했는데, 밑에서 일하다보니 의외로 잘 대해주시더라구요." 선애가 그 둘의 말을 거드는데 눈하고 코가 빨갛게 된 시오나가 끼어들었다. "잘 대해주시면 뭐하니? 네가 이렇게 가게 되었는데... 이게 다 미란다 아가씨 때문이라며? 본관 하녀들 사이에 소문이 쫘악 퍼졌대." 시오나의 말에 켐벨 집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두 아가씨가 선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기... 그 별관 하녀로 쫓겨온 애들... 그 애들이 너에게 못되게 굴어서 도련님에게 찍혀서 쫓겨 왔다는게 사실이야?"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에밀리의 질문에 선애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니냐? 그 애들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 쫓겨 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뒤로는 그 애들이 널 괴롭히니까 도련님이 괴씸죄를 적용해서 소소한 실수 가지고 꼬투리 잡아서 내쳤다고 하던데..." "에엥... 거기서 왜 도련님이 나오는데요? 거기다가 별관으로 쫓겨간 선배들이 실수는 실수는데 결과가 크게 안 좋아서 그렇게 된 거라구요." "왜 도련님이 나오냐니... 너 본관에 있게 된 게 도련님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라며? 그래서 미란다 아가씨에게 찍혀가지구 계속 괴롭힘 당하다 결국 이렇게 된 거 아니야?" 달시의 말에 선애는 입을 떠억 벌렸다. "도련님 마음에 들어서라구요? 아니, 제가 본관에 가게 된 사건이 벌어질 때 선배님들도 같이 계셨으면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 지금 하녀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돌아서 말이지." 달시가 선애의 눈빛에 기가 죽었는지 우물쭈물 변명했다. "하아... 제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이렇게 쫓겨나가겠습니까? 그거 다 뻥일 거예요."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자조적으로 말하자 에밀리와 달시가 납득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아가씨보다는 도련님의 위치와 힘이 더 컸으니 말이다. "하긴..." "그건 그러네..." "어쨌든, 배웅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나중에 다시 뵐 수 있을라나 모르겠지만... 건강하게 잘 계세요. 승진도 팍팍 하시구요." 선애가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자 겨우 진정하고 있던 미란다가 다시 눈물을 글썽 거렸다. "다시 안 볼 것처럼 그러지 마라. 언젠간 꼬옥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너도 건강하게 잘 있어." 선애의 양 손을 꼭 잡고 미란다가 작별 인사를 끝내자 달시와 에밀리도 질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자, 이거... 너 가는 길에 인심 써서 선물로 하마." 달시가 내민 건 초록색의 머리에 묶는 리본이었다. 두 개가 한쌍으로 되어 있는 건데, 싸구려가 아닌 좀 비싼 천으로 된 거라 달시가 꽤나 아꼈던 거였다. "어... 선배... 이거 되게 아끼시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인심 썼다니까. 보아하니 이번에 별관으로 쫓겨난 애들이 많아서 아무래도 봄쯤에 본관 하녀로 승진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 더 좋은 걸로 살테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마." "아... 정말 감사합니다." 선애가 감격한 얼굴로 받아들자 에밀리도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나도 이거." 에밀리가 내민 건 빗이었다. 참나무로 촘촘하게 만든 거리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고, 손잡이 쪽에도 예쁜 무늬가 조각된 것이었다. "선배..." 이번에도 선애가 감격한 얼굴로 그걸 받아들자 에밀리가 쑥스럽게 웃었다. "그거 받고 힘 내라고. 넌 어디에서든 잘 할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사용할게요. 에밀리 선배도요."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자 마지막으로 시오나가 나섰다. "음... 나는 딱히 좋은 물건을 가진 게 없어서... 내 능력으로 힘좀 썼다. 드레에에엑~!!" "엥?" 미란다의 부르는 소리에 신경도 못 썼던, 후문이 있는 그늘 쪽에서 왠 사람 한 명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의 모습을 본 선애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내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선애는 드랙의 모습을 보기는 봤지만, 멀찍이서 봤기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 긴가민가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드랙의 인상에 상당히 놀라는 표정. [미란다의 애인이야.] 선애의 놀라는 모습을 십분 공감하며 나는 친절하게 그녀의 추측이 맞음을 확인 시켜줬다. 하기야, 미란다의 부름에 선듯 나서는 남정네가 이 저택에서 그녀의 애인밖에 더 있겠는가. 내 말에 이제 선애는 드랙과 미란다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특별 수련으로 얼굴 보기 힘들다고 하더니만, 왜 여기 와있는 건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에 미란다가 싱긋 웃으며 드랙을 선애에게 소개했다. "우리 드렉씨야."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미란다의 소개에 선애는 얼떨떨하면서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 반해 드랙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원래 성격이 그렇다는 걸 아는 선애는 별로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왜 이자리에 있는 지 의아해 할 뿐. 선애의 그런 의문을 느꼈는지 미란다가 슬그머니 드렉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 무지 눈골 시렸다. -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거였다. "저기... 나는 함부로 밖에 나가지 못하잖니. 하지만 드랙은 밖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어서... 그에게 너의 배웅을 부탁했어." 뜻밖의 말. "에에에..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이렇게 배웅 나와준 것만해도 정말 기쁜걸." "그래도. 사실 너는 이 도시 지리도 잘 모르잖니. 그러니 내가 어디 마음이 놓여야 말이지. 그래서 드랙에게 큰 길가로 나가서 마차를 태워달라고 부탁했어. 마차에 타기만 하면 고아원에는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너 돌아가는 지리 알기나 해?" 물론... 모른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져 휴를 만나고 그에게 이끌려 그의 저택으로 가본 게 다였으니 말이다. 여기에 올 때도 마차를 타고 왔으니 길을 알리 만무했다. "아... 그렇군. 그럼 호의를 감사히 받을께. 잘 부탁 드립니다... 에에... 기사님." 그러자 드랙의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뭐, 이제 앞으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냥 입을 다물고 척척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에 선애도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가며 나와 있는 셋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던졌다. "그럼 저 갈께요. 선배님들 안녕히 계세요. 시오나, 너도 잘 있어." "잘가, 선애야." "몸 조심해." "혹시 가능하면 연락 좀 하구." "예. 알았어." 후문을 지나기 전 보이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그제야 앞을 똑바로 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택을 나와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저택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 탓인지 시가지와는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 큰길 까지 가려면 건물이 하나 없은 오솔길을 한참 걸어 내려가야 했다. 아마도 지금 걸어가는 길은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걸어다녀 생기는 길인 듯 했는데, 내린 눈이 제대로 치워지지 않아 그대로 얼어붙어 굉장히 미끄러웠다. 하지만, 그것 빼고는 주위의 눈 덮인 절경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걷는 느긋한 산책길로는 그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남들 몰래 뭔 일 벌이기도 딱 좋은 장소인 것 같았다. "야... 맞지?" "맞는 것 같은데... 혼자라고 하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만 남은 덤불 뒷쪽에서 세 명의 처음 보는 남정네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며 저희들끼리 수군댄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남들 몰래 뭔 일 벌이기도 딱 좋은 장소인 것 같았다. "야... 맞지?" "맞는 것 같은데... 혼자라고 하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만 남은 덤불 뒷쪽에서 세 명의 처음 보는 남정네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며 저희들끼리 수군댄다. '이녀석들은 또 뭘까...' 황당한 시선으로 그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양 팔로 몸을 감싼 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야, 대충대충 하고 가자.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나온 계집이라고는 딱 저 애 밖에 없잖아. 게다가 서대륙인이라니... 딱 맞구만." "그래도 혼자라고 했잖아. 틀리면 어떻게 해?" "누가 틀렸다고 그래? 우린 틀린 거 없다. 안 그러냐?" "맞아. 그러니까 빨리 해치우고 가자고." 그러면서 세 남자가 더욱 더 다가오자 드렉이 그래도 남자라고 선애를 뒤로 물리고 자신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뭐냐." "어이, 형씨. 우리가 자네에게 원한은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냥 맘 편하게 오늘은 재수없는 날... 이라고 생각하고 맞게나." "킬킬킬, 그려. 내 인심 써서 반 정도만 죽여줄테니 걱정 말고." "아, 후딱 하고 가자니까. 젠장, 그 놈의 돈만 아니라면... 날도 추운데 이게 뭔 짓이다냐." 그 세 남자들은 드렉의 질문도 무시하고 자기들이 하고싶은 말만 내뱉았다. 겨울의 차가운 날씨라 그들도 꽁꽁 싸매고 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 세계의 양아치들인 듯... 게다가 저들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돈'이라는 단어도 상당히 거슬렸다. 그러고보니 선애가 그랜트 녀석에게서 '내보내라.' 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저택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었다. 선애가 나간다는 걸 알고 누군가 마음을 먹었다면 이런 일을 꾸미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거기다 세 명씩이나 고용한 걸 보니 돈은 쫌 있고... 충분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좀 촉박한 시간인데 그 안에 불량배를 찾아서 일을 시켰다는 건... 말을 마음대로 탈 수 있는 사람이겠네... 미란다... 이 지지배가 끝까지... 아냐, 혹시 엘리엇 녀석일 수도 있어. 선애가 나간다니까 다시는 이쪽 생각 못하게 한다고...'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며 누가 범인일지 고민하고 있는데, 선애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뭐 해?/" [뭐 하긴, 저 놈들을 보낸 범인을 추리 중... 헛, 그러고보니 그 놈들은?]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웬걸, 모두들 눈이 좋은지 몸으로 눈밭을 뒹굴고 있었다. "/헤에... 이번 봄에 정식 기사가 된다고 하더니 역시 실력이 있는 모양인데?/" 그리고 그 가운데 버티고 서서 차가운 눈초리로 세 남자들을 노려보고 있는 인물은 드렉. 그 순간 나는 혹시 시오나가 이런 일이 있을까봐 일부러 드렉에게 부탁해서 선애를 데려다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오나 또한 정보 길드에서 그 미래성을 보고 훈련시킨 아이 중 하나. 이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녀인데다가 선애의 상황을 알고 있었을테니 혹시나... 하면서 예측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시오나 보면 고맙다고 해라.] "/그럴 생각이야./" 그렇게 선애와 속삭이는데 드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사주를 했는지 물어볼까?" 그에 선애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누구일지 예상은 하는데요 뭐." "그런가? 그럼 이만 가지." "예." 미란다, 혹은 엘리엇이 준비한 건 그들 뿐이었는지 그 뒤로 큰길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드랙은 그 근처에서 지나다니는 영업용 마차 - 이 곳의 택시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한 마리 말이 끄는, 사람 넷 앉으면 무지 좁을 것 같은 작은 마차다. - 를 잡아 선애를 태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으니... [선애야, 너 목적지 알아?] 그제야 선애가 당혹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에?/" 아마 자기도 생각 못했던 듯. "/어쩌지? 그냥 내려서 걸어가야 하겠다./" 당황하며 마차 밖으로 마악 고개를 내미는데 드랙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휜 언덕 밑으로 가주세요." "예?" 덕분에 걸어가겠다고 말하려던 선애는 그 말이 쏙 들어간 채 의문을 토했다. "어어..." 그렇다고 '거기가 어딘데요?'라고 묻기도 뭣했는지 선애가 어버버 거리자 드렉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어렸다. "시오나가 마차에 태운 뒤 목적지는 꼭 나보고 말하라고 신신당부 하더군. 표정을 보니 왜 그랬는지 알만 한걸?" "아... 그..." '오오... 시오나 녀석... 정말 친하게 지내놓길 잘했는걸? 짜슥, 기특한지고...' 그러고보니 선애와 나는 일여년 동안 산 곳의 주소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무심함이여... 휴의 집이 자리잡고 있는 그 언덕 이름이 에리휜이었던 모양이다. 그걸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조심해서 가거라." 마치 친동생에게처럼 작별 인사를 하는 드렉의 말에 선애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시오나에게도 정말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그러지. 그럼." 드렉이 그러며 마차를 툭 치자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안녕히 가세요오~" 선애가 마차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외치자 드랙이 손을 한번 슬쩍 들어보인 후 미련없이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게 보였다. 선애가 다시 마차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고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야 나는 말을 걸었다. [이야... 시오나 되게 잘 챙겨주네. 전에는 잘 몰랐는데 꽤나 세세하게 신경써준다야.] "/그러게. 나중에 기회 있으면 밥이라도 한끼 사야겠어. 그건 그렇고 언니./" [왜?] "/언제 복수하러 갈 거야? 이대로 저 저택을 그냥 냅두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너 우선 데려다 놓고 갔다 올 거야. 어디 불안해서 길에 혼자 두겠냐?] "/누구에게 할 건데?/" [물론 그 미란다 녀석하고, 엘리엇 놈도 빼놓을 수 없지. 훗, 그 녀석 자기가 아끼던 서류가 몽땅 다 타버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꼬...] "/미란다는?/" [글쎄다... 우선 옷을 몽땅 태울 생각인데... 그런데, 그래봤자 그 녀석 집은 부자니까 새 옷을 또 사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냐, 그래도 새로 살때까지는 발을 동동 구르겠지. 언니 그건 그렇게 하고.../" [응.] "/그 녀석이 날 이렇게 함정에 빠뜨린 팔지를 훔쳐와 줘. 자기가 도둑 맞았다고 했으니 진짜로 그렇게 되게 해주겠어. 이왕이면 목걸이랑 귀걸이 전부 다./" [오키. 덤으로 다른 악세사리들도 챙길 수 있는 건 왕창 챙겨주마.] "/나쁠 건 없지. 휴에게 준다면 아마 처분해줄 수 있을 거야./" [호오, 그것도 그렇겠네.] 그렇게 선애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는데 저속으로 운전(?)하고 있던 마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마차 문이 확 열리면서 대화 속에 나왔던 휴가 불쑥 들어오는 것이었다. "/으엑? 휴?/" [켁, 휴다.] 선애의 눈이 둥그래지는 걸 예상했다는 듯 바라보며 휴는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여~!" "어... 휴? 어떻게 된 거예요?" 휴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마차는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애는 너무 놀라 마차가 출발하는 것도 못 느끼는 지 아까 휴가 들어올 때 놀라서 엉거주춤 일어선 그 자세 그대로였다. "어이, 마차가 출발하는데 앉아야지. 안 그럼 다쳐." 휴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며 선애를 붙잡아 자리에 앉혀주었다. 하지만 선애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저기... 혹시 제가 저택을 나와 이 마차를 탈 걸 알고 계셨어요?" 잠시 후에야 정신을 수습한 선애가 조심스레 묻자 휴가 씨익 웃어보였다. "내가 아는 건 네가 저택을 나오게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길드원에게 잽싸게 저택으로 가는 오솔길과 큰 길이 이어지는 지점에서 빈 마차를 들고 어슬렁 거리라고 지시를 내렸을 뿐이지." "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던 선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그 저택에도 길드원이 있기는 있었군요? 그러니 제가 저택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금방 아시는 거겠지요." 그러자 휴는 씨익 웃어보일 뿐이었다. "글쎄, 아직 선애는 거기까지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니까. 미안하지만, 그건 비밀이야." "예이, 예이." 어차피 다 드러난 건데, 그걸 또 비밀이라고 입을 다물고 있다니... '규칙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휴가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 줄이야...' "어쨌든, 쫓겨나게 되어서 정말 죄송해요. 6개월 밖에 못 버텼네요. 이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귀환하게 되는 거 맞죠?" 선애가 기 죽은 목소리로 휴에게 묻자 그가 씨익 웃으며 선애의 머리를 톡톡 쳤다. "뭐, 그렇게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선애는 아직 교육도 끝마치지 못한 상태니 누구도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 이번에 서대륙인이 유리할거라는 판단만 없었으면 선애가 투입되는 일은 없었을 거야. 뭐, 그건 완전히 오판이었지만 말야." 그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륙인이고 뭐고 하녀가 모자라서 몽땅 채용하던걸요?" "그랬다더군. 정말 정보 부족이었어. 뭐, 그건 그렇고 선애야?" "예?" "그래프가 뭐야?" "에에?" "그래프가 뭐야?" "에에?" 아니 휴는 또 그래프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나 싶었다. 그래프에 대한 건 떠들고 다니지 않아서 몇몇 사람들 밖에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뭐, 사람들이 그래프에 대해 잘 모르니 들어도 뭔지 모르겠지만... '시오나가 말했나? 그 애는 벌써 길드원으로 활동을?' 선애는 그래프 이야기가 나오자 날 한번 째려보고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장부 같은 숫자 기록같은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린 표라고 할까나... 도형이라고 할까나... 그런 거예요." "흠... 선애가 그런 걸 그릴 수 있는 줄 몰랐는 걸." 휴가 팔짱을 낀 채 평소의 싱글싱글이 아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선애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는 여기에 그래프 같은게 없는 줄 몰랐어요. 괜히 그런거 그리고 놀다가 들켜가지구 일이나 크게 벌리고... 그냥 가만히나 있을 걸..."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자책할 필요 없어. 그렇게 따지자면 맨 처음 네 능력을 모르고 있었던 내 탓도 있었지. 이제보니 너는 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구나. 혹, 다른 능력도 있어?" 휴가 선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부드럽게 물어왔다. 그에 선애는 머쓱한 얼굴로 턱을 비비더니 중얼거렸다. "글쎄요...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그래도 수학을 쫌... 그쪽 공부를 좀 했거든요." 선애는 고등학교 와서 이과를 택했었다. "그으래? 그럼 돌아가면 한번 테스트를 해봐도 될까? 뭐, 그냥 단순히 네 실력을 알아보려는 것 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마음 편하게 보면 돼." "좋을 대로 하세요." 테스트라는 말에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좋아, 그럼 나중에 보자. 너는 집에 우선 가 있어. 마차가 언덕 밑에까지 데려다 줄 거야." 휴가 다시 한번 싱긋 웃어보이며 마부석이 있는 마차 벽을 톡톡 두드리자 그걸 용캐 알아들은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그럼 집에서 보자." 그에 휴가 손을 흔들어보이며 마차에서 내리자 선애도 꾸벅 인사를 했다. "예. 나중에 뵈요." 휴가 마차에서 내려 다시 마부에게 지시를 했는지 선애가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도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곧바로 다시 출발했다. 그러자 선애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으... 그놈의 그래프... 내가 학교 다닐때 통계를 싫어했더니만, 그게 이제와서 복수를 하나? 어딜 가나 그래프 이야기로구만./" 진저리가 난다는 듯 인상을 북북 쓰며 중얼거리자 나는 괜히 찔려서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에구... 미안...] "/됐어. 이제와서 뭘... 후우... 그나저나 테스트라... 나원 참... 여기 와서 수학 시험을 보게 될 줄이야... 공부 안 한지 한참 되어가지구 기억이나 제대로 날라나 모르겠네./" [에이, 편하게 봐, 편하게. 그냥 단순히 네 수준을 알아보려는 건데 뭘...] "/언니는 언제 저택에 다녀 올 건데?/" [너 집에 도착하는 거 보고. 한 밤중에 불 지르는 건 좀 잔인하니까 사람들이 잠에 들때쯔음... 불을 일으킬까 해.] "/뭐... 그건 좋을대로 해. 하지만, 엘리엇 사무실하고 미란다 방은 확실하게 태워줘야해./" [알았어.] 반년만에 돌아온 휴의 집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직 학생들이 교체될 시기가 아니었는지 사라진 얼굴도, 새로 나타난 얼굴도 없었으며 여전히 따스한 자스민은 선애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런... 고생이 많았니? 얼굴이 약간 야윈 것 같구나... 키는... 좀 컸니?" "키는 전혀 안 큰것 같아요. 하지만, 밥은 잘 먹고 잘 있었는 걸요. 그래도 자스민이 보고 싶었어요." "호호호, 그래. 나도 선애가 보고 싶었어." 자스민은 선애가 원래 쓰던 방을 내주었다. 그 곳에는 선애가 가기 전과 변한게 하나도 없었다. 룸메이트 역시도 없었고 말이다. 선애가 정든 방안을 휘 둘러보고 짐을 풀기 시작하자 나는 슬슬 저택으로 가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저녁이 다 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길을 몰라 좀 헤맬 걸 계산해서 일찍 나서는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나는 다녀올께.] "/응, 잘 갔다 와./"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뛰며 집들을 통과해 다녔지만, 지리를 모르는데다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볼 수 없었던 관계로 내가 겨우 겨우 저택에 도착했을 때에는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났을 때였다. 그래도 너무 늦게 도착한건 아니라 속으로 위안을 하면서 먼저 미란다 녀석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악세사리가 어디 있는지 미리미리 확인을 해놔야 나중에 훔쳐가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식후의 차 한잔을 마시려던 참이었는지 그녀의 유모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고 있었다. 만족스레 그녀에게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받아 든 미란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문득 생각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그건 어떻게 됐어? 내가 시킨 일 말야." "아... 그게..."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란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중년 부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미란다가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실패했답니다. 그 계집 혼자 저택을 나온 게 아니라 웬 남자가 같이 나왔는데 그 사람의 싸움 실력이 상당했답니다. 셋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방도 먹이지 못하고 모두 나가 떨어졌다더군요." "뭐? 도대체 그 남자가 누군데?" 찻잔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은 미란다의 쌍심지가 치켜 올라갔다. "그들이 모른다고 하니 알 도리가 없지요." "체엣, 운도 좋은 계집 같으니... 어떻게 그 계집애 한테는 어째 속 시원하게 한 방 먹일 수가 없는 거지? 이번에 그 계집을 쫓아 낸 것도 어째 오라버니가 그 계집을 위해 한 거 같단 말이야." 생각할 수록 분했는지 미란다는 엄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즉시 중년 여인이 다가와 미란다의 입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쯧쯧, 아가씨 또 그러시는 군요. 그러면 손톱 모양이 망가진다고 몇번이나 말씀 드렸잖아요. 나중에 보기 흉하게 되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쳇... 하여간 뒷맛이 영 개운치 못해. 그 계집이 울고불고 하는 꼴을 봤어야 속이 시원할텐데..." "쫓겨난 하녀에 뭘 그리 신경쓰십니까? 이제 다시 볼 것도 아니니 그만 잊어버리세요." "치잇... 그 계집이 자꾸 신경에 거슬리니까 그렇지..." 가볍게 투정부리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달래는 중년 여인을 향해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한번 들어주고 속삭였다. [안됐네. 마지막으로 한방 먹이는게 선애라서...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그랬냐...] 그러면서 나는 서둘러 그녀의 방을 뒤져서 미란다가 아끼고 아끼는 보석들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그녀에게는 따로 금고가 없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자주 사용해서 그러는 건지, 그 보석들은 되게 비싼 게 틀림 없는데도 이상하게 일반 물건들 처럼 그녀의 화장대 서랍에 넣어져 있었다. 그녀가 아끼는 팔찌, 목걸이, 귀걸이 세트는 금 세공인 듯한 화려한 보석함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여러 다른 보석들도 꽤 많았다. '흠... 뭐, 훔치기는 어렵지 않겠어. 좋아, 이건 됐고.' 미란다의 얼굴을 계속 보고싶지 않았던 나는 엘리엇 서재로 향했다. 자주 들락 거려서 익숙한 곳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거기서도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엇 혼자가 아니라 그랜트 녀석과 같이. 엘리엇 녀석은 무지 기분 좋아보이는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살인 미소'라고 할 수 있는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미소가 아예 활짝 펴 있었다. 마치 앓던 이를 뺀 것만 같은 시원한 표정. 잘 하면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것 같았다. 그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무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그랜트가 자신을 빤~ 히 바라보고 있는 걸 깨닫고는 살짝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차 맛이 좋군요. 날이 추워서 따뜻한 차가 그리워져 그런 걸까요?" 그런 엘리엇을 조금 더 빤~ 히 바라보던 그랜트가 비식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이 좋은가보군?" 그에 엘리엇이 멋적게 웃어보였다. "하하하, 예...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 아이를 내보내서... 인가?" 직설적으로 묻는 그랜트의 질문에 잠시 멈칫한 엘리엇이었지만, 곧 피식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왜 그 아이를 그렇게 싫어하지?" 그랜트 또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저는 분란의 싹은 애초부터 제거하자는 주의거든요." "쿡... 분란의 싹?" "그 아이는... 일반 여자아이는 아니지요. 예, 확실히 제가 보기에도 잘만 키우면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보이더군요. 게다가 어떤 면은 저보다 더 뛰어나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게 저희 상회에 도움은 될 것 같지 않더군요. 오히려 해가 될 겁니다." 정색을 하고 대답하는 엘리엇. '이놈아, 넌 대단한 인재를 놓친 거야. 왜 선애가 해가 된단 말이냐아아~~' 이런 내 부르짖음을 들은 것일까? 그랜트가 대신 물어봐준다. "왜?" "그 애는 절대 첩의 위치에 있을 여자가 아니거든요." "쿡... 첩?" 정색을 하고 말하는 엘리엇에게 그랜트가 비식 웃음을 흘렸다. "제가 잘못 봤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코흘리개 때부터 도련님을 모셔온 저입이다. 여자에게 특별한 흥미를 보이시는 것, 그 애가 처음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 애는 능력이 있다는 건 인정하나 절대 루빈스타인 후작가 안 주인으로는 부족합니다." "너무 앞서가는 건 아니고?" "글쎄요...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분란의 싹은 자라기 전에 제거하자는 주의라서요. 그 애 능력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 애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런가..." "절 원망하셔도 하는 수 없지만, 제 생각은 변치 않을 겁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엘리엇에게 그랜트는 다시 비식 웃음을 흘렸다. "천만에.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에 엘리엇의 얼굴이 환해졌다. 생각은 굳었지만, 그래도 그랜트에게 원망 받는 걸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거 참 다행입니다." '뭐야... 저 그랜트 녀석... 으아... 저 놈도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어. 서비스로 저 놈 사무실까지 태워주고 말테다아아~~!!' 그날 밤, 모든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신의 숙소에서 잠이 들 무렵, 첫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분노가 식지 않은 내가 강하게 힘을 개방했기에, 불은 조용하게 생겨 타오르는 게 아니라 폭발을 일으키며 생겼던 것이다. 장소는 엘리엇 녀석의 사무실. 미란다 다음으로 가장 얄미운 녀석이었기에 인정사정 없이 힘을 써버렸다. 두 번째는 그 곳과 가까운 그랜트 녀석의 사무실이었다. 엘리엇 녀석의 사무실에는 서류함에 대고 직접 힘을 썼지만, 그랜트는 그래도 쫌 덜 미웠기에 서류함이 아니라 사무실 가운데 있는 소파에 대고 힘을 썼다. 사람들이 발빠르게 움직인다면 서류는 무사하게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미란다의 드레스 룸이었다. 도대체 하루에 수십번씩 갈아 입어도 평생 다 못입을 정도의 이 많은 옷들이 왜 필요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 만큼 많은 옷이 한국에 있던 울 집이 통채로 들어갈 정도로 큰 방에 주르르르 걸려 있었다. 적당히 많으면 부럽기도 하겠지만, 너무 많으니까 기가 막혔다. '이게 바로 쓸데 없는 낭비라는 거다아~ 으휴, 이걸 태우는 나도 낭비 시키는 건가아?' 척 보기에도 무지 고급으로 보이는 옷감들을 찡그리고 바라본 나는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하녀들이 급히 달려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미란다를 황급히 피신 시킨 걸 확인하고 가장 큰 힘을 끌어냈다. 꾸아아아앙~~!! 그리고는 여유있게 미란다의 화장대 서랍에서 보석들을 싹쓸이 한 채 유유자적하게 저택을 나섰다. 그때쯤에는 저택의 사방에 불이 밝혀진 채 커다란 소동이 생기고 있었다. "불이야아아~~!!" 다음 날 이른 아침, 학생들 보다도 먼저 일어나 식사를 하고 출근 하려는 휴를 선애가 붙잡았다. 물론, 내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모습이 보이자 선애를 부른 거긴 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아침 인사를 하는 휴를 끌고 인적이 없는 구석으로 가서 어젯 밤 내가 가지고 온 보물을 내놓자 휴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건... 뭐지?" "솔직히 말하면... 그 저택에서 가지고 온 거예요.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어봤자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휴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어차피 휴를 속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 나와 선애는 의논 끝에 솔직하게 이야기 하기로 결론을 냈었다. 사실, 휴가 조금 생각해보면 선애에게 갑작스럽게 생긴 보석의 근원지란 저택 밖에 없다는 걸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선애의 말에 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피식 웃었다. "이야... 처음 본 인상대로 정말 당찬 아가씨였는걸? 빈 손으로 그냥 나오기가 억울했다 이거지? 알았어, 내가 적당한 가격으로 처리해주지. 하지만, 제 값을 받기 힘들 거라는 건 미리 말해두지." 정식으로 받아온 것도 아니고 훔쳐온건데 당연한 일이었다. "휴가 알아서 해주세요. 뭐, 그 돈 전부 주지 않으셔도 돼구요." 지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봤자 관리하기도 어려울 거였다. "흠... 그렇게 말한다면 수고비는 좀 떼도록 할게. 아, 그리고... 오늘 오후쯤에 널 테스트 하러 올 거 같은데 괜찮겠지?" "저야 아무때나 상관 없어요." 이 곳에 교과서나 문제지가 있을리가 없었기에 며칠 뒤에 테스트를 한다고 해도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뭐, 기껏해야 머리 속에 있는 문제를 꺼내 끄적여보는 정도? "그래,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그럼 나중에 보자." "예, 안녕히 다녀오세요." 문을 나서는 휴에게 꾸벅 인사를 한 선애가 식당으로 갔다. 전에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서 있었을 때는, 별관때는 그래도 시오나도 있고 친해져서 선애를 챙기는 에밀리와 달시, 그리고 같은 동류라는 느낌에 좋게 좋게 다가오는 애들도 있어서 좋았지만, 본관으로 간 뒤엔 얼마나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는지 모른다. 린이랑 같이 식사를 할 때는, 그래도 그녀가 겉으로나마 챙겨주는 척 했으니 그나마 나았지만, 그녀가 바빠 없을때는 선애는 순전히 혼자 외로이 먹었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이상한 일이지만 선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보통 후배 혼자 있으면 선배들이 먼저 다가와서 말이라도 걸어줄 법 한데도 말이다. 뭐, 미란다 녀석에게 미운 털 박힌 뒤로는 근처에 얼씬 거리는 하녀도 없었지만... 그런데 그런 곳에서 벗어나 휴의 집으로 돌아와 식당으로 가니 안면 있는 얼굴들이 모두 꾸벅 인사를 하더니, 시오나 덕분에 친해진 애들이 모두 한마디씩 건네는 것이었다. "선애야,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어떻게 된 거야? 너 혼자 온 거라며?" "쿡쿡쿡, 너 쫓겨난 거냐?" 어딜 가던 집이 최고라는 말이 정말 실감 났다. 뭐, 선애와 나의 집은 한국이지만 한국에 갈 수 없는 이상, 당분간 집은 여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그들에게 시오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도 전해주고, 오랜만에 수업도 듣고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드디어 다시 온다고 말했던 휴가 돌아왔다. 그리고 같이 온 - 아마도 선애의 테스트를 담당한 사람이겠지만... - 사람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전에 선애가 불을 다루는게 마법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온 바로 그 마법사였다. 부름을 받아 응접실로 온 선애를 보자마자 마법사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물어 왔던 것이다. "너는 수학에도 대단한 재능이 있다며? 정말 마법사가 아닌 거냐?" 도대체 마법하고 수학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이해를 못한 선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만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정말 마법사가 아니냐? 참내... 마나만 가지고 있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테지만... 이거 마나가 보통 사람 정도니 안 믿을 수도 없고... 아, 혹시 마나를 숨기고 있는 건가? 끄응... 대마법사에게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선애에게 대놓고 묻는다기 보다는 혼자 중얼거리는 말에 휴와 선애는 서로 마주보며 쓴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 마법사는 아무래도 선애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마법사는 마침내 다 중얼거렸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선애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우선은 테스트가 먼저지. 자자, 시작해 보자." 선애와 그 마법사가 자리를 잡고 앉자 휴도 그 옆자리에 앉았다. 선애를 마법사에게 맡기고 돌아가는게 아닌 걸 보니, 아무래도 테스트를 받는 걸 구경하려는 듯. 그렇게 시작하려고 하는데 응접실 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빼꼼 열리는 거였다. 누군가 하고 돌아봤더니, 이 곳을 떠나기 전까지 선애에게 온갖 트집을 잡으려고 애를 썼던 바로 그 수학 담당 선생이었다. "실례합니다. 저... 수리 테스트를 한다고 들었는데... 괜찮다면 저도 좀 봐도 될까요?" '저 놈이 왠일일까... 선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 걸까나?' 선애에게 별로 좋게 대하지 않던 - 후작 저택에 가기 전에는 정말 무지무지 나쁜 놈으로 생각 되었는데, 후작 저택에서 여러가지 일을 겪다보니 저 수학 선생이 선애를 갈군 건 별것 아닌 걸로 여겨질 정도였다. - 사람이 테스트를 보겠다니 솔직히 좀 의아했다. 평소 선애를 좋게 생각하던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아라고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나쁠 건 없겠지. 들어 오게나." "감사합니다." 휴의 허락이 떨어지자 응접실로 들어온 그는 마법사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흠.... 서대륙 쪽 수리가 우리랑 똑같은지 모르겠군." "비슷한가 봅니다. 저 애가 그래도 덧셈, 뺄셈, 곱셈을 할 줄 알았거든요." "그건 다행이군. 그럼..." 수학 선생의 끼어들기에 마법사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여러가지 숫자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마법사의 손 끝이 적어 내려가는 숫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끄적거리던 마법사가 선애에게 그 숫자의 조합들을 내밀었다. "자, 이거 풀 수 있겠느냐?" 대충 보아하니 더하기와 빼기, 곱셈과 나눗셈을 적당하게 섞은, 십자리 수의 나열이었다. 그에 쉽게 펜을 들어 풀려고 하던 선애가 멈칫 하더니 마법사를 바라봤다. "에... 혹시 더하기와 빼기, 곱셈과 나눗셈이 섞여 있으면 곱셈과 나눗셈 먼저 계산하는 건가요?" 선애의 질문에 마법사가 놀랍다는 듯 자신의 턱을 만졌다. "호오, 서대륙에서도 그렇게 수리 계산을 하느냐? 맞다. 곱셈과 나눗셈이 우선권이 있지." 내 보기에 아마 그걸 확인하려는 듯, 길기만 한 숫자 나열 계산을 내놓은 것 같았다. 선애가 몇번 끄적이다가 가볍게 그 문제를 풀어 답을 내놓자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였다. "맞았다. 그럼 이것도 해보겠느냐?" 이 정도쯤이야 당연히 풀었을 거라는 표정이었다. '당근이지. 그 정도 쯤이야...' 그 다음 마법사가 끄적거려 내민 문제는 숫자 가운데 문자가 하나 들어있었다. 그리고 '=' 기호 다음에는 답도 나와 있었다. 한 마디로 숫자 가운데 끼인 문자는 수학 문제에서 'x' 나 'y', 혹은 'a' 나 'b' 로 표기되는 기호였던 것이다. "이건 알 지 못하는 숫자를 나타내는 기호다. 그리고 이번 문제에서는 이 기호가 나타내는 숫자를 알아내는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문자가 하나 들어갔지만, 처음 낮은 단계부터 시작하느라고 문제는 모두 더하기 빼기 문제였다. 그걸 가볍게 맞추자 그 다음에는 곱셈과 나눗셈이 들어갔다. 그것마저도 가볍게 맞추자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호오, 역시 내가 와서 직접 테스트를 해볼 만한 실력이구나. 지금까지는 연습이었다 생각하거라. 이제부터 진짜니까." "예." 그의 말에 선애가 약간 긴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다음 마법사가 적어서 내준 것은... 방정식이었다. '헤에, 이 곳에도 방정식이 있단 말이야?' 거기에 제곱도 나오고 있었다. 비록 한국에서 사용하던 것 처럼 표시하지 않고 그냥 a x a 로 나오지만, 그게 제곱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렇게 따지고보면 어째 인수분해를 풀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여기도 인수분해가?' 그렇게 놀라움을 속으로 표하고 있을때 더욱 더 놀랍게도 그 다음 단계가 인수분해 비스무리한 문제였다. 뭐, 풀어진 수식을 인수분해로 정리하라는 문제는 아니었고, 그것 말고도 다른 수리가 더해져 있다. 게다가 방정식이 나올 때 부터 계속 되었던, 문자로 나오는 알지 못하는 수를 알아내는 것이 문제였지만, 문제를 풀때 인수분해 공식이 사용되어 그런 생각을 한 거였다. 인수분해 공식이 필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따로 따로 떼어서 풀고 나중에 합하여 문제를 완전히 풀고 나자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마법사와 수학 선생은 호오, 호오...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마치 그런 방법이 있었었구나... 라던가, 그렇게 풀수도 있었구나... 라고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결과는 같아도 방법에 좀 차이가 있구나.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래도... 서대륙 방식이 우리보다 좀 뛰어난 거 같기는 하군. 게다가 상당히 높은 단계 수리까지 풀 수 있군." 수학 선생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선애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저는 수리쪽을 다른 애들보다 좀 더 많이 공부했거든요." "역시..." 수학 선생이 '그랬구나...'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선애가 푼 문제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마법사가 갑자기 선애의 손을 덥썩 잡더니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마법 배워 볼 생각 없냐? 이거 2 클래스 마법 공식인데 이걸 이렇게 간단하게 풀다니... 혹시 마나를 느끼는데 소질이 좀 떨어져도 그런 건 다른 걸로 보강할 방법은 있으니까... 만약 생각만 있다면 내가 가르쳐주마. 어때, 생각 없냐?" "예에에에~~?"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선애는 입만 떠억 벌리고 휴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그 마법사는 내 능력을 선애의 능력으로 생각하니까 선애가 그... 마나인지 뭔지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부터 계속 선애의 - 나의 - 능력을 연구해 보고 싶어했으니까 이 핑계로 그걸 하고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선애의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시선에 휴가 나섰다. "자, 자. 그만하시지요. 만약 선애에게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면 서대륙에서 마법을 배웠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니... 역시 마법에 대한 재능은 없었나 보죠. 서대륙에도 마법은 있다면서요?" 휴의 말에 마법사는 선애의 손을 놓았지만, 무지 미련이 많은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그렇지... 서대륙에는 엘프가 있으니까." '엘프? 엘프는 또 뭐다냐...' 내가 고개를 갸웃 거리는 동안에도 마법사의 말은 이어졌다. "우리쪽과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근본은 틀리지 않았으니... 하긴... 저 애한테 재능이 있었다면 그쪽 마법사들이 냅두지는 않았겠지..." 입맛까지 쩝쩝 다시면서 미련을 표하는 마법사의 태도에 선애는 무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원래 마법사들이 저렇게 끈질긴 건지, 아니면 저 마법사만 성격이 끈질긴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다이어트나 금연을 한다면 100% 성공할 사람으로 보였다. 선애의 수학 테스는 한 가지 문제를 더 풀고서 끝이 났다. 2차 방정식에 인수분해 공식까지 필요하게 되자 나는 혹시나 로그나 아니면 미분 적분까지 등장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이 곳에서는 아직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행렬 정도는 사용할 것 같기는 했다. 수학 선생은 선애의 수준에 무척이나 놀라면서 이제부터 자기 수업은 안 들어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이 정도 수준의 애를 쉬운 문제로 트집 잡으려고 했으니... 나도 참..." 그러면서 허탈하다는 듯 허허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마법사는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선애를 꼬시려고 했지만, 선애는 마법에 대한 호기심 보다는 그 마법사의 태도에 몸서리쳐지는 게 더 컸는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마법사도 선애가 마법 재능이 없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마법을 연구하는데 수학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무척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선애를 꼬셨다고 한다. 기실, 마법사들 연구에 같이 참여하는 수학자들이 많다나 어쨌다나... 아마 그 마법사는 선애를 제자로 삼아 자신의 연구를 돕는 전용 수학자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애의 거절에 무지무지 아쉬워하는 마법사를 응접실에서 내보낸 휴는 선애를 손짓으로 불렀다. "선애야, 내가 오늘 출근해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거든. 어젯밤에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 큰 불이 났다고 하더구나." 그러면서 선애를 빤~ 히 보는 폼이 '너와 연관된 일이지?'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선애는 시침 뚝 떼었다. 비록 휴가 선애의 능력 - 물론 내 능력이지만... - 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 시인하면 밤에 몰래 빠져나가서 불을 지르고 돌아 왔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그건, 실제로 불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 집에서 몰래 빠져 나가는 건 쉽다고 해도 저택까지 찾아가는 것 하며, 저택에 불 지르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기실 나 또한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서 다시 여기로 되돌아 왔을땐 새벽에 가까운 한밤중이었다. 미란다의 보석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저택에 갈때 처럼 무조건 건물을 뚫고 지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밤이라서 사람들 눈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하여간 그렇게 길을 따라 와야 했기에 무지 헤맸었다. 그러니 만약 선애가 그랬다고 하면 휴는 선애에게 불을 다루는 능력 말고도 또 다른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어머, 큰 불이 났대요? 웬일이래... 사람들이 다치진 않았대요? 저택이 다 탔나요?" 선애의 질문에 휴는 고개를 한번 갸웃 하더니 어깨를 으쓱 거렸다. 아무래도 '얘는 아닌가봐.'라고 여기는 듯 했다. "3층에 불이 났는데... 사람이 없는 곳이라서 인명 피해는 없었나봐. 게다가 모두 깊이 잠든 시간도 아니라서... 불이 좀 번지기는 했는데, 저택을 다 태운 건 아니래. 뭐, 그래도 피해가 좀 컸다지, 아마? 하지만, 루빈스타인 후작가가 어떤 곳인데... 그 정도 쯤이야 새 발의 피 정도겠지." "그래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사람들도 다치지 않았다니 잘됐구요." 선애가 대답하자 휴가 씨익 웃어보였다. "그래도 조금은 쌤통이라고 생각하지?" "훗훗훗, 예." "그려, 그려. 나도 쌤통이라고 생각 해. 그럼, 오늘은 수고 했다." "예." 간단한 테스트라고 하더니만 선애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게 아니라 단지 그들이 정해놓은 기준 이상인지 미만인지 확인하려던 것 뿐인 듯 했다. 기실 꿍얼거리는 마법사의 말을 들으니 선애는 3클래스 마법 공식을 풀은 거라고 했다. 설마 마법이 3클래스 밖에 없는 건 아닐테니 문제를 내려고만 했다면 더 어려운 문제를 낼 수 있었을 거다. 가볍게 선애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휴가 밖으로 나가자 선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히유우우~~" [에, 긴장하고 있었어?] "/아무리 가볍게 생각하라고 해도 테스트라니까 저절로 긴장이 되는 거 있지?/" 선애가 긴장하느라 굳어진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응접실을 나서자 나도 그 뒤를 따라 나가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넌 한국에서 고 3 수험생이 안 된게 왠지 다행인 것 같아. 만약 거기서 고 3이 되었으면 분명히 지독한 고 3 병으로 고생했을 거야.] "/태평하게 지난 언니가 이상한 거야./" 그날 저녁, 다른때보다 조금 일찍 돌아온 휴가 선애를 다시 부르더니 진지하게 수리학자 - 우리로 말하면 수학자 - 가 될 거냐고 물어왔다. 아마 선애가 그쪽으로 좀 깊이 공부를 했다니까 혹시나.. 하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만약 네가 원한다면 그쪽 길로 나가도록 해주마. 아까 그 마법사도 원했고 말이다. 뭐, 네 다른 능력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수리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길드에 도움이 될 테니까." 그의 말에 선애는 좀 갈등하는 눈치였다. 선애는 수학 성적이 제법 좋은 만큼 수학 문제를 푸는 것도 좋아했던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그 성취감이 좋다나 어쨌다나... 하지만 고민하는 것도 잠시, 마음을 정한 듯 똑바로 휴를 쳐다보며 선애가 입을 열었다. "휴, 괜찮다면... 저 상단 같은데서 일해도 될까요?" "상단?" 휴는 의외의 말을 들은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예. 제가 할 수 있다면 그런데서 일하고 싶어요." "그런 쪽에 관심이 있었나? 뭐... 원한다면 한번 기회는 주겠지만... 설마... 정말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루빈스타인 후작가에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거긴 이 나라를 대표하는 대상단이라면서요? 뭐, 제가 들어가서 상단을 그만큼 키울 수 있다면 한 방 먹이는 건 고려해 보겠지만, 복수심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구요..." 말 끝을 슬쩍 흐리는 선애가 좀 못미더운지 휴가 재촉했다. "그럼?" "아뇨, 어떤 녀석이 여자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봤자 분란의 씨앗일 뿐이라고 말해서요. 절대 그런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이고도 싶고, 또 제가 무엇을 얼마만큼이나 할 수 있는지 제 자신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요." "호오..." 선애의 포부에 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만약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 된다면... 그때 수리학자쪽으로 전향하죠 뭐. 그건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요." "일단은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본다 이건가? 훗, 나쁘지 않군. 이게 바로 젊음의 패기라는 거겠지? 네 생각은 잘 알았다." "감사합니다." "고마울 건 없지. 어차피 네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 우리쪽으로써도 좋은 일이니까." 휴가 그렇게 선애의 의견을 받아들여준 건 고마웠지만, 그가 길을 마련해 준다는 건 선애가 이 저택에서의 교육을 다 마치고, 또 견습 길드원으로써의 기간도 다 마친 후가 될 줄 알았다. 한국에서 말하면 일반적으로 대학 교육 과정을 끝내고 직장 구할 생각을 하듯 말이다. 그런데, 휴의 배려가 좀 지나쳤는지 그 해 겨울이 지나고 새로 봄이 오자마자 떡 하니 선애의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예에?" "상단에 자리가 하나 났는데 해볼 생각 없냐고." 봄이 돌아와 이제 슬슬 학생들의 교체가 일어날 시기, 선애는 수학이야 이제 안 들어도 된다고 했지만, 다른 과목들 교육이 끝난 건 아니기에 졸업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이 곳에서 교육 받는 애들은 보통 2, 3년 정도로, 길어야 거기서 1년 늘어난다고 하는데 선애가 교육 받은 기간은 겨우 1년 좀 넘은 기간이었다. 그것도 반년은 말이 안 통해서 자스민에게 개인적으로 말과 글의 교육을 따로 받은 거였으니,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건 반년 조금 넘은 기간 뿐이다. 왜냐하면 교육 받고 일년도 지나기 전에 하필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저택에서 하녀를 구하는 바람에 그 곳으로 갔으니까 말이다. 거기서 있었던 것도 반년 정도... 돌아온 게 겨울인데 봄이 되자마자 이 소리를 듣게 되는 건 일러도 너무 이른 것 같았다. 게다가 길드원 견습 기간은 어찌한단 말인가? 선애도 너무 갑작스러웠던 모양이다. "이렇게 빨리요? 너무 이른 거 같은데요... 저 교육도 덜 끝난데다... 견습 기간은 어쩌고요? 설마... 거기서 일하는 기간이 견습 기간인가요?" "응? 아아... 아니야. 넌 견습 기간이 없을 거야." 휴의 대답에 선애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예?" 설마 선애가 너무 뛰어나서 건너 뛰었다는 건 아닐 거다. 물론, 선애가 뛰어나긴 하지만 여기 있는 애들도 선애 못지 않을 만큼 뛰어난 애들이란 건 내가 잘 안다. 기실, 시오나도 선애 못지 않게 영리하지 않았던가? 고아원에서 눈에 띄일 정도로 똑똑한 애들만 모아 온 것인데 말이다. "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애 넌 길드에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에엑?" 그의 말에 선애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러니까 선애가 뭔가 부족해서 길드원으로 했던 걸 무효화 시키기로 했는데, 그냥 내 쫓는게 미안하니까 먹고 살라고 직장을 하나 마련해 준다는 소리인가? "어...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선애가 조심스레 묻자 휴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어, 아니야.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아주길 바래. 네가 길드 요원이 안되는 이유는 단순히 너무 튀어서일 뿐이니까." "엥?" "우리 길드 요원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게 뭔지 알아? 바로 튀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외근하는 요원들은 물론 내근하는 요원들도 주위에서는 그들이 길드 요원이라는 걸 몰라. 오직 같이 일하는 요원들끼리만 알고 있지. 그런데... 너는 가만히 있어도 튀거든... 외모가..." "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선애의 외모는 서양인들 사이에 홀로 있는 동양인의 모습이었으니까. "게다가 후작가에서 있었던 일로 인하여 너는 부각이 되고 말았어. 그러니 네가 길드원으로써 외근을 하든 내근을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널 따라다니게 될 거야. 나는 간과하고 있었는데, 윗쪽에서 그렇게 판단을 하더라고." "아..." 아무래도 '그래프' 일도 있었고, 게다가 미란다에게 찍혀서 큰 소동을 일으키고 쫓겨나왔으니, 그 저택에서 있던 선애를 한번이라도 본 모든 사람들이 선애를 잊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네 능력은 정말 아까운 일이지. 그래서 길드측에서는 널 길드원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대신 협력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협력인... 이요?" "정보길드는 어떻게 돈을 버는 것 같아?" "예?" '아니, 선애를 정보 길드에 가입시키네 마네 하더니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 라고 생각을 했지만, 휴는 쓸데없는 말을 안 하는 타입의 사람이었기에 선애도 황당하다고 되묻기는 했지만, 곧 진지하게 대꾸했다. "정보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 아닌가요?" "맞아. 쉽게 말하면 그렇지.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도 일종의 상업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왜 우리를 상업 길드라고 안 하고 정보 길드라고 할까?" '헤에, 그렇게 보니 또 그게 그렇네. 한국에서는 정보의 바다라 불리는 인터넷 사업도 사업이었는데 말이지.' 선애도 선듯 대답 못하고 머뭇거리자 휴가 빙긋 웃더니 양 손을 깍지 끼고는 그 위에 턱을 올려놨다. "우리는 손님을 까탈스럽게 선별하기 때문에 그래." 그가 설명했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그게 뭐?'라는 게 떠올랐다. 보통 사업하는 사람들은 거래 상대자를 고를때 심사숙고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말이다. 잘못 골랐다가는 사기꾼이랑 거래해서 다 떼어먹고 도망가거나, 아니면 능력 없는 자를 골라 함께 망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일은 적은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선애 또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자 휴가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우리가 정보를 팔아서 돈을 번다고 했지? 그럼 우리가 정보를 누구에게 판다고 생각해?" "에... 그야... 정보가 필요한 사람이요." 선애의 말에 휴가 쿡쿡 웃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보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파는 건 불가능 하지. 설마 아무나 와서 어떤 사람이 모월 모일 모시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한다고 줄 수 있을 것 같냐?" '어... 그런 거 아니었나?' 나는 아무나 정보 길드로 찾아와서 돈만 내면 어떤 정보든 얻을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휴의 말투를 보니 그런게 아니었나보다. 휴는 선애에게 답을 들으려 했던 게 아니었는지 선애가 가만히 있어도 별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많은 인원과 체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어도 능력의 한계는 분명히 있지.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매 시간마다 한 일에 대한 정보를 가지는 건 불가능 한 일 아니겠냐? 설사 그 정보를 모았다고 해도 그 정보들을 저장하는 것도 어려울 테고, 필요할때 찾는 것도 힘들겠지." "그거야 뭐..." 컴퓨터가 없는 세상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선애가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수없이 많은 정보들 중 돈이 될 만한 정보들만 수집하고 보유하고 있거든. 그런데, 이 정보란 놈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 잘만 사용하면 큰 이익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망하거든. 그런데 그 망하는 게 완전히 폭삭 망한다는게 문제지." '원래 사업에 실패하면 다 망하는 법 아닌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돈이 될 만한 중요한 정보지. 그걸 원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 것 같아?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겠지. 그러한 사람들이 원한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있는 것 다 팔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돈을 많이 벌지 않을까?' "우리 길드는 쥐도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다." '에?' "예를 든다면, 어떤 힘 있는 귀족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 혹은 억누르기 위해 그 사람의 비리에 대한 정보를 샀다고 치자. 그럼 그는 우리의 정보를 잘 써먹고 난 뒤 이렇게 생각하겠지. '혹시, 저 정보 길드 놈들은 나에 대한 비리 정보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라고 말야." "아하..." 선애가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심을 한 그 귀족은 절대 정보 길드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을테니 어떻게 해서든 없애려고 하겠죠." "맞았어. 그래서 우리는 고개를 선택할때 신중에 신중을 더해서 선택하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정보를 다 동원해 그 사람에 대해 검토하고 또 검토하면서 말야. 하지만, 사람이란 건 정말 미래를 알 수 없는 일이거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전에는 괜찮을 것 같던 사람도 돌아서면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법이지. 그래서 정보 길드의 철저한 비밀 엄수가 필요한 거야. 고객의 선택 우선권도 우리쪽에 있지만, 설사 우리에게 선택된 고객이라 해도 길드에 대한 비밀은 엄중히 지켜야 하는게 길드의 첫번째 룰이다." "그런데 저는 첫번째 룰을 지키기에 어렵다는 거죠?" "그래, 너는 가만히 있어도 너무 튀는 존재거든. 외근을 하든 내근을 하든 너는 너무 주복을 끌게 될 거야. 게다가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화재 사건으로 너는 사람들 뇌리에 깊이 인식 되어 있을 거란 결론이 내려졌지. 네가 그 화재를 일으켰든, 안 일으켰든 간에 상관 없이 말이다." 어떤 커다란 사건이 생긴다면 그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 혹은 그 사건으로 인해 같이 떠오르는 사람들이나 사건은 일반 사람들에게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화재와 선애는 그런 관계였다. 선애가 쫓겨나다시피 나간 날 밤에 그렇게 큰 화재가 일어났으니, 저택에서 선애가 하녀로 일했던 걸 아는 사람들은 그 화재를 떠올리면 '아, 그날 쫓겨난 애가 있었지...' 하며 자연스레 선애를 떠올릴 거였다. 휴가 말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길드원이 되는 대신 협력인이 되라구요? 그런데, 협력인이 정확이 뭔데요?" "뭐, 쉽게 말하자면 길드에 협력하는 사람을 말해." 그렇게 시작된 휴의 설명을 잠깐 요약하자면, 길드원이 아닌데 길드와 관련을 맺고 그 일을 돕는 존재가 있는데 그를 계약자, 아니면 협력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뭐, 둘 다 길드와 공생공존하는 관계, 즉 길드의 도움을 받고 자신도 도움을 주는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은 계약자는 길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협력인은 조금이라도 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협력인과 길드 사이에는 신뢰와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마치 선애와 휴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협력인이 길드 전체에 대하여 조목조목 다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약자와는 훨 나았다. 선애는 처음부터 길드원을 시키려고 데려 왔었기에 이제와서 계약자가 되기는 힘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애처럼 협력인이 되는 경우도 꽤 있다고 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선애를 무지 탐내는 마법사라나? 고아는 아니었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의 현명함을 알아 본 길드 사람이 미래의 길드원으로 키우려고 교육 시키는 과정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떤 마법사가 그의 마법적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대로 데려가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고 했다. 얼결에 길드원을 잃게 되었지만 나중에 마법사가 되어 돌아와 협력인이 되었으니 길드도 좋았고, 그 마법사도 세상에서 대우 받는 마법사가 좋았으니 양쪽이 훨씬 좋은 일이 되었다. "그러니까 네가 길드에 큰 영향을 끼칠 존재가 되느냐, 아니면 그저 그런 미미한 존재가 되느냐는 모두 네 능력에 따라 달려 있다는 거지. 뭐, 나야 넌 큰 존재가 될 거라고 예측하고 널 데려온 거니 부디 내 예측이 틀리지 않게만 해주라." 편하게 쿡쿡 웃으면서 했지만, 엄청 부담되는 말이었다. 뭐, 그렇다고 선애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을테지만... 선애는 욕심이 꽤나 많은 애였다. 특히나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는데다가 좌우명이 '억울하지 않으려면 출세해야 한다.' 였으니 말이다. "할래요. 휴가 말한 자리가 어떤 곳이죠?" 뭔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선애가 묻자 휴가 비죽이 웃었다. "어어... 큰 기대는 하지 말라구. 아직은... 솔직히 상단이라고 할 수는 없는 작은 곳이야. 생긴지 얼마 안 된데다가 이제 겨우 작은 가계를 내기 시작한 곳이거든." "엑..." 휴가 마련한 곳이라기에 나는 루빈스타인 후작가 상단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이 곳에서는 꽤 알아주는 괜찮은 곳일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상단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데다가, 그것도 생긴지 오래 되어 뭔가 탄탄한 바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 얼마 전에 생긴 곳이라니... 이거 뭐 자신의 능력으로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거 보니 그냥 선애가 귀찮은 존재가 되어서 아무데나 쿡 쑤셔박으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선애 또한 당혹스러웠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그에 휴가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어...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말구...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상단은 우리 '고객' 이거든." " '고객'이요? 작은 곳이라면서요?" "맞아." "혹시... 그 상단을 차린 사람이 부자예요?" "뭐, 그것도 있지. 그래서 솔직히 상단이 망해도 우리가 손해보는 건 없어. 단지... 개인적으로 그 상단 주인이 내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그쪽에서 댓가를 치르는 대로 우리가 돕기는 하겠지만... 그것 말고도 그 상단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말이지. 내 개인적으로 뭔가 도울게 없을까 생각하니까..."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휴가 선애를 보더니 씨이익 웃어 보였다. "딱 하나 생각이 나더라구." "저...요?" 자신을 가리키며 묻는 선애에게 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 예측상 미래에 꽤 큰 인물이 될 거라는 선애가 그 상단에 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아, 그 상단 주인도 꽤 하는 사람이라 쉽게 망하지는 않을 거야. 내 마음에 든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과연 내가 예측한 것 처럼 대단한 결과를 낼 수 있을 지 한번 보고싶거든." '이거... 선애를 띄워 주려고 아부성으로 하는 말인거야?' 왠지 그런 의심이 쪼까 드는 것이... "그 반대로 상단이 쫄딱 망한다면요?" "음... 뭐, 그럼 할 수 없는 거지. 앞서 말했듯이 그래봤자 우리 길드가 손해 보는 건 없으니까. 그때 선애는 다른 자리를 찾아보면 되는 거야." "흐음..." 선애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자 휴가 물었다. "왜, 안 내켜? 만약 안 내킨다면 다른 곳을 알아봐 줄게." 휴의 말에 선애의 얼굴이 다시금 정색으로 돌아왔다. "아뇨, 하겠습니다. 하게 해주세요." 선애의 대답에 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선애가 하겠다니 잘됐네." "언제부터 일하는 거죠?" "응, 내일. 내가 내일 길드 연락책을 보내겠다고 했거든." "엑... 길드... 연락책이요?" 다음 날,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은 선애는 휴가 그려준 약도를 들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는 당연하겠지만 내가 졸졸 쫓아가고 있었다. [에휴... 이거 괜찮은 일인가 모르겄다. 그냥 상단에 취직 시켜주는게 아니라 연락책이라니...] 어제 휴가 말하기를, 자신이 그 상단 주인과 평소 안면트고 친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길드와 거래를 위해 자신이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힘으로 선애를 단지 취직만 시켜주기 어렵다고 했다. 오직 연락책으로 들여보내줄 수 있는 거라나? 그래놓고는 뻔뻔스레 자리가 났다고 선애에게 말하다니... 생각할 수록 괴씸하고 휴가 무책임하게 생각 되고, 이 일을 하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선애가 자신을 연락책이라고 밝힌다면 아무래도 그 상단 주인이 선애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할 것 아니겠는가? 지금이야 작은 곳이라니 크게 감출 비밀 같은 것도 별로 없겠지만, 나중에 그 상단 주인이나 선애가 열심히 해서 좀 규모를 키운다면 신뢰받지 못하는 선애에게 어디 중책을 맡기겠느냐 말이다. 그런데 휴는 그걸 한 마디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모든게 다 네 능력에 따라 달린 거지." [아니, 그걸 누가 모르남? 능력에 따라 신입을 얻어 중책을 맡게 되든, 계속 신뢰를 받지 못해서 한직에서 빌빌 거리든... 하지만 도와준다고 했으면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 차라리 이런 자리가 있으니 가서 네 능력으로 취직을 해보라고 하던가.]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양 태연하게 말하던 휴의 태도가 떠오르자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너무 무책임하잖아? 네가 길드랑 관계 있다는 걸 다 떠벌리고 들어가다니...] "/언니.../" 내 투덜거림을 묵묵히 들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던 선애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날 불렀다. [응?] "/이거... 이쪽이 오른쪽이지? 맞나?/" [엥?] '뭐냐... 이 녀석 지금까지 내 말을 듣지도 않았던 거냐?' 선애는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옆으로 기울였다가 뒤집어 봤다가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선애 뒤만 졸졸 쫓아오느라 진작 눈치채지 못했는데, 우리는 어느새 휴의 집이 있던 언덕을 다 내려와 골목 안을 한창 들어와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약간 허름한 주택가였다. 약도에서 이 부근은 큰 골목만 대충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렸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그 작은 상단은 시내 중심가의 가계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있었다. 뭐, 중심쪽이 아니라 변두리 쪽이긴 했지만... 선애가 보여주는 약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나는 적당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냥 한 사람 잡고 물어봐. 시내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언니가 해라./" [내가 어떻게?] "/아... 맞다. 쳇... 언니라면서 이런때 도움이 하나도 안 돼요./" [이봐, 이봐. 내가 안 되고 싶어서 안 되냐? 앙?] 선애 녀석은 한국에 있을때 이렇게 앞으로 나서는 일은 꼬옥 나를 시켰다. 자기는 소극적이라서 그런 일 하기 힘들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말이다. 집에서 음식을 시켜먹을때도 자신은 절대로 주문을 하려고 하지 않더니만, 그게 이제는 아예 습관이 되어서 지금의 나보고도 시키려고 한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일 수만 있다면 유령이고 뭐고에 상관 없이 무조건 나를 시키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내 말에 선애는 쳇쳇 거리면서 두리번 거리다가 마침 옆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에서 걸어 나오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대충 10살쯤 되어보이는 소년이라 만만해 보였는지 선애는 주저않고 그 애에게 다가갔다. "얘, 미안하지만 중심가로 나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니?"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던 소년은 선애의 외모를 보더니 신기하다는 눈빛을 띄었다. 뭐, 처음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제는 익숙한 선애는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소년이 좀 오래 대답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길 모르니? 이 근처에 사는 게 아니었니?" 선애의 말에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소년의 눈동자가 묘하게 가늘어졌다. "저... 이 근처에 살긴 사는데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소년이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자 선애는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모른다는 애를 붙잡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선애가 막 몸을 돌리는 순간 선애의 옷자락을 그 소년이 덥썩 잡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실링을 받는다면 어쩌면 생각 날 지도 몰라요." "엥?" 선애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돌아봤다. 세상에 길을 가르쳐 주는데 돈을 달라니... 한국에서라면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었으니 선애가 황당해 하는 건 당연했다. "1실링?" 1실링은 이 곳에서 가장 낮은 화폐 단위였다. 구리 동전 하나가 바로 1실링이었는데 이걸로 검은 빵을 하나 살 수 있었다. 검은 빵은 빵 중에서 가장 가격이 낮은 빵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빵이 주식이었는데, 이 빵을 만드는 재료 중 가장 비싼게 밀가루였다. 뭐,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버터라던지 우유라던지 설탕 같은 건 제껴놓고 말이다. 그런데 이 검은 빵은 밀가루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대신 좀 더 싼 호밀이 들어갔는데, 그것도 호밀로만 만들어진게 아니라 호밀은 반 정도 들어가고 나머지 반은 귀리라는 식물이 들어가 만들어지는 거였다. 그래 먹으면 소화는 잘 되겠지만, 먹기에는 무척이나 딱딱하고 맛이 없는게 특징이라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사먹는 빵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빵 보다 과자가 더 비싸기 때문에, 과자보다 빵이 더 비싼 한국에서 비슷한 화폐가치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 500원 정도일까? 하여간 500원이든 50원이든 까짓 길 하나 가르쳐 주는데 돈을 달라는 건 정말 황당스러웠다. 만약 한국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선애는 기가막힌 얼굴로 되묻다가 그냥 흘려버리려는 양 대답 들을 생각은 안 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곧바로 뒤에서 옷자락을 놓지 않은 그 소년의 말이 들려왔다. "여기는 굉장히 복잡해서 말로는 시내까지 나가는 길을 설명하는 건 어려워요. 그냥 나가시려면 많이 헤매실걸요? 여길 잘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는게 좋아요." '물론 그렇게 된다면야 좋기야 하겠지만...' 현재 선애에게는 돈이 있었다. 그것도 1실링보다 훨씬 많은 돈이. 후작가의 저택에서 나올때 켐벨 집사가 넉넉하게 챙겨준 돈은 무려 은화 20개였다. 화페 단위를 잠깐 설명하자면 은화 한개는 1실링이었다. 그리고 은화 위에는 금화가 있었고, 금화 위에는 백금화까지 있었다. 금화 한개는 100개의 은화고, 백금화 한개는 100개의 금화이고 말이다. 보통 한 집안의 생활비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작가의 저택에 있을때 신입 하녀의 신분을 벗어나면 기본 월급이 은화 4개였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은화 1개씩 받는 것이다. 본관 하녀가 되면 월급이 은화 6개씩이라고 알고 있었다. 뭐, 숙식까지 제공되는 상태라고 하지만, 제법 괜찮게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걸 감안해 본다면 선애는 대략 보통 월급의 3달치를 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 말고도 휴에게서 보석을 처분한 돈도 받았다. 것도 무려 금화가 30개에다가 은화가 50개였다. 아직 이 곳에 대한 물가를 적응 못해서 얼마나 대단한 가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1실링에 비한다면 정말 많은 돈이었다. 오늘은 혹시나 싶어 그 중에서 약간의 돈을 가지고 왔다. 그걸 봤을때 돈도 많은데 그냥 1실링을 주고 길을 아는게 어떨까 싶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선애가 가진 최소의 화폐가 은화라는 거다. 구리 동전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돈을 주고 길을 알고 싶어도 은화 주면서 '너 99실링 거슬러와라.'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아마 선애는 1실링을 달라는 말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구리 동전을 가진게 없어서 아쉽지만 그 소년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일게다. "됐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뭐." 그러며 선애가 슬며시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소년의 손을 빼내자 그 소년이 다시금 잡아왔다. "그건 힘들걸요? 어른들은 모두 일 나가시고 이 근처에서는 제가 제일 나이가 많아요. 다른 애들은 모두 저 보다 어린 애들인걸요. 그 애들이 제대로 대답을 해주리라 생각하세요?" 정말... 끈질기기도 하지만서도 조목조목 잘 대답하는게 제법 똘망똘망한 애 같았다. 아니면... 이런 일을 많이 해서 익숙한 걸까? 그 애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는데 자꾸 매몰차게 거절하는게 어려웠던지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잔돈이 없거든?" 그러자 소년이 승리의 미소를 씨익 지으며 말했다.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제가 누나를 시내 중심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테니까 누나는 절 기특하게 여겨주셔서 그 곳에서 맛난 빵 하나를 사주시면 돼요." 이 녀석, 정말 영리한 놈이다. 아까 말했듯 1실링이면 검은 빵 하나를 살 수 있다. 그 빵이 제일 싼건데, 설마 이 소년에게 어떻게 검은 빵을 사주겠는가? 좀 더 나은 호밀빵이라도 사줄텐데, 호밀빵은 2실링이었다. 그럼 꼬맹이는 처음에 제시했던 댓가보다 더 많은 댓가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거참, 되게 영리한 녀석이네.] "너... 나참, 그래, 그러자. 너 정말 장난이 아닌 녀석이구나? 이름이 뭐니?" 선애가 항복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허락하자 소년이 싱글싱글 웃으며 당장 앞장을 섰다. 그러며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밀이에요." 나중에 알고보니 이 녀석은 휴가 미래의 길드원으로 점찍어 놓은 녀석이었다. 녀석의 행동에 감탄을 한 선애는 그 애가 무사히 중심가까지 데려다주자 그 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보인, 꿀빵 장수에게서 꿀빵을 10개나 사서 안겨주었다. 하나가 꼬마 붕어빵 만한 자그마한 건데, 안에 꿀 같은 달콤한 소스가 - 진짜 꿀은 엄청 비쌌으므로 아마 설탕 소스 일거다. - 들어 있는, 과자 비슷한 거였다. 일반 빵의 1/4 정도의 크기인데도 하나에 2실링이나 했다. 하지만 좀 넉넉하게 돈을 가지고 있는 선애는 자신도 몇개 사들고는 그 소년과 헤어진 뒤 본격적으로 휴가 가르쳐준 가계를 찾기 시작했다. 중심가는 커다란 대로가 반듯하게 뚫려 있는데다가 번듯한 건물들도 있어서 약도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찾는 가계는 복잡하지 않는 변두리쪽에 있는 거라 크게 헤매지도 않았다.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수리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제법 깨끗한 외관을 가진 1층의 작은 목조 건물에 네모 반듯한 자그마한 간판에는 '타이거 가계' 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자 바로 밑에 꽃잎 다섯개의 꽃이 새겨져 있는 것과 비교해 볼때 정말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여기 무슨 가계인데 꽃이 그려져 있지?] "/들어가보면 알겠지./" 그렇게 대꾸한 선애는 일반 집이나 보통 가계들 같은 밋밋한 네모난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제 11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에 달려있던 자그마한 종에서 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손님이 들어온 걸 쉽게 알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가게 문에 종을 달아 놓는 건 한국이나 여기나 같은 모양이었다. 가게 안도 겉에서처럼 깨끗했다. 그것도 너무... 대략 20여평의 작은 가게 안은, 정말 가게가 맞는지, 아니면 아직 정식으로 오픈된 게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물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안쪽에 카운터로 보이는 곳이 있었고, 창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진열장이 있었는데 그 안은 거의 텅텅 비어있었다. 오직 한쪽 구석에 색색의 액체가 담긴 내 손바닥 반 만한 유리병 다섯개가 전부였다. 거기에 깨끗한 마루바닥과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벽이 가게 안을 꾸미고 있는 전부였다. [여기 가게 맞아?] "/글쎄.../" 우리가 들어오고 나서 가게 안을 대충 다 둘러보고 난 후에도 아무도 나와보질 않았다. 그러니 정말 여기가 맞는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약도에 그려진 위치에 있었고, 약도에 적힌 상호명과 같다는 걸 확인하고 들어온거였으니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 곳 주인에게 확인하고 나가야했다. 게다가 혹시 아니더라도 같은 상호를 가진 다른 가계 위치를 물어보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하지만 가게 문은 열렸잖니. 그런데... 없어도 너무 없다. 도둑이 들어도 가지고 갈게 없으니까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운 건가?] "/그러게.../" 그렇게 선애와 내가 기다리며 수다를 떠는데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가게 가운데 서 있는 선애를 보더니 황급히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앗, 이런 죄송합니다. 기다리셨습니까? 볼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왔는데 제가 너무 늦은 모양이군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가온 사람은 남자였다. 대략 20대 중반쯤을 보이는 남자로 180은 되어보이는 키에 길고 가는 팔 다리를 가지고 있어 모델 해도 될 만큼 스타일이 좋아 보였다. 약간 어두운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데도 불구하고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뭐랄까... 어색한 서양인이라고나 할까? "이야, 서대륙인이시군요. 이거 반가운데요? 저도 반은 서대륙인이거든요." "예?" "혼혈인이라구요. 아버지쪽이 서대륙인이시거든요." "아, 예. 그러시군요." '어쩐지 뭔가 이쪽 사람치고 좀 틀려 보이더라니...' 나는 보통 혼혈인이든 그냥 서양인이든 둘 다 똑같은 서양인으로 보였는데, 이 곳에서 오랫동안 서양인들에 둘러쌓여 생활하다보니 어느새 혼혈인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안목을 기른 모양이었다. "자, 그럼 어떻게 오신 거죠? 뭐가 필요해서 오신 겁니까?" 그 갈색머리의 남자 말에 나는 여기가 가게는 가게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서 뭘 판다는 것일까? 이런 내 생각을 뚫고 선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길드에서 보내서 왔는데요." 선애의 말에 싱글 싱글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한 순간에 딱 굳었다. "길... 드?" "예." 휴가 선애에게 약도를 그려주며 말하길, 절대 휴의 이름은 말하지 말고 단지 '길드가 보내서 왔다.'라고만 말하라고 했었다. 그에 그렇게 말했는데 남자의 표정이 굳어지자 선애는 자신이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싶었던 모양이다. "저기... 벨타이거씨... 아니세요?" 그랬다. 이 남자의 이름은 벨타이거였다. 것도 이름이 벨이고 성이 타이거 인게 아니라 이름이 벨타이거였다. 성은 안 말해줘서 모르고 말이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생각난건 '종범'이었다. 참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가 서대륙인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가게 이름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모양이었다. 선애의 질문에 남자가 표정을 풀더니 대답했다. "맞아. 내가 벨타이거야. 흠, 길드에서 보내준다는 사람이 너였나? 서대륙인이 그 길드에 가입해 있다니 신기하군." 그러면서 선애를 아래 위로 다시 한번 살펴보는 거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는 길드원이 아닌데요." "상관 없어. 어차피 길드와 관련이 있는 사이일 거 아냐?"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선애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선애가 가만히 있자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던 벨타이거가 다시 선애를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에 가게 같은데서 일한 적 있나?" "아뇨." "그래? 그런데 잘 할 수 있겠어?" "뭘요?" 선애의 말에 그가 한심하다는 듯이 선애를 바라봤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건가?" 왠지 못마땅하다는 듯한 그의 말에 선애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신다면 제가 알고 왔는지 모르고 왔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길드에서는 가게 일을 도울 사람을 연락책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가게 일을 도우라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잘 할지 못 할지 대답 못 해드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화가 난 선애가 딱딱거리며 대답하자 남자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헤에... 이 아가씨 성깔 있네... 그래가지고 어디 점원 일을 제대로 하겠나? 손님들에게 이렇게 땍땍 거리면 큰일인데..." "점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점원. 당신 같은 여자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손님 상대말고 또 뭐가 있다고 생각하지?" 어째 선애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나까지 열이 받기 시작했다. "이래뵈도 장부 정리 정도는 할 줄 압니다만?" "호오, 그래? 그거 참 잘됐군. 그럼 그것도 좀 부탁하지." 선애가 약간 삐딱선을 타며 말했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투로 말했다. "뭐, 잘 하든 못 하든 길드에서 보냈으니 어쨌든 쓰긴 써야겠지. 아, 그런데.. 이름이 뭐지?" '빨리도 물어본다.' "선애라고 합니다." "그래, 내 이름은 벨타이거... 알고 있겠지만. 그냥 벨이라고 불러라." "예." "궁금한거 있냐?" "여기는 무슨 가게인가요?" 벨타이거, 아니 벨의 그 말에 선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맞아, 나도 그게 제일 궁금했어.' "어? 너는 그것도 모르고 여기 왔냐? 왔어도 보면 알 거 아니야?" '알기는 개뿔이...' 기가막히다는 듯 말한 그는 가게 한쪽에 놓여있는 진열대로 가서 그 안에 단 다섯개 있는 유리병을 몽땅 꺼냈다. "이걸 파는 거야." "이게 뭔데요?" 선애의 질문에 그는 그 중 투명한 녹색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선애에게 넘겨줬다. "향수. 냄새 맡아볼래?" 그의 말에 선애는 냉큼 유리병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향수의 냄새를 맡을때 상식은 유리병을 코에서 약간 떨어뜨려 놓은 뒤 손으로 냄새를 코 쪽으로 오도록 바람을 일으켜서 맡아야 한다는 거다. 직접 향수병에 코를 대고 맡으면 너무 진한 냄새가 나기때문에 오히려 향을 잘 모를 수 있다는 거다. 뭐, 원래 정식의 방법은 한지에다가 향수 몇방울을 떨어뜨린 뒤 그걸 코 앞에서 살살 흔들어서 풍기는 냄새를 맡는거라지만, 그렇게 하려면 한번 향수 사러 가서 그 많은 향수 냄새를 언제 어떻게 다 맡겠는가. 내가 성인식을 치룰때 향수를 선물 받으며 익히게 되었던 상식들을 선애에게 가르쳐 줬기 때문에 선애는 내가 가르쳐준 상식 대로 향수병을 약간 멀찍이 든 채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냄새를 맡았다. "아... 향이 시원하군요. 독하지도 않고... 좋은데요?" 향수 병 뚜껑을 닫아 벨에게 내밀며 선애가 말하자 벨이 선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이야, 너 향수 향기를 맡을 줄 안다?" "그런가요? 다른 것도 맡아봐도 될까요?" "그래라. 이제 내가 팔 건데..." 그의 허락에 선애는 냉큼 다른 향수병들을 집어들며 하나 하나 향을 맡기 시작했다. 나도 옆에서 같이 맡고 싶었지만... 이런 몸이 된 뒤로 시각을 뺀 나머지 감각들을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에... 맡을 수가 없었다. 뭐,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향수에 별로 흥미를 가지는 편이 아닌터라 크게 섭섭하지는 않았다. "다른 것들도 다 괜찮네요. 그런데... 향수가 이것 뿐인가요?" 향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엄청 고민되게 만드는 한국의 향수, 아니 화장품 가게를 생각해볼때, 딸랑 5개의 향수만 판다는 건 정말 적어도 너무 적었다. 하기야, 적어서 뭘 살지 고민하는 시간은 줄어들겠지만... "가게가 적으니까 어쩔 수 없지. 지금 만들 수 있는 향수는 이게 다야. 게다가... 양도 별로 없지." "어, 이거 직접 만들어요?" 선애가 놀랍다는 듯이 되묻자 벨이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 선애를 바라보는 거였다. "그럼 당연하지. 다른데서 만들어 우리에게 넘기는 줄 아냐? 그럴거면 그쪽에서 직접 팔겠지." 아마 여기는 향수를 파는 곳에서 제조까지 같이 담당하는 모양이다. 거기다 더 황당한 건, 그 다음에 벨이 보여준 향수병이 유리가 아니라 나무로 된 통이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향수 병이아니라 향수 통이었다. 굵기는 내 손가락 두개 정도 합쳐놓은 정도에 길이는 내 가운데 손가락 길이 정도였다. 거기다가 향수가 들어 있는 그 통을 놓고 파는게 아니라 향수가 들어있는 커다란 통 다섯개가 대기하고 있다가 향수를 사러 온 사람이 원하는 향수를 그 자그마한 통에 넣어서 파는 것이었다. "그럼 이거는 뭐예요?" 선애가 진열대에 유일하게 자리한 5개의 유리병을 보며 말하자 벨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거였다. "그거야 진열용 상품이지." "너무한거 아닙니까? 향수병이 나무통이라니요. 차라리 이렇게 파는게 어때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의 선애가 유리병에 담긴 향수를 가리키며 말하자 벨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돼. 유리병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만약 유리병에 담아서 팔면 향수 가격이 몇배로 뛴단 말이야.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부유한 고객이 아니라서 비싼 향수는 사기 어렵다구." "하아..." 솔직히 진열대에 진열된 향수병은... 좋게 말해서 투박이고 나쁘게 말하면 꼭 대충대충 만들어 놓은 것만 같은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예쁜 모양의 병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모양인데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선애가 작게 중얼거리자 벨이 기가막히다는 어투로 말했다. "유리 제품이 얼마나 비싼데. 이것도 모양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은화 3냥이란 말이야. 이건 실습하는 녀석이 만든거라 재료값에 수고비만 살짝 얹어주고 사온 건데... 정식 세공사가 만든게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거의 몇배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애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툴툴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애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툴툴댔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황당한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 향수들은 한달 후면 상하니까 그때까지 팔지 못하면 알아서 처분하도록 해." "예?" 내가 비록 오랜 세월을 산건 아니었지만, 살다 살다 향수가 상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후배 녀석이 수학여행을 갔다와서 기념품이라고 6000원 짜리 향수를 사다준 적이 있었다. 좀... 이 아니라 무지 싼 향수였지만, 내 기념품을 챙긴 그 마음이 너무나 기특해서 곱게곱게 받기는 했는데, 원래 향수는 잘 사용하는 편이 아니라서 내 검지 손가락 만한 길이의 병에 있던 향수는 몇년이 지나도 다 사용하지 못했었다. 결국, 반은 때때로 기억 날때마다 사용하고 반은 그냥 말라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향수는 텅 빌때까지 절대로 상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한달이면 향수가 상하다니... "향수가... 상해요?" "응. 화학물질을 별로 사용하지 않고 거의 꽃 원액만 이용해서 만들다보니 쉽게 상하더라고. 그러니까 조금씩 파는 거야. 한달 안에 다 쓸 수 있을 정도로. 아, 여기 있는 거 열흘 지난 거니까 날짜 잘 기억해두록 해. 향수는 15일에 한번씩 새로 들여오니까 그것도 알아두고." "헐렉스..." "뭐?" 선애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말에 벨타이어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니예요. 그리고 다른 거는요?" 그 뒤로도 벨타이거는 선애에게 가게 일을 계속해서 설명해줬다. 가게는 몇시에 문을 열고 몇시에 닫으며, 점심시간은 몇시라는 등등... 웃긴 건, 설명하는 시간이 꽤 길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동안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거였다. 뭐,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 했었지만... 원래 향수 가게에 손님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 가게에만 손님이 없는 건지는 몰라도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손님이 없다면 좀 문제 있는게 아닐까? 선애가 장부 정리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말에 반색하는게 그냥 비꼬는 걸로만 생각 했는데 정말 장부 정리까지 다 맡길 생각인지 장부를 꺼내 모조리 선애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잘 부탁해~"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가게 안 구조는 단순하게 방 세개에 차나 간단한 요리 정도만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자그마한 부엌이 다였다. 제일 넓은 공간은 손님들을 상대하는 곳이었고, 나머지 두 방은 대략 3평과 4평쯤 되는 정도의 크기었다. 작은 방은 창고로 쓰이는 곳인 듯 비어있는 향수통들고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사무실로 쓰는 듯 작은 3단짜리 서류함 두개와 책상, 의자, 그리고 면담 정도 할 수있는 2인용 소파 두개, 그 가운데 작은 탁자 하나가 있었다. "네가 가게를 봐준다니 잘된 일이야. 다른 곳은 네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지만, 이 곳만은 마음대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음... 내가 가게에 없을때는 이 곳을 잠그고 다녀도 괜찮겠지?" 사무실 안을 보여주며 하는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선애를 어지간히 신뢰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내가 그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그렇겠지만... "좋아. 그럼 오늘부터 잘 부탁해. 음... 나는 다른 일이 많아서 가게를 자주 비울테니 내가 그리 신경쓰이거나 부담되지 않을 거야. 왠만한 일은 다 너에게 맡길테니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하고." "예." "아까도 말했다시피 점심때는 알아서 챙겨 먹어. 내가 따로 점심시간을 챙겨주지는 않을테니까. 가게에서 먹어도 되고 잠시 가게를 비우고 나가서 먹고 와도 되고. 하지만, 비울때 내가 없으면 문은 잠그고 가도록 해. 열쇠는... 조금 있다가 내가 하나 주지." "네." "그럼 질문할 건?" "아직은 없어요. 나중에 생기면 물어보지요." "좋을대로 해. 가게에 있을때 나는 아마 거의 이 곳에 있을 거 같으니까. 그럼 이제 좀 나가주겠어? 나도 할 일이 있거든." "예." 그의 축객령에 선애는 순순히 대꾸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졸졸 따라나오는 나는 솔직히 걱정이 태산같았다. 가게에서 일해보기는 커녕 아르바이트 한번 안 해본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생이 바로 선애였는데 덜컥 향수 가게를 맡게 되었으니 걱정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방학때 아르바이트 한번 해보겠다고 할때 시킬걸 그랬다. 대학교때 잠깐 아르바이트 해본 나는 - 향수 가게가 아니라 옷가게였지만... - 이런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부모님이 꼬맹이가 아르바이트 해보겠다는 걸 반대할때 나도 옆에서 부모님 편들어서 반대했던 것이다. '에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좀 해보라고 할걸...' 아르바이트 하는 경험이라도 좀 있었으면 이럴때 도움이 좀 되었을텐데 말이다. 향수에 대해서는 내가 이야기 해준 몇가지 상식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선애였으니 더더욱 걱정이 되었다. "/음.... 뭐 부터 해야 하지?/" 선애 역시 대답하고 나오기는 했지만, 막막했던지 머쓱한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그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청소는 내가 알아서 하마. 너는 우선 장부나 살펴보고 향수도 다시 한번 살펴 봐라. 집에가서는... 혹시 향수에 대한 책 있으면 찾아서 읽는게 났겠다. 나도 향수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어서...] "/알게써.../"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선애는 가게 구석에 있던 의자에 앉아 장부를 펼쳐 보기 시작했다. 녀석이 그러는 동안 나는 아까 창고에서 봐뒀던 걸레와 대걸래, 그리고 비를 가지고 가게로 나왔다. 어차피 꼬맹이가 날 시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창고에 갔을때 미리 미리 바뒀던 것이다. 제법 깨끗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바닥을 쓸었다. 생각 같아서는 창문이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싶었지만, 아무도 없는데 저절로 열리는 창문이나 문을 혹시나 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건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무실에 있는 벨타이어가가 갑자기 나올까봐 사방 기척에 최대한 신경쓰고 있던 터였다. 다행이 전부터 계속 청소를 해왔는지 지저분하지 않아서 먼지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대충대충 바닥을 쓸고 진열대나 창틀을 닦으려고 걸레를 드는데 선애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언니, 언니, 일루 와봐./" [왜?] 선애는 날 부르는 것으로는 만족 못하겠는지 아예 자기가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진열대 위에 장부를 턱 하니 펼쳐 놨다. "/나원 참... 정말 기가막혀서... 이것 좀 봐봐. 뭐 이런데가 다 있지?/" [왜에?] 나는 선애의 말에 의아한 눈으로 녀석이 가리키는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헐...] 내 입에서 기가막히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자 선애가 기다렸다는 듯이 재잘댔다. "/언니도 기가 막히지? 그치? 아니, 어쩌면 이럴 수가 있지? 참내, 이러고서도 용케 지금까지 문 안 닫고 계속 유지해왔네.../" 그 장부에 기록된 걸 보자면, 이 가게가 문을 연지는 지금이 7개월째였다. 작년 가을에 문을 열은 셈이었는데 웃기게도 한 달 장부가 모두 한 장씩이었다. 그것도 한 장을 꽉 채운 건 거의 없고 대부분 반에서 간당간당 거렸다. 최소한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 다루던 장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 거기는 한달 장부가 한권이었다. - 한달 장부가 한장, 그것도 꽉 채운게 아닌 반정도에서 달랑달랑 거린다는 건 문제가 있어도 좀 심각하게 있는 거였다. 보통 작은 집안의 가계부도 아니고 한 가게의 입출금 장부라면 말이다. "/이걸 보면... 참내...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네. 이렇게 따지자면 저 큰 향수 한 통을 완전히 판 적이 거의 없다는 소리잖아?/" 나는 아르바이트만 한달 정도 한 것뿐이라 가게의 일은 잘 모른다. 그래 가게 문을 처음 열고는 홍보를 잘 하지 않는 이상은 가게가 좀 알려질때 까지는 적자를 각오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 기간이 보통 어느정도인지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6개월동안 적자라는 건... 좀 심한게 아닌가 싶었다. 이 곳이 한국의 IMF시대랑 비슷한 기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커다란 향수 한 통의 분량은 작은 향수 통 30개 정도의 분량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로 커다란 향수통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그 크기는 커~다란 맥주통 정도가 아니라 대략 농구공이나 혹은 축구공만했다. 그러니 그 작은 향수통 30개 정도의 분량이겠지. 만약 커다란 맥주통 정도의 크기였다면 100개 분량은 가뿐히 넘어갔을 거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도의 분량을 한달 동안 다 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있었다. [그럼 남는 건 어떻게 하지?] "/버리지 않을까? 아니면 제조하는데 돌려주거나... 그걸로 혹시 여러가지 시험을 해볼 수도 있잖아?/" [상한 향수로? 나원 참... 향수가 상한다는 이야기는 내 처음 들어본다. 그것도 한달 정도에 상하다니... 이거 혹시 냉장 보관 하면 보관 기간이 늘어나는 거 아냐?] 내 기가막히다는 말에 선애가 키득키득 웃었다. "/킥킥킥, 어쩌면 그럴지도. 냉장고를 구해야 하나?/" 하지만 한가지는 좋은 거 같았다. 벨타이거가 이 가게의 적자를 걱정하지 않는다면 선애가 크게 힘들 일이 없다는 것. 한달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느낀 건데, 역시 상업에서 가장 힘든 건 손님을 상대하는 거였다. 뭐, 내가 일했던 곳은 여성용 옷을 판매하는 곳인데다가 밤 9시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술취한 손님은 아예 없었고, 사나운 남자 손님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손님 대하는 거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험하고 사나운 손님은 없어도 까다로운 손님은 많았으니까 말이다. 그런 손님들에게 항상 친절한 미소를 띄우며 사근사근 대한다는 건 정말 인내심 시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손님이 많지 않으니... - 계산해보니 하루에 대여섯병 파는게 많이 판매하는 거였다. - 손님 상대할 일이 줄어든다는 건 어려움이 줄어든다는 것과 같았다. [어쨌든, 손님들이 적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많았으면 정말 큰일 아니냐. 생초짜인 네가 감당하기는 힘들어. 하기야, 만약 손님이 많았다면 저 녀석이 너에게 덥썩 이 일을 맡기지도 않았을테지만...] "/그건 그렇지? 나도 솔직히 조금 안심했어./" 하지만, 그건 절대로 다행한 일도 아니었고 안심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다행한 일도 아니었고 안심할 일도 아니었다. 선애가 가게 일을 시작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도 평소처럼 한가한 가게안을 지루하게 지키던 선애가 퇴근할 시간이 되자 -여기는 시간이 없었기에 대략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문을 닫는다. - 칼같이 일어나서 문 닫을 정리를 하고 있는데 평소 아침에만 잠깐 얼굴을 비추던 벨타이거가 왠일로 선애를 불렀다. "부탁할게 있는데." "예." "이것 좀 가지고 갈래?" 그가 내민건 A4보다 약간 커 보이는 종이봉투였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지고 가라는 건 뻔했다. 정보 길드에 넘겨달라는 것. 선애가 이 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길드에서 보낸 연락책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뭐, 선애야 집에 가서 휴에게 넘기면 되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지만. "알겠습니다." "잘 부탁해. 아, 가게일은 할만 해?" 지나가는 듯이 묻는 벨타이거의 질문에 선애의 눈초리가 저절로 위로 치켜 올라갔다. "할 만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요. 할 일이 거의 없으니..." 선애의 뼈가 있는 말에 그가 비죽이 웃었다. "뭐, 나쁘지는 않잖아?" 그리고는 쓰윽 하고 자기가 먼저 앞서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쳇..."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애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는 가게 문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선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벨타이거가 건네준 종이봉투를 챙겨들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길을 다니기 시작한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새 익숙해진 듯한 걸음걸이였다. "어? 누나~ 이제 돌아오는 거야?" 허름한 집들의 골목으로 들어서자 그 골목 주위를 뱅뱅 돌고 있던 카밀이 손을 번쩍 쳐들며 반갑게 아는체 해왔다. "그래." 카밀은 그때의 인연 덕분인지 그 길을 지나치다가 마주칠때면 반갑게 아는체를 해왔다. 아무래도 그날 꿀빵을 사준게 무지 좋았던 모양이다. 선애도 그 애를 향해 손을 들어주자 카밀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어째 기분이 안 좋아보이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 일은 없었고. 그냥 그저 그래." "흐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 내. 누나는 이래뵈도 나 카밀의 마음에 든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풀죽어 지낼리는 없어. 뭔 일인지 잘 해결될 거야." 작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하는 녀석을 보던 선애가 피식 웃었다. 선애는 좋게 말해도 절대로 괜찮은 성격이라고 할 수 없었기에 기분 안 좋을때 누가 말 걸면 무지 쌀쌀맞게 대했다. 하지만, 이 카밀이라는 애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하는 행동이 귀여워서 그런지 그 못된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호오... 애는 귀찮아 하는 녀석인데... 하긴, 저 카밀이라는 애가 영리하게 굴기는 하지.' "위로 고맙다. 나중에 꿀빵이라도 하나 사주마." "에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그럼 잘 가." "응." 크게 팔을 휘저어 인사를 해보인 카밀이 얼른 다른쪽으로 뛰어가자 선애도 다시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헤에, 저 애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네?] "/뭐, 그럴저럭.../" 카밀에게는 성실하게 대답해줘놓고서는 내 말에는 금방 쌀쌀한 어투로 대꾸한다. 이럴때 계속 말 걸면 짜증만 돌아온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만 투덜투덜 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쳇, 쳇. 내가 저 꼬맹이보다 못하다는 소리냐아?' 집에 돌아와서도 선애는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가게 일이 재미 없나? 하기야... 지루할 만 하겠지만...' 선애가 사흘간 가게를 지키는 동안 온 손님이라고 해봐야 열명이 되지도 않았다. 첫날에는 오후에 어떤 아가씨가 기웃기웃 하며 들어와 가게만 둘러보고 갔고, 둘째 날에는 그래도 어떤 아가씨 셋이 와서 향수 한 통을 사가기는 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 와서 한번 보고만 갈 뿐이었다. 그것도 들어와서 구경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모두들 바깥에서 한번씩 기웃 기웃 해보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으니 말이다. 하기야 나 같아도 거의 텅 빈 가게에는 들어가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계속 가라앉은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선애의 모습에 나는 가게 일은 포기하고 전에 말하던 그 수학자가 되려고 그러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밤 늦게 돌아오는 휴를 기다려 벨타이거가 가져다 주라고 하던 종이봉투를 넘겨줄때도 선애는 별 말 없었다. 단지 선애가 가게를 나가기 시작한지 처음 만나는 터라 휴가 말을 걸어왔다. "어이, 그래 가게 일은 익숙해졌어?" 그에 그렇지 않아도 가라앉아있던 선애의 얼굴이 팍 찡그려졌다. "가게 일에 익숙해진 게 아니라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데 익숙해 졌어요." 선애의 말에 휴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힐끔 떠 보였다. "호오, 이런... 선애의 가치를 못알아보나보지? 그래, 앞으로도 그러고 있을 생각이야?" "아니요. 자존심 상해서라도 절대로 이대로는 못 있을 것 같아요." 주먹 쥔 손을 바르르 떨어가며 곱씹듯 말하는 거 보니 아무래도 벨타이거 녀석에게 쌓인게 많았던 모양이다. "잘 해봐. 전에도 말했지만, 뭐든 건 네가 하기 나름이라고. 아, 혹시 뭔가 도움을 요청할 건 없고?" 휴의 말에 선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휴, 혹시 향수 가게나 화장품 가게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아니면, 잘 아는 사람을 알거나..." "헤에, 뭔가 본격적으로 할 생각인가 보지? 음, 나는 잘 모르겠고... 그런 건 자스민에게 조언을 구해봐. 아마 도움이 될 거야." "자스민이요?" 의외의 인물을 들었다는 듯 선애가 되물었지만, 선애의 이런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는 피곤한 얼굴로 하품을 한번 하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응. 잘 해봐. 어떻게 할 지 기대하고 있어. 그럼 잘 자." "예? 아, 예." 얼떨결에 휴의 밤 인사에 마주 인사를 해준 선애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자스민이 그런거 잘 안다구?/" 그래 나도 같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봐줬다. [그러게 말야.] 사실 자스민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평소 그녀의 행동이 집안 일에만 전념하는 주부같은 모습을 보여서 그런데에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평소 깨끗하고 깔끔한 차림을 하고는 있었지만, 악세사리를 한다던가 화장을 한다던가 멋들어진 옷을 입는다는 가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뭐, 색조 화장을 안 할 뿐 기본 화장품은 하겠지만서도... 하여간, 그리하여 후각이 마비된 나도 그녀가 향수를 뿌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에... 나 자스민이 향수 뿌리는 거 한번도 못 봤는데.../" 그랬기에 그 동안 선애가 가게를 다니면서도 자스민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다. 그냥 다니기 괜찮다, 힘들지 않다 정도만? 그러고보니 향수 가게를 다닌다고 말하지도 않았었는데... "/흠... 어쨌든 내일 자스민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아니, 그 자스민에게 물어보는 건 둘째치고... 뭘 생각하는 거야?] 방으로 향하는 선애의 뒤를 쫓아가며 묻자, 선애는 오후의 그 가라앉았던 기분이 그나마 좀 풀어졌는지 순순히 대답해줬다. "/아니, 그 동안 좀 생각을 해봤는데... 내가 다니는 향수 가게는 왠지 눈속임 용으로 세워진 거 같아. 아니면 심심해서 한번 세워봤거나... 거기다, 그렇다고 해도 적자라는 것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거 보면... 재미 없거나 필요가 없어지면 그냥 문 닫을 거 같아. 아마... 그때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올 거 같아./" [으음, 일리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그 벨타이거인지 벨표범인지 하는 자식이 날 그런데다 박아 넣은 거 보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잖아?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엘리엇 놈도 그렇고 벨표범인지 벨타이거인자 하는 놈도 그렇고... 아아, 내가 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된 거야?/" 투덜투덜 길게 푸념을 늘어놓던 선애가 갑자기 고개를 빳빳하게 들더니 두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래서 도저히 이대로 가만 있을 수가 없겠어. 되든 안 되든 놈들이 원하는 대로 휘둘리지 않을 거야. 뭐, 나보고 가게를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 [제대로 한번 해보게?] "/응. 이대로 있다가는 나 또한 시간만 낭비할 뿐이잖아.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게 났지, 이렇게 어영부영 보내고 싶지 않아. 뭔가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어./" 선애의 다부진 표정과 말에 나는 박수를 쳤다. [오오, 멋진 생각이다. 그래, 잘 생각했어.] 기실, 나 또한 힘들지는 않다고 해도 선애가 지루하게 손님도 없는 가게에 앉아 있는게 좋아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힘들더라도 손님이 많은 곳으로 가는게 났지 않겠나... 싶은 생각도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이제 생각난 건데 말이지... 나 그 벨타이거인지 벨표범인지 하는 놈한테 월급 이야기는 하나도 못 들었어. 혹시... 그 놈 나에게 월급 줄 생각도 없었던 거 아냐? 내일 가가지고 그 사람이랑 할 이야기가 많겠어. 단판을 지어 놔야지./"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선애는 아침 준비 하느라 한창 바쁜 자스민을 붙들고 입을 열었다. "자스민, 의논할 게 있는데요." "응? 나에게?" 평소 자스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던 선애였기에 좀 의외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선애나 나나 평소 자스민을 뭔가를 상담할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기는 했었다. 편견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음음, 반성해야지.' 선애 또한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제가 다니는 가게가 향수 가게라는 거 말씀 드렸던가요?" "어머나, 너 향수 가게에 나가는 거였니? 음... 그런데 별로 그런 거 같지 않은데...." 선애의 모습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 하는 자스민의 태도에 선애가 의아하게 물었다. "에?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 향수를 파는 가게에서 일하는 걸로는 안 보여저서... 우선... 너에게서는 향수 냄새가 안 나니까. 향수 가게에서 일하면 그 냄새가 배는게 당연한 거 아니니? 하지만... 단 며칠이었지만 향수 냄새가 나는 걸 맡아본 적이 없는걸. 게다가 옷도..." 그거야 당연했다. 손님이 별로 없었으니 선애가 하루종일 향수 냄새를 맡으려고 하지 않는 이상은 향수통 뚜껑을 열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뭐, 나야 냄새를 못 맡기 때문에 그 가게에서 향수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 선애에게 향수 냄새가 배어 있는지 아닌지도 몰랐지만... 자스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애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자스민이 말을 흐리자 얼른 재촉했다. "제 옷이 왜요?" "아니... 향수 가게 점원이 입을 옷은 아닌거 같아서... 음... 제복이 따로 있나보지?" 선애 옷은... 이 곳에 와서 자스민이 준 옷이었다. 옷의 아름다움보다는 단정하고 실용적인데만 신경을 쓴... 그래서 옷감도 광택이 흐르고 하늘하늘 한 것이 아니라 튼튼하고 질긴 것이었다. 이 곳에 와서 쇼핑같은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에 옷을 따로 구입할 틈도 여건도 없었다. 자스민의 이야기를 듣던 선애가 별안간 자스민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자스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엥?" 갑작스러운 선애의 행동에 자스민이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러든 말든 선애의 입에서는 현 타이거 향수 가게에 대한 상황이 봇물 쏟아지듯 쏟아졌다. 누가보면 그 가게에 한이라도 맺힌 줄 알 것 같았다. '하긴... 한이 맺힌 건 맺힌 거지. 그 동안 계속 쓸모없는 존재 취급을 받았으니..' 가끔 고개를 끄덕여가며 선애의 설명을 듣고 있던 자스민의 얼굴이 점차 굳어져 갔다. 그래도 선애를 마치 친동생처럼 아껴주던 자스민이었으니 거의 형식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게에 선애를 냅둔 것이 거슬리는 건 당연했다. "좀... 문제가 많네." 선애의 설명을 듣고 난 자스민이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선애가 말을 받았다. "좀이 아니죠, 좀이. 이건 완전 문제 덩어리예요. 휴한테 작은 곳이라는 이야기는 듣고 각오는 했지만, 이건 작은게 아니라 완전히 말뿐인 가게라니까요." 선애가 흥분하며 말하자 자스민이 진정시키려는 듯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주먹 쥔 선애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 그런 것 같네. 그래서, 선애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 가게 운영을 아예 저에게 맡긴다고 했으니 멋드러진 가게로 탈바꿈 시키려고요. 그래서 그 벨타이거인지 뭔지하는 남자가 놀라서 입이 떠억 벌어지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쉬운 일은 아닐텐데... 그냥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어때? 선애가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휴에게 말해줄께." 자스민의 말에 선애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벌서 그에 대한 생각도 해본 모양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내가 이런 취급 당하면서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건 아예 기회를 줄 생각도 안 하고 처음부터 나를 필요없는 존재 취급하였으니까요. 당장 이런데 때려치고 날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화가 좀 가라앉으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이대로 내가 다른데 가버린다고 해도 그놈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잖아요. 그 생각이 떠오르니까 내가 지는 거 같더라고요. 그 녀석에게는 절대로 얌전하게 등 돌리고 물러나고 싶지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선애의 눈초리는 사나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벨타이거 녀석이 때를 잘못 탔다고나 해야 할까?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서 엘리엇 놈에게 당한게 쌓여 있는데다가 벨타이거 녀석이 부채질을 한 꼴이었으니, 그 모든 화가 벨타이거에게 몰린 모양이었다. 엘리엇 녀석에게는 그 놈 사무실을 불질러준 걸로 화풀이를 끝내야 했으니 말이다. 자기가 직접 한게 아닌데다가 그 뒤의 얼이 빠진 엘리엇 녀석의 모습을 보지도 못했으니 놈에게 받은 울분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했나보다. 선애의 말에 꼬맹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스민이 다시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가게를 꾸려 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도 할 거야?" "해볼래요. 젊다는게 뭐예요?" "한번 해보겠다는 각오로는 안돼. 오기만으로는 힘들걸?" "꼭 할래요. 그래서 자스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잖아요. 도와줄 수 있죠, 자스민?" "나중에 힘들다고 울면 안돼?" 자스민의 말에 선애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잠시 후 아침을 챙겨먹은 선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일터로 향했다. 이미 자스민으로부터 여러가지 조언을 들은 선애는 아마 머리 속으로 자스민의 말을 정리하고 있을 터였다. 한참 뒤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본 나는 대충 뭔가 정리가 되었음을 눈치 채고 말을 걸었다. [뭐부터 하게?] "/우선은... 벨타이거 녀석하고 월급 이야기를 단판 지어야지. 그 다음 휴가를 달라고 할 거야./" [월급은 몰라도 가게 나온지 사흘만에 휴가를 달라고 하면 주겠냐?] "/그럼 며칠 가게 문을 닫겠다고 하던지, 아니면 점심 시간을 좀 늘려야지. 점심 시간은 내 맘대로 하랬으니 자기가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지. 그 동안 다른 가게들을 둘러볼 거야./" 자스민이 제일 먼저 한 조언이 그거였다. 경쟁 상점의 모습을 알아둘 것. 이것이 바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다.'란 항목과 따악 맞는 조언이 아니겠는가? [저기... 가게에 있는 향수 자스민에게 선물해주는게 어때? 여러가지 조언을 해줘서 고맙다는 뜻도 있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뜻도 있고, 게다가 그 향수가 어떤지 알아보는 차원에서...] "/맞아, 좋은 생각이네. 에, 그리고 또.../"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을 하나 하나 정리해가면서 발걸음을 한 탓인지 어째 평소보다 빨리 가게에 도착한 것 같았다. 라이벌 가게들을 둘러보는 건 내일부터 할 생각이었다. 자스민이 쇼핑을 안 나간지 좀 오래 되어서 요 근래 유명한 화장품 가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알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는 이유였다. 오늘 저녁에 돌아가면 가르쳐 준다고 했으니, 오늘 할 일은 벨타이거와 단판을 내는 일 뿐이었다. 선애가 출근을 시작한 후부터는 벨타이거는 마음 놓고 늦게 왔기 때문에, 그날도 벨타이거는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가게에 들어왔다. "여~, 어제 부탁한 일은 잘 했겠지?" "예. 아, 그리고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요." "응? 뭔데?" "제 월급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셨던거 같은데, 월급은 어떻게 되나요?" 선애가 당당하게 묻는 폼을 껌뻑껌뻑 거리며 바라보던 벨타이거가 피식 웃었다. "아아... 월급?" "예, 월급이요. 아, 여긴 주급으로 주실 건가요?" "그렇군. 내가 깜빡 이야기를 안 했나보군. 월급은 내가 안 주는데?"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하는 말에 선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예?" "진작 말 안해서 미안한데, 내가 이 가게 운영을 모두 선애에게 맡겼잖아. 그러니 월급도 선애가 알아서 해야지. 나는 총 수입에서 향수 원 제조비만 받을테니까, 나머지 수익은 모두 선애 가지도록 해. 그게 선애 월급이야." "예에에?" '가게 수익을 가지라고?' 말은 좋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좋은게 아니었다. 향수 원 제조비는 커다란 통 하나당 은화 2개. 커다란 통 하나당 작은 통 30개가 나오는데다가 자그마한 통 하나당 가격이 향수마다 틀리긴 해도 20실링에서 30실링 사이다. 그러니 제일 가격이 싼 향수만 해도 다 팔면 은화 6개니까 원제조비를 지불한다고 해도 은화 4개의 수익이 남는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한달 안에 향수를 다 팔았을때의 이야기다. 장부상에 의하면 워낙 향수가 안 팔렸기 때문에 원제조비를 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향수가 5개니까 총 향수 원 제조비는 은화 10개인데 지난달과 지지난달 판매량은 각각 15개와 17개. 그것도 많은 거다. 맨 처음 가게를 열었을때 두달 동안은 하나도 못 팔았고, 세달째에 겨우 5개 팔았으니 말이다. 이번달에 제일 가격이 싼 걸로 20통을 판다고 설정을 해보면, 총 수익은 겨우 은화 4개. 원제조비를 건네주면 은화 두개가 적자가 난다. 이건, 다른 건 다 제외하고 단순하게 향수 제조비만 가지고 따진 거였다. 이런 상황에 향수 원 제조비만 자기에게 넘기고 나머지는 월급으로 하라고 하는 건, 오히려 선애에게서 돈을 뜯어내겠다는 소리와 다름 없었다. '세상에... 이 놈은 엘리엇 놈보다 더한 놈이잖아?' 기가막힌 선애의 입이 떠억 벌어졌지만, 그 얄미운 벨타이거 놈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그럼 됐지?'하고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한다. [야, 정신 차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잖아?] "아하하하하~~~" "자스민, 그게 그렇게 웃을 일만은 아니라고요. 이게 말이 되요?" 선애가 식식대면서 말을 하다 목이 타는지 자신 앞에 놓인 물잔을 거칠게 들어 꼴깍꼴깍 마셔댔다. 그런 선애를 보며 자스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겨우 추스르며 너무 웃어 새어나온 눈물을 닦았다. "아...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몰랐다면 처음에 돈 뜯길때 엄청 당혹스러워 했겠다." "지금도 당혹스러워요. 말을 들었을때 너무 기가막혀가지고 아무 생각도 안 날 정도였다니까요." 다시금 낮의 일이 생각 났는지 선애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정~ 말 마음에 안드는 놈이에요. 후작가의 저택에 있던 놈보다 몇십배는 더욱 더 마음에 안 들어요. 아주 아작 아작 씹어먹고 으드득 갈아먹고 싶을 지경이에요." "이런, 이런. 선애에게 너무 미움을 샀네. 그래, 이제 어쩔거야? 가게를 키우기는 커녕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해도 돈이 많이 들텐데, 말을 들어보니 그 사장이라는 사람에게는 돈을 한 푼도 지원받을 수 없겠는걸?" 기실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벨타이거를 붙잡고 가게를 좀 더 꾸며도 되냐구 물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단지,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말이다. 가게 문을 닫는 것도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며칠 안 나올건지만 통보해 달라고, 그 날은 자신이 대신 문을 열겠다고 하는 걸 듣고 선애가 얼마나 기가막혀 했는지... "저에게 돈이 좀 있는데... 그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안되면... 돈을 좀 빌리던지 할래요. 그 소리까지 들었는데 절대로 물러날 수 없죠. 크게 이익을 남겨서 그 놈 콧대를 꽉 눌러주고 말겠어요." [흠... 다시한번 미란다 녀석 방을 털 수도 있으니까 너무 염려 마.] 내 말에 선애가 약간 고개를 끄덕이며 자스민을 바라보았다. 자스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선애가 가져다 준 다섯개 향수의 향기를 다시한번 맡았다. "내가 맡기에도... 이 향수들은 상당히 괜찮은 거야. 조건만 제대로 갖춘다면... 나쁘지 않겠어. 가격도 괜찮은 편이고."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긋 웃으며 선애를 바라봤다. "좋아. 돈은... 정확하게 얼마가 들지 모르니 그건 일단 나중으로 미뤄두지. 하지만, 빌릴 수는 있을 거야. 어쨌든, 일은 제대로 시작해볼까? 가게는 며칠동안 안 나가기로 했지?" "우선 5일 정도요. 만약 더 빠지게 된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하기로 했어요." "음... 5일 정도면 충분할 거야. 이건... 대략 알아본 요즘 잘 나가는 향수 가게야. 혼자 다니기 어려울테니까... 내일 도와줄 사람을 불러줄께, 같이 돌아다니도록 해. 아마 선애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자스민이 건네준, 내 손바닥보다 약간 큰 메모지 안에는 10개 정도의 가게 이름과 그 위치가 적혀 있었다. "예." "잘 해봐. 나도 열심히 응원해줄테니까 원하는 대로 그 벨타이거라는 남자의 콧대를 꽈악 눌러주라고." 살짝 주먹을 쥐어보이며 생긋 웃는 자스민에게 선애도 마주 웃어줬다. "물론이죠. 꼬옥 콧대를 눌러주고야 말겠어요." 다음 날이 되자 자스민은 선애의 도움을 받아 대충 그날 할 일을 끝내놓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처음에는 그냥 선애에게 도움을 줄 사람만 소개시켜주고 자신은 빠지려고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처음 만나는 두 사람만 붙여놓는 것도 너무나 어색할 것 같고, 자신도 꽤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나들이도 해보고 싶어 이 기회에 같이 다니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휴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던 것 같았다. 전에도 말한 것 같았지만, 휴는 자신의 부인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 기회에 바람이라도 쐬라고 하면서 용돈도 넉넉하게 쥐어줬을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평소에 입고 다니는, 편한 옷이 아닌, 오랜만에 레이스가 달린 예쁜 나들이 옷을 입은 자스민이 자신의 옷차람이 어색한 듯 미소를 지었다. 옷차림에 맞게 얼굴에도 가볍게 화장을 했고, 손에도 옷 색과 같은 연두색의 양산을 들었다. "와, 예쁘네요." "어색하지는 않구? 이게 좀 오래된 옷이라..." "설마요. 너무 잘 어울려요." 선애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어보인 그녀는 선애의 옷차림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무래도 넌 옷부터 사야할 것 같다. 아마 그 애도 널 옷부터 바꿔 입히려고 할 거야." 자스민의 말은 적중했다. 자스민의 소개로 만난 캐더린이라는, 자스민과 비슷한 나이또래의 캐더린이란 여성은 선애를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옷부터 사야겠군." "하하하... 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캐더린이란 여성은 자스민과는 전혀 반대의 타입이었다. 화려하게 생긴 외모에 걸맞게 잘 손질된 금발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려 망사가 달린 자그맣지만,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모자를 씌워놓은 그녀는 화장도 참 화려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짙은 화장은 아닌, 세련되었다라고 할 수 있었다. 옷차림또한 하늘하늘 거리는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선애를 보자마자 마치 감정을 매기는 듯한 차가운 눈동자로 훑어보더니 옷 이야기부터 했던 것이다. 그에 자스민은 웃었고 말이다. "오랜만이지? 언니는 정말 여전하네." "너야말로 하나도 안 변했다. 그래, 네 남편은 여전히 잘 해주고?" "후후후, 그렇지 뭐." 잘 아는 사이인 듯 - 캐더린이 언니인 모양. -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한 선애는 한쪽에 얌전히 서 있었다. 캐더린이라는 여성은 말하는 폼이나 행동이 자신감에 차 당당한 걸 보니 아무래도 케리어우먼 같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능력을 인정받아 지위가 좀 높은 자리에 있는 듯 싶었다. "뭐, 그건 그렇고... 이 애가 향수 가게를 하고 싶어한다고?" 다시 한번 선애를 훑어보는 캐더린의 말에 자스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아직 아는게 별로 없어서 언니의 도움이 좀 많이 필요해." "흠... 네가 도와달라고 하는 거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가씨는 아니겠고... 눈빛을 보니 꽤나 당찬 녀석 같은데? 어디, 너 돈은 얼마나 있니? 얼마나 크게 가게를 내려고 하지? 향수 제조업자하고 길은 뚫어놨고?" "가게는 지금 있습니다. 단지 아직 꾸미고 있는게 전혀 없어서요. 향수는 5가지를 가지고 있고요." "5개? 달랑 고거? 너무 적은 거 같은데... 대표로 내세울게 5가지면 몰라도..." 선애의 대답에 캐더린이 인상을 찡그리자 자스민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 향수들이 대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괜찮은 것 같더라. 언니도 보면 괜찮다고 할 걸?" "그으래? 그럼 우선 네 가게라는 곳과 향수좀 구경이나 할까?" 그렇게 해서 시작된 행보는... 한 마디로 거침없는 광풍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선애가 안내를 해야 하는데 위치만 대충 들은 캐더린이 앞장서서 마치 질풍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둘을 이끌고 타이거 가게로 쳐들어가다시피 들어서서는, 선애가 휴가를 가지겠다고 해서 홀로 가게를 지키고 있던 벨타이거 녀석이 당혹스러워하건 말건 가게 안을 샅샅이 뒤집어 보고 향수들도 일일이 향을 맡고 색을 보고 농도를 확인하더니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 가게를 나왔다. 아마 뒤에 남은 벨타이거 녀석은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치고 나간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을 이끌고 캐더린이 간 곳은 척 보기에도 꽤나 잘 나가는 것 같은 옷가게였다. 무려 2층짜리의 가게로 우아한 디자인으로 꾸며진 가게는 일명 '유명 메이커 가게' 였던 것이다. 캐더린이 들어서자 곧바로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두명의 여성 직원이 달려와 맞이하는 게 교육이 잘 되어있다는 걸 느끼게 했다. 그 두 직원은 한국의 유명 백화점 직원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짐이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 곳을 시작으로 케더린은 둘을 이끌고 대여섯곳이나 되는 커다란 옷가게들은 모조리 휘젖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가게를 나와 다음 가게를 이동하는 사이 사이 선애에게는 여러가지 어드바이스가 쏟아져 나왔다. "네 생각에는 전전 가게와 전 가게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해?" "그, 글쎄요... 전전 가게는 직원들이 격식이 있고, 전 가게는 좀 아부가 강하달까? 너무 달라붙어서 떠들어대는 것 같았어요." "맞았다. 가게를 하려면 이걸 잘 기억해 둬. 가게에 이미지는 그 가게 직원들이 만들어내는 거야. 어떤 손님들이 모여들게 하느냐는 그 직원들 손에 달려 있지. 옆에 달라붙어 수다 떠는 걸 싫어하는 손님들은 첫 가게를 즐겨 찾겠고, 아부를 좋아하는 손님들은 두번째 가게를 찾겠지. 어떤 손님들을 끌어들이냐는 네 행동에 달려 있어. 뭐, 상품이 이 도시 전체를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면 두 종류 손님이 다 찾아 오겠지만... 네 가게에 있는 향수는 상급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최상급은 아니거든." "예." "어떻게 행동할지는 미리미리 결정해 둬." "예." "인테리어도 잘 봐둬. 비록 종류는 틀리지만, 비슷한 손님들이 찾는 곳이야." "옙." "좋아, 그럼 내일은 네 라이벌들을 살펴보러 가자. 너, 내일은 오늘 내가 사준 옷들을 입고 오도록 해, 알았지? 안 그러면 안데리고 다닐 거다." "예." "사람이란 첫인상이 무지 중요하다는 거 알지? 거기에 향수 가게를 꾸려 나가려면 손님 맞을때의 옷차림은 센스 있어 보여야 해. 그럼 손님이 '아, 이 사람 센스는 괜찮구나.' 라고 느끼고 향수 또한 센스 있을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넵." "라이벌 가게에 가면 진열 상태도 잘 봐둬. 가게에서 상품 진열도 무척 중요하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이벌 가게의 상품 체크도 잊지 말고." 너무나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서 그것들을 모두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루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줄 알았으면 메모지라도 가지고 올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뭐, 나는 못 쓸테지만 선애는 쓸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들이 너무 봇물 쏟아지듯 쏟아져서 그걸 다 받아 적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다음 날, 자스민의 도움으로 그래도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나가자 캐더린은 냉정하게 '봐줄 만 하군.' 이라고 말한 뒤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끌고 다닌 곳은, 앞으로 선애의 라이벌이 될 향수 가게들. 향수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도 있고, 화장품들과 같이 판매하는 곳들도 있었다. 그날은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곳들로만 골라다녔는데, 인테리어라든지 진열된 향수들은 한국에 있는 큰 매장 못지 않았다. 게다가, 그 곳에 있는 향수병들은 모두 유리병 아니면 크리스탈 병들이었다. [역시... 향수병은 유리병으로 해야 해.] 어떤 곳에서는 타이거 상회에서 사용하는 나무 향수통을 취급하기도 했지만, 어떤 곳은 그런건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런 곳에서 모든 향수들을 일일이 향을 맡아보고 살펴보는 선애는 나중에는 질린 표정이었다. "아우... 향들을 너무 맡아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에요." "그래도 맡아야지. 지금까지 맡아보니까 어때?" "음... 제가 취급할 향수는 역시 화학 물품이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거요. 케더린의 말대로 고급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던데요." "맞아. 볼 거 없는 가게에서 그나마 봐줄만한게 향수였어. 만약 그 향수들이 변변치 않았다면 난 아마도 가게 때려치라고 했을 거다." "그리고... 향수통은... 역시 유리병으로 해야겠어요. 비싸더라도 말이죠. 향수가 고급인데 향수통도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해야 할 거 같아요. 안 그러면 오히려 향수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마저도 깎일 거 같아요." 선애의 말에 캐더린이 선애를 만난 뒤 처음으로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머리가 좀 돌아가는데? 맞아. 제법 괜찮은 향수에 일반 나무통을 쓴다면 오히려 향수의 이미지마저도 깎일 거다. 좋아, 그렇게 머리를 굴리면서 다음 가게로 향하자고." 아름다움만 강조하여 전혀 편해보이지도 않는 구두를 신었는데도 캐더린은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에 비해 편한 신을 신고 있는 자스민이나 선애가 그녀의 말을 듣고 헬쓱해지는 것이었다. "어허, 그 표정들은 뭐야? 이런 일에 종사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너, 잘 기억해 둬. 이렇게 라이벌 가게들을 살펴보는 걸 이번으로 끝내서는 절대로 안돼. 최소한 두달에 한번은 이렇게 순례를 해야 한다고, 알간?" "네." "그리고, 너도 그 향수들이 제법 고급이라고 해서 그걸로 만족해서는 안돼. 계속해서 신상품이 나오지 않는 가게는 서서히 잊혀질 뿐이라고. 그 향수 제조사를 닥달해서라도 신상품을 개발하라고 해야해." "넵." 향수 가게들은 라이벌이라서 그런지 꽤 잘 나가는 곳 말고도 좀 적은 곳이나 알려지지 않은 곳까지 모조리 찾아다녔다. 그러느라고 향수 가게를 둘러보는 건 무려 사흘이나 걸렸다. 캐더린의 도움은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유리 공예소에도 선애를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유리 공예소는 시내 중심가에 있지 않았다. 일명 수공예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곳은 도시 변두리쪽에 있었기에 아마 선애 혼자서는 올 수 없었을 것 같았다. 유리 공예품을 파는 곳은 시내에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작은 유리병을 따로 주문하려고 하는데다가 앞으로 거래량이 커질지도 모르니 직접 이런 곳과 거래를 트는 것이 좋다고 캐더린이 충고해주며 직접 끌고 왔던 것이다. 그렇게 캐더린이 자신있게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 또한 이곳과 직접적으로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쪽과 거래를 하고 있지만... 내 생각에 너는 작은 물품을 취급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 뭐, 어디와 거래를 틀지 결정하는 건 바로 너겠지만 말이야." 그 곳은 유리 공예소만 다섯개가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유리 공예소만 있는 건 아니었고, 대장간과 다른 공예소들도 같이 있는, 공예소 거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다보니 아무래도 거친 남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나중에 온다고 해도 절대 선애 혼자서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캐더린은 달랑 선애와 자스민 둘만 이끌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그 곳에 있는 다섯개의 유리 공예소를 모두 둘러보았다. 그 곳들은 캐더린이나 선애처럼 직접 거래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공예품들을 진열해 놓은 곳이 있었다. 그 것들을 보고 거래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유리 공예품의 크기와 디자인들이 천차 만별이듯이 가격도 천차 만별이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은화에서 놀았다. 제일 비싸봐야 금화 1개나 2개 정도? 솔직히 내 생각으로는 유리 공예품 가격이 금화까지 올라가는 건 너무 비싼 거 아닌가 싶었지만, 여기는 유리 공예품이 고급 장식품에 속한다니까 그럴지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했다. 사실 예전에 TV에서 본 유리 수공예품은 몇천만원씩 했었으니 말이다.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든데다 공예품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몇천만원이라는 이야기에 입이 떠억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여기도 그런 것이 있었다. 맨 마지막 공예소인, 캐더린과 거래를 하고 있는 공예소의 전시실로 들어갔는데 떡하니 가운데에, 그것도 유리관에 정중하게 놓여진 공예품 밑에 쓰여 있는 가격이 무려... "백금화 100개?" 은화도 아니고 금화도 아니고 이 세계의 화페중 가장 상위를 차지하는 백금화가 한 두개도 아니고 무려 백개였다. 가격에 너무 놀라 떡 벌어진 입은 그래도 그 공예품을 바라보고는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너무 비쌌다. 그 공예품은 무척 컸다. 대략 1m 정도... 유리 공예품치고 이만한 크기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크기로 우아한 백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고개는 살짝 숙였으면서 날개는 약간 펼친... 너무나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만들어 져서 손을 가져다 대면 당장이라도 푸드득 날아올라 갈 것만 같았다. 너무나 세밀하고 커다란 유리 공예품이라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비싼 가격이 조금은 납득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대단... 하군요. 이거 전에 왔을때는 없었는데... 여기 수장께서 만드신 건가요?" 캐더린이 우리를 맞이한 직공사에게 묻자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하...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그거 드워프제 작품이에요. 수장께서 자극을 받고 싶으시다며 큰 돈을 들여서 사놓은 거지요. 그걸 사신 후부터는 정말 미친듯이 공예에 몰두하시더라고요. 정말... 멋지죠? 저는 이거 보니까 일할 맛이 싹~ 가시데요." '드워프? 다른 곳 공예소를 말하는 건가?' 한참동안이나 그 작품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사람들은 나중에야 겨우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다른 공예품들도 둘러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너무 대단한 걸 봐서 다른 것들은 눈에 별로 차지 않았다. 그 것들도 처음 봤으면 멋지다고 생각했을텐데 말이다. 캐더린은 여기까지 온 거 자신의 볼 일도 볼 셈이었는지 진열된 물품들을 다 구경한 후 그 곳에서 새로 물품들을 구하려고 했다. 그래 직공과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진열품들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는 선애에게 자스민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어때, 뭔가 계획이 잡혀가고 있니?" "예. 대충은요." "사실... 캐더린도 무척 바쁜 사람이거든. 아마 앞으로 계속 보기는 힘들테니까 있을때 배워둘 건 다 배워두도록 해." "예. 그런데... 가게를 좀 꾸미고 싶은데 그것도 캐더린에게 부탁할 수 있을까요?" "부탁해봐. 자기가 직접 도와주지는 못해도 잘 아는 사람은 소개시켜 줄 수 있을 걸? 캐더린이 발이 넓거든." "헤에...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러엄. 저래뵈도 이 도시에서 알아주는 커다란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걸." '크, 클럽... 그럼 클럽 사장님이였단 말이야?' 선애의 눈이 놀라움을 커졌지만, 곧 녀석은 납득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화려한 차림새에 당당한 그녀의 행동거지를 볼때 딱 어울리는 위치이기는 했다. '그런데 자스민은 도대체 그런 사람이랑 어떻게 알고 지내는 걸까나? 휴의 부인이기 때문일까?' 그렇게 선애와 자스민이 속삭이는 동안 거래를 끝마쳤는지 캐더린이 그녀 특유의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 내 일은 끝났으니까 구경 다 했으면 나가자." 그렇게 둘을 이끌고 밖으로 나간 캐더린이 다짜고짜 선애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어때, 뭔가 계획이 세워졌냐?" "예, 덕분에요." "잘 해봐라. 이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어드바이스를 해줬는데 못하고 망해버리면 내가 직접 쫓아가서 네 목을 잡고 달달달 흔들어주고 말테다." 그녀의 험악한 선언에 선애가 풋 웃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봤다. "예. 기필코 성공하겠습니다." 그렇게 선언하는 선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언제 이 녀석이 이만큼 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직 어린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그 어린티를 거의 다 벗어버리고 있었다. 하기야, 이 녀석 이 세계의 나이로 올해 20살이었다. 한국 나이로는 21살.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있었으면 대학을 다니면서 성년식을 맞이할 때였다. '다 컸네...' 제 12화 그 다음날부터 가게는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선애가 없더라도 가게는 꼬옥 열려고 하는 벨타이거 녀석은 공사하는 걸 무지 못마땅해 했지만, 자신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었던지 아무 말도 못하고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인테리어와 공사는 캐더린이 소개해준 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이 세계에서도 건축 말고도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가게는 아예 1층짜리 독채였기때문에 전체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뜯어 고치기로 했다. 그리고 가게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선애도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향수를 담을 자그마한 유리병들을 구했다. 벨타이거가 진열해놓은 밋밋한 것 보다는 훨씬 예쁜 걸로 구했다. 그리고 커다란 유리병도 구했다. 아무래도 나무통에 담긴 건 별로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대신한 커다란 유리병, 그리고 팔 자그마한 여러가지 유리병들은 공사가 끝나는 날에 맞춰 유리 공예사에서 배달해주기로 했다. 그 곳에서는 유리 공예를 만들어놓고 있다가 손님이 오면 파는게 아니라, 진열된 것들을 보고 주문을 하면 그제서야 주문 갯수에 맞춰서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라 주문한 물품이 다 만들어지면 배달까지 같이 겸하고 있었다. 대신, 한번에 일정량 이상의 물품을 주문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향수에 대해 공부하는 틈틈이 아직 돌아보지 못했던 향수 가게들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캐더린은 유리 공예사에 데리고 가준 다음 날부터는 만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커다란 클럽 사장이니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울수는 없을터였다. 그 동안 선애를 데리고 다녀준 것만 해도 선애에게는 커다란 호의를 베푼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대신 자스민이 계속 옆에 붙어 있어줬다. 유리 공예사나 향수 가게를 돌아다닐때도 같이 가준 것도 그녀였고, 인테리어를 맡은 중년 여성이 - 이 곳에서는 따로 인테리어가 있는 건 아니고 집안을 꾸미는 벽지나 커텐, 장식물들을 파는 상인들이 그런 일을 같이 하고 있었다. - 어떤 디자인으로 할지 의논하러 왔을때도 같이 봐준 것이 그녀였다. 비록 그녀가 직장 여성은 아니었으나, 직장 여성 못지 않게 일이 많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굉장히 미안해서 될 수 있는 한 그녀 몰래 몰래 그녀 일을 해주고는 했다. "아무래도... 가게에서 파는 향수 이름을 바꿔야겠어요." 어느 날 저녁, 자스민의 일을 돕고 있던 선애가 뜬금없이 말을 꺼내자 자스민이 무지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사실 타이거 1호, 타이거 2호라고 붙인 건 좀 너무했어." "개인적으로는 가게 이름도 바꾸고 싶어요. 그런데... 가게가 제 것이 아니라서..."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대부분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면서?" "예, 나중에 만나면 말은 해야죠. 가게 간판을 아직 새기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가게가 어떤 모양이 될 줄 몰라서 아직 그건 안 했거든요. 나중에 완성된 모양을 보고 거기에 어울리는 걸로 고르려고..." "그런데 왜 하필 향수가게 이름이 타이거라니?" "자기 이름을 따서 붙인거래요. 이름이 벨타이거잖아요." "향수가게 이름으로는 너무 안 어울린다." "동감이에요." 그러나 벨타이거 녀석은 가게 이름좀 바꾸자는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동안 가게를 뜯어 고치는 것도 인상만 찌푸렸을 뿐 뭐라고 하지도 않아서 이번에도 그럭저럭 받아지려니... 생각 했는데, 의외의 반응에 선애나 나나 무척이나 당혹 스러웠다. "왜 그렇게 반대하는데요?" "처음부터 이 가게 이름은 타이거 가게였어. 그러니 다른 걸로 할 생각은 하지마." 평소 가게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어 보여서, 아니 사실 뭔가에 집착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쿨~ 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꼭 타이거 이름을 붙여야 해요? 향수 가게 이름으로는 너무 안 어울린다구요." "그래도 안돼. 싫다면 차라리 가게 업종을 바꾸던가..." 강력하게 그 이름을 고수하는 그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처음에 휴가 벨타이거를 소개하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애야, 그때 휴가 말하기를 이거 상단이라고 하지 않았었냐? 그럼 타이거라는 건 상단 이름이잖아?] 내 말에 뭔 이야기를 하고 싶냐는 듯한 선애의 눈초리가 날아들었다. [아니, 내 생각인데 저 녀석은 타이거 이름을 고수하고 싶어하고, 그건 향수가게 이름에 안 어울리니까 차라리 타이거 상회 소속 무슨무슨 향수 가게라고 이름을 붙이는 건 어떠냐고.] 내 말에 선애는 눈을 반짝이더니 벨타이거를 돌아봤다.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선애가 말을 걸자 벨타이가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가게 이름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가득 들어있었지만, 선애는 그런 그에게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벨타이거씨가 '상단'을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럼 이 가게도 그 상단에 소속된 가게라는 거 맞죠? 타이거는 상단 이름이고요. 그러니가 타이거 상단 소속이라고 간판에 확실하게 넣으면 되잖아요." 녀석의 말에 벨타이거의 눈에 감탄했다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선애는 벨타이거에게 단호하게 못박았다. "그 정도면 괜찮죠? 저도 절대로 향수 가게 이름이 타이거인거 못 봐준다고요." 선애의 말에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벨타이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도 그쯤에서 양보하도록 하지." "이야기가 통해서 잘됐군요. 아, 그리고 궁금한게 있는데..." "뭐지?" "상단이라면 다른 상업도 한다는 건데, 다른 건 뭐 해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는 건데 벨타이거녀석이 띠겁게 받아쳤다. "내가 알려줄 의무라도 있나?" 그 말에 선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 열받아서라도 더 이상 물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벨타이거 녀석이 인심쓴다는 듯이 말을 툭 내뱉었다. "나중에... 알려줄 수 있으면 알려주지." "거참 대~ 단히 고마운 말씀이시군요." 선애가 비비꼬며 말하자 녀석이 한번 피식 웃었다. 가게 공사는 2주일이 걸렸다. 꾸며 놓은게 너무 없어서 뜯어 고칠건 별로 없었지만, 대신 여러가지를 새로 꾸미는게 많았다. 거기다가 창을 좀 크게 내고 직사각형이었던 현관문을 둥근 아치형으로 그린다음 현관문 옆에 각각 하나씩 있는 창문과 현관문에 달린 자그마한 창을 유리로 댔다. 선애가 그러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놀라며 돈이 많이 들거라 염려를 했지만, 선애는 밀어붙였다. 어차피 캐더린이 선애의 재산을 보고 넉넉할거라고 했으니 돈 걱정은 안 했다. 단, 가게를 뜯어고치는데에만... 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커다랗게 낸 창도 현관문에 맞춰서 큰 아치형을 그리게 되었고, 난간을 넓게 잡아 그 위에 여러가지를 올려 놓을 수 있게 했다. 그러다보니 욕심이 좀 생겨서 가게 바깥쪽의 창문 아래에 자그마한 화단을 만들어 놓고, 현관문앞에 세개의 하얀 계단과 그 계단 양 옆으로 수려한 곡선을 지닌 난간까지 만들어 놓으니까 마치 동화책속에나 나오는 아기지가지한 집이 되어버렸다. 이왕 하는 거 외관도 뜯어 고치자고 해서 바깥 벽은 빨간 벽돌로 쌓았고, 처마를 넓게 잡은 지붕은 연두색 기와를 깔았다. 놀랍게도 이 세계에는 기와라는게 있었다. 이게 서대륙에서 건너온 건데, 그쪽에서는 어두운색 계통밖에 없었지만, 이 곳에 와서 다양한 칼라와 예쁜 디자인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뭐, 덕분에 잘 써먹게 되었으니 우리로써는 나쁠 건 없었다. 안 또한 바깥과 마찬가지로 동화에나 나올 것 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몄다. 우선 벽은 연두색의 자잘한 나뭇잎이 그려져 있는 벽지를 발랐고, 진열대는 현관문이 있는 벽과 그 반대편 벽을 제외한 나머지 두 벽 앞에 나란히 놓았다. 그렇다고 가게 한구석에 있는 커다란 벽난로를 막지는 않게끔 살짝 방향을 틀었다.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벽난로 위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촛대들을 장식품으로 놓아두었다. 해가 지기 전에 가게문을 닫으니 별로 사용하지는 않을테지만, 혹시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올때는 사용하게 될 지도 몰라 혹시나해서 몇개 마련해 둔 것이었다. 그리고 벽난로 윗쪽의 텅빈 벽 공간에는 자스민이 선물해준 커다란 풍경화를 걸어놨다. 진열대 위를 대부분 채우는 것은 선애가 열심히 고른 향수병들이었다. 진열대는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으로, 단지 다른 장식이나 조각은 넣지 않은 것으로 들여놔서 들어오면 연두색 벽지와 함께 숲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해줬다. 창가에는 향기는 없지만 대신 공기정화 성분인지 뭔지 해서 냄새를 없애주는 능력이 있다는 식물을 화분에 담아 들여놨다. 캐더린이 개업 선물이라며 다섯개나 들고와서 안겨준거다. 이름이 케르... 뭐시기하는, 듣도보도 못한 거였는데, 자그마한 난처럼 생겼다. 가을에 보라빛의 자그마한 꽃이 핀다고 들었다. 하지만, 꽃이 없어도 꽤나 그럴듯해서 그걸 창문가에 가져다 놨다. 그리고 한쪽 창문가에는 둥그런, 원목 탁자와 마찬가지로 원목 안락 의자를 가져다 놨다. 손님을 접대할 경우라던지, 아니면 장부를 정리할때나 잠시 쉴때 사용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꾸미고 나니 가게는 정말 그럴듯해보였다. 비록 금화 10개라는 거금이 들었지만, 돈 들인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나 멋드러지게 변하니까 공사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던 벨타이거까지 감탄할 정도였다. 그는 그거가지고 감탄했는지 가게 정리를 끝내고 오픈할 날을 정할 즈음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선애보고 향수 값 더 낼 수 있냐고 물어보더니 신상품 두개를 더 가져다 주었다. 향수 제조사에서 얼마전에 두개를 새로 만들어냈는데 이 가게에서는 별로 팔리지 않을 거 같아서 다른 곳에서 넘기려고 했었다나, 어쨌다나? 그래서 총 향수는 7개, 출발도 산듯할 거 같았다. 가게 이름은 '야생화'로 했다. 그러니까 정식 명칭은 '타이거 상회 소속 야생화 향수 가게'인 셈이다. 원래 선애는 '블루 로즈' 라던가 '하얀 백합'등등 좀 멋드러진 이름으로 하려고 했는데, 신제품을 가져다 주면서 벨타이거가 하는 말이 이 향수 제조사 사장이 자신이 앞으로 계속 신제품을 만들면 여기다 줄테니 가게 이름을 '야생화'로 해달라고 했다고 부탁을 했다나 어쨌다나. 뭐, 특별하게 나쁜 이름은 아닌 거 같아서 가게 건물에 맞게 아기자기한 예쁜 간판에는 멋드러진 필기체로 '야생화 향수 가게'로 적히게 되었다. 그리고 가게에서 판매하는 향수도 '야생화 향수 1호, 야생화 향수 2호' 등등으로 바뀌게 되었다. 여기서는 보통 향수 이름이 제조사가 따로 붙이지 않는 한 가게 이름으로 붙이는게 관례라나 어쨌다나 그래서 따로 이름을 붙이려던 걸 포기하고 그렇게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가게 현관문 앞 계단 앞에는 하얗게 칠해진 길다란 판을 가져다 놓았다. 그 판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테를 설치해 놨는데, 거기에는 가느다란 줄기를 가진 덩굴 식물을 휘감기게 할 예정이었다. 그 판에는 몇월 며칠에 가게 문을 연다는 것과, 그 날 향수를 세일하여 한 통에 5실링 한다는 것 까지 쓰여 있었다. 이건 카페나 식당들이 그 입구에 이렇게 그날 특선 메뉴나 광고 같은 걸 간단하게 적어 놓는 걸 따라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광고지라도 많겠지만, 여기에는 그런게 별로 없으니 꽤나 좋은 광고가 될 것 같았다. 세일하는 건 오픈인 기념도 있지만, 향수의 유통 기한이 한달 정도인 걸 보고 생각해 낸 것이었다. 왜 대형 할인 매장 같은데서도 유통기한이 가까워지는 걸 단체로 세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던 걸 기억해 내 흉내낸 것이었다. 어차피 남은 향수는 향수 제조사에 돌려줘야 했는데 그러면서도 향수 값은 꼬박꼬박 내야 했으니 차라리 그러느니 세일해서 파는게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 사실 유통기한이 며칠 안 남은 향수를 제 값 받고 파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걸 기점으로 해서 앞으로도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은 향수들은 계속 싸게 팔기로 했다. 그렇게 하나 하나 가게의 오픈을 앞두고 정리가되어 드디어, 가게 오픈 당일날이 되었다. 드디어 시작이라 생각하니 선애도 긴장되어 참을수가 없었는지 다른때보다도 아주 이른 시각에 가게로 가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죄송하지만 아직 개점시간이... 어머, 캐더린." 들어선 사람은 그 동안 바쁘다고 보이지 않던 캐더린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여전히 화려하고 세련된 차림의 그녀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서더니 가게안을 한번 휘익 둘러보았다. "흠, 제법 괜찮게 꾸몄구나. 돈 좀 썼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말야." 선애에게는 아주 고마운 사람이었기에 선애는 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거야 다 캐더린 덕분이죠. 소개해주신 분들이 일을 너무나 잘 해주셨어요. 그런 분들 소개해주셔 정말 감사드려요." 뭐, 그에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가게에서 파는 향수들을 각각 종류별로 한 병씩 선물하기는 했었다. 물론, 유리병에 담아서 말이다. 그렇게 하고나니 또 자스민이 마음에 걸려 자스민에게도 신상품을 유리병에 고이담아 선물해줬었다. 우리 꼬맹이 녀석이 한국에 있을때는 자기는 소심하다 어쩐다 하면서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도 잘 안 걸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가게를 하나 차린다 생각하니 마음가짐이 달라졌는지 제법 부드럽게 말을 술술 내뱉는다. "됐다. 잘 됐으면 좋은 거지."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니다. 잠깐 틈을 내서 들린 거라 곧 가봐야해. 내가 이렇게 들린건, 너 이 가게 혼자서 한다고 했었지?" "예? 아, 그런 셈이죠. 사장님이 계시지만 거의 관심이 없으셔서..." "그러냐? 그럼 종업원 하나 들여놔라." "예?" 뜬금 없는 캐더린의 말에 선애가 되물었지만, 캐더린은 대답 대신 자신의 뒷쪽에 엉거주춤 서 있던 소녀를 앞으로 끌어냈다. 워낙 캐더린의 존재감이 크다보니 그 소녀가 캐더린의 뒤에 있는지도 이제야 알았다. "얘좀 네 밑에 데리고 있으련? 빠릿빠릿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키는 일은 잘 하는 성실한 애다." 잘 먹지 못하고 살았는지 뺨이 홀쭉한 빼빼마른 소녀였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었고, 머리는 금발이라기 보다는 노란 색이라고 하는게 더 맞을 듯한, 잘 익은 벼나 밀 색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외모를 가진 선애를 신기하다는 듯 힐끔힐끔 살펴보고 있다가 선애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고개를 숙이는게 휴의 집에서 보던 빠릿빠릿하고 눈에 정기가 도는 애들과는 반대인 타입 같았다. "에... 너무 어린게 아닐까요? 잘 해야 15살 정도로 보이는데..." "괜찮을 거다. 이래뵈도 18살이니까." "엑? 정말요?" 나도 놀랐다. 나도 이제 막 15세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우리 가게에 들어온 앤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서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다고 마땅히 맡길데가 없어서... 월급은 많이 안 줘도 돼. 단지 재워주고 먹여주고만 하면 되니까. 그럼 좀 부탁한다." "어, 저, 저기..." 캐더린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소녀만 남겨 놓은 채 선애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빠르게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선애가 얼른 따라 나가봤지만, 캐더린은 대기 시켜놨던 마차를 타고 막 출발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있는 소녀 하나. "/나 원... 어떻게 하지?/" [잘 됐네. 사실 나는 너 혼자 할 수 있을까 걱정 됐거든. 이제 손님들이 많아지면 내가 쉽게 도와줄 수도 없잖아.] "/그래도 가게를 맡은거 처음 해보는데 거기다가 종업원까지 두라고?/" [에이, 한명인데 뭐 어때? 거기다 이제 앞으로 가게를 계속 번창 시키면 종업원도 많아질테니까 연습한다 생각해.] "/허 참.../" 선애가 앞에서 중얼거렸지만, 한국말로 한 거라 알아듣지 못하는 소녀는 계속 불안한 얼굴로 선애만 힐끔힐끔 보고만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어차피 곧 있으면 가게 문도 열어야 되니... 그래, 너 이름은 뭐니?" "예? 아... 사라라고 합니다." "그래, 사라... 뭐 이렇게 된 거 잘해보자. 아침은 먹었니?" "예, 먹었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사라라는 애를 보는 선애의 눈에 살풋이 짜증이 스쳐 지나가는게 보인다. 선애 녀석은 자기도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못하는 주제에 버벅거리고 우물쭈물 거리는 애들은 못참아 했던 것이다. '성격이 더럽다니까. 쯧쯧...' "좋아. 그럼... 아, 그러고보니 너 재워줘야 한다고 했던가?" "네, 네..." "큰일이네... 갑자기 어디다가..." 선애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선애도 휴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거기다가 혹을 데려가기가 어디 쉽겠는가 말이다. "아, 저기... 캐더린님이 친구분께 잘 말씀드렸다고... 걱정 마시라고 하던데요..." 선애가 난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자 사라가 생각 났다는 듯 얼른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좋아. 그럼... 짐은? 어라? 그러고보니 맨몸이네?" 재워줘야 한다고 한 소녀는 작은 손가방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그에 의아하게 쳐다보자 사라가 얼른 대답했다. "저, 짐은... 미리 그 집으로 보내주신다고 하셔서..." 좀 더듬기는 했지만... 하지만, 선애 첫 인상에 무서워 하던 애가 한 둘이 아니었기에 나는 사라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애의 말에 선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녀의 옷차림을 바라봤다. 이 얼굴에 18세라고 하면 무지 가난한 집에서 못 먹고 자라서 그런거 같은데 다행이도 옷차림은 깨끗했다. 머리와 잘 어울리는 샛노란 원피스였다. 거기에 머리도 두갈래로 땋아 얌전하게 묶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만족한 선애는 다시한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애가 입고 있는 건 연두색 원피스에 노란색 앞치마. 분위기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앞으로도 연두색에 노란색을 고수할 생각이었다. "옷을... 사야겠군. 그래도 뭐... 오늘 하루는..." 그러면서 선애는 몸을 돌려 창고쪽으로 걸어가더니 자신이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노란색 앞치마를 건네줬다. 혹시 여기서 앞치마가 지저분해질 일이 있으면 그때 그때 갈으려고 미리 똑같은 걸 여러개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해줄테니 잘 들어. 나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잽싸게 물어보고." 바닥은 어제 하루종일 청소를 했기 때문에 반짝반짝 해서 더 닦을 일도 없었다. 사라의 손을 잡고 가게 이곳 저곳 다니면서 빠른 말투로 설명을 다다다 내뱉는 선애의 모습에 사라는 감히 말을 끊고 질문할 생각은 못하고 계속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왠지 사라가 불쌍해지는 나였다. '저거 제대로 다 기억할 수 있을라나 몰라. 나중에 고생하겠네...' 사라에게 대충 설명을 끝낼 즈음 문이 벌컥 열리고 벨타이거가 들어왔다. "여~ 오늘이 드디어 가게를 여는 날이던가? 그런데, 벌써부터 손님이 계시는군?" "종업원입니다. 오늘부로 채용했어요." 그 동안 벨타이거 녀석에게 당해온게 있던 선애였으니 녀석에게 쌀쌀한 말투로 대답하는 건 당연했다. "호오, 그래? 이름이?" 그러나 벨타이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물었다. "저, 저... 사, 사라라고 합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 사라. 나는 여기 사장이지만 가게 운영은 모두 선애에게 떠맡기고 있으니까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럼 잘 해보라구." 사라에게 다가가 우물쭈물하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고 흔들며 인사를 한 벨타이거는 마지막에는 선애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한 마디 하고는 그의 전용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에 선애는 인상을 한번 찡그려 주고는 다시 사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대충 알겠지? 질문할 거 있으면 해봐." 그러자 사라가 우물쭈물 대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 없어요." "그러냐? 그럼 나중에 생기면 물어보고. 가격은 확실하게 알아 뒀겠지? 뭐, 적혀 있으니 모를 이유도 없겠지." 유리병은 각각 가격별로 구분해 놓고 그 앞에 가격들을 써놨던 것이다. 그러니 처음 온 사라라고 해도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선애는 미덥지 않다는 시선으로 사라를 봤지만, 이왕 맡은 것 어쩔 수 없다 생각 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개점 시간이다. 잘 해봐." "네." 무지 긴장해서 딱딱하게 얼어붙은 사라가 간신히 대답했다. '잘 할수 있을라나...' 드디어 개점 시간이 다가왔다. 선애는 큰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가게 안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이거 냄새 좋다." "이거 얼마예요?" "꺄아, 이 유리병 너무 예쁘다아~~" 여기 저기에서 이건 뭐냐, 이건 얼마냐, 계산해달라 하며 달려드는 통에 선애는 몸이 세개라도 모자를 지경으로 뛰다녔.... 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가게 문을 열고도 두시간 정도는 손님이 한 사람도 얼씬 거리지 않았다. 그러자 선애는 초조해졌는지 괜히 죄 없는 사라만 달달달 볶아댔다. "그렇게 작은 소리로 하면 어디 손님이 듣기나 하겠니? 너 잡아먹는 사람 없으니까 큰 소리로 인사하란 말이야. 해봐." 선애의 재촉에 사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오오..." 그러나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내뱉는 소리치고는 무지 가냘펐다. 그 동안 선애가 연습 시킨답시고 계속 시켰던 인사 소리와 별로 다를바가 없었다. '에구... 저렇게 수줍음이 많아서야...' 그러자 선애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게 큰 소리냐? 아침 먹었다며? 다시." "어서 오세요오." 선애의 매서운 눈길에 사라가 질끈 눈을 감고는 배에 힘을 줬다. 덕분에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큰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런데 인사는 왜 빼먹어? 다시..." 그러면서 막 선애가 사라에게 다시 한번 하라고 지시를 내리려는 찰나, 사무실에 콕 박혀있던 벨타이어가 어슬렁 어슬렁 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어허, 손님이 없다고 엄한 애한테 화풀이 하면 쓰나?" 아무래도 선애의 행태를 좀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빙글빙글 웃으며 선애의 속을 박박 긁어놓는 녀석의 말에 선애의 눈초리가 살풋이 올라갔다. "제 태도가 마음에 안 드시면 가서 손님을 끌어 모아 오시는 건 어떠실지요, 사.장.님?" "에이, 뭘 그러시나? 손님이 없었던게 어디 하루이틀이었어? 난 그저 편~하게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릴랙스~ 릴랙스~ 응? 안 그러면 그 나이에 주름 생긴다고. 어린 나이에 얼굴에 주름살이 자글 자글 해지고 싶지는 않겠지?" 그 녀석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사람 좋게 빙글빙글 웃으며 선애의 속을 조금 더 세게 빡빡 긁었다. 그러나, 선애 또한 말싸움의 경지가 높았으니... "오호라... 사장님께서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줄은 몰랐네요~. 그럼 손님들 좀 모셔 오시죠? 그럼 제가 사장님 말대로 릴랙스으~ 하게 있죠." 벨타이거 녀석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며 비꼬아주었다. 하지만, 벨타이거 녀석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에이, 내가 능력 있으면 가게를 선애한테 맡겼겠어? 나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군." 능글맞는 녀석의 말에 선애의 입가가 비죽이 올라가며 비웃음을 지었다. "아, 참... 그랬었죠. 제가 깜빡 했네요. 사장님이라고 계시는 분이 도움이 하.나.도 도움이 안된다는 걸." "어허라, 그걸 벌써 잊어버리다니... 쯧쯧, 아직 젊은 나이인데 기억력이 그렇게 형편 없으면 안돼지 선애양..." "글쎄말이예요. 어느 누.군.가.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게 하지만 않았다면 이정도까지는 아닐텐데... 사장님, 절 이렇게 만든 그 누.군.가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하하하... 그거 참 좋은 생각인데, 그 누.군.가가 그렇게 쉽게 손해배상을 해줄까?" "어머나, 좋은 생각이라고 말씀해주시다니 참 고맙네요. 거기다 절 걱정까지 해주시고... 걱정 마세요. 저는 든든한 빽이 있어서 아~주~ 손쉽게 받아낼 수 있거든요. 어쩌면 제가 청구한 거 보다 훠어얼~~씬 넉.넉.하게 받아내줄 지도 몰라요." "오호라, 그런 빽이 있었을줄은 몰랐네." "어머나 사장님도 참... 거야 당.연.히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으니 모르신거죠. 사장님도 의외로 멍.청.하신 구석이 있으시군요? 호호호..." 살벌했다. 무지무지 살벌했다. 바깥은 이제 봄이 거의 가고 여름이 다가오는 시점이라 무지 따뜻했는데, 가게안은 차가운 극빙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사라는 한쪽 구석에서 어찌할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며 둘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훗훗훗,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선애도 보기와는 달리 둔.하.구.만?" "어머나... 이런 들켰네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둔해도 사장님을 바라보니까 제가 있던 곳에서 떠돌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그래? 그게 뭔데?" "능력이 없으면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라. 그럼 중간이라도 간다... 라는... 호호호, 참 훌륭한 말이죠?" 선애의 말발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 상대가 상대이다보니 그런거 같지만... 원래 선애의 말싸움 타입은 이게 아니었다. 딱 정색을 해서 카리스마를 폴폴 날리며 상대를 기죽게 한 뒤에 매서운 말들을 사정없이 쏘아대어 정신없게 만들어 Ko패 시키는 거였다. 그런데 이제는 속이 사정없이 긁히는데도 생글생글 웃으며 맞받아치다니... 어디선가 읽은 건데, 포커페이스의 제왕은 어떤 일에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는 무표정이 아니라 이렇게 생글생글 웃고 있는 거라고 했다. '이걸 기뻐해야되는 거야, 슬퍼해야 되는 거야?' 그러나 그렇게 살벌한 - 뭐, 내가 보기에 선애는 열받아서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지만, 벨타이거쪽은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 상황은 제 3자에 의해서 깨졌다. 딸랑~ "... 여기 한번 와보고 싶더라고." "어머, 그래? 난 왜 몰랐지?" "어서 오세요오~~" 그렇게 시킬때는 안 나오던 명랑하고 큰 목소리가 사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기야, 이 순간 저 손님들이 무지 무지 반가웠으리라. 문에 달아놓은 자그마한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선애는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현관문쪽으로 홱 돌리고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들어온 건 결혼한지 얼마 안 된 듯한 새댁 분위기를 폴폴 풍기는 두 여자였다.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감탄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분위기 괜찮네." "그러게. 밖에서도 예쁘장하더니만... 여기 이번에 새로 만든 가계 맞죠? 전에는 여기에 향수가게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아, 전부터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 공사를 했답니다." '돈 들이길 잘했군.'이란 뿌듯한 표정으로 선애는 잘만 대답했다. 그에 선애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두 여자의 눈에 신기하다는 빛이 피어올랐다. "어머나, 주인이 서대륙인?" "그런데 우리 말 잘하네... 아, 그런데 머리가 정말 까맣다. 눈동자도..." 선애 머리카락은 무척 진했다. 너무 검어서 오히려 햇빛 아래에서 보면 푸른 빛이 돌 정도로 까맣고 굵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었다. 거기다가 눈동자도 마치 어린애처럼 검은 편이었다. 그런 선애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한참이나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보던 그녀들은 선애가 다시한번 생긋 웃어보이자 그제야 자신들이 실례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어머... 미안해요. 좀 신기해서..." "서대륙인은 처음 보거든요." 그래도 이 사람들은 예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인지 사과의 말을 건네왔다. "아니예요. 괜찮습니다. 저도 여기 처음와서는 이곳 사람들을 무지 신기하게 봤거든요. 아마 같은 심정이 아닐까 싶네요. 아, 향수를 좀 보여드릴까요? 저희 가게에서 파는 향수는 제법 괜찮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거기다가 가게 오픈 기념 세일을 해서 무척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답니다." '오오... 녀석이 베타랑 같이 말하고 있네.' 나는 매끄럽게 말을 하며 그녀들을 향수를 진열해놓은 진열대로 이끄는 선애를 감탄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머, 이거 정말 한통에 5실링 밖에 안 해요? 정말 괜찮은 향수인데 너무 싸다." "그럼요. 세일 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단지... 이 향수는 천연 재료만 사용해서 유통기한이 있는데... 정말 죄송하지만, 이게 유통기한이 일주일 정도 밖에 안 남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저렴하게 판매하는 거랍니다." "아... 하긴..." 선애의 설명에 두 여자가 납득한 표정으로 다른 향수들의 향기를 맡아보았다. "유통기한이 좀 남은 향수는 조금 더 비싸답니다. 그러니 일주일 안에 사용하실게 아니면 좀 더 비싸더라도 이쪽을 권해드리고 싶네요. 아니면, 이건 목욕할때 목욕물에 넣어서 사용하셔도 좋을거예요." 그렇게 선애가 사근사근 설명하고 있는 때에 현관문쪽에서 사라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오~~" 한번 해보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이번에는 대략 18, 9세 되어보이는 소녀들 세명이 기웃기웃 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호오, 역시나 인테리어에 신경쓰길 잘 했어.' 아무래도 처음 가게문을 열었을때는 시간이 너무 일렀기 때문에 손님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맨 처음 손님이 왔을때가 정오가 가까워진 즈음, 그러니까 보통 전업 주부들이 대충 집안일을 끝내고 시장을 보러 나올 시간때였다. 그 뒤를 이어서 계속 꾸준히 이어서 하나 둘 들어오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돈 쓴 보람이 느껴졌다. 물론, 우르르 몰려들어 빠글빠글 했던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이게 좋을 것 같았다. 만약 정말 바글바글 거렸다면 그걸 선애가 어떻게 감당 하겠는가 말이다. 정오가 약간 지난, 점심 시간이 되자 계속 이어졌던 손님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고 드디어 가게 안에 손님이 아무도 없을때 선애는 입이 찢어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사라에게 점심을 사오라고 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의 단 몇시간의 매출이 공사하기 전 일주일치 - 물론, 장부상으로 - 매출을 넘었던 것이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잘 팔리지 않을거라 각오했던 유리병도 다섯개나 팔렸던 것이다. 그러니 선애의 입이 쫘악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그러한 손님들의 발걸음은 오후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 다다음 날에도 꾸준하게 이어졌다. 세일한 향수는 잘 팔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치보다 훨씬 윗돌아서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세일하고 있던 5가지 향수 중 3가지가 다 팔려 버렸다. 게다가 유리병도 절반 가까이가 팔려서 - 이건 잘 팔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겨우 진열대 위를 허전하지 않을 정도로 채울 것만 사놨던 것이다. - 선애는 다시금 유리병을 주문하러 가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어리버리해서 청소하고 손님 들어올때나 나갈때 인사만 담당하고 있는 사라에게 홀로 도저히 가게를 맡길 수 없었던 선애는 벨타이거에게 잠시 맡기려고 했다. 비록 그가 평소에 가게에 와서 대부분 사무실에 박혀 있다고 해도 처음에 향수를 팔던 사람인데다가 사라보다는 더 야물딱졌으니 아무래도 그에게 맡기는 게 더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향수를 팔았던 때보다 늘어난 건 단 두개인데다 유통기한은 헷갈릴까봐 커다란 병에 일일이 다 써놨고, 유리병들도 가격별로 다 분류를 해놨으니 그가 가게를 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그가 맡으려 하지 않는 걸 빼고는... "호오, 왜 내가 맡아야 하지?" "그거야 당연히 사장님이니까요." "오오, 이렇게 멍.청.한 사장한테 맡겨도 안심이 되겠어?" "어머나, 사장님이 멍.청.하시다는 건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러니 이런 나에게 맡기지 말고 아예 문을 닫는 건 어때? 하루 정도면 괜찮잖아." "호오,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네요. 전에 제가 휴가를 받겠다고 그 동안 문좀 닫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반대하시면서 직접 가게를 보셨잖아요?" "하루 정도는 괜찮아." "그래요? 하지만 전 전.혀. 안 괜찮거든요? 요 근래 매상이 올랐는데 이럴때 문 닫는 손해나는 짓을 왜 하나요? 전처럼 손님이 전.혀 없을때면 몰라도." "안됐네. 하지만, 요즘 내가 바빠서 말이야..." "그으래요? 그럼 하루 문 닫아서 생기는 손해배상을 사장님께 청구해도 될까요?" "뭐? 그걸 왜 나에게 하겠다는 거지?" "그거야 사장님께서 가게를 안 봐주시니까요." "사라가 있잖아?" "그렇군요. 그럼 사라에게 맡가고 혹시나 생기는 손해는 사장님께 청구하죠." "왜 나에게 청구하지?" "그거야 사장님이 사라에게 가게를 맡기라고 하셨으니까죠. 제가 자리를 비우면 이 가게 책임자는 사장님이 되시잖아요? 그런데 사장님 책임하에 있을때 손해가 나면 그거야 당연히 사장님이 손해를 배상하셔야죠." "사장인 나에게?" "어머나, 사장인 주제에 모든 경영을 저에게 맡긴 분이 누구시더라? 적자가 나던 흑자가 나던 모든 걸 저에게 넘기시고는 단지 향수값만 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손해가 나면 당연히 청구해야지요." "호오, 나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서 받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어머나... 사장님도 차암... 아직 젊으신데 이렇게 기억력이 떨어지셔서야...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저에게는 든든한 빽이 있어서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다고... 오호호호... 믿기지 않으시면 직접 시험해 보셔도 상관 없답니다." 선애의 말에 선애와 말싸움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벨타이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그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험해보고 싶지 않군. 좋아... 하루 정도는 봐주지."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선애도 양보했다. 이 녀석이 어느새 밀고 당기는 센스도 체득한 모양이었다. "하루까지는 아니예요. 최대한 빨리 보고 돌아올테니까... 한나절 정도만 부탁드릴께요." 승리자의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하자 벨타이거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거 참 고맙군." 그렇게 벨타이거 녀석에게 항복을 받아 낸 선애는 그 다음날 당장 유리 공예소로 향했다. 물론, 가기전에 가게에 들려 약속대로 일찍 나온 벨타이거를 붙잡고 주의사항을 말해준다는 전제하에 여러가지 잔소리를 늘어놓고 노오란 앞치마를 건네주고 나서 향했다. 그 뒤로도 가게는 제법 잘 되었다. 나중에 깨달은 거지만, 우리가 가게 인테리어를 예쁘게 꾸민 것도 큰 덕을 봤지만, 가게의 위치도 꽤나 좋았던 덕이었다. 비록 가게의 위치가 변두리이기는 했지만, 그 곳은 중산층, 그러니까 제법 넉넉하게 사는 평민들이나 기사들이 사는 주택가에서 중심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중산층에 사는 사람들이 시내를 왔다 갔다하면서 가게를 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뭐, 시내까지 나갔다면 커다란 향수 가게에 가겠지만, 그 곳까지 가지 않을 경우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 가게에서 파는 향수는 캐더린도 인정한 상급에 속하는 향수였고, 그런 향수치고는 가격도 저렴했으니 말이다. 물론, 유통기한이 일주일 정도 남은 걸 아주 싸게 파는 것도 한 몫 단단히 했다. 일부러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아 저렴하게 팔때를 기다리는 사람도 생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손님들의 대부분이 넉넉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유리병도 꽤나 잘 팔렸다. 하기야, 나무통은 일회용이라서 한번 쓰면 다시 쓰기가 좀 그랬다. 습기가 새지 않기 위하여 발라둔 용액이 향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데다가 한달 정도 지나면 그 용액의 효과가 사라져서 향수가 배어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처음에 좀 더 돈을 써서 유리병을 사두면 반 영구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는데다가 보기에도 좋았으니 유리병을 꽤나 선호했던 것이다. 게다가 유리병도 선애가 자신의 안목으로 특별하게 고른 예쁜 것이라서 향수병이 아닌 그냥 장식용이나 다른 용도로 사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걸 안 선애가 그 뒤로 향수병의 작은 것 말고도 여러가지 예쁘거나 특이한 병이나 장신구도 서서히 들여놓기 시작했고, 반응은 제법 괜찮았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이 끌어들였으니 말이다. 뭐, 손님들이 다 성격이 괜찮은 손님들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 엘리엇 녀석이나 미란다 녀석에게 당한 경력이 있던 선애는 그럭저럭 무난하게 넘기면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렇게 새롭게 인테리어를 바꾸고 가게를 연지 한 한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평소에 여자 손님들만 들어오던 가게에 왠 남자가 들어섰던 것이다. 그것도 젊은 건 아니고, 중년 남자였는데 키가 선애보다도 작고 비리비리 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른데다가 코에는 염소수염을 달고 있었다. 그 뒤로는 가끔 봤던, 이 도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경비병 두명이 따라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그들을 본 사라가 평소처럼 인사는 했지만, 좀 당혹스러운지 선애를 바라봤다. "저... 점장님..." 사라는 선애의 첫인상이 무서웠는지 편하게 언니라고 부르지도 못해 무조건 선애님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그걸 불편하게 여긴 선애가 차라리 점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 이건 내가 제의한 것이다. - 지금까지도 계속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막 손님에게 신제품의 향수를 팔아 돈을 챙기고 있던 선애는 그런 사라의 당혹스러운 부름에 즉각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선애도 중년 남자가 들어서자 좀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는 능숙한 상인이 된 선애가 중년 남자에게 다가오며 친절하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러자 이 중년 남자가 선애를 빤~히 바라보더니 대놓고 반말로 내뱉았다. "흠, 여기 사장은 어디 갔나보지?" 하필 그때는 벨타이거 녀석이 잠시 자리를 비운 때였다. "예, 잠시 나가셨습니다만... 사장님을 찾아 오셨습니까?" "뭐... 그런 셈인가? 나는 세금을 걷으러 왔는데." "예? 세금... 이요?" 뜻밖의 말을 들은 선애가 무지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리자 염소수염의 중년 남자가 짜증스럽다는 듯 힐끔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래? 그럼 세관원이 세금 받으러 왔지 뭘 하러 왔을 거 같아? 사장이 없으면 네가 내면 되겠네." '세금.... 아... 하기야, 이 시대에도 세금은 있었으니까. 그 동안 세금 내라는 말을 못들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네.' 한국에서는 고지서가 날아들었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직접 걷으러 다니는 모양이다. 하기야, 이 세계에 와서는 한번도 세금을 내본 적이 없었으니 알 리가 없었다. "아... 세금... 세금이 얼마인데요?" "여기는 한달에 은화 두냥이야. 아니, 이 가게가 세워진지 제법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그걸 몰랐단 말이야?" "아, 예. 그동안은 제가 세금을 낸 게 아니라서... 자, 잠시만요." 계속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선애는 나의 정신차리라는 말에 그제야 표정을 평소대로 회복시키고는 얼른 돈을 챙겨서 가져다 줬다. 그러자 그 염소수염의 남자가 들고 있던 책을 터억 펴더니 펜을 꺼내 그 곳에다 적는 것이었다. "어디보자... 그래, 여기 있군. 타이거 상회 소속 야생화 향수 가게... 이번달 세금 완납." 그리고는 또 다른, 이번에는 자그마한 책자를 꺼내더니 그 곳에다 몇자 끄적이고는 그 종이를 뜯어 선애에게 내밀었다. "옛다, 여기 영수증. 앞으로도 이렇게만 세금 잘 내라." "아, 예." 어벙한 얼굴로 선애가 영수증을 받아들자마자 염소수염의 중년 남자는 바쁘다는 듯 휙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언제나 경쾌한, 이제는 무척이나 익숙해진 어투의 사라 인사가 뒤따랐다. "안녕히 가세요오오~~" 이제는 사라도 가게 일에 많이 익숙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직 손님 상대하는 건 어설퍼서 가게를 맡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헤에, 여기도 영수증이라는 게 있구나...' 나는 여전히 어벙한 채로 영수증을 들여다보고 있는 선애 뒤로 가서 같이 들여다 봤다. 거기에는 커다란 직인이 찍힌 - 아마도 미리 찍어놓는 거겠지만 - 종이에 '타이거 상회 소속 야생화 향수 가게가 은화 2개의 세금을 내었음. 알파두르 항구 도시 시장 대리 세리장' 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호라... 여기에도 시장이 있었남? 거참 신기하네...] 그러고보니 여기가 항구 도시라는 건 알았지만, 어느 귀족의 영지라는 건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귀족 계급이 있는 이 세계에는 아무래도 누구 령 누구 령 하는게 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나와는 달리 선애는 찡그린 표정으로 영수증을 바라보고 있었다. "쳇... 사장님이 있는데 왜 내가 가게 세금을 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투자한 돈 회수하려면 갈 길이 멀구만..." 그렇게 투덜투덜 거리던 선애는 얼마 안 있어 벨타이거가 돌아오자마자 들고 있던 영수증을 떡 하니 내밀었다. 갑자기 코앞으로 내밀어진 영수증에 당황한 벨타이거가 얼결에 그걸 받아들고 보더니 다시 선애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아... 세금 영수증... 그런데 이걸 왜 나에게 줘?" "그거야 당연히 사장님이 낼 세금을 제가 대신 냈으니 저에게 달라는 의미죠." 선애가 허리에 양 손을 터억 걸친 채 당당하게 대꾸하자 벨타이거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당연히 내가 내야 했다고? 왜? 이제 이 가게를 운영하는 건 선애인데." "그러는게 어디있어요? 물론 운영이야 제가 하지만 이 가게는 엄연히 사장님 거잖아요. 사장님 가게에 붙는 세금을 왜 제가 내야 하죠? 그러니 빨랑 세금으로 뜯긴 은화 두개 주세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이 가게에서 나오는 이익은 모두 선애가 가지고 가잖아? 그런데 나보고 세금을 내라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그러자 선애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누가 억지를 부리는데 그러세요? 제가 운영을 맡고 싶어서 맡은 겁니까? 사장님이 저에게 다 떠넘기신 거잖아요? 그리고 처음에 운영을 맡기면서 세금 문제는 한 마디도 언급 안 하셨으면서 이제와서 제 돈을 떼먹으시다니욧?" "아니, 운영을 맡겼으면 세금 문제까지 당연히 맡는 거 아니야?" "왜 거기서 당연히란 말이 나오죠? 됐으니까 빨리 돈이나 내놔요." 선애가 척 손을 내밀며 하는 말에 벨타이거가 턱 하니 팔짱을 끼며 시선을 돌렸다. "싫어." "뭐, 뭐라구요?" 기가막히다는 선애의 얼굴에 대고 벨타이거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세금 문제는 운영자가 알아서 하는 거 아니야? 왜 나보고 달래? 나 돈 없어.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이 선애 월급이잖아?" "저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거든요? 장난 그만하시고 돈 안 내놔요?" "나 돈 없다니까. 뒤져봐라 돈이 나오나." "이러시는 게 어딨어욧?" "없는 걸 어쩌라고? 배 쨀래?" "뭐, 뭐... 이런..." 너무 기가막혀 입만 떡 벌린채 평소의 그 날리던 말발을 행사 못하는 선애에게 벨타이거는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가게를 잘 운영해서 이익을 많이 남기면 되잖아? 잘 해봐." 벨타이거 녀석의 모습이 사무실로 사라지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은 선애는 매서운 눈초리로 사무실을 바라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래애...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어디 두고 보자고." 이번달에는 가게가 그럭저럭 잘 되어서 이익이 꽤 남았긴 했지만, 유리병들을 좀 더 사고 향수 값을 지불하고 나니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거기다가 세금까지 지불하고 나자 남은 순 이익은 겨우 은화 3개였다. 이건 인테리어값은 물론이고 가게를 열기 전 선애의 돈으로 유리병을 산 걸 모두 제외하고 생긴 이익이었다. "쳇... 그래도 아예 안 남는 것 보다는 났지만... 빌어먹을 사장 같으니라고... 인테리어 하느라 돈 꽤 들어간 거 뻔히 알면서 꼭 나에게 세금까지 내게 해야 하냐고..." 그날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올 즈음, 오늘 하루 매상과 가게를 오픈한 뒤 지금까지의 매상을 장부로 정리하며 선애가 투덜거렸다. "아아... 그나마 휴네 집에서 꽁짜로 먹고 자고 하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엄청난 적자였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던 선애는 가게 안을 정리하고 있는 사라를 불렀다. "사라야아~~" "네에~ 점장님." 처음에는 선애를 무서워 하더니 그 동안 익숙해졌는지 선애가 부르자마자 웃으면서 쪼르르 달려왔다.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사라라는 애는 너무 착했다. 그러니 선애 밑에서 일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자, 이거." 그런 사라를 물끄러미 보던 선애가 은화 하나를 사라 앞으로 밀었다. "에?" "너 이번달 월급. 순 이익이 얼마 없어서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첫 월급을 그럴수야 있냐. 많이 못 줘서 미안하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까움 반, 미안함 반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자 사라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선애가 내민 은화 하나를 집어들더니 무지 감격에 찬 눈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저, 점장님... 으흑..." 그러더니 곧 이어 그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울먹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감격했냐? 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한달 동안 수고했고,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해라." 이제 성인이 되었다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도 할 줄 아는 꼬맹이었다. "으흑흑... 녜에에... 정말 감사합니다아..." 이렇게 감동이 풀풀 넘치는 분위기에서 가게 문을 닫게 되었으면, 다음 날은 좀 더 기분 좋게 가게문을 열어야 하건만.... "으아아아악~~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아아아~~~!!" 이렇게 감동이 풀풀 넘치는 분위기에서 가게 문을 닫게 되었으면, 다음 날은 좀 더 기분 좋게 가게문을 열어야 하건만.... "으아아아악~~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아아아~~~!!" 정말 황당하고 기가막히게도 그 비싼 돈을 들여서 해놓은 유리창문이 모조리 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사람이 없을때 혹시나 있을 사건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리 창문 겉에다가 나무로 튼튼하게 겉창까지 걸어 놓았건만, 그 겉창을 부수어 놓고 그 안에 있는 유리 창문까지 깨어 놓은 것이었다. 이건 누가봐도 일부러 유리창문을 깨려고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창문을 깨는데 창 아래에 예쁘게 만들어놓은 화단이 방해가 되었는지 그것까지 모조리 짓밟아 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의도적인 그 행태에 선애가 말을 잃고 서 있자 사라는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야, 정신 차려. 혹시나 뭘 훔쳐갔는지도 봐야 하잖아?] 내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선애가 황급히 잠긴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안도 엉망이었다. 왠지 유리창을 깨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던 듯, 창을 부수며 들어온 커다란 돌이 거의 십여개나 가까이 가게 안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들어온 유리창의 파편들이나 돌에 뭍어 있던 흙들도 잔뜩 들어와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얼마나 돌을 강하게 던졌던지 창문을 깨고도 더 날아 들어서 진열장에도 여러게 부딪혔던지 진열장에 여러개의 커다란 흠집이 나 있었다. 그 위에 올려진 유리병들은 가게 문 닫을 즈음 고이 싸서 창고에 넣어놨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간 유리병들도 몇개 깨질 뻔 했다. 그러나 선애는 그런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잽싸게 다다다 달려가 창고의 문을 열어 제쳤다. 매일 벌어들이는 돈이야 곧바로 정산해서 집으로 가져가고 가게에는 아침마다 필요한 돈만 가지고 왔지만, 향수들은 부피가 큼지막한데다가 유리병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기가 어려워 창고에다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창고에는 누가 침입한 흔적이 없었고, 물건들도 어제 들여놓은 그대로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 모습에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 쉰 선애는 분노에 찬 얼굴을 가게 안으로 돌렸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거야?" 매서운 눈초리로 가게안을 쓸어보자 가게 한쪽에 엉거주춤 서 있던 사라가 슬그머니 물어왔다. "저기... 청소해야 하겠죠?" "하아...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오늘 장사를 하려면... 아우... 유리창 값이 얼마인데... 잡히기만 하면 그냥..." 너무너무 분한지 선애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데 후다닥 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벨타이거가 뛰어들어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들어오자마자 엉망이 된 가게를 보고 한번 더 놀라더니 선애와 사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너희들은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그 동안 아웅다웅 싸우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라고 걱정은 되었던 모양이다. 그에 선애가 분노로 인하여 치켜 올라갔던 눈썹을 제자리로 돌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우리도 지금 막 왔는걸요 뭐... 와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선애도 벨타이거 녀석에게 평소 틱틱대기는 했어도 이럴때 의지가 되는 모양인지 좀 안심이 되는 표정이었다. 그때 사라가 창고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와 바닥을 쓸려고 하자 벨타이거가 다급하게 만류했다. "잠깐만 기다려. 쓸지 말아." "예?" 당혹한 사라가 선애와 벨타이거를 번갈아 바라보자 벨타이거가 선애를 보며 말했다. "우선 경비대에 신고를 해야 해. 청소는 그리고 나서야. 내가 가서 신고하고 올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아무래도 여기도 범죄가 일어나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 처럼 경비대에 신고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범죄 현장(?)까지 보존하면서 기껏 벨타이거가 달려갔건만, 벨타이거와 같이 온 두명의 경비대원들은 그 모습을 한번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뭐... 술 취한 사람이 돌을 던졌나 보구만... 그럴 수도 있지 뭐." 그의 무성의한 말에 선애의 쌍심지가 치켜 올라가며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벨타이거가 얼른 선애의 소매를 잡아 제지했기때문에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선애가 그러거나 말거나 휘이 한번 더 건성으로 둘러본 두 경비원들은 귀가 가려웠던지 - 아마 속으로 욕을 하는 사람이 많았던 듯... - 휘적휘적 후비며 가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술 취한 사람이 그런거 가지고 신고하면 어쩝니까? 우리가 술 취한 사람 일일이 잡을 수도 없는 거고... 그냥 재수 없었다고 생각하쇼." 벨타이거에게 그렇게 말을 던져놓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선애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표정으로 이만 바득바득 갈다가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벨타이거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울화를 터트렸다. "아니,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지? 이걸 어떻게 술 취한 사람이 한 걸로 볼 수가 있는 거야? 그렇게 보는 눈이 삐꾸지. 세상에... 저런 세금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저런 놈들 때문에 그 피같은 돈을 내야 한단 말이야아아?" "어쩔 수 없지. 저들은 전문가도 아닌데다가 잃어버린게 없다고 하니까..."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의 눈이 다시 치켜 올라갔다. "전문가요? 나도 전문가가 아니지만 이게 누군가가 일부러 그랬다는 건 알 수 있겠네요. 어휴... 저런 사람들이 경비대라니..." 선애가 분노를 터트렸지만, 그녀 또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푸념 한마디로 끝내고는 비를 들었다. "청소나 해야겠네요. 아, 그리고 좀있다가 가게 좀 봐주세요. 유리창하고 겉창을 새로 달아야 할 거 같으니까 주문 하고 오게요." "그래, 그래. 아, 바깥 화단도 정리를 좀 해야겠던데..." "그러게 말이에요. 식물들이 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창고에 자물쇠를 다는게 좋지 않겠어? 이거 보면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창을 깨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 만약을 대비해서 향수를 보관하는 창고문을 잠궈두는게 좋겠어." 벨타이거의 충고에 선애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물쇠도 같이 주문할게요." 유리창문이야 따로 주문 제작을 해야하기 때문에 며칠 걸리지만, 겉창이나 자물쇠는 그날 안으로 사람들이 와서 수리하고 새로 달아줄 수 있었다. 창문이 뻥~ 뚫리기는 했지만 향수나 향수병이 도둑 맞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청소를 깨끗이 하자 얼추 가게는 문을 열 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깨진 창문을 의아해하며 물어올때마다 애매하게 웃으며 무성의한 경비병이 툭 내뱉고 간 말을 그대로 읊어줄 수 밖에 없었던 선애는 가게문을 닫자 기분이 무지 가라앉아서 사라와 나는 물론이거니와 항상 틱틱 건들이던 벨타이거 조차도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할 정도였다.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다..." 아마 선애의 이 심정을 조금이라도 눈치 챘을텐데, 그렇지 못한 그 괴씸한 범인들은 기가막히게도 그날 밤 또 가게에 온 것이었다. 그것도 이번에는 아예 창문을 뚫고 가게 안으로 들어와 향수와 유리병을 보관하고 있던 창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벨타이거의 충고도 있고, 이왕 하는거라 생각해 튼튼한 자물쇠를 달았기에 망정이었지 안그랬으면 창고를 뚫고 들어가 유리병까지 훔쳐갔으리라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끼칠 지경이었다. 흙이 잔뜩 묻은 발을 가지고 들어와 가게 안을 둘러보던 범인들은 창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자물쇠를 몇번이나 뭔가 단단한 물건들로 두들겨보고 칼 같은 것으로 문짝을 찔러봤지만, 여의치 않자 돌아나오다가 괜히 죄 없는 진열대만 뒤집어 엎고 가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흔적들은 정말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 범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흔적들은 없어 선애의 혈압만 높아지게 만들었다. "어떤... 놈들이야.... 죽~었~어어어~~!!" 이번에 벨타이어에게 불려온 경비병들은 차마 또 술 취한 사람 짓이라고 할 수는 없었는지 입맛만 쩝쩝 다시며 '도둑이네...'라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리고는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는 척 하더니 선애와 벨타이거의 눈초리를 견딜 수 없었는지 한 사람이 가서 좀 더 많은 경비대원들을 불러왔다. 그 중에는 열명의 부하를 거느린 경비대 조장도 끼어 있었다. 조장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185 정도는 되어보이는 커다란 키에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가진 거한이었다. 아놀드슈왈츠제네거라는 할리우드의 액션 배우가 새카맣게 태우고 구렛나루를 기른 모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조장님, 여기에 도둑이 든 모양입니다." 남아서 가게 안을 살펴보고 있던 경비대는 조장을 위시한 몇몇의 경비대원들이 우르르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즉시 차렷 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붙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조장이라고 불린 거한의 사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나도 봐서 알아. 훔쳐간 물건은?" "그게 다행이도 보관 창고문이 튼튼해서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하는데요?" "그래? 그럼 도둑이 남긴 흔적은?" "가게 안을 뒤진 것 외에는 다른 흔적이 없습니다." "그럼 도둑을 어떻게 잡아? 우리가 무슨 마법사라도 되는 줄 아는감?" 가게로 들어와서 내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하던 조장은 계속 지켜보는 벨타이거를 돌아보며 말했다. "없어진 물건이 없고, 그냥 가게만 조금 어지럽힌거라 도둑을 잡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군. 내 이쪽으로 특별히 순찰을 잘 돌게 할테니까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쇼.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나 불러주고. 자, 그럼 가자." 어제 벌써 시큰둥하고 무성의한 경비대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이번에도 별로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한거 같았다. 어차피 한국처럼 지문 체취니 탐문 수사니 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도둑이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습니까? 도둑을 잡는데 최선을 다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등등 말이라도 좀 친절하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남?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라니... 참내... 저러고도 저 사람들은 이 시에서 나오는 월급을 받아먹고 살 수가 있는 걸까나?' 선애는 그들에게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는지 가게를 나가는 경비대원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라와 함께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창고 문에 자물쇠를 단 게 다행이었어요. 그쵸?" 선애의 눈치를 슬슬 살피던 사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선애가 단지 고개만 끄덕여주는데 대꾸는 다른데서 날아왔다. "그러게 말이야. 거기다가 유리 창문도 도착하기 전이라서 무척이나 다행이지. 만약 창문이 또 깨졌다면 선애가 혈압으로 쓰러지기라도 했을 걸?" '엑... 그러고보니 선애가 혈압이 좀 높은데... 이거 이러다가 완전히 고혈압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벨타이거 녀석의 말에 나는 은근히 걱정되어서 선애의 얼굴을 살폈다. 이런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가게 안을 청소하던 선애가 갑자기 비지를 멈추더니 몸을 바로 세웠다. "그 놈들... 또 올까? 또... 오겠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아니 이 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묻는 선애의 질문에 사라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고 대신 벨타이거가 입을 열었다. "아마 오지 않을까 싶은데... 왜, 지키고 있기라도 하게?"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선애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 또 오면...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말겠어." "그만 둬. 여자의 몸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오히려 네가 더 위험하겠다. 게다가 그 도둑놈들도 두번이나 이렇게 해놨으니 우리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는 걸 뻔히 알텐데 또 오겠어?" "어쩌면 올지도 모르잖아요?" "오면 네가 더 위험하다니까."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정색을 하고 만류했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이건 내가 허락할 수 없으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도 마." 그렇게 말한 벨타이거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오후가 되어 선애가 가게문을 닫고 집으로 가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고 그제서야 마음 놓고 자신의 갈 길로 갔다. 내가 그걸 알고 있는 이유는... [젠장할... 그렇다고 나 혼자 남겨둘건 또 뭐야?] 선애가 지켜달라고 부탁을 하고 갔기 때문이었다. [어휴, 내 신세야...] 그러한 이유로 문 닫힌 가게 앞에 걸터 앉아 있었기 때문에 벨타이거가 선애가 가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느라 한참 기다렸다가 돌아가는 걸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도둑들은 그날 밤 가게에 들어오지 않았다. 벨타이거도 말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도 벨타이거의 말이 옳게 생각 되었다. 두번이나 연속으로 가게에 해를 끼치러 왔는데, 그걸 가만 냅두는 사람이 바보가 아니던가? 뭔가 조치를 취할게 뻔할텐데 그 다음 날 밤에 또 도둑이 든다면, 나는 그 도둑 머리에 뇌가 분명히 있는지 의심할 거다. 역시나, 그 도둑의 머리에 뇌가 있기는 있었는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안 왔어?/" 가게 안에 마련되어 있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데 어느덧 날이 밝아 출근한 선애가 내 앞에서 손을 슬쩍 흔들어 깨우더니 다짜고짜 묻는 말이 그거였다. [오면 그게 바보지.] 사람이었을때의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런지 나는 길게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쳇... 아깝네. 왔으면 뜨거운 맛을 봤을텐데.../" 선애가 실망스럽다는 듯 투덜댔다. [오길 바랬냐?] "/당연하지./" [바랄 걸 바래라. 무뇌아가 아닌 이상 오겠어?] "/쳇... 나도 아네요./" 선애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쩝 다시면서도 확실히 자기가 생각해도 3일 연속으로 도둑님께서 방문하시는 건 무리라 생각 된 듯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선애의 아쉬움을 안타까이 여겼던 것일까. 오라는 도둑님이 안 오시니 대신 강도님께서 등장하셨다. 그것도 환한 백주 대낮에 말이다. "오오... 이것 참, 괜찮은 가게인데?" 거들먹 거리며 들어오는 폼이 '나 건달이요.'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껄렁껄렁한 패거리 다섯명이서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막 '어서오세요~.'라고 외치려던 사라가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며 선애를 바라봤다. 그나마 손님이 없을때라 그 틈새를 이용해 그 시간까지 팔아왔던 목록을 정리하고 있던 선애의 눈가가 사정없이 찡그려졌다. 그걸 봤는지 껄렁패중 지저분한 빨강머리를 하고 있는 녀석이 히쭉 웃어보였다. 입술은 얇은데 입이 무지 커서 꼭 합죽이같이 생겼다. "뭐야, 우리도 손님이라고. 손님을 이렇게 맞아도 되는 거야?" 하필이면 벨타이거 녀석도 잠시 자리를 비우고 없는 때였다. 선애는 숙이고 있던 상체를 똑바로 펴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네 놈들에게는 안 파니까 당장 나가." "어이고... 고렇게는 못하겠는뎁쇼?" 산발한 갈색머리에 눈가 바로 옆에 상하로 5cm 정도의 가늘고 긴 흉터가 있는 녀석이 껄렁대며 대꾸했다. 그 녀석이 대꾸하는 동안 유리병들을 진열해놓은 진열대로 다가간 빨강머리 녀석이 쓰윽 훑어보더니 그 곳에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은화 10개짜리 유리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오마나, 이게 은화 열개짜리야? 쬐끄만게 되게 비싸네. 그렇게 생각 안 해?" 그 놈은 그 옆에서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사라에게 물어보더니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안 하고 대신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손에 들려있던 유리병이 중력의 법칙에 의하여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고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져버렸다. "어이구, 이를 어쩌나?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를 해버렸네..." 그 놈이 기분 나쁘게 히죽 웃으며 사라를 향해 말했지만, 겁에 질린 사라는 선애에게만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저, 점장니이이임..." 그에 선애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꼬맹이는 가슴 앞에서 팔장을 턱 하니 끼더니 차갑게 말했다. "변상해." "변사아앙? 나도 무지 하고 싶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내가 지갑을 가지고 온 줄 알았는데 안 가지고 온 모양이네?" 양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빨강머리의 태도에 선애의 눈초리가 한층 더 사나와졌다. "그래서, 못 하시겠다?" "그런 거 같아." 여전히 히죽대며 대꾸하는 빨강머리 놈이었다. 그에 선애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회 할텐데?" "후회? 후회가 뭐지?" 능청맞게 고개를 갸웃 거리는 빨강머리의 말을 갈색머리 녀석이 낄낄 웃으며 받았다. "멍청아. 먹는 거잖아." "아, 먹는 거였군? 그거 이만한가?" 빨강 머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진하게 물으며 옆에 있던 또 은화 10개짜리 유리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선애가 피식 웃었다. "또 깨게? 다시한번 말하지만... 후회 할거야." "그래? 그럼 하게 좀 해줘봐. 나도 그 후회라는 걸 좀 해보자구." 빨강 머리는 그래도 낄낄 웃으며 병을 잡아챘다. 그러자. "/언니!/" [오냐.] 나는 빨강 머리 녀석이 병을 집어들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꽈악 잡고 잡힌 손 쪽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인정사정 없이 강하게 쳤다. 인체 중에서 강한 곳 중 하나인 팔꿈치가 약한 곳 중 하나인 옆구리를 쳤으니, 결과는 뻔했다. "꾸엑~!" 돼지 멱따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흘리며 빨강 머리는 잡고 있던 유리병을 그대로 놓치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유리병을 진열대위에 올려진 상태로 잡았다 놓은 것이었기에 유리병은 단지 쓰러졌을 뿐 무사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번 녀석의 옆구리를 발로 세게 걷어쳤다. "꽥!" 그러자 그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두어 바퀴 굴러갔다. "뭐, 뭐야?" "왜 그래?" "너 지금 쑈 하냐?" "이봐?" 빨강 머리 녀석의 갑작스러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나머지 네 명이 당황하며 몰려들었다. 그런 놈들을 가만 내버려 둘 내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다리를 높이 치켜들었다가 빨강 머리 녀석에게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살펴보기 시작하는 사내의 뒷덜미를 발꿈치로 강하게 내리쳤다. "컥~!!" 영화에서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사람에게 직접 행한 적이 없었는데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살펴보던 녀석이 비명을 내지르며 빨강 머리 녀석 위로 고꾸라지자 나머지 세 녀석이 당황했다. "어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벙하게 그들을 부르는, 내 왼편에 있던 놈의 품으로 파고든 나는 무릎으로 가볍게 남자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약한 급소를 쳐 올렸다. "크윽..." 가볍게 친다고 쳤는데, 너무 약한 부분이거나 아니면 내 무릎에 그래도 원한이 들어갔는지 녀석은 제대로 신음 소리도 못 내고 눈이 허옇게 뒤집어져서 사타구니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나머지 두 녀석이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한 녀석이 선애에게 잽싸게 다가들었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너?" 그러나 그걸 가만 냅둘 내가 아니다. 녀석이 선애의 멱살을 잡기도 전애 녀석과 선애 사이에 끼어 든 나는 그 놈이 내민 지저분한 손을 잡은 채 그 녀석의 품쪽으로 살며시 돌아 들어갔다. 그러자 그와 함께 내 손애 잡힌 녀석의 팔이 뒤틀려 뒤로 꺾어져 들어갔다. "끄아아아..." 나도 당해봐서 아는데, 이렇게 뒤로 꺽인 상태로 살짝만 좀 더 틀어 올려주면... 무지무지 아프다. 내가 당할때는 그래도 시범이거나 연습이라 살살 당한 거지만, 지금 나는 인정 사정없이 꺾고 있던 터라, 아마 내가 당할때의 통증보다 대략 10배 정도는 더 아플 거다. 그 상태로 나는 놈의 등 가운데를 팔꿈치로 강하게 내리 친 뒤 녀석의 몸이 아래로 내려갈때를 틈타 무릎으로 복부를 올려쳤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이래뵈도 나는 해동검도 2단이었다. 검도를 배우는 틈틈이 재미로 배운 호신술을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하여간 그때 확실하게 배워두길 무지 잘 했다. 뭐, 현실에서 정말 여러명의 건달들을 만났다면 이렇게 용감하게 맞서 싸울 정도의 실력은 안되었겠지만, 여기서는 상대에게 내 모습이 안 보인다는 것과, 상대가 내지르는 주먹은 전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무지 뛰어난 장점이 있었으니 전혀 몸 사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선애를 향해 달려가던 녀석도 비틀거리다 꼬꾸라지자 유일하게 서 있던 녀석이 덜덜 떨며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동료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으니 두려운게 당연했다. 그나마 보이는 상대가 쓰러뜨린 거라면 그 상대를 향해 달려들기라도 하겠지만, 녀석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글쎄... 유령이라도 나타났나보지.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건가?" 내가 녀석에게 다가가는 때를 노려 선애가 친절하게 묻자 녀석이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뛰어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하다가 쿠당탕~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벌써 녀석에게 다가간 내가 놈의 발을 걸었던 것이다. 그래도 녀석은 빨랑 이 곳을 나가고 싶었는지 심하게 넘어져 무지 아플텐데도 아랑곳 안 하고 벌떡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물론, 내가 놈이 몸을 일으킬때 엉덩이를 뻥~ 하고 차주어서 다시 고꾸라졌지만... 그리고 들리는 선애의 무지 고소하다는 목소리... "쯧쯧, 사람들이 말이야 양심이 있어야지. 그냥 가려니까 그렇게 벌을 받는 거 아니야. 가려면 변상을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선애가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지만 녀석은 엉금엉금 기어서 무조건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말을 안 듣는 녀석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녀석의 머리카락을 조금 잡고는 강하게 뒤로 잡아당겼다. "꽥!" 머리카락은 한꺼번에 몽땅 잡아당기는 것 보다는 이렇게 일부분만 잡아당기는 게 더 아팠다. 게다가 뒤통수 부분을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가 잡고 있던 머리카락의 대부분이 빠져 그 녀석은 뒤통수 부분에 백원짜리 동전만한 땜통이 생기고야 말았다. "어머나... 무지 아프겠네.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 그냥 가면 안된다고 했지? 아마 계속 그냥 가려고 하면 더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거다. 아...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한지 몰라. 이런걸 다 일일이 설명을 해주고 말야." '착한 사람 다 죽었다, 인석아...' 선애의 말에 내가 쓴 웃음을 흘리는데, 나에게 머리카락을 한 웅큼이나 쥐어 뜯긴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놈은 갑작스러운 아픔때문인지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있었다. "으, 은화 10개만 내면 돼?" "무슨 소리. 유리병 값 은화 10개, 사라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준 값 은화 10개, 영업을 방해한 값 은화 10개 해서 도합 은화 30개야." 선애가 손가락을 하나 하나 꼽아가며 계산을 하자 녀석이 눈을 부릅떴다. "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억지가..." 녀석의 말에 선애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작게 아~ 하는 탄성을 발했다. "아, 깜빡 했는데, 한가지가 더 있네. 내 말을 안 들어서 안 들어서 내가 계속 설명하게 만든 값. 말을 많이 하는게 얼마나 귀찮은 줄 알아? 그것 값 은화 10개 해서 도합 은화 40개네." "마, 말도 안돼." 녀석의 입이 떡 벌어지자 선애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쯧쯧,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넌 내 말을 거부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가볍게 녀석의 약한 옆구리살을 강하게 꼬집어줬다. "으따따따따~~" 괴상한 비명을 흘리며 녀석이 펄쩍 뛰자 선애가 무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거 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 어허... 자꾸 이렇게 날 귀찮게 해서야 값을 올려야 받아야 하는거 아닌가 몰라. 한 마디 할때마다 은화 한개씩 올릴까나..." 선애가 은근한 표정으로 말을 흐리자, 나는 기꺼이 녀석의 반대편 옆구리도 꼬집어 줬다. "으갸갸갸~~ 알았어, 알았다구. 알았으니까 그만 해." 그 녀석은 드디어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몸서리를 치며 품 속에서 꾀죄죄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선애 앞에 던졌다. "그거면 돼지?" 그에 선애는 자신의 발 밑에 떨어진 주머니를 잡아서 안의 내용물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쏟아놨다. "에게... 이게 뭐야? 겨우 은화 3개에... 동전 10개? 택도 없잖아? 너 지금 장난하냐?" 평소 가지고 다니는 돈 치고는 넉넉한 편이었지만, 선애는 불만이라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녀석을 쳐다봤다.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인데..." 차갑게 말을 내뱉는 선애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녀석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나한테는 그것 밖에 없다고! 그게 다란 말이야." "그럼 몸으로 때우든지." 단호하게 내뱉는 선애의 말에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만... 솔직히 나는 잘못이 없어. 저 놈이 갈데가 있다고 해서 같이 온 것 뿐이야. 여기에 오는지도 정말 몰랐다구." 두 손까지 휘저어 내뱉는 폼을 보아하니 단단히 겁에 질린 거 같았다. 이 정도면 아마 다시 이 가게에 오기는 커녕 근처에 오기도 싫어할 것 같았다. "그건 네 사정이지. 어쨌든 이 가게에 오기는 왔잖아. 그러니까 은화 40개를 못 내놓겠으면 몸으로 때우라니까." 선애가 한발 성큼 다가오며 말하자 녀석이 엉덩이를 끌며 뒤를 물러나더니 갑자기 뭔 생각이 들었는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기, 기다려. 다른 녀석들도 돈을 좀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으래?" 선애가 반응을 보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녀석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후다닥 일어나서 여전히 가게 한 가운데에 뒤엉켜 쓰러져 있는 괴씸한 놈들을 하나하나 헤쳐(?) 놓더니 녀석들의 품속을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아하니 녀석들 그 동안 정신을 잃은 듯 꼼짝 않고 있더니만 나머지 한 녀석이 자신들의 품속을 뒤적거리자 안 뺏기려고 안간 힘을 쓰는게 눈에 보였다. 아마도 벌써 정신을 차려는데, 나머지 한 녀석이 당하는 걸 보니 그냥 기절한 척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애도 그걸 봤는지 피식 웃었다. "그냥... 귀찮은데 몽땅 발가 벗겨 버리는게 편하지 않을까? 일부러 뒤질 필요도 없이 말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품속을 뒤지지 않게 옴찔 거리던 녀석들의 몸이 하나같이 축 늘어졌다. 덕분에 수월하게 품속을 뒤져 돈주머니들을 꺼냈지만, 나온 돈은 별 볼일 없었다. 한 녀석은 아예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나머지 세 녀석도 기껏 은화 두, 세개에 동전 정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아.... 은화가... 에게... 겨우 10개 채웠네? 거기에 동전이... 43개군. 이거... 내가 너무 밑지잖아? 어이, 그렇게 생각 안 해?" 동료들의 품을 다 뒤적거린 후 착 하고 무릎을 꿇고 있던 녀석에게 말하자 녀석이 죽상을 하고 대꾸했다. "좀 봐줘. 정말 그것 밖에 없단 말이야." "너, 뒤져봐서 나오면 동전 하나 당 한대씩이다?" 선애가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지만, 무릎 꿇은 녀석은 꿋꿋했다. "정말이야. 정말 그게 다라니까." "좋아, 그렇다면... 에이, 하나씩 일일이 뒤지기 귀찮다. 그냥 한꺼번에 태워보면 나오는게 있겠지. 어차피 동전은 타지 않을테니까. 안 그래?" 그러면서 마지막에 선애가 나를 바라보며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녀석들의 머리 위로 내 두팔 가득 안아도 모자를 만큼 아주 커~ 다란 불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제일 먼저 그 불덩어리를 본 무릎을 꿇고 있던 녀석은 그걸 보자마자 '히이이익~~'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거의 기다시피 달아나 버렸다. 얼마나 행동이 잽쌌는지 미처 내가 잡을 새도 없었다. 그 녀석의 행동에 기절한 척 하고 있던 갈색 머리 녀석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는지 가늘게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펴 보다가 자신들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불덩어리를 보고는 기겁해서 벌떡 일어났다. "우아아악~!!" 갈색 머리의 비명에 나머지 기절한 척 하고 있던 세명이 놀라서 눈을 뜨자마자 그들 역시 갈색머리 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아아악~!!"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향해 돌진했다. "우아아아아악~~!!" 메아리치는 비명소리만 남겨놓고 말이다. 그 모습에 나는 잽싸게 불덩어리를 끄고는 문으로 달려갔다. 이왕 돈을 받기 시작한 거 변상은 제대로 받아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말이다. [갔다 올께.] 선애를 향해 여유있게 손까지 흔들고 작별 인사를 한 나는 본격적으로 몸을 날려 녀석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시내 대로로 도망가는 대신 골목으로 들어가 여기 저기 헤집고 다녔다. 가끔씩 뒤도 돌아보고 너무 코너를 돌다가 가끔 달린데 또 달리는 걸 보니 혹시나 있을 미행을 방지하려는 듯 했다. 그러한 나의 추측은 인적이 별로 없는 좁은 골목길을 한참이나 헤집고 다니던 녀석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숨소리도 죽인 채 조용히 사방만 경계하는 것으로 확신이 되었다. 막다른 골목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동작이나, 몸을 숨기자마자 숨소리도 죽이는 게 엄청 재빠르고 익숙한 것을 보니 이런 짓을 한 두번 한게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통용될 지 모르는 그 수법이었지만, 그 놈들 중 한 녀석의 어깨에 매달려서 편하게 날아(?)온 나에게는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대로인데다가 중심가가 시작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변두리라서 그런지 대로의 뒷편에는 좁다란 골목들이 꽤나 많았다. 거칠어진 숨이 완전히 가라 앉을 정도에서 한참이나 더 그렇게 몸을 숨기고 있던 그들은 자신들을 미행하는 어떤 기척도 없는 것에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쫓아오는 놈은 없는 거 같지?" "그래. 그냥 겁만 주려고 했던 모양이야." "젠장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법사라도 있었나?" 나에게 마지막으로 맞는 바람에 자신의 주머니는 물론 동료들의 주머니까지 다 뒤져야 했던 녀석이 투덜거리자 갈색 머리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우리가 오늘 재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재수가 없기는... 역시 오늘 가는게 아니었다니까. 이틀이나 도둑이 들었었는데 아무런 방비도 안 하고 있을리가 없잖아?" 빨강 머리 녀석이 투덜거리자 갈색 머리 녀석이 인상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그래서 오늘은 밤에 안 가고 낮에 갔잖아. 게다가, 안 가면 어떻게 할 건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아쒸... 그렇다고 있는 돈까지 다 털어가냐... 그 서대륙인도 정말 지독하다." 맨 먼저 자신의 주머니를 내주던 녀석이 투덜거리자 동료들의 사나운 눈초리가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는 네놈은?" "바보같은 놈. 네 것만 내놓을 것이지 남의 주머니는 왜 뒤져?" "너때문에 내 돈까지 내놔야 했잖아?" "에라이, 멍청한 자식아." 사나운 눈초리 뿐만이 아닌, 분노에 찬 펀치가 작렬하자 맨 처음 주머니를 털린 녀석이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무지 억울하다는 눈초리를 던졌다. "아씹. 그럼 네놈들이 안 내놓는다고 했으면 됐잖아? 왜 나한테 그래? 지들도 정면으로 대들지도 못했을거면서. 그리고, 내가 아니었으면 네 놈들 다 타죽었을지도 몰라. 그 커다란 불덩어리를 보지도 못했어?"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녀석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동료에게 분노의 펀치를 먹이던 나머지 네 녀석의 얼굴이 헬쓱해졌다. "맞아... 나는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너 뿐이겠냐... 머리 위에 그 커다란 불덩어리라니..." "조금만 더 기절한 척 했어도 우린 타죽었을 거야." "잽싸게 도망치길 잘 했지..." 네 녀석들의 말에 신나게 맞아 슬슬 얼굴이 붓기 시작하는 녀석이 의기양양하게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 나는 얼마나 무서웠겠냐." "아... 젠장... 피 같은 내 돈..." 빨강 머리가 무지 슬프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녀석이 머뭇대며 물어온다. "저기... 형수님께 달라고 하면 좀 주지 않을까? 이거 어차피 형수님이 시키신 일이잖아." "아서라. 성공해도 줄까 말까인데 실패하고 쫓겨온 우리에게 주기나 하겠냐? 형님께 말씀드려서 패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갈색 머리 녀석이 푸념조로 투덜거린다. 혹시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 놈들끼리 작당을 해서 가게로 들어온 게 아닌 모양이다. 이 녀석들이 형님하고 형수님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시킨 일인듯... '흠... 언 놈인지 확실하게 이 댓가는 받아 내야겠어.' "어쨌든, 가자. 실패 했던, 성공 했던 보고는 해야지. 이러다 늦었다고 또 한 소리 듣겠다." 빨강 머리가 힘 없이 말하자 나머지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발을 질질 끌다시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략 30여분 정도 골목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어떤 집의 뒷문이었다. 골목 뒷쪽에 있는 집들보다는 제법 규묘가 큰 2층 집이었는데, 그들은 잘 아는 곳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아닌 뒷문을 통해 간다는게 좀 이상했지만, 먼저 도착한 곳이 이쪽이라 돌아가기 귀찮아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여겼다. 그 뒷문은 주방과 통해 있었다. 작은 펌프가 있고, 여러가지 식기들과 싱크대 역할을 하고 있는 탁자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자 작은 복도가 있고 양 옆과 정면에 문이 하나씩 있었다. 그들은 그 복도에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네 명은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갔고, 갈색 머리를 한 녀석은 정면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네 녀석이 가는 곳이 아닌, 갈색 머리 녀석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가본 나는 좀... 이 아니라 무지 황당스러워 했다. 정면에 있던 문 건너편에 있는 것은 가게였던 것이다. 그것도 내가 한번 본 가게... 바로 향수와 화장품을 같이 팔고 있는 화장품 가게였다. "형수님~!"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 본 갈색 머리 녀석이 작게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바로 이 가게의 주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가게에 왔을때 제법 예쁜 얼굴에 화사한 화장술이라던지 괜찮게 차려입은 옷차림에 감탄했었던 것이다. 이 곳은 우리 야생화 향수 가게에서 시내 중심가로 좀 들어가면 있는, 크지는 않지만 제법 그럴듯한 가게였다. 그리하여 선애가 중간 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는 가게였는데, 그 가게 주인이 우리 야생화 가게에 침입한 놈들과 연관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헤에... 그러니까 이게 바로 싹수 보이는 라이벌을 미리미리 제거한다는 것인가?' 가게 주인이 갈색 머리 녀석의 부름에 가게 일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점원들에게 일임하고 안쪽의 방, 그러니까 네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오자마자 물었다. "어떻게 됐어?" 가게에서 손님을 상대할때는 생글 생글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것이, 여기에서는 찬 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차가운 어투였다. 그녀는 마치 대하기 싫은 사람들을 대하는 것 마냥 표정도 굳어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빨강 머리 녀석이 눈치를 보다 겨우 겨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바보 같은 녀석들. 남자가 있을때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빨강 머리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의 입에서 차가운 질책이 떨어졌다. 그러자 갈색 머리 녀석이 황급히 변명했다. "아뇨, 그게... 저희는 분명히 남자 놈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간 거였습니다만... 하필이면 안에 마법사가 있었습니다." "마법사? 이런 머저리들... 마법사가 있을때 왜 들어가? 마법사가 들어가는 걸 봤을 거 아냐?" "아닙니다. 가게 안에 그 계집애들 둘만 있는 걸 확인하고 들어간 거였습니다. 아마 저희가 가게에 들어간 뒤에 들어왔거나 아니면, 애초에 뒷문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갈색 머리 녀석의 말에 여자는 인상을 팍 찡그린채 붉게 칠해진 입술만 자근자근 씹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여기까지 너희들을 따라온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물론입니다. 확실하게 확인 했습니다." 붉은 머리 녀석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한번 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내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모르게 해야 해." "예, 입을 단단히 봉해놓고 있겠습니다요." "물론이죠." "저희만 믿으십시요." 입 다물고 있던 나머지 세 녀석들이 자신있게 말하자 여자는 몸을 돌리면서 말을 내뱉았다. "그럼 가봐." 그녀의 말에 다른 녀석들은 '역시나...'하는 표정이었지만, 맨 처음 선애에게 돈 주머니를 털린 녀석은 뭔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어... 형수님..." 단단히 결심한 표정에 비하여 목소리는 다 기어들어갔지만, 어쨌든 그 여자가 문을 열기 전에 발목을 잡을 수는 있었다. "뭐야?" 고개만 돌린 채 냉정하게 묻는 여자의 얼굴에 입을 연 녀석이 움찔 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 그게... 저희가 그 가게에서 돈을 다 털렸거든요...." 그 녀석의 말에 여자가 몸까지 완전히 돌렸다. 물론 얼굴은 무지무지 싸늘했지만... "그래서?" "아뇨... 저기... 용돈 좀... 에헤헤헤..." 마지막에는 그래도 애교라도 부려보려고 녀석이 웃어보였지만, 여자는 싸늘했다. "놀고있네..." 그리고는 몸을 휙~ 돌려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말을 꺼낸 녀석은 그대로 굳어 버렸지만, 나머지 동료들은 그런 그를 놀리지 않았다. "힘들었지?" "쯧쯧... 수고했다." "뻔한데 뭐하러 말을 꺼내냐? 바보같이..." "그래도 용기 있네." 위로하는 분위기에 장내가 숙연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한바탕 위로의 분위기가 휩쓸고 지나가자 그 다음에는 분노가 나타났다. "제기랄... 저 여시같은 계집..." "누가 지가 무서워서 자기 말 들어주는 줄 아나?" "지 남편만 믿고 저렇게 오만한 꼴이라니..." "남편만 없었어봐..." "젠장, 우리 꼴이 이게 뭐냐?" 하지만, 그 남편이라는 사람에게 기죽어 사는 그들은 더 이상 뭘 어떻게 하지는 못하고 축 늘어진 채로 그 곳을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야, 가서 한잔 마시자." "그래, 기분도 꿀꿀한데..." "난 돈 없는데..." "그냥 외상으로 해. 외상으로." "맞아, 우리가 외상으로 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러겠어?" 멀리 사라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우선 선애에게 이 일의 전모를 말해주고 아까 그 여자의 남편이 누구인지 알아 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댓가를 받아 낼 방법도 찾아야 하고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선애는 펄펄 뛰었다. "/기가 막혀... 내가 도대체 뭘 했다고 해꼬지를 하는 거야?/" [너에게 무슨 감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잘 되니까 불안한 거겠지. 그래서 가게가 커지기 전에 더 이상 가게를 하지 못하게 회방을 놓은 거야.] "/웃겨. 정말 싸... 으... 심보가 고약한 여자잖아?/" 선애는 나를 한번 힐끔 바라보더니 얼른 말을 고쳤다. 내가 선애에게 꼼짝을 못해도 몇가지는 절대로 양보 안 하는게 있었으니, 그 중 한가지는 욕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뭐, 내가 아니라도 울 부모님이 그런데서 엄격하시기 때문에 선애는 집에서는 절대로 욕을 사용하지 않지만, 밖에서는 장난이 아니었다. 말싸움에서 이기는데 한 몫 단단히 할 정도라니 말이다. 뭐,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고, 녀석이 배시시 웃으며 고백하기로는 말이다. 물론, 가끔 이성이 흔들릴 정도로 분노하면 몇몇개는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금도 튀어 나오려다가 얼른 멈췄던 모양이다. 그런 꼬맹이의 모습에 성인이 되었어도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선애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뭐야, 기분 나쁘게 왜 웃어?/" [언니한테 기분 나쁘다고 그러다니... 뭐, 어쨌든... 나는 그 여자의 남편이 누군지 좀 알아내고 댓가라도 받아 오도록 할게. 내가 없어도 가게 문 잘 닫고 가. 나중에 나는 집으로 가도록 하지.] "/알게써. 아, 그리고... 댓가는 두둑히 받아. 지금 생각해보니 열받아서 도저히 은화 몇개 정도로는 안되겠어. 최소한 금화 하나 정도는 받아 와./" [오키.] 선애에게 들렸다가 다시 그 가게로 돌아가니 슬슬 문 닫을때가 되었는지 가게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기분이 안 좋은지 인상이 찡그려져 있었다. 덕분에 가게 안을 정리하던 두 점원 아가씨는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조심 하는 표정이었다. "아... 정말 열받네... 그 야생화인지 뭔지 하는 가게가 생긴 뒤로 향수 쪽은 매출이 너무 저조해..." 펜 대를 잘근잘근 씹던 그녀는 잠시 후 단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었다. "역시 다른 수를 써야 되겠어." 그 말은 또 다시 가게에 해를 끼치겠다는 뜻일 것이다. '역시... 오늘 안에 혼내줘야겠는걸.' 잠시 후 가게 안을 다 정리한 두 점원들을 내보내고 가게 문을 잠근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알고보니 1층은 가게고 2층은 가정집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부엌이랑 식당 - 아까 다섯 남정네들과 이 여자가 만난 곳. 응접실 겸 식당 이었다. - 이 아랫층에 있기 때문에 윗층은 꽤나 넓직했다. 그렇게 넓은 곳을 제법 잘 꾸미고 사는 걸 보니, 벌이가 괜찮은 모양이었다. '맛벌이라서 그런가?' 2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곧바로 침실로 사용되는 방으로 들어갔다. 제법 커다래서 여러가지 가구가 들여놔져 있었고, 침대 머리맡 벽에도 멋들어진 그림 액자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머리맡에 있는 액자를 떼어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액자로 가려졌던 벽면에 쇠로 된 듯한 자그마한 문이 나타났고, 거기에는 무지 단단해보이는 자물쇠가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금고였던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고 그 안에다 오늘 번 돈 꾸러미를 집어 넣는 것이었다. '오호라... 금고가 있었넹...' 그런데 금고 안에는 조금 커다란 가죽 주머니가 있었는데, 여자는 막 금고 문을 닫으려다가 그 주머니를 보고는 무지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내 돈... 더 큰 가게를 살 돈은 마련됐고... 이제 안을 멋드러지게 꾸밀 돈만 있으면 돼. 그 야생화인지 뭔지 하는 가게보다 훨씬 더 멋드러지게 꾸며야지. 조금만 더 모으면.... 호호호..."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흘린 그녀는 곧 금고 문을 닫아 걸고 액자도 제 자리에 걸어 놓았다. 금고가 있는 곳이 침대 위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곧바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무책임하게 생각해 버렸다. 사실, 들킨다고 해도 날 잡지는 못할테니 말이다. 금고에 돈을 넣어 둔 그 여자가 아랫층으로 내려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준비하려는 듯 부엌에서 이것 저것 꺼내며 막 요리를 하려는 그 순간, 부엌과 바깥이 연결 된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쓱 하고 들어왔다. "어멋, 여보오오~~" 아까 다섯 건달들을 상대할때와는 180도 다른, 애교가 철철 넘치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갑자기 이런 격언이 떠올랐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다.' 라는... 그런데 그 격언이 이 상황과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고민해 볼 사이도 없이, 나는 그녀의 남편을 보고 입을 떠억 벌렸다. 그녀의 남편은 놀랍고 기가 막히게도, 어제 아침에 우리 가게에 도둑이 들었다고 해서 왔었다가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고 갔던 그 경비대의 조장이었던 것이다. '허.허.허... 이런 기가막힌 일이... 아니, 그래서 그 건달들이 꼼짝도 못했던 것이고, 저 놈들이 우리 가게에 와서 그렇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거야?' 왠지 모르게 불법 영업 사장에게서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경찰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흥, 네 놈들은 크게 혼날 거야.' 이런 날 하늘이 돕는 것인지, 정말 운이 좋게도 그 경비대 조장이 오늘 야근이라서 저녁만 먹고 간단하게 씻고 다시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 그래. 열심히 야간 근무를 서도록 해라. 그래도 너그 집에 들어온 도둑은 못 잡을 것이다.' 그래도 그 둘은 알콩달콩 잘 살고 있었는지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씻고 다시 나가려는 조장은 무지 아쉽다는 눈초리로 부인이랑 찐~ 한 키스를 한 뒤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녀 또한 아쉽다는 표정으로 남편이 사라질 때까지 문 밖에서 지켜보다가 한참 후에야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려니 그녀는 왠지 좀 무서워 졌는지 집안 곳곳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한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2층으로 올라갔다. 부엌은 1층에 있는데 목욕탕은 2층에 있었다. 남편이 집을 비우자 오랜만에 느긋한 목욕을 하고 싶었는지 물을 데워 커다란 통에 가득히 채우는 것이었다. '이거 참... 너무 나한테 유리한 상황만 생기네?' 폼을 보하하니 최소한 2, 30분 정도는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을 거다. 거기에 몸을 씻을 시간까지 계산해본다면, 적어도 30분 정도는 목욕탕에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 절반의 시간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녀가 옷을 다 벗고, 그녀의 목에 걸린, 열쇠가 달린 목걸이도 벗어서 놓을 때를 기다리며 그 옆에서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게 왠일... 목걸이는 그냥 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 이런...' 그녀가 열쇠를 벗어 놓고 목욕을 하는 그 시간에 잽싸게 금고 자물쇠를 열려고 했더니만, 행운도 계속 따라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쉬고는 침실로 가서 기다리려고 하던 나는 번쩍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맞아... 어차피 도둑이 들었다는 걸 다 알릴 셈이었으니 저 여자가 잠들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 한 나는 다시 목욕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이제 막 간단하게 몸을 씻고 뜨뜻한 물이 가득 들어있는 욕조 안으로 들어 가려고 하고 있었다. [미안 합니다. 그러나 이건 당신이 맘씨를 곱게 못 써서 일어난 현상이니 탓하려면 자신을 탓하세요.] 비록 보지도 듣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양심상 그녀의 뒤에다 대고 사과를 한 후 나는 옆에 있던, 바가지 대용의 작은 나무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퍼억~ 있는 힘껏 여자의 뒤통수에 대고 휘둘렀더니 여자가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고꾸라 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넘어지는 곳이 욕조 안쪽이라서 내가 놀라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가볍게 혼만 내줄 생각이었지, 여자를 익사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감기까지 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비록 알몸이었지만 여자를 들쳐 업고는 침실로 가서 시트까지 잘 덮어 줬다. 그리고는 여자의 목에 걸린 열쇠를 빼내어 금고를 열고, 아까 여자가 너무도 그윽하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본 커다란 돈주머니를 빼냈다. 쩔그럭 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꽤나 많은 양의 돈이 들어 있는 듯 했다. '흠, 선애가 만족해 하겠어.' 그 소리에 흐뭇해진 나는 금고문은 활짝 열어둔 채로 몸을 돌렸다. 도둑이 들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침실 문도 열어두고, 부엌과 바깥이 연결된 뒷문도 확실하게 열어 두었다. 시각이 밤으로 향해 가는 늦은 저녁 시간이었기에 인적은 거의 없었다. 이쪽으로는 생활 필수품을 파는 가게들만 있었기에 밤만 되면 거리가 썰렁해졌던 것이다. 이 곳과는 반대편쪽, 술집이 있는 곳들은 이 시간이면 무지 북적북적 했겠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안하게 돈주머니를 들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제 13화 최대한 빨리 간다고 갔는데도 휴의 집에 도착하니 선애가 있는 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둠에 잠겨 있었다. 현관문이 잠겨 있을게 뻔했기에 벽을 타고 -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 스파이더맨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무지 능숙했다. - 올라가니 역시나 선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창문이 열려 있었다. 내가 창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자 책을 읽고 있던 선애가 반색하며 나를 맞았다. "/어떻게 됐어?/" 나를 반색한게 아니라 결과를 반색한 것 같았지만... [금고를 털었어.] 그렇게 대답하며 선애에게 돈주머니를 넘겨준 나는 금고 터는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헤에... 그 여자의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 시켰단 말이야? 오오, 검도를 해서 그런가?/" [검도하고는 전혀 상관 없어. 영화에서 처럼 수도로 멋지게 내려친게 아니라 그냥 바가지통으로 휘갈겼거든.] "/더 잘됐네. 혹이라도 하나 크게 생겼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그 여자를 그냥 냅두고 싶지는 않았거든. 언니가 그냥 댓가만 받아 왔다면 좀 섭섭했을 거야./" 선애는 생글 생글 웃으며 돈주머니를 들어보더니 그 묵직한 무게에 입이 더 벌어졌다. "/오옷... 이거 꽤 무겁네. 얼마나 들었길래 그래?/" [뭐, 대충 말을 들어보니 좀더 넓은 가게를 살 돈이라고 하긴 하더라만....] "/그으래? 어디.../" 내 말에 선애는 반색하며 침대 위에다가 주머니를 쏟아 놓았다. 그러자 와르르르~~ 하며 떨어지는 은색 광채들이란... "/앗싸, 이거 다 은화잖아? 오옷, 횡재했네, 횡재 했어. 언니, 빨리 세어보자./" 무더기로 쏟아지는 은화들의 모습에 선애가 헤벌죽 해져서는 잽싸게 침대에 앉아 은화들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그 반대편에 앉아서 은화들을 세기 시작하는데... [어머나, 선애야 이것 좀 봐라.] 은빛으로 빛나는 동전들 사이에 다른 색을 띈 동전을 발견한 나는 놀라서 선애를 불렀다. "/왜? 어라라... 그거 금화잖아?/" 그랬다. 은화들 사이에 금화가 섞여 있는 것이었다. 비록 대부분이 은화이기는 했지만, 금화가 하나라도 끼어 있다는 건 값어치를 화악 올리는 것이었다. 금화 하나가 은화 100개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금화가 하나가 아니라 무려 3개였다. "/오호라... 이런 행운이. 그 여자 배 좀 아프겠는데? 킥킥킥.../" [음... 너무 많이 가지고 온 건 아닌가 몰라.] 뒤통수도 한대 때려 줬기때문에 생각보다 너무 큰 돈을 본 나는 쬐께 양심이 찔렸다. 그러나 선애는 나와는 달랐다. "/무슨 소리. 이 정도면 충분한 거야. 언니는 유리병 하나 깬 거만 생각하고 다른 건 생각 안해? 유리창이 두개나 깨졌고, 덧창도 완전히 부서졌잖아. 덧창은 두번이나 부서졌다. 거기에 창고 자물쇠를 사서 달았잖아. 그거 생각하면 이 정도야 약과지./" [금화 빼도 그 정도는 충분히 변상하고 남는데...] "/금화는 이자야./" 단호한 선애 말에 나는 기가막혔다. [이자가 너무 비싸잖아?] "/당연하지. 복리 이자니까. 이런 말 몰라? 은혜는 10배로, 원수는 100배로./" [푸헐...] 선애의 말에 내가 헛웃음을 흘리자 선애가 쌍심지를 키고 날 바라봤다. "/언닛, 내가 그렇게 웃지 말랬지? 늙은이 같다고 했잖아./" [뭐 어떠냐? 이제는 내가 이렇게 웃든 말든 너 밖에 볼 사람이 없는데...] "/무슨 소리. 혹시 알아? 잘 생긴 총각 귀신이라도 나타날지. 사람은 언제 어느때고 항상 준비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기회가 왔을때 딱 잡을 수 있지./" [기회는 무슨 얼어죽을 기회... 그냥 포기하고 살란다.] "/쯧쯧, 언니는 그러니까 연애 한번 못해본 거라니까. 그래서 결국 처녀귀신이 된 거잖아. 억울하지도 않아?/" [음... 좀 억울하긴 하네.]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태도를 조신하게 좀 해. 아아... 유령이 멋 부리게 할 수 있는 방법 어디 없나?/" [냅둬유. 너는 연애 안 하냐?] "/바쁜데 연애는 무슨 연애. 게다가 연애를 하려면 내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괜찮은 남자를 물지. 지금 가게는 너무 작단 말야. 하려면... 한... 2층짜리 가게는 내 놓고 해야지. 나는 나랑 비슷한 남자거나 좀 못하는 남자랑 할 거야. 그래야 내가 휘어잡고 살지. 나보다 잘난 남자는 피곤해./" [어느 세월에 2층짜리 가게를...] "/두고 보라니까. 노처녀 되기 전에 하고야 만다. 아아... 그러기 위해선 뭔가 좀 특별한게 필요한데 말야. 어쨌든, 우선 지금은 돈을 다 세는게 관건이야. 이거 가게 자본으로 써야지. 후후후.../" 놀랍게도 돈은 금화가 3개였고, 은화가 2백개였다. 그러니까 총 금화로 치면 5개고 은화로 치면 500개의 돈이었다. "/오옷, 완마 완마.../" 그 돈을 다시 주머니에 쓸어담으며 선애가 행복하게 중얼거렸다. [완전히 마음에 들었다고?] "/웅, 웅. 으흐흐흐.../" [너두 참... 웃음이...] "/괜찮아, 괜찮아. 므흐흐흐.../" [입 찢어진다...] "/이런 걸로 입이 찢어질 리가 없잖아... 쿡쿡쿡.../" 선애는 돈 주머니를 고이 챙겨서 옷장 안에 마련되어 있는 괴짝에다 잘 집어 넣었다. 이건 선애의 금고로 휴에게서 보석을 판 댓가로 많은 돈을 받았을때 즉시 사서 마련해 둔 것이었다. 옷장 안에 붙어 있어서 괴짝을 들고 가려면 옷장에 붙어있는 부분을 뜯어내거나 아니면 옷장 채로 들고가게 되어 있는데다가, 괴짝도 제법 튼튼한 것이고 자물쇠도 달려 있는 것이었다. 뭐, 그렇다 해도 허술한 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집이 휴의 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든든한 방어벽이 되었다. 여기는 교육장이었기 때문에 규칙이 엄격했고, 엄격한 만큼 처벌도 강했다. 뭐, 가장 강한 처벌이라고 해봐야 여기서 쫓겨나는 것이었지만,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처벌을 받는 것 중 하나가 도적질이었다. 무사히 여기서 도적질을 해서 밖으로 나 해도 정보길드의 추적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다. 뭐, 그렇게 해도 무사한 것은 휴 정도이겠지만, 그는 그런 짓 할 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애가 큰 돈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 놓고 자기 방에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선애는 벨타이거에게 가게를 맡기고 기분 좋게 거리로 나섰다. 어제 밤에 뜻밖의 수확이 커서 날건달 녀석들에게 크게 놀란 사라에게 뭔가를 사줄 생각이기도 했고, 또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같은 업종 가게들을 꼬옥 둘러보라는 캐더린의 충고를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슬슬 유리병들도 떨어져 가고 있었고, 또 새로운 것들이 나왔는지도 알아보러 갈 겸사겸사였다. "/흐음... 우선은 거기부터 가볼까나?/" 거리로 나온 선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록 확실하게 상대방을 지칭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어딘지 알만 했다. [어젯밤에 도둑이 든 가게 말이지?] "/후후후... 응./" [어차피 가는 길이잖아. 가까운 곳부터 돌아다녀봐.]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네./" 하지만, 우리 야생화 가게 근처에 있는 향수 가게들은 모두 작은 축에 속하는 곳이라 그런지 전에 왔었을때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신제품이 나온 것도 아니었고, 울 야생화 가게가 괜찮은 수입을 얻는데 자극을 받아서 인테리어를 바꾼 것도 아니라 기껏 들린 보람이 없이 그 가게들을 나와야 했다. [흐음... 아무래도 한달 정도의 기간에 뭔가 틀려진 곳이 있으려면 규모가 좀 커야 하는 곳인가봐. 하기야, 우리 가게도 한달 좀 지났지만 인테리어를 바꾼 다음에 변한 건 없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서 슬슬 뭔가 변화를 주고 싶어. 신제품은...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그래서 차라리 향수 제조사를 한군 데 더 알아볼까 생각중이야./" [아하, 그래서 향수 종류를 늘리게? 하지만, 질이 낮은 향수는 들여놓지 말아라. 차라리 종류가 적어도 질이 좋은 걸로 승부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숫자는 적어도 질은 괜찮은 가게로 인식되는게 좋지 않아?] "/알았어. 생각해 볼께. 하지만... 그게 아니면 차라리 향수와 화장품을 같이 팔아도 될 거 같기도 하구 말야. 바로 저기... 어라, 뭔 일이 있나본데?/" 몇 군데의 작은 향수 가게를 들렀다 드디어 선애가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가게에 막 들어서려던 우리는 안쪽이 뭔가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아채고 슬며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오~~ 그 돈이 어떤 돈인데에에~~ 아이고오오오~~" 가게 가운데에 주저 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는 여인과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등치 좋은 남정네. [야, 저들이 바로 이집 주인하고 그 남편이야.] 그리고 주변에는 경비대원 복장을 한 여러 사람들이 가게 안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그건 우리 가게에 도둑이 들었다고 그들을 불렀을때와는 정말 180도 다른 행동들이었다. 그 모습에 선애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며 입 안에서 뿌득~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아마도 무지 열받은 듯.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슬프게 우는 여인을 보더니 주먹이 스르르 풀렸고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아마 오늘 장사 안 하는가보네." 괜히 아란티아 대륙어로 중얼거린 선애는 몸을 돌려 한참을 걸어 그 곳에서 벗어나더니 작게 키득대기 시작했다. "/쿡쿡쿡... 아, 너무 고소하다. 그렇게 도둑 맞은 기분이 어떤 지 알았으니 다시는 남의 가게를 털라고는 못하겠지? 다시 한번 그랬단 봐라. 다시는 가게를 열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어./" [야, 야. 어차피 그것도 날 시킬 거면서 왜 네가 하는 것 처럼 그러냐?] 내가 기가막혀서 묻자 선애가 날 보더니 태연하게 싱긋 웃어보이는 것이었다. "/언니가 내 언니잖아./" [이야... 내가 니 언니라는 이유 하나로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냐?] "/언니면서 그 정도도 못해주남? 언니가 좋은게 뭔데?/" [허어... 너는 내가 뭔가 토 달때마다 매번 그러더라. 질리지도 않냐? 레파토리를 좀 봐꿔봐라.] 차마 못하겠다는 말이 안 나오는 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내며 괜히 투덜거렸다. '어휴... 저 녀석한테 꼼짝도 못하는 나도 바보지... 에휴... 내 신세야...' 그렇게 선애는 기분 좋아서 가벼운 걸음 걸이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라이벌 가게들을 한바퀴 쭈우욱~~ 돌아 새로 나온 신제품들을 꼼꼼하게 체크한 다음 굉장히 고급 향수 두개를 골랐다. 자스민과 휴에게 선물할 거였다. 사실 그 동안 계속 그 둘에게 고마워 하면서도 제대로 된 선물 하나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큰 마음 먹고 하나 마련한 것이었다. 뭐, 내 보기에는 생각지도 않은 큰 돈이 들어와 그런 것 같지만 말이다. 그 뒤에 유리 공예소에 들려 새로 나온 예쁜 장식품들 몇몇가지와 향수병들을 주문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위한 쇼핑을 했다. 선애가 이 곳에 와서는 모든 상황과 여건 때문에 못해서 그렇지, 사실 쇼핑을 무지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기야, 옷이나 악세사리 같은데 항상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데 센스가 좋은 거긴 하겠지만.... 하여간, 그런 애였는데 그 동안 못해서 얼마나 손과 발이 근질근질 거렸겠는가? 전에 캐더린이 한번 쇼핑을 데리고 다녀준 뒤로는 틈 있으면 쇼핑을 하려고 벼르고 별렀던 것이다. 양 팔 가득히 마음에 든 옷들과 악세사리들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선애는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서 입이 마구마구 벌어졌다. 그 모습에 옆에서 쫓아가던 나는 웃으며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에구... 저렇게 좋을까... 이번에 받아 온 돈 다 쓰는 건 아닌지 걱정했네. 그나마 사라 선물 안 잊어서 다행이야.' 선애가 이번에 인심을 왕창 쓰기로 했는지 사라 선물까지 왕창 샀던 것이다. 근 한달동안 같이 일하면서 틈틈히 사라의 형편을 들은 선애는 그 애가 안됐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지 이번에 자기 것들을 사는 중간 중간 사라에게 어울릴 만한 몇몇가지를 같이 골라 사들였던 것이다. 사라는 이 도시에서 좀 멀찍이 떨어진 작은 마을 출신이라고 했다. 사라의 아버지는 그 마을 근처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귀족에게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가난한 소작농이었는데 자식이 사라까지 총 다섯이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집안의 장남 녀석이 뭔 사고를 쳐서 남의 집 기물 부셔먹고, 자신도 다치고 남도 다치게 만들어서 큰 돈이 들었다나? 그리하여 그 집안의 첫째이자 장녀인 사라는 나이도 찼겠다 싶어 돈을 벌기 위하여 이 도시로 왔다고 했다. 그런데, 사라야 스스로 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캐더린의 가게로 팔려온 것 같았다. 그런 걸 캐더린이 그 애를 가엽게 여겨 선애에게 그냥 넘겨준 듯 했다. 하기야, 내가 지켜본 사라의 성격 상 그러한 곳에서는 버티기 힘들 것 같기는 하다. 사라는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애가 너무 착해빠져서 클럽 같은데서 채 적응하기도 전에 망가져버릴 듯 했던 것이다. 캐더린도 그걸 아니까 가엽게 여긴 거겠지... 뭐, 소설 상에서도 아니면 과거 한국에서도 흔하면 흔하던 이야기였지만, 선애는 막상 그러한 존재를 실제로 보니 무지 가엽게 느껴진 모양인지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마치 자기가 친 언니라도 된 양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하는 거였다. 꼬맹이 녀석이 학교에서도 친한 후배들에게는 이것 저것 챙겨주는 자상한 선배라 인기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도 막상 그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자 쬐께 서운하기는 했다. '나한테는 바라기만 한 주제에...' 선애가 사라에게 해주는 반만 나에게 해줬더라면 이렇게 서운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뭐... 그러한 감정은 잠깐 뿐이었고 - 사실 이제와서 선애가 나에게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선애가 사라를 잘 챙겨주는 걸 보니까 제법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나도 사라가 안됐기도 하니 선애가 넉넉한 가운데서 챙겨주는 게 싫을 리도 없지.' 그렇게 혼자 여러가지 생각을 해가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앞에서 잘만 걸어가던 선애가 딱 걸음을 멈춰 섰다. "아, 저거..." '으잉?' 선애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고개를 들어보니 선애가 길 한쪽으로 다가가고 있는게 보인다. 그래 뭔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길거리에 여러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팔고 있는 좌판대 앞이었다. [이거 사주려고?] 그 좌판대 위에 올려져 팔리길 기다리고 있는 것들은 자그마한 인형들이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던 비비라던가 미미라던가 아니면 커다란 곰인형이나 강아지 인형이 아닌, 직접 손으로 새겨 만든 듯한, 내 손바닥 만한 자그마한 목각 인형들 이었다. 뭐, 병정 놀이 하는데 쓰일 수는 있겠지만, 그거 보다는 장식용으로 써야 할 듯한데, 솜씨가 좋은 사람이 만든게 아닌지 내 보기에는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색을 입힌 것도 있었지만, 색이 잘 먹히지 않아 오히려 지저분한 느낌만 들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애는 그런거에 별로 개의치 않는지 그 앞에 주저 앉더니 하나도 아니고 두개나 덥썩 집어드는 것이었다. 평소 나보다 더 센스가 높아서 조잡하다고 할 수 있는 것들에게는 눈 하나 주지 않던 녀석이라 나는 솟아올라오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야... 네가 웬일로 이런 것들을 사냐?] 그러나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좌판대에 앉아 있던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내에게 값을 치른 선애는 아무 말 않고 몸을 돌려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걸음이 아까보다는 훨씬 빨라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잽싸게 선애의 뒤로 따라붙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야아~ 내 말 안 들려? 그리고 갑자기 왜 또 서두르는 건데?] 그러자 그제야 선애가 대꾸를 해온다. "/아아... 빨리 가게에 가려고./" [아까도 가게에 가는 길 아니었냐?] 그런데 선애가 또 갑자기 선다. [이, 이번에는 뭐냐?] 당혹스러워 하는 내 질문에는 대꾸도 안 하더니 지나가는 영업용 마차를 세우고는 잽싸게 탔다. "이스트 거리 끝쪽으로 가주세요." 이스트 거리는 야생화 가게가 있는 곳이다. 이 곳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도로 4개가 있었는데, 각각 위치한 방향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지금 선애가 이스트 거리라고 한 곳은 동쪽 거리였고 나머지는 서쪽, 북쪽, 남쪽 거리가 있었다. [이봐아... 꼬맹아.] 그건 둘째치고 갑자기 잘 걷다가 마차를 타는 선애가 이해가 안되어 묻자 선애가 찡그리며 날 바라본다. "/아, 거... 말 되게 많네./" [네가 대답을 안 하니까 그렇지. 마차는 갑자기 왜 타는데.] 그러자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힘드니까 그렇지. 나 오늘 하루종일 돌아다녔잖아. 거기다 짐도 있어서... 빨리 가고 싶은데./" '체엣... 미리미리 대답 좀 해주면 안되나.' 너무 불퉁한 대답에 서운한 기분을 느낀 나는 더 이상 뭐라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애가 힐끔 날 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또 삐졌지? 입 나왔어./" [냅둬유.] "/으이구... 삐지기도 잘 삐져요. 도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는대?/" [체엣, 네가 보태준거라도 있냐?] 내 불퉁한 반응에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어휴... 가게에 좀 새로운 시도를 해볼 게 생각 난 거란 말이야./" 그리고 그에 불퉁한 기운을 없애버리고 호기심을 보이는 나. [갑자기 뭔 새로운 시도?] 내 질문에 선애가 들고 있던 가방에 던져 넣다시피 넣었던 물건들을 꺼내 보인다. 그건 아까 선애가 좌판대에서 산 것들. 하나는 내 손바닥 만한 정육면체의 상자였다. 속을 파고 뚜껑을 만들어 닫았다 열었다 할 수 있게 만든, 물론 뚜껑이 몸체에 붙어 있는게 아니라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 손바닥 반 만한 새를 조각해놓은 목각 인형이었다. 새 한 마리가 아닌 두마리로 대나무로 만든 듯한 둥지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는 거였다. 그런데 둥지 안에서 잘 굴러(?) 다니는 걸 보니 붙여놓은게 아닌 모양이다. [이게 뭐?] 내가 어리둥정하게 쳐다보자 선애가 씨익 웃었다. "/포장하려고./" [헤에? 아아... 향수 병을?] "/응./" 고개를 끄덕이는 선애의 모습에 그제야 나는 선애가 뭘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오오... 좋은 아이디어인데?] 여기는 '포장'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다. 한국에서야 어느정도 가격 이상의 물건을 사면 손님이 원할때 얼마든지 포장을 해주지 않던가?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다못해 옷가게에서 옷 하나 사더라도 쇼핑백에 넣어 주는 것이 한국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포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뭐, 찾아보면 아예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 지금까지 선애와 내가 큰 가게를 쭈욱 둘러보면서 물건을 샀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 말이다. 기실, 지금 선애가 쇼핑한 것을 담고 있는 가방도 옷가게에서 서비스로 하나 준 것이다. 커다란 천 가방을 말이다. 선애가 많이 사서 서비스로 준 거지, 아니었으면 선애가 따로 돈을 내고 사야 했다. 하기야, 가방 두개는 서비스로 받은 거지만, 나머지 하나는 직접 돈을 주고 산 거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보다 종이가 극히 귀하고 비싸다보니 종이로 만든 쇼핑백 같은 건 생각도 못할 뿐더러, 포장지 같은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 포장하는 것도 꽤나 돈이 만만치 않거나 '포장'이라는 개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만약 우리 가게에서 향수병을 팔때 예쁘게 포장해서 준다면? 모르긴 몰라도 반응이 괜찮지 않을까 싶다. 흔하지 않은 거면 신기하게 생각할테고, 한 번도 그렇게 받아보지 못한 거라면 제법 기분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나무 상자를 만드는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알아보기나 하려고. 그리고 이것도.../" 선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건 대나무로 만든 듯한 새 둥지. "/이 것에 담아주면 좋을 거 같아. 물론, 이걸 예쁘게 칠해야 하겠지만... 연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아아... 하드보드지라도 있다면 딱이겠지만.../" [누군한테 알아보려고?] "/내가 물어볼 사람이 누구겠어? 당연히 자스민 아니면 휴지. 정보 길드라니까 이럴 때 정보를 캐내야지 언제 캐내?/" 선애의 당당한 대답에 나는 킥킥 하는 웃음만 터트렸다. 하지만, 알아보는데 어려움...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좀 시간이 걸릴 거라는 내 예상을 깨고 일은 손쉽게 해결되었다. 그것도 예상외의 인물에 의하여. "어라, 갈대 바구니네요? 우와... 정말 감회가 새로운 걸요?" 선애가 사들고 온 선물에 눈물을 글썽글썽 하며 감격하던 사라가 선애가 선물을 꺼내던 와중 같이 꺼내져 탁자 위에 올려 놓았던, 둥지 역을 하고 있는 갈대 바구니 - 나는 대바구니라고 생각 했던 - 을 집어 들고 말했던 것이다. "감회가 새롭다니?" 사라의 말에 선애가 지나가는 어투로 물어본 건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집에 있을 때 우리집에서 부업으로 이거 만들었거든요. 그때 갈대라면 정말 지긋지긋 했었는데... 큰 거, 작은 거, 그것도 네모 모양, 하트 모양, 원 모양에 색까지 입혔어요." "헤에... 정말이야?" 뜻밖의 말에 선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사라가 베시시 웃어보인다. "에이... 제가 왜 이런거 가지고 거짓말 하겠어요?" "솜씨는 어때? 잘 만들었어?" 선애의 물음에 사라가 고개를 한번 갸웃 거리더니 다시 배시시 웃었다. "에헤헤헤... 뭐... 자랑은 아니지만 사가시던 상인이 제법 잘 만든다고 하시더라구요." "오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만... 한번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음... 색도 넣어가지고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크기는 요만하게..." 그러면서 선애가 양 손을 붙여 약간 오므린 크기를 보여주자 사라가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원한다면 만들어 드릴께요. 그런데... 색하고 모양은 어떻게 할까요?" "네가 말한 네모하고 동그란 모양하고 하트 모양 다 만들어줘. 색은... 글쎄다... 예쁜 색으로만... 하얀 색하고 노란 색, 연두 색, 파란 색, 보라 색 같은 걸로." "네, 최대한 빨리 만들어 드릴께요. 그런데... 지금 재료가 하나도 없으니까 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에요." "아, 재료는 내가 자스민에게 부탁할께. 그럼 얼마든지 구해줄 거야." 적극적인 선애의 반응에 사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스민은 기꺼이 도움을 줬다. 어차피 이 항구 도시 근처에 바다로 흐르는 강이 있었기에 갈대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도시 또한 이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큰 도시였기에 다른 재료들은 사라가 생각했던 것들 보다 훨씬 더 좋은 것들로 구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재료들을 받아 든 사라의 표정이 참 묘~ 했다. 반가워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씁쓸해 하는 거 같기도 하고... 가게 일을 끝내고 돌아와 재료들을 내민게 약간은 양심에 찔렸던지 사라의 옆에 마주 앉아 그녀를 살피고 있던 선애가 그 묘~한 표정을 알아채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 피곤하면 다음에 하던가... 뭣 하면 휴가라도 내주련?" 선애의 말에 사라가 배시시 웃었다. "에이... 요즘은 손님이 많아서 혼자 하기 힘드실텐데요." 그랬다. 요즘 야생화에 대한 소문이 좀 퍼졌는지 전보다 사람이 조금 더 많아졌다. 이럴때 신제품이 하나라도 더 나왔으면 좋겠지만 그놈의 신제품이 언제 나올 지 기약이 없으니 선애가 이런 다른 수를 생각해 낸 거 아니겠는가. 게다가 사라도 한달 이상 되자 그나마 유리병 정도는 팔 수 있게 되었다. 뭐, 유리병이야 '이거 주세요.' 하면 '네~' 하고 써 있는 가격만 받고 건네주는 극히 쉬운 일이었지만, 전에 사라는 너무 숫기가 없어 손님 얼굴도 제대로 못 봤던 것이다. 인사만 겨우 겨우 했었지... 하여간, 그놈의 숫기가 그래도 좀 가셨는지 이제 겨우 판매 대열(?)에 한 발 들어 설 수 있어서 전보다 선에게 훨씬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라가 없다면 선애가 꽤나 피곤할 거다. "뭐... 사장님 계시잖냐. 며칠 동안만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에헤헤... 전 괜찮아요. 피곤한 게 아니라...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 선애의 말에 사라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다가 끝에가서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목소리도 기어들어가고... 좀... 아니, 많이 이상해 보이는 사라의 모습에 선애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왜 그래? 하기 싫어? 그럼 다른 사람을 찾아볼테니까 너무 애쓰지는 말고." 그러자 잠시 머뭇대던 사라가 고개를 들고 힘 없이 미소지어 보인다. "그런게 아니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놀고 있네. 나이도 어린게 무슨 옛날 생각이냐? 하기 싫으면 그만 둬." '선애야... 너도 많은 나이는 아니라고 본다만...' 선애의 말이 좀 웃겼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나는 입다물고 있었다. 사라의 모습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는지 선애의 인상이 약간 찡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선애의 약간 차가워진 말에 - 선애는 인내심이 별로 없는 녀석이다. 상담사는 절대 못할 녀석 같으니라구... - 사라가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많이 익숙해져서 편해졌다고 하나 사라는 여전히 선애에게 꼼짝도 못했던 것이다. "아뇨,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럼 뭔데?" "그게... 그냥 예전에 집에 있던 생각이 나서요." "뭐? 아아... 집에서 부업으로 이런 일을 했다고 했지?" 그제야 선애가 알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에... 그런데... 그때는 좋아서 한게 아니었는데..." 사라의 말에 선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럼 지금 하기 싫다는 말이냐?" 그에 사라가 화들짝 놀라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점장님께는 정말 해드리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냥... 이렇게 제가 하고 싶어서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흐음..." 선애의 눈썹이 제자리로 찾아 오자 그제야 안심을 한 듯 다급해 보이던 사라의 안색도 평소대로 돌아왔다.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저희 집이 가난했다고." "그랬지." "음... 저희 아빠는 농사일을 하셨는데요... 저희 엄마는 그걸 도와드리긴 했지만, 영주님께 빌린 땅이 별로 넓지 않아서요... 그래서 대부분 제 동생이랑 아빠랑 농사일을 하고 엄마랑 저는 다른 일을 했거든요." 사라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며 탁자 위에 올려진 갈대들을 익숙한 손길로 다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애도 요즘 읽기 시작한 '상업에서 성공하려면...'이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책 읽기 무지 싫어하는 녀석이라 얼마나 인상을 찡그리며 읽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사라의 말을 들어주려는 듯 말을 던진다. "그게 뭔데?" "종이 만드는 일이요." "종이?" 마악 책을 읽으려던 선애가 뜻밖의 말을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사라를 바라봤다. 뭐, 사라는 여전히 갈대를 다듬고 있어 선애를 마주 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예. 갈대로 종이를 만드는 일이요." "헤에... 갈대로 종이를 만드냐?" 이 곳이 종이가 무지 귀한 것도 알았고,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는 한국에서 흔히 보던 것보다 질이 훨씬 훠어어얼씬 안 좋다는 건 알았지만, 그 종이를 갈대로 만드는지는 몰랐다. 어쩌면 그래서 질이 나빴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흔히 보던 종이는 나무펄프로 만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건, 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고급 종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바로 '한.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웃어야 되는 건지 감탄을 해야 하는건지 헷갈려 했다. 하기야, 한국의 '한지'도 참 훌륭한 종이로 이름이 높지 않은 가 말이다. 이곳 '서대륙'의 '한국'에서 만든 '한지'도 그렇게 이름이 높단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갈대로 만든 종이는 한국에서 쉽게 보는 종이를 서너장 합쳐 놓은 두께지만 별로 질기질 못해 잘못하면 찢어지기 일쑤인데다가 습기에 약해서 보관을 잘못하면 장마철에 방구석에 한달은 처박아 놓은 땀에 절인 운동복처럼 곰팡이가 피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 유명한 '한지'는 - 우리는 너무 비싼 종이라 아직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냥 듣기로... - 얇기가 얼마나 얇은지 햇빛에 비추면 건너편의 손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인데다가 갈대로 만든 종이보다 훨씬 질기다고 한다. 게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누렇게 뜨는 것 외에는 거의 변질되는 것이 없는 아주 우수한 종이라나? 하지만, 그만큼 우수하기 때문에 값이 엄청 비싸다. 물론, 갈대로 만든 종이도 비싸지만, 이건 종이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수입 용지(?) 이기때문에 값이 장난이 아니게 비쌌다. 하기야, 갈대로 만든 종이 A4 용지 만한게 한장에 1실링 하는데 - 그러니까 한국 식으로 치자면 A4 용지 한장이 500원을 한다는 소리다. - 한지는 한장에 50실링 이라니까 보통 사람은 사서 쓸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 계층에서 사용하는 갈대지(?)를 사라가 살던 마을에서 공동 제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뭐, 들어보니 대충 한지 만드는 것 하고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은데... 갈대를 꺾어 와서 씻은 다음 열심히 삶고 빻고를 반복하여 죽처럼 만든 다음 얇게 펴서 말리면 종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부업으로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갈대로 바구니를 짜서 종이를 가지러 오는 상인에게 팔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 종이와 바구니를 사러 오는 그 상인이 얼마나 악독한 놈이었던지 그렇게 고생해서 만드는 종이를 10장에 1실링으로 사갔다고 한다. 바구니 또한 10개에 1실링으로... 그 마을이 이 도시와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계산하면 그 상인이 얼마만한 폭리를 취하고 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는 농사 짓고 어머니는 종이 만드는 일을 하며 사라와 그 밑에 있는 동생까지 나서서 일을 거드는데도 그 집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 그래 기가막힌 선애가 다른 상인에게 팔면 안되냐고 했더니만, 그 주위의 땅을 가진 영주놈하고 그 상인하고 작당을 했는지 영주 녀석이 다른 상인에게 종이를 팔면 땅을 빌려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세금을 높이겠다고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허어... 정말 나쁜 놈들이네..." "그래서 솔직히 그때는 갈대를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 했었거든요. 마을에서는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영주의 대리인이 와서 협박을 하는 바람에 다른 일을 하지도 못하고... 거의 억지로 하는 일이었기에..." "우와... 그런 나쁜 놈들이 다 있나." 선애의 기가막혀 하는 말에 사라가 생긋 웃어보였다. "에... 그래도 그때의 경험으로 이렇게 점장님께 도움이 되어 드릴 수도 있잖아요." "허이구 야...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생각 못할 거다." 사라의, 착해도 너무 착해빠진 녀석의 심성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그 말에 선애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하기야... 네 성격에...' 그리고 선애의 모습을 보며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사라가 만든 갈대 바구니는 선애가 사가지고 온 것에 비한다면 좀 더 작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훨씬 정교하고 앙증맞고 예뻤다. 양 손을 모으면 쏘옥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으니 엉성하게 만들어도 귀엽게 보일텐데 전혀 엉성하지 않고, 오히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것만 같았다. 그만큼 사라의 솜씨가 훌륭하다는 것이겠지만... 대나무보다 훨씬 가는 갈대의 껍질을 예쁜 색으로 물들여 자른 굉장히 가느다란 줄기로 엮어 만든 것이라서 일반 대 바구니보다 강도는 약해 보였지만, 너무 예뻤기에 약하다는 것 쯤은 얼마든지 허용될 것 같았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런 앙증맞은 바구니 위에 뚜껑까지 만들어 덥을 수도 있게 하자 선애의 입은 떠억 벌어졌다. "오오... 이거 대박 날 것 같다." 사라가 만든 갈대 바구니를 보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는데 사라의 솜씨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갈대로 종이를 만드는 식으로 하여 삶고 빻고 하여 죽처럼 되었을때 종이보다 약 3배 정도 즈음 두껍게 해서 말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충 하드보드지보다 약간 더 두꺼운 상태에 강도는 얼추 비슷한 정도가 되는 것이었다. 사라는 그걸 잘라서 척척 상자를 만들어내는데, 그걸 보니 내가 고등학교 다닐때 한때 유행했던, 하드보드지 잘라서 필통 만드는 게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두꺼운 갈대지 만드는 모습은 또 종이죽으로 탈 만드는 걸 생각나게 하는 것이... 그렇게 만든 탈도 꽤 가볍고 튼튼했던 것 같았는데, 이것도 그런거 같았다. 물론... 습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러가질 생각 나게 하는 작업이군...' 그렇게해서 상자를 만들자 꽤나 가벼운데다가 색도 마음대로 넣을 수 있었고, 크기와 모양 조절도 무척이나 쉬웠다. 그런 것들을 만드는 사라의 솜씨는 무척이나 뛰어났고 말이다. 사라가 만든 갈대 바구니나 상자 안에다가 솜처럼 뽀송뽀송한 갈대 술을 채워 넣고 그 위에 향수를 담은 유리병을 놓자 뭔가 되게 그럴듯~ 해보였다. "오오... 연타 대박이야..."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사라의 솜씨가 좋고, 그 모든 과정에 익숙하다는 건 좋은데... 문제는 그 과정이 길고 힘들다는 거였다. 사라 혼자서는 무리인데다가 사라가 그쪽 일에 매달리면 선애를 도울 사람이 없었다. 그 일을 임시로 하면 좋겠지만, 반응이 좋으면 앞으로도 쭈욱~ 계속 할터인데 그러면 사라를 대신 해 선애를 도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라의 일을 도울 사람도... 처음에는 아예 사라네 식구들을 이쪽으로 데리고 오면 어떨까... 생각 했었다. 어차피 사라도 그게 좋을테고, 게다가 선애 입장에서 봐도 사라 엄마 또한 사라처럼 이쪽 일을 오래 했을테니까 사라만큼이나 솜씨를 가진 한 사람을 더 고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휴에게 슬그머니 부탁을 해봤는데, 휴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사라의 동생들은 어떻게 한 둘 데리고 올 수는 있겠지만, 사라 부모님은 영주에게 발이 묶여서 이주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 큰 도시가 있는데다 영주 또한 무지 나쁜놈일 경우 영지민이 줄어드는 걸 방지하는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바로 영지민의 이동을 불가능하게 묶어두는 것이지. 사라의 부모님이 그렇게 묶여 있었던 것이다. 뭐, 정식으로 길드쪽에서 움직여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지만 그걸 위해서는 큰 댓가가 필요하다며 휴가 선애보고 그걸 지불하겠냐고 했을때 선애는 쫌 망설이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사라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냉정하게 따져 사라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생기는 이익이 그들을 데리고 오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를 충분히 상회하고 남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데리고 왔다 해도 야생화 가게에 취직 시켜주는 것 외에는 그들을 책임져 줄수도 없었고 말이다. 설사 취직이 된다고 해도 처음 투자한 돈을 이제 막 회수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들에게 제대로 월급을 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아...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자스민에게 부탁해서 고용할 사람들을 찾아봐?/" 이것 저것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선애를 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언했다. [우선은... 반응부터 살피는게 어때? 사라네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며칠이나 기다리는 사이 사라가 만든게 좀 많아졌잖아. 그게 얼마나 잘 팔리는가를 보고 사람을 얼마나 고용해서 하루에 몇개 이상씩을 만들 건지 결정하는게 좋을 거 같다. 이렇게 계속 시간만 끌다가는... 사라만 고생하겠어. 벌써 낮에는 점원일을 하고 밤에 바구니하고 상자 만든지 며칠이냐? 이러다 애 병나면 어쩔겨?] 그런데... 그 반응은 무지 좋았다. 하기야, 한국에서 여러가지 장식품이나 인형들에 익숙해진 나나 선애에게서도 감탄을 끌어낼 솜씨였으니 야생화 가게를 드나드는 소녀나 아가씨들, 혹은 새댁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무리도 아니였으리라. 반응이나 좀 알아보려고 몇개를 골라 시범 케이스로 향수병을 넣어 장식삼아 진열대 위에 올려놨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였던 것이다. "어머어~~ 이 바구니 너무 귀엽다아~~" "어쩜. 이렇게 하니까 너무 괜찮다." "어머머... 이렇게 자그마한 상자가 있었네. 색깔도 예쁘다." 그렇게 감탄하는 여인들에게 선애는 생긋생긋 웃으면서 설명해준다. "포장용으로 들여 놓은 거랍니다. 예쁘죠? 혹시 다른 분들에게 선물할때 이렇게 상자에 넣어서 주면 향수병만 주는 것보다 훨씬 모양새가 좋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여기에 리본까지 곁들인다면 금상 첨화죠." 그들 앞에서 상자나 바구니 뚜껑을 닫고 그 위에다 리본을 십자 모양으로 두른 다음 리본 묶기로 마무리를 짓자 여인들은 무지 감탄한 표정이었다. "어머... 나 이런거 처음 봐." "아아.. 나도 이런 선물 받아봤으면..." 새댁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때를 놓치지 않은 선애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남편분께 결혼 기념일이나 생일때 사달라고 졸라보시지 그러세요? 비싸지 않습니다. 바구니나 상자에 넣어서 이렇게 리본으로 묶어드리는 것이 단돈 5실링이니까요. 다른 거 다빼고 단지 바구니와 상자 값만 계산한 거랍니다." "어머, 그럼 바구니나 상자만 따로 살 수도 있어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드릴께요." "그럼 나 이거 사고싶은데..." "아, 그런데 지금은 반응을 보기 위해서 몇개만 가져다 놓은 상태라서요. 반응이 좋으면 아예 정기적으로 가져다 둘 예정이기 때문에 사시려면 조금만 더 기다리셔야 될텐데요." "그래요? 언제부터 판매가 가능하죠?" "예, 처음에 반응을 보려는 기간이 5일 정도였으니까, 그 후부터 정식으로 판매 할겁니다." 아마 그 기간 안에 사라를 도울 사람들과 사라를 대신해 점원 일을 해줄 사람들을 구해야 할 것이다. 선애의 친절한 설명에 바구니와 상자에 감탄한 대부분의 여인들은 5일 뒤를 기약하며 돌아갔고, 몇몇 성급한 아가씨들은 아예 진열대위에 올려져 있는 상자와 바구니들을 꼬옥 자신들에게 팔라며 찜해놓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헤벌쭉해진 선애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스민에게 부탁해서 사람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요즘들어 선애와 나는 처음 자스민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완전히 깨뜨리고 있었다. 단순히 미래의 길드원을 교육시키는 교육장의 기숙사를 운영하는 사감 비슷한 존재 라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의외의 모습들을 계속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동안 휴와 자스민의 저택을 드나드는 선생님들이 자스민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건 그녀가 휴의 부인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스민에게 예의를 차리는 건 휴의 영향이 아닌, 오로지 그녀 자신이 만들어낸 위치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기간동안 미래의 길드원의 기숙사(?)를 계속 운영해왔던 탓인지 그녀는 집에만 있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곳곳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의 탄탄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캐더린 이었다. 자스민과 전혀 접점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친한 관계를 가져 자스민의 부탁 하나만으로 그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일거리를 잠시 미루고 며칠동안 선애를 데리고 다니며 교육 시켜줬으니 말이다. 뭐, 그 뒤로도 가끔 사람을 보내서 틈틈히 선애를 돌보고 있었고 말이다. 그 뒤로도 자스민의 인맥의 능력(?)은 끊임없이 선애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자스민의 능력은 마치 말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는 마법 램프의 지니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 자스민의 능력으로 선애의 사람을 구해달라는 부탁은 하루 정도 지나자 금방 이루어졌다. 선애가 있는 이 도시가 크다보니 도시 변두리쪽에서도 갈대로 종이를 제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사라처럼 갈대로 바구니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 또한 있었던 모양이다. 자스민의 인맥은 그들 중 실력이 괜찮으면서도 경제적인 형편이 안 좋아 정기적이고 괜찮은 수입을 원하는 사람들만 골라내어 하루만에 선애 앞에 데려다놓았다. 처음에 선애는 갈대 바구니나 갈대 종이 상자로 포장을 하는 것은 새롭게 시도하는 것이라 반응은 좋지만 그렇게 많이 팔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기실 선애가 운영하는 가게가 큰 것도 아닌데다가, 그 가게 대부분의 손님들은 남에게 선물 줄 것을 사러 오기보다는 자신이 사용할 것을 사러 오기 때문에 기껏해야 향수를 사는 사람들의 10~20%의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갈대 바구니나 상자를 판매하는 - 어차피 포장할때도 포장비를 받았으니 - 대금은 모조리 사라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주기로 했었다. 재료비를 제하고 남은 돈이 대충 바구니나 상자 하나당 대략 1.5실링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갈대 바구니 하나를 만들때 드는 비용이 갈대를 꺾어서 가져다 주는 사람의 수고비가 0.5실링, 갈대를 바구니를 짤 수 있게 가늘게 잘라서 염색까지 해주는 사람의 수고비가 1실링, 거기에 갈대에 색을 입히는 염색약이 비싸서 2실링이 들었다. 염색약은 좀 싼걸로 하고 싶었지만, 왠만한 걸로 염색하는 건 제대로 들지 않아서 몇번이나 반복해서 염색해야 하거나 아니면 얼룩이 지기 일쑤라서 좀 비싼 걸로 사야만 했다. 게다가 색이 예쁜 걸로만 해야 했기에 거기에서 염색약 값이 올라가버렸다. 사실 이러한 아기자기한 바구니는 색 또한 상당히 신경써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모양이 이뻐도 색이 별로면 그 상품의 가치가 많이 떨어지니까. 원래는 사라의 솜씨에 대한 댓가도 한 2실링 정도 받게하고 선애도 1실링 정도 먹게 하려고 계산을 하다보니 5실링이 훌쩍 넘어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되게 비싸게 느껴지면서 바구니가 이 가격에 팔릴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뭐, 한국에서도 그 정도 크기의 선물 상자가 큐빅 장식 같은 것이 달리지 않은 스타일의 것으로 생각해볼때 2, 3000원 정도였으니 그 비슷한 것이 적정가격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 선애가 먹는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사라가 받는 것은 좀 낮춰서 딱 5실링으로 만들었건만, 사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 무지 감격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많이 줘서 고맙다나? 하기야, 사라가 집에서 바구니를 팔때는 이보다 훨씬 못한 가격에 팔았으니 말이다. 나와 선애 입장에서는 이것도 엄연한 수공예품인데 너무 사라가 적게 받는 건 아닌가 좀 걱정을 했지만, 사라가 기뻐하니 나쁠 건 없다 생각하고 그냥그냥 넘어갔다. 종이 상자는 염색약이 1실링에 종이 상자 만드는 사라의 수고비가 1실링이었고, 나머지 3실링이 종이 죽값이었다. 죽이라서 그런지 갈대 보다는 염색이 굉장히 잘 들어서 염색약값은 좀 아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신 죽값이 가장 비쌌다. 아무래도 재료비는 싸지만 죽을 만드는 과정이 무척 힘든데다가, 같은 크기로 따질때 종이 3배의 양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뭐, 종이로 만들만큼 얇게 펴는 기술이 필요 없어 그나마 나았긴 했지만... 어차피 종이 상자를 만드는 건 종이 죽만 아주 곱게 만들어 표면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매끄럽게만 만들고 색만 잘 입히면 종이 상자의 대부분을 완성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두껍게 만들어지면 상자 만드는데는 큰 기술이 필요 없었으니... 그래 처음에는 사라보고 상자를 만들게 할 생각이었는데, 꼭 사라가 만들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아 이건 종이를 만드는 한 공장과 아예 전속 계약을 맺어버렸다. 공장이라고 해봐야 총 일군이 한 가정인 5명이라 그들의 생산량 정도라면 야생화 가게에서 수용하기가 적당할 것 같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가게 안에는 진열대를 하나 더 들여놔 상자와 바구니만 전문적으로 진열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그들 사이 사이에는 향수병까지 같이 끼어있는 포장 시범 케이스도 끼어 놓았고 말이다. 자스민의 배려로 사라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보다 좀 빠릿빠릿한 아가씨를 사라를 대신할 점원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이게 참 재미있는 인연인 것이, 그녀는 바로 카밀의 친누나였다. 이름은 칸나로 나이는 사라보다 3살이나 어린 15세의, 햇볕에 그을러 까무잡잡한 피부에 평범한 인상을 가진 소녀였다. 하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갈색눈이 참으로 인상깊었다. 그녀를 고용함으로써 우리는 휴가 카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걸 자스민에게 들을 수 있었다. 칸나는 휴의 눈에는 약간 못 미쳐 미래의 길드원은 되지 못했지만 빠릿빠릿한 행동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미래의 협력인이 될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어쩌면 그래서 자스민이 선애에게 칸나를 소개한 걸지도. 그렇게해서 정식으로 상자와 바구니를 판매하자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처음의 예상치인 손님들 중 10~20%보다 훨씬 많은, 30~40%가 상자나 바구니를 사갔으니 말이다. 그건 좋았는데, 좀 씁쓸한게 있다면 팔린 상자나 바구니의 대부분이 포장용이 아닌 집의 장식용으로 사갔다는 걸까나? 때문에 상자보다는 바구니가 판매의 대략 6,70%를 차지하고 있었다. 포장이랍시고 판매된 경우에도 진열대에 놓아진 시범 케이스를 보고 남에게 선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집에다 그렇게 보관하고 싶어서 포장해달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좋은건, 뭐 바구니를 사러 오는 사람들때문에 손님들이 전보다 10% 정도 늘은 것 같다는 걸까? 그럴 때 빠릿빠릿한 칸나의 행동은 정말 크나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으음... 역시 포장이라는 개념의 인식이 너무 희박한 거 같아. 하기야... 선물로 사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런가?/" 바구니와 상자를 판매하기 시작한지 대략 한달 정도 지난 어느날, 선애가 가게가 한가한 틈을 타 장부상에 적힌 바구니와 상자 판매 내역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향수를 선물로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좋을텐데... 이 시대에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향수같은거 선물 잘 안 하나?] 같이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내가 중얼거리자 선애가 가게 안을 쓰윽 살펴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우리 가게 손님은 여자들이 대부분이니... 이거 아무래도 남자용 향수를 들여놔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우리 가게는 몽땅 여자용 향수잖아. 남자용 향수를 들여다 놓으면 선물하지 않을까?/" [네가 원한다고 남자용 향수를 들여 놓을 수 있겠냐... 그 향수 제조하는 사람이 남자용 향수를 만들어줘야 들여놓을 수 있지.] "/에... 그건 또 그렇네. 사장 녀석에게 한번 말이나 해볼까?/" 그렇게 선애와 내가 가게의 미래를 두고 논의하고 있을때였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에 달아놓은 맑은 종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점심 먹고 얼마 쉬지도 않았는데 다시 손님들이 몰릴 시간이 된 모양이다.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사라와 그녀와 같이 갈대 바구니를 만들게 된 중년 부인에게 - 사라와 그 부인은 따로 작업장을 마련할 필요 없이 가게에서 바구니를 만들고 있었다. 손님 반응을 보면서 수량 조절이 가능하고 따로 손님들의 주문도 받을 수 있어 좋았다. - 바구니 만드는 법을 배우던 칸나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오~!" 그리고나서야 보이는, 오후 시간의 첫 손님은 정말 뜻밖의 사람들이었다. "어이 드레엑..." 무지 난처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저 약간 어벙한 인상의 남자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다시 보고 또 봐도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들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어라? 어머나 세상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칸나의 목소리에 얼른 장부를 덥고 고개를 들던 선애는 익숙한 얼굴에 큼지막한 미소를 띄우며 다가갔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 정식 기사가 되셨겠지요?" 험악한 얼굴 앞에 서며 정식으로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는 선애에게 드랙 암스트롱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아하하하... 기사님께 그렇게 불릴 줄은 몰랐는데요. 그냥 편하게 대하세요, 편하게.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선애의 말에 드렉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놨다. "그럼 그쪽도 편하게 말하지. 기사라고 부르지 말고 드렉이라고 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역시 얼굴에 비해 성격이 무지 좋은 녀석이었다. 그의 말에 선애는 싱긋 웃었다. "그럼 드렉님이라고 하죠. 아무리 그래도 저까지 말을 놓을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시오나는 잘 있나요?" 선애의 말에 드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정식으로 엠브라 부인의 하녀가 되었지. 선배 하녀들이 모두 본관 하녀로 이동되는 바람에." "오오... 그럼 모두 승진이 된 거군요. 정말 잘된 일이네요. 오랜만에 뵈어 무척 반가운데, 차 한잔 드릴까요?" 선애의 말에 칸나가 얼른 부엌으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드렉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말은 고맙지만 잠깐 들린 거라... 에... 자네..." 드렉이 선애를 힐끗 보며 말 끝을 흐리자 선애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아, 드렉님도 편하게 선애라고 불러주세요." 그에 드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선애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여기서 일하나보지?" "예, 운 좋게 여기 관리를 맡게 되었답니다. 그럼...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이군요?" 선애의 질문에 드렉이 계속 자신의 옆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사람을 선애 앞으로 끌어 당겼다. "이 녀석 좀 도와주겠어?" 드렉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버버 하던 남자가 드렉의 말에 얼굴이 붉어져 어쩔줄을 몰라한다. 그에 선애가 당황한 얼굴로 그 남자와 드렉의 얼굴을 번갈아보는데, 어째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기색이다. 그에 내가 선애에게 친절하게 속삭여줬다. [야, 이 남자가 그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서 하녀들에게 인기 있는 미남 3인방의 마지막 남자야. 맥 루돌프라고... 귀여운 미소로 하녀들에게 인기 끌었다고 가르쳐 줬잖아. 네가 이름이 루돌프나고 무지 웃었는데, 기억 안 나?] 나의 설명에 선애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저택에 있을때 멀리서 한번 뵌 기억이 납니다. 맥 루돌프씨지요?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선애의 무지 자연스러운 '아는 척'하는 말에 나는 비질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이제 이 녀석도 장사꾼이 다 됐어.' 선애의 말에 원망의 눈초리로 드렉을 바라보던 맥 루돌프가 어색하게 웃으며 선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약간 아방하면서도 귀여워서 루빈스타인 저택의 하녀들에게 '누님'으로써 귀여운 동생을 키우게 만들고 싶어하는 심리를 마구 일으키는 미소에 힐끔힐끔 보고 있던 칸나를 비롯한 사라와 중년 부인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아... 저... 어머니께 선물을 좀 드리려고 하는데..." 그에 선애가 생긋 웃어줬다. "선물을 사러 오셨군요. 여기는 향수 가게이니 물론 향수를 사러 오신 거겠죠?" "예에... 여기가 가격이 싸고 향수도 괜찮다고 소문이 나서..." "예, 저희 가게가 비록 작고 향수 갯수가 몇개 없지만, 그래도 향수의 질 하나는 자신 있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우선 향수를 고르시는게 좋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며 선애가 맥을 향수를 진열해 놓은 진열대로 이끌자 맥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이런 가게가 처음인 듯 무지 거북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뇨, 저... 그냥 괜찮은 걸로 하나 알아서 골라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을 덥썩 들었다가 잘못 골라줘서 나중에 마음에 안 들면 큰일이었다. "물론, 제가 추천은 해드리겠습니다만... 그래도 선물하실 건데 향은 맡아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어머님의 스타일도 모르니 직접 골라보시지요. 그냥 편하게 어머니께 이 향이 났으면 좋겠다... 하는 걸로 골라보세요." 선애의 권유에 맥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진열대로 다가가자 선애가 그 뒤에 가만 서 있는 드렉에게도 말했다. "아, 드랙님도 한번 골라보시겠어요? 저희 가게에서 남자 향수를 판매했다면 제가 드랙님께 선물을 드릴텐데... 여기는 여자 향수뿐이라 아쉬운대로 시오나에게 선물을 좀 하고싶은데요... 시오나에게 어울릴 거 한번 골라보시겠어요?" 선애의 권유에 드렉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시오나 건 내가 사도록 하지." "그러세요. 드렉님이 주는 거하고 제가 주는 거로 하면 되죠." [야야, 시오나거 챙기는 김에 에밀리거하고 달시 것도 챙겨라.] 내 말에 선애가 보일듯 말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맥은 어정쩡하게 향수의 향을 맡아보더니 그래도 두개를 골라내고는 선애의 권유를 받아 그 중 하나를 선택했다. 향수병은 그나마 향수보다 고르기 쉬웠던지 그래도 제법 비싼 은화 7개짜리를 고르는 거였다. 그런 그에게는 직사각형 모양의, 초록색으로 염색된 갈대바구니에 잘 포장해주고 그에 어울리는 하얀 리본까지 매어주자 거북스러워 하는 표정 가운데에 만족해 하는 빛이 보였다. 그런 그는 잠시 옆에 치워두고, 드렉의 품에는 맥에게 준 것 못지않게 예쁘고 잘 포장된 꾸러미를 네개나 안겨 줬다. 하나는 드렉이 시오나에게 선물하는 것, 그리고 나머지 세개는 선애가 시오나, 달시, 에밀리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드렉은 시오나 선물은 자기가 산다고 했지만, 선애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거라고 극구 우겨서 시오나 것만 두개가 된 것이었다. 모두 예쁜 유리병에, 그것도 은화 5개짜리에 담은 거라 선물 값이 이 둘에게 판매한 것 보다 더 많았지만 그래도 선애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선물을 가지고 찾아가야 하는데... 대신 가져다 주신다니... 그 대신... 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오랜만에 드렉님을 뵈어서 제가 너무 기쁘니 두분께 가격을 좀 깎아 드리도록 하죠." 여자들은 이렇게 가격을 좀 깎아준다고 하면 무지 좋아하는데, 남자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괜찮아." "아, 아뇨... 선물인데 그냥 제 값을 내겠습니다." 선애가 기껏 인심 써서 깎아주겠다고 하는데도 거부하는 남자들을 보고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냥 제 값을 다 낸다는데 싫어하는 상인이 어디 있으랴. 그리하여 선애는 다시 방긋 방긋 웃으며 '뭐, 두 분 의향이 그러시다면야...' 하면서 제 값을 다 받고는 큰 일을 해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잽싸게 밖으로 나가는 맥과 그 뒤를 따르는 드렉을 현관 문 밖까지 나가서 배웅을 했다. [헤에... 그러고보니 저 둘이 이 가게 처음 남자 손님이네... 선애 네가 맡은 뒤로 말이야. 그런데... 맥 루돌프하고 드렉하고 친구였나보네?] 그렇게 멀어져 가는 드렉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다시 저 무서운 얼굴을 보게 될까나... 생각 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 보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 후에나 볼 거라고 예상했던 드렉이 5일만에 다시 가게를 찾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맥이 아니라 동료로 보이는 기사들 세명을 데리고 말이다. "어서 오세요~!" 언제나 발랄한 칸나의 인사를 들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 드렉은 선애를 보더니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먼저 인사를 해왔다. "드렉님, 어서 오세요."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선애 또한 놀란 모양이었지만, 그와함께 무척이나 반갑다는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아아... 시오나가 무척이나 고맙다고 전해달라는 군. 향수 잘 쓰겠다고... 그리고 그 선배 하녀들도..." "아하하하... 기쁘게 받아줬다면 저야 고마운 일이죠. 혹시 향수를 다 쓰면 언제든지 향수 병을 가지고 오라고 전해주세요. 얼마든지 리필을 해준다고..." "훗, 그러지. 아, 그리고... 같이 일하는 선배님이 부인께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모셔왔는데..." [오오... 무지 기특한데?] 시오나의 청인지 아니면 드렉 혼자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부인 혹은 애인, 아니면 가까운 여성 가족에게 선물을 해야 할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맥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어색해서 불편해 하는 사람들에게 선애는 빨리 고르게 해주는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향수를 그들이 다 맡아보고 고르기 전에 그들에게 선물할 사람의 연령대를 골라 자신이 먼저 몇개를 추천해 줬다. 그리고 그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디자인의 유리병까지도 미리미리 몇개 골라서 그들 앞에 내놓자 그 기사들이 무지 고마워 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선물을 골라본 경험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뭐,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자들은 쇼핑할때 이것 저것 요모 조모 따져보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던가 말이다. 사실 전에 맥이 향수를 사가지고 간 뒤 선애와 남자들의 쇼핑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꼬맹이가 그걸 잘 기억해 뒀다가 이 기사들에게 최대한 불편해 하지 않도록 배려 해준 모양이었다. '오오... 가면 갈 수록 점점 더 능숙해지는 거 같아.' 그 후로 드렉이 또 시오나의 향수를 리필한다는 핑계로 다른 기사들을 데리고 가게를 한번 더 방문해준 후에는 띄엄 띄엄 남자 손님들이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후작가에 근무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후로는 소문이 퍼졌는지 일반 남자 고객들도 하나 둘 늘기 시작했던 거다. [야... 아무래도 드렉에게 선물 한번 해야하지 않을까?] "/으음... 그래야겠어.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서 남자 향수도 들여놓자고 한번 해봐야지./" [그것도 좋겠지. 그러면 여자들도 남자 선물 살 수 있을테고 말이야.] "/으음... 그래야겠어.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서 남자 향수도 들여놓자고 한번 해봐야지./" [그것도 좋겠지. 그러면 여자들도 남자 선물 살 수 있을테고 말이야.] 하지만, 이런 가게를 번창 시킬 좋은 제안을 하고 싶어도 막상 제안을 받을 사장 녀석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가 없었다. 선애가 가게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가게 일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쓰면서도 줄기차게 얼굴 도장은 찍었던 녀석이었는데 막상 필요할때는 나타나지 않자 선애의 마음이 좋을리가 없었다. "/뭐냐, 이 인간... 정작 필요 없을때는 줄기차게 나타나더니 필요할때는 콧빼기도 안 보여?/" [그러고보니... 요 며칠 계속 안 왔던 거 같은데?]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리자 선애가 여전히 투덜거리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 인간이 필요 없으니 가만히 있었던 거지. 아씨... 이럴 줄 알았으면 전에 억지로라도 향수 제조사를 알아두는 거였는데.../" 선애 말대로 향수 제조사만 알고 있었다면 벨타이거를 기다릴 필요 없이 직접 향수 제조사를 찾아가 부탁하면 될 터였다. 만약 그 제조사에서 안되겠다고 한다면 다른 제조사를 찾아볼 수도 있고 말이다. 정보를 다루는 길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스민이 있었으니 다른 제조사를 찾는 건 어려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거래하고 있는 향수 제조사였다. 생각 같아서는 벨타이거 하고만 직접 거래한다고 - 벨타이거가 해준 말이다. - 선애에게는 정체를 감추는 그 제조사를 무시하고 다른 곳을 찾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곳 향수때문에 향수가 싸고 훌륭하다는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기분 나쁘다고 거래를 끊으면 선애만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캐더린이나 자스민이 해준 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도시에 있는 괜찮다는 향수 가게는 다 돌아본 선애의 의견으로써도 이 정도 수준의 향수에 이 정도 가격이 싼 값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싼 값으로 향수를 공급해준다면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만하다고 선애가 말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놈의 비밀스러운 정체가 지금 문제였으니... "/아... 젠장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장 녀석 같으니라고... 도대체 어디 있기에 콧빼기도 안 비치는 거지? 이거 집도 모르니 쳐들어갈 수도 없고.../" [저기... 휴에게 그의 정체를 물어보는게 어때? 휴가 만약 필요하다고 생각 된다면 그의 정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잖아. 아니면 집 주소만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하던가... 만약 그가 안된다고 하면 내가 찾아볼게.] 내 말에 선애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제야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언니가 있었지?/" [뭐냐 너... 내가 있다는 걸 되게 자주 잊어버리는 거 같다?] 선애의 말투에 내가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며 중얼대자 선애가 쓰게 웃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언니가... 음... 지금 특별한 처지라는 걸 계속 잊고 있어./" 선애의 말이 뭔 말인지 못 알아들을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 때문에 선애에게 가졌던 서운함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짜슥...] 그런데 정말 황당하게도 콧빼기도 안 보여서 선애의 심기를 상하게 했던 벨타이거가 그 다음날 떠억 하니 나타난 것이었다. 문제는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선애를 비롯한 일행이 가게문을 닫고 마악 집으로 돌아가려 할때 나타났다는 거지만... 그는 오자마자 선애에게 커다란 봉투를 떠억하니 맡긴다음에 '잘 부탁해.'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는 선애가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이봐요, 벨타이거씨~!!" 선애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를 소리쳐 불렀지만, 기가 막히게도 그는 대기하고 있던 영업용 마차를 타고 가버리고 말았다. "뭐, 뭐야 저 인간..." 그에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 선애가 기가막힌 표정으로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영업용 마차만 노려보며 중얼거리기에 내가 물었다. [쫓아가볼까?] 그에 선애가 뒤를 힐끔 보고는 - 아마 사라와 칸나를 살펴본 듯. - 작게 속삭였다. "/됐어. 어차피 휴를 만날테니... 휴에게 물어보지 뭐./"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순순히 선애의 뒤를 따라갔건만... "미안하지만... 선애가 조금 참고 기다리면 안될까?" 믿었던 휴가 선애의 기대를 저버리고야 말았던 것이었다아~ 단박에 거절하는 - 물론 말은 부드럽게 우회하고 있었지만... - 휴의 말에 선애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정체를 다 말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연락하겠다고 집 주소좀 가르쳐 달라는 건데 그것도 안된다는 거예요?" 선애의 심기가 안 좋았던 터라 말도 약간 딱딱해졌다. 하지만, 선애의 심정을 잘 헤아리는 것인지 휴는 변함없이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휴의 집을 알면 그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거든." '집을 알면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다라... 집이 대단한가보군? 마치 후작가의 저택에 살면 후작가네 집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어허라, 그럼 벨타이거도 혹시 그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었던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쫓아가볼걸... 하고 덧붙여서 생각하고 있는데, 휴가 꾸욱 입만 다물고 있는 선애를 달래기 위함인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벨타이거씨 상황이 좀 복잡하거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애가 지금 간다고 해도 벨타이거씨와 제대로 이야기 하기도 어려울걸?" "흠... 그냥 제가 알아보지도 말고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씀이죠?" 선애의 말에 휴가 씨익 웃었다. "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급한 거 아니면 조금만 기다려 주라. 만약 이번 상황을 잘 해결하고도 벨타이거가 선애를 방해한다면 내 그와의 관계를 끊는 한이 있더라도 벨타이거의 정체를 알려줄께." 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 이번 상황만 끝나면 벨타이거와의 계약 관계가 끝나는 것 같았다. 그 후에 새로 계약을 하던지 아니면 관계를 끊던지 하겠지. '그렇다는 건, 지금 벨타이거 녀석이 처해있는 상황이 정보길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는 거네.' 휴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애써 움직여서 벨타이거 녀석의 집을 알아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벨타이거가 아무리 가게의 모든 운영권을 선애에게 넘겨줬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사장은 벨타이거였고, 가게의 소유자 또한 그였으니 만약 그에게 뭔 일이 생긴다면 그 동안 선애가 열심히 해왔던게 홀랑 날아가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선애에게 말해볼까 싶긴 했지만, 휴를 믿고 있는 선애는 그만 두라고 말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혼자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 부터 나는 선애가 잠든 사이 밖으로 나가 커다란 저택부터 골라서 일일이 다 뒤져보기 시작했다. 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한달이 다 되도록 벨타이거 녀석의 집을 찾지 못했다. 사실 선애가 잘때는 물론이거니와 틈 날때마다 돌아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이 도시의 지리나 도시에 거대한 저택이 몇개나 있는지, 또 어디가 누구의 소유인지 조금도 알 수 없는 나로써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 주변을 줄기차게 돌아다녀서 어느정도 지리는 익숙해 졌다는 걸까나? 그 동안 선애는 벨타이거를 만나기만 해봐라... 하고 벼르고 있었지만, 녀석의 상황이 그를 엄청 바쁘게 했는지 휴에게 전해줄 종이 봉투를 선애에게 가지고 온 뒤로 다시 콧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즈음, 지구가 다시 그 아름다운 모습을 서서히 잃어가면서 더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나야 겨울이 오든 여름이 오든 별 느낌이 없었지만, 선애의 인상이 서서히 찡그려져 가는 걸 보면 높은 기온이 꽤나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벨타이거 녀석때문에 신경이 안 좋은데 거기에다 더위까지 선애의 신경을 긁자 그렇지 않아도 더러운 성격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 했다. "아아... 이거 바다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습도는 높은데 도시 안에 가게가 있어서 그런지 바람은 적고..." 목덜미에 방울방울 솟아나는 땀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내며 선애가 투덜거렸다. 휴네 집이나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이나 모두 언덕 위에 있어서 그런지 여름에 문을 열어놓으면 살랑살랑 바람이 잘 들어왔는데, 시내 변두리에 위치한 가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어쩌면 해변가에 있는 가게들은 바람이 잘 들어올지도 모르지만, 가게가 위치한 곳은 해변에서 멀어도 너무 멀어던 것이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손님들을 상대할때는 상냥하게 대해야 하는 선애로써는 더욱더 짜증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아...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은 시원했는데... 특히나 그 자작이라던 후계자 녀석 사무실이 시원했지. 돈이 많아서 뭔가 조치를 취한 걸까나?" 점심시간, 입맛이 별로 없는지 거의 먹지 않고 의자에 거의 축 늘어지다시피 앉아 있던 선애가 푸념하듯 중얼거리자, 그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바구니 만드는 법을 익히던 칸나가 지나가듯 선애의 말을 받았다. "돈이 많으면 마법 물품으로 시원하게 했겠지요. 돈만 있다면야 그 비싼 마법 물품도 살 수 있는 거잖아요." 칸나의 말에 축 늘어져 있던 선애의 눈이 번쩍 떠졌다. "마법?" 그러자 오히려 선애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던지 칸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에... 부잣집에서는 마법으로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하기도 하고 한 여름에도 얼음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그런다던데요?" 그녀의 말에 선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아, 그 수가 있었구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희색이 만연해졌던 선애는 그날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자스민을 붙들고 마법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갑자기 왜?" "너무 더워서요. 가게를 시원하게 만들 마법이라던지, 에... 그 마법 물품이라던지 하여간 뭔가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선애의 말에 자스민이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도 요즘 들어 더위때문에 짜증스러워 하는 선애를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법 물품을 사용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가격이 어마어마 하다고 하던데." 칸나의 비싸다는 말에는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했지만, 자스민까지 비싸다고 하자 무시하지 못하겠는지 선애가 잠시 망설였다. "어느 정도나요?" "글쎄... 나도 직접 사보지는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절실해?" "너무너무 절실해요. 제 전 재산의 절반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주고 싶을 정도예요." 절절한 선애의 말에 자스민이 풋 하고 웃었다. "저런... 무지 견디기 힘드나보네. 하기야, 여기보다 가게가 좀 덥지?" "좀이 아니라고요. 어쨌든 좀 부탁드릴게요. 최소한 알아보기라도 하죠 뭐." 선애의 말에 자스민이 생긋 웃었다. "그래, 그래. 선애가 그렇게 부탁을 하니... 게다가 마법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해서 선애는 다음 날, 손님이 없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 가게는 칸나와 사라에게 맡기고 - 사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칸나가 워낙 빠릿빠릿해서 선애는 망설임 없이 칸나에게 잠시 가게를 맡길 수 있었다. - 자스민이 가르쳐준 마법사를 찾아 나섰다. 자스민이 알려준 마법사는 선애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전에 두번이나 선애를 테스트 하러 왔고, 선애를 자기 제자로 삼고 싶어했던 바로 그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자스민이 가르쳐 준 건 그 마법사가 살고 있는 곳 하고 이름 정도 뿐이었던 것이다. 그 마법사는 도시 어디에서도 볼수 있는, 툭 튀어나온 높은 탑에 살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탑이 바로 이 도시 마법사 길드의 건물이라고 했다. 정보 길드 소속이 아니라 협력자였던 그 마법사는 마법사 길드의 탑에서 거주하며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의 전공은 마법 물품 연구, 설계 하여 만드는 것이라고 했으니 선애가 원하는 조건은 따악 갖춰져 있었다. 단지, 이번에 또 만난다면 선애보고 마법을 배울래 어쩔래 하고 들러붙을까봐 문제였지만... 멀리서 봐도 높다는 건 알 수 있는 그 탑은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높아 보이는 것 같았다. [우와 높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보다 더 높은 거 같아. 대충... 30층 되려나?] "/더 높은거 같은데./" 정확히는 35층이란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 마법사가 거하는 곳은 10층.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한국의 호텔에라도 온 것처럼 데스크가 있었고, 데스크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앉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마법사 이름을 대면서 찾으러 왔다고 하자 친절하게 계단을 가르쳐 주면서 10층에 가보라고 하는데... 하는데... "/제, 젠장... 헉헉, 있으려면... 헉... 좀... 헉... 낮은 곳에나... 헉헉... 있을 것이지... 여긴... 헉... 엘리베이터도... 헉... 없나...?/" [그래서 대신 내가 업어주고 가잖냐.] 처음 나선형으로 위로 올라가는 길~다란 계단을 보며 암담한 표정을 짓던 선애는 결국 9층까지 올라오고 주저 앉았다. 하기야, 힘들긴 힘들었겠지. 이 녀석이 언제 10층짜리 계단을 올라가 봤겠는가. 루빈스타인 저택에 있어도 많이 오르 내려봐야 5층이었고, 그것도 어쩌다 한번씩이 었을뿐이니... 그래 마지막 한 층은 내가 선애를 업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나마 계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업지도 못했을 거다. "어라, 네가 여긴 왠일이냐?" 10층에 도착하여 넓다란 복도 양 옆으로 띄엄 띄엄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문에 달린 패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리자 한참 후에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빼꼼히 나오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말은 해주는 마법사였다. "호오, 설마 갑자기 마법에 흥미가 생겨 제자로 받아 달라고 온 건 아닐테고... 아, 혹시 마법 물품이 필요해서 온 거냐?" 그의 말에 선애가 놀란 눈빛을 잠시 보이더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뭐가 필요한데?" "방 안을 시원하게 해주는 장치요. 차가운 바람이 불게 한다던지, 온도를 낮춰 준다든지 하는..." 담백한 마법사의 태도에 선애는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둘의 대화를 보자니 이야기가 잘 통할 거 같아 나는 둘의 대화에 관심을 끄고는 안을 둘러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게 바로 작업실이었던지, 아주 커다란 방에는 한쪽 벽면을 꽈악 채운 책장과 그 책장으로도 모자라 바닥에까지 자리를 잡은 수많은 책들. 그리고 그 반대편 벽면을 채우는, 내가 졸업한 대학 식당 주방장에나 있을까 한 무지 커다란 넓이를 자랑하는 테이블. 그것도 직사각형이 아니라 ㄷ 자 형으로 제작되어 벽면 하나를 온전히, 그리고 두개의 벽면은 반쯤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공간 가운데에도 제법 큼직한 탁자가 버티고 있었고, 그러한 탁자들 위에는 여러가지 용도를 모를 신기한 물품들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문 반대편에는 좀 작은 문이 있어서 그쪽으로 가 보니 그쪽은 화장실이 딸린 침실이었다. 거기에도 책장과 책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책들이 마구 어지럽혀져 있었다. 남의 침실을 자세히 살피는 건 좀 실례인 것 같아서 거기는 그냥 한번 훑어 보기만 하고는 다시 작업실로 온 나는 작업대 위에 있는 물품들을 구경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내 눈을 화악 잡아끄는 것이 있었으니... 중심체가 되는 것은 동그랗고 검은 구슬이었다. 어렸을때 흔히 가지고 놀던 유리구술만한 크기의 그것은 가운데에 고정이 되어 있었는데 그 주위를 그것과 똑같은 크기와 색을 가진 구슬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허공에 떠서 말이다. 물론,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건 아니고, 중심을 잡고 있는 구슬을 고정시키는 금속 대와 연결된 가느다란 철사 같은 것이 ㄴ 자 모양으로 꺾인 모습으로 뱅글뱅글 도는 구슬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 나는 건 태양계. 마치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그에 거의 자동적으로 선애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선애를 부르려던 나는,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선애의 모습에 잠시 멈칫 거렸다. "에... 그래도 좀 비싼게 아닌가 싶은데..." 선애의 말에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안하지만 그게 최대로 깎아준 거야. 나도 그냥 재료비만 받는 거라고." "음... 그래도 금화 30냥이라니..." "네가 원하는 대로 시원한 바람을 불게 하거나 기온을 낮추려면 어짜피 마법진을 그리고 그 마법진을 움직일 동력인 마법석도 달아야 해. 마법진이야 그냥 내가 그려준다고 쳐도 3달 동안 계속 쓸 마법석값이 그 정도인걸." "그럼... 바람만 불게 하는 건..." "그것도 비슷하게 들어. 마법진이 좀 작아지는 것 뿐이지." 더위를 식힐 수만 있다면 자기가 가진 재산의 절반이라도 내놓는다고 말한 선애였지만, 금화 30냥은 절반이 훨씬 넘는 돈이었다. 게다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단 3달 쓸건데 금화 30냥을 쓴다는 건, 돈이 너무 많아서 주체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절대 못할 일이 아닐까 싶다. "하아... 금화 15냥 정도면..." 선애의 말에 마법사가 잠시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말했다. "그 정도라면... 옷에 걸어줄 수 있는데. 더위나 추위에 크게 구애받지 않을 수 있고, 금화 5냥 정도면 충분해. 그 정도면... 1년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그 마법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비싸긴 비싼 모양이다. 금화에서 노니 말이다. 어쨌든, 그 마법사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듯 선애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그렇습니까? 그건 마음에 드는군요." "그럼 그걸로 할테냐? 그러면 네가 좋을 망토를 가지고 오너라. 망토까지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는 없는 거 아니겠냐." 마법사의 말에 활짝 펴졌던 선애의 안색이 얼어붙었다. "망... 토요?" "그래, 망토. 설마 일반 옷에다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런건 면적이 너무 좁아서 마법진을 새기기가 어려워. 옷에다 마법을 걸 때는 망토만큼 좋은 건 없지. 아니면 나보다 대단한 마법사라면 몰라도." "에에... 난처하네요." 일 할때 더워서 여길 찾아온건데, 망토를 입고 향수 가게를 운영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에 선애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걸 본 나는 선애를 불렀다. [선애야, 이쪽으로 와봐.] 나의 부름에 선애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지만, 얼굴에는 '별거 아닌 일이면 가만 안 있을거야.'라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리로 와보라니까. 아마 이거면 네가 원하는 걸 만들 수 있을 거다.] 그에 선애가 주춤주춤 나에게 다가오자, 나는 제일 관심있게 지켜보던 걸 손으로 가리켜보였다. [야, 여기다가 선풍기 날개만 달면 딱일 거 같지 않냐?] 내 말과 함께 뱅글뱅글 돌아가는 두개의 검은 구슬을 바라보던 선애가 눈을 빛내며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저기요." 하지만, 선애의 원은 단박에 이룰 수가 없는 거였으니... 우선 이 세계에는 선풍기 날개 같은 프로펠라 라는 종류가 없었던 모양이다. 선애의 설명에도 잘 이해 못하는 마법사를 위하여 종이에다 그림을 그려주고 그것도 몰라 하기에 그 곳에 있는 여러 부품들을 대충대충 가져다가 대략 날개가 3개 달린 프로펠라 엇비슷하게 만들어 보여줬다. 하지만... "이상한 물건이군. 그런데 이게 바람을 일으킨다고? 부채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라고 물으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마법사를 위하여 또 급조된 프로펠라의 중간을 잡고 다다다 손으로 돌려 바람을 일으키는 시범을 보여줬던 것이다. 그 모습에 마법사가 놀라워 했다는 건 넘어가고, 그렇게 해서 내가 본 것과 선애가 급조한 프로펠라를 합체(?)하여 선풍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했건만... 그놈의 검은 구슬들은 선애의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이다. 가만 냅두면 잘만 뱅글뱅글 돌아갔는데, 이 돌아가는 힘이 강하지 않았기에 급조된 프로펠라를 붙였더니 돌아가기는 커녕 꼼짝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좀더 작고 가벼운 걸로 붙이길 여러차례... 결국 돌아가게 되기는 되었는데... 프로펠라의 크기가 내 손바닥 두개 정도 합쳐놓은 크기에, 그것도 힘에 부쳤는지 돌아가는 속도가 극히 느려, 선풍기의 '미풍' 속도의 절반도 안될 정도였다. 그래도 대충 바람은 불어오기야 오는데, 그 정도로는 선애를 흡족하게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발견(?)에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마법사와는 반대로 선애와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그나마 좀 나은 건, 그 마법사가 '프로펠라'를 가르쳐 준 걸 무지무지 고마워 하며 꽁짜로 선애가 흡족해 할 만한 선풍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한 거랄까? 문제는, 그놈의 선풍기가 언제나 만들어질 지 모르겠다는 거지만... 마치 공전하는 지구처럼 뱅글뱅글 도는 두개의 구슬은 마법사가 우연히 만들어낸 마법 물품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미있어서 자꾸 돌아가게 만들기는 했는데, 쓰임새를 생각 못해서 아직 제대로 된 연구는 하지 않았다는게 문제였다. 그걸 언제 연구해서 선애가 흡족할 만큼 힘 센 녀석으로 만든단 말인가. 결국, 선애는 기껏 왔는데도 아무 소득도 없이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연구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마법사에게 반 강제로 떠밀리다시피 방을 나와야 했다. 제 14화 기대했던 마법사에게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자 선애는 다시 더위 속에서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그나마 녀석이 종업원이 아니라 고용주의 입장이라서 다행이었지, 만약 고용인이었다면 녀석의 짜증은 크게 한번 터지고도 남았을 거다. '그래도 칸나나 사라에게 짜증을 안 부리는게 용하지...' 더위 속에서도 손님들을 상냥하게 맞이하는 선애와 칸나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칸나는 이 곳에서 태어나 자라서 그런지 더위때문에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덥다고 손님들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좀 더 늘은 것 같다. 가게의 소문이 나서 그런건지, 아니면 여름이라 땀 냄새를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 때문에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오, 여름이라서 향수가 많이 팔리는 거라면 방향제나 공기 청정제 같은 것도 잘 팔리겠다. 나중에 선애에게 말해봐야지.'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하게 가게의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나는 선애가 일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어느새 저녁이 가까워졌고, 가게도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그에 모두들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하는 표정으로 슬슬 가게안을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더위때문에 활짝 열어놓았던 가게 문 안으로 어디서 많이 봤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여어, 더운 날씨에 고생들 하는군?"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선애의 인상이 파악 찡그려지며 눈초리가 살벌하게 빛났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벨타이거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왠일이세요?" 녀석에게 향수 제조사를 알아 내던지, 아니면 녀석에게 부탁해서 말을 전달하던지 해야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얄미로운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선애의 입에서는 차가운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그에 움찔 거릴 벨타이거가 아니었다. 녀석은 눈 하나 깜짝 안 한채,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선애에게 다가왔다. "어이, 오랜만에 보는데 너무 쌀쌀 맞잖아?" 그의 말에 선애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웃기시는 군요. 언제 사장님과 제 사이가 만나기만 하면 생글생글 웃어줄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던가요?" "어어, 너무하네. 나는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능청맞은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코웃음으로 응답했다. "착각이 심하시군요. 조심하셔야 겠네요. 착각은 노망의 지름길이라던데... 노망 들기 전에 이 가게나 얌전히 저에게 넘겨주셨으면 하는 소망이 있는데요." 그러면서 선애가 씨익 웃는데, 왠지 짜증스러운 요즘 스트레스를 풀 기회를 잡았다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벨타이거 녀석은 지금 선애와 말싸움을 즐길 생각이 없나보다. "나쁘지 않지." 뜻밖의 말에 말싸움을 본격적으로 할 태세를 갖추던 선애가 멈칫 하더니 의심 가득한 얼굴로 벨타이거를 천천히, 그리고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뭐 잘못 드셨어요? 상한 거 먹어서 배탈이라도 났나보죠?" 평소 가게의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주제에 가게 소유권만은 꼬옥 쥐고 안 내놓으려고 하던 놈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으니 의심이 가는 건 당연했다. "에이 설마... 나는 이제껏 배탈이란게 나본 적이 없다고. 어쨌든 가게 소유권에 관심이 많으면 나랑 진지하게 이야기 해보지 않겠어?" 그의 말에 선애의 눈썹이 꿈틀 거리더니 옆에 있던 날 힐끔 바라보았다. 나 또한 선애의 눈길을 심각한 표정으로 받았다. [으음... 드디어 벨타이거 녀석이 가게가 필요치 않은 시점이 왔나보네.] 어차피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갑작스레 찾아오니 선애가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애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야기 하도록 하죠." 이럴때 어떻게 할지는 전부터 계획해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잘 됐군. 그럼 가게문을 닫고 저녁이나 같이 하면서 이야기 해볼까? 그러고보니 선애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네?" 그의 능글맞은 말에 선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사이가 안 좋았으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어... 그 무슨 서글픈 말을... 나는 이래뵈도 선애를 정말 좋아한다고." "전 사장님을 정말 싫어합니다." "컥... 그렇게 슬픈 말을..." "슬프다는 말이 웃으면서 하는 건줄 몰랐네요." 그렇게 둘이 노는(?) 동안 칸나와 사라, 그리고 중년 여인이 가게 안을 말끔이 정리 했다. "이야... 정리가 벌써 다 끝난 거야? 그럼 이제 그만 나가도록 하지?" 그들의 재빠른 동작에 벨타이거 녀석이 감탄하며 선애를 돌아보자 선애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에잇, 사장님 때문에 장부 정리를 다 못 끝냈잖아요?" 그에 벨타이거가 허탈하게 웃었다. "선애는 날 무척 미워하나봐..." "그 당연한 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아... 이럴수가... 나는 선애에게 미움 받기 싫은데..." 벨타이거가 과장되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하자 선애가 코웃음을 치며 펼쳐놨던 장부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그럼 저에게 미움 받을 짓을 하지 마시죠?" "내가 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에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내뱉았다. "어머나, 정말 뻔.뻔스러우셔라." "무슨 소리. 나처럼 진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진실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멸종 되었나보군요. 칸나, 사라, 그리고 아주머니 이만 나가죠."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뭐라 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선애는 그에게 대꾸할 여유를 주지 않고 뒤에서 구경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말하며 밖으로 향했다. "자, 선애는 이쪽." 밖으로 나와 문단속까지 다 끝내고 나자 벨타이거가 은근슬쩍 선애에게 붙더니만 선애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에 선애가 녀석을 한번 찌릿 노려보고는 손을 탁 쳐냈다. - 선애는 자기가 붙는거면 몰라도 남이 달라붙는 건 무지 싫어한다. 나 때문에... - 그리고는 사라에게 다가가 챙겨 나왔던 장부를 넘겨주며 말했다. "이것 좀 집에 가지고 가줄래? 그리고 자스민에게 나는 늦게 온다고 말해줘."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뵈요." 사라를 선두로 칸나와 중년 여인이 인사를 하며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확인 한 선애가 벨타이거에게 돌아섰다. "가요. 말해두지만, 맛 없는 곳으로 가면 당장 나올 겁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하지."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비식 웃으면서 앞장 섰다. 아까 선애가 손을 한번 뿌리쳤더니 아무래도 선애에게 단단히 미움 받는 거라고 생각 했던지 이제는 손을 대려고 하지도 않고 거리도 어느정도 띄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쓴 웃음이 나왔다. '음... 선애는 단순히 스킨쉽을 싫어하는 건데... 뭐,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 벨타이거가 데리고 간 곳은 해변에 위치한 2층짜리 레스토랑이었다. 1층 2층 전체가 레스토랑인데다가 엄청 넓었고, 바다를 향한 면은 온통 두터운 유리로 되어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는거 보니 엄청 고급스러운데임이 틀림 없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바깥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벨타이거는 선애를 건물 안으로 이끌었고, 거기서도 구석진 자리로 데리고 갔다. 식당 안 공간 자체가 무지 넓어서 그런지 각 좌석마다 거리가 넓직 넓직하게 떨어져 있었고 앉으면 건너편이 보이지 않게끔 각각 칸막이까지 쳐져 있어 좀 비밀스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딱 좋은 거 같았다. "자, 우선 맛있게 식사부터 할까? 이야기는 후식을 나누면서 천천히 하자고. 원래 맛있는 음식을 먹을때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법이 아니거든." "그러세요." 선애도 음식을 즐기는 편이었기에 벨타이거의 제안을 가지고 뭐라 하지 않았다. "뭐 원하는 음식 있어?" 반듯한 제복을 입은 웨이터가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자 벨타이거가 선애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여기 처음 오는 선애에게 그런게 있을턱이 없었다. "여기 처음 오는 거라서요. 알아서 시켜주세요." "가리는 건 없지?" '없긴 왜 없어? 콩은 무조건 싫어해서 콩밥은 진저리를 치고, 생선 구이는 가시때문에 싫어하고, 가지랑 오이도 싫어하지. 하여간 식성이 이상한 애라니까.' "가시 많은 생선은 싫은데요. 일일이 가시를 빼내는 거 귀찮아요. 거기에 콩하고 오이하고 가지."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는 피식 웃었다. "까다롭군." "싫은 건 싫은 거예요." "그래, 그래. 그러면..." 그러면서 메뉴판을 살피던 벨타이거는 적당한 것을 발견했는지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가리키며 뭐라뭐라 주문을 했다. 그가 주문한 것을 다 받아 적은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사라지자 선애가 벨타이거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 주문했어요?" "음? 아, 나오면 알텐데 뭘."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게요." "하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나온 걸 보면 만족스러워 할 거야."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의 눈은 점점 가늘어져 갔다. 아무래도 벨타이거 말을 반대로 해석한 듯. 그에 벨타이거가 양 손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정말이라니까. 앞으로 선애에게 부탁할 게 있는데 내가 설마 선애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주문했겠어?" "왠지... 그럴 것 같은데요?" 선애의 냉담한 말에 벨타이거의 어깨가 축 쳐졌다. 물론, 일부러 과장스레 그런 거 같다. "이런, 이런... 내가 이렇게 신용이 없었던가?" "평소의 행실을 돌이켜 보시면 될텐데요." 가차없는 선애의 말. "아아... 그러면 앞으로 내가 하는 말도 안 믿어주는 거 아니야?" "아마도... 그럴걸요? 하지만 뭐..." 선애가 말 끝을 흐렸지만, 그 뒤에 하지 않은 말이 뭔지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정보길드'를 생각하는 거겠지. 벨타이거도 그걸 눈치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선애 뒤에는 그들이 있었지?" "하긴... 선애 뒤에는 그들이 있었지?"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한번 비죽 웃어보였을 뿐 뭐라하지 않았다. 뭐, 변명할 것도 없는 게, 처음 벨타이거와의 만남은 정보길드와의 연락책으로서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히려 잘됐군. 그럼 내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금방 판별될 수 있을테니 말이야." "그나마 다행이죠."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선애의 표정에 벨타이거가 피식피식 웃는데 웨이터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쟁반에 올려져 있는 건,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을 팍팍 돋굴 것 같은, 예쁘게 장식이 된 간단한 샐러드와 스프였다. "헤에... 생각보다 음식이 빨리 나오는데요?" 장식만 예쁜게 아니라, 그것들을 담고 있는 그릇들도 장난이 아니었다. 예쁜 장식이 새겨진 도자기였으니 말이다. 도자기는 이 아벤티노 대륙에서 만들지 못해 전부 서대륙에서 수입하는, 고급 물품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식탁 위에 놓인 촛대나 선애 앞에 놓인 포크와 숟가락은 전부 은으로 되어, 그런 것 하나 하나가 이 식당이 고급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다가 손님을 오래 기다리지 않게끔 나오는 음식들까지... "여긴 그게 마음에 들어. 물론, 음식 맛도 괜찮지. 어쨌든, 우선 먹지." "그러죠." 벨타이거의 권유에 선애는 사양 없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크흑... 부럽다... 녀석이 먹는 동안 나는 딴데 가 있을까? 세상에 제일 추잡한게 남 먹는 거 보는거라고 하던데...' 스프를 떠먹는 선애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꽤나 맛있는게 틀림 없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미각을 다시 되찾고 싶은 마음이 너무너무 간절해졌다. 뭐, 간절하다고 해서 다시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 다음 나온 것은 접시라고 하기 보다는 쟁반이라고 하는게 합당할 만큼 엄청나게 커다란 도자기 접시 위에 통채로 요리된 바다가재가 올려져 있었다. 한국에서 보던 바다가재 요리는 기껏해야 내 팔뚝만했는데 - 사실 그것도 엄청 크다고 여겼지만.. - 이건 길이가 내 팔만했고, 굵기는 내 팔둑살의 네배 정도였다. 그러니 벨타이거와 선애 앞으로 단 한마리의 요리만 나온 거겠지만... 탁자 위에 놓아진 바다가재의 크기에 선애가 눈을 크게 뜨는데 웨이터가 커다란 칼을 가지고 와서 마치 통조림 뚜껑 따듯 가재 등 부분을 타서 먹기 좋게 살코기를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오오... 여기서도 이런 소리를 하네? 이건 차원을 넘어선 웨이터들의 공통 용어 인가.' 그러나 선애는 그 웨이터가 공통 용어를 하던 말던 상관 없이, 온통 시선은 먹음직 스러운 하얀 살코기를 드러낸 가재에게 향해 있었다. '체엣... 맛있겠군...' 선애의 시선에 벨타이거는 피식 웃더니 선애 앞으로 자그마한 도자기 접시를 밀어줬는데, 그 안에는 밝은 베이지색 소스가 담겨 있었다. "여기에 찍어 먹는 거야. 소스가 꽤 맛있지. 먹어봐." 선애는 이번에도 사양 않고 포크를 들어 하얀 살코기를 크게 하나 떠서 소스를 찍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이거 되게 맛있네요." "맛있다니 다행이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지. 어때, 이만하면 만족하겠지?" "물론이죠." '크허허허... 부럽다아아아...' 절규하는 내 모습을 본 것일까? 맛있게도 냠냠 먹던 선애가 갑자기 한국말을 슬쩍 던져왔다. "/언니, 부럽지?/" '쿠어어어~~ 치사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 말을 들었는지 벨타이거가 선애를 바라보며 의문을 표하자 선애가 피식 웃어 보인다. "아니, 맛있다구요." "그거 잘 됐군." 벨타이거 녀석이 선애를 여기로 데리고 온 이유가 맛있는 음식으로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면, 그건 반쯤 성공했다. 후식으로 나온 맛있는 초코 케잌까지 먹어치운 선애는 무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꼬맹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때는 무지 귀찮거나 어려운 거를 제외한 왠만한 부탁은 다 들어줬다. 후식 뒤에 입가심으로 차를 한 잔씩 주문해 앞에 놓자 드디어 벨타이거가 본론을 꺼내려는 것인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을 말해도 되겠지?" "하세요." 역시나, 선애의 목소리는 이 식당에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뇌물 하나는 잘 선택했군.' 울 꼬맹이는 보기와는 달리 먹을거에 좀 약했던 것이다. 뭐, 다른 뇌물에도 약하기는 하지만... 선애의 목소리에 벨타이거는 한번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말하지. 우리 정식으로 동업하지 않을래?" "하아?" 뜻밖의 말이었는지 선애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사실, 나도 벨타이거의 말이 뜻밖이었다. 나는 가게에서 그가 선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을때부터 이만 인연을 끊자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내 예상으로 최악은 선애에게 가게를 그만두고 나가달라고 하는 것이었고, 최상은 선애에게 가게를 살 생각이 없냐고 하는 것이었다. 뭐, 최악이라 하더라도 벨타이거에게 가게를 얻어내려 노력은 할 것이었고, 만약 그게 안된다면 녀석의 집에 침입 해서라도 가게에 투자한 본전은 뽑아 내리라는 것이 선애와 내가 짠 계획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가 예상 못한 것이었으니... 힐끔 내 얼굴을 한번 바라본 선애가 다시 벨타이거에게 시선을 돌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벨타이거가 진지하게 나오자 선애도 진지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야. 정식으로 동업을 요청하겠어." 선애는 그가 장난을 하는 건지 아닌지 가늠해 보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뜻밖인데요. 뭐, 어쨌든... 그건 그거고, 제가 사장님과 동업을 한다면 무슨 일을 하게 되며 얻는 이익은 무엇이죠?"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다. "우선 '야생화'가게를 정식으로 선애에게 넘기도록 하지. 이제부터 '야생화' 가게의 사장은 선애야. 물론, 그 가게가 타이거 상회 소속인 건 변함이 없지만..." "그러니까... 타이거 상회 회장은 사장님이 하고, 나는 그 상회 소속 가게의 사장님을 시켜주겠다?" "그렇지."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한다. "나쁘지는 않네요.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죠?" "'야생화'가게에 향수를 대주는 제조사를 소개시켜 주겠어." "오... 획기적이네요. 그렇게도 안 가르쳐 주려고 하다니..." 그 말은 좀 의외였는지 선애가 눈을 크게 떴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숨기고 싶어서 숨긴게 아니라 제조사 쪽에서 숨겨달라고 한 거야. 하지만, 만약 선애가 내 정식 동업자가 된 다면 그쪽에서도 기꺼이 만나겠다고 했어." "헤에...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게 다인가요? 그런데... 이 정도라면 동업자가 아닌데요? 그냥 상회에 고용하는 거지." "음... 상회에 고용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군. 하지만, 직함은 내 측근으로 될 거야. 상회의 모든 일을 선애 또한 다루게 될 거고." 이건 이쪽 일에는 잘 모르는 내가 들어봐도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었다. 처음 정보길드 연락책이라고 아무런 쓸모도 없던 가게를 맡긴 사람에게 제의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러한 생각은 선애도 마찬가지였던지, 지금까지 진지함을 담고 있던 얼굴에 이제는 의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저에게... 무척이나 과분한 제의군요. 제가 그 제의에 합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쩌면..."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이었다. "하아, 어쩌면이라... 그러한 예측 가지고 하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인 거 같은데..." 그러나 벨타이거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말한 건 선애 개인의 능력이야. 아무 쓸모 없던 야생화 가게를 짧은 기간 내에 저만큼이나 끌어 올린거 보면 어느정도는 있다고 생각해. 물론, 그게 나와 같이 상회를 이끌어가면서 더욱 더 펼쳐질지, 아니면 상회에 그저 그런 도움밖에 안 줄지는 모르지만..."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정확한 판단이었다. 사실, 야생화 가게를 키운 건 선애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환경이 좋았던 것 뿐이었다. "그럼, 제 개인 능력 말고 또 뭔가 있나요?" "첫째로는, 선애 뒤에 있는 이들에 대한 안전장치." "하아?" 이해 못하겠다는 듯한 선애의 표정에 벨타이거가 말을 이었다. "그들과 나와의 관계는 임시였지. 물론,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가질 수도 있어. 자랑은 아니지만, 난 그들과 관계를 지속시킬 재력 정도는 가지고 있거든." "그럼 관계를 지속시키면 지속 시켰지, 갑자기 왠 안전장치?" "정확한 사정은 지금 알려줄 수 없지만, 간단히 말하면 난 지금 세력싸움을 하고 있어. 거기에는 그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 정도는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하긴, 뭔가 일이 있으니 정보길드와 거래를 하고 있는 거겠지. "그럼 관계를 지속시키면 되잖아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불안해서 말이지. 선애는... 말하자면 인질인 셈이랄까?" "하아?" "나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쪽에서 그들과 거래를 하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잖아? 그래서 난 그들을 전적으로 신임할 수가 없어." 이건, 전에 휴에게서 들었던 말과 비슷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안전장치라는 거죠?" "사실 얼마 전에 그들과 마지막 거래를 했거든. 그때 관계를 연장 시킬지 끝낼지를 결정하는 거였는데... 그들을 믿을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하니까, 그쪽에서 제안하더군. 널 측근으로 두면 내가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 배신하지 않을거라고. 큰 변수가 없는 한 말이지." "하아아?" 선애가 그들과 협력 관계인데다 휴를 배경으로 두고 있기는 했지만, 벨타이거와의 거래에서 이야기가 나올 정도일지는 몰랐다. 선애의 기가막힌 표정에 벨타이거가 덧붙였다. "선애는 내 쪽에서는 안전장치겠지만, 그들쪽에서 보면 나의 감시인이겠지. 허튼 짓을 할지 안 할지 하는... 그러니 측근으로 두라고 하는게 아니겠어?" "측근이 나 하나인 건 아닐텐데요? 그럼 아무리 측근이라고 해도 숨길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숨기는 기미가 보이면 그쪽에서는 단번에 의심할 걸."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단지 그것때문에 절 그런 파격적인 조건으로 고용하겠다는 건가요?" "앞서 말했듯이, 동업이야. 아무래도... 선애는 그들 대표쯤이 되겠지만... " 꼬투리를 잡는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고용이든 동업이든 말이에요." "두번째는, 선애의 능력이지."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어쩌면이라면서요?" "아니... 상회를 꾸려나갈 능력은 차차 보게될 것이고... 내가 말하는 것은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거야. 내 측근이 된다면, 목숨의 위협을 좀 받을지도 몰라." "허어..." "그쪽에서 말하더군. 선애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말야. 믿겨지지는 않지만..."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벨타이거를 바라보며 물었다. "생각 좀 해봐도 돼요?" 아무래도 집에 가서 휴와 자스민과 이야기를 해보려는 듯. "좋아. 하지만 오래 기다려줄 수는 없어." "내일 말해줄 게요." "빨라서 좋군. 그럼, 내일 가게 문 닫을때 찾아가도록 하지." "좋아요." "그럼, 이만 일어날까?" "그러죠." "어두워졌으니 바래다 줄게." 벨타이거의 말에 밖을 내다보니, 해가 완전히 져서 사방이 깜깜했다. "됐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벨타이거 녀석은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는지 선애가 한번 거절했다고 순순히 물러났다. "뭐... 좋을대로 해." "그럼 내일 뵙죠." 선애는 빨리 생각을 해보고 싶었던 건지 휴가 계산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작별 인사를 하고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머리아프네.../" [어쩔거야?] "/몰라. 우선은... 휴랑 자스민하고 이야기를 해보고./" "으음, 나는 선애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길 원하는데? 사실, 벨타이거씨에게 그렇게 제안을 한게 내 지시였거덩." "엑... 어쩐지, 절 안전장치라느니 해서 좀 수상했지만... 역시 뒤에 휴가 있었던 거군요?" 언제나처럼 시원시원하게 웃어보이는 휴를 향해 선애가 인상을 살짝 찡그려보였다. 그리고 그건 옆에 있던 자스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완전히 모든 걸 의논할 상대라고 생각되어지는 자스민과 휴를 같이 놓고 선애가 벨타이거에게 들었던 제안을 털어놨던 것이다. "신변에 위험이 생갈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런 자리에 선애를 보내다니... 선애는 정식으로 교육도 받지 못한데다 더더욱이나 몸을 지키는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구요." "에이, 내가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선애를 그 자리에 밀어넣겠어? 자스민도 알잖아? 선애에게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는 거 말이야." 변명조같은 휴의 말에도 자스민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그 능력 정도로 선애가 위험속에서도 안전할거라 생각해요? 단순히 불을 일으키는 능력이라면서요?" "아니야, 난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생각해. 내가 말해줬잖아. 처음에 선애를 만났을 때 선애는 스스로 날파리 녀석들을 혼내주고 있었다고." "건달들 몇 혼내줄 정도의 실력가지고 충분해요?" 자스민의 질문에 휴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더니 다시 씨익 웃어보였다. "나는 선애의 능력을 믿어." 그의 말에 자스민과 선애는 인상을 더더욱 찡그리며 휴를 노려봤다. 하지만 잠시 후, 선애는 한숨과 함께 인상을 피고는 입을 열었다. "벨타이거의 정체가 뭐예요? 그가 누구인데 휴는 절 그의 옆에 있게 하려고 하는 거죠? 전에도 휴가 권에서 그의 밑으로 간 거였잖아요?" "그는 얼마전에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 "하아?" 그 동안 계속 벨타이거의 신분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휴는 쌈박하게 술술 털어놨다. "그가 우리 정보길드와 거래를 한건, 남작의 작위를 차지하기 위해서였어." "설마... 다른 정통적인 후계자가 있었는데 그를 밀어버리고 차지한 건 아니겠죠?" 역사에나 영화에서 그런 일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만약 벨타이거 녀석이 그런 나쁜 녀석이라면 내가 나서서라도 선애와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선애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주시하고 있는데, 다행이 그건 아닌 듯 휴가 싱긋 웃어보였다. "에이... 이래뵈도 내가 마음에 든 사람인데... 그는 남작 작위를 받을 정통 후계자야. 그러니 남작 작위가 정통 후계자에게 간 거지." "그런데 왜 남작 작위를 받기 위해 그가 우리와 거래를 한 거죠?" 자스민까지 호기심이 생겼는지, 선애가 질문하기도 전에 자스민이 물었다. "문제는... 전 남작이 자신의 후계자를 별로 안 좋아했다는 거였지. 그래서 벨타이거씨, 아니, 크리스웰 남작은 정통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존재감이 미미했지. 그러니까 다른 녀석이 작위를 노릴 수 있었던 거고." "그 사람 성이 크리스웰이에요?" "응, 정식 이름은 벨타이거 크리스웰. 이 도시에 터를 잡고 있는 가문 중에서 수위를 다투는 집안이지." "잘 나가는 집안이네요. 그런데 그렇게 작위를 받았으면 됐지 왜 정보길드와 거래를 계속 하길 원하는 거죠?" 선애의 질문에 지금까지 시원하게 웃고 있던 휴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으음... 그게... 마지막에 가서 시원하게 뒤통수를 맞았거든. 이건 우리쪽에서도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선애의 요청에 휴가 자세를 바로 잡고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대략적으로 다 말해주도록 하지." 그렇게 해서 시작된 휴의 설명에 의하면, 크리스웰 남작가는 원래 귀족이 아니었다고 한다. 뭐... 그렇게 따지면 사실 처음부터 왕이거나 귀족인 사람은 없지 않은가? 아마 지금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왕조의 조상도 처음부터 왕은 아니었을 거다. 하여간, 크리스웰 남작가도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서대륙과의 무역이 서서히 시작될 즈음 무역업에 뛰어들어 크게 돈을 번 크리스웰이라는 사람이 그 재력을 무기 삼아 귀족 작위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크리스웰 남작이 탄생 되었고, 그 첫 크리스웰 남작이 바로 벨타이거의 증조부다. 그렇게 되어 잘먹고 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었는지 벨타이거의 할아버지, 정확하게 말하면 외할아버지대에 오자, 남작의 작위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좀 더 높은 작위를 생각했다고 한다. 계속 상업에서 종사 해온 그로써는 중앙쪽으로 진출하여 사업도 좀 더 크게 키우고, 그에 맞는 권력도 움켜쥐어 자신의 가문을 루빈스타인 후작가 같은 가문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뭐, 취지는 나쁘지 않은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몰락하여 작위만 있는 백작가의 후계자와 결혼시키는 거였다는게 문제였다. 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집안의 이익을 위한 정략결혼이라는게 흔한 일이라지만, 크리스웰 남작 영애는 자신의 인생을 정략 결혼따위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참으로 용감무쌍한 아가씨라고 칭찬하고 싶지만, 그 아가씨의 끝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인지, 아니면 정말 좋아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서대륙에서 온 상인과 연애를 하여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중간에 여러 일이 있었겠지만, 결국 남작영애는 아이를 낳았지. 그 아이가 바로 벨타이거 크리스웰이야. 그 일로 인하여 정략결혼은 물건너 가버렸고 말야. 뭐, 이건 내 생각이지만... 크리스웰 남작은 그 뒤에도 여러번 결혼을 시키려고 했지만 영애가 완강하게 버틴 모양이야. 그랬으니... 크리스웰 남작에게 벨타이거씨가 곱게 보였겠어?" "거... 안됐다고 해야 하나요?" "안됐지. 아버지는 그가 태어났다는 것도 모르고 서대륙으로 돌아가버렸다고 하고, 하나뿐인 어머니도 그가 10살이 되던 해에 죽었거든." "저런..." 자스민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만약 남작 영애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벨타이거의 지위가 흔들릴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영애는 죽고, 벨타이거를 좋아하지 않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기반이 약해도 너무 약했지." "그래도 어쨌든 작위는 차지했다면서요?" 선애의 말에 휴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차지하긴 했는데... 완전히 껍데기만 차지한 꼴이 되어버렸지." 이제는 휴의 설명에 몰입한 선애와 자스민이 자연스레 의아한 표정이 되자 휴가 그 얼굴들을 만족스레 보고는 계속 설명하기 시작했다. "핸들리 크로스웰이라는 녀석이 있는데, 이 녀석은 크로스웰의 먼 친척으로 이름만 크로스웰이지 거의 평민인 녀석으거든. 그런데 머리는 좋아서 전 남작에게 띄여서 오른팔로 활동을 했지. 이번에 벨타이거씨가 자신의 오촌 숙부를 제치고 남작이 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사람이기도 하고."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실권을 다 자기가 장악했다는 거지. 마치... 그래, 어린애를 왕으로 올려놓고 뒤에서 실정을 잡아 흔드는 섭정처럼 말이야. 아주 교묘해서 우리쪽도 순간적으로 알아채지 못했다니까. 덕분에... 벨타이거씨와 우리쪽이 같이 뒤통수를 맞았지." 그의 설명을 듣던 선애가 갑자기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마치 수업중에 선생님께 질문하려는 학생처럼 말이다. "아, 잠깐만요. 내가 아까 벨타이거 녀석에게 세력싸움을 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그 핸들리 크로스웰이라는 사람과 싸우게 되는 겁니까?" "맞았어. 전에는 남작 작위를 놓고 싸우는 싸움이었다면, 이번에는 실권을 되찾느냐 잃느냐의 싸움이지." "헤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선애를 향해 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려운 싸움이 될 거야. 벨타이거 크로스웰은 이름뿐이 남작일 뿐, 전권은 핸들리 크로스웰에게 있으니까 말야. 벨타이거 손에는 그나마 외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과 작위뿐이지." "어, 잠깐만요. 그럼 타이거상회는요?" "그건 거의 이름뿐인 상회야. 핸들리녀석이 전권을 자기가 장학하면서 선심쓰듯 벨타이거에게 넘겨준 일이지. 그 동안 서대륙과의 무역만을 전문적으로 했을 뿐 국내로는 유통망이 없는 상회에서 국내 유통망을 관리하라고 내준 자리니까 말야." "네에?" 휴의 설명에 선애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 동안 벨타이거 상회 소속 가게에서 일했는데, 상회가 이름뿐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하기야, 정확하게 말하면 핸들리 녀석이 내준 건 아니지. 그 전에 남작 작위를 놓고 싸우던 5촌 숙부가 지금 남작이 상회에서 기반을 조금도 마련하지 못하게 하려고 준 자리거든. 핸들리 녀석은 그걸 그대로 이용했을 뿐이고." 휴의 말에 놀란 빛이 역력했던 선애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더니 한층 짙은 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럼... 만약 제가 그 남작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으응? 그걸 왜 나에게 묻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적으로 그 남작의 손에 달린 일이야. 우리는 단지 그가 궁금해 하는 정보를 제공할 뿐이라고. 하지만..."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 무책임한 표정으로 말하던 휴가 말 끝을 슬쩍 흐렸다. 그에 선애의 눈빛이 빛났다. "하지만 뭐요?" "선애에게는 엄청난 도박이 되지 않겠어? 아무것도 없다시피한 타이거 상회를 이끌고 크로스웰 무역상회를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자 갑자기 자스민이 끼어들었다. "엄청 위험하잖아요. 만약 선애가 그 곳에 뛰어든다면 분명 핸들리 쪽에서 가만두지 않으려고 할 거 아니에요?" "에이, 큰 도박판에는 그만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선애의 능력을 믿어." 휴는 씨익 웃으며 말했지만, 자스민은 불안한 얼굴로 선애를 바라봤다. "너무 위험할 거 같은데... 그냥 '야생회'가게만 인수하면 안될까?" "오면서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요... 그러면 향수 제조사를 영영 알 수 없게 되잖아요. 그런 상태로 가게를 계속 운영해 나갈 수 있을지... 새 제조사를 찾으려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거야... 하지만 그래도..." 자스민도 '야생화' 향수 가게를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기둥이 벨타이거가 이어주는 향수 제조사에서 오는 향수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제조사와의 거래가 끊겨 새로운 제조사를 찾아야 한다면, 그 곳에서 오던 향수만큼이나 좋은 품질의 향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뭐, 찾는 거야 정보 길드가 있으니 크게 어렵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지불해오던 향수 가격만큼이나 싼 가격으로 거래를 할 수 있느냐가 문제지. 그것만 해결 된다면야 나도 선애를 벨타이거 녀석과 붙여놓고 싶지 않다고...' 게다가, 내가 아직 세상을 오래 살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벨타이거의 상황이 상당히 구미가 당겼다. 굉장히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보고 싶게끔 만드는 의욕이 마구마구 솟아오르게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건, 선애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우리 꼬맹이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볼 수록 그 문제를 풀어냈을때의 성취감을 맛보고 싶어서 안달하는 녀석이었으니까 말이다. "저, 할래요." '역시나...' 꼬맹이가 아까 눈을 빛낼때부터 혹시나...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어쩌면 휴는 선애의 이런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벨타이거에게 그런 제안을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고, 선애보고 받아들이라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선애의 단호한 말에 휴가 씨익 하고 웃었다. "받아들일 줄 알았어." 그 옆에서 자스민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곧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최대한 도와줄께." 자스민의 말에 선애가 환하게 웃었다. "자스민이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걸요. 그래도,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휴가 선애에게 그 자리를 자신 있게 권해 줄 수 있었던 근거중에는, 전에 라이벌 가게의 음모로 찾아온 다섯 건달을 물리 쳤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일을 휴나 자스민에게 말하지 않아 당연히 모를 줄 알았는데, 사라가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건데, 그 당시에 사라도 가게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선애를 보호하는데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기에 깜빡 하고 있었지만... 아마, 다른 근거보다도 그 것 때문에 휴가 선애를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뭐,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우선 하기로 했으니 선애는 그날 가게 문 닫을때 다시 찾아온 벨타이거 녀석에게 맛있는 저녁을 다시 한번 대접 받으면서 시원스레 제의를 받아 들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벨타이거 녀석이 당혹스럽게도 선애보고 숙소를 자기네 집으로 옮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요? 나 지금 머물고 있는 숙소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데요?" 물론, 벨타이거 녀석네 집이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부자네 집이었으니 휴네 집 보다야 훨씬 좋으리라 예상은 되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던 자스민과 휴를 떠나려니 선애는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벨타이거가 자기네 집으로 옮기라고 말하자마자 선애는 그리 말하면서 단박에 거절했다. 하지만, 벨타이거는 결국 선애가 자기 말을 듣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옮기는게 여러가지로 좋지 않겠어? 솔직히 말하면, 내 상황이 안 좋아서 나는 우리 집에서 일할 거거든. 그러면 매일 매일 그쪽으로 출퇴근 해야 할텐데, 그러느니 아예 그쪽으로 숙소를 옮기는게 좋잖아. 우리집에 방 많아." "그래도 지금 머물고 있는 집에 정이 들어서..." "뭐, 며칠 가게 일을 다른사람에게 맡기고 정리해야 할테니, 그 동안 천천히 생각 해봐." 벨타이거는 느긋하니 그렇게 말했지만, 선애는 재고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자스민에게 선애 대신 가게를 관리해 줄 사람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벨타이거의 제의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날 밤 늦게 들어온 휴가 선애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짐은 언제 옮길래?" "에에에?" "크로스웰 남작네 집으로 옮겨야 하잖아." 휴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휴하고 벨타이거 녀석하고 미리 이야기가 된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안 옮길 건데요? 저는 여기가 좋아요. 자스민도 있고..." 선애의 말에 휴가 시원스레 씨익 웃었다. 요 근래들어 나는 휴가 시원한 웃음을 보일 때 불안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뭐, 평소 그가 항상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달고 살긴 하지만, 그가 선애에게 뭔가를 시키려 할 때는 매번 저렇게 시원시원한 웃음을 보인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애야, 크리스웰 남작가로 옮기도록 해." '역시나...' 나는 내 예상대로인 휴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선애에게서 불만스러운 말이 튀어 나왔다. "왜요?" "왜라니? 내가 전부터 누누히 강조한 걸 벌써 잊은 거야? 정보 길드는 첫째도..." 휴가 약간 과장되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말을 꺼내자, 선애가 투덜거리는 어저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알아요, 알아. 첫째도 비밀 엄수, 둘째도 비밀 엄수. 절대로 튀게 행동하지 말 것이며, 길드와 연관이 있다는 기색도 보이면 안됀다. 쳇, 그렇군요. 그 벨타이거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적인 핸들리 크로스웰의 시선이 언제 저에게 올지 모르니까요." 선애의 말에 휴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네. 선애는 앞으로 핸들리 크로스웰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 존재잖아? 그러니 더욱 더 조심해야지. 여기는 사설 고아원으로 알려져 있으니 주목 받게 하면 곤란하다고." 휴의 말에 선애가 천장을 바라보며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휴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나중에 놀러와도 돼요?" 그러자 휴가 시원스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안돼는 거 알지? 급한 일이 아니면 이쪽을 바라 볼 생각도 하지 마." 휴의 단호한 말에 선애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에... 그러면 연락은 어떻게 하죠?" 선애의 질문에 휴는 미리 생각해 놓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대답해 줬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너 대신 가게를 운영할 아이에게 말하도록 해. 너와의 연락책으로 외근하는 애를 배치시킬 예정이거든." 외근이라 함은, 외부에서 위장근무를 하며 정보를 모으는 걸 말하는데, 이렇게 연락책 역할도 맡는 모양이었다. "하아... 그러죠."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힘 없이 대꾸하는 선애에게 휴 또한 다시 한번 시원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선애야?" "예?' "될 수 있는 한 빨리 나가라." "엑..." 너무나 냉담한 말에 선애의 눈썹이 한번 꿈틀 거렸지만, 곧 체념한 표정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다음 날, 제안한 지 하루만에 답을 들으러 왔던 벨타이거 녀석은 선애가 최대한 빨리 옴ㄹ기겠다고 말하자 거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선애의 배알이 꼴리게 만들었다. "훗훗, 잘 생각했어. 역시 내 동업자가 될 만 한걸?" 기분 좋은 벨타이거와는 달리 선애의 표정은 기분 나빠 보였다. "그거 참, 기분 나쁘게 들리는 칭찬이군요. 칭찬을 이렇게도 할 수 있다니... 이것도 재주겠죠?" 선애가 대놓고 비꼬며 시비를 걸었지만, 벨타이거의 좋은 기분을 망치지는 못했다. 게다가 다른때라면 일부러라도 말꼬리를 잡아 말싸움의 소지를 제공했던 그 녀석이 선애의 시비를 간단히 무시해 버려, 싸움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라고 했으니, 오늘 옮기는 건 어때?" 그의 그러한 태도에 전의가 시들어버렸는지 선애는 장부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일 온다는, 선애를 대신하여 가게를 운영해줄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하기 위하여 미리미리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짐 다 못쌌어요." "그럼 지금 가서 싸지 그래? 가게는 특별히 내가 봐줄께." 왠만하면 절대로 쓰지 않는 인심까지 써가며 재촉하는 벨타이거를 선애가 시선을 들어 슬며시 노려보자 그가 어울리지 않게 배시시 웃어보인다. "그리고 짐이 많으면 말해. 내가 가서 짐 옮기는 것도 도와줄께." '헤에, 보너스 까지...' 하지만 선애는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짐은 오늘 가서 꾸리면 돼구요, 옮기는 건, 내일 가게를 끝마치고 가도록 하죠. 아침에 집에서 나올때 짐을 가지고 나올테니, 짐 옮기는 거 도와주실 거면 가게 끝날때 와서 도와주세요." "오늘 저녁에 옮기지 그래? 지금 가서 싸서 가지고 오면 돼잖아?" 한 번 더 재촉하는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보고 있던 장부를 소리나게 탁 덮더니 아예 몸을 돌려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사장님, 저는 짐 싸는 거 말고도 할 일이 많거든요? 내일 저 대신 가게를 운영해 줄 사람이 오면 인수인계 할 거 미리미리 정리해 놔야 한다구요. 진작에 가게 운영을 도와주셨으면 제가 인수인계 안 해도 됐잖아요?" 그 말이 찔렸는지 벨타이거는 순순히 물러났고, 그제야 선애는 다시 다른 장부를 펼쳐 들려고 하다가 다시 벨타이거를 바라봤다. "아, 가게를 봐주신다니 하는 말인데요, 내일은 와서 가게좀 봐주실래요? 저 인수인계 하려면 가게를 제대로 못 볼거 같거든요? 모래도요. 모래는 거래하는 유리 공예사에 가볼 예정이니까." "그러지 뭐." 기가 죽어 순순히 대답하는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장부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 날,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루빈스타인 후작가에 갈 때처럼 꼭 필요한 소지품만 가지고 가는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짐을 모조리 가지고 가야 했기때문에 챙기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게다가 전보다 짐도 훨씬 많아졌고 말이다. 휴네 집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야생화 향수 가게를 운영해 나가면서 시내를 돌아다닐 기회도 많아지고 금전적으로 여유도 생기자 선애는 가끔 즐거운 쇼핑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처음 가게를 다 뜯어 고칠때 캐더린이 해준 충고가 아니었더라도, 선애는 원래 예쁜 새 옷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던 터라 새 옷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거다. 그리하여 벨타이거 녀석 집으로 옮기려고 소지품을 몽땅 챙기고 보니 짐이 커다란 가방으로 세개나 되었다.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 짐이 일반 책가방만했던 거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침에 짐을 옮기는 건 사라가 도와줬다. 뭐, 짐 안에 든 대부분이 옷가지였고 무거운게 별로 없어서 부피만 컸지, 옮기는데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가게에 도착하여 가게문을 열자, 그 뒤로 점원인 칸나와 갈대 바구니를 만드는 중년 여인이 가게에 왔다. 짐을 창고에 넣어 두고 그들과 함께 가게 안을 청소하며 물건을 진열하는 등 가게 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약속한 대로 벨타이거가 오고 그 뒤로 한 여성이 가게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여기 사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는 목 가운데까지 오는 단정한 단발로 정리되어 있었고, 부드러운 갈색 눈은 사람이 쉽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하트형의 얼굴선에 콧잔등과 양 뺨에 난 주근깨는 그녀의 인상을 귀엽게 만들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듯한 평범한 인상이었다. 바로 정보 길드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외근을 하기 위한 적격인 외모를 가진 아가씨였다. "제가 이 가게 사장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가게를 운영하는 점장이구요." 벨타이거가 먼저 나서서 인사를 하며 선애를 소개시켰다. 그러자 아가씨는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선애를 바라봤다. "자스민의 소개로 왔습니다. 가게를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다면서요?" 그녀는 자신을 통해 정보길드와 연락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챈 모양이다. 그녀의 반응에 선애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선애라고 해요." 선애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예, 첼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척 보아하니 20대 중반으로, 선애보다 분명히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도 자연스레 존대를 하는 그녀였다. 정보 길드원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이해력이 뛰어나 선애가 한번 말하면 대부분 알아 들어 선애를 흡족하게 했다. 거기다가 당연하겠지만, 숫자 계산도 잘 해서 장부 정리도 잘 했다. 그렇게 뛰어난(?) 아가씨였으니 점심 전까지 선애의 설명을 들은 그녀는 오후부터 바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기야, 선애가 운영을 시작한 후로 가게를 좀 키웠다고 해도 여전히 작은 편에 속한 가게인데다가, 운영을 시작한지 이제 몇달이 되었을 뿐이니 인수인계를 한다고 해도 그 양이 별로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일을 전에도 여러번 해봤는지, 손님을 상대하는 것이 상당히 능숙했다. 그런 쪽은 오히려 선애보다 더 잘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호오,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네.] 내 말에 선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유리병 고르는 안목만 내 마음에 들면 완전히 마음 놓고 맡겨도 될 거 같아./" 선애가 짐을 싸가지고 나온 날 저녁, 벨타이거는 자기가 직접 마차를 가지고 와서 선애와 짐을 싣고 저택으로 데리고 갔다. 크로스웰 남작가 저택은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집안이라고 하더니만,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 못지 않을만큼 컸다. 하기야, 둘 다 너무 커서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지 않는 이상은 누가 더 크고 작은지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크로스웰 남작가는 이게 본가고 루빈스타인 후작가는 그게 별장이었으니 누구네 집안이 더 큰 건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커다란 정문을 통과하여 정원 사이에 난 길을 쭈우욱 올라가 거대한 저택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년 남자가 마차에서 내리는 벨타이거 녀석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옅은 금발에 차가워 보이는 파란 눈을 가진, 엄청나게 높고 곧은 코가 인상적인 40대 초반, 혹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였다. 미리 휴에게서 그가 얼마전에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동안 그가 선애에게 보인 행동 덕분인지 전혀 귀족으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런 대접을 받는 걸 보니 확실히 귀족은 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벨타이거 또한 그러한 대접을 받자, 지금까지 선애에게 보인 능글맞은 미소는 싸악 지워보이고 뭔가 있는 듯한, 그렇지만 어딘지 딱딱해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셉 집사, 이쪽은 오늘부터 내 손님으로 이 저택에 머물게 된 아가씨요. 거하는데 한 점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 쓰길 바라오." 말투도 왠지 딱딱하다.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 그 얼음 왕자 녀석은 본가에서 같이 내려온 켐벨 집사에게 무지 친근하게 대해 좀 과장되이 말하면 가족처럼 느껴졌는데, 벨타이거 녀석은 굉장히 딱딱 격식을 차리는 모습에 집사와 벨타이거 간에 넘볼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집사의 태도는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 본 그레샴 집사와 비슷했지만 말이다. "마차 안에 짐이 있으니, 내가 준비 해두라고 한 그 방으로 옮겨 두시오." "즉시 조취하겠습니다." 집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벨타이거는 선애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가지. 방을 안내해 줄게." 벨타이거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선애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하기야, 나도 벨타이거의 태도에 놀랐으니 말이다.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 얼음왕자 그랜트와 그레샴 집사 사이가 이렇게 좀 딱딱했지만, 그거야 오랜만에 만나는 주종관계였으니 친밀함이 없는 게 당연할터였다. 그러나 이쪽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벨타이거가 태어났을 때부터 한 저택에서 얼굴 보며 지내온 사이일텐데, 그런 것 치고 친밀감은 커녕 냉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큰일이네... 집사랑 사이가 저 지경이니 다른 하인 하녀들하고도 저러는 거 아냐? 분위기 장난 아니겠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벨타이거와 선애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솟아나는 걱정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내 생각이 기우는 아니었던 듯, 저택 안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만나는 하인 하녀들은 벨타이거의 모습에 황급히 한쪽으로 비켜나 고개를 숙이며 절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물론,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도 주인 집안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면 안됀다구 교육 받기는 했지만, 여기 하인 하녀들이 보이는 행동은 단순히 교육 받은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었다. 될 수 있는 한 눈에 안 띄려고 전전긍긍 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걸 보는 벨타이거의 냉랭한 표정에 한줄기 조소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우우... 분위기 엄청 안 좋네.' 신경 예민한 사람은 이런 분위기에서 식사 했다간 십중 팔구 체해버리고 말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집안의 저택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멋드러지게 꾸며진 저택의 모습을 구경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한줄기 빛이 나타났으니... "어머나, 이제 오세요 도련님?" 이층으로 올라가자 한국에서 봤다면 현숙한 어머니상의 표본이라고 일컬어질 것만 같은, 단정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중년 여성이 벨타이거를 보자 미소지으며 다가왔다. 그러자 그 동안 딱딱하고 냉기 풀풀 풍기던 벨타이거의 얼굴이 사르르 녹는 것이었다. "유모." 다른 사정 다 몰라도, 이 모습을 보아하니 이 저택에서 눈 앞에 있는 중년부인 만큼은 벨타이거의 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아니, 아직. 준비해줘. 아, 물론 이 손님과 같이 식사할 거야." 이 저택에 와서 처음으로 편안한 음성으로 대답한 벨타이거가 옆에 뻘쭘하게 서 있던 선애를 가리켜보였다. "내가 말했던 그 아가씨." 선애를 소개하는 말에 선애가 살짝 앞으로 나서자 중년 부인은 기품있게 미소지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도련님을 도와주실 분이시라죠?" 한국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도 어디 귀족 집안 마님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우아한 태도였다. "선애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벨타이거의 태도에 선애는 중년 부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냥 조셉 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예, 조셉 부인." 그렇게 인사를 끝내자 조셉 부인은 자연스레 벨타이거와 선애를 안내하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련님께서 특별하게 부탁하시기에 방은 도련님 방 맞은편에다 준비했습니다. 옆방으로 준비할까 하다가요... 호호호호..." 마지막에 조셉 부인이 벨타이거를 슬쩍 바라보며 웃자 벨타이거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모, 그런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맞은 편 방으로 준비했다니까요." '허어... 옆방... 허허허...' 보통 이런 귀족 집안에서 가주나 가주 후계자의 방 바로 옆방은 그들의 배우자의 방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벨타이거가 남작이니까 그 옆방은 남작 부인 방. 만약 선애가 그 옆방을 쓰게 된다면, 비록 결혼하지 않은 사이라 해도 벨타이거와 선애가 곧 약혼이나 결혼할 사이라고 여겨지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가주의 맞은편 방은 그 가주의 아주 중요한 손님이거나 가까운 친구들에게나 내주는 방이었다. 뭐, 선애가 동업자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대우 받을줄 몰랐던 나는, 이 곳에 온 뒤 처음으로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랍니다." 척 보기에도 무지 고급스러워보이는, 묵직한 나무 문 두짝이 방문이었다. 그 나무 문에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덩쿨에 달린 무성한 잎과 예쁜 꽃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조셉 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직한 실내가 드러났다.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서 보던, 그 얄미운 미란다 루빈스타인 녀석의 방만큼이나 커다란 방의 모습이 나를 더욱 더 흡족하게 만들었다. 방에는 욕실과 드레스룸이 따로 달려있었다. 커다란 킹 사이즈의 침대에는 사각 모서리에 기둥이 달려 휘장까지 쳐져 있었다. 속이 살짝 살짝 비치는 얇은 휘장과, 그 안 침대에 깔린 시트와 베개 모두 시원해 보이는 하늘색이었다. 그 시트의 색은 새하얀 침대와 참 잘 어울려 있었다. 수직으로 길쭉 길쭉한 형태의 커다란 창에 쳐져 있는 커텐은 연한 연보라색. 침대 옆쪽에는 파란색의 무지 푹신푹신해 보이는 소파들이 나뭇결을 그대로 드러내는 연한 갈색의 탁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진한 보라색 바탕에 아이보리색의 추상적인 무늬를 가지고 있는 거였다. 한쪽 벽에는 낮은 장식장과 그 위에 우아한 청자와 활강하는 매의 모습을 하는 청동상을 비롯한 몇몇의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벽에는 선애의 상반신만한 커다란 거울이 달린 우아한 화장대도 있었다. 그 모습을 쭈욱 바라본 선애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벨타이거가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마음에 들어?" "아주 많이요." "그거 다행이군." 그 즈음 문에 노크소리가 들려 조셉 부인이 문을 열자 선애의 짐을 든 하인이 들어왔다. "잠시 후에 저녁을 먹을 거니까, 옷 갈아입고 있어. 내가 데리러 올게. 내 방이 어딘지는 알지?" "들은지 하루도 안 지났으니까 당연하죠." "그럼 조금있다가 봐." 벨타이거가 방을 나가고, 짐을 가지고 온 하인들도 짐을 내려놓고 나가자 조셉 부인이 남아서 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곧 짐을 정리해드릴 하녀를 보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렇게 조셉 부인마저 나가자 그제야 나는 편하게 선애에게 말을 걸었다. [대우는 좋을 것 같은데... 분위기는 별로겠어.] "/응, 나도 느꼈어./" [벨타이거 녀석, 전 남작이었던 외할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서 후계자 자리도 위태로웠다고 하더니만 아무래도 집안에서 좋은 대접은 못 받고 살았나보지?] "/뭐, 이제는 상관 없잖아. 오히려 홀대 했던 녀석들이 문제겠지. 이제 남작은 벨타이거 녀석이니까./" [껍대기 뿐이라잖아.] "/그래도 집안에서는 괜찮겠지. 아, 이거 입을까?/" 나에게 대답하면서도 옷을 싸들었던 짐을 풀고 안을 뒤적거려본 선애가 얼마전에 산 심플한 디자인의, 아이보리색과 분홍색이 적절하게 섞인 원피스를 꺼내들었다. [괜찮겠네. 그러고보니.... 너 머리 꽤 많이 길었다. 슬슬 매직도 풀려서 곱슬곱슬 거리고.] 내 말에 선애가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반곱슬 머리가 부러웠는데, 선애는 자신의 반곱슬 머리를 싫어해서 매직을 계속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알아. 아... 여기는 매직 같은 거 없을까?/" [있을지도 모르지. 여기 여자들도 멋은 계속 부렸을테니까. 고데기도 있는데 머리 펴는 것이라고 없겠냐?] "/한번 알아봐야겠어./" 선애가 머리를 다시 빗고 옷을 갈아입으려 할 즈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선애의 허락이 떨어지자, 들어온 사람은 이 저택 하녀복을 입고 있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 "오늘부터 아가씨의 시중을 들어드릴 앤실이라고 합니다." [오옷, 널 시중 들 하녀도 생기고 말야. 선애 출세했네.] 나의 말에 선애가 비식 웃으며 인사한다. "잘 부탁해요." 선애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게 눈을 살짝 내리깐 상태에서 앤실이 다시한번 고개를 숙인다. "예. 옷 갈아입는 것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그런 건 괜찮아요." "그럼 짐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하녀에게 시중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몇개월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 봤던 게 경험이 되었는지 선애는 제법 익숙한 듯(?) 하녀를 대한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나는 작게 킥킥 거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지내게 된 건 좋았는데... "나 원... 평소에는 무지 잘난 척을 하시더니...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지낸 겁니까?" 선애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벨타이거에게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안 하며 물었다. 그에 벨타이거는 멋적은 표정으로 애꿎은 천장만 바라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애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기죽은 표정으로 선애와 마주봤다. "어차피 알고 왔을 거 아냐. 뒤통 수 맞았다고." "물론 그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이건 좀 심하네요." 선애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그 종이는 서대륙에서 수입한 고급 한지를 여기에서 또 한번 가공 처리를 한, 무지무지 비싼 거였다. 두께는 일반 엽서나 두꺼운 도화지 정도였고, 그만큼 빳빳하지만 뭔 가공을 했는지 고급 종이답게 표면은 매끄러웠다. 이 종이는 물에 담가 며칠 불리지 않는 한 젖지를 않고, 가벼운 불에도 타지 않는데다 한지의 특성을 잘 살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질이 안되었다. 그리하여 중요한 계약서나 서류 같은 것을 작성할때 사용되는데, 그런 비싼 종이에 적힌 건 벨타이거가 크로스웰 무역 회사에 대한 권리를 써 놓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비싼 종이를 사용한 것에 비해 별 볼일 없는 권리라는 거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 끝에는 벨타이거의 사인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사인 한번 무지 멋드러진다. 이런데 쓰이기 아까울 정도로 말야.] 농담같은 내 말에도 선애는 웃지도 않고 인상만 찡그린 채 앞의 탁자에 그 종이를 내려놓더니 손가락으로 그 종이를 탁탁 쳤다. "아... 그래도 정말 웃기지도 않네요. 명색이 크로스웰 무역회사 회장인데다 크로스웰 남작인데... 물론 껍데기 뿐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서류에 의하면, 벨타이거 크로스웰 남작은 크로스웰 무역회사에 대한 운영권은 물론이거니와 의사 결정권조차 없었다. 게다가 크로스웰 무역회사에 대한 서류를 볼때, 일반 서류는 가능하지만 기밀 문서로 분류된 서류를 보고싶을 경우 의사 결정권과 운영권을 가진 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전에 휴에게 들은 것을 연계하여 생각해볼 때 아무래도 그 의사 결정권과 운영권을 가진 사람이란 아마도 벨타이거의 뒤통수를 후려 쳤다는 그 핸들리 크로스웰이거나 그의 심복일게 분명했다. 아마 그러한 이유때문에 벨타이거가 그런 불합리한 권리 조항에 사인을 했을 거였다. 내 보기에 벨타이거 녀석도 선애 못지 않게 영리한 녀석이었는데 멋모르고 그런데 사인 했다는 건 말이 안됐다. 기반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정보길들와 핸들리 크로스웰을 끌어들여 위태위태한 남작 작위를 거머줜 놈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운이 나쁘게도 핸들리가 더 머리가 좋았던 모양이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이렇게 아무런 손을 못 쓰게 해놨을줄은 몰랐다. 그래도 명색이 남작이니 뭔가 아주 조금이나마 권리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타이거 상회를 운영할때 무역회사의 힘을 빌리는 건 꿈도 못 꿨다. 뭐, 다른 업자들과 같은 조건에서 거래할 경우에 최우선권을 주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 무역회사의 힘을 빌어쓸 경우에는 의사 결정권 회의에서 찬성이 절반 이상이 나와야 힘을 빌어주도록 되어 있는 거였다. 게다가 최우선권을 준다고 해도 그걸 그대로 믿을 수나 있을지... 히지만, 이런 권리서를 보낸 걸 보면 의사 결정권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핸들리 크로스웰쪽 사람인건 분명했다. 한 마디로 핸들리가 안된다면 안되는 거란 뜻이었다. "허 참... 크로스웰 무역회사는 완전히 핸들리거네요. 이거 소유주도 그 사람으로 되어 있는 거 아니에요?" "물론... 소유주는 할아버지로부터 내가 물려받아 있었지. 하지만... 무역 회사를 남에게 팔때도 핸들리의 허락을 구해야해." "그게 뭐야... 그럼 만약 핸들리가 팔고 싶을때는요?" "아아... 그래도 그때는 내 허락이 필요하지." "어이구... 그나마 났네요. 그럼 무역 회사에서 나오는 이윤은 하나도 못 받나요?" "아니... 그래도 선심 쓰듯 5%는 준다고 하더라구. 그래봤자 핸들리 녀석에게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엄청 적은 돈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에요? 아, 그건 그렇고... 다른 재산은 없는 건가요? 이 저택 빼고요..." "뭐... 그럭저럭 먹고 살만큼은 물려 받았어. 그러니 너희쪽에서 나와 거래를 한 거지. 내가 싸움에 진다 하더라도 대금은 지불할 수 있으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그렇게 최악은 아니네요." "그러니까 내가 핸들리와 싸워 볼 생각을 한 거 아니겠어?" 씨익 웃어보이는 벨타이거 녀석의 눈이 아까의 기죽은 모습은 어디다 버렸는지 선애를 곧게 바라보는 걸 보니 이미 뭔가 계획을 세워놓은 모양이다. 하기야, 그러니까 선애를 끌어들인 거겠지만. "이미 계획이 세워져 있는 모양이죠?" 선애 또한 그걸 알아차린 모양인지 이제까지의 기가막히고 황당해 약간 삐딱하게 굴었던 걸 버리고 자세를 바로했다. "맞아." 자신있게 씨익 웃어보이는 벨타이거 녀석. "나는 크로스웰 무역회사를 무너뜨리려는게 아니야. 그냥 그대로 내가 흡수하고 싶은 거지. 그렇기에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서두를 꺼낸 벨타이거의 요지는 이랬다. 자기에게 맡겨진 타이거 회사를 크게 키운 다음 무역 회사와의 거래를 천천히 늘려 무역회사 안에서의 자기 세력을 키운다음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것. 어차피 명목상이라 해도 소유주는 벨타이거였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당분간 무역회사와의 거래는 생각 안 할거야. 우선은 내륙 안에 내 상회 유통 라인을 만드는게 급선무야." 그 선두 주자는 뜻밖에도 '야생화 향수 가게'였다. 그의 말에 선애가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자 벨타이거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사실... 처음에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 다른 그럴듯한 물품을 생각해놓고 있었거든. 아마 예상했겠지만, 향수 가게는 숙부의 눈을 가리는 속임수였어. 그런데, 선애가 가게를 운영해 나가는 걸 보고 생각외로 괜찮을 것 같더라구." 진심인 듯한 말에 선애가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타이거의 말은 가만 생각해보면 선애를 칭찬하는 말이었으니, 선애가 기분 나쁠리가 없는 것이다. "크게만 한다면 꽤 괜찮아요. 지금 보유하고 있는 향수 질이 높으니까. 거기다가 돈만 있다면 여러 옵션을 집어넣어도 좋죠.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나도 알아. 향수를 생산하는 양도 문제고, 수도 문제고, 게다가 유통 기한도 문제지?" "잘 아네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씨익 웃는다. 그 모습에 선애가 인상을 찡그렸다. "벌써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놨군요?" "잘 아네." 선애의 말투를 흉내내며 대꾸하는 벨타이거 녀석에게 선애가 인상을 팍 찡그려 보였다. 하지만, 그런 선애에게 오히려 싱글싱글 웃어보인 벨타이거는 선애를 일으켜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가 선애를 데리고 간 곳은 무지 잘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이 곳도 꽤나 넓은 부지를 정원으로 가꾸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압권은 장미 넝쿨로 만든 미로였다. 사람의 허리 정도 높이의 나무 담장으로 미로를 만들어놨는데, 그 담장에 장미 넝쿨을 몇겹이나 감아 그 안의 담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도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를 같이 겹쳐놓아 무지무지 화려했다. 그리고 각각의 막힌 곳에는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인지 다른 종류의 꽃으로 작은 화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멋진 장미 넝쿨 미로를 지나 정원의 한쪽 구석 모퉁이로 들어가자, 제법 운치있게 지어진 통나무집이 보였다. 단층이긴 했지만, ㄱ 자 모양을 하고 있는, 작은 오두막이 아니라 좀 컸다. 그 안에 지금 누가 있는지 통나무집의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벨타이거는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입구에 서서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윙겟, 저 왔어요." 하지만 잠시 기다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에 벨타이거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며 다시한번 소리쳤다. "윙겟, 안 계세요?" 벨타이거가 안으로 들어가자 선애도 덩달아 따라 안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선애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으극..." [왜 그래?] "/아니... 안 좋은 냄새가 나서... 이거... 풀을 짖이기면 나는 냄새 같기도 한데... 너무 독하다./" 나에게 작게 중얼거리며 선애는 코를 손가락으로 틀어쥐었다. 그 모습을 봤는지 벨타이거가 피식 웃었다. "냄새가 좀 심하지? 당연한 거야." 그러면서 뭐라 또 설명하려고 하는데, 안쪽으로 연결된 나무문이 삐걱 열리더니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수?" 선애보다 더 작은 키에 깡말라보이는 체구를 가진, 대략 50세쯤 보이는 남자였다. 코에 기른 염소 수염에는 히끗히끗 하얀 색이 보이고 있었고, 얼굴에도 주름이 꽤 잡혀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 거뭇거뭇한 점들이 보인다. 점이라고 보기에는 그 수가 무지 많고, 주근깨라고 하기에는 좀 크다. [어어... 곰보?] 그랬다. 그 중년 남자는 주먹코에 얼굴이 곰보 투성이었다. 어렸을때부터 저런 얼굴이었다면, 외모 때문에 놀림을 무지하게 받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스타일이 좋은 것도 아니라, 선애보다도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였으니... 한국에서도 곰보 얼굴을 가진 사람은 옛날에나 있었지, 요 근래에는 거의 보기가 힘들었기에 선애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자 그 중년 남자의 눈초리가 살벌해진다. "뭐야, 이런 얼굴 처음 보나? 너도 나 못지 않게 이상해." 아무래도, 외모 때문에 시달림이 많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성격도 안 좋아진 것 같고. 그 중년 남자의 차가운 말투에 선애가 벙~ 쪄있자 벨타이거가 중간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자자, 앞으로 잘 협력해 나가야 할 사람들이니 사이좋게 지내자구요. 선애, 이쪽은 선애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던 향수 조제사 윙겟. 사실 향수 조제는 취미로 하시는 거고, 원래는 정원을 가꾸시고 있지." "아,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인사했지만, 그 윙겟이라는 중년 남자는 속도 좁았는지 살벌한 시선을 풀지 않았다. "에에, 윙겟. 이쪽은 제 일을 도와줄 사람이에요. 선애라고, 서대륙인이죠." "흥, 서대륙인건 나도 보면 안다오."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라면 벨타이거보다도 신분이 낮을텐데, 그는 벨타이거에게 너무 함부로 대했다. 말도 번존대를 쓰고 말이다. 그런데 벨타이거는 이런데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자자, 윙겟. 오늘 오면 새로 만들어낸 향수를 보여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이번 거는 금방 변질되지 않겠지요?"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를 거의 노려 보다시피 바라보고 있던 윙겟이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몇개 만들어보기는 했는데..." 말 끝을 흐리는 폼이 이번에 새로 만들어낸 향수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 반응에 벨타이거의 얼굴은 환해졌다. "오오, 몇개씩이나요? 이거 참 기쁜 소식인데요." "흥, 그저 그런 거라우." "에이, 제가 윙겟의 능력을 아는데요. 윙겟이 그저 그런거라고 하니 이번에도 상등품 이겠군요." "글쎄올시다... 이쪽으로 오시우." 그러면서 윙겟은 밖으로 나가 집을 빙 돌아 뒤쪽에 달린 문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들어갈때는 선애가 인상을 안 찡그리는 걸 보니 냄새가 안 나는 모양이다. '흠, 저쪽에서 향수를 조제하나보지?' 그 방은 창문이 없어서 방이 매우 어두웠다. 그래 윙겟이 불을 밝히려고 주섬주섬 거리는 동안 벨타이거가 선애에게 작게 속삭였다. "여기가 윙겟이 완성한 향수를 보관하는 창고야." 그러는 동안 안에 있는 등대에 불을 밝힌 윙겟이 벨타이거와 선애를 향해 손짓했다. "이쪽이우." 등의 빛 아래에 드러난 그 곳은 삼면이 3층으로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입구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3층 난간에 모두 자잘한 나무병들이 채워져 있는 것에 비해 정면과 오른쪽에는 몇개 없었다. 정면에는 단 한개의 병만 있었고, 오른쪽에는 그래도 이십여개 정도의 병이 있었는데 특이한건, 그쪽에 있는 것들은 모두 유리병에 담겨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윙겟이 가리킨 곳은 바로 오른쪽이었다. "윙겟, 이번거는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어요?" "으음... 대략 6, 7개월 정도? 잘만 보관하면 7개월 정도는 가뿐할 거요. 아, 그리고 전에 만든 것들 중 몇개를 도령이 부탁을 해서 보관 날짜를 좀 늘리게 만들어봤는데... 질이 그렇게 많이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았수." "그거 참 다행이군요." 오른쪽 난간으로 다가간 윙겟은 그 위에 있던 유리병중 열개를 골라 벨타이거와 선애쪽으로 미뤄놨다. 그 중 하나를 뽑아 향을 맡아본 선애의 눈이 놀라움으로 둥그래졌다. "어라... 이건... 야생화 3호네요?" "아아... 그건 보관 날짜를 늘려본거야. 몇가지를 좀 더 첨가해서 향이 좀 틀려졌지?" 퉁명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설명할 건 다 해주는 윙겟의 말에 선애는 다시 한번 향을 맡아보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이거... 모르겠는데요? 제가 둔하지는 않은데... 대단해요. 거의 변한게 없는 거 같아요." 선애의 솔직한 말에 차가운 윙겟의 눈빛이 약간 풀어졌다. 성격이 안 좋아도 칭찬하는 말에는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선애는 윙겟이 그러던 말던 다른 향수의 향을 맡기 시작했다. "아아... 이건 야생화 7호다. 오... 이건 새 향수인가보군요. 우와... 향이 무지 달콤해. 이야, 이것도 너무 좋다..." 선애가 하나 하나 향을 맡아보며 끝없이 감탄사를 내뱉는 동안 벨타이거는 향을 맡는 건 내버려두고 슬그머니 윙겟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새 향수가 5개 씩이나... 이거 정말 대단하신데요? 거기다가 기존에 있던 향수들도 보관 날짜를 늘리면... 총 12개군요. 내년 봄까지는 몇개 더 늘릴 수 있을까요?" "아마... 한 두개 정도는?" "양도 꽤 많이 늘리셔야 할 거예요. 부탁하신 농장은 아마 한달 내로 화원으로 완전히 개간할 수 있을 겁니다." "뭐, 맘에 드는 녀석들을 골라보도록 하겠수만..." 그렇게 둘이 속닥이는 동안 윙겟이 골라준 향수의 향을 다 맡았는지 선애가 두리번 거리다가 반대편에 있는, 꽤나 많은 나무병들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있는 것들은 뭐예요?" "실패작. 그리고 그나마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들. 아니면 아직 미완성 된 것들." 아까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그러나 여전히 퉁명스러운 윙겟의 설명에 선애는 입구와 정면에 있는 벽의 난간에 단 하나 있는 유리병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그럼 저건요?" 그러자 선애의 시선을 따라 그 유리병으로 시선을 돌린 윙겟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뭔가 추억이라도 회상하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대답한다. "내가 만든 것중... 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 "맡아봐도 돼요?" 선애가 조심스레 묻자 윙겟이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에 선애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조심스레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아무래도 윙겟이 최상의 작품이라고 한 것 때문에 약간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뚜껑을 열고 손짓으로 바람을 일으킨 뒤 향을 맡던 선애의 눈이 사르르 감기더니 잠시 후 번쩍 떠졌다. "우와, 우와, 우와...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군요. 대단해. 세상에... 제가 지금까지 맡아왔던 향수 중 단연 최고예요." 선애의 감탄에 윙겟의 표정이 완전히 풀어졌다. "이거... 설마 이것도 야생화 몇호인건 아니겠죠?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너무너무 향수가 아깝다구요." "그건 이름이 있어. '새벽의 축복'이야." 퉁명스러운 윙겟의 말투. 그러나 선애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만큼 향수의 향에 빠진 모양이다. "와우, 정말 멋진 이름이에요. 향수에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그런데 이건 왜 가게에 안 내놓으셨어요?" 선애의 질문에 여전히 퉁명스럽게 윙겟이 대꾸했다. "별로 내놓고 싶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건 다른 것들에 비해 만드는게 몇배로 힘들어. 만들어지는 것도 다른 것들의 1/10이 될까말까니까." "그래요? 하지만... 이 향수 이렇게 여기만 있기 너무 아까운 걸요. 밖으로 나가면 아마 모든 향수들의 머리 위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선애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자 윙겟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그의 뒤쪽에 있던 나는 윙겟의 얼굴이 약간 씰룩 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 선애의 말에 입이 벌어지려는 걸 참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도 부탁드리고 싶어요, 윙겟. 이 향수도 가게로 내놔주시지 않겠어요?" "흥, 별로 내키지 않는다우. 일반 유리병에 담을 바에야..." 윙겟이 그렇게 말하자 벨타이거가 씨익 웃었다. "당연히 일반 유리병에 담을 수 없지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향수인데... 그래서, 드워프제 유리병에 담아 판매할 생각입니다." '드워프?' 드워프라면 예전 유리 공예사에 갔을때 아주 고이고이 모셔진, 엄청나게 비싼 액수의, 그러나 그 만큼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리 공예픔을 만든 존재였다. 벨타이거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윙겟의 눈이 커다래졌다. "드워프제 유리병?" "당연하지요. 이 정도의 향수라면 드워프제 유리병이 아니라면 감당할 수나 있겠습니까?" 은글슬쩍 추켜 올리는 벨타이거의 말에 윙겟의 입이 다시 벌어지고 싶은지 씰룩 거렸다. "으으음... 드워프제 유리병이라...." "어때요, 윙겟?" "으으으음... 뭐... 드워프제 유리병에 담아서 판매할 거라면... 나쁠 건 없겠지만서도..." 좋으면서도 그 배배꼬인 성격 때문인지 확실하게 대답을 안 해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벨타이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결정 된 겁니다?" "뭐...." "잘 됐군요. 이번에 새로 신설할 가게는 무척 크게 낼 생각이었거든요. 아마 새로 낼 가게의 대표적인 상품이 될 겁니다." "뭐... 그 정도 까지야..." 속으로는 좋으면서 은근히 빼는 윙겟의 태도에 선애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이값..../" 제 15화 벨타이거는 선애를 자신의 상회로 끌어들일때부터 드워프제 물품들을 구입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윙겟이 최고 작품인 '새벽의 축복'의 존재를 내놓게 하려고 생각하다가 떠올린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벨타이거는 드워프제 물품 사는 것을 마치 슈퍼에 가서 과자 한 봉지 사는 것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사실 드워프제 물품을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최고의 장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드워프제 물품은 가격은 둘째치고라도 물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은 원래 사람들과의 교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덕분에 드워프 종족 전체를 두고 봤을때 인간들과 교류를 하는 건 끌어 모으고 모아도 - 그러니까 인간과 이야기라도 하는 족장이 있는 마을 드워프들 전체를 포함하여 - 겨우 30%라고 했다. 그리고 그 30%중에서도 인간들과 거래까지 하는 드워프들은 그 절반에 해당하는 정도. 전체적으로 봤을때 겨우 15% 정도일 뿐이었다. 그런 극소수의 드워프들이 만든 물품이 인간 세계로 내려오는 것이었으니 왠만한 사람들은 평생을 가도 드워프제 물건을 하나 볼까 말까할 정도였고, 그 물품의 질은 물론이거니와 그 히소성 때문이라도 가격이 정말 어마어마 했기 때문에 소유까지 가능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어떻게 해서 드워프들과의 거래를 튼 사람들은 그 거래를 계속 유지하려 했고, 더 많은 거래를 하기 원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한 틈새를 뚫고 드워프와 거래를 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타이거 녀석이 드워프제 물품 운운을 한 것은 그래도 그나마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헤스딩스 남작. 헤스딩스 남작은 알파두르 항구도시에서 남쪽으로 며칠 쭈우우욱~~ 가면 도착할 정도의 거리에 드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영지의 거의 한쪽 면이라고 할 수 있는 넓은 면적이 이 세계의 대륙을 이등분하고 있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지 무지 거대한 산과 맞다아 있었는데, 그 산속에 드워프의 마을이 무려 3곳이나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산에는 드워프들이 인간들이 사는 곳과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뭔가 매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중 한 마을은 인간 상인들과 드러내놓고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 마을의 족장과 헤스딩스 남작 조상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덕분에 헤스딩스 남작 영지에는 드워프들과 교류를 원하는 상인들로 항상 북적북적 댔기 때문에 원래 거의 볼모지라 할 수 있었던 영지가 무지하게 커질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 드워프의 마을 족장이 헤스딩스 남작 조상에게 은혜라도 입었는지 헤스딩스 남작의 허락을 받은 사람하고만 거래를 했으니, 거래를 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가져다 바친 재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헤스딩스 남작가와 크로스웰 남작가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평민이었다가 귀족이 뒤었다는 점이었다. 드워프와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남작 작위를 - 비록 귀족 작위 중 가장 낮은 것이라 해도 말이다. - 받은 거 보면 드워프제 물품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다. 뭐, 그게 어쨌든, 평민이었다가 귀족이 되었다는 공통점 하나로 헤스딩스 남작가와 크로스웰 남작가는 무지 가까웠다고 한다. 그 두 남작가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던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귀족 사회에서 전통 있는 귀족 가문들의 텃세가 심했던 탓일 것이다. 그런거 보면 인간들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비슷 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전 크로스웰 남작이었던 벨타이거 외할아버지때도 헤스딩스 남작가와 돈독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벨타이거도 헤스딩스 남작가와 안면을 익힌 상태라고 했다. "뭐, 외할아버진 날 미워했어도 남작가 사람이라고 인정은 해 준 모양이야. 하긴, 후계자 자리를 곤고하게 해주지는 않았어도 그에 걸맞는 교육은 시켜 주셨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는 벨타이거의 모습에 선애가 입술을 씰룩 거렸다. 곤혹스러워 하는 거였다. 미운 털을 콕 하고 박아 놓은 녀석이 약한 모습을 보이며 안됐다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니 지금까지처럼 틱틱 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 순간에 그를 대하던 태도를 바꾸기도 싫을테니 말이다. 뭐, 벨타이거야 선애가 자신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테니 - 물론 잘 알고 있다. -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일 거다. 하지만, 선애의 어찌할 바를 정하지 못해 찡그려진 인상을 본 그는 평소의 능글대는 표정으로 돌아와 씨익 웃었다. "뭐야, 갑자기 나에게 반한 거야? 드디어 선애도 내 매력을 느꼈나보지?" 그 말에 선애의 표정이 단박에 예전으로 돌아왔다. "회장님이 왕저병에 걸리셨는지 몰랐네요. 이제부터 절대 제 곁으로 가까이 오지 마세요. 병 옮기 싫어요. 그 병에는 약도 없다던데..." 처음 벨타이거와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애칭 '벨'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허락 했지만, 선애는 애칭은 커녕 이름으로도 절대 안 불렀다. 얄미운 녀석이라 이름을 부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동업하게 된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였던 터라 꼭꼭 그의 직함인 '회장'이라고 불렀다. 사족을 달자면, 선애의 직함은 '이사'였다. 무지 그럴듯한 직함인지 울 꼬맹이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했다. 비록 20평 정도의 작은 향수가게 하나만 달랑 보유하고 있는 꼬딱지만한 상회라고 해도 말이다. "에이, 선애는 너무 냉정하다니까. 그래가지고 어디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보겠어?" 벨타이거는 선애의 속을 박박 긁어 놓으려는 속셈이었겠지만, 그의 말에 나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해본 나와는 달리 선애는 의외로(?) 그 또래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어 몇번이나 데쉬를 받은 몸이었던 것이다. 선애는 벨타이거에게 진한 비웃음을 날려주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누구와는 달리 너무 인기가 많아서 누굴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아아, 너무 잘난 것도 죄라니까." '크허... 저 잘난 척,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만.' 선애의 행동이 정말 뜻밖이었는지 입을 떠억 벌린 벨타이거는 잠시 후에 피식 거렸다. "하, 이거 참... 정말 못당하겠군." "이기지 못하실 걸 뻔히 알면서 왜 덤비신대요? 그런 거 보면 회장님 머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니까요. 동업을 잘 한건지 의심스러워..." "어허, 나만한 동업자가 어디 있다고... 자,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러니 아마 헤스딩스 남작에게 부탁하면 거래 까지는 생각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 물품은 구할 수 있을거야."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로 되요? 거래를 틀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요?" "거래를 트면 좋겠지만... 안되면 몇개만 살 거야." "거래를 못하면 그냥 오지 왜 몇개라도 사게요?" "그거야 손님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지. 드워프 제품은 쉽게 볼 수 없는 건데, 그런 걸 전시해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릴 거잖아. 그때 우리 가게의 향수들을 선보이는 거지." "헤에..." [광고 효과라는 거군. 괜찮은 생각인데? 저 벨타이거 녀석, 꽤 많이 생각해 놓은 모양이야.] 내 말에 작게 끄덕인 선애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향수만 판매할 건가요? 윙겟이 몇개 더 만들어 낸다고 해도 채 20개도 안 되는데... 그럼 판매하는 게 너무 적어요. 드워프와 거래를 터서 드워프 제품을 판매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고가잖아요. 가격 차이가 너무 큰데다가, 제품 양도 많지 않다면서요." "그럴지도. 하지만, 어차피 가게 오픈은 내년 봄에나 할 생각이니까 그때까지 차근차근 생각하면 돼. 우선은 최소한 드워프제 물품을 가능 한 한 많이 확보하는 거야. 내일 헤스딩스 남작가로 출발할 생각이니까, 준비해 둬." 뜻밖의 말에 선애의 눈이 둥그래졌다. "엑... 나도 가요?" "당연하지. 선애는 내 동업자 잖아. 헤스딩스 남작과 안면을 익혀놓는 것도 좋아. 거기다 드워프 마을에 가고싶지 않아? 볼 것도 많을 거야." "에... 거야 뭐..." "거기다 아직 본격적으로 작업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할 일도 없잖아. 이 저택에 혼자 있느니 나랑 같이 갔다 오도록 해." 무지 신경써주고 있는 듯한 벨타이거의 말투에 선애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뭐예요? 되게 수상하네... 회장님이 언제 날 이렇게 생각해 줬다고..." "어어? 나는 항상 선애를 많이 많이 생각해주고 있다고." "웃기지 말아요. 언제 그랬다고? 솔직히 불어 보시죠? 왜 날 데리고 가려고 그래요? 설마 혼자 가는게 심심해서 그렇다는 건 아니겠지요?" 선애의 추궁에 벨타이거 녀석이 턱을 긁적 거리다가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에... 뭐... 어차피 알게 될 거니... 얼마 후에 헤스딩스 남작가에 파티가 열리거든. 헤스딩스 남작 영애 생일이라..."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래요?" "아주아주 큰 상관이 있어. 선애가 같이 안 가주면 파티에 나 혼자 가야 한단 말이야." "엑...." 선애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휴네 집에 있을때 잠깐 이곳 상식과 예절에 대해 배운 것을 더듬어 보자면, 귀족가의 파티때는 파트너를 대동하고 참석하는 게 상식이라고 했다. 뭐, 가족끼리 같이 참석하거나 말이다. 예의... 까지는 아니라서 혼자 가면 예의에 어긋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혼자 참석할 경우 그 사람이 원래 인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이 아는 경우가 아니면, 능력 없는 사람이라 비웃음을 당한다고 한다. "싫어요. 왜 하필 나예요? 거기 참석하면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릴텐데... 지금 나보고 구경거리가 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게다가 난 귀족도 아니라구요. 회장님은 그런데 동참할 여자 하나 못 구하세요? 되게 능력도 없네." 단호하게 거절하는 선애에게 벨타이거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에이, 선애는 내 동업자니까 도와줘도 되잖아." "됐네요. 그런 거 까지 도와줄 의리 없어요." 선애가 너무 냉정하게 거절하자 나는 의아해졌다. 뭐, 파티 한번 참석해주면 바람도 쐴 수 있고, 드워프들도 만나볼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그 드워프들이랑 그들이 만들었다는, 너무너무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한 물품들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면 좋잖아. 바람도 쐬고, 구경도 하고.] 그러나 선애는 나에게 찌릿한 시선을 보낼 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벨타이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같이 가준다면 파티에 입고 갈 예쁜 드레스 한 벌 사줄께." 그에 선애가 벨타이거를 한번 쓰윽 쳐다봤지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에잇, 인심 썼다. 거기에 어울리는 악세사리 하나 추가. 고르는 건 선애가 골라도 좋아." 그러자 선애의 고개가 약간 갸웃 거린다.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끝까지 허락 안 하자 벨타이거가 다시 말했다. "악세사리 하나 더 추가. 그러니까 같이 가자. 선애만큼 현명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알지 못해 데리고 갈 사람이 없단 말이야."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별로 탐탁치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쳇, 나를 그런 걸로 꼬시려고 하다니... 소용 없어요. 거긴 귀족가 파티라 싫다구요. 나는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평민 신분이니까." 그제야 나는 선애가 벨타이거의 제안이 매력적인데도 불구하고 왜 자꾸 거절하는 지 알 거 같았다. 아무래도 루빈스타인 후작가에 있을때 미란다 녀석과 한 바탕 했던 데미지가 컸던 모양이다. 그러자 벨타이거가 씨익 웃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 아까도 말했잖아? 헤스딩스 남작가도 우리 가문처럼 원래 평민이었다고." "그래도 그건 옛날 이야기죠. 지금은 평민을 하찮게 볼지도 모르잖아요." "안 그래. 현 남작님을 내가 알고 있는 걸. 그 분은 일반 평민 상인들과도 많이 교류하시는 분이라고. 게다가 선애는 내 파트너로 가는 거잖아? 선애에게 뭐라고 하는 건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거와 같다고."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고민하는 표정이다. 그에 벨타이거가 한번 더 물었다. "같이 가줄 거지?" 그러자 선애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드레스 한 벌하고 악세사리 두개는 사 줄거죠?" [어이, 어이. 아까는 그런 건 소용 없다며?] 어이가 없어 속삭였지만, 선애는 들은체도 안 했다. "간다면 사줄게." 벨타이거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선애가 씨익 웃었다. "뭐, 그렇게 내 도움을 바라신다면... 같이 가 드리죠." 그렇게 선애가 선심 썼다는 듯 동행을 허락 했지만, 출발은 그 다음날이 아니라 다음 다음 날로 미뤄졌다. 선애가 벨타이거 녀석이 약속한 것을 받아야만 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뭐,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헤스딩스 남작 영지보다 이 곳이 더 도시도 크고 번창했으니 여기서 사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애는 오랜만에 벨타이거와 함께 외출을 했다. 벨타이거가 돈을 내야 했으니 같이 가는 건 당연했고, 이왕 나가는 거 내년 봄에 새로 열 가게 자리도 한번 탐색해 보고 야생화 향수 가게에도 한번 들리자는 계획이었다. 그 동안 알아두기만 했지 들어가 볼 엄두는 내지 못한, 이 도시에서 알아주는 의상실에 들어가 평소라면 생각도 못할 가격의, 그러나 보자마자 선애의 마음속에 필을 딱 꽂은 드레스와 거기에 어울리는 파티용 구두, 목걸이까지 손에 넣은 선애는 날아갈 것만 같은 걸음으로 자신의 가게쪽으로 향했다. 하기야, 그럴만도 했다. 드레스와 파티용 구두도 엄청 비쌌지만, 거기에 덤으로 얻은 목걸이에는 무려 4캐럿짜리 다이아가 박힌 것이었다. 아마, 한국에서 치자면, 모르긴 몰라도 천만원 이상의 가격일 터였다. 여기서 잠깐, 다이아몬드 크기의 상식을 설명하자면 1캐럿 짜리는 다이아몬드 지름이 0.7cm다. 그보다 작은 건 '부'라는 단위로 나뉘는데 5부 짜리가 0.5cm의 지름을 가지고 있다. 시중에서 쉽게 보는, 아주 작은 다이아들은 0.1이나 0.2 부 정도의 사이즈라고 한다. 그런데 캐럿의 단위에서 한 단위 한 단위가 올라갈수록 지름도 0.1cm씩 늘어나는데, 그런고로 4캐럿 짜리는 지름이 1cm였다. 그러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받았으니, 악세사리를 좋아하는 선애의 입이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너무 비싼 걸 사줘서 벨타이거 녀석이 선애에게 앙심을 품었다거나, 아니면 너무 보석을 밝히는 여자라고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어 벨타이거 녀석의 표정을 살피니, 다행이 그는 단지 피식 피식 웃기만 할 뿐, 내가 걱정하는 그런 종류의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선애와 벨타이거 녀석은 좋은 분위기로 야생화 가게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아직 더운 날씨라 문을 활짝 열어놓아 손님이 들어섰을때 종소리가 나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문쪽을 보고 있었는지 들어서자마자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익숙하기기는 한 목소리지만, 이 곳에서 들게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어라? 넌..." "어어? 누나?" 그 소년은 카밀. 선애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인연을 맺은 아이였고, 나중에 그 아이의 누나인 칸나를 여기 점원으로 고용했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미래의 정보 길드원으로 휴에게 찍힌 상태였다. 여기서 고용된 거 보니 아무래도 외근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네가 여긴 어떻게 있는 거니?" 의아한 선애의 목소리에 카밀이 헤죽 웃어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서 막 손님을 배웅하던 첼시가 대신 대답했다. "여기서 심부름을 해주는 아이로 고용했답니다." "헤에, 그랬군? 잘 있었어요, 첼시?" 정보 길드 외근 요원이자 이 가게 점장을 맡게 된 첼시에게 인사하자 첼시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얼마 전에도 오긴 했었지만, 쇼핑 나온김에 잠깐 들렸어요." 선애가 가게 안에 있던 사라와 칸나, 중년 부인에게도 인사를 하고 나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첼시가 입을 열었다. "뭐, 며칠 만에 오신거긴 하지만... 그 동안 가게는 여전히 순조롭답니다." "아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그 기간동안의 장부를 보시겠어요?" "에?" 그냥 잠깐 들러본건데 장부를 보여준다고 하자 선애는 당혹스러워 했다. 그러나 첼시는 그러든 말든 선애를 이끌고 안쪽에, 이제는 이 가게의 사무실이 되어 첼시가 사용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벨타이거는 원래 가게에 신경을 안 썼던 사람인지라 지금도 별로 보고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자기는 안 움직이고 선애에게 손만 흔들어 보였다. 그래 얼결에 첼시에게 끌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는데, 장부를 가지고 와 펼쳐주며 첼시가 지나가는 어투로 속삭였다. "헤스딩스 남작가에 가십니까?" "예?" 뜬금없는 말에 선애가 되묻자 첼시가 선애 옆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벨타이거 크로스웰 남작이야 당연히 헤스딩스 남작 영애의 생일 파티에 초대 되어서 갈테지요. 그러나 사장님은 어떠십니까?" 나나 선애가 알고 있기로, 벨타이거 집안 사람들에게는 헤스딩스 남작 영애 생일 파티에 간다고 알리지 않았다. 헤스딩스 남작령으로 출발할때도 단지 며칠 놀러 갔다 오겠다고 하고 갈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첼시가 어떻게 안 거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선애도 그게 의아했던지 오히려 첼시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첼시가 별 표정 없이 어깨를 으쓱한 뒤 대답했다. "제가 안게 아니라 위에서 안 거죠." "아... 뭐, 회장님이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해서 같이 갈 예정이에요." 첼시의 대답을 이해한 선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 전에 첼시가 자신에게 한 질문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줬다. "그렇군요. 만약 사장님이 간다면 몸 조심하라고 전하래요." "에?" 당혹스러운 첼시의 말에 선애가 눈썹을 치켜뜨자 첼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토지그 크로스웰이 헤스딩스 남작 영지로 갈 걸 짐작하고 있을 거랍니다." 첼시는 그 말을 끝으로 할 말을 다 전했다는 듯 펼쳤던 장부를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에... 뭐야, 이 말을 하려고 선애 널 여기로 데리고 왔나보지?] 첼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애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인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첼시의 말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토지그 크로스웰은 벨타이거와 남작 자리를 다투던 사람이었다. 벨타이거하고는 정확히는 5촌 외숙부로, 벨타이거 외할아버지 형제의 아들이었다. 지금도 벨타이거가 사망하면 남작 작위 계승권 1순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벨타이거가 아들을 낳아 그의 작위 계승권 순위를 밑으로 내리지 않는 한 계속 벨타이거를 노릴 가능성이 있었다. 정보 길드에서는 그걸 걱정해준 모양이었다. 가게를 나와 벨타이거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선애는 첼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렇군... 남작 영애가 태어났을때부터 매년 초대장을 받아 왔으니 숙부도 눈치채고 있었겠지." 벨타이거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조심해야겠네요." "그래야지." "그런데... 첼시는 오늘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대충 그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것 같자 선애는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그럼 아까 고민한게 첼시의 말을 생각한 게 아니라 그걸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내가 기가막히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냉정한 선애는 내 말이 아니라 벨타이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 올 거라고 예상을 한 게 아니라 며칠 내로 올 거라고 예상을 한 거겠지. 남작 영애의 생일 파티에 늦지 않게 참석 하려면 며칠 내로 출발해야 할테고, 보통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으면 자신의 가게 정도는 한번쯤 들리려고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따지자면, 올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 그의 설명에 선애가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쳇, 말은 잘 하는군. 그렇게 머리 좋은 놈이 뒤통수는 왜 맞았누?' 선애와 벨타이거가 그 길로 저택으로 돌아가자 맞이하러 나온 집사가 선애를 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아가씨께 손님이 와 계십니다." "나에게요?" 이런데 찾아 올 사람이라고는 휴나 자스민 정도였지만, 이쪽으로 옮겨오면서 절대 아는척은 하지 말라고, 연락은 첼시하고만 하라고 신신당부를 들은 상태였으니 그들은 분명 아닐것이다. 그렇지않아도 첼시는 방금 만나고 들어왔으니 말이다. "예, 페르티니어스라고 하시면 알 거라고 하시더군요.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아..." 집사의 말에 선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티니어스는 이 세계에 와서 유일하게 선애와 인연을 맺고 있는 마법사였다. 맨 처음 선애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 살펴봤고, 선애의 수학 능력을 테스트 한 바로 그 마법사 말이다. 그가 찾아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선애는 의아한 표정으로 응접실로 달려갔다. 물론, 그 옆에는 벨타이거가 같이 있었다. "왜 따라 오는데요? 제 손님인데..." "그냥. 왜, 내가 옆에 있으면 안돼?" 그의 방문 목적이 뭔지도 모르는데 되는지 안되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나중에 들으면 안되는 게 있으면 내쫓을 겁니다." "그래, 그래. 그땐 얌전히 나가줄게." 그렇게 벨타이거의 확답을 받은 후에야 선애는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저택 전체의 분위기 답게, 약간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 안의 무지 폭신해보이는 소파에는 페르티어스 마법사가 앉아서 대접받은 과자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선애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는데도 불구하고 페르티어스 마법사는 약간 퉁명스레 대꾸했다. "너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왔지. 여기로 이사를 오면 온다고 말이나 해주지, 저쪽에 갔다가 다시 여기로 왔잖아?" '에에... 얼마나 친하다고 숙소 옮긴 걸 일일이 말해주고 다닌다냐... 게다가 어차피 휴에게 물어보면 다 알텐데...' 왠지 쓸데없이 선애에게 꼬투리를 잡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진 나는 마법사를 째려 보았다. 어차피 내가 째려본다고 해서 별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런데, 어째 그 마법사가 평소의 팔팔한 기운은 없애 버리고 좀 의기소침해 보이는 것 같았다. "아하하...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레 옮긴 거라 저도 정신이 없었거든요. 아, 이쪽은 크로스웰 남작이에요." "반갑습니다. 벨타이거 크로스웰이라고 합니다." "페르티어스요." 선애의 소개에 벨타이거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건만,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퉁명스레 대꾸했다. 어째 정말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듯... 선애는 마법사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음... 무슨 일이 있으신 거에요?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건데요?" 벨타이거도 선애의 옆자리에 앉으며 마법사에게 시선을 보내자 페르티어스는 죄 없는 과자만 아그작 아그작 씹어 먹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툭 내뱉었다. "네가 부탁한 거 말이다..." 그의 말을 순간적으로 알아듣지 못한 선애는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나는 그게 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선풍기 말야.] "아아... 그거요?" 선애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사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잘 될 줄 알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에? 그래요?" 선풍기야, 더위 속에서 일하는게 싫어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거지만, 이제는 이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선애는 더 이상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 크게 놀라지 않고 그런가보다... 했는데, 마법사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네가 그려준 그 날개를 만들 뭔가 좋은게 필요해. 튼튼하면서도 가벼운 것. 처음에는 가볍게 하려고 나무로 만들어봤는데... 내구력이 약한지 얼마 있지 않다가 부러지더라구. 그래서 쇠로 했는데... 이따만한게 무게가 장난이 아니야." 그러면서 마법사는 자신의 팔을 펼쳐 팔꿈치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선풍기 날개 하나의 길이를 가르킨 모양. 그럼 전체적인 크기는 그의 팔 길이 정도일텐데, 가게에서 사용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여야 했다. "그래요?" 선애의 예의상 묻는 말에 마법사는 탁자 밑에 놓아두었던 커다란 꾸러미를 낑낑 대며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 무게가 상당했는지,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굉장히 컸다. 꾸러미를 풀자, 마법사가 말한 바로 그 크기의 쇠로 만든 선풍기 날개가 보였다. 그런데... "세상에... 아니, 이게 왜 이렇게 두꺼워요? 그러니 무게가 상당하죠." 그랬다. 선풍기 날개의 두깨가 무지 두꺼워, 엄청 둔해 보이는 것이었다. 대략 내 손가락 반마디 정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도 이 정도의 두께면 제대로 돌아갈지 의문일 정도로 보일 지경이었으니... 선애가 선풍기 날개를 만지며 묻자 마법사가 툴툴 댔다. "어쩔 수가 없어. 이보다 더 얇게 만들면 금방 구브러진단 말이야." "에에?" 나도 선애처럼 기가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니, 쇠가 얼마나 약하면, 이보다 얇다고 구부러진다는 걸까? 물론, 아주 얇으면 구브러지겠지만서도... "그래서, 이것 보다 가벼우면서도 더 얇아도 튼튼한 내구성을 가진 물질이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네가 부탁한 건 못 만들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런 걸 선애에게 말하면 어쩌란 말이야? 아, 혹시 못 만들겠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선애가 이 마법사를 찾아가서 선풍기 날개에 대해 말해줬을때 마법사는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 탕탕 쳤으니 말이다. "으음... 하는 수 없죠 뭐. 갑자기 그런 물질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별로 선풍기의 존재에 대해 아쉬움이 없었던 선애는 선선히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던 벨타이거 녀석이 끼어들었다. "뭐야? 도대체 뭘 만들려는 거였는데?" 그에 선애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략적으로나마 선풍기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바람을... 일으키는 마법 도구라고?" "마법 도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원동력은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님이 만들어 내신 마법 구슬이었으니까요. 그걸 응용해서 이 모양의 날개를 달면 바람을 일으킬 수 있거든요." "오오... 그런데 그거 혹시,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색도 입히고 장식품도 붙여서..."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요. 이 날개 정 가운데에 등불이라도 붙여놓을 수도 있고요." 그의 말에 벨타이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더니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말씀하신, 가볍고 단단한 물질 말입니다... 그거 혹시, 드워프라면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 뭐... 드워프라면야...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금속 물질을 알고 있으니..." 마법사는 약간 망설였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드워프를 만날 일이 있으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 선애가 부탁한 걸 완성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벨타이거의 말에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는 두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가지. 한번 시작했는데 끝을 보려고 노력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러자 벨타이거가 응뭉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만약 제가 드워프를 만나게 해드린다면 어떻겠습니까?" "뭐?"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는 그제야 벨타이거의 표정이 요상하다는 것을 알아 챈 모양이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벨타이거에게 물었다.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나?" 마법사가 단도직입적으로 나오자 벨타이거도 돌려 말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 물건, 만약 완성한다면 판매권을 저희 타이거 상회에 주시지 않겠습니까?" 남작 집안이 상인 집안이라서 그런가, 벨타이거 녀석도 뼛속까지 상인이었던 모양이다. 선애야 마법사의 말에 별로 필요성을 못 느껴 그냥 저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벨타이거는 그걸 보자마자 완성시켜 팔아먹을 생각을 하니 말이다. [으음, 네가 대상이 되고 싶으면 저런 점은 본받아야 할 것 같구나.]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는 벨타이거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즉시 '얼마 줄건데?'라고 물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헤스딩스 남작령에 가는 여행길에 일행이 한명 더 늘어나게 되었다. 나중에 일행에 합류한 마법사 페르티니어스가 자신의 짐을 챙겨야 한다고 여유를 하루 더 달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헤스딩스 남작 영지로 출발 한 것은 맨 처음 벨타이어가 생각하고 있던 날로부터 사흘이나 지난 후였다. 일행은 모두 넷으로, 벨타이어와 나, 마법사 페르티니어스하고 마지막으로 잭 조셉 이라는 청년이 끼어들었다. 이 청년은 조셉 집사와 벨타이거의 유모인 조셉 부인의 아들로 - 이제야 말하지만 집사와 유모는 부부였다. - 어렸을때부터 벨타이거와 같이 자라서 그런지, 저택에서 벨타이거가 맘을 놓는 단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 한 사람은 유모 - 그런데 이 사람은 바로 출발하기 전 날, 그러니까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자신의 짐을 챙긴다고 기다리라고 한 바로 그 '하루' 날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무 소식 없이 돌아와서 조셉 집사와 유모는 물론이거니와 벨타이거도 무지 기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청년은 나중에 조셉 집사의 뒤를 이어 이 저택의 집사가 될 것인데다가, 재능도 있어서 특별히 수도에 있는 국립 학교에 유학을 갔다가 졸업하고 이제야 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이 세계가 틀린 것이, 이 세계에서는 입학하고 졸업하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라고 한다. 아마 한국처럼 교통 체제나 통신 체제가 발달된 게 아니라서 그런 거 같았다.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만약 입학이 봄이라면 겨울에 서둘러 움직여야 할텐데, 그럼 이동할때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걸 배려해서 입학도 졸업도 여름에 하는 것 같았다. 하여간, 그런데 이 청년은 자신이 올해 졸업한다는 걸 집에 알리지도 않고 그냥 혼자 졸업해서 혼자 온 모양이었다. 벨타이거보다 한 두살 정도 많아보이는, 20대 중반을 넘어선 청년은 인상이 선해 보여 호감이 가는 생김새였다. 아버지의 외모를 물려받아 금발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셉 집사가 차가운 회색 눈이라고 하면, 이 청년은 분위기는 어머니를 닮아 부드러워 보이는 회색 눈이었다. 훤칠한 키에 탄탄해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어, 아무래도 저택의 하녀들의 눈길을 많이 받을 듯 했다. 그렇게 바로 하루 전날 도착한 그가 벨타이거가 며칠 집을 비우겠다고 하자 자신도 따라 나서겠다고 한 것이었다. 뭐, 저택에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했던 벨타이거도 순순히 동행을 허락 한 거 보면 그가 같이 간다고 한게 좋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정보 길드에서 조심하라고 한 경고도 있고 해서 남작령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해 줄 용병들을 고용했다. 물론, 저택에도 경호를 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벨타이거는 그들을 조금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숙부와의 싸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지금은 그냥 두고 있지만, 앞으로 서서히 그들을 갈아치울 것이란다. 그러고보면 벨타이거 녀석도 참 안된 녀석이다. 편하게 지내야 할 자기 집에 고용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라니... 그리하여 그들을 데리고 가느니 차라리 돈 주고 용병들을 고용해서 데리고 간다고 한 거였다. 드워프들 만나러 갈때는 데리고 가지 못하니 계약은 헤스딩스 남작령에 도착할 때까지. 아마 올때는 거기서 다시 용병들을 고용하겠지. 그리하여, 우리 일행 넷에다가 - 물론 나는 빼고 - 벨타이거가 알아서 구한 용병 다섯명이 알파두르 항구도시를 벗어났다. 말을 못 타는 선애와 마법사는 마차를 탔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말을 타고 갔다. 그런데, 마차가 꽤나 고급인데다가 일정이 급한 것이 아니어서 천천히 달렸는데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마차를 타고 가는 거라 선애는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한국의 자동차들만큼 승차감이 좋지 않아서 꽤나 덜컹 거렸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알파두르 항구 도시에 있을때 가끔 이보다 더 안 좋았던 영업용 마차를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 영업용 마차도 천천히 달린데다 거기는 이런 길이 아니라 반듯 반듯한 돌들이 마치 보도블럭처럼 쫘악 깔린 잘 다듬어진 도로라 크게 덜컹 거릴 일도 없었다. 게다가 길어야 몇십분 정도 타고 있는 거였으니 크게 덜컹거려도 충분히 참을만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왠종일, 그렇게 해서 며칠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첫날 마차로 인하여 허리와 엉덩이의 통증을 호소한 선애를 헬쓱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점심 먹기 위해 잠깐 멈췄을때는 약간 인상을 찡그린 정도였는데, 날이 저물어 어느 마을의 여관에 도착했을때는 노친네처럼 '에구구, 에구구...' 소리를 연발하는 거였다. 그리하여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대충 먹고는 숙소로 올라가야 했다. "에구구구..." [그렇게 아프냐?] "/언니도 타봐. 이 소리 안나오게 생겼나... 아구구구... 며칠동안 이렇게 가야 하다니.../" [기둘려봐. 뜨거운 찜질 좀 해줄께. 옷 젖으니까 옷은 벗구.] "/몰라 몰라, 귀찮아... 언니가 해주라./" 선애의 투정에 기가막힌 나는 선애의 몸을 함부로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하며 험하게 옷을 벗겼다. 하지만 선애는 피곤한지 내가 굴리면 굴리는데로 데굴거리며 축 처져 있기만 할 뿐이었다. [으이그... 아니, 너보다 나이가 많으신 마법사는 괜찮은데, 젊은 네가 왜 이러냐?] 방 안에 마련된 대야에다 내 힘으로 끓인 물을 붓고는 수건을 잠시동안 담근 뒤 물을 짜서 선애의 허리에다 올려놓으며 투덜댔다. "/그 분은 익숙한가 보지. 앗 뜨거워./" [좀만 참아. 그래야 효과가 있지.] "/그래도 너무 뜨겁단 말야./" 기운 없는 목소리로 징징대는 선애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새 수건을 하나 꺼내와 뜨겁게 뎁힌 수건 밑에다 깔았다. [됐냐?] "/으응... 좀 나아./" [좀 주물러 주랴?] "/웅.../" 따뜻한 기운이 욱신대는 허리를 뎁히자 졸린지 선애가 눈을 반쯤 감으며 웅얼거리듯 대꾸했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 나는 선애 엉덩이에도 뜨겁게 데운 수건을 하나 더 올려놓은뒤 허리를 슬슬 쓸어주기 시작했다. "/아... 좋다.../" [아프면 말해라.] "/우웅.../" [에휴...] 그래도 한 밤중까지 그렇게 계속 뜨거운 물로 뎁힌 수건으로 찜질해주고 허리랑 엉덩이를 쓸어준게 효과를 봤는지 다음 날 아침 선애는 가뿐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괜찮아?" 깨끗하게 씻고 짐을 챙긴 뒤 식사를 하러 밑으로 내려가자 먼저 내려와 있던 벨타이거가 물어왔다. "어제 푹 쉬어서 괜찮아요." "쯧쯧, 아직 젊은데 체력이 그렇게 약해서 어쩌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지 팔팔한 마법사가 혀를 끌끌 차자 선애가 머쓱하게 웃었다. "마차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아아, 돌아가면 말 타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말은 좀 나으려나..."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도 오래타면 여기저기 아파. 그래도 뭐... 여차하면 필요할지 모르니까 배워두는 것도 좋겠지." "체력 단련 좀 해라." 마법사도 한 마디 했다. 아침을 먹고 나자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우리가 출발할 즈음, 우리 뒷쪽에서 십여명 정도 되는 무리가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 그들 말고도 알파두르 항구 도시 쪽으로 가는 상인 무리도 있었으니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 도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리나 그들 말고도 여럿 있었으니 말이다. 기실, 우리보다 먼저 우리가 가는 방향쪽으로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일정이 급했는지 말의 속도를 빠르게 해서 점점 거리가 벌어지더니 얼마 뒤에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잠시 후에 길에는 우리 일행이랑 우리 뒷쪽에서 따라오는 일행, 단 두 무리 뿐이었지만, 그 무리도 우리보다는 속도가 빨랐는지 조금 뒤에는 우리 일행을 추월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각자 무기를 가진, 거친 인상들의 떡대들인 걸 보니 아무래도 항구 도시를 떠나 다른 곳에 일자리를 얻거나 일을 하러 가는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그들로써는 느긋한 속도로 가는 우리가 영 마땅치 않았는지 추월해 가면서 다들 한번씩 우리를 기분 나쁜 눈초리로 쓰윽 보고 가는 것이었다. 그에 우리쪽 사람들 얼굴도 굳어졌지만, 그런 거 가지고 시비를 걸 수는 없는 일이라 그들이 빨리 가도록 길 한쪽으로 비켜서주는 선에서 끝냈다. 그 후 그들은 전보다 좀 더 속도를 내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 우리와 거리는 점점 벌어졌기에 우리 일행들은 별 다른 긴장 없이 느긋하게 전진할 뿐이었다. 그렇게 별 다른 일 없이 정오가 되자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하여 길을 벗어나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점심은 어제 저녁에 들린 마을 여관에서 싸온 도시락이었다. 몇 시간 동안 마차를 타느라 힘들었던 선애는 마차에서 내려 땅을 밝고 서자 살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병과 일행들은 따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서로 같이 가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고용자와 피 고용자 사이였으니 함께 식사를 하는게 불편하기는 할 것이다. 돈을 쫌 들였는지 제법 화려한 도시락을 선애가 행복한 표정으로 펴 들고는, 속이 많이 들어 두툼한 샌드위치를 한 입 먹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두두두두~~ 여러 마리의 말들이 힘차게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누가 급한 볼일이 있어서 길 위를 달리는 줄 알았는데, 어째 그 소리가 우리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거였다. '에? 뭐야?' 그 소리에 의아함을 느끼며 살펴보려고 일어났는데, 무지 당혹스럽게도 아까 우리들을 추월해 갔던 그 십여명쯤 되는 용병 무리들이 말을 타고 곧바로 이쪽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선애야!] 그러나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일행들은 도시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쯤, 말을 탄 무리들은 우리 일행들 바로 앞까지 도착해 멈춰서고 있었다. "뭐냐?" 용병들 중 리더격인 사람이 자신의 무기를 쥐고 앞으로 나서서 묻자, 말 탄 용병들 쪽에서도 대장 격인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너무 기분이 나빠서 말이야." 명백한 시비조였다. "그래서?" "네놈들이 기분 좀 풀어줘야 겠어." 말 탄 용병들의 대장 말이 끝나는 것이 신호인 양, 멈춰 서 있던 녀석들은 말을 탄 채로 곧바로 우리쪽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피햇!" 누군가가 소리치지 않아도 이미 사람들은 양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이 말탄 용병들이 노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행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말에서 내려 자신들도 둘로 나뉘어 각자 일행을 둘러싼 것이었다. 그들은 일행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말에서 내려 자신들도 둘로 나뉘어 각자 일행을 둘러싼 것이었다. 내가 있는 쪽에는 - 나는 제외하고 - 선애와 페르티어스 마법사가 있었다. 용병들은 세 명이 이쪽으로 와 있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이쪽이 좀 약해보이는 사람들만 있어서 한 사람이 더 온듯 싶었다. 저쪽에는 벨타이거와 잭 조셉이 두명의 용병들과 같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벨타이거야 귀족으로써의 교육은 다 받았다고 하니 검술도 배웠나보다... 싶긴 했지만, 잭 조셉까지 검을 꺼내들고 능숙하게 들고 있는 폼이 놀라웠다. 저 녀석이 다닌 학교에서는 아무래도 검술까지 가르쳐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봐자 상대편 녀석들과 우리쪽과는 인원수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십여명이라고 생각했던 놈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열 다섯명. 우리쪽을 얕보았는지, 저쪽에 여덟이 붙고 우리쪽에는 7명이 둘러서 있었다. 하기야, 겉으로 보기에 우리쪽에는 이제 갓 20대에 든 아가씨 한명하고 중년 남자 한명이었으니 말이다.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는 항구 도시에 있을때는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를 입고 다녔으면서 여행 나올때는 걸치적 거린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애가 그럼 왜 도시에 있을때는 로브를 입고 다녔냐고 했더니, 마법사 길드 눈치때문애 그랬다나 어쨌다나. 어쨌든, 숫자상으로도 단 세명의 용병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으니, 수가 더 많은 괴씸한 침입자 놈들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하기야, 자기들보다 숫자가 적으니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겠지만... "이게 무슨 짓이냐!" 저쪽 팀에 우리가 고용한 용병들의 리더가 있는 모양인지, 침착한 외침이 들려왔다.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꽤나 냉정하고 침착한 눈으로 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같이 있는 - 벨타이거와 잭도 포함하여 - 이들도 마찬가지. '뭐, 2:1이긴 하지만 금방 어떻게 되지는 않겠군.' 그들의 행동을 슬며시 살펴본 나는 피식 웃고는 우리를 둘러쌓고 있는 놈들을 바라봤다. 선애와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를 등뒤로 보낸 채 적들을 가로막고 있는 용병들 또한 침착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숫자 때문인지 꽤나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러한 용병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쁜 녀석들 중 한명이 외쳤다. "한꺼번에 덤벼!" 한 손이 열 주먹 못 막는다고, 한꺼번에 달려들면 용병들이 최선을 다해 막는다 해도 몇몇은 선애에게 갈 것이 뻔했다. 아마, 저 나쁜 놈도 그걸 계산하고 한꺼번에 덤비라고 한 걸테지만. 그리하여 나는 일단은 용병들을 피해 선애에게로 달려드는 녀석들을 우선적으로 처리 하려고 온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선애 옆에 있던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세 용병과 나쁜 녀석들이 막 부딪히려 하기 직전 낭랑하게 외쳤다. "디그!"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달려들던 나쁜 녀석들이 딛고 있던 땅이 갑자기 뒤집어지면서 커다란 구멍이 파였다. 그와 함께 달려들던 녀석들이 거기에 휘말려 그 구멍속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뭐, 구멍이 겨우 1m 정도의 깊이였기에 크게 다치지는 않고 그냥 넘어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녀석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뒤로 물러나게."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지시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바로 앞에서 커다란 구멍이 파이는 바람에 놀란 용병들은 잽싸게 뒤로 물러나며 적들과 거리를 벌렸고, 구멍 속으로 떨어진 녀석들도 마법사가 가만히 있는 동안 허겁지겁 구멍 속에서 빠져나와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다음 공격을 대비한 것이리라. 그런 녀석들을 씨익 미소지으며 바라보던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매직 미사일!"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 적들은 다시 두어 걸음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도 그럴것이, 페르티니어스 마법사 주위에 동동 떠 있는, 푸르스름한 빛으로 만들어진 약 50cm 길이의 막대기들이 5개나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 마법?" "마법사였어?" "젠장, 마법사가 있었단 말이야?" 적들만 놀라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동안 이야기로만 들어나 봤던 마법을 실제로 목격한 나도 무지 놀랐다. [오오오옷! 이게 바로 마법이란 거야? 우와아~~ 나는 순간적으로 영화를 보는 줄 알았어.[ 선애도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떠억 벌어졌다. "/이, 이게 마법? 으으으음... 지금이라도 배워볼까?/" 전에 제자로 삼아주겠다던 마법사의 제의를 냉정하게 거절한 것이 무지 아까운 모양이다. 놀란 와중에도 선애의 중얼거림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이, 어이. 그럼 타이거 상회는 어쩌고?] "/음... 그도 그렇군. 마법을 배우면서 일한다고 하면 안되나?/" [가능하면 한번 해봐라.] "/쳇.../" 선애는 무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기실, 마법이란 것이 무지 배우기 어렵다고 전에 휴가 말해주는 걸 기억하고 있었기에 상회 일을 하며 마법을 배운다는게 거의 불가능하리란 걸 알고 있을터였다. 하기야, 마법을 배우는 게 쉬웠다면 누구나가 다 마법을 배웠을 거다. 이렇게 신기한 능력을 배울 수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속닥이는 동안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는 그 나쁜 녀석들과 놀고(?) 있었다. "한방 맞고 쓰러질래, 그냥 물러 갈래? 죽을까봐 걱정은 안 해도 돼. 이거 맞는다고 죽지는 않을테니까." 그의 말에 나쁜 녀석들이 움찔 거리더니 두어발 더 물러났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재미있는지 히죽거렸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이 마법사의 성격도 참 평범하지는 않다. "음... 그냥 물러가겠다고?"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의 말에 7명이나 되는 녀석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법사는 원래 처음부터 그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기껏 만들었는데 그냥 없애기도 아깝잖아? 죽지는 않을테니까 그냥 곱게 맞아라." 그의 말에 적들은 낯빛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다시한번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고개를 격렬하게 저어댔다. 그러나 매정한 빛의 미사일들은 마법사의 손짓에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우와악~!" "피해!" 우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신 있게(?) 시비를 걸 정도로 어느정도 실력에 자신있는 녀석들이었는지, 그들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재빠른 솜씨로 사방으로 흩어져 달려갔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빛의 미사일은 그들보다 더 빨랐다. 퍼억~!! 퍼버버벅~!! 분명히 빛의 미사일은 사람과 부딪히며 폭탄 터지듯이 터지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어째 가죽부대에 몽둥이가 내려치는 듯한 소리였다. "음... 마나를 적게 넣었는지 소리가 쫌 괴상하군." 역시, 소리가 이상했던 건지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 거린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날린 마법을 맞고 다섯명은 그 자리에서 뻗어 바닥에 헤딩하고 나머지 세명은 줄기차게 도망가는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아, 그러면..." 하며 선애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한 쪽에 얌전하게(?) 서 있던 용병 중 한 명이 주춤 다가와서 물었다. "저, 저기... 마법사 셨습니까?" "음? 아, 그렇다네. 왜?" "아, 아뇨. 어쨌든, 마법사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속으로 의뢰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엄청 불안했거든요."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음... 그건 그렇고, 저쪽은 안 도와줘도 되나?" 마법사가 이제 완전히 뒤섞여 난전을 펼치고 있는 벨타이거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세 용병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한 명은 남고 두명이 도와주러 달려갔다. "아... 회장님도 제법 잘 싸우네요. 잭 조셉씨도 그렇고..." 우리쪽을 둘러싼 녀석들이 다 처리되자 여유가 생긴 건지 느긋한 표정으로 난전을 바라보고 있던 선애가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받은 건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였다. "그러게. 하기야, 체격을 봤을 때 입만 놀리는 녀석이 아닌 건 눈치챘지만..." 벨타이거는 한명을, 잭 조셉은 두 녀석을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었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잘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어 그 두 녀석을 밀어붙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밀리지도 않았다. 겨우겨우 동수를 이루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적들의 몸놀림이나 그 두사람의 몸놀림이 빠르고 날카로운 것으로 보아 양쪽 다 실력이 결코 낮은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에... 마법사님이 안 도와주셔도 될까요?" 선애와 마법사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혼자 남아있던 용병이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묻자 페르티니어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뭐, 죽자사자 달려드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힘겨루기처럼 보이는데, 냅두지 뭐.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데 금방 끝나는 건 아쉽잖아?" '역시... 성격이 평범하지 않다니까.' 하지만, 마법사가 도와주지는 않았어도 우리쪽에 있던 용병 둘이 달려간게 크게 도움이 되었는지 시비 걸던 녀석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잘은 몰라도 다섯명이라 해도 제법 큰 돈을 들여 고용한 뛰어난 용병들이라 제 값을 하는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세명과 두 명을 각각 맞아 겨우 동수를 이루고 있던 용병들이 자신의 동료 두명이 합세하자 펄펄 날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세명이 더 쓰러지자 안되겠던지 한 녀석이 외쳤다. "물러나자!" 그러자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녀석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우르르 뒤로 물러나더니 우리쪽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는 잽싸게 말을 타고 도망가 버리는 것이었다. 남 점심 먹고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와 실컷 방해해 놓고는, 이제와서 자기들이 불리하다 싶으니까 우르르 도망가 버리는 작태에 사람들은 기가막힌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뒤쫒을 생각은 못했다. "이런,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군요. 점심은 생략하고 곧바로 출발해야겠는데요?" 용병들 중 리더인 사람이 주변을 살펴보더니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애의 인상은 사정없이 팍 찡그려졌다. "/으득... 그 자식들... 한대씩 패주는 건데.../" 선애는 무엇보다도 식사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특히나 맛있는 것이 나온 식사 시간은 더욱 더... 선애는 평소보다 좀 더 늦게 잠들었다. 침대에 일찍 눕기는 했지만, 근육통과 울렁거리는 속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속이 진정되자 배가 고파져 살 찔까봐 걱정하면서도 벨타이거 녀석이 가져다 준 스프와 빵을 다 먹고 그제야 잠이 들었다. 선애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봤다. '으음... 수건은 다 적셔놨으니 마른 걸 가지고 와야겠군. 물도 얼마 없으니 길어놓고... 찜질은 한번 더 하면 되려나?' 촉각을 느낄 수 없다는 건 이럴때 참 불편했다. 물이 뜨거운지 따뜻한지, 선애 허리에 올려놓은 수건이 다 식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애가 깨어 있을때야 녀석이 말해줬지만, 지금은 잘 자고 있는 애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지 뜨거운 걸 올려놨다가는 화상 입을 수도 있어서 위험했다. '이럴 때 시계라도 있으면 시간이라도 재서 대충이라도 알 수 있을텐데...' 선애가 이 세계로 떨어졌을때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건전지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멈춘지 오래였다. 다른 걸로 대체하고 싶어도, 이 세계에는 시계가 별로 필요치 않아서 마련하지 못했다. 게다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시계란 일회용성의 모래시계나 해 시계 정도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걸로 마법 시계가 있긴 한데, 그건 엄청나게 비싸서 살 엄두도 못냈다. '하여간, 이 세계에서는 '마법'자가 들어가면 가격이 천장부지로 치솟는다니까.' 속으로 투덜대며 나는 빈 물단지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사용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밤에 돌아다니는 누군가와 마주칠까 무서워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물을 뜨기 위해서는 여관 밖에 있는 우물을 이용해야 했고 말이다. 여관 안에 펌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밤중에 펌프지를 했다간 그 소리를 누군가 들을 염려가 있기에 상대적으로 소리가 안 나는(?) 우물을 사용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물을 넣을 커다란 단지를 들고 있다는 불편함 외에는, 현재의 몸에 익숙한 나로써는 3층 정도의 높이는 별것 아니었다. 단지를 들고 3층에서 그대로 뛰어내릴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우물에서 조심 조심 물을 단지에 담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벽을 타고 오르려는 찰나였다. 부스럭, 부스럭. 무지 작은 소리였지만, 사위가 고요한 밤중이었기에 내 귀에 들렸던 것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나 말고도 벽을 타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도 세개 씩이나... '도, 도둑?' 그 모습을 본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맞보았다. 설마하니 이 밤에 창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 있었다. 그것도 세 명 씩이나. - 밖으로 나올때 창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시커먼 그림자는 2층을 지나 3층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큰일났다아~~!!' 다급함을 느낀 나는 황급히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빨라도 1층부터 타고 오르는데 이미 3층에 도달한 녀석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리 없었다. 녀석들이 선애가 있는 방의 창문으로 다가가자 나는 더더욱 다급함을 느꼈다. 아마 살아있는 몸이었다면 심장이 폭주하는 느낌이었을 거다. 그런데, 녀석들은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창문의 숫자를 세더니만 선애가 있는 방 창문이 아닌 바로 그 옆방 창문으로 다가가는 거였다. 그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는 다시 떠오른 생각에 입을 떠억 벌렸다. '가만, 저쪽은 우리 일행 방인데?' 처음 이 여관에 들어왔을때 한꺼번에 방을 빌린 우리였다. 선애와 마법사 페르티니어스가 각각 독방을 쓰고 벨타이거와 잭 조셉은 2인실을, 용병들도 2인실과 3인실을 빌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애 방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페르티니어스 마법사 방, 오른쪽에는 벨타이거왜 잭 조셉네 방, 그리고 복도 건너편에는 용병들이 사용하는 방이 있었다. 그리하여 바로 지금 시커먼 그림자들이 들어가려고 하는 방은 벨타이거와 잭 조셉이 있는 방이었다. '우엑, 큰일이야, 큰일!' 왜 열려있는 창문을 냅두고 그 옆으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벨타이거네 방 창문은 잘 잠궈 뒀는지 그 창문 앞에 매달려서 꼼지락꼼지락 대던 녀석들은 결국 창문을 열었다. '헉...' 그리고는 한 사람이 창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나머지 두 녀석도 창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그 순간! 갑자기 팍~! 하고 환한 빛이 켜지더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진 것이었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그 목소리는 마치 알람 시계가 '일어나! 일어나!' 하는 것과 흡사했다. 어쨌든, 그 소리에 안으로 들어가려던 두 녀석은 움찔 하고 몸을 빼더니 양 옆으로 갈라졌다. 거기까진 좋은데, 나머지 한 녀석이 선애가 있는 방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녀석에게는 운 나쁘게도 바로 그 순간 나도 선애의 방 창문에 도착 해 있었다. 창문 안으로 막 머리를 디미는 순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방 안으로 들어간 녀석이 감히 침대에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 아마도 옆방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깬 듯 하다. - 선애를 단검으로 위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조용히 해라." [시키는 대로 해.] 녀석의 뒤에 다가서며 내가 말하자 선애는 침착하게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녀석은 천천히 선애의 목에 가져다 댔던 단검을 뒤로 물리는 것이었다. "한 마디라도 했다간 다시는 해를 못 볼 것이다. 내가 떨어져 있다고 안심하지 않는게 좋을걸?" 녀석의 말에 선애가 다시한번 끄덕이자 녀석은 선애를 노려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바깥 상황을 모르니 선애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을 수는 없겠지. 그리고, 놈 뒤에 물단지를 들고 서 있는 내가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녀석이 선애에게서 한 걸음 더 물러나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놈의 뒤통수를 향해 물단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물단지를 휘두르는 소릴 들었는지 놈이 황급히 돌아보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쾅~!! "켁!" '바보 같은 놈. 그냥 가만 있었으면 뒤통수를 맞았을텐데, 괜히 얼굴을 돌려서 얼굴 정면을 맞냐? 어쨌든, 맞았으니 나는 장땡이다만.' 놋쇠로 된 데다가 물이 가득 들어 있었으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을 거다. 그걸 온 힘을 다해 내리쳤으니, 녀석이 외마디 신음을 흘리고 그대로 넘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이노무시키기 죽을라고. 감이 누구를 위협한대?] 쓰러져 있는 놈을 사정없이 짖밟아주고 있는 동안 선애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나에게 가지고 왔다. "/언니, 불 켜줘./" [오냐.] 발로는 계속 놈을 밟아주며 손으로 불을 일으켜 등에 불을 붙이자, 선애는 그 불에 의지하여 잽싸게 옷을 입었다. 그런데 그때 선애가 있는 방 문을 누군가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선애양, 일어나세요. 문좀 열어보십시오!" 용병들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벨타이거네 방에서 난 소리에 모두들 일어난 모양이다. 선애가 문을 열자 용병 두 사람과 마법사까지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아아, 저 사람 말인가요?" 선애가 가르키는 곳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뻗어있는 녀석을 보자 눈이 둥그래져서 다시 선애를 바라봤다. 그에 배시시 웃으며 선애 녀석이 하는 말. "잠이 안 와서 깨어 있었는데 창을 타고 넘어오더라고요. 그래서 한대 가볍~게 쳐더니 그대로 넘어지더군요. 참 약한 사람이에요." 선애의 말에 용병들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그 뻗어버린 수상한 녀석 옆에 굴러다니는 놋쇠로 만들어진 물단지와 선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법사 또한 놋단지와 선애를 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너도 참 평범하지 않은 애구나. 어쨌든,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예요?" "아아, 어떤 멍청한 녀석이 회장네 방으로 침투한 모양이다. 바보같은 놈들이지."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해준 마법사는 선애를 데리고 벨타이거네 방으로 갔다. 거기에는 이미 쓰러진 수상한 녀석을 둘러싸고 벨타이거와 잭, 그리고 세 용병들이 있다가 들어오는 선애와 마법사를 바라봤다. "아, 선애와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님께선 무사하셨던 모양이군요." 벨타이거가 반갑게 말하자 마법사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내 방에는 아무도 안 왔는데, 선애 방에는 한 명이 들어왔더군. 뭐, 선애가 가볍게 해치웠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내가 준 선물이 큰 효과를 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거 아주 대단하더군요." 이해 할 수 없는 둘의 대화에 선애가 고개를 갸웃 거리자 벨타이거가 창 틀에 놓은 뭔가를 가지고 왔다. 그건 내 손바닥만한 크기의, 통통한 토끼 인형이었다. 토끼가 뒷다리로 서 있는, 제법 잘 조각되고 색도 잘 칠해진 인형이었는데, 이게 보통 인형이 아니라 바로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만든 마법 물품이었다. 이건 창틀에 놓거나 문 옆에 놓아 오른쪽 귀를 한번 눌러주면 안에 새겨넣은 마법진이 발동하여 인형이 놓인 창이나 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오는 걸 감지한 순간 인형이 밝은 빛을 발하며 커다란 소리를 내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둑이야!'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본 빛과 들은 소리는 바로 이 인형이 낸 것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마법사님께 혹시나 하고 말씀드려본 건데 이걸 가져다 주시더라고. 덕분에 톡톡히 효과를 봤어." 벨타이거가 인형을 바라보며 기분좋게 웃자 마법사도 허허 거렸다. "당연하지, 누가 만든건데. 페르 2호는 그래도 제법 인기 있는 마법 물품이라고." "페르... 2호요?" 선애가 당황해서 묻자 마법사가 으쓱해 하는 표정으로 설명해 준다. "응, 이 인형 이름이야. 물론 페르 1호도 있지. 페르 1호는 알람 마법만 걸어놨는데 좀 더 개발한 이 페르 2호는 라이트 마법도 걸어놨어. 지금 페르 3호를 개발하고 있는데 이건 일정 영역 안에 들어오는 걸 탐지하는 거야. 노숙할때 좋겠지?" "이야, 그렇겠군요. 저희 상회에서 판매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미안하지만 그건 안돼. 내가 마법사 길드에 가입되어 그 곳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상, 내가 만든 모든 것의 판매권은 마법사 길드에 있거든. 몇개 개인적으로 파는 건 몰라도." '호오, 그런 관계가 있었군.' 벨타이거는 단호한 페르티니어스의 말에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원래 그런 관계를 알고 있었는지 그 표정은 금방 지워졌다. '저놈은 역시 상인이란 말이야.' 우리 일행의 소란스러움이 좀 컸는지 다른 방에서 잠들어 있던 손님들도 깨어나고 여관 주인도 일어나서 우리가 있는 층으로 올라왔다. 그런 그들에게 도둑이 든 것 같다며 용병들은 우리가 제압한 녀석들을 넘겨줬는데, 내가 제압한 녀석은 단지 기절한 상태였지만, 벨타이거네 방에 침입한 녀석은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목숨이 위험할 것 같으면 순순히 투항하던가 도망갈 것이지 바보같지 죽자사자 덤볐던 모양이다. 혹시 다른 인물이 있을지 모른다며 - 내가 본 그림자는 세 명이었기에, 그걸 선애에게 이야기 했던 것이다. - 우리 일행과 여관 주인은 물론, 다른 방에 투숙한 손님들까지 합세하여 여관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나머지 한 명은 잽싸게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소동은 제압된 둘을 내일 아침 이 마을의 치안대에 넘기는 것으로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그 다음날 아침, 내가 제압했던 그 남자는 물론 죽은 남자의 시신까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보통 도둑은 아닌거 같지?] 내 말에 선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잡은 도둑이 사라졌기에 여관 주인은 치안대를 부르는 대신 그냥 이 일은 묻어두기로 했고, 우리 일행은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그 마을을 떠났다. 제 16화 "어제 그 놈들... 단순한 도둑일까요?" 덜커덩 거리는 마차에서 조금이라도 허리와 엉덩이에 무리가 덜 가도록 하기 위해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앉던 선애가 뜬금없이 묻자, 맞은 편에 앉아 지나가는 경치에 시선을 주고 있던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시선을 돌렸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데?" "글쎄요..." 선애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 어제 있었던 사건이 출발하기 전에 첼시 (야생화 향수가게 지점장)에게 들었던, 정보길드로부터 나왔던 충고와 겹쳐 보이는 모양이다. 비록,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선애와 같이 정보길드 협력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벨타이거의 사생활 이야기까지 할 수는 없었던지 우물우물 댔다. 그러나, 선애가 어제 그 도둑에 대한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는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 놈 보아하니 보통이 아니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준 것도 있고..." '아... 그 페르 2혼가 뭔가하는 마법 인형?' "하지만 그러다가 독이 든 물이라도 마시면 끝이잖아요." 선애의 말에 마법사가 피식 웃었다. "도옥?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예?" '아니, 이 사람이 독 전문가라도 되나? 뭘 믿고 저리 자신만만이지?' 선애가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자 마법사가 설명해준다. "웬만한 독 쯤이야 내가 마법으로 얼마든지 해독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와... 그런 마법도 있었군요. 하지만, 마법사님이 오실때까지 견디지 못하고 미리 죽는다면..." "먹고 금방 죽을 정도로 강한 독이 얼마나 비싼데. 그런 독을 사용해서 죽일 정도라면... 아마 황족이나 공작, 아니면... 루빈스타인 후작가 정도로 대단한 집안 정도일걸? 그런 독은 비싸기도 비싸지만 구하기도 쉽지 않아." "오... 그런가요?" [독두 비싸구나...] 선애가 새로운 걸 알았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끄덕 하자 마법사가 밖에서 말을 타고 가는 벨타이거를 슬쩍 가르키며 말했다. "저 녀석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암수를 쓰려고 할때 옆에 나 같은 마법사가 있다면 독 보다는 그냥 단칼에 숨통을 끊는게 더 성공 확률이 높지." [엑... 그럼 앞으로도 어제 같은 침략이 또 있을거란 소리네. 이거, 골치 아프게 된 거 아니야?] 마법사와 나의 말에 선애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럼, 만약 어제 그 도둑이 보통 도둑이 아니라면... 앞으로 꽤나 고달파지겠네요." "에이, 그래도 헤스딩스 남작가에 도착하면 그나마 안심일거야. 그런 저택에는 경비가 대단하니까. 그런 저택 정도는 자기 집 마당 드나들 듯 쉽게 드나들며 살수행을 펼치는 살수를 고용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거든. 그 정도의 살수를 고용할 정도면 저놈 집안보다 훨씬 힘이 강한 곳일텐데, 그런 곳에서 저놈을 노리고 있냐?" "아뇨. 어쨌든, 마법사님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되네요." 벨타이거를 노리는 놈이라고 해봐야 기껏 그의 5촌 숙부인데, 그 숙부가 벨타이거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을리가 없다. 없으니까 힘을 가지려고 벨타이거를 노리지. [흠, 어쨌든... 그럼 헤스딩스 남작가에 도착할때까지만 조심하면 된다는 거군. 아, 거기서 여기 돌아올때도 조심해야 하려나?] 그러나 그렇게 잔뜩 사람을 긴장시켜 놓고서는 우리가 헤스딩스 남작의 성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걸로 그때의 그 녀석들을 단순한 도둑으로 여기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 당시 놈들이 침입하는 걸 직접 본 나로써는 절대로 단순한 도둑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놈들이 정말 단순한 도둑이었다면, 바로 옆에 열려있는, 그것도 피곤에 절은 여자 한명이 자고 있는 방을 냅두고 단단히 잠겨있는데다 검을 쓸 수 있는 건장한 남정네 둘이 있는 방을 선택하겠는가. 비록 그 방에 누가 있는지 몰랐다고 치더라도, 창문이 잠겨 있는지 열려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거였다. 이래저래 놈들을 평범한 도둑으로 여기기에는 껄그러운게 너무 많았다. 그런다는 건, 돌아갈때 더욱 더 예민하게 사방을 살펴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내가 생각해봐도 헤스딩스 남작가에서 항구도시로 돌아갈때만큼 벨타이거를 해할 좋은 찬스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벨타이거도 돌아갈때는 단단히 준비하겠지만,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거야 나중일이었고, 우선 선애는 이 지긋지긋한 마차에서 해방될 수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여기 오기 전 헤스딩스 남작네 집안이 꽤나 부유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멋진 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인줄은 몰랐다. 내성으로 둘러쌓인 성은 새하얀 벽과 새파란 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뒤에 보이는 거대한 산을 배경으로 하니 마치 그림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멋지지? 드워프들의 작품이지. 초대 헤스딩스 남작이 귀족이 되고 이 곳의 영지를 하사받게 되자 그 기념으로 드워프들이 설계하고 공사할때 참여해줬었어. 몇번이나 와봤지만, 새삼 올때마다 감탄을 금할수가 없다니까." 내성 안으로 들어와 보이는 멋진 성의 모습에 선애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정신없이 바라보자 말을 타고 있던 벨타이거 녀석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것도 드워프들의 작품이라니, 과연 세계 제일의 장인이란 말이 합당한 것 같았다. 성의 입구에서 멈춰 일행이 말과 마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집사 복장을 한 초로의 남자가 나와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크로스웰 남작님. 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랜만이오, 한스 집사.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군." 은빛 머리칼에 따뜻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 벨타이거가 싱긋 미소를 지어보이자 한스 집사 또한 마주 웃어보였다. "벨타이거님께선 훤칠해 지셨습니다. 들어 가시지요. 벨타이거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말이 끝나자 마자 성 안쪽에서 다다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벨타이거 또래로 보이는 남자와 선애보다 한 두살 어려보이는 여자가 튀어 나왔다. "벨 오빠~!!" "어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밤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그 둘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남매 같았다. 남자쪽이 약간 각진 얼굴이고 여자쪽이 좀 가냘픈 선이었지만 둘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딱 벌어진 어깨와 척 보기에도 단단해보이는 몸매, 그리고 허리에 찬 검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검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모양이었다. "여~ 언제 돌아왔냐? 잘 있었니, 리사? 생일 축하한다." 벨타이거와는 친한 사이인 듯, 벨타이거는 다가온 남자와 주먹을 마주 친 뒤 한번 힘차게 껴안았고, 여자에게는 뺨에 가볍게 입을 마췄다. "우리 집안의 보배가 생일을 맞았는데 당연히 돌아와야지. 그나저나 이번에 남작이 되었다면서? 난 네가 될 줄 알았다." "흥, 입만 번지르르한 녀석." "이거 왜이래? 난 여차하면 너에게 달려갈 만반의 준비는 갖추고 있었다고. 정작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건 너잖아? 수도에 있느라 소식이 느릴 거란 건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됐어. 집안 일인데다 나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가만 있었다." '혼자 해결하려고 한 건 좋았지. 뒤통수를 맞아서 문제지만...' 선애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나는 벨타이거의 말에 속으로 꽁알댔다. "그런데, 오빠. 저 분들은?" 두 남자가 대화를 하는 사이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가 선애와 눈이 따악 마주치더니만 벨타이거를 쿡쿡 찌르며 물어봤다. 그제야 일행을 소개시켜줄 정신이 들었는지 벨타이거가 선애와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아, 이쪽은 이번에 나와 같이 일을 하게 된 동업자 선애양. 보시다시피 서대륙인이야. 그리고 이쪽은 이번에 같이 동행하게 된 마법사 페르티니어스님." 그의 소개에 선애와 페르티니어스는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이쪽은 오닐 헤스딩스, 내 친구인데 수도 방위군 소속 기사야."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헤스딩스란 성을 가지고 있는 거 보니 남작의 아들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이 성에서 저렇게 자기 집인 양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후작가 사람 뿐이겠지. 벨타이거의 소개에 그가 오른쪽 손을 가볍게 주먹쥐어 심장 위에 대어 보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건 이 세계의 기사 예법. 기사의 맹세는 심장에 새겨야 하는 거라나 어쨌다나 하는 이유로 인사할 때 심장에 손을 대는 것이란다. 참 로맨틱한 이유였다. "이쪽은 이번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클라리사 헤스딩스 남작 영애." 조용히 인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입을 열어 인사해온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두분. 이 성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당당하고 반짝이는 두 눈.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애지중지 하면서 키워진 아가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이 제법 영특해보인다. "들어가시죠. 어서 들어가자. 아버지랑 형들도 기다리고 있어." "그래, 오랜만에 남작님께도 인사 드려야지." 오닐 헤스딩스가 먼저 선애와 마법사에게 말한 후 벨을 이끌자 그제야 우리 일행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의 인상 만큼이나 안은 공간을 잘 활용해서 그런지 넓고도 시원해 보였다. 하얀 벽들 사이 사이에는 큼직한 창이 나와서 밝은 햇빛이 성 구석구석까지 비치는 듯 했고, 그 빛들 사이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품들이 서 있어 시선을 유혹했다. 선애에게 배정된 방은 벨타이거의 일행이라서 그런지, 벨타이거의 저택에서 거하는 방 못지 않게 좋아보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더 좋았다. 뭐, 크기나 장식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더 고급스럽고 세련되었다고나 할까? 어차피 이 방의 인테리어도 그 드워프라는 종족의 작품이겠지만 말이다. 짐을 정리하고 몸을 씻고 나서 저녁 먹기 전에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선애가 대답을 하고 문쪽을 바라보니 의아하게도 문을 빼꼼 열고 들어온 사람은 클라리사 헤스딩스였다. "헤스딩스 남작 영애." 안락 의자에 늘어지다시피 앉아 있던 선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쉬시는데 방해한 건 아니죠?" 사람 좋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폼이 제법 애교스럽다. "괜찮습니다. 단지, 영애께서 오신 게 좀 놀랐을 뿐이에요. 앉으실래요?" 선애가 말하자 답싹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그녀 뒤에 따라온 시녀가 차와 다과를 놓고 물러갔다. 선애가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그녀가 다시 웃어보였다. "귀찮게 한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이 근처에서 제 또래의 여자분이 없어서... 벨 오빠랑 같이 왔을때 반가웠거든요." 그러고보니 그녀에게는 오빠만 셋이라고 했다. 남작 부인은 오래 전에 사망했고, 그 뒤로 쭈욱 남작은 자식들만 보고 살아온 모양이었다. 막내 딸이니 여러모로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란 듯 그녀는 스스럼 없이 선애를 대했다. "벨 오빠랑 동업자시라구요? 그럼 무슨 일을 하는 거죠?" 눈을 반짝이며 묻는게, 꼭 동경하는 상대를 보는 것만 같다. "아직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고, 지금 한창 준비중에 있는 걸요." "그래요? 그래도 참 대단하세요. 오빠랑 동업자라니... 저도 뭔가 일을 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아빠는 절 사교계에 데리고 나가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에서 뭔가 일을 맡기시는 것도 아니고..." "그러세요?" 그걸 시작으로 클라리사 남작 영애는 선애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를 했지만, 대부분은 선애를 부럽다고 하는 자신만의 푸념이었다. 서대륙의 일을 물어볼때는 선애나 나나 진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물 어물 잘 넘기면서 그럭저럭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벨타이거가 이 집안과 친한 관계로 저녁을 남작네 집안 사람들과 같이 하게 되어 있어서 그사이 좀 친해졌다고 선애는 클라리사 헤스딩스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할 만찬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참 기가막히게도... "오오, 어서 오너라. 너에게 소개시켜줄 분이 계시단다." 키가 작고 똥똥한 몸매에 멋드러진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중년 남자였다. 뭐, 호감을 가지고 있어 보기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커헉, 저, 저 지지배가 왜 여기 있는 겨어~~!!] 남작 옆에 좋게 말하면 당당하게, 나쁘게 말하면 오만하고 건방지게 서 있던 여자는 바로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미란다 루빈스타인이었다. 그 녀석도 선애를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물론, 선애도 놀랐지만...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 네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후작 영애가 오셨구나. 후작 영애, 저 애가 바로 제 딸 자식인 클라리사 헤스딩스입니다." 남작이 삐질거리며 소개 하고 클라리사 헤스딩스가 인사를 하는 사이 선애는 잽싸게 정신을 추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미란다 외에 안면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미란다 옆에 그녀를 에스코트 하기 위해 온 듯한 청년이 한명 서 있었다. "이쪽은 올드필드 백작님의 장남이시란다." "브에텔 L 올드필드라고 합니다. 헤스딩스 남작 영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의 미남이었다. 키도 제법 괜찮은데다 말투도 나쁘지 않아 선애의 눈요기를 좋게 할 만 했지만, 미란다와 관계 있는 녀석이라는 것 하나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그랜트와 미란다의 6촌 사이였다.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인 올드필드 백작이 루빈스타인 후작의 4촌 형제라는 것. 현 올드필드 백작의 아버지는 원래 루빈스타인 후작가 사람이었는데, 공을 받아 백작 작위를 받으면서 황제로부터 올드필드란 성까지 하사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 브에텔 녀석의 정식 이름은 브에텔 루빈스타인 올드필드. 그러니까 미란다 계집애를 에스코트 하여 여기 올 수 있었던 거겠지만... 나중에 벨타이거 녀석의 설명으로 알게 된 것이지만, 이번 클라리사의 18세 생일파티는 단순한 생일 파티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남편감을 물색해 보는 자리. 생일 파티 초대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젋은 남정네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헤스딩스 남작은 한번 밑져보는 셈 치고, 근처 항구도시에 와 있다는 그랜트 루빈스타인 녀석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후작가에서 미란다와 그랜트 녀석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손꼽히는 신랑감인 브에텔이라는 녀석이 오자 남작의 입은 함지막하게 벌어졌었다. 하지만, 선애를 보는 심상치 않은 눈초리의 미란다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나나 선애는 마냥 좋아라 웃고 있을수만은 없었다. '이거... 어째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이 불안한데... 아무래도 조심해야 겠군.' 뭔 일 나기 전에 남작가 사람들이 열받아서 홧병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그만큼 미란다 계집애는 선애와 나 뿐만이 아니라 남작가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샀던 것이다. 아마 남작은 속으로 '내가 왜 루빈스타인 후작가에 초대장을 보냈을까...' 하고 가슴을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위상을 생각해 볼때 예의상이라도 안 보낼 수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 계집애는 어딜가나 미움 받는 타입인것 같아.' 미란다 녀석과 그의 6촌인 브에텔 녀석은 이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 중 지위가 가장 높다보니 남작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이들에게 특별 대우를 받았다. 뭐, 선애는 안 마주치고 싶어서 피하는 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반대였다. 조금이라도 미란다와 브에텔에게 안면 트이고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이었으니 말이다. 클라리사의 생일파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와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도착한 지금, 주인공이 정말 클라리사인지 아니면 미란다로 바뀐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람들의 태도가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클라리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온 건데 너무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럴때 미란다가 나서서 클라리사를 띄워줬으면 좋을텐데, 미란다는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자기 외에는 딴 사람이 주목 받는게 싫은 건지 클라리사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잘보이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연스레 클라리사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었다. 덕분에 클라리사도 초대 받아 온 손님들 앞으로는 나서는 것을 자제하고 선애와 어울리가 되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일파티는 엉망이 되겠구만...' 좋은 풍채에 호탕한 웃음을 달고 있던 헤스딩스 남작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이리라. 그러나, 한낫 남작으로써 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데 한 손 거들고 있는 루빈스타인 후작가 사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테니 속만 끓이고 있을 거였다. "열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도 어김없이 선애의 방에 찾아와 눌러 앉은 클라리사가 뜬금 없이 입을 열었다. "뭐가." 어느새 친해져 언니 동생 하게 된 둘은 자연스레 말을 놓게 되었고, 선애는 클라리사를 애칭인 리사로 부를 정도였다. "언니도 알지? 사실 이번 내 생일 파티는 내 남편감을 물색하기 위한 거였다는 거." "응." 선애의 말에 클라리사는 깊은 한숨을 쉬며 턱을 괴었다. "어후, 우리 아빠가 날 사랑하신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가끔 보면 너무 구식이시라니까. 날 수도 사교계에 데리고 나가지 않으시면서 남편감을 구한답시고 이러시다니..."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헤스딩스 남작이 그녀를 수도 사교계로 데리고 가지 않은 건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무시 당할까봐서 였던 것 같다. 아무리 그가 드워프와 교류를 하여 큰 부를 축적한 남작이라고 하지만, 원래 평민 집안이었던데다가, 남작이란 작위는 귀족 작위중 가장 낮은 거였으니 말이다. 수도에 가면 그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사람들이 빠글빠글 할텐데, 그런데서 사랑하는 딸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옛 말에 용의 꼬리보다 닭 벼슬이 되는게 좋다고, 나도 비록 변방의 영지지만 여기서 떵떵거리면서 있을 수 있는게 수도에 가서 무시당하는 것 보다 백배는 났다고 본다. "그래도 괜찮은 남자들도 있지 않아?" "있으면 뭐해? 나는 안중에도 없고, 그 미란단지 하는 계집애 눈에 들려고 안달인데. 그런 사람들은 내쪽에서 사양이라고. 게다가..." "게다가?" "난 아직 결혼하고 싶은 생각 없어.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콕 쳐박혀 있다가 나이 찼다고 결혼하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 안해? 나도 화끈한 연애 한번 해보고 싶다고." 선애도 그렇지만, 핑크빛 러브 스토리는 모든 소녀들이 꿈꾸는 것 아니겠는가? "파티에 나가면 괜찮은 남자를 건질 수 있지 않아?"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서 쫌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번 파티는 영 아니야. 게다가 사실 난 쉽게 쉽게 파티에서 안면 마주치는 것 보단 뭔가 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고 싶어." [후후후, 역시 소녀는 소녀야. 운명적인 만남이라...] 소파의 등받이에 걸터앉아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비식 웃음을 흘렸다. 꿈꾸는 듯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던 클라리사는 잠시 그러고 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아빠는 내 생각이 어쨌든, 이번 생일 파티에 온 남자들 중 적당한 사람을 골라 선보라고 하셨을 거야. 훗, 그래도 이렇게 미란다 후작 영애가 와서 파티를 완전히 망쳐 버리게 생겼으니 그 곳에 있는 남자들과 선보게 하실 생각은 못하겠지." "그게 다행이라구?" "응, 그래서 말인데 언니 부탁이 있어." 생긋 웃으며 은근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클라리사의 시선에 선애가 움찔한다. "뭐, 뭔데?" 삐질 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물리는 모습에 나는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아... 이거 참, 선애가 저런 모습을 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이것아, 너도 이제 내 심정을 손톱 만큼이라도 알것냐?' "언니, 내 생일파티 끝나고 돌아갈때 나도 데리고 가면 안돼나?" 그녀의 부탁이 뜻밖인 듯 선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에에? 그걸 왜 나에게 부탁해? 회장님께 부탁해야지." 그도 그럴것이, 항구 도시로 간다면 벨타이거네 집에서 머물텐데, 그럼 주인에게 부탁해야지 선애에게 부탁할게 뭐란 말인가. "단순히 놀러가는 거라면 벨 오빠에게 부탁했겠지." "그럼?" "나 상회에 취직시켜주면 안돼?" "에엑?" 선애의 눈은 다시 동그랗게 커졌다. "취지익?" "응. 나도 일해보고 싶단 말이야." 단호한 클라리사의 태도에 선애가 당황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에... 널 얕봐서 묻는 건 아닌데... 저기, 네가 뭘 할수 있는데?" 선애가 조심스레 묻기는 했지만, 그건 클라리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는지, 그녀의 인상이 살풋 찌그러졌다. "뭐야,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무시하는게 아니라, 네가 우리 상회에 필요한 뭔가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지 묻는 거야. 사람을 채용할때 그런거 묻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선애의 말에 클라리사가 잠잠해졌다. '오옷, 우리 꼬맹이 녀석 많이 컸어. 말싸움이 아니라 저렇게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누르기도 하구 말야. 므흐흐흐... 누구 동생인지 참...' 선애의 당찬 모습에 나는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나이도 먹고 여러가지 일을 겪다보니 자그마한 어린애였던 녀석이 어느새 저렇게 커버렸다. 이제 슬슬 이사라는 직함에 - 비록 아직 정식으로 발족도 안된 상회의 직함이지만... -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선애를 힐끗 바라보던 클라리사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뭐든 도움이 될 거야. 내가 언니 일을 도우면 우선 아빠의 힘도 조금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아빠가 비록 남작이지만, 드워프들과의 친분도 두텁고 재력도 상당하다고." "그건 너만의 능력이 아니잖아." 선애의 말에 클라리사가 입을 삐죽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뭐. 귀족가 영애라고 몸만 가꾼 줄 알아? 귀족가의 영애들은 누구나 한 가문의 살림을 맡을 안주인이 될 사람들이라고. 그 일을 잘 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는 단 말이야. 나 또한 예외는 아닌데다가, 단순한 귀족 부인이 되기보다 뭔가 직업을 가지고 싶어서 여러가지로 공부했다구." 이 애가 영리하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다. 만약 외모만 그럴듯하고 머리가 가벼운 여자애였다면, 이 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처럼 미란다나 브에텔에게 잘보이기 위해 기를쓰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귀여움 받고 자란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자기 주관도 있고, 교육 또한 제대로 받았는지 안하무인이 아니라 예의도 있어 보였다. 헤스딩스 남작이 평민 상인들과도 교류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영향인지 선애가 평민이라고 해도 별로 개의치 않고 언니 언니 하면서 따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만히 클라리사의 말을 듣던 선애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잘됐네. 그렇게 회장님께 말씀 드려." "엑?" 선애의 태도가 좋아보여 희망 찬 표정을 짓던 클라리사가 벙찐 표정을 보였다. "그, 그게 뭐야?" "그게 뭐라니. 나는 동업자긴 하지만, 엄연히 회장님 밑사람이야. 최종 결정권은 내가 아니라 회장님께 있다구." "에잇, 하지만 벨 오빠는 허락해줄 리가 없다고." 선애의 말에 클라리사는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 "에에... 그럼 나로써도 어쩔 수 없네." "언니가 부탁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네가 어디에 꼭 필요하다고 할 만한 근거가 없잖아." "윽... 그럼 시험삼아 일정 기간동안 일을 시켜보면 되지 않을까?"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는지 클라리사는 잠시 울컥한 표정이었다가 시무룩게 제의를 해왔다. 어지간히 일을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뭐, 새장에 갇힌 기분이라 나가고 싶었던 심정일지도 모르지만... 내 동생도 대학만은 집을 떠나서 서울로 가겠다고 항상 말해왔었으니 말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만 합격하면 기숙사에는 절대 안 들어가고 자취를 하겠다나?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도 타지방에서 온 친구들 또한 그랬고, 고등학교때 자취를 안 해봤다면 나 또한 그랬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던 나는 클라리사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선애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클라리사의 끈질김에 넘어간 건지도 모르겠지만... "에휴, 말은 해볼께. 하지만 장담하지 마. 게다가 너희 아버지도 허락해주실 리가 없잖아." 선애의 반 승낙에 클라리사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앗~!! 고마워 언니. 언니만 허락하면 거진 다 성공한 거야. 이번 생일파티를 망치게 되어서 아빠는 나에게 되게 미안해 하시고 계시거든. 조금만 떼를 쓰면 허락해 주실 걸? 거기다 벨 오빠랑 같이 있겠다는 거니." '역시, 영리한 애라니까... 좀 철이 없는 것 같지만...' 선애의 반승낙으로 기분이 좋아진 클라리사가 들뜬 어조로 재잘거리고 있는데, 선애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방의 주인이 선애였기에 허락 하는 건 선애였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건 요 며칠동안 안면을 익힌 클라리사의 시녀였다. "아가씨, 주문한 드레스들이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 쳇, 이미 망친 파티인데 뭘 입고가든 무슨 상관이람." 시녀의 말에 클라리사가 시큰둥한 표정을 하다가 갑자기 뭔 생각이 들었는지 선애를 돌아보았다. "언니, 같이 가서 구경할래? 혹시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내가 줄게." 아무래도, 선애에게 뇌물을 주려는 듯. "응? 가자, 가자. 요즘 최신 유행 스타일부터 복고풍까지 디자인을 다양하게 하라고 했으니까 언니 마음에 드는 게 있을거야." 클라리사는 선애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탁자를 돌아와 선애의 팔을 잡아 끌고 일으켰다. "어? 어? 야아, 갈테니까 이것 좀 놔라, 응?" "에이, 뭐 어때서 그래? 그냥 빨리 가자." 자기 생각이 무지 마음에 들었던 듯 클라리사는 선애가 당황하는 것에도 아랑 곳 없이 팔을 잡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게 왠 재수없는 일인지, 클라리사의 방으로 가기 위하여 커다란 홀을 지나가려는데, 단체로 소풍이라도 가려는 듯한 미란다 일행과 떠억 마주친 것이었다. 평소 그들을 좋게 보지 않았던 클라리사와 선애는 슬쩍 목례만 하고 지나치려고 했는데, 무리들의 선두에 있던 미란다가 선애를 보더니 눈빛을 반짝였다. "어머나아~ 이게 누구더라? 우리 집 하녀였던 애 아니야?" 그 동안 아는체도 안 하더니만, 이제와서 갑자기 아는체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정말 찰나였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꿀을 보고 달려든 파리떼들처럼 미란다의 주변에 몰려든 녀석들의 눈빛이 변했던 것이다. 무시하고 깔보는 눈빛들을 보자니 미란다의 속셈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선애를 망신 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머, 하녀라고요?" "세상에, 헤스딩스 남작 영애 어떻게 하녀랑 그렇게 다정하게 갈 수 있어요?" "그러고보니 저 하녀는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이라고 들었는데..." "어머, 그럼 하녀를 생일 파티에 초대했단 말이에요?" "아유, 수준 낮게시리..." 저것들을 통채로 태워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선애 옆에 있던 클라리사가 노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말들이 심하시군요. 이 분이 전에 하녀였든 말든 지금은 제 손님이십니다. 지금 제 앞에서 제 손님을 모욕하시는 겁니까? 이건 저에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남작이라 하나 이 주위에서는 꽤나 큰 소리 치며 사는 헤스딩스 남작의 하나밖에 없는 딸의 노한 말에 주위의 파리떼들이 순간적으로 움찔 거렸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여전히 당당하 녀석들이 있었으니. "헤스딩스 남작 영애, 지금 그 발언... 그 하녀였던 계집과 나를 동등한 손님 대접 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내가 오해한거겠지요?" 미란다 계집애였다. 그녀는 양 손을 허리에 척 걸친 채 오만하게 클라리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에 클라리사는 움찔 할 수밖에 없었고, 파리떼들의 표정은 의기양양해졌다. 아무리 클라리사가 선애 편을 들어준다고 하지만, 미란다 녀석과 선애를 동급으로 본다는 건 후작가를 모욕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그게 아니라고 했다간 선애가 저들에게 당하는 모욕을 막아 줄 수가 없게 된다. '하아, 저 계집은 이런데에는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다시한번 머리를 확 태워줘 버릴까보다.' 그렇게 내가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때 선애가 클라리사의 손을 잡아 뒤로 잡아당기더니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배실배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이지요, 미란다 후작 영애?" 지금까지 가만 있던 선애가 나서자 미란다가 경계 어린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것이, 후작가에서 비록 선애가 직접 나서서 뭘 하지는 않았지만 - 다 내가 했다. - 선애를 괴롭히려고 하면 뭔가 일이 꼬여버렸으니 말이다. "뭐, 뭐야 너?" 미란다가 앙칼지게 물었지만, 선애는 여전히 느긋하게 방실방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라뇨? 단지 절 아는 척 하시길래 인사를 하려는 것 뿐인데... 아, 그런데 머리는 많이 기르셨나 모르겠네요." 선애의 말에 미란다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머, 머리?" "네에, 후작 영애의 머리 말이에요. 작년 겨울에 머리 손질하는 하녀가 실수해서 후작 영애의 머리를 왕창 태웠잖아요. 덕분에 머리를 대머리처럼 빡빡 민 다음에 그걸 감추기 위해 가발쓰고 다니시지 않았던가요? 아라, 지금 그것도 가발이죠?" 머리가 한꺼번에 길어봐야 얼마나 길겠는가? 그 일이 있었던게 작년 겨울이었고, 지금은 가을로 진입하는 시기였으니, 그녀의 머리가 빨리 자라는 편이라고 해봐야 예전의 길이가 될 리 만무했다. 이곳에서 잘 다듬어진 긴 머리는 여유 있는 여성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기야, 돈이 있으니 머리 손질할 수 있는 거겠지만, 그리하여 귀족 여성들은 모두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 머리를 멋드러지게 틀어올릴 수도 있고, 장식들도 달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뭐, 여기사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기사들은 아직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여간, 그리하여 미란다 녀석도 머리를 태워먹기 전에는 허리에 약간 못 미칠 정도로 길게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선애의 말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미란다의 머리로 향했고, 그에 미란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너, 너..." '쯧쯧, 아직 경험이 부족하구만. 지금 그게 선애의 말이 맞다고 증명한다는 걸 모르남?'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선애를 가리키며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 보다도 미란다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바들바들 떨며 사라져갔다. 악당들의 전형적인 대사를 하면서 말이다. "두고 보자. 절대로 가만 두지 않겠어." 그런 미란다의 뒷모습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던 선애는 한국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얼마든지. 나도 너에게 아직 갚아줘야 할 게 있거든./" 미란다가 사라지자 곧바로 그 파리떼들도 사라졌기에 선애와 클라리사는 편안하게 클라리사의 방으로 갔다. 아니, 정확하게 편안한 것은 선애였고, 클라리사는 잔뜩 굳어 있었다. "언니... 괜찮겠어?" "뭐가?" 클라리사의 방에는 수십벌에 이르는 드레스들이 널려 있었지만, 클라리사는 그런 것들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자기는 이렇게 심각한데 선애는 태평하니 클라리사는 무지 답답해 했다. "뭐긴 뭐야? 아까 그 루빈스타인 후작가 영애 말이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모욕을 당했으니 언니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걸?" "아아, 알고 있어." 여전히 태연한 선애의 반응에 클라리사는 기가막힌 표정이었다. "알고 있는데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야? 언니가 위험하다고." 그러나 오히려 선애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이야아, 날 걱정해주는 거야? 고마운걸?" "언니." "괜찮아. 너에게 피해가 없게 할께. 혹여 회장님께도 피해가 간다면 상회를 빠져 나가면 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언니는 어쩌고?" "괜찮다니까." "언니가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힘을 몰라서 그래. 그들에게 찍히면 이 나라에서 살기 힘들다고." 클라리사는 계속해서 걱정을 했지만, 선애는 태평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명분이 없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걸?" "뒤로 손을 쓸 수도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쉽게 당하지는 않을걸?" "어후... 언니는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 있는 거야?" 여전히 태평한 선애의 모습에 클라리사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설래설래 고개를 저었다. "뭐...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지." 선애는 싱긋 웃으며 날 힐끔 바라보길래 나도 씨익 웃어줬다. '아.하.하... 부담스러워라...' 다음 날, 그렇지 않아도 많은 손님들로 인해 북적북적 하던 성안이 더욱 더 부산스러워 졌다. 이유인 즉슨, 클라리사의 생일파티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생일 파티는 저녁에나 열리지만, 어느 세계에나 여자들의 준비 시간은 오래 걸리기 때문에, 특히 이곳 귀족 아가씨들이 준비하는 시간은 더욱 더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녀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녀들을 시중드는 시녀들까지도 부산스레 움직였다. 클라리사와 선애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선애는 시중 들어줄 시녀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서 점심 먹고 목욕이나 하고 능력껏 단장할 생각이었는데, 클라리사의 배려로 인하여 그녀의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아침부터 단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뭐, 약간 귀찮기야 하겠지만 예쁘게 꽃단장 시켜주는 거라서 그런지 선애는 별로 불만에 찬 표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선애가 직접 일일이 다 하는게 아니라 모든 걸 옆에서 서비스 해주는데 말이다. 생전 처음 해보는, 약탕 저리가라 할 정도로 피부에 좋다는 별의별게 다 들어간 욕조에서의 목욕에다, 약초 팩에다가, 피부의 탄력을 좋게 해준다는 전신 향유 맛사지를 받다보니 어느새 오전 시간이 거진 다 흘러가고 있었다. 오전 스케줄(?)의 마무리로 손톱과 발톱을 정리하며, 같은 방에서 서비스(?)를 받는 클라리사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 방으로 시녀 한명이 들어오더니 모든 서비스를 관리 감독하던 유모에게 다가갔다. "저어... 유모님..." "무슨 일이지?" "남작님께서 아가씨와 선애양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가씨를? 무슨 일인데..." '준비하느라 바쁜데...'란 말을 삼키며 묻는 유모에게 시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저는 잘... 지금 빨리 모시고 오시랍니다." "그래? 알겠다. 아가씨, 남작님께서 부르신다는데요? 그리고 선애양도..." '뭐, 아버지가 딸을 부르는 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거기에 왜 선애가 꼽사리 끼어 있는 거지?' 시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모두들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가보면 알 일이기에 선애와 클라리사는 옷을 차려입었다. 둘 모두 간단한 목욕 가운만 입고 서비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꽤나 넓은 응접실이었다. 그 곳에는 미리 와 있었던 듯한, 키만 좀 컸다면 풍채 좋다는 소리를 들었을법한 헤스딩스 남작과 그의 세 아들이 있었고, 그 옆에 벨타이어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이해 하겠는데, 그들 옆에는 의기양양한 표정의 미란다와 그녀를 에스코트 해 온 브에텔 녀석까지 같이 있었다. 무척이나 분노한 얼굴로 말이다. [뭐냐, 저 녀석들은... 또 미란다 지지배가 뭔가 꾸민 건가?] 클라리사는 의아한 듯 모인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헤스딩스 남작을 불렀다. "아빠?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오, 리사야... 그게말이다..." 평소 호탕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헤스딩스 남작은 지금은 무지 난처한 표정으로 선애를 힐끔힐끔 바라보면서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브에텔이라는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긴 말 필요 없습니다. 당장 저 계집의 방을 뒤져보죠. 그러면 알 거 아닙니까?" 그러자 당찬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아치는 벨타이거. "증거도 없이 함부로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증거는 무슨 놈의 증거? 증인이 있지 않소이까?" 아무래도 클라리사와 선애가 오기 전에 한바탕 말싸움이 오고갔는지 벨타이거와 브에텔 사이의 공기가 냉랭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무지 난처한 표정의 헤스딩스 남작. 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선애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선애양, 미안하지만 선애양의 방을 한번 볼 수 있겠소?" "제 방을요? 괜찮다면 이유를 들어도 될까요?" 선애의 질문에 헤스딩스 남작이 뭐라 말하려고 하는데, 그 보다도 먼저 의기양양한 미란다 지지배가 나섰다.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 계집애는 전에 저희 집 하녀로 있을때도 내 팔찌를 훔친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 때문에 쫓겨 났었지요." '저, 저... 얌마, 그건 네가 강제로 팔찌를 넘긴 다음에 선애에게 덮어 씌운 거잖아?' 미란다의 악의 어린 말에 남작을 비롯한 그의 세 아들들이 의심어린 시선으로 선애를 돌아봤고, 브에텔은 거 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에 선애의 눈에서 불꽃이 한차례 튀었지만,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후작 영애께서 절 보고 도둑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으셨지요. 덕분에 제 월급의 몇배나 되는 돈과 함께 미안한 표정의 집사님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왔죠, 아마?" 선애의 말에 의아한 시선이 다시 미란다에게로 넘어갔다. "닥쳐. 쫓겨난 주제에..." 그러자 선애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운이 아주 좋았죠? 귀족의 물건을 훔치고도 사지 멀쩡하게 제 발로 걸어 나왔으니 말입니다." "이익... 흥, 어디 두고보자.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걸?" 미란다의 말에 선애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헤스딩스 남작을 바라봤다. 그에 남작이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후작 영애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가 없어졌는데, 그 범인으로 선애양이 지목되고 있소이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선애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또냐. 생각해 낼 게 그것 밖에 없나?/" 하지만, 그건 미란다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었다. 미란다가 후작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어린 소녀에 불과한 그녀였으니 온전한 후작가의 힘을 사용하기는 어려울 거였다. 만약 상대가 미란다가 아니라 그랜트였다면 이런 유치한 장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법을 썼을테고, 우리는 상대하지도 못하고 도망치기도 급급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미란다였기에 이렇게 여유 있게 맞설 수 있는 거겠지. 뭐, 그래도 이번에는 전과는 좀 다른 수법을 쓴 모양이다. 최소한 선애에게 그 문제의 목걸이를 억지로 떠넘기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왜 제가 지목되고 있는데요?" 선애의 말에 이번에는 브에텔이라는 녀석이 나섰다. "어제 저녁, 후작 영애가 잠시 방을 비웠을 때 그 방에서 네가 나온 것을 본 사람이 있다. 이래도 발뺌할 셈이냐?" 그 사람이란, 분명히 저 미란다 지지배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내 전 재산을 걸고 내기할 수도 있다. "전 후작 영애의 방에 간 적이 없습니다만?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갑니까?" "거짓말. 그럼 널 본 사람은 어떻게 된 것이냐?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단 거냐?" "그럴지도 모르죠." "닥쳐라. 지금 감히 평민인 네가 귀족을 모욕하겠다는 거냐?" "호오, 절 본 사람이 귀족이었나봅니다? 그런데, 귀족들은 평생 한 번도 거짓말을 안 하나보죠?" "뭣이라?" 선애가 하나도 안 지고 맞받아치자 브에텔이라는 놈이 점점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어지고 주먹 쥔 손이 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란다가 나섰다. "흥, 네가 얼마나 날뛸 수 있을지 어디 두고보겠어. 어차피 네 방에서 내 목걸이만 나온다면 넌 끝장이야. 그때도 그렇게 입을 놀릴 수 있는지 어디 두고보지." "그것 참, 내 방에 목걸이가 있다고 아주 확신을 하시는 모양이군요? 제가 훔쳤다 해도 목걸이를 다른 곳에 보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그건 네 방을 보면 알겠지." "만약 없으면 어떻게 할건데요?" "흥, 절대로 없을리가 없다. 네가 범인인 게 분명해." "그럼, 내 방에 목걸이가 없으면 범인이 아닌가요?" "그래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건 틀림 없어. 네가 영애 방에서 나온 걸 목격한 사람이 있는 이상..." 다시 끼어드는 브에텔 녀석. 그러자 같은 일행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는지 벨타이거 녀석이 나서준다. "정말 너무 하시는 군요. 선애가 설사 영애의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그녀가 범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영애의 방을 들락거린 사람이 선애뿐지는 않을테니까요." "저 계집 뿐이라고요. 저 계집 외에 내 방에 들어온 사람은 하녀들 밖에 없으니까." 미란다의 참견에 벨타이거가 말했다. "하녀들이 보고 있지 않은 사이 누가 들어갔다 나왔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영애 방을 항상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닐테니까요." "글쎄, 저 계집이 훔쳤다니까요." 미란다의 바득바득 우기는 소리에 그 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헤스딩스 남작이 나섰다. "잠깐, 제 말좀 들어보시겠습니까?" 가장 연장자인데다 이 곳의 주인인 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사람들이 일단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자 남작이 다시 말을 꺼냈다. "우선, 제 성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무척이나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작 영애의 목걸이를 찾는 일에 최대한 협조할 것을 약속드리지요." 그의 말에 미란다와 브에텔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음에 나온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선애양을 무조건적인 범인으로 몰 수는 없다고 생각 됩니다. 증거가 없는 한 선애양은 제 손님이니 무례를 범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니까 저 계집의 방을 뒤져보면 알 거 아닌가요? 그럼 저 계집이 범인이라는 것을 당장이라도 알 수 있을 거라고요." 미란다의 말에 헤스딩스 남작은 선애를 바라봤다. "선애양, 후작 영애의 목걸이를 가지고 갔는가?" 그의 질문에 선애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지만, 그가 정말 선애를 의심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기색을 느끼고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선애양의 방을 살펴본다 해도 떳떳하겠군?" 어째 미란다의 뜻대로 되는 것 같았지만, 이제와서 선애가 고개를 저을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입니다." 남작은 선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사람들을 바라봤다. "제가 제안을 한 가지 하죠.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시녀들에게 선애양의 방에서 목걸이를 찾아보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후작 영애가 방에 있는데도 찾지 못한 걸 수도 있으니 후작 영애의 방은 물론이거니와, 후작 영애의 방을 손쉽게 드나들 수 있었던 후작 영애의 하녀들 방도 같이 찾아보도록 하죠." "뭣이라고요? 감히 내 방을 왜..." "만약 선애양의 방에서 목걸이가 나온다면 후작 영애의 방까지 찾아볼 필요는 없지만, 안 나올 경우에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남작의 말에 미란다 녀석은 무척이나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흥, 어차피 저 계집의 방에서 나올게 뻔 할테니... 마음대로 하시죠." "잠깐, 한 가지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만?" 미란다의 허락에 방 뒤지러 가자고 할 것 같던 남작을 제치고 벨타이거가 나섰다. "뭔가?" "만약 범인이 선애가 아닌 다른사람이라면,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선애는 헤스딩스 남작님의 손님이기 이전에 제 일행입니다만? 제 일행이 괜한 모함을 받는 건 가만 두고볼 수 없군요." "뭣이라고요? 감히 남작 주제에 어딜 감히 후작가의 사람인 내 앞에서..." 미란다가 벨타이거의 말에 펄펄 뛰며 앞으로 나서자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타이거가 차갑게 한마디 했다. "그럼, 루빈스타인 후작가 분들은 죄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도 괜찮다는 말씀 이시군요?" '어어... 선애야 상회를 떠나면 끝이니까 바락바락 대드는 거지만, 저 녀석은 저렇게 해도 괜찮아? 후작가에게 잘못 보이면 안될텐데...' 후작가에서 보면 벨타이거 녀석은 마치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보는 것만 같을 것이다.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부대끼는 걸 피해야 할텐데, 나서서 맞서니 보고 있는 내가 조마조마 할 지경이었다. 물론, 선애를 위해 나서주는게 기특하기는 하지만... "이이..." 벨타이거의 말에 미란다가 분한 지 이를 빠드득 물었지만, 그녀를 제지하며 브에텔이 나섰다. "물론, 루빈스타인 후작가는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모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약 저 아가씨가 범인이 아니라면 정중하게 사과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범인이 맞다면, 그에 대한 댓가는 저 아가씨는 물론이거니와 남작, 그대도 같이 치뤄야 할 거요." 벨타이거가 나서서 일행이라고 하자 더 이상 '계집'이라고 할 수 없었는지 아가씨라고 존칭을 해주기는 했지만, 눈빛만은 무시무시 했다. '얼씨구, 높은 곳에 있는 놈이라 모욕을 받고도 가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인가?'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선애에게 속삭였다. [야, 나 먼저 네 방에 간다.] 아무래도 자신 만만하게 선애 방을 뒤지라고 주장하는 미란다 녀석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또다시 뭔 수작을 부려놨을지 먼저 가서 확인해 볼 셈이었다. 내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나는 가볍게 발을 굴러 점프를 해서 천장에 매달려 그대로 통과해 위로 올라갔다. 이제는 이 몸에 적응은 물론 능력을 개발(?)하고 있어서 한 층의 천장 정도는 제자리에서 뛰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잽싸게 몸을 놀려 선애 방에 가보니 과연, 누가 가져다 놨는지 선애의 화장대 위에 처음 보는 보석함이 아주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 안에 문제의 목걸이를 품은 채 말이다. 과연, 후작가의 영애가 할 만큼 굉장히 화사하고 예쁜 목걸이었다. 처음 보는 내가 감탄할 정도로 말이다. 어찌보면 그 얄미운 미란다 녀석보다 선애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이대로 훔쳐서 나중에 선애에게 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랬다간 후환이 두려워 나는 얼른 보석함을 챙겨 창문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이동하는 것 보다 밖의 벽을 타고 이동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창문 밖으로 나가 잠시 기다리니 선애의 방 문이 벌컥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 성 소속의 하녀들이 먼저 들어와 선애의 방 여기저기를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고, 나머지 헤스딩스 남작 일행 등등은 방 가운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헹, 아무리 뒤져봐라. 목걸이가 나오나...' 나는 창문 너머의 그들에게 한번 싱긋 웃어주고는 벽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선애는 미란다의 방이 어디인지 몰라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예방 차원에서 밤에 성을 돌아다녀 알아냈던 것이다. 뭐, 거기에 덤으로 침대에서 잘 자고 있는 애를 밀어서 침대에서 떨어뜨리긴 했지만, 그건 미란다 녀석이 선애에게 한 짓에 비하면 아주 약한 보복이었다. 그거야 어쨌든, 내가 미란다 방 창문까지 이동하자 선애방과 마찬가지로 환기를 위함인지 창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어차피 잠겨 있어도 나에게는 문제될 게 없지만 말이다.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보석함은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거기다 더해 보석함 안의 목걸이를 아예 꺼냈다. 생각 같아서는 잘 보이게 보석함 옆에 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누군가가 다시 가져다 놓은 것으로 여겨질 것 같아서 - 그럼 선애가 범인이 아닐 뿐 목걸이를 누가 가지고 간 건 사실로 될테니 말이다. - 나는 화장대 뒷쪽에다 놨다. 그러면 누군가가 가지고 간게 아니라 뒤로 넘어가서 미처 찾지 못한 걸로 생각 될 터였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과연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들이 들어왔다. 선애는 무덤덤해 보였지만, 벨타이거와 클라리사의 표정은 무척 환해 보였다. 그와는 반대로 미란다와 브에텔은 굳어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선애를 보며 눈 한쪽을 찡긋 거리자 선애가 피식 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있었고, 시녀들은 곧 자기들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즉, 미란다의 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거였다. 미란다야 자기가 했든, 시녀를 시켰든 목걸이를 직접 선애 방에 가져다 놓게 했으니 비록 선애 방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방에서 발견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듯 떨떠름한 표정이긴 했지만, 긴장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화장대 주변을 살펴보던 시녀가 뒷쪽은 도통 볼 생각을 안 하기에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다가가 화장대 뒷쪽에서 작은 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은 못 듣고 그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하며 화장대 뒷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시녀의 모습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머, 여기에 목걸이가 있습니다." 시녀가 소리치며 손을 뻗어 화장대 뒷쪽에 들어가 있던 목걸이를 집어 올렸다. 그녀의 말에 방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시녀의 손에 올려진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후작 영애,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건 아까 후작 영애가 설명해 준, 잃어버렸다던 바로 그 목걸이인 것 같습니다만?" 헤스딩스 남작이 그렇게 말하며 미란다를 바라보자, 미란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후후후, 귀신이 곡할 노릇 이지? 미안하지만 유령이 웃을 일이라네.' 이로써 미란다는 자신의 오해로 선애를 모함한 철없는 아가씨가 되버리고 만 것이다. '냐하하하~~ 자신이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진 꼴이군.' 비록 후작가의 저택에서는 홈그라운드였기에 모두들 선애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누명을 벗겨주기는 커녕 선애를 내쫓는 걸로 - 비록 넉넉한 돈을 받고 좋게 좋게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 마무리가 되었지만, 여기서는 절대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무조건 미란다의 편을 들어 선애를 범인으로 몰아세웠던 브에텔 녀석도 안절부절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그야 철없는 동생의 떼에 넘어간 걸로 비쳐지겠지만, 그래도 선애에게 잘못을 하기는 한 거니까 말이다. 게다가... "후작 영애가 아무래도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모든 오해가 풀려서 참 다행이지 않습니까?" 헤스딩스 남작은 그쯤에서 좋게 좋게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지만 선애는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미란다와 브에텔을 빠아아안~~히 쳐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동안 미란다를 무지 얄미워한 클라리사와 그의 오빠들, 그리고 벨타이거까지도 그 둘을 빠아아안~~히 쳐다보았다. 비록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시선만으로도 무지 압력을 느낄 것이었다. 만약 선애 혼자 있는데서 그런 말을 했다면, 선애를 평민이라 깔보고 그냥 넘어갔겠지만, 남작 둘에, 후계자 한명, 아들 딸 한명씩, 거기에 기사까지 꼽싸리 끼어있는 자리에서 한 공언이니 그냥 넘어가기가 꽤나 힘들 거였다. 아마 브에텔이라는 녀석은 벨타이거를 꼼짝 못하게 할 속셈으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오히려 자신을 묶는 올가미가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거였다. '그러게 사람이 평소 곱게곱게 마음을 써야지 말이야.' "나, 나는 절대로 사과 못해. 내가 왜 저따위 평민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거야?" 사람들의 시선 압박을 견디지 못했는지 부들부들 떨던 미란다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어머, 한 입으로 두말 하실 건가요?" 그에 클라리사가 꼬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미란다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내가 언제 사과를 한다고 했지? 나는 절대로 그런 적 없어." 그러고보니, 사과를 한다고 한건 브에텔 녀석이었던데다 미란다 녀석까지 사과를 시킨다고 한 적이 없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는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고도 그냥 넘어가나보죠?" "너, 이...." 미란다가 이를 빠드득 갈며 눈에 독기까지 품는 것 같자 선애가 나섰다. "뭐... 아직 어리니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됐어, 어린애한테까지 기어코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클라리사를 만류하는 척 하면서 미란다의 태도를 어린애의 땡깡으로 만들어 버리는 선애였다. 그 나이대의 애들이 다 그렇듯, 미란다도 어린애 취급을 무지 싫어하는지 매서운 눈길이 클라리사로부터 선애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미란다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시선 압박을 묵묵히 견디고(?) 있던 브에텔이 나섰다. 아무래도 상황도 안 좋은데 미란다가 입을 열면 열수록 점점 더 안좋아진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건,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것이었다. "선애양, 당신을 도둑으로 몬 것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 브에텔 L 올드필드가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까지 살짝 숙여 인사를 하자 선애가 씨익 웃으며 화답했다. "기꺼이 받아들이죠."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죠." 브에텔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남작에게도 까딱 목례를 해보이더니 분노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미란다를 데리고 얼른 그 자리를 떴다. 그 곳이 미란다의 방이었지만, 남들보고 나가라고 하는 것 보다는 자기들이 딴데로 가는게 더 났다고 생각 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들이라고 이 방에 있을수는 없는 터였기에 헤스딩스 남작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험, 험. 우리들도 이만 나갈까?" "그 얄미운 후작 영애의 콧대를 꽈악 눌러줘서 기분이 좋기는 한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혹시 나때문에 리사 너에게 뭔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기분 좋게 응접실로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뒷 일에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선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오히려 헤스딩스 남작이 피식 웃으며 나서는 것이었다. "괜찮네, 괜찮아. 뭐, 영애와 미래의 올드필드 백작과의 사이는 틀어졌지만, 그렇다고 루빈스타인 후작가가 나서지는 않을 걸세. 설마하니 돌아가서 여기서 있었던 일을 일러바치겠는가? 자기들이 아무 죄 없는 아가씨를 모함했다가 진실이 밝혀져 망신을 당했다는 걸? 아마 그들은 이번 일을 자기들만 알고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걸세." "아, 그래도 혹시... 그들이 자기들이 한 잘못은 쏘옥 빼놓고 망신 당했다고만 하면 어쩌죠?" "그래도 나는 별 상관은 없어. 우리 집안에게 남작 작위를 준 건 황족이신 에스테반 공작이셨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후작가 집안이라 해도 에스테반 공작가도 만만치 않거든. 더구나 황족임에야. 우리 집안은 그 공작가의 가신이라서 함부로 못할 걸세. 나는 우리보다 오히려 자네가 더 걱정이야." 그러면서 헤스딩스 남작이 벨타이거를 바라봤다. "아하하하, 저도 괜찮습니다. 게다가 상업을 하는 사람으로써 이 정도 일로 동업자를 지지해주지 못한다면 남에게 어떻게 신뢰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상인의 최고는 뭐니 뭐니해도 신뢰 아니겠습니까?" "호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래도 혹여 뭔 일이 생기면 알려주게나. 내 능력껏 도움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그 말씀만으로 무척이나 든든하군요." 역시 헤스딩스 남작가와 크로스웰 남작가의 친분은 두터웠던 모양이다. 이걸 보니 아무래도 헤스딩스 남작에게 드워프와의 일을 부탁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미란다는 홧병이 생겼는지 열이 나 몸이 안 좋다며 생일 파티에 불참했고 - 물론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브에텔도 불참했다. - 다음 날 일찍 성을 떠나버렸다. 덕분에 주인공이 뒤바뀔뻔 했던 생일파티는 무사히 잘 치뤄져다. 그래봤자 초대받아 온 손님 대부분은 클라리사나 헤스딩스 남작에게 벌써 미운털이 박혔겠지만 말이다. 제 17화 파티가 끝이 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레 꺼넨 벨타이거의 부탁을 헤스딩스 남작은 기꺼이 들어줬다. 그러나,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드워프와 만나게 해주는 것 까지일 뿐,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거나 물건을 사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었다. "뭔가 자네에게 더 해주고 싶지만... 직접 드워프 족장님과 친분을 가지신 선조가 아닌 이상 어쩔수가 없네. 나 또한 선조의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정도의 배려를 받는게 다니... 정말 미안하이." 드워프와 만날 수 있는 허가서를 싸주면서 남작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어차피 그쯤은 예상했던 일인지 벨타이거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이렇게 해주시는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자네에게 부탁이 한가지 있는데..." 벨타이거 녀석이 허가서를 받아들자 옆에 앉아 있던 선애가 - 동업자라고 같이 와 있었다. - 일어나려고 하는데 헤스딩스 남작의 말에 멈칫 거렸다. "예?" "음... 사실, 이번 일로 인해서 우리 리사가 마음이 좀 상한 것 같아..." 그랬겠지. 비록 파티때 미란다하고 브에텔 녀석이 불참했다고 하더라도, 파티가 있기 전날까지의 며칠동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클라리사 녀석이 선애 옆에 착 달라붙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속이 안 좋았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마 그 아가씨는 자신이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테니까. "예에..." 벨타이거가 헤스딩스 남작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아무래도 클라리사가 속상하다는 것은 이해 하겠는데, 그게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는 거겠지. "그래서 말인데... 저기, 드워프 마을에 갈 때 우리 리사도 같이 데려가 주지 않겠나? 그동안 나나 제 오빠들이 애지중지 키우느라 거의 이 곳에서만 머물러 있었거든. 바람이나 좀 쐬면 마음이 풀릴까 하고 말이야." "아아... 예. 그 정도야 얼마든지... 그러면 갔다 오는길에 리사를 여기로 데려 오겠습니다." 어차피 헤스딩스 남작 집안과 크로스웰 남작 집안의 친분을 생각하면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보아하니 벨타이거도 헤스딩스 남작의 막내인 오닐과의 친분 때문인지 클라리사를 마치 친동생 처럼 생각해 주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드워프의 마을에 데리고 가는 것도, 헤스딩스 남작가의 여식이었으니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남작의 부탁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으음... 그리고 말이지..." "예." "저기... 리사가 오랜만에 자네 집에도 가보고 싶다는 군. 예전에 몇번 가보긴 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자네 집에만 있었지 도시 구경도 못했다고... 그래서 놀러가고 싶다고 조르더군. 괜찮겠나?" 남작의 말에 나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클라리사가 이번 생일파티를 이용해 아버지에게 떼를 쓴다고 하더니만, 진짜 그랬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우선은 놀러간다고 해놓은 것 같지만, 아마 벨타이거네 집에서 며칠 머무르다 일해 보겠다고 통보를 할테지?' 남작이 선애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선애양이랑 같이 지내다보니 선애양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야. 그 애가 엄마가 일찍 죽고 주변에 또래의 아가씨가 없다가 언니가 생겨서 무척이나 좋아하더군." "아하... 저도 남작 영애와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어허, 이미 리사와 언니 동생이라고 하는 사이라던데 뭘 내 앞에서까지 예의를 차리는가. 그냥 편하게 하게." "감사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내 자네에게 당분간 맡기고 싶은데... 귀찮지 않을지 모르겠군." 어른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거절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게다가 벨타이거는 클라리사가 일하고 싶어하는 걸 아직 모르니, 단순하게 놀러가는 것이라 여길 터였다. "귀찮다니요. 아마 선애가 리사의 좋은 벗이 되어줄 겁니다." '어어... 거기서 왜 선애가 나오는 걸까나...' 아무래도 벨타이거 녀석은 내년 봄 가게 오픈 준비를 하느라 바쁠테니 리사를 상대하는 걸 전적으로 선애에게 미뤄 놓을 심산인 모양이다. "허허, 자네가 그리 말해준다니 마음이 편하구만. 내 딸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애가 영리한데다 눈치도 있으니 폐를 끼치진 않을 걸세." 그리하여 일행에 끼게 된 클라리사는 그렇게 좋은지 계속 생글생글 웃었다. 뭐, 선애를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는 걸 잊지는 않았지만 말야. [야, 괜찮겠냐?] "/뭐 어때? 어차피 상회도 작으니 큰 일이야 있겠어? 비서 겸 보좌관으로 쓰지 뭐./" 드워프의 마을까지 가는 길은 남작의 성에서부터 멀지 않았다. 아무래도 처음 남작의 성을 지을때 일부러 드워프의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이 말이다. 덕분에 드워프의 마을로 가기 전 최종 관문인, 산 아래에 있는 도시에 도착한 것은 헤스딩스 남작 성을 떠난지 한나절 후였다. "내가 알기로는 정확히 드워프의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야. 드워프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드워프들의 인정을 받은 사람뿐이라고 들었거든." 그 도시의 한 여관에 자리를 잡고 저녁식사를 하는동안 클라리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줬다. "어, 그러면?" "이 도시에 드워프들이 내려와 있어. 그러니까... 드워프의 마을에서 파견되었다고나 할까? 그들이 이야기를 듣고 거래를 할지 물건을 팔지, 아니면 모조리 거절할지 결정 하는거지." "호오..." "그리고 재미 있는건, 파견 나온 드워프들이 여기 머무는 건 단 5일 뿐이야. 5일에 한번씩 바뀌는데, 파견 올 드워프들은 마을에서 제비 뽑기를 한대. 그러니까, 거래에 흥미가 있고 유능한 자가 아니라 운이 없어서 제비에 뽑힌 드워프만이 오는 거지. 두 명의 드워프가 말야." "이런..." 클라리사의 말에 벨타이거가 혀를 찼다. "헤에, 벨 오빠는 무슨 말인지 벌써 알아챈 거 같네? 그나마 인간에게 호의가 있는 드워프들이 뽑혀서 나온다면 가끔 새로운 거래가 성사되는 모양이지만, 무지 귀찮아 하는 드워프가 나와 있다면 거래는 땡~ 이라는 거야." 그녀의 말에 벨타이거나 선애, 그리고 마법사는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리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었다. 그에 선애가 그녀를 슬쩍 째려보며 물었다. "리사야, 너는 어째 무지 재미있어 하는 거 같다?" "아하하하, 언니는... 내가 뭘 어쨌다고." "아니, 우리에게 심각한 정보를 알려주면서 너는 너무 태평한 얼굴이라... 뭔가 좀 수상한 거 같기도 하고..." "에이... 무슨 소리야. 그냥 오랜만에 성을 나와서 좀 들떠 있을 뿐이야. 게다가 나는 헤스딩스 사람이라고 해도 드워프들을 만나는 건 처음이거든. 그래서 쫌 기대가 돼서 그래. 에헤헤..." "그러냐..." 그녀가 그렇게 우긴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주긴 하겠지만, 왠지 그것만이 아닌 기분은 들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지금 내가 파고들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저녁을 마치고 사람들은 하루종일 이동한 것의 피곤도 풀고 내일을 위하여 일찍 모두의 숙소로 흩어졌다. 선애와 클라리사는 같은 방을 사용했다. 그녀가 먼저 목욕을 하러 간 사이, 선애는 갈아 입을 옷을 꺼냈다. 그 사이 선애의 가방 안에서 보인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 주머니었다. [어, 이거 가지고 왔어?] 나는 주머니를 들어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쏟았다. 핸드폰과 손목 시계. 이 판타스틱한 세계로 떨어질때 선애가 가지고 있던 거였다. 이제사 이야기하지만, 이 핸드폰은 내가 사준 거였다. 꼬맹이 녀석이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내 사비를 털어야 했는데, 막 그 모델이 나왔을 때 사느라 거금 40여만원을 들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하, 이거 사달라고 몇날 며칠을 졸라서 결국 내가 두 손 들었었는데. 대학 갈때까지 못 쓰면 다음에 절대로 안 사준다고 했는데...] 밧데리가 다 해 아무것도 못하는 고물이 된 지 오래였다. 그건 손목시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손목시계는 선애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생일 선물로 사준 거였다. 고급 패션 시계라고 해서 하늘색의 알은 꽤나 큼직한데 반해 파란색의 줄은 상대적으로 가는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뭐, 아무리 예쁜 디자인이라고 해봤자 멈춘지 오래 되어서 사용하지도 못하지만... "/그냥... 부적 삼아 가지고 다녀. 항상 가지고 다니다 냅두고 다니려니 허전해서.../" [그랬냐? 나는 못 봤는데...] "/가지고 다닌다고 해봐야 가방 속에만 넣고 있었는 걸./" [하긴...]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은 서둘러 파견나온 드워프들이 머문다는 건물로 향했다. 그 곳은 헤스딩스 남작의 성에서 직접 파견 나온 관리가 머무는 곳으로, 드워프들의 편의를 봐주는 한편 이 도시를 관리하는 곳이었다. 일명 시청이라고나 할까? 원래 클라리사가 있었으니 일행은 거기서 머물수도 있었지만, 클라리사가 보통 여관에서 한번 자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여관에서 머물렀던 거였다. 뭐, 시설은 크게 나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남작에게 받은 증을 보여주기 위하여 만난, 이 곳에서 제일 높은 관리라는 중년 남자는 클라리사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 아가씨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확실히 성에서 직접 파견나온 관리라 그런지 클라리사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에... 나는 그냥 쫓아온 거니까 상관 말아요." 그런 그에게 클라리사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지만, 어디 그게 그렇게 되던가? 가여운 중년 남자는 바짝 얼어가지고서는 벨타이거에게 용건을 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벨타이거가 내민 헤스딩스 남작의 허가서를 받아 든 그의 인상은 찡그러졌다. 뭐, 귀찮다거나 하는 건 아니라 무지 난처한 기색이었지만... "왜요?" 그에 그냥 쫓아온거라고 말한 클라리사가 끼어들자 중년 관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입을 열었다. "아... 저... 아가씨, 만약 거래를 트기 위해 오신 거라면 좀 기다리시는게 어떠실지요. 지금 파견되어 온 드워프 분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별로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모든 거래는 물론이거니와 간단히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의 청까지도 모조리 거절하고 있답니다." "그래요?" "예, 다행이 이틀만 있으면 그 분들이 가시고 새로운 분들이 오시니 그때 만나시는 건 어떠실지요." 관리의 말은 일견 타당해 보여 나는 일행들이 그 관리의 말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벨타이거는 달랐나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오시는 드워프들은 인간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벨타이거의 말에 관리는 머뭇머뭇 대며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실은, 파견되는 날에 새로 제비를 뽑기 때문에 어떤 분이 오실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혹시나 호의를 가지고 오시는 분일지도 모르니..." "확실한 건 아니라는 거군요?" "예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두 번 시도를 해봐도 나쁠 건 없겠군요. 지금 있는 드워프들과 거래를 시도하다 실패 한다면 다음 파견자 분들을 만나도 되겠지요?" "에... 그건 상관 없습니다만, 그냥 다음 분들을 만나시는게 좋을텐데요... 지금 계신 분들은 성격도 무척 거치시거든요." 아무래도 관리는 우리가 안 좋은 꼴을 당할까봐 걱정했던 모양이다. "지금 있는 그 분들을 만났던 상인들 중 좋게 좋게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 분노해서 나오는 건 기본이요, 어떤 상인은 신나게 얻어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관리들이 열심히 말렸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지요." '켁... 그 정도야?' 관리의 말에 클라리사와 선애의 눈은 둥그래졌고 잭 조셉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벨타이거 녀석은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한 건지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 하도록 하지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위험하실텐데..." "괜찮습니다.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벨타이거의 고집에 중년 관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클라리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어... 그럼 아가씨께선...." "난 괜찮을 거예요. 같이 가겠어요." "에... 뭐, 그러시겠지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분들은 지금 아침식사를 하고 계시거든요. 보통 한시간 정도 걸렸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돌아오실 겁니다." 드워프란 종족이 유사인종이긴 하지만 인간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서열 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인간이야 같은 인간끼리라도 왕족, 귀족, 기사, 평민 등등으로 나누어서 윗 계급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복종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마을의 촌장이나 어른들의 의견을 가능한 한 수용하는 것을 당연시 생각한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 마을의 원로나 족장의 말도 자기가 안 내키면 무시해버리기 일수라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드워프들이 족장과 헤스딩스 남작의 선조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인간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인간들의 요리 실력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이라고 하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었는지 따악 한 곳에서 인간들보다 떨어지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요리라고 한다. 아무래도 드워프들은 선천적인 요리치들인 모양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들은 미식가이자 대식가이자, 대단한 애주가들이라는 슬픈 사실. 내 생각인데 헤스딩스 남작의 선조는 드워프의 족장에게 그 사실을 알아내서 그걸 미끼로 교류를 성공시킨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헤스딩스 남작가와 친분을 가진 드워프 족장의 마을에서 전 마을 주민이 토론을 하고 투표를 한 결과, 다수결로 교류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 드워프들은 윗사람의 말을 마음대로 무시하는 대신, 이렇게 한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다수결로 결정한 사항은 절대적으로 지킨다고 한다. 하기야, 그러니까 드워프의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거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교류가 결정되자, 드워프들을 위하여 이 마을에는 헤스딩스 남작가에서 대대로 손을 써서 전국에서 데리고 온 뛰어난 요리사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헤스딩스 남작가와 교류를 하는 드워프의 마을에서는 자주 자주 놀고 먹으러 이쪽으로 많이 내려옴은 물론이요, 가끔 정식으로 교류를 하는 마을 말고 옆 마을의 드워프들도 기웃기웃 하면서 내려온다고 한다.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드워프들은 먹을때 건드리는 걸 무지무지 싫어한다고 한다. 될 수 있는한 드워프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관리로써는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사항이었다. 이건 모두 식사하러 나간 드워프들이 돌아올때 까지 기다리는 와중에 관리가 말해준 것이었다. 아무래도 클라리사가 옆에 있으니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럼 여기 돈 많이 벌겠네요? 드워프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온다니..." 선애의 질문에 관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기서 드워프들이 사용하는 모든 비용은 남작가에서 대주고 있습니다." "헤에, 그럼 드워프들은 모두 꽁짜?"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드워프들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안 갖는 거죠?" "그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거래를 하기 위하여 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싫어하는 겁니다. 상인들이 이것 저것 따지는게 오죽이나 많습니까? 게다가 드워프들은 상업이라는 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 체질이니... 그나마 거래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주기라도 하는 게 감지덕지인 상황이죠." "아아..." "그러니... 거래를 새로 트는건 무척이나 어려울 겁니다." 관리는 벨타이거를 힐끔 힐끔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마 불가능 할테니 미리미리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라는 뜻인가보다. 뭐, 이 곳에 올때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는게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벨타이거의 표정은 별로 좋질 않았다. 관리의 말에 의하면 아예 이 곳에 오래오래 머물면서 드워프 파견자가 바뀔때마다 시도해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럴 정도로 시간이 널널한 것도, 인력이 많은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기껏 기다려봐야 한달 정도? 최소한 겨울이 되기 전에는 돌아가서 내년 봄을 위해 준비할게 많으니 말이다. 가게를 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가게 안 인테리어도 꾸며야 하고, 그 가게 안에 들여놓을 상품의 종류도 늘려놔야 하고 사람들도 구해야 하고... '아무래도 선애가 나나 클라리사를 많이 부려먹게 될 거 같아... 돈도 많이 들테니 아예 클라리사도 동업자로 만들어서 투자하라고 하면 좋을지도.' 그렇게 잠시 상회의 미래를 생각하는데 우리가 있는 응접실의 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젋은 관리 한명이 들어왔다. "드워프들께서 오셨습니다." 드워프들이 이 곳에 있을때 생활한다는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늘어져 있다시피 앉아 있던 두 드워프가 우리를 보자마자 인상을 파악 찡그렸다. 마치 기분 좋을때 찬 물을 끼얹는 존재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기야, 맛난 것 잔뜩 먹고 오자마자 다시 하기 싫은 일에 돌입해야 하니 기분이 안 좋은 건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그 대상이 내 동생이 된다는 게 열받았다. 그래도 우선은 칼자루를 저쪽이 쥐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뭐야?" 드워프란 종족의 생김새는 이 곳에 오기 전에 들었었다. 성인 남자의 허리쯤 오는 - 추측컨대 대략 1m 약간 넘는게 아닌가 싶다. - 키에 단단한 체구를 가진 종족이라고 했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한국에 있을때 읽은 판타지 자료에서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서 등장하는 일곱 난장이가 바로 드워프들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어던 걸로 기억한다. 과연, 보디빌더들이 부러워 할만한 단단하고 두터운 몸집의 키가 작은 두 종족이 우리 앞에 있었다. 한 드워프는 불타오르는 것만 같은 선홍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다른 사람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둘 다 멋드러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드워프들은 젊을때부터 수염을 기른다고 했었지?' 그 중 띠껍게 말문을 연 쪽이 붉은 머리 쪽. 갈색 머리는 들어서는 우리를 한번 힐끔 보더니 그대로 눈을 감고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참 냉정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오기 전에 관리에게 듣기는 했지만, 이래서는 어디 말이라도 끝까지 꺼낼 수 있을런지... 같이 들어온 관리는 거 보라는 듯 그만 나가자고 했지만, 그래도 벨타이거는 여기까지 온 거 찔러나 보기라도 했는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의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나 그 제의를 말하기도 전에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불쑥 말했다. "싫.어. 그러니 그만 나가봐." 그러며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에 아무리 뻔뻔한 벨타이거라도 기가막힌 모양이었다. "아직 제의는 말하지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그러니 얌전히 나가." "들어보시지도 않는 겁니까?" "내가 왜 들어야 하는데?" "상인들의 제의를 듣기 위해서 여기 계시는 거 아닙니까?" "이거 웃기는 놈이네? 누가 네놈들 제의를 듣기 위해서 왔대? 우리는 만나면 그만이야, 만나면. 얼굴 봤으니까 됐잖아. 당장 나가. 귀찮게 하지 말고." 난 세상에서 미란다가 가장 안하무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더 안하무인 녀석을 보게 될 줄이야... '허어, 세상에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는 법이라더니만...' 울 꼬맹이가 열받았는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것만 같은 징조. '으음... 저 녀석들을 날려 버리라 그럴까, 태워 버리라 그럴까?' 그런데 그때, 그 동안 조용히 있었던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나섰다. "나가기 전에 한가지만 질문해도 되겠소?" 거래 이야기가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에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곧 냉랭하게 바꿨다. "지금 수 쓰는 거요? 하여간, 인간들이란 잔머리는 잘 굴린다니까." "그건 아니오. 단지 궁금한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인 드워프에게 묻고 싶을 뿐이오." 이제보니 저 마법사도 머리를 굉장히 잘 굴리는 것 같았다. 하기야, 마법사들은 모두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했으니... 마법사의 진지한 말에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멈칫 하더니 냉랭한 표정을 좀 누그러 뜨렸다. "묻고싶은게 뭐요?" "철과 같은 질량을 가졌지만, 무게는 더욱 가볍고 강도는 더 센 금속을 알고 있소? 아니... 꼭 금속이 아니라 어떤 물질이라도 상관 없소만... 한번 모양을 만드면 변형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면 좋겠소이다만..." 마법사의 말에 드워프가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물었다. "혹시, 미스릴을 말씀하시는 거요? 철보다 더 강도가 높지만, 가벼운 금속이지. 그러나 제련하기가 쉽지 않아 우리 드워프들만 다룰 수 있다는..." "미스릴은 나도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건 구하기가 어려운 거 아니겠소? 나는 좀더 쉽게 구할 수 있는 걸 원하오이다. 혹시 당신들 드워프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이라오." 그렇게 말한 마법사는 품 속에서 뭔가 가죽 꾸러미 같은 걸 꺼내들었다. 그걸 펴니, 선풍기의 날개 한짝 모양을 하고 있었다. "보시오, 이 가죽의 두께로 이것과 같은 모양과 크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빠르게 휘둘러도 모양이 변형되지 않는 단단한 물질을 구하고 있소." 자신의 전공에 관한 이야기라 그런지 붉은 머리의 드워프는 냉랭하던 기색을 완전히 지우고 마법사에게서 선풍기 한쪽 날개의 모양을 하고 있는 가죽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그 옆에서 아예 관심을 끊은 채 눈을 감고 있던 갈색 머리의 드워프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눈을 뜨고 바라봤다. "흐음... 이거 두께가 상당히 얇은데?" 가죽의 두께를 그 짧고 통통한 손으로 만져보며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중얼거리자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철로 그렇게 만들어봤는데, 조금 휘두르니까 금방 휘어졌다오. 좀 더 두껍게 하면 무게가 상당히 나가기 때문에 안 좋고..." "미스릴로 하면 될텐데."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말하자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미스릴은 구하기 힘들지 않소?" 마법사의 말에 두 드워프가 머리를 맞대었다. "합금을 사용하면 어떨까?" "에... 나 합금은 잘 모르는데..." "두랄루민이라면 알지도 몰라." "하긴, 그 금속에 미친 영감이라면... 얼마전에도 괜찮은 합금을 만들어냈다며 좋아하는 거 같은데..." 거기까지 둘이 속닥대던 드워프가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좋소. 당신의 질문을 우리가 대답 못한다는 건 드워프로서의 자존심이 용납 못하지. 당신을 드워프의 마을로 데리고 가겠소." 드워프의 말에 거기 있던 이들의 안색이 화악 퍼졌다. 드디어 성공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빨간 머리의 드워프에 의해 그 기분은 싸악 구겨지고 말았다. "누가 너희들을 데리고 간대? 내가 허락한 건 저 사람 단 한 명 뿐이라고. 너희들은 꿈도 꾸지 마." 그에 클라리사가 나서서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우리의 꼬맹이가 앞으로 나섰다. "이것 보세요,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 생긴 건 꼭 난장이 똥자루 같이 생겨서는..." 만약 비슷한 또래였다면 다짜고짜로 반토막 말이 나갔을테지만, 나이가 많아보이는 둘에게 차마 반말은 할 수 없었던지 존대로 말했다. 그래도, 드워프들을 화나게 하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뭐어어~~? 이런 건방진... 야, 너 당장 나가. 너랑은 거래고 뭐고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아!" 그 말에 선애도 빡돌았는지 그나마 해주던 존대도 가라앉혀 버렸다. "건방지기는 누가 건방지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거래고 뭐고 할 생각도 없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안한다고 하면 누가 겁나냐? 이 바아~보야." 선애 언니로써, 이 정도면 지금까지 보아왔던 말싸움 중에서도 무척이나 정도가 약한 편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제 나이가 먹었다고 말싸움을 할때의 말투가 고상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드워프는 그걸 알아주지 않았다. 그 동안 눕다시피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당당히 선애 앞에 버티고 섰다. - 그래봤자 선애가 여전히 내려다 보는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 "감히... 감히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인 종족 드워프를 보고 바보라고 하다닛. 당장에 결투다!" 머리 못지 않게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자,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귀가 찌릿찌릿 할 것만 같았다. 갈색 머리 드워프도 기분이 나빴는지 소파에서 똑바로 앉은 채 선애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나설 태세였지만, 그래도 자기의 동료의 실력을 믿고 있는지 느긋한 태도였다. 그러나 우리의 꼬맹이씨는 뒤에 내가 있어서 그런지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인 종족 좋아하네. 안됐지만, 난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들보다 더 뛰어난 실력으로 만들어진 물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웃기지 마. 이 세상에서 우리 드워프가 만든 것 보다 더 뛰어난 물품이 있다니." "있다면 어쩔래?" 그러자 그 동안 가만히 보고만 있던,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우리 드워프가 만든게 아니라면, 인간이 만들었단 소리인가?" "당연하지. 그건 분.명.히 인간이 만들었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군. 보여줄 수 있겠는가?" "얼마든지. 에..." 자신있게 말하던 선애가 멈칫 거리자 기회를 잡았다는 듯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헤에, 거 봐라 이 계집. 없는 거지?" "시끄러. 내 숙소에 있단 말이야. 갔다 오려면 시간이 좀..." 선애가 가기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말했다. "얼마든지 기다리겠다. 가지고 와라." 그리고 붉은 드워프가 질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흥, 봐서 별 것 아니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러자 열받은 선애. "웃기고 있네. 그럼 별거라면 어쩔건데? 앙? 어쩔 거냐고?" 선애는 아마 단순히 붉은 머리의 드워프에게 다다다 쏘기 위해 꺼낸 말에 불과했을 터였다. 그런데, 의외로 대답이 다른 곳에서 나왔다. 바로 갈색 머리의 드워프에게서 말이다. "만약, 우리가 놀랄 만한 물품이라면... 너희 일행 모두를 드워프의 마을에 데리고 가주지." "엥?"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선애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데,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한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물품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마을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다." "어이구... 그 마을이 얼마나 대단하다구..." 황당함 반, 기가막힘 반에 선애가 중얼거리는데 다가온 클라리사가 선애의 손을 화악 잡아 끌었다. "언니, 뭐해? 빨리 그 물품을 가지러 가자고. 나도 그 물품이 뭔지 무척 기대가 된단 말이야." "나도 기대가 되는 군." 두 눈을 반짝이며 벨타이거가 한 말이었다. 그는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기대감도 어려 있었다. 클라리사와 서둘러 묵고 있던 여관으로 달려 온 선애가 꺼내든 것은 역시나, 손목 시계와 핸드폰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안에 들어 있던 두개의 물건을 꺼내 가만히 들여다보는 선애의 옆에서 같이 그 물건을 들여다본 클라리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헤에... 이게 언니가 말한 그 물건이야? 되게 신기하게 생겼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신기하게 생기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는지 약간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거기에, 이걸 드워프들에게 보이고 난 후의 반응이 걱정 되는지 약간 염려스러운 기색으로 선애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계를 보는 순간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목 시계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는 선애를 향해 속삭였다. [야, 잠깐만 그거 그냥 들고 있어봐.] 의아한 듯이 날 잠깐 쳐다보는 선애였지만, 묵묵히 행동을 멈추고 기다려주는 기색에 씨익 웃으며 손목 시계 속으로 내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유령에게는 미미하게나마 마이나스적 에너지가 방출 된다고 한다. 뭐, 반대적으로 살아있는 존재들에게는 플러스적인 에너지가 방출 된다고 쓰여 있었지만, 하여간, 그 마이나스적 에너지는 전기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유령이 나타났을 때 멈춰 있던 시계가 움직인 적도 있다고 했다. 사실, 그 책이 '세상에 이런 일이... 믿거나 말거나' 하는 책이라서 그때는 그냥 재미로 '설마...' 하며 읽어 넘겼지만, 그 책에 의하면 그런 에너지를 이용해서 유령이 나타났을 때를 체크하는 장치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장치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냥 한번 해보는 거였다. 혹시나 뭔가 다 된 시계 건전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안되면 그만이고, 되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번 해본 거였는데, 정말로 잠시 후에 시계의 초침이 짹깍째깍 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였다. [우와아앗, 이거 그냥 한번 해본 건데 정말 되네?] 마침 다시 근심스런 시선으로 시계를 내려다보던 클라리사의 눈이 커졌다. "어어? 이거 움직이고 있잖아? 어떻게 된 거야? 혹시... 이거 마법 물품이었어?" 그에 선애가 잠깐 당황했지만, 얼른 얼버무렸다. "아, 아니... 움직이게 만든 스위치를 누른 거야. 마법은 아니고..." "이게 정말 마법 물품이 아니란 말이야? 그럼 이게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으음... 그러니까 번개의 힘을 약하게 만들어서 저장해놓았는데, 그 힘으로 움직인 거야." 클라리사가 전기라는 걸 모르니, 대충 번개의 힘이라고 설명한 모양이다. 하기야, 번개도 전기긴 전기니까. 그런데 그게 오히려 클라리사를 알쏭달쏭하게 만든 모양이다. "번개의 힘? 그걸 어떻게 저장해? 오오라... 그러니까 혹시 마법으로 번개를 만들어 저장해놓은 거야?" 그러나, 클라리사의 질문은 오히려 선애의 반문을 낳았다. "뭐? 마법으로 번개도 만들 수 있어?" "엑? 마법으로 번개를 만들 수 있는 것도 몰랐어? 뭐야...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님도 만들 수 있을텐데..." "정말? 난 몰랐네..." 선애의 반응에 클라리사는 실망한 어투로 말했다. "에이, 그럼 이거 마법 물품 맞잖아. 난 또..." "어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쨌든, 신기하긴 하네. 그건 그렇고 빨리 가자. 모두 기다릴텐데... 그런데, 드워프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라나..." 클라리사는 그렇게 걱정하며 선애의 팔을 잡아 끌었다. 드워프가 기다리고 있는 건물로 가는 동안, 나는 선애의 날카로운 째림을 받으면서 손목 시계는 물론이거니와 핸드폰 속에다도 손을 넣고 있어야 했다. [야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정말 몰랐다니까. 지금도 그냥 생각난 김에 한번 해본거였다고... 이렇게 움직일 줄 알았으면 내가 진작에 했지.] 열심히 변명을 해봤지만, 선애의 눈초리는 풀릴 줄 몰랐다. '에휴...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나...' 입구에 들어서기 전 선애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손을 집어넣고(?) 있었던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전원을 넣었다. 그러자... 또로롱~~ 하면서 전원이 켜지는 것이 아닌가. 이로써 나는 휴대용 라이터였다가 이제는 휴대용 충전기 신세가 되게 생겼다. 옆에서 보고있던 클라리사의 눈이 커지며 뭐라 말하려고 입을 움찔 거렸지만, 선애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는지 선애의 눈치를 살피며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액정 화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던 선애는 버튼 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는가 싶더니만 움찔 거리다가 결국 폴더를 덮었다. 그리고는 클라리사를 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가자." "응? 아, 응..." 클라리사가 먼저 걸어가는 선애의 뒷쪽에다 어리둥절한 시선을 주었지만, 저만치 나가는 선애와 거리가 떨어지자 허둥지둥 뒤를 쫓았다. 그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아아... 괜한 짓을 한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계나 핸드폰을 만지지 말고 그냥 냅둘걸... 괜한 짓을 해서 향수를 일으킨건가?' 드워프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이 기다리는 응접실에 들어간 선애는 굳은 표정으로 척척 걸어가 붉은 머리의 드워프의 손에 손목 시계를 턱 하니 내려놨다. "자, 당신들이 이런 거 만들 수나 있어?" 그에 사람들의 시선이 붉은 드워프의 손으로 쏠렸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거라 어리둥절 한 모양이었다. "이, 이게 뭐지?" "어라, 쬐끄만 막대기가 움직이네?" "마법 물품?" 드워프의 가까이에 모여들어 손 안을 들여다보던 사람들은 한마디씩 하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드워프들은 손목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괜히 초조해진 사람들이 저희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왜, 왜저러지?" "글쎄요.." "혹시, 이게 마법 물품이라서 그런 걸까요?" 벨타이거의 걱정 어린 질문에 드워프들처럼 시계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 물품에서는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아. 내 이름을 걸고 말하지만, 저건 절대로 마법 물품이 아니야." "그럼 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까요?" 클라리사도 걱정스럽다는 듯 끼어들었다. 하기야, 그녀는 처음 손목시계를 봤을때부터 드워프들의 성에 차지 않을거라 짐작하고 계속 걱정했었으니 말이다. "너무 놀란게 아닐까 싶습니다." "왜요? 혹시... 큰 소리친거에 비해 너무 물품이..." "아뇨, 저도 이런 물품을 처음 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단 한가지만 봐도 말이지요. 저기 유리막 안에 있는 움직이는 금속 막대. 제가 이날 이때까지 여러가지 진귀한 물품도 보고 드워프들이 만든 몇몇 작품도 봤지만, 저렇게 가느다란 금속 막대는 처음 봤습니다." "사실이야."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꺼칠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보니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무지 분하다는 표정으로 선애를 노려보고 있었고, 손목 시계는 갈색 머리의 드워프 손에 옮겨져 있었다. 갈색 머리 드워프는 마치 시계를 해부라도 할 듯이 이리보고 저리보고 돌려보고 하더니만 선애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이거... 정말 인간이 만든게 맞나?" "맞아." 선애가 그 드워프를 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대답하자 붉은 머리 드워프가 버럭 소리쳤다. "거짓말." 그러자, 그제야 붉은 머리 드워프에게 시선을 돌리는 꼬맹이. "내가 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웃기지 마. 그럼 이걸 어떻게 인간이 만들었다는 거지?" "내가 기술자가 아닌데 어떻게 알아?" "거짓말이야. 이렇게 가느다란 금속 막대를 인간이 만들 수 있을리가 없어." "흥, 네 놈이 아무리 뭐라 해도 그건 인간이 만든 거야. 폼을 보아하니 그런 건 못 만드나 보지? 이 세계 최고의 장인이라고 자랑하더니만..." "뭐, 뭣이라?" 붉은 머리 드워프가 자신의 머리카락 색 만큼이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뭐라 하려는 찰나, 갈색 머리 드워프가 끼어들었다. "이거... 안에 여러 장치가 있는 거 같은데, 맞나? 이 가느다란 금속 막대기가 움직이는 장치 말이야." 손목 시계를 들어보이며 묻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잘 모르지만, 복잡한 장치가 들어있는 건 틀림 없지." "이거... 왜 막대기가 세개나 있는 거지? 보아하니 움직이는 건 가장 가는 막대기 뿐인 거 같은데... 나머지 두개 막대기를 그냥 장식삼아 붙여놓은 건 아니겠지?"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다시 시계를 바라보며 말하자 선애가 그의 손에서 시계를 받더니 두 드워프가 보는 앞에서 옆에 있던, 시간 맞추는 가느다란 막대기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머리가 톡 하고 튀어 나오며 초침이 멈췄다. "이건 시계야. 내가 있던 곳에서는 하루를 24시간이라고 잡았어. 오전 12시간, 오후 12시간. 이 짧은 막대는 '시'를 가리키는 거지. 그리고 1시간은 60분으로 나뉘어. 길다란 막대기가 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 바퀴를 돌면 60분, 즉 한시간이 지났다는 거야." 선애는 그렇게 설명하며 옆에 튀어나온, 시간 맞추는 돌림쇠를 살살 돌렸다. 선애의 조작에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이지 않던 길다란 막대기 (분침)이 움직여 한바퀴 돌자 짧은 막대기 (시침)이 시계에 표시되어 있는 한칸의 간격만큼 움직였다. "움직이는게 보이는 이건 초를 나타내. 1분은 60초. 이 가장 가는 막대기가 한바퀴 돌면 여기 보이는 이 한칸을 다섯 등분으로 나눈 범위만큼 움직여. 그러니까 이 한칸을 움직이려면 이 가느다란 막대기가 다섯바퀴를 돌아야 하지." 선애의 설명에 갈색 머리의 드워프 표정이 점점 더 침중해진다. "한바퀴 돌때마다 한 칸이라... 거기에 가장 가느다란게 제일 먼저 움직이고... 그럼 이 원리가..." 혼자 중얼중얼 대면서 어느 순간은 짧고 몽통한 손가락으로 뭔가를 허공에 그리거나 계산도 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더니만 한참 후에 선애를 바라봤다. "그거... 뜯어 봐도 되냐?" 그런데 선애가 미처 뭐라고 말 하기도 전에 갑자기 벨타이거가 끼어들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무지 무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방해받은 것 마냥 갈색 머리의 드워프 인상이 사나워졌다. 그러나 벨타이거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자기가 하고싶은 말을 꺼낼 뿐이었다. "그 물건에 대한 처리를 의논하기 전에 확실하게 하고싶은 일이 있는데요?" "뭐지?" "드워프께선 분명히 선애가 당신들을 놀라게 할 물품을 가지고 온다면 우리 일행 모두를 마을로 데려가 준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보니 그 물품이 두 분을 놀라게 한 것 같으니 마을로 데려가 주겠다고 확답을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도 그제야 생각 난 듯 갈색 머리의 드워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 그게 있었군. 어떻게 할 거지?" 그러자 붉은 머리의 드워프는 기분 나쁘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갈색 머리의 드워프에게 모든 대답을 일임했고,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졌다는 포즈로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좋아, 너희들을 마을에 데리고 가겠어." 그에 벨타이거가 됐다는 듯이 씨익 웃자 그게 기분 나빴는지 일침을 가하는 건 잊지 않았다. "하지만, 거래 성사까지는 장담 못해." 그러더니 갑자기 선애를, 아니 정확히는 선애가 들고 있는 시계를 힐끔 바라보는 거였다. "뭐어... 그걸 나에게 주겠다면 내가 거래에 응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드워프의 말에 선애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걸 달라고?" "뭐어... 거래의 대가라고나 할까..."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말 끝을 흐리는 걸 보니, '그 시계 나 주면 안돼냐?'고 말하는게 무지무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저 드워프라는 종족들이 이 세계 최고의 장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네들이 만들지 못한 새로운 물건을 달라고 하는게 무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겠지. 그렇게 말한 갈색 머리의 드워프는 머쓱한지 괜히 머리만 긁적이며 시선을 딴데로 돌렸지만, 그래도 힐끔 힐끔 선애를 보는 것이 시계가 무지 가지고 싶은 모양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벨타이거가 슬그머니 선애 옆으로 다가오더니만 그 응접실에서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거 어디서 난 거야?" "예전에 선물 받은 거예요." "그래? 예전이라면... 혹시 고향에서...?" 벨타이거가 조심스레 선애의 얼굴을 살펴보며 묻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다면 드워프에게 넘기기... 힘들겠네?" 그제야 나는 벨타이거 녀석이 선애에게 무슨 말을 하고싶어하는 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드워프와의 거래를 성사시킬때 선애의 시계를 사용하여 좀 더 쉽고 유리하게 거래를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거였다.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묵묵히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자, 그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으음... 내가 그것과 비슷한 것을 구해줄 수는 없겠지만... 네가 원하는 만큼의 값을 치른다고 하면 어떨까? 물론, 드워프들에게도 받아낼 수 있을때까지는 받아내 주겠어." 그의 말에 선애가 슬쩍 고개를 들어 벨타이거를 바라봤다. 뭔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선애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뭔가 답을 찾아내길 바라는 건지 벨타이거 녀석이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선애가 피식 웃었다. "뭐, 나쁘지는 않군요. 나중에 고향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괜찮겠어?" "대가가 생각보다 나쁘다면 안 괜찮을지도 모르죠." 농담 섞인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씨익 웃었다.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선애가 허락한 것에 안도한 표정으로 벨타이거가 먼저 들어가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속삭였다. [야, 괜찮겠냐? 그래도 네 친구들이 선물해준 건데...] "/됐어. 어차피 여기서 시계가 필요한 것두 아니고... 정 필요하다면 핸드폰 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장이랑 드워프들에게 긁어낼 수 있을만큼 긁어 내야지. 후후후.../" 그 음침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좋아서 웃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만사 다 포기한 웃음인지 헷갈렸다. '그래도 뭐... 시계가 필요 없는 건 사실이니까... 괜찮겠지 뭐.' 그리하여, 우리 일행들은 모두 드워프의 마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가는 길에 문제가 있다면... 그 깊은 산속에 있는 오지의(?) 마을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지만... 나는 드워프가 키가 작은 종족이라는 것만 알았지, 키가 작아서 말은 절대로 안 탄다는 것을 몰랐다. 뭐, 말을 안탄다는 건 이해 한다. 사람들도 가끔 말 높이에도 고소 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멀미를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마차도 안 타고 간다고 하는 건지... 길 안내를 하는 두 드워프가 바득바득 우겨서 튼튼한 다리로 산 길을 걸어가게 되자 길 안내 받는 사람들이 어쩌겠는가? 같이 걸어갈 수 밖에...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드워프들이 쪼잔하게 선애에게 한 방 먹은 거 가지고 복수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었지만, 드워프들을 오랜 기간 돌봐준 중년 관리의 말에 의하면 드워프들은 원래 뭔가를 타고 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다. 이 세상 최고의 장인이라면 뭔가 탈 것을 멋드러지게 만들어서 타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종족이 틀리니 만치 뭔가 우리랑 생각이 틀린건가 보다. 대신, 그 깊은 산속까지 걸어가야 하는 꼬맹이가 걱정이었지만... 다행이라고 한다면, 드워프 마을까지의 길은 그럭저럭 왕래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잘 닦여 있다는 거였다. 드워프들이야 계속 걸어다녔지만, 인간들은 말 혹은 마차를 타고 왕래를 한데다가 드워프의 마을에서 물건을 싣고 오려면 수레 같은 것도 필요했을테니 말이다. 산이 꽤나 험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구불 구불하게 있어서 그런지 크게 가파르지도 않아서 걷는데 크게 힘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단지... 거리가 좀 문제가 될 것 같지만 말이다. 드워프들은 자신있게 하루 만에 도착할 거라고 말해서 나는 산 속에 있어도 크게 멀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걸, 드워프들의 걸음은 벨타이거나 잭 조셉이 가볍게 뛰어야만 따라잡을 수 있는 속력이었던 것이다. 산 속에 살아 그런건지, 아니면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서 그런건지, 키가 작은 덕에 다리도 짧은 주제에 걷는 속도가 엄청 빨랐다. 그런 속도로 걸어서 하루종일 걸리는 거리라면, 보통 사람의 걸음 속도라면 이틀 정도 걸리는 것임에 틀림 없었다. 뭐, 벨타이거 녀석이나 잭 조셉, 하다못해 젊은 사람 못지않은 체력을 가진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는 괜찮았지만, 선애나 클라리사가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그 둘을 - 특히 선애를 - 놓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두 드워프와 일행은 의논 끝에 클라리사와 선애는 말을 타고 가기로 했다. 처음에 선애는 말을 못 타니 마차가 어떨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걸어 가는데 마차를 타기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는지 그냥 말로 낙찰 된 것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수레가 어떨까 싶었지만, - 드워프 마을에서 올때 혹시 뭔가 짐을 싣고 오게 될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말이다. - 클라리사가 절대 수레는 못 탄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 사실 선애가 수레를 거론했었던 것이다. - 그냥 무산 됐었다. 선애에게 사근사근 굴어서 털털한 줄 알았더니만, 그래도 가끔은 '역시 남작 영애였군.' 하는 말이 나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뭐, 남작 영애가 맞기는 맞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선애와 클라리사는 덩치가 작은 편이고 성격도 온순한 - 물론 중년 관리가 알아서 구해준 거다. - 말을 골라서 타게 되었다. 선애가 말을 못 타서 걱정 되기는 했지만, 다행이 클라리사가 말을 탈 줄 알아서 클라리사가 고삐를 잡고 선애는 클라리사의 뒤에 타고 가게 되었다. 그렇게 가장 체력이 약한 두 아가씨가 말을 타고 가게 되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아무리 체력 만빵인 젊은 남정네 둘과 그 못지 않은 중년 남자라고 해도 드워프들의 걸음을 쫓아가려면 계속 뛰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드워프들은 그들에게 맞춰 걷는 속도를 늦출 수 밖에 없었고, 그건 하룻 밤을 길거리에서 노숙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어차피 이럴 줄 알고 도시락을 넉넉히 싸와서 끼니를 간단하게 빵 한조각에 물로 때우는 일은 없었지만, 노숙한다고 두 드워프들이 얼마나 못마땅해 했는지 모른다. 특히나 빨간 머리의 드워프는 무지 노골적으로 투덜투덜 대는 것이다. 그걸 다른 사람들이 듣고 좋아할리는 없었지만, 드워프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 단 한사람 빼고는... "아씨, 야, 씨끄러!" 우리의 위대한 꼬맹이. 선애는 저렇게 괜히 남에게 피해주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게다가 성격도 안 좋았다. 그런 상황에 얼마든지 맞먹을 수 있는 상대였으니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선애의 날카로운 말에 붉은 머리의 드워프 눈에 분노가 어리더니만 그 짧은 다리로 순식간에 선애 앞으로 다다다 달려왔다. "뭣이라? 이게 정말..." "남들에게 피해 좀 주지 말지?" "노숙하는게 너희들 때문이잖아?" "우릴 데리고 가겠다고 말한 건 네놈들이야. 그러니 시끄럽게 굴지 좀 마." "아오... 이걸 정말..." 붉은 머리의 드워프는 씨근 덕 거리며 주먹을 들었지만, 차마 때리지는 못하겠는지 부르르 떨었다. "지금 나 위협하냐? 미리 말해두겠는데, 넌 나에게 손 못대." 그러나 이 세계에 와서 험한 꼴 몇번 당한 선애는 간이 무척이나 커져 버렸는지 무지 당당하게 선언했다. "너, 너, 너 그걸 가지고 있다고... 이씨..." 선애의 말에 부들부들 떨며 말까지 더듬던 그 드워프는 결국 혼자 화를 내고는 몸을 돌려 걸어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지금까지 생각했던 - 그러니까 그 드워프가 선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거라고 - 게 틀린 건 아닌가... 하고 여겨졌다. 중년 아니면 장년 정도라고 생각 했는데, 그 모습에서는 마치 십대 소년 같은 느낌이 났던 것이다. '에... 그러고보니 드워프들은 성년이 되기 전부터 수염을 기른다고 했었지? 에... 그럼 혹시...?' 수염 때문에 무조건 중, 장년이라고 인식해버렸는데 의심이 되어 다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의외로 주름살도 없고 탱탱한 얼굴이었다. [이런... 생각보다 더 젊은 드워프였나 본데?] 차마 선애에게 화풀이를 하지 못하니까 - 시계의 위력이 이만큼이나 대단할 줄이야... - 붉은 머리의 드워프는 괜히 죄 없는 근처의 커다란 나무들을 퍽퍽 두들겨 댔다. 그 모습은 꿍얼꿍얼 대는 것 보다 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아까 투덜투덜 댈 때는 좀 시끄럽다... 생각 했지만, 지금은 살벌한 기세가 사방으로 풀풀 날려 클라리사는 드워프가 한대 퍽 칠때마다 움찔움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는 도저히 잠을 자기는 그를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노숙이라 잠자리가 불편한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은 선애를 향해 원망 반, 어떻게좀 해보라는 애원의 시선을 보내자 선애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뭐, 꼬맹이 녀석이 엄청 열받았으면 그런 시선들쯤이야 싸악 무시해버렸을테지만 지금은 자기가 드워프에게 말한게 좀 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야, 야. 괜한 나무에게 화풀이하지 말고 이리 와봐." "뭐? 야, 내가 네가 부르면 조르르 달려오는 강아지인 줄 알아? 이게 정말..." 멀찍이 떨어져서 나무에 화풀이 하던 붉은 머리의 드워프는 선애의 부름과 손짓에 다시한번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날뛸 뿐 다가오려 하지 않는 그를 보자 선애가 다시 불렀다. "화 내지 말고 이리 와. 내가 또 신기한 거 보여줄께." "됐네. 너 아까 그 시계라는 거 보여주려는 거지? 아까 봤으니까 됐어." 헹 하고 콧바람까지 불며 고개를 팩 돌리자 선애가 피식 하고 웃었다. "아냐, 다른 건데... 뭐, 보기싫으면 말고." 다른 거라는 말에 붉은 머리의 드워프 뿐만이 아니라 갈색 머리의 드워프도, 그리고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제나 저제나 붉은 머리의 드워프의 난리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까지 시선을 보내왔다. "왜? 다른 사람은 안 보여줄 거야." 선애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뭐, 뭔데? 너 별거 아니면 정말 가만 안 둔다?" 그러자 선애가 피식 웃었다. "그럼 별거라면 어쩔건데?" "그... 에이 씨, 안 본다 안 봐."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말문이 막힌 건지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팩 하니 몸을 돌렸다. "그래? 그럼 보지 말아라." 선애가 피식 피식 웃으며 대꾸한다. 어지간히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웃겼나보다. 그런 모습을 선애도 알아채고 있었으면서 - 물론 내가 말해줬지만... - 모르는체 하자 결국 잠시 후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못 참겠던지 척척 다가왔다. "야." "왜?" "보자."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둔다며?" "이씨... 별거 아니라도 가만 있을게." "싫어.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별거거든." "쳇...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마을에 가서 내가 만든 것 중에 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가져도 좋아. 단, 내가 놀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라야 해." 그러면서 선애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폼이 무지 웃겼다. [푸하하하~~ 얘 되게 귀엽다~~] 내가 옆에서 웃거나 말거나 선애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왜?" "네가 만든 물건이 좋냐?" "뭐? 야, 내가 이래뵈도 드워프야, 드워프. 그... 영감탱이들한테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들도 꽤 있다고." "뭘 만들었는데?" "으음... 무기 종류를 만드는데, 그 중에서 특히 검을 다루고 있지." "거엄? 나는 검 같은 거 별로..." 선애가 시큰둥하니 고개를 저어 보이자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검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 장검도 있고 소검도 있고, 아아 단검도 있는데... 자그마하니 가지고 다니기 편한 걸로..." "단검?" [헤에, 그거 잘됐네. 자그마한 칼 하나 가지고 있는게 좋지 않아? 왜 은장도 식으로 호신용으로 쓰거나 아니면 맥가이버 칼처럼 여러 쓸모가 있을 거 같은데...] "으음... 봐서 내가 좋은거 아무거나 가져도 돼?" 선애가 조심스레 묻자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응." "그런데 내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그럼 네가 원하는 형식을 말해. 내가 그대로 만들어 줄께." "오, 그거 나쁘지 않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할까?" 붉은 머리 드워프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는지 선애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열어 핸드폰을 꺼내려는 찰나, 저쪽에서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흠, 흠." "에?" 괜히 헛기침을 해서 선애와 붉은 머리 드워프의 주의를 끈 갈색 머리 드워프는 슬그머니 붉은 머리 드워프의 옆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줄 수 있는데..." [푸하하하~~ 아... 정말 웃긴다. 드워프들이 아주 귀엽게 노는 구나.] 선애도 웃겼지만 차마 대놓고 크게 웃지는 못하겠는지 피식피식 웃는 걸로 대신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뭘 만드는데?" "나도 무기를 다뤄. 그런데 이 녀석과는 약간 방향이 틀리지. 나는 소형쪽을 좋아 하거든. 신발 속이나 허리띠 속에 겉으로는 표가 안 나도록 숨길 수 있게 만든다면 이해 하려나?" "이야... 그거 참 신기하겠네. 좋아, 나쁠 건 없지. 보여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그러며 선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까 잠깐 꺼내보고 집어 넣었을때 전원을 꺼놨기 때문에 폴더를 열었을때 액정 화면은 검게 죽어 있었다. 그걸 보더니 갈색 머리 드워프가 아는 척 줄줄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이거... 거울인가? 흐음... 휴대용 거울로 나쁘지는 않은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걸 보니 유리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만든 거겠군? 이왕 만들 거 은 거울로 하지... 그런데 접었다 폈다 하는거 괜찮네. 나도 그런 칼이나 한번 만들어 볼까나?" '오오, 휴대폰 하나로 이 세계에서 접이식 칼이 탄생하게 생겼군.'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선애는 다시 배시시 웃으며 핸드폰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이 곳에 오는 내내 내가 손을 집어넣고(?) 있어서 그런지 디리링~ 하면서 켜지는 액정 화면을 보니 건전지의 칸이 꽉 차 있었다. 검게 변한 화면이 밝은 빛이 나며 컬러플한 귀저기 찬 아기가 소주병을 들고 나타나자 두 드워프의 눈이 휘둥그레 떴다. "이, 이게 뭐냐?"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더듬거리며 묻자 선애가 기꺼이 대답해줬다. "핸드폰." "뭐하는 건데?" 붉은 머리 드워프의 질문에 선애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러니까 시계 역할도 하고 노래도 듣고 알람 역할도 하고... 뭐, 여러가지." 핸드폰의 가장 중요한 통신 기능을 빼먹은 거 보니, 여기서는 그런 기능을 사용할 수 없으니 말 안 한거 같다. '그걸 말하면 또 마법 물품이니 아니니 하겠지?' "헤에, 그럼 마법 물품?" '통신 기능을 빼도 마법 물품이냐고 묻는 구만. 여긴 신기하면 무조건 마법 물품이라고 하남?' 마법 물품이라는 소리에 약간 떨어져 있던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의 눈빛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만 그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마법 물품이라고?" "미안하지만 아니에요. 아까 내가 보여줬던 시계와 비슷한 원리로 움직이는 건데... 그보다 훨씬 정밀하고 훨씬 복잡한 원리가 더해져 있을 뿐이라고요." 선애가 말했지만, 모두 핸드폰에 시선이 쏠려있는 관계로 모두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만져보려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갈색 머리 드워프가 핸드폰을 채가더니만 폴더를 덮었다가 다시 열었다. "호오... 이거 열리는 각도가 정해져 있군? 그런데 덮어다가 열었는데 왜 빛이 꺼지지 않지?" "꺼지게 하는 스위치가 따로 있어요." "허어..." 선애의 설명에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감탄의 목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는데 그의 손에서 붉은 머리 드워프가 핸드폰을 탁~ 하고 채가더니만 선애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서 '잘했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푸크크크크크~~ 귀여워어어어~~] "아, 고마워." 선애가 피식 웃으며 받아들자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기... 노래도 들을 수 있다고? 그럼, 서대륙 세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건가?" "서대륙 노래라... 글쎄, 서대륙 전체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는 줄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 고향에서 부르던 노래를 들을 수 있지." "그럼 들려주라."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선애를 바라보며 요청하자 선애가 피식 웃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벨소리 코너를 열었다. 이게 우리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얼마 전에 산 최신식 핸드폰이었다면 mp3 기능이 있었겠지만, mp3 기능이 핸드폰에 넣어지기 전에 산 거라 노래를 들으려면 벨소리 쪽으로 가야 했다. 그 중 선애가 선택한 것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였다. 복음성가임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노래의 위치에 오른 노래. 하기야, 노래 내용이 무지 좋지 않은가 말이다. 내 주위에 있던 어린 애들은 교회가 아니라 유치원이나 유아원에서 그 노래를 배운다고 하더라만... 원래 선애는 유행가쪽을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빠르면 한달에 한번, 보통은 두달에 한번, 늦으면 서너달에 한번 정도 벨소리를 바꿔주고는 했는데, 가끔은 벨소리를 다운 받을때 나보고 선택하게 하는 적이 가끔 있다.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것은 '카드 캡터 체리'의 주제가랑 바로 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었다. 나는 유행가보다는 애니메이션 주제가들을 선호하는 타입이라... 선애가 버튼을 누르자 정말 오랜만에 듣는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사랑 받고 있지요 [이야,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갑자기 노래 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 이거... 정말 마법 물품 아니야? 어떻게 사람들 목소리가 여기서 나오지?" 이건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의 말. "저기... 이거 악기가 뭐야? 처음 들어보는 악기인데..." 이건 갈색 머리 드워프의 말. "이게... 서대륙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헤에... 신기하다..." 이건 클라리사의 말. "딴 건 또 없어?" 벨소리가 한참 흐르다 멈추자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물어본다. 그에 나는 얼른 말했다. [야, 야. '카드 캡터 체리'노래. 응?] 나의 애원에 선애가 힐끔 눈길을 한번 주더니만 내 말대로 '카드 캡터 체리'노래를 틀었다.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걸 말할 수 없어~ 말하고 싶은데 속 마음만 들키는 걸 [아아~~ 이 얼마나 들어보는 노래더냐...] "멜로디가 굉장히 경쾌하다. 언니, 이 노래 좋아해?"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클라리사가 묻자 선애가 피식 웃었다. "나도 좋아했지만 우리 언니도 무척이나 좋아했지." "언니? 언니가 있었어?"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클라리사가 물었다. 하기야, 그 동안 선애가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긴 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아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응, 언니가 한 명 있어. 이것도 언니가 사준 거야. 되게 비싸다고 투덜투덜 대면서 사줬지." [야, 야. 네가 그거 사달라고 엄청 졸라댔잖아. 하필 그 모델 나오자마자 사달라고 해서 얼마나 비싸게 샀는데...] 내가 옆에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선애의 말이 끝나자 따악 굳어져서 슬금슬금 자리에서 멀어졌다. "아아... 슬슬 졸리운데..." "내일을 위해 선애 너도 빨리 자라." "언니, 난 이만 잘께. 언니도 잘 자." 선애 혼자 딸랑 서대륙에서 왔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으니 선애의 말이 무지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걸 모르는 드워프들은 갑자기 멀어져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자리에 눕는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저기, 다른 기능은 없어?" "있어."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사람들의 반응에 관심을 끊고 다시 선애에게 묻자 선애가 씨익 웃으며 버튼을 조작한다. 그리고는 갑자기 붉은 머리 드워프를 바라보며 "나를 따라해봐. 치즈~" "치즈?" 찰칵~! 이 모델이 비록 mp3는 없다고 해도 카메라는 달려 있었던 것이다. '흠, 그러고보니 카메라 장착된 게 mp3 장착보다 빨랐구만?' 붉은 머리 드워프는 갑자기 자기 앞에 핸드폰을 들이대더니만 찰칵~ 소리가 나자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뭐, 뭐야?" "뭐긴, 널 찍은 거지. 자, 볼래?" 그러면서 선애가 붉은 드워프를 향해 내민 핸드폰의 액정 화면에는 당황해 하는 표정으로 선애를 따라 어색하게 '치즈~'라고 발음하는 붉은 드워프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비록 어두운 밤에 작은 모닥불 하나를 조명삼아 찍어서 어둡게 나왔지만, 드워프의 모습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나?" "그래, 너. 이거 사물을 찍는 기능도 있거든." 선애의 설명에 옆에서 같이 고개를 빼어 들여다보던 갈색 머리의 드워프가 의혹 어린 눈초리로 선애를 바라봤다. "이거... 정말 마법 물품 아니냐? 마법 물품 중에 이런게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아니야. 그런데 그 마법 물품 중에 사물을 찍는 것도 있어?" 선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이미지 저장 마법이라고 하지. 어디, 나좀 봐도 되나?" 아까 내 이야기를 한 뒤에 떨어져 나갔지만, 호기심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어느새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다가와 있었다. 그에 붉은 머리 드워프가 떨떠름 한 표정이지만 순순히 핸드폰을 넘겨주자 그가 받아서 액정 화면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으음... 이미지가 그다지 선명하지는 못하구만. 이건 확실히 이쪽 마법이 훨 나아." [거야... 하드가 적어서 카메라 기능이 낮으니까 그렇지.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라도 사가지고 올걸 그랬나?]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 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300만 화소인지 뭔지 하는 카메라 기능이 달린데다 mp3 기능까지 있는 최신형 모델로 사서 안겨줄 걸 그랬다. 하여간 그의 말에 화가 난 건 나만이 아니라 선애도 마찬가지였는지 꼬맹이 녀석이 마법사에게서 핸드폰을 돌려받아 폴더를 탁~ 하고 덥고 주머니에 집어 넣는 것으로 핸드폰 보여주기는 막을 내렸다. 당연히 마법사는 아무 말 못하고 뒤로 물러났고, 그 마법사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 본 드워프들도 뭐라 말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처음 약속은 보여준다는 거였고, 보여주긴 줬으니 말이다. 그리고 꼬맹이는 두 드워프를 돌아보며 쐐기를 박았다. "자, 그러면 둘 다 나에게 물건 하나씩은 빚진 거지?" 제 18화 다음 날 아침, 전날 여관에서 싸온 다 식어빠진 음식으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 다시 산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붉은 머리 드워프가 클라리사와 선애가 탄 말 가까이 다가오더니 뜬금 없이 말을 걸었다. "야!" 그러나 클라리사는 자신을 부른게 아니라 생각 했는지 그냥 한번 시선을 보냈을 뿐 아무말도 안 했고, 선애도 딴 데 보느라 대답을 안 했다. 그러자 당연하겠지만 붉은 머리 드워프의 목소리가 커졌다. "야아~!!" 그제야 돌아보는 울 꼬맹이. "누굴 부르는 거야?" "내가 부를 사람이 너 밖에 더 있어?" 선애의 반응에 붉은 머리 드워프가 인상을 찡그리며 툴툴 댔다. 키 작은 드워프는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선애는 내려다보며 말하는 폼이 참 웃겼는지 모든 사람들이 한번씩 돌아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너가 언제 그렇게 나랑 친했다고, 네가 부르면 날 부르는 줄 척 알아듣냐?" 선애가 따져묻자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불퉁하니 대답한다. "네가 부르면 난 알아들어." "그거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오해할 만한 발언이라는 거 아냐? 거야 내가 '야'라고 부르는 존재가 여기 너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지." "나도 너한테만 '야'라고 불러." "그랬나?" 선애가 고개를 갸웃 거린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하기야, 저 드워프들에게 대든 게 선애밖에 없었으니...' "그랬어." 단호하게 대답한 붉은 머리의 드워프. "그래, 그랬다 치고... 왜 불렀는데?" 결국 수긍하는 듯 말하는 꼬맹이. "너 이름이 뭐냐?" "내... 이름?" 그러고 보니 그렇게 싸워댔던 둘이었으면서 서로 이름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뭐, 그래봤자 부르는데 하등 불편함이 없어서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지금 알았지만 말이다. 선애도 그걸 그제야 알아챘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아... 내 이름은 선애야." "그래? 정말 특이한 이름이군. 내 이름은 스터링이다. 아, 저 놈은 브론즈야." 붉은 머리 드워프, 아니 스터링의 소개에 선애랑 내가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브론즈라... 과연 장인 종족의 이름 답다. 청동이라니... 그럼 혹시 아이언이란 이름도 있을까?] 내 말에 혹시나 했던지 선애가 스터링에게 물었다. "혹시 아이언이란 이름도 있어?" 선애의 질문에 놀랍다는 듯이 스터링이 선애를 바라봤다. "어? 어떻게 알았어? 옆 마을의 한 놈 이름이 아이언인데..." [푸하하하~~ 구리하고 철하고 잘 어울리는구만.] "야, 그런데 네 이름은 왜 스터링이야? 스틸(강철)이 아니구?" "거야... 울 아부지 이름이 스틸이니까 그렇지. 네가 울 아부지 이름을 어떻게 아니?" "쿡쿡쿡... 아냐, 그냥 생각나서 물어봤어." 선애가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어깨까지 떨며 말하자 스터링이 인상을 찡그렸다. "쳇, 어째 그 웃음 기분 나쁘다 너..." "아, 미안... 그냥 좀..." 그에 선애가 얼른 웃음을 그치고 사과하자 - 아무리 웃겨도 이름 가지고 웃어대는 건 실례가 아닌가 말이다. - 스터링이 놀랍다는 듯 올려다 보며 입을 떠억 벌리는 거였다. "우와..." 그의 그런 반응에 선애도 덩달아 놀라 그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왜?" "아니... 난 네가 사과라는 걸 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생각 했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 사과도 할 줄 아네?" 정말 의외라는 듯한 그의 말에 선애의 인상이 찡그러졌다. "야, 내가 후안무치의 인간인 줄 아냐? 나도 잘못한 거 있으면 인정도 한다고." [아아, 물론 인정이야 하지. 그 인정이라는 게 쉽게 볼 수 없는 거라 문제지...] 내가 옆에서 걷다 참견하자 선애의 살벌한 시선이 달라붙는다. 하지만, 그 시선은 얼마 있지도 않아 곧바로 다음 말을 내뱉는 스터링에게 날아갔다. "이야... 그거 믿기 어려운데..." "야, 네가 날 알아? 얼굴 본지 이제 며칠이나 되었다고..." 선애의 살벌한 어투에 스터링이 찔금 했는지 물러났다. "아니 뭐... 그럴 거 같다 이거지."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앙?" "아니 그게..." 선애의 말에 더 기가 죽었지만, 그래도 어물어물 하면서도 버티자 선애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라고?" "아니, 알았다고..." 완전 항복. 귀 늘어뜨린 강아지 같이 풀이 죽어서 뽈뽈뽈 하고 멀어진다. [쿡쿡쿡, 말싸움으로 선애를 당하려고 하다니... 그런데 어제 보여준 다혈질 성격은 어디다 버리고는 오늘은 금방 기가죽네?] 하기야, 저쪽으로 떨어진 스터링도 자기가 왜 금방 풀이 죽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뭔가 열받아서 뭐라 하고싶은데 하지 못해 불만에 찬 표정도 섞여 있는... 그 날도 점심 먹을때 잠깐 쉬고 하루 종일 계속 걸었던 덕분인지 우리는 서산에 노을이 질 무렵 드디어 드워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워프 마을에 들어서서 주변을 살펴보니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장난감 세계에 온 것만 같다는 거였다. 그 왜 있지 않은가, 아이들의 놀이터로 장난감을 애들 크기에 맞게 만들어 놓은 놀이터 말이다. 아무래도 키가 작은 종족인 드워프들의 신체에 맞게 만들어진 곳이다 보니 모든 것들이 인간 세상에서 보던 것들보다 작아서 꼭 그런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장인 종족이라 불리는 드워프들이 만든 마을답게 아기자기하면서도 멋스러운 가지각색의 자그마한 집들을 보고 있자니 한 시간이나 구경한다 해도 질리지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관광지로 만들면 엄청나게 돈을 벌지도 몰랐다. 그렇게 주변을 구경 하느라 정신 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우리를 안내해 온 두 드워프 들은 돌을 잘 깔아놓은 길을 따라 마을 중심부로 가는 게 아니라 입구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끌었다. 그 곳에서는 딴 세상에서 유일하게 튀는 한 건물이 있었다. 단층의 아담하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보다 더 아담하다 못해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옆에 옹기종이 있으니 단층이 아니라 2층 건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하여간, 단층이지만 제법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그 건물은 아무래도 드워프 마을에 오는 사람들을 위한 건물인 듯, 낮은 울타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하겠지만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고급스럽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거 보니 상인으로 보였고, 그 옆에 있는 단단해 보이는 덩치에 투박하고 질긴 옷을 입고 있는 사람 보니 용병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드워프들과 거래에 성공 한 운과 실력이 무척이나 좋은 상인 무리인 듯. 그러나 그들과 우리 일행과 안면이 없으니 이 두 무리를 인사 시켜야 할 사람은 당연히 이 마을의 주민인 드워프들인데, 웃기게도 두 드워프는 그런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 아니면 인간들끼리의 일은 인간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뜻인지 - 그냥 우리를 보며 말을 던지는 거였다. "여기가 인간 손님이 머무는 곳이오.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건 드워프를 대동하거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금지되어 있으니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시오. 내일 데리러 올때까지 여기서 알아서 머물도록 하시오." 갈색 머리의 드워프 브론즈가 설명을 끝내자마자 두 드워프는 몸을 돌려 그 곳을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두 드워프가 가는 걸 잡을 명분이 없었기에 멀뚱히 보고만 있던 우리들은 다시 우리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러다가 밤 늦게까지 이러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기우였는지 서로의 탐색전은 잠깐이었고, 집 안에서 나온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싱긋 웃어보였다. 그러자 우리쪽 대표인 벨타이거도 마주 싱긋 웃어보였고, 그걸 기점으로 침묵이 깨졌다. "이거, 여기선 처음 뵙는 분 같은데... 거래를 트기 위해 오신 건가 봅니다?" 말투가 자신은 꽤 오랜 시간동안 거래를 해왔다는 듯이 들렸다. "아, 예. 거래를 오래 해오셨나보죠?" "아아... 한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이거, 인사가 늦었습니다." 로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어디 상회의 누구다까지 자기 소개가 오가고 나서야 우리 일행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복도를 따라 양 옆으로 줄줄이 방이 있었는데 그 중 아무데나 알아서 쓰면 된다고 했다. 들어가보니 방에는 침대 두개와 탁자 하나 의자 두개, 그리고 작은 옷장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방을 돌아며 황당한 시선으로 먼저 온 상인을 바라보자 그가 멋적게 웃어 보였다. "이런, 이런. 아무것도 모르고 오신 거군요. 드워프쪽에서는 그냥 건물만 제공해주는 겁니다. 나머지는 다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해요. 침대를 가지고 다닐 수는 없으니 침낭을 가지고 와서 깔고 자야 하죠. 먹을 것도 알아서 가지고 와야 하고요, 청소도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의 친절한 설명에 우리 일행은 입을 떠억 벌렸다. 이건 그 도시에 있던 중년 관리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를 안내해 준 드워프들도 말 안해준 이야기였기에 우리는 그런 준비는 하나도 안 해왔던 것이다. 그나마 노숙에 대비하여 두터운 망토는 하나씩 가지고 왔으니 잠자리야 그럭저럭 잘 수 있다지만, 먹는 것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리 일행의 모습을 살펴보던 상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 저 혹시나 물어보는 거지만... 혹시 아무 준비도 안 해오신 겁니까?" 그에 벨타이거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노숙 준비도?" "아, 그거야 각자 두터운 망토를 가지고 왔으니 잠이야 그럭저럭 자겠지만..." "먹을 것은?" 상인의 말에 이번에는 침울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어보인다. 그에 상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허... 이거 참 큰일이시겠군요. 이를 어쩝니까? 저희 걸 나누어드리고 싶어도 저희는 내일 출발하기 때문에 남은게 얼마 없습니다만..." 그에 다시 한번 입을 벌리는 일행들의 시선이 갑자기 일제히 선애를 향했다. "왜, 왜?" 그러한 시선들에 선애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벨타이거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와 선애의 손을 꼬옥 잡았다. "선애야, 우리가 굶느냐 먹느냐는 너에게 달렸다." "왜 나한테 그러시는데요?" 선애가 뚱하게 묻자 그에대한 답이 다른데서 나왔다. "여기서 아까 그 드워프들하고 맞먹는 사람이 너 밖에 더 있냐?"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였다. "언니, 난 굶고 싶지 않아." 클라리사까지 거들고 나서자 선애의 인상이 찡그려진다. "리사야, 네가 나서도 되지 않냐?" 그러자 벨타이거의 고개가 클라리사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군, 리사도 있었어. 다행이 굶어죽지는 않겠군." 이런 일행들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상인이 잘 해결 된 거 같다고 하하 웃으며 자기 일행들에게 가버리자 우리 일행들은 꽤 큰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나 원... 이거 방에다 모닥불이라도 펴야 할 기세군." 그러고보니 다행이 방마다 벽난로는 붙어 있었다. 이제 슬슬 가을이 다가오는 계절인데다 여기는 산속이라서 밤에는 꽤나 쌀쌀했다.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의 말에 잭 조셉이 슬그머니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더니만 한참 있다가 장작을 한 아름 구해가지고 왔다. 그러자 벨타이거도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 후에 커다란 솥 하나와 약간의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까 그 상인 일행에게 가서 얻어왔어. 솥은 다른 상인이 여기에 아예 가져다 놓은 거라고 마음대로 쓰라고 하더군. 이거면 오늘 저녁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다행이 여기로 출발하기 전 넉넉하게 챙겼던 음식 중에서 노숙할때 먹고 남은 것이 약간 있었다. 그것과 옆에 있던 상인 일행에게 얻은 먹거리를 어떻게 섞어서 물에 넣더니만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와 잭 조셉이 피운 벽난로 불 위에 올려 놓는다. "이거야 원... 건물 안에서 캠핑 하는 건 참 색다른 기분이구먼."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이틀이나 연속으로 딱딱한 바닥에서 자고 일어나는 바람에 찌뿌둥한 몸 상태 때문에 개운하지 못한 다른 일행과는 달리 선애는 잘 자고 일어났는지 상큼한 얼굴이었다. 뭐, 폭신한 베개와 이불이 아닌 달랑 두터운 망토 하나 둘둘 말고 잤기 때문에 약간 불편이야 했겠지만, 그래도 숙면을 취하는데는 방해를 받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꼬맹이는 한국에 있을때는 항상 바닥에 요 깔고 자던 애였던 것이다. '역시 온돌방이 잠자리로는 최고라니까.' 그러나, 잘 잤건 못 잤건 일행은 곧바로 문제에 직면했다.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을 먹을때 약간 남겼으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어제 저녁도 푸짐하게 먹은 것이 아니라 양이 대충 배를 채우는 정도였기에 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또 옆 상인 일행에게 먹을 것을 구하기는 난처했던 터라 벨타이거는 비장한 표정으로 선애와 클라리사를 바라봤다. "자, 우리 일행의 미래는 너희 둘에게 달려 있어. 잘 부탁한다." 남작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키워졌을 클라리사는 무지 난처한 표정이었다. 돈을 내고 사먹는 것도 아니고 먹을걸 부탁해서 얻어야 하는데, 언제 이런걸 해봤겠는가. 그것도 무지무지 창피한 일을 말이다. 우물우물대며 사방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클라리사를 보던 선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요. 나 혼자 해도 충분할 거 같아. 어제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스터링하고 브론즈는 나에게 물건 하나씩 빚을 지고 있잖아요. 그걸 제해주는 대신 여기 있는 동안 식사를 책임지라고 하죠, 뭐." 선애의 말에 일행의 눈들이 커졌다. "어, 언니..."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그도 그럴것이, 선애가 포기하는 드워프 제품의 물건이란 건 아무리 못해도 가격이 백금화에서 노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하나만 시중에 내다 팔아도 지금 일행의 10배 인원이 1년간 먹을 식량을 충분히 사고도 남을 터였다. 그런 걸 단 몇끼, 혹은 며칠의 식량을 위해 포기하겠다니 일행의 눈들이 커지는 건 당연했다. 아마 그들, 아니 나라고 해도 그 정도의 물건을 받을 수 있다면야 몇끼 정도 굶는게 대수겠는가 말이다. 자신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일행들의 얼굴에 죄책감이 깃들자 선애가 피식 웃는다. "너무 좋아들 할 건 없는데요? 돌아가는 즉시 알아서 대금은 치뤄주길 바래요. 설마, 꽁짜로 음식을 먹을 건 아니겠지요?" 선애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걸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들은 선애가 자신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 줄 안 모양이다. 그러나 내 보기에 꼬맹이의 말은 아마 진심일 거다. 드워프가 만든 물건의 가치를 이제는 대략이나마 아는 선애로써는 그걸 포기한다는게 엄청 속쓰린 일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까 포기하는 걸 거다. '저 봐 저 봐, 속 엄청 쓰리다는 표정...' 선애는 그 표정 그대로 드워프에게 가려는지 방 밖으로 나서는 거였다. 그런 선애를 따라 나서던 나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슬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야, 정말 괜찮아?] "/뭐, 별루.../" 그런데 내 생각 보다 덤덤한 선애의 말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어라, 생각외로 괜찮은 거 같다?] "/그럼, 통곡이라도 할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정말 괜찮아?] "/아씨, 괜찮아, 괜찮아./" [헤에... 네가 왠일이냐... 성인이 되더니 마음이 좀 너그러워진 건가?] "/이거 왜이러셔, 나 원래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어./" 어째 정말 괜찮은 거 같다. 저런 말도 하는 거 보니. [야, 넌 네 입으로 그런 말이 나오냐?] 그래 나도 마음 놓고 기가막힌 표정을 지어보이자 선애가 피식 웃더니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사실... 핸드폰 한번 보여주고 뭐 받는 것도 좀 그렇잖아? 처음에는 전에 괴씸죄도 있고 해서 반 장난으로 한 거였는데 덜컥 준다고 할 줄은 몰랐지. 뭐, 준다는 거 거절할 필요 없으니 얼씨구나 받는다고 한 거지만... 그래도 좀 그러잖아? 차라리 이게 딱 좋은 거 같아. 뭐, 돌아가면 리사나 회장이 댓가도 준다니... 으흐흐흐.../" '얘가 잘 나가다가... 뭐, 그려. 이게 바로 선애지... 그리고, 저건 입다물고 있는 게 좋겠지?'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선애 뒤를 따라오는 일행들이 선애 혼자 중얼중얼 거리다 음침하게 웃자 무지무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애가 채 건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이었다. 두두두두~~~ 밖에서 웬 떼거지가 달려오는 소리에 선애가 당혹해 하는데 멀찍이서 따라오던 벨타이거와 잭 조셉이 얼른 달려와 선애를 자신들의 등 뒤로 밀었다. 그 소리를 들은 건 옆 상인 일행도 마찬가지였던지 방 여기저기서 용병들과 몇몇 상인들이 뛰쳐 나왔다. 그들이 먼저 건물 밖으로 나가기에 일행들도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드워프 마을쪽에서 한 떼의 검은 무리가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뭐, 뭐야?"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 검은 무리는 점점 가까워져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무지무지 험악한 인상을 짓고 있는 드워프 무리였다.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달려오는 지 그 모습에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며 혹여 자신들이 드워프들에게 뭔가 무례를 저질렀는지 알아볼 정도였다. 그러나 드워프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써도 모자랄 판에 누가 무례를 저질렀겠는가? 그래 얼떨떨하게 달려오는 드워프들을 바라보다 어쨌든 드워프들이 오니 맞아야겠다 싶었는지 옆 상인 일행의 대표와 우리 일행의 대표가 - 당연히 벨타이거 녀석이다 - 앞으로 나섰다. 먼저 옆 상인 일행 대표가 그래도 드워프들과 안면이 있다고 맨 앞에서 달려오는 드워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족장님께서 이 아침에..." 그러나 그 족장이라 불린 드워프는 냉정하게도 그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덕분에 얼결에 족장을 맞이하게 된 벨타이거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십..." 하지만, 그 또한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족장 드워프에게 거칠게 밀쳐져 버리고 말았다. "저리 비켜!" 뭐, 그래도 힘껏 밀친 건 아니라 약간 비틀 하며 두어 걸음 옆으로 간 것 뿐이지만, 족장 드워프의 뒤를 따라 우르르 달려오는 드워프의 모습에 히껍한 벨타이거 녀석은 얼른 그 옆으로 더 비켜서야 했다.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사람들이 당황해 하는 사이 어느새 그 뒤쪽에 있던 용병들을 지나쳐 우리 일행 앞에 온 족장 드워프는 다짜고짜로 선애의 손을 터억 하니 잡는 것이었다. "처자, 나느... 꽤엑~!!" 하지만, 그 족장 드워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뒤에서 달려오던 두 드워프가 갑자기 몸을 날려 이단 옆차기로 그를 쳐내는 것이었다. 어쩜 그렇게 손발이 척척 맞는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에 벨타이거보다도 더 멀리 날아가 데굴데굴 구르는 족장은 본체 만체 선애의 옆에 착 하고 멋드러지게 착지한 두 드워프가 선애의 손을 잡았다. "처자, 처자가 드워프보다 뛰어난... 컥..." 그 두 드워프도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뒤에서 두 드워프들을 향한 태클이 이어졌던 것이다. "비켜, 이 영감탱이들아." 태클을 당하고 있는 두 드워프 사이를 밀치고 한 드워프가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드워프의 목소리가 걸걸한게 아니라 톤이 높은 거였다. '여자... 드워프?' 하지만, 그 여자 드워프가 선애에게 뭐라 말하기도 전에 뒤에서 우르르 달려온 드워프들 때문에 밑에 깔리고 말았다. "꾸워워워~~!!"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드워프의 산 밑으로 사라져 가는 그 여자분 드워프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선애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데, 너무 많은 드워프가 한꺼번에 몰려 드워프의 산이 사태를 일으키고 말았다. "꽤액~!" "비켜~ 으윽..." "살류~~!!" 잠시 후, 상황이 진정되자 많은 드워프들이 뻗어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멀쩡해 보이는 맨 뒤에 있던 드워프가 그 참상을 한번 쭈욱 훑어보더니 피식 웃는 것이었다. "훗, 멍청한 놈들." 그리고는 척척 걸어와서 선애 앞에 턱 하니 서는 거였다. 그 순간 나는 그 드워프에게 'You Win' 이라고 외쳐주고 싶었다. 드워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선애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물었다. "처자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며? 그거 나 좀 보여줄 수 없을까?" 다짜고짜로 본론을 꺼내는 드워프에게 선애는 이제는 기가막힌 표정이었다. "에... 저... 누구세요?" 그런데 그때, 저 뒤쪽에서 다다다 달려오는 두 드워프가 있었으니... 무척이나 낯 익은 갈색 머리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드워프들은 우리를 데리고 온 브론즈와 스터링이었다. 브론즈는 건물 앞에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는 드워프들 앞에 멈춰서서 황당함을 금치 못한 채 이리저리 둘러 보다가 한쪽으로 뛰어갔다. 그가 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까 맨 처음 선애 앞에 당도했다가 뒤에서 두 드워프에게 이단 옆차기를 당해 저~ 쪽으로 나가 떨어져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뻗어 있는 족장 드워프가 있었다. 그러나 스터링은 다른 드워프들이 뻗어 있던지 널려 있던지 상관 않고 요리조리 피해 달려오더니 선애 앞에 당당하게 승리자의 표정으로 서 있는 드워프를 향해 외쳤다. "이 영감탱이가~!! 내가 먼저 점찍었단 말이야~!" "어허, 저 놈 말하는 폼새 좀 보소. 이놈아, 내가 먼저 왔느니라." "흥, 난 그걸 벌써 봤다고. 게다가 선애는 나랑 아~주~ 친밀한 사이야, 그치이~?" 마지막에 선애를 향해 열렬한 시선을 보내며 묻는 그 드워프 모습에 나는 푸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직접 그 시선을 받는 선애는 압박을 무시하지 못하겠는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그에 의기양양해진 우리의 귀여운 스터링군. "거봐, 내 말이 맞지? 이래뵈도 잰 나랑 정식으로 이름까지 소개한 사이라구. 그러니 우선 권은 나에게 있어." 스터링의 말에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를 살펴보던, 승리자 드워프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리더니 덥썩 스터링의 손을 잡는 거였다. "잘 해보자꾸나, 내 아들." [아, 아들이었어? 그럼... 그 스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러고 보니 그 승리자 드워프의 머리도 스터링과 비슷한 붉은색이었다. 뭐, 나이때문인지 사이 사이에 흰 머리가 조금씩 보였지만... 그러나, 이 두 부자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지 스터링은 자신의 손을 다정스레 꼬옥 잡은 아버지의 손을 냉정하게 쳐냈다. "웃기지 맛! 택도 없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스터링이었지만,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압축기에 찌그러진 깡통처럼 얼굴이 찌그러졌다. "스터링, 내 너랑 같이 왔지만 선애가 보여준다고는 했어도 너에게 준다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 브론즈였다. 그는 옆에 이제 정신을 차린 족장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드워프 산 사태 때문에 정신을 잃었던 드워프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 시끄럿. 그래도 내가 유리할 걸? 선애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흥, 너랑 선애의 관계가 뭐였는데?" "뭐야 너, 왜 끼어들고 그래?" "내가 뭘?" 어제까지만 해도 무지 사이가 좋아보이던 둘이 하룻 밤 새 뭔 일이 있었는지 서로 못 잡아먹어 으르렁 거리는 그 상황에 사람들이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이, 족장 드워프가 쩔뚝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선애 옆에 버티고 있던 스틸을 은근슬쩍 밀어 제끼더니 선애를 향해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봤자 아까 이미지는 왕창 깨졌지만...' "험험, 나는 이 마을의 족장인 자몬이라고 하네. 이 마을에 온 걸 환영하네." 난 순간적으로 그의 이름을 '자몽'이라고 들었다. 선애는 족장 드워프가 내민 짜리몽땅 손을 반사적으로 잡으며 대답했다. "아, 예.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몽 족장님." [푸하하하~~~ 여기 드워프들은 재밌는 이름이 많구나~~] "크험험, 자몽이 아니라 자몬이라네. 그런데 처자는 이름이 뭔가?" "아, 예. 전 선애라고 합니다." "그래, 선애 처자. 내 듣기로 처자에게 우리 드워프가 놀랄만한 물건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거 나 좀 보여줄 수 없겠나?" 이미지야 어쨌든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으려는 족장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태클이 들어왔다. "야! 이 빌어먹을 족장 영감탱이야! 족장이랍시고 네 놈 혼자 독차지하려고 그러냐?" 아까 나에게 가장 큰 놀라움을 안겨준 괄괄한 여성 드워프께서 맨 처음 소리치자 그 뒤를 이어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흘러 나왔다. "우우~~ 독재자는 물러가라~!!" "너 네놈 혼자 독차지하면 뜨거운 쇳물에 담가줄테다~!!" "거기에 담금질도 덤으로 해주마!" 그러자 뒤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치는 자몬 족장. "시끄럿, 이것들아. 그냥 물어보는 것 뿐이잖아. 계속 너희들이 보는데서 물어볼테니까 입 좀 다물엇!" 그 순간 나는 이 드워프 종족들이 족장을 뽑을때는 목소리 크기로 뽑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족장 드워프의 목소리는 우렁차서 주위에 있던 인간들이 자신들의 귀를 막을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는지 족장 드워프의 외침이 끝나자마 주변에 있던 드워프들은 비록 불만에 찬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조용히 시킬 수는 있었다. 대신, 선애에게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쏟아졌지만 말이다. 그런 모습에 족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선애에게 돌렸다. "에헴, 그러니까 처자..." 하지만 이번에도 자몬 족장의 말을 방해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꼬르르륵~~ "저기... 아침 좀 먹고 이야기하면 안될까요? 너무 배가 고픈데..." 내 다시 말하지만, 울 꼬맹이는 먹는 거 가지고 절대로 내숭 안 떠는 애다. 선애의 표정이 무지 절절했는지 자몬 족장은 자신이 하려던 말을 접었다. "어허허허, 그래... 이거 내가 실례를 했군. 그럼 우리는 자네들이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나중에 만나자도 아니고 밖에서 진을 치고 기다린다면, 먹는 사람 어디 부담스러워서 밥을 제대로 넘길 수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것 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아,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저희가 여기서는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식량을 미처 안 챙겨왔거든요. 그래서 식량을 좀 얻었으면 하는데..." 선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럼 우리집에서 먹어. 내가 줄께!" 빽 소리를 지르는 스터링의 말이 마치 스타트의 총소리인 양,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드워프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다. "아냐, 우리집에서 먹어. 내 음식 솜시가 뛰어나니 만족할 거야." "우리 집에는 어제 갓 따온 싱싱한 과일이 있어!" "난 어제 사냥을 해서 바베큐 해줄 수 있어!" "따뜻한 스튜가 있다오!" "빵 안 좋아 해?" "맥주가 있는데!!" 덕분에 선애는 식량을 얻으려고 뭔가를 다시 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대로 드워프의 파도를 피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결국 그 드워프의 파도를 해결 한 건, 역시 자몬 족장이었다. 드워프들이 족장의 말을 껌으로 여긴다고 하지만, 역시 족장은 족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의 아침은 옆 상인 일행이 식사를 하고 드워프들과의 거래를 끝낸 뒤 마을을 떠나가자 드워프들이 의논할때 모인다는 광장에서 드워프 마을 잔치 같은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어느 한 드워프를 딱 찝어 그 드워프네 집에 가기 뭣하니까 다 같이 먹자고 결론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의 아침은 옆 상인 일행이 식사를 하고 드워프들과의 거래를 끝낸 뒤 마을을 떠나가자 드워프들이 의논할때 모인다는 광장에서 드워프 마을 잔치 같은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어느 한 드워프를 딱 찝어 그 드워프네 집에 가기 뭣하니까 다 같이 먹자고 결론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온 동네 드워프들이 모여 커다란 식탁 다리가 부러져라 푸짐하게 음식을 늘어놓고 먹는 아침이었지만, 선애는 좋아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톡 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 할 것마냥 짜증이 목 아래에까지 차 있어 보였다.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나는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 동네 드워프들이 아침을 먹는답시고 커다란 공터에 모인 것 까지는 좋은데, 음식을 먹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앞에 놓인 음식은 안 먹고 온통 선애를 향해 따가울것만 같은 시선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한두명도 아니고 몇백은 넘어보이는 그 대 인원이 그러다보니 아무리 배가 고프다 해도 어디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겠는가? '에휴, 동물원의 동물들 심정을 알 거 같구만...' 선애의 상태가 조마조마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게 없었기에 나는 계속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결국, 선애는 그 부담스러운 시선때문에 평소 먹는 양의 반도 못 먹고 숟가락을 탁~! 하고 내려놨다. 저 녀석이 신경이 좀 예민한 구석이 있었으니 아마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거다. 그러자마자 바로 선애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족장 드워프가 반색을 했다. "오오, 이제야 겨우 다먹은 건가?" 족장 드워프 또한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선애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이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선애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매서운 눈길을 날리며 뭐라 하려는 찰나, 벨타이거가 나섰다. '굳 타이밍~!' "제가 먼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막 본론을 꺼내려던 차에 방해를 받았으니 표정이 좋을리 없었다. 그것도 아침 일찍부터 지금까지 기다려 왔다가 잡은 기회를 방해 받은 거였으니... "뭔가?" 그래도 차마 선애 앞에서 함부로 하지 못하겠던지 무지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불구하고 족장 드워프는 대답을 해줬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타이거 상회의 회장 벨타이거 크로스웰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드워프족과 거래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자기네와 거래를 하고 싶어서 찾아 왔다는데 하등 상관 없다는 양 '그래서?'라고 물으니 말발이 선애 못지 않고 얼굴이 철판 같은 벨타이거도 한 순간 무지 당혹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벨타이거가 나서주는 틈에 속에 쌓인 짜증을 정리했는지 침착해진 선애가 나섰다. "'그래서'라고 말할 게 아닌거 같은데요? 저도 타이거 상회 사람이거든요." 선애의 말에 족장은 물론이거니와 그 주위에 있던 드워프들의 인상이 크게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족장은 한참동안이나 찡그린 표정으로 있다가 같은 식탁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스터링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래 선애 옆자리는 스터링이 앉으려고 했는데 족장을 비롯하여 장로들에게 연배로 밀려서 구석자리로 쫓겨난(?) 것이었다. 그나마 선애랑 안면이 있다고 다른 식탁으로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스터링이 족장의 시선을 받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보기나 해." 이 녀석은 아까 자기 아버지에게도 막말을 하더니 족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뭐 드워프들은 서열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종족이라니 말이다. 그에 족장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선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처자, 그 물건 좀 볼 수 있을까?" 벨타이거의 말때문인지 아까의 열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열기는 약간 사그러든,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족장의 청에 선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품 속에서 시계를 꺼내 족장에게 넘겼다. 어차피 이 시계를 이용해 드워프들과 거래를 트기로 했었으니 보기 싫다고 해도 보라고 했을 거였다. 단지, 선애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드워프들이 열성적으로 달려들어서 놀랐을 뿐이지. 마치 얇은 유리판이라도 받은 양 너무나도 조심스레 시계를 든 족장이 살펴보기 시작하자 그래도 서열이 높다고 선애와 같은 식탁을 차지하고 있던 장로 드워프들과 나이 많은 드워프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족장 드워프 근처로 모여들었다. 다른 드워프들 또한 기웃 거리며 다가왔지만, 시계가 워낙 자그마한 물품이라 몇몇 드워프들이 둘러쌓니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미련을 보지 못하는 건지 기웃거리는 그들 틈에서 벨타이거는 얼른 선애를 데리고 멀찍이 떨어져 나왔다. 벨타이거에게 이끌려 드워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선애의 손에는 어느새 챙긴 건지 커다란 빵과 큼지막한 어느 동물의 잘 구워진 뒷다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 저렇게 시계에 집중할 줄 알았으면 밥 먹기 전에 저들에게 먼저 시계를 보여줄 걸 그랬네..." 시선에서 해방되자 그제야 맘 편하게 음식을 먹게 된 선애가 투덜댔다. 드워프들이 시계를 보고 결론을 내릴때까지 일행이 할 일은 없었다. 단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드워프들이 뭐라 말을 해줄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다행이도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드워프들의 집요한 시선에서 해방되어 느긋하게 커다란 빵과 잘 구워진 어떤 동물의 뒷다리를 다 뜯어먹은 후에 근처 식탁에서 가지고 온 과일 두개까지 후식으로 먹어치우고 있을 즈음, 서열로 인하여 시계를 바로 눈 앞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드워프와 장로들이 다가왔다. 그러나 어째 그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기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선애를 비롯한 일행들도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그들을 마주봤다. 허나, 족장이 무지 못마땅하다는 기색으로 툭 내뱉은 말은 일행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원하는게 뭐냐?" 아까까지만 해도 무지 다정스레 '처자~'라고 부르면서 존칭을 붙이더니만, 이제는 완전 베짱이라고 반말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환해진 일행의 표정을 어둡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족장 드워프의 반응은 우리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의미까지 풍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벨타이거는 환한 얼굴로 족장 드워프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얼른 대답했다. "거래를 원합니다." "뭘 거래하고 싶은 건데?" "유리병을 비롯한 유리 세공품. 아, 유리병의 크기는 저희가 원하는 크기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용의 악세사리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건 드워프의 마을로 오기 전에 이야기가 되었던 것 중, 바라는 것의 최상이었다. 타이거 상회가 지금 대 도시 5군데에 열려고 하는 것은 향수 가게. 그러나 갯수가 많지 않았기에 큰 가게를 채우기 위하여 화장품 가게도 같이 병행할 생각이다. 이 곳에 오려고 생각한 최초의 목적은 타이거 상회에서 내 놓을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인 '새벽의 축복'이란 향수를 담기 위한 유리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더 운이 좋으면 가게의 홍보를 위한 드워프 제품을 몇개 더 구입하고, 운이 따불로 좋으면 지속적으로 유리병과 유리세공품을 소량이라도 구입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였다. 사실 드워프 제품을 사는 건 거래를 하는 것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헤스딩스 남작가의 도움을 바랬던 벨타이거 녀석도 소량의 물품을 구하는 것 이상은 바라지 못했었다. '그런데 여성들용의 장식품이라니... 그건 또 언제 생각한거람?' 아마 지금 방금 생각해냈을 확률이 높았다. 벨타이거의 줄줄 내뱉는 말에 족장 드워프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물었다. "갯수는 얼마나?" "지금 저희 상회가 작기때문에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각각 10개 정도면 충분합니다. 단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흐음...." 아무래도 벨타이거는 드워프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숫자를 최소한도로 줄인 것 같았다. 뭐, 우리로써는 드워프의 물품을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으니 갯수가 적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벨타이거는 아주 영리하게도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단서도 붙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거야 어쨌든 벨타이거의 요구가 어렵지는 않은 거였는지 족장 드워프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그래, 기간은 얼마나?" "한달에 한번이면 좋겠습니다만... 어려우시면 두달에 한번으로도 족합니다." 한달이라는 말에 족장 드워프의 인상이 다시 찡그려지자 벨타이거는 얼른 두달이라고 고쳤다. 그에 다시 만족한 표정의 족장 드워프가 선애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손을 들어 가만히 불렀다. "처자..." 선애를 '처자'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마음이 많이 풀린 모양이다. 그의 부름에 선애가 선선히 다가가자 아까 시계를 눈 앞에서 살펴보던 드워프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시계를 살펴보며 생겼던 궁금증들을 물어보려는 모양이다. "이게 뭐지?" 역시나 족장의 그 질문을 시작으로 질문들이 끊임 없이 이어졌다. 그들이 내뱉는 질문들 중에는 처음 시계를 스터링과 브론즈에게 보여줬을 때 받았던 질문들도 들어 있었기에 선애는 질문을 받는 사이사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처음 선애에게 설명을 받았던 브론즈와 스터링은 서열이 안 되기 때문인지 멀찍이 떨어져 다른 드워프들과 같이 있었기 떄문에 그들에게 설명하라고 할 수 없었던 선애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건 시계예요." "뭣이라? 시계? 그럼 마법시계?" "마법이 아닌데요." "그럼 어떻게 움직이는 건데?" ..... 비록 선애가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설명하느라고 설명 했지만 드워프들에게는 흡족할 리가 없었다. 결국 선애가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고 나자 저희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던 드워프들이 나중에는 족장 드워프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몰라도 이들은 시선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모양이다. 그리고는 다시 족장 드워프가 선애를 향해 물었다. "처자... 이거 우리에게 주면 안될까?" "예?" 얼굴에 안 맞게 너무 처량한 표정과 어조로 묻는 드워프의 모습에 선애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족장 드워프는 다른 드워프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니... 완전히 달라는게 아니라... 잠시 빌려달라는 거지. 으음... 그러니까 이 속에 여러 장치가 있다고 했잖아? 그것만 보고 돌려줄께." "그건, 시계를 분해해 보겠다는 소리잖아요?" "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다고는 할 수 없는 말이로군. 물론... 뜯어보기는 하겠지만 뚜껑만 열어볼 거야. 게다가 처자 말대로 분해한다고 해도 우리가 완전히 수리해주면 되잖아?" 족장 드워프의 말에 선애는 불신 어린 눈초리로 말했다. "뚜껑만 열었다 보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분해하면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줄 수 있을지는..." 그러자 족장 드워프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어허,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우린 드워프라고, 드워프." '나원... 누가 드워프 아니라나?' 드워프들은 자신들이 드워프라는 사실에 무지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뭐, 그게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열혈적인 성격도 우리에게 피해만 안 준다면 재미있다고 봐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그들에게도 적용될지는 미지수였다. 특히나 지금처렴 자신들의 자긍심이 상처 입었다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에 호언장담하는 걸 보면 말이다. "우리가 이걸 분해했다가 제대로 수리하지 못한다면, 내 이거 없어도 아까 자네들이 말한 거래를 받아들이겠네." '뭐... 우리야 좋지만... 왠지 이들은 장사하면 맨날 손해만 볼 거 같아. 아, 혹시 그러니까 일부러 사람들이랑 왕래를 안 하는 걸까?' 아마 사람들이라면 이런 이들의 성격을 이용해서 뜯어먹을 수 있을때까지 뜯어먹을게 분명했다. 족장 드워프의 호언장담에 선애는 웃기지만 웃지 못하는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속이 꽤나 복잡할텐데요... 거기다 크기도 무지 작아서..." "아, 괜찮다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어려울텐데요..." 선애가 충고를 했지만, 그건 족장 드워프를 비롯한 주위 드워프들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결과만 만들었다. '무지 어려울거라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말인가?' "괜찮다니까." "당장에 하자구." "내 연장 가지고 올게." "하자구, 해." 그런 드워프들의 열렬한 반응에 선애는 멋적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원하신다면 한번 열어 보시지요." 어차피 이 시계는 포기하고 있던 거였으니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잘하면 시계도 안 주고 거래를 성공시킬 수 있는데 말이다. 선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드워프가 그 작은 몸을 잽싸게 놀려 근처에 있던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연장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한 드워프였다. 그리고 나머지 드워프들은 주변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는답시고 차려 놓았지만, 상회 사람들 외에 드워프들은 거의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음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음식과 그 음식을 차려놓은 거대한 탁자들이 사라지고 대신 중앙에 넓직한 탁자 하나가 놓여졌다. 아마도 시계를 분리할때 사용할 모양이다. 그렇게 다른 드워프들이 바쁘게 움직일때 그동안 족장과 장로들에게 밀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스터링과 브론즈가 다가왔다. "쳇, 영감탱이들이 저 정도로 흥분할 줄은 몰랐는데..." 선애가 넘겨준 시계를 공터 중앙에 놓인 탁자에 내려놓고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는 족장 드워프를 비롯한 장로들을 바라보며 스터링이 투덜거렸다. 무지무지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말투에 브론즈가 비죽이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저게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저걸 보면 우리는 몰라도 영감들은 대충 비슷하게 만들어내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거든." 약간 자조가 섞인 브론즈의 말을 받은 건 또 다른 드워프였다. "그게 바로 네 녀석들의 안목이 아직까지도 낮다는 증거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스터링의 아버지 스틸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쳇, 좀 잘 만든다고 재기는..." 그 모습에 투덜거리는 스터링. 하지만 그 정도의 버릇 없음은 애교로 생각하는지 스틸은 아들의 무례한 말에 대꾸조차 안 하고 옹기종기 모인 드워프들쪽으로만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사실 이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드워프들도 멀찍이 떨어져서 자리를 잡고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을텐데 이러고 있는게 이해가 안 갔지만, 그에 대해 뭐라 할수는 없는 일이었던 터라 상회 일행도 얌전히 공터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마법사 페르티니어스는 분해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마도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 가만히 있었다. 드디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드워프가 커다란 꾸러미를 가지고 달려와 탁자 주위에 합류했다. "우쒸...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만든 거 두개 주고 저거랑 바꾼다고 할걸." 무지 아쉬움이 담긴 듯한 스터링의 말에 선애가 비죽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그 뒤에 나온 말에 얼어붙었다. "흥, 아직 인정 받지 못한 실력으로 만든 물품을 가지고 저것과 바꾼다고 그랬다고? 만약 그 제의에 응한 사람이 있다면 난 엄청난 멍청이라고 비웃어줄테다." 너무나 냉정한 스틸, 즉 스터링의 아버지 말에 선애의 눈은 경악으로 입이 떠억 벌어졌다. "... 인정 받지 못한... 실력이라고요?" 떠듬거리며 묻는 선애를 의아한 표정으로 한번 보고 스틸은 고개를 한번 갸웃 거리더니 순순히 대답해줬다. "그래, 저 녀석은 아직 인정받지 못한 상태야. 얼마전에 성년이 되어 이제 겨우 견습인걸?" "그, 그럼... 스터링이 만든 물건들은..." "당연히 아직 인정 받지 못하지. 인정 받을 만큼 괜찮은 물품을 만들면 견습이라고 하겠어? 아직은 연습으로 만든 엉터리 물품일 뿐이야." 단언하듯 말하는 스틸의 말에 선애의 눈에 점점 분노의 기색이 어렸다. "그럼... 혹시 브론즈는..." "브론즈? 브론즈 녀석은... 그래도 저 멍청한 내 아들놈보다는 좀 났지. 곧 견습 딱지를 떼는 놈이니까. 얼마전에 만는 것도 괜찮은 거라고 인정 받았고..." 스틸의 말에 선애는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곧바로 스터링을 향해 분노의 시선을 던졌다. "이이~~ 쌉쭈한 놈 같으니라고오오~~~ 너, 너어어... 인정도 못 받는 물건을 나에게 준다고 그런 거야? 앙?" 선애의 살벌한 기세에 겁을 먹은 것인지 스터링 녀석이 주춤 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야아... 그래도 난 거짓말은 안 했다." "그래애... 거짓말은 안 했지. 아예 말을 안 했을 뿐... 그게 더 열받게 하는 거 알아? 죽고싶지?" 선애가 양 팔을 걷어 부치며 전에 꼬맹이 녀석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알아주던 그 멋진 카리스마를 풀풀 풍기며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가자 스터링 녀석이 샤사삭 하고 뒤로 물러나는 거였다. 성년이 된 드워프를 쫄게 만들다니, 역시 내 동생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스터링의 무지 쫄은 모습에 선애는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한 팔은 허리에 척 얹고 삐딱하고 건들거리는 포즈를 잡더니 한 팔을 들어 스터링을 향해 뻗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야, 야, 야... 일루 와." 평소 볼 수 없던 선애의 뒤바뀐 모습에 일행들의 눈이 둥그래지고 스터링은 더더욱 겁을 먹었는지 고개를 설래설래 젓는다. 이 포즈는 바로 선애가 만만한 상대를 놓고 싸우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선애는 만만치 않을 것 같은 녀석을 상대할 때는 무지 날카롭고 매서운 카리스마를 폴폴 날리며 - 자기 말로는 절대 얕보이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거라고 한다 -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데, 반대로 만만해 보이는 녀석을 상대할때는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건달 같은 포즈를 취하는 거였다. 만약 지금 선애가 입고 있는 옷이 보통 교복 치마인 주머니가 달려 있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이였다면 한 손이 삐딱하게 주머니에 들어가있었을 거고, 다리 하나가 삐딱하니 옆으로 약간 나가 뒤꿈치가 살짝 들린 상태로 달달 떨리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었을 거다. 뭐, 아쉽게도 지금은 이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주머니도 없고 발등을 덮는 풍성한 자락의 치마라 그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다행이 그것만으로도 스터링이 쫄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대로 쫄기는 자기 아버지도 있고 브론즈도 있는 상황이라 자존심이 상했는지 스터링은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뭐, 뭐야 너? 내가 강아지 새끼냐? 우쒸, 그렇게 손가락 까딱거리면 내가 갈 줄 알아?" "오호라... 네가 지금 그렇게 강짜를 부린다 이거지? 앙? 네가 그럴 입장이야? 입장이냐고오~~!" "내, 내가 안 준다고 그랬냐?" "그래, 준다고 그랬지. 인정도 받지 못하는 연습용으로 만든 물건 가지고 말이야. 이 쌉주한 놈. 너 빨랑 일로 안 와?" 비록 아침에 선애는 자신이 좀 무리한 요구를 한 걸 알았기 때문에 식량 제공한 것으로 그 제안을 없는 것으로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랬다 하나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선애 성격에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했으니까...' 하고 그냥 넘어갈리가 없었다. '그런 좋은게 좋은거다... 하는 성격이었으면 내 동생이 아니지.' "아후, 너어~~ 내가 봐주는 것도 모르고... 너 내가 한방 날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스터링이 창피함인지 분노인지 모를 이유로 얼굴이 뻘개져서 펄펄 뛰었다. "누가 봐주랬어? 봐주랬냐고? 안 봐줘도 되니까 당장 이리 못 와?" "내가 왜 가냐? 응? 왜 가?"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나는 왠지 이런 노래가 귓가에 들려오는 거 같았다. 야야야야야야... 너 이리와봐 (왜요?) 돈 있냐? (없어요.) 야야야야야야... 너 까불래? (아니요) 맞을래? (싫어요!) ....... 멀찍이 떨어져서는 방방 뛰며 안 오고 버티는 스터링과 그 자리 그대로 서서 건들거리며 오라고 하는 선애의 작태를 가만히 지켜보던 스터링의 아버지 스틸이 결국 보다 못했는지 나섰다. "무슨 일이야?" 그나마 좀 덜 열혈 성격을 가진 브론즈에게 설명을 요구한 것이다. 브론즈는 스터링에게 지킬 의리 같은 건 없었는지 망설임도 없이 냉큼 스터링과 선애 사이에 있었던, 핸드폰 한번 보여주면 자기가 만든 물품을 하나 주기로 한 약속을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뭔갈 생각하던 스틸은 한숨을 푹 쉬며 여전히 건들거리며 스터링을 노려보고 있던 선애에게 다가가 점잔게 말했다. "처자..." 나는 그의 어조와 태도에서 스터링을 변호해주며 선애를 말릴 것이라 예상했다. 선애는 열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차마 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내키지 않은 표정이면서도 대답했다. "예?" "내 못난 아들녀석 때문에 내 처자에게 참 할말이 없구만... 이게 다 내가 교육 못 시킨 탓일세." 게다가 이렇게 점잔게 나가니 선애 또한 건달 모드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었던지 어쩔 수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며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아닙니다..." "그래서 내 하는 말인데..." 계속해서 점잔 모드로 나오는 스틸에게 선애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 있던 스터링 녀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건, 내 눈의 착각일까나? "저 멍청한 아들놈을 내가 대신 처리해주면 안되겠나? 이 늙은이의 간절한 부탁일세... 하나 밖에 없는 아들놈인데..." 점잔 모드에다 소스로 애원의 빛까지 띄우자 선애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저 멀리서 스터링의 "안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버린 선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고마우이. 내 그 감사의 표시로 나중에 내가 만든 물건 중 자네가 고르는 거 하나를 줌세." 이 드워프들은 매일 하는 일이 뭔가를 만드는 일이다보니 툭하면 자신들이 만든 물건으로 마음을 표하는게 버릇인가 보다. 하기야, 그들이 만든 물품이 유명하긴 하지만... 게다가 스터링이 아닌 그의 아버지였으니 견습이 아닌 건 분명할 터, 선애에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던지라 선애의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굳어있던 안색이 슬그머니 풀렸다. "아니...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어허, 거절할 필요 없네. 내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시게나." "뭐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한번은 애교이나 두번 사양은 절대 없던 선애라 생긋 웃어주기까지 하며 덥썩 그의 제안을 받았다. "그럼, 나는 이만 아들을 처리하러..." "아, 예." 스틸이 가볍게 양해를 구하자 선애가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선애에게 씨익 웃어주며 스틸이 손을 뻗자, 놀랍게도 언제 준비한 것인지 브론즈는 선애 팔뚝 만큼이나 굵은 몽둥이를 척 하니 스틸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시커먼 색이 그 몽둥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몽둥이의 감촉을 음미하는지 잠시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몽둥이를 쓸던 스틸이 어느 순간 번쩍~ 하고 눈을 부릅뜨며 스터링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너 일루 안 와?" 그러나 오란다고 오는 스터링이라면 선애에게 이미 몇대 맞았을 거다. 스틸이 선애에게 말을 건 시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했더니 그가 눈을 부릅뜨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쳐버렸다. "우아아아악~~ 영감탱이가 드워프 죽인다아아~~!!" 그러나 스틸 또한 만만치 않게 잽싼 동작으로 그런 스터링을 쫓아갔다. "아들아, 오랜만에 우리 부자간의 다정한 대화를 나눠보자꾸나." "내가 미쳤냐?" 주위의 드워프들은 그 요란한 소동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한번 보내더니만 그러려니... 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모양. 게다가 몇몇 젊어보이는 드워프들의 동지를 보는 듯한 시선을 보아하니 어째 스틸 부자만의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에... 혹시 드워프들의 발이 빠른 이유가 산 속에서 살기 때문만이 아니었던 건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건축물들 사이로 사라지는 스틸 부자의 모습을 쿡쿡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드디어 시계 해부 시도를 끝낸 것인지 족장을 비롯한 장로 드워프들이 선애에게 다가왔다. 그들 얼굴에 어려있는, 자존심이 구겨진 표정들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선애의 모습을 한번 바라본 족장은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하자, 그 놈의 거랜지 뭔지..." 그러면서 불쑥 손을 내밀어 시계를 건네주는데, 족장에게 줬을때와 달라진 것이 전혀 없어보였다. 아무래도 뚜껑을 연 뒤 그 안에 보이는 자그마한 톱니바퀴들이 수없이 겹치고 얽히고 섥혀 있는 모습에 포기한 모양이다.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어렸을때 아버지의 망가진 시계를 뜯어본 적이 있었는데, 뚜껑을 연 뒤 보이는 모습에 히껍했으니 말이다. 비록 망가진거라 다 뜯어보려고 했는데, 그 복잡한 모습에 뭘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라 그냥 뚜껑을 덮었던 것이다. 아마 저 드워프들도 분해는 할 지언정 다시 재조립까지 할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선애 손바닥에 시계를 떨어뜨리자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장로들이나 족장이 너무나 애처로운 눈길로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이었다. 주름이 자글자글 한 걸로 보아 나이가 굉장히 많은게 분명한데도 아쉬움이 가득한 그,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집요한 모습에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감탄하기도 했다. 아마도 저러한 모습이 바로 드워프들을 이 세계 최고의 장인으로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싶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선애는 펴고 있던 손을 그대로 족장에게 내밀었다. "자요." 우리 선애가 성격이 좀... 으음...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린 구석이 있어서 남 가여운건 그냥 두질 못했다. 선애가 시계를 다시 내밀자 족장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무지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선애의 태도가 자존심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뭐냐?"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묻는 족장이었지만, 방금 전 애처러운 눈길을 본 선애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거 그냥 드릴께요. 구워먹던 삶아먹던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자 족장 드워프 자몬의 눈초리가 무척이나 사나워졌다. "뭐냐, 지금 너 내가 내기에서 졌다고 동정하는 거냐?" '나원... 누가 하자고 매달려서 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하겠다고 덤빈 거면서...' 그래도 왠지 자존심 상해하는 그의 마음이 좀 이해가 될 거 같기도 하고... 선애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다른때라면 그런 소리 듣고 가만 있을 녀석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태연하게 말을 바꿨던 것이다. "원래 드워프와 거래하기 위해 이거 줄려고 그랬어요. 족장님이 우리랑 거래 하신다면서요? 그러니까 이건 그 감사의 표시로 생각해 주세요." 선애의 말에 족장의 눈초리가 슬그머니 풀리고 장로들의 눈빛이 심히 부담스럽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원래... 줄려고 그랬다고?" "스터링 녀석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거 꽤나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더라고요. 앞으로 거래좀 잘 해보자고 선물로 하려고 그랬었어요." "진짜냐?" "진짜예요." "저기, 그럼... 이거 분해해 봐도 돼? 원래대로 못 돌릴수도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장로 드워프가 나서서 물어보자 선애가 씨익 웃어줬다. "이제 이 시계의 소유는 이 드워프 마을인데요 뭐. 당신들 것을 마음대로 하는데 제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울 꼬맹이에게 저런 면이 있으니 내가 안 예뻐할 수가 없다. '기특한 짜식...' 벨타이거는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선애가 자기걸로 나서니 뭐라 하지는 못하겠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아마 저 녀석 속으로 좀 아깝게 생각할 거다. 거래 성사야 드워프들이 자기 멋대로 내건 내기로 하게 되었으니, 시계를 가지고 좀 더 거래를 상회쪽이 유리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있었을텐데 이렇게 무산되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너무 냉정하게 자기 잇속만 챙기면 좋지 않은 법이다. 아무리 냉정한 사회라고 해도, 이런 따스한 인정이 있어야 살맛 나는게 아니겠는가 말이다. 만약, 벨타이거가 선애 시계가지고 뭔가 하려고 했다면 내가 나서서라도 방해했을 거다. 선애의 선선한 대답에 드워프들의 얼굴이 환해졌고, 족장 자몬이 떨리는 손으로 선애의 손바닥위에 올려진 시계를 가지고 갔다. "그럼... 이건 이제 우리꺼다?" 어린애처럼 묻는 자몬의 말에 선애가 피식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그 시계는 드워프 거예요." 그런 선애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자몬이 빙그레 웃었다. ".... 고맙다. 이건 우리 마을 진열관에 보관하도록 하지. 아, 그래... 그리고 너에게 그 진열관을 한번 관람시켜주도록 하지. 그게 옳아, 그치?" 족장이 자기 주변에 있는 장로들을 둘러보며 말하자 장로들 또한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한다. "그래, 그래." "나쁘지 않아." "저 애는 관람할 권리가 있어." "나도 찬성!"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숨김없이 대답하는 그들이 어째 귀엽게 느껴졌다. 뭐, 감히 나이 어린 내가 나보다도 몇배나 나이 많으신 분들께 할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따뜻한 감정이 뭉클 솟아 오르며 나는 이 단순하고 열정적인 종족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일들이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거래에 대하여 의논할 수 있었다.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스터링과 브론즈가 언급해준 루랄루민이란 드워프를 만나서 따로 의논을 하러 간 사이 나머지 상회 사람들은 유리 공예품을 다루는 드워프들과 함께 그들 작업장으로 향했다. 벨타이거 녀석이 처음 족장에게 말할때 여성용 악세사리도 언급해서 그쪽 드워프들도 거래를 하려고 했지만, 벨타이거가 나중에 하자고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 타이거 상회의 크기로는 그것까지 감당 못한다고 나중에 잘 봐달라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유리 세공사를 담당한 드워프들도 그쪽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 그러니까 가장 실력이 뛰어난... - 드워프가 아니라 그들보다 두어 단계 낮은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물론 그 드워프들이 만든 물품도 인간 세상에 나가면 엄청 뛰어난 물품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뛰어난 수준도 아니고, 꽤 괜찮은 수준도 아닌, 그럭저럭 봐줄만한 수준이라 족장은 꽤나 의아해 했다. 솔직히 나도 갑작스레 겸손해진 벨타이거 녀석이 놀라웠다. 이 곳에 올때까만해도 벨타이거 녀석은 기회만 있으면 최대한 많은 물품을 확보하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여기 와서 드워프들을 만나본 결과 그들 앞에서는 솔직하고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나쁘지 않지. 게다가 갑작스레 너무 좋은 물품을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안 좋을지도 몰라. 보물은 그걸 감당할 수 있는 능력자가 가져야 보물이지 무능력자가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니까.' 뭐, 선애와 드워프들 사이의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져 앞으로도 쭈욱 거래가 가능할 것 같으니 저렇게 나올 수 있었던 거겠지만 말이다. 시계는 당장 분해해 본다고 족장을 비롯한 장로들이 고이고이 모셔갔다. 그들이 가지고 사라지기 전에 장로 드워프들 중 한명인, 거의 하얀색에 가까운 노란 머리를 가진 드워프가 선애게 와서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이 쿨링이라고 하는 그 장로 드워프는 복잡한 기계 전공이라 이번에 선애 시계 분해를 담당하게 되었단다. 사실 아까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연장을 가지고 와서 시계 뚜껑을 열었던 것도 바로 그 드워프였다. 최대한 조심스레 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폼이 꼭 선애 자식이라도 하나 데리고 가 '잘 키우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선애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그가 가지고 가는 것도 시계였지만 말이다. 거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질은 좀 낮아진 감이 있지만, 대신 양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요구한, 유리병과 유리 세공품 각각 10개씩에서 25개씩으로 늘렸다. 그래봤자 알파두르 항구도시와 수도를 비롯하여 5개의 도시에 상점을 한꺼번에 열기 때문에 한 상점당 5개씩밖에 보내지 못했다. 한 상점당 유리병 5개와 세공품 5개. 아무래도 처음 시작하는 시점이다보니 많이 팔아서 이득을 본다기보다는 우선 홍보용으로 가져놓을 심산인 듯 했다. 나중에 많이 팔리면 그만큼의 양을 주문할 수 있었으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게 거래는 30분도 안되어 끝이나고, 처음 상회에서 받아 갈 물품을 직접 고르라하여 그들이 많은 여러가지 작품들을 감탄하며 살펴보고 있는데 그곳으로 브론즈가 들어왔다. "어이, 선애야." "응?" 브론즈의 부름에 선애가 시선도 돌리지 않고 건성으로 응답하자 브론즈의 음성 대신 다른 드워프의 음성이 들려왔다. "바쁜감? 개인적으로 볼 일이 좀 있는데..." 그 소리에 선애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라, 족장님?" 그 곳에는 브론즈와 함께 족장 자몬이 같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음... 많이 바쁘면 좀 있다가 이야기 할까?" "아뇨, 괜찮습니다." 선애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고 있던 벨타이거와 클라리사에게 나머지를 부탁하고 그 곳을 나왔다. 뭐, 얼추 어느정도 처음 받을 상품들은 골라두고 그 다음에 받을 걸 살펴보고 있던 중이라 선애가 없어도 괜찮았던 것이다. "예, 무슨 일이세요?" 시계 분해하는 자리에 같이 있는 줄 알았던 족장이 브론즈와 같이 선애를 찾아오자 꼬맹이는 꽤나 의아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 그러고보니 브론즈가 족장 아들이었지?] 내 말에 선애가 그제야 둘이 같이 있는 것이 이해되었다는 표정이었다. "험, 험... 내 처자에게 극히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서..." 자몬 족장이 말하기가 어려운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린다. "뭔데요? 어려운 일이 아니면야 뭐..." "으음... 딴 건 아니고... 그 뭐시냐... 처자가 아까 우리에게 준 시계 말고 또 신기한 물건이 있다며?" 핸드폰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선애는 족장의 말에 난감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핸드폰을 보면 또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나보다. 자몬 족장 또한 선애의 표정에 그걸 추측했는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허... 내가 그걸 달라는 건 아니고... 그... 잠깐 보여줄 수 없을까 해서 말이야." '보면 가지고 싶을텐데...' 그렇게 말하는 자몬 족장을 보니 더욱 더 걱정스러워졌다. 한번만 보여달라는데 눈을 왜 그렇게 빛내는 건지... 그래 선애가 더욱 더 우물쭈물하자 족장의 표정이 서서히 풀이 죽는다. "안되겠나?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어깨까지 축 늘어져서 말하는 폼이 꼭 주인에게 크게 혼난 강아지 같다. 갈색의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 그 폼새를 보니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는지 선애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작동법은 모르실테니 제가 해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알아서 살펴보실래요?" 선애의 말에 족장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진다. '우와... 정말 강아지 같아. 물론... 주름살이 좀 많지만...' "아니, 난 노래가 듣고 싶은 거야. 내가 이래뵈도 악기 전공이거든. 그런데 이 녀석 말을 들어보니 처자가 음악이 나오게 하는 신기한 물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호오, 자몬 족장은 악기를 만들었구나.' 자몬 족장의 부탁에 선애는 핸드폰 버튼을 눌러 벨소리쪽으로 화면을 옮겼다. "어떤 걸 들려드릴까요?" "있는 거 다." "그냥 단순한 벨소리도요?" "소리 나는 건 무조건 다." 자몬 족장의 요구에 선애의 입이 떠억 벌어졌지만, 한번 들려준다고 했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뭐, 빠져나가려고 해도 자몬 족장이 빠져 나가게 냅둘리도 없지만... 그리하여 결국 선애는 자몬 족장에게 붙들려 그의 작업실에 가서 의자에 앉아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벨소리란 벨소리는 다 들려줘야 했다. 그나마 효과음하고 경고음까지 있단 걸 모르는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시종일관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벨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있는 족장때문에 빨리빨리 다음 곡목으로 넘어갈 수도 없어 선애가 벨소리를 다 들려주고 나자 거의 한시간쯤 지나 있었다. 벨렐렐레~~ 띠리리리~~ 삐용~삐용~ 하는 소리에는 인상이 파악 찡그려져 있던 자몬 족장의 얼굴이 펴진건 클래식 음악하고 크리스마스 음악이 나올때였다. 간단한 멜로디 형식으로 나온 거였기에 나 또한 그게 무슨 악기인지 대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 클래식에서 '사랑의 인사'와 크리스마스 음악 중 'I Wish Your Marry Christmas' 노래를 들을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두 음악은 맑은 오르골 소리로 띵 띠딩 띵~ 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이거 금속 소리 아니야?" 흥분해서 이거, 이거 하던 자몬 족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어 진정하는 듯 하더니만 결국은 큰 목소리로 외치며 선애를 바라봤다. 그에 선애는 놀라 둥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뮤직 박스 소리인데... 실로폰 같은..." "뮤직 박스라고? 실로폰? 혹시 네가 있던 곳에서는 금속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가 있단 말인가?" 이 세계도 분명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드워프들 중에 악기를 만드는 드워프가 있겠지. 그러나 이 세계에 와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악기는 커녕 노랫소리 제대로 들어본 일이 없었으니, 악기에 뭐가 있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래도 뭐... 대충 자몬 족장의 작업실을 둘러보니 기타 같은 현악기도 보이고 피리도 보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몽땅 나무로 만든 것들. 한국에서야 금관악기에다 실로폰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악기들이 있지만, 여기는 금속으로는 악기를 만들지 않는 모양이다. 자몬 족장의 열혈적인 반응에 선애는 무지 얼떨떨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피리 종류도 만들고 타악기도 만듭니다만..." "뭣이라? 금속으로 피리도 만든단 말이냐? 그래애? 그렇단 말이지?" "금속으로 만드는게 그렇게 놀라운가요? 옥으로도 피리를 만든다고 들었는데..." 일명 '옥피리'. 족장은 선애의 말에 입을 떠억 벌린다. "그, 그렇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악기를 나무로 만들라는 법은 없지. 암, 암.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아하하하하...." 자기 머리를 치며 한탄하다가 갑자기 크게 웃어젖히던 - 선애랑 나는 족장이 갑자기 미친 줄 알고 놀랐다. - 자몬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만 선애를 돌아봤다. "처자... 혹시 악기 만드는 법 알고 있나?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으면 알려주게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게 아니라 왠지 광기가 있는 것 마냥 번득이며 말하자 선애가 놀랐는지 날 돌아본다. 선애나 나나 악기를 보기만 했지 뜯어본 것도 아닌데 그런걸 우째 안단 말인가? 그래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오르골은 대충 아는데... 전에 속을 뜯어서 본 적이 있거든.] 그러고보니 나는 꽤 분해해보는 걸 좋아한 모양이다. 아버지 시계 말고도 오르골이랑 라디오랑 전화기도 뜯어 봤으니 말이다. 물론, 다 망가진 거라서 뜯었다고 혼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공계로 안 가고 자연계쪽으로 갔지?' 내가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자몬 족장은 선애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오르골이 뭔지 묻고 있었다. 그에 선애는 아는대로 대답해주면서도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이리저리 피하면서 나를 힐끔힐끔 바라본다. '에궁, 이러다 나중에 한 소리 듣겠네...' "뭐야, 그러니까 보석함인데 뚜껑을 열면 노래 가락이 들리는 거라고?" "그렇죠."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거랑 비슷하냐?" "노래가 나오는 건 같다고 하겠지만, 사용하는 곳이나 속에 있는 장치가 완전히 틀려요." "그럼 그거 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데..." "저도 잘 설명은 못 드리겠는데요... 하여간 엄청 복잡해요." "네가 준 시계보다?" "한... 백배는 더 복잡할걸요? 엄청 작아서 장치치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척 봐도 뭐하는건지도 모를 정도예요." 흥분해서 그런지 자몬 족장이 아까는 그래도 '하오'체를 쓰고 있었는데 이제는 막 반말로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나이가 많으신 어른이라 선애는 별로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아까의 그 순수한 모습도 보기 좋았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다. "좋아. 지금 당장 만들러 가자!" "예?" "아, 뭐해? 지금 당장 만들러 가자니까?" "지, 지금요?" "그럼 지금 할 일 있냐?" "그, 그거야..." 거래는 다 끝이 났고, 상품도 거의 챙겼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은 상태. 선애가 우물대자 자몬 족장의 희색이 만연하다. "거봐, 할 일 없지? 그러니까 당장 가서 만들자." "저 돌아가야 하면 어쩌구요?" "갈때 가더라도 만들고 돌아가." '완전 어린애 땡깡...'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말한 족장은 선애가 머뭇머뭇 거리는게 마음에 안 들었던지 다짜고짜 선애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갔다. "아, 대충만 하면 보내줄께 걱정 마." "어어어..."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선애가 반항 한번 못해보고 끌려간다. 그러면서 당황한 날 바라보는 눈초리가 매섭다. '으윽... 괜히 안다고 그랬나? 그냥 입다물고 있을걸...' 제 19화 오르골 내부는 그렇게 크게 복잡하지 않았다. 시계에 비한다면 무척 간단해서 단 한번 뜯어봤을 뿐인데도 드워프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뭐, 최근에 나오는 전자 장치로 인해 음악이 흐르는 것이야 모르지만, 고전적인 오르골은 우선 표면에 띄엄 띄엄 오돌도톨 돌기가 돋은 동그란 통 하나와 굉장히 가느다란 금속막대가 여러개 붙어있는 금속판 하나, 그리고 동그란 통을 돌리게 만드는 테엽 장치 하나가 다다. 이 태엽 장치로 인하여 동그란 통이 돌아가면 그 통 표면에 붙어있는 돌기가 같이 돌아가다가 금속 막대에 부딪혀 음악 소리를 내는 것이 그 원리였다. 태엽이라는 것도 단순한 형태를 띄고 있어서 알고 있었다. 내 손가락만한 너비에 얇은 두께를 가진 길~~다란 금속 막대를 돌돌돌 만 것이 바로 태엽이었으니 말이다. 그걸 꽈아악 조이면 금속의 탄성으로 인하여 서서히 풀리게 되는데 그 힘으로 동그란 통을 돌리는 것이었다. 태엽 안에 들어가는 금속 막대의 길이가 길고 탄성이 강하면 강할 수록 돌아가는 힘이 강해지고 오래오래 가는 걸로 알고있다. 내가 선애에게 설명해주면 선애가 그걸로 다시 드워프들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설명해줬다. 복잡한 장치가 아니라 선애도 쉽게 알아들었고, 오르골은 모르지만, 비슷한 분야를 다루는 드워프들이라서 그런지 간단한 설명과 그림에도 금방 고개를 끄덕여 설명하는 거에 힘든 건 없었다. 문제라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음을 내는 금속판 만드는 일에 우리도 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아무 금속으로 대충 모양만 맞춘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음을 맞춰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설명은 다 알아들은 드워프들이 음계에 대한 건 어리둥절해 했기 때문에 - 이 세계 음악이랑 우리가 배운 음악이 틀린 모양이다. - 음을 맞추는 건 결국 우리가 맡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드워프들은 이쪽 음계에 맞춰 만드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가지 우리가 설명한 식으로 만들기 원했기 때문에 - 오르골을 만든 장인의 기술을 존중하고 싶다나 어쨌다나- 이쪽 세계의 음악을 사용하는 건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선애나 나나 직접 금속막대를 만들 수는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그 곳에 있는 금속 막대란 막대는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졌느냐에는 상관 없이 죄다 끌어모아서 두드려 댔다. 대충 어떤 음이라는 것을 드워프들에게 알려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음만 확실하게 잡아준다면 그 뒤에 그와 비슷한 음정을 내는 금속 막대를 만드는 건 드워프들이 알아서 한다고 했다. 과연 그걸로 괜찮을지 걱정도 되었지만, 한 음정을 들려주니 어떤 금속으로 크기는 어느정도 하면 되겠다... 하고 척척 설계를 해 내는 걸 보니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기야 그들은 일평생 금속을 만져왔으테니 이 정도쯤이야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울 꼬맹이도 음감이 좀 있었으면 좋으련만, 선애는 피아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중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체르니 100번 들어갈 즈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둬버렸다. 그에 비하면 나는 피아노를 즐겨 쳤기 때문에 중학교때까지도 꾸준히 학원을 다닌데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교회에서 반주를 맡았기에 음을 내는 금속 막대를 찾는건 결국 내가 떠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틈에 선애가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금속 막대들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듣는 사이 선애는 자기가 하는 마냥 금속 막대 하나 들고 수많은 금속 사이를 돌아다녀야 했던 것이다. 그거 가지고 녀석이 얼마나 투덜댔는지... 그날 밤에는 하도 금속을 두드리고 소리를 들어가지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귀에서 띵띵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투덜댈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대충 음이라도 맞춰서 금속 막대들을 골라내고, 드워프들이 그것과 비슷한 음정을 내는 똑같은 재질의 금속 막대들을 만들어내어 다시 나에게 음정 검사를 맞고, 고치고 고치고 하여 최초로 멜로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일주일이나 지난 후였다. 뭐, 태엽 없이 나무로 조각된 통을 손으로 직접 돌려서 만든 거였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소리가 나자 일주일 내내 지긋지긋 할 정도로 금속 소리를 들어가며 고생한게 뿌듯하게 느껴졌다. 솔솔 라라 솔솔 미 솔솔 미미 레 솔솔 라라 솔솔 미 솔미 레미 도 [크허~ 명곡이다, 명곡이야. 학교종만큼 단순하고 좋은 곡이 어디 있냐?] 맑고 투명한 금속음이 울려퍼지자 나는 정말 감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뭐, 선애는 웃음을 참느라고 고생하는 듯 했지만... 그래도 학교종도 저렇게 금속음으로 들으니 제법 예쁜 멜로디로 들렸다. 하기야, 그 동요가 어디 나쁜 노래도 아니고 말이다. 동요도 무시할게 못된다. 그렇게 내가 말한 오르골 구조랑 대충 엇비슷하게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급히 만든거라 드워프들이 그걸로 만족할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번 멜로디가 성공하자 그들은 더 멋진 멜로디를 내는데다 처음 선애와 내가 설명한 대로 보석함 형태까지 갖추길 원했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선애보고 드워프 마을에 머물기를 청했지만, 울 선애가 어디 한가한 사람이던가? 그렇지않아도 슬슬 돌아가서 상회 일을 할 시간이었다. 드워프들과의 거래도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니, 아마 돌아가면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자몬 족장의 청을 부드럽게 거절하자 자몬 족장은 한 발 물러나 근시일 내에 다시 한번 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이 많으신 분이, 그것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드워프 족장님이 간절히 부탁하자 그것까지 매정하게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선애가 내년 봄에 물품 받을 겸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원래는 이 곳에서 유리 세공품을 구입하는 즉시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지금 가지고 가봤자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고 혹시 누가 훔쳐가면 큰일이기 때문에 가게를 오픈할 시기즈음에 와서 받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드워프 마을을 떠나기 전, 선애는 드워프 족장과 장로들의 초청으로 진열관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원래 그 곳에는 일행 중 선애만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지만, 선애의 부탁으로 인하여 일행 모두 들어가 구경할 수 있었다. 진열관은 말 그대로 물건을 진열해 놓은 건물이었다. 마치 박물관처럼, 투명한 유리관에 주르르 물품을 진열해 놓은 건데, 이 곳에 진열되는 물품들은 당연하겠지만 무척 뛰어나서 족장과 장로들의 감탄을 받은 것들이었다. 드워프들은 남이 만든 걸 똑같이 복제하는 걸 금한다고 한다. 뭐, 실력을 늘리기 위하여 연습삼아 만든 것은 허락하지만, 그런 것들은 완성 후에 반드시 부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똑같이 복제 하는 걸 허락하는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곳에 전시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하기야, 잘 만들어서 남들에게 보여주느라 전시하는 건 좋지만, 반대로 잘 만들었는데 구경거리로만 놔두면 무척이나 아까운 일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단 한개씩만 복사품을 만들어서 진품은 여기에 진열하고 복사품은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나 하나의 건물들이 아기자기 오밀조밀하게 만들어져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 드워프의 마을에서도 다시 한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건물 전체를 새하얀 대리석을 이용하여 돔 형식으로 만들어 마치 한국의 해군 모자를 떠오르게 하는 진열관 입구에서 우리의 안내를 맡은 브론즈는 아주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이길 이 곳에 들어온 인간은 천년 전, 이 세계를 혼란스럽게 한 마왕을 처치한 영웅밖에 없으니 자랑스러워 할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선애는 진열관에 들어가 쭈욱 둘러보며 무지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자랑스러워 할 일이라고? 황당함이 먼저 드는데?" [나도 동감이다.] 그도 그럴것이 드워프의 역사 이래로 뚸어난 물품들을 대대로 보관했다는 진열관은 황당하게 그 자리를 빛내고 있는 물품 수가 극히 적었던 것이다. 뭐, 무지 넓은 부지를 가지고 3층이나 쌓았으니 자리가 수도없이 많은데다 뛰어난 장인인 드워프 종족 중에서 가장 어른인 족장과 장로들을 감탄하게 만든 물건이 얼마나 많았을까만은, 드워프의 오랜 역사 동안 그렇게 없었을까 싶었다. 이렇게 멋진 진열관이 아까울 정도였다. 머나먼 미래를 생각해서 크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물건이 없으니 1층 만으로도 앞으로 오랜 세월안 부족함이 없을 듯 싶었다. 뭐, 얼마 되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물품들이야 무척 감탄스러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선애의 말에 브론즈도 할 말이 있었다. "원래 이렇게 텅 빈게 아니었어. 여기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드래곤들이 몽땅 가지고 갔단 말이야."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말에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래 떠졌다. "드래곤이요? 드래곤이 정말 있단 말인가요?" 클라리사의 말에 브론즈의 고개가 끄덕였다. "직접 봤어요?" "아니, 나는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여기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빼앗겼거든." "빼앗겨?" 브론즈의 설명에 선애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그에 대한 대답은 브론즈 대신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했다. "역사서에 보면, 드래곤들은 드워프들의 물품을 애용한다고 한다더군. 하지만, 어느 누가 드래곤이 가지고 간다는데 대가를 바랄 수 있겠어?" 그 말에 브론즈가 무지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목숨이란 소중한 거니까..." "하아... 드래곤들이란 정말 못됐구나." 선애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그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당혹스럽다는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뭐예요, 그 시선들은?" "아니, 서대륙인이라서 그런가? 드래곤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언니, 그러다가 드래곤의 분노를 사면 어쩌려고?" "용감한 거냐, 몰라서 그러는 거냐?"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지만 선애나 나는 오히려 그런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내가 뭘?" [그러게 말이야.] 그 다음 날, 일행은 돌아가기 위해 마을 입구로 나섰다. 이번에 새로 파견되는 두 드워프들이 도시까지 길 안내를 해주기로 했고, 그 동안 그래도 안면이 있다고 족장 드워프 자몬을 비롯하여 몇몇 드워프들이 배웅을 하기 위해 나와줬다.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는 두랄루민이라는 드워프와 죽이 척척 맞아는지 금새 친해져서는 여기에 더 머물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여러가지 새로운 합금을 알게되어서 여기서 연구를 더 하고 싶어했고, 두랄루민 또한 페르티니어스가 가지고 온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싶었기에 - 아직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 마법사를 붙들어 두길 원했던 것이다. 브론즈는 약속한대로 선애에게 자신이 만든 물품을 주려고 했지만 선애가 마음에 들어하는 물건이 없어서 다음에 다시 왔을때 고르기로 했다. 열심히 도망쳤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몇대 맞아서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나타난 스터링에게는 선애가 한대 먹였다. "넌 나중에 두개 내놔야 해. 이자까지 붙여서, 알았어?" "쳇,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나중에 올때에는 견습 딱지를 벗고 있어." "노력해 볼게." 불퉁하게 볼을 부풀린채로 투덜대듯 대답하는 스터링을 웃음기가 가득 든 시선으로 바라보던 선애는 스터링의 붉은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줬다. 물론, 스터링은 무지 못마땅해 했지만. "야, 내가 애냐?" "응. 너 되게 귀여워." "귀엽긴 뭐가 귀여워? 나처럼 멋진 드워프가 어딨다고?" 선애의 말에 스터링이 버럭 화를 내자 그의 머리에 떠억 하니 다른 드워프의 손이 얹혀졌다. "너보다 멋진 드워프님께서 여기 계시잖냐." 그 목소리에 스터링이 한번 움찔 하고는 뒤를 돌아보며 팍 인상을 찡그렸다. 그 뒤에는 아버지인 스틸이 서 있었던 것이다. "나이 많은 영감탱이 주제에..." "호오, 연륜이라고 말해주지 새파란 애송이?" "흥, 주름살이 연륜이냐? 연륜 많아서 좋겠다." "훗, 견습 주제에 말이 많군." "윽..." 할 말이 없는지 이만 빠드득 가는 스터링이었다. 그 모습을 쿡쿡 웃으며 지켜보던 벨타이거가 그래도 안면이 있다고 인사를 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스틸님. 나중에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호오, 날 만나서 반가웠다니 기쁘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네만..." 스틸의 말에도 벨타이거는 단지 웃을 뿐이었다. "몇달 뒤에 다시 뵙죠." 그 뒤 선애가 나서서 인사하자 스틸도 마주 인사했다. "그때에는 아들 녀석의 버릇이 고쳐져 있도록 노력하지." "쿡쿡쿡, 기대할게요." "시계 모형을 만들 생각이야. 다음에 왔을때는 그걸 볼 수 있을 거다." 쿨링도 마중나와 있었다. 그는 요 며칠 시계 분해에 매달려 있었고, 선애는 오르골 만드는 작업에 매달려 있어서 첫날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는데 마중 나온게 좀 놀라웠다. "호오, 멋지겠군요. 그것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드워프 마을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산 밑으로 내려와 도시에 온 것은 좋았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중년 관리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헤스딩스 남작가의 성에 온 것까지도 좋았다. 그러나 거기서 다시 알파두르 항구 도시로 출발하려 할 즈음, 벨타이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처음 알파두르 항구도시에서 이 곳으로 올때 겪었던 일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때는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없고 대신 다치면 큰일 나는 헤스딩스 남작 영애가 옆에 붙어있었으니 더 심각한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헤스딩스 남작에게 영애를 잘 부탁한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맡았는데 이제와서 따님좀 보호하게 기사들 몇좀 붙여주십사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사실, 헤스딩스 남작은 사랑하는 딸내미를 위하여 기사들을 붙여주려고 했었다. 더불어 그녀를 시중들어줄 유모랑 몇몇 시녀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딸내미가 펄펄 뛰면서 혼자 가겠다고 해서 무산되었었다. 하기야, 기사들이 따라붙으면 그녀가 계획한 '상회 취직하기'는 물건너 갈테니 필사적으로 뿌리치는 건 당연했다. 그리하여 결국 벨타이거가 취한 건 실력이 좀 더 뛰어난 용병들을 좀 더 많이 구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올때는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도 있어서 단 5명밖에 고용하지 않았는데, 갈때는 20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용병을 고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좀 불안했는지 벨타이거는 선애를 불러서 클라리사를 부탁했다. "혹시라도 뭔 일이 있을지 모르니 될 수 있는 한 붙어 있어줘." "나 한몸 지키기도 좀 버거울지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부탁해. 네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는 건 그래도 어느정도 실력이 있다는 거잖아." "최선이야 다하겠지만..." 선애가 날 힐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나야 여차하면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클라리사보다는 선애를 택하 거다. 그렇게 해서 무려 24명으로 늘어난 인원은 알파두르로 출발했다. 이번에는 선애도 마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일행은 길을 서두르는 것도 아니고, 드워프의 마을에 오고 갈때, 그리고 승마 연습을 한답시고 헤스딩스 성으로 갈때도 말을 타고 갔기 때문에 이번에도 과감하게 도전을 한 것이었다. 선애는 마차를 타고 가는 것 보다는 말을 타고 가는게 더 편했던 모양이다. 물론, 아직 익숙하지 않아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여차하면 마차보다는 훨씬 기동성도 있었기에 벨타이거도 흔쾌히 허락했다. 뭐, 정 못타겠으면 다시 클라리사의 도움을 받아 그녀와 같이 타고 가도 되었으니 걱정되는 점도 없었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갑자기 쏟아진 늦은 가을비를 맞아 비 맞은 생쥐꼴이 된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이다. 이렇게 비를 맞게 될 줄 알았다면 선애에게 허리 아프더라도 마차를 타라고 할 걸 그랬다. 헤스딩스 남작의 성을 떠나 첫 날은 그런대로 날씨가 괜찮아서 일행은 편안하게 길을 따라 갔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꾸물 거리는게 왠지모르게 불안했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잘 몰랐지만, 선애나 클라리사는 날씨가 좀 추워진거 같다면서 - 뭐 가을이 다 지나가는 시점이었으니 당연했겠지만... - 두터운 망토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아아... 정말 생각을 잘못 했어. 올 때보다 날씨가 추워졌으리란 것도 예상했어야 하는데...' 이런 몸이 되어 추위나 더위 같은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보니 선애는 나와는 다르다는 걸 같이 깜빡해버렸다. 차가운 날씨 속에 말타고 가게 하는 것 보다는 추위를 조금이라도 피하게끔 내가 억지를 써서라도 마차를 타게 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길에서 점심을 먹고 얼마 가지 않아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에 사람들이 서둘러 길을 달려가는 걸 보자니 더욱 더 자책이 되었다. 빠른 말 속도에 적응 못해 그냥 말에 매달려 있다시피 하는 선애를 보고 더욱 더... 그렇게 일행이 빗방울이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근처에는 마을이 없어 조금 더 달려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때에는 일행들은 싸그리 쫄딱 젖어 있었다. 마을 위치가 어중간해 큰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잘 들르지 않는 곳이었던지 마을도 작았고, 그 마을 안에 여관도 딱 하나밖에 없었다. "후우... 가을도 다 지나가는 참에 왠 비람..." "어, 춥다." "빨리 빨리 들어가서 술 한잔 하자고. 몸을 녹여야 겠어." 척 보기에도 오래 되어보이는 듯한 낡은 이층 목조 건물이었지만, 그거라도 반가웠던지 일행은 맞으러 나온 소년에게 동전을 던지다시피 건네 말을 맡기고는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여관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안에는 우리 일행과 마찬가지로 가을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온 듯한 다섯명의 사람들이 젖은 옷은 의자에 걸쳐놓은 채 뜨끈한 스튜를 먹고 있었다. 여관의 한쪽 벽에 설치된 커다란 벽난로에는 비를 맞고 들어온 사람들을 위함인듯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벽난로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은 두개였는데, 한쪽 테이블은 이미 온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우리 일행은 그 옆의 테이블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들이 그래도 여자들을 위한답시고 선애랑 클라리사를 그쪽으로 밀어 앉히고는 자기들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선애와 클라리사가 앉은 둥근 테이블에는 의자가 네개나 있어서 벨타이거와 잭 조셉이 같이 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일행들이 좀 떨어진 테이블에 앉았는데 자신들만 여성들과 같이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는게 걸렸는지 용병들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고용인이고 용병들은 피 고용인이라 용병들이 아무말도 못할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헤에, 벨타이거 녀석에게 저런 면이 있을줄이야...'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자 선애랑 클라리사는 얼른 젖은 망토를 벗었다. 망토가 두꺼운 것이라서 그런지 속은 크게 젖지 않았다. 그래도 아에 안 젖은 것도 아니고, 습기도 많았던 터라 계속 입고 있으면 찝찝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애와 클라리사는 여관 주인이 금방 내오는 따끈한 스튜가 마음에 들었는지 방을 잡은 벨타이거가 방 열쇠를 넘겨 줬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대신 앉아서 스튜를 떠 먹기 시작했다. 하기야, 그러는 건 선애와 클라리사뿐이 아니었다. 뭐어, 지금 올라가봤자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싸늘한 방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렇게 급하게 올라갈 필요는 없었을테지만... 여관 주인은 그렇게 손님들에게 스튜를 돌리자 허둥지둥 커다란 쇠 그릇에 불씨를 담아 위로 올라갔다. 아마 손님들 방에 미리 불을 피워 놓으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뒤를 우리가 여기 왔을때 말을 받아들던 소년이 장작더미를 들고 따라 올라갔다. 그 둘이 부지런히 윗층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부산을 떤 보람이 있었는지, 선애와 클라리사가 따뜻한 스튜로 인해 기분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방을 찾아 올라갔을 때에는 방 공기가 왠만큼 뎁혀져 있었다. 여기에 뜨끈한 물에 몸을 푸욱 담그는 목욕을 하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아쉽게도 여관이 너무 작아서 목욕탕이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커다란 나무통이라서 목욕을 하려면 그 나무통을 방에 옮긴 다음에 뜨거운 물을 가져다 부어야만 했다. 그것 뿐이랴, 분명 헹굴 물도 가져다 부어야 하고 사용한 물은 또 퍼서 밖에다 가져다 버려야 했다. 그럴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여관 주인을 귀찮게 할게 분명했기에 -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 때문에 정신 없을 사람인데... - 선애와 클라리사는 아쉬운 대로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내일 도착하는 좀 제대로 된 여관에서 오래오래 목욕하기로 다짐하며 말이다. 그렇게 두 아가씨들이 대충 씻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즈음 그럭저럭 저녁이 되어 둘은 또 아래로 내려갔다. '하기야, 아까 먹은 스튜의 양은 너무 적었겠지.' 밑으로 내려가니 다른 사람들도 벌써 다 내려와 있었다. 차가운 비로 얼은 몸도 얼추 녹인 상태라 이제는 벽난로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선애와 클라리사는 벽난로에서 좀 떨어진 테이블에 벨타이거와 조셉과 같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이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자 여관 주인이 비록 고급은 아니지만 충분히 군침 돌게 만드는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기 시작했다. 거기에 일행들은 맥주까지 한 잔씩 걸치기 원했기에 그들은 꽤나 늦게까지 식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선애와 클라리사도 그 분위기에 휩쓸린 탓인지 맥주에 눈을 빛냈지만, 헤스딩스 남작에게서 클라리사를 간곡하게 부탁받은 벨타이거는 허락하지 않았다. 클라리사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였다. 얼마 전 18세의 생일을 보냈다고 항변했지만, 벨타이거에게는 먹히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그의 눈에는 클라리사가 여전히 어린애로 보이는 듯. 하기야, 벨타이거의 마음을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울 꼬맹이가 지금은 한국 식으로 성인의 나이 이기는 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애로밖에 느껴지질 않으니 말이다. 뭐, 가끔 이제는 다컸다고 생각할때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마 울 꼬맹이가 성인이 아니라 중년이 되어도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애로만 보일 거였다. 하여간, 그렇게 클라리사가 맥주 한 모금도 못 마시게 되자 선애까지 덩달아 못 마시고 방으로 쫓겨 올라가야 했다. 클라리사만 못 마시게 하기가 뭣 했는지 동지를 만들어주려고 벨타이거가 선애까지 못 마시게 했던 것이다. 그에 선애가 화난 시선으로 벨타이거를 노려봤지만, 클라리사를 부탁받았지 않았냐는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맥주를 포기하고 클라리사를 데리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선애 또한 자기는 몰라도 클라리사는 마시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웃기는 녀석... 자기는 고 1 수학여행때 마셨으면서...' 뭐, 그때 벌써 선애가 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호기심 삼아 친구들이랑 조금 맛 본 정도라는 걸 알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선애가 뾰루퉁한 클라리사를 데리고 윗층으로 올라가자 어떤 청년 한명이 선애와 클라리사의 방에서 나오다가 멈칫 거렸다. 선애나 클라리사는 당연히 누가 자기네 방에서 나오는 걸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 청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아... 저기... 장작 가져다 놨는데요..." 아무래도 이 여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던 듯. 손님들이 저녁을 먹는 사이 손님들 방의 벽난로 불을 살피고 밤 새 태울 장작을 챙겨 넣은 모양이다. 그제야 선애와 클라리사의 시선이 풀렸다. "수고 하셨어요." 그에게 한 마디 해준 뒤 선애가 클라리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자 나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까는 어린 애가 장작을 나르더니만... 일하는 사람이 또 있었나보지?' 방에 들어가보니 벽난로에 놋쇠 주전자가 걸려 물을 뎁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클라리사와 한 방을 쓰는 바람에 나에게서 뜨거운 물 찜질과 맛사지를 받지 못하게 된 선애가 그 모습을 보고 반가워 했다. "언니 뭐해?" 그래 세수대야에 뜨거운 물을 붓고 거기에 수건을 적시며 스스로 찜질 할 준비를 하는데 그걸 보고 클라리사가 묻는 거였다. "아아, 근육이 좀 뭉친 거 같아서 찜질 하려고. 너도 할래?" "응? 아냐, 나는 괜찮아. 그런데 그거 혼자 하게?" "어쩔 수 없지 뭐. 시중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네가 해줄래?" 선애가 씨익 웃으며 바라보자 클라리사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에... 저... 그런거 할 줄 모르는데..." "쿡쿡, 그냥 말해본 거야. 됐어, 나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어." 할 줄 모르는게 당연할 터였다. 부유한 남작가의 막내딸로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란 아가씨였으니까. 선애의 말에 클라리사가 우웅... 거리더니 슬금슬금 다가온다. "내가 한번 해볼까?" "괜찮아, 혼자 할 수 있다니까." "그래도... 내가 해주는게 편하잖아." 그러면서 클라리사는 선애가 뜨거운 물에 담가 휘휘 저으며 뎁히고 있는 수건을 잡으려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앗 뜨거." "뜨거운 찜질 하니 당연히 뜨겁지. 됐으니까 그냥 자. 나도 이거 올려놓고 그냥 잘 거야." 선애가 비실 비실 웃으며 뜨거워진 수건을 다리에 올려놓자 클라리사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는 자신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걸 본 선애는 피식 웃더니 자기도 그대로 드러누웠다. 클라리사에게 위로의 한마디를 건넬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람은 그래야 발전이 있지.' 클라리사는 피곤했는지 좀 있다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선애 또한 잠에 빠져들어 방은 그 두 녀석이 내쉬는 숨소리와 벽난로 안에서 타닥 거리며 불이 타오르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 나는 클라리사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시트를 잘 덮어준 뒤 선애의 다리 위에 올려진 수건을 새로 뎁혀서 다시 올려놔줬다. '으음... 역시 촉각을 잊어버리니 불편한게 많아... 뭐, 부딪혀서 아픈 건 없지만서도...' 하기야, 그런거 따지면 어디 아쉬운게 한두가지던가? 미각을 잊어버려 맛난 음식 맛도 못 보고, 후각을 잊어버려 가게에서 파는 향수 냄새도 못 맡아보는 등등... '에휴, 생각하면 뭐하나? 그냥 이대로 만족해야지. 그나마 청각이랑 시각을 잊어버리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지.' 그러고보니 문 밖에서 왁작지껄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드디어 사람들이 술자리를 파하고 자러 방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하기야, 내일 다시 출발할 걸 생각하면 너무 늦게까지 놀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들이 방으로 들어가는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날때까지 나는 멍하니 깨어 있었다. 요즘들어 왠지 모르게 점점 잠이 드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너무 자가지고 선애의 구박을 받으면서 살았던 나였는데다 이런 몸이 되고서도 밤마다 잠은 계속 잤었는데 말이다. 그리하여 온 사방이 고요해질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방 안의 벽난로의 꺼져가는 불을 보고는 다시 장작을 두어개 집어 넣었다. 그러다가 다른 방도 한번 둘러볼까... 하는 생각에 각각의 방에 가서 벽난로 불을 살펴보고 꺼질 거 같으면 장작을 넣어줬다. 모두들 술 한잔씩 걸쳐서 깊이 잠들었는지 내가 장작을 벽난로에 던져 너어 탁~! 소리가 났는데도 깨어날 기미도 안 보였다. 그냥 장작 타는 소리라고 생각을 했는지... 모두들 술 한잔씩 걸쳐서 깊이 잠들었는지 내가 장작을 벽난로에 던져 넣어 탁~! 소리가 났는데도 깨어날 기미도 안 보였다. 그냥 장작 타는 소리라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거참...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자기 전에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해야겠는 걸? 오늘이야 추워서 한잔씩 걸쳤다고 하지만...' 나는 완전히 골아 떨어진 사람들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라고 생각 했다지만, 밤이라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제법 소리가 크게 났던 것이다. 비록 눈을 떠서 사방을 살펴보지는 못할 망정 움찔 거리는 모습도 없으니, 이건 완전히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지금이야 내가 있는데다 여관에 투숙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만약 내가 없거나 노숙중이었으면 어쩔 뻔 했는가? '쯧쯧, 용병이라면서 이렇게 신경이 무뎌... 무뎠던가?' 혀를 차며 선애가 있는 방으로 이동하던 나는 잠시 멈칫 거렷다.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딜리가 없었다. 기실, 헤스딩스 남작가 성으로 갈때 고용했던 용병들도 전에 한번 여관에서 벨타이거 방에 침입자들이 있었을때 행동은 신속했던 것이다. 벨타이거네 방에서 큰 소리가 들리고 뛰쳐 나올때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었다. 뭐, 벨타이거네 방에 먼저 가고 그 다음 선애에게 왔기 때문에 선애 방에 온 건 시간이 좀 걸렸었지만... 그런데 그때와 비슷한 급의 용병들이 무디다는 건 말도 안됐다. '쳇, 역시 술을 먹지 못하게 해야 해.' 술의 효능을 다시한번 깨달은 나는 다시 한번 혀를 차며 선애의 방으로 한 걸음 들어온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묘하게... 공기의 색이 다른 것이었다. '어째... 공기 색이 좀 탁한 거 같다? 이런, 벽난로가 막혀서 연기가 좀 들어왔나?' 냄새를 맡지 못하는 나였기에 연기가 있다는 건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 벽난로 외에 빛이 없는 상황에서도 느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연기가 낀 거겠는가? 그러면 냄새도 많아서 선애가 숨 쉬는데 불편하리라 생각한 나는 좀 춥더라도 공기를 환기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본 것은, 아랫층에서부터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여관을 서서히 삼키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이, 이런... 선애야, 일어나! 불났어!!] 춥거나 더운걸 느끼지 못하는데다 냄새도 못 맡는 신세였기 때문에 불이 났다는 건 조금도 느낄 수가 없어 늦게 알아챈 거였다. 가끔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그건 벽난로에서 나는 소리라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창문 밖에서 불 난 걸 확인 한 나는 선애에게 소리쳐부르며 잽싸게 수건을 물단지 속으로 집어 넣었다. 집에 화재가 났을때, 불길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연기다. 기실, 화재 사고가 난 경우 불에 타 죽는 것 보다 연기에 질식해 죽는 일이 더 많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게 아니라 해도 독한 연기는 시야를 가림은 물론 호흡도 곤란하게 해 피신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했다. 그럴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물에 젖은 수건을 코와 입에 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울 꼬맹이는 나의 다급한 외침을 듣지도 못했는지 내가 젖은 수건을 가지고 다가갔음에도 깨어나질 않는 거였다. [야, 야, 일어나라고!! 불났다니까?] 어깨를 흔들어봐도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그에 나는 내가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선애가 연기에 질식 되었는 줄 알고 더럭 겁이 났다. 옆 침대에 있는 클라리사를 흔들어도, 침대에서 떨어뜨려도 눈도 꿈쩍 않는 거였다. '젠장할...' 밖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비라도 계속 왔으면 불길이 조금이라도 늦게 타올랐을텐데 말이다. 그나마 여관 외벽이 젖어 있는게 다행이랄까? 하지만, 그것때문에 연기가 더 많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급한김에 나는 벽을 뚫고 들어가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누워 있는 벨타이거와 잭 조셉도 불 난줄도 모르고 쿨쿨 잘만 자고 있었다. [당장 일어나지 못해애~~!!] 그 녀석들까지 곱게 깨워줄 마음이 없었던 나는 냅다 발로 차서 둘을 침대에서 떨어뜨렸다. 그런데, 심하게 아팠을게 분명한데도 놈들은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계속 자고 있는 거였다. 그제야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연기에 좀 질식 되었다 하더라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쩌지, 어쩌지...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우선은...'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다른 용병들도 깨워봤자 일어나지 않을게 뻔했다. 그렇다면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하나. 나는 우선 수건에 물을 적셔서 벨타이거와 잭 조셉의 코와 입 위에 올려주고 선애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선애가 제일 중요던 것이다. 시간이 없었기에 선애와 클라리사를 각각 한 팔에 끼고 방 문을 열고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키가 큰 게 아니었기에 옆구리에 끼인 두 아가씨의 발이 땅에 질질 끌렸지만, 지금은 그거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일층은 완전 불바다였다. 그런 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선애나 클라리사에게는 아닐 것이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쉬고 - 내가 숨을 안 쉰지 오래 되었지만, 힘을 쓰기 전에는 여전히 버릇으로 이런다. - 감각을 조정했다. 그러자 곧이어 내 앞길부터 저 멀리 있는 현관문까지 차지하고 있던 불길이 양 옆으로 좌악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길을 냅다 다다다 달려 거의 반쯤 탄 현관 문을 발로 그대로 차 열고 밖으로 나가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뭐, 나야 상쾌한 공기고 뭐고 느낄 여력은 없지만, 그래도 깜깜한 바깥을 보게 되니 불길 속을 빠져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불이 났는데도 근처 몇 안되어보이는 이웃집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이 나와 볼 생각을 안해 속으로 각박한 인심이네 어쩌네 투덜대며 선애와 클라리사를 내려 놓을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왔던 것이다. "뭐, 뭐지, 이것들은? 마법인가?" "시끄러, 우리는 조용히 처리만 하면 돼." 다가온 그림자는 둘이었고, 그들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나는 설마 설마 했던 것이 역시나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불은 저들이 일부러 놓은게 분명했다. '목표는 아마도 벨타이거 녀석이었겠지...' 그리고 선애를 비롯한 클라리사나 벨타이거 등등이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거 보니 저녁 식사에다 수면제라도 탄 거 같았다. 그렇게 해놓고서도 만약을 대비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불이 다 꺼진 후에 시신 확인이라도 한 건지도..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건 지금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조심스레 바닥에 선애와 클라리사를 내려놓자 두 녀석이 움찔 거린다. 그러나 녀석들의 눈에 난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둘을 내려놓자마자 두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빨리 처리해야 겠어. 위에 아직 사람들이 있는데...' 한 녀석의 뒤로 다가간 나는 양 손을 깍지 낀 뒤 온 힘을 다해 뒤통수를 내리쳤다. "컥..." 예전에 선애가 있던 가게에 쳐들어 왔던 양아치들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나머지 한 녀석이 움찔 하더니 잽싸게 선애쪽으로 다가가는 거였다. 그리고는 언제 꺼내들었는지 모를 날카로운 단검을 클라리사의 목에 겨누었다. "누구냐? 나와라." 클라리사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클라리사.' "나와라, 안 나오면 이 여자를 당장 죽이겠다." 그 시커먼 녀석이 낮게 다시한번 외쳤다. 그 녀석에게 나는 '네 앞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녀석은 내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어서..." 녀석은 아무런 기색도 나오지 않자 클라리사의 목에 겨눈 단검에 살짝 힘을 주며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뒤통수를 강하게 쳤기 때문에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그를 옆으로 치우고 클라리사를 살펴보자, 내가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클라리사의 목에 가느다란 핏자국이 보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미안 클라리사.]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클라리사와 선애를 얼른 들고는 여관의 담장 구석에다 내려놨다. 축축한 땅뿐인 곳이었지만, 지금 그런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부디 내가 들어갔다 나올때까지 무사하길 빌며 나는 잽싸게 불타는 여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 나머지 사람들을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선애와 클라리사는 그나마 조심스레 데리고 내려왔지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배려를 해줄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오후에 내린 비 덕분에 바깥에서의 불길은 크게 번지지 않았지만, 여관 안쪽은 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벨타이거를 비롯한 용병들은 질질 끌고와 거의 내던지다시피 밖으로 내동댕이 쳐 놓고는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가 질질 끌고 오는 일이 반복 되었다. 그러면서 이층으로 올라오는 불길은 내 능력으로 막아내며 겨우 겨우 우리가 고용한 용병들까지 다 끌어내고 나자 나는 다시 한번 이층을 둘러 보았다. 우리가 이 여관에 도착했을 때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요기만 하고 그냥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1층 안쪽 방에서 여관 주인과 그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찾을 수는 있었다. 안타깝게도 구하기는 너무 늦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미안한 마음에 살짝 고개만 숙여 보이고 나오는 내 귀에 말들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들은 여관과 약간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허름한 마굿간에 매여 있었는데 불똥이 바람에 날려 거기까지 튄 모양이었다. [이런 젠장할...] 남정네들을 바깥으로 끌어내기는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여관 근처에다 내버려 뒀기 때문에 위험할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안전한 장소까지 끌어다 놔야 하건만, 그래도 차마 울부짓는 말들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혹시라도 화상 입으면 자기 불행이다라고 생각해버린 나는 그대로 마굿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나 대충 지어놨는지 마굿간 안은 비가 막 샌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잘 붙질 않았을텐데, 문제는 말 먹이로 가져다 놓은 건초 더미에 불똥이 튄 거였다. 그나마 건초를 놓아둔 곳은 건초가 젖지 않게 하기 위해 제대로 해 놨는지 물기가 하나도 없어서 그대로 불이 타올랐던 것이다. 그와 함께 주변에도 조금씩 조금씩 불이 번지려는 찰나였다. 그걸 보고 놀란 말들이 요동을 친 거였는데, 다행이 여관에 비하면 불 크기가 크지 않아 그건 내 힘으로 끌 수 있어 나는 말들을 풀어주는 대신 불을 끄고, 그 근처에 있는, 말들을 먹이기 위해 떠 놓은 물을 불에 타 새까맣게 된 건초 더미에 부어 혹시나 있을 일에 대비까지 한 뒤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 길로 사람들을 던져 놓은 곳으로 잽싸게 달려가니 또 다른 시커먼 그림자가 용병들 밑에 깔려 있는 - 벨타이거를 제일 먼저 구해놓은 뒤 용병들을 구해 그 위에 던져놔서...- 벨타이거 녀석에게 검을 치켜들었다가 내리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으아아, 오늘은 왜 이렇게 바쁜겨~!!] 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시커먼 그림자의 허리에 태클을 걸어야 했다. '젠장, 또 다른 녀석들이 있을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예상했다고 해도 그때 내가 어디 시커먼 그림자가 있는지 수색 할 수나 있었겠는가?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나는 나에게 태클을 걸려 땅을 나뒹군 그림자가 두리번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때 턱을 발로 강하게 걷어 차줬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기껏 눈에 안띄는 곳에 잘 숨겨뒀다고 생각했던 선애와 클라리사를 각각 한 명씩 붙들고 목에다 단검을 겨눈 두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으아아아... 도대체 몇 놈이나 있었던 겨?] 내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를 하건 말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시커먼 그림자 중 클라리사를 위협하고 있는 놈이 계속 입을 열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마법으로 몸을 숨긴 걸 알고 있다. 이 여자들이 죽는 걸 보고싶지 않다면 얌전히 모습을 드러내라." [이놈아, 나는 드러내고 싶어도 못 드러낸다!] 내가 삿대질까지 하며 외쳤지만, 그걸 못 듣는 녀석은 잠시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네 놈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 둘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을 거 같으냐? 만약 우리 중 한 사람이 쓰러지면 한 아가씨도 죽을 거라는 걸 명심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나는 그 남자의 말에 번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고맙다 요놈아. 나에게 힌트를 주다니...] 한 녀석만 공격하면 그 옆의 녀석이 붙잡고 있는 소녀를 공격할테니 한꺼번에 둘을 처리해야 했다. 비록 나에게는 손이 두개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능력도 있지 않는가? 나는 척척 그 두 녀석에게 다가갔다. 놈들이 실수하는 거라면, 둘이 같이 붙어있는 거라고나 할까?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그 둘 가운데 서서 내가 팔을 뻗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거리 였다. 두 놈은 적당한 거리를 잡은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만... 그렇게 둘 사이에 자리를 잡고 그 둘이 목에 겨누고 있는 단검 날을 내가 손으로 잡자마자 참지 못하겠는지 다시 한번 녀석이 입을 열었다. "이래도 안 나올테냐? 셋 셀동안 나오지 않으면 한 아가씨의 어깨를 찔러주마." 클라리사를 잡은 놈이 그렇게 말하며 목을 겨눈 단검을 어깨쪽으로 살짝 옮겼다. "하나, 둘, 세에... 크아아~~!!" "끄아아아~~!!" 그러면서 숫자를 세기에 나도 같이 속으로 세다가 셋을 말하는 순간 두 녀석의 얼굴에다 대고 불을 일으켜버렸다. 단검 날을 내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에 녀석들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선애나 클라리사의 살속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게다가 곧 녀석들은 단검을 손에서 놓고 자신들의 얼굴에서 갑자기 피어난 불을 끄기 위해 이리저리 뒹굴었기 때문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대신 녀석들이 놓자마자 그대로 쓰러지려는 클라리사와 선애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는 선애와 클라리사를 바닥에 잘 눕혀주느라 나는 녀석들의 얼굴에 피운 불을 좀 늦게 끄게 되었다. "끄으으으..." "커허헉..." 아무래도 화상을 좀... 많이 입은 모양이었다. 얼굴을 감싸쥐며 온 몸을 웅크린채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선애를 잡자마자 꺼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불타는 여관 근처에 널부러져 있던 남정네들을 안전한 곳까지 옮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 중에는 맨 처음 선애와 클라리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을때 마주쳤던 시커먼 남정네들도 있었다. 사람들을 모조리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나는 시커먼 그림자들은 따로 떼어놓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끈으로 단단하게 결박시켜 뒀다. 그런 모든 작업을 끝내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날뛰는게 안 보이고 안 들린다고 해도 이렇게 크게 불타오르는데 어째 아무도 안 나와보는 거지? 게다가 지금은 슬슬 날도 밝아오는데 말야...' 해가 완전히 떠올라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집에서 나오는 사람은 어째 한 명도 보이질 않는 거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 의아하기도 하고,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선애가 찬 바닥에 계속 누워 있는 것도 신경쓰인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를 습격한 시커먼 옷을 입고 있는 녀석들이 걱정 되기도 했지만, 내가 잘 묶어놓은 데다가 묶기 전에 다들 기절시켜 놨으니 금방 깨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멀리 가지는 않고 요 주위의 집들만 살펴볼 거였으니 만약 무슨 소리가 나면 잽싸게 달려올 수 있을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애를 데리고 나올 때 물품이라도 좀 챙기고 나올 걸... 이라는 후회를 잠시 해봤지만, 누구라도 그 상황이 된다면 물품 챙길 정신 같은 건 없었을 거다. 사람 구하기도 빠듯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나는 사람들도 다 못구할거라고 생각 했다. 그만큼 내가 불을 늦게 발견했기 때문에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못 꺼내면 운이 나쁜 거라고 여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뭐, 내가 열심히 뛰어다닌 덕분인지 모두들 그 불타오르는 여관에서 꺼내올 수 있어서 내심 모두들 목숨줄이 질기다고 여기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집으로 무례를 무릎쓰고 들어가보니 어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의아해서 방마다 들어가보니 황당하게도 모두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자는 상태로 숨을 거둔 게 아닌 가 싶어 가슴에 귀를 대보니 심장은 잘만 뛰고 폐도 공기를 잔뜩 들이 마셨다 내쉬고 있는 거였다. '거참... 이거 단체로 늦잠 잘 수도 있는 건가? 이래서 여관이 타는 줄도 몰랐구나... 그런데 이렇게 깊게 잘 수도 있는 건가?' 어리둥절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던 나는 잠들어 있는 그 집 사람들에게 고개만 꾸벅이고는 옷장을 뒤져서 안 쓰는 이불들을 꺼내 들었다. '뭐, 나중에 들켜서 문제가 된다면 벨타이거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라고 무책임하게 생각해놓고 말이다. 그렇다고 각각의 집들이 여유가 있어서 이불 또한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집 말고도 주위에 있는 다섯 집에 더 무단으로 침입해야만 했다. 그렇게 기껏 구해놓은, 선애를 비롯한 일행들이 깨어난 것은 정오가 거의 다 되었을 즈음이었다. 그 동안 일행은 커녕 마을 사람들도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안 깨어나는 대신, 일어나지 말아줬으면... 했던, 내가 제압해 묶어 놓은 녀석들이 정신 차릴 기미를 보이는 바람에 허걱~! 하고 놀래버렸다. 다행이도 내가 선애 옆에 있을때였기에 망정이었지, 안 그랬으면 큰일났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비록 내딴에는 꽁꽁 묶어 놓기는 했지만, 영화에서 보니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꽁꽁 묶인 걸 교묘하게 푸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저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면 다른 일행이 또 있을지도 모르고... 그리하여 나는 녀석들이 신음을 흘리며 꼼지락 거리는 걸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달려가서 녀석들의 뒤통수를 다시 후려쳐 기절시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으음..." 적들을 기절 시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곧바로 누군가 깨어나려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다시 헉~! 하는 놀라운 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끄응..." 곧바로 내리쬐는 직사광선이 부담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 이는 잭 조셉, 벨타이거 녀석의 측근이었다. '휴유, 드디어 깨어나려는 건가?' 그는 한번 뒤척 거려보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주변의 환경을 보곤 놀라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것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그 심정 충분히 이해 했다. 어제 밤에 여관 방의 폭신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여관은 잿더미가 되어 있고 자신은 맨 바닥에 이불 하나 덥은 채 누워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두리번 거리던 와중 자신의 옆자리에 누운 벨타이거 녀석을 발견하곤 황급히 그의 옆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벨타이거 녀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선애보다 좀 늦게 구출한 탓인지 머리카락이 좀 그슬리고 검뎅이 여기저기에 많이 묻어 있었다. 보기에는 좀 지저분하지만, 그래도 벨타이거 녀석은 운이 좋은 편이다. 나중에 구한 용병들은 그보다 머리카락이 더 많이 그슬렸고, 화상까지 입은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벨타이거가 좀 그슬리기는 했지만 괜찮다는 걸 확인한 잭 조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잭의 기척 때문인지 벨타이거가 깨어났다. "으음..." 그리고 그걸 시점으로 여기 저기에서 사람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중에는 선애의 목소리도 섞여 있어서 나는 너무나 기뻐 한 달음에 선애 옆으로 달려가 앉았다. "/우쒸... 언니 커튼 좀 쳐주라./" 선애 또한 직진해 들어오는 광선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주고 싶지만, 커튼이 없단다. 그러니까 네가 일어나.] "아우..." 내 말에 선애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뒹굴 뒹굴 대다가 바닥의 감촉이 이상했는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보이는 하늘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 옆에 앉아 있는 날 보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뭐, 뭐야... 뭔 일 있었어?/" [응, 무지 황당한 일. 어젯밤에 여관에 불이 났어.] "/불?/" [그래. 불 끄는 사람은 없고 모두 다 잠에 포옥 빠져 있어서 사람들 구하느라고 무지 애먹었다. 거기다가 너희들을 습격하는 놈들이 있어가지구...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지.] 설명해주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선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 꽁꽁 묶인 녀석들을 보더니 인상을 쓴다. "/뭐야, 그럼 불은 저놈들이 낸 거야?/" [그럴 확률이 높지. 나야 놈들이 불 지르는 걸 보지도 못했고 물어보지도 못하니 확신할 수 없지만... 나도 불이 크게 났을때 발견했거든.] 내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혼자서 뭐라고 말하는 거예요?" 선애 옆에 눕혀놨던 클라리사가 일어났다가 나와 대화 하는 걸 본 모양이다. 뭐, 클라리사에게 난 안 보이니 선애 혼자 중얼거리는 걸로 보였겠지만... "아아, 그냥 어제 뭔 일이 있었는지 정리 중이었어. 가끔 이렇게 혼자 말로 하며 정리 하거든." "그래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요?" "우선 어제 우리가 자는 도중에 여관에 불이 났대. 그래서 날 보호하는 어떤 존재가 우리를 구해놓은 모양이야. 그리고 불을 지른 유력한 용의자를 잡아두고..." "널 보호하는 존재? 그게 누구지?" 선애에게 다가오다가 선애가 하는 말을 들은 모양인지 벨타이거 녀석이 선애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끼어들며 묻는다. 그러나 나란 존재를 밝히지 않기로 한 선애가 말을 해줄리가 없었다. 울 꼬맹이는 기분 나쁘다는 티를 역력히 드러내며 벨타이거를 째려본 뒤 고개를 휙 돌렸다. "말해 줄 이유 없는데요." 평소 벨타이거 녀석에게 거의 틱틱 댔던 선애였기에 벨타이거는 이런 선애의 반응에도 화를 내지 않고 또 한바탕 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은 양 싱글싱글 댔다. 오히려 벨타이거 옆에 붙어 있던 잭 조셉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벨타이거가 뭐라 하지 않으니 나서지 못하고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숨기다니, 너무하지 않아?" "전~혀 너무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마시고 저 놈들이나 족치시죠? 그나저나 얼마나 술을 마셔댔으면 밤새 여관이 불탄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골아떨어진대요?" 능글능글 거리는 벨타이거의 질문에 단호한 선애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온 선애의 질문에는 벨타이거가 기죽은 표정을 지었다. "으음... 내가 좀 피곤했나봐. 평소 주량에 맞춰서 마셨다고 생각 했는데..." 하지만 그런 벨타이거의 말을 잭 조셉이 부정했다. "술 때문은 아닙니다. 저도 맥주 단 두잔만 마셨을뿐인데도 여관이 불타는 것도, 밖으로 옮겨진 것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선애양도 무척이나 깊이 잠들어 계셨던 것 같던데요?" [아, 저 놈이 제일 먼저 깼거든. 네가 자고 있는 걸 봤나보다.] 내 속삭임에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그렇다면... 단체로 약이라도 먹었나?"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벨타이거의 말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어 나는 잽싸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마을 사람들도 잠들어 있었어. 여관에서 물건을 하나도 못 끄내서 남의 집에 들어가서 이불을 꺼내가지고 왔거든.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더라...] 내 말을 들은 선애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 오후가 되어가는 시간인데 마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군요. 깊이 잠을 자서 여관이 불탄 건 몰랐다 해도, 아침에는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선애의 말에 그제야 벨타어거도 마을 사람들이 안 보인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번에 고용한 용병들의 리더를 바라보며 물었다. "용병들 상태는 어떻습니까? 모두들 무사합니까?" 그에 용병 리더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대부분 무사합니다만... 두 사람이 숨졌습니다. 아무래도 연기에 질식사 한 모양입니다." [에구... 다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으음... 용병들은 확실하게 숨 쉬는지 확인도 안 했더랬지...]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나는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벨타이거는 한숨을 내쉬더니 용병 리더에게 지시했다. "그 두분은 잘 모셔두고 우선은 주변 상황부터 알아보는게 좋겠습니다. 용병을 두 팀으로 나눠서 한 팀은 마을을 좀 살펴봐주시고 한 팀은 저 사람들을 취조해 보도록 하죠. 어제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고 합니다." "여관도 뒤져 봐야죠. 우리 짐 하나도 빼내지 못했다던데..." 선애가 불쑥 끼어들자 벨타이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 팀으로 나누죠. 한 팀은 마을, 한 팀은 취조, 한 팀은 여관을 살펴보는 걸로요." "알겠습니다." 선애와 클라리사는 벨타이거에게 밀려 여관 뒤지는 쪽으로 배당 되었다. 엄청 지저분(?) 해질 일이었지만, 그래도 취조를 하는 모습은 차마 여자들에게 보이지 못하겠고, 마을을 둘러보는 일은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 중 가장 안전한 일을 맡긴 것이었다. 덕분에 나 또한 선애 뒤를 따라 쫄래쫄래 시커멓게 타버린 여관 잔해더미를 뒤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을을 둘러본 첫번째 팀과 내가 잡은 녀석들을 취조하는 두번째 팀은 별로 건진 게 없었다. 조용한 마을을 조심스레 수색하기 시작한 용병들 앞에는, 그제야 잠에서 깬 부시시한 마을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도 자신들이 늦잠을 잤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황당해 했다는 것. 나중에 알고보니 그 마을 사람들은 전날 저녁, 여관에서 푸짐하게 만들어서 마을 전체에 돌렸다는 스튜를 배불리 먹고 잠들었다고 했다. 여관에서는 오랜만에 손님들이 오면 푸짐하게 음식을 만들어 손님들 대접하고 남은 걸 마을 사람들 전체에게 나눠주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 아무래도 마을이 작다보니 그럴 수 있었던 모양이다. - 이번에도 고맙게 받아 먹고 잠들었는데 이제야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추론한 거지만, 일행들이 세상 모르게 잠든 게 아무래도 그 여관에서 대접한 스튜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스튜에는 여관 주인 몰래 일행을 - 아마 정확하게 말하면 벨타이거 녀석이겠지만...- 해하려고 한 녀석들이 강력한 수면제라도 넣었던 모양이다. 여관 주인과 그 식구들 또한 그걸 먹고 깊이 잠든 바람에 불이 났어도 피하지 못하고 화를 당한 거겠지만... 벨타이거 놈 때문에 애꿎은 여관 주인 식구들만 변을 당한 것 같아 참 마음이 착잡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여관 주인 식구들이 모두 같이 명을 달리했다는 거랄까? 냉정한 말 같겠지만, 그래도 만약 살아 남은 식구가 있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는가 말이다. 여관이야 벨타이거 녀석이 충분히 사례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식구들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이럴때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게 제일일 것 같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 몫까지 힘드니까 말이다. 두번째 팀인, 내가 잡아 놓은 녀석들을 취조하겠다던 쪽도 별 달리 건진게 없었다. 그쪽에는 벨타이거 녀석과 잭 조셉도 합세해 있었는데, 묻는 말에 아무것도 대답을 안 했다고 한다. '모르겠다.'라거나 자신들을 도둑이라고 생각 할 수 있게끔 하는 말들을 늘어놓는 것도 아닌,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건 자신들이 벨타이거 녀석을 죽이러 온 자객이라는 걸 암묵적으로 인정한 걸까나? 그 놈들이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 알파두르 항구 도시에 도착할때까지 절대 방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항구도시에 도착하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벨타이거 녀석은 너무 안일한게 아닌가? 선애 또한 그렇게 생각 했는지, 사방이 조용해 졌을때 벨타이거 녀석을 불러 넌지시 물어봤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는데, 돌아가면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 도착하기만 하면 절대적으로 안전하거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벨타이거의 모습에 선애가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에휴, 이 세계에 와서 선애가 자주 인상을 찡그리는데,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주름살이 생길까 걱정이다. "뭘 보고 그렇게 장담해요? 아아, 혹시 그 무역회사 실권을 빼앗은 핸들리 크로스웰인가 뭔가하는 사람이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더 확실한게 있지." "뭔데요?" "국법." "에엥?" 생각지도 못한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국법말이야. 지엄하신 이 나라의 국왕께서 정해놓은 법. 뭐, 현재 국왕이 아니라 몇대 전 국왕이 정해놓은 법이지만..." 대략 300여년 전 이 곳에서 커다란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아벤티노 대륙에 있던 모든 국가들이 전란에 휩싸일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선애와 내가 있던 세계의 1차, 2차 세계 대전 정도였던 듯. 그런 전쟁 후, 운이 나쁜 쪽은 망했지만 운이 좋게도 승리자쪽에 설 수 있었던 바이런 국은 전보다 더 큰 규모의 국토와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는데다 든든한 국왕의 편이 되어주는 신생 귀족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왜 전쟁은 영웅을 탄생시키는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말이다. 뭐, 그것까지는 좋지만 이 세상 모든 일에는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 그 뒤 불안했던 정국이 서서히 안정되어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자 문제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귀족들과 신생 귀족들간의 불화는 물론이거니와, 그 초대 신생 귀족들에게 충성을 받던 왕이 죽고, 그 신생 귀족들도 죽고 그들의 자식들이 대권을 쥐게 되 충성심이 서서히 약해지게 되자 왕과 귀족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서건, 등 따시고 배 부르면 그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더 큰 걸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성경에 가라사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던가. 욕심으로 서서히 시작된 대립은 결국 피까지 보게 되었는데, 그 와중 왕위를 물려받으신 어느 똑똑하신 왕이 그런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하여 국법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작위를 물려받은 귀족은 작위를 박탈하고 지위를 평민으로 등하시키며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 라는 것이었다. 수가 많아 왕권을 위협하는 귀족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에게 반항하는 귀족들을 처형하기 위한 방책으로 생각해 냈는데, 그 당시 각각의 귀족 가문에서도 자식들간에 치열한 작위 다툼이 있었는지라 귀족들이 순순히 그 법 제정을 찬성했다고 한다. 얼마 뒤 자신들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 했겠지만... 그 뒤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 혹은 그 후계자가 독살 당하거나 살해 당하는 등의 수상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작위 박탈, 재산 몰수를 해버렸으니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때 수상한 죽음을 당한 귀족들은 왕이 보기에 자신에게 별 쓸모 없다거나, 자기에게 반항했던 귀족들의 수가 좀 많았을 거 같다. 하여간 그렇게 귀족들을 휘둘러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킨 왕의 대를 이어 다음 대의 왕도, 그 다음 대의 왕도 대대로 그 국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지금에까지 이르렀다는 거다. "내가 이렇게 변두리 귀족이라도 일단은 귀족이라서 말이지, 만약 독살을 당했다던지 살해 당했다면 숙부에게 작위가 넘어가기는 커녕 모든 재산 몰수에 귀족이라는 타이틀까지 빼앗겨버린다 이거지. 그러니 날 죽이고 싶다면 누가 봐도 사고사라고 생각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거야. 운이 없어 투숙한 여관에 불이 나 타죽었다던지, 아니면 도둑이 들어서 싸우다가 죽었다던지 하는..." "오호..." "능력 있는 귀족들이야 설사 자기들이 독살 시켰다 해도 힘으로 유야무야 넘어갈테지만, 나처럼 힘 없고 돈만 많아 보이는 녀석들은 국법을 들먹이기 딱 좋은 대상이지. 그렇게 해서 쓸데 없는 귀족 하나 줄이고 국가 재정도 빵빵하게 하고." "이야..." "그걸 잘 아는 숙부님이니 이럴때 노리는 거지. 도시에서는 아무래도 사고사로 위장 시키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내가 사고사로 죽었다 하더라도 위에서 조사하러 온 관리가 수상하다... 하면 찍 소리 없이 모든 걸 빼앗길 수도 있을테니..." "여기서 사고사로 죽어도 수상하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 그게... 귀족들의 힘이 다시 강해졌을때 그 법을 어떻게 하려고 했나봐. 그래서 지금은 그 귀족의 영지 바깥에서 사고로 죽으면 무조건 사고사로 여기기로 되어 있어. 위장이던 진짜 사고이든간에 말이지. 나 같이 영지가 없는 경우는 알파두르 항구 도시 바깥에서 죽으면 무조건 사고사로 돼." 웃긴다. 그 법은 그러니까 살해 하려면 영지 바깥에서 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런게 바로 눈가리고 아웅한다는 거겠지? 헛 웃음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법이랍시고 당당하게 있다니 말이다. "흠, 그럼 반대로 말하면 도시 안에서는 안전하다는 소리군요." "맞아. 국법 상으로는..." 그러면서 벨타이거가 씨익 웃었다. 평소 기생 오라비라고 봐도 무방할 그 미소가 지금은 시커먼 검댕을 뒤집어 쓰고 있는 그의 몰골로 인하여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선애의 기분을 안 좋게 하기에는 충분했는지 선애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래도 하늘이 무심치 않았는지, 첫번째 팀, 두번째 팀이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도 세번째 팀은 그나마 건진 게 있었다. 열심히 여관을 뒤졌더니만, 그나마 불에 타지 않았던 동전들이 나왔던 것이다. 은화나 금화는 고스란히 녹아 버렸지만, 그래도 그것들이 진짜 은과 금이었기에 화폐 가치는 없어졌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돈으로 바꿀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 마을은 작아서 그게 불가능했지만, 다음 마을에 가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뭐... 은이랑 금이 뒤섞여 버려가지고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용병들의 무기와 벨타이거, 잭 조셉의 검은 손잡이를 싸고 있던 가죽은 다 타버리고 시커멓게 그을리긴 했지만, 수리만 하면 그럭저럭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말들은 다 무사했으니 더더욱 다행이었다. 여관 주인 식구들의, 알아볼 수 없는 시신도 찾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선애나 클라리사가 발견할까봐 최대한 내가 방해한 덕분인지,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용병들이 발견했고 마을 사람들과 용병들은 조심스럽게 그들을 수습하여 그 근처에 있던 자그마한 산에 묻어줬다. 이곳 장례 방식도 입관하여 땅에 묻는 식이었던 것이다. 뭐, 봉분이라든지 묘비를 세우는 것이 한국과는 좀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여관 주인 식구들 장례까지 다 마치고 나자 벨타이거는 일행들을 수습해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금방 쓸 수 없는, 녹아버린 은덩어리와 금덩어리는 잘 챙기고 여관에서 건졌던, 다행히도 제 형태를 간신히 보존하고 있던 구리 동전은 싸그리 싹싹 모아서 촌장에게 넘겨줬다. 아마 그 동전의 절반은 용병들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벨타이거는 아랑곳 하지 않았고 용병들도 뭐라 항의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여관을 뒤지느라 머무는 동안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준 대가성이기도 했고, 친절하게 대해준 그들의 따뜻한 인심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건넨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작지만 친절한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서둘러 다음에 있을 커다란 마을로 출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은... "저게 뭐야?" "어머나..." 선애가 단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린 것에 비해 옆에 있던 클라리사는 겁 먹은 표정으로 선애의 뒤로 가서 숨는다. 그 모습에 쬐끔 열이 받았다. 클라리사가 선애를 언니처럼 따르고 있다는 것도, 이럴때 기댈 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내 동생을 위험지로 내모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선애가 비록 클라리사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이가 많아봐야 겨우 두살 차이였다. '게다가 둘다 같은 여자인데 왜 선애 뒤에 숨냐구우... 저 옆에 벨타이거 녀석 아니면 그 옆의 잭 조셉이라는 놈 아니면 용병들도 지천이구만...' 그렇게 내가 선애 뒤로 몸을 피하는 클라리사를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때 - 그 동안 클라리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일로 인하여 와장창 사라져버렸다. - 용병들이 선애랑 클라리사를 얼른 저 뒤 마을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엉망이 되어 제대로 쓸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고는 마악 마을 진입로 안으로 들어서는 세 사람을 긴장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있었다. 팔 둘, 다리 둘이 달려 있었고, 거기에 한 몇년간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씻지도 않은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째 눈빛이 이상했다. 기분 나쁜 묘한 빛을 뿜어내데다 흰자위에 핏줄이 얼마나 돋았는지 눈 전체가 시뻘겋게 보일 정도였다. 이런게 바로 말로만 듣던 광기 어린 눈동자가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몸집이... 단순히 등빨 좋은 조폭 형님이나 그 외국의 유명한 육체파 영화배우들보다 더욱 더 우람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째 너무 크다보니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열심히 운동해서 근육을 키운 것이 아니라, 그 가끔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게임할 때 스폰지로 만든 커다란 근육 덩어리 인체를 만든 인형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자신의 몸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몰라도 옷 바깥으로 노출된 그들의 맨 살에는 시퍼런 힘줄이 엄청나게 돋아 있어서 징그러운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히트는, 마치 자신들이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라도 하고 싶은 양, 괴물들의 주 대사만 주절거리며 입가로 침을 흥건히 흘린다는 거였다. "크르르..." '윽... 디러...' 덕분에 그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던 나는 인상을 파악 찡그린 채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될 수 있는 한 선애에게 보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황당한 건 그런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울 듯한 요상한 괴물들의 손에는 커다란 도끼가 하나씩 들려 있다는 거였다. 배틀 액스라고, 왠만한 성인 남자의 키보다 더 큰 도끼 자루에 내 머리통의 1. 5배 정도 되는 크기의 도끼 두개가 대칭으로 붙어 있는 건데,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다면 엄청 커보일텐데 저들이 가지고 있으니까 체격에 맞게 가지고 있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도끼는 잘 관리하지 않았는지 녹이 슬고 이가 군데군데 빠져 있는데다 검은 얼룩까지 묻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 도끼를 반듯하게 들고 오는게 아니라 땅에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저놈들?' 이런 내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는 듯 용병 리더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신음 비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버서커다..." "버서커? 저들이 버서커란 말입니까?" 그 버서커가 뭔지 몰라 나는 고개를 갸웃 하는데, 옆에 있던 벨타이거 녀석이나 잭 조셉은 알고 있는지 용병 리더의 중얼거림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져서 외쳤다. "맞습니다.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참 공교롭군요. 무기가 엉망인 이 상태에서 만나다니... 상대하기 버겁겠는데요? 버서커는 느리니 말을 타고 도망가면 쫓아오지는 못하겠지만, 우리가 도망가면 저들은 그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덥칠 겁니다." 용병 리더의 말에 벨타이거는 이를 빠드득 갈며 내뱉듯이 말했다. "아마... 그걸 노리고 온 거겠죠." 뒷쪽으로 밀려나 있던 선애와 클라리사는 벨타이거와 용병 리더의 대화를 들었던 모양이다. 자신들을 경호하기 위하여 바로 옆에 있던 몇몇 용병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묻는 게 보였다. "저기... 버서커가 뭐죠?" "아... 그게... 한마디로 광전사라고..." "광전사?" "으음... 그러니까... 톡 까놓고 말한다면 미친 놈이죠." 주저주저 하며 - 아무래도 참한 처녀들 앞에서 험한 말을 쓰기가 어려워 순화한 말을 고르느라 그런 듯 - 설명한 용병의 말에 선애와 클라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순간 클라리사가 다시 물었다. "저기... 그런데 위험한가보죠?" "으음... 왜 미친놈은 힘이 세다고 하잖아요. 게다가 한대 때려봤자 맞았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끙끙 대다 툭 내뱉듯이 하는 용병의 설명에도 선애와 클라리사는 이해 했다는 표정을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사람이네요..." 클라리사가 동정이 일었는지 중얼거리자 용병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엄청 지질라게도 멍청하지만 불쌍한 놈이죠."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용병은 생각이 다른 모양인지 퉁명스런 어투로 끼어들었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하냐? 다 자업자득이지." 그의 말에 클라리사가 욱 한 모양이다. "너무하잖아요. 저 사람이 원해서 저렇게 된건 아닐텐데요..." 막말로 이 세상에 원해서 미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만은, 그 용병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 "설마요, 아가씨. 저 놈들은 다 저들이 원해서 저렇게 된 거랍니다." "네에? 그럴리가요." 우리 중 가장 순진하다고 할 수 있는 클라리사는 물론이거나와 나나 선애도 그 용병의 말이 황당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맨 처음 우리에게 버서커를 설명해주던 용병이 입을 열었다. "야,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왜, 내 말이 틀렸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쩔 수 없이 버서커가 된 사람 생각은 안 하냐?" "그런게 과연 몇명이나 되겠냐?" 그렇게 두 용병이 투닥거리는 와중 언성이 점점 커졌던 모양이다. "조용히 못해?" 앞쪽으로 나가있던 용병 리더의 날카로운 질책에 그들은 찔끔해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조용해지자 다시 용병 리더의 지시가 날아왔다. "거기 너희 둘은 마을 사람들과 아가씨들을 데리고 어디 건물 안으로라도 피해. 그리고 나머지는 저 놈들을 둘러싼다." 그 말에 용병 리더의 질책에 찔끔해서 입을 다물고 있던 두 용병이 서둘러 선애와 클라리사를 데리고 마을 사람들을 피난 시켰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채 10가구가 안되는 마을이었으니 그들이 생활하는 집 밖에 없었다. 가장 큰 건물이라고 하면 역시 일행이 묶던 여관이었지만, 그건 지금 다 타서 무너진 상태고, 그렇다고 아무 집이나 들어가자니 40명이 안되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하기는 무리였다. 그나마 그때 마을의 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감님이 나서서 우리를 마을 입구와는 가장 멀찍이 떨어진 장소로 데리고 갔다. 워낙 작은 마을인데다가 험한 동물들은 없었는지 마을을 둘러싼 담 같은 것도 없었기에 여차하면 큰 길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사실 나는 단 세명의 그 버서커라는 광전사를 설마 20여명의 용병들이 못 막겠나... 라고 안일하게 생각 했었다. 그리고 얼마후 나는 내가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 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어 멀리서 퍼퍼버벅... 하는, 일명 싸우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와서 드디어 시작했나 라고 생각 했었다. 잠시 후 그 소리가 그쳤을 즈음 이제 다 해결했나보다... 라고 생각했고, 저벅 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일행의 모습이 보일거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피투성이가 된 세 버서커의 모습이었다. "이런 젠장..." "아 씨벌... 역시 우리가 진 거야?" 옆에서 들려오는, 절망에 찬 용병들의 목소리에 나는 놀란 와중에서도 의아함이 생겼다. '뭐냐... 그럼 이들은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중간 내용 팬카페에서 안올렸음(20~23화까지) 제 24화 [하아... 날씨 좋다~] 눈으로 보기에 무척이나 따뜻할 것 같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피부로 느끼지는 못해도 아마 온기를 품은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이럴때는 김밥을 싸가지고 소풍을 가야 하는데 말이야. 크허... 생각하니 김밥이 먹고싶어지는 구나아... 그리워라아...' 지금은 벌써 5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와서 한창 자리를 잡을 때였다. 그리고 초봄에 일제히 오픈한 타이거 상회 산화 야생회 가게들도 제법 자리를 잡고 이름을 서서히 알리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이제는 타이거 상회의 식구가 된 모든 이들의 노력이 숨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정보 길드의 도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뭐, 돈 받고 움직여준 거니 도움이라고 할 수는 없으려나? 선애와 내가 토냐가 미리 만들어 본 화장품 중에 히트 상품이 될 거라고 예감한 것은 바로 립스틱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입술은 무조건 붉어야 한다는 편견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중에 나온 립스틱은 모조리 붉은 색이었다. 그 중에서 색이 좀 흐리냐 짙으냐였지만, 어쨌든 무조건 붉은 계통이었던 것이다. 뭐, 립스틱 중에서 붉은 색인 것이야 흔한 일이었고, 그 동안은 선애나 나나 화장품 쪽으로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라 몰랐었지만 말이다. 토냐가 만들어 놓은 화장품들을 구경하던 중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통에서 발견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토냐는 그걸 보고 그냥 한번 만들어 본 거라고 했을 뿐이니까 말이다. 립스틱과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립스틱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으로 색을 달리해본 것일 뿐이라고 했던 것이다. 기실, 그 것은 우리가 발견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미 완성되거나 불량품쪽에 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실험용 립스틱 색은 짙은 남색과 연두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본 선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거, 좋은데요?" "하아?" 선애는 그 길로 토냐에게 부탁하여 3색의 립스틱을 만들었다. 핑크, 오렌지, 체리색으로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핑크 립스틱은 복숭아 향이, 오렌지색 립스틱은 오렌지 향이, 체리색은 체리향이 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삼색의 립스틱을 합쳐서 '첫 입맞춤의 달콤함!' 이라고 지었다. '푸하하~~ 그건 내가 붙인 거였지...' 예전 생각을 하니 나는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립스틱의 옵션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말 립스틱을 먹으면 달콤한 맛이 나게 했던 것이다. 물론, 각각 복숭아 맛, 오렌지 맛, 체리 맛이 살짝 들어가게 한 건 당연지사였다. 이건 내가 한국에 있을때 샀던 입술 보호제 생각을 해서 첨부한 거였다. 나는 겨울만 되면 입술이 쉽게 트는 바람에 여러가지 입술 보호제를 사용했었는데, 그 중에서 먹게 되면 달콤한 맛을 내는 입술 보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이걸 건의 했을때 선애는 무척이나 회의적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나의 설명에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 설명이란 바로 '립스틱의 30%는 여성이 먹지만, 나머지 70%는 남성이 먹는다.'라는 것이었다. 이건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예전에 내가 본 TV 프로그램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음, 오래전에 본 이야기라 퍼센테이지가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하여간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라 무척이나 놀라고, 무척이나 웃었던게 기억은 난다. 그렇게 립스틱은 대부분 먹게 되기 때문에 설탕보다 더 인체에 무해한 성분으로 만든다나 어쨌다나 하며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야기가 된 것이, 이 립스틱들은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뷰를 앞두고 멋진 남성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소녀들을 겨냥하자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 세계는 곧바로 태어나면 0살이고 일년이 지나야 1살로 쳐준다. 그런데 한국과 똑같은 건 생일이 지나야 1살로 쳐주는 게 아니라 한 해가 지나면 무조건 1살로 쳐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봄에 태어났든, 가을에 태어났든 그해 겨울이 지나 다음해가 오면 둘 다 똑같이 1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18세가 된 귀족의 소년, 소녀들은 봄이 되면 아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성인이라는 입장으로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는 것이다. 귀족 세계에서는 단순한 파티는 모조리 빼고 정식 사교계 파티는 봄과 가을에 열리는 것이 관례였다. 보통 한 해의 시작이 봄부터라는 개념으로 인하여 가게 오픈을 봄으로 결정한 것이었지만, 덕분에 오픈 기념으로 따악 맞는 상품을 개발한 것 같아서 선애는 물론이거니와 벨타이거와 모건도 무척이나 좋아했다. 토냐가 선애와 나의 요구에 맞춘 립스틱을 만드느라 엄청나게 고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픈하기 전부터 정보 길드의 외근 요원들을 동원하여 은근한 홍보 활동을 펼치기는 했지만,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제법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은 했지만, 한국식으로 방송 매체를 통해 대대로 홍보한 것도 아닌데다 새로 오픈한 가게랍시고 대 세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는 이건 양심적으로 대단한 바가지였다. '첫 입마춤의 달콤함!' 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세가지 색 립스틱은 - 물론 세가지를 세트로 파는 건 아니다. - 두 가지 종류로 나뉘었다. 너무 상업적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비싼 것과 좀 싼것으로 나뉘었던 것이다. 비싼 것은 하나에 금화 다섯개였다. 구리 동전인, 1 실버를 500원으로 치자면 이건 립스틱 하나에 2500만원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한국과 이 세계의 물질 가격 비중은 틀리니 진짜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10배 적게 보더라도 250만원이었다. 그렇다고 양이 많은 건 아니었다. 내 새끼 손가락 단 한마디 정도의 적은 양의 립스틱을 크리스탈로 만든, 반지 포장곽만한 자그마한 네모 상자 안에 담아 팔았으니까 말이다. 비록 크리스탈 곽이 비싸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크리스탈 제조사에서 들여오는 값은 은화 50냥이었다. 뚜껑 겉을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여러각으로 깎고 아래 상자 속에 내 새끼 손가락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자그마한 원형 홈을 판 것이라 제법 섬세하고 높은 기술이 필요해 예전 알파두르 야생화 가게에서 취급하던 유리 세공품에 비하면 훨씬 비싼 것이긴 하지만, 금화 가격으로 판매할 것 까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립스틱을 만드는 원 재료 가격과 화장품 제조사 사람들 인건비 등등을 포함해도 은화 10개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것도 립스틱 양이 내 새끼 손가락 정도의 양일 경우에 말이다. 그러니 은화 100냥, 금화 1냥이면 충분한 것을 그 다섯배로 금화 5냥으로 팔았으니, 가격이 책정 되었을때 선애나 나는 무척이나 어이없어 했다. 싼 것은 은화 30냥이었다. 이것도 다 총합해도 은화 15냥이면 충분했건만 말이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건 이 비싼 바가지 립스틱이 다섯 도시 총 평균 2주일 안에 대부분 다 팔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달 정도 팔아도 좀... 남지 않을까... 생각 했을 양이 말이다. 물론, 립스틱 색은 붉어야 한다는 편견 때문인지 오렌지 색은 반 정도 밖에 안 팔려 아쉬움을 남겼지만, 핑크색과 체리색은 정말 '불티 나게' 팔렸다. 그렇게 팔리는 걸 보면서 나는 그들이 이게 엄청 바가지 씌운 것이라는 걸 아는지 정말 궁금했다. 웃긴 건 싼 것 보다 비싼 것이 평균 일주일 정도의 차이를 보며 먼저 다 팔렸다는 것이다. 가게를 오픈하기 전 한 시장 조사에서도 고급 립스틱 가격이 금화 5개까지 가는 건 없었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타이거 상회 수뇌부들은 야생화 가게가 오픈한 지 한달도 안 되어 모여서 '첫 키스의 달콤함!' 립스틱 생산량을 늘릴 것인가 이대로 유지할 것인가를 가지고 열띤 논쟁을 벌였었다. 생산량을 늘려서 많이 판매하는 건 좋지만, 너무 많이 판매하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상품이 너무 흔해져 가치가 떨어질까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님들이 찾는데 상품이 떨어졌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상품량을 1, 5배 정도만 더 늘리는 것으로 결론을 내었었다. 그리고 그 립스틱을 판매할때 립스틱 향을 좀 더 살릴 수 있는, 그와 잘 어울리는 향수와 립스틱 색과 너무자 잘 어울리는, 소녀들의 상큼함과 발랄함을 나타내 줄 수 있는 아이셰도우를 같이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향수와 아이셰도우를 만들어 내느라 윙겟과 토냐가 좀 힘들었지만, 반응은 무척이나 만족 스러웠다. 토냐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피식 웃으며 쉽게 주문을 받아들였지만, 윙겟은 향수가 마음 먹은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거냐고 못한다고 버팅기는 거 설득하느라고 벨타이거 녀석이 고생을 좀 했었다. 뭘로 설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렇게 나온 향수는 고급 축에 드는 꽤나 대단한 향수라서 수익이 꽤나 많아졌다. 그 립스틱과 같이 판매하는 거라 향수들도 꽤나 바가지를 씌웠던 것이다. 사실 전에는 윙겟이 만든 향수들은 시세에 비하여 엄청 싸게 판매하기는 했다. 윙겟이 취미삼아 만든 것이라고 수고비만 약간 받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재료는 크로스웰 남작가 정원에서 대부분 채취(?) 했기 때문에 재료비도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향수를 만들게 되어 남작 저택 정원가지고는 재료 조달이 부족해져 거대 꽃 농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향수값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질에 비하여 싼 가격때문에 찾아주신 손님들께는 정말 죄송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본격적인 재료값과 인력비, 거기에 전국으로 퍼진 타이거 상회 산하 가게로의 운송비에 그 곳 인력비 등등으로 인하여 향수 가격이 대부분 두배 정도 뛰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모든게 잘 풀려갔으면 좋으련만, 역시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특히나,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수도 지점에서 중점적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선애가 그쪽으로 아예 파견이 되어버렸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가지 크고 작은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그건 토냐의 제안으로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토냐의 제안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전 자신의 집안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소일하는 상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휴양지로 이름 높은 록우드에서도 제법 이름이 있었던 호프만 상회에서 오랜 세월 일해 잔뼈가 굵은 그들은 상회 일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들을 상대하는 데에도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인재들을 전적으로 정보 길드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타이거 상회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나이가... 좀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은퇴하기까지는 10여년 정도 걸릴 것 같았고 그때까지는 또 다른 인재들을 스카웃 할 수 있을터였다. 토냐네 집안이었던 호프만 상회는 제법 이름도 높고 탄탄한 상회였지만, 토냐의 아버지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풍비박산이 난 비운의 상회였다. 토냐의 아버지는 토냐의 어머니 말고도 다섯이나 되는 부인들을 두고 있었기때문에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는 싸움이 장난이 아니게 치열했던 모양이다. 토냐도 원래는 그 후계자 싸움에 끼어들려고 했었지만, 그녀의 친어머니가 토냐의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한마디로 든든하게 받쳐줄 언덕을 잃어버려 거의 쫓겨나듯 수도에 있는 기숙사 학교로 들어가게 되어버린 것이다. 뭐, 그 곳에서 의외로 마법에 대한 자질이 발견되어 마법사가 되었다는 것은 나중의 이야기. 하여간, 그런 치열한 후계자 싸움 덕분에 마지막 호프만 상회의 주인이 병들어 자리를 보전하고 눕게 되자 튼튼하고 컸던 상회가 흔들려 틈을 보이는 바람에 주변 상회들이 그 틈을 파고 들어와 결국은 망해버렸다... 라는 흔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토냐가 우리에게 제일 먼저 소개한 스탠리와 로어는 호프만 상회의 총관의 자식들로써, 총관은 그 당시 누구의 편도 안 들고 중립을 지킨 모양이었다. 결국에는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마지막에는 차라리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밀어 상회를 차지하게 했더라면 어쩌면 상회가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후회를 했던 모양이다. 내 생각인데 그가 밀었다면 아마 토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토냐와 스탠리 로이 형제 사이를 봐서도 그렇고, 토냐는 마법사가 될 정도로 머리가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뭐, 그래봤자 지나간 일이다. 역시 사회에서 탄탄하게 이름을 높이려면 집안이 평안해야 한다는 건 진리였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 타이거 상회로서는 여러가지로 이익이 되었으니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자만 나쁘지만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다른 지점의 일이었고, 선애가 직접 달려와 담당한 수도 지점은 경험이건 뭐건 아무것도 몰라 우왕좌왕 하는 덕분에 초창기부터 무척이나 삐걱댔다. 다시 생각하자면, 차라리 선애를 다른 지방 지점으로 보내고 경험이 많은 존재들을 수도로 보낼걸...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제법 뿌리를 내린 지점과 그러한 일들을 겪으므로 좀 더 성장한 것 처럼 보이는 선애를 보며 오히려 잘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점이 문을 닫을 위험한 일을 몇번이나 겨우 겨우 넘긴 시점에서는 말이다. 그 당시에는 나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 뒤집어 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닥쳐랏! 결투닷!" "이쪽이야말로 바라는 바다!" 잠시 창 밖의 너무나 좋은 날씨를 바라보며 옛 일을 회상하던 날 일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에휴... 또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수도에 와서 여러번 겪은 일이지만, 귀족들의 사상은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벨타이거 녀석이라거나 선애를 졸졸 쫓아다니는 클라리사 또한 귀족이긴 하지만, 나는 이 곳에 와서 귀족들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귀족도 중앙 귀족과 지방 귀족으로 나뉘는데, 중앙 귀족은 지방 귀족들을 마치 귀족이 기사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거였다. 하기야, 그럴만도 한 것이, 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건 바로 왕과 그 중앙 귀족들이었으니 단순히 영지와 작위를 가지고 있고, 영지 내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지방 귀족들보다 콧대가 센건 이해가 간다. 그러나, 화장품 판매원의 방문 차례가지고 자존심 운운하며 기사들의 결투까지 가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귀족들은 자신들은 평민들과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은 태아로 있을 자궁이 황금으로 되어 있다거나, 양수가 향유라거나, 태어날때 금팔찌라도 차고 태어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지 원... 하여간, 그리하여 뭔가 필요하다 할때 자신들이 직접 오지 않고 가게보고 직접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래된 명문가일수록 그들이 오랜 세월동안 거래한 거대 상회가 있었으니 그들과 거래하는데 익숙해진 집안의 살림을 휘두르는 노마님들과의 거래를 트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것에 흥미를 보이는,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하는 소녀들의 가슴을 자극하기로 한 거였고, 그건 잘 먹혀 들어갔다. 그러나, 양갓집 규수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초라하고 지저분한 가게까지 올리가 만무했다. 설사 그들이 온다고 해도 주변에서 '그래, 다녀와라.' 하고 고이 놔둘리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천상 우리가 가야 했다. 그래 뭐... 손님은 왕이니 오라면 가야 하고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건 안다. 아는데... 문제가 있었다. 화장품이라거나 향수 같은 경우에는 같은 제품을 여러개 일괄적으로 생산하니 문제가 없었다. 모든 종류를 하나씩 가지고 가도 가게에는 판매할 상품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드워프 제품이라면 문제가 틀려졌다. 드워프들은 그들 만의 고유한 장인 정신에 의거하여 똑같은 제품을 두개 이상 절대로 만들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드워프 마을에서 가지고 온 유리 세공품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 모든 제품은 단일제품이었다. 그것 때문에 드워프 마을에서 공수해온 후 각 지방으로 나뉠때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모른다. 똑같은 것이 다섯개씩이라면 각 지점에 한 종류씩 보낼텐데 이건 몽땅 다른 제품이니 어느걸 어느쪽으로 보내야 하는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온 것인데, 그 드워프 제품을 가게 홍보로 사용하다보니 호출하는 귀족 아가씨들께서는 당연하겠지만, 드워프 제품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사든 사지 않든간에 말이다. 그러니 한 귀족 영양에게 호출을 당해서 가 있는 동안에는 가게에서는 드워프 제품들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귀족 영양의 호출이 있더라도 응할 수가 없었다. 드워프 제품 빼놓고 갔다가는 '나를 무시하는 거냐!' 라는 호통을 들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귀족들의 정신 세계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정신과 의사였다면 이 세계의 귀족들 뇌를 해부해보고 싶어했을지도... 하지만, 이 중앙에 있는 귀족들을 우리가 뭘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터라 그건 모두 우리가 감내해야만 했다. 사실, 수도 지점 야생화 가게의 50% 이상의 수익이 그들에게서 나오기에 우리로써도 크게 나쁜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척이나 황당한 건, 우리 가게 사람들을 불러들이는데에도 귀족들의 자존심 싸움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뭐, 격차가 조금이라도 있는 가문 사이라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그럼 나중에 오던 먼저 오던 아랫쪽 가문이 양보하고 우리도 윗쪽 가문에 먼저 가는게 당연 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비슷비슷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가문끼리 부딪히면 생겼다. 그 두 가문이 교류가 많고 친한 사이라면 먼저 콜 한 쪽을 가주면 되는데, 서로 다른 파벌에 있다거나 아니면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가문끼리라면 이건 정말 골치가 아파졌다. 아니, 먼저 콜한 쪽을 먼저 가는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주면 안되는 걸까? 나중에 와서 주문을 해주면 그나마 싫은 내색만 보이고 돌아가는 정도에서 그치는데, 문제는 먼저 와서 콜한 가문 사람들이 돌아가기 전에 다른, 그러니까 사이가 좋지 않은 가문 사람들이 주문하러 온 경우였다. 처음에는 아직 경험도 없는 - 영리하다고 해도 경험이 없으면 뭘 알겠는가 말이다. - 점원이 순진하게 "이쪽 가문에서 먼저 주문이 들어 왔기때문에 그쪽에는 나중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었다. 이게 어디가 잘못된 말이란 말인가? 그랬더니 먼저 주문하러 온 쪽은 당연하다는 듯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나중에 온 쪽이 뭐가 잘났다고 그자리에서 대놓고. "뭣이라? 우리 ### 가문을 무시하는 것이냐?" 라고 나온 것이었다. 먼저 주문한쪽을 먼저 가겠다고 했는데 그걸 귀족 가문을 무시하는 거라고 알아듣는 그 귀족 영애의 시녀가 잘못된 것 아닌가? 정말 유령이 코가 막혀서 콧방구 낄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직접 당하는 초보 점원 아가씨로써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아니... 저어... 이쪽 가문에서..." "닥쳐랏. 너희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 즉시 준비를 하고 우리 가문으로..." 하여간, 윽박을 잘 지르는 건 귀족이라기 보다 그 귀족들을 모시고 있는 쪽일 거다. 그런데 그때 가여운 초보 점원 아가씨를 구해준 건 먼저 콜을 한 뒤 막 돌아가려고 하는 측이었다. "아니, 이거 그냥 넘길수가 없는 말이로군. 우리 가문에서 먼저 와서 불렀는데 왜 그쪽으로 가야 한다는 거지?" "흥, 웃기는 소리. 왜 우리가 당신네 가문에 양보해야 할 필요가 있나?" "그쪽 가문은 상식이란 말을 모르는 모양이군." 그즈음에는 다른 점원 아가씨의 연락을 받은 지점장이 달려왔지만, 이 두 가문 사람들, 그것도 귀족 당사자가 아니라 그 밑의 하녀 - 아마 귀족 영애들을 직접 담당하는 유모라던지 아니면 영애 담당 시녀들의 관리자인 수석 시녀 였을 듯 - 들간의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전전긍긍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점장과 점원들이 손 놓고 보고만 있는 사이 싸움이 커져버려 결국 그 중년 하녀들을 보호하고 온 기사들간의 결투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선애가 없었기에 나와 선애는 나중에 지점장의 연락으로 이 일을 듣고 얼마나 황당해 했는지 모른다. 자존심을 세우는 사이면 사이인 것이지, 그게 단지 화장품 판매원 오라가라 하는 것가지고 싸울 일이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다. 나중에 귀족들은 사소한 꼬투리 하나 가지고도 사교계에서 심심하면 몇달 동안이나 두고두고 씹히는 불쌍한 족속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말로 듣는다고 그게 이해가 되나?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결투는 울 가게에서 안 하고 밖으로 나가서 했다는 것과, 나중에 이긴 가문쪽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와 당장 오라고 했다는 것, 진 쪽은 다시는 가게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런 싸움들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이라도 정말 끊이질 않고 계속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길때마다 고래 싸움에 터지기 싫은 새우인 양, 가게에 들어와 매상을 올려줬을지도 모를, 간이 작은 손님들을 다 내쫓는 것이었다. 그나마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영업 방해를 하는 두 귀족 가문중 이긴쪽이 와서 매상을 팍팍 올려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런 주문이 하루에 한두개 이상 들어오다보니 드워프 제품이 가게에 얌전히 진열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말을 들어보니 그렇게 한번 콜이 되어 귀족 가문에 들어가면 곧바로 귀족 영애를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불렀으면 기다려주지는 못할 망정 도착하면 금방 나와서 볼 일을 봐줘야 하는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꼬옥 한시간 이상은 죽치고 기다리게 한 뒤에야 겨우 인심 쓴 양 만나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가게쪽의 판매원은 만나주셔서 크나큰 영광인 양 넙죽 업드려 감사에 감사를 표하고 말이다. 남의 돈 얻기가 힘들고, 장사라는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야 하는 거라고는 하지만,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내 동생이 판매원으로써 그렇게 하고다닌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그만두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겨우 만난 귀족 영애들에게 가지고 간 울 가게의 대표 향수인 '새벽의 축복' 부터 시작하여 모든 향수 제품들과 화장품 제품들, 거기에 유리병과 유리 세공품, 마지막으로 드워프 제품들까지 쭈우우욱~~ 선전 겸 판매 맨트를 펼치고 나면 한시간은 후딱후딱 지나가고야 만다. 단지 판매 맨트만 그 정도지, 향수는 직접 냄새 맡게 하고 화장품은 약간 써보게 하고 등등 하다보면 두 세시간은 휘리릭~~ 이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판매원이 한 귀족 가문을 방문하는 건 기껏해야 한 곳, 많아야 두곳이다. 이 귀족 가문들이 우리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다면 하루에 서너곳은 거뜬하겠지만,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천상 그들이 좋은 시간에만 우리가 맞춰줘야 하는데, 그게 거의 대부분 엇비슷한, 점심을 먹고 한 두시간 정도 지났을 즈음 이었기에 하루에 몇탕 뛰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보니 주문이 밀리면 나중에 온 가문은 며칠 정도 기다려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면 성질 급한 쪽에서는 너그들이 뭔데 우리를 기다리게 하느니 하고 마구마구 화를 내는 것이었다. 하여간, 힘 없는게 죄라고... 그렇게 화를 내면 뭐라고 변명하지도 못한다. 만약 그렇게 화내는 이들에게 어느어느 가문에서 먼저 주문을 하셔서... 라고 변명을 했다간 그 가문이 이들보다 높으면 쉽게 넘어가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비슷하고 라이벌이면 당장에 불벼락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변명을 하지 말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싹싹 비는게 최선이었다. 아니, 우리가 원해서 주문을 먼저 받은 것도 아니고 지들이 늦게 온 거면서 이게 무슨 행태란 말인가.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도 속에서 울컥 울컥 하고 기가막히는데, 직접 당하는 점원들과 판매원 들은 하루에도 몇번이나 속에서 울화가 터지겠는가. 여기에 홧병이 있다면 제일 먼저 그 병에 걸릴 사람들이 아마 이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던 중, 정말 가장 큰 사건은 선애가 온 뒤에 일어났다. 그렇게 자꾸 귀족들의 콜이 이어지는 건 좋은데, 그러니 평민이라 하더라도 부유한 이들에게 어필하려는 시도는 자꾸 어긋나게 되었다. 가게에 물품이 진열되어 있어야 팔든지 말든지 할게 아닌가? 그런데 드워프 물품이 가게에 진열될 시간이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오전에 잠깐, 그리고 가게 문 닫을 시간에 잠깐, 거기에 귀족들 간의 문제는 자꾸자꾸 생기고 해서 그 즈음 선애가 직접 수도 지부로 파견 되었던 것이다. 가서 직접 상황을 보고 뭔가 해결책을 마련하던지 하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선애가 도착하여 이 모든 상황을 보고받을 즈음, 일이 한번 거하게 터져 버렸다. 일의 발단은 단순한 것이었다. 드워프 제품들은 작은 것이지만 그 세공의 세밀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희귀성 등등 때문인지 하나당 크기에 비하여 가격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손바닥 반만한 녀석이 백금화 십단위 가격에서 놀았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드워프 제품들을 가게에 내놓게 되었을때 상회 측에서는 쉽게 팔릴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가게 홍보 차원에서 들여놓은 것이었다. 팔리기야 팔리겠지만, 아무래도 금방 다 팔릴 것이라고는 예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수도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드워프 제품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수집하려는 돈 많은 귀족들이 바글바글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맨 처음 홍보용으로 들여온 유리제품들은 모두 한달도 안되어, 두 세 귀족에게 거의 전매되다시피 다 팔리고야 말았다. 이렇게 쉽게 팔리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냥 판매하기보다는 경매에라도 붙일 걸 그랬나보다. 하여간, 그리하여 수도는 다른 지방과 틀리다는 걸 깨닫고는 드워프쪽에 부탁하여 수도에는 전에 비하여 두배의 숫자, 그리고 그 중 절반은 전에 들여온 것들 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제품들을 들여놓았다. 때문에 우리 가게를 노리는 도둑들이 늘어 보안때문에 머리가 아프게 되긴 했었다. 그거야 어쨌든, 그렇게 한단계 높은 제품을 들여놓은 뒤 얼마 안 되어 중앙 귀족중에서도 제법 큰 세력을 가진 귀족가 집안에서 가게 판매원을 불렀다. 사실, 한 단계 높은 제품을 들여놓은 뒤 정보 길드를 통하여 은밀하면 은밀하게 소문을 퍼트렸기에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판매원이 잽싸게 드워프 제품들을 싸들고 가서 전의 제품 가격보다 두배 이상이나 비싼 물품을 잘 판매하고 왔다는 건 좋았다. 그리고 그 뒤에 다른 귀족가에 불려가서 또 판매하고 왔다는 것도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중에 드워프 제품을 산 귀족가의 여식이 그 보다 앞서 드워프 제품을 사간 귀족가의 여식에게 티타임 초대를 받고 갔다가 그녀가 자랑하듯 내 놓은 드워프 제품을 보고 열받아서 우리 가게로 쫓아왔다는 것이었다. 서로 괜찮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가문 사이라고 해도 같은 또래의 여식들 간이라면 은근히 경쟁 심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보통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 귀족가의 영애는 자신이 초대받아 갔던 귀족가의 영애가 산 드워프 제품이 자기가 산 것보다 훨씬 더 좋아보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자랑하려고 가지고 갔던 제품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괜히 열이 받아가지고 식식대며 몸소 우리 가게까지 행차하셨던 것이다. 그래놓고는 하녀를 통하지 않고 몸소 어찌할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점장을 불러내어 왜 그 제품을 자신에게는 선 보이지 않았느냐고 따졌던 것이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다. 잘못이라면 늦게 호출한 그녀가 아닌가? 아니면 그 소문을 늦게 듣게 된 그녀의 불운... 이라고 할 수 있을테고 말이다. 이건 그녀도 알고 점장도 알고, 그녀의 하녀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즉, 한마디로 그녀가 쫓아와서 길길이 날뛰는 건 차마 자신의 자존심을 구긴 그녀에게 화풀이 할 수 없으니 힘 없는 우리에게 와서 화풀이 하는 것이었다. 이런 걸 바로 동쪽에서 뺨 맞고 서쪽에서 화풀이 한다고 하는 것이겠지? 정말... 힘 없는 게 죄었다. 그런 죄를 지니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점장은 그녀가 화풀이하면 화풀이하는대로 고스란히 들어주며 싹싹 빌며 그녀의 화가 풀리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격이 어지간히도 X가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지 쉽게 화를 풀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녀에게 시달릴대로 시달린 점장이 지쳤는지 그녀에게 조심스레 어차피 얼마 후에 제품을 새로이 들여올텐데 그때 제일 먼저 보여주겠다고 달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게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던 듯, 그 귀족가의 성질 더러운 여식의 성격이 폭발해버렸다. "산토이경! 저 건방지고 버릇 없는 녀석의 팔을 잘라욧!" '세상에나...' "뭐야, 저게 정말... 읍읍읍..." 며칠 전 수도 지부에 도착하여 윗층 사무실에서 여러가지 사항에 대하여 보고를 받고 있었던 선애도 점원이 급히 올라와 지부장을 찾자 같이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귀족을 대하는 경험이 없던 그녀가 나서는 것 보다는, 그래도 어느정도 경험이 있는 지부장이 나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른 점원들은 물론이거니와 선애와 같이 와 있었던 소피와 로어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들의 말림 덕분에 그나마 참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기사가 나서자 구석에 있던 선애가 폭발해 버렸던 것이다. 다행이 다급해진 소피가 선애의 입을 막고 몸을 제압해서 나서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도 정말 기가막혔다. 아무리 화가나도 그렇지, 어떻게 기사를 시켜 사람의 팔을 자른단 말인가. 그런데, 더 황당했던 건 그 기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XX 같은 성격의 여식이 시키는 대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스르릉 뽑아 지점장에게 다가갔다는 거였다. "으브브브~~!!" 그 모습에 선애가 발버둥을 치며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다급하고 절박한 시선을 보내는 거 보니 아무래도 말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계속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선애의 말이 없어도 나서려고 했었다. 그래 망설이지 않고 나서려고 하는 그 순간... 탁~! "읍..." 아무리 단련이 된 소피로써도 계속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선애를 계속 억누르고 있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결국 소피가 선애의 뒤통수를 수도로 내리쳐가지고 기절시키는 거였다. '에엣...' 그에 놀란 내가 선애의 안위를 살피는 그 짧은 시간에... 쉬이익~!! 타악~! "크으윽..." "꺄아아아악~~" "어떻게해..." '응? 이런...'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점장은 왼손으로 오른 손 팔꿈치 위를 꽈아악 잡고 있었다. 그런 바닥에는 그의 잘린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고, 그 웅덩이 속에는 점장의 잘린 오른손 팔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그 그로테스한 모습에 나는 경악을 흘리기 보다는 다급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렀다. [으아아아~~ 저 팔 빨랑 잡아서 잘 둬야 하는데~~ 이거 내가 나설수도 없고... 우씨 하필이면 선애가...] 점원들은 불쌍하게도 기세등등한 귀족 무리 앞에서 나서지도 못하고 구석에서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흥, 지금은 이걸로 봐주지. 그러니 앞으로 잘해. 만약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팔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상종 못할 인면수심 같은 사악한 악당같은 계집애는 무척이나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그딴 말을 내뱉고는 몸을 돌려 나가는 것이었다. 점장의 팔을 베어버린 기사는 무표정으로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 넣고는 몸을 돌려 계집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에 뒤쪽에 있던 기사 한명이 안됐다는 표정으로 점장을 향해 자그마한 가죽 주머니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이거 가지고 빨리 신전으로 달려가거라. 그 돈이면 팔을 붙일 수 있을 거다." 그들이 모두 가게 밖으로 나가자 그때서야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만 있는 듯하던 점원들이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였다. 두 명이 가게 문과 창문들을 모조리 닫아 밖에서 힐끔힐끔 안을 들여다보던 구경꾼으로부터 시선을 차단하자, 한 점원은 재빨리 점장에게 달려가 급한대로 자신의 앞치마를 찢어 지혈을 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점원은 여전히 피 웅덩이 속에서 점점 꿈틀대는 힘을(?) 잃어가는 팔뚝을 잡아 챙겼다. "여기!"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다른 점원이 깨끗한 수건을 가지고 오자 그 안에 잘 싸놓는 것이었다. "마차가 왔습니다." 부점장은 아까 귀족 무리가 있을때 슬그머니 사라졌다 싶었더니만 이런 일을 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에 점원 한명이 지점장을 부축하고 다른 점원이 깨끗한 수건에 싸인 팔을 챙겨들고는 부지점장을 따라 황급하게 가게 뒷문으로 나갔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점원들이 잽싸게 가게 안에 있던 핏자국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한 신속하고 나무랄 곳이 전혀 없는 동작들에 입만 떠억 벌리고 있던 나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허... 이거야 원... 이들이 누구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어.' 그들의 모습에 나는 지점장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안심하고는 소피가 선애를 옮긴 윗층으로 올라갔다. 선애는 사무실의 길다란 소파에 곱게 누워 있었는데, 소피가 아까 칠때 힘을 조금만 줬는지 마악 선애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끄으응..." [괜찮냐?] 슬며시 말을 걸자 한쪽만 실눈을 떠 날 바라보던 선애가 한숨을 쉬더니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내 뒤통수 때린 사람이 누구야?" 그러자 소피가 즉각 선애가 앉은 소파 앞에 무릎꿇고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벌을 내리시면 달게..." 그렇게 마악 소피가 사과의 말을 하려고 하는데 선애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벌떡 일어서더니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소리쳤다. "그보다, 지점자앙~ 지점장, 지점장 어떻게 됐죠? 소피, 지점장은?" 갑작스러운 선애의 행동에 놀란 소피는 벙~ 찐 얼굴로 선애를 바라만 보고 있다가 선애가 그녀를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내자 그제야 쿡 하고 웃었다. "소피, 지금 웃음이 나와요? 지점장씨가 어떻게 됐냐니까?" 여성스럽게 살짝 주먹을 말아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던 소피가 얼른 웃음을 그치고 정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지부장님은 부지점장님께서 옮기셨습니다. 지금쯤 치료를 받고 계실 겁니다." "치료?" 선애가 고개를 갸웃하다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치료라뇨?" [그게... 결국 그 빌어먹을 계집애의 지시에 따라 오른쪽 팔을 잘랐거든. 팔꿈치 밑을 이렇게...] 소피 대신 내가 잘린 부근을 반대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선애의 눈초리가 살벌해졌다. "팔을... 잘랐어? 그 계집애가? 왜 아무도 안 말렸지?" '아무도'라고 하지만 아마도 그건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선애의 매서운 눈초리에 나는 머쓱해서 머리를 긁었다. [아니 그게... 내가 미처 나서기 전에 그래서...] 차마 선애 너에게 한눈 파는 사이에 그랬다고 말하기 어려워서 그렇게 둘러댔다. 그리고 그 사이 소피도 황급히 이야기를 늘어놨다. "선애님, 분하시겠지만 참으셔야 합니다. 저희는 평민, 귀족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뿐입니다." "하, 그렇다고 팔 자르는 걸 가만히 둔단 말이에요?" 선애게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묻자 로어가 나섰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귀족이고 우리는 평민이니까요. 법으로 귀족은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즉결에서 처분이 가능합니다. 목숨까지 빼앗을 수는 없지만요." "뭐라고요? 도대체 누가 그런 황당하고 어이없고 쓸모없는 법을 만들었답니까?" "귀족들이지요. 이 나라에서 법을 만드는 건 귀족들이니까요." 체념이랄까 서글픔이랄까.... 하여간 그러한 감정을 담은 착 가라앉은 소피의 대답이 분노로 가득한 선애의 머릿속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 모양이었다. "여긴, 계급 사회랍니다." 그리고 뒤를 이은 로어의 말에 이를 한번 빠드득 간 선애는 뒤를 휙 돌더니만 오른발을 치켜 들었다. "이 @@@@ 하고 ##### 하고 &&&&&& 할 놈드으으으으으을~~~!!" 한동안 소파를 사정없이 짓밟으며 고함을 지르더니 지쳤는지 울분이 풀렸는지 헥헥 거리며 자신이 짓밟던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버엉~ 찐채 바라보던 사무실 사람들이 픽픽 웃으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고 소피와 로어만이 그 옆을 지켰다. "분이 풀리셨습니까?" 잠시 선애가 숨 고르길 기다린 로어가 묻자 가만히 있던 선애가 벌떡 일어났다. "이 정도 가지고는 임시 방편일 뿐이에요. 확실하게 기분 풀고 와야겠어요. 그러니 그 동안 나머지 일은 로어가 알아서 해주세요. 소피, 나가요." 왠지 팔까지 걷어부치는 것이 뭔가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다. "아, 예." 소피는 당황한 얼굴로 있다가 선애가 먼저 척척 걸음을 옮기자 얼른 그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하려고?] 나도 선애의 뒤를 쫓아가며 묻자 선애가 이를 빠드득 갈더니 물었다. "감히 날 건드리다니... 이 대가는 반드시 받아내고야 만다. 흥, 두고보라지." 선애의 표정을 보자니, 어째 내가 고달파지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대략 30분 정도 지난 뒤에, 선애는 고급스러운 찻집에 앉아 있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복고풍 인테리어라고 일컬어졌을 듯한, 일명 엘레강스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머니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그런지 각 좌석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각각은 우아한 칸막이로 막혀 있어 프라이버시 보호는 확실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곳 중 한 자리에 앉아 주문한 치즈 케잌과 시원하고 달콤한 과일 쥬스를 받아든 선애가 마악 흐뭇함과 기대 어린 표정으로 치즈 케잌 한 조각을 떠먹으려고 할때였다. [야, 왔다.] "응?" 내 말에 고개를 든 선애의 시야에는 예의 그 야비해 보이는 미소를 띄운 척 플래밍이 선애의 맞은편에 앉고 있었다. "여, 많이 기다렸지?" 한 손을 들어보이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자마자 선애는 인상을 파악 찡그렸다. "그거 참, 황송하옵게도 직접 납셔 주셨군요." 살짝 비꼬는 선애의 어조에도 척 플래밍은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장기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말이지." "서비스라면 당신 보다는 아주 잘생긴 남정네가 나와서 맞아주는게 더 좋은데 말이죠." 선애가 포크로 떠놨던 케잌 조각을 거칠게 입 안에 넣어 씹으며 말하자 그가 하하 웃었다. "아무나 내 보낼수 있나." "흥..." 그의 말을 대놓고 코웃음 치던 선애가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지점장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쪽에서 데리고 간 것 맞죠?" 선애의 물음에 척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 늦지 않았다고 하더군. 팔도 잘 이어붙였고, 응급조치도 잘해서 다른데 다친 곳도 없어. 단지 피가 너무 많이 흐르고 쇼크를 좀 받아서 며칠은 푸욱 쉬어야 한다더군." 척의 말에 선애는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고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도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며칠이 뭡니까? 다 나을때까지 푸욱~ 쉬어도 괜찮다고 전해주세요." 선애의 말에 척이 풋 하고 웃었다. "뭐야, 그건? 어째 그만두라는 이야기 같다?" "에? 으음... 사실 이번 일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면 그러라고 해주고 싶어요. 그런 일을 당했는데, 계속 하고 싶겠어요?" 척이 은근슬쩍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선애가 여전히 진지하게 말하자 그제야 척도 자세를 바로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 우리는 약하지 않다. 맨 밑바닥에서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 온 사람들이야. 이 정도의 일 가지고는 꿈쩍도 하지 않아." 처음 정보 길드의 바탕이 된 자들은 그의 말 그대로 맨 밑바닥에 있던 사람들, 즉 하류층 인생들이었다. 작은 여관이나 식당,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이었다. 술집에서 남정네들을 상대하는 여자들이라던지, 길에서 영업 마차를 끌고 다니는 마부라던지, 소매치기, 좀도둑, 거지, 뒷골목의 깡패 등등 사람들로부터 동정이나 경멸, 업수여김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서 조직을 이루고 그 중 특출난 사람이 나타나 이만큼까지 성장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저력을 말하는 척 플래밍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긍지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어 선애 또한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선애의 태도가 마음에 든 듯 척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데 왜 부른 거지? 설마 지점장의 상태를 물어보려고 호출한 건 아닐테고..." 척이 본론으로 들어가자 선애가 아까의 일이 떠오른 듯 빠드득 이를 갈며 대답했다. "오늘 왔었던 그 싸가지네 집안 좀 가르쳐 주세요." "뒤집어 엎게? 그 집안은 제법 세력이 있지. 그러한 집안을 무너뜨릴 수 있을만한 정보는 1급에 속해. 게다가 그러한 정보를 안다고 해도 그걸 이룰 수 있는 힘이 있어?" 척의 말에 선애가 아주아주 기분 좋게 비웃음을 띄웠다. "훗, 너무 앞서 가시는군요. 플래밍씨의 말씀대로 저 그 집안을 무너뜨릴만한 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요. 그만한 대가는 받아 낼 생각입니다." "호오, 그런가?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니 보물 정도야 있겠지요? 게다가 중앙과 줄을 대기 위하여 돈 있는 지방 귀족들이 바친 재력도 상당할테구요. 여기 수도 저택에 있는 보물과 그 위치, 그리고 그 곳을 둘러싸고 있는 경비 체계." 선애의 말에 척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입을 열었다. "흠... 그건 2급이 넘어가는 걸? 게다가, 그걸 해낼 인재까지 찾아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이쪽이 알아서 해요. 제가 이번에 부탁할 건 정보. 그리고 2급이 넘어간다면... 저택에서 얻은 보석을 대가로 드리지요." 그 말에 척이 비식 웃었다. "이런 이런, 삼키기 힘든 음식은 우리에게 떠넘기는 건가? 그리고 대가를 치뤘다고 생색을 내려고?" "내가 삼키기 힘들다고 그쪽에서도 못 삼킨다는 건가요? 실망인데요. 그 정도도 못한다니... 못한다면 관두시지요." 선애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말하자 척이 쿡쿡 웃었다. "도발하는게 너무 어설퍼. 다른 녀석에게 그랬다가는 금방 속셈이 들통 나겠는걸?" 마치 귀여운 동생, 아니 재롱 떠는 손자를 바라본다는 시선에 선애가 자존심 상했는지 비웃는 표정을 금방 잃어버리고 인상을 썼다. "됐네요. 당신 완전 잘났어요. 우쒸, 잘나서 좋겠네요." '이거, 이거... 돌아가면 또 열받아서 방방 뜨겠군.'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열받아서 죄 없는 치즈 조각 케잌만 포크로 사정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그걸 척이 그냥 고이 넘어갈리가 없다. "어이, 괜히 죄 없는 케잌에 화풀이하지 말고...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면 벌받아." "먹을 거예요. 우쒸... 아는 거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네요." "어, 잘 아네? 나 좋아하는 음식 많은 거 어떻게 알았어?" 선애의 비꼬는 말에 무지무지 즐겁게 받아들이는 척을 선애는 매섭게 노려봤다. "재밌어요? 퍽도 재밌겠네요?" "아하하하... 그렇게 화내지 말고. 알았어. 그 정도는 이미 소유하고 있을테니 며칠 내로 보내줄게." "쳇쳇..." "어어... 많이 삐졌나보네? 그만 풀어. 내가 그 케잌하고 음료수 사줄게." "됐거든요?" "허... 음료수 하나 추가해줄까?" "아, 됐다니까요." "에이이... 화 풀어라. 내가 저녁도 사줄께." "어어억... 역겹거든요? 지금 어디서 애교 떨어요?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척의 모습에 선애가 진저리를 쳤다. '미안한 말이지만... 진짜 안 어울리는군.' 그 날로부터 사흘 후, 선애는 소피로부터 한 뭉치의 서류를 받아볼 수 있었다. 그건 물론 얼마 전 가게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간 그 구워 먹고 튀겨 먹고 훈제 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귀족가의 철 없는 계집네 집안에 대한 것이었다. "/어디보자... 오호라... 그 지지배가 후작 집안의 영애였어? 캐링턴 후작가라... 아, 그런데 후작이면... 꽤 높은 거 아닌가? 귀족 중에서도 공작 다음이잖아?/" 선애는 가게측에서 마련해준 자신의 숙소에 와서 나와 둘이서 읽고 있었다. [뭐, 여기는 이 나라의 수도니까. 후작이 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게 없지. 왕도 있는데 뭘...] "/그거야 그렇지만... 왠지... 백작이나 남작들이야 만나도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후작이라니 좀 놀랍다. 이 사람들은 완전 딴 차원의 세계 사람들 같은 느낌이었거든. 평생 가도 한번 만나기 힘든 그런 사람들 말이야./" [뭐어... 그래도 중앙 귀족들이 있는 곳에 후작이 빠질리가 없잖아.]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 단지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어디보자... 오호라... 이 후작가가 루빈스타인 후작가와 사돈지간이라는 군./" [호오, 루빈스타인 후작가와? 하기야... 귀족들은 정략 결혼 같은 거 많이 하잖아? 보통 한 다리 건너 보면 다 사돈에 팔촌 아닌가?] "/그건 그런데... 왜 그 지지배 있잖아? 환타인지 미란다인지 하는.../" [아아, 너를 함정에 집어 넣으려고 했다가 된통 당하게 만들어준? 갑자기 그 녀석은 왜?] "/그 지지배하고 그 지지배 오빠인 그 차갑게 생겨가지구 잘난체 하는 녀석, 그 두 사람의 어머니가 이 후작가 사람이라는 군. 지금 캐링턴 후작의 동생이래./" [오오... 이거야 말로 정략 결혼이로구만? 꽤 세력 있는 두 집안이 정략 결혼을 통하여 더더욱 세력을 넓힌다... 이건가?] "/그건 아닌가봐. 정보 길드의 보고에 의하면 이 두 후작가 사이가 별로 안 좋은 사이였대. 그러다가 전 대 후작들이 그만 싸우자고 화해하는 식으로 자식들을 정략결혼 시켰나봐./" [흠... 그렇다고 금방 사이가 좋아지려나? 아무래도 그냥 딸내미를 희생 시킨 거 같은데...] "/그런 거 같아. 아... 혹시 그랜트 녀석이랑 미란다 녀석 혹시 부모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거 아냐? 그래서 그 지지배가 그렇게 삐뚤어졌다든가.../" [보고서에 그런 것도 나오냐?] "/에? 아니... 이건 그냥 내 생각. 여기는 캐링턴 후작가에 대해서만 나오니... 그랜트와 미란다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어. 현 후작의 동생이 그 집으로 시집가서 두 아이를 낳았다... 라는 식으로./" [헤, 그래?] "/응응. 이거 후작가가 가지고 있는 보물에 대해 알아오라고 했는데 간단한 인적사항까지 같이 보내왔네. 그런데, 제법 재밌네. 루빈스타인 후작가에 대한 것도 보내달라고 해볼까나?/" 이 세계에 온 후 한국에서 즐기던 모든 오락거리, 즉 만화책이라던지 인터넷 등등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선애로써는 오랜만에 보는 흥미로운 이야기였던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하기야, 남 집안 이야기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나 프라이버시에 가까운 이야기들... 그래서 가쉽 기사가 그렇게 인기 있는 거다. [뭐, 나중에 그러든지... 하여간, 그 집에서 가지고 있는 보물이 얼마래?] "/아아... 잠시만 기다려봐. 여기 있네.../" [어디, 어디...] 수도에 있는 캐링턴 후작가 저택에 보관중인 많은 재물들 사이에 가장 가격이 높은 것은 캐링턴 후작가 대대로 내려온 몇몇 가보들 중 하나라고 한다. 대부분 후작가의 영지에 있는 본 성에 보관되어 있는 모양이지만, 이것만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후작이 이 수도 저택에 가지고 왔다고 한다. 아마 후작이 그것을 끔찍하게 아끼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조심스러운 추측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대로 물려 내려왔다는 가보는 엄청나게 비싼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것은 한쌍의 장갑... 이라고 해야 할까? 손등만 가려주는 형태의 보호구라고 했다. 여러가지 마법 기능이 덧대어 있는 모양이지만, 그 자세한 기능까지는 정확하게 알아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손등 장갑 전체가 미스릴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미스릴이란, 이 세계에 와서 알게 된 금속인데 산재량이 적은데 유용가치가 무척이나 높아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라고 한다. 이게 다루기가 힘들어서 드워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장인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까다로운 금속인데, 일단 만들기만 하면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뛰어난 강도까지 자랑한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보통 장신구처럼 위장된 보호구 아니면 무기로 많이 사용되는 금속이라고 했다. 특히나 마법을 잘 받아들이고 오래 보호하는 등등의 마법과 상성이 잘 맞는 금속이라 마법 보호구로도 많이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비싼데, 그 장갑 가운데에는 강도를 높이기 위함인지 아니면 미적 감각 때문인지, 아니면 그 두 이유 모두를 위함인지 커다란 핑크 다이아 몬드가 박혀있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살때도 서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핑크 다이아몬드는 커녕 1케럿 짜리의 다이아 몬드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와서 벨타이거 녀석이 선애에게 선물 사준다고 보석점에 데리고 갔을때 봤지. 아, 어쩌면... 한국에서 좀 더 살았다면 결혼을 해서 결혼 반지로 다이아 반지를 받았을지도... 하여간, 그러한 신세였기 때문에 선애는 핑크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뭔지 잘 감을 잡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대충 안다. 다이아몬드는 보통 투명한 색인 줄 알지만, 그 중 아주 희귀하게 안에 분홍색이 나는 다이아가 있다고 한다. 희귀하다고 하니까 당연 보통 투명한 다이아몬드보다 몇배나 비싸겠지. 이 다이아가 얼마나 비싸냐 하면, 한국에서 쉽게 들여오지 못할 정도로 비싼 거라고 알고 있었다.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참,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쁘지만... 한국에 들여오는 거라고는 1캐럿도 안되는, 그것도 흠이 나서 가격이 엄청나게 따운 된 것만, 그것도 어쩌다 가아아아아~~ 끔 들여올 정도란다. 긍께 이 핑크 다이아몬드란 보석은 내가 살았던 21C 에서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 부호들께서나 소지할 수 있었지, 보통 사람은 쉽게 보지도 못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마치, 이 세계의 드워프제 물품 중에서 상등급 물품이라고나 할까? 그런 핑크 다이아몬드께서 박혀 있다고 하니 솔직히 나로써는 그 물건의 가치가 짐작되지도 못했다. 어마어마 하다는 건 알지만,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고나 할까? "/하여간, 비싸다는 거지?/" 핑크 다이아몬드를 잘 모르는 선애에게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해주자, 그걸 다 듣고 있던 선애가 한 마디로 결론을 내버렸다. [뭐, 그게 정답이지.] "/좋아, 그럼 이거하고... 으음, 여기에 의하면 저택에는 돈이 여러군데 분산되어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후작가 사람들이 쉽게 쉽게 쓰는 돈은 우리가 보기에는 대단한 양일테니까./" 선애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 어이, 설마 그걸 다 가지고 오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 그러기 힘드니까... 가장 큰 돈만 가지고 와./" [가장 큰거?] "/응. 저택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과 비상시를 대비한 비상금 등등을 후작과 집사가 관리하는 금고에 모아두는 모양이야.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후작 저택의 약 1년 정도의 예산 이라고 추청하니까. 팔 하나에 일년치 예산 정도면 적당하지./" [하나니까 일년치냐? 그럼 두개면 이년치?] "/그렇지./" [참... 단순한 계산법이구나. 그럼 그 장갑인지 뭔지 하는 가보는?] "/그것도 몰라? 당연히 이자지./" [그거... 후작가 일년치 예산보다 비쌀거 같은데... 비슷하려나? 나도 개념이 안 잡히니...] "/괜찮아, 그 정도는 받아내도. 그렇다고 그 집이 파산 하겠어? 어쨌든, 여기에 쓰여진 경호 수위를 보니 아무래도 언니라도 빼내 오는 건 좀 힘들겠... 윽.../" [왜?] 손으로는 서류를 들고, 눈으로는 읽으면서 나와 대화를 하는 신기를 선보이던 선애가 갑자기 멈칫 하더니 인상을 북 썼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예측이 된다. 아무래도 척 플래밍이 몇가지 충고를 써준 거겠지... "/그 녀석 메모.../" '역시나...' [뭐라고 썼는데?] "/마법 물품이 필요할 거래. 원한다면 원산지 가격으로 구해주겠다는 군. 필요 없다고 할까?/" 선애의 말에 선애가 다 읽고 난 서류를 받아 읽고 있던 나는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선애가 읽고 있는, 척 플래밍이 써준 메모를 바라봤다. [음... 난 필요할 거 같아. 최소한, 마법 가방은. 많은 양이 들어가며 무게는 적게 느껴진다니... 나 또 저번처럼 여러번 왔다갔다 하기 싫다.] "/그래? 그럼 이거하고... 음... 재운다는 마법 스크롤인지 뭔지도 필요할 거 같지? 그거하고 가보에 추적 마법을 붙여뒀을테니 그거 해제 마법 스크롤하고... 젠장, 아무래도 그 녀석이 쓴 거 다 사야할 거 같잖아?/" '뭐, 이래저래 선애를 데리고 노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놈 꽤 친절하잖아?' 마법 물품은 여전히 비쌌다. 정보를 착실히 돈을 받아내며 제공해주는 마당에 마법 물품을 서비스랍시고 꽁짜로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걸 다 사려니 꽤나 큰 돈이 들었다. 그나마 사다 주는 수고비까지 안 받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려나? 그래도 선애로써는 또 한번 큰 돈을 털리는 일이었기에 어지간히 인상을 북북 써댔다. 스크롤들이야 모두 일회용이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좀 더 비싸더라도 마법 길드의 인증을 받은 정품들을 샀고 마법이 걸린 베낭은 이번 한번만 사용하기에 아까운 일이라 괜찮은 걸로 사느라 돈이... 생각보다 더 많이 들어갔다. 수도라 그런지 그런 물품을 빠르게 마련할 수 있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이유는, 물론 일을 벌일 곳을 미리미리 둘러보는 것도 있었지만, 이번에 수도에 줄을 대고 싶어하는 지방 귀족들께서 또 한 아름의 재물을 가지고 갈 거라는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때 보통 쉽게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보석과 금방 사용할 수 있는 머니도 가지고 오기 때문에 그것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올 예정이었다. 드디어 디 데이날, 아직 동이 트지도 않아 깜깜한 이른 새벽,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내가 마법 베낭을 매고 창문을 열자 선애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배웅했다. "/언니... 잘 갔다 와./" [오냐. 너도 제 시간에 마중 나와야 한다.] "/응응. 부디 많이 많이 가지고 와./" [알았어.] 일을 벌이는 시각은 저녁이었다. 캐링턴 후작은 매일 저녁을 먹고 하루 일과를 마감하기 전 그 가보를 꼬옥 눈으로 확인하고 감상을 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굉장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 그가 그런 감상을 할 때는 당연하겠지만, 아무도 그 장갑을 보관하는 금고가 있는 후작의 서재에 얼씬하지 못했다. 그때가 바로 내가 노리는 시각이었다. 후작의 서재야 보통때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렇게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러나 금고가 보관 된 곳은 그 서재 안에서도 중요 서류나 물품을 보관하는 방이라고 했다. 그 방은 창문이 하나도 없었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로지 후작의 서재와 통해 있는 입구를 이용해야 한다. 뭐, 내 몸 하나 들어가는 거라면 하등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그 안으로 마법 배낭을 가지고 들어가서 장갑을 가지고 나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입구를 이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입구도 서재안에 들어가자마자 '입구는 여기입니다.'라고 말하듯 나무 문이 있는 게 아니었다. 후작만이 아는 방법으로 열리는, 숨겨져 있는 비밀문이 바로 그 입구였던 것이다. 정보 길드에서는 그 비밀문의 위치가 후작 서재 안을 차지하고 있는 많은 책장들 중 동쪽 벽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책장이라는 건 알아챘지만, 그 비밀 문을 어떻게 여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비밀문은 그 문을 여는 기관 장치 뿐만이 아니라, 마법까지 걸려있다고 했다. 그 마법은 후작이 아닌 다른 사람이 문을 열면 당장에 비상음이 터지며 문이 마법으로 인하여 굳게 잠긴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후작인 걸 아는지까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사람이 들어가면 안에는 자동적으로 마법등이 켜지는 것 외에는 다른 마법은 걸려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대신 그 가보를 보관하는 금고가 버티고 있는 거였다. 그 금고는 열쇠와 비밀 번호가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는데 그 열쇠는 목걸이에 연결하여 후작이 항상 목에 걸고 다니고, 비밀 번호 또한 후작만 알고 있다고 한다. 문을 여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으면서, 그 방 안의 모습은 어떻게 알아낸 건지 원...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나라고 해도 금고를 열 방법은 없었으니 선애와 나는 차라리 후작이 그 금고를 열때를 노리려고 했던 것이다. 후작이 그렇게 서재 안 비밀의 방에서 가보를 감상할때, 후작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집사는 그날 후작가에서 움직인 재정 결산을 한단다. 그날 후작가로 들어온 돈과 나간 돈을 장부에 기록하고 그 장부에 쓰인대로 돈이 있는지 검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디데이로 잡은 날은 낮에 후작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재물을 선물로 안겨줄테니 그런 거 일일이 점검하려면 아무래도 결산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 터였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에게 참으로 유용한 시간일테고 말이다. 그렇게 내가 해야 할 일의 순서와 내가 움직일 동선 등등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점검하며 나는 인적이 없는 대로를 날 듯이 달려갔다. 이 길은 그 동안 디데이가 되길 기다리면서 여러번 현장 점검 차 다녔기 때문에 너무나 익숙한 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저택의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담을 타 넘어가자 곳곳에서 순찰을 도는 사병들과 기사들,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다니는 커다란 개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단지 허공을 동동 떠다니는 마법 베낭을 보고 놀라워 할 사람들을 위하여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도 더욱 더 짙은 어둠을 가진 곳만 골라 다녔다. 마법 베낭에는 순찰병들이 데리고 다니는 개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조치가 되어 있어서 개코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어두운 곳만을 골라 무사히 저택에 도착하여 벽을 타고 뒷문 윗쪽에 매달려 잠시 기다리자, 슬슬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일 먼저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는 하인, 하녀들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부엌을 담당하는 하인 하녀들이 부엌과 연결된 뒷문을 열고 아침 식사를 만들기 위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불을 피울 장작을 들여놓고, 물을 떠오고, 싱싱한 재료들을 준비하는 등등... 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온 나는 천장을 타고 슬금슬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스파이더맨처럼 천장에 달라붙을 능력은 없지만, 벽 속을 뚫고 들어갈 능력은 있는지라 손과 발을 천장의 면을 뚫고 들어가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내 몸의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법 배낭의 무게만 견디면 되었다. 뭐, 그 마법 배낭도 무게를 가볍게 하는 마법이 걸려 있어 두 세개라도 거뜬하게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조심스레 천장을 타고 이동했지만, 어느 누가 할 일 없이 천장만 보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들키지 않고 후작의 서재가 있는 2층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품 하거나 기지개를 펴다가 천장을 볼 수 있었기에 천장의 구석진 모서리만 골라서 타고 다녔다. 서재 앞에 도착한 나는 주위를 슬그머니 둘러보다가 보는 사람이 없자 잽싸게 문을 조금만 열고 들어갔다. '자아, 그럼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구만.' 기다림이란 참으로 지루한 것이다. 그것이 아무것도 할 일 없이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면 더더욱... 마법 배낭만 아니었으면 새벽 무렵 사람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여 사병들이나 기사들의 경계가 느슨할 때를 노릴 필요도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쩌비... 이쪽 계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인내심이 무척 많아야 하겠구나...' 나는 비밀문이 있는 책장 꼭대기에 걸터앉아 손으로 턱을 괴다가 지루함에 길게 하품을 했다. '후아아아암~~ 심심해라. 기다리는 동안 책이라도 한권 빼 읽을까?' 내가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꼬던 꼬물꼬물 거리던 시간은 착실하게 지나갔다. 아침 식사를 한 후 느즈막하게 왕성에 갔던 후작이 오후에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미리 방문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지방 귀족들과 만났다. 수도로 와서 새롭게 알게 된 건데, 누군가를 방문 했을때 얼마를 기다리는가를 보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면 자신은 상대방에게 별 것 아닌 존재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고, 별로 기다리지 않는다면 거의 대등한 존재, 미리 기다리고 있거나 온 즉시 환영받는 존재는 상대보다 대단한 존재라는 뜻이다. 이따시만한 선물을 잔뜩 싸들고 와서는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후작의 비위를 맞춰주다가 차 한잔과 약간의 다과만 얻어먹고 돌아서는 지방 귀족을 바라보고 있자니, 역시 사람은 힘이 있고 봐야할 것 같았다. 자신에게 아부를 떠는 지방 귀족을 '나는 관대한 윗사람이요.'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약간 깔보는 느낌을 주어 힘의 우위를 확실하게 각인 시킨 후작은 지방 귀족이 돌아가자 그 즉시 안면을 바꿨다. "기가 막히는군. 이제는 내가 저런 놈들까지 일일이 만나야 하는 건가?" 지방 귀족이 돌아갈때 자신은 배웅조차 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집사를 보고는 후작은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댔다. "그래도 저 자는 제법 쓸모가 있는 자입니다. 원래 영지도 부유한데다가 얼마 전에 제법 탄탄한 상회의 딸자식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고 하니 데리고 있으면 들어오는 게 많을 겁니다. 확실히, 오늘 가지고 온 것들만 봐도 상당하더군요. 주인님께 처음 선보인다 하니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돈 밖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놈이더만, 앞으로도 계속 상대를 해줘야 한단 말인가?" "조금만 참으십시오. 저 자가 알아서 신나게 바치는 건 너그러이 다 받아주시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 꼬투리를 하나 잡아 쳐내시면..." "큭, 하긴... 저런 놈은 없는 게 나라를 위하는 거야." '어라라... 이거 있는 놈이 더하다고 하더니만, 그런 계산적인 생각으로...' 후작과 집사가 자신을 방문하고 돌아간 지방 귀족을 비웃으며 주고받는 대화에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에라이, 이 상종 못할 놈들... 아니, 어쩌면 무척 현실적인가? 싸들고 오는거 다 받아주고 쓸모 없으면 버리는 게. 에휴, 저런 지방 귀족 같은 놈들이 있어서 괜히 백성들만 고생하는 거야...' 왠지 못볼 꼴을 본 것만 같아 쓴 입맛을 쩝쩝 거리며 나는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 심심해서 지방 귀족이 중앙 귀족에게 아부하는 것 좀 구경하러 나왔더니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서재에서 책이나 볼 걸 그랬다. 그래 털래털래 서재로 돌아가는데 황당하게도 후작과 집사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 둘도 서재에 볼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엥... 서재로 가서 벼르던 책을 찾아보려고 했더니만... 쩌비...' 결국 나는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서재로 가서 중요한 이야기를 주고받을지도 모르지만, 지루하게 그런 것 듣고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아까 지방 귀족이 가지고 온 재물을 구경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법 배낭은 가장 높은 책장의 맨 위의 구석에다 올려 놨으니 두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지 않는 한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후작 저택의 보물 창고는 지하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죄수를 가두는 감옥도 지하에 있고, 보물 창고도 지하에 있다니 웃기는 일이야.' 지하의 보물 창고 입구는 재미있게도 3층에 있었다. 바로 집사의 서재 안에 말이다. 아마 후작 서재 안의 비밀의 방을 본따 만든게 아닌 가 싶었다. 보통 보물 창고 입구 하면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나 사병들이 무기를 들고 24시간 내내 철통같은 경비를 서는 곳이라고 생각 했는데, 아무도 지키지 않는 서재라니 좀 황당했다. 집사의 서재 또한 후작의 서재 못지 않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후작 서재의 비밀 방 만큼이나 대단한 장치가 있는 게 아닐테니 뛰어난 도둑이라면 침투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입구가 집사의 서재라니, 주인인 후작이나 그들의 혈육이 드나들기 참 불편하지 않는가 말이다. 아무래도 집사의 서재 말고도 다른데 비밀 입구가 있을지 몰랐다. 정보 길드는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건지, 아니면 필요가 없다 여겨져 이야기를 안 한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집사의 서재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당당하게 '나 문이요!' 라고 말하는 듯한 짙은 흑갈색의 문이 한쪽 구석에 버티고 있다. 뭐, 일반 문보다 되게 튼튼하고 단단해 보이는데다 튼튼한 자물쇠도 달려 있지만, 이렇게 쉽게 눈에 띄이게 만들다니... 역시 후작 서재에 있는 비밀의 방보다 경보 장치가 덜 한 것 같았다. 그런 문을 열면 성인 남자 두명이 나란히 간신히 지나다닐 듯한 폭의 계단이 나타난다. 마법 등은 커녕 횟불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빛이 들어오는 창이 있는 것도 아니라 무척이나 깜깜한데다 계단이 꽤나 가파라 한번 발 헛디뎌 굴러 떨어지면 쉽게 중상을 입을 것 같았다. 그러한 계단이 나선형으로 3층으로부터 곧바로 지하까지 쭈우우욱~~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보물 창고로 재물을 가져다 놓는 것도, 반대로 가지고 오는 것도 힘들 것 같다. 뭐, 후작이랑 후작 혈육들이야 자기들이 힘든 게 아니니 불편함 같은 건 못 느끼겠지만... 그렇게 쭈우욱... 내려가 지하에 도착하면 저택 지하에 있는 다른 창고와는 단절 된 단 하나의 창고가 나온다. 그것이 바로 후작네 보물 창고. 입구에는 과연 보물 창고 다운, 내 손 한 뼘 정도의 두께의 철문이 버티고 있다. 그 걸 열고 들어가면 보물이 눈 앞에 쌓여 있는 게 아니다. 이 방을 전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3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맨 처음 들어가면 튼튼해 보이는 철로 된, 그리고 각각의 함에 자물쇠가 달려 있는, 성인 남자의 키만한 크기의 서류철이 한쪽 벽을 꽈악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넓직한 책상과 나무 의자 세개가 그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류함 반대편에는 우리가 들어온 것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튼튼해 보이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키 160cm 에 몸무게 50Kg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몸을 조금만 구부리면 충분히 들어갈 것만 같은, 나무로 되어 있지만, 각각 모서리는 철로 덧댄 커다란 상자들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보통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보물 지도를 따라 찾아낸 골인 지점에 있는 보물 상자였다. 게다가 이것도 각각 자물쇠가 달려 있는 것이, 이 보물 창고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엄청난 열쇠 꾸러미가 필요할 것 같았다. 당연하겠지만, 이 보물 상자 속에서는 금화와 백금화가 들어있다. 은화는 취급도 안 한다. 이건 정보 길드에서 알려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와서 본 거였다. 왼쪽 벽에 쌓여 있는 상자 속에는 금화가, 오른 쪽 벽에 쌓여 있는 상자 속에는 백금화가 가득 가득 들어 있는 것이었다. 100개씩 한 천 꾸러미에 담겨, 그 꾸러미가 한 상자당 100개씩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한 상자에는 금화나 백 금화가 만개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보물 상자가 있는 창고를 지나 안쪽에 있는 쇠문을 들어가면, 그 곳에는 이 보물 창고의 하이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다른 취급을 하는지 문에는 잠김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 마법과 반응하는 열쇠가 아니면 열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엄청나게 비싼 보물들이 각각의 상자에 고이고이 쌓여 보관되어 있었다. 내가 평소에는 재물욕이 그렇게 없는 줄 알았었다. 돈이야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하지만, 그래도 모자르지 않을 정도로 넉넉하게 있으면 더 욕심을 안 내는, 담백한 처녀라고 생각을 했건만... 이렇게 소중히 고이 고이 보관되어 있는 걸 보니까 엄청나게 욕심이 생기는 거였다. 특히나 그 얄미운 계집네 집이라고 하니까 하나도 남김 없이 싸그리 싹싹 가지고 가고 싶은 거였다. 그러나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가지고 온 배낭에 이게 다 들어갈지도 의문이었다. 이번에 내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애의 요구로 정보 길드에서 구해 온 마법 배낭은 그들이 구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갈 용량이 겨우 일톤 정도였다. 그것도 금화 500냥 짜리가 그 정도였다. 그 보다 더 대단한 거 없냐고 했더니 하는 말이 차라리 드래곤에게 가서 그에게 만든 것을 사라고 하는 것이었다. 보통 1톤 정도를 한국 학생들이 가지고 다는 책가방 만한 배낭에 넣어 실제 무게의 1/100 정도의 무게로 가지고 다니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곳의 보물들을 보니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던 배낭이 순식간에 불만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 하지만, 그 만큼 이 곳의 보물이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올까나?' 하지만 이번에 내가 한번 털어가면 분명히 보물 창고 위치를 바꾸던가 아니면 마법 경보를 좀 더 강화 하던가 하는 조취가 취해질 것이었다. 게다가 이런 일에는 과욕은 금물이라고 척 녀석이 선애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한번 성공하면 부디 그것으로 끝내길 몇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물론, 나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일로 끝내기로 했지만, 아쉽기는 무척이나 아쉬운 거였다. 하여간, 이러한 3중 구조를 가진 보물 창고 안에 오늘은 첫번째 방, 즉 서류함과 책상, 의자가 있는 방에 커다란 상자 세개가 놓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지방 귀족이 가지고 온 물품이었다. 이것들은 첫번째 방에서 목록이 쭈욱 작성된 다음 금화는 금화대로, 백금화는 백금화대로, 보석은 보석대로 분류가 되어 각각의 위치에 안착이 될 것이었다. 내가 갔을 즈음에는 세 명의 남자가 열심히 상자를 열고 분류하고 있었다. 이 세 남자야 말로 후작과 집사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 후작, 집사를 제외하고 이 보물 창고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임을 받는다는 건 그들에게 미래가 보장 된 일이겠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안됐다. 그 나이 많은 집사가 육체노동을 하지 않을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좁은 나선형 계단을, 4층이나 되는 높이를, 이 절대로 가볍게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상자들을 단 셋이서 옮겼을테니 그 고생이란... '이럴 땐 차라리 신임을 안 받는 게 나을 거 같다.' 그래도 이 보물 창고를 들어올 수 있는 이들이라도 자기들끼리만 있다면 첫번째 방까지만 올 수 있는 모양이다. 집사가 있어야만 - 아마 집사에게 열쇠가 있기 때문일테지만... - 그 다음 방에 들어갈 수 있었고, 하이라이트 방에는 그나마 들어가지 못했다. 집사는 아마 저녁 식사를 마치고 후작이 서재의 비밀 방에 들어갈때 즈음에나 여기로 내려올 터였다. 그리고 이들이 분류하고 목록 작성한 것을 일일이 대조해 보고 안쪽의, 진정한 보물 창고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옳겨 놓을테니, 최소한 한시간 정도의 시간은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사실, 지방 귀족이 바친 물건을 슬쩍 하려 한 것도 있지만 집사가 이 곳에 머물 시간이 길어질 것이란 예상 때문에 오늘을 택한 거였다. '이런 이런... 부피를 크게 보이려고 한 건가?' 세 상자 중 한 상자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백금화를 담았다면 1/100 분량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을, 부피는 많아 보이게 하고 조금이라도 덜 바치려고 지방 귀족이 머리를 쓴 모양이다. 덕분에 이걸 옳기는 사람들만 신나게 고생했을 거다. 그리고 한 상자에는 서대륙에서 수입하는,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청자, 백자 등등이 깨지지 않도록 몇겹이나 부드러운 천으로 쌓여진 채 들어 있었다. '오오... 이런 자기들이 뇌물로도 이용 되는 군. 이거 왠지 기분이 으쓱해지는게...' 이게 내가 살던 한국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시래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좋아, 이 자기들은 빼야지.' 그리고 나머지 한 상자에는 각각 하나씩 포장된, 보석류가 담겨 있었다. 단순히 원석만 예쁘게 가공한 보석부터 목걸이 팔찌 브로치 등등 악세사리로 만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화려하게 보석들로 장식된 단검 장검 등등도 몇자루 들어 있었다. '뭐야, 이거 쓰라고 준 거야, 장식품으로 준 거야?' 그렇게 그 사람들이 열심히 꺼내 열어보는 것들을 하나 하나 구경하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나는 덜컹~ 하고 문 열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거기에는 아까 봤던 후작가의 집사가 서 있었다. "그래, 목록 작성은 다 했는가?" '헉, 이런 큰일 났다. 에구구... 늦었으면 어쩌지?' 집사가 여길 들어온 거 보니 아무래도 저녁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인 듯 했다. 그리하여 나는 황급히 일어나 위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부디 늦지 않길...' 내가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속도로 빠르게 달려 올라갔지만, 그래도 조금 늦고 말았다. 후작의 서재에 도착해 보니, 서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좀 일찍 온 거였으면 좋겠지만, 아무도 없는 서재에 불이 밝혀진 것을 보아하니 절대 그게아니었다. '이러언...' 비밀의 문은 닫혀 있었다. 이건 자동문이라서 한번 열었다가 사람이 나가거나 들어오면 저절로 닫혀 잠기게 되어 있었다. 이럴때 바깥에서는 열쇠가 있어야만 열 수 있었다. '에궁... 마법 배낭을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발을 동동 굴렀지만, 한번 닫힌 비밀의 문을 열 재주가 나에게 있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일 이 시간을 노릴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과연, 비밀의 방에는 후작이 이미 들어가서 금고의 문을 열고 장갑을 꺼내서 보고 있었다. 미스릴 이라는 금속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척 보아서는 절대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촉각을 느낄 수가 없어서 느낌으로는 알 수가 없지만, 이건 마치 은색의 실로 코바늘 뜨기를 하여 만든 것 처럼 생겼던 것이다. 만약 정보 길드에서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게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절대로 알지 못했을 거다. 손가락 부분과 손바닥은 나오고 손등과 손목 부분만 덮이는 디자인으로 그렇게 섬세하게 만들어진 장갑의 손등 부분에는 핑크 다이아몬드라고 하는 붉은 보석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주먹을 쥐었을때 볼록 솟아 오르는, 다섯 군데 부분과 손등 가운데에 있었다. 동그란 것이 아니라 마치 꽃잎처럼 위에는 둥글고 밑으로 가면 뾰족해지는 디자인이라서 은 쟁반위에 붉은 꽃잎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단순히 모양을 예쁘게 하기 위하여 박아 놓았다기 보다는 손 보호대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마치 건달들이 무기로 사용하는, 가죽 장갑에 박아 놓는다는 징을 떠오르게 했다. '하, 그러고 보니 저걸 끼고 주먹으로 한대 때리면 꽤나 아프겠다...' 내가 뒤에서 인상을 찌푸린채 바라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후작은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로 그 가보인 장갑을 소중하게 든 채 새하얀 비단 손수건으로 세심하게 닦고 있었다. 단순히 장갑만 들여다 보는 게 아니라 저렇게 매일 매일 닦아서 장갑은 티끌 하나, 얼룩 하나 없이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뭐가 부족한지 입김을 호호 불어 세심하게 닦는 모습을 보면 이걸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고 있는 지 절절하게 느끼게 했다. '음... 이거 잃어버리고 쓰러지지는 않을지... 쪼금 걱정 되는구만. 쯧쯧, 당신도 딸 자식 잘못 키운 벌이라고 생각 하시우... 그리고 아픈 것도... 죄송합니다아... 대신 다른 건 따악 한 가지만 가지구 갈게요.' 원래 계획은 후작이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갈때 나도 몰래 마법 배낭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작이 금고를 열고 가보인 장갑을 꺼낼 때 마법 배낭 안에 가지고 온, '슬립' 스크롤을 사용해 그를 잠재운 다음 가보인 장갑과 같이 들어 있는 몇몇 보석들을 가지고 잽싸게 집사가 있을, 후작 집안의 보물 창고로 달려가 그쪽도 털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법 배낭을 가지고 들어오지 못했으니, 스크롤 대신 순수하게 내 힘을 사용해야 될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해요오...' 나는 다시 한번 후작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 후작은 날 보지 못했겠지만... - 그 방 한쪽에 고이 모셔 있는, 대략의 높이가 70cm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을 단순 모티브로 만든 황금상을 집어 들었다. 여기에 고이 모셔져 있는 걸 보니 꽤나 비싼 것일게 분명했는데, 내 손에서 임시 방망이가 되어 버리다니, 이 황금상의 운명도 참 기구했다. 그 황금상을 안타까움과 미안한 시선으로 한번 슬쩍 본 나는 길게 숨을 들이키고는 후작의 뒤통수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퍼억~! 쿵~! 털썩~! '헉... 쫌...아니... 너무 쎘나보다.' 사살 때렸다가 제대로 기절하지 않거나 금방 깨어나면 곤란할 것 같아서 힘을 쪼까 많이 넣었더니만, 후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얌전히 앞으로 고꾸라진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어째 후작의 뒤통수와 조우한 황금상이 움푹 들어간데다...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이... 게다가 하필 앞으로 고꾸라지던 후작이 바로 앞에 있던 금고의 모서리에 이마를 그대로 찧는 바람에 내 손가락 두마디 정도 찢어졌던 것이다. 덕분에 이마랑 뒤통수에서 피가 줄줄... 그 뒤에 바닥에 다시 한번 쓰러지며 머리를 쿵.... '어억... 이거... 설마 이걸로 죽지는 않겠지?' 그래도 혹시나 출혈 과다로 뭔 큰 사단이 일어날까 걱정이 된 나는 후작이 장갑을 닦기 위하여 가지고 왔던 비단 손수건을 찢어 길게 연결한 다음 그의 상처가 난 부근을 돌돌 감아 묶어줬다. 하얀 비단 천에 붉은 피가 슬며시 배어 나왔지만 그래도 피가 줄줄 나는 사태는 막은 것 같았다. '으음... 다시한번 죄송합니다아아~~' 그렇게 기절한 후작을 고이 잘 눕혀 준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잽싸게 장갑이랑 그 장갑이 들어 있던 금고 속에 놓여 있던, 내 손바닥 만한 납작한 상자 하나 아무거나 집어서 튀었다. 원래는 그 금고 상자 안에 있는 보석은 다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후작에게 저리 부상을 입혀 버렸으니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다 가지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계획과는 달리 단 두 가지 보물만 가지고 비밀의 방을 빠져나온 - 안에서는 문을 열쇠 없이 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게 바로 비밀의 방의 맹점이겠지? - 나는 잽싸게 비밀의 문이 있는 책장 맨 꼭대기 구석에 숨겨 둔 마법 배낭을 꺼냈다. '빨랑, 빨랑...' 가지고 나온 두 보물을 던져 넣고 그 안에서 스크롤 하나를 빼냈다. 후작 서재의 창에는 날이 저물면 저절로 알람 마법이 발동 된다고 한다. 지금 내가 마법 배낭에서 꺼낸 스크롤은 바로 그 알람 마법을 해제 시키는 것이었다. 후작이 서재 안으로 들어가 있는 시각에는 복도나 계단 마다 철저한 경계가 서게 된다고 했다. 기실, 아까 집사 서재에서 서둘러 후작 서재로 올때 복도 모서리나 계단 중간 중간에 기사들이 두 눈을 부릅 뜨고 경계를 서 있는 모습들과, 사병들이 둘씩 조를 이루어 경계를 돌고 있는 모습을 봤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보는 가운데 내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드나들다가 들킬지도 모르기 때문에 창문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창문에 알람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알테니, 누군가가 드나들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 하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을 거다. 더구나 지금은 모든 이들이 잠들기에는 이른 시각이라 경계 또한 밤이나 새벽때보다 한층 느슨해 있을 거였다. 창문 하나를 향해 스크롤을 찢자 창문에 희미한 푸른 빛이 한번 어리다가 슬며시 사라졌다. 그게 바로 마법이 잘 해제 되었다는 표시라 들었기에, 나는 지체없이 그 빛이 생겼다 사라진 창문을 열었다. 과연, 마법이 제대로 잘 해제 되었던지 창문을 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창문 또한 평소 얼마나 관리를 잘 했는지 소리없이 매끄럽게 잘 열리는 것이었다. '거참... 평소 관리를 잘 한게 어째 도둑에게 유용하냐?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나는 괜히 속으로 툴툴 거리며 잽싸게 밖으로 나와 다시 창문을 닫고는 벽을 타고 기어 올랐다. 집사의 서재 창문에도 알람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그 앞에 도착해서는 알람 마법 해제 스크롤을 하나 더 꺼내야 했다. 창문이 잠겨 있었지만, 복잡한 자물쇠가 아니었기에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 될게 없었다. 손 쉽게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나는 또 다른 스크롤 하나를 마법 배낭에서 꺼내 들었다. 보물 창고로 들어가는 입구가 안에서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사가 일행과 안에 들어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명색이 보물 창고 입구인데 들어가면서 열어놓고 갈리가 만무했다. '에휴... 스크롤이 무지막지하게 들어가는 구만. 되게 편리하긴 하지만, 너무 비싸서리...'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언 락(잠긴 문을 연다.)' 마법이 걸려 있는 스크롤을 찢었다. 일반 스크롤도 엄청 비싼데 내가 들고 있는 건 마법 시동어를 읆지 않고 단순히 찢기만 하면 마법이 발동되는 거라 일반 스크롤보다 쫌 더 비쌌기에, 돈이 더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말하는 걸 선애는 듣지만 스크롤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이 스크롤이 정말 되는지 한번 해봐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큰일날 뻔 했다. 시동어를 말해야만 하는 스크롤을 가지고 왔다면 전혀 쓰지 못하고 나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그래도 이번 임무를 완수하면 스크롤을 사기 위하여 들어간 돈 정도야 금방 회수할 수 있을테니 선애도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턴 것일 거다. 이러한 내 내심과는 상관 없이, 고급 스크롤답게 찢어지자 굳건하게 닫혀 있던 문 안쪽에서 작게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았어. 돈 값을 하는구만.' 그렇게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마법 배낭 안에서 자그마한 수정 조각을 꺼내들었다. 1회용 마법 횟불이라고 해야 하나? 내 엄지 손가락 반만한 수정이었는데 마법이 걸려 있어서 두번 두드리면 희미한 빛이 나게 되어 있었다. 대략 3시간 정도 빛을 계속 낼 수 있는데, 중간에 잠깐 끄려면 한 번 두드리면 된다고 하는, 참 편리한 마법 랜턴이었다. 유령이라고 하지만 빛 하나 없는 곳에서는 사방을 볼 수 없는 나를 위하여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볼 수도 없는데다 촉각도 없어서 만져서 길을 알 수도 없는 나였기에 빛 하나 없는 깜깜한 계단을 조용히 내려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내 몸 하나 뿐이라면 그냥 바닥을 통과해서 밑으로 내려가지만, 내 등에 매인 배낭은 그럴 수 없으니 말이다. 하여간 준비해 온 모든 마법이 이 배낭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촉감도 없이 그냥 가다가 마법 배낭이 벽이나 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내는 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좁은 통로가 밑으로 이어져 있어 작은 소리가 나면 크게 울리게 되어 있어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되게 잘 들렸다. 아마 그걸 노리고 이런 통로로 만든게 아닌가 싶었다. 안에 있는 이들은 밝은 빛으로 밝혀진 방에 있을테니, 겨우 사물만 분간할 희미한 빛 정도로는 저들이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바쁘다 바빠.' 그렇게 빛나는 수정까지 집어 든 나는 빠르게 밑으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뛰어도 바늘 떨어지는 만큼의 소리도 안 나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 왠지...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태어난 거 같아. 아예 이쪽 길로 나가볼까?' 거의 날듯이 순식간에 밑에까지 내려와 드디어 보물 창고 입구인 철문 앞에 도착했다. 철문은 얼마나 정교하게 따악 만들어 놨는지 안에 밝은 빛이 켜져 있을게 분명한데도 밖으로는 빛 한 점 새어나오지 않는 거였다. 머리만 디밀고 안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호, 뇌물을 잔뜩 받친 그 지방 귀족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나?' 하기야, 집사가 여기 들어온 뒤로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니 그들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거였다. 위에 있는 문을 잠궈놔서 그런지 철문은 잠그지 않았다. 틈새라도 있으면 그 틈으로 스크롤만 몰래 가지고 들어와 마법을 발현시켰을텐데, 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을만큼 따악 만들어진 문이었으니 스크롤이 통과할 틈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만약을 대비하여 스크롤을 꺼내 입에 물고 한 손으로 스크롤 중간을 잡아 언제든 찢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나머지 한 손으로 조심스레 철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 철문은 제대로 관리를 안 했는지 최대한 조심스레 연다고 열었는데 귀에 거슬리는 불협 화음을 내는 것이었다. 끼이익~~ 거의 대화 없이 작업에만 몰두하던 사람들만 있었던 터라 그 소리는 방 안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아니, 긴장하고 있는 내 귀에만 천둥처럼 들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응?" "뭐야?" '이런, 제기랄... 에잇, 나도 몰라.' 그리하여 나는 조금 열려진 틈새로 얼굴만 들이밀고는 그대로 스크롤을 찢어 버렸다. 방위 1m 내에 빛을 쏘인 사람들은 모조리 하루동안 잠재워 버리는 아주 강력한 수면 마법이 들어있는 스크롤이 쫘아악 찢어지자, 역시 제대로 돈 값을 하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열린 문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이 몽롱해 지더니 그 자리에 푸욱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커다란 상자에서 물건들을 꺼내던 사람이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지는 바람에 상자에 걸려 크게 덜커덩~ 하는 소리가 난 것이었다. "응? 무슨 소리야?" 그 소리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빼꼼하게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다. "에엑?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소리다. 넌 왜 거기 들어가 있는 거야? 젠장, 스크롤을 찢기 전에 사람 수는 세어보는 건데...] 사람이 있다는 것만 확인했지, 몇명인 것 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가 있던 걸 그만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우... 나도 참 바보같지... 안쪽의 문이 열린 걸 보고 의심도 안 해봤단 말이야?' 안에 있던 덕에 스크롤을 찢으며 나타난 빛을 쐬지 않아 마법에 안 걸렸던 모양이다. 그 사람이 당혹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오자 나는 마법 배낭을 떨어뜨리고 그 사람에게 달려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마침 커다란 상자 속에 들어 있던, 내 머리통 두개 정도는 들어갈 상자를 발견하고는 얼른 집어 들었다. 촤르륵~~ 그런데 안에 금화라도 들어 있었는지 내가 머리 위로 번쩍 들자 안에서 자갈 쏠리는 소리가 나는 거였다. 덕분에 그 남자가 뒤를 돌다가 허공에 상자가 떠 있는 걸 보고는 눈이 동그래지며 입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 남자가 소리를 지르기 직전이라는 걸 깨달은 난 두번 생각할 것 없이 냅다 그 남자의 안면에 대고 상자를 던져 버렸다. "꿰엑~!" [우쒸, 그러게 왜 혼자 안에 있으래요?] 그 남자의 안면을 그대로 강타한 상자는 남자와 함께 뒤로 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뚜껑이 열려 안에 있는 것이 좌르르~~ 쏟아지며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은 아름다운 초록색을 내뿜는 에메랄드 보석들이었다. 아직 어딘가에 사용하지 않은, 단순히 원석만 예쁘게 가공한 보석들만 모아둔 것이었다. '쩝... 아까버라... 이거 언제 다 주워 담냐고...'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안면을 상자면에 그대로 직격 당하여 벌겋게 상자 옆면의 모습이 찍힌데다 코피까지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얼른 에메랄드를 쓸어 상자에 담고 배낭에 쑤셔 넣었다. '자, 이제 빨리 빨리...' 마침 금화와 백금화를 보관하는 창고 문이 열려서 운이 좋았다. 나는 그 곳에 있는, 세 상자 중 보물과 보석만 담겨 있는 상자 속만 싸악 비운 채 안으로 들어갔다. 뭐, 보물과 보석을 보관하는 창고 문은 열리지 않아 조금 아쉬움을 남겼지만, 백금화를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집사의 품을 뒤져보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찾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열쇠가 뭔지 모르기때문에 찾으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그냥 포기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지방 귀족이 받친 것들만 해도 꽤나 많은 양이었고 말이다. '사람이 과욕을 부리면 안되는 거야.' 커다란 백금화 상자 네개를 쑤셔 넣자 배낭이 꽈악 찼다는 신호가 들어왔다. '좋아.'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음을 느끼며 배낭을 서둘러 어깨에 매자 배낭의 무게 때문인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 정도 쯤은 얼마든지 들고 펄펄 날 수 있을 정도였다. '빨리, 빨리.' 나는 다시금 안을 둘러봐서 깨어 있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서둘러 철문을 닫고 빛이 나는 작은 수정을 꺼내든 뒤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집사의 서재로 나와 문을 닫고 슬그머니 바깥 동정을 살피는데 별 큰 소란 없이 조용했다. 아직 후작이 쓰러졌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후우, 좋았어.' 그리하여 아까 알람 마법을 해제시킨 창문을 살그머니 열고는 벽을 타고 조심스레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택의 뒷쪽으로 이동하여 땅으로 내려온 뒤 어두운 부분을 이용하여 잽싸게 달려갔다. 담벼락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자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담벼락을 타 넘어가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담벼락 어두운 구석에 말 한마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위에는 후두까지 깊숙하게 눌러 쓴 누군가가 타고 있었는데, 날 봤는지 조심스레 다가오는 거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익숙한 목소리, 선애였다. [많이 기다렸냐? 최대한 빨리 나온다고 나왔는데...] 선애의 모습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어깨에 매었던 배낭을 벗어 건네고 그 뒤에 올라탔다. [마차를 타고 올 줄 알았더니만, 왜 말을 타고 나왔어?] 배낭을 건네 받고 내가 올라타기를 기다린 선애가 천천히 출발하는 사이 내가 묻자 선애가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마차를 타면 마차를 몰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잖아. 남들 눈에 허공에 혼자 동동 떠다니는 배낭이 어떻게 보이겠어? 그렇다고 나는 마차를 몰 줄 모르고... 나중에 마차 모는 연습이라도 해야 할까봐./" [에휴... 아니면 너에게만 충성할 만한 사람을 찾던지 해야겠지. 아,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는데 혹시 미행은 없었냐? 오늘 거사를 일으킨다는 건 정보 길드에서 다 알텐데...] 내가 묻자 선애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날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겠어? 그들의 눈을 따돌릴 능력이 나에게는 없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피할까 하다가... 볼테면 보라고 생각 했지. 그들이 지켜보고 있다면 혹시 위험한 일이 있으면 알아서 막아줄테고./" [야, 그러면 너 혼자 나온 의미가 없잖아. 그럴거면 소피라도 데리고 올 것이지.] "/에잇,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 한은 해보려고 했지. 쓸데없는 짓이라고 해도 말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그쪽에 의지할 수는 없잖아? 이런 내 위대한 뜻을 몰라?/" [위대하기는 무슨... 그래도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어쨌든... 돈이다, 돈. 므흐흐흐... 얼마나 가지고 왔어?/" [가서 봐라. 가지고 올 수 있는 최대한의 돈을 가지고 왔느니라.] "/잘 했어, 언니. 푸흐흐흐흐... 내일이면 그 집안이 발칵 뒤집히겠지?/" 다음 날, 선애는 소피를 통하여 척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찻집이 아닌 고급스러운 식당이었고, 역시나 손님의 프라이버시가 잘 보장된 곳이었다. 그 곳에서 선애는 척을 보자마자 내 손바닥 두개를 합친 것만한 나무상자를 내밀었다. "자, 약속한 거요." 척은 상자를 열고 그 안에 곱게 쌓인 헝겁을 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장갑을 확인했다. "호오... 이게 그 유명한 후작 가문의 가보란 말이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그림으로 본 적은 있었지만..."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척은 감탄스러운 어조로 말하고는 선애를 바라봤다. "대단한 걸? 이걸 정말 가지고 올 수 있을줄은 몰랐어." 감탄한 빛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말했지만, 선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군가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다 알려준 덕분이죠." "아니야, 그 정보를 다 알았다고 해도 가지고 오는 건 무척 어려웠을 걸?"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그거 1급 정보 딱 하나의 값으로 홀라당 삼킬 건가요?" 선애의 말에 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후작네 집안에 대한 1급 정보에 대한 걸로 이걸 넘겨주기로 한 거 아니었던가?" 그 말에 선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내가 말한 걸 부정 할 생각 없어요. 단지, 정말 그럴거냐고 물어본 거죠. 내가 처리하지 못한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런 위험 부담감을 제외하고도 그것의 가치가 1급 정보 단 하나의 가치밖에 안 되는 거냐고 묻는 거예요." 선애가 그렇게 말하며 척을 빤~~ 히 바라보자 척도 선애를 빠아안~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선애가 지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돌리지 않고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며 계속 빠아안~~히 바라보자 결국 척이 졌다는 듯 픽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훗, 제법이야? 나에게 이런 싸움을 걸 줄도 알고." 그의 말에 선애는 승리의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헤에, 제가 이긴 건가요? 이 기쁨을 '공정해야 할 거래를 슬며시 꼬아 놓으려고 했던' 누군가에게 돌리도록 하죠." 선애의 말에 척이 다시 한번 풀썩 웃었다. "그래, 그래.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다. 뭘 원하지?" "글쎄요... 그거 가지고 뭘 해줄 수 있는데요?" 이번에도 선애가 배시시 웃으며 척을 바라보자 척이 천장을 한번 보고 허탈하게 웃더니 선애를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선애양. 설마 나와 머리싸움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걸 원한다면 정말 진지하게 임해줄 수도 있어." 척이 그렇게 단호하게 나오자 선애가 찔끔해서 뒤로 물러났다. "쳇... 누가 계속 찔러댔는데 이제와서 그런대요?" 선애 스스로도 아직 척에게 동등하게 대응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걸 느낀 탓이었다. "어쨌든... 솔직히 얼만큼 바랄 수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해주시죠, 잘난 아저씨?" 선애가 불퉁하게 투덜거리는 어조로 항복하자 척이 예의 그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훗, 좋아. 이건 내가 빚으로 하나 남겨두도록 하지. 그래도 물러날때를 아는 걸 보니 기특한 걸?" "됐네요. 졌는데 계속 물고 늘어지는 취미 없어요. 깨진게 한 두번도 아니고..." 선애가 계속 투덜대는 모습이 척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어, 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자기가 졌어도 졌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아예 재기 불능으로 왕창 깨지는 멍청한 사람들이 많거든. 그에 비하면 선애는 현명한 거지." "예이, 예이. 이렇게 현명한 날 항상 이기는 플래밍씨는 더욱 더 잘난 사람이겠죠?" "아하하... 말이 그렇게 되나?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허, 참... 잘나셨어요. 아주 잘나셔서 좋~ 으시겠습니다." 선애는 입까지 삐죽이며 투덜 거리다가 문득 생각 났다는 듯 척에게 다시 자그마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음? 이게 뭐야?" "지금 휴식을 취하는 지점장에게 전해 주세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몰라서... 금화 20개를 넣었는데... 내가 직접 방문해서 전해줘야 하겠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또 가서 얼굴 맞대기도 미안하구..." 선애의 말에 척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주머니를 열어 안의 금화를 바라봤다. "호, 이거 무슨 의미이지? 이렇게 금화를 줘도 착실하게 월급은 꼬박꼬박 받게 할 생각인데? 설마, 퇴직금?" 척의 말에 선애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만두게 할 생각도, 그거로 월급 대신 할 생각도 없어요. 그건 단지... 뭐, 산업재해보상... 이라고나 할까요?" 뜬금 없는 선애의 말을 척은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일하다가 팔을 잘린 셈이잖아요. 그거에 미안하다... 이런 거죠." 선애의 말에 척이 픽 웃었다. "이거 이거, 당차기만 한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음이 여린 구석이 있다니... 설마 선애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운이 나빴던 거라고."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잘못도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봐요. 나는 엄연히 지점장의 상관이었잖아요. 철 없는 계집이 와서 난리를 치는데 그걸 힘이 없어서 사전에 막지 못한 내 잘못이에요." "억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가게의 지점장과 점원들의 실질적인 상관으로써, 정말 고마운 마음인걸?" "됐어요. 감사의 말 듣자고 한 거 아니에요.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힘 없는게 정말 잘못인 거 같아서... 이렇게 밖에 보상을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해줘요."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차 척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전하도록 하지." "그래요. 에휴... 내가 귀족이 되던가 회장님을 대귀족으로 만들던가 해야지 원... 힘 없는 사람 서러워서 어디 살겠어요?" 선애가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내쉬며 툴툴대자 척이 선애를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진 않지." "뭐가요?"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을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야. 선애가 귀족이 되거나 크로스웰 남작을 아무도 무시 못할 중앙의 대 귀족으로 만드는 것 보다 훨씬 쉬운 일이지." "그게 뭔데요?" "현재 중앙의 대 귀족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 사람의 이름을 등에 업으면 그보다 못한 귀족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마치, 루빈스타인 상회 소속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평민이라 하더라도 귀족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 처럼 말이야." 척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던 선애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어조로 말했다. "대 귀족 밑에 들어가려면 또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 하겠죠? 아무 대가 없이 내 밑으로 들어 오라고 하지는 않을테니 말이에요."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지금으로써는 괜찮은 방법 아닌가?" 척의 말에 선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나중에 회장님과 의논해 보도록 하죠." "그거야 좋을대로 해. 아, 그런데... 오늘 식비는 더치페이인거 알지?" 척 플래밍이 별로 보기 안 좋은 눈웃음을 치며 말하자 선애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사달라고 할 맘 없네요." 제 25화 캐링터 후작가의 가보를 비롯한 많은 재물을 대가로 받아온 - 비록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 뒤 나는 제법 시끌벅적할 줄 알았다. 뭐, 수도가 발칵 뒤집히지는 않겠지만 - 솔직히 최악으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 최소한 후작가가 발칵 뒤집혀져 도둑을 잡겠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던 것이다. 수도 경비가 강화되고 경비대가, 혹은 후작가의 기사단이나 사병대가 뒷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는 등등의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내가 뒤통수를 후려쳐 생긴 후작의 상처는 후작이 실수로 넘어져 다친 것으로 둔갑 되었고 그 집안 가보를 비롯하여 꽤나 많은 돈을 가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이 발칵 뒤집히기는 커녕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야 절대로 내 소행이라는 걸 들킬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서도, 그래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쪼금은 긴장한 채로 거리를 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평소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생활이 계속 되자 선애와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선애 또한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통... 도둑이 들면 한바탕 난리가 나지 않나? 그것도 웬만한 집이 아니라 수도에서도 꽤 영향력이 있는 후작 가문에 도둑이 들었는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로어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소피와 단 둘이 남게 되자 선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상황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도 의아한데다, 조용하니 오히려 전보다 더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소피가 피식 웃었다. "설마요. 창피 해서라도 도둑이 들었다는 걸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할 걸요? 도둑이 들었다고 난리 치는 건 그저 그런 가문들 이에요. 캐링턴 후작가 처럼 한가락 하는 집안들은 보안에 특별하게 신경 쓴다고요. 그런데 그런 보안을 뚫고 도둑이 들어 가보까지 훔쳐갔다고 하는 건 캐링턴 후작가와 비슷한 힘을 가진 다른 가문들에게는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일이죠. '당신네 집안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 '얼마나 허술한 경비를 가지고 있으면 가보까지 잃어 버리느냐.' 하고 말이지요." "아하... 그래서 이렇게 조용한 거구나. 그런데... 아무리 자존심 때문이라고 해도 가보까지 잃어버렸는데 쉬쉬 하고만 있나? 열 받지도 않나보지?" 소피의 말에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선애가 다시금 떠오른 의문을 내뱉자 소피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요... 벌써 뒷쪽으로 손을 썼답니다. 장물 길드쪽이랑 도둑 길드, 그리고 현상금 사냥범쪽에 높은 상금을 내걸었대요. 가보만 가지고 와도 금화 천냥, 제보를 하면 금화 10냥, 도둑까지 생포하고 장갑을 가지고 오면 금화 5천냥, 장갑과 목을 가지고 오면 금화 3천냥... 어마어마한 상금이라서 뒷쪽 세계는 벌써 한번 떠들썩 했는 걸요." "헤에... 그랬구나. 그런데 장물 길드가 뭐야?" "장물 길드는요, 합법적이지 못한 경로로 들어온 보물들을 처리하는 길드예요.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야 당당하게 내 걸고 제 값을 주고 팔 수 있지만, 잘 알려진 보물들은 어디 그게 가능한가요? 그런 걸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해주는 길드지요. 뒷 세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길드 중 하나예요. 독자적으로도 대단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도둑 길드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나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곳이죠." "히야... 그렇군. 그런데... 웃긴다. 생포하거나 목이라도 가지고 오라고? 키득키득..." 선애가 옆 침대에 앉아 소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날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나 원...' 지점장은 벌써 복귀하여 일하고 있었다. 내 눈 앞에서 팔뚝이 싹둑 잘려나갔는데 그게 도로 붙어서 일주일만에 완쾌 된 모습을 보아하니 정말 놀라웠다.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일이었다. 선애는 캐링턴 후작가에서 대가를 받아온 뒤에 지점장에게도 산재보상금을 지급했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지불했었다. 자신이 로어와 소피에게 꼼짝 못하고 붙들려 윗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깔끔하게 뒷처리를 해 준 그들에게 대단하다는 감탄과, 고마움과, 그리고 든든한 상사가 못 되었다는 미안함이 뒤섞인 보너스였다. 그러한 돈들의 위력인지, 아니면 자신들에게 성의를 보인 선애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완쾌 되어 돌아온 지점장을 비롯한 가게에 고용된 사람들은 전보다 더 활기차게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뭐어, 여전히 잘나신 귀족들의 아랫사람들이 거만하게 굴었지만 말이다. 그로 인하여 선애는 척의 말대로 귀족들이라도 함부로 못하는 대 귀족을 선택해 그의 그늘에 몸을 의탁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심해보고 있었다. 이미 알파두르에 있는 벨타이거 녀석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보냈고 말이다. 수도 지점을 운영함에 있어 삐그덕 거리는 커다란 불협 화음의 대부분은 대 귀족의 그늘에 들어가는 것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사라질 터였다. 사실, 수도 지점은 현재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잘나신 귀족들 문제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잘 되는 가게에 속해 있었다. 오픈 된지 몇달도 안 되었는데 벌써 이윤도 생기고 있고 말이다. 상회 일에는 초보 중의 초보인 선애로써는 참 순조로운 출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날과 다름 없이 가게로 출근하여 일을 하고 있는데, 매장을 담당하는 여직원 중 한 사람이 사무실로 올라왔다. "실례합니다." "예." 그들은 상회의 가장 말단 직원이었으니 선애에게 존대하는 게 당연했지만, 선애는 그것이 여엉 어색했던지, 그들에게 차마 말을 낮추지 못하고 같이 존대를 하고 있었다. 지금에야 그녀들이 그걸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 하지만, 처음에는 그걸 되게 이상하게 받아들여 선애가 무척이나 뻘쭘해 했었다. 하기야 소피나 그녀들이나 다 비슷비슷한 연령대인데, 소피에게는 말을 낮추고 그들에게는 존대를 하니 이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했지만, 사실 선애 입장에서는 그래도 제법 친근한 소피에겐 편하게 말 하고 아직은 친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존대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뭐, 지금은 아예 존대하는 것이 입에 붙어서 갑자기 말을 낮추지 못하고 계속 존대를 하는 실정이었지만 말이다. "본사에서 이사님 앞으로 왔네요." 정보 길드의 잘 정비 된 통신망(?)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애 뿐이었다. 그러니 벨타이거나 클라리사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선애에게 연락을 하려면 일반 운송 업체를 이용해야만 했다. "고마워요." 그녀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 든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누가 보낸 거야?] 여직원이 몸을 돌리자마자 바로 운송 업체의 로고가 찍힌, 잘 쌓인 겉 포장지를 뜯어 본 선애가 안을 확인하더니 나에게 보여주며 대답했다. "/본부에서 날 호출할 인간이 누구겠어? 회장이란 녀석 뿐이지./" [헤에...]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 읽어 본 선애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며 종이를 나에게 건네 줬다. 그 종이에는 벨타이거가 아주 정중한 문체로 바쁘지 않으면 빨랑 알파두르로 와달라고 쓰여 있었다. "/뭔 일이 있나? 왜 갑자기 호출이야./" [의논할 게 있나보지. 큰 일이 있으면 정보 길드에서 벌써 알려줬을 거 아냐?] "/하긴... 뭐, 여기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잘 돌아갈테니 가 볼까? 오랜만에 휴나 자스민을 볼 수 있겠군. 아, 가기 전에 둘에게 줄 선물을 사야겠다./" 둘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는지 선애가 생글 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도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그런데, 로어는 어떻게 할 겨? 데리고 갈 겨?] "/로어? 글쎄... 별로 데리고 갈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그냥 소피만 데리고 가지 뭐./" 별 생각 없이 대답하는 선애를 조심스레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선애는 토냐 때문에 로어를 데리고 다니기는 했지만, 로어를 그닥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단순한 비서 정도? 아마 클라리사랑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보다 낮게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기야, 지금까지 그가 뭔가 재능을 보일만한 사건이나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선애게 그는 단순한 사무요원 중 한사람이었다. [데리고 가는 게 어때?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토냐가 능력을 보장한 사람이니까 나중에 너만의 사람으로 만들려면 미리미리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게 좋지 않겠어? 그도 여기에 꼬옥 있을 필요는 없잖아?] "/그런가?/" [그가 너무 늦게 합류해서 아직은 그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찬밥 신세는 좋지 않을거 같아. 이럴때일 수록 그를 중요하다는 식으로 꼬옥 데리고 다녀주면 그가 너를 좋게 생각할 거 아녀?] 내 말에 잠시 생각해보던 선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언니 말이 맞는 거 같아. 그럼 그에게 내일 가도록 정리하라고 하고, 나는 소피랑 쇼핑 가야징~/" 그렇게 일단의 결론을 내린 선애가 룰루랄라 표정으로 소피를 찾아 나섰다. 돈도 많이 생겼겠다 해서 이왕 사는 거 아직 알파두르 항구 도시에 있는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서 일하고 있을 시오나와 그의 애인인 드렉 암스트롱경, 에밀리와 달시의 선물은 물론이요, 소피와 로어의 선물까지 사서 나누어준 선애는 가벼운 기분으로 알파두르를 출발했다. 하지만, 그 알파두르에서 선애를 기다리고 있는 건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하기야, 그러니까 벨타이거 녀석이 잘 있는 선애를 호출한 거였겠지만 말이다. 평소 능글맞다고 생각 될 정도로 미소를 달고 다니던 벨타이거 녀석의 얼굴이 어째 좀 가라앉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뭐, 미소야 계속 달고 있었지만, 다른때와는 확실하게 달랐다. 선애 또한 그를 보자마자 눈치 챘는지 그에게 시비를 걸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을 꺼내는 대신 다시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뚫어져라 벨타이거의 얼굴을 바라보다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하하... 이거, 오자마자 본론부터 묻는 거야? 수도에 가 있는 동안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벨타이거 녀석이 평소와 다를 바 없다는 듯 능글맞은 어조로 말을 꺼냈지만, 선애가 그의 말을 단번에 잘라 버렸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본론만 말해요. 무슨 일이에요?" "에에... 뭐야... 그렇게 티가 나나?" 선애의 단호한 어조에 벨타이거가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어째 그의 몸짓에 피곤함이 배어 있는 거 같다. 그걸 선애도 알았는지 어조가 약간 누그러들었다. "얼굴에 '뭔 일 있습니다.' 라고 써붙이고 다니면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 게다가 날 호출할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닌거 같은데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는 픽 하고 웃었고, 그 대신 옆에 있던 모건이 분노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태클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서요?" "핸들리 크로스웰에게서 말입니다." "누구요?" 순간적으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선애가 되묻자 모건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핸들리 크로스웰 말입니다. 지금 크로스웰 무역 상회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자 말입니다." 그 설명에 선애가 알아 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회장님 뒤통수를 쳐서 실권을 빼앗은 사람. 그런데, 이번에 또 그 사람에게서 태클을 받았다고요?" 한심하고 기가막히다는 시선으로 선애가 벨타이거를 바라보자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어본 사람이었다. 벨타이거가 숙부에게서부터 남작의 작위를 지켜낼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면서 마지막에 뒤통수를 쳐서 상회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벨타이거는 크로스웰 무역 상회의 회장이란 직함만 가진 허수아비가 되어 버렸다. 뭐, 지금은 그걸 가뿐하게 잊어 버리고 새로이 타이거 상회를 일으키고는 키우려고 동분서주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뭐,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덕분에 상황이 좀 곤란하게 되었어."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차갑게 말했다. "변명은 됐으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말해 보시죠? 아니, 회장님은 됐고, 모건씨 당신이 말해봐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입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모건의 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얼마 전 벨타이거 녀석은 헤스딩스 남작령에 연 지점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 곳에 지점을 개점한 이유는 드워프들과의 연락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드워프 마을에는 로어의 형인 스탠리도 가 있었고, 그 전에 페르티니어스 마법사도 가 있는 상황이라 그들의 편의를 위할 겸 해서 특별히 개점한 것이었다. 하여간, 거기서 연락이 와서 벨타이거가 달려갔더니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와 스탠리가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완성된 선풍기를 떠억 하니 내놓더란다. 드디어 선풍기가 완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선풍기처럼 미풍, 약풍, 강풍 등등 바람의 세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리모컨으로 멀리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무조건 돌기만 하는 선풍기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거기에 드워프들의 솜씨로 멋드러지게 꾸미고 마법등을 달면 한국에서처럼 천장에 다는, 전구등이 달린 선풍기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드워프가 만든데다 마법등가지 달렸으니 엄청나게 비싸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이 시대 실내 장식품의 변혁을 가지고 올 선풍기 완성까지는 좋았는데, 드워프의 마을에서 그 선풍기를 지속적으로 일정량을 생산해내는데 대가를 요구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드워프들과 거래를 터서 유리 제품들을 가지고 왔을때 우리가 판매하는 가격의 대략 70~80% 정도의 돈을 지불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드워프의 마을에서 선애의 시계를 이유로 무상으로 계속 제공하겠다고 했었다. 어차피 우리가 받아오는 제품들은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처리하기가 곤란한 제품들이었다. 우리가 받아오는 수준의 제품들은 대부분 높은 경지를 이루기 위한 단계의 드워프들이 연습용으로 만든 거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몇몇 제품을 제외하고는 몇달 뒤만 지나면 대부분 보관 장소 부족으로 파기해 버게 된다고 했다. 사실 그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제품들을 연습삼아 만들텐데 그걸 모두 다 보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니 깨기는 좀 아까운데 보관할데가 없는 것들을 몽땅 우리가 떠맡는 것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선풍기는 좀 달랐던 모양이다. 뭐, 우리야 거래만 해준다면 대가야 능력이 닿는데로 주고싶은 형편이었으니 벨타이거는 드워프 족장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드워프들에게는 밀고 당기는 거래의 맛 같은 건 없었다. 인간들 사이의 거래처럼 조금이라도 더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한번 튕겼다가 그 즉시 완전히 거래 단절이 될 수 있으니 할 수 있으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게 좋았다. 그리하여 드워프들이 좋아하고 타이거 상회에서 공급 가능한 접점을 찾다보니, 나온 결론이 바로 '술' 이었다. 드워프들이 엄청난 대식가이자 미식가인줄은 알았지만, 대단한 애주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주량을 자랑하는... 그러나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는 다른 상인들이 벌써 이 아벤티노 대륙 각지,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 생산되는 많은 명주들은 모조리 가져다 받치는 실정이었다. 그럴때 벨타이거 녀석이 떠올린 것은 서대륙의 술이었다. 마침, 벨타이거의 조상께서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독점하다시피 하던 서대륙과의 무역에서 그 틈새를 찾아 개척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서대륙의 '술' 이었다. 왜 사정이 넉넉한 애주가들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술을 맛보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지 않으신가 말이다.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틈새를 파고들어 지금의 크로스웰 무역 상회를 이룩한데에는 서대륙의 술께서 든든한 기둥을 이루고 계셨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도 크로스웰 무역 상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타이거로써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름뿐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바로 크로스웰 무역 상회 회장인데다가 꽁짜로 가지고 오겠다는 것이 아니라 돈 내고 사가지고 올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최대한 빨리 가져와 시식시켜 드리겠다고 자신있게 말한 뒤 부리나케 달려와서는 크로스웰 무역 상회로 달려갔던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해외 무역할때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곳에서는 필요 물량보다는 대략 10 ~ 20% 정도 넉넉하게 가지고 오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오는 도중 망가지거나 상한다고 해도 반품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벨타이거는 남는 건 종류별로 몽땅 다 넘겨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크로스웰 무역 상회 측에서도 거래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남는 걸 돈 주고 사겠다는 거였으니 거절할 명분도 없어서 배 들어와서 신상품 들여놓으면 남는걸 다 넘기겠다고 약속을 했단다. "잘 했네요. 드워프들에게 남는 술 가져다 준다는게 좀 그렇지만... 맛만 선보이는 거니까. 그런데 문제가 뭐예요?" "갑작스레 남는 물품이 없다고 통보를 해왔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에 새로 들여온 물품 중에 각 종류당 한병씩만 넘기라고 했더니, 모두 다 거래품이라고 하더군요. 넉넉하게 들여 온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말입니다." 모건이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이건 분명히 핸들리 크로스웰 녀석이 우리를 회방 놓으려고 하는 겁니다. 비열한 놈 같으니라고..." 모건의 말에 선애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요? 우리가 크로스웰 무역 상회 경영권을 넘보는 기색을 보인 것도 아니고, 우리 상회를 좀 키우겠다는데..." "그게 문제인 겁니다. 핸들리 녀석은 명목만 있는 회장님이 필요하다고요. 만약 우리 회장님께 힘이 생긴다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가게 몇개 정도의 아주 자그마한 상회야 크로스웰 무역 상회의 콧김에 손쉽게 우르르 무너질테니 회장님이 연다고 했을때 그냥 두고 봤지만, 생각 외로 드워프들과 거래를 트고 커갈 거 같으니까 미리 미리 연막을 치는 겁니다." "나 원... 그럼 새롭게 서대륙 무역할때 우리 몫의 술을 들여 오라고 해도 거절하겠군요?" "그렇겠지요." 모건의 말에 선애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런 쌉주한 놈 같으니라고... 아니, 그래서 그 놈에게 당해 이렇게 쳐저 있는 겁니까? 뭔 방법을 생각해 놨어야 할 거 아니에요?" "이런 쌉주한 놈 같으니라고... 아니, 그래서 그 놈에게 당해 이렇게 쳐저 있는 겁니까? 뭔 방법을 생각해 놨어야 할 거 아니에요?" 모건이 설명할 동안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벨타이거가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선애의 힘이 필요해." "어떻게요?" "사실, 이사님께서 오시기 전에 웬만큼 해결하려고 했었습니다만, 핸들리 놈이 아무래도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이번에 드워프 마을 족장님께 말씀 드린 건, 서대륙의 술을 잔뜩 싸 짊어지고 온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맛을 보여드린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크로스웰 무역 상회에서 못 구한다면 차라리 좀 더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라도 서대륙 주류 판매상을 찾아 그에게 직접 구하려고 했었지요." 모건의 설명에 그 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로어가 손벽을 따악 쳤다. "옳거니.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하지만, 핸들리 녀석이 작정을 단단히 했다니까요. 알파두르 항구 도시에서도 분명히 유통 시키는 상인이 있는데 뭔 이야기를 들었는지 남는 술이 없다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 근처의 큰 도시 유통 상인들에게는 모두 이야기가 들어가 있을 겁니다." "비열하지만, 정말 확실한 방법이군요." 로어의 말에 벨타이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당하는 입장으로서는 이를 갈게되는 방법이지만, 확실하게 뚫기 어려운 방법이지. 그래서 선애의 인맥이 필요해. 그 인맥이라면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구할 수 있겠지?" 벨타이거의 말에 로어가 놀란 눈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헤에, 이사님께 그런 인맥이 있으셨습니까?" "인맥... 이라기 보다는 예전에 신세를 진 분이 여기서 큰 클럽을 운영하시거든. 그 분이라면 도움이 되어 주실 거야. 그러고 보니 연락을 드린 지 꽤 오래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찾아가 뵈어야 겠네."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선물로 '새벽의 축복' 한 병이 어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드워프 제품 중 가장 좋은 것에 담아서 말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잘 됐군요. 사실 수도에서 그 분 선물도 샀었거든요. 그거랑 같이 가지고 가면 되겠군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랑 모건이 무척이나 반색을 했다. "오오, 역시 선애야." "선견지명이 있으시군요, 이사님." 한시름 놨다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캐더린 선물까지 사라고 하길 잘 했군.' 사실 선애는 루빈스타인 후작 저택에 하녀로 있는 에밀리와 달시의 선물까지 다 챙긴 주제에 캐더린의 선물은 깜빡 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알파두르 항구 도시 지점의 지점장으로 일하는 첼시와 사라, 칸나, 카밀의 생각까지 나서 그들의 선물까지 사는 바람에 여기 올때 가지고 온 짐이 크게 불었었다. 울 꼬맹이가 깜빡 하면 몰라도 생각 나면 모두 같이 챙겨주는 타입이기 때문에 그들 선물까지 산다는 걸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뭐, 내가 들고 오는 것도 아니였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별로 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좋아요. 그럼 생각 난 김에 지금 다녀 오도록 하죠." 선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갈 기세를 보이자, 벨타이거가 황급히 만류했다. "어,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그에 선애는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가져다 댔다. "뭔 이야기가 남았는데요?" "이번 일로 핸들리 녀석이 우리 타이거 상회가 커지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게 확실해졌지. 그러니 앞으로 크로스웰 무역 상회와 뭔가 거래를 한다는 건 불가능 할 거야. 사실, 그 정도로만 방해 한다면 다행이겠지만..."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한심스럽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회장님, 크로스웰 무역 상회 회장님이 누구셨죠?" "에이...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고.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차라리 이 정도가 났지. 만약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나는 이름뿐인 회장 자리도, 남작 작위도 잡고 있지 못했을 거야." "하기야 뭐... 그래요, 그건 내가 좀 심했어요." 선애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사과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벨타이거 녀석이 이정도까지라도 버텨 낸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알파두르의 정보 길드 부 지부장인 휴의 인정을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혹시... 직접 서대륙과 무역이라도 하게요?" "응, 그럴 생각이야." 선애는 분명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일텐데, 그 즉시 벨타이거가 긍정하자 오히려 선애가 놀라버렸다. "예? 진짜요?" "그래. 만약 드워프들이 서대륙의 술들이 마음에 든다면 어쩔 건데? 선애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 바이런국으로 들어오는 서대륙의 주류는 크로스웰 무역 상회에서 전매하고 있다고. 선애가 가진 인맥으로 술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건 어렵지 않아? 선애가 혹시 모를 거 같아서 말하는 건데, 드워프들은 엄청난 주당들을 자랑한다고. 한 드워프당 맥주 큰 통으로 한통이 일주일 밖에 안 간다고 들었어." 맥주 큰 통으로 한 통이란, 통의 높이가 2m 인데다 지름이 1m 정도였다. 그러니까 성인 남자가 손쉽게 들어가 누울 정도의 크기였던 것이다. "뭐, 선애 인맥이라면 다음에 술을 주문할때 양을 몇 배로 늘려서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겠지. 그러나, 핸들리 녀석의 손을 통해 받는다는게 난 마음에 안 들어. 게다가 드워프들이 원하는 양은 아마... 배 한척을 채우고도 남을 양이 아닐까 싶어. 그러면 충분히 거래가 가능하지 않을까?" 벨타이거의 말에 묵묵히 듣고 있던 로어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꼭 주류만 거래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서대륙에도 여성 물품은 많을 거 아닙니까? 화장품이라던지 악세사리 등등... 어차피 서대륙의 비단이 지금 얼마나 인기가 많습니까? 돈 있는 여성들이라면 한벌 이상은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가지고 있을 정도가 아니던가요? 그러니 만약 거래만 튼다면 드워프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 상회로써도 좋을 것 같군요." 그에 선애는 시큰둥하니 입을 열었다. "그래, 주류도 좋고, 화장품도 좋고 다 좋은데, 거래를 어떻게 뚫으려고요? 내가 알기로 서대륙과의 무역은 쉬운게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꽈악 잡고 있어서 다른 상회도 뚫기 무척 어렵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들이야 틈새 시장을 노렸다지만, 지금은 틈새 시장이 있으려나?" 벨타이거의 친부가 서대륙 상인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단지 그것 뿐, 벨타이거는 자신의 친부에 대한 건 알지도 못했으니 도움이 될 수가 없었다. 도움을 받으려고 해도 하다못해 친부의 이름이라도 알아야 물어물어 찾기라도 할 거 아닌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 해도 말이다. 그러니 선애가 시큰둥 할 수밖에. "아니야, 방법은 있어. 루빈스타인 상회를 비롯한 여타 상회들이 무역을 방해할 수 있는 건 여기가 바이런 국이기 때문이야. 바로 그들의 앞마당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서대륙에서는 어떨까?"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뭐예요, 그러니까... 지금 서대륙으로 직접 가서 거래를 하겠다는 말입니까?" "맞아. 이 바이런 국에서 직접 배를 가지고 가서 서대륙의 물품을 싣고 오는 상인들이 있지만, 반대로 서대륙에서 직접 배에 물건을 싣고 와서 파는 서대륙 상인들도 있어. 크로스웰 무역 상회가 직접 물건을 싣고 오는 서대륙 상인과 거래를 하는 곳이지. 그러니, 나는 서대륙에 가서 배를 가지고 바이런 국으로 올 상인을 찾기만 하면 돼. 여유분으로 배 한척 정도 더 가지고 있는 대 상인을 찾아야겠지. 갑작스럽게 배 한척의 주문이 들어와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벨타이거의 설명에 선애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래서, 드워프의 마을에 갔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내가 직접 서대륙으로 갈까 해." "호오, 직접 가시게요?" 선애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벨타이거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선은 그렇게 배 한척 정도 주문하는 것으로 하고, 거기서 더 나가면 아까 로어씨의 말 대로 서대륙의 여성 제품들을 들여 놓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서대륙과의 거래가 현재 활발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완전히 단절되었던 예전에 비하여 활발해졌다는 것일 뿐, 사실 바이런 국의 많은 상인들 중 극소수의 상인들에 의해 겨우 물꼬가 트인 정도이다. 그리하여 대표적인 상품들의 거래가 이루어질 뿐, 아직까지는 세세한 것들까지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었다. 서대륙의 대표적인 장식품인 도자기라던가 병풍, 커다란 장식품 등등은 들여오고 있었지만, 작은 악세사리라던가 소소한 생활용품이 들여오지 않는 것이 바로 그때문이었다. 뭐, 이쪽에서 들여오고 싶어도 서대륙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상인들때문에 벨타이거처럼 직접 가서 거래를 트지 않는 한 힘들 거다. 하기야,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독점하고 있을 즈음 정말 서대륙으로 건너 가 무역을 성공 시킨 상회들이 가끔 있긴 했다. 그들이 바로 지금 루빈스타인 상회의 뒤를 이어 서대륙과의 무역을 담당하고 있는 상회이긴 했지만, 아마 거래를 성공 시킨 많은 상회 중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상회들일 거다. 루빈스타인 상회가 서대륙 상인들과 거래하지 않는 물품들로 국내에 판매처를 뚫은 상회야 살아남았겠지만,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거래하는 물품을 가지고 따로 판로를 뚫으려는 상회들은 어느 날 소리 소문없이 망해 사라졌으니 말이다. 루빈스타인 상회 측이 마음이 넓어서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들게 될 수도 있는 일을 그냥 놔둘리가 없었다. 그런 거 보면 벨타이거의 조상인 크로스웰씨는 참 머리가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들이 화장품을 들여 올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대륙에서 들여온다면 아무리 싼 가격의 화장품이라도 가격이 엄청나게 뛰어 오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울 나라에서 이천원도 안 되는 소주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삼만원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야생화 가게가 고급을 지향하고 있었으니, 게다가 백금화 십단위에서 노는 가격의 드워프 제품도 잘 팔려나가는 실정이었으니 고급 화장품을 들여온다면 반응이 괜찮을 것도 같았다. '뭐, 그것도 우선은 거래가 이루어 진 뒤에야 생각해볼 문제고...' 선애는 벨타이거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가신다니 그럼 제가 그쪽으로 신경 쓸 건 없겠군요. 단지, 회장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저보고 하란 말씀... 인가요? 아, 모건씨는?" "모건은 나와 같이 가야지. 그러니까 선애가 뒷 일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도 참 나쁘시군요. 회장님이야 총각이시니 몇달 외국에 나가 있어도 하등 상관이 없겠지만, 모건씨는 처자식이 딸린 사람인데 외국으로 꼬옥 끌고 나가셔야겠어요?" 선애의 말에 주변 사람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그렇지 않아도 마누라에게 뭐라고 말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갔다 올때 서대륙의 화장품이랑 악세사리들을 사준다고 해야 할까봐요." "그래도 난 아마 달시에게 크게 미움 받을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에게는 모건이 꼬옥 필요한 걸. 모건, 부디 날 버리지 마." 선애가 수도에서 사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벨타이거가 특별히 싸준 '새벽의 축복' 말고도 몇몇 야생화 가게 제품들을 싸가지고 캐더린을 찾아가자 캐더린은 깔깔 대고 웃었다. 가지고 온 선물이 좀 많다보니 그걸 척 보자마자 부탁할 게 있다는 걸 예상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렵지 않은 왠만한 건 들어줄테니까 부탁할때마다 선물을 잔뜩 싸올 필요 없다고 친절하게 충고해 주는 것이었다. 하여간, 이 세계에 와서 자스민 다음으로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여성이었다. 알파두르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클럽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으니 서대륙에서 수입하는 술은 종류별로 다 가지고 있어서 수월하게 구할 수 있었다. 드워프 마을에는 벨타이거와 모건이 갔다. 선애가 오랜만에 드워프들을 만나고, 또 가는 김에 있는 클라리사도 만나보길 원했지만 벨타이거가 자신이 가길 원했기 때문에 양보했다. 벨타이거는 어차피 선애는 드워프들에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 또한 타이거 상회의 대표로써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길 원했던 것이다. 그 동안 선애가 알파두르에 없는 동안 벨타이거가 몇번 드워프 마을을 방문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선애의 대리인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서대륙 '술'을 가지고 선애의 대리인이 아닌 거래처 대표로 인식을 바꾸려 했다. 그의 말도 맞기는 하지만, 왠지 선애가 없어도 드워프들과의 거래에 오차가 없도록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것 같아서 쫌 기분이 안 좋았다. 벨타이거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또한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선애가 대신 상회 일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뭐, 선애는 이런 나의 내심과는 달리 드워프들과 만나지 못해 약간 서운하다... 정도 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벨타이거가 드워프 마을에 가는 대신, 그의 업무를 선애가 대신 하기 위하여 알파두르에 남기로 했다. 어차피 벨타이거는 드워프 마을에서 돌아오는 즉시 서대륙으로 출발할테니 미리 미리 그의 업무를 넘겨받아 파악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벨타이거 녀석의 서대륙행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것 같았다. 서대륙으로 가는 배는 선애가 따로 찾아 볼 필요도 없었다. 모건이 드워프 마을로 가기 전에 운송 길드에 수배를 부탁해 놓고 갔기 때문이었다. 선애가 한 일이라고는 나중에 운송 길드로부터 온 연락을 받아 두었다가 벨타이거와 모건이 돌아오면 그것을 전해준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벨타이거와 모건이 예상보다 며칠 늦게 알파두르에 도착하는 바람에 운송 길드에서 처음에 마련해준 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결국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출발하는 배를 찾다보니, 우리처럼 서대륙과의 무역을 새로 해보려고 서대륙으로 가는 배를 찾을 수가 있었다. 어 선주가 무역 거래처만 찾으려고 하는 것이었기때문에 짐이 얼마 없어서 그런지 배가 일반 무역선보다는 좀 작은 편이었다. 대신 날씬한 선체가 증명하듯 일반 배보다는 속도가 빠르다고 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거래 하길 원하는 벨타이거로써는 잘된 일이었다. 일만 잘 풀리면 얼마 전 크로스웰 상회에 술을 잔뜩 내려놓고 돌아간 서대륙 무역상이 다시 짐을 싣고 돌아올때 그 배에 같이 타고 올지도 모르겠다. 벨타이거가 제일 먼저 노리는 서대륙 대상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벨타이거와 모건이 며칠 늦은게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벨타이거와 모건이 며칠 늦은게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우리가 그때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여기고 있었다. 핸들리 녀석이 그렇게 딴지를 걸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크로스웰 무역 상회와의 거래를 방해하는 정도 외에 다른 것을 더 할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으니 말이다. "예?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애는 얼굴에 황당함을 가득 담은 채 벨타이거 녀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가 지금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닌지 알아보려는 태세였다. 그런 선애에게 벨타이거는 무지 미안한 표정이었지만,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로써는 포기하기가 정말 아까운 기회거든. 어떻게 안될까?" "그거 참..." 간절함까지 느껴지는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던지 입맛만 쩝쩝 다시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벨타이거의 부탁이란 다른 게 아니었다. 자기 대신 서대륙으로 가서 거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곳과는 달리 정보 길드의 도움은 바랄 수 없지만, 그래도 선애가 서대륙 출신이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벨타이거는 생각한 모양이지만, 선애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 곳 사람들이 선애를 자신들이 알아서 서대륙인이라고 생각 했지, 선애는 서대륙 출신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 아벤티노 대륙과 언어나 풍습도 모두 틀리다는 그 곳에 가서 선애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뭐, 내가 있으니 말이야 알아 듣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선애가 난색을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선애가 서대륙으로 가서 상인을 만나 일을 해결 할 자신이 없어서 주저 하는 줄 오해한 모양이다. "이사님,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건 없습니다. 그냥 단지 가서 주문만 하면 되시는 일입니다. 거래를 튼다 생각하지 마시고 이번 한번만 멀리 가서 물건을 사온다고 생각 하십시오." 모건이 조심스레 말하자 선애가 인상을 북북 쓴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에는 벨타이거가 말한 기회가 정말 아깝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리라. 벨타이거가 벼르고 별렀던 서대륙으로 가는 일을 선애에게 미룰 정도로 좋은 기회란 다름 아닌 알파두르에서 내노라 하는 거대 상인들의 모임 때문이었다. 사교계라던가 모임이라는 것이 귀족들 사이에서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알파두르에 본부를 두고 있던가 아니면 이 곳에 커다란 지부를 가진 상인들도 일년에 몇차례 자신들만의 모임을 가졌는데, 이번에 벨타이거 녀석이 그 곳에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물론, 타이거 상회의 회장이 아니라 크로스웰 무역 상회 회장으로써 초대 받은 것이지만 말이다. 이제 막 상회를 키우는 벨타이거의 입장으로써는, 알파두르에서 내노라 하는 굵직한 상인들과, 혹은 전국적으로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거대 상인들과 안면을 익히고 운이 좋으면 교류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이 초대에 꼬옥 응하고 싶은 건 당연했다. 아니면, 미래의 자신의 라이벌이 될 상인들의 역량을 가늠해 보는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좀 꺼림직한게 있다면, 이 초대장이 핸들리 크로스웰로부터 왔다는 거였다. 바깥으로는 벨타이거 녀석이 크로스웰 무역 상회 회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쪽 계통의 정보가 빠삭한 사람들은 벨타이거는 그냥 이름뿐인 허수아비고 실권은 핸들리 놈이 가지고 있다는 걸 다 알터였다. 그러니 핸들리가 벨타이거에게 그 초대장을 넘겨주지 않고 자기 혼자만 참여한다 해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텐데 왜 벨타이거에게 초대장을 넘겨준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타이거 상회와 크로스웰 무역 상회의 거래를 철저하게 막은 사람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가 뭔가 꼼수를 가지고 초대장을 보내준거라 해도 그걸 감수하면서 까지 참여하고 싶은 거였다. 문제는, 그 초대장의 날짜가 우리가 타고 갈 배가 출항하는 날 저녁이라는 것이었다. 출항은 그날 아침이고. 그리하여 혹시나 하고 그 배의 선주에게 하루 늦춰주면 안되겠냐고 문의를 해봤지만, 역시나 매몰차게 거절을 당한 상태였다. 그 다음에 서대륙으로 출항하는 배가 있기는 했지만, 승선을 거부 당했다. 웃기게도, 바이런 대륙의 상선은 우리처럼 서대륙과 무역을 해보려고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안 태워줬다. 나중에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들도 어렵게 어렵게 여러가지 험난한 여정을 뚫고 겨우 겨우 개척한 무역로를 다른 사람이 쉽게 뛰어들려고 하면 그게 예뻐 보이겠는가? 그러니 우리 같은 사람이 서대륙으로 가는 방법은 자신이 직접 배를 사고 선원들을 모아서 가던지, 아니면 서대륙인의 배를 타는 것이었다. 서대륙인으로써야 물건을 더더욱 많이 팔 수 있는 기회가 될지 모르니 서대륙으로 간다는 상인을 기꺼이 태워줬던 것이다. 얼마 전 우리가 시기를 놓친 배도 서대륙인의 배였던 것이다. 그들 후로는 당분간 서대륙으로 출발하는 배가 없었기에 벨타이거가 하는 수 없이 선애에게 제의를 한 것이었다. 드워프들이 캐더린의 도움으로 구해서 가지고 간 서대륙의 술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구해오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혹시라도 늦게 갔다가 서대륙에서 아벤티노 대륙으로 상선이 오는 날짜를 놓쳐서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만 하는 불상사가 생기면 어쩐단 말인가? 매일 매일 출발하는 여객선도 아니니 한번 때를 놓치면 운이 나쁘면 서너달은 기다리게 될지 몰랐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선애였지마안... 선애는 한숨을 내쉬고는 툭 내뱉듯 입을 열었다. "저는 한국인이라고요. 서대륙인이라고 저에게 너무 기대를 하시는 것 같은데, 거래를 하는 나라는 '진나라' 라면서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절 보내고 싶으십니까? 말도 안 통할텐데..." 푸념조로 줄줄 늘어놓는 선애를 둥그런 눈으로 바라보던 모건과 벨타이거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지금... 말도 안 통하는 생소한 곳에 간다고 해서 걱정했던 거야? 아하하하, 선애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어. 귀여워라..." 벨타이거가 빙글 빙글 웃으며 하는 말에 선애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금 누굴 보고~!!" 그러나 분노에 찬 선애의 말은 슬그머니 끼어든 모건에 의하여 채 나오지도 못하고 중간에 짤리고 말았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사님. 아벤티노 대륙과 무역하는 진나라의 항구도시에서는 이쪽 말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통역도 구하기 쉬운데다 큰 가게나 여관에는 이 아벤티노 대륙의 글로 안내판까지 써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회장님도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당당히 가겠다고 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웃음을 참느라 그런 표정이 된 듯한 요상한 표정의 모건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하자 선애의 눈이 사정없이 치켜 올라갔다. 아무래도 모건의 표정을 보고 심히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덕분에 침착하게 설명하던 모건의 목소리가 뒤로 가면 갈수록 점점 기어들어가더니만, 결국은 벨타이거 녀석까지 끌고 들어갔다. 괜히 '아무것도 모르시면서'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에 선애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눈꼬리를 제자리로 가라 앉히더니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그랬군요. 그 설명을 못 들었으니 걱정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에에... 설마 모르는 줄은 몰랐지. 여기 알파두르 항구 도시에도 찾아보면 서대륙말을 하는 사람을 꽤 찾을 수 있거든." 안 찾아봐서 당연히 몰랐다. 뭐어, 우리는 서대륙인이 아니었으니 찾았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긴, 서대륙 말을 한다고 해도 이 나라와 직접적인 교역이 있는 진나라의 말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되어 결국 선애는 가겠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벨타이거가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라고 말하고, 거기 가면 이쪽 말 하는 사람도 찾을 수 있다고 밀어 붙이는데 어떻게 안 가고 버티겠는가. "알았어요. 내가 가면 되는 거죠? 가긴 가는데, 난 자신 없다고요. 나중에 잘못 되더라도 내 탓 하지 말아요." 선애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선언하자 모건과 벨타이거 녀석의 얼굴이 밝아졌다. "괜찮아, 괜찮아. 선애라면 할 수 있어." "잘못 될 일이 있겠습니까? 어쨌든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선애가 결국 벨타이거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자 우리가 '어어...' 하는 사이 일이 후다닥 진행 되어 선애의 짐이 척척 쌓였고, 선애와 같이 갈 사람들까지 지정되어 버렸다. 이런 것이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라는 것이겠지? 하여간, 그렇게 해서 선애와 같이 서대륙으로, 아니 정확하게 '진 나라'로 가게 된 사람은 소피와 로어였다. 뭐, 대충 짐작이야 되었지만... 그리고, 의외의 사람이 그 일행에 끼게 되었는데 바로 토냐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토냐의 등장은 선애는 물론이거니와 벨타이거도 무척이나 놀라게 했다. 토냐는 윙겟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새벽의 축복' 향수를 본 후 부터는 그를 자신의 일대 라이벌이자 넘어야할 장벽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윙겟은 예쁜 아가씨가 - 40이 다 되어가기는 하지만 겉보기에는 충분히 아가씨로 보이니까 - 자신을 그리 여기는게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선애는 물론이거니와 벨타이거에게도 퉁명스레 대하던 사람이 토냐에게는 그녀가 묻는 말에도 상냥하게 - 물론 남들이 보면 퉁명스럽지만, 그의 성격을 대충이나마 아는 우리가 보기에는 윙겟의 성격 치고 무지 상냥하게 말해주는 거다. - 대답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게 아니라 해도 이것 저것 충고도 해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딱히 마음에 드는 향수를 만들지 못해 낙담하고 있는 토냐에게 벨타이거가 서대륙에 가니까 같이 따라가서 서대륙의 향수 재료들을 한번 둘러보는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충고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새로운 돌파구라던지 신선한 자극을 원했던 토냐는 당장에 짐을 싸들고 달려 온 것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하여 벨타이거 대신 서대륙으로 가게 된 선애와 합류하게 된 것이었고 말이다. 원래 벨타이거를 태우고 가기로 했던 배는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었던지 약속한 돈과 시간만 지키길 바랬다. 뭐어, 맨 처음 이야기 된 것 보다 사람이 한 명이 더 늘어서 - 원래는 벨타이거와 모건, 그리고 그들을 수행할 한 명의 하인이 다였다. - 돈을 더 내야 하기는 했다. 그리하여, 그 배가 출항 한다는 날 아침, 선애는 일찍부터 소피의 재촉을 받아 일어나 씻고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여어, 출발할 준비는 다 된건가?" 선애를 보내게 된 것이 못내 미안했던지, 미리 응접실에 내려와 있던 벨타이거 녀석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 "준비는 어제 다 했는데요 뭘. 그런데 어디 가요? 어째 외출하는 차림인데?" 정말 외출 망토까지 가지고 있는 벨타이거의 모습에 선애가 고개를 갸웃 거리자 벨타이거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아... 배웅 나가려고." "헤에... 미안하긴 한가 보네요." 선애가 흐응... 하는 표정으로 묻자 벨타이거가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나 대신 아주 아~~주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아~~" "그 마음 제가 돌아올때까지 꼬옥 간직하고 계시길 바래요." "기필코 그러도록 하지." 벨타이거가 하하 웃으며 문을 열어주자 기다리고 있다는 듯 일행은 저택 밖으로 나와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황당한 건 마차 안에 모건이 미리 와서 앉아 있던 거였다. "어라? 모건도 배웅?" 선애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자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배를 섭외한 건 바로 저 아닙니까? 제가 그 배까지 안내해 드리지 않는다면 누가 안내 하겠습니까?" "아..." '맞아, 배는 모건이 알아봤지?' 일행이 항구로 출발한 시각은 평소 일행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시각보다 좀 이른 때였다. 그러나 항구는 그 시각이 이른 때가 아니었는지 우리가 도착한 넓은 항구는 벌써 하루 일과를 시작한 사람들로 인하여 활기를 띄우고 있었다. 알파두르에 살고 있으면서 선애나 나는 우습게도 항구에 와 본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기야, 배를 타고 국외로 나갈 일이 없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동안 구경 이라도 하러 올 수 있었을텐데 한 번도 발걸음 한 적이 없다니 조금 우습기도 했다. 뭐, 항구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적은 있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직접 와보는 것은 틀리지 않는가 말이다. 멀리서 봤을때도 생각한 거지만, 한국에 있을때 내가 몇 번이나 가본 속초항보다 훨씬 큰 거 같았다. 하기야, 한국의 속초항은 항구치고 작은 편이긴 했지만 말이다. 항구에서 떨어진 저 멀리 깊은 바다쪽에는 십여척 정도 되는 커다란 배가 있었다. 서대륙과 왕래를 할 정도로 커다란 배들은 항구까지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짐이나 사람들이 그 배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작은 배들을 이용해야 했다. "아, 저쪽에 있는 배 보이십니까? 가장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배 말입니다." 모건이 마차에서 내려 멀리 바다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우리를 부르며 손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항구를 구경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그의 손짓을 따라 커다란 배들이 있는 저 먼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걸 말하는 거죠?" 토냐의 말에 모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음, 가장 작은 배를 말하는 겁니다." 모건의 말대로 가장 안쪽에는 눈으로 봐도 뒷쪽에 멀찍 멀찍 떨어져 있는 배들 보다 확실히 '작다'라는 느낌이 드는 배가 한 척 있었다. 다른 배들처럼 많은 짐을 싣고 가는게 아니라서 큰 화물선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작은 배일줄은 몰랐다. 그 모습을 보니 은근히 저렇게 작은 배로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다른 배들보다 날렵해 보이기는 했다. "저 배가 타고 가실 배입니다. 다른 배들보다 빨라서 일주일 정도 기간을 단축 시킬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배도 오늘 출항하기 때문인지 작은 배들이 줄지어서 그 배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작은 배들이 출발하는 항구의 선착장 한 부분으로 다가가보니 두툼한 서류를 든 남자가 그 서류에 적혀있던 목록과 자신의 주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짐들을 비교해 보며 확인해 보고 있었다. 그 남자가 약속된 바로 그 사람인듯 모건은 그 남자를 발견하자 얼른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응? 아, 우리 배에 승선하신다는..." "그렇습니다." "늦게 오지는 않으셨구료. 그런데... 어째 말한 것 보다 사람이..." 모건 뒤로 우르르 몰려 온 일행을 바라본 중년 남자의 인상이 굳어지자 모건이 얼른 대답했다. "아아, 배웅 나온 사람들이 같이 있어서 그럽니다. 승선할 사람은 약속대로 넷입니다." "그렇소? 그럼 뭐... 아, 짐은 어디에?" "마차에 있습니다. 얼른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이, 자네 둘. 이 사람 따라가서 짐을 가지고 오게." 모건이 마차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하자 중년 남자가 근처에서 짐을 작은 배로 옮기고 돌아 오던 두 일꾼을 불러 모건쪽으로 돌려 보냈다. "곧 출항해야 하니까 작별 인사 할 거면 빨리 하쇼." 그렇게 중년 남자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우리 일행에게 말하고는 곧바로 짐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확인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오기 전에 벌써 대부분의 짐을 옮긴 듯, 그 중년 남자의 주위에 쌓여 있는 짐의 양은 얼마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도 곧 배로 향하게 될 듯. 그걸 보자마자 벨타이거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듯 곧 입을 열었다. "뭐어,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했으니... 어쨌든, 잘 다녀 오도록 해. 몸 조심하고." "그럴게요. 그 동안 상회 운영 잘 하고 계세요. 망하게 하면 가만 안 둡니다." "아하하하... 그러도록 하지." 선애가 그렇게 하고 뒤로 물러나자 토냐가 벨타이거에게 다가왔다. "윙겟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잘 다녀오겠다고. 그리고 다녀와서는 윙겟님을 능가하는 향수를 꼬옥 만들고 말겠다고 말이에요." 토냐는 이 사회에서 윙겟보다는 훨씬 높은 위치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비록 집안이 망했다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당당하게 마법사 길드에 등록된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집안이 있건 없건 어디에 가서도 충분히 대접 받을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면 윙겟은 정원사 출신으로 보통 평민 할아버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토냐는 윙겟의 능력을 인정하여 존칭을 써주고 있었다. 아마 토냐가 그렇게 대해주고 있었기에 윙겟도 토냐에게 잘 대해주는 걸지도 모른다. "꼭 전해드리지요." 그렇게 물러나자 짐을 가지러 갔던 모건이 다가와 그에게 또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아까 중년 남자가 일행을 불렀다. "거기, 이제 다 했으면 빨리 오슈." "자, 이제 가봐." 중년 남자의 목소리에 벨타이거가 뒤로 물러나며 웃어보이자 선애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어째 빨리 쫓아보내고 싶은가봐요?" "아하하하... 빨리 가야 빨리 돌아오지." "네네, 정말 말은 잘 하신다니까요." "아핫, 어디 선애만 하겠어?" "하기야, 회장님에 비하면 제가 좀 났죠." "아하하하... 아, 정말 못 당한다니까." 크게 한번 웃고난 벨타이거가 왠지 묘~ 한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이런 말 장난 다시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그의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선애는 그냥 별 생각 없이 넘기기로 했는지 시큰둥 하니 대꾸했다. "그게 누구때문인데 그러십니까?" 그러나 벨타이거는 그런 선애의 말을 받는 대신 또 다시 엉뚱한 말을 꺼냈다. "무사히 돌아오도록 해." 그것도 선애를 요상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이다. 좋게 말하면 그윽한, 나쁘게 말하면 느끼하다고 표현될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에 선애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팔뚝을 벅벅 긁었다. "닭살 돋습니다. 그런 눈길은 다른 여자에게나 보내시죠? 으에... 느끼해라." "으하하하... 역시 선애에게는 안 통하네?" "뭘 새삼스레. 어쨌든, 잘 먹고 잘 계세요. 최대한 빨리 다녀올테니까." "응, 꼭 무사히 돌아와." 벨타이거 놈은 선애가 몸을 돌려 걸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선애를 쭈욱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작게 중얼거렸다. 선애야 못 들었겠지만, 벨타이거 놈을 째려보고 있느라 옆에 있던 나는 아주 자알~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이 놈이 선애에게 뭔 감정을 품는게 아닌가 싶어 괴씸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혹시 벨타이거 녀석은 이때 뭔가 불안감을 느껴서 그랬던게 아니었나... 싶다. 제 26화 작은 배로 항구에서 좀 떨어진, 깊은 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커다란 배에 오르니 그 곳에는 또 다른 사람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항구에서 짐꾼들을 지휘하던 사람은 중년 남자라서 그런지 얼굴이 그을리고 거친 피부를 가지고 있어도 몸에 사무직 담당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젊은 남정네는 온 몸에 '나 선원이요'라고 써붙인 것만 같았다. 180은 되어보이는 훤칠한 키에 옷에 가려지지 못해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에 진한 갈색으로 그을려있었다. 머리카락은 거칠어보이는 연한 금발이었는데 이게 하도 햇볕 아래에서 일하느라 색이 바래 그렇게 된 건지 원래 그런 색인지 헷갈렸다. 그런 그가 삐딱한 자세로 배 위로 올라온 우리 일행들을 쓰윽 훑어보더니만 건들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선장이랑 선주가 만나고 싶다고 하니 따라 오슈." 그러더니 우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당연히 따라와야 한다는 듯한 태도로 휙 몸을 돌려 걸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돈을 내고 정정당당하게 배를 탄 손님이건만 이건 친절하게 대해주지는 못할 망정 완전 귀찮은 짐덩어리 취급이었다. 물론, 이게 손님들을 태우는 것이 목적인 여객선은 아니었으니 극진한 대우는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게 아닌가 싶었다. 토냐도 무척 황당했던지 그 건방진 선원의 뒤를 따라가며 선애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기... 선원이란 사람들은 원래 다 저런거야?"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으니 차마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우회해서 말하는 듯 해보였다. 그녀의 표정을 본다면 '저런 건방진 놈!' 이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거 같았으니 말이다. "그, 글쎄요... 저도 잘... 저도 이런 배 타본적은 처음이에요." "그으래?" 토냐는 선애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번 갸웃 하더니만 어깨를 으쓱 하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 서대륙에서 올때는 뭐 타고 왔냐고 묻고 싶었나보다. 그래봤자 선애는 대답해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선원이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선장실이었다. 커다란 배 갑판 위에서도 한층 높은 곳에 마련되어 있는 선장실은 그 곳에서 내다보면 갑판 위의 상황이 훤히 내려다 보이고, 뒷쪽 창으로는 넓은 바다가 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는 선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난잡하다.' 였다. 벨타이거네 저택에 마련된 선애의 방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꽤나 넓직한 곳이었건만, 온통 어질러져 있는 실내 덕분에 조금도 넓직한 맛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러한 난장판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실내와 마찬가지로 무지 난잡해 보이는 커다란 나무 탁자 앞에 서서 탁자 위를 내려다보다가 마악 들어선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가 바로 이 배의 선장인 매튜라고 합니다." 정말 '전형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지저분한 텁숙부리 수염을 가지고 있는 거대하고 거칠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중년 남자가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거칠어 보이는 느낌과는 다르게 그의 어조는 꽤나 정중해서 나는 속으로 좀 의외다... 라고 생각을 했었다. 분위기가 우리를 안내한 선원 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꽤나 무뚝뚝하거나 거칠거나 퉁명스러운 기운이 서린 어조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선애도 마찬가지였던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선장과 그 옆에 있던 사람의 시선에 얼른 제정신을 차렸다. "아, 실례를 해서 죄송합니다. 어쨌든, 환영해 주셔서 갑사합니다. 목적지까지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아, 그리고 이쪽이 바로 이 배의 주인이십니다." 선장의 소개에 우리 일행은 놀란 얼굴로 그가 가리킨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니 그녀는 대충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가씨였던 것이다. 이 세계에서 남녀차별이 심하여 여자는 집에서 살림만 하고 남자가 바깥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실 중요한 지책이나 어떤 조직의 대표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남자인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 배의 주인은 서대륙까지 가서 거래를 트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남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어, 이것도 편견이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렇게 선주로 나선 아가씨는 부티를 팍팍 풍긴다거나, 아니면 뭔가 지적으로 보인다거나 상인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 없었다. 단지 무척이나 발랄한 분위기만 나는 것이, 뭐랄까... 남자들만 있는 집안에 외동딸로 큰 듯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아니면 뭔가 거친 일을 하는 집안의 여식 같았다. 용병이라거나 선원이라거나, 아니면 술집 자식? 선장 못지 않게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를 가진 거 보니 밖에서 활동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저런 분위기를 가진 아가씨가 집에만 코옥 박혀 있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 그렇게 건강하게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머리는 거의 희미하게 금빛을 품고 있는 은발이었고 눈 색도 옅은 녹색이라서 피부와는 무척이나 대조 되었다. 눈 색과 머리색 때문에 피부가 더 짙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머리는 짧은 커트 머리였다. 뭐, 길거리의 개구쟁이 소년처럼 아무렇게나 자른게 아니라 단정하게 잘 잘리기는 했지만, 이 세계에서 여유 있는 여성들은 될 수 있는 한 긴 머리를 유지하는게 보통이라 짧은 머리의 아가씨를 보니 되게 신기했다. 이 배의 주인이라고 하면 돈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하여간 여러모로 이 세계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아가씨인 건 분명했다. "이야, 이야, 만나서 반가워요. 나 말고도 서대륙으로 가겠다고 나선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 동지잖아?" 그녀는 풍기는 분위기 만큼이나 활달한 어조로 말하며 선애에게 다가와 다짜고짜로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반가웠던 모양이지만, 선애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행동일 뿐이었다. 그 동안 선애가 가게 일을 하면서 그나마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처음 본 사람과 이야기 할때는 긴장해서 굳어버렸던 것이다. "아, 예에..." 하지만 지금은 긴장해서 굳었다기 보다는 얼떨떨해서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다. "하여간 정말 반가워요. 우리 목적지에 도착할때 까지 잘 지내보자구요." "하아, 예에..." 그녀가 말할 때마다 그녀의 귀에 달려있는 은색 귀거리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길쭉한 세모 형태의 귀걸이였는데, 색을 보아하니 은이라기 보다는 백금에 가까운 것 같았다. 내 검지 손가락 길이였는데 어찌 보면 마치 화살촉 같이 보이기도 했다. 중간 부분에 붉은색의 자그마한 보석이 박혀있는 제법 예쁜 귀걸이로 그녀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흠, 예쁘네. 울 꼬맹이도 저런 스타일이 잘 어울릴 거 같군.' 그 뒤 다시 다른 선원이 와서 일행들을 갑판 아래에 있는, 일행이 사용할 선실로 안내해 줬다. 그런데 참 기가막히게도 그 방은 3인실이었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2인실이었던 곳을 침대 하나를 2층 침대로 교체한 듯 보였다. 선장실의 반의 반 정도 밖에 안되는 좁은 방이라 침대만으로도 거의 꽈악 차서 옷장 같은 건 들여놓을 엄두도 안 났다. 그나마 한쪽에 세수나 할 수 있는 세수대야가 있다는게 다행이랄까? 하지만, 우리는 그나마 나은편이었다. 일행 중 단 한명의 남자인 로어는 다른 선원들과 같은 방을 사용해야 했으니 말이다. 작은 배인데다 화물선이라서 넓은 1인실은 선장실을 제외하고 단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건 당연하겠지만 선주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다인실이었는데 로어를 배려하여 다인실을 그 혼자 쓰게 내줄 정도로 친절을 베풀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째 로어와 같이 쓸 선원들 인상이 완전 조폭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육체파가 아니라 두뇌파인 로어를 헬쓱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인상만 그럴뿐 실제로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라 해도 거친 선원들일텐데 그 속에 로어 혼자 두려니 도저히 마음이 안 놓였다 특히나 로어의 누나라고 할 수 있는 토냐는 불안감을 참지 못했는지 방을 바꿔달라고 요구를 할 정도였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일행을 안내한 선원이 자그마한 친절을 베풀어 일행들에게 4인실을 쓰게 해주었다. 덕분에 여자들과 한방을 쓰게 된 로어가 헬슥해 졌지만 그 또한 선원들 보다는 차라리 익숙한 여성들이랑 지내는게 나을 것 같았는지 반대하지는 않았다. 뭐, 그로 인하여 선원들의 노골적인 비웃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이 배를 탄게 잘 한것인지 무지 회의가 들었다. 비록 시일이 촉박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까지 시일을 단축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배에서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니 잘 버티며 최대한 빨리 서대륙에 도착하기를 비는 수 밖에 없었다. "젠장할, 젠장할, 젠장하아아알~~ 우쒸, 돌아가기만 해봐, 회장이고 뭐고 절대로 가만 안 두겠어!" 4인실 또한 비좁은 방안이었기에 방 안에 있는 가구라고는 이층 침대 두개와 세면대 하나 뿐이었다. 게다가 이 침대라는 것도 절대로 고급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래 되어 낡았기에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면 금방이라도 움직이지 말라고 항의라도 하는 듯 삐걱삐걱 거리는 소리가 나는데다 매트리스나 베개는 딱딱했고 시트는 낡은 면 시트였다. 그나마 깨끗하다는게 감지덕지로 생각할 정도였다. 선애는 한국에 있을때 온돌 바닥에서 생활하던 애였으니 딱딱한 매트리스라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소피도 여러 훈련을 받아서 그런지 괜찮은 듯 했지만, 부유한 집안 출신인 토냐나 로어는 폭신한 침대에서만 생활해서 그런지 처음 며칠은 잠도 못 자고 온 몸의 근육통을 호소 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 선실은 바깥쪽으로 창이 나 있었지만 너무 작아서 햇볕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안은 항상 어두컴컴했다. 게다가 환기도 제대로 잘 안 되는 모양인지, 습기가 많아 선실 안의 모든 물품이 눅눅해지는 모양이었다. 나야 시각과 청각 외에 다른 감각이 모두 마비 되어 별 불편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나마 토냐가 마법사라서 가끔 마법으로 바람을 불러들여 환기도 시키고 습기도 말려주고 일행 몸도 씻겨주니까 버틸만 했지, 안 그랬으면 도저히 못 견딜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일행들은 지금 불만이 쌓이고 쌓인 상태였던 것이다. 선실 안 침대와 침대 사이에는 사람 하나 비좁음을 느끼며 간신히 누울 정도의 공간 밖에 없었기 때문에 네 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려면 아랫층 침대에 앉거나 아니면 각각 자기 침대에 앉는 수 밖에 없었다. 선애는 지금 자신의 침대인 왼쪽의 이층 침대에서 베개를 내려치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울 꼬맹이의 목소리가 앙칼졌지만 다른 이들 또한 같은 심정인지 오히려 선애와 동조하고 있었다. "아무리 급한 사안이라고 해도 이 배는 너무 심했어." 토냐의 말을 이은건 그래도 벨타이거, 아니 정확하게는 배를 섭외한 모건을 이해하려는 로어였다. "모건씨도 어쩔 수 없었겠지요. 서대륙으로 향하는 배들 중 우리를 선듯 태워주려는 배를 찾는 것도 어려웠을텐데, 배 안의 사정까지 어떻게 세심하게 신경 썼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만약 이런 배인 줄 알았다면 나는 절대로 안 탔을 거예요." 선애의 말에 로어가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신도 같은 심정이었기에 뭐라 할 수 없는 거겠지. 그도 그럴것이 일행은 이 배를 탄 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이 좁은 선실에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선장이 일행을 선실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행이 선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이 배 선원들의 이상야릇한 시선들이 쏟아져 일행의 신경을 박박 긁어 놨기 때문에 그걸 견디다 못한 일행들이 스스로 반 감금 생활을 자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성 일행들과 방을 같이 사용하게 된 로어는 노골적으로 선원들에게 비웃음을 당했고, 나머지 여자들은 추파를 당해야 했다. 단지 시선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릴 정도의 노골적인 커다란 속닥거림, 휘파람, 심하면 야유까지 당하니 일행들이 견디질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처음 며칠은 무시하거나 노려봐주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지 계속 그런 상태가 지속되니 지치는 것은 일행이었다. 그렇다고 선장에게 항의를 해봐도 선장은 오히려 우리보고 거친 선원 녀석들이니 이해해 달라고 할 뿐이었다. 뭐, 녀석들에게 주의를 준다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 주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녀석들의 행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웃기는 건 선주에게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는 거였다. 오히려 그녀와 마주친다면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시선을 내리깔 정도였다. 그런 거 보면 돈의 힘이란 정말 위대했다. 아무리 거친 선원들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직장을 움켜잡고 있는 선주에게는 꼼짝도 못했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많은 출혈을 감수해서라도 공동 선주가 되거나, 아니면 우리가 따로 선주가 되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볼 걸 그랬다. 나도 울 꼬맹이가 그런 일을 당하는데 절대로 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열받은 내가 그 즉시 쫓아가서 넘어뜨리거나 일을 방해하는 등등 혼내주기도 했지만, 한 두 녀석이 아니라 이 배에 탄 선원 녀석들 전체가 그러고 있으니 별 효과가 없었다. 한 두놈만 집중적으로 꾸준히 괴롭힌다면 뭔가 깨닫는 것도 있겠지만, 이건 한 놈에게 한 두번 찝적대고 또 딴 놈에게 가서 찝적대고 하니 내가 할 일은(?) 산더미 같고 당하는 놈들은 그냥 한 두번 재수없다 여기는 것에서 끝나니 이건 내가 먼저 기운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런게 바로 괴롭힐 맛이 안 난다는 거겠지?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예전에는 조금도 이해 못했던, 남학생들 사이에서 눈길 한번 잘못 준 걸로 시비가 생겨 싸움까지 일어난다는 말이 구구절절 이해가 갔다. 그나마 식사할때는 선장실에서 선장, 선주와 함께 했기때문에 하루에 세번은 잠깐 외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토냐는 뛰어난 향수 및 화장품 개발로 인하여 잠시 뒤로 미뤄 놨던 마법 연구를, 나머지 셋은 서대륙에 대한 공부, 그리고 선애가 소피와 로어에게서 받는 아벤티노 대륙에 대한 경제, 정치 강의 등등이 있었기에 버티고 나갈 수가 있었다. 안 그러면 울 꼬맹이는, 아니면 일행 모두는 울분을 참지 못해서 벌써 배를 한바탕 뒤집어 놓고도 남았을 거다. 뭐, 정말 그랬다면 우리에게도 안 좋은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항해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다면 차라리 깡패 혹은 해적 소리를 듣더라도 선원들을 몽땅 접수해가지고 큰 소리 치거나 아니면 선원들을 몽땅 바다 속에다 던져 놓고 우리가 배를 몰고 가기라도 하겠지만, 항해의 항자도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이들이 하는대로 얌전하게 따라가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토냐도 몇번이고 마법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억지로 간신히 울분을 참은 것이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배 위의 생활이 2주 정도 지난 어느날이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배 위의 생활이 2주 정도 지난 어느날이었다. 밖의 날씨는 화창했고, 사방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가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멋진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하여 선실에 틀어박힌 생활을 하고 있던 일행의 얼굴은 암울하기만 했다. 토냐는 어려운 마법을 파고 들었기 때문에 이주나 지난 지금도 마법 책 한권을 다 마스터 하지 못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선애와 소피, 그리고 로어는 자신들이 가지고 온 책들을 벌써 다 읽어버렸기에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기분 좋을때나 이야기가 끊임 없이 이어지는 거지 시간을 때우려고 잡담을 한다는게 어디 재미 있겠는가? 그리하여 분위기가 우중충 하게 가라앉아 있어 나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선실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이 벌컥 열리며 그 동안 우리 담당으로 배정 받았는지 매번 식사때마다 부르러 오고 데려다 주곤 하던 선원이 얼굴만 빼꼼이 들이미는 것이었다. "점심 드쇼." 참으로 예의 없는 말투였지만, 일행들에게는 잠시나마 이 선실을 나갈 수 있다는 소리였기에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저 예의 없는 녀석에게도 몇번 응징을 가하기는 했지만, 저 놈은 왜 자신이 재수가 없는지 알지 못했기에 녀석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배에서 내리기 전에 한대 크게 패주기는 해야겠어.' 나는 그렇게 속으로 결심 하고는 일행의 맨 뒤를 졸래졸래 쫓아갔다. 그런데... '어라라? 그거 참...' 선실을 나와 갑판을 올라오니 어째 평소보다 많은 선원들이 갑판 위에 있다가 일행을 발견하고는 빠안~~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여전히 노골적인 감정이 들어 있었는데, 내 기분탓인지 몰라도 오늘따라 왠지 좀 더 신경을 긁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확연하게 틀려진 점은 없어서 나는 단순히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기분이 들었나보다... 하고 그냥 넘어가버렸다. 지금 내 힘으로는 저들에게 한꺼번에 뭔가 속 시원하게 한 방 후려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참는 수 밖에 없었다. 불덩어리를 선사할 수는 있었지만, 이 망망대해 위에서 배를 태워버리면 그 뒷일을 어찌 감당 한단 말인가? 그러니 그저 저 놈들의 시선을 모른체 하며 선장실로 향할 수 밖에... '체엣... 어디 강력한 설사약 같은거 없나? 저 놈들이 먹을 음식에 왕창 타버리면 속이 시원 할텐데... 저 놈들은 밥도 안 먹나? 왜 할 일 없이 저렇게 갑판 위에 올라온 거야?' 사실, 처음에 무지 열받아서 저 놈들이 먹을 식사에 소금을 왕창 뿌리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기가막히게도 하얀 가루가 여러개라서 미각을 모르는 나로써는 뭐가 소금이고 뭐가 설탕인지 구별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뭐, 둘이 빨갛고 파랗다 하더라도 뭐가 뭔지 몰랐겠지만... 그래서 바닷물을 퍼 넣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열받게도 바닷물을 두번째 퍼 날라 집어 넣으려고 할때 놈들이 먹을 스프가 완성되어 밖으로 옮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야 놈들에게 안 보이니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지만, 바닷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양철통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시선을 피하고 피해 간신히 한번 넣는 것은 성공 했지만, 그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두번까지는 불가능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녀석들은 그때 식사는 평소보다 아주 쬐에에에에~~ 금 짭짤하구 평소보다 조금 묽은 - 바닷물을 퍼 넣었더니 스프에 들어갈 물이 많아졌던 것이다. - 스프를 먹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녀석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맛나게 퍼먹기만 했을 뿐이었다. 스프가 좀 짭짤하고 묽다는 건 그 배의 주방을 담당한 선원들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괴롭히는 나를 더욱 더 열받게 하는 놈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뒤에는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걸 그만 뒀다. 그렇게 예전 일을 생각하는 사이, 일행은 어느덧 선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있었다. 선장실까지 안내 한 선원이 막 나오면서 문을 닫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 않고 그대로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일행들이 좀 놀랍다는 시선으로 식탁을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어라라?' 그도 그럴것이 평소보다 식탁위에 차려진 음식들이 질이고 양이고 수준이 한 단계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선장, 선주와 같이 식사를 하기 때문인지 평소에도 일행이 먹는 식사는 선원들이 먹는 것 보다는 좀 나은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이 곳이 고급 유람선도 아니었으니 일반 음식점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일반 음식점의 정식 수준이었으니... "오늘 무슨 날인가요?" 토냐가 식탁을 바라보다가 다시 선장을 바라보며 묻자 그가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는데 그의 손에는 와인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예, 사실은 오늘 제 생일이랍니다. 항해중에 생일이란게 뻔해서 일부러 알리지 않았는데 녀석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렇게 준비를 해줬지 뭡니까?" "어머, 생신이셨습니까?" 그의 말에 일행이 놀라 당황하자 선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저어보였다. "아아,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자자, 어서 앉으시지요. 먹기 전에 와인 한잔씩 할까요?" 우리가 오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한 것인지 탁자 위에는 자리마다 유리잔이 놓여져 있었고 그 자리 중 두 곳을 선장과 선주가 미리 차지하고 있었다. 선장의 권유에 일행은 기분 좋게 다가가 남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선장이 따라주는 와인을 받았다. 향을 맡아본 토냐와 로어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꽤나 괜찮은 와인인 모양이다. 선애는 별 흥미 없다는 식이었지만... 울 꼬맹이는 술을 별로 안 좋아했다. 이제는 성인도 되었겠다, 막는 부모님도 안 계시겠다 해서 마음 놓고 술을 마셔도 되기는 하지만 본인이 술 맛을 잘 모르니 그렇게 즐기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남들 마실때 분위기상 조금씩 마셔주는 정도였다. 그래도 많이 마시면 알코올의 힘 때문인지 알딸딸한 것이 기분이 좋아지기는 하지만, 그걸 느끼기 위하여 일부러 맛도 없는 걸 마시고 싶지 않다는 것이 선애의 지론이었다. 아직 고급 술을 안 마셔봐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선애가 술 맛을 몰라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니 입장에서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무지 다행스러웠다. "자, 건배 할까요? 선장님의 건강을 위하여~!" 보통 이런 일은 선장이 주도를 하지만, 오늘은 선장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선주가 먼저 잔을 치켜들고 건배를 청했다. 덕분에 일행들도 얼결에 잔을 들고 가볍게 상대의 잔과 부딪혔다. 그 즉시 선장과 선주는 화통하게 적포도주를 원샷 했지만, 우리쪽 일행들은 행동이 엇갈렸다. 잔에 포도주가 채워지자마자 냄새를 맡고는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로어는 선장, 선주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쭈욱~ 들이켰지만,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는 선애는 그냥 조금만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평소 술 마시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소피도 술을 안 즐기는 지 한 모금 정도 마시고 내려 놓았는데, 로어와 마찬가지로 적포도주의 향기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토냐도 기분 좋게 쭈욱 들이키는가 싶더니만, 한 모금 정도 마시고는 잔을 내려 놓고 고개를 갸웃 거리는 것이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모습만 본다면 포도주의 맛이 감탄스러워 그러는 것 같지만, 그녀의 표정은 절대로 그게 아니었다. 마치 포도주 안에 이물질이라도 끼어 있다는 듯해 보였으니 말이다. 그 표정을 봤는지 선장이 물어왔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안에 뭐라도 들어갔습니까?" 그런 선장의 말에도 대답도 안 하고 계속 고개만 갸웃 거리던 토냐가 다시 포도주를 들어 맛을 보더니만 얼굴이 굳어졌다. "먹지마!"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늦어서 로어는 벌서 한잔을 다 마셔버린 뒤였다. 뭐, 선애와 소피는 한 모금도 다 안 마셨지만... 토냐는 그렇게 외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우리 일행도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그 중 소피만은 뭔가를 알아챈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선장과 선주를 노려보고는 잽싸게 자리를 이동하여 선애 옆자리를 차지했다. "뭐, 뭐야, 누나?" 로어가 당혹한 얼굴로 선장, 선주와 토냐의 얼굴을 바라보며 묻자 토냐가 입을 열었다. "안에 수면제가 들어있어." "엥?" 히껍한 로어의 얼굴. 선장과 선주는 자리에 앉아 일행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토냐의 말이 나오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 짝, 짝~ 선주인 아가씨는 아주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이래뵈도 꽤나 애를 써서 구한 약이었는데 말이죠." 그녀의 말에 토냐가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래뵈도 그쪽 계통 사람이라서 말이지." '엥... 토냐는 화장품과 향수 전문인데... 하긴 거기에도 향과 특효때문에 여러가지 약이나 약초를 섞기도 한다니까...' 토냐의 대답에 선주가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런... 그래도 기껏 생각해드려서 아무 고통 없이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역시 사람은 평소대로 해야 한다니까." 선주의 말에 선애가 바락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선애의 질문에 선주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설명해줬다. "아, 그건... 누군가가 대금을 지불하면서 당신들을 처리해달라고 했거든. 선수금을 받았으니 계약을 이행 해야지. 그래도 꽤나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잖아?" "누가 그런...!" "어머, 미안하지만 그건 알려줄 수 없어. 이런 일을 하려면 의뢰자의 비밀 보장은 기본이지." 그렇게 선주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로어가 불쑥 토냐를 불렀다. "누나..." "응?" 갑작스러운 부름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자 로어는 일행을 바라보며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만 그대로 눈을 감고 스르르 쓰러졌다. "죄... 송..." '아, 그러고보니 로어는 한 잔 다 마셨지?' "로어!" 놀란 선애가 그를 부르며 달려가려는데, 그 보다 먼저 로어에게 다가간 토냐가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저어 보였다. "괜찮아. 그냥 잠든 것 뿐이야." "하아..." 기가막히다는 선애의 표정을 힐끔 바라본 소피가 나섰다.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 우린 해적이야. 그것도 그 유명한 붉은 해골 해적이지." 선주의 친절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선장실이 거칠게 벌컥 열리더니만 선원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평소 깔끔한 제복이 아닌 제멋대로의 너저분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일반 선원이라 그러려니... 생각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해적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지금 그들은 각자의 손에 무기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붉은 해골 해적? 그런 것도 있었어?" 선애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작게 속삭이자 소피가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인근에 있는 해적선들 중 그래도 이름 있는 축에 드는 해적선이에요. 해적 선장이 여자인 것으로 더욱 더 유명하죠. 그런데... 그 해적 선장이던 여자는 붉은 머리라고 하던데... 그래서 해적선 이름이 붉은 해골이라고..." "뭐? 그럼 이 배에 저 여자 말고 다른 여자가 있다는 소리네?" 소피와 선애의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선주가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건 아니야. 내가 바로 이 해적선의 선장이지." "에에?" 그녀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지만, 이제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발랄하게만 보이는 아가씨의 모습 어디에서도 험악한 해적선 선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던 일행의 표정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변장하고 있는 거냐?" 토냐가 그럴듯한 추론을 내놓자 자칭 해적선 선장양께서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아니야. 이게 내 본 모습이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붉은 해골 해적단의 붉은 머리의 선장은 내 어머니셨어. 나는 2대다." '호오, 해적도 대대로 물려받는 건가?' "해적이 남의 의뢰를 받기도 하는줄은 몰랐는데." 소피의 말에도 그 해적 선장양께서는 조금도 불쾌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지불한다는 대금이 마음에 들었거든." 이번에는 토냐가 물었다. "정확하게 의뢰받은 내용이 뭐지?" "이 배에 돈을 지불하고 타는 녀석들을 모조리 죽일 것." 해적 선장양은 우리가 이 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지 여유를 부리며 묻는 말에 성심 성의껏 대답해주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선장실 문을 통해 들어온 선원 녀석들은 우리리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해적 선장양의 대답에 토냐가 기가막히다는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너 평소에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원수가 있는 거냐?" 그러나 선애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거야말로 제가 묻고 싶은데요?" 선애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잠깐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그 철없는 계집애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곧 지워버렸다. 만약 그 미란다인지 환타인지 하는 계집애가 선애에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면 애초에 수도에서 개점할때 충분히 보복을 할 수 있었을 거다. 가게를 못 열게 한다던지, 영업을 방해 한다던지, 아니면 지금처럼 목숨까지 빼앗을 생각을 했다면 그때 자객을 보내던지 말이다. 지금처럼 번거롭게 선애가 서대륙으로 떠날때를 노려 해적선에게 의뢰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손쉬운 방법이 있었을 거다. '나 원... 벨타이거 녀석처럼 작위 가지고 싸움... 잠깐, 벨타이거?' 속으로 꿍얼거리던 나는 번뜩 든 생각에 선애에게 말을 걸었다. [야, 혹시... 그 의뢰한 놈이 벨타이거 숙부 아닐까? 원래는 벨타이거가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너로 바뀐 거였잖아.] 타당성이 있는 말이었다. 핸들리 녀석이 우리를 방해하기는 해도 그는 아직 벨타이거가 필요한 입장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혹시 핸들리 녀석이 벨타이거가 위험한 걸 알고 일부러 그 초대장을 보내서 못 가게 막은게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해본다. "아뭏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우선 여길 빠져 나가자." 이 방을 빠져 나간다고 해도 배 위에서 도망칠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물론, 수면제 먹고 잠에 빠진 로어는 빼고 말이다. "아뭏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우선 여길 빠져 나가자." 이 방을 빠져 나간다고 해도 배 위에서 도망칠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물론, 수면제 먹고 잠에 빠진 로어는 빼고 말이다. 토냐는 주변을 한번 빠르게 훑어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내가 앞을 뚫지. 누가 뒤를 맡아줘." "그럼 제가 맡도록 하죠." 당연하겠지만, 뛰어난 호신술을 갖추고 있는 소피가 나섰다. "좋아, 그럼 선애는 로어 녀석좀 부탁해. 내가 신호하면 잽싸게 입구로 뛰는 거야." 토냐의 말에 선애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 아마 로어를 담당한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 지금 상황에서 혼자만 불평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터라 순순히 로어를 업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선주, 아니 해적 선장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제 의논은 끝난 건가?" 배 안에서 도망칠 곳이 없을거라 여기고 있는지 그녀는 우리를 다 잡은 것마냥 여유만만이었다. 하기야, 내가 만약 그녀의 입장이라고 해도 그럴 거 같았다. 그녀는 마치 쥐를 코너에 몰아 넣고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만약 의논이 끝난 게 아니라면 말만 해. 얼마든지 시간을 더 주지." 그녀의 말에 주변에 있던 해적 녀석들이 와하하~~ 하고 웃어제꼈다. 그 놈들도 다 잡은 고기를 보는 것 마냥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단 한사람, 우리에게 이 배의 선장이라고 했던 중년의 사내가 긴장을 풀지 않은 표정으로 해적 선장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잡는게 어떻겠습니까? 이런 일에 방심은 금물이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죠?" 그러나 해적 선장은 오히려 방실 방실 웃으며 긴장을 풀라는 듯 그의 어깨를 톡톡 쳤다. "에이 참... 숙부는 걱정도 많아요. 제깟 녀석들이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맞아요, 맞아." "부 선장은 걱정도 많으시우." "나이가 들면 걱정만 는다잖아."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면 우리는 붉은 해적단이 아니라 붉은 치마단이다." "우하하하~~" 해적 선장의 말을 뒤이어 처음부터 긴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던 주변의 해적 녀석들이 왁작지껄 떠들어 댔다. "시끄럽다, 이 놈들. 그러다 큰 코 다치지." 선장, 아니 해적 선장의 숙부가 근엄하게 한 마디 했지만,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해적들에겐 먹혀들지 않는지 그 놈들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그 소란스러운 틈을 타 침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토냐가 작게 입 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소피가 아무래도 시선을 그녀에게 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잽싸게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다." "호오, 그래? 얼마든지 물어봐. 대답 못해주는 거 빼고 다 대답해줄께." 해적 선장의 친절한 대답에 주변이 다시한번 왁작지껄해졌다. "와하하~~ 명대답입니다, 선장님." "우리 선장님은 그 미모 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우시다니까." 그런 해적 녀석들의 말 틈 사이를 뚫고 소피가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에게 수면제를 먹이려고 했던 거지? 단번에 죽이려면 독약을 먹이는 것이 좋았을텐데." 소피의 말에 해적 선장이 생글 생글 웃으며 기꺼이 대답해줬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쉽겠지. 하지만, 너희들이 죽으면 노예로 팔 수가 없잖아? 대금도 받고 노예로 팔고. 이런게 바로 일석 이조 아니야? 게다가..." 거기에서 잠깐 말을 끊은 해적 선장은 이상야릇한 눈길로 우리 일행들을 쭈욱 훑어 보더니 말했다. "생각지도 않게 그물에 걸린 고기가 여자가 셋에 남자가 하나잖아. 그래서 생각 했지. 우리 애들이 요 근래 바빠서 스트레스를 풀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잠깐이라도 스트레스를 풀 기회를 줘야겠다고 말야. 뭐어, 남자를 좋아하는 녀석도 있으니 잘 됐지. 그 남자도 야리야리 하게 생긴게..." "삐이익~~" "우리 선장님 최고오~~!!" "아, 빨랑 잡자고요!" 해적 선장의 친절한 설명에 선애가 처음에는 벙 찐 얼굴이더니 뒤이어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때였다. "준비해. 선애야, 셋 세라." 토냐의 말에 선애와 소피의 근육이 긴장되는 것이 보였다. "하나, 두울, 셋!" 선애가 나지막하게 셋을 세자 그 즉시 토냐 입에서 마법 시동어가 터져 나왔다. "일렉트릭 스파크!!"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주위에 파지직~ 하며 스파크를 일으키는 야구공만한 빛의 구 다섯개가 생기더니 선장실 문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해적 녀석들에게 날아갔다. "으헥!" "저게 뭐야!" 빛의 구가 날아가자 해적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정인지 옆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과연 이름 있는 해적단 녀석들이라 그런지 동작 하나는 잽쌌다. "가세욧!" 소피의 외침이 아니라 하더라도 미리 준비하고 있던 선애가 제일 먼저 로어를 업은 채로 달렸고 그 뒤를 토냐와 소피가 따랐다. 그들을 앞질러 내가 굳건히 닫힌 선장실 문을 열어 제꼈고 일행이 나오자마자 문을 닫았다. 그러자 토냐가 몸을 휘익 돌리더니 닫힌 선장실 문을 향해 두 손을 뻗고 외쳤다. "언락!"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장실 문에 파르스름한 빛이 잠깐 어리다가 사라졌다. 그 뒤 문이 딸깍딸깍 거리다 쿵쿵 거리는 것이 문이 안 열리는 모양이다. "됐어. 문을 마법으로 잠궈 버렸으니 잠시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문이 열리지 않으니 안에서 문을 쳐대고 욕을 지껄이는 게 들려왔다. 그에 토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지만, 소피가 가라앉은 어조로 반박했다. "그러지 못할 거 같은데요." 그도 그럴것이 겨우 녀석들의 손에서 잠시라도 해방 되었다고 안도한 순간 우리는 밖에 있던 또 다른 해적 무리들에 의하여 둘러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주방과 식당을 담당하고 있던 녀석들의 모습도 보였다. '하, 전에 읽은 소설 책에서 해적선에서는 주방장은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갑판 청소하는 신입 선원까지 모두 전투 요원이라고 하더니만 그게 진짜였나 보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선장실이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었으니 이 해적선의 전투 인력 전원이 들어왔을리가 없었다. 다 들어오고 싶어도 못들어왔을테니 말이다. 게다가 여자 셋을 잡는데 모든 인력이 몽땅 동원될리도 없고 말이다. 그걸 생각 못한 나는 그저 선장실을 빠져나오기만 하면 뭔가 길이 생긴다거나 하다못해 잠깐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을거라 여겼다. '경험이 없어서 그래, 경험이.'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암담한 눈으로 우리를 둘러싼 채 대치하고 있는 놈들을 노려봤다. 녀석들도 우리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걸 알아채서 그런지 함부로 덤비지 않고 신중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냐도 입으로 중얼중얼 거리는 것이 여차하면 마법을 날릴 태세였다. 나 또한 여차하면 불기둥이라도 피워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배 위에서 불 가지고 장난 치는 건 위험하지만, 요즘 내 불을 다루는 능력이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져서 내가 원한다면 나무가 아니라 종이 위에서 불을 태운다 해도 나무나 종이에 불이 옮겨붙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단지 놈들을 처리한 후 뒷감당을 하지 못할 것 같아 단지 대기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우지끈~~ 쿠당탕~~ 하는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더니 기가막히게도 선장실 안에 갇힌 녀석들이 문이 안 열리니까 그 주변에 있던, 문 보다는 약해 보이는 창문을 부수고 그 곳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진짜 짜증나게 만드네. 어차피 붙잡힐 거 얌전하게 붙잡힐 것이지, 감히 내 선장실의 창문을 부수게 만들어? 너희들 이 배가 어떤 배인지 알기나 해?" 해적 녀석들에 앞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온 해적 선장이 화가 나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만만하던 얼굴에 가지고 있던 미소를 싸악 지워버리고 목소리도 조금 날카로와졌다. '어떤 배긴, 해적선이지.' 그녀의 질문에 속으로 이죽거리며 대답해주기는 했는데, 정말 난감했다. 하다못해 멀리 육지라도 보인다면 이 배를 다 뽀사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 바탕 소동이라도 일으킬텐데, 우리가 알파두르 항구에서 떠나온지 어언 2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 동안 서대륙으로 갈 것이라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배가 움직이는 것에는 요만큼의 신경도 쓰지 않았던 터였다. 지금 어느쪽으로 가야 망망대해고 어느쪽으로 가야 육지가 나오는지도 모르는 시점이라서 무지 괴씸하기는 했지만 저 놈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제압하기에는 놈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머뭇머뭇 대기만 하고 있는 그때였다. "우왁!" 선애의 놀람에 찬 외침. 여자다운 '꺄악!'과는 거리가 좀 먼 비명이긴 했지만, 다급하다는 것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선애야!] "선애!" 선장실의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온 해적 선장에게 신경이 쏠려 있느라 나나 토냐는 미처 뒤에 있던 녀석들이 선애에게 달려드는 걸 막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사람, 선애 옆에 있던 소피가 다행스럽게도 녀석들에게 맞서 갔다. "쿠엑!" "꽥!" 선애의 비명 소리가 난 다음에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나는 안타깝게도 소피의 멋드러진 펀치를 보지 못하고 단지 턱을 부여잡고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나는 녀석 하나와 복부를 감싸고 제 자리에 주저앉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뭐, 그 다음 복부를 붙잡고 주저앉는 녀석을 소피가 다시 멋드러진 발차기로 턱을 걷어차는 모습은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 토냐의 시선이 다른쪽을 향해 있자 그 틈을 타서 선애나 소피를 인질로 잡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소피가 뛰어난 체술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른 그들의 계산 착오로 부상만 입었지만, 시도는 정말 좋았다. 녀석들이 소피에게 얻어 맞는 틈을 타 정신을 차린(?) 다른 녀석들이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토냐의 시선이 녀석들에게 닿은 후였다. "움직이지 맛! 움직이면 마법 맛을 보게 될 것이다!" 토냐는 자신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척 보기에도 고압 전기로 보이는 빛줄기가 파지직 거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배 위라서 차마 불을 사용할 수 없어서 선택한 것이 전기인 모양이다. 전기라도 뜨거우면 불이 나겠지만 전압만 잘 조절하면 그래도 덜 위험할 거다. 여차하면 나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그런 토냐의 날카로운 말에 처음 달려들던 두 녀석이 제압되는 틈을 타 달려들려고 몸을 움찔 하던 녀석들의 동작이 멈춰 버렸다. "모두 꼼짝 마. 안 그러면 네 놈들이나 우리나 다 같이 죽는 거야. 내 능력이면 이 배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산산조각 낼 수 있다고." 토냐가 한바퀴 비잉 돌아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해적 녀석들을 하나 하나 노려보며 힘 주어 말하자, 토냐와 시선을 마주친 녀석들은 슬그머니 토냐의 시선을 피했다. 잘못 했다간 자신들이 덤벼들거라고 오해를 줄거 같은가보다. 그렇지 않아도 토냐가 들어올린 손에서 파직 거리는 전기의 스파크는 아까에 비해 훨씬 커졌다. 얼핏 봤다가는 번개가 손 위에 내려 꽂혔다고 착각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저 녀석들 사이에 마법사가 있다는 소리는 없었잖아?" 그 모습에 해적 선장이 옆에 있던 녀석에게 앙칼지게 물었다. "그, 그게 저도 잘... 그런 말은 없었는데..." 옆에 있던 녀석이 아무래도 우리 일행에 대한 정보를 담당하는 놈인가 보다. 기가 팍 죽어 우물쭈물 하고 있는 녀석에게 처음 우리에게 자신을 선장이라고 말했던 중년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바보 같은 녀석. 타겟은 한번 확인 했다고 안심하면 안되지." "그, 그게... 마지막에 갑자기 인원이 바뀐 거란 말입니다." 녀석이 억울한지 볼 멘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안 좋았던 터라 목소리에 힘은 없었다. "어쩌지요? 저 놈들 사이에 마법사가 끼어 있으면 아무래도 힘들텐데... 이쯤에서 그냥 타협을 보고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중년 남자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선장을 향해 건의를 했다. 그에 해적 선장은 열받는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쯤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조심스럽게 하나 둘씩 건의를 했다. "저기... 그냥 한꺼번에 덥쳐 버리죠?" "야, 그러다 저 마법사가 다 같이 죽자고 폭발하면 어쩌냐?" "그, 그건..." "나중을 기약하는 게 어떨까요? 여차하면 우리 아지트로 데리고 가는 것도 좋구요. 제깟 놈들이 항해를 알기나 하겠습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그 즈음 우리 일행도 재빠르게 의견이 오고가고 있었다. "이제 어쩌죠?" 선애의 말에 전기 스파크를 번쩍이고 있는 토냐가 하늘 높이 올렸던 팔이 아픈지 슬그머니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몰라." 최대한 마나를 아끼려는지 빛의 크기도 아까보다 훨신 작고 약해져 있었다. "혹시... 텔레포트 할 줄 아십니까?" 소피의 말에 토냐가 절망스러운 어조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내가 가능할 리 없잖아? 나는 겨우 3클래스 익스퍼트, 4 클래스 익스퍼트 마법사라고." "몇명을 인질로 잡아서 협박 해볼까요? 이 놈들 살리고 싶으면 돌아가자고." 소피의 말에 선애가 토냐를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러자 토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 밖에 없으려나? 그럼... 누구를 인질로 잡지?" "아무래도 해적 선장을 잡는게 났지 않을까요?" 소피의 말에 선애가 슬그머니 나를 한번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아. 그럼 인질로 잡는 건..." 선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우리랑은 반대로 저쪽에서 쑥덕대고 있던 해적들의 의논이 끝났는지 해적 선장양께서 갑자기 우리를 불렀다. "이봐!" 의미심장한 뜻이 있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우리의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려는 건지 그녀는 처음처럼 방긋 웃어 보이며 일행이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길 기다리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이쯤에서 그냥 타협하자." 우리도 바라는 바였지만, 해적 쪽에서 먼저 제의를 해오니 반가움 보다는 의심이 앞섰다. "타협?" 그게 나 뿐만이 아니었던지 토냐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묻자, 해적 선장양 께서는 별 다른 뜻이 없다는 의미인지 빈 손인 양손을 앞으로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래, 타협 하자고." 그러자 소피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신이야 비무장일지도 모르지만, 험악한 사람들이 둘러싼채로는 당신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걸?" "거참 의심도 많으셔라." 소피의 말에 해적 선장 양은 어이 없다는 듯 허허 웃으면서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해적들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녀석들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만 손에 들고 있던 무기들도 다 땅에 내려놨다. "이 정도면 만족해?" 하지만, 솔직히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난 거 가지고 뭔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무기도 내려놓기는 했지만, 여기가 한번 도망가면 다시는 못 잡을 도시의 뒷골목도 아니고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배 위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도 소피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나자 토냐가 해적 선장을 향해 턱짓을 해보였다. 하고 싶은 제안을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그에 해적 선장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계속 싸운다면, 우리에게는 마법사가 없어서 너희들과 싸우면 큰 피해를 입을 거야. 그리고 너희들도 비록 마법사가 있고 저 계집이 좀 하는 모양인데, 그렇다 해도 우리 모두를 상대로 이기기는 힘들 거야. 설사 이겼다고 해도 항해 기술도 모르는 너희가 어떻게 육지로 돌아갈 거지?" 거기에서 해적 선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 동의하냐는 시선을 일행에게 던졌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에 우리 일행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가 말을 계속 하기를 재촉했다. "해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이거야. 싸움을 중지하자는 것. 만약 너희들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이상 너희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고 의뢰를 포기하고 너희들을 무사히 육지로 데려다 주겠어." "육지가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지." 토냐의 말에 해적 선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물론 알파두르 항구지. 서대륙에는 처음부터 갈 생각도 없었어. 혹시 너희들이 원하다고 해도 우리는 한번도 간 적이 없어서 어려워." 드워프들에게 술을 가져다 줄 날이 엄청나게 늦어지기는 했지만, 지금 그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 제안을 덥썩 받아들이기에는 해적 선장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쪽이나 우리쪽이나 양쪽 다 좋은 조건이기는 한데, 이들이 우리에게 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믿음이 조금도 가지가 않았던 것이다. 역시나 토냐가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제안은 좋은데, 그걸 어떻게 믿지?" 그러자 해적 선장이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가 한 행동과 우리의 정체를 알고 믿기는 어려울테지. 그래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너희들에게 인질이 되겠어." 그녀의 말에 그녀와 의논하지 못했던 해적들이 놀라 숨 들이키거나 그녀를 부르는 등등 웅성 거림이 일어났다. 하지만 해적 선장은 싸그리 무시한채로 우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내 조건이?" 그녀의 조건은, 물론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우리 일행도 그들 중 중요한 사람 한명을 인질로 잡아서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인질이 해적 선장이라면 더더욱 좋았다. 그녀가 혹시 다른 마음을 품고 온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소피도 있고 토냐도 있으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애와 토냐, 그리고 소피는 서로의 시선을 마주쳐 의사를 교환하더니 결국 해적 선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대표로 토냐가 승낙의 말을 건넸다. "좋아. 혹시 몸에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없겠지?" 토냐의 말에 해적 선장이 방글 방글 웃으며 말했다. "의심스러워? 의심스러우면 이 자리에서 옷을 벗어줄 수도 있어." "의심스러워? 의심스러우면 이 자리에서 옷을 벗어줄 수도 있어." 벗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벗겠다는 여자는 당당했지만, 그 말을 들은 선애는 무지 기가막힌 얼굴을 했고 토냐는 자기가 벗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빨개졌으며 소피는 담담했다.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벗으라고 해놓고 그녀의 온 몸을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내가 나설 곳이 아니었기에 가만히 입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되, 됐으니까 그럼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 오도록 해. 경고하지만, 허튼 행동을 했다가는 그대로 날려버릴 거야." "알았어." 토냐의 말에 해적 선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 손을 들어 빈 손을 보인 채로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 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토냐의 손에서 파지직 거리며 불꽃을 튀기던 전기 스파크는 사라져 있었지만 토냐의 폼을 보니 다른 마법을 준비해 놓고 있는 모양이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가 다가올 수록 우리 일행은 긴장한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해적들 또한 긴장한 시선으로 우리를 주시했다. 단 한사람, 당사자인 해적 선장은 여유만만한 얼굴이었다. 속 마음을 내색 안 하는 건지, 정말 여유가 많은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드디어 해적 선장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고 소피가 먼저 앞으로 나서서 그녀가 들고 있던 팔 하나를 잡아 뒤로 꺾어 제압했다. "아야야야... 사살 하라고. 평화를 위해 넘어 온 인질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순순히 팔을 꺾여주던 해적 선장이 과장되이 인상을 찡그리며 엄살을 부리자 소피는 흥~! 하고 코웃음을 한번 치기는 했지만, 팔 힘을 약간 풀어줬다. 해적 선장의 말대로 휴전 하기 위하여 넘어온 인질을 거칠게 다루었다간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실수였다. 소피가 약간 힘을 빼서 그녀의 꺾은 팔을 느슨하게 해주는 순간, 해적 선장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소피의 손을 거세게 쳐 내고는 소피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앗!" 정말 앗 하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 소피를 쳐내고 벗어난 해적 선장은 바로 옆에 여전히 잠들어 있는 루어를 데리고 있느라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선애에게 달려들었다. "우악!" 놀란 선애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해적 선장은 선애의 등 뒤를 점하고 팔뚝으로 선애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는 반대 손으로 자신의 귀에 달려 대롱거리고 있는 귀거리 하나를 뜯어내듯이 떼어 내 그 끝을 선애의 목에 가져대 댔다. "선애야!" "선애님!" 놀란 토냐가 마법 시동어 대신 선애를 불렀고 소피도 선애를 부르며 달려들려고 하자 해적 선장양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외쳤다. "움직이지 마." 저 놈의 귀걸이가 이상하게 끝이 뾰족하다 했더니만, 이럴때 쓰는 암기였던 모양이다. 해적 선장의 말에 토냐와 소피가 멈칫 거렸다. 그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해적 선장이 말했다.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이 귀걸이 끝에는 독약이 뭍어 있거든? 조금만 이 아가씨의 목을 파고 들면, 이 아가씨는 그 즉시 끝장이야." 그러나 소피는 그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웃기지 마. 어차피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이잖아?" 하지만 해적 선장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언제 죽인다고 했는데? 나는 분명히 노예로 판다고 했어." 그녀의 말에 토냐가 방방 뛰었다. "시끄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네가 말한 걸 그렇게 쓰레기 버리듯 어거벼릴 수 있는 거야?" 토냐의 반박에 해적 선장이 아주 기분 좋게 방그읏~~ 웃으며 말했다. "해적이 말한 걸 그대로 믿어버리는 사람이 바보 아니야?" 그 말에 토냐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래, 나 바보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짓을 좀 해야겠어. 네놈들 죽고 우리도 죽자아!" 그렇게 열받아서 외치는 토냐가 마악 마법 주문을 외우려고 하자 해적 선장이 그 대바늘 같은 자신의 귀걸이를 선애의 목에 더 가까이 되며 외쳤다. "조용히 해!" "윽..."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외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눈 앞에서 선애가 붙잡혀 있으니 차마 계속 외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토냐가 주문을 멈추자 해적 선장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행을 무척이나 소중이 생각하는 아주 착한 마법사시군요." "그러게. 그리고 너는 참 멍청한 해적이고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온 말이라서 그런가? 해적 선장양께선 그 목소리가 나온 곳을 향해 무척이나 황당하다는 시선을 돌렸다. 그도 그럴것이, 그 말을 한 이는 바로 해적 선장에게 잡혀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선애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상황에 맞지 않게도 얼굴은 여유만만에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그러한 선애의 태도에 오히려 뭔가 불안함을 느끼고 긴장을 한 건 해적 선장이었다. "뭐지? 뭐가 그렇게 여유만만이실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러나 이 해적 선장양께서도 어머니의 빽 덕분에 거저로 선장의 자리에 올라온 것은 아니었던지 금방 긴장어린 표정을 지우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선애의 목에 가져다 댄, 귀걸이 암기를 위 아래로 쓰다듬으며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협박을 가했다. 그러나 울 용감한(?) 꼬맹의 얼굴은 여전히 여유만만, 무사태평, 유유자적 등등이라 표현할 수 있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거기다 이제는 뭔가 있는 듯한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씨익 지어보였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럴 수 있는 거지.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 지금이라도 얌전히 물러나서 네가 처음에 제안한 대로 행동하는 게 좋을 걸? 안 그러면 후회할 거야." 선애의 자신만만한 말에 해적 선장이 불안함이 더 가중되었고 거기에다 뭔가 껄끄러움 등등이 생긴 모양이다. 그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결국 화를 냄으로써 감정을 표출해 버렸다. "시끄러! 뭐가 그렇게 잘났지? 어디, 그 믿는 구석 좀 한번 보여주지 그래? 응?" 그러면서 해적 선장이 강하게 선애의 목을 조이려고 할 때였다. "꺄아악~!!" 그녀는 그 동안의 호탕한 이미지를 깨뜨리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그 이유는... 내가 뒤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화악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물로온, 선애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댄 독이 묻은 뾰족한 귀걸이는 선애의 목에 찔리지 않도록 자알 잡고 말이다. 갑작스럽게 머리카락이 뜯기는 통증 때문인지 놀람 때문인지 선애의 목을 조이고 있던 그녀의 팔이 풀리자 그걸 놓치지 않은 나는 그 팔을 잡고 뒤로 꺾었다. '호신술 배워놓길 잘 했다니까. 비록... 어설프지만... 냐하하하...' 그렇게 해적 선장이 선애에게서 떨어지자 얼른 소피가 달려와서 선애를 끌어 토냐쪽으로 밀어 놓고는 내가 제압하고 있던 해적 선장을 대신 잡았다. 이번에는 인정사정 없이 손에 힘을 주어 아까보다 더욱 더 강하게 그녀의 팔을 꺾고 어깨를 붙잡아 제압했다. "아윽... 사살 해. 아프단 말이야." "당신이 자초한 일이지." 정말 아팠던 모양인지 해적 선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 거렸지만 소피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선애의 무사함을 확인 한 토냐는 기가막히다는 시선으로 소피에게 제압당한 해적 선장을 바라봤다. "정말 기가막히는군. 뭐? 해적을 믿은 사람이 바보라고? 그래, 이렇게 되니까 좋냐? 이제 어쩔 거냐?" 비아냥 거리는 어조로 묻자 해적 선장이 피식 웃었다. "글쎄. 이제 내가 뭐라고 말해봤자 너희들이 믿기나 하겠어? 그냥 이대로 다 같이 죽을까?" "이..." 무책임한 해적 선장의 말에 토냐가 분노한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이런...'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선애를 무사히 구출하고 해적 선장을 인질로 잡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상황은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해적들을 이제 콩으로 메주를 만든다고 해도 믿지 않을 상황이니 해적 선장을 인질로 잡았다 해도 저 놈들이 이대로 얌전히 말을 들을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저 해적 선장이 정말로 거래를 할 마음이었다면 모든게 평화적으로 잘 해결 되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저 심보 고약한 해적 선장 덕분에 일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고, 덕분에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번져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요, 선장? 자신 있게 이번 의뢰를 받아들이더니만, 돈을 벌기는 커녕 우리가 다 죽게 생겼잖아!" 무지 못마땅하다는 어조로 나선 놈은 맨 처음 배에 탔을때 우리를 마중해서 선장실로 안내해준 놈이었다. 그 뒤로는 다른 사람이 연락을 가져오고 안내도 해줘서 배 위를 지날때 얼핏 얼핏 얼굴만 보던 녀석이었는데 보아하니 선장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배의 대장인 선장에게도 공손은 커녕 무례한 어투를 사용하는 걸 보니 말이다. 게다가 문제는 녀석의 말에 노골적으로 동조를 표하는 해적들이 있다는 거다. '내분인가?' 혹시 저희들끼리 치고박고 싸운다면 우리에게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지만, 아까 해적 선장의 거짓 거래를 겪은 뒤라 그 모습이 좋다기 보다는 '이번에는 또 뭔 수작인거냐.'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네 이놈. 닥치지 못할까? 지금 이 상황에 그 말투가 뭐야? 내분이라도 조장하겠다는 거냐?" 해적 선장이 숙부라고 부른 중년 남자가 나서자 조금은 '어... 이거 진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아직은 진짜라고는 믿지 못할 거 같다. 중년 남자의 카리스마 넘치는 매서운 호통에도 그 4가지가 없는 놈은 조금도 위축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쳤다. "닥쳐 영감. 그럼 어쩌라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다 죽게 생겼는데. 이렇게 만든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그러자 주위에서 '옳소!' '역시 계집은 안돼!' '엄마 빽만 믿고...' 등등의 동조 소리가 아까 보다 더욱 더 높게 퍼졌다. "이놈들이!" 중년 남자의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그러고보니 그 남자도 나이가 좀 있어보였다. '어... 이거 진짜인가?' 토냐나 선애, 소피도 당혹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들도 진짜처럼 느껴지는가보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나설 수는 없는 일이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해적 선장이 나섰다. "모두 닥쳐!" 갑자기 터져나온 커다란 고함 소리. 뭐, 소피에게 제압당해 있는터라 주변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주변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으는데는 성공했다. 그걸 본 해적 선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지는 시선으로 자신에게 반하는 놈들을 바라봤다. "그래, 난 실패했다. 그러니 이번 일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도록 하지. 그 뒤는 잘난 네 놈들이 알아서 해결해봣! 죽든지 이들과 타협하던지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해적 선장은 아주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이들이 네 놈들의 말을 믿어줄지는 미지수지만 말야." 그러더니 갑자기 으윽...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쿨럭..." 게다가 기침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시커먼 물... 소피가 황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지만 이미 해적 선장의 얼굴은 푸르죽죽했고 입술은 보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한 선애가 곁으로 다가오자 소피는 해적 선장의 손을 들어보였다. 거기에는 아까 선애의 목숨을 위협했던 해적 선장의 귀걸이 암기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암기의 뾰족한 끝이 해적 선장의 손가락 끝에 꽂혀 있는 것이었다. "선장님!" 그 모습에 선장파들이 놀라 달려들었고, 반대편도 낭패한 표정으로 덤벼들었다. "씹, 덤벼!" [선애야!] 그 모습에 놀란 나는 무조건 선애를 잡아당겨 그 무리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놈들이 우리를 둘러쌓고 있던 터라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 불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콰과광~~!! 나 보다도 먼저 토냐가 손을 썼다. 물론, 그녀는 사람들에게 직접 타격을 주고 싶지는 않았는지 사람들이 아무도 없-으리라 예상 되-는 선장실을 노렸지만 말이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선장실이 산산조각이 나자 험한 표정으로 달려들려고 하던 녀석들이 멈칫 거렸다. 그런 이들을 쭈우욱 둘러보며 토냐가 말했다. "잊었나본데, 나는 마버사거든? 지금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이번에는 선장실이 아니라 네 놈들 발 밑을 폭발시켜 주지." 토냐의 협박이 먹혀들었는지 녀석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눈빛만은 매서운 것이 여차하면 다시 달려들 태세다. '허어...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꼬.' 인질이었던 선장은 자결했고, 선원들은 두 패로 나뉘어 분위기가 험악하다. "이제 어쩌죠?" 선애가 묻자 소피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방법은 있습니다. 첫째는, 가만히 관조해서 양 패거리가 싸우는 걸 지켜보거나 아니면 한쪽 패거리와 거래를 해서 반대편 패거리를 제압하는데 힘을 보태는 대신 육지로 돌아가는 거죠. 아니면 우리가 양쪽을 다 제압하던지." 그녀의 말에 선애가 말했다. "지금은 단순히 관조하기는 그른 거 같은데?" 일행이 있는 곳은 싸움의 한 복판, 일명 태풍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싸움의 한 귀퉁이에 있었으면 이게 제일 좋지만, 놈들에게 둘러쌓여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고 놈들의 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데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설사 빠져나가려 한다면 분명 어느쪽과 부딪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되니 싸우지 않고 지켜본다는 건 애당초 그른 일이었다. "한쪽 패거리와 거래한다는 것도 마땅치 않아." 이건 토냐의 말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와 거래를 할 가능성이 있는 쪽은 선장 반대파 녀석들인데, 자신의 상관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안 좋은 상황에 싸악 등 돌리는 놈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이런 놈들은 박쥐같은 놈들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이나 생명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이 속한 조직을 배신하고 팔먹을 수 있는 놈들. 그러니 믿음이 가는 건 그나마 좀 의리가 보이는 선장 옹호파인데, 선장 시체가 우리들 손에 있는데 우리랑 거래를 하려 하겠는가? 선장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덤벼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럼 양쪽 다 제압할까요? 몇 놈만 살려 놓고 위협하면 항해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소피의 제안에 선애와 토냐가 시선을 마주봤다. 그게 어째 제일 그럴듯해 보였던 것이다. "좋아. 그럼 대충 양쪽에서 몇명만 살려놓고..." 토냐의 말에 선애와 소피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경청한다. "내가 한꺼번에 절반 정도 쓸어버리지. 그럼 선애나 소피는?" "제가 제압하죠. 가능 할겁니다." 선애의 말에 토냐와 소피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아까 해적 선장에게 잡혔을때의 일도 있고 해서 믿는 모양이다. 물론, 궁금증은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나중에 묻기로 한 모양이다. "열명 정도면 될 거예요." "알았어." 소피의 말에 선애가 날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나도 대답을 해줘야 하겠지만... 날 힐끔 보던 선애가 내가 대답을 안 하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도 그럴것이, 아마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거다. 새파랗게 질렸다던가, 새하얗게 질렸다하는... 유령도 그런 얼굴색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언니?/" 내 표정이 되게 놀라웠는지 선애가 대놓고 나를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고 싶었는데 입이 따악 달라붙었는지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만큼 내가 느끼는 압력은 너무나 크고 커서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 선애에게 정말 절실하게 묻고 싶었다. '너는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거대한 힘이 느껴지지 않니?' '너는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거대한 힘이 느껴지지 않니?' "/언니, 왜 그래?/" 내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굳어만 있자 더욱 더 이상했는지 선애가 재차 물어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토냐와 소피도 의아함을 느낀 모양이다. "왜 그래?" "무슨 일입니까, 선애님?" "아... 그게... 날 돕던 힘이 이상해요." 선애의 말에 토냐와 소피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하필 이럴... 응?" 한탄을 내뱉으려던 토냐. 그런데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뭔가를 느낀 듯 얼굴이 굳어지더니만, 그 굳어진 얼굴에서 서서히 사아악~~ 하고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나 말고도 토냐까지 이상한 행동을 하자 선애는 더더욱 불안한지 나와 토냐를 번갈아 바라보며 묻는다. "토냐? 토냐까지 왜 그래요?" 불안함 때문인지 목소리가 떨리자 소피가 다가와 선애의 팔을 굳건하게 잡아준다. "아그그..." 그래도 토냐는 나보다 한결 나은지 입술이 벌려졌다. 물론, 단지 그것 뿐 그녀의 입에서는 단어가 형성대어 나오는 대신 뭔가 신음소리 같기도 한 괴상한 언어만 흘러나왔지만 말이다. "왜 그래?" 덕분에 울상인건 선애. 그러나 이상하게도 토냐와 나 말고는 우리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힘을 느끼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나와 토냐는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해적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최대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토냐와 내가 묶인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데 참, 이 무슨 오묘한 일이런가. 해적들이 주춤주춤 다가와도 우리 일행이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그에 힘을 얻은 듯 와아~~ 하며 달려들려는 찰나~! ((어느 버러지가 죽고 싶어서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거냐?)) 만약 나에게 고막이 있다면, 그 즉시 고막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기실 다른 이들에게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현실이었기에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귀를 막고 그 자리에서 업드러지고 말았다. "끄으윽..." "끅, 끅..."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겠던지 나오는 소리라고는 얕은 신음 뿐이었다. 그러나 나라고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온 몸이 재가 되어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톡 건들면 우수수 무너져 내려 바람이 불면 휘잉~~ 하고 날아가 흩어져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것만 같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서 견디고는 있지만, 까딱 잘못하다간 정말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이런게 바로 소멸 될 것만 같은 기분인걸까? 그러한 기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미치겠군.' 이었다.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할 처지라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 거대한 힘의 주인의 모습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다행이라고 할 것은, 그 거대한 주인은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보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다 업드러졌는데 홀로 뻣뻣하게 서 있는 날 보고 뭐라고 한 마디 건넸을테니 말이다. 날 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내가 소멸을 생각할 정도로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드래곤 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갑자기 바다 밑에서 불쑥 솟아나서 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을 부라리며 죽고싶냐고 말한 존재는 바로 드래곤이었다. 말로 많이 듣고 그림으로 많이 보고 판타지 소설에서 묘사를 많이 읽어서 그런지 척 보자마자 한눈에 드래곤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림으로도 무척이나 강인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한국에서 상상력으로 그려진 그림은 실제 드래곤 모습의 1/10 도 표현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게다가 존재감만으로도 내가 소멸될까봐 두려움에 떨게하다니... 몸체가 고고히 하늘에 떠있는 달빛을 받아 새하얀 은빛으로 빛이나는 드래곤은 그 두려움 속에서도 찬탄이 나올 정도로 정말 아름답고 강한 생명체였다. 과연 모든 생명체중의 으뜸이라고 손꼽힐만 하다. ((간뎅이가 너무 부어 죽고싶어 환장 했느냐? 감히 내 영역에 그 천한 발을 들이밀다니.)) '헉... 여기가 드래곤 영역이었어? 이 바보 같은 해적 놈들이!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그래서 열받은 드래곤이 뛰쳐 나온 모양이다. 드래곤의 말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업드리고 있는 놈들이 사색이 되었다. ((다 죽여주마!)) 마지막으로 매서운 사형 선고가 떨어지자 드래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벌벌 떨기만 했던 해적들이 경악을 했다. 그리고 그 중 해적 선장의 숙부라 불린 중년 남자가 마지막 용기를 그러모았는지 목소리를 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위대한 존재시여. 저희는 여기가 위대한 분의 영역인지 몰랐습니다." 물론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는지 엄청 떨리는데다가 목소리도 크지는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드래곤에게는 들린 모양이다. ((흥, 하찮은 변명거리구나.)) "아니옵니다, 절대로 아니옵니다. 만약 알았다면 저희는 이 근처에서 얼정거리지도 않았을 것이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중년 남자가 결사적으로 부인하고 나서자 그와 같은 파의, 나이가 좀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거들며 나왔다. "저희는 정말 몰랐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나이 많은 선장파 사람들이 나서자 반대파 사람들도 가만 있을 수가 없는지 드래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베풀길 빌었다. 그 모습을 드래곤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들이 간절히 비는 모습이 통한 것이길 바라지만... "아, 아냐... 우린, 우린, 다 죽을거야." 내 옆에서 업드러진 토냐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는게 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말에 십분 동감했다. 그도 그럴것이 드래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해적들의 간절한 말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비웃음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다 잡아놓고는 마지막에 몸부림 치는 걸 거만하게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드래곤의 시선을 암담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 솔직히 말하면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계속 바라보고 있게 된 것이다. - 계속 보고 있다보니 드래곤에 대한 공포심이 조금이라도 익숙해졌는지 나는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드래곤의 머리, 정확히는 드래곤의 콧등 위에 있는 희끄무레한 무언가를 말이다. 그러고보니 드래곤이 실버 드래곤이라 온통 은색으로 빛나다보니 더욱 더 발견이 늦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번 발견하고 시선을 집중시키자 나는 그 희끄무레한 것이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주 기~~다란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를 등지고 앉아 있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구분이 안 갔다. 단지 무척이나 날씬한 형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거기다 특이하게도 그 존재의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싱그러워 보이는 초록색이라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칼라플한 머리색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초록색은 또 처음 보는 것이라 나는 그 와중에 신기함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그 존재에게 더욱 더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보니 그 존재가 드래곤에게 뭐라고 계속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흑흑흑....] '어라, 우네? 그런데... 목소리가 가는 거 보니... 여자?' 그러나 드래곤은 자신의 콧등 위에서 여자가 걸터앉아 울고 있다는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억... 그, 그럼 저 여자는 나와 같은 귀신? 허억, 그럼 지금 귀신이 곡하고 있는 거야?' 같은 유령인 주제에 나는 그런 처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키며 뒤로 움찔 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한번 놀랐다. '헉... 내가 지금 움직였다? 움직일 수 있어?' 그러면서 드래곤을 보던 나는 다시금 그 존재감에 압도당해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번 움직이고 나자 나는 어렵지만 다시금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금씩 움직일때마다 내가 산산조각 흩어지는 건 아닌지 무지 겁이나고 떨렸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존재를 의식하면 계속 못 움직일 것 같으니 나는 최대한 드래곤 대신 그 드래곤의 콧등에 앉아 있는 여자 유령에게만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나는 아까는 희미하게, 단지 울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정도로만 들리던 그녀의 속삭임을 좀 더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흑흑흑... 안돼요... 그만해요... 렌... 더 이상 그러면 안돼요. 흑흑흑... 내 말 안 들려요?] '렌? 저 드래곤 이름이 렌인가? 그럼 저 여자는 드래곤이랑 잘 아는 사이?' 내가 그렇게 놀라고 있는 사이, 드래곤이 해적들이 애걸하는 것을 듣는 것도 지루해졌는 모양이다. ((시끄럽다. 내 영역에 들어온 것은 용서하지 못할 죄. 죽음으로 갚아라!!)) 그리고는 사람, 아니 유령 무지 불안하게 시리 깊게 깊게 숨을 들이마쉬는 것이 아닌가? "허억... 브, 브레스..." 그 모습을 본 것인지, 토냐가 이번에는 새파랗게 질려서 중얼거렸다. 게다가 드래곤의 콧등에 있던 여자도 더욱 더 놀라서 이제는 아예 드래곤의 미간에 달라붙어 간절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안돼요, 렌. 제발, 제발 그만해요! 부탁이예요, 제발 그마아아안~!!] 그녀의 눈물 젖은 간절한 외침에 나는 잽싸게 선애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야, 저 드래곤 이름이 렌이래. 그러니까 잠시만 멈추라고 해봐. 알려줄 게 있다고.] 이 상황에서 드래곤의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얼어버린 내가 드래곤의 브래스를 정면으로 막을 수 없다는 건 당해보지 않아도 잘 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저 드래곤 콧등에 올라타 미간에 들러붙어 애절하게 애원하고 있는 저 여자 귀신 이야기로 뭔가 타개책을 마련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저 여자 귀신 폼을 보아하니 뭔가 원한을 가지고 드래곤에게 들러붙는게 아니고, 말하는 폼이 어째 드래곤이랑 잘 아는 사이인 거 같으니까 저 여자 귀신 이야기가 뭔가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내 말에도 선애는 업드러진 채 부들부들 떨며 도통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드래곤이 숨을 들이마시는 게 어째 곧 절정에 다다를 거 같은 폼새였기에 나는 다급하게 선애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야, 야, 정신 차려. 여기서 죽고 싶냐? 빨랑 말하라니까.] 나의 거친 손길에 강제로 상체를 일으킨 선애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날 바라봤다. "/뭐, 뭐야, 이 상황에?/" 그러나 드래곤의 영향력 때문인지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저 드래곤에게 말을 걸라고.] "/나, 날 그렇게 죽이고 싶냐? 언니가 해애~/" 선애의 말에 나는 점점 더 다급해졌다. [야, 내 말이 들리면 당장이라도 외쳤지. 빨랑 말해. 저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으려고 하잖아. 그럼 우리는 끝장이라고~!!] 내 다그침에 선애는 인상을 찡그리고 드래곤을 한번 바라보더니 그 존재감에 다시 압도 되었는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하려 나는 다시 선애의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정신차리라니까아아아~~~!!] 덕분에 선애의 째림을 다시 받아야 했지만, 그나마 선애의 굳음이 풀렸다는게 다행이었다. "/시, 시끄러... 알았으니까 그만 해./" 말투가 아예 기어들어가 별로 미덥지는 않았지만 내 말은 드래곤에게 들리지 않으니 나는 초조했지만 기다려야 했다. 선애는 날 흘겨본 다음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시선은 절대로 드래곤에게 주지 못하고 갑판의 나뭇결을 바라보며 말이다. "/저, 저기... 뭐라고 말하라고 했지?/" [저 드래곤 이름이 렌이래. 할 말이 있다구 해.] 내 말에 선애는 다시 한번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꺼냈다. "후우... 드래곤 렌님? 하, 할 말이 있는데요." 그런데 목소리가 옆에 있는 나에게 말하는 정도의 크기밖에 안 나와 날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만약 나에게 심장이 있었다면 이 순간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을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작은 선애의 말을 드래곤이 들은 것이었다. 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던 드래곤이 숨을 멈추더니 놀람의 빛을 담은 시선이 우리에게, 정확히는 선애에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 크다란 얼굴이 높은 곳에서 쭈우욱 떨어져 내려왔다. 드래곤 입장에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기실, 울 꼬맹이를 비롯한 토냐와 몇몇 해적들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다시 머리를 박고 벌벌 떨기만 했다. 소피도 새파랗게 굳어서 숨만 간신히 깔딱깔딱 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의 무서운 일갈이 떨어졌다. ((누가 날 불렀지?)) 그러나 당연하게도 선애가 기절해버렸기 때문에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드래곤은 잠시 기다려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자신의 질문이 무시당했다는 것에 무지 기분이 나빴는지 분노를 담아 다시 물었다. ((누가 날 불렀냐고 물었다!!)) 드래곤의 몸에서 분노 때문인지 강하고 무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만이면 좋겠지만, 그 기운과 함께 거센 강풍이 불어와서 사람들을 다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덕분에 간신히 기절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인간들은 이번에 모두 기절해서 강풍에 우르르 쓸려가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배의 높고 튼튼한 난간 때문에 바다에 떨어지지 않은 건 천만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일행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나 또한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던 터라 나는 간신히 선애만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일행이 어디 어디로 쓸려갔는지는 확인해 뒀으니 나중에 금방 회수(?) 할 수 있을 거다. 선애는 하필이면 갑판의 정 가운데에 떠억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가장 굵은 중앙 돗대에 부딪히려 했지만, 내가 부딪히기 직전 간신히 잡아서 돗대를 몇 센티 안 남긴 거리에서 멈출 수 있었다. '후아, 후아, 후아...' 그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드래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당장 대답하지 않는다면 네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어차피 죽일 거였으면서 이제와서 다시 죽이겠다고 협박하다니, 참 논리적이지 못한 드래곤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 드래곤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분노에 질려 기절했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이대로 뒀다가는 정말 저 분노한 드래곤이 자신의 말을 실천할까 두려워 얼른 선애의 팔을 잡고 높이 들었다. 이게 먹힐지는 자신 없었지만, 지금 나로써는 이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 갑판 위를 분노에 찬 시선이나마 바라보고 있던 드래곤이었기에 선애가 팔을 드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그의 고개가 좀 더 아래로 숙여지더니 물어왔다. ((네가 날 불렀느냐?)) 그러나 기절한 꼬맹이가 질문에 대답할리 만무했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오~~] 내가 아무리 선애의 귀에다 대고 소리치고 뺨을 때려봐도 선애는 도통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우째, 우째, 이를 우째애애~~] [우째, 우째, 이를 우째애애~~] 그러나 천만 다행스럽게도 이 드래곤은 자신의 의문은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 였던 모양이다. 대답 없는 선애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는 선애가 기절했음을 깨닫고는 낮게 한 마디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웨이크 업!)) 순간적으로 나는 그 드래곤 녀석이 선애에게 해꼬지라도 하는 줄 알고 놀랬고,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선애의 몸에서 하얀 빛이 생성 되었다 선애 몸 속으로 사그라드는 걸 보고 한번 더 놀랬다. 그러나 놀라서 내가 굳어있는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쓰러져 있던 선애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만 몇번 깜빡 거리더니 벌떡 상체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후아, 후아, 후아아... 뭔가 해꼬지를 하려는 건 아니었군. 너 괜찮냐?]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을 못해 어리둥절해 할 뿐 딱히 해를 입은 것 같지 않아 그제야 나는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말문을 열 수가 있었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주위를 둘러보던 선애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쓰러져 있고, 하늘에서는 여전히 드래곤이 내려다보고 있자 움찔 해서는 고개는 푸욱 숙이고 엉덩이 걸음으로 슬그머니 내 쪽으로 붙으며 속삭였다. 그러나 그때 드래곤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그에 선애가 위암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리는 것이었다. "그, 그게..." 자기에게서 보통 사람이 감당 못할 두려움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는 건 모르는지, 이 드래곤은 선애가 제대로 대답 못하고 버벅거리자 짜증스러운 모양이다. ((인간이여, 나는 인내심이 많지 못하다는 걸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답을 듣고 싶으면 네 그 위압감 좀 어떻게 해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힘 없는게 죄라고 나는 차마 그걸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하기사, 내가 말해봤자 드래곤은 들을 수도 없겠지만. 그리하여 나는 그 말 대신 손을 뻗어 선애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마치 고개를 끄덕여 드래곤의 말에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말이다. 그러자 드래곤이 다시 물어온다. (('렌'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누가 알려준 것이냐?)) 얼음장처럼 싸늘한 말. 왠지 선애가 그 이름을 부른걸 되게 기분 나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 이거... 내가 잘못 짚은 건가?' 저 드래곤은 혹시 인간에게 자기 이름을 막 불리는 것을 안 좋아할 수도 있었다. 그걸 생각지 못하고 급한 김에 드래곤 이름을 부르게 했으니, 나 때문에 선애가 더 위험해 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작정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저 드래곤이 화를 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걸로 시선을 끌었으니 우선 내 의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뭐어, 끝까지 계속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내가 드래곤 콧등에서 어떤 여자가 부르는 걸 들었다고 해.] 내 말에 선애가 무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차마 드래곤을 마주 보지는 못해 고개는 푸욱 숙인 채로 눈동자만 힐끔 돌려 날 바라봤지만 그 시선에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라는 의미가 강력하게 담겨 있었다. [어쨌거나 빨랑 말이라도 해봐. 지금은 어설프게 둘러대기보다는 정공법으로 나가는게 최선이 야.] 물로온, 이건 내 생각일 뿐 근거는 없었다. ((계속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가?)) 그때 다시 대답을 재촉하는 짜증스럽고 화가 난 드래곤의 말이 들려와 선애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우, 우리 언니가요... 드, 드래곤님의 콧등 위에 올라앉은 부, 분이 부르는 걸 들었다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는데다 바들바들 떨려 말도 중간 중간에 더듬더듬 거려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속이 탈 지경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드래곤이 선애가 끝까지 말할때 까지 기다려주기는 했지만, 얼굴에는 짜증스런 기색이 역력해서 내 간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야, 야. 저 드래곤 지금 무지 짜증스러워 한단 말이야.] 내 말에 선애가 무지무지 열받고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온다. 아마 자기도 당당히 또박또박 자알 말하고 싶었지만, 몸이 자기를 따라주지 않는 걸 어쩌냐는 항의이리라. [침착하게 해. 침착하게. 여차하면 내가 너 들고 튈테니까.] 양 주먹을 불끈 쥐며 선애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을 하고 있는데 드래곤의 음성이 다시 들려온다. 여전히 짜증스럽고 분노가 깃들어 있는 음성이다. ((지금 나랑 수수께끼라도 풀자는 건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내 콧등위에 있는 존재라 니?)) 내 말에 선애가 대답을 바라는 눈으로 날 보았고 나는 얼른 드래곤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해줬다. [밝은 초록색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가진 존재라구 그래.] 그런데 이런 내 말을 들었음일까? 드래곤의 콧등에 올라타 무지무지 서럽게 흐느껴 울던 존재가 고개를 돌리고 내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 존재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듯 고귀하며, 까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답고, 새벽에 이슬을 머금은 한떨기 백합처럼 청순하며... 빼어난 자태와 우수에 젖은 눈망울이 마치 잔잔한 호수 같아 그 눈에 풍덩 빠질 거 같으며... 등등의 수식어가 내 머릿속에서 마구마구 휘몰아쳤다. 그 만큼 그 존재의 얼굴은 아름다웠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어댔으면 눈이 퉁퉁 붓고 얼굴은 뻘게져서 아무리 예쁜 외모를 가졌다 해도 웃겨 보일텐데, 그 존재의 얼굴에서 뚜욱 뚜욱 떨어지는 눈물을 보자니, 정말 새벽녘에 수줍게 피어있는 초롱꽃에 맺혀있는 이슬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에, 내가 생각해도 닭살이닷!' 그렇게 스스로의 생각에 닭살을 느끼는 순간. ((네가 어떻게 그녀를 알지?)) 드래곤의 놀란 고함소리와 함께 그 커다란 얼굴이 쑤욱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더니만 갑판의 난간에 드래곤의 턱이 닿을랑 말랑하는 곳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덕분에 선애는 더더욱 화들짝 놀라 내 등뒤로 숨었다.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그게 숨는 걸로 안 보였을테지만 말이다. ((네가 그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아니, 혹시 우리에 대해 알고 온 녀석이냐? 바른대로 말해! 안 그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억겁의 고통을 맛보게 되리라!)) 그 무서운 협박에 결국 선애는 울먹울먹 거리며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본다. 아마 생각 같아서는 시원하게 울음을 터트리고 싶겠지만, 너무 무서워서 울지는 못하고 눈물만 나오는 것이리라. "히끅, 히끅... 그, 그게... 어, 언니가 본 건데... 히끄윽..." ((언니? 네 언니가 도대체 누구냐? 어디에 있지? 당장 나오라고 해!)) 드래곤의 윽박에 선애는 날 가리키며 말했다. "바, 바로... 히끅... 앞에... 으흑... 어, 언니는... 우욱... 유, 유령인데... 히끄윽..." ((유령? 유령이라고?)) 기가막히다는 드래곤의 말에 선애는 열심히 입을 열었다. "며, 몇년 전에... 사, 사고로... 우욱... 그 뒤로... 히끅... 항상, 내 옆에..." 울먹거리면서도 열심히 설명하는 선애의 말에 진심을 느낀 것인지 드래곤이 설마... 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너 네크로맨서였던가? 아니면 영능력자?)) 그게 뭔지 모르는 선애는 당연히 의문에 찬 눈길을 나에게 보냈고, 나는 예전에 읽었던 자료를 떠올리며 말해줬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귀신을 보고 부리는 사람. 무당 비스무리 하다고나 할까?] 내 설명에 선애는 드래곤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어 보였다. "저, 저기... 그냥 전... 단지 언니만..."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채 쫄아서 간신히 대답하는 선애의 모습을 보자니 괜히 울컥 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울 꼬맹이가 뭔 잘못을 했다고 저런 꼴을 당했나, 누가 오고 싶어서 왔나? 등등의 생각을 하는데.. [저, 저어... 저기요] 조심스레 날 부르는 목소리. 이건 분명히 아까 드래곤 붙들고 구슬프게 울던 그 여자 귀신의 목소리라 나는 고개를 돌리다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노, 놀랐잖아요!] 그도 그럴것이 아까 드래곤의 콧등에 타서 날 내려다 본 건 봤는데 어느새 그 곳에서 내려와 바로 내 뒤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기척도 없이 슬그머니 온 것이 마치 유령... '아, 유령 맞지, 참.' 드래곤의 콧등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서 있는 걸 보니 나 보다도 키가 크다. 대략 165에서 170 사이인 거 같은데 팔 다리가 길고 가는데다 허리가 완전 개미 허리다. '우쒸... 엄청 부러운 몸매구만...' 나는 키가 작고 좀 통통한 편이었기에 엄청 엄청 그 여자가 부러웠다. 그러나 이런 내 심정을 모르는지 그 여자 유령은 내 말에 반색해서 내 손을 꼬옥 잡아왔다. [세상에, 당신 지금 제 모습이 보이시는 거죠?] [거야 뭐... 같은 유령이니까 보이는 거 같은데. 댁도 유령 맞죠?] 내 말에 그녀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에~ 저 유령 맞아요. 그래도 저 같은 분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너무 반가워요오~~] '누가 보면 유령이 되어서 기쁘다고 하는 것 같겠다.' 전혀 기쁜일이 아닌데, 이 여자의 모습에 같이 반갑다고 하며 기뻐해야 될 것만 같아 어정쩡 하게 같이 웃어주다가 '이거 이러는 거 맞아?'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선애가 날 부른다. "어, 언니... 언니이이~" [아, 응? 왜?] 선애의 부름에 내가 돌아보자 그 여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세상에, 동생분? 그런데 동생분은 당신이 보이시는 거예요?] [아, 예. 이상하게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던데 내 동생에게만 내가 보이나봐요.] "언니이... 왜 그래? 혼자 중얼거리지 말구... 나 무섭단 말야." 선애의 말에 나는 좀 놀라서 선애를 바라봤다. [어, 너... 이 여자분 안 보이냐? 내 바로 옆에 있는데...] 내 말에 겨우 겨우 울먹임을 가라앉히던 선애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뭔 소리야. 나한테는 언니 밖에 안 보인단 말야. 언니 옆에 누가 있는데에?" [그, 그래? 나 밖에 안 보이냐? 신기하네... 지금 내 옆에 아까 드래곤 콧등에 타서 마악 우시던 분이 와 계시거든.] "그게 무슨... 히익... 언니!" 나에게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내던 선애가 옆을 보더니 놀라서 나에게 매달려 왔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여자분은 무척이나 반색하며 외쳤다. [렌!] [에엥?] 그도 그럴것이 언제 어느새 나타났는지 내 옆에는 아름다운 실버 브론드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웬 사람 하나가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대략 180은 되어보이는 키에 강인한 인상이라 남자라는 걸 알게 해주지만, 만약 키가 작고 인상만 좀 온화했다면 여자라고 해도 믿을 외모였다. 것두 무척이나 뛰어난 미인. 내 옆에 있는 초록색 머리의 여자분 못지 않을만큼 대단한 미인 말이다. 그 남자의 등장에 여자 유령이 반색하며 그 남자의 팔에 매달리려 했지만, 여자 유령의 손은 남자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리고 말았다. [아...] 그걸 보고 멈칫 하다 날 바라본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에헤헤... 하고 웃었지만, 그녀의 미소에는 슬픔과 체념이 어려 있어 내 가슴을 지끈거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우쒸... 이쁘면 다냐.' [깜빡 했어요. 나는 이제 그를 만질 수 없다는...] 웃으면서 나에게 말하던 그녀는 내가 선애를 품에 안고 토닥토닥 하는 걸 발견하고는 그렇지 않아도 호수라고 말할 만큼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는 것이었다. 덕분에 난 그녀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줄 알고 놀랐다. [어, 어떻게... 당신은 어떻게 동생을 만질 수 있는 거죠?] [그게... 저도 모르겠는데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더라구요.] 내 당혹스러운 대답에 그녀는 처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아... 당신, 인간이죠? 인간이면 가능한 건가?] [에? 그...] 그녀의 말에 다시 한번 놀란 내가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선애가 날 다급하게 불렀다. "언니이~~!!" [응, 응, 왜?] "저 분이 물어보시잖아, 저 분 옆에 있는 존재가 어떻게 생겼냐구~" [응?] 그러고보니 아까 소리 소문없이 나타난 은발의 잘생긴 남정네가 팔짱을 떠억 끼고 선애를 노려보고 있었고, 선애는 어떻게 해서든 그 시선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군데?] 내 질문에 선애와 여자 유령이 동시에 대답했다. "아까 그 드래곤이시래." [렌이에요. 아까 그 드래곤인...] [아하... 폴리모프 했구만.] 내 태평한 깨달음에 선애가 다시 재촉한다. "옆에 계신 분이 어떻게 생겼냐니까아~~" [그거야... 어라, 그런데 너 왜 한국말 안 쓰고 아벤티노 대륙 공통어 쓰냐? 아까 질문은 한국어로 했으면서...] "저 분이 질문도 이쪽 말로 쓰라고 하셨단 말이야. 그거 말고 얼른 대답, 대다아압~~" 다급한 선애의 말에 나는 그제야 정신차리고 선애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니까 초록색 생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고...] 내가 운을 떼자 선애가 얼른 따라 말하낟. "초록색 생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대요." "그건 아까 말했다." 선애의 말에 남자의 대꾸가 들려왔다. 그에 나는 재빨리 여자 유령의 모습을 훑어보며 대답했다. [키가 170 정도에 무척이나 흰 얼굴의 뛰어난 미인.] "키가 170 정도신데요 무척이나 뛰어난 미인이시래요." [눈동자는 황금색이 섞인 초록색.] "눈동자는 황금색이 섞인 초록색이시구요." [날씬한 몸매.]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계신대요." [근데, 옷차림도 설명해야 하나?] "옷차림도 설명할지 묻는데요?" 선애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물어보라고 해라." "이름." 그러나 내가 채 그 여자 유령에게 물어보기도 전에 선애와 드래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녀가 먼저 잽싸게 대답해줬다. [미아트 숲의 아리아예요. 렌은 날 리아라고 불렀어요.] 둘다 애칭을 부르는 걸 보니 범상치 않은 관계인가보다. 나는 그녀에게서 들은 말을 얼른 그대로 옮겼고, 그건 선애가 그 드래곤에게 고스란히 옮겨줬다. "미아트 숲의 아리아라고 말했대요. 그런데 드래곤께선 리아라고 부르셨다면서요?" 선애의 말에 드래곤인 그 은발의 남자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팔짱을 낀 팔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왠지 격정을 참는 듯 보였다. 잠시 그렇게 참고 있던 남자가 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넌... 그녀가 보이는가?" 차가운 기색이 많이 가라앉은게 선애의 말을 이제 믿는 모양이다. 게다가 위압감도 많이 사라져 선애도 완전히 진정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뭐, 여전히 심하게 긴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뇨, 전 언니만 보이는데요, 언니는 그 분이 보이신대요." 선애의 대답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 하더니만 갑자기 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에 놀란 선애가 반동으로 그나마 약간 피고있던 몸을 움츠리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편히 앉아, 편히. 널 해칠 생각은 없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으니까." 드래곤의 말에 여자 유령이 열렬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부디 전해주세요.] [야, 이 분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대.] "그 분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시대요." 선애의 전달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리아는 어디에 있지?" [옆에 앉아 있다고 그래. 아아, 오른쪽에.] "오른쪽 편에 앉아 계시대요." 선애의 말에 남자가 얼른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지금까지 안 보이던 모습이 이제와서 갑자기 보일리가 없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남자는 길게 한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군. 너는 어떻게 볼 수 있는 거지?" "그, 그게... 저는 잘... 게다가 저는 언니밖에 안 보이거든요. 다른 유령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언니는... 사고를 당한 다음에 정신 차리고 보니까 유령이 되어서 제 옆에 있더라고요." "그런가? 그럼 아까 질문으로 돌아가서. 내 이름은 그녀가 부르는 걸 네 언니가 들어서 알게된 거라고?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나?" 그의 질문에 선애의 시선이 나에게 왔고, 나는 기꺼이 대답해줬다. [콧등에 올라타서 구슬프게 울면서 매달려 있었다고 전해줘.] "콧등에 올라타 무척 슬프게 울고 계셨대요." 선애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울... 었다고? 그녀가? 왜?" 그에 선애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왔고 내 시선은 그녀에게 돌아갔다. [그건...]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난 다시 선애에게 시선을 돌려 그녀의 말을 전했으며, 선애는 곧바로 드래곤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참 기나긴 통로를 거친 대화는 그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게 많은 덕분에 무척이나 길어졌고, 우리는 그렇게 모두가 기절한 갑판에 앉아서 해가 서쪽 바다로 저물어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드래곤과 엘프 아가씨야 좋았겠지만, 가운데 끼인 울 꼬맹이는 죽상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로 애칭을 부르는 걸 보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 드래곤 분과 엘프양께선 연인 사이였다. 엘프양은 서대륙에 있는 미아트라는 숲에 살고 있는 엘프였는데 여행을 나온 렌스버리라는 이 실버 드래곤과 사랑에 빠져 연인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드래곤과 알콩달콩 깨 쏟아지게 잘 산건 좋았는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드래곤과 엘프의 수명이 달라 드래곤이 팔팔하게 살아있는데 엘프양께서 수명이 다해 죽게 된 것이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건, 이 엘프양께서 죽기 전에 드래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엘프라는 종족의 문화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수명이 다해 죽으면 그 유체를 자신들이 살던 숲으로 가지고 가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곳에서 무덤을 만드는 건지 화장을 하는 건지 모르지만, 하여간 외부로 나가 어떠한 사고나 수명이 다해 죽게 되면 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살던 곳에서 엘프들이 나와서 유체를 수습해 간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 엘프양께서는 죽어서도 드래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죽기 전 드래곤에게 자신의 유체를 가지고 가는 걸 막아달라는 뜻으로 '그들이 오는 걸 막아주세요.' 라고 했단다. 자세한 설명 없이 단지 그 말만 하고 꼴까닥~~ 해버리자 슬픔에 빠지신 열혈 로맨틱 드래곤 렌스버리군께서는 그 말을 글쎄 서대륙 사람들이 아벤티노 대륙으로 못 오게 막아달라고 오해를 해 버린 것이다. 이 드래곤과 엘프 커플은 신혼 살림을 드래곤 레어에 꾸몄는데, 처음 이 렌스버리 드래곤의 레어는 아벤티노 대륙의 왈라키 산맥 - 헤이븐 국과 바이런 국의 국경 역할을 하는 거대한 산맥인 -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유언을 들은 우리의 드래곤군은 그 즉시 자신의 레어를 서대륙과 아벤티노 대륙의 유일한 해상 교통로라고 할 수 있는 달마티아 해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으시고 서대륙과 아벤티노 대륙의 왕래를 철저하게 막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동안 이유 없이 바닷길이 막혀 서대륙과의 왕래가 끊긴 이유였던 것이다. 참으로... 어이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하고... 하여간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이 드래곤께서 수면기에 접어들어 잠시 잠을 자는 동안 - 재미있는 건 그 잠시 잠을 자는 기간이 몇백년이라는 거였다. - 호기심 많은 인간들이 서대륙으로 가는 것에 성공, 그리하여 다시 서대륙과의 왕래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쿨쿨 잠을 주무시고 계시던 드래곤께서 이제 활동기가 되어 수면에서 깨어나 몸을 풀고(?) 있는데 감히 자신이 막아 뒀던 해상에서 갑자기 마법의 기운이 느껴져 '언 놈이야?' 하고 나오셨던 것이었다. 그 곳에 나와 선애가 있었고 말이다. '거 참 재미있는 인연일세...' 그 이야기 말고도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지 한참 시간이 지난 무렵, 이야기를 전달해주던 선애가 피곤했는지 그만 꼬박꼬박 졸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낮에 해적 녀석들의 함정에 빠져 점심도 못 먹고 이리저리 날뛰다가 난데없는 드래곤의 등장에 두려움에 벌벌 떨어댔다가 한번 기절도 해보고 깨어났으니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그런데 그 상태로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있어야 하다니... 그래서 선애가 꾸벅꾸벅 졸자 드래곤 녀석이 불쾌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것이었다. "지금 감히 어디서 조는 거지?" 차가운 호통에 선애가 놀라 번쩍 깨기는 했지만, 아무리 무서운 공포라고 해도 수마를 이기지 못하겠던지 선애의 얼굴에는 졸음이 가득했고 눈은 거의 풀려 있었다. 그런 선애를 보다못한 엘프양께서 드래곤을 제지했다. [오늘은 그만해요, 렌. 이제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녀의 말을 선애에게 그대로 옮겨주자 선애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후아아암... 아, 죄송... 오늘은 그만 하시자고..."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하품에 선애가 찔끔해서 얼른 입을 닫으려고 했지만, 드래곤은 화가 났는지 선애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 쫄아버린 선애가 얼른 내 뒤로 숨으려고 하는데 드래곤이 못마땅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중얼거렸다. "리커버리!" 그러자 휘황찰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밝은 백색의 광체가 선애를 둘러싸더니만 서서히 스며드는 것이었다. 놀란 선애가 눈을 번쩍 뜨고 자기를 돌아보는데, 퉁명스런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안 졸리지?" "예? 에에..." 당혹스러운 선애와 내 표정을 본 것인지 유령 엘프양이 친절히 설명해줬다. [회복 마법이에요. 지친 체력을 회복시켜주거나 떨어진 면역력을 회복시켜줘 환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마법이죠.] [오오, 그런가요? 야, 그거 회복 마법이래.] 내 말에 선애가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우우웅..." 선애의 가장 가까이에 쓰러져 있던 해적 한 명이 신음소리를 흘리며 깨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제 27화 선애 근처에 있던 해적 한명이 깨어나려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 여기저기에서 기절해 있던 사람들이 깨어나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에 선애의 안색이 굳어졌다. "큰일이네. 언니 우리 일행들좀." [알았어.] 어차피 아까 일행들이 어디로 쓸려가는지 봐 두었기에 나는 주저없이 일어나서 달려갈 수 있었다. 일행들을 데리러 가는 내 뒤로 드래곤의 질문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지?" 제알 먼저 발견한 건 로어였다. 그는 갑판 한쪽 구석에, 굵은 밧줄들을 보관한 곳에 몇몇 해적들과 함께 처박혀 있었다. 다행이 굵은 밧줄들이 쿠션 역할을 해주어서 크게 다친 곳은 없었는데, 어딘가에서 부딧혔는지 이마에 커다란 혹 하나가 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반대쪽에 있던 토냐는 몇번 나뒹굴다보니 옷자락이 걷어 올라가는바람에 맨 바닥에 피부가 그대로 쓸려 여기저기가 심하게 빨갛게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그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그렇지, 정신 차리고 나면 꽤나 따겁고 쓰라릴 거 같았다. 로어와 토냐는 그래도 내가 그들을 데리러 갈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해 쉽게 데려올 수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소피를 데리러 갔을때 그녀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우리 일행 중 제일 운이 없었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왼쪽 어깨를 오른쪽 손으로 감싸고 있었던데다가 한쪽 다리도 절뚝 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정말 무례하게도 뒤통수를 후려쳐야 했다. 나에게는 쉽게 기절시키는 방법 따위는 없었으니 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정말 미안했다. 그녀가 한 방에 기절해줘서 다행이었지, 안 그럼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더 때려야 했을지도 몰랐다. 정신을 잃은 소피를 업고 선애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드래곤이 놀란 시선으로 날, 아니 정확히는 허공에 둥둥 떠서 다가오는 소피를 바라보더니 선애게 물었다. "저게, 네 언니가 하는 일이라고?" "예, 지금 저 기절한 여자를 업고 있는데요." "그래? 흐음... 그럼 나의 리아도 저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언니가 아까 물어봤는데 그 분은 못한다고 하시던데요. 아까도 몇번 저기... 드래곤님의 팔을 잡으려고 했는데 못 잡으셨대요." 선애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나는 소피를 토냐 옆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난 것이 있었으니... [어라, 그러고보니 아리아씨, 아까 저 드래곤님 콧등 위에 올라타고 있지 않았어요?] 그 동안 계속 말을 전해주다보니 이 엘프 유령께서는 나에게 친절히 자신의 이름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런데 저 프라이드 높은 드래곤께선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허락지 않고 있어서 나나 선애는 계속 드래곤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 말에 아리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난 단지 앉아있는 흉내를 낸 것 뿐이에요. 신애님도 아시잖아요. 난 그의 몸을 만질 수 없다는 걸.] [에? 그럼 지금은 어떻게...] 라고 말하던 나는 말 끝을 흐리고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갑판 위에 서 있는게 아니라 갑판에 닿을랑 말랑하는 위치에서 동동 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 드래곤의 콧등 위에 올라탄 것이 아니라 콧등 부근의 허공에 앉은 모양으로 떠 있었던 거였다. [어라라... 그럼 아리아님은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으신거네요. 오오... 저는 그게 불가능 하거든요.] [대신 신애님은 물건을 마음껏 잡을 수 있으시잖아요. 저는 그게 부러운데요 뭐.] [하지만 저는 잡을 수 있잖아요.] [그도 그렇네요. 저도 이제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건가요? 신애님은 저랑 같은 유령이라서 그런 건가?] 사근사근한 아리아양과 나는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무척이나 친해진 상태라 화기애해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때, 선애의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예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돌아보니 선애가 놀라고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드래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드래곤은 거만한 표정으로 선애의 시선을 맞받아치고 있었다. [야, 왜 그러는 거야?] 내 질문에 선애는 울상인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드래곤께서 나머지 사람들은 돌려보내 주는데, 우리는 안 된대. 여기에 있으래." [왜?] 기가막혀 묻기는 했지만, 이유는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리아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꼬옥 필요한 거니 그러는 거겠지. "말도 안됩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요. 여기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울 꼬맹이가 아까는 두려움에 질려 대답도 못하더니만 신변에 대한 일이 되자 대놓고 나서기 시작했다. "시끄럽군. 목숨을 살려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원래부터 사람들을 싫어하신 게 아니라 엘프님의 유언때문에 그러셨던 거잖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오해가 풀리셔서 이제는 안 그러신다고 하셨잖아요." 선애의 말에 드래곤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하찮은 널 곁에 데리고 있어준다고 하면 감지덕지 할 것이지 말이 많군." "절대로 감지덕지 할 상황이 아니거든요? 전 가서 할 일이 많단 말입니다." "그럼 내가 가서 네가 할 일을 없애주지. 그럼 되겠지?" 드래곤의 심드렁한 말에 선애가 차마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노골적으로는 드러내지 못하고 분노를 참다가 물었다. "어떻게요?" "네가 사는 도시를 지도상에서 없애주면 될 거 아닌가?" "예에? 무,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런데 그때였다. "저깄다, 잡아라!!" [이런!!] 그 동안 해적 녀석들이 슬슬 정신을 차리는 것 때문에 일행들을 찾아서 데려와 놓고는 드래곤과 선애의 이야기 때문에 녀석들에 대해 깜빡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급한김에 선애를 잡고 튀려고 하는데... "정말 시끄럽군." 한 마디 낮은 소리와 함께 쉬잉~~ 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만 우릴 발견하고 달려들던 해적들이 순식간에 두동강이 나서 갑판 위로 흩어지는 것이었다. [헉!] "흑..." 선애가 내 품에 파고들고 눈을 감는다. 이건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손짓 한번에 수십명이 뒤로 나가 떨어져 피를 뿌리는...' 이라는 대목과 다를바가 없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내가 후각을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아마 비릿한 혈향이 진동을 할 것이다. [레엔~!!] 옆에서 엘프양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리쳤지만, 드래곤 녀석에게 들릴 리 만무했다. 그렇게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동강이 나버리자, 나머지 녀석들이 주춤 거리며 감히 덤빌 생각을 못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레 바라본 드래곤이 선애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인간은 어딜 간 거지? 이제야 얌전히 말을 들을 맘이 생긴 건가?" 드래곤의 말에 선애의 어깨가 움찔 거렸지만, 그래도 얌전히 말 들을 맘은 아직 안 생겼나보다. "그, 그래도 여기에 있는 건 싫습니다." "흥, 용기는 가상하다만, 내가 붙잡는데 어떻게 도망 간다는 거지?" "서, 선애야?" "선애님?" 드디어 우리 일행들도 깨어난 모양이다. 한 쪽에 웅크리고 있는 선애의 모습에 토냐와 소피가 보자마자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 다치셨습니까?" "아... 난 괜찮은데..." [아, 맞다. 소피는 많이 다쳤어. 토냐는 찰과상 정도인데...] 내 말에 선애가 둘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아까 보니까 둘 다쳤던데... 소피, 어깨하고 발은..." 선애의 말에 토냐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네가 우릴 여기로 데려다 놓은 거구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까 나타난 드래곤은 또 어디..." 그러나 토냐의 말은 소피가 옆구리를 쿡쿡 찌름으로 인하여 끊어졌다. 의아해서 바라보는 토냐에게 소피가 눈빛으로 옆을 가리키자 토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고, 곧 이어 그 곳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은장발의 남정네를 보고는 히껍했다. "헉... 호, 혹시..." 문장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것 만으로도 그녀가 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아챈 선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럼... 저 일도 저 분이 하신 겁니까?" 소피가 피투성이의 광경을 가리키며 낮게 물어오자 선애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헉... 그, 그럼 저 분이 우리편이 되신 거야?" "그게 아니라, 시끄럽게 굴었다고 저렇게 하셨어요." 선애가 입을 꾸욱 막고 말하는 바람에 발음이 불분명 했지만, 그래도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울 꼬맹이는 피비린내 나는 모습을 실제로 처음 본 거라 - 때려 눕힌 거와 죽인 거는 틀린 거니 말이다. - 아무래도 토기가 올라오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차마 이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어 간신히 억누르는 모습이 보기가 참 애처러웠다. 그래 가까이 다가가 열심히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는데 그 드래곤이 다시 선애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네 일행?" 그의 질문에 선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드래곤의 눈이 기분 나쁘게 가늘어지며 웃음기를 띄웠다. "그래? 그럼 내가 너희 일행의 목숨을 담보로 하면 어쩔래?" 그의 말에 토냐와 소피의 시선이 선애에게로 쏠렸다. '무슨 말이야?'라는 질문이 역력한 그들의 시선에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기... 저 분이 다른 사람은 놔줄테니 저는 여기 남으래요." 선애의 말에 소피는 굳었고 토냐는 히익~ 하고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에? 너 무슨 실수라도..." 핏기가 싸악 가신 토냐가 죽상을 하고 물어온다.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런데 그때였다. "벌레가 많이도 꼬이는군." 드래곤의 낮은 저음에 정신 차린 일행이 주위를 후다닥 둘러보자, 어느새 해적 녀석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였다. 뭐, 드래곤 때문에 함부로 덤비지는 못하지만 기세만은 흉흉했다. "네, 네놈은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한 머리나쁜 해적이 감히 드래곤을 향해 삿대질하며 외치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그 해적을 향해 묵념을 빌어주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는데, 저 해적은 머리가 나쁜 덕에 자신의 몇 십년의 수명은 물론 자신의 동료들 수명까지 없애버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썬더 스톰!" 기분 나쁜 건 절대로 못 참는 우리의 드래곤께서 낮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아리아가 놀라서 날 붙잡았다. [빨리 일행들을 모아서 꽈악 붙들어요.] 그러나 그녀 뿐만이 아니라 벌써 토냐가 일행들을 불러 모으며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실드, 실드, 실드으~~" 드래곤의 주위에서 갑자기 휘잉~~ 하는 바람소리가 들리더니만 점차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점점 강해져 마침내는 토네이도를 일으켜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그런 폭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 속에서 빛이 번쩍 번쩍 빛나더니만 그 곳에서부터 수 많은 번개들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었다. 다행이 토냐가 토네이도가 완성되었을 즈음 실드를 완성시켜 일행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가막히게도 토냐가 삼중으로 실드를 쳤는데도 불구하고 오 분도 안 되어 번개를 몇번 맞자 맨 처음 실드가 파칭~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유리가 부서지듯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었다. 그 것은 토냐에게도 무척이나 큰 타격을 주었는지 토냐가 심하게 휘청 거리며 신음소리를 내 뱉을 정도였다. "으윽..." [어떻게, 어떻게... 빨리 저 분을 부축해 주세요. 지금 정신을 흐트러뜨리면 마법이 완전히 깨질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리아가 다급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자 나는 그녀의 말을 얼른 선에에게 옮겼고 그 즉시 선애와 소피가 토냐를 부축했다. [렌... ] 아리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드래곤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유인 즉슨, 해적들이 날아가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드래곤이 너무 힘을 썼는지 배 까지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아아악~!!" 당황한 선애가 날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당황하지말구 일행 잘 붙들어. 아리아씨 저 좀 잡아주세요. 혹시 일행들을 데리고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아리아도 황급히 드래곤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 글쎄요. 지금까지 사물을 잡고 날아본 적이 없어서...] [저는 잡을 수 있죠?] [예에...] [그럼 제가 일행들을 잡을테니까 아리아씨는 저를 잡고 있는 힘껏 날아주세요. 아셨지요? 많이 날지는 못해도 떨어지는 속도를 천천히만 해주시면 돼요. 어차피 저는 물 위에서 설 수 있으니까 수면 위에만 닿으면 저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예, 예. 한 번 해볼께요.] 아리아의 끄덕임에 선애를 바라봤더니, 선애는 벌써 토냐의 허리에 팔을 둘러 깍지를 끼고 있었고, 소피가 자신의 팔을 선애 팔에 낀 채로 로어를 붙들고 있었다. 그 즈음 배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던 균열이 우리 일행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고 덕분에 배가 크게 기우뚱 하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괜찮아, 버티기만 해. 나랑 아리아씨가 너희들을 데리고 있으니까 떨어지지는 않을 거야.] 내가 선애의 허리를 잡으며 말하자 선애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우리 일행이 서 있던 갑판이 와지직 하며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발 디딜 곳이 없어진 일행은 그대로 밑으로 추락하는 가 싶었지만, 곧이어 나와 아리아의 힘으로 인해 허공에 멈췄다. [아리아씨, 괜찮아요?] [하, 하, 하... 그, 그게... 오, 오래 못 버티겠어요. 어쩌죠?] [천천히 내려가요, 천천히. 물 위에만 닿으면 돼요.] 내 말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만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배의 파편이 후두득 떨어지고 있었지만 토냐가 친 실드에 부딪혀 일행에게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선애의 언질이 있었는지 토냐는 허공에 떠 있는데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마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 죄송해요. 마법 사정권에서라도 벗어나야 하는데...] 아리아의 말을 듣고 보니 이 드래곤이 얼마나 힘을 썼는지 배 주위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바다에까지 마법 공격이 미치고 있어 주변에는 때 아닌 광풍이 불고 높은 파도가 일고 번개가 쏟아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누가 보면 폭풍이라도 닥친 줄 알거 같았다. 나라도 저 드래곤을 말리고 싶지만, 지금 선애를 두고 가지도 못해 이래저래 속만 끓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드래곤이 진정된 건지, 아니면 마법의 지속 시간이 다 된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토네이도가 멈춘 거는 새벽녘이 다 되어서였다. 정말 기가막혔다. 비록 작은 편이라고 해도 먼 항해를 할 수 있는 배였으니 제법 큰 축에 속한 함선이었는데, 그게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게다가 해적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뭐, 그건 잘되었다고 생각 했다. 한 순간에 두 동강난 시체를 보는 것도 끔찍했는데 거기다가 익사체까지 보는 건 더 끔찍했으니 말이다. 아니면 전기에 새카맣게 탄 시체를 보는 것도... 그러고보니 배의 파편들 사이에 시커먼 뭔가가 둥둥 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보기 싫어서 일부러 그쪽에는 시선도 안 줬다. 우리 일행들은 다행이 수면에 내려앉을 때 아주 큼지막한 배의 파편을 발견해서 그 위에 올라앉아 있을 수 있었다. 거기에다 내가 주변에 동동 떠 있던 커다란 통이나 밧줄 등등을 가지고 와서 묶어가지고 뗏목 비스무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새벽녁이 되자 그제야 수면제 효과가 다 했는지 로어가 부스스 깨어났다. 그는 선원들과 배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자신은 배 파편 위에 있는 걸 보고 어리둥절 해 하며 토냐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가 한 대 크게 얻어 맞았다. 그도 그럴것이 토냐는 드래곤 녀석의 마법으로부터 일행들을 지키느라 무척이나 탈진한 상태였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토냐가 마법이 멈출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마법 공격이 약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지, 직격으로 맞는 곳에 있었다면 한 시간도 못 버텼을 거라고 한다. 덕분에 토냐는 로어에게 한대 먹이고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 드래곤이 나타났다. 잘난 놈이라서 그런지 그 녀석은 여전히 멀끔한 얼굴로 물 위를 철벅 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선애보고 남으라고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분노한 아리아양이 나서서 펄펄 뛰었던 것이다. 다시는 말을 안 한다고 사라져 버릴꺼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결국 드래곤이 양보하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너희를 따라가도록 하겠어. 그럼 됐지?" 라고 결론이 나버리는 건 왜일까? 덕분에 나중에 깨어난 토냐는 다시 기절할 것만 같은 표정이 되었고 소피도 질린 얼굴이 되었고, 여전히 사태가 파악이 안 되는 로어만 멀뚱멀뚱 있다가 토냐에게 얻어 맞았다. 사태가 좀 진정이 된 후에야 로어는 그가 드래곤이라는 걸 깨닫고는 흐엑... 거렸지만, 그런 걸 보니 갑자기 떠오른 단어가 생각이 났다. '형광등 같은 놈.' '형광등 같은 놈.' 물론 로어가 원래 그렇게 머리 회전이 느린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눈치는 물론 머리 회전까지 빠른 사람이었다. 단지 지금은 약으로 인하여 장시간 잠에 빠져 있느라 그 동안 벌어졌던 사건들에서 소외 되었고, 또 갑작스런 드래곤의 등장이라는 것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요소였기에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현실을 인식하자마자 침착성을 되찾고는 선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는 드래곤을 절대로 데려가면 안 된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누군 데려가고 싶어서 데려가는 줄 아남?'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정말 힘 없는 것이 서럽다고, 리아나가 펄펄 뛰는 바람에 선애를 여기에 붙잡아 놓는 것은 양보했지만 - 사실 이것도 힘 있으니 강제로 억류시킬 수 있었던 거지, 세상에 이러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 선애 곁에서 떨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건 리아도 은근히 바라는지 아무말도 안 하고 있어서 한 드래곤과 한 유령을 말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기실, 그렇기 때문에 로어도 뭐라 말은 못하고 시선만 보내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게다가, 지금 우리 상황으로써는 치사하고 아니꼽기는 하지만 드래곤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배는 난파되었고, 여기가 어딘지 아는 해적 녀석들은 보이지도 않는 이 망망대해에 급조된 뗏목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우리 일행으로써는 말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고 씹어먹고 구워먹어도 시원찮을 드래곤 녀석이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 아니 자기가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괜히 잘 있는 - 에, 물론 우리 상황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항해술을 가진 사람이랑 배랑 더불어 식량까지 모조리 작살내놓고는 어떻게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안 느낄 수 있는 것일까? 기실, 상황이 좀 안정되고 나서 나는 좀 건질거 있나 하고 근처를 돌아다녀봤었다. 그러나, 우리 근처에 있는 거 외에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지 않으면 시커멓게 타 버린 것들이라서 뭔가가 둥둥 떠 있기는 하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뭐, 그런 상황에서도 크게 걱정이 되지 않는 건 먹을거야 내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생선이라도 잡아오면 되는 거였고 불은 토냐랑 내가 있으니 구워 먹는 것도 가능한데다, 식수도 토냐가 마법으로 공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시원한 맑은 '삼다수 생물' 정도는 아니었지만, 우선은 먹고 안 죽으면 되는 거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대로 내가 배를 끌고 가거나 토냐가 마법을 일으켜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로 가야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어디에 있는지, 아니면 하다못해 여기가 배들이 자주 다니는 소위 '뱃길'이라는 곳인지, 등등... 우리가 자기에게 너무 많아 넘치는 마력으로 텔레포트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는 것 좀 그것도 많이도 아니고 단 하나만이라도 가르쳐 달라는데, 돕지는 않아도 최소한 그런 거라도 가르쳐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치사하고 치사하고 치사하고 치사빤쮸인 드래곤 녀석은 그걸 알려달라고 물어도 계속 단 한 마디 '내가 왜?'란 말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정말 내가 조금만 힘이 있었다면 뒤통수를 한 대 후려 쳐가지구 저 깊은 바다속에 365일 정도는 재워놓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우리보다 힘 센 놈도 저 놈이고, 정보를 알고 있는 것도 저 놈이고... 그리하여 나는 결국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다가 점점 미안한 표정이 되어가는 아리아를 향해 도움을 청하려는 찰나, 저 멀리 수평선에 왠 점이 하나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는 안 보였는데 갑자기 생긴 점이라 의아해서 눈 비비고 힘을 줘보니, 세상에나 그 점은 바로 배였던 것이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아직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배라는 것은 확실했다. [야, 야, 선애야 배가 온다, 배가 와!] 해적 녀석들이 우리에게 해꼬지를 하려고 온 곳이라 뱃길에서 좀 많이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남의 배 위에서 뭘 하던 별로 상관 없었으니 뱃길 위에서 일을 벌려도 상관 없었으려나? 내 말에 선애의 표정이 환하게 피어 올랐고, 내 말은 곧 선애를 통해 다른 일행에게로 전달 되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 치사하고 치사하고 치사하고.... 한 드래곤 녀석의 표정에 낭패감이 어리는 것이었다. "쳇..." 낮게 혀까지 차면서 말이다. 배를 발견하고 나는 더 이상 드래곤 녀석에게 치사함을 감수하고 매달리지 않게 되어 고소한 마음에 녀석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뭐, 뭐냐 저 드래곤은?' 마치 철 없는 어린애의 투정을 보는 것만 같아 기가막힌 심정으로 드래곤 놈을 바라보는데 아리아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미안해요. 이해해 주세요, 신애씨.] [뭘요?] 저 놈이 철 없는 어린애모냥 투정 부리는 걸 이해하라는 거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리아가 배시시 웃어보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저 드래곤 놈의 투정이 심했다는 걸 알고 있었나보다. [렌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점점 더 알수 없는 말이라 나는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싱긋 웃고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드래곤이라는 걸 다른 녀석들에게 알리지 않는게 좋을 거다. 만약 입을 잘못 놀려서 날 귀찮게 만드는 녀석이 있다간 너희 모두는 나의 분노를 받게 될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말 깐죽거린다 싶을 정도로 이죽거리며 말하던 드래곤 녀석이 돌연 정색을 하고 말하자 일행 모두는 굳어서 고개만 끄덕끄덕 거렸다. 그러고보니 이 드래곤 녀석 깐죽거릴 동안 기운을 갈무리 했는지 어쨌는지 일행들은 그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 일방적으로 우리쪽이 매달리고 애원하는 식이었지만, 그래도 배 위에서 녀석의 위압감에 질려 제대로 입도 못 여는 것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드래곤 녀석이 하도 얄밉게 굴어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저어... 그럼 뭐,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아무래도 같이 계신다면 불러야 할 일이 있을텐데..." 토냐의 조심스런 질문에 드래곤 녀석은 조금도 생각 않고 즉석에서 입을 연다. "주인님." 덕분에 일행은 컥~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야 했다. "그, 그건 좀... 그냥 거물을 일행으로 삼는 식은 어떨까요? 나중에 혹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을 만났을때 주인으로 섬겼다면 이상하게 볼 겁니다. 저희는 상회 사람이거든요." 로어가 침착하게 묻자 드래곤은 무지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마치 '무지 마음에 안 들지만 네 놈들이 애걸복걸하니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울컥 하게 되었다. 그래봤자 드래곤 녀석에게 대 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하는 수 없지. 그럼 렌스버리님 이라고 불러라." '젠자앙~~ 속으로는 어리버리놈 이라고 불러줄테닷~!!' 이런 내 마음과는 달리 일행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끄덕 할 뿐이었다. 뭐 씹은 것 같은 내 표정을 본 아리아가 다시 설명해줬다. [그건 어쩔수가 없어요. 드래곤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면 여러모로 귀찮잖아요? 일행분들을 위해서도 그게 좋은 거예요.] 남들이 드래곤이라고 알건 말건 우리가 꼼짝도 못한다는건 똑같은데 뭐가 좋단 말인가? 그래 나는 부루퉁하니 투덜댔다. [설마하니 저 분이 드래곤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깐죽 거리다가 저 분이 열받아서 마을 하나라도 통채로 날려버리면 어쩌죠?] 내 말에 아리아가 호호 웃었다. [괜찮아요. 아주 오래전에 드래곤 로드께서 드래곤들을 모아놓고 이유 없이 대량 살상을 벌이면 가만 안 두겠다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선언 하셨거든요.] [에?] 내가 의아해서 돌아보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설명해준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그런 드래곤 로드의 공언이 없기 전 드래곤이라는 오만하고 치사한 종족들이 유히이던 그냥이던 놀러 세상에 나갔다가 기분 나쁘다고 고위 마법을 남발해도 아무런 제제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단다. 이걸 자기들이 알아서 재량껏 조절해주면 좋았을텐데, 이 놈들이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드래곤들이 이 세계에서 제일로 꼽히고, 또한 그에 걸맞게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신으로부터 그런 사명과 함께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에 걸맞게 인격, 아니 용격도 성숙되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놈의 용격은 힘에 비해 정말 미미해서 드래곤들의 그런 안하무인격 일들로 인하여 여러 사건이 발생, 결국에는 다른 세계의 힘으로부터 위협을 당하기도 전에 드래곤 녀석들에게 이 세계의 종족들이 멸상 당하겠다고 생각한 신께서 드래곤 로드를 불러 충고 하셨다고 한다. ((적당히 해라, 잉? 안 그랬다간 힘을 절반으로 파악 줄여삔다?)) 그리하여 그 충고에 놀란 드래곤 로드는 부랴부랴 드래곤들을 불러놓고 그 선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 뒤로 드래곤들의 사고는 사라졌고, 드래곤들은 자신의 종족을 밝히고 세상으로 내려가는 일을 줄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툭 하면 등장했던 악룡도 사라지고 드래곤들의 등장도 사라진지 몇 천년, 이제는 드래곤은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존재일 뿐, 멸망 했는지 아직도 잘 먹고 잘 사는지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저 옆에 있는 놈이 그 드래곤이란 말이지.' 나는 점점 더 다가와 이제는 로어의 눈에도 확연히 보이는 배를 바라보며 생각 했다. 그 동안 저 치사한 렌스버리가 서대륙과 왕래하던 배들을 몽땅 수장시켜 버려도 드래곤 로드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그 뱃길이 바로 이 놈의 '영역' 이었기 때문이란다. 드래곤들은 자신의 영역에 대해 매우 민감한 종족이라 함부로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곳에 하찮은 인간들이 배를 타고 침범 했으니, 드래곤 로드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배들이 수장 당해도 '그래도 싸다.', '그럴만 한 이유다.' 라고 생각해줬던 것이다. 아마 저 드래곤 녀석은 그걸 노리고 자신의 레어를 이 바다 밑으로 옮긴 걸지도 몰랐다. 하기야, 그럴 잔머리는 있겠지. 저 놈이 이제 8천살이 넘은 고룡에 속한다니 말이다. 지금까지 보아 온 저 놈의 치사한 행실로 봐서는 어디가 8천살이나 먹은 놈으로 보이는가만은...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배에서 작은 보트가 내려온다. 아까 토냐가 다가오는 배를 향해 하늘 높이 불꽃을 쏘아 올려 구조 신호를 보냈기에 즉각적으로 조처를 취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다가오는 보트를 바라보며 한시름 놓자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중앙 돗대에 아주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문장이 어디서 봤는지 되게 낯이 익었다. '이상하다... 어디서 봤는데 생각이 안 나냐. 분명히 잘 아는 거 같은데...' 그렇게 안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끙끙 거리던 나는 일행이 옮겨타 다시 커다란 배로 옮겨가는 뒤를 졸래졸래 쫓아갔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사람들이 있으니 당연히 선애에게 말 걸기는 어려워 혼자만 끙끙 거렸다. 그러던 나는 일행을 따라 배 위에 오르자 그 문장을 어디서 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억해낸 것이 아니라 깨달은 것이었다. 배 위에 오르자 문장보다도 더 강력하게 내 뇌리에 남은 인물 둘이 서 있었던 것이다. 선애 또한 그 둘을 보자 멈칫 했지만, 우리를 구해준 사람들인데다 일행들 중 대표였기에 나서서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루빈스타인 자작님.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네비아님." 그랬다. 배 위에 떠억 하니 버티고 있었던 놈은, 알파두르 항구도시에 있는 루빈스타인 후작 저택에서 질리도록 봤던, 얼음 왕자 그랜트 루빈스타인 녀석과 꽃미남이지만 속은 얼굴과는 정 반대인 엘리엇 제네비아, 바로 그 둘이었던 것이다. '하, 나도 참... 낯 익은게 당연하지. 루빈스타인 후작가에 있을때 질리도록 본 문장이었으니...'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군." "오랜만입니다. 선애양... 이었던가요?" 그랜트 녀석의 뒤를 이어 엘리엇 녀석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그에 선애도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아... 정말 열받게 하는 놈이었지.' 운이 좋게도 그 배는 서대륙으로 향하는 배였다. 우리야 중간에 구조되는 입장이었으니 반대 방향으로 간다고 해도 감지덕지였을텐데, 원래 가던 방향이라 정말 '이게 왠 떡이냐.' 싶었다. 우리가 그렇게 된 건, 해적의 공격을 받았다고 둘러댔다. 배가 폭발한 건 해적들의 공격을 막지 못해 최후 수단으로 강한 걸 썼다가 두 배가 풍지박살 났다고 했다. 뭐, 주번에 정말 풍지박살난 배의 잔해들이 떠돌았기때문에 이 변명은 그대로 먹혔다. 단지, 루빈스타인 상회의 배에 그랜트 녀석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6서클의 마법사가 있어서 우리가 있던 배가 부서진건 7클래스의 마법이라고 하는 바람에 렌스버리가 나서기는 해야 했다. 토냐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4서클의 마법사라 금세 그녀의 실력이 탄로나 그 마법을 토냐가 썼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랜트의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에 그 6클래스의 마법사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을 해보였으나 마법으로 외모를 젊게 만들어 보인거라고 해서 그제야 납득하고 넘어갔다. 루빈스타인 상회가 서대륙과 무역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무역을 하러 후계자가 직접 서대륙까지 가는 것이 꽤나 놀라웠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그쪽에서도 말 하려 하지 않았고 우리도 물을 입장이 아니었기에 그냥 유야무야 넘어갔다. 내가 나중에 녀석들의 선실에라도 몰래 침입하여 알아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렌스버리 녀석이 다른 일이 있을때는 양보했지만 한가할때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아리아와 이야기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피곤할때는 고히 자게 냅둬주는게 고마울 뿐이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꼬박꼬박 존다고 회복 마법을 걸어 잠 못자게 했으니 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건 8클래스의 마법이라고 한다. 단순히 잠 깨우기 위하여 8클래스의 마법을 걸어버리다니, 역시 마법 생물이라 불리는 드래곤 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 배에서 융숭한 대접은 못 받았지만, 일반 선원 정도의 대우만으로도 우리는 무지 감지덕지 였다. 물론,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드래곤과 단 둘이서 방을 쓰게된 로어의 심정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자유고, 나가서 돌아다닌다고 해도 노골적인 야유와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게 그렇게 기쁜 건지 이제야 알았다고 말하는 선애와 토냐는 얼굴이 화알짝 피어 있었다. 거기다 식사도 괜찮았고 말이다. 단지... 옷이 없어서 남자 옷을 빌려 입고 있어야 했지만, 일행들은 그래도 만족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일행이 자신만의 시간을 위하여 뿔뿔이 흩어진 때 선애는 렌스버리와 갑판의 인적이 없는 쪽으로 갔다. 렌스버리 녀석이 말은 안 했지만 - 나와 아리아의 존재는 렌스버리와 선애만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 선애 때문에 일행에 합류했다는 건 아무리 둔한 눈치를 가졌다 해도 며칠만 지내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었기에 요즘 일행들은 시간만 나면 선애와 렌스버리를 위해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게 되었다. 뭐, 렌스버리의 노골적인 매서운 눈길을 받는다면 싫다고 해도 그렇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때도 일행들이 자리를 피해줬기 때문에 선선한 바닷가의 바람을 맞으며 밤바다의 경치를 감상하며 대화의 창이 되어주려고 하는 그때였다. "산책 중인가?" 뜻밖의 목소리에 선애와 렌스버리가 돌아보자, 거기에는 그랜트 녀석이 다가와 있었다. 평소 찰싹 달라붙어 다니던 그 엘리엇 녀석은 어디로 보내버렸는지 혼자였다. 그가 다가오자 대외적으로 평민인 두 사람이 그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그래도 대 마법사인 - 렌스버리는 자신을 7서클의 마법사라고 했는데, 그건 인간 세상에서는 대 마법사였다. - 렌스버리는 가벼운 인사를, 선애는 허리를 숙이는 정중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렌스버리니임~!!" 저쪽에서 이 배에 탑승하고 있던 마법사가 어울리지 않는 공손한 목소리로 렌스버리를 부르며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렌스버리가 자신보다 높은 서클의 마법사라는 것을 안 뒤부터 그에게 배우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의 소속이나 정체를 캐뭍고 싶은 건지 - 우리는 그가 말하려 하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둘러댔다. - 하여간 마법에 대해 심도 높은 토론을 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다행이도 렌스버리 녀석이 그 마법사의 관점을 무척이나 흥미로워해 말을 걸면 제법 같이 토론을 해주곤 했었다. 덕분에 토냐까지 그 곳에 끼어들어 여러가지 지식을 얻는 모양이었다. "아하하, 산책 나오셨습니까?" 그는 후작가로부터 남작이라는 작위를 받고 있었지만, 렌스버리보다 한 단계 서클이 낮기 때문에 평민이라 밝힌 렌스버리에게 존대를 쓰고 있었다. 그런거 보면 마법사 세계는 용병 세계와 마찬가지로 정말 철저한 실력제인 모양이다. 하기야, 7서클의 마법사라면 어딜 가든 당장이라도 남작 정도의 작위는 쉽게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저, 그런데 렌스버리님 전에 말씀하셨던 그 것 말씀입니다만, 예전에 제 스승님과 사형제들이 다른 각도에서 접근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아주 흥미있는 결론이 나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제가 가지고 온 책들을 정리하다 발견한건데..." 그 마법사의 말에 렌스버리가 눈을 빛냈다. "호오, 그런가? 어떻게 했는데?" "아, 여긴 어두우니 제 선실로 가시겠습니까? 아, 마침 호프만양도 저기 있군요. 같이 가서 보죠. 전에 호프만양이 말한 방법이랑 비슷하거든요." "그러지. 아, 나중에 이야기 하자. 실례 하겠습니다." 렌스버리가 선애를 향해 말하고 그랜트 녀석에게 말하자 마법사가 그제야 그랜트를 발견한 듯 황급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렌스버리를 끌고가다시피 데리고 가자 그 인기척이 적은 갑판에 선애와 그랜트 단 둘이 남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내가 옆에 있기는 했지만, 그랜트 녀석은 내가 안 보이니 말이다. 그리고는 렌스버리를 끌고가다시피 데리고 가자 그 인기척이 적은 갑판에 선애와 그랜트 단 둘이 남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내가 옆에 있기는 했지만, 그랜트 녀석은 내가 안 보이니 말이다.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랜트 녀석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만 느긋한 몸짓으로 배 난간에 팔을 얹고는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애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 원래 그 치사빤쮸인 드래곤 녀석의 전화기 역할을 해주러 왔건만, 그 사용자가 갑자기 볼 일이 있다고 휑~ 하니 가 버리고, 대신에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옆에 있다니... 그것도 편안해서 한가하게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무지무지 불편한 이 배의 주인인 그랜트 루빈스타인 녀석이 아닌가? [야야, 우리도 그만 들어가자. 여기서 뭐 하냐?] 내 말에 선애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랜트 녀석을 부르려고 했다. 아까 인사한 이상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그것 또한 무례이기 때문에 간다고 인사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선애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랜트 녀석이 뜬금 없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것도 선애를 바라보며 말한 게 아니라 시선은 여전히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했기 때문에 선애나 나는 처음에 그가 선애를 향해 말한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쉽군, 고든이 있었다면 무척 반가워 했을텐데..." '반갑다고? 밤바다를 보면 반가운가?' 그의 말을 금방 이해 못하고 선애나 나나 어리둥절한 시선만 주고받는데 그랜트가 반응이 없자 이상하게 여긴 모양인지 난간에 기대어있던 몸을 일으켜 선애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 "예?" 선애는 자신에게 말한 건 줄 그제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봤자 나라고 별 수 있냐? 나는 그가 누군지도... 가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내가 기억 못해내자 선애가 난처한 시선으로 그랜트를 바라본다. 그에 그랜트가 약간 인상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선애를 바라봤다. "벌써 고든을 잊어버린 건가?" "고든? 아아, 켐벨 집사님 말씀이시군요. 그러고보니 그 분은 같이 안 오셨나봅니다?" 그래도 선애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애의 말에 나는 그제야 집사의 이름과 함께 모습이 떠올랐다. 첫 인상은 꽤나 깐깐하게 생긴 영감이었는데, 인상과는 달리 주인과 그 소속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열혈 성격의 소유자였었다. 엘리엇 제네비아 녀석 덕분에 얼결에 선애를 맡게 되었는데, 그랬던 것 치고는 꽤나 잘 돌봐 주었었다. 선애가 그 미란다인지 써니텐인지 하는 녀석 때문에 나오게 되었을때도 무척이나 아쉬워 해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뭐, 선애의 능력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말야. 냐하하하~~' "그는 같이 오고 싶어했지만, 그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하는 일이 생겨서 말이지. 무척 아쉬워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남았지."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부터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 열혈 성격의 할아버지는 아마 자신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그랜트 녀석에게 처절하게 사죄를 했을 거다. 그가 만약 일본인이었다면 할복을 하겠다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른다. "훗, 정말 서운해 하셨을거 같아요." 선애 또한 비죽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그랬지. 게다가 여기서 널 만났다고 한다면 더욱 더 서운해 할지도..." 그렇게 말끝을 흐리던 그랜트 녀석이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선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선애는 오히려 '뭐야, 이 놈은?' 이라는 시선으로 그의 시선을 곧바로 맞받아쳤다. '하여간 우리 꼬맹이는...' 그게 웃겼던 것인지 그랜트 녀석이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봐도 신기하군. 서대륙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을까?" 한국에서도 울 꼬맹이만큼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나도 검은 눈동자라기보다는 갈색에 가까운 눈동자였으니까. 머리색도 나는 머리카락이 가늘어서 그런지 약간 옅은, 갈색이 섞인 검은색인데 비하여 울 꼬맹이는 칠흙같이 검은색이었다. 선애야 자신은 피부가 검은편이라 머리카락과 눈동자도 검은 거라고 투덜대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색이긴 했다. '만약 피부가 하얗다면 전통 한국 미인으로 따악이었을텐데... 쩌비... 아까운거.' "뭐어... 제가 있던 곳에서는 저 만큼 진한 검은색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지요. 다 검은색이긴 한데 자세히 보면 조금씩 색이 틀리거든요. 좀 옅든가 아니면 갈색이나 푸른색이 약간 섞였던 가..." 선애가 결국 그렇게 눈싸움 하는 것에 흥미를 잃었던지 몸을 돌려 난간에 기대어 밤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랜트 녀석도 난간에 몸을 기댔다. "흠... 그랬던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기분은 어때?" "고향이요? 아닌데요? 제 고향은 한국입니다. 이번에 가는 나라는 진나라인걸요. 제 고향과는 엄청 멀지요." "그런가? 서대륙이라고 해서 친근감을 느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설마요. 처음 가는 나라라 어떤 나라일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서대륙에는 왜 가는 거지? 상회 일때문인가?" "예, 뭐 그렇죠." 이 배에 올라왔을때 우리를 타이거 상회 사람들이라고 소개했기에 그랜트 녀석이 선애가 상회에서 일한다는 걸 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왠지모르게 묘~~ 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내가 후작가의 저택에 있을때 본 그랜트라는 녀석은 완전 얼음왕자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언제나 반듯반듯 하고 차가운 위엄과 날카로운 냉기를 품고 있어 모두들 우러러 보고 존경하고 대단하다고 감탄은 하지만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인간 말이다. 항상 그렇게 꼿꼿하게 있으면 되게 피곤할 것 같지만, 저 놈은 내가 볼때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런 그가 그나마 편안하게 말을 하는 상대는 그의 보좌관이자 어려서부터 같이 커온 엘리엇 제네비아나 고든 켐벨 집사 정도? 동생에게는 자상한 오라버니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엄격한 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선애하고 참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별 시덥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말이다. 언제 울 꼬맹이가 저 남자와 시덥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후작가에서도 저 놈은 선애에게 항상 뻣뻣하게 대했던 거 같은데 말이다. '말도 거의 걸지 않았지. 필요한 말만 했고... 그러고보니 몇번은 뜬금 없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하기야, 울 꼬맹이가 저 인간에게 말 걸 필요성도 거의 없었고, 저 놈도 항상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분위기를 폴폴 풍기고 있었으니 울 꼬맹이의 소극적인 성격상 말 걸기도 어려웠을 거다. 지금이야 저 놈이 말을 거니 대답해주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시시하지만 잔잔한 대화는 한 남자의 등장으로 인하여 끊어졌다. "그랜트님!" 낮지만 힘 있게 부르는 목소리에 그랜트의 회색 눈동자가 돌아갔다. 항상 그랜트의 옆에 달라붙어 있던 엘리엇 제네비아 녀석이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선실에 안 계셔서 찾아다녔습니다." 그 놈이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선애와 그랜트 사이에 끼어든다. 뭐 대단히 중요한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처음에 선애는 그랜트와 있는게 어색해 들어가려 했으니 잠시 틈이 생긴 걸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두 분도 쉬십시오." 그렇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선애의 뒤를 따라가려는 순간 나는 저 얄미운 엘리엇 놈이 선애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걸 봤다. [야, 야, 저 엘리엇이라는 놈이 너 노려본다.] "/냅둬. 저 놈이 언제는 나를 좋아했나?/" [하긴.] 그러고보니 엘리엇 놈은 선애의 목을 조른 적도 있는 놈이었다. [이번에도 함부로 손을 대면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던지 해야겠어. 이제는 전 같이 않으니 가만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 엘리엇 놈도 놈이지만, 나는 은근히 그랜트 녀석도 신경이 쓰였다. 그리하여 다음날부터 그랜트 녀석만 집요하게 노려 보았다. 녀석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가끔가다 뜬금 없이 고개를 들고 사방을 쳐다보았지만, 내가 보일 리 없었기 때문에 고개만 갸웃 하고는 말 뿐이었다. - 케케케... - 그러나 그건 단순히 웃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며칠 그랜트 놈을 유심히 관찰하고 나니 나는 놈이 선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단순한 호감인지 신기해서 그런 건지는 파악을 하지 못했지만, 놈이 선애에게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고 선애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놈만 계속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알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때는 무관심한 듯 스쳐 지나가는 시선 외에는 특정한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 혼자 있을때, 그리고 선애가 시야에 있을때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배가 우리가 탔던 해적선의 두 배 정도라고 할 정도로 무지 큰 배지만, 유람선이 아닌 화물선이다보니 대부분이 무역품을 보관한 창고라 사람들이, 특히 우연히 구함을 받은 일행이 돌아다닐 공간은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그랜트 놈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선애가 있는 곳을 자신의 시야에 담을 수 있었고, 놈은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 하루에 꼬옥 한 번 이상은 홀로 여유있는 시간을 가질 때 자신의 시야에 선애를 담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 선애가 안 보이는 자리에서 말이다. 선애가 아랫 갑판에 있을때 놈은 윗 갑판에 있거나 아니면 선장실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거나 등등 그런 식으로 말이다. 아마 내가 작정을 하고 놈을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놈이 그러한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덕분에 처음에는 우연히 놈이 선애를 발견해서 보고 있는 건줄 알았었다. 그렇게 녀석이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선애를 바라보고 있었건만, 그의 시선을 눈치 챈 인물이 또 있었다. 당연하게도 엘리엇 제네비아 놈이었다. 그 녀석이야 거의 대부분을 그랜트의 곁에 붙어 있는데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온 상대이니 아마 그랜트의 여러가지 요소로 눈치를 챈 거 같았다. 덕분에 원래도 선애를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는데 더더욱이나 선애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기가 막혀서... 아니 누군 기분 안 나쁜 줄 알아? 이놈아, 난 그랜트 녀석이 선애에게 반했다고 해도 그랜트에겐 내 동생 못 줘! 그런 얼음덩어리 같은 놈에게 가면 울 꼬맹이가 얼마나 고생 하겠어?' 저녁 시간, 손님이라는 이유로 - 내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렌스버리를 회유하거나 그와 친목을 다지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와 더불어 토냐에게도 은근히 눈독을 들이는 것 같고. - 이 배에서 높은 사람들, 그러니까 그랜트를 비롯하여 이 배의 선장, 엘리엇, 그리고 6서클의 마법사 등등과 같이 식사를 하는 내내 선애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엘리엇 녀석을 째려보며 저 놈의 뒤통수에 지금 한대 먹여서 접시에 코를 박게 할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데 나와 같이 있던 아리아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래요, 신애씨? 기분이 무척 나빠 보이는데...] [저 녀석이 무지 기분 나쁘게 해서요.] [예? 누가요?] 아리아의 질문에 나는 기꺼이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놈을 처억 하니 가리켜 보였다. [저 놈이요.] [저런... 신애씨, 인간들 사이에서는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건 실례 아니던가요? 무척 불쾌하게 생각 하던데...] 그러나 아리아는 내가 말하는 녀석은 안 보고 내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상관 없어요. 저 놈에게는 얼마든지 그래주고 싶거든요. 게다가 그렇게 해봤자 저 놈은 나를 못 보잖아요.]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놈에 대한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지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엘리엇 제네비아 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 사람 말이지요? 갈색 머리에 보라빛 눈을 가진 미남 말이에요.] [예. 바로 그 녀석이요.] [에에... 왜 그렇게 미워하세요? 아, 하긴... 저 분과 선애씨 사이가 안 좋아 보이기는 하던데...] [저 놈이 일방적으로 선애를 미워하는 거라구요. 아아... 정말 지금이라도 가서 한 대 때려 줄까?] [아하하하...] 엘리엇의 사나운 눈초리를 알아챈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사이 렌스버리와 아리아의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갑판의 한쪽 구석에 모였을때 렌스버리가 선애를 향해 말했던 것이다. "이봐, 너 그 갈색 머리 녀석에게 뭐 밉보인거라도 있냐? 자꾸 째려보던데?" "그 놈이 일방적으로 저를 미워하는 거예요."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며 툴툴 거리자 렌스버리가 쯧쯧 혀를 찼다. "하필이면 그런 놈에게 걸리냐. 그런 놈들이 질겨서 한번 앙심을 품으면 두고 두고 이를 가는데..." "아아... 그러게 말입니다."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렌스버리가 한번 더 혀를 쯧쯧 차더니 고개를 휘익 돌렸다. "조심해라. 잘못 해서 나에게까지 피해가 오게 하지 말고." '허... 참... 야, 너도 못됐기는 마찬가지야!' 물론, 우리가 녀석에게 도움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보통 이럴때는 '내가 도와줄까?' 라고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심이든 예의상이든 말이다. 게다가 저 렌스버리란 놈이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없는게 아니라 아예 넘쳐서 주체를 못하는 녀석이니 이럴때 쫌 도와주면 어디가 덧난단 말인가? 그런데 도와준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피해가 오지 않게 하라니... 그 엘리엇 제네비아 녀석이 선애를 괴롭힌다고 저 렌스버리에게 찝적거려서 저 놈 좀 무지무지 귀찮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선애도 나랑 비슷한 심정이었던지 녀석을 기가막힌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놈이 '왜?' 라는 시선으로 맞받아쳐오자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야, 야. 냅둬. 내가 엘리엇 놈 한 대 쳐 줄께.] 그런데 그때였다. 우리의 화제 인물인 엘리엇 제네비아가 짜안 하고 등장한 것이었다. "아, 두 분 여기 계셨습니까?" 생글 생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놈을 향해 선애나 렌스버리는 아무도 대답을 안 해줬다. 렌스버리는 녀석을 아예 상대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고, 선애는 예의상으로라도 상대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도 이 놈은 얼굴에 철면피를 깔았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날씨가 따뜻해서 해가 져도 바람이 차지 않아 자주 나오시는 것 같더군요. 그것도 두.분.이. 서 말입니다?" 녀석이 이상하게 '두분이서'란 말에 강조를 하자 선애나 렌스버리가 이 놈이 또 뭔 수작을 하나 싶어서 녀석을 바라보는데, 녀석이 렌스버리에게 아주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렌스버리님, 제가 선애양과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녀석은 렌스버리가 자신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렌스버리는 그렇게 착한 드래곤이 아니었다. "내가 왜?" [푸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어.] 나는 정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어 대 놓고 웃어 제꼈다. 가여운 선애는 대 놓고 웃지 못하고 웃음을 참느라고 어깨를 부르르 떠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보기에 렌스버리나 엘리엇이나 삐까삐까하게 못된 놈들이었다. 단지 엘리엇 녀석은 약아빠져서 아무리 싫어하는 상대라 해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용해 먹으려고 하고 렌스버리는 원래 강한 종족이다보니 상대를 이용할 생각도 없으니 대 놓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었다. '하아... 역시 힘이라는게 있는게 좋군.' 그렇게 엘리엇 녀석의 말을 들어주기 싫어하던 렌스버리는 결국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리아가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옆에서 잔소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엘리엇은 그걸 모르기 땜시 아리아의 말을 전달하기 위하여 렌스버리에게 귓속말을 하는 선애의 모습만 보고는 선애의 요청을 들어 자리를 비켜주는 걸로만 여겼다. "하, 정말 대단하군. 저 대 마법사를 손에 넣다니 말이야. 상회의 힘인 줄 알았는데 네 힘이었나보지?" 렌스버리의 모습을 감추자마자 곧바로 이죽대는 엘리엇을 향해 선애가 비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좀 잘났거든." 후작가에서야 선애가 하녀의 신분이었으니 당연히 존대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울 꼬맹이가 녀석에게 존대를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이 있는데서야 손님의 입장으로써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존대를 했다지만, 지금은 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선애의 반말을 듣게 된 엘리엇 녀석은 그렇게 생각 못했는지 얼굴을 굳히며 매섭게 쏘아보는 것이었다. "네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나보구나?" "난 잘 보이는데. 시력이 좋은 편이거든." 물론 아니다. 울 꼬맹이는 시력이 별로 안 좋았다. 공부할때는 안경을 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평소에는 안경 끼고 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안 끼고 있다가 이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다행이 여기서는 수업할때 칠판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었다. 더군나 옆에 시력이 엄청 좋아진 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이 놈에게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하, 지금 대 마법사를 일행에 넣었다고 자만하는 모양인데, 그러다가 큰 코 다칠 거다." 엘리엇의 말에 선애는 당당히 대답했다. "자만한 적 없어. 단지 내가 이제 당신에게 존대를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안 쓰는 것 뿐이지. 내가 당신에게 존대를 안 쓴다는 이유 하나로 자만하다고 하다니, 자신을 너무 높게 보는 거 아닌가? 당신 또한 나와 같은 평민이잖아?" 선애의 말에 엘리엇 녀석이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이죽댔다. "아주 잘 아는데?" 그에 선애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훗... 그런가? 그럼 그 잘난 머리로 이것도 잘 기억해두는 게 좋아.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친다는 것을." 뜬금 없는 녀석의 말에 선애가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대 마법사에게는 어떻게 알랑거렸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그랜트님에게까지 통용될 거라 생각하지 마라." "하아?" "내 예전에 경고 했던 거 같은데? 허튼 수작 부렸다가는 내가 가만있지 않겠다는 걸 말이야. 그게 지금도 유효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군." 엘리엇 녀석은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다 한다음 황당해 하는 선애는 냅두고 몸을 휘익 돌려 걸어가버렸다. '허 참, 녀석 그렇게 하면 지가 멋있어 보이는가 보지?' 그 뒤에서 열 받아서 이를 빠드득 가는 선애를 향해 나는 씨익 웃어보이고는 엘리엇 놈을 쫓아 달려갔다. 그날 밤, 엘리엇은 자신의 선실로 돌아가려다가 갑자기 허공에서 떨어진, 구정물에 흠뻑 젖어 있는 걸레를 머리에다 뒤집어쓰는 아주 진귀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덕분에 그 곳 청소를 담당하는 애꿋은 선원만 무지하게 혼났다나 어쨌다나... 그로부터 며칠 동안은 아주 화창한 날씨가 지속 되었다. 한 여름이라 날은 더웠고 바다 위라 습기는 많아 낮에 선실에 있으면 마치 찜질방에 있는 것 처럼 더워 사람들은 낮에 될 수 있는 한 선실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갑판 위로 나오면 햇볕이 따겁기는 해도 그 햇볕만 피하면 바람도 자주 불어오기 때문에 오히려 선실 안보다 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던지 렌스버리 녀석은 시원한 그늘 아래 아예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곳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다가가보니 단순히 앉아만 있는게 아니라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아주 고급스럽게 보이는 깃털펜을 쥐고 종이에 뭔가를 휘갈기는데, 이 세계에 와서 읽고 쓰기 교육을 받은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기호에 문자들이었다. '이, 이게 뭐래?' 그가 끄적대고 있는 테이블쪽으로 고개를 기웃대며 어리둥절해 하는 날 보고는 아리아가 풋 하고 웃으며 설명해 줬다. [룬 문자라는 건데요, 아벤티노 대륙에서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기 위하여 사용하는 문자래요. 서대륙에서는 마법을 써도 이런 건 안 쓰는데...] [오오, 그래요? 그럼 서대륙에도 마법이라는 게 있나봐요?] [으음... 비슷해서 마법이라고 말한 건데, 그 곳에서는 주술이라고 해요. 제가 렌과 함께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보니 주술하고 마법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거더라고요.] [그, 그래요?] 왠지 내가 모르는 복잡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아 나는 그 쯤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려고 시선을 다시 드래곤이 쓰는 테이블로 옮겼다. 그런데 아까부터 좀 위화감이 드는 것이, 그가 앉아서 끄적거리기 시작한지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어째 테이블 위에 종이가 단 세장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가 끄적대는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쯤 그의 주변에는 다 쓴 종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그가 막 다 쓴 종이를 뒤집는 순간 선애가 놀란 외침을 내뱉는 것이었다. "어, 저 종이..." [응? 왜 그러는데?] "아니, 저거... 아까 다 쓰고 뒤집은 거 같았거든. 그런데 내가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 거리며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선애의 말에 아리아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건 아니에요. 렌이 지금 사용하는 펜이 마법의 펜이거든요. 잉크가 무한정으로 나와 따로 잉크를 찍을 필요 없이 얼마든지 쓸 수는 있지만, 대신 한번 쓰여진 글씨는 잠시 지나면 그래도 지워져요. 쓸데없이 낙서할때 좋죠.] [에엣, 그럼 지금 저 펜이 마법의 펜이란 소리네요?] 내 놀란 외침에 선애가 눈을 둥그렇게 해서 돌아본다. "마법의 펜이라고?" 선애의 말에 무언가를 신나게 끄적대던 렌이 그제야 고개를 돌아본다. 너무 열중해 있다보니 우리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나... "시끄러. 아까부터 뭐라고 혼자 중얼대는 거냐?" 가 아니었군. "아, 아뇨.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거 마법 펜이라는거 진짜인가요?" 선애가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자 드래곤 녀석이 웬일로 기꺼이 마법펜을 보여준다. "신기하냐? 하기야, 너희 인간들은 이런 것도 무척 신기하게 보이겠지? 이거 내가 옛날에 심심해서 만들어본 건데..." 웬 일이 아니라 자기 자랑 하려고 보여주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마법의 펜이 아니라 일반 펜이라고 해도 되게 고급스러워 보였다. 깃털은 밝은 청색이었는데 가공을 잘 했는지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굵기가 일반 볼펜 정도라 잡기도 편안하게 보였다. 게다가 펜 촉이 금빛으로 반짝이는데 그게 진짜 금인 거 같다. 뭐, 완전한 순금으로 만든다면 너무 물러서 쓰기 불편할테니 아마 14K 정도겠지만... 그런데 그 펜촉에는 섬세하게 조각까지 되어 있는 것이었다. 펜촉 가운데에 그어진 선을 중심으로 활강하는 매가 양쪽에 똑같이 새겨져 있었는데, 얼마나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는지, 그 작은 펜촉에 새긴 건데도 불구하고 깃털 하나 하나에 매의 발톱까지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펜촉이 움직여 각도가 바뀔때마다 빛에 반짝거려 매가 정말 날개를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 멋진 펜을 보자니... 한번 써 보고 싶어졌다. 왜 예쁘거나 멋진 펜 보면 한번 써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마구 생기지 않는가 말이다. 이 펜은 별로 그런 욕구가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 잡아서 자세히 살펴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무지무지 멋졌다. 선애 또한 그 펜에 반했는지 뚫어져라 바라보자 신나게 자기 자랑을 하고 있던 렌스버리가 히죽 웃으며 물어왔다. "왜, 만져보고 싶냐?" 그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자 렌스버리 녀석이 정말 웬일인지 기꺼이 선애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래, 내 용심 한번 썼다. 한 번 써봐라." "와아..." 선애가 조심스레 펜을 받아들더니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야, 야, 나두, 응? 나도 써보자.] 내 말에 선애가 막 종이에 펜을 대다 말고는 나에게 한번 인상을 찡그려 보이더니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드래곤 녀석을 바라봤다. "저기... 언니도 써보고 싶다는데, 그래도 돼요?" 선애의 말에 평소 거만만 떨어대던 드래곤 녀석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저 놈이 왜 저러나... 싶었다. "네... 언니?" "예, 저희 언니요." "그... 유령?" "예에... 뭐..." "그런데... 글도 쓸 수 있냐?" 드래곤 녀석의 질문에 선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에... 저희 언니는 물건을 만질 수도 있는데요. 말씀 안 드렸던가요?" 선애의 말에 드래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랬었지. 물건을 만질 수 있다면 펜도 만질 수 있을테니... 그걸 미처 생각 못했군. 잠깐만, 그럼 내가 리아와 이야기를 하는데 너까지 낄 필요가 없잖아? 네 언니가 리아의 말을 종이에다 쓰면 되니까." 그의 말에 선애나 나나 아리아씨나 모두 아하~ 하는 표정이었다. 모두들 미처 그 곳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자, 잠깐만요. 저기... 신애씨? 나는 신애씨 잡을 수 있죠?] 뭔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리아가 다급히 나를 부른다. [예? 아, 그랬죠.] [그리고 신애씨는 물건을 잡을 수 있고요.] [그, 그렇죠.] 이 아가씨가 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나 싶어 바라보는데 아리아가 나를 막 재촉했다. [그, 그럼 빨리 펜 좀 잡아 보세요. 어서요.] [예? 아, 예.] 내 팔을 잡고 아예 펜에 손이 닿을 정도로 끌어당기며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선애를 통해 렌스버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펜을 쥐었다. 그랬더니 내가 펜을 잡은 손 위를 아리아가 자신의 손으로 덥더니만 펜을 종이 위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각, 사각, 사각... {안녕, 렌.} 이라고 쓰는 것이었다. 그에 렌스버리 녀석이 인상을 팍 찡그리는 것이었다. "내가 내 애칭을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엣, 내가 쓰는 거 아니야. 아리아씨가 쓰는 거라고.] 내가 황당해서 다급히 말하자 선애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내 손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애의 눈에는 아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어어, 야아... 정말 내가 쓰는게 아니라니까. 나는 펜만 쥐고 있을 뿐이고, 아리아씨가 내 손을 잡아서 자기가 움직이고 있다고.] 내가 막 다급하게 변명을 하고 있는데, 아리아가 다시 날 불렀다. [신애씨, 신애씨가 오른 손으로 잡고 있으니까 불편한데, 왼 손으로 잡아주실래요?] [예? 아, 예.]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쓰는게 아니라 내 손을 통해서 쓰는 것이라 그런지 그녀의 필체는 마치 어린애가 처음 글을 쓰는 것 마냥 삐뚤삐둘 어색 어색 거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리아양은 무척 기쁜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제는 나를 통하고 선애를 통해서 말을 전달하지 않고 직접 자신이 써서 전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내 도움이 좀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 이걸... 리아가 직접 쓰는 거라고?" {그래요.} "하, 하하... 하하하... 리아, 글씨 정말 못 쓴다." {어쩔 수 없잖아요. 신애씨 손을 잡고 쓰는 건데. 그래도 이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거라고요.} "후후후...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삐뚤 빼뚤..." 렌스버리 녀석이 아리아가 쓴다는 걸 믿은 후 부터 분위기가 왠지 가슴을 아릿아릿하게 만들자 선애가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던지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에 나는 내가 펜을 잡고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선애를 따라가려고 움직이다보니 마침 글씨를 쓰고 있던 펜을 쭈욱 잡아당기고 말았다. "뭐, 뭐야?" [신애씨?] 즐거운 분위기를 만끽하던 연인은 갑작스러운 방해를 받자 렌스버리 녀석은 인상을 찡그렸고 아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렌스버리의 목소리를 들은 선애가 나를 돌아보았기에 나는 뻘쭘해져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죄송해요. 선애를 따라 가려다가 그만...] 내 목소리는 당연히 안 들렸으니 렌스버리는 선애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야, 네 언니가 뭐라고 하냐?" "절 따라오려고 그랬대요. 날 왜 따라와?" [왜 따라가다니? 당연히 널 보호하려고 그러지. 요즘 그 엘리엇 놈이 심상치 않은데 어떻게 너 혼자 보내냐?] "아..." 내 말에 선애가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애 또한 얼마 전 그 엘리엇 녀석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 혼자 돌아다니다가 마주치는 건 별로 내키는 일이 아니었을 거다. "뭐냐, 무슨 일이야?" 내 말은 못 듣고 선애는 제대로 된 설명이 없자 렌스버리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끼어들었고 그에 아리아가 여전히 펜을 쥔 내 손을 움직였다. {선애씨 혼자 보내기 불안하대요.} 그 글을 본 렌스버리가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 얘가 무슨 어린 애냐?" {렌, 언니 입장에서 걱정 되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렇게 써 주는 아리아에게 나는 미안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죄송한데요, 저 선애를 따라 가볼께요.] [그러세요.] 아리아가 순순히 내 손을 놓자 나는 얼른 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선애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인 펜을 바라보던 렌스버리가 선애를 불렀다. "이봐." "예?" "지금 네 언니 네 옆에 있냐?" "아, 예." 선애가 날 힐끔 바라보며 대답하자 렌스버리가 펜을 들어 선애쪽으로 내밀었다. "네 언니에게 물어볼 게 있으니까 펜 좀 잡으라고 그래라." 그에 나는 어리둥절해졌지만 순순히 그에게 다가가 펜을 잡았다. 내가 잡음으로 인하여 펜이 허공에 뜨자 렌스버리는 자기가 잡았던 손을 놓고는 펜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그러니까 네 동생을 혼자 두는게 불안하다는 거지? 그래서 쫓아다니는 거 아냐?" 그의 질문에 나는 종이를 잡고 그 위에 답을 썼다. {그렇죠.} "그럼 만약에 동생을 보호할 뭔가가 있다면 굳이 네가 쫓아다닐 필요는 없는 거지?" '엥... 그게 그렇게 되나?' 하지만 아무리 울 꼬맹이를 보호할 뭔가가 있다 해도 혼자 있다면 그래도 불안할 거 같았다. 그렇지않아도 소피나 로어는 렌스버리 녀석 때문에 떼어놓고 다니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아무런 대답도 안 쓰자 렌스버리 녀석은 무언을 긍정이라고 생각 하려는지 난 대답도 안 했는지 혼자 납득하는 것이었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뭐가 그렇단 말이야?' 내가 당황해서 바라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렌스버리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올리더니 허공에서 한번 휘이 저어주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그의 손에는 웬 목걸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 무지 아까운 거긴 하지만... 하는 수 없지." 그러며 선애를 향해 휙 그 목걸이를 던지는 것이었다. 얼결에 선애가 받아서 들어 보이는데 그것은 가느다란 은색의 줄에 물방울 모양의 은색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펜던트는 진주색 비스무리 하기는 했지만 좀 다르기도 하고, 또 펜던트는 진주라기 보다는 겉 면이 유리알 같기도 하고... 내가 목걸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아리아가 반갑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이야, 저거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저거 렌의 피로 만든 거예요.] [에엑... 목걸이를 피로 만들었다구요?] 아리아의 말에 내가 놀라 목소리를 높이자 선애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렌스버리에게로 돌아갔다. "에... 저... 이, 이걸 피로 만드셨어요?" 목걸이를 어떻게 피로 만들수 있었을지 황당하기만 하다. 그러나 렌스버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실수로 피가 조금 났는데, 버리기는 아까워서..." [저, 저게 무슨 소리래요?] 아리아에게 묻자 아리아가 살포시 웃으며 설명해준다. [저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가 렌의 피예요.] [헉... 드래곤이라서 피 색이 틀린가봐요. 피 색이 은색이에요?] [호호호... 아니에요. 드래곤이라도 피는 붉어요. 단지 저건 렌의 피가 가지고 있는 마나를 가공하여 형상화 시켰기 때문에 은색이 된 거예요.] [그, 그런 겁니까?]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다. "그거 마법을 두개 가공해 놓은 거니까 도움이 될 거야. '실드', 하고 '힐링' 마법. 실드는 특별히 신경 써서 5클래스의 마법은 물론 물리력까지 막을 수 있는 거니까, 그 거면 든든한 보호막이 되겠지?" [오오~~] 사실 마법 용어는 잘 몰라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드가 뭔지는 안다. 얼마 전 렌스버리 녀석이 공격 마법을 펼칠때 토냐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펼친 방어 마법이 실드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힐링은 치유 마법이 아니던가 말이다. 선애가 감탄스러운 시선으로 목걸이를 바라보자 렌스버리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뭔가 위험이 닥치면 '실드'라고 외치면 방어막이 형성될 거고, 다치면 '힐링'이라고 하면 될 거다. 시동어만 외치면 거기에 저장된 마나가 줄어들때까지는 마법이 발현되니까. 아아, 마나가 다 고갈되어도 자기가 저절로 외부 마나를 끌여들여 충전하게 해놨으니 넌 신경 안 써도 돼." 왠지 '자동충전 방식의 고성능 mp3~'라고 광고라도 하는 것만 같다. "자, 그럼 다 해결 된 거지? 그럼 잘 가." 렌스버리가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선애에게 손을 휘휘 저어보이며 펜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아리아와 대화를 하고 싶은 표정이다. 그에 선애는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헤죽 웃어주더니 목에 목걸이를 걸고 몸을 휘익 돌려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목걸이를 걸었다고 어디 마음이 진정된단 말인가? 그리하여 선애와 떨어져 초조함을 가진 채 손만 아리아씨에게 맡겨놓고 계속 사방만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내 눈에, 아랫쪽 갑판 위로 선애가 걸어가는데 그 옆으로 그랜트 녀석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으엑, 저 놈은 또 왜 울 꼬맹이에게...] 그 모습에 놀래 다가가려던 나는 또 아까와 같이 글을 쓰던 아리아를 방해하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야, 이번에는 또 왜 그래?" 그에 렌스버리 녀석이 짜증난다는 듯 물어왔지만, 나는 그에 대답해줄 여력이 없었다. [어라라... 저 놈이 정말...] [저런, 저런... 신애씨.] 아리아가 잡지만 않았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선애 옆으로 달려갔을 거다. 렌스버리는 두 유령에게 대답이 없자 혼자 이유를 찾으려는 듯 두리번 거리다가 아랫쪽 갑판에 선애와 그랜트 녀석이 서 있는 걸 발견했는지 요상한 웃음을 흘렸다. "으흐흐흐... 너 노처녀지?" [엑? 그건 또 무슨 말씀.] [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렌스버리 녀석의 말에 두 유령이 항의를 하다가 곧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녀석에게 전달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펜과 종이를 들었다. {렌,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말은 실례라구요.} {아리아, 렌스버리님, 저 노처녀 아니예요!} 아리아의 뒤를 이어 내가 한 문장을 사납게 휘갈겨 쓰자 렌스버리 녀석이 묘하게 웃는다. "아니, 노처녀가 아니면 왜 동생의 연애를 방해하려고 그렇게 날뛰는 거지?" {연애라니요, 연애라니요오~!! 설사 연애라고 해도 저 놈에게는 못 줍니다. 차라리 다른 놈에게 주면 줬지 저 얼음덩어리에게 보냈다가 동생에게 무슨 고생을 시키려구...} "어라? 그럼 다른 녀석이 있단 말이야? 그럼 지금 양다리?" {양다리는 무슨 얼어죽을 양다리 입니까? 울 꼬맹이는 지금 연애 할 마음도 없다고요!} "그으래? 동생도 노처녀로 늙게 하려고?" {무슨 소리십니까? 제 동생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결혼하고 싶으면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서 갈 능력있는 애라구요. 그리고 저 노처녀 아니라니까요!} {렌, 자꾸 그렇게 실례되는 말을 할 거예요?} 그날 저녁, 나는 렌스버리 녀석과 아리아에게 풀려나 선애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자 선애에게 아주 진지하게 물어봤다. [선애야, 너 설마 저 그랜트 녀석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뭐? 갑자기 웬 뜬금 없는 소리야?" 황당하다는 듯 날 바라보는 선애에게 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이 언니는 저 놈은 안된다구 봐. 차라리 저 놈보다는 벨타이거를 추천한다. 그 놈은 네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잖니. 저 녀석은 네가 소화시키기 힘들다고 본다. 저 놈이 너에게 푸욱 빠져서 너 없으면 못 산다구 한다면 몰라도.] "뭐야, 언니도 저 엘리엇 놈 화가 되어가는 거야?" [아니, 얼마 전에도 그러고 저 놈이 자꾸 너에게 관심이 있는 것 처럼 보여서 말이지... 아까도 둘이 이야기 하데?] "아이고, 언니가 무슨 조선시대 여자야? 둘이서 이야기 했다고 연애한다고 생각하게? 그저 렌스버리에 대해서 물어보던데 뭘." [그래? 그런 거야?] "아, 그럼 뭐가 더 있길 바래?" [아니 뭐... 그래도 저 놈은 소화시키기 힘들 거 같아. 생각해보니 저 놈 은근히 네 이상형 아니냐? 완전히 엘리트잖아. 좋은 배경에 머리도 좋은 거 같고, 얼굴도 그럭저럭...] "이상형이라고 결혼하고 싶어하냐? 나는... 으음... 내가 사랑하는 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는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음, 그건 나도 동감이다.] 제 28화 그렇게 여러가지 일들을 겪는 와중에 배는 드디어 달마티아해를 지나 서대륙에 도착했다. 서대륙에서도 유일하게 아벤티노 대륙과 무역을 하는 진나라의 국제 항구도시인 광진에 도착한 것은 한 밤중이었다. 그리하여 사실 우리 일행은 도착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들이 꿈 나라를 한창 여행하고 있는 그 시각, 난데없이 누군가가 선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선애양, 호프만님, 소피님!!" '뭔 일이야?' 별 일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일행을 완전히 깨우려는 듯 강하게 선실 문을 두드리는데데 일행들 이름까지 부르는 통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선애의 어깨를 흔들었다. [선애야, 일어나봐. 누가 왔다.] "아씨... 누구야?" 내가 아니라 해도 선실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충 깨어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소피는 진작에 일어나 등불을 키우고 있었고 토냐도 인상을 찡그리며 손으로 얼굴을 쓸고 있었다. "아... 무슨 일이래?" "글쎄요. 우선 알아보겠습니다." 잠옷 위에 대충 가운을 걸친 소피가 대답을 하고는 선실 문의 잠금쇠를 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한밤중에 사람들을 다 깨운 선원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밤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제노비아님께서 여러분께 서대륙의 무역항에 도착했다고 알려드리라 하셔서요. 지금 여러분을 항구에까지 태워다 드릴 보트를 마련하고 있으니 준비하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이 밤중에 말입니까?" "제네비아님께서 여러분이 무척 급박해 하신다고 말씀하시던데요?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항구에 도착하게 해드리라고..." '허, 엘리엇 녀석이?' 그 녀석이 우리 일행을 한시라도 빨리 우리 일행을 이 배에서, 아니 정확히는 선애를 그랜트 녀석에게서 떼어놓고 싶어 안달인 모양이다. '헹, 이놈아 너만 그런 줄 아냐? 나도 환영이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들은 그 한밤중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짐을 챙겨서 - 사실 대부분의 짐을 잃어버린 상황이라 별로 챙길 것도 없었긴 했다. - 그 배에서 내려야 했다. 그리고는 밤중이라 인적이 끊어진 텅 빈 항구 거리에 덩그라니 놓이게 되었다. "뭐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일행이라는 이유로 얼결에 같이 끌려 오게된 렌스버리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선애를 돌아보자 선애가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하하... 그게 말이죠..." 그러나 웬일인지 렌스버리는 선애가 채 변명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손을 휘휘 저어 말을 끊는 것이었다. "아아, 됐다, 됐어. 말 안해도 대충 알겠다." 이 드래곤 녀석이 처음에 만났을때는 무지 속 좁고 이기적이고 까탈스럽고 등등... 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최근에 그런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좀 부드러워 졌다고나 할까,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그 동안 대화가 끊어졌던 연인과 다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그런 건가?' 뭐, 우리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여기 있지 말고 우선 여관이라도 찾지요? 밤 새도록 여기 있을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로어의 제안에 우리는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그래도 어두컴컴한 항구에서 그나마 불빛이 보이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행이 조금만 그 곳을 벗어나자 불이 켜진 거리가 보였다. 환하게 켜지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흘러 나오는 모습은 우리가 살았던 아벤티도 대륙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그 불이 흘러나오는 건물 모양새라던지, 그 건물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말소리를 들으니 확실히 다른 곳이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 가게 간판들의 글씨도 확실히 다른 글씨였다. 대략 한자와 비슷했는데, 한자를 도장 글씨로 써 놓은 것만 같았다. 그래봤자 나는 뜻은 다 알아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술집이야. 지나가.] 아벤티노 대륙에서 보던 사람들보다 약간 키가 작고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얼핏 보면 정말 동양인과 비슷하게 생겨 있었다. "선애, 고향에 온 기분이 어때?" 그런 사람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토냐가 묻자 선애가 피식 웃었다. "토냐, 여기는 제가 살던 곳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조금도 고향에 온 거 같지 않아요. 단지 제가 살던 곳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있는 다른 나라... 라고 생각되어서 조금 신기할 뿐인 걸요." "그으래? 아, 저 사람들 보니 확실히 우리가 서대륙에 온 거 같은 기분이다. 음... 서대륙 이라서 그런지 공기 냄새도 다른 거 같아." 토냐가 깊숙하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말하자 렌스버리가 뚱~ 하니 대답했다. "난 술 냄새에 음식 냄새만 나는구만..." "아.하.하.하..." 뻘쭘한 토냐에게 나머지 일행은 안됐다는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와, 와, 누나, 저것 좀 봐. 저기에 아벤티노 공통어가 써 있어!" 로어가 가리킨 술집 간판을 보니 확실히 이 세계의 글자인 한자 비스무리한 글 옆에 아벤티노 공통어로 술집이라고 써 있는게 보였다. 그걸 보니 과연 아벤티노 대륙과 무역하는 국제 무역항 도시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골목을 지나자 술집 거리보다는 좀 더 불빛이 약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불을 밝혀놓은 거리가 나왔다. 이번 거리는 확실히 여관 거리였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대부분의 여관 간판에는 이 곳 언어는 물론이거니와 아벤티노 대륙 공통어로 여관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한밤중이라 입구에는 불을 밝혀 있었지만 여관들은 모두 굳건히 문을 닫고 있었다. 그 중 제법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여관을 고른 우리는 굳게 닫힌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쾅, 쾅, 쾅~~! 잠시 후, 안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잠시만 기다리세요.'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귀에는 한국말로 잠시만 기다리라는 소리로 들렸지만, 억양이 틀리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로 들린 모양이다. "뭐라는 거야?" 선애가 나에게 작게 물어오자 나는 기꺼이 대답해줬다. [잠시만 기다리래.]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덜커덩 덜커덩 하는 빗장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예, 무슨... 아아, 뭘 도와드릴까요?" 상체만 빼꼼이 내민 검은 머리를 가진 청년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말을 끊더니 다시 물어온다. 그러나 대충 보아하니 앞의 부분은 이쪽 세계 말이고 뒷쪽 부분은 아벤티노 대륙 공통어인 거 같았다. 일행들의 얼굴이 밝아진 거 보니 말이다. 다행이 이 여관에는 아벤티노 대륙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오늘 밤 머무르려고 하는데 방 있습니까?" 로어가 일행의 대표로 나서서 묻자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활짝 열어 우리를 들어오게 해줬다. "물론 있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건물의 모양이 아벤티노 대륙과 달라서 혹시 여관이 좌식이 아닐까 걱정 했는데, 다행이 여기도 입식이었는지 침대가 있었다. 늦은 밤이라 다른 건 주문 할 엄두도 내지 못한 일행들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냥 침대에 쓰러져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간단하게 씻은 일행은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그 곳도 1층은 식당이었고 2층은 여관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관 건물이 ㅁ 자 형으로 되어 있어 가운데가 뻐엉 뚫려 있었는데 그 곳은 작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여관 건물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가 있는 곳 1층만 식당이었고 나머지는 다 숙박용 방이 있었다. 뒷쪽에 있는 건물을 후원이라고 하는데 그 곳은 항상 소란스럽고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식당과 거리가 멀고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식당 바로 윗층에 있는 방 보다 가격이 더 높았다. 우리야 한 밤중에 곧바로 들어오느라 후원에 있는 방을 사용하지 못하고 급한대로 가장 가까운 식당 바로 윗층방을 사용했지만 말이다. 이건 우리가 아침을 먹기 위하여 아랫층으로 내려오자 우리를 본 종업원이 와서 이야기 해준 것이었다. 그는 어젯밤 우리를 이 여관 안으로 들여줬던 총각이었는데, 어젯밤에는 대충 봐서 20대 초반 이라고 생각 했는데 오늘 보니 약간 앳된 것이 18세 혹은 19세 정도로 되어 보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그는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머리를 양 갈래로 따서 앞쪽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7, 80년대의 여학생들이 하는 머리 스타일 형식으로 말이다. 소년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실제로 봐서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들여다 봤는데 나중에 보니 이 곳의 많은 남자들이 그런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길면 땋아 내렸고 짧으면 그냥 묶었는데, 어린 애들은 양 갈래의 머리를 애용했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하나로 묶거나 따아 내렸다. 만약 이마 윗부분을 깨끗이 밀었다면 옛 중국인 청나라 시대의 변발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밝은 빛이 비치니 과연 아벤티노 대륙 사람과 틀린 외모들이 확연히 들어났다. 쌍꺼플이 없이 양 옆으로 찟어지고 눈꼬리가 윗쪽으로 치켜 올라간 눈에 아담한 사이즈의 이목구비, 그리고 약간 작은 체격들... 아벤티노 대륙에서는 175 에서 185 정도의 크기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이 곳에서는 170에서 180 정도의 키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화려하게 반짝이는 은발머리의 미남인 렌스버리는 확연히 눈에 튀었다. 뭐, 로어나 토냐의 밝은 금발머리도 튀는 거였지만 워낙 렌스버리가 튀어서 그의 외모에 가려질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가 식당으로 내려가자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한번씩 힐끗 힐끗 쳐다보는 통에 무지 신경 쓰였다. 선애는 드워프의 마을에서 받았던 그 집요한 시선들이 생각이 났는지 무척이나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도 그 지경인데 정작 당사자인 렌스버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식사를 하고 있어 나는 드래곤 종족은 신경이 참 굵은 종족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 뭐, 나중에 아리아에게 들어보니 워낙 저런 외모로 나돌아다니는 바람에 하도 시선을 많이 받아 이제는 무지 익숙해서 태연한 거라고 한다. 그래서 일행은 식당에서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하기 보다는 차라리 방에 가서 의논하자고 결의하고 먹는 속도를 빨리하고 있는데, 왠 남자 하나가 친절한 미소를 띄우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제법 매끄러운 억양을 구사하며 인사하는 남자에게 나머지 일행은 힐끔 눈길만 주고 로어가 일어나서 그를 맞이했다. "누구십니까?" 그런데 로어의 목소리에 좀 날이 서 있었던지 남자가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아하하하... 그렇게 경계하실 것은 없습니다.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혹시 여러분은 이 광진에 처음 오신 것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아, 예. 그렇다면 혹시 이 도시를 안내해주고 통역을 해줄 사람이 필요 없으신가 해서 와봤습니다. 만약 필요하시다면 제가 저렴한 가격으로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통역과 이 곳에 대한 정보에 능통한 사람을 구하려고 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다가오니 왠지 의심이 든다. 스스로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디 정말 수상한 사람이 얼굴에 '나 수상하오' 라고 써붙이고 다닌단 말인가? 그래 일행들이 뭐라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자 남자가 좀 더 신뢰를 주고 싶었던지 지나가던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자자, 제가 의심스러운가보신데, 이 종업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는 이 곳에서 외 대륙에서 건너오신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소정의 수고비를 받는 사람이랍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일을 해와서 이 근처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어때, 내 말이 틀렸나?" 그의 말에 지나가다 잡힌 종업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대인은 그런 일을 하시지요." "거 보십시오. 이렇게 이 종업원까지 제 신원을 보증하지 않습니까?" 남자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일행들을 돌아보자 일행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종업원이 말이야 그렇게 했는데 어째 우리나 그 남자나 시선을 안 마주치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면서 대답했던 것이다. 게다가 좀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식당의 한쪽 구석에 있는 카운터에서 자꾸 이쪽을 주시하는 중년 남자의 시선이었다. 일행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얼른 안본 척 시선을 돌리지만, 힐끔 힐끔 불안한 표정으로 곁눈질 하는 폼이 뭔가 수상했다. 그래 저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 그때, 렌스버리가 나서는 거였다. "뭐, 그렇다면 한번 맡겨보는게 어때? 어차피 통역하는 사람 구하려고 했었잖아?" 렌스버리가 그렇게 나서자 일행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나서서 의견을 내놓았는데 반대할 만큼 간 큰 사람이 우리 일행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뭔 사단이 나더라도 렌스버리 녀석이 자기 입으로 제안한 거였으니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받아들인 거였데...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라고 그 남자가 장담한 지 한시간 후에 일행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인적이 드문 공터에 서 있었는데, 우리 주위에는 여러가지 가벼운(?) 무기를 든 건장한 청년 20여명이 물샐 틈 없이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탁월 어쩌구 저쩌구 떠든 그 남자는 예의 그 친절한 미소를 띄운 채 건장한 청년들 틈새에 끼어 있었다. "하, 탁월한 선택? 후회를 않는다고?" 그 기가막힌 상황에 토냐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자, 그 친절한 남자가 친절하게 대답해온다. "물론입니다. 죽는데 어떻게 후회를 하겠습니까?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거... 말 되는데?" 그 친절한 남자의 말에 렌스버리가 쿡쿡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에 친절한 남자가 더욱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입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렌스버리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안 죽으면 네가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거네?" 아주 당당한 렌스버리의 태도에 친절한 남자의 얼굴이 살풋 굳었다. 그리고는 우리 일행들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을 따라 일행쪽으로 나도 시선을 돌리니, 어이없고 기가막히고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어디에도 두려움이나 공포따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일행들 사이에는 4서클의 마법사인 토냐에 건달 10여명 정도는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고단자 소피, 나, 그리고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까지 있는 것이다. 이런 일행들이 검사나 기사도 아닌 보통 건달 20명을 앞에 두고 두려워 할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렌스버리라, 우리 일행들은 렌스버리가 모두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십니까? 아주 자신만만 하시군요." 친절한 미소를 걷어 치운 남자의 말에 렌스버리가 대답해줬다. "지금이라도 무릎꿇고 싹싹 빌면 용서해주도록 하지." 그에 친절한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어쩝니까? 저희는 무릎 꿇고 싹싹 빈다 해도 용서해줄 마음이 없는데..." 그의 말에 렌스버리는 태평한 얼굴로 우리 일행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렇다는데? 그럼 알아서 처리해." "예에?" 렌스버리의 황당한 말에 일행은 한 뜻 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뭐 이런 무책임한 드래곤이 다 있는가 말이다. "아, 아니... 렌스버리님...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렌스버리님이 오자고 해서 온 거거든요?" 선애의 기가막히다는 말에 렌스버리가 눈을 가늘게 해서 쓰윽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니, 그게... 렌스버리님이 시키는 대로 해서 이렇게 된 건데..." "그런데?" 내가 예전에 읽은 소설에서 누군가가 말한 대목이 생각이 난다. 말싸움 할때 가장 얄미운 놈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래서?' 와 '그런데?'만 반복하는 놈이라고 했다. 그런 놈들은 아무리 해도 이길수가 없다나 어쨌다나... 지금 보니 저 드래곤 녀석이 따악 그짝이다. 게다가 우리 중 가장 힘 있는 놈이 바로 저 드래곤 놈이니 어쩌겠는가? "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선애가 당하는게 안되어 보였는지 토냐가 애써 선애를 뒤로 끌어당기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렌스버리 놈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 내 너희들을 위하여 이 주변에 차단막을 쳤다. 한 놈도 도망 못 갈거고 여기서 일어나는 소음은 밖으로 절대로 안 나갈테니 마음 놓고 패도록 해. 아아, 내가 이런 것 까지 해주다니 난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착한 놈 다 죽었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내 바로 옆에는 아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간신히 아주 가아아아안~~ 신히 그 말을 다시 목구멍 밑으로 내려보냈다. '착한 놈 다 죽었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내 바로 옆에는 아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간신히 아주 가아아아안~~ 신히 그 말을 다시 목구멍 밑으로 내려보냈다. 요 근래 좀 바뀌었다 생각 했더니만, 그건 단지 내 착각이었나보다. "다 죽여!!" 내가 렌스버리 녀석에게 잠시 시선을 주는 사이, 그 친절한 남자의 외침과 함께 주위를 둘러 싼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자 토냐가 먼저 손을 들더니 소피에게 외친다. "소피, 넌 저 놈 잡아.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 할게. 선애, 로어, 그 나머지의 나머지는 너희들이 담당해." "넵!" 토냐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피가 외치며 앞으로 뛰쳐 나갔다. '어이, 너 선애 경호 담당 아니었냐?' 소피의 재빠른 행동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선애를 바라봤다. [목걸이 잘 가지고 있지? 여차하면 실드 마법을 써.] "/응? 으응./" 선애의 대답을 들은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로어와 선애 앞을 막아섰다. 로어는 그래도 제 딴에 선애를 보호한답시고 선애 옆을 지키고 있었지만, 별 도움이 안될 거라 여기고 있었기에 난 로어와 선애를 같이 보호할 생각이었다. 제일 첫타는 토냐의 마법이었다. "위드!" 그녀의 마법이 떨어지자마자 허공에 허옇고 길다란 줄이 하나 생기더니만 그 줄로부터 여러 가지가 뻗어나와 얽히고 섥혀 마침내 커다란 거미줄 모양을 한 망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우리에게 달려들던 녀석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우와아악~!!" "이, 이게 뭐야?" "끈적끈적해.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그녀의 마법으로 형성된 거미줄로 인하여 대여섯명의 발이 묶이자 그녀는 지체없이 다음 마법 시동어를 읇었다. "일렉트릭 스파크!!" 그러자 해적선 위에서 한번 본 적이 있던, 내 주먹만한 전기 덩어리가 십여개가 생겨 적들을 향해 날아기 시작했다. "왁, 왁, 왁!" "으갸갸갸~~!" "뭐, 뭐야 이거?" 그 전기 덩어리가 날아가자 비명을 내지르며 피하는 녀석들부터 한 방 맞아서 찌릿찌릿함을 호소하는 녀석, 도망가다 자기 동료와 뒤엉켜 넘어지는 녀석 등등 반응이 참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소피는 그러한 녀석들을 요리조리 피해서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라 멍청하게 서 있는 그 일명 '친절한 남자'에게 차근 차근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얼결에 우리쪽으로 오는 녀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어차피 놈들은 나란 존재를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기 때문에 정신없는 녀석들을 한대 먹여 쓰러뜨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치사한 렌스버리 녀석은 선애와 로어의 뒷쪽에 서서 상황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 중 가장 키가 큰 녀석이라서 그런지 그 뒷쪽에 서 있어도 상황을 구경하는데 하등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수, 술법?)" "(헉, 이게 술법이야?)" "(술법사다, 술법사야!)" "(술법사였어!)" 그렇게 일련의 상황을 겪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녀석들 중 누군가가 소리치자 그 소리가 주위 녀석들에게 퍼져나가 녀석들은 더욱 더 패닉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자기들이 소리치고 자기들이 놀라는 모습이 엄청 황당스러웠다. [술법사라고?] "/뭐?/" 내 중얼거림을 이해 못한 선애가 되묻기에 나는 친절히 설명해줬다. [아니, 저 녀석들이 술법사라고 떠드는데? 술법사가 뭐지?] 내 말에 이번에는 아리아가 설명해 준다. [아아, 술법사란... 그러니까 아벤티노 대륙식으로 말하면 마법사예요. 전에 말했었지요? 아벤테노 대륙에 마법이 있듯이 여기에는 술법이라는 것이 있다고요. 그걸 다루는 사람을 술법사라고 하지요. 아니면 법사나 도사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쪽은 도를 전하는 사람들이라...] [도... 요?] [아, 예. 도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 아리아의 설명에 나는 허허허... 하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설마 이 세계에 '도를 아십니까?'파 사람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그러는 동안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어버렸다. 토냐를 술법사로 생각한 사람들이 패닉 상태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몽땅 전의를 상실해버렸고 그러는 동안 소피는 예의 그 '친절한 남자'를 우리 앞으로 끌고올 수 있었다. 소피에게 몇 대 맞았는지 눈덩이 부분이 시뻘겋게 부풀어 있었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거기에다 배를 감싸쥐고 낑낑대는 폼이 복부도 좀 맞은 모양이다. "이 녀석 이제 어떻게 할까요?" 소피의 말에 토냐가 생각에 잠긴 어조로 중얼거린다. "벼락을 몇대 맞춰줄까? 찌릿찌릿하게 말야. 그래야 정신을 좀 차리지." 토냐의 말을 들었는지 녀석이 흠칫 흠칫 거린다. "아, 불로 구워줄 수도 있는데..." 선애까지 덩달아 거들자 녀석의 얼굴이 시퍼렇게 되었다. "음, 저도 사실 스트레스가 덜 풀렸는데요. 좀 더 패도 될까요?" 소피의 말에 녀석은 하얗게 질려서 털푸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무지 가련한 표정으로 우리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 저기요... 살려주시면 안될까요?" 그의 말에 토냐가 시선을 들더니 우리 주위에 전의를 상실한 채 얌전히 바닥에 무릎꿇고 업드려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어디보자... 하나, 둘, 셋... 어이고 스무명씩이나 끌고와서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거야? 저 녀석들도 가만 두면 안되겠지?" 그런데 어째 녀석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토냐의 말은 협박성이 짙었는데 말이다. 그래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 거리던 일행들은 곧 이어 아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들은 토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여긴 아벤티노 대륙이 아니니까 말이다. 일행들이 사용하는 아벤티노 대륙 공통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 '친절한 남자'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토냐의 말을 고스란히 들은 친절한 남자는 헬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동료들을 둘러보더니 그대로 우리 앞에 엎드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며칠동안 굶주리다 못해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저희들이 지은 죄 크고 무겁다는 것을 아오나 부디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저들은 집에 나이드신 노모와 처자식들이 있는 몸입니다. 저들이 죽으면 집에서 기다리는 그들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부디 그들을 봐서라도..." 어째 아주 많~~ 이 들어본 레파토리다. '굶주려? 하아, 볼이 탱탱한데다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데...' 그 친절한 남자가 우리 앞에 업드려 애원을 하자 뒤에서 업드린 녀석들이 뭔가를 눈치 챘는지 갑자기 마구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하, 나원 참... 이렇게 뻔한 말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었군.' 나는 옆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토냐를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부잣집 따님으로 곱게 곱게 키워져서 그런지 그녀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그대로 믿은 모양이다. "우리... 그냥 용서해 주자. 며칠 굶다 못해 그런 거라잖아. 거기다 집에는 나이드신 어머니와 처자식까지..." 그녀의 물기 젖은 말에 앞에서 업드린 놈이 더욱 더 큰 소리로 울어댔고 덩달아 뒤의 녀석들 울음소리까지 커졌다. 그에 소피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뒤 선애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설마 선애님도 저 말을 믿는 건 아니시겠죠?'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 꼬맹이도... "좀... 불쌍한 놈들이었잖아?" 란다. '에구, 이 녀석도 곱게 곱게 자란 녀석이었지?' 선애의 말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야, 며칠 굶은 녀석들이 볼은 탱탱하고 옷은 깨끗하냐? 보통 며칠 굶을 정도로 돈이 없으면 옷도 꽤죄죄 하고 볼은 쏘옥 들어가고 눈은 퀭~ 하고 몸은 비리비리 말라서 톡 치면 툭 하고 쓰러질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 말에 선애가 아차 싶었는지 녀석들을 찬찬히 살펴보다 중얼거렸다. "그럼... 그 말이 거짓말이란 말야?" 선애의 중얼거림에 소파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주 빤히 보이는 거짓말 아닙니까?" "에엥?" 선애와 소피의 말에 토냐까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거짓말이라니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뉘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아~~" 거짓말이 슬슬 들통나는 분위기자 친절 남자가 잽싸게 소리를 높여 항변했지만, 우리 일행 중 누구도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렌스버리 녀석이 드디어 나섰다. "아, 정말 재미있게 구경 좀 하려고 했더니 시끄러워서 더는 못 봐주겠군. 조용히 하지 못해?" 하여간 정말 얄미운 놈이다. 렌스버리 녀석이 박력있게 말하며 감추어 두었던 기운들을 은근히 개방하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녀석들이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빠른 놈들이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렌스버리가 우리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야, 이 놈들 어떻게 할 꺼야? 잽싸게 처리하고 가자고. 죽일 거면 빨리 죽여. 뒷처리는 해줄 테니." 렌스버리의 말에 친절 남자의 얼굴이 다시 푸르딩딩 해졌다. 렌스버리의 말에 소피가 토냐와 선애를 돌아보았다. "그냥 다 죽여버릴까요?" 소피의 말에 친절 남자의 표정에 절망이 어리는데, 바로 그 순간 그 동안 가만히 있던 로어가 끼어들었다.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뭔데?" "뭔데요?" 토냐와 선애의 말에 로어가 의견을 내놓았다. "예정대로 저 녀석을 그대로 길잡이로 쓰는게 어떨까요?" 그의 말에 제일 먼저 토냐가 반응을 보였다. 비록 그 반응이 기가막히다는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야, 너 지금 저 놈이 일행들 이끌고 우리를 덥치려 한 걸 보고서도 그 말이 나오냐?" 사실 선애와 소피도 토냐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단지 렌스버리만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을 뿐. "물론 나도 알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겠어? 어차피 우리는 이 도시의 정보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고. 이 사람 지금 보니 뒷골목에 줄을 잡고 있는 사람 같은데, 그렇다면 정보는 빠삭할테고 말이야. 게다가..." "게다가?" "우리에게 크게 당했으니 언감생심 다시는 덤빌 생각은 못할 거 아니야?" 로어의 말을 듣고보니 왠지 그럴듯 했다. 그래 토냐와 선애가 은근히 로어의 의견에 마음이 기우는 듯 해보였는데, 소피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로어의 질문에 소피는 녀석과 뒷쪽에 있는 놈들을 쭈욱 바라본 후 대답했다. "녀석은 우리의 실력을 대충 짐작하니까 다음에 틈을 봐서 우리가 감당치 못할 더 많은 인원들을 데리고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 그럴수도 있겠다." 토냐의 말에 소피가 힘을 주어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냥 처리해 버리죠?" 소피의 말에 토냐와 선애가 그럴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 놈의 하등 도움이 안되는 드래곤 녀석이 쏘옥 끼어들었다. "야, 그냥 저 놈 말대로 해라." 여기서 저 놈이란 로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로어의 의견대로 착한 남자를 우리 일행의 길잡이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예? 아니 갑자기 왜?" 선애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드래곤 녀석이 히죽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재미있을 거 같아서." '헉... 이, 이놈이이이~~!' 놈의 말에 벙 찐 일행이 놈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렌스버리는 마음에 찔리는 구석이 요만큼도 없는지 낯 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우리 일행 앞에 엎드러진 착한 남자를 발끝으로 톡톡 차는 것이었다. "야, 야, 일어나서 저 떨거지들 다 치워라." 그리고는 일행을 향해서도 한 마디 했다. "뭐해? 안 바뻐?" 자기 의견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리라 의심 한 점 없이 믿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우리 일행중에 녀석의 의견을 반대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이, 이런..." 로어는 그래도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기쁜 표정을 보이지 않았고, 소피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선애와 토냐에게 속삭였다. "최대한 저 놈을 감시하겠습니다. 두 분도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착한 남자를 어거지로 길잡이로 삼은 일행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옷가게였다. 해적선이 날아갈때 짐들도 같이 몽땅 날아가는 바람에 우리가 아벤티노 대륙에서 챙겨왔던 옷이고 소지품이고 몽땅 다 같이 날아갔다. 하지만 차마 그 원인 제공자인 드래곤 놈에게 물어내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없었던 우리는 얌전히 알아서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 천만 다행이도 돈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울 꼬맹이가 이 곳에서 계약할때 지불할 대금과 여행 경비, 그리고 비상금까지 넉넉하게 챙기는 바람에 꽤 많은 양의 돈을 가지고 오게 되자 일반 지갑에 넣어 가지고 오는 것으로는 꽤나 불안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대금은 서대륙이나 아벤티노 대륙이나 똑같이 귀중품으로 취급하는 금궤를 사용하기 때문에 무게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마법 가방이었다. 전에 어느 어느 후작가네 집을 방문하여 많은 대가를 받아 올때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던 마법 베낭을 떠올리고는 새로 장만한 것이다. 그 마법 베낭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 안에 많은 재물이 들어있는 터라 그 재물을 꺼내 따로 보관하고 마법 베낭을 가지고 오느니 새로 하나 사는게 좋겠다 해서 사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 베낭은 안에 들어있는 많은 재물과 함께 정보 길드 금고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벨타이거네 집에 맡겨 놓을수도 있었지만, 왠지 불안해서 말이다. 정보 길드에 맡겨 놓으면 혹여 잃어버렸을 경우 그들이 고스란히 물어줄테니 우리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물론, 보관료는 꽁짜였다. 저번에 넘겨줬던 그 어느어느 후작가네 가보의 값어치가 그만큼 대단했던 모양이다. 하여간 그리하여 새로 구입한 것은, 마법 베낭에 비하면 꽤나 작은 가방으로, 덕분에 들어가는 양이 훨씬 적긴 했지만, 그래도 선애가 가지고 갈 돈은 다 들어가고도 약간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그 가방의 좋은 점은 배에 차고 다닐 수 있다는 거였고, 주인으로 인식한 자가 아닌 다른 자가 만지면 알람 마법이 발동하는, 분실 방어 마법이 걸려 있다는 점이 여행할때 가지고 다니기에 아주 따악 좋았다. 그리하여 밤에는 풀러 놓지만, 낮에는 항상 옷 속에다 차고 다녔는데, 그게 해적들의 함정에 빠지고 드래곤을 만났을때에도 옷 속에 차고 있어서 다른 건 다 잃어버렸어도 그 마법 가방과 그 안의 돈들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거였다. 우리로써는 정말 불행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얄미운 엘리엇 녀석이 우리를 한시라도 빨리 배에서 내쫓으며 동정조로 약간의 돈을 건네주는 걸 그의 면전에서 아주 정중하게 거절하고는 배 값이라고 그 보다 좀 더 많은 돈을 건네줘 녀석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항구에 내려져서 당당히 여관을 찾아 간 거였고, 지금도 이렇게 옷가게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던 거였다. "(어서 오십시오.)" 동양인 외모의 중년 여인이 진 나라 말로 인사를 해왔지만, 우리에게는 유창한 통역관이 있는 한 걱정할 건 없었다. 거기에 덤으로 말은 전달하지 못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도 둘이나 있고 말이다. 진 나라의 의상과 바이런국의 의상을 비교했을때 가장 큰 차이점을 들으라고 한다면, 바이런국의 의상은 매듭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옷을 여밀때 사용하는 단추라던가 끈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옷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단추도 화려하게 보석 달린 것을 쉽게 볼 수 있었고, 묶는 끈도 레이스를 이용하는 것 부터 시작하여 수를 놓는다든가 작은 장식을 다는 던가 하는데다 예쁘게 묶는 방식도 수십가지였다. 그러나 이 진나라의 의상은 그러한 매듭을 안으로 감추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추 보다는 끈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것도 아주 가늘고 얇은 끈을 애용했다. 거기다가 치마 매듭이나 윗 옷의 매듭은 모두 허리쪽에 있어서 그런지 허리에는 넓은 천으로 띠를 둘러 마지막으로 옷차림을 정리하는게 이 나라의 방식이었다. 그 띠의 매듭도 안으로 집어 넣었기 때문에 겉에서 볼때는 옷의 매듭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 그 위에 자켓 처럼 겉옷을 걸칠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덕분에 처음 입을때는 무지 복잡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완전히 다 차려입은 복장은 제법 깔끔하고 단아한 디자인을 하고 있어 나는 바이런 국의 의상보다 이 나라의 의상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옷의 디자인이 복잡하고 화려하지 않아 작은 장식품을 걸쳐도 그 장식품이 화악 살아나는 디자인이었다. 왜 옷 자체가 화려하다면 그에 걸맞는 화려하고 큰 장식품이 아닌 이상 걸쳐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지 않는가 말이다. 바이런국 의상이 좀 그런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귀족들의 파티복이지만 말이다. "오, 이거 입는 방식이 좀 어려워도 입으니가 꽤나 편한데? 꽈악 조여서 몸매를 드러내는 속옷도 없고 말이야. 나 이 나라의 의상에 반할 거 같아. 돌아갈때 좀 많이 사가지고 갈까봐." 여직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토냐가 무지 만족한 표정으로 말하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이쪽이 마음에 드는 거 같아요." "뭐, 선애 너야 고향과 가까우니 이쪽 의상에 더욱 친근감을 느끼겠지." 일행은 비싸더라도 이 나라의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는 비단옷으로 마련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부터 우리가 찾아가서 거래를 하는 상단은 하류의 - 친절한 남자의 이름이다. 처음 이 이름을 듣고 선애랑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 정보에 의하면 이 도시에는 물론이거니와 이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아주 거대한 상단이라고 하니, 옷차림부터 신경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기분 좋게 쇼핑을 하고 모두들 짐을 한 보다리씩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오자 낯 익은 여관 종업원과 카운터의 중년 남자의 눈이 뚱그래지는 것이었다. "어, 어떻게..." "저, 저기... 손님들, 괜찮으십니까?" 이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류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방을 좀 옮겼으면 하는데... 조용하고 좀 더 넓은 곳으로 말이오. 며칠 머물 듯 하니 그리 아시고." 그런 그들에게 별 다른 말 없이 로어가 주문을 하자 카운터의 중년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별채의 방을 내어드리도록 하죠. 몇인실로 드릴까요?" "3인실과 2인실로 주시오." "저기... 지금 별채에 3인실은 없고 4인실만 있는데... 어쩌시겠습니까?" "아, 그럼 그냥 4인실하고 2인실로 주시오." "알겠습니다. 이 놈아, 뭘 하고 거기 서 있느냐? 어서 손님들을 별채 홍동의 이층방으로 안내해 드리거라. 아, 짐꾼들을 불러 드릴까요? 아니면 시중 들 애들이라도..." "괜찮소. 짐은 우리가 가지고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 녀석을 따라가십시오." 주인의 지시에 따라 아까 우리 일행을 보고 놀란, 낯 익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가는데 우리의 모습이 모퉁이를 지나 사라질때까지 카운터의 중년 남자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쪽이 욕실이고 이건 옷장입니다. 목욕시중을 원하신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단순한 목욕 시중부터 여러가지 맛사지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별채에 있는 방이 한 단계 수준 높은 곳이라고 하더니만, 확실히 그랬다. 우선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본관과 떨어진 덕분에 조용했고, 방도 훨씬 넓었다. 전날 잤던 방에는 침대와 간단히 씻을 이 세계에 세면대가 가구의 전부였는데 여기는 탁자와 안락하게 보이는 의자도 네개나 있었다. 그런데 탁자는 단순한 나무로 만든 탁자였는데 의자가 대나무로 짜서 만들어진 거였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대나무로 만든 가구의 모습에 신기하게 느껴진 나는 의자로 다가가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는데, 다른 일행들은 신경도 안 쓴채 열심히 방 안 이곳 저곳을 설명 하고 다니는 종업원을 잡았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로어의 말에 갑자기 잡혀서 놀란 표정이던 종업원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아, 예. 손님께서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뭐든 대답해 드려야죠." "당신, 아까 아침에 우리에게 다가온 남자 알지? 하류라고..." 그러나 종업원은 아무것도 몰라요~~ 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리는 것이었다. "그, 글쎄요... 제가 아침에 바뻐서 손님들께서 나가시는 것을 못 본지라..."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척 하는 연기가 수준급이었지만, 이미 녀석이 하류를 알고 있다는 티를 낸 후였기에 일행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봐요. 알고 있잖아요." "아이쿠, 손님도 참... 제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데 저희 여관을 오셨다고 어떻게 다 기억하겠습니까?" 끝까지 발뺌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먹힐 거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행은 다음 작전을 쓰기로 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안되겠군요. 제가 손을 쓸까요? 시간만 좀 주신다면 술술 불게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입니다. 마침 도구도 사 왔겠다..." 그러면서 그녀가 꺼내든 것은 내 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소도였다. 일명 은장도. 옷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몇개 살겸, 이 세계의 보석류를 구경할 겸 간 가게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여성들이 몸 속에 숨겨 다닐수 있게끔 만들어져 작았고, 예쁜 세공장식까지 되어 있어 소피가 한 눈에 반해 선애가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소도를 꺼내 날카로운 날을 밖으로 드러내며 소피가 씨익 웃자 종업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이 종업원도 만만치는 않았다. "저, 저기... 제가 나가지 않으면 주인 어르신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거기다가 제가 조금이라도 다친 걸 보시면 관아에 신고하실 걸요?" 그의 항의에 이번에는 토냐가 나섰다. "오호호호~ 그건 걱정하지 마. 웬만한 상처는 치료해 줄테니까." 선애도 한 마디 거든다. "아, 그러지 마시구요, 토냐가 직접 손을 쓰는 게 어떨까요? 겉으로는 티도 안 나게 토냐의 특기 마법을 날려주면 좋잖아요. 치료도 따로 해줄 필요도 없고." 토냐의 특기 마법이란 바로 전기 공격이었다. "그거 좋네요. 그렇게 하시죠?" 소피가 선애의 말을 거들고 나서자 토냐가 웃었다. "오호호호~~ 그럴까? 그럼 사양 않고..." 그러며 토냐가 슬며시 오른 손을 들어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손에서 파지직 하는 파르스름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시작하지 뭐. 단 한방 맞고 기절하면 안되잖아?" 토냐의 파지직 하는 스파크 튀는 손을 바라보던 종업원의 얼굴이 다급해지며 우리 일행들을 쭈우욱 바라본다. "저기, 소, 손님들... 이러시면, 정말 이러시면 안됩니다." "괜찮아, 괜찮아. 티 안나게 만져줄테니까." 나는 토냐가 협박에 저렇게 조예가 깊은 줄 오늘 처음 알았다. 화려한 분위기의 미인인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주변에 꽃들이 만개한 것처럼 빛이 나는게 아니라 마치 공포 영화에 위험이 다가오는 장면을 보는 것 처럼 으스스해질 지경이었다. 그때 로어가 슬며시 끼어든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예의 상 한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우리랑 같이 나간 하류라는 사람,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저, 저기요... 소, 손님..." 공포에 질려 헬쓱한데도 말 안하고 어물거리는 종업원을 보자 선애가 인상을 찡그렸다. "로어, 모른다잖아요. 모른다고 하는데 왜 자꾸 물어봐요?" "아아, 그렇군요. 이거 제가 실례한 건가요? 그럼, 누나..." 로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종업원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닙니다, 압니다. 알아요!" "어머나, 안다고요? 아까는 모른다고 했잖아요?" 소피의 살짝 비꼬는 말에 종업원이 바람소리가 일 정도로 고개를 휘휘 내젔는다. "아닙니다. 아까는 어떤 분인지 기억을 못했지만, 지금은 기억이 났습니다." "자자, 너무 겁먹지 말고 차근차근 말해봐요.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잔뜩 긴장한 종업원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툭 두드리며 위로하듯 말하는 로어를 종업원은 무지 원망스러움과 불신의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로어거 씨익 웃어보이자 체념의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는... 이 거리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거리에 있는 여관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그렇게 시작한 그 종업원의 말에 의하면 하류는 이 여관 거리를 장악하고 있는 건달패 조직 중에서 중간 보스 정도 된다고 한다. 이 거리에 있는 여관들에게 보호세 명목으로 일정 금액 이상을 받고, 정말 다른 구역이나 아님 관청에 고발하지 못할 고민거리를 해결해주는 그 조직은 제법 구성력이 탄탄하다고 한다. 하기야, 아까 쇼핑을 하러 거리에 나갈때 봤지만, 이 거리는 제법 번화한 곳이었다. 여관들은 모두 제법 커다란 규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거리는 깨끗했고 사람들은 많이 왕래하는, 상인들 말로 물 좋은 곳이었다. 이런 곳을 구역으로 가지고 있다니 아마 그 조직 재정도 넉넉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 조직이 그렇게 이 거리의 가게에서 보호세로 생활 했으면 좋으련만, 다른 여러가지 사업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중 하나가 뭔가 새로운 상업이나 거래를 터 보고자 다른 지방, 다른 나라,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들을 뒤통수 치는 것이었다. 상업을 위하여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니 당연히 그들의 능력으로 가능한 한 넉넉한 돈을 가지고 왔을테고, 이 도시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테니 사라진다 해도 난리가 날 일은 아닐테고 말이다. 인물이나 체격이 받쳐준다면 사람을 노예로 팔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먹잇감이란 말인가? 이 도시는 아벤티노 대륙과 유일하게 무역을 하는 국제 항구 도시였으니 새로운 상업을 위하여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하류가 속한 조직은 그런 사람들이 많이 찾는 깨끗한 여관 거리를 자신들의 구역으로 가지고 있고 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곳은 여관 거리에서 중간 수준의 거리라고 했다. 이 도시에 뭔가 연줄이 있거나 아니면 돈 많은 사람들은 여기보다 한 단계 높은 고급 수준의 여관으로 간다는 거였다. 어느 정도 돈 있는 사람이 바로 이 거리를 자주 애용했고, 그런 사람들이 그 조직에서 눈독 들이기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우선 일행도 여자 셋에 남자 둘로 단촐한데다 이 곳은 처음 온 것처럼 어리버리 했지, 그런데 옷은 제법 괜찮은 차림이라 돈은 있을 것 같지, 거기에 일행들은 모두 젊고 외모도 뛰어난 사람이 있어 노예로 팔면 짭짤할 것 같지, 따악 녀석들이 일등 요리로 생각할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만 해도 벌써 몇번째 강도와 조우하는 거라 - 당하지는 않고 오히려 우리가 강도를 털었지만 - 나는 선애와 내가 강도를 자주 만나는 아주 강력한 악운이라도 낀게 아닌가 걱정 했었는데, 이렇게 따지고 보니 정말 강도를 자주 만날 수 밖에 없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전에는 당연히 선애와 나 둘이서 다녔으니, 강도들이 보기에는 돈 좀 있어보이는 젊은 여자가 혼자 다니는 것으로 보일 게 아닌가 말이다. '그거 참...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이 호위병을 많이 데리고 다니는 건가? 아예 건달들이 좋은 먹잇감으로 생각지도 못하게 말이야.' 하여간, 이 거리에 있는 여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공생(?) 관계에 있는 조직이 그러한 사업을 한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손님에게 그 조직 사람들이 접근하는 걸 봐도 차마 경고를 해주거나 막아주질 못한다는 거다. 만약 그랬다가 뒷 감당을 어찌 하겠는가? 아마 이 거리에서 금방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 한 아무도 돕지 않을거라고 했다. 오늘 아침, 아벤티노 대륙어를 유창하게 하는 관계로 아벤티노 대륙에서 온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하류가 우리 일행에게 접근하기에 여관 주인이나 - 그 카운터의 중년 남자가 바로 여관 주인이란다. - 자신은 우리도 또 녀석들에게 먹힐 걸로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 탈 없이, 그것도 쇼핑까지 신나게 하고 돌아왔으니 무지 놀랄 수 밖에... 종업원은 모든 걸 남김없이 털어놓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는지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손님들은 아무래도 이 도시에 연줄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무사히 돌아 오셨지요." 종업원의 말에 일행은 그냥 피식 웃으며 종업원이 그렇게 여기게 놔두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꼬옥 초를 치는 존재가 있었으니... "인맥은 무슨..." 픽 하고 웃으며 중얼거리는 놈의 이름은 렌스버리라 하는 아주 아주 치사한 드래곤이었다. 그런 드래곤의 중얼거림에 일행은 기가막힌 표정이었고, 종업원의 눈은 놀라움으로 커졌다. "예에? 인맥이 없으시다구요? 그럼 하다못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신 겁니까?" 종업원의 놀란 외침에 토냐가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고, 그 동작 하나만 가지고도 이 눈치가 빠른 종업원은 자신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아챘다. "헉... 그, 그러면 어떻게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었던 겁니까? 분명 여러분들을 데리고 간 그... 가 함정으로 유인했을텐데... 설마, 그 함정을 해결하고 오셨던 겁니까?" 이번에도 우리 일행은 아무도 대답을 안 했지만, 종업원은 일행들의 얼굴을 보고 이번에도 자신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세상에나... 손님들은 뭔가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계셨나 보군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종업원은 뭔가 떠오른 듯 토냐를 바라봤다. "아... 하긴... 술법사님이 함께 계셨으니... 잠깐,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어떻게 했지요?"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종업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 이야기가 길어졌기에 일행 모두는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 외치다시피 일행을 바라보며 묻자 일행은 서로 시선을 마주 보다가 로어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아아... 그래도 해치지는 않았습니다. 모두 고이 보내주고 하류씨... 는 다시 우리들의 안내자이자 통역자로 채용을..." 로어는 말을 하다가 종업원의 얼굴을 보고 말 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것이 종업원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떠억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 침이 슬슬 새어 나올 것 같았는데 그는 그것도 모를 정도로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런 주제에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제정신이 아니야~' 라는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 미치셨군요... 미치셨어요... 으아아아~~ 그들을 그냥 냅두다니이이~~" 중얼 거리다가 나중에는 고함을 지르며 종업원은 그대로 밖으로 뛰쳐 나갔다. "(쥔장님~~ 쥔장니이이임~~~)" 그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일행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 보았다. "왜... 저러는 거야?" 잠시 뒤 토냐가 황당하다는 기색을 지우지 않고 물어보자 소피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가 그들을 때려 눕혔으니 저 자의 생각으로는 분명 보복하러 올 것이 뻔한데 이 여관에서 받아줬으니 아마 그 보복이 자기네에게도 행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소피는 소매 안으로 쓰윽 뭔가를 집어 넣는 것이었다. 그걸 발견한 사람은 나 뿐이 아니었는지 로어가 물었다. "어라... 소피, 그건 뭔가요? 아까 꺼내서 들고 있던 것 같던데..." "아아, 약간의 보상금이랄까요? 우리가 묻는 말에 친절히 대답해줬으니 대가를 좀 줘야 할 거 같아서." 역시 정보를 이용해 돈을 버는 정보 길드 사람 다웠다. "자, 그럼 우리는 좀 쉬고 저녁 먹으러 가자." 토냐가 한 고비 넘겼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우며 말했지만 소피는 반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우리가 거이 내팽개치다시피 방치해 두었던 짐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음? 소피 뭐 해요? 짐 정리하게요?" 평소 소피가 선애의 시중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선애 또한 모든 일을 소피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하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소피가 짐을 챙기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돕기 위해 다가가는데 소피가 고개를 저어보이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 짐을 챙겨 두려고요." "엥? 왜?" 그녀의 대답에 침대에 벌렁 누워있던 토냐가 의아했는지 시선만 돌려 묻는데 그 동안 방 한쪽 구석에 가만히 자리를 잡고 있던 렌스버리가 말했다. "오는군." '누가?' 뜬금 없이 던져진 말이지만 나는 잽싸게 귀를 기울였다. 자기만 알고 치사하고 남을 기가막히게 하는 드래곤이었지만, 그래도 허튼 소리는 안 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쿵쿵 거리며 급히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헤에, 한 두명이 아닌데?' 그리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방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열어 제치고 뛰어들어 왔던 것이다. "헉, 헉, 당, 당신들~!!" 밑에서부터 뛰어 올라왔던지 사람들의 맨 앞에 있던 카운터의 중년 남자, 아니 이 여관 주인은 붉어진 얼굴로 헥헥 거리면서도 다급히 우리를 불렀다. 그에 일행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여관 주인 양반은 다급히 숨을 고르더니만 다짜고짜 외쳤다. "당장 나가시오!" "에엑?" 갑작스러운 여관 주인의 방문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던 토냐가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자 주인이 발을 쾅쾅 굴렀다. "에엑이 아니요 에엑이! 누굴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거요? 당장 나가요, 당장 나갓!!" "자자, 어서 나가죠." 그리고 주인의 말에 이어 소피가 어느새 챙긴 짐들을 각각의 주인들에게 나누어 주더니 자신 몫의 짐을 처억 둘러매며 말하는 것이었다. "소, 소피?"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이들은 그 놈들이 자신들에게까지 보복의 손길이 미칠까봐 두려워 하는 거예요. 이 곳에 우리 편은 아무도 없을테니 차라리 조용히 나가주는게 이들도 좋고 우리들도 좋은 거예요." 소피의 설명에 주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아시는구만. 내 긴말 하지 않을테니 어여어여 나가시오. 내 대신 방 값은 받지 않겠소." 별 일 없이 나가줄 거 같자 너무 좋아하는 주인장의 모습이 얄미웠다. 그래 선애를 부추겨 나가지 않고 버텨볼까... 했지만, 주인장의 뒤에 우르르 몰려 있는 장정들을 보고 그냥 포기했다. 아무래도 일행들이 안 나가겠다고 버티면 끌어서라도 내쫓을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난동을 부려봤자 이 곳 관아 사람들이 달려오면 불리한 건 우리쪽이었기 때문에 여관 주인은 아주 당당할 수 있었던 거고, 소피는 그걸 알고 미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나보다. 그리하여 주인장의 밀어냄과 소피의 이끌림에 의하여 일행들은 우르르 여관을 나서자 여관 종업원이 우리 뒤에서 문을 타악 닫는 것이었다. 별 거 아닌거 같은데도 되게 기분 나빴다. 그런데 그거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쫘아악 퍼져 있었는지 우리가 그 여관을 나서서 옆에 있는 여관을 보자마자 밖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고 있던 그 여관 종업원이 흠칫 하고 놀라더니만 잽싸게 여관 안으로 들어가 문을 타악 닫는 것이었다. 덕분에 일행들의 분위기는 급속하게 가라앉았고 그들의 시선은 모두 이번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렌스버리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 얼굴 가죽이 두터운 드래곤 녀석은 오히려 '뭘 봐?' 하는 시선으로 일행의 시선들을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힘 없는 일행들은 녀석에게 대들 용기 또한 없었기에 그냥 한숨 한 번 내쉬며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쩌지?" 토냐의 물음에 소피가 대답했다. "우선 머물 곳을 마련해야지요. 아마 이 거리에서 우리를 받아 줄 여관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겁니다." "그럼 거기로 가지요? 아까 종업원이 말한, 이 거리보다 한 단계 수준이 높은 고급 여관들이 있는 곳 말입니다. 그 곳은 그 조직의 영향권이 아니니 아무래도 우리를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물론... 돈이 문제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로어가 선애를 힐끔 바라본다. 일행 중 무사히 돈을 보존한 이는 선애가 유일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짐들과 함께 고스란히 잃어버려 돈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선애에게 의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 가자고. 혹시 몰라 비상금을 꽤나 넉넉히 가지고 왔는데 다행이네." 그랬다. 계약금으로 지불할 금괴 말고도 비상금으로 금괴를 넉넉히 챙겨왔고 혹시 또 몰라서 보석까지 좀 챙겨 왔었던 것이다. 여기 물가는 잘 모르겠지만, 바이런 국의 고급 여관에서 특등실... 까지는 안 되고 1등실 에서 반년은 편안하게 먹고 자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한국식으로 치자면 별 다섯개짜리 호텔의 하루에 몇십만원 정도 하는 방에서 반년 정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 고급 여관이라고 해도 돈이 좀 아깝다는 것 뿐이지 돈이 없어서 두려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선애는 당당하게 가자고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음,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한다니까.' 제 29화 그렇게 당당하게 가자고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들은 당혹스러운 시선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도시 어딘가에 고급 여관 거리가 있다는 건 아는데 거기로 가는 길을 모르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지만, 주위에 주욱 늘어서 있는 여관들의 종업원들이 우리 일행을 마치 무서운 사람 보듯 피해버리니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이상한 눈초리로 힐끔힐끔 바라보며 피하는 바람에 물어보지 못했다. 한 녀석 잡고 두들겨 패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죄 없는 사람을 그럴수는 없는 일이라 일행은 재빨리 그 거리를 빠져나오기만 했다. 사실 대로를 따라가면 고급 여관 거리가 나오거나 아니면 그 곳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참 황당하게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인적이 없는 바닷가였다. 휘이잉~~ 때 맞춰 불어온 바닷 바람이 마치 이 곳까지 찾아온 우리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도,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보면 모르나? 바닷가군." 기가막혀 중얼거린 토냐의 말을 받은 건 정말 얄미운 렌스버리 녀석이었다. 정말 나에게 능력만 있었다면 저 비만 도마뱀 녀석의 껍질을 홀라당 벗겨서 구워먹었을텐데. 드래곤 고기가 맛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이번 일의 원흉인 주제에 여전히 뻔뻔스러운 낯짝이다. 일행이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 와서 당혹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전~ 혀 잘못이 없는 양 '제대로 못해?' 라는 시선으로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일행은 아예 이 녀석에게 도움을 청할 엄두는 내지도 않고 저희들끼리 의견을 묻는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하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 쫓아가지 않았더라면..." 별 뾰족한 수가 없었던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갑자기 로어가 한숨을 쉬며 깊숙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 무척이나 큰 책임을 느끼고 있던 모양이다. "됐어. 누가 너보고 뭐라고 하던?" 토냐의 시큰둥한 말 뒤로 선애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로어가 안 갔으면 나라도 가서 물었을텐데요." 그도 그럴것이, 일행들이 그 중급 여관 거리를 벗어나 고급 여관 거리로 가는 방향을 물어보기 위해 사람을 찾고 있을때, 때마침 골목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어린 아이를 발견했던 것이다. 대충 보아하니 14, 15 정도? 그런데 일행을 보고 도망치기는 커녕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기에 로어는 마침 잘 되었다 싶었던지 그 애에게 다가갔다. "저기, 말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혹시 아벤티노 대륙어를 모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조금은 알아 듣는 모양인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뭐, 좀 지저분하고 허름한 옷을 입기는 했지만, 이런 애들일 수록 적은 돈을 쥐어주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로어 또한 그걸 알고 있었는지 아이를 향해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품에 손을 집어 넣더니만 자그마한 구리 동전 하나를 꺼냈다. 아까 낮에 쇼핑을 갔을때 금괴 하나를 처분하고 남은 잔돈들 중에서 낮은 단위의 돈들을 일행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이 곳의 돈도 아벤티노 대륙의 단위처럼 구리, 은, 금 식으로 사용했는데 재미있게도 구리는 동전이고 은과 금은 동전이 아니라 마치 통통하게 뭉뚱그려 만든 종이배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은과 금의 화폐는 작아서 내 검지 두 마디 정도 크기가 있는 반면 큼직해서 내 손바닥 반 정도의 크기를 차지하는 것도 있었다. 큰 은화 한 냥은 작은 은화 10냥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게다가 구리 동전은 백원 정도의 크기였는데 옛 버스 통화권인 토큰처럼 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뚤려 있었고 그 구멍을 기준으로 상하 좌우에 이 나라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지금 로어가 꺼낸 바로 그것이 말이다. 로어의 손에서 구리 동전을 발견한 아이의 눈이 반짝 거렸다. 이 아이에게도 돈의 위력이 발휘된 것이다. "자, 네가 대답만 잘 하면 이것 말고도 하나 더 주마." 아이의 눈빛이 달라진 걸 눈치 챈 로어가 동전을 왼 손으로 옮겨 아이의 눈 앞에 드러낸 채 오른손으로 동전을 더 꺼내기 위하여 품 속으로 집어 넣었더니 이 아이가 뻔뻔하게도 손을 쓰윽 내미는 것이었다. "호오, 말하기 전에 우선 하나 달라는 거냐?" 로어의 말에 아이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로어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마도 아이의 영악스러운 태도에 기가 막힌 모양이다. [헤에... 어째 그리운 태도로군. 그렇지 않냐?] 내가 킥킥 웃으며 선애에게 말을 걸자 선애 녀석 또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 녀석, 일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무슨 소리야?" 선애의 낮은 중얼거림을 들은 토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 왔을때였다. "자, 가죠." 활기찬 로어의 말이 들려와 토냐는 대답 들을 생각을 못하고 그쪽으로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이번 일을 쉽게 해결한 거 같아 무척이나 뿌듯한지 로어의 걸음은 힘찼다. 구리 동전 두개의 위력으로 그 아이를 우리의 안내자로 삼은 모양이다. 일행의 앞에 서서 걸어가며 가끔씩 뒤를 돌아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하는 폼이 확실히 안내자의 폼이었다. 게다가 대로를 벗어나 허름해 보이는 골목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은 집이 부요하지 못해 이러한 뒷 골목에서 살아 이쪽 지리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래, 생각만...' 골목 골목을 몇번이나 꺾어서 따라가던 와중 우리 앞에 서서 걸어가던 아이의 모습이 앞에 있는 좁은 골목으로 다시 한번 꺾어는 것이었다. 그 뒤를 따르던 일행은 '또냐...' 하는 표정으로 부지런히 그 아이의 뒤를 쫓아 꺾어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방금 전 우리 앞에서 골목 안으로 들어갔던 그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헉!" "뭐야, 그 애 어디 갔어?" "이런 황당한 일이..." 제일 먼저 로어가 좁은 골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아이의 모습을 찾았고, 일행 또한 사방으로 흩어져 두리번 두리번 기웃 기웃 거리며 아이를 찾았지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와 아리아씨가 마음 먹고 주변을 샅샅이 뒤져본다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좁은 골목에 선애를 두고 떨어질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토냐와 소피가 좀 믿을만 하기는 했지만, 렌스버리라는 아주 극악한 변수가 버티고 있는 한 완전히 안심을 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속은... 건가?" 토냐의 말에 소피가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애...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었네요... 혹시, 우리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을까요?" "어... 하, 하지만, 그 애는 제 말에 고개도 끄덕이고 돈도 받아 들었는데요?" "물론 그렇기는 한데요... 뜻은 몰라도 대충 때려 맞춰서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대답은, 아마 눈치가 좀 빠른 아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걸요?" 얼빠진 로어의 눈치를 조심조심 살피며 하는 소피의 말에 일행은 너나 할것 없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소피의 말인 즉슨, 우리는 아벤티노 대륙어는 요만큼도 모르는 아이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그 아이가 아벤티노 대륙어를 모른다는 건 확실했다. 고급 여관 골목까지 데려다 주면 동전 한 닢을 더 준다고 했는데 하나만 가지고 튄 걸 보면 우리가 하나를 더 준다는 건 눈치로 알아챘다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곳은 어딘지 알아듣지 못한 것일테니 말이다. 그러니 대충 아무데나 가다가 기회를 봐서 자기만 튄 거겠지. 하지만 덕분에 그런 애에게 걸린 우리 일행만 난처해졌다. 튀려면 차라리 대로 가까운 곳에다 던져놓고 튈 것이지 골목 골목 깊숙히 들어온 데다가 던져놓고 튀는 바람에 일행들은 모두 방향 감각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피 또한 기억하려고 애쓴 모양이지만, 계속 꺾이고 꺾이고 꺾이고 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는 수 없죠. 우선 여기를 벗어나는 걸 최종 과제로 삼지요? 뭐,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테니까..." 렌스버리에게는 요만큼의 도움도 바라지 못한 일행은 선애의 제안으로 우선 그 자리를 떴다. 아직 어두운 시기가 아니라 일행들이 골목 골목을 돌자 가끔가다 운이 좋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일행들의 운은 거기까지였을 뿐, 그러한 골목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벤티노 대륙어를 조금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하는 말은 내가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문제는 일행들이 원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손짓 발짓으로 대로로 가는 길을 묻자 고개를 갸웃 갸웃 하면서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켜 주는데, 그게 정말 대로로 가는 길인지 아니면 귀찮아서 아무 곳이나 가리키는 건지 헷갈렸다. 기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아무리 가도 가도 비슷비슷한 골목만이 나올 뿐 우리가 원하는 고급 여관 거리는 커녕 대로 비슷한 곳도 안 나오는 거였다. 정말 한참 헤매었다. 나중에 아이라가 차라리 자기가 공중에 떠서 길을 찾아보겠다고 할 즈음 - 진작 그렇게 부탁 하고 싶었지만, 렌스버리 녀석이 나중에 뭔 눈길을 줄가 무서워 그런 부탁을 할 생각도 못했다. - 일행은 간신히 간신히 그 미로같은 골목길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찾던 잘 뚫린 대로가 아니라 어느 한적한 바닷가 였지만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일행이 한적한 바닷가로 오게 된 경로였다. 덕분에 일행들은 간신히 골목길을 벗어났다는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엉뚱한 곳으로 나왔다는 낭패감에 힘이 쭈욱 빠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언제까지 날 여기에 세워둘 거냐?" 풀이 죽은 로어에게 일행들이 모두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지 렌스버리가 얄밉게 말을 톡 내던졌다. 분위기 깨는 놈의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험악해졌지만, 그 눈빛을 렌스버리 녀석에게 보일 만큼 간 큰 사람이 없었기에 생긴 것 만큼이나 빨리 사라졌다.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릅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변화가 쪽에서 밝은 불을 켤테니 말입니다. 저희는 이제 느긋하게 밝은 빛이 보이는 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소피의 말에 토냐가 나섰다. "아무래도 불빛은 아래 보다는 윗쪽이 더 잘 보이겠지? 내가 올라갔다 올게." 그렇게 말한 토냐는 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잽싸게 주문을 외우더니 하늘로 떠오르는 거였다. 그래 일행은 토냐가 어서 불빛을 보고 내려와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당혹스럽게도 얼마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그냥 다시 내려오는 거였다. "누, 누나?" 가장 기대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던 로어가 제일 먼저 토냐를 부르자 그녀가 난처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돌아봤다. "아니, 저~ 쪽에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지." 그러면서 그녀가 가리키는 쪽은 지대가 푹 꺼져 있어 가까이 가지 않는 한 아랫쪽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밑에서도 우리가 서 있는 언덕이 슬쩍 튀어 나온 형태로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또한 토냐의 말을 듣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았지 그 전까지는 누가 있는지 몰랐으니 말이다. 인적이 없는 곳을 찾는 연인들에게는 따악 좋을 것 같은 장소였지만, 오늘 저녁에는 연인이 아니라 한 떼의 남정네들이 그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기... 내려가서 물어봐야 하나?" 토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일행 셋은 - 렌스버리 놈 빼고 -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를 벗어나죠." "딴 사람을 찾는 게 좋겠습니다." "바쁜 것 같으니 방해하지 말자구요." 로어, 소피, 선애의 말에 토냐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여길 벗어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도 그럴것이 우리의 아랫쪽에서는 다섯의 남자를 삼십여명쯤 되어 보이는 녀석들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황당하고도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자기 멋대로인 어. 떤 존재 때문에 이 곳에 도착 하자마자 엉뚱한 일에 휘말려 길거리로 내몰린 상황이었으니, 일행이 더 이상 다른 일에 휘말리지 않길 바라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 또한 정의의 용사거나 그 비스무리한 건 아니었으니 오히려 내가 앞장서서 일행을 이 곳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일행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 해도 그 지 멋대로인 존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일행은 그 존재가 뭔 짓을 저지르기 전에 빨리 자리를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행이 한 발 늦었던 모양이다. "어어어~~" 아랫쪽에 있는 일단의 무리를 방해하지 않고자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반갑지 않은 커다란 소음(?)과 함께 로어가 허공에 부웅~ 뜨는가 싶더니만 곧바로 저 아래에 있는 무리의 머리 위오 떨어지는 것이었다. "로어!" "로어씨!" [렌!] 당혹스러워 하는 토냐와 선애의 외침을 뚫고 들려온 아리아씨의 목소리에 나는 이번 일의 범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기시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일행 중 일을 벌일 존재는 단 한놈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이러언~ 어디 도마뱀 가죽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데 없나? 있으면 공짜로 몽땅 넘겨줄 용의가 있는데. 에휴... 불쌍한 로어.' 아닌게 아니라 로어는 선애가 기껏 생각해서 그의 재능을 좀 발휘해 보라고 데려 왔건만, 이 먼 곳까지 와서 재능 발휘는 커녕 애물단지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더니만, 그것도 모자라 저 렌스버리 놈의 문제 일으키는 것에 이용되고 있으니... 동정을 금치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로어를 쫓아 아래로 내려가는 토냐와 선애를 막지 못하고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우아아악~!!" 무게 때문인지 머리가 밑으로 향하자 두려움을 느낀 로어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음, 아무래도 느긋하게 갈 때가 아닌거 같은데?' 그러나 천만 다행스럽게도 일단의 무리 한 가운데, 좀 더 정확히는 삼십여명의 무리에게 둘러쌓인 다섯 남자의 머리위로 떨어지던 로어는 그들 중 키가 가장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잡아준 덕분에 땅 위로 곤두박질 치는 것만은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스럽게도 일단의 무리 한 가운데, 좀 더 정확히는 삼십여명의 무리에게 둘러쌓인 다섯 남자의 머리위로 떨어지던 로어는 그들 중 키가 가장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잡아준 덕분에 땅 위로 곤두박질 치는 것만은 면할 수가 있었다. '나이스 캐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로어 입장에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키가 큰 그 남자가 로어를 잡아준 건 사실이지만, 그게 로어가 거꾸로 떨어지며 마악 머리가 땅을 잡기 직전 로어의 발 한쪽을 잡아 챈 것이었다. 그것도 로어의 발목을 말이다. 덕분에 로어의 머리와 땅과의 거리는 내 손으로 한 뼘 정도였고, 그걸 본 로어의 얼굴은 피가 얼굴로 몰릴텐데도 무지 헬쓱해졌다. 그런 걸 보면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로어를 가볍게 여겨 도와주려고 했다기 보다는 바로 자기 코 앞에서 떨어지자 얼결에 잡은 것 같았다. 기실 그는 자기가 로어의 발을 잡았다는 것에 황당함을 느끼는 듯 곧바로 잡은 로어의 발을 놓아 버렸던 것이다. 꽈당~! "윽..." 그래도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테지만, 로어는 상당히 아팠던지 땅과 부딧힌 머리를 문지르며 어기적 몸을 일으켰다. 그 즈음 그들 무리가 있는 곳에 도착한 토냐는 바깥에서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을 부랴부랴 헤치고 들어가 로어를 부축했다. "괜찮아?" "아, 누나... 괜찮은 거 같아." "다행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그대로 떨어졌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걸요?" 그 뒤를 이어 달려온 소피가 토냐와 같이 로어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며 말했다. "다친데는 없는 거죠?" 선애의 말에 로어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난데없고 정신 사나운 소동에 다섯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긴장했다가 곧 그들이 다른 대륙에서 온, 학자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와 여자 셋인 걸 보고는 마음을 놓는 기색이었다. [그런데... 선애야... 드래곤 님이 안 보이신다.] 선애의 뒤를 졸래졸래 쫓아온 내가 문득 든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니 렌스버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였다. 아마 윗쪽에서 아예 내려오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래에서 볼때 윗쪽에 있는 사람이 몸을 살짝 숙이거나 조금만 뒤로 물러나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앗, 정말이네. 렌스버리님이 안 보이시는데요?" 선애의 말에 나머지 세 일행이 두리번 거리더니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안 계시는게 도와주는 거 아니냐?" 토냐가 작게 속삭이는 말에 소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게다가 안 보인다고 해도 걱정 되는 것도 아니구요." "그러게. 오히려 같이 있다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걱정만 되지. 방금 로어를 던진 것도 그분이잖아?" 이렇게 우리가 속닥거리는 사이,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도 저희들끼리 쑥덕 거리고 있었다. "/뭐야, 이 것들은?/" "/같이 잡아버릴까?/" "/하지만, 저쪽 대륙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우리 담당이 아니라구./" "/맞아, 하류 담당 아니야? 그 자식 성격이 드러워서 괜히 우리가 건드려다가 나중에 된통 당하면.../" "/음? 아, 그러고보니 하류 놈 오늘 아침에 물고기를 못 잡아가지구 심기가 불편하다고 하던데? 건드리지 말지? 까딱 잘못하다가 분풀이 당하면 어쩌려구?/" 그러한 속삭임들이 오가는 와중에 내 귀에 따악 포착된 단어가 있었으니, 그 이름 꿈에서도 잊지 못할 '하류'였다. [꼬맹아, 저 녀석들 그 하류놈 패거리인가봐.] 내 말에 선애의 고개가 휙 들려지더니 우리 일행을 둘러싼 녀석들을 향해 눈빛을 번뜩였다. "뭣이라? 저 놈들이 그 하류와 한 패거리라고?" 선애의 말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소피와 토냐가 거의 동시에 선애를 돌아보았다. "하류라고요?" "그 하류가 우리가 아는 그 하류야?" 토냐의 구체적인 질문에 선애가 나에게로 시선을 던졌고 나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 없는거 같아. 저 놈들이 말하길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들은 하류 담당인데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을 실패했대.] 내 말에 선애의 얼굴이 분노로 단단하게 굳어졌다. 꽈악 다물린 턱에서 빠드득 하는 이 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여관에서 그대로 쫓겨난 것에 어지간히도 화가 났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 놈에 대한 원한이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좋게 좋게 끝났으니 다행이었지, 안 좋았더라면 우리는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지도 못했을 거다. 선애의 반응에 확답을 얻은 토냐 또한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시선으로 놈들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저벅저벅하며 앞으로 나서는 거였다. "그으래, 네 놈들이 그 하류인지 뭔지하는 녀석과 같은 패거리라고?" 그러더니 치렁치렁한 소매까지 걷어 올리며 투지를 불태웠다. "누, 누나? 도대체 뭘 하려고?" 로어가 걱정 되는지 만류하려 했지만 토어는 들은체 만체 입 속으로 작게 읇조리더니 오른 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라이트닝 볼트!!" 비록 크기가 야구공만한 전기 공이긴 하지만 갯수가 척 보기에도 십여개였다. 그러한 전기 공들은 토냐의 분노를 받아서 그런지 작아도 강력해 보이는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며 놈들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정말 기가막히게도 놈들은 토냐의 주변에 전기 공이 파직거리며 생겨나는 걸 보자마자 우르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놈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좀 자존심 상하는 일일지 모르나 무척 현명한 선택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 막 분노의 대상을 발견하여 그 화를 좀 풀려고(?) 했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타는 분노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었다. "야! 이것들이 거기 안 서?" 토냐가 외쳤지만, 세상에 서란다고 서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토냐의 외침에 오히려 더욱 더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지는 놈들이었다. 라이트닝 볼트는 시전자가 방향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을 끝까지 쫓아가서 맞출 수 있는 공격 마법이었지만, 갯수가 십여개가 되다보니 토냐가 컨트롤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에 절반은 허공에서 그냥 사라져버리고 절반 정도만 겨우 발이 늦은 놈들을 맞춰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엇다. 그러나 따끔한 맛을 본 놈들은 도망친 놈들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숫자였다. 그에 더욱 더 분노한 토냐가 녀석들을 쫓아가며 주문을 외웠지만 몇 걸음 못가서 멈춰서야 했다. "누나, 누나아아~~ 안돼, 절대로 못 가. 가면 위험하단 말야!" 토냐가 그들을 쫓아가려고 하자마자 로어가 몸을 던져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토냐는 몇 걸음이나 앞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녀의 힘이 대단한 건지, 분노의 힘이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끝까지 주문을 완성시킨 그녀의 정신력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매직 미사일!" 그녀의 분노에 찬 외침에 비하여 나타난 매직 미사일은 채 열개도 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전에 라이트닝 볼트의 실패를 생각해서 일부러 숫자를 조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놈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기에 토냐는 기껏 만든 매직 미사일을 어디다 던질지 결정을 못하고 이만 부득부득 갈았다. 능력만 되었다면 매직 미사일을 수십, 수백개 정도 만들어 온 사방으로 뿌렸으면 좋겠지만, 토냐의 능력은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울 꼬맹이가 나섰다. "제가 오른쪽을 맡을게요, 토냐님은 왼쪽을 맡으세요." "그래, 네가 있었지? 좋았어!" 선애의 말이 끝나자마자 토냐는 씨익 웃으며 자신이 만든 매직 미사일을 왼쪽으로 날렸다. "/언니, 부탁할게!/" 그리고 곧바로 들려오는 선애의 작은 속삭임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나는 양 손을 뻗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허공에 불덩어리를 만드는 건 예전부터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공격마법처럼 사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약간 긴장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들을 해하려 하는게 아니라 좀 혼내주려는 것 뿐이라 화력 조절 때문에라도 더더욱 긴장 되었다. 곧바로 허공에서 갑자기 형성 된 다섯개의 불덩어리들이 내 의지를 따라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마법사가 만들어 던지는 파이어 볼처럼 둥근 공의 형태가 아니라 모닥불처럼 물방울 형태의 불이, 빠르게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그것도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며 날아가는 것이다. 이건 공격마법 같은 게 아니라 완전 어두운 밤 길가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장난 같은 도깨비 불이었다. 덕분에 구경으로나마 스트레스 좀 풀려고 했던 선애가 김이 팍 샜는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언니, 지금 뭐 해?/" [그, 그게... 처음이라서 그런지 잘 안되네. 정신이 조금만 흐트러지면 저 놈들이 지 멋대로... 아앗, 또 엉뚱한 데로 간다.] 선애에게 대답하느라 정신이 흐트러져 그렇지 않아도 비틀비틀 거리며 전진하던 불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려고 하는 거다. 그에 얼른 정신을 집중하여 진로를 바로 잡는데 선애가 다시 속삭였다. "/불덩어리를 그냥 던지면 안돼?/" [그래도 되면 진작에 그랬지. 땅에서 일으키는 거와는 달라서 허공에서 일으킨 불은 목표에 도달할때까지 계속 신경쓰지 않으면 그대로 꺼져. 우쒸, 불덩어리를 세개만 만들걸 그랬나? 너무 많이 만들어나봐.] "/그래봤자 다섯개인데... 그럼 땅에서 불이나 일으키지? 도망가는 거 방해나 하게./" 선애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면 몰라도 지금은 너무 멀고 범위가 넓어서 어려워.] 내 말에 뭔가를 생각하는지 잠시 텀을 둔 선애가 다시 물었다. "/언니, 지금 불의 장벽을 만드는게 어렵다고 한 거지?/" [그러라는 거 아니었어?] "/뭐어, 그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저 놈들 다 생포해서 뭘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지 스트레스 좀 풀어보자는 건데 불의 장벽까지 만들 필요 잇어? 그냥 중간 중간에 불기둥이나 하나씩 솟게 만들거나 폭발을 일으켜서 진로 방해 하거나 기겁하게 하는 정도.../" 선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허탈한 심정이 되어 맥이 탁 풀려버렸고, 그와 함께 정신도 흩어져 겨우겨우 유지시키며 날려보내던 다섯개의 불덩어리들도 피식~ 하며 꺼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큰 허탈감에 바져 그에 대해 별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불덩어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불안스레 바라보고 있던 선애가 난리였다. "/언니이~~ 뭐 하는 거야? 불이.../" 작게 속삭이던 중이라 큰 고함소리가 아니었지만 선애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어조였다. 허나, 평소라면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칠 선애의 당혹스러운 어조도 이때만큼은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그러는 선애에게 무지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어우 야~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좀 알려주지. 그럼 이 고생을 안해도 됐잖아.] 내 말에 선애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뭐야, 몰랐어?/" [내가 알았으면 자신없는 이 짓을 하고 있었겠냐?] 한숨을 내쉰 내가 지금이라도 불기둥을 솟아나게 하려고 시선을 돌리자 이미 늦었는지 도망치는 녀석들의 뒷모습이 까마득히 멀어져 있었다. [에엣, 뭐야? 벌써 저기까지 갔잖아?] 내 말에 선애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말했다. "/아까 그 도깨비 불들도 다 도망가기 전에 도착할 수나 있었을지 의문이었어./" [우쒸,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단 말이다.] "/알아, 알아./" 내가 기분이 상햇다는 티를 팍팍 내자 선애가 얼른 내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그러나 선애가 채 뭐라고 하기 전에 토냐의 화난 음성이 들려오는 거였다. "선애, 뭐 하는 거야? 놈들이 그냥 다 도망가버렸잖아?" 그에 선애는 날 한번 힐끔 보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궁,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 저를 보호하는 존재에게 제대로 의지를 전달하지 못한거 있죠? 그런데 저는 제대로 전달한 줄 알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지 뭐예요." "뭐어? 나 원..." 토냐는 선애의 변명에 기가막히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선애에게 뭐라 하기도 뭣했는지 입맛만 쩝쩝 다실 뿐이었다. 게다가 놈들은 이제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뭐, 드문드문 토냐의 마법에 당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놈들이 보이긴 했지만, 녀석들을 끌고와 심문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리 일행 중 이 나라의 말을 할 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을 들들 볶아 알아내고 싶은 정보도 없었기에 일행은 그쯤해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람들에게 신경이 미쳤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 선애의 말에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 토냐와 로어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단지 소피만이 힐긋 시선을 던졌는데, 아마도 소피는 복수심에 불타느라 바빴던 다른 일행들과는 달리 그 낯선 일행들을 쭈욱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연, 선애의 보디가드.' 그렇다고 그들이 수상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처음 봤던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던 거 같다.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침착한 시선을 보내오는 그들을 보자니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그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는 사이 로어가 상대방이 경계하지 않게끔 천천히 몇 발 앞으로 나서더니 아까 자신이 떨어질때 잡아줬던, 그 일행중 가장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까 잡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 제 말을 알아 들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인사는 드리고 싶습니다. 아까 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이 복잡했던 터라 이제서야 드리게 되었군요." 지금에야 이야기 하는 건데, 키가 큰 남자는 삿갓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꾸욱 다물린 입술과 약간 각이져 고집스럽고 강인해보이는 턱 밖에 안 보였다. 그런데 로어가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자 그 남자의 뒷쪽에 있던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슬며시 그의 옆으로 가서 작은 목소리로 뭐라뭐라 속삭이는 것이었다. 귀를 기울이니 로어가 말한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행이 그들 일행 중 아벤티노 대륙어를 익힌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키가 큰 관계로 살짝 몸을 기울여 옆사람의 말을 듣던 키 큰 남자가 알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쓰고 있던 삿갓을 벗었다. 그제야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과 가늘게 옆으로 찢어진 눈에 검은 눈동자, 산맥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만큼 높게 솟은 큰 코가 드러났다. 키와 덩치가 커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얼굴 전체적인 인상도 강해보이는 것이 '나 한가락 하는 무사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통역하러 나온 남자가 고개를 끄덕그덕 하더니 말을 꺼냈다. "도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니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하십니다." 아까는 얼굴을 계속 키 큰 남자에게로 향하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었는데, 로어에게 말하느라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굉장히 잘 생긴 미남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본 남자들 중 가장 뛰어난 꽃미남을 꼽으라면 저 얄미운 드래곤인 렌스버리와 그랜트 루빈스타인 자작의 보좌관인 괘씸한 엘리엇 제네비아 녀석 - 그러고 보니 둘 다 싫은 놈들이다. - 정도였다. 뭐, 렌스버리는 마법으로 외모를 만든거니 진정한 꽃미남이라면 엘리엇 녀석일텐데, 이 남자의 외모는 엘리엇은 물론이거니와 마법으로 만들어진 그 렌스버리의 잘난 외모 못지 않는 거였다. 아니 오히려 이쪽은 동양의 신비스러운 분위기까지 가미하고 있어서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 둘보다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이쪽 서대륙인도 아벤티노 대륙인 못지 않은 흰 피부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듯한 티 하나 없는 백옥같은 피부에 상커플이 없는데도 크고 예쁜 눈, 거기에 뚜렷하고 반듯한 선을 가진 코와 입술까지... '어라, 그런데 어째 그의 머리카락이 약간 푸른색인 것 같단 말이야?' 내가 고개를 갸웃 거리는 사이 로어가 다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도야 어쨌든 덕분에 제가 큰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를 드리는 건 당연하다 생각 합니다." 자알 생긴 동양판 꽃미남의 통역을 전해 들은 키 큰 무사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뭐라뭐라 대꾸한다. "에... 아무리 그렇다해도 이 분 입장에서는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하시는군요." 로어가 정중히 인사를 하는데 거기다 대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미안했던지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뒤에서 뚱~ 하니 지켜보고 있던 토냐가 불쑥 나섰다. "이제 그만 둬, 로어. 넌 할 만큼 했고 저쪽은 받을 이유가 없다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원 참, 저 사람도 그래. 그냥 고맙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여주면 될 것을 뭘 저리 정색을 하고 받을 수 없다느니 어째느니 그럴까?' 그러나 로어는 생각이 달랐나보다. "에... 그래도 누나 은혜는 확실히 인사를 해둬야..." 로어가 키 큰 무사를 힐끔 바라보며 머뭇거리자 토냐가 코웃음 쳤다. "뭐야,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인사를 받을 쪽은 우리 아니니? 아까 그 녀석들을 다 쫓아줬으니 말야." '옳소~ 토냐 잘 한다!' "에이, 누나 그건..." 로어가 얼른 토냐의 말을 반박하려 했지만, 그건 동양 꽃미남에 의하여 끊기고 말았다. "그에 대하여 저희 도련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예?" 뜬금 없는 동양 꽃미남의 말에 로어를 비롯한 우리 일행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그는 샤방~한 미소를 한번 날려준 뒤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하여 키 큰 무사와 동양 꽃미남 사이에 한 사람 들어갈 정도의 틈이 생겼는데, 그 곳으로 웬 남정네 하나가 끼어드는 것이었다. 뒤에 있던 세 사람 중 한명이었는데, 성인이 된지 얼마 안된 듯, 풋풋한 소년티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를 딱 본순간 '귀공자'란 단어가 떠올랐다. 좋은 집안에서 곱게곱게 자라는 한편 엄격한 고등 교육을 받은 듯한 단정한 얼굴형에 반듯한 자세, 맑고 총기가 가득한 눈을 보자니 그 단어 말고는 그 청년을 설명할 단어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와 시선이 마주친 그 청년이 싱긋 웃어보이는데, 그러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살짝 덧니가 드러났다. 그런데 그게 또 무척이나 귀여워 보이는 것이었다. 알파두르 항구도시에 있던,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의 3대 미남 중 한 사람으로 이름 날리던(?) 맥 루돌프의 아방한 귀여움과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으음... 단아한 귀여움? 단정한 귀여움? 그런데... 이거 말이 되는 건가?' 그, 내가 감탄한 귀여운 매력의 귀공자께선 일행을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쭈욱~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물론, 동양 꽃미남이 통역은 해줬고 말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필요한 필을 흘리게 될까봐 좀 걱정했는데, 여러분들 덕분에 무사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예의바르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귀공자의 단아한 인상과 멋지게 저화되어 가벼이 본다면 정말 기분 좋은 감사 인사였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을 다시 곱씹어 본다면 이거였다. '웬 날파리들이 날아와 처리하기 귀찮을 것 같았는데 대신 처리해줘서 고맙다.' 라는 것. 그러니까 아까 이들을 둘러싼 놈들은 이들에게 위협은 커녕 귀찮은 존재들이었고, 우리는 이들을 위험에서 구해준 게 아니라 귀찮은 일을 대신 해준것 이라는 말이다. '허, 이런...' 그 말로 인하여 동양 꽃미남과 귀공자를 봐서 좋아졌던 기분이 급속 하락학 말았다. 뭐, 내가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자신들기리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럴땐 예의상으로라도 '덕분에 살았습니다.' 라고 해주는 거 아닌가 말이다. 이런 생각은 나 뿐이 아니었던지 우리 일행의 얼굴은 과히 좋지 않았다. 반대로 귀공자 옆에 있던 키 큰 무사는 만족한 표정이었고, 귀공자의 뒷쪽에 있느라 잘 보이지 않는 중년 남자 둘은 무척이나 흐뭇한 표정을 짓는 거였다. "뭐야, 저것들은..." 그들의 분위기에 토냐가 인상을 찡그리자 얼른 로어가 나섰다. "선애님, 인사도 받았으니 그만 가도록 하지요? 어차피 처음부터 인사를 받으려고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소피도 낮은 목소리로 로어의 뒤를 이었다.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 입니다만, 저들 확실히 만만치 않은 존재들 입니다." "저 앞의 키 큰 남자 말이야?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지만, 소피와 내가 있는데..." 토냐의 말에 소피가 고개를 살짝 저어보였다. "저 자만 하더라도 저와 정식으로 붙는다면 제가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뒷쪽에 있는 저 평범한 체격의 중년 남자는 제가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헥, 그 정도나?" 선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새삼스럽다는 듯이 뒷쪽의 중년 남자들을 살펴 보았다. 나 또한 다시 그들을 찬찬히 살펴 보았지만, 그저 평범해 보이는, 한 사람은 약간 통통한 몸집의, 그리고 한 사람은 약간 말랐다... 싶은 보통 체격의 중년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통통한쪽은 인상이 둥글둥글해보이고 약간 마른쪽은... 나이 어린 내가 말하기에는 좀 건방질지는 모르겠지만, 중년의 완숙한 멋을 풍기는 단정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아마 젊었을때는 여자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을 듯 싶었다. 하기야, 지금도 사람 좋게 빙그레 웃고 있는 거 보니 나라도 '어쩜~!'이라고 감탄할 정도다. 저런것이 바로 중년 미남이라는 거겠지? 그러나 단지 그것 뿐, 무협지에서 나오는 고수의 기세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흥, 그렇게 대단하다면 어디 한번 해볼까나?" 토냐가 투지를 불사르며 나서려고 하자 로어가 얼른 앞을 막아섰다. "누나, 누나아~~ 왜 괜히 시비를 걸려고 그래? 선애님, 우리 어서 가야죠? 너무 늦게 갔다간 저녁도 못 먹고 자게 되면 어쩌시렵니까?" "저도 될 수 있으면 저들과 안 부딪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소피까지 로어를 거들고 나서자 나도 한 마디 했다. [렌스버리 드래곤을 생각해. 아, 그런데 그 둘은 아직까지 안 온 거야?] 그 동안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미처 몰랐는데 둘의 모습이 여전히 안 보였다. 뭐, 어디다가 던져놔도(?) 잘만 살아 있을 존재지만 눈에 안 보이니 어디서 또 뭔 일을 벌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물론, 눈 앞에 있다 해도 막지는 못하지만... 소피와 로어, 나까지 말리고 선애 또한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지 별로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나섰다. 뭐, 어쨌든 이 일행의 대표는 선애니까 말이다. "고마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도 여러분을 도우려 했던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싫었는지 키 큰 무사와 귀공자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에게, 그냥 지나갈 거냐? 나 한판 더 해도 되는데..." 토냐가 아쉬웠던지 한 마디 던진다. 이 마법사는 생긴 거와는 달리 성격이 호전적이다. 그런데도 어째 전투 마법사 - 공격과 방어 마법을 중심적으로 익힌 마법사. 기사단이나 용병대, 모험가 파티에 많이 소속되어 있다. - 가 안 되고 연구 마법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렌스버리님을 생각 하셔야죠." 선애가 대답하자 토냐가 흠칫 하더니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린다. 아마 그녀도 이제서야 그의 모습이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귀공자측은 선애가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받아치자(?) 놀란 표정이었다. 하긴, 아벤티노 대륙엣 온 일행의 대표가 서대륙인으로 보이는 사람이니 놀랄만도 했다. "당신은 이 대륙 사람 같군요. 출신이 어디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귀공자의 언질을 받은 동양 꽃미남이 물었지만, 그들에게 감정이 별로 좋지 못한 선애가 순순히 대답해줄 리 없었다. "관심은 고맙지만, 사양하고 싶군요. 저희는 이만 숙소로 갔으며 하거든요? 서로 감사 받을 일이 없다하니 여기서 작별 하지요." 쌀쌀맞은 선애의 대답에 귀공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치 선애가 이럴줄은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자, 뒤에서 가만 지켜보고 있던 중년 남자중 좀 통통한쪽이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허허, 무에 그리 급하시다고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식사라도 같이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한 턱 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는 조금이라도 지기 싫은 것처럼 나와놓고서는 이제와서 달래는 듯이 나오니 '무슨 수작인 거야?' 싶었다. "헤, 자기들이 한 턱 내갰다고?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토냐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중얼 거리자 로어가 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질문은 토냐에게서 나왔다. "뭘 바라는데?" "그거야 아직 모르지. 어쩌시겠습니까, 선애님? 일단 호응 하면서 저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만." 토냐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한 로어가 선애를 보면서 묻자 소피가 끼어들었다. "위험합니다. 저들도 범상치 않은 자들인데 또 다른 일행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마 그 하류같은 일당이겠습니까? 하류 일당에게 당할 뻔 한거 보면 저들도 외지에서 온 상인일겁니다. 왜, 아침에 하류 놈이 말하길 그들 일당은 그런 사람만 노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어의 말에 선애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어, 혹 저들에게 바라는 게 있어요?" 그러자 로어가 화색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새로운 거래를 틀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약간 흥분이 섞인 단호한 대답에 토냐가 심드렁하니 물었다. "뭘 보고 그렇게 단정하냐?" "생각해봐, 누나. 소피양이 걱정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을 호위로 두고 있는 거잖아? 그게 뭘 말한다고 생각해?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저들은 돈이 많다는 거야." 맞는 말 같다. 돈이 없다면 대단한 사람을 호위로 둘 수 없으니까. 단순한 인연 덕분에 능력 밖의 호위를 둔 걸지도 모르지만, 뭔가 큰 일을 하니 호위가 필요한 거 아닐까? 로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거기다 하류 일당에게 노림을 받았다는 건 이 곳에서 낯선 존재라는 거잖아? 아마 새로운 사징이나 거래처를 찾기 위하여 온 상인일 거야. 그러면 어쩌면 우리와 이해타산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좋은 정보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로어는 토냐와 선애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야기 하느라 말에 반말과 존대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도 덧붙였다. "거기다 저들이 식사를 대접한다지 않습니까? 식대를 굳힐 수 있다는..." 그러나 로어가 끝까지 이야기 하기도 전이었다. 절대로 반갑지 않은 존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호오, 누가 나에게 식사대접하길 원한다고? 귀찮긴 하지만 너희들을 위하여 기꺼이 가주도록 하지." '누가 네놈에게 대접한대냐?' 란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뻔뻔하기가 강철합금 저리가라 할 정도의 존재 옆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또 한 존재를 보자니 차마 말은 못 하고 그냥 어색하게 웃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웃지요... 젠장할...' 지금까지 안 보이다가 갑자기 나타난 존재 덕분에 우리 일행의 분위기는 차악~ 가라앉았고 귀공자측은 당혹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키 큰 무사와 마른 몸매의 중년 남자가 지금까지의 여유로웠던 표정은 어디다 버렸는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이 네가지를 팔아먹은 렌스버리를 살피고 있는 거였다. 아무래도 저 둘은 이 드래곤을 척 보자마자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이건가?' 렌스버리가 식사 대접을 받겠다고 했는데 면전에서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라고 반대할 수 있을리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가여운 선애는 괜히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아주 기이인~~ 한숨을 내쉰 뒤 대답을 기다리는 꽃미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그 제안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통통한 중년 남자와 귀공자의 시선이 렌스버리를 향하며 반짝 빛났다. 그들의 시선을 보아하니 우리 일행의 리더로 렌스버리를 확정지은 것 같았다. '에휴... 이거 맞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틀렸다고도 할 수 없고...' "허허허, 잘 생각 하셨소이다. 가지요. 마침 우리가 묶고 있는 여관 식당의 요리가 꽤 괜찮더군요. 제가 안내 하겠습니다." 중년 남자가 몸을 돌려 척척 걸어가자 렌스버리가 느긋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고, 우리 일행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 일제히 한숨을 한번 내쉬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 걸음에는 내키지 않다는 기색이 아주 역력했다. 렌스버리의 지시대로 따르자니 저들과 접촉하길 원했던 로어마저도 무지 걱정되는 모양이다. [에... 어째 일행분들의 표정이 안 좋아보여요. 렌이 괜한 일을 한 걸까요?] 나에게 보이는 것이 아리아에게 안 보일리가 없었다.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오기에 나는 얼른 대답했다. [저들이 만만치 않아서요. 여차하면 위험할 거 같으니 걱정이에요.] 하고 싶은 말은 좀 달랐지만, 이게 내 심정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최대한 표정에 걱정을 담으려 애쓴 보람이 있었는지 아리아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방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런 건가요? 괜찮을 거예요. 여차하면 렌이...] 그러나 거기까지 말한 아리아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잠깐 말 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것이었다. 아마 내 심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렌스버리 녀석이 우리 일행을 위험에 밀어 넣으면 넣었지 도운적이 없다는 것을 나만큼이나 그녀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말을 맺었다. [렌보고 제가 강력하게 도와달라고 부탁할게요.] 아리아가 나선다면 조금 믿음이 갔다. 그래 나는 그녀의 두 손을 덥썩 잡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아리아씨, 부디 잘 부탁해요.] [예, 최선을 다하겠어요.] 내 말에 아리아가 씩씩하게 대답을 해준다. 뭐, 그래도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좋은 점은 있었다. - 한 끼를 공짜로 먹게 된 것 빼고 말이다. - 그것은 바로 이들이 묶고 있는 숙소가 고급 여관 거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과의 식사 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머물 곳을 찾기 위하여 오랜 시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일행은 안도의 빛을 비쳤다. 물론 그 빛은 렌스버리의 의기양양한 표정에 순식간에 꺼져버렸지만 말이다. "이쪽입니다." 바닷가의 경치가 잘 보이는 곳에 주르르 자리잡은 고급스러운 고층(5, 6층 정도) 건물들 중 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과연, 고급 여관이라 그런지 안으로 들어서자 멋드러지게 꾸며진 넓은 홀이 보였다. 우리가 전날 묶은 여관에는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식당이 있었는데 말이다. 홀 중앙 부근에는 지대가 푹 꺼져 있었는데 그 곳에는 작은 못을 중심으로 조그마한 실내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앉을만한 의자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휴식 공간은 아니라 그냥 홀 인테리어차 만든 모양이다. 그 실내 정원을 기준으로 우리가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에는 윗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이 보였다. 나무로 만들어진게 분명한 그 계단은 뭘 발랐는지 아니면 얼마나 깨끗하게 닦였는지 빛이 번쩍번쩍 날 정도였다. 왼쪽으로는 다른 홀 - 아마도 식당인 듯 - 로 연결된 복도가, 오른쪽에는 길다란 카운터가 보였는데 거기에는 단정한 제복을 입은 세 사람이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식사를 제안한 중년 남자가 홀을 휘이 둘러본 뒤 동양 꽃미남에게 뭔가를 속삭이자 동양 꽃미남이 우리 일행을 돌아보았다. "식사를 저희 방에서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제안에 우리 일행은 렌스버리를 돌아 보았다. 이 곳에 온 것은 그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 방 넓은가? 난 좁은 곳은 질색이야." 일행의 시선 탓인지 렌스버리가 심드렁하게 묻자 꽃미남이 친절하게 대답해준다. "좁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묶는 방은 최고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급이거든요." 로어의 예상대로 확실히 어느정도 재력은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된 거 뭔가 소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렌스버리는 꽃미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뿌지는 않겠군." "그럼 위로 가실까요?" 그들이 안내한 곳은 3층에 있는 방으로 넓은 거실을 끼고 각자 욕실이 딸려있는 침실이 두개나 있었다. 그런데 그 곳은 두 중년 남자들의 방이었던지 귀공자와 꽃미남, 그리고 키 큰 무사는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신들의 방에 다녀왔다. 그 사이 일행은 한 침실을 빌려서 욕실에서 간단히 씻고 지저분해진 옷차림도 정리했다. 덕분에 그 후 모든 사람들이 거실에 모였을땐 모두 깔끔해진 외모로 마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이니 정말 좋군요. 자, 그럼 서로 소개부터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제 이름은 사다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니 정확히는 렌스버리 녀석이 식사 제의를 받아들인 뒤 계속 분위기를 주도해온 통통한 남자가 이번에도 제일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나머지 사람들도 자신을 소개했는데 꽃미남이 오사함, 귀공자는 예흔랑, 키 큰 무사가 백운, 마른 체형의 중년 남자가 기파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먼저 소개를 하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일행의 시선이 렌스버리에게 쏠렸는데 그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관심한 표정으로 날라져온 음식만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관심할 때는 안 건드리는 것이 상책이었기에 일행들은 선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여간, 나이는 무지하게 많이 먹은 주제에 인격, 아니 용격은 나이와는 반비례 하는지 소갈딱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치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우선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짐작하셨겠지만, 아벤티노 대륙에 있는 타이거 상회 소속 사람들입니다." 선애의 말이 시작되자 즉시 꽃미남 오사함이 통역을 시작했다. 우선은 선애의 이름을 밝히고 그 뒤 렌스버리부터 모든 일행들을 소개하고 나자 사다함이 정말 기분 좋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허허허, 예상은 했었습니다만, 과연 상인이셨군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건배하는 것이?" 그러면서 그 앞에 있는 작은 술잔을 치켜들자 딱히 거절할 필요성을 못 느낀 선애가 순순히 응했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술잔을 채워서 들어 올렸다.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자!" 사다함이 선창하며 잔을 들어 올리자 우리 일행들은 일제히 잔을 부딪히며 '건배~!'라고 외칠 준비를 했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이들은 우리 일행의 준비를 무시해 버린 채 자신들의 술잔을 각자 얼굴 높이까지 올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홀짝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어어..." 그 뒤 그들 일행은 자신들이 마신 술잔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려는 듯 입구를 맞은 편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굳어있던 우리 일행을 보고 멈칫 거렸다. 왜 그러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그들의 시선에 선애는 힘겹게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하.하... 건배하는 방식이 저희와 틀리군요. 처음 보는 거라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렌스버리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큰둥하기는 했지만, 사다함의 선창에 맞춰 잔을 들어 보이고는 홀짝 마셔버렸던 것이다. 그걸 보면서도 '알고 있었으면 일행에게 귀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불평이 떠오르기는 커녕 이제는 '저 놈이 그렇지 뭐...' 하고 납득하게 된다. "이런, 저희가 그걸 생각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사다함이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 해오자 우리 일행은 서로 쓴 웃음을 나누며 그냥 술잔을 입에 댔다. [많이 마시지 마, 응? 그냥 마시는 척 입술만 적셔.] 울 꼬맹이는 이제 한국에서도 성인 대접을 받을 나이지만, 여전히 내게는 어린 꼬맹이로 느껴지는 터라 나는 선애가 술이 가득한 잔을 입에 가져다 대자 괜히 안달이었다. 오죽했으면 옆에 있던 아리아가 '선애양이 술을 마시면 큰일 나는 병이라고 있느냐?' 라고 물었겠는가? 그런데 우리 선애는 이 타는 언니의 가슴을 몰라준 채 날 한번 흘겨보고는 그 안에 있는 술을 홀짝 하고 한 입에 털어 넣는 것이었다. [야아~ 입술만 적시라니까 그걸 다 마시냐? 이제 마시지 마, 응? 마시면 안돼!] 그러나, 이런 언니의 애타는 마음을 완전히 밟은 이가 있었으니... "이거, 제 실수로 저대로 건배를 못햇으니 다시 한번 하지요? 이번에는 여러분 방식대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 돼에에에~~ 한번이면 충분하다고 그래, 응? 한번이면 충분하잖아? 뭘 또 해?] 하지만, 다른 이들은 사다함의 말을 통역한 오사함의 말을 듣고 얼른 술잔을 채우고는 잔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쪽에서 선창을 하시지요?" 사다함의 권유에 선애는 별로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일행들의 시선에 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럼 제가 선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선애가 잔을 쳐들며 외치자 토냐, 로어, 소피가 흥겹게 잔을 들며 따라 외쳤다. "위하여~!" 그리고는 서로의 잔을 가볍게 부딪히는 것이었다. "자자, 드시지요." "이야, 이거 와인하고는 또 맛이 틀린걸?" "거기도 같이 드시지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건배 했다는, 기분 좋은 표정의 일행들은 아까와는 달리 어색하니 잔을 들고 있는 그 일행들에게 잔을 부딪혀주는 배려까지 선보였다. 그러자 그들도 마주 웃어주며 어색하게나마 서로 잔을 부딪히고는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건 선애도 마찬가지였다. 렌스버리의 눈치를 살피고는 - 그를 무시했다가 뒷 감당을 어찌 하려고 - 어색하게 잔을 부딪히고는 (렌스버리 녀석이 건배하고 싶었던지 안 마시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홀짝 하고 또 마셔버렸다. "크에... 쓰다..." 술을 아직 즐길 줄 모르는 선애는 인상을 쓰며 투덜댔다. [그러니까 마시지 말고 입술만 적시랬지? 얼렁 안주 먹어. 속 베린다.] 내 잔소리가 통했던 건지, 아니면 원래 먹으려고 했던 건지 선애는 앞에 놓인 먹음직 스러운 새우튀김을 집더니 한 입 바삭~ 하고 물었다. 그런데 샛노랗게 튀겨진 그 새우튀김은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데 선애가 한 입 베어(?) 물 때 나는 바삭~! 하는 소리가 너무 맛있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거... 맛있냐?] "/응. 금방 튀겼는지 아직도 따끈따끈 하네./" [쩝... 맛있겠다.] "/무지 맛있어./" [좋겠다...] "/응./" [쩝...] 날 놀리려는지 선애가 씨익 웃으며 새우 튀김을 완전히 입에 넣는데 사다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상인이시라면 이 대륙과 지금 거래를 하고 계시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저희는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구하러 온 것 뿐이죠. 그러나 뭔가 괜찮은 기회가 있다면 할 용의는 있습니다." 얼른 입 안의 음식물을 삼킨 선애가 대답하자 사다함 일행이 눈을 빛내는 것이었다. "그거 참 흥미로운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무엇을 구하러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술이요. 이쪽 대륙의 괜찮은 술들을 구하려 합니다." 선애의 대답에 그들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서로 고개를 맞대고 수군수근 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사다함이 선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술은 이미 거래가 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고보니 두 상회가 독점 거래 한다던데, 설마 그들의 시장을 파고드시려 하는 겁니까?" 사다함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대륙과 - 정확하게는 진나라 하나뿐이지만 - 무역하는 아벤티노 대륙의 나라는 두 곳,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바이런국과 바로 옆나라이면서 가장 사이가 안 좋아 무엇이든 치열하게 경쟁하는 헤이분 국. 그 중 바에런 국에서는 크로스웰 상회에서 술 거래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 나머지 한 곳은 헤이븐국의 상회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크로스웰 상회도 참 대단했다. 처음에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틈새 시장을 공략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서대륙의 술이 서서히 퍼지면서 이윤이 꽤나 된다는 걸 알고 다른 곳에서 공략해 왔을텐데 독점권을 끝까지 지켜냈으니 말이다. 바이런국 전체에서 본다면 열 손가락 안에 들기 힘들 정도의 규모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음으로나 양으로나 치열한 상업적 전투가 수도없이 벌어졌을 거다. 그런 모든 전투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아 지금까지 그 이름과 시장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뭐어, 회장 녀석이야 측근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실권을 빼앗긴 상태지만... 그런데 선애의 말은 얼핏 그런 대단한 상회의 시장을 파고 들겠다고 들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다함은 우리가 크로스웰 상회와 다투려는 줄 아나봐.] 내 속삭임에 선애가 피식 웃더니 오사함의 통역이 끝나길 기다려 입을 열었다. "다른 상회와 다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판로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선애의 말에 사다함의 눈이 빛났다. "그렇습니까? 그런대, 구하시려는 양은 어느 정도이신지?" "우선은 최소 선박 한척 분량을 구하려 합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종류와 수를 늘릴 예정이죠. 서대륙까지 자주 왕래하기 힘드니..." "호오, 그 말씀은 이번 한번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지속적으로 계속 구입할 예정입니다. 그게 주된 목적이고요." "술은 어디 것으로 하시게요? 아, 설마 진나라 것으로만 생각 하신다던지..." "그건 아닙니다. 괜찮은 것이면 어디 것이든 상관 없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기회가 닿는대로 여러 종류를 구하는 것도 목표라서요." 선애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사다함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술들은 어떻습니까?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이번에 한국의 술을 수입하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만." 사다함의 제안은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었다. 사실 우리가 이번에 여기까지 직접 와서 술을 구입하게 되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응급 처치였다. 여기에는 핸들리 크로스웰의 눈길이 미치기 어렵기에 지금은 손 쉽게 구입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라도 우리가 직접 와서 샀다는 걸 알게 되면 여기다 손을 쓸 게 뻔하기 때문이다. 크로스웰 상회에서 수입하는 주류의 양은 장난이 아닐 터, 그런데 거기서 '당신네 것은 사지 않겠소!'라고 한다면 그에 영향을 받지 않을 곳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이 곳의 주류 업계에서의 영향력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크로스웰 상회의 영향력을 적게 받는, 이 곳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곳이며 주류를 중점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여러가지를 같이 취급하는 곳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사정이니, 만약 크로스웰 상회에서 있는지도 모르는 새로운 주류 거래처를 개발한다면 핸들리의 방해에 대한 염려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으로 핸들리와 거래를 할 수도 있을 거다. 어느 상업이든 새로운 상품은 필요한 거니까 말이다. "좋군요. 여러분이 정말 한국의 술을 취급하신다면 저희와 좋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선애는 물론이거니와 로어까지 얼굴이 활짝 폈다.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낚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른 것들도 취급하는데 듣고 싶으십니까? 이것들도 모두 한국에서 수입하는 것입니다." 이제보니 이들은 한국와의 무역을 다루는 상회인 모양이다. 진 나라에 수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아벤티노 대륙에까지 수출시켜 중개상인으로써의 이득도 취하려 이 도시에 온 듯 했다. 이러한 나의 추측은 대부분이 맞았다. 몇 가지만 빼고 말이다. "너희들이 취급하는 한국 물품에는 독도 포함되는 모양이지?" 이제 막 활기를 띄우며 본격적으로 거래 이야기에 들어가려는 찰나, 이러한 좋은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렌스버리가 차가운 어조로 툭 내뱉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저 녀석이 또 무슨 방해를 하려고?'라고 생각 했는데, 그가 말한 내용은 뜬금 없긴 했으니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술잔에만 발라 놓다니, 머리 좀 썼는데?" [독?] "독이요?" "독이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해적선에서 한번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는 일행이었던 터라 반응은 즉각 나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일행이 렌스버리와 사다함 일행 전체를 살피며 뭔 일 일어나면 반격할 수 있도록 온 몸을 긴장시켰던 것이다. 그러자 그 즉시 키 큰 무사 백운과 마른 중년 남자 기파랑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귀공자, 즉 예흔랑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저 녀석인 모양이군. 여차하면 인질로 잡아야지.' 그렇게 일촉즉발의 긴장된 공기가 흐르는 와중, 갑자기 어이 없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다함이었다. "헛헛헛, 이거 참... 일행에 대한 장난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황당하다는 듯한, 자신은 절대로 무죄라는 듯한 당당한 그의 태도를 보자니 왠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렌스버리 녀석이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태연하게 술을 홀짝 홀짝 자작하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자기 입으로 독이 발렸다고 한 바로 그 술잔으로 말이다. 그걸 본 일행들의 표정은 기가 막히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토냐에게로 돌렸다. 아무래도 우리 중 그런데 지식이 가장 많은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행들의 시선을 받자 자신 없는 표정으로 렌스버리의 눈치를 살피며 주저주저 말하는 것이었다. "그, 그게... 나는 잘 모르겠거든? 내가 아는 건 아벤티노 대륙 거라..." 자신 없는 말이긴 했지만, 그녀의 말에 일행은 서로 얼굴을 보더니 어깨에서 긴장을 뺐다. 그런 우리 일행에게 사다함이 쐐기를 박았다. "허허허, 아니 우리가 독을 사용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원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익을 두고 서로 다투는 사이도 아닌데요." 그의 말에 우리 일행은 완전히 의심을 벗어 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쫘악~ 깔린 렌스버리의 음성이 들렸으니... "내 말을 못 믿겠다, 이거지?" 그 녀석의 말에 막 자리에 앉으려던 일행은 경직되고 말았다. 그 상태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일행은 기나 긴 한숨을 내쉬고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벗어나 렌스버리 뒷쪽으로 모여 들었다. 그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해도 우리 중 그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아리아씨이이~~] 괜히 렌스버리의 심술에 울 꼬맹이만 식사도 못하고 고생하게 생겼자 나는 아리아를 붙들고 울먹 거렸다. [죄송해요. 나중에 렌에게 한 마디 할게요. 그래도 렌이 괜히 그러는 것은 아닐 거예요.] 괜히 안 그러기는 뭐가 안 그런단 말인가? 렌스버리 녀석이 언제는 괜히 안 그랬나? '게다가 나중에 한 마디 한다고 무슨 소용이야?' 라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데 렌스버리의 '심술 + 고집' 으로 인하여 그의 뒤에 엉거주춤 모여있던 일행 중 토냐가 선애를 툭툭 치더니 뭐라 뭐라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에 선애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토냐의 찔림과 시선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렌스버리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저기... 저희가 독에 중독된 거라면 해독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선애의 속삭임을 어떻게 들었는지 오사함이 일행에게 통역을 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걸 들은 사다함이 곧바로 응수해왔다. "허허허,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중독이 되어야 해독을 하던지 하겠지요. 어디 독에 중독된 증상이라도 보이십니까? 구토 증상이 있으신가요? 어지러우신가요? 아님 피라도 토하실 것 같습니까? 렌스버리님 장난이 너무 과하신 것 같습니다. 좋은 의도로 여러분을 초대한 건데 이러시면 서로 불쾌해지지 않겠습니까?" 사다함이 불쾌감을 내비치며 말하자 일행은 무지 미안한 듯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힘 없는 게 죄라고 일행은 뭐라고 말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단지 사다함에게 미안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시선만 열렬하게 보낼 뿐이었다. 그러자 사다함이 그 시선을 느꼈는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말했다. "렌스버리님, 음식이 다 식겠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지요? 아, 혹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 겁니까? 다른 것을 가져오게 할까요?" 그의 말에 렌스버리가 비죽 웃었다. "극진한 배려는 고맙네만, 음식은 아주 맛있었네." "그럼 왜...?" 사다함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렌스버리 뒤에 꼼짝 못하고 서 있는 일행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렌스버리가 부하들 군기를 잡고 있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일행은 부하가 아니라 단지 힘이 없는 탓이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아리아가 보다 못했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나섯다. [신애씨, 렌에게 말 좀 전해주세요.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정말 화 낼 거라고요.] [넵! 선애야 아리아씨가...] 그녀의 말에 화색이 돋은 내가 선애에게 잽싸게 말을 전했고, 선애 또한 얼른 렌스버리에게 속삭였다. "아리아씨가 화 내신답니다." 선애의 말에 렌스버리 녀석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정말이냐고 묻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아니이~~ 선애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뭔 의심이 저리 많담.' 나의 못마땅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렌스버리는 선애의 단호한 끄덕임을 보고 나서야 '쳇' 하고 혀를 한번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그러자 당황한 것은 사다함 쪽이었다. "아니, 그냥 가시게요?" 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당황한 어조로 묻는 사다함에게 렌스버리는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흥이 식었어. 그러니 네 놈들은 딴데나 알아봐." 그러면서 정말 가려는 듯 렌스버리가 입구를 향해 몸을 돌리자 로어는 뒤로 넘어갈 듯한 표정이 되었다.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려도 유분수지, 렌스버리 스스로 제안을 받아 들여서 여기 오게된 건데 끝까지 협조 좀 잘 해주지는 못할망정 기껏 좋은 거래 이야기를 하기 전 그것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여길 떠나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입도 뻥끗 할 수 없는 로어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표정으로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렌스버리의 뒤를 따르려 했다. 그러나 입도 뻥끗 할 수 없는 로어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표정으로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렌스버리의 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이런 로어를 안타까이 여긴 것일까? 렌스버리 녀석이 채 한 발자국을 떼기 전에 사다함이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가실 겁니까?" 그도 우리와의 거래를 놓치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렌스버리가 어디 그런데 상관할 녀석이던가? "간다고 했잖아."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렌스버리. 사다함 일행이 보면 참 성의 없는 무례한 태도였지만, 내가 보니 '저도 좀 미안하기는 한가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렌스버리는 관심이 없으면 대꾸는 커녕 아예 없는 듯 싸악 무시해버리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사다함은 렌스버리가 자신을 무시한다 여겼던지 결국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대로 가신다면 영영 해독을 못하게 되실텐데요?" 그의 말에 렌스버리를 제외한 일행들은 사다함을 무척이나 동정의 눈길로, 그리고 동지의 눈길로 쳐다 보았다. 아마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오죽 열 받았으면 사다함이 저런 말까지... 내 그 마음 이해 한다, 이해 해.' 란 문장이 떠돌고 있을 거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요~~만큼도 하지 않을 렌스버리 녀석은 비죽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다. "중독시킬 이유 따윈 없다며? 중독 시킨 적 없다고 극구 부인하지 않았던가?" 노골적인 비웃는 어조에 사다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짐과 동시에 붉게 달아 올랐다. 웃고 있을때는 무척이나 좋은 인상이라 여겨졌는데 저렇게 분노를 드러내니 무지 험악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지 길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자 안색이 금방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처음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다함은 렌스버리를 한번 매섭게 노려보고는 일행과 작게 속닥속닥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날 듯 보여던 렌스버리 녀석이 그들이 하는 모습을 비죽 웃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는 거여다. '허... 저 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이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다함이 일행과의 의논을 끝냈는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독을 사용했다는 걸 시인하지요. 이 말을 기다리신 거 아닙니까, 렌스버리님?" 마치 내기 바둑을 큰 차이로 이기며 두고 있었는데 거의 끝날 즈음 갑자기 나타나 고의로 판을 엎어버린 훼방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사다함이 렌스버리를 노려보며 말하자, 렌스버리 보다는 옆에 있던 우리가 더 놀라버렸다. '헉, 정말 독이 있었단 말이야?' 입을 떠억 벌리고 놀라움을 여과없이 표현하는 나와는 달리 아리아는 감격이 가득한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으흑흑... 미안해요 렌. 당신을 끝까지 믿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당신만 믿을게요.] 그녀의 말을 옆에서 들은 나는 다시 한번 경악해야 했다. '헉! 앞으로 정말 큰일났다.' 충격 고백을 한 사다함은 렌스버리의 잘난체 하는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앗던지 렌스버리가 뭐라 하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앉으시지요. 이제 그럴 이유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잔뜩 비꼬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조에 - 오사함의 통역을 거쳐 조금 완화 되었다 해도 사다함의 표정만 보면 그가 말하고 싶은 심정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 우리 일행은 잔뜩 긴장했다. 해적선에서 단지 시끄럽게 굴었다는 이유로 수십명의 해적들을 두동강 내고, 그에게 건방지게 굴었다고 해적선은 물론이거니와 해적들의 시신까지 몽땅 태워 찾지도 못하게 한 작자가 바로 렌스버리 였으니 말이다. 하류 일행이 렌스버리에게 혼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렌스버리가 그들과 우리 일행을 붙여보고 싶었던 것 때문도 있겠지만, 그들이 렌스버리를 향해 직접적으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비결(?)일 것이다. 만약 렌스버리에게 직접 뭐라고 한 마디라도 했었다면 렌스버리의 성격에 재미고 뭐고 그냥 그 자리에서 즉결 처결을 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 사다함이 바로 그렇게 되게 생겼으니 일행이 잔뜩 긴장을 한거다. 비록 직접적으로 험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대놓고 비꼬았으니 렌스버리의 성격상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 모두들 예측한 것이다. 사다함 혼자만 얌전하게 보내(?) 버리면 별로 걱정도 안 되겠지만, 이건 빈대 잡으려고 집까지 몽땅 날려버리니 말이다. 혹 이번에는 이 여관까지 다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번에 렌스버리 녀석이 준 목걸이 가지고 무사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여차하면 선애를 들고 튈 준비를...' 그러나 이런 나의 고심이 무색하게도 렌스버리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은 덤덤한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보며 말하는 거였다. "뭐 해? 저 녀석이 앉으라잖아." "예?" '어라? 저 녀석 화가 안 났어?' 당연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은 선애가 당혹한 표정으로 되묻자 렌스버리 녀석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는 거였다. "뭘 멍청하게 바라봐? 이 일행의 리더는 너 아니야? 저 놈이 할 말이 있는 거 같으니 들어 주던지 거절 하던지 해야지." "하아?" 선애는 렌스버리가 지금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건지 긴가민가 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까지 일행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존재가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선애보고 결정하라고 하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러니 그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심술 부리는 건지 의중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행에게는 이미 사다함 일행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자 그걸 참기 힘들었던지 사다함의 말을 통역한 오사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진지하게 이야기 할 마음이 없다면 우리도 더 이상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렌스버리가 다시 선애에게 입을 열었다. "네가 머뭇 거리니까 저들이 화가 났잖아. 쯧쯧, 이 먼 곳까지 왔으면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 마치 선애가 모두 잘못했다는 듯 책망하는 어투에 선애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이 붉어지며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더니 마악 뭐라 입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으면 렌스버린 놈이 어떤 놈인지도 잊은 채 그에게 대들려고 했겠는가? 내 선애의 심정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상대하기에는 렌스버리 놈이 너무나 버거운 존재였다. 그리하여 나는 선애의 편을 들고 싶은, 아주아주 커다란 마음을 어렵사리 억누르고 원하지 않은 몸을 움직여 선애를 말리려 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이 나만이 아니었던지 나 보다도 먼저 로어, 소피, 토냐가 선애를 막아섰다. "선애야, 렌스버리님 말씀이 옳아. 빨리 결정해 줘야지." "선애님, 오히려 지금이 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소피는 토냐나 로어처럼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슬그머니 선애 옆으로 다가가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그런 셋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선애는 소피의 당김에 얌전히 따라가 아까 박차고 일어났던 그 의자에 다시 앉았다. 하지만 화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던지 앉았어도 입을 앙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보다 많이 성장했다고 해도 완전히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도 2% 부족한 모양이다. [야, 야, 화 풀어라, 응? 저 성격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옆에 아리아씨가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바람에 차마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고 우회적인 말만 늘어놓으니 제대로 효과가 날 리 없었다. '어휴... 말을 아니 한 만 못하구만.' 덕분에 다시 자리에 앉은 우리 일행을 의아함 반 기대 반의 시선으로 쳐다보던 사다햄 일행들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토냐가 얼른 로어의 옆구리를 꾹꾹 눌러댔고 선애의 상태가 이들과 대화할 수 없다는 걸 자각한 로어가 결국 대표로 입을 열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그러나 로어의 반응이 너무 늦었던 것일까? 로어가 말을 마칠 무렵에는 어째 사다함쪽 사람들의 표정이 더더욱 굳어지는 것이었다. 이유를 몰랐는지 로어와 토냐가 당혹스러운 시선을 교환하는데 사다함이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것이오?" "예? 그러니까 거래 이야기를..." 로어가 다급히 입을 열었지만 사다함은 냉혹한 어조로 로어의 말을 잘랐다. "지금 당신이 나와 거래를 논하겠다는 것이오?" 그러니까 사다함의 말은 한 마디로 '높은 사람 불러 와!' 인 거다. 사다함측에서는 아마도 울 일행의 리더는 렌스버리, 그 다음은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선애, 다음은 토냐, 그 다음에야 로어 혹은 소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행 중 가장 아랫 사람이 대표로 사다함을 대하고 있으니 화가 난 거다. 아무래도 사다함은 그쪽 일행에서는 두 무사에게 보호 받는 귀공자 다음 서열인 듯 하니 말이다. 보아하니 귀공자는 후계자 정도고 사다함이 실무 경험자인 듯 하니 귀공자 대리로 나와도 무리는 없을테지만, 우리측은 그게 아니었으니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모든 거래를 할 때는 거기에 적당한 권한이 있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담당해야 했다. 거기다 모든 거래 상대자는 비슷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 하는 법이었다. 거래처에서는 이사급이 왔는데 맞이하는 사람이 대리급, 혹은 과장 급 정도라면 상대를 얕보고 있다는 소리밖에 안되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예의이기도 하지만, 또한 일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식당 안의 인테리어를 바꾸는데 식당 종업원이 인테리어의 방식과 가격을 흥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걸 잘 알고 있었는지 로어는 사다함의 말에 반박은 못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아마 로어는 급하니까 선애의 보좌관으로써 나선 거지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을 거다. 아니면 그들에게 잘못한게 있으니까 이쪽에서 좀 막 나가도 괜찮다고 생각한 걸지도. 그러자 울 꼬맹이가 분노를 좀 가라앉혔는지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그쪽 또한 마찬가지 아닙니까? 도대체 왜 우리에게 독을 사용한 겁니까?" 분노를 가라앉힌 게 아니라 분노의 화살 방향을 돌린 모양이다. 착 가라앉은 선애의 어조에는 냉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다함 또한 이러한 반응과 질문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 당연하겠지만... - 눈 하나 깝짝 않고 태연히 대답하는 거였다. "예방책이지요. 당신들과의 거래가 만족스러웠다면 당신들은 독에 중독 되었었다는 것도 모른 채 해독 되었을 겁니다." 너무나 태연한 반응에 오히려 선애가 흥분을 드러내버렸다. 그렇다고 탁자를 뒤엎는다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고 눈썹을 꿈틀대며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떠는 정도였다. '음음, 여전보다 많이 성숙했다니까.' 대체적으로 침착스러운 태도에 지켜보고 있던 나는 가슴 뭉클하니 다가오는 진한 감동을 느끼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선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에게 독 먹인 걸 너무 가볍게 말씀하시는군요. 그것 만큼이나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요? 거래 상대로는 최악의 조건이네요." '장하다, 내 동생. 저 약점 찌르기의 말발. 캬~ 감탄스럽다. 거기서 더 밀어부쳐버렷!' 두 주먹까지 불끈 쥐어가며 나는 옆에서 아리아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차마 방해가 될까 입을 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열심히 응원했다. 하지만, 이 사다함 녀석도 정말 노련한 사람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생각한 적 없습니다. 단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해독할 수 있기에 손을 쓴 거지요. 유비무환 아니겠습니까?" "흥, 그러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놔두고 말이죠?" "계약 내용만 충실하게 지켜 신용만 잃지 않는다면 그럴 염려는 없을 겁니다. 아, 차 한잔 드시겠습니까?" 선애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다함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 여겼음인지 태연히 시종이 가지고 온 차를 받아들며 차를 권하는 여유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사양하겠습니다. 거기에 뭐가 들어 있을 줄 알고요?" "아하하하... 설마 또 그러겠습니까?" "귀하께선 이미 저희에게 신용을 잃으셨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선애의 날카로운 질문에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슬쩍 차 향을 맡던 사다함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싱긋 미소를 날렸다. 전이라면 '참 사람 좋아보이는 선한 미소다.'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어쩜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사람이 정말 겉 다르고 속 다르네.' 라는 생각만 들었다. "정말 안 드시겠습니까? 차 향이 무척 좋은데요." "됐습니다. 이쪽 차는 별로 입에 안 맞아서요." 향 좋은 차를 즐기는 편인 토냐가 아쉬워하는 듯 했지만 선애는 사다함만 노려 보느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때 안 나서도 되건만, 꼬옥 나서서 산통깨는 놈이 하나 있었으니... "난 한잔 줘. 이쪽 차라는게 처음에는 이상한 거 같아도 한번 맛 들이면 계속 찾게 되더군." 어느새 떠억 자리를 잡고 있아 있었는지 렌스버리 녀석이 건방진 포즈로 - 이제는 그가 뭘 하건 내 눈에는 다 삐딱하게만 비쳐졌다. - 시종을 향해 손짓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다함 녀석이 아까 열받아 했던 건 그새 싸악 잊었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거는 거다. "오호라, 렌스버리님께선 차를 즐길 줄 아시는군요." "훗, 내가 못하는 것이 어디 있을까?" 렌스버리 녀석이 손에는 찻잔을 들고 다리는 꼰, 거만한 자세로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말하는데, 아리아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지이인~~짜 별꼴이 반쪽이었다. 렌스버리가 차를 받아들이자 시종은 선애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냐와 로어, 소피는 물론이거니와 선애 앞에도 찻잔을 내려 놓는 것이었다. 그거 보면 아무래도 저 시종 또한 이 일행과 한 패인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쪽 대륙에 이 차도 수출한다지요? 혹 차도 취급하고 있으신가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사다함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어투로 물어왔다. "아니오. 차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차도 수입하십니까?" 그에 선애가 순순히 대답해준다. 렌스버리의 산통 깨기 덕분에 화를 내는 것이 허탈해진 모양이다. "아쉽게도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차는 한 나라 보다 진 나라가 더 뛰어나서요. 오히려 진 나라에서 한 나라 쪽으로 수출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아, 그래도 그쪽에 루트를 가지고 있으니 혹 원하신다면 거래를 틔워 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다함의 그 말에 선애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러더니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던지는 거였다. "사다함님은 참 긍정적이신 분이군요. 상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를 잃어버리셨으면서 저희가 거래를 할 것이라 생각하신 겁니까?" 가시가 삐죽삐죽 솟은 말이었지만, 사다함은 느긋했다. 찻잔을 양 손으로 감싸 그 따뜻함을 즐기며 마치 손녀에게 대하듯 인자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사람이 살면서 때로는 원하지 않아도 할 수 밖에 없는 일도 있지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선애를 향해 말해 선애를 열받게 하더니만 나중에는 렌스버리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는 것이다. 아무래도 아까 열받게 했던 걸 완전히 씻어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자 렌스버리도 마주 웃어주며 대꾸한다.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군. 그런데 뭘 거래하고 싶은 거지?" "저희가 내 놓는 것은 우선 종이와 도자기, 술, 장식류, 곡물 몇가지 입니다. 우선은 진나라 물건보다 괜찮거나 최소한 그에 못지 않는 것만 가지고 왔습니다만, 그쪽 대륙에서 통할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해 주셔야겠지요." 사다함은 거래가 다 이루어진 것인 양 줄줄줄 늘어 놓는다. 그의 말을 관심 많은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렌스버리 녀석이 우아한 포즈로 마시던 찻잔을 내려 놓더니 양 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상거래에 있어서는 역시 신용이 제일인 것 같아, 그렇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지금 설마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뭔 생각인가 싶었던지 방 안 모두의 시선이 렌스버리를 향하며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렌스버리가 사다함만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자 - 아마 그에게 한 말이었나보다. - 사다함이 당혹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 물론 그렇지요. 그런데 그 말씀은 갑자기 왜...?" 방 안의 모든 인물을 당혹감 속에 빠뜨려 놓고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양 태연히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신 렌스버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 차 맛이 정말 좋군. 아, 내가 하고싶은 말은 신용을 쌓고 싶으면 서로간의 신뢰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거지. 신뢰, 믿음 얼마나 좋은 말이야?" 자기가 한 말에 감탄한 건지, 차 맛에 감탄한 건지 렌스버리가 무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그게 좋은 말이라는 거 누가 몰라? 저 녀석 도대체 왜 그래?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야?' "하, 하, 하,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희 상회와 여러분의 상회는 신뢰로 맺어졌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다함 녀석, 누가 상인 아니랄까봐 말은 매끄럽게 잘 한다. 그러나 그 보다도 계속 만족스레 웃고 있는 렌스버리가 더 신경 쓰였다. "자네가 그리 생각한다니 더더욱 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상호간의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진실'이 필요한 법. 그렇지 않은가? 그래 자네 상회와 이쪽 상회의 돈독한 신뢰를 위하여 내가 '진실'의 물고를 틔워 줌세." 통역을 하는 오사함이나 그의 말을 듣는 나머지 일행의 표정이란 마치 별나라 외계어를 듣는 듯 하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감상하듯 잠시 텀을 둔 렌스버리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거 아나? 이쪽 상회 사람들에게 독은 별 소용이 없다는거." "예에?" "아니, 그걸 왜?" "렌스버리님!" "헉스..." 이건 사다함 일행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숨기려 했을 -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기에 딱이었으니까. - 일행들이었을텐데 그걸 자기 마음대로 밝혀 버렸으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로어는 얼마나 놀랐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찻잔을 넘어뜨릴 정도였다. 그가 경악해서 렌스버리의 이름을 부르자 - 애가 얼마나 놀라고 다급했으면 그랬겠는가? - 렌스버리가 로어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왜 불러?" "예? 아니, 그게..." 그러나 렌스버리의 싸늘한 시선은 보통 사람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 시선을 직격으로 받은 로어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쩔쩔 맸지만, 렌스버리 녀석은 다음 타격을 날렸다. "뭐야, 불렀으면 말을 해?" 보통 사람이야 그 정도에서 가벼운 경고의 시선이나 준 뒤에 넘어가겠지만, 렌스버리 녀석이 어디 그럴만한 관용이라도 가지고 있던 녀석이었던가? 그러나 이때, 토냐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겠던지 용감하게 나섰다. "그걸 말씀해 주시면 어쩝니까?" "왜? 내가 어디 틀린 말 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마법사인 토냐가 있었으니 말이다. 독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그녀의 마법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정 안되면 렌스버리 녀석이 있으니까. 설마 선애를 죽게 내버려 두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어디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가지고 토냐가 따지고 드는 것이겠는가? 렌스버리 놈 빤히 알고 있을텐데도 저렇게 나온다. 그러나 토냐도 이번에 아주 단단히 작심을 한 모양이다. "그건 어니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이..." 토냐가 끝가지 용감하고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정말 아쉽게도 렌스버리 녀석의 치사한 성격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이야." 그 놈이 자기 마음이라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렌스버리가 간단히 토냐의 입을 막자 그제야 오사함이 황급히 통역을 시작했다. 아마 스스로 렌스버리의 말이 믿기지 않아 통역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우리 일행의 반응과 사다함 일행의 재촉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너희들도 그 말을 들으면 반응이 비슷할걸?' 과연 오하삼의 통역을 들은 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사다함이 제일 먼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통역을 제대로 한 거 맞는가?" 믿기 힘들다는 말에 오사함이 이해 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처음에 제가 잘못 들은 건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제대로 들은 것 같습니다." "독이 소용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요? 설마 저쪽 대륙 사람들은 독이 듣지 않는 체질이란 소리일까요?" 그 동안 거의 말이 없었던 백운 - 키가 큰 무사 - 이 심각한 어조로 끼어들자 사다함이 코웃음 쳤다. "무슨 소리. 저들은 어디 인간이 아니라 선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거기에 오사함도 사다함을 거들었다. "선인이라도 독에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닙니다. 단지 독의 효력이 나타나는 게 인간보다 약간 느린데다 그들이 약초나 독초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웬만한 독은 별 소용이 없을 뿐이지요." 그들 모르게 - 당연하겠지만 - 그들의 대화를 선애에게 열심히 통역 해주던 나는 잠시 멈칫 거렸다. [선인? 선인이 뭐지? 이 대륙에 있는 유사 인종인가?] 그러자 내 곁에 있던 아리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우리 엘프를 여기에서 선인이라고 불러요.] [에에? 선인이 엘프였어요?] 내 말에 아리아가 싱긋 웃으며 설명해 줬다. [이 대륙에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 우리 엘프의 생활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게다가 약초에 대한 지식과 주술에 대한 지식을 높이 평가했던지 선인이라고 부르며 존중해 준답니다.] [오오...] 아리아의 설명에 흥미를 느끼며 귀를 기울이는데 선애의 다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언니, 통역, 통역./" [아아 그래, 그래.] 선애의 재촉에 나는 아리아에게 나중에 이야기 하자는 사인을 보내고 얼른 사다함 일행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잠깐 대회를 놓치기는 했지만, 대화의 내용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다함과 오사함, 그리고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귀공자 예흔랑은 렌스버리의 말을 믿지 못하고 무슨 속임수가 있는 거라 여기고 있었으며 무사측인 백운과 고수 기파랑은 정말 독에 영향을 받지 않을 무슨 방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허허허, 기대협은 상인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구려. 대협 같은 고수야 내공으로 독을 막을수도 있다 하지만, 저들은 보통 상인이올시다." 사다함의 말에 '고수' 기파랑이 우리 일행쪽으로 힐끔 시선을 주더니 대꾸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확실히 저 자는... 모르는 일이오." 기파랑의 말에 그들 일행의 시선이 렌스버리에게 향했다. 그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모든 일행이 동의하는가 보다. "저 자가 문제인가? 허면, 저 자만 확실히 제압한다면 그의 말이 허풍이냐 진심이냐며 싸울 필요가 없이 모든게 정리되는 거 아닌가?" 귀공자 예흔랑의 침착한 말투. 난 그 이야기를 통역하며 속으로 쓴 웃음을 흘렸다. '맞는 말이야. 허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게 문제겠지. 물론, 그렇게 해준다면 우리로써야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다함은 반색을 표하고 백운은 눈을 반짝 빛냈지만, 오사함과 기파랑이 동시에 고개를 저어보이는 것이었다. "위험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오나, 저는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예흔랑은 설마 기파랑이 그리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대가 그리 말할줄은 몰랐소만... 저 자가 그 정도란 말이오? 기껏해야 나보다 몇살 위로 보일 뿐인데. 하다못해 한번 해볼만 하다도 아니고..." 렌스버리의 외모야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긴 했다. 예흔랑의 말에 기파랑이 밑으로 자연스레 내리고 있던 오른 팔을 들어 올렸다. 밑에 늘어뜨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의 오른손은 주먹을 꽈악 쥐고 있었는데 사람들 앞에 그 손을 펴 보였던 것이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백운과 오사함만은 움찔 놀라는 표정 이었다. 단지 상회에 소속 된, 머리 좋은 꽃미남인줄만 알았는데 오사함이 아무래도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대협..." 신음성을 흘리는 듯한 백운의 목소리에 기파랑이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제가 저 자와 맞선다고 생각만 하는 것만으로도 제 주먹이 덜덜 떨리더군요." "그런..." 기파랑의 자신 없는 말에 사다함과 예흔랑의 눈이 커졌다. "그럼... 기대협과 백운이 합공을 한다면 어떨까요?" 오사함의 말에 백운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그 동안 마치 석상처럼 움직임이나 말도, 감정도 극도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가 크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자 내가 다 놀랄 정도였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어서 예흔랑까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자 백운이 창피했던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기파랑이 가볍게 웃는 거였다. "젊었다는 건 좋은 거죠. 불가능해보이는 상대라 해도 계속 도전해 보고 싶은 열정이 샘 솟으니." 그러나 마냥 웃고만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으니... "지금 웃고 계실 때입니까? 기 대협과 백운군을 투입하다니요. 아니될 말씀입니다." 사다함이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예흔랑은 렌스버리의 실력 체크에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아, 그냥 한번 물어보는데 뭘 그렇게 흥분하시오? 어떻소, 기 대협. 기 대협과 백운이면... 내 생각에는 가능할 거 같은데?" 예흔랑의 재촉에 기파랑은 백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리더니 오사함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 탁자 너머로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의 눈빛이 마치 얼음 송곳 같다는 느낌이 들어 몸서리가 쳐졌다. 내가 이런데 바로 코 앞에서 그 시선을 받는 오사함은 아마 한 겨울에 팬티만 입은 채로 차가운 얼음 계곡 물 속에 빠지는 느낌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 했건만, 오사함은 눈 하나 꿈쩍도 않은채 그 샤방~ 한 미소만 보이는 것이었다. "저에게 볼 일이 있으십니까?" 게다가 그가 꺼낸 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기파랑이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과연... 저와 사함군, 그리고 백운이라면... 완전한 제압은 불가능 하더라도 일행들이 제압 될 때까지 최소한 버티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사, 사함군이 말입니까? 아니, 잠깐... 그건 그렇다치고... 셋이 덤벼도 불가능 하단 말입니까?" 사다함의 경악한 어조에 기파랑이 씨익 웃어보인다. "나머지 일행을 제압하는데 너무 시간이 걸리면 오히려 우리가 당할 지 모르니 조심해야 할 겁니다. 공자, 어쩌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기파랑이 예흔랑을 바라보자 나머지 이들의 시선도 예흔랑을 향했다. 과연, 모든 일의 결정권이 예흔랑에게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일행들을 제압하는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안됩니다, 공자님. 정말 하시면 어쩝니까? 기 대협과 백운을 이 일에 투입하다니요. 그럼 공자님의 경호는 어쩐답니까?" 우리 일행, 정확하게는 렌스버리를 제압하는데 마음이 기울었다는 듯한 공자의 말에 사다함이 사색이 되며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예흔랑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차피 저 일행들은 모두 바쁠텐데 내 경호가 무슨 필요가 있겠소? 게다가, 나 또한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소." "아니되십니다. 그 귀한 몸에 상처 하나라도 생긴다면..." 사다함이 다시 펄펄 뛰려고 했으나, 예흔랑이 매섭게 노려보자 그는 찔끔하며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만. 사숙, 난 여기 보호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오. 내가 일에 방해가 된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지 않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해라니요." 사다함이 얼른 손을 저으며 말하려고 했지만 예흔랑이 이번에도 말을 잘랐다. "그럼, 지금 저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소?" "그러니까... 저 자의 말을 완벽히 믿을 수 없으니 그대로 밀고 나가시면..." "확실한게 아니잖소. 정말 저자의 말대로 독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어쩔 것이오?" "공자님, 기 대협도 저들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원래 상거래란 적당히 밀고 당기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을 쓴 것이 밝혀진 이 상황에서도 말이오? 이대로 한다면 우리에게 상당히 불리한 것 아니오?" "그... 그게..." "논쟁은 그만 합시다. 이 상태라면 난 차라리 강경하게 나가는 것이 더 났다 생각하오. 혹 더 좋은 의견 있소? 오사함?" 예흔랑이 오사함을 바라보자 오사함은 샤방~ 한 미소를 띄우며 허리를 숙여 보일 뿐이다. "저는 공자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오사함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예흔랑이 흡족한 미소를 띄운다. "좋습니다. 밖으로 연락 하십시오. 이번 일의 지휘는 기대협, 그대에게 맏기겠소. 사숙은 밖에서 연락이 올때까지 저들을 맡아 주십시오. 그리고 신호가 오면 나랑 뒤로 물러나 있읍시다. 그럼 되겠소?" 단호한 결단력과 명령을 내리는 거 보니 과연 온실 속에서 고이고이 자라기만 한 도련님은 아닌 모양이다. 예흔랑의 말에 사다함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들의 말을 잽싸게 통역하자 선애가 킥킥 웃었다. 그리고는 토냐에게 - 선애의 왼쪽에는 소피가, 오른쪽에는 토냐가 앉아 있었다. 렌스버리는 일행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 속닥거렸다. "토냐님, 저들이 우리를 제압한대요." "우리만?" "렌스버리님을 집중적으로 노린다는데요?" "오옷, 이런 횡재가 다 있니? 만약을 대비해 실드를 준비해야겠군." 렌스버리에게는 별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알려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일행이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뭔 꼬투리를 잡힐까 무서워서 그의 옆에 앉아있던 로어가 슬며시 그에게 조심하라는 식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놀랍게도 렌스버리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눈치로 때려 맞춘건가 생각 했는데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저들의 대화를 알아 듣는 것 같았다. 하기야, 따지고보면 아리아가 이쪽 대륙 출신이었으니 이 대륙의 언어를 좀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기도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으면서 말할 생각이 없었단 말이야? 정말 도움이 안 되는 놈이라니까.' 나는 차마 노골적으로 노려보지는 못하고 곁눈질로만 힐끗 보며 속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그 말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사다함의 대외용(?) 어조의 말에 오사함이 번역을 시작했다. 저들의 말을 빌리자면 바깥에서 신호가 올때까지 우리를 맡으려는 거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렌스버리는 느긋했다. 하기야, 저 놈이 느긋하지 않을때가 어디 있었던가? "내 아까 '진실'을 말한다고 한 것 같은데? 하지만, 믿고 안 믿고는 그대들의 자유겠지." "사실이라면 정녕 놀라운 일이군요.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오사함의 통역을 들은 렌스버리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였다. "안돼지, 안돼. 자네들은 상인이면서 왜 이러시는가? 거래란 당연히 주고 받는 거 아니던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저 자식... 완전히 놀고 있잖아?' 렌스버리의 느긋한 말에 사다함의 인상이 못마땅하다는 듯 찡그려지는게 보였지만, 그건 아마도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일 거라는데 나는 내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사다함이야 그렇다치고 렌스버리 녀석도 저들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 아주 즐겁게 의도에 장단 맞춰 놀아주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우리 일행이 저들에게 습격 당하는 꼴을 보고싶은 건가? '핫, 그렇다면... 조금 있다가 저들이 습격해올 때 우리에게 조금도 도움이 안 되겠군?'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내 느린 두뇌가 오랜만에 팽팽 돌아가는게 느껴졌다. '렌스버리에게 세 사람이 들러붙는다고 했지만 -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고수들일 거다.- 렌스버리가 그들에게 제압은 안 당하더라도 최소한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아채서 한 사람이라도 빠져 나머지 일행들을 공격하는데 가담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왠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선애야 소피하고 토냐에게 방어 위주로 하지 말고 공격할 준비도 하라고 그래. 아무래도 렌스버리님의 도움을 받기는 어려울 거 같아.] 아라이가 옆에 버티고 있는 관계로 우회적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선애는 충분히 알아 들은 듯 몸을 살짝 긴장시키며 토냐와 소피에게 작게 속닥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노크 소리 후 문이 열리더니 여섯 정도의 시종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탁자를 치워드릴까요?" 정말 탁자를 치우려는 양 커다란 쟁반을 줄줄이 들고 온 그들에게 오사함이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채 우리 일행을 바라봤다. "치워도 되겠습니까?" 기실 탁자 위에는 거의 손을 안 댄 - 렌스버리놈이 애들이 채 몇번 먹기도 전에 독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 많은 음식들이 차갑게 식어서 거의 내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아, 치우게." 렌스버리의 허락에 오사함이 시종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아무래도 시작한 거 같지?] 내 말에 선애가 소피와 토냐에게 가만히 신호를 보냈다. 오사함의 손짓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깊숙히 허리를 숙여보인 후 다가온 시종 일행들이 커다란 접시에 음식들을 옮겨 담는다고 부산을 떨어댔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주시한 채 여차하면 선애를 잡아 끌 요량으로 선애의 뒷덜미에 손을 올린 채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자 과연, 커다란 쟁반에 음식들을 절반 정도 담았을 때, 탁자 건너편에서 여전이 예흔랑의 곁에 서 있던 기파랑이 움직였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싶은 순간, 어느새 기파랑은 공중으로 뛰어 올라 한 시종이 들고 있던 쟁반을 가볍게 발로 차 렌스버리에게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 위에 있던 음식 접시들까지 같이 날아가 잘만 하면 렌스버리 녀석이 그걸 온통 뒤집어 쓰는 아주 멋진 꼴을 볼.... 수 있었지만, 렌스버리가 어디 그리 만만한 녀석이었던가? 나야 기파랑의 모습이 잠깐 사라지자마자 선애의 뒷덜미를 냉큼 잡고 뒤로 물러나느라 잘은 못 봤지만, 나중에 보니 렌스버리의 몸에는 음식물은 커녕 소스 한 방울도 안 묻어 있는 거였다. '젠장, 기파랑씨 잘 좀 하시지요~!' 그러나 솔직히 나도 속 편히 기파랑을 응원하고 있을 입장은 아니었다. 기파랑이 움직이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같이 움직였던 것이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음식 접시를 치우겠다고 들어온 시종들은 다 저 녀석들과 한패거리였다. 게다가 그 여섯 시종 뿐만이 아니라 문 밖에서 네 명의 시종이 더 뛰어 들어온 것이었다. 확인은 안 해봤지만, 아마 바깥에 몇명은 더 있을 거였다. 그렇게 열명의 시종은 모조리 렌스버리를 제외한 나머지 우리 일행에게 덤벼 들었다. 기파랑이 움직이자마자 내가 잽싸게 선애를 들고 뒤쪽으로 물러나서 선애는 온전했지만, 긴장하고 있었던 토냐와 로어는 한 발 늦어 그 시종 녀석들이 던진 음식 접시를 맞고야 말았다. 다행이 무조건 뒤로 물러나느라 큰 피해는 없었지만, 저녁 식사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음식물 세례를 받은 토냐는 무척이나 분노했다. "이 자식들이! 라이트닝 볼트!" 첫 방에 큰 효과를 보고 싶었던지 토냐는 강한 마법을 선사했다.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허공에 대여섯개의 번개가 형성되더니만 그것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막 우리에게 검을 들고 달려드는 시종 차림의 녀석들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좋았다. 아무도 토냐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지 마법에 대한 방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다섯명이 번개를 정통으로 맞고 뒤로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뒤의 다섯이 잽싸게 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번개가 철을 향해 달려드는 것만은 피하지 못해 전기에 감전된 검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 놈들은 얼마나 대단한 훈련을 받은 녀석들이었던지 비록 검을 들었던 오른쪽 팔들을 그을리긴 했지만,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곧바로 덤벼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뒤로 세 명의 놈들이 뛰어 들어와 같이 달려들었다. 토냐의 마법을 한번 본 뒤라 그런지 앞서 달려드는 다섯 녀석들은 떨어뜨린 검은 냅두고 그냥 맨 손으로 달려 들었다. 그런 그들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토냐가 다시 시동어를 외치려는 찰나!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뒷쪽에서 세개의 단검이 날아드는 것이었다. "꺅!" 비록 공격 마법에는 능통한 그녀였지만, 실전 경험은 별로 없었는지 그 모습에 대경실색하여 몸을 숙이고 말았다. 다행이 소피가 나서서 세 단검들을 쳐냈지만, 그 틈을 타서 놈들이 우리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가만 내비둘 내가 아니었다. 푸확확~!! 이번에는 자신 있는 걸로 작심을 하고 있었던 터라, 달려들던 녀석들 코앞에서 아주 뜨거워 보이는 불의 장벽을 세울 수 있었다. 아까 전기의 짜릿함에는 버틸 수 있었던 녀석들도 이 불의 장벽만은 안되겠던지 '헉!' 하는 신음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는 기색이 비춰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타악~! 하는 가벼운 발 구름 소리와 함께 두 녀석이 높이 솟아 올라 불의 장벽을 뛰어 넘으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불의 장벽 너머에서 누군가가 발을 받쳐 허공에 띄워주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토냐의 매서운 마법이었다. "매직 미사일!!" 덕분에 두 녀석이 다시 고스란히 불의 장벽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잠시 여유를 가지고 렌스버리 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랬더니, 과연... 이라고나 할까? 렌스버리 놈 세 사람의 공격을 아주 유연하게 살짝 살짝 피하기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여유로운 그 몸놀림으로 보아하니 세 사람을 제압하는 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겠구만, 특히나 렌스버리의 전공은 체술이 아니라 마법이 아니던가? '역시 도와줄 마음 따윈 없잖아?' 녀석을 째려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그때, 갑자기 촤아악~ 하더니 내가 일으킨 불의 장벽을 향해 물이 끼얹어지는 것이었다. 나의 조정을 받는 불이라고 해도 과연 물에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인지 녀석들이 두어 양동이 정도의 물을 끼얹자 푸시식 하면서 꺼져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 불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자 전보다는 기운이 두배 이상 드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나설게!" 토냐의 외침에 나는 내 의지를 끊어버렸고 그와 함께 불의 장벽이 사라졌다. 너머에서 각각 나무 물통을 든 세 명의 시종들이 움찔 하는게 보인다. 그들이 토냐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물러났지만, 토냐의 마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워드!" 그러자 허공에서 척 보기에도 끈적끈적해 보이는 거미줄이 수십가닥이나 나타나 놈들을 향해 덥쳐 들어갔다. 녀석들이 침착하게 그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녀석들을 향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거미줄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나 거리의 제약이 있는 이 방에서는 더욱 더. 과연 녀석들은 몇번이나 몸을 피하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검을 들어서 자신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미줄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이 거미줄은 끈끈한데다가 탄력이 있어서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고 해도 쉽게 잘라지는 것이 아닌데 이들을 그것들을 베고 있는 것이었다. 불 아니면 냉기, 그게 아니면 제거하기 어려운 것을 베어버리다니 아무래도 저들 또한 보통 실력자가 아닌 모양이다. 물론, 다는 아니고 다섯명만 쉽게 잘라내고 나머지들은 거미줄이 꽁꽁 묶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결심만 확고하게 해주었다. '안되겠어.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대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거야.' [선애야, 내가 나서야겠어.] "/뭘 어쩌려고?/" [인질을 잡으려고. 저 녀석이 여기에서 가장 귀한 신분이니 저 놈을 잡으면 꼼짝 못할거야. 내가 잽싸게 갔다 올테니까 그때까지만 조심하고 있어.] 내 말에 선애도 지금 이대로는 어렵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빨리 갔다 와./" [오키!] 무기는 많았다. 아까 처음에 토냐의 번개를 맞고 녀석들이 떨어뜨린 검도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후에 토냐를 저지하기 위해 날아온 단검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나는 근처에 있던 단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어차피 위협용이라 길거나 짧은 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움직이기 편한 걸로 고르는게 더 유익이었다. 단검을 집어 든 나는 지체없이 방 한쪽 구석에서 사다함과 함께 시종 차림을 한 세 녀석의 호위를 받으며 피신해 있는 예흔랑에게 향했다. 녀석들에게 단검을 들키지 않으려고 단검을 입에 물고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기어서 녀석의 머리 위까지 도착한 나는 단검을 들고 그대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반은 화풀이로, 반은 나의 존재를 알리고자 감정을 담은 발을 들어 사다함을 걷어찼다. "쿠엑!" 사다함과 예흔랑을 둘러싸고 등을 보이고 있던 이들이 놀라 고개를 돌리는 사이 나는 사뿐이 바닥으로 내려선채로 단검을 예흔랑의 목에 들이대었다. "헉, 다, 단검?" "누구냐? 이게 무슨 사술이냐?" "공자님!" 다른 녀석들은 왠만한 통증에는 신음 소리 하나 안 내던데 이들은 그런 교육은 안 받았는지, 아니면 통증에는 소리 안 내는 대신 놀라움에는 소리를 크게 내는 건지, 하여간 그 세 호위 녀석들이 소리 치는 바람에 방 안은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자님!" 렌스버리를 상대하던 - 아마 놀아주던... 이 좀 더 정확하겠지만... - 세 고수들이 달려왔던 것이다. "누구냐?" 예흔랑의 목에 겨누어진 단검을 보던 기파랑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얼마나 큰 소리로 외쳤는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움찔 할 정도였다. "저기요~ 조금 비켜주시겠어요? 안 보이는데..." 확실히 예흔랑 주위를 사람들이 둘러싸는 바람에 선애의 모습이 안 보였다. 선애의 갑작스러운 말에 기파랑의 분노에 찬 시선이 선애를 향해 돌아간 모양이다. 선애가 움찔 하며 뒤로 물러나자 소피가 얼른 나서서 선애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한 짓이냐?" 분노에 찬 기파랑의 목소리에 열받은 나는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예흔랑의 머리카락 몇 개를 잡아 뽑아버렸다. "아앗!!" 갑작스러운 통증에 예흔랑이 자기도 모르게 약한 비명 소리를 지르자 기파랑의 고개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휙 하고 급박하게 돌아왔다. "아.하.하... 그, 그게..." 그의 시선에 예흔랑이 미안했는지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내가 다시금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뽑았기에 그는 다시 움찔 거리며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뭐, 이번에는 신음소리를 안 내려 입을 꾸욱 다물었지만, 인상이 찡그려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나보다. "이 무슨 짓이냐? 이 분이 뉘신데 감히!! 저 분의 안전에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한다면 내 기필코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기파랑이 다시 선애를 향해 분노에 찬 외침을 터트리자 토냐가 만만치 않게 화난 모습으로 나섰다. "웃기시네. 지금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당신들때문이잖아, 당신들!!"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소매를 걷어 부친 채 삿대질까지 하며 토냐가 펄펄 뛰자 찔리는게 있던 기파랑이 움찔 하더니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더니 침착한 어조로 선애를 향해 말했다. "소저, 이 분을 놓아주시오. 그럼 그대들이 원하는 바는 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소." 그가 한결 침착한 음성으로 말하자 그제야 선애가 소피의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선애를 향해 나는 목청을 높여 마음껏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이 녀석 보고 천천히 걸어서 네 곁으로 오라고 그래. 아아, 우선 주변 녀석들부터 좀 떨어지라고 해라.] 내 말을 들은 선애가 목을 험험 가다듬고 기파랑을 향해 입을 연다. "죄송하지만, 여러분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요. 우선은 그 주변에 있는 분들부터 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선애의 말이 오사함을 통해 통역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예흔랑의 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놈들이 어떻게 단검이 허공에 홀로 떠서 예흔랑의 목을 겨눌 수 있는지 알기 위함인 듯 눈을 부라리며 뚤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선애야, 셋 셀동안 안 떨어지면 피 본다고 그래라.] 사실... 살짝 찔러서 조금만 피 볼 자신은... 요~~ 만큼도 없었다. 중등학교때 과학 시간에 혈액형 검사 해볼때도 약간만 찔러 피 한두방울만 내면 되는 것을 아무리 찔러도 안 나오길래 열받아 푹 찔러서 피를 뚝뚝 흘린 전적이 있는 나였다. 더구나 지금은 힘 조절을 완전히 감으로 하고 있는 상태라 피 본다고 하다가 잘못해서 푹 찔러버릴지도 모르는 나였다. 그러니 선애에게 말한 건 순전히 엄포였다. 내 말을 들은 선애는 무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제 말에 따라주지 않으신다면 피를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러길 원하십니까? 숫자라도 셀까요?" "소저! 내 진심으로 충고하건데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기파랑의 기세가 다시 매서워지자 선애가 움찔 거렸다. 하기야, 기파랑의 기세는 나 조차도 무서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자 토냐가 나섰다. "그럼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아니면 다시 한번 해볼래요?" 기파랑 못지 않게 매서운 토냐의 말에 나에게 붙잡힌 예흔랑이 나섰다. "그만하고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하시오." "하지만 공자님...!" 백운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나섰지만 예흔랑도 단호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대치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우리 계획은 실패했고 칼자루는 저들이 쥐고 있으니 일단은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저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 혹 딴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사다함이 무지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말하자 예흔랑이 피식 하고 웃었다. "애초에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우리가 아니었소?" "만약을 대비했을 뿐, 정말로 저들을 해칠 생각은 없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작전을 성공시켰으면 모르되, 지금 그건 변명거리밖에 안 되오. 실패했으니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 아니오?" '호... 역시 대단한데? 알지만 그렇게 하기는 힘들텐데...' 그의 말에 감탄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감동 + 감탄 + 안타까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공자님..." "그럼 이제 물러나시오." 예흔랑의 말에 기파랑이 비장한 어조로 속삭였다.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뒤에는 저희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말을 들으니 무척이나 든든하오." 예흔랑 또한 결연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예흔랑의 곁에서 떨어진 기파랑이 손짓하자 예흔랑 주위에 바글바글(?)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서너발자국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예흔랑이 방 건너편에 있는 선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소저?" 자신이 인질이 되자 직접 선애를 상대할 모양이다. "그걸로는 좀 부족한데요?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천천히 걸어 오시기 바랍니다." 선애의 말에 예흔랑이 뭐라 하기도 전에 사다함이 결사적인 어조로 외쳤다. "그건 아니되오. 절대 아니되오. 이 정도가 좋지 않소?" 사다함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까지도 막으려는 양 예흔랑의 앞을 막자 토냐가 나섰다. "그럼 중간 정도로 타협 하지요. 완전히 이쪽으로 와 주시지 않는 대신 그쪽 일행들과도 될 수 있는 한 많이 떨어졌으면 하거든요. 중간 정도에 홀로 서 있는게 어떨까요? 이게 최대한 양보한 거니 여기서 더 양보해 드릴수는 없습니다." 토냐의 말에도 녀석들은 여전히 불만에 찬 표정이었지만 예흔랑이 나서서 수락했다. "좋소. 그러리다." 그리하여 그 방은,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이제는 완전 난장판이 된 거실에는 새로운 대치 국면을 맞게 되었다. 우선은 기파랑 등등의 일행이 선애네 일행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예흔랑이 빠져나와 그들 가운데에 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거실 정 중앙에 선 것이 아니라 벽 가까이에 서 있었는데, 그가 선 곳은 바깥에서 여길 들어오는 입구의 맞은편이었다. 입구에는 아마 밖으로 빠져 나가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한 새로운 무사 셋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시종으로 위장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리고 있는 폼이 여차하면 발검할 것 같았다. 단 세명을 가지고 우리를 막을 생각을 하다니, 아마 실력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그 전에 우리를 공격했던 이들은 다른 이들에 의하여 방 밖으로 옮겨지고 없었다. 그렇게 모두 자리를 잡고나자(?) 그동안 조금도 도움이 안되던 렌스버리 녀석이 심히 한심스럽단 표정을 지으며 나서는 거였다. "쯧즛, 내 기껏 양 상회의 관계를 위하여 몸소 나서기까지 했건만, 사람들이 말이야..." 렌스버리의 말에 예흔랑을 비롯한 일행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긴, 찔리는 구석이 없다면 그건 아예 양심도 없다는 소리겠지? "변명은 않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나에게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비굴하지 않고 요점만 집어 묻는 예흔랑의 모습은 솔직히 감탄스러웠다. '헤, 이것봐라...' 그와함께 녀석에 대한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뭐랄까... 괜한 화풀이로 상처 내기 아까운 녀석이라는 느낌? 그런 느낌이 나 뿐만은 아닌 듯 분노로 인하여 무섭게 굳어있던 우리쪽 일행들의 얼굴이 살짝 풀리는게 보여졌다. 그리고 선애와 로어, 토냐가 눈짓을 주고받는게 보이더니 - 대충 토냐는 선애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 같았고, 로어가 몇가지 언질을 주는 것 같았다. - 선애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말했던 건데, 우리에게 독을 사용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선애의 질문이 좀 뜻밖이었는지 예흔랑을 비롯한 일행들이 약간 당황한 표정이다. 이들은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돈을 달라던가 거래의 유리한 고지를 달라고 할 줄 알았나보다. 그러나 그런 걸 요구하는 것도 우선 이들에 대한 걸 파악하고 난 뒤의 일 아니던가? "그 전에 한가지 묻고 싶은데, 저희와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만약 이대로 헤어질 거라면 이유는 묻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요." 이번에는 예흔랑의 말이 또 뜻밖이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손쉬운 요구라고 생각 했는데, 거래를 안 할거면 묻지 말라니. '그럼 끝가지 이유를 들으려고 하면 거래를 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예흔랑의 말에 선애가 처음에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지만 곧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토냐와 로어가 뭐라고 속삭이자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던 선애가 곧 생각을 정리했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고 싶지만, 여러분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설득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라면 거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저희쪽에 빚이 있으니 저희쪽이 유리하더라도 양해해 주실거라 생각합니다. 아, 이번에는 정말 진실을 말씀해 주시겠지요?" 선애의 말에 예흔랑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후후후... 진실이라, 좋은 말이지. 그러나 좋은 만큼 어려운 일이야." 느긋하게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방관자의 자세를 잡고 있던 렌스버리가 갑자기 끼어들어 툭 던진다. '뭔 소리야... 또?' 그러나 나에게는 황당한 말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무지 심각한 어조로 입을 꾸욱 다물고 있던 예흔랑이 내가 목에다 단검을 들이대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그대로 렌스버리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이었다. 덕분에 놀란건 나였다. '힉, 하마터면 찌를 뻔 했잖아? 뭐야, 이 자식! 갑자기 움직이고!!' 이런 내 심정과 자신의 수하들이 기겁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흔랑은 진심을 담아 렌스버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거였다. "귀중한 충고, 감사드립니다." 도대체 렌스버리의 말 어디를 봐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지는 지 모르겠지만, 정말 정중한 인사에 렌스버리 녀석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그 동안 보아왔던, 장난조나 비웃음이 아닌 정말 기분 좋은 미소였기에 그 녀석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던 일행을 놀라게 했다. 그 동안 알고 있었음에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그의 잘생긴 외모가 그 미소 하나만으로 정말 눈부시게 빛났던 것이다. 뭐, 그의 외모가 만들어진 거라고 해도 잘 생긴 건 잘 생긴 거였다. 하여간, 그렇게 난생 처음보는 렌스버리의 미소때문에 절반 정도 빠져나간 우리 일행의 얼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놔준건 예흔랑이었다. "이렇게 우리를 정식으로 소개하게 되어 죄송스럽습니다만, 아무래도 우리의 신분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이야기를 진행 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예흔랑의 서두에 사다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 공자님!" 얼마나 다급했던지 예흔랑이 있던 곳으로 뛰어 오려는 그의 움직임을 제지한 것은 기파랑이었다. "기다려." "하지만, 기대협!" "공자님께서 결정하신 일. 우리는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네." 처음에는 예흔랑이 위험해질까봐 사다함이 함부로 움직이는 걸 제지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예흔랑의 결심을 지지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 기파랑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낸 예흔랑이 선애 일행이 있는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더니 허리와 어깨를 펴 몸을 곧추세웠다. 그와 함께 얼굴 표정에 진지함을 담자 뭔가 그에게서 위엄이라고나 할까? 카리스마... 라고 하기는 좀 부족하지만, 그래도 남들 위에 서서 사람들을 지휘하는 사람만이 풍기는 그러한 기운을 풍기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나는 한국의 네번째 왕자 예흔랑이라 하오." '왕자?' 귀공자인 건 알았지만, 설마 왕족, 그것도 한국의 왕자일 줄 몰랐던 일행들은 그의 소개에 놀라움으로 눈이 둥그래졌다. "전하아..." '결국 말해버리고 말았어어~~!'라고 온 몸으로 외치는 사다함의 비통한 어조가 뒤에서 들려 왔지만, 예흔랑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선애 일행들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를 바라는 듯한 시선에 선애가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자, 선애 뒤에 있던 로어가 작게 속삭인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 하길 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기... 왕족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그에 선애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나에게 보냈지만, 나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시 그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걱정 말라는 제스츄어를 선애에게 보낸 뒤 천천히 단검을 바닥에 내려놨다. 예흔랑의 일행들이 안도의 표정을 짓는 걸 보고 피식 웃은 나는 선애의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선애는 자신의 일행들을 다시금 정식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저희는 바이런이라는 나라에 있는 타이거 상회 소속 사람들이 옵니다." "나 역시 그대들을 만나서 반갑소. 이쪽은 내 수행원들이오." 그렇게 말해서 다시 소개받은 사다함은 외교부 소속 대신이었고, 기파랑은 왕실 수호대 소속 무사, 백운은 같은 소속이면서 예흔랑 전속 경호원이었다. 오사함만은 나라에 소속된 이가 아닌, 한국을 대표하는 커다란 상회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단순히 소속된 것이 아니라 그 상회의 주인이었다. 그것도 맨 손으로 상회를 일으켜서 크게 번창시킨 초대 상단 주인이라는 것이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에 상회를 일으키고 번창시켰다는 것에 놀랐지만, 사실 그의 나이는 102세로써 하프 엘프였었다. 엘프들을 선인이라 해서 존경하는 사회이다보니 하프 엘프들도 가끔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직접 자신들에 대해 모두 이야기를 해주었기에 우리 일행들도 스스로에 대하여 정식으로 다 밝혔다. 그래봤자 대부분 그들이 짐작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토냐가 마법사라는 거야,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때 이미 알아챈 사실이었고, 선애가 타이거 상회의 이사라 했을때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단지 서대륙 사람으로 보이는 선애가 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에 의아해 하며 서대륙 어느 나라 출신인지 다시 한번 밝히고 싶어 했지만, 선애는 그에 대해서 함구하고 단지 어려서 풍랑을 맞아 아벤티노 대륙으로 넘어간 거라 이쪽 말은 다 잊어버렸다고 둘러댔다. 기실, 나중에 선애가 말해주길, 자신은 한국(?)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걸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하기야, 나라 이름이 같다 해도 차원이 다른 곳에 있는데 어찌 언어까지 같을 수 있겠는가? 그걸 아는데도 선애는 아예 못 알아듣자 약간 서운했던 모양이다. 선애가 한국 출신이라는 걸 아는 소피는 선애가 아무것도 모르는체 하는 것이 일부러 의도하는 건 줄 아는 눈치였다. 그리고 로어가 선애의 보좌관이고 소피가 선애의 경호 무사라고 할때도 그들은 납득했다. 서대륙의 높으신 분들 중 여성들 사이에서는 여 무사를 경호 무사 겸 시녀로 두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소피의 경우도 놀랍다는 대신 '그렇군.'하는 눈치였다. 사실, 우리는 원래 소피는 숨겨진 한 수로 단순히 선애의 시녀라고 소개하려고 했지만, 기파랑이 어느새 소피가 상당한 실력을 가진 무사라는 걸 알아채버린 상태라서 사실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렌스버리를 소개할때 상회 소속이 아니라고 하자 사다함과 기파랑의 눈이 번쩍 빛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자기들쪽으로 스카웃 할 생각인가 보다. '부디 그래주길~~' 아마 이런 내 마음은 우리 일행의 공통적인 심정이 아닐까나? 자신들에 대하여 솔직하게 털어놔서인지 그 뒤로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서도 솔직 담백 하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생각 외로 좀 방대한 면이 있어서 다 들으려니 시간이 꽤나 지나 있었다. 뭐, 이야기를 하다보니 분위기가 좋아져서 좀 있다가 자리를 옮겨 - 그 방은 완전 난장판 이었으니 말이다. - 새로 차려진 야식과 차를 나누면서 대화를 할 정도였다. 그들이 왕족, 그것도 현재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왕자를 데리고 타국에 와서 상인으로 위장하여 거래를 하려는 이유를 설명하다보니 필연적으로 그들 나라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 되었다. 한 나라는 '예'씨 성을 가진 초대 왕이 200여년 전에 세워 서대륙의 세 나라 중 가장 강대한 나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게 '예전'일이라는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초대 왕과 그 밑의 두 왕 정도는 능력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나머지 두 나라를 합친 것만큼이나 거대한 국토를 수립하고, 두 나라가 뒤로 조약을 맺어 견재해옴에도 불구하고 코웃음 치고 넘어갈 정도였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랬으면 뭐 하는가? 지금은 자기네 국토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진나라에 밀리는 실정인데. 그리하여 진 나라의 독주를 막기 위해 수 나라와 조약을 맺은 게 바로 전대 왕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 나라의 독주를 막는데 2%가 부족 했으니... 그렇게 서대륙의 3/4나 되는 - 한 나라와 수 나라 합쳐서 -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 나라가 진 나라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는 간단했다. 진 나라가 서대륙의 경제를 한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돈의 위력이란... 위대하다니까.' 그 부분을 이야기할 때 사다함과 오사함은 분통이 터지는지 무척이나 흥분을 했다. 그 동안 하소연 할 곳이 없어 쌓이고 쌓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진 모양이다. 속에 능구렁이 몇 마리는 품고 있는 듯하던 사다함과 상큼한 이미지의 오사함이 감정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자니 웃기기도 하고 왠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적'이라 간주하고 털을 세우던 상대가 갑자기 속 살을 내보이니 경계심이 누그러지며 인간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려면 목욕탕에 가야 한다더니, 그것과 같은 건감?' 그들이 그렇게 분노하는 건, 두 나라 모르게 살금 살금 손을 뻗쳐 어느새 서대륙 전체의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위력을 차지한 진 나라가 아니었다. 바로, 그렇게 될 때까지 모르고 방치한 자국에 대한 분노였다. 진 나라가 그렇게 되는 동안 정말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리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모르더라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거나 경계심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한 건 소수고, 나머지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무시해 버렸으니 이 지경까지 된 것이리라. 오사함은 자국 정부의 한심한 작태를 한탄한 정도였지만, 사다함은 직접 '뭔가 수상하다. 조심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던 소수의 사람 중 한 사람이었기에 속에 쌓이고 쌓였던 감정은 더욱 더 컸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서대륙에서 손꼽히는 커다란 강이 흐르는, 기름진 곡창지대가 여러곳을 포함한, 아주 넓고 기름진 국토와, 진 나라의 눈치를 보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러한 국토를 굳건히 지켜낼 수 이었던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경제력이 뒷쳐지게 된 이유도 정말 간단했다. 경제력의 가장 큰 원동력이자 든든한 기둥이 되는 상업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긴 했지만 계급 사회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왕족 외에는 모두 다 평민이라 귀족이 없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능력만 있고 학문을 배웠으면 누구나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나면서 - 왕족을 제외하고 - 정해진 계급이 없다보니 직업으로 계급이 생겨 버렸던 것이다. 솔직히 한국에서도 직업에 귀첞은 없다고 부르짖어도 소위 말하는 '3D 직종' 해서 기피하는 직업과 너도 나도 되고싶어하는 선호 직업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는 직업 가지고 계급이 나뉠 정도로 귀천 구분이 무척이나 심하다 한다. 위에 있는 건 정부에 등용될 수 있는 학식이나 무예를 가진 사람들. 그나마 '무'를 천시 안 하는 게 다행이랄까? 그랫다가는 진 나라에 영토를 다 빼앗기던지, 아니면 고려의 무인시대처럼 무인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켰을지 모른다. 그만큼 직업 차별이 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라고 해야 할지,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직업 귀천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덕분에 상업은 발달하지 못했고 사치를 위한 공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 나라는 달랐다. 뭐, 수 나라도 딱히 상업을 천시하는 건 아니라 꽤 발달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나라는 지리적으로도 타국이 쉽게 침입할 수 없게 고립되어 있는데다 환경도 두 나라에 비해 훨씬 좋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고 매력이 없는 건 아니라서 외세의 침입이 가끔 있었지만, 수 나라의 국민들은 위협이 닥치면 위에는 왕 부터 온 국민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로 똘똘 뭉치는, 강한 단결력을 가진 민족이라 타국의 탐욕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강력한 특수 군대가 있어서 한 나라와 서대륙에서 최고의 군대 자리를 놓고 싸울 정도라 한다. 그런데도 민족성이 또 전쟁은 안 좋아해서 타국으로 침입해 들어간 역사가 없다고 한다. 그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겨우 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한 나라나 500년 약간 안되는 역사를 가진 진 나라에 비하여 천년의 역사라는 긍지를 가진 곳이라 한다. 그러니 국력이 약하다 해도 타국들에게 무시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단 3국 밖에 없으니 어느 한 나라를 견재하기 위해서는 꼬옥 필요한 나라이고 말이다. 필요하지만 침입 당할 염려가 없어 경계하지 않는 수 나라에 비해 진 나라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나라의 라이벌 국이라는 의식이 강해 정면으로 맞붙어야 했다. 200여년 전 한 나라의 초대 왕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군대도 한 수 아래가 되어버린 진 나라로서는 '돈'이라는 것이 한 나라를 상대할 최고의 무기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한 나라와는 달리 진 나라는 상업을 대우했기에 제법 상업이 발달해 있었다. 그런 진 나라가 서대륙의 경제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 대략 100여년전. 그때가 바로 바이런 제국의 루빈스타인 후작이 거의 독점적으로 서대륙과 교류를 활발하게 할 즈음이었다. 그걸 봐서 아마도 진 나라의 경제를 한 층 더 성장시킨 것에 아벤티노 대륙과의 무역이 한 몫 단단히 한 것이 틸름 없었다. 그러니 진 나라에서 아벤티노 대륙과의 교역을 어디 다른 나라와 같이 하고 싶어 하겠는가? 아마 철저하게 독점하기 위하여 교류한다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아벤티노 대륙의 존재에 대해서도 숨기고 싶어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진 나라가 그랬던 것이다. 처음 서대륙과, 정확히는 진 나라와 거래하기 위하여 이 곳에 온 루빈스타인 후작을 만난 것은 그 당시 진 나라 국왕의 친 동생이었던 광진대군 이어다. 둘이 만나게 된 경위야 모르겠지만, 그 광진대군은 현명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루빈스타인 후작과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이루자마자 자신의 형에게 아벤티노 대륙과 교역이 이루어질 항구 도시 '광진'을 자신의 영토로 얻어냈다. 그리하여 광진군령이 된 항구 도시는 오랜 세월동안 자칫 잘못하여 진 나라의 정권 싸움에 휘말릴 요지를 씻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벤티노 대륙에 대하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벤티도 대륙인은 광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머물'수는 있지만 직업을 가지는 것을 금지 시켰다. 광진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호패를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외지에서 들어 오거나, 혹은 외지로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괸리하였다. 게다가 아벤티도 대륙과 교역할 상인, 상단들은 그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항구 도시를 벗어난 후로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켰다. 그러한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진 나라가 아벤티노 대륙과의 교역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 노력은 여전했지만, 어떤 조직이든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사실, 지금까지 독점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무척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상인들이란 커다란 이익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한 레이더를 가진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아벤티노 대륙과 교역을 하는 상인들 대부분이 전국을 무대로, 심지어는 타국에까지 손이 닿는 대 상인들이다보니 아무리 조심에 조심을 하더라도 '광진'에 대한 이야기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는 어려웠을 거다. 그리하여 지금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비밀이 된 상태. 그러니 외지인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거래를 찾기 위하여 사람들이 꾸역꾸역 찾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일행 앞에 앉아 있는 한 나라 왕자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한 나라는 상업을 천시한다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던 로어가 심각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저희 입장에서야 한 나라와 새로 거래를 트게 된다면 반가운 일이지만, 그것이 한 나라 정부에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러분끼리 추진하느 거라면..." 로어는 미래의 안전성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기실 왕자님께서 몸소 나서주셨다 하지만 우리 눈 앞에 있는 왕자는 막말로 별로 파워가 없는 존재. 왕의 거부 한 마디면 찍 소리 못하고 물러나야 하는 입장이었다. 혹, 그가 남이 무시 못할 세력을 키우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는 즉시 계승 서열 제 1순위나 그 다음 서열의 왕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어 심한 태클을 받게 될 건 뻔한 일. 이래저래 버팀목으로는 약한 존재였다. 그래서 로어가 염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로어의 걱정을 예상 했다는 듯, 아니 오히려 물어봐주길 기다렸다는 듯 사다함이 무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다. "허허허, 그건 걱정 마십시오. 왕자님께서 여기 오신 건 국왕폐하의 명이셨으니 말입니다." '호오...' '상업 중흥'을 부르짖는 소수파 중 한 사람인 사다함의 얼굴을 활짝 피게 만든 국왕인거 보니 아무래도 경제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내 예상대로 15년 전 새로이 등극한 현 국왕은 국가 경제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리하여 등극 초기부터 국내의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한편, 2차로 외국과의 무역을 위한 물품을 개발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고 한다. 이번 일에도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왕자를 보낸 거라나 뭐라나. 그 말까지 듣고난 일행은 두말 할 것 없이 그들과 거래하기로 약속했고, 내친김에 물품을 보려고 했으나 시간이 너무 늦어 그건 내일 하기로 했다. 거래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수용하지 못할 것은 가려내야 하니 말이다. 거기까지 이야기가 되자 한 나라 왕자쪽에서도 기분이 업 되었는지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뭐,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것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생각이 있는 제안이겠지만, 우리야 늦은 시각에 다른 여관을 찾아가기도 귀찮은데다 내일 어차피 다시 와야 하는 불편이 있기에 그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가장 일행의 마음을 흔들었던 건 공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지만 말이다. 거기다 이런 난리까지 친 뒤에 이루어진 거래라 또 다시 우리에게 해를 끼칠 거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 여관 건물 한 층을 모두 다 빌리고 있었던 탓에 우리에게 제공한 숙소 또한 같은 층에 있었다. 게다가 오사함이나 사다함 등등이 사용하는 방 못지 않게 넓은 곳이라 일행은 만족스러워 했다. 뭐, 우선 렌스버리가 지적하고 사다함이 시인한, 한 나라 왕자 일행이 복용(?) 시켰다는 독을 해독하기 위하여 자기 전에 한 방에 모여야 했지만 말이다. 하긴, 내일 일을 위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도 나누기 위해 어차피 모였으려나? "아아... 정말 정신 없고 황당한 하루였어요. 아침에는 웬 녀석들이 잡겠다고 달려들고, 점심때는 여관에서 황당한 이유로 쫓겨나고, 거기에 길 잃고 헤매다가 얼결에 저 사람들을 만나고..." 선애의 말을 뒤이어 토냐가 킥킥 거렸다. "저녁 식사 대접한다고 해서 따라왔더니 독을 먹이질 않나, 통하지 않으니 직접 달려들어 제압을 하질 않나, 그런데 웃긴 건 그게 다 거래를 위해서 그런 거였다니..." "다른 사람 이야기라면 이해는 되는데, 직접 당하니 굉장히 분한 일이더라구요." 한 나라 왕자 일행이 우리에게 독을 먹인 이유는 상대편에게 당하고 싶지 않아서란다. 그들이 여기 온 지는 벌써 몇달 전. 외지에서는 이 곳 정보를 제대로 모을 수가 없는데다 거래 성립은 꿈도 못 꿔서 서류 조작에 뇌물까지 써서 어렵게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 두어달 정도는 차분하게 여기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있는데까지 모아서 드디어 한 상회를 물색, 계약까지 맺었는데 그들이 뒤통수를 쳤다는 것이다. 하기야, 하류 같은 조직이 어디 하나 둘 뿐이었겠는가? 그리하여 대금을 지불하지 않은 채 물건만 들고 튀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들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숨기 전에 눈치 채서 잡았기는 했지만, 그로 인하여 일어난 소동을 무마하느라 -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여러가지로 힘들었을 거다. -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번에 거래를 하게 된 상대는 신용이고 나발이고 우선 독을 먹이고 보자고 생각한 거라고 한다. 뭐, 그들로써는 괜찮으면 나중에 기꺼이 해독을 시켜줄 생각이었으니 크게 나쁘다고 생각지 않은 모양이고 말이다. "그런데, 저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다 믿어도 될까요? 특히나 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상업을 천시해서 발달하지 않았다는 거 나 같으면 밝히는게 꺼려졌을텐데 그걸 다 말하다니..." 선애가 은근히 걱정되는지 조심스레 말하자 로어가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건 그들이 거래를 오래 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니까요. 한 나라와 무역을 한다면 아마 그들은 광진을 통하지 않고 한 나라에 직접 아벤티노 대륙과 무역하는 항구를 만들고 싶어 할 겁니다. 그래서 왕래가 이루어진다면, 그런 이야기야 말 하지 않는다 해도 곧 알게 될 일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알게될 거 그들은 미리 밝혀서 나중에 약점이 되지 않게 한 걸 겁니다." "흠, 그래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자 토냐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아, 그럼 어디 한번 힘 좀 써볼까? 독이 어떤건지 몰라서 마나를 남발하게 되겠군. 오늘 안에 다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힘을 내려는지 어깨를 풀며 중얼거리는데 렌스버리가 툭 끼어들었다. "앉아라." "예?" 뜬금 없는 그의 말에 토냐가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던 그 포즈 그대로 굳어서 그를 바라보자 렌스버리가 상큼하게 웃어주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앉으라고 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다시 한번 말하게 하면 주~~거!' 라는 메시지가 아주 강렬하게 담겨 있었다. "예에..." 덕분에 토냐는 반은 얼어서, 반은 얼결에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갑자기 왜 독을 해독하는 걸 방해하는 건가 기가막혀서 바라보는데 렌스버리가 무지 간단하게 오른 손을 가볍게 튕기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해독!"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솨아아~~ 하는 초록색의 빛이 물결처럼 퍼져 나가더니만 그의 주변에 앉아 있던 일행들에게 달라붙어 몸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헉..." "엑?" 렌스버리가 저녁에 뭘 잘못 먹은 모양이다. 아니면, 일행이 먹은 독이 렌스버리에게는 좀 다르게 영향을 미친 걸까?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기에 일행은 고맙다는 말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렌스버리는 처음부터 그런 인사 받을 마음이 없었는지 마법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밤 새도록 글을 쓸 것이다. 그러니 방해하는 놈은 가만 안 두겠어." 그리고는 그 말만 던지고 그 곳을 벗어났다. 지금까지 일행이 있던 곳은 여자들이 사용하는 방이었던 것이다. [어휴... 밤 새도록 대필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네? 뭐, 하는 수 없지. 선애야 나 갔다 온다.] 렌스버리의 말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리아양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거였다. 그걸 알아챈 나는 선애에게 손을 설래설래 흔들어 보이고는 렌스버리와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아리아와 함께 렌스버리의 뒤를 쫓았다. 여기가 한 나라 왕자가 내 준 숙소라는게 좀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로 옆 방이니 뭔 일 일어나면 금방 올 수 있으리라 마음을 다독이면서 말이다. 제 30화 그러나 멋진 거래를 성사 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나보다. 밤 새도록 렌스버리와 아리아의 닭살 대화를 부러움 반, 느끼함 반을 느끼며 고스란히 다 듣느라 심적으로 지쳐있던 나였지만, 그래도 아침이 되어 일행이 예흔랑 왕자 일행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 분주히 준비하는 걸 보자니 기대가 부풀어 오는 걸 느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물품이 나올지, 그걸 바이런 국으로 가지고 가면 얼마나 큰 이익이 남을지, 이 거래로 인하여 타이거 사외가 혹 전국 10대 상회 안에 들어가는 건 아닌지, 그건 어렵다 해도 최소한 크로스웰 무역 상회를 핸들리 녀석에게서 돌려받을 수 있지는 않을지 등등등... 한번 부풀기 시작한 상상은 무한대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울 꼬맹이가 한국 식으로 치자면 무지 비싼 메이커 정장, 그러니까 대충 사넬 정도의 정장을 입고 보좌관 = 비서를 대 여섯명 거느리고 아랫 사람이 건네준 서류를 멋진 포즈로 쓰윽 훑어본 뒤 척 하고 사인해 주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일행은 드디어 한 나라 물품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 상상 만큼 한 나라 물품이 대단해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거나, 우리 상회를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그 정도로 대단한 물품이 있었지만, 그건 우리 상회가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한지였다. 상업과 공업이 활발하지 못한 환경에서도 종이만은 정말 뛰어난 수준을 자랑하여 진 나라의 제품을 제치고 아벤티노 대륙에까지 수출 되어 이 세계 최고의 종이라는 자리를 굳건이 지키고 있는 위대한 한지. 현재 아벤티노 대륙으로 들어오는 한지는 100% 진나라의 광진을 거쳐 들어오기 때문에 만약 한 나라에서 직접 수입한다면 최소한 10~20%의 가격을 다운 시킬 수 있을 거였다. 게다가 한지는 수요에 비하여 공급이 턱 없이 부족한 형편이라 내놓기만 하면 날게 돋힌 듯 팔려 재고 남을 걱정이 없는 물품이었다. 정말 무지무지 군침 나는 물품이지만, 그. 러. 나, 우리 상회로써는 그림의 떡이다. 왜냐하면 바이런 국에서 한지를 독점 공급하고 있는 곳이 바로 루빈스타인 상회였기 때문이다. 그 상회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곳에서 한지를 판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라거나 나뭇가지로 드래곤을 찔러 죽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그러니 아쉬움이 크지만 눈물을 머금고 시선을 돌릴 수 밖에... 그 다음 보인 것은 한 나라의 도자기였다. 여러가지 모양의 청자와 백자의 모습을 본 토냐와 로어, 그리고 소피는 꽤나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아마도 '이런 자기도 있나?'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벤티노에만 있던 이들에게는 정말 생소한 디자인의 도자기들이었던 것이다. 지금 아벤티노 대륙으로 들어오는 도자기는 100%가 진나라 도자기다. 그런데 진 나라 도자기의 특징은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진 나라의 도자기는 백자와 청자도 많지만, 적자(붉은 도자기)가 제일 많은 수를 자랑했다. 도자기에 새겨진 무늬는 대부분 크고 화려했고, 색 또한 무척이나 칼라플했다. 가장 많이 그려지는 것이 활짝 핀 꽃, 아니면 아름다운 아가씨들, 전설이나 신화의 한 장면들 정도였다. 무늬의 색도 붉은색과 금색, 아니면 강렬한 원색이 많이 사용되는 편이라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유채 풍경화 이미지였다. 그래서 화려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바이런 국에 쉽게 퍼질 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한 나라 도자기는 그것과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이었다. 한 나라의 도자기는 대부분 청자나 백자였고, 붉은 계통의 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무늬도 크고 화려한 대신 작고,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를 띄고 있어 밋밋하고 심심한 느낌만 살짝 없애주는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민무늬 도자기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무늬의 색도 될 수 있는 한 안 튀게 하고 싶었는지 흐린 무채색이나 파스텔 색조를 사용했다. 금색도 가끔 사용되기는 하는데 화려하게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아니라 약간 흐릿해서 겨우 금색이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였다. 그래 마치 단아한 동양화 같은 이미지의 자기라 그 나름의 멋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게 과연 바이런 국에서 통용이 될지는 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한 나라의 청자. 진 나라의 청자는 녹색 빛을 띄우는 것 단 한 가지인데 반하여 한 나라의 청자는 두 가지였다. 바로 파란 빛을 띄는 것과 녹색 빛을 띄는 것. 녹색 빛의 청자 또한 싱그러운 수풀의 색을 가지고 있어 아름다운 색이라 여겨지지만, 파란 빛의 청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파란 빛의 청자를 본 순간, 비가 온 뒤 개인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높디 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그 파아란 빛에 정신이 퐁당 빠져버릴 것만 같은 너무나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 색만 있으면 어떤 화려한 무늬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늬들이 튀지 않도록 작거나 여백을 많이 남기는 것이 아닐까? 그 아름다운 색에 약간 실망한 상태로 도자기들을 살펴보던 다른 일행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한 나라의 자기는 특이하게도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제품이 있었다. 진 나라의 자기는 '자기란 이렇다!' 라고 말하는 듯 둥근 형태에 굴곡만 약간식 틀린 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 나라 도자기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던 것이다. 예를 든다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용이 두어번 칭칭 감은 형태를 띄고 있는 술잔이라던가 세 마리의 거북이가 등에 받치고 있는 형태의 대접이라던가, 커다란 잉어가 둥글게 몸을 말아 그 가운데 품고 있는 접시 등등... "야, 이건 멋있네요. 괜찮은데요?" 로어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하자 긴장한 채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사다함과 오사함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다음 본 장신구들은 단아한 미를 살리려 너무 그쪽으로 치중하다보니 화려한 맛이 좀 떨어졌다. 어제 아침에 잠시 장신구 가게에 들려서 진 나라의 물품들을 둘러본 적이 있던 일행들이었으니 그 차이가 확연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걸 바라본 선애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장신구는... 여기서 좀 더 화려함과 섬세함을 가미했으면 좋으련만... 단아한 것도 좋지만, 바이런국 패션과는 잘 어울리지 않겠는데?" 마침 선애 가까이에 있었던 오사함이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을 걸어왔다. "그 나라의 취향이 약간 화려한편인가 봅니다?" "예, 너무 치렁치렁한 건 아닌데, 그 몇몇 포인트를 주되 그 포인트는 화려하고 크고 멋지게... 랄까요?" 선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오사함이 우리에게 보여주던 장신구 밑에 깔린 넓적한 함을 드러내었다. 장신구를 받쳐놓기 위해 놓아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장신구를 넣어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음... 사실 이건 혹시나 하고 가지고 온 것입니다만..." 진한 갈색으로 윤기가 자르르 흘러, 척 보기에도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듯한 함 뚜껑을 열자 거기에는 비녀가 두개 들어 있었다. 하나는 비녀 머리에 용이 만들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주작이 만들어진 금비녀였다. 그러나 다른 장신구들과는 정말 차원이 틀린 아주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이, 진 나라 장식품들과 견주어봐도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을 뛰어난 물품이었다. 이건 비록 화려한 맛은 없지만 우아함과 섬세함, 그리고 단아함으로 먹혀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이거 멋지네요. 이 정도면 잘 먹혀들겠는데요?" "하하... 그렇습니까?" 선애가 기쁨에 찬 어조로 말했는데, 어째 오사함은 선애처럼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때 토냐가 뭔가 괜찮은 것을 발견했는지 선애를 부르는 바람에 미처 그의 반응에 대하여 묻질 못하고 그냥 넘어가버렸다. "선애야, 잠깐 이리 와봐." 뭔가 싶어서 다가간 선애나 나는 솔직히 좀 실망스러웠다. 토냐가 보고 잇는 것은 옥으로 만든 제품들이었던 것이다. [뭐야, 옥이네?] 옥은 한국에서도 귀중품으로 여겨지고 있기는 했다. 게다가 선애와 내가 살았던 춘천에서 나는 옥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유명한 것인데다 마침 우리 가족과 친분이 있으셨던 분이 옥 취급점을 하고 계셔서 들은 풍월이 좀 있었다. 그분께 듣기로 옥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옥에도 질의 등급이 있다고 한다. 문방구에서 파는 플라스틱 장식품 비슷한 수준의 취급을 받는 것부터 시작하여 건축용, 혹은 옥 매트용, 거기서 더 나아가 몸에 착용하는 장신구용까지... 물론 장신구용급이 가장 수준 높은 건데 그건 전 세계에서 딱 두군데에서 난다고 한다. 그 하나가 중국에 있고 나머지 한 곳이 바로 한국의 춘천에 있는 거다. 그 곳에서 난 옥은 가격이 꽤 높아서 그 옥으로 만든 반지 하나만 해도 몇 십만원은 쉽게 넘어간다. 잠깐 옥에 대한 상식을 이야기 하자면, 옥은 청색을 띄고 있는 것일수록 가격이 낮고 백색을 띄고 이쓴 것일수록 비싸다. 그리하여 청색이 하나도 안 섞인, 완전 백색의 옥으로 만든 주먹만한 조각품은 몇 천만원은 가뿐하게 넘어간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춘천에서 나는 옥이 최고급품이라고 '춘천 옥'이란 브랜드 이름을 가진 제품을 최고급이라 오해하는데, 그건 말 그대로 오해이다. 춘천에는 옥 광산이 두군데에 있는데, 한 곳이 옥 매트용 수준이고 나머지 한 곳이 세계 제일의 수준이다. 그런데 옥매트용 수준쪽 브랜드 이름이 '춘천 옥'이고 최고 수준의 브랜드 이름은 '옥산가' 이다. 두 제품은 가격 면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는 걸로 알고 있다. 전에 아는 분 덕분에 '옥산가' 제품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옥으로 만든 싱글 옥침대 가격이 무려 1억이 넘어갔다. 시중에 파는 옥침대하고 디자인 차이는 거의 없는데 옥 하나의 품질 때문에 그렇게 가격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그게 믿겨지는가? 하여간 한마디로 무지하게 비쌌다. 그렇게 질 좋은 건 엄청 비싼 귀중품인 이 옥은, 그런데 황당하게도 돌 족속인 주제에 다른 보석들과는 달리 강도가 무지 약하다. 다이아몬드를 보라. 그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라 일컬어지지 않는가 말이다. 루비나 사피이어 등등도 또한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무지 단단해서 그 보석들을 세공하려면 직접 자르지 못해 갈아서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옥이란 녀석은 강도가 약해서 잘못 다루면 금방 금이 가고 깨지기 때문에 섬세하고 세밀한 조각을 하는 건 엄청나게 어렵다. 그런데 그러한 옥의 특성이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여던지 옥 제품이 하나같이 투박한 편이었다. 드워프들의 섬세하고 세밀한 유리 공예품에 비한다면 심한 말이지만 어른 작품과 아이들 작품을 비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재질의 차이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다른 장식품들보다 더 투박한 모습에 선애가 실망감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토냐는 그런 선애의 마음을 모르는지 눈을 빛내며 거북을 조각한 옥 제품을 들어올려 요리조리 살피는 것이었다. "이것 봐. 정말 신기하지 않아? 이거 대리석과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틀리네. 이런 재질의 돌은 처음 봐. 이게 뭐지? 옥 제품에 감탄한게 아니라 옥 자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헤... 그러고 보니 아벤티노 대륙에 있을때 선애의 악세사리를 사러 보석 가게에 몇번이나 가봤지만 옥은 본 적이 없었지?' "그건 옥이라고 하는 돌로 만든 것이랍니다. 옥은 여기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서 보통 윗 사람들에게 많이 선물한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진 나라에서는 옥을 수출하지 않나 보군요." 오사함의 설명에 토냐는 고개를 끄덕끄덕이며 다른 옥제품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청옥하고 백옥 밖에 못 봤는데 여기에서는 붉은 색의 옥도 있었다. 그렇다고 루비처럼 투명한 것이 아니라 옥 특유의 우유빛이 섞인 돌이었지만 말이다. 신기하기는 했지만, 세공하기가 쉽지 않아 섬세하거나 화려한 맛을 낼 수가 없는데다가 아벤티노 대륙에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을 알 리 없으니 고가치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거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선애한테 속삭였다. [선애야, 저 옥 드워프에게 가져다 주면 어떨까? 그들은 아마 새로운 재료에 흥미를 느낄 거 같은데. 그리고 드워프들이 얼마나 잘 세공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 아, 또 지금 생각난 건데 옥 가루가 피부에 좋다고 하지 않냐? 그럼 영양 크림 같은데 섞어서 맛사지 팩 같은 걸로 사용하면 좋을 거 같은데. 왜, 금 가루나 진주 가루 처럼 말야.] 금 가루나 진주 가루가 들어간 영양 크림은 다음 기획 상품으로 생각해 놓고 있는 거였다. 한국에 있을때 약간 황당해 하며 들었던 풍월을 여기서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야생화 가게가 돈 많은 아가씨들에게 제법 알려진 상태이니 잘 먹힐거라 생각한 것이다. 뭐, 이미 아주 비싼 재료들로 만들어져 서민이 보기에는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화장품들이 몇몇 있으니 금이나 진주 정도야 그럭저럭 먹히지 않겠는가? 나는 야생화 가게에서 그 제품들을 낸 뒤 다른 화장품 상회에서 루비 가루로 만든 립스틱 이라던지, 사파이어나 에메랄드 가루로 만든 아이세도우를 내놓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 김 샌 표정으로 토냐를 바라보던 선애의 눈이 내 말을 듣고선 급작스레 빛이 났다. "흠, 시험적으로 좀 가지고 가봐야겠군." 그 다음 그들이 보여준 건 가장 중요한 한국의 술이었다. 선애는 술 맛을 잘 모르는 터라 시음은 토냐와 로어가 맡았다. 소피도 술을 좀 할 줄 알기는 하지만, 선애를 호위하는 입장이었기때문에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주는 술병을 본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라?" "유리병?" "한 나라에... 유리병이?" 상업을 천시해서 무역도 생품필이나 겨우 할까, 미미한 수준이었던 한 나라에 아벤티노 대륙에서 넘어온 것이 분명한 유리병이 떠억 하니 술병으로 내놔졌으니 일행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록 아무런 무늬가 없는 일반 단지 모양, 쉽게 말해 요강단지 크기와 모양의 유리병이었지만, 저렇게 굴곡 하나 없고 흠 하나 없이 일정하게 둥근 모양을 만드는 것도 꽤나 높은 솜씨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어 가격도 꽤나 만만치 않았을 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단지 모양의 유리병 안에 아주 잘 익었을듯한 커다란 배 하나가 들어가 동동 떠 있는 것이었다. 잘 익었는지 모르는 것은, 배 주위를 옅은 위스키 색의 액체가 - 아마도 술일 듯 - 감싸고 있어서 색이 노르스름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술은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하나에는 포도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제법 길죽한 모양의 유리병 안에는 산삼인지 도라지인지 더덕인지 모를 커다란 약초 뿌리가 들어 있는 단지, 그 다음에는 시커먼 뿌리, 그 다음에는 뱀 한 마리가 똬리를... "꽤엑~ 뱀이야!" "허허허, 이거 몸에 좋은 겁니다. 그래서 보통 술이라고 안 하고 약주라고 하지요." 사다함이 화들짝 놀라는 선애를 향해 푸근한 웃음을 보이며 제일 먼저 그쪽에 손을 뻗는 거였다. "그래, 우선 제일 좋은 걸로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 아니요, 저는 사양하렵니다. 시음은 이쪽이 하실테니..." 선애가 양 손까지 저어가면서 사양하자 기다렸다는 듯 토냐와 로어가 앞으로 나섰다. 뱀이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게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그런 그들을 피해 슬그머니 옆에 있던 술병을 살피던 선애는 뭘 발견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오사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거 안에다 배와 포도를 어떻게 넣은 거죠?" 그러고 보니 유리병 몸통이야 튀어나온 똥배처럼 볼록했지만, 입구는 좁았던 것이다. 뭐, 다른 약초 뿌리라던가 뱀이야 제법 큰 편이긴 했지만 입구보다 굵어 보이지 않으니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하지만 배와 포도는 입구보다 더 커 보였기에 잘라 넣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아, 그건 말입니다. 열매가 생기면서 유리병을 씌워둔 겁니다. 그 상태로 자라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다 익었을때 그 안에 소주를 부어 저장시키면 저렇게 됩니다. - 이거 한국에 진짜로 있는 술입니당. -" "오오..." 선애의 감탄사의 뒤를 이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로어와 토냐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캬아~~ 이거 맛 되게 독특한데?" "오오... 끝맛이 깔끔한게 좋네요." 그들의 말이 들리자마자 선애 곁에 있던 오사함이 잽싸게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 통역한다. 참, 통역사의 일도 힘든 거 같다. "허허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한번 개봉한 술은 상품이랄 수 없으니 잠시 후 식사 시간때 반주로 곁들일까요?" "오옷,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리병에 담긴 술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한 나라 도자기의 특징을 제대로 간직한 청자로 된 술병과 백자로 된 술병이 다섯개나 더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배나 포도, 약초나 뱀 술을 만드는 재료인 소주. 진 나라에도 같은 이름의 소주가 있어 우리는 처음에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맛을 본 토냐와 로어의 말에 의하면 이쪽이 좀 더 독하고 깨끗한 느낌이라고 한다. 그에 사다함이 자랑하는 것이, 한 나라의 술은 깊은 산속의 맑은 옹달샘에 있는 물로만 만들기 때문에 이런 맛이 난다나 어쨌다나. 뭐, 물이라는 것이 다 똑같아 보여도 각 지방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틀린 맛이 있다. 그리하여 예민한 사람들은 다른 지방에 갔을때 그 지방의 물 맛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아마 그 때문에 진 나라의 소주와 한 나라의 소주 맛이 틀린게 아닐까나? '에... 그런데 소주는 증류수인데 그래도 맛이 틀린감?' 다른 하나는 사과주라고 한다. 잔에 따라보니 마치 녹차처럼 약간 초록빛을 띈 투명한 술이었는데, 마셔본 토냐의 말에 의하면 약간 새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고 한다. 이건 소주를 안 넣고 사과와 몇몇 약초, 그리고 누룩을 넣어서 발효시킨 술이라고 한다. 마치 포도주 만드는 것 처럼 말이다. '흠... 사과 와인이라고 하면 되겠네.' 그리고 나머지 세 술은 곡식으로 만든 것으로 이화주, 동동주, 청주라고 했다. 그런데 이화주는 색깔이 꼬옥 막걸리처럼 탁했다. 처음에는 이화주라고 해서 무슨 배꽃을 이용해서 만든 줄 알았는데, 배꽃 필 무렵에 이 술을 만드는 재료인 누룩을 만들기때문에 이화주라고 한단다. 그렇게 모든 상품을 살펴본 일행은 점심을 먹기 전 잠깐 시간이 있었기에 일행들끼리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다. 계약은 점심을 다 먹은 후 하기로 하고 말이다. 어차피 모든 물품들을 모두 다 취급할 수 없다는 건 우리 일행도 알고 그쪽 일행도 알고 있을 테니 의논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다. "아아... 정말 아쉽더군요. 한지를 취급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그걸 외면해야 하니 말입니다." 로어가 무척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입을 열었다. 그 뒤를 이어 토냐가 물었다. "선애, 아까 옥이라는 돌로 만든 제품들은 어쩔꺼지?" 그에 선애는 대답하는 대신 로어를 바라봤다. "로어가 보기에는 어때요?" 선애의 질문에 로어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는지 금방 입을 열었다. "그게 여기에서는 귀중품으로 취급되고 색이 꽤 곱긴 했습니다만, 세공이 그렇게 멋지지는 않던데요? 그들이 내 놓은 장식품도 마찬가지구요. 아, 그... 오사함씨가 나중에 잠깐 보여준 머리 장식품은 정말 멋있었습니다만, 다른 것들은... 장식품은 차라리 진 나라쪽을 선택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뭐... 장식품이 별로인 거야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아깝네... 그런 돌 처음 보는데..." 토냐 또한 로어의 의견에 수긍하는 빛이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선애가 다시 물었다. "도자기는 어때요?" "파란 빛의 자기는 감탄스러웠습니다만, 여성 물품을 주로 다루는 우리 상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로어의 부정적인 말에 토냐가 반대 의견을 냈다. "난 아까 독특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거 보고 화장수 병이나 분통으로 사용할수 없을까 생각 했는데 말이야. 으음... 이쪽에서 뭔가 수입한 식물이나 향유 같은 것으로 만든 화장품을 담으면 좋을 거 같아." '흠, 옥 가루를 넣은 맛사지 크림통으로 쓰면 좋을 거 같네. 아, 차라리 옥을 세공해서 거기에 담으라고 하면...' 토냐의 의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로어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여성용 화장품 통이라면 좀 더 화려하거나 아니면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본 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은 화장품이나 재료도 없는 상태고." "아까 물품을 보니까 여러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던데, 그럼 여성용으로 아기자기하게나 좀 화려하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 화장품이야 정 수입할 게 없으면 그쪽 화장품을 넣어도 되고 말이야. 그럼 디자인은 이쪽에서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해달라고 하면 되지 않아?" "그러느니 차라리 술병으로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술은 꼬옥 구매할거고, 한 나라 술을 한 나라 자기에 넣으면 좋잖아요." "좋은 생각이긴 한데, 로어, 술은 판매하려는 게 아니잖아?" 토냐의 말에 로어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맞다. 술은 몽땅 드워프에게 넘겨야 하지요?" 깜빡 했다는 그의 말에 선애가 웃어보였다. "아니에요. 몽땅 넘길 필요는 없지요. 어차피 드워프쪽에 넘기는게 엄청난 양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 보다 더 많이 수입하면 되는 거니ㅏ요. 사실 나는 한 나라 술을 가지고 베지테크스 상회와 뭔가 거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했거든요. 마침 거기서도 도자기를 취급하니까 더 좋은 조건일 거 같은데요." 선애의 말에 로어가 기쁜 듯 미소를 지어보였고 토냐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흐으음... 그럼 어찌되는 거야? 한지는 소화 시키지 못할 만찬이니 포기하고, 장식품은 진 나라게 더 좋으니 그것도 넘어가고... 그럼 기껏 남는게 술하고 도자기 뿐인가?" 토냐의 말에 선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그 파란 빛 청자는 아무래도 너무 멋진 거 같아서요.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눈독을 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생각한 건데, 어차피 그쪽이 탐내면 우리로써는 대항할 방법이 없으니 얌전히 넘길 거, 미리 넘겨주면서 다른 뭔가를 얻어내면 어떨까 싶어요." "헤에? 다른 뭔가를 얻어낸다?" 토냐와 로어의 눈이 흥미를 보이며 반짝 빛나자 선애가 자신감을 얻었는지 씨익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한 나라쪽은 우리가 한지와 도자기를 사지 않는다고 하면 다른 매매자를 찾겠지요? 그럴 거 우리가 루빈스타인 상회와 연결시켜 주자고요. 어차피 루빈스타인 상회가 아니면 바이런 국 출신 상인은 취급하지 못하는 거니까. 그럼 우리는 한 나라와 루빈스타인 상회 양 쪽에 도움을 주는 격이 되잖아요." 선애의 말에 로어가 무릎을 탁 쳤다. "멋지십니다. 최고의 생각이에요. 게다가 루빈스타인 자작이 우리와 같이 왔으니 주변에 있겠지요? 만나기 힘든 사람이라 해도 한지를 제작국에서 곧바로 수입할 수 있다고 언질을 주면 맨발로 뛰어나올 겁니다." "맞아요. 어차피 루빈스타인 상회의 눈치를 살피는 거, 다 넘겨 주더라도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내야지요. 그와 함께 한 나라 도자기도 보여줄 셈입니다. 그들이 수용 하겠다고 하면 술병용만이라도 우리가 얻어내고 안 한다고 하면 다 취하도록 하죠." "멋져! 그렇게 되면 저 한 나라 왕자 일행도 우리가 술하고 도자기만 취급한다고 서운해 하지는 않겠지. 훌륭해, 선애." 토냐의 칭찬에 선애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구요. 그냥 우연히 떠오른 거예요. 아, 그런데 이번에는 옥도 살 생각이에요." 선애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토냐와 로어의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선애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좀 신기하다는 이유로 사시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래, 선애야. 신기한 건 인정하지만 단지 그것만 가지고는 상품 가치가 별로 없다고." 둘의 열렬한 반대에도 선애는 배시시 웃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아아, 제가 사려는건 옥돌 원석이에요. 드워프 마을에 가지고 가보려고요. 뭐, 이렇게 세공한다는 예로 그나마 제일 좋아보이는 제품은 몇개 사가지고 가겠지만요." 선애의 말에 로어가 자신의 뒤통수를 탁탁 쳤다. "그렇군요! 아, 이런... 저도 머리가 많이 녹슬었나봅니다.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도 잊어버리다니... 드워프들이 있었지요." "야, 야, 그럼 나도 녹슨 거냐? 그 동안 계속 정신 없었으니 깜빡할 만도 하지." 로어의 말이 은근히 거슬렸던지 토냐가 로어를 흘겨보며 말하자 선애가 얼른 토냐의 말을 거들었다. "그럼요.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는걸요. 그냥 옥을 보던 와중 세공이 별로다... 생각하는데 우연히 드워프들이 떠올랐지 뭐예요. 왜, 그런 측면에서는 드워프들이 최고잖아요. 부디 드워프들이 저 옥돌을 마음에 들어해야 할텐데 말이에요. 아참참, 그리고 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옥 가루가 미용에 좋다던데요? 피부를 탱탱하게 해준다던가?" "오오... 그거 반가운 소식인데? 드워프들이 좋아해주면 일석이조겠군." "이왕이면 이쪽 화장품에 대해 좀 더 알아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서대륙에서 수입한 화장품 세트로 판매하게끔 말입니다. 아, 그걸 판매하는 여 점원들은 서대륙 복장을 시키는 겁니다. 거기에 장신구도 몇개 착용시켜서 자연스레 장신구 홍보도 하고 말이지요. 으음... 거기다가 저희가 실크 원단도 수입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실크도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있으니... 아, 혹시 한 나라에 실크를 대체할 수 있는 멋진 옷감이 있지 않을까요?" 한번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가 맹렬한 회전을 하는가보다. 로어의 입에서 여러가지 의견이 줄줄줄 나오자 토내가 키득 웃으며 로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진정해, 진정. 그렇게 한꺼번에 이야기 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 그에 로어가 당황한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어보이는 거였다. "아, 죄송합니다. 혼자서 너무 앞으로 나갔나봅니다." "아니에요.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귀중한 의견인데요. 음, 그런데 한 나라에는 아무래도 실크를 대체할 만큼 뛰어난 옷감이 없나봐요. 그러니까 이번에 선 보이지 못했겠지요. 그리고 설사 있다 해도 루빈스타인 상회 눈치를 봐야 하니... 우선은 장식품까지만 다뤄보도록 하지요. 화장품은 진 나라 것도 알아보고 한 나라 것도 알아보죠. 어차피 우선 술은 여기서 사야 하잖아요. 한 나라와 지금 거래 계약을 맺는다 해도 상품을 금방 바이런 국으로 가지고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고요." "그래,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이왕이면 두 나라 걸 다 보는게 좋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도 안 좋아. 그럼, 거래 내용은 결정난 건가?" 토냐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리 입장은 결정 했습니다. 이제 저쪽과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조율해봐야겠지요." 과연, 식사 후 본격적으로 거래를 논하기 위한 자리에서 사다함 일행은 실망감을 내비쳤다. "이거 참... 단지 술 뿐입니가? 옥도 제품이 아니라 원석을 원하시고, 그것도 우선 반응을 보기 위해서 구매하시는 거라 장기 계약은 나중으로 미루시다니..." "죄송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희 상회로써 수용할 수 있는 것이 그 정도라서요." 선애가 반은 예의상, 반의 반은 진심으로, 나머지는 계획적으로 차분하게 말하자 사다함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참...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처음부터 못 밖으시니 무언가를 원해서 밀고 당기기를 하려는 건 아닌 듯 하군요. 뭐, 수용하기 어려우시다니 뭐라 더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다함에게 선애가 예의 바르게 인사한다. '이해... 라기 보다는 체념 같은데.' "그런데, 이건 개인적인 의문입니다만, 저는 다른 건 다 몰라도 한지 만큼은 무척이나 탐이 나는 상품이라 생각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지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그게 아니라 너무 탐나는 상품이라 아예 엄두를 못 내는 겁니다." 선애의 대답에 사다함의 눈에 다시금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 정도로 작은 상회였어? 처음부터 대상을 잘 못 잡았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선애가 은근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희가 좀 도와드릴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선애의 말에 어리둥절한 사다함 일행들. "도움이라... 무슨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아까의 실망 때문에 별로 기대는 안 되는지 시큰둥한 어조다. 그에 개의치 않고 선애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우리의 제의를 저들이 거절하면 그걸로 끝. 그러면 양 쪽에서 뭔가를 얻는 건 고사하고, 우리는 우리가 살 것에 대한 계약만 하고 빠이빠이 해야 하니 말이다. "어차피 저희 말고 다른 거래자를 찾으실 것 아닙니까? 특히, 그 한지를 매입해 줄 상회를 말이죠. 저희가 그 거래자와 연결시켜 드리면 어떨까요?" 선애의 말에 사다함이 잠깐 갈등하는 눈빛이더니 오사함, 예흔랑과 의논하기 시작했다. 백운과 기파랑도 같이 자리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오로지 경호만을 위해 참여한 것인 듯 의논에 끼지는 않았다. 잠시 후, 우선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결론이 났고, 사다함이 선애를 바라봤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대답해 드리죠." 선애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약간 긴장했는지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서로간의 치열한 정보 쟁탈전이 시작 되었으니 긴장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데 경혐이 많은 사람들도 살짝 긴장할 판에, 완전 초보인 선애라면 더더욱.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루빈스타인 상회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상회의 후계자인 그랜트 루빈스타인 자작이 우리와 같이 이 곳에 왔으니 아마 이 근처에 지금 머물고 있을 거라는 것, 단 두개의 정보다. 거기에 하나 반 어거지로 가져다 붙이자면, 그들과 여러가지로 인연이 있다는 것 정도? 시일이 많이 지났으면 그랜트가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었겠지만, 우리가 여기 도착한지 오늘로 사흘째. 게다가 첫 날은 한 밤중이었으니, 시간상으로는 48시간까지는 안 되었을 거다. 그렇게 보면 한 나라 일행과 일찍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 정보를 넘겨주지 않은 상태에서 예흔랑쪽으로부터 '그럼 소개해 달라.'는 말을 받아내야 했다. 예흔랑쪽은 우리와 반대로, 소개 부탁을 하는 대신 우리로부터 최대한 정보를 빼내려 할테고 말이다. 루빈스타인 상회가 여기서도 많은 거래를 하다보니 어쩌면 이들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다함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사람 좋게 웃으며 물었다. "어느 상회와 소개시켜 주시게요?" 참 지당한 질문이었지만, 선애는 절대로 '루빈스타인'이란 이름을 올리면 안 된다. 그걸 이 자리에 앉기 전 로어와 토냐로부터 충분하게 교육을 받은 선애 또한 예쁘게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분이 충분히 만족하실 만한 상회입니다." 선애의 대답에 사다함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는 잇지만, 눈에서 차가운 빛이 한번 번득였다. 속으로 '이것봐라?' 하고 생각했나보다. "하하하... 소저가 그렇다면 그렇겠지요. 그래, 그 만족할 만한 상회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음... 어쩌면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최소한 이름이라도 들어 보셨을지도..." 생글생글 웃으며 절대 이름을 밝히지 않는 선애의 대답에 사다함이 이번에도 하하하 웃었지만 눈빛이 '아쭈?' 라고 말하고 있었다. 선애도 겉으로야 웃고 있지만 무지 긴장했는지 뒷목에 땀방울이 하나 둘 맺힌다. '힘 내, 꼬맹아!' 신경 쓰이게 할까봐 땀을 닦아주거나 부채질도 못해주는 나는 그저 마음으로만 열심히 응원해 줄 뿐이었다. "호오, 그렇게 대단한 상회인가요? 그러넫, 그런 상회와 어덯게 소개를 시켜 주신다는 것입니까?" 상회 이름을 절대로 안 밝히자 사다함이 작전을 바꾸기로 한 모양이다. "다행이 그 상회와 안면이 있어서요." "커다란 상회라면 안면 있는 자가 많겠지요." 단지 얼굴만 아는 사이 아니냐고 묻는 말이다. 그에 선애가 이번엔 진짜로 훗~ 하고 웃었다. "제가 어찌하다 보니 그쪽과 좀 인연이 있었답니다." "악연도 인연이라 할 수 있지요." '으음... 뭐, 악연 비스무리 하기는 하지.' 그러고 보니 정작 장본인 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랜트와는 별 일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지 잘난 맛에 사는 보좌관 녀석과 네 가지를 팔아먹은 철 없는 여동생과는 여러가지로 부딪혔으니 말이다. 뭐, 그건 다 그들이 먼저 다가와서 난리를 친 거긴 하지만... 사다함의 말에 선애의 입술이 실룩이더니 곧 씨익 웃으며 말한다. "후훗, 서로 독을 먹이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 말을 오사함이 약간 어색한 얼굴로 통역하자 그 말을 들은 한 나라 네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예흔랑, 사다함, 오사함 이 세사람이 다시 머리를 맞대고 속닥속닥 하는 거다. 슬그머니 다가가 귀를 기울이니 선애가 독을 언급한 걸 가지고 그 이유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론이 점점 '저덜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치사하게 언급했다.' 라고 나는 거였다. 그러나 아마 울 꼬맹이는 말 겨루기(?)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언급한 걸 거다. 왜, 보통 사람들은 말 다툼할 때 가끔 그러지 않는가? 그런데, 자기들 멋대로 안 좋게 결론을 내 버린 일행은 이제는 어찌 대처할 거냐고 의논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나는 기가막혀 선애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야, 저 녀석들이 네가 치사하게 자기네가 독 쓴 걸 들먹거린다는데? 제안을 받아 들이게 하려고 수 쓴대.] 내 일러 바치기에 선애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열 받아서 좀 찔리라고 이야기 한 건데.../" [흥, 자기가 치하사면 남들이 다 치사한 줄 아는 법이지. 야, 잠깐만...] 거의 결론을 낸 거 같은 분위기라 후다닥 다가가 귀를 기울이자, 과연 선애가 나중에 화 나서 소문이라도 내면 곤란하니 제안을 받아 들이자고 하고 있었다. 뭔가 이익을 바라고 제안을 한 거 같으니 크게 손해가 없으면 들어줘서 입막음을 하자는 것이다. 결과야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기는 했지만, 그 중간 과정이라는 것이 여엉~~ 찜찜해서 마음에 좀 걸렸다. '이거, 이래도 되는 겨?' 잠시 후, 의논을 끝낸 사다함이 정색을 하고 선애를 바라봤다. "소저, 우리 탁 터놓고 이야기 합시다. 원하는 게 뭡니까?" 그에 선애는 쌈박하게 대답했다. "거래 우선권이요. 저희가 수용하지 않는 상품이야 상관 없지만, 저희와 거래하는 상품은 물론이요, 새로운 거래에도 우선권을 주셨으면 합니다." 선애의 말에 사다함이 인상을 찌푸린다. "너무 과한 요구 입니다. 이건 우리 나라와의 거래를 독점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절대로 과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데요.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고 독점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저희측이 크게 유리한 것도, 여러분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도 아니라고 보는데요. 사실, 이 정도는 첫 계약 상대자에게 예의상이라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선애의 딱 부러지는 말에 사다함이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그저 신음성만 삼킬 뿐이었다. 잠시 기다려도 그가 아무말도 안 하자 선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거래가 저희는 물론이거니와 귀 국 입장에서도 좋은 기회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를 계속 지속시키 길 원합니다. 그러한데 어찌 여러분께 손해를 끼치려 하겠습니까?" 선애의 말에 그 동안 가만 있던 예흔랑이 어이 없다는 듯 툭 내뱉었다. "소규모의 거래를 하면서 말이 너무 거창하군."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리자면, 저희가 구하는 물품이 적은 것도 있으나, 저희가 원하는 물품이 여러분께 없어서 거래가 적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앞으로 차차 나아질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뭐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선애의 강한 어조 때문인지 예흔랑 왕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발 물러났다. "어쩌시겠습니까? 만약 제 제안이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우리의 거래 계약이나 하죠?" 그들이 의논하는 걸 들은 내가 벌써 제안을 받아 들일 거라는 걸 알려 줬기에 선애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마치 '너희들이 받아 들여도 그만, 안 들여도 그만이야.'란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사다함이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좀 분했던 모양이다. "우선 계약을 한 뒤 제안을 받아 들일지 거부할 지 이야기 하겠소." 마치 계약할 때 마음에 들면 제안을 받아 들이고, 아니면 거절 하겠다는 뉘앙스. 이왕 제안을 받아들여 줄 것, 얻을 건 최대한 얻으려고 수 쓰는가 보다. 그에 선애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거래 내용을 이야기 해볼까요?" 그렇게 우리가 약간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한 건 좋은데, 잠시 후 우리쪽 일행들은 약간 허탈한 감에 젖은 표정으로 한 나라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가 적게 산다고 실망한 주제에 우리가 사려는 술의 양을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거였다. 뭐어, 기가막혀 바라보는 우리에게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해주는 사다함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기는 했다.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는 한 나라다 보니 전국 각지에 술이 있기는 한데, 그건 각지에 있는 주막이나 술집에서 자기들이 장사할 양만 직접 만들어 파는, 그러니까 자급자족형 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높으신 분들이 식후에 한 잔, 심심할 때 한 잔, 즐거울 때 한 잔 마시기 위하여 상납케 하는 주조장이 있기에 그나마 한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있었지, 높으신 분들이 뭔가 엄격한 종교에 귀의하여 술을 한 모금도 안 마셨다면 이런 것도 없었을 거다. 이런 것을 6, 7년 전 유리병 안에서 키운 배와 포도주로 담근 술을 개발하고 나자 거기서 착안, 그와 함께 유명한 몇몇 술을 모아 상업의 활성화 일환으로 여러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에도 수출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수량을 늘리려 애썼기에 이 정도라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계속 제조량을 늘리고 있으니 다음에는 좀 더 많은 양을 살 수 있을겁니다." 사다함이 마지막에 그렇게 덧붙였지만,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양이야 계속 늘린다는 건 사실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한 나라 내에서도 유통을 시작했고 진 나라와 수 나라에도 선보였던지 선보일텐데, 그러면 수요량이 늘어날 테고, 그 늘어난 수요량을 다 감당하면서 우리에게까지 더 공급할 수 있을만큼 양을 늘릴 수 있을건가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몇년 동안은 이 정도의 술, 여기서 아주 조오금 늘어나는 양을 가지고 만족해야 할 거다. 우리가 바라는 우선권은 아벤티노 대륙과의 무역만 해당하는 거였으니, 진 나라나 수 나라에 넘길거 우리에게 달라고 할 수도 없을테고 말이다. 지금 저들이 줄 수 있는 양은 화물선 반 척 정도의 분량. 이건 드워프 마을에 보내면 땡~ 일 양이니, 이거가지고 크로스웰 상회의 핸들리와 무언가 거래를 해볼 생각은 당분간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옥 또한 그것을 다루는 장인들의 수는 많지 않아서 생산해 내는 숫자는 얼마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건 옥 제품이 아니라 원석 자체였기 때문에 원한다면 수량을 많이 늘려줄 수 있다고 했다. 다행... 이라고 해야할지, 나라에서 모든 광산을 관리하고 있었기때문에 옥 광산 또한 그들의 관리하에 있었던 것이다. 세공하는 것도 아니고 광산에서 캐내는 수량을 늘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만약 드워프들이 만족해 한다면 그건 얼마든지 원하는 분량을 대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건 다음 일이고, 우선 술의 양이 적었기 때문에 선애는 나머지 화물선을 채울 수 있는 거래를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다. 첫 거래인데 이왕이면 화물선을 꽈악 채워서 돌아오는 게 반 정도만 겨우 채워오는 것 보다는 양쪽이 기분 상이라던지 실리면에서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원래 여성용 장식품들은 진 나라에 비해 수수한 편인데다 마음에 드는 장식품이 겨우 하나뿐 이라서 제외하려고 했었지만, 이렇게 된거 다 물어보자 싶었는지 선애가 마지막에 오사함이 보여준 장식품을 거론하자 사다함이 난처한 빛을 보였다. "그게 말입니다..." 그러면서 시작한 설명인 즉슨, 오사함이 보여준 건 왕실에만 납품하는 물품이라는 거다. 이번에 오사함이 하나 가지고 온 것은, 한 나라의 세공 실력이 이 정도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판매 자체를 금지하고 있는 세공품이라서 안된다는 것이다. "저기... 다른 건 안되겠습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다른 건 저희 나라의 세공 실력보다 한 단계 낮은 정도입니다. 제가 말씀 드린 그게 대충 고급품에 속한다고 할까요? 그러나, 최고급은 아닙니다. 그래도 한 나라 특유의 멋이라고나 할까요? 저희 나라에는 없는 우아한 멋이 있어서 취급해도 좋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세공품을 수출하기 원하신다면... 아마 최소한 그 외부로 판매가 금지 된 그 정도의 세공 실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 "혹... 자기도 그래서 외면하신 겁니까?" "아니요, 다른 건 몰라도 파란 빛의 청자하고 왜 동물 모양으로 만든 자기들 있지 않습니까? 그건 상품 가치가 높은 것 같습니다. 아,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혹시 한 나라의 여성들이 사용하는 고급 화장품 아십니까?" "예? 화장품... 이요?" "예. 만약 저희가 수용할 만큼 괜찮은 화장품이 있다면, 여성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아름다운 도자기 화장품통을 만들어 같이 판매하면 어떨까 싶어습니다만. 한 나라 화장품 세트로 말이죠. 에... 거기에 장식품 까지 같이 판매하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금지 품목이라니 그건 그냥 진 나라 장식품으로 해야 할 것 같군요. 뭐, 그게 아니라도 그 도자기 정도면 충분히 상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그들은 여성용 장식품은 상품을 생각 해 준비해 왔으면서 화장품은 조금도 생각 못한 모양이다. 화장품이 유통되고 있는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거 보니 아무래도 직접 가서 대갓집 여성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진 나라에서는 제법 화장품도 유통되고 있는 것 같던데... [에구, 아무래도 상업이 발전 되고 안되고의 차이인가보다. 에...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까지는 봇다리 상인이 화장품을 팔기도 하지만, 집에서 각각 만들어 썼다고도 하던데. 설마, 한 나라에서 각각 집에서 직접 만들어 쓰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선애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토냐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화장품도 어려울 거 같지요? 그냥 화장품 통이나 생각해놔야겠네요." 자기들은 꽤나 많이 준비한다고 했지만 너무 부족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인지 한 나라 사람들은 잔뜩 풀이 죽은 분위기였다. 사다함과 오사함에게 뭐라 뭐라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은 예흔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또 뭐라 뭐라 속삭인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가서 듣고 싶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닌거 같고, 그쪽이나 우리 쪽이나 예상보다 작아진 거래 내용 때문에 분위기가 침울한 터라 그냥 선애 옆에 있었다. "그럼, 그냥 술하고 옥 원석 한 덩어리?" "이번에는 아무래도요. 다음에 부디 옥으로 나머지를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화물선을 반 밖에 못 채우는거... 아무래도 적자일까요?" 선애의 말에 로어가 위로를 하려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그걸 팔려는게 아니라 드워프들과의 거래에 이용하려는 거였으니까요. 드워프들은 새로운 술을 가지고 왔다는 것에 더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로써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거래를 튼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이득을 생각하면 적자라고 할 수 없지요." "그렇군. 아아... 크로스웰 상회와 뭔가 거래까지 해보고 싶었는데..."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리시면 안 됩니다, 선애님. 지금 이 정도만 해도 우리는 처음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수확인걸요." "그래요, 그래. 뭐 이 정도로 만족 해야지요." 선애가 로어의 말에 납득하며 애써 기분을 풀려는 그때, 우리로써는 예상치 못한 거래 제안이 들어왔다. "혹시... 유리 세공품도 취급 하십니까?" "유리 세공품이요? 아, 예. 마침 저희가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습니다만...?" "호오, 그렇습니까? 이거 잘 되었군요. 그거 저희 나라에 판매할 수 있을까요?" 사다함의 말에 우리 일행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 유리병 안에 담긴 술을 바라보며 생각을 잠깐 떠올리기는 했지만, 우리 상회가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것도 아니고, 또 작은 상회라 차마 한 국가와 수출 거래 계약을 맺을 엄두가 안 나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그거 저희와 하시게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그렇게 큰 상회가 아닙니다만..." 너무 놀라던지 선애가 놀랍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자 예흔랑이 쿡 하고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까 우리 나라와의 모든 거래에 우선권을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선권이 있는 그쪽 상회에 이야기를 하는 거네만."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단 말씀이십니까?" 아까 내가 이야기 해줘서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생각보다 크자 선애는 이번에도 놀란 어조로 물었다. "허허, 아까는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그게 다 연출이었나봅니다, 그려?" 사다함이 사람 좋게 웃으며 하는 말에 선애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고개가 푸욱 숙여졌다. 무지 창피한 모양이다. 그런 선애를 대신해 로어의 언질을 받은 토냐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원하시는 유리 세공품과 수량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희가 가능하지 못하다면 다른 상회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건 크로스웰 상회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다행히 크로스웰 상회가 진 나라에게 유리 세공품과 바이런 국의 와인 등등을 수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한 나라는 우리 생각보다 더 적은 숫자의 갯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일 년에 한번씩 최소한 천개 정도면 좋겠습니다. 모양은 여러분이 보셨던 배와 포도를 담을 크기의 단지 형태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고, 그 외에는 커다란 호리병 모양도 좋습니다. 이건 다른 술을 담글 용도로 사용할테니까." 일년에 천개 정도면, 현재 우리 상회가 데리고 있는 유리 세공소를 좀 무리하게 하면 얼마든지 감당할 정도다. 게다가, 정 안되면 드워프 마을에서 가지고 오는 유리 세공품 갯수를 늘려도 좋았다. 거기서도 견습 드워프들이 실력을 늘리기 위하여 아무 무늬 없는, 단지 둥그런 형태를 띄는 유리병을 만드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원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느냐도 실력 측정의 한 가지였던 모양이다. "단지 유리병만 원하십니까? 장식품은 필요 없으신지요. 여성용 장식품은 물론이거니와, 장식대 위에 올려놓는 커다란 장식품은 이 나라의 세공 실력을 한 단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 하는데요. 그리고 지금 말씀드리자면, 저희 상회에는 저희 대륙에서 손 꼽히는 대단한 실력의 장인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이 만드신 물품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이지요." [우와... 토냐씨 아예 네 보좌관으로 스카웃 해라. 상인의 모습이 따악 잡혔잖아? 아무리 로어씨에게 언질을 받은 거라고 해도.] 내 감탄에 선애가 동감이라는 눈빛으로 토냐를 바라봤다. 토냐의 말에 사다함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정도의 상품은 취급할 수 있다는 소리입니까?" "놀라우신가요? 하지만 일년에 천개 정도면 웬만한 상회는 다 취급할 수 있을 걸요. 천개면 한 달에 백개 정도인데요. 좀 큰 상회면 한 달에 몇 백개 정도는 거뜬할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 하지요. 아, 그리고 유리 세공품은, 몇개 정도의 견본을 봤으면 합니다만." "그럼 저희가 술을 가져다 놓고 다시 올때 견본품을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옥 원석을 구입 할지도 말씀드려야 하니까. 아, 그때 유리병도 몇개 정도 가지고 올까요?" 그에 다시금 사다함과 예흔랑과 오사함이 속닥속닥... 그때 로어도 토냐와 선애에게 슬며시 속삭였다. "저기... 저희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만... 저희 술 대금 지불할 여유 자금이 있습니까?" 그에 시선이 선애에게로 몰린다. "음... 가지고 올 수 있는 만큼 다 가지고 왔는데요. 혹시나 몰라 비상금까지 넉넉하게 가지고 왔으니까... 뭐, 약간 부족하면 좀 덜던지 아니면 외상으로 하던지 해 보죠." "이런... 여기 장식품들이랑 화장품들도 사가야 하는데..." "견본품으로 몇몇개 사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해요. 단지... 거래를 당장은 못하는데... 흠, 아무래도 다시 갔다가 오는게 좋겠네요." "화장품은 아무래도 직접 써보기도 하고, 유통기한이 얼마인지도 살펴야 하니까 당장 거래하는 건 불가능 하겠지. 장식품도 몇몇개만 사서 반응을 살펴보고 나중에 다시 주문을 하도록 하고." 어느 덧, 이쪽편도 자신들끼리 의논에 포옥 빠져 있는데, 오사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에 얼른 정신을 차린 선애가 대답한다. "어떤 제안이 있으신가요?" "어차피 옥 원석과 저희 나라 술을 실으려면 저희 나라로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실 때 저희 나라 사람 두어명을 데리고 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 나라 문물을 살펴서 혹시 수입 할 물품이 있는지, 어떤 물품이 그 나라에 먹혀들지 알아보고 싶습니다만. 게다가 여러분이 말씀하신 유리 세공품도 살펴보고요. 아, 물론 유리병은 여러분 상회와 계약을 할 것입니다." 사다함의 말에 토냐와 로어와 선애의 머리가 다시 맞대어졌다. "나쁘지 않습니다. 혹 대금이 모자르면 가서 준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로어의 말에 토냐가 맞장구 쳤다. "그러네. 거기다 간다고 해도 우리가 드워프 제품을 취급하는 한 우리 상회에서 내놓는 것 보다 더 뛰어난 유리 세공품을 볼 수는 없을 거야." "저들을 드워프 마을까지 데리고 가야 할까요?" "으음... 그건 가서 회장이랑 의논해봐야 겠지만, 내 생각에는 나중은 몰라도 벌써부터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아마 알파두르 항구 도시만 봐도 충분히 놀라지 않을까 싶은데?" 토냐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서로 의견이 잘 맞으니 정말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저희에게 소개시켜주신다는 상회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람 좋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사다함에게 선애도 같은 미소를 되돌려줬다. "물론입니다." 그 날 저녁, 선애 일행이 예흔랑 왕자에게 식사 초대를 받아 휘황찬란한 만찬을 대접받고 있을 때, 나는 구경도 못하고 근처에 있는 여관들을 뒤지고 있었다. 그랜트가 어디 묶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기껏 우리가 소개해 주겠다고 나섰는데 어디인지 몰라 예흔랑 왕자 일행에게 찾아달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랜트 녀석의 위치를 생각해볼 때 아무래도 여관 최고급층에 자리하고 있을테고 그의 인연 덕분에 그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안면은 알고 있었기에 찾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한 나라 사람들과 선애 일행이 머물고 있는 여관으로부터 두 건물 떨어진 또 다른 건물의 고급스러운 방에 바로 내가 찾던 그랜트 녀석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 저녁 식사를 끝낸 참이었던지 진 나라 차를 앞에 둔 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의 부록(?)인 엘리엇 제네비아 녀석이 있었다. '흥, 저 얼굴은 여전히 멀끔하네. 아아... 저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고 싶어라...' 엘리엇 녀석을 한번 노려봐준뒤 그랜트 녀석이 묶고 있는 곳을 확인 했으니 할 일도 끝냈다 싶어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얄미운 엘리엇 녀석에게 가볍게 장난을 쳐주고 갈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랜트가 들고 있던 서류를 다 살펴 보았는지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 무뚝뚝한 녀석이라 나는 그 녀석이 차 맛을 감상하고 있는 건지, 아무 생각 없는 건지, 아니면 딴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오랜 세월 녀석 옆에 있었던 엘리엇은 아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랜트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지만, 그랜트는 대답해 줄 기분도 안 났는지 차만 홀짝 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에 엘리엇 녀석은 그랜트가 내려놓은 서류를 곁눈질로 훑어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거래 내역이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으니 다행 아니겠습니까?" 왠지 대화 내용이 중요할 거 같아 나는 아예 그들 옆으로 다가가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그랜트가 보고 있던 서류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대충 보니 루빈스타인 상회와 진 나라의 상회간의 무역 계약서였다. 아마 몇 장에 걸쳐져 작성된 것인 듯, 맨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루빈스타인 상회와 호암 상회와의 계약 내용이다.' 라는 문장을 서두로 하는, 계약 내용과 목록을 이제 이야기 하겠다... 라는 말을 여러가지 수식과 어려운 말을 동원하여 잡다하게 써 놓은 계약서 첫번째 장이었다. 얼마나 쓸데없는 말만 장황하게 써놨는지 거기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내용은 루빈스타인 상회가 진 나라의 호암 상회와 거래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계약 기간이 3년이라 3년에 한번씩 새로이 계약을 한 다는 것, 혹 추가나 삭제 사항이 있을때 양 거래의 합의 하에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이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 밑에 깔려있는 몇 장의 종이가 살짝 옆으로 삐져나와 보이자, 나는 뒤의 내용도 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 했다. 뭐, 루빈스타인 상회가 진 나라에서 수입하는 대표적인 목록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이 사람 마음이 아닌가 말이다. 혹시 아는가? 계약서 첫 장을 보고 몇몇 정보를 얻은 것 처럼 내가 몰랐던 정보를 알 수 있을지 말이다. 그게 아무리 사소할 지라도. "거기에 전 거래에 비하여 수량도 늘어났고요." 엘리엇 녀석의 말에 그제야 그랜트 녀석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나는 계약서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들을 봤다. "가격도 올랐지." 가라앉은 어조. 평소 그에게서 듣던 어조에 비하여 확실히 틀린 거 보니 정말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대충 수용할 수 있는 한도내가 아닙니까? 게다가 가격이 약간 오를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고요." 계속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그랜트가 그 말에 엘리엇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차가운 분노가 어려 있었는데, 이 방에 있는 누구도 그게 엘리엇을 향한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12년 전부터 계속 올려댔으니 예측 못할 수가 있나? 후우... 이런 시덥지 않은 수작을 모른 체 그냥 넘어가줘야 하다니..." 엘리엇에게 분노에 찬 시선을 계속 보내는 것이 미안했던지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그랜트의 분노에 찬 어조에 엘리엇이 싱겁게 웃어 보인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3년 전 브라우닝님께서도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실 수 밖에 없었는데요." "헬게 형님 말인가? 그래도 형님은 새로운 거래 목록을 추가 하셨었지." "그랜트님도 새로운 거래를 개척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내일 계약을 하시고 시장을 둘러 보시면 브라우닝님보다 더 괜찮은 거래를..." 그랜트를 위로하려 엘리엇이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그랜트가 그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형님과 경쟁하려 하는 것이 아니야. 나는 단지 그들의 수작에 넘어가줘야 하는 상황이 불쾌한 것 뿐이야." 이번의 날카로운 어조는 확실히 엘리엇을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그 '헬게 브라우닝' 이라는 사람이 그랜트의 역린인 모양이다. '흠... 그런데 그 이름은 전에 그랜트네 저택에서 머물러 있을때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아, 하긴 그랜트의 예민한 부분이니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거였을라나? 어쨌든, 돌아가면 선애보고 정보길드에 알아보라고 해야겠다.' 엘리엇은 그랜트의 날카로운 반응에 '이크' 싶었는지 황급히 말꼬리를 돌렸다. "어쩔 수 없지요. 다른 건 몰라도 한지와 비단 만큼은 독점 공급하게 나라에서 지원을 팍팍 해주니 말입니다. 군대를 일으켜 이 나라를 확 쓸어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는데요." 루빈스타인 상회에서도 권력과 자금력을 동원하여 바이런국에서의 독점권을 지키는데 진 나라 상회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능력만 있으면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독점을 하더라도 적절한 수위는 지켜줘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언젠가는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틈새를 치고 들어와 누군가가 화악 뒤집어 엎을 수 있으니 말이다. '바로 우리 상회처럼 말이지. 우후후후... 아, 그런데 한지와 비단을 그러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는걸? 뭐, 덕분에 선애가 더 유리해지게 생겼어.'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귀를 번쩍 뜨이게 할 말이 곧바로 들려왔으니... "비단은 몰라도 하다못해 한지만이라도 새로운 거래를 텄으면 좋겠는데... 한지는 어차피 한 나라에서 생산하니 거기서 직접 수입을 한다면..." 그랜트의 중얼거림. 그에 엘리엇이 만류한다. "아서십시오. 예전에도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해가지고 괜히 한지 값만 오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저희 상회에 대한 이 나라의 감시가 더욱 더 철저해졌고요. 5년 전에 브라우닝님께서 직접 한 나라에 찾아가려 했다가 진 나라의 방해로 실패한 거 모르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때보다 더 심해졌을 걸요?" '호오, 그런 일이...' "나도 알아. 그래서 더 아쉬워. 하다못해 이 서대륙의 지도라도 있었다면 형님께서 성공하셨을 텐데. 아니면 정보라도..." "그걸 이 나라에서도 자알 알고 있으니 철저하게 단속 시키는 거겠지요. 어쨌든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내일 호암 상단 사람들을 만나시려면 또 신경쓰셔야 할거 아닙니까? 그 뒤에 곧바로 하남 상단과 만나서 비단 계약도 맺으셔야 하고요." "어차피 호암 상단과 만나는 건 점심때니 벌써부터 쉴 필요는 없어."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 뒤로 잠시 더 지켜 보았지만, 엘리엇이 그랜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하여 이것저것 시도하고 그랜트는 계속 가라앉아 있는 상태로 그닥 중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랜트 녀석 얼음 왕자 같은 이미지라서 성격또한 쿨~ 한 것이 기분 나쁜 일도 금방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금방 원래의 기분으로 컴백 하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번 기분 나쁘면 그게 꽤나 오래가는 타입이었나보다. '이거... 한번 삐지면 쉽게 안 풀어진다는 소리? 흠... 그럼 혹시 한번 찍히면 두고두고 화풀이 하거나 끝까지 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언제 어느 순간 기회가 온다면 복수를 하는 타입?' 이런게 바로 의외성이라는 걸까? 나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무표정하게 앉아 엘리엇의, 일명 달램을 듣고 있는 그랜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뭐 대단한 정보도 안 나오는 것 같고,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선애한테 돌아가려는 것이다. '우후후... 그래도 꽤나 큰 수확을 얻었어. 엘리엇 녀석, 네가 여러 이야기를 한 게 행운인 줄 알거라. 네 덕도 있다는 걸 알기에 오늘은 얌전히 물러가지, 안 그랬으면 내 너에게 뭔가 하나 했을 거다.' 밖으로 나오니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시간이 지나 있어서 나는 말 그대로 거의 날 듯이 일행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달렸다. 그러자 과연 내가 좀 늦기는 늦었는지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선애가 반색하며 맞이한다. "언니!"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같이 기다린 렌스버리 덕분에 더 반가웠을 거 같다. 내가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선애의 반응을 보고 내가 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미안, 많이 기다렸냐?] "찾는게 힘들었어? 루빈스타인 자작이 이 근처에 없었어?" 나랑 단 둘이 이야기할때는 보통 한국말로 하지만, 렌스버리 놈이 옆에 있으면 그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벤티도 대륙어로 말한다. 아, 그러고 보니... 렌스버리 놈 서대륙 말을 대략 아는 거 같던데, 그럼 선애 말이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그도 못 알아 들어서 아벤티노 공통어로 말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니 말이다. 뭐, 지금까지 그에 관해선 물어오지 않아서 우리도 잊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쫌 걸린다. 그가 그냥 계속 관심을 안 가져줬으면 좋으련만. 뭐, 그건 그거고 지금은 급한 용건이 있었기에 나는 선애를 향해 말했다. [선애야, 우선 사람들부터 불러라. 시간이 좀 촉박하단다.] 내 말에 선애가 난처한 표정으로 렌스버리를 힐끗 바라본다. "에... 지금? 시간이 없어?" 그에 렌스버리 녀석의 인상이 팍 찡그려진다. 내가 낮에는 선애 옆에 있는 걸 양보(?)해 주는 편이지만 밤에는 거의 자기네 전용 메신저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 말은 선애만 듣는 거고, 글을 쓰는 건 아리아씨가 내 손 잡고 쓰니까 옆에서 대화 하시면 안될까나요? 저는 선애 뒷쪽에 있을게요.] 내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선애. "오래 걸리나?"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는 렌스버리의 말에 선애와 나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야 정보를 전달하기만 하면 되지만, 내가 컴퓨터가 아니니 말하던 중에 모르고 누락시키는 정보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이야기 중에 생각나는 또 다른 정보나 의견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이들이 의논 하는 중에 끼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그 의논이 얼마나 짧게 끝나느냐를 누가 알겠는가? "글쎄요...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해보겠지만..." 조심스러운 선애의 말에 렌스버리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한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언니 유령이니까 저 벽은 그대로 통과하겠지?" "예? 아, 예..." 의도를 몰라 얼떨떨한 표정의 선애가 대답하자 그 녀석이 씨익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하는 거였다. "그럼 됐어. 내가 어느 정도는 양해해 줄테니 너는 그 의논이라는 걸 마음 껏 하도록." "예?" "네 언니보고 저 벽 사이에 끼어 있으라고 해. 어차피 벽이 크게 두껍지 않으니까 벽 너머로 손은 빠져나올 수 있겠지. 그리고 얼굴은 이쪽에 와 있으면 들릴 거 다 들리고 말할 거 다 말 할 수 있지 않겠어?" "에에에?" [에에엑?] 우리가 무슨 표정을 짓던 자기가 내 놓은 제안이 무지 마음에 든 렌스버리 놈은 우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거기는 그가 사용하는 침실로, 왕자측에서 내준 방이란 것이 거실 하나에 침실 두개, 혹은 세개가 딸려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 방은 2인실 침실 하나와 1인실 침실 하나가 있는 곳으로 선애와 소피가 한 방을, 렌스버리가 한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답도 안 들어가는 렌스버리의 뒷 모습을 무지 허탈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아리아씨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저어... 미안해요.] 그녀가 미안해 해봤자, 이제와서 우리가 뭘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지요 뭐. 그래도 이렇게라도 양보를 해 준것만 해도 어디인가요? 선애야, 넌 빨랑 가서 사람들이나 불러와라. 벽이 그렇게 두껍지 않아야 할 텐데...] 길게 한숨을 내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그리하여 그날 밤, 나는 벽 가운데에 끼인 채로 한 손은 아리아씨에게 잡혀 글을 썼고, 머리는 선애 쪽으로 내밀어 선애에게 말을 거는 희안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나보고 가라고? 아니 왜? 그 루빈스타인 자작과 안면이 있는 건 바로 너잖아? 게다가 우리 상회의 대표도 너고." 의아한 토냐의 목소리. 그녀의 의문은 당연한 거였다. 내일 정오즈음에 루빈스타인 상회와 진 나라 호암 상회간에 한지 계약의 새로운 갱신이 있을 거기 때문에 그 전에 그랜트를 만나 이쪽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후, 선애가 타이거 상회의 대표로 토냐보고 자작을 만나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루빈스타인 상회가 이 나라의 감시를 받는대요. 이 나라에서 몇몇 상회를 선택해 한지와 비단을 독점 판매하게 하고 있다니, 아마 그걸 유지하기 위해 지원해주고 있는 거겠죠." 선애가 거기까지 말했을때 토냐와 로어가 동시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 그러니까 그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날 보내는 거군? 넌 어딜 봐도 이 곳 사람이니 네가 만난다고 나서면 눈에 뜨일테니 말이야." 토냐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한 가지 더 부탁드릴게 있는데. 저희 상회에서 나왔다고 하지 마시고요, 그냥 면접 보러 온 것처럼 해주셨으며 해요. 이야기는 루빈스타인 자작과 그의 보좌관만 있을때 하시구요." "오케이." "마음 같아서는 로어씨도 같이 가셨으면 좋겠는데요. 이상할까요?" 선애가 토어와 로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묻자 토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무슨 소리야. 어차피 자작의 흥미를 유발시켜 거래 테이블로 끌어내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거기다 흥미 유발 요소도 충분하고. 이런 일에 뭐하러 로어까지 데리고 가니? 나 혼자 가면 충분해." "그런데... 거래는 어디서 하지요? 감시가 심하다고 하면 한 나라 사람들과 만나는 걸 들키는 것도 안 좋지 않습니까? 한 나라 사람들도 지금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여기에 와 있는 판에..." 로어의 말에 선애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어차피 한 군데 상회하고만 거래하는 것도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요? 여기도 상회로 위장하고 있잖아요." "에이, 그래도 이왕 조심하는 거 끝까지 조심해야지. 선애 너는 내일 다른 여관에 가서 방 하나 잡아놓고 기다려. 그럼 내가 루빈스타인 자작을 데리고 거기로 가도록 할게." "그것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약 제가 여기 정부라면 고급 호텔 모든 곳에 눈과 귀를 심어 두었을겁니다." 로어의 말에 같이 있던 소피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바로 옆에 그러한 정보 단체가 있으니 로어의 말을 '무슨 첩보 영화 찍냐?'하면서 웃어 넘길수가 없었다. "그럼... 차라리 한 나라 사람을 데려가도록 하지요. 그들이 토냐님의 말을 믿지 못할 때 산 증인이 될 수도 있는데다, 아예 가서 계약까지 체결하도록 하게요." 선애의 말에 토냐가 손뼉을 따악 쳤다. "오, 그거 좋네." "나쁠 건 없겠군요. 어차피 그들이 거래할 때 우리 상회가 끼어들 여지는 없으니까요. 아, 갈때 한 나라 대표를 우리 나라 사람으로 꾸미는 게 좋겠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내 마법이라면 외모 눈 속임 정도야 식은 죽 먹기거든."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일행은 늦다 못해 이제 새벽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한 나라 일행을 방문하러 갔다. 하지만,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차마 왕자나 나이 많으신 분을 깨우긴 미안했는지 타깃은 오사함이었다. 사실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그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랜트를 만나려면 아침 일찍 나가야 했기에 - 만약 계약이 성사되기까지 한다면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한게 좋았다. - 그 전에 한 나라 대표를 정하고 그가 가질 위임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사다함은 물론 예흔랑까지 모두 다 깨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렌스버리에게 붙잡혀 있느라 나중에 선애에게서 들었다. 그 뒤 사다함네 방에서 여러가지 의논을 하느라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한 일행은 이른 아침, 한 나라의 대표로 선발되어 토냐의 간단한 마법으로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이 되어 이국적인 외모가 된오사함과 토냐를 불안과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배웅했다. 그 즈음 렌스버리에게 풀려난 나는 반즘 감긴 눈으로 있는 선애에게 슬며시 물었다. [잘거지?] "/응. 무지 졸려.../" 작게 하품까지 하는 선애에게 나는 피식 웃고는 다시 말을 걸었다. [내가 따라가볼까?] "/안 졸려?/" [요즘은 요령이 생겨서 아리아씨에게 손만 빌려주고 나는 반쯤 자거든. 그 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도 한두번이지. 계속 듣고 있으려니 솔직히 좀 지루해서리...] "/그래주면 고맙지. 솔직히 좀 불안하거든. 나는 잘테니까 끝나면 와서 깨워주라./" [알았어.] 선애의 어깨를 가볍게 톡 쳐준 나는 토냐와 오사함의 뒤를 쫓아갔다. 그 둘은 겉에는 여기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색의 장포를 입고 삿갓을 깊숙히 써서 머리와 얼굴을 가린 채 오사함의 부하들 사이에 섞여서 밖으로 나왔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랬다고, 둘만 여관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가는 것 보다는 아침 일찍 외부로 나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정문으로 당당히 나가는 것이 훨씬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에 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거리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활기찬 분위기였다. 그들 틈에 섞여있다가 토냐와 오사함만 슬며시 부하들과 떨어져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겉 옷과 삿갓을 벗고 머리를 다듬었다. 그러자 안에 입고 있던 아벤티노 대륙의 옷차림이 나타나 그 둘은 누가 봐도 완전히 저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아아, 로어의 옷이 맞아서 다행이에요." 먼저 머리를 다듬은 토냐가 약간은 어색한 얼굴로 자신의 차림새를 살펴보는 오사함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때요, 끼는 데는 없지요?" "아... 움직이기가 약간 불편한 거 같은데요. 이거 괜찮은 겁니까?" "미리 말했듯이 저희 나라의 옷은 몸에 약간 달라붙는 디자인이라서요. 여기는 약간 풍성한 스타일이라 정말 편하기는 하더라고요. 좋아요, 이제 출발 할까요?" "길은 제가 아니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좋아요. 아, 잠깐만요." 그들이 외모를 숨기기 위해 입었던 회색 장포와 삿갓을 챙겨 넣은 가방에서 토냐는 마법사 후드를 꺼내 위에 걸쳤다. "추우신 겁니까?" "호호, 그건 아니에요. 이건 마법사... 아, 그러니까 여기 말로 하면 주술사? 하여간 그런 사람들이 입는 옷이죠. 면접을 보러 가는 거니까 당연히 이런 차림이어야지 않겠어요?" 그녀의 금발과 아주 잘 어울리는 밝은 초록색의 후드를 걸친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오사함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예. 그것도 편해보이네요." "그렇죠. 이건 실용적인 디자인이니. 그럼 이제 정말 출발 하자고요." 오사함은 여기 몇달 있었다더니 지리까지 훤한 듯 척척척 걸어가더니 한 번도 헤매지 않고 그랜트가 머물고 있는 여관에 도착했다. '흠... 하기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도 아니었으니까.' 외국인이 두 사람이나 쑤욱 들어왔지만,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그런지 종업원들이 한번씩 쳐다보고는 시큰둥 하게 생각한다. 뭐, 토냐의 미모에 한번씩 더 시선을 집중 시키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카운터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는데도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을 제지한 건 맨 윗층, 그러니까 루빈스타인 자작께서 머물고 있는 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여긴 전세 낸 층... 어라?" 올라오는 사람을 제지하려 한 기사 한 명이 토냐의 얼굴을 알아본 듯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그 기사 그랜트 녀석의 호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랜트 녀석이 그래뵈도 후작가의 후계자였기때문에 호위 기사가 딸려 있었던 것이다. 뭐, 가장 옆에 있는 건 엘리엇이고 그들은 한 발짝 정도 물러난 곳에 위치해 있어 크게 드러나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낯은 익었다. "안녕하세요? 루빈스타인 자작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십니까?" 토냐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잠시 움찔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보통 기사가 아니라 그런지 곧바로 정색을 하면서 정중하지만,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혹시 4서클의 마법사를 채용하실 의향이 있으신지 물어봐 주시겠어요?" 그녀는 방긋 방긋 웃으며 말했고, 오사함은 옆에 가만히 있는 것 같았지만 그가 시선을 주고 있는 곳을 따라가보니 그들이 서 있는 곳 바로 반층 아랫쪽에 윤이 자르르 흐르는 원목으로 만든 계단 난간을 열심히 닦고 있는 종업원이 보인다. "옆의 분은?" "아, 이 앤 제 아는 동생이에요. 이 애도 약간의 재주가 있지요." 토냐야 안면이 있지만 오사함은 처음 보는지 의아한 표정의 기사, 그러나 별 말 없이 한 사람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히유, 부디 잘 되어야 할텐데...' 다행이도 잠시 후 기사가 나와서 토냐에게 고개짓을 한다. "들어 오시랍니다." "고마워요." 하기야, 사실 토냐는 루빈스타인 상회나 아니면 나라에서 조차 탐이 날 만큼 대단한 마법사다. 그러한 토냐가 채용해달라고 찾아 왔는데 문전 박대 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토냐가 우리 상회에 들어와 준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윙겟의 능력이 대단한게 다행이었지.' 그걸 알고 있었기에 일행이 토냐를 상회 대표로 세운 것이다. 기사가 토냐와 오사함을 데리고 간 곳은 어제 내가 본, 그랜트 녀석이 머물고 있는 룸의 거실 이었다. 식사중이었던지 거실의 탁자에는 반쯤 먹은 음식이 있었고 그 앞에는 그랜트와 엘리엇이 토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자작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호프만 마법사." 토냐의 말에 그랜트가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였고, 인사는 엘리엇이 해왔다. "제네비아님도 안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저희 상회에 들어오고 싶으시다고요?" 단도직입적인 질문. 식사 시간을 방해 받아서 그런가, 일을 빨리 해치우고 싶어하는 기색이다. 뭐, 토냐야 그야말로 바라던 바였던지 뒤를 힐끔 돌아 아까 그 기사가 있는 걸 확인하고는 화사하게 방긋 웃는다. "이제부터 제가 드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건데요..." 아무래도 토냐가 마법사라는 것이 걸렸던지 기사는 밖으로 안 나가고 문 옆에 서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에 왼 손을 올려 놓고 대기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를 채용하는 것이 그렇게 크게 중요한 일이었는지 몰랐습니다만?" 토냐의 말에 엘리엇이 토냐 못지 않은 샤방~ 한 미소를 보이며 슬쩍 비꼬았다. 아무래도 토냐가 지금 몸 값을 올리기 위해 수를 쓰는 거라 생각했는지 '너 정도의 마법사는 우리 상회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에 토냐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이런, 이래뵈도 저는 귀한 대접을 받던 몸이라서 말이지요. 굉장히 중요한 정보도 같이 가지고 있을거란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그랜트가 나섰다. 아무래도 자기가 가만 있다가는 토냐와 엘리엇의 대결이 끝나야 본론으로 들어갈 것 같았나보다. "저 기사는 제 수족과 같은 사람으로, 언제 어느때고 필요하면 참석시킬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염려 말고 말씀하시지요." 그에 토냐가 뭐라 말을 하려고 할때 문에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마법사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전에 우리가 배가 파손되어서 루빈스타인 상회 배에 신세를 졌을때 역시나 안면이 있던 6서클의 마법사였다. 토냐가 마법사라 그런지 마법사까지 동원된 모양이다. 그 마법사와도 안면이 있던 터라 토냐가 먼저 인사를 하자 그 마법사는 토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오사함만 바라보며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토냐가 오사함에게 건 마법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그게 단순히 이미지 변신 마법이라 일단은 위험하지 않다 판단하고는 토냐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시선만 던졌다. 그에 토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 마법사 세계는 위계 질서가 엄격했던 것이다. - "모든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번 해보게." 할아버지 마법사의 말에 토냐는 그랜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본론을 꺼냈다. "사실 저는 고용을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타이거 상회의 대표자 자격으로 왔습니다." 그에 그랜트와 할아버지 마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엘리엇의 인상은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또 그 상회냐!'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엘리엇의 입에서는 곱지 못한 어조가 튀어 나왔다. "이게 무슨 수작입니까? 이런다고 당신네 제안을 받아줄 것 같소? 당장 돌아가십시오." "뭔가 굉장한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제네비아님. 내가 처음에 마법사 고용 운운 했던 것은 당신들이 우리 제안을 들어주지도 않을까 염려해서가 아니라, 당신네들을 감시하는 눈들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해두고 싶군요?" "뭐?" 엘리엇이 멈칫하는 사이 토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우리 상회의 제안을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건 당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루빈스타인 자작께서 정하는 것 아니었던가요?" "윽..." 그에 엘리엇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다. 지금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하여간 저 녀석 선애에 대한 거에 유난히 민감하더라. 마음에 안 든다니까. 가기 전에 한 방 먹여줄까?'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엘리엇이 얼른 그랜트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자 그랜트가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토냐를 향해 물었다.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감시를 당해서 그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선애가 아닌 자네가 왔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 "그 설명을 들으려면 저희 상회의 제안까지 다 들으셔야 할텐데요?" "그 정도의 시간은 내주도록 하지." 그랜트의 허락에 토냐가 방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 제안을 들으신 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안이 신통치 않을 경우도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것이오." 엘리엇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토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선애가 오지 않은 건, 여러분을 감시하는 곳이 이 나라 정부이기 때문이지요. 저야 아벤티노 대륙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선애는 서대륙인. 그런 선애가 찾아 왔다면 당연히 그들의 신경에 거슬릴 것 아니겠습니까? 그 뒤에 여러분이 호암 상회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 더." 토냐의 마지막 말에 그랜트와 엘리엇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더니만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일정에 대해 토냐가 아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리라. 그에 굴하지 않은 우리의 토냐양, 더욱 더 화사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저희 상회의 대표인 선애양이 이틀 전에 운이 좋게도 한 나라 상회 사람들을 만났지 뭡니까? 그들과 이야기가 잘 되어서 거래를 하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저희 상회의 힘이 크지 않아서 한 나라 상회 사람들이 거래하고 싶어하는 한.지.를 수용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이 곳에 올때 루빈스타인 상회의 도움을 받은 것이 생각나서 말이지요. 그때의 은혜를 받고자 선애가 한 나라 상회 사람들에게 루빈스타인 상회를 소개 하려고 하는데요. 어때요, 생각 있으십니까?" 토냐의 말에 살벌하게 번뜩이던 눈들이 놀라움으로, 다음에는 기대와 열의로 번쩍 빛났다. "그 말... 믿을 수 있나?" "선애양에게 그렇게 신용이 없으셨던가요?" 이건 오사함 들으라고 하는 말. 선애와 그랜트가 언제 믿음을 주고받고 하는 그런 대단한 사이었던가 말이다. 그러나 그랜트 루빈스타인 자작, 어려서 곱게만 자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 열의로 번쩍이던 눈빛을 순식간에 지우고 다시 차가운 빛을 내뿜는다. "타이거 상회에서... 우리에게 바라는 게 있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에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차원이랍니다. 그러나 저엉 감사를 표하려 하신다면, 성의를 봐서 물리치지는 않겠습니다." 알아서 달라는 말. 그러나 사실 이게 더 골치아픈 거다. 원하는게 있다고 탁 터놓고 이야기하면 밀고 당기기라도 해서 규모를 축소 시키기라도 해볼테지만, 알아서 달라고 하면 여기에는 루빈스타인 상회의 명예가 달려있는 것이다. 그 명예에 맞지 않게 작게 주면 웃음거리가 되는 건 자명한 일, 이건 밀고 당기기 할 건덕지도 없이 푸짐하게 줘야 하는 것이다. 아마 엘리엇 놈 배가 너무너무 아파서 사흘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좋아. 나중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 능력 닿는 한도 내에서 들어주지." '캬~ 영리한 놈이라니까. 한계를 따악 정해놓고 무리한 건 얄짝 없다고 못 밖다니.' 그러나 어차피 우리는 처음부터 무리한 거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바라는게 원래 없어서 돌아가면 무슨 요구를 할까 궁리중이니 말이다. "고마우신 말씀이십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물러날테니, 한 나라 상회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토냐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시동어를 외우자 오사함의 갈색 머리와 파란 눈이 서서히 원래대로 변했다. 토냐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자 그제야 앞으로 나서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오사함.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회 대표가 아니라 한 나라의 대표자로 온 오사함 이라고 합니다." 유창한 아벤티노 대륙 공통어를 하는 서대륙 꽃미남의 모습에 처음에는 놀라움과 얼떨떨한 기색이었으나 그건 잠깐, 곧바로 그랜트가 응대한다. 나라 대표였으니 상회 대표가 나서는 것이 격에 맞았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몰라뵈었던 점 사과 드립니다." "아닙니다. 감시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일이었는 걸요." "그런데... 한 나라에서 오셨다고요?" "여기, 저희 나라 국왕 폐하 옥새가 찍힌 공문서, 이 곳에 머물러 계시지만 사정상 저에게 위임한다는 저희 일행의 대표자이시자 사왕자 전하의 위임장이 있습니다." 제 31화 확실히 대 상회, 그것도 한 국가의 대표라고 일컬어지는 이름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했다. 사실 그 동안 루빈스타인 상회가 대단하다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피부로 느낀 적이 없어 단지 '그런가보다...'라고 생각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사함과 그랜트의 만남이 있은 뒤 타이거 상회는 한 나라와 누구보다도 먼저 거래를 했고 우선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와 루빈스타인 상회가 일으킨 돌풍에 '어어~' 하며 휘말려 가는 자신들을 발견해야 했다. 그만큼 그 둘의 만남은 우리 상회로써는 엄두도 안 나는 스케일들의 일들이 우리가 입 벌리고 바라볼 정도의 스피드로 척척 진행이 되니 정말 돌풍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고, 작은 스케일의 우리 상회로써는 그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쓸려갈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자존심 상하고 주눅 들고, 감탄 스럽고... 그래도 내 보기에는 그러한 일들이 선애의 시야를 한층 더 틔워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내심 좋은 경험이라 여겨졌다. 오사함과 그랜트의 만남을 주선한 토냐는 둘이 본격적으로 거래를 논의할 분위기자 그 자리를 피해 숙소로 향했다. 토냐의 임무는 만남을 주선하는 것 까지. 그 뒤 지지던 볶던 그건 두 대표가 알아서 할 일이었기에 제 3자인 토냐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뭐, 양쪽 다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니 최소한 거래가 무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요는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정도? 이것도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가운데 끼인 우리 상회로써는 두 곳을 대하는 입장이 틀려지게 되니 말이다. 바라건데 둘 다 만만치 않아서 거의 공평하게 되었으면... 했다. 생각 같아서는 토냐는 돌아가더라도 나는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우리 상회도 그 두 단체와 상관 없이 할 일이 많은 터라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서만 있었던 일을 들으면 난 틀림없이 선애에게 말하게 될텐데, 혹 나중에 선애가 둘 중 누간가와 이야기할 때 실수해서 언급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알아두면 좋기는 하지만 위험부담이 크니 차라리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토냐가 갈때 같이 돌아온 나는 곤히 자고 있는 선애를 깨웠다. [꼬맹아, 일어나. 언니 왔어.] 너무 정신없이 자고 있는터라 깨우기가 정말 미안했지만, 할 일이 많으니 할 수 없다. 그건 이 녀석도 잘 알고 있는 터라 그냥 나뒀다간 나중에 안 깨웠다고 무지하게 원망을 해댈 것이 뻔했기에 차라리 지금 깨우는 게 났다. "우웅..." 하지만, 이 녀석도 피곤 했는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선애의 어깨를 흔들었다. [피곤해도 일어나. 오늘 할 일 많잖아.] "우웅... 알아... 일어 났어..." 꼼지락 꼼지락 배게속으로 더더욱 파고들며 하는 말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저 녀석 세수할 수 있게끔 준비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대답하는 거 보면 정신 차리기 시작했다는 증거. 이럴때 더 깨우려 들면 오히려 신경질을 내기 때문에 이제는 알아서 깨게 두는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이쯤 되면 자기가 알아서 일어나니 말이다. 과연, 오분 정도 흘렀을때 잠을 못 자서 벌겋게 된 눈으로 부시시 몸을 일으킨다. "우우... 졸려..." [어이구, 착하다. 언능 언능 세수해.] 엉덩이를 톡톡 두들겨주며 말하자 팩 화를 낸다. "에이 씨... 엉덩이 때리지 말라니까. 내가 애냐?" [냐하하하~~ 이쁜 걸 어쩐대.] "아악... 징그러.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랬지?" 저 녀석 아직 애기였을때 하도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이제는 그런 소리에 진저리를 친다. 그래도 그 반응 조차 귀여운 걸 우짜노? 나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세수를 퍽퍽 해댄 다음 얼굴을 닦는 선애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어댔다. "웃지 마. 기분 나빠." [어허, 어디 언니에게...] "쳇, 그건 그렇고... 갔던 건 어떻게 됐어?" [무사히. 오사함이랑 그랜트랑 만났지. 엘리엇 놈이 되게 땍땍 거리기는 했는데, 양쪽 다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이었으니까. 오사함이 한 나라 사람이라니까 눈을 번뜩이더구만. 그 둘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할 거 같아서 돌아왔어. 사이 좋게 지내야 하는데 둘의 기밀을 듣기는 좀 뭣 하잖냐.] "잘 했어. 어차피 나중에 궁금하면 기밀 문서라도 훔쳐보면 되지 뭐. 소피가 아직 자려나? 밥 먹고 나가야 하는데..." [토냐씨도 데리고 갈 거냐? 토냐씨는 지금까지 계속 안 잤잖아.] "음... 술 사러 갈때는 냅두고 오후쯤에 장신구 보러 갈때나 깨워서 같이 가지 뭐. 술 계약 하러 갈때는 로어하고 소피하고만 가도 되니까." 우리는 솔직히 술 계약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서 금방 끝날 거라 생각하고 오늘 장신구와 화장품까지 다 보려고 했건만, 의외로 술 계약 하는 것이 시간을 오래 잡아먹어 그날 하루의 대부분을 소비해 버렸던 것이다. 크로스웰 상회처럼 여기도 진 나라에서 생산하는 모든 술을 독점 까지는 아니다 하더라도 다루는 상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하기야, 진 나라는 상업이 발달해서 그런지 몰라도 술의 종류가 무진장 하게 많아 그 모든 걸 독점은 커녕 수용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듯 싶었다. 우리가 바이런 국에서 봤던 건 그 모든 술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마도 바이런국 사람들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수입한 거겠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알게 된 건, 그 곳에 가장 큰 주류 상회는 네 곳으로 진 나라를 사이좋게 네 등분 하여 각각의 지방들에서 생산되는 술을 사이좋게 수출하고 있었다. 크로스웰 상회는 그 네 상회 모두와 계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문제가 생겨 버렸다. 네 상회 모두 무역선을 가지고 있을 정도의 큰 곳이라 우리가 그 곳에서 배 한척 분량의 술을 산다면 기꺼이 그 상회의 배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사려는 술이 네 상회 모두 고루 분포되어 있다보니 한 상회 주류의 양 가지고는 배 반척 분량을 채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 상회의 배를 빌린뒤 다른 상회에서 술을 사서 그 배에 채우려니 다른 상회의 시선이 곱지 못할테고 말이다. 게다가 그 네 상회 모두 계속적인 거래나 배 한척 분량의 술이 아니면 자신들의 배를 내주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배로 바이런국 까지 배달을 받고 싶으면 배 한척 분량을 사던가, 아니면 우리가 알아서 배를 조달하고 소량을 사던가 하라는 것이다. 정말 칼자루는 자기들이 쥐고 있다고 배짱 튕기는데, 생각 같아서는 그 네 상회의 술 창고들을 모두 폭파시키고 싶었다. [확 불질러 버릴까...] 더 열받는건, 이 광진 항은 아벤티노 대륙과의 무역만을 위해 만들어진 계획 도시였기 때문에 우리와 거래를 할 만한 주류 상회가 그 네 곳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다른 곳에서 살 수 있었으면 저 상회 사람들이 배짱을 튕기지도 못했을 거다. 아주 작은, 그러니까 광진 안의 술집이나 여관들에게 술을 공급하는 도매상들이 있기는 했는데, 그 곳의 술들도 이 거대 네 상회에서 흘러나온 것인데다 많은 양의 여유분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만약 이 도매상들에게 구입하려면 광진 도시 전체의 도매상들을 다 둘러보아야 할 듯 했다. 그래도 분량을 다 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기에 우리는 차라리 배를 따로 구해서 네 상회에서 주류를 사기로 결정을 봤다. 그런데, 그 배를 구하는 것에도 정말 여러 곡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 진나라가 아닌, 바이런국의 해운조합 무역선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광진을 다스리는 윗분의 압력으로 인하여 이 곳에는 아벤티노 대륙 상회가 경영하는 그 무엇도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상회의 지부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여기에 온 사람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집을 사는 것도 금지였다. 그러니 바이런국 해운조합 또한 여기서 경영 활동을 할 수가 없었으니 모든 일은 거의 자국에서 처리하고 여기서는 그냥 잠깐 들렸다가 가는 정도였다. 그래서 이 곳에 오는 바이런국 배들은 모두 올때도 짐을 싣고 오고, 갈때도 짐을 실을 예약이 미리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하기야, 먼 길을 오가는데 올때나 갈때 어느 한쪽에 빈 배로 오면 그 만큼의 손해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천상 우리가 바이런국 무역선을 이용하려면 바이런국의 알파두르 항구에 있는 지부에 연락해서 예약을 해서 때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배 한 척을 아예 전세 내어 빈 배로 여기 와서 우리의 짐을 싣고 가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운 좋게 만난 친절한 바이런국 출신 무역선 선장의 말에 의하면 예약은 대부분 일주일 전에 하는 것이 원칙인데, 우리는 여기서 배편을 통해 연락을 해야하기 때문에 빨라야 두달 후에나 두달 반 뒤에 올 배편에 가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배 한척을 전세 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연락이 가는 시간과, 거기서 연락을 받고 배를 몰고 여기에 도착하려면 그 정도는 걸리니 말이다. 거기다 배 한척을 전세 내는 건 요금이 두배였다. 그런 상황이니, 천상 여기 광진 해운조합 무역선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 일행이 요금을 알아보러 갔는데, 기가막히게도 요금이 바이런국의 한배 반 정도였다. 그러니까 요금은 바이런국과 똑같은데 광진을 다스리는 누군가께서 외국인에게는 요금의 절반을 세금으로 물렸다는 것이다. 정말, 어이 없고 허탈하고 열받고... 세상에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을 거다. "우리... 우선 돌아가서 좀 의논을 한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요. 나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머리도 잘 안돌아 가는 거 같아요." 광진의 해운조합에서 나온 선애는 이마를 짚으며 이야기하자, 로어가 얼른 맞장구쳤다. "저도 동감입니다. 가서 좀 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의논하도록 하지요."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거의 저녁이 다 되도록 신나게 돌아다니기만 하고 기가막힌 정보 외에는 별 소득 없이 터덜터덜 돌아온 일행을 맞이한 건, 그 동안 푸욱 자고 일어나 생생한 토냐였다. "왜들 그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어리둥절하 시선으로 축 쳐져 돌아온 일행을 살피는 토냐를 바라본 선애는 다짜고짜 토냐를 붙잡고 징징 거렸다. "토냐니이이이임~~~ 저 이 나라가 정말 진저리나게 싫어졌어요오~~~ 아으~ 뭐 이따위 나라가 다 있지요?" "뭐? 야, 선애야 왜 그래?" 토냐가 놀래서 선애를 달래려고 하는 그때, 우리 일행의 뒷쪽에서 아주아주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국과의 무역이 빵 뜯어 먹는 건 줄 아셨습니까?" 놀라서 시선을 돌려보니, 기가 막히게도 거기에는 한 나라 일행과 함께 그랜트 녀석이 엘리엇과 마법사, 그리고 두 명의 사무원 사람들, 호위 기사 몇몇과 같이 서 있는 것이었다. "헉." 너무 화가 나 있던 선애가 잠시 여기가 어디라는 걸 깜빡 하고 복도에서 토냐를 보자마자 감정을 터트렸던 것이다. 놀라서 당황한 선애를 향해 한 나라 일행이 미안한 미소를, 엘리엇 녀석은 고소하다는 미소를, 사무원 사람들은 이해 한다는 시선을 담뿍 보내오고 있었다. 그랜트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수 없는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게 제일 신경 쓰였다. "어라, 어쩐 일로 다 같이 오시는지요?" 당황해서 어버버 거리는 선애를 살짝 자신의 뒤로 미룬 토냐가 나서서 묻자 오사함이 대답했다. "아, 사실은 한 나라와 루빈스타인 상회의 거래가 좋게 성사된 기념으로 왕자 전하께서 루빈스타인 상회 분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 하셨답니다. 이렇게 된 것도 여러분의 도움이 크니 여러분도 초대 하고자 했는데..." 진 나라의 감시가 있는데도 이렇게 당당하게 여기로 오다니, 그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는 걸까나? 어쨌든, 갑작스러운 식사 초대에 평소라면 기꺼이 응했겠지만, 지금 일행은 피곤에 지친 상태고 선애 또한 창피할테니 토냐는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그랜트 녀석이 토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말을 하는 것이다. "같이 하지. 그쪽 상회에 이야기 할 것도 있고 하니." 고국의 귀족께서 저리 이야기 하니 평민인 우리가 감히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 토냐는 난처한 시선을 선애에게 한 번 던지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 일행이 준비하는 대로 전하의 방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오사함이 얼른 대답을 해주고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을 안내해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줬다. 아무래도 우리 일행을 배려해 준 모양이다. "아... 쪽팔려..." 그들이 가고 나자 선애가 창피해서 붉어진 얼굴로 속삭이자 토냐가 쿡쿡 웃으며 등을 타악 쳤다. "괜찮아, 괜찮아.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거기서 넘어져서 치마가 훌렁 넘어간 것도 아니고 말야. 그거에 비하면 훨씬 났지 뭐. 어쨌든,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니 준비하자고. 선애 네 이야기는 가면서 듣고." "정말 짜증나게 구네. 그래서 어쩔거야?" 선애가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 입으면서 낮에 고생했던 일을 푸념조로 털어놓자 토냐가 혀를 끌끌 찼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여기 무역선을 이용해야죠. 하는 수 없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바이런국에서 올 때 무역선을 빌려서 타고 올 걸 그랬어요." 선애가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으며 투덜대자 토냐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여기가 이렇게 짜증날 줄 누가 알았냐. 게다가 만약 우리가 무역선 하나 빌려서 타고 왔으면 저 루빈스타인 자작이나 한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겠어? 지나간 일 어쩔 수 없는 거, 좋게 좋게 생각 해." 토냐의 말을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랬다. 인생사 세옹지마라더니 상인의 길 역시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우, 어쨌든 생각보다 돈이 엄청 들어가게 생겼어요. 비상금에 혹시 괜찮은 거 있으면 쇼핑 하려고 돈을 넉넉히 준비해 온 게 다행이에요. 뭐, 제 개인 쇼핑은 포기하게 생겼지만요." "인생이란 그런 거지." 선애의 말에 토냐가 키득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서는 한 나라의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우습게도 한 나라에는 머언 바다를 항해할 커다란 배가 없었다. 있는 거라곤 진 나라 정도만 왔다 갔다 하는, 얕은 바다를 왕래하는 작은 배라던가, 강을 왕래하는 소형선 정도? 그래서 이번에 우리와 거래를 하면서도 배는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 상회도 물론, 바이런 국의 해운 조합이 있으니 거기의 힘을 빌리면 되겠다 싶어서 알겠다고 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한 나라의 도움을 받는 건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인생이란 정말 예측 불허에 변화무쌍한 건가보다. "타이거 상회에는 배 없지요? 그럼 우리 상회 배를 쓰도록 하시죠?"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무척이나 큰 은혜로 여겨졌을텐데, 엘리엇 녀석이 말하니까 우리 상회 작다고 비웃는 것 처럼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설명을 좀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샤방한 미소를 띈 엘리엇 말에 화사한 미소를 띤 토냐가 상냥하게 물어본다. "타이거 상회는 여기에 물건 사러 오셨다면서요? 아마 이곳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이 돈만 들고 오셨을텐데, 배가 없어 곤란해 하지 않으십니까?" "아... 그래서 저희 상회를 위해 배를 빌려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이거 참 고마운 말씀 이시군요. 그래, 대여료는 얼마 정도로 해주실 생각이신지요?" "저런 저런, 저희 상회를 너무 냉혈한으로 보시는 군요. 타이거 상회의 사정을 뻔히 아는데 저희가 어찌 돈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어머나, 세상에... 루빈스타인 상회의 넓으신 아량에 이거 참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지금까지 그 넓으신 마음씨를 왜 저희는 몰랐을까요?" '가난한 너희에게 뭔 돈이야? 그냥 적선하는 셈 치마.' 란 엘리엇의 말에 토냐가 '네 놈들이 언제부터 자원 봉사를 했다고 지금 와서 유세냐?' 라고 받아치는 것이었다. 그것도 샤방~ 미소와 화사한 미소를 사방으로 뿌리면서 말이다. '오라~ 이게 샤방~ 미소와 화사 미소의 대결인가?' "이거 전부터 모르던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저희가 타이거 상회를 외면하겠습니까?" 엘리엇의 말이 무지 무지 열받기는 했지만, 사실 우리 처지에서 꽁짜로 배를 빌려주겠다는 제안은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특히나 상계에서는 댓가 없는 친절은 조심해야 하는 것이고, 특히나 저 엘리엇 놈이 말하면 평소보다 수십배는 더욱 더 주의해야 했다. 그것이 토냐가 엘리엇 놈의 제안을 덥썩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말을 톡톡 받아 치면서 의중을 알려고 노력하는 이유였다. "어머, 어머, 평소와 다르시니 이거 참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갑자기 착한 척 하지 말고, 원하는 게 뭔지 솔직히 말해.' 라는 토냐의 말에 엘리엇이 더욱 더 진한 미소를 보이며 본론을 꺼냈다. "아하하... 정말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군요. 아무 부담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그가 말 끝을 흐리며 드디어 본론을 꺼내는 것 같자 토냐와의 싸움을 재미있게 관람(?) 하던 나는 '드디어'란 얼굴로 엘리엇의 입을 주시했다. "단지, 한 나라와의 무역을 하실때 항상 저희 상회의 배를 이용해 주시면 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잠시 그의 말을 이해 하느라 침묵하던 토냐와 선애는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거절 하겠습니다." "거절 입니다." 그 말에 샤방~한 미소를 띄우던 엘리엇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토냐와 선애는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한 후 확고한 시선으로 엘리엇을 바라봤다. 나도 토냐, 선애와 같은 의견이다. 다른 계산 다 떠나서 엘리엇의 제안이라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 제안 받아들였다간, 나중에 그거 가지고 얼마나 거만 떨겠는가 말이다. 아마 선애도 반 정도는 그 때문에 거절을 한 걸 거다. 그런데 이때, 놀랍게도 오사함이 엘리엇 편을 들며 나서는 거였다. "한번 더 생각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가 나설 줄 몰랐던 선애 일행이 그를 바라보자, 오사함은 예의바르게 끼어들어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엘리엇과 함께 설명 하기 시작했다. 한 나라와 루빈스타인 상회는 한지는 물론이거니와 도자기까지 거래하기로 했단다. 역시 루빈스타인 상회의 눈으로 봐도 가을 하늘 빛의 청자는 탐스러웠던 모양이다. 열 받는 건, 그 와중에 마치 인심을 쓰듯 술병용 자기와 독특한 모양의 자기는 우리에게 양보 했는데, 술병용 자기에는 그 파아란 청자는 쏘옥~ 빠져야 했고, 독특한 모양의 자기도 여성 화장품용 병이나 통만 우리에게 넘긴 거였다. 엘리엇 놈 그 이야기 하며 득의양양하게 웃는데, 속에서 열이 화악 올라왔다. 정말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하여간, 그리하여 이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한 나라를 자주자주 왔다갔다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 되었다. 이 한 나라에는 진 나라와의 국경 가까운 곳의 바닷가에 해군 기지가 있는 항구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항구에 진나라의 무역선이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게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벤티노 대륙과의 무역을 독점하려 무진장 애를 쓰는 진 나라인데, 한 나라 항구에 루빈스타인 상회 배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둘 사이에 거래가 생겼다는 걸 눈치 채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하려 들 건 불을 보듯 뻔~ 했다. 그러니 거래 한다는 건 가능한한 숨기자고 결론이 난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원래 아벤티노 대륙과의 거래를 성사, 진행, 확대 하려 했던 한 나라에서도 이것을 예측하여 진 나라의 광진 같은 아벤티노 무역 전용 비밀 항구를 만들려고 여러가지로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여기에 루빈스타인 상회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이 계획이 마치 순풍에 돛 단 듯 구체적으로 착착 진행이 되게 생겼던 것이다. 한 나라에다 만드는 거니 당연히 한나라의 힘이 필요하겠고, 루빈스타인 상회가 거기에 손을 댈 여지가 있었던 것은 진 나라 몰래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작은 항구 하나 만드는데도 많은 돈이 필요할텐데, 거대한 무역선이 드나들 커다란 항구를 만들려면 '많다'라는 표현은 좀 부족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갈 거다. 그러한 돈이 한 쪽으로 흐른다면, 서대륙의 경제를 손아귀에 준 진 나라가 그걸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그리하여 진 나라가 수상히 여기지 않게 루빈스타인 상회가 외부에서 지원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단순히 자금뿐만이 아니라 건축 자재 등등의 물질 후원도 있는 것 같다. 아마 한 나라는 그 만큼의 혜택을 루빈스타인 상회에 줄 거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것 외에는 생각 못 하는 타이거 상회와 무지하게 비교되는 순간 이었다. 뭐, 내 자격지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사함과 엘리엇 말의 요지는 우리 상회가 원하는 물건을 날라다 줄 무역선도 그 항구를 이용해야 할텐데, 어차피 해운조합의 배를 이용할 거 기밀 유지를 위하여 루빈스타인 상회의 배를 이용하라는 것이다.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은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게 우리 상회로써는 절대로 좋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악재가 높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 상회는 루빈스타인 상회에 비하면 마치 범선 옆에 구명 보트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무역선을 루빈스타인 상회에 의존하게 된다면, 이건 완전히 범선 위에 구명 보트를 올려놓고 다니는 격이다. 그러니 한 나라가 볼때 우리 상회는 루빈스타인 상회에 소리 소문 없이 흡수되어 사라져 존재를 잊어버리게 될 확률이 높았다. "안 됩니다. 거절 하십시오." "절대 안돼." 오사함과 엘리엇의 설명을 - 내 보기에 설명이라기 보다는 루빈스타인 상회의 무역선을 이용해야 하는 당위성의 주장이었지만 말이다 - 듣는 와중 로어는 얼굴색이 안 좋아지며 필사적인 목소리로 선애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건 토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주장에 선애는 단호하 얼굴로 사람들을 마주보았다. 어차피 엘리엇 놈이 마음에 안들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었을테니 울 꼬맹이에게는 거리낌이 없었으리라.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거절하겠습니다." "그렇다는 건, 귀 상회로써는 저희 루빈스타인 상회의 무역선을 이용하는 것 만큼이나 좋은 대안이라도 있으신 모양이군요. 혹, 무역선을 사기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엘리엇의 비꼬는 말투. 그에 선애의 눈초리가 차가워졌지만, 나는 씨익 웃으며 선애에게 속삭였다. [그럴거라고 해. 돈 모자르면 내 루빈스타인 상회 본부에 쳐들어가서 훔쳐 오마.] 내 말에 선애의 얼굴이 음흉하게 빛났다. "예, 바로 그럴 생각입니다." 선애의 당당한 선언에 엘리엇 녀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랍군요. 타이거 상회에 그만한 재력이 있었다니, 몰랐습니다." "괜찮습니다. 떠들고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아, 그래도 이번에 귀 상회의 무역선을 빌려 주신다는 배려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직 배가 마련되지 않아서 곤란하던 차였거든요. 거기에 내친김에 배 한 척 더 빌려주시겠습니까? 한 나라에서 물건을 싣고 올 배도 마련해야 하는데, 여러분께서 말씀하신 '비밀 엄수'를 위하여 배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귀 상회의 도움을 받는게 좋겠지요?" 갑자기 당당해진 선애의 태도에 엘리엇의 눈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선애가 뭘 믿고 당당해질 수 있었는지 분석하느라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설마 자신네 상회의 금고를 믿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하겠지? 생각지도 않았고, 별로 고맙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루빈스타인 상회 덕분에 배 문제가 해결 되자 그 뒤로 타이거 상회 일도 일사천리였다. 루빈스타인 상회가 내 준 배를 가지고 진 나라 주류 상회 네 곳을 들려 생각하던 목록과 수량은 물론이거니와 크로스웰 상회에서 아직 들여오지 않은 술들 중 괜찮은 것 - 로어와 토냐, 그리고 소피도 간간히 시음해서 고른 것들이다. - 까지 여러 종류를 실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한 나라와 소개시켜준 댓가로 배 두척을 꽁짜로 빌려줬기 때문에 자금이 넉넉하게 남아서 광진에 있는 여성용 가게를 모조리 돌아다니면서 물건들을 사들였다. 단순히 개인적인 쇼핑이 아니라 야생화 화장품, 향수 가게에 들여놓고 반응을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괜찮다 싶은 물건들은 거의 다 사들였다. 덕분에 가지고 간 돈이 모자르게 될 뻔 했지만, 그것도 운 좋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한 나라 왕자 일행과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과 같이 저녁을 한 그 다음 날, 광진 도시 내를 돌아다니다가 그 '하류' 녀석의 일당을 발견하여 잠시 선애와 헤어진 내가 뒤를 밟았던 것이다. 그 뒤는, 뭐, 다들 예상 했다시피 마법 가방 하나 몰래 들고 가서 녀석들이 고이 고이 모셔 놓은 금괴를 털어 내는 것이었다. 여기는 아벤티노 대륙의 마법 쓰임새와 달리 주술이라는 것이 일상 생활에 다양하게 사용되지 않는지 귀중품을 보관 하는데 주술 같은게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아서 자세한 정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캐링턴 후작가 저택을 털었던 것 보다 무지무지 쉬웠다. 뭐어,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캐링턴 후작가를 털었을때 보다 소득이 훨씬, 훠어얼~~씬 적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무역선 짐 한 칸을 당당히 차지 할 정도로 꽤나 많은 여성용 장식품들과, 그것을 판매 하는 여 종업원들을 위한 진 나라 여성복, 그리고 토냐가 흥미로워 하는 많은 화장품들과 그 재료들까지 구입하다보니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그 동안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과 한 나라 왕자 일행들도 바빴다. 한 나라 왕자 일행들은 온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몇몇 정보원만 냅두고 철수 준비를 했고,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은 한 나라에 가기 전, 진 나라 상회들과 맺은 계약들을 정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주일 후, 우리 일행은 다시 루빈스타인 상회 무역선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행에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로어가 빠졌다는 것이었다. 로어는 곧바로 바이런국의 알파두르 항구로 향하는 무역선에 타고 있었다. 타이거 상회의 짐을 싣고 가는데 아무래도 일행 중 한 사람이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서였다. 선애는 일행 대표이니 한 나라에 직접 가야 할테고, 토냐는 화장품 재료들을 둘러봐야 할테고 소피는 선애의 시녀이자 호위 무사이니 선애와 떨어질 수 없다는 이유를 들다보니 갈 사람이 로어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자 혼자 아무도 모르는 무역선에 태우는 것 보다는 그래도 남자가 가는게 좀 맘이 편하고 말이다. 로어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뭐어, 그래도 그 무역선에 조금이라도 빨리 본 상회에 연락하고자 안면을 익힌 그랜트의 비서가 같이 타게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라도 얼굴을 아니 서로 말 동무도 되고 좋을 거 아닌가? 거기에 겸사 겸사 서로 정보도 탐색해보고 말이다. 그래도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캐낼 것이 타이거 상회에서 캐낼 것 보다 많지 않겠는가? 우리로써는 이래저래 손해볼 건 없었다. 그렇게 로어를 보낸 일행은 곧바로다른 배에 올라 한 나라로 향했다. 한 나라 왕자 일행, 그랜트 일행과 한 배를 탔는데, 그랜트 일행은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었다. 그와 함께 오사함과 사다함도 같이 바빴다. 토냐도 광진에서 산 화장품을 살펴 보느라 선실에 콕 박혀 있었다. 가장 한가한 건 예흔랑 왕자와 선애, 렌스버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세 사람은 자주 모이게 되었다. 물론 호위인 백운이나 소피도 같이였다. 의외인 것은 렌스버리가 따로 놀지 않고(?) 같이 있어준다는 거였다. 물론, 내가 걱정되어 선애와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녀석의 성격 상 좀 의외이긴 했다. 밤에 아리아씨에게 뭔가 단단히 언질이라도 받았나? 예흔랑 왕자가 선애와 같이 있는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오사함과 사다함이 바빠서 거의 상대를 못 해주는데다 백운은 과묵한 스타일이다보니 즐거운 이야기 상대가 못 되어서 대화 상대가 별로 없었던 차에 그나마 선애가 대충이라도 말을 알아 듣는 듯 하니 자연스레 선애를 붙들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선애야 말을 못 해도 그가 말하는 건 내가 모두 해석해 주는데다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는 것으로 '예', '아니오' 정도의 의사 표현은 할 수 있으니 그럭저럭 말은 통했던 것이다. 게다가 선애도 한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알고 싶어했고, 예흔랑도 바이런 국에 대해 여러가지를 알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가끔 가다 변덕이 생긴 렌스버리가 끼어들어 통역을 해주거나 설명을 해주기도 해 둘 사이에는 어설프게나마 대화가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낮의 일, 저녁 식사가 끝나면 예흔랑은 자신들의 일행과 함께하는 모양이었고, 선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저녁 이후에는 아리아씨의 전용 펜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때 선애가 뭘 하고 있는지는 나중에 선애가 이야기 해주지 않으면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밤 새도록 전용 펜이 되어준 나는 날이 새고 나서야 아리아씨의 미안함 반 고마움 반이 섞인 시선을 받으면서 선애가 묶고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에구구... 찌뿌두둥 해라. 이럴때는 그저 뜨끈뜨끈한 방에 드러눕는게 최고인데... 아아, 유령이 되고 나서 그런 즐거움도 사라졌어. 크흑...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아끼지 말고 새로 생긴 찜질방은 다 가볼걸~' 괜히 경직된 것처럼 느껴지는 어깨와 팔을 주무르며 선애가 머물고 있는 선실로 돌아오자 폭신한 침대 위에서 잘 자고 있다. 이번에 한 나라와 만나게 해줘서 그런지 선애 일행은 전에 구조되어 배를 얻어타고 왔을때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뭐어, 그랜트 녀석이 사용하는 선실보다야 훨씬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좁지 않은 1인용 선실에 침대도 꽤나 괜찮은 걸 사용할 수 있었다. 한 나라 사람들과 우리 일행을 태우려고 미리 준비를 한 모양이다. [어이, 이제 슬슬 일어나지? 조금 있으면 소피가 깨우러 올 거야.] 곤히 자고 있는 선애를 보자니 왠지 심술이 솟아나 나는 괜히 선애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요즘들어 내가 매일 선애에게 부리는 자그마한 심술이었다. 예전에 대한 복수라고나 할까? 선애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중학생때보다 훨씬 압당겨진 등교시간 때문에 매일 졸린 눈을 비비며 힘들게 일어나야할때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라 엄청 줄어든 수업 덕분에 선애보다 서너시간은 더 잘 수 있었다. 그걸 억울해 하는 울 꼬맹이는 매일 등교하기 직전 잘 자고 있는 나에게 와서 강제로 날 깨워놓고는 후다닥 도망을 가버렸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때의 원한이 그래도 쪼~~끔은 쌓여 있었나보다. 소피가 와서 깨워도 될텐데 괜히 소피 올 시간이라고 미리미리 깨워버리니 말이다. 어차피 일어나봤자 크게 할 일도 없어 소피도 만약 선애가 원하면 늦잠을 자게 내버려뒀을 건데, 나 때문에 선애는 요즘도 꼬박 꼬박 일찍 일찍 일어나고 있었다. "/아... 언니.../" 평소라면 원망을 담뿍 담은 선애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을텐데, 오늘은 잠에 취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째 나를 기다렸다는 듯한 어조다. 과연, 평소라면 내가 깨운 뒤에도 이불속에서 한참동안이나 꼼지락 꼼지락 된 후에야 겨우 몸을 일으키는 녀석이 오늘은 몇번 뒤척거리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 졸려./" [어라라, 오늘은 아침에 할 일이 있나봐?] "/후아아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이 아니면 언니랑 이야기 할 시간이 없잖아. 우우.../" 상체를 일으키긴 했지만 다시금 밀려드는 졸음은 어쩔 수 없었는지 얼굴을 다시 배게 속으로 파묻은채 뒹굴 거렸다. [왜? 나에게 할 말이 있어?] "/웅? 아아... 그게... 우우웅.../" 길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후에야 선애는 제대로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발딱 일어나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앉은 꼬맹이는 엉망인 머리를 뒤로 대충 쓸어 넘긴 후 입을 열었다. "/언니, 나 물좀.../" [오냐.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아... 그게 있잖아, 나 어젯밤에 그 사람 만났다?/"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 선애에게 물이 담긴 컵을 건네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에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감? "/그 사람 말이야. 그랜트 루빈스타인 자작. 저녁 먹고 선실이 좀 더워서 바람 쐬러 갑판에 나갔다가 만났어./" [허, 요즘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을 용케도 만났네. 앗, 혹시 옆에 엘리엇 놈 있디? 그 놈이 너보고 뭐래?] "/혼자 나왔던데 뭐. 그런데, 왜, 내가 그 사람네 저택에서 일했을때, 그 사람이 나 서대륙 사람인 줄 알고 출신지 물어본 적 있었잖아./" [그랬지. 그래서 한국 춘천... 앗, 혹시 그거 물어보디?] "/응응, 어후,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니까. 어제 만났는데 갑자기 고향 가니까 좋겠다고 그러는 거야. 나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잖아./" [이런, 이런... 좀 난처하네. 에... 설마 정보 길드에서 너에게 한 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려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난 그것 보다 그 자작이란 사람이 한 나라 사람에게 춘천이 어디냐고 물어볼까봐 더 걱정 인데? 그런데 여기 한 나라에도 춘천이 있으려나?/" [앗, 그것도 그렇네. 이거 참...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 "/그게... 너무 당황해가지고 말이야. 대충, 이제는 아무 상관 없는 곳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한 나라 출신인거 말 안 했다고 이야기 하지 그랬냐?] "/아아, 그것도 말했어. 고국 사람들을 만나서 무척 기쁘겠다고 하면서 그들도 내가 한 나라 사람인 거 아냐고 물어보기에...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 나라 출신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아니, 네가 언제 거짓말 했냐? 우리는 분명히 한국 출신인데 뭐. 혹, 나중에 춘천이라는 곳이 있냐고 하면 거기 출신이라고 빠득빠득 우겨.] "/아후, 어쨌든 심장이 철렁 했었어./" [뭐, 별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음? 그거 외에는 별다른 거 없었던거 같은데. 한 나라 출신인거 들먹거리는 바람에 놀라서 정신도 별로 없었고./" [으휴... 한 나라와 거래를 튼 건 좋은데, 이런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 너 될 수 있으면 그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말아라. 에, 그래봤자 네가 한국 출신이라는 건 여기서 루빈스타인 자작하고 엘리엇 놈 뿐인가? 소피는 빼고.] "/아마 그럴 걸?/" [어쨌든, 이제는 스스로 바이런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한 나라에는 모든 인연이 없다고 우기는 거야. 한 나라에서 올때는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이랑 같은 배 타고 오지 말자고.] "/머리 아프네. 한 나라로 가지 말고 그냥 바이런 국으로 돌아갈 걸 그랬나? 한 나라에서 물건 싣고 오는 건 루빈스타인 상회에 부탁하면 되었을 걸./" [에이, 그건 그래도... 원래 한 나라에 가려고 했었잖아. 바이런 국에 가지고 갈 상품하고 분량 확인은 해야 하니 까. 게다가 한 나라에 또 다른 괜찮은 상품이 있을지도 모르잖니. 특히나 화장품. 그래서 토냐씨도 직접 가는 거고 말이야. 나중에 다시 오기 어려우니 여기 온 김에 다 해야지.] "/그거는 그렇지만.../" 그런 일들이 아니었다면 나도 엘리엇 녀석이랑 한 배를 타면서까지 선애와 함께 한 나라로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한 나라의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일행은 엄청난 실망을 맞보아야 했다. 그 항구는, 아직 이름도 없는 한적한 바닷가였던 것이다. 이제부터 거대한 항구로 만들 계획만 구체적으로 세워진, 아직도 공사를 시작하지도 않아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앞으로 시작될 공사들을 대비하여 인부들 숙소 창고 등등으로 만들어진 가건물들과 막사들만 여기저기에서 보일 뿐이었다. 물론, 우리도 건설 예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에 만들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최소한 뭔가 기초가 될 만한 작은 어촌 마을 같은 곳이 있을 줄 알았지. 그러한 상황이니 다른 뭔가 괜찮은 상품을 찾기는 커녕 제대로 된 숙박 시설이나 찾을 수 있을 지 걱정이었다.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은 이런 모습인 걸 알고 있었을까? '쩝... 하기사, 같이 사업을 하려면 이야기를 안 할래야 안 할수가 없겠지. 아, 그런데 심하긴 너무 심하구만. 여기에 우리가 싣고 갈 물건이 있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군요." "하아?" 허허벌판인, 미래의 큰 항구도시가 될 이 곳의 풍경으로 보아 새로운 상품 발굴은 물 건너간 일이라 생각한 선애 일행은 상품 개발은 다음번으로 미루고 약속 되어 있던 물건을 싣고 곧바로 출발하기 원했다. 어차피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배 한척을 빌려준 뒤였기에 그 배를 가지고 언제 출발하느냐는 우리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뭐, 식량등등도 챙겨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 의견을 전하기 위하여 찾아간 자리에서 오사함이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려는 상품들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수도에 있었는데 우리가 출발할 즈음 한 나라에 연락을 띄워 이쪽으로 운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 여기에 와 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직 도착을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뭐, 그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21C의 한국이 아니었으니 예정이 며칠 어긋나는 것 정도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더욱 더 당혹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일행은 더 이상 이 미래에 항구가 될 허허 벌판에 정신을 계속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잠시 루빈스타인 상회분들이 오신 뒤에 말씀드릴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오사함을 찾아온 곳은 허허벌판에 몇개 안 만들어진 가건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제법 깨끗하게 만들어진 것이, 여기에 거하는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는 걸 한 눈에 알게 했다. 역시나, 여기에 거하는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공사의 총 책임자를 맡고 있는 나라의 관리와, 이 곳에 대한 비밀 유지, 중요 인물 경호, 중요 자재 경비 등등을 책임지고 있는 장군의 숙소였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예흔랑을 위시한 한 나라 사람들이 잠시 머물고 있었다. 여기는 숙박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은 우리가 타고 온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고, 타이거 상회 사람들은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빌려 준 배로 모든 짐을 옮긴 상태였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이 도착하여 모두 모이자 예흔랑 왕자가 사람들을 쭈욱 둘러보더니 직접 입을 열었다. "부왕께서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부왕? 부왕이라고라?' 왕자의 부왕이라면, 이 나라의 국왕. 하기야, 왕자 일행이 처음부터 진 나라 광진에 온 것이 왕명을 받아서였으니, 일이 성공한 이상 국왕이 우리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진 나라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부왕께서는 조용히 궁을 나오시겠답니다. 그리하여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여러분들을 궁으로 직접 초대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부왕의 초대를 받아 들이시겠습니까?" 초대라고 하니 우리에게 거절할 여지가 있긴 있나보다. 물론, 아벤티노 대륙과의 무역과 자국의 경제에 크나큰 관심이 있는 왕을 만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어하는 상인이 어디 있을까? 특히나, 처음으로 거래를 하게 된 상인이라면 뇌리에 진하게 각인될텐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 상회는 거절해야 했다. "아쉽지만, 거절해야 해. 스케일이 너무 커졌어. 지금 우리 상회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 알지? 상인은 무조건 커다란 이익만 바라는 것이 아니야. 적은 이익이라도 차라리 감당할 수 있고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상인이다." 토냐가 진지한 표정으로 선애에게 충고한 말이었다. "선애님, 외람되지만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저희는 분명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과 같이 왕을 배알하게 될텐데, 그러면 저희 상회는 루빈스타인 상회에 묻힐 것이 뻔합니다. 저희가 그들의 영향력을 벗어나 한 상회로 당당하게 존재하지 못한다면 한 나라 왕이 아니라 여러 왕을 같이 만나도 소용 없다 생각합니다." 로어가 있을때는 될 수 있는 한 이런 일에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지 않는 소피였는데, 지금은 선애에게 충고해 줄 사람이 토냐밖에 없어서 그런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건 나도 동감이었다. [소피 말이 맞아. 우리 상회를 드러내지 못하면 만나봤자 오히려 우리만 초라해질 뿐이야. 우리는 벌써 충분히 예상치 못한 이득을 충분히 얻었어. 과욕은 금물인 거 알지?] 사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란 말인가. 이 기회를 그냥 차버리려니 선애 속이 무지 쓰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과욕은 안 좋았다. 만약 우리 상회가 적어도 크로스웰 무역 상회 정도만 되었더라도 왕을 만나보는 걸 심각하게 고려해볼텐데, 지금 우리 상회는 너무나 작은 곳. 분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은 당연히 감사하게 초대를 받아들였다. 하기야, 거대 항구를 건설하는데 크게 뒷받침 해줄 상회인데, 첫 무역 거래자가 아니라 해도 얼마든지 왕을 만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무지 아쉬운 마음으로 한 나라 왕자에게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예흔랑이 그래도 처음 만난 거래 상대라 그런지 서운함을 드러냈다. 대신 오사함과 사다함의 배려로 우리는 미래에 항구 도시가 될 그 허허벌판에서 좀 떨어진 제법 큰 도시에서 영향력이 있는 유지의 부인과 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관계로 이 나라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여성 물품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직접 사용하는 부유한 여성들을 만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서였다.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이 국왕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 마침 그 도시가 있었기에 - 아마도 오사함이나 사다함이 그들이 가는 길목에 사는 아는 사람을 찾아준 거겠지만... - 그 도시까지 같이 가서 그 집에서 하룻 밤 머문 뒤 왕자 일행과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은 왕을 만나러 길을 떠났고 우리 일행만 남아서 며칠 머물렀다. 사다함과 가까운 친척 집안인 그 곳에서 중요한 사람이라고 신신 당부를 들었는지 우리는 참 극진한 대접을 받고 지낼 수 있었지만, 기분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별로 좋은 미래가 없는 것 같아서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랄까? 한 나라는 완전 조선시대였다. 여성은 집안에서 내조만 해야 하고 외간 남자와 함부로 대면하지 않아야 하며 등등등... 그리하여 우리가 그 사다함의 친척 집에서 머무를때 그 집안의 주인의 얼굴은 맨 처음 예흔랑 왕자 일행과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과 같이 있을때 인사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만날 수 있었던 건 부인과 딸들뿐. 진 나라에서는 우리가 본 건 광진뿐이기는 했지만, 가게나 상회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을 제법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래 한 나라도 그럴 거라고 기대를 했었는데, 완전 차원이 다른 상황이라, 그것도 좀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쪽이 그러니까 분위기가 업 될수가 없었던 것이다. 광진에 온 한 나라 사람들이야 몇 달동안 그 곳에 머물며, 여성들이 사회 활동하는 것을 직접 본 데다가 선애나 토냐들은 다른 나라 사람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별 다른 말은 없었지만, 한 나라에 도착해서 새로이 만난 사람들은 차마 말은 못해도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나 쑥덕 거림을 종종 보았었다. 뭐, 그들과 자주 교류하는 건 아니고 멀찍이서 느끼는 시선들이기에 토냐나 소피처럼 튀는 외모를 가진 외국인을 봐서 그런가... 했더니만, 아무래도 그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한, 상업도 발달하지 않은데다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거의 제한되다시피 한 상황이니, 여성용 장신구나 화장품도 상업이 발달했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한 나라의 여성들은 대부분이 화장품을 자급자족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집에서 스스로 화장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한 화장수나 스킨 종류는 물론이거니와 얼굴에 바르는 분이라던지 눈썹 그리는 펜이라던지 립스틱 종류를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멋진 화장품 만드는 법!' 같은 책자가 있는 것고 아니고, 인터넷 같은 정보 교류 매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들 몇몇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며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가르쳐준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작되다보니, 아이세도우 라던지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볼터치 등등등 좀 더 기술과 여러 재료들이 필요한 세부적인 색조 화장품들은 보기 힘들었다. 기껏해야 가끔 찾아오는 보따리 상인들이 그들만의 기술과 노하우로 만든 크림이나 맛사지 팩 정도가 특별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나라의 독특하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는 커녕, 토냐가 살펴보려고 가지고 왔던, 진 나라의 화장품이라던지, 선애 일행이 쓰려고 가지고 온, 바이런 국 화장품을 무지 무지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바람에 오히려 우리가 그 시선에 못 이겨 진 나라에서 구입한 몇 가지 화장품을 선물로 내놨을 정도였다. "차라리 여기다가 타이거 상회 지부를 만드는게 더 나을지도." "아하하하..." 토냐의 투덜거림에 선애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확실히 토냐의 말이 현실성이 있어보였다. 단지, 여성들이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이 곳에서 타이거 상회 지부를 만들려면, 아무래도 '야생화 향수 & 화장품' 가게의 종업원들도 모조리 남자로 해야겠지만... 아니면, 여기서 간간히 활동하는 중년 여성들의 봇다리 상인 연합을 만들던지. 한 나라에 오면 뭔가 좀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째 만나서 발견하는 요소 요소 마다 여기서는 단지 옥 원석 하고 술 정도만 거래할 거 같다는 아주 가슴 아픈 예감이 들었다. "에휴우~~ 어느 상회는 첫 거래에서 항구 건설에 참여하는데다 국왕이 만나러 온다는데... 우리 상회는 언제나 그렇게 되죠?" 선애의 허탈한 어조에 토냐가 선애의 등을 철써억~ 하고 내리쳤다. "어이구, 아직 앞 날이 창창한 녀석이 무슨 노친네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네가 그렇게 만들면 되는 거지. 열심히 하면 빠른 시간 안에 그리 되는 거고, 게으름 부리며 느긋하게 하면 언제 될 지 모르는 거고. 야, 솔직히 말해서 술 사러 왔다가 한 나라와 거래까지 하게 된건 정말 대단한 거 아니냐? 그거에 만족하도록 해. 처음부터 너무 큰 욕심 부리면 안된다." "네에~" 확실히 토냐는, 싱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필요할 때마다 선애에게 알맞는 충고를 잘 해준다. '운이 좋았지. 사람 잘 만나는 것도 운인데.' "자자, 빨랑 가자고. 가서 렌스버리님을 만난 뒤 집으로 돌아가자. 나 바이런 국 음식이 너무 너무 그립다고." 렌스버리는 우리가 사다함 친척네 집에 며칠 머물게 된다는 걸 알고 잠시 떨어져 나갔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온 곳이라 한번 둘러보고 싶었는지도. 원래 나도 끌려갈 뻔 했지만, 아리아씨의 중재로 인하여 선애 곁에 무사히 남을 수 있었다. 동생 옆에 있는 것도 누군가의 허락을 맡아야 하다니, 정말 서글픈 현실이었지만 렌스버리 놈이 선애에게 해꼬지를 못하게 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느아쁜놈~!! 갔다가 발병나서 돌아오지 말아라!' 제 32화 그러나 내가 발병 나길 바랬던 렌스버리 녀석은 여전히 멀쩡한 얼굴로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미래에 항구 도시가 될 허허 벌판에 도착해 있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고 해도 며칠 안 보이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반가운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저 놈은 여전히 미워 보였다. 한 10년 정도 안 보이다 보면 그때서야 조금 반가울까나? 그 렌스버리를 모시고 배에 오른 우리 일행은 곧바로 출항했다. 돌아갈때의 배 여행은 너무나 기분 좋았다. 뭐, 배를 조정하는 선장이나 선원 모두들 루빈스타인 상회에 소속 된 사람들이고 이번에도 우리는 역시 '손님' 의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루빈스타인 자작과 엘리엇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편안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번 여행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니, 렌스버리 녀석 하나 있는 정도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행들의 가벼운 기분에 하늘도 기분 좋았는지 바람과 해류 조차도 배의 운행을 도와줘 - 이건 렌스버리 녀석이 말해준 건데, 달마티아 해에선 정말 해류가 서대륙에서 아벤티노 대륙 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 우리는 바이런국의 알파두르 항구에서 진 나라의 광진까지 걸린 날짜와 광진에서 한 나라의 미래에 항구 도시가 될 바닷가에 도착한 시간을 합한 것의 1/2 되는 날짜에 드디어 알파두르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들 집에 도착했다는 행복한 기분에 함박 웃음을 지으며 항구로 내렸는데, 맞이하는 건 우중충한 모습의 로어와 벨타이거였다. "헉... 누구세요?" 특히나 로어는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단지 얼굴만 어둡다... 생각만 들었는데, 벨타이거는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선애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누구냐고 물었겠는가? 그나마 옷차림과 얼굴이 깨끗해서 다행이었지, 얼굴과 옷차림까지 후줄근 했으면 얘가 갑자기 사업이 망해서 빚쟁이들에게 몇날 며칠을 쫓겨 다녔나... 하고 생각했을 거다. 전의 버터기 좌르르 흐르는 애송이의 뽀송뽀송한 얼굴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짧게 커트 친 머리에 코 아래와 턱 등등에 깎지 않은 짧은 수염이 덮여 있었다. 선애의 놀란 반응에 벨타이거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상하냐?" "이상하고 안 이상하고는 둘째치고, 그 수염은 뭡니까? 갑자기 수염이 기르고 싶어지신 거예요, 아니면 게을러져서 깎지 않은 거예요?" "아니 뭐... 어쩌다보니..." 하지만 처음 놀란 감정이 가시고보니, 그러한 모습도 제법 괜찮아 보였다. 마치 일부러 연출한 모습처럼, 뭐랄까... 전보다 약간 성숙되고 차분해진 느낌? '헤에... 난 전 보다 더 나은 거 같기도 하고. 음음, 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얼굴은 꽤 봐줄만한 녀석이었으니까 뭐...' 하지만, 괜히 분위기를 바꾸려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거나 수염을 기르는게 아니라 정말 뭔가 일이 있는 눈치였다. "뭐예요, 뭔 일 있었어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와 로어는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로어가 앞장 서기로 결정 된 모양이다. 그래 로어가 긴 한숨을 쉬고 입을 열려는 찰나, 선애가 뭔가 생각 났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 잠깐... 모건씨는 어디 가셨죠? 회장님 옆에 안 계시다니 중요한 일이 있나보죠?" "예, 그게 말이죠,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험험, 선애님, 안 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는데 무엇 먼저 들으시겠습니까?" 로어의 말에 잠시 인상을 찡그린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좋은 소식이요." 기다렸다는 듯 로어가 빠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이번 가을에 신상품으로 내 놓을 예정이었던 제품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뭣이라? 그게 무슨 소리야?" 선애보다도 더 놀라 먼저 외친 건 토냐였다. 그도 그럴것이, 선애와 나의 아이디어로 기획되긴 한 거지만, 그래도 그 제품들을 직접 연구하여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토냐였던 것이다. 서대륙에 갔다 오는 길이 얼마나 오래 걸릴 지 몰라서 떠나기 전 토냐 밑에 있던 화장품 제조 업자에게 만드는 방법을 다 전수하고 가을이 되기 전에 물량을 채워놓을 것을 지시하고 갔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었어요. 토냐님 밑에 있던 사람이 다른 상회로부터 매수를 당했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가 신제품 제조법을 몽땅 들고 그쪽으로 붙어서... 그 상회 신상품으로 나와버렸어요." 벨타이거가 가라앉은 얼굴로 설명해 준다. "이 자식이 감히 누가 만든 걸... 그 자식, 지금 어디 있지요? 그 정도쯤은 파악해 뒀겠지요?" 이를 빠드득 갈며 살벌하게 묻는 토냐의 질문에 벨타이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한다. "그게... 그쪽 상회에서 벌써 손을 썼더군요." 신제품을 모조리 도둑 맞았다는 걸 안 벨타이거가 눈에 불을 켜고 그자를 수소문 하기 시작하자 걸리면 골치 아프게 될 거라 생각한 그 상회 측에서 증거 인멸을 시킨 것이다. 상품이야 자신들이 먼저 만들었다고 우기면 되지만, 그 사람이 우리 상회 소속이었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제기랄~ 그 자식... 내 손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토냐가 우리 상회에 들어올때 자신과 교류가 있었던 그 화장품 제조업자를 추천하여 같이 우리 상회로 끌어들였기에, 그의 배신이 토냐에게는 무척 충격적이었을 거다. 그러나, 사실 토냐의 추천이 있었기는 했지만 그 전에 우리도 정보길드에 의뢰하여 그에게 별 흠이 없다는 걸 알고 받아들였으니 토냐 혼자만 책임 질 일은 아니었다. "토냐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자에게 다른 상회에서 접근한 걸 알아차리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그가 단순히 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어쩌면 협박이나 납치, 고문에 굴복한 것일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벨타이거가 위로조로 말을 건넸지만, 말하는 벨타이거나 그 말을 듣는 토냐나 조금도 인상이 펴지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이번 가을에 신제품을 내놓지 못하는 건 좀 아쉽지만, 그래도 상회가 망할 정도의 큰 타격은 아니잖아요. 신제품이야 또 새로 만들면 되는 거고, 이번에 진 나라의 화장품들도 괜찮은 걸 많이 발견했으니 그걸로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선애가 딱 부러진 어조로 말을 하자 로어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에... 그리고..." "뭐예요, 설마 또 있다는 거예요?"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헤스딩스 남작가에 손을 뻗어 왔습니다." "헤스딩스 남작가라면... 리사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헤스딩스 남작가는 루빈스타인 후작가와 대립한다는 공작네 심복으로 있잖아?" 헤스딩스 남작가란 대대로 케루빔이 족장으로 있는 드워프 마을과 친분을 가져 인간과 드워프 사이의 교역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집안이었다. 벨타이거가 현 헤스딩스 남작과 친분이 있어 우리가 드워프 마을에 갈 수 있을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고, 지금 그 남작의 외동딸인 클라리사, 애칭 리사가 우리 상회에 이사이자 헤스딩스 남작령 지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헤스딩스 남작가는 드워프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인의 입장에서 볼때 무척이나 매력적인 집안이라 어떻게든 연줄을 가지면 좋기는 했다. 그러나 그 대단하다는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헤스딩스 남작가를 자신의 상회로 흡수하지 못한 이유는 헤스딩스 남작가가 에스테반 공작가의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에스테반 공작가는 바이런국에 다섯개 밖에 없는 공작 집안 중 한 곳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이라고 손꼽히는 집안이었기에 그 대단하다는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집안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작위에서도 한 단계 높은데다가 이 에스테반 공작가는 건국 공신으로 공작 작위를 받은데다가 공작가의 역사상 그 집안으로 시집을 간 왕녀가 여럿이었기 때문이다. 현 공작의 어머니도 전전대 국왕의, 그것도 왕비에게서 난 왕녀라 공작은 물론 공작 후계자인 에스테반 자작도 서열이 낮기는 하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대단한 집안의 가호를 받는 곳이었으니 루빈스타인 후작가가 손을 못 대었고, 우리 상회도 이 계급 사회에서 커가기 위하여 헤스딩스 남작가를 통해 그 공작가에 연줄을 좀 이어볼까... 생각하기도 했었던 곳이다. 아직 기회가 안 되서 시도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며칠 전 헤스딩스 남작가에서 급한 연락이 왔는데, 브라우닝 백작가에서 청혼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브라우닝 백작가의 후계자인 헬게르트 L 브라우닝경과 클라리사 헤스딩스양을 결혼 시키자고 말이지요." "헬게르트 L 브라우닝? 브라우닝 백작가가 루빈스타인 후작가와 무슨 상관이지요?" 선애가 고개를 갸웃 하며 묻는다. [야, 그 브라우닝이라는 성... 어디서 들어본 거 같다?] 내 말에 선애가 고개를 갸웃 갸웃 하더니 손바닥을 탁 친다. "아, 혹시... 헬게 브라우닝이 헬게르트 L 브라우닝인가요?" [아~ 맞다. 그 사람에 대해 물어본다는 거 잊어버릴 뻔 했네? 다행이야. 어차피 여기 와서 정보길드에 의뢰해 볼 거였잖아?] 내가 말하는 중에 로어의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헬게르트 L 브라우닝경의 애칭이 헬게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분은 현재 루빈스타인 상회 회장 자리를 놓고 루빈스타인 자작과 다투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토냐의 말을 뒤이어 정신적인 충격에 빠져있던 토냐가 어느새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나도 그 집안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봤어. 사실 브라우닝 백작과 루빈스타인 후작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하니까 말이지. 브라우닝 백작은 아름다운 로맨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해." "호오?" 브라우닝 백작과 루빈스타인 후작가는 사촌간으로 루빈스타인 상회 회장 자리를 놓고 다투던 라이벌 사이었다고 한다. 지금 그들의 아들들 사이처럼 말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브라우닝 백작이 루빈스타인 후작에게 회장 자리를 양보하게 된 사건이 바로 브라우닝 백작의 러브 스토리 때문이었다. 그 당사자야 가장 행복한 이야기겠지만, 그가 회장 자리에 앉길 바라던 사람에게는 아마도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었을까? 빵빵한 집안에 머리도 좋고 인물도 좋은 그들은 당연히 결혼도 빵빵한 집안의 딸내미들과 하도록 내정된 상태였을 거다. 그때 브라우닝 백작은 집안끼리 약속된 빵빵한 집안의 딸내미 대신,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 여성의 몸으로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왕실 기사단에 들어간 여기사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이때 루빈스타인 후작은 전에 선애에게 잘못 보이는 바람에 내가 그 집에 쳐들어가 그에 대한 대가를 넉넉하게 가지고 나온, 캐링턴 후작가의 딸내미와 정략 결혼을 했다.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려 경쟁할때는 스스로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받쳐주는 배경도 무시 못할 것이었던지 그로 인하여 회장과 후작의 작위는 현 루빈스타인 후작에게 돌아갔고, 브라우닝 백작은 '브라우닝'이라는 성과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옆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지금 현재 브라우닝 백작 아들과 루빈스타인 후작 아들이 가장 유력한 호보자이자 경쟁 상대였으니~ [에... 그런데 선애야, 그때 내 보기에 그랜트 녀석은 헬게르트인지 헬게인지 하는 녀석을 싫어하지 않는 거 같던데? 라이벌로 본다기 보다는 오히려 호감이 있는 거 같던데... 에... 라이벌에게 호감이 갈 수도 있는 거긴 하지만...] 토냐의 설명과 내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던 선애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루빈스타인 상회가 두 파로 갈려있는데, 그 한쪽인 헬게르트 L 브라우닝경 파가 자신들의 힘을 늘리기 위하여 헤스딩스 남작가를 끌어들이려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쪽은 어떻게 에스테반 공작가의 눈치를 안 보고 청혼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와 로어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사실 연락을 받은게 바로 며칠 전이라서..." "그래요, 그건 제가 알아보도록 하지요. 어쨌든 골치 아프게 되었네요. 에스테반 공작가가 모른체 한다면 헤스딩스 남작가로써는 브라우닝 백작가의 청혼을 거절하지 못할테고, 만약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드워프와의 거래권이 몽땅 루빈스타인 상회로 넘어가게 될 지도 모르니... 우리로써는 결혼이 일어나지 않는게 좋겠는데요. 우선 그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본 후 방해 계획을 세우던지 대책 계획을 세우던지 하고요... 그럼 이제 좋은 소식은요?" 선애의 말에 로어가 선애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연다. "저어... 선애님, 좋지 않은 소식이 하나 더 있는데요?" "예? 또요? 도대체 안 좋은 소식이 몇개예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거 참...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나요?" 선애의 차가운 말에 벨타이거가 기 죽은 표정으로 말한다.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일부러 만든 건 아니었다고. 그런데... 이게 우리 입장에서는 가장 큰 문제야." 그의 말에 선애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뭔데요? 빨랑 빨랑 말해봐요." 선애의 재촉에 벨타이거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지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전에는 그래도 제법 긴 머리라 쓸어넘길 거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커트 머리라 쓸어 넘길 머리도 없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정말 심적으로 부담이 컸던 듯. "핸들리 크로스웰 녀석이 나에게도 청혼을 해왔더라고. 자기 딸과 결혼하래." "하아?" "자기 딸과 결혼한다면 크로스웰 상회의 모든 권리를 내 손에 쥐어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만약 청혼을 거절한다면, 숙부에게 붙겠다더군." "하아아?" 벨타이거의 숙부는, 만약 벨타이거가 없었다면 크로스웰 남작의 작위를 물려받았을 사람이었다. 지금 현재 크로스웰 상회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머리 좋은 핸들리가 그의 힘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벨타이거가 허수아비라도 크로스웰 상회의 회장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숙부의 눈에는 핸들리 녀석이나 벨타이거 녀석이나 눈엣가시였을 거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법. 핸들리에게는 이제 성인이 된 딸네미가 하나 있는데, 문제는 벨타이거의 숙부에게도 이제 막 성년이 된 아들이 있다는 것. 핸들리는 벨타이거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딸을 그 숙부의 아들과 결혼 시키겠다고 통첩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크로스웰 상회가 그 둘에게 넘어가는 건 당연지사고, 벨타이거의 목숨까지 위험해 진다. 크로스웰 상회를 완전히 장악한 그들이 남작의 작위까지 탐낼 건 불 보듯 뻔했으니까. 기실, 벨타이거의 숙부인 토지그 크로스웰 녀석은 전에 벨타이거의 목숨을 노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물론, 증거는 없고 단지 심증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헤스딩스 남작가에 청혼이 들어온 것도 문제지만, 이 벨타이거의 결혼 문제도 더 큰 문제였다. "완전 엎친데 덥쳤구만." 듣고 있던 토냐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벨타이거의 말을 듣자니 자신이 받은 충격은 그에 비해 미미한 것이라고 생각 되었는지 이제는 완전히 신색을 회복해서 벨타이거를 동정하고 있다. 핸들리 녀석, 아무래도 처음부터 자신의 딸과 벨타이거의 결혼을 노리고 그에게 힘을 실어준 모양이다. 그러면 그는 비록 귀족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외손자 만큼은 남작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게다가 상회는 자신이 장악해 한 손으로 휘두르고 있고... 벨타이거야 자신이 없으면 작위의 기반은 물론이거니와 목숨도 위험하니 무조건 핸들리에게 고분 고분 해올 수 밖에 없었을 거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 타이거 상회에 울 꼬맹이가 이사로 영입된 후 부터 그의 계획이 조금씩 조금씩 어긋나 핸들리의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겠지. 처음 벨타이거에게 타이거 상회를 설립하게 했던 건 크로스웰 상회의 일에 손을 못 대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크로스웰 상회의 일을 하려고 하면 타이거 상회 일이나 하라고 하면 될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타이거 상회는 정말 향수 가게인지 의심스러울 형편 없는 가게 하나만 딸랑 붙어 있는, 크로스웰 상회가 콧김을 휙~! 하고 불어도 금방 넘어질 초라한 상회였으니 벨타이거를 손에 쥐고 흔드는데 문제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상회가 선애의 영입으로 인하여 갑자기 드워프와 거래를 성공시키는데다 수도를 비롯한 대 도시 5군데에 지부를 설립하고, 첫 신상품이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커져갈 조짐을 보이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타이거 상회가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벨타이거는 핸들리의 손아귀를 점점 벗어나게 되니 말이다. 게다가 벨타이거가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크로스웰 상회를 넘보게 될 건 뻔할 뻔자, 그로인해 핸들리 녀석이 위험을 느낀 것이다. "아... 그 영감탱이, 정말 짜증나는 구만. 쫓아가서 한대 패줄까?" 선애가 짜증을 팍팍 내며 중얼거리자 토냐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건 금물이야. 움직이려면 뒷 탈이 없는 확실한 방법을 가지고 움직일 것." "하아아..." 그 말에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는 선애를 끝으로 일행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침묵속에 빠졌다. 아마도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딱히 좋은 방도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던지 모두에게서는 암울한 오라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핸들리의 청혼을 받아들이면 분명히 벨타이거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하여 타이거 상회의 운영에 간섭을 하려 들 것이고, 그럼 선애의 입지도 위험해질 게 뻔했다. 게다가, 벨타이거 녀석이 핸들리의 딸내미를 무지 사랑한다면 몰라도 사랑 없는 정략 결혼은 너무 슬픈 일 아닌가? 그렇다고 거절할 힘도 없고... [아아... 뭐, 좋은 생각 없나?]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린 내 말에 선애가 움찔 하며 고개를 들더니 로어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고 했지요? 나쁜 소식은 다 들었고, 그럼 좋은 소식은 뭔가요?" 그러자 로어가 '아차~!' 하는 얼굴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암울한 오로라에 빠져 깜빡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드워프 마을에서 온 소식입니다. 저희와 거래를 하는 케루빔 족장님 마을 근처에 있는 다른 드워프 마을의 족장님께서 선애님의 물품을 보고 크게 흥미를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같이 공유해도 되겠느냐고 여쭈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원한다면 거래를 해도 좋다고 하신답니다." "오오... 그거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그리고, 드워프 마을에 가 있던 형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마을에서 새로운 물질을 개발해 냈는데, 그게 드워프들의 관심을 이끌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재료로써 말이지요. 기걸 가지고도 드워프들과 좋은 거래를 할 수 있게 될 듯 합니다. 그리고 드워프들이 새로운 재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옥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히야... 완전히 죽으란 법은 없나보군요. 진 나라의 술은 좋아하던가요?" "예. 아참참, 그 근처에 있던 족장님이 진 나라의 술을 맛보더니 자신들과 거래할때 술을 대가로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아무래도 그 마을도 본격적으로 인간들과 거래를 틀 모양입니다." "우리로써야 환영이지요. 진 나라 술이야 공급량이 무지 많았으니 배 한 척 분량을 더 가지고 오게 하면 될 거고... 아, 우선 배부터 수소문 해봐야겠네요. 진 나라야 당분간 해운조합 배를 이용한다고 해도 한 나라... 아, 그러고 보니 한 나라와 거래를 텄다는 거 말씀 드렸던가요?" 안 했다. 여기 오자마자 만난 벨타이거와 로어가 자기들이 먼저 암울한 기운을 팍팍 뿌리면서 한 나라에 대한 보고를 받을 눈치를 내비치지 않았고, 선애 또한 그들의 말에 정신을 빼앗겨 깜빡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토냐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어, 잠깐만... 이번에 헤스딩스 남작가에 청혼을 한 사람이 루빈스타인 자작의 최대 라이벌 이잖아? 그거 우리가 잘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루빈스타인 자작은 라이벌의 힘이 커지는 걸 원치 않을테니 그 쪽에다가 청혼을 거두어 달라고 하면?" "글쎄요... 저에게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루빈스타인 자작은 그 브라우닝경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우선 자세한 정보를 알아본 후에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죠. 잘못 했다간 우리가 이용 당할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급한 건 회장님 결혼 문제인데..." "혹시 핸들리라는 사람이나 저 회장의 숙부의 약점같은 거 없나? 그거 가지고 협박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토냐의 말에 선애가 손뼉을 따악 쳤다. "아,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에... 하지만, 알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텐데... 청혼에 대한 답 언제까지 해주기로 했어요?" "정확한 날짜는 말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빨리... 라고 말을 들어서..."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가 한숨을 내쉰다. "며칠 안에... 알아볼 수 있으려나? 시간이 문제네..." 그때 로어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시간을 끄는 방법이라면..." "음?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 "며칠 정도라면 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회장님이 자리에 안 계시면 청혼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선애님이 오셨으니 드워프 마을에 가셔야 할텐데, 그때 회장님도 동행 하시지요? 중요한 일로 급히 출장을 가야한다면 뭐라고 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마침 지금 모건씨도 없으니 회장님이 직접 움직이셔야 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거 괜찮네." "그거 괜찮네." 토냐의 말에 선애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벨타이거는 만족하지 못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별 다른 뾰족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그는 결국 선애와 토냐의 시선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로어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일행은 그때부터 초스피드로 드워프 마을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로어와 벨타이거가 모든 일을 책임지고 준비하는 동안 선애는 '야생화 향수 & 화장품' 가게에 들러 첼시를 만나고 왔다. 이번 드워프 마을 방문 길에는 토냐도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드워프 마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다가 오랜만에 드워프 마을에 가 있는 스탠리 얼굴도 볼 겸... 이라는 명목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벨타이거 녀석의 경호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벨타이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마법사인 페르티니어스는 스탠리와 같이 드워프 마을에서 연구에 몰두해 있는 바람에 지금 현재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나라에서 사온 많은 술들과 2인용 마차 하나 정도는 가득 채울 수 있는 옥 원석, 그리고 드워프들에게 보여줄 몇몇 견본품이라고 할 수 있는 옥 제품들을 가지고 가야한다는 핑계로 많은 돈을 들여 실력이 높은 용병들을 호위로 고용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좀 부족한 것 같아서 정보 길드에 부탁해 길드 소속의 높은 실력 무사들을 벨타이거의 호위로 붙였다. 핸들리야 벨타이거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 줄지는 모르지만, 벨타이거의 숙부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면 핸들리가 벨타이거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벌써 토지그 크로스웰과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첼시의 말에 의하면 핸들리와 토지그가 벌써 몇 차례 만남을 가졌다고 하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기실, 심할 정도로 호위를 많이 붙인 건 정보길드의 충고 때문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벨타이거가 거북스럽게 느낄 정도로 철저하게 호위할 준비를 끝내자 일행들은 잽싸게 알파두르 항구를 빠져 나왔다. 다르게 보면 꼭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단지 선애가 오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라 며칠 푸욱 쉬고 드워프 마을로 출발했으면 좋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떠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울 꼬맹이 아직 젊은 나이라 그런지 다행히 크게 피곤해 하는 기색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천만 다행스럽게도 렌스버리는 이번 일에서도 또 빠져줬다. 오랜만에 아벤티노 대륙에 와서 그런지 또 둘러보러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솔직히 드워프 마을에 가서 뭔 일을 벌이지나 않을지 무지 걱정했던 일행들은 두팔 벌려 만세라도 외치고 싶을 심정이었다. 호위를 든든하게 데리고 가는 덕분인지, 우리는 어떤 습격도 당하지 않은 채 헤스딩스 남작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에 내친김에 무사히 헤스딩스 남작 저택에 도착한 일행은 - 그래도 도움을 많이 주시는 어른인데 영지를 지나가는데 인사하러 들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 친절하게 맞아주기는 하지만 헬쓱 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남작을 만날 수 있었다. 헤스딩스 남작은 야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선조의 덕택으로 남작의 작위를 물려받고 풍요로운 생화를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조용히 영지를 다스리며 이제 자식들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귀여운 손주 녀석들을 보는 것만 기대하고 살아가는, 인심 좋은 평범한 남자였던 것이다. 부인을 일찍 잃기는 했지만 네 자녀들이 다 커서 자신의 일을 돕는데다가 큰 아들은 벌써 현숙한 여인과 결혼하여 귀여운 손자까지 본 상황이었다. 이제 상업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사업을 벌이려고 구상하는 둘째 아들과 수도 근위대의 기사로 복무하고 있는 막내아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만 결혼 시켜 잘 살기만 하면 죽어도 원이 없을 터인데,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지고 만 것이다. 고이고이 길렀던 막내딸에게 들어온 청혼. 물론,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브라우닝 백작가의 후계자라면 어디에 내놔도 꿀릴 데 없는 대단한 사윗감이다. 문제는... 그 청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이 여엉~ 불안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결혼을 시킨다고 해도 딸내미가 그 집에 가서 잘 산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아마 남작의 걱정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남작에게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네고 나자 벨타이거는 남작과 남작의 큰 아들, 둘째 아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러 자리를 뜨자 선애는 마침 남작의 저택에 와 있던 클라리사에게 붙들려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리사, 너 괜찮아?” 남작과 마찬가지로 표정이 별로 안 좋은 클라리사에게 선애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가 선애를 확 붙들더니 필사적인 어조로 말했다. “언니, 나 좀 도와줘요. 나, 그 브라우닝 백작가의 후계자란 사람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랑 결혼을 할 수 있겠어요? 절대로 안 할 거예요. 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다고요.” “그래,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줄게. 그런데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선애가 클라리사를 달래려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묻자 클라리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망설이더니만 결국 결심을 굳힌 확고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언니.” “응?” “저기... 벨 오빠를 어떻게 생각해요?” “회장님?” 클라리사의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진지해 보이자 선애가 잠시 생각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그래도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이랄까? 뭐, 마음에 안 드는 면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려운 면이 없으니 편하기는 하지. 다른 상회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회장님만큼 편한 상사는 없을 거라고 생각 하는데?” “그거 말고는요.” “흠... 어떤 대답을 원하는데?” 클라리사의 말에 대답은 안 하고 그렇게 묻자 클라리사가 선애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더니 주저하며 입을 연다. “언니... 나... 벨 오빠 좋아해요.” “에에에? 정말? 그딴, 아, 아니... 회장님이 왜 좋아?” 선애의 놀랍다는 반응에 클라리사가 약간 안심한 표정으로 편안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혹 선애가 벨타이거에게 연애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했던 모양이다. “그, 그걸 어떻게 설명해요? 그냥 어려서부터 쭈우욱~ 좋아했단 말이에요.” “하아... 뭐...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이유는 없겠지만. 그럼, 혹시 회장님 신부가 되고 싶어?” 선애의 질문에 클라리사가 대답은 안 했지만, 들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클라리사가 두 뺨을 바알갛게 물들이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이다. [하, 귀엽네.] “뭐야, 그럼 회장님께 고백 했어?” “아니... 그게...” 거기서 다시 우물쭈물... 아직 고백도 못 해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벨타이거 녀석은 클라리사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그건 동생을 향한 애정이었던 것이다. 전에 벨타이거는 클라리사를 친동생처럼 생각한다는 걸 몇 번이나 내비쳤으니 말이다. “아직 이야?” 그걸 기억해낸 듯 선애가 클라리사를 약간은 안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그러자 클라리사가 주먹을 꼬옥 쥐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 오늘 고백할 거예요.” 꼭 쥐어진 두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어지간히도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에... 나는 그런 거 한번도 안 해봐서 어떤 심정인지는 짐작도 안 가지만 말이다. “잘 됐으면 좋겠네. 행운을 빌어줄게.” 선애는 클라리사에게 그렇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기사, 남의 애정사에 이보다 뭘 더 어떻게 해줄 수 있겠는가. “그, 그런데...” 갑자기 연약한 소리를 하는 클라리사. 이제 드디어 선애에게 부탁할 말을 꺼내려는 모양이다. “응?” “언니이... 나 고백한다고 생각만 해도 너무 긴장되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올 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응.” “저기... 나 고백하는데 같이 가주면 안돼요?” 그러자 선애가 무지 다정하게 방긋~ 웃어주며 말했다. “안돼.” “에?” 당혹한 얼굴로 - 아마 클라리사는 선애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나 보다. - 바라보는 클라리사에게 선애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안 돼. 이건 너와 회장님 사이의 일이잖아. 이때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좋지 않아. 거기다가 만약 내가 있으면 회장님이 너에게 할 말을 못하게 될 수도 있잖아. 떨리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고백하기로 마음먹은 거 용기를 내도록 해. 같이 가주지는 않겠지만 내가 뒤에서 응원해 줄 게.” “에에...” 실망했다는 걸 내비치는 클라리사였지만, 선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울 꼬맹이는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면 좋은 꼴을 못 본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상담을 해오거나 푸념을 해올 때 들어줄 수는 있어. 하지만, 네 일은 네가 해결해야 한다고 봐. 그게 진정한 연애 아니야? 남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게 무슨 연애니?” “그, 그런가...” “그렇지. 그러니까 힘 내. 용기 있는 자가 사랑을 쟁취하는 거야.” 선애의 힘 있는 어조에 클라리사가 입술을 꼬옥 깨물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 언니 저 힘낼게요.” “그래, 파이팅~!” “옙!” ‘잘 되면 좋겠지만 과연... 벨타이거 녀석은 클라리사를 동생으로 밖에 안 보는 것 같은데...’ 그렇게 선애에게 힘을 받아 당장이라도 고배를 하러 뛰어갈 것처럼 보이던 클라리사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 어정쩡한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보았다. “언니, 그런데... “응?” “있잖아요, 저기요... 지금 제 상황이 안 좋잖아요... 그런데 고백해도 되는 걸까요? 오빠에게 괜히 부담 주는 거 아닐까요?” 자신의 상황이 마음에 걸리자 다시금 용기가 사르르 사라진 모양이다. 그러자 선애가 클라리사의 두 어깨를 강하게 쥐더니 입을 열었다. “클라리사.” “예?” “고백하려고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밀어붙여. 상황이 어떻고 오빠의 기분이 저떻고 따지다가는 너 평생 고백 못 한다. 너 상황 때문에 고백을 미룰 거라면, 전에 상황이 괜찮았을 때는 왜 고백 안 했니?” “아, 그, 그게...” “그때도 뭔가를 따지다가 못한 거 아니야. 창피하다던가,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 했다던가...” “그거야 뭐...” 선애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클라리사가 괜히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 거렸다. “가끔은 이기적이 되어도 좋잖아. 지금 네가 고백했다고 너보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그, 그럴까요? 아... 그래도 혹시 오빠가 이기적인 애라고 생각 하면...” “회장님이 정말 그렇게 생각할거 같아?” 선애의 물음에 클라리사는 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라서 네 고백을 더 진지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다른 때라면 가벼운 장난으로 여겼을 텐데, 이런 상황에 장난을 하리라고 생각 하겠어?” “아... 그럴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상황 때문에 고백할 수 없을 것 같다면, 왜 나 붙잡고 오늘 고백할 거라고 했니?” “그거야... 미처 생각을...” “고백 한다고 결심하다가 막상 상황이 닥치니까 겁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영리한 네가 고백 한다고 말하기 전에 상황이 안 좋다는 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선애의 말에 클라리사의 고개가 아래로 더욱 더 숙여졌다. “너, 지금 고백해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지? 고백하라고 밀어줄 사람이 필요한 거잖아. 고백해도 좋아.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니?” 선애의 다정한 말에 클라리사가 고개를 들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묻는다. “언니... 혹시 상황이 악화되어서 오빼에게 부담만 되면 어떻게 하지요?” “왜 상황이 악화된다고 생각 하니? 네가 싫다면 남작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결혼 시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 해. 게다가 지금 이게 어떻게 되는 상황인지 회장님이랑 내가 알아보고 있거든. 그러니까 네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여러 사람들이 애쓰고 있으니까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 거지. 안 좋게 흐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주저앉아 있는 것 보다 훨씬 좋지 않아?” 선애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클라리사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역시 나 오늘 저녁에 고백할래요.” “그래, 뒤에서 힘내라고 응원해 줄게.” “그런데...” “응?” “오빠가 저 거절하면 어떻게 하죠?” 다시금 흔들리는 표정으로 묻는 클라리사에게 선애가 피식 웃어보였다. “그건 네게 선택할 문제지. 깨끗하게 마음을 접고 사이좋은 오빠 동생으로 남던가, 아니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던가.” “다시 도전한다고 고백이 받아들여질까요?” “그건 모르겠는 걸.”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뱉는 선애의 대답에 클라리사가 비질 웃었다. “아하하... 하긴...” 그날 저녁, 클라리사는 정성을 들여 예쁘게 차려입고 벨타이거를 불러냈다. 나는 솔직히 클라리사를 따라가 엿보고 싶었지만 선애에게 붙잡혀서 가보지는 못했다. “/가지 마./” [뭐 어떠냐? 그냥 보기만 하는데. 어차피 그들은 내가 안 보일 테고.] “/안 돼. 남의 애정사는 장난으로 보는 거 아니야. 그들은 얼마나 진지하겠어?/” [어이구... 울 꼬맹이 다 컸네.] “/언니가 철이 없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내가 뭘?] “/어쨌든, 가지 마. 그런 거 몰래 훔쳐보는 거 아니야. 남의 연애사를 재미로 삼겠다는 거잖아. 남들은 심각한데.../” [그래, 그래. 알겠다. 그만 두지 뭐.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기에 남들 연애하는 게 부러우면 언니도 진작 좀 하지 그랬어?/” [체엣, 됐네요. 그래, 나 능력 없었다. 아, 그런데... 벨타이거가 클라리사의 고백을 받아줄 거 같아?] “/모르지.../”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밤에 클라리사는 두 눈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벨타이거는 클라리사를 여동생으로밖에 생각 안 해봤다고 한다. 밤새도록 선애를 붙들고 훌쩍훌쩍 우는 클라리사를 선애는 뭐라고 위로하기 보다는 그냥 옆에서 가만히 안아주기만 했다. ‘저런 거 보면 울 꼬맹이도 다 큰 거 같다니까.’ 클라리사가 새벽녘에야 겨우 진정하고 잠이 드는 바람에 선애도 늦게 잘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 클라리사는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고 선애는 잠이 부족해서 눈이 퉁퉁 부었다. 그래도, 클라리사는 비록 거절당했지만 전부터 마음 졸이고 졸였던 고백도 했고, 선애를 붙들고 신나게 울어서 그런지 제법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벨타이거 녀석이야 거절한 게 마음에 안 좋았던지 계속 클라리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말이다. 남작은 브라우닝 백작가에서 들어온 청혼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는 바람에 이 둘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는 공기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두 아들만은 얼핏 눈치를 챈 듯 하다. 그래도 벨타이거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는 건 그들의 상황이 안 좋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신들이 애지중지 하는 여동생을 울렸다고 벨타이거에게 주먹을 휘둘렀을 텐데 말이다. ‘으음... 역시 상황 덕을 본 건가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드워프의 마을로 출발하기 위하여 일행들이 저택을 나서려는데 클라리사가 선애를 붙들어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언니.” “응?” “저기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한번 거절당한 거 가지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해요. 지금까지 제가 마음에 품고 전전긍긍 하고 있었던 게 얼만데요.” “호~ 다시 한번 도전하게?” “예. 뭐, 지금이야 거절당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이니 한 동안은 얌전히 있겠지만, 다시 데쉬는 해볼래요. 생각해보니까 오빠에게 뭔가 여성으로 어필은 한 번도 안 한 채 여동생으로 있다가 갑자기 고백을 해서 실패한 거 같아요. 이번에는 무조건 고백하기 보다는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서 성공 확률을 높이려구요.” 일부러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클라리사의 눈은 제법 기운차게 또랑또랑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선애가 어른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클라리사의 어깨를 툭툭 쳐 준다. “보기 좋네. 훌륭하다. 잘 해봐, 언제든 네 고민은 들어줄 테니.” “넵!” ‘흠... 그러고 보니 울 꼬맹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후배 애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기는 했지. 그때도 저렇게 어른스럽게 애들을 대했을라나?’ 다행이 우리가 출발하기 전 기운을 찾은 클라리사와 기분 좋게 작별한 선애는 일행과 함께 드워프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길을 떠나는 일행 사이에 헤스딩스 둘째 아들내미인 안토니 헤스딩스가 끼어든 것이다. 벨타이거의 언질에 의하면 이 안토니 헤스딩스는 영지에서 상인들에 관련된 일들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영지 차원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려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드워프들과 관련 있는 모양이다. 상황이 안 좋은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되는지 걱정도 되긴 했지만, 어찌 보면 상황이 안 좋다고 두 손 놓고 있는 것 보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았다. 드워프 마을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던지 기다렸다는 듯 몇몇의 드워프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허허허, 어서 오시게나. 기다리고 있었다네~” 제일 먼저 반갑게 맞아주는 드워프는 이 마을의 족장 자몬. “안녕 하셨습니까? 저번에 보내드린 술이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술을 구해 왔는데 그것도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어허허허, 그런가? 이거 참 기대 되는구만.” 그러면서 족장이 뭐라고 더 하려고 하는데 그의 말을 싹둑 자르면서 끼어드는 녀석이 있었다. “왜 이제야 와? 인간인 주제에 너무 게으름 부리는 거 아니야?”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되게 반갑게 구는 스터링 녀석. “호오라, 너 되게 잘난 척 구는 거 같은데. 견습 딱지는 뗀 거냐?” “날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거 예저녁에 벌써 떼었다.” “잘난 척은... 얼마 전에야 겨우 겨우, 그것도 반 어거지로 뗀 주제에...” 옆에서 딴지를 거는 녀석은 브론즈 녀석. “이야아,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있었어요?” “어서 와라.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쿨링도 나와 있었다. 그 드워프는 복잡한 기계를 전공한 드워프로써 선애가 건네 준 손목시계를 책임지고 분해한 드워프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걸 토대로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낸 드워프이기도 했다. 다들 무척이나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주자 선애의 얼굴은 무척이나 환해졌다. 술과 손목시계의 위력이 무지 대단했던 모양이다. “허허허, 빨리 보여주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거리더군. 네가 보면 무척 놀랄 거다.” 스스로 생각해도 괜찮았는지 오랜만에 만난 페르티니어스의 얼굴도 활짝 피어 있었다. “그동안 안녕 하셨습니까, 페르티니어스님.” 그렇게 선애가 벨타이거 녀석을 들러리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토냐와 로어가 스탠리와 함께 회포를 풀고 있었다. “토냐... 잘 다녀왔어?” “오랜만이다, 스탠리. 너 이번에 괜찮은 물품을 발견했다며? 기대하고 있어.” “아하하... 그렇게 대단한건 아닌데...”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는 스탠리. 오랜만에 토냐를 봐서 얼굴이 활짝 핀 채로 토냐를 정면으로 보지도 못하고 힐끗 힐끗 보며 헤벌레 하고 있건만 토냐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랜만에 만난 귀여운 동생을 바라보는 표정이다. “왜 대단한 게 아니야? 드워프들의 관심을 끌었다던데. 기특해. 난 네가 여기서 잘 해나갈 줄 알았다니까. 연구하는데 뭐 어려움은 없지?” “아아... 드워프들도 모두들 잘 대해주시고, 페르티니어스님과도 마음이 잘 맞아서 여기 오길 잘한 거 같아. 단지... 토냐 널 자주 볼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아하하하... 이 녀석, 내가 언제까지 널 돌봐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아, 혹시 나나 로어가 없다고 여기서 식사도 제대로 안 챙겨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 그러고 보니 얼굴이 약간 마른 거 같기도 하고...” “아, 아니야. 그건 아니야. 식사는 잘 하고 있어. 단지 요즘 드워프들께서 흥미를 가진 그 재료를 많이 만들어내느라 좀 무리를 했더니...” “건강 좀 챙겨. 네 옆에 나나 로어도 없는데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시간 나는대로 자주 오기는 하겠지만, 그때마다 야위어 있으면 알아서 해.” “응, 응.” 완전 동생 다루는 듯한 말이었는데, 스탠리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듯한 표정이다. ‘어휴... 로어도 약간 소심한 면이 있는 것 같더만... 형제들이 소심한 게 똑같아. 아니, 로어는 렌스버리 놈 때문에 소심해진 건가? 뭐, 어쨌든...’ 그렇게 약간은 요란스럽게 느껴지는, 반가운 환영 인사를 끝내고 나서야 우리 일행은 가지고 온 짐들을 풀어 놓을 수 있었다. “이게 이번에 저희가 새로 구입해 온 술입니다. 그리고 이건 혹시나 마음에 드실까 하고 조금 구해본 것입니다. 서대륙에서 보석의 하나로 여겨지는 ‘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일반 보석에 비하여 강도가 약한데다가 그쪽은 아무래도 여러분에 비하여 기술력이 떨어지는지 이 옥의 아름다움을 살릴 만한 세공품을 못 만들더라고요. 그래 혹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장.인. 이라고 일컬어지는 여러분이라면 혹 멋진 물품을 만들 수 있지 않으실까 싶어서 말이지요.” 선애는 생글생글 웃으며 은근히 ‘최고의 장인’에 악센트를 주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그런 선애의 은근한 아부는 눈앞에 떠억 하니 놓여있는 커~ 다란 옥 원석 앞에서는 들리지 않는지 뚫어져라 옥 원석을 바라보며 선애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저거, 언제쯤 만져볼 수 있어?” 작품에 대해서는 뜨거운 열의를 가지고 있는 드워프라서 그런지 그들은 남이 가지고 온 물품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굉장히 멋진 성품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지금 그 성품 때문에 옥 원석을 앞에 두고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언제 줄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 결국 못 참겠는지 스터링이 퉁명스레 묻자 선애가 픽 하고 웃었다. 괜히 아부를 늘어놨다고 생각 한 모양이다. “얼마든지 만져 봐도 됩니다. 여러분 보여드리려고 가지고 온 건데요.” 선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드워프들이 쌔앵~ 하니 옥 원석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언제 가지고 있었던 건지 작은 망치라던지 끌 같은 연장이 들려 있었다. 옥 원석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자신에게 달려드는 드워프들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싶다. “오오옷~~ 이거 돌 맞지? 이 감촉... 처음 느껴보는 것이야.” 제일 먼저 도착해서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피부를 만져보듯 무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옥 원석의 표면을 쓰다듬은 드워프가 감동했다는 듯 온 몸을 부르르 떤다. 톡톡~ “이 소리. 오오, 내가 처음 보는 돌 맞아.” “강도는 약할 것 같군.” “대리석과 비슷할까?” “비슷하지만 재질이라던지 색이 완전히 틀린걸. 이 말간 우유 빛 색이 끝내주는 군.” “오, 이건 강도가 더 강한데요? 색도 녹색이고. 반투명한 에메랄드같은 느낌...” 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연옥과 경옥인데 연옥은 백옥이 많고 경옥은 청옥이 많다. 경옥이 좀 더 단단한 강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연옥이 더 비싸다. 춘천의 그 ‘옥산가’ 브랜드인 옥광산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연옥. 경옥은 다른 말로 비취라고도 불린다. 옥을 눈앞에 두니 그 좋아하는 술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지 내팽개쳐 둔다. 그리하여 로어는 자기가 알아서 일꾼들을 지휘하여 드워프 마을 공동 저장 창고에다가 술을 가져다 두었다. [드워프들은 여전하네. 그래도 보기 좋지?] “/응. 너무 순수한거 같아. 존경스러워./” 그들이 옥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우리를 바라본 건 그로부터 거의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드워프들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 일행들은 일꾼들은 사람들을 위한 숙소로 보내고 우리는 근처 그늘에 옹기종기 앉아 간단한 간식 거리를 즐기면서 드워프들이 정신 차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드워프들이 일행을 본 이유는 옥에 대한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기 때문이 아니었다. “처자, 저거 나 주면 안 되나? 내가 멋진 세공품을 만들어 넘겨줌세.” “아니, 아니, 날 주게. 내가 저 놈보다 기술이 더 뛰어나.” “뭣이여? 이 놈이!” “어허, 내 틀린 말 했는감?”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냐?” “처자, 난 다 달라고 하지는 않아. 저거 반만 주면 안 되나?” 그러니까 서로 옥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선애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던 드워프들만 있었는데, 언제 어느새 다른 드워프들까지 몰려들어 옥 원석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선 보인다고 커다란 원석 한 덩어리만 가지고 온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드워프들이 흥미를 안 보인다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갈아서 화장품 재료로 쓰면 되기 때문에 한 종류 당 이륜마차 하나 정도는 가득 채울 정도로 가지고 왔던 것이다. “좋아하실지 몰라 조금만 가지고 온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많이 가지고 올걸 그랬어요.” 선애의 말에 족장이 허허 웃었다. “많이 가지고 오지 그러나. 이런 건 언제든 환영인데.” “음, 그럼 다음에 서대륙으로 배를 보낼 때 잔뜩 가지고 올 테니 이번에는 그냥 조금씩 나눠받는 걸로 만족하시면 안 될까요? 그런데... 어느 정도 가지고 올까요? 전에 가져다 드린 술의 양만큼 정도면 될까요?” “많을수록 좋지.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 오게. 그럼 이걸로 만든 괜찮은 제품들 중 마음에 드는 물품들은 다 넘겨주도록 함세. 뭐, 아직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야, 그러시면 저희로써야 감지덕지지요. 그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옥을 나누어 주는 건 선애가 하기가 좀 난처했기에 결정권을 아예 족장에게 다 넘겨 버렸다. 그리하여 그거 가지고 옥신각신 하면서 다투느라 드워프들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음날이 되어서였다. 그 틈을 타서 스탠리와 페르티니어스가 자신들이 만든 물품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자신들의 작업실로 데리고 갔다. 그래도 그 둘은 드워프들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인정을 받아 그런지 그들의 작업실은 드워프 마을 안에 있었다. 게다가 드워프들이 그들의 편의를 위하여 작업실까지 손수 만들어주는 성의까지 보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신들과 같이 작업하는 존재로 인정한 모앙이다. “이게 바로 내가 최초로 만든 거야. 뭐, 드워프들이 이걸 좀 더 다듬어서 멋지게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형태는 이것과 과히 틀리지 않지.” 먼저 페르티니어스가 자신이 만든 선풍기를 보여준다. 얇은 금속판으로 된 선풍기 날개가 다섯 개가 달린 모습은 한국에서 본 선풍기의 모습과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축은 페르티니어스가 발명한 마법 물품. 거기에 한 가지 기능을 더 해서 스위치를 달았다. 키면 돌아가고 끄면 멈추게 말이다. 게다가 전에 비하여 돌아가는 속도도 빨라져 선애 말에 의하면 제법 기분 좋은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이다. 드워프들이 가공한 물품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국에서 본, 천장에 다는 것처럼 페르티니어스가 자그마한 마법등까지 달았는데, 드워프들이 만든 꽃 모양의 유리병 속에 담겨진 마법등이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웠다. 그런데 마법등에 불이 들어오자 겉을 감싼 유리병의 여러 각도로 깎인 유리면 때문에 빛이 사방으로 퍼지는 것이었다. “대단합니다. 멋있어요. 이거 자체만으로도 가격이 백금화 단위에서 매겨질 텐데, 수공예픔이라 수량이 적을 테니 가격이 더더욱 올라가겠군요.” “이거 처음에 선 보일 때 아무래도 경매에 내 놓는 게 좋을 거 같아. 우리가 한 명, 한 명에게 파는 것 보다 그게 나을 테지.” “계속 경매에 내 놓을 수는 없겠지요. 처음에만 그러고 그 다음부터는 저희가 직접 팔도록 하지요. 올해 여름은 거의 다 지나가는 추세이니 내년 여름이 다가올 때 즈음 내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수량이 많아지면 가장 뛰어난 두어 작품만 경매에 내 놓고 나머지는 저희 상회에서 판매하는 게 좋겠습니다.” 벨타이거와 로어가 제품을 보자마자 눈을 번뜩이는 폼이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는 거 같다. “그럼, 이제 새로운 가게를 세워야겠네? 이걸 ‘화장품 & 향수’ 가게에서 판매할 수는 없잖아?” 토냐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차피 이 것도 여성 고객들을 주로 대상으로 삼을 텐데요 뭐. 어차피 집안 인테리어를 바꾸는 건 대부분 안주인들이 하잖아요. 차라리 여러 종류를 판매하는 가게로 아예 이름을 바꾸는 게 났겠어요. ‘야생화’란 타이틀만 내 놓고 일층에서는 화장품과 향수를 판매 하고 이층에서는 수공예품을 파는 거예요. 어차피 지금도 드워프제 유리 제품들을 같이 판매하고 있으니 상품 수량과 종류만 조금씩 조금씩 늘리는 식으로 말이죠.” “호오... 그거 좋다. 이거 말고도 이제 서대륙에서 옥을 수입하면 옥 제품들도 나올 테고, 거기서 여성용 장신구들도 반응이 좋으면... 아, 그 장신구들은 벌써 선을 보였나?” “곧 가을이잖아. 가을에도 사교계 파티가 많이 열릴 테니 그때 특이한 상품을 선보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여기 도착하자마자 모건님께 보내드렸지. 뒷수습 하실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지금쯤 각 지역의 가계로 나누어져 전시 되었을 걸.” “좋구만. 여기에 스탠리가 만든 것 까지 마음에 들면 좋을 거 같아. 스탠리, 네가 만든 건 뭐야?” 페르티니어스 마법사가 만든 걸 봤으니 이젠 스탠리 차례였다. “아... 내가 만든 건 단지 재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완성품은 드워프들 작업실에 있거든.” “드워프들 솜씨야 안 봐도 대단하다는 건 알겠고, 네가 뭘 만들었는지만 보여주면 돼.” “그거야 뭐... 그럼, 내 작업실로...” 스탠리의 작업실은 페르티니어스 작업실 바로 옆에 있었다.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미리 꺼내놓은 페르티니어스와는 달리 스텐리는 드워프가 완성시킨 제품이면 몰라도 자신이 만든 물품을 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미리 꺼내놓지 않았던 터라 스탠리는 엉망인 자신의 작업실을 휘적휘적 걸어가서 꺼내 와야 했다. 완전 밀림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복잡하고 엉망인 곳에서 무엇이 어디에 있다는 걸 어떻게 기억하는지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스탠리가 가지고 온 넓적한 유리 접시에 담겨진 걸 바라본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젤리?” 투명한 파란 색의, 반원형 모형을 하고 있는 건 정말 특유의 말랑말랑한 촉감과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는 영락없는 젤리였다. “이거, 만져 봐도 돼?” 토냐가 가장 먼저 호기심을 드러내고 묻자 스탠리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토냐가 손가락으로 쿡 찌르니 쏙 들어갔다가 손을 떼니 톡 튀어나오는 것이 영락없는 젤리의 탄력이다. “어때요?” 로어가 묻자 토냐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다시 손가락으로 쿡쿡 찌른다. 그러자 그에 쏙쏙 들어갔다가도 계속 통통 튀어나오는 것이 꼭 탄력 좋은 고무공 같지만 쏙 들어갔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약간 느린 거 보면 고무공만큼 탄성이 강한 건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토냐의 폼을 보니 가볍게 눌러줄 때마다 쏙쏙 들어가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힘을 줘야 들어가는 거 보니 마냥 약한 젤리만은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겉에는 마치 젤리, 아니면 고무처럼 탄성을 가지고 있는 고체인데 안에는 어째 액체 같기도 하다. “이거... 혹시 안에는 엑체야?” “원래 이게 처음부터 액체야. 단지 굳는 시간이 엄청 느려서... 실온에서 안에까지 완전히 굳히려면 이 자그마한 거라도 한달 정도 걸릴 정도야. 그런데 그렇게 완전히 굳으면 지금 같은 탄성은 없어지고 딱딱해져. 이것처럼 말야.” 그러면서 스탠리가 다시 꺼낸 건 내 새끼 손톱만한 자그마한 구슬이었다. 그런데 색을 넣은 유리구슬처럼 꽤나 예쁘다. “이게 완전히 굳어진 거야.” 그걸 보자마자 눈을 빛내는 일행들. “오옷, 장식품으로 이용하며 좋겠네요. 얼핏 보면 유리랑 질감이 비슷하고...” 로어가 제일 먼저 하나 집어 들며 말하자 벨타이거도 그 뒤를 이었다. “이거 색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을까요?” “색이야 뭐... 처음에 재료들을 혼합 할 때 몇몇 가지만 바꿔주면 여러 가지 색이 가능해요. 빨강색, 파랑색, 녹색, 거기에 투명한 색도...” “좋다!” 일행들의 얼굴이 더더욱 환해졌다. “그래, 드워프들이 이걸 장식품으로 이용하는가 보죠?” 선애의 질문에 스탠리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그건 아니고...” “뭐? 이걸 장식품으로 이용 안 하면 뭐로 사용 하는데? 혹시 그릇을 만든다던가? 이거... 단단한가?” “아뇨, 그게 아니라... 침대 매트로 이용 하던데요? 소파 쿠션으로도...” “엥?” 의아한 표정의 일행들을 돌아보며 스탠리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게 이렇게 작은 것도 완전히 굳히려면 한달 정도 걸리거든요. 그러니 조금만 크면 완전히 굳는데 몇 달 걸려요. 그러니 그 동안 기다렸다가 장식품으로 사용 하느니 차라리 쿠션으로 사용하겠다... 이야기가 나와서요. 그런데 침대 매트로 만들어보니까 누워있는 감촉이 정말 좋더군요. 거의 물침대? 아니, 물침대보다는 좀 딱딱한 편이기는 해요. 게다가 열전도율이 굉장히 느려서요. 한번 시원하게 해 두면 따뜻하게 데워지는데 몇 시간 걸리더라고요. 반대로 따뜻하게 해 두면 식는데도 몇 시간 걸리고... 여름이나 겨울에 이용하기 좋겠지요?” [오옷, 완전 온돌이네.] “이야... 그거 괜찮네. 드워프들이 만든 침대의 매트로 이용된 단 말이지?” 토냐의 말에 일행의 눈이 번쩍번쩍 빛난다. “거기다 색도 여러 가지고 반투명해서 굉장히 예쁘니까... 가치가 높아지겠어요.” 선애에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인다. “최고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드워프가 만든 침대라니... 도대체 가격이 얼마나 할까?’ 잘만 하면 가구까지 취급하는 종합 상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멋진 일은 그거 뿐만이 아니었다. 그 다음 날이 되어 제정신을 되찾은 자몬 족장이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드워프를 한 명 데리고 왔다. “처자, 인사 하게. 저기 위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의 촌장인 케루빔이라고 하네.” “처음 뵙겠습니다.” 이미 전에 로어로부터 언질을 받았던 터라 선애는 반갑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자, 처자가 진열관에 있는 그 기계를 만든 사람인가?” “예? 아니요... 그건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선물 받은 거거든요.” 전에는 서대륙에서 받아온 거라고 둘러 댔지만, 이제 그 변명이 통할지도 의문이다. 벨타이거가 직접 서대륙에 다녀오지는 않았지만, 거길 갔다 온 다른 이들의 말을 들으면 서대륙이나 아벤티노 대륙이나 문명의 발달 속도가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뭐, 어쩌면 그 전부터 이미 그 손목시계가 서대륙의 물품이 아니라는 건 눈치 채고 있었을지도... 그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으니 선애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사 묻는다고 해도 다른 차원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처자, 내가 기계에 관심이 많거든. 진열관에 전시된 걸 보니 정말 멋지더군. 처자가 비록 이 마을에 넘겨주기는 했지만, 우리 마을 드워프들도 함께 살펴보도록 허락해 주지 않겠나?” 이 마을의 족장인 자몬과 옆 마을의 족장인 케루빔은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케루빔이 오랜만에 친우를 만나기 위하여 마을을 방문하자, 자몬이 기계를 다루는 친우를 위하여 선애의 손목시계를 구경 시켜 준 모양이다. 어느 정도 분해하고 연구하는 건 끝났지만, 그래도 그걸 다시 조립하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단다. 그 작업을 이 마을 드워프들이 하고 있는 중인데 케루빔 족장은 자신들 마을의 드워프들도 같이 하게 해줬으면... 하는 거다. 더불어 이미 다 살펴봐서 원리를 알아낸 기술도 알려줬으면 하는 거고. 선애가 그 시계는 이미 이 마을에게 넘겨준 상태였기에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그건 자몬이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사항이었는데, 드워프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선애가 준 건 이 마을 드워프들이니 그걸 살펴보고 연구하고 만질 수 있는 건 이 마을 드워프 뿐이라고 여기는 거다. 그래 다른 드워프들에게도 그 기술을 전수하거나 같이 연구하고 싶으면 선애에게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우리로써는 럭키~! 라고 할만한 드워프들의 사상이었다. 그러고 보면 드워프들은 인정한 자에게는 자신의 뛰어난 기술을 공개하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은 뭔가 대단한 기술 하나 만들어내면 독점하려고 난리인데 말이다. 드워프들은 대단한 기술이나 기교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각자의 노력과 재능에 달린 일이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마치... 학교에서 다 같이 수업을 받아도 누구는 공부를 잘 하고 누구는 공부를 못 하는 것처럼 말이다. 뭐,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다 공개하는 건 아니고 그들이 원하는 기준을 통과한 존재에 한해서라는 단서가 붙기는 한다. 만약 아무에게나 공개했다면 드워프들의 기술이 몽땅 인간 세계로 넘어왔을 거다. 물론, 그렇다 해도 드워프들의 말처럼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다른 드워프 마을과의 거래를 이룰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선애가 놓칠 리 없었다. “저야, 저희 상회에 상품을 제공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단지, 이 마을 드워프들께서 기꺼이 같이 하겠다고 허락하신다는 조건 하에서 말입니다. 만약 이 마을 드워프들께서 반대하신다면 저도 허락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이 마을 족장 자몬과 옆 마을 족장 케루빔의 얼굴이 같이 환해졌다. “그건 걱정 할 필요 없네, 처자. 우리 마을 녀석들은 얼마든지 허락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같이 연구할 녀석들이 적어 머리에 쥐나게 생겼다고 얼마나 툴툴댔는지 아는가?” 금상첨화가 바로 이런 것일까나? 기쁜 소식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선애가 전에 드워프 마을을 방문했을 당시 자몬 족장의 부탁으로 인하여 오르골의 원리를 알려준 적이 있었다. 거기에 선애의 손목시계 분해, 연구의 책임자인 쿨링이 그 동안 시계를 연구하여 비스무리하게 만들어 낸 멋진 제품이 우리를 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케루빔 족장에게 같이 연구를 해도 좋다고 허락하자마자 그 다음에 곧바로 자몬 족장이 선애를 자신의 작업실로 데리고 갔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쿨링이 먼저 와서 뭔가 커다란 물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드워프들의 평균키 정도의 크기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원목으로 몸체를 형성하고 있는 그것은 드워프들이 만든 괘종시계였다. 이 세계의 시간에 대해 잠깐 설명한다면,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는 건 똑같았다. 그러나 한 달은 무조건 30일이었고, 일년은 12달로 360일이었다. 지구에서는 과학적으로 기준을 정하여 시간과 달력을 만들었지만, 여기서는 그 기준이 마법이었다. 새해 첫날 첫 시간인 1월 1일 영시가 이 세계의 마나가 가장 고요하고 옅어지는 시간이란다. 그걸 0시를 기준으로 이 세계의 시계가 돌아가는데, 재미있는 건 하루를 기준으로 했을 때 밤 12시가 마나가 가장 고요하게 흐르고 낮 12시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이 마나라는 것도 밤, 낮을 타는 모양이다. 드워프들이 만든 괘종시계도 그 시간의 법칙을 따르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시계의 둥근 테두리에는 1부터 12시까지만 표시된 건 선애의 손목시계를 흉내 낸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계 판은 2개로 되어 있었다. 0시부터 낮 12시까지는 새하얀 바탕에 검은색으로 숫자가 둘러써져 있었고 낮 12시가 되면 이 판이 짙은 고동색 바탕에 하얀 색 숫자로 13시부터 24시까지의 숫자가 써진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기는 시간을 시로 나눌 뿐 분이나 초까지 나뉘어 있지는 않았기에 시계 바늘은 시를 가리키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대신 한 시간 한 시간이 바뀔 때마다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사실 이것도 우리가 설명한 것이긴 했다. - 그런데 단순히 종소리만 나서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오전 3시로 시침을 조절하자 종소리가 세 번 울리더니만 갑자기 시계 판 밑의, 괘종시계 몸통부분에 있는 두 짝의 여닫이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는 마치 인형극장 같은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한 명 한 명이 내 손바닥 만한, 굉장히 섬세하게 만들어진 드워프 인형 일곱 개가 그 무대 위에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흘러나온 아름다운 오르골 소리에 맞추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한국의 명 동요인 ‘학교 종이 땡땡땡~!’ 오르골의 원리에 대해 직접 시범을 보이느라 가르쳐준 그 동요를 여기에 사용할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그 ‘학교 종이 땡땡땡~!’ 멜로디와 일곱 드워프 인형의 움직임은 제법 잘 어울렸다. 드워프 인형은 2차원으로 만들어진 평면 인형이었다. 거기에 팔과 다리, 머리를 따로 이어 붙여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정도였는데, 그 팔과 다리에 각각 섬세한 줄을 연결하여 단조로운 동작을 반복시키는 것이었다. 한 드워프는 뜨거운 불이 타오르른 가마에 풀무질을 했고, 그 다음 드워프는 불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가마에 땔감을 집어넣었다. 그 다음 드워프는 망치질을 했고, 그 옆의 드워프는 망치질 하는 드워프를 위하여 망치질 당하는 물체를 집게로 잘 잡아주고 있었다. 그 옆에서 한 드워프는 작은 나팔을 불었고, 그 옆의 드워프는 폴짝 폴짝 뛰며 춤을 추고 있었다. “머, 멋지다...” “대단합니다.” “우와아...” 그 모습을 본 일행들은 한 동안 말을 잃다가 잠시 후 선애의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감탄사를 한명씩 내뱉었다. “훗훗훗, 이 정도 쯤이야. 이게 제일 처음에 만든 건데, 어때, 괜찮은가?” 일행의 반응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자몬 족장이 선애를 향해 묻자 선애가 박수까지 치며 열렬하게 대답했다. “대단해요. 멋지십니다. 이렇게 대단한 것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생각해도 꽤나 마음에 드는 작품이야. 섬세하고 복잡한 작업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 옆에서 시계를 조작해 여러 가지를 보여주던 쿨링도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진열관에 들어갈까요?” 그러자 자몬과 쿨링이 동시에 말한다. “만족스럽기는 하지만, 처음 만든 것 치고 만족스럽다는 거지 진열관에 들어 갈 정도는 아니야.” “진열관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좀 부족해. 다음에 만들면 혹 거기에 들어갈 만한 걸 만들게 될지도 모르지.” “이야아... 기대할 게요.” 이것도 야생화 가게에서 판매하게 될 걸 상상하는지 선애는 무척이나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의 선풍기, 거기에 스탠리가 발명한 젤리 매트로 만든 침대 - 굉장히 멋졌다. 나는 킹사이즈의, 백조가 매트를 날개로 감싼 형태의 크리스탈 침대는 처음 봤다. 그 안의 밝은 녹색의 매트는 크리스탈 백조와 너무 잘 어울려 굉장히 멋있었다. - , 자몬 족장과 쿨링이 만든 괘종시계, 거기에 케루빔이 족장으로 있는 드워프 마을과의 새로운 거래까지, 타이거 상회 일행은 보물섬을 발견하거나 노다지를 캔 것만 같은 기분이었을 거다. 허나, 이건 한국 속담으로 말하자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라고 할 수 있겠다. 자몬이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은 우리에게 상품으로 주겠다는 게 아니라 ‘단지 너희들과 안면 있는 존재들이 이렇게 멋진 걸 만들었다.'라고 성과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 뿐이었다. “우리가 그걸 줄 이유는 없지. 자네들이 대가를 치르는 것은 유리 제품들과 그 마법사와 합작으로 만든 ‘선풍기’뿐이지 않은가?” “아... 그, 그런...” 선애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단호한 자몬 족장의 표정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드워프들은 한번 아니면 아니었기에 그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이때 벨타이거 녀석이 나섰다. “음... 저기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만...” “뭔가?” “유리 제품들은 선애의 시계를 대가로 치른 것이고 선풍기는 서대륙의 술을 대가로 치른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맞습니까?” “맞네.” “서대륙의 술은 처음에 가지고 온 것이 약속한 분량입니다만, 그 후에 저희가 여러분을 생각해서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판매처를 찾아서 어렵사리 구해온 건데, 그것도 ‘선풍기’의 대가로 치실 생각입니까?” 벨타이거가 차분하게 조목조목 지적하며 말하자 자몬이 생각해보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저희가 이번에 가지고 온 것은 너무 드러내려고 하는 거 같아서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만, 수요량에 비하여 생산량이 너무 적어서 구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것을 선애가 판매처 사람들과 단판을 지어서 이만큼이라도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지요. 앞서 가지고 온 술을 구한 루트와 완전히 다른 루트거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에 가지고 온 술의 양이 훨씬 적지 않습니까?” 벨타이거의 말에 자몬이 선애를 바라본다. “이 자의 말이 맞는가?” “예. 구입 루트가 둘 다 틀려요. 앞에서 구한 건 수량을 얼마든지 더 확보할 수 있는데, 이번 건 이게 구할 수 있는 최대치였습니다. 다음에 좀 더 많이 달라고 예약을 해 놓고 왔습니다만. 솔직히 얼마나 더 구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흠...”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옥에 관련된 것입니다만...” “그건 또 왜?” “여러분이 만드신 옥 제품 중 괜찮은 수준의 것들을 내주겠다고 하셨지만, 저희가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부분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모두 대가로 생각하시는 건 좀...” 벨타이거의 말에 다행스럽게도 자몬이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그래, 그건 자네 말이 옳은 것 같네. 넌 어떻게 생각 하냐?” 자몬이 의견을 구한 드워프는 두랄루민으로 합금 제조의 대가였다. 선풍기를 만드는데 페르티니어스 마법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드워프였고 스탠리가 와서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상회와의 거래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이 자리에 함께한 것이었다. “나도 저 인간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우리가 다루는 종류가 워낙 많아야지. 그걸 다 가지고 가라고 했다고 대가를 치룬 건 아니지. 저들이 수용하는 부분과 수용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텐데.”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잘 먹히는 것 같자 벨타이거가 내친김이라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또 뭔가?” “여러분이 만드신 시계 말씀입니다만...” 벨타이거가 시계 이야기를 꺼내자 자몬이 이번에는 우리가 너무 욕심을 부린다 생각 했는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미안하지만, 그거에 대한 기술의 대가는 유리제품이 아니던가?” “아니요, 유리 제품은 선애가 여러분께 드린 시계의 대가지요. 그러나 제가 그 시계를 보자니 두 가지 기술이 들어갔던데요. 하나는 선애가 여러분에게 드린 시계를 여러분이 연구하여 알아 낸 기술이고, 하나는 선애가 직접 가르쳐드린 오르골이라는 음악상자에 대한 기술입니다. 제가 틀린 겁니까? 전에 선애가 여기 왔을 때 직접 만들어서 시범까지 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음악 또한 선애가 가르쳐준 게 아닙니까?” 벨타이거의 말에 자몬과 두랄루민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시선을 교환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자네 말이 옳아. 내 미처 생각을 못 했군. 그럼, 그 대가로 뭘 요구하겠나?” 자몬의 말에 벨타이거는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었던 듯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우선 옥 제품은 여성용 물품과 장식품 정도로 제한을 해두면 괜찮겠습니까?” “그건... 차라리 나중에 자네가 제품을 받고 싶은 드워프들을 정하는 게 좋겠군. 그리고?” “다른 옥 제품들을 수용하지 않는 대신 스탠리가 개발한 재료로 만든 매트를 끼운 침대 제품들을 원합니다만. 그리고 선애가 가르쳐준 음악상자의 기술 대가로는... 괘종시계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벨타이거의 말에 자몬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참 난처한 요구로군.” “어려우시겠습니까?” “오르골 기술의 대가로 괘종시계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주는 건 너무 과하다고 보네. 그러니... 5개 정도면 적당할 것 같군. 그리고 침대는... 사실 자네들이 오기 전에 먼저 도착한 상인이 있네. 그는 우리에게 대리석을 납품해주는데, 그가 얼마 전에 대리석으로 만든 제품들을 요구했다네. 원래 건축 제품들 정도만 받았는데 이번에 그 종류를 늘렸거든. 사실, 그에게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받았기에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네.” 우리가 본 멋진 침대들 중 대리석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스탠리가 발명한 젤리 매트를 깐 대리석 침대도 꽤나 멋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 말고도 대리석으로 만든 여러 가지 장식품도 꽤나 눈에 띄였다. 그래서 드워프들이 쉽게 옥의 용도를 찾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자몬의 말에 벨타이거가 고심하는 표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대가를 정하기 전에 먼저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혹시 그와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건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오르골에 대한 대가는 괘종시게 5개로 괜찮겠지?” 그때 선애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저, 한 가지 여쭈어볼 게 있는데...” “음? 뭔가, 처자?” “괘종시계를 만들 때 말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계속 멜로디가 나오게 하실 건가요?” “그럴 생각인데. 혹, 자네 기술을 계속 쓴다고 대가를 요구하는 건?” 주는 것마다 다 대가를 요구하다보니 ‘이번에도냐?’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눈초리가 곱지 않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계속 같은 멜로디를 사용하실 건가요? 제가 가르쳐드린?” “음? 그럴 생각인데...” “같은 멜로디만 계속 사용하면 식상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다른 멜로디도 알고 있는데요.” “당연히 그 대가가 있겠지?” “아하하...” 선애가 난처한 웃음을 흘리자 자몬이 어쩔 수 없는 놈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오르골 기술에 대한 대가를 안 주는 대신, 멜로디 두개 당 시계 하나면 어떤가?” “에에... 멜로디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흠, 그럼 그냥 다섯 개만 받던가.” “멜로디가 필요하시지 않으세요?” “필요하지. 그런데 많지 않다며? 뭐, 그거라도 필요하긴 하니... 그럼 여섯 개로 할까?” 자몬의 말에 선애가 나를 바라본다. 멜로디를 몇 개 정도 내 놓을 수 있느냐는 시선. [으으음... 그래도 최소한 10개 정도는 되지 않을까?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혹 나중에도 또 떠오를 수 있으니... 그냥 멜로디 두개 당 시계 하나로 해.] 그렇게 자몬 족장과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는 이 드워프 마을에 대리석을 공급한다는 상인을 찾아갔다.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서 자몬 족장이 덧붙이길 케루빔 족장 또한 우리 상회와 거래를 하자고 마음먹자 다른 재료에도 관심이 쏠리는지 대리석을 공급하는 상인과도 거래를 하길 원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서대륙의 술과 옥을 공급받기 원했는데, 진 나라의 술이야 쉽게 공급해줄 수 있지만 한 나라의 옥 생산량이 두 드워프 마을에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 정도가 될지 모르겠다. 다행이 옥은 진 나라에도 광산이 있다 들었기에 얼마 후 서대륙으로 갈 때 광진에 가서 루트를 알아볼 예정이었다. 대리석을 공급하는 상인은 마침 인간들을 위한 건물에 머물러 있었다. “실례합니다. 리클레어씨를 뵙고 싶은데요.” 그가 머무는 방 입구에 호위를 위함인지 무사 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들에게 벨타이거가 정중하게 요청하자 한 사람이 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말한다. “찾아온 분이 계십니다.” “들어오시라 하게.” 안에서 허락의 목소리가 들리자 무사들이 문 앞에서 비켜서줬고 벨타이거와 선애, 로어가 안으로 들어갔다. 토냐는 스텐리와 이야기할 게 많은지 그의 작업실에 가 있었다. 뭐,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마법사라는 신분 때문에 이런 만남에 혹 경계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몰라 동행하기가 좀 곤란하기는 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 놀랍게도 거기에 안토니 헤스딩스가 있는 거였다. “어, 형 여기 있었어?” 그와 가까운 사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엄연히 상단 사람은 아니라 상단 일을 볼 때 같이 동행할 수는 없었다. 뭐, 그 또한 다른 볼일이 있어 여기에 온 것이라 마을로 들어온 뒤에는 같이 움직인 적이 없었다. “이 분께 볼일이 있어서 말이지. 그런데 너는 웬일이냐?” “아아, 이 마을 족장이신 자몬님께 리클레어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 왔어.” “호오, 저에 대한 이야기를 족장님께서 하셨단 말입니까. 설마 나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그렇게 장난스레 이야기 하며 끼어든 사람은 30대 초반, 혹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은발에 회색 눈을 가진,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라던가, 단정한 옷차림 등등이 약간 날카로운 인상과 조화되어 좀 깐깐해 보였다. 하지만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행동이 엘리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종합하면... 깐깐한 엘리트? “처음 뵙겠습니다. 타이거 상회의 벨타이거 크로스웰이라고 합니다.” 벨타이거가 자연스레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하자 그 또한 벨타이거의 손을 맞잡으며 소개를 해왔다. “아시겠지만, 닷지 상회의 벨저 리클레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이 크로스웰이시라면... 알파두르의 크로스웰 상회와 연관이 있으신 거 같습니만?” 상인이라 그런지 크로스웰 상회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다. “뭐, 여러 가지 인연은 있습니다만, 지금은 타이거 상회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쪽은 제 동업자인 선애양.”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이디.” 벨저 리클레어가 선애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을 대는, 귀족 영애를 대하는 예를 하려고 하자 선애가 얼른 웃으며 만류했다. “저는 평민이니 예의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그런데 저희가 혹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방해한 건 아닌지요?” “괜찮습니다. 거의 다 끝난 참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은 단순히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 오신 건 아니신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십니까?” “사실... 저희가 이번에 드워프 마을에 와서 받아가는 제품의 종류를 좀 늘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족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저희가 원하는 제품이 여러분이 원하는 제품과 겹친다고 하더군요.” “호오... 여러분이 원하시는 제품은 어떤 건데요?” “장식품과 가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의아하더군요. 닷시 상단은 건축 재료를 다루는 상회가 아니었던가요? 대리석으로 만든 모든 종류의 제품을 구하신다던데, 이제 와서 업종을 변경하실 예정입니까?” “글쎄요. 여러 가지를 생각 중이죠.” “그 종류를 포기하시면, 원하시던 계획에 크게 지장이 될까요?” “흠... 계획에 지장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드워프 제품은 대단한 이익이 될 수 있지요. 저희 상단에서 그걸 포기한다면 혹 그를 대신 할 다른 것이 있을까요?”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으음... 여러분들이 드워프 마을에 여러 제품을 구할 수 있다면 드워프들에게 뭔가를 제공한다는 것이겠지요? 저희 상단을 위하여 그 대가의 일부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양보하는 대신 말이지요.” “혹 드워프 마을에 바라시는 다른 무언가가 있으신지요?” 벨타이거의 질문에 벨저 리클레어는 빙긋 웃으며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아마도 본론은 안 꺼내고 빙빙 겉도는 이야기만 했을 거다. 그런데 그 전에 옆에서 가만히 있던 안토니 헤스딩스가 리클레어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괜히 밀고 당기기 하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하자고. 저 녀석 제법 괜찮은 녀석이라 이기적으로 안 굴어.” “형?” 갑자기 끼어드는 안토니의 모습에 벨타이거가 의아하게 묻자 안토니가 입을 연다. “너 내가 새로운 사업을 해보려고 여기에 온 거 알지?” “그거야, 형이 간단하게 언급 했으니까.” “그런데 그 사업이란 걸 여기 벨저 형이랑 같이 하려고 하거든.” “저기... 둘이 아는 사이?” “내가 수도에서 학교 다닐 때 같은 학교 선배였어.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지.” “그렇군. 뭐,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맥주 한 잔 하면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아~ 같이 한다는 사업이 뭐야?” “목재 사업이야. 벨저네 상단이 건축 자재를 다룬다는 걸 알지? 거기서 목재도 꽤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데, 지금까지 그 상회에서 유통시킨 목재는 웨이벌리에서 생산한 거야. 그런데 거기는 워낙 많은 상회에서 목재를 구하다보니 고급 목재를 충분히 얻기 어렵거든.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생산지를 개척하고자 했지.” “그 생산지가... 여기?” “맞았어. 드워프 마을 주변에는 드워프들 덕분에 몬스터가 적은데다 여기 목재는 웨이벌리 못지않게 고급 목재들을 구할 수 있거든.” 드워프들도 목재를 굉장히 많이 사용했다. 그리하여 드워프 마을에서도 직접 나무를 베어 오는 팀이 존재하기도 했다. “흠... 대리석 제품을 요구한 건 어떻게 된 건데?” “건축 자제를 다룬다는 건 그와 관련된 모든 걸 다 다룰 수 있는 것이지. 인테리어 소품들이라던지 가구라던지. 이번에 상단을 확장할 예정인데 그때 이런 것들도 다뤄볼 예정이거든.”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곳과 가까운 다른 드워프 마을의 족장님이 여기 와 계시거든. 케루빔님이라고... 그런데 그 곳에서도 대리석을 공급 받기를 원한다던데?” “어제 요청하시더군. 우리로써야 좋은 기회이지. 하지만 그 마을에서도 건축 재료를 공급받기를 원해서...” 닷지 상단이 드워프 마을에서 공급 받는 제품은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 있는 고급 문짝이라든지 기둥, 벽 장식 등등... 그들 입장에서도 제공 받고 싶은 제품들은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그 일부분을 포기하고 목재를 공급 받으려고 하니 어느 정도에서 균형을 맞출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축 자재를 다룬다면... 옥도 다룰 수 있겠네? 한국에서도 옥이 건축 자재로 쓰였거든.] 나의 속삭임을 듣던 선애가 로어를 불러 속삭였다. “저기... 닷지 상회라는 곳 큰 곳입니까?” “예. 그쪽 계통에서는 손꼽히는 곳이지요. 아무래도 드워프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니까요. 상계 전체적으로 봐도 20대 상회 안에 드는 곳입니다.” “흠...” 로어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선애는 이윽고 뭔가 괜찮은 계획을 세웠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세 남자들 틈에 끼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계획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선애의 계획이란 닷지 상회와 타이거 상회의 상품들을 모두 모아 놓은 가게를 만드는 것이었다. 백화점처럼 말이다. 닷지 상회에서는 건축에 관련된 제품들을 다루는 덕분에 인테리어용 제품들도 꽤나 많이 다루고 있었다. 거기다 이번에 드워프제 제품들까지 많은 수를 포함시키려 하고 있으니 그 숫자는 더욱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타이거 상회에서 새로 들여놓으려고 하는 선풍기와 침대와 옥 장식품, 가끔가다 들여올 수 있는 시계는 모두 인테리어에 관련된 제품들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안주인들이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는 제품들이었다. 그런 공통된 제품들을 모아서 같이 판매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층을 다르게 한다던가 코너를 다르게 한다고 해서 분리해두면 두 상회의 제품들이 뒤섞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희 상회에서는 이번에 새로 인테리어 제품들을 들여놓으려고 하는데, 그 종류가 크게 많지가 않거든요. 게다가 주 된 제품들이 모두 드워프 제품들이니 숫자도 많지 않고요. 그 부족한 부분을 닷지 상회의 제품들이 채워주시는 것이죠. 닷지 상회에서는 드워프 제품들 말고도 많은 상품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괜찮은 생각이기는 한데... 설마 화장품이나 향수나 장신구들을 같이 판매하자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물론 같이 판매할 겁니다. 그러나 단지 한 건물 내일 뿐, 여성 전문 용품들은 다른 층에서 판매하도록 할 겁니다. 화장품을 구입하러 왔던 여성들이 다른 층에 있는 인테리어 소품들을 구경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인테리어 소품들을 구하러 왔던 여성들이 화장품을 구경하러 올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흠... 획기적인 발상이군.” 벨저 리클레어가 나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안토니 헤스딩스도 끼어들었다. “그러게. 남성들이 주 고객인 건축 자재들 같은 경우도 층을 달리해서 판매처를 만들면 되니까.” “한 층은 완전 건축 자재를 판매하고 한 층은 인테리어 소품들을 판매하고 한 층은 여성 전용 제품들을 판매하려면... 가게만 3층이 필요하겠군.” 벨타이거도 진지하게 고려해보고 있는 모양이다. “제품을 판매하는 가게 이름은 각 층에 따로 붙이거나 아니면 각 판매처마다 붙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래도 우리들은 같이 진열할 많은 제품들을 확보할 수 있어서 좋고, 여러분은 상회 가치를 높이고 선전이 될 수 있는 드워프 제품들을 같은 자리에서 판매할 수 있잖아요. 서로에게 좋은 일 같은데요.” 선애의 말에 벨저 리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소. 우리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봅시다.” “제 제안을 마음에 들어해주시니 정말 감사하군요.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만.” “무엇입니까?” “이 마을의 드워프제 제품 중 대리석 제품들은 모두 그쪽에 양보하지요. 그러나 단 한 가지, 침대만은 저희 쪽으로 양보해주셨으면 해요. 대신, 여러분께 괜찮은 건축 자제 한 가지를 소개해 드리지요.” 이제 완전히 케리어 우먼티를 보이며 능숙하게 상대방과 거래를 하는 선애의 모습을 보자니 뿌듯한 감정이 든다. ‘흐음... 그런데 이거 우리 타이거 상회도 서대륙 무역을 본격적으로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제 33 화 스터링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채 그에게 뭐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다짜고짜로 선애의 팔을 잡더니 그대로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것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선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처음부터 선애만이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어어어~ 야, 야~!!"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선애가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스터링 녀석은 들은체도 안 했다. "급하다니까. 빨리, 빨리!" 키는 선애의 허리를 겨우 넘는 주제에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선애가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주르르 끌려갔다. 그 뒤로 놀란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선, 방 안에 같이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들은 이 마을의 주인인 드워프가 와서 데리고 가는 것이라 그런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막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벨타이거만 몇 발자국 쫓아오려 했지만 스터링이 워낙 빨리 끌고 나갔기때문에 쫓아갈 엄두도 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 그래도 드워프들이 선애에게 해꼬지를 안 할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쉽게 포기한 걸거다. [하이고, 다리도 짧은 녀석이 빠르기는 엄청 빠르네.] 선애의 뒤를 따라가며 내가 반은 황당하고 반은 웃겨서 쿡쿡 대며 말하자 선애가 인상을 찡그린다.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와?/" 그러더니 스터링을 향해 빽 고함을 질렀다. "야,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할 거 아니야? 무조건 끌고가면 어떻게 해?" "와보면 알아, 와보면." 그렇게 대답도 제대로 안 하는 스터링이 무지 다급하게 선애를 끌고 간 곳은... "어라라? 여긴 왜?" "와 보면 안다니까?" 어리둥절한 선애가 다시 한번 물었지만, 이번 질문도 그대로 무시되고 말았다. '아니, 여긴 왜?' 나는 선애의 뒤를 따라가며 입구에 씌어져 있는 멋들어진 글씨를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이 곳은 이 마을에 사는 드워프라고 해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바로 '진열관'. 선애 일행이야 선애의 손목 시계 덕분으로 한번 구경한 적이 있지만, 평소에는 족장 드워프와 장로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드워프들이 들어가 볼 수 있는, 드워프 마을에서 최고라고 인정받은 제품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었다. 스터링에 끌려서 안으로 들어간 선애와 그 뒤를 따라간 나는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볼 일이 있을때만 겨우 얼굴을 볼 수 있는 족장부터 시작해서 자신들이 아쉬울 때만 얼굴을 비출까 말까하는 장로들까지 우르르 거기에 다 몰려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언제 어느때도 당당함을 과시하던 그들이 마치 고양이 앞의 쥐 마냥 움츠러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스터링이 선애를 이끌고 등장하자 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오~ 처자아~" 족장이 무지 반갑게 맞아주는데, 어째 평소의 그 우렁찬 목소리는 어디 가버렸는지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간다. 그에 나는 이 진열관에 갑자기 '정.숙!'이라는 규칙이 새로 생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뚜벅 뚜벅 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워프 족장과 장로들이 진열관 입구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터라 우리도 자연스레 그 곳에 멈추게 되어 안에 누가 있는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전 정말 진심으로 반갑다고만 할 수 없는, 그러나 그쪽은 무척이나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애씨이이~~~!] [어라라, 아리아씨이~?] 환한 기색으로 도도도... 는 아니고 허공을 날아서 나에게 다가오는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는 엘프 유령 아리아씨였다. 물론, 그녀가 싫은 건 아니다. 단지 그녀 옆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놈이 싫은 거지. "흠... 너였나?" '역시나...'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렌스버리를 확인하자마자 선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마 본심은 인상을 사정없이 구기고 싶었지만, 그대로 했다가는 뒷탈이 두려운지라 내색을 안 하려 무진장하게 애쓰는 것일거다. "레, 렌스버리님? 어떻게 여기에..." "오랜만에 온 김에 뭐 괜찮은 거 없나 해서 구경왔다." 마치 자기네 집 안방에 왔다는 것 마냥 당당히 대답하는 렌스버리 녀석. 그러나 안타까운 건 그의 말에 뭐라 반발하는 존재가 한 명도 없다는 거였다. 렌스버리와 감히 시선을 마주할 생각도 못한 채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드워프들을 동질감 어린 시선으로 선애가 바라보는데 렌스버리가 선애에게 말을 건넸다. "이게 네거라며?" 그러면서 렌스버리가 들어 보이는 것은 선애의 손목 시계였다. 선애와 내가 한국에서 살았다는 증거품인, 그러나 드워프들과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예전에 그들에게 넘져주고 분해되어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 본래의 예쁜 패션 시계 자태로 돌아와 렌스버리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어... 그, 그거..." "네거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저 놈들이 네거라고 하던데?" 뜻밖의 모습이라 선애도 놀랐는지 대답을 못하자 렌스버리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인내심이라고는 쥐똥 만큼도 없는 드래곤 녀석 같으니라고...' 진즉에 분해되어 있던 시계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거 보니 분명 저 놈이 드워프들을 닦달해서 다시 조립시켜 놓은 걸 거다. 렌스버리 녀석의 인상이 안 좋아지자 선애가 얼른 입을 열었다. "전에는 제 것이었습니다만, 예전에 드워프 마을에 선물로 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흠... 그딴 건 상관 없고, 원래 네 것이었단 소리지? 그럼 네가 구했다는 이야기네?" "예." 선애의 대답에 렌스버리가 다시 입을 연다. 그에 무슨 생각인지 모를 묘한 시선으로 선애와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던 렌스버리가 다시 입을 연다. "이거... 움직이는 거라며? 그런데 지금은 왜 안 움직이지?" "그걸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의 힘이 다 했기 때문일겁니다." "그럼 다시 움직이게 하려면?" "원동력을 갈아 끼우면 됩니다만, 여기서는 그 원동력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저 녀석들의 말에 의하면 저들에게 넘겨 주기 전에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고 하던데?" 그건 그랬다. 건전지가 다 되어 멈춰버린 시계에 우연치 않게 내가 접촉하자 시계 바늘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 했으니까. "그건 언니가..." 선애는 거기까지 말한 뒤 말 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렌스버리는 선애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듯 더 캐묻는 대신 드워프들 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거 가지고 간다." "헉..."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작은 경악성들. 드워프들의 시선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색이 가득 가득 담겨 있었지만 렌스버리는 그것들을 싸아악 무시해버리고는 몸을 돌려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떼는 것이었다. 그를 향해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가여운 드워프들... '크흑흑흑... 동지이이~~~' 그 모습에 심한 동질감을 느껴 속으로 부르짓고 있는데 막 한 걸음 떼던 렌스버리가 멈칫 하더니만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에 올때까지 괜찮은 것들 좀 만들어 봐라. 얼마만에 오는 건데 괜찮은 것들이 하나도 없는 거냐?" 그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뗀다. 그 뒤에서 건드리면 툭 하고 쓰러질 안색으로 부들부들 떨며 경기를 일으키는 드워프들. '이 놈아, 네가 만드냐? 네가 만들어?' 그런 드워프들을 대신하여 내가 녀석을 있는 힘껏... 그러나 속으로만 씹고 있는데 렌스버리 녀석이 두어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몸을 휘익 돌린다. 그에 녀석의 뒤에서 경기를 일으키던 드워프들이 후다닥 자세를 잡는데 - 렌스버리 놈이 '불만이야?' 라고 할까봐... - 다행... 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 보는 건 선애다. "너, 왜 안따라와?" "예? 저 따가라는 거였습니까?" '아니 저 놈이? 선애가 네 놈 비서냐? 왜 널 따라가야 하는데?' 이번에도 속으로만 외치고 있는데 선애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렌스버리 눈가가 꿈틀 한다. "갑자기 바보가 된 거냐? 그럼 따라 와야지 안 따라 올 거냐?" "예, 예." 그리하여 얼떨결에 렌스버리의 뒤를 따라 선애가 발걸음을 옮기자 나와 같이 있던 아리아도 자동적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절망으로 인하여 바닥에 쓰러지는 드워프들을 뒤에 두고 말이다. 그런데 렌스버리는 딱히 어디로 향하려는 목적지가 있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열관을 나오자 이리저리 한참을 둘러 보더니만 선애를 데리고 간 곳은 진열관 뒷쪽, 아무도 없는 공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을 못한 듯 렌스버리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희미한 빛의 구가 형성 되더니만 선애와 렌스버리를 둘러싸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빛의 구는 둘을 품은 채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록으로 두 유령까지 달고 말이다. 발 밑이 허전해지자 선애는 놀라 얼른 나에게 매달렸다. "엄마야!" [괜찮아요. 렌이 마법을 쓴 거거든요.] 놀라는 선애를 안심시키려는 듯 아리아가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그 '렌'이라는 놈이 마법을 썼다는 것이 더욱 더 불안했다. 뭐, 아리아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할테니 죽이지야 않겠지만, 앞으로도 놀라지 않게 하리라는 법은 없는 거 아닌가? 게다가 이 놈이 친절하게 선애를 안심시켜 줄 놈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리아에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도 선애를 은근슬쩍 품에 안고 팔을 단단히 허리에 둘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렌스버리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고 희미한 빛의 구는 빠른 속도로 허공으로 떠올라 어느새 우리가 머물고 있는 드워프 마을이 마치 장난감 마을처럼 작게 보이고 그 주변의 산의 모습까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비행기도 타보고 63빌딩 전망대에도 올라가보고, 설악산에서 케이블카도 타봐서 딱히 고소 공포증은 없다고 생각 했었는데, 단지 희미한 빛을 내는, 거의 투명한 막 하나만이 달랑 발 밑을 받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다행이도 선애는 내가 잡아주고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겁먹은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느긋하니 주위를 둘러보며 경치 감상을 하고 있었다. '흠... 하기야, 아래만 안 보면 무서울 건 없겠지.' 게다가 울 꼬맹이는 놀이공원에 가면 바이킹은 무조건 맨 끝자리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 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선애를 언제 관찰하고 있었던 건지, 렌스버리 녀석이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겁 먹은 표정이 아니군." 그에 선애가 얼른 녀석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예?"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 언제 이렇게 높은 곳 까지 올라와봤을까? 마법사를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데리고 있을 정도로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닌 그냥 일반 평민이 말이야. 그런데 마치 익숙한 일 처럼 너무 태연하군." "아니... 뭐... 지금 언니가 잡아주고 있거든요." "그렇다 해도 보통 처음에 이 정도 높이에 올라오면 놀라기 마련이지." 그렇게 말한 렌스버리는 딱히 선애에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닌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리는 가 싶더니만 다짜고짜로 손에 들고 있던 시계를 선애에게 휘익 던졌다. "엑!" 선애가 긴장 상태로 녀석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시계에 어딘가에 맞았을 거다. 얼결에 시계를 받아 든 선애가 의도를 몰라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렌스버리가 입을 열었다. "그거... 네 언니가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했지?" "예." "네 언니가 만든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아마도... 언니가 유령이라서 할 수 있었던게 아닐까 추측 합니다만,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혹시 아리아 또한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만... 한번 시도해 볼까요?" "그래." 어째 평소의 건방지고 오만한 목소리가 아닌, 약간은 풀이 죽은 것 같은 목소리다. 하지만 그에 의아해 할 사이도 없이 나는 선애에게서 시계를 건네 받고는 선애의 허리를 감은 팔 하나를 풀어 아리아에게 뻗었다. [그냥 여기 가운데 있죠? 동그란데. 거기다 손가락을 넣으시면 돼요.] 내 설명에 아리아가 주저주저 하면서 손가락을 시계 가운데에다 집어 넣었다. [이, 이렇게 하면 돼요?] [예. 그러고 가만히 계시면 돼요.] 한 인간과 한 드래곤과 두 유령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굳건하게 침묵을 지키던 시계 녀석이 2, 3분 정도 지났을까? 집요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던지 초침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만 아주아주 힘겹게 오른쪽으로 한 칸 움직였다. [움직였다!] "움직였어!" 보고 있던 선애와 내가 동시에 외쳤다. [오옷, 아리아씨. 아리아씨도 가능하군요. 역시, 저와 같은 동류였어요.] 새삼스럽게 동질감을 가득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사는 차원이 틀리더라도 유령은 다 같나봐.' 생각 같아서는 그녀의 팔이라도 잡고 흔들거나 방방 뛰고 싶었지만, 선애를 붙들어주고 있는 관계로 그냥 말과 표정으로써 내 기분을 전달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한번 그렇게 움직인 초침은 계속 오른쪽으로 한 칸 한 칸 움직여 나중에는 한바퀴를 도는데 성공했다. [아아... 이게 이렇게 움직이는 건가봐요?] 처음에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아리아가 초침이 한 바퀴돌고 또 돌아가자 흥미를 잃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뗐다. [그런데 왜 가장 작은 것만 움직여요? 다른 건 안 움직여요?] 분명히 분침이 옆으로 한 칸 움직였을텐데, 폭이 너무 작아서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아아, 그건 말이지요...] 그렇게 내가 막 설명하려고 하는 순간, 초침이 움찔 하더니만 멈추는 것이었다. "앗, 멈췄다." 선애의, 얼결에 나온 외침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아리아씨에게 하던 대답을 멈추고 선애에게 설명한다. [아리아씨가 손을 떼서 그래.] [어어, 그럼 이거 계속 손을 대고 있어야 하는 건가요?] [아니, 그러니까... 좀 오래 손을 대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 뒤에는 손을 떼어도 일정 시간동안 계속 움직이거든요.] 다시 들리는 아리아씨의 질문에 고개를 돌리고 설명해주는데 렌스버리의 질문이 들렸다. "이거,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 거지?" "어... 으으음... 그러니까 저도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데요... 저희는 '전기'라고 이야기 하거든요." "'전기'라... 네가 살던 세상의 용어인가?" "어... 으음..." 평소 선애를 서대륙인이라고 생각해주는 척 해놓고는 이제와서 '네가 살던 세상'이라고 하니 선애는 당혹스러운지 뭐라 말은 못하고 나만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올게 왔다고 생각되었다. 그동안 렌스버리가 모르는 척 해주는게 이상했을 뿐, 그 놈은 진즉에 우리가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챘으니 말이다. "설마 내가 모르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챘을 줄 알았는데." 뭐어, 그것도 대충 짐작한 일이었다.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곰곰히 생각하면 모르고 있는게 오히려 어려운 일일거다. "예...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언급을 안 하셔서..." 선애의 긍정에 렌스버리가 훗, 하고 웃었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 했지. 뭐, 내가 좀 더 젊었더라면 호기심을 느껴 이것저것 알아봤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만 아니었으면 끝까지 모른체 했을 거다." 아마 아리아양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자극을 받은 것 같다. '역시 사랑의 힘이란 위대한 거야.' 속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렌스버리는 선애에게 '전기'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에에... 그러니까 저는 그쪽을 깊이 공부한게 아니라서 자세한 설명을 해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제가 배우기로는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에너지가 있습니다. 에에... 에너지란 쉽게 말하면 힘이라고나 할까요? 뭔가를 움직이는 힘 말입니다. 그걸 여러 종류로 세분한 거죠. 예를 들자면 제 손이 있는데 이걸 제가 움직이는 것과 렌스버리님이 와서 움직이는 것과,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움직이는 것, 소나기가 내려서 움직이게 하는 것, 우박이 떨어져서..." 설명이 길어질 것 같자 렌스버리가 냉큼 끼어들며 말을 잘랐다. "대충 이해 했다. 그래서?" "전기도 그러한 에너지의 일종입니다. 물체 안에는 전자라는 것이 있는데, 이 전자라는 것은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흐르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흐름을 이용하여 물체를 움직이는 것이지요." 선애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던 렌스버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전자라는 것이 많은 물체가 이 것의 원동력이겠군. 그리고 그 물체 안에 있던 전자가 적은 곳으로 다 흘러가버리면 이게 멈추는 것이고, 그때는 새로운 걸로 갈아낀다는 건가?" '오오... 머리 되게 좋잖아?' 대단한 놈이다. 선애의 설명을 가지고 거기까지 추리하다니. "맞습니다." "그렇다면, 네 언니... 아니 유령의 존재는 어떻게 전자라는 것이 다 나가버린 원동력에서 다시 전자가 생기게 하는 거지?" "저도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말에 의하면 제가 살던 세계에 유령에게서 어떠한 에너지의 파동이 감지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뭐, 극히 소수의 기록이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그러한 파동이 뭔가 작용을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실 언니는 저를 만지기도 하고 물건을 움직이는 등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보통 유령은 그런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리아도 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다른 유령처럼 어떤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도 그녀를 보지 못하는데 말이다." "에에... 그러나 그 분도 뭔가 힘을 가지고 계신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언니는 이 곳에 와서 아리아씨 외에는 어떤 유령도 보지 못했거든요. 다른 유령은 언니에게 보일 정도의 능력도 없지만, 아리아씨는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선애의 말에 렌스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을 수도 있겠군. 그럼, 전기나 전자에 대해 네가 아는대로 모두 설명을 해봐라." 내 생각인데, 렌스버리 녀석이 시계에 극히 집착을 하는게 단순히 그게 신기해서라기 보다는 아리아씨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지금도 시계에 대한 설명 보다는 전기에 대한 설명을 더 요구하니 말이다. 아마 전기에 대해 요구하여 아리아씨가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펜을 만든다던가, 아리아씨의 모습을 본다던가 하는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기실 저 놈은 마법에 능하고 머리도 똑똑한데다 선애에게 선물한 마법 물품도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렌스버리 녀석이 뭔가에 호기심을 느끼면 가장 고생하는 건 선애나 나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렌스버리에게 시달리고 시달려서 선애가 더 이상 아는 게 없다고 몇번이나 맹세하고 나서야 땅에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렌스버리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대답하려고 하도 머리를 쥐어짜서 땅에 내려왔을때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선애도 머리가 띠잉 한지 양 손으로 양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 하지만, 렌스버리 녀석이 어디 그런거에 아랑곳 할 놈이던가? 땅에 내려온 렌스버리는 갑자기 허공에 손을 휘젓더니만 선애에게 뭔가를 휙 하고 던졌다. 얼결에 받아보니 왠 반지였다. 백금으로 만든 링이 매끄럽게 손가락을 한번 휘감고는 끝에 마치 장미꽃잎이 봉오리를 이룬 모양으로 투명하고 동그란 수정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제법 예쁜 디자인이라 누군가에게 청혼을 하면서 건네줘도 될 것 같았지만, 그걸 받은 선애나 본 나는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렌스버리 녀석이 설마 수고 했다고 대가로 이걸 줬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과연 렌스버리는 선애가 반지를 받은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나와 통신할 수 있는 마법 반지다. 혹시 물어볼 게 있으면 반지를 통해 연락 할테니 항상 끼고 있도록 해라. 뭐, 영상은 안 나오고 목소리만 전달되는 거니까 목욕 중이라 하더라도 즉시 응답하도록." 거기까지 말한 렌스버리 놈이 갑자기 선애를 머리부터 발끝가지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리아에 의하면 볼 것 없는 몸이니 나에게 보이기 창피할 거 아니냐?" 그 말에 나는 하마터면 이렇게 소리칠 뻔 했다. '아니, 내 동생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나, 정말 초인적인 인내로 그 말을 억누를 수 있었다. 뭐... 좀 솔직해 지자면 아리아씨가 워낙에 흠 없는 완벽한 미인이라 어느 누구도 감히 그녀와 견줄 수 없을 것 같지만서도... '그래도 내 동생도 매력적인 아가씨란 말이다아아~~!!' 라고... 나는 이번에도 속으로만 외쳤다. 어흑흑흑... 렌스버리 놈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혹시 또 다른 정보가 생각 난다면 연락 하도록 해라. 그 반지의 수정을 오른쪽으로 비틀면 됀다. 한번 해봐라." 그의 말에 선애가 수정을 잡고 오른쪽으로 힘을 주자 살짝 돌아며 수정에서 마치 전구가 켜지듯 빛이 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알고 말을 걸게 될 거다. 내가 너에게 연락할때도 수정에서 빛이 나올테니 그리 알고." "예." 선애가 대답하자 렌스버리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마. 아리아..." 마지막에 작은 목소리로 아리아를 부르자 내 옆에 있던 아리아씨가 냉큼 렌스버리 녀석에게 다가가 그의 팔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러자마자 마치 뿅~!! 하는 효과음이 들린 것처럼 렌스버리 놈이 아리아씨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헤... 저게 바로 순간이동이라는 것이겠지?] "어, 빛이 꺼졌다."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중얼 거리는데 선애가 수정 반지를 들어올리며 말한다. [그러게. 연락이 끊어진 모양이다.] "으아... #$%*&%$@ 할 놈. 정말 힘이 없으니 서럽다, 서러워. 그런데 이거 어째 클 거 같다." [검지에 넣어봐 검지에.] 내 말에 선애가 왼 손 검지에 반지를 끼자 마치 맞춘 것 처럼 따악 맞는 것이었다. "어라, 맞는데? 이거 설마 내 손가락 사이즈를 알고 준 건가?" [모르지.] 그렇게 선애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다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여러 드워프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처자아아~~" 바로 아까 진열관에서 렌스버리가 선애의 시계를 낼름 강탈해 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을 비운의 드워프 족장, 장로들이었다. 맨 앞에 있던 족장 드워프가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선애에게 속삭였다. "가셨는가?" 주어가 빠졌지만 이 자리에 그게 누구인지 모를 사람... 아니, 존재는 한 명도 없었다. "예. 공간이동으로 가신 거 보니 좀 멀리 가신 거 같아요." 선애의 말에 그들이 일제히 얼굴 표정을 풀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자아아아~~~!! 역시.. 가지고 가셨겠지?" "아하하... 뭐..." "어흐흐흐... 가지고 갈때 가더라도 하다못해 복제품이 완성된 뒤에나 가지고 가실 것이지..." "처자아아~~" 바로 아까 진열관에서 렌스버리가 선애의 시계를 낼름 강탈해 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을 비운의 드워프 족장, 장로들이었다. 맨 앞에 있던 족장 드워프가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선애에게 속삭였다. "가셨는가?" 주어가 빠졌지만 이 자리에 그게 누구인지 모를 사람... 아니, 존재는 한 명도 없었다. "예. 공간이동으로 가신 거 보니 좀 멀리 가신 거 같아요." 선애의 말에 그들이 일제히 얼굴 표정을 풀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자아아아~~~!! 역시.. 가지고 가셨겠지?" 목적어가 빠진 질문이었지만,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묻는 족장 드워프나 듣는 선애나 모두 알고 있는 거였다. 선애는 족장 드워프의 얼굴이 너무 절실해 보여 차마 대답하기 미안했는지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 뭐..." "어흐흐흐... 가지고 갈때 가더라도 하다못해 복제품이 완성된 뒤에나 가지고 가실 것이지..." "이럴 수는 없어어~~" "나는 우리 마을 녀석들에게 보여주지도 못했는데에~~" 땅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는 드워프들을 안쓰럽게 보던 나는 문득 그 자리에 이번에 새로 교류하게 되었던 옆 마을의 드워프 족장 케루빔도 있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선애야, 혹시... 옆 드워프 마을과 교류하기로 했던 거 취소 되는 거 아닐까? 시계를 같이 연구하는 걸 조건으로 교류하기로 한 거였잖아?] 내 말에 선애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맞아, 그랬었지?/" [어쩌지?] "/하, 하지만... 나 때문에 넘어간 것도 아니고, 드워프들도 막지 못하니까 넘겨준 거잖아./"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교류의 조건이 사라졌으니 이대로 계속 교류하자고 할 수도 없는 거잖아? 게다가... 그 렌스버리 녀석... 솔직히 따지자면 우리 일행 아니냐? 족장 드워프가 그걸 알았다간...] 내 말에 선애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일행의 입단속을 해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선애가 마악 몸을 돌리려는 찰나... "처자아, 지금 바쁜가아암~~?" 시선을 돌려보니, 정말 나이에 안 맞게 드워프 족장 자몬이 간절한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기 갑자기 급한 볼 일이 떠올라서요." 그러나 족장 드워프와의 대화 보다도 일행의 입단속이 우선이라 생각 한 선애가 난처한 얼굴로 대답하자 자몬이 다시 묻는다. "그렇게 급한감? 잠깐만 이야기 하면 되는데..." "저기... 저도 잠깐 다녀오면 되거든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안될까요?" "그럼 나도 같이 가면서 이야기 할까?" 드워프들에게 이야기가 새는 걸 막으려는 건데 같이 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냥 제가 금방 갔다오면 안될까요?" "갔다오는 시간에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자몬도 물러설 태세가 아니었기에 선애는 한숨을 내쉬며 한 발 물러섰다. 자몬이 저리 끈질기게 나오는데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드워프들과 안 좋은 관계로 만들 수 있는 일은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하는 것이 최선인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마음에 안 들어도 벨타이거 녀석이나 토냐씨, 로어가 입을 함부로 놀릴 사람들이 아니라 선애의 언질이 없다 하더라도 렌스버리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하지 않을 거였다. "그렇게 급하시다면... 먼저 족장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도록 할까요?" 선애의 항복에 자몬 족장이 씨익~ 하고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선애가 자신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 이용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어쩐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옆 마을의 족장 케루빔까지 동석한 것이었다. 물론, 선애는 이번에도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지 못했다. "이보게 처자아..." "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건지... 자몬이 말꼬리를 늘이며 선애를 부르자 나는 왠지 모르게 되게 불안해졌다. 이들은 심성이 순수한 만큼 원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무척이나 컸다. 순수한 욕심이라서 그런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리하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안 좋게 말하면 치사한 방법까지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뭐어, 인간들 중에도 그런 인간은 수두룩 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도 없긴 하지만, 우리가 그 목적에 부합되어 치사한 방법을 당하게 된다면 마냥 웃으면서 '대단한 열정이야~' 라고 말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자몬이 씨익 웃는다. "허허허, 그리 긴장할 건 없다네. 그냥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말이야." 단순히 물어볼 거라면 왜 곧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질질 끌겠는가. 자몬은 그렇게 말해 놓고서도 잠시간 선애의 눈치를 살피며 주저주저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처자아..." "예." "음... 저기 말일세... 그... 아까 그 분에게서 그걸 좀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예? 저어... 아까 그 드래곤님이 가지고 가신 시계 말이지요?" 정말 뜻밖의 말에 선애가 무척이나 놀란 표정으로 물어본다. 그러나 틀리게 이해한 건 아니었는지 자몬이 난처한 얼굴이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렌스버리 놈이 자기가 가지고 간 걸 순순히 내어줄까나? 더구나 아리아씨와 관련되어 있어 연구하느라고 불을 키고 있을텐데...' 나 만큼이나 그걸 잘 알고 있는 선애였으니 대답할 말은 뻔했다. "불가능 할 거 같은데요. 아까 그 분... 보아하니 한번 손에 들어온 물건을 다시 돌려주실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그게 말일세... 사실은 그 분이 그걸 보셨을때 감탄하시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거든. 단지... 여기 오신 김에 빈 손으로 가기 아쉬우셔서 기념품 삼아 가지고 가신 건데... 그러면 기념품이면 다른 거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하기야, 내 보기에도 렌스버리 녀석이 시계 안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원리를 연구하고 앉아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리아씨와 관련이 생겨 버렸다는 거다. 렌스버리 놈 성격 상 '다른 걸로 바꿔줄테니 돌려주세요~' 라고 말해봤자 둘 다 힘으로 빼앗고 말이 교환하고 자시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게 아리아씨와 관련이 생겨 버렸으니 더더욱 돌려줄 리 만무하다. "다른거요? 다른 거와 교환... 하실까요? 제가 보기에는 둘 다 가지실 것 같은데..." 선애의 말에 자몬이 화들짝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니, 아니... 물론... 돌려주신다면 좋지만... 저엉 돌려주기 싫으시다면... 그래, 우리가 빌리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뭐어, 지금 당장 빌려주기 싫으시다면 한 몇년 후에 빌려주셔도 좋네만." '허어... 참 처절하다.' 아무리 드워프라 해도 드래곤을 상대로 해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다. "에에... 저기... 그 분이 가지고 가신 제 시계를 대체할 만한 기념품이라는 게 있으신가요?" 선애 또한 자몬이 너무 안돼어 보였는지 렌스버리 놈이 안 돌려줄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묻는다. 그런데 자몬 족장의 대답이란 것이 너무나 뜻밖이었다. "저기 말일세... 그으... 처자의 신기한 물품이 또 있지 않았는가? 그거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예? 제... 물품이요?" 선애가 너무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자몬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자네 물품 말일세. 그... 전에 노래 가락을 들려줬던..." "핸... 드폰 말인가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정말 뜻밖의 말에 선애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 그런..." "부탁하이 처자. 어떻게 좀 안되겠나?" 그러나 그건 정말 무리한 요구였다. 선애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증명하는 단 두개의 물품 중 하나였고, 나머지 하나였던 시계를 드워프들에게 넘긴 터라 선애가 가지고 있는 건 이제 핸드폰 뿐이었는데 그걸 넘기라니 말이다. 게다가 그 핸드폰은 선애가 엄청 애지중지 하는 것이었다. 뭐어, 선애가 이 세계로 넘어올 즈음에는 그 핸드폰도 신형 대열에서 밀려나 있었기는 하지만, 선애가 그걸 살때는 완전 최신형이라 엄청 비싸게 주고 샀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드워프들의 부탁이라도 선애가 쉽게 들어주기는 어려웠다. "저, 저기..." 그리하여 어렵지만 그래도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찰나, 선애가 거절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족장 자몬이 선애가 채 뭐라 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처 입을 열면서 선애의 말을 막아버렸다. "잘 생각하게 처자. 그게 없으면 이 놈네 마을의 거래도 끝나는 거 아닌가?" "그럼, 그럼." 옆에 같이 있던 케루빔이 얼른 자몬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내 공짜로 자네 핸... 뭐시기를 넘기라고는 안 하네. 이 놈도 그럴 거야, 안 그래?" "물론이지. 대가는 충분하게 치를 거야. 원한다면 그쪽 형편에 맞게 거래 규모를 더 키워줄 수도 있어." 그들의 말에 선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었고, 아무리 그래도 핸드폰을 넘겨주기는 싫었는지 선애가 낯빛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하지만, 이번에도 먼저 자몬의 말이 선애의 말을 막았다. "그런데 처자... 내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그런데, 자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순진 무구한(?) 얼굴에는 애원의 기색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눈초리가 슬며시 가늘어진 것이 꼭 '나는 네가 지난 여름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예?" 그에 살짝 긴장한 선애. "아까 오신 분이... 이상하게도 처자를 잘 알고 계시는 듯 말하더라고." "예?" "아니, 아까 그 시계가 처자 거라고 하니까 아시는 눈치시던데..." '헉... 이런...' 자몬의 말에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고, 선애 또한 나 못지 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으이그... 그 비만 도마뱀이 도움은 못 줄 망정...] 이제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럴때를 두고 하는 말이 '빼도 박도 못한다.' 라는 거겠지? "시계를... 그래도 안 돌려준다고 하면 어쩌지요?" 선애가 포기했다는 듯 약간 풀 죽은 음성으로 묻자 자몬과 케루빔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아하하하... 그렇게 크게 부담 가질 필요 없네. 돌려 주지 않으신다면... 그냥 몇년 동안만 빌려주신다고 해도 좋아." "그냥 아예 둘다 가지고 가 버리시면..." 선애의 말에 자몬의 눈이 다시 게슴츠레 해졌다. "그거야 처자가 알아서 잘 해야지. 핸드... 뭐시기까지 넘겼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으면 그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는가? 이 놈네 마을하고의 거래도 파탄 나고 거래가 확장되는 일도 없으니 말일세." 그러니까 지금 자몬 족장은 시계를 다시 가지고 오지 않으면 케루빔네 마을과의 거래는 물론이거니와 우리에게 유리한 거래 확장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평소 드워프들의 열정에 대해서는 찬탄을 금할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 순수한 열정이 오히려 저주처럼 느껴졌다.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우린 처자만 믿네. 어여 어여 연락 해보게나." "우리는 저~~ 쪽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선애가 결국은 승락하자 자몬과 케루빔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드래곤이 가지고 간 시계를 다시 되찾기를 열망하지만, 드래곤과는 맞대면 하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모양이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절망스레 바라보고 있던 선애가 나를 돌아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우선 여기로 오라고 그래. 내가 아리아씨를 붙잡고 이야기를 해볼께.] 렌스버리 놈은 몰라도 아리아씨라면 공략이 가능한 상대였으니 그쪽에다 희망을 거는 수 밖에 없었다. "/알겠어. 하지만... 우선은 핸드폰부터 가지고 와야겠군./" 핸드폰을 가지고 오는 동안 선애와 나는 렌스버리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 것인가 심각하게 논의 했었다. 최악은 둘 다 자기가 싸악 가지고 가버리는 것인데 렌스버리의 성격 상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을거라는 것이 선애와 나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단지, 아직은 렌스버리가 아리아씨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니까 드워프들이 원하는 대로 몇년 정도 빌려주는 식으로 돌려주는게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걸 좀 더 높은 가능성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그리고 좀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하여 선애가 렌스버리에게 말을 거는동안 내가 아리아씨에게 애원을 해본다는 것이 선애와 내가 심사숙고하여 찾아낸 방법 - 생각해보면 그것 뿐이 방법이 없었지만... - 이었다. 그리하여 그 즉시 아리아씨가 렌스버리 놈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도록 우리가 종이와 펜까지 준비하는 치밀성까지 보였다. 그런데... "좋아, 넘겨주지." 정말 어이 없게도 이러한 모든 것이 무색하리만큼 렌스버리 놈이 쌈빡하게 저리 선언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핸드폰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을 다 들은 뒤에 말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여기 있는 놈이 따른 놈과 바뀌었는 줄 알았다. 드워프들이 원하는 대로 잠깐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아예 돌려주다니 말이다. 물론, 대신 핸드폰을 넘겨주기는 하지만, 평소 보아왔던 렌스버리 놈의 입에서 내 저리 순순히 허락하는 말을 들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놈이 반지를 던져주고 사라진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부른 거라서 처음 나타났을때 렌스버리 놈의 표정은 상당히 살벌했다. '별거 아니어봐라.' 라고 잔뜩 벼르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저렇게 순순히 허락을 하니까, 처음에는 딴 놈이 온 줄 알았다가 그 다음에는 '저 놈이 뭔 꿍꿍이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건 선애도 마찬가지인듯 렌스버리가 휘익~! 하고 던져준 시계를 얼결에 받은 선애는 뭐라 말을 못하고 머뭇 머뭇 대더니 한참 후에 간신히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저어... 정말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까?" 그에 렌스버리 녀석의 눈썹이 꿈틀 한다. 저 너그러움이라고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행태를 보아하니 역시 본인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렌스버리의 반응에 선애가 움찔 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다른 과한 요구를 듣는 것 보다는 지금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을 듯 싶었는지 없는 용기를 다 짜내어 말을 이었다. "저어... 혹시 달리 원하시는 건..." 그러자 렌스버리 놈이 선애를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거였다. 물론, 그 놈은 그냥 빤~ 히 바라보는 거 - 라고 나중에 아리아씨가 설명해 주기는 했지만... - 였지만,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마치 유리알 같은 금빛 눈동자는 그냥 볼때는 아름답다고 감탄하게 만들었지만 그것과 마주치면 마치 한 겨울에 빨가벗고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바로 드래곤이라는 종족 특유의 박력인지 위압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친 선애가 견디질 못하고 움츠러들자 나는 당연히 놀라서 선애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한참동안이나 선애를 째려본 놈이 픽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행동에 아리아씨가 당황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나라도 은혜는 안다." [렌은 그렇게 나쁜 드래곤이 아니에요.] '허, 네 놈이?' 내가 기가막혀 한다는 걸 알았는지 렌스버리가 입을 열었다. "네 고향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 아닌가? 그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가 있는지 나도 짐작이 가. 그런 걸 욕심을 부려 덥썩 두개 다 받을 마음은 없다. 원래 저 시계라는 것도 드워프 녀석들을 반쯤 놀려주자는 생각에 집어 온 거였으니까. 원래 네 것인지도 몰랐고 더더구나 리아에게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만." '얘, 얘가 왜 이럴까?' 선애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당황 + 의아함 + 불안함의 표정으로 렌스버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렌스버리 놈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마디 더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난 다시 돌아가도록 하마. 필요한 거 있기 전에는 당분간 안 올테니 그 동안 마음껏 놀도록 하고. 그리고..."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놈이 잠시 고개를 갸웃 하다가 키득 하고 웃더니만 말을 이었다. "혹시나 부탁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야기 해라. 나도 내가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이 있을줄은 몰랐다만, 크게 귀찮은 일 아니면 하나 정도는 들어주도록 하마." 렌스버리가 그렇게 이야기 하자 옆에 있던 아리아씨가 완전 감동 먹었다는 듯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렌이 그 동안 당신들과 다니다보니 정이 들었나봐요. 어쩜~~] '이봐요, 왜 당신이 감동하는 건데?' 그리고서 렌스버리 놈은 선애의 핸드폰을 들고 다시 아리아씨와 사라져버렸다. 선애와 나는 그들이 사라진 자리만 한참 동안 멍~ 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놈이 죽을 때가 다 됐나봐.] "/언니, 저 드래곤 곧 죽나봐./" [... 역시 넌 내 동생이다.] "/에엣, 언니도 그렇게 생각 했어?/" [역시 그렇지?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니 나는 처음에는 딴 녀석인 줄 알고 놀랐다니까.] "/나도, 나도. 그래서 혹시나 다른 뭔가를 더 요구하는 건 아닌지 되게 걱정했다니까./" [이제는 드워프들에게 이 일로 멋진 보상을 받는 일만 남았구만.] 내 말에 선애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지면서 음흉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우후후후후... 맞아, 그게 기다리고 있었지./" 그 모습에 갑자기 더럭 겁이 난 나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너무 과한 걸 요구하면 안된다. 모든 건 적당히, 적당히. 오케이?] 그러나 울 꼬맹이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렌스버리가 넘긴 시계를 손에 꼬옥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치마가 펄럭 거리지 않게 잘 잡아 들어 올린 뒤 두다다다~~ 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야, 어디가?] 선애가 두다다 달려간 곳은 바로 벨타이거와 로어가 있는 숙소였다. 그 둘은 여전히 벨저 리클레어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 하더라도 너무 갑작스러웠으니 의논하고 의견을 조율할 것이 많을 터였다. "무, 무슨 일이야?" 갑작스럽게 묻는 벨타이거에게 선애는 씨익 웃어 보였다. "좋은 소식이요. 드워프들이 우리와 거래를 좀 더 늘릴 의향이 있대요." "뭐? 진짜?" "그게 정말입니까?" "그런...!!" 벨타이거와 로어는 물론이거니와 같이 있던 벨저 리클레어씨도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드워프들과의 거래를 성공 시키는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도 선애의 시계 때문에 시작은 그나마 무난했지만, 거래량과 종류를 늘리는데 드워프들이 얼마나 까탈스럽게 굴었던가. "지금 거래 내용을 이야기 하러 갈 건데..." 선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타이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가자, 당장 가자!" 그렇게 힘차게 일어나서 드워프 족장들을 찾아간 우리는 자몬 족장과 케루빔 족장과의 열띤 논쟁 끝에 자몬 족장 마을에서는 현재 이루어진 거래 말고도 모든 시계 종류와 뮤직 박스를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케루빔 족장 마을에서도 유리 제품들과 옥으로 만든 제품들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장식품과 가구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조건이었지만 말이다. 거기에 대가로 자몬 족장네에 공급하는 만큼의 서대륙의 술과 옥을 공급하기로 했었지만, 그건 우리 입장에서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선애야, 역시 넌 대단해." 족장들과의 거래를 끝마치고 나온 벨타이거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지 싱글벙글 이었다. 벨타이거와 로어에게는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고 그냥 렌스버리만 살짝 언급했다. 그랬더니 로어는 단박에 렌스버리 놈이 드워프들에게 피해를 끼쳤는데 그걸 선애가 보상해 줬다는 걸 눈치 챘다. 하기야, 로어가 그 동안 렌스버리와 다니면서 당한게 얼마인데 척 하면 착일 거다. 단지 벨타이거가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다. 렌스버리는 알파두르 항구 도시에 도착했을 당시 잠깐 벨타이거네 집에 머물기는 했었지만, 그때 벨타이거는 상회에 마구잡이식으로 일어난 여러 일때문에 정신이 없어 렌스버리가 아벤티노 대륙을 둘러본다고 사라질때까지 제대로 된 대화도 못해봤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일행 또한 렌스버리의 엄명 때문에 그의 정체를 벨타이거에게 입도 뻥끗 못해 벨타이거는 렌스버리가 단지 여행 도중에 만난 은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가 상회 일로 정신 없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렌스버리를 상회로 끌어들이려 애쓰는 엄청난 짓을 저질렀을 거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렌스버리를 언급하자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선애나 로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피했기에 벨타이거는 약간 서운해 하면서도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가 드워프들과의 거래 확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자 벨저 리클레어씨가 계약서를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그쪽 상회나 우리쪽이나 여기서는 의논만 하고 '본격적인 계약은 돌아가서~!!'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드워프와의 거래를 늘리는 걸 보고 '지금 꽈악 잡아놔야겠다.'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뭐, 우리쪽도 그들과의 거래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기에 벨타이거는 그가 내미는 계약서에 자신의 인장을 콰악~ 찍어줬다. 물론, 세부사항을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하느라 논의가 밤새도록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양쪽 상회 회장들은 피곤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만족한 얼굴로 악수를 하고는 각자의 계약서를 가진 채 각각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잘 됐네. 이 드워프 마을은 너에게 행운의 장소 같다. 여기만 오면 모든 일이 잘 풀리잖아.] 피곤한 얼굴로 느릿느릿 잠 잘 준비를 하는 선애를 도우며 내가 기분 좋게 중얼거리자 선애가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어째 완전히 안심이 안돼. 너무 좋은 일만 일어나니까 혹시 이거 뒤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거든./" [아, 하긴... 서대륙에 갔다올때는 계속 그런 식이었지. 좋은 일 있다가 나쁜 일 생기고, 그게 지나가면 다시 좋은 일이 생기고...] "/응응, 아아... 다음에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그게 얼마든지 감당할 정도였으면 좋겠어.../" 선애는 침낭 속으로 몸을 밀어 넣은 뒤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러나, 신께서는 사람에게 계속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드워프의 마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쉬워하는 드워프들과 헤어져 길을 내려온 일행이 돌아가기 전 다시 인사차 헤스딩스 남작네 저택에 도착했을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새파랗게 질린 헤스딩스 남작과 그의 딸네미인 클라리사였다. "크로스웰 남작, 내 자네에게 사죄해야 할 일이 있네." "예?" 예전부터 두 집안의 친분이 돈독했고 벨타이거는 현 헤스딩스 남작 아들네미와 절친한 친구였던 터라 벨타이거는 헤스딩스 남작을 아버지처럼 대했고, 헤스딩스 남작 또한 벨타이거를 아들처럼 대하여 보통때는 이름을 부르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름이 아닌 작위명을 부르니 벨타이거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 벨타이거가 그를 진정시키고 연유를 물으려는 찰나였다. "호오, 저 자입니까?" 남작 저택 안쪽에서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나오며 밑도끝도 없는 질문을 던진 자는 처음보는 자였다. 그러나 남작과 클라리사는 그를 잘 알고 있는 듯, 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움찔 하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남작과 클라리사를 아랑곳 하지 않고 성큼 벨타이거 앞에 다가선 그는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벨타이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살펴보더니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크로스웰 남작. 진작부터 뵙고 싶었는데... 헬게르트 L 브라우닝 이라 합니다." '이 자가 그 헬게르트란 말이야?' 대충 27, 8세쯤으로 보이는 그는 당당한 태도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큰 키가 더 커보였다. 한... 190 정도? 떠억 벌어진 어깨와 딴딴해 보이는 몸매를 보아하니 기사나 전사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붉으스름한 갈색 머리는 뒤로 넘겨 목덜미에서 리본으로 묶은 단정한 모양새라던지 이지적으로 보이는 새파란 파란색 눈을 보자면 책상에 앉아 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 같기도 했다. 그는 그랜트 루빈스타인 녀석과 사촌간이자 루빈스타인 후작가 작위는 물론이거니와 상회의 회장 자리를 놓고 다투는 라이벌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는 자였다. 그들의 아버지대를 이어 2대째 라이벌인 사이 이기도 하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 놈이 클라리사 헤스딩스에게 청혼을 했다는 거다. 헤스딩스 남작은 그걸 무척이나 부담스러워 하고. [이 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우리 일행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으로 인하여 무지 당혹스러워 하고 있을때, 그가 직접 인사를 한 벨타이거는 노련하게 금방 당혹스러움을 지우고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주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브라우닝 경. 저를 알고계시다니 좀 뜻밖이군요." 제 34화 헤스딩스 남작은 헬게르트와 벨타이거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이나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는 헬게르트와 벨타이거가 대충 인사를 나누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헬게르트와 같이 동행하고 있던 자신의 큰아들을 불렀다. "얘야, 브라우닝 경과 어디를 가는 중이었니?" 헬게르트는 백작의 후계자일 뿐 아직 작위가 없었기 때문에 기사 작위의 명칭인 '경'자를 붙이는 것이었다. 후작이나 공작의 후계자라면 '자작'이라는 작위가 주어졌겠지만 말이다. 남작의 큰 아들은 아버지의 불안을 금새 알아챘던 것인지 얼른 헬게르트에게 입을 열었다. "경, 크로스웰 남작은 지금 먼 길을 왔기 때문에 피곤할 것입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지금은 제가 약속드린대로 저희 승마로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헤스딩스 남작이 얼른 말을 건넨다. "그러도록 하시지요. 마침 제가 얼마전에 아주 멋진 말을 한 마리 구했답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제 아들에게 보여달라 하시지요." 그 부자가 그렇게 나오자 헬게르트 녀석은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가 꼬옥 '어차피 나중에는 자신이 승리할테니 지금은 맘대로 해봐라.' 하는 것만 같았다. [에궁, 저 녀석은 좀 건방진 거 같아. 하기야, 대단하신 루빈스타인 후작가와 가장 가까운 친척인데다 라이벌이라고 일컬어지는 집안이니 대단하기야 하겠지.] 더 열받는 건 저 녀석이 그렇게 거만하고 건방지게 구는 태도가 '그럴만 하다.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느껴지는 점이었다. 확실히 헬게르트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백은 녀석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랜트 녀석과 비교하자니, 그랜트 녀석은 차분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라면 저 녀석은 열정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다. 전에 그랜트 녀석만 봤을때는 헬게르트에 대해 들었어도 그랜트 만큼 후작가와 대 상회를 이어받을 사람은 없을거라고 여겨졌었는데, 오늘 헬게르트를 보자니 둘 중 누가 뛰어나다고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헤스딩스 남작 큰 아들과 멀어져 가는 헬게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품평을 하는데, 헤스딩스 남작의 다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벨, 피곤하니? 그게 아니라면 나와 이야기 좀 하자." 권유하는 어조였지만, 표정과 태도를 보아하니 거절하더라도 끌고갈 태세다. 그에 벨타이거가 어리둥절한 표정이면서도 일행에게 올라가 쉬라는 이야기를 남기고는 남작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같이 있던 클라리사가 선애의 팔을 붙잡는다. "언니, 나 좀 봐요." 그 둘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냥 단순히 헬게르트 녀석이 쳐들어 왔다는 것 말고도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선애 또한 일행들에게 잠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클라리사에게 재촉을 당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무지 급하게 선애를 데리고 온 클라리사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지 선애에게 자리를 권할 생각은 못하고 초조한 얼굴로 손가락만 꼼지락대며 자신의 방을 서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선애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가 알아서 방 한쪽에 마련된 우아한 탁자 앞 안락 의자에 앉아 클라리사를 빤~ 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돌아다니던 클라리사는 문득 자신이 자리도 권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차~ 하는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벌써 앉아 있는 선애를 발견하고는 미안한 웃음을 보였다. "아앗, 언니... 미안해요. 에... 저기... 차라도 마실래요?" "나는 별 생각 없으니까 괜찮아. 단지 네가 진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마셔도 좋고." 선애의 말에 클라리사가 머쓱한 얼굴로 선애 맞은편에 앉았다. "저도 뭐... 아까 마셨으니..." 그렇게 말해놓고는 이제는 다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며 안절부절 못하더니만 갑자기 불쑥 입을 열었다. "언니, 저 어떻게 하죠?" "왜?" "제가요... 너무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뭔데?" "그게..." 거기서 다시 주저주저 하던 클라리사는 눈을 질끈 감고는 토해 내듯 입을 열었다. "저기... 브라우닝 경에게 벨 오빠와 약혼 했다고 말해버렸어요." "뭣이라?" 헬게르트 녀석이 벨타이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 하다 했더니만, 이런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미안해요오~~ 다급해서 그만 나도 모르게... 왜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대답을 하라는데 뭐라고 변명할 거리가 없어서..." [이런, 이런... 일났네.] 클라리사가 받은 청혼은, 사실 그녀에게는 안됐다는 감정이 있었어도 선애와 나는 별로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뭔가 도움이 되어주고는 싶었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있는게 아니었던데다 우리 상회의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던 터라 머리 한쪽 구석으로 미뤄놓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클라리사가 그렇게 말해버렸으니, 헬게르트 녀석 헤스딩스 남작가를 포기 할 생각이 없다면 크로스웰 남작가와 타이거 상회를 장애물로 여길게 뻔했다.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는지 선애가 이마를 집고 있자 클라리사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연신 선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연다. "언니... 정말 미안해요." "에휴... 이제와서 거짓말이라고 하기는... 그렇겠지?" "아마도요. 자신을 기만했냐고 화를 내겠지요. 그럼 그 화를 풀려면 꼼짝없이..." 선애의 질문에 클라리사가 풀 죽은 어조로 어물어물 대답한다. 그녀가 채 말은 안 했지만, 그 뒤에 나올 말이 '클라리사가 브라우닝 백작가로 시집 가고 헤스딩스 남작가는 브라우닝 밑으로 꿀꺽~!! 삼켜지는 것' 이라는 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클라리사의 말에 선애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더니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답이 안 나올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는 게 최고야. 내 보좌관과 그 누나는 믿을만한 사람들이고 현명한 사람들이니까 같이 의논을 해보자고." 그렇게 말하면서 선애가 클라리사를 데리고 일행에게 배정된 숙소를 가려는데, 그 중간에 아까 헤스딩스 남작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던 벨타이거와 마주쳤다. "여, 선애. 마침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듯 반색하던 벨타이거는 선애 옆에 있던 클라리사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리사에게 이야기 들었어?" "아아... 그럼 그걸 의논하려고?" "응응, 아무래도 별 뾰족한 수가 생각이 안 나서 선애와 의논하려고 했지. 뭐 좋은 수가 있지 않을까 하고." "저도 마찬가지에요. 별로 좋은 생각이 없어서 토냐씨하고 로어하고도 같이 이야기 하려고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좀 난색을 표한다. "에... 그래도 이건 나나 선애의 이야기가 아니라 헤스딩스 남작가 이야기니 좀..." "이미 회장님도 말려 들었잖아요. 게다가 토냐씨나 로어나 현명하니까 뭔가 좋은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게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머리를 모으는게 때로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게 한다고요." 선애의 단호한 말에 벨타이거가 클라리사를 돌아보았다. "음... 리사, 괜찮겠어?" "전 괜찮아요. 괜히 벨 오빠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되어서... 어떻게든 해결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걸요." "토냐씨나 로어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지금 토냐씨를 마법사로써가 아니라 우리 상회 이사로 스카웃 하면 어떨까... 생각중인걸요?" 클라리사의 허락과 선애의 강력 추천이 있자 벨타이거는 어깨를 으쓱 하고 결국 찬성했다. "좋아, 그럼 나는 남작님 서재에 있을테니까 그쪽으로 와줘. 미리 남작님께 말씀 드리고 양해를 구해야겠어." 그리하여, 남작의 큰 아들이 헬게르트 녀석을 데리고 바깥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일행들은 남작의 서재에 모여들었다. 남작 또한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같이 의논 하는 걸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또한 클라리사처럼 평소 평민을 하찮게 보는 사람이 아닌데다가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뭘 해도 상관이 없었던 듯 했다. 그리하여 얼결에 선애에게 끌려온 토냐와 로어는 남작가와 벨타이거에게 닥친 이야기를 쭈욱~ 듣더니만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방법은 에스테반 공작가 뿐이야." "저도 동감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도 나머지 사람들의 인상은 변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에스테반 공작가에서 아무래도 헤스딩스 남작가를 냉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측근이 아니라 하지만 '드워프와 가깝다.'라는 매력적인 조건을 가진 남작가였으니 달려가서 많은 뇌물과 함께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모른다 생각했겠지만, 헤스딩스 남작이 침울하게 냉대를 받는 듯 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그 생각을 싸악 지워버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왜 이렇게 된 건지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지만, 뭐라 경고를 하거나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터치 없이 가만히 나두기만 할 뿐이었으니 헤스딩스 남작으로써는 더욱 더 답답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이유라도 알았으면 그걸 어떻게라도 해결해볼 생각을 할텐데, 이건 아예 이유조차 모르니 말이다. 그렇다고 아직 에스테반 공작가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 다른 가문을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에스테반 공작가에 매달리는게 나아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잖아요." 토냐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지만, 헤스딩스 남작가는 길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네. 하지만 말일세... 사실... 내 창피해서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얼마 전에 전 에스테반 공작님이 돌아가시고 그 아드님께서 새로이 공작 작위를 받으신 것을 아는가? 그때... 우리 남작가는 초대를 받지도 못했네." 대단한 가문서 새로 작위를 받을때 그 축하 연회를 겸하면서 주변에 새로운 귀족이 등극했음을 알림과 동시에 가신들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는다. 그럴때는 거의 이름뿐인 가신이라고 해도 초대를 받아서 축하 선물을 잔뜩 싸들고 가 충성의 맹세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무리 평소 무관심, 무반응 했던 상대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제외를 당했으니... "그건 곤란한데..." 토냐가 낙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남작의 얼굴이 엄청나게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때, 서재의 문에 노크 소리가 나더니만 남작가 저택의 집사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남작님." "무슨 일인가?" "선애님을 찾는 사람이 왔습니다. 선애님께서 시키신 일이라고 하던데요?" 의아한 표정의 선애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더니 아주 평범해가지고 한번 지나가면 기억에도 안 남을 청년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애님?"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존이라고 합니다. 심부름을 왔지요." 그러면서 아주 두툼한 종이 봉투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선애와 나는 시선을 마주치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 마을을 향해 출발하기 직전 정보 길드에 부탁한 정보가 도착한 것이었다. 혹시라도 급할지 몰라서 선애의 행로를 가르쳐주며 다 모으는 즉시 찾아서 가져다 달라고 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 수고했어요." [야, 야. 이럴 땐 팁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아차 싶었는지 선애가 얼른 주머니를 뒤져서 은화 한 닢을 꺼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한번쯤은 예의상 거절해보는 건 이 세상에서는 없는지 존이라는 남자는 은화를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지며 싱글벙글 웃는 것이었다. 그 상태로 마치 누군가에게 은화를 뺏기기라도 할 양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집사의 안내를 받을 것도 없이 자기가 알아서 휭 하니 저택을 나가버렸다. [거 참, 어지간히도 급한가보네.] 사라지는 그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반응이 없어 돌아보니 선애가 사라져 있었다. [어어, 얘 어디 갔어?] 그래 휘휘 둘러보니 벌써 윗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몇 개나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급했던 건 그 청년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애는 일행들이 모여있는 남작의 서재로 가는 대신 우선은 자신에게 배당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꼬옥 걸어 잠그고 종이 봉투를 폈다. 그 곳에는 현재 루빈스타인 남작가 상황, 벨타이거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숙부와 핸들리 녀석 주변에 대한 상황,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라리사네에 도움이 될까 해서 부탁해 놓은 에스테반 공작에 대한 정보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아주 친절한, 척 플래밍의 안부 편지(?)가 들어 있었지만 그건 제껴두고 에스테반 공작에 대한 정보만 꺼내 들었다. 몇달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현 에스테반 공작인 덴티는 올해 35살인 한창때의 젊은이었다. 20대 초반에 결혼하여 벌써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그는 아이들에게는 제법 자상한 아버지라고 한다. 특히나 곧 있으면 5살이 될 딸내미를 무지무지 귀여워 한다고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이 공작이 작위를 받기 전 그가 후계자 시절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배 다른 동생과 치열한 자리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배다른 동생의 어머니가 바로 에스테반 공작가의 가장... 은 아니지만, 가장 다음으로 가까운 가신 집안인 백작가 출신인데, 이 백작가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 백작가는 지금 에스테반 공작의 그늘에서 싹뚝 잘려서 산산조각이 나 있지만...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하필이면 그 백작가가 오랜 기간동안 헤스딩스 남작가를 통해 드워프와 거래를 해온 거였다. 같은 주군을 모시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상인인 백작이 이런 좋은 껀수를 놓칠리가 없었을테고, 헤스딩스 남작쪽으로도 뭔가 이득이 있었을테니 오랜 기간동안 가까이 지냈던 것이겠지만, 그게 이제와서 악재로 작용한 것 같다. 떠올리기만 하면 이를 득득 가는 그 집안과 오랫동안 왕래를 해왔다니 공작이 보기에 헤스딩스 남작가가 안 좋게 보였겠지. "맙소사... 그 백작가와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지 벌써 10년은 된 것 같은데. 처음에야 거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잘 대해줬지만, 거래가 완전히 굳은 후, 그리고 더 이상 커질 것 같지 않자 우리 가문은 무시하고 자기들이 알아서 드워프에게 갔거든. 나도 뭐라 할 입장은 아니라 그냥 놔두고 있었지만..." 선애의 이야기를 다 들은 남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알아온 바에 의하면 그 백작가 지금 망했다고 하는데요, 그럼 거래도 끊겼을 것 아닌가요?" "아아... 그, 그게... 이제는 내가 드워프와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고 그건 큰 아들이 다 전담해서 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드워프와의 거래는 다른 상회로 넘어갔으면 넘어갔지 중단되지는 않았을 거네. 자세한건 큰 애가 와봐야 알겠지만..." 과연, 나중에 온 큰 아들은 백작 가문이 완전히 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공작가의 냉대와 연결시키지 못했던 건 드워프와의 거래는 몇년 전에 백작가에서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긴 상태였고, 백작가와의 연락도 오래전에 끊겨 현 백작의 얼굴이나 어렴풋이 알 정도로 교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설마 예전의 인연 가지고 뭐라고 할 줄 알았겠는가? "하기야... 그 백작가와 가까웠던 가문들은 모두 같이 작위 반납하고 쫓겨 나던가 작위가 강등되는 등의 조치를 받았다고 하네요. 남작가가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았던 건 인연이 오래 전에 끊겨서 그랬던 것 아닐까요?" 선애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예전에 친했던 걸로 뭐라 하기는 뭣하고, 그렇다고 미운 감정이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으니 냉대한다는 거네?" 토냐의 말이 가장 정답인 듯 하다. "어쩌지? 이제라도 가서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이야기라도 해볼까?" 무지무지 울상인 표정으로 남작이 말하자 그 동안 잠자코 있던 로어가 불쑥 입을 연다. "혹시, 공작님이 좋아하시는 건 없나요? 애원하더라도 그쪽을 공략하면서 애원하면 그나마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거기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공작님은... 검과 검술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검술이 뛰어난 자라면 한 번 겨루어 보길 원하고... 아, 명검을 수집한다고 해요." "그리고요?" "음... 자식을 무척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라고 하더군요. 특히 올 해로 4살인 딸을 무척이나 귀여워 한다고 해요. 부부간 금슬도 좋고." 선애의 말에 토냐가 씨익 웃으며 나선다. "이거 이거,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요?" "이거 이거,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요?" 그러면서 토냐가 자신있게 내 놓은 방법을 들으면서 나는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기가막히기도 했다. '그걸로 돼?' 이런 심정은 나 뿐만이 아니었던 듯,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대표로 남작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것 가지고 되겠는가?" 그러자 토냐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 되면 되도록 해야죠." 그 말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게 뭐야?' 라는 표정으로 실망스러움을 내비친다. 하지만, 단 한사람 로어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닙니다, 남작님. 제 누나라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이럴때는 가장 단순하고 막무가내인 방법이 가장 효과가 좋답니다. 만약 뾰족한 수가 없다면 밑지는 셈 치고 한번 해보시지요?" 그도 그럴것이, 토냐가 내놓은 방법이란 '명검 하나 마련해 공작을 찾아가 받치면서 애원하자!' 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는 이유 중 가장 큰게 남작이 공작에게 미운 털이 박혀 공작의 비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데 명검 하나 가지고 찾아가서 애원한다면 그 미운털이 쏘옥 빠지겠는가? 그러나 토냐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녀는 방 안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어려서 수도에 있는 국립 학교에 입학하여 10여년 동안 다녔답니다. 그 학교에는 저 같은 집안이 넉넉한 평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귀족이었어요. 그런 곳에서 저 같은 평민들은 귀족 출신 애들의 행동 패턴에 대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거든요. 뭐, 그런 사회에서 떠난 지 좀 되었지만, 그래도 지금도 그런 귀족들에게 웬만큼 잘 대처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제가 드린 제안은 아무 생각 없이 드린게 아니니까 믿으셔도 좋을거예요." 그녀의 말에 방 안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럴것이, 이 곳에서 중앙 귀족들 눈치를 살피며 생활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남작이야 야심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주변에 자신과 비슷한 위치의 귀족들과 교류를 하거나 자신을 찾아온 이들만 대할 뿐, 자기가 직접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손바닥 비비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작가의 가신이라 해도 변두리에 있었으니 일년에 공작 생일에나 한번 방문이나 할까? 벨타이거야 남작 집안이라고 해도 자신의 입장이 위태위태 했으니 집안 싸움에 바쁜 주제에 한가히 높으신 분들과 풍류를 즐기러 돌아다녔을리 만무하다. 몇년 전에 갑자기 이 세상에 뚝 떨어진 선애야 말할 것도 없고, 남작의 큰 아들은 이제야 좀 자신의 가문을 부흥시켜 볼까 하는 중이니 앞으로라면 모를까 아직은 별 경험이 없다. 로어 또한 행정 기관에 다니면서 여러 귀족들을 보기야 했겠지만, 평민인데다 기관장도 아닌 주제에 직접 상대했을리가 없다. 그러나 토냐라면, 비록 작위를 가진 본 귀족이 아니라 그 자녀들이라고는 해도 10여년간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직접 맞부딪힌 경험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런 곳에 있으면서 들은 풍월또한 많을 것이 아닌가. 토냐의 말에 방 안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 건 그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들어 먹힐 확률이 지극히 낮다고 보는 의견이었지만, 잠시 후 남작의 입에서는 토냐의 말 대로 해보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다른 뾰족한 수도 없으니 호프만 마법사의 말 대로 한번 해보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뭔가를 하는게 좋겠지요." 벨타이거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의 큰 아들도 거들었다. "그렇다면 드워프 마을에 연락을 해두겠습니다. 명검 하면 역시 드워프들이 만든 검이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남작의 큰 아들 말에 방 안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는 분위기였던 터라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쏠려버렸다. 덕분에 그 말을 한 로어의 얼굴에 살짝 당혹한 기색이 어리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지 단호한 시선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맞받았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드워프들이 만든 검을 따라갈 만한 대단한 검이 어디 있다고?" 자신의 말이 부정당해서 그런지 남작 큰아들의 어조에는 당혹감 속에 은은한 분노의 기색이 섞여 있었다. "물론, 제품의 품질 상 드워프들이 만든게 최고라는 건 인정합니다. 단지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이번에 남작님께서 구하셔야 할 명검은 품질이 뛰어난 새 검이 아니라 명성을 가진 검이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물론, 품질도 뛰어나야 하겠지만, 품질이 다소 떨어진다 하더라도 오래 되었으면서도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사용한 검이라야 합니다. 이왕이면, 영웅의 검이면 더더욱 좋겠지요." 로어의 말에 남작이 알아들었다는 듯 '아하~' 하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네. 하기야, 드워프들이 만든 검은 우리 가문에서 공작가에 받친 것만 해도 벌써 두자루가 있지. 그러니 여기서 드워프들이 만든 검을 또 받는다면 그저 희소성만 낮추는 것이겠군." 보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대단한 원석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오래전에 만들어져 이미 그 이름을 날린 보석 제품과 이제 갓 만들어진 보석 제품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으리라. 현대 시대에 와서 비슷한 값어치의 원석으로 비슷한 수준의 제품을 만들었다 해도 예전의 그 유명한 프랑스의 마리 앙뜨와네뜨 왕비가 소유하고 있던 것과 비교한다면 가격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날 것이다. 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현대 시대에 만들어진 검과, 너무 오래되어서 낡고 날도 다 없어졌다 해도 이순신 장군이 쓴 검과 비교한다고 하면 당연히 후자가 더 높은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 로어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명검을 수집하는 사람이니 뛰어난 품질을 가진 검보다도 유명한 검을 더 좋아할 것이다. 품질 좋은 검이야 돈 많은 사람이니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구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벨타이거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그런 이름 높은 검이라면 벌써 소유자가 다 있을테고, 그런 사람들이 이제와서 검을 팔라 한들 쉽게 내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할 수 있는데까지 해봐야지. 내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남작이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정보는 아무래도 제 쪽이 빠른 것 같으니 제가 최대한 알아봐드리겠습니다." 선애가 말하자 남작의 얼굴이 환해진다. "오, 그래주겠나? 그러면 고맙지.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 없으니 좋은 걸로 알아봐주게." "그리고 남작님께서 또 명심하실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토냐가 설명하는 말에 남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꼭 명심하도록 하지." "그럼... 드워프 마을에는 연락 할 필요 없을까?" "아닙니다. 만에 하나 명검을 구하지 못했을때를 대비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공작을 위한 명검 말고도 부인과 아들, 딸을 위한 선물이 필요합니다." 토냐의 말에 나는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선애에게 속삭였다. 선애 또한 내 생각이 괜찮았던지 고개를 끄덕이고 듣더니만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연다. "선물은 제게 맡기세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드워프들에게 부탁 하게?" "예, 이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겁니다." 토냐의 질문에 선애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인다. "드워프 제품 만큼 좋은 선물은 없겠지. 그건 그럼 선애에게 맡기고... 나는 시간을 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군. 뭐 좋은 방법 없나?" 벨타이거도 나섰다. "같이 생각하세. 사실 이 일은 우리 가문이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인데, 자네까지 휘말리게 해서 정말 미안하군." "에이, 형! 무슨 그렇게 서운한 말을... 내가 이런 위험에 빠졌으면 형은 모른체 하고 가만히 있었겠어?" 남작의 큰 아들이 벨타이거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벨타이거가 사람 좋게 하하 웃는다. 그 뒤 타이거 상회 일행들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선애는 당연히 공작가에 가지고 갈 선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드워프 마을로 향했는데, 거기에는 클라리사도 동행했다. 헬게르트 시선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같이 데리고 가달라고 남작이 부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은 알파두르 항구 도시로 향했다. 벨타이거는 헬게르트 말고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로어는 알파두르 항구 도시에 도착한 후 곧바로 서대륙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서대륙의 한 나라와도 거래를 하지만, 진 나라와도 거래가 있기 때문이다. 술은 크로스웰 무역 상회를 통해서 했으면 벨타이거의 입지도 올라가고 우리도 거기까지 신경 안 써도 그들이 알아서 가져다 줄테니 여러모로 좋았겠지만, 당분간은 핸들리 녀석과 계속 대치를 할 것 같으니 그 동안은 스스로 구해와야 할 듯 하다. 거기다가 진 나라와의 거래는 술만이 아니었으니 아예 앞으로도 계속 우리가 알아서 해도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선애는 토냐에게 첼시에게 보내는 편지를 맡겼다. 물론, 정말 받을 사람은 첼시가 아니라 알파두르 부 지부장인 휴였지만 말이다. 내용은 당연히 명검에 대한 정보. 헤스딩스 남작 영지에도 정보 길드 지부가 있겠지만, 이 영지에서는 한 번도 정보 길드를 이용하지 않았던터라 접선자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다. 토냐도 같이 드워프 마을에 갔으면 좋겠지만, 원래 토냐를 데리고 온 가장 큰 목적이 벨타이거의 경호이다 보니 벨타이거와 떨어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애와 클라리사가 드워프 마을로 돌아가자 다른 드워프들은 별 반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친하게 지내던 족장을 비롯한 몇몇은 의아해 하면서도 기분 좋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곧바로 선애가 주문 목록을 내놓자 노골적으로 기분 나쁨을 드러냈다. 드워프들이 선애에게 좀 이기적으로 군 적은 있어도 화를 낸 적이 없어 선애와 나는 속으로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했다. 그 동안의 관계는 제껴 두고도 그들 때문에 핸드폰을 렌스버리 녀석에게 넘긴 걸 생각하면 그 정도의 부탁쯤이야 얼마든지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나마 설명하길 좋아하는 스틸 - 스터링의 아버지 - 의 설명을 듣고 선애나 내가 드워프들의 방식을 알지 못해 부탁하는 방식을 잘못했던 것이지, 드워프들이 우리들의 부탁을 귀찮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드워프들을 만나면서 그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 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모르는 점도 많았던 모양이다. 선애는 드워프들에게 '알아서 만들어 주세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크기와 모습까지 정해주면서 그대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실력에 자부심도 대단한 만큼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해주고 존중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인간들이 와서 주문을 할 때 종류와 갯수만을 부탁받을 뿐 형태와 무늬 같은 세세한 것까지 지시받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물론 검처럼 길이와 무게를 조정하는 건 이해했지만, 나머지는 만드는 드워프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모든 부분을 일일이 세세하게 주문 받는다면 그건 '작품'이 아니라 '복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드워프 세계에서 '복제'는 '진열관'에 들어가는 제품과 연습 제품을 제외하고는 허용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원하는 선물을 하려면 아무래도 크기와 전체적인 모양까지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결국, 애원에 애원을 해서 단 하나의 선물만 우리가 원하는 크기와 모양대로 해주기로 합의를 보고 나머지 선물들은 모두 전적으로 드워프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드워프들이 우리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우리가 제시한 것이 드워프들이 처음 보는 방식이라 흥미를 느껴서 연습한다 셈 치고 따라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처자, 이 기능과 이 기능이 합쳐져야 한다고?" 처음 주문할때 말해줬는데 기분 나쁘다고 제대로 듣지도 않다가 그들과 선물에 대한 협상(?) 을 끝내자 못 들었다고 다시 묻는 것이었다. "네. 어려울까요?" "천만에. 이 정도쯤이야 며칠만 시간을 주면 만들어 낼 수 있어. 오랜만에 힘 좀 쓰도록 할까나? 스터링, 브론즈, 그 놈들 좀 데리고 오니라." "이거 유리로 만들어도 돼?" "예. 뭘로 만들든 상관 없어요. 모습과 장식도 전적으로 여러분들께 맡길게요. 대신 꼭 그걸로 만들어주시기만 하면 돼요. 크기에 따라 숫자가 틀려지겠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 이상은 되어야..." "걱정 마. 내 알아서 하지." "이 장치는 아래에 한다고?" "제가 본 것들은 모두 그랬는데요. 하지만 어디에 장착하든 제대로 움직여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것도 알아서 해주세요." "알았어, 알았어. 우선은 처자 말대로 해보지." "이 것도 내 맘대로 한다?" "네!" "좋아." 한번 쭈욱 설명을 끝내자 족장은 같이 선애를 맞이하러 나왔던 브론즈와 스터링을 시켜 여러 드워프들을 부르게 했다. 그리고는 선애에게 새로이 설명을 요구하더니만 이야기가 끝난 다음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선애와 나는 그쯤이면 우리의 임무는 다 끝난 줄 알고 그 곳을 떠나려 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가 심부름 온 스터링에게 불려 다시 돌아가야 했다. 드워프들의 질문이 안 끝났다는 것이다. 선애가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드워프가 선애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질문을 던지고는 답을 듣더니 다시 고개를 내리고 다른 드워프들과 머리를 맞댄다. 그래, 이제 된건가 싶어 몸을 돌리는데 또 다른 드워프가 고개를 들더니만 선애를 부른다. "처자~!" 그래놓고는 선애가 설명을 하려고 하면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다시 고개를 내리고 머리를 맞댔다. 이야기 좀 다 듣고 내리면 그 뒤에 또 물을 일이 적어질텐데, 드워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답만 듣고 나중에 또 물어보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질문에 답해주던 선애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성격들이 급하긴. 다 듣고 하면 자기들도 좋을텐데...] 그 뒤에는 선애도 요령이 붙어서 자세한 설명 대신 드워프들이 듣고 싶은 대답만 간략하게 해주고, 될 수 있는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 세세하게 주문하는 대신 가능한 건 모두 그들의 재량에 맡겼다. 그렇게 드워프들이 만족스럽게 설계도를 완성할때까지 붙들려 신나게 질문을 받았던 선애는 드워프들이 작업에 들어가자 '이제야 해방이구나~' 라고 생각 하고는 돌아가려고 했다. 선애가 가지고 있는 상회의 이사직이 단지 이름뿐인 직함이 아니기 때문에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겠다고 인사 하려고 만난 족장은 단호하게 못 가게 붙잡았다. 확인 작업할때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리 이 세상 최고의 장인이라 일컬어지는 드워프라 해도 선애의 설명만 따악 듣고 그에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물품을 척 하고 만들어내는 마법 램프 지니는 아니라는 걸 이번에 절절히 깨달았다. 처음 작업에 들어가기 전 선애가 몸서리 칠 정도로 질문을 던지면서 엄청 세세한 설계도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작업된 제품들이 완벽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럴때마다 왜 그러는지 분해해서 이유를 알아내고, 알아낸 뒤에는 몇 번이고 새로 만들고 수정하고 수리하여 결국에는 선애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보니, '과연 저렇기 때문에 이 세상 최고의 장인이라 불리는 구나...' 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본래 타고난 재능이 있고, 열정이 있다 해도 수십번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성공할때 까지 계속해서 도전하는 그 끈기가 받쳐줘야만이 '최고의 장인' 이라는 자리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음, 에디슨이 오면 동지~!! 라고 했을 거 같아.' 역시 드워프라는 종족은 가끔은 너무 자기네만 생각하는 것 같아도, 그래도 멋진 종족이라는 것은 인정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대신... 선애가 너무 시달려서 탈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런 주문은 안 하게 될 것 같다. 선물은 일주일 만에 완성 되었다. 선애가 최대한 빨리 해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에 자몬은 특별히 그 마을에서 각 분야별로 최고의 장인 드워프들을 모았다. 물론, 작업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놀고 있는 드워프들을 모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건 자몬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다. 거기에 아직 자기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놀고(?) 있던 옆 마을의 드워프 족장 케루빔도 한 팔 거들어 주었다. 그렇게 최고의 배려를 해준 드워프들에게 선애는 이번에 서대륙으로 가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최고급의 서대륙 술을 구해와 보답하겠다고 인사 하고는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선물들을 고이고이 잘 포장하여 빠른 속도로 다시 헤스딩스 남작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우리를 맞이하는 헤스딩스 남작은 울상이었다. "이보게 선애양... 자네가 정말 애를 써줬네만...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엄청 어두운 남작에 비해 선애는 낙담한 표정이 아니었다. 사실, 정보 길드에다 명검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달라고 이야기 하면서도 선애나 나는, 아니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정보를 얻는다고 해도 쉽게 명검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명검도 보물 중의 보물인데 누가 쉽게 내놓으려고 하겠는가? 단지 보물의 가치 때문에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큰 돈을 주면 내놓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 하고는 최대한 그런 쪽의 사람들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정보 길드에서 보내온, 명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안면이 있는 귀족 출신의 상인 집안이 있어서 처음에 그 곳에서 구해보려 시도 했단다. 그런데 그 상인이 기가막히게도 드워프와의 권리를 모두 넘기라는 조건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명검 하나만을 가지고 남작 집안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드워프와의 인연을 홀라당 집어 먹으려고 하다니, 정말 나쁜 놈이었다. 아무리 높은 가격을 제시해도 들은 체도 안 해서 어쩔 수 없이 포기 하고 그 다음에 대대로 많은 기사를 배출해 냈으나 최근에는 뛰어난 기사가 나오지도 않고 가문도 많이 몰락하여 재력쪽으로도 상당히 쪼들리고 있는 백작가를 방문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곳에는 백작이 검을 빼들고 사생결단을 내려고 해서 화들짝 놀라서 도망 나왔다나? 사실, 그 백작가가 가지고 있는 명검은 몇대 전에 이 나라의 국왕이 손수 하사해준 검으로 거의 가보로써 물려져 내려왔었다. 물론, 그런 명검을 쉽게 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남작으로써는 딸을 구하려는 심정으로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이라도 내놓겠다는 결의로 갔건만 그런 이야기는 제대로 들어주려 하지도 않고 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검을 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건 남작이 실수한 거였다. 백작가가 가문의 영향력이 작아져가고 재력적으로도 좀 쪼들리게되자 사방에서 그 검을 얻으려 찝쩍대는 사람들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의도가 좋았다하나 백작에게 어디 그렇게 느껴지겠는가? 그리고 설사, 그 의도를 이해해 줬다 한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내놓을리 만무하다고 본다. 그 두 집안이 그나마 남작이 한번 찝쩍이라도 해볼 수 있었지, 나머지 명검을 가진 사람들은 차마 방문할 엄두도 못 낼 빵빵한 집안이라 남작이 낙담해 있었던 것이다. "너무 걱정 마세요, 남작님. 회장님께서도 여러 방면으로 계속 알아보신다 하셨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만..." 선애의 말에도 별로 위안이 안 되었는지 회의적인 남작에게 선애가 씨익 웃었다. "좋은 소식을 하나 말씀 드리지요. 이번에 제가 얻어온 검이 어떤 검인지 아십니까? 바로 드워프 장로님이 만드신 검이랍니다." 이번에 한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헤스딩스 남작의 얼굴에 놀람과 함께 빛이 돌아왔다. "장로님의 작품이라고? 그게 정말인가?"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물어보는 그의 얼굴에는 확실히 희망이라는 빛이 보이고 있었다. 모든 이가 평등하고, 권력에 대한 관심이 없어 마을을 대표하는 족장 자리도 귀찮은 일을 떠맡을 존재의 필요성때문에 제비 뽑기로 가장 운이 나쁜자에게 맡겨버리는 이 드워프의 사회에서도 명예로운 직함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장로'라는 직함이다. 나이 많다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능력이 뛰어나 그의 작품이 마을 전체 중 70% 이상의 드워프를 감탄 시켜야만 그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단 한명이라는 제약이나 나이 제한이 없기 때문에 한 분야에서도 두 명 이상의 장로가 나올 수 있고, 젊은(?) 장로가 나올 수 있지만 워낙에 안목들이 높은 드워프들을 감탄 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보통 10명 이상의 장로가 나온 적이 없다고 들었다. 따라서 '장로'란 드워프 마을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장인을 일컫는 말이고 그 장인의 작품 이라면 드워프제 물품 중에서도 최소한 상등품에 속한다는 이야기다. 거기다, 이 검은 선애에 대한 배려로 그 검을 만든 장로의 입장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제품' 이 아니라 '꽤 괜찮은 제품'이니, '특상품'만은 절대로 인간 사회에 내놓지 않으려는 걸 감안할 때 이 제품은 인간 사회에 나온 것들 중에서 특상품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예, 이름 높은 명검까지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것만으로도 공작님께 충분히 어필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애의 말에 헤스딩스 남작이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 물론이야. 그 동안 우리 가문에서 받친 검은 장로님의 작품이 아니었거든. 고맙네 선애양. 내 자네가 우리 집안을 위해 여러가지로 애써준 것 절대로 잊지 않겠네. 정말 고마우이." 이제 살았다 싶었는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남작은 그 감사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선애의 손을 덥썩 잡고는 몇번이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저런 면이 마음에 드는 아저씨란 말이야.' 나는 왠지 모를 흐뭇한 감정으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남작이 좀 진정한 것 같자 선애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내일 알파두르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무슨 소식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남작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니, 나도 같이 가세. 우리 집안 일인데 여기에 가만히 앉아 소식만 기다릴 수는 없지. 게다가 어차피 공작령으로 가려면 알파두르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빠르니 거기서 있는게 더 났지 않겠는가." 남작의 말에 클라리사도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나두, 나도 갈래요. 그래도 돼죠?" 선애와 남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애교 어린 미소를 보내는 클라리사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선애가 빙긋 웃으며 뭐라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남작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돼." "에? 왜요오~~?" 모르는 사람네도 아니고 아버지와도 같이 가는데 설마 안된다고 할 줄은 몰랐는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남작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 "브라우닝 경이 알파두르에 머물고 있단다." "엑." 남작의 말에 클라리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 모든 소동이 브라우닝 경의 청혼 때문에 벌어졌으니 당연히 그의 존재가 부담이 되리라. "그, 그럼 아빠는요?" 그 청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클라리사만이 아니었던 터라 클라리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작을 바라보자, 남작이 '어이구, 우리 딸 밖에 없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된다. "이 애비야 괜찮지. 크로스웰 남작이 대충 시간을 벌어둔 것 같으니 당분간은 괜찮을게다. 그런데 너에게는 그런거와 상관 없이 자꾸 찝적댈 수 있잖니. 그러니 넌 여기 있도록 해라." "네에..." 불만인 듯 얼굴이 불퉁했지만, 클라리사는 남작의 말이 맞다 여겼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당혹한 건 선애였다. 남작과 둘이서 알파두르에 가게 생겼으니 말이다. 남작과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해도 편안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까 클라리사가 같이 가겠다고 했을때 웃었던 건 클라리사가 귀여워서가 아니라 그녀가 같이 가서 다행이라 생각해 그랬나보다. 그러나 이제와서 클라리사보고 같이 가자고 할 수는 없는 일, 결국 선애는 반은 울며 겨자먹기로 남작과 함께 알파두르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그래도, 나는 생각지도 못한 남작의 배려에 새삼, 남작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처럼 보여도 어른은 어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작은 자신과 선애가 한 마차에 타면 선애가 불편해 하리라는 걸 미리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타고 갈 마차와 선애가 타고 갈 마차를 따로 마련해 줬던 것이다. 그것도 남작이 타고 가는 마차 못지 않은 아주 고급 마차로 말이다. 덕분에 선애는 생각외로 편안하게 알파두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꼬맹이에게는 일복이 터진 모양이었다. 알파두르에 있는 크로스웰 남작 저택에 도착하니 지금쯤 서대륙으로 향하고 있을 로어는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여기에 있으리라 생각한 벨타이거와 토냐씨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선애가 서대륙에서 돌아왔을 당시, 상회에 터진 일 뒷수습때문에 다른 지부에 가 있었던 모건이 피로에 지친 얼굴로 선애를 맞이했다. 푸석푸석한 피부에 헝크러진 옷차림새, 거기에 벌겋게 핏줄 선 눈동자가 마치 며칠 밤을 꼬박 샌 사람의 모습이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 "오랜만에 만난다고 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 보다 모건씨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상회에 터진 일을 겨우 겨우 수습하고 이제 한시름 놓으려나 했더니만, 이사님이 일거리를 와장창 가시고 오셨더구만요? 그걸 겨우 분배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뛰어들려고 했더니만, 헤스딩스 남작령에 갔다 오신 회장님께서도 일거리를 잔뜩 싸짊어지고 오시더라구요. 덕분에 지금 저희 상회 사람들은 며칠째 철야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선애를 불안스레 바라보는 모습이, 혹시나 선애 또한 일거리를 가지고 온 건가... 하며 경계하는 듯 하다. "아하하... 수고하십니다. 이번에 저는 일거리 아무것도 안 가직 왔으니 안심하셔도 돼요." 선애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모건이 문득 뭔가 생갔났는지 음산하게 으흐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잠시 후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가실 겁니다. 이사님의 결제를 기다리는 서류가 지금 잔뜩 쌓여 있거든요." 동지를 하나 만들었다는 듯 너무나 기쁘게 웃는 그와는 반대로 그의 말을 들은 선애의 얼굴은 천천히 굳어져갔다. "이사님께서 자리를 비우신지... 정말 오래 되었지요?" "그 동안 일은 회장님께서..." "아, 물론... 이사님이 서대륙에 갔다 오시는 동안에는 회장님이 감당하셨지만, 돌아오신 이후에는 회장님이나 이사님이나 같이 자리를 비우셨지 않습니까?" "그럼... 그 회장님께선 지금?" 선애가 대답을 듣기 무섭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묻자, 모건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쳤다. "그러고 보니, 이사님께 급보가 있지요. 서대륙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하면 알아 들으실거라고 합니다만. 지금 회장님과 호프만 마법사님께서 맞이하러 가셨답니다." "그래요? 지금 어디에 계신답니까?" "그게...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 여장을 푸셨다고 하던데요." 그의 말에 선애의 인상이 살풋 찡그려진다. 뭐, 루빈스타인 상회에서야 한 나라와의 거래를 독점하고 싶어하니 그들이 이 곳에 머무는 동안 계속 자신들의 그늘 아래 있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지만, 덕분에 선애가 한 나라 사람들을 만나려 할때 원하지도 않게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과 마주치게 생겼으니 말이다. "혹시, 나보고 오자마자 그쪽으로 오라고 하던가요?" "에이, 이사님이 언제나 오실 줄 알고 그러시겠습니까? 단지 혹 오시면 그렇게 알고 계시라고 하시는 것 같더군요. 게다가 이사님은 그 곳 말고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답니다아~" "네에에..." 선애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너무 신이난 모건은 선애가 겨우 몸만 씻고 옷을 갈아입을 정도의 시간만 기다렸다가 얼른 선애의 집무실로 밀어 넣었다. "로어군이 서대륙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서류를 분류해 놓은 것 같습니다만, 서류의 양도 많고 로어군도 할 일이 많아서..." 선애의 눈길을 받은 모건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면서 변명조로 말을 꺼냈다. 집무실에 들어선 선애는 선애의 책상은 물론이거니와 손님을 상대하기 위하여 마련해 놓은, 소파용 탁자 위에도 두서없이 잔뜩 쌓여 있는 서류더미를 보고는 기가 질려 입을 떠억 벌린 채 모건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선애가 잠시 씻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선애에게 일을 시키려고 모건이 일부러 서류들을 잔뜩 가져다 놓은 것만 같았다. "이걸... 언제나 다..." 선애가 말도 막히는지 띄엄띄엄 말하자 모건이 씨익 웃는다. "이사님, 전 마누라 얼굴 못 본지 벌써 며칠째인지 모릅니다. 다른 지부에 갔다가 돌아온 날 잠깐 얼굴 보고는 곧바로 이 저택으로 불려와서 집에 돌아가지도 못한지... 글쎄요... 3주 째던가? 이러다 애들 얼굴도 잊어버릴 듯 합니다." 그의 말에 선애가 입을 다물고는 길게 숨을 들이키고는 팔을 걷어 부쳤다. "우리...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더 뽑읍시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인원을 모집 중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이사님 보좌관을 한명 더 붙여드릴게요." "빠른 시간안에 부탁 해요." 그 말을 끝으로 선애는 비장한 각오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고, 모건은 행운을 빌어준 다음 문을 닫고 가버렸다. 서대륙, 아니 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러 갔던 벨타이거와 토냐가 돌아온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 선애가 거의 반사적으로 허락하고 나자 기세좋게 열린 문 사이로 기분 좋은 표정의 벨타이거와 토냐가 보였다. "여어~ 선애, 바빠 보이는 걸?"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는 벨타이거는 무시한 채 선애는 뛰다시피 토냐에게 달려와 그녀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토냐, 부디 우리 상회에서 같이 일하지 않을래요? 내 권한으로 부장 자리 줄게요. 전 당신의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해요!" 진작부터 토냐를 실무자로 스카웃 하고 싶어하긴 했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상회의 입장 상 토냐의 마법사로써의 능력과 향수와 화장품 제조자로써의 능력이 우선 필요시되던 차였기에, 차마 이야기는 못하고 나중에 화장품과 향수 제조자들을 많이 확보한 후에, 그런건 취미 삼아 틈틈히 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스카웃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서류더미에 푸욱 빠져본 선애는 실무자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껴 그 계획은 그냥 제껴두기로 했나보다. 그에 토냐는 선애와 선애의 뒤로 보이는, 엄청나게 쌓인 서류더미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깔깔깔~ 웃었다. "고생했나 보네. 로어도 가기 전까지는 거의 좀비가 되어가지고 퀭~! 하고 다니더니만." "그러니 좀 도와주세요, 예?" 선애의 절절한 말에 토냐가 씨익 웃더니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대우는 어떻게 해줄건데?" 나중에 토냐가 이야기 해주길, 상인의 피를 타고나서 그런지, 아니면 어려서부터 집안의 일에서 제외되었던 한이 맺혀서 그런지 상회의 일에 자꾸 끌렸었다고 한다. 선애가 토냐에게 의지하는게 싫지만은 않았고, 상회의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미쳐 괜찮은 결과가 나왔을때의 쾌감이란 괜찮은 향수나 화장품을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해 토냐도 나중에 때를 봐서 상회의 실무에 참여하겠다는 의견을 내려고 했었단다. 뭐, 이야기 하기 전에 선애가 먼저 덥썩 제의를 해와서 은근 슬쩍 몇 번 튕겨보고 참여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나? 제 35화 토냐가 장난삼아 몇번 튕기고, 얼결에 소외된 벨타이거가 툴툴거리고, 그에 선애가 심각한데 장난한다고 화내고 하는 소동은 벨타이거의 서재에서 이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다 못해 달려온 모건에 의하여 진정이 되었다. "회장니임~? 이사님께 인사도 할 겸 모시러 가신다 하더니만, 지금 복도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아~?" 음울한 오라를 풀풀 풍기면서 끼어든 모건에 의하여 지금 계속 선애의 집무실 입구 겸 복도에 서서 떠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일행은 머쓱해져서 모건에게 이끌려 벨타이거의 서재로 향했다. 벨타이거의 서재 또한 선애의 집무실 못지 않게 엄청난 서류더미가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선애 집무실보다 넓어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실 공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애까지 네 명이 옹기종기 모인 건 좋았는데, 선애는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어서 긴장하고 있었건만, 나머지 세 명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하녀가 가지고 온 차를 편안한 표정으로 음미하고 있는 거였다. 덕분에 혼자만 차를 마실 생각도 못하고 있던 선애만 얼결에 따가 된 느낌에 당혹스러워 하며 나머지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뭐예요? 설마 티 타임 가지자고 부른 거예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선애나 나나 진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 바쁘니 일분 일초라도 아끼자는 차원에서 '용건만 간단히'란 의도로 꺼낸 이야기였다. 그런데 벨타이거 녀석의 대답이... "응!" 인 것이다. 그 순간 선애의 눈에서 분노의 빛이 번쩍이는데 몸까지 벌떡 일으키는 폼이 잘못 하다간 눈 앞의 탁자라도 뒤집을 것 같은 폼이다. 물론, 벨타이거만 있다면, 아니 거기에 모건씨까지만 있다면 괜찮겠지만, 옆에 토냐씨가 있는데 그럴리가 없었다. 덕분에 선애의 주먹이 꽉 쥐어 부르르 떨리고 눈초리가 무지 매서워졌지만,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회장님, 구워지고 싶으시죠?" 대신 차가운 어조의 협박이 튀어나왔고, 선애의 말에 나는 얼른 기운을 끌어 모았다. 나 또한 벨타이거 녀석의 면상에 주먹을 한대 쳐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벨타이거가 과장되게 겁먹은 듯 움츠러들며 외쳤다. "진정해! 장난삼아 한 말이 아니란 말야!" "장난이 아니라 농담이셨겠지요. 이럴 때 한번 온 몸을 노릇하게 구우시면 정신이 번쩍 드실테니 사양하지 마세요." 목소리와 어조는 사근사근하지만 말의 내용이나 허리에 손을 척 올린채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는 선애의 폼은 무시무시하다. "아니야,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 구울 때 굽더라도 이유라도 들어줘~!!" 벨타이거가 이번에는 조금은 진심이 담긴 어조로 외치자 선애의 기세가 잠시 누그러들었다. "이야기 해보시죠?" "음... 선애가 서 있으면 올려다 보느라 목이 아픈데..." 그렇게 말하며 정말 뒷목을 주물주물 하는 벨타이거 녀석을 정말 얄밉다는 시선으로 한번 더 노려본 선애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토냐에게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혹 회장이 마음에 안 들면 마법을 마음대로 난사하셔도 돼요. 주변에 피해가 없이 해주시면 뒷처리는 제가 깔끔하게 해드릴게요." 그러자 토냐가 깔깔 웃는다. "그거 정말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 나에게 해준다는 대우 중 가장 최고인걸?" "자, 노는 건 그만하고..." 벨타이거의 말에 매서운 선애의 시선이 날아간다. 그 시선 속에는 '그러면 그렇지~' 라는 말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에이~ 선애양, 우리 사이에 이 정도의 놀이도 없으면 너무 삭막하잖아." "저는 회장님과의 사이가 삭막했으면 좋겠습니다만?" "너무한 거 아냐? 그 동안의 애정이 식은..." "구워드릴까요? 그만 놀고 본론을 말하시죠?" 벨타이거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채며 선애가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벨타이거가 무지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 분명히 일부러 나타내는 거다. - 순순히 입을 열었다. "에... 어쨌든, 이렇게 우리가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지게 된 이유는 내일부터 지금보다 더 바빠지기 때문이지. 그래서 지금만이라도 휴식을 취해보자... 하는 아주 깊은 뜻으로 마련한 자리라고."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녀석의 말투가 여전히 장난기 어려서 그런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바빠진다고요? 지금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러자 벨타이거가 히죽 웃는다. "그건 나도 알지. 나도 여기 왔을때 서류더미에 파묻혀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일이 또 생겨서..." 거기까지 듣자 선애는 그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아챘다. "아하, 서대륙에서 오신 손님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기 도착했을때 모건씨에게 들었어요." 기밀 유지를 위하여 우리는 절대로 '한 나라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서대륙 손님'이라고 했다. "그렇지. 지금 쌓인 일거리에 더해 앞으로는 서대륙과의 거래를 놓고 루빈스타인 상회의 눈치를 보게 생겼으니 말이야. 으으... 내 정신이 남아날까 몰라." 장난스레 말하고 있는 벨타이거였지만, 눈을 보니 꽤나 긴장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한편에서는 열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과 만났다고 해서 기가 팍 죽어 있는다면 울 꼬맹이의 파트너로써는 실격이지.' 그 다음날 저녁, 선애는 크로스웰 남작 저택을 나섰다. 루빈스타인 상회의 저녁 초대를 받아 벨타이거, 토냐와 같이 가는 거였다. 남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대단한 루빈스타인 상회의 초대를 받아서 가는 거니 엄청 부러운 일이었겠지만, 당사자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건 엄밀하게 따지자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원래 한 나라와의 계약을 시작한 건 바로 타이거 상회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주선으로써 루빈스타인 상회도 끼어든 것인데, 타이거 상회가 힘이 작고 루빈스타인 상회가 힘이 크다보니 그 과정에서 주도 상회가 바뀐 것이다. 뭐, 어차피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이 한 나라 사람들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절대로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루빈스타인 상회가 하는 일에 이러쿵 저러쿵 참견 하기는 커녕, 찍 소리도 못하는 우리 약소 상회 입장에서는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선심 써서 끼워준다는 식의 저녁 초대에도 아무런 불평 없이 쪼르르 가야 하는 신세라는 건, 더더욱 어깨에서 힘 빠지게 만들었다. 어제 한 나라 사람들을 만났던 벨타이거와 토냐의 말에 의하면, 한 나라 사람들이 우리 상회와 계약한 대로 유리병들을 수입하면서 그와 함께 우리 상회가 가진 공예품의 실력도 구경하고자 우리 상회 산하 유리 공예점들을 둘러보려 했다 한다. 그런데 그걸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이 자기네도 있으니까 우리걸 먼저 한번 둘러보라고 막았다는 거였다. 물론 계약은 우리 상회와 했지만, 여기까지 먼 길을 왔으니 이왕이면 아벤티노 대륙의 전체적인 공예 수준을 보는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그에 한 나라 사람들은 솔깃 했는지, 아니면 자신들을 머무르게 해주는 주인측의 의견이었으니 그들의 입장을 고려했는지 모르겠지만, 루빈스타인 상회 제안을 받아들여 그들 산하의 공예소를 먼저 둘러보겠다고 했단다. 그런데, 그 거대한 상회 산화 공예소가 어디 한 두개 정도겠는가? 그들에 비교하면 달빛 앞의 반딧불 정도인 우리 상회의 유리 공예소만 십여개가 된다. 게다가 루빈스타인 상회에서도 유리 공예만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건 뻔했다. 아마, 앞으로 있을 계약도 모조리 자기네들이 독점하려는 속셈일 것이다.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라. 생각해봐. 아무리 루빈스타인 상회 소속 공예사들 실력이 뛰어나봤자 드워프들만 하겠어?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건 많은 양의 물품을 빠른 시간 안에 댈 수 있다는 것 정도지. 게다가 우리 입장에서는 서대륙 사람들이 늦게 둘러본다고 하면 할 수록 더 좋아." 토냐의 말에 선애와 벨타이거가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봤다. "어째서요?" "어째서라니. 앞으로 우리 상회가 열 가게가 아직 완성 안 됐잖아? 지금 서대륙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우리 상회에서 내 놓을 물품이지만, 한 두달 정도 뒤라면 닷지 상회 물품까지 같이 보여줄 수 있지 않겠어?" "오라... 그렇군요. 거기다 더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옥 제품이라던가 침대 제품들, 선풍기 등등도 나오겠죠." 선애가 환한 얼굴로 무릎을 탁 치자 벨타이거의 얼굴도 밝아졌다. "이거, 모건에게 말해서 닷지 상회와의 공사를 서두르라고 해야겠는걸?" 그렇지 않아도 지금 모건이 상회의 재정이 가능한 정도 안에서 더 큰 가게 건물을 찾느라 바쁜 상태였다. 정보 길드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우리 상회도 이제 많이 성장했으니 작은 일부터라도 독립을 해야지 언제까지 거기에만 기댈 수는 없는 일인 거 같아서 모건에게 맡겼다. 덕분에 모건이 몸이 세개라도 모자를 지경이 되었지만, 상회가 성장하는데는 이런 정도의 희생쯤은 감수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조건 불리하다고 낙심할 필요 없어.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거야. 이번 일도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많잖아? 불리하다고 모든 걸 포기한다면 상인이라고 할 수 없지." "오오옷~ 멋져요, 토냐씨. 나 토냐씨에게 반할 것 같아." 선애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토냐를 바라보자 토냐가 오랜만에 여왕님 포즈로 웃어 제꼈다. "오홋홋홋~~ 이 정도 쯤이야.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감탄스러워." '역시, 토냐를 스카웃 한건 정말 좋은 생각이었어.' 토냐 덕분에 기운 차린 일행은 씩씩하게 루빈스타인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 우리를 맞이한 건 이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와 엘리엇 제네비아 녀석, 그리고 루빈스타인 상회 알파두르 지부 지부장의 보좌관이자 비서인 맥 루돌프였다. 모두들 선애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집사와 같이 나와있던 하인, 하녀들은 선애를 보고 놀란 시선이었다. 하기야, 억울하게 쫓겨났던 서대륙 출신의 하녀가 설마 주인의 초대를 받아 당당하게 저택을 방문할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우리를 마중 나온 세 사람의 안내를 받아 향한 곳은 이 저택에서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응접실이었다. 뭐,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일테지만 말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먼저 와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한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진 나라에서 만난 한 나라 왕자 일행이었다. 현 한 나라 국왕의 다섯째 아들인 예흔랑과 그의 호위무사 백운, 그리고 일행 전체의 호위 책임자인 기파랑, 한 나라 왕실 대신인 사다함, 그리고 통역자이자 한 나라에 얼마 없는 큰 상회 대표자인 오사함. "오랜만이오, 선애양. 이렇게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갑소. 그리고, 크로스웰 남작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이 나라가 마음에 드셨나 모르겠습니다." "아하하... 아직 많은 구경을 안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신기한 면이 많더군." "저희 상회에서도 전하를 놀랍게 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은근히 우리 상회에도 멋진 물건이 많다는 걸 어필하는 벨타이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운 나라에 와서 새로운 문물을 본 탓인지 흥분으로 인하여 상기 된 에흔랑 왕자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꺼이 그때를 기다리겠소."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옆에 있던 그랜트 녀석에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작님." 그랜트 녀석 옆에는 루빈스타인 상회 알파두르 지부의 지부장인 맥 윌리엄스가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저택에 머물때나 먼 발치에서 몇번 봤을 뿐인 그는 여전히 '압둘라'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저택을 방문했을때 선애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지, 낯선 사람 보는 듯 대했다. 대신, 그의 옆에 있던 켐벨 집사는 무척이나 놀란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이 저택에서 그나마 선애를 생각해 주던 몇 안 되는 사람으로, 여전히 깐깐한 인상이었는데, 전보다는 주름이 좀 더 늘은 것 같다. 선애 또한 그가 반가웠던지 가까이 가서 인사는 못했지만, 반가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가 그 곳에 같이 자리했는데, 그는 바로 헬게르트 브라우닝이었다. 헤스딩스 남작에게서 그가 알파두르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루빈스타인 후작가에 머무르고 있을줄은 몰랐다. 뭐, 같은 혈족이기는 해도 그 둘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라이벌이었으니 말이다. "어제 여기 왔을때 브라우닝 경도 있었어요?" "아니, 못 봤는데..." 당혹한 표정으로 선애가 토냐에게 속삭였지만, 토냐도 당혹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반갑습니다, 크로스웰 남작님. 이런 곳에서 다시 뵙는군요. 호프만 마법사님도." 사람들이 놀라워 하는 걸 즐기는지 헬게르트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 토냐는 왜 부르는 거야? 혹시 스카웃 하려고 노리고 있나? 토냐가 뛰어난 마법사 이긴 하지만... 아니, 그건 그렇고, 울 꼬맹이는 왜 무시하는 건데? 이거 참 기분 나쁘네?' 나는 뒤에서 그렇게 궁시렁 거리면서 헬게르트 녀석을 노려봤다. 그런데 이 놈이 정말 토냐를 노리고 있는 건지 자꾸 토냐에게 시선을 주는 것이었다. '이거, 선애에게 주의하라고 이야기 해놔야겠어.' 그렇게 의외의 사람들과 같이 자리를 해서 그런지, 한 나라 사람들과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과의 만남의 장(?)은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은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살어름 판을 걷는 기분을 느낄거라고 생각 했었던 것이다. 기실, 서대륙, 정확히는 진 나라의 광진에서 루빈스타인 상회 사람들과 만났을때 토냐와 엘리엇 녀석이 살벌한 말싸움을 벌인 전적이 있었던데다 어제 이 곳을 방문했던 벨타이거와 토냐가 전해줬던 말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도 엘리엇 녀석을 가장 주요 인물로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이 엘리엇 녀석이 마치 봄바람 마냥 살랑살랑(?) 거리면서 제일 앞장서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이었다. 라이벌을 의식해서 그런지, 아니면 아니면 손님 앞에서 너무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랬는지, 양쪽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우리 쪽에서 혹은 일부러인 듯이 헬게르트쪽에서 분위기를 살짝 냉각 시키는 - 서대륙과의 거래 - 이야기가 나오면 즉각적으로 화제를 전환시켜 거래 이야기는 흐지부지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하여간, 말발 하나는 선애 못지 않게 뛰어난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받쳐주는 사람이 바로 맥 윌리엄스였다. 엘리엇 녀석처럼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아니었지만, 절묘한 타이밍에 한 마디씩 던져 엘리엇의 시도를 도와주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저 맥 윌리엄스는 확실히 그랜트 녀석쪽 사람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한 나라 사람들쪽에서 적극적으로 일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어쨌든, 무척이나 걱정 되었던 만남의 장이 생각지 못한 여러가지 요소 덕분에 무사히 끝날 수 있었고, 이 일로 인하여 당분간 한 나라 사람들은 루빈스타인 사람들에게 잡혀(?) 있을테니 한 나라 사람들이나 루빈스타인 사람들이나 다시 만나는 건 한참 뒤의 일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런데... [헉, 저 인간들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무지 당혹스러운 일을 여러번 겪는 것 같다. 그것도 다 루빈스타인 상회에 관련된 일이었으니 저 상회하고 울 꼬맹이하고 도대체 무슨 악연인건지. 내 말에 고개를 돌린 선애가 눈에 들어오는 그랜트 녀석하고 헬게르트 녀석을 보더니 기겁했다. "켁! 왜 여기에..." [그건 내가 한 말이거든? 빨랑 도망치는 게 어떨까?] 내 말에 선애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토냐의 옷자락을 끌었다. "토냐, 토냐, 빨랑 이쪽으로." "응? 아니 왜?" 자리를 찾느라 두리번 거리고 있던 토냐는 미처 그 둘의 모습을 못 봤는지 선애의 이끔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지만 순순히 따라왔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 둘이 사람들 틈새로 끼어들기 전, 그랜트와 헬게르트가 먼저 선애와 토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거 참 재미있는 우연이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런데도 다녔던가?" "으으음...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두 분." "안녕하십니까?" 신분 높은 귀족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데 평민이 외면하고 갈 수는 없는 일이라 토냐와 선애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꾸뻑 인사를 했다. "이 곳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떤가?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이?" 헬게르트의 말에 선애와 토냐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고마우신 제안이오나,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냥 저희 자리에 앉겠습니다." 토냐의 말에 선애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는 신경쓰지 마시고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러면서 둘이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그랜트 녀석이 제동을 걸었다. "어째 우리에게 숨기고 싶은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모양새군." 그에 움찔한 우리 두 아가씨들... "오호호...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오해를 한 건가? 너무 서둘러서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아니... 그게 감히 두 분과 한 자리에 있는다는게 부담스러워서..." 선애의 말에 헬게르트가 나섰다. "부담스러워 할 것 없네. 어차피 우리는 심심풀이로 온 것이니... 자, 그럼 이쪽으로." 이 놈은 같이 앉겠다고 말한 적도 없건만, 자기 멋대로 그걸 기정사실화 해버려 선애와 토냐에게 자리를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더 이상 사양할 수 없던 선애와 토냐는 울며 겨자먹기로 녀석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곳은 알파두르 뒷 세계에 있는 거대 경매장이었다. '뒷세계'라고 하니 눈치 챘겠지만서도, 법에 걸리는 고귀한 물품들이 나오는 곳이었다. 뭐, 어떤 곳에는 사람이나 이종족까지 내놓는 경매장이 있다고 들었지만, 여기는 거기까지는 아니고 일명 장물 경매장이라고나 할까? 어디에서 훔쳤다던지, 아니면 왕족이나 대단한 귀족의 무덤을 도굴했다던지, 아니면 법으로 발견하면 무조건 국가에 보고를 해야 하는, 던전에서 발견했다던지 하는 불법적으로 얻은 보물을 내놓는 곳이었다. 이번에 이 곳에서 어느 왕실에서 도굴했다는 보검이 나온다는 소식을 길드에서 전해준 덕에 부랴부랴 왔던 것이다. 이 곳 초대장은 돈이 많고 신원이 확실한(?) 사람만 얻을 수 있다고 하던데 다행이 정보 길드에서 선애 앞으로 초대장을 하나 마련해 줘서 선애와 토냐가 들어올 수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초대장을 얻은 헤스딩스 남작은 지금 벨타이거와 함께 딴 구석에 가 있을 거다. 잘못 해서 보검이 딴 사람에게 넘어갈까 싶어 지금 두 팀으로 나뉘어 포진하려고 한 건데, 운 없게도 토냐와 선애가 그랜트와 헬게르트에게 따악 걸린 거였다. [아... 정말, 이 놈들이 하필이면 왜 여기 와 있는 거냐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툴툴 거렸지만, 사실 이 곳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곳이고, 웬만한 귀족은 다 초대장을 가지고 있기에 그랜트와 헬게르트가 여기 온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지금 찔리는게 있으니 그랜트 녀석을 만난 것에 크게 놀란 것이지. 이 녀석과 같이 있는 상황에서 보검을 사려고 하면 헬게르트는 척하면 착 하고, 에스테반 공작에게 받치려 한다는 걸 알아챌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럼 무지하게 방해를 하겠지...' 아무래도 보검 사는 건 벨타이거 측에 맡겨야 할 거 같다. 녀석들은 아무래도 대단한 신분을 가진 녀석들이라 그런지 자리도 경매가 이뤄질 단상이 무지 잘 보이는 로얄석이었다. 탁자도 고급스러운 원목 탁자에 의자도 선애가 앉으니까 푸욱 파뭍힐 정도로 쿠션이 두텁다. 그런데 토냐와 선애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같이 붙어 앉자 그랜트와 헬게르트가 떨어져 앉는 거였다. 그러니까 토냐와 선애가 붙어 앉자 비어 있는 토냐의 나머지 자리에는 헬게르트가, 선애의 비어있는 옆자리에는 그랜트 녀석이 앉았는데, 헬게르트와 그랜트 녀석 사이로 단상이 보였기에 헬게르트 옆이 그랜트이기는 했지만 둘이 떨어져 앉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에엥? 아니 왜 그렇게 앉는 거야?' 선애와 토냐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리번 거리는데, 그때 갑자기 단상에 불이 밝혀지더니만 멋드러진 팔자 콧수염에 번쩍 거리는 의상을 입은 중년 남자 한 명이 올라왔다. "이 자리를 빛내주러 오신 신사~ 숙녀~~ 여러부우운~~~ 아주 자아알~~ 오셨습니다아~~" 과장된 포즈와 매끄러운 말투로 사회자는 익숙하게 경매의 시작을 선언했다. "첫번째 물건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물건은..." 그렇게 사회자의 소개로 백금으로 만든 팔찌가 올라왔다. 마법에 의하여 단상 가운데 탁자에 올려진 경매 물품이 바로 그 윗쪽 허공에 몇 백배로 확대 되어 마치 3D 영상처럼 보였기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경매 물품을 보지 못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제법 고급스러운 팔찌의 모습에 선애와 토냐는 자리의 불편함도 잠시 잊어버리고 팔찌 구경에 폭 빠져 있었다. 사실 여기에 온 주된 목적이 보검 구입이기는 하지만, 이런 보물 구경도 살짝쿵 끼어 있었다. 게다가 자의든 타의든 로얄석에 앉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마다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그리하여 선애도 이제는 오른쪽으로 서서히 회전하며 그 모습을 뽐내는 팔찌를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때, 옆에 앉아 있던 그랜트 녀석이 슬며시 몸을 기울이더니만 선애의 귀에 낮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갑자기 귓가에 들려온 음성에 선애가 무지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돌아보았다. 지금 경매중이라 그걸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목소리를 낮추는 건 이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이 앉아있는 일행에게도 안 들릴 정도로,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말씀 하시지요." 함부로 귀에다 대고 말하지 말라는 표시로 선애가 손으로 귓바퀴를 문지르며 대답하자 그랜트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있으신지요?" 선애의 딱딱한 말에 그랜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쿡 하고 한번 웃더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프'라는 걸 손님들께 보여 드렸었지." 그랜트의 말에 선애가 움찔 하더니 긴장한 시선으로 녀석을 째려봤다. "갑자기 그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서." 그래프가 무엇이던가. 선애가 아직 루빈스타인 저택의 하녀로 있을 당시, 신입 하녀였던 선애를 그랜트와 엘리엇 녀석의 눈에 뜨이게 만들어 결국 그 곳에서 나올때까지 켐벨 집사의 비서로 일하게 만든 대단한 녀석이었다. 문제는, 그게 선애가 그린게 아니라 선애 옆에 달라붙어 있던 내가 심심해서 한번 그려본 것이 들켜서 그렇게 된 거였다는 것이고, 그걸 이 나라에 와서 배웠다고 할 수가 없었던 터라 한 나라의 수리 이론이라고 둘러댔었다는 거다. 그때야 다급한데다 반은 진심으로 그리 대답한 거였지만, 설마 그 뒤에 그랜트 녀석이 한 나라 사람들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우리의 소개로 말이다. 하여간 인연 한번 웃기게 꼬여버렸다. 이래도 안 나갈거냐고 묻는 듯한 그랜트 녀석의 시선에 선애가 날 한번 째려보더니만 토냐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 좀 나갔다 올게요." 선애의 말에 이제 막 경매에 들어가 여기저기서 돈 걸리는 걸 구경하고 있던 토냐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돌아봤다. "같이 가 줄까?" "에이... 어린애도 아닌데요 뭐. 혼자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해." 아무래도 그랜트 녀석이 뭐라 속삭이는 걸 본 모양이다. 선애가 토냐를 안심시키려는 듯 괜찮다는 미소를 보여준 후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오자 그랜트 녀석이 뒤를 따라 나왔다. 경매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통로로 나오자 경매 주최측 사람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다른 곳은 몰라도 로얄석에는 시종을 부를 수 있는 비단 끈이 있었다. 그걸 잡아당기면 그 끝에 달린 종이 울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통로로 나왔으니 주최즉 사람이 의아해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 조용히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소가 있겠나?" 시종이 더욱 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 거린다. 하지만 얼마 안가 그랜트 옆에 선애를 보더니 뭘 생각한 것인지 이 놈이 이해 했다는 눈빛이다.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 녀석이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기야, 고급 물품이 나오려면 좀 더 기다리셔야 할테니, 그 사이 잠시 편안~히 쉬시는 것도 좋으시겠지요, 암요." 그에 선애의 얼굴이 무지 불편하게 찡그려졌지만, 그랜트 녀석이 가만히 있으니 나설 수가 없었다. 녀석이 하도 수상한 미소를 보여서 혹 이상한 데로 데리고 간 건 아닌지 걱정을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 녀석이 안내한 곳은 아담한 응접실이었다. 그랜트 녀석네 저택이나 벨타이거네 저택에 있는 응접실보다 조금 작은 곳이었지만,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 곳에서도 손님을 개별적으로 상대해야 할 일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창문이 없어서 좀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했고, 방 구석 구석이 어둑어둑 했지만, 이 곳으로 안내한 사람이 불을 환히 밝혀 놨기때문에 상대를 보는데 별 불편함은 없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마치 나이트 클럽에서 부킹을 시켜주고 나가는 웨이터처럼 녀석은 씨익 웃어보이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러나 울 꼬맹이에게는 좋은 시간이 될 리가 없었다. 소파에 앉을 생각도 못한 채 바깥에서 이 곳까지 안내해준 남자가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자 선애는 같이 서 있는 그랜트 녀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게 하실 말씀이 뭡니까?" "좀 앉겠어?" 그러나 대답을 안 하고 소파를 가르키며 딴 말을 꺼내는 그랜트. 그 녀석이 얄미웠는지 살짝 흘겨보며 선애가 대답을 재촉한다. "아니요. 그냥 이대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괜찮으시면 제 질문에 대답을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선애의 말에도 그랜트 녀석은 팔짱을 떠억 끼더니 선애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마냥 관찰하는 시선으로 조용히, 아니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루빈스타인 자작님?" 그에 의아함을 느낀 선애가 그를 부르자 그랜트가 그 상태 그대로 지나가는 어투로 툭 말을 던졌다. "우리 상회에 들어와라." "예?"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란 말인가. 선애는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랜트 녀석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우리 상회로 들어오란 말이다." [지금... 저 녀석이 널 스카웃 하려는 거야? 그런데 보통 스카웃을 이런 식으로 하나?] 그도 그럴것이, 그랜트 녀석의 어조는 자기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식사를 방으로 가져 와라.'라고 하는 듯한, 자기가 말만 하면 척척 이뤄질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어조였으니 말이다. 선애도 무척이나 기가막히다는 시선이다. 그런 시선을 그대로 맞받으며 그랜트가 말을 이었다. "내 보좌관 자리를 주마. 엘리엇과 동급이지. 그 정도라면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지위 못지 않을테지?" 녀석의 말에 선애의 입은 떠억 벌어졌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 못지 않는게 아니다. 훨신 좋은 위치다. 그랜트의 보좌관 자리는, 쉽게 설명하자면 현재 벨타이거 위치에서 대략 두 세계 계단 위에 있는 위치라고 보면 된다. 만약, 그랜트가 후작 작위와 루빈스타인 상회 회장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면 거기에 한 두개 정도 더 올라간다. 그러니까 대략, 중앙 귀족 중에서 상위와 중위 가운데 정도의 위치? 루빈스타인 후작가는 대 상회를 가지고 있는는 건 물론이거니와, 현재 이 나라 정, 제계를 좌지우지 하는 손꼽히는 대 귀족 중 하나다. 이 루빈스타인 후작가와 쉽게 맞대결 할 수 있는 집안이 거의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테반 공작가 정도라는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한 모든 힘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자의 바로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지방 귀족에다 이제 겨우 자라기 시작하는 상회를 가진 벨타이거의 위치와는 차원이 틀리다. 내가 엘리엇 녀석을 싫어하기 때문에 녀석을 계속 낮춰 이야기 하기는 하지만, 사실 엘리엇 녀석은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가신인 제네비아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사실 녀석이 그랜트의 보좌관이 아니라 해도 선애나 벨타이거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녀석인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그런 위치에 있는 녀석이 평민인 저택의 시종, 시녀들에게 모조리 존대를 쓰고 상냥하게 대하는 거 보면 이 놈이 얼마나 음흉하고 무서운 놈인지 알 수 있을 거다. 처음에 녀석이 그렇게 모두 존대를 하는 걸 보고 나는 평민 출신인지 알았지 뭔가. 아마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나중에 정보길드에서 알려줘서 알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평민 출신이라 굳게 믿고 있었을 거다. 그러고 보면, 평민이나 귀족에게나 똑같은 존대를 쓰던데, 혹시 이 녀석은 웬만한 귀족들은 평민이랑 같은 등급으로 보이는 걸까? 하여간, 그렇게 대단한 대우를 해주면서 스카웃 하겠다니 입이 벌어지는 것 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럽다. 왜, 사람이 '적당한' 크기의 이익을 받게 되면 혹 하게 되지만, 그 '적당한' 이란 기준을 훨씬, 훠어어얼~~씬 넘어가버리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말이다. [저 녀석 도대체 무슨 생각이람? 이건 너무 파격적인 대우잖아?] 내가 그랜트 녀석을 수상하게 바라보며 선애에게 주의하라는 의미로 속삭였이자, 선애가 놀랐다는 기색을 지우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랜트 녀석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아무래도 선애가 단칼에 거절할 줄은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내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제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파격적인 조건이니까요." "그럼 어째서?" "제가 지금 위치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무리 좋은 조건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위치를 버리고 갈 생각은 없습니다." 선애의 단호한 대답에 그랜트 녀석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옅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미소라는게 너무 차가워 보인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널 우리 상회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순간적으로 그 말을 이해 못한듯 선애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랜트를 바라보자 그가 좀 더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를 든다면... 그래, 타이거 상회의 일에 사사건건 방해를 한다던가..." 그의 말에 선애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랜트가, 아니 루빈스타인 상회가 타이거 상회 일에 작정하고 방해하려 나선다면, 버티기 쉬울리가 없다. 혹 우리가 운이 좋아서 에스테반 공작의 그늘 밑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방해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았으니 말이다. 선애의 눈초리가 차가워졌지만, 그랜트 녀석은 눈썹 하나 까딱 하기는 커녕 오히려 대답을 재촉 하려는 듯 선애만 빤~ 히 바라본다. 그에 선애가 작게 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하기야, 여기서 선애가 강하게 나와봤자 이득 될 건 없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루빈스타인 상회에 저 정도의 인재는 부족하지 않을텐데요." "부인하지는 않아. 그러나, 너 정도라고 말하는 다른 인재들은 상회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시피한 상회에 들어가 짧은 시간에 여러 대 도시에 지부를 설립하고 가계를 열 수 있을까?" 그 말을 들으니 울 꼬맹이가 무지 대단한 것처럼 들렸지만, 선애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제가 때를 잘 맞췄던 것 뿐입니다." 그러자 그랜트 녀석의 입술이 비틀린 미소를 보였다. "과연 그럴까? 네가 루빈스타인 상회에 들어온다면 타이거 상회가 자연스레 흡수될 거란 거에 내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어." 그의 말에 선애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돌았다. "제가 아니라 타이거 상회가 목표였던 겁니까? 그럼 사람을 잘못 찾으셨군요. 제가 아니라 회장님을 만나셔야지요." 선애의 얼굴에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과 함께 속 시원한 기색이다. 아무래도 녀석이 왜 선애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는 모양이다. 그런데, 선애의 말에 그랜트 녀석이 피식 웃는 거였다. "잘못 짚었어. 내가 원하는 건, 드워프와의 거래를 트고 부족한 재력을 채우고 한 나라와의 교역까지 이룬 네 능력이니까. 타이거 상회는 덤이라고나 할까? 오면 좋지만 안 와도 상관은 없는." 그 말에 선애는 인상을 더더욱 찌푸린다. "그럼 더더욱 잘못 찾으셨습니다. 그건 모두 제 능력으로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드워프와 거래를 틀 수 있었던 것은 손목 시계 덕분이고, 재력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정보 길드의 도움과 내 덕, 한 나라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 싸가지 없는 드래곤 렌스버리 녀석 덕이 컸다. 이렇게 보면 선애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들은 모두 울 꼬맹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선애가 없었으면 이 모든 일들도 없었다. 그랜트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보다. "하지만, 너로 인해 그 모든 일들이 이뤄진 것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것이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선애는 살짝 뾰루퉁한 표정으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랜트 녀석이 뭔가 말하려는 듯 움찔 거렸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녀석은 말을 하는 대신 다시 입을 다물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손님들이 돌아갈때까지 여유를 주도록 하지. 그때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다면 루빈스타인 상회의 힘을 직접 체험하게 될 거야. 어차피 내 밑으로 들어오게 될 것, 강제로 들어오는 것 보다는 순순히 알아서 들어오는게 좋지 않을까?" 그랜트 녀석은 자기가 할 말만 쭈우욱 늘어 놓고는 선애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즉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뭐, 뭐야 저 녀석?/" 선애는 무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그랜트 녀석을 노려보다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골치 아프구나. 지금 헬게르트인지 요구르트인지 하는 녀석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저 놈까지 골치 아프게 만드냐? 하여간 루빈스타인 상회하고는 전생에 무슨 악연이라도 있었나보다.] "/어쩌지?/" [토냐하고 벨타이거와 같이 의논을 해야지. 지금 이게 너만의 문제가 아니잖냐.] "/그렇겠지?/" 같이 의논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선애는 안정을 되찾은 모양인지 그 방을 나서 자리로 되돌아 올때는 제법 침착해질 수 있었다. 뭐, 제자리에 앉을 때는 그랜트 녀석이 좀 신경이 쓰였지만, 녀석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관심해 보였기에 선애는 얼마 뒤 그 녀석에 대한 신경을 끄고 경매 구경까지 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그런 여유는 길지 못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경매장을 나와 마차를 타자 토냐가 긴 한숨을 내쉬며 선애에게 입을 열었다. - 경매장까지 같이 오면 눈에 뜨일까 따로 따로 움직였기에 벨타이거와 헤스딩스 남작은 없었다. - "선애, 문제가 생겼어." "예? 뭔데요?" "아까 너하고 루빈스타인 자작이 자리를 비웠을때 브라우닝 경이 나보고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 "엑? 정말요?" "그래." "그,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긴장한 표정으로 선애가 묻자 토냐가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픽 하고 웃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했지. 내가 처음부터 마법사로써 활약하고 싶었다면 여기에 있었겠니? 수도로 갔어도 진작에 갔지. 그런데..." "그런데요?" "아니, 쉽게 물러설 기색이 아니더라고. 은근히 협박까지 하던데?" "윽... 그런... 누가 핏줄 아니랄까봐 어째 둘이 하는게 그렇게 똑같지요?" "둘이 하는게 똑같다니?" "아까 루빈스타인 자작이 할 말이 있다고 불러내더니 저한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구요." "너한테?" "예. 그런데 제 경우에는 제 능력이라기 보다는 아무래도 타이거 상회를 흡수하려는 거 같아요." 선애의 말에 토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음... 그럴 수 있겠다. 아무래도 한 나라와의 거래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독점하려는 생각 이겠지? 우리에게 외부에 발설 못하도록 신신당부하기는 했지만, 그게 완벽하지 않으니 아예 자기들 밑으로 끌고 들어와야 안심이 되겠지." "어쩌죠? 사실 저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흡수할 거라는 뜻까지 내비치더라구요." 선애의 말에 곰곰히 생각에 잠긴 토냐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 거였군." "뭐가요?" "브라우닝 경이 갑자기 날 스카웃 하려는 이유가 말이야. 아무래도 루빈스타인 자작이 브라우닝 경에게도 한 나라와의 거래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모양이지. 이럴때 내가 브라우닝 경 밑으로 들어가면 그에 대한 정보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잖아. 덤으로 괜찮은 마법사도 얻고 말이야." "그런 일이..."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되었네. 그 녀석들 때문에 잘하면 타이거 상회가..." 토냐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지만, 그 뒤에 나올 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후우우..." "에휴우우..."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다가 상대방이 같이 한숨을 내쉴 줄은 몰랐는지 멈칫 하고는 서로 마주보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후 다시 또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휴우우..." "어휴우우.." 막막한 상황에 계속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벨타이거는 토냐나 선애와는 달리 긍정적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낙담할 상황은 아닌걸?" "그게 무슨... 아니, 그럼 회장님은 루빈스타인 상회를 상대로 뭔가 뾰족한 수가 있다는 겁니까?" 토냐는 상회 운영에 참여하게 된 뒤 벨타이거에게는 그래도 회장이라고 존대를 써주고 있었다. "뾰족한 수가 있다는 게 아니라 아예 방법이 없다는 건 아니지. 생각해봐. 브라우닝 경과 루빈스타인 자작은 같은 루빈스타인 상회 소속이긴 하지만, 서로 라이벌 관계라고. 그것도 이 다음 상회 회장으로 가장 유력한." "지금... 두 강대한 라이벌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자는 거죠?"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았어. 이래뵈도 나는 전에 그런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선애와 토냐를 위로 하려는 듯 자신있게 씨익 웃어보이는 벨타이거를 향해 선애는 과장되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전에 말했잖습니까? 루빈스타인 자작은 소문처럼 브라우닝 경을 적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다고. 회장님 계획은 두 사람이 철전지 웬수처럼 여기고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단 말입니다." 선애의 말에 토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둘도 벨타이거의 제안을 생각 안 해본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벨타이거는 물러서지 않았다. "선애 말이 맞다고 해도 루빈스타인 자작은 어쩔 수 없을걸? 많은 사람들을 책임 지고 있는 사람은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해야만 할 때가 있는 거라고. 루빈스타인 자작의 상황이 바로 그렇지.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루빈스타인 자작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 루빈스타인 후작이 가만 있을까? 그는 브라우닝 경에게 자신의 자리를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을 거야." 물론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100% 안심할 수 없는 것이, 그 동안 내가 봐온 그랜트라는 녀석은 자기의 뜻에 맞지 않아도 아버지가 원한다고 해서 거기에 무조건 복종하는 효자 같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의 이미지가 더 크다고나 할까? 이런 내 의견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은 그랜트와 그의 아버지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현 루빈스타인 후작은 정략 결혼을 해서 그런지 자식들에게 별로 정을 주지 않는 아버지라고 했다.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 볼때, 그랜트 녀석은 아버지의 뜻과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상회에 큰 손해가 나지 않는 선에서 오히려 아버지와 맞설 것 같았다. 뭐, 실제로 그런지 확인한 것은 아니고, 단순히 내 추측이지만 말이다. 그래 나는 이러한 내 추측을 선애에게 이야기 해주려고 했는데, 막 입을 열기 전에 멈칫 하고 말았다. 말하기 전 벨타이거 녀석을 우연치 않게 보게 되었는데, 녀석의 밑으로 내린 손이 꽈아악 주먹이 쥐어져 하얗게 변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눈에 안 띌 정도로 가늘게 떨리는 것이 어지간히도 힘을 쥐고 있는 모양이다. 주먹이 하얗게 변한 걸 눈치 못 챘다면 떨고 있는 것도 몰랐을 거다. 그래놓고서는 얼굴에서는 자신 있는 미소를 보이는 걸 보니, 차마 내 입이 안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 뭐...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나쁠 건 없겠지. 여차하면... 루빈스타인 본가에 쳐들어 가서 불을 질러버리던지 하지 뭐.' 토냐와 선애 또한 벨타이거의 의견에 동의했는지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상황이 안 좋다고 손 다 놓고 있는 건 바보니까. 회장 말을 믿으며 그쪽으로 머리를 좀 굴려볼까나?" 토냐의 말에 선애가 피식 웃었다. "어째, 회장님 말보다 토냐의 말이 더 믿음직스럽네요." "에엑? 아니, 선애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하는 거야? 그 동안 선애와 나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데." "길었죠. 그 악연의 시간이 말이에요." 선애가 냉정하게 말하자 벨타이거 녀석이 과장되게 충격 받은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그, 그런 말이이..." "장난하지 마시구요. 루빈스타인 상회 일은 손님들이 가실때까지 시간을 준다고 하니 일단 넘어가고, 우선 에스테반 공작가로 갈 준비를 해야겠지요?" "그렇지. 아, 그건 남작님과 같이 의논하기로 했으니 일단은 남작님께 동석을 청하자고." 벨타이거는 그렇게 말하고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남작에게 보냈다. 토냐와 선애가 도착 했을때 벨타이거와 헤스딩스 남작은 무척 안도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었다. 돈이... 좀... 많이 들기는 했지만, 생각 외로 제법 명성이 괜찮은 검이라 무척 만족해 했던 것이다. 정보 길드에서는 단지 명검이 한 자루 나온다고 했을 뿐, 그게 어떤 검인지까지는 알려주지 못했다. 사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뒷 세계 경매라고 해도 언제 무슨 꼬투리로 사단이 날 지 모르기 때문에 경매 직전까지 경매 목록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다고 하니, 그 목록에 명검이 있다는 걸 알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게다가 돈을 우리 상회가 감당하는게 아니라 헤스딩스 남작이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이니 우리야 어떻게 해서든 명검을 구입했으면 만사 오케이 였다. 그렇게 주 뇌물품이라 할 수 있는 명검까지 구입했으니 이제 에스테만 공작가로 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헤스딩스 남작이야 당연히 가는 것이고, 우리 상회 사람 중 헤스딩스 남작과 동행할 사람만 정하면 됐다. 그런데, 여기서 신분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의 어두운 면이 나타나는데, 귀족이 아니면 공작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뭐, 그런 대 귀족이 평민을 평생 아예 안 만나는 건 아니지만, 공작측이 필요에 의하여 평민을 부르면 만날 수 있지만 평민쪽이 공작에게 면담을 청해 만나는 건, 아예 청하는 것 조차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서도, 평민은 아예 청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딱 못을 밖으니 괜히 열받는다.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공작을 만날때 헤스딩스 남작과 같이 동행할 수 있는 건 기사 작위 이상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니, 우리 상회에서는 당연히 벨타이거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게, 지금 벨타이거가 은근히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에서 나가는 건 위험했다. 도시에서야 전에도 이야기 했다시피 후계자 문제로 살인을 당하면 그 집안은 작위가 몰수 되기 때문에 저연스러운 사고사로 위장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도시 밖에서는 그런 것에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벨타이거는 드워프와의 거래가 좀 더 업그레이드 된 것에 고무되어 핸들리 크로스웰에게 아주 당당하게 청혼을 거절해버렸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의 딸과 결혼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는데, 상황이 그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크로스웰 상회를 무시해도 될 만큼 크게 될 기미가 보이자 억지 결혼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뭐, 그의 선조가 일으킨 크로스웰 상회를 잃어버리게 되는게 아깝기는 했지만, 혹시 아는가? 타이거 상회가 크로스웰 상회보다 더욱 더 강해진다면 크로스웰 상회를 흡수할 수 있을지. 아무리 이름뿐이라 해도 지금 크로스웰 상회의 소유주는 벨타이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목숨을 지키고 있을때에나 가능한 일일거다. 타이거 상회 상부 사람 몇몇만 알고 있는 일이지만, 벨타이거 녀석은 청혼을 거절한 뒤로 몇차례 위험한 적이 있었다. 그게 정말 단순한 사고인지, 아니면 극도로 치밀한 계획인지 증거가 없어서 밝히지는 못하고 심증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사실,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건, 벨타이거가 청혼을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선애가 정보 길드에게 벨타이거의 보호를 의뢰 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정보 길드는 의뢰자 보호 같은 주문은 안 받지만, 알파두르 정보 길드의 부지부장인 휴가 손을 써준데다 전에 선애가 그들에게 넘겨준, 캐링턴 후작가 가보의 대가로 하겠다고 요구했기 때문에 그들 쪽에서 받아들인 일이었다. 사실, 그게 아니라 해도 정보길드 쪽에서는 밝히지 못하는 선애의 이런 신기한 능력 - 바로 나 - 을 높이 산 상태라 웬만한 부탁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해 거절하지 못할 거다. 뭐, 정보 길드의 부탁을 받은 적이 아직까진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 정보 길드의 지원과 바로 옆에서 보호를 해준 토냐 덕분으로 몇번이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벨타이거를 그나마 안전한 도시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토냐를 보내자니, 우선 벨타이거 곁에서 떨어뜨리는 것도 걱정되는 데다가 공작가에 사정을 하러 가는 마당에 마법사를 보낼 수도 없었다. 기사 작위까지 공작을 만나겠다고 요청하는게 가능하다 했지만, 막상 공작을 만났을때 검을 가지고 갈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전에 토냐가 그랜트를 만나겠다고 했을때 그 자리에 토냐보다 뛰어난 신임을 받는 마법사가 동석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토냐를 동행 하는 것 자체는 안 좋게 비춰진다. 그래서 결국 남은 건 선애. 그래봤자 공작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같이 있지도 못하고, 단지 저택에까지만 같이 갈 뿐이다. 가서 운이 좋으면 뇌물로 받치는, 앞으로 타이거 상회의 대표로 꼽힐 제품을 소개할 수 있는 정도? 솔직히 헬게르트 녀석이야 벨타이거가 클라리사의 약혼자라고 알고 있지만, 공작은 그걸 모를테니 사정해야 하는 남작만 가도 상관은 없을 거다. 그러나, 앞으로 커다란 상회를 운영하게 될 지 모르는 상인으로써 이 나라 최고로 꼽히는 귀족 가문을 방문하고 그 일원을 만나 혹 제품을 광고하게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어떻게 그냥 걷어차 버리겠는가? 남작의 애원이 잘 먹혀 들어가 뇌물까지 받칠 경우 - 애원을 안 들어주는데 뇌물은 꿀꺽 하지는 않겠지 - 그 용도를 설명하는 사람은 꼬옥 타이거 상회 사람이어야 했다. "우리 상회 입장으로써는 나쁘지 않아. 어차피 앞으로 타이거 상회에서는 서대륙 제품을 많이 판매하게 될 거라고. 그러면 서대륙 출신의 사람이 우리 상회 대표로 간다면 '타이거 상회 = 서대륙의 물품을 판매하는 가게' 라는 이미지가 콰악 박히게 될 거야. 게다가 서대륙 인이라면 신기해서라도 쉽게 만나줄 지 누가 알아?" 벨타이거의 말에 토냐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어서 선애를 보내는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 했다. 상인의 입장에서 이미지를 콰악 박히게 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장점이란 말인가? 게다가 나쁜 이미지도 아니고 상회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니 금상 첨화였다. "그거 멋지군. 비록 난 상인이 아니긴 하지만, 내가 들어도 꽤 그럴사해. 거기다 선애양과 함께라면 나도 좋지." 헤스딩스 남작까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흠, 저 벨타이거 녀석 가끔은 꽤 괜찮은 말을 한단 말이야? 하기야, 그런 게 아니었으면 선애를 여기 있게 하지도 않았지.' "남작님께도 몇 가지 당부를 드릴께요." 그래도 이들 중 중앙 귀족들을 많이 겪어본 토냐가 헤스딩스 남작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줬고, 남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며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에스테반 공작은 이 나라의 정사에 관여 안 하고 자신의 영지에 콕 박혀있는, 단순하게 뜻만 따지자면 지방 귀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난다 긴다하는 중앙 귀족들 중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에스테반 공작가가 거의 왕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왕가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 그의 영지가 바이런 국 전체의 1/10 정도의 크기라 귀족들 중에서 가장 크다는 것도 그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들이기는 했지만, 가장 큰 요인이라면 그와 그의 휘하 기사단에 있었다. 이 나라 제일의 기사단이라고 하면, 물론 왕족과 왕실을 수호하는 왕실 기사단이기는 하지만, 유일하게 그 명성과 맞먹는 기사단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에스테반 공작가 기사단인 것이다. 뭐, 건국 공신인 초대 에스테반 공작이 '바이런 국 제 일의 기사'란 명예로운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대대로 지금까지 지킬 수 있었던 건 후인들이 게으름 부리지 않고 선조의 명예를 지키고자 계속해서 노력한 덕일 것이다. 현 에스테반 공작 또한 이 나라 제일... 은 아닐지라도 손꼽히는 검술의 대가라 불리고 있다니 말이다. 그런 에스테반 공작가의 영지는 알파두르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헤스딩스 남작 영지가 에스테반 공작가의 변경 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에스테반 공작가의 영지가 얼마나 넓은지 그 영지의 경계점이 바이런 국 3개의 커다란 강 중 두개인 재클리 강과 세라핌 강이었다. 그러니까 전에 선애가 수도로 가기 위하여 알파두르에서 재클리 강을 건너 쭈우욱 말을 타고 내려오다 세라핌 강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수도로 가지 않았던가? 선애가 말을 타고 온 그 길이 모두 에스테반 영지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사실, 거리상으로만 따져본다면 헤스딩스 남작 저택과 에스테반 공작 저택의 거리가 알파두르 도시와 에스테반 공작 저택의 거리보다 더 가까웠다. 그러나, 헤스딩스 남작 영지와 에스테반 공작 영지 사이를 직통하는 도로가 없는 대신 알파두르와 수도간의 도로는 잘 닦여 있었기에 이동 속도를 높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동 기간도 길지 않았고, 잘 닦인 도로를 달려 오느라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거기다가 헤스딩스 남작이 출발하기 전 미리 공작가에 '뵈러 가겠습니다. 꼭 만나 주십시오.' 라는 통지를 미리 보냈기 때문에 공작가에 도착하자 오래 기다리지 않아 남작은 공작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물론 선애는 공작가에 받칠 뇌물과 그것을 관리하는 몇몇 상회 사람들과 함께 '대기실'용도로 만들어진듯한 응접실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그럼, 내 다녀 오겠네." "잘 다녀 오세요. 토냐씨가 말한 것 확실하게 기억하고 계시죠?" "물론." "힘 내세요. 다 잘 될거예요." 긴장된 얼굴로, 이번에 경매에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명검과 드워프 장로가 만들어준 명검, 이렇게 두 자루를 손수 챙겨 든 남작이 선애의 격려를 받으며 응접실을 나서자 방 안은 조용해 졌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상회 사람들은 그래도 높은 상관인 선애와 한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한 듯 선애가 앉은 소파와 조금 떨어진 곳에 저희들끼리 모여 서서 속닥 거리고 있었고, 선애 옆에는 이제는 선애의 그림자라고 불려도 손색 없을 소피만이 있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리기 시작하는데, 어째 기다리는 동안 먹으라고 이 저택의 시녀들이 가져다 준 차와 다과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먹다가 결국 다 먹어버리는 동안 기다리던 소식이 안 오는 것이었다. 그에 슬슬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선애 덕분에 나까지 덩달아 초조함을 느꼈다. [저기, 내가 한번 살펴보고 볼까?] 그리고 그 기분을 이기지 못한 내가 슬며시 제안을 하자 선애의 눈이 빛난다. 어째서 그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하느냐고 말하는 듯 하다. 뭐, 내가 일부러 그랬남? [음... 그럼 갔다 올께.]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내가 몸을 날려 그 응접실을 벗어나려는 순간, 응접실 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그 틈사이로 자그마한 머리 두개가 빼꼼히 솟아난다. [응?] "있어?" "응." "어디 어디?" "저어~기." "아, 정말..." 조금 큰 머리와 조금 작은 머리. 조금 큰 머리는 남자아이였고, 조금 작은 머리는 여자아이 머리였다. 있냐고 물어본 아이가 여자아이, 있다고 대답한 아이가 남자 아이였다. 둘이 혈육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밝은 군청색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두 아이 중 남자 아이는 이제 대략 8, 9세쯤 되어 보였고, 여자 아이는 4, 5살 정도로 보인다. "도련님, 이러시면 안돼요." "아가씨이~~" 그 뒤에서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시녀 둘이서 안절부절 못하며 뭔지 모르지만 그 두 아이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그 두아이는 콧등으로 안 들은 채 계속 안을 들여다보더니 곧 결심한 듯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 손을 잡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응접실 문이 열렸을때부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애들을 주시하고 있었던 터라 별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들어온 사람이 왠 앙증맞은 남자, 여자 아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두 아이가 들어오자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시녀들도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얼른 뒤쫓아 들어온다. 그렇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두 아이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그 애들을 빤~ 히 바라보고 있는 선애에게 도도도 하며 다가가더니 남자아이가 다짜고짜로 묻는 거였다. "여자야, 네가 서대륙 인이냐?" 그에 선애가 기가막혀 하는 표정으로 대답은 하지 않은 채 그 애를 바라보고만 있자 남자애가 고개를 갸웃 하더니 다시 물어온다. "왜 대답이 없느냐? 아, 우리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가?" "아니... 그게..." 그에 선애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불안한 표정으로 두 아이 뒤에 서 있던 시녀가 다부진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이 분이 뉘신줄 알고 그렇게 당당히 앉아 대답을 하려는 건가? 이 분은 에스테반 공작가의 장자이신 마틴 에스테반 공자님이시다! 어서 예를 갖추지 못하겠는가?" 그에 한쪽 구석탱이에 몰려 있던 상회 사람들이 얼른 허리를 숙였고, 선애도 무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소피의 이끌림을 따라 소파에서 일어나 살짝 무릎을 굽혀 보였다. "이름 높으신 에스테반 공자님을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러나 이 꼬맹이는 그 인사를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놀랍다는 듯 입을 헤 벌렸다. "우와... 우리나라 말을 잘 하잖아?" "이래뵈도 바이런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몸이랍니다." "그으래? 너 이름이 뭐지?" "선애라고 합니다." "서내? 스내?" "선.애." "아하, 선.애. 이름이 참 신기하네. 그게 너희 나라 이름이냐?" "그렇습니다. 제가 있던 나라에서는 별로 신기한 이름은 아니지요." "오오... 너, 너희나라 말 좀 해봐라. 한번 들어보고 싶구나." 그에 선애가 생긋 웃으며 한국말을 아주아주 부드럽게 내뱉았다. "/이러언~ 네가지를 팔아먹은 녀석 같으니라고. 내가 니 친구냐, 임마? 어디서 쬐끄만게 어른보고 이래라 저래라 반말이야? 생각 같아서는 엉덩이라도 몇 대 때려주고 싶구만./" 그러나 이 장소에서 저 말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웃어봤자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선애 뿐이라 나는 마음 놓고 배를 잡고 웃었다. [파하하하하~~] 그런데 그때, 공자에게 손이 잡혀 같이 들어온 여자 아이가 공자의 손을 잡아당겼다. "오빠, 나도 한번 말해볼래." 그 여자 아이가 바로 현 에스테반 공작이 무지 애지중지 한다는 공녀, 아사벨라 에스테반인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 오빠의 허락이 떨어지자 꼬마 공녀는 냉큼 선애 앞으로 다가가더니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리 앉아봐, 응?" 그에 선애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높이를 맞춰주자 공녀가 무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선애의 볼과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린다. "우와... 되게 신기해. 너 피부가 왜 이런 색이야? 우왓... 눈도 까매." 한국인의 눈동자야 아기였을때는 동공이나 검은자나 모두 까맣지만, 성인이 되어갈수록 갈색이 섞여 좀 진한 고동색 정도로 변한다. 그런데 울 꼬맹이는 좀 특이한 체질인지 눈에 갈색이 거의 섞이질 않아 여전히 검은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완전히 검은 건 아니라 밝은 빛 아래에서 보면 동자와 확연히 구분 되었지만, 약간 어두컴컴한 실내라던지 밤에 보면 그냥 다 검게 보일 정도였다. 이 세계에서 내가 본 눈동자중 가장 진한 색이 갈색이였는데, 그래봤자 한국인에 비하면 밝은 색 계통이라 선애의 눈동자를 신기해 하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울 꼬맹이의 피부색을 이야기 하니 선애의 이마에 빠직 하고 힘줄이 돋았다. 울 꼬맹이는, 이게 유전자 탓인지 아니면 겨울에 태운 건 절대로 하얀 색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던데 초등학교때 겨울 방학때마다 스케이트를 배우게 한 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피부가 검은 편이었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검은 피부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피부색 이야기에 굉장히 민감해 했다. 그러나... 지금 울 꼬맹이는 약자의 입장이었기에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이려 하느라 입꼬리가 푸들푸들 떨렸다. "너, 정말 다른 나라에서 왔니?" "예." "그래? 그 나라 사람들은 다 너처럼 생겼어?" "그렇습니다. 모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지요." "얼굴 색도?" 거기에서 선애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뾰족 솟아 올랐지만, 선애는 간신히 간신히 미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 뭐, 볼이 좀 떨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으으음... 그, 그렇지요오오..." "옷도 신기해. 이게 그 나라의 옷인가?" 사실, 선애는 서대륙의 신비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일부러 진 나라에서 사온 비단 옷에 진 나라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제 나라 옷은 아니지만, 서대륙의 옷은 맞답니다." 선애의 말에 여자 아이가 신기하다는 듯 옷자락을 조물락 대보기도 하고 옷에 달려 있는 장신구들도 만져보기도 하면서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남자 아이는 처음에는 얼마쯤 신기해 하다가 그게 곧 시들해진 표정이다. 그걸 놓치지 않은 선애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사실, 공자, 공녀님께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뭐? 서대륙 물건이냐?" "서대륙에서 가지고 온 게 아니라, 여기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만..." "뭐? 에이..." 그 말에 남자 아이가 실망감을 드러내 보이자 선애가 고개를 살짝 갸웃 하며 말했다. "관심 없으십니까? 그래도 제가 제 고향에서 봤던 걸 드워프들께 말씀 드려서 만든 것입니다만... 관심 없으시다면... 공자님 선물은 그냥 가지고 가야겠군요. 공녀님께서는 어떠세요?" 그 말에 여전히 선애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던 여자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난 볼래, 난 볼래." "그럼, 공녀님 선물을 먼저 보여드릴께요." 그렇게 말하며 선애가 손짓 하자 한쪽 구석탱이에 존재감 없이 가만히 있던 상회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재빨리 선물 꾸러미 안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서 가지고 왔다. 크기가 선애 몸통 만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 상자를 받아 든 선애가 소파의 탁자에 올려 놓고 열자, 그 안에는 망가지지 않게 가득 담아 놓은 솜 틈새로 멋드러진 황금색이 빛을 번쩍였다. 마치 새장 모양처럼 생겼지만, 가느다란 창살 대신 사방에 틈새가 하나도 없었다. 대신 꼭대기에 둥근 고리가 달려서 들고 다닐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었지만, 척 보기에도 귀중품으로 보이는데다 너무 크고 무거워 보여 쉽게 들고 다닐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공녀님, 여기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답니다. 자, 이게 바로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 이지요." 나무 상자 한쪽 구석에 고이 붙어 있는 나무 곽을 선애가 꺼내 공녀에게 보여준다. 그건 마치 학교 다닐때 가지고 다녔던 숟가락통처럼 생겼는데, 그 통 뚜껑을 열자 안에는 아름다운 황금 열쇠가 들어 있었다. 손잡이 부분은 세 잎 클로버 모양이었는데, 각각의 잎에는 자그마한 사파이어 세개가 박혀 있었고, 둘레에는 덩쿨 같은 무늬가 양각 되어 있었다. 뭐, 열쇠 자체는 단순히 사각형에 틈 몇개를 내 놓은 모양이었지만, 그게 아니라 해도 공녀에게는 충분히 예뻐 보이는 모양이다. "이건,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 보이시죠?" 그렇게 선애가 가리키는 세잎 클로버 중 가운데 잎사귀에는 정 가운데 구멍이 뚤려 있었다. "여기에 줄을 끼워 목에 걸고 다닐 수 있답니다. 이렇게요." 물론, 줄도 우리가 미리 준비해 온 금줄이었다. 선애가 줄을 끼워 목걸이로 만드는 시범을 보이자 공녀가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하지만, 공자는 열쇠로 목걸이를 만드는 것 보다는 커다란 황금 상자 안의 비밀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뭐야, 그건 대충하고 빨랑 이거나 열어봐? 어떻게 여는 거지?" 이미 황금 상자를 만지작 거리면서 돌려봤지만, 도통 어떻게 여는 건지 모르겠는 모양이다. "설마, 이 자체가 끝이라는 건 아니겠지?" 비밀을 슬그머니 들먹이자 처음에는 시큰둥 했던 공자도 그 비밀이라는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물론 보여 드려야죠. 자, 공녀님. 이건 공녀님 선물이니 한번 직접 해보시겠어요? 이건 이 열쇠로만 열 수 있답니다." 선애가 그리 말하자 공녀의 고개가 몇 번이고 끄덕여진다. "응, 응. 내가 할래." 그 공녀의 모습이 귀여웠던지 주변 사람들이 다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 그럼 열쇠로... 여기 이 구멍 보이시죠?" 황금 상자 안의 아랫쪽, 세공 덕분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열쇠 구멍을 가리키며 공녀의 손을 이끌어 열쇠를 끼워주고 돌려주기까지 했다. 그러자 딸깍~!! 하는 장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자 선애는 상자 맨 위에 있는 고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 겉에 있던 화려한 황금 세공 상자는 단순한 뚜껑이었는 듯 그것이 밑단과 분리되어 벗겨져 나가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우와아아~~!!" 그건 공녀와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멋지지요? 하지만, 이건 이게 끝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지요. 공녀님, 이번에는 이쪽이에요." 그리고 선애가 다시 황금 열쇠를 쥔 공녀 손을 이끌어 다른 쪽에 만들어져 있는 구멍에 열쇠를 끼우고 돌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번만 돌리는게 아니라 여러번이나 돌리자 사람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어린다. 공녀와 공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공자가 짜증을 냈다. "이봐, 언제까지 돌리는 거야? 그거 왜 자꾸 돌아가는 거지?" "공자님, 비밀을 알려면 인내심이 필요한 거랍니다. 이번에는 여러번 돌려야 해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돌리는 동안 다 돌아갔는지 더 이상 열쇠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 자리는 바로 태엽이었던 것이다. 그걸 움직이지 못하게 꼭 잡은 선애가 주변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자, 그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열쇠를 쥔 손을 떼자, 그 열쇠가 저절로 돌아가기 시작하더니만 그 위에 있던 아름다운 유리 세공 말들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멜로디가 들려왔다. 따란 따라라~ 따라라 따라라 따라 라라라 따라라~~ 곡명은 그 유명한 '할아버지의 시계' 간단하면서도 너무 아름다운 멜로디였기에 내가 선심 써서 드워프에게 알려줬었다. 그랬다. 공녀의 선물은 바로 회전 목마였던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비싼... 회전대 위에서 돌아가는 말들은 모두 유리 세공품으로 만들어졌다. 그것도 하나 하나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서 모두들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중 마차도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여성과 남성이 타고 있었고, 마차 앞에는 마부까지, 주위에는 호위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모두 유리 세공품이었다. 그리고 그 말들을 잡고 있는 대나 밑받침, 윗 천장들은 모두 황금이었고,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공이 되어 있었다. 말들의 눈이나 안장, 말 고삐들은 자그마한 보석들이었고, 마차 테두리 등등도 황금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름다운 유리 말들이 음악에 맞춰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돌아가자 사람들의 입이 떠어억 벌어졌다. [우후후... 놀랬을 거다.] 이거 만들게 하느라 선애와 내가 엄청나게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놀란 표정을 보니 흐뭇한 것이, 그 동안 고생한 보람이 엄청나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틴, 아벨!"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여성의 고운 목소리에 시선이 자동적으로 그쪽으로 돌아갔고, 응접실 문 앞에 서 있는, 고급 + 우아 한 차림의 여성의 모습을 보자 아이들을 따라왔던 시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꾸벅 허리를 숙인다. "마, 마님!" "어, 어머니." 그녀가 바로 현 에스테반 공작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낯선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함부로 가지 말라고 한 걸 잊었니? 거기에 호위 기사도 없이 달랑 시녀 둘만 데리고!" 그녀의 말에 마치 반응이라도 하듯 문 안으로 공작가 기사 다섯이 우르르 들어와 우리들을 둘러쌌다. "어, 어머니... 그, 그게... 우리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해서..." 역시 공자도 어린애는 어린애였던 모양이다. 엄한 표정의 공작 부인에게 찔금 했던지, 그가 우물쭈물하는데, 오빠를 구원하려는 것일까? 꼬마 숙녀가 당당하게 나섰다. "엄마, 나 이거 가질래! 나에게 줄 선물이라고 했으니 내가 가질 거야." "아벨... 사람이 준다고 해도 아무거나 덥썩덥썩 받아서는 안돼요." "싫엇! 이거 좋단 말이야." 딸내미가 볼을 부풀린채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탁자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자 - 시녀가 몇번이나 그녀를 데리고 공작 부인에게 가려고 했던 것이다. - 공작 부인이 궁금해졌던 모양이다. "도대체 뭔데 그러니?"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느라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람들이 길을 내준 덕에 볼 수 있게 된 그녀 역시 회전 목마를 보자마자 눈을 둥그렇게 뜨며 감탄사를 흘렸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도대체 뭐라니? 이 음악이 여기서 나오는 거였구나. 어쩜... 이렇게 예쁜 음악 소리가 있었다니..." "예쁘지? 예쁘지? 응? 이거 내 선물이래." 회전 목마의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던지 공작 부인은 자랑스레 대답하는 딸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멜로디에 맞춰 경쾌하게 돌아가는 아름다운 유리 말들의 모습을 눈으로 쫓느라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작 부인이 온 뒤 곡이 한번 더 돌아간 뒤에는 점점 회전목마가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멜로디도 회전 목마도 멈춰 버렸다. 태엽은 무기한 원동력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공녀는 물론 공작 부인이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공작 부인은 놀란 목소리로 물어봤지만, 공녀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해져서는 선애를 돌아보는 거였다. "뭐, 뭐야, 이거? 왜 그래?" "힘이 다 빠져서 그래요. 힘을 다시 채워주면 또 다시 돌아가게 되죠." "힘? 힘을 어떻게 채워주는데?" 공녀가 고개를 갸웃 거리자 선애가 웃으며 여전히 태엽에 꽂혀 있는 열쇠를 가리켰다. "이거 말이에요. 제가 아까 몇번이고 돌렸지요? 그게 이 녀석에게 힘을 채워주는 거거든요. 열쇠가 안 돌아갈때까지 계속 돌려주면 돼요. 이렇게요. 그럼... 다시 돌아가지요?" 선애가 열쇠를 두어번 돌리고 손을 놓자 다시 회전 목마가 돌아갔지만, 예전만 못하고 느릿느릿 거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려?" "제가 끝까지 안 했기 때문이에요. 끝까지 돌려주면 원래대로 돌아와요. 단, 이 열쇠로만 돌릴 수 있으니까 이거 잊어버리시면 안돼요? 아, 저기... 음... " 선애가 다 돌아가 멈춰진 태엽에서 열쇠를 꺼내 황금 상자 뚜껑을 닫아 다시 잠근 후 공녀에게 돌려주려 하다가 옆에 있던 공작 부인의 눈치를 슬며시 보며 머뭇 거린다. 그에 이 공녀, 눈치가 무척이나 빠른 꼬맹이였던지 얼른 엄마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엄마, 엄마, 엄마아아~~ 나 이거 가지고 싶어어요오~~ 웅?" 눈치만 빠른게 아니라 영악하기도 하다. 어느새 존대에 애교까지 부리다니. 그러나 공작 부이는 그런 딸이 예쁘기만 한지 너그러운 표정이 되어 딸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선애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구지?"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는 이번에 헤스딩스 남작님과 같이 온 타이거 상회 사람들입니다. 이 것들은 모두 남작님께서 공작 각하를 위하여 특별히 주문하신 드워프제 물품이옵니다." '드워프 제'란 말에 공작 부인이 납득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이렇게 신기하고 멋진 제품이구나...'하는 표정이다. '이것에 대한 아이디어는 나에게서 나왔다는 걸 저 아줌마는 알라나 몰러. 쩌비...' "그랬군. 어쩐지 정말 대단한 물품이다 생각 했어. 이거 이름이 뭐지?" "'회전 목마'라고 합니다. 이번에 저희 상회에서 새로 선보일 물품들 중에서도 특별히 제작한 것들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시면 저희 상회 사람을 불러주십시오. 이런 것 말고도 여러가지를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공작 부인이 아쉬운 표정으로 줄까 말까 갈등하고 있을때 선애가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아랫사람의 부탁은 들어주지도 않는 주제에 뇌물만 꿀꺽 하는 나쁜 귀족도 가끔 있는 모양이지만, 천만 다행이도 이 공작은 그래도 제법 사리분별이 있는 귀족이라 했다. 그래, 만약 남작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 물품들도 도루묵이 될테니 공작 부인이 딸에게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어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난처함을 표했던 것이다. 자기가 덥썩 받았다가 공작이 부탁을 거절하기라도 하면 공작 마음이 안 좋을테니 말이다. 공작 부부 간에 금술이 제법 좋다고 하고, 이 부인도 괜찮은 귀족이라 하더니만 여러가지로 생각을 해주는 모양이다. 그런 틈에 선애가 은근슬쩍 '앞으로 이런 제품을 우리 상회에서 판매할 것이다.' 라고 선전을 하니까 공작 분인의 얼굴이 밝아진다. 이걸 물려도 나중에라도 자신이 사면 될테니까 말이다. "자네 상회는 드워프와 거래를 하는 모양이군?" "물론입니다. 드워프와 거래는 물론이거니와 서대륙과도 거래를 하는 상회이옵니다." 선애의 말에 그제야 공작 부인이 선애가 독특한 외모에 독특한 차림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한 표정이다. 하기야, 그 동안은 회전 목마에 온통 신경을 빼앗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자네는...?" "예, 저는 이 나라 출신이 아니옵니다." "그랬군. 어쩐지..." 그렇게 공작 부인이 납득하고 있을때, 한쪽에 물러서 있던 공자가 슬그머니 나섰다. "으흠... 저, 저기... 아까 내 선물도 있다고 하지 않았어?" 자기가 이 곳에서 만들었다고 하니 흥미 없다고 한 주제에 회전 목마를 보고 난 뒤에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보여드릴까요?" 이때다 싶은 선애가 은근한 어조로 묻자 공자가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그에 선애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상회 사람 한 명이 부리나케 또 한 상자를 꺼내서 가지고 온다. "음... 그런데 공자님, 공자님 선물은 이 회전목마처럼 신기하게 움직이는 건 아니랍니다." 선애의 말에 꼬맹이가 실망한 표정이다. "에... 그럼 내건 뭔데?" "직접 보시겠습니까?" 선애가 건네준 것은 길이가 약 50cm 이고 넓이는 20cm 정도 되는 고급스러운 나무곽이었다. 하기야, 공작 집안에 받치는 것이니 고급스럽지 않고 우아스럽지 않은게 어디 있을까만은. 이것은 따로 장치가 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선애는 황금 열쇠를 주는 등의 부산을 떨지 않고 곧바로 나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어머나 세상에..." "우와아..." 그 안에는 우리의 특별 주문으로 제작된 모형 무기들이 붉은 빌로드 천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던 것이다. 바스타드 소드, 롱 소드, 투핸드 소드, 레이피어 말고도 에스테반 공작가 기사단이 사용하는, 공작가 문장이 들어간 방패, 거기에 여러가지 도끼에다 나중에는 에스테반 기사단용 갑옷까지 정교하게 제작되어 누워 있었다. 그래봤자 그 모든 검의 길이가 투핸드 소드만 해도 내 손의 한뼘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자그마한 보석등이 박혀서 화려하게 세공된 검집에 고이 넣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 뽑아보시겠습니까? 안전을 위하여 검날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모양만은 정말 그럴듯 하지요?" 선애의 말에 공자는 가장 끝에 있던 투핸드 소드를 집어 들어 조심스레 검집을 벗겨냈다. 그랬더니 그 안에 은빛으로 빛나는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우와아... 이거 모두 이렇게 만든 건가?" "물론이지요. 이 갑옷도 모두 진짜 갑옷처럼 분리된답니다." 갑옷은 똑바로 세울 수 있게 받침대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우와, 우와, 우와아... 이게 내 선물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공자님은 에스테반 공작가의 혈통을 타고 나셨으니 검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해서 드워프들에게 특별히 주문한 거지요. 공녀님께 드리는 선물이야 같은 종류를 저희 상회에서 앞으로 판매 하겠지만, 이건 그렇지 못하답니다. 드워프 마을에도 없는 거구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이거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랍니다." "우와아아..."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란 말에 공자의 입이 양 옆으로 쫘아악~~ 벌어졌다. "이, 이게 내거라구?" "정말 멋진 선물이구나, 마틴." 공작 부인의 다정한 말에 남자 아이가 양 볼을 붉게 물들이며 얼른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너무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작 부인의 눈이 어떤 결심을 한 듯 굳는다. 아무래도 왠만한 부탁이면 들어주라고 공작에게 강력하게 주장할 것 같다. 하지만, 천만 다행이도 헤스딩스 남작 또한 자기 선 안에서 목적을 무사히 달성하고 있었다. 공작 부인이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 있을때, 방으로 우리 일행을 데리러 온 시종이 왔고, 우리가 그것 말고도 공작에게 받칠 짐을 꾸려 시종을 따라갈때, 그 뒤를 공작 부인이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쫓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있던 곳 보다 좀 더 화려하고 넓은 응접실에 가자 그 곳에서는 눈이 벌겋게 퉁퉁 부은 헤스딩스 남작이 우리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토냐의 조언이 잘 맞아 떨어진 모양이다. 공작이 다행이 괜찮은 귀족이라는 정보를 얻자마자 토냐가 해 준 조언이란, 우선 가자마자 아무 말 없이 검을 받치라는 것이었다. 절대로 '이 검을 드릴테니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라는 기색을 내비쳐서는 안 된다는 것. 공작 같은 귀족은 들어줄만한 부탁이면 당연히 들어줄텐데, 이걸 무시하고 마치 상인처럼 거래를 하려 하는 아랫사람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계속 공작가 그늘에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쫓겨도 좋을테니 이번 딱 한번만 자신의 딸을 보호해 달라고 하라는 것이다. 대단한 사람과 결혼 시키는 것 보다는 돈이 적고 대단하지 못한 가문 사람이라 해도 딸을 정말로 사랑해주는 사람과 결혼 시키고 싶다는 말을 꼬옥 넣으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도 공작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며 눈물로써 호소하라고 했던 것이다. 공작 또한 애지중지하는 딸이 있으니 그렇게 하면 분명히 마음이 동할 거라고 말이다. 눈이 팅팅 부은 거 보니 정말 울면서 애원한 듯 싶었다.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척척 진행 되었다. 공작은 부탁을 들어주는 마당에 정말 감사하다면서 헤스딩스 남작이 받치는 뇌물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공작 부인과 아이들은 무지 좋아라 했다. 아이들의 선물 말고도 선풍기와 괘종 시계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괘종 시계도 태엽으로 돌리려고 했는데, 그 보다는 좀 더 비싸기는 하지만 편리하게 마법석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것이 태엽보다 더 오래 갔기 때문이다. 물론, 건전지처럼 일년에 한번 정도 갈아줘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괘종시계는 선애가 - 물론 그 뒤에는 내가 - 주문한 것을 만드느냐 따로 많은 시간을 내지 못한 드워프들이 차마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틈이 없어서, 그들이 미리 만들어 놨던, 매 시간마다 일곱 드워프가 나와서 즐겁게 일하고 노는 괘종시계를 눈물을 머금고 내줬다. 뭐, 다른 건 둘째치고 드워프들이 음악에 맞춰서 움직이니까 애들이 너무 좋아해서 딴 거 말고 이걸로 가지고 오기를 무지 잘한 듯 싶었다. 그리고, 선애가 "망가지면 언제든지 가지고 오십시오. 수리해서 드리겠습니다." 하는 말에, 공작 부인의 배려(?)로 공작의 영지 큰 도시 세 군데에서 우리 타이거 상회 지부와 가게를 열도록 허락 받을 수 있었다. 뭐, 공작의 그늘 아래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어 만족하기로 했다. 남작은 딸을 사랑하는 그 절절한 마음이 공작의 심금을 울렸는지, 공작이 계속 자신의 가신으로 받아주겠다고 했단다. 그러니 헤스딩스와 친하게 지내면 그 덕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번 생각해 봤다. 마지막으로, 공작 부인이 회전 목마와 괘종 시계를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 회전 목마와 선풍기, 괘종 시계를 특별 주문했다. 자신들에게 준 것 못지 않게 잘 만들어 달라면서 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을 얼마 후 있을 왕비의 생일 파티때 그녀에게 생일 선물로 주겠다는 것이다. 왕실에 선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중앙 귀족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이 될 것이니 우리 상회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많은 것을 얻고 기분 좋게 돌아오는 길의 마차 안에서 선애는 소피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번에 정보 길드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거든.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예." 공작가의 어린 자녀들이 선애가 있는 응접실에 찾아온게 우연이라 생각 하는가? 그건, 혹 헤스딩스 남작이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우리가 미리 깔아놓은 포석이었다. 공작가에 들어가 있는 정보 길드원에게 어린 공자와 공녀의 귀에 서대륙인이 왔다는 이야기가 들어가게끔 하라고 지시를 내려놨던 것이다.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서대륙인이 왔는데, 되게 신기하게 생겼더라... 등등의 말을 어린 아이들에게 흘린다면 호기심 왕성한 그 나이에 가만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호위 기사도 없이 시녀만 데리고 어머니 몰래 공자가 공녀를 데리고 살금 살금 선애가 있는 응접실에 온 이유었던 것이다. [후후후, 그 계획, 정말 멋진 거 같아.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잘 풀렸잖아? 앞으로도 모든 일이 그렇게 잘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Me Too" "예? 선애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응, 아니... 그냥 혼잣말." 제 36화 가장 큰 변수가 되리라 생각했던 에스테반 공작가 방문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헤스딩스 남작의 표정은, 마음만으로도 가능하다면 하늘을 둥둥 떠서 다닐 것만 같았다. 하기야, 그에게서 가장 큰 근심거리였던 딸의 혼사 문제를 이제는 무사히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게다가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딸을 생각한 일이 성공을 거둔거라 나까지 덩달아 흐뭇해졌다. 그런데 울 꼬맹이는 왠지 별로 기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물론, 에스테반 공작가를 나설때는 선애 또한 헤스딩스 남작 못지 않게 환한 표정이었는데 하루, 이틀 지나니까 어째 얼굴에 점점 그늘이 지는 것이었다. 선애에 대한 일을 모든지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하는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얘가 갑자기 기분이 저조해진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 결국 나는 스스로 해답 찾는 걸 포기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왜 그래? 왜 갑자기 저기압이야? 모든게 잘 풀렸잖아? 아, 혹시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들어올 태클을 벌써 걱정하는 거야?] 선애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사서 걱정하는 경향이 좀...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학교 다닐때 시험기간이 되면 미리부터 시험 못 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바람에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혹시 그런게 아닌가 싶어 물었더니만, 의외로 선애가 부정한다. "/아냐./"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는데?] "/몰라도 돼./" 이 녀석이 확실히 꼬였다. [알면 안돼냐?] "/아씨... 뭘 그렇게 알려고 그래?/" 내가 끈질기게 물으니까 선애가 왈칵 짜증을 냈다. 평소같으면 선애의 성질을 안 건드리고자 이쯤에서 물러났을테지만, 선애가 저기압이니 같이 가는 사람들이 선애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신경쓰는게 눈에 보이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작이야 기분이 허공을 둥둥 날아다니느라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선애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아무래도 신경쓰이지 않겠는가. [네가 갑자기 저기압이니까 그렇지. 상회 사람들이 네 눈치 보느라 몸 사리는게 눈에 빤히 보이잖아. 도대체 왜 그래?] 내가 평소같지 않게 계속 달라붙는데다 아랫 사람들까지 들먹이자 선애가 불퉁한 표정이면서도 더 이상 짜증을 내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있어./" [내가 해결 해줄 수 없는 거야?] "/어엉./"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대답하는 목소리 톤이 한 층 올라갔다. [나원 참... 도대체 뭐길래 그런대... 어쨌든, 너무 가라앉아 있지 마. 같이 가는 사람들 불편하잖아.] 그에 더 이상 묻지는 못하고 나는 그냥 가벼운 충고 정도로 끝내며 뒤로 물러났다. 대신 선애를 평소보다 더 세밀하게 주시했다. 그러자 발견한 건데, 선애가 평소에도 기분이 저조하지만 헤스딩스 남작을 볼때는 그게 더 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봐, 헤스딩스 남작이 너에게 잘못한 거 있수?] 내 질문에 선애가 황당하다는 듯 날 바라본다. "/언니가 보기에는 있는 거 같아?/" [아니.] "/그런데 왜 물어?/" [네가 남작을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니 그렇지. 그래서 나 모르게 남작이 너에게 잘못한 거 있나 하구...] 그렇게 말하며 선애를 주시하고 있자니, 선애 녀석이 분명 움찔 한게 보인다. 자기는 안 그런 척 하는데, 분명히 '헤스딩스 남작을 볼때 기분이 나빠졌다'는 말을 할때 깜짝 놀랐었다. "/내가 언제?/" [에에~~ 네가 안 그랬다구?] 내 말에 선애가 날 찌릿 하고 노려본다. 하지만 내가 당당하게 마주보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말하기 싫냐?] "/에잇... 그냥 별거 아니야./" [말하기 싫으면 말구.] 선애가 불퉁하니 고개를 홱 하니 돌리기에 나는 이번에도 틀렸나... 하는 생각에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꼬맹이가 대답해주는 것이다. 물론, 부루퉁한 어조였으니 말이다. "/그냥... 우쒸... 오랜만에 아빠랑 엄마가 생각 나서 그랬던 것 뿐이야, 뭐.../" 선애의 말에 나는 움찔 거렸다. [아빠랑 엄마?] 되 묻는 내 말에 선애는 날 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 나더라구./" 딸내미를 위하여 갖은 애를 쓰는 남작을 보다가 부모님을 떠올리는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지만, 울 꼬맹이가 이야기 하니 가슴이 짜안~ 했다. 선애 또한 내가 이럴 걸 알고 아무말도 안 하려고 했나보다. '짜슥...' [보고싶냐?] "/가끔... 언니는 안 그래?/" [너 보느라 바빠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내 말에 선애가 코웃음을 친다. "/하기야, 언니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잖아./" 그 말에 나도 움찔 하기는 했지만, 울 꼬맹이도 지가 말하고 지가 놀라버렸다. "/아, 아니... 그게.../" 그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건 아닌데. 하늘을 봐도 엄마랑 아빠가 하늘에서 손짓 하는 모습은 안 보이던걸?] 내 말에 선애가 고개를 팩 돌린다. "/쳇.../" 뭐, 선애와 나를 뜨금하게 만든 대화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대화 이후 선애는 마음이 좀 풀릴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여전히 허공을 붕~ 뜬채인 남작과 그나마 조금 기분이 풀린 선애가 알파두르에 도착하자 삼각 붕대를 맨 벨타이거가 둘을 맞이했다. "아하하... 표정을 보아하니 일이 잘 된 모양입니다." "어허허허... 자네가 많이 도와줘서 그렇지. 그 동안 정말 고마웠네." "그 무슨 서운한 말씀을요. 일이 잘 풀렸다니 저도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래, 자네도 그 동안 마음 고생이 많았지? 그건 그렇고, 그 팔은 또 왜 그런가?" 남작이 천 매듭을 목 뒤로 묶어 팔을 고정시키고 어깨를 편하게 한 모습을 가리키며 묻자 벨타이거거 어색하게 웃는다. "아하하... 이거 참, 말씀드리기 창피한데요... 요즘 저희 상회 일이 너무나 많아서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만... 졸다가 계단에서 굴렀지 뭡니까? 그래서 어깨 뼈가 좀 부러졌습니다. 뭐, 토냐가 있어 금방 치료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당분간은 이러고 있는게 안전하다고 해서요. 통증도 거의 없고 움직이는데 무리도 없는데 괜히 폼만 잡고 있는 겁니다."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의 상황을 알고있는 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귀에도 그의 말은 핸들리 혹은 그의 숙부에게서 한번 더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으로 들렸다. 그래도 이번에도 무사히 위기를 넘긴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걸 알리 없는 헤스딩스 남작은 벨타이거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표정이었다. "저런... 그러기에 좀 쉬엄쉬엄 하지 그러나. 아무리 젊었다고 해도 몸을 혹사시키면 나이 들어서 고생이네. 나이 많은 사람의 충고는 진지하게 듣게." "하하하... 저도 그러고 싶은데 상회의 일이 부쩍 많아져서요. 지금은 제 몸이 두개였으면... 하고 바란다니까요." "그래도 그건 기쁜 소식이구먼. 상회 일이 잘 풀리니 일이 많아진 거 아니겠는가?" "예, 다행이도 아직까지는 순탄 합니다. 그러니 제가 잠도 못자고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기껏 남작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거 제가 바빠서 제대로 된 대접도 못 해드려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어허, 그런 말 말게. 우리가 어디 남인가? 오히려 자네가 바쁠때 내가 와서 괜히 일만 더해 준것 같아 미안하이. 아아, 이런이런, 내 바쁜 사람 붙잡고 너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구만. 난 내일 곧바로 내 영지로 출발할테니 신경쓰지 마시게나. 이 소식을 또 우리 애들에게 빨리 전해주고 싶기도 하고." "물론 그러실테지요. 아, 제가 먼저 그쪽에다 소식을 보낼까요?" "아닐세. 그냥 내가 직접 전해주고 싶군. 자네는 신경쓰지 말고 어여 자네 일이나 보게. 빨리 끝내야 조금이라도 더 쉬지."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배려랄게 뭐 있겠나? 그럼 나는 이만 올라가서 쉬겠네. 아, 선애양도 나 따라 다니느라 정말 수고했네." "제가 뭘 했나요? 남작님이 다 알아서 하셨는데요. 어서 올라가셔서 쉬세요." "그래, 그래. 이거 나도 나이가 먹었는지 마차 타고 편히 온 주제에 온 몸이 쑤시는 구먼. 엣헴..." 그렇게 헤스딩스 남작이 슬며시 자리를 피하자 벨타이거가 선애를 데리고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그 곳에는 토냐와 모건이 왠 남정네 한 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선애,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제일 먼저 토냐가 성과가 궁금했다는 듯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결과를 물어왔다. 하기야, 토냐도 선애처럼 헬게르트 녀석에게 반 협박 스카웃 제의를 받고 있었으니 이번 결과를 목 빠지게 기다렸으리라. 그에 선애가 함박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성공~!! 했습니다!" "잘~ 했스~!!" "다행입니다!" 선애의 말이 끝나자 토냐가 환하게 웃으며, 모건이 살았다는 얼굴로 외쳤다. "남작님께서 말씀하시길 토냐가 말한게 모두 들어맞았대요. 아마 나중에 고맙다고 하실 걸요? 정말 공작님 다리를 부여잡고 우셨던 모양이에요." 선애의 말에 토냐가 웃었다. "세상에... 나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정말 다리 붙잡고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말야." "그만큼 절실 하셨던 거겠죠. 하여간, 그렇게 해서 회장님이 브라우닝경에게 파혼 하라는 협박을 받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거기다 더 좋은 소식은, 뇌물로 받친 우리 상회 제품에 폭 빠지신 공작 부인께서 특별 상품을 주문 했다는 것, 그리고 에스테반 공작가 영지 안에 있는 큰 도시 세 군데에 우리 상회 지부하고 가계를 열도록 허락 받았어요." "멋지십니다, 이사님. 덕분에 저는 더더욱 집에 못 가게 되었군요." 선애의 말에 모건이 막 좋아하다가 결국에는 익살맞게 울상을 지었다. "아하하하... 미안해요, 모건. 대신 회장님께 보너스 듬뿍 청하세요.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신지?" 평소 이런 자리에 같이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이 떠억 하니 버티고 있자 모건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소개했다. "이사님을 옆에서 도울 사람 입니다. 로건씨도 금방 돌아지 못할테고, 또한 돌아왔다 해도 일이 많아졌으니 비서가 또 있는 것이 좋을 듯 해서 말입니다." 모건의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와 선애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알프레드라고 합니다. 평민 출신이라 성은 없습니다." [알프레드? 알프레드라고라?] 그 이름을 들으니 예전 한국에서 봤던, 모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유명한 캐릭터가 떠올라 웃음이 비져 나올 듯 했다. 선애도 갑자기 그를 떠올렸는지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나 차마 그 앞에서 웃을 수는 없는 일인지 능력껏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 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지고 있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제법 깔끔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주변 여자들에게 은근히 호감을 살 듯 했다. 그가 인사를 했음에도 선애는 웃음을 참고 표정을 유지 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답이 나와야 하는데 침묵이 길어지자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고, 그제야 웃음을 진정 시킬 수 있었던 선애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예전에 아는 사람이랑 같은 이름이라 좀 놀랐어요. 어쨌든, 이렇게 만나서 반갑구요, 잘 부탁 합니다." 선애의 말에 그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알프레드가 여기 온 지 사흘이 되었답니다. 이사님이 안 계신데 서류는 계속 올라오고 있는 바람에 제가 마음대로 서류 정리를 시켰습니다." 모건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잘 할 수 있어요. 보니까 모건과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모건이 추천한 사람이면 믿을 수 있지요." [앗싸, 이제 일거리가 좀 줄어들겠구나!] 선애가 일하고 있는데 내가 놀 수 있을리가 없다. 덕분에 옆에서 같이 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요즘 잠이 점점 줄어든다는 이유로 선애가 잘때도 혼자 선애 옆에서 일한 적도 허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선애 비서가 한 명 더 늘었으니 유령이 된 뒤 생긴 취미를 즐길 여유가 좀 생길 듯 하다. 그 뒤 공작가에서 있었던 일을 선애가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 물론, 정보 길드 덕분에 꼬맹이들을 만났다는 건 쏙 뺐다. 그건 그냥 우연으로 치부하게끔. - 선애가 없었던 동안 상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한 후에 모건과 토냐, 그리고 새로 생긴 선애의 비서 알프레드가 일을 하려고 자리를 뜨려 하자 선애 또한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벨타이거가 선애를 붙잡았다. "아, 잠깐만 선애, 좀 물어볼 게 있어." "에? 그래요?" 그렇게 선애가 멈칫 하며 자리에 다시 앉는 동안 사람들은 우르르 벨타이거 서재를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그들이 모두 나가고도 벨타이거가 뭔가 생각에 잠긴 채 침묵을 지키자 잠시 기다려 주던 선애가 더 이상 기다려주기 싫었던지 입을 열었다. "그... 어깨 다친거, 그냥 계단을 구른게 아니죠?" "응? 아아... 역시 그렇게 티가 났나?" 벨타이거가 어색하게 웃으며 목에 묶인 매듭이 불편한 듯 만지작 거린다. "회장님이 그렇게 얼빵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눈치 챈 거죠. 그래도 이렇게 다친 건 처음 있는 일이네요." "그게 이번 공격은 정말 위험했거든.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 그래서 생각 한 건데..." 아무래도 거기에 관련 된 이야기인가 싶어 선애가 진지하게 벨타이거를 바라보자, 이 벨타이거 녀석이 히죽 웃으며 말을 꺼냈다. "선애,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 그 말을 들은 선애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소파와 소파 사이에 놓인 탁자 위에 있던 도자기를 양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벨타이거가 사색이 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앗, 농담이야 농담. 우리 사이에 농담도 못하남?" 선애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벨타이거를 노려 봤지만 정말 집어 던질 생각은 없었던 터라 순순히 도자기를 제자리에 돌려놨다. 이거 꽤나 비싼 거라 함부로 깨뜨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나중에 물어내라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 "죽고 싶으시면 그냥 말하시지 그러셨어요. 기꺼이 손을 빌려드렸을 텐데." 선애가 매섭게 노려보며 말하자 벨타이거가 하하 웃었다. "무슨 그런 소리를... 나는 오래 오래 사는게 목적인 사람이라고." "평소 행동하시는 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내가 그랬나? 생각이 잘..." "어머, 벌써 치매기가...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으면 다시 생각날 지도 몰라요." 선애가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다시 도자기 쪽으로 손을 뻗자 벨타이거가 얼른 손사래를 친다. "그만 둬. 날 정말 죽일 생각이야?" "음... 죽으면 회장님 운이 없는 걸로 생각하죠, 뭐." "아하하... 사양할게. 그러니 그 도자기와는 좀 떨어져주지 않겠어?" 벨타이거의 말에 선애는 무척이나 아쉽다는 얼굴로 도자기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장난은 그만하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청혼을 질색할 정도로 날 그렇게... 아하하, 농담이라니까, 농담." 선애의 손이 다시 도자기를 향해 뻗어가자 벨타이거가 얼른 말을 중단하고 얼버무렸다. "한번만 더 그 농담을 하면 정말 날려버리겠어요." "예이, 예이. 음... 그런데, 아예 상관 없는 일은 아니거든?" "그게 또 무슨 소리에요?" 또 장난인가 싶었지만, 이번 어조는 정말 진지했기에 선애는 미심쩍은 얼굴이면서도 도자기로 손을 뻗지는 않았다. "그 동안은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나도 나는 좀 놀라기만 했을 뿐 상처는 입지 않았기에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생각 했지만, 이번 일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까딱 잘못 하다가는 모든게 끝장일 수 있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난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한 거야. 내가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 상회가 녀석들 손에 넘어가겠지?" 그건 그랬다. 선애가 공동 투자가이자 운영자이기는 하지만, 타이거 상회의 명의는 벨타이거 앞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만약 벨타이거가 죽으면 크로스웰 상회는 핸들리에게 넘어갈테고, 남작 작위와 타이거 상회 명의는 벨타이거의 숙부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벨타이거는 반으로 뚝 잘라지게 되지 않을까? 선애가 벨타이거 숙부 밑으로 들어가려 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난 이 상회가 녀석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확률이 있다는 것 조차 참지 못하겠어. 그래서 그걸 막을 방도를 생각한 거지." 가장 좋은 건 벨타이거가 빨리 결혼하여 자식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벨타이거가 잘못 됐을 때 작위며 명의며 모든 것이 자식에게 돌아가니 말이다. "쓸데 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회장님 상황이 안 좋다보니 쓸데 없는 말로 치부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결혼 할 마음은 있는 거예요? 난 이왕이면 클라리사가 어떨까... 싶은데..." "리사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동생 같은 존재라 그런지 지금도 전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걸. 그렇다고 작위를 지키기 위하여 조건만 맞는 아무 여자와 결혼 하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선애에게 청혼 한 건데..." 그러면서 벨타이거가 슬며시 선애를 바라보자 선애가 눈썹을 치뜨며 쓰읍... 하고 바람 소리를 낸다. "뭐, 그건 반은 농담이고... 그래서 생각한 건데... 선애, 내 양녀가 되지 않겠어?" "엑?" "선애가 나보다 어리니까 내가 양녀로 삼을 수 있잖아.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잘못 되었을 경우 내 작위와 타이거 상회 소유권, 그리고 크로스웰 상회 소유권 - 비록 명분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 을 가질 수 있어." "그렇게까지 날 죽음의 늪으로 끌어들이고 싶으세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머쓱하니 웃어 보였다. "사실, 그게 마음에 걸리기는 해." 벨타이거의 말처럼 선애가 벨타이거의 양녀가 될 경우 그런 혜택이 있지만, 그와 함께 앞으로 핸들리 녀석이나 벨타이거 숙부에게 목숨을 노림받게 된다는 악재도 따라온다. 뭐, 이 나라가 아들에게 우선권이 있지만, 여자에게 아예 아무 권리도 안 주는 건 아니라서 아들이 없을 경우 미혼의 딸, 미혼 딸이 없을 경우 기혼한 윗 딸에게 작위와 재산이 물려지긴 하니 벨타이거가 말한 방법은 괜찮은 것이기는 하다. 덕분에 선애는 귀족가의 영양이 되는 것이고, 이건 벨타이거가 결혼해서 아들만 낳으면 이에 대한 권리는 자연스레 사라지니까 나중에 벨타이거가 이 모든 권리를 못 돌려받게 될까 전전긍긍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딸을 낳는다고 해도 양녀보다는 친딸의 권리가 우선이니 말이다. 게다가 벨타이거 입장에서는 오로지 혼자 노림을 받다가 선애와 같이 노림을 받게 된다면 좀 숨통이 트이지 않겠는가. 단, 선애가 그 노림 속에서 무사히 버틸 수 있느냐는 것이 관건인데... 내 의견으로는 귀족 영양 안 되도 좋으니 제안을 거절했으면 좋겠다. 뭐, 상회가 문제가 된다면 그거야 벨타이거가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놓으면 되는 거 아닌가 말이다. '내가 죽으면 상회에 대한 모든 권리는 선애에게 넘긴다.' 라고 말이다. 선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작위를 물려주려고 해요? 딴 사람은 없었어요? 예를 들면... 아, 그래. 모건도 있는데..." 솔직히 따지자면 선애보다는 모건이 벨타이거와 더 가까웠다. 아니면, 벨타이거의 다른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크로스웰 남작가 저택 집사와 유모 사이에 태어난 잭 조셉도 있고 말이다. 그 잭 조셉은 다른 도시 지부에 가 있어 얼굴 못 본지 꽤 오래 되었다. "음... 솔직히 말해도 될까?" 선애의 질문에 벨타이거가 망설이더니만 그렇게 묻는다. 그에 선애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언제는 솔직히 말하지 말랬던가? 그랬는데 벨타이거가 불안하게 선애에게 시선을 던진다. "화... 안 낼 거지?" "왜요? 내가 화 낼 일이에요?" "아니, 화... 까지는 아니다 하더래도 조금은 서운할까봐..." "뭔데요?" "사실은... 처음에는 모건을 떠올렸었어. 그 다음에는 잭을 떠올렸고. 아무래도... 그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같이 있던 사람들이니까." 그거는 이해 하는지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들을 양자로 삼으려니 걸리는게... 우선 모건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부인에 아들까지 딸려 있잖아. 만약 모건이 목표가 된다면, 그의 부인과 아들이 제일 먼저 노림을 받을 거야. 그들이 위험해지는건... 정말 생각 하기도 싫어." 그 말에 선애가 이해 한다는 듯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건 아들이 이제 5살이 되었는데, 그 애가 위험해진다면 모건이나 모건 부인이나 얼마나 절망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하니 잭이 왜 양자의 후보에서 제외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잭의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벨타이거가 정말 친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를 절대로 위험에 내몰고 싶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따지자면, 선애는 벨타이거가 보기에 홀홀 단신인데 비빌 언덕도 있었다. "알겠어요. 나는 회장님보다 나이도 적고 홀홀 단신인데다 도움 받을 곳도 있으니까 그나마 났다고 생각한 거죠?"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때?" 그에 선애는 옆에서 보고 있는 날 한번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져 보더니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까짓거 남작 영애가 한번 되어 보도록 하죠." '아, 그러고 보니 저 목걸이... 그 동안 쓸 일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구만.' 그 목걸이는 그 싸가지 없는 렌스버리 녀석이 준 것으로 방어 마법과 공격 마법이 담긴 마법 아이템이었다. 나도 옆에 붙어 있고 목걸이까지 있다면... 좀 안심이긴 하다. 다음 날, 헤스딩스 남작은 이 기쁜 소식을 어서 전하기 위하여 한 시가 급하다는 듯 이른 아침에 저택을 빠져 나갔다. 아침을 먹을 시간이 되기도 한 두어 시간 정도 남은 시각이었기에, 벨타이거와 선애는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 집에 간다고 서두르는 헤스딩스 남작을 황급히 배웅해야 했다. 헤스딩스 남작과 그의 수행원들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잠이 다 달아나버린 일행들은 자기는 애매한 시간에 아쉬움이 섞인 쓴 웃음을 지으며 이른 식사를 하려 식당으로 향하는데 편지가 왔다. "닷지 상회군." 집사로부터 편지를 넘겨받은 벨타이거가 편지 봉투에 쓰인 발신인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한창 닷지 상회와 공동 가게를 열기 위한 계약 때문에 벨타이거가 골치를 썩고 있었다. 새로 마련할 가게 위치와 건물을 모두 흡족한 것으로 찾아내어 매수도 완료 했고 공사할 준비도 끝이 났건만, 단 한 가지 의견 때문에 아직도 닷지 상회와 완전한 계약을 못 맺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오늘 정오에 방문 하겠다는군. 아무래도 아랫사람하고 이야기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당사자가 직접 오겠대.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하는데... 점심을 과연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편지 봉투를 뜯어 안의 내용을 훑어보며 벨타이거가 입을 연다. 닷지 상회와 타이거 상회는 왠만한 건 서로 한 발씩 물러나기도 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 하기도 하면서 다른 문제들은 해결 했지만, 이 한가지 의견만은 둘 다 물러서지 않고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다. 최대한 빨리 계약을 맺고 공사에 들어가야 내년 봄에 맞춰 멋드러진 가게를 오픈할 수 있기 때문에 양쪽 상회 모두 빨리 해결했으면 하지만, 이 사안이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라 계속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안이란 바로 1층을 어느 상회의 가게로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걸로 이렇게 팽팽하게 맞설 줄 알았다면 가게를 도시 번화가 말고 변두리 쪽에 터를 무진장 넓은 곳에 잡아 단층의 평수만 무지하게 넓은 곳으로 마련했다면 좋았을 걸 그랬다. 하지만, 이미 번화가쪽에 자리를 잡아 평수를 넓히는데는 한계가 있었으니 넓은 가게 매장을 확보하려면 위로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닷지 상회와 타이거 상회가 의논한 끝에 한 상회당 매장을 2층씩 가지기로 했다. 그렇다보니 여기서 누가 상층 매장을 가지느냐 하는게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한국 백화점처럼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면야 그냥 제비 뽑기라도 하겠지만 여기는 그렇게 없으니 말이다. 하기야, 한국에서도 2, 3층짜리 상가 건물은 1층이 제일 비싸고 2층, 3층으로 갈수록 가격이 싸지는 법이었다. 여기 있다 보면 아주 재미있는 '우리 상회가 1층에 매장을 오픈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 에 대한 토의가 벌어질테지만, 아쉽게도 선애는 루빈스타인 후작가를 방문해야했다. 오늘이 바로 서대륙의 손님들이 돌아가시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선애가 에스테반 공작가에 가 있는 동안 그 손님들은 루빈스타인 상회의 가게들은 물론 타이거 상회 산하 가게들 견학을 모두 끝낸 상태였다. 그래 마지막으로 식사나 같이 하자는 초대가 들어와서 점심 전에 방문하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벨타이거와 토냐도 같이 가기로 했었지만... "이거 참... 손님들께는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드려. 마지막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는데..." 토냐라도 같이 갔으면 좋겠지만, 요즘들어 한층 더 무서워진 공격 때문에 벨타이거 곁에서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그럼 손님들 배웅에는 제가 가도록 하지요. 뭐, 그쪽에서도 중요한 손님 때문이라고 하면 이해해 줄 거예요." "가능하면 손님들이 승선 하기 전까지 끝내고 그쪽에 들리도록 하지. 그런데... 조심해야 할 거야. 여유 기간은 손님들이 돌아가실때 까지였잖아." 벨타이거가 선애 혼자 보내려니 전에 그랜트 녀석의 협박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나보다. "그렇군요. 조심할게요." "그리고..." 벨타이거는 주변을 힐끔 살핀 뒤 선애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예의 그 건은 오늘 서류 처리가 될 거야." 예의 그 건이란 선애가 벨타이거의 양녀가 되는 걸 말한다. "벌써요? 빠르네요." "빠르면 빠를 수록 좋으니까. 대신 공식적인 발표는 최대한 늦출 생각이야. 그 편이 선애가 안전할테니까. 그래도 공식 서류가 만들어진 이상 언제 어디서 알려질지 모르니까 항상 조심하고 있어." "그렇게 할게요." "그럼,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다함의 말을 통역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사함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알파두르는 바이런 국에서 상업으로 가장 크게 번성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도시를 쭈욱 둘러본 덕에 상인으로써의 혼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는지 오사함의 눈에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하하하...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 상회에서 다시 방문할테니까요." 엘리엇 녀석이 말했다. "부디 평안한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대표로 나와있던 그랜트가 마지막 인사를 하자 왕자가 답했다. "고맙소. 내 그대들에게 받은 큰 대접을 부왕께 꼭 아뢰겠소이다." 그리고서는 울 꼬맹이도 바라봤다. "타이거 상회의 제품들도 무척 인상깊었소." 하기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가지고 온, 드워프들이 만든 수박 크기만한 유리상들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보고 그들이 말을 잃을 정도였다고 하니 인상이 콱 박혔을 거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내 그대를 만난 것이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오. 앞으로도 귀 상회와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저도 그리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인사를 끝낸 왕자가 몸을 돌려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는 작은 배에 오르자 그 일행들도 뒤를 따랐다. 드워프 제품들을 그들에게 보이길 잘한 거 같다. 그렇게 말을 잃을 정도로 무척 놀란 왕자 일행은 매번 유리병들을 가지고 올때 유리병 말고 다른 제품들을 왕실에 납품하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왔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 가격을 듣고 다시 한번 말을 잃었지만 말이다. 그도 그럴것이, 향수병용의 내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작은 유리병이 아니라 앞서 말한 큰 수박 크기 정도의 제품들이었으니 당연히 가격 또한 몇 제곱으로 높아졌던 것이다. 가격에 다시 한번 놀란 그들은 그래도 제품이 너무나 탐났던지 적은 양으로 주문을 해왔다. 뭐, 이건 선애가 담당한게 아니라 나중에 다 들은 이야기지만 말이다. 한 나라 왕자 일행이 다 오르자 배는 선착장에서 멀어져 곧바로 저 깊은 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는 큰 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작아지는 배와 그 위에 탄 사람들을 부둣가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데, 그랜트 녀석이 다가왔다. "그래, 대답은?" 다짜고짜의 주어, 목적어가 빠진 질문이었지만 그가 뭘 묻고 싶어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고, 선애 또한 그가 물어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머뭇대지 않고 대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선애의 대답이 끝나고 그랜트는 묘한 표정으로 잠시 선애를 바라보기만 했다. 차라리 화를 내던지, 협박을 하던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이라도 하면 좀 났겠는데 뭔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얼굴을 보자니 은근히 불안함이 솟아나기 시작하는 거였다. '저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저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참 후에야 나온 대답은 "그런가..." 라는 거여서 나는 한 순간 맥이 빠져 휘청 거릴 정도였다. 거기다 더해 마지막에 '훗' 인지 '픽' 인지 하는 웃음이 딸리니... '저 놈 도대체 뭔 생각이야?' 하지만 결국에 그 놈이 하는 건 협박이었다. "그럼 각오하도록. 아마 힘들거야." '각오하라'고 한 건 이해 하겠다. 아마도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휘두를 수 있는 모든 힘을 휘두른다는 소리겠지. 아니면 뭐... 우리 타이거 상회가 괴로울 정도만... 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뒤에 '힘들거야.'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그럼, 우리 상회보다 몇 배, 아니 쳐다볼 엄두도 안 날 상회에서 방해하려고 나서겠다는데 힘들지 안 힘들겠는가? 그런데 어째 그 녀석이 그 뒷말을 하는 모습이... 선애한테 한 줄 알았지만, 허공을 보면서 거의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것이 딴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녀석은 몸을 돌려 가버렸기에 나는 내 생각에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다. "가죠." 그랜트 녀석이 먼저 일행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버리자 선애도 자신과 같이 왔던 알프레드와 소피에게 말했다. "이거 참 무지 긴장 되는데요? 앞으로도 저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글쎄요... 혹시 깡패들을 사주해서 가게에 쳐들어 오게 하지는 않을지..." 이건 예전에 한번 당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녀석들을 처리하고 그 뒤를 밟아 그걸 사주한 여자에게 위로금을 듬뿍~ 얻어 왔지만 말이다. "음, 그래도 우리 상회도 이제 커서 경비원들이 상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깡패를 사주했다는 소문이라도 나 보십시오. 오히려 루빈스타인 상회의 명예가 실추될 걸요?" "그건 그렇네요." 타이거 상회가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가게를 지키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귀중품이 있는 이상 가장 크게 신경써야 할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가게가 제법 번창한 상태이기 때문에 돈도 많아져 어느정도 수준 있는 사람들을 고용한 상태라 왠만한 건달이나 깡패 정도는 걱정 없었다. "그럼 우리 물품을 수송할때 덮친다던가..." "으음... 그건 확실히 일리 있습니다. 돌아가면 회장님께 물품 수송시 경호를 좀 더 강화 하도록 말씀 드리세요." "그래야겠어요. 또 뭐 없나..."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 선애와 알프레드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기는 했지만, 루빈스타인 상회가 사용한 방법은 그 안에 없었다. 그것도,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빠른 시간 내에 움직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 다음 날 즉시 손을 쓰리라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큰일입니다!" 오후 3시 쯤, 점심 먹고 나서 신나게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던 선애가 잠시 숨을 돌릴까... 생각을 하는 와중 선애의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온 알프레드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그와 함께 들어온 중년인 또한 알프레드 못지 않게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는 이제 앞으로 서대륙으로부터 많은 물건을 수시로 받게 될 거란 예상에 서대륙으로부터 물건을 받아서 운반해 올 수송선과 그 배로부터 물건을 받아 임시로 저장하게 될, 부두에 있는 임시 창고 임대, 관리, 제품들 관리 등등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안색이 안 좋아서 달려온 거라면, 당연히 그쪽에 관련된 일일거다. 앞으로 타이거 상회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될, 서대륙 제품 수입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면 타이거 상회 입장에서는 무척 큰일이다. "무슨 일입니까?" 덕분에 선애 또한 긴장한 얼굴로 그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연유에서인지 해상 운송 길드에서 다음 우리 상회 수송을 못 하게 되었답니다." "예?" "한 달 뒤에 서대륙에서 알파두르로 술을 싣고 오게 계약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배가 서대륙으로 출발 했다가 운 없게 태풍을 만나서 부서지는 바람에 서대륙까지는 못 가고 되돌아 오고 있다고..." "아니, 만약 그런 일이 되면 그 다음 배를 자동적으로 배당해주고 지연에 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 그게... 비어 있는 배가 없다면서 배상금하고 계약 파기금까지 모조리 돌려주겠답니다." "그럼 다른 배를 찾으면 되지 않습니까? 한달 후가 어려우면 그 뒤에라도 찾으면 되잖습니까?" "저도 그리 생각해서 뒷쪽을 알아봤습니다만, 두 달 후까지 모조리 계약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거짓말!" 아무리 계약 건수가 많다고 해도 한 달 정도면 몰라도 두달 후에까지 모조리 계약이 되어 있다는 건 말도 안됐다. 특히나 얼마 전에 자리가 많다고 해서 앞으로 지속적인 계약을 한다면 할인 해주겠다고 나온 쪽이 바로 해상 운송 길드 측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자리가 꽉 차서 남는 배가 없다고 나온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럼, 그 후에는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혹시 모르니 대기자 명단에 올려달라는 것도 거절 당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손을 쓴 것 같습니다."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방해 작전으로 나온다는 것 역시 수뇌부 몇몇만 알고 있는 비밀 사항이다. 그게 뭐가 좋다고 떠벌리겠는가? 떠벌리면 오히려 우리 상회 직원들만 불안해 하고, 혹 무슨 일이 있을까봐 주위 사람들도 멀어질텐데. "지금 당장 로어에게 연락 하도록 해요. 당분간 이쪽 배는 구할 수가 없으니 서대륙에서 배를 구하라고요. 장기 전으로 될지 단기 전으로 될지 모르지만, 올해 말까지의 단기 계약으로 하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파두르가 대답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서대륙 제품 담당 부장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문제가 또 있습니다." "뭔데요?" "부두에 있는 임시 창고에서도 앞으로 창고를 임대해 주지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 당장 그 곳에 남아있는 제품들도 빼라고..." "물론, 계약 파기금까지 모두 돌려 줬겠지요?" "예에..." 선애의 눈초리가 사나워져서 그런지 괜히 서대륙 제품 담당 부장이 선애의 눈치를 보며 움츠러든다. 괜히 죄 없는 아저씨만 미안해 하는 거 같아 내가 선애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만 해라. 아저씨가 불편해 하시잖아.] 그에 선애가 아차 싶었는지 얼른 표정을 풀었다. "죄송해요. 부장님 잘못이 아닌데... 어쨌든, 그래서 내일 당장 제품들을 옮기겠다고 했습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갑자기 그럴 수 있냐고 강력하게 항의를 해서... 그래도 그쪽도 워낙 강경하게 나와서 3일 정도로..." "알겠습니다. 그럼 운송팀에게 연락하세요. 일정이 좀 빨라졌다고 하면서 판매 제품은 각 가게 창고에다 두고 술은 지금 당장 가져다 주면 오히려 좋아할테니... 아차, 술은 두 파트로 분류해주세요. 그 상태로 마을로 가져다 주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운송팀에 연락 하겠습니다. 그럼... 창고 임대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죠. 알프레드, 지금 즉시 회장님과 토냐씨를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로어씨에 대한 연락은..." "아아, 그건 내가 맡겠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사님." "예. 최대한 빨리 움직여 달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서대륙 제품 담당 부장이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얼른 선애의 집무실을 빠져 나가자 그 뒤를 알프레드가 빠져 나갔다. [정보 길드에는 연락 안 해?] "/뭐라고?/" [루빈스타인 상회로부터 공격을 받게 생겼다고.] "/그럼 그쪽에서 말할걸?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면 척 플래밍은 '네가 선택한 일이니 조금쯤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해봐. 우리보고 전부 막아달라고 할 건 아니겠지?' 라고 할지도 몰라./" [아...] 그 동안 녀석의 태도를 보자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뭐, 언듯 보면 녀석이 선애를 가지고 노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때 녀석 덕분에 선애가 분개해서 더욱 더 분발한 거 보면 무조건적으로 녀석을 원망하기도 어려웠다. 어쩌면 녀석이 일부러 선애를 자극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이번에는 우리끼리 해볼 거야. 정 안돼면... 그때 도와달라고 하겠지만... 음, 그런데 아무리 정보 길드라도 루빈스타인 상회를 상대할 수 있을까나? 그냥 넘어가라고 하는 거 아닌가 몰라./" [것두 그렇네. 단순히 상회가 아니라 권력도 상당한 집안이니... 으으음... 이게 바로 '정경유착 무소불위' 라고 하는 거겠지?] "/맞아, 맞아./" 알프레드의 연락을 받은 벨타이거와 토냐는 그 즉시 달려왔다. "드디어 시작된 건가?" "하필이면... 하기야, 루빈스타인 상회라면 가장 공격하기 쉬웠겠지. 뭐니뭐니해도 서대륙과의 무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곳이 바로 그 상회이니까. 루빈스타인 상회를 상대 한다고 했을때 제일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국내에서 루빈스타인 상회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곳도 바로 서대륙과 무역하는 상인들인데요. 그래서 크게 걱정을 안 했건만... 정말 기가 막히네요. 아무리 상인이 이익에 민감한 족속이라 해도 그렇지 자존심도 없나?" 토냐가 정말 배신감을 느낀 것마냥 분노하는 어조로 말했다. 하기야, 그녀의 집안은 내분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주위 상회들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으니 이러한 현상, 그러니까 무슨 이유로 손쉽게 안면을 바꾸는 모습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뭐, 그들만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가 반대 상황이라 해도 아마 똑같이 반응했을 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넌 화나지도 않냐?" 선애가 덤덤하게 말하자 - 그들이 오는 동안 나와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았던 것이다. - 토냐가 선애를 살짝 흘겨 보았다. "왜 안 그러겠어요? 두 분이 오기 전에 혼자 신나게 씩씩 댔었어요." "아... 그래도 이왕이면 닷지 상회 사람들이 돌아간다음에나 시작할 것이지, 하필이면..." "맞다. 아직도 안 돌아갔죠? 계약은 어떻게 됐어요?" "다행이도 아까 전에 계약서에 싸인이 끝났지. 하지만, 곧바로 우리 상회와 루빈스타인 상회에 대한 이야기가 퍼질텐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만약에 우리가 견디지 못해 망하게 된다면, 우리와 거래하는 드워프 제품들 중 닷지 상회에서 다룰 수 있는 제품들은 모조리 그쪽에 넘기겠다고 해요. 물론, 그건 우리 상회와 루빈스타인 상회와의 문제를 알고 따지러 왔을때 말이에요."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봤다. "이야, 선애... 벌써 뒷수습할 방법까지 다 생각난 거야?" "아뇨, 그건 방금 생각난 건데... 그래도 솔직히 우리때문에 닷지 상회에까지 피해를 주는 건 미안하잖아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지만..." 선애가 멋적은 표정으로 말하자 토냐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대가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 닷지 상회는 군말 없이 물러날걸? 어쩌면 우리가 망하길 기다리게 될 지도..." "어쩌면 닷지 상회의 도움을 받게 될지도 몰라. 그 문제는 그렇게 하면 되겠고. 나머지는 어떻게 하지?" "우선 배 문제는 이쪽 수송선은 사용할 수 없으니까 로어에게 최소한 올해는 진 나라쪽 배와 계약 하라고 연락하라고 했어요. 돈이 좀 더 들겠지만 아예 운송 수단이 끊어진 것 보다는 나을 거 같아서요. 문제는, 로어가 곧 가지고 올 술들인데... 임대 창고가 문제예요. 우리 상회 창고는 작아서 다 수용하기 어려워요." "아, 그건 가능할 거 같아. 이 도시에 닷지 상회의 창고가 있다고 했어. 그걸 사용할 수 있을지 물어보지. 이번 한번만 사용하자고 해놓고, 그 동안 우리 상회용 창고를 짓자고. 어차피 앞으로 필요할 거 같아서 창고 하나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었어." "그거 좋네요. 그리고 배 사는 거 빨리 진행하죠? 이거 느긋하게 할 게 아닌데요?" 그렇지 않아도 한 나라와의 거래때문에 배 한척 사려고 지금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처음에는 배를 사면 다 끝난다고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선 배를 사면 그 배를 맡을 선장이 필요했고, 휘하 선원들도 필요했다. 그리고 그 배를 소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서류 작업들도 귀찮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순전히 우리 상회의 힘으로 해보려고 정보 길드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알아보고 있느라 아직까지 배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당장에라도 배를 구하자." 벨타이거가 선애에게 강한 눈빛을 보내며 그렇게 말하자 선애는 곧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은 즉 정보 길드에게 정보를 얻어달라는 시선이었다. 토냐에게는 미안하지만, 선애가 정보 길드와 선이 있다는 건 알리지 않았다. 하기야, 타이거 상회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선애와 벨타이거 단 둘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정보길드'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고 은근슬쩍 돌려서 말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시작은 순조로웠다. 비록 돈이 좀 많이 들게 생겼지만, 그래도 루빈스타인 상회의 방해 공작을 무난하게 막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착각이라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예?" 그 소식을 들은 건 선애가 정보 길드에 미처 연락하기 전이었다. "배를 사는 쪽도 모조리 막혔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를 팔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소쪽에서도 우리 상회에게는 배를 팔 수 없다고..." 모건이 차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면서 대답했다. "작정을 했군." 벨타이거가 팔장을 낀 상태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건 심한 거 아닙니까? 왜 배를 못 사게 막습니까? 그건 그들이 제안한 거였잖아요. 해상 운송 길드 수송선을 이용하지 말고 자기들 배 이용할 거 아니면 아예 하나 마련하라고." 물론 전에 그들이 말한 건 보안을 위하여 해상 운송 길드의 배를 이용하지 말고 자기네 것을 이용하라고 하기에 우리 꼬맹이가 아예 한 척 마련하겠다고 한 거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토냐의 말을 지적하려 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 자리에 모건과 벨타이거는 있지도 않았고, 유일하게 있었던 선애는 그 말을 지적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제가 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좀 더 알아볼께요. 모건씨는 닷지 상회와의 일에 전념해 주세요." "그래, 그게 좋겠다." 선애의 말에 벨타이거도 찬성하자 토냐는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전부터 선애가 인맥(?)을 통해 상회의 일 몇몇을 해결했기 때문에 모건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자신이 못해 일을 넘기게 되었기 때문인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선애가 길드에 연락을 넣었어도 나온 결과는 별로 신통치가 못했다. 선애를 사람들 시선을 피해 만난 휴가 어렵다는 뜻을 전했던 것이다. "팔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요?" "찾아보면 한 척 정도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배만 구한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니잖니. 배를 구하게 되면 이번엔 선장과 선원 구하는 것이 난관에 부딪힐 거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해결 한다면 이번에는 배 등록 과정에서도 문제가 생길테고..." 휴의 말이 계속 될 수록 선애의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녀석들이 이렇게 나온 이상 아마 끝까지 방해할테지요." "맞아." "우쒸... 정말... 뭐 좋은 수가 없을까요?" "서대륙과의 거래를 위해 배를 구하는 거라면... 힘들거다. 국내에서 서대륙 무역에 대한 제 1위의 상회는 루빈스타인 상회니까. 국외라면 몰라도..." 중얼거리는 듯한 휴의 말에 선애가 탁자를 손바닥으로 타악~! 하고 내리쳤다. "그거 좋네요. 국외. 아따따다~~ 아후... 손바닥 아파라." 너무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내려친 거라 선애의 손바닥은 빨갛게 되어 있었다. "아후, 아후... 어쨌든... 국외에서 구하면 되잖아요? 제가 알기로 진 나라와 무역을 하는 나라는 우리 바이런 국 말고도 헤이븐 국에서도 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선애의 '드디어 해결의 기미가!!' 라는 듯 환해진 얼굴에 대고 휴는 참으로 미안하다는 미소를 보였다. "물론... 네 말은 맞다만... 그것도 힘들거다." "엑? 왜요?" "헤이븐 국이 진 나라와 무역을 하는 건 맞다만, 서대륙에 대한 무역의 모든 부분을 나라에서 독점하고 있거든. 서대륙과 새로운 무역을 하고 싶으면 국가를 통해서 해야 해. 음... 전매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 먼 바다를 움직일 커다란 배 또한 국가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지. 구하려면... 지금 너희 상회가 여기서 구하려는 것 만큼 힘들걸?" "윽... 그런가요? 그, 그럼... 아예 방도가 없는 걸까요?" "배를 구하는 거라면... 자, 그럼 여기서 루빈스타인 상회가 왜 갑자기 너희 상회의 앞길을 막는 건지 이유를 들을 때가 된 것 같구나." 뭐, 여기저기서 단편적인 정보는 이미 얻은 상태일테니 대충 알고 있을테지만, 그래도 어디 당사자에게 듣는 것만 하겠는가? 게다가 선애는 휴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처음부터 다 털어놨다. 아무리 정보를 다루는 길드라 해도 휴가 선애를 위험하게 할 정보를 아무렇게나 다룰 리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비열한 녀석들이죠? 하기야 한 나라에 대한 무역을 이번에도 독점하려고 애쓸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이야." "그들 입장에서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는 건 당연한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후우... 이제 어쩌지요?" 선애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휴를 바라보는데 휴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제법 길었기 때문에 선애는 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전에 시켰지만 절망적인 상황때문에 먹을 생각도 못했던 차 한 잔과 딸기 무스 조각 케잌을 하나 맛나게 해치우고도 모자라 호두 파이 한 조각에 우유 한잔까지 더 시켜먹었던 것이다. 호두 파이의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맛난 소리와 함께 씹어 먹은 뒤 입가심으로 바닥을 보이는 우유를 홀짝 마시고 있을때야 생각에서 빠져나온 휴가 고개를 들어 선애를 불렀다. "선애야." "예?" 휴가 생각에 잠긴 동안 혼자서 케잌 먹고 우유 먹고 그랬던 게 걸렸던지 선애가 멋적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휴는 그런 것에 아랑곳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으로는 현재 네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다." 세 가지라니 그게 어디인가? 지금 어떻게 할 바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인데 하늘에서 동아줄이 세 가닥이나 늘어뜨려진 기분이다. 그러나 그 기분은 휴가 첫번째 방법을 말하자마자 사정없이 구겨졌다. "첫번째는, 루빈스타인 자작에게 가서 따지는 것이다." "따... 져요?" 순간적으로 자기가 잘못 들은 건가... 하는 표정으로 선애가 되물었지만, 휴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래." 선애는 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휴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래도 선애가 살피는 눈치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 건 아니었던지 휴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장난치는 거 아니니 들어봐라. 무슨 일이든 명분만 있다면 유치한 일도 비겁한 일도 정당한 일이 되는 법이다. 명분만 있으면 반역도 혁명이 되듯 말이다. 지금 너에게는 당당한 명분이 있지 않냐?" "어떤 명분이요?" "당연히 왜 '한 나라와의 무역을 방해 하느냐!!' 라는 거지. 루빈스타인 상회와 너희 타이거 상회는 한 나라에 대한 걸 비밀로 하기로 약속 했잖아. 그러기 위해서 너희 상회가 배를 구입하기로 한 거고." "그렇죠." "그런데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배 사는 걸 방해하고 나섰으니, 너희는 '한 나라'에 대한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어진 거야. 이해 했어? 명분이란 그럴듯하게 만들면 돼." 휴의 설명에 선애가 무릎을 쳤다. "아하... 그러니까 자꾸 방해하면 '한 나라'에 대한 비밀을 발설한다고 협박 하는 식이군요." "그렇지. 그렇다고 너희 상회에서도 정말 퍼트리지 않을테고 루빈스타인 상회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너희 상회에는 그게 있잖냐, '거래 우선권' 말야. 너희에게 먼저 거래를 이야기 한 다음 안 되면 다른 상회에 양보한다던가 또 다른 상회를 소개 시켜줄 수 있는 권리." "오호라... 아, 그런데 그건 루빈스타인 상회에서는 모르는데요?" "그래도 상관 없어. 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발설하지 않고 끝내면 좋고, 안되면 그럴듯한 상회 하나만 끌어들여도 루빈스타인 상회는 견제할 대상이 둘로 늘어나는 거니 골치 아프겠지. 지금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한 나라'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나라가 너희에게 '거래 우선권'을 줬다는 사실을 루빈스타인 상회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야." "오오... 그럴 듯 해요." 선애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옆에서 나도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황당무계 했는데 듣다보니 너무나 그럴듯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루빈스타인 자작의 약속을 들먹이는 것. 너희들이 그들에게 한 나라 사람들을 소개시켜 준 대가로 루빈스타인 자작이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했잖아?" "오오~~ 그러니까, 그 자작보고 우리 타이거 상회를 건드리지 말라는 걸로?" "그렇지. 이건 따지러 갔을때 정 안되겠으면 같이 써먹을 수 있어서 좋잖아." "그렇군요. 마지막은요?" "이건, 정말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나중에 뒷탈이 두려운 거야. 그러니 될 수 있으면 안 썼으면 좋겠어. 그래도 만약을 위해 가르쳐 주는 건데, 루빈스타인 상회의 약점을 네가 손에 쥐는 거야." "헤에?" "정보... 는 확실한 증거를 필요로 하니 아무리 치명적인 거라고 해도 단순한 정보는 안돼. 그러니 손에 쥘 만한 물건... 루빈스타인 상회 입장에서는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돼는 물건을 네가 손에 넣으면 돼지. 그걸로 루빈스타인 상회와 거래를 할 수 있을 거야. 단지 거래가 끝이 나면 그들은 보복으로 네 목숨을 노릴테니... 절대 절명의 순간이 아니면 절대로 써서는 안돼." "오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루빈스타인 상회... 아니 루빈스타인 후작가의 가보 같은 걸 훔쳐서 제가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소리죠?" "가보는 솔직히 잃어버리면 창피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없다고 루빈스타인 후작가가 흔들리지는 않아. 후작의 반지 정도면 몰라도." "후작의 반지요?" "그래, 그건 단순히 후작을 증명하기 위한 물품이 아니니까. 그 반지에는 인장이 새겨져 있어서 후작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중요 결재, 혹은 외부에 후작의 이름으로 보내는 편지에 찍는 인장을 모두 그 반지로 하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고, 단 하나밖에 없어야 하는 물품이니 잃어버리면 후작가는 그 날로 큰일이지. 마치 왕국의 옥새처럼 말야." "오호라... 하지만, 정말 건들이면 뒷탈이 크겠네요." 정말 그거 훔쳤다간 후작가가 가만 두겠는가? 나중에 돌려준다고 해도 괘씸죄, 혹은 앞으로 또 훔쳐갈까 싶어 절대로 가만 안 둘거다. "맞아. 그러니 최후에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한 거랬잖아." 선애나 나도 설마 그 수단을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 그냥 그 이야기는 들어두기만 하고 우선은 앞의 방법들을 구체화 시켜 써먹기 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세세하게 방법을 만들려면 벨타이거, 토냐와 의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타이거 상회가 잘 성장 시키는게 은혜를 갚는 거야." "물론이죠. 멋지게 성장 시킬 거예요. 그럼 나중에 뵈요!" 선애는 휴에게 인사에 대한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거의 뛰는 속도로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이야... 이거 나중에 휴랑 자스민에게 뭔가 좋은 선물이라도 해야겠다?] "/그래야지. 그나마 전에 서대륙에서 사온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니 좀 더 고급 물품을 생각해봐야겠어./" [좋은 생각인데, 네가 언제나 서대륙에 가냐?] "/내가 갈 필요 있나? 어차피 우리 상회에서 다룰 물품이 고급인데, 그 중에서 괜찮은 거 고르면 돼지./" [아하~ 그렇군.]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거라는 근거도 없는 생각에 선애와 나는 크로스웰 남작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떠들었다. 그리고 그건 벨타이거와 토냐도 마찬가지였다. "이야... 그 사람 누군지 몰라도 정말 대단한걸? 사실, 나도 배를 정 못 구하면 비밀을 퍼트린다고 협박 하거나 아니면 루빈스타인 자작과 한 약속을 들먹여야겠다... 하고 생각했었거든." 토냐가 감탄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둘 다 대단한데요? 어떻게 루빈스타인 상회에 대고 협박을 할 생각을 합니까? 나는 엄두도 안 나는구만." 벨타이거는 오히려 토냐가 감탄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토냐가 호호~ 웃으며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게 바로 경험에서 나오는 연륜이라는 겁니다." "그렇군요. 다시 한번 생각하는 거지만, 역시 토냐는 마법사로 썩기는 아까운 인재입니다." 벨타이거가 은근슬쩍 아부성 발언을 하자 토냐가 듣기 싫지는 않은지 깔깔 웃었다. "자, 그럼... 이제 누가 따지러 가느냐 하는 건데..." 벨타이거가 선애와 토냐를 둘어보며 말하자 선애가 토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전 토냐씨가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루빈스타인 자작으로부터 그 약속을 받아낸 것이 토냐잖아요. 게다가 여기서 가장 말발이 센 것도 토냐씨고." 그러자 벨타이거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나도 동감." "음... 내가 가는 건 상관 없지만, 그럼 회장님은요?" 토냐가 자신과 떨어져도 괜찮겠냐는 의미로 벨타이거를 힐끔 보며 묻자 벨타이거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같이 갈까 해. 아무래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났지 않겠어? 게다가 나 또한 어느정도 말 재주는 있다고 자부하니까." 어느 정도 뿐인가. 선애 못지않게 녀석도 꽤 한다. 단지... 선애가 매서움 + 카리스마형 말발이라면, 녀석은 능글맞은 구렁이 같은 말발인데, 그게 엘리엇 녀석이나 그랜트 녀석에게 통할지 모르겠다. 뭐, 토냐 보조를 목적으로 간다면 괜찮을지도. 제 37화 다음 날, 벨타이거와 토냐는 선애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루빈스타인 후작 저택을 향해 출발했다. 그 둘이 못미더운 건 아니었지만, 엘리엇 녀석 말발도 만만치 않은데다 우리가 아무리 당당한 명분을 가지고 빼도박도 못하게 현란한 말발과 논리로 따악 잡는다 해도 귀족 권력으로 밀어 붙여버리면 소용 없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벨타이거도 일단은... 귀족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방 귀족하고 중앙 귀족하고 어디 비교가 되겠는가? 뭐, 그랜트 녀석이 그렇게 치사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밑에 있는 놈이 너무너무 치사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선애는 물론이거니와 나 또한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꽤나 시간이 지나갔다... 싶어서 하늘을 바라보면 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저택 입구로 누가 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왜 이렇게 안 돌아오지?" 선애 또한 같은 심정이었는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중얼 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때 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며 알프레드가 들어온다. "이사님!" "회장님 돌아 오셨나요?" 알프레드가 채 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애가 다급하게 묻자 오히려 알프레드가 놀라서 굳어버렸다. "아... 저기... 예?" "아니, 회장님 돌아 오셨나고요." "에... 예, 아직 안 돌아오셨는데요?" "그래요? 후우... 회장님 돌아 오시면 빨리 알려주라고 하세요." "아, 예, 예." "그래, 무슨 일이에요?" "예에... 이번에 우리 상회가 확장 되면서 상회 본 건물을 마련 했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리모델링 견적이 나왔습니다." 타이거 상회는 규모가 별로 크지 않았고, 상회 회장과 단 한명뿐인 이사가 모두 크로스웰 남작 저택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회의 일을 모두 저택에서 처리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제법 규모도 커지고 닷지 상회는 물론이거니와 진 나라, 한 나라와 거래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상회처럼 상회 본부 건물을 하나 마련할 예정이었다. 돈이 좀 넉넉하다면 아예 넓은 부지에 멋드러진 새 건물을 하나 지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 재정이 넉넉지 못했기에 크기는 하지만 오래된 건물 하나를 구입하여 완전히 리모델링 하기로 했었다. 지금 그 견적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어디 한번 보죠." 건물 전체를 완전히 뜯어 고친다고 할 수 있는 리모델링이었기 때문에 견적비와 함께 어디를 어떻게 얼마 가격의 무엇으로 고친다... 하는 설명과 간략한 그림까지 곁들여진 서류까지 있었기 때문에 서류가 꽤나 두터웠다. 거기다가 그 밑에 벨타이거, 선애, 토냐의 집무실, 그리고 그들의 비서라 할 수 있는 모건과 로어, 알프레드 들의 집무실에 들여놓을 가구들까지 모두 곁들여져 있었다. "어라... 이거 사무실이 하나 더 있는데?" "아참, 오늘 아침에 모건 실장님께 들은 겁니다만, 잭 조셉이라는 분이 이쪽으로 합류하실 거랍니다." "오오... 잭 조셉 말이죠? 알프레드는 그 분을 뵌 적이 없던가요?" "예." 나도 그 녀석의 얼굴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사람이 부족한 덕분에 알파두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몇몇 도시 지부를 차마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그에게 맡긴 것이었지만, 사실 오랜 세월 공부하느라 유학 갔다 온 사람에게 다시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게 하는 건 너무한 처사였다. 아마 벨타이거 녀석도 그걸 생각해서 잭 조셉을 불러들이려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제법 모건이나 잭 조셉 말고도 벨타이거가 신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조셉 부인이 기뻐하시겠네. 아들이 돌아오시는 거 알고 계시려나?" "나중에 한번 슬쩍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모른다고 하시면 이사님께서 알려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야겠네요." 알프레드는 그 뒤 선애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면서 처리해야 할 서류더미들을 은근히 밀어붙였고, 그의 질문 대부분은 그가 밀어붙이는 서류나 일에 관계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선애는 그와 대화를 하다보니 자동적으로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런 거 보면 아무래도 알프레드가 그런 걸 노리고 괜히 이것저것 말을 시킨게 아닌가 싶다. '오옷... 노련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모건이 알프레드를 선애에게 붙인 거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일에 몰두한지 대략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선애야 옆에 알프레드가 붙어 있으니 집중해서 일할 수 있었겠지만, 선애 외에는 보이는 사람이 없는데다 알프레드가 같이 집무실에 있던 덕분에 쉬이 서류를 움직이지 못했던 나는 전보다 더욱 더 한가해져서 나중에는 아예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내 눈에 저택 현관문을 향해 온 힘을 다하여 빠르게 달려오는 말 한 마리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라라?]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던 중에 발견한 거라 나는 나도 모르게 놀라서 자리에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자세하게 살피려 했다. 위에 타고 있는 건 타이거 상회 경비 제복을 입은 사람이다. 그는 현관에 다다르자 거의 구르다시피 말에서 내려 현관 문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다. 그가 달려오는 모습을 미리 알고 있었던지 말이 현관 앞에서 멈추자마자 무슨 일인가 싶어 한 시종이 안에서 현관문을 열고 나왔는데 상회 소속 경비병은 그를 지나쳐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어라? 선애야, 뭔 일 있는 거 같은데? 상회 경비병이 급하게 뛰어왔네?] 나의 부름에 알프레드와 함께 서류더미에 얼굴이 파묻힌 채 한창 일하고 있던 선애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선애의 행동에 알프레드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본다. "이사님? 갑자기 왜?" "아뇨... 왠지 바깥이 소란스러운 거 같아서요." "바깥이요?" 선애의 집무실은 벨타이거 녀석이 그래도 동업자라고 무척 좋은 방을 줬기 때문에 방음 시설이 제법 잘 되어 있는 탓에 왠만한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가요? 음... 저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만... 한번 제가 나가볼까요?" 선애의 말에 알프레드가 고개를 기울였지만 뭔가 특별한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었는지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제안했다. 선애가 들린 거 같다는데 자기가 안 들린다고 무시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주겠어요? 뭐, 별 일이 아닐수도 있습니다만... 왠지 마음에 걸려서요." 선애의 말에 알프레드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슬슬 회장님이 돌아오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만... 혹시 그에 관련된 소식 일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말하며 알프레드가 문에 다가가 열자마자 바깥에서 거의 달리다시피 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내가 창문 밖에서 본, 막 말을 타고 달려온 그 경비병이 숨을 헥헥 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님 계십니까? 급한 일입니다." 이사 집무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 알프레드를 발견했는지 병사가 물었지만, 대답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곧바로 열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외친다. "이사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쯤 정말 뭔 일인가 싶었던 선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기에 꼬맹이는 병사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회장님께서..." "회장님이 뭐요?" 선애는 정말 뭔 일이 있나 싶어서 놀라 물었지만, 이 병사가 선애에게만 말하라는 신신당부 라도 들었는지 말 끝을 흘리며 주변을 살피더니 슬며시 선애에게 다가간다. 이때 선애는 빨리 무슨 일인지 듣고 싶어, 알프레드에게 문을 닫으라는 말이나 그는 믿을 수 있다는 말을 할 생각도 못하고 병사에게 재빨리 귀를 내줬다. 보통 중요한 일은 비밀을 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눈치껏 문을 닫아 바깥의 시선과 귀를 차단시킨 알프레드는 병사의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애에게만 속삭이려는 듯한 그 폼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같이 들으려고 재빨리 선애 옆에 바싹 붙어 있었기에 그 병사가 말하는 폼을 잡으면서 품에 손을 넣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손을 왜 품에?'라고 의아해서 보는 순간 병사의 품에서 빠져나온 손에 쥐어진 것은 시퍼런 날을 번쩍이는 단검이었다. "죽어!" [야!] 녀석이 선애에게 소리치며 검을 뻗은 것과 내가 소리치며 선애를 향해 손을 뻗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천만다행으로 내가 늦지 않아서 녀석의 날카로운 단검에 선애의 가슴 부분의 옷자락이 잘리기는 했지만, 단검의 날이 피부에까지 닿지는 않았다. "뭐, 뭐야?" 나에게 목덜미를 잡혀 뒤로 잡아당겨진 선애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치자 병사, 아니 병사의 제복을 입은 암살자는 온 몸으로 그에 대한 답을 했다. 한 걸음 성큼 내딛으며 선애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위험해!] "이사님!" 이번에는 선애의 허리를 잡고는 녀석이 휘두르는 방향에 같이 맞춰 내가 옆으로 몸을 틀었다. "경비병~!! 경비병 없는가? 암살자다~!! 이사님이 위험해!!"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챈 알프레드는 잽싸게 문을 열어 제끼고는 목청껏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칫!" 그에 두 번이나 공격을 실패한 암살자가 알프레드의 목소리를 듣고는 낭패한 표정을 짓더니만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선애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건 너무 늦은 몸짓이었다. [야! 너 마법의 목걸이 가지고 국 끓여 먹을래? 실드 쳐, 실드!!] 녀석이 두번째의 공격을 실패하고 다시 자세를 잡는 사이 선애의 허리를 붙잡고 여차히면 도망 갈 준비를 하던 내가 선애를 향해 악을 썼던 것이다. 덕분에 그제야 자신이 어떤 무기를 가졌는지 생각해 낸 선애가 다급하게 외쳤다. "시, 실드!" 암살자가 선애를 향해 몸을 던진 것 보다 일, 이초 정도 선애가 빨랐고, 그건 선애와 암살자의 희비를 엇갈리게 했다. 깡! 마치 단단한 쇠에 다른 쇠를 있는 힘껏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암살자의 단검이 마법의 목걸이에 의하여 형성된 실드에 부딪혔고, 그 충격이 상당했는지 암살자는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고 두어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후아, 후아... 아슬아슬 했어. 쫌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 했잖아?] 내가 뒤로 물러서기는 했지만, 그건 단 한 걸음 뿐이었던 터라 실드가 없었으면 선애가 그대로 찔릴 뻔 했다. 그리고 그쯤에 바깥에서 두다다다~ 하는 여러명이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남작가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누구냐!" "젠장!" 그에 암살자는 욕설을 한번 내뱉고는 창문을 향하여 돌진~ 마치 액션 영화에서처럼 그대로 몸으로 유리창을 깨면서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잡아라!!" "놓치지 마라!" "바깥으로 나갔다!!" 몇몇은 암살자처럼 유리창으로 몸을 날려 바깥으로 나갔고, 나머지는 복도를 이용해 바깥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선애의 집무실은 벨타이거와 같이 3층에 위치해 있었고, 여기는 한 층의 높이가 제법 높아서 3층이라 해도 일반 4층의 높이였지만,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어느 정도 몸이 날렵한 녀석이면 다치지 않고 충분히 안전하게 밑으로 내려갈 수 있을 거다. 뭐, 몸을 날리지만 않는다면 저택 바깥 면 여기저기 장식을 하느라 새겨놓은 조각들이 쉽게 손잡이 역할도 해줄테고 말이다. 그래서 암살자가 바깥으로 몸을 날린 이상 놓칠 수 있었기에 기사들과 사병들이 정신없이 달려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알프레드와 소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선애에게 다가왔다.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선애는 겨우 잊지 않고 실드를 해제시킨 뒤 다리에서 힘이 빠졌는지 그 자리에 털푸덕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래도 애써서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기야, 울 꼬맹이가 목숨을 위협받은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맨 처음에는 그 못된 엘리엇 녀석이 선애의 목을 조르려 했었고 - 물론 그때 진짜 죽이려는 건 아니라 단지 협박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목숨 가지고 위협하는게 아니고 뭐겠는가? - 두번째는 서대륙에 갈때 음모에 휘말려 해적선에 올라탄 덕분에 위험 했었다. 일이 틀어지자 해적 선장이 속임수를 써서 선애를 인질로 잡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 다음 렌스버리 녀석에 의하여 죽을 만큼 무서운 공포를 맛보았고, 흥분한 렌스버리 녀석 때문에 배가 부서져서 물에 빠질 뻔 했고... '하이고... 죽을 뻔 한 적도 많구만.' 그러고 보니, 맨 처음 교통 사고로 죽을 뻔 하지 않았던가? 그때 털 끝 하나도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거 보면, 울 꼬맹이 행운이 엄청 크다는게 증명된 것 같기도 하다. "아아... 괜찮은 거 같아요." 알프레드가 다가와 여기저기 살펴보려 하자 선애가 손을 저어 만류했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기는 했지만, 대체로 침착하게 나와준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어찌될 지 모르니 의원을 불러서 진찰을 받으시는게 좋겠습니다." 뒤에 다가온 집사가 침착하게 제안하자 알프레드가 얼른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혹 모르니 진찰을 받으시고 만약을 대비하여 약도 처방 받는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래. 놀라서 잠 못 잘지 모르니까 진정제라도 받아두는게 좋겠어.] 나까지 거들고 나서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집사가 의원을 부르겠다며 방을 나서며 시녀들에게 방을 치우도록 지시했다. 그 틈에 알프레드는 선애를 부축해서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혔다. "오늘은 더 이상 일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정리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시녀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가지고 오게 할테니 천천히 드십시오. 떨림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알프레드가 그렇게 말하고 엉망이 된 서류를 정리하기 위하여 선애 옆자리를 뜨자 나는 그제야 선애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괜찮아?] "/아아... 그래도 좀 있으니 진정 됐어. 엄청 놀랐네./" [그러게. 무슨 영화 같다. 너에게 암살자도 오고...] "/아니, 그런데 왜 나에게 암살자가 왔지? 나에게 원한이 있는 녀석이라도 있나? 아, 혹시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거기서는 널 스카웃 하려고 한 건데 암살자를 보내겠냐? 으음... 네가 죽어봤자 특별히 이익을 보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휴하고 자스민인데...] 선애는 이 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기 때문에 재산이 꽤 불었을때 만약을 대비하여 사망시 전 재산을 휴와 자스민이 운영하고 있는 고아원에 기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걸 노리고 휴가 암살자를 보냈다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일리가 없잖아?/" [그건 나도 동감이야. 아앗~! 그럼 혹시... 네가 벨타이거의 양녀가 되었다는 걸 알고...] "/내가 없어지면 뭐 하나. 벨타이거 녀석이 있는데.../" [음, 그것도 그렇네.] "/하여간... 토냐하고 벨타이거 녀석이 돌아오면.../" 그 둘과 같이 의논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던 선애의 말은 다급하게 뛰어들어 오는 알프레드에 의해 끊어졌다. "이사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데요?" "회장님께서... 회장님께서... 돌아오셨는데..." 알프레드가 채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선애는 그의 말을 듣는 대신 빠른 걸음으로 바깥으로 나갔다. 현관 밖으로 나갔더니 그 곳에서는 루빈스타인 후작 저택에 갔던 일행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놀랍게도 모두들 부상을 당한 채였다. [헉! 습격을 당한 거야?] 그런데 의아하게도 벨타이거를 호위하고 갔던 병사들이나 기사들은 별로 다친 기색이 없는데 모건과 토냐의 부상이 심했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벨타이거는 정신을 잃은 채 들것에 실려서 들어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선애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단지 토냐가 선애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는 벨타이거 침실로 쳐들어갔다. 그 뒤를 모건이 따라들어와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고는 문을 굳건하게 닫아 걸었다. "왜, 왜요?" 그 둘의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얼굴까지 심각하게 굳어있자 그 분위기에 눌려 선애가 문이 닫혔는데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우선, 회장님부터 치료해줘." 그러나 선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 토냐. 그에 선애가 황당하다는 듯 토냐를 바라봤다. "제가요?" "어쩔 수 없어. 나 지금 마나를 다 사용한 바람에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단 말이야. 그런데 너에게는 마법 목걸이 있잖아. 설마, 지금 없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지고 있어요. 잠시만요, 우선 회장님 치료해 드리고 토냐와 모건도 해드릴께요." "알았으니까 서둘러." 토냐의 재촉에 선애는 옷깃 안속에 들어가 있던 목걸이를 꺼내들고는 사람들에 의하여 침대로 옮겨진 벨타이거에게 다가갔다. 오는 길에 의료원에 들렸던지 몸 여기저기에 붕대가 보이고 붕대로 감기지 않은 상처 위에는 검은 색의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 그러나 얼굴이 창백하고 정신을 잃은 것이 상태가 안 좋다는 건 확실했다. 선애는 벨타이거의 몸에 한 손을 올려놓고는 시동어를 외웠다. "힐링!" 곧바로 선애의 목걸이에서 빛이나기 시작하더니 그 빛이 선애의 팔을 타고 벨타이거에게 흘러가 녀석의 온 몸을 감쌌다. 분명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겠지만, 검은색의 연고에, 혹은 붕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선애가 마법을 조절하는게 아니라 목걸이에 새겨진 마법 조건이 알아서 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잠시 후 빛이 사라졌을때 선애는 '이거 된건가?' 하는 표정으로 머뭇 거리며 손을 떼었다. 뭐,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창백했던 얼굴에 약간 혈색이 돌아오는 것이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누가 만든 건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겠는가? 그런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보니 이거 다 된건가... 의아스럽기도 하고... 마법 목걸이를 받은 뒤에 힐링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으니 뭘 알 리가 있나. "저어... 한번 더 사용해야 할까요?" 선애가 머뭇 거리며 토냐를 바라보자 토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힐링은 단지 상처를 아물게 할 뿐이라 그 마법을 시전했다고 해서 정신을 잃은 사람이 완전히 나아서 번쩍 눈을 뜨는 건 아니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리커버리 뿐일까?" 그렇게 말해봤자 마법에 문외한인 나나 선애는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단지 이제 됐다는 것만 알아들어 선애가 그 즉시 토냐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럼 토냐에게 해드릴께요." "응, 부탁해." 선애가 마법을 시전하는 동안 옆에서 지켜봤던 토냐는 그제야 힘이 빠졌는지 휘청거리며 침대 근처에 있던 안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토냐가 다쳤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토냐도 벨타이거 못지 않게 얼굴이 심히 창백한데다 계속 움직여서 그런지 식은땀마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건도 마찬가지였다. 선애는 토냐에게 마법을 시전해 준 뒤 모건에게도 마법을 시전해주고나서 잠긴 문을 열고 그들을 위하여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아아... 이번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아마 선애가 주문하기 전에 이럴까봐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차가 날라져 왔고, 그 차를 한 모금 마신 토냐가 '이제 살것 같다.'란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말해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회장님이나 두 분이 그 지경인 거 보면 큰 싸움이 있었던 거 같은데... 어라라... 그러고 보니 같이 갔던 경호병들은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던데..." "그게...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당했거든. 이 도시 안에서 회장님이 인위적인 사고를 당하면 '후계자 다툼 금지' 법령에 의거하여 작위가 몰수되잖아? 그거만 믿고 녀석들이 손을 쓰더라도 무조건 자연스런 사고로 보이는 방법일거라고만 생각 했었어." "예? 그럼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마차에다 폭발 장치를 해놨더군.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에서 나와 한참 달렸을때 갑자기 폭발했어. 손을 쓸 새도 없었는걸." 이 세계에도 화약 비슷한 물품이 있다.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만, 이 세계의 화학자라 할 수 있는 연금술사들이 예전에 만들어 냈는데 마법에 밀려서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다. 하지만, 반대로 마법같은 효과를 노리면서 마법사의 시선을 피하여 대여섯명에게는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용도로 가끔 사용되는 모양이다. 바로 이번처럼, 토냐가 옆에 있다는 것을 역이용 하여 공격하는 것처럼 말이다. "회장님 의자 밑에 장치를 해놨더군요. 덕분에 좀 떨어져 앉은 토냐님이나 저는 피해가 적었습니다만... 게다가, 마부가 적이 보내온 암살자였습니다. 그 놈이 마차를 폭발시키자 마자 크게 다치신 회장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온 때를 노려 회장님을 찌르고 달아났습니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녀석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해가 간다. 마차 안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면 경호하고 있던 이들도 놀라 우왕좌왕 했겠지. 그 틈을 노려 달려들었다면 성공 확률이 무척 높았을 거다. [으음... 그런데... 이 곳 폭팔물은 성능이 낮은가보네. 한국에서 구했다면 마차는 물론 안에 탄 사람들도 흔적 하나 남지 않았을텐데...] 마차가 뭔가. 내 그냥 지나가다 들은 풍월이지만, 내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인데 반경 1Km 내를 초토화 시킨다는 고성능 소형 폭탄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만 좀 다치게 할 정도니... 그러니 폭발 장치만 해놓고 안심할 수가 없어 암살자도 같이 딸려 보낸 거겠지. "녀석이 찌른 단검에는 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토냐님이 계셔서 얼른 해독 마법을 펼치실 수 있었지만, 토냐님도 폭발에 다치신 터라 해독 마법을 펼치시는게 고작이었습니다." 덕분에 벨타이거는 독에 중독되는 건 면했지만, 폭발에 의한 상처도 무척 커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토냐도 마법 하나 펼치고 지쳐서 쓰러져 주변에 있던 경호병들이 얼른 그들을 부축하여 가까운 의원에게 달려가 치료를 받게 한 것이었다. 그 둘의 말은 거기서 끝났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선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날 뻔 하셨네요."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선애나 나는 별 걱정이 안됐다. 여기 오기 전에 의원에게 보인데다 마법으로 치료까지 받았으니 걱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벨타이거 녀석이 좀 심하게 다쳐서 정신을 잃었지만, 내일 정도면 깨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선애의 이런 반응에 토냐와 모건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에? 왜요?" 그 시선을 이해 못한 선애가 어리둥절해서 묻자 토냐가 고개를 갸웃 갸웃 하더니 조심스레 묻는 거였다. "저기... 선애야, 평소에 회장님과 투닥투닥 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정말 사이가 안 좋았던 거야?" "예? 아니, 갑자기 회장님과 제 사이가 여기서 왜 나오는데요?" "음... 내가 오해 했다면 미안한데, 회장님이 중상을 입어 누워 계시는데 별로 걱정을 안 하는 거 같아서." 토냐의 말에 선애와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선애가 날 바라보는 폼을 보니 자기가 제대로 들었나 싶었나 보다. "중상이요? 회장님이?" 선애의 말에 토냐와 모건이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그에 선애는 침대 위에 있는 벨타이거를 바라봤다 날 바라봤다. 나 또한 벨타이거를 한번 보고 선애를 봤다. [저게... 중상이야?] 선애 또한 나와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아니, 저게 중상이에요? 내일이면 깨어나실 거 아닌가요? 아니면, 혹시 회장님께서 머리를 크게 다치셔서 심한 뇌진탕이라도 걸리신건가요?" 선애의 질문에 토냐와 모건이 어리벙벙한 표정이다. "저게 중상이 아니면? 저보다 더 심한 부상을 입으면 죽어." "네에?" 토냐의 진지한 말에 모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애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기... 혹시 벨타이거 녀석이 폭발 때문에 정신을 잃었는지, 아니면 그때는 정신이 있었는데 마차에서 나왔을때 정신을 잃었는지 물어봐. 내가 알기로 폭발 때문에 정신을 잃은 거면 혹 뇌에 큰 충격이 온 걸수도 있거든.] 내 말을 들은 선애가 토냐와 모건에게 묻자, 다행이 그건 아니라고 했다. 모건이 벨타이거를 부축했을때는 정신을 잃지 않은 채라서 모건과 토냐의 안부를 물어봤다고 하니 말이다. 단지 마차에서 나온 후 암살자 녀석에게 칼침을 맞은 후 피부가 독때문에 퍼렇게 되어갈때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에이, 그럼 뭐... 독이 뇌에 침투해 뇌 기능을 마비시킬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건 토냐가 즉시 해독했다며? 근데 뭐가 문제야?] 선애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에... 으음... 전 아무리 봐도 심한 부상으로 안 보이는데... 저 정도면 길어야 두 주에서 세 주 정도면 완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선애의 말에 눈이 뚱그래진 토냐는 모건과 시선을 맞부딪히더니 물어왔다. "저기... 혹시 네가 있던 곳에서는 저 정도 부상을 입으면... 웬만하면 모두 완치하니?" [그렇지. 저거 보다 좀 더 심해도 웬만해선 안 죽을 걸?] 나는 그렇게 쉽게 중얼거렸지만, 선애는 뭔가 깨닫는게 있는지 나처럼 대답하는 대신 조심스레 묻는다. "저 정도 부상을 입으면... 혹시 완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가요?" 선애의 질문에 모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은 그래도 마법 치료를 받으셨으니 완치하실 수 있겠지만, 저 정도의 부상을 입으면 절반 정도는... 살아나기 힘듭니다." 그의 말에 선애와 내 입이 떠억 벌어졌다. [뭣이라? 저 정도 다쳤다고 죽는다고?] "회장님은 제가 마법도 걸어드렸잖아요. 혹 필요하다면 나중에 다시 걸어드릴 수도 있는데요?" 선애의 말에 토냐와 모건은 그제야 이해 했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토냐의 조용 조용한 설명. "선애야,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힐링 마법은 상처를 아물게 할 뿐이야." 설명하는 폼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선애가 '마법이면 어떤 환자든 다 났게 한다.' 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 모양이다. "지금 회장님의 상황은... 상처 뿐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충격과 손실이 큰 상황이거든? 그걸 이겨내셔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걸 이겨내지 못하시면..." 뒷 말은 안 하지만, 아무래도 위험하다는 이야기겠지. 보아하니까 데미지가 커서 그걸 회복시켜야 한다는 이야기 같은데... '그게 죽음까지 생각 할 정도로 어려운가?' 물론, 피를 많이 흘렸다면 그건 위험하다는 건 안다. 이건 빨리 피를 보충해주지 않으면 죽음까지 이를 정도다. 여기서는 혈액 은행도 없고 수혈이라는 것도 없으니, 그거라면.... '음... 확실히 위험하겠군.'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토냐와 모건의 걱정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하아... 이럴때 8클래스의 마법사나 고위 신관이 있었다면..." 토냐가 지나가는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문득 떠오른 존재가 있었다. 그러나 워낙 그 존재의 성격을 볼때 치료해 달란다고 순순히 치료해 주리라고는 생각 할 수가 없다. 그때였다. 똑, 똑!! "선애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갑자기 왠 손님인가 싶었다. 그것도 선애한테 말이다. 그런데 손님이 오셨다는 걸 집사가 직접 와서 알리는 거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누굽니까?" "그, 그게... 남작님의 숙부님께서 오셨습니다." 그에 일행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벨타이거의 숙부는 토지그 크로스웰이라는 사람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벨타이거의 5촌 외숙부다. 벨타이거 어머니의 4촌 오라버니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벨타이거 다음으로 남작 계승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 사람이었다. 현재는 그 중간에 울 꼬맹이가 꼽사리 끼어버렸으니 말이다. 원래 벨타이거의 손님이었지만, 벨타이거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으니 선애를 부른 모양이다. 선애가 모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요, 그 호적..." 선애가 무엇을 묻고 싶어하는 지 알아챈 모건이 선애가 다 말하기도 전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사님은 현재 합법적으로 회장님의 양녀십니다." 그에 토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애와 모건을 바라본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나 선애가 토냐에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집사의 재촉이 들려왔다. "선애님!" "알겠습니다. 나가지요." 그러고는 모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 집사님은 알고 계시나요?" "예. 회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함구를 명하셨기 때문에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으시는 겁니다." 벨타이거와 이 저택 집사의 사이는 별로 안 좋은데도 불구하고 이런 거 보면 신뢰하는 사이 같기도 하고... 선애가 모건과 토냐를 데리고 침실 밖으로 나가자 집사가 평소 예의 차가운 무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를 까딱했다. "어디 있어요?"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토지그 벨타이거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직접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이가 사이이다보니 평소는 물론이거니와 새해라던가 생일이라던가 하는 특별한 날이라 해도 뭔가 축하 메시지 같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선애가 볼 일이 있겠는가? 해서 처음 본 토지그 벨타이거는, 불독이 연상되었다. 약간 통통한 몸매를 지닌 중년 아저씨였는데 특히나 볼이 통통해서 약간 처진 느낌이 나는데다 눈매도 약간 쳐져서 귀만 밑으로 쳐져 있다면 완전히 불독이었다. 그런 그가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지도 않고 서서 왔다갔다 하다가 들어오는 일단의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의문 어린 시선을 집사에게 던졌다. 여기서 아는 인물이 집사 뿐인가보다. 하지만 조셉 집사는 아무말도 안 했고 대신 선애가 앞으로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자 의아하다는 듯 눈쌀을 찌푸리는 토지그 크로스웰. "넌 누구지?" 다짜고짜 반말로 내뱉는 녀석에 선애의 인상이 굳어졌지만, 그 보다도 모건과 집사의 얼굴에 분노가 피어 올랐다. "토지그님 이 분은 당신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집사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토지그가 움찔 하더니 선애를 살핀다. "이, 이분이 누구신데 그러는가?" 토지그 크로스웰은 벨타이거의 5촌 숙부라 한국으로 치면 그는 분명 벨타이거의 어른이지만, 바이런국 식으로 치면 그는 벨타이거에게 존대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한 핏줄이기는 하나 토지그 크로스웰은 평민이고 벨타이거는 작위를 가진 남작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귀족이면 그 자식들도 귀족이지만, 거기에는 한계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갑이라는 백작이 있는데 그에게는 아들 둘 딸 둘이 있다고 치자. 그 네 자식들은 모두 귀족이기 때문에 두 아들이 성인이 되면 자동적으로 기사의 작위를 받게 된다. 세월이 흘러 백작이 죽고 큰 아들이 작위를 물려받았다면, 큰 아들의 자식들은 자동적으로 귀족이 된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경우 그가 뭔 특별난 재주를 가져 따로 귀족 작위를 받게 되지 않는 한 그는 계속 기사 작위를 가진 귀족일 뿐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아이는 귀족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고 기사의 작위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검술을 연마하여 나중에 따로 작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기사의 작위를 받지 않는다면, 그는 그냥 평민일 뿐이다. 그가 기사의 작위를 받던 받지 못하던 그의 자식은 평민으로 되고 말이다. 하기야, 이렇게 제한을 둬야지 아버지가 귀족이라고 그 자식들도 대대로 모두 귀족이게 하면 작위 없는 귀족들이 얼마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는가? 이렇게라도 귀족의 수를 제한해야지. 딸의 경우는 좀 틀리다. 딸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귀족이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의 계급을 따르는 것이다. 뭐, 이 나라 법률은 일부일처제지만, 전통관례상 후처가 인정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일부다처제라고 할 수 있어, 보통 귀족 영애들은 후처라도 모두 귀족들과 결혼을 하지만, 만약 평민, 혹은 기사와 결혼하게 된다면 그 즉시로 귀족 계급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외가 있는데,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어 딸에게 작위가 내려왔다면 평민과 결혼하여 귀족 계급을 잃어버렸어도 다시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 급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는 평민이었던 남편도 부인의 성을 얻으면서 자동적으로 기사 작위를 가진 귀족이 된다. 한 마디로... 데릴사위라고 할까나? 이러한 법률 때문에 지금 토지그 크로스웰은 '기사 작위를 가진 귀족'의 아들이기 때문에 평민이다. - 그는 기사 작위를 받지 않았다. - 그리고 선애는 양녀이기는 하나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작 영애이기 때문에 엄연한 귀족. 법률상, 토지그 크로스웰은 선애를 향해 존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분은 현 크로스웰 남작의 영애이신 선애 크로스웰님이십니다." 조셉 집사의 위엄있는 말에 토지그 크로스웰의 입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쩌어억~ 하고 벌어졌다. "뭐, 뭣이라?"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듯 쥐어짜듯 그 말을 한 토지그는 선애와 조셉 집사를 둘러보더니 발악을 하듯 외쳤다. "남작 영애라니, 남작 영애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남작 영애라는 거야?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남작 영애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란 말이냐?" 거의 집사에게 달려들 듯이 외치는 토지그였지만, 조셉 집사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했다. 오히려 토지그를 향해 엄하게 질책하는 것이었다. "말 조심 하십시오, 토지그님. 당신이 아무리 현 남작님의 친척 어른이라 해도 당신은 엄연히 평민이시고 아가씨는 남작 영애. 당신이 함부로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내가 모르는 남작 영애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단 말이냐! 거기다 남작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는데... 남작이 어렸을때 애를 낳았단 말이냐?" "물론, 이 분은 양녀십니다." "말도 안돼! 난 인정 못해!" "죄송합니다만, 이건 남작님과 아가씨 사이의 일일 뿐, 토지그님께서 관련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여전히 냉정한 조셉 집사의 말에 토지그는 볼을 푸들푸들 떨며 선애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너, 너, 너어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계집이기에!! 근본도 모르는..." "밀양 박씨 집안의 천자공파로써 신라 3대 왕 첫째 아드님이신 경원대군의 제 35대 손입니다." - 이건 작가가 그냥 지은 겁니다.- 갑작스레 선애가 내뱉는 말에 울그락불그락 해진 얼굴로 소리치던 토지그 녀석의 말문이 터억 막혔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 으으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사님은 대단한 집안 출신이란 말씀 이시군요." 모건이 말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건 모르겠고, 35대손이라는 건 알아듣겠네. 그거 꽤 역사가 깊은 집안이잖아?" [음홧홧홧~~ 당연하지. 우리 선조는 신라 초기 시대 사람이고 선애와 나는 한국인이었으니 역사가 얼마야?] 울 고향은 한 마을에 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곳으로써, 명절때 고향에 내려가면 집안 어른들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울 집안은 어떤 집안이었느니, 몇대 할아버지는 뭘 하시는 분이셨느니 하면서 집안 자랑(?) 을 하셨더랬다. 직장 다니시던 사촌 오라버니들은 예전의 그 대단한 영화를 다 잃어버렸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며 듣기 싫어하셨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옛날 이야기 듣는 기분이라 재미있게 듣곤 했던 것이다. [내가 그거 가르쳐 주길 잘 했지? 므흐흐흐... 거봐, 알아두면 좋잖아.] "선조께서는 왕족이셨습니다. 물론, 그 나라는 멸망하고 다른 나라가 세워졌습니다만, 그래도 그 뒤로는 쭈욱... 음, 그러니까 이 나라 식으로 말하면 귀족집안이었습니다." 음... 솔직히 울 집안은 직계가 아니라 방계라 따지고 보면 토지그 입장과 비스무리 하지만 말이다. 선애의 말에 토지그는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기는 싫었던지 악을 쓰듯 외쳤다. "그게 진짜인지 거짓인지 어찌 알아?" "당신이 믿든 말든 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 출신을 따지러 오신 겁니까?" "이이익... 가, 감히..." 토지그가 선애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를 갈았다. [아... 저 아저씨 정말 마음에 안 드네... 지금 누구에게 삿대질이야, 삿대질이!] 자꾸 선애에게 함부로 대하는 토지그의 태도에 눈쌀을 찌푸리며 한번만 더 하면 저 손가락을 꺾든지 팔을 꽈악 물어버리던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나 보다도 조셉 집사가 먼저 나섰다. "무례하십니다. 지금껏 남작님의 혈육이란 생각에 가만 있었지만, 계속 이렇게 나오신다면 더 이상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조셉 집사가 단호하게 말하자 차마 그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지 토지그가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아니었던지, 더 이상 뭐라 하는 대신 자신이 이 곳에 온 목적을 밝혔다. 물론... 거의 씹어 내뱉는 듯한 어조였지만 말이다. "남작이...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왔네. 남작은 지금 어디 있는가?" 선애는 무시한 채로 조셉 집사에게 말하자 조셉 집사 또한 냉정하게 대답했다. "남작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모처럼 문안을 와주셨지만, 지금은 뵐 수가 없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단지 피곤해서 자는 거라면 깨워주지 그러나? 내 오랜만에 방문한 건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면 서운하지 않겠나?" "죄송합니다. 일어나기 전에는 왠만한 일로는 깨우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내가 방문한 것도 왠만한 일인가?" "죄송합니다." 조셉 집사가 한치도 물러섬 없이 그의 요청을 거부했는데 이상하게도 토지그는 불쾌한 기색이 아니다. 오히려 아까 선애의 존재 때문에 엄청 분노했던 것이 점차 가라앉아 침착해진다는... 특이한 상황이 연출되어버렸다. 게다가 그렇게 침착해지니 더 이상 버티고 있다간 자시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순순히 물러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흠...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알겠네, 오늘은 아쉽지만 그냥 가도록 하지."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선애를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면서 한 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남작 영애라? 흥, 어디 두고보자." 두고보자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무지하게 나빴다. 특히나 저 태도를 보자하면 분명 선애에게 뭔 짓을 하기는 할게 분명 한데... 그렇지 않아도 누군지 모를 놈에 의해 암살자까지 보내진 마당이었으니, 신경이 있는대로 곤두서 있던 나는 토지그의 그런 선언을 들으니 분노와 함께 심지어 나도 모르게 살기까지 뭉클뭉클 치솟아 올랐다. '저, 저놈... 그냥 확 없애버릴까? 어차피 벨타이거에게도 하등 도움 안되는 놈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구체적인 방안까지 여러가지로 떠오르는데... 솔직히 지금 내 입장에서 아주 자연스레 죽게 만드는 건 캐링턴 후작가에 들어가서 가보를 훔쳐 오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막말로 녀석이 어떤 계단 위에 있을때 밀어서 구르게 해도 되고 녀석이 밤에 잠 잘때 배게를 들고 녀석이 숨을 못 쉬게 막아도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자고 있을때 몸 속에 손을 넣어 심장이나 폐를 한번 꾸우욱... 눌러줘도 되고... 그런데, 내가 거기까지 떠오르며 실천을 고려하고 있을때였다. 갑자기 내 발 밑이 어두워지면서 그 곳에서 뭔가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내 발을 칭칭 감아오는 것이었다. [우와아악~!!] 이런 몸이 된 뒤로 촉각이 사라져버려 부드럽다, 단단하다, 거칠다는 느낌은 물론이거니와 차갑다거나 뜨겁다는 느낌도 전혀 못 느끼게 된지 오래였기에 갑자기 느껴지는 차갑고 음습한 기운은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래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자 선애가 무지 놀라 날 바라보는 것이었다. "/뭐, 뭐야? 왜 그래?/" 선애 또한 너무 놀라는 바람에 옆에 토냐와 모건이 있다는 것도 깜빡 하고 물어 토냐와 모건을 놀라게 만들었다. "선애?" "이사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선애는 나를 향해 찌릿한 시선을 보내고는 얼른 둘러댈려고 입을 열었다. "어... 그게 말이지요 갑자기 생각난 건데..." 그런데 그때 선애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 준 사람이 있었으니... "혹시... 아까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생각지 못한 말에 선애와 내가 놀란 시선을 돌리니 그 곳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알프레드가 서 있었다. "어라? 알프레드 언제 왔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아까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라니." 선애와 모건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묻자 알프레드가 갑자기 끼어들어 실례했다는 듯 살짝 목례해 보이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까 집사님께서 손님 배웅 나가시는 모습을 보고 이제 들어가도 되겠다 싶어 들어 왔습니다.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까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누군가 이사님께 살수를 보냈던 일을 말합니다." 알프레드의 말에 토냐와 모건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살수? 살수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루빈스타인 후작가 저택을 방문하러 간 사람들이 돌아오려면 의논하려고 했었는데, 그들 또한 큰 일을 당해서 정신이 하도 없다보니 말한다는 걸 깜빡 하고 있었다. 토냐와 모건이 그렇게 묻자 본격적으로 의논하고 싶었던지 알프레드가 자리를 옮길 걸 요청했고, 둘은 기꺼이 받아들여 토냐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 선애의 집무실로 가려 했지만, 살수 녀석이 하필 그 곳에서 선애를 노리는 바람에 지금 그 곳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뭐, 덕분에 선애가 갑자기 소리쳤던 걸 해명하는 일은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휴우... 다행이다. 너도 참, 갑자기 거기서 소리치면 어떻게 하냐?] 사람들이 자리를 옮기려 이동하는 중, 일행의 맨 뒤에서 가던 선애에게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자 선애가 매서운 시선을 날리며 속삭였다. "/그게 누구때문인데? 언니야말로 갑자기 왜 비명을 지르는 거야? 놀랐잖아?/" [아니, 그게... 나도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거든?] 뭐, 선애가 놀란 건 나 때문이었으니 나는 머쓱하게 그러며 아까 내가 겪었던 이상한 현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설명을 다 들은 선애가 되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본다. "/차갑고 음습한 기운?/" [응. 되게 놀랐어. 그래서 깨달은 건데... 나 아무래도 사람의 생명을 해한다면 안 될거 같아.] "/당연한 일을... 언니, 혹시 그거... 지옥의 문이라도 열린 거 아니야?/" [응응, 나도 그런게 아닐까 생각했어. 왜 옛날에 나온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혼에서도 그랬잖아.] "/몰라, 그런 영화 안 봤어. 어쨌든, 그게 아니라도 사람 죽이는 건 정말 큰 죄잖아.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앞으로는 그런 생각 하지마./" 하기야, 그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내가 중학교 1학년때인가, 2학년 때인가 나왔던 영화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음... 생각하기 싫다. [알았어.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내가 장난 치는 건 그나마 용서가 되도 생명에 손 대는 건 용서가 안되나봐.] 선애의 말에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토지그 녀석때문에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분노와 살기가 한 순간 얼음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고, 대신 겁이 덜컥 나 앞으로는 생각 조차도 하지 말아야 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토냐의 집무실에 도착하여 문을 굳게 닫고 일행이 자리에 앉자마자 토냐가 잡아 먹을 듯한 시선으로 선애와 알프레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그게 무슨 소리야? 선애가 살수의 공격을 받았다니?" "그게... 아까 우리 상회 경호병 복장을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다급히 달려와서 회장님께 큰일이 났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세한 설명을 나에게 하려는 척 다가오더니 갑자기 단검을 빼서 찌르려고 하데요?" "그래서? 찔렸어?" 토냐가 묻자 선애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운 좋게 피했지요. 몇 번 계속 공격 했는데 실패하는데다 그때 알프레드가 사람들을 불러서 녀석은 도망갔어요. 괜히 제 집무실 유리창을 깨면서 말이죠." 선애의 이야기가 끝나자 토냐와 모건은 심각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하더니만 잠시 후 모건이 진지한 어조로 장난같은 질문을 해왔다. "이사님... 혹시 전에 원한 같은 거라도 산 적 있으세요?" 뭐, 비록 선애가 아주 착하게만 살아 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선애를 죽으려고 혈안 될 정도의 큰 잘못은... "으으음... 없는 거 같은데요?" "그럼... 역시 아무래도..." 토냐가 진중한 어조로 말하자 모건이 뭘 말하려는지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선애와 나 알프레드는 고개를 갸웃 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혹시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요?" "짐작... 이라기 보다 할 만한 사람이 너무 뻔한 거 같아서. 단지, 지금까지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아주 교묘하게 움직여 왔으면서 왜 갑자기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서느냐 하는 거지." 토냐가 뻔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까 그 토지그 크로스웰과 핸들리 크로스웰이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왜 선애를 노리느냐 하는 거다. 선애는 그들과 이해 관계가 전혀 없는데. 아, 물론 선애가 크로스웰 남작 영애가 되었으니 그들에게는 눈엣가시겠지만, 방금 토지그 녀석이 와서 집사에게 듣기 전까지는 그들은 그걸 몰랐으니 그들이 선애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들이 왜 절 노려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아, 물론 이제 생겼지만..." 선애 또한 토냐가 누굴 가리키는지 금새 알아챈 듯 그렇게 물었다. "내 생각엔, 회장님과 널 한꺼번에 없앰으로써 두 가지를 얻으려는 것 같아. 첫번째는, 타이거 상회. 예전에는 크로스웰 상회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 같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 거기다 크로스웰 상회를 통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서대륙의 술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니 아무래도 신경에 거슬리겠지." 선애가 남작 영애가 되기 전에도 벨타이거가 죽으면 타이거 상회는 자동적으로 선애에게 넘어 오게 되어 있었다. 선애가 벨타이거의 동업자라는 것도 있지만, 처음 그와 동업자로써 계약할때 동업자 중 누군가 한명이 죽고 자식이 없으면 나머지 동업자에게 상회에 대한 모든 권한을 넘긴다는 조항을 작성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벨타이거 녀석은 그때부터 혹 자신이 노림 받을 것을 예상하고 대비한 것 같다. 그러나 만약 두 동업자가 같이 죽어버린다면, 타이거 상회는 벨타이거의 핏줄인 토지그 크로스웰에게 남작 작위와 함께 넘어갈거다. "신경에 거슬리는 점을 제거하는 한편, 제법 큰 상회를 삼키게 되었으니 이득 아니겠어?" "그렇군요. 그리고 다른 이득은 뭐예요?" "전 같으면 벨타이거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살수에게 죽는다면 그들이 당연히 범인으로 지목되겠지만, 너와 같이 죽게 된다면 범인을 그들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진다는 이야기지. 그들도 물론 용의자로 지목되겠지만, 타이거 상회가 사라진다면 이익을 볼 다른 누군가도 용의자로 지목되지 않겠어?" "우리 상회가 사라진다고 누가 이익을 봐요? 이 도시의 화장품 계열 상회들?" 선애의 말도 안된다는 뉘앙스의 말에 모건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다른때라면 이건 설득력이 없습니다만, 지금 저희 상회 상태라면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루빈스타인 상회에게 밉보였다는... 그들로써는 더 좋겠지요. 용의자가 루빈스타인 상회라면 조사 나온 관리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그냥 단순 원환 관계로 범인은 알 수 없음... 이라고 끝낼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쪽 사람들에게 잘 봐달라고 뇌물을 좀 쓰기도 하겠지요." "그게 말이 됩니까? 우리 상회하고 루빈스타인 상회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사람들이 잘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한 가지 가정이 들어가는 거지. 루빈스타인 상회와 우리 상회 사이를 그들이 벌써 알고 있다는 거. 아니, 내 생각에는 회장님의 왠만한 일거수 일투족을 그들이 알고 있었던 거 같아." 토냐의 말에 분위가 심각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그 동안 회장님이 겪었던 사고들을 쭈욱 생각해보니까,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회장님의 행보를 범인은 알고 있었거든. 뭐, 극비로 치부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떠들지 않았던 행보나 갑작스레 이루어진 행보 등등에서 사고를 당한 경우도 있었거든. 이번에 우리가 루빈스타인 후작 저택에 방문한 것 처럼." 하기야, 벨타이거와 토냐가 후작가를 방문한 건 갑작스레 이루어진 일이었다. 선애가 휴를 만나고 와서 벨타이거 토냐와 의논한 뒤 후작가로 가자~! 해서 그 다음 날 바로 방문한 거였으니 말이다. "오늘 사고, 회장님이 후작가에 방문하기 전에 당할 수 있는 사고였어. 설마 그 폭발물이 후작가 안에서 설치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왜 우리가 후작가를 나온 후에 폭발을 일으켰을 거 같아? 용의자로 루빈스타인 상회가 지목되기를 바랐던 거야. 특히나 우리 상회와 루빈스타인 상회 사이가 안 좋을때 일어난 일이라면 더더욱 범인으로 유력하게 보이겠지." 토냐의 말을 듣고 있던 알프레드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회장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이. 회장님이 남작 작위를 받기 전에 이 저택 안 사람들 중 회장님 편이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어. 그러니, 저택 안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쪽 사람이라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야." 모건이 침중하게 말한다. "잠깐만요, 그럼 아까 그 토지그라는 불독 녀석이 온 것도?" 선애의 말에 모건이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에게 듣고 직접 확인하러 온 걸겁니다. 아마 회장님이 정신을 잃은 채 실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겠지요. 직접 용태를 확인할 겸, 남작 대리로 나설때를 대비해서 말입니다. 그러다 이사님이라는 존재를 알고 낭패를 당하기는 했습니다만..." 모건의 말에 알프레드가 뭔가 떠올랐는지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큰일이군요. 만약 회장님이 빨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다면, 앞으로의 공격은 이사님께 집중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회장님이 정신을 차리신다면 공격이 좀 양분화될테니 좀 덜해지겠지만, 이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다면... 앞으로 더더욱 위험해지실 겁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그 빌어먹을 스파이 녀석을 찾아내야 해. 그런데 어떻게 찾아내지? 한꺼번에 모아놓고 일일이 심문을 할 수도 없고, 차라리 싹 갈아버리자고 건의를 해봐?" 모건과 토냐가 줄줄이 말을 꺼내자 선애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조셉 집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떨까요? 회장님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지만, 오늘 절 보호하는 거 보니 그래도 회장님쪽인 것 같던데요. 우리야 이 저택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지만, 집사님이야 평생 저택을 관리해 오신 분이니 저희보다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그러자 모건이 난색을 표했다. "집사님이요? 차라리 조셉 부인쪽이 더 나을텐데..." "아니에요. 조셉 부인이 회장님 편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 조셉 부인이 나서면 오히려 어려워질 거예요. 차라리 전에 회장님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는 조셉 집사가 제격이에요." 선애의 말에 토냐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말이네. 그 집사라면 티 하나도 안 내고 잘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거기다 이제 남작은 회장님이고 부인도 회장님 편이고, 그 아들도 회장님이랑 친하다며?" "맞아요. 젝 조셉씨도 곧 돌아온다면서요? 그러니 집사님이 제격이에요. 모건이 나중에 한번 가서 도움을 청해보세요. 아니면, 제가 말해볼까요?" 선애가 다시한번 말하자 모건이 좀 꺼림직한 표정이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이 일로 조셉 집사님과 회장님 사이가 좀 나아졌으면 좋겠군요." [거기에 정보 길드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 집사에게만 맡겨두기는 그렇잖아?] 내 말에 선애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 38화 그날 밤, 선애는 처음 암살을 당할 뻔한 충격으로 인하여 잠을 못 잘까봐 걱정 했었는데, 왠걸... 이 세계에 와서 하도 여러가지 험한 일을 당해서 담이 커진 건지, 아니면 암살 미수 말고도 여러가지 정신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정신적인 피곤이 많이 싸여서 그런지 할 일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밤이 깊어지자 그 즉시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밤 늦게까지 잠 못자고 혹시나 왠 놈이 몰래 숨어들어오는 건 아닌가 지키고 있었는데, 울 꼬맹이는 도로롱 도로롱 쌕쌕~ 거리면서 잘도 자는 거였다. 이 녀석이 내가 옆에 있어서 안심을 하고 잘 수 있는 건지, 담이 커져서 잘 잘 수 있는 건지 헷갈렸다. 그러나 우리 꼬맹이와는 달리 벨타이거 녀석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녀석은 그 다음 날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해 사람들을 걱정 시키더니 그날 밤에는 체온까지 갑자기 뚝 떨어져 그를 간호하던 의원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 체온은 다음 날까지도 회복이 안 되어 벨타이거 덕분에 밤을 샜던 의원은 퀭 해진 눈으로 조심스레 일행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이 고비가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대로 체온이 회복 안 되신다면, 힘들겁니다." 의원의 말에 모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뭐니뭐니해도 벨타이거와 처음부터 함께 했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벨타이거와 정이 깊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의 말에 의원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게 뭡니까?" "최고위 신관님이나 아니면 대 마법사가 오셔서 회복 마법을 걸어주신다면 가능합니다만, 그런 분들을 모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알파두르 도시도 제법 발달한 도시였기에 큰 신전이 존재했고 고위 신관도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고위 신관은 수도에 있는 대 신전에나 볼 수 있는 존재였다. 뭐, 다른 도시에 또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알파두르에는 없다는 거다. 최고위 신관은 7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만큼이나 아주 극소수의 보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의원의 말을 들은 모건은 더욱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던지 토냐는 선애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따로 불러낸 뒤에 속삭였다. "선애, 그러고 보니 그 분 아직도 안 돌아 오셨나?" 토냐는 드워프 마을에 같이 갔었지만, 그 곳에 렌스버리가 왔다는 건 몰랐다. 워낙에 갑작스레 와서 드워프들만 보고 다시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말이다. "아뇨, 드워프 마을에 있을때 잠깐 오셨었는데... 뭐 연구할 게 있다고 돌아가신다고 하셨어요." 선애의 말에 토냐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셨다고? 그럼... 다시는 안 돌아오시려나?" "그게... 연락할 방법은 있는데요." 선애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토냐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스러운 한숨을 내뱉었을 뿐. "하긴... 불러봤자 그 분이 도와주신다는 보장은 없지. 오히려 이런 귀찮은 일로 왜 불렀냐고 화를 낼 게 뻔해. 자기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토냐의 말이 맞을 것이다. 평소라면 말이다. 그러나, 선애한테는 한 가지 이점이 있었으니... [야... 저기, '그거' 쓰면 안되려나? 아무래도 뭣 보다 사람 목숨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냐?] 내 말에 선애가 막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어제부로 우리에게 완전 협력하기로 약속한 조셉 집사가 다가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군데요?" "닷지 상회의 리클레어씨라고 하셨습니다." 리클레어라면 닷지 상회 대표였다. "그가 갑자기 왜? 모건... 은 지금 정신이 없을테니, 토냐 나랑 같이 가서 만나요." "그래." 모건은 지금 정신이 없을테니 아무래도 그 보다는 선애가 직접 만나는게 좋을 것이다. 뭐, 모건이 그를 만나러 나간다 해도 선애도 같이 나가야 했겠지만 말이다. 대표가 왔는데 대표가 맞아줘야 하는 건 예의 아니겠는가? 그러나 선애의 뒤를 따라가서 본 벨저 리클레어는 예의를 차렸던 안 차렸던 그걸 알아 볼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정신 없어 보였던 것이다. "크로스웰 남작님, 제가... 아니, 그대는?" 문 열리는 소리에 몸을 돌리며 다짜고짜 벨타이거를 찾던 그는 들어온 사람이 자신이 기대한 사람이 아니란 걸 발견하고는 화를 내려다 선애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어서 오십시오, 리클레어씨. 지금 회장님께선 자리에 안 계셔서 제가 나왔습니다." "그래요... 크로스웰 남작님의 동업자이신 선애양... 이라고 했던 가요?" "잘 아시는 군요. 이제는 선애 크로스웰이라고 합니다." "크로스웰? 음... 그럼 혹시... 결혼을...?" 놀라움으로 눈이 둥그래진 그에게 선애가 배시시 웃어보였다. "아닙니다. 양녀가 되었지요." "험험, 그랬군요. 어쨌든, 축하합니다 남작 영애." "감사합니다. 자, 그럼 방문 목적을 여쭈어 봐도 될까요? 무척 급한 용무이신 것 같은데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벨저 리클레어가 다시금 다급한 표정이 되었다. "크로스웰 양, 내가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소." "무슨 말을 들으신건지 말씀을 해주셔야 그에 대한 답을 해드릴텐데요." 선애의 말에 벨저 리클레어가 초조한 얼굴로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는 것이었다. 처음, 아니 전에 만났을때만 해도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으면 사람이 이리 변했나... 싶기도 하다. 거기에 깊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벨저가 좀 침착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내 수하가 밖에서 놀라운 소식을 하나 들었다고 했소. 그게 뭐냐면... 타이거 상회가 루빈스타인 상회에게 밉보였다는 것이오. 그게 사실이오?" "예에?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밉보이다니요?" 선애 대신 토냐가 무지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벨저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과연... 헛소문이었군. 어제 루빈스타인 후작가를 방문했던 크로스웰 남작님이 돌아오던 도중 습격을 당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소? 지금 밖에서는 그게 루빈스타인 상회에 밉보여서 그런 거라고 소문이 파다하오." 그 말에 선애와 토냐가 심각한 얼굴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이틀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길거리에서 폭발이 있었다니 목격자가 없지는 않을테니 소문이 났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그 소문이 루빈스타인 상회에 밉보여서 그렇게 된 거라고 한다니... 너무나 구체적이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작정을 하고 퍼트린 것처럼 말이다. "리클레어씨,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씀 드리는데, 저희는 닷지 상회에 피해를 드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선애의 말에 벨저가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크로스웰양? 그럼 정말 루빈스타인 상회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말입니까?" "사이가 나빠졌다고 말씀드리기 조금 미묘하군요.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자세한 설명을 드릴테니 지금은 믿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럼 일이 잘못 해결되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암울한지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벨저에게 -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공사도 한창 진행된 상태였으니 이제와 무르면 닷지 상회는 엄청난 손해를 보니 말이다. - 선애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닷지 상회에는 절대 피해가 없을 겁니다.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만약 저희 상회가 잘못 될 경우, 저희 상회가 가지고 있는 드워프와의 모든 거래를 닷지 상회에 넘겨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선애의 말에 벨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드워프와의 거래를?" "그렇습니다." 선애의 말에 벨저는 마치 선애의 진심을 가늠하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에 선애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계약서라도 써드릴까요?" 그러자 벨저는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거기서 계약서 쓰라고 했다가는 타이거 상회에 이미지가 안 좋게 찍힐테니 단호하게 쓰라고 할 수는 없을 거다. "아닙니다. 크로스웰 양을 믿겠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큰 위험 부담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가 객관적으로 봤을때 선애의 말은 신용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드워프들과 거래를 한다는 건 '신뢰 할 수 있는 사람'이란 보증수표였던 것이다. 드워프들은 인간 됨됨이가 부족한 사람과는 절대로 거래를 하지 않았다. 현재 드워프들과 거래하고 있는 벨저 또한 그런 면을 잘 알고 있을테니 저리 말할 수 있는 걸 거다. 선애가 그렇게 '드워프와의 거래'까지 걸고 나서자 벨저 리클레어는 그쯤에서 진정하고 오히려 잘 해결되길 바란다며, 혹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 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자 토냐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그냥 끝가지 시치미 떼지 그랬어?" "아뇨, 처음에는 그럴까 했었는데 누군가 작정을 하고 퍼트리는 이상 우리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질 게 아닌거 같아요. 이럴때는 그냥 정직 작전으로 나가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선애의 말에 토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런데... 누굴까?" "저는 핸들리 크로스웰쪽이 유력한 거 같은데요?" "동감이야. 루빈스타인쪽이야 그런 소문따위 내지 않아도 우리들을 엄청 힘들게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아아... 그렇군요. 다시 생각난 거지만, 빨리 배를 구해야 하는데... 그놈의 루빈스타인 상회 때문에..." "거기다가 루빈스타인 상회와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도 문제야. 이러니 앞으로 뭘 하든 힘들어지겠어." 토냐가 계속 되는 악재에 한숨을 푹푹 쉬며 걸음을 옮기는데 손님 배웅을 나갔던 조셉 집사가 다시 다가왔다. "아가씨." 조셉 집사는 선애가 남작 영애라는 것이 밝혀진 후부터 꼬박꼬박 아가씨라고 부르는 한편 저택의 다른 시종 시녀들에게도 아가씨라 부르게 했다. 처음에는 닭살이라고 질색하던 선애도 하도 사방에서 아가씨, 아가씨 하고 부르니 이제는 익숙해져 그러려니... 하고 있다. "무슨 일인가요?" "잭이 돌아왔습니다. 뵙고 싶어하는데 만나시겠습니까?" 잭이라고 한다면 조셉 집사의 외아들이자 모건과 같이 벨타이거의 측근이라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가게를 확장 하면서 그를 불러들인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당연히 만나야죠." "이리로 데려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같이 가요." 집사를 따라 현관으로 나가니, 과연 오랜 여행으로 약간 피로해 보이는 잭 조셉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아마 벨타이거가 나올 줄 알고 기다린 듯 선애와 토냐만 모습을 드러내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상태로 얼결에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사님." 그는 미래의 크로스웰 저택 집사가 될 몸이었지만, 현재는 상회에 소속된 몸이라 선애보고 이사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애가 그에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집사의 호통이 떨어졌다. "이 분은 크로스웰 남작 영애시다. 그러니 앞으로 아가씨라 불러라." "예?" 집사의 호통 보다는 그 내용이 뜬금 없었기에 잭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자 집사가 못마땅한 듯 눈쌀을 찌푸리며 뭐라 하려는 찰나 선애가 끼어들었다. "아아, 집사님...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잭, 나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네요. 음... 설명이 좀 길어질 거 같으니 가면서 이야기 할까요? 게다가 회장님도 만나뵈어야죠?" 집사는 선애가 남작 영애로 밝혀진 후 벨타이거 녀석을 회장님이라 부르는 걸 굉장히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상회를 위하여 남작 영애가 되었지 정말 되고 싶어서 양녀가 된게 아닌 선애는 벨타이거를 '아버지'라 부르기 무지하게 싫어했기에 호칭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선애가 벨타이거를 '회장님' 이라 하자 집사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 댔지만, 선애는 싸악 무시했다. "가요, 회장님은 윗층에 계세요." 그렇게 선애와 토냐를 따라 벨타이거의 침실로 향한 잭은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는 벨타이거를 보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이... 이... 이..." 너무 놀라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잭을 보고는 벨타이거 곁을 지키고 있던 모건이 동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잭은 그 손을 사납게 쳐내더니 모건을 무섭게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게, 이게...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당신이 곁에 있었는데 어떻게 벨님이 이런 상태가 되신 겁니까? 어떻게 당신은 멀쩡할 수가 있죠?" "면목 없군." 잭의 사나운 어조를 모건은 고개를 푹 숙인채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실 모건이 멀쩡했던 건 아니다. 그가 벨타이거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을때 그도 토냐도 꽤나 크게 부상당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단지 선애가 가지고 있는 마법 목걸이 덕분에 치료 마법을 받아 지금은 멀쩡해 보이는 것 뿐이지. "당신이 저렇게 되더라도 벨님을 지켰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럴거면 뭐하러 벨님 곁에 남아있었단 말입니까? 차라리 내가 남아있었을 것을..." 처음에는 사납지만 작은 목소리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흥분했는지 잭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러자 토냐가 듣다 못했는지 척척 다가가 잭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퍼어억~! [나이스~!!] 잭의 말이 너무 심하다 생각하고 있던 나는 토냐의 행동에 짝짝~ 박수를 쳤다. "좀 진정 하지 그래? 너야말로 환자 옆에서 그렇게 큰 목소리로 떠들면 어쩌자는 거냐? 그리고, 모건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 네가 뭘 안다고 모건씨를 질책하는 거지? 네가 그때 옆에 있었다 해도 모건씨보다 더 잘하지는 못했을 거다." "익... 그래도..." "시끄러. 계속 그렇게 흥분해서 떠들테냐, 아니면 사정 설명을 들을테냐?" 토냐가 매섭게 노려보며 단어를 딱딱 끊으며 묻자 잭이 움찔 하더니 흥분을 가라앉혔다. [오오~~ 토냐씨~ 멋있어요~~!!] 이야기가 아무래도 길어질 듯 해서 토냐는 잭과 모건을 이끌고 다시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모건은 벨타이거의 옆에 계속 있으려고 했지만, 일해야 하지 않냐는 토냐의 질택에 얌전히 토냐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그 곳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쭈우욱... 듣게 된 잭 조셉 녀석은 생긴 건 침착하고 남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것 처럼 생겨 놓고서는 성격은 그렇지 못한지 중간 중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는 이를 빠득빠득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뭐, 당장 핸들리나 토지그를 처단하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것만 해도 인내심이 있다고 칭찬해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토냐가 의원이 이대로 벨타이거 녀석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위험하다는 말을 끝내자 잭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벨님..." 그가 낮은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린 후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기에 토냐의 집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 틈에 나는 선애에게 작게 속삭였다. [야, 꼬맹아... 아까 이야기 하다 말았는데... 벨타이거 녀석, 아무리 미운 놈이라고 해도 그 동안 인연도 있는데 이대로 둘 거냐? 게다가 저 녀석 없어지면, 너도 힘들어질텐데...] 내 말에 선애가 날 힐끔 째려본다. 그 시선이 마치 '내가 아무리 성격이 안 좋다지만, 그래도 아픈 사람을 그냥 두고볼 거 같아?' 라고 날 질책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길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일행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지금 현재 우리 상회의 상황을 이야기 하자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격이겠지요?" 선애의 말에 일행들은 '다 아는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나?'하는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봤지만, 선애의 시선이 단호하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생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지금 저희 상회는 벼랑에 몰려 있습니다." "맞아, 회장님은 쓰러져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 서대륙으로 빨리 배를 보내야 하는데 배를 구할 수 있는 방도는 보이지 않지, 밖에서는 우리 상회와 루빈스타인 상회 사이가 안 좋다고 소문이 났지, 이사의 목숨도 노려지고 있지, 거기에 앞으로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어떻게 나올지 몰라 불안하지... 이보다 더 나쁠 수 있나?" 벨타이거가 다치기 전 루빈스타인 후작 저택을 방문한 일은 성과 없이 끝났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휴나 토냐가 비상한 머리를 가지기는 했지만, 사실 엘리엇 녀석도 입만 산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해낸 것 정도는 그들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거다. 거기다 그쪽이 우리보다 파워가 강하고 말이다. 그것 말고도, 그랜트 녀석이 말하길 이번 일은 자기들 선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루빈스타인 상회의 회장인 후작이 직접 명령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 한 나라 사람들과 소개시켜준 대가 운운 해봤자 그랜트 녀석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니 이루어질 수 없었을 거다. 그랜트가 약속한 건 자신의 능력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겠다고 한 거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 나라와 다른 상회를 연결해주려 해도, 우리 상회가 루빈스타인 상회에게 찍혔다고 소문 난 이상 우리와 새로 손 잡을 상회를 찾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마지막 강수를 쓰려고 합니다." 선애가 단호하게 말하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나는 알아듣고는 기함을 했다. [야, 너 설마... 그거 뒷탈이 위험하단 말야!] 하지만 선애는 내 말을 무시해 버렸고 사람들은 선애의 단호한 표정을 바라보고는 질문을 던졌다. "어떤 방법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모건의 말에 선애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방법에 대해서는 그냥 모른체 해주십시오. 단지, 확실한 만큼 뒷탈이 있을 겁니다. 저는 사실 그것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저희 상회가 벼랑에 몰려있으니 이대로 무너지길 기다리느니 차라리 도박을 하려 합니다." "도박을 하는 건 좋은데, 방법을 말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도와줄 수가 없잖아?" 토냐의 말에 선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건 저 혼자 할 겁니다.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그 방법을 사용하면 저는 당분간 상회에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혹... 저때문에 상회에 피해가 올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선애의 말에 토냐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그럼 하지 마. 지금 회장님이 저 상태인데, 그 뒤를 이어야 할 너까지 상회를 떠나 있겠다고? 너까지 없는데 상회가 제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 "회장님은 살아나실 겁니다. 토냐, 아까 저에게 물으셨죠? 그 분께 연락할 수 없냐고요." 선애의 말에 토냐의 눈이 둥그래졌다. "말도 안돼. 그건 내가 하도 답답해서 해본 말이야. 그 분을 부른다 해도 정말 그분께서 들어줄 리 만무하다고." "아니에요. 전에 그 분께서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한도내에서 한 가지는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어요. 저는 그걸 회장님을 살리는데 쓰려고 합니다." 선애의 말에 이번에는 토냐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 분'이 누군지 모르는 알프레드와 모건, 조셉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그 분'의 정체를 아는 토냐는 그 약속이 가지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깝다... 회장님이 저 지경이 되지 않으셨다면...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미리쓰지 그랬냐." "아하하... 크로스웰 상회를 상대로 쓸까요, 루빈스타인 상회를 상대로 쓸까요?" 토냐의 말에 선애가 웃었다. "그거야... 으음... 그런데 쓰는 것도 문제군." 내 생각인데 만약 선애가 렌스버리에게 루빈스타인 상회를 막아달라고 부탁하면, 렌스버리는 이것저것 깔끔하게 생각하기 귀찮으니 아마 루빈스타인 상회 본부라던지 가게들을 박살내 버릴 거다. 그게 얼마나 간편한 방법인가? 토냐도 그걸 알기에 문제라고 한 걸 거다. 우리야 괴롭히는 거대한 적이 사라져서 좋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 재산 피해가 생길까? 루빈스타인 상회는 이 나라 경제를 지탱하는 상회고, 루빈스타인 후작가는 이 나라를 좌우하는 후작가, 그 대단한 가문이 한순간에 파괴된다면 국가 입장으로써도 상당한 손해일 거다. 뭐, 라이벌들 입장에서야 좋겠지만... 게다가 울 꼬맹이는 자기의 일은 자기 스스로 하길 원하는 녀석이었기에, 그렇게 해결한다면 상당히 찝찝해 했을 거다. "저어... 대화하시는데 죄송하지만,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선애와 토냐만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자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모건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러자 토냐가 무지 암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알려고 하지 마요. 알면 다쳐." 선애 또한 토냐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보였다. "그냥 우리를 한 번 도와줄 분이 있다고만 알고 계세요. 단지, 이번 일은 비밀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우리를 도와줬다는 사실 마저도 잊으시길 바라요." 쇠 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선애는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한 이상 시간을 끌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 즉시 벨타이거의 침실로 쳐들어갔다. 그 안에서 벨타이거를 간호하고 있던 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침실 문을 단단히 잠갔다. 토냐는 렌스버리 녀석을 만나기 무섭다고 밖에서 아무도 못 보게 지키는 역하를 맡기로 했다. 여전히 정신을 못차린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벨타이거를 확인하고 선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도대체 상처도 기껏 치료해 줬건만 못 일어나는 이유가 뭐야?/" [그러게 말이다. 하는 수 없지. 사람 목숨 살리는 것 만큼 값진 일은 없으니까.] 내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렌스버리가 주고 간 반지를 들었다. [야, 그러고 보니 생각난 건데, 그 녀석 궁금한 거 있으면 가끔 연락한다더니만 그 뒤로 한 번도 연락 안 했네?] 내 말에 고개를 갸웃 거리던 선애가 어깨를 으쓱 했다. "/궁금한게 없었나 보지 뭐. 설마 궁금한게 있는데 날 귀찮게 하기 싫어서 연락 안 했겠어?/" [하긴...] 녀석이 가르쳐준 대로 반지의 수정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수정에 환한 빛이 켜지면서 잠시 있자 렌스버리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냐?) 오랜만에 듣자 그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반갑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녀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기때문에 그런 걸까? "안녕하셨습니까? 저기... 부탁이 있어서 연락 드렸는데요." 선애가 조심스럽게 목적을 밝혔는데, 어째 한참이 지나도 응답이 없는 거였다. 부탁이 있다는데 그게 뭐냐고 묻거나 하다못해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하라는 말은 커녕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선애는 불안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이거... 왜 아무런 말도 안 하시지?" [그러게... 그거 혹시 망가졌나?] "아? 정말 망가졌나? 이거 토냐씨에게 한번 보일까?" 그러자 갑작스레 들려온 퉁명스러운 목소리. "망가지긴 뭐가 망가졌다는 거야? 누가 만들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벨타이거 침대 옆에 떠억 하니 렌스버리 녀석이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보통 공간이동 하면 빛이 번쩍 하면서 누군가 왔다는 뭔가 현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나타나니 선애와 나는 무지하게 놀라버렸다. "으헉!" [왁!!]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그러자 렌스버리 옆에 따악 달라붙어 있던 아리아가 미안함과 반가움이 섞인 얼굴로 나에게 다가온다. [아하하... 무지하게 놀랐네요. 어떻게 이렇게 소리소문 없이 나타나실 수 있는 거죠?] [아, 이건... 공간 이동 마법보다 한 차원 높은 용언 마법을 쓴 거거든요. 그래서 마나의 파동도 거의 없지요.] 아리아가 자랑스레 말했지만 용언 마법이 뭔지 마나의 파동이 뭔지 내가 알게 뭔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 부탁이 있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 말에 이렇게 즉시 날아올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렌스버리의 반응이 좀 신기했다. '저 놈이 아리아씨랑 못 노니까 무지하게 심심했나보네.' "왜 불렀냐?" "에" 뭔가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그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안 하고 용건부터 묻자 선애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렌스버리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인상이 살짝 찡그려지며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부탁이 있다며? 그게 뭐냐고!" 그제야 퍼뜩 정신 차린 울 꼬맹이. "아, 예. 부탁이 있습니다." 선애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쳐진 휘장을 걷어 거기에 누워있는 벨타이거를 렌스버리에게 보여줬다. "이 분 좀 살려주세요. 의원의 말이 8클래스의 리커버리 마법이 있다면 살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선애의 말에 렌스버리는 벨타이거를 힐끔 보더니 침대 가에 다가가지도 않고 나타난 자리에 그대로 선채 손만 뻗어가지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회복!) [저게 용언 마법이에요. 세상에, 렌이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고 용언 마법을 써주네요.] 그 모습을 본 아리아가 기쁜 표정으로 방방 뜬다. 용언 마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일반 마법보다 한 단계 더 좋은 거라고 납득한 나는 '저 놈이 왠일이야?' 라는 시선으로 녀석을 쳐다볼 뿐이었다. 마법이란 건 확실히 신기한 거다. 그 창백한 얼굴에 입술도 파리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벨타이거의 몸에서 하얀 빛이 새어 나오다 다시 스며들더니 그 후에 벨타이거의 혈색이 돌아오더니만 미약하던 숨소리도 커진 것이었다. "됐냐?" 됐나고 물어봐도, 혈색이 좋아진 건 알았는데 이게 확실하게 회복된 건지 선애나 나나 어떻게 알겠는가? "아... 저기... 완전히 회복된 건가요?" 그러자 렌스버리의 눈쌀이 찌푸려진다. "날 못 믿는 거냐?" 그에 화들짝 놀란 우리 선애. "예? 아뇨, 절대로 그런 건 아니고요, 마법이 다 시전된 건지 여쭈어본건데요... 제가 이런 건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아이고, 저 놈 한번이라도 좀 좋게 말할 수 없냐? 저 놈때문에 내 동생 가슴 새가슴 되게 생겼네!' "다 된 거다. 저 놈 완전히 회복 되었으니 걱정 마. 한숨 푹 자고 일어날거다. 그럼 부탁은 끝난 거지?" 렌스버리가 순순히 대답해주자 선애가 안도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다시는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선애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래, 다시는 하지 말아라. 이제 끝이다.' 라고 할 줄 알았던 렌스버리가 무슨 이유인지 멈칫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선애를 빤~~ 히 바라보더니 잠시 후 고개를 살짝 틀어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뭐, 더 부탁할 거 없냐?" "예?" "부탁할 거 없냐고. 너 한번만 더 날 다시 말하게 하면 가만 안 둔다?" 렌스버리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선애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선애만 탓할 수 없는 것이, 나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것이다. '에엥? 아니, 저 놈이 왜그런댜? 뭐 잘못 먹었나? 전에도 그러더니... 이 놈 요즘 이상하네...' 렌스버리의 밴댕이 소갈딱지만한 용심에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그러나 갑자기 그렇게 말한다고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울꼬맹이는 부탁할게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 머뭇댔을지도. "아... 저... 그러니까..." "뭐냐, 없으면 나 그냥 간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할 바를 모르니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다고 그러니 놀란 선애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하기야, 뭘 부탁할지 모를때는 부탁 들어주는 사람에게 '뭐 들어줄래?' 라고 묻는 게 좋을지도. 그에 렌스버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뭔데? 말해봐라." "저기... 사실은 지금 제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한 단체에서 받고 있는데, 조금 더 있으면 일을 하나 더 벌일 예정이라... 그러면 그때는 저희 상회로써는 감당하지 못할 엄청나게 큰 상회에서 절 노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제 목숨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선애의 말에 렌스버리가 선애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거 있잖냐." "예, 물론 이 목걸이가 큰 도움은 됩니다만, 얼마 전 제가 살수를 맞이했는데, 제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 덤비면 실드도 소용이 없더군요. 거기다가... 혹시 독이라도 있으면..." 선애의 말을 듣던 렌스버리가 픽 하고 웃었다.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목숨까지 노림을 받냐?" "그게... 어쩌다 보니... 일부러 원한을 사려는게 아니었는데 저희 상회가 잘 나가려고 하니까 시기하는 곳이 생기더군요." 선애의 말에 잠시 곰곰히 생각해보던 렌스버리가 갑자기 허공을 휘젓더니 뭔가를 선애에게 휘익 던졌다. 얼결에 받고 보니 단순한 은빛 링 팔찌였다. 그 가운데에는 내 새끼 손가락 만한 붉은 구슬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 색이 너무 예쁘다는 것 빼면 디자인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디자인이었다. "에... 저... 이게 뭡니까?" "팔찌다." 선애의 질문에 간단한 렌스버리의 답변. '이놈아, 누가 팔찌인 거 몰라서 물은 거냐?' 그러나 잠시 후에 렌스버리가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눈치 챘겠지만 마법의 팔찌다. 그 붉은 구슬은 레드 드래곤의 피다. 예전에 나에게 깝죽 대던 빨강 녀석을 반 죽여놓은 기념으로 만든 거지. 그 놈이 흘린 피거든." "아하하하... 예..." 저 놈 성격 상 다른 드래곤과 맨날 싸웠다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거 같다. "그 곳에 두 가지 마법이 새겨져 있는데, 블링크와 매직 미사일이다. 그에 대한 설명은 저 밖에 있는 마법사에게 물어봐라. 매직 미사일은 3서클의 마나가 들어간 것 다섯개가 만들어진 거다. 사방으로 보내지는 못하고 단 한쪽에만 보낼 수 있는 거야." "아...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블링크란 공간이동 마법보다 한 단계 낮은 마법이라고나 할까? 순간 이동 할 수 있는 마법인데 눈에 보이는 곳 안에서밖에 할 수 없었다. 한 번 가본 곳이라면 자신의 능력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던 보이던 멀리 떨어져 있건 상관없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공간 이동에 비하면 격이 좀 떨어지는 마법이지만, 그래도 낮은 서클의 수식이 간단해 도망갈때 엄청 유용한 마법이라고 나중에 토냐가 설명해 줬다. 도망갈때 유용하다고 붙이는 거 보니 렌스버리가 선애가 도망다닐때를 대비하게 한답시고 준 거 같다. "아, 한 가지 더 이야기 하겠는데... 내가 준 목걸이와 팔찌를 같이 차고 있으면 왠만한 독으로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될거다. 드래곤의 피에는 강력한 마나가 담겨 있어 네 몸에 나쁜 물질을 분해하는데 도움이 되어주거든. 특히나 레드 드래곤의 피는 독과는 완전 상성이 반대라 네 몸에 들어온 독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거다." 그거라면, 정말 선애가 몸을 피하는데 큰 도움이 될 듯 하다. "아... 정말 감사 합니다." 그 팔찌를 받은 선애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도 정말 고맙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때가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말이다.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나... 싶기도 하고... 선애도 그걸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물어본다. "음... 저기... 잠시 언니를 빌려드릴까요? 아리아씨와 오랜만에 대화라도..." 그런데 놀랍게도 렌스버리가 거절하는 것이었다. "됐다. 난 이만 갈란다. 그럼 앞으로는 볼 일 없겠지? 아참참, 그거 내놔라." "예? 뭘요?" "반지 말이다. 앞으로 나에게 연락할 필요 없을 거 아니냐?" "아, 예에..." 물론 연락할 일 없기는 하지만, 원래 저 반지를 준건 자기가 쉽게 연락하려고 준 게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데 도로 가져가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에 대한 정보는 둘째치더라도 아리아와 가끔은 대화하고 싶을테고 그러려면 내가 필요할텐데 연락할 수단을 없애버리니 말이다. '핸드폰을 연구하다 아리아와 이야기 할 방법이라도 찾았나? 흐음... 그럼 아리아가 말했을텐데...' 그러나 아리아도 별 말 없이 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생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럼 난 가마. 잘 먹고 잘 살아라." "예에... 안녕히 가세요." 희한한 인사를 하고는 아리아와 함께 순식간에 샤사삭~~ 하고 사라진 렌스버리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저 녀석... 인사가 왜 저런대? 잘 먹고 잘 살라니...] "/몰라. 저 심중을 누가 알겠어? 그나저나 별일이네... 드래곤이라서 마법 물품이 쌓였나? 이런 걸 쉽게 던져주고 말이야./" [그러게...] 선애와 내가 완전히 변한 렌스버리의 태도를 두고 쑥덕 거리는데 그게 좀 시끄러웠던지 침대쪽에서 약간 짜증이 섞인 신음성이 들려왔다. "으으음..." [어라라? 야, 저 놈 깼나보네.] "/어? 정말?/ 회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선애가 다가가 보니 렌스버리가 오기 전만 해도 움직일 힘도 없는 양 눕혀준 대로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 거린다. 거기에다 대고 선애가 벨타이거의 어깨를 흔들며 깨우자 인상이 더욱 찡그려지더니 눈이 떠지는 거였다. "으으음... 선애?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 잠에 취한 듯한 탁한 목소리, 그러나 분명 벨타이거 녀석의 목소리였다. "어머나, 회장님이 깨어 나셨어요!" 그 모습에 선애가 박수를 짝 치더니 잠궈 뒀던 침실 문을 열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물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들어온다. "벨님!" "회장님!" "뭐, 뭐야? 무슨 일 있어?" 그 모습에 반쯤 상체를 일으켰던 벨타이거 녀석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벨타이거 녀석은 자신이 며칠동안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의원의 지시로 시종이 가지고 온 죽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정신이 없어 모르고 있었다가 막상 죽을 대하니 식욕이 무척이나 동했던 모양이다. 죽도 한 그릇 깨끗하게 비워내고 혈색도 체온도 정상인 걸 보고 의원은 기적이라고 떠들어 대며 며칠만 정양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도 될 거라고 했다. 그 사실에 모건과 잭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벨타이거가 깨어난 것에 들뜬 마음이 가라앉자 선애는 벨타이거에게 마지막 강수를 쓸 거라고 선언했다. 당연히 벨타이거는 펄쩍 뛰며 반대 했지만, 선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우리 상회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해결할 방법 있으면 말해봐요."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해. 토냐가 브라우닝 경에게 가서 우리를 도울 수 있는지 타진해 보는 거야." "그쪽은 토냐를 스카웃 하길 원한다고요. 그럼 우리 상황을 해결해주는 대신 토냐를 넘기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그랬다면서요? 이번 일은 루빈스타인 자작이 아니라 루빈스타인 후작이 시킨 일이라고. 상회 회장이 시켰는데 아무리 루빈스타인 자작의 라이벌 이라고 해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벨타이거가 강경하게 대답했지만 선애도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브라우닝 경 여기 없는 거 알죠? 수도로 돌아갔단 말이에요. 토냐가 거기까지 가서 의견 타진해 오길 언제까지 기다려요? 곧 배를 사서 내보내야 한단 말이에요." "조금 늦어도 되잖아?" "그것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 안 해요? 그 동안 바깥에 퍼진 소문은 어떻구요? 게다가 이제 내가 남작 영애라는 것도 알려져서 핸들리나 토지그가 나도 노릴 거라구요." "그럼, 이렇게 해." 옆에서 선애와 벨타이거의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공방을 보고 있던 토냐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후작도 수도에 있지? 그럼 선애가 나와 같이 수도로 가는 거야. 그래서 우선 내가 브라우닝 경을 만나서 의견을 타진해보고 안 되면 선애가 강수를 쓰는 거지. 어때?" "안돼요. 회장님 경호는 어떻게 하고요?" "브라우닝 경과 만나서 협상 하려면 어차피 내가 가야 하잖아. 그 동안 회장님 혼자 알아서 버티라고 하지 뭐. 그쪽도 이렇게 실패한 이상 다시 함부로 움직이기는 힘들 걸? 게다가 남작 영애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좀 자중할 거라고 봐." 토냐의 말에 모건도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오히려 이사님이 회장님과 떨어져 있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이 곳에서야 그들이 얼마든지 날뛸 수 있지만, 이사님이 수도로 가버리신다면 그들이 쉽게 손을 쓸 수 있겠습니까? 두 분을 한꺼번에 노리기 힘들 겁니다." "하나 하나 해결하려 든다면요?" 선애의 질문에 모건이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허허 웃었다. "그건... 운에 맡겨야지요. 뭐, 두 분이 여기 함께 계시던 따로 떨어져 계시든 게속 노림은 받지 않겠습니까?" "후우... 나야 든든한 경호원이 있지만, 회장님은 토냐와도 떨어져 계신다니 걱정이네요. 그냥 나 혼자 갔으면 좋으련만..." 선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벨타이거가 선애를 흘겨봤다. "나는 선애 혼자 보낸다는 게 더 걱정이야.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꿀 수 없어?" "없어요. 됐어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는 걸로 하죠. 저는 준비 되는대로 출발할테니까, 제가 없는 동안 일이나 열심히 하시길 바라요." 출발하기 전 정보 길드 본부에 미리 연락을 하기도 하고, 당분간 못 만날 것 같아 작별 인사를 하려고 휴를 만났다. 휴는 당연히 선애 이야기를 듣고는 펄쩍 뛰었다. "네가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에이, 제가 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이렇게 나서는 거죠."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그래, 너 혼자는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치자. 그럼, 타이거 상회를 인질로 잡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러니까, 타이거 상회에 손을 안 댄다는 약조를 받아야죠."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있어?" "약속을 어기면 다시 한번 후작가 인장이 사라질텐데요? 아마 후작이 완벽하게 안심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나만 감쪽같이 처리하는 것 뿐이에요." 선애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휴가 이마를 짚었다. "내가 그 말을 해주는게 아니었는데... 괜히 말해줬어. 그냥 알아두라고만 이야기 한 걸 정말로 실천할 줄이야." "에이... 그건 아니에요. 휴가 그 의견을 말 안했어도 내가 생각해 냈을 걸요? 제 최고의 무기가 그거잖아요." 선애의 말에 휴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걱정스런 시선으로 선애를 바라봤다. "잠시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도 알아봐주랴?" "그래주시면 고맙구요. 계속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거니까... 뭐, 잠시 숨어있는 동안 길드 일을 도우면 되겠네요." "상부에 이야기는 해 놓으마. 에휴... 네 녀석을 처음 봤을때 이렇게 골치를 썩일 거라는 걸 알아봤어야 하는데..." "에이이... 휴는... 제가 일부러 그러나요? 상황이 저를 이렇게 만드니 제가 어쩔 수가 없는 거죠." "후우... 부디 조심, 또 조심하길 바란다. 상부에 연락을 해 놓을테니까 네가 수도에 도착 하면 그쪽에서 연락을 취할 거다." "예. 음... 오랫동안 못 뵐거 같은데 그 동안 안녕히 계세요. 선물 못 보내드려도 너무 미워하지 마시구요. 자스민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그래, 내 걱정은 말고 너나 몸 성히 돌아오거라. 아차차... 내 깜빡 했는데, 그 녀석 알아냈다." "그 녀석이라니요?" "네가 부탁한 저택 내의 스파이 녀석." "오오, 그래요? 집사님은 아직 못 알아 내셨는데..." "집사가 생각 못 할 뜻밖의 녀석이었으니까 그렇겠지." "누군데요?" "와일리." 휴의 말에 선애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엥? 누구요?" "와일리. 그 저택의 부집사 말이다." "에엑? 그 사람이요?" 사각턱에 구렛나루를 기르고 있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그래도 선애와 별로 마주치는 일이 없어서 독특한 인상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스파이였다니. 하기야, 부 집사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니 벨타이거의 일정이라던지 형편을 아주 잘 알 수 있는 거겠지. '흠... 요 근래 선애 주위에서 자꾸 보이더라니...' "어디에 붙었어요? 토지그? 핸들리?" "핸들리 쪽이더라. 그 녀석이 직접 핸들리 저택을 방문했기에 알 수 있었던 거였어. 그래서 캐보니 전에 가끔씩 들렸더라고." "세상에나... 어쨌든, 제가 출발하기 전에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다음 날, 선애는 소피, 토냐와 함께 수도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악연인지, 배를 타고 수도까지 가려고 웨이벌리에서 여객선에 올라탔는데, 그 곳에서 그랜트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상회의 운명을 걸고 향하는 길이었기에 그런 그들을 위로할 겸 해서 돈을 좀 들여 고급 여객선에 올랐는데 따악 마주쳐 버린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혹시 저 놈들이 울 꼬맹이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수도로 가는 걸 수상히 여겨 쫓아 오는 건가, 아니면 혹 우리 계획에 대하여 뭔가 눈치 챈 건 아닌가 등등...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었다. 이런게 바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는 걸 거다. 하지만, 천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내 생각은 기우였던 듯, 그랜트 일행도 놀란 표정이었다. 뭐, 엘리엇 녀석만 그런 표정이었다면 '저 놈이 혹시 연극하고 있는 거 아냐?' 라고 의심을 했겠지만, 같이 있던 그랜트와 켐벨 집사도 놀란 기색인 거 보니 정말 우연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거기서 선애와 나는 반가운 얼굴을 또 한 명 볼 수 있었다. 선애가 후작가의 시녀로 취직(?)할 때 같이 취직했던 시오나의 애인인 드렉 암스트롱 경이었다. 선애가 후작가를 나온 후 시오나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지는 못햇지만 간간히 휴에게서 소식을 듣기로는 지금은 하녀 사이에서 계급이 높아졌고 정식으로 정보 길드 외근 요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했다. 그런 시오나와 여전히 사이 좋은 애인이라는 것만 해도 반가운데 전에 선애가 후작가를 나오던 날 받은 도움도 있었으니 더 더욱 반가웠다. 폼을 보아하니 드랙도 지위가 올라 그랜트 녀석 수도 가는데 호위 기사로 뽑힌 모양이었다. 뭐어, 자리가 자리이고 서로의 입장이 있어서 정식 인사는 못 하고 그냥 나중에 스쳐 지나가며 가벼운 눈짓만 주고 받았지만, 선애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했다. 그렇게 같은 배를 타고 수도까지 가려니 될 수 있는 한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랜트 녀석 일행과 가끔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배가 고급 여객선이라 해도 크루즈 같은 엄청나게 큰 호화 유람선 같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행동반경이 좁은데다가 서비스를 해주는 종업원이 많지 못해서 식사는 단 한 곳 밖에 없는 손님용 식당에서 해결해야 했기에 종종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럴때마다 우리 일행은 불편한 마음으로 잽싸게 그 자리를 피하고는 했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일행이 수도에 가는 목적이 '타파, 루빈스타인 후작!' 이었으니 아무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일부러 우리가 유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루빈스타인 상회 쪽에서 잘못한 거라 해도 말이다. 다행이, 그랜트의 주위에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로 북적북적 했기에 우리가 그를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그랜트 일행과 스쳐 지나갈때 나는 항상... 은 아니고 가끔가다 그랜트 녀석이 선애를 향해 오묘한 시선을 던지는 걸 발견하곤 했다. 적의가 아니라는 건 분명한데, 그렇다고 호의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도통 이해 못할 그 시선에 기분이 매우 찜찜해지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확실한 감정을 나타낸다면 그에 맞춰 뭔가를 해볼수도 있는데, 이건 뭔지 모르겠으니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처음에는 선애에게 말해둘까 하다가, 그렇지 않아도 그랜트 일행과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에 신경이 곤두 선 꼬맹이를 더 더욱 자극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게다가 얼마 후 수도에 도착하여 그들과 쌈빡하게 해여진 후엔 나도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자 그에 대한 찜찜했던 기분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수도에 도착하여 지부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짐을 푼 선애 일행은 우선 첫날은 여행 피로를 풀고 그 다음 지부와 가게에 가서 그 동안의 경영에 대해 보고를 들었다. 다행인 것은, 이 곳에는 타이거 상회와 루빈스타인 상회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걸 보면 알파두르에서의 그 소문은 아무래도 핸들리쪽에서 낸 것 같았다. 만약 루빈스타인 상회쪽에서 소문을 냈다면 전국... 까지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루빈스타인 상회 지부가 있는 대 도시에는 소문이 났을테니 말이다. 덕분에 이 곳 가게 운영에 별 지장은 없는 터라 선애와 토냐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 후 하루가 지나 토냐가 헬게르트가 지내고 있는 저택을 방문하러 간 사이, 선애에게도 척에게서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전갈이 왔다. 어떤 고급 식당에서 만날 거라 생각을 했는데, 예상외로 선애가 안내된 곳은 중상위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주택가였다. 제법 넓직한 정원에 멋드러진 이층 저택을 보자니 꼭 한국 드라마에서 본 부자촌 주택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잘 가꾼 깔끔하고 멋드러진 정원을 지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염소수염을 가진 나이 지긋하신 집사님이 두터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현관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 분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니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던 척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어서 와." 그 모습에 선애는 놀란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거... 혹시나 하고 물어보는 거지만... 여기... 혹시..." 선애의 말에 척이 피식 웃으며 책을 덥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가로챘다. "내 집이야. 어때, 멋지지?" "우오... 척이랑 안 어울려요." 선애의 단호한 말에 척이 의아한 표정이다. "응? 왜? 내가 이래뵈도 심미안이 좀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네가 보기에 인테리어가 좀 이상한가?" 인테리어가 조금 이상한 건 아니다. 최소한의 가구와 장식품으로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것이 완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다. "인테리어가 이상한게 아니라... 저는 왠지 척은 아주 화려한... 엔틱이나 고풍 스타일을 선호할거라고 생각 했거든요." 선애의 말에 척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린다. "그래? 하지만, 난 화려하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 왜... 음... 이건 편견이겠지만서도, 좀 야비하게 생긴 사람은 돈을 엄청나게 모아서 집안을 엄청 휘황찬란하게 꾸미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척의 집은 마치 어느 근엄한 학자네 집 같다. 서재가 따로 있었지만, 응접실 구석에도 작은 책장이 하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주변에 읽는 중인 듯한 책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서재도 나중에 가보기는 했는데, 크로스웰 남작 저택에 있는 선애의 집무실보다 더 넓은 곳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을 정도의 책장이 창문과 문을 제외한 나머지 벽들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고, 그 곳에는 얇은 책부터 내가 기겁할 정도로 엄청나게 두꺼운 양제본 책들이 꽉꽉 차여 있었다. 혹시 장식품인가 싶어서 선애와 내가 중간 중간 랜덤하게 책을 선택해서 뽑아봤더니, 모든 책이 사람이 읽었다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런 거 보면 척의 독서량은 저 왕립 학교의 교수들이나 왠만한 학자들 못지 않을 듯 싶다. [대~ 단한 사람이잖아? 역시, 사람은 얼굴만 보고 모른다니까.] 더 놀라운 건, 척네 집의 멋드러진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 받을때 요리사가 직접 요리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바로 벤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집사님 만큼이나 나이 지긋한 분으로 척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절대로 평범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소피처럼 호위 무사 겸 시종 역을 하고 있나... 했는데 요리사 역까지 하고 있는 모양이다. 요리의 데코레이션도 상당히 뛰어나다 생각을 했는데 직접 먹어본 선애의 평에 의하면 맛도 무지하게 뛰어나다고 한다. 요리사로 나가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맛나게 식사를 하고 이동한 곳은 아까 내가 소개 했던 척의 서재였다. 그 곳에서 감탄하며 나랑 같이 신나게 구경하고 있던 선애를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 온 척이 소파를 권하고 자신도 앉으면서 말을 던졌다. "인생이 지루한가봐?" 뜬금없는 그의 말에 선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에?" "감히 혼자의 몸으로 루빈스타인 후작과 한 판 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척의 말에 선애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지금, 그거 재미있으라고 하는 말이죠?" "감탄한 건데?" "그게 어디가 감탄한 거예요?" 선애의 인상이 찡그려지자 척이 슬며시 웃으며 물러섰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뭐, 어쨌든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음, 이건 그냥 한 번 물어보는 건데, 루빈스타인 상회에 얌전히 들어갈 마음은 없는 거지?" "들어 갈 생각이었으면 벌써 들어갔겠지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는 가게를 이만큼 키우기 까지 들인 공이 아까워 버틸 생각이었는데, 점점 압력이 들어오니까 이제는 오기가 생기는 거 있죠? 끝까지 버텨내고야 말겠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애는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심하다... 싶었는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뭐, 솔직히 말하면 가능성이 있으니까 끝까지 버티는 거죠. 아예 망망대해에 있는 것처럼 절망적이라면 진작에 항복하고 얌전히 흡수 되었을 걸요." 선애의 말에 척이 쿡쿡 웃었다. "멋진 걸? 버틸 수 있으니 버틴다라... 좋아, 그건 그렇고 목적을 이룬 뒤에는 어떻게 할 예정이야?" "꽁지 빠져라 도망 가야죠. 별 수 있나요?" 자기가 말하고도 머쓱한지 배시시 웃는 선애를 향해 척이 진지한 어조로 말한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선애에게는 어려운 일인 거 알아?" "예?" "선애가 우리 정보 길드의 외근 요원이 되지 못하고 협력자가 된 이유, 기억해?" '그거야, 너무 눈에 뜨이는 외모... 아하...' "제 외모 때문이지요? 어디에 있든 너무 눈에 뜨이니까." "맞아, 그 외모로 도망갈 수 있겠어?" 그런거... 생각 못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때야 틀린 외모를 평소에도 확실히 각인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익숙해진데다 선애가 대부분 머무르는 알파두르 항구 도시에는 선애 말고도 서대륙에서 넘어 온, 비슷한 외모의 사람들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튀는 외모라는 각인이 서서히 흐려져 갔던 것이다. 거기에 얼마 전 렌스버리의 변덕으로 인하여 새로이 받은 마법 팔찌도 있으니, 그 능력에 내 능력까지 더하면 도망 정도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아마 휴도 그에 대해 아무 말 안 한거 보니, 선애의 외모가 튄다는 걸 깜빡 한 모양이다. 그 또한 알파두르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니 말이다. 선애가 '아차...' 싶은 표정이자 척이 싱긋 웃었다. "자, 그러면... 선애가 필요한 건 후작의 물건에 대한 방범장치는 물론이거니와 무사히 도망갈 수 있는 방법과 거기에 적당한 시간이 흐를때까지 숨어 있을 수 있는 피난처에 거기까지 널 변장시키면서 안내해줄 사람...까지군?"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어째 이번 일에 대한 가격을 흥정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정보 길드에 매년 납부하는 머니가 있지 않느냐?' 라고 따질 수 없는 것이, 내가 생각해 봐도 이번 일은 좀 고난위의 요구였기 때문이다. 선애 또한 동감인듯 척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를 요구 할 생각이세요?" 선애의 반응에 척이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얼마를 요구하든 들어줄 거야?" "들어 보구요." "오오... 이제 제법 흥정을 걸 줄도 알고..." 척이 마치 기특한 동생을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선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난하지 말고 얼렁 얼렁 이야기 하시죠? 저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요? 에... 가만, 제 재산 대부분을 이 길드에서 보관해주고 있죠? 부디 그 안에서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선애의 말에 척이 양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에이... 설마 내가 선애에게 돈을 내라고 하겠어? 내가 원하는 건 선애가 단순한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하는 거야." "단순한 부탁이요?" "그래, 선애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나 할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음... 왕궁 지하 보고 지도." "예?" [뭔 소리야?] 척이 부탁하는 건 간단했다. 선애를 지키는 어떠한 존재 - 바로 나 - 는 캐링턴 후작가에 숨어들어가 후작가의 가보를 쉽게 훔쳐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왕궁 또한 쉽게 침입할 수 있을거라는 가정 하에 왕궁 지하의 지리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왕궁 지하에는 왕궁에 받쳐지는 수많은 보물들 중 당장에 슬 일이 없는 것들을 콕 박아두는 보고가 있는데 그 곳으로 가는 지도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보 길드에서 그 곳을 침입한다는 건 아니고, 단지 정보를 다루는 길드의 입장으로써 최고의 기밀 정보를 얻고 싶어하는 것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선애에게 속삭였다. [저기... 들어갔다 나오는 건 상관 없는데... 혹시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도 알아봐야 해?] 선애는 내 말을 듣고 척에게 그대로 질문을 옮겼고 척은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이고... 고생이겠구나...] 물론, 내가 아니라 왕궁을 지키는 분들 말이다. 따르르르르~~!! 귀가 따가울 정돌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몇 초가 지나자마자 절그럭 절그럭 하는 금속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힘차게 다다다다~~ 하며 달려오는 소리들... [죄송합니다아아~~~] 왕실 지하로 침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멋드러지고 화려한 건축물을 구경할 틈도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지만, 토냐가 헬게르트와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지도를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한 시라도 아껴야만 했다. 지금 토냐는 어떤 의도인지도 모르겠지만, 헬게르트에게 며칠 초청을 받아서리 헬게르트네 별장에 갔다. 헬게르트 녀석 토냐가 너무나 탐이 나서 어떻게든 스카웃 하려는 건데, 토냐는 걱정 하덜덜 말라고 하면서 당당히 저택으로 갔지만, 솔직히 넘어갈까 쬐까 걱정이 된다. 오늘로 벌써 닷새째. 토냐가 돌아오는 건 내일 모래였다. 오늘 실패하면 내일 단 하루밖에 시간이 없는 셈이었다. 그 동안 지하 어디 어디에 무언가가 장치 되었는 줄 알기 위하여 물리적 행사를 하며 왕실 지하를 헤매다 보니 모든 방법 장치에 계속 계속 걸려서 하루라도 저 알람 소리를 안 울리는 적이 없었다. 도대체 이 놈의 알람 마법을 설치 못해서 안달 난 높으신 분이라도 있으셨던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방금 건드린 알람 마법이 벌써 13개째였다. '부디 이게 마지막이 되길...' 보물 창고는 벌써 발견했다. 첫날에는 우선 돌아다니며 보물 창고를 확인하고 그 곳으로 가는 지리를 익힌 후에 그 다음부터 그 곳에 있는 방범 장치를 알기 위하여 무조건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며 걸어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 방범 장치가 발동되면 힘을 풀고 그 자리에 선 채 방범 장치가 어떤 식으로 발동 되는 지 알아본 후에 다시 움직였다. 너무 한쪽으로 움직이면 뭔가 정체를 조금이라도 들킬 거 같아서 처음에는 밖에서부터 시작 했다가 두번째는 안에서 시작 했다가 세번째는 왔다갔다 했다가... 등등... 규칙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덕분에 죽어는 건 방범 장치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하루에 단 한번씩 해도 이게 며칠 계속 지속되면 피곤할텐데, 이건 하루에 네 다섯번씩 방범 장치를 건드리고 다니니... 내 오늘 들어올때 보물 창고로 가는 길 골목 골목에 경비를 서는 기사들 얼굴을 보니 모두 눈이 시뻘건데다 눈 밑에 다크 써클이 두텁게 깔려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미안하던지... 나중에 익명으로 왕실 경비대 기사들에게 고급 영양식 이라도 기증해야겠다. '어휴... 여기에 알람 마법 또 깔려 있다는 거 체크하고 와야지.' 나는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몇 시간동안 쭈욱 건드리고 다니는 걸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번 방범 장치 건드려서 알아내면 그 즉시 종이에 메모를 해야만 했다. 그 종이 또한 들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안전한 구석탱이에 놓고 방범 장치를 알아내면 종이가 있는 곳 까지 쌩~ 하니 달려가 체크 하고 다시 돌아와 다른 곳 건드려서 알아내고 또 종이 있는 데 까지 달려가 체크하고는 했다. 그나마 지금은 지리에 익숙하니 다행이지, 처음에 도둑 방지를 위하여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진 이 지하 지리를 외우는데 얼마나 고생 했는지 모른다. 대충 내 머리가 기억하는데까지 걸어간 다음 쌩 하니 달려가 종이에 체크 하고 달려온 것 까지는 좋은데, 달려온 후에 내가 체크한 곳이 어디였는지 찾지 못해서 낯 익은데가 나올 때까지 열심히 헤매고 다녀야 했던 것이다. '어휴... 차라리 보물 창고에 어떤 보물이 있으니 그거 훔쳐와 달라고 하는 부탁이 더 쉬웠어~!!' 나는 물론이거니와 그 기사분들도 고생이었지만, 내 볼 일이 끝나고 나서 왕실 마법사가 대량으로 물갈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어흠흠... 그리고 며칠 후... "수고 했어. 며칠 내내 왕실이 엄청 소란스럽다 했더니만... 역시 직접 하나 하나 체크 하면서 다닌 모양이야?" 선애가 턱 하니 건넨 지도를 훑어보며 척이 말하자 선애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마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니 직접 일일이 확인해 볼 수 밖에요. 참, 참고 하실 건 이렇게 신나게 헤집고 다녔으니 장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뭐, 지리야 다 뜯어 고치지 않는 한 바뀌지는 않겠지만서도... 어쨌든, 저는 부탁 받은 대로 한 거니까 앞으로는 알아서 하세요." "물론이야. 그건 그렇고, 선애는 언제 행동을 할 거지?" "오늘 밤이라도 당장이요. 물론, 지금은 물건을 빼내 오는 것 뿐이니까 다른 건 필요 없고 정보하고 그에 대한 준비물만 주시면 돼요." 토냐의 작전은 실패 했다. 헬게르트 녀석 또한 회장의 명이라고 타이거 상회를 돕지 못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단지, 자신의 밑으로 오면 지금 현재의 지위를 보장하며 받아주겠다고 했는데, 그건 이미 그랜트 녀석이 제의한 거라 선애나 토냐는 조금의 고려도 없이 그 제의를 걷어 차 버렸다. '나쁜노무시키. 그렇게 말할 거면서 뭐하러 토냐를 일주일씩이나 붙잡고 있었담?' 나중에 토냐가 떠날때도 언제든 돌아오면 좋은 대우로 받아줄테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는 거였다. 확실히... 토냐의 능력이라면 누구라도 탐이 나기야 하겠지만, 이럴 때 우리 상회의 인재를 탐내니 의도가 무엇이든 다 나쁜 녀석으로 보였다. 하여간, 마지막 기대주였던 헬게르트 녀석도 별 도움이 안 되는 걸 아는 이상, 이제는 내가 움직이는 일만 남았다. 제 39화 루빈스타인 후작의 반지를 빼내는 건 캐링턴 후작가의 가보를 빼내는 것보다 오히려 쉬운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캐링턴 후작가의 가보가 고이 모셔져 있었던 곳은 후작이 열지 않는 한 항상 굳게 잠겨 있어 물건을 가지고 나올 수 없었지만, 루빈스타인 후작 반지야 항상 공개 된 곳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 자리가 후작의 손가락이라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돌발 상황에 의하여 캐링턴 후작의 뒤통수를 내리쳐야 했던 것에 비한다면야 미리 '일어날 지도 모른다... ' 하는 마음의 대비를 하고 갔기 때문에 오히려 훨씬 상황이 나았다. 게다가 이건 선애가 가지거나 정보 길드에 넘길 필요가 없었기에 저택 밖으로 가지고 나갈 필요도 없어 일은 더 더욱 쉬웠다. 삼엄한 방범 장치도 잠시 작동을 멈추고 경계도 느슨해지는 백주 대낮에 방화, 방수 기능을 갖추고 있는 금속 상자와 모든 마법을 무효화 시키는 '디스펠' 마법진, 그리고 혹 있을 지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하여 몇몇 스크롤과 함께 '초강력, 초 스피드 수면향!'을 챙겨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후작의 침실까지 무사히 들어간 나는 거기서도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는 구석탱이에 가지고 온 물건들을 잘 숨겨놓고 시간을 때울 겸, 적에 대해 좀 더 잘 파악하기 위하여 루빈스타인 후작을 찾으러 갔다. 어제 미리 와서 저택 구석 구석을 자세히 살펴보고 갔기 때문에 구조는 익숙했다. 루빈스타인 후작은 부자간이라서 그런지 그랜트와 판박이었다. 그랜트 녀석이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될 거라는 모습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단지 그랜트와 다른 면이 있다면, 그랜트는 냉정해 보이기는 해도 '사람' 이라는 범위(?) 안이었지만, 루빈스타인 후작은 완전 얼음 조각이었다. 인간미가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얼음 여왕이 아니라 얼음성의 성주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존재'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그랜트나 미란다가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후작을 보니 단순히 '사이가 안 좋다'정도의 차원이 아닌 것 같다. 자식이라도 앞길에 방해가 되면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치워버릴 수 있어 보였으니까. '미란다 지지배만 못됐다고 할 게 아니었어.' 그, 핏줄 속에 피 대신 얼음이 흐를 것 같은 후작은 내가 그를 찾았을때 서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 바ㅗ 옆에 공손한 자세로 시립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엘리엇 녀석이었다. '아니, 그랜트 옆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에 있는겨?' 그 녀석 또한 후작이 무섭기는 무서운지 그랜트 옆에 있을때는 항상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는데 지금은 바짝 군기가 들어 있었다. 루빈스타인 후작이 서류 작업을 하는 수십분간 엘리엇 녀석이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꼼짝 없이 서 있는 걸 보니 무지 고소하게 느껴졌다. 그래, 후작이 작업을 오래 오래 했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건만, 어째 서류가 바닥을 보이지 않는데 후작이 문득 지나가는 투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 녀석은?" 앞은 나왔어도 몸통과 끝은 다 잘라먹은 질문이었는데 엘리엇 녀석은 알아 들었는지 조금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조용하십니다." "흠, 그나마 생각은 있는 모양이군." 거기서 다시 서류 작업에 집중하는 후작 때문에 대화는 잠시 끊기고 침묵이 돌았다. 그러나 잠시 후 후작이 또 다시 지나가는 투로 질문을 던진다. "크로스웰 남작이란 녀석이 다시 팔팔해졌다지?" "예." 이번에도 지체없이 엘리엇 녀석의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그냥 듣고 지나갈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 '에엥? 크로스웰 남작이라고? 그럼 벨타이거잖아? 갑자기 여기서 그 녀석 이야기는 왜?' 이런 내 심정을 헤아려 준 것인가?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흠... 핸들리 크로스웰이라는 놈 쓸모 있겠다 싶었는데 내가 잘못 봤군." '헉... 뭐야 이거, 지금 그럼 핸들리 놈하고 루빈스타인 후작하고 뒤로 손 잡았다는 소리잖아?' 뜻밖의 소식에 나는 입이 떠어억~~ 하고 벌어졌다. 핸들리 녀석이 벨타이거를 노렸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 뒤에 루빈스타인 후작이 버티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게..." 엘리엇 녀석이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후작이 그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뭔가?" "말씀드리기 송구하옵니다만, 크로스웰 남작은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그를 치료했던 의원의 말에 의하면 도저히 살아나지 못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살아 났잖나? 죽을 뻔 했어도 살아 났다면 그건 살아난 거야." "아, 예." 아무래도 엘리엇 녀석은 암살 시도가 거의 성공했었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듯 하다. 그러나, 그는 후작의 딱 자르는 말에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후작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약혼식을 준비해라. 날은... 그래, 그런 건 역시 봄이 좋겠지. 핸들리에게는 올 해 안에 일을 마무리 지으라 전해라. 만약 그때까지 해결 못한다면 쓸모 없는 녀석이란 소리겠지."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지체없이 대답한 엘리엇은 깊숙히 허리를 숙여 보이고 뒷걸음질 쳐 후작으로부터 멀어진 뒤에야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함부로 등을 보이지 않는 그 엘리엇 녀석의 태도 하나만 봐도 엘리엇 녀석이 후작을 얼마나 경외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의범절에서 상대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최고의 예우를 해주는 자는 오로지 국왕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엘리엇 녀석이 서재 밖으로 나가자 다시 일에 열중하는 후작을 한번 힐끗 본 나는 엘리엇의 뒤를 쫓아갔다. 아무래도 엘리엇에게 좀 더 붙어있는 것이 후작과 엘리엇의 대화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거 같아서였다. 엘리엇이 향한 곳은 그랜트의 서재. 그런데 서재에 가까웠을 즈음 서재 안에서 켐벨 집사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복도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었는데, 어째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예전 둘 사이는 같은 주군을 섬기는 '동지'라는 의식이 있어서인지 서로 존중해주는, 그럭저럭 좋은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둘이 서로를 마주보니 찬바람이 쌩쌩 하고 분다. 뭐, 그나마 엘리엇 녀석은 덤덤하게 켐벨 집사를 보고 있었지만, 켐벨 집사는 마치 잡아먹을 것 처럼 험악한 시선으로 엘리엇을 노려보고 있었다. "집사님." 엘리엇이 먼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 했지만, 켐벨 집사는 인사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다짜고짜 묻는 것이었다. "어딜 다녀오는 건가?" 말투하며 눈빛이 마치 배신자를 보는 듯 하다. "후작님께서 부르셔서 다녀왔습니다." 그 말에 켐벨 집사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오른다. "자네, 정녕 이럴 건가? 도대체 자네의 주군이 누구신가? 후작님이신가, 그랜트 도련님이신가?" 켐벨 집사, 여기서 더 흥분 했다간 발이라도 쾅쾅 구를 것 같다. 그러나 엘리엇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전 항상 그랜트님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도련님을 위한 일이란 말인가? 도련님은 어린애가 아니시네. 그런데 어찌 감히 자네가 앞길을 좌지우지 하려 하는가?" 켐벨 집사의 어조가 흥분으로 인하여 조금씩 커졌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는 엘리엇 녀석의 단호한 어조. "사람이 항상 옳은 길을 선택하는 건 아닙니다. 주군이 잘못 된 선택을 할 때 그걸 어떻게 해서든 바로잡는 것이 바로 보좌관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바른 길로 인도오~~? 자네의 욕심대로 주군을 휘두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켐벨 집사가 비꼬는 어조로 묻자 엘리엇 녀석이 발끈했다. "그럼, 켐벨 집사님께선 하찮은 여자 하나 때문에 후작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도련님께서 후작님의 뜻을 언제 거슬렀단 말인가? 나에게는 자네가 괜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앞당겨 확대해서 이 난리를 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이네." 켐벨 집사의 나무라는 어조에 엘리엇 녀석이 그 놈 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거칠게 내뱉었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옳은지 집사님이 옳은지는 두고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전 이만..." 그리고는 더 이상 이야기 하기 싫다는 듯 켐벨 집사를 지나쳐 그랜트 녀석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이익..." 그 무례한 모습에 분노한 켐벨 집사가 몸을 돌려 엘리엇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려 했으나 저쪽 복도 끝에 보이는 시종의 모습에 멈칫 하고는 그대로 휙~ 하고 다시 몸을 돌려 제 갈길로 가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그러나 엘리엇 녀석이 안에서 허락을 받아 서재 안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어리둥절해 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멀어져 가는 켐벨 집사에게 한번 시선을 준 나는 얼른 엘리엇의 뒤를 따라 그랜트의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 서재의 분위기도 어째 아가 엘리엇과 켐벨 집사와의 분위기와 흡사했다. 평소 차분했던 분위기는 어디다 던져 버렸는지, 그랜트의 주변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엘리엇 놈이 더 대단해 보였다. "뭐지?" 그랜트의 목소리에도 얼음 덩어리들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엘리엇 녀석이 같잖게도 '어쩔 수 없나?'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굳건한 얼굴로 입을 여는 거였다. 자기가 무슨 '내가 아님 누가 지옥에 가리오.' 라고 외치는 의적, 아니면 목숨을 내놓고 충언을 올리는 충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다. "약혼식이 준비 될 겁니다. 아직 날짜는 정확하게 잡히지 않았지만, 후작님께선 내년 봄 쯤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엘리엇이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었는데도 그랜트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묵묵히 서류만 보고 있다. 잠시 기다리던 엘리엇은 그랜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를 부른다. "그랜트님." 그제야 엘리엇을 힐끔 보며 귀찮다는 듯 시큰둥하니 한 마디 내뱉는 그랜트. "알았다." 하지만 엘리엇 녀석은 그 대답이 못미더운 모양인지 한숨 섞인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랜트님, 부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랜트님은..."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알았다고 했다." 칼날 같이 날카로운 어조에 엘리엇은 한숨을 삼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만 나가봐라." "그럼..." 그랜트의 축객령에 엘리엇 녀석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한다. 그 모습만 봐도 엘리엇 녀석이 그랜트 보다 후작을 더 경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엘리엇 녀석이 그렇게 축객령을 받아 나가버려 대화가 끊기자 나는 더 이상 이 어두운 분위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단편적으로 얻은 정보를 종합해 보면, 엘리엇 녀석이 그랜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후작에게 들러 붙었는데, 그 이유가 그랜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인 듯 하다. 아마 그 여자분이 엘리엇은 물론이거니와 후작의 눈에 안 차는 모양이다. '그래, 뭐 그건 이해가 가는데... 거기에 왜 우리 타이거 상회가 끼어 있는 거지? 그 그랜트가 좋아하는 여자가 우리 상회 사람인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이가 없다. 솔직히 우리 상회에 있는 여성 중 그랜트와 인연이든 악연이든 가장 많이 얽혀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울 꼬맹이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 꼬맹이 말고 다른 여성에게 필이 꽂혔단 말인가? '뭐어... 꼬맹이랑 연결되길 바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거 은근히 기분 나쁘네... 울 꼬맹이보다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길래... 아, 혹시 토냐인가?' 가능성이 있었다. 토냐는 나이가... 그랜트보다 연상이라서 그렇지 얼굴만 보면 절대로 그 나이로 안 보이는데다 엄청난 미인이다. 거기다 마법사였으니 머리 좋지, 능력 좋지, 성격 호탕하지, 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이란 말인가? 헬게르트 녀석도 토냐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니 그랜트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후작이나 엘리엇 녀석 눈에 차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간다. 토냐는 그렇게 본신의 능력은 높아도 배경이 안 좋았으니 말이다. 우선 평민인데다 빵빵한 상단이었던 집안도 예저녁에 망해서... 물론, 토냐 개인적인 재산은 꽤 넉넉한 편이긴 하지만, 그게 후작이나 엘리엇 눈에 찰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 놈이 토냐에게 찝적 대는 건 못 봤는데? 그거 참... 선애 없을때 그랬나?' 그게 아니라면, 그랜트에게 좋아하는 여성이 생긴게 최근이라 우리 타이거 상회와의 문제와 같이 맞물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이거 상회가 아무리 밉보여도 그렇지, 어떻게 벨타이거를 제거하기 위하여 핸들리 녀석과 뒤로 손까지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으으음... 후작의 스타일이 '불온한 싹은 미리 미리 뿌리까지 뽑는다.' 인가?' 그러나 당사자들이 아무 말도 없는데 내가 아무리 혼자 낑낑 대봤자 전후 사정을 다 알 수 있을리가 없었다. 이런 일들을 문서로 남겨놓을 리도 없고 말이다. '에휴, 모르겠다. 그냥 나는 내 일이나 열심히 하자.' 결국 머리의 과부하로 인하여 생각 하기를 포기한 나는 후작의 침실로 돌아가 앞으로 일어날 거사를 위해 계획과 준비물들을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드디어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후작이 혹시 오늘 밤은 딴 데서 자는 건 아닌지 걱정 했는데, 다행이도 밤이 깊어지자 후작이 피곤한 얼굴로 침실로 들어섰다. '히유... 정말 다행이야.' 후작의 왼손 검지 손가락에는 나의 목표물이 단단히 끼어 있었다. 인장으로 사용되기 때문인지 반지가 제법 크고 묵직해 보여 그걸 끼고 다니면 꽤나 불편할 것 같은데도 후작은 자기 전 목욕 할때도 그 반지만은 꼬옥 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니 후작의 시중을 들어주던 일단의 무리들이 조심스레 물러나고 후작이 침대 위에 누웠다. 대략 한 시간 정도 기다린 후에 침대에 슬그머니 다가가니 후작이 눈을 감고 있기는 한데 표정이 되게 무뚝뚝하다. 잠들어있을 때 어찌 표정 관리가 가능할까만은, 그래도 그렇게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이거 깊이 잠들어 있는지 얕게 잠들어 있는지 헷갈린다. 그렇지 않아도 정보 길드에서 준 정보에 의하면 후작은 신경이 제법 예민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래 잘 자는 후작의 머리카락을 하나 슬며시 탁 뽑자 후작의 눈꺼플이 파르르~ 떨리더니 떠질락 말락 한다. '으음... 아직 푹 잠든게 아닌가베...' 그래도 혹시나 싶어 뺨을 한번 콕 찔러보니 정말 눈이 번쩍 하고 떠졌다. '흐엑... 놀래라...' 살짝 목만 들어 주변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한번 갸웃 한 후 짜증스럽다는 듯 괜히 베개만 툭툭 두번 때린 후 다시 몸을 누이고 눈을 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정말 예민한 사람인가 보다. 거기서 대략 30여분 정도 더 기다려 봤다가 슬금슬금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끄응~ 소리를 내며 돌아눕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깰 기미를 안 보이는 거 보니 그래도 어느정도 깊이 잠이 든 모양이다. 이제 된 것 같아 돌아 눕느라 이불 바깥으로 나온 후작의 왼손을 조심스레 잡아 반지를 빼려고 했다. 그런데, 이 놈의 반지가 안 빠지는 것이었다. '뭐야? 본드라도 붙여 놨나?' 보아하니 손가락이 굵지도 않고 반지도 잘 돌아가고 헐렁헐렁 해 보이는 것이 꽉 끼어서 안 나오는 것은 아닌 거 같은데 이상하게도 빠지지 않았다. '우쒸, 왜 안 나와?' 처음에는 조심 조심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갖은 애를 다 썼는데도 안 나오자 나도 모르게 힘을 세게 줬나보다. 갑자기 후작의 상체가 벌떡! 하고 일으켜지더니만, 후작의 오른 손이 내가 있는 곳을 휘익~! 하고 휩쓸어 가는 것이었다. 물론, 후작의 손에 잡힌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갑작스러운 그 상황에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마도 육체가 있었다면 엉덩방아를 찢는 소리가 쿵~! 하고 크게 났을 것이다. 번개같은 습격이었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자 후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 눈빛은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무지무지 날카롭기까지 했다. 그의 바로 눈 아래에서 나는 털썩 주저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무지하게 놀랐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멈춰버린 심장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엄청 벌렁벌렁 거리고만 있는 것 같았다. 루빈스타인 후작가에서는 자녀들을 모두 문무에 뛰어나도록 교육 시킨다고 하더니만, 후작의 몸놀림도 장난이 아니다. 후작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나와 침실 안 구석 구석을 살펴 보는 것이었다. 그나마 사람들을 불러 찾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거기다가 내 준비물이 있는 곳까지도 들여다보지 않는게 무지무지 다행이다. 그렇게, 베란다, 두터운 커튼 뒤, 침대 아래 등등, 사람이 숨을 수 있을만한 공간 구석 구석을 모조리 둘러본 뒤에야 만족한 후작은 그제야 침대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안 하겠구만, 역시 대단한 집안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하여간, 그렇게 후작이 침대에 누워 다시 눈을 감았지만, 한번 크게 놀란 나는 다시는 함부로 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한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준비해온 수면향을 슬며시 태우기 시작했다. 그냥 건드리기에는 너무 무서워서 다시는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왕 준비해 온 것 모조리 다 쓰고 가련다!' 정보 길드에서 재료를 준비해주고 토냐가 직접 제조한 것으로 태워도 연기나 냄새가 거의 나지 않으면서도 효과는 극대화시킨 특제 수면향이었다. 나중을 대비하여 우선 절반만 모조리 태운 뒤 그러고도 대략 30여분 정도 기다린 후에야 나는 슬금슬금 후작에게 다가갔다. 숨소리를 들어보니 느리고 고르게 숨 쉬는 것이 역시 깊이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래도 좀 불안해서 어깨를 콕 찔렀는데,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찔린 것도 모르는 듯 계속 잠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안심을 못한 나는 후작의 목을 간질렀다. 잠시 후에 간지러움을 느낀 듯 움찔 움찔 거리는 했지만, 절대 눈을 뜨지 않는 거 보니 수면향의 영향을 받은 듯 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후작의 왼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빠지질 않는다. '으음... 아무래도 척의 말대로 빠짐 방지 마법이라도 걸린 모양이네.' 이런 커다란 가문의 인장은 정말 왕실의 옥새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도난 방지용으로 마법이 걸려있다고 했다. 추적 마법은 기본적으로 걸려있을테고, 그것 말고도 다른 마법이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디스펠' 마법 스크롤을 또 준비해 왔던 것이다. 스크롤을 가지고 와 반지 앞에서 찢자, 과연, 반지에서 희미한 빛이 한번 휘감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떤 마법도 걸려있지 않는다면 디스펠 스크롤을 찢어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이다. 그 후에야 후작의 손에서 반지를 빼자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쉽게 쓰윽~ 하고 빠진다. '오오... 역시 마법 반지였어. 그런데... 정말 크다.' 무척 긴 시간동안 대대로 물려 내려왔다고 들었는데 마치 새것처럼 반짝반짝 거려 이게 짜인지 좀 의심스러웠지만, 마법 중에는 '보존'마법이라는 것도 있다고 들은데다 대략 50원짜리 동전만한 면에 양각으로 섬세하게 새겨진 문장이 틀림없는 후작가의 문장이었기에 가짜는 아닌 것 같았다. '좋았어.' 그 후 그 반지를 '디스펠' 마법진이 새겨진 종이에 조심스레 감싼 후 준비해온 금속 상자에 넣고 나만이 아는, 아주 은밀한 곳에다 잘 숨겨 두었다. 이 곳은 선애나 정보 길드에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이 저택을 완전히 부서뜨려 하나 하나 수색하지 않는 한 절대로 찾지 못할 거다. 그 모든 일을 다 마무리 지은 후에 나는 여유있게 후작가를 빠져 나와 선애에게 돌아왔다. 그때의 시각은 대략 새벽 4시경쯤이었는데 울 꼬맹이는 그때까지 자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어떻게 됐어?/" [냐하하하~~ 당연히 무사히 끝내고 왔지. 아... 그 후작 정말 사람 놀라게 하더라만, 그래도 날 어떻게 찾아 내겠어? 우훗훗훗....] "/후우... 그렇구나. 너무 늦어서 혹시 실패한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단 말야./" [에이, 설사 내가 실패했다고 해도 날 어떻게 잡겠어? 어쨌든,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으니까 잠이나 푹 자.] 그 후 우리는 일주일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 동안, 타이거 상회에서는 딱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애가 알파두르에서 멀어진 것이 유효했는지 딱히 선애를 노리는 어떠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가게도 잘 돌아갔으며, 새로이 오픈할 가게 단장 공사도 착식하게 진행 되었다. 단지, 토냐가 헬게르트 녀석과의 담판에서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해서 그런지 좀 가라앉은 분위였다. 선애가 잘 해결될 거라고 했지만, 단지 위로라고 생각 했는지 한번 쓴 웃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후작 반지를 숨겼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기에 빨리 결과만 나오기를 바라며 토냐를 걱정스레 바라볼 뿐이었다. 가끔 혼자 어딜 다녀오는 것 같기는 한데, 그녀의 사생활 모든 걸 꼬치꼬치 캐묻기는 뭣 했기에 자세하게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 상회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루빈스타인 후작가는 겉으로는 고요했으나 정보 길드의 말에 의하면 안으로는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이 세계는 사인과 인장을 같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인은 개인용이고 인장은 가문용이기 때문에 인장이 한 차원 높았다. 왕의 친필 보다는 옥새가 찍힌 것이 더 높은 위력을 발한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그런데 그 가문의 인장이 사라졌으니 후작가는 지금 가문의 이름을 넣어야 할 공문서를 작성할 수가 없는 입장인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위기를 넘겼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내가 반지를 숨긴 날로부터 5일이 흐르자 후작가는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위험한 상태가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냉큼 가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예의상 한 두번은 사양하는(?) 맛이 있어야지. 그리하여 정보 길드로부터 '이제 가보지 그래?' 라는 연락이 온 날에서 이틀이 더 지난, 즉, 반지가 없어진날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뒤에야 선애가 후작가의 저택을 향했다. 드디어 D - 데이 날, 아침 일직... 이 아닌 정오가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든든하게 배를 채운 선애는 숙소를 나섰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소피만은 눈치 채고 따라 나서려 했다. 그러나 선애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그녀의 호위를 거절했다. 도망치는 것 쯤이야 나도 있고 렌스버리 녀석이 준 팔찌도 있으니 자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소피에게는 선애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토냐에게, 그리고 벨타이거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몸을 숨길 곳은 벌써 예비되어 있었다. 위험할 때 언제든 약속된 곳으로 가기만 하면 뒷 일은 정보 길드에서 알아서 해 줄 것이다. 마차도 상회의 마차가 아닌 일반 영업마차를 타고 후작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멋드러지게 꾸며진 엄청 큰 정문 앞에 내리자 당연하겠지만, 지키고 있던 두 병사가 막아선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서대륙인은 한번도 보지 못한 듯 선애를 보는 시선에 신기함이 어렸지만, 태도와 어조는 정중했다. 대 귀족 가문 답게 사병 교육도 확실하게 시킨 모양이다. "후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상대방이 정중하게 나오니 선애 또한 예의 바른 자세로 대답했다. 약속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잃어버리신 물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자 얼마 기다리지 않아 저택 안으로 안내 되었다. 현관 앞에서 선애를 안내하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후작의 보좌관인 켐벨이었다. 물론, 선애가 알고 있는 켐벨 집사는 아니었다. 여기서 잠깐 켐벨 집안에 대해 소개 하자면, 대대로 후작가를 모셔온 집사 집안이었다. 그리하여 현재의 켐벨 집안 사람들도 후작가 사람들을 모시고 있었다. 현 켐벨 집안의 가장이자 장남은 후작 영지에 있는 후작가 본 성의 집사이자 전국 각지에 있는 후작가 저택의 모~든 집사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리고 켐벨가의 차남은 후작의 보좌관으로써 그랜트 옆에 붙어있는 엘리엇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삼남이자 막내는 후작가 본 성의 부 지배인이란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 그랜트와 미란다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들 교육을 담당해 왔기에 현재는 그랜트의 유모 겸 개인 집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미란다야 따로 유모가 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켐벨가의 막내가 바로 선애가 알고 있는 고든 켐벨 집사다. 그리고 현재 선애를 마중나온 자는 고든 켐벨 집사의 바로 윗 형이고 말이다. "크로스웰 남작 영애십니까?" 켐벨 집사와 형제라 그런지 외모가 많이 닮았다. 하지만, 고든 켐벨 집사는 외모와는 달리 열혈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형 켐벨은 분위기를 보아하니 후작과 성격이 비스무리 한 것 같다. 그는 일단 선애를 저택 내의 한 응접실로 안내해준 후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선애는 제법 느긋한 얼굴로 응접실을 둘러본 후 고급스러워보이는 가죽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는 것이었다. [긴장 안 돼냐?] "/무지 긴장돼. 그래도 왠지... 겁은 안 나는걸?/" 평소 큰 일을 앞두고 있으면 방방 뛰면서 안달을 하던 녀석인데, 그 동안 여러 경험들을 하면서 그나마 연륜이 조금이나마 쌓였나보다. 잠시 후 문이 달칵 하고 열리기에 나는 시녀나 아니면 형 켐벨이 돌아왔는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익숙한 얼굴의 켐벨 집사가 쓱 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복도로 고개를 내밀어 누가 오는지 확인한 후 다급한 어조로 선애에게 속삭였다. "너 뭐하는 거냐?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얼른 돌아가. 큰일나기 전에 얼른!" 누가 들을까 작게 속삭이는 걸로는 부족한지 문쪽으로 가게끔 선애의 등을 밀어내기까지 한다. 그 모습에서 켐벨 집사가 울 꼬맹이를 아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물론, 선애도 감동은 했지만 이대로 나갈 수는 없었기에 양해를 구하려 몸을 돌리는데, 문이 다시 달칵~! 하고 열리더니만 이번에는 형 켐벨이 모습을 드러내는 거였다. 그 순간 고든 켐벨이 얼른 선애의 몸에서 손을 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형의 의아해 하는 시선을 면하기 어려웠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그 말에 켐벨 집사가 움찔 한다. 그랜트 마저도 마치 친 손자를 보는 듯 대한 켐벨 집사였기에 두려워하는 누군가가 있을 줄 몰랐던 터라 이런 그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형님..."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형을 불렀지만, 형 켐벨은 동생을 한번 노려보는 것으로 그의 입을 막고는 선애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오시지요.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켐벨 집사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그런 그에게 선애는 배시시 웃으며 목례를 해 보이고는 형 켐벨을 따라 나섰다. 형 켐벨이 선애를 안내한 곳은 의외로 후작의 서재였다. 설마 그 곳으로 안내할 줄은 몰랐기에 선애와 나는 놀란 시선을 교환했다. 그도 그럴것이, 서재는 중요한 서류가 많아 저택 내에서도 침실과 함께 접근 불가령이 내린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처음 보는 손님을 서재에서 맞이한다는 건 정말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선애를 그 곳으로 부른다는 건, 사안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일까나? 문을 열자 책상에 기댄 채 우리를 - 정확히는 선애를 - 주시하고 있는 후작의 모습이 보인다. "후작님, 크로스웰 남작 영애십니다." 형 켐벨의 소개에 후작이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남작 영애.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투와 내용은 평이했으나, 후작의 시선이나 분위기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전에 봤을때도 인간 같지 않게 보였는데, 오늘은 거기에서 한 단계 더 업데이트 한 것만 같다. 허튼 짓을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매서운 시선 앞에서도 울 꼬맹이는 담담하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빈스타인 후작님." "괜한 인사는 됐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군." 후작의 말에 선애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바라는 바입니다." '오오~~ 훌륭하다, 선애야. 저 후작의 앞에서 당당하다니. 역쉬~ 내 동생~~' "내가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선애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내는 걸 보니 급하기는 무지 급했나보다. 그와는 달리 선애는 방긋 방긋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얘가 아무래도 토냐의 태도를 따라 하려는 것 같다. 전에 토냐와 엘리엇의 대결에서 큰 인상을 받은 모양. '그거, 상대방 열 받게 하는 데 특효지.' 그 효과가 후작에게도 발휘 되었는지 후작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러나 그 또한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호오, 그렇다라? 재미있군. 내가 잃어버린 물건이 있었던가?" 어이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후작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선애를 살폈다.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아, 그럼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소중한 반지를 잃어버리신 줄 알았는데... 아니라면,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이제는 모션까지 배웠는지 그리 말하며 '그렇다면 볼일 없다.' 라는 기색으로 인사 하고 가려 하는 거다. 그러자 후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마 무지 하찮게 여긴 상대가 약점을 쥐고 살살 약을 올리니 분노를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기다려!" 쫘악 가라앉은 얼음장 같이 찬 목소리였지만, 분노가 어려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와 후작에게서 뿜어지는 분노의 오라, 거기에 후작의 카리스마까지 어우러지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어서 조금 걱정 되었다. 그런데 울 꼬맹이 녀석, 언제 나 모르게 호랭이 간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는 것이다. 괜히 허세를 떠는 게 아닌 듯 해서 더 놀라웠다. "무슨 일이신지요?" 후작의 위압감에도 선애가 태연하자 후작이 더 화가 난 모양이다. "정확하게 말해라. 내가 뭘 잃어버렸다는 거지?" "잃어버리신 물건이 없는 거 아니셨던가요?" 선애가 이번에도 대답 안 하고 질문을 되돌리자 후작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봐 주는 것에도 한게가 있어. 계속 이렇게..." 그런데 울 꼬맹이, 생글 생글 웃던 표정을 싸악 지우고 정색을 하더니만 감히 후작의 말을 싹둑 잘라버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분이셨군요, 후작님께선. 무슨 농담을 그리도 잘 하십니까?" 후작도, 그 옆에 있던 형 켐벨도 놀란 표정이었지만, 나도 무지 놀랐다. '얘가, 얘가, 정말 호랭이 간이라도 삶아 먹었나?' "농담? 내 말이 농담 같은가?" "농담으로 들릴 밖에요. 이미 저희 타이거 상회와 회장님이신 크로스웰 남작님 목숨을 노리고 계시면서 봐주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다니, 정말 웃기시는군요!" 물로온, 전에 여기에 숨어 들었을때 들은 이야기를 선애한테 해주기는 했지만, 그걸 여기서 금방 써먹을 줄은 몰랐다. 반지를 가지고 '더 이상 타이거 상회 건드리지 말기' 정도만 거래할 줄 알았지,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설마 선애가 그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지 후작이 움찔 했다. 아마 은근슬쩍 떠보는 거였다면 후작은 놀란 내심을 감추고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왜그랬냐?' 라고 물으니 허를 찔린 모양이다. 선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지요. 후작가 인장 잃어버리셨지요? 그걸 찾아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 타이거 상회에 대한 모든 압박을 철회 하십시오. 지금 하시는 모든 일은 물론, 앞으로도 말입니다." 선애의 단호한 말에 후작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네가... 네가 가지고 갔느냐?" 그에 선애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물론, 아니지요. 저에게 그런 능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누가 가지고 가지?" "그건 당연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네 말을 어찌 믿느냐? 내가 너희 상회에 행하는 모든 일을 철회한다 해도 반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후작의 말에 선애가 다시 한번 기가막히다는 시선으로 후작을 봤다. "정말... 어이 없으시군요. 그 대사 제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제 계획을 말씀 드리자면, 후작님께서 철회 하겠다고 약속 하시면 오늘 밤..." 거기서 선애가 날 힐끗 보자 나는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일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네가 안전한 곳에 도착한 뒤에 돌려줄 거야.] "...은 어려울 것 같고, 며칠 내로 후작님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만약 내가 반지를 손에 넣은 뒤 다시 압력을 가한다면?" "그러면 후작님께선 소중한 무언가를 다시 잃어버리시게 되겠지요. 인장 말고도 후작님께선 소중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계실 거 아닙니까?" 선애가 태연하게 말하자 후작이 선애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런데 선애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후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도대체... 얘가 뭘 믿고 이렇게 간뎅이가 부었을까?' 어쨌든, 울 꼬맹이는 토냐의 생글 생글 전법보다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센 말발로 나가는게 훨씬 꼬맹이 다웠다. 하기야, 꼬맹이도 자기에 안 맞는 것 같으니 중간에 그 전법을 포기하고 자기 식으로 나간 거겠지만. 한참 동안 선애를 노려보며 갈등하던 후작은 결국 마음을 정한 듯 한풀 꺾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다. 네 말대로 하겠다. 단 조건이 있다." "말씀 하시지요." "우선, 너희 상회에 대한 압력을 철회하는 건 내가 반지를 받은 후다." "알겠습니다." "따로 이번 거래에 대한 문서를 작성하길 바라느냐?" "아닙니다. 후작님께서 약속하시면 믿겠습니다." "좋아. 그러나 나는 우선 반지를 받아야겠다. 그러니 네가 이 저택을 나가는 건 내 손에 반지가 들어온 후가 될 것이다." 이건 어쩔거냐는 표정으로 후작이 선애를 보자 선애가 날 힐끔 본다. 나야 뭐.. 반지는 후작의 침실에 있으니 언제라도 넘겨줄 수 있었다. 단지 내가 선애의 곁을 잠시라도 떠나는게 걸려서 선애가 안전한 곳에 도착한 후에야 돌려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선애가 저택 안에 있다면... '금방 주고 오면 되겠지.' [나야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까 네가 원하는대로 해.] 내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요. 알겠습니다." 선애가 어깨를 으쓱 하며 선선히 동의하자 후작이 의아한 듯 약간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결국 아무래도 상관 없다 생각 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럼 다 된 건가?" "아참, 남작님 목숨을 노리는 것도 철회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선애의 말에 후작이 팔짱을 턱 끼더니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내, 말할 기회가 없어서 미처 묻지 못한건데, 무슨 근거로 내가 크로스웰 남작 목숨을 노린다는 거지? 너희 상회에 대한 압박은 인정하지. 한 나라와의 거래를 독점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남작 목숨을 노린다는 건 인정 못하겠군." 그의 말에 선애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후작을 노려봤다. "정말 이러실겁니까? 후작님께서 핸들리 크로스웰 녀석 뒤에 버티고 있었다는 것 모를 줄 아셨습니까?" 후작은 처음에 선애의 말을 부인 하려는 듯 욱... 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생각을 바꿨는지 양 손을 올리며 인정했다. "좋아, 인정하지.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는지... 잠깐... 그렇군, 그 날인가? 내 반지가 사라진 날 낮..." 후작의 말에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정말 머리 좋은 사람이다. 그걸 금방 알아채다니 말이다. "내 말이 맞지?" "그건 아닙니다. 핸들리 크로스웰이 노골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을때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고 알아보기 시작했으니까요. 잘못되면 작위는 물론이거니와 재산까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 마치 그것과 상관 없는 양 나오는 걸 보고 법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뒤에 버티고 있을거라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이라고 해야 할지, 후작님의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방해하고 나오기 시작해서 둘 사이를 의심했었습니다." 선애의 당당한 말에 후작이 못마땅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랬군. 빨리 해결하려는 욕심에 일을 너무 서둘렀던게 화근이었나? 좋아, 그건 그렇다고 하지. 그럼, 이만 물러가서 쉬도록 하게." 그렇게 말한 후작은 형 켐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손님이 쉬실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후작의 명에 켐벨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선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선애를 안내한 곳은 갑자기 마련한 곳이 아닌, 마치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은 아주 멋드러진 방이었다. "시녀를 보내 드릴테니 필요한게 있으시면 말씀 하십시오." 그 곳으로 안내한 뒤 켐벨은 그렇게 말한 뒤 나가버렸다. 그제야 나는 마음 놓고 선애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야... 후작가라 그런가? 어째 크로스웰 남작 저택에 있는 네 방보다 더 넓고 좋다야.] "/그러게... 우왓, 언니, 이거 진짜 금이겠지?/" 방 한쪽에 놓인 길다란 장식 탁자 위에 청자 하나 백자 하나, 그리고 금으로 만든 매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오옷... 눈이 파래. 이거... 진짜 사파이어겠지?] "/돈 많다. 손님 방에도 진짜 금 조각상을 가져다 놓고./" [그러게... 하기야, 전에 갔던 에스테반 공작 저택도 완전 금칠을 해놨었지.] 예전에 갔었던 저택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공작 저택의 현관문이 두짝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테두리하고 가운데 조각이 금으로 도금이 되어 있었고 손잡이도 금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애 옆에 붙어있느라 선애가 머물러 있던 응접실 밖에는 보지 못했지만, 현관문에도 그렇게 금칠(?)을 해놨으니 공작 침실은 얼마나 화려하고 멋드러지게 꾸몄을까나? "/뭐, 그건 그렇고... 언니, 그거 언제 돌려줄 거야?/" [오늘 밤에 내놓지 뭐. 아, 그런데 꼬맹아... 나 아까 무지 놀랐다. 너 후작이 무섭지 않디? 어떻게 그렇게 당당했냐? 옆에서 보는데 내가 다 조마조마해지더라.] 내 말에 선애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만 작게 속삭였다. "/허연 도마뱀 덕분에... 그때 크게 놀란 뒤로는 왠만한 건 껌으로 보이네?/" 그 말에 나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푸하하하~~ 아, 맞다, 맞다. 그 녀석이 있었지? 그래, 그래, 세상에 그 녀석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또 있을까나?]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종족이라는 드래곤, 그것도 엄청 오래 묵은 드래곤의 분노를 직격으로 맞아봤으니, 그에 비하면 후작의 위압감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을 거다. [이야... 그거 참... 요 근래 희안하게 그 도마뱀 도움을 많이 받네?] "/피해도 많이 입었잖아? 그럼 쎔쎔이지 뭐./" 선애가 후작과의 면담(?)을 어렵지 않게 끝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긴장을 조금도 안 할 수는 없었던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겉옷을 벗었다. 그 즈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며 켐벨이 보낸 듯한 시녀 세명이 들어왔다. "시중들기 위하여 왔습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 한 명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람 두명. 저들이 그냥 보통 시녀겠는가? 아마도 선애를 감시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러나 울 꼬맹이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시중을 즐기면서, 그녀들이 가져다 준, 고급 실크로 만든 실내복을 입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그 동안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보니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약간 떨어진 복도 모퉁이, 모퉁이마다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무장을 한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갈때 내가 업고 냅다 달려야겠는걸?' 선애가 잠자리에 들고서도 몇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었을때에야 나는 내가 맡은 임무를 하기 위하여 선애의 숙소를 벗어났다. 이쯤 되면 보통은 모두 잠에 들 시간인데, 후작의 저택은 구석구석 환하게 불을 밝히고는 모든 기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후작 또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서재에서 켐벨 보좌관과 이 저택의 집사, 그리고 중년의 기사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거... 반지는 침실에다 가져다 놓을텐데, 여기 있으면 언제나 발견 하려나? 그렇다고 서재로 가져다 줄 수도 없고...' 차라리 후작이 침실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면 반지 가져다 놓고 그가 금방 발견할 수 있도록 깨우기라도 했을텐데 말이다. '하는 수 없지. 반지가 후작 손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지키고 있을 수 밖에.' 그러나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내가 숨겨놓은 곳에서 반지를 꺼내 침대 바로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 놓았을때 문이 열리며 집사와 켐벨 보좌관이 후작과 함께 들어왔던 것이다. "조금 쉬십시오." "알겠네.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깨우도록 하게." 아무래도 내일을 위해 잠시 눈을 붙이려 했던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일어나기 위하여 겉옷도 안 벗은 채 시중 들려는 집사도 물리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 거다. '어라라? 이봐, 이건 봐야지.' 이대로 그냥 잠들었다가는 언제 발견할지 몰라 나는 일부러 반지를 건드려 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달그락~ 그러자, 역시 예민한 후작은 번쩍 눈을 뜨더니 탁자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 반지가... 게 아무도 없느냐?" 후작의 외침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한 시종과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임무 완수.' 그 모습에 나는 씨익 웃고는 얼른 선애에게로 달려갔다. 여기서 후작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도 싶었지만, 이 곳은 적진 한 가운데였으니 될 수 있는 한 선애 옆에 붙어 있는게 더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 날, 내가 반지는 돌려줬어도 혹시나 시침 뚝 떼고 선애를 붙잡아 둘까 걱정 되어서 우리가 따로 이 곳을 빠져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의외로 후작이 켐벨 보좌관을 달고 선애가 머무는 방으로 행차했다. "반지가 돌아 왔더군." 들어오자마자 선애를 보고 툭 던진 말이었다. 이렇게 정직하게(?) 나올 줄 몰랐던 터라 난 후작이 새삼스럽게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도대체 뭔 꿍꿍이일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럼 약속을 지키시겠군요?" 오늘도 울 꼬맹이는 태연하게 후작을 상대한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겠지. 그래도 알파두르에까지 연락이 가려면 좀 시간이 걸릴테니 내일부터 모든 압력은 없어질 거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남작님에 대한 일도..." "핸들리와는 손을 끊도록 하지." "한 가지 더 확실하게 하자는 차원에서 묻겠습니다만, 저희 상회에 대한 압력을 철회 하신다는 건 직접적인 것들은 물론 간접적인 것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선애의 말에 후작이 씨익 웃었다. "직접 적인 것이야 내가 통제할 수 있겠지만, 간접적인 영향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겠군. 상회 사람들의 입까지 일일이 단속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상회를 꾸려 나간다면 이 정도의 압력은 수시로 받게 될텐데, 그것도 감당 못하겠는가?" 다른 상회하고 루빈스타인 상회하고 어디 같은가? 그러나, 루빈스타인 후작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기에 선애는 못마땅한 표정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건 후작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후작의 말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겠지. [간접적인 압력은 계속 행사한다는 소린가보네.] 그래도 직접적인 압력이라도 사라진다는게 어디인가? 최소한 배는 구해서 서대륙과의 왕래는 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반지도 돌아왔으니 자네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겠지. 잘 가도록 하게. 다시는 이런 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후작의 말에 선애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감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어차피 잡아 놓으려 해도 우리가 알아서 나갈 생각이었으니 보내 준다는데 머뭇 거릴 이유는 없었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켐벨 보좌관이 그러면서 안내를 자처 했기에 선애는 후작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나가자마자 도망쳐야겠지?] 후작이 선선히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을때까지는 몸을 피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내 말에 선애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켐벨 보좌관이 배웅해주는 건 저택의 현관문 까지. 그리고 정문까지는 선애가 혼자 알아서 가야 했다. "/그래도... 무사히 끝내서 다행이다./" 켐벨의 모습이 현관문 안으로 사라지자 선애가 기분 좋게 기지개를 키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는 솔직히 한 바탕 할지도 모른다고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거든.] "/동감이야. 나도 겁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언제든 시동어를 외칠 준비를 하고 있었어. 계속 긴장하고 있으니까 그것도 꽤 피곤하더라./" 큰 고비를 넘겨서 그런지 선애의 얼굴은 무지 홀가분해 보였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덕분에 잠시 긴장이 완화된 상태라 길 옆에 쭈욱 늘어서 있던 무지하게 크고 굵은 가로수 뒤에서 갑자기 손 하나가 뻗어 나와 선애를 끌어 당겼을때 선애는 엄청 놀라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꽥~! 질렀다. 물론, 곧바로 다른 손이 선애의 입을 막았기에 그 비명은 나오다가 막혀 버렸지만 말이다. "쉿!" 그런데, 그 손의 주인이 더 놀라웠다. 바로 그랜트 녀석이었던 것이다. "진정해. 지금 여기서 소리치면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그걸 바래?"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왜 저 놈이 여기 있는 거야? 선애야, 어떻게 할까? 구워 버릴까?] 내가 옆에서 방방 뛰자 오히려 선애가 냉정을 되찾은 듯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랜트가 조심스레 선애의 입을 막은 손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고 싶은데요, 자작님?"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랜트를 보며 선애가 물었지만, 그랜트는 대답하는 대신 다짜고짜로 선애의 팔을 잡고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자작님?" "가만, 지금은 조용히 따라와. 시간이 없어." 그랜트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하고 목소리도 다급하고 진지했기에 선애도 얼결에 그를 따라 거의 뛰다시피 걸었지만, 의아함은 가시지 않았다. "저기...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면 고마울텐데요?" "살고 싶으면 따라오도록 해." "엥?" 그의 말에 선애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물로온, 선애가 위험할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목숨을 걸고 왔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랜트의 행동이었다. 후작의 아들내미인 주제에 마치 선애를 구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랜트는 선애를 데리고 그 넓은 후작가의 정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복잡 다단한 길을 지나 어느 멋드러진 정자에 도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정자에는 켐벨 집사가 초조한 얼굴로 왔다갔다 하다가 둘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하며 얼른 다가오는 것이었다. "도련님, 무사히 오셨군요. 제가 갔다 온다니까요." "잘 왔으니까 됐잖아." "그러게요. 이것아, 내가 어제 얼른 가라고 할 때 갈 것이지... 이게 무슨 막무가네 짓이냐?" 켐벨 집사의 무지 안타깝다는 어조에 선애는 더욱 더 어리벙벙해졌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래?' "고든, 시간이 없어." "그렇군요. 어여, 어여 가세요. 저는 지금이라도 막고 싶지만... 도련님이 굳게 결심 한 일이니 부디 일이 잘 풀릴때까지 무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급해서 제대로 준비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문제 없을 겁니다." 그랜트의 재촉에 캠벨이 미리 준비한 듯한 책가방 만한 꾸러미 두개를 들더니 하나는 그랜트, 하나는 선애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보석하고 금화 은화를 적당히 섞었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아껴서 쓰세요. 그리고 갈아입을 옷 하고 육포도 조금 챙겨 넣었고요." "고마워." 그랜트가 녀석에게서 보기 힘든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정자의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그 벽에는 아름다운 처녀 한 명이 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모습이 양각 부조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벽의 몇 군데를 툭툭 건드리니 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벽이 가운데를 회전축으로 해서 90도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컴컴한 통로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오옷,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비밀 통로?' 그랜트가 그렇게 수상쩍은 통로를 여는 동안 켐벨은 선애의 손을 꼬옥 잡고 신신당부 하고 있었다. "부디 몸 조심해라. 어쩌면 차라리 이렇게 된 게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 네 꾸러미에도 금화들을 적당히 넣어놨으니 필요할때 쓰도록 하고." "예에? 저기... 켐벨 집사님..." 그러나 선애가 채 제대로 묻기도 전에 그랜트가 다가와 선애의 팔을 잡아 끌었다. "빨리..." 뭐, 폼을 보아하니 선애를 해하려는 건 아닌 듯 해 선애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면서도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조심 하십시오." 걱정스러운 켐벨 집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다시 그르릉~ 하며 문이 닫혔고, 덕분에 선애가 들어선 통로는 빛이 차단되어 무척이나 깜깜해졌다. 하지만 곧, 그랜트가 미리 준비한 듯한 등을 켰다. 보아하니 불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마법의 등 같았다. 그것으로 앞길을 밝힌 후 선애의 팔을 잡아 걸어가며 그랜트가 입을 열었다. "이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그에 선애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러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만?"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네 목숨을 구하려 하잖아." 아주 간단하게 나온 대답이지만, 그렇다고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왜 자작님이 제 목숨을 구하려 하시냐구요? 저 지금 후작님께 목숨을 위협 당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랜트 녀석 선애의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자작님이라고 하지 말고 이름을 부르지?" "예?" "이름을 부르라고. 내 이름 알잖아?" '쟤 갑자기 왜 저래?' 선애도 어이없다는 시선을 나에게 보낸다. 지금 이 상황에 저 말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랜트야 선애 앞에 서서 앞만 보고 가니 선애의 기분을 짐작 못하는 건지 아니면 대충 추측이 가능하지만 모른 척 하는 건지 아무 말이 없다. 그리하여 잠시 후 침묵을 깬건 대충 어이없는 감정을 수습한 선애였다. "아... 예에... 그, 그럼... 그랜트님..." " '님' 자 빼." [헐... 쟤 진짜 왜 저러냐?] 내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선애는 이제 '그러려니...' 여기기로 했는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럼, 그랜트, 이유는 말해주시죠? 절 돕는 거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맞아." 여전히 단답형이라 선애가 열받았는지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아버지의 뜻을 어겨도 돼요?" "물론 안돼지." "그런데 왜 이러는데요?" 그러자 계속 앞으로 걷기만 했던 그랜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선애를 돌아보더니 무지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에에엑~~!! 이게 무슨 소리야~~!!] 선애는 그랜트의 말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바로 튀어 나온 내 비명 같은 외침에 인상을 찡그리며 날 째려봤다. 그에 나는 허걱 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다시 그랜트에게 시선을 돌린 선애. "정말 죄송하지만, 그 말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야. 내가 이 상황에 농담을 할 거 같아?" 그건... 그랬다. 게다가 저 녀석이 아버지의 뜻을 거슬리며 선애를 구하는 이유가 선애를 좋아해서라고 한다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저 놈이 정말 선애를 좋아하는지 의문이다. 그 동안 선애와 여러 일이 있기는 했지만, 선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기는 커녕, 무슨 반응을 보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에에... 처음 만났을때 울 꼬맹이 눈동자보고 흑진주 같다고 하기는 했지만, 설마 그게 좋아한다는 감정의 표현이었던 건 아니겠지?' 그랜트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선애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려있자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널 맘에 두고 있었지만, 그걸 표현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간 아버지가 널 가만 두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과연, 결국 이런 일을 벌이시더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째 머리가 더 복잡했다. "저기... 좀 이해 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시면 안될까요?" 선애가 더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랜트가 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는 내가 완벽한 후작이 되시길 바라시지. 루빈스타인 후작가와 상회를 잘 이끌어 갈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집안에 도움이 될 만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여 후작가를 더욱 더 튼튼히 하길 말이야." 그건 이해할 만 했으니 선애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 특히, 아버지의 눈에 차지 않는 다른 여성을 취하는 것은 더욱 더..." 그의 말에 선애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저기... 이런 말은 좀 열받기는 하지만, 이 나라는 능력만 있으면 두번째 부인을 둘 수도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부인이 여러명이면 나중에 후계자 싸움으로 집안이 시끄럽게 될 테니까. 애초부터 그런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시려는 거지. 아버진,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시면서도 다른 여자는 만들지 않으셨다면, 이해가 갈까?" 내가 후작에게서 받은 이미지를 생각하자면, 후작은 능히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찌보면 가여운 사람이라고나 할까? 집안을 위해서 사랑조차도 안 한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내 부인이 될 사람도 손수 정해 놓으셨지. 자신이 그런 인생을 걸어 오셨기때문에 내가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는 것 또한 용납하지 못하시는 분이야. 그래서 만약 내가 너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나에게 뭐라 하는 대신 널 없애버리셨을 거다. 당장에야 내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해도 나중에라도 널 취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의 말에 나는 기가막히기도 했지만,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확실한 방법이 아닌가 말이다. "처음에는, 너에 대한 감정을 없앨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널 저택에서 내보낸 일도 널 보지 않으면 이 감정을 지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너에게 감정을 가지기 시작할 즈음이었으니 가능할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널 다시 본 순간... 내가 실패 했다는 걸 깨달았지. 널 잊는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널 그리워 하고 있었더군. 그때 난 처음으로 그리움이란 감정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그랜트는 선애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철저하게 숨기기로 했지. 나중에,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을만큼 충분한 힘을 가질때까지. 하지만... 서대륙에 가는 길에 널 계속 보면서 슬며시 욕심이 생기더군. 내 감정은 숨기고 있겠지만, 그 동안 네가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 널 내 눈안에 두고 싶었다." '우오오옷~~ 닭살이다아앗~~!!' "그래서 알파두르로 돌아와 기껏 짜낸 생각이 한 나라와의 거래를 독점 한다는 핑계로 널 내 곁에 두는 거였지. 그것이 내 최소한의 욕심이었건만... 그런데, 넌 거절했지." 그 동안 마치 책을 읽듯이 이야기 하던 녀석이 그때 선애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피식 웃는 거다. "섭섭하기는 했지만, 너 다운 선택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도 내 욕심을 순순히 포기하기는 싫었지. 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 넌 내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모를 거다. 그런데... 그 사이... 엘리엇이 내 감정을 눈치 채버렸지." 엘리엇이야 그랜트의 옆에 항상 붙어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엇은 내가 아버지처럼 완벽무결한 후작이 되길 바랬지. 그랬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날 위하는 일이라 생각한 거야. 엘리엇의 보고로 아버지또한 나의 감정을 알게 되신 거였지." '아하... 그래서 켐벨 집사가 엘리엇 보고 어찌 그럴수 있느냐고 펄펄 뛰었군.' "엘리엇이 나 몰래 아버지와 연락을 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손을 써 볼 틈도 없었다. 게다가 그 후에 나 또한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지. 아버지의 명으로 수도로 돌아가면서 널 봤을때 어쩌면 널 보는 일이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었다. 그런데 수도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가 인장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 하더군." 눈이 둥그래져서 그랜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선애가 어색한 얼굴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그랜트가 다시 피식 하고 웃었다. "처음에는 그 일과 널 관련시키지 못했지. 그러나 어제 켐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 네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야 알아챌 수 있었다. 넌 언제나 날 놀라게 하더군. 그와 함께 이 일이 나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란 걸 깨달았다." 기나긴 이야기를 놀란 얼굴로 쭈우욱 듣고 있던 선애가 그랜트가 말을 끝냈음에도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요, 저기... 제가 자작, 아니... 그랜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면 어쩌려고요?" 그러자 그랜트가 음흉한 얼굴로 피식 웃는 것이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도 있는 척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 없다고 단언하면 난 실망해서 이번 일에서 손을 뗄지도 몰라." '헐... 살고 싶으면 자길 좋아하라는 소리냐?' 선애가 기가막혔는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지만, 그랜트는 상관 없다는 듯 즉시 몸을 돌려 다시 선애 손을 잡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에 나는 선애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물었다. [저 놈 웃기지 않냐?] 그러자 선애가 픽~ 하고 다시 한번 웃는다. 그런데, 어째 꼬맹이 표정이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어... 이거... 설마 싶지만... 어째 수상한디?' 그 후로도 대략 30여분 정도 더 걸어간 후에야 그 통로가 끝나려는지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고, 그 위로 올라가자 두터운 나무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똑, 똑, 똑... 나무 벽에 가까이 다가간 그랜트가 벽을 두드리자 잠시 후에 덜컥 덜컥 하는, 벽 앞을 치우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잠시 후에 덜커덕 하며 나무 벽이 아예 들려서 옆으로 치워지는 것이었다. "오셨습니까?" 이미 대기하고 있었던 듯 그랜트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밝은 빛 덕분에 선애가 인상을 찡그리는 동안, 그런데 별 영향을 받지 않는 나는 대기하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 후작가의 기사인 드렉 암스트롱이었다. [야, 야, 드렉 암스트롱 경이 있어.] 내 말에 고개를 돌린 선애의 눈이 드렉을 확인하고 둥그래졌다. "어라, 암스트롱경?" 선애의 부름에 그가 시선을 돌리더니 살짝 고개를 숙여 아는체를 해 보인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랜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서두르십시오. 지금 총 비상 동원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저도 곧 돌아가봐야 합니다." "수고했네." 그랜트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선애의 손을 잡아 끌자 같이 있던 중년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얼른 선애와 그랜트가 빠져나온 통로를 막았다. 마치 창고 같은 그 곳의 문을 열고 나가자 곧바로 커다란 마굿간이 보인다. "여기가 어디에요?" "어떤 고급 여관의 마굿간. 루빈스타인 상회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곳이지." 아무래도 그 비밀 통로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여관을 세워 운영하는 모양이다. 먼저 문 밖으로 나간 드렉이 그 넓은 마굿간에 얌전히 매어져 있는 말 중 두 마리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 사이 그랜트는 켐벨 집사가 넘겨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꾸러미를 열어 후드가 달린 망토를 꺼내 선애에게 넘겨줬다. "이걸 써." 그리고는 또 다른 망토를 꺼내 자신도 두른다. 그제야 그랜트는 선애를 데리고 마굿간을 나왔다. "조심하십시오." 미리 나와 두 말의 말고삐를 쥐고 있던 드렉이 그랜트에게 말고삐를 넘겨 주며 말하더니 선애와 그랜트를 보고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이 가는게 어떻겠습니까? 자작님 혼자서는 힘드실텐데..." 그런데 그랜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네.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그 곳에서 그랜트는 드렉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말 고삐 하나를 선애에게 넘겨주고 앞장을 섰다. 그가 나온 곳은 여관의 뒷문. 제법 넓은 골목으로 이어져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꽤 보이긴 했지만, 어느 누구도 뒷문에서 나오는 둘을 신경쓰지는 않았다. 후두를 깊이 눌러써 머리와 얼굴을 가린 둘은 재빨리 그 골목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숙부님 댁." "숙부님 댁?" "너도 알걸? 브라우닝 백작님 말이야." "아..." "지금 현재 아버지에 맞서 나를 도와주실 분은 그 분 뿐이거든." 그랜트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문제는... 그 곳까지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는 건데..." "멀어요?" "숙부님하고 아버지는 사이가 좋지 못하거든. 이 수도에는 귀족 저택가가 두 군데 있는데 양 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떨어졌지. 우리 집하고 숙부님 댁이 각각 거기에 있어." "헤에..." "수도를 가로질러 간다고 해도 시내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으니 오늘 안에 도착하기 힘들어. 그러니 편법을 써야지." 바이런국은 땅이 무지하게 넓은 나라였다. 그런 나라 답게 수도도 무지하게 넓었다. 수도 외곽 성 안에 커다란 숲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이 숲은 왕실 소유로 귀족들의 오락거리인 사냥터로 애용이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평소에도 평민은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 되어 있지만, 귀족들은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었다. 지금 그랜트는 그 곳을 통과해 숙부님 댁으로 갈 생각이었다. 수도 내든 외곽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었지만, 숲 안에서는 얼마든지 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평민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어 인기척도 적을테니 사람들 눈을 피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그 숲에 도착할때까지가 문제였다. 한 나라의 수도인 만큼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특히나 그랜트가 선택한, 대로가 아닌 약간 뒷 골목에는 용병들도 많이 보였고 선애나 그랜트 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후드를 눌러 쓴 사람들도 가끔 볼 수 있었다. 거기다 말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도 흔치 않아 선애와 그랜트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였다. "거기! 잠깐만 기다려라!" 길을 잘 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게 왠 일? 거기에는 루빈스타인 후작가 문장을 떠억 붙이고 있는 기사 셋과 사병 십여명 정도가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오?" "지금 우리는 범죄자를 쫓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얼굴을 좀 보여봐라."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한 무리는 용병들로 보였는데 그들 틈에 외소한 체격을 가진 사람이 후두를 깊숙히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들과 사병들이 눈을 부라리니 용병들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후드를 눌러 쓴 사람이 한숨을 내쉬며 후드를 걷어 올렸다. 거기에는 체격이 좀 작고 말랐지만, 갈색 머리를 가진 평범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동안이라 그런지 20대가 안 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기사들은 그가 남자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길을 비켜줬다. "좋아, 가 봐라."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은 뻔했다. 꼬맹이를 찾고 있는 거였다. 그 모습을 본 그랜트도 같은 생각이었던 듯 선애의 팔을 잡고 다짜고짜로 옆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거기, 잠깐!" 다행이 후작가의 기사와 사병들은 이 둘의 모습을 보지 못한 듯 이번에는 또 다른, 후드를 눌러 쓴 사람을 잡아서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언제 어디서나 꼬옥 감초처럼 끼어 있는, 그러나 절대적으로 환영 받지 못하는 인물이 여기서도 등장하고 말았으니... "저어... 기사님?" "뭐냐?" 왠 후즐그레한 중년 남자 한 명이 양손을 비비적 거리며 슬그머니 기사 곁으로 다가간다. "저기... 기사님들이 찾으시는 범죄자 말입니다요, 신고하면 포상금이 있습니까요?" "물론이다. 누굴 봤느냐?" 현상금 포스터도 없는 사람을 찾는데 포상금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울 꼬맹이는 수배범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기사 녀석은 그렇게 말했고, 중년 남자는 얼굴이 환해졌다. "얼굴을 본 건 아닙니다만, 아까 어떤 후드를 쓴 두 인물이 도망가는 걸 봤습니다요." "어디냐?" 기사가 다급하게 묻자 중년 남자가 헤픈 웃음을 흘린다. "에헤헤... 그런데... 포상금은 얼마나 되는지..." 거기까지 듣자마자 나는 선애를 향해 뛰었다. [야! 누가 너 숨는 거 보고 기사들에게 일러 바쳤다.] 내 외침에 선애가 그랜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누가 우리를 보고 기사들에게 말했대요." 그 말에 그랜트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별 말 않고 다시 선애를 데리고 또 옆 골목으로 꺾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다다다~~ 하는 여러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없잖아?" "어라... 분명히 여기로 들어갔는뎁쇼?" "네 목을 걸고 맹세 하느냐?" "물론입니다요. 분명히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요!" "흩어져서 찾아봐라. 방금 갔다고 하니 얼마 가지 못했을 거다. 두 사람이고 말을 데리고 있다고 했다." "이런..." 한번 꺾어진 뒤 계속 전진하지 않고 잠시 몸을 숨기느라 벽에 따악 붙어 있던 그랜트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낭패 어린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어쩌죠?" "우선 가만히 있어보지. 만약 들킨다 해도 저들이 흩어진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그랜트의 말에 선애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힐끔 나에게 시선을 준다. [알았어. 너희들을 발견하기만 하면 입을 막고 뒤통수를 내려 칠게.] 잠시 후 세 기사는 각각 세명의 사병들을 데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골목이 좀 많았던 관계로 운 좋게 우리가 있는 골목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다급했던 그랜트가 잠시 몸을 숨길 요량으로 말이 겨우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골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지금 좀 움직일까요?" 선애가 속삭이자 그랜트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조금 더 있다가..." 그리고 한참 귀를 기울이더니 바깥에서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곧바로 우리가 있던 골목을 뛰쳐 나왔다. 과연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쪽으로." 그랜트는 선애를 맨 처음 우리가 가던 그 길로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인적이 없는 곳 보다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숨어드는 것이 더 났다는 걸 아는 듯 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우리가 가려는 그 길과 골목이 이어지는 모퉁이에 사병 하나가 우리가 간 곳을 일러 준 그 중년 남자를 감시하며 있었던 것이다. "여기다! 여기 있다!!" 사병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골목 안으로 외쳤지만, 기사들이 너무 멀리 갔는지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에 그랜트가 잽싸게 달려들어 사병의 얼굴을 가격하여 기절 시킨 후, 그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중년 남자도 마찬가지로 때려 눕히고는 선애에게 달려왔다. "어서!" 후작의 몸놀림도 잽싸다고 생각 했지만, 그랜트도 그 못지 않았다. 사병을 가격시키는 것이 정말 전광석화 같았던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체술에 자신 있으니까 자기 혼자 선애를 데리고 도망 갈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러나 채 그 둘이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전, 사병의 외침을 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사가 달려온 것이었다. "게 섯거라!" 서라고 서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달려!" 결국 상황이 다급하게 되자 그랜트는 한 손에는 고삐를 다른 한 손에는 선애의 팔을 잡고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지 무장만 했을 뿐인, 평소 단련된 기사의 달리는 속도와, 한 손에는 말 고삐, 한 손에는 아가씨의 팔을 잡은 그랜트의 달리는 속도 중 누가 더 빠르겠는가? 게다가 그랜트의 앞에는 길거리를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기사에게 따라 잡혔다. [내가 나설까?] 그 기사의 뒤로 두두두~~ 달려 오는 다른 기사들과 사병의 모습을 봤기에 물은 건데, 선애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랜트가 선애에게 자신의 말 고삐를 넘겨 주더니 그대로 기사에게 달려 들었다. 채앵~!! 언제 빼들었는지 모를 검으로 기사에게 달려들자 기사 또한 차고 있던 검을 빼어들어 막아섰다. "제법이구나." 기사가 호기롭게 외치며 팔에 힘을 주어 그랜트를 밀치고는 자신도 두어 걸음 떨어졌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기사의 외침은 당연한 거겠지만, 마찬가지로 그랜트 또한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랜트는 대답하는 대신 다시 검을 들고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채애앵~!! "/언니, 저 뒤에!/" 선애의 외침에 나는 그랜트와 겨루는 기사 뒤로 다른 기사들과 사병들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알았어!] "/여기서 불은 위험해!/" 그들에게 달려들며 불을 일으킬 준비를 하던 나는 선애의 외침에 멈칫했다. 그제야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멀찍이 서서 지켜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럼 그냥 해결할게!] 좀 번잡스럽겠지만 한 명 한 명 직접 제압하는 수 밖에 없었다. 뭐, 그렇다고 아예 목숨을 끊어 놓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애와 그랜트가 도망 칠 시간만 버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다다다다~~ 후작가 기사들은 실력이 뛰어난지 달리는 속도도 무지하게 빨랐다. '이럴때 넘어지면 더 아플텐데...' 그 아픔이 상상이 되어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며 미안함이 샘 솟았지만, 선애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아...' 나는 속으로 사과를 하며 제일 앞서 달려오는 기사에게 다가가 슬쩍 발을 내밀었다. 턱! 쿠당탕탕~~!! '갑옷 때문에 더 아프겠지?' 하지만, 나는 그 기사를 돌아보는 대신 그 다음 두 기사에게 다가가 있었다. 거의 엇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슬라이드 하듯 지면에 납작 업드려 양 팔을 뻗었다. 턱, 턱, 꽈당탕~!! 기사들보다 좀 느려 그 뒤에서 쫓아오던 사병들도 같은 운명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턱, 꽈당~!! 턱, 퍼억~! 터억, 떼구루루... 단순히 한번 넘어뜨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넘어진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 달려가려 하면 또 쫓아가서 밀던지 발을 건던지 해서 넘어뜨려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랜트 녀석이 기사를 제압 했는지, 반대로 제압 당했는지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선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그랜트가 선애를 붙잡고 도망가고 있었다. '호오... 제압했나 보네.' 과연, 그 뒤를 쫓아가보니 아까 그랜트와 대결 하던 기사가 피가 새어나오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멍~ 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 표정이 왜 저래? 그랜트에게 진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그 모습에 잠시 멈칫 하는데 기사 뒷쪽으로 나 때문에 넘어졌던 기사들과 사병들이 '게 섯거라!'를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