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역 1번출구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뭐지?" 20년만에 지구로 귀환한 네크로맨서의 지하철역.... 이 아닌 던전 접수기가 시작된다. 1인군단의 위용에 경배하라. [레이드] [헌터] [네크로맨서] [먼치킨] [1인군단] ──────────────────────────────────── 0화 - 프롤로그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여정의 마무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돌아갈 것이다. “그대 궁극에 이른 네크로맨서여…” 그저 갑옷을 입은 붉은 빛 덩어리일 뿐인 차원관리자의 음성이 웅웅 귓전을 때렸다.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백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참고 견딘 삶을 보상받는 기분이다. 한시도 잊은 적 없었던 그곳.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 “어디긴, 당연히 서울이지.” 아르펜 행성에서의 20년,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 1화 - 드디어 서울! 차원관리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몸을 감쌌다. 온몸이 세포단위로 쪼개져 부유하는 신기한 경험과 함께 암흑이 찾아왔다. 시간마저 잊을 정도의 아득함에 겨우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강우진! 정신 차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시간이 흐르고 어둠에서 빛이 자라났다. 빛이 다가와 집어 삼켰을 때, 세상이 밝아지며 쓰레기냄새가 진동했다. ‘으으.’ 신음했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겨우 눈이 떠져 주위를 둘러보니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손끝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만져보니 재활용 마대자루 위였다. 정체불명의 쓰레기냄새는 거기서 나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가라앉았던 기억의 편린 들이 떠올랐다. ‘학교 소각장.’ 20년 전 이곳에서 ‘그곳’으로 넘어갔다. 어쨌든 그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20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구나.’ 조금 더 낡아 보인다뿐이지 소각장은 그대로의 모습인 것 같았다.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을 기다리며 조금씩 몸이 회복되길 기다렸다. “야, 시발. 빨리 와. 개새끼야.”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겨우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교복의 학생들이 소각장으로 몰려왔다. ‘교복도 똑같네.’ 20년이나 지났으면 교복의 디자인이 바뀔 만도 하건만 아직도 그대로인 모습에 반갑기만 했다. 사람을 보니 정말 지구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괜히 울컥한 기분이었다. 교복의 학생들은 척 보기에도 일진으로 보이는 셋이 하나를 끌어오고 있었다. 찐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멀쩡하게 생겼고, 또 잘생긴 학생이었다. “개새끼. 일단 맞고 시작하자.” “내가 왜 맞아?” “뭐? 이 새끼가.” 다짜고짜 날아오기 시작한 주먹에 둘이 뒤엉켜 개싸움을 벌였다. 옆에 있던 일진들이 가담하자 싸움은 일방적인 구타가 되었다. “이 시발 좆만이가 어디서 대들어?” “존나 거슬리게 지랄이야. 조용히 학교나 다니지.” 일진 셋이 신나게 학생하나를 밟는 걸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왠지 모르게 옛날 생각도 나고, 20년간의 참혹한 경험을 해서인지 애들이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때리던 일진들이 숨을 헐떡이며 멈췄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꿈틀거리던 학생은 여기저기 긁히고 터져 상처가 생겼으나 눈빛만큼은 아직 죽지 않고 있었다. 일진들의 리더인 이수혁은 그런 도재민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 애들이 다 자기를 보면 무서워서 눈 피하기 바쁘거나 선망의 시선으로 보기 마련인데 이 새끼는 저따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하, 시발. 재민아. 아프지? 존나 아프지? 그러게 누가 거슬리는 짓 하고 다니래? 학교 조용히 다니자 응?” “좆까. 시발.” 거슬리는 짓? 그저 조용히 공부만하는 재민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잘생겼다는 것뿐이다. 이수혁이 좋아하는 여자애가 재민이를 짝사랑 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그가 맞고 있는 이유다. “하, 이 새끼가 진짜 뒤져봐야 정신 차리겠구나? 이 새끼 못 움직이게 잡아.” 일진들이 재민을 붙잡아 누르는 사이 수혁은 허공에 대고 위협적인 발차기를 날렸다. 꼴을 보아하니 그대로 머리에 사커킥을 날릴 모양이었다. 그때, 우진의 감각이 모두 돌아왔다. “아, 그쯤 해둬.”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수혁을 위시한 아이들이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재활용마대자루 위에 웬 이상한 옷을 입은 남자가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발. 뭐야? 언제 있었어?” “허, 시발? 애새끼들이 하늘같은 대 선배님을 뵙고도 한다는 말이 시발?” 우진이 마대자루를 타넘듯이 내려와 섰다. 아, 지구의 땅. 20년 만에 밟아보는구나. 일진이라도 어른 앞에선 그저 애들. 당황한 녀석들이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일진들이 원래 학교 족보를 더 엄히 여겨…. “시발. 선배면 뭐?” …기는 개뿔.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 가지? 웬 거지새끼가 끼어들어 지랄이야. 아저씨 요즘 고딩 무서운 거 없어. 걍 가던 길 가세요.” 수혁은 거침없었다. 눈치 보던 일진들도 수혁의 기세에 당황을 쫓았다. 수혁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이 시간에 선생도 아닌데 학교에 있는 놈이다. 그것도 소각장에. 동네 모자라는 형이 틀림없었다. 옷도 엄청 낡았고 말이다. “허, 요즘 애들 싸가지들이 왜이래? 20년 위의 대선배님 앞에서.” 우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수혁은 확신했다. 고작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놈이 20년 운운하는 것을 보니 정신 나간 놈이 틀림없다. 확신했다. “맞기 싫으면 꺼져. 이 새끼야.” 덜떨어진 애들은 겁 좀 주면 도망가기마련. 위협적으로 추켜올린 손에 겁을 먹기는커녕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허, 이 새끼들 안되겠네.” 우진이 앞으로 손을 뻗자 수혁이 움찔 놀랐다. “…….” “…….” 우진은 팔을 뻗고 당황했다. 왜 속박 마법이 발현되지 않지? 당황한 그를 향해 수혁이 인상을 구겼다. “시발. 뭐야?” “어? 왜 이러지? 속박!” 당황한 우진이 연달아 손을 뻗으며 시동어까지 외쳐봤지만 마법의 발현이 없었다. 수혁이 욕설을 뱉었다. “시발. 쫄았잖아. 이 오타쿠 새끼가.” 확실하다. 동네 모자란 놈에게 잠시 쫄았다는 게 자존심 상해 수혁은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주먹을 휘둘렀다. 수혁의 주먹이 우진의 머리에 닿기 전 우진이 고개를 까닥 옆으로 피했다. 부웅. “허, 시발 피해?” 붕. “이 개새끼가. 뒤지려고. 이 새끼 조져!” 수혁의 발악에 일진들이 달려들었다. ‘허, 시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우진은 20년 동안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마력이 반응하지 않아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마법을 잃었다고 해도 고작 고삐리들의 주먹에 맞을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전사들보다 신체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쪽 세상에서의 이야기다. 이곳에서 비교하자면 마법사도 특공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신체능력이 좋았다. 괴물이 버글거리는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는 체력은 되어야 하니까. 우진은 귀찮게 달려드는 일진들의 주먹을 한 번씩 피하곤 가볍게 주먹을 뻗어 명치를 한대씩 때려주었다. 퍼퍼퍽. “윽.” 정확히 세 번의 공격에 셋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도재민이 아픈 몸을 추스르는 것도 잊고 멍하게 우진을 보았다. “쩌, 쩐다.” 우진은 귀찮은 것들이 쓰러지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무심결에 하던 그의 버릇이었다. “뭐, 상관없으려나?” 차원이동의 여파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법을 잃은 것인지 봉인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렴 상관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이곳은 서울. 더 이상 괴물의 위협도, 생존을 위한 사투도 필요 없는 곳이니까. 아마도…? ──────────────────────────────────── 2화 - 드디어 서울! (2) 일진들은 몇 번 컥컥 거리다가 슬금슬금 일어서더니 눈치를 보곤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우진은 쫓을 생각도, 쫓을 이유도 없기에 내버려두었다. “가, 감사합니다.” 도재민이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상한 차림새의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을 도와줬으니 말이다. “아, 별거 아냐. 그보다 뭐 하나만 묻자.” 재민은 우진의 말에 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일진에게 두들겨 맞는 아이를 구해주고 던지는 질문이라 봐야 ‘왜 맞았냐?’ 정도 아니겠는가. 보통의 어른이라면 말이다.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되냐?” “예?” “오늘이 며칠이냐고?” “아, 9월 10일인데요.” “몇 년도?” “2015년이요.” “뭐?” 강우진은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저쪽세계에 ‘소환’당한 것이 2010년. 그가 고3이던 시절이었다. “하, 뭐가 어떻게 된 거지?”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왔건만 지구는 5년이 흘렀을 뿐이었다. 우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생각을 정리했다. “오히려 잘 된 건가?” 아무런 의심 없이 20년이 흘렀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들을 다시 찾을 일이 막막했는데 5년이라면 가족들이 아직도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쁠 게 전혀 없는 상황. 주위에 거울 될 것이 있나 찾아봤지만 없었다. 우진의 눈에 재민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 내가 몇 살처럼 보이냐?” “예에?”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이때 쓰는 것인가? 일진 피했더니 미친놈에게 잘못 걸린 것은 아닐까. 재민은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 답했다. “스물 둘 정도요.” “그래?” ‘몸도 젊어졌다는 건가? 마법을 모조리 잃고 젊음을 되찾았다? 아니, 몸이 재구성되었다?’ 고민은 차차해보기로 한 우진은 일단 급한 것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20년만의 귀환. 하지만 지구는 5년이 흘렀을 뿐이다. 가족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집 전화번호는 물론 가족들의 전화번호도 아예 기억나지 않았다. 다행히 여긴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인지라 집까지 찾아가는 길은 아직 기억에 남아있었다.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오늘 중으로 가족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집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걸어갈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지하철 7정거장 정도의 거리. 우진의 눈에 불안한 눈초리의 재명이 들어왔다. “돈 좀 빌리자.” “예에?” “차비 좀 빌리자고.” 재민은 아까 일진들이 도망칠 때 함께 도망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거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진들을 한방에 골로 보내버리는 그의 주먹질은 거부를 용서할 것 같지 않았다. 재민이 주머니를 뒤져 가진 돈을 모조리 내밀었다. 7300원의 돈. “고맙다. 내가 꼭 갚아주마.” “아, 아니에요.” “어허, 내가 꼬맹이들 삥이나 뜯는 걸로 보여? 갚아 준데도.” 우진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깜빡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참. 나 핸드폰 없지. 어디 종이에 전화번호 적어 줘봐.” 우진의 말에 재민은 시키는 대로 가방에서 공책끄트머리를 찢어 전화번호를 적었다. 자신의 번호를 그대로 적어야 하는지, 가짜번호를 적어야하는지 수십 번의 번뇌가 찾아왔다. ‘에잇, 어떻게 확인하겠어.’ 재민은 일부러 가짜번호를 적었다. 괜히 나중에 자신을 불러내 또 삥을 뜯을 것 같아서였다. 한시라도 빨리 해코지를 당하기전에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래. 형이 돈 갚을 때 연락할게.” “네. 안녕히 계세요.” 안 갚아도 되니 제발 다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싶은 재민은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우진은 소각장을 나와 교정을 걸었다. “햐, 추억이 새록새록 하네.” 5년밖에 흐르지 않았다지만 그에겐 20년 만에 와보는 학교였다. “그럼 내 나이가 24살인가? 어머니 아버지도 50이 넘으셨겠네.” 가족들을 생각하자 다시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참고 견딘 것은 언젠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리라는 간절함 덕이었다. “수아도 많이 컸으려나?” 늦둥이 동생 수아가 2살이었으니 어느덧 7살이나 되었을 터였다. 가족들을 생각하자 우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학교를 나와 인도를 걷자 마주치는 사람마다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진의 차림이 말이 아니었다. 차원 이동의 여파 때문인지 걸치고 있던 장비는 모조리 증발해버렸고 옷도 꼬질꼬질한 무명옷이었다. 신발도 가죽신을 신고 있어 사람들의 눈에 충분히 이상해보일 만했다. “거참.” 괜히 민망했으나 그렇다고 기가 죽을 우진은 아니었다. 옷차림 따위로 괜히 고개를 숙일 정도의 멘탈은 진즉에 초월한 우진이었다. 쪽팔려봐야 어차피 집에 갈 때 까지만 이다. 우진은 애써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무시하며 지하철역을 찾았다. “응? 웬 군부대야? 사고 났나?” 지하철 입구에 군인들이 몰려있었다. 무슨 훈련이라도 하는지 아예 초소까지 치고 근무를 서고 있었다. “허참. 뭐지?” 우진은 마침 지나가는 행인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요. 말씀 좀 물을게요.” “아, 안 믿어요.” 마흔쯤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신경질적으로 답하며 벌레라도 본 듯이 발걸음을 빨리해 총총 사라졌다. 뭐지? 기분이 묘한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둘이 지나가기에 얼른 그들을 붙잡았다. “저기요.” “아, 놓으세요. 저 도 같은 거 몰라요.” 신경질적인 반응에 우진이 울컥했으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도 믿으란 게 아니라. 저기 군인들 뭐에요? 훈련 있어요?” 우진의 물음에 여학생들이 마치 신기한 생물이라도 보듯 우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군인들이 던전 입구 지키는 거야 당연하죠. 아, 놔요. 저 학원가야 되요.” 여학생이 우진의 팔을 뿌리치고 불결한 듯 팔을 쓰다듬으며 멀어져갔다. “하, 싸가지들.” 그나저나 요즘은 지하철을 던전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5년의 세월이 짧다고 느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요즘 애들 유행어인가.” 자신이 학교 다닐 때도 한창 그랬으니까, 뭐. 줄임말이나 은어는 인터넷이 발달하며 그 변형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으니 5년이나 옛날사람인 우진이 모를 만도 했다. “어? 저긴 군인들 없네.” 우진은 횡단보도 건너의 지하철입구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길을 건넜다. 지하철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니 감옥과 같은 쇠창살의 철문이 쳐져있었다. “뭐야, 왜 막아놓은 거야?” 어쩐지 오가는 사람들이 없다했더니 아예 폐쇄해놓아 그런 모양이었다. 우진이 쇠창살 너머를 보니 지하철 통로의 불빛은 밝았다. 철문엔 단단한 자물쇠가 잠겨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치 아파트경비실 같은 작은 부스가 있어 안을 살폈다. 열쇠꾸러미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곤 가져와 자물쇠를 열어보았다. 철컥. “뭐야? 철도파업이라도 한 건가?” 우진은 열쇠 꾸러미를 부스에 가져다 놓고는 철문너머로 향했다. 깜빡이는 형광등아래 보이는 통로는 사람하나 없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양쪽으로 늘어선 지하상가도 한참 전에야 장사를 접은 듯 해보였다. “파업이 아니라 아예 역을 폐쇄했나보네.” 역이 폐쇄되었다면 지하철이 운영할리가 없었다. 문을 막아놓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우진이 막 발길을 돌려 나가려 할 때였다. <과천역 1번 출구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허, 뭐지?” ──────────────────────────────────── 3화- 레벨 업! “하, 그 던전이 진짜 던전인거야?” 은어인지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머리가 지끈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우진이 한숨을 쉬며 눈앞에 보이는 메시지들을 훑었다. <이미 공략된 던전입니다. 기본 몬스터들이 소환됩니다.> 충분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우진은 당황은커녕 오히려 익숙한 기분마저 느꼈다. “아르펜행성하고 너무 비슷한데?” 우진이 지난 20년간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였던 그곳. 아르펜 행성은 다름 아닌 게임세상이었다. 아니, 게임설정의 새로운 세상이라고 해야 하나? “지구가 변했단 거야? 아니면 내 눈에만 이런 거야.” 우진은 고민해봤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지하철을 타려했을 뿐인데 던전으로 들어왔다. 꼴을 보아하니 지구도 5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나가자.” 지하철이 안 되면 버스를 타고 가면 될 일이다. 발길을 돌렸을 때 우진의 앞을 가로막는 투명한 결계가 있었다. <귀환석이 없습니다.> “허, 거참.” 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귀환석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니 곤란했다. “괜히 잠겨있었던 게 아니네.” 괜한 궁금증에 한번 열어봤다가 아니면 다시 돌아나가려 했건만 이제는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별수 없이 귀환석이란 것을 찾아야 탈출할 수 있을 듯싶었다. “어디 보자.” 마법을 잃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단련된 몸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20년 동안 살아남은 그의 생존경험도 있었다. 망해버린 가게를 뒤져보다 옷걸이 봉을 발견했다. 끼리릭. 간단히 돌려 옷걸이 봉을 꺼내 간단한 곤봉을 만들었지만 아쉬웠다. “너무 가벼운데.” 옆의 상가를 둘러보다보니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가운데 장도리가 있었다. 부웅, 붕. “쓸 만하네.” 우진은 장도리를 챙겨 쥐고는 의자를 하나 들고는 바닥에 내리쳤다. 부서진 의자의 등받이를 뜯어내 대충 다듬자 몇 번 정도는 쓸 만한 방패가 만들어졌다. “가볼까?” 귀환석이 어떻게 생긴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기본 몬스터들이 소환되었다고 했다. 이정도 대비로 될까 싶어 불안했지만 어차피 뒤로 도망 칠 수도 없는 상황.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깜빡이는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걷던 우진은 지하철 화장실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 한 끈적끈적한 느낌. 슬쩍 몸을 숙여 부서진 타일조각을 주워 던졌다. 채앵. 유리문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에 그것이 반응했다. “쿠르.” 괴상한 괴성을 흘리는 그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인가 싶을 정도의 괴상한 생김새였다. 강아지처럼 생겼는데 토끼처럼 큰 귀를 가지고 있었다. 지구엔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지만 우진은 너무 잘 알고 있는 몬스터였다. 아르펜 행성에선 수없이 마주쳤던 몬스터. “드레빗.” “크와.” 드레빗은 두 쌍의 송곳니를 위협적으로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몸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뒷다리를 이용한 점프 돌격은 드레빗의 장기이자 유일한 공격수단이었다. 쾅. 방패를 들어 막자마자 장도리를 휘둘렀다. “꾸룩.” 머리통을 가격하자 드레빗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 드래빗의 목줄을 누르고는 장도리의 끝을 이용해 찔렀다. 익숙한 몬스터의 등장에 그리 위협적이지 못한 놈이라 하더라도 방심은 금물. 죽일 수 있을 때 확실히 죽이는 것. 몬스터를 상대로 생존에 필요한 기본이자 필수 덕목이었다. 바람 빠지는 듯 한 신음을 흘리며 드레빗의 몸이 축 처지자 우진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드레빗은 항상 암수가 함께 다니는 특징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드레빗 하나가 뛰어올라 무시한 아가리를 벌린 채 날아오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로 만든 방패는 이미 이전의 공격을 막으며 박살이 난 상태. 우진은 장도리를 들고 그대로 내뻗었다. 콰직! “뀌엑.” 장도리는 정확히 드레빗의 아가리를 관통해 뒤통수에 삐죽이 튀어나와 버렸다. 정확힌 타이밍에 정교한 찌르기로 내지른 한수가 카운터가 되었다. “어째 익숙한데?” 우진은 처음으로 아르펜행성에 소환되었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무서웠는지.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라 할만 했다. “아르펜행성의 몬스터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지? 이 던전이라는 곳도 찜찜한데.”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했다.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부터 시작해서 몬스터의 출현까지, 아르펜행성이었다면 이상할 것이 하등 없었겠으나 이곳은 지구. 지구의 지하철역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러다 레벨 업이라도 하겠네.” 우진이 아르펜행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곳은 게임세상과 같았다. 아니, 게임에 익숙한 지구인인 우진이기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세계에 법칙일지도 모르나 우진에겐 어쨌든 게임처럼 느껴졌다. 차이가 있다면 가상의 세계가 아닌 실체였다는 것이지. 레벨이 존재했고 우진은 만렙의 네크로맨서로 성장했다. 여정의 끝을 보진 않았으나 차원의 관리자를 만나 미련 없이 지구로 귀환했다. 그때 이룩했던 모든 마법을 잃었지만 상관없었다. 더 이상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지구에서는 필요치 않은 능력이라 생각했으니까. 헌데 어떻게 된 일인지 던전이라는곳에 들어온 지금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드레빗 정도라면 당황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 그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있다면 위험할지도 몰랐다. 더 강한 몬스터를 만나기전에 귀환석을 얻어 던전을 탈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상황. “아르펜과 비슷하다면 귀환석이란 것도 몬스터가 가지고 있거나 뭔가 특유의 기운을 풍길 텐데.” 능력을 가진 돌이나 물건은 그 자체로 기운을 풍긴다. 마치 살기를 내뿜는 몬스터의 기척처럼 말이다. 우진은 깨진 타일조각을 쥐곤 날카로운 부분으로 드레빗의 가죽을 찢어 안을 헤집어보았다. 두 마리 모두 살펴보았으나 몬스터들이 품는 특유의 마나석인 혈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치 없는 놈들이네.” 우진은 헤집어진 드레빗의 시체를 놔두고 한쪽 기둥에 슬쩍 숨었다. 피 냄새를 맡고 근처의 몬스터가 와도 좋았고 아니더라도 잠깐 추스르고 다시 탐색을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퀴릭?” 드레빗 두 마리가 나타나 죽은 드레빗의 시체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생긴 것은 개처럼 생겼어도 후각은 그리 발전하지 않은 드레빗은 청력으로 사물의 위치를 파악했다. 빠직. 일부러 크게 내딛은 발에 깨진 타일조각들이 밟히며 우진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퀴이!” 드레빗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어 훌쩍 점프에 우진을 향해 날았다. 우진이 장도리를 쥐고 야구스윙을 하듯 후려쳤다. 퍼억, 퍽! 시간차를 두고 날아드는 드레빗의 머리통을 연달아 깨부쉈다. 그와 함께 눈앞에 그 메시지가 나타났다. <레벨 업!> ──────────────────────────────────── 4화 - 레벨 업! (2) “허, 진짜야?” 우진은 황당함에 얼른 상태창부터 열어보았다. 레벨 : 1 이름 : 강우진 클래스 : 네크로맨서(전승) 등급 : 미배치 업적 : 4 마력 : 0/0 기력 : 0/0 <스탯> 근력 : 15 민첩 : 13 체력 : 17 지능 : 15 마력 : 0 기력 : 0 회복 : 0 치유 0 지배 : 0 미분배 포인트 : 99 <스킬> 조합상자 소환(lv 1)(전승스킬)(분배 불가능) 업적상점 이용(lv 1)(전승스킬)(분배 불가능) 미분배 포인트 : 99 처음 아르펜행성에 소환되었을 때와는 영 딴판인 상태창을 보곤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 사라진 게 아니었어.” 지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동안 아르펜 행성에서 이룩했던 모든 힘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전승. 말 그대로 만렙의 캐릭터가 1레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여러 가지 혜택을 받으면서 말이다. 척 보기에는 전승스킬 2가지가 생겼고 스탯과 스킬 포인트가 전승 전 레벨만큼 주어진 것 같았다. “클래스는 똑같이 네크로맨서라.” 네크로맨서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다. 궁극이라고 불리는 언데드들까지도 지배하에 부려봤었다. 나쁠 게 없었다. 서울이 이상하게 변해버린 것 같은 지금.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힘이 생겨 나쁠 일은 없었다. 먼 미래를 볼 것도 없이 당장 던전을 안전하게 탈출하자면 힘이 필요했다. 우진은 레벨업을 겪자마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여유가 생겼다. 상실했던 힘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니 위협에 대처할 심리적 피로가 상당히 낮춰진 기분이었다. 괜히 피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몰려올까싶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망가진 상점이 늘어선 통로로 들어오자 우진은 본격적으로 새로 생긴 전승스킬을 살펴보았다. <조합상자> 여러 가지 재료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물건을 얻어낼 수 있다. 혹은 물건을 넣어 핵심적인 재료를 추출해낼 수도 있다. “어떻게 사용하지?” 한 번도 본적이 없던 스킬인지라 어떻게 사용하는가싶어 시동어도 내뱉고 여기저기 찾아봤으나 결국 인벤토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인벤토리의 하단에 조합상자가 놓여있었다. 건드려보니 또 다른 인벤토리가 열리듯이 열렸고 아래에 [조합], [추출]의 두 가지 버튼이 있었다. “쳇, 인벤토리도 확장하기 전으로 돌아갔네.” 인벤토리는 겨우 3칸의 공간뿐이었다. 레벨이 오르면서 확장하면 더 늘어나지만 아무런 전승특전이 없는듯해 아쉬웠다. 물론 굉장히 아쉬운 것은 그동안 모은 아이템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우진은 또 다른 전승스킬 업적상점을 건드렸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니 업적상점은 시동어로 활성화가 가능했다. 몇 번 불러내는 걸 반복하자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불러오는 것이 가능했다. 상점은 스킬북과 장비, 소모성 아이템들이 쭈욱 나열되어 있었다. 구입에 필요한 대금은 업적 포인트. “재밌네.” 아르펜행성에서는 업적상점 따위는 없었다. 이건 마치 인터넷쇼핑을 아무런 장소의 구애도 받지 않고 하는 것과 같아보였다. “살 수 있는 게 없네.” 장비라고 해봐야 어차피 살 수 있는 것들은 조잡한 것들 뿐. 지금 당장 크게 써먹을 것이라곤 스킬인데 가장 하위의 스킬들도 10의 업적 포인트를 필요로 했다. 우진이 고르고 고른 스킬은 세 가지. [탐색], [감지], [해골병사 소환] 모두 업적 포인트 10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탐색은 주위에 가치 있는 물건들을 찾도록 도와주는 스킬로 귀환석을 찾아야하는 지금 필요한 스킬이었다. 감지는 위험을 사전에 보다 명확히 알려주는 패시브 스킬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필수스킬이고, 해골병사 소환은 네크로맨서의 기본스킬 중 하나였다. 전승의 영향덕분인지 이미 클래스가 정해져버린 탓에 스킬을 익히는데 제약이 생겨버렸다. 공통의 마법스킬이나 무력스킬은 익힐 수 있지만 클래스스킬은 오직 네크로맨서의 것만 익힐 수 있었다. “뭐, 지금 고민해봐야 어차피 포인트도 모자라네.” 지금 쌓인 4의 포인트를 보자면 방법은 명확했다. 드레빗 하나에 1의 포인트. 6마리의 드레빗을 더 해치우면 스킬 하나를 구할 수 있다. 당장 몬스터를 안전하게 잡자면 전투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스킬이 아니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스탯> 근력 : 30 민첩 : 30 체력 : 30 지능 : 30 마력 : 10 기력 : 0 회복 : 10 치유 : 10 지배 : 9 미분배 포인트 : 0 우진은 분배가 완료된 스탯창을 보며 장도리를 휘둘러보았다. 부웅, 붕.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파공성이 났다. 슬쩍 몸을 움직여보니 아까보다 몸이 가벼웠고 그것들이 적용된 반응속도는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보통의 인간들이 10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우진은 보통의 성인 남성보다 3배 더 강력한 근력을 가졌고 3배 더 빠르며 3배 더 체력이 좋았다. “3배 더 똑똑한 건 모르겠고.” 확실히 기억력이라던가, 암산능력이 좋아진 듯 뇌의 회전이 빨라진 기분이었지만 당장 체감되는 것은 신체적 움직임이 컸다. “자, 가보자고.” 드레빗 6마리를 해치운다. 탐색 스킬을 구한다. 귀환석을 찾는다. 그리고 던전을 탈출한다. 장도리를 든 우진이 다시금 아래를 향해 움직였다. * “하, 더럽게 많네.” 드레빗은 아르펜 행성에선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몬스터다. 그만큼 마주치기 쉽고 해치우기도 쉽다. 하지만 그것도 연속해서 좁은 통로에서 계속 마주치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계단을 통해 내려가자마자 맞닥뜨린 드레빗들을 차례로 해치우며 착실히 업적 포인트를 모았다. 어둑한 통로를 지나며 해치운 드레빗만 27마리. 업적 포인트를 이용해 필수로 필요한 탐색과 감지 스킬을 구입했다. 구입과 동시에 인벤토리에 생겨나는 스킬북을 그대로 익혔다. 한번 시전에 마력 1포인트를 소모하는 탐색 스킬을 시전해 보았지만 주변에 귀환석이라 불릴만한 아이템이 보이지는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실행해보았지만 귀환석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남은 장소는 오직 한곳. “저길 내려가야 하나?” 우진은 계단 난간에 숨어 슬쩍 아래를 보았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지하철이 정차해있는 역사 안. 한눈에 보기에도 20마리는 넘어 보이는 드레빗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좁은 통로에서 서너 마리 정도야 동시에 상대 가능하지만 저렇게 넓은 곳에서 20마리가 넘는 드레빗에게 포위된다면 다칠 것이 뻔했다. “후, 역시 혼자 움직이는 건 성격에 안 맞아.” 우진은 드레빗의 피로 얼룩덜룩해진 장도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업적 상점을 활성화한 우진은 남은 포인트로 [해골병사소환]스킬북을 구입했다. ──────────────────────────────────── 5화 - 폐쇄 던전 <해골 병사 소환> 몬스터의 시체를 재물삼아 [힘 5 민첩 8 체력 5]의 해골병사를 소환한다. 소모마력 : 1, 필요지배력 : 1 우진은 추가로 27마리의 드레빗을 잡으며 두 번의 레벨업으로 3렙이 되었다. 레벨업마다 5개씩 오른 스탯포인트 10을 나눠서 마력과 지배에 투자했다. 마력 : 15 지배 : 14 15마리의 해골병사를 소환할 수 있고 그중에 14마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배력 수치를 벗어난 소환수는 통제력을 잃고 그저 몬스터가 되어버리고 만다. “일어나라. 똘마니들아.” 우진은 궁극에 이른 네크로맨서. 전승되어 쪼렙부터 시작한다지만 이미 왔던 길을 다시 걷는 격. 주문이나 시동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익숙하고 숙달된 마법은 의지만으로도 발현이 가능했다. “쿠르르.” 근처에 있던 드레빗의 시체 셋이 터지며 해골병사 셋이 소환되었다. 워낙에 약한 놈들이다 보니 후반에는 거의 쓰지도 않았던 놈들이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가자.” 아직 후방 지원마법은 없지만 드레빗 정도라면 상관없었다. 우진과 해골병사 셋이 계단을 내려가자 드레빗들이 반응하고 달려들었다. “돌격!” “키에엑!” 해골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뼈칼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퍼억! “키엑.” 드레빗의 위협적인 박치기에 해골병사 하나가 한방에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다른 놈들은 운 좋게 팔과 어깨가 깨물렸다. 뼈 뿐인 해골병사들에게 이빨 공격이야 위협적일 것도 없었다. 빈약한 힘에 의한 공격력도 별 볼일 없어 그들이 휘두르는 무딘 뼈칼은 드레빗에게 별 효용이 없었다. 하지만 드레빗의 위협적인 첫 돌격을 막아낸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할일을 다했다. 퍼억, 퍽! 우진이 휘두르는 장도리에 드레빗들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순식간에 세 마리의 드레빗을 죽여 버린 우진이 그들을 매개로 해골병사 셋을 추가로 소환했다. “키키킥.” 하나가 부서졌지만 오히려 수가 많아진 다섯 마리의 해골병사들이 우진의 앞을 믿음직스럽게 막아섰다. 우진은 의지로서 그들을 조종하며 앞으로 나섰다. “퀴엑!” 부서진 지하철의 창문들 사이로 드레빗들이 우글거리며 달려 나왔다. 그 수가 엄청나 우진이 순간적으로 멈칫할 정도였다. “막아!” 다섯 마리의 해골병사들이 방벽을 쌓듯 일렬로 늘어섰다. 퍼퍼퍽! 부나방처럼 뛰어든 드레빗들이 해골병사들의 사지를 향해 박치기를 날렸다. 퍼석! 가운데 있던 해골병사가 쓰러지며 그 틈을 비집고 드레빗 하나가 정확히 우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우진의 장도리가 4번 타지의 스윙처럼 허공을 갈랐다. “한 놈 추가!” 저만치 튕겨져 나간 드레빗의 시체가 터지며 해골병사 하나가 더 소환되었다. 해골병사들이 버틴 가운데 한데 엉겨 붙은 드레빗들을 향해 우진의 장도리가 타작하듯 내리쳐졌다. “죽어라. 죽어!” 퍼퍼퍽! 우진은 드레빗들이 숨통이 끊어지는 족족 해골병사로 소환해버렸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우진의 마력은 15. 열다섯 번의 소환이면 마력이 동나버린다. 마력의 회복은 자연적 회복과 아이템이나 스킬을 이용한 회복이 있었다. 스탯 [회복]을 올리게 되면 마력의 자연회복력이 빨라진다. 마법사에게 지능, 마력, 회복은 굉장히 중요한 스탯이었다. 스탯 [치유]는 자연적인 신체의 회복을 의미했다. 자가 치유력과 무력스킬을 사용할때 소모되는 [기력]의 보충속도를 올려줬다. 전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스탯. 우진은 회복, 치유 모두 10의 스탯치를 가지고 있었다. 회복이야 시간당 10의 마력을 회복시켜 줄 것이고, 중요한 것은 10의 치유. 애초에 하나도 올리지 않은 기력 따위 보충하나 마나 상관없지만 10정도의 치유 수치만으로도 어디 긁히고 까진 상처쯤은 몇 분 만에 지혈이 되고 몇 시간 만에 아물어 버린다. 하루만 지나도 얕은 상처 따위는 흉터도 남지 않을 정도로 치유될 정도였다. “다 뒤져라!” 우진은 자가치유력을 믿고 장도리를 든 채 돌진했다. 부웅, 퍽! 부웅, 펄! 이미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그의 움직임에 장도리가 휘둘러질 때마다 드레빗들이 고꾸라졌다. 지하철역을 가득 채운 수십 마리의 드레빗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레벨 업!> 우진의 레벨이 4가 되며 떨어졌던 마력수치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하, 목말라 뒤지겠네.” 우진은 드레빗의 시체밭이 되어버린 역을 두리번거리다 자판기로 향했다. 이미 부서져버린 자판기의 문을 뜯어냈다. 꽈직. 괴력의 힘에 자판기의 문이 벌어지며 몇 개의 캔이 눈에 들어왔다. 우진은 콜라캔을 하나 집어 들고 바람을 후 불었다. 쌓인 먼지가 날아가며 비교적 온전한 모습인지라 먹어도 될듯했다. 딱, 치익. 캔을 열어 미지근한 콜라를 벌컥 들이켰다. “크아. 꺼으으으.” 부글거리는 가스에 트림을 시원하게 내뱉은 우진은 피식 웃었다. 던전이 되어버린 지하철 역에서 괴물들을 쓰러트렸다. 아직도 아르펜행성인 듯 착각마저 들었으나 근 20년 만에 느껴보는 탄산음료의 시원함에 지구로 귀환한 것이 실감이 났다. “이제 진짜 집에 가보자고.” 우진이 회복된 마력으로 탐색스킬을 시전 했다. “으음.” 망가진 지하철의 기관석 쪽에서 반짝이는 은은한 빛이 있어 따라가 보니 그곳에 손가락만한 보석이 놓여있었다. 은은한 녹색의 그것은 우진이 손에 쥐자 빛을 잃었다. <귀환석을 획득하였습니다.> 우진은 그것을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결계의 근처에 다다르자 손에 쥐고 있던 귀환석이 빛을 내며 흩어져 결계에 닿았다. 츠츠츳. 결계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우진이 발길을 옮겨 과천역 1번 출구의 계단을 밟았다. * “으으, 싸는 줄 알았네.” 오준환은 9급 공무원이다. 공략완료 되어 한 달 동안 폐쇄된 [과천역 1번 출구] 던전의 출입통제요원으로 발령난지 한 달. 별다른 사고 없이 파견기간 한 달을 꽉 채웠다. 이제 내일이면 본청으로 출근하는데 급히 화장실을 다녀온 준환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뭐, 뭐여?” 잠겨있던 던전의 출입구 문이 열려있었던 것이다. 아찔함에 하늘이 노래졌다. “미, 민간인이 들어갔나? 하, 시발 좆됐네.” 폐쇄된 던전에 각성자가 들어갔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과천역 1번 출구]는 특정 재료템이 떨어지는 스팟도 아니고 그저 하위몬스터인 드레빗이 출몰하는 던전이다. 초급 각성자들의 훈련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런 이득을 볼 것도 없어 찾지 않는 던전이니 각성자가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니, 애초에 각성자라면 던전출입 신청만 하면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이 이렇게 파견 나와 있지 않은가. 열려진 입구 너머를 보니 결계가 생성되어 있었다. 누군가 던전 안에 있다는 신호. “하, 시발. 빨리 구조요청 날려야겠네.” 드레빗이 각성자들에게나 하위몬스터로 분류되지 일반인에게는 괴물이다. 오준환이 재빨리 전화를 걸려는데 결계가 흐려지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어어?”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준환은 그대로 몸이 굳었고 우진은 그런 준환을 보며 마주 놀랐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 저 문을 따고 들어간 건 그냥 호기…….” “가, 각성자입니까?” 준환의 물음에 우진이 생각했다. 그가 말을 뱉기도 전에 준환이 말을 쏟았다. “후우, 10년 감수했네. 여기 출입 기록 좀 남겨주십시오. 어휴, 다행이네 다행. 근데 얻을 것도 없는 던전엔 왜 가셨습니까? 솔로플로 클리어 한 거보니 꽤 강하신분 같은데.” 우진은 그가 건네주는 던전출입기록일지에 대충 이름과 소속을 갈겨쓰고는 말을 아꼈다. ‘왜 가긴. 지하철 타고 집에 가려고 들어갔지.’ 제대로 변명할 말이 없으면 침묵이 제일이다. 상대가 알아서 변명거리를 던져주니 말이다. 사인을 마친 우진이 당당히 되물었다. “가도 됩니까?” “아, 네 가셔도 됩니다.” 우진은 몇 걸음 걷다 뒤돌아서 물었다. 5년이란 세월은 짧은 시간이 아닌 모양이다. 던전도 생기고, 각성자란 것도 생긴 것을 보니 말이다. “근데, 요즘 버스요금 얼맙니까?” “예?” 뭐지? 각성자는 거의 부자라던데. ──────────────────────────────────── 6화 - 폐쇄 던전 (2) “세상 참 많이 변했어.” 우진은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풍광을 보며 중얼거렸다. 버스 요금이 300원 오른 것보다 더 놀라운 변화는 도로의 차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버스에 달린 텔리비전에서는 어디어디 지하철역 몇 번 출구가 공략에 성공했다. 등등의 뉴스를 흘리고 있었다. ‘공략에 성공하면 던전에 따라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동안 안전. 실패하면 안의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뉴스는 5년간 세상과 단전되어있었던 우진에게 현실과의 괴리를 좁혀주었다. 해외토픽으로 도쿄의 어느 지하철역이 터져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군대를 동원해 막아냈다고 했다. ‘역세권도 옛말이군.’ 언제 공략에 실패해 몬스터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폭탄을 옆에 두고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지하철 역 근처에 사느니 차라리 원전 옆이 안전하다는 것이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서울은 지하철로 못가는 곳이 없을 정도로 지하철이 촘촘히 연결된 대도시다. 어딜 가나 몬스터로부터 안전한곳은 없었다. 서울의 인구가 확 줄어든 것은 두말할 나위 없고, 인구가 줄어드니 교통량도 확 줄었다. 나는 듯이 달려간 버스가 멈춰 섰을 때 우진은 눈앞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지, 집이…….” 우진의 집이었던 아파트가 사라져있었다. “…….” 너무 당황스러우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우진이 살던 아파트가 사라져 있었다. 본래 5층짜리 아파트였던지라 재건축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그가 사라진 5년 사이에 이렇게 으리으리한 빌딩이 들어설지는 몰랐다. <해머 길드> 집이 있던 곳엔 척 봐도 아파트가 아니라 사무실 빌딩같이 생긴 건물이 위압적으로 솟아 있었다. 근처에서 빌딩을 구경하는 우진을 정문에 서있던 경비가 수상히 여기고 다가왔다. “뭡니까?” 다짜고짜 묻는 경비병을 보며 우진은 욱하던 화를 내리눌렀다. 마음에 안든다고 바로 죽여버리고, 멋대로 그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일은 아르펜 행성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곳은 지구. 우진은 억지로 화를 내리누르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잠시 그러고있자 어느정도 화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여기 살던 사람들 어디 갔습니까?” “엥?” “여기 빌딩 짓기 전에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 “아니, 이 사람이 그걸 왜 나한테…….” 경비는 우진을 향해 눈을 치켜뜨다 깜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사람 눈이 저렇게 무서워도 된다는 말인가. “나, 나야 모르지. 빌딩 지어지기 전에 어차피 여긴 폐허였는데.” “폐허?” 우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흉흉한 기색에 경비가 식은땀을 흘렸다. 5년 전 던전쇼크때 죽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당시 지하철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로 죽었다. 한 달 동안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던전이 터진다.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때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또 부지기수였다. 갑작스런 변화에 대처하기엔 서울은 너무 거대하고 굼떴으니까. 몬스터들의 난리로 미사일이 떨어진 곳도 있었고, 난동에 엉망이 된 곳도 많았다. “모, 몬스터들 난리 때 폐허된 곳이 지천인데 왜 여기서 난리요?” 경비의 말에 우진은 속으로 분노를 다스렸다. ‘침착하자. 침착해.’ 엄한데 화풀이할 일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겨우 이성의 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괜히 지레 짐작하고 날뛰는 건 우스운 일이다. 이성적판단의 마법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후, 겨우 5년이다. 찾을 방법은 많다.’ 20년을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5년이 흘렀다. 그래, 겨우 5년이다. 구청에 가보면 이전 주소지가 남을 것이다. 등본만 떼봐도 사망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아, 나 주민등록번호도 모르는데.’ 주민등록증이야 고2때 발급받았지만 지금에야 어디있는지도 모르겠다. 주민등록번호야 그의 모교를 찾아가면 그만이다. 학생기록부만 뒤져봐도 알 수 있다. 운이 좋으면 그가 잊어버린 부모님의 핸드폰번호를 알 수도 있는 일이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수록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래, 가족들은 모두 안전하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이미 시간은 6시를 지나고 있어 학교를 찾아가기도 구청을 가기도 애매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의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내일아침을 맞이할 숙소와… 꼬르륵. 우진이 주머니를 찔러보니 5800원의 돈이 만져졌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빌딩의 길 건너 식당가가 즐비했다. 우진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 “하, 무슨 국밥이 6천원이나 해.” 우진은 투덜거리며 컵라면의 국물을 들이켰다. 200원이 없어 우진은 거지 취급을 당하며 국밥집에서 쫓겨났다. 물론 200원이 모자란 것보다는 거지같은 그의 차림이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쳇, 원조 할매 국밥은 얼어 죽을, 할매도 없더만.” 우진은 괜히 국밥집의 야박한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삼각김밥을 뜯었다. 괜히 돈이 없어 서럽긴 했지만 컵라면에 삼각김밥도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기만 했다. “아, 밤은 어디서 새지? 진짜 경찰서라도 가야하나?” 죄 지은 것도 없건만 왜 이렇게 경찰서는 가기 싫은 걸까? 나쁜 짓도 몇…, 수십 가지 하긴 했지만, 사람도 몇…, 셀 수 없이 죽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르펜행성에서의 일이다. 지구의 강우진은 그저 평범한… 하지는 않지만 겨우 고 3때 사라져 5년 만에 돌아온 아이일 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경찰서가면 또 이것저것 캐묻겠구나.” 어디에 있었느냐? 뭘 하다 왔느냐? 그동안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 어휴, 조서꾸밀 생각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경찰서로 향하는 건 최후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에휴.” 폭삭 망해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땅값도, 인구도 확 떨어진 서울이지만 여전히 우진이 몸 늬일 집은 없었다. 20년만의 편의점 방문에 신나서 핫바며 음료수며 사먹다 보니 수중의 돈도 겨우 300원이 남았다. 찜질방은 커녕 피시방도 넘볼 수 없는 잔고였다. 뭐, 이제 노숙자들이 간다는 지하철역도 어림없으니 꼼작 없이 거리를 서성이다 아침을 맞이해야할 판이었다.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낯익은 얼굴을 보며 우진은 눈을 반짝였다. 운명이다. 이건 운명이 틀림없었다. 도재민. 그가 오후에 구해줬던 학교후배가 삼각김밥을 고르고 있었다. 우진이 남은 컵라면 국물을 들이키고는 일어섰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그를 재빨리 따라갔다. “어이, 학생.” “네?” 고개를 돌려본 재민은 귀신이라도 만난 듯 해쓱한 얼굴이 되었다. 우진이 얼굴가득 미소를 띄었다. “하하,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딱 만났네.” “왜, 왜요? 저를 왜…….” 재민이 주춤 뒷걸음질 쳤다. “집에 부모님 계시니?” “그건 왜요?” 재민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우진이 별일 아니라는 듯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신용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일도 있고, 내가 긴히 드릴 말이 있어서 그래.” “저희 부모님 돌아가셨어요.” “응? 잘됐… 아니, 유감이구나. 혼자 자취하니?” 재민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라.” “왜요?” “하룻밤만 신세 좀 지자.” 재민이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거적때기를 걸친 싸움을 겁나게 잘하는 이상한 아저씨가 자신의 집으로 침입하려한다. “아, 공짜는 아니야.” 그가 자신의 손을 억지로 펴더니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300원. 이거 아까 삥 뜯은 돈 아니야? 재민이 황당하게 쳐다보자 우진이 자기가 생각해도 민망한지 씩 웃었다. “하하, 모자라는 건 내가 꼭 갚을게. 허허, 여기 웬 파리가.” 은근슬쩍 허공에 날리는 그의 주먹이 권투선수의 그것처럼, 아니 각성자의 그것처럼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를 냈다. 재민이 울상이 되어 집으로 향했다. ──────────────────────────────────── 7화 - 집으로 후회가 밀려온다. 재민은 집 문 앞 비밀번호를 누르면서도 후회했다.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겠지? 진짜 오늘 상경해서 묵을 곳이 없는 거겠지?’ 우진은 재민에게 그럴듯한 핑계를 댔다. 5년 전 던전쇼크 때 기억을 잃고 흘러흘러 지리산에 들어갔다고 했다. 지리산에서 이상한 도사를 스승으로 모시며 지냈다고 했다. 괴팍한 도사를 모시고 살다가 어느 순간 기억이 돌아와 서울로 상경해 자신이 기억을 잃었던 고등학교로 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삼류드라마에서도 요즘은 안 쓸 소재를 늘어놓는 우진을 보며 재민은 긴가민가했다. ‘사정이 그러면 경찰서를 가야지.’ 재민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경찰에 경자 소리만 나와도 허공에다가 잽을 날리며 파리를 잡았으니까. 한 대만 맞아도 재민은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죽을지도……. ‘에라. 모르겠다. 나쁜짓 할려고했으면 진즉 했겠지.’ 띠딕, 띠로리. 문이 열리며 재민을 따라 들어온 우진이 환하게 웃었다. “이야, 집 좋구나.” 집은 평범한 빌라의 원룸이었다. 서울의 땅값이 싸지며 빈집들이 늘어나며 임대료는 싸졌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전기세, 가스세같은 비용은 상승해 여전히 서민살기는 퍽퍽했다. 몬스터들이 허구언날 제반시설을 부수니 가격이 인상되는 것은 당연했다. 원룸은 꽤 넓어 침대와 책상을 두고도 꽤 큰 공간이 남았다. “하하, 하루 신세 좀 지자. 나 먼저 씻어도 되냐?” 우진은 넉살좋게 말하며 욕실로 가 거적때기를 훌렁훌렁 벗고는 샤워를 했다. ‘어흠, 허, 좋다.’ 같은 이상한 소리를 들으며 재민은 한숨을 쉬었다. “하……. 이래도 되나.” 오면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다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보였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감. 우진은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상해보이긴 했다. 어찌 우진의 페이스에 말린다 싶다가 정신차려보니 이렇게 같이 집에 와 있었다. 재민은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을 뜯어먹었다. 이것이 오늘 그의 저녁이다. 저녁을 사먹을 돈을 우진에게 삥 뜯겼기에 별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후, 시원하다. 뭐, 버리려던 옷 없냐?” “……잠시 만요.” 아주 친한 사촌 집에라도 온 듯 우진은 친근했고 재민은 불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저 기본으로 입는 흰티와 검은 반바지를 내어주었다. “팬티는 있어요?” “신세지는데 팬티까지 뺏어 입기는 좀 그렇잖아.” 우진은 넉살좋게 웃으며 노팬티에 옷을 챙겨 입고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벌컥 들이켰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재민은 이제 놀랄 힘도 없었다. “후, 저 이제 공부해야해요.” “그래그래. 난 방해 안할게. 어서 공부해. 근데 컴퓨터 좀 쓸 수 있냐?” 가지가지 하는구나. “……쓰세요.” 재민은 책상의 컴퓨터를 양보하고는 밥 먹을 때 펴는 상을 펴고는 책을 폈다. 재민이 무섭게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신에게 유일한 가족이라면 누나뿐이다. 이 원룸도,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도 모두 누나의 희생덕분이다. 지금도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을 누나에 대한 보답이라면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뿐이었다. 재민이 치열하게 공부하느라 우진은 감히 말을 걸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어후, 잘생긴 놈이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는구나.’ 우진은 컴퓨터를 켜고는 익숙한 포털사이트에 접속하곤 던전에 대해 검색했다. 지난 5년간 지구의 변화에 대해 알고자한다면 인터넷만큼 좋은 수단은 없었다. ‘어디보자. 던전쇼크. 8월 5일. 어라? 내가 소환된 게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시기상으로 공교롭게도 자신이 아르펜행성에 소환된 것과 지구의 지하철역이 던전화 된 것이 비슷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의 촉이 같은 날이라 말하고 있었다. ‘연관이 있다는 말인데.’ 던전쇼크가 일어나며 자신이 그쪽으로 소환된 것일까? 아직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저 살아남고자 발악했고 돌아오고자 열망했으니까. 어째 영 찜찜한 기분이었다. ‘각성자. 뭐야? 이것들 초능력자들이네.’ 각성자들을 검색해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이동에 발화능력, 가속, 등등 여러 가지 특기를 쓸수 있는 각성자들이 즐비했다. 각성자들은 그들이 가진 특기도 중요했지만 보다 가치있는 것은 던전에서 구한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할수 있는 자들이란 것이다. 마법아이템을 사용할수 있다는 것을 보니 이들도 마력을 지닌 존재들. 마법사라 봐도 무방했다. ‘현실에 마법사가 있다니.’ 궁극의 네크로맨서였다가 전승하여 엄청난 보너스 스탯까지 받은 우진이었지만 순수하게 놀랐다. 지하라는 특성상 던전에서 대형화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금, 각성자는 서울의 나아가 전 지구의 히어로였다. 던전은 그대로 놔두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던전은 변한다. 그 분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공략유무에 따라 달랐다. 던전 – 말그대로 공략기간의 던전이었다. 최초 생성되거나 갱신된 지하철역은 던전으로 변하며 한 달 동안의 시간을 카운트한다. 카운트가 끝나기 전에 던전을 클리어하면 광산, 실패하면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났다. 광산 – 처음 은유적 비유로 쓰였으나 이제는 거의 굳어버려 정부에서도 그렇게 불렀다. 공략된 던전은 기본몬스터만을 소환한다. 이때부터 탐사가 이루어진다. 던전 출입 시마다 소환되는 기본 몬스터들이 가치 있는 곳도 있었고, 간혹 아티팩트가 발견되는 곳 도 있었다. 이런 광산은 시간이 지나면 리셋 되는데 짧으면 며칠에서 길면 몇 달을 넘어가는 것들도 있었다. 언제 던전이 리셋 될지 모르기에 그것을 관리하는 공무원을 파견하고 있었다. 유용한 특정 아이템이나 특정몬스터가 등장하는 던전을 금광 또는 스팟이라 부르기도 했다. 던전 브레이크 – 끔찍한 일이지만 던전공략에 실패한 채로 한 달의 공략기간이 지나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말 그대로 던전이 터진다. 결계가 무너지며 내부의 몬스터들이 외부로 탈출한다. 우진이 들어갔던 [과천역 1번출구]는 광산이었다. 그것도 기본몬스터의 급이 낮아 혈석도 나오지 않고, 드레빗 자체도 딱히 쓰임새 있는 몬스터가 아닌지라 가치 없음 판정을 받은 폐광이었다. 간혹 이런 휴식기의 던전에 초보 각성자들이 수련삼아 오기도 했으나 그런 일은 드물었다. 우진은 해머길드를 검색해보았다. 자신의 집이 있었던 곳에 우람하게 세워진 빌딩의 정체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공부하다 뻐근한 목을 펴던 재민이 무심코 모니터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아저씨 해머길드 아세요?” “응? 야, 형이라 불러. 너 여기 뭐하는덴지 아냐?” “왜 몰라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3대 길드 중에 하나인데.” 재민은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해머길드, 화랑길드, KH길드. 세 곳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길드였다. “그러니까 회사란 말이야?” “어, 음. 조금 다른데 각성자들 모임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거의 회사라고 봐도 무방해요. 아니, 조금 더 큰 각성자들끼리의 조합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횡설수설하던 재민은 곧 말을 정리했다. “각성자들한테는 조합이겠고, 저 같은 일반인에게는 회사죠. 그것도 꿈의 회사. 엔간한 스펙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해요.” 대한민국 3대 길드는 재민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이자 목표였다. 직원복지도 엄청나고 연봉도 후했다. 입사하기만 하면 고생하는 누나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허, 그래?”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며 열망 가득한 음성을 내뱉는 재민의 모습이 낯설어 대충 대꾸하던 우진이 물었다. “그보다 낮에 걔들이 내일 해코지 하는 거 아니냐?” 재민은 집요한 성격의 이수혁을 떠올리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오늘이야 우진이 나타나며 얼떨결에 지나갔다지만 내일부터 학교생활이 괴로워 질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우진이 시원하게 말했다. “야, 어차피 나도 학교에 볼일 있는데 내일 같이 가자. 내가 다 해결해줄게.” “가, 같이요?” 자신만만한 우진을 보며 재민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 8화 - 집으로 (2) “허, 우진이 살아있었구나.”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라는 고3시절 담임선생님을 보며 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던전쇼크때 죽은 사람은 수없이 많았고 우진도 그중 하나라 여긴 모양이었다. 우진은 실제 20년이 넘는 시간 후에 재회하는지라 별다른 감회가 없었다. 우진은 선생님과 자신의 생활기록부를 찾아보았다. “아, 여기 전화번호가 있구나.” 띠리리. 선생님은 곧장 전화를 걸어보았다. 번호가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까? 번호가 바뀌었을까?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는 우진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보세요?] 힘없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담임선생은 그 특유의 학부모 접대톤의 목소리를 뱉었다. “네, 안녕하세요. 미도고등학교 교사 이상우입니다.” [예에? 미도 고등학교요?] 떨리는 목소리가 아스라이 파묻혀있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닮았다. 우진의 심장이 빨라지며 숨이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이수경님 맞으십니까?” [예. 맞는데 무슨 일이죠? 미도 고등학교면 우리 큰애가 다녔던데 인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우진이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발록의 채찍에 정통으로 맞았을 때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핸드폰을 뺏듯이 집어든 우진이 떨리는 음성을 뱉었다. “엄마.” […….]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얼마나 떨고 있는지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엄마. 저 우진이에요. 강우진.” 9서클의 마법주문보다 엄마라는 한마디 뱉기가 더 힘들었다. 목이 매여 겨우 눈물을 참으며 한 그 말에 수화기너머엔 말소리 대신 흐느끼는 소리만이 들렸다. [우, 우진이냐? 우리 우진이냐? 정말 우리 우진이냐?] 울부짖는 그 소리에 얼마큼의 한이 서렸는지 우진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 슬픔이 기쁨이 전해져 울컥 눈물이 흘렀다. “저 돌아왔어요.” [어어, 어응 우진아.] 이 순간을 위해 20년을 버티며 살았다. “어디로 이사간 거에요? 제가 갈게요.” [아니다. 내가 가마. 지금 당장 갈 테니 꼼짝 말고 있어라.] 우다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우진은 선생님에게 전화를 넘겨주었다. “후우.” 괜히 울음을 삼키며 긴 숨을 토해냈다. 선생님은 전화를 건네받고 어머니를 진정시키며 한참 통화를 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얼른 전화기부터 한대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두 시간 정도 걸린다는구나.” “후,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휴,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살아있어서 오히려 내가 다 고맙구나.” “학교 좀 둘러봐도 될까요?” “뭐, 그러려무나.” 우진은 가만히 앉아있자니 두 시간 내내 초조 할것 같아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후우. 재민이나 보러가야겠다.” 어머니가 오면 일단 급한 대로 돈을 받아 재민이에게 빌린 돈을 갚아야겠다. 24살이나 되어 부모님께 돈을 받는다는 게 머쓱하긴 했지만 이제 평생 효도하며 보답할 작정이다. 마침 쉬는 시간인지라 복도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아이들 틈을 비집고 걸었다. 잘 때나 입는 흰 티에 반바지를 입고 교정을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우진을 보며 학생들이 저마다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와, 대박 잘생겼어.’ ‘키도 커. 아까 들으니 우리학교 선배라던데.’ 교복 입은 학생들만 아니면 다 자신의 이상형으로 삼으려드는 여고생들은 수군거리며 저들끼리 좋다고 손뼉을 쳤다. ‘와, 촌스럽게 패션 뭐야.’ ‘시발, 겁나 띠껍네. 뭐하던 백수새끼지.’ 남자아이들은 남몰래 우진을 야렸다. 우진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재민의 반을 찾았다. 재민은 쉬는 시간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어이, 재민아.” 우진이 반갑게 다가서자 재민을 둘러싸고 있던 일진들이 깜짝 놀랐다. 수혁을 비롯해 어제 우진에게 당했던 아이들은 눈이라도 마주칠까 피하는데 다른 아이들은 우진을 야려보며 이죽거렸다. “뭐야 저 새낀?” “와나. 겁나 왕따 될거 같으니까 형이라도 불러왔냐?” 못해도 일곱 명은 넘어 보이는 그들을 보며 우진은 씩 웃었다. 불안한 얼굴의 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재민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젖는데 우진이 소리쳤다. “일진 놀이하는 새끼들 전부 옥상으로 따라와.” 우진은 난감한 얼굴로 풀죽은 재민을 데리고 먼저 앞서 옥상으로 향했다. 일진들이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 그 뒤를 따랐다. “와, 시발 패기에 지리겄소. 야, 다른 반 애들도 다 불러.” 수혁은 아이들이 나서서 옥상으로 향하자 슬쩍 함께 따라 나섰다. 뒤따르는 아이들이 스무명을 넘어가자 어제의 일은 기억에서 미화 되었다. ‘그래 방심하다 급소에 잘못 처 맞은 거야. 제 놈도 쪽수에 별거 있어?’ 수혁을 위시로 일진 스무명이 옥상의 문을 밟았다. * “하나.” 우진의 입에서 잔뜩 거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쭉 늘어선 일진들은 동시에 팔을 굽히고 상체를 바닥에 밀착시키며 푸시업 1번자세를 취했다. “둘.” “재민이 똘마니다.” 일진 스물 다섯 명이 늘어선 채 동시에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을 보고 있는 당사자 도재민은 당황한 심정을 감출길이 없었다. ‘지리산에서 뭘 배운 거야?’ 틀림없이 무술을 배웠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홀로 덩치 좋은 일진들 스물다섯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울 수 있단 말인가? 정말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벌써 푸시업을 50번은 시킨 거 같은데 쉬는 시간이 끝나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팔이 부들부들 떨릴 때쯤 우진은 그들을 한데 모았다. “자, 다 여기 와봐.” 잔뜩 상기된 얼굴의 일진들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지구였으니 망정이지 이곳이 아르펜 행성이었다면 놈들은 저렇게 서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육체는 언데드가 되어 그의 수족이 되었을 것이고 영혼은 타락하여 한줌 마력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이게 뭘로 보여?” “쇠, 쇠파이프입니다.” “그래. 어떤 새끼가 가져왔는지 참 싹수 보인다.” 우진은 자신을 패기위해 어떤 놈이 가져온 쇠파이프를 쥐고는 너무나 간단히 구부러뜨렸다. 거기서 모자랐는지 구부러진 쇠파이프를 양손으로 잡더니 서로 당겼다. 쯔쯧. 쇠파이프가 엿가락 찢어지듯 늘어서더니 어느 순간 장력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져 버렸다. 넋을 놓고 보고 있는 일진들을 보며 우진이 찢어진 쇠파이프를 바닥에 버렸다. 까앙. 우진이 옆에 있는 재민의 어깨를 둘렀다. “우리 재민이 건드리면 안 되겠지?” “안 건드립니다.” “절대 안 건드립니다.” 앞 다투어 소리치는 그들을 보며 우진이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히 왕따니 뭐니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알겠지?” “네, 넵!” “그럼 수업 들어가 봐.” 우진의 말에 일진들이 살았다는 안도감에 앞다투어 옥상을 내려갔다. 재민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우진을 보았다. “이제 저 학교 어떻게 다녀요…….” 이정도 대 사건이 학교에 소문나지 않을 리 만무했다. 울상인 그를 보며 우진이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공부할거 아녀? 앞으로 누가 괴롭히는 새끼 없으면 됐지 뭐.” 어라? 뭐지. 왜 설득력 있지. 공부만 할 건데 친구 좀 없으면 어때. 당황한 얼굴의 재민을 보며 우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참. 어머니랑 연락됐다. 빌린 돈은 조금 있다가 갚아주마.” “아, 아니에요. 형.” “그래도 그게 아니지.” 우진은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재민은 수업종이 언제 칠까 초조한 마음이었고, 어서 빨리 우진의 이야기가 끝나길 바랐다. “아, 신세는 꼭 갚으마. 낯선 사람 하룻밤 재워주는 게 어디 쉬우냐.” “하하, 아니에요. 형이 먼저 도와주셨잖아요. 오늘도 그렇고.” 당분간 학교 다니는 게 조금 쪽팔리겠지만 어쨌든 나쁘진 않았다. 일진 녀석들이 앞으로 건들 것 같지는 않았다. 치졸하고 찌질한 방법으로 괴롭히려 들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다. 휴대폰 사면 연락하마. 녀석들이 또 괴롭히면 전화해.” 우진이 주머니의 쪽지를 흔들었다. ‘하, 잃어버리지도 않았네.’ 아무렇게나 적은 가짜번호다. 괜히 찔끔하여 재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네, 형. 어머니 만나신거 축하드려요.” “하하, 오냐. 너도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좋은데 취직해라.” 수업종이 치자 재민은 이때다 싶어 꾸벅 인사하고 교실로 뛰어갔고 우진은 그저 피식 웃으며 옥상에 남았다. “날씨 참 좋다.” 자동차가 많이 줄어서 그런가. 유난히 서울하늘이 맑게만 보였다. 우진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교문 앞에 택시가 멈춰서고 급한 걸음으로 교정을 뛰어오는 여인을 보고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엄마…….” 우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교무실로 향했다. ──────────────────────────────────── 9화 - 돈을 좀 벌어야겠는데 “우진아. 우리 우진이 맞구나. 우진이 맞아.” 어머니는 우진을 붙잡고 한참이나 울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진이 5년 만에 살아 돌아왔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간 어디 있었던 게냐?” “말하자면 길어요. 그보다 다른 가족들은 어디 있어요? 집 가보니까 없어졌던데.” “수아는 유치원 가있지. 네 아빠는…….” 어머니는 말을 하다말고 또다시 울먹였다. 좋지 못한 예감에 우진은 두근거리던 심장이 싸늘히 식는 느낌이었다. “가요. 집으로 가서 이야기해요.” “그래. 그러자꾸나. 집으로 가자.” 어머니는 우진이 이대로 사라져버리기라도 할까 두 손을 꼭 쥐고 교무실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가며 담담히 말하는 어머니의 소리에 그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 퇴근 도중 던전쇼크에 휘말리셨다. 그때 당시 지하철을 이용하던 그 수만 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체조차 찾지 못한 채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홀로 수아를 보살피며 살아야 했다. 집안의 가장을 잃고 아들마저 행방불명이 되었음에도 어머니가 버틴 것은 어린 수아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그리 풍족하지 않았던 집안을 홀로 책임져야했던 어머니의 힘겨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는 던전쇼크로 똥값이 되었고, 혼란스러운 서울에서 그동안 가정주부로만 지낸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수아마저 아프자 집안의 재산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이제는 정말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정말 아둥바둥 버틴 5년이었다. “살았으니 됐다. 너는 아무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네가 그때 지하철이라도 탄줄 알았구나.” 어머니는 우진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감사한듯 싶었다. 버스는 한 시간을 달려 본래 그가 살던 집근처로 이동했다. 해머길드의 본사빌딩이 차지한 그 블럭에서 멀지않은 곳에 다닥붙은 빌라촌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너나 네 아빠가 돌아올까 싶어서 가까운 데로 이사했단다.” 던전쇼크 당시의 행방불명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어머니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5년 만에 아들이 돌아왔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꼬불한 골목길을 한참 돌아 어느 한 빌라로 향했다. 아주 작은 원룸이었는데 재민의 집보다 더 좁았다. 거기에 쌓아놓은 짐도 많아 더 비좁게만 느껴졌다. “여기 꼼작 말고 있거라. 내 유치원에 들러 수아 찾아오마.” 어머니는 우진을 원룸에 홀로 남겨두고 집을 나서셨다. 우진은 좁디좁은 방을 가득채운 상자들을 보며 궁금증에 하나를 풀어보았다. “아…” 상자엔 다름 아닌 자신의 옛 물건들이 담겨있었다. 다른 상자들을 열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자신의 옷은 물론, 아주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 까지도 들어있었다. 5년 전 아파트에 살던 그때의 짐들을 모조리 원룸에 구겨 넣었으니 집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물건들을 버리지 못한 연유를 알듯해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돌아온 수아는 말똥말똥한 얼굴로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인상이 창백해 보이지만 하얀 피부에 귀엽게만 보였다. 우진의 기억 속 2살 아기는 7살의 귀여운 꼬맹이가 되어있었다. “수아야. 오빠야. 인사해야지.” “오빠?” 수아는 어머니의 옷깃을 잡고는 경계하듯 우진을 훑어보았다. 우진은 최대한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수아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수아야. 잠깐 오빠랑 놀고 있을래? 엄마가 금방 맛있는 밥해줄게.” “응? 엄마 식당 안가도 돼?” “그럼. 오늘 하루 쉬는 날이란다.” 어머니는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점심이건만 진수성찬을 차리셨다. 고기반찬을 보며 유난히 신나 보이는 수아를 보면 평소에 자주 먹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흐뭇하게 자신을 보시는 어머니를 보며 그에 보답하듯 우진은 밥을 맛있게 먹었다. 세 공기를 비우고서야 숟가락을 멈췄다.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인간의 경계심을 낮추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되곤 한다. 수아는 금방 적응했는지 ‘오빠오빠’소리를 잘도 조잘대며 우진에게 달라붙었다. 경계심이 없다기보다는 애정에 굶주린듯해 보이는 그 모습에 우진은 짠한 마음이었다. “그럼 수아는 유치원 갔다 오면 혼자 노는 거야?” “응. 엄마 엄청 고생하셔. 나 얌전히 혼자서 잘 놀아.” 7살짜리의 대견한 말에 우진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 참. 나 말고 미미 머리 빗어 줘야지.” “아, 으응.” 우진은 수아가 건네주는 미미라는 바비인형의 머리를 손가락만한 빗으로 빗어주었다. 우진은 수아와 인형놀이를 하면서도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에게 시선이 가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5년 만에 연로해지신 기분이다.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는 전화벨소리에 전화를 받더니 급히 화장실로 가서 통화를 했다. [아니, 한창 바쁜 시간에 그렇게 가는 게 어딨어요? 당장 돌아와요.]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에요. 연차로 안 될까요?” [아니, 이 아줌마가. 쥐꼬리만한 식당에 연차가 어딨어요. 평소에도 딸래미 아프다는 핑계로 잘도 빠지면서. 짤리기 싫으면 당장 돌아와요!] 일반인에 비해 몇 배는 예민한 청각의 우진은 작게 소곤거리는 통화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대강의 사정을 파악한 우진은 가슴에 돌을 얹어 놓은 듯 묵직한 기분이었다. 화장실을 나온 어머니는 급히 설거지를 마치고는 미안한 얼굴로 우진과 수아에게 말했다. “수아야. 미안한데 오빠랑 좀 놀고 있을래?” “음, 괜찮아. 오빠랑 놀고 있을게.” 옛 기억이야 없을 텐데도 만난 지 몇 시간만에 잘도 오빠하고 따르는 수아가 귀엽기만 했다. “우진아. 미안해서 어쩌지?” 우진이 넉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그래. 금방 다녀오마.” 어머니가 나가고 수아와 둘만 남게 되자 수아가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피, 맨날 바빠. 수아는 맨날 혼자야.” 울먹이는 수아를 보며 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야. 오빠가 있잖아.” “치, 언제 봤다고 오빠래.” “허허, 진짜 오빠 맞아. 너 어릴 때 기억 안나? 내가 기저귀도 갈아주고 했는데.” “수아 이제 쉬 안 싸!” 우진은 투덜거리는 수아를 달래 놀아주었다. 저녁쯤이면 돌아올줄 알았던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우진은 손수 요리를 시작했다. 아르펜행성에서 노숙은 흔한 일이었고 요리는 우진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까 장을 봐온 식재료들이 몇 남아있었다. 우진은 간단히 계란을 곁들여 야채볶음밥을 해내고는 수아와 나눠먹었다. 어머니가 돌아온 것은 9시가 다되어서였다. “미안. 엄마가 늦었지? 밥은 어떻게 했니? 내일 우진이 너 핸드폰부터 사야겠다.” 어머니는 우진과 연락이 되지 않아 어지간히 마음 졸이며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좁은 원룸에 이부자리를 펴고 눕자 몸을 틀기도 비좁았다. 수아는 어머니에게 안겨 금세 잠들었고 어머니도 우진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네가 돌아와서 엄마는 참 좋단다.” 어머니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며 고단한 몸을 뉘이셨고 우진은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샜다. ‘이건 아니야.’ 우진은 무너진 건물에 깔리기라도 한듯 답답한 심정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부산스러운 아침을 맞이해 수아가 유치원으로 등원하고 어머니도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우진아. 구청가서 주민등록증부터 재발급 받아라. 엄마가 퇴근하면 있다가 같이 핸드폰이나 보러가자. 어디 가지 말고,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아니다. 배고프면 요 앞에 식당에 와서 먹으렴. 마트 앞에 승미식당이다.” “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우진은 모두가 출근하고 홀로 남게 되자 기분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할일이 많았다. 행방불명 신고도 취소해야하고 구청에 들러 주민등록증도 재발급 받아야했다. 고3때 소환되느라 졸업도 못했다. 검정고시도 봐야했고, 백수로 살 것도 아니니 취업도 해야 했다. ‘돈을 벌어야해.’ 바쁜 어머니도 그랬고 매일을 홀로 지내야하는 수아도 안타까웠다. 이제 이 집안의 가장은 자신이다.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한다. ‘많이 벌어야해.’ 공부를 다시해도 되고, 당장 아르바이트를 해도 된다. 우진은 빠르게, 그리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운명처럼 느껴졌다. 아니, 꼭 자신을 끌어들이는 악마의 손짓과 같았다. ‘각성자.’ 우진은 어머니가 쥐어준 꼬깃한 만원짜리 세장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진이 박스에 고이 간직해둔 자신의 옷을 꺼내 입고는 집을 나섰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행방불명신고도 취소했다. 은행에 들러 자신의 계좌를 개설하고는 핸드폰 가게에 들러 핸드폰도 하나 구매했다. “이게 요즘 가장 잘나가는 제품입니다. 고객님. 내구력이 남달라 유명한 각성자들도 많이 쓰고 있는 모델입니다.” 폰팔이의 추천으로 산 핸드폰을 쥐고 어머니의 번호를 등록해 메시지를 보냈다. ‘집 근처에 자취하는 아는 동생이 있어요.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며 검정고시라도 준비할까봐요.’ 우진의 메시지에 당장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고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느라 한참을 통화해야했다. 공부를 하기에 지금의 집의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그녀도 마지못해 허락했다. “후, 미안하긴 하지만 다음에 신세 갚지 뭐.” 재민의 집은 우진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걸어가도 될 정도였기에 큰 집을 구하기 전에 당분간 지내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우진은 꼬깃한 메모지를 펴 도재민의 번호를 입력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연결음이 울리고 곧 전화를 받았다. [네, 동진인력 박휘소입니다.] 걸걸한 목소리에 우진은 혹시 자신이 번호를 잘못 눌렀나싶어 번호를 대조해보았으나 같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전화 걸었으면 말씀을 하세요.] “재민이 아니냐?” [아닙니다.] 뚝- 짜증나는 음성과 함께 끊겨버린 전화를 보며 우진이 혀를 찼다. “하, 뭐지? 나 깐 거야?” 우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 10화 - 던전으로 우진은 멀뚱히 전화기를 보며 씩 웃었다. “잘됐네.” 일부러 가짜번호를 가르쳐 주다니……. 집도 알고 있으니 다시 만날 걱정은 없었다. 어떻게 며칠 신세질 부탁을 할까 싶었는데 조금 뻔뻔해도 될 성싶었다. 좋은 핑계를 얻었다. 우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재민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 “휴.” 도재민은 슬금슬금 자신의 눈치를 보며 피하는 아이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일진 놈들이 건드리지 않는 것은 좋은데 다른 일반학우들도 우진을 피했다. 한명만 빼고. 6인용 식탁에 홀로 앉아 급식을 먹던 그의 앞에 식판이 탁 놓였다. “야, 그 오빠가 일진애들 다 박살냈다며? 진짜냐?” 재민은 애초에 발단이 된 인물 이슬기의 물음에 한숨을 쉬었다. 슬기는 자신이 봐도 예뻤다. 하지만 공부에 열중하지 않고 연애나 하는 건 지금도 고생하고 있을 누나에 대한 배신이다. “그냥 밥이나 먹자.” “헤헤, 그 오빠 네 사촌형이라던데 진짜야?” 소문이 이상하게 난 모양이었다. 재민은 뭐라 해명하기도 전에 슬기가 배시시 웃었다. “헤헤, 잘생기기만 한줄 알았더니 빽도 있었네. 이수혁이 이제 찌질 하게 방해 안하겠네.” 슬기를 멀리하는 게 꼭 누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진인 이수혁이 슬기를 짝사랑하는 건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슬기는 그런 수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잘생긴 재민에게만 사근거리니 수혁이 재민을 곱게 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재민이 괜히 슬기에게 철벽을 친 것은 수혁의 눈치 때문도 있었다. ‘이제 눈치 볼 필요 없잖아?’ 정말 우진이 자신의 사촌형은 아니지만 그렇게 소문이 났다면 나쁠 건 없었다. 어쨌든 일진 놈들이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재민은 좋을 대로 생각했다. 눈치 볼 필요 없다. “너도 나 좋아하지?” 슬기의 돌직구에 재민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한결 같이 적극적일까? 슬기가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왜에? 나 안 예뻐?” 예쁘지. 그렇게 당당하게 본인 입으로 말하니 어이없는 거지. “에혀, 밥이나 먹자.” 연애보다는 역시 공부다. 연애는 취직하고 해도 늦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자신을 귀찮게 하는 슬기를 떨쳐내고는 재민은 학원으로 향했다. 띠리리. “어, 누나.” 학원으로 가는 하굣길엔 항상 누나 도지원에게서 전화가 오는 시간이다. [별일 없었어?] “별일은 무슨. 아참. 나 어제 이상한 형을 만났는데 우리학교 5년 선배라던데. 누나도 알아? 이름이 강우진이라던데.” 누나도 자신과 같은 미도고등학교의 선배였다. 생각해보니 누나도 5년 선배였으니 우진과는 동기였을 터였다. [어? 우진이? 던전쇼크 전에 갑자기 행방불명된 애였는데…….] 지원도 우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행방불명 때문에 전교생이 그의 존재를 알았을 뿐. 학창시절 그렇게 친했거나 한 아이는 아니었다. “어, 누나도 알고 있네. 이번 주말에 집에 오면 자세히 이야기해줄게. 그 형이 나한테 조금 도와준 게 있어서.” [그래, 재민아. 누나 쉬는 시간 끝났다. 공부 열심히 해.] 3교대의 빽빽한 공장생활을 하는 누나였다. 누나 덕에 생활비 걱정도 없이 학교도 다니고, 학원도 다니는 재민이다. 그에게 5살 많은 누나는 엄마이자 아빠였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참. 돈 주고 간다더니 그냥 갔네.” 재민은 우진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또라이 같긴 했지만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일진들을 두드려 팰때는 정말 무서웠지만, 어쨌든 자신에게는 잘 대해 줬으니 말이다. 우진이 일진들을 혼내준 것만 하여도 이미 7300원의 가치는 넘었다. 애초에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몇 번이나 꼭 갚아준다고 해놓고는 그냥 간 것을 생각하자 우스웠다. 띠딕, 띠로리. 학원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온 재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못 보던 신발이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귤을 까먹고 있는 그가 있었다. “재민이 왔냐?” “혀, 형. 저희 집 비밀번호 어떻게 안거에요?” “그때 누를 때 봤지.” “이, 이거 가택침입이에요.” “아, 전화하고 왔는데 다른 사람이 받더라.” “그, 그건.” 찔리는 게 있는 재민은 괜히 말을 더듬었다. 그땐 정말 돈 뜯기고 괜히 엄한 꼴 당할까봐 거짓번호를 준 것 이었는데……. “새끼. 누가 때리냐? 그냥 일로 와봐. 내가 물어볼게 좀 있어서 그래.” 재민이 긴장하여 뻣뻣이 앉았다. 집주인이 바뀐 듯 한 묘한 그림을 그리며 우진이 깠던 귤을 하나 입에 넣고는 물었다. “각성자 돈 많이 번다며?” “그, 그렇죠.” “보니까 길드니 협회니 뭐, 소속도 많고. 던전도 공개된 게 있고 독점 된 게 있고 하던데 좀 설명해봐.” 너무나 뜬금없는 질문인지라 재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그건 왜요?” “던전 좀 공략해보려고.” “형, 각성자였어요?” 깜짝 놀라 물은 재민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스무 명이 넘는 일진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트린 우진이었다.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그 신들린 몸놀림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바보같이 지리산에서 무술을 배우고 왔다고만 생각했다니. “돈 좀 필요해서 그래. 아는 데로 좀 말해봐.” “공개 던전이라도 일단 출입하려면 협회에 각성자 등록은 하셔야 돼요.” 본래 길드며, 각성자에 관심이 많던 재민이다. 아니, 재민뿐만 아니라 또래 남자아이들은 모두 그럴 것이다. 그의 열성적인 설명에 우진은 귤을 까먹으며 묵묵히 들었다. “그러니까 각성자 등록만하고 혼자 가서 던전 공략하는 게 제일 돈 많이 번다는 거네?” 우진의 설명에 재민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설명을 뭐로 들었다는 말인가? “정산 비율은 그렇긴 한데요. 그건 너무 위험하고, 길드에 드는 방법이 제일 좋아요. 아니면 협회나 관리국에 취직하는 것도 좋고요.” “길드는 입사시험 본다며?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 없어. 협회나 관리국은 죄다 월급제 아냐? 한 달을 어떻게 기다려.” 재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최소한 파티는 구성하셔야 되요. 던전은 진짜 위험한곳이에요. 아참, 휴대폰 사셨다고 했죠? 이 어플 꼭 받으세요.” “어플?” 스마트폰이 익숙하지 않은 우진을 대신해 재민이 어플을 다운로드 해주었다. “제가 대신 해줄게요. 어? 갤러기1이네 와, 아직도 이런거 쓰네. 가족들이 쓰던 건가 봐요?” “그, 그거 최신 폰인데?” “예에? 이거 4년도 더 지난 건데요. 설마 신규로 산거에요?” 재민의 반응에 우진은 자신이 바가지를 뒤집어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폰팔이 새끼를 그냥.’ 할 게 없어 궁극의 네크로맨서를 상대로 사기를 치다니. 아르펜 행성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 겁나 느리네. 어쨌든 이게 던전포럼이에요. 원래 지하철역 안내 어플인데 각성자 협회에서 구입해서 대대적으로 리메이크해서 지금은 던전에 관해 종합적으로 다루는 포털어플이죠.” 재민은 주절주절 아는 것을 쏟아냈다. 던전포럼은 그야말로 종합적인 어플이었다. 공략인원을 모집하는 구인부터 공략기간중의 던전을 검색하는 기능, 던전브레이크까지 얼마 남지 않은 위험 던전을 알리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알림기능도 있었다. “협회에 각성자 등록하고 각성자 아이디로 로그인하면 미공략 던전 중엔 누가 도전했고 누가 실패한 이력까지도 다 나와요.” “흐음.” 우진은 조작법을 배워 어플을 대강 만지다가 말했다. “어쨌든 이걸로 검색해보고 미공략던전에 도전하면 되는 거네?” “안전하긴 공략된 광산이 좋다니까요.” 공략된 던전인 광산은 정보가 공개된다. 제일 중요한 귀환석의 위치라던가 등장 몬스터 등을 알 수 있으니 파티를 짜기도 수월했고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문제는 최초 공략에 성공한 길드나 각성자가 그 던전에서 캐내는 물건에 대한 일정한 지분을 가진다는 것이다. 협회에 일정액의 수수료를 내고, 최초 공략자에게 또 일부 수수료를 내는 것이다. 아직 이전의 힘도 다 되찾지 못한 우진에게는 공략된 탐색기간에 놓인 던전에 출입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문제는 그런 광산은 최초의 입장에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 우진으로서는 아주 부담스러운 금액을 말이다. 미공략던전은 목숨을 거는 도전이 담보되니 모든 것이 무료였고, 광산은 그야말로 아이템이나 몬스터사체, 혈석을 캐내기만 하면 되는 금광이니 엄청난 수수료와 입장료를 받았다. “제법 돈벌이 되는 던전은 입장료만 10만원 넘는다며?” “그, 그렇죠.” 그이상하는 던전이 즐비했지만 그 이하의 던전은 없었다. 과천역 1번 출구처럼 아무런 돈도 되지 않아 폐광이 되어 공짜인 던전은 있어도 말이다. 우진은 고민했다. 미공략던전에 도전해 한탕을 노릴 것인가, 적은 수익이지만 안전하게 공략된 던전을 노릴 것인가. 고민은 되었지만 답은 정해져있었다. 무모한 도전을 하기 엔 가족들이 눈에 밟혔다.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목숨 걸고 미공략던전을 클리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께 다시 돌아가 입장료를 달랠 수도 없고……. “돈 좀 빌리자.” “…….” 당당한 우진의 말에 재민은 벗어날 수 없는 덧에 걸린 기분이었다. ──────────────────────────────────── 11화 - 각성자 등록 우진은 버스에서 내리며 폰을 꺼내 지도어플을 실행했다. 로딩중을 나타내는 동그란 막대가 무한대로 도는것을 보며 폰팔이놈을 어떻게 처단할까 고민했다. 30초가 지나서야 지도가 떴고 우진은 네비게이션 기능을 이용해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를 탐색하는 1분 동안 또 한참이나 기다려 안내를 시작했다. [각성자 관리국] 우진은 각성자 등록을 하기 위해 관리국을 찾았다. 접수처에서 우진은 간단한 신상명세와 능력을 적었다. 접수번호를 받고 잠깐 기다려 검사장으로 향했다. 검사장에는 곳곳에 카메라가 달려있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관리국의 각성자 두 명과 검사결과 작성을 위해 공무원 하나가 앉아있었다. 관리국으로 복귀한 공무원 오준환은 강우진의 파일을 살폈다. “소환능력이시네요? 시연해보시겠어요?” 지극히 사무적인 그의 물음에 우진이 되물었다. “여기 서요?” 우진이 멀뚱이 있자 준환은 모니터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 구면인가?’ 불과 사흘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그때 우진의 차림새와 지금의 차림새는 큰 차이가 있어 오준환은 알아보질 못했다. “매개가 필요한데요.” “아, 대가형 소환능력이군요. 어떤 매개죠?” “시체하나 주시죠.” “네?” 준환은 물론 관리국의 각성자들도 일순 당황했다. 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사람 시체 말고요. 몬스터나 뭐, 죽은 동물도 됩니다. 뼈있는 놈으로요. 아, 물론 사람도 되고요.” “아, 알겠습니다.” 준환이 당황하면서도 지원부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지원부에서 실험용으로 쓰이다 죽은 토끼의 사체를 가져왔다. 검증실의 중앙에 놓인 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파팍! 토끼의 사체가 폭발하며 스켈레톤 병사 하나가 불쑥 솟아났다. “키키킥.” 스켈레톤 병사가 내는 기괴한 소리에 준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별의 별 희한한 각성자들을 많이 보지만 이런 장면은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9급이라 짬이 얼마 안 되는 준환이 처음 본다 뿐이지 이런 이능을 가진 각성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네, 네크로맨서시군요.” 각성자는 이능에 따라 마법사니, 전사니, 성기사니 여러 가지 별칭으로 불렸다. 언데드를 조종하는 네크로맨서도 물론 있었다. 개중에 유명한 이들도 몇 있었고 말이다. “보시다시피.” “소환계열 이능은 소환수의 전투력으로 각성등급이 매겨집니다. 저걸 한번 공격해보시겠어요?” 실험실의 중앙에 생겨난 홀로그램을 보며 우진은 새삼스런 눈으로 검증장을 살폈다. 반구형의 검증장은 여기저기 장치가 달려있어 홀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상전투라 생각해주세요. 소환수의 움직임을 보는 겁니다.” 홀로그램은 작은 몸집의 코볼트였다. 드레빗 만큼이나 흔한 몬스터지만 좀 더 집단적으로 출몰하고 무리행동을 하는 습성때문에 사냥이 까다로운 놈이었다. “키킥.” 우진의 의지에 따라 스켈레톤 병사가 코볼트를 상대했다. 실체가 없는 홀로그램인지라 휘두르는 뼈칼이 그대로 통과했지만 여기저기 빼곡히 달린 기계장치들이 그 움직임을 그대로 측정하고 있었다. 5분정도가 지났을 때 준환은 멈추도록 지시했다. “다른 이능이나 능력이 있습니까?” “뭐, 딱히 별다른 건 없어요.” 아직은. “흠, 잠시 만요. 저 따라 오시겠어요?” 준환은 휴게실로 안내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곤 한시간만에 나타나 검은색 카드를 주었다. 고급 신용카드 같은 재질이었는데 주민등록증처럼 우진의 사진이 박혀있었다. “각성자 등록증이에요. 신분증 겸, 직불카드로 쓰실 수도 있습니다.” 카드에는 우진의 간단한 신상명세와 F 등급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F 등급 낮은 겁니까?” “음. 높다곤 할 수 없죠. 아니, 제일 낮죠. 소환수의 전투능력이 생각보다 약해서….” 당연하지. 포인트도 투자하지 않아 1레벨인 스켈레톤 병사들이다. 성인의 반밖에 되지 않는 힘밖에 낼수 없었다. “음, 뭐 등급 낮으면 던전입장에 제한 있고 그럽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파티 꾸리실 때 등급 따라 배분에서 좀 밀리긴 하죠.” 문제없었다. 어차피 파티가 아니라 혼자 던전을 이용할 생각이니 말이다. 우진은 굳이 맨손으로 철도 끊을 수 있다느니, 소환수를 14개채를 동시에 소환할 수 있다느니 떠벌리지 않았다. “저, 그런데 저희 어디서 봤던가요?” 오준환의 물음에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옛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해내려 애쓰진 않았다. 아니, 그럴 가치를 못 느꼈다. “처음인데요. 그럼 수고하세요.” 우진이 그대로 관리국을 나서버리자 준환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어디서 본 것 같았는데…….” 괜히 뭔가 찜찜한 기분. 준환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찜찜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 그때 그 놈이구나. 과천역 1번 출구.” 파견 업무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준환은 상사로부터 신나게 혼이 났다. 던전출입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준환이 서랍더미를 뒤져 과천역 1번 출구 출입기록일지를 꺼내들었다. [이름 : 강우진, 소속 : 지구별, 각성자번호 : 12345] 장난스레 적힌 기록지를 보자 준환은 다시금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위급도 아니고 겨우 F급이었어? 그것도 오늘 등록한 신삥이네. 아놔.” 준환은 겨우 이런 놈 때문에 상사한테 그렇게 혼이 나야했나 싶어 한동안 씨근덕거렸다. “어? 근데 F급이 어떻게 혼자 클리어했지?” 과천역 1번출구가 혈석도 나오지 않는 드레빗 뿐이지만 결코 F급 혼자 클리어 할만한 던전은 아니었다. “거참.” 준환이 고개를 갸웃하며 파일을 그대로 책상에 던져두었다. 어차피 다시 볼일도 없는 사람. 알게 뭐란 말인가. * 관리국을 나온 우진은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던전포럼을 실행시켰다. 한참이나 걸리는 로딩화면에 짜증이 폭발하기 전 어플이 실행되었다. 재민에게 배운 대로 검색옵션에 입장료를 10만원에 체크하고 소환 몬스터의 등급을 2성 아래로 설정했다. “여기가 제일 가깝네.” 우진은 [신림역 7번 출구 던전]까지 가는 버스 노선을 검색하고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이야, 이거 어플이란게 정말 편하네.” 5년 동안 지하철대신 던전만 생긴 게 아니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스마트폰이 이제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었다. 실생활에 편리한 어플들도 넘쳐났고 말이다. 신림역이 가까워질수록 건물들의 높이가 낮아지며 황량해졌다. 역세권이라며 빌딩들로 번화한 거리는 없었다. 사거리는 드문드문 공터도 있었고 넓은 주차장도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한번 일어났던 모양이네.” 그게 아니라면 멀쩡한 빌등들이 철거되고 저런 공터가 남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1번 출구 방향은 아예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목적지인 7번 출구 앞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우진은 맛집 블로그를 보고 찾아오는 네티즌 마냥 몰려온 사람들의 긴 줄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생각 못했네.” 낮은 금액의 입장료와 2성 이하의 몬스터들만 소환되어 위험부담이 적지만 돈벌이는 되는 광산은 경쟁이 치열했다. 우진은 하는 수없이 줄을 섰다. 삼삼오오 짝지어 수다 삼매경에 빠진 것을 보니 모두 함께 일하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앞줄에 서있던 날렵한 인상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 12화 - 각성자 등록 (2) “형씨 보아하니 혼자 같은데 우리파티에 끼지 그러나? 마침 딱 7명 모았는데 한명이 비어.” “아, 괜찮아요. 전 혼자서 입장할겁니다.” 우진의 거절에 남자가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굳이 왜 입장료 아깝게 혼자 입장하나. 어차피 제한시간까지 혈석 캐는데도 한계가 있는데.” 어리둥절한 우진의 표정을 보곤 남자가 껄껄 웃었다. “광부 된지 얼마 안됐나 보구만.” 각성자를 부르는 은어가 있었다. 미공략 던전을 위주로 전문으로 도전하는 이들을 레인저, 공략된 안전한 던전에서 혈석 캐기를 주로 하는 이들을 광부,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난 지하철역에 출동하여 군인들과 함께 몬스터를 처리하는 이들을 가디언이라 불렀다. 주로 하는 일에 대해 그렇게 부를 뿐 직업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라 레인저가 광부가 되기도 하고 광부가 가디언이 되기도 했다. 남자는 우진이 초짜라 생각했는지 대략 광부들의 룰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던전은 입장 인원에 제한이 있었다. 레인저들이 던전을 공략할 때 그 인원수대로 팀을 꾸려 도전한다. 이들을 공격대라고 불렀는데 대한민국 3대 길드가 유명한 것은 유능한 공격대를 보유하고 있어서였다. 광부들도 마찬가지다. 입장인원수만큼 한 번에 던전에 입장한다. 공격대가 최상의 전력을 위해 최대인원이 입장한다면, 광부들은 효율 때문이다. 입장료 또한 최대인원수에 맞춰 계산되어진다. 신림역 7번 출구 던전의 최대 입장 수는 8명. “그러니까 혼자 이용하려면 8명분 80만원을 내야 한다구요?” “그렇지. 그것도 시간당 요금이지.” 던전의 기본 소환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위험한 것은 매 한가지. 정보가 이미 공개되어 덜하다 뿐이지 광부 또한 목숨을 거는 것은 똑같았다. 귀환석은 대부분 던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어진다. 혼자서 한 시간 안에 클리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시간 오버라도 되면 괜히 입장료를 두 배로 물어야 하는 것이다. ‘혼자서 두 시간 이용하자면 입장료만 160만원.’ 그 안에 몬스터를 모조리 때려잡고 혈석을 혼자서 차지하자면 돈벌이야 쏠쏠하겠지만 그 정도 능력이 되는 각성자면 돈이 더 되는 상위의 던전을 가지 겨우 별 두개짜리인 2성 던전을 찾을 리가 있겠는가. “등급이 어떻게 되나?” “F급인데요.” “쯧쯧, 멋모르고 무작정 찾아온듯한데 자넨 운이 좋아. 배운다 생각하고 우리 파티에 끼게. 안전이야 보장해주지.” “흠, 그럽시다.” 안전 따위야 우진 스스로도 충분히 챙길 수 있었지만 순순히 파티에 끼어들었다. 순전히 입장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거 빨리 레벨 올려서 마음 편하게 던전이나 공략해봐야겠네.’ 제약도 많고, 수수료도 많이 떼는 광산은 우진의 성미에 맞지 않는 듯 싶었다. 아쉬운 대로 일단 오늘 하루는 체험한다 생각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하기로 하였다. 8명씩 뭉텅이로 입장한 덕에 대기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각성자들이라곤 하지만 모두 등급이 낮은 자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은지 앞선 파티들은 모두 40~50분 사이에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자신을 배도수라 소개한 남자는 E급의 능력자로 이미 동료 6명과 팀을 이루고 전문적으로 광산들을 돌아 수익을 남기는 전문 광부였다. 평소 1성의 광산을 돌다가 이번에 2성의 광산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첫 도전이니 그도 입장인원인 8명을 모두 채우고 들어가길 원했다. 6명 보다는 8명이 나았으니까. 홀로 던전을 찾은 강우진과 홍성구라는 각성자가 배도수의 팀에 합류했다. 홍성구도 우진과 마찬가지로 초짜로 F급의 각성자였다. “자, 저 빼고 다들 F급이시니 제가 2몫 나머지 분들이 1몫씩입니다. 나오는 혈석들 다 모아 시세대로 계산해 9등분해 나눌 겁니다.” 배도수의 말에 우진은 별말 없이 수긍했다. 어차피 처음 경험삼아 도전하는 광산이다. “후, 떨리네요. 그죠?” 홍성구는 본래부터 팀인 배도수 무리와 어울리기 힘든지 줄을 서는 내내 우진에게 친근히 굴었다. 우진은 적당히 대꾸하며 이것저것 대화했다. 홍성구는 F급의 초짜이지만 던전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아, 알고 있는 지식이 다양했다. 우진으로서도 그와의 대화가 꽤 유익했다. 21살인 홍성구는 겨우 두 달 전 능력을 각성해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각성자 활동을 시작했다. 두 달 동안 1성 광산을 다녔는데 제법 익숙하다 생각되어 이번에 처음으로 2성 광산에 도전하는 것이다. 돈이 목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의 각성 능력의 강화와 단련이 목적인 그였다. 꿈은 미공략 던전에 도전하는 레인저들의 팀. 공격대에 드는 것이다. “남자는 쫄려도 쪼는 척 하는 거 아니야.” “하하, 형은 자신만만하시네요.” 대기시간만 몇 시간이다 보니 그새 수다 떨다 형동생 하게 된 둘이었다. “자자, 저희도 슬슬 입장 준비 합시다.” 던전의 결계가 초록빛을 발하며 스르르 사라졌다. 앞선 팀이 나오는 모습을 보던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사고났나보네.” 경험 많은 배도수의 예상대로 앞선 팀에서 사망자가 넷 발생한 것이다. 던전관리국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과 관계자들이 달려들어 조사했다. 바로 뒤에 대기하고 있었던 탓에 우진의 귀에도 생생히 들렸다. “홉고블린이 출현했어요! 이게 말이 돼요?” 따지는 각성자를 향해 파견 공무원이 출입일지를 보여주었다. “이거 안 읽어보셨어요? 여기 사인도 하셨잖아요.” [던전내에서 생성되는 기본몬스터는 임의적이며 정보와 다를 수 있다.]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각성자 본인이 진다.] …. 팀을 잃고 살아남은 네 명의 각성자들은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으나 보상받을 길은 없었다. 광부라 하여 언제나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쯧쯧, 저렇게 따져봐야 별 수 없는데. 저분들 괜히 힘 빼시네.” 동료 시체도 그대로 두고 온 것을 보면 귀환석만 챙겨 겨우 도망친 듯 보였다. 혈석도 못 챙긴것을 보니 이번 던전에서는 손해만 입은 모습이었다. 나름 광부로서의 베테랑답게 배도수는 이런 상황을 많이 격어 봤었다. 실랑이하는 그들을 제쳐두고 배도수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홉고블린은 2성 몬스터입니다. 대처만 잘하면 상대 못할 것도 없어요. 아니, 오히려 확정적으로 혈석 드랍하는 놈이니 오히려 좋아요.” 그리 말하는 배도수도 홉고블린을 직접적으로 사냥한 적은 없지만 1성 던전은 200회가 넘는 클리어 경험을 가진 그였다. 8명의 파티원들은 던전출입기록일지에 간략히 본인들의 이름과 사인을 마치고는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자, 진입합시다.” 배도수의 파이팅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 통로에 접어들자 왔던 길에 흰 결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림역 7번 출구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이미 공략된 던전입니다. 기본몬스터들이 소환됩니다.] ──────────────────────────────────── 13화 - 신림역 7번 출구 우진은 성구에게 슬쩍 물었다. “야, 너도 이 소리 들리냐?” “예? 무슨 소리요? 바람소리?” “그래. 바람이 꽤 부네.” 나한테만 들리는군. 우진은 던전과 아르펜행성이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 포지션 잡읍시다.” 배도수의 말에 팀원 넷이 앞으로 나섰다. 넷 모두 근접 공격수들로 제법 튼튼한 방패를 앞세웠다. 그리고 그 뒤를 배도수와 다른 팀원 둘이 섰다. 배도수는 발화능력을 가진 각성자였고, 다른 한명은 활을 들고 있었다. 근접 공격수 넷에 원거리 공격수 둘의 조합이었다. “자, 두 분은 처음이시니 일단 뒤에서 포지션 잡으시고 차차 손발 맞춰 봅시다. 이 앞 코너 돌아가면 평상 고블린 넷 소환되어있습니다.” 2성 던전은 처음 도전이지만 배도수는 이미 이곳에 대해 빠삭하게 공부했는지 매뉴얼에 대해 꿰고 있었다. “킥?” 던전을 돌아가자 고블린 넷이 일행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었다. 괴물같이 생긴 난쟁이 몬스터 고블린은 짧은 곤봉 같은 것을 휘둘러댔다. 탕, 탕. 방패에 막혀 별 효과를 못 보는 사이 배도수의 발화능력이 빛을 발했다. 화르륵. 갑작스럽게 얼굴에 불이 붙자 시야를 잃은 고블린들이 우왕좌왕했다. 그사이 근접 공격수들이 가지고있던 무기들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스컥, 퍽! 쓰러진 고블린들을 무기들을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때려잡았다. 그중 한마리가 멀찍이 멀어지려는것을 화살하나가 귀신같이 날아가 머리통에 처박혔다. 쐐애액. 양궁선수가 쏘아내는 화살이 아니었다. F급이지만 각성자는 각성자. 충분히 몬스터에게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그들은 피떡이 되어 쓰러진 고블린의 머리를 갈랐고 헤집었다. 그 곁에 우진은 물론 성구도 가만히 지켜보았다. 우진이야 더 참혹한 광경도 많이 봐와서 아무렇지도 않았고, 홍성구도 1성 던전에서의 경험이 있던지라 인상을 찌푸리기만할뿐 헛구역질같은 꼴불견은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네. 혈석 두개야. 이정도 크기면 못해도 20씩은 받겠어.” 배도수의 말에 우진은 깜짝 놀랐다. 손가락보다 작은 크기의 혈석이다. 그게 하나에 20씩이나 한다니, 괜히 목숨걸고 던전에 들어오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만원이 그리 비싼것도 아니네.’ 우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담스러웠던 그 돈이 우습게 보였다. “자, 다음 코너부터 같이 해보지. 능력이 다들 뭐라 그랬었지?” “전 화염구생성이에요. 하나 던지고나면 3초는 있어야 또 던질수 있어요. 연달아 던질수있는 수가 6개고요.” “좋아. 그쪽은?” 배도수의 시선이 우진에게 닿았다. 우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블린 시체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퍼억. “키키킥.” 한마리의 스켈레톤 병사가 등장하자 깜짝 놀랐던 사람들이 다시 우진을 보았다. “허허, 소환계열이구만. 뭐, 다른 능력은?” 우진은 바닥에 고블린이 흘린 곤붕하나를 주워 허공에 대고 붕붕 휘둘렀다. “뭐, 제 몸하나 지킬정도 무력은 있죠.” 사람들이 스켈레톤 병사를 구경하기 바빴다. “네크로맨서는 또 처음보네.” “히야, 이거 신기하네.” “탐색이나 정찰용으로 괜찮겠는데요?” 저마다의 감상평이 난무하는 가운데 배도수가 포지션을 정리했다. “기존 포지션에서 우진씨 소환수가 앞에서 정찰병 역할하고, 홍구씨는 제가 신호하면 화염구 날리세요.” 우진은 조심히 코너를 돌아 걸으며 서둘러 스킬창을 열어 스켈레톤 병사소환스킬을 올렸다. 몬스터의 시체를 재물삼아 [힘 14 민첩 17 체력 14]의 해골병사를 소환한다. 소모마력 : 1, 필요지배력 : 1 8개의 포인트를 소모해 스킬레벨을 올렸다. 단번에 능력치가 향상된 스켈레톤 병사는 개체 하나가 일반 성인남성 보다 더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스킬 레벨이 10에 이르면 스켈레톤병사의 외형이 변하기에 9레벨 까지만 올렸다. 괜히 외형이 변해 그에 대해 설명해주는 게 귀찮아서였다. ‘이정도면 밥값은 하겠지.’ 우진은 그저 적당히 지내다 적당히 벌어 나갈 작정이었다. 제법 돈을 벌면 혼자서 던전에 도전할 작정이었다. “이번 코너에 돌아가면 고블린 여섯 마리!” 배도수의 지휘에 따라 스켈레톤 병사가 앞서가며 시선을 끌었고 근접공격수들이 튼튼한 방벽을 쌓았다. 성구의 화염구는 의외로 위력을 발휘했다. 화르륵. 쾅. 머리통만한 화염구가 날아들자 고블린들의 진형이 단번에 무너졌다. 배도수의 발화능력은 직접적 피해는 미비했지만 전술적 효과는 좋았다. 얼굴에 불꽃이 갑자기 일어난 고블린들은 당황해 허우적거렸고 그때를 노려 근접 공격수들이 달려들어 고블린들을 두들겨 팼다. 그사이 가담해 우진도 스켈레톤을 부려 고블린을 때려잡았다. “뼉다구가 생각보다 재빠르구먼.” “힘도 있어. 엥간한 F급보다도 나은데?” 배도수의 팀은 우진과 성구를 인정했다. 거듭 전투가 계속 될수록 손발이 맞아갔고 사냥속도는 빨라졌다. 애초에 목표는 던전의 클리어가 아니라 기본 소환되는 몬스터를 모두 잡고 혈석을 캐는 것이다. 귀환석이 있는 하층까지의 최단루트가 아니라 위층부터 샅샅이 훑듯이 사냥하며 내려갔다. 제법 많은 몬스터를 잡아 우진은 레벨업을 한번 겪고 5레벨이 되었다. 드레빗보다 업적포인트도 더 많아 마리당 2씩의 포인트가 쌓였다. 우진은 스켈레톤 병사를 부리기만 할뿐 별달리 할일도 없었다. 1성 던전에서 잔뼈가 굵은 팀답게 서로간의 호흡이 좋았다. 2성 던전이 처음인지라 신중했던 배도수는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혈석의 드랍률도 1성 던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벌써 얻은 혈석만 17개. 크고 작은 혈석들을 대충 돈으로 환산하자면 못해도 400은 받을 것이다. 인원수대로 나눠도 100이상의 돈이 수중에 떨어졌다. 그것도 여태 번 혈석만 따졌을 때였고 아직 남은 몬스터를 모두 정리하면 더 많은 돈을 벌 터였다. ‘2성 던전은 대박이다.’ 물론 기존의 그의 팀의 활약도 있었지만 스켈레톤 병사를 이용해 대신 몸빵 하면서 위험수위를 줄여주는 우진과 성구의 화염구덕이기도 했다. 솔솔찮은 전력인지라 팀원으로 받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나는 인재들이었다. 던전 공략이 끝나고 한번 진지하게 제안해봐야겠다고 생각한 배도수였다. “이제 마지막 층입니다. 다들 힘냅시다.” 한 시간의 제한 시간 안에 던전을 클리어하고 돌아 가야하기에 휴식시간은 짧았다. 파티가 복도를 거닐어 마지막 층 계단에 섰을 때였다. 그 입구에 고블린 무리 다섯과 홉고블린 한마리가 서있었다. 다른 놈들보다 덩치가 하나는 더 커 보이는 그놈은 거대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기본 진형으로 갑시다.” 배도수의 자신만만한 말에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펜행성에서 마왕의 군대와 싸웠던 그다. 수없이 많은 몬스터를 만났고, 구중엔 홉고블린도 있었다. 놈이 까다로운 건 보통의 고블린보다 큰 덩치가 아니었다. 놈은 고블린 중에서도 지능이 높은 고블린 마법사였다. 그리고…. ‘안될 텐데.’ 우진은 천천히 전진하는 일행들을 보며 혀를 찼다. “조금 신중히 가죠?” 우진의 말에 배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거듭된 승리로 처음 2성 던전에 도전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매뉴얼 숙지했어. 저놈 주공격이 마법이야. 종철이 능력이 방어막이니 한번 막고 딜레이 때 들이닥치면 필승이야.” 방패부대 중에 하나가 방어막을 능력으로 가지고 있었다. 우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그들의 의견대로 따랐다. 팀의 리더는 배도수였고 자신은 객식구일 뿐이다. 물론 책임도 리더인 그의 것이다. “온다, 막아!” 배도수의 말에 종철이란 남자가 즉시 능력을 발동했다. 희끗한 막이 펼쳐진다 싶더니 홉고블린이 날린 번개가 와서 부딪혔다. 파지직! 방어막이 사라지며 번개도 함께 사그라졌다. “됐다. 가자!” 배도수는 즉시 발화능력을 이용해 홉고블린의 시야를 어지럽히며 일행들과 돌진했다. 성구도 홉고블린을 향해 화염구를 냅다 집어던졌다. ‘위험 할텐데.’ 홉고블린은 지능이 높다. 마법을 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홉고블린이 위험한 것은 그 마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끼이, 끽.” 괴성에 가까운 홉고블린의 소리에 근처의 고블린들이 뭉쳤다. 몽둥이를 쥔 고블린들의 손에 조잡한 방패가 들려있었다. 여기저기 지하철역에서 뜯어낸 표지판부터 신문 거치대까지 다양한 것들을 임시로 들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숨긴 고블린들이 긴 대롱을 꺼내들고 조준했다. “공격! 홉고블린만 먼저 끝내면 돼.” 배도수의 말에 궁수도 홉고블린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지만 놈은 계단 난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화염구 공격에 흥분해 달려들었어야 할 고블린들은 진영을 정비한 채 그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고블린들과 팀이 충돌했다. “이, 이놈들 뭔가 다른데?” 드잡이질하는 놈들의 체격도 힘도 같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영악하게 싸운다는 것이다. 묘한 위화감을 느끼는 일행들이지만 이미 전세는 기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퓨퓨퓩. 숨어있던 고블린들이 그들 특유의 무기인 마비침을 쏘아냈다. 그중 어느 놈은 독침이 섞였을 수도 있었다. “아, 따거, 뭐야?” “어어, 몸이.” 완벽한 전신마비는 아니지만 마비침을 맞은 부위가 잠깐 경직되는 정도라도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에서라면 큰 위험요소로 작용했다. 퍼억! “어어?” 고블린이 휘두른 곤봉에 한명이 쓰러지는 것이 시작이었다. 배도수는 심장이 옥죄어오는 듯 답답한 느낌이었다. 칼 한번 휘두르면 죽을 놈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니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쯧, 저래서 안 된다니까.’ 홉고블린이 위험한 것은 그의 신체능력도 마법도 아니었다. 고블린 보다 높은 지능으로 인한 지휘능력이다. 지휘관을 가진 고블린들은 더 이상 1성의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그들 무리자체를 한 개체로 봐야했다. “도, 도망쳐. 빠져나와.” 후방에 있던 배도수의 외침에 근접공격수들이 앞 다투어 도망쳤으나 이미 한명은 완전히 실신한 후였다. 이대로 도망치면 그가 죽을 것은 뻔 한 일. 화르륵, 펑! 쿨타임이 끝나자마자 생성해 던진 성구의 화염구에 뒤쫓던 고블린 둘이 불이 붙어 황급히 물러났다. 그 틈에 근접공격수들이 재빠르게 후퇴했다. “안되겠다. 일단 빼자!” “종철이는?” “이미 죽었어! 보면 몰라?” 격앙된 배도수의 외침에 그들의 얼굴이 굳어갔다. 동료에 대한 미안함, 두려움, 살고자하는 욕구가 버무려져 음울한 표정들이었다. 고민해봤자 어차피 결정은 뻔했다.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다. “후퇴!” 배도수의 외침에 일행들이 서둘러 도망쳤다. 그렇다고 고블린 무리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파지직! 정신을 차린 홉고블린이 날린 전기공격이 그대로 성구의 몸에 직격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린 성구의 눈자위는 이미 흰자위를 보이며 뒤집어져 있었다. “쳇, 어서 도망쳐!” 애초에 본래의 팀도 아닌 성구의 죽음은 그들에게 조금의 미안함도 들게 하지 못했다. 던전에 입장을 마음먹은 각성자의 죽음은 언제나 그림자에 숨어있다. 그가 운이 없었을 뿐이다. “키익, 킥!” 고블린들은 얼마간 뒤쫓는 시늉을 하다가 홉고블린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기둥에 숨어있던 우진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몰이사냥은 오랜만이네.” 사망자 둘에 나머지는 도망쳤다. 한껏 몰려든 고블린들을 보며 우진이 희게 웃었다. 보고 즐기는 쇼타임은 끝났다. ──────────────────────────────────── 14화 - 던전의 네크로맨서 “자, 가보자. 똘마니들아.” 파팍, 팍! 우진의 부름에 쓰러져있던 고블린 네 마리의 시체가 터지며 해골병사들이 소환되었다. “끼긱.” “키키키.” 원숭이가 놀란 듯 소리치는 고블린의 비명과 스켈레톤 병사들의 특유의 장난스러운 음성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우진이 쥐고 있던 가벼운 곤봉을 버리고는 인벤토리에서 장도리를 꺼내들었다. 무게감도 적당하고 묵직해 파괴력도 있어서 일단 제대로 된 무기를 구하기전까지 아쉬운 데로 쓰려고 인벤토리에 보관하던 차였다. “자, 가보자고.” 우진이 뛰어들자 스켈레톤병사들이 장군의 진입로를 열듯이 달려들어 고블린들을 몰아붙였다. 당황한 홉고블린의 다급한 명령에 고블린들이 막아섰지만 장도리에 머리통이 터져나갈 뿐이었다. “키키키.” 죽은 고블린들의 시체는 그대로 터져나가며 스켈레톤 병사로 화했다. 스킬포인트를 소모해 레벨을 올려놓았더니 이제는 어지간한 하급 각성자급의 신체능력을 발휘하는 스켈레톤 병사였다. 잘 죽지도 않았기에 지배한계인 14마리가 모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고블린들의 피로 얼룩진 장도리를 든 우진이 당황한 홉고블린의 앞에 높였다. 놈이 든 지팡이의 끝에 파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기가 모여들었다. 가늠해보니 얼추 녀석의 전기공격 쿨타임이 끝난 듯 싶었다. 우진이 장도리의 뒷부분 뾰족한 부위로 홉고블린의 머리통에 쑤셔 박았다. 콰작. 피시시. 두개골을 뚫고 들어간 그 공격에 지팡이에 맺힌 전기들이 차마 쏘아지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후, 이거 포인트 모으기 좋네. 역시 사냥은 몰이사냥이야.” 고블린 한 마리당 업적 포인트 2, 홉고블린은 무려 5의 포인트나 올랐다. 겨우 2성 던전이 이럴 진데 그보다 상위의 던전에 가면 얼마나 오르겠는가. 포인트 상점에서 팔고 있는 마법서들을 생각하면 아르펜행성에서 이룩했던 경지를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 싶었다. 경험치도 쏠쏠해 1레벨을 올렸다. “역시 파티플레이는 나랑 안 맞아.” 앞에서 몸빵 해줄 스켈레톤 병사도 있었고, 뒤에서 공격할 딜러 또한 조금만 더 레벨을 올리면 스킬을 배울 수 있었다. 괜히 파티플레이로 사냥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다보니 우진이 막타를 치는 몬스터들이 적어 경험치나 업적의 습득이 더뎠다. 우진은 널브러진 고블린들의 시체를 보며 탐색마법을 시전했다. 번거롭게 모든 고블린들의 시체를 헤집어 혈석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탐색 마법에 의해 마나의 기운을 가진 것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우진은 바닥에 쓰러진 홉고블린의 품에서 빛이 새어나오자 그것을 뒤져보았다. “어? 마법서네.” 우직은 마법서를 이리저리 둘러봤으나 무슨 마법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차피 식별마법이야 배워야하니, 이참에 구입해야겠네.” 우진은 포인트 상점을 불러내 20의 업적 포인트를 소모해 ‘식별’ 마법을 배웠다. 1회성 소모아이템인 식별스크롤을 이용해도 되지만 어차피 자주 사용하는 마법이기에 배워둬서 나쁠 것이 없었다. <식별> 밝혀지지 않은 아이템의 정보를 알 수 있다. 지능이 높을수록 실패 확률이 낮아진다. 소모마력 : 1 우진은 마법을 배우자마자 마법서를 식별했다. <전기충격> 대상을 향해 전기공격을 가할 수 있다. 소모마력 : 1 대기시간 : 20 “호오. 아까 이놈이 쓰던 거네.” 우진은 포인트상점에 검색해 전기충격의 가격을 알아보니 업적 포인트 100짜리의 마법서였다. 그저 불꽃을 일으키거나 물을 생성하는 정도의 하급 원소마법은 30포이트로도 살 수 있었다. 전기공격은 그것들보다는 쓸 만한 대인 공격마법이니 세배나 더 비싼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애매한 가격이네.” 고블린 50마리를 해치워야 벌 수 있는 포인트다. 고블린을 해치우는 속도를 생각하면 그리 비싸보이지도, 그렇다고 막 살 정도로 싸보이지도 않았다. 당장 필요한것도 아니기에 우진은 마법서를 품에 챙기고는 여전히 빛을 반짝이는 고블린들의 머리통을 가랄 혈석을 캤다. “으으으.” “응?” 혈석을 캐던 우진은 신음소리에 인상을 굳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타난 몬스터는 없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우진의 눈과 쓰러져 고통에 찬 성구의 눈빛이 마주쳤다. 희번덕거리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잔뜩 찡그린 인상이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은 듯 괴로워보였다. 그의 곁에 다가간 우진이 쪼그려 앉았다. 전기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굳은 혀를 억지로 굴려 성구가 뱉어냈다. “사, 살려주…” “어디까지 봤냐?” 우진이 성구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간절한 눈빛만이 가득한 성구를 내려다보는 우진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야 수없이 봤다. 동료도 있고, 적으로 만났던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죄 없이 타락하여 영혼을 빼앗긴 이들도 있었다. “아, 뭐 상관없으려나.” 아르펜 대륙이 아니다. 굳이 이정도 일로 성구를 죽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국의 첩자도 아니고, 입막음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서서히 혀가 풀리는지 말투가 또렷해지는 성구였다. 화염구의 능력을 가진 성구다. 마력을 다룬다는 의미는 그 자신도 항마력을 어느 정도 가졌다는 의미.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라면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 두고 가도 아래층의 몬스터에 의해 죽을 것이다. “살려주면 뭐 해줄 수 있냐?”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뭘?” “형님이 D급 각성자라는 걸 말입니다.” 성구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홉고블린에 고블린 십여 마리의 무리를 쉽게 해치울 정도면 D급 정도의 각성자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알려져도 별 상관없는 이야기들. 우진의 관심은 그런 것에 있지 않았다. “얼마 줄래?” “네?” 너무 당황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홍성구는 뭐라 대답해야할지를 몰라 망설였다. “내가 그냥 이대로 가면 너도 저렇게 될걸?” 우진이 가리킨 곳엔 피떡이 되어 축 늘어진 종철의 시신이 있었다. 고블린들의 곤봉에 여기저기 얻어맞아 참혹한 모습이었다. “드, 드리겠습니다.” 살수만 있다면 어디 돈이 문제겠는가?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살수만 있다면 모두 줄 수 있었다. 돈이야 각성자 등급이 높아질수록 더 많이 벌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어, 얼마를 원하십니까?” 성구의 말에 우진이 손가락 두개를 폈다. 성구가 깜짝 놀랐으나 이내 이를 앙다물었다. ‘2천이면 목숨 값으로 전혀 아깝지 않아.’ 저금해둔 돈을 거의 다 쓰겠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각성자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으니 앞으로 벌 돈이 더 많았다. “알겠습니다.” 성구의 대답에 우진이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2백이면 솔로플레이할 정도 입장료는 되겠어.’ 귀환 3일차. 아직은 소박한 각성자 강우진이었다. ──────────────────────────────────── 15화 - 인과응보 “후, 끝났네요.” 성구는 질린 얼굴로 땀을 닦았다. 가장 마지막 층의 넓은 공간을 몬스터들이 빼곡 채울 정도로 많았다. 물론 성구가 전투에 가담한다고 땀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 “다 캤냐?” 우진의 말에 성구가 혈석 무더기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형 같은 분이 어떻게 F급 이세요? 적어도 D급인데. 아니, 능력이 많으시니 C급도 받으실 수 있을 텐데.” “나중에 받지 뭐.” 심드렁히 말하는 우진을 성구는 괴물 보듯이 했다. 던전의 마지막 층의 몬스터를 전멸시킨 것은 우진과 그의 소환수들이었다. 성구가 한일은 우진이 지목한 몬스터들을 헤집어 혈석을 캐는 뒤처리 작업이었다. 2성과 1성 몬스터들을 홀로 사냥할 수 있는 전투능력은 능히 D급에 가까웠고 다재다능함은 C급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스켈레톤 소환에, 혈석을 찾아내는 탐색, 거기에 더해 어떻게 한 것인지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에서 희끗한 뭔가를 뽑아 자신을 치료해준 능력까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남다르다고 했던가? 성구는 각성자 등록을 마친지 3시간밖에 되지 않았다는 초보각성자 강우진이 크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 근데 뭐하시는 거에요? 그거 안 팔고 배우시는 거에요?” “응, 왜?” 우진은 손에 쥔 마법서에 마력을 주입했다. 마법서가 사라지며 전기충격 마법이 우진에게로 흡수되었다. 업적 포인트야 차차 쌓이고 있지만 달리 배워야하는 스킬도 많았기에 마법서가 나온 김에 전기충격을 배웠다. 네크로맨서계열의 마법서가 아니니 이보다 더 상위의 마법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었다. 전기충격 정도면 대인공격 마법으로 쓸 만한 것. 배워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헐, 형 능력도 많으신 것 같던데 추가로 마법을 또 배우시는 거예요? 그거 팔면 못해도 1억은 받을 텐데…….” “……?” 홍성구의 말에 우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100포인트짜리 마법서가 1억? “…비싼 거였냐?” “당연하죠. 추가로 능력을 각성할 수 있는 건데요. 아티팩트하고는 질적으로 다르죠.” 아티팩트가 마력을 주입해 새겨진 마법을 발현시켜 주는 것이라면 마법서는 그 마법을 각성자 본인이 익히는 것이다. 잃어버릴 염려도 없이 영구적으로 마법을 얻는 것이니 하급의 마법서라 하더라도 비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 그 비싼 게 왜 고작 2성 던전에서 나와?” “저엉말, 정말 운이 좋은 거에요.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에요. 거의 안 나와서 그렇지. 근데 어떤 마법이에요?” “네가 아까 한방 맞았던 거. 홉고블린이 쓰던 전기충격.” “헐, 그 정도면 못해도 정말 1억은 받을 텐데…….” 1억. 1억이라. “후우.” 마법서가 1억 일 줄 알았다면 그냥 팔아버리고 전기충격 따위야 100포인트를 써서 배웠으리라. 포인트 상점에서 마법서를 구입해 팔고 싶었지만 포인트상점에서 구입한 스킬북은 거래불가였다. 오직 우진만이 배울 수 있는 것. 우진은 목숨이 간당간당한 성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영혼 갈취’라는 스킬을 배웠다. 50포인트나 했지만 어차피 배워야하는 스킬이기에 주저함은 없었다. 몬스터든 사람이든 사망하고 나서 잠깐 동안 그들의 영혼이 시체 근처에 머무른다. 그때 그 영혼들을 갈취해 에너지원으로 삼는 것이다. 마력이나 기력, 체력 등 모든 것이 소량 회복된다. 우진이 아닌 남에게 주입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효율이 낮았다. 성구는 우진이 치료마법을 쓴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른 이의 생명력을 뺏어 나눠주는 것뿐이다. “쓰읍, 후. 아까워 말자.” 우진은 괜히 쓰린 속을 달랬다. 마법서를 그대로 팔면 한동안 던전을 돌지 않아도 됐건만. 아니, 떨어진 서울 땅값을 생각하면 지금의 원룸보다 더 큰 빌라로 이사 할 수도 있을 텐데……. 아, 생각하질 말자. “이정도 혈석이면 얼마냐?” “못해도 800쯤은 받을 것 같아요. 더 받으려나. 저도 잘 가늠이 안돼서…….” 10만원을 투자해 그 정도라면 꽤 괜찮게 남겼다. 일행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분배해서 겨우 100만 원 정도의 돈을 만졌겠지만 말이다. “다 내꺼다.” “무, 물론이죠.” “귀환석은?” “여기 챙겼어요.” “이제 나가자.” 우진과 성구가 막 혈석들을 챙겨 가방에 쓸어 담고는 위층으로 향할 때였다. “매복 같은데.” 저 레벨의 감지스킬이지만 옅은 살기를 감지해 우진에게 경고를 보내왔다. 우진이 멈춰 서자 성구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모든 몬스터를 토벌했다. 귀환 후 재입장 하지 않는다면 몬스터 리젠은 없다. 매복이 있다면 도망쳤던 배도수의 일행뿐이다. “PK라도 하려는 걸까요?” 불안한 듯 떨리는 성구의 물음에 우진이 되물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 “가끔 있죠. 비공식적으론 더 많을 거에요. 그래서 웬만하면 모르는 사람하곤 파티를 잘 안 해요. 마법서나 아티팩트 같은 보물이라도 나오면 헬게이트 열리는 거죠.” “싸움이 나면 보통 어떻게 처리되는데?” “던전 안에서의 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확실한 증거라도 있지 않는 다음에야 모두 불문율에 붙여요.” “허, 거참 시체 유기하기 편하네.” 우진이 씩 웃으며 어두컴컴한 계단 위를 보았다. 멈춘 걸음 그대로 뒤를 보았다. 널브러진 몬스터의 시체들. 우진은 그대로 뒷걸음질 쳐 계단에서 멀어졌다. 성구도 덩달아 우진을 뒤따랐다. “거, 쥐새끼마냥 숨어 있지 말고 왔으면 나오지 그래?” 우진의 말에 곧 반응이 왔다. 배도수 일행이 느릿하게 계단을 밟고 내려서고 있었다. 어색한 표정들은 미안한 듯 보이기도 했고, 그냥 실없어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된 겐가? 자네들이 다 해치웠나?” 능청스럽게 묻는 배도수의 연기에 우진은 성구를 향해 낮게 말했다. “가까이 오면 기습할 생각이야.” “어쩌죠?” 성구의 불안한 눈빛이 우진을 보았다. 우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 도망친 놈들이 뻔치 좋게 나타났네. 결계 앞에서 기다리지 여기까진 왜왔데?” 대뜸 내뱉는 우진의 반말에 배도수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이내 표정관리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자네 왜 그러나. 같은 팀끼리. 작전상 후퇴에 다시 던전 클리어 하러 왔을 뿐이야. 와보니 몬스터들을 다 처치해놓았군. 어떻게 한 건가?” 배도수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F급 각성자 둘이서 몬스터들을 싹쓸이 했다곤 도무지 믿기지 않았으니까. 배도수의 시선이 슬쩍 혈석이 가득 든 가방을 향했다. 우진은 웃었다. 욕심에 눈이 먼 놈들은 봐야할 것도 외면해버린다. “지랄 옆차기를 하네. 귀환석이라도 챙겨서 튀려다가 밥 차려 놓으니까 탐 나냐?” 우진이 혈석이 가득 든 가방을 앞에다 던져버렸다. 촤르륵. 열려진 가방 사이로 혈석들이 쏟아졌다. 그 위치가 교묘해 우진과 배도수 일행의 중간쯤이었다. “탐나면 주워 가봐.” 우진의 말에 배도수가 인상을 굳혔다.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군. 우리도 어쩌지 못한 몬스터 무리를 해치운 자네들에게 PK를 건다고? 오해야 오해.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계속해봐.” “못 챙겨 간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제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어쩌겠나? 우린 그저 귀환석을 찾으러 왔을 뿐이야. 자네가 던전을 클리어 했으니 다행히 종철이 시신도 수습해 갈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네.” 배도수의 말에 우진은 자신이 너무 예민했었나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이곳 사람들이 전부 아르펜행성과 같지는 않겠지. 계단위에 매복하고 있었던 것도 그럼 혹시 모를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래의 상황을 모르니 말이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도…….’ 지난 20년 동안 한줌의 재화에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동네에서 살다보니 너무 날카로웠나보다. 이곳은 지구, 그것도 서울이다. 평화와 도덕이 살아 숨쉬는… 화르륵. …기는 개뿔. 우진은 자신의 눈앞에서 발화하는 화염에 얼른 팔을 휘저었다. “지금이야.” 배도수의 외침에 활을 든 사내가 홍성구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의 화염구 공격은 요주의 능력이었다. 배도수는 도망쳤을 때 일행과 합의했다. 아직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2성 던전에 도전하기 버겁다는 것을 말이다. 돈은 얼마 되지 않겠지만 1성 던전을 다시 돌아야할 판이었다. 조심스럽게 귀환석이라도 찾을까 싶어 돌아왔는데 몬스터들이 죄다 죽어있었다. 홉고블린마저 죽어 있는 것을 보곤 머리를 굴렸다. 욕심이 났다. 아무리 찾아봐도 종철의 시신만 있을 뿐, 우진과 성구의 시신이 없었다. 그 말은 둘이서 아래층을 공략하러 갔다는 말. 홉고블린을 해치울 정도라면 둘중 하나는 본래의 실력을 숨겼으리라. 그리고 몰래 기습을 준비했으나 상대가 먼저 눈치채버렸다. 배도수는 우진을 안심시키려했다. 그리고 동시에 간을 봤다. 해치울 정도가 되는지 되지 않는지 말이다. 우진이 던진 가방에 든 혈석은 도수의 눈을 뒤집히게 할 만큼 많았다. 1성 던전을 돈다면 한 달은 일해야 만질 액수였다. 배도수는 의심 가득한 우진의 날카로운 반응에 확신했다. ‘우릴 경계하고 있다.’ 경계한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무슨 수로 몬스터들을 해치웠는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이 덤벼드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상대가 위험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공격해볼만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들이친다.’ 배도수는 미리 약속했던 사인을 주고는 발화능력을 발휘했다. 우진의 얼굴을 가득 채우는 화염과 동시에 화살이 날아가 성구의 어깨를 꿰뚫었다. “크윽.” 당황한 그가 화염구를 생성하기도 전에 일행들이 들이닥쳤다. 무기는 질긴 몬스터가죽보다 사람 가죽을 더욱 손쉽게 찢어발길 것이다. “후, 원망 말게. 각성자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배도수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들어 허우적거리는 우진을 향해 찔렀다. 쉬익. 불꽃에 시야가 가린 우진이지만 용케 배도수의 찌르기를 알고는 그 손을 잡아 엎어치기로 그를 던져버렸다. 그 힘과 빠르기가 굉장해 배도수는 손쓸 틈도 없었다. 신체능력 각성자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후. 화끈하네.” 우진은 사그라지는 화염을 마른세수로 쫒으며 당황한 배도수 일행을 노려보았다. 성구는 어깨에 화살을 박은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만 있었다. “꽤 발칙한 공격이었어.” 얼굴이 벌건 것이 약한 화상을 입은 듯 했지만 우진은 미소 짓고 있었다. “어떻게 예측을 벗어나질 못하냐?” 우진이 양팔을 뻗었다. 파팍!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몬스터들의 시체가 터져나가며 육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장관이라기보다는 심약한 사람은 그대로 기절할만한 그로테스한 광경이었다. “나를 원망해라.” 우진이 희게 웃었다. 원망한다고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한껏 비웃어 줄 테니.” 약자들의 원망 따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영혼마저 구속당해 타락할 그들에게 그것마저 허락지 않는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니까. 스켈레톤들의 뼈칼에는 자비도, 망설임도 없었다. “크아악.” 순식간에 쓰러진 그들을 보며 우진이 배도수를 향했다. 꿈틀거리는 그는 아직 목숨이 붙어있었다. “자, 잠깐 대화를…….” “발화능력 쿨타임 기다리냐?” 콰직! 우진은 망설임 없이 배도수에게서 뺏어든 칼을 그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부들거리다 이내 축 처진 그를 보며 우진은 별다른 감흥 없이 그가 맨 가방을 뺏었다. 홉고블린을 만나기전까지 얻은 혈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진은 거기에 더해 배도수의 품을 뒤져 지갑을 꺼내들었다. 현찰을 모두 빼들고 주머니에 찔러 넣는 우진은 어느새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홍성구는 눈앞에서 사람 넷의 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자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던 말을 두 손으로 막았다. 너무 놀라 어깨에 박힌 화살이 아픈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쓰러진 다른 일행의 주머니까지 뒤지는 우진이 중얼거렸다. “하여튼, 뒤통수치는 새끼들은 답이 없어.” 나보고 들으라는 말인가? 성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난 뒤통수 까는 놈들이 제일 싫어. 안 그냐? 성구야.” 휙 돌아보는 우진과 눈이 마주친 성구는 너무 놀라 오줌을 지릴 뻔했다. 사람 넷을 죽이고도 우진은 너무나 무심한 얼굴이었다. 몬스터만 죽여도 아니, 작은 짐승만 죽여도 흥분되거나, 죄책감이 들거나 감정이 생기기 마련인데 우진은 사람을 죽이고도 그저 길가의 잡초를 뽑아낸 듯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살인자를 넘어선 느낌. 그 평온함이 홍성구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왜 대답을 안 하냐?” ──────────────────────────────────── 16화 - 인과응보 (2) “마, 맞습니다.” 우진은 배도수 일행의 주머니를 모두 털고는 희희낙락한 얼굴이었다. 돈을 세는 그의 표정을 보니 전혀 죄책감은 찾을 수가 없었다. 성구는 그런 우진이 무서워 신음소리도 흘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1성 던전에서 제법 구른 성구지만 사람이 눈앞에서 죽은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손에 의해서. 더군다나 우진은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마치 이까짓 일쯤은 많이 겪어봤다는 듯이. “현찰 두둑이 들고 다니네.” 우진은 못해도 90만원이나 되는 불로소득에 기분이 좋았다. 그 콧바람 소리에 성구가 괜히 딸꾹질했다. “너도 괜히 나 때문에 죽을 뻔했구나.” “아, 아닙니다.” 우진이 아니었다면 진즉 몬스터에게 죽었을 것이다. “그럼 두개 더 보내라.” “네?” “두 번 살려줬잖아.” “…….” 총 4개. 4천만 원이면 저금을 다 털어도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성구가 울상을 짓는데 우진은 신난 얼굴로 그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고는 아직 흩어지지 않은 배도수일행의 영혼을 끌어와 성구의 상처를 치료했다. “흐읍.” 뭔가 쑥하고 들어오며 빠르게 재생되어가는 상처에 성구가 헛숨을 들이켰다. 상처의 회복이 아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등생물의 영혼일수록 영혼갈취의 효과가 좋았다. 몬스터보다 인간의 영혼이 더 좋은 에너지원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 뭘.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네.” 성구는 빠릿하게 흩어진 혈석들을 주워 모아 우진의 뒤를 따랐다. 우진과 성구가 던전을 나서자 관리공무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왜 둘 뿐입니까?” “모두 몬스터에게 당했습니다.” 태연한 우진의 말에 관리공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어떻게 혈석은 그리 챙겼습니까?” “뒤질 때 뒤져도, 돈은 챙겨야 할 거 아닙니까?” 당당한 우진의 반문에 공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딱 상황만 보면 뒤통수 까고 둘이서 돈을 독차지한 것 같지만 증명할 길이 없었다. “크흠. 여기 사인하고 가보세요. 사건조사를 위해 나중에 관리국에서 연락이 갈수도 있습니다.” 우진과 성구가 사인한 출입대장을 넘겨받은 담당공무원은 그와 함께 던전에 입장했던 각성자들의 명단에 ‘사망’이 새겨진 도장을 찍었다. 지하철역 인근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혈석 매입소가 있었다. 혈석의 가격은 거의 정해져있었다. 매입소에서 측정한 금액에서 세금과 던전의 주인이랄 수 있는 최초 공략자에게 수수료를 지급하고 나머지 금액을 정산 받는다. 신림역의 혈석 매입소를 나서는 우진의 입은 귀에 걸려있었다. ‘던전 한번에 1300만원이 넘다니.’ 혈석이 1230만원에 놈들 지갑에서 털었던 게 90만원이었다. 본래라면 8명이 나눴어야 할 돈이니 얼마 되지 않겠지만 어쨌든 수중에 1300만원의 돈을 벌었다는 게 중요했다. 거기에 성구의 목숨 값으로 400만원을 이체 받으면 1700만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앞으로도 혼자 던전 돌아야겠네.’ 한 번에 이정도 돈이라면 굳이 입장료를 아까워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1시간 안에 클리어하는 것도 문제없으니 온전히 독식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우진이 성구의 목을 두르며 어깨동무했다. “폰 번호 찍어봐.” “예, 예.” 홍성구가 번호를 찍어주자 우진은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성구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곤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좋아, 좋아. 계좌 적어준거 있지?” “넵, 확실히 적었습니다.” “그래. 조심히 가고” 우진은 두툼해진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꺼내 만류하는 성구의 손에 쥐어주었다. “갈 때 차비해.” “고, 고마워요. 형.” “아참, 난 뒤통수 까는 놈이 그렇게 싫더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한껏 신이나 떠나가는 우진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인 성구는 나라 잃은 얼굴이 되었다. “네 개라 그랬지… 저금 깨고도 모자라네.” 두 달 전 각성한 홍성구는 21살의 또래에 비해 큰돈을 벌었다. 그렇다고 쉽게 번 것은 아니었다. 두 달 동안 1성 던전들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 덕에 3천이 조금 안 되는 돈도 저금했고 화염구의 능력도 증가해 위력도, 쿨타임도 줄이는데 성공했다. 일반인에 비하면 엄청난 고수익. 하지만 목숨을 걸고 번 돈이었다. 아둥바둥 모은 돈을 모두 날리게 생겼으니 속이 쓰렸다. 그래도 목숨을 건졌으니 전 재산이 아까울까? 4천 정도라면 모자라는 돈은 여기저기서 빌리면 채울 수 있을 성 싶었다. “끙, 설마 4장이 큰 거 4장은 아니겠지?” 4천이던 4억이던 그것이 목숨 값이라면 얼마 던지 지불할 의사가 있지만 당장 4억의 돈은 변통할 능력도 없고 멀게만 느껴지는 액수였다. 우진이 자신의 목숨 값을 그리 높게 생각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성구는 저금을 해약하러 은행으로 향했다. * 우승훈은 제법 잘나가는 휴대폰판매점의 사장이다. 판매원 경력 8년간 저금한 돈으로 인수한 판매점은 꽤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암, 오늘따라 손님이 없네.” 승훈이 하품을 하는 그때 유리문이 열리며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요? 여긴가?” 남자는 다짜고짜 진열대 뒤의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승훈은 황당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너무 당황하면 할 말이 없다던가? “뭐야? 이 또라이는?” 승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짜증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아저씨. 거기 창고에요. 나오세요.” “…….”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자 승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설마 창고에다 볼일을 보는 건가 싶어 승훈이 창고 문을 열었다. “아 좀, 나오…….” 승훈은 자신의 옷깃을 낚아채는 손에 의해 창고 안으로 강제로 딸려 들어갔다. 쿠당탕. 제품박스에 처박히며 나뒹군 승훈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또라이다. 또라이가 나타났다.’ 승훈이 재빨리 상대를 찾았다. 아니 그보다 상대가 먼저 승훈을 낚아챘다. 멱살이 잡혀 들어 올려진 승훈은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버둥거렸다. ‘무, 무슨 힘이.’ 덩치 좋은 승훈이지만 상대는 그보다 더 힘이 셌다. 그리고 힘만큼이나 무식했다. 휘익, 쩌어억! 다짜고짜 올려붙이는 따귀에 승훈은 할 말을 잃었다. 잉잉거리는 이명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머리는 그보다 더 멍청해진 듯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휘익, 쩌억! 다시 반대쪽으로 올려붙인 따귀에 우승훈은 정신이 아득한 심정이었다. 입안은 이미 다 터져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휘익, 쩌어억! 다시 올려친 따귀에 승훈은 정신을 차렸다. 그것은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필사의 사력을 다해 입을 열었다. “사, 살려주세요.” 휘익, 짜악! 대답대신 손이 날아와 이제 감각마저 무뎌진 뺨에 부딪혔을 때 승훈은 절망을 느꼈다. ‘상 또라이다. 잘못하면 진짜 죽는다.’ TV에서 보던 그런 건가? 무차별 폭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 폭행하고 그런 건가? 아니면 누가 보낸 킬러인가? 생각해보니 상대는 일부러 CCTV가 없는 창고로 들어왔다. 당했다. 계획된 범행임이 틀림없었다. “야, 마.” “네, 넵!” 처음으로 손이 아닌 상대의 물음에 승훈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휘익, 콰당. 의문의 남자는 승훈을 다시 벽에 거칠게 던져버렸다. “으윽.” “일어난다. 실시.” “넵.” 군대를 제대한지 꽤 되었지만 생존본능이 그의 각을 살아나게 만들었다. 각성자가 일반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면 얼마나 무겁게 처벌되는지, 각성자 특별법이 어쩌구하는 소리는 감히 내뱉을 상황이 아니었다. 찍소리만 내도 억하고 때려죽일 것만 같았다. 의문의 남자 우진이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어딘가 수백 명을 거느린 조폭 보스 같은 포스를 풍기는 중이었다. 너 같은 놈은 쥐도 새도 모르 게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라고 말하는 듯 한 위압적인 분위기. “난 내 뒤통수 깐 놈을 아주 싫어해. 감히 날 속이는 놈들도 말이야.” “…….” 언제 만났다고 뒤통수를 깐단 말인가? 승훈이 겁이나 억울한 표정조차 짓지 못하는데 우진이 그를 힐끗 보았다. “대답 안하지?” “죄, 죄송합니다.” 제발 무엇이 죄송한지 스스로 알고 싶었다. “후, 좋아. 운이 좋은 줄 알아라.” “…….” “아르펜 행성이었으면 그냥 보이는 즉시 죽였을 거야.” “…….” 승훈은 지금 이 상황이 어디가 운이 좋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히 여겨라.” “넵! 대한민국 만세!” “오버하진 말고.” “넵.” 겨우 이까짓 일로 사람을 죽이기엔 이곳은 도덕과 법이 있으며, 인권이 있는 나라니까. 우진은 이쯤 할까 싶었다. 툭. 그가 던진 휴대폰이 승훈의 발치에 떨어졌다. “어제 네놈이 내게 최신폰을 팔았지.” “…….” 망할. 승훈은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만원도 안할 휴대폰을 어디 깡촌에서 올라온 듯 한 놈을 만나 90만원에 개통시켜줘 너무 기분이 좋아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호구새끼가 지금 이 새끼라고?’ 사람의 분위기가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어제의 호구가 오늘의 저승사자가 되어 돌아왔다. 하필 각성자였다니. 상대가 각성자인 것을 알았다면 어설픈 사기 따위는 절대 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최신폰을 샀는데…….” “…….” “집에 가보니 옛날꺼래.” “그, 그것이…….”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지?” 생존이 위협될 정도의 극한상황은 사람의 두뇌회전을 가속시킨다. 판매원 경력 8년의 우승훈이 우진이 의도하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차, 착오가 있었습니다.” “역시 그렇지?” 그렇긴 개뿔. 착오로 사람을 이렇게 패나? “바꿔와.” “어, 어떤 기종으로…….” “내가 어떻게 알아? 알아서 바꿔와.” “…….” “가장 비싼 걸로.” “…….” 우승훈은 고심했으나 결국은 딱 한 대뿐인 그 휴대폰을 내어올 수밖에 없었다. * 휴대폰 판매점을 나오는 우진은 희희낙락한 얼굴이었다. “후후, 세상 참 좋아졌어.” 지도가 1초도 걸리지 않아 켜졌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탐색하는 것과 동시에 경로를 안내했다. 인터넷도 빨랐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허허, 역시 최신폰이 좋아.” 우진은 전화번호부 목록을 열었다. [어머니] [도재민] [진짜재민] [4백만] [폰팔이] “짜식, 잘 옮겨놨네.” 현대인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심플한 인간관계를 자랑하는 전화번호 목록을 보며 미소 지었다. 또 들르겠다며 전화번호 바꾸면 알아서하라는 협박과 함께 판매원 우승훈의 전화번호도 받아두었다. 우진은 어머니에게 전화해 일하는 식당의 주소를 알아냈다.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우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후후, 조금 더 모으면 이사부터 해야겠다. 그전에 어머니 일부터 그만두게 해야겠지?’ 우진은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께서 일하는 직장으로의 첫 방문인지라 음료수 한 박스를 샀다. [승미 식당] “여기랬지?” 우진이 식당을 찾은 것은 오후 4시. 제법 한가한 시간임에도 작은 식당의 절반은 손님으로 차있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문 열리는 소리에 카운터에 있던 아가씨가 휴대폰에서 눈도 떼지 않고는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뿅뿅. 피버!, 뾰뵤뵹. 휴대폰 게임을 한창 하던 승미는 아쉽게 게임이 끝나버리자 고개를 들었다. “몇 분 이세…….” 반사적으로 손님을 응대하려던 승미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건장한 체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 미남은 아니지만 훈남은 되는 얼굴. 무거운 분위기에 다크아우라를 풍기는 듯한 퇴폐미까지. 무엇보다 그의 얼굴은…. “우진 오빠?” “어? 승미 네가 여기 왜있어?” 우진은 식당 이름을 떠올리고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유추해냈다. “우리 어머니 너희 식당에서 일하는 거였어?” “어? 어머니?” “이수경여사님 말야.” “주방 아줌마?” 승미가 놀란 눈 그대로 굳어버렸다. 주방 아줌마가 우진의 어머니였다니? 그보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5년 전 분명…….” 우진이 씩 웃었다. “컴 백 홈.” “아…….” 승미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5년 전 행방불명된 그녀의 첫사랑이 돌아왔다. ──────────────────────────────────── 17화 - 그들의 사정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그만두세요.” “못 그만둔다.” “돈 안 버셔도 되요. 제가 많이 번다니까요? 이게 하루 만에 번 돈입니다.” 우진이 은행 어플로 들어가 통장의 잔고를 보여줬지만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자식을 또 사지로 내미는 어미도 있다더냐?” “그럼 평생 백수로 이 나이에 용돈이나 받으며 살까요? 어머니 고생하셔서 번 돈으로?” 우진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돈 많이 벌 겁니다. 어머니께서 돈 걱정 하지 않을 정도로 벌 겁니다. 어머니, 수아는 제가 책임집니다. 제가 돌아왔으니 이집 가장은 접니다.” “우, 우진이 너…….” 어머니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흘리셨다. 가장이라는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큰아들이 행방불명되고 남편마저 죽었다. 2살배기 늦둥이 딸을 위해 평생 가정주부였던 그녀가 가장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살았다기 보단 버텼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우진은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눈물 젖은 모자의 대화를 지켜보는 식당의 주인이자 승미의 어머니인 김순옥은 헛기침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남의 가게에서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옆에서 눈치 주는 딸 승미 때문에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었다. “허음, 이런 말 하긴 뭐한데. 그렇게 일 그만두는 게 어디 있어. 사정이야 알겠지만 이 씨도 양심이 있으면 사람 구해질 때까진 일 좀 봐줘야지. 가게 바쁜 거 뻔히 알면서.” 김순옥의 말에 우진이 인상을 굳혔다. 당장이라도 힘든 식당일은 관두게 하고 싶었는지라 그가 대답하려는데 어머니가 더 빨랐다. “그래. 관둘 때 관두더라도 사람이 책임감 없게 그러면 안 된다. 이건 돈 문제가 아니니 더 말하지 마라.” “끙, 그럼 일주일 안엔 관두세요. 저보다는 수아가 어머니를 더 필요로 해요.” 겨우 7살 유치원생이다. 평소 수아에 대한 미안함이 컸던지라 동생을 언급한 것은 결정적 한수가 되었다. ‘우진 아버지. 우리 우진이가…….’ 무슨 재주인지 5년 만에 나타난 아들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러 간다더니 어마한 돈을 벌어왔다. 식당에서 일하는 그녀로서는 엄청난 목돈이었다. 지난날들의 고생이 떠올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머님. 흐흑. 너무 슬퍼요.” 승미는 따라 울며 손수건을 건넸다. 김순옥은 딸의 낯선 모습에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자신의 딸이긴 하지만 착하기보단 싸가지 없다는 것을 안다. 평소에도 아줌마 아줌마 하면서 신경질적이던 딸아이가 오늘은 어찌된 영문인지 요조숙녀처럼 굴었다. 한참이나 울더니 감정을 추스른 이수경은 사장인 김순옥을 보며 사정했다. “오늘은 먼저 퇴근하면 안 될까요?” “안 시켜주면 아예 관두고.” 우진의 추임새에 김순옥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결국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쁜 식당일에 한명 빠지는 게 크지만 별 수 없었다. 막상 내일부터 안나와버리면 그게 더 큰일이니까. “네, 어머니. 먼저 들어가세요. 우진오빠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 그래. 승미씨.” 이수경은 식당집 딸인 승미의 싹싹한 반응에 영 얼떨떨했다. “오빠. 잘가! 다음에 또 봐. 아참 여기 전화번호.” 박승미는 우진의 휴대폰을 뺏듯이 가로채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어 전화를 걸었다. “헤헤, 그럼 어머니 들어가세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우진과 이수경이 식당을 나섰다. 곧 저녁손님이 들이닥칠 시간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도무지 마음잡고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 엄마 어디가요” 우진은 어머니 이수경의 손에 이끌려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가보면 안다. 그보다 승미씨랑은 아는 사이냐?” “아, 걔요? 학교 후배에요. 왜요?” “음.” 어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재촉하다가 멈춰 섰다. 등 돌려 우진을 똑바로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많은 고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들 연애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만, 그런 싸가지 데려오면 이 엄마는 반대다.” 어머니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 애 관심 없어요. 난 또 뭐라고.” 발렌타인데이다 뭐다 바리바리 많이도 가져다 줬기에 20년의 의식시간이 흐른 우진도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당시에도 별 감정이 없었는데 지금 감정이 생길 리 만무했다. 더욱이 어머니 반응을 보면 그동안 어떻게 대했는지 상상돼 괘씸하기도 했다. “그보다 어디 가는 거에요?” “가보면 안다.” 이수경이 아들 강우진을 데리고 간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형성된 아파트였다. 본래 폐허가 되었던 곳에 해머길드본사가 새워지며 많은 발전을 이룬 곳이지만 한쪽은 거대한 공원이 조성되어있었다. 이수경은 공원 입구의 매점에서 아들에게 술을 한 병 사도록 시켰다. 그리고 꽃집에서 국화꽃도 한 송이 샀다. 한적한 공원길을 걸어 도착한곳은 공원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비석 앞이었다. <사당역 희생자 추모비> 던전쇼크 때 희생당한 사람은 수십만 명에 달했다. 그 이후 던전브레이크마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았지만 하루 동안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날을 꼽으라면 던전쇼크 당일이었다. 우진이 사라졌던 그날. 그날에 지하철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버렸다. 이후 던전 브레이크때 초토화된 역 근처엔 공원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곳도 그중 하나였다. 우진은 말없이 추모비 앞에 꽃을 바치고 술을 따랐다. 무거운 마음에 절하는 우진을 보며 이수경은 함께 눈물 흘리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여보. 우진이가 돌아왔어요. 우리 우진이가…….” 우진은 절을 마치고도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는 듯 하염없이 우는 어머니를 꼭 안아 달래주었다. ‘아버지…….’ 우진은 아버지를 생각하자 기분이 울적했다. 지난날 홀로 고생하셨던 어머니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뿐이지 아버지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우진도 아버지가 그리웠다. 다만, 그보다 어머니와 수아의 안타까움이 더 컸다. 어쩌면 지난 20년의 시간동안 우진은 죽음에 대해 너무 무뎌졌는지도 몰랐다. “이제 말해주려무나.” “뭘요?” “그동안 어디서 무얼 했는지 말이다.” “…….” 진지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우진은 수없이 갈등했지만 결국 사실을 털어 놓기로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치열하게 생존하며 자신의 손으로 앗아야 했던 수많은 목숨들. 자신을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던 그 수많은 사람들. 어머니가 자신을 그렇게 보는건 싫었다. “어, 음. 던전쇼크 영향이었던 거 같아요. 아르펜이라는 행성에 소환되었었어요.” 평소라면 믿지 않았을 말이나 이미 변해버린 세상이 비상식을 상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 거기서 뭘 했더냐?”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우진은 고민하다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위험하진 않았어요. 아, 게임 같은 거에요. 가서 레벨업도 좀하고, 사냥도 열심히 하고, 소환수도 부리고, 전쟁도 했는데 막, 어머니가 걱정하시고 그럴건 아니에요. 전 거의 소환수들 부려서 한 거라 멀리서 구경만 했어요.” “…….” 우진의 말에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하이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동안 게임만 하다왔어.” 어라? 이게 아닌데. ──────────────────────────────────── 18화 - 그들의 사정 (2) “아이고 이놈아! 엄마는 너를 얼마나 걱정했는데.” 우진은 등짝을 맞으며 고민했다. 이거 사실대로 이야기해야하나? “하이고, 5년 동안 폐인처럼 게임만 하다 왔어!” 허허, 이게 아닌데? “그래도 몸 성히 이렇게 돌아 와줘서 고맙다.” 우진은 오해를 풀기위해 어머니에게 조금 더 사실을 이야기해야하나 고민했지만 관두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집으로 돌아왔고, 어머니가 기뻐하신다. 어머니의 눈물엔 아들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원망이 있다면 지난 세월의 야속함일 것이다. 때리는 어머니의 손엔 점점 힘이 빠졌고, 눈물방울은 굵어졌다. 우진도 함께 울었다. 지난 20년의 세월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한없이 울었다. * 수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엄마 왜 그렇게 눈이 빨개? 울었어?” “아니야. 엄마가 울긴 왜 울어.” “아닌데, 울었는데? 난 엄마가 왜 운지 안다.” “왜에?” “엄마도 소고기 먹을 생각하니까 좋아서 그렇지?” “응? 호호, 얘가. 그래 좋다. 오빠가 소고기 사주니까 좋아서 눈물이 나네.” 어머니의 눈에서 이슬이 비쳤다.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방울에 우진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공원을 나온 우진은 유치원에 있던 수아를 데리고 한우전문점으로 왔다. 인근에서 가장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지만 가격이 비싸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 치지직. 우진은 맛있는 소리를 내며 구워진 소고기를 수아의 앞 접시에 올려주었다. 수아는 오물오물 씹으면서 하나를 집어 어머니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엄마도 먹어봐. 엄청 맛있어.” “그래, 그래. 수아가 줘서 그런지 참 맛있네.” 어머니는 고기를 한 점 드시곤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 수아는 우진을 보며 씩 웃었다. “오빠 오니까 참 좋다.” “그래? 오빠가 고기사주니까 좋아?” “응! 엄청 좋아. 민수가 맨날 놀려. 자기는 엄청 맛있는 고기 먹었다고.” “민수?” “우리 반에서 엄청 잘살아. 그래서 맨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유치원와서 자랑해. 장난감도 짱 많아. 걔네 아빠 각성자라서 엄청 부자야.” “허, 그래? 이제 그런 거 부러워 하지마. 수아도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오빠한테 말해. 다 사줄 테니까. 오빠도 각성자야.” “우와 진짜? 오빠 최고야. 나 오빠 좋아.” 수아의 함박웃음에 어머니는 아직도 걱정을 떨치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괜찮아요. 저 그렇게 약하지도 않아요. 크게 위험한일 없으니 걱정 마세요.” “오빠 위험해?” “아니야. 오빠 안 위험해.” 우진은 고기가 본격적으로 익기시작하자 소주를 한 병 시키고는 어머니께 따라드렸다. 어머니는 그게 또 감도인지 뭉클해 눈물지으셨다. “고3 아들이 어른이 되어 돌아왔네. 엄마랑 술도 한잔하고.” “그러네요. 저도 소주는 처음이에요.” “응? 아들 소주 처음 먹어보는 거야?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지. 자 한잔 받아.” 소주야 처음이지. 다른 술을 많이 마셔봐서 그렇지. 우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소주잔을 받았다. 꼴골. “늬들 아빠가 봤으면 얼마나 뿌듯해 하셨을까. 우리 아들이 벌써 장성해서 이렇게 술도 같이하고, 고기도 사주고.” 아버지 이야기에 괜히 울적해졌지만 슬프기야 어머니만큼 일까. 우진은 소주를 한잔 털어 넣었다. 달큰한 맛이 제법 괜찮았지만 조금 맹숭맹숭했다. 여운이 남는 쓴맛은 꽤 맛있었다. ‘마실만하네.’ 아르펜행성이 다른 건 몰라도 술맛은 정말 우진의 마음에 쏙 들었었는데. 언젠가 그것을 추억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 지금 이 자리에,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우리 행복하자. 엄마.” “그래, 아들.” “나도, 나도!” 멋도 모르고 컵을 내미는 수아에게 음료수를 따라주고는 건배했다. * 취하셨는지 연신 고맙다는 어머니와 마냥 해맑게 웃는 수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왔다. 나오는 길에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아 100만원의 돈을 식탁위에 올려두었다. 번 돈을 모두 주고 싶었지만 이것은 종자돈이다. 어느 정도 입장료가 있어야 높은 등급의 던전에 갈 테고, 그래야 빨리 돈을 벌 테니까. 우진은 얼른 괜찮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하, 좋다.” 우진은 어머니와 수아를 집에 바래다주고는 밤거리를 걸었다. 시간은 7시. 수아를 데리고 일찍 저녁을 먹은 덕에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소주 맛이 계속 아른거렸다. 더 마셨으면 좋겠지만 혼자서 궁상떨고 싶지는 않았다. 20년이 지나 이제 기억도 아른한 친구들 얼굴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도재민이었다. “짜식. 이제 돈도 갚아줘야지.” 이것저것 신세진 게 많았다. 우진은 은원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에 익숙했다. 선의에는 보답을, 원한에는 복수를. 변해버린 지구에 대해 개념을 잡는데 재민의 도움이 컸다. 우진은 아직 문을 연 백화점에 들러 선물을 샀다. 허름한 옷에 술 냄새를 풍기며 서성이는 우진을 보고도 친절한 점원을 따라 들어갔다. 화장품 매장이었는데 추천을 받아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쓸 만한 제품을 구입했다. 제법 많은 돈이 들었지만 크게 아깝진 않았다. 선물을 들고 오는 길에 치킨집에서 치킨도 한 마리 시켰다. 편의점에 들러 소주도 한병 사고 재민의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눌러도 반응이 없어 도어락 덮개를 열었다. 띠띠띠, 띠! 띠! 띠! “이 새끼… 그새 바꿨네?” 우진이 곧장 전화하려다 재민이 학원을 마치고 올 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그냥 기다렸다. 재민은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우진을 보고 흠칫 놀랐다. “왔냐?” “혀, 형 오셨어요?” “그래. 닭이나 한 마리 뜯자.” 재민은 우진을 힐끗 보고는 얼핏 손가락을 가리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띠로리! 우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탁에 사온 치킨을 올려두고는 판을 깔았다. “잔 좀 가져와봐.” “아, 잠시 만요.” 책가방을 벗어놓자마자 재민은 컵을 찾아왔다. 매일 밤 찾아오는 우진 때문에 불편하면서도 치킨을 생각하자 군침이 돌았다. 아직은 한참 먹을 나이의 재민이었다. 자신의 컵에 콜라를 따르려는 재민을 우진이 막았다. “자, 너도 한잔 받아봐.” “네? 형, 저 고등학생인데요?” “쓰읍, 형이 주는 건 먹어도 돼.” “그, 그럴까요?” 우진은 재민의 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주고는 자신의 컵에도 소주를 가득 채웠다. 소주잔이 없어 컵에 따랐더니 겨우 두잔 만에 소주 한 병이 바닥나버렸다. “자, 한잔하자.” “네….” 우진이 시원하게 한잔 비우고는 닭다리를 하나 집어 뜯었다. 재민도 어설프게 고개를 돌리고는 한 모금 마시고는 오만상 인상을 찌푸렸다. “크.” 쓰고, 쓰다. 이딴걸 왜 먹을까? 재민은 닭날개를 집어 들고는 한입 베어물고 질문했다. “던전 가신건 잘 되셨어요?” “그러엄. 자, 여기 선물이다.” 재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쇼핑백을 열어보니 향수였다. 브랜드를 보니 꽤 값이 나가는 제품이었다. “혀, 형?” “짜식 놀라긴. 이건 빌린 돈이다.” 우진이 지갑에서 50만원을 꺼내 건넸다. 재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너무 많아요. 빌린 돈만 주셔도 되요. 아니, 솔직히 그것도 안 받아도 되요. 형이 저한테 해주신 게 얼만데.” 그래.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우진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집 비밀번호를 바꿨구나.” “그, 그건….” 당황하는 재민을 보며 우진이 씩 웃었다. “빌린 돈에 나머지는 앞으로 숙박비.” 어? 계속 여기 있겠다는 소린가? 재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19화 - 적당한 오해 “형, 어머니 만나시지 않았어요?” “새끼. 집이 좁으니까 그러지. 집 살 때까지만 부탁하자.” 아무리 서울땅값이 떨어졌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재민과 같은 서민들에겐 꿈도 못 꿀 돈이다. 집 살 때까지 부탁한다는 건 아예 빌붙어 살겠다는 거겠지? 복잡한 표정의 재민을 보며 우진이 낄낄 웃었다. “금방 나갈 테니 걱정 마 임마. 형이 오늘 하루 번 돈이 1300이야. 거기에 아직 못 받은 돈이 400 더 있어.” “그, 그게 아니라 주말이면 저희 누나 오거든요.” “아, 그래?” “제가 내일 전화 해볼게요. 아참, 형 저희 누나 아세요? 누나는 형 이름 알던데.” “어? 누나 이름이 뭔데?” “도지원이요.” 우진은 도지원이란 이름을 곰곰히 생각하다 눈을 크게 떴다. “도지원? 그 3반 전지현?” “음. 친누나라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그렇게 불렸던 거 같아요.” “허허, 네가 지원이 동생이었단 말야?” 우진이 도재민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놈이 잘생겼다 싶었더니 도지원이 누나였을 줄이야.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 났는지 남매가 둘다 미모가 좋았다. 도지원은 20년이 지금도 우진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교에서 가장 예뻐서 유명한 것이 도지원이었다. 우진도 남몰래 지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그때는 왜 그리 숫기가 없었는지……. 지금이면 그냥. “누나는 어디서 사는데 주말에 오냐?” “공장에 있어요.” “뭐? 공장? 도지원이? 돈이 필요하면 차라리 연예인을 하지.” 우진은 도무지 지원과 공장이 연상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재민이 조금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그, 그럴 사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형 휴대폰 바꾸셨어요?” “어, 오는 길에 바꿨어.” “우와, 이거 정말 비싼 건데. 한번 만져 봐도 되요?” “그래? 좋은 거야?” “헐, 이거 크레이지레드잖아요.” “크레이지레드?” “혈석기술 적용 되서 정말 비싼 거에요. 형 돈 정말 많이 버셨나 봐요?” 혈석은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신물질. 5년간의 연구개발끝에 차츰 현실의 물건에 그 기술이 적용되고 있었다. 혈석을 이용한 배터리기술은 요즘 IT시장의 핫이슈였다. “공짜로 바꿔주더라고.” “예? 이걸 공짜로요?” “뭐, 이벤트지. 이벤트.” 인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목숨을 건 이벤트. “헐, 좋겠다. 이거 정말 비싼데.” 우진은 폰팔이가 그래도 양심은 있는듯해 조금 꽁하던 마음을 털어버렸다. 재민이 한창 휴대폰의 신기능에 대해서 주인인 우진보다 더 신나서 이것저것 가르쳐주는데 문자가 왔다. 띠링. 재민은 화면의 상단에 미리보기로 뜨는 문자 내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2015. 9. 13. 21:13 입금 40,000,000 잔액 51,230,000 xx은행 홍성구 “허, 이거 0이 몇 개야.” 재민은 문자를 한번보고 우진을 한번 보았다. 각성자 카드에는 F급이었는데 어떻게 하루만에 1300만원을 벌어오더니, 지금 또 4천만 원을 벌었다. 우진이 달라 보일 수밖에 없는 재민이었다. “혀, 형. 능력 있으시네요.” 우진은 핸드폰을 뺏어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이자식이 네 장 보내랬더니.” 우진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난 니 문자가 신경 쓰여, 문자가 신경 쓰여.] 컬러링의 한 소절이 지나기 전에 성구가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형, 입금 확인하셨어요?] “야, 임마. 누굴 거지로 아나? 내가 그냥 4장만 보내랬지? 이거 뭐야?” [역시, 그 4장이 그 4장이었나.]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듯 작게 들렸으나 청각이 예민한 우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혀, 형님. 제가 지금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소 하나만 불러 주십시오.] “뭐? 굳이 왜 찾아와?” [제가 가서 다 설명 드리겠습니다. 형님 지금 어디십니까?] 다급해 보이는 성구의 목소리에 우진은 얼떨결에 주소를 댔다. [거기 엔젤엔젠이라고 큰 카페 있습니다. 10분 안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급하게 전화를 끊는 성구의 반응에 우진은 전화기를 보았다. “이놈, 뭐지?” 그냥 계좌번호만 불러주면 3600만원을 돌려줄 생각인데 왜 만나자고 할까. “술도 떨어졌는데 나 잠깐 나가서 사올게. 치킨 먹고 있어.” “네, 형.” “현관문 번호 원래대로 바꿔놔라.” “…네.” 우진이 떨어진 소주도 살 겸 성구를 만나 돈을 돌려줄 생각으로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재민은 컵에 남은 소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크, 이런 걸 왜 마셔.” 아직 따지 않은 콜라를 열어 입가심하고는 심심하여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비쌀 텐데.” 재민은 화장품의 브랜드와 모델을 검색하곤 입을 딱 벌렸다. ‘이, 이십만 원?’ 고등학생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부담되는 가격. 애초에 향수도 잘 뿌리고 다니지도 않는다. 담배를 펴면 몰라도. “허, 이형 기분파인가? 돈 번다고 막 쓰네.” 우진이 쥐어준 50만원의 돈을 보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누나는 지금도 힘들게 공장에서 일 할텐데 연봉이라 봐야 우진이 오늘 하루 벌어들인 5300만보다 적었다. 우진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심심했던 재민은 자신이 자주 드나드는 커뮤니티에 접속해 글을 작성했다. [형들. 나 향수 선물 받음. 한 3일전에 우연히 만난 아저씨인데 자취방에서 하루 재워줬다고 향수도 사주고 50만원도 줌. 리얼 횡재? 지금 치킨에 한잔 하다가 그 형 지금 술 떨어져서 술 사러 나감. 돈 겁나 많음. ㅋㅋㅋ 선물자랑 ㅇㅈ?] 재민은 향수의 인증사진까지 올리고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띠링, 띠링. 댓글은 폭발적이었다. [ㅋㅋㅋ. 님 등짝 조심하셈.] [향수, 자취방, 성공적.] ㄴ [리얼 오늘 합방각 ㅋㅋㅋ] ㄴ [ㅋㅋㅋㅋ 이 형 내일부터 옆 동네에 입갤할듯.] [술이 아니라 콘돔사러 갔을 듯.] ㄴ[병시나 임신도 안 되는데 콘돔을 왜사.] ㄴ[뭐, 이 병시나. 그럼 관장약.] ㄴ[ㅋㅋㅋㅋㅋ 관장약이래.] [님, 늦지 않았음. 자취방을 버리고 후방을 지키셈.] [근데 누가 바텀?] [ㅋㅋ 돈쓴 놈이 탑이지.] [에널개통축하!] ㄴ[에널이 뭐에요?] ㄴ[니 똥꾸멍 병시나.] [후기부탁. 모니터 앞 대기 중.] 재민은 인상을 팍 썼다. “쯧쯧,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지. 괜히 게이 드립은.” 재민은 계속해서 달리는 댓글들을 보며 슬쩍 현관문을 향했다. 음,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 맛있는 치킨이 고무줄 씹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아, 아닐거야. ──────────────────────────────────── 20화 - 적당한 오해 (2) 홍성구는 전화를 끊자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 4장이 4억이었어.” 어쩐지 목숨 값이 2천이면 너무 싼거 아닌가 싶었다. 역시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있었나보다. “내가 그래도 2억은 되는구나.” 두 번 구해주었으니 4장. 4억이다. “하, 이럴 때가 아닌데.” 성구는 한숨을 쉬었다. 능력을 각성한지 2개월. 그동안 쉬지 않고 던전을 돌아 마련한 돈이 3천이었다. 거기에 모자라는 돈은 주변에 빌려 융통했는데 어디서 갑자기 3억 6천이나 되는 거금을 마련해간단 말인가. “역시, 이수밖에 없어.” 혹시나 싶어 준비해두었던 것이 있었다. 성구는 서류뭉치를 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사당역 인근에 도착해 엔젤엔젤이라는 큰 카페를 찾아 다급히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다보니 우진이 한편에 앉아있었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점심때쯤 던전을 나와 헤어졌던 둘이다. 고작 몇 시간 됐다고 잘 지내기는. “왔냐? 그런데 뭐 직접 찾아오고 그러냐.” “찾아오는 게 맞지 말입니다.” “됐고, 계좌번호나 불러주고 가.” “허윽.” 성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돈을 돌려주겠다는 건가? 그럼 결국 돈도 필요 없으니 자신을 죽이겠다는 것인가? 성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배도수일행을 죽여 버린 우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일 뿐인지라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상당했다. 성구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형님. 살려주십시오.” “응? 왜이래.” “모자라는 돈은 반드시 드릴 겁니다.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성구의 반응에 주변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뭐야, 뭐야? 조폭인가?” “무슨 사채 같은데.” “쯧쯧, 사채 끌어다 썼나보네.” 주변인들의 수근거림에 우진이 인상을 썼다. 주변의 관심을 끌어 뭐하려는 짓일까? 우진의 음성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뒤지기 싫으면 그냥 앉지?” “넵!” 성구가 즉시 우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형님. 지금은 4억을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기다려주시면 반드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4억?” “넵.” “하아….” 우진이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똑, 똑. 그와 함께 성구는 마른침을 삼켰다.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앉아있는 성구를 보며 우진은 인상을 구겼다. 아무래도 400만원 보내라고 4장을 보내라고 했더니 그걸 4천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은 4억으로 오해하고 있고 말이다. ‘요즘 애들 참 통 커.’ 어떻게 1장을 1천이나 1억으로 생각을 할 수 있지?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 오해를 했다면 응당 그 오해를… “언제까지 기다려줄까?” …이용해주지. 성구가 재빨리 말을 쏟았다. 자신이 언변에 이렇게 재주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빠른 말이었다. “여기 이걸 보십시오.” 성구가 내밀어준 종이서류를 쥔 우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능력 각성과 그 발전에 따른 수입 보고서.> 성구가 처음 능력을 각성하고 하루 벌었던 수입과 능력이 익숙해지고 점점 진화하면서 차츰 높아져가는 수입들. 그것들을 그래프까지 동반해 정리해 두었다. 거기에 아래에는 자신이 여태 공략했던 던전의 목록과 상대해봤던 몬스터의 수까지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이를테면 성구 자신의 포트폴리오. “2개월 동안 모은 돈이 3천입니다. 앞으로의 수입은 늘어날 것이고 빠른 시일 내에 나머지 돈을 채워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25개월 안에는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너무 긴데?” 우진의 부정적인 말에 성구가 빠르게 말을 받았다. 자신의 처세술이 이리도 능했던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 되자 자신의 또 다른 특기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두 번째 방법입니다.” <던전 공략 사업 계획서.> 우진이 인상을 구기며 서류를 테이블에 던졌다. “그냥 말로하지?” 성구가 즉시 혀를 놀렸다. “형님의 능력이시면 1성이나 2성 던전보다 상위의 던전을 충분히 공략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던전 공략 1회당 벌어들이는 수익이 지금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저와 함께 파티를 이루고 수익성이 좋은 던전을 골라 이용하면 금방 4억의 돈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성구가 본 우진의 각성등급은 절대 F등급이 아니었다. 2성 던전도 솔플로 공략할 수있는 수준인데 어찌 F등급일수 있겠는가. 보다 상위의 던전은 수익 자체가 다르다. 금방 4억의 돈을 벌수 있을 것이다. 성구로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혼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상위의 던전도 우진과 함께라면 가능했으니까. 문제는 하나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빌 붙겠다? 편하게?”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한 세 번째 방법입니다.” 성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세 번째 방법을 제시했다. “기간을 정해 제가 형님의 매니저를 하겠습니다.” “매니저?” “네. 조금 등급이 높은 각성자들은 전부 데리고 다닙니다. 길드에서도 지원부서가 따로 있지요. 던전선정 부터, 예약이나 혈석판매 같은걸 전부 대행합니다. 운전도 합니다.” “머슴이네.” 어라,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기분 나쁘지? “정확한 분석이십니다. 형님.” 성구의 말에 우진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매니저가 진짜 연예인의 매니저와 같은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우진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돈 없으니 몸으로 때우겠다는 거네.” 아, 맞긴 맞는데. “정확하십니다. 형님.” 우진이 잠깐 생각해보다 말문을 열었다. “좋아. 기간은?” “형님이 전해주십시오.” “1년. 무보수는 좀 그러니, 따로 돈은 주도록 하지.” 성구가 벌떡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어우, 야 내가 고맙지.” 그냥 3600만원만 돌려받으면 되는 일인데 알아서 머슴살이 해주겠다고 하니 말이다. * 재민은 목을 타는 갈증에 잠에서 깼다. “으윽.” 어질한 머리에 주변을 둘러보니 침대 위였다. 기억의 편린들이 합쳐지며 점점 떠오르는 기억들. 술을 산다고 나간 우진이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 한 모금 한 모금씩 마셨던 소주에 그만 식탁에 엎어져 잠이 들었는데…. 왜, 침대지? “헉!” 윗옷은 입고 있다. 재민이 서둘러 이불을 들춰보니 바지도 입고 있었다. 괜히 엉덩이를 만져봤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휴.”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 긴장이 풀리자 오줌이 마려워 일어서려는데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우진이 보였다. 식탁에 소주병이 두병 더 보이는 것을 보니 홀로 마시고 잔 모양이었다. “착한 형 맞네.” 재민이 안도하며 화장실로 향하려는데 우진이 신음했다. “으으으.” 잔뜩 웅크린 채 누운 우진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 아픈 거야?” 재민이 웅크린 우진을 바로 눕히려 손을 뻗는데 닿기도 전에 따끔한 충격이 전해졌다. “앗, 따거.” 재민이 화들짝 놀라 침대에 다시 앉았는데, 충격 때문인지 헛것이 보였다. 우진을 감싸고 서서히 유영하듯 돌고 있는 희끗한 물체들. 어떤 것은 검었고, 어떤 것은 형제가 없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보였고, 실체 없이 존재했다. 눈이 풀린 재민이 그것을 멍하니 보았다. 귀신? 도깨비? 아니면 환각? 생명에 대한 짙은 증오와 원망. 보다 근원적인 악. 본능적인 두려움. 재민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눈을 까뒤집고 침대에 다시 풀썩 쓰러져버렸다. “으으으.” 신음하는 우진의 몸은 식은땀이 가득했고, 잔뜩 찡그려진 그 얼굴은 악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네크로맨서. 순리를 거슬러 죽음을 거부하는 자. 결국 죽음의 저주에 시달리는 자들. 우진은 그렇게 신음했다. ──────────────────────────────────── 21화 - 3성 던전 “형님. 여깁니다.” 다음날 아침 성구는 우진이 말한 시간에 맞춰 집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차는 뭐냐?” “어머니찹니다. 잘 이용 안하셔서 평소 제가 타고 다녔습니다.” 우진은 흰색 마티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창문은 왜 여냐?” “에어컨 안 됩니다.” “…….” 여름의 막바지에 아침인지라 서늘한 날씨였다. 에어컨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는 성구를 보며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머슴살이 첫날부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냐?” “하하, 머슴도 나름 아닙니까.” 우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오늘 가는 데가 3성 던전이랬지?” “넵.” “뭐 나오는 데냐?” “라퀴들 나오는 뎁니다.” 라퀴들은 거대 바퀴벌레. 그 자체였다. 혈석의 드랍비율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개체수가 워낙에 많이 나오는 던전이다 보니 혈석이 꽤 되었다. 성구는 운전 중에 알아서 던전에 대해 브리핑했다. “매봉역 3번 출구 던전은 수용인원 10명에 입장료 30만입니다.” “더럽게 비싸네.” 한명 당 입장료이니 혼자서 이용하자면 300만원의 돈을 지불해야했다. “별수 없지요. 그런데 몬스터 수가 워낙에 많기도 하고 다 처치하지 않으면 귀환석이 드랍 되지도 않아서 보통 공략에 2시간은 잡아야합니다. 운이 없어 3시간이 걸리기도 하죠.”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 조건은 맞췄네.” 매봉역 3번 출구를 목표로 잡은 것은 성구의 의견이 아니었다. 우진은 던전은 딱 한 가지를 주문했다. 소환되는 몬스터가 많을 것. 수익률도 아니고 몬스터 리젠 수로 찾으라니 의구심이 들었지만 열심히 찾았다. 3성 던전 중에서는 이곳이 가장 몬스터가 많이 리젠되는 곳이었다. 우진의 기억 속과 비교해 도로의 차들이 정말 줄어들긴 줄어들었다. 꼭 명절날을 보는듯했다. 지하철역 인근에는 어김없이 주차장이 마련되어있었다. 5년 동안 서울의 가장 큰 변화는 지하철일것이다. 출퇴근 수단이던 그것이 이제는 출근해야하는 직장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던전사업은 서울의 가장 큰 수익원이었다. “주차비 한번 더럽게 비싸네.” 우진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성구가 옅게 웃었다. “이번 던전 공략하시고 정산 받아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3성 던전과 2성 던전은 또 엄청난 차이가 나니까요.” “뭐, 가보면 알지.” 우진도 돈은 중요하다. 가족과 함께 살려면 큰집이 필요했다. 적어도 다른 방에서 무방비상태에 잠에 빠질 정도는 되는 집 말이다. 수익률이 좋은 던전은 입장료도 비쌌고 인기도 많아 대기자가 많았다. 예약으로 던전을 도는 것은 4성 던전 부터다. 그것도 D급 이하의 각성자는 도전자체가 금지되어있었다. 성구처럼 짐꾼 정도로 끼어가는 거라면 몰라도, D급 각성자가 4성 던전을 주도하는 리더로 갈수는 없다. 그에 반해 3성까지의 던전은 제한이 없었다. 예약도 없었다. 먼저 도착하는 대로 던전 도전의 순서가 주어진다. 그래서 1성이나 2성 던전은 던전 공략시간보다 대기시간이 더 많았다. 3성 던전은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아침 일찍 왔던지라 앞선 두 팀이 있었다. 2시간씩만 잡아도 4시간은 기다려야하는 상황. “형님은 카페라도 가서 쉬다 오십셔.” 대신 줄서기는 매니저의 주요업무이기도 했다. 우진이 주변을 둘러보니 카페를 비롯해 편의시설이 많았다. 역세권이 위험하다더니 그것도 틀린 말인 듯 싶었다. 주거지가 멀어졌다 뿐이지 상업시설은 오히려 더 발달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던전은 쉬지 않고 돌아간다. 24시간 각성자들이 던전공략을 위해 모여든다. 사람 모이는 곳이 번화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됐어. 같이 기다리지 뭐.” “감격입니다. 형님.” 성구는 이제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아부에 스스로를 다독이며 우진이 지루하지 않도록 자신이 아는 각성자들의 사회와, 여러 던전의 종류까지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뿅, 뿅, 팡야! 우진은 왜 크레이즈레드가 각성자들 사이에서 인기스마트폰인지 알 것 같았다. 내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보름을 충전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미친 배터리는 짬짬이 쉬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우진이 던전에 입장하기까지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우진은 1200만원. 무려 4시간에 달하는 던전 이용료를 지불했다. 성구는 우진을 보며 힘차게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산만한 덩치에 온갖 아양을 부리다보니 이제는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형님. 화이팅 하십시오!” “너도 가야지. 임마.” “저, 저도 말입니까?” “혈석 캐야할 것 아냐?” “감격입니다. 형님.” 영혼 없는 감탄사와 함께 성구가 잽싸게 우진의 뒤를 따랐다. “너 일부로 나 따라다니려고 머슴 자처한 거였잖아.” “…….” 답이 없자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성구가 뜨끔한 얼굴이 되었다. “예, 예리하십니다.” 이제는 아부가 입에 달라붙은 듯한 성구였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얌마. 적당히 해. 그리고 형이라 불러.” “네, 형.” 인생은 실전. 괜히 오버해서 400만원을 4천으로 붙인 성구가 잘못이다. 우진은 굳이 그것을 되짚어줄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는 성구의 부모도 보호자도 아니니 말이다. 꽁돈은 꽁돈. 대신 그가 자신의 부하를 자처한다면 손해 본 금액 이상으로 보답해줄 작정이었다. 궁극의 네크로맨서 우진에게도 그 정도의 아량은 있으니까. “길잡이만 잘해. 심부름 잘하고. 무보수로 부릴 생각 없다. 이번 던전 정산해서 10%는 네 몫이다.” 9:1의 비율. 터무니없지만 성구의 얼굴은 기쁨이 가득했다. 그로서는 3성 던전의 도전 자체가 어려웠다. 10%라 하더라도 1성 던전을 몇 번이나 공략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을 만질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형.” 성구는 정말 고마움을 느꼈다. 솔플을 원하는 듯 한 우진에게 매니저라곤 하지만 빌붙으면 함께 던전을 입장할 것 같아서였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3성 던전을 경험해보며 능력을 사용한다. 능력의 연습이나 숙련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진화를 이룰지도 몰랐다. 보다 높은 각성자가 목표인 성구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알면서도 속아준 우진이 고마웠다. “그럼 가자. 시간이 금이다.” “넵!” 우진은 돈 4백에 머슴이 되어준 성구가 고마웠다. * 레벨업! 우진은 순식간에 올라버리는 레벨을 보며 징한 듯 고개를 훠이 저었다. “많긴 겁나게 많네.” 바닥은 라퀴의 시체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놈들은 근처에 생명체가 있으면 무작정 달려들어 수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견고한 방진을 짜던가, 놈들이 모여드는 속도보다 먼저 제거해버리는 것이 유일한 상대법. 우진의 상대법은 괴랄 했다. “감히 나한테 쪽수로 밀어붙여.” “키키키.” 머릿수에는 머릿수로. 우진의 주위에 선 스켈레톤 병사들의 수가 19기에 달했다. 그간 레벨업으로 오른 스탯포인트를 지배에 모조리 몰아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진은 탐색 마법으로 감지되는 라퀴의 사체에 빨간 스프레이를 칙칙 뿌렸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스프레이만 뿌리는 건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와중에 성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형님! 다 캤습니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내려오는 성구는 땀이 흥건했다. 던전 입장을 하고 한 번도 화염구를 쓰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우진이 남기고간 시체 밭에서 혈석을 캐내는 일이었다. 우진이 혈석이 든 몬스터를 지정해주었기에 괜히 빈 깡통을 뒤질 일은 없었으나 그 수가 수인지라 쉴 틈이 없었다. 우진의 사냥속도는 또 얼마나 빠른지 혈석만 캐는데도 뒤쳐진 성구였다. “어, 수고했다. 계속 수고해라.” “헉.” 우진이 만들어놓은 마지막 층의 참상을 보며 성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슬쩍 보기에도 그 수가 수백이다. 그중 스프레이가 뿌려진 것만 하여도 60은 넘어보였다. ‘이, 이게 돈이 얼마야?’ 2성 던전 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드랍률이었다. 성구는 가득 찬 배낭을 벗어두고는 새로운 배낭을 꺼내 들었다. “아이고, 난 좀 쉬어야지.” 우진은 시체밭에서 벗어나 벤치에 앉았다. 귀환석은 마지막으로 죽은 라퀴의 몸에서 나온다. 우진은 성구가 혈석을 캐는 동안 한편에 앉아 캐릭터창을 열어 레벨업으로 생긴 보너스포인트를 모조리 지배에 투자했다. 24의 수치. 5마리를 더 추가로 소환할 수 있었다. ‘이제 레벨 6인가.’ 우진은 레벨 6때 배울 수 있는 스킬들을 훑었다. 작은 불을 만들거나 물주먹 등의 하급 공격마법은 배울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마법들은 클래스에 제한이 있었다. 우진은 하위마법 중에 필요한 마법들을 모조리 구입했다. 업적 포인트 10에서 30사이의 것들. 점점 몬스터에게 사용하긴 힘든 허약한 마법들이지만 마법이란 것이 꼭 몬스터 사냥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자잘하게 실생활에도 유용한 것들이 많아 미리 구입해 익혀두었다. ‘이건 200포인트나 하네.’ <해골 마법사 소환>[제한 : 레벨 10, 마력 20] 시체나 뼈를 재물삼아 [힘 5 민첩 5 체력 5 마력5]의 해골마법사를 소환한다. 힘이 증가할수록 사거리가, 민첩이 증가할수록 연사속도가, 마력이 증가할수록 공격력이 상승한다. 소모마력 : 1, 필요지배력 : 1 업적 포인트 3씩 쌓이는 라퀴들이 워낙에 많아 업적 포인트가 여유 있었기에 스킬북은 바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레벨제한이 있어 아직 배울 수는 없었다. 1레벨에서 9레벨까지는 본래 클래스가 없었다. 그때 배우는 하위 스킬들은 클래스 제한도 없고 대부분 낮은 업적 포인트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10레벨부터 클래스가 생기고 배울 수 있는 스킬들은 대부분 비쌌다. ‘그러고 보니 스탯 작업도 좀 해야 되는데.’ 스탯을 올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레벨업에 따른 보너스 스탯은 말 그대로 보너스. 레벨업을 제외하면 방법은 두 가지. 첫 번째는 반복적 수련을 통한 노가다가 있었지만 시간대비 그 효과가 미비해 잘 쓰이지 않았다. 그저 기대하지 않고 있다 보면 한 번씩 스탯들이 오른다. 두 번째는 약물을 이용한 방법이었다. 일시적으로 스탯을 상승시켜주는 강화약도 있었지만 영구적으로 해당 스탯을 올려주는 영약도 있었다. 우진은 업적포인트 상점을 뒤져보다가 인상을 구겼다. 강화물약이 있긴 했는데 스탯포인트 +1짜리가 2000업적 포인트나했다. 아직은 부담되어 사먹지도 못할 판이다. 대신 영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레시피 - 오크 힘줄 탕.> 재료 : 오크 힘줄 3, 드레빗 꼬리 5, 랫트 송곳니 2 효과 : 힘 + 2 150업적포인트로 팔고 있는 레시피였는데 제법 괜찮았다. 조합방법이야 간단했다. 전승스킬 조합상자를 이용하면 되었다. “형님. 다했습니다. 귀환석도 나왔습니다.” 두툼한 가방을 두개나 가득채운 혈석들을 보며 우진이 씩 웃었다. 못해도 지난 2성 던전때의 5배였다. 아니, 던전의 등급이 높을수록 혈석의 농도도 짙어져 가치가 높다고 하였나? “몇 분 지났어?” “27분 지났습니다.” 우진이 웃으며 일어섰다. “일곱 타임 더 뛴다. 빨리 챙겨.” “헉, 알겠습니다.” 스켈레톤 병사들이 다가와 배낭을 들었다. 우진과 성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달리듯이 입구로 향했다. 예상외의 이른 시간에 그들이 나오자 던전관리국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은 깜짝 놀랐다. 웬 F급 각성자가 겨우 둘이서 10인 기준의 3성 던전에 도전하나싶어 객기로 봤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시, 시간 전에 클리어 하셔도 입장료는 반환되지 않습니다.” 공무원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시간 내내 다시 도전 할테니 걱정마.” “예에?” “말할 시간 없으니 묻지 마슈.” 우진과 성구는 배낭을 들고는 던전의 근처에 있는 혈석매입소로 달려가 모조리 현금으로 교환했다. 5430만원. 단순히 산술적으로 7번을 더하면 오늘 하루만 4억의 돈을 벌게 된다. 그 10%를 받게 되는 성구도 현실감이 없는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543만원.’ 30분 만에 성구가 벌게 된 돈이다. 보통 3성 던전을 풀파티로 공략하면 1몫으로 그 정도를 챙긴다. 하지만 아직 성구의 실력으로는 3성은 커녕 2성 던전이나 겨우 도전할 수준이었다. “대, 대박입니다. 형님.” “또, 형님이냐?” “형님은 너무 위대하셔서 제가 감히 형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실없는 소리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직 7번 더 남았다.” 7번 더 돌면 성구의 몫은 4천만 원이다. 1성 던전을 두 달 동안 뺑뺑이 돌아도 3천밖에 벌지 못했는데 하루만에 4천이라니. “뛰어.” “네엡!” 성구와 우진이 잽싸게 던전을 향해 내달렸다. ──────────────────────────────────── 22화 - 듀얼 클래스 “헉, 헉. 형님 조금 쉬면 안 됩니까?” 우진이야 어차피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비율은 적었다. 라퀴들이야 물량이 무서워 3성의 몬스터로 평가받지 그 자체의 전투력은 별 볼일 없었다. 오죽했으면 라퀴와의 싸움은 몬스터가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지 않나. 지치는 순간 끝장이다. 해골병사는 지치지 않았고, 파괴되면 새로 소환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해골병사의 외형이 변해 있었다. 해골병사의 스킬레벨이 1이 올라 10이 되면서 진화한 것이다. 뼈다귀뿐이었던 해골병사의 앙상한 몸에는 부실해 보이긴 했지만 견갑과 흉갑이 채워졌고 한손에는 작은 방패가 쥐어졌다. 뼈칼은 여전히 무뎌보였지만 전보다 더 뾰족하고 커졌으며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스킬은 많이 사용할수록 스킬레벨이 오른다. 그 외에는 아이템의 도움을 받아 올리거나, 보너스 포인트를 투자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냥은 점점 더 빨라지고, 수월해졌으나 문제는 성구의 체력이었다. 벌써 3시간째 쉬지 않고 혈석작업을 했다. 사냥속도가 워낙에 빨라 성구는 잠깐이라도 쉴 틈이 없었다. 스프레이도 다 떨어졌으나 우진은 언제 배웠는지 마킹마법으로 혈석이 든 몬스터를 표시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진의 다재다능함에 연신 감탄하면서도 체력이 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조금 쉬자.” 성구의 앓는 소리에 우진이 털썩 주저앉았다. 성구도 그 옆에 앉고는 배낭에 달린 생수를 꺼내 우진에게 먼저 내밀었다. 땀범벅에 피로한 표정이 역력한 성구가 자신에게 먼저 물을 주자 우진이 씩 웃었다. “새끼. 넌 장수하겠다.” “예?” “싹수가 있어서 마음에 든다고.” 우진이 생수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건네주자 성구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마냥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햐.” 물이 뼛속으로 흡수되는 느낌이라해야할까? 성구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너부러졌다. “몇 시간 남았냐?” “한 시간 12분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페이스는 더 올랐고 벌써 6번째 던전공략인데 채 3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정산금이 보자… 3억이 넘었네? 거의 4억인가?” 혈석거래소에서 정산된 금액은 일정액의 수수료를 던전의 최초 공략자와 협회가 가지고 나머지 금액은 저절로 우진의 각성자등록 계좌로 입금되었다. 넉다운 된 성구를 보며 우진은 고민했다. 3억 정도면 수아랑 어머니 모실만한 집 정도는 구할 돈이었다. 돈이란 것은 결국 수단이다. 원하는 것을 이룰 도구일 뿐이지 그 자체가 우진의 목적은 아니었다. ‘혈석은 포기한다.’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구가 따라 몸을 일으켰다. “으윽.” “성구야.” “예, 형님.” “지금부터 캐는 혈석들은 전부 네 꺼다.” “예?” “마킹정도는 해 줄 테니 알아서 용껏 캐봐.” “혀, 형님?” “그럼 수고해라.” 우진이 스켈레톤들을 이끌고 아래층으로 달리듯이 내려갔다. “어디, 랩타임 좀 재볼까?” “키키키.” 성구는 멍한 얼굴로 우진이 사라진 계단만 힐끔 거렸다. “혀, 형님?” 우진이 사냥을 끝내기 전에 혈석을 모조리 캐면 5천만 원이다. 이건 목숨 값이고 뭐고, 움직이는 만큼 돈이 벌린다. 힘든 건 잠깐이다. “우오오!” 마킹마법이 사라지기전에 서둘러 단검을 놀렸다. 성구는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미친 듯이 우진에게 따라붙으며 마킹한 라퀴의 시체를 뒤져 혈석을 캐냈다. 몇 시간째 이 짓만 반복하다보니 라퀴 대가리 쪼개는 것은 거의 숙련자 수준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보다 우진의 사냥속도가 워낙에 빨라 고작 한층 아래까지 내려갈 정도면 우진은 벌써 귀환석을 가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아아, 내 돈!’ 밑에 있을 라퀴 시체들을 생각하면 아까워 땅을 칠 일이었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우진을 따라 다시 던전을 나섰다가 입장하길 몇 차례. 던전 이용시간인 4시간 종료까지 20분. 우진은 마지막 층에 진입 전 발길을 멈춰 세웠다. <레벨 업!> <10레벨에 도달하셨습니다. 클래스를 분류중입니다.> 우진이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클래스?” 본래 10레벨에 클래스가 정해지는 게 맞았다. 아르펜행성에서는 네크로맨서가 되었고 말이다. 전승되며 이미 네크로맨서 클래스가 정해진 상태인데……. 눈앞에 나타난 창을 보곤 고심했다. <행동 양식을 분석합니다.> <클래스 선택 중입니다.> <마법사><정령사><전사><사제><트랩퍼>…. 우진은 수없이 떠오르는 클래스들의 향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르펜행성에서 10레벨 때 이미 겪었던 일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클래스가 이미 있다는 것. “듀얼 클래스란 말이지?” 고민해봐야 답은 그것뿐이었다. <클래스 ‘전사’가 선택 되었습니다.> <클래스 선택 보상 전사의 무기가 주어집니다.> 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곤란한데?” 스킬과 스탯은 무관하지 않다. 마력이 필요한 스킬이 있었고, 기력이 필요한 스킬이 있었다. 네크로맨서는 마력과 지배에 특화된 클래스. 그와 어느 정도 겹치는 마법사가 되는 것이 여러모로 이점이 있겠으나 클래스는 레벨 10에 도달할 때까지의 행동방식에 의해 정해진다. 듀얼클래스가 될 줄 알았다면 1레벨부터 그냥 마법만 쓰고 다녔을 것이다. 장도리를 휘두르고 다니는 게 아니라 말이다. “뭐, 별수 없지.” 스탯포인트에 쪼들리겠지만 어차피 보너스 포인트는 네크로맨시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전사 클래스는 말 그대로 하나 덤으로 생긴 것. 그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주력 무기는 아니고 보조 무기 정도. 부족해질 스탯이야 물약이나 영약을 동원해 최대한 올려볼 생각이다. 생각을 정리하자 미련은 빠르게 털었다. “보상이라.” 우진은 즉시 인벤토리를 살폈다. 클래스 선택 시 주어지는 특전보상이 궁금했다. 전사의 특전은 무기인 모양이었다. 네크로맨서일때는 성장형 소환악마를 하나 줬었는데 말이다. “응? 두개네?” <전사 특전 - 전사의 무기> <네크로맨서 특전 - 악마봉인석.> 우진은 씩 미소 지었다. “듀얼클래스… 괜찮은데?” 우진은 전사 특전을 꺼내보았다. 파팟. 파란 상자는 빛과 함께 흩어지며 방망이 하나를 내밀었다. 구블구블한 지팡이처럼 생겼는데 마법사의 지팡이라 하기에는 재질이 달랐다. “쇠, 쇠파이프?” 쇠로 이루어진 지팡이는 쇠 장도리와 닮아있었다. 그간의 전투방식이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강철 지팡이> 전사의 무기는 그의 친구이자 생명과 같다. 전사의 무기는 사용자와 함께 성장한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며 당신의 부름에 준비되어있다. 효과 : 힘 +5, 내구도 회복(해제 상태) 스킬 : 소환, 해제 우진은 손에 든 강철지팡이를 들고 해제를 생각하자 손에서 사라져 버렸다. “소환.” 파팟. 공중에서 뿅 나타나 자신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를 보곤 우진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데?” 언제든지 꺼내들 수 있는 무기가 생긴 것은 좋은 일이다. 더군다나 성장형 무기.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더군다나 인벤토리의 공간도 차지하지 않으니 굉장히 좋았다. 우진은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악마의 봉인석을 꺼내들었다. “이번엔 어떤 놈일까?” 아르펜행성에서는 운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좋았던 것인지 서큐버스가 걸려 전투에서는 영 도움이 되지 않았었다. 그 수다스러움에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파팟. 소환석이 사라지며 연기가 자욱하게 서렸다. 그 연기가 뭉쳐지더니 작은 아이의 형상으로 변했다. 검은 원피스에 레이스 달린 모자를 쓴 귀여운 꼬마 여자아이. “주인님!” “어어?” 우진은 와락 안겨드는 여자아이… 꼬마 악마를 안아들었다. “너… 비비?” “넹, 주인님. 어디갔어쪄요.” 하급 서큐버스 비비의 등장에 우진은 멍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아 비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뭐야? 네가 왜 나와?” “힝, 주인님이 이제야 봉인을 푸셨잖아요.” “허허.” 우진은 골치 아픈 생각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그가 비비에게 물었다. “나와 함께 차원이동 된 건가… 아니지, 봉인이라….” “주인님을 다시 만나서 너무 기뻐요.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샌가요? 꼭 트라넷의 졸개들 냄새가…….” 비비가 가리키는 계단아래는 라퀴들이 있는 마지막 층이었다. “뭐? 트라넷의 졸개?” 트라넷은 아르펜행성을 침공한 악마의 이름이다. 악마가 아닌 재앙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비비의 말에 우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트라넷의 침공이 지구에 미쳤다? 그래서 던전이 생긴 것 이라면…….’ 알 길이 없었다. 묘한 위화감이 우진의 신경을 자극했다. 지옥에서 벗어났건만, 지옥이 도래하려한다. “제니스님이라면 잘 알 텐데. 헤헤.” “제니스?” 현자 제니스. 아르펜행성에서 수위를 다투었던 마법사였으나 트라넷의 침공 이후 스스로 리치가 되었던 마법사. 리치가 되어 200년이나 존재한 그는 아르펜의 역사와 함께했다. 우진이 거느린 권속들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언데드 마법사. 리치.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넹. 저와 같이 봉인의 방에 있었어요. 용용이랑 씽씽이도 있고, 키바님도 있었고, 또…….” “자, 잠깐. 봉인의 방이 뭐야?” “잘 모르겠어요. 소환의 방 같았는데 주인님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이었어요.” 소환의 방은 그의 권속들이 우진이 소환하기 전에 모여 있는 곳이다. 인벤토리와 같은 일종의 아공간이자 권속들의 파라다이스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모두 봉인되어있단 말이지?” “네, 제가 제일 먼저 주인님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우진은 상황을 이해했다. 전승되어진 네크로맨서 클래스. 그의 소환수들이 모조리 자신의 부름을 기다리며 봉인되어있다. 리치소환은 80레벨이 되어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레벨제한에 권속들이 봉인되어 있는 모양. ‘만약 지구가 트라넷의 침공을 받은 것이라면…….’ 던전이 생겨난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위기감이 피어올랐다. 한가롭게 혈석이나 캐며 몬스터를 잡을 것이 아니었다. 아직 인류는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우진은 조금 더 빨리 레벨을 올릴 필요성을 느꼈다. “형니임!”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우진이 비비를 보았다. “넌 들어가 있어.” “힝. 주인님 옆에 있을래요.” “또 부를 테니까 들어가 있어.” “알겠어용. 소환의 방은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파팟. 비비가 한줌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성구가 우다다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어? 형님 방금 여자애 목소리 못 들으셨어요?” “어, 못 들었어.” “어? 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 “저 밑에만 쓸고 오늘사냥은 접자.” 빠듯하게 움직이면 한 타이밍 더 던전을 돌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성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진은 다소 복잡한 얼굴로 스켈레톤 부대를 이끌고 아래로 향했다. ──────────────────────────────────── 23화 - 해머길드 정민찬은 해머길드 제 4지원팀 팀장이었다. 지원 4팀이 하는 일은 3성 이하의 던전에 대한 관리업무와 길드의 신입 각성자 교육, 수련 지원이었다. 출근 후 항상 손수 커피를 내릴 정도로 그는 커피마니아였다. 넓은 사무실에서 여유롭게 커피한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기쁨이자 중요한 의식과 도 같았다. 출근 후 30분. 이때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팀원들도 그의 작은 행복의 시간을 지켜주었다. 띠리리. 막 핸드밀로 원두를 갈던 그는 벨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4지원 팀장 정민찬입니다.” [팀장님. 저 해민입니다.] 김해민은 매봉역 3번 출구에 파견나간 관리요원이었다. 매봉역 3번 출구는 한 달 전 해머길드가 공략하여 관리하고 있는 라퀴 스팟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아침에 던전 4시간 끊고 두 놈이서 들어갔는데요. 이놈들 이거 심상찮은데요?] “죽기라도 했냐?” 던전에서 각성자가 비명횡사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아니요. 무사 공략하고 나왔는데 공략시간이 비정상적이에요. 첫 공략이 30분인데 지금은 11분대에 끊고 있어요. 헐, 방금 나왔는데 지금은 9분 47초네요. 야야, 내가 이겼어. 돈 걷어.] 뒷소리는 작게 들렸으나 민찬은 해민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눈에 선했다. “뭐 하냐, 너?” [아, 그게 10분 안에 끊나 못 끊나 내기해서요. 아 그게 아니라. 이놈 이거 좀 알아보죠? F급 이라는데 제가 볼 때 분명 그 이상이에요.] 확실히 심상찮았다. F급의 각성자 둘이서 라퀴가 나오는 던전을 10분대에 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전화기 옆에 두고. 기다려봐. 알아보고 바로 전화 할 테니. 일단 그놈들 던전 이용시간 지나면 붙잡아둬.” [넵. 팀장님. 수고하십셔.] 민찬은 전화를 끊자마자 협회사이트에 접속해 보내준 정보를 조회해보았다. “뭐야? 어제 등록한 놈이야? 이놈은 두 달 전 등록한 놈이네.” 햇병아리 둘이 3성 던전을 클리어하고 있었다. 그것도 10분 만에 말이다. “네크로맨서와 화염마법사라.” 그들의 특기를 보면 얼추 사냥 스타일이 머릿속에 그려지긴 했다. 이정도면 각성자 등급 측정이 잘못되었거나 일부러 감추었다. 어찌되었든 F급을 한참 초월하는 각성자다. 적어도 C급. 처음부터 C급의 능력을 발휘한 각성자들은 여지없이 고위급의 각성자로 성장했다. 오랜만의 싹수가 보이는 각성자의 등장. “무조건 잡아야지.” 정민찬이 그 좋아하는 커피도 제쳐두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지원 4팀의 주요업무는 3성이하의 던전관리지만 그 던전을 이용하는 각성자들의 스카우트업무도 중요했다. 민찬의 차가 매봉역에 다다랐다. 도로가에 대충 주차한 그가 3번 출구로 향했다. 김해민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반겼다. “어, 형님 오셨습니까?” “업무시간이다.” “아차차, 팀장님. 헤헤 그놈들 들어간 지 8분 지났습니다. 곧 나올 텐데 이놈들 공략시간보면 아직 한 타임 더 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약한 4시간까지 15분여 남은시간. 곧 나올 테니 아마도 한 번 더 도전할 모양이었다. “이놈들 장난 아닙니다. 자기들 정산금만 벌써 3억을 넘었습니다. 어후, 나도 능력만 있었으면 던전 뛰는 건데.” 고위 각성자팀이 도전한다면 3성 던전을 10분에 클리어 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고작 3성 던전을 도전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보다 높은 등급의 던전을 공략하면 3억 따위는 우스운 수준이니까. 그들에게 3성 던전은 단순반복 노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엄청난 자질을 가진 놈이던가, 어디 신분 숨긴 범죄자 던가.” 엄청나게 굉장한 각성능력을 타고나서 고작 며칠 만에 3성 던전을 쓸고 다닐 정도의 F급 각성자라면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어디 신분 세탁한 범죄자라면 이야기가 달랐지만 각성자 관리는 보기보다 엄격해 신분을 속이고 다시 각성자로 등록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범죄자라면 이런 눈에 띄는 짓은 하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왜 안 나오지.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해민은 우진 일행이 10분이 넘었는데도 평소와 다르게 나오지 않자 초조해했다. 던전은 한치 앞도 모르는 곳. 고위 각성자가 하위 던전에서 죽는다하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음, 이러면 이번이 마지막 타임이란 소린데….” 해민은 괜히 초조해 시계를 힐끔 거렸다. 이제 남은시간은 5분여. 한 번 더 도전하긴 모자란 시간이니 마지막 타임이던가, 아니면 영영 나오지 못하던가, 둘 중 하나였다. 다행히 후자는 아니었는지 복잡한 얼굴의 우진과 해탈한 듯 한 성구가 나왔다. ‘하, 하얗게 불태웠어.’ 성구는 두 팔이 끊어지는 듯 아팠지만 등 뒤의 배낭에 가득 담긴 혈석을 생각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려 5천만 원어치의 혈석. 그것이 모두 자신의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었어.’ 매니저를 자처하며 우진에게 붙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이것은 일생일대의 한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그 기회와 같았다. “뭐해? 빨리 가서 정산하고 와.” “넵. 형님.” 정산된 금액을 모두 성구가 받을 것이기에 굳이 우진이 함께 갈 필요도 없었다. 성구가 재빨리 혈석 매입소로 향하려는데 그를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두 분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성구가 대답하지 않고 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2개월 경력의 화염마법사와 2일차 네크로맨서의 이상한 조합. 더 이상한 것은 둘의 관계다. ‘저 사람이 리더군.’ 민찬은 우진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니, 없어.” 언행일치라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있을까? 우진이 면전의 민찬을 지나쳐 걸었다. 당황한 민찬이 서둘러 우진의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저, 저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면 됩니다.” “어차피 시간 뺏을 거면서 왜 정중한 척 물어?”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에 민찬은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이 또라이 새낀 뭐지?’ ‘직설적이군. 요점만 간단히.’ 전자는 그의 감성이 내뱉는 말이고, 후자는 그의 이성이 내뱉는 말이다. 해머길드의 지원 4팀장에 오른 민찬은 감성보다 이성이 앞선 사내. “용건을 먼저 전하겠습니다. 저희 해머길드에서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민찬은 서둘러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한장 건넸다. 우진은 명함을 받아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길드라는 것에 대해서는 재민에게 또, 성구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거절.” 1초도 고민하지 않는 우진의 대답에 민찬은 침음성을 삼키며 겨우 되물었다. “저, 아직 해머길드에 대해 잘 모르시는….” “대한민국 3대 길드라면서?” “잘 아시….” “지금 기분 뭐 같으니까 그만 귀찮게 굴지?” 우진은 트라넷 관한 생각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있는데 귀찮게 굴자 짜증이 났다. 원하지 않는 상대와의 원하지 않는 대화 시간이 유쾌할 리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민찬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워, 지금이 아니라도 꼭 한번 연락 주십시오. 저희 해머길드는 능력 있는 각성자를 귀하게 모십니다.” 민찬이 건네주는 명함을 그저 슬쩍 보고 지나쳐 걷는 우진이었다. 그런 우진을 뒤따르던 성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쩐다.’ 해머길드가 어디인가? 대한민국 3대 길드다. 세계에 내놓아도 20위권에 들어갈 길드. 무려 A급 각성자를 둘이나 보유하고 있는 막강한 길드다. 서울에 깔린 던전의 4분의 1은 해머길드 소유로 그 수수료만 하여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길드다. 그런 길드의 눈에 띄었다는 것은 고속 출세를 보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지원과 팀장이 직접 와서 캐스팅할 정도면 엄청난 관심이라 봐야했다. ‘이런 기회를 발로 차?’ 아까부터 우진의 기분이 영 좋지 못한 느낌이었다. 길드가 보유한 것이 현금뿐일까? 그 수많은 마법과 아티팩트. 그리고 경험들. 각성자로서의 능력향상과 등급 향상이 목표인 성구에게는 꿈과 같은 곳이었다. 민찬은 성구의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일행분과 잘 상의한 후에 연락한번 주십시오.” “아, 네.” 성구가 슬쩍 정민찬 팀장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떠나는 그 둘을 보며 정민찬은 얼굴에 신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들이 혈석매입소로 들어가자 인상을 구기며 욕을 뱉었다. “와놔! 건방져도 정도가 있지.” “맞습니다. 팀장님. 보통이 아닌 놈입니다.” “아아! 눈여겨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도 모자랄 판에!” “맞습니다. 해머길드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도 모르고.” “후우…” 민찬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며 화를 삭였다. 관리국에서 나온 공무원도 있었고 주변에 각성자들도, 매니저들도 있었다. 괜히 날뛰어봐야 꼴만 사나웠다. 민찬이 공무원에게 다가갔다. “보고 할 겁니까?” “예? 보고야 해야 하지만…….” “보고 하지 마시죠?” “예에, 뭐. 그러죠.” F급 각성자 두 명이서 3성 던전을 10분 만에 클리어했다. 이건 등급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기에 따로 보고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공무원은 친 해머길드 인사. 이미 현장직원인 김해민이 구워삶은 지 오래 되었다. “다른 길드에도 따로 정보 주시면 안 됩니다.” “네, 그러죠.” 공무원의 대답에 김해민이 정민찬의 팔을 끌었다. “에이, 팀장님. 일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제가 저 친구랑 소주 한잔하겠습니다. 그보다 저 둘 붙잡을 겁니까?” “그래. 넌 오늘 사무실 복귀해. 저 두 놈 신상 좀 털어봐. 보니까 길드 자체에 관심이 없는 놈들 같은데.” “그렇게 붙잡을 정도로 가치 있는 놈들일까요?” “가치 있고 없고는 잡은 다음에 생각하는 거야. 너 낚시 안 해봤냐?” “낚시요?” “입질이 오면 당기고 보는 거야. 잔챙이면 그때 버리는 거지.” “아하.” “아무튼 알아봐. 적게 알수록 좋아.” 저 정도로 눈에 띄는 놈들이라면 알려지는 건 순식간이다. 하지만 최대한 늦춰야한다. 그사이 해머길드에 입사하면 제일 좋고 말이다.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다 좋은 각성자를 다른 길드에 뺏기면 손해였다. “나, 나옵니다.” 김해민의 말에 돌아보니 혈석매입소에서 우진과 성구가 나오고 있었다. 민찬과 해민이 나란히 서서 온화한 미소를 짓고 그 둘을 바라보았다. * “많이 벌었네.” 우진은 최종 정산된 금액을 보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정도 돈이면 당장 지낼 집을 구하는데 문제가 없어보였다. 각성자 등록을 한지 이틀 만에 이룬 성과였다. 3억 8천만 원. 우진의 통장에 든 잔고였다. 5천이 본래 있었으니 3억 3천쯤 되는 수입. “형님. 존경합니다.” 성구는 10%의 받은 몫과 마지막 우진이 허락해준 혈석까지 모조리 캔 금액이 무려 9300만원이었다. 여태 날린 금액은 생각지도 않는 거금이었다. 이것이 하루 만에 번 돈이라는 사실에 놀랍고 또 놀라웠다. “일단 동네로 가자.” “넵.” 주차장으로 향한 그들은 차를 찾고는 정산소를 지나는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진짜 주차비는 아무것도 아니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4성 던전은 또 다릅니다. 아티팩트 드랍률도 심상찮은 곳이니까요.” 집을 구한다면 급한 것은 끝이다. 당장 돈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레벨업이 목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다시 복잡한 얼굴로 변하는 우진을 보며 성구가 넌지시 물었다. “형님. 그런데 길드 제의는 왜 거절하시는 겁니까? 무슨 다른 이유라도…….” “그냥.” “예?” “안 익숙하거든. 누가 내 위에 있는 거.” “…….” 지배자였던 우진이다. 익숙하기는커녕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다? 웃긴일이다. 피식 웃는 그를 보며 성구는 조용히 품안에 든 명함을 창문 밖으로 흩날렸다. 괜히 뒤에서 명함 받은 것을 들키면 혼이 날까봐 겁이 났다. ‘잘 가라. 해머 길드.’ 조금 울적한 듯 성구는 핸들을 잡았다. ──────────────────────────────────── 24화 - 집구경 우진이 사당에 도착했을 땐 11시쯤이었다. 우진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마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네, 어머니. 그럼 있다 뵙죠.” 우진은 전화를 끊고 성구를 보았다. “3시까지 시간 비는데 밥이나 먹을까?” “영광입니다. 형님.” “오버하지마. 임마.” “헤헤, 진짜 영광입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음. 지구로 돌아온 듯 한 맛집?” “…….” 위기다. 맞받아칠 드립이 생각나지 않는다. 머리야 돌아라. 성구는 가까스로 침묵이 길어지기 전 대답을 뱉었다. “하하하, 유기농 한식집으로 모실까요? 제가 아는 데가 있습니다.” “음. 저기로 가자.” 창밖을 보던 우진이 가리킨 곳을 보곤 성구가 눈을 비볐다. “저길 말입니까?” “그래.” [김밥세상] 성구는 속으로 자책했다. ‘돈 좀 만졌다고 헤퍼지다니. 형님은 이리도 알뜰하신데.’ 우진과 성구는 김밥세상 앞에 주차하고는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시켰다. 우진은 참치김밥과 라면을 시키고는 아주 행복한 얼굴로 그것을 음미했다. ‘이거지. 이거야.’ 옛 고3시절. 그리고 그 이전의 추억들. 그때가 느껴지는 맛이다. 2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네크로맨서가 고3의 지구인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후룹, 형님, 그런데 다음 던전은 어디로 알아봅니까?” “음. 몬스터목록 같은 것 없냐? 1성 2성 레벨별로 정리되어 있으면 더 좋고.” “당연히 있지 말입니다.” “그거보고 결정하자.” “넵. 그럼 있다 카페가면 제가 정리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진과 성구는 엔젤엔젤로 향해 커피를 주문했다. 성구가 우진을 힐끗 보더니 종업원에게 말했다. “여기 지구의 맛이 느껴지는 뭐 그런 느낌의 느낌적 메뉴가 뭐 있을까요?” 성구의 질문에 종업원은 별 미친놈을 보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성구가 우진을 돌아보니 그도 자신을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너 취향 이상하다. 난 카페모카.” “…….” 우진이 그리 말하고는 먼저 자리에 가 앉자 성구가 뻘줌한 얼굴이 되었다. “아메리카노 하나랑 카페모카요.” “네. 9800원입니다.” 우진은 성구가 진동벨을 가져와 앉자 슬쩍 물었다. “요즘 커피 값 장난 아니네.” “거의 밥값수준이죠.” 우진은 카페 내부를 훠이 둘러보았다. 전에 왔을 땐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가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깜짝 놀랐다. 국밥이 6천원인데 커피 값이 비슷한 수준이라니…. 사람들이 적은 것도 아니라. 이 큰 카페의 절반이 손님이 앉아있었다. 우진이 넌지시 물었다. “이런 거 하나 하려면 얼마쯤 하냐?” “카페요? 잘은 모르겠는데. 한 10억쯤 하지 않을까요?” 임대료가 얼만지는 모르지만 총 3층의 대형 카페다. 이런 쪽으로 어두운 성구기에 대충 넘겨짚어 답했다. ‘어머니 하나 해주면 좋겠는데.’ 커피 값도 비싸니 장사도 잘될 것 같고, 식당일보다는 덜 고되 보였다. 오늘 하루 3억 벌었으니 3일 바짝 벌면 10억이야 벌지 않겠는가. 우진은 편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집 사고 나면 더 이상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 레벨업을 위해 던전이야 앞으로도 계속 공략할 터이니 돈이야 모이기 마련이다. 쓸데도 없는 돈 그냥 어머니 편하게 소일거리 하시라고 이런 가게하나 차려주면 어떨까 싶었다. 뿅뿅, 뾰로로롱. 우진이 달달한 카페모카를 한 모금 빨아 당기며 폰게임에 열중하는 사이 성구가 자신의 테블릿pc로 자료를 띄웠다. “형님. 여기 있습니다.” “어디보자. 이거 어떻게 넘기냐.” “스마트폰하고 똑같습니다. 형님.” 우진은 화면을 위로 올리며 몬스터 목록을 보았다. 3성의 라퀴를 비롯해 2성 몬스터인 고블린이나 코볼트들의 몬스터들이 별의 개수대로 분류되어있었다. 아예 몬스터의 분류를 1~3성의 몬스터를 하위 몬스터 4성 이상부터를 상위 몬스터로 분류하고 있었다. 4성의 가장 기본적인 몬스터가 트롤이었다. 민첩한 행동력과 도구를 이용하는 지성, 거기에 괴랄 한 재생력까지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몬스터가 아니었다. “4성부터는 던전 생김새도 조금씩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직접 가본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3성 던전까지는 지하철 본연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4성 던전부터는 지하는 다른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입구는 그저 게이트의 역할만 할뿐. “뭐, 가보면 알겠지.” 우진은 4성 레벨의 몬스터들을 쭉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레벨을 가늠했다. ‘이정도면 가능해.’ 상다하기 쉬운 몬스터들도 있었고 까다로운 놈들도 있었지만 4성까지의 몬스터는 할 만하다 느꼈다. 레벨을 올리자면 하위의 던전을 도는 것보다는 상위의 던전을 미리미리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별은 누가 매기는 거냐?” “그거 측정 수치인데요.” “뭘 측정해?” “던전 에너지요.” “그런 게 있었어?” “네. 던전 리셋되면 던전 에너지부터 측정해요. 그래야 견적보고 어떤 팀들이 도전하던 도전할 테니까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은 몬스터에게 매긴 것이 아니라 던전에 매긴 것이었다. 그 등급의 던전에 자주 출몰하는 몬스터를 분류한 것뿐이고 말이다. 2성 던전에 3성급의 몬스터인 홉고블린이 출현한 것이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었다. “일단 경험삼아 한번 구경하게 4성 던전으로 알아봐.” “4성 던전부터는 줄 설 필요없이 예약할 수 있으니 스케쥴 빈곳 있는지 알아볼게요.” 우진은 성구에게 4성 던전부터 생기는 필드형 던전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들으며 시간을 때웠다. 우진과 성구는 약속한 시간이 되자 카페를 나섰다. “형님. 이런 자잘한 일들은 제가 대신해드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아니다. 어머니가 살 집인데 어머니가 보셔야지.” “네, 형님. 그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주십시오.” 깍듯이 인사하고 멀어지는 성구를 보며 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은 머슴 얻었네.” 우진은 가끔 오버스럽지만 싹싹한 성구가 마음에 들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승미식당으로 향했다. 카운터에 앉아 열심히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던 승미는 신기록 달성중임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을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섰다. “어머, 오빠. 오셨어요? 식사는요?” “응. 먹었어.” “커피 드릴까요?” “아니야. 바로 나갈 거야. 어머니는?” “잠시 만요. 제가 불러 드릴게요.” 승미가 안쪽의 주방에 들어가 보니 이수경은 다른 아주머니들과 함께 점심시간이라 한창 바빴을 때 쌓였던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어머, 어머님. 우진오라버니 오셨어요. 얼른 나오셔요.” “으, 응. 승미씨. 이것만 하고.” 이수경은 어색한 대꾸에 동료 아주머니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아휴, 이씨는 좋겠어. 아들이 돈을 얼마나 잘 벌길래 집까지 알아보러간다 그러고.” “돈 버는 게 아주 그 양코양반 뭐냐, 닐 게이츠여.” “아이고, 맞어. 나도 들어봤어. 그 닐인지 뭔지가 돈을 그렇게 많이 번다는데. 우진이가 딱 그 짝이여.” “맞아. 부러워 주겠어. 우리 아들이 우진이만 같았으면 난 당장 일 관뒀어.” “어여 가봐. 아들 기다릴라.” “그래도 하던 건 하고 가아죠.” 동료 아주머니들의 칭찬에 이수경은 괜히 쑥스럽게 웃으며 설거지를 끝마쳤다. 없이 살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든든한 아들이 생기자 식당일도 힘든지 모를 요즘이었다.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나오신데. 오빠 여기 앉아서 잠깐 기다려.” “그래.” 승미가 당겨주는 의자에 앉은 우진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승미를 보며 물었다. “뭐 하냐, 너?” “헤헤, 오빠 얼굴 구경.” “어우, 못생긴 게 그러니 조금 부담스럽다야.” 우진의 돌직구에도 승미의 얼굴은 부드럽기만 했다. “어쩜. 박력도 그대로야.” “어휴, 커피나 한잔 타와봐.” “네, 오빠. 오빠가 부담스럽다면 조금씩 아껴서 볼게요.”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싫다 해도 뻔치 좋게 자신에게 들이대던 승미와의 추억이. 우진은 그녀가 가져다준 믹스커피를 홀짝이는 사이 어머니가 나오셨다. “아들 왔어?” 이수경여사의 뒤에는 마치 남의 집 귀한 아들 구경이라도 하듯 따라 나온 동료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우진이 헛기침을 했다. “험, 가시죠.” “응, 그런데 돈도 없이 갑자기 집 알아본다니 무슨 말이야?” 은근히 기대하고 물어오는 어머니를 눈망울을 보며 우진은 고소를 머금었다. 뭐,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괜찮겠지. “없긴요. 오늘 입금 된 거에요.” 우진이 스마트폰의 문자를 보여주자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이수경도 깜짝 놀랐다. 집을 옮기자 길래 한 5천정도 모은 줄 알았다. “사, 사, 삼억?” 이수경의 더듬는 소리에 승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잔액을 살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우와. 대박. 3억 8천이야! 각성자 짱이다!” 각성자가 돈을 많이 번다. 번다 소리만 들었지 눈앞에서 보게 되자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놀라긴 우진의 어머니인 이수경도 마찬가지인지라 어안이 벙벙했다. “아유, 이씨 장한 아들 뒀네. 워매 하루 만에 억 소리 나게 벌어 부러네.” “하이고, 닐이고 뭐고 보다 그 누구냐. 이잉, 만숙이 안부럽구먼.” “만숙이는 또 누구여?” “아, 그 왜 있잖은가, 저짝 코 큰 동네에 석유파는 양반.” “이잉, 나도 들어봤어야. 김씨는 참말로 유식혀.” “호호호, 이씨 그동안 내숭은! 아들이 어디 가서 게임만 하고 왔다고 속상하대놓고서는.” “일 관두는 게 뭐야. 식당을 차려도 되겠네.” “이씨 식당 차리면 꼭 말혀. 나 거기 가서 일할랑께” 이수경은 수다스러운 동료들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우, 우진아?” “가시죠? 집 보러.” 우진이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 우진은 어머니를 모시고 부동산 중개사의 안내를 받으며 집들을 둘러보았다. 보는 집집마다 이수경은 꿈에 젖은 듯 행복한 얼굴이었고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 너무 마음에 드는 집들이 많아 고르기 힘들 지경이었다. 어디든 지금의 원룸에 비할까. 아니, 이전에 우진이 행방불명되기 전에 살았던 집들보다도 좋았다. 그때엔 3억으로 전세도 꿈도 못 꿀 집들이 지금은 살수가 있었다. 집 고르기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 난관에 부딪혔다. “흥, 이집은 별로야.” 유치원 하원시간이 되어 데려와 함께 집구경에 동참한 수아는 뭐가 그리 심통한지 보는 집마다 심술을 부렸다. “수아, 왜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집은 강아지 못 키우잖아. 엄마가 약속했잖아. 집 이사하면 꼭 강아지 키우게 해준다고.” “어머, 얘가.” 이수경은 작년쯤 수아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는걸 집이 좁아 힘드니 다음에 이사하면 키우게 해주겠노라 약속했었다. 그게 벌써 언제 적인데 아직도 기억하는 수아를 보자 난감한 얼굴이었다. 우진은 수아의 그런 모습까지도 귀여운지 흐뭇하게 웃으며 중개사에게 말했다. “아파트는 안 되겠네요. 주택으로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하지만 단가가 쪼금. 하하.” “뭐, 일단 보죠.” 몇 개의 매물 중에 가족들의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우와! 집 좋다.” 수아가 방방 뛰며 좋아하는 집은 작은 마당이 딸린 2층집이었다. 사당역의 던전브레이크 이후, 생겨난 부지에 새롭게 조성된 전원주택단지였다. 몬스터의 난동으로 아파트가 무너지는 일도 비일비재했기에 공지에는 주택단지가 인기였다. “이집으로 하죠.” 시원시원한 우진의 결정에 중개사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급매물로 나와 시세보다 싸긴 하지만 그래도 6억 3천입니다. 고객님 생각하시는 액수와 꽤 차이가 나는데…….” “괜찮아요. 계약하죠.” “그럼 사무실로 돌아가실까요?” 부동산 중개인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에서 만날 약속을 잡는 사이 우진은 성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성구야. 나 집사는 돈이 조금 모자라다. 좀 빌려주라.” […….] 줬다 뺐는 것이 제일 나쁜 건데…. [저, 형님 저 뭐하나 사려고 계약 중이었는데…….] “싫다는 거지?” [아닙니다. 돈을 빌려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형님.] 우진이 피식 웃었다. “다음 던전 정산 때 이자 쳐주마.” [감사합니다. 형님.] 깔끔하게 모자라는 돈을 해결한 우진이 부동산 사무실로 향했다. ──────────────────────────────────── 25화 - 꼬마악마 비비 이사날짜는 보름 뒤로 잡혀졌다. 계약금과 중도금을 지급하고 잔금은 이삿날 처리하기로 하여 우진은 굳이 성구에게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다. 고3때 아르펜행성에 소환된 우진이다. 그쪽에서야 부동산 계약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그가 가는 곳이 그의 땅이었고, 잠드는 곳이 그의 집이었다. 자그마치 20년. 이런 소소한 계약 따위는 해본 적이 없으니 중도금이니 잔금이니 하는 것도 몰랐던 우진이었다. 집을 보러 다니느라 이미 해가 저문 지 오래였다. 근처 식당에서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수아도 지쳤는지 잠들어버렸다. 수아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 뉘이자 이수경은 아들과 헤어지기 못내 섭섭한 얼굴이었다. “이사전까지라도 같이 지내지 그러니.” “아니에요. 이제 곧 같이 지낼 텐데요, 뭐.” 우진도 그러고 싶었다. 20년을 고대한 가족과의 만남이었는데 왜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가족이기에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집을 구한 것이고 말이다. 불편해 하는 것 같은 아들을 좁은 집에서 억지로 자라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차마 잡지 못했다. “그래. 일 그만두는 데로 그 같이 산다는 동생한테 반찬이라도 좀 해주마.” “에헴. 그럼 이 아들 체면이 좀 서죠.” 아들의 넉살에 이수경이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 떨쳤다. 아들이 돌아온 것만 하여도 꿈만 같은데 꿈같은 일들이 너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 내일 또 뵐게요. 며칠 내로 일 관두세요. 수아 유치원 보내고 정 심심하시거든 카페라도 하나 내드릴게요.” “어머, 얘는. 난 너랑 수아랑 매일 밤 같이 저녁만 먹어도 행복할 것 같구나.” “저도 그래요.” 우진은 잠들어 버린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봬요. 어머니.” “그래. 내일보자. 아들.” 우진은 어머니와 아쉬운 작별을 마치곤 재민의 집을 향해 걸었다. “후, 그래도 다행이네.” 우진은 매일 밤 악령에 시달린다. 그래서 잘 잠들지 못한다. 이것은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저주였다. 다행이라면 이 고통에서 조금 해방될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우진은 길을 걷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비비, 나와.” 휘리릭. 우진의 부름에 바람이 불어오는듯하더니 검은 연기가 실체화 되어 뭉쳐졌다. 뭉쳐지는가 싶던 검은 연기는 다시 흩어졌다 몇 번 더 뭉쳐져 실체화 하려다가 흩어지더니 어딘가로 휙 가버렸다. “뭐야? 비비. 나와라.” 휘리릭. 더 깊숙한 골목 어귀로 사라졌던 검은 연기는 이내 우진의 앞에서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보다 더 작은 크기. “냐아.” 비비가 실체화한 모습은 작은 꼬마악마가 아니라 고양이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작은 아기고양이. “뭐야? 왜 그래?” “냐아, 실체화가 안된다옹. 할 수 없이 작은 생물을 탐색했다옹.” 우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여긴 어디냐옹? 트라넷의 영향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옹.” 우진이 비비를 안아들었다. “너 그 모습으로 능력은 쓸 수 있냐?” “냐앙, 주인님이 쪼렙이라 나도 쪼렙이다옹. 아직 악몽밖에 못 쓴다옹.” 우진의 권속들도 레벨이 있었다. 우진이 전승되면서 권속들의 레벨 또한 초기화된 듯 했다. 비비는 하급 서큐버스. 기본 능력인 악몽실현은 실체화모습과는 상관없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것만 쓰면 됐어.” 어차피 비비가 레벨이 올라도 그 이후에 나올 능력들이야 딱히 우진에게 필요한 것들은 없었다. “냐앙, 여기 냄새 좋다냥. 평화의 냄새.” 악마주제에 평화를 바라는 비비의 말에 고소를 머금었다. “오히려 잘됐네. 이러면 같이 지내도 문제없겠다.” “정말이냥? 소환의방에서 안기다리고 주인님과 같이 있어도 되냐옹?” “그래. 대신 말하지 마.” “냐앙. 그 정도는 이미 안다냥. 고양이가 어떻게 말하냐옹.” 눈치 빠른 비비가 알아서 잘할 것이다. 비비는 우진이 잘 때 큰 도움을 준다. 악령의 저주보다 차라리 악몽을 꾸는게 낫다면 너무 변태같은 것일까? 우진에게 비비는 중요한 존재였다. 어린 악마모습 그대로였다면 지구의 도덕적 관념에서 볼 때 조금 문제가 있었겠지만 고양이의 모습이라면 문제없다. 밤에 함께 자도 누가 뭐랄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수아가 개 키우고 싶다고 했었는데……. “너, 개로 변신은 안 되니?” “냐앙, 실체화 모델을 이미 정해서 못한다옹.” “음….” 뭐, 고양이도 좋아해줄 수도 있지 뭐. * 학원이 끝난 시간 재민은 집으로 향했다. “어, 누나. 조심히 올라와. 그럼 학원 앞에서 만나.” 오늘은 금요일. 내일 누나가 집으로 오는 날이다. 띠띠 띠, 띠로리! 문이 열리고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방안을 살피니 역시나 우진이 침대에 걸터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귤을 까먹고 있었다. “하하하, 왔냐?” 재민의 등장에도 우진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있었다. 누가 보면 같이 산지 한 1년은 되어보였다. 아니, 친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자연스러움. 그런데 오늘은 우진 혼자만이 아니었다. “혀, 형. 그건 뭐에요?” 재민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양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단침입… 이라기엔 50만원이 크긴 하지만, 어쨌든 얹혀 지내는 주제에 애완동물까지 데려오다니! “아, 오다 주웠어. 키우려고.” “허허. 고양이라니. 털, 털, 냄새, 냄새…….” 재민이 허탈한 얼굴로 힘없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가방을 벗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건 아니잖아.’ 어차피 내일 누나도 온다. 자신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누나가 마련해준 소중한 원룸에 다른 남자를 들인 것도 못마땅한데 주인의 허락도 없이 애완동물까지. 이건 분명 도를 넘은 행위다. 집 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을 때였다. 재민이 마신 물잔을 식탁에 ‘탁’소리가 나도록 내려두었다. “형!” “어, 식탁에 숙박비 좀 더 놔뒀다. 하하하, 겁나 웃기네.” “…….” 우진은 티비 속에 빠져있다시피 했다. 재민이 슬쩍 식탁위의 봉투를 열어보았다. ‘사, 사, 삼백?’ 생각지도 못한 거금에 재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돈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재민의 시선이 다시 우진에게로 향했다. “재훈재훈, 이거 사주면 안댐? 푸히히.” 텔레비전에 푹 빠져있는 우진의 모습만 보자면 영락없는 동네 건달 형이나, 백수 형인데 돈 씀씀이는 금수저 그 자체였다. 아니, 이렇게 헤픈 금수저도 있던가. “냐아.” 우진의 옆에서 같이 귤을 받아먹는 고양이는… 어? 고양이도 귤 먹어? “뭘 그렇게 서있냐? 너도 와서 귤먹어. 이거 정말 맛있다.” 아르펜행성엔 사과나무는 있지만 귤나무는 없었다. 원래 귤을 좋아하던 우진인데 마침 거리마다 심심찮게 팔고 있어 눈에 보일 때마다 사오는 우진이었다. 재민이 아무 말 없이 우진의 곁에 앉았다. “아, 재밌네.” 개그프로의 코너가 끝나자 그제야 눈을 떼고 재민을 돌아보는 우진이었다. “재민재민, 왜, 그리 죽을상이냐? 재민재민.” 이 형은 왜 이렇게 인생이 유쾌할까? 잔걱정을 달고 사는 자신이 이상해보일 지경이었다. “재민재민, 용돈 필요하냐? 재민재민.” “…….” 우진이 지갑에서 꺼내는 5만원 다발을 보곤 재민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누나에게 카톡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누나. 내일은 누나가 호텔에서 자야겠어…] “재민재민, 용돈 받아라. 재민재민.” “고맙습니다. 형, 고양이 이름은 뭐에요? 참 예쁘네요.” 봄날의 눈 녹듯 부드럽기 만한 재민의 목소리였다. * 휘이익. 성구는 휘파람을 불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어깨춤이 춰지는 기분이었다. “히야. 이게 내 차라니.” BMW 5시리즈. 더 무리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4성 던전의 입장료 등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현금을 남겨 두어야했다. 어제 영업소를 찾아 계약할 땐 간이 쫄렸었다. 일시불로 계약하려는데 우진에게서 전화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60개월 할부로 계약하고 오늘 인도받았다. 틴팅을 마치고 나니 12시. “흐흐, 붕붕아. 그럼 달려볼까?” 홍성구. 21세. 인생 처음으로 갖게 되는 차인지라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친구들에 비하면 굉장히 좋은 차. 아니, 애초에 친구들 중에 차를 가진 놈도 몇 되지 않았다. 부우웅. 마티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출력과 간지에 성구의 기분은 한껏 업 되어갔다.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 점심을 먹고 나니 2시. 우진을 픽업하러 갈 시간이었다. “오늘도 힘차게 가볼까?” 3성 던전에서 4억을 뽑아내는 무시무시한 각성자다. 보통 한 타임에 5천정도의 수준인 3성 던전에서 그 정도니, 4성 던전에서는 또 어떤 활약을 할지……. 성구에게 우진은 로또나 다름없었다. [오빠차 뽑았다. 널 데리러 가~] 성구는 음량을 높이며 사당역으로 향했다. 우진은 성구의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왔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야. 너 차 샀냐?” “하하, 형님을 좁은 마티즈에 태우는 것이 송구스러워 마련했습니다.” “아참, 돈 안 빌려줘도 돼.” “네?” “보름 후에 잔금 치르기로 했어.” “…….” 누구 때문에 60개월 할부로 계약했는데…. 조금 일찍 말해줄 것이지. “아쉽습니다. 형님을 위해서라면 전재산이 아깝지 않은데.” 우진은 이제는 익숙해진 성구의 아부를 흘리며 차를 구경했다. “이야, 차 좋다.” 우진은 조수석에 타고는 신기한 듯 차 구석구석을 만져보았다. 차의 오너, 성구는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아, 손기름.’ 차마 말은 못하고 웃는 얼굴로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 우진은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꾹꾹 눌렀다. ‘안돼에!’ 성구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우진의 손은 거침없었고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뭐해? 출발 안하냐?” “…네.” 어차피 더러워질 거였다. 새차가 헌차가 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고, 그것은 자연의 섭리. 성구는 속으로 염불을 외는 심정으로 셀프 멘탈케어를 진행 중이었다. “예약 몇 시랬지?” “5시입니다.” 4성 던전은 미리 계약금을 걸고 예약제로 던전을 이용한다. 미리 가서 기다릴 필요도 없이 예약만 해놓으면 된다. 인기 있는 던전은 일주일치 예약이 꽉 차있기도 했다. 던전리셋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일주일 이상의 예약은 받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이번엔 어디야?” “과천역 6번 출구입니다.” 어? 고등학교 근처네. 우진은 처음 실수로 들어갔던 과천역 1번 출구를 떠올려보고는 피식 웃었다. 둘을 태운 새 차가 과천을 향해 달렸다. ──────────────────────────────────── 26화 - 4성 던전 “팀장님. 얘들 과천역 6번 출구 예약했는데요?” “어디 길드꺼냐?” “화랑길드겁니다.” 정민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들 하는 것 보면 영락없는 초짜들인데.” 4성 던전은 F급 각성자가 도전할 수 없다.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고 무작정 예약하고 가는 것을 보면 아마추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한 그들의 능력이 더욱 궁금했다.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고작 둘이서 4성 던전에 도전한단 말인가? “그 근처에 우리 4성 던전 없어?” “있습니다. 청사역 11번 출구입니다.” “바로 옆이네. 그 시간에 예약 있나?” “음. 이번에 신입들 훈련이 거기에 잡혀있습니다.” “다른데 알아보고 거긴 스케쥴 비워둬.” “예?” “고기를 잡으려면 밑밥을 깔아야 할것 아냐. 밑밥을” 맨날 낚시이야기. 김해민이 속으로 꿍얼거리면서도 스케쥴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있다 나랑 과천 좀 가자.” “네이, 네이.” “쓰읍. 난 사장 보고 간다. 준비 다 해둬.” “눼이, 눼.” 장난스레 대꾸하는 해민을 괜히 한대 친 민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싸가지는 없지만 해민은 팀에서 가장 믿을만한 놈이었다. 눈치 좋고 일처리도 빠르고 말이다. * 우진과 해민은 예약한 시간에 과천역에 당도하곤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다. “아니, F급 각성자가 무슨 4성 던전이에요. 그것도 겨우 둘이서.” “아, 괜찮다니까요? 정말 자신 있어서 그러는 거에요.” “글쎄, 안된다니까요.” “아저씨보고 책임지라 안 그래요. 걍 들여보내주세요.” “자살하려면 한강을 가세요. 왜 여기 와서 그러세요. 안됩니다. 규정이 그래요.” 무조건 막아서는 관리국 직원을 보며 성구는 난감한 얼굴이 되어 우진에게 돌아왔다. “혀, 형님. 안되겠는데요? 죄송합니다. 제가 꼼꼼하게 알아봤어야 했는데.” 성구는 어제 차 계약을 하며 너무 들떴었다는 것을 자책했다. 전보다 수입이 월등히 늘었지만 어디까지나 우진이 자신의 수익을 양보해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뭐, 별수 없지.” “예약금은 제가 메꾸겠습니다.” 예약에만 200만원을 들였다. 예약 관리자도 설마 F급 각성자 둘이서 던전을 레이드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냥 말단이 대신 예약한다고 생각하고 받아줬겠지.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오늘은 공쳤네. 내일 관리국가면 갱신이나 해야겠다. 근처 어디 3성 던전이나 한번 알아봐.” “넵.” 미안한 얼굴의 성구가 잽싸게 움직이려 할 때였다. “이런, 여기서 또 뵙게 되는군요?” “어?” 정민찬은 놀랍다는 얼굴을 하고는 우진과 성구에게 다가왔다. “이런 우연이 있나, 실례지만 무슨 일이신지? 가능하다면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구가 사정을 전하자 민찬이 고심하는 얼굴로 슬쩍 우진의 눈치를 보았다. 우진은 정민찬의 속내가 빤히 보여 피식 웃었다. 우연은 개뿔. 우진이 성구에게 턱짓했다. 이야기나 해 보라는 의미. 성구가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한정거장 옆에 저희 길드의 던전이 있습니다. 그곳을 이용하게 해드리죠.” “어? 혀, 형님?” 성구가 결정을 바라며 우진을 돌아보았다. 우진이 슬쩍 물었다. “대가없는 호의는 없죠.” “그저 호감의 표시입니다.” 민찬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자 우진이 따라 웃었다. “고맙게 써주죠.” “시원시원 하시군요.” 민찬이 우진을 보며 미소지었다. 어제보다는 부드러운 반응. 아니, 애초에 싸이코도 아니고 어제의 반응이 이상했다. “하하, 따라오시죠.” 민찬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우진과 성구를 에스코트했다. 그들이 떠나자 화랑길드의 파견 직원은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방금 정민찬이 와서 F급 각성자 둘을 웬 귀빈 모시듯이 데려갔습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 그, 방금 F급 둘이 와서 4성 던전 들어간다고 강짜 부리는 거 실랑이하고 있었는데 해머길드 그 고상한척하는 팀장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F짜리 둘 데리고 갔어요. 아니 모셔갔어요.” [정민찬이 그놈이 움직였다면 냄새나는데…….] “그쵸? 이거 저놈들 뭔가 있는 놈들 같은데요? F가 4성던전 도전하려는 것도 그렇고.” [일단 끊어. 알아볼 테니.] 화랑길드의 지원팀장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과천역과 과천시청사역은 그리 멀지 않았다. 잠깐의 담소를 나누며 걷자 곧 도착할 수 있었다. “길드에 가입하면 이런 자잘한 일들은 미연에 방지 할수 있죠. 더구나 각성자 등급 올리는 건 순식간입니다. 저희 길드는 각성자에 대한 지원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민찬은 잠깐 걷는 그 사이 해머길드의 장점에 대해 수없이 어필했다. 우진은 알고 있었다. 그의 호의에 대한 대가가 저 수다를 들어줘야하는 것임을. 그래서 그냥 들어줬다. “거참. 편하겠는데?” “정말 편하죠. 돈이면 돈, 아티팩트면 아티팩트 원하는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죠.” 대충 맞장구도 쳐줬고. “해머길드원들은 참 좋겠어.” “하하하, 이제야 저희 길드를 알아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대충 여지도 주고. “아, 이런 금방 다 왔군요. 던전은 편하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이용료는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도 호의?” “물론입죠.” 4성 던전은 이용료만 해도 어마어마한 액수를 자랑했다. 그것을 아예 받지 않겠다는 것은 상당한 호의였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받았다. “고맙게 쓰죠. 그럼 저 공무원은요?” “저희가 우진님과 성구님의 등급조정을 빠르게 처리해두겠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네요.” 우진의 대답에 민찬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대가없는 호의란 없다. 아니, 대가를 바라지 않더라도 호의엔 마음의 빚이 따른다. 밥 한끼 얻어먹어도 다음엔 한번 사줘야 되나 부담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적어도 우진이 다른 길드보단 해머길드를 더 생각해 줄 것이다. 빚을 지울 때는 확실히 지게 해야 하는 법.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두 분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어우, 뭘 또 선물씩이나.” 우진은 전혀 거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민찬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각성자로서 잠재능력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 우진 이지만 24살의 햇병아리일 뿐이다. 사회생활을 못해본 티가 났다. 준다고 덥석덥석 받고 말이다. 민찬은 확신했다. 이제 상대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민찬이 직접 선물을 가지러 근처에 주차했던 차로 돌아갔다. 그사이 김해민이 둘을 보며 친근히 말을 걸었다. “헤헤, 우진씨는 어제랑 영 딴판이시네요.” “응? 뭐가요?” “어우, 어제는 말 걸기도 무섭더라구요.” 해민의 넉살에 우진이 웃었다. 어제야 트라넷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서 그랬었지. “어제는 기분이 좀 그랬죠.” “헤헤, 기분파신가 보군요. 오늘 보니 성격 좋아 보이시네, 마치고 소주나 한잔?” “그거 좋죠.” 아, 소주야 언제든 환영이지. 해민은 눈치껏 우진과 성구를 칭찬하며 그들의 기분을 맞추려 애썼다. 성구는 그런 그들을 보며 혼자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옆에서 아부해봐야 우진이 길드에 가입하려고 할까? ‘저 양반들 헛물켜고 있네. 쯧쯧.’ 성구는 민찬과 해민이 불쌍한 기분까지 들었다. 일부러 장단을 맞춰주는 우진이 사악해 보인다고 하면 양심 없는 거겠지. 역시 형님의 저런 모습은 멋지시다. “아, 기다리기 지루한데. 선물은 갔다 와서 받는다고 전해줘요.” “아,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갔다 와서 보죠. 소주나 한잔 하면서.” “헤헤,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우진이 성구와 함께 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예약시간 넉넉하니 화이팅 하십셔.” 우진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결계 안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김해민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다가 섬뜩한 기분에 자라목을 하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 심장아. 잔뜩 인상을 굳힌 정민찬 팀장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하냐, 너?” “배, 배웅하는데요?” 정민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내가 선물 가지러 간다고 안했냐?” “하하, 어차피 클리어 때까지 기, 기다리실 거 아니었습니까? 나오면 주죠.” 해민의 말에 정민찬은 욱하고 손이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가 들고 왔던 가방을 바닥에 툭 놓았다. 커다란 스포츠백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무게가 상당해 충격으로 지퍼가 찢어지며 내용물을 드러냈다. 정수필터와 응급의료도구, 옷과 탐색기 그리고, 귀환석의 위치가 드러난 지도와 던전의 정보가 든 공략집까지. ‘생존 킷?’ 1~3성 던전을 하위 던전. 4~6성 던전을 상위 던전이라한다.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하위와 상위는 그 구조 자체가 달랐다. 정민찬이 준비한 선물은 다름 아닌 생존 킷이었다. “F급이 상위 던전 도전하겠다고 온 놈들인데 상위 던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왔을까?” “그, 그야…….” 해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4성 던전의 권장 도전 등급은 C급을 팀장으로 한 D급 정도의 각성자 팀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도전한다면 그보다 더 높은 등급의 각성자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고작 둘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던전에 들어갔으니. “이건 호의로 보내준 게 아니라 사지로 몰아넣은 거나 다름없다.” “…….” 정보 없이 4성 던전이라… 끔찍한 일이다. 해민이 눈치 보며 말했다. “사, 살아 돌아 올수도 있지 않을까요?” “맨몸으로 밀림에서?” “…….” 해민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럼 선물이라 그러지 말고 생존킷 챙겨가라고 할 것이지. 민찬과 해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 팀장님. 만약에 말입니다.” “뭐?” “저들이 살아 돌아온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야…….” 맨몸에서 밀림에, 그것도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그것도 팀이 아닌 둘이서……. “최소 B급 이상.” 말을 뱉은 민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우리길드에 호의는커녕 적의만 가득하겠지.”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그대로 사지로 몰았다. 아니, 함정을 파고 밀어 넣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각성자 관리국에서도 문책을 당할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F급 각성자 둘을 4성 던전에 던져 넣은 꼴이니까. “후우. 지금 빨리 각성자 등급 조정이나 바꾸라 그래.” 정민찬의 한숨소리가 해민을 더욱 주눅 들게 만들었다. * <과천시청사역 11번 출구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이미 공략된 던전입니다. 기본 몬스터가 소환됩니다.> 우진과 성구는 차근차근 아래로 내려가며 진행했다. 우진이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탐색마법으로 혈석을 탐색, 마킹 마법으로 표시한다. 성구는 뒤 따르며 몬스터의 시체를 갈라 혈석을 챙겼다. 4성 던전이라고 하여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몬스터는 약했다. 2성 던전과 3성 던전 정도의 수준? “여기 진짜 4성 맞냐?” “그, 글쎄요.” 몬스터와 상대해봤어야 알지. 애초에 2성 던전의 몬스터도 버거운 성구였다.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우진이 약하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할뿐이었다. “평균보다 난이도가 조금 쉬운 던전 아닐까요?” “뭐, 그럴지도 모르지. 후딱 해치우고 나가자.” 우진은 지하철이 정차하는 가장 아래층의 몬스터를 모두 해치우고 탐색마법을 펼쳤다. 그리고 던전에 들어온 이래 그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뭐야? 귀환석이 없어.” “예? 설마요.” 성구도 혈석을 캐다말고 불안한 얼굴로 우진에게 다가왔다. ‘탐색 스킬 레벨이 낮아서 그런가?’ 탐색 스킬 레벨이 늘어나봐야 어차피 탐색 범위만 넓어진다. 보다 은밀히 숨겨져 있는 것들을 탐색하려면 보다 상위의 마법을 배워야하는데 그것은 마법사 클래스가 필요했다. “음. 뭐, 일단 되돌아가면서 다시 탐색해보자. 혈석부터 마저 캐라.” “네, 형님.” 우진은 지금의 던전이 4성의 던전이 맞는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나오는 몬스터의 수준은 별 볼일 없었다. 이것은 그 누구보다 정확히 측정할 수단이 있었다. 업적 포인트. 라퀴들 수준인 3의 업적 포인트만 주는 놈들이었다. 혈석의 드랍률이 그리 높은 것도 아니라 차라리 물량이라도 많이 나오는 라퀴 스팟을 공략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다 캤습니다. 형님.” “그럼 역으로 입구까지 가면서 찾아보자.” 귀환석은 꼭 몬스터의 시체에서 나오진 않는다. 여기저기 숨겨져 있기도 하는지라 우진은 왔던 길을 역으로 되짚어가며 탐색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입구가 가까워짐에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만 올라가면 입군데….” 성구의 중얼거림을 흘리며 오른 계단 너머로 보이는 것은 결계 앞에 생성된 붉은 빛의 포탈이었다. 위이이. 기묘한 소리를 내는 그것을 보는 우진도, 성구도 묘한 얼굴을 했다. ──────────────────────────────────── 27화 - 4성 던전 (2) “포탈아냐?” 색깔만 다르다뿐인지 차원 관리자를 통해 지구로 올때 이용했던 포탈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그 크기가 조금 작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난데없이 성구가 우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응? 뭐가?” “제 불찰입니다. 제가 어제 차를 산다고 너무 들떠서 던전의 사전조사에 소홀히 했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일어서.” 우진의 관대함에 성구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일어섰다. 들떴던 마음을 버리고 긴장으로 감각을 조였다. ‘내가 미쳤었어.’ 성구는 돌이켜보면 지난 이틀 동안 너무 들떴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성 던전을 주로 공략하던 성구다. 처음 2성 던전에 도전해 죽을 뻔 했던 것을 잊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우진이 아니었다면 그때 죽었을 것이다. 더욱이 3성 던전은 물론이고 4성 던전에 입장 하지도 못했겠지. 성구에게 있어 4성 던전인 이곳은 사지나 다름없었다. 이런 곳에 오면서도 제대로 조사는 커녕, 소풍이라도 가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오다니…. 미쳐도 제대로 미친것이다. 더군다나 성구가 간략하게나마 조사한 던전은 이곳이 아닌 옆이었다. 던전이 바뀌면 다시 조사해보고 계획을 세우고 입장해야 하는 것인데 너무 서둘렀다. “생각해보니 이상합니다. 아무리 호의라지만 떠밀려 들어온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글쎄.” 우진도 잠깐 고민을 해보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지나간 일에 대한 고민은 항상 쓸데없는 것이었다. “엿 먹이려고 작정하고 그랬던가, 아니면 나를 과대평가했겠지.” 우진은 지나간 일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포탈.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지하철역을 모두 뒤져보았지만 귀환석은 없다. 애초에 고민거리도 없는 답이 정해진 일이었다. “들어가자.” “넵. 형님.” 지옥이라도 따라 들어갈 거다. 성구는 결심했다. 길드고 나발이고 이거다. 우진이야 말로 자신을 인도할 빛이여, 구원줄이다. 지이잉. 우진은 포탈을 통과했다. 아르펜행성에서 지구로 돌아올 때의 격렬함은 없었다. 그저 눈앞이 어지러진다 싶더니 곧 시야가 밝아왔다. 차원이동이 되었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끈적한 액체를 통과한 듯 불쾌하고 어지러운 느낌. 신체적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 우진은 눈앞의 광경에 놀랐다. 우거진 수풀과 키 큰 나무들이 펼쳐진 밀림이 펼쳐져 있었다. “혀, 형님.” 당황한 성구의 음성에 뒤를 돌아보니 알몸의 성구가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의 손을 들어보니 입은 것이 없었다. “몸만 차원이동이라.” 그야말로 알몸으로 밀림에 던져진 격. 우진은 업적상점을 열어 옷가지들을 쇼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무런 옵션이 없는 기본 옷가지들이야 5포인트도 안하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흠흠.” 성구가 조금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성구의 시선이 슬쩍 우진의 하체에 가 있었다. ‘역시 형님은 위대하시다.’ 진 것 같은 기분이지만 상관없다. 존경하는 형님의 거대함이야 당연한 것 아닌가. “자, 입어.” “어? 옷이 어디서….” 성구가 잠깐 다른 곳에 눈과 마음을 뺏기고 있는데 우진이 던져준 옷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역시, 물건도 크시고 옷도 뿅하니 만드시다니. 우진은 평상복을 챙겨 입고는 주위를 자세히 관찰했다. 돌로 만들어진 제단에 위치한 포털의 주위는 공터였다. 반경 5미터 수준. 동서남북 어딜 둘러봐도 나무뿐이다. “제대로 4성 던전 입성이구나.” 우진이 씩 웃었다. 성구가 옷을 다 입고는 긴장된 얼굴로 우진을 보았다. 정신 바짝 차려야한다. 까닥 잘못하면 죽는다. “잠깐 준비하고 가자. 망 좀 봐라.” 성구가 즉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진은 업적 상점을 열어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레벨은 10. 전승보너스가 있어 본래의 10레벨보다는 높이 평가되겠지만 4성 던전이라면 그도 위험할지도 몰랐다. 네크로맨서의 특성상 저 레벨의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땐 거리낄 것이 없었으나 강력한 하나의 적에게 애먹기 마련이었다.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다행히 라퀴 스팟에서 미친 듯한 사냥으로 혈석에서는 손해를 봤지만 업적은 차곡차곡 쌓았기에 여유가 있었다. 우진은 자잘한 생활마법들을 모조리 사들였고, 전사 클래스의 스킬을 몇 개 구입했다. <전사의 감각> 상대의 강함을 느낄 수 있다. <전사의 분노> 전사를 분노케 하지 말라. 그의 분노가 믿을 수 없는 힘을 낸다. 분노하여, 적을 도륙한다. 힘, 민첩, 체력 능력치 50% 상승. 유지시간 : 30초 재사용 대기시간 : 60분 <도약> 전사는 종종 믿기지 않는 점프력을 보여준다. 소모기력 : 1 <돌진> 전사의 돌진은 저돌적이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에 이미 그가 있을 것이다. 소모기력 : 1 <후려치기> 전사의 강력한 일격. 기본공격에 + 100%의 공격을 더합니다. 소모기력 : 1 전사의 감각과 분노라는 패시브 스킬을, 그리고 도약, 돌진, 후려치기의 엑티브 스킬을 구입했다. 모두 10레벨이 돼야 배울 수 있는 클래스 스킬로 전사가 아니면 배우지도 못하는 것들이었다. ‘좋아. 이정도 하면 됐고. 남은 스탯은….’ <스탯> 근력 : 30 민첩 : 30 체력 : 30 지능 : 30 마력 : 25 기력 : 0 회복 : 10 치유 : 10 지배 : 34 미분배 포인트 : 0 우진은 10레벨이 되도록 쌓아둔 미분배 포인트 20을 마력과 지배에 나누어 투자했다. 그리고 전투 중 부족할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상점에서 마나 물약을 몇 개 샀다. ‘스탯 노가다하려면 인벤토리도 늘려야 하는데.’ 스탯을 영구적으로 상승시키는 영약제조에는 다양한 재료들이 필요했다. 우진의 지금 인벤토리는 겨우 3칸. 업적상점에서 3칸짜리 아공간 가방 3개를 샀다. 구입한 아공간 가방은 그대로 인벤토리의 공간을 확장하며 12칸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더 이상 구입할 수 없습니다.> 더 확장하고 싶으면 다른 종류의 가방을 사야했다. 같은 종류의 가방은 3개가 구매 한계인 듯 싶었다. ‘6칸짜리는 1만 포인트나 하네.’ 아직은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재료템을 모으려면 레시피가 봐야 하기에 가장 가격이 저렴한 레시피부터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전투준비는 이쯤하면 됐지?’ 네크로맨서는 애초에 소환수들을 이용한 전투가 주를 이룬다. 장비의 중요성보다는 스킬이 더 중요했다. 보너스 스킬포인트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그것들은 아껴 두기로 하였다. 전투의 난이도가 높다 생각되면 그때 귀중하게 쓰일 우진의 비장의 한수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진은 남는 포인트로 자잘한 아이템들을 구입해 인벤토리에 쟁여두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진이 소환을 생각하자 그의 손에 강철 지팡이가 튀어나와 쥐어졌다. “이제 가자.” “네, 형님. 저 근데…” “왜?” “형님 그, 막 아공간도 다루고 하십니까?” 우진이 허공에서 갑자기 옷도 꺼내고, 지팡이도 꺼내고 하는 모습에 물어본 것이다. 아공간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그래.” “헉!” 아공간 아티팩트는 굉장히 비싸다. 우진이 아티팩트로 아공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마법이라는 소리인데 아공간 마법은 B등급은 되어야 쓸 수 있는 것이다. B등급의 각성자는 대한민국에 몇 되지 않는다. “혀, 형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그만 까불고 기척이나 잘 감춰라.” “넵!” 우진은 성큼 성큼 걸었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4성 던전이다. 그동안 꾸준히 오른 감지스킬도 3레벨이었다. 이제 어지간한 몬스터의 기척은 멀리서도 감지가 가능했다. “전방에 셋이다. 뭔지는 몰라.” “어, 어쩌죠?” “한방 날려봐. 놈들이 공격해오면 무조건 내 쪽으로 피해. 괜히 해골병사로 소환되고 싶지 않으면.” “히엑.” 성구는 자신의 시체가 터지며 해골병사로 소환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짜식, 쫄긴. 그만큼 긴장하라는 거야.” 결투에서 긴장은 오히려 독이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긴장을 놓치는 순간이 제삿날이다. 몬스터와의 전투라면 더욱 더. 사냥꾼이 되느냐, 사냥감이 되느냐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게 아니다. 녹아 물이 되느냐, 얼어 눈이 되느냐 정도일까……. 우진의 모습은 여유로워보였지만 그의 기감은 어느 때보다도 활짝 개방되어있었고, 감각은 바짝 곤두서 있었다. “날려.” 화르륵. 우진의 명령에 성구의 화염구가 날아들었다.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원거리 공격마법은 현재 우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성구의 화염구가 더 강했다. 퍽! 불꽃이 날아가 부딪히며 주위에 불똥을 튀겼다. “어?” 지하철역에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 산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크와아!” 괴성과 함께 악어형상의 몬스터 크로커다일이 유격 훈련하는 군인 마냥 돌진해왔다. 쿵, 쿵. 짧은 발을 열심히 놀리며 몸을 양쪽으로 흔들며 돌진해오는데 작은 나무들은 그대로 부러져 버릴만한 괴력이었다. 덩치는 황소 그 이상. 톱날처럼 붙은 이빨은 식칼과 같이 거대했다. ‘좆됐다.’ 그 엄청난 위압감에 성구가 도망칠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우진이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크로커다일 lv 31> ‘전사의 감각이 이거군.’ 슈욱! 수풀을 헤치며 돌진하는 우진의 모습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육상선수보다 아니, 무협에서 보던 이형환위의 신법이 저러할까? 콰직! 위협적으로 벌린 아가리를 피해 훌쩍 뛰어오른 우진의 몸은 3미터는 넘게 공중을 날았다. 성구가 입을 헤 벌렸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까? 떨어져 내리는 우진이 양손으로 잡은 강철 지팡이가 크로커다일의 머리통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그 일련의 움직임이 너무 완벽해 성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진이 체조선수였다면 성구는 만점을 줬을 것이다. 성구의 눈에 비친 우진의 움직임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아, 가죽 겁나 질기네.” 퍼억, 퍽! “꾸륵!” 거칠었으며, 폭력적이었다. * 과천청사역 11번 출구 앞. 민찬과 해민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던전의 결계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결계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아직도 내부의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증거. “하, 얼마나 버틸까?” “크로커다일 정도는 그래도 처리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야 처리하겠지.” “그럼 크로커다일 셋 이상 만나면 어렵지 않을까요?” “…….” 크로커다일은 까다로운 몬스터다. 질긴 가죽에 어지간한 물리공격은 통하지도 않았고, 마법적 내성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나마 날카로운 창 같은 무기로 약점인 입안이나 배를 공격한다면 모르겠지만 4성 던전은 외부의 물건을 쓸 수가 없었다. 포탈을 통해 이동 가능한 것은 오직 각성자와 그쪽 세계의 물품들 뿐. 생존 킷에 담긴 것들은 모조리 그쪽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가공한 물건들이었다. “음, 맨손으론 셋이 아니라 한 마리도 힘들려나.” “몬스터를 해치운다 해도 식량과 물이 문제지.” 위협이 몬스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몬스터가 없는 아마존의 정글에 맨몸으로 던져놓아도 인간의 생존률은 극히 떨어진다. “어휴.” 민찬과 해민은 애꿎은 목숨에 대한 죄책감에 한숨을 쉬었다. * 지글지글. 불 위에 잘 익고 있는 꼬지를 한입 빼먹는 성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님. 이거 맛 죽입니다!” “악어는 원래 줘 패서 구우면 맛이 별미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형님!” 성구의 눈에 우진은 이제 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언제 이 모든 걸 다 챙긴 것인지 아공간에서 날카로운 도축용 칼이며, 냄비에 조리도구를 꺼내들더니 슥슥 잘라 나무 꼬지에 꿰어 소금을 뿌려 불에 구우니 맛이 일품이었다. 우진의 전지전능함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커다란 오크통을 꺼내더니 그 안에 든 맥주를 한잔 따라 주었다. 던전에서 술이라니! “짜식. 이것도 먹어봐. 크로커다일 꼬지가 맥주 안주에 기가 막히지.” “캬, 정말 맛있습니다.” 성구는 양 엄지를 치켜세웠다. 수입맥주보다 더 깊고 진한 맛이었다. 술맛을 잘 모르는 성구도 반할 맛이다. 우진도 업적상점에서 구입한 아르펜행성의 맥주맛에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다시 이 맛을 즐기게 될 줄이야. “든든히 먹어둬. 이 넓은 데를 다 뒤져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예, 형님.”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 귀환석을 찾으려면 온 밀림을 뒤져야할 판이다. 그럼에도 우진이 신나 보이는 건 크로커다일 한마리가 30의 업적 포인트나 줬기 때문이다. 라퀴의 10배에 달하는 포인트였다. ‘레벨업 좀 하겠어.’ 우진이 넓은 밀림을 생각하며 씩 웃었다. ──────────────────────────────────── 28화 - 동향 초조함이란 감정은 얼마나 지속될까? 해민은 30분을 넘지 않았고, 민찬도 40분을 넘지 않았다. 둘은 그저 언제 결계가 사라지나 앉아서 기다렸다. 적어도 그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는 기다려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팀장님. 이놈들 꽤 버티는데요?” “그러게.” “이정도 시간이면 밀림에서 생존은 꽤 확보된 상황 아닐까요?” “그렇지.” “…이거 클리어 하는 거 아닐까요?” 해민의 희망적 말에 민찬의 얼굴도 잠깐 밝아졌으나 곧 시무룩해졌다. “네크로맨서니까 소환수가 있으니 크로커다일이야 어찌 소환수를 미끼로 처리했다 쳐도 늪지는 못 벗어나.” “음. 늪지라면….” 밀림의 중간중간 넓게 생성된 늪지는 근접 공격수들에게는 그야말로 사지나 다름없었다. 행동의 제약이 생기는데 늪지에 출몰하는 몬스터는 두 종류. 후코원숭이와 늪아나콘다. 후코원숭이는 후코라는 딱딱한 과일열매를 던지는데 이게 상당한 데미지가 있어 머리에 잘못 맞으면 그대로 죽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행동이 불편한 늪지에서 상대하는 법은 원거리 공격뿐인데 민찬이 파악한 둘의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홍성구라는 각성자가 화염구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후코원숭이는 한번 출몰하면 열 마리는 기본으로 출몰한다. 한손으로 그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욱이 후코원숭이에 한눈이 팔리면 조용히 다가온 거대 아나콘다의 공격에 맥없이 당할 것이다. “후, 어렵군요.” “어렵지.” 4성 던전의 공략엔 여러 가지의 능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팀 단위를 꼭 이루어야했다. 민찬과 해민은 어두운 얼굴로 결계를 다시 주시했다. * 화르륵, 퍼펑! 십수 발의 불꽃이 나뭇가지들 사이를 향해 쏘아졌다. “우끼끼.” 놀란 원숭이들이 여기저기 미친 듯이 피해 다니는 와중에 날아온 얼음화살이 그들의 몸에 적중해 행동을 굼뜨게 만들었다. 쐐애액! 퍼엉! “끼끼끼.” 불타오르는 숲의 나무사이를 오가는 그들의 틈에 어디서 날아온 건지 전기충격이 작렬했다. 파지직! “뀌익!” 우수수 떨어지는 원숭이들을 보며 우진이 광소했다. “크하하하, 모조리 쓸어버려라.” “…….” 성구는 질린 얼굴로 주변의 참상을 살폈다. 화르륵. 숲이 불타고 있었다. 이곳이 던전이 아니라 지구였다면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을 것이다. 우진의 곁에선 해골 마법사는 이미 40기가 넘어서고 있었다. 어떤 것은 화염마법을 뿌렸고, 어떤 것은 얼음화살을 날렸다. 또 어떤 것은 전기마법을 날렸는데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자신의 화염구가 해골마법사의 화염구보다는 조금 더 위력적이라는 것이다. 성구가 보아온 어떤 사냥보다도 난폭하고 무지비한 방법. 우진이 거느린 해골마법사 부대는 온 밀림을 불태우고 파괴하고 있었다. 무차별 난사. 마법의 향연. 화르륵, 퍼퍼펑! “크크크, 또 레벨업이구나. 으하하.” “…….” 성구는 우진이 미친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까부터 한껏 업 된 기분으로 미친 듯이 밀림을 파괴하는 모습이 매치가 안되니까. 성구가 보아온 우진의 모습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아, 아니 가장 신나 보였다. 우진은 레벨업으로 오른 10의 보너스 스탯 포인트를 마력과 지배에 나누어 5씩 투자했다. “자, 신병 받아라!” 우진의 부름에 죽은 원숭이의 시체 다섯이 터지며 새로운 해골 마법사가 추가되었다. ‘듀얼 클래스 겁나 좋아!’ 우진은 10레벨에서 11레벨이 되었을 때 신세계를 맛봤다. 레벨 업 당 5씩 오르는 보너스 스탯이 두 배인 10씩 오른 것이다. 보너스 스킬포인트도 1개가 아닌 2개씩 오르는 상황. 전사와, 네크로맨서 두 가지 클래스를 함께 성장시키기 위한 장치인 듯 싶었으나 우진은 전사쪽 스탯이나 스킬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조리 지배와 마력에 포인트를 몰아넣었다. 지금 현재 레벨 14. 보너스로 받은 40의 스탯 포인트를 지배와 마력에 투자하고 마력회복을 도와주는 회복에도 몇을 투자했다. 마력 : 40 회복 : 14 지배 : 55 우진의 주위에 해골마법사가 늘어날수록 숲의 파괴속도는 더했고, 몬스터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업적 + 25, 업적 + 23….> 우진은 후코 원숭이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오르는 업적 포인트를 계산하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간 3성 던전에서 겨우 3의 업적 포인트를 얻은 것은 사냥터가 맞지 않아서였다. 우진의 현재 레벨은 14지만 전승 보너스와 여러가지 스킬 등을 고려해보면 40으로 봐도 무방한 상태. 우진은 거침없이 진군했고 그의 뒤론 다연발 로켓포처럼 날아오르는 마법에 파괴되어 불타는 숲만이 남았다. * “짜장면 시키신 분!” “아, 여기에요.” 해민은 배달원이 건네주는 짜장 두개를 들고는 지하철역의 계단에 걸터앉은 민찬에게 다가갔다. 던전의 공무원과 담당 직원은 근처의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팀장님. 식사왔습니다.” “나 간짜장이랬잖아.” “이집은 짜장이 더 맛있습니다.” “새끼, 지도 처음 시키면서.” “…….” “어휴, 됐다. 그냥 먹자.” 민찬은 짜장면을 건네받고는 슥슥 비벼 입에 가득 집어넣으며 물었다. “몇 시간 지났냐?” “4시간 지났습니다.” “음. 16시간이라….” 4성 던전이 특이한 것은 구조만이 아니었다. 현실시간보다 4배나 빠른 시간. 던전 안은 지금 16시간이 경과한 상태다. 던전의 몬스터들은 침입자의 존재를 곧장 눈치 챈다. 서서히 사냥하기 위해 다가오기에 어딘가에 숨는다는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잠깐의 은신이라면 몰라도 16시간동안이나 몬스터의 눈에 띄지 않고 숨어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늪지까지 넘었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우린 그들의 능력 자체를 모르잖아.” “맞습니다. 어…. 그럼 이거 살아 돌아오는 걸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희가 곤경에 빠트린 상황이니….” 해민의 걱정에 민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16시간이야 굶는데도 한계가 있지. 그들이 저쪽 생태계에 대해 얼마나 잘 알겠나? 지구와는 생물도, 동물도 , 곤충도 모두 다른 것들 천지인데 말이야.” “이런, 잘못했다가 독이든 식물이라도 먹으면….” “끝이지.” 중얼거리는 민찬은 기분 탓인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앞으로 여기 시키지 마.” “…네.” * 초토화된 밀림… 이었던 공터에 우진은 모닥불을 피워 꼬지에 뭔가를 굽고 있었다. 치지직. 성구가 주변에서 불에 그슬리지 않은 과일이나 버섯 등을 끌어 모아왔다. “형님. 주워왔습니다.” “어, 수고했다.” 우진은 성구가 가져온 과일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이건 껍집 벗기고 그냥 먹으면 되고, 이건 못 먹어, 이건 독 있고, 이건 독성이 있는데 불에 구우면 먹어도 괜찮아.” 우진의 설명에 성구는 수능을 앞둔 학생마냥 열성적으로 들었다. 노트라도 있다면 적고 싶은데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형님은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어, 그야….” 어떻게 알긴, 20년 동안 구른 동네랑 생태계가 같은데. “뭐, 그냥 잠자코 듣지?” “죄송합니다. 형님. 다시는 묻지 않겠습니다.” “저기 저 풀 좀 꺾어와. 저걸 빻은 즙을 고기 발라먹으면 기가 막혀.” “넵. 이번 메뉴는 뭡니까?” “뱀고기. 이것도 기막히지. 계속 고기만 먹었더니 텁텁하다야, 버섯도 구워서 같이 먹자.” “캬, 벌써 군침이 돕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진이 해주는 요리들은 하나같이 맛이 좋았기에 성구는 진심으로 기대하는 중이었다. * 간짜장 취향이라 입맛이 없다던 민찬은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현재시간 7시 45분. 우진과 성구가 던전에 들어간 지도 4시간 20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해민이 담요를 하나 가져와 민찬에게 건넸다. “팀장님. 날 춥습니다.” “그래. 고맙다.” “근데 팀장님. 우진씨랑 성구씨 스카웃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그냥 아깝고 마는 거지.” “사장님 보고까지 가시지 않았습니까?” “갔지. 시큰둥하더라고.” “네?” 해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장님 지시가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공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직원을 시켜 강우진의 등급을 C급으로 올려놓았고 홍성구를 D급으로 올려두었다. 새로 발급된 그들의 각성자 카드는 지금 민찬의 손에 배달되어 있었다. 막말로 둘이 죽으면 일이 더 깔끔했다. 그들을 길드에 입사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저 아쉽고 말 일이다. 살아 돌아와서 괜히 문제를 따지면 골치 아팠다. “해민아.” “네, 팀장님.” “난 말이다. 지난 5년 동안 내 눈을 의심한 적이 없다.” “이를 말입니까. 팀장님의 사람 보는 눈이야 항상 정확하시지 말입니다.” 민찬은 던전쇼크가 일어난 뒤부터 던전과 관련된 일을 해온 베테랑이었다. 해머길드의 창립멤버는 아니지만 길드에 들어온 뒤 이룬 업적은 꽤 화려했다. “박진우도 팀장님이 발굴하지 않으셨습니까?” 해머길드엔 A급 각성자가 둘 있었다. 그중 하나인 박진우도 정민찬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곤 해머길드에 입사시켰다. “그 우진이란 놈에게서 강렬한 느낌이 와.” “그 정도 재능입니까?” 각성자 본인이 재능만 있다면 길드의 지원으로 얼마든지 고속성장 할 수 있었다. 우진이 박진우만큼의 재능인지 묻는 해민의 말에 민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의 느낌이 와.” “…!” “그래서 놓치고 싶지가 않아.” 정민찬은 진심이었다. 강우진에게서는 강렬한 느낌이 왔다. 될성부른 떡잎을 보는듯한 느낌이 아니다. 보다 한 차원 높은 듯한… 이미 거대한 나무를 보는듯한 느낌일까. “그래서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어. 해머길드에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런 각성자를 잃는 것은 인류의 손해니까.” “티, 팀장님….” 해민은 자신의 상사인 정민찬을 다시 봤다. 평소엔 밥맛없기만 한데 오늘은 멋져 보인 달까? 아니, 진심으로 멋졌다. “팀장님, 함께 기도해보죠. 꼭 살아 돌아올 겁니다.” “힘들 거야.” “…?” “귀환석을 지키고 있는 그놈은 정말 어려운 상대니까.” “…!” 그걸 누가 모르나. 살아 돌아오도록 기도를 하자는 거지. “결국 죽을 거야….” “…….” 아니,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며? 내 감동 물어내. 팀장만 아니면 진짜 한대 때려주고 싶다. 해민은 잠깐이나마 팀장이 멋있다고 생각한 자신을 자책했다. * “형님! 저기 귀환석입니다.” 밀림을 모조리 태운 우진이 탐색에 나섰다. 귀환석은 넓은 공터의 한가운데 만들어진 재단에 둥실 떠 있었다. 위험천만한 던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한껏 들뜬 성구가 달려가려는데 우진이 그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어억.” 목덜미가 잡혀 뒤로 자빠진 성구가 ‘왜?’라는 의문을 품기 전에 성구가 밟았던 땅이 푹 꺼지며 사라졌다. 자욱한 먼지를 풍기며 드러난 함정에는 죽창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허억.” 한발만 더 디뎠어도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성구는 철렁한 가슴으로 우진에게 감사를 표하려는데 우진은 심각한 얼굴로 어디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곳에 나타난 존재를 보며 성구는 할 말을 잃었다. ──────────────────────────────────── 29화 - 동향 (2) “이건 좀 의외인데?” 우진은 스물쯤 되어 보이는 인영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크들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사의 감각으로 보이는 레벨이 저 정도면 실제 전력은 그 이상이라 봐야했다. 놈들도 인간처럼 집단으로 뭉쳤을 때 시너지를 발휘하는 유사인종이니까. “라쿠어 리 막투, 리 케오 아르펜.” 우진의 입에서 괴상한 말이 흘러나오자 성구가 깜짝 놀랐다. “혀, 형님?” 놀란 것은 성구만이 아니었다. 오크들이 깜짝 놀라 술렁였다. [지구의 인간이 어찌 오크의 말을 아느냐?] 우진이 쓴 웃음을 지었다. 오크는 유사인종. 아르펜의 사회를 이루는 근간중의 한 부족이었다. 우진이 의아한 것은 오크들이 어떻게 던전에 나타났나 하는 것이다. 던전은 트라넷의 침공루트가 아닌가? [아르펜의 오크들이 지구엔 어쩐 일인가?] 우진이 같은 말을 반복하자 덩치 큰 오크 하나가 나섰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떻게 지구의 인간이 아르펜의 오크어를 아는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째서 그대들이 이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터전을 잃었다.] 오크의 말에 우진이 깜짝 놀랐다. [아르펜이 트라넷에게 먹혔단 말인가?] 우진의 말에 오크들이 침묵했다. 눈앞의 지구인은 어떻게 아르펜의 사정에 대해 저리 잘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균형추의 한 조각이 사라졌고, 트라넷은 모든것의 주인이 되었다. 우린 그와의 계약에 의해 이곳에 존재한다.] [계약?] [지구는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 될 것이다.] 지구 침공.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계약은 얼어 죽을 계약이란 말인가. 애초에 지구가 트라넷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뒤질려고 여길 쳐들어와?” 우진의 한국말에 성구가 벙찐 얼굴로 물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뭐가?” “형님 입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성구는 진심 걱정했다. 우진이 갑자기 괴랄한 발음을 쏟아냈으니까. 성구의 충성어린 걱정이 우진의 감각을 일깨웠다. <전사의 분노가 발동합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유지시간 29, 28 ….> 후, 분노라는 게 이런 거구나. 우진은 화를 억누르며 오크들을 보았다. 지금 그가 화를 낼 상대는 성구가 아니라 고향 잃고 남의 땅에 기어들어와 뺏으려는 오크들이었다. “팀전이라고 쫄 것 없지.” 팀전이라면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퍼부어.” 우진의 말에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해골마법사들이 각자의 마법을 퍼부었다. 슈슈슈슈, 퍼퍼펑! 불과 얼음, 전격의 마법들이 마치 화살비 마냥 날아가 오크들의 진지를 초토화시켰다. 잠깐의 소요가 일고, 먼지가 가신 후 드러난 광경에 성구는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저, 저놈들 멀쩡한데요?” 오크 주술사가 펼친 방어마법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우진이 히죽 웃었다. 오크고 나발이고 그가 있는 한 지구는 넘보면 안 되지. “이래도 버티나 보자고.”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위력을 올리면 될 일이다. 우진은 스킬창을 열어 해골마법사의 레벨을 당장 10으로 올려버렸다. “키키킥.” 해골마법사의 외형이 변했다. 앙상한 그들의 몸에 검은 기류가 생겨나더니 검은 로브를 만들어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사람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로 착각할지도 몰랐다. 로브 사이로 튀어나온 앙상한 뼈로 이루어진 손 사이에는 전에 비해 두 배는 큰 듯 한 빛 덩어리들이 뭉쳐 마법을 만들어냈다. “쏴.” 우진의 명령에 아까 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법들이 쏟아져 내렸다. 화르륵, 펑! 쩌저정, 파지직! 불꽃은 닿는 순간 폭발했으며 얼음은 사방을 열렸다. 강화된 전기충격은 쇠붙이를 무기로 쓰는 오크들에게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용맹한 전사들이여! 돌진하라!] “돌진하기 전에 조져버려.” 슈슈슈슉. 우진의 명령에 해골마법사들이 연달아 마법을 발사했다. 레벨이 오르며 사거리도 연사속도도 위력도 모두 증가한 마법이다. 제법 먼 거리였던지라 우진의 앞으로 돌진해오는 사이에 벌써 반수가 넘는 오크들이 죽어버렸다. 그들이 가까워지자 우진은 즉시 40기의 해골마법사들을 소환해제 시켰다. 와르르. 그들의 몸이 무너져 내리며 뼈무더기를 만들어내자 우진이 씩 웃었다. “2차전은 종목 바꿔서 가보자고.” 그 뼈들을 매개로 곧장 해골병사들을 소환했다. “키키킥!” 40의 마력이 전부 소진되었지만 상관없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공격 수단은 많았다. 마법뿐이 아니다. “자, 가자.” “케케케.” 우진이 강철 지팡이를 들고 돌진하자 해골병사들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오크들의 공격이 워낙에 무시무시해 맷집이 약한 해골병사들이 두어 대를 맞고 두개골이 깨져 무너져버리는 일이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하나의 해골병사를 해치우는 대가로 상처를 입고, 또 하나의 해골병사를 해치우는 대가로 상처를 입는다. 세 번째는 상대하지 못하고 해골병사의 칼에 찔려 죽는다. 아무리 용맹한 오크전사라 하여도 수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우진은 마지막 남은 오크 주술사의 머리통을 깨부수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던전에서 사람도 나오겠네.” “형님, 농담도 잘하십니다.” 전투가 끝나자 이제는 익숙한 듯 성구가 재빨리 오크들이 사용하던 전리품들을 수거했다. * 과천청사역 11번 출구 앞. 김해민은 볼을 긁적거렸다. “팀장님. 이거, 심상찮은데요?” “몇 시간이나 흘렀지?” “6시간 20분입니다.” 해민의 말에 민찬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4성 던전의 보통 클리어 시간은 5시간. 던전내의 시간으로 20시간이었다. 이들이 던전에서 보낸 시간은 벌써 25시 20분. 하루가 넘어가는 시간동안 던전에서 생존해있다는 것은……. “어, 어, 팀장님. 결계가.” 스르륵 사라지는 결계를 보며 정민찬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라. 살아서 나와라. 속으로 외쳐봤으나 계단아래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 작게 탄식하는 그때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수레라도 가져가던가 해야지.” 투덜거리며 걸어오는 우진과 성구는 오크들이 입고있던 가죽갑옷과 무기 등을 잔뜩 가져오고 있었다. “무, 무사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민찬이 한달음에 계단아래를 내려가 우진을 붙잡고 감격스러워하는데 우진이 그를 멀뚱히 보았다. “뭘 그렇게 호들갑이에요?” “예?” “아, 저 밑에 저거나 들고 와요.” “아….” 우진과 성구가 챙긴 전리품은 어마어마했다. 혈석만 해도 배낭으로 2개였는데 그 크기가 하위 던전에서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욱이 가치있는 것은 오크들이 장비하던 무구들이었다. 쇠붙이에, 짐승의 가죽, 거친 천등 지구에서도 구할 수 있는 이것들이 가치있는 것은 포탈을 통과할수 있어서였다. 하위 던전은 각성자라면 누구나 입장할 수있다. 그들이 현대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도 가능했다. 이를테면 던전은 중립지역. 하지만 상위 던전의 포탈너머는 오직 각성자만을 허락했다. 현대의 물건은 무용지물. 우진이 귀환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땐 포탈 주변에 어질러진 옷가지와 휴대폰, 혈석가방 등이 너부러져있었다. 그것들까지 같이 챙겨서 나오자니 전리품만 한 가득이었다. 우진과 성구는 민찬의 도움을 받아 전리품을 분류 중이었다. “그러니까 혈석은 매입소에서 처리해야하는데 다른 물건들은 알아서 팔아도 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만….” 민찬은 스포츠백에서 탐색기를 꺼내들고는 물건들을 스캔하듯 가져다댔다. “음. 모두 노멀 아이템입니다. 아티팩트는 없지만 던전에서 나온 물건들이니 꽤 값이 나갈 겁니다.” “이걸 어디 가져가서 팔아.” “보통 소속길드의 지원부서에서 다 처리하지만….” 민찬은 말을 하다말고 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말해도 될까? “저, 길드에 입사하시면 이런 자잘한 일처리들은….” “거, 편하긴 편하겠네요.” “저희 길드에 입사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최고의 대우를 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 됐고. 이거나 아저씨 길드에서 좀 사가요. 들고 가기도 뭐하니까.” “…….” 민찬은 우진이 가져온 전리품을 모조리 샀다. 그것도 후하게 주고 샀다. 1억 1천. “벌이는 별로네.” “그러게요.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편했지 않습니까?” 우진의 말을 성구가 받았다. 라퀴 스팟처럼 정신없이 혈석 캐지도 않았으니 성구야 조금 편했지. 우진도 딱히 위험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시간당 수익을 생각하자면 오히려 3성 던전이 더 나은 이상한 상황. “…….” 정민찬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우진과 성구의 반응을 보니 던전 안에서 딱히 위험에 처한 적도 없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A급.’ 민찬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할 수 만있다면 우진과 함께 던전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던전을 공략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던전 공략 경험이 단 세 번뿐인 각성자가 이렇게나 민찬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화 번호 좀 주십시오.” “싫어요.” “주십시오.” “귀찮게 할 거잖아요.” “…….” 당연하지. 민찬은 자신이 점찍은 각성자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우진도 만만찮았다. 길드원도 아닌 우진과 성구를 위해 해준 것이 많았으나 그것을 생색내기도 그랬다. 우진은 그것에 대해 고마워하긴 커녕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는듯한 분위기였다. “그럼 다음에 또 우연히 봅시다.” “…….” 돈이 입금되자 쿨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우진을 잡을 명분이 없었다. “제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 괜찮아.” “하하, 그래도 그게 아니죠. 가시죠.” 해민이 둘을 따라 그들이 주차해둔 주차장까지 배웅했다. 민찬이 허탈하게 앉아있는데 잠시후 해민 헐레벌떡 뛰어왔다. “팀장님! 땄습니다.” “뭘 따?” “전화번호요.” 두 눈이 휘둥그레진 민찬이 해민이 흔드는 전화번호를 보았다. [강우진 010-12xx-xxxx] “이거 가짜 번호아냐?” “아닙니다. 직접 전화 걸어봤습니다.” “허, 이렇게 쉽게 줄거 왜 밀당이야?” “그, 글쎄요.” 민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면전에서 거절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이렇게 여지를 주는 것을 보면 또 길드에 영 마음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협상의 고수야, 뭐야?’ 민찬은 우진을 24살의 사회경험 부족한 젊은이로 여겼던 생각을 수정했다. 한창 고민중인 민찬이 불쑥 물었다. “너 뭐라고 하니까 번호 주더냐?” “그냥 다음에 소주한잔 하자고 했는데요?” “…….” 하, 도무지 속을 모르겠네. ──────────────────────────────────── 30화 - 동향 (3) 성구의 차 안. “허, 크로커다일 가죽이 이렇게 비싸게 거래되는거야?” “그, 그런가보네요.” 우진은 민찬이 선물이라며 준 여러 물품 중에 과천청사역 11번 출구의 공략집을 보고 있었다. 등장 몬스터와 패턴, 취약한 약점등 여러가지 공략에 필요한 정보부터, 몬스터의 어떤 부위가 얼마에 거래되고, 값나가는 식물이나 광물이 어떤것이 등장하는지도 기술되어있었다. 찾는건 어렵지 않다. 우진이 몰랐던것은 이것들이 현실에서 활발히 거래된다는것이었다. “뭐, 아깝지만 별수 없지.” 우진은 어차피 가져오지 못한것들이기에 후회하는짓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굳이 스스로 챙길 생각은 없었다. “성구야 다음엔 잘 챙겨라.” “…네.” 혈석만 캐는게 낫지. 몬스터 사체까지 해체하여 돈되는 부위를 가져와야 된다는것은 좀…. ‘아, 화염마법사의 꿈이….’ 성구는 돈만큼이나 능력의 개발과 상위 각성자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우진을 만나고 화염구 마법을 사용할 일보다 도축용 나이프를 쓰는 일이 더 많던 성구다. 이제 혈석 추출은 거의 장인의 급에 올랐지만 화염구 능력은 그대로 답보상태였다. 하지만 계약한것이 있으니 1년동안은 매니저업무에 충실할 생각이었다. 돈벌이는 전에 비해 상상도 하지 못할 수준이니 차근차근 모았다가 마법서를 구입해 능력을 상승시켜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형님.” “어, 왜?” 우진이 공략집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대충 대답했다. “그, 아까 김대리란 분한테 왜 전화번호 주신거에요?” “소주한잔 하자잖아.” 단순한 걸까? 호쾌한 걸까? 아니면 멍… 아, 형님이 그러실 리가 없지. “그, 김대리가 번호 알았으니 정팀장이란 분도 형님 전화번호 알 것 아닙니까?” “알겠지.” “알면서 주셨습니까?” “그게, 왜?” 우진이 고개를 돌려 성구를 보았다. 우진의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성구는 자신의 질문이 잘못 되었나 되짚어봤다. “형님. 길드 들어가실겁니까?” “아니.” “귀, 귀찮은거 싫어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 정팀장이란 분 꽤 집요한 것 같던데.” 우진이 피식 웃었다. “넌, 스팸 차단한다고 안오는거 봤냐?” “차단해도 오죠.” “아니, 그냥 적당히 상대해주면 이렇게 던전도 소개해주고, 선물도 주고 얼마나 좋아?” 즈, 즐기고 있어. 역시, 형님의 심계는 정말…. “던전에서야 지가 쫓아올 거야 어쩔 거야? 던전 나오면 뭐, 나 할 일없어. 시간 많아.” “…….” “지치면 알아서 나가떨어지겠지.” 사, 사악하다. 성구는 침묵한채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 무심한 듯 창밖을 보던 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재민인데?” “예? 형님하고 같이 산다는 그 학생이요?” “그래. 차 옆으로 붙여봐.” 성구의 차가 3차선에 정차했다. 우진이 조수석에서 내리고는 반갑게 외쳤다. “재민재민!” “어?” 누나와 함께 학교 근처에서 외식을 하고 나오는 길이던 재민은 깜짝 놀랐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우진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 숙이는 재민이었다. “안녕하세요. 형.” * 해머길드 최상층. 대한민국에 단 10명뿐인 A급 각성자중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길드마스터 박상오] 책상의 명패 뒤에 놓인 인터폰이 울렸다. 박상오가 누르자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장님. 지원 3팀장 방문입니다.] “들여보내세요.” 삐이. 인터폰이 꺼지고 잠시 뒤 문이 열렸다. 자신과 동갑인 서른다섯의 열성적인 지원팀장. 뒤늦게 입사했지만 해머길드가 확장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길드 자금줄인 하위 던전을 문제없이 잘 관리하며 인재를 발굴해내는 능력은 길드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그였다. “사장님. 저번에 보고 드렸던 강우진씨 스카웃 경과보고입니다.” “성공했습니까?” “아직….” “관련 권한은 모두 일임한 것 같은데요? 굳이 중간보고 안올려도 됩니다. 혹시, 협상이 잘 안됩니까?” 협상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협상 자체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문제지. “정 팀장님이 눈여겨본다면 조건이야 얼마가 되도 좋습니다. 재량껏 스카웃 해보세요.” “그에 대해 결제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돈이야 우진도 많이 번다. 아니, 3성 던전에서 4성 던전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신기한 사냥법을 구사하는 그다. 돈보다는 다른 것으로 그를 유혹해보려 한다. 박상오는 결재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부사장자리까지 필요해요? 그 정도로 가치가 있어요? 하, 부사장 자리가 장난도 아니고…….” 박상오는 다른 파일을 뒤적였다. 강우진의 이력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5년 동안 행방불명에 돌아오자마자 2성 던전 한번, 3성 던전 한번, 오늘은 4성 던전 한번이네요.” “그렇습니다. 예측하기로 그는 분명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각성자입니다.” “보셨습니까?” “네?” “직접 보셨나구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예측하기로….” 박상오가 서류를 던지고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이보세요. 정 팀장.” “네, 사장님.” 동갑이지만 회사는 그들을 부하와 상사로 나누었다. 학벌도 민찬이 더 좋았지만 둘 사이의 간극이 있다면 각성자와 일반인의 차이일 것이다. “그가 진짜 능력이 있다면, 부사장자리가 아깝겠습니까? 그런데 우습잖아요. 해머길드 부사장자리가 어디 알바자리도 아니고, 던전 3번 클리어한 햇병아리를, 검증되지도 않은, 오직 가능성만으로 줄 자리가 아니잖아요?” 문제는 더 있었다. “그 가능성이라는 것도 오직 팀장님 감 아닙니까?” 뿌득. 정민찬은 이를 악물었다. 그 감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데려왔나. 해머길드의 인재발굴은 다른 길드보다 한발 앞섰고, 거기엔 민찬의 역할이 컸다. “확실한 가능성을 제시하세요. 하다못해 그가 사용하는 능력이라도요. 그래야 길드가 투자가치를 판단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정팀장 감만 믿고 투자를 합니까? 매번 성공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이 맞다. 정민찬이 강력하게 주장해 과한 대우로 데려온 각성자중에서 아직 포텐이 터지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태 번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투자는 무리한 것도 아닌데…. “부사장 자리를 아무데나 척척 던져줘서야. 어디 가서 얕잡혀 보입니다. 해머길드 위상이 떨어져요. 아시겠어요?” “네….” 삐이이. 때마침 울리는 인터폰을 누르자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님. 부사장님 방문입니다.] 부사장 박진우. 정민찬 팀장이 발굴한 최고의 인재. 27살의 나이에 준수한 마스크, 요즘은 티비에도 자주 출현해 연예인급으로 인기가 많았다. 해머길드에서 그의 가치는 사장 외의 유일한 A급 각성자라는 것에서 모두 설명이 된다. 훤칠한 키의 박진우는 정장차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다 사장실을 나서는 정민찬 팀장과 마주치자 박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으며 인사했다. “어? 정실장님 계셨네요.” “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예전이야 그가 발굴한 햇병아리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부사장이다. 그때와는 입장차이가 달랐다. 정민찬이 굳은 얼굴로 지나쳐 가자 박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분위기를 보니 사장에게 또 한통 깨진 모양이었다. 박진우는 그래도 초보 각성자였던 시절 자신을 알아보고 해머길드를 소개해준 그에게 애정이 있었다. “팀장님 무슨 일이래요?” “쯧, 몰라. 웬 네크로맨서 하나 본거 같은데 부사장 자리를 내주자고 하잖아.” 짜증난 듯한 사장의 말에 박진우가 웃었다. “정팀장님이 그리 말할 정도면 무조건 잡아야하는 거 아니에요?” “무조건 잡긴. 저 양반 요즘 눈 갔어. 데려오는 애들마다 별로잖아.” 요즘 정민찬 팀장이 발굴해낸 인재들이 그저 그렇긴 했다. 재능은 있는데 막 성장이 그리 빠르진 않다고 할까. “정 팀장이 널 알아본 것도 순전히 운이지.” “에이, 그래도 너무 그러지 마세요.” “쯧, 됐어. 그보다 미국 간 일은 어떻게 됐어?” 박진우.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긴 했지만 무려 A급 각성자에 해머길드를 대표하기에 모자라지 않을 부사장 직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미국에서 길드 컨퍼런스가 열렸다. 해머길드를 대표해 박진우는 그곳에 참가했다가 뉴욕에서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박진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돌아가는 분위기 보면 소문이 맞는 거 같아요.” “맞아?” 사장 박상오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얼마 전 길드 사이에서 도는 찌라시에 요상한 소문이 돌았었다. 이번 컨퍼런스에 부사장을 보낸 것은 그 소문의 진위파악 여부도 있었다. “니가 볼 때 어디서 확보하고 있는 거 같아?” “타이탄쪽 같던데요.” “타이탄이라….” 미국엔 대형 길드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 하나만을 꼽으라면 단연 타이탄이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타이탄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긴 했다. “던전에서 나온 사람이라….” 박상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외계인이라 불러야 할까? 새로운 인류라 불러야할까? 본적이 없으니 뭐라 할말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소문이 타이탄에서 지어낸것일지도 몰랐다. 정확한 사실이야 타이탄의 수뇌부들만이 알고 있겠지. 소문이 사실이라면 던전이 생긴지 5년. 최초의 사건이었다. * 맨허튼의 중심가 위압적으로 치솟은 빌딩 앞에 리무진이 정차했다. 보안요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 펼쳤다. 리무진의 문이 열리고 갈색머리의 중년부인을 들어 휠체어에 앉혔다. 그런 그녀를 향해 단정한 차림의 금발미녀가 다가가 미소 지었다. “해밀턴 부인. 오시는 길 불편함은 없었습니까?” “불편하다뇨. 이런 호사는 처음인걸요.” 비행기를 타고 여섯 시간을 날아왔지만 불편하다고 생각 된 순간이 조금도 없었다. “길드의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제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당연히 응해야지요.” 미국의 가장 저명한 심리치료사 해밀턴 부인은 금발미녀의 안내를 받아 길드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해밀턴 부인. 환자를 만나보기 전에 먼저 이 서약서에 사인해주셔야 해요.” 금발미녀가 내민 서약서는 흔한 비밀유지에 관한 서약서였다. 재력가의 단골고객으로 둔 심리치료사인 그녀로서는 많이 겪어본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서약서에 사인하자 금발미녀는 그녀를 환자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사이 환자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건네받아 읽어보는 해밀턴은 의아한 듯 물었다. “실어증이 전부인가요?” “네.” 해밀턴 부인이 물은 것은 다른 증상이 아니었다. 서류엔 그녀의 증상 외에 아무런 인적사항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름도, 고향도, 나이도, 없어요?” 금발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던전에서 구출되었으니까요.” “…….” “해밀턴 부인이 하실 일이 그녀의 목소리를 찾아주고, 그 빈칸의 인적사항을 채워주시는 일입니다.” 해밀턴 부인은 금발의 미녀비서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놀라움에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오, 마이 갓.” 태어나서 이런 미녀는 처음 보았다. 여자인 그녀가 보아도 놀라운 외모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5성 호텔 부럽지 않게 꾸며진 호화로운 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그녀만이 보였다. 비단 신비로운 것은 이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신비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던전에서 구출되었다는 것 치고는 그녀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심리치료사인 해밀턴 부인은 조용히 휠체어를 밀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비서는 곁에서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조금 진정한 해밀턴부인은 정체불명의 미녀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해밀턴이 진정할 동안 시종일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해밀턴 부인이라 해요.” 그녀의 부드러운 인사에도 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말을 못하는 것에 비해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갈구하듯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힘들다면 굳이 말하려 하지 않아도 되요. 제게 글로 알려주시겠어요? 아니면 그림으로 그려도 되고요.” 이미 시도해보았는지 바로 옆의 테이블엔 종이와 펜이 있었다. 해밀턴이 자기가 먼저 그림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차츰차츰 하면 된다. 병이 갑자기 호전되는 경우는 없다. 마음의 문에 갑자기 구멍이 뚫리는 경우도 없다. 조금씩 다가갈 뿐이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을 다한 마음. “전 당신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답니다.” [제 말이 들리나요?] “네?” 머리를 울리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에 해밀턴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그녀가 비서를 돌아보았다. “방금 말 들었습니까?” “네?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그대의 믿음이 제 목소리를 전해받았군요.] 놀란 빛이 가득한 해밀턴의 눈이 정체불명의 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라고. “드, 들려요.” [신이 아직 저를 버리시지 않았군요.] “맙소사.” 미녀의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데 분명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생생히 해밀턴의 귀에 들렸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어, 어떻게 말한 거죠?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이런 일이…?” 비서는 해밀턴의 당황한 듯 한 혼잣말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귀에는 환자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은 탓이다. 오직 해밀턴만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제가 무례했군요.] 다짜고짜 부탁이라니. 정체불명의 미녀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우아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해밀턴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르펜의 일곱 좌. 대지의 어머니이자 예지의 날개 아리아의 목소리, 메르디에요.] “맙소사.” 아리아교단의 성녀, 메르디. 그녀가 지구에 첫 발을 디뎠다. ──────────────────────────────────── 31화 - 도지원 “형, 안녕하세요. 여긴 저희 누나에요. 누나, 이형이 내가 말한 우진이형.” “지원이 오랜만이네. 여전히 예쁘네.” 우진의 넉살에 지원이 피식 웃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데 여전히 예쁜 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오랜만이네.” 우진이 행방불명되었으니 5년 전이 마지막이다.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기 전의 인연이다. “우리 막창 먹으러 갈 건데 한잔 하러 갈래?” “어? 막창?” 도지원은 우진의 말에 멈칫했다. 얘가 이렇게 적극적인 애였나? 지원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때의 우진과 지금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었다. 아니, 애초에 5년 전 별로 친하지도 않았으니 우진의 성격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 사람 많은 곳은 좀….” “그래요. 방금 밥 먹고 나와서 배불러요.” 재민까지 말리고 나서자 우진이 재민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밥 배하고 술 배하고 같냐?” 우진의 말에 지원이 재민을 돌아보았다. 우진과 이야기는 하고 싶었다. 자신의 동생을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는 해야 했으니. 또, 너무 과분하게 받은 돈은 돌려주기도 해야했으니 말이다. “교복입고 술집을 어떻게 가. 그냥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내 동생 도와준 거 다 들었어.” “에이, 얘 술 잘 마셔.” 우진의 말에 재민이 뜨악한 얼굴이 되었고, 지원은 홱하니 재민을 노려보았다. “너, 술도 마시니?” “그게 아니라….” 아, 치사하게 자기가 먹여놓고 뭐하는 짓이지? 재민의 구원의 눈길을 받으며 우진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애는 집에 보내고, 우리끼리 한잔하자.” “어?” “나 돌아오고 고등학교 친구는 처음만나. 그동안 어떻게 된건지 이야기나 좀 해주라.” 맞다. 우진은 행방불명이었지. 애초에 우진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던전쇼크 이전에 학교에서 가장 핫이슈가 우진의 행방불명이었기 때문이다. “가자.” “막창 좋아해?” “응. 할 말도 있구.” 지원이 가려는데 재민이 누나의 팔을 붙잡았다. “누나. 술 많이 마시지마.” “알았어. 집에 먼저 들어가 있어.” “누나, 취할거 같으면 바로 전화해.” “으이구, 들어가서 공부나 하고 있어. 곧 시험이라며.” 지원은 자신을 걱정하는 동생을 보내곤 우진을 따라갔다. “네 차야?” “아니, 같이 일하는 동생 차.” 지이잉. 조수석의 차문이 열리며 성구가 밖을 보기위해 조수석 쪽으로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누님.” “아, 네. 안녕하세요.” 지원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모자깃을 더욱 깊이 눌렀다. 큰 모자챙이 그녀의 콧잔등까지 모두 가렸으나 가녀린 턱선과 붉은 입술만으로도 상당한 미녀임을 알 수 있었다. 지원이 뒷 자석에 타자 우진이 뒤따라 탔다. “형님. 어디로 모실까요?” “어디긴, 아까 맛좋은 막창집 간다며?” 저런 미녀와 막창 집에? 성구가 의아해 하든 말든 우진은 오늘 막창이 먹고 싶었다. “누님 막창 괜찮으 십니까?” “네 괜찮아요. 그런데 기왕이면 사람들 좀 없는곳으로….” “마침 제가 단골로 가는데가 있는데 장사가 안 되서 사람 없는데가 있습니다.”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오늘 맛있는 막창이 먹고싶었다. “…그럼 맛없는데 아니냐?” “아닙니다. 정말 맛은 제가 보장합니다.” 성구는 운전기사 마냥 차를 몰았고 뒷자리에 앉은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근데 모자는 왜 쓰고 다니냐? 머리 안 감았어?” “…….” 우진의 말에 성구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거침없는 성격이야 진즉에 파악이 끝났지만 어떻게 여자에게 저리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위대한 형님께서 모쏠이신가……. 여자를 상대하는 법이 너무 서툴러도 서툴렀다. “아, 아니야. 그냥 모자 쓰고 다니는거 좋아해.” “흠, 그래?” 우진이 과거를 떠올려 보려고 해도 생각나지가 않았다. 지원에 대해 기억나는것도 그저 그녀가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는 것 뿐이었다. 성격이 어땠는지 생김새가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그래?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엄청 반갑다. 재민이 누나가 너라고 했을 땐 깜짝 놀랐다니까.” 뭐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편하게 대할수 있을까? 지원은 우진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나도 놀랐어. 재민이가 학교생활은 말을 잘 안 해서 괴롭힘 당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었는데, 정말 고마워.” “아, 아냐아냐. 재민이가 도와준 게 얼만데.” 지원이 재민이 한말이 생각나 작게 중얼거렸다. “삥을 뜯었다고….” “하하하, 빌린 거야, 빌린 거. 성구야 운전 빨리 안하냐?” “어린이 보호구역입니다. 형님.” “…….” 이 자식은 눈치가 없는 걸까? 지원이 ‘풋’하고 웃는사이 성구의 자동차는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번화가를 떠나 공사한창인 도로를 접어들었다. “쯧, 던전 브레이크라도 일어났나보네.” “네, 형님. 본래 공터였는데 개발 잡혀서 한 달 전부터 공사 중입니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역 주변이 초토화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가장 먼저 역 주변이 정비되고 새로이 생긴 던전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역주변의 개발이 달라진다. “역주변에 무슨 공사를 이렇게 크게 하냐?” “아, 김강철이 입주하는 빌라촌 공사입니다.” “그게 누구야?” “네?” “그게 누구냐고.” 어떻게 김강철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 10대 각성자 중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인물인데. “김강철 모릅니까?” “모르지” “대한민국 최초의 A급 각성자입니다. 각성자 순위로 보면 대한민국 랭킹 1위죠.” “걔는 무슨 아방궁을 지으려고 집을 이렇게 크게 짓냐?” 형님은 24살이신데 어떻게 21살인 자신보다 사회 돌아가는 것을 더 모를까? “전부 김강철이 집이 아니고 그가 산다고 분양광고 때린 빌라 촌입니다.” 역 주변은 위험하다. 30일 내에 던전을 공략하지 못하면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말 그대로 던전이 터지고 몬스터들이 범람한다. 주택 단지로서는 최악이다. 누가 폭탄을 옆에 두고 지내고 싶겠는가. 하지만 그 집에 고위 각성자가 산다면 사정이 달랐다. 자신의 집을 날리기 싫어서라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에 던전을 공략해줄 거니까 말이다. 그래서 건설사들은 고위각성자를 입주시키기 위해, 그들을 홍보모델로 삼기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설명을 들은 우진은 이해했다. “거, 등급 올리면 집을 공짜로 준다는 거네.” “… 맞습니다.” 우진은 자신의 각성자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눈치껏 일처리 빠른 정민찬이 자신의 각성자 등급을 C급으로, 성구의 것을 D급으로 만들어주었다. ‘언제 관리국에 한번 들려서 등급이나 올려둘까?’ C급 정도 되면 상위던전의 출입자격이 주어지니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고위 각성자에게 주는 혜택이 여럿 있어 솔깃했다. 우진의 각성자 카드를 보곤 도지원이 깜짝 놀랐다. “우진이 너 C급 각성자였어?” “어? 응.” “재민이 말로는 F급이라 했었는데.” “아, 올랐어.” 각성자 등급이라는 것이 그렇게 막 올릴 수 있는 거였나? 지원은 우진을 새삼스런 눈으로 보았다. 재민에게 듣기로 우진이 돈을 엄청 잘번다고 하던데 C급 각성자라면 이해가 갔다. “그보다 하나 물어보자.” “어?” 우진의 물음에 지원이 바짝 긴장했다. 자신의 컴플렉스를 들추지는 않을까. 노파심에 심장이 콩닥 거렸다. “옛날에 나 어땠냐?” “어?” 우진은 과거의 자신이 알고 싶었다. 아르펜에서의 20년의 세월은 자신마저 잊을 정도로 지독한 삶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친했던 것은 아니라서….” “아, 그래? 나랑 친했던 애들 혹시 알아?” “그것도 잘….” 우진이 짧게 고민했다. 지원은 괜히 우진을 흘깃 보았다. 창밖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 우진의 모습이 설렌다면 이상한걸까. 오랜만이었다. 5년 전 예쁘기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 그리고 동정도, 혐오도 없는 이런 대화가 너무나 낯설고 반가웠다. 그래서 보이기 싫었다. 지원은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 성구의 차는 공사 중인 빌라촌을 지나 언덕의 달동네에 멈췄다. 지하철도 들어오지 않아 불편했던 그곳이, 던전쇼크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서울을 아예 벗어나버렸고, 달동네엔 여전히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구, 내 새끼 왔냐?” “할머니이!” “아이고, 우리 성구 친구들인감?” “아니에요. 제가 아는 형님하고 누님입니다.” “아유, 우리 성구 선배님들이시구먼, 어여 앉으셔들.” 허름한 건물의 가게는 테이블이 고작 다섯뿐이었다. 그마저도 비어있어 우진 일행이 첫 손님인 듯 싶었다. 여기가 맛집이 맞을까? 엄청 기대하고 왔는데……. “너네 할머니가게였냐?” “아닙니다. 친구 할머니 가겝니다.” “친구집 매상 올려주러 왔냐?” “헤헤,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이집 막창이 제일 맛있습니다.” 우진은 여전히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으나 음식이 내어져 나올수록 굳었던 얼굴이 풀렸다. 막창은 맛있었다. 아니, 지구의 모든 음식이 우진에게는 맛있는 듯 했다. 주인 할머니는 음식 솜씨도 꽤 좋았다. “형님하고 첫 술이라 영광스럽습니다.” “가득.” 성구가 우진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형님의 동창분과 한잔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네….” 이 사람은 조폭일까? 말끝마다 형님이 입에 붙어 있었다. “캬, 맛있다.” 건배 후에 소주를 털어 넣고 잘 익은 막창 한점을 장에 찍어 먹었다. 시원한 소주에 쫄깃한 막창의 식감에 제대로 맛있었다. “아, 맛있다.” 성구는 우진의 잔이 빌 때마다 즉각 술을 채웠고 우진은 잘도 먹었다. 정말 막창만 먹으러 온 듯한 우진의 행동에 성구는 물론,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있는 지원도 우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응? 왜 안 먹어. 내가 살게. 먹어.” “…….” 성구는 우진과 지원을 힐끗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처음 우진이 지원을 데려왔을 땐 오랜만에 만난 친한 동창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모양. 이야기를 들어보면 5년 만에 처음만난 얼굴만 아는 동창이었다. 와, 나같았으면 어색해서라도 인사만 하고 말텐데. ‘혹시 형님은 여자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설마 형님은 저 턱선 예쁜 누나가 마음에 드는 것일까? 그래서 데려온 것인가? 심계가 뛰어난 우진의 속뜻이 무엇일까? 매니저로서 자신의 임무는 무엇인가? ‘그래. 난 분위기만 만들고 빠져야겠어.’ 어쩌면 형님은 자신의 능력을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각성자가 되며 자퇴하는 바람에 짧게 다닌 대학생활이지만 여느 대학신입생들과 마찬가지로 성구가 마신 술은 적지 않았다. 성구의 지난날 학사경고는 헛되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리라. 그리고 이런 어색한 상황을 타개할 수십 가지 방법이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형님! 게임합시다. 게임.” “응? 게임?” 고 3일 때 지구를 떠난 우진이 대학생의 주도를 어찌 알겠는가? 술병을 한 손에 쥔 성구의 입에서 방언이 터진날 우진은 신세계를 경험했다. 그리고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진은 다채로운 게임을 경험했다. 테이블 바닥엔 12병의 빈 소주병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고, 지원은 테이블에 팔을 베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 지원을 보며 의자에서 일어선 성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 간드아아, 쭉, 쭈쭉, 쭉, 쭉,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고야아, 놔아 어깨에를 봐아아. 탈~” 우진은 인상을 굳혔다. 그저 그렇게 맛있다는 막창에 소주를 즐기러 온자리가 어찌 술을 먹이지 못해 안달난 자리가 되었단 말인가? “어깨 뽑아버리기 전에 앉지?” 살기마저 섞인 그 음성에 들썩이던 성구의 어깨가 그대로 멈췄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자라목을 하며 눈치 보는 성구의 시선이 우진의 눈과 마주쳤다. “앉아.” “넵.” 아, 술 깬다. 성구가 다급히 의자에 앉았다. 둘의 시선이 이미 상당한 술을 마시고 엎어진 지원에게로 향했다. “으음.” 벌써 골아떨어진 지원이 슬쩍 움직이는사이 그녀가 쓰고 있던 모자가 떨어졌다. “어?” 성구는 자신이 잘못본 것은 아닌가싶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헛것이 아니었다. 지원의 왼쪽 머리에 머리카락이 아예 없었다. 두피엔 보기흉한 울퉁불퉁한 상처 투성이였고 그 상처는 이마를 지나 좌측 눈까지 내려와 있었다. “…….” 성구가 우진의 눈치를 살폈고 우진은 그저 무심히 지원을 보았다. ──────────────────────────────────── 32화 - 도지원 (2) “…….” 성구는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진도 아무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젓가락이 막창 한 점을 집어 장에 찍어 깻잎쌈 위로 올려놓았다. 쌈장을 찍은 마늘을 올리고 쌈을 쥔 우진이 소주를 한입 털어 넣었다. 우적, 우적. 쌈을 먹은 우진은 미소 지었다. “아, 이건 진짜 소주 안주로 딱이네.” “…….” 우진이 빈 잔을 내밀자 성구가 말없이 잔을 채웠다. “야, 앞으로 게임 같은 거 하지 말고 술은 조용히 먹자?” “…….” 성구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소주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던 우진이 성구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성구가 말문을 열었다. “형님.” “어, 왜?” “왜 아무 말 없으십니까?” “무슨 말?” 성구가 슬쩍 엎드린 도지원에게 눈길을 주었다. “뭐? 머리 까진 거?” “…….” 와, 어떻게 저렇게 쉽게 말할수 있을까? “마. 저게 뭐 어때서?” “예?” “저게 뭐 엇떴냐고?” “…형님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저게 뭐?” 우진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상처 좀 있다고 안 죽어.” “…….” 그 말이 아니지 않은가. “왜? 불쌍하냐?” “그럼 안 불쌍합니까?” 우진이 피식 웃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르펜에서 살았다. 살기위해 무기를 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세상에서 자랐다. 흉해진 외모? 장애인? 두 다리 멀쩡해서 달릴 수 있고, 두 손 멀쩡해서 창을 쥘 수 있으면 정상인이다. 우진의 관념에서 지원은 그저 머리에 흉터 입은 여자일 뿐이다. 재민이의 누나고, 5년 만에 만난 동창이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술이나 따라봐. 딱 기분 좋은데.” 우진의 말에도 성구는 반응이 없었다. 우진의 이마가 찌푸려지는데 술을 잔뜩 먹어서 그런지 얼굴이 붉어진 성구는 용기를 냈다. “한 번씩 저는 형님이 무섭습니다. 너무 매정하십니다.” “하.” 우진이 어이없어하는데 성구가 벌떡 일어섰다. “한국에서 여자가 얼굴을 다쳤다는 건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못한 걸지도 모릅니다!” “뭐?” 성구가 움찔하더니 쭈뼛쭈뼛 옆으로 가더니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렸다. 빈 잔을 내밀고 있는 우진은 황당한 얼굴로 성구가 나간 가게 문을 보고 있었다. “하아.” 우진이 잔을 내리고는 소주병을 잡고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꼴, 꼴. “직접 따라 먹으면 되지 뭐.” 우진이 소주를 한잔 털어 넣고는 막창을 집어 씹다가 슬쩍 지원을 보았다. “뭐, 어때서 그래?” 너무 드센 아르펜의 여자들만 상대해봐서 그런가? 아르펜이었다면 저 정도의 상처에 의기소침해 가리고 다니는 여자는 없다.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지. 몬스터의 공격에 이정도의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았노라. 말 그대로 훈장이다. “저게 뭔, 대수라고 여전히 예쁘구만.”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상처야 그냥 상처일 뿐이지 않은가? “후우. 지구라….” 너무 아르펜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진 탓인가? 지구의 사고방식과는 너무 괴리가 생기지 않았는가? 지금 당장 병원에 찾아가 우진의 심리검사를 하면 당장 입원을 하자고 할까? “변했지. 변하긴….” 많은 것이 변했다. 스스로 괴물이 되었으니. 20년동안 매일 고향을 되뇌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가 생겼다. 우진이 소주를 한잔 털어 넣었다. 다시 잔을 채우다 우진이 슬쩍 지원을 보았다. “거, 새끼. 괜히 신경 쓰이게.” 우진은 성구가 한말이 괜히 신경이 쓰였다. 잔을 비우곤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지원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꼴, 꼴. 소주잔에 술이 차다 말았다. “아, 막잔이네.” 우진이 가게 안쪽을 보니 이미 주인 할머니는 알아서 마시다 가라고 하곤 자러 들어간 참이다. “끙.” 우진이 아쉬운 잔을 비우고는 지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집에 가자.” “…….” “거참.” 우진이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한 지원을 안아들었다. * “어머, 저 여자봐.” “죽은 거 아니야? 저 사람이 그런 건가.” “으, 흉해.” “난 아까 먹은 거 토하려고 해. 으윽.” 지원을 공주님 안기로 들고 가는 우진은 그녀의 모자가 벗겨질 때마다 집중되는 이목에 짜증이 났다. 기분 좋게 술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일까. 우진은 모자를 다시 주워 씌우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편의점으로 다가간 그는 의자에 잠시 지원을 앉히고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 “별일 없겠지?” 집으로 향하는 재민은 괜한 걱정에 한숨을 쉬었다. 옛날엔 퀸카다 여신이다 칭송만 받아온 누나다. 그 사건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도도하고 새침하던, 활발하던 성격도, 외모도… 그리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그런 그녀가 애써 공장을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홀로 남은 가족 재민 때문이었다. 재민도 누나의 마음을 알기에 엇나가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는 중이었다. 띠 띠 띠, 띠로리. 문이 열리자 아기고양이가 침대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었다. 어? 뭐가 이상한데? 재민이 깜짝 놀라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서 티비를 보니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인 뽀로토가 방영 중이었다. “허, 네가 켠 거야?” “냐아.” 그저 귀엽게 그르릉 거리는 고양이를 보며 재민은 피식 웃었다. 고양이가 무슨 재주로 티비를 본단 말인가? 잘못 리모컨을 밟았겠지. “아, 근데 이형은 고양이 주워다 놓고 필요한 물품도 안 샀네.” 재민은 대충 교복을 갈아입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고양이 필요물품이라고 검색하니 화장실이라던가, 사료 모래 등의 필수용품들을 보다가 문득 오늘 하루 종일 고양이가 혼자 방치 되어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아. 이리와.” “냐아.” 사람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하듯이 손을 뻗었음에도 도망가지를 않았다. 재민은 고양이를 잡고 눈을 맞췄다. “헤헤, 귀엽긴 귀엽당. 비비 배고프지?” 재민은 고양이를 잠시 식탁에 올려두고 냉장고를 열었다. 평소 사다놓던 소시지를 주기 위해서였는데… 누가 먹었지? “어?” 분명 먹은 기억이 없었는데 소시지가 사라져 있었다. 휴지통을 뒤져보니 소시지 비닐껍질이 버려져 있었다. “하, 이형이 정말.” 고양이가 냉장고 문을 열고 먹었을 리는 없으니, 우진 밖에 범인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재민은 얼른 편의점에 가 고양이용 여럿 사왔다. 우진이 용돈을 넉넉하게 주었기에 돈에 여유가 있는 재민이었다. 고양이에게 이정도 투자쯤은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헤헤, 맛있겠지?” “냐아아” 재민은 캔을 까주고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기 고양이 비비는 몇번 냄새를 킁킁 맞더니 도무지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 왜 안먹지? 먹어봐.” 잔뜩 기대감어린 시선에 고양이는 옅은 한숨… 어? 고양이가 저렇게 표정이 풍부해도 되나. 아무튼, 옅은 한숨과 함께 할짝 캔을 먹었다. “냐아아아앙!” 혀끝이 닿는 순간 눈이 동그라진 고양이가 허겁지겁 캔을 먹어치웠다. “헤헤, 잘 먹네.” 하루 종일 굶었으니 얼마나 배고팠을까, 재민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잠깐의 웹서핑을 즐기던 그가 슬쩍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아 요즘 좀….” 평소 혼자 살던 재민이지만 우진이 오고부터 개인적 은밀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 지금이 딱 각인데.” 재민의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어른들이 술을 마신다면 최소로 잡아도 2시간. 그전까진 재민은 혼자였다. 마우스 포인트가 내컴퓨터를 지나 깊숙이 숨겨진 직박구리를 찾았다. * “아, 이 자식 왜 전화를 안 받아?” 우진은 재민이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지원을 안아 든 채 문을 열었다. “냐아아.” 비비가 달려 나와 우진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주인님인가? “주인님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옹.” “레벨업 좀 했어. 그보다 쟤는 왜 자냐?” 우진이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 행복한 표정으로 기절해있는 재민을 가리켰다. “냥, 인간들의 교미를 보고 혼자 해결하기에 좋은 꿈을 꾸게 해줬다옹.” 하급 악마. 몽마, 서큐버스 비비. 악몽뿐만이 아니다. 야한 꿈이야 말로 비비의 전문. “쯧, 애 괜히 몽정하게….” “냥, 천국을 맛보고 있을 거라옹.” “됐고, 이불이나 펴봐.” “냥.” 비비가 옷장을 열어 이불을 꺼내들었다. 고양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괴력. 우진이 도지원을 이불에 눕히고는 돌아섰다. “후, 그럼 나가자.” “냥.” 비비가 폴짝 뛰어 우진의 어깨에 올라탔다. 우진은 여관을 찾았으나 근처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어머니와 수아가 있는 집으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관뒀다. 괜히 악몽에 시름하는 모습을 보일까 염려되었다. 다행히 우진은 현대문명의 만능열쇠라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해머길드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애완동물은 함께 투숙이 불가능하다는 직원의 말에 우진은 데려다 놓고 온다는 말과 함께 잠깐 밖에 나갔다가 비비를 소환해제 시키고 호텔 객실을 잡을 수 있었다. “비비 나와.” 객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우진이 비비를 부르자 검은 연기가 뭉쳐 아기고양이의 형상으로 변했다. “냐아앙. 여기가 호텔이냐옹?” “그래. 30만 원짜리 방이다.” “냥, 지구는 참 살기 좋은 곳이다냥. 아참, 고양이캔이란 게 참 맛있다냥. 지구의 고양이들은 그렇게 맛있는걸 먹고 자란다니, 행복한 행성이다옹. 다음에 종종 부탁한다냥.”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보다 비비.” “냥?” “트라넷이 침공하기 이전의 아르펜은 어땠어?” “냐앙? 나는 주인님이 첫 계약이라 잘 모른다옹. 내가 살던 곳은 마계라냥.” “후, 레벨이라도 빨리 올려야겠군.” 적어도 리치소환이 가능한 80레벨까지는 빠르게 올릴 필요성이 있었다. “오랜만에 편하게 자자.” “냐앙.” 우진은 침대에 누웠고 비비는 그런 우진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잠깐의 침묵 후에 고른 우진의 숨소리가 들리자 비비의 눈동자가 완전한 흑색이 되었다. “캬악, 이 미천한 악귀들.” 우진의 지배력에 억눌려있던 악령들이 그의 의식이 흐려진 틈을 타 우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악령의 존재 자체가 우진을 괴롭게 만들었다. 하급 서큐버스인 비비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우진이 악령으로 부터 괴롭힘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 우진의 꿈을 조종해 악몽으로 만들었다. * 우진의 의식이 흐려졌다.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깊은 의식의 침체. 무한정 가라앉을 것 같은 그 느낌은 사지를 옭아매는 끈적끈적한 액체에 멈췄다. 붉고 끈적한 그것들. 피, 피와 피. 그리고 피. 우진이 그 피의 강 위에 섰다. 피는 검어졌고 꿈틀거리며 파도를 만들었다. 그것들이 손이 되어 우진의 발목을 잡았다. [저희를 버리지 마오.] 검은 손길들은 흐느적거리며 다가와 우진을 향해 손을 내 뻗었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들은 참혹 그 자체였다.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버려진 이들. 자신이 버린 이들. [저희를, 군주여, 이 고통에서 저희를….] 어떤 것은 손만, 어떤 것은 상반신만, 가지각색으로 어우러진 시체들이 우진의 몸을 옭아맸다. 우진은 떨쳐내지 않았다. 발을 움직여 걷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서 모든 것을 감내했다. [아르달의 군주시여….] 쾌활하기만 하던 우진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후회고, 미련이었다. “미안하다….” 자신이 죽인 존재들? 아니다. 지켜내지 못한 자들, 자신이 지켜내지 못한 그들의 영혼이 악령이 되어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갈 곳 없는 그들의 원혼을 버릴 수 없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렇게 우진은 모든 것을 감내해내고 있었다. 우진이 시체 밭에 악령들의 늪에 삼켜지기 전 저 멀리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펭귄과 두발로 걷는 공룡, 비버, 곰에 여우까지. 거대 뽀로토 친구들이 습격해오고 있었다. ‘오늘은 쫓기는 악몽인가?’ 우진은 어느새 사라진 악령들의 모습에 한번 잘못 밟히기라도 하면 압사 당할 것 같은 덩치의 뽀로토 친구들에게 쫓기면서도 미소 지었다. ──────────────────────────────────── 33화 - 리셋 “으으.” 지원은 깨질 듯한 두통에 신음하며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재민의 집이었다. 조각 조각난 기억의 편린들이 맞춰졌다. 홍성구라는 우진의 동생이 주도하는 미친 듯한 게임의 폭풍에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괜히 소원으로 모자를 벗어달라고 하기에 오기로 마셨다. 그러다 너무 어지러워 엎드려 있는데 모자가 떨어졌다. “다 봤어….” 왠지 감추고 싶었다. 아름답기만 했던 자신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인연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만 자신의 치부를 모두 보이고 말았다. ‘저게 뭔, 대수라고 여전히 예쁘구만.’ 모자가 벗겨져 차마 일어나지는 못하고 잠든 척 누워있을 때 들은 것 같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우진이 자신을 안고 여기까지 온 것 같기도 했는데… 그땐 진짜 필름이 끊겨 기억이 없었다. 지원은 빨개진 볼을 감싸 쥐다 문득 아직도 모자를 쓰고 있음을 알고는 모자를 벗으려했다. “아야.”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져 지원은 천천히 모자를 잡아 당겼다. 찌이이. 모자의 양옆에 몇 가닥 머리카락과 함께 붙은 스카치 테이프를 보자 지원은 실소하고 말았다. “어쩜.” 언제 붙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묘하게 설렜다. 스카치테이프가 사람 마음을 이렇게 흔들 수 있다는 건 처음 느꼈다. 처음이었다. 괴물같이 변한 자신을 보고도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원의 앞에 우진이 나타났다. “으으.” 설레는 거야 설레는 거고, 숙취는 숙취다. 갈증에 물을 마시곤 화장실을 가려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어, 어? 누나 깼어? 잠깐만.” “새벽부터 왜 깼어?” “어어? 자다가 생각해보니까 빠, 빨래를 안했더라고. 누나 고생할까봐.” “뭐야, 문이나 열어.” “어어? 자, 잠깐만. 다했어.” 새벽 5시. 화장실 문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 “냐아아.” 우진이 잠에서 깼을 때 가장 먼저 비비가 그를 맞이했다. “잘 잤나옹?” “후, 그 쫓아오는 애들은 뭐야?” “뽀로토 친구들이다옹. 티비에서 봤다옹.” “후우.” 긴 꿈이었다. 어찌나 해맑게 웃으며 쫓아오는지… 아직도 그 동물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휴대폰 좀 가져와.” “알았다옹.” 비비가 물어온 핸드폰을 열어 문자메시지를 작성했다. [해머호텔 1703호실. 9시까지 안 오면 뒤진다.] 지금 시간은 8시. 한 시간이면 넉넉한 시간이다. 우진이 땀으로 흥건히 젖은 몸을 씻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섰다. 쏴아아아.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비비가 책자를 보고 있었다. “뭐보냐?” “룸서비스 가이드다옹. 나 이거 먹어보고 싶다냥.” “룸서비스?” 우진이 가이드를 보더니 호텔의 전화기를 들었다. “배달음식이구만.” 우진이 룸서비스를 시키자 곧 있다 비비가 골랐던 음식들이 내어져왔다. 레스토랑에 온 듯이 차려지기 시작하는 음식들을 보며 우진이 혀를 내둘렀다. ‘지구도 아르펜 못지 않구만.’ 아르펜의 귀족들 사치가 심하다 여겼는데 지구도 돈만 있으면 사치는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은듯했다. 아니, 우진이 지구의 상류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더할지도 몰랐다. 음식이 차려지자 비비가 냉큼 식탁위로 올라와 포크를 들었다. “냥, 이게 먹어보고 싶었다옹.” 비비는 아르펜에는 없는 음식인 돈까스를 썰었다. “냐앙, 돼지를 튀기다니. 지구인들의 요리법이 신기하다옹.” “돼지 말고도 다 튀겨.” “정말이냐옹?” 튀김이라는 요리가 없는 아르펜이었다. 비비는 다음에 꼭 먹을 거라며 이것저것 티비에서 봤던 것을 떠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우진은 깨달았다. “아, 나도 티비 좀 봐야겠는데?” 20년 의식의 괴리. 단 5년뿐이지만 우진에게는 20년 만에 돌아온 지구다. 그의 기억 속 지구와 지금 눈앞의 지구는 다른 세상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진은 던전을 도는 시간을 빼면 모조리 티비를 보는데 투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문화를 즐기는 것만큼 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게 또 있겠는가. 식사가 한창일 때 벨이 울렸다. “비비, 소환의 방에 들어가 있어.” “냐앙. 아직 덜 먹었다냥.” “나중에 더 사줄게.” “알았다옹. 꼭 사줘야된다냥.” 비비가 검은 연기가 되어 홀연히 사라지자 우진은 짐을 챙겨 문을 열었다. 성구가 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다가 우진이 나오자 넙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어제는 제가 술김에 미쳤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형님.” “됐고, 예약되는 4성 던전 있냐?” 시간당 벌이를 생각한다면 3성 던전을 굉장히 빠르게 공략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경험치가 적었다. 레벨업을 목적으로 하자면 4성 던전을 공략하는 게 나았다. 집을 사는데 모자라는 돈이야 어차피 이사 전까지 모두 벌수 있었다. “곧 찾아보겠습니다.” “내려가서 커피나 한잔 하자.” 우진과 성구가 호텔의 1층에 마련된 커피숍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여긴 커피값도 더럽게 비싸네.” “호텔이지 않습니까…. 호텔은 원래 비쌉니다.” “쯧, 어쨌든 빨리 찾아봐. 이왕 예약하는 거 이번 주에 가능한 거 죄다 예약해.” “넵.” 우진에겐 조금 별개의 일이지만 일반적인 각성자들을 기준으로 보자면 3성 던전 보다는, 4성 던전의 벌이가 좋았다. 우진이야 괴물 같은 던전 클리어시간을 내기에 3성 던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해버리니, 시간당 수익은 그쪽이 더 나았다. 하지만 익숙해진다면 4성 던전의 공략시간도 더 줄어들 것이고, 시간당 벌이가 더 나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4성 던전은 워낙에 넓고 변수가 많아 위험했기에 각성자 팀들도 신중을 기해 도전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4성 던전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아 빈곳이 많지는 않았다. 성구가 열심히 검색하며 찾는 사이 우진은 휴대폰 게임에 열중했다. 뿅뿅, 팡야! “이게 누구십니까?” 반가운 듯, 반갑지 않은 소리에 우진이 고개를 돌리니 정민찬이 웃는 낯으로 서 있었다. “거, 귀신같이 오시네.” “하하, 출근 전에 항상 여기서 커피를 마시죠.” 거짓말이다. 해머호텔은 해머길드에서 관리하는 호텔이다. 우진이 체크인한 것도 어제부터 알고 있었다. “아저씨, 또 우연이에요?” “하하하, 그러네요. 이정도면 저희도 인연인거 아닙니까?” 능청스러운 그 말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를 가리켰다. “왔으면 앉죠?” “그럴까요?” 정민찬이 자리에 앉자 우진이 물었다. “용건 있으면 빨리 하세요.” “하하, 제가 무슨 용건이 있겠습니까? 어제 일도 미안하고 해서 뭔가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사과의 의미로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자신 같은 사람을 길드에 데려가 봐야 뭐한다고 이렇게 열성적이란 말인가? “성구씨 혹시 던전 예약 중이십니까?” “네? 네. 4성 던전으로 찾으니 스케쥴 빈 데가 잘….” “던전포럼이 범용성이 좋긴 하지만 그리 전문적이진 못하지요.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민찬은 가져온 노트북을 테이블에 올렸다.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니 상위 던전의 예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화면이 떴다. “헐.” 성구는 놀랐고, 우진은 별 관심이 없었다. 좋은 프로그램을 쓰나, 아랫사람을 시켜서 하나 던전 예약만 할 수 있으면 거기서 거기다. “길드의 지원부서는 이런 쪽으로 특화되어 있지요. 또 우진씨같은 각성자께서 저희 길드에 오신다면 집도 무상으로 드립니다. 아, 호텔이 더 편하시면 이곳을 평생 쓰셔도 되죠. 이미 많은 각성자들이 이곳을 숙소로 쓰고 있으니까요.” 우진이 힐긋 그를 보았다. “좋긴 하겠네요.” “하하하, 이제 마음이 조금 생기십니까? 여기 보십시오. 오늘 당장 빈 스케쥴의 4성 던전입니다.” 11시, 2시, 5시, 10시의 4개의 던전이 비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예약금과 이용금액까지 모두 나와 있었다. 확실히 던전포럼보다는 좋아 보이는 프로그램. “어떻게, 예약해드릴까요? 길드에 계신다면 이 모든 번거로운 절차를 신경 쓸 필요가 없으시죠.” 확실히 길드가 있으면 편하긴 할 것 같았다. 우진이 물었다. “그쪽 길드장 내가 꺾으면 내가 길드장 해도 됩니까?” “설마요.” “그럼 됐어요.” “…….” 너무 황당한 소리에 정민찬은 한동안 대답을 찾지 못했다. ‘역시, 높은 자리를 원하는 거였나?’ 민찬은 자신의 예상이 맞다고 생각했다. 역시, 우진은 자신을 상대로 협상을 진행하는 중인 거였다. 무심한척 하면서 계속 여지를 주는걸 보면 말이다. 필시 해머호텔에 투숙한 것도 자신에게 던지는 신호였을 것이다. 내가 여기 머물고 있으니 찾아오라는 신호. ‘밀당할게 없어. 이정도 각성자는 무조건 잡아야 해.’ 그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줘서라도 길드에 넣는게 이득이었다. 사장의 결재가 떨어지지 않아 부사장은 힘들겠지만 각성자 팀의 팀장 정도면 우진도 승낙하지 않을까? 민찬이 머리를 굴리는데 우진이 손가락으로 가장 윗줄의 던전을 가리켰다. “이걸로 예약할 수 있어요?” “물론이죠.” “길드 사람도 아닌데 이런거 막 도와줘도 되요?” “호의입니다. 호의.” 민찬이 웃자 우진도 따라 웃었다. * 우연이라 치기엔 너무 공교롭게도 김해민이 호텔밖에 차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자, 가시죠.” “저, 주차장에 차 있는데.” “걱정 마십시오. 던전 공략 끝나시면 여기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이런 것들도 길드에서는 각성자분께 당연히 제공해드리는 혜택입니다.” 민찬의 길드홍보를 들으며 우진과 성구는 차에 탔다. 해민은 차를 몰아 사당역에서 바로 두정거장 거리인 서울대입구역으로 향했다. 걸어와도 될 만한 거리. “예약은 마쳤습니다. 이용시간까지 조금 남았는데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 하고 오시죠?” 11시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은 상황. 민찬으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공략집에 모두 서술되어있긴 하지만 이번 서울대입구 2번 출구 던전에 대한 브리핑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서울대입구 2번 출구는 해머길드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위 던전에 대한 정보는 길드사이에 거래되기에 공략집 외에 보다 상세한 던전의 내용을 알고 있는 민찬이었다. 던전 공략 전 브리핑은 중요하다. 잘만 듣고 그대로 실행만 해도 던전의 공략이 한층 쉬워진다. 어제 과천청사역에서 정보 없이 고생했을 것이니 이번에 제대로 된 정보를 주려는 것이다. 정보가 이렇게 힘이 된다! 길드에 가입하면 이렇게나 편하게 던전을 공략할 수 있다! 그것을 어필하고 싶었다. “아, 좋죠.” 우진의 승낙에 민찬의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데 사거리 교차로 너머의 6번 출구가 환한 빛을 내 뿜었다. “어? 던전 리셋이다.” 동영상에서만 보았지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인 성구가 놀라 말했다. 던전 자체가 빛나는 현상은 딱 하나였다. 던전 리셋. 광산이 수명을 다하고 새로운 던전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30일 동안 던전을 공략하지 못하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이, 이런. 해민아 빨리 길드에 연락해라.” “넵.” 김해민이 분주히 전화를 거는데 우진이 교차로 너머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저거 공짜 던전 생긴거 맞죠?” “예에?” 던전 리셋. 최초 공략자가 사라진 셈이니 달리 말하면 주인 없는 던전이긴 했다. 하지만 던전이 어디 땅에 떨어진 동전 줍는것도 아니고 무모하게 도전할 수 있는 게…. 분주히 움직이는 6번 출구 주변의 광경을 바라보는 우진의 두 눈은 더없이 초롱초롱해졌다. < 29화 - 던전리셋 (2) - 유료연재 시작 > “저거 아무나 도전할 수 있죠?” “예에? 안됩니다. 새로운 던전공략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런 일은 길드에서 처리하도록….” “길드에서 독점하는 겁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각성자 팀들도 던전을 소유한 경우는 몇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은 미공개 던전을 전문적으로 레이드하는 각성자팀을 보유한 길드가 처리했다. “도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 민찬은 몇 번이나 고민하다 말을 뱉었다. “있긴 하지만 던전에너지를 측정 후에 기회가 생깁니다.” “거, 속 시원하게 설명 좀 해봐요.” 민찬이 별수 없이 대답했다. “던전 에너지 측정한 뒤 등급에 따라 도전 제한이 있습니다. 4성이라면 C급, 5성이라면 B급, 6성이라면 A급만이 도전 자격이 생깁니다.” 우진이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다. “내가 C급이라 그랬나? 그럼 4성 던전이면 자격은 되네. 그다음은요?” “각성자라면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기회가 주어집니다. 첫 도전자가 실패시 그보다 상위의 전력을 가진 팀만 도전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경쟁자가 많으면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합니다.” “호오?” 우진이 그 말을 듣자마자 성구를 보았다. “성구야 가자!” “네?” “선착순이라잖아. 빨리 뛰어.” “넵!” 우진이 먼저 교차로를 가로질러 가버리자 성구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자, 잠깐.” 어찌 저렇게 무모할까? 던전이 장난도 아니고, 정보도 없이 아무렇게나 막 공략할 수 있는 게…. “어? 그러고 보니.” 바로 어제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4성던전을 기준시간과 거의 비슷하게 클리어 한 사람이 눈앞에 뛰어가고 있었다. “허, 아무리 그래도….” 신나서 뛰어가는 모습이 마치 마감세일 하는 마트의 식품코너를 습격하는듯했다. “뭐 저렇게 신나는 건지.” 정민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었다. 김해민이 옆에서 걸으며 웃었다. “하하, 우진씨보면 참 유쾌하지 않습니까?” “그래. 전혀 두려움이 없어 보여.” “에, 상위 던전에 대해 너무 몰라서 아닐까요?” “그….” 민찬은 그 반대의 느낌이라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우진이 각성자 등록을 한지 며칠이 지났나?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정민찬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모르고 덤비는 게 아니다. ‘어디서 저런 사람이 툭 나타나서.’ 정말 어디 별에서 온 사람마냥 요 며칠 정민찬의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사람이다. 다른 각성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상황이다. 오직 강우진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고 있었다. * 서울대입구역 6번 출구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던전이 리셋의 시작은 항상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아이고, 정국형님.” 앞서 던전을 레이드 중이던 팀의 매니저가 울부짖었다. 그들 팀은 모조리 죽었다. 그들의 슬픔과는 별개로 관리국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던전 관리국의 마크가 랩핑된 탑차가 오더니 모여든 사람들을 소개하고 던전입구쪽으로 차를 이끌었다. 입구 앞에 후방 주차하더니 탑차의 지붕이 양옆으로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인공위성의 안테나처럼 생긴 기계였다. “던전 에너지 측정기입니다. 대략적인 던전 안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죠.” 언제 온 것인지 우진의 옆에 온 정민찬이 친절히 설명했다. “4성 나와야 내가 들어갈 수 있네.” “대기순번 접수하셨습니까?” “했지.” 벌써 우진은 한켠에 있는 던전관리국 직원이 든 접수명부에 이름을 적어뒀다. 그것도 무려 첫 번째로 말이다. “4성 이하면 내꺼네.” “하하, 규정상 되기야 하지만 웬만하면 각성자 팀을 이루시는 게…. 저희 해머길드에는 우진님과 보조를 맞출 유능한 각성자들이 많습니다. 입사하시면 당장 우진님을 리더로 하는 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 부하는 나도 있어요.” “…?” 우진은 기계 옆에 붙은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812837128 어지럽게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던 숫자를 보자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저거 한번 가동하는데 사용되는 혈석이 5천만 원어치입니다.” “허, 더럽게 많이 잡아먹네요.” “네, 저것보다 작게 만들어진 에너지 측정장비가 있는데 높은 등급으로 추정되는 각성자들은 모두 그 장비로 측정합니다.” 우진의 고개가 민찬에게로 향했다. “제가 측정할 땐 아니던데요?” “모든 각성자를 상대로 측정장비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한번에 200만 원 가치 정도의 혈석이 소비되니까요.” “혈석이 안 쓰이는 데가 없구만.”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 측정자료 하나만 남겨 주십시오. 아무래도 측정 수치가 있으면 우진님에게 알맞은 등급을 배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뭐, 나중에요.” 민찬과 이야기하는 사이 측정장비의 숫자가 고정되었다. 삐삐, 삑. 최첨단 기계 괴수처럼 생긴 장비가 아날로그틱한 소리를 내며 결과를 도출해냈다. 등급 5성. 우진의 눈에 실망이 스쳤고, 민찬의 얼굴엔 안도감이 어렸다. 4성이었다면 우진 홀로 도전했었어도 성공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면 우진의 가치는 모든 이들에게 공개되고 말 것이다. 이미 공략당한 광산을 클리어하는 것과 미공개 던전을 홀로 클리어한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우와, 주작 팀이다.” “응? 어디 어디?” 화랑길드의 4대 공격대 중의 하나인 주작의 등장에 사람들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애초에 몰려든 기자들이 그들의 모습을 담으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A급 각성자인 이연희를 리더로 두고 있는 주작팀은 10인의 팀원 모두가 B급의 각성자였다. “어우, 이번 던전은 화랑에게 뺏기겠군요.” “쳇, 별수 없지.” 리셋된 던전은 선착순으로 기회가 주어진다. 길드의 본사를 비롯해 각 지부가 역세권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해머길드의 본사가 있는 사당역이 겨우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데 때마침 근처에 있었던 것인지 화랑길드의 주작팀이 가장 먼저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언제 왔는지 방송용 장비 차까지 출동해 주작팀을 찍고 있었다. 새로운 던전의 출현과 최초공략은 아직도 주요 관심사였다. 공략에 실패하면 그것은 곧 재앙의 씨앗이 될 테니까. “네, 여기는 새롭게 리셋된 서울대입구역 6번 출구입니다. 5성의 던전으로 화랑길드의 주작팀이 던전 공략을 위해 준비….” 아나운서는 카메라를 향해 준비된 멘트를 쏟아냈다. 성구는 그것을 구경하다가 문득 싸한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어? 그런데 우진형님 어디 가셨지?” 성구가 두리번거리자 민찬도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우진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야, 이게 측정 장비란 말이지?” “가까이 오시면 안됩니다.” “비키세요. 다칩니다.” “아, 구경만 할게요, 구경만.” 던전 에너지 측정장비를 회수하는 공무원은 우진을 보며 짜증을 냈다. 그 소요에 보안 요원들이 달려와 우진을 떼어내려 했다. “어어? 밀지 마요.” 우진은 자신을 미는 보안요원의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비틀거리며 넘어지더니 그대로 던전 입구의 계단을 굴렀다. “어어?” 주위의 사람들이 놀라 어버버하는 사이 우진의 몸은 구르고 굴러 던전 입구 아래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 속도가 자연적 사고라고 하기엔 구르는 속도가 어째 빠른 듯 한데……. ‘서, 설마 일부러 떨어졌겠어?’ 성구는 긴가민가 하면서도 설마 싶었다. 무려 5성 던전이었으니까. 아무리 우진이 자신만만하기로서니 5성 던전에 홀로 도전할 만큼 무모할까. “큰일이다! 사람이 들어갔다.” “특종이다!” 기자들과 방송용 카메라가 즉시 던전의 입구를 찍었다. “큰일입니다! 현장은 지금 낙상사고로 인해 사람 하나가 던전에 입장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현재 이 각성자의 신원을 파악 중이며 소식이 들어오는 데로….” 성구와 민찬, 해민은 모두 그대로 굳어 던전 입구만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헐.” 성구의 어이없는 음성에 얼음 땡이라도 하듯 민찬과 해민이 한숨을 쉬었다. “팀장님. 우진씨 아무래도 5성 던전은 홀로 무리지 않습니까?” “후우. A급 각성자라도 혼자서는 힘든 게 5성 던전인데…….” 측정된 던전 중 가장 높은 것이 6성이다. 이 던전은 잘 리젠되지도 않고, 된다 하더라도 길드와 정부가 모두 힘을 합쳐 나라차원에서 최고의 각성자 팀을 꾸려 도전한다. 도전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재앙을 막기 위한 사투였다. 그렇게 막지 못한 6성 던전이 터져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적도 꽤 되었다. 5성 던전은 사실상 길드가 독점할 수 있는 최고등급의 던전. 무조건 아티팩트가 포함되어있고 나오는 몬스터의 위험도도 달랐다. 최소 도전 등급이 B급. 보통 A급 리더가 이끄는 B급 팀이 이런 던전을 공략한다. 각 길드의 정예 팀들. 공략된 6성 광산은 서울에 딱 두 군데 뿐이다. 그리고 5성 던전도 여덟 군데일 뿐이다. 주작 팀도 공략을 앞두고 긴장할 정도의 5성 던전인데 각성자 하나가 낙상사고로 던전에 들어갔다? 100% 죽음이다. 주작의 리더 이연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쯧, 딜레이됐네. 곧 돌입할 테니 모두 긴장 풀지 말고 대기.” “네, 팀장님.” 닫힌 결계가 다시 열리는 경우는 하나 뿐이다. 입장한 각성자의 죽음. 이연희는 그것을 잠깐의 시간 정도로 보았다. 성구는 우진의 죽음을 생각하자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혀, 형님….” 하지만 잠깐이면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결계는 계속 유지 중이었다. 점심이 지나고, 저녁이 찾아와 해가 질 때까지도 결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 “어? 우진 오빠다.” 승미는 티비를 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데없이 우진 오빠의 얼굴이 뉴스에 뜬 것이다. “헤헤, 잘생겼다. 어어?” 우진의 모습에 헤실 거리던 승미는 뉴스의 내용에 경악해 주방으로 뛰어갔다. “아주머니! 큰일 났어요. 우진오빠가 던전에 떨어졌데요.” “그게 무슨 말이니?” “이잉? 이씨 아들이 떨어져?” 주방 아주머니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홀의 티비에 시선을 주었다. 누군가의 휴대폰에 찍힌 동영상이 재생 중이었는데 던전 입구에서 실랑이하던 우진이 보안요원에게 밀려 던전으로 구르는 영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사고자 강모씨는 C급의 각성자로 던전 경험이 4회 뿐이며…. 한편 최초 입장으로부터 8시간이 지난 현재. 던전 내의 시간으로는 32시간이 경과한 상태로, 이는 기적에 가깝다는 전문가의…. 곧 한계에 부딪힐 각성자 강모씨의….] 뉴스를 보던 이수경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우, 우진아.” “아이고, 이씨 어떡한대.” “그르게 저 위험한 데를 가서….” 동료 아주머니들의 위로도 승미의 안타까운 흐느낌도 들리지 않았다. 이수경은 차오르는 슬픔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우진 아버지. 제발 우리 우진이 좀 보살펴 주세요. 제발.” 이수경의 슬픔에 찬 눈물에 식당 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 사고현장 서울대입구역 6번 출구. 결계 생성 9시간 12분 경과. 주위는 주작팀을 위시한 화랑길드의 관계자들, 방송국 사람들과 기자들, 몇몇 구경꾼들이 뒤섞여 있었다. 민찬과 성구, 해민은 우진과 동행이라는 이유로 던전의 입구계단 쪽에서 감시 아닌 감시를 받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 짜증 나게 버티네. 그만 하지 이제.” 주작팀의 누군가의 음성에 성구가 발끈했다. “버티는 게 아니라 우리 형님은 공략 중이신 거요!” “허, C급 새끼가 공략은 무슨. 존나 숨어서 겨우 목숨줄 연명 중이겠지.” 성구가 벌떡 일어서려는데 민찬이 성구를 말렸다. “참아요. 성구씨.”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잖아요.” “우리라도 믿고 기다립시다.” “후우.” “성구씨는 봐서 알 것 아닙니까? 가능성이 있습니까?” “당연하죠.” 성구는 확신에 차 있었다. 4성 던전에서도 우진은 그다지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우진이 아무런 준비없이 던전에 내던져졌다지만 아공간이 있었다.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대체 우진씨 능력이 뭡니까? 자료로는 고작 스켈레톤 소환 하나 뿐이니….” “말 못합니다.” 성구의 앙다문 입술에 민찬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청년 고집 보통이 아닐세. 아까부터 은근히 물어보는데 중요한 건 하나도 말하지 않는 성구였다. “식사들 하세요.” 벌써 시간이 늦어 배고픈 와중에 짜장면이 배달돼 왔다. 성구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괜히 눈물이 나는듯했다. ‘형님은 안에서 고생하실 텐데 난 여기서….’ “성구씨. 먹어요. 먹고 기다립시다. 5성 던전 평균 최초 공략시간이 12시간이에요.” 던전 내의 시간으로 2일이나 되는 시간이다. 그것도 평균이 그렇다는 거지 더 걸릴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실패하면 영영 다시는 볼 수 없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배고픈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성구는 랩을 뜯어 짜장면을 비볐다. 막 한 젓가락을 입에 물었을 때였다. 츠츠츳. 결계가 사라지며 우진이 튀어나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으엉, 어엉니임.” 짜장면을 씹는 것도 아니고, 뱉는 것도 아닌 성구의 말에 우진이 씩 웃었다. “내 것도 시켰냐?” “으어으엉.” 성구는 짜장면을 억지로 삼키며 우진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방송 카메라들이 일제히 우진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 29화 - 던전리셋 (2) - 유료연재 시작 > 끝 ⓒ 진설우 < 30화 - 던전 리셋 (3) > 설마 규정을 어기고 입장했다고 무슨 제약이나 벌이 있는 건가? “하하….”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 된 순간. 우진은 자신을 밀쳤던 보안요원이 아직도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어우, 아저씨. 밀면 어떻게 해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미, 밀지 않았는….” 우진이 보안요원에게 다가가 과장되게 안았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뭐 살았으면 됐죠. 아저씨도 놀랐죠?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살았잖아요?” 아니, 이게 그저 살았으면 될 일인가? 혼자서 5성 던전을 공략한 각성자가 나타난 초유의 사건인데. “어어? 야야, 빨리 카메라 돌려.” 잠시 쉬고 있던 방송국 사람들이 분주히 카메라를 다시 세팅하기 시작했다. 아나운서의 말에 우진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방송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새로운 소식을 전합니다. 낙상사고로 던전에 입장했던 강모씨가 놀랍게도 던전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당사자와 인터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나운서가 다가오는 가운데 정민찬이 재빠르게 우진의 곁에 다가와 웃옷을 벗어 덮었다. “어?” 우진이 어리둥절해하는데 민찬이 빠르게 그를 부축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언론에 노출되면 저만 귀찮게 하는게 아니라 전국에서 귀찮게 다 모여들 겁니다.” 그러면 안되지. 우진은 순순히 웃옷을 덮어 썼다. 성구가 눈치껏 우진을 옆에서 부축하자 김해민이 빠르게 일행에서 이탈해 차를 가지러 갔다. 그사이 정민찬이 방송국 사람들과 셔터를 마구 눌러대는 기자들을 막아섰다. “5성 던전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참입니다. 인터뷰 거부합니다. 안정이 우선입니다.” “아니, 당신이 뭔데 국민의 알권리를 막는다 말이오?” 어느 기자의 항의에 몇몇 이들은 정민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해머길드 팀장 같은데?” “그럼 저 사고 각성자도 해머길드 소속인가?” “이거, 설마 사고를 가장해 해머길드에서 가로채기 한거 아니야?” 기자들의 수군거림에 정민찬이 정색하고 말했다. “추측성 기사 자제해주십시오. 고소할 겁니다. 사고 각성자 개인정보 유출도 강력히 대응할 겁니다.” 민찬이 한마디 정보라도 얻으려는 기자들을 막아서는 사이 해민이 차를 가져왔다. “팀장님! 여깁니다.” 성구가 우진을 데리고 재빨리 뒷좌석에 탔다. 민찬도 차에 오르자 인파들이 몰리기 전에 빠르게 사거리를 빠져나왔다. “후우, 무슨 범죄자 된 것 같네.” 우진의 말에 민찬은 참았던 숨을 뱉었다. “후우. 정말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민찬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진에게서 촉이 온다 싶긴 했지만 설마 혼자서 5성 던전을 클리어 할 줄이야…, 그것도 미공개 던전을 말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요? 떠밀려서 우.연.히. 들어간 거?” 되묻는 우진의 모습에 민찬은 피식 웃었다. 지금 모습만 보면 누가 5성 던전을 다녀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던전은 좀 어땠습니까?” “아, 뭐 대충 아슬아슬했죠.” “전리품도 못 챙겨 오신걸 보면 이번엔 꽤 힘드셨나 봅니다.” 아, 그거야 다 아공간에 있지. 혈석 하나 까지 다 챙겨오느라 늦은 건데…. 우진은 굳이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뭐, 그렇죠.” 정민찬이 조수석에서 몸을 반쯤 틀고는 우진을 똑바로 보았다. “언론에서 한동안 시끄러울 겁니다. 당분간 던전은 물론이고 아예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기자들이나 방송국이나 저희 해머길드에서 최대한 막아드리겠습니다.” 민찬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정성도 정성이다. 이 아저씨는 왜 이렇게 자신에게 우호적일까? “조건은요?” 민찬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해머길드에 입사 하시겠습니까? 이미 실력이야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부사장직까지는 어떻게 될 겁니다. 사장님 결재도 문제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우진님을 위한 팀을 만들어 드리죠. 팀원들도 우진님이 마음껏 뽑으셔도 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성구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긴, 대한민국에 단 10명뿐인 A급 각성자다. 새로운 A급 각성자일지도 모를 우진의 출현이니, 비싼 대우야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격적이었다. 숨죽인 성구의 눈길도, 운전하는 해민의 귀도 우진의 입술을 주목했다. * “쯧, 꼭 저런 데까지 가서 얼굴을 팔려.” 해머길드의 사장 박상오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뉴스속보에서 비치는 화면들 사이에 정민찬 팀장의 얼굴이 보인 까닭이다. 사당역에서 겨우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의 5성 던전의 공략 순서도 화랑길드에 뺏긴 주제에 잘도 저런 곳에서 뻐기고 있었다. 애초에 우진인가 뭔가 하는 네크로맨서 하나 스카우트해보겠다고 평소 업무를 소홀히 한 대가이지 않은가? 돌아오면 단단히 징계를 내려야겠다 생각할 때였다. “어?” 방송 카메라에 잡힌 던전의 입구 쪽 결계가 사라지며 우진이 걸어나왔다. 박상오가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미친.” 혼자서 5성 던전? 가능할 수도 있지. 박상오 본인도 자신이 있었다. 그는 A급 각성자니까. 하지만 상대는 C급이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C급도 정민찬이 중간에서 조절한 것이다. “A급 이라고?” 박진우처럼 포텐을 감춘 각성자가 아니었다. 이미 완성되었다고 봐야 했다. “미쳤어.” 정민찬의 감이 맞았단 말인가? 방송화면은 서둘러 우진의 신변을 보호하며 차에 태워 사라지는 민찬의 모습이 보였다. 박상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정 팀장이 해낼 줄 알았어.” 정민찬이 해머길드에 세 번째 A급 각성자를 물어다 주게 생겼다. * 화랑길드의 마스터 이상호는 지원부에서 조사해온 보고서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 보고서의 신뢰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70% 정도입니다.” “흠.” 이상호는 인상을 썼다. 강우진이라는 각성자에 대해 조사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 보고서였다. 해머길드에서 비밀리에 키운 각성자. 행방불명된 5년이라는 시간이 그것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최근에서야 활동했고, 굳이 각성 등급을 올리지 않고 C급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번에 주작팀이 먼저 도착한 5성 던전을 새치기했다. “새치기는 아닌가?” 우진이 가장 대기열에 이름을 적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C급 각성자. 자격이 없었다. 그의 도전은 규칙에서 어긋난 일. 그것을 피하고자 사고를 가장해 던전에 입장했다? 솔로 플레이라는 위험을 안고? 더욱이 5년간이나 비밀리에 키운 각성자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무엇보다 해머길드에서 고작 5성 던전 하나 먹자고? “앞뒤가 안 맞아요. 지금 해머길드에서 아등바등 기자들 입 틀어막고 있는 것 보면 알잖습니까?” 해머길드는 우진의 신원이 감춰지길 원한다. 보고서를 올렸던 지원팀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해머길드의 소속이 아니라면 그의 실력이 설명 되지 않습니다.” “그렇죠. 설명이 안되죠. 던전 4번 돌고 A급 되면 지금쯤 A급 각성자가 수백 명은 넘어야죠.” “그렇습니다.” “다시 조사해보세요. 그전에 그가 프리라 생각하고 접촉을 해보세요. 가능성이야 넓게 봐야죠?” 지원팀장은 고심하다가 말을 뱉었다. “사장님. 그가 어디의 소속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이상호의 귀가 솔깃해졌다. “뭡니까?” “강우진씨 아직 미필입니다.” “……!” 동그래진 이상호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과연 그 방법이라면 우진의 소속을 확실히 파헤칠 수 있었다. * “푸하하. 나 촉 되게 좋아.” “하하하, 정말 웃깁니다. 형님.”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인지라 재민은 인상을 팍 썼다. 고개를 돌려보니 개그프로를 보고 박장대소하는 우진과 성구, 그리고 고양이…. 어? 고양이가 왜 저렇게 웃어? 쟤 스스로 고양이라는 자각이 있는 애일까? 재민은 그들을 보며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시험공부 하는데 조금만 음량 줄여 주시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어.” 우진이 대충 리모컨을 눌러 음량을 한 칸 줄였다. “헤헤, 재민 학생 미안.” “하아.” 재민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왜 자신의 집이 갈 곳 없는 청춘들 머무르는 여관이 되었는가? “형들, 걱정 안되세요?” “아하하, 뭐가?” 티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충 대답하는 우진이었다. “밖에 기자들 쫙 깔린 지 벌써 3일째에요.” 재민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조금씩 지쳐서 나가떨어지잖아.” 첫날보다 많이 줄어들기야 했지.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형 인터넷은 안 봐요? 난리에요. 5성 던전 솔로 플레이. 이거 형이잖아요.” “나 유명해졌네.” 시큰둥한 우진의 대답에 재민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실제로 우진과 관련된 기사가 하루에도 수십 개 뜨다가, 수십 개씩 묻혔다. [베일의 각성자 강XX 그의 정체는?] [해머길드의 비밀 각성자.] 별의별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하는데 어떻게 당사자들은 저렇게 천하태평일 수 있을까? 우진은 계속 말 거는 재민이 귀찮아 지갑을 찾았다. “아, 그래서 이렇게 불편한데 밖에 나가지도 못하잖아. 말 나온 김에 밖에 가서 귤 좀 사와 봐.” “재민 학생 두 봉지.” 헐, 형들 겁나게 편해 보이거든요? 님들이 아니라 내가 불편해요. 겁나게 불편해요. “형, 저 시험기간이거든요?” “남는 거 심부름 값.” 우진은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흔들었다. 재민은 뾰루퉁한 얼굴로 그것을 째려보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건요?” “재민학생, 난 메로나.” “난 월드콘.” “냐아, 냥.” “…….” 재민이 나가자 우진은 당장 티비의 음량을 다시 올렸다. “형님. 그런데 재민학생한테 너무 민폐 아닙니까?” “하하, 그럼 어디 가냐? 어딜 가나 기자들이 쫓아오는데.” 집까지 찾아와 하도 가족들을 괴롭게 하기에 재민의 집으로 피신한 둘이었다. 그것이 벌써 3일째 전보단 덜했지만 여전히 매복 중인 기자들이 있어 던전 공략도 하지 않은 채 재민의 원룸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형님. 해머길드 제의는 정말 이대로 계속 거절하실 겁니까?” “어, 왜?” 아, 이 좋은 기회를. 부사장이 어디 아무한테나 주는 자리인가…. “후우, 아닙니다. 형님.“ 띠리리리. 그때 때마침 우진의 휴대폰이 울리자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기자들 이젠 안 오죠? 네, 네?” 삐딱이 누워 티비를 보던 우진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런 게 아직도 날아와요?” 성구는 무슨 전화기에 우진이 저리도 놀라는지 궁금했다. “후우. 알았어요. 있다 기회 봐서 가지러 갈게요.” “형님. 무슨 일입니까?” 우진이 전화를 끊자마자 성구가 물었다. 우진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져 있었다. “성구야.” “네, 형님.” “우리나라 아직 통일 안됐냐?” “안 됐지 말입니다.” “왜 안됐냐?” “…….” 그걸 알면 통일부 장관을 하고 있지. 왜 여기 앉아있겠는가. 우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영장이 날아왔다. 그가 사라진 5년 동안 던전도 생겼는데 이 망할 나라는 아직도 분단국가였다. “성구야. 나랑 같이 평양 가자.” “예옛? 어딜 말입니까?” “김정일이 멱따러 가자.” “예? 김정일이 죽은지가 언젠데….” “뭐? 걔가 죽었는데 왜 통일 안 되냐?” “그 아들이 물려받았습니다.” “…….” “…….” 잠깐 고심하던 우진이 다시 말했다. “그럼 그 새끼 죽이러 가자.” “예에?” 진지한 우진의 얼굴을 보며 성구는 농담이 아님을 알고는 심각해졌다. “아니, 형님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영장 나왔다.” “…….” 성구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우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혀, 형님.” “가자! 통일시키러. 입대 전에 통일 시켜버리자.” “혀, 형님 진정하십시오. 그사람 죽인다고 통일이 바로 됩니까?” “되지 왜 안돼.” “안됩니다.” 성구의 말에 우진이 좌절하고 털썩 앉았다. “하아.” 아니, 시대가 어떤 시댄데 징병제란 말인가? 성구는 덩달아 심각히 고민하다가 불현 듯 생각나 말했다. “아 형님!” “왜?” “각성자는 어차피 군대 가봐야 특별사단에 배치됩니다.” “그게 왜?” “얘들 하는 일이 던전 브레이크 일어난 지역에 제일 먼저 출동해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군대에 안가고도 그들하고 똑같은 일 하는데가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기에 성구도 곧 영장이 날아올 터였다. 군대에 대해 조사해봤기에 성구는 훤히 꾀고 있었다. “공익근무 같은 겁니다. 군대 안 가고 부대에서 지원 요청 있을 때만 합류해 몬스터 토벌 돕는 겁니다.” “오! 그건 어떻게 신청하냐?” “그런데 이게 신원이 확실한 길드소속의 각성자들만 가능한데 말입니다.” “으음.” 고심하는 우진을 보며 성구가 은근히 말했다. “이참에 길드에 드는 것이 어떠십니까?” “흠.” 우진이 고민했다. ‘평양에 몰래 가 암살을 할까?’ 애초에 길드의 가입 따위는 고민의 선택지에 있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오른 우진이었다. “성구야.” “네, 형님.” “길드 하나 만들자.” “예?” 우진은 만족한 듯 웃음 지었다. “길드 설립 준비해라.” 어디든 숙이고 들어가긴 싫으니 아예 하나 새로 만들면 될 일이다. 길드 뭐, 그까짓 거 대충 하나 만들면 되지. < 30화 - 던전 리셋 (3) > 끝 ⓒ 진설우 < 31화 - 길드 설립 > “새로 만들까? 뺏을까?” “빼, 뺏다니요. 안됩니다.” “역시 만들어야 하나.” “…….”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봐.” 성구는 당황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길드가 동호회도 아니고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거란 말인가? “밖에 기자들 많아서 못 나갈 텐데요?” “성구야.” “네, 형님.” “평생 숨어 살 것 아니면 저런 건 일찍 무시하면서 사는 거야.” “네? 하지만 형님께서 주목받는걸 원치 않으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우진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아르펜에서의 우진이 어땠는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전 대륙의 관심사였다. 그런 관심들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우진으로서는 딱히 언론의 노출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 대해 거부감도,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소시민의 삶을 산다? 트라넷이 지하철역마다 땅굴을 파고 지구를 노리고 있는 마당에? 가당찮은 소리다. “얼굴 좀 팔리면 어떠냐? 세상엔 막는다고 될게 있고 막아도 안될게 있어.” “어, 그야.” 철없어 보이면서도 이럴 땐 왜 이렇게 딱 맞는 소리만 하실까. 형님의 말대로 이미 매스컴을 탔다. 해머길드의 언론에 대한 압박으로 그에 대한 정보가 풀리지 않았지만, 그와 비례하여 사람들의 궁금증은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우연히 사고로 입장하게 되었다지만 5성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 해낸 괴물이니까. 관리국에서는 우진에 대한 각성자 등급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조만간 새로 측정할 것이라 했다 “그럼 조사해보겠습니다.” “군대 가기 전까지 다 처리해라.” “네.” “나 군대 가면 너만 피곤한 거 아니다?” “…네.” 어차피 우진 정도 되는 고위 각성자는 군대에 거의 간부급 대우를 받긴 하지만…. 성구가 막 컴퓨터를 부팅하는데 우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우진씨. 저 김해민입니다.] “아, 무슨 일이죠. 아침부터 소주?” [하하, 그건 다음에 하시고요, 찾아뵙고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서울역 6번 출구 던전 위탁관리 때문에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으음.” 우진은 해민의 연락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보고 이야기 합시다. 안 그래도 길드 때문에 이야기할 것도 있는데 정팀장도 같이 보죠?” [예? 길드요? 정말이십니까?] “네. 어디서 보죠?” [지, 지금 달려가겠습니다. 곧 갑니다!] 전화가 끊기도 전에 우당탕 거리는 해민의 소리가 들렸다. “허, 왜 이렇게 좋아하지?” * 지원 4팀. 팀장실. 쾅. 거칠게 열리는 문에 정민찬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어떤 놈이 싸가지 없이….” “팀장님! 해냈습니다. 해냈어요.” 한국이 월드컵을 우승한 것처럼 기쁨이 줄줄 흘러 보이는 얼굴을 하곤 해민이 달려왔다. 그 기세에 민찬이 직장 상사와 부하 간의 에티켓과 한국의 선후배 문화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시도해보려던 것을 멈췄다. “뭐, 뭐냐?” “우진씨가 길드일 때문에 한번 보잡니다!” “뭐어!” 민찬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엉덩이에 밀린 의자가 넘어졌으나 그것을 신경쓸 정신이 아니었다. “팀장님이 또 한 건 해냈습니다!” “하하, 하하핫!” 스트레스만 받아온 요즘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정민찬은 서둘러 재킷을 챙기고는 해민에게 말했다. “당장 만나러 갈 준비해. 난 사장 보고하고 간다.” “넵. 하하.” 해민이 신나서 뛰어가자 민찬도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사장실로 향했다. 민찬의 방문에 여비서가 인터폰을 눌렀다. “사장님. 지원 4팀장 방문입니다.” [아이구, 어서 모시세요.] 민찬의 귀에도 작게 들리는 인터폰 소리에 절로 미소 지어졌다. 그래. 나 정민찬이 아직 죽지 않았어! 당당하게 사장실로 들어서는 민찬을 해머길드의 사장 박상오가 소파까지 마중 나왔다. “아이고, 우리 정팀장님. 무슨 일입니까?” “강우진씨에거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가.” 박상오가 정민찬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정팀장이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허허허.” “흠흠, 강우진씨 건으로 결제받을 것이 있습니다.” “허허, 그거야 우리 정팀장에게 전권 준거 아닙니까?” “전에 보고 드렸던 부사장직을….” “아이고, 우리 정팀장님이 줘야 된다면 줘야지요.” 박상오의 부담스러울 만치 적극적인 지원에 정민찬이 속으로 승리의 어퍼컷을 몇 번은 날렸다. “허허, 고생하셨습니다. 정팀장 덕에 우리 해머길드가 대한민국 1등 길드로 거듭날 발판을 마련했어요.” 대한민국의 3대 길드. 해머, 화랑, KH 모두 A급 각성자를 3명이나 보유한 곳은 없었다. 우진을 길드에 입사시키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해머길드가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박상오는 정민찬이 더없이 보배처럼 보였다. “그럼 결재하신 걸로 알고 갔다 오겠습니다.” 박상오는 손수 사장실 밖까지 정민찬을 배웅했다. “암요. 조심해서 갔다 오십시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은 소식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이봐 김비서. 오늘 길드 전체 회식 준비시켜!” “네, 사장님.” 정민찬이 엘레베이터를 타는 그 순간까지 박상오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엘레베이터가 닫히자 정민찬이 주먹을 쥐고는 어퍼컷을 날렸다. “예쓰!” 훗, 제까짓 놈이 내가 아니었으면 어디 A급인 박진우도 발굴했겠어? 다 내 덕이지. “에헴.” 민찬은 떨어졌던 자존감이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힐링이란 이런 것인가? 또, 한 건을 해냈다. 나 정민찬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 나는 건재하다. 계약서와 필요한 서류, 노트북을 챙겼다. 1층에 가보니 해민이 차를 가지고 대기 중이었다. 민찬 만큼이나 신나 보이는 해민이었다. * 사당역 카페. 엔젤엔젤의 비지니스 룸.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민찬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계약서는 꺼내보지도 못했다. 우진이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아저씨가 저희 길드로 오라고요.” “…….” 이게 무슨 상황일까? 언뜻 이해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전화가 그럼 해머길드와 계약하신다는 말 아니었습니까?” 우진이 피식 웃었다. “내가 왜가요. 정팀장이랑 해민씨가 저희 길드로 오시죠.” “…….” 정민찬도 놀랐고, 김해민도 놀랐다. 정민찬은 탄식했다. 길드가 있었구나. 우진이 소속 길드가 있었어. 그러니 해머길드 입사를 그렇게 유혹해도 거절했지. 어디일까? 화랑? KH? 아니면 다른 중소길드? “후, 우진씨 길드 이름이 어딥니까?” “아르달 길드로 하죠.” 하죠? 아르달?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가 모르고 있음은 규모가 작은 길드라는 말. 눈치 빠른 해민이 검색해보니 아예 길드 자체가 없었다. “저, 아르달이란 길드는 없는데요?” 해민의 말에 우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네?” 우진이 해민과 민찬을 바라보았다. “두 분이 오셔서.” “네.” “만드셔야죠.” “…….” 오늘 아침 먹은 커피에 누가 약을 탔나? 왜 이렇게 헛소리가 들릴까. 그러니까 지금 길드를 새로 만들겠다는 소리인가? “해민씨 지금 얼마 받아요?” “예?” “연봉이요.” “저야 5천 조금 더 되는….” “1억 줄게요.” “예에?” “적으면 5천 더 주고.” “……?” 해민이 눈이 동그래지는데 우진이 정팀장을 보았다. 정민찬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전 돈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 아닙니다. 아니, 그것보다 황당하지 않습니까?” “뭐가요?” “갑자기 길드라뇨. 더군다나 이직이라니요. 저 해머길드 팀장입니다.” 길드는 각성자들의 조합이기도 했고, 회사이기도 했다. 연예기획사와도 비슷해, 각성자들은 모두 개별로 길드와 계약관계를 맺는다. 지원부서와 같은 일반인들은 사원으로서 입사한다. 정민찬은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뒤늦게 해머길드에 합류했지만 팀장까지 오를 만큼 능력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 그가 돈에 의해 길드를 옮긴다? 멀리 내다보면 자신의 커리어에 큰 흠집이 남을 일이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길드 아르달. 창립멤버가 되어 주시죠?” “……!” 정민찬의 눈이 흔들렸다. 창립멤버라는 그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길드 하나 만들려고 해도 아는 게 있어야죠. 아저씨가 와서 좀 도와주시죠?” “…….” “안 그러면 그냥 평양가고.” “……?” 자신의 이직과 평양 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 “…….” 해머길드로 돌아가는 차안 해민과 민찬은 말이 없었다. 해머길드 본사에서 엔젤엔젤이 있는 사당역 사거리는 걸어도 될 정도로 지척이다. 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주차장에 도착했고 침묵은 길지 않았다. “팀장님. 저는 옮길 겁니다.” “야, 너.” “아니, 막말로 멋진 일 아닙니까? A급 각성자일지도 모를 우진씹니다. 아니 거의 확실하죠. 누가 솔로플레이로 5성던전을 클리어 합니까. 길드가 어떻게 커질지 압니까? 해머길드에 남아있어 봐야 제가 어디까지 올라가겠습니까?” 이미 커질 대로 커진 해머길드가 더 팽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의 입사 선배들은 윗자리에 꽉 차 있으니 승진은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한 상황. “우진씨 5성 던전도 하나 소유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 굴려도 솔직히 제 연봉 떼먹진 않을 겁니다.” “…….” 맞는 말이다. 우진의 던전 공략 패턴으로 볼 때 우진이 만들 길드의 미래는 굉장히 밝았다. “창립멤버입니다. 솔직히 총괄지원부장 정도는 맡을 수 있을 겁니다.” 지원팀을 총괄하는 직위. 저리 말하는걸 보면 해민의 오랜 꿈이었나 보다. 민찬은 고민했다. 나의 야망은 어디에 있는가? 해머길드에서의 나는 어떤가? 해머길드의 지원부장, 이사는 모조리 창립멤버였다. 아무리 혁혁한 공을 세워도 정민찬이 그들을 제치고 상사가 될 수는 없는 곳. “나도 간다.” “팀장님.” 민찬의 결정에 김해민이 항상 품고 다니던 사직서를 품에서 꺼냈다. “너, 맨날 가지고 다녔냐?” “헤헤, 직장인이 다 그렇죠. 뭐.” 정민찬이 피식 웃으며 정장 주머니에서 사직서 봉투를 꺼냈다. 해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팀장님도?” “직장인이 다 그런 거지.” “크, 같이 멋지게 던지고 소주나 한잔하러 갑시다.” “오냐.” 정민찬과 김해민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해머길드를 향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지원 4팀이 있는 11층에서 내리자 사무실의 불이 모두 꺼져있었다. “어?” 커텐까지 쳐서 어두컴컴한 실내에 촛불이 켜진 케익과 주위를 빙 둘러싼 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4 지원팀만 모인 것도 아니고, 지원팀들이 죄다 모인듯했다. 사장인 박상오와 부사장인 박진우도 자리에 함께였다. “정민찬 팀장님 부장승진 축하드립니다!” “어어?” 민찬이 어리둥절해하는데 사장인 박상오가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내 민찬씨 애초에 눈여겨봤는데 팀장자리론 모자라. 내일부터 민찬씨는 총괄지원부장으로 자리 옮기세요.” “예에?” 깜짝 놀라는 그를 보며 팀원들이 부추겼다. “팀장님. 빨리 초 부세요.” “총괄 가서도 저희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하하, 팀장님 승진 축하드립니다.” “허허.” 민찬은 너무 당황스러워 웃음밖에 새어나오지 않았다. 얼떨결에 촛불을 불어 끄니 불이 켜지며 사무실을 빼곡 채운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자, 이번에 엄청난 협상을 하고 온, 협상의 귀재. 정민찬 총괄부장님을 위해 다시 박수 한 번 칩시다.” “와아. 부장님 멋져요!” 박상오의 선창과 함께 이어진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민찬의 귀를 때렸다. 민찬과 해민만이 핼쑥한 얼굴로 허허롭게 웃고 있었다. 예, 사장님, 그 협상의 귀재가 협상하러 가서 협상 당하고 왔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저, 사장님.” “하하하, 자아, 좋은 소식이야 회식자리 가서 들읍시다. 오늘 아주 좋은 곳으로 예약했습니다.” “와아아아! 회식이다.” ‘허허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해머길드의 총괄부장과 새로운 길드의 창립멤버. 그토록 바라던 달콤한 열매와 무엇으로 자랄지 모를 씨앗을 쥐었다. 사직서를 전할 새도 없이 사람들이 우루루 회식장소로 이동했다. “티, 팀장님. 어떡하죠?” “어쩌긴….” 당황한 해민의 물음에 민찬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사장은 오늘따라 왜 저렇게 오버를 해서는……. “하아, 송별회 해준다는데 가야지.” 이 빅엿은 정민찬이 만든 것이 아니다. 박상오. 사장 본인이 자초한 것이다. 민찬은 품에 쥔 사직서를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 31화 - 길드 설립 > 끝 ⓒ 진설우 < 32화 - 길드 설립 (2) > 해머길드 소유의 호텔. 커다란 연회실이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당직근무에 파견 근무를 나가 있는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인 듯 싶었다. “미치겠네.” “티, 팀장님 어떡합니까?” “난들 아냐?” 도무지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호텔의 조리사들이 총출동한 듯 뷔페가 차려졌고,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에서 정민찬과 김해민의 얼굴만 어두워져 갔다. 사표를 수리해줘야 할 상사인 총괄지원부장은 다른 곳으로 발령나 버리고 자신이 부장이 되었다. 사장은 저쪽 이사들과 상무들이 즐비한 자리에 가 있었고, 자신은 팀원들에게 둘러싸여 연신 승진 축하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때 김해민이 민찬을 향해 봉투를 내밀었다. “뭐냐?” “사표 수리해주시죠.” “…….” “저라도 나가야죠.” “우리 어차피 같은데 가.” “먼저 가서 좋은 자리 좀 달라 하죠. 혹시 압니까? 제가 팀장님보다 높은 자리 앉을지.” 이 새끼. 평소에도 싸가지없더니, 오늘따라 왜 이리 얄밉지? “어우, 자리 불편해서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질 않네. 저 먼저 갑니다. 팀장님 화이팅!” “야아.” 해민이 혹여라도 잡을세라 재빨리 사라졌다. 손에 쥔 사표를 꼭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장님. 제잔 한잔 받아주십시오.” “어, 그래.” 벌써 부장님, 부장님 하며 잘도 아부해오는 직원들이 주는 술잔을 받으며 민찬은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퇴사하면 어차피 안 볼 사람들이지만 어차피 좁은 길드 사회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일들이 태반일 테니 안 좋게 헤어져 봐야 신생길드인 우진만 힘들었다. 벌써 몇 잔째인지도 모를 술잔을 들어 비웠다. “크.” 자리에서 일어선 민찬이 이사들이 즐비한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하하하, 대한민국 최고길드의 길드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허허헛, 뭘 그러십니까? 다 여러분 덕이지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박상오를 보며 민찬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말을 해도 엿이다. 아름다운 이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말이다. “저, 사장님.” “아니, 우리 길드의 일등 주역 정부장님 아니십니까? 자자, 이리 오세요.” 사장이 이끌자 이사들이 민찬을 보았다. 한때는 정민찬이 발굴해낸 인재들도 있었다. 모두가 B급의 각성자들. 저들에게 성과는 보다 높은 각성자등급과 던전공략 이력이다. 어제의 동료가 한순간 보다 높은 직위에 임명되는 것이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부러워하거나 배아파 하는 이들은 적었다. 각성자인 그들에게 직위야 어차피 명함에 찍힐 글자일 뿐이다. 그들에게 길드란 조합일 뿐이다. 이익을 위해 함께하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계약 종료 후 떠나면 된다. 누군가에겐 명함의 한 줄 글자뿐인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목표가 되기도 한다. “사장님.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오, 우리 정부장님의 무용담을 들어봐야지요.” “실패했습니다.” 민찬의 말에 박상오의 얼굴이 웃는 모습 그대로 굳었다. “강우진씨 계약에 실패했습니다.” “뭐라고요?” “면목없습니다.” “…….” 박상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이 자리가 무슨 자린가? A급이 거의 확실한 각성자 강우진을 해머길드에 스카우트한 정민찬의 부장진급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닌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될 일이에요? 회사 잘리고 싶습니까?” 어? 그래 주면 고마운데. “정팀장이 그동안 강우진씨 꽁무니 쫓아다니며 쓴 돈이 얼만지 압니까? 이게 지금 죄송하다고 될 일입니까?” 무료로 던전을 이용하게 해줬지, 몰래 각성자 등급을 조정하느라 또 돈을 썼지…. 손해는 손해였다. 그래,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어. 아주 큰 실수를 했네.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책임? 지금 이게 책임을 진다고… 뭡니까 이건?” “사직서입니다. 모든 책임을 지고 해머 길드에서 퇴사하겠습니다.” 박상오는 사직서를 힐끗 보고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미쳤습니까?” “예?” “국회의원도 아니고, 물러난다면 다 책임지는 겁니까? 지금 일 저지르고 도망치는 겁니까?” “…….”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아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제 그만두는 마당에. “저 갑니다. 잘 지내십쇼.” “…?” 테이블에 두 장의 사직서가 놓였다. 정민찬이 꾸벅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저, 저! 미친 새끼가?” 박상오의 노발대발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정민찬은 귀를 닫고 꿋꿋이 걸었다. 아직도 쿵쾅 뛰는 심장에 조마조마한 심정인데 거의 입에는 미소가 내걸렸다. 통쾌하기도 했고, 후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대도 됐고 말이다. 열매보다 씨앗을 선택한 민찬이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해민이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깁니다. 팀장님.” 아, 내가 저래서 싸가지 없는데 저놈을 좋아한다니까. * 저녁 8시. 사당역 엔젤엔젤 비즈니스룸. “아르달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우진의 말에 민찬과 해민이 씩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우진이 민찬과 악수를 나눴다. “편하게 대하십시오. 아르달이 자리 잡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앞으로 민찬이라 부르면 되나?” 어? 그렇게까지 편하게는 아닌데? “저, 정팀장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래, 정팀장. 길드 설립 준비는 모두 맡길 테니 알아서 준비해요.” “…네.” 동방예의지국이 옛말이라더니 세상 참… 영 적응이 되지 않는 정민찬이었다. “그럼 오늘 소주나 한잔하러?” “…….” 인생 참 심플하다. 누가 보면 길드가 아니라 어디, 동호회라도 결성하는지 알 것이다. “저, 친목 도모는 후일에 하더라도 우진…. 사장님이 먼저 정해야 할게 있습니다.” “뭐죠?” “길드발족에 창립멤버 5인이 필요합니다.” 한 명이 더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재민이 넣을까?” “미성년자라 안되지 않을까요?” “네, 미성년자는 안됩니다.” 성구의 말을 민찬이 받아줬다. 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을 열었다. [어머니][도재민][진짜재민][4백만][폰팔이][김해민] ‘아, 나 아는 사람 정말 없구나.’ 새삼 자신의 인맥이 이렇게 단순했었나 싶었다. 우진의 던전낙상사고가 그대로 전파를 타고 뉴스에 나온 터라 어머니는 몸져누워있었다. 기자들이 하도 찾아와 일도 당장 그만두고 집에 계시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안 되겠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재민이도 빼면 남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는 모르는 번호고… 폰팔이 뿐인데. “그거 그냥 이름만 올리면 되죠?” “예? 그렇죠. 다섯 명만 채우면 되니.” 민찬은 길드창립멤버로 우진이 가족의 이름을 올리는구나 생각했다. 우진은 폰팔이를 선택하고 전화버튼을 눌렀다. 뚜루루루 한참의 대기시간이 지나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아, 안녕하셨습니까?] “아, 나 알지? 그때” [무, 물론입니다. 알지요. 잘 압니다.] 우진이 잠깐 전화를 내리고는 민찬을 보았다. “뭐 필요한 서류 뭐 있어요?” “예? 그냥 신분증 복사본하고, 인감 있으시면 인감 한 부만 있으면 됩니다.” 우진이 휴대폰을 들고는 다시 말했다. “여기 사거리 엔젤엔젤인데 신분증 사본하고, 인감 가지고 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아, 그냥 명의만 잠깐 빌리는 거야.” […….] “왜 대답이 없어?” [저 티비 다 봤습니다.] “티비?” [전국적으로 얼굴 다 팔리신 분이 이렇게 불법적인 거 요구해도 됩니까?] “하, 내가 너냐? 사기 아니니까 가지고 오지? 그냥 잠깐 명의만 빌리는 거야.” [시, 신고 할 겁니다.] “하든지 말든지 빨리 가져와. 성질나기 전에. 내가 갈까?” [아, 아닙니다. 제가 갑니다.] 우진이 통화를 끊자 민찬이 물었다. “누구십니까?” “아, 그냥 아는 사람.” “이쪽으로 오시는 겁니까?” “곧 올걸요.” “잘됐습니다. 여기서 초기 필요한 서류 작성하고 제가 내일 바로 관리국에 제출해 심사받도록 하겠습니다.” 민찬이 미리 준비했는지 서류가방에서 몇 가지 서류를 잔뜩 꺼냈다. “마음에 드네.” 길드든 나라든 뭐 하나 꾸리려면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줄 부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일이다. 우진은 민찬을 회유한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아참, 그리고 먼저 시급히 해결하셔야 할게 있습니다.” “뭐죠?” “서울대입구역 6번 출구의 공략작성입니다. 5성 던전을 정보 없이 도전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략이 없으면 예약도 받기 어렵습니다.” 던전을 최초공략한 길드나 팀에게는 굉장한 이점이 있었다. 던전을 공략할 때 나오는 혈석 가격의 30%의 수수료를 챙기고, 던전 이용요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대략적인 던전의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정보가 공개된 5성 던전은 B급의 각성자 팀으로도 공략이 가능한 수준으로 난이도가 낮아지니 말이다. 대형길드들은 물론 상위의 중소길드들도 그 정도의 팀은 있는지라 수요가 꽤 될 터였다. “뭐, 꼭 이용자 받아야 되요? 내가 돌아도 되는데.” “사장님이 쉬는 시간에 던전을 놀리는 것보다는 이용하게끔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러네.” 우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 난 있다가 필요한 서류 다 준비되면 곧바로 던전이나 가죠.” 생각난 것은 바로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우진이었다. “성구 너도 가자.” “제, 제가 말입니까? 5성 던전인데….” D급으로 올랐다지만 어디 본신의 실력이 그 정도까지인가? 성구는 절로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안가?” “아,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겁이 나면서도 묘한 기대감을 품은 성구를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 카페의 비즈니스룸에 들어서는 우승훈은 요즘 가장 요란한 이슈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것을 보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것봐. 이것봐. 다 모였어.’ 뉴스에서 봤다. 던전낙상사고 당사자 강우진과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 “어, 왔어?” 우진의 말에 흠칫 몸이 굳었다. 마치 천적을 만난 것 마냥 움츠러들었다. “가져오라고 한 건?” “가져오긴 했는데….” “그럼 정팀장이랑 이야기해봐.” “예?” 우진과 성구가 일어섰다. “그럼 정팀장 수고해요. 던전 공략하고 나오면 내일이겠네. 내일 보고 소주 한잔하죠.” “네, 사장님. 그럼 아까 말한 대로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우승훈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것들 뭐하는 시츄에이션일까? 우진과 성구가 자리를 나가버리자 정민찬이 악수를 건넸다. “전 해머길드 팀장이었던 정민찬입니다. 이번에 함께 아르달길드를 발족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해머길드? 대한민국 3대 길드인 그곳? 이 사람이 해머길드의 팀장이었나? 혼란스러운 우승훈은 연달아 악수를 청해오는 김해민의 손을 얼떨결에 맞잡았다. “김해민입니다. 헤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지인이시면 어느 쪽… 친구? 아니면 친척?” 뭐지? 이 사기꾼들은. 우승훈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척 하며 테이블 아래의 손은 남몰래 그들을 검색했다. 뉴스의 초점이 강우진에게로 맞춰져있었기에 그 주변인들에 대해서는 정보가 덜했다. 그래도 인터넷이라면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기사를 검색해본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32화 - 길드 설립 (2) > 끝 ⓒ 진설우 < 33화 - 5성 던전 > “강우진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던전 앞에서 특종을 위해 무료한 기다림을 이어가던 기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우진과 성구에게로 달려왔다. “뭐, 뭡니까?” 성구가 양팔을 벌리고는 기자들을 막아섰다. 매니저라고 하지만 실제 각성자의 매니저 업무에 능통하지는 못한 성구였다. “강우진씨. 해머길드의 비밀 각성자라는 말이 있던데 진실입니까?” “A급 각성 등급이 진실입니까?” “어머니가 식당일을 하신다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그들의 질문에 성구가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데 우진이 나섰다. “뭘 서있냐? 가자.” “예에? 이대로 말입니까?” “그럼 붙잡혀있냐?” “하지만 어떻게….” 우진이 혀를 찼다. “비켜봐. 빨리 대답해주고 가면 되지. 뭘, 끙끙 대냐.” 쿠, 쿨하시다. 역시 형님이시다. 우진의 앞으로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빨리 물어봐요. 바쁘니까.” “강우진씨 답변부탁드립… 어? 예?” “빨리 물어보라고요.” 당황하던 기자가 직업정신을 발휘해 재빨리 말했다. “해머길드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아무 사이 아니에요.” “정확한 각성등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곧 재볼 거에요.” “어머니가 식당일을 하신다는데 어떻게 되신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요. 그냥 식당일 하는 거지.” 사소한 질문들에 단순한 대답을 하는데도 5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제 슬슬 던전 들어가 볼까 하는데 비켜주시죠?” “마지막 질문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말해요.” “소속길드가 어디십니까?” “아르달.” 기자들이 서둘러 메모하며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길드입니다. 아르달은 어떤 길드입니까?” 어떤 곳이긴, 군면제카드지. “성구야 질문 끝났으니 가자.” “네, 형님.” 우진과 성구가 기자들을 헤치고 던전의 입구로 향했다. 몇몇 기자들이 따라붙어 재차 질문을 던졌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입구는 관리국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길드가 아닌 개인이 공략한 던전이라 관리국에서 대신 위탁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간 문의만 있었지 실제로 예약한 팀들이 없어 아직 한 번도 이용료를 받지는 못했다. “어? 강우진씨? 던전 이용하시려고요?” “네. 여기.” 우진이 각성자 카드와 출입관리 명부에 이름을 적었다. “두, 두 명이어서 들어가십니까?” “둘이면 충분합니다.” 우진과 성구가 숱한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던전으로 진입했다. 입구를 넘자 결계가 생겨나 외부와 던전을 완전히 차단했다. <서울대입구역 6번 출구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이미 공략된 던전입니다. 기본 몬스터를 소환합니다.> 성구가 흥분된 음성을 뱉었다. “우와. 형님 완전 연예인 같았습니다.” “실없는 소리 말고 정신 바짝 차려라.” “넵.” “농담 아니다. 제대로 한 대 맞으면 너 죽을지도 몰라.” “헙, 넵.” 성구가 긴장한 채 감각을 예리하게 벼렸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제법 각성자 생활이 익숙한 성구는 금방 집중력을 발휘했다. “마지막 층까지 랫트가 나온다.” 랫트는 거대 박쥐형의 몬스터였다. 지하철역의 천장에 붙어있다가 빈틈을 노려 공격해오기에 영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원거리 공격수단이 없다면 정말 애를 먹는 몬스터였으나 우진도 성구도 원거리 마법이 있었다. “아참, 이거 한번 써봐.”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짧은 스틱을 건네주자 얼떨결에 받은 성구가 어리둥절해했다. <루비 마법봉> 큰 루비가 달린 마법봉. 화염계마법의 위력 +100%의 효과가 있다. “주운 거야. 너 써.” “…혀, 형님.” 성구가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마법아티팩트가 어디 보통의 가격이던가? 이런 걸 척척 내주는걸 보면 우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걸 구할 수 있는 능력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베풀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귀한 것을 말이다. ‘저렙 아이템이라 한동안 쓸만하겠지.’ 하찮아 내어준 것인지는 모를 성구겠지만 우진은 지난 던전을 돌며 몇 개의 아티팩트를 주웠다. 던전에서 발견한 아티팩트는 포인트상점에서 구입한 것과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포인트상점에서 구입 한 물건들도 실체화가 된다. 다만, 특수한 능력들은 오직 우진만이 쓸 수 있었다. 옷도, 음식도 나눌 수 있지만 그 외에 스킬북, 마법이 붙은 아티팩트 등은 나눌 수 없었다. 정확히는 양도할 수야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빈 책이 될 뿐이고, 아무런 마법도 발휘할 수 없는 그저 그런 노멀아이템일 뿐이었다. ‘소모성 아이템도 한번 실험해봐야겠네.’ 남에게 양도가 가능하다면 포션 같은 것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5성 던전은 4성에 비해 굉장히 많은 업적포인트를 줬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레벨업도 굉장히 빨랐다. “자, 실험 삼아 한번 날려봐.” “네, 형님.” 성구가 감격에 겨운 얼굴 그대로 화염구 마법을 생성했다. 전보다 배는 커진 화염구를 보며 성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염덩어리를 천장에 붙어있던 랫트에게 던졌다. 화르륵, 펑! 불덩어리가 랫트에게 닿자 수십 개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불똥을 튀었다. “찌익.” 온몸에 불이 붙은 랫트가 허공에서 펄럭 거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무리해.” “넵.” 성구는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자신의 마법이 5성 던전에서 통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5성 던전은 포탈 너머에 있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5성 던전의 공략에 성구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우진은 성구의 마법 발현을 신기한 듯 보았다. ‘스스로 몸을 매개로 마법을 각인시키는 건가?’ 각성자란 존재는 신기한 존재였다. 아르펜의 마법사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마법을 배웠다. 마치 우진이 레벨업을 하듯이 각성자란 그저 스킬 하나를 가진 존재일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트라넷을 막아내자면 우진 홀로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아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함께 싸울 우군일지 모르는 각성자란 존재에 대해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우진의 곁엔 성구라는 좋은 관찰대상이 있었다. “형님. 잡았습니다! 제가 해냈습니다.” 랫트 한 마리를 거의 굽다시피 하여 잡아냈다. 박쥐를 닮은 랫트고기는 썩 맛있지 못해 잘 구워졌더라도 먹기엔 부담스러웠지만 말이다. “잘했다.” 우진은 랫트의 시체를 매개 삼아 해골마법사를 소환했다. 그동안 레벨이 올라 13이 되어버린 해골마법사는 마법봉을 든 성구 하나의 몫을 해냈다. 해골마법사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사냥속도는 더해졌고 성구는 다시 마법봉이 아닌 날카로운 단검을 들었다. “하, 이제 혈석 캐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 우진과 성구는 순식간에 지하철역을 정리하고 1층으로 돌아오자 생성된 포탈을 볼 수 있었다. “이제부턴 진짜다.” 저번과 같은 실수가 있지 않기 위해 우진과 성구는 옷을 갈아입었다. “어? 형님. 장비가….” 우진이 옷을 갈아입고 아공간에서 하나씩 꺼내 장착하기 시작하는 아이템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진은 옷 위에 걸쳐 입는 푸른색 래더아머를 착용하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모자를 썼다. 거기에 장갑과 신발도 남달라 보였다. “장비 좀 맞췄지.” 신발과 장갑은 포인트상점에서 구입한 것이고 갑옷과 모자는 지난번 공략에서 얻은 것이다. 마력과 회복스탯을 올려주는 옵션이 붙어있어 당분간 쓸 예정이었다. ‘옛날에 쓰던 장비들 구하면 좋을 텐데. 아쉽네.’ 궁극의 네크로맨서 우진이 아르펜행성에서 사용하던 장비들을 다시 손에 넣는다면 몇 배는 더 강력해질 텐데 말이다. 아쉬운 대로 더 좋은 장비를 얻으면 하나씩 바꿔갈 수밖에 없었다. “자, 가자.” “넵.” “넌 전투에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마라. 공략집이나 쓰도록 해.” 성구가 전투에 끼어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니 우진은 홀로 전투에 나설 생각이었다. 아르펜에서도 소환수들과 손발을 맞추는 게 낫지 괜히 다른 사람과 함께 사냥하는 것은 우진의 스타일에 맞지 않았다. ‘이제 6레벨 남았어.’ 지금 우진의 레벨은 24. 지난 던전의 공략에서 무려 10레벨이나 올렸다. 그만큼 5성 던전이 경험치가 많았다는 말이고, 우진에게도 난이도가 꽤 있었다는 의미. 10레벨마다 개방되는 우진의 주력 스킬들. 20레벨엔 우진의 주력 전투스킬들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이제 6레벨만 더 올려 30이 되면 또 다른 그의 필수 소환수가 소환 가능했다. 지난 공략에서 10레벨을 올린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 6레벨은 충분히 가능할지도 몰랐다. ‘뭐, 모자라면 한 번 더 뛰고.’ 던전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우진의 소유인 던전이니 예약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제대로 된 무한 사냥터를 얻은 우진이 성구와 함께 포탈을 통과했다. * 포탈을 타고 펼쳐진 광경은 사막. 작열하는 태양에 이글거리는 공기가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10초 내에 기습이다. 조심해.” 우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서웠다. 파파팟! 사막의 모래가 폭발하듯 튀어 오르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촉수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촉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샌드웜. 길쭉한 지렁이가 길이만 2미터가 넘는데, 끔찍한것은 큰 아가리에 촘촘히 박힌 톱니 같은 이빨이었다. 모래 속을 유영하다 한번에 튀어 올라 적을 물어뜯는 샌드웜의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우진은 샌드웜의 표적이라도 되듯, 일부러 하늘 높이 도약했다. “변형.” 우진의 손에 쥔 강철지팡이가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었다. 뭉텅한 지팡이 머리가 사라진 대신 날카로운 창날이 생겨나 언월도의 모습으로 변했다. 전사와 함께 성장하는 전사의 무기. 20레벨이 되어 창으로 모습을 변형시킬 수 있게 되었다. 촤?! 우진이 도약하느라 야심 차게 뛰어오른 샌드웜은 점프력이 모자랐고, 우진의 언월도가 그들을 도륙했다. 물렁물렁한 샌드웜은 타격공격에 대해 내성이 있기에 절삭형 무기로 상대하는 것이 더 없이 효과적. 우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기습하는 샌드웜 다섯 마리를 해치우는 데는 눈 깜짝할 사이면 충분했다. 굉장하다! 성구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모습만 보자면 마법계 각성자가 아니라, 꼭 신체능력 각성자와 같은 모습. “기록 했냐?” “네? 넵. 적었습니다.” 성구는 손에 쥔 노트에 얼른 ‘입장과 동시에 샌드웜 기습 5마리, 몽둥이보다 칼’이라고 썼다. “저기 보이지?” “…네. 저게 뭡니까?” 우진이 저 멀리서 불어오는 먼지 구름을 가리켰다. “사막공벌레가 굴러 오는 거다. 대략 열 마리에서 열두 마리.” “어떻게 처리합니까?” “놈들 공격수단은 하나뿐이야. 재빠르게 굴러 와 자폭하는 거지.” “예에?” “자폭하면서 독가스를 뿜어. 이게 또 겁나게 독하니 놈들이 접근하기 전에 요격하는 게 좋아.” “해, 해골마법사면 되지 않습니까?” “사거리가 짧아. 놈들을 처치해도 독가스의 범위에 들거다. 나는 몰라도 넌 중독돼서 죽어.”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해독약을 꼭 챙기거나, 궁수나 원거리 마법이 가능한 수준의 마법사를 꼭 팀에 넣어야지.”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독가스라는 말에 조금은 겁에 질린듯한 성구의 떨리는 목소리에 우진이 씩 웃었다. 귀여운 녀석. 우진이 한 손을 들어 올리니 그곳에서 뼈의 창이 생성되었다. 20레벨에 얻은 강력한 공격 마법. 후우웅. 활처럼 꺾인 우진의 몸이 역동적인 동작과 함께 창을 저 멀리 내던졌다. 창던지기 선수처럼 아름다운 그 모습에 성구는 입을 헤 벌리고 보았다. 날아간 창은 800미터는 될 정도의 거리에 박혔다. 아직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막공벌레에게 닿으려면 턱도 없는 거리.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오는 놈들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가 되자 성구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죽어도 독에 중독되어 고통 속에 죽기는 싫었다. 가만히 공벌레가 다가오는 것을 보던 우진은 주문을 위웠다. “솟아라. 뼈의 장벽이여!” 시동어와 함께 쑥 빠져나간 마력이 미리 내던져 사막에 버려지듯 박혀있는 본스피어를 변형 시켰다. 촤르르륵! 사막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뼈들이 넝쿨 식물처럼 빠르게 자라나듯 퍼져 벽을 만들었다. 콰쾅, 쾅, 콰쾅! 갑작스럽게 생겨난 뼈의 장벽에 사막공벌레들이 부딪혀 폭발했다. 자욱한 독구름이 퍼졌으나 우진이나 성구와는 거리가 멀어 금방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1차 목표는 저기보이는 오아시스까지다. 그사이 사막공벌레가 4번, 거대 스콜피온을 8마리 만났지, 사막쥐는 심심하면 튀어나오고, 샌드웜도 5마리씩 3번의 공격이 더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우진의 말에 성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이 5성 던전이구나. 그리고 우진형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상대하는구나.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레벨 업!> 우진은 사막공벌레를 처리하며 다시 하나가 오른 레벨을 보며 미소 지었다. 30레벨. 골렘의 소환까지 이제 5레벨이 남았다. < 33화 - 5성 던전 > 끝 ⓒ 진설우 < 34화 - 5성 던전 (2) > 오아시스를 다섯 개 지났다. 그사이 아티팩트를 세 개나 찾았다. 혈석도 꽤 많이 얻어 모두 우진의 아공간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우진과 성구는 마지막 필드에 도착해 있었다. 무너진 벽들과 모래가 쌓인 도로. 드문드문 나 있는 나무들만이 이곳에 생명이 있음을 알리는듯했다. “여, 여긴 뭘까요?” “라그리시아.” “예?” “버려진 이 도시의 이름이다.” “헐, 형님은 어떻게 이름까지 아십니까?” “쓰여 있잖아.” 우진이 무너진 도시의 성문 한쪽을 가리켰다. 성구는 봐도 모를 글자가 쓰여 있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아시지?’ 저번에 오크하고도 말을 주고받는 것도 그랬고, 던전 내의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도 그랬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호기심은 호기심일 뿐. 괜히 물어 혼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조심해라.” “넵!” 씩씩하게 대답하는 성구를 보며 우진은 괜히 볼을 긁적였다. 조심한다고 하여 위험이 없다면 던전에서 죽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음. 있어봐.” 우진이 인벤토리를 뒤져 가죽 갑옷 하나를 꺼냈다. “마법사한테 어울리는 건 아닌데, 방어력은 괜찮으니 이거 입어봐.” “혀, 형님.” 성구는 거의 울먹이며 우진이 주는 갑옷을 받아 입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졌지만 가슴과 옆구리에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단단했다. “어?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리시아의 가호> 라그리시아의 병사들이 입던 갑옷. 제법 묵직한 갑옷이지만 민첩을 5 상승시킨다. 스킬 : 가속 우진은 갑옷을 입고 신난 성구를 보며 말했다. “아티팩트에 붙은 마법. 각성자만 쓸 수 있다고 했지?” “네, 형님.” “써봐.” “예에?” 성구가 깜짝 놀라 갑옷을 더듬었다. “능력이 붙은 겁니까?” 능력의 종류에 따라 아티팩트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써봐.” “넵.” 성구가 갑옷에 마력을 불어넣자 놀란 음성을 토했다. 몸이 붕 뜨는 듯 어질하기도 했고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은 듯 머리가 찡하기도 했다. “어어?” “움직여봐.” 우진의 말에 성구가 옆으로 몸을 움직이다가 꽈당 넘어졌다. “우와!” 넘어진 성구가 깜짝 놀라 주변을 빠르게 왔다갔다 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성구가 가진 마력의 양이 보잘 것 없어서인지 금방 움직임이 느려졌다. “헉, 제 능력으론 30초 정도 유지가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 상태에서 화염구 능력은?” 성구가 화염구 마법을 일으키려 했으나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려 화염구가 만들어졌다. ‘아티팩트를 통한 스킬이나 본연의 스킬은 모두 각성자 스스로 마나를 재료로 하는군.’ 화염구 능력이야 쓸 일이 없을 테니 갑옷으로 인한 민첩성 보정과 가속 스킬을 제때 회피용도로 사용한다면 성구의 생존은 문제없어 보였다. “그 정도면 잘 피하기만 하면 죽을 일이야 덜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라.” “넵.”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면 날 믿지 마라. 목숨은 스스로 지켜라. 누군가 대신 지켜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우진이 성구의 보호자도 아니고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성구 때문에 한눈을 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는다면 그건 그의 팔자다. 우진이야 새로운 심부름꾼을 구하면 된다지만 성구가 제법 마음에 들었기에 이것저것 챙겨주며 그가 오래 살았으면 바라는 것이었다. 우진의 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최종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은 본인이다. 성구 스스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등장하는 몬스터는 수인종, 나가다. 수는 안 세어봐서 모르겠지만 무기에 독을 발라 쓰는 놈들이니 조심해라.” “예.” 라그리시아는 버려진 도시다. 무너진 집들과 지붕 없는 담들이 장애물이 되어 미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구석마다 사막쥐들이 숨어있다가 공격해왔는데 우진은 해골병사들을 길잡이 삼아 보내 청소하게 만들었다. 해골병사들은 정찰병 이상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캬아!” 괴성과 함께 날아온 창이 전방에서 걸어가던 해골병사 하나의 머리통에 날아와 박혔다. 두개골이 깨지며 해골병사가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우진이 골목으로 튀어 나가 보니 나가병사 셋이 나타나 있었다. 뱀의 하체와 인간의 상체가 만난 모습의 나가들은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독을 바른 무기를 쓰고 있었다. 그들에게 안된 일이라면 해골병사들은 중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키킥.” “케케.” 해골병사들이 재빠르게 달려가 나가병사들을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뼈 칼은 나가들의 상반신을 채운 갑옷과 하반신을 둘러싼 비늘을 뚫지 못했다. 나가 병사들의 창은 빠르고 정확해, 해골병사들의 두개골을 단번에 으스러뜨렸다. 강함의 격차도 어느 정도라야 수로 밀어붙이지. 아직 레벨 17의 해골 병사로는 나가병사에게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했다. 차라리 해골마법사의 마법이 더 위협적이었으나 그땐 나가 병사들이 재빨리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어버리기에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 우진이 부서져 내린 해골병사의 뼈 잔해를 걷어찼다. 퍼퍽. 뼈 무더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상태 그대로 우진은 나가병사를 조준해 뼈창. 본스피어를 전개했다. 촤라락! 회전하며 쾌속하게 날아가는 뼈의 창은 나가병사의 주의를 돌리기에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나가병사의 창이 우진의 본스피어를 막아냈다. [후퇴한다!] 나가병사가 재빨리 해골병사를 떨치고 멀어지려 하자 우진이 즉시 뼈의 장벽을 소환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뼈의 조각들 중 하나가 나가병사들의 퇴로에 있었다. 촤아악! 갑작스럽게 나타난 장벽에 나가병사들이 당황하는데 이번엔 쇠로 된 창이 날아왔다. 콰앙! 막을 수도 없었다. 아니, 막았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진이 20레벨의 전사 스킬 ‘투척’을 이용해 던진 언월도는 나가의 숨통을 끊어놓기에 충분한 공격이었다. “해제, 소환.” 파팟. 우진의 명에 나가병사의 심장에 박혀있던 언월도가 사라지며 다시 우진의 손아귀에 소환되었다. 전사와 함께 성장하는 전사의 무기. 그 응용법은 무궁무진했다. <투척> 무기를 던지는 것은 최후의 공격이다. 손에서 무기를 놓았을 땐 일격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힘에 비례해 위력, 속도 증가. 민첩성에 비례해 정확도 향상. 전사의 클래스의 고유 스킬들은 전사의 감각이나 투척, 창술처럼 기본적인 패시브 스킬들이 많았다. 그리고 회수가 자유로운 전사의 무기는 최고의 투척용 무기가 되어주었다. 해골병사들의 공격은 나가병사들의 주의를 끌며 그를 정신없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슈아악! 쾅! 활처럼 당겨진 우진의 몸이 앞으로 숙이며 쏘아낸 창이 나가병사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혼자 살아남은 나가 전사는 낭패한 기색이었다. 우진이 그런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리아 니 레우트 타. 리우나 라케” “리케투 라? 리우나 라케타 니아.” 또다시 알 수 없는 우진의 말에 성구는 이번엔 오해하지 않았다. ‘쩐다. 몇 개 국어를 하시는 거야?’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이제 우진의 행동 하나하나에 놀라는 것도 식상하다. 그저 형님의 스마트함을 당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나가의 신전을 지키고 싶거든 모든 전사를 모아 대기하라.] [넌 누구냐? 나가의 신전을 침입하려는 이유를 대라.] [이유는 너희와 같다. 나가들이 신전을 지키듯, 나 또한 지구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신전의 수호자들을 모두 모아 당신을 막아내겠다.] 대화를 주고받은 후 우진은 뼈의 장벽을 거두었다. 우진이 나가 하나를 살려주자 성구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형님, 왜 하나는 놓아주십니까? 그보다 뭐라고 하셨는지 좀….” “떼거리로 덤비라 그랬어.” “…….” 위험하지 않을까? 엄청나게 쌔 보이던데. “멋지지 않냐?” “…….” 뭐지? 뭐가 멋있다는 것일까? 생각해내라 성구야. 답은 정해져 있다. 대답을 찾아라. 형님이 원하시는 답을. “나 같은 고수는 말이야.” “예, 형님.” “몹몰이도 말로 다 하잖냐.” “…….” 그 말이었나. 몹 몰이는 상대하기 쉬운 몬스터를 몰아서 잡는 거 아닌가? 척 보기에도 해골병사로 상대하기엔 엄청 역부족으로 보이던데…. 하지만 이거야 제 생각이고 형님은 다르시겠지. “멋지십니다.” “후후, 가자. 나가 놈들 죄다 찾아서 잡으려면 여기서만 한나절 보내야 한다.” 우진은 그저 도시에 흩어진 나가를 한번에 사냥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그 뒤를 조금은 불안한듯한 성구가 뒤따랐다. ‘30레벨이면 몰이 사냥도 할만하지.’ 10레벨마다 우진은 주력 스킬들을 얻는다. 골렘의 소환도 그중 하나이지만 30레벨에 얻는 전투 스킬 또한 우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공격기술이었다. 방금 30레벨이 되지 않았다면 무리하게 몰이 사냥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30레벨이 되었고 나가와의 일전은 충분히 해볼 만 했다. 도시의 중심부. 우뚝 솟은 탑이 있었다. 탑 주위로는 나가병사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 수가 못해도 100명은 되는지라 성구가 마른침을 삼켰다. “혀, 형님. 너무 많이 모였는데요?” “넌 위험하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네, 형님.” 우진은 보무도 당당히 해골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병사들 앞에 나섰다. [신전을 노린다는 건방진 인간이 그대인가?] [긴말 하지 말지?] [신전은 반드시 지키겠다.] 나가병사들이 투지를 불태웠다. 우진의 뒤로는 해골병사들이 80기나 있었다. 아직 여유분의 지배스탯이 있지만 굳이 한계 수치까지 소환하지는 않았다. 이번 던전에서는 해골병사들의 활약이 미미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전장에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연결고리였다. “돌격!” “키키키!” 해골병사들이 특유의 괴성을 내며 재빨리 돌진했다. 이미 죽은 그들은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을 향한 명령은 굳이 음성으로 내뱉을 필요도 없다. 애초에 그들 모두가 우진의 지배하에 있는 권속들. 그의 의지만으로도 수족처럼 움직여 진형을 바꾸었다. “키키키.” 기세 좋게 달려든 것과는 달리 나가 전사들의 창에 우수수 터져나가는 해골병사들의 수는 빠르게 그 수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우진은 전혀 걱정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마지막 해골병사마저 파괴되었을 때 덩치 큰 나가전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보스몹은 처음 한 번만 나오나 보네.’ 우진이 최초 공략할 때 있었던 ‘나가 족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곁에 있던 다섯 명의 나가 대전사 중 하나가 이번 필드의 보스 격인 듯 했다. 확실히 최초 공략보다는 확 내려간 난이도. [고작 이따위 망자의 군대로 신전을 침범하려 들었더냐.] 해골병사들이 모조리 부서질 때까지도 가만히 뒤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우진이 희게 웃었다. [망자의 군대?] 트라넷의 군대는 항상 적으로 망자의 군대를 상대해 왔겠지. [트라넷에게 네놈들의 목소리가 닿는다면 알려야 할게다.] 우진이 뼈창을 두 개 소환해 각자 쥐었다. 쌍창을 쥔 우진이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나, 아르달의 주인이 지구에 있노라고.] 세 걸음, 네 걸음. 내딛는 걸음이 더해질수록 그 속도가 빨라졌다. 종래에는 치고 달리더니 몸을 위로 훌쩍 날렸다. 후우우웅. 공중에서 내려다보니 훤히 내다보였다. 우진은 나가병사들의 주위에 잔해가 되어버린 뼛조각들을 보았다. 그의 몸에서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촤자작. 뼛조각들이 서로 합쳐지고 자라나듯 커져 거대한 뼈의 장벽을 만들었다. 아니, 그것은 뼈의 감옥이었다. 나가를 둘러친 그 뼈의 장벽. 한가운데 우진이 떨어져 내렸다. 콰직! 운 나쁜 나가전사 하나가 우진의 무릎에 채여 그대로 두개골이 터졌다. 우진이 발아래 깔린 나가전사를 향해 양손에 쥔 뼈창을 머리통에 찔러넣었다. 주위의 나가 병사들이 우진을 포위하기 위해 달려드는데 우진이 교차하여 박아넣은 뼈창을 중심으로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퍼어억! 녹색의 충격파에 나가전사들이 일시에 밀려났다. 충격파 뿐이었다면 그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공격이었을 것이다. 녹색의 연기가 퍼져 나가 나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갑작스럽게 퍼져나온 녹색의 독무에 나가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독무가 숨을 막히게 하고, 피를 갉아 먹었다. “캬아, 캭!” “리케느 케타!” 고통에 찬 절규와 함께 쓰러지는 나가병사들의 모습에 우진은 더없이 희게 웃었다. “나도 독 좀 쓰지.” 나가들의 뱀독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독을 말이다. < 34화 - 5성 던전 (2) > 끝 ⓒ 진설우 < 35화 - 5성 던전 (3) > 성구는 건물의 옥상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쩐다.” 뼈의 장벽들이 펼쳐져 나가들을 가두더니 우진이 그 적진의 한가운데 뛰어들었다. 그와 함께 터진 충격파를 동반한 독안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무차별적인 학살. 독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우진은 나가들 사이를 누비며 목숨을 취했다. 고통에 허우적 거리는 마지막 나가의 목숨마저 거두자 뼈의 장벽이 무너졌다. 그와 함께 그 속을 가득 채우던 녹색의 독무가 한곳으로 뭉쳐졌다. 흡입기로 빨아당기듯 뭉쳐지는 독무의 한가운데 우진이 있었다. 독무는 모조리 우진에게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미, 미쳤어.” 미친 강함이다. A급 각성자들은 다 저렇게 강한 것일까? 도대체 우진은 뭐하던 사람이기에 이런 강함을 감추고 F급 각성자 행세를 하였는가? 성구는 우진이 별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새삼 그런 그와 인연을 맺었다니, 놀랍고 한편으론 무서웠다. “성구야.” “네, 형님.” 성구가 재빨리 다가가자 우진이 참혹한 전장에서 비켜나 오고 있었다. “전리품 수거 해라.” “네, 형님.” 이미 우진은 값어치가 나갈법한 아이템에 마킹마법으로 모두 표시해 놓은 뒤였다. “어? 형님 혈석은 하나도 안 나왔습니까?” 보통 혈석을 품은 몬스터에게 표시를 해두는데 나가들에게는 아무런 표시도 안 해두고 있었다. “유사인종은 혈석 같은 거 없다.” “예?” “됐으니까 표시해둔 것만 얼른 걷어라.” “네, 형님.” 성구는 100구나 되는 나가의 시체들에서 창과 갑옷 기타 여러 개의 표시해둔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성구의 ‘가속’ 스킬의 첫 실전 무대는 전리품 수거였다. 우진은 그사이 나가의 신전으로 향했다. 원초적 모양의 둥근 공간의 중심에 제단이 있었다. 그 제단을 수호하듯 오른쪽에 나가 전사의 석상 하나와 왼쪽에 나가 주술사의 석상이 든든히 서 있었다. 그 제단의 한가운데 귀환석이 둥둥 떠 있었다. 우진이 제단에 걸어가 귀환석을 습득하니 그 아래 하나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보석상자를 열어보니 반지가 하나 나왔다. “기본 던전이라 그런가 하나네.” 최초 공략 때는 무려 3개의 반지를 얻었다. 그런데 반복되는 던전이다 보니 하나의 반지만을 주는듯했다. 우진은 반지를 챙기고 나가전사의 석상에서 칼등에 달린 붉은 보석을 빼냈다. 그리고 나가주술사의 석상에서 이마에 달린 푸른 보석을 빼내 챙겼다. 우진이 세 아이템에 대해 식별마법을 사용했다. <치유의 반지> 나가의 공주가 예물로 받은 반지. 착용시 치유 +10 <나가 용사의 증표> 나가의 용사와 같은 힘을 얻을수 있다. 힘 +3 <나가 주술사의 인장> 나가 주술사의 인장. 마력 +3 “괜찮네.” 스탯을 보조해주는 아티팩트 하나에 영약 두 개였다. 기본 소환되는 던전에서 이 정도의 전리품이라면 확실히 괜찮았다. 물론 최초 보상 때 보다는 못했지만 말이다. 최초 보상 때는 아티팩트 3개에 영약 7개였다. 줄어든 보상이지만 이 정도면 짭짤한 수입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사 클래스도 전용스킬이 더 나왔지.” 모든 클래스는 레벨 10마다 새로운 스킬이 해제된다. 우진이 30레벨이 되면서 네크로맨서 전용스킬 골렘소환, 포이즌 노바를 배웠듯이 전사도 마찬가지였다. 우진은 포인트 상점을 열어 전사의 30레벨 스킬을 살펴보고 모조리 구입했다. <대지 강타> 거대 망치로 땅을 내려쳐 적들을 공격한다. 소모기력 : 3 <회오리 바람> 무기를 들고 회전하며 주위의 적을 강타한다. 소모기력 : 초당 1 <둔기술> 숙련될수록 둔기류를 숙달되게 다룬다. 몇 가지 스킬들을 더 구입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어스 스트라이크와 휠윈드. 전사 클래스의 첫 광역공격기였다. 우진은 곧장 전사의 무기를 소환했다. 팟. 쇠지팡이의 정보를 열람했다. <강철 지팡이> 전사의 무기는 그의 친구이자 생명과 같다. 전사의 무기는 사용자와 함께 성장한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며 당신의 부름에 준비되어있다. 효과 : 힘 +15, 내구도 회복(해제 상태) 스킬 : 소환, 해제, 변형 (창, 해머) 성장한 강철지팡이는 추가 힘이 5 더 붙었고 변형에 해머가 추가되어있었다. 우진이 즉시 지팡이를 해머로 변형시켰다. “웃차.” 지팡이의 머리가 사람 머리통만 해지며 거대한 해머로 변했다. 증가한 힘으로 들고 있기에도 제법 무게가 나가는지라 처음엔 휘청 하고 만 우진이었다. 후우웅, 훙. 해머를 휘둘러보자 앞쪽으로 쏠린 무게중심 때문에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 휘둘러보니 제법 감이 잡혀왔다. 패시브 스킬로 얻은 ‘둔기술’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전사도 쓸만하네.” 실제 전투에서 다루자면 수없이 연습해 스킬레벨들을 올려야겠지만 처음 배운 지금도 제법 쓸만할 듯 싶었다. 우진은 전사의무기를 다시 해제시키고는 전리품들을 인벤토리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어?” 한참 아이템을 수거하고 있어야 할 성구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찾아보니 나가들 틈에 누워있었다. “일하다 말고 자냐?” 우진이 피식 웃으며 다가갔으나 성구는 대꾸가 없었다.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우진이 돌진까지 써가며 뛰어들자 입술이 파랗게 질려 누워있는 성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눈이 뒤집혀 바들바들 떠는 성구는 목숨이 꺼져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중독?” 우진이 급히 나가의 영혼을 끌어와 성구에게 에너지를 주입했다. “으으으, 혀, 형님.” 기운을 차린 성구가 흐릿했던 시야에 우진의 모습이 보이자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으으, 창 옮기다가 손바닥이 베였어요.” 나가의 창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우진이 어이없는 얼굴로 성구를 보았다. “나 참.”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변에 있는 나가의 영혼을 더 끌어모아 성구에게 에너지를 전달했다. 혈색이 좋아지며 체력을 회복한 성구였으나 여전히 중독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혀, 형님. 저 어쩌죠?” “어쩌긴 뭘. 그렇게 죽는 거지.” “혀, 형님!” 성구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 멍청하게 생을 마감하는가? 절망에 빠진 성구를 부며 우진은 혀를 찼다. ‘해독마법이 통하려나.’ 제대로 된 해독이나 치유는 성직자 클래스가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우진은 10레벨 이하에 배울 수 있는 해독마법을 30포인트를 주고 구입해 배웠다. “이리 와봐.” 파팟! 우진의 손에서 시작된 빛이 성구를 통과했으나 여전히 그의 중독상태는 풀리지 않았다. “쯧, 안되네.” 저레벨의 해독마법인지라 약한 독성을 해결하는 수준이었다. 배탈을 일으키거나 하는 정도의 약한 독 말이다. 우진은 포인트 상점을 열곤 해독약을 구입 했다. 우진이 허공에서 뿅 하고 해독약을 꺼내 성구에서 던져주었다. “그거 마셔보고 안되면 진짜 방법 없다.” “흐윽, 흑. 네.” 성구가 기도하며 병마개를 열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으으.” “왜? 어때?” “으, 잘 모르겠어요. 그냥 김빠진 콜라 먹는 맛인데.” “아, 맛이 아니라 좀 해독이 되는 거 같냐고.” “으으, 잘.” 우진은 한숨을 쉬었다. 해독약을 건네받고는 정보를 열람했다. <해독약> 중독상태를 치료할 수 있다.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 “역시 안되나 보네.” “혀, 형님.” 우진이 씁쓸히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는 성구를 보았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었는데, 이렇게 보내게 되니 아쉬웠다. 이렇게 죽으면 또 자신의 주위를 맴돌겠지……. 우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포인트 상점에서 해독마법이야 구할 수 있지만 마법사 클래스도, 성직자 클래스도 아닌 우진이 쓸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유언이나 말해봐. 전해줄게.” “아이구, 형니임! 살려주십시오. 으어엉.” 성구가 울며 우진에게 다가와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어어? 야,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살려.” 우진이 뒷걸음질 치다가 그가 들고 있던 해독병의 약이 찰랑거리다 주위로 뿌려졌다. 치지지직. 주위에 있던 나가의 창날에 닿은 해독약이 소리를 내며 연기를 피웠다. “어?” 우진이 그 모습에 눈을 번뜩였다. 혹시, 그렇게 쓰면? “으어엉, 형니임. 살려만 주시면 다시는 안 대들게요. 으어엉.” 성구는 술김에 우진에게 버럭 대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미쳤지, 미쳤어. 형님에게 대들다니. 우진은 끈덕지게 달라붙는 성구를 밀쳐냈다. “야, 떨어져 봐.” “아이구, 형니임.”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우진의 다리를 다시 감싸 안았다. 믿을 건 우진 뿐이다. “어어? 살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좀 떨어져 봐.” “정말입니까?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떨어져 봐.” “안됩니다. 안됩니다. 살려주시기 전까진 절대 못 놓습니다.” “허, 참.” 끈덕지게 달라붙는 성구를 내려다보며 우진은 혀를 찼다. “그럼 입 벌려봐.” “예?” 성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우진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살려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하라고. 우진의 양다리를 감싸 안은 성구의 눈에 우진의 그곳이…. 입을 벌리라니, 이것은…. ‘아.’ 성구는 탄식했다. 게이로 살 것이냐, 남자로 죽을 것이냐. “흑흑, 형님. 그쪽 취향이셨습니까? 흐엉, 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얘가 죽기 전에 실성을 했나. 너 벌써 얼굴까지 퍼래. 빨리 입 벌려.” 중독 상태로 인해 겨우 회복한 성구의 체력이 빠르게 줄고 있었다. 성구는 어질어질해지는 정신에 눈물을 흘리며 우진의 허리띠를 잡았다. “뭐, 뭐하냐? 입 벌리라니까?” “흑흑. 꺼내야 할거 아닙니까. 흐어엉.” 성구는 울면서 우진의 벨트를 풀려 했다. “아, 이 새끼 골때리네.” 우진이 성구의 머리채를 잡고 힘으로 제쳤다. “아아악!” 뒤로 젖혀지며 고통을 호소하는 성구의 입에 해독약을 들이부었다. “아아악가아악그르륵.” 비명과 함께 가글하듯 해독약이 성구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꾸륵. 컥, 컥.” 기도로도 넘어갔는지 헛기침한 성구가 눈물 흘렸다. “흑흑, 형님 거친 거 좋아하십니까?” “뒤지기 싫으면 그만 입 다물지?” “흐윽.” “해독은 됐네.” “흐윽, 네? 네에?” 성구가 깜짝 놀라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열도 없고 시야도 정상이다. 아프던 머리도 괜찮아 진 것이 확실히 중독상태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우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소모품의 사용법을 알았군.’ 포인트상점에서 구입한 물품들의 마법적 기능은 양도와 동시에 상실된다. 성구가 해독약을 받아 먹어봐야 그저 맹물이 될 뿐이다. 오직 우진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 양도할 수 없으면 우진이 직접 사용하면 된다. 그가 직접 먹여주면 되는 것이다. 성구는 살았다는 기쁨과 함께 아주 강력한 의문이 들었다. 이것은 성구의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저, 그럼 안 해도 됩니까?” “뭘?” 이 자식은 중독되더니 미친것일까? 아까부터 횡설수설. “형님 게이 아니셨습니까?” “…….” <전사의 분노가 발동합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유지시간 30, 29….> 우진이 본 스피어를 소환했다. 얘를 왜 살렸을까? 분노를 다스릴 길이 없다. “좀, 맞자.” “흑흑, 역시 에스엠 쪽….” 성구가 눈물 흘리며 다소곳이 엉덩이를 내밀었다. <깊은 분노로 스킬’전사의 분노’가 레벨 업!> <증가한 시간으로 카운트 됩니다. 유지시간 45, 44….> “후우우.” 찌푸려진 우진의 이마 골이 더욱 깊어졌다. < 35화 - 5성 던전 (3) > 끝 ⓒ 진설우 < 36화 - 핫이슈 > “어어? 결계가 사라진다.” “뭐? 미친 말이 돼?” 서울대입구역 6번 출구 앞에 모여있던 기자들이 옅어지는 결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략된 5성 던전의 평균 공략시간이 8시간이다. 그런데 우진과 성구가 들어간지 겨우 4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배의 시간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던전 안에서 겨우 16시간 만에 공략을 완료했다는 말이었다. “빠, 빨리 기사 작성해.” “인터뷰 따야겠네. 우아, 이게 무슨 일이래?” “이 정도면 거의 김강철 급이지 않아요?” “에이, 그래도 김강철에 비하려고.”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를 꼽으라면 누구나가 김강철을 말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임팩트 장난 아닌데요?” “그래, 어, 저기 나온다.” 확실히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진만큼 핫한 각성자도 없었다. 5성 던전을 혼자 클리어한 각성자였으니까. 새로운 A급 각성자의 등장에 묻혀 그렇지 그에 대한 논란은 많았다. 왜 각성 등급을 속였는지, 행방불명된 5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등…. 알려진 것이 없으니 여러 가지 억측이 남발했고, 인터넷 커뮤니티는 뜨거웠다. 그리고 베일에 가려진 각성자 강우진에 대해 밝혀내는 것이 기자인 그들이 할 일이다. “강우진씨. 인터뷰 부탁합니다.” 우르르 몰려드는 기자들의 접근에 강우진이 계단을 오르다 눈을 부라렸다. “기분 뭐 같은데, 좋은 말할 때 비키지?” 들끓는 그 목소리가 짐승의 소리 마냥 사나웠다. 그 기백에 기자들이 움찔하여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모여든 기자들만 스무 명이 넘었다. 그 뒷줄에 있던 기자 하나가 소리쳤다. “강우진씨.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 우진이 서서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우진은 자신의 코앞에 와있는 마이크에 시선을 두었다. “치워.” “…….” 서슬 퍼런 음성에 기자가 조용히 마이크를 내렸다. 우진이 그들을 노려보자 하나같이 눈을 피했다. ‘으으, 무슨 사람 눈빛이.’ 우진이 걸어나가는데 차마 다시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기자들이 의기소침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성구에게 붙었다. “홍성구씨. 강우진씨의 유일한 팀원이신데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강우진씨와 김강철씨가 비교되고 있는데요. 누가 더 강하다 생각하십니까?” 기자들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성구가 그답지 않게 버럭 했다. “너무들 하신 거 아닙니까? 던전이 놀이텁니까? 죽이고 죽이고 죽을뻔하다가 왔습니다. 살아서 이제 막 지구공기 마신 사람한테 이렇게 카메라 들이밀고 싶습니까?” “…….” 기자들이 침묵하자 성구가 더욱 울컥해 소리 질렀다. “다른 팀들도 이럽니까? 저희가 만만합니까?” 만만해서 취재 왔다. 다른 대형길드의 팀들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달려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원팀에서 알아서 다 막았을 테니까. “비켜주십시오.” 성구가 기자들 틈에서 빠져나오자 우진이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성구가 뛰어가 우진의 뒤에서 걸었다. “형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마.” “예에.” “적당히 해. 적당히.” “네, 형님.” “적당히 해야 귀여워서 좋아해 주지. 너무 하잖아?” “주의하겠습니다.” 의기소침한듯한 성구의 음성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애가 순진해서 그렇다. 죽음이 직면했는데,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데 제정신이면 이상하지. 우진도 아르펜행성에서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가? “남자가…. 가슴 펴. 임마.” “네에.” “씩씩하게 임마. 욕 좀 먹었다고 다 죽어가는 얼굴로 그러지 마.” 아, 억울하다. 욕한 당사자한테 그런 말 들으니. 그렇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는 성구였다. “네엡!” “짜식, 가자, 그럼.” 성구의 차를 탄 우진이 김해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진씨, 아니, 사장님 벌써 나오신 겁니까?] “정팀장 뭐 합니까?” [팀장님, 사무실 계약 마무리하고 귀가했습니다. 집에 가서 내일 제출할 서류 최종 점검한다고….] “사무실 벌써 구했다고요?” [네, 보시겠습니까?] 봐서 뭐하겠는가. 오늘은 쉬고 싶었다. “내일 보죠. 주소 하나 줘요.” [넵. 그럼 바로 문자 보내겠습니다.] 우진이 전화를 끊자 곧장 문자가 왔다. 주소를 누르자 지도 어플이 실행되며 위치를 표시했다. “가깝네.” 우진의 말에 성구가 슬쩍 물었다. “해머길드에 너무 선전포고하는 거 아닐까요?” “왜?” “그야 본사끼리 가까우면 경쟁하게 되니까요.” 던전리셋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팀에게 공약의 기회가 주어진다. 본사가 가까울수록 먼저 도착할 확률은 높아진다. 근처의 회사끼리의 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 대한민국 3대 길드라는 대형길드들은 모두 멀찍이 떨어져 있다. KH는 강북에 화랑은 인천에, 해머는 강남에 있었다. 그 외의 중소길드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래야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으니 말이다. “뭐 어때.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구색만 갖추자는 거 아냐?” “그렇기야 하죠….” 애초 길드 설립 목적이 입대를 피하려는 거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해머길드에서도 그렇게 생각할지…. 던전에서 겨우 두 정거장 거리기에 재민의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네, 형님. 들어가십시오.” “그래.” “저, 형님.” “왜?”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됐어, 임마.” 우진이 손을 흔들고 재민의 집으로 향했다. * 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재민이는 학원 시간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냐아, 주인님 또 엄청 강해졌다옹.” 언제나처럼 자신을 반기는 비비를 보며 피식 웃었다. “비비. 트라넷의 부하들 기억해?” “냥? 그 괴물들은 왜 그러냥?”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트라넷이 지구를 공격하기 위해 이 빌어먹을 던전이 생겼다고 쳐. 이게 놈들의 차원커넬 같은 거라고 이해는 가. 그런데 어째서 트라넷의 부하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지?” “냥. 그때 있었잖냥.” 라퀴도 드레빗도 모두 하급의 몬스터다. 트라넷의 군대라 불리기도 어려웠다. 그저 트라넷의 주둔지에 항상 출몰하는 야생동물 정도, 아니 그들이 부리는 하수인 정도의 개념일까. “진짜 그놈의 부하들 말이야.” 하급의 몬스터가 아니라 트라넷의 진짜 군대가 나타났다면 지금 지구의 전력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었다. 그 전력차는 확실했다. 대한민국에서 10명뿐이니 마니 떠드는 A급 각성자도 겨우 60레벨대의 능력을 보유할 뿐이었다. 6서클의 마법사 수준. 그 정도의 전력은 아르펜에서 차고 넘쳤지만 트라넷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냐앙. 그건 아직 힘이 모자라서가 아닐까냥?” “힘?” “날 보라냥. 지구에서 실체화 할 수가 없어 이 모양이지 않냥?” 우진은 번뜩이며 드는 생각이 있었다. “놈들이 아직 지구에 실체화 하기에는 힘이 모자라다?” “냥, 그렇지 않을까옹?“ 그럴듯했다. 아니, 맞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놈들이 아르펜에서 사로잡거나 굴복시킨 유사인종들을 선발대로 보내고 있어.” 던전을 통해, 던전 브레이크를 통해서 말이다. 이러다 정말 아르펜의 인간들이 넘어올지도 몰랐다. 그들을 지구인의 관점에서 같은 인종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 근데 왜 던전 브레이크는 항상 30일이지? “냐앙. 혹시 그거 아닐까냥?” “어떤 거?” “트라넷의 군대도 거의 한 달마다 충원되었던 것 같다냥.” “…!” “그때 주인님이 그랬잖냥. 놈들이 월급날 마냥 나온다고냥.” “그래, 그랬었지.” 비비가 고양이 얼굴을 한 주제에 진지하게 말했다. “확실한 건 던전브레이크가 계속 일어날수록 지구도 트라넷의 향기가 짙어질 것이라옹.” 그러면 곤란하지. 지구의 인간들은 아직 트라넷의 진짜 군대를 맞서기엔 무리였으니까. 아르펜 보다 더 허무하게 트라넷에게 굴복해버릴지도 몰랐다. 던전 자체를 없애버리면 좋을 텐데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듯 한데 말이다. “아참. 소환의 방에 이제 돌쇠도 있을 거야.” “냐앙? 정말이냐옹?” 우진의 두 번 째 권속. 골렘 돌쇠의 등장을 유난히 반기는 비비였다. “냥, 행복하다옹. 나 소환의 방에서 돌쇠랑 놀고 있어도 되냐옹?” “그래.” “야옹, 그럼 다음에 그 던전이란 곳에 갈 때 나도 불러 달라옹.” “그래, 알았어.” 스스슥. 비비는 돌쇠의 등장이 그리도 반가운지 금세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져버렸다. “음. 그럼 나도 사회공부나 해볼까?” 우진은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재민에게 문자를 작성했다. [올 때 귤 한 봉지.] 띠링. 10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저 집 다 왔는데요.] “어?” 우진이 다시 답장을 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 띠, 띠, 띠. 띠로리. “야, 좀 나가서 사오지.” “네, 옷만 갈아입고요.” “어?” 고분고분한 재민의 말에 우진이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띠딕. 가방을 두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서는 재민을 보며 우진이 지갑을 꺼내려다 말았다. “이 자식, 돈도 안 받아가네?” 잠시 후 재민이 귤을 한 봉지 사 들고 와 우진에게 건넸다. “너, 학교에서 안 좋은 일 있냐? 누가 괴롭혀?” “아뇨. 형 덕분에 잘 다니고 있어요. 다시 한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재민을 보며 우진은 적응이 되지않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얘가 왜 이럴까? “용돈 필요해?” “아니에요. 형이 저번에 주신 것만 해도 한동안 용돈 걱정이 없는걸요.” “허, 이 새끼. 오늘따라 이상하게 진지하네.” “저, 그럼 공부할게요. 시험기간이라.” “어, 어. 그래라.” 책상에 앉아 바로 책을 펴는 재민을 보며 우진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애가 갑자기 진지하니 우진으로서는 괜히 신경이 쓰였다. 우진이 리모컨을 눌러 음량을 줄여주었다. 재민은 책을 펴고 있었으나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소리 때문도 아니었고, 우진의 귤까는 소리 때문도 아니었다. 가슴이 답답하다. 뭔가 꽉 막힌 기분. “하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한숨이 새어나와 우진이 재민을 불렀다. “왜, 왜? 무슨일인데? 사춘기냐?”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라면서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은 세상의 고민을 모두 짊어진 모습이었다. 우진이 혀를 차며 불렀다. “이야기해봐 임마. 푹푹 한숨만 쉬지 말고.” “…….” 우진의 말에 재민이 책을 덮고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형.” “으응.” 우진이 드라마를 껐다. 재민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이더니 겨우 말을 이었다. “전에 제 꿈 이야기 드렸죠?” “어, 뭐. 길드 들어가는 거?” “네.” “그래, 돈 많이 벌고 싶다고 그랬지.” 우진은 재민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재민이 용기 내 다음 말을 이었다. “요즘 형 이야기로 장난 아니에요. 전 형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인지 몰랐어요.” 고등학생 삥… 이라기엔 돌려줬지만, 어쨌든 차비가 없어 돈을 빌리고, 갈 곳 없어 자신의 집에 머무르는 우진을 대단하게 생각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말 안 해서 삐친 거야?” “아니요. 형님이 길드 만드신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우진이 슬쩍 미소 지었다. “아, 난 또. 너 입사시켜줄까? 야아, 안 그래도 너 끼워 줄랬는데 미성년자라서 안된다고 못 넣었지. 짜식, 섭섭했구나?” “아니에요.” 섭섭할 리가 있겠는가. 다만……. “제 꿈은 대한민국 3대 길드에 입사하는 거에요. 그래야 그 약을 구할 확률이 높으니까요. 제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에요.” “그 약?” “돈만으로는 구할 수가 없으니까요. 길드에 들어가서 공을 세우면…….” “무슨 약인데?” “재생의 연고요.” “아, 누나 때문에?” “…….” 재민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요즘 인터넷 검색어에 심심하면 오르는 우진이었다. 김강철에도 비견되는 그런 우진이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이 뭐라고… 부탁할 염치가 없었다. 까똑, 까똑. 때마침 울리는 재민의 휴대폰에 그가 괜히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했다. “형,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그, 그래라.” 재민이 서둘러 외투를 차려입고 나서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거, 새끼. 밀당은.” 공부에 열심인 재민이다. 그냥 돈 때문에 길드입사가 목적인 줄 알았더니 모두 누나 때문인듯싶었다. 누나는 동생 때문에 또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고……. 참 애틋한 남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놈이 부탁을 하려거든 속 시원히 말하면 되지.” 우진이 피식 웃고는 포인트 상점을 열었다. < 36화 - 핫이슈 > 끝 ⓒ 진설우 < 37화 - 핫이슈 (2) > “으으, 내일 학교에서 보면 되지. 꼭, 이 추울 때 불러.” 쌀쌀해지는 날씨에 재민은 옷깃을 여미며 총총 걸었다. 작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있는 여자를 보며 재민이 눈에 힘을 줬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그 모습이 이슬기가 틀림없었다. “야, 학교에서 보면 되지 이 시간에 위험한데 왜 왔어?” “이여, 재민 나 걱정해주는 거야?” “어어? 당연하잖아. 여기 어두워서 얼마나 위험한데.” “헤헤, 공부벌레 재민이가 이 누나도 걱정해주고, 애써 온 보람이 있는데?” 해맑게 웃는 슬기의 말에 재민은 심장이 쿵쾅 거렸다. 교복 입은 모습도 예쁘긴 한데 사복 입은 슬기의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예뻤다. “하, 할 말이 뭐야?” “뭐가 그렇게 급해? 여기 앉아.” 슬기의 말에 재민이 투덜거리며 그 옆에 앉았다. 슬기가 말없이 발을 까닥였다. 그 움직임에 그네가 흔들렸다. 재민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는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오늘의 슬기는 왠지 알 수 없는 분위기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는지…. “재민아.” “응.” “나, SW 기획사 연습생으로 뽑혔어.” “뭐어?” 재민이 깜짝 놀랐다. SW 기획사면 굉장히 큰 연예기획사다. 그런 곳에 연습생으로 뽑히다니… 슬기 정도의 얼굴이며 데뷔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 이야. 축하한다! 너 옛날부터 연예인 할거라고 했었잖아. 추, 축하해.” “…….” 재민의 축하에도 슬기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축하 말고 나한테 다른 할 말 없어?” “하, 할 말?” 재민은 가슴이 떨렸다. 아, 왜 이렇게 떨리지? 언제나 해맑게 웃으며 들이대던 슬기의 얼굴이 오늘따라 슬퍼 보여서 그런 걸까? 쿵쾅대는 심장에 이대로 숨이 멎는 것은 아닐까 엉뚱한 상상마저 들었다. “할 말 없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하하, 꼭 좋은 연예인 되라.” 슬기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촉촉한 눈망울에 금방 습기가 차올랐다. 그 모습에 재민은 죄악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이 바보, 멍청이. 슬기를 슬프게 하다니. 온갖 자책이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주워담을 수도 없는 말. “바보… 끝까지.” 슬기가 작게 중얼거렸다. 끝내 듣지 못했다.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껄렁거리지도 않고, 여자에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애도 아니고. 정말 좋아했는데…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재민이도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랐는데, 끝내 혼자만의 기대였나 보다. 슬기가 그네에서 일어났다. 슥슥 눈을 비벼 눈물을 닦아낸 슬기가 그네에 앉은 재민의 앞에 섰다. “스, 슬기야.” 재민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비어버리는 듯한 기분. 슬기는 애써 웃었다. “이 누나 엄청 유명해지면 너 후회한다.” “어, 어?” “너 진짜 땅을 치고 후회하는 날 온다.” “…….” 이렇게 예쁜 앤데. 눈을 마주치는 것만도 심장이 떨려 죽겠는데 당연히 후회 하겠지. 아니, 벌써 후회된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을까? 온갖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데, 그 복잡하던 생각들이 일순간 날아가 버렸다. 츱. 갑자기 몸을 숙인 슬기가 재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흐읍, 숨이 멈췄다. 재민의 심장은 쉼 없이 방망이질 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눈을 감은 슬기의 얼굴이 코앞에 있다. 파르르 떨리는 그 속눈썹이 이렇게 슬픈 것이었나? “흐읍.” 화들짝 놀라듯 떨어진 슬기의 얼굴이 빨개졌다. 재민도 덩달아 얼굴이 빨개져 어찌할 줄을 몰랐다.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슬기가 ‘풋’하고 웃었다. “너 나중에 나 유명해지면 악플달고 그러면 안된다?” “어? 하하, 그럴 리가.” 이 병신! 그따위 대답밖에 못하냐. 미칠 것 같았다. 슬기가 손을 흔들었다. “누나 간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으응, 잘 가.” 아, 난 병신이야. 잘 가라니. 잘 가라니…. 흥분으로 뛰는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 끝이라고… 이게 끝이라고. 잡아, 잡아. 마음의 소리에 끝내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 [여보, 사실 할 말이 있어요.] [뭔데 그래?] [띠리 따라라, 따라라라….] “아오! 거기서 끝나냐.” 한창 재밌게 보던 드라마화면이 멈추며 하단에 뜨는 카페 광고에 우진이 펄쩍 뛰었다. 이러면 또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나. 아쉬운 입맛을 다지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띠, 띠, 띠. 띠로리. “여, 왔냐? 누나 휴대폰 번….” “으어어엉.” 뭐, 뭐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넋 놓고 울고 들어오는 재민을 보며 우진은 적잖게 당황했다. “재, 재민아?” “으어어엉.” 재민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더니 얼굴을 닦고 나왔다. 물기 닦은 그 모습이 더 처량해 보였다. 벌게진 그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폭풍처럼 흘렀다. “으어어어엉. 슬기야아.” “야아, 왜 그래?” 우진의 말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재민은 침대에 털썩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억, 으어엉.” “뭐, 뭔 일이냐?” “으엉, 혀으엉, 저 내으어, 버려두, 으어어엉, 세요. 흐어” “어, 어후, 알겠다야.” 밖에서 뭘 겪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도저히 지원이 전화번호를 물어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으어어엉.” 재민은 서럽게 울었다. 후회와 자책, 아쉬움과 떨림. 이제 슬기는 자신은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저 높은 곳으로 갈 테지. 그래. 내가 어떻게 네 발목을 잡겠어. 잘가, 슬기야. “으어어엉.”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떠난다니 알 것 같다. 고3의 때늦은 사랑에 재민은 하염없이 울었다. * “어우, 꿈자리 한번 사납네.” 매일 악몽이지만 오늘의 악몽은 좀 더 심했다. 하염없이 울어 재끼는 재민이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꿈이었다. 재민은 벌써 학교에 가고 없었기에 우진은 대충 씻고 집을 나섰다. “지원이 번호도 안 받아놨네.” 딱히 급할 것도 없었으니 우진은 어제 해민이 준 주소지로 향했다. 사거리 인근에 있는 제법 큰 빌딩이었다. “5층이었지.” 우진이 건물에 들어가 보니 한창 내부인테리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해민이 멀뚱히 구경 중인 우진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어, 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정팀장은요?” “관리국에 길드설립 자료 제출하러 갔습니다.” “언제 온 데?” “점심때까진 올 거 같습니다.” “그래?” “사무실 구경이나 해보시겠습니까?” “보자.” 해민이 우진을 이끌고 사무실을 보여주었다. 본래 사무실로 쓰던 곳이어서 그저 정리하는 수준의 공사였다. 인부들이 많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딱히 원하시는 인테리어라도 있으십니까? 말씀해주시면 당장 바꿀 수 있습니다.” “에이, 그냥 티비나 큰 거 하나 놔 둬요.” “헤헤, 넵. 그리고 말 편하게 하십시오. 나이야 제가 많아도 사장님 아니십니까?” 해민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 그렇다고 그렇게 바로 반말을 놓을 줄은. “이사도 하는데 점심은 짜장면이라도 먹자.” “…네.” 기분 묘하네. 웃긴 것은 24살인 우진의 자연스러운 하대가 어색하지 않았다. “난 할 것도 없는데 던전이나 한 번 더 돌아야겠네.” “아, 아티팩트 캐기 하셔야 되죠.” “응?” “아티팩트 캐기 때문에 가시는 거 아닙니까?” “그게 뭐야?” “…….” 김해민이 최초공략된 던전의 변화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최초공략 때가 가장 많은 수의 아티팩트가 나옵니다. 그 이후 기본 던전이라도 어느 정도 아티팩트가 나오죠. 이게 반복될수록 확률이 적어집니다.” 그래서 기본소환 몬스터만 나온 던전을 도는데 아티팩트가 그만큼 나왔구나.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던전을 반복 공략하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데 이때부터 대여를 합니다.” “혈석 캐는 광부들한테 말이지?” “예, 그렇다고 확률이 제로는 아니라서 아티팩트가 영 안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라도 나오면 대박이고, 또 노멀 아이템이야 계속 나오니까요.” 우진이 피식 웃었다. “단물만 쪽 빨아먹고 외부에 대여한다 이거지.” “그, 그렇죠.” “그럼 난 단물 빨러 갔다 올게. 점심때까진 오지.” “성구씨 데려가십니까?” “가는 길에 전화하지 뭐.” “넵.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지원부서의 엘리트였던 김해민이다. 던전 관리부터 각성자 매니지업무, 기타 지원업무에 통달한 그였기에 일 처리는 매끄러웠다. 우진은 던전 앞에서 성구를 만났다. 두 사람이 던전을 들어가기 전 해민이 물었다. “저, 사장님. 그런데 혈석이나 이런 건 안 캐오십니까?” “아공간에 다 들었는데.” 우진의 말에 김해민이 깜짝 놀랐다. 두 번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동안 우진이 아무것도 챙겨나오지 않아 의아하던 참이다. 첫 번째야 던전 공략에 애쓴다고 미처 전리품을 수거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고, 두 번째도 엄청나게 빠른 시간에 나왔기에 중요한 몇몇 아티팩트만 챙기고 나온 줄 알았다. “왜? 꺼내줘?” “아, 아닙니다.” 주위엔 보는 눈이 많았다. 아티팩트야 어차피 개인의 소유, 어디서 처분하던지 문제가 없었지만 혈석이야 관리국에서 운영하는 혈석 매입소에 팔아야 했다. “저, 사장님. 이번엔 혈석만이라도 매입소에 처분해주십시오. 다른 루트로 판매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번거롭습니다.” “그러지. 가자, 성구야.” “넵. 형님.” “다 돌고 사무실로 갈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가 있어. 점심 전까진 온다.” 12시까진 겨우 3시간 3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 알겠습니다.” 우진과 성구가 던전으로 향하고 해민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인부를 많이 쓰기도 했고, 애초에 깨끗한 사무실을 가벽을 몇 개 세워 구획만 나눈 정도였기에 공사는 점심 전까지 모두 끝났다. 벽이 모두 세워지기 무섭게 구입한 가구와 집기들을 배달온 배송기사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정민찬도 그때쯤 사무실로 왔고, 우승훈도 그때쯤 와서 정리를 도왔다. 정리를 모두 마치고 보니 어느덧 1시. “후우. 이제 좀 볼만 하네요.” 아직 인부들이 남아 청소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제법 배치는 모두 잡혔다. “모두 고생했어.” “하하, 팀장님이 고생하셨죠.” “승훈씨도 고생했어요.” “아, 네에.” 우승훈이 멋쩍게 웃었다. 어제는 꼭 사기인 줄 알았는데 인터넷에 아무리 찾아보고 기사를 대조해봐도 사기로 보이지가 않았다. ‘방통위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데 차라리 길드에 입사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자신이 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굳이 일거리를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승훈은 아침부터 가게를 정리했고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은 뒤 이곳에 합류했다. ‘그땐 무섭기만 하더니, 이제 보니 그래도 양심은 있네.’ 두들겨 패고 그 비싼 크레이지 레드를 강탈해가더니 그래도 이렇게 길드 직원채용도 해주고 말이다. 정민찬과 김해민의 말을 들으니 대우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판매점 수입보다 높은 연봉을 받을지도…. 우승훈이 은근히 기대감에 고무되어 우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우진과 성구가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거의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성구는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탄성을 터트렸다. “이야, 사무실 정말 좋습니다.” 성구가 놀람 만큼이나 우진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아침엔 어수선하고 휑한 기분이 있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모든 집기를 넣고 정리를 마친 것이 놀라웠다. 제법 사무실 태를 내는 공간. 겨우 다섯 명이어서 쓰는 것치고는 넓은 것과 책상이 조금 과하게 많은 것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말이다. 우진이 의외의 인물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얘는 여기 왜 있냐?” “예?” 우승훈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명의만 빌려주면 되는데.” 우진의 말에 우승훈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고 정민찬도 당황해 물었다. “차, 창립멤버로 입사하는 거 아녔습니까?” “응? 그냥 머릿수 채운 거죠.” “이런. 제가 착각을 해서….” 우진과 잘 아는 사이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우승훈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데 우진이 피식 웃었다. “뭐, 할 일 있으면 적당한 일 주고. 아무튼 짜장면이나 시킵시다. 배고프네.” “예, 제가 이 근처에서 제일 맛있는데 압니다.” 김해민이 눈치 빠르게 음식들을 시켰고 먹는 와중에 우진의 아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그럼 전리품들이 모두 아공간에 보관 중이시란 말입니까?” “그래. 먹고 꺼내줄게.” 우진의 말에 성구를 제외한 모두가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 아티팩트와 아이템들을 좋은 값에 판매하는 것은 지원부서의 또 다른 업무 중 하나였다. “여긴 좀 좁고. 저긴 뭐야?” 우진이 한쪽의 문을 가리켰다. “사장님 방입니다. 저 옆이 창고입니다.” 사무실이 워낙에 넓다 보니 몇 개의 구획을 정리하고도 공간이 남아 텅 비워놓았다. 우진이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크게 부피를 차지하는 건 적어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했다. “자, 그럼 풀어놓는다.” 우진이 인벤토리를 열어 여태 쌓아둔 전리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가의 갑옷만 무려 300벌이 넘게 쌓였고, 또 그들이 쥐고 있던 창이 그 정도 쌓였다. 그 놀라운 수에 그들이 입을 쩍 벌리는데 정작 놀라운 아티팩트는 손가락만 한 크기의 물건이었다. “이, 이것은!” 민찬이 깜짝 놀라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티팩트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치는 물건. 해머길드를 통해서도 몇 번 유통된 적 없는 초 고가의 물건이었다. < 37화 - 핫이슈 (2) > 끝 ⓒ 진설우 < 38화 - 재생 연고 > “귀환 포탈 구슬 아닙니까?” “귀환 포탈 구슬?” 정민찬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폈다. “마, 맞는 것 같습니다.” “귀환 포탈 구슬이라….” 우진은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보석을 살폈다. <스키아의 눈물> 모험가들의 신 스키아의 눈물은 그들을 시작점으로 발길을 돌릴 길을 열어준다. 사용 : 포탈생성 “던전 탈출용인가 보군.” “마, 맞습니다. 정말 발견되기 쉽지 않은 아이템입니다. 제가 해머길드에 있으면서도 두 번인가 세 번….” “그래?” 우진은 업적상점에서 그것을 찾아보았다. 비슷한 기능의 아이템이 있었다. <해리스의 결심> 세월의 신 해리스는 모험을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타인에게 양도불가. 사용 : 포탈생성 가격 : 3000업적 포인트. 라퀴를 잡아 채우려면 1000마리나 잡아야 하지만 5성 던전의 나가 한 마리가 얼추 100포인트 정도를 줬다. 30마리나 되는 나가를 잡아야 하는 업적포인트. 적지 않은 포인트였지만 그래도 위급할 때라면 쓸만한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얼만데?” “최하 100억입니다.” 그 말에 우승훈과 성구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 그렇게 비쌉니까? 도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그렇습니까?” “아주 희귀한 능력이지. 바로 던전을 클리어 하지 않고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까.” 하위의 각성자들이야 필요치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위의 각성자들에게 귀환 포탈 구슬은 그 어떤 아티팩트보다 값비싼 역할을 했다. 던전은 귀환석이 아니면 돌아오지 못한다. 그것이 결계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어주니까, 하지만 귀환 포탈은 결계를 통과하지 않는 우회 길. “6성 던전의 공략에 꼭 필요한 아이템입니다. 물량이 적으니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던전의 미공략은 죽음을 의미했다. 6성 던전의 공략은 전원 A급 각성자로 팀을 꾸려도 성공확률이 희박한 던전. 그래서 6성 던전의 도전에는 귀환포탈이 꼭 필요했다. 던전 공략에 실패하면 포탈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이것이 아니라면 A급 각성자라 하여도 감히 6성 던전의 도전을 쉽게 결심하기 힘들었을 터였다. “그래서 얼만데?” “길드나, 나라마다 최대한 물건을 확보하고 싶어 합니다. 가장 초기에는 500억 가까이 했던 물건이지만 요즘은 구입처가 어디냐에 따라 100억에서 200억 정도 합니다.” “헐.” 모두가 놀랐다. 눈앞에 손톱만 한 보석이 100억의 물건이라니…. 우진은 다른 쪽으로 놀랐다. ‘양도만 되면 3천 포인트에 100억씩인데.’ 3천 포인트가 적지 않은 수치지만 아직은 포인트보다는 현금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것들은 얼마나 해?” 우진이 이번에 꺼낸 것은 각양각색의 물건들이었다. 어떤 것은 광물이었고 어떤 것은 버섯 모양의 식재료도 있었다. 병에 담긴 물약도 있어 통일성이 없었다. “강화석이군요. 광물이던 아니던 통칭 강화석으로 부릅니다. 각성자의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물건이지요.” “제대로 알아보네. 이것들은 얼마씩 해?” 지원부서의 팀장답게 여러 아이템을 유통해봐서인지 민찬의 눈썰미는 쓸만했다. “측정해봐야 압니다. 에너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최하 1억부터 에너지를 많이 품은 강화석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습니다.” “1억이라….” 1억이라면 스탯 포인트를 1 올려주는 영약인 모양이었다. 1포인트를 올려주는 영약의 포인트상점 최하 판매가가 2천 포인트. ‘아쉽네.’ 귀환포탈이 거래만 됐어도 3천 포인트에 팔아 100억으로 영약을 끌어모을 텐데 말이다. 포인트를 아끼며 대량으로 영약을 구할 수 있을 방법이 막혔지만 상관없었다. 귀환포탈이 아니라도 돈을 벌 수단은 많았다. “거기 비켜봐.” 우진은 마법서 7권과 아티팩트 17정을 쏟아냈다. “후우, 정말 어마어마하군요. 이 정도면 진짜 5성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걸 모두 얻어오셨군요.” 우진이 피식 웃었다. 우진이 직접 사용할 아티팩트들은 꺼내놓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거기에 혈석의 판매대금은 고스란히 그의 통장에 들어있었다. “이것들은 얼마 정도씩 해?” “아티팩트들은 능력이나 효과를 봐야 합니다. 어지간한 길드들은 자체 감별팀이 있고 관리국에 맡겨 감별해도 됩니다.” “종이 가져와 봐.” “예?” 우진은 눈치 빠른 해민이 가져다준 종이에 마법서들의 능력과 아티팩트들의 효과들을 모조리 적었다. “이 정도면 얼마나 해?” “시, 식별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까?” 아티팩트의 정보를 알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을 갖춘 각성자들은 등급이 F급 이라도 길드에서 후하게 대우한다. 감별사는 아티팩트의 유통에 꼭 필요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왜? 이상해?” “능력이 몇 계십니까?” 음, 스킬이 몇 개던가. 그동안 자잘하게 배운 스킬들이 많았다. “음, 몇 개 돼. 왜? 중요해?” “아, 굳이 꺼리신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능력의 개수도 각성자 등급 측정에서 가점이 있으니 드린 말씀입니다.” “그보다 다하면 얼마나 하겠어?” “아티팩트들은 혈석처럼 정해진 가격이 없어 정확한 건 팔아봐야 합니다. 대략적이라면 150억 정도는 받을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귀환포탈까지 처분하면 250쯤 들어오겠지?” “최하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급한 것이 아니라면 천천히 두고 팔면 그보다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여기 있는 거 알아서 다 처분해. 그리고 강화석은 적당한 가격의 물건이 있으면 죄다 사들여.” “넵. 알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승훈은 남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이거 장난 아니다. 단위가 달라.’ 어제 기사를 찾아보며 강우진이 핫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그 대단하다는 각성자 세계에 발을 들인것같아 온몸이 덜덜 떨렸다. ‘무조건 붙어있어야지. 무조건.’ 길드에 얼마나 입사하기 힘든지 잘 안다. 하물며 A급 각성자가 있는 길드라니… 아직 초기라서 그렇지 큰 길드로 성장할 것은 당연한 수순. 휴대폰 대리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입과 명성을 얻게 되리라. 정민찬이 아이템들의 재고수량을 작성하기 시작하자 우진은 더 이상 창고에 있어야 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강화석만을 싹 챙기고 자리를 옮겼다. “내 자리 어디야?” “이쪽입니다.” 우진은 해민의 안내에 따라 사장실로 향했다. 재민의 원룸보다 두 배는 될듯한 공간이었다. 우진이 소파로 가 앉더니 정면에 보이는 벽을 가리켰다. “저기다 티비 달면 되겠네” “네. 안 그래도 주문했는데 오후에 배송 온다 했으니 곧 올 겁니다.” 아침에 넌지시 말했던 건데 벌써 해민은 준비하고 있었다. “재고파악 끝나면 다 들어오라 해.” “넵.” 우진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는 생각에 잠겼다. 고작 다섯 명뿐인 소규모의 조직이지만 위계는 필요했다. 아르펜에서 제법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던 우진이다. 그런 쪽으로는 더없이 편한 방법이 있었다. 잠시 후 네 명의 사람이 들어오자 우진이 자리를 권했다. “정팀장.” “네. 사장님.” “무슨 자리 줄까?” “예?” “직급이라도 있어야 앞으로 일할 거 아냐? 다들 원하는 거 말해봐.” 우진의 말에 모두가 긴장했다. 지금 말을 잘해야 한다. 우진은 이런 쪽으로 아주 무신경하고 관대해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정팀장. 보통 길드 직급이 어떻게 돼?” “두 분류로 정리합니다. 각성자들은 대리부터 이사, 부사장까지 각성자들에게 직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우는 던전 공략 대금의 정산 비율, 기본 정산금 등 세세한 계약에 의해 결정되니까요.” 각성자라고 해봐야 딱 하나다. “성구야 뭐할래?” “예에? 저야 어차피 1년 동안 형님 매니저로….” “아, 됐어. 그럼 성구는 이사.” “이, 이사요?” 성구가 감격한 얼굴이 되었다. 우진이 씩 웃었다. “전리품 수거 담당. 이사.” “…….” 그런 직함의 이사도 있었던가? 차라리 포장이사라고 하지. “지원부는 뭐 어떻게 나뉘어?” “회계와 총무과 판매부, 지원부, 관리부 정도로 나뉩니다.” “세 명이어서?” “…….” “정팀장.” “예.” “총괄 이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성자가 아닌 길드의 임원으로 가장 높은 자리다. 정민찬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에 감격했다. 너무 감격해서인지 우진이 자연스레 하대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해민이 뭐할래?” “지원부장 정도 직함 주십시오.” “그래.” 엄마, 아빠 정하는 소꿉놀이도 아닌데, 이렇게 쿨할 수 있을까? “헤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우진이 마지막 남은 우승훈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기대감이 가득했다. “뭐, 나머지는 정이사가 알아서 해.” 정이사, 정이사! 정민찬은 귓가를 맴도는 그 소리에 심장 고동이 빨라지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이직하길 잘한 것 같았다. 뭔가 이 길드의 핵심이 된 느낌. 느낌이 아니라 실제 핵심이 되었다. “예, 사장님. 그래서 말인데 신규 직원의 채용은 어떻게 진행할지….” 민찬의 말에 우진은 사무실을 가득 채우던 빈 책상들을 떠올리곤 물었다. “더 뽑아야 돼?” “네, 아무래도 원활한 업무를 위해서는 더 뽑아야….” “뭐 하려고 더 뽑아?” “…네? 그래도 길드도 키우고, 앞으로 각성자도 더 많아지고 하면, 직원이 좀 있어야…….” 우진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툭 던졌다. 민찬이 그것을 집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징병검사 통지서] “이, 이것은….” 우진이 씩 웃었다. 고작 네 명뿐이지만 자신의 밑에 이렇게 부하들을 거느리니 뭔가 귀찮은 일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더욱이 민찬과 해민은 이쪽 바닥에서는 엘리트였다. “나의 군면제와 원활한 던전 공략.” “…….” “그거 위해 굳이 직원이 더 필요해?” “…….” 이거였구나. 이거 때문에 길드를 만든 거구나. 민찬은 아찔한 기분이었다. 겨우 군면제 때문이면 차라리 해머길드에 입사를 하지. 그랬으면 자신은 그 공로로 총괄지원부장에 잘나가고 있었을 텐데. “왜 대답이 없어?” “그래도 몇 명은 더 뽑아야….” “좋아. 그럼 알아서 해. 지원부 일은 총괄이사에게 모두 일임하지. 됐지?” “…네.” 자신을 믿어서 저러는 것일까, 귀찮아서 저러는 것일까? 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럼 일봐. 난 던전이나 한 번 더 돌아야겠으니.” 4시간 남짓이었다지만 던전 내에서는 16시간이다. 우진의 사냥속도를 따라가느라 성구는 죽을 똥 살 똥 애썼는데, 얼마나 쉬었다고 다시 던전이라니…. 성구의 얼굴이 어두워지는데 민찬이 우진에게 말했다. “그전에 각성자 관리국에 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긴 왜?” “제대로 된 각성 등급을 측정 해야 길드심사가 진행된답니다.” “그럼 갔다 가지 뭐.” “제가 모시지요.” 우진과 성구는 민찬과 함께 관리국으로 향하고 해민과 승훈은 사무실에 남아 나머지 비품을 정리했다. * “신기하네.” 우진은 던전의 에너지 측정기와 비슷하게 생긴 기계에 섰다. 기계를 한번 작동할 때마다 혈석이 뭉텅이로 쓰이니 남발할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각성등급을 재자면 측정기로 하는 것이 가장 정확했다. 공무원은 세팅이 끝나자 두터운 측정실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장 강력한 능력을 한번 발현해 보시겠습니까?” 각성자가 능력을 발휘할 때 에너지가 발생한다. 측정기는 그 에너지를 재는 것이다. 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뼈의 창을 소환했다. 띠리리리릭. 여러 개의 숫자가 나타나고 최종적으로 등급이 표시되었다. “어? C급 인데요?” “뭐? 잘못된 거 아니야?” 모니터를 보던 공무원둘이 자기들끼리 심각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론에서 이미 A급 각성자가 거의 확실하다고 떠들던 우진이다. 아니, 이룬 성과만 봐도 그렇다. 혼자서 5성의 던전을 클리어 했으니까. 그들은 우진이 A급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오늘은 그저 등급측정의 기록을 남기는 형식적인 자리였다. “뭐, 더 필요해요?” “아, 더 강력한 기술이 있으십니까?” “뭐, 모자라면 더 해주고요.” 우진의 말에 공무원들이 다시 혈석을 준비해 측정기를 가동했다. “그럼 A급 뜰 때까지 마력방출 해보죠. 모니터 이쪽으로 돌려봐요.” “예에? 예에.” 공무원이 모니터를 우진이 볼 수 있게 보여주었다. 우진은 본스피어를 단번에 10개나 소환했다. 측정기의 숫자가 빠르게 올랐으나 옆에 표시된 문자는 ‘B’ 아직 모자란듯하여 재빨리 그것들을 측정실 벽에 던져 단번에 많은 마력이 소비되는 뼈의 장벽을 소환했다. 기력을 소모하여 무기 없이 대지강타의 준비동작까지 마치자 ‘A’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우진이 그것을 보곤 모든 마력을 거두었다. “됐네. 됐죠?” “…예에, 되, 됐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우진이 자리를 벗어나자 공무원 둘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헛것이라도 본 듯 이미 우진이 사라진 측정실을 보았다. “마, 마력 컨트롤이 장난 아닌데?” “정말 김강철하고 비교할 만 하겠네. 후우.” 우진의 이름으로 된 A급 각성자 카드가 정식으로 발급되었고, 그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며 몇 시간 뒤 그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그 시각 우진은 던전에 입장했고, 도지원은 일과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와 휴대폰을 열었다. < 38화 - 재생 연고 > 끝 ⓒ 진설우 < 39화 - 재생 연고 (2) > 교대근무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지원은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휴우.” 본래 작았던 회사가 던전사업으로 호황을 맞으며 업무량이 늘어나다 보니 하루하루가 더 벅찬 느낌이었다. 기숙사 문이 열리며 룸메이트인 혜진과 나영이 들어왔다. “어휴, 언니 고생하셨어요.” “응, 너희도 고생했어.” 21살 또래의 혜진과 나영이었다. 지원은 24살의 언니였으니 그녀의 나이 차 때문에 불편한지, 그 외모 때문에 불편해서인지 몰라도 지원을 빼고 둘이서 잘 어울렸다. “언니, 저희부터 좀 씻을게요.” “응, 그렇게 해.” 지원은 잠깐 쉴 겸 휴대폰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고된 하루에 짧은 휴식을 안겨주는 웹툰을 보았다. 그리고 짧은 글귀의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후후.” 지원은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고3 갑작스러운 던전 쇼크로 부모님들이 돌아가셨다. 던전 쇼크 이후 무차별적으로 일어난 던전브레이크로 난리가 난 서울이다. 지원도 그때 하마터면 죽을뻔했으나 어떤 각성자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다.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다시 만날 길은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살린 대가로 잃게 된 것이 너무 많았다. 여신으로 불리며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때는 그 도도한 맛에 산다고 고백하는 남자마다 번번이 퇴짜놓았고, 한순간 추락한 인생에서는 모두가 자신을 괴물 보듯이 보았다. 혹은, 동정의 시선이거나. 불쌍한 마음에 사귀자고 고백하는 남자가 있을 리 없었다.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한 지원에게 소설은 그런 지원을 설레게 했다. 일과를 마친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아, 재밌다. 이 작가는 꼭 재밌을 때 딱 끊네.” 감질나게 끝난 몇 개의 소설을 보았으나 기숙사 동생들이 여전히 화장실을 쓰고 있었다. 지원은 시간이 남아 포털사이트의 글들을 훑어봤다. “어? 우진이다.” 가장 핫한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 첫 화면에 보이는 우진의 사진에 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뾰루퉁한 우진의 얼굴에 실소가 배어 나왔다. “헤, 우진이 엄청 유명하네.” 포털의 메인을 장식한 기사들 중의 절반이 우진의 것일 정도로 핫했다. [강우진의 길드 아르달 등록. 관리국에서 검토 중.] [대한민국 11번째 A급 각성자 강우진, 어느 별에서 왔니?] [초신성 강우진. No 1 김강철의 심경은?] [강우진의 남자. 홍성구는 누구인가?] [강우진의 졸업학교 미도고교 선생님의 인터뷰.] “어? 우리 3학년 때 국사 선생님도 나오네.” 지원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이렇게 유명해진 것에 대해 신기하면서도 신나는 기분이었다. 그런 사람과 며칠 전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니, 마치 대중들이 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듯 신기한 마음이었다. “흐음.” 한참 기사를 살펴보던 그녀는 일어나 침대 곁에 있는 옷장을 열었다. 그곳에 각양각색의 모자가 쌓여있었다. 모자는 그녀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아이템. 그중에서도 따로 옷장의 한켠을 차지한 모자를 꺼내 들었다. 모자의 양옆에는 투명테이프가 붙어있었는데 뜯어진 머리카락 몇 올까지 함께 붙어 있었다. “후후.” 며칠 전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 지어지는 지원이었다. 편견 가득한 사람들의 혐오와 동정 어린 시선들 속에서 살아온 5년. 5년 만에 나타난 고등학교 동창 강우진은 그녀에게 소설 속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아차, 재민이 마칠 시간이네.” 지원은 항상 재민이 마칠 시간에 전화를 했다.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자 살아가는 이유. [어, 누나.] “응? 어디 아파? 목소리가 왜 이래?” 아프지, 마음이 아프지. 하아. [아니야. 괜찮아.] “응, 밥 먹었지? 학원 가는 길이야?” [응. 아참, 아까 우진이형이 문자로 누나 전화번호 알려달라던데 알려줘도 돼?] “어, 어? 우진이가?” 도지원은 우진이란 말에 묘하게 심장이 뛰었다. [역시 좀 그렇지? 내가 안된다고….] “알려줘!” [어, 어?] “알려주라고.” […그 형 조금 위험….] “너 요즘 누나 말에 개긴다?” [아, 알았어. 누나, 나 학원 다 왔다. 그럼 끊는다?] “그래. 공부 잘하고 이번 주는 나 바빠서 집에 못 가.” [응, 알았어.] 전화를 끊은 지원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하아.” 왜 알려달라 했을까? 자신의 번호를 왜 알려달라고 했지? ‘저게 뭔, 대수라고 여전히 예쁘구만.’ 우진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술에 취해 잘못들은 것이 아니다. 확실하다. 우진이가 설마…. “에이, 무슨.” 못생긴 여자와 사귀는 사람은 있어도, 괴물과 사귀는 사람은 없다. 괜히 고개를 처드는 기대감을 애써 눌렀다. 딸칵. 화장실 문이 열리고 나온 혜진과 나영은 옷장 앞에 서 있는 지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언니!” “어어?” “아무리 방안에서지만 모자 좀 쓰고 있죠?” “맞아요. 언니. 매너라는게 있죠. 깜짝 놀랐잖아요.” “어, 으응.” 지원은 서둘러 수건을 챙기고는 얼굴을 가렸다. 화장실로 들어간 지원이 샤워기 물을 틀고 옷을 벗었다. “아휴, 오크년. 깜놀했네.” “아, 진짜. 나 돈 더 모으면 기숙사부터 나갈 거야. 볼 때마다 심장 떨려 죽겠어.” “저 얼굴로 어떻게 살아. 나 같았으면 진작에 자살했다.” 다 들으라는 듯 떠드는 그 소리에 지원은 소리 없이 옷을 벗었다. 모든 것을 탈피한 지원의 몸은 아름답기만 했다. 샤워기 물소리도 모자라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아아아. 세면대에 두 팔을 짚고 섰다.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말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아프다. 마치 넌 자격이 없으니 헛물켜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 뚝, 뚜둑. 흐르는 물에 묻힌 눈물방울이 슬펐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거울 속 괴물이 오늘따라 유난히 슬프게 울었다. * “후우.” 채집을 모두 마친 성구는 깊게 한숨 쉬고는 우진에게로 향했다. “형님, 다 모았습니다.” “그래?” 쉬고 있던 우진은 성구가 모아놓은 전리품들을 모조리 인벤토리에 넣었다. “형님. 전보다 사냥속도가 월등히 빨라진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벌써 레벨이 33에 달했으니까. “이제 슬슬 아티팩트는 적게 나오네.” “네, 형님. 아무래도 아티팩트 채집은 다 한 듯 싶습니다.” 성구의 대답에 우진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이번 공략에서 얻은 아티팩트는 세 개뿐이었다. “이제 나가자.” “네, 형님.” 우진과 성구가 던전을 나서니 우승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 이사님이 보냈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사장님 나오시면 모셔오라 했습니다.” 정민찬이 운전기사로 그를 보낸 모양이었다. “정 이사는?” “길드 승인이 났는지 관리국에 갔다가 사무실로 온다 했습니다.” “그래.” “그럼, 차 가져오겠습니다. 사장님.” “그렇게 해.” 우승훈이 사라지자 성구가 예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형님. 그런데 승훈씨하고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쟤?” “예, 형님.” “나한테 휴대폰 판 애야.” “예?” 주차장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차를 빼 온 승훈이 크락션을 울렸다. “아, 앞에 기자들 좀 나오라고!” 빵빵 울리며 기자들을 해산시키는 그 모습에 성구가 식은땀을 흘렸다. 휴대폰 하나 팔았던 인연이라고 창립멤버로 넣어? 우진의 앞에 차가 서자 그가 내려 뒷자리 문을 열었다. “타시지요.” 우진과 성구가 차에 타려 하자 기자들이 다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강우진씨. 서울대입구역 6번 출구 던전에 대해 예약을 받지 않고 있으신데요. 언제 외부에 대여할 생각이십니까?” “강우진씨….” 기자들의 질문 러쉬에 우승훈이 험악한 인상을 구기며 버럭 소리 질렀다. “아, 물러나세요. 방금 던전 공략 끝내고 나와 피곤한 분입니다. 이런 일은 길드에 정식으로 취재 요청하세요. 계속 이런 식으로 밀착 취재하시면 해당 언론사 상대로 법적 대응도 진행하겠습니다.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습니다. 물러나세요. 제가 얼굴 다 봐놓 습니다. 나중에 정식 취재요청 때도 제가 다 기억해둘 겁니다. 저 뒤끝 많습니다.” “…….” 속사포 같은 우승훈의 비트 있는 말에 기자들이 질려 물러났다. 우승훈이 가볍게 운전석에 올랐다. “정이사가 언론사 고소도 하겠데?” “아닙니다. 사장님.” “어? 아냐?” “뻥카 한 번 날려봤지 말입니다.” “…어, 잘했어.” 우진의 칭찬에 우승훈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사장님.” “그, 그래.” 판매점까지 접었다. 이 길드에서 뼈를 묻으리라. 우승훈이 사명감을 담아 핸들을 잡았다. * 3일이 지났다. 그사이 던전 공략이 9번이나 반복되었고 마지막 공략은 2시간 49분의 랩타임을 기록했다. 그것을 두고 또 기자들은 바쁘게 기사를 쏟아냈다. 전대미문. 강우진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한국 랭킹 1위 각성자 김강철과 비교하는 단골소재가 되었다. 아니 이제는 그것도 식상한지 세계의 유명 각성자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강우진은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사장실 소파에 앉은 그는 바구니에 가득 담긴 간식을 까먹고 있었다. <‘소리버섯’을 섭취합니다.> <마력 스탯이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힘의 결정’을 흡수합니다.> <힘 스탯이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래닌의 피’를 흡수합니다.> <먼저 흡수한 ‘첸의 총명’을 소화중입니다.> <재 흡수까지 27시간 남으셨습니다. 중복 복용 시 흡수시간이 길어집니다.> 스탯을 올려주는 영약이라고 하여 무한정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약마다 몸이 받아들이는 시간이 있었고, 이것은 영약을 먹을수록 길어졌다. 기력을 올려주는 래닌의 피와 첸의 총명을 연달아 먹었더니 소화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우진은 다른 스탯을 올려주는 영약들을 골고루 먹었다. 어떤 것은 2시간 뒤 다시 먹을 수 있었고, 어떤 것은 무려 17일이나 걸렸다. 성구는 강화석(영약)을 사탕 먹듯 야금야금 먹는 우진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2억, 저건 1억 7천, 저건 5억짜리….’ 돈 먹는 하마다. 돈 먹는 하마가 눈앞에 있다. 우진은 성구의 시선을 느끼고는 슬쩍 말했다. “왜? 너도 줘?”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어차피 강화석이라 불리는 영약들은 정이사가 틈틈이 구입하고 있었다. 딜레이 시간이 걸려 모두 한번에 먹을 수도 없으니 성구에게 몇 개 먹인다고 딱히 아까울 것도 없었다. 자신을 따라다니며 심부름 할 성구가 강해지면 그만큼 생존확률이 높았고, 또, 그만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이거, 이거, 요거 먹어.” 우진은 ‘힘’과 ‘민첩’, ‘체력’을 올려주는 영약들을 성구에게 건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형님.” 성구가 감격한 듯 넙죽 엎드려 감사를 표했다. “아니, 뭘.” 힘이 좋아야 짐도 더 많이 들고, 민첩이 좋아야 아이템 줍기도 빠르지, 체력이 좋아야 더 많이 일할 테고. “앞으로도 너한테 필요한 거 몇 개씩 줄게.” “이 홍성구. 형님을 만난 것이야 말로 인생의 축복입니다.” “그래. 잡무이사. 어서 드시게.” 아, 업무가 딱 그거긴 한데 그렇게 부르지 말지? “잡무이사가 한번 먹어보겠습니다.” 우진은 왕에게서 하사받은 보약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영약들을 하나하나 흡수했다. 우진이 피식 웃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메신저 프로그램을 열고는 대화창을 눌렀다. 도지원님과의 대화. 1[나 우진이다.] 1[도지원 아닙니까?] 1[전화 좀 받지?] “아, 이거 아직도 안 봤네.” 재민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 것 보니 영락없이 도지원인데 메시지를 읽어보지도, 전화를 받지도 않는 그녀였다. “허, 이거 뭐, 만나야 약을 발라주던 말던 하지.” 우진의 혼잣말에 강화석을 흡수하고 얼굴이 벌게진 성구가 대꾸했다. “예? 뭐가 말입니까?” “지원이 말야. 전화를 안 받아.” “공장 교대근무면 휴대폰 못쓰지 말입니다. 오늘 토요일인데 쉬지 않습니까?” “재민이가 이번 주 바빠서 못 온다던데.” “흐음. 지원이 누나가 딱히 형님을 피할 이유가 없을 거 같은데 말입니다. 호, 혹시 그날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날이야….” 우진은 셋이서 막창을 먹은 날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테이프 때문에 화났나…?” “예?” “모자 자꾸 떨어지길래 테이프 붙였거든.” “흠, 제가 여자 경험이 없어서….” “어휴, 연애도 안 하고 뭐 했냐?” “…….” ‘그러는 형님은?’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겨우 인내했다. “밖에 나가서 이런 거 빠삭한 애로 불러와.” “…네.” 시무룩한 성구가 나가고 조금 있다 우승훈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이리 와봐.” “넵.” “이거 문자 봐봐. 왜 이런 거냐? 이거 일부러 안 읽은 거지?” 왔다. 기회가 왔다. 이미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어 업무능력이 뛰어난 정민찬과 김해민, 각성자인 홍성구에 치여 길드 내에서 입지가 약한 우승훈이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여기저기 싹싹하게 비비며 잡무처리는 도맡아 한 그였다. 그런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건 하늘이 그의 출셋길을 도운 것이다. “저를 입사 시키신 건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어?” “이런 방면으론 제가 스페셜리스트입니다.” “…?” 나의 존재가치를 입증해 보이리라. 회심의 미소를 짓는 그를 우진이 못 미더운 얼굴로 보았다. < 39화 - 재생 연고 (2) > 끝 ⓒ 진설우 < 40화 - 재생 연고 (3) > “여러 현란한 기술들이 있지만 역시 기본 베이스는 정성과 감동입죠. 이럴 땐 강행돌파가 답입니다.” 우승훈은 마치 제 일처럼 열정적으로 나섰다. 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누나의 마치는 시간을 알아내더니 시계를 보았다. “빠듯하군요. 사장님. 일단 이동하시죠?” “어딜 가?” “사장님은 모든 게 완벽하시지만 그… 스타일은 아무래도 좀… 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하도록 꾸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약 발라주는데 옷까지 차려입고 가야 하는 걸까? 뭐, 주말이기도 하니 잠깐 쉬는 것도 괜찮겠지. “일단 가시죠.” 신이 나보이는 우승훈은 할 일 없는 성구까지 대동해 우진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시간이 빠듯하니 일단 깔끔하게 가죠.” 새로운 A급 각성자라는 사회적 이슈와 명성은 첫 방문임에도 강우진을 백화점 vip로 만들어 버렸다. 알아서 찾아온 백화점 vip 응대 직원이 우진을 vip 라운지로 안내했다. 엄청나게 호화롭게 꾸며진 개인 룸으로 안내된 우진을 직원들이 줄자로 여기저기 치수를 쟀다. “사장님은 여기 계십시오. 옷은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우승훈이 나가고 룸에는 우진과 성구, 그리고 담당 직원 하나만 남았다. 그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성구는 눈도 못 마주치고 불안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기만 했다. “물 좀 가져와.” “네, 고객님.” 우진의 말에 담당직원의 대답과 동시에 쟁반에 물잔을 가져왔다. 우진이 그것을 힐끗 턱짓했다. “좀 마셔.” “예? 예에.” 물은 긴장한듯한 성구를 위한 것이었다. “후아, 형님은 이런데 익숙하십니까?” 한국의 백화점은 처음이지. 아르펜에서야 뭐…. “뭐, 대충 익숙해.” “역시 형님은….” 우진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지는 그때 우승훈이 쇼핑을 마쳤는지 룸으로 들어섰고 그 뒤로 직원들이 옷을 가지고 입장하고 있었다. vip는 강우진인데 어깨에 힘은 우승훈이 더 들어간 듯 싶었다. “사장님 머리와 메이크업은 이런 스타일링으로….” 승훈이 휴대폰의 사진을 가져와 들이밀며 설명하자 우진의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봐. 승훈이.” “넵.” “적당히 하지?” 위험하다. 승훈의 본능이 경고했다. 더 나가면 위험하다. “사장님은 본판이 좋으셔서 패션만으로도 스타일이 사실 겁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약 주러 가는데 먼 요란인가 싶었지만 좋은 옷 한 벌 사입는 게 뭐 나쁜 일이겠는가. 우진이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승훈과 성구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역시, 남자는 슈트 빨. 잘 단련된 몸을 가진 우진이 정장을 차려입자 제대로 핏이 살아났다. 남자가 봐도 멋있어 보였는데 옷을 가져온 여직원 몇몇도 설레는 얼굴이었다. 승훈이 구두와 시계를 내밀었다. “수트의 완성은 시계지 말입니다.” 우진이 피식 웃고는 시계를 찼다. “그럼 난 갔다 오마.” “홍 이사 데려가십시오.” 승훈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쟤가 무슨 운전기사냐. 그동안 고생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쉬어라. 택시 타고 갔다 오지 뭐.” 아닌 게 아니라 성구는 그동안 죽을 맛이었다. 고작 며칠이지만 던전 안에서의 시간은 4배나 더 많이 보냈다. 그 강행군 동안 쉴 새 없이 일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쉬는 김에 주말 동안 출근도 하지 마. 월요일에 보자. 정 이사한테 그렇게 전해.” “넵, 꼭 성공하십시오.” 성공은 무슨, 약만 발라주면 되는데. 우진이 막 나서려는데 승훈이 쪽지를 건넸다. “제가 평택에 대해 사전조사 끝냈습니다. 이대로만 따라가시면 됩니다.” “어?” 우진이 쪽지를 받아보니 몇몇 맛집 주소가 적혀있었다. 제법 상세하게 짜여진 데이트 코스. 뭐, 내려간 김에 잠깐 쉬다 올까? “뭐, 고맙다. 그럼 주말 잘 보내라.” 우진이 나서자. 백화점 직원은 바로 어딘가에 연락해 우진을 위한 차량을 대기시키도록 하였다. “후아, 간만에 쉬는 시간이네. 승훈씨는 뭐하실 거에요?” 성구는 꿀맛 같은 이틀간의 휴식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그에게 승훈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후후후,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예?” “제가 주선해서 커플 안된 사람들이 없습니다. 제가 사장님을 제대로 서포트 할 겁니다.” “예? 형님 지금 고백하시러 간 거에요?” “후후후, 왜 아니겠습니까?” 승훈의 확신에 찬 말에 성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진이 형님이 지원이 누나를 좋아했던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후후후, 그럼 홍 이사님 월요일 뵙죠. 전 준비할게 많아 조금이라도 빨리 평택으로 가봐야겠습니다.” 승훈이 쌩 사라지자 성구가 고개를 저었다. “고백하는 거 아니지 싶은데….” 아까 사장실에서 얼핏 듣기론 치료 어쩌고 하는 거 같았는데 말이다. 뭐, 어쨌든 모쏠인 자신이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성구는 백화점에 온 김에 부모님을 위한 선물이나 쇼핑하기로 했다. 몸은 고됐지만 그동안 정산받은 돈이 어마어마했으니 부모님을 위한 선물 쯤은 사가야하지 않겠나. 성구가 쇼핑을 하는 사이 우진은 평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늦었네.” 택시를 타고 오려고 했으나 백화점의 호의로 내어준 차량을 타고 편하게 지원이 일하는 공장까지 내려온 그였다. 헌데 지원의 조는 이미 교대근무가 끝나 기숙사로 퇴근 한 후였다. 우진은 하는 수없이 기숙사를 찾았다. 기숙사는 오래된 7층 아파트처럼 생긴 건물이 두 동 덩그러니 있는 게 다였다. 우진이 기숙사의 경비실을 찾았다. “도지원씨 좀 불러주시죠?” “인터폰 같은 거 없으니, 직접 전화 하슈.” “전화를 안 받아서요.” “예에?” 늙수그레한 경비원이 우진을 힐끗 보더니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인이랑 싸웠구먼?” “…….” 퇴직하고 경비원 생활만 10년 차다. 척하면 척이다. 어디 제비처럼 쫙 빼입은 것이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처자 애인인 듯 싶었다. “허허허, 내 불러줌세.” 경비원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 우진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원은 잘 준비를 했다. 이번 주말은 조가 바뀌는 날이라 조금 쉬고 있다 저녁에 야간조로 다시 출근해야 했다. 그런 지원을 방해하는 초인종이 울렸다. “도지원씨. 애인이 찾아왔어. 아, 얼른 나가 봐.” 초인종 너머에서 들려오는 경비원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지원보다 그녀의 룸메이트인 혜진과 나영이였다. “우와! 언니 남자친구 있었어요?” “와, 대박, 대박!” 그녀들이 재빨리 창문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와 미쳤다. 키 커.” “어어? 여기 봤다. 잘생겼어. 대박이야!” 그녀들의 호들갑에 지원은 누가 자신을 찾아온 것인가 빼곰 고개를 내밀었다. 3층의 창문 밖으로 모습을 비춘 그녀를 보곤 우진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와, 미친다. 여기 봤어. 진짜 언니 남자친구에요?” “방금 언니보고 손 흔든 거 같은데.” “와, 맞나 봐. 대박 사건!” 혜진과 나영의 호들갑에 지원이 당황해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난데없이 왜 여기까지 나타났을까? 지원이 서둘러 휴대폰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긴 왜 왔어?” [왜 오긴?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보길래 왔지.] “하아.” 지원의 한숨에 혜진과 나영이 입을 가리고는 오두방정을 떨었다. ‘와, 대박. 대박.’ ‘진짜야, 진짜.’ “할 말 있으면 말해.” [전화로는 좀 그런데? 나와. 밥이나 먹으러 가자. 줄 선물도 있고.] 혜진과 나영은 꺅꺅 거리는 비명을 참으며 지원의 휴대폰에 귀를 쫑긋 가져다 댔다. 지원은 그녀들이 불편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으나 그만큼 쫓아와 더 들으려는 그녀들이었다. “나 야간에 다시 일 나가야 해. 시간 없어. 전화로 이야기해.” [아까 회사 간 김에 너네 사장한테 이야기했어. 너 내일 스케쥴없으니까 그냥 나와.] “뭐?” 얘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까? 이미 언론에 얼굴도 팔릴 대로 다 팔린 애가…. 유명인이 자신과 엮여서 무슨 안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갈까? 뭐 거기서 줘도 괜찮은 선물이긴 한데.] “아, 아니야. 내가 나갈게. 여기 외부인 못 들어와.” [알았어. 천천히 나와.] 우진이 전화를 끊자 지원이 한숨을 쉬었다. “와! 대박. 언니 저 오빠 누구예요? 진짜 남친?” “아니야. 그냥 고등학교친구야.” 지원의 말에 혜진과 나영이 잔뜩 기대감 어린 얼굴로 바뀌었다. “강우진이다!” “어머, 진짜야! 각성자 강우진이다.” 기숙사 창으로 구경하던 누군가의 외침에 혜진과 나영이 서둘러 창가로 다시 나가보더니 저들끼리 휴대폰 검색을 했다. “와, 나 소름 돋았어. 진짜, 강우진이다.” “언니 진짜 강우진이랑 친구에요?” “응? 으응.” 지원의 말에 이제 둘의 눈빛은 이글거리는 열망에 가까워졌다. “언니 저희도 데려가시면 안 되요? 저희도 배고픈데.” “네, 언니. 저녁 먹는데 저희도 좀 데려가 주세요.” “어어?” 그냥 나가서 이야기만 하고 돌아올 생각인데 얘들이 왜 이럴까? 갑작스레 친한척하는 이들의 모습에 부담스러우면서도 황당했다. 언제, 이렇게 친했다고……. “우, 우진이한테 물어보지 않았는데, 이건 예의가 아닌….” “오빠만 좋다고 하면 되는 거죠?” “아싸. 야 얼른 준비해.” “역시! 언니 천사얌.” “나 인증샷 찍어서 페이스북 올려야지. 히히.” “…….” 혜진과 나영이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어떤 화장을 해야 하나 부산 떠는 모습에 지원은 조용히 모자를 골랐다. * “하아, 왜 이렇게 안 나와?” 우진은 기숙사 창마다 고개를 빼곰 내밀고 구경하는 사람들 덕에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남 시선을 신경 써본 적이 없던 우진이 그것들을 불편해 하지는 않았다. 보거나 말거나. 한참 만에 나타난 지원의 모습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뭐야? 그렇게 튕기더니 예쁘게 하고 나왔네.” “…….” 우진의 말에 지원의 얼굴이 수줍게 빨개졌다. “오, 오빠. 안녕하세요.” 뒤따라온 그녀들의 인사에 우진이 눈을 끔벅였다. “뭐야? 이 못난이들은?” 하나는 얼굴이 넓어 오크를 닮았고, 하나는 눈이 찢어졌다. 어? 하나는 오크고 하나는 고블린인데? 우진의 말에 도지원이 깜짝 그의 입을 가로 막았다. “루, 룸메이트야. 너랑 같이 밥 먹고 싶다고 해서….” 곤란해하는 지원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손을 치웠다. “너희 배고파?” “네, 오빠.” 거슬리는 소리를 들은 거 같긴 한데 뭐, 각성자 강우진과 저녁을 먹을 수 있다면야. 우진이 지갑에서 5만 원짜리 하나를 꺼냈다. “얘들아, 오다 보니 통닭집 많더라. 시켜들 먹어. 오빠는 예쁜 언니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허, 뭐, 뭐야.” “완전 깬다.” 급 실망한 그녀들의 반응에 지원이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우진이 그녀의 어깨를 끌었다. “자, 닭다리 잘 뜯게 생긴 동생들은 놔두고 우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어? 우, 우진아.” 우진이 손을 잡아끌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면서도 지원은 이 상황이 너무나 어이없어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왜 이렇지? 황당해하는 혜진과 나영을 보니 가슴을 누르던 돌을 치운 느낌이었다. “뭐, 뭐야? 완전 어이없어.” “헐, 강우진 완전 밥맛이야. 나 페이스북에 올릴 거야.” “맞아. 나 기사보고 멋있다고 댓글 달았는데, 악플로 바꿔야지.” “아, 별꼴이야. 지원이 언니 같은 사람하고 밥 먹으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갈까?” “몰라. 미친놈인가 봐.” “미남과 야녀도 아니고 참 내.” “에이, 씨. 괜히 화장했네. 닭이나 뜯자.” “후우, 들어가자.”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그녀들을 두고 우진은 지원을 데리고 택시를 잡았다. < 40화 - 재생 연고 (3) > 끝 ⓒ 진설우 < 41화 - 재생연고 (4) > 택시 안은 조용했다. 우진은 어쩐지 불편해 보이는 모습의 지원을 보며 물었다. “왜 연락 피해?” “어? 그냥….” 그냥이라는 말만큼 아리송한 말이 어디있을까. “내가 불편해?” “아, 아니야. 그런거.” 불편하기보단 불안하지. 좋아하게 될까 봐. 이렇게 자격없는 내가 널 좋아하게 될까 봐. 억지로 외면하려는데 왜 이렇게까지 찾아와서는…. “그런데 진짜 무슨 일 때문이야?” “일은 무슨, 그냥 줄 것도 있고 겸사겸사 데이트나 하는 거지.” “데, 데이트?” 아,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정신이 없었다. “가자. 다 왔네.” 우진의 말에 내리고 보니 평택의 번화가였다. 사람이 많아 그간 한 번도 오지 못한 곳이었다. “밥 먹기 조금 이른데 영화나 보러 가자.” “…우진아 여기는 좀.” 우진이 그녀를 보곤 말했다. “왜? 사람 많아서?” “어? 으응.” “그렇게 남 시선이 신경 쓰여?” “어?” 신경 안 쓰일 리가 있겠는가. 이런 얼굴을 하고 말이다. 지원이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우진이 그런 지원을 보다 근처의 좌판으로 걸어갔다. 지갑을 열어 조잡한 모양의 복면처럼 된 마스크를 샀다.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의 모습이 프린트된 조악한 모양의 복면이었다. “아이언맨할래? 스파이더맨 할래?” “어?” 뭐지? 뭐 이런 애가 있지? 지원이 당황하는데 우진은 아이언맨복면을 뒤집어썼다. 정장을 쫙 빼입고 아이들이 어린이날에나 쓸 법한 조잡한 복면을 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써봐.” “….” 우진은 그녀의 모자를 벗기고는 당황하는 그녀의 얼굴에 스파이더맨 가면을 씌워주었다. “어때?” “모, 모자 돌려줘.” 모자는 그녀에게 옷과도 같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발가벗겨진 기분. 잔뜩 웅크린 그녀의 어깨를 짚고 근처 건물의 유리창을 가리켰다. “어때?” 어떻긴… 바보 같은 모습이다.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이라니. “괜찮지? 가자 그럼.” “이, 이러고 돌아다니게?” “뭐 어때? 다른 가면 사줘?” “아, 아니야.” “그럼 가자.” 우진이 지원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지원은 끌려가면서도 힐끗 건물 창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정장 입은 아이언맨이 긴머리 스파이더맨을 데려간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와, 뭐야? 진짜 웃긴다.” “저게 뭐야? 와 대박.” 지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와, 근데 둘 다 비율 장난 아니야. 뭐지? 연예인인가?” “무슨 이벤트인가?” “아직 할로윈도 멀었는데.” 횡단보도 앞에 섰다.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 시선, 시선. 익숙한 사람들의 시선, 노골적인 눈빛.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멸시와 혐오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와, 여자 몸매 장난아니다. 얼굴도 엄청 예쁘겠는데?” “오빠, 미쳤어? 어딜봐.” 옆에서 다투는 커플들의 소리에 지원은 저도 모르게 풋하고 웃었다. “왜?” 주변에서 수근거리는것은 아무런 반응도 없던 우진이 지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너무 갑작스러운데….” “왜?” “너무 웃기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뭐야. 신호 바꼈다. 가자.” 우진이 지원의 손을 잡아 끌었다. 지원이 우진의 손을 조금더 꼭 쥐었다. 그녀의 움츠렀던 어깨가 펴졌고, 발걸음이 조금은 당당해졌다. 민망함을 집어던진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이 영화관에 입장했다. * “아, 이거 곤란하네.” 우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모든 영화가 매진이었다. 지원이 우진의 팔을 잡았다. “굳이 영화 안 봐도 돼.” “아쉽네.” 우진이 막 돌아서려는데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 영화 보시겠어요?” “예?” “저, 그럼 수고하세요. 저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우진은 얼떨결에 표를 건네받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남자를 보았다. ‘저거 낯이 익은데.’ 저 멀리 사라지던 남자는 우진을 돌아보다 눈이 마주치자 윙크하고는 사라졌다. ‘뭐하러 여기까지 따라왔데?’ 우진은 표를 들고 지원에게 흔들었다. “운 좋은데?” “그, 그러게.” 지원과 우진이 팝콘을 사서 영화관에 입장하자 마스크에 모자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다시 등장했다. 마스크를 내린 그는 다름아닌 우승훈이었다. 매표소로 간 그는 품안에서 수북한 표를 꺼냈다. “이 스크린 빼고 환불 좀 해주세요.” “네? 아까 분명 단체 관람이라고….” “아, 환불 좀 해주시죠? 아직 20분 남았잖아요.” “…….” 매표소 직원이 진상 손님을 상대하는 사이 우진과 지원은 영화관에 입장하곤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 “뭐야? 매진이라더니 아무도 없네.” “그러게.” 부하 한 놈이 괜히 오바를 했구나. “뭐, 어때. 그냥 보자.” 우진은 아무도 없는 영화관의 좌석에 앉았다. 앉고 보니 영화가 가장 잘 보이는 중앙 자리였다. “아무도 없는데 답답하면 벗어.” “그럴까?” 지원은 마스크를 벗고는 고개를 돌렸다. “모자 좀 줘.” “괜찮아. 그냥 봐.” “넌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왜? 이상하게 봐줘? 불쌍하게?” “아, 아니. 그 말이 아니라….” 훅 들어온다. 무슨 돌직구가 이리도 묵직한가. 지원이 당황하는데 우진이 말했다. “넌 예뻐. 겨우 그깟 상처때문에 주눅들지마.” “…….” “상처하나 없어도 못생긴것들 천지야. 아까 오크랑 고블린처럼.” “오크랑 고블린?” “아까 나왔던 애들. 난 던전 들어온줄 알았잖아.” “아…. 그래도 너무 사람을 외모로 그러면 안돼.” “뭐, 외모도 그렇지만 걔들은 영혼이 안 예뻐. 구질구질 하더라고.” “영혼?” “넌 영혼이 예뻐. 순백색이지.” “…….” 와, 소름. 어떻게 이런 느끼한 멘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칠 수 있을까?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우진의 성격도 참 4차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 같은 자신을 보고도 놀라지도 않고, 아니, 아예 감흥이 없어 보인다. 아무런 편견 없는 그 눈빛이 지원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자신을 배려한 마스크도 그렇고…. “아, 시작한다.” 우진은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집중했다. 지원은 영화 한번 보고 우진을 한번 힐끗 보길 반복했다. * “아, 재밌네.” “후아, 나 정말 영화 5년 만에 보는 거 같아.” “난 한 20년 만에 보는 거 같아.” “호호, 뭐야.” 지원의 웃음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복면을 쓰고 있어도 좋아하는 게 보였다. 그녀의 맑은 영혼이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거봐.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 “나 화장실좀 갔다올게.” 우진이 잠깐 화장실을 가자 지원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나 어떻게 해.” 떨리는 심장은 속도 모르고 더 가쁘게 뛰었다. “어떡하면 좋아.” 어찌할 줄 모르는 지원을 두고 화장실로 가 소변을 보던 우진은 진동에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XX레스토랑에 사장님 이름으로 예약해뒀습니다. 산책 삼아 걸어가시기 좋습니다.] 승훈의 문자였다. “뭐하자는 거야?” 어차피 밥을 먹을 생각이긴 했으니 뭐…. 우진은 지원을 데리고 영화관을 나왔다. 지도에 주소를 검색해보니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분비는 번화한 도로를 따라 걸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스파이더맨 복면에 적응한 지원은 오히려 더 신이 났다. “오, 거기 히어로 커플. 이거 한번 돌려보고 가세요. 무료에요.” 광고이벤트인듯한 룰렛을 보며 지원과 우진이 순서를 기다려 돌렸다. 꽝의 확률은 겨우 10%. 거의 돌리기만 하면 선물을 주는 이벤트였다. 지원이 룰렛을 돌렸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아 나 이런 거 잘 못하는데.”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꽝에 멈췄다. “아, 아쉽다.” “하하, 아이언맨이 한번 돌려보시죠? 여자친구분 선물 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으음.” 우진은 룰렛을 잡고 힘차게 돌렸다. 빙그르르 돌던 룰렛이 천천히 돌다 꽝으로 향했다. 조마조마하게 그것을 지켜보는 지원과 그런 지원을 보는 우진, 룰렛에 인생을 건 이벤트 담당자의 감정이 교차했다. 룰렛이 꽝에 멈추려는 순간. “허허.” 이벤트 담당자가 슬쩍 룰렛을 툭 치자 조금 더 돌던 룰렛이 아슬하게 꽝을 넘어 선물 1에 당첨되었다. “오오. 특별 선물에 당첨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남자는 우진에게 작은 쇼핑백 하나를 넘겼다. 다른 사람들은 물티슈에, 생수 같은 선물을 주다가 우진에게만 주는 선물이 달랐다. 우진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이벤트 담당자… 승훈을 노려보았다. 승훈이 그를 향해 윙크했다. “끙. 가자.” 우진이 다시 길을 걸었다. 지원은 길을 가며 뽑기 게임도 해보고, 좌판의 액세서리를 구경하기도 하며 한가롭게 걸었다. 여전히 주변의 사람들이 신기한 듯 복면의 커플을 쳐다봤으나 이젠 정말 신경 쓰이지 않았다. 모든 게 새롭고 모든 게 감사했다. 이런 적이 얼마 만이던가?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는 언제나 쫓기듯이 걸어야 했는데…. 지원은 꼭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이게 꿈이면 깨지 않았으면.’ 복면을 썼을 뿐이지만, 그것도 옆에서 함께 해주는 우진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무시하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쳤고 근처의 공원을 걸었다. 공원길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녁 산책을 하는 가족부터, 한밤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에 삼삼오오 무리지어 나온 학생들이 오갔으나 번화가보다는 덜 붐볐다. 말없이 걸었다. 조용히 걷다가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 이 상황이 너무 웃겨 지원이 풋 웃었다. “진짜 웃긴다.” “뭐가?” “그렇잖아. 이런 이상한 가면 쓰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사람들이 정말 이상하게 봤을 거야.” “무슨 상관이야.” “그래. 네 말이 맞아.” 지원의 입매에 걸린 웃음이 잦아들었다. 좋겠다. 그럴 용기가 있어서. “난 아직 용기가 부족해. 이렇게 사람들 많은 곳에 다니는 것도, 영화 보는 것도, 외식하는 것도 나한텐 정말 꿈같은 일이야.” “…….” 잠깐이지만 꿈꿀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잠깐이지만 우진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 해도 지원은 받아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은 너무 초라하고, 우진은 이미 올려다보기에도 까마득히 높이 날고 있었으니까. “너무 고마워. 정말 고마워.” “…….” “꿈만 같았어. 나, 정말 이렇게 사람들 시선이 두렵지 않았던 날은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 정말 고마워.”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고마움이 느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원은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소설이 아니고, 꿈은 깨기 마련이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더 꿈꿨다간 자신이 우진에게 빠질 것만 같았다. “스파이더맨이 헐크로 돌아갈 때야.” “…….” 지원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마스크를 벗었다. 우진이 씩 웃었다. “그 용기에 내가 선물을 주지.” 품에 손을 넣어 약병을 쥐었다. 그때였다. 피유유유, 퍼퍼펑! 난데없이 하늘에서 터지는 폭죽에 그때까지 주변에서 무심한 듯 산책을 즐기던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들의 손에 꽃송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와아아,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은 지원의 민얼굴을 보곤 기겁하는 얼굴이었다. “히익? 뭐, 뭐야?” “헐, 어, 얼굴이….” “아, 정말 사랑하나 봐.” 승훈에게 섭외되어 기꺼이 이벤트에 동참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우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 우승훈 이거, 어휴.’ 우진의 눈에 당황한 지원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가면이 벗겨진 그녀의 얼굴 한쪽은 어그러져 있었다. 아니 혼이 빠진 듯 얼빠진 모습이었다. 공황장애라도 빠진 듯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우진은 뼈의 장벽을 소환했다. 촤르르륵! 우진이 앉은 벤치를 중심으로 마치 돔처럼 쌓여버린 뼈의 장벽이 우진과 지원. 그리고 주변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완벽히 차단해 주었다. 사람들의 환호도 폭죽음도 들리지 않았다. 우진이 아이언맨 가면을 벗었다. “우, 우진아…….” 멘탈이 나간듯한 그녀를 보며 우진이 품에서 재생연고를 꺼냈다. “가면은 좀 답답하지?” “어?”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눈 감아. 내가 선물 하나 줄게.” “어?” “네 말이 맞아. 이제 꿈에서 깰 때야.” “…….” 재생연고를 든 우진이 그녀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우진의 손이 닿자 그녀가 파르르 떨었다. ‘악몽은 끔찍하지.’ 힘들었으리라. 누구보다 그 고통을 잘 아는 우진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긴 긴 악몽에서 깨어날 때다. 우진이 기도하듯 정성스레 연고를 발랐다. 재생연고가 지원의 상처에 스며들었다. < 41화 - 재생연고 (4) > 끝 ⓒ 진설우 < 42화 - 던전 브레이크 > 모자를 눌러쓰고 걷는 지원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참 엉뚱하다니까.” 뜬금없이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데이트라니. 그렇게 아무런 신경 쓰지 않고 놀아본 게 얼마 만인지… 아직도 설렘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심한 듯 또 배려심 있는 그 모습이 묘하게 설렜다. 띠링. [하루 동안 샴푸 하지 마. 약 지워져. 그냥 자.] “풉, 뭐야.” 무슨 미용실이라도 된단 말인가? 뜬금없이 폭죽에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선물이라고 준 게 머리에 무슨 약이라며 발라줬다. 처음엔 물파스를 바른 듯 따끔거리던 것이 지금은 시원한 청량감으로 머리를 맑게 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원이 웃으며 답장 버튼을 눌렀다. [네, 네. 오늘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미용사님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헤헤.” 일찍 헤어져 왔기에 지원이 기숙사에 도착했을 땐 나영과 혜진이 막 야간조로 출근하려던 참이었다. “어? 얘들아 이제 출근하니?” “….” 지원의 말에도 혜진과 나영은 대꾸없이 준비를 하곤 기숙사를 나섰다. 그들의 냉랭한 반응에 지원이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휴우.” 무시쯤이야 익숙하다. 지원이 크게 숨을 한번 쉬곤 잘 준비를 했다. 세수를 하고 나오던 지원의 눈에 식탁에 너부러진 치킨박스가 보였다. ‘닭 다리 잘 뜯게 생긴 동생들은 두고….’ “풋.” 그 말이 떠오르자 방금 나간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크와 고블린이 어떻게 생긴가 싶어 검색해보니 정말 닮긴 닮았다.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지원이 자신의 뺨을 두들겼다. “아아, 내가 이러면 안되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된다. 그것이 얼마나 상처되고 못된 짓이란 건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기초화장품을 바른 지원의 눈에 조금 부기가 가라앉은 머리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어? 정말 약효 있는 건가.” 하긴 각성자들은 신기한 아이템들을 접할 기회가 있으니 제법 효과 있는 약을 발라준 것일지도 몰랐다. 다음 주에 집에 찾아가면 우진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해야겠다. 침대에 걸터앉은 지원의 눈에 작은 쇼핑백이 들어왔다. “아참.” 룰렛 선물이 뭐 대단한 게 들었겠느냐마는 궁금하긴 했다. 지원이 안에 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비닐 뚜껑에 쌓인 보석 상자가 나왔다. “어?” 지원이 작은 보석함을 열자 안에 반지가 나왔다. “뭐, 뭐야?” 길거리에서 하는 룰렛 이벤트에서 반지를 줄 리가 없다. 우진이가 준비한 걸까? 그러고 보니 오늘 온종일 이상했는데. 텅 빈 극장에 반지, 그 비싼 레스토랑에 난데없이 폭죽과 장미꽃을 든 사람들…. 지원의 볼이 빨개졌다. “설마?” 우진이 자신에게 고백하려고? 에이 설마…. 믿기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혼란스러웠다. 긴가민가 하던 마음이 반지를 보고 ‘혹시’로 변했다. 확신하지 못하는 건 우진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 모르겠다.” 지원이 침대에 털썩 누웠다. 몇 번이나 문자를 썼다 지웠지만 결국 보내지 못했다. 이미 받은 것이 너무 많은데 그 마음까지 받으면 양심 없는 짓일까. 지원은 사진첩을 뒤적였다. 활짝 웃는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의 셀카를 보며 미소 지었다. 5년 만에 휴대폰을 가득 채운 셀카들을 넘겨보다 잠이 들었다. * 일요일 아침. 길드 아르달의 사무실. “하나.” “오지랖도.” “둘.” “적당히 하자.” 우진은 소파에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때마다 우승훈은 푸시업을 이어갔다. “어이, 승훈이.” “넵.” 승훈이 벌떡 일어섰다. “시키는 것만 해. 시키는 것만. 왜 그래?” “제 어긋난 충성심의 발로였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걸 아니 살려두고 있었지. 악의가 있었다면 푸시업이 아니라 머리통이 날아갔겠지. “적당히 해. 적당히.” “넵.” “돈은 다 어디서 났냐?” “길드 법인카드로….” “…….” “하나.” “오지랖도….” 반자동으로 엎드려 푸시업을 하는 승훈을 구해준 것은 정민찬이었다. “아? 사장님 계셨습니까? 응? 승훈씨도….” “오늘 출근하지 마라니까. 연락 못 받았어?” “하하, 어디 제가 쉴 수 있겠습니까?” 길드가 설립된 지 이제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총괄이사라지만 밑에 부릴 직원도 몇 없으니 그가 직접 할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휴일이라고 어찌 쉬겠는가. 우진은 굳이 스스로 휴일을 반납하겠다는 민찬을 말리지 않았다. “그럼 일봐.” “넵. 아참. 국방부건 마무리 됐습니다.” “그래? 승인 났데?” “넵. 국방부가 요청하는 작전에 10회 참여하는 조건으로 병역 면제 되셨습니다.” 우진이 씩 웃었다. 작전이라 봐야 별것 없다.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날 것 같은 지역에 가 몬스터를 소탕하거나, 국가에서 주도하는 던전 공략에 참여하는 수준이다. “잘했어. 정 이사. 하하.” 우진의 보기 드문 칭찬에 정민찬이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조만간 회식한 번 하자고.” “하하, 넵.” 기분이 좋아진 우진이 승훈을 그만 괴롭히고 물렸다. “아, 성구 없이 던전 가려니 심심한데.” 당장 트라넷이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니 우진은 하루쯤은 더 쉬기로 하였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가 티비를 켰다. 몇 번 채널을 돌리던 그는 ‘신비로운 TV 서프라이즈’에서 멈췄다. 던전 특집으로 꾸며진 프로그램은 한창 던전의 미스터리에 대한 여러 가설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보여주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외계의 생명체입니다. 던전은 지구 종말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이제 곧….] 던전 전문가를 자칭하는 몇몇 과학자들의 인터뷰와 지난 5년간 던전에서 일어난 몇 가지 일들을 버무려 음모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던전이 5년 전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존재 했었다는 둥, 이미 외계의 생명체는 지구에 널리 퍼졌다는 둥. 여러 가지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다. [외계침공이 우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3차원적인 접근일 뿐입니다. 던전은 그들의 통행로, 즉 외계생명체들이 지구로 건너올 수 있는 발판인 게이트가 되어준다는 겁니다.] “그래. 저게 맞지.” 어느 외국인 과학자의 말에 우진이 동의했다. 그는 몇 가지 자료들을 제시하며 자신의 말에 신빙성을 더했다. [이들은 게이트를 만들고도 바로 건너오질 못하죠. 던전 브레이크까진 30일이 있어야 합니다. 왜 30일일까? 저는 귀환석이란 아이템에 대해 한가지 가설을 세워봤습니다. 이것은 결계를 허물 유일한 열쇠지요. 던전의 몬스터들이 30일간 귀환석을 지켜내면 그들이 이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 말입니다….] “어? 그럴듯한데?” 왜 몬스터들은 던전이 생성된 지 30일이 지나야만 던전 밖으로 나오는가. 결계는 던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초창기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들은 약했습니다. 꼭 마약을 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이었지요. 초창기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전혀 그것들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의 몬스터들은 확실히 약했습니다.] 우진이 알지 못하는 던전쇼크가 일어난 직후의 혼란스러운 지구 모습이 담긴 영상이 흘러나왔다. “크기가 작아. 저건 분명 실체화 에너지가 적어서야.” 이미 비비를 통해 증명되었다. [던전 쇼크 이후 어땠습니까? 그땐 4성 던전이 전부였지요. 이후 5성 던전 6성 던전의 발생 빈도가 빈번합니다. 이 상태로 가속화된다면 7성 던전의 등장도 머지않았습니다.] 우진은 어느새 티비 속 박사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가 제시하는 이론은 명확했다. 점점 더 큰 에너지를 가진 던전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던전 쇼크 이후부터 꾸준히 증가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지구상의 각성자 수도 꾸준히 증가해왔다. C급이 최고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새 A급 각성자들이 즐비한 시대까지 왔다. 조금 있으면 그보다 더 상위의 각성자들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아니, 무조건 나타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우진은 이것만은 확신했다. A급 각성자 자체가 6서클의 마법사 수준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보다 상위의 등급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각성자 증가와 상위 던전의 잦은 출몰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지구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티비 속 박사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던전은 광산 따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약탈하는 혈석이 실은 그들이 뿌리는 미끼일지도 모릅니다.] 우진은 그 말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혈석은 에너지를 품는다. 그 근간이 되는 에너지 마나. “마나 농도….” 혈석의 사용이 지구의 마나 농도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그것이 각성자들을 증가시키고 있었고, 점점 더 몬스터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었으니…. “저 박사 이름이 뭐지?” 우진은 잠시 후 나오는 영국의 ‘제임스 토플러’라는 박사의 이름을 메모했다. 우진이 한창 티비에 빠져있는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민찬입니다.” “들어와.” 민찬은 곤란한 얼굴로 우진을 향해 말했다. “국방부에서 연락입니다.” “국방부? 뭐, 벌써 출동이래?” “예, 꼭 참석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사유서만 제출하면 되니….” 그 사유서를 그럴 듯하게 꾸며내야 하는 게 민찬의 일이고 말이다. “아니야. 가지, 뭐. 무슨 일이래?” “던전 브레이크입니다.” 처음으로 눈으로 보게 될 던전 브레이크. “어디래?” “대구입니다. 죽전역 3번 출구입니다.” “승훈이 퇴근했어?” “밖에 있습니다.” “차 대기시켜.” “넵.” 아르달의 첫 합동작전은 국방부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 “으으음.” 지원은 무겁게 떨어지는 눈꺼풀에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헉!” Pm 10:20 12시쯤에 잠들었으니 꼬박 하루를 잔 셈이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 오래 잠들다니…. 같은 야간조인 나영과 혜진은 지원을 깨우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먼저 출근한 모양이었다. 지원은 씻을 시간도 빠듯했는지라 대충 모자를 덮어쓰고 허겁지겁 뛰었다. “헉, 헉. 안녕하세요!” “아, 예에.” 기숙사의 경비는 허겁지겁 뛰어가는 지원을 보곤 마주 인사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지원은 겨우 아슬하게 도착해 공장의 출근 카드를 찍었다. 탈의실로 들어간 그녀는 동료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출근 시간이야 늦지 않았지만 어디 직장 출근 시간이 그렇던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나와서 옷도 갈아입고 믹스커피를 타 한잔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원에게로 모였다. ‘으으, 너무 잤어.’ 어제도 출근하지 않았는데 오늘도 지각해 보였으니 얼마나 고까울까. 사람들의 시선에 지원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지원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모자를 벗을 때였다. “맙소사.” “지, 지원이 맞아?” “어, 언니?” 일제히 놀라는 사람들을 보며 지원이 민망함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늦어 죄송합니다.” 지원이 그리 말하고는 작업복을 입고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작업모를 쓰려 했다. “어?” 지원은 쓰려던 작업모를 내렸다. “어….”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 사람들이 지각한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 때문에 놀랐구나. “지, 지원씨 머리가.” “언니, 얼굴이….” 놀란 사람들의 반응에 지원이 다시 거울을 보았다. 한쪽 얼굴을 모두 뒤덮고 있던 상처가 씻은 듯 사라져있었다. 다 벗겨져 흉물스런 상처로 부풀어 올랐던 머리는 말끔히 사라지고 윤기나는 머리칼로 덮여 있었다. 들쭉날쭉 머리 길이가 맞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원의 떨리는 손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이… 내 얼굴이….” 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진이구나. 우진이가 발라준 약…. 지원이 눈물 때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시야로 휴대폰에서 우진을 찾아 통화를 눌렀다.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아.” 하필 이럴 때 전화를 안 받는다니. 지원은 벅차오르는 고마움과 기쁨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치지직. 속보입니다. 던전 브레이크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대구의 죽전역 3번 출구 주민들의 대피가 완료된 가운데 각성자 강우진씨가 던전에 입장하여….] 탈의실 겸 휴게실의 한쪽 벽에 매달린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속보에 지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 42화 - 던전 브레이크 > 끝 ⓒ 진설우 < 43화 - 던전 브레이크 (2) > 우승훈이 차를 몰아 간 곳은 대구가 아닌 서울의 각성자 관리국이었다. 관리국 옆의 건물이 국방부 산하의 특수방위여단의 본부가 있었다. 승훈의 차가 멈춰 서자 본부건물 앞에서 대기중이던 군인 하나가 나섰다. “반갑습니다. 특수방위 여단 최해솔 중위입니다.” “반가워요. 강우진이에요.” 우진이 인사하자 최해솔이 우승훈을 보았다. “제가 인솔하도록 하겠습니다. 일행분께서는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넌 가봐.” “네, 사장님.” 우진은 최해솔을 따라 본부로 안내되었다. 특수방위 여단은 군부대라 하여 딱히 딱딱한 인상은 아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있어서 그렇지 그냥 일반 회사를 온듯한 기분이었다. “뭐, 여단장 경례 같은 거 하러 가요?” “아닙니다. 몇 가지 행정처리만 하고 바로 출발할 겁니다.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니니 이번 작전의 브리핑은 가는 동안 해드리겠습니다.” “뭐, 그러죠.” 우진은 최해솔 중위의 인솔에 따라 몇 가지 검사를 했다. 시력검사도 하고, 피도 뽑았다. 우진이 가진 능력에 관한 몇 가지 시범과 종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해솔이 우진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우진씨는 참 특이하십니다.” “뭐가요?” “보통 각성자들은 체혈이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는걸 굉장히 꺼려합니다.” “그래요? 뭐, 내 능력이 뭔지 알아야 공동작전에 쓸 거 아니에요?” 아군의 전력파악이야 기본 아닌가? 해솔이 웃었다. “모든 각성자들의 생각이 우진씨와 같다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순순히 협조해주는 각성자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각성자라는 것이 군대에서 다루기 여간 까다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대구까지도 제가 인솔할 겁니다.” “그래요.” 우진이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관용차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차타고 가요?” “넵. 차량 이동합니다.” “던전 브레이크라면서요? 안 급해요?” 우진은 헬기라도 타고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해솔이 웃으며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정확한 던전브레이크 시각은 내일 오후 2시입니다. 자세한 건 이동 중에 말씀 드리죠.” “뭐, 그러죠.” 우진이 상석에 타고 최해솔 중위가 그 옆에 탔다. “출발하겠습니다.” 운전병이 차를 출발 시키자 최해솔이 이번 작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민의 대피는 2일 전 완료되었고, 오늘까지 최종 미대피자 점검이 끝날 겁니다. 브레이크 시각은 내일 오후 2시 11분입니다. 등장 몬스터는 다수의 고블린과 다수의 트롤, 그리고 소수의 오우거입니다.” “어? 뭐가 튀어나올지도 알아요?” “당연합니다. 6성 던전의 브레이크는 한번 공략에 실패한 던전이니 말입니다.” 우진이 이해했다. 던전 공략 도중 힘에 부쳐 귀환 포탈을 이용해 탈출했다면 던전 안의 정보를 함께 가져왔을 것이다. “내일 오후까지면 아직 시간 있구만 왜 재공략 안 한대요?” “예?” 우진의 물음에 최해솔이 당황해 되물었다. 그런 기본적인 상식을 물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던전 내에서 귀환 포탈을 이용한 탈출은 세 번뿐입니다. 네 번째는 포탈 자체가 안 열립니다.” “그래요?” “네, 이번 던전은 최초 화랑의 주작팀이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두 번째 화랑과 KH의 연합팀이 도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세 번째로 국내의 A급 각성자를 대상으로 협조요청을 했으나 팀 결성에 실패해 세계 각성자 기구를 이용해 도전팀을 유치했지만 그 팀마저 실패해 더는 공략이 불가능한 던전입니다.” “흐음.” “그리고 세팀 모두 던전의 초입에서 실패 후 귀환했습니다.” “…?” 포탈을 생성해 탈출하면, 재진입은 그 포탈을 이용해야 했다. 일종의 세이브 포인트. 그것을 이어받아 재공략했는데도 세 번 모두 실패했다는 것은 던전의 난이도가 상상 이상이라는 소리였다. “그 정도 난이도면 상당히 위험한 거 아니에요?” 해솔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의 난이도야 지형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까? 이번 던전도 지형의 영향이 컸다 합니다.” “자세한 정보 있어요?” “예? 이제 곧 브레이크가 일어날 던전인데….”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전쟁터가 던전에서 외부로 바뀌는 것이다. 던전이 저들의 홈그라운드라면 던전 밖은 지구인들의 홈그라운드다. 던전 내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는 현대화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몬스터의 처치에 크게 유리했다. 초기야 제대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그렇지 요즘은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민간인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재산의 손실이 막대해서 그렇지…. “오우거도 항마력이 높아 문제지, 12.7mm 나토탄도 통하니까요.” “그럼 난 왜 부른 겁니까?” “예? 그건 저도 잘….” “몇 시 도착해요?” “7시쯤 도착입니다. 저녁 드시고 호텔에서 쉬시다. 내일 아침 10시부터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오우거 정도면 해볼 만한데…. “던전 내의 정보 기밀이에요?” “음, 아닙니다. 던전의 정보야 본래 모두 공개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아무리 던전의 공략에 혈석사업이 깊게 관여되어있다지만 기본적으로 도시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일이다. 정보의 독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히 드물었다. “좀 구해주실래요?” “음. 알겠습니다.” 최해솔 중위는 어딘가에 전화하더니 곧 우진에게 답했다. “도착하는 즉시 열람해볼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우진은 창밖을 보다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았다. 최고급 승용차라 그런지 아주 편안했다. 운전병이 차를 부드럽게 몰기도 했고 말이다. 우진이 팔짱 끼고 눈을 감자 최해솔 중위도 더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차가 멈춰 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우진이 눈을 떴다. 창밖을 보던 그가 주변을 둘러보니 쥐죽은 듯 조용한 도시가 꼭 유령도시를 방불케 했다. “어딥니까?” “지휘통제실 앞입니다.” 우진이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커피전문점의 간판이 보였다. “지휘관부터 만나고 호텔?” “넵. 파견 나온 다른 각성자들도 함께 있으니 인사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죠. 자료는요?” “아, 곧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줄 거면 프린트해줘요.” “네, 그러겠습니다.” 우진이 카페에 들어서니 미리 연락을 받아서인지 작전지휘관인 50사단장까지 대기 중이었다. 그가 악수를 청해왔다. “50사단장 이준태 소장이올시다.” “강우진이올시다.” 우진이 이준태의 말투를 따라 하자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렇게 달려와 주니 든든하올시다. 간단한 작전 설명 듣고 다른 각성자들하고 인사 나누시게.” “알겠시다.” 이준태 소장은 말과는 다르게 별달리 우군의 합류가 그리 격하게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얼굴 봤으니 됐다는 듯이 그가 떠나고 카페 안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있는 다른 각성자들이 눈에 띄었다. “작전 지휘실 부관 김준용 소령입니다. 작전 설명하겠습니다.” 김준용이 내일 있을 몬스터 소탕에 대해 설명했다. 죽전역을 중심으로 1차 방어선을 꾸리고 몬스터가 나오면 집중포화를 쏟는다. 그 뒤로 2차 방어선과 3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공중 몬스터와 화력지원을 위한 공군기도 출동할 예정이며 민간인들은 이미 소개령으로 모두 대피한 후였다. 각성자들이 할 일은 1차 저지선의 붕괴 후 2차 저지선으로 최우선 접근하는 몬스터들을 막는 일이었다. 2차 저지선까지 뚫리면 그 뒤로는 알아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던전에너지를 봤을 때 2차 저지선은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오나 최종 몬스터에 대한 정보가 없어 그에 대한 변수에 대비해 주시면 됩니다.” 던전공략이 초입에서 끝났으니 최종 몬스터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었다. “보다 정확한 세부작전은 내일 10시에 전달 예정입니다.” “네, 고마워요.” “그럼 다른 각성자들과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모든 각성자들이 우진을 빤히 보고 있었다. 군이나 길드의 소속을 떠나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각성자의 수가 480명이다. 그중 B급 이상의 각성자도 30명이나 되었다. 그중 카페에 있는 사람은 20명 남짓. 나머지는 호텔에서 휴식중일 것이다. 대한민국 11번째 A급 각성자. 강우진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리고 그중엔 구면도 있었다. 단발의 미녀가 우진을 향해 다가왔다. “반갑다.” “그래.” “우리 전에 봤지.” “언제?” “서울대 입구역 6번 출구.” “…?” 무슨 개소리냐는듯한 우진의 표정에 단발미녀가 인상을 구기며 자기를 소개했다. “화랑길드 주작팀장 이연희다.” 놀랍게도 화랑길드의 대표 각성자인 이연희가 이번 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 반갑다.” 우진이 짧게 인사 후 때마침 해솔이 가져다준 서류뭉치를 넘겨받았다. 간략한 던전의 지도와 나타나는 몬스터 등, 던전의 정보가 자세히 기술되어있었다. “고마워요.” “네,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호텔은 이 건물 502호입니다.” 그가 건네주는 키를 넘겨받은 우진은 서류뭉치를 대충 넘겨 보다가 그것을 둘둘 말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해볼만 해.’ 우진이 카페를 나서자 곁에 있던 이연희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날 무시해?” 이연희가 바들바들 떨자 그녀의 팀인 주작의 대원들이 재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진정시켰다. “진정하십시오.” “요즘 애들 개념 없어서 저럽니다. A급 각성자라는데 얼마나 지가 최곤 줄 알겠습니까?” “헤헤, 팀장님이 참으시죠? 저렇게 콧대 높은 것도 한때입니다.” 이연희가 벌개진 얼굴을 부채질했다. “후우.” 그녀가 전화를 꺼내 오빠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쟤는 왜 여기 부른거야?” [누구 말이야?] “그때 던전 새치기한 싸가지.” [허허, 강우진씨? 잘 보고 친분 좀 쌓아둬. 일부러 특별히 이번 작전에 참여하도록 한거니까.] “친해지기 싫은데?” [아, 왜 또 그래 잘 지켜봐. 어떤 능력을 쓰는지, 어느 정도의 힘을 다루는지. 특이한 버릇은 없는지.] “후, 다른애들 시키지?“ 화랑의 길드마스터 이상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이건 네 오빠가 아니라 화랑의 길드마스터로서 하는 명령이다. 각성자 강우진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 근엄한 그 목소리에 이연희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나 길드 탈퇴한다. 수고해라 오빠새꺄. 맨날 짜증 나는 것만 시키고 있어.” [어어? 연희야 또 왜 그러냐. 오빠가….] 뚜우.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끊은 이연희는 인상을 구기고는 카페문을 나섰다. “어? 어디간거야?” 이연희는 강우진이 보이지 않아 그와 함께 왔던 군인을 보고 물었다. “강우진씨 어디갔죠?” “현장 둘러보고 싶다 해서 갔습니다.” 어차피 내일 터질 던전에? 왜? “저도 차한대 쓰죠?” “예? 옛. 곧 준비하겠습니다.” 이연희는 호텔 앞에 대기 중인 군용차량 하나를 타곤 죽전역 3번 출구로 향했다. 차 하나 없는 한적한 도로는 드문드문 탱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하철역이 가까워지자 바리케이트와 여기저기 배치된 탱크와 건물마다 배치된 기관단총. 경계 중인 군인들로 가득한 1차 저지선이 나왔다. 1차저지선에서 내린 이연희가 걸어서 문제의 지하철역이 있는 4거리까지 걸었다. 주변의 높은 건물은 시야확보를 위해 이미 폭파 철거되었는데 치우지 않은 그 잔해들로 어지러웠다. 그 폭파의 여파에도 멀쩡하게 보호된 던전의 입구 그 앞에 생성되어있는 오묘한 빛깔의 포탈 앞에 강우진이 서 있었다. “야.” “왜?” 강우진의 대답에 이연희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본인도 싸가지 없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자신보다 더 싸가지 없는 인간을 만나니 기분이 상했다. “여긴 왜 왔는데?” “던전 왜 오냐? 공략하러 왔지.” 우진의 말에 연희가 깜짝 놀랐다. “미쳤구나.” 우진이 희게 웃었다. 미치긴, 이 많은 경험치와 업적을 이곳을 무려 3차 저지선까지 처가며 빙 둘러친 군인들과 각성자들과 함께 나누는 게 미친 짓이지. 우진의 그 웃음에 농담이 아니라 느낀 이연희가 그에게 다가갔다. “미, 미쳤어? 혼자서 뭘 하게? 죽고 싶어? 들어가면 포탈도 못써.” 쓸 생각이 없다. 그가 나올 땐 포탈이 아니라 귀환석을 이용해 결계를 깨고 걸어 나올 테니까. “야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어차피 몬스터 튀어나와도 군인들하고 합동작전이면 다 막아. 뭐, 그런 거야? 그렇게 대를 위한 희생이니 뭐 그런 거? 야야, 정신 차려. 죽으면 아무도 안 알아줘.” 대를 위한 희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를 위한 몬스터들의 희생이겠지. 우진이 한 발짝 떼자 이연희가 깜짝 놀랐다. “진짜 미쳤어? 들어가면 죽어!” “아, 거 겁나 시끄럽네.” 우진이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고는 질린 얼굴의 이연희를 보았다. “쫄뱅이는 평생 쫄뱅이로 살아.” 한 걸음 더 내디딘 우진을 포탈이 집어 삼켰다. 포탈이 요란한 빛을 내며 꿈틀거렸다. 30초 뒤면 사라진다. “와아, 미친새끼!” 이연희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와, 또라이 새끼. 완전 싸이코 새끼.” 만난 지 몇 분 되지 않아 자신에게 이렇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준 놈은 처음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인 그 비웃음이 이연희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이연희. 여기서 욱하지 마. “미친새끼, 아아, 진짜 대가리 총 맞아 죽을 새끼.” 포탈은 사라진다. 5초, 4초, 3초. “이 또라이 새끼.” 이연희가 포탈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 43화 - 던전 브레이크 (2) > 끝 ⓒ 진설우 < 44화 - 던전 브레이크 (3) > 파팟. 우진은 포탈을 나오자마자 주변을 경계했다. 마지막 세 번째 팀은 쫓기는 와중에 급히 포탈을 타고 도망쳤다고 되어있었다. 저항의 흔적인지 몬스터들의 시체가 드문드문 보였다. “끼릭!” 그리고 수풀 사이로 보이는 고블린들의 모습에 우진이 재빨리 본스피어를 전개했다. 슈우웅, 퍽! “꿰룩.” 단번에 날아간 뼈창에 숨어있던 고블린 세 마리가 목숨을 잃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기감을 확대해 감지해보았지만 느껴지는 생명체는 없었다. 상위의 포식자들은 물러났고 고블린들만이 정찰병으로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주변에 널린 사체들도 대부분이 고블린의 것이었고 트롤도 두 개체나 있었다. 제법 돈이 되는 트롤의 시체도 회수하지 못한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급히 퇴각한 모양이었다. “마지막 팀이 일본 애들이었지?” 우진이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프린트물을 찾았으나 존재하질 않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휴대폰도 없었다. “아, 외부물건 못 가져오지.” 그나마 우진이 입은 옷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던전의 물건들로 만들어져서였다. 상위 던전을 출입하는 각성자들은 던전의 재질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건 기본이었으니까. 어쩐지 정민찬이 옷을 여러 벌 사서 자신과 성구에게 주더니…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도 챙기는 그를 보면 인재는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팟! 그때 포탈이 사라지며 마지막 빛이 사그라지기 전 사람을 뱉어냈다. 포탈에서 튀어나온 이연희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 미친, 또 저질렀어!” 이연희의 등장에 우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뭐야?” “뭐야? 뭐어야? 너 때문에 미친 들어왔잖아. 왜 도발하고 지랄이야.” “…….” “시발 뒤지려면 혼자 뒤지지. 왜 지랄인데? 왜 내 앞에서 지랄인데?” “미친년.” 누가 들어오라고 했나? 지가 들어왔지. 이연희에게서 시선을 거둔 우진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우진의 어깨를 연희가 붙잡았다. “미친새꺄, 혼자 어딜 가? 내가 앞장설 테니 마법사니까 서포트나 해.” “…….” 우진이 자신의 어깨를 잡은 연희의 손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오랜만이네! 누가 자신의 몸에 허락 없이 손댄 게. 우진이 뒤로 고개를 돌려 연희를 보았다. “뒤지고 싶지?” “허, 뭐?” 우진이 몸을 돌려 연희를 똑바로 보았다. 휘이익, 쫙! 우진의 손이 연희의 볼을 후리고 지나갔다. 피할 새도 없이 따귀를 맞은 그녀의 볼이 벌겋게 물들었다. 혼란은 잠시였고 황당함은 찰나였으며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분노는 거셌다. “이 개새끼가!” 창! 그녀의 반지가 순식간에 검으로 변해 휘둘러져 왔으나 우진이 소환한 강철지팡이에 가로막혔다. 빠각! 그리고 날아든 우진의 발차기가 그녀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아악!” 그대로 관절이 꺾여 쓰러진 그녀가 비명 지르며 쓰러졌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몸이 떠올랐다. 그녀의 멱살을 움켜진 우진이 그녀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쳤다. 빠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그녀가 땅에 처박혔다. “이익, 이 개….” 휘이이익 꾸웅! 훌쩍 도약한 우진이 내려진 강철 지팡이가 그녀의 코끝을 스쳐 바닥에 찍혔다. “한마디만 더 지껄여봐.” “…….” “모가지 잘린 듀라한이 되는 게 소원이면.” “이이…….” 어금니를 앙다문 연희가 으르렁거렸으나 감히 짓지 못했다. 우진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농담 따위가 아니다. 무식한 새끼. 시발 새끼. 여자를 이렇게 패? 나를? 나 이연희를? 맹세코 남자에게 맞아 보는 게 처음이었다. 몬스터에게 죽기 직전까지 상처 입어봤으나 같은 사람에게 폭행을 당할 줄이야. “너 같은 년들이 제일 싫어.” “…….” 우진이 본스피어를 소환해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땅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 오싹함에 연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제 잘못을 남 탓으로 미루기 바쁘지.” 누가 던전에 들어오라고 했나? 지가 들어와 놓고 어디 남 탓인가. 어디 경험치 가로채고, 버스 타려고…. “지가 약해서 뒈지는걸 지켜주지 못한 사람 탓으로 미뤄.” “…….” 우진이 소환한 두 번째 뼈창이 그녀의 반대쪽 땅에 꽂혔다. “악심으로 가득 찬 영혼은 구리구리한 썩은 내가 진동하지” “…….” 우진이 한발 물러섰다. “뒈지고 싶으면 따라와. 살고 싶다면 얌전히 있어라. 나갈 때 데려는 가줄게.” “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굴복하다니. 내가 굴복하다니! 이따위 더러운 기분이라니! 우진이 재갈 물린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저런 년을 자신의 악령 컬렉션에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촤자자작. 양쪽에 박힌 뼈창에서 뻗어나온 이빨들이 그녀를 가두는 뼈의 감옥으로 자라났다. 우진이 그녀에게서 등 돌려 걸었다. “이익. 미친놈아 혼자서 뭘 어쩌겠다고! 여긴 6성 던전이야!” 발악하듯 외치는 그녀의 말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우진이 손을 내뻗었다. 상당한 마력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파파팍! 주변에 널린 고블린들의 시체가 폭발하듯 터지며 스켈레톤들이 무더기로 소환되었다. “키키키킥.” “케케케케.” 소름 끼치도록 기괴한 소리를 내는 스켈레톤들이 우진의 뒤를 건들거리며 따랐다. “미친년. 누가 혼자래.” “…….” 아, 강우진 성격 많이 죽었다. 저딴 년은 자신 앞에서 고개도 못 쳐들었었는데. 연합군의 용사니, 국왕이니, 성녀니 하는 것들도 감히 올려다보지 못한 자신을 말이다. “아, 성구 이 새끼 휴일이라고 아주 편하게 쉬겠네? 아, 새끼 괜히 약오르네.” 오늘따라 성구의 빈자리가 컸다. 역시 영혼이 맑아야 따듯한 정도 생기고, 따가리 짓 시킬 맛도 나지…. 우진이 스켈레톤들을 이끌고 숲으로 향했다. * 대규모 무리의 이동은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적진이라면 흔적을 지우며 이동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초식동물들이 자신의 채취와 흔적을 지우는 조심스런 몸짓은 생존의 본능이며, 육식동물이 그 흐릿한 흔적을 쫓는 은밀한 움직임은 사냥본능이었다. “킁킁.” 두 마리의 트롤이 여기저기 나 있는 발자국을 따라 은밀히 움직였다. 흔적은 커다란 동굴로 이어져 있었다. 냄새가 진동한다. 침입자가 코앞이다. 사냥감이다. 두 마리의 트롤이 동굴로 들어섰다. 컴컴한 동굴에 들어섰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먹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동굴 깊숙한 어둠엔 이리의 눈알 같은 붉은 점들이 빼곡히 나열되어있었다. “어? 또 왔네. 얘들아 손님 받아라.” 화르륵. 난데없이 나타난 온갖 마법들의 등장에 동굴이 밝아지며 붉은 안광을 토해내는 해골마법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수십 기의 해골들을 관람할 기회는 3초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화르르륵, 퍼퍼펑. 날아온 마법들에 트롤들이 사지가 터져나가며 둥굴 밖으로 날아갔다. 잊고 있었다. 흔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는 존재를. “비비, 재료채집.” “피이. 또 이런 거 시켜. 돌쇠나 빨리 불러달라고.” “어허, 어서 가져와. 저것들 숨넘어갈라.” 소녀의 모습으로 실체화된 비비가 잔뜩 볼을 부풀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동굴 밖으로 향했다. 트롤들은 죽어가는 자신들의 피를 병에 받고 있는 꼬마악마를 보았다. “헤헤, 많이 아푸지? 내가 꿈에서 주인님 많이 때찌하게 해줄게.” 서서히 의식이 꺼져가는 그들의 시선에 손에 쥔 뼈를 집어던지고 일어서며 기지개 켜는 인간이 보였다. “으으으. 배도 채웠으니 또 열렙하러 가보실까.” 자신의 존재감을 대놓고 드러내는 포식자의 살육본능이 숲을 광기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 “쿠오오오오!” 오우거. 거인족의 후손 중의 한 갈래 쿵쿵 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숲의 주민이 멀리 도망치며, 혹여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공포에 질려 도망갈 엄두도 못 낸다는 숲의 최상위 포식자. 오우거. 그 숲의 포식자를 쫓는 요란한 무리가 있었다. “키케케” 해골병사들이 재빨리 달리며 마주치는 고블린에 코볼트에, 죄다 보이는 족족 썰어버렸다. 길을 여는 그들의 뒤로 우진이 달렸고 그 머리에 비비가 매달려있었다. 그 뒤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 마법사가 뒤따랐다. “우오오오!” 빠각, 뻑! 요란한 소리를 들으니 이미 해골병사의 선발대가 오우거와 조우한 모양이었다. 빼곡한 숲길이 끝나며 확 트인 시야에 오우거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우거. 키가 4미터에 원시적인 차림이 성기만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단단한 민머리의 박치기도 위협적이지만 거인족의 후예답게 타고난 완력의 두 손은 흉기 그 자체였다. 바위를 잡으면 투석기가 되었고 나무를 잡으면 그대로 거대한 몽둥이가 되었다. 흉포한 숲의 포식자. “드디어 찾았다!” 높은 경험치와 업적포인트, 엄청난 크기의 혈석을 토해내는 효자 몬스터. “쿠오오오!” 포식자의 흉포한 외침. 오우거의 피어가 해골 병사들의 발길을 멈추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잊은 망자였으니. 하지만, 포악한 손길은 해골병사들을 부수기 충분한 힘이 있었다. 우진은 오우거와 같은 3단고음은 없지만 그 덩치에 맞설 수단은 있었다. “돌쇠야.” 우진의 외침에 그의 권속, 돌쇠가 나타났다. 팟. 한 줌 크기의 빛 덩어리 주위를 반딧불 만한 작은 빛이 위성처럼 주위를 어지러이 맴돌고 있었다. 줄었다 커졌다 요동치는 그 빛은 동물의 심장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 빛이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그그그그. 바닥이 요동치더니 흙 더미가 쑤욱 올라왔다. 대가리 부터 뽑혀 나온 그것이 팔과 다리를 들쳐 올리더니 포효했다. “그어어어.” 클레이 골렘 돌쇠의 머리를 향해 비비가 훌쩍 뛰어 점프했다. “돌쇠찡!” 골렘의 머리는 비비가 가장 좋아하는 명당자리였다. “밟아버려!” “돌쇠찡, 고! 고!” “그어어어.” 우진은 명령에 돌쇠가 돌진했다. 키는 오우거보다 오히려 1미터나 더 컸다. 쿵, 쿵! 돌쇠의 내딛는 걸음마다 몸을 이루고 있는 흙더미의 잡초와 돌멩이들이 뭉텅이로 떨어져 내렸다. 후우웅, 쾅! 돌쇠의 주먹이 오우거의 안면을 강타 했으나 1레벨의 골렘은 약하기 그지없어 치명적 타격을 가하긴 무리였다. 하지만 오우거의 정신을 오로지 돌쇠에게 돌리기엔 충분한 공격. “흐랴압!” 돌쇠의 등을 타고 훌쩍 뛰어오른 우진의 손에는 해머로 형태변환 한 전사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어?” 돌쇠의 거대한 덩치에 안긴 오우거가 괴상한 소리를 내는데 우진의 해머가 그 정수리를 그대로 강타했다. “끄어.” 충격에 비틀 거리는 오우거를 보며 바닥에 착지한 우진이 해머를 어깨에 짊어지고 뒤로 가 도약할 거리를 확보했다. “돌쇠야 꽉 잡아라. 한 번 더 간다.” “그어어.” “주인님 힘 좀 쓰라옹. 한 방에 보내버려라옹.” “으자차.” 돌진으로 가속된 신형이 점프대처럼 휘어진 돌쇠의 등을 타고 질주했다. 도약까지 더해져 높이 뛰어오른 우진의 해머가 그로기상태의 오우거 정수리에 다시 작렬했다. 콰직!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오우거의 신형이 기우뚱 기울었다. 엄청난 가죽두께에 어지간한 창검은 통하지도 않고, 항마력에 지금 수준의 해골마법사의 마법도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오우거에게 지금의 해골병사나 마법사는 통하지 않으니 우진이 듀얼 클래스가 아니었다면 꽤 잡기 힘들었으리라. “비비, 돌쇠랑 주변 경계해.” “알았다응. 돌쇠찡 산책가자옹.” “아까부터 왜 자꾸 돌쇠찡이냐 우리 귀여운 돌쇠보고…. 아 지금은 흙쇠인가.” “이거 티비에서 봤다옹. 귀여우면 찡이라 부른다옹.” “허, 티비가 애를 다 버려놓네. 뭐 봤냐?” “목성인 바이러스다옹. 주인님도 보자용. 그걸 보고 내가 지구인들에 대해 배우는 게 많다옹.” “다음에 같이 보자. 얼른 주변이나 둘러봐.” “돌쇠찡. 출바알!” 쿠웅, 쿵. 우진은 영약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오우거의 신체부위를 절단해 채집했다. 크게 힘들이지 않는 일이야 비비가 할 수 있지만 몬스터 해체 같은 것은 우진이 직접 해야 했다. “아, 성구 이 새끼 휴가 주는 게 아녔는데.” 우진이 괜히 툴툴 거리며 오우거의 사체를 모두 분리했을 때였다. “주, 주인님.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아.” “왜?” 우진이 채집한 재료들을 인벤토리에 넣고는 다급한 비비의 외침에 다가가니 숲의 끝이 나왔다. “어?” 숲이 끊겨있었다. 지진의 단층? 협곡? 절벽? 분리되어있었다. 아래를 보니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절벽이고 200미터는 떨어진 앞쪽에도 그 높이가 어마어마한 절벽이 솟아 있었다. 지금 딛고 선 지형보다 대략 300미터는 높은 지형. 우진이 좌우를 둘러봐도 협곡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쭉 이어져 있었다. 그 모양새가 적의 진군을 막는 성의 해자같았다. 옆으로 아무리 가보아도 눈앞에 있는 불쑥 솟은 땅으로 가는 길은 이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도너츠모양의 땅의 중앙에 기둥이 우뚝 솟은 모양이었다. 그 거리가 200미터나 되었고 말이다. 우진의 기억 속에 이와 비슷한 지형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었다. “타릇의 고원.” 우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것의 다른 이름. “거인 신전.” 우진의 시선이 까마득히 높은 협곡의 너머 땅을 향했다. < 44화 - 던전 브레이크 (3) > 끝 ⓒ 진설우 < 45화 - 타릇의 고원 > 우진이 제법 자신의 몸무게와 비슷한 바위를 들고왔다. “던져봐.” “그어어.” 돌쇠가 바위를 힘껏 던졌으나 협곡 건너 땅에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200미터를 던지는 것은 가능했으나 300미터의 높이나 솟아있어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기다려봐.” 우진이 9개의 스킬포인트를 투자해 골렘소환의 스킬을 10으로 만들어 버렸다. <권속 : 돌쇠> 매개를 이용해 몸체를 구성하는 골렘의 심장을 소환한다. 소환사의 권속들은 신뢰도, 충성도에 따라 필요지배력이 감소한다. 그들은 소환사의 지배를 받는 소환수에서 진정한 동료로 거듭난다. 가능 매개 : 흙, 바위, ?(lv 20 해제) 소모 마력 : 30, 필요지배력 0(-99 충성, -99 신뢰) 파파팟. “그어어.” 몇 번이나 빛에 휩싸이던 돌쇠의 덩치가 더욱더 무럭무럭 자랐다. 거의 8미터에 육박하는 그 덩치에 우진이 올려다보다 뒷목을 잡았다. “돌쇠야. 바위 먹자.” “그어어.” 돌쇠의 몸체를 이루고 있던 흙들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덤프트럭 열대가 동시에 퍼붓는듯한 그 흙더미에 우진이 비비를 안고 도약해 피했다. “어우. 좀 옆으로 가서 해야지.” 위잉, 위잉. 우진의 타박에 돌쇠 그 자체랄 수가 있는 골렘의 핵이 부르르 떨었다. 비비가 그런 돌쇠를 귀엽게 어루만졌다. “돌무룩해쪄? 돌쇠찡도 주인님 꿈에 한번 보내줄게, 우쭈쭈.” 위잉, 위잉. 쌩쌩 회전하는 빛 무리를 보며 우진이 인상을 팍 썼다. “너네 뭐하냐?” “헤헤, 지구인들이 이렇게 재밌게 놀아쪄.” 우진은 목성인바이러스라는 프로그램이 뭔지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숲의 한쪽에 위치한 바위를 가리켰다. “돌쇠, 그만하고 바위나 먹어.” 위이잉. 골렘의 핵이 바위에 흡수되었다. 바위가 들썩이더니 천천히 부서지고 뭉쳐져 땅에서 일어났다. 크기는 4미터 정도로 작았으나 그 힘은 클레이골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휘우우웅. 돌쇠가 집어던진 바위가 건너편에 닿았으나 한참이나 절벽 아래에 부딪혔다. “이래선 안 되겠네.” 남은 스킬 포인트를 골렘 소환에 다 찍어버리면 힘이 닿을까? 돌쇠의 레벨이야 계속 함께 싸우면 자연히 오른다. 성급하게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긴 아까웠다. “어차피 레벨업이야 해야 되니.” 40레벨이 되면 건널 수단이 생긴다. 숲은 넓었고 몬스터는 많았다. 다만 불안한 것이 있다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시간까지의 계산이다. 정말 귀환석이 30일. 이곳의 시간으로 120일이 지난 후에 그것을 이용해 몬스터들이 튀어 나가는 것이라면 그전까지 귀환석을 확보해야 한다. “몇 시에 들어왔더라.” 저녁 7시는 넘었으나 8시는 되지 않았다. 던전 브레이크 시간이 오후 2시 11분이었으니 대략 18시간? 19시간? 정확한 시간은 모른다. 4배로 시간이 느리니 3일에서 3일 4시간. 오차가 컸다. “3일로 잡고.” 귀환석을 손에 넣기까지의 시간이다. 겨우 협곡 하나 넘는데 3일을 다 쓸 수는 없다. “40레벨까지가 관건이네.” 하루 만에 오른다. 우진은 숲을 보았다. 돌쇠가 바위를 매개로 몸을 구성할 수 있으니 오우거를 상대하는 것도 이젠 제법 쉬울 터였다. 최대한 빠르게 40레벨까지 올린다. 새로운 권속을 이용해 협곡을 넘는다. 귀환석을 최우선적으로 확보해 던전 브레이크를 막는다. 목적을 위한 목표가 서자 우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죽전역 던전 브레이크 대비 1차 저지선. 제 3 초소. “어? 김병장님.” “왜?” “포, 포탈이 사라졌습니다.” “뭔 개소리야?” 김병장이 삐딱하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곤 죽전역 3번 출구를 보았다. 계단의 앞에 바로 생성되어있던 포탈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언제 없어진 거야?” “방금 사라졌습니다. 앞에 있던 남자가 들어가고 여자가 들어갔는데 포탈이 뿅하고….” “시, 시발. 계속 보고 있어.” “넵.” 김병장이 재빨리 통신병을 불렀다. 보고는 빠르게 전달되었고 50사단장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부관이 사단장이 머물고 있는 호텔방을 방문했다. “입장한 인원은?” “각성자 강우진씨와 이연희씨입니다.” 사단장 이준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첫 만남부터 건방지던 두 남녀가 나란히 포탈에 진입했다. “치기 어린 영웅심인가?” 이준태가 부관을 보았다. “언론은?” “아직 모릅니다. 작전지역엔 군인들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곧 알아챌 겁니다.” 포털은 빛을 내뿜는다. 멀리서라도 망원렌즈로 통해 살펴보면 충분히 보인다. 이상함을 알아채고 의문을 제기하면 숨길 수가 없었다. “끄응.” 이준태는 고민했다. 이 사건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은 무엇인가? 이리저리 생각해봤으나 그가 입을 손해는 미미했다. “설마 던전을 클리어 하는 건?” “사실상 어렵습니다….” “죽었다 봐야겠군.” 그러면 던전 브레이크는 예정대로 일어난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있다면 이연희가 화랑길드의 사장 동생이라는 것 정도? 생긴지 며칠 되지도 않는 아르달의 길드 마스터라는 강우진은 알 것도 없고 말이다. “달라지는 것 없네. 부대원 단속하고 내일 있을 브레이크나 대비해.” “넵, 알겠습니다.” 부관이 나가자 이준태는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다고하여 모든이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날세.” [예, 사단장이 이 저녁에 무슨 일로…?] 건방진 녀석. 항상 이놈은 말이 짧다. “이연희가 방금 포털로 진입했소. 이건 계획에 없던 일 아니오?” […….] 상대의 침묵 속에 얼마나 큰 당혹이 함께하는지 알기에 이준태는 슬쩍 미소 지었다. “기자들이 아우성인데 어찌하겠소?” [사정 파악 후에 다시 전화 드리죠.] “알겠소다.” [언론보도는 막아주십시오. 지금 당장 제가 대구로 가죠.] 이준태가 전화를 끊으며 웃었다. 젊은 놈이 사장자리에 올랐다고 거만하더니 상황이 우습게 되었다. 자신이 주도하여 꾸민 일에 제 동생을 피의 제물로 바치게 생겼으니 말이다. * “헬기 대기시켜.” “넵.” 이상호는 싸늘히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들고는 이연희의 부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사장님.] “이 버러지들아. 너네 팀장 어딨어?” [예? 팀장님 아까 강우진씨 따라 나갔습니다.] 이상호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런 개새끼야! 내가 연희 그년 사고 치기 전에 잘 보라 했어 안 했어!” [예에?] 영문을 모르는 그가 얼빠진 음성을 내뱉는데 이상호의 고함은 더욱 커졌다. “이 새끼들아. 연희가 지금 포탈에 들어갔다잖아!” […….] “지금 거기로 갈 테니, 그전까지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알아봐!” [네, 사장님.] 뚜우, 뚜. “후우, 후욱.” 이상호가 화를 참기 위해 크게 심호흡했다. 벌게진 얼굴과 충혈된 두 눈이 그의 분노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때 다시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이 뜬 이름을 보며 이상호가 팍 인상을 구겼다. “영감탱이 귀는 존나 밝지?” 이상호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회장님.” [이사장. 어떻게 된 건가?] “큰일 아닙니다.” [큰일 아니라니. 자네 동생이 들어갔어. 설마 던전 클리어라도 할 셈인가? 이렇게 날 곤란하게 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번 건에 저도 투자한 돈이 적지 않습니다. 연희의 단독 행동입니다. 화랑의 입장이 아닙니다.” [크흠. 내 어디 내일 지켜봄세.] “던전 브레이크는 예정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알겠네. 동생의 일은 유감일세.]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뚜우, 뚝. 전화를 끊은 이상호의 얼굴이 시뻘게지다 못해 폭발할 듯 했다. “이 개새끼가! 유감? 유가암?” 동생이 죽게 생겼는데 유감이라? 이상호가 휴대폰을 집어 던지려는데 그의 폰이 다시 울렸다. 띠리디리딩동. 띠리디리딩동. 번호를 보곤 이상호가 허허롭게 웃었다. “아주 안달이 나나 보지? 여기저기 눈알도 많이 심어 놓으셨어. 아주 정보가 LTE 급이네.” 아직 언론발표도 나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바리바리 전화가 오는 걸 보니 여기저기 매수해놓은 놈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놈들은 이런 게 전문인데. 이상호가 전화를 받았다. “예, 박의원님.” [자네 지금 장난하는 건가! 도대체 화랑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 게야!] “일을 꾸미다니요. 던전 브레이크는 일어납니다.” [거긴 싹 밀고 무조건 재개발 해야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여기에 꼬인 돈이 얼만지 알아? 돈이!] “아무렴요. 걱정 마십시오.” 뚜우, 뚝. 전화를 끊은 이상호는 화낼 힘도 없었다. 바닥에 털썩 않은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 이연희. 이연희. 고작 B급에 머무른 자신을 대신해 화랑길드를 대표하는 각성자.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화랑도 없다. 대한민국의 3대 길드 마스터 이상호도 없다. “이 미친년이. 분노조절장애도 적당히 해야지. 시발….” 그 싸가지 없는 년을 어르고 달래며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사고를 쳤다. 그것도 자살이라니…. “자살을 해도 이 큰 건에….” 이상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투투투투투투. 멀리서 들려오는 헬기 로터음에 이상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상호의 가슴을 채우는 건 슬픔이 아닌 분노다. 동생의 죽음보다 A급 각성자의 손실이 컸다. 자신의 야망을 높이 올려줄 날개가 꺾였다. “후우.” 동생을 애도하기에는 너무 오래전 곪아버린 남매 관계였다. * “아, 오줌 마려.” 이연희는 팔뚝만 한 뼈 이빨들 사이로 주변을 두리번 살폈으나 우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한참이나 지났으니 갔어도 멀리 갔을 것이다. “싸이코새끼. 여자를 그렇게 패? 나같이 예쁜 애를?” 연희는 우진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며 뼈 이빨 하나를 잡고 뜯었다. A급의 신체능력 각성자. 뚜둑. 그녀에게 이 정도 뼈 감옥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자신의 힘은 보통사람의 몇 배에 달했으니 말이다. “아오, 그 새낀 마법사계열이라더니 왜 그렇게 빠르지?” 우진을 생각하자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두 개의 뼈 이빨을 부러뜨리자 유연한 여자의 몸 하나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났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떨어진 자신의 검을 챙겨 들고는 주변을 살폈다. 서둘러 바지를 내려 볼일을 해결했다. 쉬이이이. 우진이 사라진 방향을 보니 수십의 발자국이 보였다. “깡패 새끼. 조폭도 아니고 우르르 끌고 다니네.”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녀지만 네크로맨서는 처음 본다. 애초에 다른 각성자들과 함께 던전을 공략하는 기회 자체가 없었다. 그녀만의 팀원들과 항상 함께하니 말이다. 바지를 추켜올리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진짜 혼자 클리어 하려는 거야?” 우진의 그 넘치던 자신감을 생각하면 분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그가 보여줬던 그 눈빛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몸이 잘게 떨렸다. “후우, 시발.” 자존심 상했다. 미치도록 수치스러웠다. 죽음 따윈 초월했다고 생각한 그녀가 극도의 공포 앞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못 견디게 치욕스러웠다. “흥. 죽일 테면 죽여보라지.” 물론 죽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이번 던전은 공략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물론 초입에서만 머무르며 시도 자체를 해보지 않았으니 클리어 가능성은 모를 일이다. 진지하게 던전 공략에 임했더라도 실패했을 수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연희는 자신이 있었다. 오빠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이번 던전도 그녀의 주작팀이 클리어 했을 것이다. “내가 먼저 나가 주지.” 모든 몬스터를 상대할 자신은 없지만 귀환석만 챙기고 도망치는 것 정도라면 자신 있었다. 자신은 A급의 검사. 그림자 사냥꾼 이연희니까. < 45화 - 타릇의 고원 > 끝 ⓒ 진설우 < 46화 - 타릇의 고원 (2) > 높이 뻗은 나무의 꼭대기에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화르르륵. 숲이 불타고 있었다. 불길은 미친 듯이 거세게 몸집을 불렸고 매캐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나보다 더 미친놈은 처음 봐.” 이연희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미친놈이다. 던전 브레이크가 얼마 남지 않은 던전에서 한가로이 사냥을 즐길 정도로 말이다. 그것도 숲에 불을 다 질러 놓고 말이다. 강우진은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빨리 챙겨 달아나기나 해야지.” 던전의 클리어는 어렵지 않다. 적어도 이연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귀환석을 가지고 결계를 열고 나오면 된다. 최종 보스가 항상 있어서 문제지만 이연희는 자신이 있었다. 몬스터를 상대할 자신이 아니라 그들 몰래 귀환석을 탈취해 도망칠 자신이 말이다. 누구보다 은밀히 이동할 자신이 있는 그림자 사냥꾼이니까. 불길이 뻗어 가는 곳과는 반대로 가다가 숲의 중앙으로 접근했다. 저 멀리 뻗은 협곡을 보며 이연희는 위치를 가늠했다. “이 어디쯤일 텐데.” 죽전역 3번 출구가 리셋되고 6성 던전으로서의 측정이 끝났을 때 가장 먼저 도전한 팀은 다름 아닌 화랑의 주작팀. 그녀가 이끌었던 팀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KH 길드와의 협력에서도 그녀는 함께였다. 두 번의 기회로 던전을 탐사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탐사를 하고, 수익성을 판단하고 클리어를 포기했을 뿐이다. 6성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보다 그 던전이 터졌을 때의 경제적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돈이나 정치적인 일 따위는 상관없다. 이번 일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어차피 잘됐네.” 오빠가 하는 일마다 마음에 안 들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오빠인 이상호는 화랑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가 먼저 벌인 일도 아니고 강우진이 먼저 포탈에 진입했다. 그대로 두어 죽어버린다면 던전브레이크에 차질이 없어 상관없으나, 만약 강우진이 던전을 클리어 해버리면 큰 문제였다. 그의 손에 던전이 클리어 되느니 차라리 그녀가 끝내버리는 것이 낫다. 1차로 화랑이, 2차로 화랑과 KH의 연합이, 3차로 일본의 헤네시 길드가 도전했는데도 못한 것을 신생 길드인 아르달이 해내면 곤란했다. 주작의 위상이 추락한다. 그것은 막아야 한다. ‘화랑이 망할 순 없지.’ 이연희에게도, 이상호에게도 화랑은 중요했다. 화랑을 최고의 길드로 만들기 위한 그 방식에서 차이가 있어서 문제지. 한참이나 절벽 길을 걷던 그녀가 은밀히 감춰진 줄을 발견했다. 이연희가 밧줄을 당기자 아래로 축 처져있던 밧줄이 딸려 올라왔다. 1차 탐색 때 설치해두었던 것. 협곡 너머엔 단 세 마리의 몬스터만이 존재한다. 그것을 보고 공략을 포기했다. 던전을 클리어해서 얻을 아티팩트의 수와 혈석의 양을 추정해봤으나 별 볼 일 없었으니. 주작팀이 발길을 돌린 건 여기서였다. 이연희가 끌어올린 밧줄이 어느 정도 팽팽해지자 그것을 나무에 묶었다. “미친놈 언제 던전 터질지 알고 사냥이래.” 빨리 귀환석만 가지고 튀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이연희가 밧줄을 타고 뛰었다. 흔들리는 밧줄 위에서도 이연희의 신형은 더없이 안정적이었다. * 화르륵. 사방으로 불덩이가 날아다니며 숲을 태웠고 튀어나온 작은 몬스터부터 오우거까지 모조리 사냥감이 되었다. 쿠우우웅! 우람한 덩치의 돌쇠가 불도저처럼 돌진해 오우거를 들이박았다. 꾸웅. “쿠오!” 오우거가 쓰러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접근한 우진이 비명을 지르는 오우거의 아가리에 창을 박아넣었다. <레벨 업!> <40레벨이 되었습니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40레벨의 제한이 걸려있던 스킬들을 배웠다. <권속 : 씽씽> 열혈 전투마의 질주는 죽어서도 멈추지 않는다. 소환사의 권속들은 신뢰도, 충성도에 따라 필요지배력이 감소한다. 그들은 소환사의 지배를 받는 소환수에서 진정한 동료로 거듭난다. 소모 마력 : 30, 필요지배력 1(-99 충성, -99신뢰) 스킬 : 혼령질주, (lv10 해제) “좋아.” 우진이 즉시 유령마를 소환하자 공간을 찢고 흐릿한 모습의 유령마 하나가 튀어나와 그 몸을 실체화했다. 짙은 검은색이 되었다가 서서히 투명해졌다가 다시 짙어지며 마치 호흡하듯 그 투명도가 달라졌다. “씽씽아. 누나 보고 시퍼찌?” “푸르릉.” 가장 먼저 달려온 비비가 유령마 씽씽이의 목을 끌어안고는 얼굴을 비볐다. 우진의 권속들은 지금 모조리 봉인의 방에 갇혀있었다. 그들이 다시 우진의 목소리를 듣고 나오려면 빨리 레벨을 올려야 하는 일. 우진은 40 제한의 다른 네크로맨서 클래스의 스킬도 익혔다. 배회하는 영혼을 끌어와 지배자의 주위를 맴돌게 한다. 이들은 스스로 움직여 지배자를 보호하며 외부로부터 방어한다. 종속 수 : 0/10 유령의 창을 소환해 적을 공격한다. 유령의 창은 적을 끝까지 쫓아 공격한다. 소모 마력 : 1 유령갑옷(스피릿 아머)과 유령 창(스피릿 스피어)은 영혼갈취의 상위 스킬이었다. 유령갑옷은 그 자체로 우진을 맴도는 방어막이 되기도 하지만 좋은 도시락이 되기도 했다. 유사시에 그것을 영혼갈취로 흡수해 에너지를 회복할 수도 있어서였다. 스피릿 스피어 또한 주변에 영혼이 없더라도 종속된 영혼을 유령 창으로 변화시켜 공격할 수도 있는 일. 우진은 스피릿 아머의 레벨을 10까지 올려 종속 가능한 유령의 수를 100까지 늘렸다. “잡귀들아 오너라.” 우진이 주변을 배회하는 영혼들을 훑어보자 그들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우진을 향해 모여들었다. 휘리리릭. 그들이 모조리 우진의 곁에 모여들더니 우진에게 종속되어 인공위성처럼 주변을 맴돌았다. 우진이 전사의 40레벨 클래스 스킬들을 배웠다. <형태변환 - 대검> <대검술> <일도양단> 전사의 무기가 지팡이 형태에서 창, 해머, 그리고 이제 대검으로 바뀔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대검술을 배웠고, 일도양단이라는 강력한 한방 스킬을 배웠다. “좋아. 이제 가보자. 돌쇠 이리와.” 쿠르르릉. 돌쇠가 자신의 몸체를 이루고 있던 돌무더기를 털어버리고 작은 골렘의 심장으로 돌아와 우진의 곁에 착 달라붙었다. 우진이 씽씽이를 타자 비비가 폴짝 뛰어올라 그 앞에 앉았다. 우진이 주변을 빼곡히 채운 해골들을 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하나하나 데려갈 수는 없었다. 파팟. 와르르. 우진이 마력을 거두자 그것들이 모조리 뼈 무더기로 무너져내렸다. 아쉽지만 건너에도 몬스터는 있겠지. “고고.” 비비의 말에 우진이 씩 웃으며 씽씽이의 고삐를 챘다. “푸르릉.” 씽씽이가 앞발을 치켜들고 포효하더니 그대로 절벽을 향해 내달렸다. “혼령질주.” 츠츠츳. 우진의 말에 씽씽이의 앞길에 유령의 길이 나타났다. 유령의 길은 씽씽이의 앞에 나타나 지나가면 사라지길 반복했다. “아하하, 주인님 달려.” 씽씽이가 거인 신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 “후우.” 이연희는 긴장된 한숨을 토해냈다. 겁이 나거나 쫄아서가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은 절로 위압감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화산의 분화구처럼 푹 꺼져 분지로 된 지형. 거대한 분지에는 석상이 가득 서 있었다. 모아이 석상보다 정교하게 조각된 그것들은 일견하기에도 수백 수천 개가 넘었다. 건축물 따위는 없다. 분지의 중심에 지어진 거대한 탑 위에 귀환석이 떠 있었다. 너무 멀어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크기지만 각성자들의 시력은 이미 보통 사람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 제단주위를 돌고 있는 세 마리의 몬스터. 생명체는 단 셋뿐이다. “이거, 그래도 혼자 가기엔 조금 그런데?” 이연희는 막상 거인 신전에 당도하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자식도 오겠지?” 자신만만했으니 뛰어들었겠지. 이연희는 곁에 있던 바위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어디, 엿 먹어봐.” 감히 자신을 때리다니. 기회가 오면 복수한다. 기회가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놈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귀환석만 챙겨 달아나면 된다. 그림자에 숨은 이연희의 몸이 스르륵 그곳에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 오후 1시. 화랑길드의 길드 마스터 이상호의 기자회견장. “던전에 입장한 이연희씨와 강우진씨의 생환 가능성은 어떻게 보십니까?” “거의 희박하지 않나 싶습니다.” “던전 브레이크까지 약 1시간이 남았는데요. 이연희씨는 친 동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심정이 어떻습니까?” 이상호가 질문한 기자를 노려봤다.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가족이 눈앞에서 죽게 생겼는데 저따위 질문이라니… 이래서 기레기 기레기 하지. 물론 슬픔보다 분노가, 그리고 안도감이 더 큰 이상호였다. 이제 겨우 1시간 남짓. 둘 다 실패했다고 봐야 했다. 던전 브레이크는 예정대로 일어난다. 속마음과는 달리 이상호는 슬픔을 감내하는 얼굴로 말했다. “질문 그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억지로 눈물 참는듯한 그 얼굴은 진한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화랑 사장님.” 기자들이 우루루 일어났으나 화랑길드원들이 경호원처럼 사장을 엄호해 사라졌다.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온 이상호가 길드원에게 물었다. 슬픔에 잠겨 비통하던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던전은 어때?” “아직 그대로입니다.” “후, 다행이군.” “…….” “지휘본부로 가지.” 어제 새벽부터 지금까지 이상호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혹시라도 이연희나 강우진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는 것은 아닌지 얼마나 간을 조렸는지…. 이상호와 길드원들이 탄 차량이 3차 저지선을 통과해 텅텅 빈 도로를 따라 1차 저지선까지 향했다. 작전지휘부의 앞에 모여든 군인과 그들의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보고 이상호가 인상을 굳혔다. “뭐야? 민간인이 왜 여기 있어?”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됐어. 같이 가지.” 이상호가 다가가니 다섯 명의 사람이 군인들 앞에서 항의하고 있었다. “들여보내 달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르달의 길드마스터입니다. 어떻게 된 경위인지 자세한 사정이라도 듣고 싶은 것 아닙니까?” “언론에서 발표한 그대로입니다.” 정민찬은 군인을 향해 정중히 이야기했으나 그는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정민찬과 홍성구, 김해민, 우승훈 그리고 도지원은 난감한 얼굴로 굳었다. “여기서 더 말해보셔도 소용없습니다. 지금 시각 13시 6분입니다. 정확히 5분 뒤 강제 소개령에 의해 해산토록 하겠습니다.” 던전브레이크 1시간 전엔 관련자라 할지라도 전투인원이 아니라면 모조리 대피하도록 되어있었다. 본래 민간인이 작전지역에 들어와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아르달은 이번 작전에 정식으로 참가요청을 받았다. 길드마스터인 강우진이 그에 응해 이곳으로 와있지 않은가. 사건소식을 접하고 당장에 달려온 그였다. 겨우 우격다짐으로 2차 3차 저지선을 넘어 지휘소까지 왔으나 지휘관은 만나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화랑의 길드마스터 이상호가 부드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그의 시선은 힐끗 도지원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도 잠깐 눈길이 갈 만큼 빼어났다. “저희는 아르달의 길드원입니다. 사장님이 던전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아, 알지, 아르달.” 이상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 개자식 때문에 일이 꼬였지. 이연희도 잃게 생겼고 말이다. “1시간 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납니다. 이 일에 대한 책임과 손해배상은 차후 던전브레이크를 막아내고 난 뒤 이야기하죠.” “예에?” “당신들 사장 때문에 내 동생 이연희가 희생되게 생긴 거 아닙니까? 당신 사장을 구하려고 그 착한 것이 뛰어든 것 아닙니까? 예?” 정민찬이 당황하는데 홍성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희생입니까. 우리 형님이 조금 있으면 결계 깨고 나올 텐데.” 이상호의 번들거리는 눈이 홍성구를 노려보았다. 새파란 애송이 따위가… 그 살기 어린 눈빛을 받고도 성구는 지지 않고 노려봤다. “허, 같잖지도 않아서… 강우진이 던전 클리어 할 일이 없으니 당신들 모두 돌아가! 내 조만간 길드의 변호사를 보내도록 하지.” 이상호의 호통에 아르달의 식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1차 저지선 안의 군인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알아보겠습니다.” 이상호의 호통에 길드원이 재빨리 지휘소로 가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돌아왔다. “겨, 결계가 해제되었습니다.” “…….” 이상호의 얼굴이 딱딱히 굳는데 성구가 소리쳤다. “역시 우리 형님이시다.” 이상호가 성구를 노려보며 길드원에게 물었다. “누구야? 누가 나왔어?” “그것이….” 길드원의 우물쭈물하는 대답에 한편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서 있던 도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46화 - 타릇의 고원 (2) > 끝 ⓒ 진설우 < 47화 - 타릇의 고원 (3) > “여기가 거인신전인가?” 우진의 말에 비비가 눈앞의 광경을 보곤 입을 헤 벌렸다. “우왕, 무덤이라고 해도 믿겠다용.” “…쯧, 설마.” 우진은 수백 수천은 될것같은 석상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가보자.” 우진이 씽씽이를 돌려보내곤, 비비와 함께 걸었다. 꿈틀거리는 빛 덩어리인 돌쇠는 비비의 머리 위에 앉아있었다. “이것들 골렘같은 거로 변하려나?”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었다. 우진이 손가락을 가리키자 돌쇠가 날아올라 석상에 흡수되었다. 석상이 들썩이더니 몸을 움직였다. 쿠구궁. “오, 되네… 가 아니네.” 석상의 밖으로 튕겨져나온 돌쇠를 보곤 우진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위이잉. 시무룩한 돌쇠가 비비의 품에 안겼다. 이미 다른 것에 지배당하고 있는 석상을 가지고 자신의 몸체를 이룰 수는 없었다. “흙이라도 먹어.” 위이잉. 돌쇠가 땅에 흡수되더니 흙먼지를 피워올리며 몸체를 일으켜 세웠다. 파워는 바위를 매개로 했을 때보다 약하지만 그 덩치는 두 배가 넘었다. “이거 조금 성가시긴 하겠네.” 구우우웅. 하나 둘 거인 골렘들이 깨어났다. 모든 골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아니나 주변의 골렘들은 모조리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범위에 들면 자동으로 깨어나는 트랩과 같은 모양이었다. “5개체라 이거지?” 우진의 침입을 감지하고 깨어난 골렘은 5기. 시체와 영혼이 없으니 우진의 네크로맨서 클래스의 스킬 대부분이 사용불가해지지만 상관없었다. “전사 클래스 스킬업 타임인가?”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소환해 해머로 형태변환 했다. 묵직한 그 무게감이 이제는 썩 낯설지 않았다. 우진이 망치를 치켜들고 골렘을 향해 돌진했다. *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이연희는 깜짝 놀랐다. “골렘이었다니.” 발길을 돌린 게 잘한 일이었다. 그녀의 팀원만으로 저 수많은 골렘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 범위 내의 골렘들만 소탕하며 직선으로 가로지른다면 중앙의 제단까지 갈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런데 귀환석을 탈취하고 모든 골렘들이 떼거리로 덤벼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제단을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거인들은 또 어떠하고 말이다. 강우진도 그것을 염두에 두는지 모든 골렘을 척살하고 있었다. 제단을 향해 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달팽이 집을 그리듯 깎아내고 있었다. “네크로맨서 아니었어?” 비밀이 많은 강우진이다. 오죽했으면 그가 네크로맨서라는 사실 하나 밖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강우진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네크로맨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림자 사냥꾼인 자신의 힘을 압도하는 힘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벌써 A급 각성자가 된 지 2년도 넘은 자신이 힘에서 밀린다니…. “저 새끼 해골소환은 연막이야. 전사가 틀림없어. 그것도 힘만 주구장창 키운 놈일 거야.” 우진의 모습은 딱 그래 보였다. 무식하게 큰 망치를 들고 흙골렘이 사로잡은 거인골렘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있었다. 그것도 무식하리만치 한가지 기술만을 쓰면서 말이다. “어어? 뭐야?” 수백 기의 거인 골렘을 잡고는 강우진은 스타일을 바꿨다. 해머를 이용해 계속해서 바닥을 찧고 있었다. “뭐, 뭐야? 무슨 노가다도 아니고….” 이연희는 우진이 멀찍이 멀어지자 조금 전진해 몸을 숨겼다. 강우진의 무한사냥과 이연희의 낮은 포복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 “후우, 저놈들 신경 거슬리네.” 귀환석이 둥실 뜬 제단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거인 골렘은 이제 그 수가 50기도 남지 않았으나 제단을 둘러싼 살아있는 거인 셋은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귀환석을 등지고 서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통의 중앙에 난 외눈만이 데굴데굴 굴러 우진을 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외눈박이 거인을 신경 쓰며 우진은 거인 골렘들을 마저 정리했다.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린 느낌이었다. 실제로 귀환석이 요란한 초록빛을 뿌리며 터질 듯 말 듯해 보이는 것이 던전 브레이크 시간이 다된 모양이었다. 전사클래스의 스킬레벨을 대폭 올렸다. 반복 행동으로는 미미하게 오르기만 하는 스탯들도 무려 몇 개나 상승할 정도로 고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레벨도 벌써 49에 달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골렘들을 처치했으니…. “아, 아쉽다옹. 한 마리 정도만 더 처치하면 50레벨인데. 그럼 인형놀이도 할 수 있는뎅.” “저놈들 잡으면 되겠지.” 우진이 제단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사이클롭스들을 향해 걸었다. 쿠웅, 쿠웅. 우진의 뒤에는 부서진 거인골렘의 바위조각들을 뭉쳐 몸체를 만든 돌쇠가 뒤따랐다. 그런 돌쇠의 머리 위에는 어김없이 비비가 타고 있었다. “비비 이제 내려와. 위험하니까.” “알았다응.” 사이클롭스는 위험하다. 같은 거인족의 후손 중 한 갈래이지만 그들을 그저 오우거와 비교해서는 곤란했다. 흉포한 야성만을 물려받은 오우거보다 몸집도 크고 덩치도 크면서, 찬란한 문명을 이뤘던 거인 족의 지혜도 함께 물려받은 이들이니까. [그대를 알고 있다.] 우진이 사이클롭스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나를 알아?” [그렇다. 진격하는 파괴의 거신.] 사이클롭스의 시선이 골렘 돌쇠에게 머물렀다가 그 옆의 서있는 작은 비비를 보았다. [환각의 마녀.] 사이클롭스의 큰 눈알이 우진에게로 향했다. 우진은 웃고 있었다. [그대의 암흑 기사들 또한….] “나 좀 유명했나봐?” 우진의 실없는 농담에 사이클롭스가 꿈쩍않던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대를 어찌 모르겠는가? 학살의 네크로맨서.] 사이클롭스의 두손이 움직였다. [산자들의 공포.] 사이클롭스의 손 위에 황금빛 철퇴가 소환되었다. [죽은자들의 왕.] 옆에 있던 사이클롭스들도 소환된 철퇴를 들고 한발짝 걸어 우진을 보았다. [아르달의 군주.] 세 사이클롭스들이 철퇴를 높이 치켜들고 한발짝 걸어왔다. [임모탈!] 후우우웅. 사이클롭스의 철퇴가 우진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데 그보다 먼저 돌쇠가 뛰어들었다. 쿵, 쿵. 돌쇠가 몸을 뻗어 사이클롭스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꽈아앙. 돌쇠의 몸체가 여기저기 부서지며 사방에 돌가루를 뿌렸다. 뒤로 슬쩍 물러난 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너희도 트라넷이 보냈나?” [그대는 트라넷의 진군을 막을 수 없다.] “헛소리.” [도망친 순간 패배는 정해졌다.] 우진이 버럭 인상을 구겼다. 도망친 게 아니지. “뒤지고 싶지?” [그대의 분노가 패배의 증거.]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창으로 변형시켰다. “개소리도 작작해야지.” 미사일처럼 쏘아진 우진의 신형이 사이클롭스의 눈알을 향했다. 푸우욱. 창이 사이클롭스의 눈알을 찔렀으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진을 그대로 낚아챘다. 우진이 사이클롭스의 손에 잡혔으나 그 자리에서 소용돌이를 시전하며 피해냈다. 쿠웅 쾅! 사이클롭스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우진이 요리조리 피하며 공격을 가했다. 철퇴 하나하나의 공격이 위협적이라 오우거 100마리를 상대하는 게 나을 정도로 사이클롭스 셋을 상대하는 게 힘들었다. “후, 미치겠네.” 하나하나 공격을 피해내는 것도 힘겨운데 놈들에게 조금씩 공격을 쌓는 것도 의미 없었다. 눈이 찔린 사이클롭스는 제단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의해 상처가 곧장 나아버렸다. 일도양단을 이용해 대검으로 손가락을 잘라내도 그렇고, 다리의 힘줄을 잘라도 소용없었다. 비비는 거의 도움이 안되고, 돌쇠와 둘뿐이니 수적으로도 밀려 시간이 없었다. 제단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힘으로 계속해서 치유되니 결국 우진이 먼저 지칠 판이었다. 그때 돌무더기의 그림자에서 나타난 이연희가 제단 위의 귀환석을 잡아챘다. 곧 터질 듯 밝은 빛을 뿜어내던 귀환석은 이연희의 손에 잡히자 곧 그 빛을 갈무리하고는 얌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사이클롭스의 회복시키던 제단의 빛도 더는 흘러 나오지 않았다. “야이 개새끼야. 좆뱅이 쳐라. 쫄뱅이는 그만 집에 간다. 콱 뒈져버리면 더 좋고. 미친새끼.” 이연희의 등장에 우진이 미소 지었다. 쓰레기도 제때에 쓰일 때가 있었다. “돌쇠야 시간 벌어라.” “그어어.” 우진이 즉시 전장에서 이탈해 이연희를 향해 돌진했다. “뭐, 뭐야. 미친새끼야!” 이연희는 던전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강우진의 고전하는 모습을 봤다. 지금이면 적당하다 생각되어 귀환석을 탈취한 것인데 거인 셋을 버려두고 자신을 향해 이리 쐐도 할 줄 몰랐다. 설마 이대로 귀환석을 함께 가지고 탈출하자는 의미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강우진의 손에 들린 창이 섬뜩하기만 했다. “오, 오지 마.” “고맙다.” 강우진이 창을 내질렀다. 카아앙. 겨우 막았으나 이연희는 손목이 욱신거렸다. 무슨 힘이…. “마지막 경험치.” “뭐?” 우진의 창이 이연희의 심장을 향했다. A급 각성자 이연희. 그녀는 빠르게 몸을 틀며 자신의 특기인 달빛 베기를 시전했다. 그 공격에 우진은 피하긴 커녕 더욱 빠르게 돌진하며 창을 내질렀다. “미, 미친새끼….” 황당해하는 그녀의 눈에 서린 생명의 기운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우진의 창은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고 그녀의 검은 겨우 우진의 얼굴을 스쳤다. 목을 베어내기엔 모자란 공격. <레벨 업!> <50레벨이 되었습니다.> 역시, 피와 뼈를 가진 인간은 골렘보다 상대하기 쉽다. 우진은 즉시 50레벨 제한 스킬 <부활>, <시체폭발>을 배웠다. 죽은 시체를 조종한다. 시체는 본래 사용하던 능력의 50%를 발휘한다. 단순한 명령밖에 수행할수 없다. 소모마력 : 1, 시전자의 반경 10미터 내의 시체, 혹은 조종중인 시체를 폭발시킨다. 소모하는 마력에 더해 그 위력을 더한다. 우진의 마력에 이연희의 시신이 벌떡 일어섰다. 흰자위만 보이는 이연희의 시체는 골렘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우진은 달리면서 자신의 주력 스킬이었던 시체폭발을 10레벨까지 찍었다. 그리고 이연희의 신형이 훌쩍 뛰어 사이클롭스의 머리에 안착했을 때. 대량의 마력이 빠져나가며 그것이 폭발했다. 꽈아아앙! 폭발하며 사이클롭스의 머리통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그 쓰러지는 신형이 일어서자마자 옆의 사이클롭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꽈아아앙! 단 두 번의 공격에 모든 마력을 소비해 버렸다. 마지막 남은 사이클롭스가 물러나려는데 돌쇠가 붙잡았다. 어느새 다가온 우진이 희게 웃었다. “내가 도망쳤다고?” […….] “자신 있으면 다 덤비라 그래.” […….] 우진의 창이 사이클롭스의 눈알을 꿰뚫었다. “주인님 이제 인형놀이 하는 거냐옹?” 해맑게 웃는 비비를 보니 악마는 악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진이 문득 피식 웃었다. “나도 다를 게 없지.” 우진이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곤 영혼갈취를 이용해 상처를 치료했다. “쓰읍, 연고 발라야겠네.” 연희의 공격이 꽤 깊어 제법 깊은 상처를 냈다. 욱신거리는 그 상처에 재생의 연고를 발랐다. 흉터는 자고 나면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우진이 바닥에 떨어진 귀환석을 줍고는 빠르게 아티팩트를 수습했다. < 47화 - 타릇의 고원 (3) > 끝 ⓒ 진설우 < 48화 - 토픽 > 죽전역 3번 출구. “결계가 사라졌다면 이제 안전한 거 아닙니까? 저희는 정식 요청받은 아르달 길드원으로서 통행할 자격이 있습니다. 보내주시죠.” “그, 그치만.” 당황하는 군인들을 제치고 정민찬이 우격다짐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 틈을 타고 성구와 해민도 몸을 날렸고 우승훈도 뒤따랐다. “비켜봐.” 이상호가 신경질적으로 군인들에게 명령하자 그들이 저도 모르게 주변을 물렸다. 그 틈에 지원도 1차 저지선 안으로 향했다. “아아….” 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여기저기 피가 묻은 우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굴에 깊이 팬 검자국은…. 지원이 눈물 흘리며 달려갔다. “사장님!” 강우진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정민찬과 홍성구 김해민, 우승훈을 보곤 눈을 꿈벅였다. “어? 너네 언제 왔냐?” “뉴스 보고 바로 내려왔지 말입니다.” “아, 그래? 여기 어디 내 휴대폰 떨어졌는데 찾아봐.” 아, 지금 사장님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는데 하는 말이…. 벙찐 얼굴의 그들이 대꾸하기도 전에 지원이 달려가 우진을 안았다. 우진이 훅 하고 들어오는 그녀의 몸에 한 발짝 뒤로 밀렸다. “흐흑, 우진아.” “지원이?” “흐어엉, 얼마나 걱정했는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원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약 잘 스며들었네. “예뻐졌네.” “흐으응, 흐윽.”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예뻐졌다. 고맙다. 너무 고마워서 주체할 수가 없다. 6성 던전에 덜컥 들어가다니…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이 고마움도 못 전하고, 대답도 못하고. “얼굴은 왜 이래? 흐흑, 바보야. 왜 이렇게 다쳤어?” 지원이 우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어, 그거 만지면 약 닦이는데. 그거 내일 되면 사라지는데…. “흐흑, 이렇게 다치면 어떻게 해.” 지원이 서럽게 울었다. 자신은 얼굴을 되찾았다. 그런데 우진의 얼굴은…. 아니다. 어차피 상관없다. 우진이 괴물처럼 되어도 상관없다. 그저 살아 돌아온 것이 감사했다. 반지를 선물 받은 지원은 답을 정했다. 우진에 비해 한없이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지원이 우진의 목을 끌어안고는 입술을 훔쳤다. “읍.” 우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가 왜 이러지? “뭐야?” “흐윽, 이게 내 대답이야.” 어? 뭔가를 물은 적이 없는데. 무슨 대답? 우진이 어리둥절해하자 지원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반지 줬잖아. 나도 네가 좋아.” “…….” 우진이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정민찬의 옆에 선 우승훈이 양 엄지를 척 세우고 있었다. 아, 저놈이구나. 저놈이었어. ‘휘이익, 사장님 멋지십니다.’ 작게 말해도 다 들린다… 눈치 없이 휘파람 부는 저놈을 어찌해야 할까? 우진은 찰싹 달라붙어 있는 지원의 이마를 검지로 밀었다. “얘가 겁도 없이 어디 주둥이를 내밀어.” “응?” “귀신 붙어 임마. 좀 떨어져.” “피, 뭐야….” 볼멘소리를 하던 지원은 상황을 깨닫고는 황급히 떨어졌다. 주변에서 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우진은 지금 대한민국이 주목하는 사람. 그런 유명한 사람을…. ‘내가 생각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기자들의 카메라는 쉴 새 없이 장면을 찍고 있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우진의 모습 빼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너무 후회되었다. 괜히 민폐 짓을 한 것은 아닐까…. 지원이 혼자 속앓이를 하는 그때 이상호가 우진의 어깨를 짚었다. “이봐.” “…….” 우진이 말없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호의 화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동생은 왜 안 나오지?” 동생? 말도 없이 따라 들어왔던 그 시끄럽던 여자 오빠인가? “오빠고 동생이고 버릇없이 남의 몸에 손대는 게 특기야?” 우진이 이상호를 쏘아보았다. 이상호가 괜히 움찔해 손을 떼고 뒤로 주춤했다. ‘시발, 무슨 눈빛이.’ 저절로 욕지기가 올라왔으나 보는 이들이 많았다. “내 동생은 어떻게 됐지? 설마….” “아, 죽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시신은? 왜 시신은 챙겨오지 않았지? 망자에 대한 당연한 예우이지 않나?” 함께 던전을 공략한 팀원에 대한 예우. 당연히 지켜야 하는 룰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면 상관없겠으나 우진은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시신이라….” 우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드의 식구들, 군인들, 기자들, 그리고 이상호와 화랑의 식구들. ‘뭐, 여기가 아르펜은 아니니까.’ 굳이 일을 키울 필요는 없겠지. “용감한 여자였다.” “……?” “덤벼서는 안되는 적에게 덤볐고, 장렬히 전사했다.” “누, 누구지? 내 동생을 죽인 몬스터는?” 몬스터라…. “임모탈.” “임모탈….” 조용히 되뇌는 이상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우진이 자신의 길드 식구에게 돌아갔다. “내 폰 안 찾냐?” “… 군에서 맡아두고 있을 겁니다.” 우진과 아르펜의 길드 사람들이 작전지휘부로 삼은 호텔건물로 향했다. 이상호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 진정하십시오.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자들 소집해.” “예?” “새꺄, 이대로 손 빨고 있냐?” 던전브레이크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연희도 죽었다. 최악. 최악 중의 최악. 이상호는 계산기를 굴렸다. 그의 시선이 사라지는 우진을 향했다. “십새….” 생각해보니 저놈이 나타나고부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 5성 던전도 빼앗겼고, 지금의 6성 던전도 뺏겼다. 이상호가 겨우 화를 참으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차에 탔을 때였다. 띠리디리딩동, 띠리디리딩동. 이상호는 전화벨소리와 함께 액정에 뜨는 이름을 보자 스트레스 수치가 팍 오르는 기분이었다. 안 받을 수도 없는 번호. “어후. 시발.” 욕지기와 함께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회장님. 예… 예. 그렇게 조치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최대한 손해를 메꾸는…….” 한참이나 통화한 이상호는 통화를 끊고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랬다. “후우, 강우진 씨발.” 난데없이 나타난 미친 각성자. A급? 이젠 그마저도 우스운 이야기다. 벌써 매스컴은 그를 AA급의 각성자로 띄우기에 들어갔다. 연희가 도와줬겠지만 그래도 둘이서 6성 던전을 클리어하고 되돌아오다니…. “혼자 잘나간다 싶지?” 이상호가 입술을 잘끈 씹었다. 아무리 뛰어난 고위 각성자라 하여도 상관없다. 이 사회는 아주 유기적이고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대한민국 랭킹 1위라는 김강철이 별로 두렵지 않은 것은 세력이 없어서다. 독야청정해봐야 그것이 끝이다. 반면, 자신은 세력이 있다. 대한민국 3대 길드라는 화랑이, 그리고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재계 인물들과도 촘촘한 인맥들이. 동생인 연희는 싫어했지만 화랑이 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처세술과 그들의 인맥이 큰 몫을 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내가 뺏기고는 못사는 인간이거든.” 감히, 자신의 야망을 가로막으로 들어? 이상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 본때를 보여주리라. * “던전 하나 공략한 거 가지고 인터뷰는 무슨.” “그럼 인터뷰 없이 방금 말씀해주신 걸로 언론에 보도자료 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아티팩트 캐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고 가지 뭐.” “일단 한 달 동안 이 호텔을 쓰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홍 이사와 해민이 남겨 돕도록 하겠습니다.” “짐꾼 하나 심부름꾼 하나면 충분하지.” 성구와 해민이 볼을 부풀렸다. “아참 어머니는 뭐라 안 하디?” 어머니가 은근히 걱정되는 우진이었다. 뭐, 매번 던전 들어갈 때마다 왜 이리 티비에 틀어대는지…. “저… 사장님 충격 받지 마시고 들으십시오.” “뭐, 뭔데?” 가족들 소식인지라 긴장한 우진의 물음에 정민찬이 정색하고 말했다. “아직 모르십니다.” “어?” “제가 연락드려봤는데 티비를 안 보셨는지 아직 모르셨습니다.” “…….” 우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괜히 알아서 걱정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이…. “사장님 전화 안되신다길래 제가 눈치껏 휴대폰 사무실에 두고 출장 갔다고 이야기만 했습니다.” “…….” “괘, 괜찮으십니까?” “하하,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도 이번 일은 뉴스에 막 계속 나오고 하진 않았나 봐?” “속보 나온 뒤론 거의 생중계되다시피 했습니다.” “…….” “6성 던전의 2인 도전은 처음이라 외국 언론들도 뉴스로 다뤘습니다.” “…….” 묘하게 기분이…. “어머니 뭐하셨데?” “이사날짜가 다가와서 가구 보러 다니신다고….” “…….” 어머니가 많이 신이 나셨구나… 티비 볼 시간도 없으시고…. 차라리 잘된 건가? 괜히 별스럽지 않은 일로 가족까지 걱정해서야 쓰겠나. “아티팩트 캐기하고 올라가면 이사날짜 지나겠는데?” “저와 승훈씨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사장님께서는 던전공략에 집중해주십시오.” “어, 그래. 고맙다….” “아닙니다. 지원부서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정만찬이 일어나자 김해민과 우승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김해민은 의자를 밀어 넣다가 눈치 없이 앉아있는 홍성구의 팔을 잡아끌었다. “홍이사님 아까 이야기하신 거 끝났습니다.” “예? 무슨 이야기요?” 김해민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눈치 줬으나 성구가 멀뚱히 보며 자신의 손에 쥔 카페모카를 쭉 빨아당겼다. “하하하, 일단 가시죠. 저리 가서 이야기 해드리죠.” “예?” 김해민이 여전히 눈치 없는 성구를 데려가자 테이블에는 우진과 지원만이 남게 되었다. 지원은 괜히 얼굴이 빨개져 볼을 붉혔다. “너 그런데 회사는 어떻게 하고 왔냐?” “어? 그게….” 어떻게 하긴, 무턱대고 왔지. 회사에 다닌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무단결근이라는 것을 해봤다. 아니, 어제도 우진 때문에 회사에 결근했으니 두 번째인가? 우진을 만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우진이 지원을 보며 피식 웃었다. “보기보다 대책 없네 이거.” 대책 없기엔 자기보다 더 할까 싶지만. “너 나 좋아해?” “어? 네가 반지를… 나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마음이….” 그거야 우승훈이 오버한거지.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거 큰일 날 여자네.” “어?” “위험하게 나 같은걸 좋아하고.” “…….” 지원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눈에서 금방 눈물이 차올라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렇구나. 우진이는 자신이 부담스럽구나. 한낱 공순이 따위가 넘보기엔 우진은 너무 높이 있는 사람이구나. 우진은 말없이 눈물 흘리는 지원을 보았다. 티 없이 깨끗하고 맑은 영혼. 악령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또 얼마나 괴롭히고, 또 얼마나 상처 줄까. 멀리 두고 지켜두기엔 우진의 마음도.... 우진이 지원의 턱을 잡고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귀신 좋아해?” “……?” “안 무서우면 덤벼봐.” “…?” 어리둥절하던 지원이 우진의 웃음에 울음을 뚝 그쳤다. “내가 아주 스펙타클하게 살게 해줄 테니.” “…….” 그 모습을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고 있는, 기자라고 하기에는 차림이 수상쩍은 사람이 있었다. < 48화 - 토픽 > 끝 ⓒ 진설우 < 49화 - 토픽 (2) > 미도고등학교. 이제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평소보다 더욱 조용하기만 한 3학년 교실 앞 복도. 도재민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이슬기를 보곤 절로 긴장된 얼굴이 되었다. “슬기야 안녕?” “응. 재민아 안녕.” 화사하게 웃는 슬기를 보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던 재민은 그녀가 지나쳐가자 심장에 묵직하게 올려뒀던 돌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 도재민 이 바보.’ 자책해봤으나 늦은 일이었다. 그날 이후 슬기에게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전보다 더 예뻐졌고, 더 잘 웃었지만 전에 없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도통 공부도 집중되지 않는 하루가 힘없이 흘러갔다. 재민은 학원에 앉아 수업이 시작하기 전 휴대폰을 열었다. 습관처럼 띄운 인터넷 창을 도배한 기사들을 보곤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이 형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일 줄이야.” 꼭 어디 노숙자 같았는데 알고 보니 재벌 2세? 같은 느낌이다. [전대미문 2인 파티 6성 던전 공략.] [화랑 길드 부사장 이연희 의문의 죽음.] [강우진 A?, AA?] “어? 사고라도 있었나?” 재민이 기사를 찾아보니 어제 새벽부터 인터넷이 시끌시끌했던 모양이었다.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직전의 던전에 우진과 이연희가 들어가 던전을 공략한 것. 그리고 이연희가 그 과정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헐.” 둘이서 6성 던전을 공략하고 브레이크를 막았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유명한 각성자인 이연희가 죽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강우진의 그녀? 관심집중.] “뭐, 뭐야?” 재민은 기사를 클릭해보고는 깜짝 놀랐다. “뭐야? 여자친구 있었어? 우와. 씨 겁나 예쁘다.” 던전 공략 중에 다친 것인지 상처 입은 강우진의 얼굴과 그런 그에게 키스하는 여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가 강우진 여자친구였다. 여러 사진들을 보며 재민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우아, 정말 예쁘다.” 어딘가 익숙한 듯 낯익은 그 얼굴은 재민이 여태 본 여자들 중에 단연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사진에 찍힌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모습이 더욱 그런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자자, 수업 시작합시다.” 학원 강사의 등장에 재민은 휴대폰을 집어넣고는 수업에 열중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걸려온 전화에 재민이 반갑게 받았다. “어, 누나.” [집에 가는 길이야?] “응.” [나도 집에 가는 길이야.] “어?” [누나 일 관뒀어.] “어어?” [가서 이야기해. 다 와 가니까 바로 집에 가 있어.] “어어어?” 뚜우, 뚜. 재민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는 누나를 보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재민은 집으로 돌아와 책가방을 던져놓고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요즘 같은 날은 공부도 잘 안되고 슬기 생각만 났다. 한참을 멍청히 있는데 도어락키음이 들렸다. “누나 왔어? 갑자기 일은 왜….” 재민은 일어서다 말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누나의 모습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런 재민의 반응에 지원은 쿡 웃었다. 자신도 놀랍기만 한데 재민은 얼마나 놀랐을까. 재민이 두 눈을 끔벅였다. “누, 누구….” “누구긴, 나야.” 재민은 눈앞의 여자를 본 기억이 있었다. 퍼뜩 떠오른 그 생각에 깜짝 놀랐다. “우, 우진이형 여친?” “맞을래? 누나 얼굴도 모르냐?” “허윽, 누, 누나?” 재민이 깜짝 놀랐다. 사고 이후론 거의 얼굴을 가리고만 다녔으니… 그러고 보니 누나가 맞았다. 예전 예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누, 누나. 누나아.” “흐윽, 재민아.” 남매는 한참을 부둥켜안고 물었다. 그러다 문득 재민이 눈물을 닦고는 누나를 보았다. “우진이형은?” “대구에 있어.” “형이 낫게 해준 거야?”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흑, 그 대신 사귀자구 해?” “으응? 그건.” “으어엉.” 누나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 감격스러우면서도 뭔가 뺏긴 기분이 들어 재민은 한동안 목놓아 울었다. * 대구 죽전역 인근의 호텔. 우승훈의 차편에 지원을 곧장 서울로 올려보냈다. 정민찬은 군과 화랑길드와 던전의 지분을 두고 협상할 것이 있어 서울행을 미뤘다. 협상이 길어져 우진은 호텔에서 한참을 쉬어야 했다. “아, 이거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냐?” “누가 형님 욕하는 거 아닙니까?” 성구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욕 정도로 아플 귀가 아닌데. 누가 저주라도 퍼붓고 있나.” “…….” “던전이나 돌러 가자.” “지금 말입니까? 아직 협상도 마무리 안됐는데….” “미리 돌고 그냥 혈석 좀 나눠주면 될 거 아냐?” 지분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혈석 따위 안 캐도 그만이다. 하지만 업적포인트와 경험치는 최대한 충당해야 한다. 점점 느려지고는 있지만 이대로 간다면 곧 60레벨 이었다. 우진의 레벨업 만큼이나 그의 권속들의 레벨업도 중요하다. ‘그래도 아르펜에서 보다야 빠르긴 하지만….’ 아르펜에서처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 안심하기 어려운 것이 트라넷의 대대적 침공이 언제일지 알 수 없었다. 아르펜은 지금처럼 던전 따위에서 몬스터들이 설치지 않았다. 언제고 던전은 터진다…. 진짜 혼란은 그때부터다. 우진은 조급하지도,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준비할 뿐이다. “나가서 해민이한테 이야기해. 던전 갈 수 있게 준비하라고. 지분협상이야 정이사한테 적당히 협상하라 그래. 돈이야 나누면 되지.” 돈만 나누고 경험치만 안 나누면 된다. “넵.” 성구가 밖으로 나서고 우진도 다시 재도전할 준비를 했다. 이제는 넘쳐나는 포인트를 이용해 인벤토리를 확장하는 가방을 구입하고 챙겨둔 강화석을 흡수해 스탯 포인트를 올렸다. 잠시 후 해민이 우진을 찾아왔다. “사장님. 아무래도 직접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민찬이한테 다 일임했잖아.” 구질구질한 놈들과 지루한 협상이라니. 딱 질색이었다. 그런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민찬과 해민을 고용한 것이 아닌가. “아, 협상은 거의 마무리입니다. 국방부가 20%의 지분을 요구하고 있고, 화랑이 30%, 그리고 저희가 50%입니다.” “군인 놈들이 거 엄청나게 떼먹네.” “뭐, 병역을 대체하는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어쨌든 국방부의 요청에 따라 이번 작전에 참여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화랑길드가 이티팩트 캐기의 일정 참여를 원합니다. 아르달과 합동참여를 원한 것 같지만 사장님이 솔플하실게 뻔해서 정이사님이 재협상 중입니다. 대충 저희가 2번 이용할 때 화랑이 1번 이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흐음.” 우진이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시간으로 바꿔. 우리가 2일 이용할 동안, 놈들이 1일 이용하는 걸로.” 공략되어 정보가 오픈된 6성 던전의 적정 공략 시간은 현실 시간으로 12시간, 던전 내의 시간 흐름으로는 2일이다. 아르달이 4번 도전하고, 화랑이 2번 도전한다. 어차피 2:1의 비율이지만 우진은 그 시간 동안 시간이 허락하는 한 미친 듯이 경험치를 쓸어담을 작정이었다. 우진이 속도를 낸다면 2일 동안 4번이 아니라 그 두 배도 가능할 것이다. 언제 또 6성 던전을 차지할지 모르니 이번에 폭렙을 해둘 작정이었다. “그렇게 협상하라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협상이 아니라 기자회견 때문에 가셔야 합니다.” 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자회견?” * 우진은 수십 대의 카메라와 그보다 많은 기자들이 빼곡한 호텔의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의자엔 이미 어두운 표정의 정민찬과 화랑의 대표 이상호와 그 외 몇몇이 앉아있었다. 우진이 정민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인터뷰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곤란한 질문에는 답하지 마십시오.” 민찬의 말을 대충 흘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뜻 미소 짓는 이상호의 얼굴을 보니 알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꾸미고 있다 이거지?’ 우진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던전 브레이크 전의 무리한 던전공략은 화랑과 아르달이 협의된 내용이었습니까? 사장님께서는 따로 지시하신 것이 있습니까?” “따로 지시한 것은 없습니다. 현장은 모두 이연희 부사장에게 일임했으니까요. 그저 요즘 주목받는 강우진씨를 최대한 보필하라 했지요.” 기자의 질문에 마치 쿵짝이라도 맞춘 듯 이상호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연희 부사장님은 아르달 사장인 강우진씨를 구하기 위해 던전에 무리하게 진입하셨을 확률이 높군요?” “음. 그에 대해서는… 지금도 동생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 믿을 수가….” 이상호는 괴로운 얼굴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모습에 기자들의 시선이 강우진에게로 향했다. “강우진씨에게 묻겠습니다. 이연희씨와의 던전 입장은 사전협의가 있었습니까?” “…….” 우진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기자들이 분분히 질문을 던졌다. “던전 공략 과정에서 이연희씨와의 팀워크는 어땠습니까?” “그녀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십시오.” “어쩌다 죽은 겁니까? 임모탈이 최종 몬스터였습니까? 강우진씨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 계속되는 질문 속에 우진은 침묵했다. 대답한 것은 정민찬이었다. “질문 수위가 너무 과합니다. 사장님께서는 던전 공략을 마친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습니다.” 정민찬의 대답에 한 기자가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방금 전 던전 공략 간다고 요청한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던전 공략을 준비할 정도라면 그리 크게 충격을 받지도 않은 모습인데요.” “대답을 회피하시는 겁니까? 혹시 던전 내에서 이연희씨와의 마찰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이상호가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씩 웃었다. 그래, 더 몰아붙여라. 각성자도 공인이다. 그것도 A급 아니, AA급일지 모를 강우진은 이제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론에 노출되어 사사건건 주목을 받는다.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어디 피곤하게 살아봐라. 그것이 얼마나 피곤한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제깟 놈이 어디서 이런 관심을 받아봤겠어?’ 어디, 제 성질에 못 이겨 넘어져 봐라. 언론은 세계인의 관심은 우진이 조그만 잘못을 할 때마다 헐뜯고 물어뜯어 파멸시킬 것이다. 이것은 각성자의 능력과는 별개의 멘탈 문제였다. “강우진씨. 국민의 알권리가 있습니다. 그만 침묵하고 대답해 주시죠.” “…….” 우진의 묵묵부답에 정민찬은 얼굴이 굳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며 마치 청문회처럼 되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절대 말렸을 것인데 협상이 유리하게 되면서 그 양보카드로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동생을 잃은 것에 대한 이상호의 분노를 짐작했어야 했는데…. 물론 사장님이야 잘못이 없겠지만 어디 가족을 잃은 심정이 그러한가? 누구라도 보이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화를 내고 싶을 것이다. ‘괜히 우리 사장님한테….’ 이상호의 슬픔을 이해하려 하면서도 괜히 억울한 기분이었다. 이미 기자회견은 생방송으로 방영되고 있었기에 여기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우진씨 대답….” 기자들의 아우성에 우진이 그만하라는 듯 손바닥을 펴 보였다. 우진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거만하게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원하는 게 뭐야?” “저희는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개소리 하지 말고.” “…….”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정민찬의 옆을 지나 이상호에게로 향했다. 이상호가 여전히 슬픈 듯 찡그린 그 얼굴로 강우진을 올려다보았다. 강우진이 그대로 이상호의 어깨를 발로 차버렸다. 콰당. ‘허?’ 이상호는 의자 채로 넘어지면서도 너무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혔다. “뭐하는 짓이죠?” “까고 있네.” 우진이 피식 웃고는 일어서려는 이상호의 가슴을 한 번 더 찼다. 콰다탕. “허, 당신 미쳤어? 이거 생중계야.” “그게 뭐?” 우진이 일어선 이상호의 멱살을 잡아채 올렸다. 자신의 앞에 바짝 끌어당겨 눈을 맞추었다. 강우진의 무심한 듯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 눈빛에 이상호가 저절로 눈을 내리 깔았다. “까고 싶으면 직접 까. 개새끼처럼 뒤에서 꽁알대지 말고.” “흐흐, 당신 실수한 거야. 이거 전국에 생중계 되고 있다고.” 이상호는 멱살을 잡히고서도 웃었다. 제 성질을 못 이길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넌 이제 끝이다. “그래서 뭐?” 전국 생중계? 대한민국 인구가 5천만 쯤 되나? 아르펜 인구가 얼마였더라… 10억? 20억? 하도 죽고 죽어 얼마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르펜의 행성 자체가 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었다. 5천만 정도 더 해져봐야… 아니, 전 세계 60억 눈알이 따라붙어 봐야 우진의 행동이 변할까? “넌 그렇게 생중계 되는데 처맞아서 좋냐?” “뭐?” 강우진의 손아귀가 이상호의 볼때기를 후려 갈렸다. 쩌억. 놀란 카메라가 그 모습을 멍하니 찍고 있었다. 기자들은 할 말을 잃고는 침만 꿀꺽 삼켰다. < 49화 - 토픽 (2) > 끝 ⓒ 진설우 < 50화 - 토픽 (3) > “아, 피곤하네.”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며 도지원을 사당까지 데려다 주고 오느라 운전이 피곤했다. 옆에 태우고 오느라 조마조마 얼마나 불안했는지. 다름 아닌 강우진의 여자다. 더구나 얼마나 예쁜지 여자경험이 많은 우승훈도 그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이었다.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차를 타고 간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승훈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샤워를 하곤 맥주를 한 캔 따 소파에 앉았다. “하아, 뭐 재밌는 거 없나?” 티비 채널을 돌리던 승훈은 아르달과 화랑길드의 기자회견을 보곤 채널을 멈췄다. 그래도 자기 길드라 그런지 눈길이 갔다. “하, 개처럼 물어뜯네.” 승훈은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과 무심하게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우진을 보며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저거 성질 겁나 더러운데….” 원래 없는데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우진이 성질 더러운 거야 승훈이 가장 잘 알지 않는가? 생각해줘서 이벤트로 엮어줬더니 고맙다는 소리도 없고 얼차려나 시키고…. “저러다 엎는 거 아냐?” 불안하면서도 설마 카메라 앞에서 그럴까 싶었다. 성질이 더럽긴 하지만 설마 그렇게 무식할까.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던 승훈은 화면의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사, 사고 친다. 저거 야마 돌았어.” 우진의 표정을 보니 단단히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판매원 경력 8년의 승훈의 눈치가 어디 보통 눈치던가. 척하면 척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진이 슬픔에 괴로워하고 있는 화랑의 사장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와, 시발 쩐다.” 우승훈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사장 새끼 또라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또라이일 줄이야. “와, 시발 나 좆될뻔 한거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했다. 저런 사람한테 갤러기 따위를 팔았다니. 아직도 그때 맞은 볼이 얼얼하다. 등줄기가 움찔움찔하는 게 우진이 일어서려는 이상호를 다시 걷어찼을 땐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까지 됐다. “와, 와아… 와.” 너무 황당하고 당황스러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와, 인간이 저럴 수도 있구나. 저렇게 남 시선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살 수가 있는 거구나. 제 성질대로 사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휘이익, 쫘악!] 카메라 오디오를 통행 들려오는 생생한 따귀음에 승훈은 몸을 움찔 떨었다. 티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떤 더 큰 사고를 칠까? “이, 이미 큰 사고인가?” 대한민국 3대 길드. 화랑의 길드 마스터다. 그 화랑의 사장이 멱살이 잡혀 따귀를 맞고 있었다. 우진의 성격으로 보면 한대로 안 그칠 텐데…. [야생의 가젤이 암컷을 만나 짝짓기를 시도합니다. 암컷 가젤은….] 나긋한 아저씨의 음성과 함께 티비 화면이 바뀌어 가젤 두 마리의 밀당을 보며 승훈이 눈을 끔벅였다. “뭐, 뭐냐?” 드라마를 결방 시킨 긴급속보 기자회견을 난데없이 동물의 왕가로 바꿔버리다니. 역시, 사장님은…. “이거 난리 나겠네 또.” 이 정도면 거의 핫이슈메이커가 아닐까? 승훈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웹페이지를 열자 아니나 다를까 강우진이 실시간 검색어를 도배하고 있었다. 1. 강우진 폭행 2. 기자회견 3. 분노의 싸다구 New. 성녀 5. 강우진의 그녀 New. 성녀의 기적 7. 방송사고 8. 탈모약 ……. “어? 뭐지?” 우승훈은 성녀를 클릭했다. 검색기록들이 쭉 나열되는데 그중 첫 화면의 동영상을 클릭했다. BBS 방송국의 앵커가 나오고 승훈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내뱉고 있었다. 곧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엄청 예쁜 금발의 미녀가 나왔다. “허, 엘프다. 엘프.” 도지원이 정말 예쁘다 생각했는데 이건 뭐…. 현실에 존재하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꼭 CG를 보는듯한 괴리감마저 느껴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앞에 앉은 사람들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향해 뭔가 기도하던 엘프녀의 말에 빛이 휘몰아치더니 휠체어의 환자가 벌떡 일었다. “뭐, 뭐야?”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쪽 팔이 없는 남자의 앞에 선 엘프녀가 또 기도를 올리더니 빛이 휘몰아쳐 남자의 팔이 재생되었다. “미, 미친. 조작 아냐?” 각성자가 판치는 마당에 기적을 이행하는 약은 많았다. 재생연고만 하여도 사라진 신체 부위쯤은 얼마든지 재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선천적 기형을 가진 사람을 낫게 하는 약이나 능력 따위는 없었다. 약이 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비쌌다. 돈이 있다고 하여 모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물건인데, 기적을 이행하는 능력이라니. “이거 참.” 강우진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던 검색어 순위는 성녀와 메르디 BBS, 탈모기적, 타이탄 길드 등으로 대체되었다. 기적을 실현하는 자. 성녀 메르디. 그녀의 등장에 미국이, 아니,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었다. * 치료. 의학. 특히나 불치병의 치료는 세상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선천적 기형으로 다리를 쓸 수 없는 너무 유명한 환자 해밀턴 부인의 완치는 시작에 불과했다. 전쟁 중 팔을 잃은 지 20년이 넘은 사람부터, 한 번도 두 발을 딛고 일어선 적이 없는 환자까지 일으켜 세웠다. 기적은 놀라웠고 타이탄길드는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국적 불문, 계층 불문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나 그들이 모두 기적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믿음이 있는 자. 아리아의 종을 자처하는 자. 아리아 교단의 성녀 메르디는 기적을 선보이며 여신 아리아의 존재를 지구에 헌신시켰다. 하나 둘 늘어나는 신도들은 자발적 헌금을 바치기에 이르렀다. “이제 더 이상 막는 것도 무의미하군.” 타이탄의 길드 마스터 딘쿤은 메르디를 만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다. 타이탄길드 본사의 한 개 층을 모조리 할당해 메르디와 그녀의 추종자들을 위해 내어주었다. “사장님. 정말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실 겁니까?” “저길 보게.” 비서의 말에 딘쿤은 여신 아리아를 모시는 아리아교단으로 개종한 수많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성녀의 기적을 바라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개종이다. 그녀의 힘은 여신을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만 발휘가 되었다. “이미 그녀는 추종자들을 거느렸네. 좋든 싫든 우리 길드가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들어줄 수밖에.” 딘쿤의 체념한 말에 비서도 동의하는지 입을 앙다물었다. “그녀의 예지 능력은 꼭 필요해.” 맞는 말이다. 그녀의 예지 때문에 겨우 일주일 사이에 타이탄은 5성 던전 5개와 6성 던전 던전 2개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타이탄에게 요구한 것은 딱 하나였다. 아리아의 성기사단. “벌써 지원자도 꽤 되잖아?” “그게 걱정이에요. 마스터.” 비서의 걱정도 이해는 간다. 타이탄 내의 각성자 중 아리아 여신을 모시는 교단에 참여한 자들이 꽤 되었다. 그 기적에 놀라서거나, 가족들이 그 수혜를 입은 자들도 꽤 되었다. “어쩔 수 있나. 막을 수 없다면 최대한 이용해야 하지 않나?” “…….” 딘쿤은 담담히 말했다. 주도권이 넘어간 듯해 속이 쓰리지만 그도 별수 없었다. 최대한 손해를 메꾸며 이익을 노려볼 수밖에. 어쨌거나 그녀는 현존하는 최고의 각성자. SS급의 이능력자니 말이다. * “이연희는 나를 죽이려 했다. 그녀의 죽음의 이유는 내가 아닌 암살 배후인 이놈에게 물어라.” 강우진은 기자들을 향해 그렇게 일갈하고는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기자들은 분주했고 이상호는 멍하니 누워있었다. 누구 하나 질문을 던지지도 답변을 하지도 않았다. 침묵. 강우진이 폭탄을 던지고 같다. 그 폭탄을 건네받은 이상호는 가만히 누워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퉁퉁 부은 그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시발.’ 무식해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의 막무가내일 줄 몰랐다. “사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뭘 어떻게 돼! 꾸며낸 개소리지!” 이상호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는 기자회견장을 나섰다. 젠장, 쪽팔려도 정도가 있지. 이상호는 뒤따라오는 화랑 길드원들을 향해 물었다. “크윽, 퉤. 피 섞인 가레가 깨끗한 호텔복도를 더럽혔다. 입안이 얼얼하고 감각이 죽었다. 시야도 흐린 것이 눈의 핏줄도 터진 모양이었다. “시발, 나 몇 대 맞은 거냐?” 우습게도 이상호는 중간에 기절했다. B급의 신체능력 각성자인 그가 따귀에 맞아 기절하다니. “이, 일곱대입니다.” “개새끼.” 이상호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무식한 새끼, 미친 새끼. 온갖 욕을 갖다 붙여도 모자랄 놈이었다. “차 대기시켜. 본사 변호사들도 죄다 소집해놔.” “네, 사장님.” 이상호가 호텔의 뒷문을 이용해 조용히 빠져나갔다. * “너무 심하셨습니다.” “…….” “일이 커졌습니다. 여론이 들고 일어날 겁니다.” 정민찬의 말에 우진이 발길을 멈췄다. 우진이 정민찬을 똑바로 보았다. “민찬이.” “예, 사장님.” 자신보다 어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민찬은 강우진이 크게 보였다. “놈들이 나를 살인자로 몰아가려고 하고 있어.” “사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이야.” “……!” 정민찬이 너무 놀라 눈만 끔벅였다. 뒤따르던 해민과 성구도 얼어 붙었다. “날 죽이려 했고 내가 죽였어. 내가 더 강하니까. 이게 문제가 돼?” “…….” 문제가 되지 왜 안 되나. 하지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데 그대로 죽어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 “뒤에서 일 꾸미는 놈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 “앞에서 사고 치는 거야. 대놓고.” “…….” “그럼 아주 머리가 아프지. 뒤에서 작당하기가 쉽지 않아.” 강우진의 말에 정민찬은 반박할 말을 떠올리려다가 말았다. 결과가 어떠한가? ‘강우진은 이연희의 죽음을 왜 방조했는가’ 에서 ‘화랑이 정말 강우진의 암살 배후인가’로 바뀌었다. 증거 따위 없다. 던전 안에서의 일이니까. 생각 없이 행동하는 듯 싶었는데 나름의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정민찬은 존경 어린 얼굴로 우진을 보았다. “과연 사장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수습은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걸 내가 왜 해?” 강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해야지.” “…….” 생각이 없었구나! 사장 새끼. “월급 적으면 더 올려서 받아가.” 양심은 있구나. “큼, 난 던전이나 돌러 갈 테니 알아서 수습해봐. 정 이사 능력 한번 보자고. 성구야 가자.” “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이런 대형사고를 치고 뒷짐이라니. 망연자실한 정민찬의 어깨를 김해민이 잡았다. 알 수 없는 동질감에 촉촉한 두 사람의 눈망울이 마주쳤다. 강우진과 성구는 호텔을 나왔으나 던전으로 바로 갈 수 없었다. “와, 강우진이다!” 호텔 앞 도로를 빼곡히 메운 인파. 유명 연예인의 팬 사인회에 가면 이럴까? 기자회견에 초대받지 못한 기자들의 카메라의 셔터가 바쁘게 돌아갔다. “뭐야.” 이 야밤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몰렸단 말인가? 강우진이 한발 내딛자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워낙에 대단한 각성자다 보니 차마 다가가지는 못하고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고마움과 신기함, 기쁨이 공존했다. “고맙습니다. 우리 집을 지켜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무조건 응원합니다.” “오빠, 멋있어요. 고맙습니다.” “이 동네에서 70년을 살았다우.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 “흑흑,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노인도 있고, 이제 갓 결혼한 새댁도, 교복입은 학생도, 투박하게 생긴 아저씨들도 있었다. 6성 던전의 브레이크. 포기하고 피난 가야 했던 동네의 주민들이 몰려나와 강우진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야밤에 연예인을 보려고 모인 게 아니다.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준 은인을 보러 온 것이다. 강우진이 피식 웃었다. 경험치를 독차지 했고 레벨업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저들의 터전을 지켰다. 강우진의 걸음마다 인파가 해쳐지며 저절로 길을 만들어 주었다. 뒤따르는 홍성구는 울컥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가슴이 저절로 펴졌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인파 사이에서 튀어나온 꼬마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강우진의 발길이 잠시 멈췄고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꼬마의 두눈이 웃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웃음. ‘뭐, 이것도….’ 강우진이 꽃다발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꼬마를 안아 들고는 꽃다발 쥔 손을 치켜 올려 주었다. ‘괜찮지.’ 강우진의 액션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와아아아!” “강우진 만세!” 사람들의 소란에 호텔 밖으로 나온 정민찬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사건 수습이 어쩌면 쉬울지도 모르겠다. 아르달의 리더는 어쩌면 야누스 일지도…. 민찬과 해민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던전을 향해 걷는 아르달의 사장을 보았다. 도시를 지켜낸 히어로, 강우진을 말이다. < 50화 - 토픽 (3) > 끝 ⓒ 진설우 < 51화 - 이사 홍성구 > 아리아여신을 위한 제단이 꾸려졌다. 지구의 조형 기술은 놀라워 메르디의 설명에 의한 조각상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메르디는 매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조각상 앞에서 기도를 했다. 해밀턴이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제 휠체어가 필요치 않았다. 가고자 하는 곳엔 그녀의 두 다리면 충분했다. 사람의 의지를 가장 믿었던 심리의학자는 신을 가장 믿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성녀님. 길드 마스터의 방문이에요.” [알겠어요.] 해밀턴의 공손한 말에 메르디가 답하며 무릎을 일으켰다. 아직 그녀의 의사소통은 신의 목소리를 빌어 이루어졌다. 아리아여신을 인정하고 믿지 않으면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도, 그녀의 기적과 같은 축복을 받을 수도 없었다. 해밀턴을 보는 메르디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조만간 여신님의 축복이 있을 거에요.] “오, 맙소사, 감사합니다.” 해밀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메르디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치유하는 아리아교단의 신자라는 것을 더 없이 자랑스러워했다. 구원을 바라는 자들은 많았고, 진짜 신의 등장에 몰려든 사람들은 구름과 같았다. 자신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다니. 메르디는 응접실로 향했다. 아르펜의 여신 아리아의 성녀인 메르디에게 지구의 기물과 문명은 놀라운 것 투성이였다. 그녀에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타이탄길드는 그녀를 적극 지원하고 있었고, 그녀 또한 타이탄길드를 위해 신성력을 나누고, 예지로 인한 소식을 나누었다. 메르디가 응접실에 도착하자 타이탄의 길드마스터 딘쿤과 그의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녀님께 예를 올리세요.” “…….” 해밀턴의 말에 딘쿤이 메르디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메르디가 손을 내밀자 딘쿤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금발의 비서도 그와 똑같이 한 뒤에야 메르디가 미소 지었다. [저를 찾으셨다지요?] 딘쿤과 비서에게도 그녀의 말이 들렸다. 아리아교단에 들고 아니고를 떠나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적에 아리아신의 존재 자체야 믿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딘쿤이 말했다. “예에. 아리아의 성기사단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지요.” [생각해보셨나요?] 도도하게 묻는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들뜬 음성도 도도하기만 하던 얼굴에 드리운 미소도 그녀가 기뻐하고 기대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길드 내의 지원자들에 한해 성기사단을 조직하도록 도와드리죠.” [여신께서 기뻐하실 거에요.] 조금이라도 고맙다는 말은 없다. 마치 이것이 여신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만들어버린다. 딘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리아의 교단 사람도 아니건만 꼭 아리아여신을 위해 일하는 종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답도 확실했다. 그것이 메르디의 의지인지, 아니면 정말 그녀가 모시는 신의 의지인지는 모른다. 하나를 내어주면 꼭 하나의 보상을 돌려주었다. [3일 뒤 윌셔/웨스턴 역에 트라넷의 군대가 재침공할 거에요.] 그녀의 말에 딘쿤이 즉시 비서에게 눈짓했다. 비서가 응접실을 빠져나가더니 타이탄길드의 서부지부에 연락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메르디.” […….] 도도한 얼굴의 그녀 옆에 있는 해밀턴이 딘쿤을 나무랐다. “성녀님을 대하는 건 아리아여신을 대하는 것과 같아요. 예의를….” 딘쿤이 속으로 한숨 쉬며 다시 말했다. “성녀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세요.] “성기사단을 통해 이루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리아를 따르는 자들을 지켜내기 위한 일이에요.] 그거야 이미 타이탄 길드가, 더 나아가 미국의 경찰들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진정한 목적 말입니다.” [저는 거짓말을 못해요.] 그녀의 말에 딘쿤이 말을 바꾸었다. 그녀의 말이 진실뿐이라면 결국은 대답해 줄 것이다. “교단을 지키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이 무엇입니까?” […….] “그것을 알아야 적극적으로 타이탄이 성기사단을 조직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습니다.” 딘쿤의 말에 메르디는 잠시 뜸을 들였다. 언제나처럼 평온한 그녀의 표정은 변함없었으며 침묵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지구를 지키고, 고향을 되찾는 성전을 펼칠 거에요.] “고향이요?” [아르펜. 그곳에서 고통받는 아리아의 자녀를 구할 겁니다. 이것은 거룩한 성전이며 나아가 지구를 지키는 일입니다.] “으음.” 딘쿤이 신음했다. 그리고 고심했다. 성녀의 예지로 타이탄은 일주일 새 상위 던전의 보유량을 급격히 늘렸다. 거기서 나오는 혈석과 아티팩트들은 타이탄 길드의 세를 더욱 불려주었다. 타이탄에게 있어 메르디의 존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없었다. 그녀를 위한 성기사단 쯤은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주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말이다. 딘쿤이 걱정하는 것은 이 엄청난 이익에 대한 리스크였다. 달콤한 초콜릿이 비만을 불러오듯 이 달콤한 이익이 훗날 불러올 리스크가 걱정되었다. [상위의 던전이 끝이 아니에요. 그것은 발판일 뿐.] “으음.” 벌써 몇 번이나 들은 말이다. [그들의 침공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어요.] 이것이 침공이 아니라면 도대체…. 딘쿤은 어쩌면 이 달콤한 열매를 다른 길드와 어쩌면 세계와 나눠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부서진 골렘들의 잔해들이 즐비한 평원에 우진이 앉아있었다. 그 옆에 돌쇠와 비비가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성구는 강화석으로 증가 된 힘과 민첩으로 인해 신 나 있었다. “우하하, 형님 제가 힘이 더 세진 것 같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혈석캐기가 전보다 더 빨라지긴 했다. 우진은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성구를 지켜보았다. 혈석의 유통은 가속화되고 있고 각성자들의 활약에 차츰 줄었던 던전 브레이크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다. 트라넷의 졸개들. 아직은 지구의 마나가 적다고 치자. 에너지가 적어 실체화 하지 못하는 것이라 치자. 하지만 언젠가는 온다. 우진은 그 언젠가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트라넷의 72 군단장. 말이 졸개라 부르지 그들은 몬스터를 부리는 군단장이자 소환사였다. 하나하나가 위험한 자들인데 그 수가 많았다. 만약 그들이 지구에 한번에 나타난다면 모두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하지.’ 아르펜에 우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러 종족들이 있었으며 인간들도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있었다. 그 수많은 군집들이 트라넷이라는 공통의 적을 상대로 팽팽히 균형을 맞추는 정도가 전부였다. 우진의 영역이었던 아르달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불사의 군대를 제외하고도 우진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수만을 넘었음에도 겨우 하나의 균형추를 이루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지금의 우진에겐 그 수만의 불사의 군대도 없고, 추종자는 넷이다. 그중 각성자는 홍성구 하나. “야, 성구야.” “네, 형님.” “그만 캐고 이리 와봐.” “넵.” 성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증가한 근력과 민첩성에 신 나 있었다. 스스로 향상과 발전을 체감하면 신이야 나겠지. “부르셨습니까?” 순진하고 착한 놈이다. 그래서 마음에 들고 말이다. “보통 이사 정도면 어느 정도 등급이냐?” “B급 정도 됩니다.” “부사장은?” “A급 정도 되지 말입니다.” “흠….” 부사장이 6서클, 이사가 5서클이다. 다른 여타의 조직들의 구조를 봐도 지구를 통틀어 6서클은 소수고 5서클은 그나마 수가 꽤 되었으나 우진의 기준에서 볼 때 형편없는 전력이었다. 아르펜을 기준으로 한다면 말이다. 지구 자체의 전력의 질은 높아질 것이다. 마나가 풍부해질수록 그 속도는 더해 곧 7서클, 8서클의 능력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이들에게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느냐다. 이연희와 같은 능력자들에게 등을 맡길 수 있을까? 그 구리구리한 썩은내가 진동하는 영혼들에게 말이다.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도 능력이 출중한…. “너 부사장 할래?” “예에?” “6서클 아니지, 일단 A급까지 수련 좀 해볼래?” “…!” 성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애초 성구의 목표가 무엇이던가? 고위 각성자로의 발전이었다. 대형 길드에 가입을 기대했던 것도 그들의 지원 시스템 때문이고 말이다. “하겠습니다. 무조건 합니다.” 순수한 놈들은 더 높은 것에 대한 욕심이 열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었다. 열망이 있는 놈은 고통을 감내할 인내가 있었고. “힘들 텐데?” “아닙니다. 무조건 합니다.” “정말?” “목숨 걸고 하겠습니다.” “오케이.” 성구의 이글이글 거리는 눈빛을 보며 우진이 씩 웃었다. *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성구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집중을 잃지 않으려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집중을 잃는 순간 목숨이 위험해진다. “키키키키.” 수풀들을 해치며 소름 끼치는 괴성과 함께 해골병사가 튀어나와 성구의 머리를 노리고 뼈칼을 휘둘러왔다. 장난은 없다. 맞으면 죽는다. “흐읍.” 성구가 짧게 호흡하며 바닥을 굴렀다. 그의 손에 뭉쳐진 화염구가 해골병사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노렸다. 쾅! 전에 비하면 상당한 수준까지 오른 화염구 능력이지만 해골병사 하나를 즉사시키기엔 모자란 수준이었다. “키킥.” 머리가 검게 그을린 해골병사의 뼈칼이 무자비하게 성구의 목을 노려왔다. 성구가 앞구르기로 그것을 피하며 해골병사에게 접근했다. 한방이 안되면 두방으로. 성구의 오른손이 해골병사의 투구와 한뼘에 불과한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손바닥에서 화염구가 일었다. 쾅! 화염구가 바로 터지며 해골병사의 두개골이 바스러졌다. “키키킥.” 기뻐할 새도 없이 튀어나온 또 다른 해골병사의 등장에 성구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소리쳤다. “헉, 헉. 형님. 잠깐만 쉬면 안됩니까?” “키키킥.” 우진의 대답 대신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두 마리의 해골병사를 보자 성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두 마리도 겨우 상대하는데 벌써 세 마리를 상대하라니…. 아무래도 형님이 나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구나. 성구는 암담한 심정에도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진은 나무 위에서 성구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있었다. 스킬 ‘관찰’, ‘전사의 감각’, ‘정보 분석’까지 총동원해 성구를 보고 있었다. 당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며, 미워하면서도 좋아한다. 클래스 : 전투 마법사 능력 : 화염구, 위기감지 우진은 성구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 덕택에 하루도 지나지 않아 레벨이 3이나 오르고 위기감지 능력도 생겨났다. 우진은 성구에게 배우게 할 스킬 목록을 살폈다. 스킬북은 한정적이었다. 포인트상점에서 구입한 것들은 성구가 배우지 못한다. 그간 던전을 클리어하며 모아둔 스킬북중에 적당한 것을 배우도록 해야 했다. ‘배울 수 있는 게 있고, 못 배우는 게 있다고 했지?’ 스킬북이라 하여 만능은 아니라 마력을 주입해도 반응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우진의 예측에 클래스가 달라 배우지 못하는 것들. 관찰과 정보분석으로 성구의 클래스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큰 정보였다. 우진은 성구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스킬북을 추렸다. 몇몇은 아직 레벨이 낮아 습득하지 못하겠지만 두 개의 스킬은 배우게 할 수 있었다. “헉, 헉.” 우진이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성구는 셋이나 되는 해골병사를 해치우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극한상황에서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마련이다. 우진이 마력을 일으켜 근처의 시체 넷을 해골 병사로 만들었다. 주위에 널린 게 고블린의 시체였고, 시간은 4배나 느리게 흘렀으며, 성구의 성장은 눈부셨다. < 51화 - 이사 홍성구 > 끝 ⓒ 진설우 < 52화 - 이사 홍성구 (2) > “그쯤하고 이리 와봐.” “헉, 헉. 수고하셨습니다.” 정신도 몸도 상당히 지쳤음에도 꾸벅 인사부터 하는 성구를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이래서 이놈을 좋아하지. 다쳤는지 여기저기 상처 입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우진이 스피릿아머를 이루던 영혼 하나를 보내 성구의 상처를 치료했다. “후, 감사합니다.” 상처가 나으며 기력까지 회복한 성구가 한결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우진이 스킬북 두 개를 내밀었다. “일단 배워.” “예?” 성구가 낡은 책 두 권을 받아들고는 그것들이 내뿜는 은은한 마력을 느끼고는 눈을 부릅떴다. “형님. 이거 스킬북 아닙니까?” “맞아. 가속이랑 강철피부다.” 가속은 순간적으로 민첩성을 빠르게 늘려준다. 이미 갑옷에도 있는 스킬인데 공교롭게도 나가의 던전에서 스킬북도 주웠던 우진이었다. 그리고 강철 피부는 이곳 거인 신전에서 습득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어쩐지 점점 화염마법사의 꿈과는 멀어지는 것 같지만 벌써 능력을 몇 개나 깨우치다니…. “저 형님. 그런데 한두 가지 능력에 집중하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성구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다. 각성자마다 가진 에너지(마력, 기력)는 한계가 있었고, 여러 능력을 갖췄다 해도 모두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살고 싶으면 제때 쓰게 되어있어.” “…….” “빨리 익히기나 해. 혈석 처분하고 한바퀴 더 돌자.” “네, 형님.” 성구가 스킬북에 마력을 주입하자 스킬북 자체가 사라지며 빛으로 화해 성구에게 흡수되었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식과 능력의 감각에 성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써봐.” 성구가 즉시 몸을 움직였다. 순간적인 움직임이 사람의 눈으로 좇기 벅찰 정도로 빨랐다. 아티팩트를 이용했을 때보다 더욱 미세하게 제어되는 마력의 힘에 성구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이것도 익혀.” “넵.” 성구가 강철피부까지 익히자 우진이 말했다. “어때?” “예?” “팔 내밀어 봐.” 성구가 팔을 내밀자 우진이 뼈창 하나를 소환했다. 성구가 놀란 눈을 치떴다. “저, 저 때리시려고요?” “강철피부 활성화 해봐.” 성구가 강철 피부를 활성화하자 온몸이 뻣뻣해지는 느낌과 꿈을 꾸는 듯 붕 뜨듯이 몸에 대한 통제권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감각이 옅어지며 일어나는 잠깐의 괴리였다. 까앙. 우진이 휘두른 뼈창이 성구의 팔에 부딪히며 튕겼다. 우진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이군.’ 우진이 주변에 대기 중이던 해골병사들을 모조리 소환 해제하고는 성구에게 말했다. “나갔다 들어오자. 이번에 고블린들은 모조리 네가 맡아라.” “예에?” “충분하니까 엄살 부리지 마.”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아니, 던전에서 보낸 시간이 워낙 많다 보니 실제로 흘려보낸 시간이야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성구가 우진을 만난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일이었다. F급의 각성자로서 홉고블린의 전기충격 한방에 사경을 헤매던 홍성구는 이제 그 정도 급의 몬스터는 스스로 제압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넌 한 달 내에 A급 찍는다.” 우진의 말이 농담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성구의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대형길드? 이젠 다 필요 없다. 강우진의 길드야 말로 자신이 뼈를 묻을 곳이다. “예, 형님.” 우진과 성구의 던전 공략은 이틀간이나 계속되었다. * 서울로 올라가는 성구의 차안. 성구의 눈 밑은 다크서클로 가득했고, 머리는 까치집처럼 덥수룩했다. 이틀… 아니, 8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중첩된 피곤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우진이 준 몇 개의 스킬북도 익혔으며, 보조하기 위해 대구에 대기 중이던 김해민을 올려보내 우진이 직접 스킬북을 구하도록 지시했다. 그 모든 게 성구가 익힐 것들이었다. 그게 벌써 어제의 일이니 서울에 도착하면 성구를 위한 스킬북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성구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먹지않아도 배부르지만 잠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목숨을 내건 사투를 벌였던 던전과는 달리 이곳은 지구이니까. 긴장이 풀리며 참았던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아암.” 우진은 조수석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우진을 탓할 수는 없었다. 면허증도 없는 우진에게 운전하라고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성구가 할 수밖에…. [칠곡 휴게소 5km 앞] 성구는 휴게소까지만 참자는 심정으로 겨우 졸음을 물리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운전했다. 성구의 차가 휴게소에 진입하자 우진이 귀신같이 눈을 떴다. “형님, 안 주무셨습니까?” “그냥 눈감고 있었어.” 잔거 같은데… 아닌가? “잠 와?” “예, 조금. 커피 하나만 사오겠습니다.” “하암. 나도 같이 가자. 뭐라도 먹지 뭐.” 야밤의 휴게소는 제법 쌀쌀한 찬바람이 불었다. 이미 밤이 깊어 휴게소 밖의 매점은 문을 닫았고 휴게소 안의 편의점과 식당만 영업 중이었다. 우진과 성구가 라면과 우동을 시켜놓고는 잠시 기다렸다. 자꾸 고개를 숙이는 성구를 보며 우진이 스피릿 아머를 이루고 있던 영혼 하나를 보내 성구의 기력을 북돋았다. 일시에 피로가 풀리며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우진의 영혼갈취 스킬이 아니었다면 성구는 던전 안에서의 8일 동안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형님.” 육체의 피로야 나았지만 쉬고 싶다는 정신적인 피로는 여전했다. 우진이 막 나온 우동을 불어 한입 빨아당겨 우물우물 씹었다.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더니 말했다. “네 육체 피로는 풀렸어. 잠 같은 건 오지 않아. 나약한 정신이 몸의 휴식을 바랄 뿐이야. 최면이든 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내. 전쟁이 길어지면 열흘쯤 못 자는 건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니까.” “네, 형님.” 그런데 던전 안에서 열흘씩이나 보내야 할 일이 있을까? 던전 브레이크의 진압은 압도적인 화력무기의 도움으로 이제 하루 정도면 끝인데 말이다. 우진은 우동국물을 들이키며 휴게소의 벽에 붙어있던 티비를 보곤 실소했다. “나 알던 애랑 엄청 닮았네.” “어디 말입니까?” 성구가 등을 돌렸다가 티비에 나오는 엘프녀의 모습에 입을 헤 벌렸다. “히야, 정말 예쁩니다. 꼭 엘프 같습니다.” “엘프 아니네.” “예쁘지 않습니까?” “엘프라고 다 예쁘진 않아.” “…….” 지구의 한국에선 예쁜 여자보고 엘프라고 부르지 말입니다. 성구는 대꾸하려다 말을 삼켰다. 우진의 표정을 보니 엘프녀의 뜻을 아예 모르는 듯했다. 아니면, 엘프에 대해 잘 알거나 말이다. 성구가 말을 삼키는데 우진은 바쁘게 젓가락을 놀려 남은 우동 면발을 건져 먹고는 물을 들이켰다. “빨리 먹어. 애들 기다리는데 빨리 가야지.” “네, 형님.” 아, 명색이 각성자에 이사인데… 지원부의 도움도 없이 운전까지 도맡아야 하다니. 지원부에 고작 셋 뿐이니 일손이 많이 모자라긴 했다. 각성자 두 명을 서포트하는데도 제법 많은 지원부의 요원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길드 아르달은 그 재정적 여유가 충분했다. “형님, 이번에 올라가면 직원 좀 뽑지 말입니다.” “라면이나 먹어.” “넵.” 성구의 말이 아니더라도 생각하고 있었다. 지원부서야 민찬에게 맡겨두면 알아서 뽑겠지만, 우진은 전장의 동료가 될지도 모를 각성자를 더 충원할 생각이었다. ‘싹수 보이는 몇몇 뽑아서 가르치고.’ 새로 충원되는 인력은 또 그들이 가르치면 될 일이다. 우진이 신경써서 가르치는 건 성구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는 성구가 알아서 할 일이고 말이다. 우진은 라면을 허겁지겁 들이키는 성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천천히 먹어.” “헤헤, 네, 형님.” 실없는 놈. 이렇게 착해서 독해질 수 있을까? 가르쳐보니 의외로 몸을 쓰는 전투에 센스가 있어 조금 놀랍긴 하지만 말이다. 우진은 성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휴게소의 티비를 보았다. 아까 보았던 엘프녀가 마법 시연을 하고 있었다. 앉은 사람을 일으키고, 팔이 잘린 사람에게 팔을 선물하고…. “어?” 우진은 자신의 기억 속 그녀와 묘하게 닮은, 하는 짓까지 비슷한 화면 속 인물을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삼켰다. 그리고 화면의 아래 자막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허, 메르디?” 뭐지? 왜 쟤가 여기 있지? 자신처럼 차원관리자를 통해 왔는가? 만약 그녀가 트라넷에게 굴복되어 오크나 사이클롭스처럼 지구로 넘어온 것이라면… 그녀는 몬스터에 불과했다. 수많은 의문이 우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가서 물어봐야겠는데?” 아무래도 미국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 “수고했다.” “후아, 수고하셨습니다.” 사무실 건물에 주차한 우진은 영혼 하나의 에너지를 더 성구에게 주고는 사무실로 향했다. 새벽 2시였지만 길드의 사람들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우진을 반기는 정민찬을 보니 딱 할 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민찬보다 우진이 빨리 용건을 밝혔다. “미국 가는 비행기 하나 알아봐.” “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응?”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지? 우진의 표정을 읽고는 민찬이 얼떨떨한 음성을 뱉었다. “컨소시엄 초청 때문 아닙니까?” “뭐? 자세히 이야기해봐.” “얼마 전 타이탄 길드가 던전에서 사람을 하나 구출했습니다. 메르디라는 성녀인데, 사장님 던전에 들어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인터넷에 동영상이 뜨면서 엄청난 이슈를 불러왔습니다. 타이탄이 정보를 공개한 것이죠.” 우진도 안다. 아까 휴게소 티비에서 그것을 봤으니까. “그 일과 관련해 타이탄 길드가 세계 각지의 길드를 향해 컨소시엄을 요청했습니다. 안 그래도 이에 응할지 여쭤보려 했는데 가실 생각이시군요?” “뭐, 아무거나 표만 끊어놔. 그 메르디를 만나러 가야겠으니.” 우진의 말에 또 그가 사고 치지는 않을까 민찬은 조마한 심정이었으나 딱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수밖에. “뭐, 별일 없었지? 내가 말한 것들은 구했어?” “네, 구했습니다. 음, 그리고 몇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정민찬이 새벽임에도 퇴근하지 않고 남아있었던 것은 우진이 서울로 오자마자 알려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뭔데?” “어머니께서 아셨습니다. 막아보려 했지만 워낙에 큰 사건이라….” “뭘 알아?” “사장님이 6성 던전을 공략 성공한 것 말입니다.” “끙. 뭐래?” “걱정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은 재민 학생집 말고 집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이사는 어제 완료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굳이 좁은 단칸 원룸에서 함께 잘 것이 아니면 악령에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귀여운 재민이와 떨어지는 게 마음 쓰였지만 이제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다른 건 없어?” “있습니다.” “또 뭔데?” 우진의 물음에 민찬이 A4 용지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이게? 출석 요구서?” 서류 상단의 문구를 읽던 우진은 인상을 찌푸리곤 민찬을 보았다. “뭐야 이게?” “경찰서로 오랍니다.” “왜?” “화랑의 사장이 폭행죄로 신고 접수했습니다.” 이 새끼를 그냥? 우진이 인상을 팍 구겼다. < 52화 - 이사 홍성구 (2) > 끝 ⓒ 진설우 < 53화 - 가족의 의미 > “폭행? 내가?” 네, 사장님이 전국 생중계로 패셨지요. 그렇다고 그리 대답하지는 않았다. 모두의 침묵에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살짝 볼 터치 한 거잖아? 해민이 말 들어보니 방송에 잠깐 나왔다며?” 그 잠깐으로도 폭행한 사실은 변하지 않지…. 볼 터치 경험자인 승훈은 인상을 굳히고는 몸을 떨었다. “허, 아예 죽여버렸어야 했나.” 카메라도 돌고 있어 적당히 참았더니……. 충분히 자기 뜻을 알아 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넘어갔건만 폭행죄로 신고할 줄이야. 화랑의 길드 마스터는 아무래도 계속 자신과 엮이고 싶어 하는가 보군. 은원관계의 끝은 항상 누군가의 죽음으로 비롯된다. 그리고 우진은 항상 살아남아 왔다. “성구야. 운전 좀 해라.” “형님, 경찰서는 아침에 가도 됩니다.” 걱정스러운 성구의 말에 우진의 눈썹이 휘었다. “경찰서를 왜가?” “그, 그럼 어디 가십니까?” “화랑 길드로 가자.” “…….” 모두의 얼굴에 불안감이 엄습하자 우진이 슬쩍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 “잘 해결할게. 뭘 그렇게들 불안해 하냐?” 불안하지 안 불안하겠는가? 정민찬이 나서서 우진을 진정시켰다. 괜히 여기서 더 일이 커지면 문제였다. “이 건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출석요구서에 일일이 응하는 것도 우스웠다. 명색이 길드 마스터인데 말이다. 화랑도 우진 보고 폭행죄에 대한 공권력의 집행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뭐하러 귀찮게?” “귀찮아도 제가 귀찮지 않습니까?” 어라? 그거 말 되는데… 그러려고 길드 만들고 애들 고용하고 한 거긴 한데…. 우진이 열정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정민찬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아서 해.” 역시, 당사자만 귀찮지 않으면 상관없는 거구나. 민찬은 괜히 보고 해서 마음 졸인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럼 미국엔 언제 갈 수 있어?” “컨소시엄이 한 달 후입니다. 그때 가시면 될 듯 합니다.” “흠, 한 달이라.” 성녀를 만나보고 싶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야 뭐… 어차피 성구도 훈련해야 하고 말이다. “그럼 뭐, 굳이 내가 결재할 건 없잖아?” “있습니다. 하나만 해주시면 됩니다.” “인력충원에 대한 허가만 해주십시오.” 당장 이번 사건을 해결하자면 변호사도 뽑아야 하고, 지원부서의 인력도 확충해야 했다. “하는 김에 각성자들도 뽑아.” “음, 당장 급한 것이 아니라면 지원부서의 인력을 더 충원한 후에 뽑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각성자를 뽑아도 그들을 서포터할 인원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 그럼.” “넵, 그럼 모두 제게 맡겨주시고 사장님은 조금 쉬십시오.” 우진이 피식 웃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마냥 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지구가 아르펜처럼 생존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살벌한 동네가 되는 것은 싫으니까. “집에 간다. 내일 보자.” “네, 들어가십시오.” 우진이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전원주택 단지는 사당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천천히 걸어가도 될만했다. 전에 계약할 때 한번 왔었기에 길을 헤맬 염려 따위는 없었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우진은 발걸음을 멈췄다. “아, 집 비밀번호 뭐지…? 어머니 주무시려나.” 우진은 걸음을 멈추고는 전화를 꺼내다가 다시 집어 넣었다. 지금 시각 새벽 3시. 전장에서 단련되어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며칠 밤샌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 괜히 새벽에 소란 피울 것 없었다. “아침에 가지 뭐.” 우진의 발걸음이 번화가로 향했다. 우진과 다르게 피로에 지친 성구는 전화기가 꺼져있고 정민찬이나 김해민은 일 때문에 바빴다. 그렇다고 학생인 재민을 불러낼 수도 없고, 지원에게 연락하기 좀 그렇고…. 새벽 3시. 참 애매한 시간에 우진의 곁에서 함께 밤거리를 걷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승훈이었다. “사장님. 어디로 모실깝쇼? 말씀만 하시면 제가 취향대로 모시겠습니다.” 어떤 취향을 원하는 걸까. 우진은 길 건너에 보이는 간판을 턱짓했다. “저기 가자.” “예?” 5층짜리 건물은 학원 간판이 층층이 내걸려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갈만한 곳은 2층의 피시방 뿐이었다. “피시방 말입니까?” “그래. 가서 카오스나 한판 땡기자.” 게임을 해본 것도 거의 20년 만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면 벌써 설레었다. 고3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더럽혀지고 찌든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는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아르펜의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지 않은 순수한 시절의 그때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우진과 승훈이 피시방으로 향했다. 피시방을 둘러보는 우진은 감회에 젖은 얼굴이었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승훈은 우진의 건전한 취미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히 룸 같은데 데려갔으면 핀잔 들었겠구나. “여기 앉으시죠. 사장님.” “이게 얼마 만이냐.” 우진은 낯선 마우스 감촉에 몇 번이나 그것을 움직여보았다. 곧 익숙해진 그가 워크래프트를 찾을 때 승훈이 옆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사장님. 요즘은 카오스 안 하지 말입니다. 그거 인기 한물가서 게임 잡기도 힘들 겁니다.” “그래? 요즘은 그럼 뭐하냐?” 하긴, 5년이나 지났으니. 한국의 게임 유행 흐름이 어디 보통이던가. “카오스랑 비슷한 건데 요즘은 다 롤 합니다.” “그래?” 우진은 승훈의 도움을 받아 계정을 생성하고는 접속했다. “사장님. 이거랑 이거 고르시지 말입니다.” “어, 그래.” “일단 봇전 한판 하면서 저랑 바텀가시면 됩니다. 제가 차근차근 알려드리면서 해드리겠습니다. 승훈이 하자는 대로 게임을 세팅하고는 곧 시작되었다. “사장님. 막타만 치시면 됩니다.” 우진은 활을 쏘는 원거리 캐릭터였고 승훈은 기계 팔이 달린 서포터 캐릭터였다. 일렬로 줄지어 돌격하는 미니언을 따라 라인을 걸어가다 적과 마주쳤다. “카오스랑 비슷하네.” “여, 사장님. 가닥이 있어서 잘하실 겁니다.” 승훈의 아부를 들으며 우진은 오랜만에 재미를 느꼈다. 컴퓨터의 인공지능은 별 볼 일 없었고 무난하게 게임을 이겼다. 오랜만의 게임에 우진이 슬쩍 미소 지었다. “재밌네.” “그럼 봇전말고 큐 돌려보지 말입니다.” “그래.” “부캐로 오겠습니다.” 승훈이 레벨 5짜리의 계정을 가져와 우진과 같이 큐를 돌렸다. 역시 사람은 인공지능보다 월등했고 우진은 익숙하지 않은 게임에 자꾸 죽어버렸다. “아, 또 실수했네.” “하하하, 괜찮습니다. 사장님. 정말 잘하시는 겁니다.” 승훈은 애써 우진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고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창을 보며 조마조마한 심정을 달랬다. [야이 병시나 그만 좀 던져라.] [딸피만 보면 쳐들어 가냐? 약하냐?] [어머니 안 아프시냐?] [미니언 잡아서 보약이라도 지어드리고 해라.] “아, 근데 저거 욕하는 거냐, 걱정해주는 거냐?” “아하하, 착한 애들도 있고 나쁜 애들도 있지 말입니다.” “쯧, 그래도 애들이 효자네.” 애들이라… 고위 각성자고, 하는 행동이 워낙에 카리스마 있어 한 번씩 망각하게 되지만 우진도 24살이다. 승훈보다도 한참 어린 나이. 상급자라서 그럴까? 돌이켜보니 우진이 자신보다 어리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게 되는 승훈이었다. “하하, 채팅은 무시하는 게 좋습니다.” “아니야. 애들이 그래도 착하네.” [고맙다. 너희 어머니도 건강하시지?] 우진의 채팅을 보고 식겁한 승훈이 말릴 새도 없이 채팅창은 욕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야이 트롤색히야, 어디서 패드립이야.] [이 xxxxxxxx] “뭐야?” 당황한 우진이 혹시 화나기 전에 재빠르게 채팅을 꺼주었다. “하하, 원래 처음엔 다 이렇게 채팅 끄고 합니다.” “흠, 옛날에도 이렇게 심했던가.” 5년 전. 우진의 기억 속으론 20년 전에도 인터넷 익명을 빌어 악플이나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렇게 심했었나 싶었다. 채팅을 끄고 과외와 흡사한 승훈의 밀착 지도아래 한게임 한게임 흘러갔다. “하하, 사장님 라면 드시겠습니까?” “아, 좋지.” 피시방에서 먹는 컵라면만큼 또 별미가 없지. 우진이 추억에 잠겼다가 문득 깜짝 놀랐다. “지금 몇 시냐?” “예? 11시지 말입니다.” “젠장.” 해 뜨고 7시쯤 되면 집에 들어가려고 했건만 너무 재밌게 몰입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버리고 말았다. “나 집에 간다.” “예, 사장님.” “그래. 재밌었다. 수고해라.” “…….” 우진이 승훈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고는 흡사 정액 요금 떨어진 초등학생처럼 사라졌다. 승훈은 컵라면의 봉지를 뜯다 그대로 굳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옅은 감동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재, 재미있으셨데.” 좋았어. 사장님께 인정받았다. 길을 찾았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나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해답을 찾았다. “더 재밌게 해드리겠습니다. 사장님.” 승훈이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 띵똥. [누구세요?] “어머니 저에요.” 우진의 목소리에 부리나케 현관문이 열리더니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내셨다. 우진을 와락 끌어안더니 몸을 살피셨다. “아이고, 이놈아. 무슨 티비에 그리 자주 나와. 몸은 괜찮냐?” “하하, 괜히 티비에서 오버한거에요. 별일 아니에요.” “연속극 취소되고 뉴스 할 정도면 큰일이지 뭐가 별일이 아녀.” “수아는요?” “유치원 갔지. 그보다 정이사가 오늘 새벽에 너 온다던데 왜 이렇게 늦었냐? 새벽까지 기다리다 내가 잠들어서….” 아, 밤새 기다리신 건가? 어쩐지 눈가가 퀭한것이 피로해 보이셨다. 우진이 괜히 미안해 뒷머리를 긁적였다. 본의 아니게 던전을 돌다 보니 어머니께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았다. “하하, 아침에 오려고 했는데 피시방에서 게임 좀 하다 보니.” “…….” 머쓱한 우진의 말에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걱정은 걱정인데…. “하이고, 이눔아. 5년 동안 그렇게 게임하다 왔으면 됐지 또 게임이여.” 어… 그건 목숨을 건 게임이고, 이건 다른 건데… 추억을 되새기는…. 우진은 어머니를 겨우 진정시키며 이사한 자신의 첫 집으로 들어섰다. 집을 계약할 때 한번 보긴 했지만 또 이렇게 가구를 바꾸고 달라진 인테리어에, 내 집에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가구 보러 다니신다고 바쁘셨다던데, 역시 우리 엄마 센스있으시네.” “후, 네 방에 가보거라.” 어머니는 몰래 숨겨둔 장난감을 건네는듯한 기대 만발의 표정이셨다. 아, 또 날 위해 뭘 준비하셨나. 우진이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어?” 방은 별것 없었다. 촌스럽게 꾸며진 벽지와 낡은 책상과 책장 그리고 싱글사이즈의 침대. 다른 곳과는 아예 다른 분위기의 방에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다 중고를 산 듯한 책상을 한번 쓸어보았다. 방을 둘러보니 묘하게 낯 익었다. “어머니 이거….” “그래, 네가 전에 살던 방이 그립다고 하길래….” 밥 먹으며 흘리듯이 한 말인데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나 보다. 우진은 뭉클한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전에 쓰던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책상 찾으려고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기억난다. 중학교 입학선물로 아버지께서 사주셨던 책상이다. 여기서 공부했었지…. “아들은 목숨 걸고 그렇게 돈 버는데 어미는 해줄게 없어서…….” 그래, 가족 때문이었지. 그 고통 속에서 버티며, 괴물이 되어서라도 돌아오고자 했던 지구. 지구가 그토록 그립고 그리웠던 건 가족이 있어서였다. 우진이 어머니를 꼭 안아주었다. * 우진이 잠깐 방에서 눈을 붙였다. 비비가 머리맡에서 그런 우진에게 악몽의 저주를 내려주었다. “어? 오빠 신발이다! 엄마아아! 오빠 왔어?” 쩌렁쩌렁하게 들리는 수아의 목소리에 우진이 잠에서 깼다. “엄마아! 오빠가 강아지 데려왔어?” 거실에서 들리는 수아의 목소리에 우진이 아차 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시선이 침대맡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하는 고양이 모습의 비비를 향했다. “비비야.” “냥?” “절대 고양이 아닌 거 들키지 마라.” “냐앙? 왜 그러냥?” 우진이 비비를 안아 들고는 거실로 향했다. “수아야. 오빠가 수아 고양이 사왔다.” 우진의 말에 비비와 수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수아가 비비를 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고양이 말고 강아지랬잖아.” 머쓱한 우진과 좋지 못한 예감이 드는 비비가 서로 당황했다. < 53화 - 가족의 의미 > 끝 ⓒ 진설우 < 54화 - 가족의 의미 (2) > 비비앙 로드리오 어둠뿐인 마계에서 태어나 주인님인 강우진과 계약해 처음으로 세상을 보았다. 주인님은 강하셨고 그 권속들 또한 대단했다. 아르달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고 트라넷의 졸개들 또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불사의 땅을 찾아 들어온 추종자들도 많았다. 그러던 중 주인님은 차원의 관리자와 접촉하는 법을 알아내셨다. 그리고 모든 게 끝이었다. 어둠뿐인 봉인의 방에서 기다리길 한세월. 비비가 처음으로 우진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아르펜이 아닌 지구였지만 상관없다. 우진이 가는 곳이 비비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이곳은 주인님의 새로운 보금자리. 주인님을 탄생시키신 위대한 여성체 인간과 주인님의 여동생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주인님은 강수아라는 어린 여성체 인간에게 자신을 맡기고 가버렸다. 밤마다 주인님을 괴롭히는 악령을 쫓기 위해 함께 하지만 더 이상 사냥에는 함께하질 못했다. 주인님과 함께 사냥해야 나의 레벨도 오른다. 전에 잃어버린 힘을 되찾아야 하건만 주인님으로부터 더 귀한 임무를 부여 받았다. 수아라는 꼬마인간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꼬마인간은 한시도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다. 주인님이 자신을 남겨두고 사냥터로 떠난 지 1일째. "비비야. 잡아!" 수아라는 꼬마인간이 쏜 레이저 포인트가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아, 귀찮은 인간. "피, 뭐야. 고양이가 뭐 이래?" 꼬마인간의 실망한 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하찮은 놀이에 동참해줘야 한다니…. 어슬렁 일어서서 포인트를 쫓았다. "푸하하. 이거 잡아봐라." 재빨리 레이저 포인트를 휙 치우는 모습이 약이 오른다. 재빨리 다시 쫓았으나 레이저 포인트는 저만치 멀어졌다. "냐아아아앙." 감히 서큐버스의 피가 흐르는 나를 자극하다니. 저깟 빨간 점. 내가 잡아주지. 재빨리 휙휙 레이저 포인트를 쫓았으나 잡힐 리 만무했다. "냐냐냐."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며 뛰어가다 테이블의 다리를 못 봤다. 콩. "어? 비비 괜찮아?" 수아가 깜짝 놀라 다가왔으나 비비는 괜히 머리를 홱 돌렸다. '쳇, 이따위 놀이에 집중하다니.' 꼬마인간의 술수에 놀아나다니… 딱히 재밌어서 집중했던 건 아니다. 그저 고양이를 연기하기 위해 놀아줬을 뿐이다. 소파로 훌쩍 뛰어 올라 자세를 잡고 웅크리고 앉았다. "비비, 언니가 캔 줄까?" "냐앙." 고양이캔은 제법 먹을 만하지. 얼른 내려가 다리를 비벼주니 좋다고 까르르 거리는 꼬마인간이었다. '하, 주인님 빨리 돌아오라옹.' 다시 주인님과 돌쇠찡,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사냥을 하고 싶었다. * 서울대 입구역 6번 출구. 길드 아르달의 주력 수입원인 5성의 던전이다. 나가들이 출몰하는 사막 맵이자, 강우진이 작성한 공략집이 워낙에 조악하고 맵이 넓으면서도 난이도가 있어 예약스케쥴이 빽빽하지는 않았다. 우진은 빈 스케쥴은 모조리 예약을 걸었다. "준비됐냐?" "넵!" 다부진 표정으로 답하는 성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우진이 전사의 감각으로 보이는 성구의 레벨은 37이다. 40레벨 대에 진입하면 일단 4서클, C급이다. 민찬이 해머길드에 있을 때 조작한 성구의 등급이 현재 D급인데 그것을 넘는 것이다. "가자, 그럼." 예약한 시간은 12시간, 던전 안은 2일이다. 이틀이면 뭐…. "살아서 나오면 넌 C급이다." "네, 형님!" 성구의 음성에 힘이 느껴졌다. 이제 우진이 팥으로 메주를 만든다 해도 믿을 것이다. 성구가 앞장서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 입장 4시간 경과. 성구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쓰러진 그의 시야 속에 세상이 점점 사라지기 전 알 수 없는 기운이 쑥 들어온다 싶더니 급격히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혀, 형님." 영혼갈취로 성구가 딱 죽기 직전에 에너지를 회복시킨 우진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거, 아직 솔로 플레이로 4성 던전도 무리겠는데." "……." 예, 형님. 보통 4성던전을 C급이 혼자 돌진 않습니다. 더욱이 지금 나가의 사막신전은 5성의 던전이었다. "잘 봐. 몬스터들의 특징이나 약점들을 모조리 익힌다고 생각해. 힘이 달리면 요령이라도 좋아야지." "네, 형님." 사경을 헤맨 직후의 휴식 따위는 없다. 우진의 한마디 한마디를 피에 새기는 심정으로 들었다. "여기 나오는 것들이 거의 독을 품고 있긴 한데. 이놈 고기는 거의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거야." 우진은 끔찍하게 생긴 웜의 고기를 적당히 해체해 불에 구웠다. 딱히 장작을 모으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화염마법을 일으켜 초고속으로 구워지는 고기. 맛은 별다른 게 없었다. 그저 바짝 마른 텁텁한 황태포를 씹는 기분이다. 미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먹는 요리다. 우진은 성구에게 전투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생존, 몬스터를 만나 이기는 법과 그것들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가르쳤다. 정면에서 안 되면 피해서 몸을 숨기고 기회를 노리면 된다. 전투의 기술과 사냥의 기술 모두를 전수중이었다. "여기서 상대하기 곤란한건 나가들뿐이야. 나약해 지지 말고 지레 겁먹지 마. 모두 네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야." "네, 형님." 우진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성구는 기력을 회복하고는 다시금 투지를 불태웠다. "뭐, 지금도 1:1까지는 어떻게 되겠지. 2마리면 무조건 죽을 테고." "……." "아, 또 뭐 그렇게 똥마려운 표정이냐. 무조건 1:1로 붙여줄게." "예, 형님." 우진과 성구는 나가들의 버려진 도시 라그리시아에 도착하자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도시 곳곳에 산재한 나가들을 굳이 도발해 한곳으로 모으지 않았다. 본래 미로와 같이 얽혀진 도시다. 우진은 길목 사이사이 뼈의 장벽을 치고는 성구가 나가와 1:1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두 마리가 나타나면 한 마리를 죽여 버리고 나머지 하나를 성구가 해치우도록 만들었다. 나가 전사들은 용맹하고 강하다. 잠깐의 방심이나 허점도 그냥 지나칠 리 없었고, 성구는 아직 미숙했다. 슈우, 푹! "허윽." 배를 관통당한 창을 보곤 성구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죽음의 공포에 머리가 노래지며 아프다는 생각뿐이었다. 나가 전사의 얼굴에 승리자의 미소가 지어지는 그때. 휘익, 쾅. "뀌익." 우진이 휘두른 망치가 나가의 머리를 그대로 깨부쉈다. 우진이 성구의 배에 찔린 창을 무심히 보았다. "혀, 형님." "곧 죽을 놈이 날 찾아 뭐해?" "……!" 성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배를 관통한 창을 쥔 손에 점점 힘도 빠져온다. "배때기 구멍 뚫렸으면 어떻게 해서든 그놈 대가리라도 날렸어야지. 새로 배운 기술은 그새 까먹었냐?" "죄,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한 게 아니야. 어차피 네 목숨인데 왜 나한테 죄송해야 하냐?" "……." 공격을 허용 당했으면 어떻게 해서든 반격을 가해야 했다. 그저 멍청히 있는 건 그대로 상대의 처분을 기다리는 패배자의 행동이다. 성구는 기회가 있었다. 멈칫한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살고 싶으면 창 뽑아." "……." 성구가 배를 관통한 창을 보았다. 이걸 스스로 뽑으라고? 아픈 건 둘째 치고 창자도 그대로 딸려 나올 텐데… 고통은 참을 수 있으니 형님이 해주시면 좋으련만…. "죽으면 네 영혼은 씽씽이 간식으로 줘야겠다." "으으으." 성구가 창을 잡고는 힘을 주었다. 겁이나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습게도 죽는 게 겁나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생겼다. "끄어억!" 창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척추가 비틀린다고 생각할 정도의 극악한 고통을 맛봤다.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이런 건가? 배가 사라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 "끄아아." 저절로 무릎이 굽혀졌다. 쑥 뽑혀져 나오는 창날에 소장인지 대장인지 모를 내장이 삐죽 나온 게 보인다. 핏줄이 다 터져 시뻘게진 성구의 눈알이 그것을 보았다. 한손으로 창자를 받치고는 한손으로 창을 뽑아냈다. "크악!" 쑥 뽑혀져 나온 창날에 구멍 난 상처 사이로 핏물이 넘쳐흘렀다. 손으로 막아봤으나 소용없었다. 등짝에 뚫린 상처 사이로도 피사 뿜어지는지 엉덩이 골을 타고 흐르는 피가 그대로 느껴졌다. 급격하게 흐려지는 의식과 무거워지는 눈꺼풀 너머로 씩 웃고 있는 우진이 보였다. 머리가 터져 죽은 나가의 영혼이 쑥 뽑혀져 오더니 성구에게 흡수되었다. 핑핑 돌던 세상이 멈추며 상처가 빠르게 나아갔다. 영혼 하나로는 모자라 스피릿아머를 이루고 있는 영혼 두엇을 더 뽑아 흡수시켰다. "뒤지게 아프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네…." "살고 싶으면 독해져야해."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이 독해졌다. 그런데 아직 모자랄 뿐. "당장 나 없어져봐. 어떻게 할래?" "……." 형님이 사라지면 던전에 들어오질 않았겠죠. 아직까지 하급 던전 돌면서 그냥 혈석광부일이나 했겠죠. 그런 성구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우진이 씩 웃었다. "몬스터들이 언제까지 던전에 있을 것 같지?" "예?" 아픈 와중에도 물었다. "상상해봐. 지구의 모든 지하철역이 동시에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고. 참 볼만하겠어. 그지?" "……." 황당하고 황당한 이야기. "사냥? 혈석? 당장 먹을 거 구하기도 쉽지 않을 걸? 60억 인류? 내 장담하는데 절반으로 줄어드는데 3일이 안걸릴 거야." 성구는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를 어디 동화 읽어주듯이 차분하게 전하는 우진이 처음으로 낯설다고 느꼈다. "혀, 형님." "난 내 가족 지키는 정도로 족하지. 트라넷 새끼들 쳐들어와봐야 어차피 지구 전부를 먹는 덴 시간 걸릴 테니까." 아르펜도 그 수십 년의 세월을 버텨왔다. 지구라고 못할 것은 없었다. 지금과 같은 평화의 시기가 꿈같은 날이겠지만 말이다. "열 받지 않냐? 누가 내 앞마당에 허락도 없이 발도장 찍는 거?" "……." "너도 네 가족 지키고 싶으면 너무 물렁물렁 하지마." "……." 뭐지? 갑자기 생기는 이 위기감은? "놈들이 쳐들어오면 네 등 뒤에서 너 하나 보고 지켜줄 짬이 없어. 살아남는 건 스스로 해야지." "……." 우진의 말은 진심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성구의 뒤에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 전장의 앞에 설 것이니. 죽지 않고 우진의 뒤를 따르려면 성구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한다. 그것도 많이, 그리고 더 빨리.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오로지 성구의 몫이다. * 아침 7시부터 시작한 던전이 저녁 7시가 되어서 끝났다. 녹초가 되어버린 성구와 평소와 다름없이 희희낙락한 미소를 띤 우진이 사무실을 찾았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우승훈이 쩌렁쩌렁하게 답하자 여기저기서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사무실의 빈 책상들이 제법 괜찮은 주인들을 찾은 것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들이 우진을 보며 분분히 인사했다. 경력자도 있고, 아예 신입들도 있을 것이다. 정민찬이 알아서 잘 뽑았을 것이고 알아서 잘 통제할 것이다. 몇몇 영혼이 구리구리한 놈들이 있었지만 뭐…. "그건 준비했냐?" "물론이지 말입니다." 우진의 말에 승훈이 자신만만해하며 우진을 휴게실로 안내했다. 직원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휴게실의 한쪽에 유리책상들이 쫙 나열되어있었고 커다란 모니터와 최사양 컴퓨터가 자리해있었다. 정확히 5대의 컴퓨터 풀 세팅. "저건 뭐냐?" "사장님을 위한 특별 게임룸입니다. 제가 신입들 죄다 조사해봤는데 다이아가 2명 있었습니다. 플레도 1명 있고… 헤헤, 팀랭은 문제없습니다. 저희는 버스 받기만 하면 됩니다." 정작 티어 실버2의 우승훈의 자신만만한 말에 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뻘짓도 가지가지 한다. 그거 말고 준비하라고 한 거는?" 이게 아니었나? 우승훈이 잠깐 당황하더니 우진이 아침에 지나가듯 한 말이 떠올랐다. "아, 강아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물론 준비했지 말입니다." 승훈이 휴게실 한쪽에 있는 철창을 가져왔다. 허벅다리만 한 강아지였는데 척 보기에도 대형견의 새끼 같았다. "마스티프라는 견종으로 이놈 아비가 투견대회에서 날리는 놈입니다. 제가 정말 어렵게 공수했습니다. 어미도 튼실한 놈이라 다 자라면 80킬로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장님의 애완견이면 이정도 급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아, 이놈은 왜 항상 오버해서 이럴까? "여동생 줄 건데? 7살짜리한테 어울려?" "……." 승훈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하지만 판매원 경력 8년의 짬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마스티프죠. 이놈은 이거 제대로 대형견종의 피를 이어받아서 초대형견으로 클겁니다. 여동생을 지키는 든든한 보디가드가 될 겁니다. 사장님이 출타 중이실 때 집을 지킬 충실한 놈입죠." …묘하게 설득력 있는데?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 54화 - 가족의 의미 (2) > 끝 ⓒ 진설우 < 55화 - 가족의 의미 (3) > 주인님 없이 집을 지키는지 4일째. 비비는 한숨을 쉬었다. “어휴” 꼬마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보면 놀아달라고 보챘고, 주인님은 이틀 전 강아지 한 마리를 투척하고는 사라져 이틀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꼬마인간은 강아지를 이미 다 큰 개라 부르며 울었고, 여전히 자신을 향해 레이저포인트와 낚시대를 들이밀었다. 그래도 꼬마인간이 유치원에 가있는 한낮은 비비의 자유시간이었다. 오늘은 주인님을 낳으신 위대한 어머니도 밖에 출타 중이었기에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고양이의 모습이긴 하지만 굳이 고양이인 척 할 필요는 없었다. 비비가 냉장고를 열어 연어를 꺼냈다. 실체화 모델로 잡은 몸뚱이가 이래서 그런지 꼭 식성이나 행동도 묘하게 본능을 따랐다. 연어를 봉지째 꺼내 랩을 벗기는 비비를 향해 그 녀석이 다가왔다. “으르르릉, 컹, 컹.” “에휴, 저리 가라옹.” 비비가 귀찮게 녀석을 쫓았다. 주인이 던져 주고 간 골칫덩이. 강아지 주제에 자신보다 더 덩치가 큰 놈이다. 아무래도 꼬마인간은 작은 강아지를 원한 모양이었다. “으르릉, 컹.” “누렁아 저리 가라옹.” 누렁이라는 성의 없는 이름이 붙어버린 강아지가 여전히 비비를 보며 으르렁 거렸다. 덩치도 작은 녀석이 탐나는 먹이를 가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만만히 보고 뺏으려는 모양이었다. 비비가 콧웃음 쳤다. “네가 기어오를 짬이 아니다옹.” “으르릉.”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누렁이를 보곤 비비가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어쩌다 개에게까지 만만한 취급을 받는 신세가 되었던가? “좋은 말로 할 때 저리 가라옹.” 비비가 휘두른 분홍 발이 누렁이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퍽! “깨갱, 깨잉.” 누렁이가 깜짝 놀라 황급히 도망쳤다. “어휴, 주인님은 언제 돌아오실는지.” 주인님은 던전에서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레벨이 올라서 온다. 비비도 얼른 레벨을 올리고 예전과 같은 강력함을 되찾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재깍재깍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조금 있으면 꼬마인간이 유치원에서 하원 할 시간이었다. * 아르달의 길드 사무실. <‘마력의 결정’을 섭취합니다.> <마력 스탯이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 우진은 스탯을 올려주는 강화석을 흡수했다. 재섭취 딜레이가 걸릴 때까지 꼬박꼬박 강화석을 먹어주는 우진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성구도 우진이 준 강화석을 흡수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상처 입은 성구는 어딘지 모르게 거친 야생의 기운이 느껴졌다. 근처의 5성 던전이나 6성 던전의 예약을 잡을 때마다 성구와 함께 다니며 여러 몬스터를 경험시켜주고 있었다. 아직은 대부분의 몬스터를 우진이 잡고, 성구는 일부분의 몬스터를 잡는 것 뿐이지만 그 일부가 중요했다. 성구가 상위던전의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C급의 4서클 능력자다. 목숨의 극한에서 발휘되는 능력들의 활용에 빠르게 강해지는 성구였다. 똑똑. “들어와.” 노크소리와 함께 정민찬이 상자하나를 들고왔다. “사장님 말씀하신 스킬북입니다.” “드디어 구했네.” 우진은 상자를 받아보고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가 지시한건 3개인데 2개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하나는?” “4서클의 스킬북은 굉장히 고가입니다. 꼬박꼬박 사들이고 있는 강화석에 더해 길드 재정의 대부분을 아이템 구입에 쓰고 있습니다.” “돈이 모자라?” “예, 그렇지만 적자는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듯 합니다.” 이미 6성 던전 하나와 5성 던전을 보유해 벌이야 좋지만 그 금액이 굉장히 크지는 못하다. 쓰는 돈이 쓰는 돈이다 보니 처음에 쌓아두었던 여유자금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아이템은 우진의 스탯을 올려주는 강화석 지출에도 쓰였지만 지금은 성구를 강하게 하는 아이템을 사느라 더욱 많이 쓰였다. 길드의 자금은 던전에서 나온다. 보유한 던전을 늘리던가, 던전을 공략할 각성자를 늘리던가. “어디 리셋되는 던전 없어?” “여간 운이 좋지 않고서야 겨우 신생인 저희가 선점하기 쉽지 않습니다.” 서울대입구역도 정말 시기가 맞아서 우진이 공략했지, 그것이 아니었다면 화랑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비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던전리셋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던전에 도전할 기회를 갖는 게 쉽지 않았다. 기존의 대형길드들과 중소형 길드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아르달이 그 틈을 비집고 경쟁에서 성공하기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하다못해 바로 코앞의 사당역 또한 대형길드인 해머길드와 경쟁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역에 지부를 둘 정도로 아르달이 큰 것도,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터지기 전의 6성 던전이라도 있는지 알아봐.” 성구를 훈련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레벨업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획득하는 경험치가 많이 줄었다 하지만 6성 던전은 여전히 우진에게 많은 경험치를 주었다. “네, 알겠습니다.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화랑은 어떻게 됐어?” “그 건은 아직 협상 중입니다. 조만간 마무리될 듯 합니다.” “너무 봐주지 마. 정 안되면 들이받아 버리지 뭐.” 우진의 말에 정민찬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가 바짝 긴장한 얼굴이 되자 우진이 희게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하하, 사장님께서 신경 쓰시지 않도록 빨리 마무리 짓겠습니다.”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민찬은 이번 건을 최대한 빠르게 협상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럼 구하면 바로 연락해.” “넵. 6성 던전은 특성상 국방부에서 연계된 것이 많습니다. 일정 부분 수수료율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공략을 포기한 6성 던전이라면 곧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직전의 던전이리라. 국방부에서 담당하는 것도 이해되었다. “더 잘됐네. 빨리 까고 국방의 의무나 다 하자고.” 금전적 손해 따위야 조금 보더라도 어차피 경험치는 독식하게 될 터였고, 수수료율도 던전을 공략한 우진 쪽이 더 많이 가져간다. 6성 던전의 공략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도 전혀 손해가 아니다. “네, 그럼 최대한 빠르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규 각성자 모집은 언제로 일정을 잡을까요?” “그거? 미국 갔다 와서 하자고.” 그전까지 성구를 빡빡하게 굴려 A급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몬스터에 대한 정보와 지식까지도 모조리 욱여넣고 있으니 새롭게 각성자들을 늘려도 성구가 알아서 잘 키워 낼 것이다. “그럼,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일봐.” 용무를 마친 민찬이 나가고 사장실에 우진과 단둘이 남게 되자 성구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형님, 저한테 이렇게 투자할 가치가 있으실지….” 성구는 대형길드의 특급 각성자처럼 관리와 지원을 받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꽤 부담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우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우리 잡무이사가 세져야 내가 편해지지.” 아, 그놈의 잡무…. “돈은 어차피 수단이야.” 돈 써서 강해지면 그뿐이지, 모아둬서 뭣하겠는가? 돈이야 어차피 던전 공략을 멈추지 않는 한 계속해서 모일 것인데 말이다. “괜히 돈 아까워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안 죽고 오래 살까부터 생각해. 이렇게 키워놨는데 나중에 쓸 일이 해골병사 소환 매개체 정도로만 쓰이면 그게 얼마나 억울하냐?” “그, 그러게 말입니다.”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우진을 보며 성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우진이 그런 성구를 보고 피식 웃었다. “3성 던전 예약이 언제였지?” “6시입니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 됩니다.” “그래, 고생하다 가라.” “넵.” 성구는 처음으로 혼자서 3성 던전을 도전할 생각이었다. 그간 상위 던전을 돌았지만 모두 우진과 함께였다. 성구에게 있어 우진이 있고 없고는 생존을 보장받느냐 못 받느냐의 차이일 정도로 컸다. 처음으로 그가 없이 홀로 3성 던전을 도전하는 길이니 절로 긴장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감 가져 임마.” “넵, 형님.” C급의 각성자다. 최초도 아니고 이미 공개된 3성 던전을 공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성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실력이었다. “그럼 수고해라.” “네, 형님도 가족분들하고 좋은 시간 나누십시오.” “그래.” 우진은 성구와 사무실 식구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약속했다. 가족들이 그리워 지구로 돌아왔고, 그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레벨업하며 강해지려는 우진이, 아이러니하게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었다. 앞으로의 암울한 미래를 위해 지금 서둘러 대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현재를 내팽개칠 수도 없었다. 우진에게는 순간순간이 소중한 시간. 20년을 바라왔던 시간이니까. 집으로 귀가한 우진을 누구보다도 반긴 것은 수아였다. “오빠!” “아이구, 우리 수아 오빠 기다렸어?” “응, 헤헤.” 아이라 그럴까? 수아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적응이 빨랐다. 큰 집이 생기고, 근처의 보안이 좋은 유치원으로 옮겼다. 어려서 그런가 친구들과도 금세 친해졌고, 하루하루가 재밌다는 수아였다. 반면, 어머니는 그간 아둥바둥 살다가 아들이 돌아오고는 급격하게 변화된 환경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셨다. 그만두라고 했지만 얼마 전부터 승미식당에 가서 일을 도와드리는 듯했다. 다분히 돈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불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우진은 슬슬 어머니 가게라도 하나 차려드려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했다. “아들, 씻고 있어. 금방 맛있는 저녁 대령할 테니.” “옙.” 뭐, 저녁 먹으며 말해보지. 우진이 샤워라도 할 요량으로 욕실로 가려는데 그의 발길을 막는 존재가 있었다. 비비가 뒷발로 일어서서 우진의 다리에 꼭 매달렸다. “뭐야?” 비비가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우진에게로 훌쩍 뛰어올라 어깨에 올라타 귓속말했다. “주인님. 나 좀 데려가 달라옹.” “어딜?” “심심해 미치겠다옹. 돌쇠찡과 함께하는 피 튀기는 전장이 그립다옹.” 비비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집에서 뒹굴 거리니 어지간히도 무료했나 보다. 전장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천생이 악마는 악마인 모양이었다. “수아는 좀 어때?” “말도 마라냥. 어디서 무식하게 큰 강아지를 데려와서는 강아지랑 잘 놀지도 않고, 자꾸 나만 귀찮게 군다냥.” 고양이라 싫다더니 이제는 비비가 그리도 좋은지 잘 노는 수아였다. “비비야! 어딨어?” 거실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비비의 큰 눈망울이 떨렸다. “주인님. 부탁한다옹. 차라리 날 가출한 걸로 해달라냥.” 그러면 밤에 데리고 같이 잘 명분이 사라지는데. “음, 방법을 생각해보자.” “꼭이다옹. 다음 전장엔 꼭 나를 데려가달라옹.”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비가 안심하고는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비비, 언니가 찾았잖아. 어디 갔었어?” “냐아아아.” 거실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우진이 슬쩍 미소 지으며 샤워했다. 잠시 뒤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에 세 사람이 앉았다. “오늘 무슨 날이래요?” “아들 많이 먹어. 고생 하잖니.” 우진을 바라보는 어머니 이수경의 얼굴엔 고마움과 든든함이 함께였다. “오늘 승미네 갔었는데 아들 생각보다 더 큰 일 하더라?” 티비를 잘 보질 않으시니 세상 돌아가는 일에 느린 어머니였다. 승미식당에서 동료 아주머니들이 또 뭐라 한 모양이었다. 우진이 지레짐작하고는 말했다. “에이, 별로 안 위험해요. 걱정할 것 없어요.” 우진의 말에 이수경이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어미도 귀가 있어 위험한 일이란 걸 안다.” “음, 그게….” “걱정 마라. 아들이 큰일을 하는데 어떻게 내 욕심 하나로 막겠더냐. 어미 걱정하지 마라.” “어머니….” 우진이 이수경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런데 들으니 여자친구가 있다던데….” 아, 그것도 들으셨구나. “네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니 빨리 결혼해 대를 잇는 것도 나는 괜찮다 생각하는구나.” 진지한 이수경의 말에 우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머니, 너무 앞서 가십니다. 우진이 한번 지원을 어머니에게 소개는 시켜주어야겠다 생각했다. 한창 가족과의 즐거운 식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우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민찬의 이름에 우진은 미소 지었다. [사장님 공략 대기자가 없는 던전을 찾았습니다.] 공략 대기자가 없다는 것은 던전 브레이크를 기다리는 던전이라는 소리. 우진으로서는 경험치와 아티팩트의 보고나 다름없었다. “어디래?” [평양입니다.] 우진이 귀를 쫑긋했다. 잘못 들은 거 아니겠지? “북한?” [네, 사장님.] 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평양, 평양 했더니 진짜로 가게 될 줄이야. < 55화 - 가족의 의미 (3) > 끝 ⓒ 진설우 < 56화 - 평양에서 외치다 > 사당역의 카페 엔젤엔젤. “어?” 도지원은 자신이 잘못들은것은 아닌가 싶었다. “어디간다구?” “평양.” “…거기 북한 아니야?” “맞아. 가서 던전하나 깨고 오려고.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갔다와서 가족끼리 인사라도 할까?” “어?” 어떻게 하면 평양 가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보다 가족끼리 인사라니…. 지원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그냥 밥이나 먹자고. 너 일도 그만뒀다며?” “어? 으응. 빚도 거의 다 갚았고….” “빚이 있었어?” “나 다쳤을 때 병원비 때문에.” 던전 쇼크가 19살 때의 일이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장례식에 또 큰 부상과 상처에… 세상 물정 몰라 여기저기 빚이 생겼다. 얼굴이 다치지 않았으면 어쩌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나쁜 길로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그럼 이제 뭐할 거야? 길드 나와서 일해볼래? 아니면 나 카페 하나 차릴까 생각 중인데 생각 있어?” “응? 카페?” 우진만큼 뜨거운 각성자가 어딨다고 뜬금없이 카페개업인가? 그냥 하위 던전을 돌아도 카페수익보다는 월등히 많이 벌 텐데 말이다. “어머니 심심해 하시는 거 같아서.” “아, 괜찮아. 나 빚 다 갚으면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 “뭔데?” “로맨스 소설 작가.” “응?” 너무 뜬금없는 말인지라 우진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 어색한 침묵에 지원이 부끄러워 볼이 빨개졌다. “그, 그냥. 취미 삼아 해보려고.” “멋지네.” “응?” “멋있어. 나중에 읽어볼게.” 자신이 쓸 글을 읽어본다고 하자 지원의 볼이 더 빨개졌다. 괜히 부끄러워 말을 돌렸다. “아참. 얼마 전에 동창회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네 전화번호를 묻길래 일단 알려주진 않았어.” 지원은 사고로 얼굴을 잃고 친구들과 멀어졌다. 방황을 끝내고 일을 시작했을 땐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우진이 유명해져 티비에 나오면서, 또 그런 우진과 함께한 지원이 전파를 타면서 동창들의 귀에도 들어갔는가 보다. 행방불명 소년과 괴물소녀가 인기남과 미녀가 되어 인터넷 포털을 장식했으니 알아본 동창들이 있었다. “그래? 오랜만에 친구들 보겠네. 이거, 이름이나 기억 나려나. 평양 갔다 오면 한번 연락해서 보자.” 미국 가기 전에 잠깐 시간이 날듯 싶었다. 우진의 말에 지원이 깜짝 놀랐다. “어? 같이?” “같이 보면 되지. 왜?” 흐릿하게 떠오르는 몇몇 얼굴들과 이름들이 있었으나 누가 누군지 잘 매치되지 않았다. 20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만나게 되는 친구들이니 말이다. 우진보다는 못했지만 지원도 거의 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친구들이다. 우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 같이 만나자.” 지원은 친했던 친구들이 많았다. 아니, 친하다고 생각했었던 친구들이 많았다. 지원의 미모는 독보적이었고 주변엔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얼굴을 다치고는 하나 둘 떠나간 사람들이다. 몇몇이 동정 어린 시선을 주었지만 그마저도 지원이 스스로를 가두며 연락이 끊겼다. 돌이켜보니 고교 시절에는 딱히 친분도 없던 우진만이 옆에 있었다. 그것도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을 찾아준 은인으로 말이다. “그럼 바쁠 텐데 이제 가봐.” 우진이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였다. 12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슬슬 출발하긴 해야 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응?” “평양까지 가는데 뭐 선물이라도 사와야지.” “풋.” 우진의 말에 지원이 실소하고 말았다. 우진의 이야기만 들으면 별 대수롭지 않은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듯한 뉘앙스였다. 아무리 가깝다지만 한국사람들에게 아직 북한은 멀고도 먼 땅이었다. “평양에 뭐가 유명하더라….” 우진이 기억을 되새겨봤지만 친구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마당에 평양의 특산물이 떠오를 리 만무했다. “어디 다치지만 말고 돌아와.” 지원이 우진의 얼굴을 쓰다듬듯 만졌다. 상처는 말끔히 나아있었다. “긁힌 것 가지고 뭘, 그럼 아무거나 보고 사다 주지.” 상처도 죽음의 고비도 너무 익숙하기 때문일까. 우진은 부상당하는 것에 무덤덤 하기만 했다. * 각성자 관리국 특수방위 여단 최해솔 중위는 며칠 만에 다시 만나는 우진을 반갑게 맞았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평양까지 제가 인솔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나야 익숙한 사람이 낫지.” 우진의 말에 해솔이 미소 지었다. 하루도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지 않는 날이 없는 남자. 강우진은 직접 만나면 신기할 정도로 소탈했다. 화제의 그 인물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일정 브리핑 해드리겠습니다. 점심 식사 후 저와 함께 곧장 판문점을 지나 평양으로 출발합니다. 오늘 저녁 평양 도착 예정이며 휴식 후 다음 날 아침 던전에 입장하시면 됩니다.” “그게 끝?” 북한에 간다고 뭔가 까다로운 절차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자잘한 출입에 대한 허가는 이미 받아두었고, 대북협상단이 꾸려지고 있습니다. 내일쯤 평양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사이 우진씨가 던전 공략에 성공한다면 북한과 남한 모두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진의 던전 공략 성공 여부에 따라 협상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어있었다. “복잡한 건 알아서들 하시고. 도착하자마자 던전 입장하는 걸로 하죠?” 굳이 북한에서 하룻밤을 보낼 필요도 없었다. 잠이야 솔직히 북한에서 자는 것보다 던전 안에서 자는 게 더 안정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김종은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이 우진씨와의 회동을 꼭 가지고 싶답니다.” “회동은 얼어 죽을.” “웬만하시면 들어주시는 게….” 김해솔도 티비로 봤다. 우진의 거침없는 발길질과 패기를. 혹시라도 북한에 가서 잘못된 언행으로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아닌지 수십 번도 더 걱정했다. 우진만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동행한 자신도 위험해지니 말이다. “뭐, 일단 가죠. 가서 이야기해 보죠.” “…….” 우진과 해솔은 대기 중인 관용차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판문점의 광경도 생경한테 북한땅을 밟고 자동차가 달리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허, 막 군사시설들에 군인들 투성이일 줄 알았더니 한가롭네.” 추수기를 마친 논을 바라보며 우진이 중얼거렸다. 차량을 앞뒤로 에워싸고 에스코트중인 북한군을 제외하면 밖의 풍경은 시골 그 자체였다. 옆에 타고있던 최해솔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북한은 개발된 지역이 정말 한정적입니다. 그 외에는 꼭 70년대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죠. 오죽했으면 지하철역도 평양이 전부입니다.” “그 코딱만 한데를 왜 관리 못 해서 이렇게 지원까지 바란대요? 북한은 각성자가 없나?” 우진이야 뭐, 던전 공략의 기회가 주어지고, 경험치와 업적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으면 이유야 상관없었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각성자가 적습니다. A급 각성자 만으로 팀을 이루기는 쉽지 않죠. 더욱이 북한의 각성자들은 사망률이 높아서….” 사망률이 높은 거야 굳이 이유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우진의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그럼 여태 6성 던전 터질 땐 어떻게 했데요?” 여력이 없었다면 여태 버틴 것이 궁금했다. 던전쇼크가 일어난 지 5년이다. 그사이 평양에 6성 던전이 리셋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제가 알기엔 7번의 6성 던전이 리셋되었습니다. 두 번은 브레이크가 일어났고 나머지는 모두 중국 쪽에서 처리했습니다.” “그럼 이번 것도 중국에서 처리하다가 못해서 포탈 3번까지 다 쓴 던전이란 거네요? 그래서 한국에 요청했고?” “음, 아닙니다. 북한이 자력으로 처리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중국이 본보기를 보여 주려는지 던전의 수습을 방관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북한이 세계각성자기구를 통해 공략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냈습니다.” “알만하네.” 던전에서 나오는 혈석은 새로운 성장동력 에너지다. 지하철역을 갖추지 못한 후진국들과 지하철역을 가진 나라의 국력차이는 더욱 더 벌어질 것이다.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겨우 몇 개의 역일 뿐이지만 지하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간 중국의 도움을 받으며 그 도움의 대가로 던전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했던 북한이다. 매번 중국의 불합리한 처사에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북한이었다. 이번 던전도 실상은 북한에서 자력으로 도전해보다가 실패한 것이다. 중국이 그런 북한의 독자적 행동이 괘씸하다는 이유로 수습에 나서지 않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북한이 다급히 세계 각성자기구를 통해 요청한 것이다. 그것을 때마침 정민찬이 보았고 말이다. “뭐, 후딱 해치우고 갑시다. 첨에 약속한 대로 보름의 시간만 철저히 지켜 주세요.” “네, 그 조건은 무조건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의 던전 공략이다. 나라의 특성상 던전이 위치한 북한과 남한, 그리고 우진의 길드가 공략 성공한 던전에 대한 권리를 두고 협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우진이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최초 공략 후 보름간 자유롭게 던전을 공략할 수 있도록 해줄 것. 그것 외에는 어떤 조건도 없었다. 가장 업적이 클 수도 있는 최초공략자가 양보 아닌 양보로 그 정도의 지분을 요구하고 빠져주니 북한과 남한의 협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다. 상위 던전에 대한 중국의존도를 줄이고, 혈석의 확보에 주력하려는 북한과 혈석보다는 다른 외교적 이익을 보려는 남한의 협상은 하루 뒤 대북협상단이 도착하고 나서 시작될 것이다. 그보다 앞서 중요한 것이라면 역시 우진의 던전공략 성공이다. 실패하면 우진이야 어차피 던전에서 죽을 것이고, 함께 따라온 최해솔 중위도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다. 브레이크가 일어난 평양은 일부 파괴될 것이고 북한은 엄청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우진씨에게 모든 게 달렸습니다.” 진지한 최해솔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고 말았다. * 금수산태양궁전. 주석궁으로 더 많이 불리는 그곳에 발을 디딘 우진은 적잖이 감탄했다. 넓은 광장에 놀랐고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기들과 군인들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그들은 평소 티비로 보던 북한 열병식의 의장 군대가 아니었다. 진짜 총으로 무장하고 여기저기 기관총과 탱크를 배치한 것이 전형적인 던전브레이크를 앞둔 진지구축 모습이었다. 최해솔 중위도 놀라 북한군 간부와 이야기하고 돌아오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리셋된 던전이 광명역이랍니다. 브레이크를 꼭 막아야 하는 심정이 이해됩니다.” 광명역이 터지면 주석궁이 위험했다. 북한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을 지키자면 던전 브레이크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동무, 따라오시라요.” 우진과 해솔은 북한군 간부에 의해 안내되어간 회동장소에 도착했다. 식사를 위한 자리인 듯 세팅된 식탁에 몇몇 북한간부들이 앉아있었다. 우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안내된 자리에 앉았다. 오히려 해솔이 경직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회동장소에는 여러 외신 기자들이 장면을 찍으며 기록하고 있었다. “우진씨는 긴장되지 않으십니까?” “긴장은 무슨.” 해솔의 딱딱한 물음에 우진이 시큰둥 하게 답했다. 전형적인 정치가의 수법이다. 손님 초대해놓고 심리적 압박이라도 줄 요량으로 잔뜩 뜸들이고 말이다. 아르펜의 제국 황제도 즐겨 쓰던 수법이지. 뭐, 딱히 관계가 좋게 끝나진 않았지만 말이다. 우진이 지루함에 턱을 괴고 있을 무렵이었다.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 동지 드십니다.” 잠시 쉬고 있던 기자들이 바쁘게 셔터를 눌렀으며 우진도 그의 등장에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다. 독보적 헤어스타일의 3대 세습 독재자와의 첫 대면이었다. < 56화 - 평양에서 외치다 > 끝 ⓒ 진설우 < 57화 - 평양에서 외치다 (2) > 의미 없는 기다림의 시간으로 슬슬 부아가 차던 우진이었다. ‘뭐야 이 돼지는?’ 김정일의 뒤를 이어 김종은을 처음 본 우진의 첫인상은 그것이었다. 이상한 헤어스타일의 젊은 북한 통치자가 그보다 더 젊은 남한의 각성자 강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동무. 이야기는 많이 들었시다.” “그래. 반가워.” 우진이 마주 악수하자 김종은과 함께 나타난 북한군 간부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동무, 위원장 동지입네. 말 가려 하시라요.” 그의 말에 우진이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반갑다. 정은아.” “…….” 당사자인 김종은도 함께 따라온 북한군 간부들도, 그리고 우진과 함께 이 자리에 온 최해솔 중위도 얼어붙었다. ‘아, 실수했구나. 실수했어.’ 최해솔은 후회했다. 화랑의 길드 마스터도 카메라가 돌든 말든 따귀를 날리는 우진인데,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못했다니. 북한 최고의 통수권자라고 예의를 차릴 거라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아니, 딱히 잘못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상식이니까. 보통사람이라면 알아서 조심할 것이다. 최해솔의 잘못이 있다면 우진이 보통사람의 범주를 넘어서는 인간 이라는걸 망각한 거다. 북한군 간부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간나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장난질이네?” 그의 흥분에 우진이 겁먹기는커녕 피식 웃었다. 가리래서 가렸더니 왜 승질인가? 우진이 흥미로운 얼굴로 노발대발하는 간부를 지켜보는데 김종은이 웃었다. “하핫, 역시 호쾌하구먼 기래. 앉으시다.” 우진이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용건만 빨리빨리 하죠. 지금 당장 던전에 들어가고 싶으니.” 우진의 짧은 말에 북한간부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할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우진을 한대 올려붙이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외신기자들의 카메라 셔터도 쉴새없이 움직이며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하하, 시원시원하구먼 기래. 역시 남한 제일의 역전용사 답구만 기래. 허헛.” 김종은은 우진의 건방짐을 호쾌한 웃음으로 받았다. 애초에 우진이 벌일 협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던전을 공략하고 그날부터 보름의 던전 공략 시간. 그 기간 동안 던전 안에서 나오는 모든 아이템에 대한 권리는 우진이 가진다. 그것만 확답을 받으면 된다. “제대로 끝장만 내준다면 내 약속 지키갔어.” “그럼 기다릴거없이 지금 당장 가죠.” “하하, 가기전에 사진 한장 남기고 가라우.” 우진은 김종은과 서서 기자들 앞에서 사진을 남겼다. 김종은의 지시인 듯 북한 측에서도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동무. 무사귀환을 빌갔어.” 우진이 걱정되어서일까, 우진이 살아 돌아와야 던전브레이크를 막을 수 있어서일까. “별소리를.” 회동은 30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실제 사진을 찍는 시간이 절반을 차지했으니 기다린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누구보다 좌불안석이었던 최해솔은 진땀을 흘리고는 질린 얼굴이었다. “정말. 심장 쫄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여긴 평양입니다. 우진씨 제발 조금만 언행에 조심해 주십시오.” 해솔의 부탁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심한 거 티 안 났어요?” “예?” “그럼 저 먼저 갑니다. 며칠 후에 봅시다.” “무사귀환 하시기 바랍니다.” 던전을 향해 성큼 걸어가는 우진이 손을 흔들었다. 포탈은 없다. 먼저 도전한 북한의 각성자들은 포탈을 통해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죽음을 택했다. 그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던전에 대한 아무런 정보조차 없었다. “후, 정말….” 해솔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자신감 하나만큼은 세계제일이리라. 막무가내 정권인 북한에서도 저리 거침없으니 말이다. 우진이 들어서고 얼마 안 있어 광명역의 입구에 결계가 생겨났다. 던전 브레이크까지는 8일.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제 추가 공략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북한이 세계각성자기구를 통한 모집도 응하는 팀들이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최해솔과 다른 곳에서 우진의 입장을 바라본 김종은은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참 시원시원하지 않네?” “기렀습네다.” “인민에도 저런 초능자 하나 나오면 얼만 좋네 기래.” “아쉽게 됐습네다. 영웅 중에 호색 아닌 자 없다고 기랬는데, 미녀들을 그리 대기시켰사온데, 써보지도 못하게 생겼습네다.” “됐시야.” 김종은의 말에 그의 부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원장 동지께서는 저자가 성공하리라 보십네까?” “성공하지. 하고 말지.” 우진이 사라진 던전을 보는 김종은의 눈빛도, 그 목소리도 우진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힘내시라우.’ 조심스럽게 응원하는 김종은의 얼굴엔 약간의 부러움도 섞여 있었다. 저 정도의 불세출 영웅이 인민에도 하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아, 이거 귀찮네.” 포탈도 아닌 처음부터 입장하는 던전이라 던전 내부의 몬스터 소탕부터 시작되었다. 문제는 북한의 지하철은 아주 깊고 깊었다. 에스컬레이터는 작동하지 않았고 그 계단을 통해 밀고 들어오는 몬스터들의 러쉬에 진행이 더뎠다. 모든 몬스터를 해치우고 레벨이 오른 영혼갑옷에 추가로 영혼들을 끌어와 종속시키고는 입구에 생성된 포탈을 통과했다. 지이이잉. 공간의 어지러짐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우진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죽은 나무들과 죽은 땅, 버려진 폐허들과 그것들을 뒤덮은 이끼처럼 끈적한 물질들. “식민지라 이거지?” 처음이다. 아르펜의 존재가 아닌 트라넷의 본대가 모습을 보인 것이. “케룩 케룩.” 산등성이 위에서 들려오는 괴성과 함께 뚱뚱한 사마귀 모양의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고작 1미터 정도에 길이도 1.5미터를 넘지 않지만 검과 같이 날카로운 앞발은 위협적인 무기였다. 무엇보다 문제는 놈들은 항상 수십 마리씩 떼거리로 모여 다닌다는 것이다. 가장 흔하게 보며 가장 까다롭기도 한 트라넷의 하수괴물. 베직. “물량싸움은 오랜만인데?” 우진이 골렘 돌쇠와 서큐버스 비비를 소환했다. “후아, 드디어 탈출이다냥!” 섭섭해하는 수아를 겨우 설득시켜 출근할 때 함께 데려온 비비였다. 비비는 전장의 냄새를 맡고는 코를 막았다. “으윽, 누구의 식민지다냥?” “아직 모르지.” 트라넷의 72 군단장. 누구의 식민지인지는 모른다. 아니, 누구든 상관이 없다. 지구에 발을 디디는 족족 처치해버릴 테니까. “돌쇠야 가라.” “위잉.” 돌쉬가 주변의 흙으로 흡수되더니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죽은 흙으로 몸체를 만들어 일으켰다. 그 거대한 덩치를 보고도 베직들은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두려움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트라넷의 부대와의 일전이 시작되었다. * 돌쇠를 앞세워 베직들을 모두 처치하고는 그들의 시체를 매개로 해골병사들을 소환하였다. 한번에 50기. 베직의 시체가 딱 그 정도였다. 끈적한 크립들은 숲과 길, 평원과 산, 버려진 도시를 할 것 없이 넓게 퍼져있었다. 그 죽은 땅의 넓이 만큼이나 몬스터들이 수없이 존재했다. 트라넷의 장기인 물량공세였다. 전투 소리를 듣고 다시 몰려오는 듯한 베직들의 괴성을 들으며 우진이 슬쩍 웃었다. “이쪽도 만만찮지.” 레벨 : 50 이름 : 강우진 클래스 : 네크로맨서(전승), 전사 등급 : 미배치 업적 : 273219 마력 : 201/250 기력 : 34/60 <스탯> 근력 : 45 민첩 : 39 체력 : 51 지능 : 32 마력 : 251 기력 : 60 회복 : 42 치유 : 40 지배 : 250 미분배 포인트 : 0 영약 재흡수 대기시간 근력 : 12 민첩 : 31 체력 : 7 지능 : 480 마력 : 27 기력 : 6 회복 : 11 치유 : 5 지배 : 3 그동안 오른 보너스 포인트는 대부분 지배와 마력에 투자했다. 영약(강화석)으로 스탯을 상승 중이지만 이것도 흡수할수록 재흡수 시간이 길어져 점점 더뎌졌다. 스탯마다 흡수 시간이 다르다 보니 지능같은 경우에는 거의 한계치에 왔는지 벌써 며칠 전에 먹은 영약이 아직도 흡수가 덜되어 있었다. 우진의 지금 지배스탯으로 부릴 수 있는 소환수의 수는 250기. 해골병사와 해골마법사를 조화한다면 제법 대부대의 태를 낼 수가 있었다. 해골병사들의 전력을 극대화 하려면 역시 그들의 군단장이랄 수 있는 데스나이트가 있어야겠지만 우진의 지휘도 꽤 뛰어났다. 그리고 부대의 다양성은 우진만의 장점이 아니었다. “케켁.”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베직들의 뒤로 고개를 치켜든 개미인 듯, 거미 같은 괴수가 보였다. “란처네.” 놈들은 촉수 같은 가시를 뱉어낸다. 그 사거리도 길고 위력도 총알은 저리 가라 할 정도기에 굉장히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락토도 있네.” 일단 시야에 보이는 것은 한 마리 뿐이지만 코끼리만 한 덩치에 거대 갑각을 두른 괴수였다. 항마력도 높고, 갑각의 방어력도 뛰어나 어지간한 해골병사의 칼과 해골마법사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데스나이트의 다크블레이드나 리치의 마법 정도가 놈들을 위협할 수단이었다. 지금 우진은 부를 수 없는 권속들이지만 그 대신 전사클래스의 강력한 공격수단들이 있었다. “돌쇠야 길 뚫어라.” 그그그. 돌쇠가 진동을 일으키며 돌격해 적진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해골병사들이 줄지어 열을 맞춰 돌격 대기했으며 뒷 열에 자리한 해골마법사들이 앙상한 뼈마디가 드러나는 손으로 마법을 일으켜 유지하고는 발사 대기했다. 스스슥. 우진은 유령마를 소환해 탑승하고는 전사의 무기를 도끼로 변형했다. 50레벨이 되며 봉인 해제된 전사 클래스의 스킬. 무기의 도끼변환과 ‘부술’, ‘휘돌리기’는 우진의 파괴력을 한층 더 높여줄 것이다. “가자, 얘들아!” “키키킥.” 우진이 기세 좋게 유령마를 출발시키며 돌쇠의 뒤로 따라잡았다. 군데군데 뼈창을 소환해 던져두고는 적절한 때에 뼈의 장벽을 일으켜 적 병력의 행동에 제약을 주었다. 후우웅, 콰직! “꾸에엑!”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괴물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우진의 도끼가 위협적으로 베직들을 찢었다. 그들의 갈라져 죽으면 그대로 터져나가며 새로운 해골병사로 화했다. 우진을 뒤따르는 해골들의 수는 점점 많아졌고 모여드는 트라넷의 괴수들은 더욱 많았다. 새까맣게 몰려드는 그들을 보며 우진이 희게 웃었다. “레벨 좀 오르겠네.” 어차피 쳐들어오는 트라넷이고, 그사이 자신도 그에 대항해 빨리 강해지면 될 일이다. 지금도 쉴 새 없이 오르는 업적포인트를 보며 우진의 도끼날이 춤을 췄다. * 콜로니의 중심부. 우진은 꾸물거리며 자기들끼리 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 괴생명체를 보았다. “어떤 놈일지 궁금하다냥.” “누구든 똑같지 뭐.” “흐음. 지구도 이제 트라넷의 졸개들이 보이겠다냥.” “때가 된거지.” 우진의 무심한 시선이 콜로니의 중심부를 향했다. 저것이 완성되면 주인인 트라넷의 군단장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지금도 그 주위에 생성된 흉물스러운 부화장에서는 베직과 란처들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었다. “끝내고 나가자.” 식민지 전체를 휩쓰는데 12일이 걸렸다. 밖의 시간도 이미 3일이 흘렀을 터. 이제 그만 나가야 할 때다. “냐옹. 나도 북한구경 하고 싶었는데 아쉽다옹.” 우진이 피식 웃고는 콜로니의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베직과 란처의 시체들을 진군시켰다. 아직 시체 부활의 레벨이 낮아 살아있었을 때의 생체능력의 절반도 못 내는 시체들이지만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전투능력이 아니었다. 시체들이 콜로니 본부와 부화장 등에 엉겨붙자 우진은 가득 찬 마력을 일시에 쏟아냈다. 콰콰콰쾅! 시체 폭발의 여파에 핏기를 머금은 후폭풍을 우진이 망토를 들어 가로막았다. <레벨 업!> “후, 두 개 오른 건가.” 12일의 사냥 동안 두 번 겪었다. 아직 보름간의 독점 기간이 있으니 빡빡하게 던전을 구르다 보면 60레벨은 가능할 듯 싶었다. 폭발의 여파로 죽은 땅에 생긴 크레이터의 중앙에 귀환석이 둥실 떠 있었다. 그런데 녹색의 귀환석 옆에 비슷한 모양새의 보라색의 보석이 하나 더 떠 있었다. “귀환석이 두 개인 건가?” 우진이 두 개의 보석을 갈무리했다. <귀환석을 획득하였습니다.> <차원의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어?” 우진이 어리둥절해 봉인된 보석의 정보를 식별마법으로 해제했다. < 57화 - 평양에서 외치다 (2) > 끝 ⓒ 진설우 < 58화 - 평양에서 외치다 (3) > <차원의 조각> 물질계를 이루는 신비로운 조각. 차원영지를 이루는 재료로 쓰인다. “음.”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영롱한 보라색으로 빛나는 그 보석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으나 더이상 떠오르는 정보는 없었다. “비비, 차원 영지라고 알아?” “오잉? 잘 모르져.” 비비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니 우진은 의문을 접었다. 고민해봐야 답이 없는 문제는 그냥 제쳐놓는 게 낫다. 차원의 조각을 인벤토리에 수납하고는 귀환석을 챙겨 발길을 옮겼다. 이제 던전을 나갈 시간이다. * 결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광명역 입구를 지키고 있던 북한군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니 보라우. 저게 뭐이네?” “어흑, 가림막이 사라지고 있지비.” “남조선 간나새끼, 진짜 성공했구만기래. 날래 상부에 보고하라우.” 분주히 움직이는 북한군의 소요에 근처에 있던 외신기자들도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강우진의 사진을 찍기 위해 망원렌즈를 들이밀었다. “쉣,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미쳤어. 6성 던전의 솔로공략이라니. 이건 무조건 토픽이야.” “한국에 엄청난 각성자가 나타났어.” “이거이거, 아메리카에 나타난 메르디만큼이나 뜨거운 각성자잖아?” “어서 본사에 연락해.” 기자들이 분주해지는 사이 던전을 나서는 우진은 자신을 향해 몰려든 시선을 마주 보았다. 여전히 방어선 구축이 한참인 군인들과 그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기자들. 한국에서처럼 기자들이 먼저 달려와 취재를 가장한 인터뷰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최해솔 중위가 우진을 보곤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성공하실 줄 알았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뭐, 성공할 줄 알고 온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야 당연한 말씀이지만 정말 이렇게 해내시니 놀라운 일입니다.” 지원자가 없는 던전에 우진이 의기양양하게 도전해 성공했다. 그것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폐쇄적인 던전을 말이다. 도전하는 자체가 용감한 일이고, 그것을 성공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협상단 왔어요?” “예, 남북측 모두 던전의 공략 여부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진의 던전 공략 실패를 70% 확률로 계산하고 협상을 준비 중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럼 협상 알아서 잘하세요. 난 다시 던전 들어가 볼 테니까. 이제 브레이크 없으니 여기 군대나 물리라 하세요.” “예? 휴식도 없이 바로 다시 재도전 하신단 말씀입니까?” 최해솔이 깜짝 놀랐다. 3일이 지났다. 던전 안에서는 그 4배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엄청난 시간 동안 긴장감이 팽팽히 감도는 전장을 다녀왔는데 어떻게 휴식도 취하지 않고 재도전한다는 말인가? “뭐, 어려운 거 한다고 휴식은 무슨.” “…….” 6성 던전을 어디 놀이터 가듯이 이야기하는 우진의 진정한 능력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능력을 사용하기에 저렇게 쉽게 던전을 공략하는가? “그럼 수고.” 우진이 곧장 발걸음을 돌려 던전으로 들어가버렸다. 60레벨을 목표로 하려면 보름은 빠듯한 시간이기에 최대한 시간을 줄여야 한 번이라도 더 던전 공략이 가능했다. 잠이야 던전 안에서 자도 된다. 휴식도, 배를 채우는 것도 던전 안에서 모두 가능했다. 포인트상점이라는 아주 유용한 보급수단이 있으니 말이다. 우진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 간부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어깨에 달린 계급장을 보니 대좌의 고위 직책이었다. 그는 다시금 던전 입구를 막고 있는 결계를 보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이네? 가림막이 걷혔다 하지 않았나?” “맞습네다. 고조 방금까지 있었는데 다시 들어갔습네다.” “뭐이네? 미친 아새끼래 숨도 안 돌리고 다시 들어갔네?” “그렇습네다.” 그가 주위를 둘러봐도 대기 중이던 군인들 모두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던전의 공략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영웅인 강우진이 그런데 다시금 던전으로 들어가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가 당황했으나 별수 없었다. “큰일 났구먼 기래.” 위원장 동지가 강우진 동무를 꼭 모셔오라 했는데 그를 불러올 길이 없으니…. 하는 수없이 보고하기 위해 그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 주석궁의 방 하나에 김종은이 심각한 얼굴로 두툼한 살집의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왼쪽으로 기울렀다우.” “네, 동지.” 부랴부랴 기울어진 액자를 맞추자 김종은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벽에 걸린 거대한 액자에는 강우진과 함께 찍은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 액자는 어떻게 처분 합네까?” 김종은은 원래 걸려있다가 떼어진 액자를 보았다. 데니스 로드먼과 다정하게 악수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때 좋아했던 농구스타지만 이제 그의 관심 밖 인물이었다. “버리라우.” 김종은의 차가운 말에 하녀들이 액자를 들고 조심히 밖으로 나섰다. 본래 NBA의 시즌별 농구공부터 농구화에 헤어밴드까지 각종 농구용품으로 진열 장식되어있던 방안은 조금씩 그 자리를 던전에서 출품되는 물건들로 바뀌었다. 벽에 걸린 사진을 끝으로 작은 던전 박물관이라 불려도 될 정도로 방안은 아티팩트들과 소형 몬스터의 박제들로 들어차 있었다. 액자 속의 우진을 바라보는 김종은의 얼굴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똑똑. “들어오라우.” 잔뜩 미소 지은 김종은이 열린 문을 보았으나 기대한 인물은 없었다. “뭐이네? 강우진 동무는 어디갔네?” “그것이… 다시 던전에 들어갔습네다.” “뭐이네?” 북한군 대좌가 사정을 설명했으나 소용없었다. “안 말리고 뭐했네?” “이미 갔을 땐 들어간 뒤였습네다.” “내 말이 우습네?” 사력을 다해 빌었으나 김종은의 얼굴은 눈썹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대좌가 식은땀을 흘렸다. “동지. 아무래도 자아비판이 필요하갔어.” “사, 살려주시라요.” 김종은의 말에 대좌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일 없네. 나가보라우.” “위, 위원장 동지. 제발….” 그가 애원했으나 소용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소란이 그의 명을 재촉했다. “자아비판도 필요 없겠구먼 기래.” 김종은이 자신의 뒤에 있던 호위총국의 경호원의 권총을 뺏어 그대로 쏴버렸다. 타앙! 북한군 대좌의 죽음치곤 너무나 허망하고 어이없는 이유로 인한 것이나, 경호원들의 얼굴은 놀람보다는 또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정도였다. “니보라우. 가서 두 눈 똑똑히 뜨고 기다리다가 강우진 동무 나오면 내게 데려오라우.” “알겠습네다.” 재수 없게 지목된 경호원은 속으로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 갔으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하아, 평양을 구한 영웅을 내가 대접해야 할끼닌데.” 김종은은 책상 위에 진열된 스킬북들을 어루만졌다. 자신이 각성자였으면 익힐 수 있었겠으나 각성자가 아니기에 아무런 반응도 없는 스킬북이었다.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는 김종은의 두 눈엔 부러움과 동경이 가득했다. * <레벨 업!> “후.” 레벨업과 함께 떨어졌던 마력과 기력들이 일시에 회복되며 척추를 찌르르 울리는 청량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약이 주는 쾌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60이네.” 베직부터 촉수창을 던지는 거미같이 여섯 발로 다니는 괴수 란처, 오우거보다도 더 강력한 항마력과 질긴 가죽으로 무장한 거대 코뿔소 락토. 거기에 심상찮게 땅굴을 파고 은밀히 접근해 갑자기 치솟아 공격해오는 땅두더지 투돈까지. 트라넷의 군대를 이루는 기본 하수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하며 던전의 이곳저곳에 위치한 부화장을 파괴했다. 처음 던전을 들어왔을때 존재했던 콜로니 본부는 두 번째 공략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콜로니 본부가 이 던전의 보스였던 모양. 반복된 사냥의 끝에 넓은 던전에 수없이 많은 부화장 중 한 곳에서 귀환석이 랜덤하게 나왔다. 우진은 귀환석이 나오면 얼추 눈에 띄는 몬스터들을 대거 정리한 후에 던전을 나갔다가 재입장했다. 자잘하게 남은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보다 새로 리셋된 몬스터를 대거 몰이 사냥하는 게 더 경험치 획득에 유리했다. 그렇게 반복하며 던전을 재입장하길 7번째. 드디어 60레벨을 달성했다. 우진은 먼저 전사 클래스의 스킬들을 모조리 배웠다. <전사의 인내><형태변환 - 활><궁술><난사><속사> 전사의 인내는 고통을 감내하게 해주는 패시브 스킬이고, 나머지는 모조리 활과 관련된 스킬들이었다. 우진은 전사의 무기인 강철지팡이를 꺼내 들고는 즉시 형태변환 해보았다. 지팡이가 휘어지며 즉시 활대를 이루고는 마력으로 빛이 타오른다 싶더니 줄이 생성되어 걸렸다. 우진은 네크로맨서 클래스의 스킬을 뒤져 <뼈화살>을 배웠다. 뼈창 보다 위력이 약해 배우지 않았던 스킬이었으나 활과의 시너지를 생각하면 꼭 필요한 스킬처럼 느껴졌다. 뼈화살(본 애로우)을 소환해 시위를 걸고는 쭉 당겨 발사해보았다. 쐐애애액. 뼈창을 투척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멀리 날아가는 화살을 보며 우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뼈창이나 뼈 화살은 마력이 허용하는 한 무한정 소환해낼 수 있었다. 이것들은 해골의 소환 매개는 못되지만 뼈장벽(본 월)의 매개는 되기에 전술적 가치가 뛰어났다. 우진은 미리 사두었던 60레벨 제한의 네크로맨서 클래스 스킬도 배웠다. <권속 : 깨비> 그림자를 통해 숙주에 기생하는 유령을 소환한다. 숙주의 감정을 읽고, 정보를 수집하며, 그 숙주가 시체라면 그것을 조종할 수 있다. 시체부활로 되살아난 시체의 본신 능력을 조금 더 이끌어낼 수 있다. 소환사의 권속들은 신뢰도, 충성도에 따라 필요지배력이 감소한다. 그들은 소환사의 지배를 받는 소환수에서 진정한 동료로 거듭난다. 그림자 수 : 1 시체 증폭 : +10% 필요 지배력 1(-99 충성, -99신뢰) 깨비가 있으면 시체부활로 살아난 좀비들의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체답게 살아생전의 민첩함도 사라지고 지능도 없어졌으나 깨비가 조종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나와라. 깨비” 우진은 즉시 그의 권속 깨비를 불렀다. 그러자 우진의 그림자가 쑥 하고 일어나더니 그의 앞에 흐릿한 우진의 모습이 나타났다. 유령마 씽씽이처럼 투명한 몸체가 아니었다면 우진이라고 착각할 만큼 똑같은 생김새였다. [키킥, 드디어 주인의 목소리를 듣는군.] “기분 나쁜 건 여전하네.” [키키킥, 이제 적응될 때도 되지 않았나?] 깨비의 말 그대로다. 이제 적응 될 때도 되었는데 우진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자신의 또 다른 분신 깨비의 존재가 말이다. 분명히 이질적인 다른 자아를 가진 존재가 자신과 생각, 시야,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색다름을 넘어서 거부감이 들만 한 느낌이었다. [그게 싫다면 내게 새 몸이라도 주지 그래?] 우진이 전투로 폐허가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야 많다. 하나를 부활시켜 그 시체를 깨비에게 숙주로 주면 된다. 하지만 이미 던전의 공략이 끝났기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필요할 때 부를 테니 그림자로 돌아가 있어.” [키킥, 지구라는 곳은 재밌는 것 투성이군.] 또 제멋대로 자기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림자로 돌아간 깨비를 쏘아보았다. “쳇.” 기분이 나쁘다 뿐이지 깨비가 못된 놈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진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줄 정도로 충실한 권속이었다. “하루 정도 남았나?” 밖의 현실 시간으로 14일 정도가 조금 안되게 지났을 것이다. 하루 하고 몇 시간 더 남은 시간이지만 빠르게 공략한다면 한번 전도는 더 던전을 돌 시간이 있었다. 우진이 귀환석을 가지고 던전 밖으로 나왔다. < 58화 - 평양에서 외치다 (3) > 끝 ⓒ 진설우 < 59화 - 평양에서 외치다 (4) > 우진은 던전을 나오자마자 대기 중인 최해솔 중위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우진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응? 왜 이래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뭘요?” “1시간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쉬었다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 매번 던전을 나올 때마다 해솔 중위가 자신을 붙잡긴 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절실히 매달렸다. “거참. 내가 괜찮다는데.” “지금 분위기가 말이 아닙니다. 제발 조국을 생각해 조금만 쉬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해솔이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했다. “북한이 이번에 우진씨의 던전공략을 대대적으로 선전할 생각인가 봅니다. 남측도 이번 일을 남북 공동 작전으로 포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네.” 우진은 그래서 뭐? 하는 얼굴이었다. “같이 가주십시오.” “난 던전 돌아야지. 정치는 알아서들 해요.” 최해솔이 이제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우진이 얼굴을 비추고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좀 몇 장 찍어야 할 것이 아닌가? 최해솔의 사정에 우진이 한 시간을 비우기로 하였다. “거참. 귀찮게 하네.” 우진이 온다는 소식에 주석궁이 분주해졌다. 북측의 고위 관료들과 남측의 협상단들이 모조리 연회장에 모였다. 몇몇은 우진 때문에 내리 2주일을 기다린 것이 못마땅한 얼굴들이었으나 우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산해진미를 모아놓은 듯 성대하게 꾸려진 연회장에 우진은 몇 가지 음식을 집어먹다가 김종은과 남측 협상단의 대표와 함께 셋이서 사진을 찍었다. “조금 웃어주십시오.” 기자의 부탁에 우진이 과장되게 입술을 끌어당겨 올랐다. 북측의 고위 군간부 몇이 그 모습을 아니꼽게 보고 있었다. “자, 그럼 난 바쁘니 마저 일보십시오들.” 우진이 가려고 하는데 소좌 계급을 단 호위총국 소속의 경호원이 붙잡았다. “동무, 여기 이름 하나 써주시고 가시라요.” 그가 내미는 흰 종이를 보곤 우진이 멀뚱히 그를 보았다. “남조선 최고 초능자신데 사인하나 받아두면 두고두고 영광입네다.” “난 또.” 우진이 피식 웃고는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럼 수고하셔.” “고맙습네다. 동무.” 경호원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슬쩍 김종운 쪽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우진이 찝찝한 기분에 속으로 깨비를 불렀다. ‘깨비, 저기 돼지 보여?’ ‘보인다. 주인.’ ‘들러붙어 있어봐.’ ‘크큭, 드디어 지구에서의 첫 임무군.’ 깨비가 그림자에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김종운의 그림자에 쏙 빨려 들어갔다. 그의 그림자에 숨어 보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을 공유할 것이다. 그리고 깨비가 다시 우진에게 돌아왔을 때 깨비가 경험한 것은 그대로 우진의 경험이 될 것이다. “빠듯하겠네.” 던전의 이용시간이 하루가 남았다. 조금이라도 업적포인트를 더 모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듯 싶었다. 우진이 사라지고 연회장의 한쪽에 우진을 눈여겨보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있었다. 공화국 초능부대 사령관 리평관. 그에게 다른 남자가 다가오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사령관 동지, 준비됐시오. 어캅네까? 정말 들이받습네까?” “최대한 은밀하게 실행하라우.” “알겠습네다.” 명령을 받은 남자가 사라지자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간나새끼. 공화국을 너무 우습게 봐써.” 남조선 초능자 따위가 공화국의 심장에까지 와서 설쳐대는 모습이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위원장 동지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당당한 모습도 눈에 거슬렸다. 위원장 동지는 초능자를 우대했다. 북한 내의 초능자 육성부대를 따로 편성했으며 자신이 초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고위 각성자의 수가 적어 그간 평양에서 리셋되는 상위 던전은 모조리 중국의 도움을 받아 공략했으나 그만큼 손해가 막심했다. 앞마당에서 금을 캐가고 있는데도 방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 리셋된 6성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야심 차게 그동안 육성한 초능자부대를 투입했다. A급 2명과 B급 8명. 북한 고위 각성자의 거의 절반이랄 수가 있는 전력이었다. 공화국 내에 단 두 개 밖에 없는 귀환포탈도 챙겨갔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부대가 궤멸하고 말았다. 귀환포탈도 쓰지 못하고 죽으면서 던전 안의 정보는 물론, 어렵게 육성한 각성자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초능특수부대는 한순간 신뢰를 잃으며 사령관인 리평관의 입지 또한 흔들렸다. 공화국 자력으로의 6성 던전 공략은 커녕 당장 던전 브레이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중국은 공화국을 외면했고, 세계의 나라들 또한 외면했다. 그때 남조선의 각성자 하나가 호기롭게 도전해 왔으니 리평관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가 3일 만에 던전 공략에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꼈다. 위원장 동지는 그 강우진이란 초능자를 공화국으로 회유하려는 계획까지 수립하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에 그가 공화국에 투신한다면 당장에 초능자 사령관인 자신의 입지가 위험했다. 어차피 던전의 공략은 이루어졌고, 이후의 던전 운용에 대한 협상도 마무리 지었다. 아직 공화국엔 A급 각성자가 2명 있었고, 실력 있는 B급의 각성자는 수십 명이 넘었다. 던전의 최초공략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그 난이도가 대폭 하향된다. 더욱이 조금 전의 회담으로 던전 내의 대략적인 정보 또한 입수했다. ‘간나 새끼.’ 사냥을 마쳤으니 사냥개를 잡을 때였다. 그가 홀로 던전을 공략할 정도의 각성자라지만 그 또한 사람이다. 각성자도 총에 맞으면 죽고, 몸이 터지면 죽는다. 던전 안에서의 일은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고, 역내의 몬스터를 모조리 해치우고 포탈을 이용하기 전까진 지구상의 물건을 사용할 수 있었다. ‘강성대국을 위한 밑거름이 되라우.’ 모든 것이 강성대국을 위한 길이다. 잠깐 판단이 흐려진 위원장 동지를 위한 길이다. 김종은을 바라보는 리평관의 눈빛에 야망이 가득했다. * 우진은 여전히 던전을 삼엄하게 경계하는 군인들을 지나쳐 던전 입구로 향했다. “다시 들어가십네까?” “당연하죠.” “마지막 되시겠습네다. 건투를 빕네다.” 병사들이 던전 입구를 향하는 길을 터 주었다. 이제 하루만 더 고생하면 된다. 아니, 던전 안에서의 4일만 더 고생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우진이 가벼운 마음으로 던전으로 진입했다. 결계가 생기기 직전 던전 안으로 뛰어드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의 난입에도 병사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들어갔구만기래.” 결계가 생기기 전에 들어갔다. 결계가 사라지는 건 이제 던전의 공략이 끝나던가, 진입한 인원이 모두 죽던가 둘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후자일 것이다. “수고했시오. 남조선 동무.” 병사 하나가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그들은 외신기자 하나가 멀리서 그 장면을 찍은 것을 보지 못했다. * 강우진의 던전 입장 4시간 경과. 리평관은 초조했다. “실패인가?” 우진을 뒤따라간 요원은 초능부대의 C급 각성자였다.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남다른 인물로 온몸에 폭탄을 두르다시피 하여 던전에 진입했다. 애초에 목숨을 건 작전. 진입하자마자 강우진을 끌어안고 자폭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를 끌어안지 못해도 상관없다. 지하철의 입구는 좁았고 폭탄의 양은 근거리에서도 충분히 위협적인 양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아직 결계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가 살아 돌아온다면…. “젠장.” 리평관은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었다. 건물 하나도 날려버릴 폭탄이 바로 근처에서 터졌는데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있을까? “그래. 못해도 치명상을 입었을 게야. 숨이 꼴딱거려도 그 중상을 입고 어디 귀환석이라도 찾아오가써?” 각성자들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강우진이 재주가 있어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라도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 틀림없다. 결계를 깨고 나오자면 귀환석이 있어야 할터. 아직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몰랐다. 던전 안의 상황을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지만 리평관은 희망을 품고 그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 강우진의 던전 입장 2일 1시간 경과.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최해솔 중위의 말에 이번 협상단의 대표인 이순채준장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강우진씨의 성격을 볼 때 가능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진 않았을 겁니다.” “일이 꼬였겠지.” 이순채의 음성에는 불편한 감정이 가득했다. 우진이 던전에 들어간 지 2일이 지났다. 던전의 독점 사용시간이었던 15일에서 벌써 하루가 지난 일이다. 그에 대한 보상을 남측에서 제공하기로 했기에 이순채의 심정이 고울 리가 없었다. “우진씨의 마지막 던전 공략시간이 1일 17시간입니다. 통상적이라면 벌써 나왔어야 할 시간입니다.” “끙,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조사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뭘? 우리가 뭘 할 수 있나?” 평양이다. 여기저기 숨은 감시자의 눈들만 수십 수백인데 고작 십여 명 안팎의 협상단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을 보십시오.” 최해솔은 외신기자들을 통해 얻은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거기엔 우진이 던전에 입장하는 것과 시차를 두고 의문의 사내 하나가 던전에 따라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순채도 사진을 보고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언제 입수한거야?” “30분 전입니다.” 최해솔도 사진을 입수하고는 불안한 마음에 보고한 것이다. “당장 조사해봐야 합니다. 북측에 항의해야 합니다.” “자네 미쳤나?” 최해솔의 흥분에 이순채가 싸늘히 대꾸했다. 누군가 일을 꾸몄다면 그것은 북한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항의 한다? 당신들의 음모를 알고 있으니 그것을 밝히라?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이곳은 북한의 심장부고, 그들을 적으로 돌려세우는 순간 호랑이의 아가리에 스스로 뛰어드는 꼴이다. “일단, 지켜보자고.” “…….” 그들이 일을 꾸며 강우진을 죽음으로 몰았다면 이 또한 유리한 협상카드를 하나 쥐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남한에 가서 할 일이다. 외교적으로…. 최해솔만이 불안과 걱정에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 강우진의 던전 입장 2일 18시간 경과. “이게 뭐이네?” 김종은은 테블렛의 기사를 보곤 역정을 냈다. 프랑스 언론사의 기사였는데 사진엔 우진의 던전 입장과 곧장 뒤따라가는 의문의 남자가 찍혀있었다. “이 새끼 누구네?” “알아보고 있습네다.” “날래 알아보라우. 이 간나새끼 누군지 당장 알아오라우!” “명을 받듭네다.” 김종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의 풍만한 턱살이 부르르 떨렸다. 남조선 최고 초능자가 북한에서 죽게 생겼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봐도 손해뿐인 이 일을 한 획책한 머저리를 찾아야 한다. 언제나 과잉충성하는 놈들이 문제였다. “망할 에미나이들!” 김종은이 주먹을 내리쳤다. 그의 시선이 액자에 담긴 흰 종이를 보았다. 종이엔 강우진의 싸인이 새겨져 있었다. * 강우진의 던전 입장 3일 5시간 경과. “어? 사라진다.” 결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살아 나오는 것이든, 죽어 던전이 초기화 되는 것이든, 토픽이다. 외신기자들의 카메라 셔터가 바쁘게 돌아갔다. 어떤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찍힌 의문의 남자가 이미 뉴스에 공개되어 북한 내의 분위기도 심상찮았다. 북한군의 간부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남한의 최해솔 중위는 아예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던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그의 바람 덕일까? 계단을 타고 발소리가 들렸다. 턱, 턱. 한 걸음 한 걸음 느린 걸음. 그가 계단을 오르며 내비치는 머리칼과 얼굴. 여기저기 그을린 모습과 상처가 벗겨진 듯 울긋불긋한 얼굴 피부는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우진이 계단을 모두 오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흐흐.” 웃음이 났다. 무표정하던 우진의 입매가 비틀렸다. 재생연고를 퍼붓고도 아직 회복 중인 얼굴과 몸의 상처는 상관없다. 몸의 상처야 어차피 며칠 지나면 말끔히 나을 것이다. 문제는 이 더러운 기분과 가슴을 답답하게 채우는 분노다. 한껏 비틀린 웃음을 자아내던 우진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전부 뒤지고 싶지? 그지?” 우진의 무심한 눈빛이 좌중을 훑어보았다. < 59화 - 평양에서 외치다 (4) > 끝 ⓒ 진설우 < 60화 - 뜻밖의 전리품 > 심상찮은 분위기의 우진이 한발 앞으로 내딛자 입구에 섰던 군인들이 주춤 뒤로 밀려났다. “돼지 새끼 나오라 그래.” “…….” 우진의 말에 북측의 간부들도, 남측의 협상단도, 그리고 외신기자들 또한 모두 하나의 인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말의 무게에 충격을 느꼈다. 지금 우진의 언행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한 복판에서 말이다. “안 나오면 내가 가지.” 우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설 때 군인들이 반사적으로 막아섰다. 그들의 눈엔 두려움이 가득했고 우진의 무심한 눈빛은 그들의 두려움을 삼켰다. 우진이 손을 일으키는데 그의 뒤에 있던 고양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어휴, 주인님은 너무 막무가내다옹.” 우진보다 앞선 비비가 분홍빛의 앙증맞은 발을 휘저었다. 비비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눈처럼 퍼져 나간 검은 꽃송이들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훑었다. “으으음.” 군인들이며 기자며 할 것 없이 모두가 스르르 눈을 감으며 쓰러졌다. “쓸데없이.” “냥, 이게 더 효율적이다옹. 괜히 죽여서 또 고소 당하면 어쩌냐옹? 여긴 지구다옹, 지구. 자꾸 귀찮은 일 만들지 말라냥.” 뭐, 여기서 사람들을 죽이면 고소 수준으로 끝나진 않겠지만…. 티비를 자주 봐서 그런가? 지구의 사회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비였다. 어쨌든 귀찮은 일을 피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일이다. 우진은 무차별 살인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폭탄테러를 자행한 놈의 배후만 죽이면 된다. 그 영혼을 씹어먹어 화를 달랠 것이다. 잠들어버린 사람들을 지나려는데 비비의 능력에도 잠들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항마력을 가진 존재. 각성자들. “간나새끼. 공화국이 만만하다 이거네?” “결국 이리될 줄 아랏써. 남조선 아새끼리 평양에 들이는게 아이였지비.” 북한의 초능 부대 각성자들. 사령관 동지 리평관의 지시로 군인들 사이사이에 섞여 있던 자들이었다. ……. A급이 1명에 8급이 9명. 아무래도 우진이 던전에서 나온 후에 던전 공략을 하기로 준비된 팀원들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이 우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진이 그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뭐? 새끼들아.” “…….” 노려보면 어쩌자는 것인가? 우진의 말에 초능부대 각성자들이 저마다 능력을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며 우진이 씩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대가리를 치겠다는데 부하들이 나 몰라라 하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우진은 그들이 준비도 하기 전에 뼈 창을 소환해 던졌다. “흥.” 고위 각성자답게 그들이 아주 손쉽게 피해냈으나 애초에 우진의 노림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지이잉. 우진이 스피릿 아머를 이루고 있던 영혼 몇을 꺼내어 스피릿 스피어를 쏘아 보냈다. 그것들은 대상을 맞출 때까지 끝까지 추격한다. “헛! 뭐야?” 방어마법을 이용해 막아내는 자들도 있었고, 공격마법을 이용해 아예 스피릿 스피어를 깨부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잠깐이나마 한 눈이 팔린 사이 우진이 쏘아낸 뼈 화살이 날아들었다. 푸슉! “으윽!” 우진은 연달아 뼈 화살을 쏘아냈다. 전사클래스의 궁술 스킬은 우진의 활쏘기에 대한 숙련도를 전문가 수준으로 높여주었다. 하지만 몇몇은 화살을 막아내고는 곧장 반격해왔다. 그것도 아주 신속하고 날카로운 공격. 이연희에 비해서도 결코 밀리지 않을 빠른 쾌검이었다. 그 공격에 얼굴을 다쳐 아찔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의 레벨은 그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겨우 A급 각성자의 공격 따위. 카앙. 우진이 들고 있던 활이 그대로 도끼로 변했다. 그와 함께 도끼날을 머리 뒤로 돌려 그대로 한 바퀴 돌리며 돌진해오는 상대를 아래에서 휘돌려 쳤다. 쾅! 휘돌리기가 적중하자 그 충격에 비틀거리는 상대의 가슴에 그대로 본 스피어를 쏘아 보냈다. “큭!” 후우웅, 툭! 한발 앞으로 도약하며 휘두른 도끼날에 상대의 머리가 분리되어 치솟았다. 우진이 피식 웃으며 시체부활을 시전했다. <특수조건 충족. 듀라한을 소환하셨습니다.> 목이 잘린 전장의 기사. 듀라한은 그냥 되살아난 부활시체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A급인 6서클 이상의 전장에서 목이 잘린 신체능력 각성자를 상대로 시체부활을 써야만 조건이 충족한다. 까다롭지만 결과물은 놀랍다. 그저 굼뜬 시체가 아니었다. “크라아.” 움직임은 죽기 전과 비슷했으며 그 힘과 파괴력은 오히려 더욱 늘어났다. 인민군복의 듀라한은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 들고는 불과 몇 초 전까지 동료였던 북한의 각성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으아악.” 언제 죽은 시체와 싸워봤을까? 아니, 불과 몇 초 전 동료였던 사람의 시체와 싸워봤을까?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었으며 우진은 죽은 각성자들의 영혼을 그대로 흡수해 스피릿 아머에 저장했다. 퍼어엉! 시체 몇이 터지며 해골 병사가 되었고 또 몇은 해골마법사가 되었다. 위이잉. 돌쇠가 빛 덩어리인 채로 소환되어 비비의 주위를 맴돌았다. 명령만 있다면 즉시 주위의 사물을 끌어당겨 몸체를 이룰 것이다. “가자.” 우진이 주석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김종은이 어디에 숨던 지 상관없었다. 깨비의 기운이 느껴지는 데로 가다 보면 김종은이 있을 것이다. 감히 자신을 나를 상대로 뒤통수를 치다니. 그 대범함을 칭찬하며 비참하게 죽여주마. 우진의 앞에 이번엔 최해솔이 가로막았다. “멈춰주십시오.” 뜻밖의 상황에 우진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각성자였나?” 너무 존재감이 없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전사의 감각을 활성화하며 최해솔을 관찰하니 레벨이 11이었다. 겨우 1서클은 도달한 수준. F급의 각성자였다. 일반인이었다면 1에서 9레벨 사이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보잘것없는 항마력으로 비비의 수면의 저주를 버텼다니 칭찬해줄 만한 정신력이었다. “멈춰주십시오. 아직 수습할 수 있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꼭 내가 사고 친 것처럼 말한다?” 사고를 수습해주겠다는 건가? 뭐, 그런 소리라면 정말 우진으로서는 어이없을 수밖에 없었다. “사고는 이제부터 칠 건데?” “…….” 인민군의 초능 부대 고위 각성자 10명이 죽었다. 주석궁의 광장 한복판에서 기자들을 포함해 인민군 300명이 일시에 잠들었다. ‘이보다 더 큰 사고라니….’ 최해솔은 머리가 아찔했다. 우진의 눈빛을 보자면 전혀 장난이 아니었다. 더욱이 해솔은 방금 전 눈앞에서 10명이나 되는 고위 각성자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당한 지 보았다. “크롸아.”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는 머리를 옆구리에 낀 시체는 괴기스러움을 넘어섰다. 시체를 폭파시키고 나타난 해골 병사들의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해솔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본적이 없었다. “멈춰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왜?” “전쟁입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평양에서 무력충돌.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것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좋은 쪽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은 무슨, 그냥 돼지 새끼만 혼내주는 거야.” “…….” 그렇게 혼내면 안된다니까? 시큰둥한 우진의 대답에 해솔은 잠시 멍하게 할 말을 잃었다. “난 내 뒤통수를 친 새끼를 용서할 수 없어.” 뒤통수라니. 그럼, 던전에 진입한 의문의 남자는 역시 우진을 공격하기 위한 북측의 요원이었던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조국을 생각해주십시오. 전쟁을 일으킬 순 없습니다.” “거, 쫑알 쫑알. 말 많네. 전쟁 안 해. 임마.” 우진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해솔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해솔은 우진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그 발소리에 맞춰 심장이 덜커덩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우진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땐 벌렁거리다 못해 심장이 밖으로 흘러 나오는 줄 알았다. “죽기 싫으면 비켜.” “…….” 우진의 말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최해솔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죽이십시오. 참으셔야 합니다.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참아주십시오. 이건 아닙니다.” 해솔의 말에 우진이 가만히 그를 보았다. 그래, 참을 수는 있지. 그런데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참을 이유가 없다. 감히 폭탄테러를 지시한 돼지를 살려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제발….” 우진의 주먹이 해솔의 복부에 꽂혔다. 해솔이 그 한 번의 공격에 몸을 새우처럼 접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고통스럽겠지만 죽진 않을 공격이다. 우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이상 깨 있어 우진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은 없었다. 저 멀리 구경꾼들이 있었는지 분주한 움직임이지만 상관없다. * 주석궁의 지하벙커로 향하는 통로. 두루루루루! 티리리리링! 한쪽 벽에서 빼꼼 내밀어 진 총구가 불을 뿜었지만 모조리 스피릿 아머에 막혀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쾅! 우진의 해머가 벽을 때리자 총구가 비틀리며 벽도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히익!” 각성자도 아닌 인민군은 자신을 지켜주던 두터운 벽이 사라지자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냥!” 비비가 수면의 저주를 걸어 즉시 재우자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귀찮게시리.” “냥, 괜찮다옹.” 우진은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연기를 돌아보았다. 화약냄새가 진동을 했다. 우진은 이제 강철 문을 하나 남겨두고 있었다. “어이, 종은이. 잠깐 이야기 좀 하지?” “…….”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사람은 안에 있었다. 깨비의 존재가 바로 너머에 있으니까. 뭐,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인가? 쾅, 쾅! 폭탄에도 견딜 강철문이다. 우진이 해머로 내리쳐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쳇, 돌쇠야.” “위이잉” 돌쇠의 레벨도 어느덧 27. 기본매개로 흙을 이용할 수 있었고, 10레벨에 바위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레벨에 금속을 이용 가능해졌다. 쿠쿠쿵. 강철문 자체가 뜯어지며 뭉쳐졌다. 돌쇠가 웅크린 그 자세 그대로 길을 비켜주었다. 흔들리는 지하공간에 천장에서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히익!” 문 자체가 골렘으로 변해버리자 안엔 겁에 질린 김종은과 호위총국의 경호원들이 있었다. 우진이 그들을 보며 씩 미소 지었다. “이야기 좀 해볼까?” 그 미소가 악귀의 미소보다도 더 잔인했다. “감히 날 죽이려 해?” “동무, 내래 그런 적이 없시야.” 김종은이 떨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괴물이다.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었다. 초능 부대의 초능자들의 시연을 몇 번이나 봤지만 우진처럼 거침없고 상대 불가능한 초능자는 없었다. 김종은은 정말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숨어도 숨어도 우진은 귀신같이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는 밀고 들어왔다. “뭐, 그거야 아는 방법이 있지.” 우진이 씩 웃자 종은의 그림자에서 깨비가 뽑혀 나와 우진의 그림자로 흡수되었다. ‘으음.’ 우진이 던전에 있을 동안 김종은의 그림자에 붙어 그가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우진이 경험한 것처럼 합쳐졌다. 그리고 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아니네?’ 난감한 상황에 비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주인님 또 사고쳤다옹. 좋게좋게 해결하라옹.’ 이미 한바탕 날뛰었더니 화도 조금 수그러든 참이었다. 그렇다고 용서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 징벌의 대상이 김종은이 아닐 뿐이다. “이봐, 종은이.” “말하시오. 동무.” “자살 폭탄으로 날 죽이려 한 놈의 배후를 찾아. 난 내 뒤통수 깐 놈을 살려둔 일이 없어.” “약속하갔시오. 동무. 반드시 뒷배를 찾아 일벌백계하갔시오.” 김종은의 말에 우진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오해했군 그래. 미안하게 됐어.” 평양을 한바탕 뒤집어 엎고는 미안하다로 끝날 일일까 싶었지만…. “아니오. 수하를 간수하지 못했시오.” “오해가 없었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우진의 말에 김종은이 아쉬운 얼굴로 악수했다. 우진은 넉넉한 턱살의 그를 보며 웃었다. 북한을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독재자가 각성자 덕후였다니… 아무런 능력도 없는 그가 여러 아티팩트를 수집할 정도로 열렬한 마니아였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팬이라니…. ‘그럼 선물은 잘 받아가지 동무.’ 우진이 히죽 웃었다. 주석궁의 구석구석은 물론 아티팩트를 잔뜩 모아놓은 김종은의 취미실까지 알고 있었다. ‘강우진 동무가 날 보고 웃었시야.’ 김종은이 마주 웃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각성자의 강함에 대한 동경은 우진의 생각보다 더 깊었다. < 60화 - 뜻밖의 전리품 > 끝 ⓒ 진설우 < 61화 - 뜻밖의 전리품 (2) > 우진이 지하통로를 걸어나왔다. “멈춰 주십시오!” 그때 용케 우진을 찾은 최해솔이 뛰어와 우진의 앞에 섰다. 여전히 찡그려진 그의 표정이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멈춰주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직 봉합할 수 있습니다.” 최해솔은 진심이었다. 이대로 터지면 전쟁이 일어난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최해솔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이건 아닙니다. 제발 이제 멈춰주십시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전쟁은 수십 수만의 희생이 뒤 따른다. 그 처참한 비극은 꼭 막고 싶었다. 우진이 그를 보곤 이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해솔이 그런 우진의 표정을 살피고는 눈빛이 흔들렸다. “서, 설마!” 벌써 일을 쳤구나. 김종은이 죽었구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또 피바람이 몰아치겠구나. 실수했다. 길드 아르달이 요청한 평양의 6성 던전 공략을 수락하는 게 아니었다. 털썩 주저앉은 해솔이 망연자실해하는데 우진이 슬쩍 웃었다. “아직 안 죽었어.” “정말이십니까? 잘하셨습니… 아직 이라면 정말 죽이실 작정입니까?” 해솔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뭐, 봐서.” 폭탁테러를 지시한 놈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고 말이다. “참아주십시오. 화가 풀리지 않으신다면 제 목숨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진심입니다.” 해솔은 주저앉은 채로 자세를 잡아 무릎을 꿇었다. “정말?” “한반도만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00년도 안됐습니다. 이 땅에 또다시 그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제 목숨으로 만족하신다면…….” 아니, 세계전쟁으로 확진되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무대가 한반도가 되는 게 문제였다. 사랑하는 조국이 망하게 생겼는데 한목숨 바치는 게 아까울까? 우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해솔을 보았다. 지원처럼 티 없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은 아니지만,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영혼은 지구에 와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진심을 담은 의지가 있다는 말. 제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최해솔 중위.” “네.” “진짜 목숨 내놨어?” “여기서 더 일이 번지는걸 막을 수 있다면 물론입니다.” 김종은이 살아있다면 아직은 덮을 수 있었다. 우진은 해솔의 진심을 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죽이긴 아깝고… 전역해.” “잘 못들었습니다?” “전역하고 내 밑으로 와. 종은이 살려 줄 테니.” “…….” 해솔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참된 군인으로의 자신의 꿈은? 그때 우진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날래날래 정리하라우. 리평관이 어디 갔는지 알아보라우.” 김종은의 목소리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냥 돼지 잡을까?” “…가겠습니다.” 우진이 미소가 짙어졌다. 최해솔과 같은 신념이나 의지를 지닌 자는 흔치 않았다. 뜻밖의 전리품에 우진이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깨비의 기억 때문에 주석궁의 위치는 훤했다. 이제 김종은의 컬렉션을 털러 갈 때였다. “그럼 잘 이야기 해서 수습해봐.” “…….” 뭐지? 이렇게 사고를 쳐놓고 저렇게 간단하게 수습이라니…. 우진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기 전에 빠르게 김종은의 취미방으로 향했다. * 폭풍 같던 3일이 지났다. 리평관과 관련자들이 모조리 잡혀 들었고 언제나처럼 죄 없던 몇몇도 함께 잡혀들어갔다. 남한의 인사들은 그들의 처분이야 모두 김종은에게 맡겨두고 귀환했고, 김종은은 고문실에서 분노로 부들거렸다. “반동분자 새끼! 감히 인민의 피땀 어린 보물들을 빼돌려? 공화국의 미래를? 간나새끼!” “위원장 동지… 정말 모르오… 내래 정말 모르는 일이오….” “아직도 거짓부렁이네? 입 열 때까지 본때를 보여주라우.” “알갔습네다.” 푸줏간 고기처럼 양팔이 매달린채 축 처진 리평관을 향해 고문관들이 다가와 매질을 시작했다. 김종은은 차가운 눈으로 그것을 보며 끓어오르는 속을 달랬다. 인민의 피와 땀으로 모은 보물들이 몽땅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강우진과 찍은 사진과 그의 사인 정도…. 정말 몽땅 쓸어갔기에 김종은의 분노는 대단했다. 지난 5년간 모은 컬렉션인데 말이다. 의심이 가능한 사람은 리평관 뿐이다. 오래전부터 반역을 준비하며 계획했을 것이다. 아마 이번 남측의 방문에 그들에게 뒤집어 씌울 작정이었던 모양이지만…. ‘강우진 동무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했구먼기래.’ 그가 죽지 않고 살았기에 리평관의 반역이 밝혀졌다. ‘그들은 아니야.’ 잠깐 남한측 인물들을 의심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들은 그저 두 개의 차에 나눠 타고 갔을 뿐이다. 그 막대한 양의 보물을 훔쳤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각성자라곤 AA급의 강우진과 F급의 최해솔 뿐. 그들이 혹시라도 아공간의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을까 검사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나왔다손 치더라도 아공간에 수납할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었다. 최고의 아공간 아티팩트는 중동의 한 왕가에서 가지고 있는데 300리터 냉장고 크기 정도를 수납하는 게 최고였다. 사라진 보물들의 양이 어마어마하니 아공간이 있었다 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결국 남는 것은 북한측 인물의 소행. “간나새끼. 독하구먼기래.”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리평관을 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 “이제 판문점입니다.” “으으, 다 왔네.” 기지개를 켜는 우진을 보며 해솔은 말을 아꼈다. 3일 동안 우진은 그야말로 늘어지게 잠을 잤고, 협상단은 3일 동안 재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북한내의 반역에 연루된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남한의 각성자 강우진이 활약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실제야 어떻든 간에 사정은 더 좋아졌다. 우진이 북한의 고위 각성자를 죄다 쓸어버렸으니 북한은 공략된 6성 던전도 자체 전력으로 도전할 수가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미 배제시킨 중국과의 관계는 더욱 껄끄러워졌으며 러시아와도 신통치 않았다. 결국 남한이 이 던전을 운용하며 그 수익을 혈석으로 나누는 것에 대한 사용계약까지 이끌어냈다. 평양에서 칼부림이 일어난 것 치고는 너무나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당사자인 우진은 그 난리를 치고도 주석궁에서 늘어지게 잠을 잤다. 리평관과 그 외 관련자들을 잡아들인다고 새벽에 간간이 들려오는 총소리에도 잘도 잤다. 최해솔은 우진과 같은 강심장은 아니었기에 북한에서 머무르는 내내 불안했고, 험악한 분위기에 협상도 힘들었다. 이제 판문점을 지나면 남한땅을 밟으니 그렇게 안심일 수가 없었다. “여쭤볼게 있습니다.” “말해봐.” 최해솔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순간부터 강우진은 자연스레 그에게 하대하고 있었다. “어째서 제가 아르달에 들어가는 정도의 조건으로 참으신 겁니까?”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도 당당히 화랑 길드 사장을 따귀 때리는 우진의 막무가내 성격을 생각하면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적어도 우진은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중간에 잘 바뀌는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예?” 우진의 반문에 최해솔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쑤쓰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에 대한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인가? 북한 최고 통치자의 죽음을 말린 사건이니까? 이건 뭐, 스스로 다시 생각해보니 ‘답정너’와 다를 바 없었다. 창밖을 구경중인 우진의 뒤통수를 보며 해솔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최해솔이 부끄러운지 헛기침하는데 우진이 피식 웃었다. “가치 있고 능력 있는 놈들로 채우면 조직은 알아서 돌아가.” “…….” 뒷말은 생략했다. 관리할 필요도 없고, 귀찮고 어려운 일들은 부하들이 다 처리해줄 것이다. 우진에게 이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넌 가치 있어. 매력적인 인재지.” “…….” 밑에 두고 부려 먹고 싶을 만큼. 우진이 창밖 풍경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고개를 돌렸다. 감격한 듯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젊은 군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울지는 않지만 눈가도 촉촉했다. “전역 후에 당장 찾아가겠습니다.” “어, 어 그래.” 우진은 굳이 원래부터 김종은을 죽이지 않으려 했단 것은 말하지 않았다. * 아르달의 길드 사무실. 유일하게 커다란 티비가 위치한 사장실에 아르달의 창립멤버들이 모조리 모였다. 그들은 3일 내리 속보와 특집으로 편성된 티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틀어줬는지 이제는 외울 정도였다. 우진의 모습을 얼마나 자주 봤는지 전혀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네, 현재까지 소식들을 종합해보면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로 리평관으로 북한의 유일 초능부대 사령관이라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각성자들의 능력은 양날의 검과도 같아요. 인간의 범위를 초월한 그들은 몬스터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취약하기 마련이죠. 북한과 같은 정권에서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죠. 초능부대의 사령관의 변절 만으로 북한정권은 상당한 위협상황에 놓이게 되는 거죠.] [예, 이번에 6성 던전의 공략 건으로 평양을 방문한 아르달의 길드마스터 강우진 사장이 아니었다면 쿠데타로 김씨정권이 막을 내렸을지도 모르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급진적 성향의 새 인물이 북한의 정권을 휘어잡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남북관계에 대해 강우진 사장의 공로는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훈장도 수여되지 않습니까?] [줘야지요. 강우진 사장의 활약으로 남북이 급진적인 관계회복의 계기가 되었으며…] [강우진 사장의 폭행 스캔들이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띠릭. 정민찬은 패널들의 대화가 같은 내용의 반복이자 티비를 껐다.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맞댔다. “저거 백 퍼 구랍니다. 사장님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 우승훈의 말에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했다. “이거 딱 각 나오는데. 사장님이 김종은 협박한 거 아닐까요? 보니까 짤막하게 리평관이 그간 북한이 모은 아티팩트들을 싹 쓸었을 거라던데, 이거 왠지 사장님이 한 거 같은데.” 우승훈의 날카로운 추측을 김해민이 받았다. “에이, 설마요. 사장님이 좀 패도적이라 그렇지 도둑질까지 하실 분이십니까?” “좋게 말해 패도적인거지, 걍 앞뒤 안 가리는 거 아닙니까?” 옥신각신하는 그들을 보며 좋지 못한 표정의 성구가 말문을 열었다. “저, 사장님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긴데….” 배도수 일행을 죽인 일과 그들의 호주머니를 턴 일등을 이야기해주자 창립멤버들의 얼굴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우승훈이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와, 이것 봐요. 이거 분명 뭔가 있는 거라니까? 언론에서 떠드는 거 다 믿을게 못돼요.” “그러고 보니 길드 만들기 전에 김종은 목 따러 가자고….” “와, 이것 봐. 이것 봐. 나 팔에 소름돋았어. 우와.” 성구의 말에 우승훈의 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사장님이 벌써 김종은 죽였을지도 몰라요.” “에이, 설마요.” “전에도 멱따러 가자고 했다며? 계획된 평양 방문일지도 몰라. 뭐, 국가유공자 집안이고 그런가? 북한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으신 게 틀림없어.” “에이, 그땐 사장님이 입대영장 나와서 화나서 그러신 건데….” 성구의 말에 우승훈의 눈썹이 휘었다. “겨우 입대영장으로? 와, 그거랑 무슨 상관이….” 입대영장 나왔는데 김종은이 멱따기는 왜 따는가. “군대 안 가시려고….” “와, 사장님 스케일 보소. 이건 이거대로 소름인데요?” 군대 안 가려고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암살하려 하다니. “제가 이런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아, 뭐, 제가 꽁하게 마음에 담아두고 그런 성격은 아닌데, 제가 휴대폰 팔던 때에…” 딸깍. 승훈의 말은 사장실 문이 열리며 그쳐야 했다. “잘들 있었냐?” “…….” 우진의 등장에 모두가 얼어 붙었다. 우진이 오랜만에 보는 그들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뭐, 왜 그래?” “사장님 대통령하고 만찬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거기 가서 뭐해. 너희랑 소주나 한잔하려고 왔어.” 아, 대통령하고 약속을 저렇게 쉽게 깨도 되는 건가? “아오, 그런데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냐? 누가 내 욕 했냐?” 우진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반자동 적으로 우승훈을 향했다. 우승훈의 동공이 마이크로초 단위로 줄어들며 진동했다. 우승훈이 벌떡 일어서더니 우진을 보며 박수쳤다. 짝, 짝, 짝! “고생하고 돌아오신 히어로 강우진 사장님을 위해 박수 한 번 칩시다. 사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리액션 속도가 느린 다른 사람들과 과장된 우승훈을 보며 우진이 눈매를 좁히며 웃었다. “했네, 했어.” 우승훈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 61화 - 뜻밖의 전리품 (2) > 끝 ⓒ 진설우 < 62화 - 영웅심리 > 시간이 시간이었던지라 새로 뽑은 신규직원들은 거의 퇴근했고 몇 남아있던 이들도 퇴근시켰다. 그동안 바쁘단 이유로 회식 한 번 못했는데 짬을 내어 창립멤버들끼리 저녁 겸 술자리를 가졌다. “할머니이!” “아이쿠, 내 새끼 왔누?” 달동네의 푸근한 할머니는 여전했고 성구는 제집처럼 일손을 도와 기본 찬을 차리기 시작했다. 허름한 가게는 그들이 유일한 손님이었고 분위기는 썰렁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민찬이었다. “사장님. 정말 안 가십니까?” “안 간다니까 자꾸 묻냐?” 아니, 전화에 메시지에 불이 나니까 그러지. 길드의 대외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정민찬이기에 지금도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대통령님과 약속 아닙니까?” “난 약속한 적 없어. 걍 지들이 오라는 거지. 오라면 내가 가야 해?” “상 준다지 않습니까?” “그런 상 안 받아도 되니까 전화하지 말라그래.” “그래도….”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냥 갔다 온다, 갔다 와. 가서 상이고 나발이고….” “아, 아닙니다. 제가 정중히 거절토록 하겠습니다.” 정민찬이 무음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을 보았다. [부재중 27통, 읽지 않은 메시지 128개] 어우, 괜히 우진이 가서 사고 칠 바에야 안 보내는 게 낫다. 민찬이 전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조금 무거운 분위기에 우승훈이 웃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하하하, 사장님 이번에 평양에서 있었던 일 좀 이야기해주십시오. 무용담 말입니다. 무용담.” “별거 없었어.” “에이, 그러지 말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무용담이라…. “뭐 무용담이랄게 있나, 던전 좀 돌다가 애들 좀 혼내주다가 내려온 거지.” “하하하, 저희는 사장님이 김종은이 죽이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지 말입니다.” “아, 그러려고 했는데 살려줬어.” “…….” “내 팬이래.” “…….” 그러려고 했다니… 또, 팬이라니… 승훈과 해민의 얼굴이 굳는데 막창을 든 성구와 통화를 끝낸 민찬이 자리로 돌아왔다. “잘 이야기 끝냈습니다. 대신 미국 일정 이후에 한번 청와대의 초청에 응해야 하십니다.” “뭐, 그렇게 해.” 우진은 대충 대답하고는 불판에 올려지기 시작하는 막창을 초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치지지지직. “야, 이 집 막창 끝내준다. 소주랑 딱 이야. 딱.” 벌써 군침이 도는 듯 입맛을 다시는 우진을 보며 해민과 승훈이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해민의 눈짓에 승훈이 옅게 한숨을 쉬고는 말문을 열었다. “저… 그런데 김종은 왜 죽이려 하셨습니까?” “아, 던전 들어가는데 어떤 놈이 폭탄 들고 난입해서 껴안더라고. 난 또 김종은이 시킨 줄 알고 혼내주려고 그랬었지.” “…….” 그럼 지금 그 폭탄테러에도 살아 돌아왔다는 말인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우진은 멈춰진 성구의 집게 대신 열심히 젓가락을 놀려 막창을 뒤집었다. “성구야. 탄다.” “예? 예, 예.” 멍때리던 성구가 집게를 집곤 막창을 자르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이야, 맛있겠다.” 노릇하게 구워지는 막창을 보며 우진이 소주를 깠다. 소주병을 내밀자 민찬이 잔을 들었다. “왜 이렇게 죽을상이야? 분위기 왜 이래? 첫 회식인데.” “아, 아닙니다.” 너무 담담하게 누굴 죽이네 마네 해서 그렇지. 지금 눈앞에 있는 사장이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고찰과 현실과 상상의 괴리만 빼면 회식 자리 자체는 썩 좋았다. 무엇보다 길드 아르달의 첫 회식이니 말이다. 우진이 창립멤버들에게 모두 술을 따르고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자, 그동안 고생했고, 더 고생해라.” “…….” 무슨 건배사가… 승훈이 눈치껏 소리쳤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쨍. 시원하게 소주를 꺾은 우진이 막장에 찍은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었다. 캬, 이 맛이지. 본격적으로 먹으려는 듯 깻잎 쌈을 준비하는 우진과 어색한 나머지들을 보곤 우승훈이 눈치를 보더니 과장되게 웃었다. “하하하, 사장님. 요즘 사장님보다 더 유명한 사람 누군지 아십니까?” 대한민국에서야 우진이 매번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유명인이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가장 유명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우승훈이 휴대폰의 배경화면으로 바꿔놓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메르디라는 여잔데 아리아 교단 성녀랍니다. 이게 조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동영상만 보면 진짜 신통방통합니다. 진짜 신이 존재하는지…….” “조작 아니야. 진짜야.” “예? 사장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응? 원래 알던 사람이야.” “예?” 놀라는 우승훈과 달리 정민찬은 좀 더 심각한 표정이었다. 메르디는 다름 아닌 던전에서 나온 첫 인류였다. “이분은 던전에서 첫 발견되어 나온 사람입니다. S급 이상의 각성자인데… 이 사람을 아신단 말씀입니까?” “어, 알지. 그래서 이번에 미국 가는 거 아니냐? 물어볼게 있어서.” “…….” 그것까지는 몰랐다. 그저 타이탄 길드가 주최한 컨소시엄을 참석하기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 성녀 메르디와 친분이 있다니…. “어떻게 아시는 사이입니까?” 우진이 소주를 시원하게 비우고는 크게 싼 쌈을 입에 구겨 넣었다. 모두가 우진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우진은 느긋하게 맛을 음미했다. 한참을 씹다가 꿀꺽 삼키고는 사이다를 한 모금 마셨다. “아르펜이란 행성이 있어.” 사장님이 천문학에도 관심이 깊었던가? 모두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자 우진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5년 전 행방불명 되었었지. 그때 소환되어 간 게 아르펜이란 행성이다.” “…….” 우진의 충격적인 말에 모두가 침묵하는데 우승훈이 눈치를 보다가 조금씩 웃었다. “하하하, 사장님 너무 고차원적인 개그라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개그 아니니까 가만히 있어.” “넵….” 승훈이 어깨가 움츠러드는데 우진은 제법 심각한 얼굴로 모두를 보았다. “이유야 몰라. 난 그곳에서 20년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지. 난 살아남았고 지구로 돌아왔어. 근데 5년밖에 안 흘렀더라고.” “마치 던전의 시간하고 비슷하군요….” “그래. 돌아와 보니 던전이 생기고 지구가 이상하게 변했어.” 우진의 진지한 말에 모두가 혼란에 휩싸였다. 이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우진의 놀라운 능력의 비밀이 이것인가? “뭐,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도 메르디도 비슷하게 넘어왔겠지. 아니, 정확히 모르니까 이번에 가서 물어보려는 거야.” “…….”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서인가?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성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이, 이런 이야기 해주셔도 되는 거에요?” 혜성처럼 등장한 각성자 강우진에 대한 뒷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재생산되고 있었다. 더욱이 그가 행방불명된 5년간의 행적은 어디에도 노출되지 않아 모두의 궁금증을 사고 있었다. “왜? 뭐, 감춰야 되는 건가?” “…….” 던전도 생기고, 몬스터도 기어나오고, 더구나 성녀도 등장한 마당에 굳이 감춰야 하는 이야기인가? 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밝혀질 이야기들이다. 미리 이야기하는 것은 아르달의 식구들로 하여금 먼저 알고 대비하라는 의미였다. “그럼 그곳에서 성녀님하고는 어떤 관계셨습니까?” “메르디랑?” 우진은 옛 기억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복잡하지, 복잡해. “뭐, 친구 같은 거야. 친구.” * 타이탄 본사건물의 아리아 교단. 성녀 메르디는 신의 힘을 빌려 대화했다. 얼마 전까지는 아리아의 존재를 믿는 사람하고만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성녀의 언어습득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 이제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동안 벙어리라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성녀가 말문을 열자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또다시 놀라야만 했다. “이, 이게 뭐죠?” “예? 왜 그러십니까. 성녀님?” 도도하고 기품있으며 언뜻 오만하기까지 해 보이던 성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란 것이 표출되었다. 그만큼 성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해밀턴 부인은 요즘 성녀가 배우고 있는 컴퓨터를 보곤 다가갔다. 모니터엔 한국의 각성자 강우진의 사진이 내걸려 있었다. “미스터 강이군요.” “미스터 강? 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더 찾을 수 있나요?” “물론이죠.” 해밀턴은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뤄 강우진의 이름을 키워드로 몇 가지 검색했다. 강우진에 대해 제법 자세하게 다룬 칼럼이 있어 그것을 보여주었다. 찬찬히 칼럼을 읽던 메르디의 눈빛이 흔들렸다. 옆에 서 있는 해밀턴이 그 떨림을 느낄 정도였다. 인간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흔들림 없던 그녀가 동요하고 있었다. “성녀님. 괜찮아요?” “이럴 수가…. 그, 그라니….” “왜요? 이 사람을 아시나요?” 메르디의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알다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아르펜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인데. “학살의 네크로맨서가… 이곳에 있다니….” 메르디는 공포영화라도 본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서, 성녀님. 진정하세요.” 해밀턴은 메르디를 진정시키며 얼른 모니터에 뜬 우진의 사진부터 껐다. 10여 분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하여 마음을 추스른 메르디가 해밀턴에게 부탁했다. “저 자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메르디는 해밀턴이 자료를 조사하는 사이 마음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창밖으로 향했다. 아리아 교단은 타이탄길드의 고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밖으로 한눈에 보이는 맨해튼의 도시 전경을 보며 메르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임모탈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그가 사라지고 아르펜의 상황이 급변했다. 그가 부리던 불사의 군대가 사라지자 트라넷은 그가 통치하던 땅을 모조리 차지했고 균형은 빠르게 무너졌다. 모두가 임모탈이 당연하게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갑자기 사라진 그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지구는 신기한 곳이다. 마나의 농도가 낮기 때문인지 각성자들의 수도, 그 수준도 아르펜에 비할 바 없이 낮았지만 화학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의 숫자도 수준도 월등히 높았다. 던전 브레이크로 튀어나온 몬스터는 2시간이 걸리지 않아 모조리 소탕할 정도로 화력이 좋았다. 거기에 엄청나다는 말로는 부족한 정보교환 속도는 메르디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도록 만들었다. 아르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반대로 전 인류가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했다. 바로 인터넷이라는 존재로 말이다.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사정까지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서, 설마!” “왜 그러시나요?” 메르디는 해밀턴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한민국에도 제 존재가 알려졌을까요?” “물론이지요. 성녀님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에요.” “…….” 성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 모든 계획을 철수해야하나? 임모탈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쩌면 아직 그가 자신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을까? “아, 여기 찾았어요. 아르달 길드의 마스터군요. 이번 컨소시엄에도 참가한다고 되어있네요.” 아르달. 아르달… 그 저주받은 죽은 자들의 왕국 이름을 지구에서 또 듣게 되다니. ‘끝났어.’ 성녀 메르디는 절망했다. 임모탈이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 62화 - 영웅심리 > 끝 ⓒ 진설우 < 63화 - 영웅심리 (2) > 구워진 막창은 빠르게 사라졌고, 몇 순배의 술이 돌았다. 불콰하게 취한 몇몇은 벌써 얼굴이 시뻘겠다. 특히 우승훈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마시더니 벌써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으으, 사장님 술 정말 세십니다.” 좀 놀아봤다고 자부하는 우승훈이 기색 하나 바뀌지 않고 소주를 마시고 있는 우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르펜의 술에 비하면 소주는 맹물이지 맹물. “흑흑, 사장님 술도 잘 마시면서 저 왜 때렸습니꽈?” “얘, 왜 이래?” 옆에서 성구와 해민이 눈치껏 우승훈을 붙들었다. “아파쪄잉. 휴대폰 좀 비싸게 팔 수도 있지! 흐윽.” “…….” 저걸 죽이지 않은걸 후회해야 하는 걸까? 우진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는 성구와 해민이 승훈을 둘러업고는 성구의 차에 태웠다. 뒷좌석에 반쯤 눕히니 곧장 잠들어버리는 승훈이었다. “으휴.” 승훈을 눕히고 온 성구는 술김을 빌어 물었다. “그런데 형님.” “어, 왜?” “한 번씩 보면 형님 너무 매스컴이나 주변 상황을 너무 신경 쓰시지 않는 거 같아 염려됩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신경 써서 뭐해?” “음. 귀찮지 않으십니까? 기자들이 막 달라붙고….” “익숙해 지랬잖아.” “그게….” 말이 이렇게 안 통할 수 있을까? 성구가 말을 조리 있게 못해 답답해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정민찬이 성구의 뜻을 알고는 말을 보탰다. “법적인 문제도 있고, 국제적 고립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적을 만들어 좋을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적을 만든 다라….”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술을 한잔 마시고는 아르달의 길드원 성구와 민찬, 해민을 보았다. 뭐, 어차피 알긴 알아야겠지. “나도 옛날에 다 그래 봤지. 나라 눈치도 보고, 민심이 무서워 사람들 시선도 의식했었지.” 아르달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은 그렇게 막무가내란 말인가? “지금이야 나라도 있고 법도 있지, 근데 이게 얼마나 갈 거 같아?” “예?” 황당한 물음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던전은 터진다. 그것도 곧 터지겠지. 멀지 않았어. 곧 임박했어.” 이유 따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멀지 않았다. 그것도 대대적인 던전 브레이크가. “지구의 모든 던전들이 일시에 터진다고 생각해봐.” “…….” 대재앙.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군대가 있어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우진이 코웃음 쳤다. “6성 몬스터야 막겠지. 그 이상은?” “예?” “그럼 이게 끝이라 생각했어? 음. 보자. 6성 몬스터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수준이라고 치자. 그러면 이제 호랑이에 사자에 육식하는 코끼리가 막 쏟아질 거야. 거기서 끝이 아니지 나중엔 용도 튀어나오겠지.” “…….” 이걸 믿어야 되나 말아야 하나. “당장 스펙터들만 나돌아 다녀도 현대화기는 무용지물이지. 뭐로 막을래? 핵? 그거야말로 자살골이지. 세계는 붕괴하고 나라라는 울타리는 의미 없어. 도덕은 무너지고 생존 욕구만 남지. 본능이야.” “…….” 성구는 아찔한 생각에 괜히 몸이 잘게 떨렸다. 우진의 담담한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세계가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아나키에 빠져.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별별 미친놈들이 다 기어나오지. 강간에 약탈은 기본이지. 몬스터는 무섭고 인간은 약하니 같은 인간 것을 뺏어.”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분명 힘을 합쳐 싸워낼 겁니다.” 그래, 그런 인간들이 있었지. 용사에 권왕에 성기사단과 성녀들. 마탑의 마법사들과 연합왕국의 왕들과 기사들, 병사들…. “부질없지. 버티고 버티다 쓰러질 뿐이야. 결국 분열되고 저들의 꾐에 넘어가 등을 돌리지.” 트라넷에게 굴복하여 그의 종이 된 종족은 많았다. 고블린도 코볼트도 모두 그들의 종이 되었다. “어, 어쩌죠? 그래도 누군가는 막아야….” 성구가 말을 하다말고 우진을 보았다. 그 누군가가 있다면 우진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6성 던전의 솔플공략은 전례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 준비하고 있잖아.” 지구는 우진의 고향이다. 어머니가 있고 여동생이 있고 지인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지키려 하고 있다. “사람들 눈치를 보며 조심? 언론의 디스 기사들? 경찰 출석요구서? 다 부질없어. 오히려 더 알려야지.” 뭘 알린단 말인가? “내가 얼마나 무식하고 잔인하며 포악한지.”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떠든다면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다. 보편적 정의나 양심 따위는 우진에게 없었다. 그것들을 간직하며 살아남기엔 지난 20년의 세월이 너무 가혹했다. “세계가 뭐라 떠들던 상관없어. 영웅이 되려는 게 아니니까.” 강력한 통치자. “아르달이라는 나라엔 도망치는 자들이 없었어. 용감히 나가 싸우는 자들은 안식을 찾을 것이고, 도망치는 자들은 언데드가 되어 적을 향해 돌진했으니까.” 심각한 표정의 사람들을 보며 우진이 씩 웃었다. “적어도 아르달에서는 인간끼리 싸우지는 않았어. 그럼 왕에게 뒤져서 종신군역에 처하거든. 그들은 알고 있었거든. 왕이 얼마나 포악하고 망설임 없는지 말이야.” 성구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그 아르달이라는 나라랑 저희 길드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 우진이 씩 웃었다. “왜 없겠어? 내가 아르달의 왕이었는데.” 어쩐지 배도수 일행 죽일 때 콧노래까지 불더라니. “…….” 민찬도 성구도 해민도 그저 입을 꾹 다문채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민찬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이라도 세계에 알리고 협조를 구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풉.” 우진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누가 협조해? 세계인들이? 곧 지구가 몬스터 밭이 될지도 모르니 힘을 모아 대비하자?”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안 할걸?” “위기를 느낀다면 분명 뭉칠 겁니다.” 우진이 막창을 하나 입에 넣고는 질겅질겅 씹었다. 젠장, 덜 익었군. 막창을 빈 접시에 뱉어내고는 사이다로 입가심을 했다. “자연이 파괴되는지 알면서도 석유를 채굴해.” 자연 파괴하고는 급이 다른 문제지 않은가?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민찬이. 자연을 보호합시다 하면서 석유채굴을 막을 수 있겠어?” “…….” 우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난 이거 보는 순간 포기했어.” “휴대폰하고 무슨 상관이….” 크레이지 레드. 새로운 에너지원인 혈석을 이용한 현대문명. “지금 당장에라도 던전에서 혈석 캐내는걸 막아봐. 던전 공략만 하고 나오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말이야.” “…….” 전리품 없는 던전 공략. 그것도 목숨을 건 도전을 누가 하려 할까. “혈석을 채굴해 오는 것만 멈춰도 지구의 마나 농도는 아주 미세하게만 증가할 거야. 던전브레이크를 늦추는 거지. 그사이 대비를 하는 거야. 어때? 아주 합리적이지 않아? 할 수 있겠어?” “…….” 민찬은 할 말을 잃었다. 멈출 수 없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미 던전 사업은 너무 세계와 밀접해졌고, 자본을 가진 지배자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폭탄을 짊어진 기차는 이미 출발했다. “어, 어떻게 합니까?” 우진이 한 말들이 너무나 그럴듯해 자신을 이성적 인간이라 생각한 민찬도 거의 패닉에 가까웠다. 위기가 불쑥 찾아온 기분이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뭘 어떻게 해? 이렇게 소주나 마시고 던전이나 돌며 힘 키우는 거지.” 아니, 잔뜩 심각하게 말해놓고 지금 술이 넘어가는가? 술기운이 확 달아난 세 사람이었다. “캬아.” 우진이 소주를 비우고는 바삭하게 구워진 막창을 하나 씹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세 사람을 보았다. “뭐? 왜? 뭘 바래?” 다 함께 으샤으샤 지구를 지킵시다. 해도 어차피 들어먹지 않을 사람들이다. 인간은 위기에 뭉치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뭉치니까. “죽을 놈들은 죽고, 살 놈들은 살고, 싸울 놈들은 싸우게 되어있어.” “…….” 철학과 교수도 저렇게 태평하지는 못할 것이다. “희망적인 건 혈석이 몬스터도 불러들이지만 지구의 각성자들도 레벨업 시킨단 말이지.” 우진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희망적인 말에 세 사람의 눈빛에 기대감이 어렸다. 적과 아군의 전력은 동반 상승한다. 힘을 어떻게 결집 시키느냐에 따라서 싸움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주 적극적이란 말이야.” 언제나 지구로 돌아오고 싶어했던 아르펜에서의 상황과는 달랐다. 이곳은 지구. 우진으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곳이다. 트라넷의 졸개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사고는 치겠지. 난 내 원칙을 절대 어기지 않을 테니까.” 그의 행동이 아르달의 법이 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절대 만만히 보일 수 없다. 뒤통수친 놈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우진에게 있어서 그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한다. 법과 도덕이 무너진 세상에서 우진이 지켜낸 원칙은 사람들에게 질서를 줄 것이다. 대혼란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결국 구심점을 찾아 모일 것이다. 우진은 그 중심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자비한 악마가 되어서라도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수습해봐.” “…….” 아르달의 지원부서에 특명이 내려졌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무언가 묵직한 사명감이 얹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저길 건드렸다가는 내가 좆되겠구나. 그 정도 개념은 심어줘야지.” 세계인들에게 말이다. 우진이 계획한 아르달의 울타리는 이미 세워지고 있었다. * 길드 화랑의 본사 사장실. 디리릭. 마우스 위에 얹어진 손이 거칠게 휠을 내렸다. “이익.” 이상호는 이를 뿌득 갈았다. 강우진의 기사를 보면 볼수록 더 열이 뻗쳤다. “젠장, 이게 말이 돼?” [북한을 위기에서 구한 히어로] [남북 각성자연합 결성 초읽기? 최대 공로자 강우진.] [남북관계 급진전. 제 20차 이산가족 상봉 준비중.] [던전 클로저 AA급 각성자 강우진. 세계가 주목.] [집중탐구, 강우진이 있는 한 던전 브레이크는 없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딨어? 폭도를 영웅 취급해? 허, 대한민국 잘 돌아간다!” 강우진은 아직도 폭행혐의로 고소된 상태지만 그에 대해서는 단 한줄의 기사도 없었다. 이상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할 길이 없었다. 띠리리. 인터폰 소리에 이상호가 신경질적으로 인터폰을 눌렀다. “뭐야?” [사장님. 경찰청장님 전화입니다.] “뭐? 연결해.” 경찰청장은 이상호도 단 한 번밖에 본적이 없는 거물이다. 친분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으나 쉽지 않은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전화가 걸려오다니. “화랑길드 사장 이상호입니다.” [나 이철동이오.] “예, 이청장님. 전에 최 의원님 환갑 때 뵌 적이 있지요.” [긴말 않겠소. 강우진씨 폭행 건 덮읍시다.] “예? 청장님. 생중계로 전국에 나간 일입니다. 5천만 국민이 아니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증인인데 덮을 일입니까?” [위에서 내려온 지시요. 억울하겠지만 그만 덮읍시다.] “…그게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내 말은 전했소.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고 끊겠소.] 뚜, 뚜. “청장님, 청장님?” 이상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손에 쥔 전화기를 그대로 던졌다. 콰당탕. 수화기에 달린 줄에 인터폰이 채로 딸려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런 개새끼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대한민국 민주주의 잘 돌아간다! 시발, 이 나라는 인권도 없어?” 썩을 대로 썩었다. 한참이나 씩씩 거리던 이상호가 벽장 속에 숨겨진 금고를 열었다. 낡은 메모노트 하나를 꺼내 펼쳐 든 그가 빼곡히 적힌 거래내용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시발, 이래도 전화 안 받나 보자.” 몇 주째 자신의 전화를 피하고 있는 김회장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즉각 그의 전화가 울렸다. 이상호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자네 정말 이러긴가? 같이 죽자고 협박하는겐가!] “하나만 들어주시면 장부 없애 드리겠습니다.” [뭔가?] “중동쪽 애들하고도 일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연결해 주십시오.” […….] 한참이나 침묵한 김회장이지만 결국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장부가 공개되면 아주 곤란해진다. [알겠네. 장부 가지고 한번 만나지.] “예, 회장님.” 통화를 끊은 이상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날 건드려?”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감히 화랑의 길드 마스터인 나 이상호를 건들다니 말이다. < 63화 - 영웅심리 (2) > 끝 ⓒ 진설우 < 64화 - 미국으로 > “으악!” 성구는 자신의 애마의 뒷좌석 문을 열어보고 비명을 질렀다. “으윽, 냄새… 뭐냐?” 우진이 코를 막곤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휴, 전을 부쳐놨네.” 해민이 뒷좌석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승훈은 여전히 잠들어있었고 위장에서 리믹스된 그것들이 성구의 차 안을 후끈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장님 콜 불렀습니다. 큰길로 가시지요.” 일 처리 빠른 정민찬이 벌써 전화를 마치고 우진을 보았다. “그래. 어차피 대리 부르면 다 타지도 못하는데… 난 택시 타고 갈게. 성구야 내일 보자.” “홍 이사님 내일 뵙겠습니다.” “승훈씨 잘 부탁합니다.” 우진과 민찬, 해민이 나란히 떠나가자 성구가 울먹이며 뒷자리를 보았다. “흐흑, 잘못 해쪄여… 흐흑.” 잠꼬대인지 술주정인지 꿍얼거리는 승훈을 보고 있자니 불쌍하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내 붕붕이가… 붕붕이가….” 출고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지경이 되었는지. 성구가 울먹이며 대리기사를 기다렸다. * 우진은 집 앞의 큰길에서 내렸다. “내일 보자.” “네, 사장님. 들어가십시오.” 우진이 손을 흔들어주고는 골목을 걸었다. 인적이 없는 것을 보곤 비비를 불러냈다. 검은 연기가 뭉치더니 우진의 어깨 위에 고양이의 모습으로 뭉쳤다. “냐앙, 벌써 집이냐옹?” 우진의 권속들은 소환의 방에서 대기하며 우진의 시야와 감각을 공유한다. 비비로서는 차라리 소환의 방에 있는 게 낫지 집에 있으면서 우진과 떨어지는 게 싫었다. “왜? 걱정돼?” “하아, 걱정된다옹.” 우진이 웃으며 비비를 어깨에서 내려 품에 안았다. “이제 수아도 강아지랑 많이 친해졌겠지.” 본래부터 강아지를 원하던 수아였으니 이제 비비를 가만히 내버려 둘지도 몰랐다. “어디 보자 비번이….” 우진이 휴대폰의 메모를 찾아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띠, 띠리릭! 집에 돌아온 우진을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우다다 뛰어온 개였다. “왈, 왈! 크르릉.” “어?” 고작 며칠 집을 비웠다고 벌써 훌쩍 커버린 개를 보곤 우진이 꿀밤을 먹였다. “이게 며칠 안 봤다고 이빨 보이네.” 우진이 제법 묵직해진 강아지를 안아 들고는 눈을 마주쳤다. 한번 노려보자 강아지의 눈이 급격히 흔들리며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끄응, 끄응.”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구원한 것은 수아였다. “엄마아! 오빠 왔어.” 수아는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우진이 강아지를 내려두고는 양팔을 벌렸다. “어이쿠, 우리 수아. 오빠 보고 싶었어?” “응.” 다가와 살짝 안기고는 곧장 옆에 있는 비비를 확 끌어당겨 안았다. “비비야, 언니 안 보고 싶었어?” “…….” “냥?” 잊기는 커녕 비비를 향한 그리움만 키우고 있었나보다. 우진의 씁쓸한 웃음과 비비의 구원의 눈빛이 교차했다. “강아지랑은 안 놀아?” “복희랑도 놀아주는데 난 비비가 더 좋아.” “…복희가 이름이니?” “응!” 해맑게 이야기하며 비비를 안고 거실로 뛰어가 레이저 포인트부터 찾는 수아였다. 그때쯤 안방에서 어머니가 나왔다. “우진이 왔니?” “네, 어머니.”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우진이 어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작은 식탁에 앉자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따라 우진의 앞에 주었다. “술 마셨니?” “네.” “그래, 대통령님 만나고 왔지?” “아뇨. 그냥 회식했는데요?” 언론에서는 우진이 북한에서 돌아오자마자 청와대로 향한 듯 발표했나 보다. 우진이 괜히 머쓱해 화제를 돌렸다. “곧 만나긴 할거에요. 그런데 수아는 왜 아직 안 자요?” 회식이 빨리 끝났다곤 하지만 벌써 11시였다. “내일 토요일이잖니. 제 오빠 돌아온다고 보고 잔다더라.” “으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비비만 데리고 노는데? “수아는 아직도 네가 많이 어색한가 보더라. 신경 좀 써주려무나.” “…….” 비비랑 놀면서도 힐끗 부엌 쪽을 보는 수아였다. 생각해보니 우진만 기억하지 어린 수아는 어렸을 적 오빠에 대한 기억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오빠가 생겼는데 집에도 잘 들어오질 않으니…. “음,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요?” “바쁜 아들 시간 뺏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어머니의 말에 우진이 괜히 뻘쭘해졌다. “수아가 많이 아팠어. 병원에선 이제 괜찮다는데 요즘도 가끔 같은 증상이구나.” 아버지와 우진이 사라졌기도 하지만 집안의 재산을 빠르게 소진한 것은 수아의 병원비 영향도 컸다. 우진이 던전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돈이 없어서 못할 일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수경은 딸 수아에게 못 해줬던 치료를 다시 해주려고 병원을 찾았으나 뜻밖에도 병원검사 결과상으로는 수아가 멀쩡한 상태였다. “저 어린 게 가끔 발작을 하면 이 어미 마음이….” 어머니가 눈물짓자 우진의 마음이 무거웠다. “애는 아픈데,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하고, 답답한 마음에 얼마 전엔 무당에게까지 찾아가봤구나. 무당 말로는 귀신이 쓰였다는데.” “에이, 귀신은 안 붙었어요.” 귀신이 붙은건 우진에게지, 수아의 주위엔 아무런 악령도 없었다. 혹여라도 가족들에게 악령이 붙을까 봐 얼마나 조심했던가? 따로 방이 생기기 전까지는 가족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을 최소화 한 우진이었다. “네가 어떻게 안다고 그러냐?” 어떻게 아냐고 그러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어머니, 아들이 귀신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고 할까. “무당이 괜히 사람 홀리려는 말인 줄 알면서도 어미는 혹시나 싶다.” “에이, 그 무당 가짜 같은데….” “속상해서 하는 말이다. 큰일 하느라 바쁜 아들 내조도 못 해줘 미안하다만, 하나뿐인 동생은 한 번씩 챙겨주려무나.” 이수경은 연일 텔레비전에 나오는 강우진이 바쁜 것을 안다. 이번에는 북한까지 가서 큰일을 해내지 않았는가? 집안일이야 신경 쓰지 않고 바깥일에 열중하도록 내조해주고 싶었지만 수아의 일만큼은 그녀도 힘에 부쳤다. 아이는 아픈데 방법이 없으니 속앓이만 하다 겨우 털어놓는 그녀였다. “제가 신경 좀 쓸게요. 죄송해요. 어머니.” 훌쩍이는 이수경을 우진이 꼭 끌어안았다. 우진은 거실로 나가 수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고양이를 매개로 함께 놀아주니 어색하고 말 것도 없이 재밌게 놀았다. 시간이 늦어 더 놀려고 보채는 수아를 어머니가 데려가시고 거실엔 우진과 비비, 복희만이 남았다. “킁킁, 킁.” 복희는 아직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코를 벌름 거리며 비비에게 머리를 비볐다. “냥! 저리가라옹.” 퍽. “깨잉.” 비비가 휘두른 앞발에 복희가 머리를 맞고는 저만치 도망갔다. “냥, 우리 새 고양이 하나 들이자옹. 몬스터를 때려잡고 말지, 이건 너무 힘든 것 같다옹.” “잠깐씩 놀아주는 건데 뭐 어때?” “냐앙. 고양이인 척 하는 게 더 힘들다옹.” …그게 힘든 거였나, 우진이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조금만 참아봐.” “냐앙, 알겠다옹.” “그리고 한동안 집에 좀 있어. 수아에게 악령이 접근하는지 잘 봐둬.” 딱히 악령의 괴롭힘 때문은 아닌듯했지만 어머니께 한소리를 들었던 터라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깨비를 붙일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아직 깨비의 레벨이 낮아 그림자 주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비비가 최고였다. “영혼이 강한 아이다옹. 악령 따위가 붙을 수가 없다옹.” “혹시 모르니 말이야.” “알았다옹.” 우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권속이기에 비비도 알고 있었다. 우진이 가족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말이다. 우진을 따라 방으로 들어간 비비였다. “끼잉, 낑.” 복희만 거실에 남아 컴컴해진 거실을 불안한 눈초리로 살폈다. 그때 우진의 방문이 조금 열리며 비비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냥, 너도 이리오라옹.” 복희가 꼬리를 흔들며 비비를 따라 우진의 방에 가 침대맡에 자리를 잡았다. * 토요일이지만 우진은 일찍 사무실로 나왔다. 어머니가 도지원을 궁금해 했기에 오늘 점심약속을 정한 터다. 저녁엔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터라 오전 중에 사무실에 들러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토요일이라 새로 뽑은 신입사원들은 출근시키지 않았다. 창립멤버들만이 먼저 출근해 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해민이는?” “창고에 가 있습니다.” “그리로 가자.” 민찬은 우진의 결재를 받아 같은 층의 다른 사무실들을 웃돈을 주고 내보내 추가로 계약했다. 보안의 문제도 있었고, 또 기존에 사용하던 공간이 좁아서 기도 했다. 그중 50평 정도 되는 공간을 판매부 사무실과 아티팩트 창고로 쓰고 있었다. 창고에는 1톤 트럭 하나도 나오지 않을 만큼의 적은 양의 아티팩트가 쌓여 있었다. 그것도 부피가 큰 재료 아이템과 노말아이템이었다. 애초에 아르달의 각성자라고는 우진과 성구뿐이니 아티팩트의 수집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간 아티팩트 드랍률이 월등한 최초공략을 위주로 공략했기에 적은 각성자의 수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아티팩트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넌 술 좀 깨냐?” “…면목없습니다.” 우승훈이 아직도 숙취가 덜된듯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직장생활로 단련이 되어서인가, 민찬과 해민도 멀쩡한 얼굴이었고, 신체능력이 전에 비할 바가 아닌 성구는 생생한 수준이었다. “자, 그럼 꺼낸다?” “넵.” 우진은 잔뜩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인벤토리를 열어 김종은의 컬렉션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김종은은 각성자도 아니면서 얼마나 많은 아티팩트와 스킬북을 모아두고 있었는지 우진의 인벤토리 공간이 모자라 추가로 인벤토리를 확장하는데 꽤 많은 업적포인트를 소비해야 했다. 우진이 허공에서 낚아채듯 꺼내놓는 물건들이 시장통에서 파는 옷가지처럼 바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 그 양이 한두 번의 던전 공략으로 얻을 정도를 훨씬 웃돌자 입이 쩍 벌어졌다. “뭐해? 분류해.” “예?” “마켓에 팔아도 되는 거하고, 장물하고 분류하라고.” …사장님도 장물이라는 인식은 가지고 계시는구나. 막무가내로 마켓에 팔아 돈으로 바꿔오라고 했으면 곤란할뻔했는데 우진이 그래도 생각해주니 고마운 민찬이었다. 우진이 쏟아낸 아티팩트들은 창고의 한편을 차지할 정도로 굉장히 많은 양이었다. 1톤 트럭 세대는 실어야 될 분량. 민찬의 주도하에 아티팩트들이 분류되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재료들이나, 많은 수량이 풀린 스킬북들은 상관없었지만 한정된 수량의 아티팩트들이던가, 특이한 모양에 특이한 능력을 갖춘 것들. 한마디로 누가 봐도 출처를 알 수 있을법한 아티팩트들을 한곳으로 따로 모았다. 특이하기만 하고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성능의 아티팩트들이었다. 100억 200억은 우습게 볼 정도의 아티팩트들이 10여 종은 넘었다. “이건 내가 쓰면 되겠네.” 착용해서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귀걸이 한쌍을 챙기고는 나머지 아티팩트들은 모조리 인벤토리에 다시 집어 넣었다. 그리고 전승 스킬 [조합상자]를 열어 그것들을 모조리 집어넣자 하단의 두 가지 항목 중 [조합]의 불이 꺼지고, [추출]의 불이 활성화 되어 반짝였다. 우진이 망설임 없이 [추출]을 선택했다. < 64화 - 미국으로 > 끝 ⓒ 진설우 < 65화 - 미국으로 (2) > <세계수의 가지를 얻었습니다.> <아르만티움을 얻었습니다.> <녹슨 고대 철괴를 얻었습….> <최상급 힘의 결정을 얻….> <강인한 정력의….> 추출과 동시에 인벤토리의 빈 공간을 빠르게 채우는 아이템들을 보며 우진이 혀를 내둘렀다. 아르펜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귀한 재료아이템들이 쏟아지다시피 했다. 물론 가장 많은 개수를 차지하는 것은 철괴니 마력 결정이니 하는 것들이었지만 상당수의 귀한 재료들도 함께 추출되었다. ‘이거 잘하면 옛 무구들을 만들수도 있겠는데?’ 아르달에서 자신이 쓰던 장비들. 마법을 보조해주며 언데드들을 부릴 수 있는 지배를 보조해주던 장비들을 다시 갖춘다면 아르펜에서 위용을 보인 불사의 군대를 지구에 재현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아니, 꼭 필요했다. 보너스 스탯과 강화석으로 스탯을 올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모든 장비를 맞추게 되면 3배, 아니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우진은 포인트 상점에서 자신이 쓰던 장비의 목록을 살펴보았다. ‘300만 업적 포인트?’ 우진은 장비의 가격을 보곤 입을 떡 벌렸다. 업적 포인트로 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장비를 만드는 재료가 적힌 레시피는 1만 포인트면 구입이 가능했다. 우진이 그중 하나를 구입해 보았다. <트래쉬의 영광> 파괴신 트래쉬의 힘이 깃든 투구. 재료 : 드래곤 하트(1), 백금 주괴(3), 흡혈귀의 심장(2)…. 우진은 20가지는 가뿐히 넘는 재료들을 업적포인트 상점에서 찾아보았다.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랐으나 그 재료들의 값을 모두 더해보니 400만 포인트가 넘었다. 업적포인트에서 재료를 구입해 만드는 것보다 완성된 것을 구입하는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모아보고, 정 없는 건 상점에서 사야겠네.’ 최대한 재료들을 모아보고 수급이 힘든 재료 몇 개만 포인트상점에서 구입한다면 싸게 만들 수 있을듯했다. 우진은 파괴신 트래쉬의 다른 세트 아이템도 구입했다. <트래쉬의 수호> <트래쉬의 위엄> <트래쉬의 징벌> <트래쉬의 행진> 갑옷, 벨트, 장갑, 부츠를 이루는 아이템들의 레시피를 모조리 구입해 재료들을 체크했다. 아이템 추출로 얻은 재료들이 한정적이라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는 장비는 하나도 없었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마켓도 돌아보고, 또 사냥하고 나오는 재료템도 모으고, 안되면 이미 거래되는 아티팩트를 분해해 얻어도 되고 말이다. 직원들이 아이템 분류를 얼추 마치자 우진이 그들을 불러모았다. “성구는 혼자서 4성은 무리니까 3성 던전만 돌아라.” “네, 형님. 안 그래도 예약 마쳐놨습니다.” 혈석 캐기가 목적이 아닌 능력의 연습과 숙달을 위한 던전 공략이다. 성구는 요즘 하루하루가 지난날 혈석 채집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해민이는 성구 잘 좀 챙겨줘.” “물론이지 말입니다.” 성구도 이제는 C급 조만간 B급의 각성자가 된다. 대형 길드에 가도 대우받을만한 실력자로 크고 있는 성구를 소홀히 대할리가 없었다. 워낙에 친해져서 그렇지 해민은 지원부 직원으로서 각성자로서 홍성구 이사를 서포트하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민찬이는 미국티켓 어떻게 됐냐?” “다 마쳤습니다. 일주일 뒤 출발합니다.” “그래. 뭐, 워낙 알아서 잘하니 뭐.” 민찬에게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우진의 칭찬에 민찬은 머쓱해하면서도 뿌듯한 얼굴이었다. 해머길드에 있었을 때와는 다르게 이곳 아르달에서는 민찬이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었다. 일의 성취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진이 아직도 핼쑥한 얼굴의 우승훈을 보았다. “너는 해장 잘하고.” “…네.” 우진은 직원들에게 지시사항을 다 전하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 “아참. 신입하나 뽑았다. F급인데 조만간 이리로 찾아올 거야.” “예?” 나름의 빅뉴스인지라 모두가 궁금해하는데 우진이 씩 웃었다. “나중에 보면 알아. 그럼 수고들 해라.” “들어가십시오. 사장님.” “들어가십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사무실을 나온 우진이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우진아.] “도작가님. 어디십니까?” [아이, 뭐야. 나 카페야.] “그리로 갈게.” [아니야. 내가 나갈게. 앞에서 만나.] “그래, 그럼.” 우진은 전화를 끊고는 엔젤엔젤 앞으로 갔다. 건널목을 건너는 사이 도지원이 나오는 게 보였다. 우진을 발견하고는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 게 오늘따라 너무 예뻐 보였다. “가자. 어머니랑 동생은 식당에 있을 거야.” “나 어떻게 해. 너무 떨려.” “그냥 밥 한끼 먹는 건데 뭐.” 우진의 말에도 지원은 좀처럼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연인의 부모님을 뵙는것은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지니 말이다. 우진과 지원이 함께 걸으니 주변의 행인들이 한 번씩을 힐끗거릴 정도였다. “우와. 쩐다.” “대박 예쁘다.” “그런데 남자도 조금 낯익지 않냐?” “남자? 몰라 어떻게 알아.” 지원이 워낙에 예쁘다 보니 사람들의 주목을 한 번씩은 받았다. 요즘 가장 텔레비전 출연이 잦은 AA급의 각성자 얼굴도 몰라볼 정도로 말이다. “저기네. 들어가자.” “후우.” 심호흡하며 긴장을 털어버린 지원이 우진과 함께 예약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 요즘은 유치원에서도 예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인기라니, 빗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원을 보며 쉴 새 없이 말 붙이며 관심 보이는 수아 덕에 식사자리는 화기애애 했다. “티비로 보고 너무 궁금해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나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어머니, 불러주셔서 감사하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유, 아니에요. 남의 집 귀한 딸인데.” 어머니는 지원이 굉장히 마음에 드신 듯 했고 짧은 점심 후에 곧장 수아를 데리고 일어나셨다. “그럼 가볼 테니 데이트 하도록 해요.” 마치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짧게 만나고 휙 하니 떠나버린 어머니를 보며 우진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아들의 연애에 감 뇌라 배 놔라 하기 싫다더니 그저 어떤 여자인지 얼굴 본 정도로 만족하신 듯 싶었다. 잔뜩 긴장한 지원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밥만 한 끼 하고 떠나셨다. “시간 많이 남았네. 저녁에 본댔지? 누구나와?” “응, 남지혁이랑 박소희라고 알아?” “어렴풋이 이름은 알겠는데.” “지혁이는 너랑 친했다던데….” “아, 그래? 다시 친해져 보지 뭐. 저녁까지 뭐하지? 영화나 보러 갈까?” “응, 그러자.” “그래, 걸어가자.” 영화관은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였다. 걸음을 옮기는 우진이 지원의 손을 잡자 그녀의 볼이 빨개졌다. * 검은색 밴 안. “휴, 정말 싫다.” 4인조 걸그룹 유리걸스의 신디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 “헤헤, 그래도 물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빨리 가자. 감독님 기다리셔.” “어휴, 이렇게 하면 관객 수가 올라간데?” “이미지메이킹. 임마, 영화 찍으면 끝이야? 홍보도 열심히 하고 그래야지. 주연배우가 무대 인사 빠지면 되냐? 관객 수는 안 올라도 네 팬은 더 늘어난다.” “아, 쉬고 싶다.” 데뷔 6년 차의 유리걸스는 후배 걸그룹들에게 밀려 인기가 시들했지만, 신디만큼은 요즘 들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연기자로 변신에 성공해 커리어를 쌓아가다가 이번에 찍은 영화에서 그야말로 연기에 정점을 찍었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성기. “얼른 가자.” “알았어.” 신디는 선글라스를 챙겨 쓰고는 로드 매니저가 열어주는 차 문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볼이 자연스레 상승하며 화사한 미소를 짓는데 밴 앞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아무리 비밀리에 다닌다고 해도 어떻게 알았는지 구름떼처럼 운집하는 팬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신디를 기다리고 있는 보안요원들만이 그녀를 맞이했다. “오빠, 너무 비밀리에 잘 온 거 아냐?” “그, 그러게.” 매니저도 이런 상황은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뭐, 편하고 좋지 뭐. 얼른 가자.” 신디는 보안요원들과 함께 대기실로 가는데 그사이 한쪽에 운집해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뭐야? 이 영화관에 우리 팀 말고 다른 팀들 일정도 있어?” “응? 잠시만 알아보고 올게.” 부리나케 뛰어간 매니저가 잠시 후 호들갑을 떨며 돌아 왔다. “와, 대박!” “왜?” “강우진야! 강우진이 영화 보러 왔데.” “그래?” 신디도 강우진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 연예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인기를 구가 중인 각성자다. “오빠.” “응?” “가서 연락처 좀 받아와.” 신디의 말에 매니저의 미간이 좁혀졌다. 와락 얼굴이 굳은 그는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다. “야, 너 왜 그래 또. 이번에 스캔들나면 진짜 안돼.” “오빠. 누가 사귄 데? 그냥 친분을 쌓자는 거잖아. 빨리 연락처 받아오라고.” “야, 대표님하고 약속한 게 있는데….” “내가 직접 가? 사람들 막 알아볼 텐데?” 그러면 더 문제지. 기자들이 좋다꾸나 하고 달려들 테니 말이다. 매니저는 다른 핑계를 찾아야만 했다. “여, 옆에 여자친구 있었어.” “하아.” 신디가 한숨을 쉬며 선글라스를 슬쩍 내렸다. 매니저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오빠. 나 신디야. 신디. 유리걸스의 신디.” “…….” 아, 얘는 연기도 잘하고 성실하고, 스텝들한테도 싹싹하고 다 좋은데 연예인이 벼슬인 줄 아는 게 문제였다. “내가 직접 간다?” “아, 아니야. 간다 가.” 매니저는 더 큰 일이 있기 전에 얼른 밀집한 군중들 사이로 파고들어 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표정을 보곤 신디가 짐작하고 물었다. “뭐야? 못 땄어?” “…어.” “신디 매니저라고 했어?” “했지.” “그런데도 안줘?” “그게 누구냐던데….” “…….” 매니저의 말에 주변에 있던 보안요원들이 웃음을 참는것이 눈에 보였다. 신디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는 담담히 걸었다. ‘허, 날 몰라? 거절해?’ 신디는 구겨진 자존심을 겨우 참으며 영화관이 마련해준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감독님과 다른 주연배우들과도 인사하곤 무대 인사를 위해 영화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 우진은 표를 들고 입장하며 지원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취소 표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게. 그런데 우진이 너는 안 불편해?” “뭐가?” “사람들이 막 몰려오고….” 지원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 뭐 익숙해서. 불편해? 마스크 또 써?” “풉, 아니. 괜찮아.” 마스크가 생각나 지원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얼굴을 다쳤을 때 사람들이 주던 그 동정과 혐오의 시선들에 비하면 지금의 사람들 시선과 관심은 견딜 만 했다. 아니, 오히려 묵혀두었던 옛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고교 시절 그녀는 여신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었으니까. 자리에 앉은 우진과 지원은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어? 무대 인사인가 봐.” 지원은 운 좋게 예매한 영화가 무대 인사인 것에 눈을 반짝였다. 감독들과 연예인들이 우르르 들어오고 그들이 인사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무림여걸 감독 이재홍입니다.” “안녕하세요. 무림여걸에서 주인공을 맡은 신디에요.” “안녕하세요. 이번에 신디씨를 지키는 호위무사역을 맡은 최재성입니다.” 그들의 상투적인 인사를 구경하며 지원은 해묵은 기억이 떠올랐다. “저기 신디 기억나? 우리랑 고등학교 동기였던 애. 8반에 연습생 하는 애 있었잖아.” 같은 반 친구도 기억 안 나는데 다른 반 애가 기억날 리가 없었다. 어렴풋이 연습생 하던 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기억 안 나는데.” “헤, 동창 중엔 쟤가 제일 성공했을걸? 아니, 우진이 네가 더 성공한 건가?” “성공은 무슨.” 우진이 피식 웃는데 무대에 있던 신디와 눈이 마주쳤다. “어? 우리 쪽 보는데? 너 알아본 거 아니야?” “글쎄.” 아까도 지원이 화장실 간 사이에 매니저라는 놈이 와서 번호를 물어보더니…. 어째 촉이 좋지 못했다. 우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신디가 마이크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 65화 - 미국으로 (2) > 끝 ⓒ 진설우 < 66화 - 미국으로 (3) > “요즘 가장 뜨거운 인기남 강우진씨가 저희 영화를 보러 와주셨네요. 정말 영광입니다.” 신디의 말에 영화관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강우진을 보았다. 강우진이 쓰게 웃으며 신디를 보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대 앞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신디의 말에 스텝 하나가 재빨리 우진에게로 다가왔다. 옆에 앉은 관객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잠시만 비켜주세요. 예, 실례합니다.” 우진의 옆에 앉았던 사람들이 그가 빠져나오기 좋도록 모두 일어서 통로 쪽으로 비켜주었다. 스텝이 다가와 우진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실례되니까, 꺼져.” “예?” 실례되는 줄 알면 그냥 가만히 있지 왜 굳이 부탁이니, 소원이니 하며 귀찮게 굴어? “대충 인사하고 꺼지라고 그래, 슬슬 짜증 나려고 하니까.” “그, 그게.” “말로 해서 안 듣지?” 우진이 마력을 모으자 심상찮은 기운에 스텝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저, 전하겠습니다.” 스텝이 빠르게 다가가 말을 전했다. 조용한 영화관에서 그들이 듣디 못했을리 없었다. 감독이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하하,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그만큼 저희 영화가 빨리 보고 싶으시다는 반증이겠죠. 즐겁게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감독과 배우들이 짧게 인사하고 빠져나가자 사람들이 힐끗 우진의 눈치를 보았다. 지원이 우진에게 귓속말했다. “신디는 너랑 같은 고등학교 나온 지 모르나봐.” 뭐, 모를 수도 있지. 우진도 신디를 모르고, 신디도 우진을 모르고. 영화는 제법 재밌었다. 각성자들의 능력은 마법. 현실에서 불가능한 능력을 보여준다. 몸값이 워낙에 높아서 그렇지, 각성자들을 섭외해 영화를 찍으면 특수효과를 CG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벌이가 시원찮은 F급이나 E급의 각성자들은 이런 쪽으로 전문적으로 취업한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능력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목숨을 걸고 고소득을 노리지는 않으니까. 영화가 끝나자 얼추 약속시각이 되었다. 쌀쌀한 날씨 탓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터워져 있었다. 우진은 문득 지원의 낡은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 빚 있다고 했었나?” “아, 다 갚았어. 퇴직금 받았었잖아.” “흠, 뭐, 도움 필요하면 말해.” “에이, 도움은 무슨. 이미 충분히 받았어.” 얼굴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갚을 수 없는 은혜였다. “재민이는 요즘 뭐해?” “수능이 코앞이라 엄청 바빠. 요즘 정말 진지하게 공부해.” “그래? 충격은 다 털었나 보네.” “응? 충격?” “걔 좋아하던 애가 연예인 연습생 들어갔잖아. 울고불고 난리 났었는데.” “허, 재민이가 그래?” “몰랐어?” 지원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서로 감추는 것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건만 자신에게는 이야기하지 않다니 조금 서운했다. “그래서 요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가….” “하하, 공부 열심히 하면 좋지 뭐.” 우진은 수능이 끝나면 재민이도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길드 길드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니 아예 길드에 입사시켜도 되고 말이다. 우진은 지원을 따라 약속된 고깃집으로 향했다. 남지혁이란 이름으로 예약된 방으로 들어가자 아직 도착 전인지 아무도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남지혁과 박수진이 물을 열고 조심히 들어왔다. “수진아.” “지, 지원아!” 박수진은 마지막까지 지원과 연락하던 친구였는데 그마저도 지원이 공장일로 바쁘니 연락이 뜸해져 소원해진 사이였다. 대구의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우진과 지원이 키스하는 모습이 기사로 화제가 된 터라 그것을 알아보고는 수진이 다시 연락을 한 것이다. 수진은 지원의 얼굴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진짜 잘됐다. 계집애! 다 나았네. 다 나았어.” “으응. 나 다 나았어.” “흐흑, 정말 잘 됐다. 잘됐어.” 수진이 진심으로 기뻐서 눈물을 보이자 지원도 눈물이 맺혔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 흘리는 그들의 옆에 남지혁이 뻘쭘한 듯 우진에게 다가왔다. “오, 오랜만이다?” 행방불명되어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5년 만에 나타났다. 그것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각성자가 되어 나타나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수능 걱정에 같이 공부하며 카오스나 같이하던 친구가 5년 만에 짠하고 나타났는데 엄청난 사람이 되어있었다. 지혁은 우진을 대하는 것이 영 어색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년 만에 친했던 친구를 만난 우진은…. “왔냐?” 말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꼴꼴. 잔을 채우는 우진의 입가엔 미소가 맺혔다. 20년 만에 만나서 모를 줄 알았다. 어렴풋이 이름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가물가물했다. ‘남지혁이. 기억나.’ 얼굴을 보니 알겠다. 20년 만에 만났는데도 친구의 얼굴을 보니 고3 시절 있었던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 게 있었다. 기뻤다. 너무 기뻐 울고 싶었다. “잘 지냈냐?” “새끼, 뭐하다 갑자기 뚝 떨어졌냐? 티비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우진이 편하게 대해주자 지혁도 긴장이 풀리는지 피식 웃었다. “자, 한잔하자.” 미도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였다. 고교 시절 친했던 친구도, 얼굴만 기억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아르펜의 임모탈이 지구의 강우진으로 회귀하는 기분이다. 죽어도 좋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었다. 이곳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다. 싸우다 죽으면 뭐, 그것으로 되었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 더욱 살고 싶었다. 가족을, 친구를,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돌아가기 위한 치열한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제부터 지키기 위한 전쟁의 시작이다. 고기까지 나오고 기분 좋게 술잔이 돌자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우진은 친구들을 통해 듣는 옛날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그 시절의 추억을 들으며 곱씹는 것만으로도 포근하고 따뜻하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행복했다. 트라넷이니, 던전 브레이크니 하는 걱정에서 잠깐 벗어난 꿈같은 시간이었다. * 친구들과 헤어지고 지원과 단 둘이 밤길을 걸었다. “하, 좋다.” 우진의 입에서 입김과 함께 행복이 묻어났다. “다행이다.” 지원도 미소 지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기분이었다. “연말이면 친구들 더 많이 보겠다. 그지?” “그러게.” 우진 만큼이나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지원이다. 연말송년회 시즌에 한다는 동창회에 나가면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될 테니 벌써 기대되었다. 우진과 지원이 거리를 거니는데 주변에서 아까부터 힐끗거리던 사람 하나가 다가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강우진씨. 팬입니다. 사인 하나만 해주십시오.” “…….” 우진이 멀뚱히 보고 있자 주변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나가 먼저 나서니 뒤이어 너도나도 나서는 것이다. 이깟 종이쪼가리 어차피 가져가 봐야 쓸모도 없으면서 하나가 받으니 너도나도 받으려 든다. “연예인도 아닌데 무슨 사인입니까?” “그래도 공인 아닙니까?” “귀찮으니까 비키기죠?” 우진의 싸늘한 반응에 몰려든 사람들이 주춤했다. 우진의 내친걸음에 사람들이 물러나자 지원의 손을 이끌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쳇, 뭐야?” “공인이 저래도 돼?”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우진의 발길이 멈췄다. 막 돌아서서 한소리 하려는데 지원이 우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냥 가자.”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지원을 보며 우진이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땠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너무 감성적이어서 일까? 평소엔 신경 쓰지도 않던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화가 나고 말이다. “차를 사야겠어.” “응?” 그래, 그게 좋겠어. 거리에 사람들을 죄다 쓸어버릴 수도 없으니 자신이 피해야겠지. “너 면허 있어?” “아니, 없지.” “…….” 고3 때 아르펜으로 소환된 우진이다. 면허가 있을 리 없었다. “면허부터 따야겠네.” 우진이 지원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우진은 심심하신 어머니의 카페 자리도 알아보러 다니고, 오후엔 수아와 놀아주는 시간을 가졌다. 자신을 어색해하던 수아가 조금씩 마음을 여는것이 보여 뿌듯한 시간이었다. 성구는 낮엔 홀로 3성 던전을 위주로 공략하고 밤부터는 우진과 함께 아르달 소유의 5성 던전과 빈 스케쥴에 예약한 다른 길드의 5성, 6성 던전을 공략했다. 잠이야 굳이 집에서 잘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간상으로 4배의 이득을 볼 수 있는 던전에서 잠깐의 잠으로 정신적 피로를 쫓는 것이 나았다. 강화석을 꾸준히 먹으며 성구에게 이것저것 스킬들을 익히게 하고 여러 가지 몬스터들에 대한 대응법과 마법과 체술을 곁들인 여러 가지 전투방법들을 전수했다. 고작 일주일의 시간이지만 던전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지라 C급의 각성자 홍성구를 B급으로 바꾸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형님! 바꿔왔습니다.” 자랑스럽게 B급으로 바뀐 각성자등록 카드를 들고오는 성구를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쉽네. A급 까지는 올리고 미국 가려고 했더니.” “아닙니다. 형님.” 성구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인해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B급이 어디입니까. 이게 다 형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4성 이상은 들어가지 마라.” “물론입니다. 형님.” 이미 우진은 지켜보기만 하는 가운데 성구 홀로 4성 던전의 공략을 몇 번이나 성공했다. 이 정도면 혼자서 4성 던전을 솔플하는데 문제가 없겠지만 또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였다. 우진이 주먹에 딱 알맞게 쥐어지는 붉은 보석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성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혀, 형님! 귀환포탈 아닙니까?” “괜히 개기다 죽지 말고, 위험하면 빠져나와.” “혀, 형님.” 100억은 가뿐히 넘는 이 귀한걸…. 성구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제법 쓸만해 졌는데 죽으면 아깝잖아.” 아, 꼭 감동적일 때… 그래도 무심한 듯 내뱉는 우진의 말이 진심과 다르다는 것은 성구도 알고 있었다. “괜히 죽지 마라. 들인 돈이 얼만데. 죽으면 나 그냥 다 날리는 거 아냐? 얼마나 아까워?” “…….” 진심이 따뜻한 게 맞을까…. 그래도 우진이 성구에게 투자한 돈은 수백억 단위가 넘었다. 그간 흡수한 강화석에 아티팩트에, 스킬 북까지… 특히 성구가 끼고 있는 반지만 해도 물건 3가지를 수납할수있는 아공간 아티팩트로 30억이 넘는 물건이었다. 성구는 자신의 여벌 목숨줄이 되어줄 귀환포탈을 아공간에 수납했다. “그럼 수고해라.” “헤헤, 공항까지 모시겠습니다.” “됐어. 던전이나 돌아.” “헤헤.” B급 각성자가 된 게 어지간히도 좋은지 실없이 웃는 성구를 두고 우진은 민찬과 함께 택시에 올랐다. 우진이 혼자 갔다가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몰랐고, 컨소시엄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으니 길드 아르달의 업무처리를 위해 동행하는 거였고, 우진은 성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민찬이, 미국 가봤어?” “세 번 정도 가봤습니다.” “음.” “사장님은 가보셨습니까?” “아니.” 미국은 커녕 비행기도 처음 타보는 우진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데 택시 안을 경쾌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필요한 건 네 전.화.번.호!] “예, 아르달의 정민찬입니다.” 전화를 받은 민찬은 제법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왜? 누군데?” 전화를 끊은 민찬이 심각한 얼굴로 답했다. “국방부에서 온 전화입니다. 테러 첩보가 제보되었답니다.” “그래? 그래서?” “아무래도 목표가 사장님인 것 같다고….” “나? 날 왜 노려?” 그렇게 당당히 물으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근래 적을 많이 만든 우진이었다. 민찬의 심각한 얼굴에도 우진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미국 가는 길 심심하다고 놀아주려고 하나 보네.” “…….” 농담이어도 문제고, 진심이어도 문제다. 민찬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 66화 - 미국으로 (3) > 끝 ⓒ 진설우 < 67화 - 테러 > 공항의 입구엔 군복 입은 군인이 대기중이었다. “어? 해솔이.” 우진은 익숙한 얼굴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셨습니까?” “인사해. 여기 우리 길드 총괄이사.” “정민찬입니다.” “최해솔 중위입니다. 조만간 한솥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민찬이 악수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우진이 씩 웃었다. “이번에 새로 뽑은 신입.” “아….” 저번에 한번 말했던 신입이 최해솔중위구나. 우진이 해솔을 보았다. “전역신청이나 하라니까 왜 여기 와있어?” “사장님 돌아오실 때쯤이면 민간인 신분입니다. 아직은 군인이니 업무에 충실해야지요.” “뭐야? 말년휴가 이런 거 없어?” 우진의 말에 해솔이 어설프게 웃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이런 실없는 농담을 하실까. “소식 들으셨겠지만 테러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알아. 그래서 미국 못 가?” “아무래도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 보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륙을 지연시키고 승객들과 승무원들을 하나하나 신원조회하고 있지만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화물들도 이중 삼중으로 검사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언제쯤 뜰 것 같아?” “내일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차라리 다른 비행기 알아보지?” “그래서 사령관님 지시로 KH길드에 협조를 요청해 두었습니다.” “KH길드?” KH그룹이라는 건실한 대기업이 운영하는 길드였다. “거기에 왜?” “KH길드도 이번 컨소시엄에 참가합니다. 그룹의 전용기를 타고 간다고 하니 같이 이용하시면 됩니다. 이미 허락을 구했습니다.” “오호. 잘됐네.” 우진은 해솔의 안내에 따라 간단히 출국 심사를 진행했다. 자잘한 일들이야 민찬과 해솔이 처리하고 우진은 그저 얼굴을 보여주는 게 전부였다. “이게 내 여권이야?” “네,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얼마 전 사무실에 사진사가 와서 증명사진을 찍고 가더니 여권을 만들려고 그랬나 보다. 우진이 여권을 민찬에게 넘기고는 해솔과 악수했다. “그럼 갔다 와서 보자고.” “넵. 잘 다녀오십시오.” 안내를 마친 해솔과 헤어져 긴 통로를 걸었다. 활주로를 걸어 민찬과 둘이 셔틀버스를 탔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활주로의 모습에 우진이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처음 비행기를 타러 가는 딱 그 모습이라 민찬이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생각 안되어 그렇지 우진은 해외여행 경험이 없는 24살이다. “뭘 구경하십니까?” “비행기들.” “저희가 타는 건 저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주기 중인 A380을 보며 말하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더 큰 것도 타봤어.” “예? 비행기 처음이시지 않습니까?” “비행기야 처음이지. 나는 건 많이 타봤어.” “…….” 하늘을 나는 것 중에 항공기 보다 더 큰 것도 있단 말인가? “다음에 너도 태워줄게.” “기대하겠습니다.” 민찬의 대답에 우진이 고소를 머금었다. 승차감을 생각하면 고생할 민찬의 얼굴이 훤히 그려졌다. 버스는 KH그룹의 로고가 그려진 비행기 앞에 멈춰 섰다. 계단 앞에는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KH 길드 정찬성 상무입니다. 연락 받았습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민찬의 말에 정찬성이 미소 지었다. “신세라니요. 강우진 사장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르시지요. 저희 길드 사장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진은 계단을 올랐다.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비행기 좌석이 아니라 응접실과도 같은 배치의 방이 나왔다. 그곳의 상석 소파에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우진이 요즘 매스컴에 워낙 자주 등장하고 있어서 그렇지 대한민국 10대 A급 각성자들의 얼굴이나 프로필도 이미 대중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정민찬이 바로 얼굴을 알아보곤 우진에게 귓속말했다. “KH길드 사장 백종도입니다.” 우진이 다가가는데 백종도가 벌떡 일어나 우진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다니 한 손을 번쩍 치켜 올렸다. “아이고, 강사장!” “…….” 우진이 멀뚱히 보는데 그의 비서인 정찬성이 빠르게 다가와 백종도를 말렸다. 어쩐지 그의 얼굴은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사장님, 처음 보시는 손님께는 자제해 주십시오.” “으허허, 알겠네.” 백종도가 강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워낙 인기라 자네도 이 드라마 보는 줄 알았지. KH길드의 백종도 일세.” “강우진이에요.” 우진이 마주 악수하며 물었다. “아까 그건 뭡니까?” “응?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에 나오는걸세. 허허.” “아, 난 또 싸우자는 줄 알았네.” 우진의 말에 백종도가 유쾌하게 웃고는 말했다. “자네 드라마 좋아하나?” “좋아하죠.” “으허허, 미국까지 시간도 많은데 나랑 드라마나 보지.” “아, 잘됐네요. 심심해서 뭘 하고 놀까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그렇지 우진도 티비 보기를 즐긴다. 사장실에 티비도 그래서 설치하지 않았는가. 틈틈이 예능에 드라마를 챙겨보는 우진이었다. “전용기에 기가 막힌 멀티미디어실을 만들어놨네. 이리 가세나.” 백종도와 강우진이 통로를 지나가 버리자 응접실에 남은 정찬성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사장님이 워낙에 괴짜시라….” “하하하, 아닙니다. 저희 사장님이야 말로….” 어색하게 대답하는 민찬은 왠지 모르게 정찬성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 화랑길드의 사장실. 한쪽 벽에 걸린 티비에는 테러 첩보와 인천공항의 부분 폐쇄와 검문에 대해 뉴스 속보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강우진의 미국행이 KH길드의 사장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긴급 속보까지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아주, 대한민국 귀빈이 되셨어.” 이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인터넷 뉴스 기사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미국방문이나 6성 던전의 공략 같은 것은 아예 방송국 카메라가 붙을 정도로 큰일이 되어버렸다. 이상호는 찌푸린 얼굴로 울리지 않는 휴대폰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띠리디리 딩동, 띠리디리…. 이상호는 기다렸던 한국인 브로커의 전화에 퍼뜩 전화기의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로 가져갔다. [나요.] “일을 이렇게 어설프게 하는 게 어딨소?” [어설프다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이오?] “전국에 테러 소식을 다 알리고 목표는 빠져나갔는데 지금 여유 부릴 때요?” [크큭,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후우, 확실한 거요?” [요즘 촌스럽게 누가 항공기 테러를 하고 그럽니까? 다 1차 연막이나 안심하고 기다려보시오.] “후, 알겠소.” 이상호가 전화를 끊었다. 계획이 틀어졌으나 아닌 척 하는 것인지, 그들의 말대로 1차적인 연막일 뿐인지는 알 길이 없다. 브로커는 매일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건다. 그가 전화를 해오기 전까지 다시 연락을 할 방법도 없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충분한 대가의 금액을 이미 지불했고, 이들이 아직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전문적 킬러 집단이라는 것이다. * KH그룹의 전용기 멀티미디어실. 작은 영화관처럼 꾸며진 그곳에 세 사람이 쪼로로 앉아 있었다. 화면엔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드라마 ‘응답하소 1988’이 방영 중이었다. “후후.” 화장실을 다녀온 백종도는 열심히 시청하는 그들을 보며 뿌듯한 마음을 느꼈다. 내가 재밌게 느끼고 좋아하는 매체를 남과 함께 나누고 즐기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우진이 화장실을 다녀오는 백종도를 보고 벌떡 일어나 한 손을 치켜들고 다가갔다. “아이고, 백사장!” 백종도도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고, 강사장!” 두 손이 만나 서로 맞잡자 두 몸이 꿀렁이며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반갑구만. 반가워.” 두 사람의 콩트에 민찬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강우진이 남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산다는 거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KH길드의 백종도 사장도 만만치 않았다. 슬쩍 옆을 보니 정찬성도 귀까지 시뻘게져 있었다. 눈이 마주친 정찬성과 정민찬이 애잔한 시선을 교환했다. ‘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인가.’ 민찬은 제발 사람 많은 곳에서는 저러지 않았으면 싶었다. * 2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뉴욕. 타이탄 길드가 주최한 컨소시엄답게 각 길드의 사람들을 모시기 위해 직원을 배치해두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타이탄 길드의 리처드 최입니다. 호텔까지 안내하겠습니다.” 각국의 손님들을 위해 자국어가 가능한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대기중인 차량에 타기전 백종도가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좀 쉬고 있다가 한잔 어때?” “아, 좋죠.” “흐흐, 그럼 있다가 보세나. 아우.” “있다 뵙죠. 백형.” 우진과 민찬이 리처드 최와 차량에 탑승했다. “사장님. 백사장님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하하, 재밌잖아.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고.” “음….” 백종도의 나이가 올해 42살이다. 우진은 24살인데…. “아, 아르펜에서 20년을 사셨다고 하셨죠.” 추정해본다면 39살의 우진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민찬은 우진이 어리게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됐다.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 많나? “뭐, 던전 때문에 이제 나이라는 것도 웃기지.” “그것도 그렇군요.” 꼭 아르펜에 다녀온 우진이 아니라, 상위 던전만 하여도 4배의 시차가 있으니… 각성자에게 나이란 기준은 우스운 것일지도 몰랐다. 나이가 아니라 각자가 경험한 세월의 흐름 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39살인 것 치고는 너무 철없는 것이 아닐까? “뭐, 살아온 인생의 무게는 다 다르니까.” 조용히 혼잣말하는 우진의 음성에 민찬은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듯해 뜨끔했다. 20년의 지옥 같은 시간. 유쾌하지 않았다면 자살했을지도 모를 삶이었다. 재벌 3세라는 백종도도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정도로 무거운 인생을 살았으니까. 차량은 공항을 벗어나 인근의 호텔에 멈춰 섰다. 컴컴한 밤이라 그런지 호텔들만 늘어선 거리라 그런지 근처에 유흥을 즐길만한 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컨소시엄은 내일 점심 무렵이다.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오전 11시 차량을 준비하겠습니다.” 체크인까지 대신 마친 리처드 최가 돌아가고 우진과 민찬은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했다. “씻고 바로 나와. 술 마시러 갈 거니까.” “네. 사장님.” 컨소시엄에 초대된 모든 사람들이 귀빈이긴 하지만 대우에 차이는 있었다. 민찬은 3층의 비지니스 룸에 우진은 최상층 vip들의 스위트룸으로 안내받았다. 샤아아아. 우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털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 마신 우진은 민찬이 챙겨준 캐리어를 열었다. 내일 입을 정장과 몇 가지 트레이닝복이 준비되어있어 트레이닝복을 꺼내 입었다. 트레이닝복이라 하여도 각성자들이 입는 것은 그 소재가 던전의 것으로 만들어진다. 모르긴 몰라도 옷 하나에 몇천은 우스운 수준일 것이다. 우진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방의 불을 껐다. “응?”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돌린 우진은 방 한쪽에 흔들리는 붉은 점을 보았다. “레이저?” 수아가 비비를 데리고 레이저포인트로 잘 놀아줬기에 익숙한 불빛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보다 다섯 배 정도는 크다는 것일까. 우진이 레이저포인트의 출처를 찾아 몇 걸음 옮겼다. 창문 밖으로 저 멀리 건물에서 쏘아지는 레이저 불빛이 보였다. “어?” 그와 함께 저쪽 하늘에서 날아오고 있는 미사일 한대가 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미사일은 우진을 향해 그대로 날아오고 있었다. < 67화 - 테러 > 끝 ⓒ 진설우 < 68화 - 테러 (2) > 날아오는 미사일을 보자마자 뛰었다. “허.” 우진이 몸을 날린 것은 문이 아니라 창문 쪽이었다. 파앙! 우진의 몸이 두꺼운 창문을 깨곤 창틀을 밟고 그대로 도약했다. 도약한 건 하나였으나 움직인 건 둘이었다. 우진은 미사일을 향해, 그림자는 어둠을 타고 레이저를 향해. 미사일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고, 우진이 도약한 거리는 짧았다. 폭발력이 어느 정도나 될까? 그것을 실험하기엔 호텔 안에 정민찬이 있었고, 백종도도 인근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중에 뜬 우진의 주먹이 미사일의 머리를 후려쳤다. 방향을 바꾸면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다. 꾸우웅! 억눌린 에너지가 터져나가며 폭발을 일으켰고 우진의 곁을 맴돌던 소울아머가 그보다 더 빨리 작용했다. 영혼의 방벽이 우진의 주먹을 중심으로 겹겹이 둘러쳐져 보호했다. 콰아앙! 엄청난 폭발이 영혼의 갑옷에 가로막혀 그 불꽃을 하늘 위로 뿜어냈다. 그리고 그 폭발의 반발력은 모조리 우진이 감내해야 했다. 슈우우욱, 콰아앙! 우진의 신형이 날아오른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건물 사이를 겨우 피한 우진의 신형이 도로에 충돌하며 주변이 움푹 함몰되었다. 삐익, 삐익! 충격에 주변에 주차중이던 자동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댔다. 푸스스스. 움푹 팬 도로의 파편들과 먼지가 주변을 가득 메우는데 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미사일의 폭발이 어느 정돈지 영혼갑옷에 구속 중이던 영혼들이 모조리 증발되어 버렸다. 이후 바닥과 부딪히면서 입은 충격은 그대로 우진이 감내해야 했다. “크으, 미국에서 이래도 돼?” 우진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게 갈비뼈가 부러진 듯싶었다. “후.” 구속하고 있던 영혼들을 모조리 써버렸으니 영혼갈취로 회복할 수도 없었다. 폭발에 놀라 창문 밖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죽여 영혼을 흡수하기는 싫었다. 아르펜의 임모탈이었다면 그랬겠지만, 지구의 우진은 그때와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포인트 상점에서 포션을 꺼내 입에 물었다. “크으.” 얼추 회복되자 고통이 가시며 슬슬 짜증이 났다. 미국에서 미사일 공격이라니… 어떤 놈일까? 국방성의 협조를 받은 타이탄? 아니면 다른 세력? 무엇이 되었건 이건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북한에서는 피할 새도 없이 좁은 지하철역에서 폭발에 휘말려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때도 영혼갑옷이 없었다면 허무하게 죽었을지도 모를 공격이었다. “자꾸 날 노린다 이거지?” 상대야 다르겠지만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차피 트라넷에 대항해 전 지구인끼리 똘똘 뭉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망둥이처럼 날뛴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성격대로 살았다. 세상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보여주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 와중에 적이 생겨도 상관없다. 적이 생긴다는 것은 우군을 추린다는 의미도 되었다. 또 다른 안배. 지구수호를 위한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 기존의 기득권자인 자본가들? 힘을 손에 넣은 능력자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들? 힘 있는 놈들은 죄다 주도권을 쥐려 할 것이다. 세력은 나뉘고 트라넷은 그 틈을 노릴 것이다. 트라넷의 군대는 쉼 없을 테고 무너진 세력들이 그제야 연합이라는 체제를 구축할 것이다. 이미 아르펜에서 겪었던 패턴. 강우진이 소환된 것은 연합과 트라넷의 세력 싸움이 팽팽하던 때였다. 많은 이들이 죽었으며, 많은 땅이 불모지가 되었다. 우진의 목소리는 연합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고 그는 버려진 죽음의 대지에서 스스로 세력을 일구었다. 조용히 힘을 키워 대비한다? 그것도 좋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으면 말이다. “이렇게 나와주긴 해야 할 텐데….” 우진의 목숨을 노리는 놈들이 나와줘도 상관없다. 놈들은 본보기가 되어 전 지구상에 우진의 존재를 각인시킬 것이다. 그것이 두려움이 되어도 상관없다. 더 잔혹한 적을 앞두고 지구는 뭉칠 것이다. 그 상황을 우진이 주도 할 것이고 말이다. 적어도 한목소리 낼 정도의 존재감정도야 갖추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명성이든 악명이든 말이다. 문제는…. “너무 이른데….” 우진의 예상보다 빨랐다. 굳이 성격을 죽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적을 만들만한 행동은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자신을 해치우고 싶어 안달이 난 머저리가 누구일까? 파파파파파. 우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상공에 떠있던 헬기가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비비, 따라가 봐.” [알겠쪄영.] 검은 연기가 뭉쳐 들더니 바람결에 날려가 헬기의 동체 아래에 뭉쳐 고양이로 변해 찰싹 달라붙었다. “후, 어떤 놈인지 면상한 번 볼까?” 우진이 레이저포인트를 쏘던 놈에게 붙여놓은 깨비의 기운을 따라 걸었다. * “성녀님. 방금 공항을 통해 아르달 길드의 강우진 사장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해밀턴 부인의 말에 성녀 메르디가 깜짝 놀랐다. ‘강우진이라는 한국인 이름만 들어도 왜 이렇게 과민하실까?’ 해밀턴은 아르펜에서 온 메르디가 어떻게 한국인을 알고 있으며, 또 그를 언급할 때마다 이렇게 과민반응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개종한 아리아교단의 고귀한 성녀이니까. “그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았나요?” “그럴리가요. 특별히 요청하여 타이탄 길드에서 극진히 호텔까지 모셔드렸다고 합니다.” “…….” 메르디의 앙다문 입술이 잘게 떨렸다. 이제 곧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자신을 만나러 오고 있었다. 피할수는 없다. 정면돌파만이 답이지만 또다시 대면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전에 먼저 찾아가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불같은 성격에 미리 인사 오지 않은 것을 문제 삼지는 않을까? ‘충분히 그럴 사람이야.’ 성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분이 머물고 있는 호텔이 어디지요?” “예?” 해밀턴이 깜짝 놀랐다. 한국인 강우진이 아리아 여신 아래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분이 그분이라 칭할 정도의 사람이란 말인가? “그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성 기사단을 준비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일과를 타이탄 길드의 본사빌딩 아리아 교단에서 머무르는 성녀지만 가끔 외부행사를 위해 밖을 나갈 때는 성 기사단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평균 등급이 B+일 정도로 성 기사단의 능력은 출중했다. 지구 상에 현존하는 호위단체 중에 가장 막강한 집단일 것이다. “성녀님을 따르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성녀님을 모시겠습니다.” 앞다투어 따르려는 성 기사단 중에 10명이 추려졌다. 메르디는 그들과 함께 강우진이 투숙 중인 호텔로 향했다. 세대의 차량 중에 성녀는 두 번째 차량에 탑승 중이었다. 그녀의 옆자리엔 제임스가 타고 있었다. 제임스는 불치병을 앓던 딸이 완쾌되는 기적을 목도한 이후 누구보다 열렬히 아리아 교단의 종이 되길 자처했다. 타이탄 길드를 대표하던 A급 각성자는 현재 아리아 교단의 성 기사단장이 되어 있었다. “성녀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에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눈초리의 성녀의 모습은 제임스로서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도도하고 기품있는 모습의 성녀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만큼이나 아름다웠고, 신의 대리인답게 위엄있었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은 제임스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생소한 모습. “후우,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예, 성녀님.” 메르디의 불안에 제임스는 호위에 좀 더 만전을 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호텔을 향해 나아가던 차량이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임스가 귀에 꼽고 있는 이어 마이크를 누르곤 물었다. “뭐야?” [치직, 전방에서 폭발이 있었습니다.] “뭐?” 제임스가 운적석의 시트 너머로 고개를 빼곤 앞 유리 너머의 도시를 보았다. 도시 위에 뭉쳐진 뭉게구름은 자연 발생적인 것은 아니었다. 폭발시각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아까 창문이 살짝 떨리던 것이 이 폭발의 여파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테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안전을 위해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성녀의 턱이 떨렸다. 그가 난동을 부린 것일까? 가서 봐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어요.” “돌아가셔야 합니다. 제가 알아보고 보고하죠.” “…….” 성녀의 침묵에 제임스가 팀원들에게 무전을 쳤다. “교단으로 돌아간다. 닉. 애들 데리고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라저.] 두 대의 차량이 고개를 돌려 돌아가고, 후미에서 따르던 차량이 폭발이 있었던 거리를 향해 갔다. * 닉은 움푹 팬 구덩이 앞에 섰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건가?” 주변을 둘러봐도 충격파에 무너진 건물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파편에 부서진 벽과 자동차들이 눈에 띄었다. 싱크홀과는 다르게 그 모습이 전형적인 크레이터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주변에 탐문갔던 팀원 하나가 돌아왔다. “이거 믿기진 않지만 사람이 떨어진 자리야. 목격자가 많아.” “시체는?” 닉의 물음에 팀원 지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살아있어. 목격자들 말이 그대로 걸어서 나왔데.” “지미, 농담해? 터미네이터라도 왔다고 하지 왜. 너라면 이 정도 충격파를 일으킨 충돌에 살아남을 수 있겠어?” “모르지. 신체능력을 가진 각성자라면 가능할지도.” “흐음.” 일리 있었다. 마법계열의 각성자라면 그냥 총을 맞아도 죽는다. 하지만 신체능력 각성자 중에서는 총알 따위는 뚫지도 못하는 강철 피부를 가진 이들도 더러 있었다. 적어도 B급 이상의 신체능력 각성자. 그것도 방어에 특화된 능력자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왜? 투투투투투투. 로터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방송용 헬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벌써 몇몇 기자가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돌아가자.” “이대로? 조사는?” “뉴스가 알려주겠지.” 닉의 태평한 말에 지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돌아가자고.” 아리아 교단의 성 기사단이 교단으로 향했다. * 강우진의 호텔 방문 앞. “아, 제발.” 마스터키를 이용해 문을 여는 직원의 뒤에 선 정민찬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샤워를 하는데 도중에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폭발음이 들렸다. 지진처럼 진동도 느껴졌다. 심상찮은 생각에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강우진이었다. 당장 우진의 방을 찾았으나 잠겨진 문은 열리지 않았고 안에서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민찬이 빨리 직원을 찾은 이유였다. “아, 사장님 제발.” 마스터 키를 가진 직원이 문을 열자 캄캄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탁. 밝혀진 실내와 휑한 바람이 정민찬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아.” 깨진 창문을 보곤 민찬이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었다. “사장님.” 원망스러웠다. 폭발음이 들렸을 때 직감했다. ‘사장님 짓이다.’ 정민찬은 깨진 창문 아래를 살펴보고, 방 구석구석을 살펴봤으나 강우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허.” 사장님 미국에서 테러라도 일으키실 겁니까? 이건 저라도 뒷수습 못합니다. 사고치지 않기로 하셔 놓고는……. 민찬이 어질러진 우진의 캐리어 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 68화 - 테러 (2) > 끝 ⓒ 진설우 < 69화 - 조우 (10:10 내용 수정) > 한참을 뒤따랐다. 벌써 호텔과도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우진은 슬럼가의 뒷골목 같은 그곳을 천천히 걸었다. 녀석은 우진의 미행을 눈치챘는지 이리저리 길을 맴돌았다. “들켰네.” 더 미행해봐야 건질 것도 없다. 뻔히 알면서 본거지에 갈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우진이 고민했다. 어차피 깨비를 붙여놓았다. 이대로 놈을 내버려두고 정보를 수집할 것인가? 깨비라고하여 무조건 들키지 않고 그림자에 숨어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이 좋은 능력자라면 이상함을 눈치를 챌 터. 미행, 도청, 감시 따위는 사실상 우진과 맞지 않았다. 납치, 감금, 협박도 썩 내키진 않지만…. “일단 잡고 볼까?” 우진이 걸음을 빨리해 놈에게 따라붙었다.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가니 커다란 기타 가방을 맨 녀석이 눈에 띄었다. ‘저놈이네.’ 우진이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데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둘의 걸음이 동시에 멈춰지며 시선이 엇갈렸다. 녀석이 뛰었고, 우진이 쫓았다. ‘7서클?’ 처음이었다. 각성자 중에서 70레벨 대의 인물을 본 것은. 그렇다면 상대가 AA급의 각성자라는 의미였다. 60레벨 후반대의 각성자들도 많았으니 전 세계를 놓고 보면 70레벨대에 진입한 각성자가 없는것도 이상했다. 앞으로 더 많은 각성자들이 6서클의 벽을 깨고 7서클에 진입할 것이다. 미래는 미래고 지금 중요한 것은 쫓고 있는 놈이 전 지구를 통틀어 수위를 다투는 랭크의 각성자라는 것이다. ‘그런 놈이 날 노려?’ 슬슬 배후가 누군지 궁금증이 커졌다. 어쩌면 큰 세력을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진이 속도를 높이는데 녀석도 상당한 빠르기로 도망치는지라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일부러 나한테 맞추는 느낌인데?’ 딱 우진이 잡지 못할 정도. 그 정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녀석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놈은 보나 마나 7서클의 신체능력 각성자다. 그것도 제대로 단련한 놈이다. 이연희와도 비교 불가한 놈이다. ‘재밌네.’ 우진은 네크로맨서지만 전사이기도 했다. 질주 스킬을 사용하자 속도가 배는 더 빨라졌다. ‘잡았… 어?’ 우진이 막 기타 가방을 잡으려는데 상대도 비슷한 능력이 있는지 갑자기 빨라지며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요놈 봐라?’ 지구에서 이만큼 우진의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을까? 어쩌면 놈은 지구에서 처음으로 만난 강자일지도 몰랐다. 한참 도망치던 놈이 멈춘 것은 지하철 역 앞이었다. 놈은 우진을 보고 손을 까닥했다. “허.” 겨우 2차선 도로를 앞에 두고 자신을 도발하는 놈을 보며 우진은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근래 들어… 아니, 근 10년을 통틀어 자신 앞에 저토록 맹랑하게 도발하는 놈을 본적이 없었다. 놈은 씨익 미소 지었다. 지가 이소룡이야? 미소를 남기곤 그대로 던전으로 들어가버리는 놈을 보곤 우진이 황당해 혀를 찼다. “참신하게 귀엽네.” 배후가 누구든 저 새낀 죽인다. 던전은 최초 입장 30초가 지나면 결계가 생긴다. 우진이 던전 입구를 통과했다. * 알 아사드.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난 그는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자신을 반군에 팔았다. 돈 몇 푼을 쥐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말이다. 총과 칼을 잘 썼기에 또래 아이들이 그저 총알받이에 미끼로 쓰일 때 알 아사드는 훌륭한 대원으로 자랐다. 그가 사는 세상은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20살이 되던 해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세상이 혼란스럽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여전히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각성자가 되며 더이상 전쟁의 부속으로 쓰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반군 수뇌의 눈에 띄었고, 정부군과의 국지전에 투입되는 대신 좀 더 고차원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 표적의 암살과 테러 등을 성공적으로 실행하며 차츰 신임을 얻어 이제 수뇌부의 핵심요원이 되었다. 그때쯤 자기 일이 신념이 아닌 돈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행위가 사람들을 벌주며, 단죄하고 더 나아가 돈을 번다. 돈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몬스터 따위는 잡아본 적도 없다. 그는 오직 인간을 사냥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AA급으로 알려진 네크로맨서를 하나 잡는다. 등급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각성자들을 암살해왔고 그들의 등급이 대인 전투력의 지표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법사들 따위야 조용히 접근해 목을 그어버리면 A급의 각성자라도 그냥 죽어버린다. 너무나 손쉽게. 던전에 들어선 아사드는 즉시 어둠에 몸을 맡기고 숨었다. 어둠과 동화하는 그의 능력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적에게 접근해 죽이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야야, 나와봐. 던전 빵이라도 하자는 거냐?” 저것이 한국어인가? 넘겨받은 표적의 정보에 의하면 놈은 한국인이라고 되어 있었다. “안 나오면 뭐.”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놈은 운이 좋았음인지 아사드가 숨어든 벽과는 멀리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대로 계단을 타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멍청한 놈.’ 감지계열의 마법 따위도 없는 네크로맨서가 분명했다. 저렇게 부주의하게 던전에 덜컥 들어오다니 말이다. 유인은 성공적이다. 이제 뒤를 쫓는 사냥의 시작이다. 알 아사드가 어둠에 동화된 채 던전 아래로 향했다. ‘어디까지 간 거지?’ 이상했다. 표적은 자신을 쫓기 위해 던전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그렇게 유인했다. 그런데 놈은 자신의 존재를 잊은 것인지, 아니면 지나친 자신감인지 지나치리만큼 던전 아래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알 아사드는 조심히 걸음을 옮기다가 멈칫했다. ‘시체가 없어.’ 주변에 핏자국이 낭자했지만 시체가 없었다. 묘한 위화감이 그를 자극하는 그때. 화악. 던전 안의 불빛이 밝아졌다. “아, 영혼 충전 시간도 벌어주고 고마워.” 눈앞에 나타난 표적은 당황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능력을 보여봐. 쓸만한지.” 표적의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그의 뒤에 나열해있던 해골병사들이 덮쳐들었다. ‘하나, 둘….’ 수를 세는 게 의미가 없었다. 던전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해골병사들의 수에 아사드는 자신의 장기인 쌍수도를 빼들고 달려들어야 했다. “호오, 좀 하네.” 수적으로 불리하지만 해골들의 수준은 낮았다. 차근차근 해치웠지만 쉽게 해낸 것은 아니었다. 쌍수도에 특화된 그의 전투능력들을 하나씩 선보이며 적에게 정보를 노출하고 있었다. “암살자 타입에, 쌍검도 꽤 쓰네. 몰이 사냥보다는 1:1에 더 낫겠네.” 저 한국말이 아까부터 거슬린다. 마치 자신을 품평하는듯한… 놈은 아직도 손 하나 까닥이지 않고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먼저 지칠 판이다. 후욱, 훅. 알 아사드는 숨겨둔 능력을 폭발 시켰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와 그보다 더 거칠어진 그의 움직임은 아까완 전혀 딴판이었다. 그의 쌍수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해골들이 우수수 나가 떨어졌다. “호오, 버서커도 있어? 전사타입에 암살자의 듀얼클래스인가?” 이죽거리는 놈에게 도약했다. 신의 분노라 이름 붙인 자신의 마지막 기술은 세상을 향한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내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쌍수도가 네크로맨서의 목을 치려는데 가로막는 쇠 막대기가 있었다. “쓸만하네. 쓸만해.” 네크로맨서의 강철지팡이가 자신을 후려쳤다. 후욱, 퍽. 생각지 못한 힘과 충격에 잠깐 혼란이 찾아왔다. 정보에는 네크로맨서라고 했는데? 표적의 발이 자신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힘에 옴짝달싹 못해 두 손으로 표적의 발을 붙잡아 들어 올리려 했다. “70레벨 되면 보자고.” 어느새 도끼로 변한 무기가 그대로 목에 떨어져 내렸다. 콰직. 장작을 패듯, 머리통을 몸과 분리한 우진은 놈의 영혼이 빠져나가기 전 얼른 영혼의 봉인석을 구입해 담았다. 놈은 아슬아슬하게 7서클을 넘었다. 지구에서 처음으로 구한 7서클급의 전사의 영혼. 놈을 고문해 배후를 묻는 것 따위는 의미 없었다. 70레벨이 되어 놈이 자신의 권속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우진은 놈의 시체와 수급을 인벤토리에 넣고는 살아남은 해골들을 불러들였다. “쓸데없이 상위 던전에 들어와서.” 귀환석은 없었다. 예상대로 입구로 돌아오니 붉은 포탈이 생성되어 있었다. “이거 지각하는 거 아니야?” 컨소시엄이 점심때라고 그랬나? 우진이 빠르게 사냥을 시작했다. * 던전을 나온 우진은 멀리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깨비, 따라붙어.’ [주인님의 뜻대로.] 깨비가 감시자의 그림자로 스며드는 것을 확인하곤 걸음을 옮겼다. 놈들이 관리하는 던전인지 주변에 던전의 관리인이 없었다. 우진은 던전의 역 이름을 기억하곤 걸음을 옮겼다. “하, 여기가 어디야?” 어젯밤 정신없이 쫓다 보니 어딘지 알 길이 없었다. 휴대폰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호텔에 두고 왔다. ‘혹시 영어도 파나?’ 우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인트 상점에서 언어의 물약을 살펴보았다. 아르펜의 언어를 깨칠 수 있는 물약은 팔고 있었지만… 영어도 있다! 영어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다른 언어들도 모두 있었다. 우진은 2000포인트나 하는 그것을 구입하곤 그대로 마셨다. 스킬북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각성하듯 영어라는 언어를 그대로 습득해버린 우진이었다. 능력이든 언어든 새로운 지식이 머릿속을 헤집어 자리 잡는 느낌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하.” 그제야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컨소시엄이 예정된 맨해튼의 타이탄 길드의 본사를 향했다. ‘택시 타면 금방인데 택시비가 없네.’ 아르펜이었으면 그냥 강탈하고 말았겠지만… ‘뭐, 사고 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냥 걸었다. 어차피 컨소시엄은 12시였고 조금 늦기야 하겠지만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그리고 늦으면 좀 어떠랴. 컨소시엄 따위야 어차피 함께 온 정민찬이 알아서 할것이고 우진은 그저 성녀를 만나면 된다. 생각해보니 더 늦어도 상관이 없다. 우진이 거리를 걷는데 거리의 건물 상단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서 뉴스가 흘러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제 일이네.” 휴대전화로 촬영 한듯한 어제의 미사일 폭발 영상과 움푹 팬 도로와 부서진 자동차들의 모습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테러 발생. 911 악몽의 재현인가? 인류의 적은 몬스터가 아니라 테러?” 우진이 소리 없는 뉴스의 하단 자막을 읽었다. 화면은 바뀌어 아나운서와 동양인 남자가 모습에 나타났다. “어? 민찬이?” 익숙한 동양인 남자 민찬의 얼굴은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전전긍긍한 얼굴이었다. 우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쇼윈도 너머의 편의점에서 같은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딸랑. 우진이 편의점을 들어가니 카운터에 서 있던 점원이 슬쩍 우진을 보았다. 트레이닝복의 동양인 남자임을 확인하곤 다시 티비로 시선을 옮기는 점원이었다. [호텔이 폭파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에서 몸을 던져 막은 한국인 강우진씨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아나운서의 말을 정민찬이 끼어들었다. [사장님. 저는 처음부터 사장님 믿었습니다! 사장님 어디있습니까? 돌아오십시오.] “허, 짜식. 누가 보면 미아찾는줄 알겠네.” 그래도 자신을 저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우진은 살짝 마음이 훈훈해졌다. 걱정 마라, 민찬이. 이제 나 영어도 할 줄 안다. [테러범은 미국정부에서 알아서 잡을 겁니다. 사장님은 그냥 돌아오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괜히 일 커지기 전에…….] “이미 잡았다. 이놈아.” 우진이 피식 웃는데 실종자 강우진의 모습이 화면 상단에 떴다. 그리고 그가 돌진해 미사일을 튕겨 하늘에서 터지는 장면과 바닥으로 추락하는 동영상이 연달아 재생되고 있었다. 편의점 점원이 눈이 동그래져 티비와 우진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 69화 - 조우 (10:10 내용 수정) > 끝 ⓒ 진설우 < 70화 - 조우(2) > 소식을 들었을 때 메르디는 너무 놀라 신을 찾았다. 아리아의 동상 앞에 그녀가 무릎 꿇었다. “여신이시여… 그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였습니다.” 믿기지 않는 것은 그 방법이다. “그가… 자신의 몸을… 내던져 다른 사람을….” 직접 말하고도 믿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일 수도… 그래, 다른 사람일 수도….” 메르디는 혼란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억 속 임모탈의 생김새와 똑같았으나 그라고 생각하기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행동에 동일인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불안과 불안이 중첩되며 그녀의 스트레스가 커졌다. “다른 사람일 거야. 다른 사람….” 차라리 그렇기를 빌었다. 메르디의 기도에도 여신은 답이 없었다. *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민찬의 얼굴은 우울해 보였다. 타이탄 길드에서 차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미리 나와 기다렸다. “정 이사.” “아, 정상무님.“ 정찬성이 바로 맞은편 호텔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나타난 백종도가 민찬을 보고 인사했다. “우진이는 아직 소식이 없는가?” “하하, 곧 연락이 있으시겠지요.” “별일 있겠는가? 대한민국 최고 각성자 아닌가? 하하하.” “하하….” 민찬이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은 우진의 실체를 모른다. 아르펜이란 행성에 불려 가고도 살아서 돌아온 사장님이다. 미사일에 그대로 돌진하는 사람인데 걱정은 무슨. 민찬이 걱정하는 것은 괜히 우진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미국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다른 곳도 아니고 뉴욕에서 일어난 미사일 테러다. 그것이 건물 하나 정도 날릴 위력의 소형미사일이라 해도 이것은 분명 오해를 살만했다. 미국 국방성이 허수아비도 아닌데 자국의 그것도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다니 말이다. ‘제발 오해이기를.’ 민찬은 우진을 노린 세력이 미국이 아니길 빌었다. 그것이 사실이면 지금 적진의 한가운데 제발로 기어들어온 꼴이었다. ‘아닐거야.’ 세상이 뒤숭숭해지며 테러도 빈번했는데 각성자들의 능력이 워낙에 기상천외하니 그들로 인한 테러가 많았다. 각성자들의 아공간이라는 능력도 있으니 미사일을 들여왔을 수도 있었다.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셔야 할 텐데.’ 우진의 그간 행적이나 성격을 보면 다짜고짜 펜타곤으로 직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디 계신 것인지….’ 하도 불안하다 보니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물가에 아이를 내놔도 이만큼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핵 발사 버튼을 아이의 장난감이라고 쥐여준 기분이었다. “심심할 텐데. 같이 가세나.” 백종도는 민찬, 찬성과 함께 차를 타고 컨소시엄이 예정된 타이탄의 길드 본사로 향했다. 전국의 길드들로 보내진 초대장을 가진 자들만 입장할 수 있는 이번 컨소시엄은 입구부터 기자들이 밀집해있어 마치 연말 시상식에 참석하는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방송국 카메라와 리포터가 쫓아와 일행의 앞길을 막았다. “인터뷰 가능한가요?” “예?” “자칫 많은 희생자를 낼뻔한 끔찍한 테러를 막아낸 강우진씨와 같은 길드 분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예, 예.” 리포터의 너무 빠른 영어에 민찬이 그나마 귀에 들리는 단어로 뜻을 알아 들었다. “놀랍게도 아직 생존해있다고 하는데요. 그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혹, 테러범들에게 납치되었을 것이라 추측하는데, 같은 길드원으로서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야….” 납치? 그게 가능한 것일까. 민찬이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혹시 이 속보를 보고 있을지도 모를 강우진씨에게 전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민찬이 카메라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장님. 저는 처음부터 사장님 믿었습니다! 사장님 어디 있습니까? 돌아오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 또 사장님이 벌이신 일인 줄 알고 오해했습니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십시오. “테러범은 미국정부에서 알아서 잡을 겁니다. 사장님은 그냥 돌아오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괜히 일 커지기 전에 돌아만 오십시오.” 괜히 혼자 잡으려 하시다가 전쟁납니다. 돌아오십시오. 민찬은 간절히 빌었다. 우진에게 전하는 민찬의 말은 한국말인지라 리포터가 알아듣지 못하는데 스텝 하나가 다가와 통역된 말을 적은 종이를 건넸다. “네, 놀랍군요. 같은 길드원의 추측으로 강우진씨는 현재 테러범을 쫓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어? 그냥 추측인데…. 민찬은 찝찝한 기분을 떨쳐두고 경호원들이 줄지어 지키고 있는 입구를 통과했다. 대 회의실 같은 공간은 의회 같기도 했고, 오페라극장 같기도 했다. 길드의 사옥에 이만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미국 1위 길드임을 생각하면 이정도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가 지정배석이 된 탓에 민찬은 KH길드의 백종도와 정찬성과는 떨어져 앉았다. 강우진의 이름이 적힌 옆자리의 빈 의자가 민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잠시 후 타이탄의 길드 마스터 딘쿤이 무대의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컨소시엄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딘쿤은 짧은 인사와 함께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세계 수위를 다투는 중국의 길드부터 유럽의 길드와 일본의 길드들. 러시아에서도 두 개의 길드나 이번에 참석했다. 그 와중에 한국에 보낸 4개의 초대장. 3대 대형길드와 아르달. 해머, KH, 아르달이 참석했지만 화랑 길드는 불참했다. 그리고 아르달의 길드 마스터는 현재 실종상태고 말이다. 메르디에게 귀가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에 아르달이라는 길드는 딘쿤도 주목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번 컨소시엄은 길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 있어 이것을 공개하고 지구상의 모든 각성자들의 도움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컨소시엄은 시간을 두고 일반에도 공개될 것이다. 생방송은 아니지만 이번 컨소시엄을 찍는 여러 대의 카메라가 회의장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다. 딘쿤이 짤막하게 각국 길드에 대한 감사 인사와 던전과 몬스터 그로 인한 위기감을 전달하며 분위기기를 고조시켰다. “이번에 전할 사항은 인류가 알지 못했던 던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대번에 집중되었다. “저희가 알아낸 바로는 던전은 차원 게이트의 역할을 합니다. 현재 아르펜이라는 행성과 지구를 잇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지요. 그곳과 이곳의 시간 차는 4배입니다. 그래서 던전 안의 시간이 4배가 차이 나지요.” 딘쿤은 짧게 쉬며 사람들을 살폈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볼 카메라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르펜행성의 괴수들이 던전이라는 다리를 건너 지구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이것을 막아 내야 합니다.” 누군가 불편한 음성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던전을 폐쇄하자는 소리요?” 던전 사업으로 호황을 맞이한 일본의 다켄 길드였다. “다리를 부숴봐야 새로운 다리가 놓일 겁니다. 불가능한 일이지요. 저희는 한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 여러분을 이곳으로 초청했습니다.” 잠깐 뜸을 들인 후. “인류가 먼저 다리를 건너 몬스터를 소탕하는 것입니다.” 선제공격. “전쟁터를 지구가 아닌 그곳에 여는 것이지요.” 미국다운 발상. 전쟁이 아르펜에서 일어나면 던전브레이크로 인한 피해는 확실히 막을 수 있을 터. “아까부터 아르펜이라는 행성에서 괴수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건 신빙성 있는 말이오?” “물론. 그에 대한 산 증인이 있습니다.” 대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성기사단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등을 돌려 일제히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구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아르펜행성에서 온 아리아교단의 성녀를 소개합니다.” 각성자들 사이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동영상이 아니라 직접 본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성기사단의 뒤로 메르디가 걸어나왔다. 지구의 것과는 조금 양식이 다른 수수한 수녀복을 입은 그녀는 볼품없는 옷으로도 가리지 못한 기품과 아름다움이 묻어나왔다. 그녀는 대회의장의 가운데 길을 천천히 걸어 무대로 올랐다. 그녀의 뒤로는 해밀턴이 뒤 따랐다. “아리아 교단의 성녀 메르디에요.” 그녀의 아름다운 말소리에 회의장이 다시 한 번 술렁였다. 메르디는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생기 넘쳤다. 자신의 연설에 따라 고통받고 있을 아르펜의 연합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 왔다. “지구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나아가 아르펜의 해방을 위해 여러분께 간곡히 청합니다.” 그녀의 말과는 달리 태도는 기품이 흘렀고 표정은 도도했다. 신의 가호로 알 수 없는 위엄이 그녀의 전신에 흘렀다. “증명하시오. 그대가 아르펜행성에서의 성녀였다곤 하나 이곳에선 하나의 각성자에 지나지 않소.” 여전히 일본의 다켄길드 사람이었다. 그는 어지간히도 지금의 상황이 바뀌는 것이 달갑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지하철역은 어마어마한 수를 자랑했다. 그로 인한 피해도 많았지만 신사업이라 할 수 있는 던전 사업 또한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세계를 주도하는 던전 사업의 메카가 일본이었다. 메르디가 무대의 앞으로 나왔다. 고작 각성자? 9서클, 이곳의 등급으로 따지자면 SS급의 성직자다. 메르디가 두 팔을 벌렸다. 그녀의 몸에서 빛이 뿜어지더니 대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성스럽고도 따뜻한 빛이 휘몰아치며 회의장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버프를 걸었다. 각성자들은 뚜렷이 그 변화를 감지했고, 일반인들도 몸에 활력이 돋는 정도의 변화는 느꼈다. “증명이 되었나요?” 도도하고 위엄있다.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다켄길드의 사람이 신음 흘리며 지지 않고 꼬투리를 잡았다. “어폐가 있소. 던전은 몬스터만 기어나오지 인간은 들어가 봐야 다시 되돌아오는 것만 가능하오.” 귀환석이라 이름 붙인 차원의 조각은 지구에 당도하기 위한 열쇠니까. 하지만 차원의 조각은 귀환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르펜으로 향할 수 있는 열쇠도 있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성기사단을 조직했다. “길은 저와 성기사단이 열겁니다. 여러분은 지구의 안전을 위해 아르펜으로 향하셔야 합니다. 망설이면 지구도 아르펜과 같이 황폐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이것은 파멸을 막기 위한 전쟁입니다.” 성녀의 말에 누군가는 심장이 뜨거워졌고, 누군가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모두가 전쟁을 사명감으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돈이 되야 움직이지.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메르디는 사람들을 살피며 안도했다. 아리아 여신의 말씀이 맞았다. 지구에 구원자가 있었다. 이들이 아르펜행성에 다시금 자유를 되찾아 줄 것이다. 그때 대회의장 문이 열리며 소란스러운 밖의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열린 문 사이로 검은색 트레이닝복에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장난스러운 얼굴을 한 동양인 남자가 서 있었다. “까고 있네.” 그는 천천히 대회의장을 걸었다. 중앙의 길을 따라 무대로 일직선으로 걸었다. 천천히. 느릿느릿. 회의장의 모든 이목이 집중 되었다. 누군가는 반가움을 누군가는 호기심, 누군가는 불편함 감정이 뒤섞여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우진에게 내리꽂혔다. 정장을 차려입은 수백 쌍의 눈동자가 모였음에도 강우진의 시선은 전방을 향해 있었다. 무대 위에 선 메르디. 그녀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우진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수록. 메르디는 심장이 한 계단씩은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맞았어.’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정말 그가 지구에 있다니…. 우진이 무대의 앞에 멈춰 섰다. 무대 위에 패닉에 빠진듯한 메르디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이거 어색한데?” “…….” 너무 두려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저 웃는 얼굴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우군일 때도 불안하지만, 적이 되면 재앙이 될 사내. “내가 올려다볼 일도 다 있네.” “…!” 성녀 메르디가 깜짝 놀라 무대를 내려갔다. 도도한 그녀의 행동에 기품은 없었다. 허둥지둥 내려간 그가 우진의 앞에 섰다. 그리고. “!” 메르디의 신형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불사의 군대를 아우르는 왕….” 메르디의 입에서 아르펜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파괴신 트래쉬의 전진자이자….” 그녀의 맞은편 무릎도 바닥에 닿아 꿇어앉았다. “아르달의 군주….” 그녀의 허리가 천천히 숙여졌다. 떨리는 두 손이 우진의 운동화를 조심스레 잡았다. “불멸자… 임모탈께….” 그녀의 입술이 우진의 운동화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아리아의 미천한 종이….”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난 메르디가 절하듯 엎드렸다. “인사 올립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우진이 밝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그치?” 아르펜에서 지구까지 찾아온 친구와의 첫 대면이었다. < 70화 - 조우(2) > 끝 ⓒ 진설우 < 71화 - 소탕 > 정적. 실오라기 하나 떨어져도 크게 들릴듯한 숨 막히는 정적이 대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찰칵. 습관적으로 누른 어느 한 기자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에 동면이 풀린 개구리처럼 굼뜬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상호불가침은 깨진 건가 그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이곳이 아르달인줄 알았다면 절대 발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진이 희게 웃었다. 그가 궁금하던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미국에 온 직접적 이유. “지구엔 왜 온거야?” “구원자를 인도하라는 여신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흠, 아리아가 널 보냈어?” 신성모독. 하지만 메르디는 화를 내거나 기분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않는다. 이미 신을 대면한 자. 그 앞에서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예… 저는 그저 미천한 종일 뿐인지라 여신의 계시대로….” “아, 됐어.” 들어봐야 뻔했다. 우진이 손을 휘젓고는 딘쿤을 보았다. “이야기 좀 합시다.” 딘쿤이 우진의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그 옆에 있던 비서가 즉시 통역했다. “…음. 자리가 그러니 따로 봅시다.” 딘쿤의 비사가 말을 전하자 우진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와중에 방송국 카메라를 보곤 그대로 걸어갔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카메라맨이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는데 우진이 그 앞에 서서 물었다. “이거 생방송입니까?” 뜻밖에 유창한 영어에 카메라맨이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생방으로 돌려봐요.” 우진의 말에 카메라맨이 더욱 당황했다. 그가 뒤의 방송국 간부를 바라보자 그도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회의 내용의 비밀엄수를 위해 후일 타이탄 길드와 협의하여 제한된 정보만 세계에 전하기로 한 방송국이었다. “연말 인사 같은 겁니다. 연말 인사.” 우진의 말이 방송국 간부의 마음을 움직였다. 어젯밤 테러로부터 자국민을 구한 영웅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세계에 전한 의무가 있었다. 테러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포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컸다. 그 반대급부로 제 몸 던져 그것을 저지한 우진에 대한 관심도도 폭발적이었고 말이다. “말씀하시면 됩니다.” 우진이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히죽 웃었다. “나한테 미사일 날린 새끼, 중간에 일 꾸민 새끼, 그 뒤에서 사주한 새끼….” 카메라맨은 한국말이라 못 알아듣지만 뒤에 다가온 민찬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사장님 말 좀 예쁘게…. “곧 찾아가서 죽여줄 테니, 기다려라.” 우진이 말을 마치고는 방송국 간부를 보았다. “땡큐.” 억양이나 어조만 보아도 연말 인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이미 영상은 생중계 되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고개를 돌려 간부에게 작게 말했다. “저것도 찍습니까?” 성녀가 우진의 앞에 무릎 꿇는 것은 녹화되어있었다. 어수선한 대회의장을 보며 간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화만 해둬.” 생방송으로 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 동양인은 대체….’ 단시일 내에 전 미국인의 관심을 받은 인물 성녀 메르디. 그런 그녀가 동양인 남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누가 보더라도 극경의 예를 취하는 모습. ‘재밌어지겠어.’ 세계는 강우진이라는 남자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할 말을 마친 우진은 무대 쪽으로 다시 걸었다. 어느새 뒤에 다가온 민찬이 우진을 불렀다. “사장님.” “아, 민찬이.” “…….” 우진을 바라보는 민찬의 시선은 복잡했다. 자신을 비롯한 호텔의 사람들을 구하려 제 한 몸 내던진 우진이었다. 자신이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없었던 그것은 희생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됐고, 따라와. 쟤들이랑 할 말 있으니.” 컨소시엄의 진행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빠르게 뒤로 사라지는 타이탄의 길드마스터 딘쿤과 성녀 메르디, 그리고 그녀를 추종하기 시작한 성기사단을 보며 말하자 민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친구 아녔습니까?” “어, 뭐. 친구잖아.” “…….” 어딜 봐서? 어딜 봐서? 누가 봐도 친구처럼 안보이잖아. “따라오기나 해.” “…….” 우진과 민찬이 사라진 딘쿤을 쫓아가자 대회의장이 그제야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동양인은 누구야?” “메르디양의 남편인가?” “성녀가 무슨 남편.” “또 모르지. 저쪽 행성은….” 왁자지껄한 와중에 백종도의 얼굴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정상무.” “예, 사장님.” “나, 나….” “예, 말씀하십시오.” “정말 재밌는 아우가 생긴 거 같아.” 백종도의 눈빛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정찬성이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어디가 재밌다는 말인가? 딱 봐도 위험하구만. 정찬성의 한숨이 깊어졌다. * 타이탄의 길드마스터 집무실. 딘쿤이 회의 테이블의 상석 소파에 앉자 메르디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아르달의 군주께 자리를 양보 하심이….” “예?” 딘쿤이 잠깐 패닉에 빠지자 뒤따라온 우진이 손을 저었다. “아, 됐어. 됐어.” “…….” 우진이 딘쿤의 우측에 앉자 따라온 민찬이 자연스레 그 옆에 앉았다. 메르디가 딘쿤의 옆에 서 있자 딘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성녀님도 앉으시지요.” “어찌 감히….” 우진이 성녀를 보았다. [그냥 앉아.] […네에.] […….] 둘만의 아르펜 언어가 귀에 거슬렸다. 딘쿤의 미간이 좁혀지며 우진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이 둘은 무슨 사이였단 말인가? 비서보다 더 능통한 한국어 통역사가 당도하자 그가 궁금증을 풀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두 분이 어떤 사이신지….” “아, 친구야. 친구.” 우진의 말에 딘쿤은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고 메르디는 얼굴이 희게 질렸다. ‘오, 여신님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임모탈의 친구라니…. 상상만으로도 몸이 잘게 떨렸다. “음, 뭐 동맹 비슷한 거야.” “동맹이요?” “트라넷의 군대를 함께 때려잡았으니까.” “…….” 성녀는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함께 때려잡았다고도 하기는 애매했다. 우진은 아르달에 발을 디디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였으니까. 후일 연합군이 아르달에 사신을 보내 침범하지 않겠노라 맹세를 한 후에야 아르달과 연합군의 마찰이 없었다. 트라넷은 여전히 아르달의 땅을 노렸고 우진은 트라넷의 군대를 사냥했다. 공통의 적을 두고 싸운 것은 맞으나 그리 긴밀한 협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동맹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이를테면 각자 트라넷을 때려잡았다. 우진이 트라넷을 사냥했다면 연합은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 버티는 정도? 통역사가 딘쿤의 말을 다시 전했다. “한국인이라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아르펜행성에서 인연이 있었던 겁니까?” “5년 전 소환당했지. 20년을 살다가 얼마 전 돌아왔고. 그런데 청문회라도 열 셈인가?” 계속되는 질문에 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성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딘쿤에게 말했다. “자극하지 마십시오. 군주께 실례가 됩니다.” “…….” 한없이 도도하고 위엄있던 성녀가 저렇게 불안에 떠는 모습이라니.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딘쿤이었다. 우진의 실체를 모르는 그가 보기엔 우진이 좀 더 인간에 성녀가 좀 더 신에 가까운 모습인데 말이다. 어쨌든 강우진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굳이 그에게 직접 들을 필요는 없었다. 성녀가 우진에 대해 잘 아는듯하니 그녀에게 나중에 따로 들으면 될 터였다. “흠, 흠. 저를 보시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이제야 본론으로 돌아오자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꺄악!” 비서가 소리를 지르고 통역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민찬도 얼굴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하는데 딘쿤은 눈에 힘을 주고 눈빛이 깊어지며 고민이 많아졌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하는 한 거대 조직을 이끄는 길드마스터로서의 고민이 깊어진 모습인데 뜻밖에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은 성녀였다. 그녀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르달의 군주가 누군가의 수급을 가져왔구나.’ 딱 그 정도였다. 딱히 놀랍지도 않은 일. 의문이 가득한 딘쿤의 시선을 받으며 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젯밤 날 습격한 놈이야. 던전으로 유인해 나를 죽이려 한 놈이야. 이놈이 누군지 알아봐 주면 좋겠는데.” 성녀는 놀란 눈이 되었다. 지구는 트라넷이 아니라 다른 멸망의 길을 택했구나… 아르달의 군주를 암살 시도 하다니… 자살하는 방법 중엔 최악의 방법이 아닐까? 전에 비슷한 시도를 하다 멸망한 왕국이… 몇 개…. “여기 와서 물어봐야 저희는….” “너희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 이놈이 어디 소속인지 알아와. AA급의 각성자에 암살자로 활동하는 놈이면 그 수가 많지 않을 거야.” “그래도….” “알아보겠습니다.” 딘쿤이 협상을 하려는데 성녀가 날름 수락했다. 타이탄 길드마스터님. 그동안 협조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도 갚으려면 살아야지요? 살아서 아르펜으로 돌아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제발 임모탈을 자극하지 맙시다. 성녀의 간절한 눈빛에 딘쿤이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미사일을 쏜 헬기의 출처는 지금부터 쫓을 거야. 그 출처가 미국방성이 아니길 바라지면 뭐, 맞다면 별수 없지.” 미국 정부가 우진을 적대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 와중에 몇몇은 분명 관계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 정부가 나서서 헬기의 자취를 좇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할 필요 없어. 이미 어딨는지 알고 있으니까. 곧 출발할 거야.” “…….” 가만히 있던 메르디가 불쑥 나섰다. “함께 가겠습니다.” “왜 따라와?” 마뜩잖은 우진의 반문에 정민찬이 나섰다. “타이탄길드와 함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굳이 공을 세우기 위한 일이 아니다. 테러범을 색출하기 위한 일도 아니다. 우진은 그저 복수를 하려 할 따름이다. 민찬은 그로 인한 오해와 잡음을 줄이고 싶었다. 미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타이탄길드와 함께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테러에 민감하다. 테러의 발생과 그것을 막은 우진은 이미 미국에서도 영웅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그가 테러범의 근거지를 색출 일망타진한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가 진짜 슈퍼히어로가 아닌 이상 자국 내에서의 무력행위를 고깝게 보지 않는 미국인도 있을 것이다. 미국길드인 타이탄과 함께하는 것이 나았다. “뭐, 좋아. 언제 출발 할 거야?” “끄흠. 대응팀을 꾸리겠소. 5시간이면 충분하오.” 뭐가 그리 오래 걸리나 싶었지만 놈들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비비와 깨비 둘이나 붙여두었다. 도망치더라도 쫓는 것은 문제없었다. “그럼 그동안 고향이야기나 좀 해볼까?” 우진은 자신이 사라지고 나서 변한 아르펜의 사정이 궁금했다. 외국 나가면 같은 나라 사람만 봐도 고향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말이 꼭 들어맞아서일까? 유난히 친근하게 구는 임모탈의 행동이 영 적응되지 않는 성녀였다. “무엇을 아뢰면 되오리까….” “카일은 요즘 뭐해?” “용사님은 3년전 다친 부상에도 고군분투 하시다 1년여 전 트라넷의 군단장과 결전 끝에 전사하셨습니다.” “아, 그 친구 죽었구만. 다리가 좀 불편한 친구였나….” 네, 그 불편한 다리 임모탈이라는 어떤 네크로맨서와 싸우다가 아작난 다리지요. 성수에 신의 축복을 퍼부어도 완치하지 못한 부상이죠. “숲 지기 영감은 뭐해?” “엘프 대장로께서는….” 말문을 줄이는 메르디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우진을 보았다.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인가? “왜 말을 하다 말아?” “…….” 하, 몰라서 묻는 것이구나. 그치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너 님이 죽였잖아요. 세계수 강탈해가면서….’ 도무지 머리를 굴려 보아도 임모탈의 기분을 망치지 않으면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성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 71화 - 소탕 > 끝 ⓒ 진설우 < 72화 - 소탕 (2) > “임모탈께서 엘프들의 숲에 행차 하셨을 때….” “응?” “그때… 세계수를 지키시다가….” “응? 나때문에 죽은거야?” “…….” “내가 그랬었나?” 턱을 괴는 그를 보며 성녀가 기억의 회상을 도왔다. “죽음의 기사가….” “아, 키바가 그랬구나.” 우진은 어렴풋이 생각났다. 세계수의 가지가 필요해 엘프의 숲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어차피 길은 데스나이트와 죽음의 군단들이 열었고 말이다. “거참. 나뭇가지 하나 주면되지.” “…그게 그들의 사명….” “뭐?” “아, 아닙니다.” 애초에 세계수의 가지 하나 정도라면 엘프들도 내어줬을 것이다. 세계수 자체를 뽑아 가려는데 어떤 엘프들이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두겠나. “대학자는 뭐해? 이름이 뭐더라, 노팅….” “노티우스 대학자님도 그 옛날 지병이 도져….” “…….” 그 지병이 왜 생겼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야겠다. 들어봐야 괜한 찝찝한 마음이 커질테니까. “아, 됐어. 넌 왜 그렇게 보냐?” “…….” 괜히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정민찬에게 불똥이 튀었다. 그가 헛기침을 하곤 조심스레 물었다. “흠, 사장님께서 조금 거칠으셨나 봅니다.” “아….” 성녀가 탄성을 질렀다. 조금만 거칠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임모탈을 조금 거친 정도로 순화시키다니. 역시 저놈도 아르달의 사람. 사악하기 그지없구나. 성녀는 정민찬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좀 그랬지.” “…….” 우진의 쿨한 인정에 성녀는 할 말을 잃었다. 괜히 대답하기 싫었다. “그래도 고인 되신 분들 이름이라도 좀 기억하시지….” 성녀와 우진의 미묘한 분위기에 괜히 해본 말이나 우진은 진지하게 대꾸했다. “민찬이. 넌 초딩때 배운 영단어 다 기억나?” “그야….” 그 수백 수천 영단어가 어떻게 다 기억이 나겠는가. 아니, 애초에…. “제때는 초딩이 아니라 국딩이죠. 영어 자체를 안배웠습니다만….” 어째, 말이 옆으로 세는데…. “그래. 나도 안 했으면 좋았을걸.” “…….” 우진은 진심이었다. 처음은 정당방위였고 후엔 무뎌졌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재주가 있어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적을 앞에두고 멍청히 당할수 있겠는가. 간디 정도의 평화주의자도 아니고 말이다. “이거, 괜히 기분만 꿀꿀해지는데….” 우진의 말에 메르디가 파르르 떨었다.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아, 아냐아냐.” 얘는 무슨 말만하면 이렇게 떠냐? 혹시 내가 자기를 죽일거라 생각하는건가? 내가 굳이 해악을 끼치지도 않는 사람을 죽일 이유야….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아까 그이야긴 뭐야?” “…무엇을 말씀이신지.” “애들 선동해서 아르펜 처들어간다며?” “…….” “뒤질래?” 성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지구에 각성자들 죄다 아르펜으로 끌고 가 개죽음 시키면 지구는? 던전 어차피 터질 거 너도 알잖아? 그땐 누가 막아?” 전하지 않은 진실의 한 조각. 그 때문에 성녀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우진이 웃고 있다고 하여 만만히 봐서는 안된다. 저 얼굴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나한테 선전포고하는 거야?” “절대아닙니다!” 성녀가 다시 넙죽 엎드렸다. “머리 굴리지말고 앉아. 제대로 설명해봐.” “던전브레이크를 차단할수 있습니다.” “그건 구미가 당기네.” 던전브레이크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면 아르펜을 전쟁터로 삼아도 상관없다. “말해봐.” “차원영지를 얻어 인근의 던전을 하나씩 영지로 점령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소유가 된 던전은 영주의 뜻이 없다면 몬스터를 외부로 내보내지 않습니다.” “음? 처음 듣는데.” “트라넷의 72군단장은 대영주들. 그 하위의 영주들 또한 무수히 많습니다.” “그래?” “…모르셨습니까?” “알아야 하는 거였어?” 성녀가 똥씹은 얼굴이 되었다. 임모탈앞에서는 왜이렇게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들까? 그럼 지난날 아르달은 무엇을 위해 트라넷과 싸웠는가? “난 그냥 내 땅 밟길래 싸웠는데.” “…….” 돌이켜보면 임모탈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적은 트라넷이건 연합이건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 보복으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했지만 점령이나 주둔지 이전 같은 작업은 아예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복수와 파괴, 약탈 뿐. “지구는 지금 빈 던전뿐입니다. 하위 던전은 그저 경작지, 상위의 던전도 영주들이 탐을 낼만하지만, 대영주들의 눈에 차는 던전은 아닙니다.” 하위의 1~3성 던전, 상위의 4~6성 던전. “지구에 최상위의 던전이 생성되는 순간 대영주들이 눈독을 들일 겁니다.” “흐음.” 우진이 의자 팔걸이를 톡, 톡 두드렸다. 얼추 자신의 예상과 맞았다. 7성 던전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트라넷의 군단장들이 모습을 보일거라고 예측했으니까. 성녀는 자신보다 트라넷이라는 그 거대한 적들의 구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던전브레이크는 그럼 왜 일어나는 거야?” “지구의 말로 동기화 과정입니다.” “동기화?” 성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설명했다. 던전에너지 3만짜리 던전이 리셋되었다고 치자. 이것이 공략되지 않은채 동기화시간인 30일이 지나면 터진다. 지구에 몬스터들이 날뛰고 3만 에너지만큼의 마나가 지구에 퍼지게 되는것이다. 그렇다면 30일 전에 공략하면 어떻게 될까? 얌전히 광산이 되어 혈석을 제공한다. 3만 에너지 만큼의 혈석을 캐내고 나면 그 던전은 리셋된다. 결국엔 그 캐낸 혈석들로 인해 지구의 마나가 3만 에너지만큼 증가한다. “어차피 막을 수 없구만. 결국 지구가 아르펜처럼 변한다?” “예….” “그래서 던전 브레이크가 뭐야?” “지구의 마나가 충만해 동기화 과정이 필요치 않으면 그 30일의 시간은 의미가 없어지게 되지요….” “…….” 던전이 리셋되는 즉시 몬스터가 튀어나온다. 끔찍한 일이다. 공략에 필요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고, 보다 심각한 문제는 던전 인근의 주민들이 대피할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공개하면 우왕좌왕하다 공멸하겠구만.” “…….” 전 지구가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다. 우진의 납득에 성녀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지금 말한 이야기는 타이탄의 길드마스터에게도 전한 이야기다. “좋아. 던전을 소유하면 던전브레이크를 막을 수 있다 치지. 그런데 왜 굳이 아르펜에 가야 하지?” 성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차원영지를 얻고 지구의 던전을 그 영역으로 두면 된다. 던전을 소유한 자의 의지에 따라 던전 브레이크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차원영지 또한 뺏을 수 있습니다.” “호오?” 우진이 반응을 보였다. “지키려면 강해져야 하고….” 성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르펜은 최고의 사냥터가 될 겁니다.” 지구에 마나가 가득 찬다. 그 이후는 어디에서 에너지를 조달할 것인가? 아르펜이 그 대안이 될 수도 있었다. “괜찮은데?” 우진의 반응에 성녀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트라넷의 졸개 놈들 영지 다 뺏으면 그놈들은 실업자 되는 거네?” “…….” 역시 임모탈. 지키기 전에 뺏을 생각부터 하다니. 명불허전. “그렇사옵니다.” 성녀의 대답에 우진이 씩 웃었다. “죄다 뺏으면 코빼기도 비춘 적 없는 트라넷 놈도 만날 수 있겠네.” “…….” 우진의 사악한 계획에 성녀가 침묵했다. 거짓과 진실의 양면이 한곳에 존재하는 것. “좋아. 그럼 차원 영지를 어떻게 얻는지 말해봐.” “뺏을 수도 있고… 직접 선포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차원의 조각이라는 보석이 필요하며….”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영롱한 보라색의 보석을 꺼냈다. “어,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주웠어.” “…….” “이걸로 어떻게 하는데?” “뺏은 던전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덴 하나의 차원의 조각이 필요하지만 임모탈께선 차원영지가 없으니 최초로 영지를 선포하실 땐 세 개의 차원의 조각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 데나 가면 돼?” “던전의 선택을 받으셔야 합니다.” “뭐가 그렇게 까다로워?” 성녀가 고개를 조아렸다. “차원의 조각이 반응하는 던전이 있으실 겁니다.” “흠, 그런데 세 개나 있어야 한다고?” 우진이 차원의 조각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두 개만 줘봐.” “…….” 성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 못하는 거보니 있긴 있네.” “…….” 성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우진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갚아줄게 줘봐.” “하나뿐입니다.” 지구에 던전을 열면 성녀가 쓰려고 했다. 그런데 우진이 가로채버리면 자신은…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고. 성녀가 자신의 아공간에서 차원의 조각 하나를 꺼냈다. 우진이 덥석 그것을 잡았다. “힘 빼.” “…정말 소중히 얻은 겁니다.” 이것을 얻기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나? 생존한 아르펜 인들이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데…. 지구에 던전을 얻어야 성녀의 차원영지를 통해 아르펜으로 통하는 길이 열린다. “알았어. 갚아줄게. 줘.” “정말 돌려주셔야 합니다.” “뺏길래? 빌려줄래?” 성녀가 손에서 힘을 뺐다. 우진이 그것을 낼름 받아 챙기고는 웃었다. “그럼 이제 반응하는 던전만 찾으면 된다 이거지?” “…….” 누군가에게는 행성 전체의 사활이 걸린 일이 누군가에게는 저리도 신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우진은 이것저것 차원영지에 대해 캐물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진은 그림자 속으로 불쑥 들어오는 존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야?’ 우진이 내면 의식을 통해 물었다. 그림자로 돌아온 깨비가 음침한 목소리를 쏟아냈다. [주인… 환각의 마녀가 잡혀갔다.] ‘뭐? 비비가?’ 우진이 깜짝 놀랐다. 소환의 방에 있는 권속들은 우진의 감각을 공유한다. 돌쇠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소환되었다. “어이쿠.” 갑작스레 나타난 돌쇠의 모습에 민찬이 깜짝 놀랐다. 밝은 전구에 여러 반딧불들이 주위를 맴도는 모습의 돌쇠는 신비로운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돌쇠의 몸이랄 수가 있는 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위이이잉.] 유난히 비비와 친한 돌쇠가 걱정으로 떨었다. 그 마음은 우진 또한 다르지 않았다. 누가 있어 감히 자신의 권속을 사로잡는단 말인가? ‘누구야?’ [트라넷의 졸개… 래쉬모드였다. 환각의 마녀가 사로잡히자 나는 몸을 빼냈다.] ‘잘했어.’ 래쉬모드라면 72군단장 중의 하나였다. 우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먼저 가야겠는데.” “아직 대응팀이 꾸려지지 않았습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래쉬모드가 나왔다.” 우진의 말에 성녀의 눈이 반짝였다. 래쉬모드라면 72 군단장 중의 하나. 드디어 지구에 최상위 등급 던전이 열린 것이다. 그것을 뺏어 자신의 던전으로 삼으면…. ‘차원의 조각을 뺏겼으니.’ 눈앞에 찾아온 기회에도 어찌 손쓸 방법이 없었다. “대충 꾸려서 따라와. 위치는…….” 우진이 깨비가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설명을 하다가 멈칫했다. “여긴 지하철역이 없는데?” “…….” 우진이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성녀를 보았다. “도, 동기화가… 임박했습니다.” 우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따라와.” “군주의 뜻대로….” 화가 난 듯 차가운 분위기의 우진을 성녀가 조심히 뒤따랐다. < 72화 - 소탕 (2) > 끝 ⓒ 진설우 < 73화 - 아이언 골렘 > 투투투투투. 타이탄소유의 헬기가 세대나 날아올랐다. 강우진과 성녀, 타이탄의 길드마스터 딘쿤, 그리고 성기사단 10명이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전부였다. 딘쿤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지원팀 없이 되겠습니까?” 그가 성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화력이….” 미국의 각성자 지원팀은 한국의 그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소규모로 보면 용병부대 정도였고 타이탄 정도의 대형길드라면 군부대 수준이었다. 몬스터 브레이크에 대처하기에는 소수의 각성자보다 차라리 지원팀의 막강한 화력에 의존하는 것이 나았다. “화력이라면 저분의 권속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성녀는 아직도 우진의 권속인 리치와 해골마법사 부대의 위용을 잊을수 없었다. 그들이 뿜어대는 화염마법이 비처럼 내리는 그 모습은 장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재앙이었다. “아직 제니스는 못불러.” 무심한듯 헬기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있던 우진이 한마디 툭 던졌다. “예?” “아직 리치소환은 못한다고.” “어찌….” “봉인되었거든.” “…….” 우진의 말에 성녀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봉인되어? 임모탈의 힘이? 그 어마한 네크로맨시의 마법이? “죽음의 기사들은….” “곧 봉인이 풀리긴 할텐데 아직은 못불러.” 피도 눈물도 없는 전사들. 해골병사들의 군단장. 불사의 군대의 선봉장들. 그들까지 아직 봉인되어 있다면 우진의 곁에 있는 권속들은…. 헬기의 한 좌석을 차지하고있는 빛덩어리는 분명 파괴의 거신이 분명했다. 거기에 그림자에서 느껴지는 이질적 기운과 지금 래쉬모드에게 잡혀있다는 환각의 마녀정도…. ‘이 정도라면….’ 성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우진이 피식 웃었다. “왜? 들이받아보게?” 성녀가 화들짝 놀랐다. 히죽 웃는 그 모습 자체가 너무 위험해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눈알 굴리면서 이리저리 재는 거 다 보여.” “…….” “얼마든지 상대해줄 테지만, 지금은 들이받고 싶더라도 참아.” 성녀가 자신을 적대해도 상관없다. 자신이 한 짓이 있으니 좋게 보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기억에 덧씌워진 공포에 성녀가 조심하는 것일 뿐. 그렇다고 성녀가 덤빈다해도 당해질 우진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비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아직 만렙이 아니더라도 성녀 하나쯤 상대하는거야 뭐. “저는 군주님을 그저 지켜볼 따름입니다.” “웃기네.” 우진이 피식 웃고 말았다. “전방에 저들의 기지입니다.” “응?” 헬기 기장의 말에 딘쿤이 앞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농작지가 펼쳐진 허허벌판이라곤 하지만 뉴욕의 인근에 어떻게 이런 기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모습에 딘쿤이 신음하는데 우진은 비비의 흔적을 쫓았다. 폐허가 된 건물로 보이는 그곳에 비비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끈적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래쉬모드.” 우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 커다란 농장 건물의 그곳에 헬기부터 군용 자동차와 탱크까지…. 사소하게 보면 돈 많은 밀리터리 매니아의 개인 수집 창고 같지만 실상은 조달력 있는 마피아의 무기창고였다. 창고의 한 쪽에 마련된 건물 안에서 대화의 절반을 욕설로 채운 사내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냐앙.” 비비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조용히 접근해 귀를 쫑긋했다. [보스, 그가 실패했습니다. 목표가 살아서 나왔어요.] “뭐라고? 다시 말해봐!” [목표가 살아있다고요. 지금 복귀 중입니다.] “빨리 돌아와.” 리버스 조직의 보스 잭은 도시에 나가 있던 정찰원과의 통화를 마치고는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보스, 왜 그러십니까?” “아사드가 실패했어.” “예에?” 상상해보지도 않은 일이다. 중동 최고의 암살자 인간사냥꾼 아사드가 실패할 줄이야. “평범한 네크로맨서는 아닌 모양이군요.” “당연한 소리를 왜 해?” 평범한 마법사 클래스의 능력자가 아사드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웠다. 아니, 그만 던전을 나왔다는 것은 아사드가 그의 손에 죽었음을 의미했다. “기지가 발각되지는 않겠죠?” “이익…. 중동 새끼들하고 같이 일하는 게 아닌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생각해보자 스트레스가 가중되었다. 목표였던 놈이 살아남았으니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어차피 버리기로 한 기지다.” “그래도 아직 연구가….” “… 조금 서둘러야겠군.” 잭은 자신의 조끼를 챙겨 입었다. 조끼에 두 자루의 권총이 달려있었다. “박사에게 갔다 오지. 경계를 강화하고, 언제든 떠날수 있도록 조치해.” “예, 보스. 그런데 어디까지 준비합니까?” “이 멍청아! 다 버려. 연구 결과만 챙기고 기지는 폭파한다.” “…예, 보스.” 구식이긴 하지만 탱크와 미사일, 군용 차량이 아깝지만 별수 없었다. 그것들을 모두 챙겨 도망가기에는 너무 눈에 띄었다. 조직원들이 부랴부랴 짐을 챙기며 기지 곳곳에 폭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잭은 사무실 건물을 나와서는 농장의 한쪽에 마련된 작은 콘크리트 구조물에 다가갔다. 끼릭, 끼익. 육중한 철문을 열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농장건물이 리버스 조직의 무기창고라면 이 지하 벙커야 말로 그들의 자금줄인 신던전연구기지였다. 리버스조직은 미국의 군수 업체로부터 후원받으며 그들의 연구를 돕고 있었다. 적당한 장소를 제공하고 파견된 연구인원들을 보호한다. 뒷골목 조직이었던 리버스가 일약 거대조직으로 탈바꿈한 것은 군수업체의 막강한 후원 탓이었다. 턱, 턱. 잭의 발걸음이 지하공동을 울리는데 돌연 그가 이질적 인기척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냐!” 신속하게 빼든 권총이 그의 손에 쥐어져 후방을 겨눴다. “냐아앙.” 잭의 눈에 계단을 타고 내려오다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하는 고양이가 보였다. “뭐야? 꺼져.” 길고양이의 모습에 잭이 경계심을 풀고는 다시 아래로 향했다. 위협적으로 발소리를 굴려 보아도 고양이는 잠시 멈췄을 뿐, 계속해서 뒤 따라왔다. 잭은 고양이 따위는 무시한 채 계단을 타고 내려가 연구시설로 향했다. * 연구기지는 휑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연구원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공간이 있었고 몇 대의 컴퓨터와 이상하게 생긴 기계들이 전부였다.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개미굴처럼 사방으로 확장된 굴에 혈석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는 것 정도. “리올라 박사! 기지를 옮겨야겠소.” 연구의 총책임자 리올라는 잭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연구가 막바지네. 옮길 수 없네.” “기지가 발각될 수 있소.” “애초에 약속된 시간은 이틀 뒤이지 않나?”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그랬다. 뉴욕에 미사일을 쏘아댔으니 미국방성이 출처를 이 잡듯 뒤질 것이고 그쯤 그들에게 발견되어 주기로 했다. 그런데 목표가 건재하게 살아있으니 그 시기에 변수가 생겼다. 더 일찍 발각될 수도 있는 상황. 그들의 후원자들도 테러로 분노한 미국의 민심을 등에 업은 미 정부의 보복을 막아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발을 빼야 하는 상황.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리올라가 양보했다. 어차피 계산은 모두 끝났다. 최종적인 실험과 결과만이 남았을 뿐. “좋네. 세 시간만 기다리게. 마지막 실험만 시도한 후에 떠나도록 하지.” 비비는 조용히 어둠에 숨어 지하기지의 내부를 샅샅이 훑어 보았다. ‘이상한데.’ 묘한 위화감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연구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혈석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겨 위치를 조정했고 리올라 박사는 검은색 상자에서 보라색의 영롱한 보석을 꺼내 들었다. ‘차원의 조각!’ 언젠가 한번 본적이 있던 아이템이라 비비가 눈을 빛냈다. 리올라 박사는 그것을 마법진처럼 배치한 혈석 들의 중앙에 올려놓고는 연구원들을 보았다. “자, 그럼 올라들 가세나.” 잭도 지루한 기다림을 끝내고 연구원들과 함께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차원의 조각이 허공에 떠올랐다. “냥, 뭔가 심상찮다옹.” 홀로 남은 비비는 차원의 조각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위에 배치되어있던 혈석들이 웅웅 거리며 하나둘 허공에 떠올라 마나를 발산했다. “으윽, 이러다 큰일 나겠다옹.” 비비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계단을 타고 뛰었다. 비비가 계단을 완전히 벗어나는 그때 지하벙커의 입구에서 뻗어나온 빛 무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파파팟! 그 놀라운 광경이 가시고 나자 지하벙커의 입구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빨리 가져와.” 리올라박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던전에너지 측정장비를 가동했다. 연구원 하나가 그것을 가동하고는 점점 오르는 측정 수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성공한 듯 싶습니다.” “수치가 얼마야?” “5성 이상입니다. 어… 6, 6성을 넘었습니다.” “좋았어!” 리올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던전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 과학자는 이제부터 토플러가 아니라 자신이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 지하철이 아닌 새로운 던전을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어어? 수치가 폭등합니다. 이 수치는… 7성 던전이….” “뭐?” 리올라는 깜짝 놀라 측정장비의 숫자를 살폈다. 여태 발표된 적 없는 유례없는 수치. 파팟! 그때 던전에서 나온 강력한 충격파에 던전 측정 장비는 물론이고 허술하게 천장을 이어놓고 있던 농장건물도 무너졌다. 건물에 있던 탱크들이 충격파에 밀려나고 대기 중이던 차량이 토네이도라도 만난 듯 들썩였다가 뒤로 밀려났다. 던전의 지근거리에 있던 리올라 박사는 물로 잭도 그 충격의 여파에 바닥에 처박혀 나뒹굴었다. 운 나쁜 몇몇은 그대로 절명했고, 그보다 더 운 나쁜 몇몇은 죽기 직전의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크하하하, 나 래쉬모드를 소환한 인간이 누구인가?” 가래가 끓는 기괴한 목소리를 내며 좁은 던전의 문을 걸어 나오는 래쉬모드는 털을 바짝 세우고 있는 고양이를 보곤 눈을 반짝였다. “호오, 많이 익숙한 기운의 서큐버스인데….” “냐아아앙.” 비비는 래쉬모드를 노려보았으나 별수 없었다. 복귀 후 사무실에서 대기하던 정찰조직원의 그림자에서 깨비가 쑥 빠져나갔다. * 농장의 인근에 헬기가 내려 앉았다. 우진이 망설임 없이 걸었고 그 뒤를 걱정 가득한 돌쇠가 뒤 따랐다. 딘쿤과 성녀를 위시한 성기사단이 바짝 긴장한채 그 뒷열에 따라붙었다. 거친 비포장도로를 걷는 우진의 눈은 무너진 농장 건물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 어설프게 무장한 인간들이 그놈의 눈치를 보며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이거 정말이었군. 임모탈의 서큐버스였다니.” 래쉬모드는 축 늘어진 비비를 한 손에 쥐고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우진이 눈매를 좁혔다. “동기화는 아닌 모양이네.” “크큭, 지구는 아직 설익었지. 소환마법진을 생성한 것이 누구인가 궁금해서 와봤더니 임모탈이 있었을 줄이야!” 래쉬모드는 진심으로 지금 이 상황이 유쾌한 듯 싶었다. “임모탈이 도망쳐 숨은 곳이 고작 지구였는가?” “비비나 돌려줘.” “아하, 이 꼬마 아가씨.” 래쉬모드는 고양이를 쥐고 흔들었다. “임모탈의 권속들은 죽여도 죽지 않지. 마치 우리처럼 말이다.” 그래, 찰거머리 같은 트라넷의 군단장들. “크큭, 그래서 그 죽음의 고통과 허무를 누구보다 더 잘 알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죽음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억하기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우진은 비비가 그 고통과 허무를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벌써 치매라도 왔나 봐? 나한테 다섯 번 정도 죽었었나?” “아, 그랬지. 그랬어.” 래쉬모드는 유쾌하게 웃었다. “초기화되기 전의 너에게 말이야.” “…….” 자신을 꿰뚫어 보는듯한 래쉬모드의 눈빛에 우진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어디 자신 있으면 한번 도전해 보겠나? 크큭.” 래쉬모드는 성녀를 힐끗 보고는 지하던전을 향했다. “조무래기들은 다 떼놓고 들어와 봐.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고.” 래쉬모드가 기분 나쁜 웃음을 남기고는 던전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을 떼는 우진을 성녀가 잡았다. “함정이에요.” “아니었던 적이 없지.” “…….” “넘지 못한 함정도 없고.” 임모탈의 행적이 그러했다. 우진이 던전을 향하려는데 던전에서 괴수들이 튀어나왔다. “크라악!”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수들의 모습에 살아남은 리버스의 조직원들이 기겁하며 던전에서 멀어졌다. 우진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보곤 웃었다. “조무래기들 다 떼고?” 던전안의 괴물들을 모조리 내보내고 있었다. 주인이 정해진 던전은 주인의 의지가 없으면 몬스터 브레이크는 없다. 달리 말하면 언제든 몬스터 브레이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던전 안의 괴물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보내는 듯 그 수가 백을 넘어서자 성녀도 기겁한 얼굴이 되었다. 래쉬모드다운 선택. 우진에게 시체를 주지 않기 위해 부하들을 포기하는 래쉬모드였다. “돌쇠야.” 위이이잉. 비비의 걱정 때문인지 돌쇠의 진동이 평소보다 한층 더 격렬했다. “구해올게.” 위이잉. 돌쇠의 슬픔과 걱정, 분노가 느껴졌다. “조무래기들은…” 우진이 자신의 모든 마력을 뽑아내 돌쇠에게 전달했다. “알아서 쓸어버려.” 위이이잉.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마력포션을 꺼내 먹으며 괴수들을 향해 걸었다. 그것들은 훈련받은 개처럼 우진이 옆을 지나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돌격 전의 병사들을 보는 듯 살기를 뿜으면서도 규율을 지켰다. 익숙한 기분. ‘이거.’ 우진이 실소했다. 지겹도록 싸워온 트라넷의 군대와 다시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근거릴까? 우진이 던전 안으로 들어가자 괴수들이 일제히 날뛰었다. “쿠와아아!” “어, 어떡합니까? 역시 지원조를 데려왔어야….” 딘쿤이 뒤늦게 후회하는데, 돌쇠를 중심으로 폭풍이 몰아쳤다. 기기기긱.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탱크들이 인력에 끌리듯 돌쇠를 향해 다가왔다. 헬기도 끌려왔고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차와 미사일도 끌려왔다. 농장의 골조를 이루던 철과 두꺼운 문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그극. 헬기가 찌그러지고 탱크가 분해되어 여기저기 붙으며 재조립되었다. 탱크의 바퀴가 다리가 되고 강철판들이 몸통이 되었다. 어깨에 미사일이 달리고 헬기의 날개가 회전 검날이 되어 팔에 붙었다. “구오오오오!” 강철 거신의 포효에 괴물들이 움찔 놀랐다. 성녀가 마른 침을 삼켰다. “파괴의 거신….” 임모탈의 권속 중에서도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소환체. 강철 골렘이 날뛰기 시작했다. < 73화 - 아이언 골렘 > 끝 ⓒ 진설우 < 74화 - 래쉬모드 > 분노가 재앙이 되어 일대를 휩쓸었다. 투투투투! 돌쇠의 왼쪽 팔에 달린 프로펠러가 짓쳐들어오는 늑대형태의 몬스터의 몸을 그대로 두 동강 내버렸다. 마력으로 강화된 프로펠러 날은 날카로운 회전 칼날이 되어있었다. 늑대의 피가 사방으로 튀며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쿠오오!” 돌쇠가 포효하며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쾅, 쾅! 강철거인의 내딛는 발걸음 마다 땅이 움푹 패며 그 역동적인 진동에 몸체에 붙어있던 볼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크와악!” 못해도 수백은 되는 괴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으나 돌쇠는 거리낌 없었다. 콰앙! 콰직! 돌쇠의 주먹이 휘둘러지면 어김없이 몬스터의 머리통이 부서졌고, 회전 톱날이 몬스터들의 진형을 무너뜨리며 때로는 그들의 몸통을 날카롭게 베어버렸다. 푸슈우웅! 돌쇠의 등짝에 달라붙어 있던 미사일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몬스터들이 밀집한 후방지역에 떨어져 내리며 폭발을 일으켰다. 도망치지 못한 리버스 조직의 사람들이 폭발에 휘말렸으나 돌쇠의 파괴본능을 멈출 수는 없었다. 몬스터들의 한가운데서 미친 들소마냥 날뛰는 돌쇠를 멍하니 지켜보는 성기사단이 있었다. “와우. 트랜스포머인가?” “멋진 능력인데?” 지미는 자신이 가진 비행능력이나 가속검을 버리고서라도 갖고싶은 능력이라 생각했다. 강철 골렘이라니…. 이건 정말 로봇이지 않은가? “저 대포 좀봐.” 돌쇠의 어깨에 달려있던 자주포가 불을 뿜으며 멀리 떨어진 비행형 몬스터를 저격해 터트리자 박수까지 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성기사단의 모두가 로봇마니아는 아니었다. “뭘, 멍청하게 있는 거야? 어서 몬스터를 사냥하지 않고!” 성기사단장 제임스의 호통에 그들이 부랴부랴 전투준비를 했다. 막 그들을 향해 몬스터 두 마리가 어슬렁 다가오자 저마다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파파팟. 아리아여신의 축복을 걸어주자 성기사단의 전투력이 보다 상승했다. B급의 각성자라고 하더라도 메르디의 버프가 있다면 A급, 어쩌면 그보다 더 한 힘을 발휘하는 그들이었다. “자, 오랜만에 사냥이나 해볼까?” 성기사단이 나서려는 그때 두 마리의 몬스터 주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쿠웅!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돌쇠의 양쪽 발이 두 마리의 몬스터를 땅속 깊숙이 처박히게 만들었다. 보나 마나 압사되어 터져 죽었으리라. 후우우웅. 충격파로 인한 흙먼지가 사방을 흩날렸다. 자연스레 성기사단의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졌다. “젠장.” “뭐야, 이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돌쇠는 성기사단을 향해 손을 내 뻗었다. “뭐야? 끼어들지 말라는 건가?” 끼기기기긱. 돌쇠가 움직일 때마다 쇠붙이 소리를 내는 몸을 돌려 다시 몬스터들을 보았다. 돌쇠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는 성기사단이 고개를 절레 흔들며 성녀를 보았다. “아군 아녔습니까?” “…….” “어떻게 합니까?” “기다리세요.” 파괴의 거신이 그러기를 원하고 있었다. 홀로 몬스터들을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그러고자 마음먹었다면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나았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몬스터가 아닌 파괴의 거신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콰콰쾅! 내딛는 걸음마다 지축을 흔드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돌진하는 파괴의 거신보다는 오히려 불리한 전장으로 향한 우진이 걱정이었다. ‘내가 임모탈을 걱정하고 있었다니.’ 성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실까. 자신이 있었으니 홀로 뒤따라 갔을 것이다. “모두 준비하세요.” 성녀의 말에 성기사단이 어리둥절해했다. “음, 저 강철친구가 막아설 텐데요?” “마력이 다하면 재생할 수 없습니다.” 최초 몸체를 구성할 때 마력이 소모된다. 그리고 부서진 몸체를 다시 재생하기 위해서도 마력을 소비했다. 우진이 모든 마력을 돌쇠에게 전하고 갔지만 언젠가는 바닥을 보일 것이다. 지금도 몬스터에게 물어뜯긴 장갑 부위를 새로운 차량의 지붕을 끌어들여 재구성한 돌쇠였다. 마력은 조금씩 소비되고 있었고 몬스터의 수는 아직도 수백이 남아있었다. “파괴의 거신이 쓰러지면 저 괴수들이 어디로 향할지 모릅니다.” 지금은 마치 훈련받은 사냥개처럼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 괴물들이었다. 이것도 군단장인 래쉬모드의 권위 아래 굴복한 몬스터기에 가능한 일. 저들이 목표를 달성하거나, 래쉬모드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흉폭한 야성만을 지닌 몬스터가 될 것이다. 일반적인 몬스터 브레이크와 다를 바 없는 상황. 한마리의 몬스터라도 놓치면 곤란했다. “저 강철골렘이 최대한 버텨줘야겠군.” 길드마스터 딘쿤이 신음했다. 지금 지원조들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까지 성기사단만으로 어떻게 시간을 벌어야 하나 근심이었던 딘쿤에게는 듣던중 반가운 소리였다. 강철골렘이 지원조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버텨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아까 강우진씨가 따라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이요?” 성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간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 끔찍한 악마들이 말이다. “트라넷의 72군단장 중의 하나….” 그의 진정한 정체. “흑마법사 래쉬모드에요.” 메르디의 걱정스러운 눈이 지하던전의 입구로 향했다. * 우진은 던전의 지하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계단은 짧았고 좁은 공간엔 하나의 붉은 포탈이 존재했다. 상위 던전과 같은 구조. 우진은 망설임 없이 포탈을 통과했다. 파팟. 빛이 사라지며 나타난 것은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드래곤의 레어같은 공동은 크기가 축구장의 두 배만큼이나 넓었다. <래쉬모드의 연구소에 입장하셨습니다.> <‘공략’모드에 도전합니다.> “이건 또 뭐야?” 던전 입장 안내음이 조금 달랐다. 이것이 누군가가 소유한 차원 영지에 입장하는 소리인가. “크하하, 멍청한 놈. 정말 따라 들어올 줄이야.” 래쉬모드는 기분 좋게 웃었다. 즉흥적이고 우발적이며 조급한 네크로맨서가 저급한 도발에 이리 쉽게 넘어오다니 말이다. 던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하들은 모조리 밖으로 내보냈다. 괜히 수를 차지하고 있어봐야 해골 병사들의 매개만 되어줄 뿐이다. “네크로맨서따위가 시체 없이 무얼 할 수 있나?” “네놈 정도는 죽일 수 있겠지.” “크하하, 초기화된 주제에 허세 하나는 그대로구나.” “네놈도 키메라 없이 너무 자신만만한데?” 래쉬모드는 한때 아르펜에서 유명했던 흑마법사. 트라넷에게 굴복하며 영생을 부여받은 그는 연구를 거듭하며 자신의 몸을 키메라화 하는데 성공했다. 나약한 마법사의 신체 따위가 아니었다. 똑같이 소환체를 배제하고 싸운다면 임모탈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후후후, 드디어 네놈의 죽음을 구경하겠구나.” “자신만만하네. 비비는 돌려주고 한판 붙지?” “응? 크하하하하.” 래쉬모드가 광소했다. 임모탈의 색다른 모습을 본 기분이다. 도도하기만 하던 우상의 허당끼 있는 모습을 본 기분이 이러할까? “권속들과의 우정? 크하하하.” 한참이나 웃던 래쉬모드가 웃음을 뚝 그쳤다. 손아귀에 뒨 고양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소무품 따위 아무렴 어때? 이것들은 그저 지배당할 뿐이야.” 래쉬모드가 손아귀를 말아쥐며 고양이 비비를 그대로 잡아 뜯었다. 퍼억! 고양이의 머리통을 그대로 뽑아버리는 모습에 우진의 눈썹이 꿈틀 떨렸다. <서큐버스 비비가 죽었습니다. 서큐버스의 레벨이 1 다운됩니다.> <32일간 재소환이 불가능합니다.> 권속들도 죽음을 경험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레벨만큼의 시간 동안 죽어있겠지만 그 뒤엔 다시 소환의 방에 나타난다. “크하하, 왜? 설마 화라도 나는 건가?” “설마.” 우진의 착 가라앉은 눈이 래쉬모드를 향했다. “화 따위로 이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겠어?” “크하하, 건방진 놈.”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다. 저 시건방진 자신감과 오만함은 도대체 언제 비굴함으로 바뀌게 될까? 오늘 그 모습을 보고 말리라. 래쉬모드가 우진을 향해 대쉬했다. 전신의 몸 하나하나 키메라화하지 않은 부위가 없었다. 땅을 박차는 두 다리는 켄타우로스의 발길질만큼이나 힘 있고 빨랐다. 두 팔은 오우거의 악력을 초월한다. 화르륵. 래쉬모드의 손엔 이글거리는 검은색 검이 생겨났다. 강화된 신체에 본래의 특기인 흑마법 또한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초기화 되어 이제 겨우 70레벨도 넘지 않은 네크로맨서 따위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내 발아래 기어라!” 살려달라 몸부림쳐봐라. 비굴하게 땅을 기어봐라. 뭐, 단번에 죽어도 좋고. 화르륵! 래쉬모드의 암흑검이 우진을 두 동강 낼 듯 휘둘러 졌다. 까앙 우진이 꺼낸 전사의 무기, 강철 지팡이가 래쉬모드의 암흑검을 막아냈다. 래쉬모드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호오! 강령술?” 임모탈이 종종 보여주던 기술. 마법사라곤 생각하기 힘든 전투능력을 보여 주곤 했다. 우진이 차갑게 웃었다. “천만에.” 강철 지팡이가 대검으로 변해 래쉬모드를 공격했다. 후우웅. 래쉬모드가 훌쩍 피했으나 어느새 모습을 바꾼 창이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성가신 무기.’ 에픽 아이템인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것이 마치 전사의 무기와 닮아 있었다. “서, 설마!” 래쉬모드가 말도 안 되는 가정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보니 강화된 자신의 움직임에도 그리 뒤처지지 않는 민첩한 반응과 밀리지 않는 힘. “네놈! 전사가 된 것이냐?” 우진이 대답 대신 웃었다. <전사의 분노 남은 시간 77, 76, 75….> 극한의 분노로 레벨이 올라 지속시간이 길어졌지만 여전히 촉박했다. 우진이 도끼로 변한 무기를 휘둘렀다가 신속히 대검으로 바꿔 찌르기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 변칙적인 공격과 힘에 점점 밀리게 되자 래쉬모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사의 군대를 버리고 한낱 전사가 되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그것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지러이 공방을 주고받다 보니 점점 밀리게 되는 래쉬모드였다. 강화된 힘과 민첩성을 손에 넣은 마법사와 전사의 대결이다. 이런 육박전은 전사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푸욱! 복부에 깊숙이 박히는 창날을 보며 래쉬모드의 낯빛이 굳었다. 그대로 도약해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푸화악! 창날이 뽑혀나가며 구멍난 복부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지만 몇 초지 나지 않아 아물더니 금세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치료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트롤의 재생력을 가뿐히 넘어서는 키메라 신체의 효능이었다. “멍청한 놈. 고작 지구로 도망치더니 한다는 게 네크로맨시를 버리고 전사기술이나 훈련하는 거였나?” “이건 이거대로 재밌지.” “멍청한 놈.” 인정한다. 우진의 전투능력은 확실히 가능성이 굉장했다. 이대로 전사 클래스가 만렙에 이르면 확실히 연합군의 용사니 뭐니 하는 놈들보다는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래쉬모드가 던전의 에너지를 소비해 빠르게 몬스터를 리젠시켰다. “크르르르.” 공동에 하나 둘 늘어나는 괴수들을 보며 래쉬모드의 얼굴에 여유가 생겼다. 임모탈이 곤란했던 것은 그가 거느린 불사의 군대 때문이었다. 트라넷의 군대에 대적할만한 이점을 가진 군대니까. 하지만 그것을 포기했다면 더 이상 무서울것이 없었다. 래쉬모드가 항복하는 순간 트라넷은 그에게 힘을 주었다. 소환된 괴수들이 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큭,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고.” 놈은 결국 지칠 테고, 승리는 자신의 몫이 될 것이다. 군단장의 지위에 걸맞게 이제야 느긋하게 뒤에서 놈의 끈질긴 저항을 구경하고 승리의 순간을 즐기면 될 일이다. 우진은 여러 스킬들을 난사하며 괴수들을 상대해갔으나 100여 마리가 넘자 눈에 띄게 지친 얼굴이었다. 벌써 몸 여기저기에 상처도 늘어나 혈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크하하하, 어리석은 녀석. 스스로 지배의 권좌를 버리고 피묻은 검을 들어 올린 대가가 어떠하냐?” “…누가.” 피를 뒤집어쓴 우진이 웃었다. “누가 버렸대?” “뭐?” 기력을 모두 사용해봤을 뿐이다.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 마나도 이제 거의 90%에 육박했다. 우진이 양팔을 뻗었다. 퍼퍼퍼퍽! 주위에 널브러진 괴수들의 시체가 일시에 터져나가며 해골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키키키킥.” 지하 공동을 가득 메우는 해골들의 목소리가 섬뜩했다. 아군의 죽음이 -1에서 끝나지 않고 적으로 돌아서며 -2가 된다. 이것이 임모탈이 까다로운 이유였다. 수백의 해골들을 바라보는 래쉬모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 74화 - 래쉬모드 > 끝 ⓒ 진설우 < 75화 - 래쉬모드 (2) > 단 72명 뿐인 군단장이라는 직함답게 래쉬모드는 결코 만만찮았다. 악마소환을 통해 끊임없이 우진의 해골부대를 제거했으며 동시에 위협적인 흑마법을 구사했다. “슬슬 지치나 봐?” “크크큭, 네놈에 비할까?” 래쉬모드가 비웃었다. 지친 것은 맞지만 우진도 다르지 않았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우진의 몸은 잔뜩 달아올라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우진이 씩 웃었다. “확실히 알겠어.” “또 무슨 허세냐?” “네놈도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구나.” “…….” 우진의 말에 래쉬모드가 정곡을 찔린 듯 침묵했다. 그리고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건 숫제 상대에게 사실을 인정한 꼴이지 않은가? “크큭, 확실히 지금의 링크는 불안정하지.” 아예 인정해 버렸다.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링크? 무슨 소리지? “하지만 네놈 또한 힘을 잃기는 마찬가지.” 임모탈이 초기화되었다. 알 수 있다. 우진은 옛날의 그 임모탈이 아니었다. 약해진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우진의 주위로는 부서진 해골들 뿐이었다. “잃었던걸 빠르게 되찾는 중이지.” “뭐?” 반문하는 래쉬모드의 얼굴을 보며 우진이 비웃었다. 아르펜에서에 이룩했던 경지까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머지않았다. 그리고 우진의 레벨업은 사냥을 하지 않는 지금도 현재 진형형이었다. 래쉬모드가 소환한 몬스터를 사냥하며 어느 정도 경험치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도 밖에서 분전하고 있는 돌쇠가 보내오는 경험치로 곧 레벨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진이 대검을 들고 래쉬모드와 맞부딪혀갔다. 쾅, 콰쾅! 사력한 다한 공격들이 래쉬모드에게 가로막혔다. 스스로 키메라가 된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마력도 바닥이고, 기력도 거의 사용했다. 파팟! 그때 우진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갔다. 우진은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충만한 기운을 느끼며 웃었다. 이 기분은 매번 우진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컨디션 안 좋아 보인다?” 래쉬모드가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가서 좀 쉬어.” 우진의 해머가 래쉬모드의 머리통을 때렸다. 퍼어억! 기력을 가득 담은 후려치기에 머리통이 단번에 터져나갔다. 검은 거품을 뿜어내며 빠르게 재생되는 머리통을 보며 우진이 재빨리 해머를 도끼로 변환해 목을 내려쳤다. 캉, 콰직. 목뼈에 무슨 짓을 했는지 쇠줄을 끊는 듯 질겼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흑마법사의 머리통이 데구르르 구르다 멈췄다. 부글부글 끓는 머리통이 화상을 입은 듯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겨우 한쪽 눈알이 움직여 우진을 노려보았다. “크크큭, 이미 링크는 시작되었다. 또 도망가보시지. 이번엔 어느 차원으로 도망갈 텐가?” 우진의 발이 래쉬모드의 머리통을 밟았다. 콰직. “도망 안 가! 새끼야.” <레벨 업.> 우라질 놈. 경험치 하나는 많이 주는구나. 우진이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신발에 묻은 래쉬모드의 뇌수를 바닥에 비볐다. 우진이 걸음을 옮겨 축 처진 고양이의 시체에 다가갔다. “후우.” 마음이 무겁다. 부활전까지 짙은 허무 속을 헤매고 있을 테니까.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쉬어, 비비.” 우진이 고양이의 시신을 만지자 검은 연기로 변해 우진의 몸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소환의 방에서 부활을 기다릴 것이다. “귀환석은 어딨지?” 우진이 탐색마법을 펼쳐보았으나 래쉬모드의 시체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공동의 벽면마다 가득한 문들 중 한 곳에서 유독 많은 마력이 새어나와 그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보니 제단처럼 생긴 둥근 돌계단 위에 사람의 몸통만 한 붉은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용의 심장?” 혈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한 마력을 머금고 있는 그것은 우진도 몇 번 본 적 없던 보물이었다. 인벤토리로 사라지는 그것을 보며 우진이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걸린 몬스터의 신체 부위들과 뼈들이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뭘 만들려던 거야?” 어떤 대단한 키메라를 만들려고 드래곤하트까지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잘 써주지.” 우진의 손이 보석에 닿았다. <드래곤하트를 얻었습니다.> “용용이 친구라도 하나 만들까.” 우진은 뜻하지 않은 소득에 기분 좋게 연구실을 탐색했다. 이곳저곳 쌓여있는 몬스터들의 고급재료들과 흑마법서를 몇 개 획득하고는 귀환석을 챙겨 포탈을 통과했다. 우진이 계단을 통과해 나오니 폐차장에 쌓아둔 고철들처럼 거대한 구조물이 서 있었다. 기기긱. 우진을 발견하자 강철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몸체는 몬스터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써 아이언골렘이 아니라 블러드골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어어.” “……” 돌쇠가 비비를 구했는지 묻고 있었다. 권속들 중에서도 유난히 친한 둘이니…. “이리와.” 우진의 말에 돌쇠의 몸을 이루던 탱크들과 헬기 조각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위이이잉. 골렘의 심장. 사람의 머리통만 한 빛 덩어리가 우진에게 다가와 구슬프게 울었다. 우진은 착잡한 마음에 돌쇠를 한번 쓰다듬었다. “수고했다. 들어가서 비비 돌봐줘.” 위이이잉. 돌쇠가 진동하며 허공에 녹듯 사라졌다. 한동안 돌쇠는 소환하지 않아야 할 듯싶었다. 소환의 방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비비가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돌쇠가 오매불망 눈뜨길 기다릴 테니까 말이다. 우진이 주변을 둘러보니 무장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괴수들의 시체를 해체하고 있었다. 성녀가 우진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역시, 덤벼들지 않기를 잘했다. 죽음의 기사들도 없이 트라넷의 군단장을 해치울 정도라니… 파괴신의 전승자 다웠다. “뭔지 알지?” 우진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아들은 메르디였다. “아직 지구가 완전히 동기화되진 않았습니다. 이것은 소환진입니다.” “자세히 이야기해.” “…….” 성녀는 잠시 침묵하며 말을 골랐다. “던전… 저들에게는 거점 포인트를 소환하는 마법진입니다.” “거점 포인트?” “차원 영지의 입구를 연결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지구인들은 던전이라고 부르지요. 아르펜에서는 게이트라고 부릅니다.” “…….” 우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있는 던전 잘 지켜도 모자랄 판에 새로운 던전을 만들어낸다? 지구엔 미친놈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메르디.” “네….” “협조해.” “무엇을….” “트라넷 놈들 지구 밟는 건 못 본다.” “…….” “최대한 협조해. 나도 차원 영지부터 얻으면 적극 아르펜 수복을 돕지.” “…!” 메르디가 두 눈을 부릅떴다. 믿기지 않는 전율에 온몸이 잘게 떨렸다. 저것이 임모탈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말인가? 메르디의 눈에서 얼핏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임모탈이 아르펜에서도 이렇게 관심이 많고 적극적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행성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여신이시여….’ 어쩌면 아리아여신은 지구로 건너온 임모탈을 다시 데려오라고 자신을 이리로 인도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지구를 지키는 것이 아르펜을 되찾는 길이다. 성녀가 우진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 우진을 위해 타이탄 건물 내에 위치한 VIP들만을 위한 호텔이 제공되었다. 하지만 우진이 호텔에 머무른 시간은 채 5분이 되지 않았다. 타이탄길드의 협조 아래 6성 위주의 던전을 공략하며 레벨업에 시간을 투자했고, 운 좋게 던전 리셋이 일어난 6성 던전을 하나 공략하는 성과까지 거두었다. 호텔은 정민찬의 차지였다. 그렇다고 그가 호텔이 머무르며 편히 쉰 것은 아니었다. 성녀의 강력한 건의로 타이탄길드와 아르달길드의 강력한 동맹체제를 구축했으며, 아르펜 행성으로의 원정과 지구방어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한다고 정신없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로 끝난 컨소시엄은 이후에 트라넷이라는 정복세력과 아르펜의 사정, 던전의 발생과 구조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며 혼란을 불러왔다. 딜레마. 혈석의 채굴과 사용이 지구를 위험에 빠트리지만, 또한 그것이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무기가 되어준다. 당장 던전공략을 중지해야 된다는 사람들과 보다 적극 던전을 공략해 방어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사람들로 나뉘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세계는 단일화된 방어체계의 필요성을 느끼며 명목뿐인 세계각성자기구를 활성화하여 지휘부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다. 워낙에 여러 나라와 각성자들이 모인 탓에 협의는 진전되지 않았으며 꽤 시일이 걸릴 듯 싶었다. 세계에서 모인 각 나라의 각성자들이 모두 자국으로 돌아가고도 민찬과 우진은 미국에 남아있었다. 래쉬모드를 해치운 지 32일째 되는 날이었다. 비비가 부활하는 날이며, 우진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기도 했다. 타이탄은 귀국하는 우진을 위해 길드의 전용기를 대기시켜 주었다. 우진이 자신을 위해 6성 던전의 예약과 비용을 모두 지급한 타이탄 길드의 마스터 딘쿤과 악수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저희야말로 감사한 일이지요. 우진씨만큼 던전 공략이 빠른 각성자는 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진의 무지막지한 던전 클리어 속도에 혀를 내두른 딘쿤이었다. 그 어마한 던전 공략을 하고도 아직 70레벨에 미치지 못한 우진이었다. 70레벨까지 겨우 10% 남짓 남은 경험치. 한국에 던전이 없는 것도 아니니 한국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아쉬운것이 있다면 리셋이 일어난 6성 던전을 공략하고도 차원의 조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조심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또 보죠.” 우진이 성녀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우진의 앞에서 조심스러웠으나 전처럼 허둥지둥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아르펜 쳐들어갈 땐 같이 가자고.”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넙죽 고개를 숙이는 성녀를 보며 우진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 안보니 속 시원하겠네.” “…….” 아르펜 수복에 대한 약속이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우진에 대해 남아있는 두려움과 불편함은 별개의 문제였다. 우진의 옆에만 가면 조마조마한 심정인지라 메르디는 내심 후련한 기분이었다. “어쭈? 대답 못 하는 거 보니 진짜네.” “…그것이 아니오라.” “됐다. 잘 있어라.” “군주님도 조심히 가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임모탈과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될 줄이야…. 메르디는 공항에서 우진의 비행기가 떠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자리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도도함과 위엄이 돌아왔다. 길드 본사의 아리아여신을 모신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여신의 조각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메르디였다. “여신이시여… 하루빨리 아르펜으로 되돌아갈 날이 오기를….” […….] “아!” 눈을 감고 기도하던 성녀는 웅웅거리는 이명에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고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로서도 몇 번 경험해보지 못한 여신의 신탁이다. 여신의 동상 앞에 오체투지를 한 그녀가 성스러운 은혜에 귀 기울였다. […따라 가거라.] 따라가리니. 누구를…. [그를 따라 가거라.] “…….” 성녀는 신탁이 전하는 그가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가 아니길 진심으로 빌었다. 제 생각을 읽은 것인지 여신의 영롱한 목소리가 다시 마음을 울렸다. [그의 곁에 머물지어다.] “…여신이시여.” 못 들은 척 하고 싶었다. 여신은 자신을 심장쇠약으로 거두어 곁에 두고 싶은 것인가? [강우진의 곁에 머물러라.] 오늘따라 신탁이 길다. 저도 알아들었습니다. 여신님. 믿고 싶지 않을 뿐이지. 아르펜의 구원을 위해 한몸 희생해 차원을 넘을 때도 이만큼 참담한 심정은 아니었는데…. 여신님 어찌하여 제게 이런 시련을…. < 75화 - 래쉬모드 (2) > 끝 ⓒ 진설우 < 76화 - 귀국 > 타이탄길드의 전용기. 성대하게 준비된 기내식을 보자 우진이 한마디 툭 뱉었다. “이 비행기가 종도 형 꺼보다 낫네.” 민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종도? 아… 백종도 사장. 민찬은 문득 지금의 이 상황이 어색했다. 미국으로 갈 때는 KH길드의 전용기를 타더니, 다시 한국으로 갈 때는 미국 최고의 길드라는 타이탄길드가 전용기를 내어줬다. 미국에서는 컨소시엄에 참가했지만 그보다 더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타이탄 길드와 따로 협약을 진행했다. 대등한 관계… 아니 아르달이 보다 우위에 선 입장. 미국 최고의 길드를 상대로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우진으로부터 기인했다. “정말 사장님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뭘?” 우진은 빵을 찢어 꿀을 찍어 한입 넣었다. 민찬의 눈엔 그 모습마저 대단해 보였다. 생각해보면 이만한 호사도 없다. 오며 가며 전세기에 최고급호텔에, 통역사에…. 이 모든 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쿨하게 넘기는 우진이 대단해 보이지 않으면 이상했다. “사장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습니다.” 해머길드의 팀장이던 그가 미국 1위 길드인 타이탄의 주요인사들과 대등한 협약을 진행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민찬은 스스로 자존감이 업그레이드되는 기분이었다. “별소리를 다하네.” 이보다 더한 호사와 관심도 받아봤던 우진이기에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사실 우진에게 이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황제도 부럽지 않던 생활을 내팽개치고 지구로 돌아온 그니까. “하하, 저도 차차 익숙해지겠지요.” 정민찬이 머쓱하게 웃었다. 우진을 보고 아르달의 성장 가능성에 마음이 기울어 입사했지만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 아르달은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다. 자신은 그 열차가 출발하기 전 운 좋게 탑승했을 뿐이다. 그 성장이 너무 빨라 아르달길드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중이다. 총괄이사인 자신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떨어져 나갈 판이다. “그래. 익숙해져야지…. 비비.” “예? 비비 뭐요?” 우진의 앞 테이블에 검은 연기가 뭉치는가 싶더니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비비가 민찬을 보더니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냐아.” “고양이인 척 안 해도 돼.” “하아, 알겠다옹.” 난데없이 튀어나온 사람 말에 민찬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이 고양이는 뭐, 뭡니까?”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몬스터도 튀어나오는 세상에서.” 듣고보니 맞는 말인데? 민찬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소환수다.” “비비다옹.” “저, 정민찬입니다.” 민찬은 고양이와 대화를 주고받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비비가 우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불렀냐옹?” “밥이나 먹으라고.” “입맛이 없다옹….” “…….” 죽음에서 부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비비다. 우진은 지구의 음식 맛보기를 좋아하는 비비를 위해 일부러 소환했는데…. “그냥 있다가 잘 때 부르라옹.” “어, 그래.” 비비가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져버리자 우진도 입맛이 달아난 듯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민찬이다. 눈치껏 분위기를 보아 덩달아 심각해진 민찬이었다. “아니야. 잘 테니까 깨우지 마라.” “예… 쉬십시오.” 지난 한 달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던전을 공략한 우진이다. 현실 시간이 30일이라지만 우진이 느낀 시간은 얼추 120일이다. 지치지 않으면 이상할 시간이다. 침실로 걸어가는 우진을 보며 민찬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장님도 힘드실 거야.’ 문득 우진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들에 대해 반성했다. 우진도 사람인데 왜 힘들지 않겠는가. ‘제대로 보필하는 게 지원부의 일이다.’ 각성자의 지원. 길드의 존재 목적이다. 세계의 수호가 어쩌고저쩌고 해도 결국 민찬이 할 일은 우진을 보조해주는 일이다. 세계를 구하는 일은 너무 멀게 느껴졌고, 그것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우진은 가까이 있었다. 민찬이 할 일은 우진을 돕는 일이다. 우진은 민찬의 생각보다 더욱 피로했다. 오죽하면 잠든 시간보다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긴장된 상황이 더 낫다고 할까. 버티고 버티다 그의 정신력이 한계에 달하면 잠을 청했다. 우진의 의식이 약해진 그틈을 타고 깨어난 악령들이 우진을 괴롭혔지만 별수 없었다. 비비가 죽어있었으니까…. 호텔의 객실처럼 호화롭게 꾸며진 침대에 누운 우진의 머리맡에 비비가 웅크리고 누웠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비비를 볼 때마다 래쉬모드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앞으로 사냥갈 때 절대 빼먹지 않을게.” “…알겠다옹.” 비비가 강했다면…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간 가족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비비를 너무 집에만 두었다. 우진이 강해지는 것만큼이나 그의 권속들의 레벨업도 중요했다. 임모탈의 진정한 전력은 그 본인이 아니라 권속들이 이루는 불사의 군대니까. 우진은 정말 오랜만에 숙면에 빠져들었다. 달콤한 꿈이 아닌, 악몽에 시달려도 좋았다. 우진을 태운 비행기가 한국을 향해 날고 있었다. * 좌석 위의 짐칸에서 가방을 내린 매니저가 좌석에 앉아있는 자신의 가수를 보았다. “신디야. 내리자.” “오빠,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응? 많이 피곤하지?” 신디의 매니저 문상철은 그녀의 피로한 얼굴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물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인기를 누리겠는가. 일정이 촉박하게 짜여 뒤늦게 항공권을 알아본다고 일등석을 예약하지 못한 것이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때 일반석에 앉아있던 여자 하나가 신디쪽으로 다가왔다. “언니이! 여기 협찬들.” 코디가 내미는 운동화와 선글라스를 끼곤 백을 들었다. 스타의 공항 출입은 그 자체만으로 화젯거리였다. 기자들이 찍은 사진은 공항패션이라는 이름 아래 훌륭한 광고수단이 되어준다. 신디 같은 인기연예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협찬이 붙기 마련이었다. “준비됐으면 가자.” “후. 가자.” 신디는 짧게 한숨 쉬고는 터덜터덜 걸었다. 불편하긴 하지만 그나마 비행기에서 꽤 잔 터라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짐짓 쾌활한 미소를 짓고는 입국장을 통과했다. 밝게 웃던 신디는 생각보다 많은 기자들과 방송용 카메라까지 보이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너무 많은데?’ 당황한 것은 신디만이 아니었다. 코디와 매니저 문상철도 덩달아 당황해 쭈뼛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오빠, 뭐해?” “아차.”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신디였고, 그녀의 작은 주의에 상철도 정신을 차렸다. 밝게 웃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 상황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저 수십 대의 카메라에서 단 하나의 플래시도 터지지 않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신디의 입가에 맺혔던 자본주의 미소는 차츰 사라졌다. 그녀가 조용히 매니저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누가 또 들어오는 사람 있어?” “모르지. 누가 있나 본 데….” 차마 신디가 자존심이 상할까 봐 ‘너보다 더 유명한 애가….’라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저기 신디 아냐?” “그런가 보네. 몇 컷 찍어.” “에, 뭐 이거라도 건져야지.” 뭐지? 이건 무관심보다 더 기분 나쁜데? 신디는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 없는 다른 기자들의 대화 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그러고 보니 평소 자주 보던 연예부의 기자들이 아니었다. “강우진씨 입국예정시간이 언제지?” “전용기라 자세히 모르죠.” “하, 이거 미리 다른 루트로 내뺀 거 아냐?” “에이, 여긴 무조건 통과하게 되어있어요.” “또, 모르지. 청와대에서 모셔갔을 수도….” 그 기자의 말에 옆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기자들이 눈총을 주었다. 진짜 그렇다면 5시간이나 되는 대기가 물거품이 되니 말이다. 뜻하지 않게 공항을 얌전히 빠져나온 신디는 대기 중이던 회사의 밴을 타자마자 선글라스를 벗었다. “허, 거참. 강우진이 대단하긴 대단하나 봐.” “어우, 굉장히 핫 하지. 미국 갔다더니 오늘이 입국 날인가 보다. 희섭아, 출발하자.” “예, 실장님.” 회사의 로드매니저가 밴을 출발시켰고 문상철은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검색할 필요도 없었다. 강우진의 이름으로 실시간 검색어를 점령하고 있었다. “뭐만 했다 하면 실검 1위네.” 지금 강우진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폭발적인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기자들이 저리 몰려드는 것도 이해가 갔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가 특종거리였다. “아, 대통령 만났나 보네. 거, 기자들 전부 공쳤네.” 강우진 비밀리에 이미 공항을 빠져나간 듯 싶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이제 막 ‘강우진 대통령 만남’, ’강우진 청와대’ 같은 키워드들이 뜨고 있었다. “신디야.” “어?” “뭘 그렇게 봐? 너도 기사 찾아봐?” “아, 아니야.” 신디는 자신의 개인용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 들어온 문자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미도고 동창회 안내. ㅇㅇ식당 7시. 강우진 참석. … 전체 메일입니다. 참석자 회신 바랍니다. 회장 남지혁.] 데뷔 초엔 몇 번 나갔던 동창회였다. 바빠지고 난 뒤론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는데 가봐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신디는 해묵은 기억을 되짚었다. 던전 쇼크 이전에 행방불명되어 시끌시끌했던 학생 하나. ‘강우진이 그 강우진이었단 말이지?’ 신디의 눈에 오랜만에 흥미가 감돌았다. 신디의 손가락이 휴대폰의 답장버튼을 눌렀다. * 청와대 비서실에서 보내온 리무진 안. “난 저기 내려줘.” “예?” 당황할 일이 참 많은 나날이지만 이럴 때마다 새롭게 당황스럽다. 민찬은 멍청히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 들은 것인가? “저기 세워줘. 택시 타고 갈 거니까.” “대, 대통령과 만찬은 어쩝니까?” “만찬은 무슨. 배불러.” 아니, 그러니까 만찬이 정말 밥 먹자고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대통령님 초청인데….” “양키대통령도 까고 왔는데 새삼 무슨.” “그래도 두 번째인데….” “네가 대신 가면 되겠네.” 민찬이 한숨을 푹 쉬었다. “사장님이 가셔야죠. 총괄이사가 가봐야….” “명함 새로 파.” “예?” “지금부터 넌 부사장이다.” “…….” “사장 대신 왔다고 해.” “…….” 민찬이 이마를 짚었다. 하, 왜 곤란한데 기분이 좋지. “난 피곤해서 집에 갔다고 해. 그럼 잘 이야기 하고 와.” “그래도 이건….” “정민찬 부사장님. 화이팅하십셔!” “…….” 하, 부사장. 부사장…. 눈은 곤란한데 입은 삐죽삐죽 웃고 있다. 우진은 피식 웃으며 운전대를 잡고 있는 말끔한 양복의 기사에게 말했다. “저기 좀 세워줘요.” “하지만 대통령님께서….” “가기 싫은데 데려가시게?” “하지만….” “납치하게요? 아저씨 감당할 수 있겠어?” 우진의 말에 기사가 당황해 어찌할 줄 모르는데 민찬이 좋게 타일렀다. “세워주십시오. 저희 사장님이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답니다.” “…….”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기사는 별수 없이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럼 사장님. 있다 사무실 가면 제대로 정리해서 업무보고 하겠습니다.” 타이탄 길드와의 조율한 길드 연합이나, 미국 정부의 요청 끝에 간략히 체결한 협약 등, 보고할 것이 많았다. “그래. 밥 잘 먹고 와. 정 부사장.” 아, 만찬이 꼭 밥 먹으러 가는 건 아니라니까. 꼭 저렇게 말하면 어디 돌잔치에 밥이나 먹으러 가는 것 같지 않은가? 민찬은 우진과 인사하곤 창문을 올렸다. 은근슬쩍 자리를 옮겨 우진이 앉았던 상석에 앉았다. “허허, 부사장. 허.” 민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린 듯 가리지 않은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아마 최초이지 않을까? 길드에서 지원부서의 셀러리맨이 부사장의 직위까지 오른 것은 말이다. “하, 부사장… 허허.” 운전기사가 힐끗힐끗 룸미러로 민찬을 이상한 듯 살폈다. 이 길드는 사장부터 부사장까지 왜 정상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을까. 리무진은 청와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 76화 - 귀국 > 끝 ⓒ 진설우 < 77화 - 귀국 (2) > 갓길에 내린 우진은 택시를 잡았다. “어디까지 가세요?” “사당이요.” 우진이 말을 하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일단 집에 가서 어머니와 수아를 보고, 던전을 돌아야겠다. 일단 70레벨은 만들어야 마음의 안정이 느껴질 듯 싶었다. 그리고 리셋되는 던전을 찾으며 차원의 조각을 얻는다. 자신에게 반응하는 던전을 찾아 차원 영지로 삼고, 하나의 입구를 아르펜에 뚫는다. 아, 그전에 성구 훈련도 시켜야 하고 새로운 각성자들 뽑아 훈련도 시켜야 하나? 우진은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며 명상했다. 택시는 곧 목적지인 집 앞에 도착했다. “이만 오천 원입니다.” “허어, 엄청 나오네.” “목숨 걸고 하는 일 아닙니까.” 그것도 그렇긴 한데 던전쇼크 이후로 지하철 인근에 사는 사람 중에 어디 목숨 내놓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우진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이제야 생각난 듯 머쓱한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니 모든 짐이 든 트렁크가 민찬에게 있었다. “지갑이 없네요.” “…?” 택시기사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그의 불안한 눈초리를 보며 우진이 짐짓 쾌활하게 웃었다. “허허, 걱정 마시죠. 돈 가져 나오라 하면 되니까.” 돈이야 어차피 민찬이 들고 다니던 것이라 우진은 항상 휴대폰 하나만 들고 다녔다. 그나마 휴대폰이라도 챙겨다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끊이지 않는 긴 수화음과 택시기사의 불안한 눈초리. 우진은 괜히 찔끔하여 초조한 기분이었다. 한참 만에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우진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웠다. [어, 아들. 한국 왔어?] “네, 지금 집 앞인데 택시비가 없어서 그런데 좀 나와주세요.” [응? 나 집 아닌데.] “…….” 이걸 생각 못했네. 낮이니 수아는 유치원에 가 있을 테고, 어머니는 밖에 나가신 듯 한데…. [집에 돈이 있으려나…. 화장대에 한번 찾아볼래?] “아뇨. 괜찮아요. 사무실에 가 있죠. 뭐.” 어차피 잠깐 쉬다 사무실로 나갈 작정이었다. “아저씨, 택시 돌려서 사당역으로 가죠.” “거긴 왜요?” “거기에 가면 돈 드릴게요.” “…….” 뭐지? 신종 택시 절도인가? 기사의 불안한 눈초리에 우진이 허허롭게 웃었다. “아저씨 저 누군지 아시죠?” “내가 자네를 어찌 아는감?” “응? 나 유명하다던데.” “…….” 택시기사의 눈초리에 의심이 더욱 묻어났다.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실시간 검색어야 어차피 인터넷 세상이니, 티비로 보지 못했다면 자신을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리로 가요. 아는 사람 부를 테니.” “크흠.” 택시기사가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를 하곤 룸미러를 힐끔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우진은 성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예, 사장님.] “어? 해민이냐? 네가 왜 받아?” [지금 홍 이사 던전공략 지원 나와 있습니다.] 성구는 우진이 없음에도 던전공략에 열심인 모양이었다 “어딘데?” [홍대 입구입니다.] “쯧, 멀리도 갔네. 승훈이는 뭐하냐?” [승훈씨 지금 강화석 매입하러 마켓에 가 있을 겁니다.] “끙, 알겠다. 있다 사무실에서 보자.” [예, 홍 이사 이번 공략만 끝나고 곧장 사무실 복귀하겠습니다.] “그래.” 몇만 원 때문에 이렇게 곤란해도 되는 것인가? 우진은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우진은 전화를 끊고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수십 수백억이 계좌에 들어있으면 뭐하는가? 지금 당장 쓸 돈이 없는데. 우진이 몇 개 안되는 주소록을 둘러보곤 하나의 이름에 절로 미소 지어졌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우진이 주소록에서 [진짜재민]을 선택해 눌렀다. * ‘문제를 읽고 맞지 않는 값을 구하시오.’ 집중해서 문제집을 읽던 재민은 진동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책상 한쪽에 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우우우웅. 재민은 깨진 집중력에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들어 액정에 뜬 전화번호를 보았다. “어? 우진이 형이네.” 재민은 오랜만에 연락이 온 우진의 번호가 반가워 얼른 전화를 받았다. “형.” [어, 그래. 재민아, 집에 있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수능 전날이라 일찍 집에 온 재민이었다. [오, 잘됐다.] 찍은 거구나…. 재민은 용건을 묻… [나 요 앞에 사거리 편의점 앞인데 5만 원만 갖고 나와라.] …기도 전에 먼저 꺼낸 우진이었다. “5만 원이요?” [어. 가지고 좀 나와라. 택시비가 없다야.] “…….” 이 형은 왜 변한 게 없을까? 뉴스에 심심하면 나오고 뭐만 했다 하면 실시간검색어에 오르는 사람이… 미국 갈 때는 전세기로 왕복하는 갑부가 왜 자신에게 또 돈을 뜯으려 하는 것일까? [야야, 갚아준다. 갚아줘. 내가 돈이 없냐.] “…….” 돈 있는 사람이 왜 돈 가져오라고 할까? “돈 있으시면 그걸로 택시비 내시면….” [돈은 있는데 택시비가 없어.] “…….” 이것이 말인가, 방귀인가. [아, 나중에 갚아줄게. 빨리 가지고 나와봐.] “…네.” [오, 역시 믿을 건 우리 재민이 뿐이구나.] 이형은 참 한결같다. 재민은 풀던 모의고사를 덮고는 외투를 챙겼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던 지원은 밖으로 나서려는 재민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지막 모의고사 푼다며. 어디가?” “우진이형이 택시비 빌려 달래.” “으응?” “잠깐 나갔다 올게.” “야, 감기 걸려. 내일이 수능인 애가 어딜 나가? 내가 대신 갔다 올게. 어차피 나갈려고 했어.” “됐어. 급한 것 같던데. 머리나 말려.” 잠깐 나갔다오는데 감기는 무슨. 방금 샤워하고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린 누나가 밖에 나가는 게 더 위험했다. 11월의 날씨는 쌀쌀하다 못해 추웠으니까. 밖으로 나온 재민은 옷깃을 여미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총총 걸었다. 자주 가던 편의점 앞에 택시가 한대 서 있었다. 재민이 가서 뒷자리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지이이잉. “어, 왔냐? 돈은?” “여기요.” 우진이 재민이에게서 5만 원을 받아 기사에게 건넸다. “아저씨. 맞죠? 제가 거짓말 아니라고 했잖아요.” “허허, 거참.” 대화만 들어서는 택시기사와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진은 거스름돈을 챙겨 받고는 그것을 그대로 재민이에게 돌려주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줄게.” 뭐 이런 사람이 다… 아니, 이형은 원래 이랬지. “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냐?” “저 내일 수능이에요.” “오! 나도 못 본 수능을.” 우진은 신기한 얼굴로 재민을 보았고, 재민은 황당한 얼굴로 우진을 보았다. “너네 누나는 뭐하냐?” “나갈 준비 하던데요.” “어딜?” “모르죠. 전화해보세요. 아깐 씻느라 못 받았을걸요.” “그래?” “전 그만 들어가 볼게요. 컨디션 조절해야 돼서요.” “어, 그래… ” 우진은 맥빠져 보이는 재민을 보며 잠깐 멈춰 세웠다. “야, 이거 먹고 가라.” “예?” 우진이 의문의 파란병을 들고 있었다. “아 해봐.” “집에 가서 먹을게요.” “내가 먹여줘야 돼서 그래. 아 해봐.” 재민이 미심쩍어하며 입을 벌리자 우진이 그것을 손수 먹여주었다. “윽, 맛있네요. 이게 뭐예요?” “머리 맑게 해주는 각성제다.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후, 효과는 있는 것 같은데요?” 재민은 박하사탕을 깨문 듯 청량한 기분과 두통이 날아가는 듯 가벼워진 머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커피에 박카스를 그렇게 마셔도 이만큼 즉효를 보지는 못할 것이다. “고마워요. 형.” “하하, 그래. 내일 수능 잘 봐라. 시간나면 응원 갈게.” “네.” 우진은 재민을 돌려보내자마자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진아. 안 그래도 너 온다는 소식에 나가려고 했었어.] “아, 그래?” 다른 약속이 아니라 자신을 마중 나오려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길드 식구들 모이기 전까진 쉬려고 했으니 지원이와 데이트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우진은 커피숍에서 들어가 앉았다. 돈이 없으니 주문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으나 워낙에 단골인 카페인지라 별말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우진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신기해했지만 우진의 분위기라던가, 알려진 성격 등이 그리 썩 좋진 않았기에 누구 하나 먼저 용기 내 다가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동물원 원숭이 마냥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바빴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며 지원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우와, 저 사람이 도지원인가봐.’ ‘강우진 여친? 진짜 예쁘다.’ 연예인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일반인이 도지원이다. 강우진의 여자로 인터넷 언론에 오르며 유명해졌고, 그 외모 덕에 인기를 얻었다. 얼마 전 아르바이트 삼아 찍은 쇼핑몰 화보로 인해 개인 팬카페까지 생길 정도였다. “헤헤, 오래 기다렸지? 커피 시켰어?” “아니, 나 돈 없어.” “아참, 지갑 없댔지. 뭐 마실래? 나 돈 벌었는데 내가 사줄게.” 지원은 커피를 두잔 시켰고 둘은 자리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미국으로 출국하고 꼭 한 달 만이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그러게. 그동안 뭐했어?” “나? 뭐 이것저것? 후후, 나 요즘 연예인 해보라고 기획사에서 연락 엄청 받는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우진이 웃었다. “연예인하게?” “아니, 헤헤. 그냥 신기해. 이렇게 두려움 없이 사람들 틈에 있는 것도 난 아직 신기해.” 어지간히도 위축되어 살았나 보다.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예인 해봐. 어디 좋은 기획사에서 연락이라도 왔어?” “오기야. 다 왔지. 그런데 기다리던 연락은 안 왔어.” “어디?” “연예기획사 말구, 출판사.” “아아.” 로맨스 소설을 쓴다길래 농담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던 모양이었다. 반응을 보니 그것도 꽤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돌연 한숨을 쉬었다. “어휴, 재능이 없는 걸까? 독자들 반응도 안좋아.” “응? 어떤데 그래?” “개연성 없다고 욕먹어.” “개연성?” “말이 안되는 내용이라고….” “내용이 어떤데?” “있잖아. 어떤 이야기냐면….” 지원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소설을 대충 이야기했다. 이세계에 소환된 고등학생이 엄청난 절대 고수로 성장해 세계를 주름잡다가 지구로 되돌아온 이야기였다. 되돌아온 남자주인공이 몬스터에게 당하기 전의 여자를 구해주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은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난데?” “응. 너 생각하며 쓰다 보니….” 지원은 부끄러운지 볼을 붉혔다. “거의 사실 그대로구먼 뭐가 말이 안된데?” 지원이 잠시 망설이더니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이고깽이 지구 돌아와서도 성격이 너무 욱한다고….” “응? 이고깽?” “아, 그게 무슨 말이냐면, 이세계에 고등학생이….” 설명을 들은 우진의 눈썹이 씰룩 떨렸다. “말이 안되긴 뭐가 말이 안돼.” “그치?” 지원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말이 안될 리가 있나, 현실 인물 그대로 투영해 적었는데. “이고깽이 집 돌아오면 이고깽이지. 뭐 철들어서 어른 돼서 돌아와?” “그, 그치? 내 말이 그래.” “뭐, 악당처럼 살았던 놈이 갑자기 영웅 흉내 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맞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지원의 맞장구에 우진이 말했다. “뭐라 그러는지 한번 읽어보자.” “응? 부, 부끄럽긴 한데.” 지원은 주저하면서도 우진의 휴대폰으로 자신이 올린 소설사이트에 접속해 주었다. 우진은 글을 읽으며 감탄했다. ‘이거 난데?’ 주인공의 성격이 우진과 거의 판박이였다. 소설 내용이 끝나자 댓글들이 보였는데 얼마나 창조적으로 욕을 하는지 가관도 아니었다. 꼭 자기가 욕을 먹은 것 같아 우진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우진은 창조적인 욕 댓글들 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댓글 하나를 가리켰다. “이건 무슨 뜻이야?” “어디?” 지원이 휴대폰을 보았다. [바둑이]- 이번 편에 하차 지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무슨 뜻이냐면….” < 77화 - 귀국 (2) > 끝 ⓒ 진설우 < 78화 - 길드 확장. > “음. 격려 비슷한 거야. 지켜보고 있으니 잘 하라는 신호?” “허, 하차한다는 게 격려한다는 말이야?” “음, 그냥 그렇게 써.” “요즘 유행어는 왜 이렇게 어려워?” “헤헤, 인터넷엔 이러고 놀아.” 우진이 뒤편의 댓글들도 휙휙 넘겨보았다. “바둑이 얘는 네 팬인가 보네. 편마다 하차한다고 하네.” “그, 그렇지.” 지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재밌네. 나도 글이나 써볼까?” “으응?” “하하, 농담이야. 농담. 이런 유행어 공부나 해봐야겠는데.” 우진은 백종도가 생각나 슬쩍 미소 지었다. 나중에 백종도를 만나면 자신이 신문물을 전수해주어야겠다. “웹툰 봐봐. 재밌는 거 많아. 거기 보면 진짜 네티즌들 기발함에 놀랄걸.” “오, 그래?” 우진은 지원이와 머리를 맞대고 한참이나 작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놀았다. ‘새록새록 하네. 이건 아직도 연재하네.’ 우진은 소환 전에도 보던 ‘몸의 소리’ 웹툰이 아직도 연재 중인 것을 보곤 옛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를 추억하는 건 우진에게 언제나 아련한 설렘을 주었다. 그땐 그랬었지… 같은 아쉬운 마음. 우진은 지원과 한참을 이야기하며 놀다가 사무실로 향했다. 오후 5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십 명의 사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진에게로 향했다. 쭈뼛거리는 그들 틈에 재빠르게 우진에게 다가온 이가 있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어, 성구랑 해민이 아직 안 왔냐?” “전리품 정리하고 있답니다. 지금쯤 오는 중일 겁니다.” “그래.” “헤헤, 식사하셨습니까?” 자연스럽게 웃는 낯으로 아부하는 우승훈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 나쁜 놈은 아니다. 영혼이 썩은 것도 아니고…. 우진의 눈이 승훈의 명찰에 갔다. [지원부 우승훈 대리] “승진하고 싶어서 그래?” “헤헤….” 우승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뒤늦게 뽑은 신입생들도 경력이나 능력에 따라 여러 부서에 배치되며 부장에 과장에 직함을 다는데 창립멤버인 우승훈이 아직도 대리다. 슬슬 눈치도 보이는 것이 우승훈은 요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우진이 승훈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장마. 내가 주시하고 있어.” “헤헤, 감사합니다.” “곧 하차할 수도 있으니까 열심히 해.” “…….” 이것이 희망퇴직 압박인가? 승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우진이 웃었다. “뭘 쫄고 그래? 격려야, 격려.” “아, 네….” “그럼 수고해라.” “…네.” 어쩐지 자신의 농담에 더 기운이 없어지는 듯한 승훈을 내버려두고 우진은 사장실로 향했다. “영약이나 먹어야겠네.” 우진은 인벤토리를 열어 강화석 몇 개를 꺼냈다. 흡수대기시간이 끝난 스탯치의 강화석을 흡수했다. 성구가 오면 성구에게도 강화석을 또 먹여야 했다. 우진은 상태창을 통해 정확히 스탯별로 재흡수 시간을 알수 있지만 성구는 아니었기에 괜히 중복해서 강화석을 먹으면 효과 없이 강화석만 사라져 손해였다. 성구의 강화석은 우진이 꼬박꼬박 챙겨주고 있었다. 우진이 몇 개의 강화석을 더 꺼내먹고 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어, 들어와.” 문을 열고 빼곰 얼굴을 내미는 것은 다름 아닌 최해솔 중위였다. “오! 최중위.” “이제 예비역이지요.” 해솔이 우진의 앞에 다가와 절도있게 차렷했다. “군인티 벗으려면 한참 멀었구만. 언제 왔어?” “어제부터 출근했습니다.” 우진이 웃으며 악수했다. 길드 아르달의 세 번째 각성자. “자잘한 건 민찬이 오면 이야기하고 일단 앉아봐.” “넵.” 우진이 지그시 해솔을 보았다. 능력 - 몬스터 테이밍, 스탯 - …. 관찰, 직감, 분석 등 여러 가지 스킬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해솔의 정보를 떠올려주었다. “호, 테이머였어?” “헉, 어찌 아셨습니까?” “보면 알지.” “…….” “확실히 성장하기 어려웠겠네.” “하하, 그렇지요.” 지구에 살아있는 몬스터?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나면 몬스터야 튀어나오긴 하지만 군부대의 집중포화로 사살을 최우선으로 한다. 테이밍 해볼 기회가 적었다. 뭐, 생각이 있었다면 1성 던전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조금씩 테이밍 능력을 발전시켰겠지만 해솔은 군인인 와중에 각성자로 각성한 경우였다. 원했다면 각성자 소대로 전입할 수도 있었겠지만 해솔은 스스로 선택에 의해 본래 근무하던 부대에 남았다. 능력을 각성했다고 하여 모두가 각성자로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선택지 없는 선택에 의해 자신의 꿈인 군인을 포기하고 아르달 길드에 입사했고 말이다. 우진이 강화석 몇 개를 내밀었다. “흡수해.” “예?” “할 줄 몰라? 이건 먹으면 되고, 이건 손에 쥐고 마력주입 해봐.” “아, 알긴 하지만….” 무슨 초면에 이 비싼 강화석을 덥석덥석 준단 말인가? “기름칠 좀 해야 써먹지. 지금은 아무 도움도 안돼.” “…….” 무능하다는 말을 면전에서 듣는 말은 썩 좋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상대는 보통 강한 게 아니라 거의 세계 최고수준의 각성자였고, 그런 그가 자신을 이끌어주겠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가치를 환산해보면 족히 몇억은 우습게 들 영약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최해솔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었으나 우진은 씩 웃었다. “기본적으로 성장이 빨라.” 마나가 증가하며 각성자들은 스스로 조금씩 강해진다. 아무런 단련도 하지 않은 해솔의 레벨이 14. 9레벨까지가 일반인이고 10레벨이 되면 1서클의 각성자가 되는 것이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오른 레벨이 네 개나 될 정도면 해솔의 기본 재능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 “약발도 잘 받네. 여기 이것도 먹어.” 강화석을 흡수하자 재흡수 대기시간 없이 곧장 흡수되는 것을 보며 우진이 몇 개의 강화석을 더 내밀었다. 해솔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우진의 성화에 하나씩 차례로 흡수했다. 해솔의 오르는 능력치를 보며 어떻게 키워줄까 고민하며 적당한 마법서를 뒤적였다. 인벤토리에 있는 건 그대로 익히라 전해주면 되고 없으면 길드에 애들 시켜서 사오라 하면 될 터였다. 우진은 적당한 마법서 하나를 꺼내 주었다. “텔레파시다.” “헉, 이렇게 막 주셔도 됩니까?” 몇억이나 하는 물건들을 과자 주듯 계속 들이밀자 해솔도 이제는 현실감각이 둔해질 지경이었다. “이건 중요하니까 꾸준히 연습하면서 능력 키워.” 텔레파시는 중요하다.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지휘하자면 텔레파시 스킬은 훌륭한 명령전달수단이 되어준다. 지금이야 통신망도 온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대대적인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은 도시다. 문명이 이룩한 전기 수도 통신망 등의 모든 인프라가 파괴될 것이니 말이다. 군인출신에 기본 재능도 좋고, 충성심이라 하긴 그렇지만 제법 신용이 가는 인물이다. 새로 뽑을 각성자들의 통솔을 맡기기엔 딱 제격인 인물이었다. 텔레파시 스킬은 그야말로 필수적인 것. 우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술, 방어마법, 윈드, 등등 클래스제한이 없는 초급의 스킬 중에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주었다. “이, 이걸 다 익힙니까?” “그럼, 왜?” 당연하다는 듯한 우진의 반문에 해솔은 곤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해솔이 본인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각성자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가지 계열을 익혀야 각성자로서의 성장이 안정적인 법인데…. “…이지 않습니까?” 해솔이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자 우진이 피식 웃었다. “해솔이 게임 해?” “예?” “게임 캐릭 키우냐고.” “…….” “뒤지기 싫으면 다 배워. 배부른 소리하지 말고.” “…네.” 순간 우진이 보여준 박력에 찍소리도 못한 해솔이었다. 나름 군부대에서 강단이 굵은 해솔이지만 방금 우진이 살짝 보여준 분위기에는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해솔이 군말 없이 우진이 챙겨주는 마법서들을 하나씩 익히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조금 다급해 보이는 표정의 김해민과 홍성구가 사장실에 들어섰다. “형님. 진짭니까?” “뭐가?” 미국에서 한 달 만에 돌아온 사장님을 처음 본 인사가 저거라니… 우리 성구 많이 컸구나. “아… 이것 보십시오.” 성구가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잡고는 티비를 틀었다. 채널을 몇 번 돌리자 기자회견장면이 중계되고 있었다. 기자회견 석에는 세 명의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낯익었다. “민찬이 아냐? 밥 먹으러 가 놓고는 저기서 뭐하냐?” “…….” 우진의 반응에 성구가 할 말을 잃었다. 우진이 정민찬의 옆에 앉은 두 사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쟤들은 누구야?” “육군참모총장이랑 국방부 장관입니다.” “민찬이는 쟤들이랑 지금 뭐 하는 거냐?” “…….” 우진의 반응을 보니 하나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김해민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침착히 말했다. “아르달 길드가 지금 정부와 맺은 협약이면 거의 준 공기업 수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그거 발표 중인 겁니다.” “그래?” “그냥 ‘그래?’ 하실 게 아니에요.” 그런 자잘한 계획 따위야 어차피 다 민찬이 처리할 거니 신경 쓸게 없었다. 쿨한 우진의 반응에 김해민이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사장님. 대한민국 최초라고요.” “뭐가 그리 호들갑이야?” “국가방위를 담당하는 길드로서… 에, 그러니까 국군 같은 대우라는 겁니다.” 국군에 준하는 국가에서 인정한 국가방위단체. “그게 뭐?” “그러니까 그게….”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해민이 어버버 하는데 성구가 나섰다. “군 생활 늘어났습니다.” 어쩌면 종신 군역일지도……. “응?” 이 새끼가… 그냥 청와대 가서 밥이나 먹고 오랬더니 쓸데없는 일을…. 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민찬이 부사장 되더니 아주 큰 건 하셨어.” “…….” 우진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모두가 눈치껏 침묵했다. “저놈 돌아오면 퇴근하지 말고 있으라 그래.” “사장님 어디 가십니까?” “던전이나 돌아야지.” “예?” “성구랑 해솔이도 따라와.” 우진이 말을 마치고 먼저 사장실을 나서자 재빠른 해민이 차를 준비시키기 위해 부리나케 따라갔다. 성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해솔을 보았다. 그러더니 곧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해솔도 마주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해봅….” 성구가 해솔의 악수를 거절하고는 와락 껴안았다. “으엉, 앞으로 같이 고생해봐요.” “예….” 길드의 세 번째 각성자 해솔은 성구의 반응에 불안한 기분이었다. 성구는 해솔을 격하게 아끼며 웃었다. 앞으로 외롭지 않다. 동지가 생겼다. “늦기 전에 갑시다.” “예… 그런데 어떤 던전으로 갑니까?” “몰라요. 4성쯤 가지 않을까요? 5성 갈려나.” 길드의 소유로 예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던전은 제한적이었다. 해민이 알아서 준비해줄 터였다. 상위 던전에 간다는 소리에 해솔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잘못 들었습니다?” “예?” “바, 바로 상위 던전 갑니까? “그럴걸요.” “저 아직 F급인데, 어떻게 바로 상위 던전으로…. 보통 교육은 1성 던전에서 부터 하지 않습니까?” 어떤 길드가 있어 신입 각성자 교육을 상위 던전에서 진행한단 말인가? 성구는 해솔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에 반갑고 웃기고 슬펐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정상이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여태 자신이 비정상적인 루트로 자란 거야. 암, 그렇고 말고. “하하, 죽을 것 같긴 하겠지만 막상 죽진 않게 해주실 거에요.” 응? 귀가 잘못됐나? 해맑은 홍성구 이사의 입에서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하하하, 우리 함께 꼭 같이 살아 돌아옵시다.” “…….” 각성자의 비장한 각오라고 하기에는 너무 쾌활한데? 어리둥절한 신입과 동료가 생겼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한 잡무이사였다. < 78화 - 길드 확장. > 끝 ⓒ 진설우 < 79화 - 길드 확장 (2) > 비서실의 직원이 검은 승용차의 문을 열었다. “모셔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민찬이 인사후 탑승하자 그가 문을 닫아주고는 반대편으로 가 운전석에 앉았다. “자택까지 모셔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사무실로 부탁드립니다.” “사무실도 곧 옮기셔야겠습니다.” “하하, 아직이지요.” “부지선정만 해주십시오.” “그건 사장님 의견을 들어봐야죠. 아직 계약도 체결 전이니.” “…….” 말이 없어지는 비서실 직원을 보며 민찬은 별 생각없이 창밖을 보았다. 많은 부분 자신의 재량으로 협상을 진행했지만 몇 가지는 우진의 의견을 구해야 하는 일이다. 정부는 길드 아르달을 대한민국의 공식 방위길드로 선정하는 것에 대해 어마어마한 혜택을 약속했다. 길드 사옥의 건립과 지원은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 어마한 혜택들을 생각하자 민찬이 절로 미소 지었다. ‘사장님께서 좋아하시겠어. 이 정도라면 수락하실 거야.’ 청와대에서 작정하고 준비한듯 엄청난 혜택을 약속하며 아르달을 국가수호단체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내에서라면 전무후무한 위치의 길드가 되는것이다. 어서 이 기쁜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다. 뚜루루루. 민찬은 우진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해민이 네가 왜 받아?” [사장님 지금 홍 이사랑 최해솔씨랑 던전 들어가셨습니다.] “아, 그래?” [아니, 이사님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허허, 이사라니. 이제 부사장인데.”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수호길드라뇨? 어떻게 된 겁니까?] “응? 네가 어떻게 알아?” [하, 어떻게 알다니요? 연속극도 취소되고 속보로 나왔구만.] “응?” 민찬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운전 중인 비서실 직원에게 물었다. “아까 기자회견 한 거. 생방송으로 나갔습니까?” “그럴 리가요.” 태연히 대꾸했지만 목소리가 아까와 조금 다른 것이 미리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민찬이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일단 사무실로 가 있으마.” [예, 어디 다른데 새지 말고 오십시오. 사장님 별로 기분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큰일을 단독으로 저지르시면 어찌합니까?] “내가 미쳤냐? 사장님 승인 없이 이런 큰 협상을 체결하게.” [예? 무슨 말입니까?] 민찬이 이마를 짚었다. “가서 이야기하자.” 기자회견이 문제였다. 어쩐지 청와대에서 서두른다 싶었다. ‘이거 안 좋은데.’ 민찬은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한 만찬에서 사장의 불참에 대해 양해를 구하며 몇 번이나 사과해야 했다. 세계에서도 요주의 길드로 떠오른 아르달. 아니, 각성자 강우진을 잡아두기 위함인지 대한민국은 민찬에게 엄청난 제안을 했다. 길드 아르달을 국군에 준하는 국가수호길드로서 인가하는 건이었다. 그와 함께 제시된 엄청난 혜택들. 만찬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여러 조건들과 의무, 혜택과 복지 등이 논의되며 민찬은 피로하면서도 쾌감을 느꼈다. 엄청난 빅딜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반응도 호의적이며 협상을 진행하는 관계자들 또한 협조적이었다. 워낙에 아르달에게 유리하게 제시된 조건인지라 사전협상은 길지 않은 시간에 끝났으며, 남은 것은 우진의 결정 뿐이었다. 핵심은 길드 아르달이 아니라 강우진의 해외 이주를 막기 위함이니까. 민찬은 이 정도의 혜택이며 우진도 승인할 것이라 생각했다. 승인 즉시 언론사에 배급할 비공개 기자회견도 순순히 따랐다. 정식으로 계약이 체결되는 순간 언론사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할 것이다. 그런데 먼저 이것이 방송되었다? ‘다 알고 주도했구만.’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일까? 아직 체결되지도 않은 계약을 이미 한 것처럼 꾸며서 공표하면 어쩔 수 없이 따를 것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주변국들의 압박이 심해서일까? ‘사장님 성격에 어림도 없는데.’ 정부는 왜 조잡하게 일을 이렇게 꾸밀까? 우진이 해외이주라도 할까 봐 그렇게 불안했던가? 민찬은 두통에 머리를 어루만졌다. ‘설득을 해야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진이 그렇게나 강조하던 원칙. 받은 것은 그대로 되갚아준다는 그 원칙을 빗겨가게 해야 한다. 우진의 그 성격에 청와대 가서 엎는 건 불 보듯 뻔하다. 대한민국에서 계속 살 생각이라면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민찬의 고민이 깊어졌다 ‘빌어먹을 공무원새끼들.’ 항상 똥은 싸는 놈들이 싸지. 민찬은 분을 삭히며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애국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기분이라도 좋으셔야 할 텐데.’ 언뜻 기분파로 보이지만 우진이 누구보다 냉철한 성격임을 민찬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기분이라도 좋았으면 싶은 것은 그렇지 않은 날은 아예 말 붙이기도 힘들어서였다. 그냥 무표정하기만 해도 무서운 분위기의 우진이다. 화라도 난 상태라면 민찬은 제대로 말이나 꺼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 ‘후, 반드시 설득해야해.’ 정부가 저질러 버렸고 민찬이 수습해야한다. 민찬은 대한민국에서 오래 살고 싶었다. * 강남역 9번 출구. 중소길드 ‘심연의 마법사’ 줄여서 심마길드가 운영하는 6성 던전이다. 김해민이 발 빠르게 상위 던전 중에 예약이 빈 곳을 찾아 안내한 것이다. 최해솔은 그곳에 서서 침을 꿀꺽 삼켰다. “들어가자.” 우진이 말과 함께 앞장서 들어가자 성구가 활기차게 뒤따랐다. 후임을 받았단 생각에 저리도 기쁠까? “어서 들어가십시오.” “정말 들어갑니까?” 최해솔의 반문에 해민이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빨리 들어가십시오. 이러다 결계 생깁니다.” 해민의 성화에 최해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입구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어머니, 아버지. 꼭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아르달에서의 첫 던전 경험이 6성 던전이라니.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해솔이 던전에 진입했고 곧 결계가 생겨났다. “이얍!” 해솔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했다. “뭐해요?” “예?” 성구의 물음에 정신 차린 해솔이 반문하고 보니 우진은 온데간데없었고 성구뿐이었다. 괜히 민망하여 해솔이 벌줌이 물었다. “사, 사장님은요?” “벌써 가셨죠.” “예?” 교육하러 온 거 아니었나? 홍 이사와 자신을 남겨두고 이렇게 덜컥 혼자 가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저희도 뒤처지지 않으려면 빨리 가야죠.” 성구가 품을 뒤져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을 건넸다. 슬쩍 찌르기만 해도 옷 따위는 그대로 뚫을 듯 날카롭다. 위험한 무기가 손에 쥐어지자 해솔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칼 좀 쓰죠?” “칼보단 총이 더 익숙하긴 한데….” “아! 중위님 오해하고 있으시구나.” 성구는 해맑게 한번 웃어주고는 말했다. “6성 던전에서 나대다가 죽어요. 저도 얼추 몬스터 몇 상대야 하지만 직접 사냥을 주도할 정도는 아니에요. 한순간에 죽어요. 한순간.” “…….”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치고는 너무 긴장감 없는데? “그럼 이 칼은 왜….” 사냥에 참여할 것도 아니고, 교육을 위한 것도 아니라면 왜 따라 들어왔으며, 이 칼은 왜 쥐여준 것인가? 성구가 웃으며 물었다. “회 떠봤어요?” “낚시 좋아해서 몇 번….” “오오! 우리 길드에 에이스가 들어왔네.” 최해솔을 바라보는 성구의 눈빛에 호감이 더욱 증가했다. “…….” 잠시 후, 해솔은 성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컥, 깡. 썰고 썰고 또 썰었다. 가르고 썰고 칼끝에 뭔가 걸리면 여지없이 혈석이다. ‘여긴 어디….’ 해솔은 반복된 동작에 자신이 길드에 입사한 것인지 공장에 취직한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나는 왜….’ 저릿한 팔은 이제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홍성구 이사는 혈석 채집이 능숙한지 자신보다 거의 두 배는 될듯한 속도로 몬스터를 해체하고 있었다. 신속, 정확. “서두릅시다. 이러다 아래층 가기 전에 형님이랑 마주치겠습니다.” 이제 막 2층이다. 우진은 어디 갔는지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몬스터들의 시체만 지하철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법으로 표식이 남은 몬스터의 시체만 해체해 혈석을 꺼내는 성구였다. ‘사장님은 도대체 어떻게 사냥하시기에 이렇게 빠른거지?’ 우진의 경이로운 던전 공략 속도는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6성 던전이라 하여도 마음만 먹으면 몇 시간 만에 공략해버리는 괴물같은 능력자. “홍 이사님. 사장님은 도대체 어떻게….” “자자, 잡담할 시간 없으니 서두릅시다.” “…….” 푹, 스컥! 겨우 허리 한번 펴고 몇번 두드리고는 다시 몬스터 해체에 열중인 성구의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아니, 자신의 미래를 보는듯해 더 짠한 마음일지도 몰랐다. 해솔이 다시 혈석 채집에 열을 올리는데 발자국 소리가 지하공간을 울렸다. 해솔이 바짝 긴장해 단검을 쥐었다. 그래도 군대에 있을 때 각개전투 평가점수도 높았던 해솔이다. “어이쿠, 형님 올라오시나 보네.” “예?” 성구의 말에도 해솔은 일말의 긴장감을 가지곤 아래쪽 계단을 주시했다.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 듯 심통한 얼굴의 우진과 그 뒤를 따르는 수십의 해골들…. “키키킥” 수십이나 되는 그것들이 저마다 내뱉는 특유의 그 소리가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해솔은 저들이 몬스터가 아닌 우진의 소환수임을 알면서도 그대로 얼어버렸다. “형님, 빨리 채취하겠습니다.” “됐어. 얼마 된다고. 그냥 따라와.” 아래 한 개 층에 몬스터들의 시체가 바글거린다. 채집한다면 몇 푼이 아닌 몇억의 수입이 더 늘겠지만 우진은 돈을 버리고 시간을 선택했다. ‘모조리 잡아도 레벨업은 무리겠는데?’ 오르는 업적포인트와 경험치를 계산할 때 이 던전을 공략해도 70레벨 달성은 무리였다. 한번에 어렵다면 한 번 더 하면 될 일이었다. 우진이 빠르게 던전의 입구로 향하자 성구가 해솔의 어깨를 툭 쳤다. “뭐하세요? 얼른 따라가요.” “예? 옙.” 해솔은 앞서 가는 해골들이 우진을 따르는 모습에 충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이 거느린 소환수의 수가….’ 얼핏 세어보아도 백은 넘어 보였다. 해골들 개체 하나하나의 전투력을 봐야 하겠지만 수가 워낙에 많으니…. ‘혼자 사냥하는 게 아니었어.’ 경이로운 던전 공략 시간의 비밀을 엿본 기분이었다. 입구로 돌아와 보니 우진은 한쪽에 휴대폰을 비롯한 현대의 기기들을 내려놓았다. 성구도 익숙한 듯 휴대폰과 지갑, 차키 등의 개인물건들을 모아두었다. 해솔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성구가 웃으며 말했다. “해솔씨 입고 있는 거 던전 재료로 만든 거 아니죠?” “예, 일반 옷입니다.” “그럼 포탈 통과 못해요. 알몸만 갈걸요.” “그, 그럼….” 해솔도 상위 던전에 대한 정보가 기억이 났다. 포탈은 오직 그 세계의 물건들만 이동할 수 있었다. “입어.” 우진이 포인트상점에서 가장 싼 옷을 하나 구입해 훌쩍 던져주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승려복과도 비슷한 그옷을 갈아입는데 우진이 말했다. “성구는 적당한 몬스터 몇 잡아다가 해솔이 테이밍 연습 좀 도와줘라.” “헤헤, 네.” 성구의 수련성과도 확인하고 같이 사냥도 하면 좋겠지만 우진은 지금 빠르게 70레벨을 찍을 작정이었다. 사냥감은 최대한 독식하는 게 나았다. “가자. 가서 배부터 좀 채우자.” “넵.” 우진이 망설임 없이 포탈을 통과했다. 해솔도 귀가 있어 우진의 말을 들었다. 드디어 교육의 시작이다. 상위던전은 포탈 너머부터가 시작이라는 말도 있었다. 해솔이 침을 꿀걱 삼켰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입니까?” “헤….” 본격적인 시작은 무슨, 넘어가도 혈석캐고 하는 건 마찬가지다. 백번 말해야 무엇하나? 겪어봐야 알지. “배고픈데 얼른 갑시다.” 성구가 포탈을 통과했고 해솔이 뒤따라 통과했다. 비틀린 차원의 틈을 통과하는 기분은 해솔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질 거리는 머리와 메스꺼운 속은 전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우웨에엑.” “이크, 진정 좀 되면 오세요.” 토사물이 튈까 멀찍이 점프한 성구가 잽싸게 우진에게로 다가갔다. 해솔은 몇 번이나 속에 것을 토하더니 침을 뱉어내며 입 주위를 닦았다. “으으으으.” 조금 진정되는 속과 가시는 두통에 주변을 살필 정신이 돌아왔다. ‘히야.’ 숲 속이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보존된 자연의 한가운데 내던져진 기분. 상위 던전은 다른 세상과 연결되어있다더니 자신이 그곳에 와있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이 신선한 경험을 만끽하는 와중에 상상도 못해본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어? 좀 진정되면 얼른 이리 와요.” 자신을 부르며 재촉하는 성구를 보며 해솔은 두 눈을 비볐다. 이것이 헛것인가? 던전에서 캠핑이라니…. 모닥불에 익혀지고 있는 정체불명의 고기는 냄새만으로도 해솔을 군침 돌게 만들었다. < 79화 - 길드 확장 (2) > 끝 ⓒ 진설우 < 80화 - 길드 확장 (3)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최해솔은 불에 타죽은 고블린의 가슴을 가르며 능숙하게 혈석을 끄집어냈다. “아이고, 다 캤습니다.” 해솔이 혈석을 가방에 넣으며 허리를 폈다. “힘들죠?” “아닙니다.” 해솔이 성구가 건네주는 물병을 들어 마셨다. 우진이 그 신비한 아공간에서 꺼내준 것인데 아무거나 함부로 먹으면 위험한 던전에서 세균이나 중독에 걱정 없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이었다. “후, 그래도 오기 전 강화석을 먹은 게 있어 도움이 됩니다.” “하하, 주시는 건 재깍재깍 받아드세요.” 성구의 절대 철칙이다. 우진이 주는 건 사양하면 안된다. 시키는 건 해야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와 함께하는 던전 안에서만큼은 목숨을 잃을 일이 없다. 얼마 전 솔로 플레이로 5성 던전도 클리어한 성구다. 그때의 긴장감이나 스트레스에 비하면 우진과 함께하는 지금의 던전은 소풍을 나온 것 만큼이나 안정감이 있었다. 그냥 노는 건 아니고 혈석 채집에 땀을 흘리니, 소풍은 아니고 봄나물 캐러 온 정도? 아무튼 목숨이 위협받는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해솔도 마찬가지. “정말 놀랍습니다. 사장님께서 저 많은 언데드들을 통제하시다니….” 소환계열 각성자는 그 능력에 따라 소환하거나 테이밍해 부릴 수 있는 소환수의 질과 양이 달랐다. 우진은 하나하나가 C급 전사라 해도 무방해 해골병사와 C급 마법사라 해도 좋을 해골마법사를 백여 마리가 넘게 부렸다. “지금 소환해 다니시는 건 절반 정도밖에 안 될걸요? 저도 제대로 전부 소환하는걸 본적이 없어서. 하하.” “…….” “그냥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 세상은 아직 사장님의 진정한 능력의 절반도 모르는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건 이렇게 같이 던전공략을 함께하는 성구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우진을 가까이서 지켜본 성구는 아직 한 번도 우진의 한계를 본적이 없었다. 우진은 계속해서 강해지는 중이었다. “저기 오시네요.” 파괴된 숲길을 거슬러 우진이 해골부대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군인 것을 아는데도 흉흉한 그들이 수백이 몰려오자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무리의 앞에서 걷는 우진은 포스가 남달랐다. “그어어.” 해골부대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 바위로 이루어진 골렘이 손아귀에 무언가를 쥐고 오고 있었다. “해솔이.” “넵!” 우진의 부름에 해솔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이거 한번 테이밍 해봐.” “저, 저걸 말입니까?” 돌쇠의 손에 잡혀 바동거리는 그것은 백호였다. 아니, 지구에서는 멸종한 삐죽 돌출된 송곳니를 가진 검치호였다. 파팟. 우진은 뼈창을 몇 개 소환하더니 바닥에 꽂았다. 마력을 주입하자 그것들이 자라나 커다란 뼈의 감옥을 만들어냈다. 돌쇠가 검치호를 그곳에 던져 넣었다. 퍼억! “크르르르.” 바닥에 거칠게 내려쳐 진 검치호는 곧 자세를 낮게 깔고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다. 겨우 뼈로 이루어진 창살 너머로 검치호를 대면하자 엄청난 위압감이 전해져왔다. 크기도 어찌나 큰지 집채만 한 호랑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드, 들어갑니까?” 해솔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쉽게 잡아왔지만 저래 보여도 레벨 57의 검치호다. 해솔이 들어가면 찢기는데 3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왜 벌써 죽으려고 그래?” “…….” “성구야.” “예, 형님.” “말 잘 듣게 좀 다져봐.” “옙.” 성구가 씩씩하게 뼈 창살 너머로 훌쩍 뛰었다. 그 과감함에 해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르달의 두 번째 각성자이자 한 달 전 B급으로 승급한 각성자. 강우진의 남자. “헤헤, 안녕?” “크르르륵.” 성구는 검치호를 보며 히죽 웃었다. “크와아아앙!” 검치호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는 포효했다. 오우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피어가 작은 동물들은 그대로 지리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해솔은 몸이 굳고 다리가 얼어붙은 듯 바닥에 고정된 기분이었고, 성구는 귀를 문질렀다. “그럼, 미안해.” 먼저 사과한 성구가 검치호를 향해 달렸다. 뼈 감옥의 크기는 반경 5미터 수준. 피할 공간은 그리 많지 않았고 검치호는 아예 피할 생각이 없었다. 자세를 낮게 하며 달려드는 성구에게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 검치호였다. “아이언 스킨.” 성구는 강철 피부를 시전하며 온몸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검치호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퍼억, 퍽! “크와앙.” 퍼억, 퍽! 꽝! 한 번씩 헛발질이 바닥에 박혔으나 그것은 정말 가끔이었고 검치호는 거구의 덩치만큼이나 때릴 곳이 많았다. 검치호의 민첩함은 소용이 없었다. 좁은 우리에 갇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우웅, 퍼억, 퍽! 주기적으로 강화석을 섭취한 성구의 스탯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검치호에 필적할… 아니, 앞설 정도로 말이다. 마치 복싱 선수처럼 현란하게 휘두르는 성구의 주먹은 간결하고 유효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검치호의 앞 발 휘두르기를 피하며 무차별 난타를 가하고 있었다. ‘홍 이사가 저렇게 강했나?’ 전역신청서를 제출하고 아르달 길드에 대해 여러모로 조사한 최해솔이었다. F급에서 시작하여 한 달 전 B급 판정을 받은 홍성구 이사. B급이라면 어느 정도 강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한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저 정도면 B급 중에서도 거의 상위의 신체각성자의 움직임. 더욱이 해맑기만 하던… 같이 혈석을 채집하던 어린 청년이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에 해솔은 작은 충격마저 느꼈다. 그 충격은 성구의 빠른 움직임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해맑은 얼굴, 여유로운 움직임. 성구가 보여주는 여유가 해솔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해솔이 뼈창살 안으로 들어간 것은 검치호가 정말 숨만 붙어 있을 때였다. 그것도 꿀밤 한대만 때려도 죽을 정도로 기진맥진하여 다져졌을 때였다. 해솔이 검치호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는 테이밍 기술을 시전했다. 파파팟. 손안에 모여든 빛이 검치호와 해솔을 감싸다 사라졌다. 해솔이 어두운 얼굴로 우진을 돌아보았다. “실패했습니다.” 우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둘 사이의 레벨차이를 생각하면 테이밍할 성공확률은 그야말로 희박. “될 때까지 해.” “…알겠습니다.” 해솔은 이후 열두 번이나 더 시도해봤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온몸에 땀으로 젖은 그가 털썩 주저앉았다. “더, 더이상 마력이 없습니다. 고갈된 듯 합니다.” 우진은 영혼 하나를 보내 에너지를 채워주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의 몸에 흡수되며 마력이 충만해진 느낌이 들자 해솔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우진을 쳐다보았다. “계속해.” “…예.” 해솔의 테이밍스 킬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연이어 실패했다. 보다 못한 성구가 한마디 거들었다. “간절하게 바라면서 해보세요. 우주가 도와줄지도 모르잖아요.” “…….” 테이밍이 그렇게 한다고 되겠는가? “성구야. 저놈 해솔이 목덜미 노린다. 좀 더 패라.” “어? 언제 기운 차렸데.” 퍼퍼퍽. 숨이 꼴딱 거리던 검치호는 누운 채 체력을 비축하고 있었다. 기회를 노려 해솔을 공격하려 했는데 성구가 다시금 구타하기 시작했다. “끼잉, 깽.” 뒤로 물러선 해솔에게 우진이 한마디 거들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레벨차이가 하도 나서 본래 어려운 거야.” 좀더 하위의 몬스터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이곳은 상위던전이다. 고블린같이 부족사회를 이루는 고등 몬스터는 오히려 테이밍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검치호 같은 야수형 몬스터가 쉽지. “테이밍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친밀감을 가져 친구가 되는 것과 제압하여 굴복시키는 것. 지금은 어떤 거 같아?” 검치호를 무차별적으로 후드려 패는 성구를 보며 해솔이 조심히 말했다. “제압 아닙니까?” “아니지. 네가 제압한 게 아니잖아?” 네크로맨서인 우진에게 ‘지배’ 스탯이 있다면 테이머에게는 ‘친밀’ 스탯이 있었다. 이것이 높아야 보다 상위의 몬스터를 테이밍할 가능성이 높았다. 우진이 검치호를 패는 성구를 가리켰다. “저놈은 악당.” “…….” 우진의 손가락이 맞고 있는 검치호를 가리켰다. “저놈은 맞고 있는 친구.” “…….” 우진의 손이 해솔의 어깨를 짚었다. “넌 맞는 놈하고 친해지고 싶은 놈.” 우진과 해솔의 얼굴이 마주 보았다. “어떻게 해야겠냐?” “마, 말리러 갑니까?” “아니지. 악당한테서 지켜내야지.” “…….” 이게 뭐하자는 상황이지? 꽁트라도 해야 하나? “연기라도….” “아니, 진심으로 해. 악당 잡무이사한테서 고양이 지키듯 하라고. 가서 싸워. 악당을 물리쳐.” “…….” 우진이 성구에게 소리쳤다. “다 들었지?” “예, 형님.” “적당히 연기해줘.” “예!” 우진이 해솔의 등을 툭 두드렸다. “가서 구해. 그리고 친구로 삼아.” “…네.” 해솔이 달려들자 성구가 소리쳤다. “우헤헤, 너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없다.” 애니메이션 좀 본듯한 성구의 대사에 해솔이 검치호를 위해 대사를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은데 성구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해솔이 무심결에 가드를 올려 막아냈다. 퍽! ‘어?’ 성구의 주먹은 천천히 휘둘러진 것 같은데 팔뼈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허윽!” 한순간 집중된 고통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헛바람 소리와 함께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골절을 말하고 있었다. “호, 홍 이사님. 파, 팔 부러졌습니다.” “으헤헤, 나약하기 그지없군.” “…호, 홍 이사님.”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발차기를 휘둘러 오는 성구를 보며 해솔은 진심 두려움을 느꼈다. 바닥을 구르다시피 하여 피해낸 해솔은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해솔이 빨리 공격하는척하고 테이밍이나 해.” 우진의 목소리에 해솔이 성구에게 다가가 주먹으로 가슴을 후려쳤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성구는 그것을 맞고는 뒤로 날아…가는 척 뛰었다. 콰직! 뼈 창살을 뚫고 날아간 성구가 바닥에 떨어져 몸을 비틀거렸다. “…….” 아닌걸 알면서도 해솔이 날아간 성구와 자신의 주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빨리 테이밍이나 해.” “넵.” 이런 멍청한 연극이 효과가 있을까? 해솔이 뒤돌아보니 잔뜩 얻어맞아 겨우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검치호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렁그렁한 검치호의 눈빛. 테이밍 하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가, 감동했어?’ 해솔이 검치호의 정수리에 손을 가져다 대자 터져 나온 빛 무리가 둘을 감쌌다가 이내 끈끈한 빛으로 연결되었다. “크릉.”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는 검치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감동, 고마움, 보답.’ 자신을 잡아온 인간과 두들겨 팬 인간에게 대항하여 자신을 구해준 인간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졌다. “가디언 하나 얻었네.” 우진이 씩 웃으며 소울 아머에 저장되어있던 영혼을 뽑아 해솔의 부러진 팔과 곤죽이 되어버린 검치호를 단번에 회복시켰다. “크르르륵.” 기운을 차린 검치호가 우진과 성구를 향해 이를 드러냈으나 곁에 있는 해솔에게는 조금의 적대감도 없었다. “그놈 정도면 근방에서 너 지켜줄 정도는 될 거다.” “감사합니다.” “그럼, 혈석 캐면서 따라와.” “…네.” “오늘 익힌 스킬들도 수련하고.” “넵.” 우진이 무리하여 해솔에게 검치호를 테이밍시킨 것은 성구를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였다. 혈석이나 캐며 해솔의 보디가드로 붙여두기에는 효율이 나빴다. “헤헤, 형님 제 연기가 어떻습니까?” “남우주연상 감이다.” “으헤헤헤.” 우진의 영혼 없는 칭찬에도 성구는 좋아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해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성구를 보고 엄살을 피웠다. “후, 홍 이사님 아까는 진짜 무서웠습니다.” “헤헤, 돌아가실까 봐, 살살 쳤습니다.” “…….” 사장보다 홍 이사가 더 위험할 수도 있겠구나. 해솔의 머릿속에 그리 큰 존재감이 없었던 성구가 요주의 인물로 급 부상했다. 아르달에 각성자가 둘 뿐인데, 하나는 이미 그 경지를 논하기 어려웠고, 나머지 하나도 굉장히 뛰어난 수준이었다. “각성자 부대에서도 홍 이사님 정도의 신체 각성자는 보기 드뭅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곧 A급도 받으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솔의 입에 발린 칭찬에 성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마법산데요?” “…….” 이 길드 뭐가 이상한데? < 80화 - 길드 확장 (3) > 끝 ⓒ 진설우 < 81화 - 길드 확장 (4) > 우진은 삐쳐서 입이 한 댓 발 나온 성구를 데리고 파괴되지 않은 숲으로 이동했다. 고요한 숲 속에 온갖 야수형들의 몬스터가 숨죽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형님.” “왜?” “저는 왜 마법 위주로 안 가르쳐 줍니까?” 삐친듯한 성구를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배울 깜냥이 돼야 가르쳐주지.” “…평생 형님 시중들며 잔 심부름하고 혈석 캐는 것도 저는 좋습니다.” “그런데?” “화염계 마법 하나만 제대로 가르쳐 주십시오. 제 꿈 아시지 않습니까?” 불의 마법사. 각성자가 된 성구의 궁극적 목적이자 염원이었다. 화염구와 몇 가지 불의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 상위라고 할 수 있는 마법은 배우지 못한 성구였다. “네가 마법서 사서 배우면 되잖아?” “아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우진의 육성에 너무 익숙해지다보니 시키는것만 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성구가 놀라우면서도 시무룩해졌다. 우진이 그런 성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홍성구 잡무이사.” “…네.” “잡무이사가 뭐냐?” 뭐긴 뭔가? 월급 많이 받는 심부름꾼이지. “잡일담당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해?” “예?” “자잘한 일을 다 도맡아 한다는게 뭐냐?” 뭐긴… 잡일 담당. 그것도 회사 막내나 할 일이지. “내가 자리를 비우면 내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그게 누구겠어?” “서, 설마.” 우진이 성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넌 우리 길드 넘버 투다.” “혀, 형님.” 그것도 모르고 투정이었다니…. “내가 입수한 몇 가지 마법이 있지만 그동안은 네가 못 배우는 거였지.” 지금 성구의 레벨은 61. 당장 에너지를 측정해 등급을 매기면 간당하게 A급 판정을 받을 것이다. 우진이 미국에 가있는 동안 꾸준히 던전을 돌면서 수련한 성과였다.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세개의 마법서를 꺼냈다. “이제는 배울 수 있겠네.” “형니임….” 성구가 마법서를 보곤 울먹거렸다. 형님은 이렇게 속이 깊으신데 그동안 투정이었다니…. 이제는 섭섭한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듯한 기분이었다. “형님, 그동안 자잘한 업무들을 지시하신 건 제게 다방면의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해서군요?” “아니, 그건 그냥 잡무다.” “…….” 아, 눈물이 나오다가 마네. “넘버 투라고…. 다방면에 유능해야….” 우진이 피식 웃었다. 다방면에 유능해 봐야 뭐 하려고? 유능한 놈을 잡아다 놓으면 되는데. “민찬이 있는데 뭐 하려고. 넘버 투는.” 우진이 성구를 보고 씨익 웃었다. “나 다음으로 강하면 된다.” “…….” “불꽃남자로 만들어주마.” “오오!” 성구가 참지못하고 탄성을 질렀다. 우진이 건네준 마법서를 그대로 익히기 시작했다. * 성구는 세가지 마법을 익히고는 입이 귀에 걸렸다. 우진이 준 마법서는 하나하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것들이었다. 몇번 반복해보더니 이제 능숙하게 마법을 펼쳤다. 스킬트리. 몇몇 상위의 스킬은 익히기 위해서 하위의 몇 가지 스킬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동안 성구가 익혔던 스킬들이 모두 상위의 마법들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자, 실전이다!” “넵, 형님.” 성구가 자신 있는 듯 다부진 얼굴을 했다. 즉시 아이언 스킨으로 몸의 피부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하고는 마력보호막을 둘렀다. 거기에 가속 마법이 추가되고 오늘 배운 화염마법이 발현되었다. “블레이즈!” 화르르륵. 성구의 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습 그대로 불길에 휩싸인 성구가 내달리자 그 뒤로 불의 길이 만들어졌다. 화르르륵. 내딛는 걸음마다 화마를 일으키며 숲을 질주하는 성구의 손에는 달리는 와중에 꺾은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써온 마력보호막은 숙달의 경지를 넘어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만큼이나 익숙했다. 나뭇가지가 마력보호막에 휩싸여 타는 것을 막았고, 그 위에 새로 배운 화염마법이 더해졌다. “인챈트 파이어!” ‘화염부여’ 마법이 더해지자 나뭇가지에 두른 마력보호막에 불길이 치솟으며 거대한 화염검이 만들어졌다. 후우우웅, 후우웅! 화염검이 휘둘러질때마다 나뭇들이 불타오르고 숲이 타올랐다. 지나는 자리마다 불길이 치솟았고, 미쳐 날뛰는 성구의 움직임에 숲의 몬스터들이 동요하며 날뛰었다. “사장님, 혈석 다 캤습니다.” “크르르릉.” 어느새 친밀도가 더 오른 것인지 검치호의 둥에 탄채로 다가온 최해솔은 눈앞에 불타는 숲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를 날뛰는 성구의 모습을 드문드문 본 탓이다. “호, 홍 이사님 정말 마법사였군요.” “크큭.” 우진이 웃으며 날뛰는 홍구를 가리켰다. “저게 무슨 마법사야. 불 몽둥이 든 전사지.” “…….” 본인이 마법사라는데…. “좀 물러나 있어. 저래 보여도 괜히 불똥 튀면 너 죽는다.” “네.” 해솔이 타고 있는 검치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만졌다. “잭슨. 가자!” “…이름이 잭슨이냐?” “예, 저희 부대에 있던 짬고양이가 잭슨이었는데 그게 생각이 나서….”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성구야! 이제 몰아와!” “예, 형님!”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성구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땅이 조금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두두두두. 곧 불타는 숲을 헤치며 자동차만 한 멧돼지 몬스터에 호랑이에 곰, 별별 야수 몬스터들이 뛰쳐 오고 있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존재를 쫓고 있었다. “헤헤헤, 형님 갑니다. 가요.” 야수들에게 쫓기고 있는 성구는 불을 뿜으며 달렸다. 그 화염 데미지가 또 야수들을 자극하며 뒤쫓게 했다. 성구가 몰아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우진이 씨익 웃었다. 역시 계획대로다. 언데드군단이 숲을 뒤지며 사냥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야수들은 본능이 뛰어난 몬스터들. 강한 군체무리를 피해 몸을 숨기는 녀석들을 일일이 뒤쫓아 추적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제법 만만한 미끼가 필요했는데 성구가 딱 맞았다. 성구가 우진의 옆을 스쳐 지나가듯 하다가 제자리에 딱 멈춰 섰다. “수고했다.” “헤헤.” 성구는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냈다. 우진의 주위에 은신해있던 해골마법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며 몰아온 몬스터들을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쭉쭉 오르기 시작하는 경험치에 우진이 슬쩍 미소 지었다. 생각 이상으로 더 일찍 던전공략을 마칠 수 있을 듯 싶었다. * 사무실에 거의 다 와 간다는 해민의 전화를 받은 민찬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무조건 설득해야 한다.’ 괜히 일 나기 전에 무조건 설득해야만 한다. 민찬은 정리한 말들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우진과 해솔, 그 뒤를 지친 표정의 해솔과 신나 보이는 성구가 따랐다. “민찬이 잠깐 들어와.” 우진이 사장실로 들어가버리자 해민이 다가와 귓속말했다. “사무실 밑에 기자들 쫙 깔려서 사장님 기분 안 좋으세요.” 그동안 잠잠했는데 이번엔 워낙에 큰 사건인지라 기자들이 한마디라도 취재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끙.” 민찬은 신음을 삼키고는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앉아.” 민찬이 우진의 맞은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우진의 얼굴을 살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뉴스 뭐야?” “오보입니다. 사장님 최종 결제 후에 언론사에 내보낼 녹화용이었습니다.” “멋대로 뿌렸다 이거지?” “언론사에서 착오가 있었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실수하라고 시켰겠지.” “…….” 민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조건이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굉장히 좋은 조건입니다. 정부에서는 현재 사장님의 해외이주를 잡아두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벌써 몇몇 국가가 한국정부에 압박을 넣은 모양입니다.” 그중엔 미국도 포함되어있겠지. 그래서 한국정부에서 이런 무리수를 뒀는가? 강우진은 이미 한국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더이상 수작 부리지 말라. “민찬이.” “네.” “조건이 좋고 말고가 문제가 아냐.” “허면….” “내가 길드 왜 만들었는지 잊었어?” “…….” 군대에 가기 싫어 만들었지. 우회해서 병역의 의무를 마치려고. ‘그것이 왜?’라는 민찬의 표정에 우진이 추가 질문을 던졌다. “왜 내가 해머길드에 안가고 새로 만들었겠느냐.” “그야…. 헉!” 민찬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그렇게 해머길드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애썼는데 우진이 새로 길드를 만들어 독립한 것은 남의 밑에 들어가기 싫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회사가 아니라 국가에까지 적용되는 것이었나? 여태 대한민국 국민으로 잘 살다가 이제 와서 왜…. “내게 목줄을 채우려 하는데 내가 가만 있어줘?” 혜택이고 뭐고 달콤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내어준다고 하여도 목줄을 찬 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우진의 음성은 차분했고, 그래서 무서웠다. “차, 참으십시오.” 민찬의 호들갑에 우진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뭘?” “반란은 안됩니다!” 우진이 청와대로 쳐들어가 뒤집어엎으면 그게 반란이고 국가전복이다. 민찬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야? 내가 그렇게 막무가내야?” “…….”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민찬이 우물쭈물하자 우진이 소파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받은 만큼만 돌려주자고.” “어떻게….” “밖에 깔린 기자들 불러들여.” “…….” 큰일이구나. 민찬은 또 한 번 빅이슈를 터트리려는 우진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저지르고 나서의 사태에 대해 감이 안 잡혔으니 그 수습을 생각하면 그저 암담할 따름이었다. * 그동안 비밀에 싸여있던 아르달의 사무실로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사무실 곳곳을 스캔이라도 할 태세로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각 언론사별로 두 명의 제한으로 추려진 기자단이 모여 간단한 기자회견장이 만들어졌다. 특종의 기회를 잡은 기자들은 모두 한껏 들뜬 얼굴로 저마다 노트북과 수첩을 펼쳐 들고 있었다. 취재용 마이크 수십 개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종이 한 장을 든 우진이 나와 앞에 마련된 책상에 앉았다. 우진이 민찬이 직접 적어준 종이를 힐끗 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먼저 언론사의 오보로 인해 아직 체결되지 않은 수호길드협의가 발표됨에 따라 매우 유감으로….] 우진이 종이를 구기고는 앞에 빼곡히 자리를 채운 기자들을 보았다. 그중 눈이 마주친 몇몇 기자들이 손을 들었으나 우진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자, 질문은 나중에 받고 일단 아르달 사장으로서 입장 전합니다.” 기자들이 숨을 죽이며 우진의 말에 귀 기울였다. “정부가 방송국이랑 짰는지 체결되지도 않은 협약을 내보냈네요.” 누군가 ‘특종이다!’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빠르게 타자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는 짓이 아주 구려요. 기분이 아주 뭐 같아요. 이딴 계약 체결 안 합니다. 앞으로도 안 할거니 재논의니 뭐니 접촉 자체를 하지 말라고 전하세요.” “헉.” 몇몇 기자들이 헛숨까지 터트리며 길드 아르달의 공식 입장을 적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 이민 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양인데 괜히 뒤에서 수작 부리면 당장 떠나줄 테니 그리 알라고 전하면 됩니다. 이상, 끝.” 정부를 상대로 당당히 협박할 수 있는 사내가 몇이나 될까. 기자 하나가 재빠르게 손 들자 우진이 그를 가리켰다. “여러 나라에서 제의가 들어온 걸로 아는데 이민을 생각 중이십니까?”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든 귀찮게 하는 나라엔 안가겠죠. 그럼 질문도 끝.” 우진은 고개를 돌려 뒤에 시립 해있는 정민찬을 보았다. ‘이젠 망했어.’라는 표정의 그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얌전히 밥만 먹고 오면 될 것을 괜히 일을 만들어와서는…. “나머지는 우리 부사장에게 물어보세요.” “자, 잠깐만요.” 기자들의 만류에도 우진이 자리를 나가버리자 기자들의 시선이 민찬에게로 향했다. “부사장님께 질문 있습니다.” “JS미디어의 김신영입니다. 아르달의 향후….” 아까는 우진의 기에 눌려 겨우겨우 용기있는 몇몇만 손을 들더니 이젠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질문부터 던져대기 시작하는 기자들을 보며 민찬이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의 시선이 방을 나서는 우진의 등에 가 있었다. ‘여론몰이에 여론몰이로 맞짱이라니.’ 차라리 다행이다. 괜히 청와대에 쳐들어갔으면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해지는 민찬이었다. < 81화 - 길드 확장 (4) > 끝 ⓒ 진설우 < 82화 - 길드 확장 (5) > 민찬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조금 안되어 보였는지 우진은 해민을 이사로 승진시켜 일을 돕도록 했다. 인터넷을 비롯한 티비 뉴스, 신문들이 난리가 났다. 어차피 논의되던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것뿐이었으나, 이것이 정부의 주도 아래 미리 공개되었다는 것과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아 아르달이 부정했다는 것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강우진 미국에서 이미 이민 잠정 합의?] [대한민국 정부 퇴짜맞다.] [AA급 각성자를 잃은 대한민국.] [화랑길드 마스터, 3대 길드만으로도 이미 대한민국 방호는 충분.] [일본, 중국도 눈독. AA각성자 신규발굴 필요성.] 몇 분 사이에도 새로 쏟아지는 기사들을 다 훑어보지도 못할 정도다. 민찬은 언론사들의 기사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그가 대응하는 것은 정부의 새로운 접촉 뿐. “아닙니다. 사장님의 뜻은 확고합니다. 더이상의 재고는 없습니다.” 어차피 더 유리한 혜택을 끌어내기 위한 협상이 아니었다. 아르달의 뜻은 확고했다. 우진이 정부와 방위협약을 맺을 리가 없었다. 민찬이 할 수 있는 것은 거부 의사를 전하는 것뿐. 그런데 말귀를 그냥 그대로 알아들으면 되지 거부를 표명할 때마다 보다 나은 혜택과 조건을 제시하며 재접촉을 해오고 있었다. “하. 미치겠네.” 조건들이 얼마나 좋은지 생각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받아도 될듯 싶었으나 사장님이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민찬이 진짜 바쁜 것은 정부의 대응이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아르달 길드의 기사도, 취재요청도 아니었다. “오늘까지만 벌써 1200명입니다.” “하, 쉴 새 없이 밀려드는구나.” 오늘부터 정식 모집 공고를 낸 이후 접수된 서류였다. 우진이 가이드라인이라도 잡아두었다면 이렇게 어렵진 않았겠지만 F급을 비롯해 각성자라면 누구나 자격요건이 되었다. 실제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은 낮은 등급이라도 이미 길드에서 스카웃되어가고, 재야의 각성자들이라면 거의 F급과 E급이 대부분이었다. C급 이상부터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면, 구속이 싫어 그런 것이 대부분인지라 모집에 참여하는 수가 적었다. 지금 접수된 서류들은 대부분 F급. 이사로 승진한 김해민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면접 일정 잡는 것만 해도 골치 아프네요.” “그래도 해야지. 지원부서 지원자는 얼마나 돼?” “이건 더 심합니다. 3200명이에요.” “…음.” 민찬이 혀를 내둘렀다. 각성자 뽑는 거야 우진이 결정하기에 면접일정과 장소물색만 하면 끝이지만 지원부서는 아니었다. 그가 온전히 뽑아야 하기에 서류전형부터 다 검토해보아 한다. 진짜 일은 지금부터였다. “후, 안 뽑을 수도 없고.” 이미 직원이 100명이 넘어가는 아르달이지만 이후 추가될 각성자들의 수를 생각하면 이보다 10배는 더 많아도 모자랄 정도였다. 보통 각성자 하나당 10명 정도의 지원인력이 필요하니 말이다. 서류뭉치에 파묻히고도 해민은 웃었다. “하하, 그래도 힘 나지 않습니까? 정 부사장님.” “그건 그래. 김 이사.” “하하하.” 해머길드에서 이직 한지 불과 몇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부사장에 이사로 초고속 승진한 그들이다. 요즘은 해머길드에 있던 옛 동료에게서도 심심찮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자리만 주면 이직하겠다고…. 아직 규모에서 차이가 나지만 해머길드와 아르달의 위상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사장님의 육성 능력 생각하면 양적으로도 추월하는 건 금방이겠지요?” “후, 당연하지.” 성구도 F급이었고 해솔도 F급이었다. 성구는 미국으로 가기 전 이미 B급이 되었고 해솔은 아직 등급 측정을 해보지 않았지만 어제 데려온 자동차만 한 검치호를 보곤 마음을 놓았다. 사장님은 제대로 가능성이 있는 각성자만 뽑는다. 지원자들의 면접도 일일이 보시겠다고 한 것을 보면 알수 있었다. “승훈씨가 조금 안쓰럽긴 합니다.” “눈치 있는 친구라 잘 할 거야.” 어찌 보면 지금 승훈이 가장 핵심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규 각성자니, 지원부니 뭐니 해도 아르달의 핵심 목표는 강우진을 보좌 던전 공략을 원활히 하는 것이다. 이에 강우진 전담의 비서실이 만들어졌고 비서실장으로 우승훈이 낙점되었다. 우진의 던전 일정 조율은 물론 자잘한 개인 업무에 기사까지 모든 업무를 처리한다. 비서실에 딸린 직원들만 20명. 그 수장이 된 우승훈은 입이 찢어졌고, 신나게 일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자, 그럼 힘내보자고.” “넵, 부사장님.” “허허허, 김 이사도 참.” “하하하.” 부사장과 이사가 화기애애하니 사무실의 분위기는 좋았으나 지금도 쉴 새 없이 접수되는 메일과 안 울리는 전화기를 찾기 어려운 전화벨 소리로 사무실의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 이수역 2번 출구의 5성 던전. 몬스터들이 레벨이 한참 낮아서 그럴까? 우진이 조금 남은 경험치를 모두 채우는 데는 필드의 몬스터를 3분의 2나 잡았을 때 끝이 났다. <레벨업!> 우진은 70으로 변한 레벨에 긴장이 탁 풀렸다. 봉인 해제된 스킬을 배웠다. <데스나이트 소환> 죽은 기사(lv 70이상)의 영혼과 주종의 계약을 맺으면 죽음의 기사로 소환 가능하다. 군단장인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야 하며, 합당한 대우만이 그들의 복종과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훈련과 사냥으로 레벨업 할 수 있으며 권속마다의 레벨에 따라 능력의 차이를 보인다. 공통 보유 스킬 유령마 소환 - 유령마를 소환해 전투에 함께한다. 군단편성 - 레벨 1당 편성 해골 10기 부대지휘 - 휘하 편성 외의 소환사의 부대를 지휘할 수도 있다. 우진이 수만의 대군을 지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 네크로맨서에게 지배스탯은 몬스터일 뿐인 언데드들을 휘하에 거두며 조종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군단장인 데스나이트에게 휘하의 해골들을 편성하면 더는 그들에 대한 지배스탯은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우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군단장인 데스나이트의 지배를 받으니 말이다. 우진이 관리해야 하는 것은 데스나이트 뿐. 대규모 부대를 운용하고도 딱히 머리 쓸 일도 없었다. 우진의 든든한 데스나이트 52기가 봉인이 풀리며 소환의 방에 속속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진은 정신감응으로 연결되는 그들의 의식들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들이 레벨 또한 초기화되었다는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레벨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시일에 끝날 전쟁들도 아니었고, 죽여야 할 적들은 넘치고 넘쳤으니까. 든든한 친구들과 다시 만난 기분. 우진은 오늘 사냥은 여기에서 종료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멀리서 몹몰이를 하고 있는 성구에게 소리쳤다. “성구야! 막 타 쳐도 되니까. 다 잡아라.” “네, 형님!” 화염검을 휘두르며 몬스터를 유인하기만 하던 성구가 돌연 몬스터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화염폭발에 우진은 흐뭇하게 보았다. “많이 컸어. 성구.” 성구가 던전의 나머지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이 우진은 인벤토리를 열어 봉인된 영혼석 하나를 꺼냈다. “알 아사드.” 운 좋게 지구에서 처음으로 구한 70레벨의 전사형 각성자의 영혼. 데스나이트로 쓰기에 딱 맞은 재료였다. 목이 분리된 그의 시체마저 꺼내놓고는 우진은 영혼석을 깨트려 봉인된 알 아사드의 영혼을 불러냈다. [목표 말살!] 아사드의 영혼은 우진을 보자마자 달려들었으나 그의 주먹은 허무하게도 우진을 그냥 통과하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별별 수를 다 쓰던 아사드의 영혼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자신에게 들러붙은 그 수십 수만의 악령들도 아사드 만큼 귀여우면 얼마나 좋을까? “멈추어라.” 우진의 조용한 명령이 그대로 시동어가 되었다. 아사드의 영혼이 제자리에 딱 멈추더니 우진의 앞으로 옮겨졌다. 영혼의 속박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듯 발버둥쳤으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의 희끗희끗한 눈알뿐이었다. “나의 종이 되어라.” [가당찮은 이야기!] “굴복하라.” [말도 안 돼….] “꿇어라.” [으….] 그의 반항심 가득한 기세와는 반대로 알 아사드의 영혼이 우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파괴신 트래쉬의 전승자이자 죽은 자들의 왕 임모탈의 권능!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아사드의 영혼을 보며 우진이 데스나이트의 소환 스킬을 시전했다. 우진의 손에 검은 기운으로 뭉쳐진 쌍검이 생겨났다. 알 아사드가 쓰던 무기. 그가 원하는 무기. 우진이 쌍검을 쥐고는 아사드의 어깨에 살짝 올렸다. “복종하라.” [복.종.합…니다.] 파괴신의 권능으로 이대로 목을 그으면 그의 영혼은 소멸한다. 이미 죽은 그에게 영혼의 소멸은 그대로 종말을 의미. “나를 따르라.” [따.르.겠습니다.] 우진이 쌍검을 알 아사드에게 내밀었다. 그의 영혼이 두 손을 들어 쌍검을 들었다. “너의 분노를 나의 적에게 보이라.” [마스터의 뜻대로….] 아사드가 쌍검을 거머쥐었다. 그의 영혼이 소용돌이처럼 휘말리더니 생을 잃은 그의 시체로 스며들었다. 잘렸던 머리가 엉겨붙고 피부가 썩어 떨어져 나갔다. 검게 물든 그의 해골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검은 연기와 함께 생겨난 갑옷과 거적때기 같은 검은 천이 그의 몸을 감싸고 터번 이 되어 머리마저 휘둘러졌다. 허리춤에 쌍검이 생겨나 달리며 새로운 죽음의 기사가 탄생했다. “딱 아랍 암살자 같네.” […….] 굴종하여 죽음의 기사가 되었지만 완벽히 우진을 신뢰하지도, 충성하지도 않는 그의 삐딱한 기운이 느껴졌다. 힘에, 권위에 눌려 복종하고만 있을 뿐. 임모탈 강우진의 53번째 기사. 아직은 반항적인 그를 권속으로 두기위해 상당한 지배력이 소모된다. 공통스킬 - 유령마 소환, 군단편성, 부대지휘 고유스킬 - 은신, 유령걸음, 사신의 검, 신의 분노(광포화) 휘하 부대 - 0/10 필요 지배력 - 312(신뢰, 충성, 복종에 영향.) 데스나이트마다 제각각 개성 따라 다른 무기나 고유스킬들을 확인한 우진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암살자 타입의 데스나이트는 또 처음이었다. 한가지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다면 312나 되는 지배스탯. 해골병사 312마리나 부릴 수 있는 지배스탯을 알 아사드 하나를 소환하는데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차 시간을 두고 낮아지겠지만 우진으로서는 알 아사드를 전장에서 써먹으려면 어느 정도까진 낮춰야 한다. 그리고 우진에겐 그의 지배 스탯을 낮출 아주 좋은 방법이 있었다. “이리 와봐.” […….] 우진의 명령에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대답조차 없다. 뭐, 개기는 것도 잠시 뿐이다. 우진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이자, 가장 많은 시간 전장을 함께 한 동료, 그의 벗을 불러냈다. “키바.” 휘리리릭. 알 아사드의 옆에 뭉치기 시작한 검은 연기가 실체화 하기 시작했다. 인간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골격. 투박한 갑옷, 등에 매인 커다란 도끼, 위협적인 뿔이 달린 투구. 수십 년 전장을 넘으며 더욱 흉포해진 붉은 광망 그르르르.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그의 숨소리는 야수의 그것과 같았다. 쿵! 거구의 신형이 바닥에 닿자마자 건방지게 멀뚱멀뚱 주인 앞에 서 있는 신입 데스나이트 알 아사드의 뒷 무릎을 후려 찼다. 쾅! 무릎이 굽혀졌다면 다행이지만 다리 채로 아예 분리해버리는 괴력! 콰직! 키바의 우악스러운 손이 알 아사드의 터번 위를 덮치더니 머리를 내리눌렀다. [크윽.] 알 아사드의 신형이 바닥에 처박히듯 고꾸라져 우진의 앞에 오체투지를 했다. 키바가 그와 동시에 저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먹으로 바닥을 찧었다. 콰아앙. [마이 로드 임.모.탈!] 오크들 중에서도 용맹하기로 소문난 잿빛 날개 부족의 대족장. 오크 로드 키바가 시간의 개념이 없는 긴긴 시간을 봉인의 방에서 풀려나 그의 주인 임모탈 강우진과 재회했다. 여전히 터프한 그를 보자 우진의 얼굴에 절로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오랜만이다.” 지구로 귀환한 강우진.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죽음의 검을 다시 얻었다. < 82화 - 길드 확장 (5) > 끝 ⓒ 진설우 < 83화 - 종말을 향해 > 결국 여기까지 왔다. 혼자가 아니다. 전장을 함께할 동료가 생겼다. 하지만, 긴장을 아예 풀기엔 일렀다. 자유와 평화의 시간은 아직 멀었다. 72군단장. 그리고 아직 코빼기도 본 적 없는 트라넷을 해치우면 평화의 시기가 올까? “이제 사냥이 수월하겠어.” 데스나이트들은 개별적으로 지휘권을 가진다. 스켈레톤들을 통제할 카리스마를 가진 존재들이기에 우진에게서 멀어져도 스켈레톤들이 몬스터가 아닌, 데스나이트에 귀속된 병사들로 남을 수 있었다. 한층 더 쉬워질 사냥을 생각하자 80레벨도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리치 제니스마저 봉인에서 풀리면 레벨 올리는 것쯤은 이제 일도 아니게 된다. 한방 사냥에 그보다 유능한 존재는 없었으니까. “소모 지배력이 계속 낮아지네.” 알 아사드를 통제하는데 필요한 소모 지배력이 쭉쭉 떨어지고 있었다. 키바를 비롯한 데스나이트들이 아무래도 제대로 신입교육을 시키는 모양이었다. 소환의 방에서 투닥거리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성구의 사냥도 거의 끝나갔고, 기분도 좋으니 요깃거리나 할 요량으로 우진은 인벤토리에서 이것저것 조리도구를 꺼내 불을 만들고 솥을 걸었다. 죽은 물소 하나를 도축하여 고기를 떼와 손질하는데 우진의 옆에 비비가 뿅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볼을 부풀린 그가 우진의 옆에서 투정했다. “어유, 소환의 방이 너무 시끄럽다옹.” 그렇겠지. 한창 서열정리를 하고 있을 테니까. “조금 조용해지면 들어가.” “어휴, 앞으로 뼈다귀들로 가득 찰 텐데 조용할 날이 있겠냐옹.” “그렇긴 한데….” 우진의 권속들은 모두 소환의 방에서 기다린다. 매번 새롭게 매개를 이용해 소환해야 하는 해골병사들도 데스나이트에게 귀속시키면 소환의 방에서 기다렸다가 각각의 군단장들의 부름에 소환될 것이다. 우진이 할 일은 병력 충원 뿐. 운용이나 지휘는 모두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진으로서는 지금부터가 제대로 불사왕의 존재감을 뽐내는 시기인 것이다. 데스나이트들의 레벨이 오를수록 휘하에 배속된 스켈레톤들의 수가 많아지고, 소환의 방도 가득 차게 될 것인데…. “앞으로 더 시끄러워져서 어떻게 해?” “으휴, 됐다응. 이제 사냥이나 할거다옹.” 한층 밝아진 듯한 비비의 반응에 우진이 반색했다. “이제 기분 좀 괜찮아?” “흥, 괜찮고 말고 할게 어딨나옹? 빨리 강해져서 그자식에게 악몽을 선사 할 거라옹.” 자신에게 죽음을 경험하게 한 래쉬모드를 생각하며 투지를 불태우는 비비를 보며 우진이 웃었다. 강제로 부리려면 부릴 수 있지만 우진은 권속들을 그리 대하지 않았다. “다음 던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알겠다옹.” 이미 성구가 남은 몬스터들을 모조리 해치웠는지 귀환석을 가지고 돌아오고 있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매번 솔로 플레이로 던전 공략하는걸 보더니 저놈도 어느새 혼자서 6성 던전은 공략할 정도는 된 것 같았다. ‘뭐, 아직 위험하지만, 해솔이가 조금 더 커서 받쳐주면 가능은 하겠지.’ 우진의 권유 같은 강압 속에 별별 잡기들을 다 익힌 두 사람이다. 거기에 아낌없는 강화석 투자로 기본 스탯치도 같은 등급의 각성자보다 월등했다. 불사의 군대는 거의 반이나 이룬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른 부대. 아르달의 각성자 부대를 조직할 필요성이 있었다. 성구는 선봉장이 될 것이고, 해솔이 지휘관이 될 것이다. 아직은 가르쳐야 할 것이 많았다. [사장님 다 캤습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해솔의 텔레파시에 우진이 텔레파시를 보냈다. [벌써?] [예, 다 했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와.] 성구와 함께하는 몰이 사냥은 속도가 굉장히 빨랐는데 전리품의 수거는 모조리 해솔에게 일임했다. 캐는 만큼만 캐고 나머지는 버린다는 생각으로 맡긴 것인데 그 많은 혈석을 다 캤다고 하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헤헤, 형님 다 잡았습니다.” 그사이 다가온 성구가 요리 중인 음식을 보곤 군침을 흘렸다. 어째 갈수록 더 단순해지기만 하는 녀석이었다. “해솔이 오면 같이 먹자.” “네, 헤헤.” 잠시 후 해솔이 다가왔다. 해솔의 뒤로 혈석이 든 배낭을 가득 실은 잭슨과 14마리의 까마귀떼가 따라오고 있었다. “어? 아직 몬스터가 남았네요.” 성구가 까마귀떼를 해치우려 하자 우진이 말렸다. “테이밍한거 같은데?” “어? 진짜네.” 까마귀들이 해솔을 뒤 쫓는다기보다는 그저 따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펼친 길이가 1미터나 하는, 칼날 부리 까마귀. 이름 그대로 날카로운 칼날 같은 부리를 가져 상대를 공격하는 검은 새였다. “그것들은 뭐야?” 우진의 물음에 해솔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하하, 테이밍했습니다.” “어떻게?” 차츰 강해지고 있는 해솔이었지만 칼날부리 까마귀의 레벨은 32. 3성 급의 몬스터를 해솔이 테이밍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검치호 잭슨이 보호하고 있으니 다칠 리야 없었겠지만…. “시체 밭에서 혈석을 캐고 있는데 이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잭슨의 기에 눌려 접근 못하는걸 제가 먹이 하라고 몬스터 시체 몇을 양보했습니다.” 복종이 아닌 친밀로 성공한 모양이었다. “연기 좀 했습니다.” “…….” 의외로 몬스터들이 연극에 약한걸 지도…. “근데 혈석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캔 거야?” “이 녀석들이 도와줬습니다.” “응?” 우진이 그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돼?” “예, 약간이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테이머들의 필수 스킬이기도 했다. ‘교감’, ‘정신감응’같은 스킬들을 자연스레 각성한 모양이었다.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칼날부리 까마귀의 특징을 생각하면 될것 같기도 했다. 칼날부리 까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동물의 내장이다. 날카로운 부리는 피부를 찢어 내장을 찾아 끄집어내는데 딱 제격이었다. 본래 반짝이는걸 모으는 까마귀들의 습성도 있으니, 친구가 된 테이머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괜찮네.”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크로맨서의 소환수들은 그 태생이 언데드라 그런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전진하는 불사의 군대로서 전투에서는 딱 알맞았지만 아이템을 채집하거나 혈석을 캐는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영 부적절했다. 우진이 명령을 내리며 직접 조종하다시피 하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들 스스로 할 수는 없었다. 마치 인형놀이처럼 그들을 조종해 할 바에야 직접 하는 것이 더 빠르고 속 편했다. “어디 한번 해봐.” “넵.” 해솔이 정신을 집중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주변에 내려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더니 방금까지 성구가 사냥해놓은 몬스터들의 시체들을 향해 날아갔다. 곧 날카로운 부리가 시체를 찢어 혈석들을 빼내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우진이 신기한 듯 물었다. “어디에 혈석이 들은 줄 알고 가는 거야?” “음, 그게 조금씩 느껴집니다.” “응?” “텔레파시를 보내기 위해 기운을 감지하려고 애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조금씩….” 몬스터도 인간도, 아이템도 특유의 기운을 풍긴다. 마력이라고 해도 좋고 생명력이라고 해도 좋다. 죽은 몬스터는 사기를 풍기지만 몸 안에 혈석이 있는 녀석은 마력과 사기를 동시에 풍긴다. 해솔은 본능에 따라 그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 본능이라기보단 감지계열의 능력을 각성한 모양이었다. 텔레파시가 낳은 또 다른 부수효과였다. “호오.” 우진이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해솔이 발전 가능성이 높다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줄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특출난 재능을 가지며 말이다. 우진이 성구를 보았다. ‘오토 몹 몰이’ 우진의 시선이 해솔에게로 향했다. ‘오토 파밍’ 우진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그저 새로 뽑을 각성자들 지휘나 시키려고 데려왔더니 새로운 재능에 눈을 떴다. 얼떨결에 완성되었다. 완벽한 오토매틱사냥의 실현이었다. * 던전의 입구. “수고하셨습니다. 사장님.” 대기하고 있던 우승훈이 따뜻한 녹차를 내밀었다. 우진이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아직 예약시간 남았지?” “넵, 사장님께서 워낙 빠르게 공략하셔서 아직 1시간 12분 정도 남았습니다.” “충분하네. 넌 관리국 전화해서 몬스터 관리부 직원 하나 보내달라고 해.” “넵,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최해솔의 뒤로 주렁주렁 달고 나온 커다란 까마귀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테이머계열의 각성자가 해솔이 최초는 아니었고, 이미 수많은 테이밍계열의 각성자들이 존재해왔다. 그들이 길들여온 몬스터는 관리국에 반드시 등록을 해야 하며 허가받은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도록 하고 있었다. 따뜻한 녹차를 한 모금 더 마신 우진이 성구와 해솔을 보았다. “한번 더 가자.” “네, 형님.” “알겠습니다. 사장님.” 1시간. 상위 던전이기에 4배의 시간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4시간은 5성 던전의 공략시간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하지만 우진은 자신 있었다. 오토봇들과 함께라면 말이다. * 사무실로 복귀하는 밴. 승훈이 아닌 전문적인 로드 매니저가 운전하는 그 차에 앞좌석에 앉은 비서실장 우승훈을 필두로 강우진과 홍성구가 타고 있었다. 해솔은 자신이 테이밍한 몬스터들을 실은 컨테이너 트럭에 함께 타고 뒤따르고 있었다. “아, 아쉽다. 몇 마리 더 잡았으면 딱 좋았을 텐데.” “헤헤, 그래도 20마리가 어딥니까. 정말 혈석채집은 이제 문제없겠습니다.” 해솔의 친밀스탯은 한계가 있었고 검치호 잭슨과 함께 20마리의 칼날 까마귀들을 테이밍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 이상은 테이밍 되지도 않았고,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해솔이도 좀 빡세게 굴려야겠어.” “헤헤, 해솔이형도 이제 쭉쭉 강해지겠군요.” 이미 해솔의 레벨은 31. 그가 2년이 넘도록 F급에 머물렀던 것을 생각하면 단 세 번의 던전 경험으로 D급에 오른 것은 기함을 토해낼 속도지만 우진에게는 아쉽기만 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흡수한 강화석으로 인해 늘어난 마력을 비롯한 스탯치와 테이밍과 능력 각성에 따른 보정치였다. 전투경험이나 공략 경험 자체가 늘어난 것은 아니기에 아직 해솔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아참, 민찬이 바쁘겠지?” “바쁠 겁니다.” “타이탄 길드 쪽 전화번호 알아?” “음, 알아보겠습니다.” 승훈이 사무실에 전화해보더니 휴대폰을 우진에게 내밀었다. “사장님, 정 부사장입니다. “거, 되게 불안하나 보네.” 우진이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왜 그냥 전화번호나 문자로 찍지.”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 그냥 물어볼 거 있어서 그래.” [제가 직접 전달해 회신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바쁜지 아는데. 전화번호나 하나 찍어줘. 별일 아냐.” [정말 별일 아니시죠?] “거, 참.” 우진이 목소리에 힘을 주자 민찬이 즉시 꼬리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휴대폰으로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계속 수고해라. 곧 사무실 도착하니까 저녁이나 같이 먹자. 나갈 시간 없지? 난 짜장면.” “저도 짜장면이요.” “전 짬뽕으로 하겠습니다.” 눈치껏 끼어드는 성구와 승훈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들었지? 짜장 둘에 짬뽕 하나 추가. 해솔이 것도 알아보고 시켜놔.” [네, 알겠습니다.] 제발 더이상 사고를 치지 말았으면 하는 민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통화를 끊고 승훈에게 돌려주었다. 띠링. 우진은 문자알림음에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타이탄길드 비서실 직통입니다. XXX-XXX-XXXX] “국제통화 어떻게 하냐?”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뚜루루루. 승훈의 도움으로 수화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성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근데 저희 통역 없는데. 승훈씨 영어 할 줄 아세요?” “아, 아니요. 못합니다.” 지나치게 당황스러워하는 승훈이 급히 로드매니저를 보았으나 그도 곤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여보세요.] [아르달의 강우진이오.] 우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능숙한 영어에 성구와 승훈의 눈이 똥그래졌다. [즉시 길드마스터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아르달길드의 연락에 대한 대응 교육을 미리 받은 것인지 비서실 직원은 바로 길드마스터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르달 마스터 강. 무슨 일이십니까?] [전에 미국에서 머리통 보여준 놈 기억합니까?] [알 아사드 말입니까?] [오, 이름까지 아는 거보니 소재파악 끝났나요?] [아닙니다. 워낙 유명한 암살자다보니… 그의 정확한 소속은 없습니다. 자유 용병같이 활동하는데 주로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쪽의 일을 많이 처리했습니다. 이라크에서 활동한 이력도 있고, 시리아에서도 몇 번 있습니다. 정확한 배후를 지금 밝히기 위해 노력 하고 있으….] [내가 알 것 같은데.] [뭐라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알다마다 인가. 알 아사드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어디서 지령을 받은 것인지 누구인지 역추적 해나갈 수 있었다. 우진이 타이탄 길드에 바라는 것은 그저 약간의 도움 뿐. [테러 배후. 잡으러 같이 갈래요?] 감히 자신을 향해 암살자를 보내다니…. 이제 복수의 시간이다. < 83화 - 종말을 향해 > 끝 ⓒ 진설우 < 84화 - 종말을 향해 (2) > 사장실 테이블에 빙 둘러앉은 아르달의 핵심요원들은 탕수육에 소스를 부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최고 결정권자인 사장 강우진의 ‘난 아무거나.’가 낳은 참상이었다. 승훈의 주도 아래 펼쳐진 가위바위보에서 찍먹파가 이겼으나 그 꼴을 보던 우진이 ‘그냥 부어’를 외치는 바람에 탕수육그릇은 소스가 투하되었고 부먹파가 환호했다. 우진은 짜장면을 슥슥 비비다가 가만히 앉아있는 민찬을 보곤 그의 앞에 놓인 짜장면 그릇을 턱짓했다. “뭐해? 불겠다.” 민찬은 젓가락을 드는 대신 억울한 음성을 토해냈다. “사장님 정말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뭐가?” “지금 CCB에 속보로 뭐가 떴는지 아십니까? “뭔데?” 우진이 슥슥 비빈 짜장면을 한입 크게 입에 넣었다. “미 정부, 타이탄, 아르달 삼자 합동 대테러 진압부대 편성이랍니다.” “그래?” 우진이 소스에 젖은 탕수육을 하나 집어 간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음, 여기 맛있네. “거기도 입이 너무 싸네. 얼마됐다고 방송에서 떠들고 그래.” “사장님, 지금 이렇게 태평할것이 아닙니다.” “왜? 뭐가 문제야?” “언론사의 취재요청 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정도입니다.” 지금 사장실 밖 직원들은 모두가 전화기를 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화선 뽑아 그럼.” “그….” 뭐 이런 황당한 답이 있단 말인가? “어차피 다 거절할 거 아냐? 뭐하러 일일이 받아?” “하지만 그러면 다른 업무가….” “어차피 전화 때문에 업무마비라매?” 사장님이 왜 이러시지? 논리학원이라도 다니시나? 반박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치만….” “면접서류를 전화로 받아?”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전화 쓰지마.” 아, 이건…. 아무리 그래도 좀. 전화가 문제라고 전화를 안받는게 말이 되는 것인가? 민찬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이야기했다. “후, 사장님. 그렇게 되면 저희 길드의 대외적 이미지와 협력 중인 다른 여타 길드와의 신뢰가….” 우진이 피식 웃었다. “더 나빠지고 떨어질게 있어?” “그야….” 아하! 우리 회사 이미지 원래 안 좋았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한국 최고의 막무가내 길드. 6성 던전을 연달아 클로즈하는 실력 좋은 마스터가 없었으면 진즉 규탄되어 사라졌을 길드. 한대 맞은 듯 멍한 얼굴의 민찬을 보곤 우진이 승훈을 보고 고갯짓했다. “가서 뽑아.” “넵.” 비서실장이 되더니 우진의 명령이면 불이라도 뛰어들 승훈이었다. 당장 사장실 박으로 나가더니 전화선을 모조리 뽑도록 시켰다. “이제 문제없지? 편하게 일봐.” “…….” “뭐 그리 일일이 대응하고 있어.” 가끔 무시가 답일 때도 있다. 우진이 탕수육을 하나 더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야, 여기 맛있네. 여기 어디냐?” “소문각입니다.” “앞으로 여기 시켜.” “넵.” 우승훈이 헤실헤실 거리며 우진의 말에 맞장구 쳐주고 있었다. “사장님의 일 처리 능력은 정말 제갈공명급이십니다.” 우진이 아부하는 승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요즘 들어 하는 짓이 귀엽다. 얼핏 듣기로 집안이 그리 잘사는 건 아니라던데 그것 때문인지 열심히 하려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짜식…. 넌 오늘부터 호봉 하나 올려받아.” “사장님의 은혜가 하늘과 같습니다.” 콩가루다. 콩가루 회사다. 민찬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황당한 지시에 황당한 칭송에 이어 그나마 정상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띠리리리. 민찬의 휴대폰을 비롯해 몇몇 휴대전화들이 거의 동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벨소리를 토해냈다.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솔의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접촉할 거리가 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시도해보는 언론사였다. “다 꺼.” “넵.” 모두가 하나둘 휴대폰을 끄자 민찬도 자신의 휴대전화를 잡았다. “허허.” 전원키를 누르는 민찬은 깨달았다. 포기하자. 생각해볼수록 문제 될게 없었다. 자신들이 무슨 국가기관도 아니고, 해명할 필요성도 못 느끼겠다. 수습이야 정부가 알아서 하겠지. 뭐…. 띠리릭. 휴대폰 화면이 꺼지자 극에 이르던 스트레스 수치가 급격히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해결해야 될 사안이 하나 남았다. “사장님. 중동으로 가시게 되면 면접은 어떻게 진행합니까?” “그게 왜?” 그게 왜라니. 지원부의 인력이야 민찬이 뽑지만 각성자들은 우진이 꼭 참석하여 뽑도록 되어 있었다. “중동으로 가시면 얼마나 뒤에 돌아오실지도 모르는데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겠습니까?” “거 얼마나 걸린다고.” 테러리스트들의 진압이 그렇게 며칠 걸리지 않을 거였으면 진즉 이 세상에 테러는 사라졌겠지…. “한번에 뽑자.” “예? 가능하겠습니까?” “그래. 한번에 하자. 어디 큰 체육관이라도 빌려봐.” 뒤통수칠 구질구질한 놈들만 거르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놈들만 뽑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서류로 나오지 않는다. 관찰과 감지계열 스킬들을 총동원하여 직접 대면하고 봐야지. “그럼 언제로 하면 되겠습니까?” “음.” 우진은 짜장면을 한입 더 입에 넣고는 해솔을 보았다. 통솔이야 어차피 해솔에게 맡길 생각이었던지라, 해솔이 어느 정도는 성장해줘야 했다. 적어도 B급 정도…. “3주 뒤로 하자. 그때까지 지원자들 받고 장소 물색해.” “음, 알겠습니다.” 민찬은 크게 해결해야 될 일들에 대한 답이 정해지자 랩을 뜯고 짜장면을 비볐다. 이미 불어 잘 비벼지지 않는 그것을 보곤 우진이 혀를 찼다. “거봐. 불기 전에 비비라니까.” “괜찮습니다.” 짜장면이 중요한 게 아닌데 말이다. 민찬이 짜장면을 비비며 물었다. “그럼 타이탄에는 3주 뒤 사장님 합류하는 걸로 정하면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예?” 우진이 씨익 웃었다. “그전에 돌아올 건데 뭐.” “3, 3주 만에 말입니까?” “3주는 무슨, 일주일이면 되겠구먼.” “…….” 3주 뒤에 떠난다는 말이 아니었구나. 3주 안에 돌아오겠다니…. “그럼 언제 출발하십니까?” “타이탄에 연락해. 중동 갈 때 나 태워가라고.” “…….” 누가 보면 콜택시 부르는줄 알겠습니다. 하지만 민찬은 곧 수긍했다. 우진이라면 그럴 가치가 있었다. 아니, 당연히 모셔 가려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난 있다 퇴근한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우진의 전담비서인 우승훈이 즉각 나섰다. 우진으로부터 기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내일 적당한 6성 던전으로 예약해놔. 비행기 오기 전까지 가르쳐줄 건 가르쳐 주고 갈 테니까.” 중동에서 돌아오는 게 얼마 걸리진 않겠지만 그동안 성구와 해솔이 둘만으로 던전 공략 할 정도의 기반은 닦아주고 가야 할 터였다. “넵.” 우진은 짜장면을 모두 먹고는 내일을 기약하며 퇴근했고, 민찬은 타이탄을 향해 보내는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타이탄 길드 본사. 마스터 딘쿤은 이 엄청난 제안을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러리스트를 색출해 뿌리 뽑는다.’ 저번 미사일 테러는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끔찍한 악몽이었다. 같은 인간의 손에 자행되는 재앙이라 그럴까, 우습지만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던전 브레이크보다 테러를 더 혐오했다. 우진이 알 아사드의 배후를 알고 있다. 그리고 먼저 제안했다. 복수를 하러 갈 건데 함께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테러단체를 향한 엄정한 응징이 될 수 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미국의 몇몇 기업도 관계되어있어.’ 조사 중 찾은 몇 가지 물증. 인공 던전 래쉬모드의 사건 때 잡아들인 갱단의 입을 통해 들었다. 어느 기업으로부터 후원받고 있다고…. 그 정체는 오직 보스만 알고 있는데 하필 보스가 래쉬모드의 사건 때 죽었다. 거기에 함께 발견된 몇몇 과학자들의 신원과 몇몇 기업들과의 관계까지 확인했지만 아직은 심증에 불과한 단계. 아직 조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은밀하고 조용하게…. 그런데 우진의 제안이 왔다. 섣불리 행동했다가 적이 꼬리를 자르고 발뺌하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이대로 행동하는 게 맞는 것인가? 고민은 또 있었다. ‘정부가 움직이려 할까?’ 기업들이 정부와 끈이 닿아있는 것은 당연했다. 어쩌면 테러응징 자체를 반대해 무산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아르달 길드는 복수를 위해 중동으로 향할 것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를 미국정부가, 미국의 길드가 아닌 한국의 길드가 복수를 위해 중동으로 향한다. ‘좋지 않아.’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여 손해 볼 것은 없지만 중요한 한 가지를 잃는다. 아니 어쩌면 이만한 손해가 없을지도 모른다. 타이탄의 명성, 그리고 상징 가치. 미국을 대표하는 제일 길드이자 미국을 수호한다는 이미지 자체에 타격을 맡게 된다. 지금 당장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성녀의 예언대로 지구에 대재앙이 닥치면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타이탄은 상징적 의미가 되어야 한다. 재앙에서 사람들이 사람으로서의 도덕성을 잃지 않을 희망이자 방패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번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도 단시일 내에 결정해서…. 딘쿤은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CCB에 연락해.” [네, 마스터.] 일단 지르고 보는 거다. 행동하지 않고는 후일 재앙에서 빛나는 등불이 되어 세계를 주도하기 힘들다. 명분도 충분하다. 미국인들이 원한다. 정부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배후가 누군지 모르지만 마음 꽤 조리게 될 것이다. * 화랑의 길드 마스터. 이상호는 요즘 굉장히 심기가 좋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은 더 심했다. 티비를 켜도, 라디오를 들어도, 인터넷을 봐도 온통 아르달의 이야기 뿐이다. 강우진, 강우진, 강우진. 온통 그에 대한 이야기, 가십거리들로 넘쳐난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MBS, 리포터 정수연입니다. 이곳은 현재 길드 아르달과 유일하게 유선상 통화가 가능한 중국음식점입니다. 음식점 사장님과 인터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좀 삐- 삐- 장사 안되게 뭔 삐- 삐- 좀 가시라고 삐- 삐-] [네, 아르달의 최후 연락 음식점답게 폭력적이며 과격한데요. 이를….] 화가 굉장히 많이 난듯한 중국집 사장님과 그 주변에 인산인해를 이룬 기자들을 보며 리모컨의 전원을 눌렀다. “별 거지 같은… 후….” 화랑 길드의 마스터 이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지 온갖 강우진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업계 최고는 개뿔….” 중동의 암살테러집단과의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애초에 추적이 불가능한 번호로 그들이 일방적으로 연락해왔다. 그쪽에서 다시 연락해오지 않는 이상 이상호가 다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김회장은 아예 연락이 닿지 않았고 최의원은 번번히 만남을 회피하고 있었다. 길드의 유일한 A급 각성자 이연희를 잃고 나서는 화랑길드의 위세는 추락 중이고, 아르달 길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이젠 감히 뒤에서 뭔 일을 꾸미기도 어려울 정도로 높은곳에 올라있었다. 이리저리 답답하기만 한데 이상호의 앞에 흰 연기가 뭉쳐 들더니 환영을 만들어냈다. “누, 누구야? 뭐야?” 그 자체도 B급의 각성자. 이상호는 놀라긴 했지만 침착히 상대를 노려보았다. 희끗희끗한 연기로 이루어진 그녀인지 그인지 모를 존재가 웃었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 생전 처음 듣는 말이 머릿속에 울렸으나 그 의미가 명확히 이해되었다. 생소한 언어지만 뜻은 전해졌다. “누구지?” [이연희를 죽인 그 녀석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 이연희를 죽인 그 녀석이라…. 상대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강우진?” [쿡쿡쿡, 복수할 힘을 주지. 동생이 죽은 던전으로 가라.] “뭐야?” 누군지 알고 따른단 말인가? 아니, 정체가 뭐란 말인가? 이상호가 버럭 고함을 지르는데 눈을 번쩍 떴다. “뭐야? 기절했던 건가?” 스트레스를 하도 받다 보니 잠깐 정신이라도 잃은 것일까? 너무나 생생한 환영을 본 탓이라 이상호는 꿈이라도 꾼 것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환영이 있던 자리에 놓인 검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동생 이연희가 사용하던 검. 다급히 다가가 확인해보니 손잡이에 적힌 이니셜이 연희의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 어떻게?” 동생이 죽은 던전 안에서 소멸하였어야 할 그 검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당시 홀로 던전에서 나온 강우진이 챙겨오지 않았다면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공략 이후 재입장할 때 던전은 초기화되었을테니까. 기존의 던전 이론과 맞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환영이 되뇌던 말이 떠올랐다. “복수, 힘….” 이상호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 84화 - 종말을 향해 (2) > 끝 ⓒ 진설우 < 85화 - 종말을 향해 (3) > 성녀는 여신의 동상 앞에 섰다. “여신이시여. 정말 가야 하나이까?” 간다 간다. 생각만 하며 주저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 운명이 그리 흘러가는지 임모탈이 먼저 타이탄에 협조를 요청하여 중동의 테러진압에 나선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보고 오라고 손짓을 하는듯하여 영 마음이 불편했다. “하아.” 안 갈 수도 없었다. 지금도 여신의 동상이 자신을 주시하는 듯 마음이 불편했다. 애초에 자신을 지구로 인도한 것도 여신. 그녀가 임모탈에게 가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그가 아르펜을 구할 구원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가겠습니다.” 그녀의 결심에 여신의 동상이 미소 짓는듯한 것은 착각일까? 성녀는 마음먹은 즉시 여신의 신탁을 타이탄의 길드마스터에게 전했다. 그리고 딘쿤은 즉시 성녀를 찾아왔다. “안됩니다.” 그간 타이탄길드에서 성녀에게 쏟은 정성이 얼마인데 이제와 떠난다니, 될 말인가? “신탁이 그러합니다. 저 또한 내키지 않는 걸음이나 더는 어쩔 수 없습니다.” “난감하군요.” 딘쿤은 진심으로 난감했다. 성녀를 돕고, 길드의 고위 각성자들을 성기사단에 배치해 준 것은 거저 선의로 대의를 위해, 아르펜의 해방을 위해 한 것이 아니다. 타이탄 길드로서도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부리는 기적의 축복을 찍은 동영상으로 타이탄길드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그녀 치료한 수많은 사람들이 아리아 교단을, 또 타이탄 길드를 고마워했다. 그녀의 예지능력도 큰 힘이 되었다. 전보다 세배는 많은 수의 상위 던전을 얻었으며 그것은 오롯이 각성자의 유입으로 이어졌다. 던전 확보력이 뛰어난 길드에 각성자가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기사단으로 많은 고위 각성자가 유출되었는데도 타이탄 길드의 전력은 보다 상승했다. 양적으로 보면 몇 배나 팽창했고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만족할 수야 있겠는가? 성녀가 가져다준 이익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후 아르펜 정벌과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에서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신을 찾듯, 몬스터가 들끓는 재앙에서 강력한 비호단체와 신을 찾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녀를 쥐고 있어야 앞으로의 상황에 대응하기 좋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행로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간 타이탄 길드의 배려에는 감사드려요. 제가 받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겠습니다.” 성녀의 말에 딘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럴 순 없지. “신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지만, 성기사단은 계속해서 성녀님을 따를 것입니다. 저희 길드도 성녀님과 아리아 교단을 보다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 “정말인가요?”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감사의 표시를 했다. 딘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리아교단은 이곳이니 성녀님께서는 언제든 돌아오셔도 됩니다.” 아리아교의 본단은 어차피 아르펜행성에 있다. 이곳은 그저 아리아교의 지구에 새워진 임시교단일 뿐이다. 성녀 메르디도 딘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해밀턴부인이 여신님의 은총을 받아, 은혜를 나눌수 있게 되었으니 이곳의 교단을 책임지는 주교로 임명토록 하겠습니다.” “성녀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딘쿤이 웃었다. 차선책 정도는 되었다. 최선은 성녀가 타이탄길드의 교단에 남는 것이지만 그게 안 되니 이 정도로 만족했다. 아리아교단은 여전히 타이탄과 함께한다. 그리고 성녀를 따라가 보필하는 성기사단들도 타이탄길드의 인물들. 이정도 끈이면 되었다. “그럼 성녀님도 이번에 중동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한국으로?” 성녀 메르디가 잠시 고민했으나 곧 결정을 내렸다. 여신은 그에게 가라고 하셨다. “중동으로 가겠어요.” “준비합지요.” 딘쿤이 즉시 길드의 전용기를 대기시켰다. 우진이 타이탄에게 구한 협조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중동으로 갈 교통편과 우진으로 인해 무너진 그곳의 안정적인 통제. 전자는 타이탄이 제공할 것이고, 후자는 이미 주둔 중인 미군이 수행할 것이다. 자신이 직접 갈 필요는 없다. 메르디와 성기사단을 실은 전용기가 공항을 출발했다. * 던전 안. “키바. 그만해.” [주인의 뜻 대로!] 호탕한 키바의 목소리는 언제나 든든한 울림이 있었다. 대련인지 실전인지 모를 무자비한 결투에 지쳐 쓰러진 성구와 해솔을 보았다. “으으.” “사장님… 살려주십시오.” 성구는 배에 구멍이 났고, 해솔은 어깨가 박살이 났다. 한쪽 다리는 기이하게 꺾여 걷기는 커녕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에 누운 채로 있었다. “쯧.” 우진이 끌어모은 영혼을 주입해 둘을 치료했다. “커흑.” 돌아간 뼈가 제자리를 갖추며 엄청난 고통을 동반했으나 몸은 빠르게 치유되고 있었다. 잠시 뒤 둘의 혈색이 제법 돌아왔으나 아직도 멍한 얼굴은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많이 겪어본 성구가 빨랐다. “휴우, 키바씨는 정말 쌔네요.” “당연하지. 오크 로드였는데.” 한 부족을 책임진다는 족장. 그들 중에서도 대표할만한 대족장이 키바였다. 잿빛 날개 부족의 키바라면 트라넷의 졸개들도 알아볼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A급, C급. 아르펜의 등급으로 이제 겨우 6서클과 4서클에 입문한 그들이다. 키바를 감당할 정도가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해솔이, 정신 차려.” “예? 네, 넵!” 정말 죽는 것은 아닌가 공포를 맛봤다. 해솔은 멍하던 감각을 우진의 호통에 바짝 조였다. 거의 죽어가는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우진의 표정이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얼추 5성 던전. 무리하면 6성 던전도 클리어 가능하겠네.” “헤헤. 형님의 지도 덕분입니다.” 성구의 아부에 해솔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람이 회복이 어떻게 저리 빠를 수 있을까? 이미 이 정도 상황은 많이 겪었을 성구가 대단해 보였다. “그럼 다시 가자.” “넵.” “…….” 성구가 다시 도전적 눈빛을 보이는데 해솔은 덜컥 두려운 얼굴이었다. ‘쯧, 멀었네.’ 죽을뻔했으면 두려운 게 맞지. 그런데 그것도 반복되면 이기려 한다. 성구처럼 죽지 않으려 강해진다. 해솔도 그리 될 것이다. 성구와 해솔의 능력이 던전의 공략시간을 대폭 줄여주었다. 우진은 남는 시간 동안 키바를 비롯한 데스나이트들을 불러 둘을 단련 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던전 안에서의 시간은 현실에 비해 4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제각각 다른 무기들만큼이나 전투스타일도 다른 데스나이트들인지라 둘은 여러 가지 적을 가정한 상황을 맞이해 제법 현실적인 전투감각들을 익혀낼 수 있을 것 이다. “락토.” 우진이 차례로 데스나이트들을 소환해 소개했고 죽음의 경계에 걸친 그들의 대면식은 우진이 중동으로 떠나는 약속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 대구의 죽전역 인근에 멈춰선 검은색 세단. 정신없이 차를 몰아온 화랑의 길드마스터 이상호는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이게 뭐하자는 건지.” 귀신에 홀린 것인지… 차를 타고 내려오는 와중에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그 환상 같은 현상을 믿는가? 안 믿자니 이렇게 연희가 쓰던 검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 “도대체 누가.” 던전은 공략 후 재입장하면 초기화되어 기본 몬스터가 새롭게 소환된다. 그 이전의 던전은 초기화되며 모든 것이 사라진다. 누가 있어 이 법칙을 거스를 것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이거나 던전의 구조를, 어쩌면 던전이 생겨난 현상에 접근한 존재들…. “하아.” 믿든 안 믿든 유혹이 되었고, 이상호는 대구까지 내려왔다. 차에서 내린 그가 연희가 죽었던 죽전역 입구를 찾았다. “제길.” 생각해보면 여기서부터 모든 게 틀어졌다. 자신이 괜히 강우진을 떠보겠다고 연희를 대구로 내려보내지만 않았어도…. 지하철역의 입구에는 강우진의 작은 동상이 서 있었다. [재앙을 막아낸 영웅을 기리며.] 대구시가 아닌 인근 동네 주민들의 사비로 제작된 그 작은 동상을 보자 이상호는 욕지기가 다시 올라왔다. 이 주민 사람들에겐 영웅일지 몰라도 이상호에겐 원수였다. 자기 일을 망치고, 동생을 죽였고, 길드 자체를 고꾸라뜨린 원흉. 이상호가 던전의 입구에 섰다. 관리국의 직원이 그런 이상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던전은 이용자들이 있어 결계가 처져있었다. “이봐요. 위험합니다. 예약 안 하셨으면 저리 가세요.” 이젠 하다못해 지방에 있는 관리국 직원도 자신을 몰라보나? 대한민국 3대 길드의 마스터였던 자신을? 짜증이 치밀었다. 가슴이 울컥 화가 솟았다. “어어?” 던전의 입구를 지키던 공무원과 그 옆에 대기 중이던 경호업체의 직원들 셋이 동시에 몸을 띄웠다. 자신의 통제와 상관없는 그 초자연적인 현상에 셋의 당황스러운 눈동자가 원흉으로 짐작되는 이상호에게 향했다. “나 몰라?” 보호장비 없이 물에 잠수라도 한 듯 온몸에서 느껴지는 압박이 심해졌다. 그 고통에 머리가 어질하면서도 생존본능이 꿈틀하며 이상호의 얼굴을 보곤 겨우 아는 인물임을 떠올렸다. “화, 화랑의 길드 마스터.” 이상호가 셋을 옥죄던 염동력을 풀었다. 땅에 털썩 떨어진 공무원이 숨을 몰아쉬더니 겨우 정신을 차리곤 물었다. “여, 여긴 무슨 용무로….” “…….” 그래. 왜 왔을까? 힘을 위해? 복수할 힘이 없어서? 우습다. 알 수 없는 환영의 말에 속아 이곳에 온 것도, 그런 환영의 말이라도 믿고 싶은 자신의 처지도, 모두 우스웠다. “별일 아니오.” 이상호는 등을 돌렸다. 아무리 사정이 궁해도 그렇지 미친놈처럼 이게 뭐란 말인가? 판단력을 상실한 사이비 신도 같지 않은가? 이상호가 막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크큭, 마음에 들어.] 눈앞에 다시 등장한 환영의 모습에 이상호의 눈동자가 푸들 떨렸다. [따라오면 힘을 주지.] 환영은 다시 하얀 연기가 되어 이상호의 귓불을 스치듯 지나치며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에 흡수되듯 사라진 환영을 보곤 이상호가 눈을 비볐다. ‘뭐야?’ 정말 귀신에라도 홀렸단 말인가? 이상호는 고개를 흔드는데 던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팟! 던전에서 솟구친 빛 무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던전 리셋이다!” “헉, 진짜다.” 사거리에 위치한 던전이다. 오가는 행인들이며 각성자들이 모두 그것을 보곤 몰려들고 있었다. 우연이라 치기에는 너무나 공교로운 일에 이상호의 눈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여보세요? 여기 죽전역….” 던전 리셋은 발생한 시간이 중요하다. 그로부터 30일간 공략시간이 주어지니까. 황급히 전화 중이던 공무원은 전화기가 터져나가 자신의 일을 끝까지 수행할 수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공무원이 주변을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공무원과 경호원의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옆으로 날아가 벽에 그대로 머리를 처박았다. 퍼어억!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벽에 긴 혈흔을 남기며 셋의 신형이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힘.” 이상호는 자석에 끌리듯 리셋 된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의 에너지가 어떤지, 등급이 어떤지, B급 각성자일 뿐인 자신이 공략 가능한지 등의 현실적 판단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복수.” 저곳에 자신의 힘이 되어줄 무언가가 있다. 사이비 신도가 되어도 좋다. 힘을 다오. 판단력을 상실한 지구인이 던전의 입구를 통과했다. < 85화 - 종말을 향해 (3) > 끝 ⓒ 진설우 < 86화 - 종말을 향해 (4)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던전에 입장한 이상호는 화들짝 놀랐다. 뒤늦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후회가 밀려왔으나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버렸다. 뒤로는 결계가 생성되어 나갈수 없다. 방법은 던전을 공략하고 귀환석을 찾아 나가는 방법 뿐. [아니지. 내 초대에 응한다면 쉽게 나갈 수 있지.] “누, 누구냐?” [크크큭.] 머릿속에서 울리는 웃음소리에 이상호는 오싹한 기분이었다. [힘을 원한다면 와봐.] 지이이잉. 이상호의 눈앞에 붉은 포탈이 생성되었다. ‘기본 몬스터를 해치우지도 않았는데?’ 지하철역 내의 모든 몬스터를 없애야 진정한 상위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된다. 그런데 입장하자마자 포탈이 생성되었다. 정확히는 의문의 목소리가 만들어 낸 것. 이상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 있었다. ‘던전을 조종 가능한 자다.’ 누군지 모른다. 신인지 악마인지, 외계에서 온 침략자인지 모르지만 던전을 조종할 수 있는 자다. 그런 자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포탈을 통과하는 것 외에 아무런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던전 공략’이란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힘’을 준다며 유혹하는 어떤 ‘존재’와의 거래를 앞두고 있을 뿐이다. 위이잉. 포탈을 통과하며 들리는 이명과 붕 뜬 몸의 감각은 그를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의 던전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들게 해주었다. B급 각성자인 그도 몇 번 상위 던전의 공략경험이 있었고 이 감각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장관은 분명 이상호의 눈에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휘이이잉. 찬바람 부는 거대한 얼음 성. 필드라고 부를 것도 없는 황량한 허허벌판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가득했고 길을 따라 난 얕은 구릉엔 거대한 얼음 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위압적인 풍광에 이상호는 절로 움츠려 들었다. 몸이 떨리는 것은 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키는 그때 성에서부터 출발한 거대한 무언가가 이상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쿵, 쿵, 쿵! 거구가 내는 발자국 진동만큼이나 이상호의 심장도 뛰었다. 염동력을 자신의 특기로 가지고 있는 이상호다. 신체능력 각성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약한 존재. “으윽.”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의 접근에 이상호가 절로 신음했다. “크르르릉.” 거구의 존재는 구부정한 허리에 덥수룩한 흰털을 가진 아이스 트롤이었다. 사람덩치의 세배는 될듯한 아이스 트롤이 이상호의 코앞에 멈춰 섰다. “킁킁, 킁.” “…….” 코를 벌름거리며 자신의 냄새를 맡았다. 녀석의 입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에도 이상호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악취미의 존재가 자신을 그저 아이스 트롤의 먹이로 삼자고 이곳에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쿠르릉.” 녀석이 뒤돌았을 때 손으로 끌고 온 것이 보였다. 마차처럼 보이는 썰매였는데 녀석은 그것을 내보이곤 등을 돌렸다. 명확한 의사전달에 이상호가 심호흡하고는 썰매에 올라탔다. “쿠르릉.” 녀석은 콧김을 뿜으며 썰매를 끌고 성으로 달렸다. 워낙에 커다랗게 지어진 성인지라 가까이 느껴졌는데 썰매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한참이나 가야 했다. 성문 앞에 서보니 높이가 10미터는 될듯해 평소 이성을 이용하는 주인의 덩치가 짐작되었다. 열린 성문을 따라 천천히 쉼없이 걸었다. 힐끗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스트롤들이 심심찮게 보였고, 마치 맘모스 같은 거구의 괴수들도 몇 보였다. 이상호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걸은 후에야 성의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의 거처 같은 그곳은 반짝이는 얼음세공으로 꾸며져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는 궁전이었다. 거대한 홀의 중앙에 높게 쌓아진 계단과 그 정점에 자리한 왕좌에 자신을 부른 존재가 앉아 있었다. “진짜 왔네.” 존재는 얼음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이스골렘과도 같은 모습이었으나 인간의 체형이나 신장과 비슷했다. 키가 비슷하다고 하나 존재감은 일개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 이상호는 절로 존재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를 보며 얼음으로 이루어진 그것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도 빨라.” 마음에 드는 듯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와 이상호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봐.” “예.” 이상호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고개를 들었다. 온 몸으로 느껴졌다. 눈앞의 얼음 조각상 같은 존재는 손끝 한방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자신을 카메라 앞에서 줘 팼던 강우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존재감을 마주하고 있었다. “내 차원 영지로의 방문을 환영하지.” “…….” “쿠쿡, 떨 것 없어.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 전령을 보냈던 거니까.” 얼음으로 만들어진 존재의 옆에 하얀 형체의 유령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네가 원하는 힘을 주지.” 힘을 준다라… 좋은 말이다. 원하던 말이고,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고 존재는 힘을 운운하며 자신을 불러들인 것은 미끼이자 보상이다. “무엇을 원하는지요.” “크크큭.” 존재가 웃었다. “이래서 인간들이 좋아.” 주제를 넘어선 욕심에 대가와 보상이라는 아주 근원적 논리에 가장 접근한 존재가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주 좋은 먹이이자 에너지원이 되어주고 말이다. “난 지구를 선점하고 싶지만 지구는 아직 나를 받아들이긴 이르지.” “…….” 이상호는 그저 묵묵히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굉장히 비밀스럽고 지구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엄청난 사실을 들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랫것들에게 그 좋은 사냥터를 빼앗길순 없단 말이야.” 존재는 이상호에게서 등을 돌려 자신이 앉아있던 왕좌를 보았다. 25개의 계단. 영광된 칭호 트라넷의 대군주 25좌. 이엘로. “멍청한 래쉬모드처럼 불안정한 링크는 꺼림칙하단 말이야?” 트라넷의 72군단장. 왕위를 가진 72명의 대군주들. 그들은 하나의 왕좌를 가진 1좌부터 72개의 왕좌를 가진 절대군주까지…. 모두가 새로운 사냥터가 필요했다. 지구는 동기화 중이었고 에너지 총량이 낮은 1좌부터 링크될 것이다. 그들은 지구에서 힘을 키울 것이며 상위의 왕좌를 노릴 것이다. 이엘로는 그것이 꺼림칙했다. 아래 좌의 대군주들보다 먼저 지구의 땅을 밟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비슷하게, 그렇게 늦지 않게 지구에 링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구에 변화가 필요했다. “마음껏 난장을 부리면 돼.” 이엘로가 다시 등을 돌려 무릎 꿇은 이상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킬북을 통해 능력을 배우듯 새로운 지식이 이상호의 머릿속에 흡수되었다. ‘이, 이건.’ 던전 브레이크. 정확히는 30일이 지나야 쓸 수 있는 귀환석을 ‘지구인’ 이상호가 매개가 되어 앞당기는 것이다. 몬스터들로부터 지구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 “아, 힘을 나눠주지. 그 골치 아픈 임모탈에 대한 원한이 대단한듯하니 말이야.” 이엘로가 자신의 어깨에 붙은 얼음조각을 떼 이상호에게 주었다. 이상호가 그것을 공손히 받자 눈꽃처럼 깨진 얼음조각들이 이상호의 몸으로 순식간에 흡수되었다. ‘이, 이럴 수가!’ 느껴진다. 넘치는 에너지가 용솟음 치고 있었다. 새로운 능력들과 늘어난 지식. ‘신이다. 이들은 신이다.’ 아스가르드가 있다면 이러할까? 이들의 세상은 신계라고 부를까? 신이 지구에 현신하려 하고 있다. 멍청한 지구인들이 부질없는 저항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엔 이들이 군림할 것이다. 이상호는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막을 수 없다. 이 엄청난 힘과 존재 앞에 무릎 꿇었다. 신의 사자가 되어주마. 복수해주고 파괴해주마. <25좌의 대군주 이엘로의 가신이 되었습니다.> 이엘로는 미소 지었다. 전령을 보낸 대군주가 자신만은 아닐 것이다. 지구의 동기화는 가속화 될 것이고 아랫것들이 힘을 키우기 전에 자신들이 현신할 것이다. 왕좌를 지키고 상위의 왕좌에 도전할 것이다. “마음껏 날뛰어라. 나의 종이여.” 이상호의 눈에 푸른 귀기가 일렁였다. * 한번 타봤다고 익숙한 기장과 승무원과 인사까지 해가며 오른 타이탄길드의 전용기에 익숙한 여인이 기다리고 있자 우진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네가 왜 여기 있냐?” “…….” 성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우진의 옆에 검은 연기가 생기더니 키바가 실체화 했다. [간악한 계집!] 키바의 외침에 비행기 공간이 쩌렁쩌렁할 지경이었다. 당장에 달려들어 도끼로 두 쪽을 내려는 키바를 우진이 통제했다. “부르기 전에 멋대로 나오지 마.” 그르르르릉. 키바의 거친 숨소리가 성녀를 압박했다. 성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으나 그렇다고 굴하지도 않았다. 우진은 의식으로 연결된 소환의 방에서 서로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데스나이트들의 의지를 읽고는 한숨 쉬었다. “너도 들어가.” 절대복종해야 할 임모탈의 명. 키바가 살기를 감추지 않고 메르디를 쏘아보다가 검은 연기로 변해 우진에게 흡수되었다. “…….” 무언가 엄청난 존재가 다녀간 탓에 승무원들이 벽에 붙어 바들바들 떨었고 성녀와 함께 온 성기사단들도 바짝 긴장해 몸을 굳혔다. 한순간 보여준 엄청난 살기와 위압감은 A급 B급으로 이루어진 성기사단들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도 중동 가냐?” “예에….” “애들이 싫어하잖아. 왜 따라오려고 그래?” “…여신님의 신탁이 계셨습니다. 임모탈을 보필하라는….” “아오, 그 누님은 왜 그런데?” 우진이 인상을 팍 썼다. 성녀가 무슨 얼어 죽을 네크로맨서 보필인가? “죄, 죄송합니다.” 메르디가 고개를 조아렸다. 신을 대면한 존재. 임모탈의 앞에서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메르디였다. 자신은 그저 신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신의 종일 뿐이니까. “어휴, 됐다. 네가 미안할 게 뭐냐.” 성녀는 신이 까라면 까야 한다. 아리아 여신이 악취미지 성녀인 메르디가 무슨 죄겠는가. “괜히 가까이 다가오지 마.” “예에.” “괜히 근처에서 신성마법 같은 거 쓰지 말고.” “예….” 우진은 그래도 못마땅한지 다시 한번 주의를 시켰다. “진짜 쓰지 마. 괜히 애들한테 신성력 튀기면 죽는다.” “예에, 조심하겠습니다.” 아직도 소환의 방에서 날뛰는듯한 데스나이트들의 원성에 우진이 이상을 찌푸렸다. 우진이야 상관없지만 그의 권속. 악마인 비비나 골렘인 돌쇠는 괜찮았는데, 언데드계열의 권속들은 성녀를 지나치게 싫어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부리는 신성력을 싫어했다. “에휴, 모르겠다.” 우진이 털썩 자리를 찾아 앉았고, 좌석벨트를 맸다. 성녀도 멀찍이 떨어져 좌석벨트를 매며 신에게 기도했다. ‘여신이시여, 저를 가엽게 여기시거든 보살펴 주옵소서.’ 아르펜의 구원도 좋고, 다 좋다. 우진을 따르는 동안은 눈칫밥 생활을 해야 할듯하니 앞날이 캄캄한 것이 벌써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움츠러들자 따라온 성 기사단들도 덩달아 우진의 눈치를 슬슬 보았다. “아, 드라마나 넣어올걸 그랬네.” 우진이 아쉬운 후회를 했으나 이미 늦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중동으로 향했다. < 86화 - 종말을 향해 (4) > 끝 ⓒ 진설우 < 87화 - 사막의 분노 > 아프간 바그람 공군기지. 사령관 데이비드 게이츠 장군은 국방부장관으로부터의 전화를 끊고는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회의의 주제는 하나. “지금 타이탄 길드의 전용기를 탄 한국국적의 각성자가 본토의 미사일 테러 배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오고 있다.” “테러를 막은 그때의 한국인인 모양이군요.” “그렇다. 배후의 색출과 복수에 직접 나서길 원하며 우리 군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 사령관 데이비드의 말에 참모 하나가 즉각 되물었다. “각성자라고 하지만 전쟁은 위험합니다. 손발이 맞지 않는 민간인과의 합동작전은 더욱 위험합니다.” 적군보다 멍청한 아군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알량한 능력을 믿고 나서는 각성자라면 더욱 더 위험했다. 각성자라고 하여 총알 맞고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전쟁터는 눈먼 총알에 맞고 죽는 그런 곳이니까. “음, 타이탄 길드에서 보내온 참조 영상이다.” 지휘관의 말에 부관이 즉시 영상을 재생했다. [오, * 전용기에서 내린 우진과 타이탄 길드의 사람들은 곧장 사령관실로 안내되었다. 사령관 데이비드와 짧은 인사가 오간 후 우진의 요청으로 곧장 작전수립에 들어갔다. “어떻게 입수한 정보입니까?” 가장 궁금한 것이 그것이다. 미국의 특수정보단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미사일 테러 배후에 대한 정보를 우진이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 뭐.” 우진은 데스 나이트가 되어버린 알 아사드를 불러냈다. 여전히 충성심이나 신뢰는 약하지만 복종은 더욱 커져 필요지배력이 80으로 낮아진 알 아사드를 보며 물었다. “자, 다 말해봐.” [자주 거래하던 브로커에게 받은 의뢰다. 한국인 각성자를 암살하라는….] 한때 자신을 표적으로 삼은 암살자를 자신의 소환수로 두고 있는 강우진을 작전실의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으나 우진은 개의치 않았다. “그게 누구야?” [이란출신의 사업가다. 이름은 모르며 사진을 보면…….] 알 아사드의 요청에 부관이 이란 출신의 사업가 중에 주의할 인물들의 리스트를 사진으로 띄웠다. 알 아사드가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흠, 이 사람은 나세르 살체군요. 반군과 정부군에 모두 무기를 판매하는 놈입니다. 주시 중이죠.” [돈 될만한 각종 의뢰를 중개한다.] 우진이 사진을 보았다. 나세르 살체라는 사업가는 중개인. 이놈을 털어보면 누가 자신의 암살을 지시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가면 만납니까?” “워어, 급하기도 하셔라.” 당장에라도 찾아가려는 듯한 우진의 행동에 데이비드가 만류했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참모들과 세부작전 수립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보를 뱉었으니 잠시 기다리는 이야기. 상대는 미군도 주시하고 있긴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저 합법적 사업가일 뿐이다. 하지만 미국의 테러를 사주한 인물. 군권력을 동원해 사로잡아도 될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혹시라도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치기 전에 사로잡으려면 제대로 된 작전이 필요했다. “놈에게 들키지 않고 며칠 동안 감시할 방법이 있어. 놈을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 거리까지 날 안내만 해도 돼.” 딱히 상대와 만나 협상하듯 꾸며, 유인할 것도 없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근처에 다다르면 깨비를 붙일 것이다. 며칠 기다려보고 놈의 행동패턴을 본 다음 지난 거래에 대한 장부라던가, 저장된 거래내역등을 추적할 것이다. “그럼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겠지. 어때?” “…….” 우진의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다. 이상한 해골기사의 말만 믿고 나세르 살체를 체포했는데 그가 테러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미군은 국제적 지탄을 피할 길이 없었다. 우진은 보다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려 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진으로서도 나세르 살체로 부터 자신의 암살지시 배후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그 뒤로 추격할 일이 막막해지니 좀 더 신중을 기하려는 것이다. ‘누군지 걸리기만 해봐.’ 우진의 제안을 잠시 고민한 데이비드가 답했다. “좋습니다. 함께 작전을 수립하지요.” 작전명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고 정해지고 우진은 [그림자에 침 바르기]라고 부르는 작전이 수립되었다. * 파키스탄 페샤와르. 부우우웅. 택시의 뒷 자석에 변장한 우진과 사복을 입은 미군소속 정보장교 레이첼 박, 한국이름 박은지 중위가 타고 있었다. 어딜 보나 관광 온 동양인커플로 보이는 그들은 목적지인 호텔을 향해 가고 있었다. “뭘 그리 긴장해?” “후우, 처음이라 그래요.” 현장과는 거리가 먼 업무를 보던 레이첼이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이유는 그녀가 우진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이어서였다. 외모에서 위화감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커플로 위장해 돌아다니기 좋았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지원병력은 위장한 채 다른 차량을 타고 택시 뒤를 따르고 있을 것이다 “그냥 관광하러 왔다고 생각해. 이것 봐 얼마나… 그리 좋지는 않네.” 창밖을 가리키던 우진은 와르르 무너진 건물과 그 주변을 통제하는 군인들과 아이들, 거리의 사람들을 보곤 말끝을 흐렸다. “얼마 전 폭탄테러가 있었던 곳이에요.” 정보장교인지라 아프간은 물론 인접한 파키스탄의 테러소식도 모두 꿰고 있는 그녀였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봐?” “여기선 빈번하죠. 본토에선 이런 테러 하나만 나도 난리겠지만 여기선 일상이에요.” “흐음.”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을 보던 우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전장의 기운이 감도는 묘한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그를 아르펜으로 옮겨놓은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역시 여유롭구나.’ 레이첼은 미소마저 짓고 있는 강우진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강우진에 대한 모든 자료를 가지고 있으며 검토해보았다. 그저 그런 각성자라고 하기에는 우진의 등급이 너무 높았고, 그의 과감한 행동도 특이했다. 그녀의 임무는 목표인 나세르 살체가 방문하기로 한 호텔의 레스토랑에 안내하는 것 외에 욱하는 성격과 막무가내의 행동을 보이기도 하기에 그를 잘 구슬려 통제하는 것도 또 하나의 주요임무이기도 했다. “이제 곧 도착이에요. 혹시라도 눈에 띄는 행동이나 돌발 행동을 삼가주세요.” “걱정마.” 우진과 레이첼은 호텔에 들어가 예약한 방을 체크인했다. 레이첼은 가져온 트렁크 가방을 열자 나오는 통신장비를 세팅하고는 작은 초소형 이어폰을 귀에 달았다. 지원부대의 작전차량과 통하는 몇 번의 통신체크를 마치고는 목표가 나타나기를 조심히 기다렸다. 잠시 후. [치직, 목표 레스토랑 접근 중.] “왔어요.” “가보자고.” 우진과 레이첼이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여유롭게 식사주문까지 마치고는 레이첼이 속삭였다. “제 뒤쪽 창가 3번째 테이블의 하늘색 셔츠 남자에요.” 우진이 슬쩍 보니 사진에서 보던 얼굴과 일치했다. ‘깨비, 붙어.’ [예이, 예.] 자신의 그림자에 붙어있던 깨비가 나세르 살체의 그림자로 옮겨붙었다. 잠시 후 시킨 음식이 나오자 우진이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치킨과 새우가 들어간 양념요리였는데 조금 간이 강하긴 했지만 입맛에 맞았다. “이거 괜찮네.” 우진의 모습에 레이첼이 조금은 초조한 듯 물었다. “여유 있을 때 감시장치를 발동하세요.” “이미 했어.” 언제?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거나 먹고 가자고.” “…알겠어요.” 레이첼은 눈앞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면 지금 여유롭게 식사 중인 나세르 살체도 눈치채지 못했겠구나 싶었다. 목표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진짜 관광을 온 듯 식사를 즐기는 우진의 모습에 레이첼도 첫 작전이라는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우진의 모습이 허세가 아닌, 진짜 여유임을 느끼자 레이첼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장비 챙겨서 와. 난 밑에서 기다리지.” “같이 올라가지 그래요?” “굳이 둘이 가서 뭐해.” “둘이 가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죠.” 레이첼의 도발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목숨을 내놔야 할 텐데?” 우진의 대답이 거절이라 생각한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를 상대로 이런 살벌한 퇴짜는 처음이었다. “아쉽네요.” “갔다 와.” “네, 그럼 잠시 기다리세요.” 레이첼이 객실로 올라간 사이 우진은 로비를 나섰다. 정비가 잘된 호텔 앞 거리는 깨끗했고 사람들의 모습도 전쟁이나 테러에 극한의 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아니었다. “여기가 아르펜보다는 낫네.” 거기는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옥이었으니까. 우진이 멀뚱히 서 있자 고아로 보이는 꾀죄죄해 보이는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뭐라고 떠드는 그들의 외침을 알기 위해 굳이 언어의 물약을 추가로 들이킬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바디랭귀지는 격렬히 구걸을 원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나 어렵지.’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만큼 생존이 어려운 이들도 없다. 그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우진이 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아이들이 알 수 없는 말로 저들끼리 감사의 말을 건네며 멀어졌는데 골목에서 우진을 주시하던 여자아이 하나가 도도도 달려왔다. “호오.” 티 없이 맑은 영혼. 아이의 것이라 그럴까, 도지원의 영혼보다 더욱 맑고 순수하다. 전쟁터에도 맑은 영혼은 피어난다. 우진은 괜히 기분이 좋아 미소 지었다. 우진의 앞에 온 아이는 겨우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키의 작은 소녀였다. 우진을 보고 웃는 미소가 예뻤다. “헬로우.” 꾸벅 인사를 한 아이가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우진이 웃으며 지갑을 여는데 이질적인 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째깍. 우진이 슬쩍 인상을 굳히는데 아이의 옷 속에 감춰져 있던 폭탄이 폭발했다. < 87화 - 사막의 분노 > 끝 ⓒ 진설우 < 88화 - 사막의 분노 (2) > 콰아앙! 폭발에 가장 먼저 본 것은 흩날리는 육편이었다. 그리고 스피릿 아머가 발동하며 눈앞에 영혼의 보호막이 나타나 충격파를 막아주었다. 그 반발력까지 막아준 것은 아닌지라 우진의 신형이 뒤로 튕겨 호텔의 벽에 처박혔다. 폭탄의 위력은 꽤 강한지 바로 곁에 있던 우진과 지나가던 차량 세대가 휘말렸다. 전복된 차량이 터지며 2차 폭발을 가져왔고 푸시시시. 부서진 벽돌 가루가 날리며 우진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폭발로 인한 충격은 없다. 벽에 부딪힌 충격도 없다. 스피릿 아머가 모두 막아주었으니까. 얼굴로 내려앉는 돌먼지야 공격이랄것도 없으니 스피릿 아머가 발동하지도 않았다. 신체의 충격은 없지만 정신적 충격은 조금 받았는지 우진이 멍하니 누워있었다. ‘나도 참.’ 지구로 돌아온 지 몇 달 되었다고 이리도 여려졌는지. 반갑기도 하면서 씁쓸했다. 우진의 눈앞에 맑은 영혼이 떠올랐다. 방금까지 심장이 뛰던… 이젠 시체를 찾는 것 조차 우스운 소녀의 맑은 영혼. [아저씨 아파요.] 아프겠지. [아저씨 무서워요.] 소녀의 맑은 영혼이 조금씩 조금씩 색이들고 있었다. 검은 잉크라도 떨어트린듯 회색으로 검은색으로 진하게, 진하게…. [아저씨 살려주세요.] 할 수 없어 괴롭다. 누가 있어 저 티 없이 맑은 영혼을 악령으로 타락시키는가. 폭발에 휘말린 건 우진만이 아니었고 이미 몇 명의 사상자가 났다. 소녀는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살인을 저질렀다. [아저씨….] 검게물든 소녀의 영혼이 뭉그러졌다. 둥글게 변한 악령이 우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살려주세요.] 맴도는 악령을 우진은 가만히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저 여린 악령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까? 우진은 그저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소멸 뿐. 되돌리는 건 할 수 없다. ‘지구에서 첫 악령.’ 꿈에 나타날 악령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대수로울 것이 있겠는가? 우진이 화나는 것은 그 지옥 같은 아르펜에서의 참상을 지구에서 처음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여기야. 어서 들것 가져와.” 위장하고 있던 미군들이 황급히 달려와 우진을 구호하려 했으나 우진은 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섰다. “괘, 괜찮으십니까?” “용의자는?” “자살했습니다.” 독한 놈이군. 아니, 독하게 미친놈이라고 해야 하나. “차량으로 가죠.” “예? 예에.”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는데 멀쩡한 거야 AA급 각성자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토록 차분한 모습을 보이자 미군들도 기가 질렸다. 우진이 작전 차량인 승합차에 올랐다. 곧 놀란 얼굴의 레이첼이 차량에 탑승했다. 레이첼이 우진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날 노린 건가?” 우진이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기에 레이첼이 즉시 대답했다. “아닙니다. 지금 인근에 동시다발적으로 7번의 폭발이 있었습니다.” “7명의 아이가 죽었겠군.” “…….” 폭발에 이용당한 아이 외에 더 많은 피해자들이 생겼을 테고 말이다. 죽고 죽이는 거야 상관없다. 싸울 수도 있고, 싸움엔 사상자가 생기니까. 그런데 아무런 관련도 없는 아이를 이용한 다라…. 기분이 더럽다. 지구인이 트라넷의 하수인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복귀하지.”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어디 다치신 건….” “아니.” 다친 곳은 없다. 침착한 것을 보니 조금 위화감이 들 뿐이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너무 멀쩡해 보였으니까. 안 괜찮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곳을 다쳤는가? “말 걸지 마.” “…….” “기분 더러우니까.” “…….” 우진이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보았다. 정말 오랜만이다. 아니, 지구로 돌아오고 처음인 것 같았다. 질척하고 끈적한 무언가가 기분을 더럽히고 순수하게 분노심이 치솟는 것은 말이다. * 하루 뒤, 바그람 공군기지. 장교들이 모인 자리. “불가합니다.” “그래? 그럼 나 혼자 가지.” 우진의 패기에 장교들이 할 말을 잃었다. 그들도 끝내지 못한 전쟁을 우진이 혼자서 끝낸다고? 이건 화력이나 병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면으로 붙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놈들의 수뇌부는 더 꽁꽁 몸을 숨길 뿐입니다.” “후우.”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할수록 테러리스트라는 놈들이 짜증 났다. 반군과 민간인들의 경계도 모호하다. 일반인처럼 보이는데 어느 순간 총질을 하는 놈들이 널린 게 이곳이다. 팔에 난 종기를 짜자고 팔을 잘라버릴 수는 없는 노릇. 숨은 놈들을 잡기 위해 죄 없는 민간인들까지 모조리 죽일 수는 없다. “방법을 생각해봐요.” “생각할게 어딨나? 불가능한 일인데.” 로저스였다. 이 전쟁을 종식할 수 있었다면 진즉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주둔하며 더 큰 세력 확장을 막을 뿐이다. 아니, 이것도 계속된 철군으로 아프간의 반군은 이미 영토의 30%를 점령한 상태였다. “정부에서도 지금 추가파병을 의논하고 있으니 기다리는 게 어떤가? 화난 마음이야 공감하지만 이건 개인이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우진의 귀에 데이비드 사령관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같이 가던 말던 상관없어. 혼자라도 갈 테니.” “반군의 점령지에 가서 뭘 어쩔 텐가? 모조리 죽일 텐가? 가장 악랄한 테러리스트라는 호칭이라도 필요해?” “씁.” 로저스인가? 저놈은 아까부터 왜 자꾸 자신의 신경을 건드릴까. “낄 거 아니면 신경 쓰지 마. 협조는 필요 없다.” 우진이 지휘실을 나섰다. 깨비가 충분한 정보를 얻는 사흘 동안만 기다린다. 그리고 자신을 암살한 배후를 알아내면 그놈도 죽이고, 테러를 주도하는 반군도 쓸어버린다. 계획은 없으나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우진이 나가자 지휘관실의 분위기가 후끈해졌다. “저걸 내버려둡니까? 각성자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날 겁니다.” 테러리스트가 무엇인가? 무력을 가진 자가 명분 없이 사람을 죽이면 테러리스트가 된다. 우진은 한순간 가장 유명한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자네가 가서 막아봐.” 사령관의 말에 로저스가 한숨을 쉬곤 지휘관실을 나섰다. 저 막무가내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이미 성녀에게 자문도 구해봤다. 그를 막으면 공군기지부터 박살 낼 거란 말에 지금 지휘부는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어이.” 우진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멈춰서 뒤돌아봤다. 부대 내에서 특수 각성자팀의 지휘관이라고 했나? “아까부터 죽고 싶은 건가? 왜 자꾸 귀찮게 하지?” “도와주지.” “뭘?” “전면전이 아니라 지휘부 암살을 원하는 거라면 놈들의 근처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지.” 우진이 미소 지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말해봐.” “납치시켜주겠네.” 오호, 신선한데? 우진의 눈썹이 휘어졌다. * 일주일 뒤. 덜크덩, 덜크덩. 우진은 두 손이 묶이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복면에 얼굴이 쌓인 채 어딘가로 실려가고 있었다. “흑흑흑.” 짐짝취급당 하는 것은 우진만이 아니라 넷이나 더 있었다. “신이시여. 저를 구원하소서.” 중얼중얼 떠드는 녀석의 이름은 로만. 불법으로 무기밀매를 하는 녀석이었는데 요즘 반군과 아프간 정부군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못했는지 찍힌 녀석이다. 우진은 녀석이 납치당할 때 옆에서 그저 같이 납치당했을 뿐이다. ‘깨비.’ 우진은 자신의 그림자에 붙은 깨비를 불렀다. 감각이 활성화되며 깨비의 의식이 깨어났다. 우진은 포인트를 이용해 깨비의 레벨을 50까지 올려버렸다. 어차피 전투에 계속 나서면 레벨이 오를 테니 포인트를 아끼려 했지만 지금 당장 써먹어야 하니 포인트를 쓸 수밖에 없었다. <권속 : 깨비> 그림자를 통해 숙주에 기생하는 유령을 소환한다. 숙주의 감정을 읽고, 정보를 수집하며, 그 숙주가 시체라면 그것을 조종할 수 있다. 시체부활로 되살아난 시체의 본신 능력을 조금 더 이끌어낼 수 있다. 소환사의 권속들은 신뢰도, 충성도에 따라 필요지배력이 감소한다. 그들은 소환사의 지배를 받는 소환수에서 진정한 동료로 거듭난다. 그림자 수 : 6 보유 스킬 : 그림자 증식, 감각 확장, 영혼교환, 그림자 이동 시체 증폭 : +50% 필요 지배력 1(-99 충성, -99 신뢰) 10레벨 때 생긴 그림자 증식으로 인해 이후 10레벨마다 하나씩 총 6개의 그림자를 사람들에게 붙일 수 있었다. 하나는 나세르 살체에게 붙여두었기에 사용할 수 있는 그림자는 5개. 감각 확장을 통해 사람이 아닌 건물의 그림자에 숨어들어 가 내부의 정보를 알 수 있으며, 영혼교환은 말 그대로 깨비와 우진의 영혼을 맞바꾸는 것.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 우진은 그림자가 되어 사람들과 사물들 사이의 그림자로 옮겨갈 수 있었다.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크큭, 알겠다. 주인.] 주인의 몸을 차지할 생각에 기분이 좋은 깨비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우진은 그림자가 되어 눈을 떴다. 낡은 트럭 위에 짐짝처럼 처박힌 다섯의 사람. 반군은 넷. 운전하는 놈과 옆에 탄 놈, 짐칸에 함께 실려 감시하는 놈 둘. 트럭을 뒤따르는 차량이 셋. ‘잔챙이들은 넘기고.’ 겨우 이들을 상대로 화풀이나 하자고 납치까지 당한 게 아니다. 우진은 아예 반군을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해야 가슴속에 쌓인 화가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반군의 트럭이 멈춰선 건물로 우진의 그림자가 숨어들어 갔다. 말단 간부에서 중간 간부로, 중간 간부에서 보다 상위의 인물로…. 주요인물이다 싶은 놈들에겐 증식을 이용한 그림자 하나를 붙였다. 우진이 반군의 수장에게까지 접근하는 데는 20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새끼네.’ 반군 수장을 통틀어 눈에 보이는 주의할 인물들을 죄다 쓸어버리면 반군은 와해한다. 그 뒤처리는 미군에 맡기면 될 일이고 말이다. 우진이 반군 수장의 그림자에 숨어들어 본격적으로 정보를 캐 모으기 시작했다. 우진이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 찍듯 기억하며 차근차근 살생부를 기록했다. [주인 날뛰어도 되나?] ‘뭐, 왜?’ 잠잠하던 깨비의 의식에 우진이 불쾌한 듯 물었다. 자신의 몸이 남의 통제를 받아 움직인 것은 영 좋지 못한 기분이다. 전에도 종종 깨비가 자신의 몸으로 대학살을 벌인 적도 있고 말이다. [총살이 진행 중이다. 주인의 머리통에 구멍이 나기 전이다.] ‘…….’ 잡아들인 인질을 바로 죽이지는 않는다고 들었는데 꼭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바꾸자.’ [크큭, 알겠다. 주인.] 정보수집이야 깨비를 통해 계속하면 된다. 우진이 통제할 때처럼 그림자 이동은 할 수 없지만 반군 수장의 몸에 붙여놓았으니 적어도 이놈을 놓치게 될 걱정은 없었다. 파팟. 본신의 육체와 깨비의 그림자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둘의 영혼이 교환하는데 잠깐 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복면을 하고 있지 않아 주변의 풍경이 보였다. 후우우웅. 후끈한 열기를 내뿜는 사막에 늘어선 반군들과 자신처럼 손발을 결박당한 인질들이 무릎 꿇고 있었다. “신을 대신해 벌을 내릴 것이다. 신을 경배하라.” 반군들 중에 한 놈은 캠코더를 들고 있었는데 총살 장면을 녹화하고 있었다. 우진이 상황파악을 끝냈다. ‘반군이 25명, 인질이 18명.’ 그리고 사막 너머에 보이는 그들의 기지가 보였다. 인질 수용소 겸 훈련소를 겸하는 곳. 신입 반군들이 살인을 연습하는 곳. 인질들을 살펴보니 로만은 없었다. 로만과 함께 사로잡혔던 자신을 비롯한 인원들만 쓸모없다 여겨져 이 꼴을 당하는 모양.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 좋아하네.” 발목을 죄는 케이블 타이에 걸을 수도 두 손을 옥죄는 케이블타이에 무기를 뽑을 수도 없다. 반군들이 몸을 일으킨 우진을 보면서도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였다. “얼마나 많이 죽였나?” 카메라 앞에서 연설하던 베테랑 반군 하나가 이죽였다. “흥, 우리말이 제법이군.“ 그렇지. 빌어먹을 아랍놈들 언어가 왜 그렇게 많은지 언어의 물약을 몇 병이나 마셔야 했지. “신의 징벌을 받은 이들이 수천은 넘는다. 내 손에도 수백이 죽었지.” 임모탈 앞에서 살인을 자랑하는 그놈이 우습다. 아니, 귀엽다. “아, 느껴져.” 느껴진다. 사막에 묻힌 원혼들이. 인질로 잡혀 와 몸값 협상이 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보기로, 재미로 죽인 이들의 원혼이 느껴진다. “징벌은 신이 내리는 거다.” “내가 신의 사자다.” 터번을 둘러쓴 반군의 말이 우습다. “신의 사자라….” “네놈은 영광스럽게도 내가 죽여주지.” 베테랑 반군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티잉! 총알이 우진의 앞에서 스피릿 아머에 막혀 튕겼다. 보유 중인 영혼의 개수가 하나 줄었다. “뭐, 뭐야?” 타앙, 탕! 연달아 발사한 총알이 보호막에 가로막힌 듯 통하지 않자 베테랑이 주춤 뒤로 한발 물러섰다. “가, 각성자다! 쏴라!” 타다다다다당! 수십 발의 총알이 우진을 향해 쏘아졌으나 단 하나도 우진에게 상처 주지 못했다. “네놈들 따위에겐 신의 징벌도 과하다.” 징벌이 아니다. 복수다. 억울한 원혼들이 스스로 갚는 복수. 우진이 힘을 주자 케이블 타이가 너무나 손쉽게 뜯어졌다. 우진이 일시에 마력을 개방했다. 파파파팟! 사막의 모래 곳곳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터져나가며 해골 병사들이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사로잡힌 미군 포로, 사업가, 관광객, 그저 거리를 걷던 민간인, 인질이 되어 죽어 사막에 버려졌던 이들…. 일제히 몸을 일으키는 그들의 수는 500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진은 마력을 보충하며 그들을 더욱 더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데스 나이트들을 소환했다. 아직 레벨이 낮은 그들. 평균 레벨이 8이다. 레벨당 10명의 휘하병사를 배속할 수 있으니 80기. 4240기의 해골 병사가 필요하지만 걱정 없다. 적들의 시체로 충원할 생각이니 말이다. 53기의 데스나이트 아래로 해골들을 모조리 자동배속 시켰다. 손발이 묶인 인질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대규모 무리의 해골들을 보며 웜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고, 반군들은 대응 사격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지로 부리나케 도망가고 있었다. 우진이 그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쓸어버려.” [주인의 뜻대로!] 키바를 비롯한 데스 나이트들이 일제히 해골마를 소환해 올라타고는 돌격했다. 그 뒤를 해골 병사들이 장군을 뒤따르는 병졸 마냥 일제히 돌격했다. 사막에 피의 축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 88화 - 사막의 분노 (2) > 끝 ⓒ 진설우 < 89화 - 사막의 분노 (3) > “괴물들이 몰려온다.” “어서 사격 준비해!” 폭격을 피하고자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이동에는 최적화 되어있었다. 기관총을 비롯한 대부분의 무기들이 개조된 차량에 실려있었다. 부르르릉. 검은 매연을 일으키며 시동을 걸기 무섭게 차량을 돌려 기지 밖 사막 쪽을 향해 조준했다. “사격!” 투두두두두두두. “키에엑.” 수백 발의 총알들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 해골 병사들을 난사했다. 운 좋게 두개골에 든 해골의 정수를 맞춰 파괴되는 해골 병사들이 있었지만 소수. 더구나 앞서 유령마를 타고 달리는 데스나이트들은 하나의 피해도 입지 않고 있었다. “로켓 런처를 가져와.” 황급히 RPG-7을 가져온 부하가 가장 가까운 유령마 하나를 조준하고 발사했다. 피슈우웅! 매섭게 날아가는 탄두를 향해 짧달 막하지만 풍채가 큰 데스나이트를 태운 유령마가 더욱 매섭게 질주했다. [람손님이 나가신다!] 드워프 대전사였던 난장이, 람손이 자신의 커다란 해머를 휘둘렀다. 콰아앙! 해머와 충돌한 탄두가 폭발하며 모조리 해머로 흡수되었다. 람손의 고유스킬 ‘충격 흡수’는 물리 충격은 물론 폭발을 비롯한 마법 공격까지도 모조리 흡수해 저장한다. 흡수되어 해머에 저장된 충격은 배가되어 방출된다. 빗발치는 총알 사이에도 유령마는 진지에 가까워졌고 바리케이드 삼은 벽에 람손의 해머가 휘둘러졌다. 꽈아앙! 벽이 터져나가며 그 파편이 흉기가 되어 반군을 덥쳤다. 터져나간 벽으로 유령마들이 난입했다. “쏴, 쏴라!” 투두두두두두. 기관총의 총열이 데스나이트를 향해 겨눠졌으나 지근거리에서 맞춰봐도 총알이 모조리 튕겨 나오고 있었다. 키바의 유령마가 앞다리를 치켜들더니 기관총이 실린 차량을 그대로 뭉개버렸다. 콰지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사수를 보며 키바가 도끼를 치켜들었다. [임모탈의 위엄을 보이라!] 부서진 벽을 넘은 해골 병사들도 살육전에 뛰어들기 시작하자 기지에 살아있는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우진은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인질들을 보았다.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가장 가까운 인질의 케이블타이를 끊어내고는 단검을 쥐어주었다. “나머지 풀어줘.” 우진의 입에서 나온 영어에 남자가 되물었다. “미, 미군이십니까? 저흴 구하러 온겁니까?” “아니.” 우진은 남자를 남겨두고 기지를 향해 걸었다. 그런 우진의 등을 바라보며 남자는 자신의 신께 기도 올렸다. 신이 기도를 들어주셨다.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구원자를 내려주셨도다. 남자가 나머지 인질들의 케이블타이를 끊어주자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우진이 향한 기지로 향했다.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은 누가 뭐래도 우진의 곁 같았다. “나머지 인질들은 어딨지? 우진은 쑥대밭이 된 기지와 시체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모조리 해골 병사로 부활시켰다. 파팟! 순식간에 기백은 되는 스켈레톤들이 일어나 새롭게 데스나이트의 휘하로 배정되었다. 한번 배정된 스켈레톤들은 부서지기 전 까지는 소환의 방에서 대기하다가 군단장인 데스나이트의 부름에 응해 소환될 것이다. “나머지 인질들은 어딨지?” 우진이 잡힌 인질들을 찾기도 전이었다. “제길, 꼼짝 마!” 밖의 소란에 미처 나오지 못한 것인지, 인질들을 감시하던 보초병 둘이 인질 하나를 끌어 나왔다. 머리에 총이 겨눠진 채 오줌이라도 지린 사람처럼 어색하게 걸어나오는 인질은 다름 아닌 무기밀매업자 로만이었다. “공격하면 인질은 죽는다.” 놈들의 눈은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르르릉.] 짐승의 그것처럼 으르렁 거리는 데스나이트들의 붉은 안광을 마주하자 오우거 피어를 마주한 듯 움찔 몸이 굳는 그들이었다. 우진이 손을 뻗어 전기충격을 시전했다. 파지지직. 풀썩 쓰러진 둘을 향해 다가간 데스나이트 ‘락토’가 창을 두 번 찔러 두 개의 심장을 멈추게 했다. “허으윽.” 풀려난 로만이 공포에서 해방되어 만세를 불렀다. 그가 우진을 보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후우, 구해줘 고맙네. 미군인가? 자네 이름을 알려주면 내 반드시 보답하지.” “필요 없다.” “어허, 군인이라 그런가? 비밀리에 잘 전달 할테니, 액수는 섭섭지 않게.” 우진이 뼈의 창을 소환해 로만의 심장에 겨눴다. “쫑알쫑알. 그만 입 다물지?” “…….” 전장의 현역들이 거칠다곤 하지만 어떻게 미국의 시민인 자신에게 이럴 수 있지? 로만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 이번 일은 잊지 않을걸세.” 그것이 은혜가 될지 원한이 될지는 자신을 구해준 각성자 군인이 판단하겠지. 로만의 말을 들은 우진이 피식 웃었다. 명령을 기다리는 충실한 53기의 데스나이트가 있고 그들의 수족이 되어주는 해골 병사가 600기가 넘었다. ‘그래. 이 정도 담은 되야 무기 밀매를 하지.’ 우진이 가슴에 겨눠졌던 뼈창을 내렸다. 로만은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여겼는지 얼굴에 한층 더 여유가 생겼다. 그와 비례해 우진의 미소도 짙어졌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하하, 사과할 필요 없네. 미국의 시민으로서….” “내가 양키로 보이냐?” 본인이 미국인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자부심이 넘치는듯한 로만의 말을 잘랐다. 아니, 자른 것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퍼억, 투둑.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진 뼈창이 로만의 목을 잘랐다. 아니, 뭉툭한 그 몸체가 목뼈를 부러뜨리며 머리를 목에서 뜯어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누굴 베이비시터로 보나?” 죽은 것들은 본능에 따라 흥분했고, 살아있는 것들은 충격에 빠졌다. “히익!” 그 잔인한 광경에 로만과 함께 딸려나온 인질들, 총살의 위기에서 구사일생한 인질들이 질린 얼굴이 되었다.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모여.” 우진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눈치껏 한자리에 모였다. 언어가 통하고 말고는 상관없었다. 눈치껏 옆 사람을 따랐다. “기자 앞으로 나와.” “…….” 우진의 말에도 나서는 이가 없자 손을 들어올렸다. “다섯에도 안 나오면 뒤진다. 하나, 둘….” 우진의 손가락이 하나만 남았을 때 세 명의 남자가 동시에 일어섰다. “좋아. 너희는 날 따라간다. 나머지는 알아서 구조요청을 하도록 해.” 우진의 무책임한 말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쏟아낼 수 없었다. 눈앞에서 로만이 죽는걸 봤으니까. 알아서 기지 내의 장비로 통신하라고 두고 우진은 따라나온 기자 셋을 손짓 해 불렀다. “종군기자인가?” “예, 톰이고 이쪽은 마크입니다. 미국인이고 저쪽은….” “조니입니다. 영국인입니다.” 우진이 셋에게 지령을 내렸다. “날 따라다니며 찍어라.” “…뭘 찍게 됩니까?” 누군가를 구출하고 고통에서 해방하고, 구원하고…. 임모탈과는 맞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없었다. 대신 파괴신의 전승자답게 고통을 안기고 파멸을 부르며 종식을 선언하는 건 자신 있었다. “죽이고 파괴하는걸.” “…….” 이 사람은 미치광이인가? 사이코패스도 이런 사이코패스가 있을까? 인질로 가장해 잡혀 왔다가 전설의 이집트 파라오라도 되는지 언데드들을 부려 반군들을 모조리 처 죽이질 않나, 살려낸 인질 하나를 본보기로 죽이질 않나…. 이제는 자신의 살인행위를 찍어라? 변태가 틀림없다. “테러를 종식하러 간다.” “……!” 살인도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살인마와 전쟁영웅은 한끝 차이. 정정한다. 변태가 아닌 메시아가 나타났다. * 바그람 공군기지 지휘관실. “이것 보십시오. 조금 이상합니다.” 레이첼은 본국에서 보내온 위성사진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먼지 구름이 피어오른 것이 대규모 기동 전차라도 움직이는듯한 규모였다. “뭐지? 반군에게 이만한 전차부대가 있었나?” “이들이 향하는 게 반군들의 거점입니다.” “내분이라도 일어난 건가?” “…모르겠습니다.” 위성사진에 잡힐 정도로 대규모 무리의 이동이라면…. 데이비드가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드리는데 통신장교가 기다리던 연락을 보고했다. “A팀으로 부터 통신입니다. 목적지까지 무사도착. 사로잡혔던 인질 37명의 신병을 확보했답니다. 안타깝게 로만은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흐음, 천만다행이군. A팀의 피해는?” “전무합니다.” 데이비드 사령관은 잘못 들었나 싶다가, 역시 A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를 당하지 않고 반군의 점령지 중에서도 그 깊은 곳까지 가다니 말이다. “한 번의 충돌도 없었답니다.” “…….” 그때 레이첼이 급히 회신이 들어오는 자료들을 태블릿에 띄워 사령관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인터넷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영상과 사진입니다.” “으음.” 데이비드가 테블릿을 스크롤 해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초토화된 반군들의 기지와 해방된 사람들, 그리고 항복한 반군들의 끄나풀까지…. 사진들과 섞인 동영상 하나를 클릭해보았다. [키키킥.] [알그락 투 마쉬.] 그들은 알 수 없는 아르펜어가 오고 가는 동영상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전투를 찍고 있었다. 탱크쯤은 너무 쉽게 부숴버리는 푸른 귀기가 일렁이는 유령마를 탄 검은 갑옷의 인영들과 그 뒤를 따르는 수백의 해골 병사들. “영화 트레일러라도 되나?” “…뒤의 영상을 보십시오.” “흐음.” 뒤의 영상을 확인하자 각양각색의 데스나이트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강우진의 모습이 화면에 담겼다. 아니, 호위를 받는다기보다는 가장 앞장서서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강우진?” 카메라에는 비치지 않지만 종군기자로 보이는 리포터가 열심히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메시아가 나타났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을 향한 전쟁을 선포한 한국인 각성자 강우진의 분노가 사막을 휩쓸고 있습니다. 테러의 종식까지 그의 군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격앙된 리포터의 음성과 얼굴 너머로 수천에 이르는 해골병사들의 모습은 기가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이걸 믿어야 하나? 자료 출처가 어디인가?” “톰이라는 종군기자의 SNS입니다. 영국의 조니의 SNS와 유튜브에도 올라오고 있습니다.” “허어.” 조각이 맞춰진다. 위성사진에 잡히는 반군들의 대 기지이동. 그리고 폭발과 먼지 구름을 피워올릴 정도로 대규모 이동하는 부대. 반군의 전 병력이 한곳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진이 이끄는 언데드 부대도 그에 근접하고 있었다. 대규모로 뭉친 두 무리가 부딪히기 일보 직전이다. “네크로맨서라고 하던데, 이정도 규모가 가능한 일인가?” 각성자들이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수천만 언데드를 부리는 네크로맨서라니, 이런 건 전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워낙에 단시간에 유명해진 각성자라 능력에 비밀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가능하냔 말일세?” 단시간에 이렇게 강해지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도 아니고 말이다. 가능성의 유무를 따지는 건 의미 없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까. “성녀 메르디가 강우진을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음, 그녀를 불러오게. 아니, 내가 가지. 그녀는 어디 있지?” “보통 치료실에 계십니다.” 데이비드가 직접 움직였다. 화가 난 각성자 하나가 인질로 위장해 반군들의 점령지로 침투하더니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고작 하루 만에 심상찮은 변화가 불더니 최후 결전을 앞둔 듯 반군세력이 결집하고 있지 않은가? 미 정부도 수년간 해내지 못한 업적을 고작 개인이 이루려 하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성녀를 찾은 것은 텅 빈 치료실이었다. 현대의학적 상식을 뒤집을만한 그녀의 능력은 바그람 공군기지의 환자를 0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한쪽에 나무로 깎아 만든 작은 여신의 조각상 앞에서 기도 올리고 있었다. “여신이시여, 그의 분노를 막아 주소서….” 적당히 멈추어야 한다. 넘치는 분노가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 세상과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기 전에 말이다. < 89화 - 사막의 분노 (3) > 끝 ⓒ 진설우 < 90화 - 사막의 분노 (4) > 한편으론 원망도 들었다. “왜 진즉 분노하지 않았나이까.” 그녀가 기억하는 임모탈은 아르달의 군주였다. 버려진 죽은 자들의 땅, 아르달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한 그는 다른 곳을 욕심내며 침략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세력과는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에게 있어 보호대상은 아르달뿐. 왕국들이 분열할 때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연합할 때도, 임모탈은 아르달을 지킬뿐이었다. 임모탈이 아르달이 아닌 아르펜을 지키고자 했다면…. 만약 그랬다면…. 아르펜은 무사했을까. “여신이시여 그의 분노를 막아주소서….” 그가 같은 지구인을 적대하면 안된다. 또다시 환멸하고 칩거하여 방관하게 되면 지구도 아르펜 꼴이 되는 것은 순식간. 지구인들이 제 행성 지키기도 급급한데 아르펜을 구원할 여력이나 생길까? “그의 분노가 트라넷을 파멸로 이끌길….” 그녀도 이제는 안다. 우진은 구원자가 아니다. 아니, 될 수 없다. 파괴신 트래쉬의 전승자.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느니 교활한 임프족과 동맹을 맺는 게 나을 정도다. 그의 분노가 트라넷을 향하길 바란다. 적들을 죽이고 파괴하고 부숴 절대자로 군림하길 원한다. “파멸뒤에 질서를 주소서….” 동경과 칭송이 아닌 두려움에 의한 경외 또한 신을 숭배하는 방법. “임모탈이여 진정한 파괴신으로 거듭나소서….” 메르디는 진심으로 빌고 빌었다. 자신의 간절함이 닿지 않은 것인지 여신의 조각상은 웃는지 우는지 알 길이 없었다. * 반군 지휘실. “제기랄!” 반군 수장 카림은 이를 갈았다. “저 미친 뼈다귀들은 다 뭐냔 말이다!” 반군 주요 기지들이 모두 당했다. 점령 중이던 도시의 반군부대도 당했다. 민간인들과 섞인 그곳에 미군의 폭격은 불가능한 일. 내륙 깊은 그곳까지 미군 보병부대가 밀고 들어올 일도 없으니 민간인이야말로 반군의 주요 방패막이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미친 해골 부대가 도시를 휩쓸었다. 총기는 무용지물이었고 던전에서 튀어나온 듯 흉측하게 생긴 해골 놈들은 인지능력을 가진 것 마냥 반군만 골라 죽였다. 그렇다고 민간인들이 아예 표적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대항하는 자는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죽었다. 더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건 저 미친 무리의 이동 경로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화감에 은신처에서 이동해 다른 곳으로 향했으나 놈들의 이동 경로가 자신을 향해 수정되었다. ‘내 위치가 발각되고 있다.’ 방법은 알 수 없다. 놈들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어떤 미친 종군기자가 저 해골 부대를 따라다니며 중계하고 있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놈들의 표적은 자신이다. 도망칠 수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싸우려면 빠를수록 좋다. 각개 격파당하기 전에 힘을 뭉쳐야 한다. 놈들은 죽은 시체를 그대로 해골로 되살려내 전력이 줄어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났으니 말이다. “집결을 마쳤습니다.” “나가지.” 매번 어둠 속에서 지시만 내리던 자신이 반군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추적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은신처의 벙커에서 숨어만 있다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죽을 수는 없다. 숨겨둔 무기들이 적지 않다. 제대로 보여주마. 신의 대리인 카림이 벙커를 나섰고 그의 그림자가 남몰래 웃었다. * 기자들이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자리를 잡았다. 톰을 비롯해 셋에서 시작했던 종군기자들이 조금씩 합류하더니 지금은 서른 명에 다다랐다. 발 빠르게 보내진 장비들도 더해져 이제는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가능할 정도였다. 방송을 위한 차량만 다섯 대. 적들의 화기공격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위험하기에 전장에서 꽤 떨어져 있지만 시야는 트여있어 성능 좋은 카메라로 전장의 상황을 못 잡을 건 없었다. [최후 격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 기록적 리트윗을 기록 중인 종군기자이자 리포터 톰의 목소리는 하루 만에 세계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것은 테러리스트들을 향한 엄중 경고, 그 이상입니다.] 망원렌즈로 당긴 카메라가 언데드 부대의 앞에 당당히 선 우진을 잡았다. 유령마에 탄채 주위에 데스나이트들과 함께 천천히 말을 몰아가는 그 모습이 전투를 앞둔 장군처럼, 결투를 앞둔 기사처럼 보였다. [네크로맨서 강우진. 그가 세계로 보내는 선언.] 카메라가 반군들의 집결지를 비추었다. 탱크는 예사였고 개조된 미사일 차량에, 몇몇 보이는 마법을 보니 각성자들도 섞여 있는 듯싶었다. 통일된 복장도, 번쩍번쩍한 장비도 아니지만 그들의 수는 1만이 넘어 보였고 갖춘 화력도 만만찮았다. [그가 테러의 종식을 위해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카마레가 톰의 얼굴을 비추었다. [미군과 UN의 연합군이 파병과 지원을 논의만 할 뿐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이때 강우진 그는 최후의 전장을 앞두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누군가는 저 엄청난 군대를 다스리는 네크로맨서를 경계하며 꺼릴지도 모릅니다.] 톰의 얼굴이 진지를 넘어 비장해졌다. [종군기자로 15년을 살았습니다. 절망 속에 처음으로 희망을 보았습니다.] 카메라가 언데드 대군을 잡았다. 그의 주변에 둘러싼 해골 병사들은 이미 1만이 넘어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마법사들의 수도 수백은 되는 상황.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강우진을 비추었다. [그가 죽은 자들의 왕을 넘어 신으로 거듭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양측이 분주해지며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승리가 그를 신으로 만들 것입니다.] 격앙된 음성을 내뱉은 톰이 눈물지었다. * 씽씽이 위에 올라탄 우진은 슬슬 말을 몰았다. 그 주변으로 데스나이트들이 몰려들었다. 키바의 유령마는 남들보다 덩치가 한 배 반은 더 컸는데 골격이 말이 아닌 늑대였다. [왕과 함께 달릴 줄이야!] 호전적인 오크들 중에서도 전장을 수 없이 전전한 대전사 키바는 전장을 앞두고 잔뜩 흥분해 있었다. 임모탈이 자신들과 함께 선봉에 선다. “아, 기대해도 좋아.” 우진이 슬쩍 웃었다. 전사 클래스까지 갖춘 그는 더이상 소환수들의 뒤에서 보조만 해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불사의 군대라 하지만 이젠 강우진 개인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와하핫, 군주께서 진정한 왕이 되셨다.] 람손은 우진의 듀얼클래스를 더없이 반겼고 다른 데스나이트들도 잔뜩 흥분해있었다. 반군점령지를 휩쓸다 보니 그들의 레벨도 이젠 평균 20의 수준. 지금 하나의 데스나이트가 200기 정도의 해골 병사를 휘하에 둘 수 있다. 거의 1만에 가까운 해골 병사들을 배속시켰다. 그들을 유지하는 지배력은 데스나이트 하나를 소환유지하는 1의 지배력만 필요한 상황. 우진은 남은 지배력 중에 깨비와 돌쇠, 씽씽이, 비비를 유지하는 수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해골마법사를 소환해 유지했다. 그 수가 거의 1200에 이르렀다. 트래쉬의 세트아이템을 갖췄다면 그 수는 몇 배가 더 되었겠지만 지금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전력. “제니스가 없어 아쉽네.” 리치 제니스가 있었다면 이런 대규모 전투가 훨씬 쉬웠을 텐데 말이다. 아쉽지만 그렇다고 조급하지도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 성구와 해솔을 굴리다 보면 80레벨도 금방이다. “나오나 보네.” 우진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깨비의 기운에 반군 수장이 지하벙커에서 나온 것을 느꼈다. “슬슬 가보자.”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꺼내 망치로 형태 변환했다. 씽씽이가 투레질하며 앞서 갔고 그 뒤로 데스나이트들이 뒤따랐다. 그들 휘하의 해골 병사들이 슬슬 따라붙었다. [왕과 나란히 달리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 [축제다! 피의 축제다!] 잔뜩 달아올라 시끌벅적한 데스나이트들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휘하에 1만이 넘는 언데드 군단을 이루고 나니 아르펜에 되돌아온 듯 착각마저 들었다. 지구인 강우진을 그리워하며 동시에 아르펜의 임모탈을 버리지 못했다. 갈팡질팡한 이중적 마음에 혼란 따위는 없다. 아련한 추억이고 업보다. 되돌릴 수도 없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았고,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펼쳐질 지옥도의 끝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모조리 쓸어버려!” 씽씽이가 냅다 내달렸다. [왕을 따르라!] 키바의 유령늑대가 뒤따랐고 락토와 람손이 뒤따랐다. 데스나이트들이 앞다투어 속도를 올렸다. 투투투투투투투. 의미 없는 총알 세례가 쏟아졌고, 조금 위험한 미사일이 퍼부어졌다. 콰콰콰쾅! 데스나이트들이야 저마다의 유용한 고유 스킬이 있어 소형미사일에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해골 병사들은 한 번의 폭발에 몇이나 죽어 소멸했다. 끼리리릭. 앞서 늘어선 탱크들이 전열을 조금씩 조정하며 포에 불을 뿜었다. 콰콰쾅! 물리법칙을 놀리는 듯 유령마의 신묘한 움직임이 요리조리 탄두를 피하게 해주었다. 아직 거리가 있어 문제지, 탱크들은 접근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신경을 거슬리는 것은 공중에 뜬 헬기들 5대. 투투투투투, 피융, 피슈슈. 잔뜩 장전한 미사일들이 차례로 발사되며 후방에서 돌진 중인 해골병사들을 노리고 있었다. 우진을 태운 씽씽이가 혼령 질주를 발동했다. 두두두두. 하늘에 생겨난 유령을 밟고 치솟았다. 헬기에 거의 접근했을 때 우진은 뼈의 창을 소환해 냅다 던졌다. 콰직. 앞 유리를 깨고 처박힌 본 스피어가 파일럿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통제력을 잃은 헬기가 제자리에서 빙글 돌 때 우진의 앞에 소환된 돌쇠가 헬기를 향해 흡수되었다. 꾸꾸궁. 강한 기압에 우그러지는 쇠처럼 뭉쳐지던 헬기가 피고름을 짜내듯 안에 탄 사람들을 으스러뜨렸다. 그리곤 아직 유지 중인 프로펠러가 맹렬히 회전하더니 가까운 헬기를 향해 기우뚱 향했다. 콰앙! 서로 부딪힌 헬기가 돌쇠가 점령한 헬기에 흡수되듯 우그러져 몸체를 만들어냈다. [구오오오!] 돌쇠가 울부짖자 우진의 몸에서 마력이 일시에 쑥 빠져나갔다. 돌쇠를 중심으로 인력이 발생해 공중에 뜬 나머지 헬기들이 통제력을 잃고 끌려들어 가 골렘의 일부가 되었다. [크오오오.] 몸 곳곳에 헬기 프로펠러로 치장한 강철 골렘 돌쇠의 모습은 마치 칼을 수십 자루 찬 무사 같았다. 쿠웅. 바닥에 착지한 돌쇠가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내달렸다. 허리춤에 달린 헬기의 미사일이 적진을 향해 모조리 쏟아냈다. 콰콰쾅. 예상치 못한 화기공격에 적진이 소란스러웠다. 유령마가 말의 형상이라 하여 기마병을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스포츠카보다 빠르게 질주한 그들이 탱크를 짓밟았다. 전방에서 격돌이 일어나자 그사이 사정권까지 접근한 해골마법사들이 마법을 퍼붓기 시작했다. 화르륵. 수백 발의 화염공격이 반군집결지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혼란스런 전장을 데스나이트들이 휘저으며 아비규환을 만들어냈다. * 소총 탄환을 교환하던 반군은 턱을 덜덜 떨었다. “이, 이건 악몽이야.” “이런 귀여운 악몽이 어딨나옹?” “히익.” 반군은 느닷없이 나타난 말하는 고양이를 보곤 기겁했으나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정신을 잃고 기절하고 말았다. “귀여운 악몽이나 꾸라옹.” 꿈속에서 지금의 두려움을 반복할 것이다. 한 100년쯤? 자각하는 순간 죽을 테고…. “냐앙.” 비비가 다른 먹이를 찾아 움직였다. * “말도 안 돼.” 반군 수장 카림은 두려움에 떨던 몸의 경련이 멈추는걸 느꼈다. 두려움을 느끼기엔 눈앞에 일어난 현실이 너무 참담했다. 해골들을 2000은 넘게 파괴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말을 탄 놈들은 하나도 파괴하지 못했고, 파괴한 해골 이상으로 죽은 아군이 해골 병사가 되어 부활했다. 죽여도 소용없고, 죽어도 손해다. 전장은 정리수순을 밟고 있었다. 총알 소리는 희미했고 사람들의 비명은 처절했다. 기괴한 언데드들의 웃음소리와 확인 사살이 이어졌다. 강우진이 카림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저 자다.’ 불사의 군대를 아우르는 주인. 전대미문의 강력한 네크로맨서. 이리저리 몸을 숨기고 도망치려 해봤으나 저자가 계속해서 자신을 추적해오고 있었다. “신이 분노할 것이다!” 카림의 외침은 발악에 가까웠다. “쓰레기를 치우는데 신이 왜 분노해?” “…신이 네놈들을 벌할 것….” 콰직! 우진의 손에 들린 해머가 카림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반군 수장이라 하여 인질로 잡을 가치도, 입맛 따라 맞춘 그의 신앙심을 확인할 필요도, 쓸데없이 늘어질 말을 들어줄 필요도 없다. 죽을 놈은 죽이면 그뿐. 망치에 묻은 그의 피가 뚝, 뚝 떨어졌다. “나와.” 스르륵. 죽은 카림의 그림자에서 나온 깨비가 우진에게 흡수되었다. 깨비가 보고 듣고 느낀 카림의 행적이 고스란히 경험이 되어 우진에게 흡수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아프간에만 있지 않았다. “세상엔 쓰레기들이 참 많아.” 세상이 쓰레기장 같았다. 우진이 쓰게 웃으며 전장을 정리했다. < 90화 - 사막의 분노 (4) > 끝 ⓒ 진설우 < 91화 - 경악 > 투투투투투 불타는 전장의 상공에 미군헬기가 2대 떠올라 있었다. 반군 점령지에 대한 공격결정을 떠드는 정부지만 소규모의 게릴라 부대운용은 예전부터 해왔었고, A팀은 그중에서도 수차례 인질구출, 주요시설 파괴 등의 임무를 수행해왔었다. 안경과 인이어 마이크까지 일체형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무전기기는 시끄러운 헬기의 로터음에도 대화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게 해주었다. “와우,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죠?” “놀랍군.” “리더,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없겠네?” A팀의 리더 브론은 이미 승패가 나버린 전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서진 현대화기와 여기저기 무너진 건물들과 폭격을 맞아 파헤쳐진 도로와 땅들은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소름 돋는 것은 적의 시체도, 아군의 시체도 없었다. 적의 시체는 모조리 해골병사로 소환되는 매개로 사용되었고, 아군이라 정의할 수 있을지 조심스러운 강우진이야 본래 혼자였다. “개인의 무력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놀랍군.” “이거 고생하며 훈련받은 게 억울한데요? 그냥 각성자 랭크나 올릴걸 그랬어요.” D등급 이상의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미군 특수부대. 그들의 전투능력이나 작전수행능력은 A급의 각성자가 부럽지 않다는 평이었으나 직접 눈앞에서 벌어진 AA급 각성자 강우진의 믿기지 않는 전과를 보자 그간 자신들의 노력이 허무하기까지 했다. “정말 1인 군단인데요?” “한국은 국방예산을 모조리 강우진 인건비로 줘도 되겠어.” “하하하, 그것도 그렇네.” “허무하구먼. 그동안 우린 이 전장에서 뭘 했는지.” “우리가 못난 게 아니야. 저 사람이 뛰어난 거야.” “사람이라 부르기도 그렇구만.” 강우진은 데스나이트와 그에 배속된 해골 병사들을 차례로 소환의 방에 보내고 있었다. “자, 지루한 연장전을 끝낸, 마무리투수를 영접하러 가자고.” “이제 내려가자.” 리더의 말에 헬기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헬기가 착륙했을 때 우진은 배속된 해골 병사들을 모조리 보내고, 해골마법사들은 어쩔 수 없이 모조리 소환해제 해버렸다. 누군가 통제하지 않는 스켈레톤은 그저 몬스터가 되어버릴 뿐이다. 1000기가 넘는 해골마법사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장관을 만들었다. “너희도 수고했어.” “나도 이제 제법 힘을 되찾았다옹. 조금만 있으면 본신으로도 소환될 수 있을 것 같다옹.” “잘됐네. 고생했다.” 고양이 모습을 유지해도 악몽이나 최면 따위의 능력을 사용하는데 문제없었지만 위력에서 차이가 났다. 비비가 본체로 소환되면 그 위력이 제법 매서웠다. 집단 환각을 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비비가 레벨업을 겪으며 점점 구현할 수 있는 힘이 늘어난 탓도 있었지만 지구의 마나 농도가 올라간 탓도 있었다. “으하암, 그럼 다음 전장에서 보자옹.” 비비가 하품을 하며 검은 연기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우진이 돌쇠를 보았다. “너도 들어가 봐.” [그그그극.] 쇠 끓는 소리를 내던 돌쇠가 만신창이가 된 몸을 훌훌 털어버리듯 몸을 두른 강철 장갑이 하나하나 떨어져 내렸다. 곧 고철 더미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골렘의 심장인 돌쇠가 쏙 튀어나와 뿅하고 사라져버렸다. 멀찍이 착륙한 헬기보다 더 먼저 다가온 것은 방송차량이었다. 그들이 우진을 향해 접근한 그때 A팀들도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인터뷰를 해도 되겠습니까?” 기자 톰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으며,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아니.” “예, 그럼.” 톰은 더 권하지도 않았고, 그를 찍던 생중계 카메라도 머리를 돌려 전장을 찍었다. 메시아의 탄생이자 테러의 종식을 선언하는 전쟁이며, 세계평화의 수호자가 탄생했다고 떠들며 멘트지었다. 생중계를 종료하고는 급히 우진에게 다가와 고개 숙였다. “앞으로 어딜 가실 겁니까?” “한국으로 돌아갈 거니 더이상 안 따라와도 돼.” “아…!” 톰이 탄식했다. 우진이 테러의 완전한 종식을 위해 싸워줄 거라 생각했으나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톰이 함부로 우진을 막을 순 없었다. “감사합니다. 세계인들도 이곳의 사람들도 강우진님을 잊지 못할 겁니다.” “다들 수고했어. 다음에 보자고.” “…….” 우진이 기자들을 향해 휘익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가오는 A팀을 향해 다가갔다. 우진의 멀어지는 등을 보며 톰은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최고의 미녀와 한 침대에 누워있어도 이처럼 설레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에….” 우진이 남긴 말이 묘한 기대감이 되어, 또 우진으로부터 인정받은 듯해 톰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우진은 기자들을 제쳐놓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A팀을 향해 다가갔다. 오직 승리자 1명만이 생존한 이 기이한 전장에서 A팀 리더 브론은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우진도 A팀과는 안면이 있었다. 반군에게 인질로 잡히도록 작전을 짜고 도와준 것이 A팀이니까. “믿기지 않는 결과에 찬사를 보냅니다.” “왜, 왔데?” 인간이 인간을 죽였는데 무슨 찬사가 필요한가? 죽음은 저주뿐이다. 살아있는 자들만이 승리의 축복을 이야기한다. 네크로맨서인 우진에게는 살인자에 대한 예찬만큼이나 듣기 거북한 건 없었다. 바로 말을 돌린 우진이 물었다. “모시러 왔지요.” “콜 부른 적 없는데.” “예?” 당황한 브론이 용케 눈치껏 농담인 것을 알아차렸다. “전면전에 대한 승인이 나지 않아 저희 A팀 단독으로 지원을 위해 왔습니다.” “멀리서 간 봤구만.” “…….” 우진의 직설적이 말에 브론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제 A팀이 로저스에게 받은 명령이 ‘전황이 불리하면 강우진을 구출하라’였으니 말이다. 정말 미국도 하지 못한 전쟁을 국가도 아닌 일개 인간 하나가 끝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됐고, 돌아가자.” “네. 귀환한다.” 리더 브론의 명령에 A팀들이 우진을 호위하듯 자리 잡고는 헬기로 데려갔다. 기자들이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기 위해 바쁘게 셔터를 눌러댔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말이오?” 영국인기자 조니의 말에 톰이 되물었다. “2만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음.” “강우진씨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톰이 불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강우진이 학살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우상이 모욕이라도 당한 듯 톰의 기세가 흉흉했기에 조니가 한발 물러나며 손을 저었다. “워어, 저는 강우진씨가 걱정되어 그럽니다.” “그가 왜요?” “파병 갔던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떤 전쟁 후유증을 겪는지 말입니다.” 조니의 말에 톰의 얼굴이 즉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가 시체로부터 해골 병사를 불러들여 전투를 한다지만 어쨌든 그 주체는 강우진 본인이다. 혼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몰살했는데 마음의 상처가 없겠는가? 살인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병들게 한다. 스스로 수만의 목숨을 앗아야 했을 우진이 지금 견뎌야 할 정신을 생각하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그간 우진이 보여준 거침없는 행적에 착각했다. 이 테러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하늘이 보내준 구원자라고 말이다. 결국 그도 같은 인간. “맙소사.” 톰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이르렀을 지금의 상태에서 부정적 의견이라도 들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맞고 있는 사람을 구해주었는데 되려 폭행죄로 몰린다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강우진을 향한 부정적 여론형성을 막아야 한다. 그는 살인자가 아닌 전쟁영웅이다. 저마다 경력은 다르지만 종군기자로 살아왔던 30인의 기자들이 저마다 비장한 얼굴이 되었다. 도와야 한다. 힘들어 할 강우진을 위해, 자신들을 구출해준 그를 위해 이제 그들이 싸워야 할 때였다. * 투투투투투. 귀를 울리는 로터음을 들으며 우진은 팔장을 낀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헬기를 타자마자 저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던 터라 A팀의 누구 하나 말을 붙이지 못했다. 우진은 눈을 감고 명상하듯 단단히 조인 마음을 풀었다. 긴장을 풀고, 세상에 몸을 내맡긴 듯 의식을 흐렸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의 몸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자 어김없이 악령들이 스멀스멀 우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악령들은 우진의 몸에 집착했다. 한이 있어 떠나지 못하는 지박령이라도 된 듯 우진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미안하다.’ 우진은 아직 색이 덜 검은, 이름 모를 소녀의 악령을 보곤 의지를 전했다. 악령이 부르르 떨더니 곧 다른 악령과 융화되어 우진의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사과했다. 그것으로 끝이다. 자신의 몸에 들러 붙어있던 말던…. ‘오랜만에 날뛰었더니.’ 우진이 악령들을 보며 생각이 깊어졌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자신은 신이 아닌데 살아야 할 자와 죽어야 할 자를 어떻게 판가름 할 수 있단 말인가? 악령이 되어버린, 자신을 욕해주고 저주해주며, 원망하는 이 악령들이 모순되게도 우진을 견디게 해주었다. 적절한 벌이 죄책감을 낮춰주기도 하니까. ‘기분 더럽네.’ 우진이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살인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기에는 지난날이 너무 가혹했다. ‘사춘기는 진즉 지났지.’ 무언가 사색에 잠기기엔 지나온 삶이 너무 거칠고 가혹했다. 여린 고등학생은 임모탈이 되어 아직도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저 죽을 놈을 죽였을 뿐이다. 정신력에 흠집도 가지 않았으나 기분이 더러운 건 별수 없었다. 브론의 부름에 우진이 눈을 떴다. “도착했습니다.” “…그래.” 우진이 의식을 집중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하자 금세 악령들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우진의 두 눈에 바그람 공군기지의 모습이 드러났다. “체육회라도 하나? 뭘 저리 나와 있어?” “…훗.” 우진의 말에 브론이 웃지 않을수 없었다. 이 영웅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해낸 것인지 자각이 없을까? 투투투투. 착륙장에 내려앉는 헬기를 중심으로 군인들이 사열해 있었다. 공군기지의 모든 군인들이 나와 있었다. 근무도 순찰도 모두 제쳐놓고 나와 있었다. 전쟁을 끝낸 영웅을 맞이하기 위해. 투투투투. 헬기가 착륙하자 우진이 내렸다. 헬기 바람을 맞고 선 사령관 데이비드가 사열한 병사들의 가장 앞에 있었다. 참모를 비롯한 특수각성자부대의 로저스도, 다른 부대의 지휘관들도 그의 한발 뒤에 자리 잡고 서 있었다. “뭐야?” 우진이 장난스레 웃으며 사령관 데이비드에게 다가갔다. 헬기가 곧 시동이 꺼지고 A팀들도 우진을 뒤 따랐다. [차렷!] 촤착! 로저스의 음성에 병사들이 모조리 차렷했다. 그 일치된 동작이 주는 박력에 우진이 눈썹을 한번 올렸다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웠다. [경의를 담아 경례!] “Sir!” 동시에 올라가는 손바닥. 활주로를 울리는 그들의 함성. 피식 웃은 우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왔던 A팀의 대원들도, 정보장교 레이첼도, 공군 조종사들도, 전투요원이 아닌 공병들과 지원부서의 군인들도 모두…. 30년이 넘는 군 생활 동안 전쟁터만을 누빈 데이비드 사령관도 우진을 향해 경례하고 있었다. 존경과 감사를 담아…. “뭐….” 우진이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려 눈썹에 붙였다. “이렇게 하나?” A팀이 미소 지었고, 마주 보고 있는 데이비드 사령관이 웃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종식한 영웅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영웅의 귀환을 환영하네.” 데이비드가 말과 함께 슬쩍 손짓으로 안내하듯 뒤 돌았다. 그를 중심으로 사열한 병사들이 쫙 갈라지더니 길을 만들었다. “뭐, 낯 간지럽게.” 뭐, 나쁠 게 있나. 우진이 걷자 미군들이 저마다 박수 치고 환호하며 영웅을 맞이했다.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놈들에게 동료 다섯을 잃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갈수 있게 됐습니다.” 우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십씩 떠들어대니 귀가 얼얼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 우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뭐, 이것도 이것 나름.’ 처음이었다. 자신을 두려움과 경배가 아닌 환영으로 대해주는 사람들. 군인들이 터준 길이 끝나고 우진이 걸음을 멈췄을 때 그 앞에 성녀가 서 있었다. < 91화 - 경악 > 끝 ⓒ 진설우 < 92화 - 경악 (2) > 아직 종전선언도, 반군이 사라진 반군점령지에 대한 치안관리 문제도 해결된 것이 없지만, 아프간 정부와 미군, UN이 초유의 이 사태에 대해 논의 중이며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UN 가입국의 몇몇 나라들이 군대를 파견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미 이곳에 주둔 중이던 미군의 반절이 그렇게 출동했다. 아직 살아남은 반군들이 벌이는 자잘한 테러가 예상되지만 그래도 그들은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전보다 더 힘을 냈다. 남은 군인들은 영웅을 환대하는 작은 파티를 열었다. 음식이 깔리고 잔을 든 군인들이 춤추며 웃고 떠들었다. 우진은 바의 한 쪽에 앉아 어떤 흑형이 섞어주는 칵테일을 홀짝이고 있었다. 주인공의 과장된 영웅담이나, 취담은 없었다. 그저 종전에 대한 기쁨과 귀국후 가족들과의 재회에 대한 기대가 그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조용히 술을 기울이는 우진은 성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아르펜행성을 대표해 당신에게 사과합니다.’ 성녀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우진을 인간이 아닌 임모탈로 학살의 네크로맨서로… 그렇게 두려워하고 배척하며 껄끄러워했다. 개인이 가졌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큰 힘이기에 우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반신으로 보았다. 실제 신과 대면한 우진을 인간으로 보기에도 어려웠다. 적어도 아르펜 출신의 메르디에게 그것은 믿어온 절대 법칙을 깨는 것처럼 어려운 가치관의 변화였다. ‘당신도 인간임을…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메르디는 울었다. 진심으로 슬퍼했으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임모탈이 아닌 강우진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망자들의 왕이 아닌, 아르달의 군주가 아닌, 인간 강우진과 함께 더불어 살았다면 어땠을까. 반신 임모탈이 아니라 인간 강우진을 보았어야 했다. 메르디는 지구로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임모탈이라 알려진 그 망자의 왕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그의 고향이 어떠했는지 말이다. 지구로 왔기에 강우진이라는 인간을 보았다. ‘도와주십시오. 고통받고 있습니다. 아르펜을 구원해 주십시오.’ 무릎꿇은 성녀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전장에서 마주쳤을 뿐인 성녀가, 자신을 항상 두려운 눈으로 보던 성녀가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우진이 남은 술을 마저 넘겼다. “로저스.” “말씀하시게.” 우진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로저스 대령은 우진을 보는 눈에 호감이 가득했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인 줄 몰랐다. 더구나 로저스에게 놀라운 것은 우진의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지금 나세르 살체에게 붙여둔 꼬리를 회수할 거야.”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중개상인 놈이 거래장부를 한 번 이상 접촉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위치를 알려주면 A팀이 회수해주면 좋겠어.” “흠, 직접 하지 않고?”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른 할 일이 있었다. “주요테러단체 수장들에게 꼬리를 붙일 거야.” “오호.” 우진의 능력에 의한 감시수단은 굉장했다. 이번에도 반군 수장 카림의 위치를 귀신같이 알고 추적해 최후의 일전을 벌이지 않았는가. 놈이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었다는 조바심이 없었다면 최후의 결전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 깊은 어둠에 몸을 숨겼을 것이며 테러활동은 더욱 은밀해졌을 것이다. “아프간을 봤으니 놈들이 숨을 거야. 숨으려면 최대한 몸집을 줄이는 게 좋지. 놈들의 머리만 청소하자고.” 그들 단체의 조무래기들이야 지휘부가 사라지면 그저 과격한 종교에 심취한 아이들일 뿐이다. 그들의 핵심 조직원만 사로잡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궁지에 몰아 주요인물들만 추리겠다?” “아, 그렇지. 인류 평화를 위해 인류를 몰살할 수는 없으니까.” “…….” 우진의 말에 로저스가 심장이 싸해졌다. 우진이 정말 그런 비정상적 사고를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재앙이리라. “꼬리를 붙이면 차례로 놈들을 제거해.” “흐음, 왜 직접 하지 않고 공을 우리에게 돌리지?” 로저스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공이나 명성이라고 할만한 게 있나. 자신을 건드렸기에 본보기를 보였을 뿐이다. 공명심 따위에 몸을 움직이던 시간은 이미 애초에 지났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엔 효율이 나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진은 다른 할 일이 있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가지.” “바로 A팀을 준비하겠네.” 우진이 일어서자 로저스 대령도 일어섰다. 우진이 자신의 앞으로 배정된 숙소를 향해갔다. 그 앞에서는 성녀가 여전히 대기 중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우진은 옅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뭐 해?” “대답을 해 주십시오.” 성녀가 공손히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우진이 성녀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야.” “예?” “같은 사람으로 볼 거라며?” “…….” “근데 볼 때마다 넙죽 무릎 꿇고 똥 마련 강아지처럼 끙끙 대냐.” “…….” 어쩌란 말인가. 우진은 신을 대면한 자. 인간이긴 하지만 아리아 여신을 모시는 그녀로서는 우진이 공경의 대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강우진님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임모탈이 아닌 인간 강우진을 볼 것이다. “에휴, 어차피 아르펜으로 갈거야.” “그 말씀은…!” 성녀의 눈동자가 격동으로 일렁거렸다.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지구에 열리는 던전은 6성까지. 던전은 9성까지 존재한다. 9성이 모두 열렸다는 것은 지구의 마나 농도가 극에 이르렀다는 증거. 그때가 되어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있다. 그리고 우진이 얻어야 할 장비들의 재료들은 대부분이 귀한 것들. 업적을 모아 포인트상점에서 구하지 않는 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9성 던전은 물론 희귀 재료들이 즐비한 아르펜에서의 원정 사냥뿐이다. 트라넷의 군단장들을 상대하려면 트래쉬의 세트아이템이 필요했다. “난 아르펜을 친다. 구하는 건 직접 해봐. 따라다니게 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녀가 넙죽넙죽 고개를 숙이며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여신의 말이 맞았다. 지구에 아르펜의 구원자가 있다더니 다름 아닌 강우진인 모양이었다. 여신님을 자신을 이리로 인도한 이유가 있었다. “망이나 봐. 한 며칠 가만있을 테니까.” “예에.” 우진은 방에 들어와 곧장 깨비를 불렀다. “그림자 거둬.” [크큭, 어떤 놈일지 기대되는군.] 깨비가 나세르 살체에게 심어두었던 분신을 거둬들였다. 뭔가 훅하고 몸으로 흡수되는가 싶더니 우진은 그간 나세르 살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대로 경험으로 흡수했다. 그가 이룬 며칠간의 행적의 기억들이 한번에 밀려들어와 작은 두통이 일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우진이 인상을 썼다. “잡으러 갈 필요도 없네.” 나세르 살체가 뒤적거리던 장부의 미해결 건에서 중요한 이름을 보았다. 수십 개나 나열된 다른 사건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화랑 길드 마스터 의뢰건] “이 새끼가?” 우진은 화랑의 길드 마스터 이상호를 떠올리자 인상을 썼다. 생긴 건 간이 콩알만 하게 생겼던데 감히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돌이켜보면 자신에게 원한을 품을 이유야 충분했다. “돌아가면 보자.” 우진은 테이블의 메모지에 나세르 살체의 장부 위치와 그의 지금 위치, 행적, 등의 모든 정보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메르디.” “네에.” 메르디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우진이 메모를 넘겼다. “로저스 대령이 오면 전해주도록 해. 그리고 3일은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마.” “예에.” 메르디가 메모를 받아 나가자 우진은 깨비를 다시 불렀다. “침대에 가만 누워있어라. 어디 돌아다니면 진짜 뒤진다.” [크큭, 이를 말인가.] 권속들 중에서 유일하게 불안한 깨비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쓸 수밖에 없었다. 우진은 깨비와 영혼을 교환하곤 그림자가 되어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는 여섯.’ 적어도 여섯 명의 행적은 조사할 수 있었다. 우진은 카림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가장 극단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여섯에게 그림자를 붙이기 위해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방을 나섰다. 우진이 그림자가 되어 나서자 우진의 몸을 차지한 깨비는 방을 두리번거리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 마셨다. “크크큭.” 시체에 강림하는 것도 좋지만 깨비에게 주인의 몸을 차지하는 것은 엄청난 쾌감을 주었다. 맥주 한 병을 단번에 마시고는 침대맡을 오가며 방문을 노려보았다. 저 밖에 성녀가 있다. 놀잇감이. “크큭, 아직은 얌전 해주지.” 놀고 싶고 사고치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아직 주인은 덜 여물었고, 그와 함께 자신도 더 커야 했다. 깨비는 음흉하게 웃으며 침대에 털썩 몸을 누웠다. * 사당역 길드 아르달의 사무실. 회의실에 모인 핵심 멤버들은 서로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 하나 심각하지 않은 얼굴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부사장 정민찬이었다. “홍 이사는 알고 있었습니까?” “능력이야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습니다.” 홍성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우진이 해골병사들과 마법사를 부리는 것은 안다. 그들 개개의 능력도 D급은 이상인 것도 안다. 아니, 이제 보니 거의 C급이라 불러도 될 정도. 그런 해골들을 1만이 넘게 거느린다. “후…. 정말 이런 분이 우리 사장이시니.” “…….” 모두 같은 사장을 두고 있는 그들이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이제 사무실 앞에 기자들이 없으면 허전한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이제는 별별 이상한 시민단체까지 아르달의 사무실 앞에서 집회 중이었다. 거기에 그들을 막기 위한 경찰들까지 출동해 사당역사거리는 항상 인파로 북적였다. “자, 어차피 일은 터졌고 대책을 논의해봅시다.” 강우진이 이번에도 아주 큰 일을 터트렸다. 아프간의 반군 자체를 아예 학살해버린 것. 전쟁이라 불려야 할 그 일이 학살로 불리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사람들은 일개 개인인 우진의 무력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가 거느린 수하들이 사람의 시체가 되살아나 움직이는 스켈레톤이라는 것이 그런 염려를 더욱 부추겨 불안과 두려움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음, 일단 시뮬레이션부터 해봅시다. 저기 밖에 시위 중인 사람들을 마주친 사장님의 반응은?” 민찬의 말에 우승훈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말해보세요. 우실장.” 우승훈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우진의 표정을 흉내 냈다. “이 잡것들은 뭐야? 뒤지고 싶지?” “푸훗.” 성구가 웃음을 터트렸고, 곧 정색하곤 사과했다. “아, 죄송. 그런데 형님 돌아오시면 정말 큰 일인데요. 형님 성격에 진짜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민찬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러니 대책을 마련하자는 것 아닙니까.” 해민이 심각한 얼굴로 거들었다. 친해진 기자들이 있어 국회에 대한 정보도 얻고 있는 그였다. “국회에서도 별로 좋은 분위기가 아니랍니다. 협약을 거절한 게 있어 저희 길드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데 저만한 무력이 있다는 게 알려졌으니 많이 껄끄러워 한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가 무슨 쿠데타라도 일으킨답니까?” 우승훈이 제 일이라도 되는 양 성질 냈으나 그거야 그들의 이야기고, 국회의 어른들이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 힘을 가진 것을 극도로 껴려한다. 손을 잡고 한배에 태우거나, 그 배를 침몰시키거나…. 우진은 내민 손을 거절했고, 침몰시키기엔 아르달의 존재감이 너무 커져 버렸다. “몇몇 의원들은 사장님을 입국 금지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해민의 말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한민국에 무슨 해를 끼쳤다고 저리들 호들갑인지…. “끙. 대책을 세웁시다.” 강우진이 이대로 한국에 돌아오면 큰일이다. 세계의 언론이 모두 강우진을 테러로부터 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하는 분위기인데 한국의 정부는 강우진을 꺼림칙해했고, 종교단체들은 미쳐서 날뛰고 있었다. 이대로 강우진이 돌아오면 폭탄이 터지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사람들은 너무 모르고 있었다. 받은 건 그대로 되갚아준다는 강우진의 제 1 법칙을. 강우진은 법보다 그것을 더 우위에 두고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법을 믿고 너무 나대고 있었다. 울타리가 무너진 지도 모르고 사자 앞에서 춤추는 꼴이다. “에휴.” 사무실을 옮긴다고 될 일도 아니고,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모두가 한숨만 쉬는데 휴대폰을 슬쩍 슬쩍 보던 우승훈이 말했다. “어? 대구에 던전 터졌답니다.” “응? 그런 정보는 없었는데.” 민찬이 의아해하며 티비를 틀었다. 던전브레이크는 최초공략에 실패한 던전이 30일 이후에 일어난다. 그런 던전이 있었다면 민찬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이곳은 대구입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에 지금 현재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인근의 군부대가 출동한 상태이고, 정부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길드에 협조 공문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멀리 떨어진 헬기에서 찍은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불타는 도시와 무너진 건물들 날뛰는 몬스터들…. 그 아비규환을 보니 대비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 엄청난 피해를 당한 대 재앙, 초창기의 던전 쇼크가 생각나는 그들이었다. ‘사장님.’ 뉴스 속보를 보는 모두가 한 인물을 떠올렸다. < 92화 - 경악 (2) > 끝 ⓒ 진설우 < 93화 - 홍성구 대폭주 > [현재 추정되는 던전브레이크는 이미 공략되었던 던전으로 추정되며 이는 전례 없던 일로 던전 쇼크의 재현이….] 뉴스속보를 보는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징조도, 30일의 시간도 없이 갑자기 던전이 이렇게 막 터질 수도 있는 건가? 모두가 패닉에 빠진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부사장님. 국방부 요청입니다. 모든 각성자 던전 공략 중지하고 출동 대기하랍니다.” “음, 알겠어.” 직원의 말에 민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례적인 던전 브레이크인지라 현재 던전에 입장한 인원 외에는 대기하는 게 맞았다. 성구는 여기 있었고, 해솔도 근처에 새로 임대한 몬스터 격리소에 대기 중이었다.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장님께 일단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음, 연락할 수단이….” 우진이 소셜미디어를 하는 것도 이메일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도 아니기에 연락할 수단은 메신저 앱 뿐이었는데 인터넷에 연결되어있지 않다면 불가능했다. “일단 메시지 보내고, 타이탄 통해서 연락해봐.” 성녀와 함께 있다고 했으니 그녀를 통하면 연락이 닿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번 던전 브레이크는 세계적 이슈로 뉴스에 나갈 테니 소식을 접할 것이다. “흠, 이게 또 무슨 일인지….” 민찬은 5년 전 던전 쇼크가 생각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얼마나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는가, 던전이 주는 혈석이라는 엄청난 자원 덕에 단시일에 복구되었다 하지만 그때 죽은 인류의 수는 아직도 복구되지 않고 있었다.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 대구 죽전역 인근 건물들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쿠오오오!” 미친 듯이 날뛰는 아이스 트롤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차량이 너무나 가볍게 날아다녔고, 건물을 두들기면 너무 쉽게 바스러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는 던전 브레이크는 인근 도시민들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스 트롤 하나가 거친 숨을 내쉬며 주택가를 배회했다. “킁킁.” 인간들의 냄새가 난다. 쿵, 쿵. 오우거 만큼의 거구는 아니지만 인간에 비해서 두 배나 큰 몸집과 키는 2층 주택의 창문과 눈높이가 같았다. 징그러운 속눈썹이 달린 트롤의 눈이 창문을 훑었다. “꺄아아악!” 눈이 마주친 소녀가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쿠르르” 아이스 트롤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어린 인간은 특히 맛있다. “꺄아아악!” 흰털이 숭숭 난 아이스트롤의 긴팔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 여자아이를 낚아채기 위해 방안을 어지럽혔다. 아이는 뒷걸음질 쳐봤으나 등은 벽에 가로막혀 더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문이 바로 옆이지만 너무 무서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열고 나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쿠르륵.” 잘힐듯 잡히지 않자 아이스트롤이 화가 난 듯 성을 내더니 손을 빼곤 자신의 무기인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집채로 부숴버리고 어린 인간을 먹으리라. 그때 하늘에서 근육질의 인간이 뛰어내렸다. “하아압!” 콰앙. 인간이 내지른 주먹이 아이스트롤의 머리를 그대로 후려쳤다. “쿠루루룩!” “아, 안 뒈지네.” 체중을 모조리 실은 공격에도 아이스트롤은 죽지 않았다. 역시 트롤이라 그런지 두개골이 깨진 듯 머리 모양이 변형되었는데도 꿈틀거리며 회복하고 있었다. “한방에 안되면 두방에!” 남자의 주먹이 검게 변했다. 콰앙! 검게 변한 주먹은 돌덩이라도 되는 듯 아이스 트롤의 머리통이 그대로 깨져버렸다. 뇌가 터졌는데도 꿈틀거리던 아이스 트롤의 몸이 멈췄다. “어이 꼬마야. 나와라.” 사내의 말에도 여자아이는 너무 무서워 움직이질 못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내를 쫓아왔다. “사장니임!” “여기 정리해라. 저기 애 하나 있다.” “네엡.” KH 길드의 사장 백종도는 골목으로 다시 하나 기어오는 아이스 트롤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군대는 아직 이래?” “동쪽에서부터 수색 진압 중이랍니다. 민간인들 대피가 안되다 보니 화력지원은 기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이게 문제다. 예정된 던전 브레이크는 문제가 안 된다. 주민을 대피시키고 군부대의 압도적 화력으로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그대로 집중 포격해 말살하면 되니까. 하지만 예기치 못한 던전브레이크인지라 그것이 불가능했다. 주민들의 대피가 이뤄지지 않았으니 폭격은 불가능했고, 도시로 숨어든 몬스터를 쫓는데 중기갑은 너무 느렸다. 도시에 풀린 몬스터를 추격 사냥하는데 각성자만 한 이들이 없었다. 대구의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찾은 모든 각성자들에게 동원령이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KH길드의 백종도는 대구역의 6성 던전을 예약하고 내려왔다가 던전 브레이크 소식을 듣고 바로 이곳으로 왔다. 다른 각성자도 도심을 누비며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쯧, 얼마 안 풀려 다행이구만.” 아이스트롤 자체는 B급의 각성자 정도면 상대가 가능했다. 좀 큰놈이라도 몇 명이 협력해 덤벼들면 가능했다. 이곳은 입장제한이 있는 던전이 아니기에 수적우세는 각성자들에게 있었다. 그나마 몸집이 커 찾기 쉬운 아이스트롤이 등장해 다행이다. 몸집이 작고 잘 숨는 놈이었다면 진화에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피해는 별수 없지만 브레이크가 일어난 던전이 1개뿐이라 재앙이라 불릴만한 피해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런 예고 없는 던전 브레이크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날지, 이것이 시작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헤프닝이면 좋으련만.” 이번 일을 단순 사고로 끝내자면 예고 없는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이유를 밝혀야 하겠지만, 우선은 풀려난 몬스터를 소탕하는 게 먼저였다. 백종도는 골목을 어슬렁 거리며 다가오는 아이스트롤을 보며 주먹을 검게 물들였다. *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며 뜨거운 몸과 정신을 식혀주는 기분이었다. “하아.” 이상호는 달뜬 신음을 쏟아냈다. 엄청난걸 얻고 말았다. “조종할 수 있다.” 각성자는 던전을 공략하고 귀환석이 있어야만 결계를 허물고 던전을 나올 수 있었다. 몬스터도 마찬가지로 30일이 지나면 귀환석을 이용해 던전을 나온다. 이것이 던전 브레이크. “하아, 이 힘은….” 이엘로의 가신이 되었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귀환석으로 향하는 자신을 아예 적대시하질 않았다. 귀환석을 가지고 결계를 허문다. 던전 브레이크와 다를 바 없지만 이것은 자신이 몬스터들을 인도해 세상에 풀어놓는 것과 같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기 뜻에 의해. “크크큭.” 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던전 브레이크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는지는 던전 쇼크 때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하철역에서 먼 안전지대로 이동했지만 던전 산업과 관련하여 아직 많은 사람들이 던전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사상누각과 다를 바 없는 상황. 자신이 조금만 조종하면 와르르 무너질 터였다. “공포에 떨어라.” 몬스터들을 조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상관없다.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물론 몇 가지 준비는 필요했다. 결계를 허물고 먼저 나오던, 늦게 나오던 언젠가는 몬스터들과 함께 던전을 나오는 자신을 사람들이 발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준비. 몇 가지 준비를 모두 마치면 시작할 것이다. “강우진. 기다려라.” 강우진. 녀석도 느껴보아야 한다. 상실의 슬픔을 말이다. “무엇부터 뺏어줄까.” 힘을 얻은 이상호가 웃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더없이 만족스럽다. 근래 들어 오늘처럼 기뻤던 날이 있었을까? 어떻게 녀석을 파멸시킬까를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엔돌핀이 솟구쳤다. 자신을 옥죄던 스트레스가 모조리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일단 가족부터….” 그다음은 지인들, 길드, 부하들, 명성까지…. 모조리 뺏어주마. * 사망자 47명 부상자 512명 재산피해 500억 추정. 예고 없이 찾아온 던전 브레이크가 가져다준 파장은 그 피해만큼이나 컸다. 던전 쇼크의 기억, 그리고 두려움. 단 한 번의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지하철을 품은 도시로부터의 엑소더스의 조짐을 보였다. 남는 자들도 있었고 떠나는 자들도 있었지만 남은 자들도 떠나지 못해 남았을 뿐. 돈 있고 발 빠른 사람들은 벌써 안전지대로 옮겨갔고, 남은 사람들도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대구의 던전브레이크가 종료된 지 이틀째. 단 2일 만에 서울의 인구 10%가 강원도의 안전지대로 터전을 옮겼다. “후우, 이거 영 불안해서 못 있겠는데요.” 성구와 해솔은 던전을 공략하지 않고 허송세월 보낸 이틀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위기가 찾아오는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무력한 기분. 아니, 준비는 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가족들을 지킬 수 있도록 임시로 아르달 사무실 인근으로 이사시켰다. 안전지대의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지만 역세권의 아파트들은 바닥 없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나마 사당역은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인 해머길드의 본사가 자리하고 있기에 비교적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성구의 입장에서도 가족들이 멀리 있는 것 보다는 가까이 있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형님은 아직 연락이 안 닿아요?” “음, 작전 수행 중이라네. 조만간 연락을 주시겠지.” 민찬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전체가 요동치는데 아르달의 중심을 잡고 이끌어줄 리더가 부재중이었다. 성구는 가슴이 답답했다. 수련도 사냥도 하지않으니 정체를 넘어 퇴보되는 느낌에 불안감이 커졌다. “안 되겠네요. 저는 근처에 하위 던전이라도 돌아야겠어요.” “음, 그렇게 해. 끝나면 바로바로 연락하자고.” “네.” “우팀장이랑 같이 가. 우팀장 편으로 연락 주고 받는게 낫겠어.” “그렇게 할게요.” 사장비서실장이지만 어차피 강우진이 부재중이기에 우승훈이 성구의 지원을 위해 붙었다. 하위 던전은 자체의 공략시간이 짧으니 마냥 앉아서 대기하는 것보다는 하위던전이라도 공략하면서 있는 게 마음도 편하고 효율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뒤숭숭한 분위기 탓인지 예전이었으면 꽉 찼을 던전의 스케쥴이 군데군데 빈 곳이 여럿 있었다. 예약 없이 운영하는 하위 던전이다 보니 비서실의 직원들이 각자 흩어져 인근 하위 던전의 줄서기를 하며 예약시간을 조정했다. “이수역 4번 출구가 지금 이용 가능하답니다.” “그쪽으로 가요.” 바로 한 정거장 거리였으니 위치상으로도 부담이 없다. 성구는 해솔과 함께 이수역으로 향했다. 잭슨을 태운 컨테이너 트럭으로 이동한 그들은 이수역에 도착하자 검치호 잭슨을 내리고, 칼날부리 까마귀들을 내렸다. “3시간 내로 올게요.” “넵, 고생하십시오. 이사님.” 강우진처럼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클리어하지는 못하겠지만 3성 던전인지라 솔플로도 3시간 이내에 클리어는 가능했다. 해솔과 함께하니 클리어 시간은 더 줄어들 것이다. 성구와 해솔이 던전 안으로 사라지자 우승훈이 이제는 익숙해진 기다림을 시작했다. “하, 어디 카페라도 가 있죠.” “네, 실장님.” 자신의 휘하 비서실에만 20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승훈은 몇몇만 던전 앞을 지키도록 하고는 나머지 인원들과 함께 인근의 카페로 향했다. “어?” 카페로 향하던 승훈은 검은 로브에 마찬가지로 검은색으로 칠한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린 사람과 마주쳐가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날 보고 웃은 거 같은데.’ 황급히 뒤돌아봤으나 상대는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잘못 봤나.’ 눈 모양이나 눈빛이 꼭 자신을 잘 아는 듯 웃은 것 같은 느낌이지만, 뭐 가면에 가려져 있으니 잘못 보았나 싶었다. 우승훈이 카페로 향했고, 가면의 남자는 이수역 8번 출구로 향했다. < 93화 - 홍성구 대폭주 > 끝 ⓒ 진설우 < 94화 - 홍성구 대폭주 (2) > “저 사람 수상하지 않습니까?” 직원의 말에 우승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사람 한둘이냐. 각성자겠지.” “그런가요.” 아티팩트의 모양은 천차만별이다. 분실이나 혹시 모를 강도의 위험이 있어 소중한 아티팩트일수록 감추기 마련인데 종종 드러내놓고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지하철역이 인접한 역세권에서는 칼이며 창이며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리 드문 경우도 아니었다. 띠리디리 딩 딩! 승훈은 벨소리에 휴대폰을 꺼내보니 이사로 승진한 김해민이었다. “어? 무슨 일이지. 난 아무거나 쥬스로.” “네, 실장님.” 직원들이 먼저 커피숍으로 들어가고 승훈은 카페 앞 테라스 의자에 앉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이사님.” [승훈씨. 지금 성구씨랑 해솔씨 던전 들어갔어요?] “네, 방금 들어갔습니다.” [하, 이거 큰일이네. 사당역이 터졌습니다. 사무실로 오지 마시고 일단 알아서 대피하십시오.] “예?” 우승훈이 눈을 끔벅이는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애애애애애앵! 마치 민방위 훈련이라도 하는듯한 그 소리에 우승훈은 등줄기가 싸해지며 머리가 쭈뼛 섰다. 얼마 전 있었던 대구의 던전 브레이크가 생각났다. 사당역이면 겨우 한 정거장 거리다. [알립니다. 지금 현재 사당역에서 던전 브레이크 발생. 시민 여러분께서는 지금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알립니다….] 안내방송 멘트가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비서실의 직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 실장님!” “후, 모두 따라와. 가자.” 직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우승훈은 패닉에 빠진 직원들을 이끌려면 스스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승훈의 말에 직원들이 뒤따라 대기 중이던 차량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모두 차량 탑승하고 일단 사당역에서 멀어집니다. 서두르세요.” “넵.” 던전은 안전하다. 폭격에도 던전은 무너지지 않는다. 던전이 위험한 것은 내부의 사정이지 외부의 충격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성구와 해솔은 무사히 던전 공략을 마치면 밖으로 나올 것이다. 차라리 던전 공략에 시간이 더 걸려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 나오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승훈은 빠르게 조수석에 오르며 휴대폰을 열어 뉴스부터 확인했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자마자 속보로 떠오른 뉴스를 클릭했다. “젠장, 6성 던전이야!” 하필이면 6성 던전인 1번 출구가 터졌다. 빠르게 던전포럼을 실행해 던전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주력 몬스터는 회색늑대. 송아지만 한 크기에 기동력도 좋고 사냥에 특화되어 조직적으로 각성자들을 상대하는데 능한 녀석들이다. “젠장!” 이런 놈들이 적어도 수십 수백 마리가 서울에 풀렸다. 아이스 트롤보다 더 작으며 더 재빠른 놈인지라 소탕에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명피해가 크다. “실장님 어디로 갑니까?” “일단 출발해. 인근 대피소가….” 던전 포럼을 다시 살피던 우승훈은 차량이 교차로를 지날 때 묘한 위화감에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이수역 8번 출구. 검은 로브에 검은 가면까지 쓴, 조금 특이해 보이던 사람이 들어갔던 던전이다. 그곳에서 흉측한 이빨을 쩍 벌린 거대한 뱀의 대가리가 튀어나왔다. 우승훈의 눈동자가 커졌다. 사람의 몸통만 한 크기의 머리를 생각하면 생각하면 어마한 크기의 대형 뱀. “밟아!” “…!” 우승훈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운전대를 잡은 직원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부아아앙! “캬르르르!” 일반 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던전에서 튀어나온 그것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어 캑캑 거리며 교차로로 튀어나왔다. 쿠우웅! 승훈의 뒤에 따라오던 차량이 뱀의 대가리에 부딪혀 그대로 뒤집어졌다. 뱀의 이빨에서 떨어진 독이 전복된 차량의 유리에 떨어졌다. 푸시시시시. 독성이 얼마나 강한지 유리째로 녹여버린 독은 운전자에게까지 닿아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끄아아악.” 쉬쉬쉭. 날름거리는 뱀의 혀가 돌기라도 달린 듯 운전자를 휘감아야 그대로 입속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미친!” 우승훈은 조금만 늦었어도 뱀의 아가리에 빨려 들어가는 인간이 자신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던전에서는 거대 뱀을 시작으로 밀림에서 활동하던 몬스터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무조건 밟아.” “넵.” 운전하던 직원도 눈이 있는지라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몬스터를 보며 미친 듯이 가속 페달을 밟았다. 잠깐 사이에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몬스터들에게 가차 없이 살육당했다. “시발, 이건 5성이야.” 던전 포럼에서 정보를 찾아본 우승훈이 욕을 뱉었다.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는 상황이었다. 징조 없는 던전 브레이크. 대구는 시작에 불과했다. 서울의 던전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 “하아, 하아.” 해솔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해솔을 향해 성구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헤헤, 수고하셨어요.” “하아, 홍 이사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근접 전투술은 정말 신체 각성자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몬스터 테이밍 능력을 개발하는 것과는 별도로 다른 전투술을 익히는 것도 중요했다. 성구와의 대련은 해솔에게 큰 공부가 되고 있었다. “헤헤, 전 아직 멀었습니다. 형님에 비하면… 아니, 어깨 기사들한테도 못 미치는걸요. 헤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강우진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데스나이트들은 그야말로 괴물들이었다. 그들과 대련을 해본 적 있던 성구와 해솔은 진정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타고난 전사였다. 그만큼 강해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욱 단련해야 한다. “이제 나가요.” “알겠습니다.” 성구는 해솔과 함께 귀환석을 챙겨 결계로 향했다. 귀환석을 내밀자 결계가 희미해지며 사라졌고 계단을 오른 둘은 변해버린 거리를 마주 해야 했다. “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군데군데 패인 도로와 부서진 자동차들, 유리창이 깨진 건물들과 군데군데 치솟는 불길과 검은 연기. “으아아악!” “크롸아아.” 비명과 괴성. 투두두두두! 파지지직! 총성과 전기 마법이 작렬하는 소리. “허.” 성구의 입에서 짧은 숨을 토했다. 상황파악을 못할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다. 던전 브레이크. 성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은 적당했고, 근육은 몸을 활시위처럼 팽팽히 조였으며 감각은 날카롭게 벼려졌다. “해솔씨. 저기 저놈 맡으세요.” “네. 가자, 잭슨!” “크와아앙!” 잭슨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자랑하듯 포효하며 날아올랐다. 각성자와 대치 중이던 거대 곰과 어우러져 싸움이 벌어졌고, 해솔은 즉시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각성자들을 향해 텔레파시를 전개했다. [하나씩 각개격파 합시다.] 해솔은 빠르게 전장을 파악했고 산발적으로 팀을 이루고 몬스터들과 대치 중인 그들을 차례로 도왔다. 그들 모두가 C급 이하의 각성자들. 검치호 잭슨 하나만으로도 B급 이상의 전투력. 해솔이 합류하자 몬스터들의 사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성구의 시선은 던전 근처에 있던 혈석매입소에 가 있었다. “쿠르륵, 쿠르륵.” 건물 자체를 무너뜨리고 혈석을 처먹느라 정신이 팔린 거대 뱀. 녀석의 피부는 혈석을 먹을 때마다 은은한 빛을 뿜었으며 조금씩 덩치가 자랐다. 혈석을 먹느라 정신이 팔려있어서 그렇지 놈이 날뛰었으면 근처의 하위 각성자들은 모조리 죽어나갔을 것이다. 화르륵. 성구가 화염구를 그대로 뱀에게 쏘아냈다. “취익.” 위협을 느꼈는지 뱀이 대가리를 들어 화염구를 피해냈다. 콰앙! 능력이 발전한 화염구는 비록 명중하진 못했지만 바닥에 닿자 불꽃이 터지며 폭발했다. “취익?” 혀를 날름거린 뱀이 성구를 향해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몸집은 전설에 나오는 이무기라 해도 될 정도로 거대했으며 녀석의 번들거리는 피부는 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지개 코브라. ‘아직 상대할 만 해.’ 녀석의 비늘이 다섯 가지 색을 띈다는 것은 5성급의 몬스터라는 의미. 성구가 눈매를 좁히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쉬쉬쉭.” 혀를 날름거리며 성구를 향해 다가오는 녀석의 비늘이 허옇게 떴다. “어?” 갑작스레 피부병이라도 걸린 게 아니라면 한가지 이유 뿐이다. “쉬쉭.” 녀석이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비늘은 6가지 색을 띄었다. “하하.” 성구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6성의 무지개 코브라. 공개된 정보에 의하면 녀석은 최초 공략 때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다. 공략된 6성 던전에는 5색의 무지개 코브라가 기본 몬스터로 등장하는데…. ‘할 수 있을까?’ 공략된 6성 던전만 클리어해봤지 미공략 6성 던전은 도전 자체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성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진을 처음 만났던 그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쫄려도 쪼는 척 하는 거 아니야.’ 우진의 음성이 머릿속에 들리는듯하다. 성구가 괜히 그를 따라 피식 웃으며 아이언 스킨을 전개했다. “쉬쉭.” 6색으로 진화한 무지개 코브라를 노려보며 강화된 피부에 흐르는 마력을 불태웠다. 화르륵. 성구의 몸이 불타며 말 그대로 불의 인간으로 화했다. “캬아악.” 무지개 코브라가 위협적인 이빨을 드러내며 독을 뱉었으나 불길에 타올라 증발하고 말았다. 성구는 무지개 코브라를 향해 불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쾅, 콰앙! 녀석의 크기가 워낙에 거대했기에 대충 던져도 맞는다. 두터운 비늘로 인해 별반 피해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화를 돋구기에는 충분한 공격. “캬악!” 바짝 약이 오른 녀석이 성구를 향해 매섭게 돌진했다. “블레이즈” 성구가 뒤로 돌아 질주하자 그의 뒤로 화염의 길이 만들어졌다. 불길 따위야 비늘을 태우지도, 화성을 입히지도 못한다. 하지만 성구는 녀석을 피해 이리저리 다니며 바닥에 불을 질렀다. 화르륵. 도로에 가득한 불과 도망치는 성구와 쫓는 무지개 코브라. 한참을 도망치던 성구는 폐부를 찌르는 후끈한 열기와 온통 시뻘건 주변의 불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취익.” 약이 바짝 오른 무지개 코브라가 성구를 쏘아보며 똬리를 틀었다. 비틀린 허리가 펴지며 녀석을 덮칠 것이다. “화염흡수.” 성구가 주문을 외우자 도로를 가득 메우던 화염이 모조리 성구를 향해 빨려들어 왔다. 폭발 중이던 차량의 불꽃도, 가스배관이 터진 듯 활활 타오르던 상가건물의 화염도 모조리 성구에게로 빨려들어왔다. 아이언 스킨으로 보호되고 있던 그의 신체에 붙었던 불길도 모조리 흡수되어 성구의 오른손에 뭉쳤다. 우진이 구해준 화염 마법서 중 대인 공격수단으로는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마법. 주변의 모든 화염을 모아 만든 불꽃의 정수. “좀 뜨거울 거다.” “캬아.” 화염 덩어리를 든 성구가 도약했다. 허리를 바짝 편 무지개 코브라가 뛰어오른 성구를 그대로 삼켜버릴 듯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성구가 씨익 웃으며 오른손에 뭉쳐진 불덩어리. 헬파이어를 6색 무지개 코브라의 입속에 던졌다. “구워주마!” 꽈아아앙! 입속에서 터진 화염 덩어리에 코브라의 머리통이 그대로 폭발했고 그 폭발의 후폭풍에 성구가 휩쓸려 날아가 주위에 있던 차량을 깨고 처박혔다. “홍 이사님!” 해솔이 놀라 뛰어왔으나 어지간한 신체 각성자는 비교도 안될 맷집의 성구는 어깨를 빙빙 돌리며 일어났다. 차에 처박히며 팔로 짚다가 자칫 골절될뻔했다. “으으, 팔 부러질뻔했네.” “정말 대단하십니다!” “헤헤, 뭘요.” 순박하게 웃는 성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해솔의 눈동자엔 선망이 가득했다. < 94화 - 홍성구 대폭주 (2) > 끝 ⓒ 진설우 < 95화 - 총알택시 > “후, 그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성구의 물음에 해솔의 옆에 있던 각성자 하나가 답했다. “아유, 말도 마십시오. 사당역을 시작으로 인근의 던전이 차례로 터졌습니다. 지금 서울 자체가 비상입니다. 그런데 어느 길드의 뉘신 지….” 척 보기에도 성구의 전투력이 심상찮았다. 이 정도면 이미 유명한 고위 각성자일 텐데 얼굴이 낯설어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의 말에 성구는 평소처럼 헤실 웃지 못했다. 브레이크가 일어난 던전이 하나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총성이 성구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 와중에 거슬리는 단어. “사당역이 터졌다고요?” “예에. 최초로 터졌지요. 해머길드가 있어 정리는 빠르게 된듯했는데 최초 6성 던전이 터지고 뒤이어 5성 하나랑 4성 하나가 연달아 터졌습니다. 아직도 수습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하철역은 여러 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수만큼의 던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좁은 역 근방에 연달아 3개의 던전이 터졌다면 소탕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사당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역들이 모조리 터지며 어딜 가나 몬스터들과 마주치는 상황. 그곳에 가족이 있는데…. “해솔씨. 전 사당으로 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겨우 한 정거장의 거리. 성구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 사당역 인근의 해머길드 본사. 던전 브레이크 이후에 지어진 고층빌딩답게 기본적으로 어지간한 몬스터의 침입은 막아낼 수 있도록 철옹성과 같이 지어졌다. 3층까지의 모든 문과 창문에 두터운 쇠로 만들어진 문이 내려와 회색늑대의 접근을 막았다. 유사시 대피처도 겸하도록 한 건물. “빨리빨리! 뛰어!” 해머길드의 각성자들이 시민들을 보호하며 독려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회색늑대가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해머길드의 사장 박상오가 앞으로 나섰다. “하압!” 그가 두 손을 뻗자 풍압이 일며 회오리가 휘몰아쳐 늑대들을 저 멀리 날려보냈다. 대한민국 최고의 바람술사, 박상오가 소리쳤다. “빨리 뛰십시오.” 시민들이 재빨리 건물로 향했다. 박상오가 몰려드는 몬스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던전의 변덕일까, 아니면 변화의 시작일까. 기존에 정립되었던 던전 브레이크의 공식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공략이 완료된 던전이 막 터지고 있었다. “어?” 박상오의 눈에 시민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민찬씨.” “…사장님.” 좋지 못한 상황에서 좋지 못하게 헤어진 전 상사와 마주쳤다. 민찬은 함께 온 성구의 가족들과 강우진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보곤 손짓했다. “먼저 가십시오.” “아이고, 부사장님은 어쩌고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일반인인 그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저 박상오가 부르니 잠깐 멈춰 선 것이다. 같은 직장에서 몸담았던 해민은 가족들과 길드의 식구들을 이끌고 피난처인 해머길드로 향했다. “거참.” 박상오는 입맛이 썼다. 민찬을 보는 그의 눈빛에는 애증이 감돌았다. 자신과 동갑의 나이에 유능했던 직원은 자신의 밑에 있을 그릇이 아니었나 보다. 팀장이었던 그가 아르달로 가서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 걸 보면 말이다. “위험하니 어서 들어가세요.” “예, 저희 길드의 각성자들도 곧 합류할 겁니다.” 박상오가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길드 아르달이야 강우진의 원맨팀 아닌가. 중동에 있는 그가 어떻게 예까지 오겠는가, 그 말고 홍성구인가 하는 B급 각성자나, 이제 막 입사한 군인출신 각성자 정도의 인물은 해머길드에 차고 넘쳤다. 지금 당장 박상오의 주위에 모여있는 회사의 각성자들만 하여도 B급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됐습니다. 얼른 들어가세요.” “예, 그럼.” 일반인이 있어봐야 방해만 된다. 그들은 피난처로 안전히 피신해 얌전히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거다. “쳇, 이럴 때 진우라도 있었으면.” A등급의 해머길드 부사장 박진우는 지금 자신의 팀들과 부산의 6성 던전 공략에 나가 있었다. 함께 갔던 지원부에 소식이야 전했으니 던전에서 나오는 데로 서울로 올라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미 몬스터 소탕이 끝났을 테니 별반 의미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박상오가 나서서 회사의 각성자들과 함께 몬스터를 소탕해야 할 판이었다. “어디 발바닥 땀나도록 뛰어 볼… 어?” 박상오는 도로의 중간을 어슬렁 걸어오는 존재를 보곤 말을 잊었다. 터진 게 6성 던전이라지만 저런 게 튀어나와도 되는 것인가? 공략된 던전엔 보스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리를 활보하는 녀석은 척 보기에도 보스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아우우우우.] 녀석의 울부짖음에 건물들 사이사이에서 회색늑대들이 어슬렁 튀어나왔다. 군집을 이루는 늑대의 우두머리. “좀 많이 큰데요?” “저게 좀 많이 큰 정도냐?” 옆에 있던 각성자의 말에 박상오가 인상을 팍 쓰며 대꾸했다. 일반 회색늑대도 크기가 비정상적이다. 그것들이 승용차 정도의 크기라면 지금 나타난 우두머리는 트레일러 정도의 크기였다. 머리에는 뿔까지 달려있어 심상찮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젠장, 뭐 튀어나올지 모른다. 방어 준비하고 공격준비.” 박상오도 A급의 각성자. 그의 팀들도 B급의 베테랑 각성자로 미공략 6성 던전의 경험도 몇번 있었다. 저 정도의 보스 몬스터를 잡아 본적도 몇 번 있기에 겁먹을 것이 없었다. 더구나 여긴 입장제한도 없으니 더욱 유리한 상황. “으르릉.”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압박을 가해오던 늑대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돌개바람!” 후우우웅! 바람술사라는 별명답게 박상오가 즉발로 전개한 마법이 달려드는 늑대들의 진형을 무너뜨리며 움직임을 방해했고 길드의 신체 각성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빼들고는 달려들었다. 스컥, 콰직! “크왕, 컹!” “뒤져라, 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머길드의 각성자들이 가장 수가 많았지만, 중소길드의 각성자들도 그 수가 제법 되어 저마다 뭉쳐서 서로의 등을 내맡기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박상오의 신경은 모조리 우두머리 늑대에게 가 있었다. 자신의 팀이 녀석만 맡아주면 몬스터들의 소탕은 순조로울 것 같았다. 수도방위부대도 곧 올 것이다. 모든게 순조로운 전장에 변수가 등장했다. “끼아아악!” 소름 끼치는 괴성과 함께 하늘 위로 괴생명체가 출현했다. ‘인면박쥐.’ 녀석이 얼굴만 인간을 닮았다면 어쩌면 귀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은 불행히도 그 크기마저 인간과 비슷했다. 날카로운 부리는 없지만 사람의 손과 같은 발로 대상을 낚아채 하늘 위에서 떨어트려 죽이는 것은 녀석들만의 사냥법이었다. 얌전히 잡혀줄 리 만무하지만 늑대 녀석들과 싸우는 와중에 녀석들이 난입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목숨을 건 승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존재의 등장은 곧 균형을 무너뜨렸다. “젠장! 마법사들 자유사격. 신체 각성자는 일단 늑대를 막는다.” 박상오는 크게 소리치고는 얌전히 구경 중인 우두머리 늑대를 노려보았다. 녀석의 노림수를 읽을 수 없다. 아니, 얼추 느낌은 왔다. 자신이 한눈을 팔면 녀석이 자신을 덮치리라. 그러자고 녀석에게만 신경을 쓰자니 불리한 전황이 신경 쓰였다. 곧 다른 각성자들과 군인들의 지원이 올 텐데 그전까지 피해가 클 듯 싶었다. 화르륵! 그때 기울었던 균형추를 되돌리는 지원군이 도착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박상오는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의 등장에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하압!” 성구가 재빠르게 인면박쥐 셋을 불태우고는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늑대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는 펀치력! 성구는 거리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보곤 인상을 썼다. ‘5성 던전의 슬라임.’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녀석들은 물리공격에 타격을 입지 않는다. 형형색색의 색깔만큼이나 끔찍한 독과 산성공격을 하는 녀석들이 도시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앙이었다. 재빨리 소탕하지 않으면 피해가 클 것이다. “불의 장벽!” 성구가 배에 힘을 꽉 주곤 주문을 외우며 손을 뻗었다. 머리가 어질 할 정도의 마력이 빠져나가면 성구의 손이 가리킨 곳에 불의 장벽이 길게 일어났다. 화르르르륵! 그 엄청난 열기에 슬라임들이 접근하지 못했다. 그사이 늑대와 인면박쥐라도 재빨리 소탕하면 마법사들을 위주로 슬라임을 토벌하면 될 일이다. “모두 힘냅시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성구의 활약에 사람들이 기운 내기 시작했다. “수방사다.” 수도방위사령부의 헬기가 공중에 떠올랐다. 그들을 보자 각성자들과 해머길드의 건물로 피난한 시민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건물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환호했다. 전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고 생각한 그때. 우두머리 늑대가 몸을 움직였다. [지구는 재밌는 곳이구나.] 늑대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주변 사람들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언어를 초월한 그 의지의 전달에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몇몇은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토해냈다. ‘말하는 늑대?’ [재밌는 사냥터가 되겠어.] 지켜보았다. 지구의 인간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도 말이다. 트라넷의 72군단장. 두 개의 왕좌를 가진 2좌 쥬리엘. 그가 기쁘게 웃었다. 사냥하고 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3좌에 도전할 것이다. 이제 막 오르기 시작한 지구의 마나 농도는 딱 자신이 본체를 헌신할 정도가 한계였다. 3좌도 100%의 힘으로 지구에 헌신하지 못하는 지금의 타이밍이 딱 적기였다. 지구 사냥터를 미리 선점해 강해질 기회 말이다. 우두머리 늑대 쥬리엘의 뿔이 흰빛으로 반짝이며 주변을 휩쓸었다. 파지지직! “끄으윽!” 일대를 휩쓴 전기충격에 항마력이 약한 이들은 그대로 절명했고 항마력이 높은 몇몇도 몸을 떨며 머리를 부르르 떨었다. “마, 막아야.” 혀가 꼬여버린 성구가 충격을 털어버리기 위해 애써 움직이는데 쥬리엘의 두 번째 전기충격이 성구의 몸을 강타했다. 넓게 퍼진 공격이 아닌 단일 대상으로 쏟아진 충격은 낙뢰에 강타당한 듯 강렬했다. “으어어.” 흰자위를 까 뒤집은 성구가 그대로 쓰러졌다. ‘혀, 형니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죽음을 직감한 성구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우습게도 부모님이 아닌 우진이었다. 아직은 좀 더 살고 싶은 것일까? 강우진이 보고 싶은 성구였다. ‘맛있는 인간들이 모여있군.’ 쥬리엘의 시선이 해머길드의 건물로 향했다. 인간들… 자신의 에너지 원이 되어줄 공급원들이 모여있었다. 지구는 쥬리엘에게 천국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각성자도 7서클 정도인지 자신의 전기마법을 견딜 정도가 아니었다. 피유우우웅, 콰아앙! 헬기에서 날아온 소형로켓이 명중했으나 쥬리엘의 털 한 올도 그슬리지 못했다. [귀찮군.] 파지직, 투투투투투투. 쥬리엘의 뿔에서 시작된 전기충격이 작렬하자 헬기가 방향성을 잃고는 빙글 돌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아우우우우.] 쥬리엘의 부름에 주위에 있던 회색늑대 뿐만이 아니라, 군단장의 위엄에 굴복한 인면박쥐와 슬라임 등의 몬스터들이 모조리 모여들기 시작했다. * 수도방위사령부 긴급 작전실. “출동한 헬기 두 대 모두 추락했습니다.” “음, 지상부대는 아직 인가?” “사당역 도착까지 12분입니다.” “제길.” 던전쇼크 이후 서울 요소요소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지만 모든 지역을 단 몇 분 만에 출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몬스터들의 난동으로 도로가 파괴되고 혼잡한 이때는 더 말이다. “어? 괴 물체가 서울 상공에 접근 중입니다.” “뭐? 공중괴물이라도 나타난 거야?” “다, 다릅니다.” 레이더를 읽은 장교가 떠듬거리며 답했다. “속도로 보아 미사일로 보입니다.” “뭐야!” 사령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어떤 미친놈이 서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가. 중국? 북한? 아니면 일본? “서울 상공 도달 2분 전입니다. 요격을 허가해주십시오.” 확인되지 않은 미사일이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단 막는 게 중요했다. “허가한다.” “미사일 방어체계 가동합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라도 되는지 미사일이 거의 수직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저 정도면 대기권을 뚫고 내려오는 정도다. 얼마나 멀리서 쏘았길래…. 파편과 충격에 의한 피해는 별수 없겠지만 조금만 더 늦었다간 충격파에 의해 서울이 쑥대밭이 될 참이다. 요격에 실패하면 서울은 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 “요격 성공했습니다!’ 레이더의 붉은 점이 사라졌다. * 바닥에 누운 성구가 하늘을 보았다. 우라지게 맑은 하늘을 보니 그가 죽기에 썩 나쁜 날은 아닌 것 같아 묘한 위로가 되었다. 전기충격이 뇌까지 자극했는지 멍한 성구의 눈에 하늘의 점이 보였다. ‘어?’ 간식처럼 강화석을 먹어댄 탓에 보통이 넘는, 집중한다면 망원경 부럽지 않은 시력을 손에 넣은 성구의 시선이 점에 집중되었다. 미사일 같기도 했고, 전투기가 몇 대 이어붙인 것 같기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서울을 포기했구나.’ 성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방의 미사일로 몬스터를 일거에 정리하는 줄 알았다. 콰아앙. 그런데 지상에서 쏘아 올린 소형 미사일들이 괴상한 미사일을 격추 시켰다. 폭발물질은 싣지 않았는지 그저 요란한 굉음만 울리며 산산조각이 난 미사일의 파편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맹렬한 속도로 하강하는 사람도 하나 있었다. ‘어어?’ 너무 멀어 자세히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쪽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거의 근처까지 접근한 사람의 얼굴을 보곤 성구의 마비되었던 입술이 열렸다. “형… 님?” 하늘에서 미사일이 날아오다가 터졌고, 형님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형님의 등에 낙하산 따위는 없었다. 콰아아아앙! 운석처럼 떨어져 내린 사람의 존재감은 지진이라도 일으키듯 주변을 크게 울리며 모든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푸시시시. 도로 한중간에 파헤쳐진 크레이터를 헤치고 수북이 날리는 흙먼지를 손사래 치며 강우진이 걸어나왔다. 성구가 벌떡 몸을 일으켜 눈을 비볐다. 진짜 강우진이다. 중동에 있던 그가 어떻게? “혀, 형님. 설마 미사일 타고 오신 겁니까?” “그럼 루돌프 타고 왔겠냐.” 강우진이 씨익 웃고는 대형 늑대 쥬리엘을 보았다. “날뛴 게 너냐?” 한국의 던전을 차례로 터트리는 놈이 있다고 하더니 이놈이 범인이었나? 2좌 쥬리엘. 어찌 안면이 없을 수 있겠는가. 여유롭던 쥬리엘의 몸이 처음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 95화 - 총알택시 > 끝 ⓒ 진설우 < 96화 - 쥬리엘의 광야 > “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조금 있다 이야기하자.” 우진은 성구를 내버려두고 쥬리엘을 향해 나아갔다. “너였냐? 던전 터트리고 다닌 게?” 우진은 심장이 철렁했었다. 요주의 테러리스트 6인에게 그림자를 모두 붙이고 돌아왔을 때 성녀 메르디가 한국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대구의 던전이 예측을 벗어나 징조 없이 브레이크가 일어났다고 말이다. 빨리 귀국을 준비하는 와중에 서울의 대대적인 던전브레이크 소식을 들었다. 온갖 뉴스들이 떠들어대는 그 소리에 우진은 미사일을 탔다. 데이비드 사령관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탄두가 제거된 미사일을 로켓으로 사용했다. 돌쇠가 능력을 부려 전투기 몇을 함께 덧 붙여 즉석의 대륙 간 탄도 로켓 택시를 만들어냈다. 착륙장치 따위는 필요 없었다. 스피릿 아머가 우진을 보호해 줄 것이다. 사당역이 터진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우진이 서울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기존의 법칙을 뒤엎는 던전 브레이크에 누군가 개입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트라넷의 군단장 중 하나인 쥬리엘이 눈앞에 있었다. 우진의 기억 속에는 그리 강하지 않은 녀석이라 자신과 빈번히 충돌은 했지만 딱히 위협적이진 않은 녀석이었다. [이럴 수가….] 쥬리엘은 몸을 떨었다. 망할 래쉬모드 자식. 지구의 소환마법에 기회가 왔다고 좋다고 소환되어 현신하더니 빛도 못 보고 다시 돌아왔다. 무엇에 당해 그리되었는지 끝내 말해주지 않더니 그 이유가 임모탈이었을 줄이야…. [네놈이 어떻게 여기 있지?] “여기가 집이야.” […….]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쥬리엘은 한참을 지켜봤다. 지구인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그들의 현대화기는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는지, 각성자들의 수준은 어떠한지 말이다. 슬슬 본거지화 해도 될만하다 여겨 현신했더니 눈앞에 떡하니 임모탈이 나타날 줄이야. “어떻게 터트린 거지?” [무슨 개소리냐?] “개한테 개소리 취급 당하니 기분 묘한데?” 쥬리엘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랑스러운 회색늑대족의 우두머리 쥬리엘에게 개 취급은 가장 모욕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임모탈은 자신에게 수없이 모욕을 준 천하의 개새끼다. “네가 터트린거 아냐?” […….] “아닌가 보네.” [오호. 네놈 초기화를 당했구나.] “…….” 래쉬모드가 했던 이야기와 같은 소리. [크하하하, 네놈 진짜 지구인이구나.] 쥬리엘은 기분 좋게 웃으며 뿔에서 빛이 모여들었다. 초기화 당해 아직 제힘을 되찾지 못한 임모탈. 이건 숫제 복수를 하라는 기회이지 않은가? [트라넷의 은총이로구나! 크하하하.] “개소리는.” 번개 마법을 준비하는 쥬리엘을 보며 우진이 인상을 팍 썼다. “그놈의 초기화, 초기화.” 말이 거슬리긴 하지만 분명 우진은 전승이라곤 하지만 레벨다운을 겪었다. 빠르게 복구되고 있긴 했지만 트라넷의 군단장들이 그것을 알아본다는 것이 거슬렸다. “착각하는 게 있는데.”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빼들었다. 강철 지팡이가 도끼로 변형되었다. 우진이 쥬리엘을 향해 뛰었다. ‘질주’로 인해 우진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쥬리엘의 눈앞에 도착했다. “고딩이 중딩됐다고 초딩한테 지겠냐?” 우진의 도끼가 쥬리엘의 머리를 노렸다. 쾅! 쥬리엘이 마주 뿔을 내밀며 충돌했다. 파지지지직. [네놈의 그 건방짐이 언젠가 위기를 불러올 줄 알았다.] 쥬리엘이 웃었다. 건방지기론 대륙 제일인 임모탈이다. 약해진 주제에 멋도 모르고 날뛰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녀석을 해치울 기회다. 콰쾅, 파지직! 덤프트럭만한 늑대에게 달려드는 인간의 모습은 무모해 보였으나 둘의 싸움은 의외로 박빙이었다. 맞부딪칠수록 점차 뒤로 밀리는 감에 쥬리엘은 속으로 조급함이 들었다. ‘임모탈이 이렇게 잘 싸웠었나?’ 녀석은 자신을 희롱하는 것인지 별다른 마법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힘 그 자체랄 수도 있는 불사의 군대가 없다. ‘그렇구나. 놈은 불사의 군대를 잃었구나!’ 갑작스레 놈이 사라진 아르펜행성의 사정이 어떠한가? 임모탈의 영지 아르달. 불사의 군대가 주둔하던 그곳에 왕도 없고, 그들을 통솔할 기사들도 없다. 불사의 군대는 군대가 아닌 그저 언데드 몬스터로 전락해 아르달을 배회했다. 조무래기들을 잃은 임모탈이라…. 더이상 죽은 자들의 왕이라 부르기도 힘든 상태라면…. [우우오오오오!] 쥬리엘의 함성에 회색늑대들이 몰려들었다. “크르르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회색 늑대들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주위에 배회하던 녀석들이 모조리 몰려들고 있었다. 우진이 뒷걸음질 쳐주었다. [우오오오!] 쥬리엘은 강우진이 판세가 불리해 후퇴를 가늠한다 생각했는지 더욱 크게 부르짖으며 주변의 몬스터들을 끌어모았다. 개중에는 회색늑대만 있지 않았다. 왕좌를 2개 가진 트라넷의 군단장. 쥬리엘의 권위에 굴복한 여러 몬스터들이 모조리 그의 부름을 받아 몰려들었다. 우진이 떨어져 내려 생긴 크레이터. 그 주변을 빼곡히 매운 몬스터들의 물결. 그 가운데 포위된 우진이 해머길드의 본사 건물 아래 출입구가 닫히는 것을 확인했다. 쥬리엘이 부하들을 끌어모으는 사이 우진의 텔레파시를 받은 성구, 박상오를 비롯해 해머길드의 각성자들이 모조리 퇴각을 마쳤다. [크큭, 반대의 상황이 되어보니 어떠하냐?] 쥬리엘은 임모탈을 상대로 숫적압박을 펼쳐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지치고 지친 녀석은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되어 쓰러질 것이다.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다. 아니, 최후의 순간 정도는 녀석을 이빨로 물어 뜯으리라. 임모탈은 항상 이런 기분이었을까? “개새끼가 뭘 쪼개냐?” [개…. 자랑스러운 회색늑대 일족의….] “늑대도 개 맞지 뭐.” […죽여라.] 쥬리엘의 흉포한 의지에 몬스터들이 반응했다. 인면박쥐에 회색늑대에 던전에서 튀어나온 여러 몬스터들이 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진은 그것들을 보며 웃었다. “고맙네. 이렇게 모아주고.” 도시는 복잡했고, 추적 사냥을 하기엔 최악의 장소다. 한 마리만 하수구로 도망쳐도 그놈을 사로잡는데 평소보다 며칠은 더 걸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몬스터들을 모아주니 고마울 따름. “나와라.” 파팟. 우진의 부름에 그의 주위에 검은 연기들이 뭉쳐져 데스나이트들이 모조리 실체화했다. “모조리 쓸어.” [왕의 명이시다!] 키바를 비롯한 데스나이트들이 유령마를 소환하며 동시에 소환의 진을 열었다. 공간이 찢어지며 검은 틈이 벌어지며 그곳에서 휘하에 배속된 해골병사들이 튀어나왔다. “키키킥.” 괴상한 소리를 내며 등장한 해골병사들을 이끌곤 사방에서 덮쳐오는 몬스터를 쓸어갔다. 순식간에 나타난 언데드 부대가 몬스터를 휘몰아치자 쥬리엘이 당황했다. [수, 숨기고 있었다니!] “개과는 똑똑하다던데 넌 왜 이렇게 멍청해?” […….] 데스나이트들이 피로 뚫어놓은 길을 우진이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모욕적이다. 너무 모욕적이라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저 능글맞은 임모탈을 물어 죽이고 싶다. “개새끼처럼 그만 끙끙거리고 덤벼.” 우진이 무기를 해머로 바꿔 접근하자 쥬리엘이 재빨리 뇌전을 터트렸다. 파지직! 사방으로 퍼진 전기공격을 스피릿 아머로 막아낸 우진이 잠깐 사라진 시야를 다시 잡으며 녀석의 공격을 대비했다. “뭐야?” 연달아 몰아칠 줄 알았더니 쥬리엘이 내빼고 있었다. [두고 봐라. 임모탈!] 식상한 말로 정신승리를 이루며 도망치는 쥬리엘은 그 큰 몸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의문을 남기고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참.” 우진은 수없이 맞부딪혔던 쥬리엘의 성정을 떠올리자 피식 웃었다. 개처럼 잘 짖던 놈이다. 수십 번을 맞부딪혔지만 녀석을 죽인 적은 손에 꼽았다. 아르펜 행성에서도 녀석은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꽁무니를 내빼기 일수였다. “정리해라.” [명을 받듭니다.] 데스나이트들이 더욱 몰아치며 몬스터들의 사체를 하나 둘 늘려갔다. 당장 쥬리엘 놈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지금 몬스터가 뭉쳐져 있을 때 몰살해야 한다. 괜히 또 흩어지면 일일이 찾아 없애기 번거로우니 말이다. “형님! 돕겠습니다.” 쥬리엘이 사라지자 성구를 비롯해 각성자들이 다시 달려나왔다. 투루루루루루. 불을 뿜는 기관총을 장착한 헬기가 다섯대 뜨더니 곧 탱크가 도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인들이 나타나 넓게 진을 펼치며 포위망을 만들었고, 몬스터들이 유난히 몰린 곳엔 탱크의 자주포가 불을 뿜었다. 꽈앙! 군인들에 주변의 각성자들까지 합류하자 몬스터의 토벌은 금방이었다. “이겼다!” 승리했다는 기쁨도 잠시. “흐흑, 어머니.” “아진아! 우리 아진이 어찌할꼬.” 가족이나 지인 중에 희생자를 낸 시민들이 울부짖었다. 얼추 주변에 몰린 몬스터들을 토벌했지만 쥬리엘의 권위에 굴복해 모이지 않은 몬스터들은 여전히 주변에 설치고 있었고 완전한 토벌은 아직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거리엔 몬스터들의 사체만큼이나 사람들의 시체도 많았다. 예고 없는 던전 브레이크가 가져다준 재앙. 대피소를 겸하고 있는 해머길드의 건물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아우성이었다. “내보내 줘요.”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들어가 계십시오.” “내 딸이 저기 누워있다고! 내 딸 시신이라도 수습해줘야 할 거 아냐?” 아직 몬스터가 완전히 토벌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이렇게 난리란 말인가, 해머길드 직원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화난 시민을 달랬다. 죽음의 그림자가 목줄을 움켜쥐니 제 목숨 귀해 도망쳤으나, 이제 살만하니 가족들을 잃은 슬픔이 전염되듯 휘몰아쳤다. 그 와중에 우진이 등장하자 사람들의 아우성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우진이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뒷걸음질치며 저절로 길이 만들어졌다. 민찬이 우진을 발견하고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왔다. “사장님!” “살아있었네.” “…….” “가족들은?” “어머니와 동생분 모두 무사하십니다.” 사당역이 터졌다기에 걱정했더니 운 좋게 피신했던 모양이다. 우진이 민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래,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하마.” “예? 만나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하도 뒤엉켜 어디 있는지 모를 뿐이지 피난민들 사이에 우진의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강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살아있다며.” “예. 그야….” “그럼 됐어. 난 놈들 쫓고 오지.” “예에.” 우진 훌쩍 피난소를 떠나자 민찬은 그런 우진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공과 사가 철저하다고 하여도 저만큼일까? ‘아니야.’ 그것과는 다른 느낌. 가족들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도 지나치게 덤덤해 보이는……. 민찬이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리고는 뒤엉킨 사람들 사이에서 우진의 가족과 아르달의 길드원들을 찾기 시작했다. * 우진은 데스나이트와 해골 병사들을 소환의 방으로 돌려보내고는 홀로 던전을 찾았다. 쥬리엘이 황급히 도망친 던전. 차원의 문이 되어주는 던전의 비밀. 30일도 되지 않은 던전이 어떻게 터졌을까? 브레이크 자체가 차원의 균열에 의한 연결. 이토록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이제 던전 브레이크는 일상이 될 것이다. 인류는 또 수천수만의 희생을 겪을 것이고 말이다. 우진이 쥬리엘이 도망친 지하철역을 내려갔다. 일단 놈을 쫓고 볼 일이다. 던전에 입장하자 평소와는 조금 다른 알림음이 들려왔다. <쥬리엘의 광야에 입장하셨습니다.> <미배치 상태로 ‘결투’, ‘영지전’ 모드가 선택 불가합니다.> <‘방문’, ‘잠입’, ‘공략’ 모드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이거 참….” 우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이 던전 자체가 쥬리엘의 차원영지로 통하는 게이트인지 평소와 다른 입장 안내음은 래쉬모드의 던전에 입장했을때 이미 겪어보았다. 하지만 그땐 선택지 없이 공략모드로 선택되었는데…. “이럴 땐 별수 없지.” 역시 이런 상황일 땐 그 선택이 제일 현명하다. < 96화 - 쥬리엘의 광야 > 끝 ⓒ 진설우 < 97화 - 쥬리엘의 광야 (2) > 우진은 포인트상점을 열어 이와 관련된 물건이 있나 살펴보았다. 포인트 상점에는 스킬북뿐만이 아니라 여러 서적도 함께 팔고 있었으니 말이다. [차원 영지의 관리] “이거 같은데….” 차원 영지의 관리 메뉴얼이 떡하니 존재했는데 2천 업적포인트나 하는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락이 걸려있어 읽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해당 등급에서는 열람할수 없습니다.> 우진은 여태 별반 변화가 없어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던 상태창의 등급메뉴를 보며 고심했다. 아무런 수치도 표시도 없는 공란. “뭐, 어때.” 지금 안된다면 굳이 고민해봐야 더 답이 나오겠는가. 가이드라도 있다면 상관없으나 없다 해도 내친걸음을 주저할 정도로 자신 없진 않았다. 우진이 ‘공략’을 선택했다. <공략 모드에 도전합니다.> <공략 성공 시 업적 포인트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흠. 조금 다른데?” 래쉬모드의 던전에 입장해봤기에 안다. 공략이 그저 남의 집 쳐들어가서 약탈하는 정도일 줄 알았더니 보상까지 운운하는 것을 보니…. “트라넷이라 이거지?” 녀석의 법칙이 작용하는 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나침반을 찾은 것 같은 느낌. 강우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붉게 생성된 포탈을 통과하자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넓은 들에 어슬렁 거리는 회색 늑대들. 그리고 저 멀리 지평선에 우진의 눈길을 끄는 보라색의 빛 기둥. 저곳에 쥬리엘이 있다. 감이 왔다. “크르르.” 주변에 있던 회색 늑대들이 우진을 보고 몰려들었다. 아무런 지형지물 없는 들판은 광야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집단 전에 능한 늑대들이 침입자를 물어 죽이기에도 안성맞춤이고 말이다. 그들에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침입자 또한 광야를 썩 좋아한다는것이다. “길을 터라.” 파파팟. 우진의 명에 주위에 뭉쳐진 검은 기류들이 데스나이트로 화해 소환되었다. 그들이 유령마를 소환해 타고는 어슬렁거리는 늑대들을 향해 질주했다. 그들이 재량껏 부리고 싶은 만큼의 해골병사를 소환해 이용했다가 다시 역소환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우진이 해줄 일이라곤 해골병사가 부서져 정원이 비거나, 그들의 레벨이 올라 휘하에 배속 가능 수가 늘어나면 신병을 채워주는 일 뿐이다. “가보자.” 우진도 씽씽이를 소환해 올라탔다. 비비가 소환되어 씽씽이의 머리에 착 앉았고 돌쇠도 골렘의 심장 형태로 우진의 머리맡을 맴돌았다. 불사의 군대가 광야를 질주했다. * 보랏빛 기둥은 하늘로 쭉 뻗어 있었다. 그저 검은색 일색의 그 공간을 하늘이라 불러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빛 기둥은 끝을 알 수 없게 위로 향하고 있었다. 빛이 시작된 지상의 건물. 건물이라고 부르기도 조잡한 그것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동굴의 입구에 선 우진은 피식 웃었다. “도망간게 여기라 이거지?” 쥬리엘이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동굴의 입구가 넓었으나 불사의 군대가 모두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우진은 유령마에서 내려 걸었고 데스나이트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동굴은 그리 길지 않았고 축구경기장 정도 크기의 공동이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하늘이 뻥 뚫려있고 가운데 있던 커다란 보라색 보석이 하늘로 빛 무리를 쏘고 있었다. 쥬리엘은 그 앞에 긴 몸을 누이고 있었다. “도망치더니 포기라도 한 건가?” [포기지.] “의외인데?” [힘들여 싸울 이유가 없지.] 안될테니까. 쥬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섣불리 지구에 게이트를 만든 것이 실수다.] 우진은 게이트란 말에 눈을 빛냈다. 성녀의 말이 떠올랐다. 차원 영지를 얻고 아르펜에 게이트를 열어 그곳으로 원정 가겠다는 계획. “앞으로 자주 놀러올게.” [무슨 뚱단지같은 소리냐.] “…….” [아무것도 모르는군.]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쥬리엘이 머리를 저었다. [공략당하면 게이트는 사라진다. 너와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다.] 지구에 연 게이트가 사라지고 쥬리엘의 차원 영지는 이후 게이트를 열기 전까지 지구에 올 일이 없을 것이다. 저 끔찍한 임모탈과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나마 강우진이 공략을 선택한 것이 다행일까? 이곳에서 죽더라도 자신은 다시 부활하게 될테니 말이다. [작별인사나 하자고.] “순순히 죽어줄 작정인가?” [그럴수야 없지.] 쥬리엘이 몸을 일으켰다. 지구에서보다 몸이 좀더 커보이는것은 착각일까. [네놈은 실수했다.] 스아아아아. 공동의 주변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풀들에서 녹색의 기운이 뿜어져나와 쥬리엘의 몸에 흡수되었다. 광야의 가호를 받은 그의 몸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작아지고 작아졌다. 상실로 인한 축소가 아닌 압축. 쥬리엘의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후우우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쥬리엘이 두발로 섰다. “웨어울프?” “외형만 빌렸을 뿐이지. 크흐흐.”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친개?” “크흐흐흐, 네놈을 수십번 찢어 발기고 싶구나.” “못하잖아?” “크흐흐, 그렇지. 네놈은 한번 죽으면 끝이니 말이야.” “개소리.” 개, 개. 그놈의 개취급. 쥬리엘의 눈에서 붉은 안광을 뿜었다. “죽인다.” 쥬리엘이 차갑게 웃었다. 우진의 옆에 있던 고양이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팻이라도 되나? 귀여운 눈망울이 인상 깊었지만 임모탈의 것이라면 하찮은 것이라도 기분이 나빴다. “냐아앙.” 쥬리엘이 달려오는 고양이를 걷어찼다. 슈아아악. 쥬리엘이 한발 내딛자 눈 깜짝할 사이에 우진의 앞까지 돌진해왔다. 쥬리엘의 앞발은 손이 되었으나 날카로운 손톱은 굵기만 줄었는지 날카로운 검과 다를 바 없었다. 카아아앙! 키바의 도끼가 쥬리엘의 발톱을 막아섰다. “귀찮은 것들.” 카앙, 쾅! 쥬리엘의 발톱을 연달아 막아낸 키바였으나 뒤이은 발차기엔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압도적인 힘. [그르르.] 키바가 낮게 으르렁 거렸다. 힘에서 밀리니 자존심에 상처입은 모습. 쥬리엘은 그러거나 말거나 우진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작아진 몸 만큼이나 폭발적인 민첩성을 얻었는데, 그 힘은 그대로인 듯 굉장했다. [못 지나간다!] 콰아앙! 람손의 해머가 쥬리엘의 공격을 막아냈다. 해머가 충격을 흡수하곤 그 데미지를 그대로 담아 휘둘러졌다. 부우웅, 부웅! 아무리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어도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 람손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던 쥬리엘의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람손의 두개골을 노렸다. 급히 고개를 젖혀 피해냈으나 투구의 절반이나 뜯겨 날아갔다. [감히!] 람손이 분개하여 놈을 끌어안았고 옆에 있던 데스나이트의 대검이 쥬리엘의 목을 쳤다. 까앙. 동물의 가죽이라곤 믿기지 않는 소리와 함께 검을 튕겨낸 쥬리엘은 사지를 비틀어 데스나이트들을 떨쳐내고는 우진을 향해 달렸다. ‘죽인다.’ 귀찮은 그의 권속들과 드잡이할 시간이 없다. 네크로맨서를 상대하는 방법. 죽여도 죽여도 부활할 그의 권속들이나 소환수들은 상대하지 않는다. 오로지 네크로맨서를 죽이면 그들은 그저 오합지졸의 몬스터에 불과하다. [지나가지 못한다!] 네크로맨서도, 그의 권속들도 그것을 아는지 임모탈을 꽁꽁 보호했다. 쥬리엘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들을 상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광야의 가호는 짧다. 아쉽지만 그만큼 폭발적인 힘을 준다. 임모탈이 제 발로 자신의 영지에 발을 들인 이때가 놈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붙기만 하면.’ 귀찮은 권속들을 떨쳐내고 놈에게 닿기만 하면 단 일수에 쳐죽일 수 있다. 쥬리엘이 수십 번도 더 생각한 네크로맨서의 상대법. 물량공세는 어떻게 하든 밀린다. 권속들의 힘을 압도하는 강력함. 영지의 고유효과 광야의 가호가 그 힘을 준다. “죽어라!” 쥬리엘이 우진의 앞에 다가와 발톱을 내뻗었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엉겨붙는 데스나이트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임모탈의 죽음을 천천히 감상하겠건만 광야의 가호로 몸을 줄이는 것은 시간한계가 임박했다. 길어야 10초. 놈을 죽이는 덴 1초면 충분하다. 카앙! 쥬리엘의 밥톱이 우진이 내민 강철 지팡이에 가로막혔다. 힘에 밀리는 듯 훌쩍 뒤로 뛴 우진이지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낼 정도의 반응 속도라니…. 8초. 츄아아악, 깡! 쥬리엘의 발톱이 당황한 임모탈의 머리통을 깨부수기 직전 달려든 데스나이트 하나가 대신 그 공격을 막았다. 콰지직! 무기째 파고든 발톱이 갑옷을 우그러뜨리며 데스나이트 하나를 이등분 해버렸다. 6초. 조급하지만 아직 시간은 있다. 임모탈의 당황한 얼굴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놈을 죽일 수 있다. 슈아악, 캉! 녀석의 강철지팡이가 대검으로 변해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힘에서 워낙 월등한 차이를 보이기에 대검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대로 쥐고 있었다면 손아귀가 찢어졌을 것이다. 3초. 승리다. 쥬리엘의 발톱이 무기 잃은 강우진의 심장을 꿰뚫었다. 죽였다. 임모탈을…. “해냈다.” 상위왕좌를 차지한 군주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2개의 왕좌만을 가진 자신이 해냈다. 강우진의 낭패… 하지 않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병신.” “어째서….” “개가 똑똑하단 건 역시 다 개소리야.” “…….” 쥬리엘은 공간이 어질러 지는듯하더니 빙글빙글 현기증이 들었다. 기울어진 동굴 벽이 보이는 몸은 우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 꼬마 악마가 조금 악취미라.” “…….” 쥬리엘의 시선이 고양이에게로 향했다. 파팟. 고양이의 모습이 꼬마악마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 기억난다. 환각의 마녀. “환각이었군….” “춤 잘 추더군.” “…….” 눈알을 굴려보니 데스나이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듯 그저 시립 한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흥분해 혼자서 날뛰었구나…. 따끔한 목의 상처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창에 찔려 쓰러진 쥬리엘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에 보자고.” “크큭, 네놈을 다시 볼 일은 없다.” 긴긴 어둠과 죽음의 허무를 지나겠지만 어차피 자신은 부활한다. 지구엔 다시는 게이트 따위 열지 않을 것이다. “또 모르지.” 우진이 창을 더욱 깊이 찔러 쥬리엘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그의 시체가 회색빛에 횝싸이더니 그대로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후, 위험했네.” “헤헤, 나 잘했져?” “그래.” “쟤는 매번 걸려놓고 또 걸린다옹.” 우진이 피식 웃으며 비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광야의 가호를 받은 쥬리엘의 움직임은 위협적이었다. 그가 환각이 아닌 자신을 보고 제대로 노렸다면 위험했으리라. 전사의 듀얼 클래스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보너스 포인트는 모조리 지배와 마력에 모았으니 말이다. 강화석으로 인해 증가한 수치가 있다곤 하지만 인간의 각성자와 비교해 더 높은 힘과 체력을 가졌다 뿐이지 트라넷의 군단장을 상대하기엔 모자랐다. 우진이 쥬리엘의 둥지 중앙에 있는 빛 기둥에서 보라색 보석을 만졌다. 슈슈슈슝. 보석을 빼내자 빛 기둥이 사그라지며 우진의 손에 쥔 보석에 빨려들어 왔다. <차원의 조각을 얻었습니다.> 우진이 씩 웃었다. 차원 영지를 얻을 수 있는 3개를 모두 모았다. < 97화 - 쥬리엘의 광야 (2) > 끝 ⓒ 진설우 < 98화 - 차원 영지 > 우진은 인벤토리에서 차원의 조각을 꺼냈다. 평양에서 얻은 하나와 방금 얻은 것, 메르디가 준 것까지 3개였다. 위이이잉 주먹만 한 보석들이 서로 공명하며 떠올랐다. 진동하던 보석이 회전하며 뭉쳐지더니 곧 하나로 변해 천천히 하강했다. 우진이 그것을 낚아채니 밝은 빛이 사라지고 보석의 안에 진동하는 보라색 빛 무리가 일렁였다.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 찰랑거리는 빛은 꼭 유리병 안에 봉인된듯한 모습이었다. “음.” 우진은 보석의 정보를 보았다. <차원의 증명> 찢어진 차원의 한 조각을 소유할 수 있다. “여긴 아닌가 보네.” 차원영지를 얻기 위해선 찢어진 차원의 한 조각 그 자체인 던전을 찾아야 한다. 자신과 맞는 던전이 있으면 스스로 반응할 것이라 그랬는데 광야는 쥬리엘의 것이라 그런 것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우진은 차원의 증명을 인벤토리에 넣고는 주변을 쓸어봤다. 래쉬모드의 연구실이 그랬던 것처럼 쥬리엘의 광야에도 무언가 전리품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비비, 찾아보자.” “알았쪄요.” 비비는 총총걸음으로 광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우진도 탐색마법을 전개해가며 쥬리엘의 보금자리를 살폈다. 동굴의 한편에 흙이 파헤쳐진 흔적이 있었다. 색이 다른 흙으로 덮은 그 아래에 강렬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우진이 그 아래를 파보니 뼈들이 잔뜩 묻혀 있었다. “음. 이건 뭐….” 갖가지 동물들과 몬스터들의 뼈. 모두 한 부위인지 생김새가 비슷했다. 딱 몽둥이 하기 좋은 뼈를 보니 쥬리엘의 간식 취향을 알 듯했다. 그 와중에도 강렬한 마나를 풍기는 커다란 뼈가 있어 주웠다. <레드 드래곤의 3번 갈비뼈> <블루 드래곤의 3번 갈비뼈> <삼색고릴라의 3번 갈비뼈> 드래곤의 것은 거대했고 삼색고릴라의 것은 몽둥이 정도였다. 우진은 마력을 머금은 그것들을 챙겨 넣고는 비비에게로 향했다. “이게 다인 것 같은데….” “…….” 우진은 비비가 찾은 것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만한 게 없네.” 괴수의 시체로 보이는 것은 딱 봐도 먹다 남은 먹이 같았고, 잡다하게 버려진 아이템들도 별다른 게 없었다. “개털인 것 같져?” “그래. 그만 나가자.” “알았쪄여. 주인님, 나 이제 이러고 다녀도 되여?” “음….” 우진이 비비를 보았다. 악마라지만 겉모습은 누가 봐도 10살 정도 소녀. “진짜 본모습 찾을 때까진 그냥 고양이로 하자.” “헤헤, 알겠어영.” 비비가 고양이로 변해 소환의 방으로 사라지고 데스나이트들 또한 모조리 소환의 방으로 들어갔다. 우진이 차원의 조각 옆에 있던 귀환석을 집어들고 던전을 나섰다. “형님!” 던전의 앞에는 성구가 기다리고 우진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이러다 서울에 무슨 일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어딘데?” “4호선이 쭉 터지고 있습니다. 아까 라디오 뉴스로 용산역 터졌다고 들었습니다.” “넌 주변 정리해라.” “네, 형님. 조심하십시오.” 도로가 엉망이고 부서진 차들이 꽉 막고 있어 차를 타고 가는 건 좋지 못했다. 우진이 유령마 씽씽이를 소환해 탔다. 히이이이잉! 가로막힌 차들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 도로를 따라 달렸다. 여기저기 날뛰는 몬스터에 비해 그것들을 사냥할 각성자도 군인들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 시민들이 쫓기고 있는 것을 공공연하게 목격했다. “가서 죽여.” [명을 따릅니다.] 유령마를 타고 길을 따라 달리면서 몬스터들이 보일 때마다 데스나이트들을 출동시켰다. “던전 쇼크가 일어난 지 5년밖에 안됐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겨우 5년 전 일이다. 서울인구의 절반이 죽은 것이. 던전 브레이크에 대비하기보다는 서울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던전 사업의 성공과 서울의 안전성만 광고를 해댔으니…. 한번은 사고지만 두 번은 인재다. 적어도 던전 인근에 주거지역은 조성하질 말았어야 했다. “쳇, 저기도 가서 죽여. 사람들이 공격하면 곧장 소환의 방으로 가라.” [군주의 명대로!] 데스나이트들이 하나씩 달려가 몬스터들을 사냥했다. 그들의 외견도 언데드 몬스터와 크게 다를 바 없는지라 혹여라도 오해한 각성자들이 나타나 공격이라도 하려고치면 곧장 소환의 방으로 되돌아오는 그들이었다. 우진이 용산역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비규환이 열려있었다. 인근의 몇 개 출구를 터트렸는지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즐비했다. “제니스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불사의 군대 중에서 화력이라면 단연 으뜸인 리치 제니스였으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빠르게 레벨이 오르고 있으니 제니스를 다시 만날 시간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 정도. “돌쇠야, 가라.” 위이이잉. 던전 브레이크로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몬스터가 바글거리는 그곳에 돌쇠가 날아들었다. 철컥, 철컥! 근처의 자동차들이 한데 뭉쳐 곧 거대한 강철거인이 만들어졌다. 미사일이나 기관총 같은 화기가 없었으나 강철 거인 그 자체로도 몬스터들을 때려잡기는 충분했다. 우진이 가세하면 몬스터들의 사냥이야 빨라지겠지만 그래선 끝이 없다. 차오르는 물을 함께 퍼낼게 아니라 새는 구멍을 막아야 한다. “어떤 새낀지 걸리기만 해봐라.” 어떻게 던전을 터트리는 것인지는 우진도 알지 못했다. 이유나 방법이야 범인을 잡고 보면 저절로 알게 될 터였다. 우진을 태운 씽씽이가 시끌시끌한 북쪽을 향해 내달렸다. “젠장.” 이제 막 터진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진은 뼈의 창을 소환해 입구 주변에 던지고는 뼈의 장벽을 일으켜 몬스터들의 감옥을 만들었다. “쿠루룩!” 쾅, 쾅! 날뛰는 몬스터들에 의해 곧 부서질 테지만 아직 남아있는 행인들이 대피할 때까지 잠깐의 시간은 벌어줄 것이다. 미리 비상 대피방송이 있었기에 아직 대피하지 못한 시민은 소수였다. “다음은 저긴가?” <서울역> 우진이 서울역을 보았다. 이미 공략된 던전에서 왜 브레이크가 일어나는지 파악한다. 우진은 저마다의 임무를 마치고 소환의 방으로 돌아온 데스나이트들을 다시 불러내 뼈의 감옥을 탈출하려는 몬스터들을 맡겼다. 우진은 던전이 다음 브레이크로 예상되는 경로에 위치한 서울역으로 향했다. ‘왜지?’ 던전 브레이크는 왜 일어나는가. 자연적 현상일 리 없다. 다른곳은 멀쩡한데 한국만 서울만 이 지경이니까. 동시다발적인 것도 아니고 차례로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다.’ 던전 쇼크가 일어나고 5년. 공략이 완료된 던전이 터지는 건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그때와 지금이 바뀐 게 무엇일까? ‘래쉬모드, 그리고 쥬리엘.’ 트라넷의 군단장.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좌와 2좌의 보잘것없는 군주라 하여도 일단 그들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곧 3좌가 나타날 것이고, 지구의 마나 농도증가가 더욱 가속화되면 상위의 왕좌를 가진 군주들도 속속들이 현신할 것이다. ‘누군가 조종하고 있다.’ 방법을 알 수야 있다면 사전 차단할 것인데 그것을 모르니 답답했다. 지구가 아닌 타 차원에서 건드렸다면 이렇게 길 따라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군단장 중 하나가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차례로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취미가 있지 않는 이상 방법을 알 수 없는 연쇄 던전 브레이크의 스위치는 지구에서 작 동하는 것일 터. 누군가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우진은 한참을 기다려도 서울역의 어느 입구도 터지지 않자, 주위 감각을 더욱 활성화했다. ‘시간이 지났다?’ 여태 동선을 보면 다음 타깃은 분명 서울역이다. 그런데 일어나질 않았다. 던전 브레이크 작업에 시간이 더 걸리는가? 우진이 30분을 더 기다려봤으나 던전브레이크는 일어나지 않았다. ‘확실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진이 미리 서울역에 도착해있다는 것 뿐. 자신을 보고 멈출 정도면 분명 누군가가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 범인이 있다. 그놈을 잡으면 된다. 자신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우회해 다른 던전으로 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진이 감각을 더욱 세밀하게 확장하는데 방금 전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몬스터웨이브를 정리한 데스나이트들과 각성자들이 우진을 향해 다가왔다. “강우진씨.” “…?” “KH길드 부사장 이명진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아스길드 사장 오태규입니다. 티브이로만 뵙던 분을 이렇게 뵈니 영광입니다.” “루트길드 소속 김철진입니다. 만나서 영광…….” 이제 막 전투가 끝났다. 초기에 몬스터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가둬두고 이후에 데스나이트들과 출동한 각성자들이 토벌했다곤 하지만…. 토벌을 마치자마자 우진을 발견하곤 바리바리 인사하러 오는 그들이었다. 개중에 몇몇은 선망의 시선을 몇몇은 그저 연예인을 보듯 신기함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들은 자신을 잘 알지만 우진은 이들을 알지 못한다. 팬심을 관리해야 할 연예인도 아니고…. “가서 몬스터나 잡지?” “다른 쪽엔 다른 각성자들이 출동했을 겁니다.” 수도방위사령부의 특수능력각성자팀을 비롯해 각 길드에 요청해 빠르게 던전 브레이크 지역에 각성자들이 투입되었다. 사당역은 최초라 더욱 피해가 막심했을 뿐. 다른 역들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 강북지역은 많은 시민이 미리 대피해 피해가 작았고, 호출을 받은 각성자들도 인근에 몰려 사냥에 참여한 터라 토벌이 빨랐다. “사진 하나만 같이 찍어도 되겠습니까?” “영정사진 쓸 거면 찍어줄게.” “…….” 우진의 살벌한 말에 말을 꺼냈던 각성자 하나가 입을 오므렸다. 우진은 주위를 둘러보다 인상을 썼다. 마법사인 듯 수정 박힌 작은 완드를 무기로 들고 있는 20대 여성. 우진이 그녀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깜짝 놀라 동그란 토끼 눈을 했다. 마치 불시에 카메라에 잡힌 사람 같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이 맞는지 어필했다. 우진이 인상을 굳히고는 여자를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왜, 왜요?” 우진이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자 여자는 당황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만있는 게 좋을 거야.” “…….” 우진의 말에 여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우진의 두 눈은 흉포한 야수의 그것과 같았다. 오우거와 눈이 마주쳐도 이처럼 발이 얼어붙진 않을 것이다. 여자에게 다가간 우진은 여자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쳤다. 콰직! 설마 진짜 때릴 줄 몰랐던지라 맞아서 뒤로 벌렁 나자빠진 여자나, 주위의 구경꾼들이나 벙찐 얼굴이 되었다. 막무가내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그들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신형이 깜박거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우진의 지팡이 끝이 쓰러진 여자의 머리를 쓸어 넘기듯하자 허공에서 후드모자의 깃이 나타나 지팡이에 딸려 올라갔다. 모자가 벗겨지자 투명했던 검은 망토가 드러났고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코가 빨개진 이상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큭, 어떻게 알았지?” 이상호가 비릿하게 웃었다. 환영의 망토를 사기 위해 거금을 들였건만. “이쪽으론 전문가가 있어서 말이야.” 우진이 강철지팡이를 소환하며 웃었다. < 98화 - 차원 영지 > 끝 ⓒ 진설우 < 99화 - 차원 영지 (2) > “크큭, 겨우 변장 좀 했다고 다짜고짜 때리다니. 성격 더러운 건 알아줘야 해.” 주위를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하는 이상호를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니, 웃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퍼억! 이상호가 깜짝 놀라 뒤로 훌쩍 뛰었으나 우진의 지팡이는 같이 따라와 기어코 옆구리를 후려쳤다. “시발!” 이런 무식한 새끼. 이엘로의 종이 되어도 상관없다. 이새낀 정말 죽이고 싶다. 강우진 이 개새끼. “뭐하는 짓이야! 왜 때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우진이 강철지팡이를 창으로 형태변환 했다. 우진의 진지한 눈빛에 이상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다.’ 진짜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모습이다. 이상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영문을 몰라 멀찍이 떨어선 여러 각성자들. 그들이 눈치 보며 둘의 모습을 살폈다. “하, 시발. 무슨 죽을죄? 넌 살인미수야.” 우진이 피식 웃었다. 곧 죽일 놈과 말 섞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도 없다. 차라리 시체와 대화를 하지. 슈아아악. 깡. 우진이 찌른 창을 이상호가 막아냈다. 그 모습에 우진의 눈썹이 슬쩍 휘었다. 이상호가 이 정도로 반응속도가 빠른 인간이었나? ‘시발, 무식한 새끼.’ 이상호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우진의 손 속에 당황하면서도 자신 있었다. 이엘로의 가신이 되면서 준 힘. 이것이 이상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상호가 핏대선 눈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죄가 있어도 재판을 받아야지. 네깟놈이 뭔데 날 죽이려 해!” 이상호의 발악에 우진이 그저 씨익 웃었다. 추악하고 더러운 영혼이 부들부들 떠는 게 느껴졌다. 우진이 한 발짝 땠다. 이상호가 한 발짝 물러섰다. 진짜다. 진짜 찌른다. 저 또라이 새끼는 진짜 자신을 찌르려 하고 있었다. ‘눈치챘나?’ 무슨 이유로? 지금 이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걸까? 환영의 망토를 이용해 이동할 때마다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는데도 말이다. 이상호의 고민은 길었고 강우진의 고민은 지나치게 짧았다. 푸욱! “허윽.” 미친 새끼. 진짜 미친놈이다. 갈비뼈 사이를 지나 폐부를 깊숙이 찌른 창날에 이상호의 핏발선 눈이 강우진을 보았다. 빠르다. 이엘로의 가신이 되며 힘도 반응속도도 전과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으나 우진의 단 한 수도 제대로 피해내지 못했다. ‘시발, 무식한 새끼.’ 가슴을 가득 메웠던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이 자식은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 있는 거지?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의문이다. 환영의 망토를 이용해 본 사람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자신이 던전을 터트리고 다닌 줄 알았을까? “어떻게 알았지?” “…….” 어떻게 알긴, 중동까지 가서 알아내고 돌아왔지. 우진이 창을 더욱 비틀었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꿀렁 새어나왔다. “크윽.” 이상호는 흐려지는 집중력에 염동력을 일으킬 생각도 못했다. 공격해봐야 우진에게 먹힐 수 있다는 자신도 없었고 말이다. “시발, 세상 참 불공평해. 크큭. 네깟놈이 아무리 잘나 봐야 막지 못한다.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터트렸을 거야.” “뭘?” “크크큭, 세상의 파멸은 막지 못한다. 그분들은 신이다. 신께서 강림하려 하신다!” “…….” 우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크크크큭.” 이상호는 웃었다. 피를 게워내며 웃었다. 어차피 모두 죽는다. 자신은 좀 더 일찍 죽을 뿐이다. 강우진의 당황한 모습을 본 것만 해도 다행이다. “어떻게 터트렸지?” “끄큭, 끄르르.” 피를 게워내던 이상호의 눈알이 뒤집히자 우진은 영혼갑옷에 저장되어있던 영혼 두엇을 보내 이상호를 치료했다. 갑작스럽게 몸에 에너지가 넘치며 가물거리던 정신이 돌아오자 이상호는 눈을 부릅떴다. 푸욱. “크아아악!” 우진이 창을 뽑아내자 피사 분수처럼 솟구쳤으나 다시 영혼 몇을 보내 흡수시키자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우진이 그런 이상호의 뒷목을 낚아챘다. “크으윽, 왜 살려주는 거지? 왜?” 죽이려면 죽일 것이지 왜 살린단 말인가? 이상호가 발악하거나 말거나 우진은 그를 끌고 가장 가까운 던전으로 향했다. 구경 중이던 각성자들 중 하나가 다가왔다. “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도와드립니까?” “필요 없어.” 우진은 이상호를 데리고 던전으로 향했다. 이상호를 죽이는 거야 상관없다. 죽을죄가 충분한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를 고문하는 장면을 굳이 사람들 앞에서 보여줄 필요는 없다. 우진은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이상호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쿠당탕. “도대체 뭐하자는 거지?”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 게 너냐?” “…알고 날 죽이려 한 거 아닌가?” “몰랐지.” “그럼 대체 왜 날 죽이려 하는데!” 이상호는 울컥하는 심정이었다. 다짜고짜 죽이려 하기에 던전브레이크를 터트린 사실을 아는 줄 알았더니…. “죽이려 한 건 너지. 난 죽지 않았고 복수하는 것뿐이야.” “…….” “중동에 의뢰 넣은 게 너잖아.” “…….” 이상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일 처리를 확실히 한다던 중동 브로커는 어떻게 꼬리를 남겼는지 강우진이 그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 이럴 거면 뭣 하러 대포폰으로 그리 연락을 해댔는지…. “죽일 때 죽이더라도 던전 브레이크를 어떻게 알았는지 불어.” 이상호가 비릿하게 웃었다. 놈이 원하는 게 그거였나? “내가 말해줄 것 같으냐?” 우진이 더욱 비릿하게 웃었다. “버텨봐.” 우진이 강철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 검은 로브를 입은 비비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몸에 맞지 않는 어른 옷을 입은듯, 소매도 길고 밑단도 땅에 끌렸으나 본인은 더없이 만족한 듯 해맑게 웃었다. “헤헤, 이옷을 지구에서 볼 줄 몰랐쪄.” “맘에 들어?” “당연하져, 내 옷인데.” 비비가 자신의 유니폼처럼 입고 다녔던 망토. 이상호가 어렵게 구한 환영의 망토는 우진에게 뺏겨 비비에게 돌아갔다. “알건 다 알았으니 깨워봐.” “헤헤, 알았져요.” 바닥에 누운 채 하얗게 뜬 얼굴로 신음하는 이상호를 향해 비비가 힘을 발휘했다. “허윽, 헉!” 이상호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우진을 귀신 보듯이 보며 놀라 앉은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우진을 보는 그의 눈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꿈이긴 하지만 자그마치 1년 동안 우진에게 두드려 맞았으니 그 공포란…. “이제 그만 죽어.” 우진이 도끼를 들고 다가서자 녀석이 질린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말하겠습니다. 전부 말하겠습니다.” “이미 알아.” “예?” 우진의 도끼가 이상호의 목을 쳤다. 몸통에서 분리된 그의 목이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다 회색빛에 휩싸였다. 츠츠츳. 시체가 증발하듯 사라지자 우진이 혀를 찼다. “지구인도 슬슬 포섭되는군.” 이엘로의 가신이 되었다고 했나? 녀석이 어떻게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켰는지도 들었다. 이엘로의 가신이 되며 몬스터들로부터 공격받지 않았다. 귀환석을 이용해 결계를 허물어 몬스터들이 나오도록 빗장을 풀었다. “그래도 일단은 한시름 놓았잖아여.” “그래도 계속 생겨나겠지.” 귀환석은 30일의 시간이 지나야 몬스터들이 만질 수 있었다. 이상호가 귀환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지구인이었기 때문. 지금 죽어 사라진 그는 트라넷에 가담하여 되살아날 테지만 그땐 더 이상 지구인 따위가 아니다. 72 군단장 중 하나인 이엘로의 가신이 될 뿐. 녀석은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일 뿐이다. 앞으로 트라넷의 꾐에 속아 그들의 가신을 자처하는 자들은 죄다 죽이고 볼 일이다. “슬슬, 나가보자.” “알았져용.” 긴 소매를 접고 밑단을 올려 질끈 허리를 묶어 담요를 두른듯한 모습이지만 비비는 최근 들어 기분이 가장 좋은 듯 보였다. 우진이 귀환석을 얻기 위해 지하철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달려드는 몬스터를 처리하며 가장 아래층까지 갔지만 귀환석을 찾을 수 없었다. “상위 던전이었나?” 조금 더 귀찮을 뿐이지 우진이 공략하지 못할 던전은 없다. 결계가 있는 입구까지 올라와 보니 붉은 포탈이 생성되어 있었다. 우진이 포탈을 통과했다. 위이이잉. 잠깐의 이명과 어지러움이 가시고 상위 던전이 모습을 보였다. 드문드문 갈대가 즐비한 황무지.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음.” 칼날처럼 높게 솟은 여러 개의 산들. 그중에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서 솟구치는 초록색 빛을 보니 그곳에 귀환석이 있었다.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 우진이 씽싱이를 소환해 탔다. 투두둑 우진이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드문드문 자리한 황무지를 가로질러 달렸다. “여긴 기본 몬스터가 뭐지?” 미리 알아보고 들어온 것이 아니기에 던전에 대한 정보는 없다. 우진의 궁금증은 황무지를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풀렸다. “키아아악!” 괴성과 함께 나타난 몬스터는 하늘에 있었다. 필드에 왜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나 싶었더니 이곳의 서식자들이 사는 곳은 황무지가 아닌 칼날같이 뾰족한 산에 있었다.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십여 마리의 개체가 날아오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멀었음에도 매처럼 커 보이는 녀석들의 정체는 와이번. “비룡 둥지라 이거지?” 비룡이 수십 마리 등장하는 던전. 보나 마나 6성 던전이다. 제법 경험치도 올릴 수 있는 기회. 슈슉! 우진이 달리는 씽씽이 위에서 전사의 무기를 소환했다. 형태변환은 활. 시위를 당기자 마력 화살이 생성되어 장전되었다. * 산의 정상에 올랐다. 리셋된 최초공략 던전은 아닌지 와이번 우두머리라거나 다른 보스몬스터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아쉽지만 별수 없다. 레벨도 하나가 올랐고, 좋은 던전을 알았으니 앞으로 몇번 더 이곳을 이용하면 될 일이다. 산꼭대기에 지어진 버려진 고성. “주인님. 여기 좀 으스스 하지 않아? 꼭 귀신 나올 것 같앙. 으으.” 비비가 몸을 부르르 떨며 큰 눈망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꼬마 악마와 네크로맨서와의 대화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보나 마나 오늘 우진의 악몽은 귀신 꿈이 될 듯 했다. “저기 있네. 혹시 모르니 아티팩트라도 있나 찾아봐.” “알았쪄용. 돌쇠찡 같이 가자.” 위이이잉. 비비가 돌쇠와 함께 고성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러 가자 우진은 초록빛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 파헤쳐진 정원과 마구간처럼 보이는 건물을 지나 성에 발걸음을 디뎠다. 부서져 문짝도 없는 문을 통해 들어가니 거미줄 쳐진 성의 내부가 모습을 보였다. 누군지 모를 초상화는 태워져 액자 틀의 윗부분만 겨우 남아있었고 넓은 홀의 중앙에 작은 무대가 있었고 그곳에 부서진 왕좌가 남아있었다. “쯧, 누가 이런 꼭대기에 성을 지어?” 던전은 실존했던 지형들을 기반으로 한다. 찢어진 차원의 조각. 이 성도 트라넷에 잠식되기 전까진 누군가가 주인이었을 것이다. 우진이 왕좌에 놓인 귀환석을 집어 들었다. 위이이잉. 그때, 손안에 든 귀환석이 부르르 떨며 빛을 토해냈다. 인벤토리에서 꺼내지도 않은 차원의 증명이 튀어나와 귀환석과 어우러져 술래잡기하듯, 지구 주위를 달이 돌듯 회전하며 공중에 떠올랐다. <동기화율 72%, 와이번 둥지를 영지로 선포하시겠습니까?> 우진이 눈앞에 뜬 안내 창을 보곤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과 맞는 던전과 접촉하면 된다더니 이런 말이었나? 우진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 99화 - 차원 영지 (2) > 끝 ⓒ 진설우 < 100화 - 차원 영지 (3) > “동기화율이 뭐지?” 우진은 턱을 슬쩍 쓰다듬다가 눈앞의 창 하단에 뜬 설명을 읽었다. 동기화율 만큼의 영토를 가지게 된다고 적혀있었다. “나쁘지 않아.” 우진이 안내 창의 ‘영지선포’를 눌렀다. <와이번 둥지를 차원 영지로 선포하셨습니다.> <랭킹 등록 전입니다. 이름을 바꾸시겠습니까?> 뭐, 볼 거 있나? 아르달이지. <강우진이 아르달의 영주가 되셨습니다.> <강우진의 아르달이 랭킹에 등록됩니다.> <영지 안정화 기간 30일 경과 후, 모험가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방어에 실패 시 해당 던전(출입구)을 잃게 됩니다. 영지의 물건 일부가 약탈당할 수 있습니다.> <신임 영주 보호기간 30일 경과 후, 타 영주로부터 영지전을 신청받을 수 있습니다.>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쥬리엘의 던전에 들어오기 전 선택 가능했던 여러 가지 모드들이 이해가 되었다. 더불어 던전의 원리구조까지 말이다. ‘던전 자체가 출입구. 공략당하면 출입구를 잃는다.’ 본체가 될 수 있는 차원 영지에 출입구인 던전이 문어발처럼 붙는다. 던전을 모두 잃으면 차원영지 또한 파괴된다. 우진이 여태 공략했던 1~3성의 하위 던전은 그저 던전 그 자체. 4~6성의 상위 던전은 붉은 포탈로 차원 영지로 이동하게 해주는 관문이었다. “그럼 7성부터 트라넷의 군단장들인가….” 지구에 아직 7성 던전이 링크된 적이 없으니 알 길은 없었다. 지금 계속 고민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니 우진은 눈앞에 놓인 왕좌를 보았다. “귀환석은 없으니….” 다른 던전을 공략해 나가기만 해봤지 자신의 영지에서 나가는 방법을 몰랐다. 우진이 척 보기에도 범상찮은 마력을 내뿜는 의자에 앉았다. 쿠우우우웅. 성이 크게 진동하며 떨었다. 갑작스럽게 유체이탈을 하듯 영혼이 쑥 뽑히는 느낌이 들었다. “흡.” 우진의 시야가 확 밝아졌다. 주변이 휙 하니 움직이더니 차원 영지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섬과 같은 그것이 주변에서부터 깎여나갔다. ‘동기화율만큼 버려지는가.’ 정확히 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소실되는 것은 28% 한층 더 작아진 차원 영지는 크기만 작아진 게 아니었다. 우진의 앞에 저절로 몇 가지 메뉴가 나타났다. <영지 정보> <던전 정보> <영지 관리> <병력 관리> <차원 상점> 우진이 차례로 안내창을 띄워보았다. <차원영지 - 아르달> 영주 : 강우진 랭킹 : 1317위 에너지 : 38%(115,340/300,000) 가신 : 0 영지민 : 0 병력 : 와이번, 철갑코뿔소 보유 던전 : 1 <던전 정보 - 서울역 1번 출구> 에너지 : 100% (10,000/10,000) 병력 : 거대거미, 독충 <영지 관리> 가신을 임명할 수도, 차원을 떠도는 이주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영지의 지형지물을 바꿀 수도, 성을 꾸밀 수도 있습니다. 타 영지와 전쟁을 할 수도 있으며, 결투를 벌일 수도 있습니다. 차원의 조각 1을 소진하여 새롭게 던전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영지를 관리하는 모든 일을 이곳에서 합니다. <병력 관리> 영지와 던전을 지킬 병력을 배치합니다. 영지의 병력이 부족하지 않도록 항상 유의해야 합니다. 병력은 상점에서 구입하실 수도 있으며, 이주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던전은 귀찮은 방문자들을 저지하는 1차 관문입니다. 소멸 된 병력은 새롭게 배치 시 던전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해당 던전의 에너지가 소멸할 시 더이상 병력을 충원하지 않습니다. 그전에 미리 에너지를 충전하여야 합니다. 병과 카드를 상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영지 병력 : 와이번 37, 철갑코뿔소 241, 후코원숭이 471 던전 병력 : 거대거미 42, 독충 132 <차원 상점> 당신이 상상하는 모든 것을 구입 할 수 있습니다. “휘유.” 우진이 모든 창들을 살펴보곤 머리를 절레 저었다. 그전까지 원리를 알 길이 없었는데 이젠 알 것 같았다. 던전 자체가 영주들의 관문일 뿐이었다. 하위 던전이 빈 공터라면 상위 던전은 영주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모험가가 공략에 성공하면 귀환석을 얻고 말이지?” 귀환석을 30일간 지켜내면 이제 방어가 아닌 공격을 할 수가 있다. 영지의 병력들을 외부에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던전 브레이크. 던전의 잠긴 문을 푸는 것이다. 우진이 영지관리 안의 던전 검색을 이용하니 수십 개의 차원에 수백 수천 개의 던전의 목록이 쭉 나열되어있었다. 그것들을 사기 위해서는 차원의 조각이 하나 필요했다. 개중에는 아르펜행성의 던전들도 있었다. 아르펜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중 하나를 사야 했다. “이거….” 우진이 인상을 썼다. “짜증나네.” 트라넷의 농간에 놀아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뒤에서 이렇게 판을 깔아놓았다 이거지?” 던전 에너지를 얻기 위해 브레이크를 일으키고 휘하 몬스터들로 하여금 사냥을 가게 하고…. “후우.” 열이 뻗쳐 스팀이 올라왔다. 더욱이 트라넷의 군단장… 아니 군주들이 왜 일치단결하여 아르펜을 침공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그랬네.” 영지전. 그들에게 아르펜은 그저 새로운 사냥터일 뿐이었다. 에너지를 끌어모아 상위좌에 도전할 사냥터. 지금의 지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 “개새끼들.”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우진은 이제 실체나마 있을까 싶은 트라넷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내가 뒤엎어 줄게.” 지구를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방범창을 달게 아니라 도둑을 모조리 때려 잡아야 한다. 영주든 뭐든 지구에 관문을 여는 놈들은 모조리 잡아줄 것이다. 우진이 차원상점을 열어 던전에 배치할 몬스터 병과 카드를 샀다. 해골병사와 해골 마법사. 더 상위의 언데드들을 사고 싶었지만 카드를 팔지 않았다. 던전에 배치할 수 있는 몬스터에는 등급에 제한이 걸려있었다. <던전 병력 목록> 배치 병력 : 0/300 리셋 에너지 : 해골 병사 3, 해골 마법사 4, 거대거미 3, 독충 2 우진은 해골병사 100기와 해골마법사 10기를 설정해 두었다. 모험가가 던전에 발을 들이면 150기의 해골들이 소환되어 그들을 막아낼 것이다. 그들이 모조리 파괴되면 340의 던전 에너지를 소비하는 셈. 그리고 차원 영지로 들어오는 붉은 포탈을 내어주게 된다. 그 반대로 모험가들을 해치우는데 성공하면 그들의 수준만큼의 던전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를 생각하면 어차피 소비되는 거니 비워두고 차원 영지에서 아예 몰살시키는 게 더 경제적일 수도 있고, 후자의 경우를 생각하면 보다 강력한 병력을 배치해 아예 진입을 막고 개미지옥처럼 에너지를 벌 수도 있었다. 아직은 침입자를 받아본 적도 없는 처음이었기에 우진은 실험 삼아 110기의 병과를 설정해 두었다. “영지의 방어는….” 우진은 일단 와이번을 구입했다. 던전방어에는 병과 카드를 사서 세팅해두는 것이라면 영지의 병력은 말 그대로 그들 자체를 사는 것이다. 에너지를 소비해 용병을 들여오는 것과 비슷했다. 재밌는 것은 판매 목록 중에 ‘인간’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흐음.” 우진은 영지정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와이번 하나를 구입하는데 드는 에너지가 300, 10마리를 사느라 3000을 썼다. 문제는 배치 가능한 총 병력의 수가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거 참.” 영지의 병력배치는 던전 에너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던전 에너지의 양에 따라 배치병력의 수도 함께 늘어났다. 높은 에너지를 가진 영지에 보다 많은 병력을 배치할 수 있는 것. 아이러니한 것은 병력을 구입하는데 던전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이다. “이러니 기를 쓰고 사냥이지.”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배치할 수 있는 병력이 줄어든다. 그렇다고 싼 가격에 허접한 병력으로 배치하면 영지전의 표적이 될 수도 있고, 어이없게도 모험가에게 털릴 수도 있었다. “뭐, 30일간은 보호된다고 했나?” 신임영주의 보호기간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으니 잠깐 고민해보고 수비병력을 짜기로 하고 우진은 영지에 대한 생각을 거두었다. 그러자 시야가 이동하며 영주의 의자에 앉은 우진의 몸으로 들어왔다. “후우.” 약간 어질한 느낌에 깊이 숨을 쉬었다가 뱉었다. 깨비와 영혼교환을 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우진은 전에 사두었다가 락이 걸려 열지 못한 ‘차원영지 관리’라는 메뉴얼북이 떠올랐다. “어디 보자.” 레벨 : 75 이름 : 강우진 클래스 : 네크로맨서(전승), 전사 등급 : 영주 업적 : 713,219 마력 : 1320/1320 기력 : 240/240 전에 ‘미배치’였던 등급이 ‘영주’로 바뀌어있었다. “이제 읽을 수 있겠지?” 우진은 책을 꺼내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즈으으응. “어?” 공간의 일그러짐과 함께 우진이 앉은 왕좌의 뒤로 세 개의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던 벽에 생긴 문은 붉은색과 검은색, 흰색의 문이었다. “뭐야?” 난데없이 생긴 문에 어리둥절할 때 안내음이 울렸다. <비틀린 공간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인벤토리와 영지 창고가 통합됩니다.> “…….” 우진은 인벤토리를 열어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존에 업적상점에서 아공간 확장 배낭을 부지런히 사먹여 100칸이 넘는 공간을 가진 인벤토리는 거의 무한대의 공간으로 늘어나 있었다. 아무래도 공간 자체가 영지의 창고로 변화된 모습.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이거, 털리면 약탈당하는 거겠지?” 차원 영지가 공략당하거나 영지전에서 패하면 약탈당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다. 영지를 내어줄 것이 아니라면 인벤토리가 무한대로 확장된 이득만 있는 것이니 나쁠게 전혀 없었다. 인벤토리는 전과 같이 간단히 물건을 수납하고 꺼낼 수 있었다. ‘차원 영지의 관리’라는 메뉴얼북을 꺼내 읽어보니 드디어 열람이 가능했다. 의자에 앉아 한동안 정독하던 우진은 30분 만에 책을 덮었다. “개새끼들.” 트라넷.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만난다면 반드시 죽여버릴 것이다. 판을 깔아도 제대로 깔아놨다. 그리고 트라넷의 군단장. 72좌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영주가 아닌 군주 레벨의 그들. 하나의 왕좌를 가진 1좌부터 72개를 가진 72좌 까지… 그들은 대군주가 되기 위해, 상위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군주가 되어야만 자신이 가진 왕좌의 개수만큼 영주를 가신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뭐, 놀아나 주지.” 판을 깔았으니 신명 나게 이용해줄 것이다. 최후에 판을 뒤집어엎으려면 일단 제대로 알아야 할터. 우진은 인벤토리에 책을 넣기 전 일어나서 뒤에 생긴 문으로 다가갔다. 붉은색 문을 열어보니 커다란 창고가 나타났다. 우진의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창고의 모습을 보곤 우진이 손에 든 책을 휙 던져보았다. 인벤토리 창에 방금 던진 책이 목록화되자 고개를 끄덕였다. “넣고 빼는 건 둘 다 되네.” 창고에 직접 가져다 놓든 기존처럼 인벤토리를 활용하든 똑같은 창고 공간을 이용하게 되었다. “여긴… 잠겼구나.” 우진은 왕좌의 바로 뒤에 자리한 하얀색 문이 잠겨져 있는 것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이 문도 등급에 락이 걸려있는지, 애초에 이런지는 알 수 없다. 메뉴얼에도 세 가지 문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그 오른쪽에 위치한 검은색 문 앞에 섰다. “여긴 열리겠네.” 자물쇠가 없는 것을 보곤 우진이 문을 열어젖혔다. 검은색 문이 열리며 대리석 바닥으로 만든 거대한 공간과 그곳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스켈레톤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긴….” 저 멀리 마구간처럼 보이는 그곳에 들어찬 유령마들과 저들끼리 무기를 주고받으며 대련하는 데스나이트. 공터 저 너머에 하늘 높이 솟은 탑은 아직 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불이 꺼져 있었고, 문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오두막은 안에서 촛불이 켜져 있었다. 위이잉. “돌쇠찡, 어디가!”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돌쇠가 나오고 그 뒤를 쫓아 나오던 비비가 우진을 보곤 발걸음을 멈췄다. “어?” 비비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우진을 응시했다. “으악, 주인님이 소환의 방에 왔어!” 비비의 놀란 고함에 훈련 중이던 스켈레톤들과 데스나이트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쪽으로 쏠렸다. < 100화 - 차원 영지 (3) > 끝 ⓒ 진설우 < 101화 - 의무 > “주인님이 죽었어!” 비비의 말에 데스나이트들이 술렁였다. [군주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 [마녀의 헛소리.] 그들의 말에 비비가 고개를 갸웃하며 우진을 보았다. 우진이 웃으며 다가와 비비에게 꿀밤을 날렸다. “구경이나 시켜줘 봐.” “아이쿠, 흐음. 어떻게 들어왔지.” 비비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총총걸음으로 우진을 이끌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내 땅이당. 헤헤, 오두막 이쁘지?” 우진은 울타리 쳐진 땅 너머에 마계 식물인듯한 괴상한 식물들이 자라는 텃밭과 아담하게 지어진 오두막이 보였다. 앙증맞게 꾸민 소품들이 가득했는데 비비는 하나하나 자랑을 늘어놓았다. “에헴, 기다려보시라.” 비비가 허공에 손을 휘젓더니 마당에 피크닉 테이블이 나타났고 그 위로 빵과 고기가 만들어졌다. “음? 어떻게 한 거야?” “그냥 한 건데용?” 비비는 익숙한 듯 보였다. “주인님이 강해지면 꾸밀 수 있는 게 많아져용. 헤헤 좀 더 분발하세요.” 무의 공간이었던 소환의 방은 각자 취향에 맞춰 꾸민 모양이었다. 아직 주인 없는 탑은 제니스의 것이겠고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용용이 것이려나? 너른 공터에 여기저기 쓰러진 해골들과 훈련하는 해골들은 데스나이트들과 해골병사들이 그런 모양이었는데 참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데스나이트들 하나하나가 워낙에 특색있는 자들이 많다 보니 주변에 듬성듬성 들어선 건물들이 대장간에 술집에 유령마들의 마구간까지 별별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로드, 나와 전사의 증명은 어떠한가?] 매번 자기들끼리 치고받기 지루했는지 우진에게 대뜸 대련을 걸어오는 놈들도 있었다. “그건 나중에 하고 다들 따라나와 봐.” 우진이 권속들을 이끌고 소환의 방을 나섰다. [이곳에 언제 문이 생겼지?] [전에 이곳은 그냥 제단이었지.] 저들마다 한마디씩 하며 문을 통과해 차원 영지에 발을 디뎠다. <데스나이트 키바가 아르달을 방문했습니다.> <우호적입니다. 영지민으로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서큐버스 비비가 아르달을 방…….> 권속들이 땅을 밟을 때마다 들리는 알림음에 우진이 미소 지었다. 생각대로 권속들 또한 영지민으로 등록이 되며 병력배치도 가능했다. ‘굳이 에너지를 쓸 필요도 없겠어.’ 매번 방문자를 받을 때마다 몬스터를 리스폰시키는 던전이야 별수 없다지만 차원 영지의 방어는 자신의 권속들만으로도 일단 방어가 될듯했다. 물론 이들을 지구에서 소환시킬 때를 대비해 미리 영지의 방어자원을 든든히 마련해 두어야겠지만 말이다. 우진은 그들을 모조리 영지민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비비와 키바를 영지의 가신으로 삼았다. 영주의 레벨에서 가신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딱 두 자리. 방어를 총괄하는 수비대장과 성의 업무를 총괄하는 집사 뿐이었다. “헤헤, 집사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하나?” 비비가 검은 연기에 휩싸이더니 검은색에 흰 프릴이 달린 메이드복을 입은 모습으로 변했다. 앙증맞아 귀엽긴 했지만 적절해 보이진 않았다. “그건 집사 복장이 아니지.” “주인님은 이런 거 싫어해용?” “까불지 말고. 앞으론 여길 지켜.” “야호! 맘대로 꾸며도 되나용?” “뭐, 적당히.” “헤헤, 신난당.” 집사의 권한 내에서는 비비가 알아서 할 것이다. 키바를 수비대장으로 임명하자 배치병력인 와이번 10기를 그가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둘을 가신으로 삼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우진은 집사의 권한으로 쓸 수 있는 에너지로 1만을 책정하고, 수비대장의 임의로 쓸 수 있는 에너지를 3만으로 설정했다.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기면 쓰도록 해.” [군주의 명을 목숨과 같이!] 비비가 입을 삐죽였다. “피, 이미 죽었으면서…. 주인님, 성 꾸미는데 에너지 조금만 써도 되나용?” “뭐, 적당히 써. 위험할 때가 되면 아끼지 말고 쓰고.” “야호.” 소환의 방에서도 꾸미기가 취미였는데 이제 드넓은 차원 영지의 집사가 되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비비였다. 자신이 태어난 마계처럼 만들까? 지구에서 봤던 모습으로 꾸밀까? 고민에 휩싸인 비비를 두고 우진은 의자에 앉았다. “일이 있으면 부르도록 해.” 30일간 보호기간이 적용되는 영지보다는 지금 서울의 사정이 더 엉망이었다. 던전 브레이크의 원흉을 제거하긴 했으나 이미 풀려버린 몬스터 소탕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차원 영지 메뉴얼을 읽어보고 어느 정도는 숙지했다. 우진이 원할 때, 영지전을 신청받았을 때 언제든 차원영지로 이동하는 포탈을 이용할수 있었다. 우진이 서울역 1번 출구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을 생성했다. 즈아앙! 홀에 포탈이 생성되자 우진이 그것을 통과했다. 잠깐의 어지럼이 가시고 나타난 곳은 지하철역 안이었다. 기존에 결계가 생성되는 입구 부분. 우진이 걸어서 올라가자 아까 모였던 각성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상호 사장은 어딨습니까?” 둘이 들어갔는데 혼자만 나왔다.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을 던진 이를 보았다. 중소길드의 누구라고 했나? “죽였어.” “…….” 뭐, 이런 당당함이 다 있지? 모여있던 각성자들은 오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날 암살하려 한 놈이다. 더 설명 필요해?” “…….” 설명이야 필요하지. 아까의 모습만 보면 우진이 다짜고짜 핍박하는 걸로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물을 만큼 용기 있는 자는 적어도 이곳에 없었다. 우진이 KH길드의 부사장이라고 소개한 이명진을 보았다. “백형길드 식구랬나?” “예에, 부사장에 있는 이명진입니다.” “부탁하나 해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사장 백종도로부터 강우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인 이명진이다. 그와 절대 부딪히지 말고, 필요하면 최대한 협조하라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우리 애들 올 때까지 여기 좀 지켜줘. 아무도 들이지 마.”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던전 리셋이 일어났었는데….” 외부에서 볼 때는 던전 리셋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는가보다. 우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이제 내 던전이거든.” “…?” 우진은 이명진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었다. “언제 백형하고 같이 한번 보자고.” “예에.” 이명진은 한껏 밝아진 얼굴로 유령마를 소환해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우진을 보았다. “자자, 얼른 주변 정리하고 여긴 아르달길드에서 올 때까지 저희가 통제합니다.” 이 난리 통에 던전에 도전하는 이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KH길드의 길드원들이 던전의 주위를 철통같이 경계했다. 이명진은 간략하게 상황을 문자메시지로 전송했다. 띠링. [굿.] 짧고 굵은 답장 하나에 이명진이 미소지었다. 백종도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만한 칭찬이 없었다. 기분파인 그가 내려줄 보상을 생각하면 절로 뿌듯했다. * 우진이 사당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몬스터가 거의 토벌된 후였다. 거리를 매운 군부대의 화기와 병력들이 몬스터사체와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었고, 막혀버린 도로를 재정비 중이었다. 탐지와 추격 계열의 능력을 갖춘 각성자를 중심으로 편성된 팀들이 혹시 모를 몬스터를 찾기 위해 분주히 서울을 뒤지고 있었다. “미꾸라지 하나 때문에 엉망이네.” 단시간에 초토화된 도시를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우진이 발걸음 한 곳은 해머길드의 본사 쪽이었다. 여전히 그곳엔 대피한 사람들이 통제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도 있었고, 몬스터 사체의 수거와 도시의 피해복구도 한창 진행 중이었기에 위험했다. 우진이 그들 틈에 가족을 찾으려 하자 타이탄 길드의 직원 하나가 와서 우진을 타이탄 길드의 위층으로 안내했다. “가족분들은 여기 계십니다.” 고층에 위치한 손님용 응접실이었다. 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개소리였다. 컹컹! 수아에게 선물한 대형견인 복희였다. 못 본 사이 제법 컸는지 우진을 보고 짖었으나 째려보자 녀석이 낑낑거리며 물러났다. “왔니?” “예, 어머니.” 난리를 겪고도 어머니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네가 다녀가고 난 뒤에 사람들이 우리만 이리로 들여다 주더구나.” 어머니의 음성이 힘없어 보였다. “수아는요?” “잠들었구나.” 우진이 응접실의 기둥을 돌아가니 침대에 수아가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수아가 깰까 조심히 뒤돌아 나오는데 어머니가 불렀다. “잠깐 앉아보렴.” “…….”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못해 보이는 모습에 우진이 순순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수경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으나 고민이 길지는 않았다. “우진아.” “네.” “난 네가 자랑스럽구나.” “…….” “죽은 줄로만 알았던 네가 5년 만에 돌아온 것만 해도 어미는 소원을 이뤘다.” 이수경의 눈에 눈물이 고여 흘렀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눈빛에는 애정을 가득 담아 우진을 보았다. “네가 사라지고, 아버지도 사라지고… 서울이 난리도 아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싶었더니 5년 전 있었던 대 재앙. 던전쇼크가 기억난 모양이었다. 더불어 어렸던 수아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날의 세월 까지. “생각지도 못한 효도도 받아봤고, 아들 덕에 티비도 나와봤다.” 인터뷰에 그리도 시달렸을 텐데도 이수경은 그것마저 감사히 생각했다. 대단해도 너무 대단한 아들을 두었다. 그래서 그렇다. 이수경이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어미는 이런 특혜는 필요 없다.” 강우진의 가족이기에 대피 온 사람들이 뭐 한 장 없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자신들만 이 넓은 공간에 침대에…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더불어 아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어미는 신경 쓰지 말거라. 어미보다는 서울을 구하거라.” “…….”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진을 여태 버티도록 해준 가족인데. “사람들이 너를 영웅이라 그러더라.” 영웅은 무슨, 육식자를 잡아먹는 포식자일 뿐인데. 그보다 어머니가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뉴스 보셨어요?” “…….” 아예 기자를 달고 다니며 찍게 했다. 세상 사람들이 보라고, 보고 경각심을 가지라고. 두려움을 가졌다면 우진이 원하는 것이었고, 반발심을 가졌다면 그 또한 우진이 원하는 것이었다. 적아를 구분케 해줄 테니까. 하지만, 무차별 살육을 벌이는 아들의 모습을 티비로 본 심정은 어떨까? 어머니의 눈은 안쓰러움과 동정, 걱정과 불안이 뒤섞여 억눌려 있었다. 당장에라도 관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나 억지로 참는 것이 느껴졌다. 우진이 씩 웃으며 이수경의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걱정 마세요.” 아들의 웃는 모습에 이수경은 더 가슴이 메어왔다. 영웅은 하늘이 내린다고 했다. 그 고난의 길을 왜 하필이면 우리 아들이 걸어야 하는가? 따지고 싶고, 빌어서 물리고 싶다. 그럴 수 없으니 가슴이 미어졌다. 묵묵히 응원해주는 것밖에, 가족들이 짐이 되지 않게 도와주는 것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품에 넣기엔 너무 커버린 자식이었다. 너무 커서 세계를 품에 안고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 “저 괜찮습니다.” “그래, 그래.” 이수경이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어여 가보거라. 바쁠 텐데.” “예에.” 우진이 일어서서 어머니를 한번 안아주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찰칵. 문을 닫고 서 있는데 어머니의 우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지구는 이미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영웅이 아닌 신이라도 막을 수 없는… 던전 쇼크는 애교로 보일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 < 101화 - 의무 > 끝 ⓒ 진설우 < 102화 - 의무 (2) > 해머길드의 사장실. 네 명의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해머길드 사장인 박상오와 부사장인 박진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A급 각성자인 그들 앞에 앉은이는 홍성구와 정민찬. 한때 부하직원이었으나 아르달길드의 부사장이 되어버린 사람과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으나 어느새 A급 각성자가 되어버린 홍성구를 바라보는 박상오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아까워.’ 저들을 모두 해머길드에 흡수했다면 A급 각성자가 셋에 AA급 각성자가 하나 더 생기는 건데 말이다. 아니, 그를 AA급 이라고 하기에도 이제는 부족한가.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사무실에 인터폰이 울렸다. 박상오가 누르자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진씨 엘리베이터 타셨습니다. 곧 도착하십니다.] “알겠어요.” 박상오가 호출버튼에서 손가락을 떼곤 민찬을 보았다. “강우진씨는 지금 이 사태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겠죠?” 정민찬이 박상오의 눈빛을 받아 넘겼다. “글쎄요. 오시면 물어봐야겠지요.” 민찬이라고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우진이 매번 강조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법도 도덕도 무너진 세계가 올 것이라고 주의한 적이 있었다. 지금의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그것의 전초전이 아닐까 싶었다. 끼익. 조용한 사무실에 유난히 크게 들리는 문소리와 함께 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왜 다들 죽 쑤고 있어?” 우진의 말에 성구가 가장 먼저 일어섰다. “형님!” 민찬이 신뢰 가득한 얼굴로 우진을 보고 있었고, 박상오와 박진우도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박상오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인사하는군요.” “그러게.” 우진의 자연스러운 하대에 박상오가 순간 얼굴이 굳었으나 박진우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박진우입니다.” “강우진이야.” 우진이 악수를 나누고는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다들 앉지?” 우진이 제 사무실이라도 되는 듯 너무 편하게 앉아버리자 박상오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표정관리에 애를 썼다. “할 말 있다며?” 우진의 직설적 물음에 박상오도 사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동방예의지국의 선후의 예를 논하기엔 시기가 좋지 못했고, 상대도 좋지 못했다. “지금 이 사태의 이유를 아십니까?” “이상호가 터트렸어. 트라넷의 이엘로라는 군주의 가신이 되면서 던전브레이크를 일으킬 수 있게 되었지.” “……?” 질문을 던진 박상오도 그 외에 앉아있던 이들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눈만 껌벅였다. 대충 알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니? “트라넷의 이엘로는 누굽니까? 아니, 트라넷이 뭡니까?” “던전을 가진 주인들. 지구를 사냥터로 만들려는 놈들 중 하나지.” 너무 엄청난 이야기인지라 박상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우진이 슬쩍 박상오를 보았다. “직업이 기잔가?” “…해머길드 마스터입니다.” “농담이야. 농담.” 우진이 피식 웃고는 답했다. “갔다 왔거든. 이미 놈들에게 먹혔던 세상에.” “…….” 알 수 없는 말이고, 이해되지도 않는 말이다.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고 말이다. “문제의 원흉이 이상호라면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미 죽였어.” “헉.” 우진이 놀라는 그를 보며 어깨를 뒤로하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여긴 손님대접이 왜 이래? 커피도 없나?” 아니, 이 와중에 커피 타령은……. 박상오는 울컥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비서를 호출해 커피를 부탁했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강우진을 훑었다. ‘종잡을 수 없다 생각했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대비를 해야 할지… 슬쩍 정민찬과 홍성구의 안색을 살피니 그들도 놀라긴 했지만 우진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분위기였다. 우진이 지금 상황의 원인을 알고 있다면 그 대책도 있을 터.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우진이 피식 웃으며 비서가 가져다준 커피를 후룩 마셨다. “뭘 어떻게 해? 똑같지.” 아직 자신도 잘 모른다. 트라넷의 군주들이 대거 넘어오게 될지, 아니면 조금 더 뜸을 들일지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전쟁이 임박했다. “던전 막고, 각성자 키우고, 힘 키우고… 전쟁 준비 하는 거지.” 던전 산업이라는 명목 아래 각성자들은 성장해왔다. 지금 나라마다 수십 수백 개씩 설립된 길드들이 그 증거지 않은가? 지구는 차근차근 힘을 키우고 있었다. 길드의 이익이라는 목적 아래 강해진 그들의 힘을 이제는 한데 모을 필요도 있었다. 예전의 우진이었다면 아무런 의견타진도 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명의 각성자 강우진과 지금의 강우진의 한마디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컸다. 강우진이 언제나 든든히 일 처리를 해주는 정민찬을 보았다. “한번 다 같이 만나서 준비를 해보자고.” “으음.” 옆에서 듣 고있던 박상오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머길드가 주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한 달 뒤 대한민국 길드 총회를 계획 중입니다. 그 자리가 어떻겠습니까?” “음, 뭐 그렇게 하지.” 박상오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것은 기회다. 강우진을 해머길드로 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이미 강우진을 품기엔 너무 커버린 상황.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엔 플랜 B가 있는 법. 건방지기가 하늘을 찔러 보였지만 아직 이런쪽으로의 손해계산은 어두워 보이는 모습이다. 이 정도면 뭐……. ‘이렇게 된 이상 2인자로 간다.’ 최고라는 명성을 포기하고 실속을 찾는다. 대한민국 최고 길드가 아니라면 두 번째 길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최고 길드가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아르달이라면 1위 자리쯤은 내어줘도 될만했다. “뭐, 그럼 그때 보자고.” 어차피 한 달 뒤 대한민국 길드들이 모두 모인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각성자들의 힘은 한데 뭉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 와중에 뜻을 함께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꼭 반대하거나 따로 노는 이들도 있겠지만 위험성을 전하고 주의를 환기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 했다. 꼭 전쟁을 한팀이 되어 할 필요는 없었다. ‘각자의 싸움이지.’ 어차피 생존을 위한 싸움. 각자가 알아서 살기 위해 싸울 것이다. 우진도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고. 굳이 돌봐야 할 사람이 적어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지금의 박상오처럼 말이다. ‘눈알 굴리기는.’ 아직도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주도적으로 움직이려 한다. 생존 욕구 앞에 이익 따위는 무의미하다. 저런 놈들이 있어야 편하다. 상대적으로 신경 쓸 것도 덜하고 말이다. “우린 가자고.” “예, 사장님.” 아르달의 식구들이 일어서자 박상오가 직접 배웅했다. 아직 통제가 풀리지 않아 민간인들이 그대로 대피소인 본사건물에 남아있는 와중에 아르달의 사람들이 건물을 나섰다. 여전히 거리는 군인들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어머니랑 동생은 정리 좀 되는 데로 데리러 오지.” “걱정 마십시오.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거의 토벌이 완료되었다지만 혹시라도 숨어있을지 모를 몬스터 때문에 집보다는 차라리 해머길드가 안전했다. ‘덩치 큰 것도 괜찮아.’ 직원이 많고 휘하 각성자들이 많은 것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달은 겨우 각성자가 셋 뿐이니 일을 분담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었다. 가족들이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면서 적들과 싸우기까지는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아르펜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었다. “다른 애들은 어딨어?” “김이사는 직원들하고 대피해있습니다. 지금도 대피소에 남았을 겁니다.” 아르달 길드에 머무르다 사고가 터지며 운 좋게 피신한 그들이다. 성구의 가족들과 길드의 식구들은 모두 해머길드의 본사에 대피해 있었다. “저기 다 있어?” “이 실장하고 비서실 직원들은 지금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해솔씨는 무사해요. 헤어지기 전까지 저랑 같이 있었어요.” 그와 함께 던전을 나왔으니까. 해솔은 잭슨이 지켜주니 별일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이승훈과 비서실 직원들. 민찬이 휴대폰을 꺼내보고는 여전히 통신이 불가능하자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통신망 복구 안됐나 봅니다.” 워낙에 던전브레이크에 호되게 당한 도시다 보니 파괴된 관계시설망을 복구하는 것은 수준급이었으나 이번엔 워낙에 피해가 커서인지, 그간 성공적으로 서울의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내어 잠시의 평화에 만성이 되어서인지 복구가 느렸다. “사무실로 가보자.” “예, 사장님.”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일반인들의 대피소 밖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각성자 등록증을 가진 사람이 둘이나 있다 보니 일반인인 민찬은 눈감아주었다. 엄밀히 말하면 일반인이 아닌 길드 관계자이기도 했고 말이다. “쯧, 엉망이네.” 혼란스러운 상황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 사무실은 엉망진창이었다. 패닉에 빠진 직원들이 그나마 모두 신속하게 대피실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경험 많은 민찬 덕분이었다. 던전 쇼크 때부터 던전 관련 일에 종사한 그는 각성 능력이 없다 뿐이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우진은 아무렇게나 넘어진 의자를 바로세워 앉고는 사무실을 훠이 둘러보았다. 올라오다가 본 창고는 이미 누군가에게 털려있었다. 범인이 몬스터인지 사람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이사 가자.” “예?” 요새가 필요했다. 넘쳐날 몬스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적은 인원으로 효율적으로 방어를 할 수 있게 만드는… 해머길드의 본사 건물 같은 요새 말이다. “서울역 근처로 알아봐. 적당한 건물로 추려 말해봐. 살 수 있으면 사고, 아니면 뺏자고.” “…….” 적응이 된다 싶으면서도 여전히 사장님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는 만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진이 하자고 하는 일이면 결국 한다. 자신은 최대한 잡음 없이 일 처리 되도록 돕는 것이 사명이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보다 승훈씨랑 비서실 직원들이 걱정입니다.” “살아있으면 돌아올 거야.” “…….” 너무나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들어 어떻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민찬이 황당한 얼굴로 우진을 보는 그때 안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아, 통신망 복구 됐나 봅니다.” 민찬이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비서실 직원인가 싶었지만 전혀 다른 번호였다. “구, 국방부인데요?” “음? 거기서 또 왜?” 우진의 반문에 옆에 있던 성구가 답했다. “형님, 미사일 타고 오셨잖아요.” “아, 그… 뭐, 미국이 쐈다고 해. 그냥.” 민찬이 옅게 한숨을 쉬곤 전화를 받았다. “…아르달 부사장 정민찬입니다.”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하던 그가 수화기를 막고는 우진을 보고 말했다. “이미 미국방성에 벌써 물어봤답니다. 거기서 여기까지 날아올 거리가 아니랍니다.” “그래서 전투기 몇 대 끌어다 개조 좀 했어.” “…….” 돌쇠가 개조하느라 그저 미사일에 전투기를 갖다 붙인 수준이었지만 우진의 마력을 더해 출력을 높여 서울까지 단번에 날아왔다. “미국방성에서도 사장님이 미사일과 전투기를 빌려… 타고 갔다고 사실 확인했답니다.” 우진이 인상을 썼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번엔 한번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 국방부에? 딱히 해명할 것도 없는데….” “아니요. 청와대에서 부릅니다.” “…….” “이번엔 정말 다녀오십시오.”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지 뭐. 일주일 뒤에 간다고 해.” 그 정도 시간이면 증거자료가 담긴 서류도 도착할 것이다. 민찬이 겨우 통화를 마치는데 또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띠리디리 딩딩. 조금 멀리서 들리는 그 소리는 사장실에서 울리고 있었다. “어? 내 휴대폰인데.” 중동에 갈 때 휴대폰을 두고 갔던 우진이었다. “제가 가져올게요.” 성구가 재빨리 뛰어가 우진의 휴대폰을 가져왔다. “형님. 지원이 누나인데요?” “…….” 도지원을 생각하자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프간에서 자신의 앞에서 악령으로 변해버린 그 맑은 영혼의 아이가 생각난 탓이었다. “여보세요.” 우진이 통화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흐윽, 우, 우진아… 도와줘.] 우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지금 어디야?” [여기가 어디냐면….] < 102화 - 의무 (2) > 끝 ⓒ 진설우 < 103화 - 의무 (3) > 사당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병원. 아직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 차보다는 뛰어오는 게 빨랐다. 우진은 병원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병원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빼곡했다. “흠.” 사망자보다 부상자의 수가 수배는 더 많았다. 우진은 사람들로 마비수준이나 다름없는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비상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복도를 빼곡 매운 환자들을 지나 격리실로 향했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돼요.” 갑자기 들어오는 우진의 행동에 간호사들이 깜짝 놀라 저지했다. “괜찮으니 잠깐 들어가죠.” “안됩니다. 감염될 수도 있어요.” “각성자라 괜찮아요.” 각성자라고 해서 어디 모두가 만독불침인가? 바빠죽겠는데 왜 생떼를 쓰는가? 우진이 각성자 카드를 내밀자 간호사가 그것을 받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강우진?” A급이라 찍혀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각성자 협회에 등록된 랭크일 뿐이다. 한국의 강우진은 세계적으로 AA등급, 혹은 그보다 높은 S등급까지도 평가받고 있는 각성자였다. “하지만 감염되실 수도….” “괜찮아요.” “…….”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자 생떼처럼 들리지 않았다. 간호사가 갈등하다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권한 내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네, 원장님. 각성자 강우진씨가 찾아왔는데 지금 격리실에….” 한동안 통화하던 간호사가 전화를 끊고는 우진에게 말했다. “들어가는 건 상관없지만 나오실 땐 무조건 검사 받으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누구 찾아오신 거죠?” “도지원, 도재민이라고 있을 겁니다.” “3호실이에요. 이수민 선생님에게 말씀하시고 만나보시면 될겁니다.” 우진이 몇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복도와 함께 4개의 병실이 모습을 보였다. 투명한 창으로 안이 훤히 내다보이는 병실엔 척 보기에도 수용인원을 초과한 사람들이 들어있었다. 우진의 등장에 안에 있던 이수민 교수와 레지던트 둘은 깜짝 놀랐다. “강우진씨입니까? 이수민입니다. 반갑습니다.” “3호실 문 열어봐요.” 우진은 건성으로 악수하고는 굳게 잠긴 문을 가리켰다. 격리실이라 불러야 할지 감금실이라 불러야 할지… 이수민을 비롯한 의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접촉하시면 안됩니다. 면회는 여기서 하십시오. 아직 증상에 대해 파악 중인 환자입니다.” “…….” 레지던트 하나가 마이크 하나를 가져왔다. 3호실 안쪽의 스피커와 연결되어 대화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우진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 이건 뭐하자는 건지, 격리가 아닌 감금이다. 치료도 아닌 관찰이다. 나아지는 것 없이 시간만 축내는 짓이다. “열어.” “어허!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요. 격리조치 후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우진이 이수민을 지그시 보았다. “열어.” “감염경로도 아직….” 우진이 피식 웃었다. 드잡이질 하는 게 우습지. 우진의 팔이 이수민의 어깨를 둘러 어깨동무했다. 우진의 두꺼운 손이 이수민의 어깨를 쥐었다. “으으으.” 통증에 이수민이 신음하자 레지던트들이 소리쳤다. “어허, 뭐하시는 겁니까!” “놓으십시오! 다칩니다.” 레지던트들이 감히 달려들지는 못하고 허둥지둥 말만 한마디씩 거드는데 우진의 다른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 “의사면 잘 봐라.” 콰직. 잠겨있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열린 문을 우진이 이수민을 들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이수민이 자유로운 팔을 들어 소매로 입을 막았다. “흐읍.” 이수민의 호들갑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우, 우진아….” 병실에 들어온 우진을 지원이 불렀다. 우진이 슬쩍 눈인사 하고는 이수민의 귀에 대고 말했다. “호흡기로 전염되는 게 아냐. 턱 부숴버리기 전에 손 내려.” “헉.” 이수민은 얼른 손을 내렸다. 병실에 모인 사람은 얼핏 14명.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중독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 하지만 감염자들과 밀접접촉한 사람들로….” “아무도 이상 없어. 격리 풀고 놔줘도 돼.” 우진이 그를 이끌고 복도로 나왔다. 레지던트들은 벌써 도망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수민은 사자의 아가리에 물린 것 마냥 옴짝달싹 못하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우진이 1호실 문을 잡았다. 그곳엔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다섯 명이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저건 구울의 시체독이다. 아직 지구엔 구울이 나타난 적이 없다니까 뭐, 처음 보는 독 종류겠지. 만져야 옮으니 걱정하지 마.” “여, 열지 마십시오.” “의사 새끼가 지 목숨 아까워 벌벌 떠는 꼴이 가관이네.” “…의사의 생명은 더없이 소중합니다. 제가 살아야 더 많은 환자들을….” “개소리.” 우진이 어깨동무한 팔에 힘을 주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이 제 목숨 아끼는걸 봤나?” 목숨을 담보로 나가는 전장이다. 우진은 한 번도 죽음을 피한 적이 없었다. 아니, 늘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난 살고 싶었지, 죽기 싫었던 게 아니야.” 괴물이 되기 싫었다. 트라넷의 군단장들과 같은……. 그래서 가족들을 생각하며 버텼고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기 위해 애썼다.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이수민이 고민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우진이 저장된 영혼을 보내 시독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즉시 치료했다. 한결 편해진 그들의 모습에 이수민이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큰 병원들은 모두 치료계열의 각성자들과 전문인력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곳에 격리된 환자들은 모두 현대 의학으로도 각성자의 능력으로도 원인을 알수없어 격리된 자들. 우진이 너무나 간단히 치료해버리자 어안이 벙벙했다. 강우진을 모르진 않았다. AA랭크의 네크로맨서. 시체나 조종하는 사령술사가 치료마법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우진이 2호실의 투명 창 너머를 보았다. “저기 셋은 뭔 줄 아나?” “모릅니다.” “독이나 병이 아니라 저주다.” “…….” 너무 자신 있게 말해서 이걸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자신감 하나만큼은 대단했기에 이수민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치료하실 수 있습니까?”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났다. 저주를 풀 방법이 없어.” “아!” 골든타임이 지났다는 말. 우진이 침대에 누운 채 오한이 들린 듯 몸을 떠는 그들을 보았다. 발광을 부렸는지 침대에 묶여 있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중에 하나가 재민이었다. 데굴데굴 눈알만 굴리고 있었는데 유리창 너머의 우진을 보고는 눈물을 주룩 흘리는 녀석이었다. 애초에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모르겠으나, 걸렸다면 치료법이 없다. “그럼 저들은….” “하루를 저렇게 떨다가 저주가 발동하겠지.” 우진의 선언에 의사는 낭패한 얼굴이었고 뒤에서 듣고 있던 지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되는데?” “밤귀족의 하수인이 되는 거지.” “그, 그게 뭐야?” “몬스터가 되는 거지.” 이지를 상실한 뱀파이어의 하수인. 그저 피에 대한 갈망밖에 남지 않은 괴물이 되는 거다. 지원이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흐윽, 재민아….” 지원이 흐느껴 울었다. 우진은 지원을 내려다 보았다. 위로 같은 건 지금 어울리지 않았다. 우진이 의사에게 얹었던 팔을 내려 어깨동무를 풀고는 2호실의 문을 잡고 열었다. 콰득. 간단히 뜯긴 문을 지났다. 침대에 묶인 셋의 눈동자가 동시에 우진에게로 몰렸다. “혀엉.” 재민의 동글동글한 눈이 재민을 보았다. “너 살고 싶냐?” “네에… 살고 싶어요.” 재민이 창백한 얼굴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렸지?” “네에. 어깨에….” 우진이 재민의 옷을 찢어 보자 그곳에 선명한 이빨자국이 있었다. 이미 붉은색을 넘어 보라색으로 변한 자국. “쯧.” “흐윽, 형, 저 어떻게 되는 거에요?” “흡혈귀 알지?” “네, 형.” 왜 모르겠는가, 자신을 물었던 놈이 꼭 흡혈귀 같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돼.” “그럼 저 평생 햇볕도 못 보고 그래요?” 우진이 피식 웃었다.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데? “아니, 해는 보는데 내일 되면 넌 죽고 그냥 몸만 살아서 흡혈귀가 되는 거야. 내일부터 넌 없어. 네가 생각하는 건 진짜 뱀파이어족이고. 넌 그냥 하수인인 흡혈귀가 되는 거야. 몬스터 같은 거 말야.” “……흐윽, 혀어엉.” 몸이 묶여있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달려들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울었을 듯 싶었다. 우진이 진지한 얼굴로 재민을 내려다 보았다. “너 뱀파이어 되어서라도 살고 싶냐? 네 말대로 평생 해도 못 보는데.” “흑, 네. 저 하고 싶었던 것도 많은데. 여태 공부만 했는데…. 살려주세요. 형.” “그래. 살려주마.” 우진의 대답에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두 환자가 소리쳤다. “나도 살려주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저씨, 저도 살려주세요.” 우진이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못 살려요.” “아니! 왜 저 사람은 되고 우린 안돼요?” “아저씨 강우진 아니야? 공인이 막 이래도 돼?” “우리도 살려내!” 그들의 아우성에 우진이 그저 대꾸없이 재민을 옭아매던 결속장치들을 모조리 풀었다. “야이 시발! 우리도 살려내라고!” “가기만 해봐. 다 떠벌릴 거야. 강우진이 영웅이고 뭐고 다 가식이라고!” 우진이 피식 웃으며 복도에 멍하니 서 있는 이수민 교수의 팔을 끌어왔다. 얼떨결에 2호실에 들어온 이수민 교수가 죽음의 문턱에서 발악하는 둘을 보았다. “누가 영웅이랬나? 목숨 구걸은 내가 아니라 의사한테 해야지.” 우진이 이수민 교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재민이를 데리고 문을 나섰다. “어, 어떻게 합니까?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우진을 따라 나온 이수민이 진지하게 물었다. 방법을 몰라서 문제지 알고 있다면 살려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물었던 뱀파이어의 심장을 꺼내 피의 의식을 하면 돼. 그럼 힘이 계승되지.” “…….” 알 수 없는 저주만큼이나 엽기적인 방법. “의식은 한 명에게만 할 수 있지. 안타깝게도 셋 다 같은 놈한테 물린 것 같으니.” “…….” “난 내 동생을 살려야겠어.” “혀어엉.” 내 동생이란 말에 감동한 듯 재민이 울먹였다. 패닉에 빠진듯한 의사를 보며 우진이 말했다. “하룻밤이 지나면 저놈들은 흡혈귀가 될 거야. 저렇게 허술하게 묶어두면 후회할 거야.” “…어, 어떻게 합니까?” “알아서 해. 괴물 두 마리를 살리든, 안락사를 해서 수많은 병원 사람을 살리든.” “…….” 할 말이 없다. 이보다 무책임한 말이 어딨는가? 이수민의 간절한 눈빛과 우진의 무심한 눈빛이 만났다. 우진도 방법이 없다. 선택을 해야 하고, 자신은 선택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재민이도 살리는 게 아니다. 인간 도재민을 뱀파이어 도재민으로 만드는 것이지. “의사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알아서 해.” 우진이 바닥에 주저앉은 지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어디로?” “재민이 살려야 할 거 아냐.” “고마워. 고마워 우진아.” “하루 안에 재민이 문 범인 못 찾으면 어차피 죽어.” “…….” 아깐 내 동생이라더니… 저렇게 담담하게 죽음을 이야기하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우진이 지원과 재민을 데리고 격리실을 나서자 이수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야….” 여전히 혼란스럽다. 2호실의 침대에 묶인 환자 둘은 미친 듯이 욕설과 저주를 내뱉고 있었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도망쳤던 레지던트들이 다시 찾아 이수민을 부축했다. 위급할 땐 나 몰라라 도망가더니 강우진이 사라지자마자 나타난 녀석들이 괘씸했지만 지금은 사제간의 의리를 논하기엔 사정이 좋지 못했다. “뱀파이어의 저주에 대해 자료를 구하게.” 이수민은 이들을 감금한 것이 아니다. 원인불명의 증상을 보이니 격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을 뿐이다. 일단 살아있는 사람인데 최선을 다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각성자 협회와 세계 각성자 기구에도 자료를 요청하게.” 몰랐으면 모르되, 원인을 알았으니 최선을 다해 치료법을 찾아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자신에게 병원은 전쟁터다. < 103화 - 의무 (3) > 끝 ⓒ 진설우 < 104화 - 뱀파이어 사냥 > 어두운 골목.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자와 남자가 껴안고 있었다. “아아.” 여자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신음은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한동안 부둥켜안고 있던 두 남녀가 떨어지자 여자는 바닥에 쓰러졌고 남자는 입술에 가득 묻은 피를 닦으며 웃었다. “크크크, 이곳은 낙원인가?” 신선한 피를 가진 인간이 넘친다. 어떤 차원도 이만큼 인간이 넘쳐나는 세계는 없었다. 오늘만 벌써 24명의 피를 탐했다. 동물과 몬스터의 피가 연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풀죽이라면 인간의 피는 달콤한 과자와 같았다. 더 많은 피를 탐하고 싶지만 이제 곧 동이 터 오를 시간이다. “큭, 시간은 많지.” 7개의 왕좌를 가진 대군주 7좌 레일러의 충실한 가신이자 최고의 염탐꾼 베이모트. 주인님이 링크할 최적의 던전을 찾기 위해 먼저 지구에 현신한 그였다. “천천히 즐기자고.” 시간은 많다. 인간세상을 돌아보며 천천히 정보를 파악해가면 된다. 지금은 일단 아침 해가 떠오르는 사이 잠시 숙면할 곳을 찾아야 할 때였다. 박쥐로 변신하려던 그가 흠칫 인상을 굳혔다. “휴, 겨우 찾았네.”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베이모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창백한 인상의 앳된 남자아이와 묘하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덩치 좋은 남자였다. 본능적인 경계심에 베이모트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어허, 어딜 가?” “누구지?” “굳이 알 필요 없어.” 우진은 씩 웃자 베이모트가 왠지 모를 위화감에 등을 돌렸다. 재빨리 도망치기 위해 하늘로 점프 하는데 발목을 확 끌어당기는 힘에 날아오르지 못했다. 콰앙! 우진은 베이모트의 다리를 잡자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들어올려 바닥에 패대기치자 베이모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으으윽.” 우진은 신음하는 베이모트의 목줄을 밟아 눌렀다. “크르륵.” 숨쉬기가 곤란한 듯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그를 단단히 내리 누른 뒤 골목 어귀에 가만히 서 있는 재민을 불렀다. “이리 와.” “…….” 말은 많이 들었다. 기사도 많이 보았고 동영상도 보았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강우진이라는 사람은 굉장했다. 자신을 물었던 뱀파이어가 힘 하나 쓰지 못하고 제압되었다. 재민은 우진이 대단해 보이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우진은 겁먹은 얼굴로 쭈뼛쭈뼛 걸어오는 재민에게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쥐어봐.” 재민이 어설프게 단검을 쥐자 우진이 아래를 가리켰다. “심장을 찔러.” “네?” 재민이 화들짝 놀라는데 우진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빨리 찔러.” “…….” 단검을 쥔 재민의 손이 덜덜 떨렸다. “살기 싫어?” “아, 아뇨.” 살고 싶은 건 살고 싶은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재민이 울먹거렸다. “어, 어떻게 찔러요….” “어휴.” 우진이 단검을 쥔 재민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래로 내려 베이모트의 심장을 향해 내렸다. “어어?” 칼끝이 옷깃에 닿자 우진이 손을 뗐다. 떨어진 칼을 줍는 듯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숙인 재민을 보곤 말했다. “찔러.” “혀, 혀엉.” 하려면 다 해주지…. 용기없어 못하는 번지점프도 누가 강제로 밀어주면 못 이기는 척 떨어져 내릴 것 아닌가. 재민은 지금 용기가 없었다. “스스로 해.” “흐으윽.” 우진의 음성은 무심했다. 눈물 콧물 흘리는 재민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해 뜨면 너도 죽고 이놈도 죽어. 이놈이야 제 영지에서 되살아나겠지.” 주인의 총애를 받는 가신은 살아날 수 있다. 차원영지매뉴얼을 읽은 우진이기에 알 수 있다. “선택해. 죽던지, 이놈의 흡수해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살아 남던 지.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살려주는 게 아니다.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결정은 스스로. 우진은 그저 가만히 재민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흐윽, 흑.” 재민은 울었다. 피를 게워내며 애끓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뱀파이어 베이모트는 인간이 아니다. 수십만 가지 생각이 재민의 머릿속을 스쳤고 그의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날 새겠다.” “흐윽, 흑.” 재민이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살자. 살아야 한다. 지금도 울면서 기다리고 있을 누나 핑계를 들먹거릴 필요도 없다. 살고 싶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한다. 눈빛이 독해졌다. 어차피 자신의 피를 빨고 해치려 한 놈. “으아아악!” 재민이 힘주어 단검을 내리눌렀다. 투툭. “어?” 뱀파이어의 가죽은 생각보다 질겼고 단검은 잘 들어가지 않았다.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사내놈이 힘이 왜 그렇게 없냐? 빨리 찔러. 이러다 진짜 해 뜨겠다.” “네, 형.” 퍼억 퍽, 푸욱! 처음이 어렵지 한번 마음을 먹고 보니 질긴 가죽을 내리치는 팔에 더욱 힘이 들었다. “되, 됐다!” 재민이 기뻐하기도 잠시 단검이 찔린 심장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우진과 재민의 몸을 더럽혔다. 비산한 피 분수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듯 알갱이져 공중에서 흐르더니 그대로 재민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피의 계승. 하수인이 주인의 피를 이어받아 진정한 뱀파이어로 깨어나는 것이다. “으어어어억!” 피가 끊임없이 입으로 빨려 들어오자 익사라도 한 듯 버둥거리던 재민은 모든 피를 마셔버리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웁!” 재민은 생각만 해도 역한 기분에 두 손을 입으로 틀어막았다.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던 그는 이내 눈물을 흘렸다. “흐윽, 흑흑.” “사내새끼가 왜 자꾸 울어?” “흐윽, 혀엉….” “왜?” “피가… 맛있어요. 흑흑.” 달콤하고 맛있다. 재민이 여태 먹어본 그 어떤 음료보다 맛있다. 이 비정상적인 감각과 쾌락에 재민이 울었다. 자신이 인간에서 벗어난 듯해 슬프고 슬펐다. “난 또…. 저것만 정리하고 가자.” 잿빛으로 변해 사라진 베이모트의 시체는 정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우진은 전사의 무기를 꺼내 창으로 변형했다. 우진이 미니스커트의 여자에게로 다가가자 재민이 눈을 크게 떴다. “혀, 형! 뭐하시려고요?” “응? 처리하고 가야지.” “사, 사사사사, 사람을요?” “곧 동 틀거야. 어차피 의식 없는 흡혈괴물로 변할 건데 처리해야지.” “…….” 사람의 목숨을 두고 너무나 감정 없어 보이는 우진의 음성에 재민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맞는 건가 싶은 위화감이 들었다. “왜? 네 심장이라도 떼 줄래? 그럼 살릴 수 있고.” “…….” 침묵하는 재민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이제 30분도 남지 않은 이 여자의 목숨이 아깝냐? 흡혈괴물이 되어 죽이게 될 사람들의 목숨이 아깝냐?” “그야….” 물어보지 않아도 당연한 계산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냉정하고 침착하며 무심할 수 있을까? “네가 할래?” “아, 아니요.” “익숙해져야 할 거야.” 뭘 말일까? 사람을 죽이는 우진을 지켜보는걸? 아니면 너무 많이 변해버린 이 미친 세상을? 푸욱! 우진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있는 여자의 심장을 창으로 찔렀다. 재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에 우진이 씩 미소 지었다. 여리고 순수한 놈이다. 마치 5년 전 아르펜에 첫발을 디딘 자신처럼. “천천히 생각해. 천천히.” “네, 형.” 뭐, 급할 것 없다. 자신처럼 독해지든, 계속 저렇게 약한 마음에 주저하다 목숨을 잃든. 선택은 본인의 몫이고 살아가는 것도 본인의 몫이다. “일단 해뜨기 전에 가 있어라.” “어딜요?” “음, 이젠 갈 수 있을 거야.” 우진은 재민의 레벨을 보았다. 레벨 5였던 재민은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하지만 피의 의식을 치르고 나서 레벨 10이 올라 1서클이 넘는 능력을 얻었다. 인간은 아니지만 각성자. 던전에 출입할 기본 요건은 충족되었다. 지이이잉. 우진이 자신의 차원영지 아르달로 통하는 포털을 열었다. “미리 말해놓을 테니 들어가서 비비를 찾아.” “…네, 형.” “마음 좀 추스르고 있어, 곧 갈 테니.” “네, 형. 미안해요.” 재민은 부끄러웠다. 우진이 잘못되지 않았음은 안다. 그저 본능적 두려움이 들었을 뿐.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일이 아니었나? 가증스럽게 목숨을 구한 자신이 우진의 도덕성을 논할 자격 따위는 없었다. 우진이 피식 웃으며 재민의 등을 밀었다. “들어가기나 해. 햇빛 보면 너 타서 죽어.” “힉, 네.” 재민이 포털을 통과하자 우진이 곧 포털을 닫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떠오르는 밝은 햇살에 우진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기존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대구의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의 연쇄 던전브레이크에 세계는 경악에 빠졌다. 30일의 시간 동안 최초공략에 실패한 던전만이 브레이크가 일어난다는 기존의 법칙이 무너졌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지라 던전을 보유한 나라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대책을 수립하기 바빴다. 그들에게는 좋은 표본이 있었다. 예기치 못한 던전 브레이크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서울. 세계가 경악했다면 서울은 패닉이라 해도 모자랐다. 대규모 엑소더스가 일어났다. 언제 터질지 모를 던전의 주위에서 누가 살고 싶겠는가. 너도나도 피난 가기 바빴고, 정부는 사람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연일 던전을 통제할수 있음을 발표했지만 신뢰하는 사람은 적었다. 정부는 무너진 국민들의 지지를 회복하는 것과 차후에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던전브레이크에 대항하기 위해 길드 아르달을 압박했다. 모든 언론사들이 길드 아르달의 마스터 강우진을 혼란스런 이시기를 타계할 영웅이자 수호자로 포장했고, 그가 대한민국을 지켜줄 것이라 기대했다. 국민들의 기대도 강우진에게 집중되었으나 그는 어디에 칩거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길드 아르달의 행보는 의아했다. 모두가 서울을 떠나는 이때 길드 아르달은 똥값이 되어버린 서울역 인근의 부동산을 매입했고, 이사를 준비 중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서울의 도로가 다시 정비되었고, 사흘이 지나자 사람들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나흘째가 되자 던전 브레이크에 대한 불안감에 대책을 요구하는 시민의 시위가 광장을 점령했다. 폭동으로 변질할지도 모를 그 시위대에 정부는 전전긍긍했고 국민의 분노와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강우진을 내세우는 것이다. 길드 아르달을 샅샅이 뒤졌지만 강우진은 던전이라도 공략하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다섯째 날 국회와 청와대의 완전한 세종시 이전계획이 언론을 통해 새어나가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분위기는 흉흉했다. 그리고 그날 인천공항을 통해 성녀 메르디가 한국땅을 밟았다. “이쪽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메르디는 7명의 성 기사단에 경호 받으며 공항검색대를 통과했다. “와아… 대박.”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저 사람 메르디 아니야?” “헐, 너 저 사람 알아?” “그 있잖아. 성녀. 유튜브로 본 거 같은데….” “그래?”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든 이의 집중을 받으면서도 도도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출구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한 사내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이에요. 민찬.” 그녀의 유창한 한국말에 놀라면서도 정민찬은 미소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항까지 마중 나온 정민찬은 메르디와 성 기사단을 이사한 아르달 길드로 안내했다. “이리 주십시오.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미소 지으며 거절한 메르디는 작은 가방을 소중한 듯 품에 안았다. 이 안엔 임모탈이 부탁한 ‘문서’가 들어 있었다. < 104화 - 뱀파이어 사냥 > 끝 ⓒ 진설우 < 105화 - 두번째 아르달 > 우진은 민찬에게 서울역 인근의 부동산 거래와 이사를 지시하고는 곧장 차원 영지로 향하려 했다. <귀환 포털의 재충전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를 이용해 충전하시겠습니까?> “뭐야.” 우진은 별수없이 차를 얻어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먼곳도 아니니 굳이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1번 출구는 이미 아르달의 길드 직원들이 파견 나와 지키고 있었다. 우진의 지시대로 아예 아무런 예약자도 받지 않고 입구를 폐쇄하여 우진이 드나들 수 있도록 작은 문만 달려 있었다. “수고들 해.” “넵, 사장님.” 아르달의 창립멤버들이야 우진을 예전부터 봐왔지만 신입들은 강우진이 세계적으로 유명할 때에 입사한 이들이다. 그들에게 사장님은 까마득히 위에 있는 고위 각성자였다. <서울역 1번 출구에 입장하셨습니다.> <차원 영지 귀속 던전입니다.> <사냥과 영지 귀환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뭐야? 내 던전에서 내가 사냥할 수 있는 거야?” 우진은 어이없는 상황에 실소했다. 레벨이 모자라면 영지의 에너지를 이용해 몬스터를 리스폰시키고 사냥해도 되는 상황. 소모적인 일인지라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영지귀환을 선택하자 눈앞에 곧자 붉은 포탈이 생성되었다. 지이잉. 우진이 포탈을 통과하자 바로 영주성의 앞이었다. “주인니임!” “별일없었어?” 우진이 오자마자 털썩 안겨오는 비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떠돌이들이 오긴했는데 와이번들이 사냥해 먹고 있어서 그냥 뒀어용.” “응?” 우진이 의문과 함께 왕좌에 앉자 영주성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들소처럼 보이는 것들이 영지의 곳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수가 많지않아 고작 20마리 정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어?” “넹, 한번에 10마리씩 들어올때도 있고, 두셋씩 흘러들어올때도 있었어용.” “흠, 그래? 재민이는 어딨어?” “아, 그 쪼렙 뱀파이어 말이에요?” “그래.” “조금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집을 선물해줬어영.” “잘했어.” “헤헤.” 우진이 비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비비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왕좌가 있는 홀을 나오자 잘 꾸며진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응?” 떠날때만해도 공터였는데 몇몇 조경수들과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알록달록한 꽃들을 보며 우진이 흠칫 놀랐다. “헤헤, 예쁘져.” “…….” 성의 관리를 맡겨 놓았더니 정원을 꽃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음에 안들어여? 바꿀까요?” “아니야. 나름 괜찮네. 재민이한테 준 집은 어디야?” “헤헤, 이쪽으로 따라오셔용.” 비비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자 우진이 느릿하게 뒤따르며 많이 변해버린 영주성을 두리번거렸다. 왕좌의 홀이 위치한 성 건물도 그대로 높은 성벽과 세 개나 되는 탑도 건재했다. 구조는 그대로인데 내부가 비비의 취향에 맡게 알록달록하게 뒤바뀌었을 뿐이다. “흐음.” 성 안쪽으로 횅한 공터엔 몇가지 건물들이 생겨나 있었다.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굴뚝을 가진 집을 보고 있자 비비가 자랑스레 말했다. “빵집이다용. 연습해보고 곧 맛있는 빵을 만들어 드릴게여.” “…….” 이런데 에너지를 소모해도 되는 것일까. 우진이 그 옆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까앙, 깡, 깡! 척 보기에도 대장간처럼 보이는 그곳엔 데스나이트 람손이 차지하고 있었다. “에효, 람손씨가 부탁해서 하나 지어줬어여.” 비비는 시끄러운 망치질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개의 건물들이 더 보였고 그것들은 몇몇 데스나이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로 재탄생하기 전 람손처럼 특이한 직업을 가진 데스나이트들이 몇 있었다. 행동 제약이 많은 소환의 방보다 차원 영지는 넓고 많은 것이 가능했다. 람손처럼 대장간에 처박힌 기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법 커다란 건물에 들어가 있었다. “저긴 뭐야?” “선술집이에용.” “얘들 술도 마셔?” “마력으로 만든 술이 있긴 하지만 그건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못샀다용.” “…그럼 저기서 뭐하는거야?” “재미없는 카드 놀이 하고 있겠져.” “흠.” 우진은 권속들이 평소 소환의 방에서 그들끼리의 사회를 유지하며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르펜에서는 거의 주변에 소환된 채 생활했으니 소환의 방은 그저 파괴되었을 때 회복을 기다리는 장소 정도였을 것이다. “저기가 뱀파이어의 집이에여.” “알았어. 넌 돌아가 있어.” “헤헤, 알겠쪄영. 주인님, 나 에너지 좀 더 충전해 주세요.” “…나중에 해줄게.” 집사의 권한으로 쓰도록 준 에너지 1만을 모두 써버린 비비였다. 하루도 되지않아 써버렸으니 괜히 더 줬다가는 차원영지의 에너지를 모조리 써버릴것만 같았다. 우진은 한동안은 자신이 에너지를 관리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헤헤,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중얼거리며 멀어지는 비비를 뒤로하곤 단촐하게 지어진 2층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기름칠이 부족한 듯 초인종을 대신한 소음을 울리며 집 내부가 모습을 보였다. 넓은 집 안에 간단한 조리 실과 탁자 하나 의자 둘이 전부였다. 재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계단을 타고 올랐다. 2층엔 작은 침대 하나와 협탁이 전부였는데 재민은 침대 위에 웅크려 있었다. “재민아?” “…혀엉.” 우진의 부름에 고개를 든 재민의 얼굴은 창백함 그 자체였다. “흐윽, 흑.” “왜, 왜 그래?” “피가… 피가 먹고 싶어요.” 재민은 우진을 보자 본능적인 욕구가 더욱 꿈틀거렸다. 우진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근육이 자리한 목선이 더없이 먹음직스러웠다. 뾰족하게 자란 송곳니는 무엇이든 뚫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악, 학.” “못 참을 정도야?” “여긴….” 우진이라고 뱀파이어가 되어봤겠는가. 재민이의 심정을 100%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기색을 보니 그가 괴롭다는 것 만은 느낄 수 있었다. “…뼈다귀 뿐이에요. 전부 뼈다귀….” “이거 심각하네.”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재민의 시선은 우진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동자는 이미 뻘겋게 변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에휴.” 우진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쥐고는 재민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검날을 보자 재민이 피의 갈망보다 생존 욕구가 더 짙어지는지 두려움에 눈빛이 흔들렸다. 뒤로 주춤 물러나는 그가 애처롭게 우진을 불렀다. “혀, 형?” “입벌려.” “네?” 촤악. 우진이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버리고는 재민의 머리칼을 잡고 목을 뒤로 젖혔다. “아아, 아!” 재민은 나른한 탄식을 흘리며 줄줄이 떨어지는 우진의 피를 허겁지겁 받아 먹었다. 그 모습이 사막에서 일주일을 헤매다가 물을 만난듯 갈망을 해소하는 모습이었다. 재민의 혀가 바쁘게 움직이며 떨어지는 피를 받아 넘겼다. 점점 붉은빛이 빠지기 시작한 그의 눈동자가 검은색이 되었을 때 습기가 차오르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흑….” “…….” 이불에 고개를 처박고 울음 터트리는 재민을 보며 우진은 손의 상처를 치료했다. 영혼 하나를 갈취하자 에너지는 금방 회복되었다. 재민이 오열했다. 입술엔 핏자국이 가득한데 애처롭게 우는 그 모습을 그저 묵묵히 내려다 보았다. “형, 저, 저 괴물이 되어버린 거죠?” 재민은 죽고 싶었다. 아니, 살고 싶었다. 매 순간에도 수십 번 이중적 마음이 반복했다. 자신의 모습이 미치도록 혐오스럽다. 우진은 절규하는 재민을 보며 그저 안타까웠다. 꼭 첫 살인을 저지른 후에 절망하던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흐윽, 흐엉.” 눈물콧물을 모두 쏟아내던 재민이 조금 진정되자 물었다. “누나가 걱정하는데…. 집엔 언제 갈래?” “…저 한동안 여기 있으면 안돼요?” 자신이 없다. 누나를 볼 자신이, 괴물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좋을 대로 해. 누나한테는 내가 잘 말하마.” “…감사합니다. 형.” “그래, 쉬어. 뭐 필요한거 있으면 비비를 통해 연락해.” 집사로 임명한 비비는 언제든 우진과 의사를 주고받을수 있었다. “그럼 쉬어라.” “네, 형.” 우진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재민을 남겨두고는 집을 나섰다. “후우.”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으나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진이 영지의 사정을 파악하려 하자 상태창과 비슷하게 영지 상태창이 떠올랐다. 미니맵에 영지의 주민의 위치와 병력의 위치가 모두 표시 되어있었다. 뾰족한 산의 꼭대기에 둥지를 튼 와이번들의 위치와 영주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키바의 위치가 찍혀있었다. “혼자 뭐하는거지?” 우진은 의식을 흘려 와이번을 호출했다. 키아아악! 잠시 후 괴성과 함께 거대한 와이번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웅, 후우웅. 힘찬 날갯짓이 바람을 일으키며 흙먼지와 함께 착지했다. 용용이에 비해 아담하고 작은 모습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용이가 거대했기에 그런 것이고, 와이번의 동체도 전투기만큼의 크기는 되었다. “어디보자.” 우진이 차원상점을 열어 와이번 라이더들이 사용하던 기본형을 구입했다. 그것을 와이번의 등에 장착해 올라탔다. “영지 구경이나 한번 가보자.” 상태창을 통해 미니맵을 볼수도 있고, 왕좌에 앉아 총괄하자면 영지의 구석구석을 한눈에 볼수있는 우진이지만 또 이렇게 직접 가보는것과는 기분이 달랐다. 후우우웅, 후웅. 날갯짓 몇 번에 금세 땅에서 발을 뗀 와이번이 날아올라 키바를 향해 날아갔다. 슈아아아. 용용이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착승감을 보이며 와이번이 하늘을 갈랐다. 매마른 황무지가 휙휙 뒤로 지나갔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종종 있었고 푸르게 피어난 풀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그리고 황무지 위에 초연히 서있는 덩치 큰 데스나이트 키바가 모습을 보였다. 우진이 그의 곁에 착지해 다가가자 키바가 우진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군주여.] “여기서 혼자 뭐 해?” […….] 키바는 몸을 일으키고는 말없이 아까와 같이 섰다. 우진이 그런 키바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나이까?] “흠, 모르지.” 우진이 전방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희끗희끗한 안개가 펼쳐진 그 너머엔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니맵은 이곳이 끝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이 궁금하였나이다.] “그래서 여기 있었던 거야? 뭐 알아낸 거 있어?” [저 너머에서 떠돌이 들소들이 나타나 영지를 침범하였나이다.] 키바는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들소 두마리를 즉결 처분했다. 영지의 수비대장에게 그것은 침입자. 그 뒤로 더 나타난 들소 8마리도 해치웠으나 이후에 나타난 들소 하나를 와이번이 먹이로 삼자,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이 땅에 흘러들어오도록 내버려둔 것이 지금 영지를 배회하는 들소들. “의외야. 소 따위도 눈감아주고.” 오크대왕이었던 키바다. 약탈과 전쟁, 부족의 수호를 위해 한평생 살았던 그는 누구보다 더 영토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이곳은 왕의 두번째 아르달입니다.] “…….” [왕의 잘못이 아닙니다.] 키바의 말에 우진이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옛일들이 떠올랐다. 죽은 자들의 땅, 아르달. 그곳의 지배자, 아르달의 군주. [죽어 왕을 모시나, 왕께서는 살아있는 것들을 보살피소서.] 키바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미 한번 실패를 보았다. 아르달에 살아 숨을 쉬는 건 왕이 유일했고, 그곳은 죽은 자들의 땅이 되었다. 절규에 찬 사람들… 자신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던 그들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악령이 되어 떠도는 그들의 영혼들도……. […….] 키바는 대답이 없었다. 우진이 무슨 길을 가던 따를 것이나, 주인이 뜻대로 가길 바랐다. “후우.” 우진이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려 크게 심호흡을 하는데 알림음이 들렸다. <차원을 떠돌던 존재들이 차원 영지에 발을 들였습니다.>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내쫓을 수도, 설득해 영지민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가보자.” 우진이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고, 키바가 자신의 유령늑대를 소환했다. < 105화 - 두번째 아르달 > 끝 ⓒ 진설우 < 106화 - 두번째 아르달 (2) > 우진이 미니맵을 살피니 주황색 점이 찍힌 곳은 그리 멀지 않은 영지의 경계였다. “뭐야, 사람이야?”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위치까지 오자 두 발로 선 생명체가 보였다. 우진이 더 다가가 보니 사람이 아닌 수인의 하나인 호인족이었다. 후우웅! 바람을 일으키며 착지하자 곧 키바의 유령늑대도 도착했다. [그르륵, 아르달에 무슨 일이냐?] 키바가 도끼를 쥐곤 위협적으로 물었다. 덩치 좋은 호인족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망자가 되어버린 전사여, 영지의 주인을 뵙게 해주시오.” 와이번의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린 우진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주인이야.” “청컨대 제 가족들이 이 영지에 잠시 머무르도록 해주십시오.” 우진이 일행을 훑어보았다. 8명의 호인족 가족. 남자가 다섯이고 여자가 셋이다. 우진의 앞에 부탁하고 있는 남자는 저들의 가장으로 보였다. “좋아. 허락하지, 대신 조건이 있다.” 우진의 허락에 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덜컥 굳었다. 그늘진 얼굴이 말해주듯 꽤 고초를 겪었던 모양. “조건이 무엇입니까?” “너희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좋겠어.” 어렵지 않은 조건. “그것이 조건이라면 백번이라도 들려 드리겠습니다.” 우진이 키바를 돌아보았다. “영주성으로 데려와.” 키바를 따라 영주성으로 오도록 하곤 우진은 먼저 와이번을 타고 돌아왔다. 우진이 성의 공터에 착지하는데 기다리고 있었는지 비비가 마중나와 있었다. “주인님, 지성체가 영지를 방문해쪄요.” 영주성을 관리하는 집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기에 미리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아, 손님 맞을 준비 해.” “헤헤, 그럼 에너지 좀 충전해주세용.” “아니야. 직접 하지 뭐.” “흥, 쳇.” 비비가 볼을 부풀리곤 바닥을 찼다. 우진이 피식 웃고는 차원상점을 열어 호인족 가족이 지낼 적당한 집을 물색했다. <2층 오두막.> - 300p <난민 정착세트> - 150p “…….” 생각보다 싼 건물의 가격에 우진은 할 말을 잃었다. 비비는 도대체 1만 포인트나 되는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한 것일까. 우진이 집을 구입 하자 미니맵이 마치 3D 입체영상처럼 커지며 우진에게 보였다. 적당한 자리에 위치를 잡아주자 그곳에 불쑥 건물이 올라왔다. “…재밌는데?” 옛날에 한창 해봤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건물을 짓고 유닛을 생산하고 말이다. 우진은 난민 정착세트를 집안에 끌어다 넣자 잡다한 물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침구와 가구에 요리를 할 수 있는 솥과 음식재료들까지… 며칠 지내는데 아무런 불편도 없을 만큼의 물건들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자 미니맵은 사라졌다. “쳇, 주인님도 쇼핑의 즐거움을 알아버렸어.” 입이 한 댓 발 나와서 중얼거리는 비비를 무시하곤 열린 성문으로 들어오는 호인족 가족을 맞이했다. “이곳에서 지내도록 해.” 호인족들은 우진이 가리킨 집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과분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셔도….” 여러 차원 영지를 떠돌았지만 이만한 대접은 없었다. 그가 바란 것은 정말 영지에서 머무르도록 허락만 해주는 것이었다. “수수낙입니다. 은혜에 보답고자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수수낙이라 자신을 밝힌 호인족이 내미는 것은 작은 혈석이었다. 우진이 그것을 받아드니 50p의 에너지를 채울수 있다는 메시지가 떴다. ‘던전 에너지를 이렇게 올리는군.’ 우진은 혈석을 도로 돌려주었다. “모험담이나 듣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수낙은 우진의 호의에 감동한듯 아는것이라면 무엇이든 들려줄듯한 태도였다. “들어가서 듣지.” 우진은 오두막으로 들어가자 수수낙과 그의 가족들이 따라 들어왔다. 안락한 집안의 풍경에 호인족들의 얼굴에 모두 기쁨이 흘렀다. 우진은 꼬마 호인족에게 손짓했다. “2층도 있으니 구경해봐.” “…네.” 부끄러운지 꾸벅 고개를 숙인 호인족 꼬마 둘이 우다닥 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머리에 달린 호랑이 귀만 아니라면 인간하고 별반 다를게 없었기에 귀엽기만 했다. “앉아.” “예에.” 수수낙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고분히 우진의 앞에 앉았다. 수수낙의 부인이 어색한 듯 집안의 집기들을 보더니 몇 가지를 꺼내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음, 하나부터 열까지. 먼저 어떻게 여기 왔는지 말이야.” 우진의 궁금증을 알곤 수수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로서의 권위적인 모습과 강압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의아했는데, 영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영주인 듯싶었다. “영지를 얻으신 지 얼마 되지 않으십니까?” “하루가 지났지.” 수수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시작했다. “저희는 이곳에 오기 전 오르트라는 오크부족장이 다스리던 영지에 있었습니다. 영지전을 앞두고 있어 가혹하게 세금을 걷어 난민이 되어 떠돌게 되었습니다.” 다른 차원 영지에 있었던 주민이라는 말. “밖에 오면서 들소를 봤나? 그것들도 그럼 다른 영지에서 오는 건가?” “예에, 영지의 경계는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앞으로도 몬스터들이 알아서 흘러 들어온다는 말. “차원 영지가 몇개나 있지?” 우진의 물음에 수수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야 셀 수 없지요.” “좋아. 아까 세금이라고 하던데 영지민들에게 부과하나?” 민감한 문제인지 수수낙의 표정이 덜컥 어두워졌다. 약한 경계마저 내비칠 정도로 중요한 일인지 목소리마저 조금 딱딱해졌다. “정착한 영지민들에게 영주는 세금을 부과하지요.” “흐음.” 아까 혈석을 내밀던 것을 보니 세금은 혈석으로 받는 모양. 그렇다면 영지민들은 혈석을 어떻게 구하는가? 차원영지에 자연적으로 흘러들어온 몬스터를 잡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농사를 지어서? 우진은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으나 정확한 사실은 그냥 물어보면 쉽게 알수 있는 일이다. “영지민들은 세금을 어떻게 버는 거야?” “사냥을 나서서 벌어와야지요.” “아, 그렇군.” 역시 사냥을 통해 버는 모양. 그런데 그러자면 영지민들 보다 몬스터들이 보다 많이 흘러들어와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겠는가? “영지민들이 많이 늘어날수록 영지로 흘러들어오는 몬스터들의 수도 많아지나?” “예에? 영지의 땅이 넓을수록 많이 흘러들어오겠지만 그들은 그저 떠돌이일 뿐입니다.” 영지의 절대적인 영토의 크기. 경계가 넓을수록 보다 많은 차원 영지와 인접해있는 듯싶었다.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럼 어디서 사냥을 해오지?” “게이트를 열어주시면 사냥해 혈석을 세금으로 바치지요.” “…….” 우진의 표정이 굳어지는데 수수낙이 물었다. “하루전에 영주님이 되셨다면 게이트도 하나지 않습니까. 연결된 세계는 어떤곳입니까?” 수수낙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듯 이례적으로 질문까지 해왔다. “지구란 곳이지.” “아…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주로 산다고… 인간들은 손쉬운 사냥감이지요.” “…….” 수수낙은 기뻐하고 있었다. 차원영지의 게이트가 어디로 연결되었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영지민들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 대영지는 여러 개의 게이트를 가지고 있으니 입맛에 맞는 사냥터로 가면 될 일이지만, 소영지는 겨우 한두 개의 게이트만 가지고 있으니 정착에 신중해야 했다. 지구라는 곳은 소문에 들어보았다. 사냥이 어렵다고 하지만 행성을 구성하는 대부분이 인간이라 상대적으로 쉬운 사냥터였다. “정착금만 적다면 이곳에 정착하고 싶을 정도군요.” “흐음.” 수수낙의 말에 우진의 생각이 깊어졌다. ‘30일의 보호기간.’ 차원 영지와 던전이 타 차원 영지로부터 보호받는 기간. 새롭게 던전을 얻게 되면 그 던전의 보호기간은 또 30일이 주어질 것이라 예상되었다. 아니, 거의 확실한 일이다. “던전 브레이크….” 우진이 눈을 감았다. 왜 몬스터들이 쏟아졌는가? 그들은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 나섰다. 그런 그들을 인간이 역으로 사냥했고 말이다. 차원영지가 에너지를 버는 방법은 많았다. 던전으로 사냥오는 모험가를 죽여 그들의 에너지를 흡수하는것, 던전의 통행료를 받고 영지민들의 사냥을 허락해 세금을 매기는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 타 영지와의 전쟁을 벌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되겠지만 위험부담이 큰 방법이다. “게이트를 오픈하는 일은 없을 거야.” “예에?” 게이트인 던전을 오픈하지 않으면 세금은 어떻게 거둔단 말인가? 영지의 에너지가 줄어들면 그만큼 배치 가능한 병력도 적고, 할수있는 일도 제약이 생겨 결국 타 영주에게 먹힐텐데 말이다. “지구는 내 고향이거든.” “아이쿠, 이런… 죄송합니다.” 수수낙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차원영지에 종의 차별은 무의미하다. 같은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고, 앙숙이라는 엘프와 오크들이 동맹을 맺는것이 이 세계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고향별은 소중한 법. 수수낙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도 차원 난민이 되기 전 고향별이 그리운것은 같았으니 말이다. “뭐, 괜찮아. 알아서 쉬다 가라고.” “예에.” “그럼 다음에 보지.” 우진이 일어서자 수수낙은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걸었다. “영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이곳에 지내는 동안 영주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체류를 거부하면 즉시 다른 곳으로 또 떠나야 하니 말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 차원영지는 우진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지성체만 주인으로 있는것은 아니니 말이다. “던전밖의 사냥이 불가하다면 영지에서 충당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벌이야 얼마되지 않지만 이것도 한가지 방법은 방법. “어떻게 하지?” “혈초를 재배하는 수도 있고 몬스터를 키울 수도 있고….” 우진은 수수낙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산 시설이군.’ 이해했다. 군사시설에 집중 투자해 전투력을 높여 혈석을 사냥하거나 약탈할수도 있고, 생산시설에 투자해 혈석을 자체 조달할수도 있다. 영주의 성향에 따라 영지의 성장방향도 달라진다. 물론 전자가 투자 대비 많은 수입과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고, 후자는 방어할 병력이 충분치 않다면 그저 다른 영주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지만 말이다. ‘연구해봐야겠어.’ 적절한 분배와 균형이야 당연한것이겠지만 어떤것에 보다 가치를 두느냐는 주인의 마음이었다. 영주의 성향에 따라 영지의 성장방향도 달라진다. 우진은 집을 나서기전 한가지를 더 물었다. “혈석을 가지고 다니던데 상점을 사용할수도 있나?” 수수낙이 당연하다는듯이 답했다. “당연합니다. 영주성에 상점이 있다면 그곳에서 혈석으로 물건을 사지요.” “음, 잘못 알아들었군. 차원 상점말이야.” 수수낙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것은 영주님들만이 가능한것이지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설 가능한 건물들 중에 잡화점이니, 정육점이니 하는것들이 왜 필요한가 했더니 영지민들이나 여행자들을 위해 존재하는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영지의 주요 세금수입이 될테고 말이다. ‘할게 많겠어.’ 차원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빠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30일의 보호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다른 영주에게 영지를 잃을 판이었다. 우진이 수수낙에게 빌려준 집을 나서 왕좌가 위치한 성으로 향했다. < 106화 - 두번째 아르달 (2) > 끝 ⓒ 진설우 < 107화 - 청문회 > 왕좌에 앉은 우진은 건설 가능한 건물들을 살폈다. 혈석을 채집하기 위한 농장과 광산에 영지민들이 사용하는 잡화점과 식당, 심지어 카페까지… 수십 가지가 넘는 상업 시설에 감시탑과 초소, 병력이 훈련하는 병영까지 군사 건물도 가지 수가 많았다. “병력은 에너지로 사는 거 아녔어?” <병영 - 군사시설> - 1,000p 원하는 병과를 모집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 병영을 지어놓고 원하는 병과를 훈련할 수 있는 훈련관을 섭외하면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에 맞는 신병 공고를 내면 전 차원에서 그 것을 보고 모집되는 인원들이 훈련을 받는 것이다. 군사시설은 병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늑대 조련소, 엘프 궁술 훈련장 등, 몬스터와 이종족을 훈련시키는 시설도 있었다. 그리고…. “허허, 이것도 있네.” <와이번 둥지 - 군사시설> - 3,000p 와이번이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운다. 성장 : 90일, 수 : 1마리 와이번을 구입하는 가격이 300임을 생각하면 그 열 배나 되는 값이지만 추가적인 에너지 소모 없이 90일에 한 마리씩 와이번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우진은 영지 관리창을 열어 보유 건물을 확인했다. 성과 비비가 지은 몇 가지 건물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중에 하나가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와이번 둥지 (12) “허, 공짜로 얻었네.” 본래 차원 영지의 이름 자체가 와이번 둥지다. 그들의 서식지이지 보금자리인 이곳이 우진에게 귀속되며 열두 개의 와이번 둥지도 함께 그의 것이 되었다. 동기화율을 제하고 소실되어 와이번 둥지도 몇 개 손해 봤겠지만 열두 개가 어딘가 싶었다. 90일마다 열두 마리의 와이번을 에너지 소모 없이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유지되는 거였네.”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에너지가 빠르게 소모돼야 할 테고, 결국 에너지 총량이 낮아진 영지는 소멸할 것인데 어떻게 수백, 수천의 차원 영지가 존재하는지 말이다. “그럼 에너지로 바로 병력 구입하는 건 결국 급할 때나 쓴다는 말이네.” 우진은 곧장 시스템을 이해했다. 에너지를 병력 사는 것에 남용할 수 없다. 에너지 총량은 보유할 수 있는 병력의 수와 같았다. 그것을 낮추는 것은 결국 전력의 약화를 불러오는 일. 무협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선천지기를 쓰는 것과 같았다. “일단 몇 가지 사볼까.” 어떤 병력 양성소를 짓느냐에 따라서 영지민들의 구성도 달라지게 되어 있었다. “아직 사람은 조금 위험하겠지.” 우진은 상관없었으나 아직도 집에서 웅크리고 있는 재민이 걱정되었다. 사람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지구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영지에 당장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가장 기본이 되는 병영을 구입했다. <오크전사 훈련소> - 1,000p 성안의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았기에 후일을 생각해 도시계획을 세워야 했다. 성은 산의 꼭대기를 평평히 다져 지어졌는데 공터가 크지 않았다. 그 뒤로 뾰족한 칼날과 같은 산이 두 개 있어 그곳에 와이번의 둥지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우진은 영지의 화면이 눈앞에 펼쳐지자 훈련소의 위치를 영주성이 위치한 산 아래 배치했다. 뚝딱뚝딱 만들어진 훈련소는 기본 건물이라 그런지 건설 시간도 크게 걸리지는 않았다. “흐음, 어떤 놈으로 하지?” 훈련소만 짓는다고 병력이 우르르 생성되는 게 아니었다. 우진은 훈련소를 책임질 훈련 교관의 목록을 살폈다. 훈련 교관은 별수 없이 에너지로 구입해야 했다. 앞으로 교관이 훈련할 병력들을 생각하면 초기 투자금으로 쓸만한 정도의 액수였다. <검은 바위 부족 아라크> <외로운 날개 부족 리틴> <쟃빛날개 부족 토루아> “어?” 우진은 익숙한 이름에 토루아를 골랐다. <토루아> - 900p 쟃빛날개 부족의 오크전사. 훈련 가능 병종 : 오크병사(3일), 오크전사(30일) 동시 가능 훈련 수 : 10명 왕좌의 앞에 붉은 포탈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덩치 좋은 회색 피부의 오크 하나가 걸어나왔다. 두터운 눈두덩에 부리부리한 눈알, 삐죽 튀어나온 아랫송곳니가 인상적인 오크가 영주를 보았다. “나를 고용하고 싶다면 매주 70포인트의 혈석을 지급해야 하오.” 당찬 토루아의 말에 우진이 씨익 미소 지었다. 쟃빛날개 부족은 다름 아닌 오크 대왕 키바의 부족. 그저 그것이 반가웠기에 토루아를 선택했다. “키바를 알고 있나?” “초보 영주가 영광된 그 이름을 어찌 아시오? 난 그의 심복이었소.” 아직은 그와 고용 계약을 맺지 않아서인지 퉁명스러운 반응. 우진이 키바를 호출했다. ‘잠깐 와봐.’ 그의 의식을 전해 받은 키바의 몸이 검은 연기가 되어 우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옛 부하 같은데, 누군지 알아?” [그르륵.] 키바가 성큼 토루아에게 발길을 옮겼다. 죽어 뼈밖에 남지 않았으나 키바의 키는 토루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 거구의 덩치에서 풍기는 위압감도 생전에 비해 전혀 줄어든 것이 없었다. 죽음의 기운으로 더 날카로워지고 더욱 흉포해졌다면 몰라도…. [나를 아나?] “저, 정말 키바 대족장님이십니까?” 토루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눈앞의 데스나이트를 보고 눈알을 굴리자 키바가 돌연 발을 휘둘렀다. 퍼억, 콰직! 키바의 정강이가 토루아의 뒷무릎을 차곤, 우악스러운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내리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크윽, 왜, 왜 이러십….” 그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키바는 몸을 돌려 왕좌에 앉은 우진을 보았다. [애송이였나 봅니다.] “어떻게 알아?” [부하들 중에 제 앞에서 고개를 쳐든 놈은 없었으니까요.] “큭.” 키바의 말에 우진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과연 키바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토루아에게 물었다. “나와 계약하겠나?” “무, 물론입니다. 주급은 필요 없습니다.” 왕좌에서 뻗어 나온 빛이 토루아의 몸에 스며들어 그의 어깨에 문양을 만들어냈다. 고양이가 하품하는 듯한 그림…. <훈련 가능 병종 추가! ‘오크병사’, ‘오크전사’>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문양을 받고 난 뒤 토루아는 깍듯이 인사하며 우진을 영주 취급했다. 그가 즉시 훈련소로 가서 신병 모집 공고를 냈다. 이에 응하는 오크 부랑자가 있다면 병사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동시 가능한 병력의 수가 열 명이었으니 3일에 열 명씩의 오크병사를 얻을 수 있었다. 30일의 보호 시간을 생각하면 100명의 병력. 1,900포인트의 초기 투자로 이만한 병력을 얻는다면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훈련소가 부서지거나 토루아가 죽지 않는 이상 매일 병력이 쏟아질 테니 말이다. “이 황당한 문양은 뭐야?” 우진은 하품하는 고양이의 정체를 영지 정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르달의 문양> 언뜻 성벽에 걸린 깃발에서도 하품하는 고양이를 본 것 같았는데… 비비의 꾸미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예 영지 문양을 저렇게 만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에휴.” 우진이 다시 차원 상점을 열어 문양을 살피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가 이리 비싸?” 단순한 그림들이 얼마나 비싼지 가장 싼 것이 5,000포인트나 했다. 기본이 1만이 넘었고 더 비싼 것들도 즐비했다. “어휴, 여기에 돈 다 썼구만.” 뭐에 돈을 썼나 싶었더니 문양을 선택하는 데 다 써버린 게 틀림없었다. 목록의 다른 아이템들도 살펴보다가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도 사치품들 천지구만.” 영주성을 꾸미는 사치품. 지닌 효과에 비해,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 비효율적이지만 포인트가 남아도는 영주라면 분명 영주성을 멋지게 치장하려 들 것이 뻔했다. 그리고 써버린 포인트를 충당하기 위해 더 전쟁을 일으키고 약탈을 자행하겠지. 그저 꾸미기 효과뿐이거나 영주의 만족을 위한 사치품은 나중의 일. “일단 생산 시설부터 몇 개 만들어 볼까?” 우진은 건물들 중에 생산 시설을 살폈다. 몬스터들을 끌어들이는 구조물들도 다양했는데 미끼 덫과 특정 페로몬향을 내는 유혹의 나무 등, 유인하고 싶은 싶은 몬스터에 따라 설치하는 건물이나 구조물이 달랐다. 우진은 강철멧돼지와 회색늑대를 불러들이는 유혹의 나무를 몇 그루 영지 곳곳에 배치했다. 그리고 혈초를 한가득 샀다. <혈초> - 30p 혈석을 자라나게 하는 풀. 하루에 한 번 열매를 맺으며 수확하지 않으면 열매는 계속 커진다. 이것을 자주 먹는 동물들은 몸 안에 혈석이 생성되기도 한다. 하루 경과 + 1p 풀에서 열매를 채취하면 하루에 1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걸 동물이 먹어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더군다나 30포인트란 가격이 애매했다. 30일이 지나면 본전이고 그 뒤로는 수확하는 대로 이득이었다. 하지만 혈초는 농장에서 수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영지에 혈초가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혈초를 구입하고 들은 알림음. 이것은 구입하면 영지 내에서 알아서 자라난다. 랜덤으로 자라니 수확하기가 어려웠다. 직접 하던가, 채집꾼을 둬야 하는데 아직 영지민이 턱없이 부족하니…. “이래서 다들 전쟁을 하는구만.” 생산시설로 혈석을 모으느니 전쟁을 하는 게 훨씬 낫다. 혈초도 구매에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혈초가 열매를 맺기엔 토지가 부족합니다.> 우진이 심은 혈초는 1,000개. 무려 3만 포인트나 되는 에너지를 소모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자 크게 아깝진 않았다. 30일만 지나면 본전치기는 할 테니 말이다. 그 뒤로는 하루에 1,000포인트씩 에너지를 거저 얻는 것이다. “쓰다 보니 엄청 빠르게 쓰네.” 차원 영지에 남은 에너지는 7만 포인트 정도. 에너지 총량에 따라 랭킹이 정해지는지 1,317위던 랭킹이 하락하여 3,212를 랭크했다. 3만 포인트에 순위가 저 정도로 하락했다는 것은 이 구간에 차원 영지가 저만큼이나 많다는 소리. “이건 뭐, 이거대로 끔찍하네.” 지구를 노리는 것이 비단 72좌의 대군주만은 아니다. /그 아래의 던전을 가진 영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지구에 던전을 뚫고 사냥할 것이다. 지금은 문명이 있고, 군대가 있어 몬스터 브레이크와 동시에 거의 토벌이 완료된다지만 언젠가는 뚫리게 될 것이다. 그 한 번의 고비가 지나면 더 이상 던전 브레이크는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이 사냥감이 되는 것은 뻔한 수순. “아르펜을 그렇게 두면 안 되는 거였어….” 아르펜이 멸망한 것도 지금과 똑같지 않았을까? 우진은 그때 좀 더 트라넷의 몬스터들을 학살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아르펜이 점령되는 것이 조금 늦었다면 지구의 던전이 좀 더 천천히 터졌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후회해 봐야 지난 일. 우진이 생각을 털어버리고 차원 상점의 여러 건물을 살펴보곤 눈을 빛냈다. “자, 그럼 어디. 제대로 짜볼까?” 우진이 차원 영지의 지도를 띄워놓고 구획을 나누어 도시개발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난민들이 하나둘 영지를 찾아왔다. * 20일이 지났다. 그동안 차원 영지 아르달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됐어.” 우진은 펼쳐서 보던 영지 지도를 접어 넣고는 일어섰다. 던전 안에서 20일이 지났지만 현실에서는 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우진은 적어도 4일에 한 번, 그러니까 현실 시간으로 하루에 한 번은 가족들을 만나러 갔다. 지원을 만나 재민이의 상황을 전해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아르달길드의 이사는 순조로웠고 서울역 바로 인근의 빌딩을 통째로 매입해 이전이 한창이었다. “메르디가 왔다고?” 5일이 지난 그날, 메르디가 그 ‘문서’를 가지고 도착했다는 소식에 우진은 던전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국회 나들이나 가볼까?” 우진은 복수를 마무리 지을 생각에 비릿하게 웃었다. /어서 빨리 메르디가 사무실에 당도하길 기다렸다. < 107화 - 청문회 > 끝 ⓒ 진설우 < 108화 - 청문회 (2) > 서울역 1번 출구를 걸어나오는 우진을 승훈이 반겼다. “나오셨습니까?” “그래. 민찬이는?” “공항으로 마중 갔습니다.” “곧 오겠네. 사무실로 가자.” “예, 모시겠습니다.” 잠깐씩 집에 들러 가족들과 지원이를 만나는 것 빼곤 차원 영지를 관리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옮긴 사무실에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진이었다. 승훈을 따라가던 우진은 몇 걸음 가지 않아 발길을 멈췄다. “저건 뭐냐?”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허, 참.” 우진은 던전 앞에 늘어선 노점상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붕어빵에, 꼬치에. 별별 길거리 음식들이 늘어서 있었다. “누가 저걸 다 사먹냐?” “기자들하고 구경 온 시민들이 주로 이용합니다. 날이 워낙 춥다 보니.” “뭐가 맛있냐?” “저희는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까지 말고.” “저쪽 붕어빵이 제일 맛있습니다.” “몇 개 사와 봐.” “넵.” 비서실장인 승훈이다. 우진의 경호를 위해 기본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인원만 여섯 명. 그중 하나가 부리나케 뛰어가 붕어빵을 사왔다. 우진의 등장에 오래도록 잠복하던 기자들이 바쁘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중에는 파파라치도 있을 정도였는데, 웃긴 건 카메라를 든 사람들 중에 절반이 외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이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 부럽지 않은 관심도에 아르달 사람들은 불편하기만 했지만 당사자인 우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음, 맛있네.” 붕어빵을 한입 베어 문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깁니다.” “응?” 우진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멈춰선 발걸음에 고개를 들었다. “여기야?” “네.” “엄청 가깝네.” “사장님께서 가까운 곳으로 지시하셔서….” “잘했네.” 우진은 자신의 지시를 최우선으로 여겼을 민찬의 일 처리에 만족했다. 새로 얻은 사무실은 1번 출구에서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았다.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주변은 대부분이 공터고 덩그러니 서 있는 5층 빌딩. 높이 솟았다고 하기에는 차지한 면적이 넓어, 옆으로 길죽한 모습이 마치 학교 건물을 보는 듯했다. 부지를 감싸고 있는 튼튼한 담장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뭐하던 데야?” “군인 숙소였습니다.” 던전쇼크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역 인근에 덩그러니 위치한 건물이다. 구식이긴 했지만 튼튼하게 지어져 요새화하기도 적당해 보였다. 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라 그런지 담 안쪽으로 몇 가지 시설들이 보였다. “나올 때마다 공사하더니 여기가 우리 사무실이었구나.” “…네.” 분명 보고를 한 것 같은데 우진이 대충 들었나 보다. “어머니 이사는?” “다음 주 내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들어가자.” “넵.” 담을 막고 있던 문이 열렸고 우진은 걸어온 거리의 두 배만큼을 더 가서야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이, 내부를 청소하고 페인트를 다시 바른 수준이었고 지금은 구획마다 용도에 맞게 가구와 물건들이 쌓이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가 사장님 방입니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위치한 비서실과 경호실을 지나자 넓은 사장실이 나왔다. 전에 비해 별반 달라진 것 없이 단출하게 꾸며진 그곳은, 변한 게 있다면 좀 더 회의 테이블이 길어졌다는 것 정도였다. 우진이 소파에 앉자 비서실 여직원이 눈치껏 마실 음료를 내어와 테이블에 놓았다. 직원을 힐끗 보고는 맞은편에 앉는 승훈에게 물었다. “직원들 몇 명이나 돼?” “400명 정도입니다.” 각성자를 뺀 지원부서의 인원만 그 정도. 아르달의 각성자는 여전히 성구와 해솔을 포함해 셋뿐이었다. “각성자 면접도 슬슬 준비하라 그래.” “예, 최근 들어 지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답니다.” 지구의 마나가 계속해서 증가한다. 각성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1~9레벨까지가 일반인. 10레벨이 되는 순간 1서클의 힘을 가진 각성자가 되는 것이다. “성구는 어디 갔어?” “던전 공략 중입니다.” “몇 성?” “6성입니다.” “호오?” 이제는 혼자서 6성 던전까지 클리어가 가능한 수준으로 자라난 성구였다. “해솔이는?” “격리소에 있을 겁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응? 여기서?” 승훈이 미소 지으며 사장실의 창문에 처진 블라인드를 걷었다. 우진이 창가로 가서 아래를 보곤 피식 웃었다. “동물원을 만들어놨네.” 격리소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다, 테이밍한 몬스터들이 민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격리해 두는 곳. 공터에 사파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검치호 잭슨을 비롯해 칼날부리 까마귀부터 못 보던 몇 가지 몬스터도 있었다. ‘와이번도 한 마리 테이밍하면 좋을 텐데.’ 확실히 성장 포텐이 있는 녀석이라 능력의 발전 속도가 빨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해솔과 같은 각성자들만 추려서 뽑을 작정이었다. “다른 곳도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됐어. 티비나 틀어봐.” 우진이 티비를 본 지 한 시간이 지났을까? “부사장님 도착했답니다.” “바로 오라 그래.” “넵.” 우진이 잠시 기다리자 정민찬과 메르디, 그리고 그녀의 성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르디가 우진을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리려 하기에 말렸다. “임모탈님께….” “야, 야. 됐고 여기 앉아.” “예에.” 자리에 앉자마자 우진은 본론을 꺼냈다. “가져오라고 한 건?” “여기 준비했나이다.” 성녀가 소중하게 챙겨온 서류 가방을 내밀었다. 우진이 두터운 서류를 휙휙 넘겨보는 사이, 성기사단장인 제임스가 슬쩍 말했다. “이 자료를 넘긴 것은 미 국방성이 보인 우호의 표시이자 타이탄길드와 돈독한 관계를….” “아, 알았어, 임마.” “예에.” 제임스가 시무룩히 답했다. 자신은 미국과 타이탄을 잇는 다리와 같다. 그들은 이미 우진을 대한민국의 각성자가 아닌, 그 자체를 국가와 버금가는 일개 무력 단체로 보고 있었다. 옆에서 눈치 보던 민찬은 도대체 무슨 서류기에 성녀와 그의 성기사단장이 저리 반응하나 궁금했다. “사장님, 그게 도대체 뭡니까?” “살생부.” “아, 살생… 예에?” 민찬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사장님이 왜 또 이러실까? “봐, 봐도 됩니까?” “어, 봐.” 우진이 이미 본 서류를 집어 들어 읽은 민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건….” 중동의 테러리스트를 지원한 기업의 임원. “허.” 재건축을 위해 몬스터 브레이크를 방조하도록 하여 시민들의 재산과 생활권을 위협한 정치인. “이게 대체….” 하나의 인물에 증거 자료와 이적까지 모조리 정리하여 첨부되어 있었다. 자료의 출처에 미국 정보 단체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어 정보의 신뢰성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한국이 아닌 타국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기에 보다 더 정확한 정보. 민찬의 얼굴이 거멓게 죽었다. 서류는 수십 장. 그중 정치인이 못해도 반은 될 것이다. “다, 죽이실 작정입니까?” “그래야지. 날 죽이려던 놈인데.”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에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이렇게 자세히 조사할 수 있었고 말이다. “서, 설마 이것 때문에 기다리신 겁니까?” “뭘?” “국회에 가는 거 말입니다.” 요청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온다. 우진이 요지부동이니 그들의 요청을 거절해야 하는 직원들만 곤혹스러웠다. 왜 가지 않나 했더니 자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 당연하지. 한군데 모였을 때 다 해치워야 편하지.” “…….” 와, 미칠 것 같다. 민찬은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효율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헛웃음이 났다. 우진의 생각은 철저히 자신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여론은 철저히 배제한 채 말이다. 우진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각성자는 던전방어에 꼭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지르는 범죄를 용인하진 않을 것이다. 세상은 영웅을 바라지 악당을 바라는 게 아니니 말이다. 만약 국회에서 살인이 일어난다면… 그 뒷일은 끔찍하다. “재고해 주십시오.” “왜?” 우진의 물음에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그가 생각을 바꿀까? “귀찮아지실 수도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귀찮아. 더 귀찮아지기 전에 정리하려는 거야.” “…….” 이미 확고한 듯한 우진의 결정을 어떻게 되물릴 수 있을까? 민찬이 고민하는데 성녀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혹, 미국으로의 이민을 생각하십니까?” 민찬은 나름의 추측을 물었다. 한국을 떠나려는 것이 아니면 지금 우진이 하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이라 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민은 무슨.” 우진이 메르디를 보곤 물었다. “아르달이 뭐야?” “군주의 땅이십니다.” “여기가 어디야?” “아르달입니다.” “들었지?” “…….” 민찬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감히 내 목숨을 노린 놈들인데 내 땅에서 꺼져 줘야지.” 던전도 이곳에 있고 사무실도 이사했는데 왜 굳이 미국까지 간단 말인가, 내쫓아야 한다면 그놈들이 가야지. 아찔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민찬은 막막한 기분에 사정하듯 말했다. “주위 사람들이 버티지 못합니다. 사장님이 아닌 저희들이 못 버팁니다.” “응?” “주변도 돌아봐 주십시오.” 우진의 시선이 거의 울상인 민찬의 얼굴을 떠나 뒤에 서 있는 승훈을 보았다, 그도 놀라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그 옆의 비서실 직원들을 살폈다. 그들은 아예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흐음.” 우진이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왕께서는 살아있는 것들을 보살피소서.” 키바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너무 오래도록 혼자 살았나?’ 그의 주변엔 죽은 것들뿐이었으니…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서류를 챙겨 넣었다. “국회 연락해, 지금 간다고.” “제발, 다시 한 번 생각을….” “국회서 피 안 봐. 걱정 말고 전화 걸어.” 민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독불장군 같은 우진이 생각을 고쳐 먹을 줄이야……. 성녀도 놀란 얼굴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빛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과연 임모탈이 생각을 바꾼 것일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아이고, 최 의원님.” “아유, 형님. 의원님은 무슨, 말 편히 하십시오.” “허허허, 공직 생활 오래하려면 공사는 구분해야지요.” “어허허, 박 의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역시 4선 국회의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최태오와 박소국은 서로 얼굴에 금 치장을 하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러다 순간 박소국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우진이 드디어 온다지요?” “하하, 제 놈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쯧, 젊은 놈이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면 당연히 봉사해야 할 것을.” “그러게 말입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우습게 알아요. 아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시한 조건이 어디 가당키나 한 겁니까? 국방부와 동등한 국가 방위 단체로 인정을 해준다는데도 싫다고 하니, 에잉.” 국방의 의무는커녕 면제를 받은 최태오와 박소국의 대화치고는 진지한 분위기가 오갔다. “이번엔 제대로 목줄을 채워야합니다.” “제 놈이 한국에서 계속 살자면 별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몸값을 올리자는 얄팍한 수작이지요.” “뭐, 청문회 심문하면 최 의원이 현직 최고 아닙니까?” “으허허, 박 의원님도 참. 제가 그놈을 제대로 까발려 보지요.” 거품이 낀 녀석이다. 잔뜩 올라간 가치를 깍아내리고 몸값을 낮춘다. 국가의 부담을 줄이고 방위를 튼튼히 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 아닌가? 최태오와 박소국이 서로를 보고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었다. < 108화 - 청문회 (2) > 끝 ⓒ 진설우 < 109화 - 청문회 (3) > 운전대를 잡은 승훈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내가 역사에 남을 수도 있겠구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왕이면 명예롭게 남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승훈이 룸미러로 힐끗 보니 우진이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사장님, 정말 피 안 보실 거지요?” “한 번만 더 물으면 다 뒤집는다.” “헙, 알겠습니다.” 괜히 물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승훈은 입을 오므렸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승훈은 괜히 꽉 막힌 도로에 화가 났다. “어휴, 시위 할거면 좀 얌전히 하지.” 서울역에서 청와대까지는 지척이건만 도로에 시간을 버린 지 벌써 한 시간이다. “천천히 가, 급할 거 없으니.” “예에.” 정말 급했다면 씽씽이를 타고 날아갔을 것이다. 창밖을 보던 우진이 무료하던 차에 물었다. “뭐 때문에 시위하는 거야?” “요 며칠 전, 던전 브레이크로 피해가 컸지 않습니까? 대책을 내놓으라고 시위하는 겁니다.” “대책?” “예에, 불안해서 못살겠으니 안전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거죠.” 우진이 실소했다. “던전 옆에서 무슨 안전장치야.” 그런 게 있기나 할까? 전장의 한가운데서 두 손 들고 살려달라고 하는 꼴이다. 살고 싶으면 도망가든지, 창을 들고 싸우든지 둘 중 하나다. “안전하려면 시위할 게 아니라 서울을 떠야지.” “그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돈 많은 이들이야 벌써 떴죠. 모르긴 몰라도 국회의원들도 서울에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떠날 수 없으면 싸워야지.” “어휴, 각성자도 아닌데 어디 그게 쉽겠습니까?”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초보 각성자가 몬스터를 척척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능력과는 별개로, 개념은 약하디 약한 현대인의 그것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능력이 좋은 것과 잘 싸우는 것은 별개였다. 살고 싶은 욕구는 모두 같으니 저리도 떠드는 것이겠지. “…….” 우진은 거북이 걸음마냥 나아가는 차가 시위대 인근을 지나자 무료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악다구니를 쓰고 소리치며, 한뜻이 되어 복창한다. 그들이 든 피켓이 눈에 들어왔다. - 생존권을 보장하라! - 서울의 안전을 책임져라! 우진은 시위대를 막고 있는 경찰들을 보았다. 인의 장벽을 이루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몬스터 대군이 몰려온다면 과연 저들 중 누가 앞서 싸울 것인가? 목숨을 잃을 일이 없기에 대담하며 용기 있는 것일까, 시위대의 행동은 거칠고 거침없었다. 저들 중 몇이나 몬스터 브레이크에 대항해 지구를 지킬까? “…보살핀다라….” “예에?” “아니야.” 우진의 중얼거린 말에 승훈이 룸미러를 보았다.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보호한다면 용기 없는 이들까지 모두 보호해야 할까?” “예?” 뜻 모를 말에 승훈이 반문하자 우진이 말을 정리했다. “전장에서 도망치는 놈들이 있으면 그놈들 몫까지 싸워줘야 하느냔 말이다.” “음. 탈영병은 놔두면 큰 문제죠.” “그치?” “…….” “용기가 없다면 죽어서라도 싸워야지.” 우진의 말에 승훈이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저어.” “어, 왜?” “탈영은 문제가 심각하죠. 하지만… 모든 이를 전장에 세우는 것도 문제가 크다고 봐요.” “뭐?” “아니, 그렇잖아요. 애들이나 여자들까지 다 전쟁터 나가는 건 아니잖아요. 지킬 사람은 지켜줘야죠.” “……!” 우진의 눈이 커졌다. 그 반응에 승훈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혹시 무슨 실수를 했나? 사장님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제 말은 여군도 있긴 하지만 여자들 다 입대하는 거 반대라구요. 아직 없지만 여자친구가 전쟁터에 나간다 생각하면… 어휴, 끔찍하죠. 제가 대신 싸우고 말지.” “…….” 우진이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수아가, 또 지원이 전쟁에 나간다라…. 과연 자신은 그들에게 창검을 쥐여주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용기 있게 싸우라 말할 수 있을까? 우진의 고민이 깊어져 이마가 찌푸려지는데 승훈이 안절부절 못했다. “잘못했습니다.” “뭐가?” 우진이 눈을 떴다. 승훈이 말을 더듬었다. “그게 그러니까, 저는 그냥 여자친구도 없고… 부모님도 이제 늙으셨으니 민방위할 나이도 아니시고….” “됐어.” 우진이 피식 웃었다. 모든 이가 용기 있진 않지만 그것을 탓할 순 없다. 큰 것을 깨달았다. ‘아르달도 지옥이었구나.’ 결국 자신이 죽인 거다. 그 많던 사람들을… 그저 살기를 바란 그 수많은 이들을 전장에 내몰았다. 용기 없는 자는 스켈레톤으로 부활해 싸웠고, 살아서 싸우는 자들은 언데드가 될까 두려웠던 이들이다. 그들에게 적은 트라넷이 아니라 임모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휴, 그나저나 너무 막히는데요.” 이제 광장이다. 코앞까지 왔건만 수많은 인파에 더 이상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시민들의 불안과 걱정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렇게 따지면 국회에서 뭘 하는데?” “…….” 승훈이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아니, 사장님 빼곤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뭐야? 왜 말을 안 해?” “음, 몇 주 전에 정부랑 협상 결렬된 거 있지 않습니까? 수호길드….” “그게 왜?” “그걸 다시 체결하길 바랍니다.” “저 사람들이?” “…예.” “나보고 대신 싸우란 거네.” “…….” 그렇게 말하면 또 그렇긴 하지만…. “내려서 가자.” “예에? 위험합니다.” “내가?” “…….” 사장님은 안 위험하겠죠. 괜히 사람들이 다칠까 봐 걱정되는 거지. 딸깍. “사, 사장님.” 우진이 차문을 열고 내리자 승훈이 황급히 뒤따라 내렸다. 두 사람이 인파를 헤치며 걸었다. 워낙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보니 우진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인파를 헤친 우진이 방패 벽을 쌓고 있는 경찰들 앞까지 당도했다. 촤아아아! 사람들이 만든 저지선을 넘어 접근하는 우진을 향해 물대포가 쏘아졌다. 물줄기가 그 앞에 생성된 마력 보호막에 가로막히자 경찰 간부가 즉시 무전했다. “각성자다. 각성자 대응팀 출동 바람.” 각성자는 시위가 금지되어 있다. 지금 이 광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법. 각성자 대응팀이 오기도 전에 우진이 훌쩍 뛰어 경찰버스 위에 올라탔다. 그 위에서 확성기를 들고 지휘하던 경찰 간부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당신 이건 범죄야.” “그거나 내놔.” “뭐?” 우진이 경찰 간부의 확성기를 뺏어 들었다. 삐이이이- 귀가 따가운 그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아!] 웬 트레이닝복의 남자가 버스 위에서 확성기로 말하고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강우진이다!” “아르달 사장이야!” 얼굴을 알아본 시민들이 소리치자 들불이 번지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떠들었다. 우진은 그들의 소요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용히 해봐!] 우진의 한마디에 번져 나간 침묵이 광장을 휘몰아쳤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우진의 목소리가 닿지않은 곳의 시위대들도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침묵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저 멀리 버스 위의 남자의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던전 브레이크는 막을 수 없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우진이 말을 이었다. 연설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저 사실을 전하고 선택지를 주려 할 뿐. [서울을 벗어나 도망쳐라. 던전 브레이크는 앞으로도 계속 일어난다.] 지구에 링크하는 차원 영지가 많아질 것이고 서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브레이크는 막을 수 없어도 몬스터를 막을 수는 있다.]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다 눈치를 보곤 우진의 말을 기다렸다. [몬스터와 싸우려는 자만 서울에 남아라.] 우진이 아무리 수만 죽음의 군대를 거느린다 해도 서울 전체를 막을 수는 없다. 결국 누군가가 함께해 줘야 하는 일. [나는 서울에 남는다.] 우진이 확성기를 경찰 간부에게 돌려주었다. “여, 영광입니다.” 빳빳하게 굳은 경찰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영광은 뭐가 영광이란 말인가? “수고하세요.” “예, 옙!” 우진이 버스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광장과 대비되게 버스 너머는 오가는 경찰들뿐이었다. “사, 사장님.” 겨우 따라온 승훈이 구겨진 정장을 매만졌다. “휘유, 연설 멋졌습니다. 결국 서울을 지켜주시기로 하셨군요.” “내가?” 우진이 피식 웃고는 청와대를 향해 걸었다. 서울에 남겠다는 게 지켜주겠다는 거 아닌가? 승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뒤따랐다.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김병만의 이마 주름은 오늘도 더 깊어지고 있었다. “시위대는 여전한가?” “예, 국민들의 분노가 대단합니다.” 경호실장의 대답에 대통령 김병만이 두 눈을 감고 소파에 누웠다. 답답하고 죄스럽다. 이것이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국민들 앞에 고개를 들 낯이 없었다. 몬스터의 등장이 불가항력적인 재앙이라고 하더라도 국가가 무능해 국민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또한 인재라 할 만했다. “후우, 강우진 씨는 도착했는가?” “아직이랍니다.” 강우진이 국회에 도착하면 대통령도 헬기를 타고 넘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시위대가 광장을 점거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랄 수도 있는 대통령마저 청와대를 비워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괴롭다고 피할 수 없다. 욕을 한다면 먹어주는 게 일이다. “후우. 이번에 접촉하려고 하는 건 방위 조약 때문이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되었으면 좋겠군.” 기존의 조건도 파격적이었지만, 더한 것도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강우진의 중동행에서 확실히 느꼈다. 그는 메시아다. 그가 한국 사람인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만약, 다른 나라에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국가 안보에 큰 위협을 초래해 국민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는 돌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쯤 거의 도착하지 않았겠습니까? 헬기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경호실장이 막 일어서는데 경호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귓속말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대통령을 향해 말했다. “강우진 씨가 지금 청와대에 와 있답니다.” “뭐?” 대통령도 경호실장도 깜짝 놀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르달에서 국회로 올 거라 했는데 여긴 왜…. “어디 있는가?”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잘했네. 지금 당장 가보세.” “예에.” 김병만이 벗어두었던 재킷을 입곤 걸음을 옮겼다.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 1인 군대를 보유한 자. 중동에서 테러 조직을 섬멸하며 세계가 극찬 중인 영웅. 그를 만나러 가는 김병만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 국회의사당. 이례적으로 전 국회의원이 참석한 그곳에 짜증과 욕설이 가득했다. “온다는 놈이 왜 이렇게 늦어?” “아니, 엿먹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건방지기가 아주 대단해!” “국회를 물로 보는 거야 뭐야? 나라가 만만한가? 국민들 분노를 아주 귓등으로도 안 들어 먹어요.” 여기저기 불만을 토로하는 그들을 보며 박소국이 최태오에게 귓속말했다. “내뺀 게 아닌가?” “크흠,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에 정부 요청을 똥으로 알던 놈이라.” 그동안 아르달이 정부의 요청을 무시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이번에도 온다고 해놓고 내뺏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보좌관이 다가와 말했다. “강우진이 지금 대통령님과 회담 중이랍니다.” 박소국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뭐? 왜 그리로 가?” 국회로 온다 해놓고 왜 청와대로 간단 말인가? 나라와 국민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건방진 새끼.” 박소국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 109화 - 청문회 (3) > 끝 ⓒ 진설우 < 110화 - 청문회 (4) > 아르달의 길드마스터 강우진과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병만이 마주 섰다. 대통령이 손을 내밀었다. “대통령 김병만이오.” “어? 개그맨?” “하하하, 이름이 같지요.” 우진의 무례에도 병만은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넘겼다. 그가 피식 웃으며 악수했다. “정치인들이라 다 구릴 줄 알았는데 뭐, 괜찮네요.” “응? 나도 알고 보면 구린 사람이요.”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영혼은 지원처럼 투명하진 않았지만 맑았다. 적어도 해솔처럼 굳은 신념이 있다는 의미. 그가 비리를 저지르거나 말거나는 우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순수한 의지가 어디서 기인하는지가 중요했다. 해솔처럼 굳건한 애국심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얼마나 구린지는 알 것 없고, 앉읍시다.” “하하, 듣던 대로 시원시원하시군요.” 대통령과 우진이 쇼파에 앉았다. 거침 없다기엔 너무 무례한 그의 태도에 경호실장만이 굳은 인상으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화가나 떨리는 주먹을 들킬 것 같았다. “얼마나 들었어요?” “예?” “조사해 봤을 것 아닙니까.” “…….” 김병만은 그저 허허롭게 웃었다. 정치 경력이 짧지 않은 그이지만 이처럼 급하고 직설적인 상대와 대화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멋도 모르는 애송이거나 자신의 속을 여과 없이 내보이는 것이 정직하고 진실된 줄 아는 얼치기들이었는데, 우진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말에 무게를 더해줄 힘이 있었다. “어디의 강우진 씨를 말합니까?” “호오. 아르펜에서의 행적도 알고 있다?” 김병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추어봐야 득 될 게 없을 대화임을 직감했다. “모두가 아는 것만큼은 알지요.” 대한민국이 강우진에 대해 알아내기 위한 노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자국의 각성자이면서도 정보도 없고, 이제는 통제하기도 쉽지 않은 그이니까. 우진이 말해보라는 듯이 빙그레 웃고만 있자 김병만이 입을 열었다. “5년 전 소환되어 20년을 거치고 돌아왔다 들었습니다. 지금의 무력은 그때에 얻은 것이구요.” “다른 건요?” “그것까진 잘…….” 우진이 어깨를 으쓱하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김병만도 등을 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왜 왔다고 생각해요?” “지속적으로 요청한 국가 수호길드의 정식 승인에 대한 협상 때문이 아닙니까?”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난 복수와 경고, 제안을 하러 온 거죠.” “…….” 우진이 서류를 탁자 위에 놓았다. * 국회의사당이 거의 다가오자 우승훈은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이제야 녹는 기분이었다. 그가 슬쩍 룸미러로 우진을 살폈다. “저, 사장님.” “어, 왜?” “정말 하실 겁니까?” “뭘?” “살생부 말입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럼 봐줄까? 내 목숨을 노린 놈들을?” “부사장님하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우진이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한 말은 지킨다. 분명 국회에서 피 보지 않겠다고 했는데…. “국회에서만 피 안 보면 되잖아.” “……!” 아니! 그럼 결국 할 거란 소리잖아? 승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승훈아.” “예, 사장님.” “쫄지마.” “…….” 이거 더 심각해지는데? 승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데 우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국회의사당도 던전쇼크 때 피해를 입었으나 빠르게 복구되었다. 그리고 그 인근을 지키는 군부대의 수는 서울 전체의 20%에 달했다. “다 왔네.” 국회의사당은 아예 군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검문소를 거쳐 우진이 차에서 내리자 정장 입은 남자가 다가와 인사했다. “이강진입니다.” “강우진이에요.” “갑자기 호출받고 왔는데 무슨 일이죠?” 그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대통령에게 정치인들에 대해 빠삭한 검사 하나 보내달라고 했더니 눈앞의 이강진이 그 사람인 모양이었다. “뭐, 일단 같이 갑시다.” 일단 우진의 뒤를 따랐다. 오늘 국회에서 청문회가 있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왜 필요한지…. “조언 좀 얻으려고 그래요.” “뭘 말입니까?” 우진이 서류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의아한 마음에 서류를 건네받은 이강진이 그것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더러운 새끼들, 아예 국제적으로 놀았네.” 서울지검 이강진. 정치계에서 미친개로 소문난 그는 안 건드리는 국회의원이 없을 정도로 들쑤시고 다녀 이 바닥에 유명했다. 그의 자료조사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3년 전에는 4선 국회의원을 교도소로 보낼 정도였다. 물론 몇 달 지나지 않아 풀려났지만 말이다. 서류에는 이강진도 잘 아는 사람들이 빼곡했다. 모두 그의 목표 리스트에 있는 비리 공직자들. 강우진이 준 자료는 던전 브레이크를 조장, 국민을 위험에 빠트린 악질적인 놈들이다. 이번 미국 미사일 테러에도 간접적 영향을 끼친 자들. 대충 견적이 나왔다. 국회의원 뒤 파는 건 자신의 전문이었다. 대통령이 특별히 호출해 강우진에게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강우진이 자신에게 바라는 건 무엇인가? “뭘 조언해 드리면 됩니까?” “거기 다섯 놈은 무조건 죽일 생각인데, 그 뒤로는 죽일지 말지 고민 중이에요. 조언 좀 해줘요.” 어? 이런 건 생각 못 했는데? 이강진이 걸음을 멈추고 멍한 얼굴로 우진을 보았다. 이 사람 뭐지? 우진이 국회에 입장했다. 이강진과 우승훈이 그의 보좌관마냥 뒤따라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그들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감히 나랏일 하느라 바쁜 자신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지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진행자의 말이 있기도 전에 최태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강우진 씨는 국회가 우습습니까?” 그래 우습지. 강우진은 그를 슬쩍 보고는 단상 위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청문회를 받으려는 게 아니다. 그저 이 위치가 국회의원들의 모든 얼굴을 볼 수 있어서였다. 우진은 의자에 앉은 채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보좌관, 방송국 기자들도…. 우진은 개중 다섯에게 그림자를 붙였다. 이상호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자신의 암살을 방조한 놈들이다. 그중에는 최태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 들리지도 않습니까? 대답을 하세요.” 최태오는 자신이 무시당했다 생각했는지 목에 핏대를 세웠으나 우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펼쳐 들어 한 장 한 장 넘기며 인물들의 얼굴을 대조해 보았다. 사진 옆에 X표시가 있는 자들은 모두 이강진이 체크한 사람들이었다. ‘이놈은 필요 없고.’ 쓰레기는 많지만 우진이 죽일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데 일조한 사람들이다. 우진은 복수를 하러 온 것이지 대한민국의 국회를 청소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들이 쓰레기 짓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지만 굳이 이강진의 도움을 받아 살생부에 몇몇을 추가하는 것은 서비스였다. ‘꽤 많네.’ 체크하고 보니 거의 국회의원의 절반은 되었다. 우진이 그들의 얼굴을 모두 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일 놈들을 기억했으니 되었다. “자, 나가자 이제.” “예? 벌써 다 하셨습니까?” “죽일놈들 얼굴 봤으면 됐지.” 우진이 이강진과 승훈을 데리고 나가려하자 최태오가 소리쳤다. “어허, 어디 갑니까!” 강우진이 일어서자 국회가 술렁였다. 여태 기다렸는데 오자마자 어딜 가려 하는가? 우진을 향해 보좌관들이 달려왔다.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왜?” “예? 청문회를 시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 청문회.” 검증하는 자리라고 했던가? 생각도 없는 국가 수호길드라는 것을 할지 말이다. 계속 말이 무시당한 최태오는 씨근덕거렸으나 이내 자리에 앉았다. ‘시작하면 두고 보자.’ 우진의 치부를 샅샅이 드러내 모조리 까발려 줄 것이다. 그가 어긴 법들만 하여도 수십 가지가 넘었다. 우진이 단상의 테이블에 있는 마이크 하나를 빼 들고는 말했다. 국회, 아니, 정확히는 그를 찍고 있는 여러 카메라와 기자들을 향해서. “수호길드인지 뭔지 안 할 거니 청문회는 필요 없고 한 가지 알리죠.” 우진의 말에 국회가 술렁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 죽이려고 미사일 테러와 연관된 놈들, 일부러 던전 브레이크 일으킨 놈들, 앞으로 변화될 몬스터들과의 전쟁에 필요 없어 보이는 놈들에게 경고합니다.” “무슨 헛소리냐!” “건방져도 정도가 있지!” 몇몇 의원이 소리쳤으나 우진은 간단하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관계 자료는 이미 언론사에 제공….” “개소리!” “어디서 헛수작을! 들을 것도 없다.” “감히 건방지게 어디서!” 우진은 자신의 말을 먹어버리는 그들의 소란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 말도 못 하게…. 휘리릭. 우진의 뒤로 검은 기류가 생성되어 53기의 데스나이트가 소환되었다. 갑작스런 그들의 등장에 국회가 조용해졌다. 이윽고 최태오가 소리쳤다. “신성한 국회에서 뭔 짓인가!” 국회에서 각성자의 능력 발현은 철저히 금지된 법. “강우진 씨는 지금 각성자 특별 관리법 1조 17항을 어기고 있소. 당장 저 몬스터들을….”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 어어억.”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억누르는 기분이다. 우진이 최태오에게 붙인 그림자 깨비. 육체 장악의 하위 스킬인 그림자 구속이 발동된 탓이다. 우진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이제 조용하네. 뭐 일단 자료는 언론사에 넘기니 본인들이 왜 죽어야 되는지는 뉴스 보고 아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 밖에서 기다리죠.” 우진이 마이크를 놓고 대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앞길을 막는 이는 없었다. 흉흉해 보이는 데스나이트들이 그를 호위하듯 길을 텄으니까. 그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국회가 들끓었다. “감히 건방진! 보셨습니까? 보셨어요?” “저런 무도한 사람에게 국가 수호를 맡겨요? 이건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어디서 날조한 자료일지도 모릅니다. 강우진을 추방해야 합니다.” 대회의장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우진이 주차된 차로 돌아가는 와중에 우승훈이 침까지 튀겨가며 흥분해 말했다. “정말 잘 참으셨습니다.” 그의 거침없는 성격을 잘 아는지라 우승훈은 지금의 일이 기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강진은 조금 김샌 표정이었다. 그도 뉴스를 보아서 잘 안다. 중동에서 테러리스트들을 무참히 학살해 버린 강우진이다. 그런 그라면 뭔가 일을 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도 들었다. ‘아쉽군.’ 더러운 정치를 일삼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이강진의 혐오는 우진이 사고를 치기 바랄 정도로 컸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우진은 늘어선 데스나이트들을 보곤 명령했다. “내가 아까 얼굴을 기억한 놈들, 나오면 죄다 수급을 가져와.” [명을 따릅니다.] 우진의 명령에 데스나이트들이 저마다 흥분된 기색을 보였다. 우승훈이 식겁해 물었다. “구, 국회에서 피 안 보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왔잖아.” “…….” 부사장이 한 말은 그 말이 아닐 텐데… 이렇게 공개적인 곳보다는 차라리 국회 안이 더 나을 지경이었으나 우진은 그런 것쯤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알.” [주인님이시여.] 고분고분해진 쌍검의 데스나이트 알아사드가 우진의 앞에 무릎 꿇었다. 검은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이 고대 페르시아의 암살자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모습이었다. “깨비.” [흐흐흐, 재밌는 놀이가 되겠어.] 우진의 의식을 들여다본 깨비가 음흉히 웃었다. 알 아사드의 그림자에 흡수되어 둘의 능력이 합쳐졌다. “오늘까지 처리해.” [주인의 명을 따릅니다.] 살생부에 오른 기업인들. 그들을 암살하기 위해 알아사드의 몸이 흐려지며 지형지물에 녹아들어 갔다. 은신과 유령걸음을 가진 그는 사람들 틈에서도 들키지 않고 임무를 잘 완수해 낼 것이다. 이강진은 우진을 보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정말 할 셈인가?’ 이건 국가 전복죄라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짓인데…. “나오려면 한참 걸리겠네.” 기다리기가 지루한지, 우진은 파이어 마법을 일으켰다. 뭐, 불이라도 지르면 살려고 나오겠지. “사, 사장님?” 우승훈은 불안한 마음이 커져 갔다. 이거, 일이 점점 커지는데? “괜찮아. 뒤처리는 대통령이 할거니까.” 우진의 말에 이강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대통령과 무슨 밀약을 했기에……. 우진의 손에서 날아간 불덩이가 건물 안으로 날아갔다. 토끼굴에 연기를 피웠으니 이제 사냥을 할 때였다. < 110화 - 청문회 (4) > 끝 ⓒ 진설우 < 111화 - 아르달 시국 > 화재 경보 사이렌과 함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흠뻑 젖은 채 뛰쳐나오던 사람들은 입구에서 인의 장벽에 가로막혀야 했다. “아, 비켜! 왜들 멍청히 서 있어!” 욕심이 많은 최태오는 생존욕도 남달랐다. 엎치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제치며 겨우 밖으로 나섰다. “됐다, 살았다.” 큰불인지 작은 불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가야 안전할 것 아닌가? 국회의 화재 진압 시스템을 믿고 가만있기엔 최태오의 의심과 생존욕은 그의 뱃살만큼이나 비대했다. 인파를 헤집어 겨우 빠져나온 그는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스프링클러에서 나온 물로 젖은 정장이 찝찝했지만 뭐, 추가 세탁비가 두둑히 지급될 테니 새로 하나 맞추면 되고… 지금은 빠져나오느라 실추된 자신의 체통을 찾을 때였다. “어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란이야!” 화재 경보의 원인을 꾸짖는 그의 호통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 반쯤 얼이 빠진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응?” 입구에 몰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마주 보고 선 최태오. 두 무리의 시선은 미묘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본인이 아닌 뒤로 향한 것 같자 최태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렸다. “어?” 피를 흘린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아니,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이들. 거기엔 최태오와 친분이 있던 박소국도 있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살인이 일어났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최태오는 따져 묻거나 경찰을 부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 “…….” 슬금 뒤로 물러나 인파의 틈에 섰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상황을 살폈다. 아까 대회의장에서 본 강우진의 데스나이트들이 국회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프간에서 봤던 놈들이군.’ 뉴스를 통해 지겹게 봐왔다. 강우진이 거느린 1만이 넘는 해골부대 말이다. 아예 매개 없이 소환할 수도 있는지 국회는 수천의 해골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화재경보에 빠져나와보니 해골몬스터들이 자행한 살인에 놀라 얼어붙어 있었다. 최태오가 옆에 선 사람에게 작게 물었다. “미쳤군.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지?” “그러게 말입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정도가 아니다. 대한민국 공공의 적… 아니, 초특급 범죄자가 될 판이다.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한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아무런 죄도 없이 현직 국회의원을 죽이다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차별 학살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저 해골들이 누굴 골라내서 죽이는지 아나?” “모르겠….” 대답하던 남자는 속삭이던 말을 멈추고는 뻣뻣이 얼어붙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데스나이트가 해골들을 이끌고 코앞까지 당도한 탓이었다. [목표 확인.] 데스나이트는 정확히 최태오를 보고 있었다. “뭐, 뭐야?” 최태오가 당황해 뒷걸음질 쳤으나 성냥갑의 성냥마냥 빼곡히 선 인파에 막혀 갈 곳이 없었다. “비, 비켜! 나 최태오야! 비켜!” 그의 발악에도 사람들은 주춤주춤 소극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데스나이트의 우악스런 손이 최태오의 팔을 붙잡았다. 휘이이익. 콰당! 최태오의 신형이 거부할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공중을 날아 내동댕이쳐졌다. [군주께 연행해라.] 키키킥. 스켈레톤들이 군단장인 데스나이트의 명을 받아 최태오의 사지를 붙잡고 이동했다. “놔, 놔라! 이 더러운 몬스터들아!” 최태오가 발악했으나 스켈레톤들은 기괴한 소리를 흘리며 그의 몸을 이끌고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강우진과 다수의 시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른두번 째인가?” 우진의 앞으로 다가온 스켈레톤들이 최태오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그의 얼굴을 잡아 억지로 들었다. “으윽, 놔라!” 소리쳐 봐야 들을 리가 없었건만 그는 발악하며 버둥거렸다. 자신의 미래를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들에게서 본 탓이었다. 우진이 기억을 더듬으며 끌려온 그의 얼굴을 보았다. “최태오네, 처리해.” [명을 따릅니다.] 창을 든 데스나이트 하나가 다가왔다. 최태오가 발악했다. “뭐, 뭐 때문에 이러는 거요?” “뉴스 보면 알아.” “주, 죽으면 어떻게 본단 말이오!” “아쉽겠네.” 우진의 말에 최태오가 발악했다. “힘이 있다고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니야, 이 개새끼야!”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이리도 농락할 수 있단 말인가? 최태오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이상호랑 커넥션 있지? 던전 브레이크로 그동안 짭짤했고 말이야. 이번에 미사일 쏴서 나 죽이려 한 데 일조했어. 그게 이유야.” 최태오가 눈을 번뜩였다. 이유야 상관없다, 일단 살고 봐야 될 일이다. “난 관계가 없다! 무고하다! 어떻게 무고한 나를 법도없이 멋대로 죽인단 말이냐!” “죽을 이유로 충분해.” 최태오는 울컥 피를 토하는 기분이었다. 뭐, 이리 미친놈이 다 있지?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그것도 국회에서 이런 엽기적인 살인쇼라니. “이 미친 새끼! 여기 대한민국이야. 대한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라고. 네깟 새끼가 이따위 짓 저지르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악에 받친 그의 말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걱정이나 해.” “이런 시발 새끼가….” 말이 안 통한다. 뭐, 이런 미친놈이 나타났을까? AA급 각성자 강우진. 대한민국의 수호자? 지구의 희망? 각성자들의 롤모델? 개소리다. 눈앞의 저 미친놈은 그저 몬스터를 거느리는 테러리스트다. 감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참혹한 짓거리라니…. [왕께 무례하다.] 데스나이트의 창이 최태오의 심장에 박혔다. “미, 미친….” 마지막 유언이라고 하기엔 힘 빠지는 소리와 함께 최태오의 신형이 축 늘어졌다. 우진이 그와 관련된 서류를 찢어버렸다. 아직 그의 손엔 몇 장의 문서가 더 남아 있었다. “더럽게 늦게 나오네.” 그런 우진의 뒤엔 속엣것을 한껏 개워낸 우승훈과 이강진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우승훈은 수많은 생각을 했다. ‘후, 갤러기가 아니라 옴러기 팔았으면 난 따귀가 아니라, 뒤졌겠구나.’ 휴대폰 판매원 시절의 아찔한 첫 만남을 돌이켜 보며 안도했다. 이강진도 수많은 생각을 했다. ‘미친 거 아니야?’ 누구보다도 대한민국 정치계를 혐오하는 그였다. 안 더러운 정치인들이 누가 있겠냐만은 개중에는 정말 살아서는 안 될 쓰레기들도 있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헌법은 그들의 목숨을 보호하니……. 이강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고작 몇 달 감옥 견학을 보내주고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강우진은…. ‘혁명가라 이건가.’ 대한민국의 썩은 뿌리를 뒤엎을 혁명가를 자처하는 것일까? 역사에 최악의 살인자로 남을지도 모를 위험을 자처하면서? 이강진이 강우진이라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고뇌하는 사이 처형이 끝이 났다. 아니, 이것은 복수라기보단 경고에 가까웠다. “가자, 이제.” 마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듯 가볍게 일어선 우진이 자리를 옮겼다. 토할 힘도 없어 핼쑥한 얼굴의 우승훈과 이강진이 뒤따르며 조심히 물었다. “사장님, 정말 괜찮을까요?” 우승훈은 자신들을 여기저기서 찍고 있는 카메라들이 못내 불안했다. 이런 짓을 하고 과연 체포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괜찮으니까 저기 카메라나 좀 가져오라 그래.” “예에.” 우승훈이 심부름하기 위해 뛰었다. 국회를 우진의 데스나이트들과 스켈레톤들이 포위하고, 그런 해골부대를 또 난리 난 군인들이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 틈으로 카메라와 방송국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승훈이 그들을 향해 다가가자 자신에게 겨눠지는 수십 발의 총구를 보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마십시오.” “사장님이 할 말 있으니 카메라 가져오랍니다.” “…….” 부대 지휘관인 박 대령은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미쳤다고 하기에는 너무 심한 엽기 행각을 벌여놓고 지금 카메라를 가져오라니. 정말 미친 것이 아닐까? 우진의 행동은 쇼킹 그 자체였다. “가겠습니다.” 방송국 관계자는 특종이라 생각했는지 목숨을 걸고 앞으로 뛰어갔다. 리포터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카메라 스텝을 따라갔다. 우진은 다가온 방송국 관계자를 보곤 물었다. “이거 생방송이야?” “예? 예에.” 우진이 카메라를 보며 선포했다. * 대통령은 티비를 두고 경호실장과 함께 있었다. 국회로 가기로 한 일정은 취소되었다. ‘경고와 제안이라….’ 강우진이 자신에게 한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저건 국가 내란죄입니다.” 경호실장이 모든 방송 채널을 점령한 전무후무한 뉴스 속보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한 제안 말일세.”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흐음….”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남북으로 분단된 것만 해도 비극인데, 이 좁은 땅덩어리에 또 다른 나라가 생긴다는 것은…. 대통령 김병만의 고뇌가 깊어지는데 비서실의 직원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국방부장관 전화입니다.” 받지 않아도 뻔했다. 강우진에 대해 포위와 함께 무조건적인 대기를 명령했다. “이리 줘보게.” 김병만이 전화를 받자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강우진이 5분 후 포위를 풀지 않으면 공격한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교전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선제공격해야 합니다.] 선제공격한다고 그를 잡을 수 있을까?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이 화력이 모자라 그에게 패했을까?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위하는 것이 무엇일까? 김병만이 고뇌 끝에 답했다. “포위를 풀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반란입니다. 단호히 응징해야 합니다.] “사상자가 몇인가?” [박소국 의원을 비롯해 57명입니다.] 김병만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강우진은 정확히 약속을 지켰다. “포위를 풀어주게. 명령일세.” […알겠습니다.] 김병만은 전화를 끊고는 비서실 직원에게 말했다. “공식 기자회견을 준비하게.” “넵.” 김병만이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 아르달의 사장실에 모인 직원들이 슬금슬금 부사장 정민찬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곤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두통이 얼마나 심한지 약으로 가시지 않아 머리엔 넥타이까지 졸라매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늘어진 그를 김해민이 위로했다. “부사장님, 그만 포기하십시오. 사장님 사고치는 게 한두 번입니까.” “하아…. 이건 사고 정도가 아니야….” “…….” 그 말에 동의하긴 하지만 이미 뉴스 속보엔 강우진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우와, 형님이 또 실검 1위했어요.” 스마트폰을 내밀며 해맑게 웃는 성구의 말에 민찬의 다크서클은 더욱 깊어졌다. 우리 길드 각성자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저럴까. 검색어 순위는 강우진, 아르달, 내란죄, 반란, 국회 습격 등의 키워드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강우진이 사고를 치고 정민찬이 수습한다. 그러라고 있는 부사장 자리지만 그 스트레스와 부담감은 상당했다. 꼭 글로벌 이슈가 될 만한 것들만 가져 오니 말이다. “이거라도 한 알 더 드십시오.” “하아, 그래.” 김해민이 내미는 청심환을 받아 입에 넣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속보입니다. 공식 기자회견을 연 대통령은 아르달길드의 분리 독립을 발표하며 아르달을 국가로서 인정, 그들의 주권을….] 푸웁! 민찬이 뱉은 물이 테이블을 적셨고 청심환이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물 분수 쇼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향했다. “사, 사장님, 결국 왕이라도 되시려는 겁니까.” 혼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민찬의 말에 가만히 티비를 지켜보던 성녀가 말을 이었다. “이미 왕이셨죠.” 아르달의 군주는 변한 게 없었다. 임모탈의 손에 아작 난 왕국이 몇 개인지를 생각했다면 대한민국은 절대 그를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57명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 111화 - 아르달 시국 > 끝 ⓒ 진설우 < 112화 - 아르달 시국 (2) > [뉴스 속보입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미사일 테러와 관련된 한국의 정치인 57인의 서울 테러가 사전 포착되어 각성자 강우진에 의해 제압, 제거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들이 벌여온 던전브레이크로 인한 피해가 알려지며 국민의 분노가….] 정민찬은 뉴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 언제 도착합니까?” “30분 뒤입니다.” 국회에서 서울역까지는 크게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뉴스는 살해당한… 정치인들의 비리와 그들이 저질러 온 악행들에 대해 늘어놓고 있었다. 메르디가 가져온 자료의 내용 그대로였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아르달길드의 마스터 강우진에게 감사를 표명했으며, 파행된 국회를 재구성하는 대로 아르달길드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는 국민투표에 대한 안건을 상정할 것임을 밝힌 가운데…….] 민찬이 해민에게 물었다. “김 이사, 인터넷 여론은 어때?” “난리도 아니에요. 전부 사장님 이야긴데 일단 정치인들 해온 짓이 워낙 더럽다 보니 잘됐다는 분위기예요.” “뉴스에 그 난리를 피웠는데도?” 강우진의 스켈레톤들이 국회를 점령한 것이 그대로 생방송으로 속보를 탔다. 그런데도 여론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예. 뭐, 직접적 살인 장면이 나오진 않았으니….” 강우진이 무슨 엽기적인 살인 쇼를 벌인 것은 아니다. 죽일 놈들의 심장을 찔러 죽인 게 전부다. 국회에서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것 자체가 충격이었으나 인과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누군가 꾸며낸 것처럼…. “하아, 사장님은 진짜….” 그 누군가가 다름 아닌 대통령이다.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우진에게 유리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뉴스만 보자면 큰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미리 알고 구해낸 영웅이다. 테러에 깊이 연관된 57인의 정치인을 부득이하게 죽여, 한국을 구원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독립은 또 뭔지….” 민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르달의 분리 독립이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바티칸도 있지 않습니까?” 김해민의 말에 민찬이 한숨 쉬었다. 바티칸시국도 국가로서 존재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라는 큰 틀을 가져서다. 한국에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 가능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한 그들이다. “후우, 가능이야 하겠지만.” “이미 대통령과 다 협의했겠지요.” 해민의 말에 조금 안도한 민찬이다. 미리 이야기가 다 진행되지 않았다면 대통령이 기자회견까지 열어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 참.” 하여튼 상상외의 일을 만들어오는 덴 강우진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황당하면서도 어이없는 상황에 사장님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그를 태운 차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핼쑥한 우승훈과 어딘지 모르게 잔뜩 상기된 얼굴의 이강진,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조금 나른해 보이는 강우진이 차에서 내렸다. “뭐야? 왜 다들 나와 있어?” 우진은 주차장에 쪼르르 나와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민찬이 나서서 물었다. “사장님, 이렇게 대형 사고를 치시면 어쩝니까?” “국회에서 피 안 봤다.” 그걸 말이라고… 아, 차라리 국회에서 보지 그러셨습니까. 생중계로 국회 점령이 뜨는데 얼마나 심장이 쫄깃했는지 아십니까. 죽은 놈들이 워낙에 나쁜 놈들이다 보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 우진이 영웅 취급받아 다행이지…. “대통령과는 언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막 궁금증을 쏟아내려던 민찬은 주변에 직원들이 많아 일단 우진을 사장실로 모셨다. 가는 도중 처음 보는 사람이 있는지라 물었다. “누구신지….” “아, 이강진입니다. 서울지검에 있습니다.” “아아! 이강진 검사님.” 무서울 것 없는 젊은 검사 이강진은 유명했다.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은 그의 이름 정도는 모두 들어봤을 것이다. 민찬이 악수를 청했다. “아르달 부사장 정민찬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사장인 강우진만큼이나 주목받는 인물이 정민찬이다. 아르달 자체가 워낙에 단시일에 유명해지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길드의 안살림을 모조리 책임지는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각성자도 아닌 일반인 중에는 요즘 가장 주가가 높은 인물일 것이다. 길드의 지원 인력으로서는 최고의 인재. 다른 회사들이 탐내는 그였다. 우진과 민찬을 위시한 일행이 사장실에 모였다. 성구도 던전에서 돌아와 있었으니 아르달의 창립 멤버가 모두 모인 격이었다. 성녀와 제임스를 비롯한 성기사단, 그리고 이강진이 함께였다. “사장님, 국가 독립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 네가 어떻게 알아?” 강우진의 대답에 정민찬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발표했습니다.” “아, 결국 결정했나 보네.” 우진은 자신의 경고와 제안을 받아들인 김병만 대통령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니까 요새 너무 심했다 싶더라고. 던전에 볼일이 많다 보니 너희 관리도 제대로 못 하고… 특히 민찬이 힘들어했잖아.” “알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독립은 대체 왜….” 힘든 줄 알면 이런 큰 사건은 좀 자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계속 정부에서 귀찮게 할 것 아니야? 그래서 나라 하나 만들자고, 간섭 안 받게. 그럼 너도 좀 편할 거 아냐.” “…….” 정민찬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단순히 그런 이유로 나라를 건국하겠다는 발상 자체도 경악스러웠지만 그것을 이뤄내는 추진력과 실행력이 더욱 놀라웠다. “도대체 대통령과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그냥 제안 하나 했어.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데 막으면 죽인다 했지.” “…….” “가만히 내버려 두면 동맹해 준다 했어.” 하아. 이것이 21세기 지성인의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민찬은 얼굴이 해쓱해지는데 성녀는 우진을 찬양했다. “군주님의 자비로움에 감탄했습니다.” “그지? 괜히 여럿 피볼 뻔했잖아.” “…….” 민찬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는 물었다. “나라가 만들고 싶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시기로 협의했습니까?” 우진은 대통령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조약 하나 맺자더라.” “그러니까 그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그건 네가 만들어봐.” “…….” “어디 보자. 강진 씨, 나라 만들려면 뭐 필요해요?” 아르펜에서야 그냥 왕이 있고 나라 선포하면 그게 끝이지만 어디 현대사회야 그렇던가. 가능이야 하겠지만 굳이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입법이랑 사법, 행정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음.” 고등학교 3학년 때 소환되었던 우진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뉜 아르펜에서 구른 20년 동안 군주로 지냈으나 산 자는 그가 유일했다. 밑에 두고 부리는 자들이야 전부 데스나이트에 리치뿐이니…. “민찬이.” “네.” “오늘부터 총리.” “하아….” 사장님, 이런 초고속 승진 바라지 않습니다.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제게 이런 자리를 내리십니까. 제 야망을 너무 크게 보신 것 아니십니까? “나머지는 이강진 씨한테 자문 구해서 구성해 봐.” “…….” 이강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나는 왜….’ 대통령의 부탁으로 강우진을 찾아와 조언을 주라 했지만 그것이 이것인 줄은…. 사장실의 모두가 황당한 마음에 침체된 분위기만은 아니었다. 성구가 헤실 웃었다. “헤헤, 형님, 그럼 전 뭐합니까?” “넌 뭐할래?” “음, 형님이 왕 하시면 제가 근위대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케이. 성구 근위대장.” “으헤헤, SNS에 자랑해야지.” 각성자 등급의 향상과 사회적 지능은 반비례하는 것일까. 너무 해맑은 성구의 음성에 사장실의 분위기가 한층 유해졌다. “저, 사장님.” “어, 넌 뭐하고 싶어?” 우진의 대꾸에 승훈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이다. 지금이 인생에 있어 다시없을 타이밍이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들어준다. “나라 있으면 외교부 정도는 꼭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또 말발이 되다 보니….” “그래. 외교부처장? 장관? 아무튼 그건 네가 해라.”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승훈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어머니, 제가 해냈습니다. 우씨 가문의 자랑이 탄생했습니다. 정민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꿉장난이면 차라리 행복하리라. 우진은 뱉은 대로 행동하고 그대로 실현한다. 그게 무서웠다. 지금 이 대화 자체가 건국의 초석이 될 것이니…. “방향은 정해주십시오.” 민찬이 포기하고 청했다. 이미 대통령이 발표한 사안이니 무르기도 힘들었다. 더욱이 바티칸시국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에 작은 도시국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규모도 구조도 그저 길드 그 자체이면서 대한민국에서 독립된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받는 것뿐이다. 우진의 뜻대로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온전히 그만의 나라를 가진다. “무슨 방향?” “그, 존립 목적 같은 것 말입니다. 아르달왕국이 추구하는 목적 같은 것 말이죠.” 우진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세계 평화.” “…….” 장난인가, 진심인가. 적어도 성녀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군주의 선택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임모탈이 세계 평화를 가치로 걸었다. 파괴신의 전진자가… 행차하는 곳마다 절망과 죽음만을 남겼던 그가 수호를 택했다. 이것은 변혁이다. 아르펜 행성을 생각하면 이것은 축복이다. 강우진이 세계 평화를 위해 행차한다. 우진이 감격에 겨워 하는 성녀를 한번 흘겨보곤 민찬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 “알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라를 건국하는 게 거창하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찬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은 없겠지.’ 왕까지 되셨는데 이제 더 큰일이야 있겠는가 싶었다. 이제는 정말 더 큰 사고는 없을 것 같았다. ‘이번만 잘 넘기자.’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야 하니 어려운 일이지만 뭐, 대한민국을 뒤집어엎고 혁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길드라는 작은 단체를 독립된 주권을 가진 나라라는 형태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대한민국과 어떤 조약을 체결하느냐가 문제였다. 그에 대해 준비하는 것 자체가 민찬의 몫. “그럼 정 총리는 고생 좀 하시고….” “정 총리….” 우진의 말을 되뇌며 볼이 살짝 붉어지며 상기된 얼굴의 정민찬이었다. 어쩐지 두근거리는 심장은 걱정과 다르게 설레고 있었다. 조약이든 나라 건국이든 민찬을 위시한 길드 사람들이 잘 처리할 것이다. 잘 못 하면 잘 처리하는 놈을 잡아다가 앉히면 된다. 우진은 또 다른 아르달, 차원 영지를 다스리기만 해도 벅찼다. “넌 잠깐 나 좀 보지.” 우진이 성녀를 보았다. 메르디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예, 군주시여….” 우진과 메르디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최초로 던전에서 발견된 사람, 성녀 메르디. 그녀는 어떻게 해서 던전을 통해 지구로 오게 되었는가? 우진은 차원 영주가 되면서 그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사장실의 한쪽 빈 공간에 우진이 귀환 포탈을 열었다. 지이이잉. “따라와.” “예에….” 우진이 포탈로 사라지고 성녀가 뒤따라 들어갔다. 아리아 교단의 성기사단은 모두가 타이탄길드 출신. 성녀의 호위만큼이나 중요한 그들의 주된 임무는 요주의 각성자 강우진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 “쉣, 지금 즉시 타이탄에 알려.” 성기사단장 제임스의 말에 단원 하나가 빠르게 메시지를 작성해 타이탄길드 마스터 딘쿤에게로 전송했다. [강우진이 아르달을 건국했다.] < 112화 - 아르달 시국 (2) > 끝 ⓒ 진설우 < 113화 - 모의전 > 즈아아앙. 우진은 귀환 포탈을 통과한 메르디의 멱살을 잡아 확 끌어 당겼다. “으윽.” 당겨진 옷깃이 목을 압박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메르디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우진을 보았다. 그는 무심한 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의 가신이지?” “이, 임모탈이시여….” 메르디가 두려운 눈으로 우진을 보았다. 무심하고 감정 없는 그의 눈빛은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임모탈이었다. 한 줌의 감정도 읽을 수 없는 그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말해.” 메르디는 목을 죄어오는 옷깃에 숨쉬기마저 곤란했다. “아, 아닙니다. 저 또한 차원 영주였습니다.” 우진이 멱살을 놓아주었다. “허윽, 헉.” 메르디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임모탈이 보여준 잠깐의 살기에 정신적 압박감이 상당해 지쳐 버렸다. “다른 차원 영주의 가신이 아니란 말이지?” “예에.” “그런데 어떻게 던전을 통해 왔지?” 메르디는 아르펜 행성 사람이다. 던전은 행성과 차원 영지를 이어주는 통로. 그곳에서 발견된 그녀가 몬스터들로부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분명 그 던전 주인의 가신이라는 게 우진의 추측이었다. “저 또한 차원 영지를 가졌었습니다.” “가졌었다? 지금은?” “빼앗겼지요.” 우진은 이마를 찌푸렸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했다. 우진이 왕좌에 앉았다. “제대로 이야기해 봐.” “제가 지구로 온 것은….” 아르펜 행성의 연합 세력은 수많은 용사의 희생 끝에 차원의 조각을 셋 구할 수 있었다. 차원의 증명으로 합쳐진 그것을 가지고 있던 메르디는 신탁을 받고 던전으로 향했다. 주인 없던 그 던전은 메르디와 동기화율이 맞았고 차원 영주가 되었다. 그녀는 지구로 통하는 던전을 얻기 위해 차원의 조각이 하나 더 필요했으나, 30일의 보호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해 계속되는 영지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 패배의 대가는 컸다. 아르펜으로 통하는 출입구인 던전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차원 영지에 갇히게 된 메르디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지전이나 결투를 통해 다시 던전을 빼앗거나 차원의 조각을 얻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지 관리에 재능이 없었고, 차원 영지는 쇠퇴하기만 해 랭킹의 하락을 거듭했다. 이대로 가다간 고향인 아르펜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차원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한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신탁이 내렸다. ‘지구에 구원자가 있다.’ 메르디는 여신의 신탁에 기대어 차원의 증명을 깨트려 스스로 차원 영주에서 물러났다. 합쳐질 땐 세 개였으나 분리되고 나서는 두 개였다. 메르디는 그중 하나를 가지고 차원 상점에서 지구로 통하는 던전을 구입했다. 차원 영주가 아닌 던전 오너로 등급이 강등된 메르디지만 차원 영지를 버림으로써 드디어 타 차원인 지구로 올수 있었다. 그녀가 구입한 미국의 지하철역은 리셋이 일어났고 그것을 최초 발견한 것이 타이탄길드였다. “흐음.” 우진은 그녀의 말을 듣곤 차원의 증명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파괴 시, 차원의 조각 (2)를 얻을 수 있습니다.> <등급이 ‘영주’에서 ‘자유민’으로 강등됩니다.> 할 말을 마치고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메르디를 보았다. 적어도 그녀가 다른 차원 영주의 가신은 아니라는 이야기. “좋아. 의심을 거두지.” “진실을 알아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진은 새로운 것을 알았다. 던전 리셋이 일어날 때 최초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 ‘던전 오너였구나.’ 그들이 30일을 방어에 성공하면 해당 차원을 통해 나올 수 있고 말이다. 여태 지구인들의 개념 속 진정한 던전 브레이크. 차원 영주가 무서운 것은 30일의 시간을 무시하고 아무 때나 던전 밖으로 몬스터를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영지민들의 사냥을 허락하는 것이라, 꼭 몬스터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외람되오나… 군주시여, 영지의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하옵니다.” “키바가 있고, 언데드 군단이 있으니 충분해.” 누가 쳐들어오더라도 우진은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메르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보호 기간이 지나게 되면 영지전이 빗발칠 것인데… 그때 군주의 죽음의 군대는 사용치 못합니다.” “……?” 우진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메르디가 말을 이었다. “지금의 방어는 그저 방문자들을 위한 것.” 평상시 영지의 수비와 영주들끼리만 통용되는 결투와 영지전은 분명 다르다. 던전을 거쳐 도전하는 이들을 막아내는 데 영지의 모든 병력을, 영주의 개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영지전은 조금 방식이 달랐다. “그것은 장기와 같습니다.” 메르디는 자신도 처음에 제대로 알지 못해 당황하는 사이 조금씩 잃어갔던 영지와 에너지 등을 떠올리자 우진의 상황이 염려되었다. 초보 영주의 보호 기간인 30일 사이에 최대한 많은 방비를 해야만 했다. “장기말을 모으셔야 합니다.” “흠, 아는 걸 모두 말해봐.” “영지전은 영주들끼리의 유희이자 약탈 전쟁이온데….” 영지전은 오직 영주만이 할 수 있다. 마치 장기 대회를 펼치듯 영지의 자원을 이용해 전쟁놀이를 한다. “모의전을 한번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모의전?” 우진이 모의전을 생각하자 메뉴가 떠올랐다. <가상 영지전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좋아. 한번 해보지.” <배팅 에너지를 설정해 주십시오. 1만, 2만, 3만….> 영지가 가진 던전 에너지를 1만 단위로 배팅할 수 있었다. 우진이 1만을 선택하자 곧 화면이 나타났다. <가상의 적을 탐색합니다. 인간족 리튼 백작과 매치됩니다.> 눈앞의 창에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귀족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간략한 정보와 함께 우진의 시야가 훅 멀어졌다. 영지에 건물을 지을 때처럼 모든 공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야가 펼쳐졌다. <전장을 탐색합니다. 리트리아 평원으로 선택됩니다.> 우진의 영지 크기 정도의 황무지가 설정되었다. 넓지만 곳곳에 움푹 꺼진 구덩이가 있어 지형지물이 만들어진 평원. <리트리아 평원에 에너지가 배치됩니다.> 리튼 백작과 우진의 진영에서 빠져나온 각 1만씩의 에너지. 총 2만의 에너지가 평원 곳곳에 혈초와 혈석 광산으로 변해 배치되었다. <리튼 백작과의 가상 영지 전쟁을 시작합니다.> <모의전으로 에너지를 잃지 않습니다.> <모의전으로 승리 시 승자의 권리를 실행할 수 없습니다.> 우진은 정신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치우며 전장을 살펴보았다.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잠시였고, 낙하하는 기분과 함께 시야가 낮아져 한 인물에 고정되었다. “영주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우진의 앞에는 수수낙과는 조금 생김새가 다른 호인족들이 넷 늘어서 있었다. 우진이 양손을 들어보니 황색의 털이 나 있는 호인족의 팔이었다. ‘빙의?’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앞의 호인족 넷을 보았다. 그중 하나를 보며 빙의를 생각하자 휙 하고 시야가 바뀌었다. “윽.” 우진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었던 호인족을 보았다. “영주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들의 말에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 줄은 알겠어.’ 우진이 빙의한 호인까지 다섯 명.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몸이든 빙의해 조종할 수 있었다. 그나마 깨비를 통해 영혼 교환을 하는 것에 익숙해서인지 금방 적응했다. 우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성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건축물이 하나 있었다. 3층 정도 높이의 탑을 하나 가진 아담한 성은 빌라 건물 정도의 크기였다. 우진이 건물을 유심히 보자 또다시 영혼이 이동하는 어질한 기분과 함께 성 안의 왕좌에 앉아있었다. 실내에 있지만 주변의 지리 상황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성 앞에 대기 중인 다섯 명의 호인족도 보였고,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몇 가지 수치가 시야의 한쪽에 고정되어 보였다. [혈석 100 인구 5/10] 우진은 지금의 상황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카오스?’ 고교 시절 즐겼던 게임이 이럴까? 아니, 장르가 달랐다. ‘전략 시뮬레이션 같은데?’ 기지가 되는 건축물과 일꾼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해 자원을 모으고 건물을 짓고 적과 싸워 이기는…. “혈초를 채집해 와.” “명령을 받듭니다.” 우진의 시야는 성에 머물러 있지만 밖에 있는 호인족 일꾼들과 마치 바로 앞에서 대화하듯 목소리가 통했다. 왕좌에 앉아 이것저것 둘러보니 건축도 가능했다. [오두막, 농장, 유혹의 나무, 오크 훈련소, 와이번 둥지….] 건축 가능한 건물들의 리스트를 보며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말을 모으라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영지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닛도 건축물도 모두 영지에 보유하고 있는 것만 가능했다. 전쟁 도중에는 차원 상점을 사용하지 못하니 미리미리 대비해 건축물을 보유할 필요성이 있었다. 에너지가 평원의 곳곳에 퍼져 있지만 우진은 혈석 광산을 건축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군사 건물도 오크 훈련소와 와이번 둥지뿐. 오크 훈련소는 적은 혈석으로 건축이 가능했지만, 와이번 둥지는 굉장히 많은 혈석을 필요로 했다. ‘효율적이지 못해.’ 알뜰히 혈석을 모아 와이번 둥지를 건설하는 와중에 공격을 당해 영지전에서 패배할지도 몰랐다. 우진은 일단 성에서 생산할 수 있는 일꾼(50)을 둘 생산했다. 그리 길지 않은 대기 시간이 지나 차례로 일꾼이 성 안에서 나와 대기했다. 우진은 그 둘까지 더해 일곱에게 명령해 혈초를 채집해 오도록 했다. 주변에 있는 혈초를 부지런히 모아온 그들 덕에 혈석이 500에 이르자 오크 훈련소 건설을 지시했다. 호인족 둘이 투입되어 성의 인근에 오크 훈련소가 지어졌다. 그 와중에 다섯의 일꾼이 부지런히 움직여 혈초를 모아왔고 우진은 훈련소가 지어지는 와중에 일꾼을 셋 더 생산했다. <한계 인구를 초과했습니다. 오두막을 지어주십시오.> “거참… 이거 오랜만이긴 한데, 짜증나네.” 답답한 마음에 우진은 짜증이 치밀었다. 수만의 언데드 대군도, 데스나이트들도 사용하지 못한다. “이게 뭣 하는 짓거리인지.” 차원 영주들은 왜 이런 게임을 하고 있을까? 왜 이런 것들로 서로 에너지를 배팅해 얻고 랭킹을 올릴까? 우진이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삭히는 사이, 추가 지시한 오두막이 모두 지어졌다. 한계 인구가 20까지 늘어났고 오크 훈련소 건설이 완료되었다. <오크 병사 : 50, 오크 전사 150> 훈련 가능한 병과는 우진의 차원 영지에서 훈련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병사 둘의 생산을 지시하자 방금 지은 오두막에서 오크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와 훈련소에 들어갔다. 대기 시간을 보니 일꾼의 다섯 배는 걸리는 10분은 될 것 같았다. 우진은 오크 병사가 얼른 나오길 기다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보호 기간 전에 준비하기 어렵겠는데?’ 모의전이 아닌 진짜 영지전에서 오크 훈련소와 와이번 둥지 둘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혈석 광산은 무조건 있어야 했다. 영지에 갖춰야 할 기본 건축물들이 많았다. 차원 영지에 많은 재료를 갖추고 있어야 영지전에서 활용이라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병력의 테크트리나, 조합, 거기에 영지에 존재하지 않기에 영지전에서 지을 수도 없는 방어 건물 등을 연구해 봐야 했다. 겨우 6일 정도 남았다. 그사이 기본적인 전력을 갖출 수 있을지……. 10분의 시간이 지나자 집에서 나와 어슬렁 훈련소로 들어갔던 오크는 창으로 무장한 듬직한 병사가 되어 밖으로 나왔다. 오크 병사 셋을 갖추었을 때 저 멀리서 리튼 백작의 보병 일곱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과 방패,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은 만만찮아 보였다. “답답하네, 정말.” 손발이 모두 구속된 기분. 쓸 수 있는 것은 오크 병사 셋뿐이었다. < 113화 - 모의전 > 끝 ⓒ 진설우 < 114화 - 결투 > 크와아! 오크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용기를 북돋았다. 셋과 일곱의 전투는 불 보듯 뻔해 보였다. 우진이 오크 병사에게 빙의하여 셋을 지휘했지만 역부족. 오크 병사 셋을 잃고 보병 넷을 해치웠지만 아직 적은 셋이나 남아 있었다. “모두 모여.” 우진은 일꾼들을 모두 모으고 때마침 훈련소에서 나온 오크 병사 하나에 다시 빙의해 보병 넷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다시 저 멀리서 보이는 보병 열. “졌네. 짜증 나게.” 이따위 인형 놀이라니. 우진은 미련 없이 모의전을 종료해 버렸다. 휘이익. 눈앞이 일그러지며 세상이 깨졌다. 깜빡이며 다시 나타난 밝아진 시야는 우진의 차원 영지. 성녀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답답해 죽겠군.” 그럴 것이다. 본신의 능력은 제한된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임모탈이기에 더욱 답답함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차원 영주들은 모두 이 짓거리를 하나?” 자신의 차원 영지를 키우고 다른 영주들과 이깟 대전이나 하고 있다고? 우진은 입맛이 썼다. 그 재료로 쓰이는 것이 에너지. 그것을 어떻게 벌어들이는지 생각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영지전은 그들에게 중요합니다. 적은 것을 걸지만 그것만큼 착실하고 안전하게 랭킹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없지요.” 던전 에너지의 10%만 되도 감히 적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크다고 할 수도 없다. 위험도도 낮았다. 성녀만 하여도 스스로 차원의 증명을 깨고 영주의 지위를 버리지 않았나. “이건 멍청한 짓이야.” 이런 것을 위해 차원을 침범하고 혈석을 모은다라…. “결투는 뭐야?” “영지전은 차원 영지끼리의 전투… 하지만 결투는 영주끼리의 대결이옵니다.” “그럼 그냥 처음부터 결투를 하면 되네.” “결투는 상대가 동의하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습니다. 강제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영지전에서 패배하여 복수를 원할 때뿐입니다.” 우진이 씩 웃었다. 모의전을 하는 내내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결투가 그런 식이라면 그건 마음에 들었다. “좋아. 뭐, 안 되면 공략을 해도 되고.” 영주 대 영주의 전투가 아닌 모험가의 신분으로 그 영지에 도전하는 것. 래쉬모드의 연구실, 쥬리엘의 광야 모두 우진은 공략으로 도전했다. 그때는 영주의 등급이 없었으니 공략밖에 선택할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뭐, 좋아. 그럼 차원의 조각 하나 얻는 게 중요하겠군.” 던전을 구입하려면 차원의 조각 하나가 필요했다. 아르펜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뚫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지구로 통하는 여유 던전을 하나 더 확보하든 차원의 조각은 많을수록 좋았다. ‘까짓 10% 잃지 뭐.’ 남은 보호 기간 동안 최대한 대비를 할 테지만 이미 늦은 것이라면 별수 없었다. 괜히 걱정하고 마음 써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게 좋았다. 우진이 왕좌에서 일어났다. “오해해서 미안하군.” “아, 아닙니다.” 임모탈이 사과라니… 메르디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우진이 피식 웃고는 서울역 1번 출구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나가봐. 그래도 대비는 해야겠지.” “예에.” 메르디가 인사 후 포탈을 통과하자 우진이 왕좌가 있는 넓은 홀을 빠져나왔다. “주인님!” 비비가 달려와 우진의 품에 안겼다. 볼을 잔뜩 부풀리고는 슬쩍 성 안을 살폈다. “성녀 갔어여?” “갔어.” “어휴, 깜짝 놀랐어용.” 우진의 권속들은 전부 성녀를 싫어했다. 존재 자체가 언데드니 상극인 그녀가 싫을 수밖에 없었는데, 악마인 비비도 그 영향인지 본능적 거부감이 있었다. “헤헤, 재민이가 기운을 차렸어요.” “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지금 뭐하는데?” “오전에 사냥을 하곤, 지금은 집에 있어요.” 우진은 업적 상점을 열어 영지전에 대한 매뉴얼을 구입했다. 대충 훑어보니 모의전에서 경험했던 것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그저 방식과 기초만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것 읽어봐. 영지전이 들어오면 대신 나가야 할 테니.” “알겠어용.” 비비가 책을 받아 들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성 바로 앞에 귀여운 오두막이 자리한 것을 보니 비비가 자신의 집을 구입한 모양이었다. “가신에게도 대리를 맡길 수 있으니 뭐.” 오는 영지전을 피할 수 없다면 결국 해줘야 한다. 이기면 좋지만 준비가 미흡해진다면, 아쉽지만 별수 없다. 대신, 반드시 결투로 복수를 한다. 랭킹이 굉장히 높은 72좌의 대군주들도 우진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질 영지전이라면 굳이 영주가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비비 보고 유흥 삼아 놀라고 한 다음, 잃은 에너지나 아이템은 결투로 다시 뺏어온다. 우진은 모의전을 하느라 답답해진 마음을 털고는 재민의 집으로 향했다. “재민이 있냐?” “네, 형.” 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재민이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웬, 책?” “요 앞에 잡화점에서 샀어요.”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 차원 영지의 시간으로 20여 일 동안 우진이 영지를 발전시킨 것은 영지민들의 생활에 관한 부분이었다. 공터뿐이었던 곳은 그동안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잡화점에 대장간, 빵집에 술집과 식당, 카페까지 상업 시설이 다양해졌다. 난민들이 꾸준히 유입되다 보니 호인족뿐만 아니라 오크와 난쟁이, 그리고 인간 몇도 영지민이 되었다. 우진의 정책상 하나뿐인 던전인 ‘서울역 1번 출구’를 사냥터로 개방하지 않아 호전적인 난민들에게 아르달 영지는 메리트가 없었다. 정착세를 따로 받고 있지 않았으니 잠시 머무르려는 난민들에게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영지였다. “무슨 책인데?” “그냥 여행 책이에요.” 책 표지를 슬쩍 보니 유명한 차원 영지들을 여행하면서 적은 기행문. 우진이 테이블에 앉았다. “아까 사냥했다며?” “…네.” “할 만해?” “그냥… 뭐.” 재민이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피의 갈망이 심해져 키바에게 부탁해 사냥을 나서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을 잃고 오가는 영지민들을 덮칠지도 몰라서였다. 영지를 찾는 몬스터와 난민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저 정착을 원하고 영지의 규율을 따르면 난민, 그렇지 않으면 몬스터 취급을 당한다. 종의 구분 또한 무의미하다.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거나 엘프와 오크가 서로 손을 잡고 협동하기도 한다. 재민은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또 차원 영지의 존재에 대해 충격을 받았지만 이제 조금 적응한 모양새였다. “이제 누나 만나러 가는 게 어때?” “음, 누나가 이곳으론 못 오겠죠?” “누나는 힘들지.” 각성자만이 던전에 입장할 수 있다. 정확히는 포탈을 통과하는 것은 각성자만 가능하다. 지원은 능력이 없는 일반인. 하물며 그녀의 영혼을 생각하면 각성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나가긴 해야 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전해주세요.” “뭐, 천천히 해.” 지원이가 걱정을 많이 하긴 하지만, 결국 재민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보다, 형.” “어, 왜?” 재민이 진지한 얼굴로 우진을 보았다. “형은 신인가요?” “신이라….” 재민은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다. 차원 영지 내에서라면 영주가 신이라 해도 무방했다. 에너지만 있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신인가?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다.” 신을 만나본 적은 있지만 그들과 자신은 달랐다. 아니, 다름을 유지하고 싶었다. “휴, 아참. 사람들이 불안해하던데요.” “누가?” “영지민들이요. 영주가 호… 구라 이대로 있다가 영지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거 아닌가 하고요.” 그들에게 호구로 보일만도 했다. 보통의 영주들은 난민을 영지민으로 등록할 때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다. 지금 우진의 영지는 정착세가 없는 대신 상가 건물들을 두고 그것으로부터 세금을 걷고 있었다. 자체적으로 혈초를 채집하는 농장이 있어 그곳에서 일하길 바라는 난민들이 정착하기도 했고 말이다. 던전을 통한 사냥을 하지 않으니 혈석의 수입이 적을 수밖에 없고, 방비가 튼튼하지 못하니 여타 영주들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다. 영지가 공격받고 힘들어지면, 또 그들은 난민이 되어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야 할 것이다. 우진이 되물었다. “내가 호구로 보여?” “그럴 리가요.” 우진은 딱히 영지민들을 쥐어짤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의 목표는 저 멀리 72좌에 있는데, 네 자릿수 랭킹의 하위 영주들과 드잡이질하며 아웅다웅할 생각이 없었다. “너무 집에만 있지 말고 오늘처럼 사냥도 하고 그래. 너도 어떻게 보면 각성자 아니냐?” “각성자요?” “그래. 일반인들 기준에서 보면 각성자는 전부 괴물이야.” “각성자라….” 재민이 조용히 말을 곱씹었다. 흡혈 능력에 변신 능력이 있는 조금 특별한 각성자라고 해야 할까? “그럼 쉬어라.” “네, 형.” 우진이 재민의 집을 나섰다. 건물들이 들어선 거리에 각양각색의 유사 인종들이 우진을 보곤 슬쩍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해 왔다. 영주의 행차에 영지민들이 슬금슬금 인사 후 물러가는 것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호구라.’ 답답하게 진행되는 영지전을 생각하면 그럴지도 몰랐다. 전략에 재능이 없으면 매번 질지도 모를 일이다. 영지전 자체가 귀족 놀음. 스스로 나서지 않고 결투를 벌이는 것이다. 제 목숨은 아껴두고 부하들을 이용해 에너지를 벌어오는 것이다. 우진과는 전혀 맞지 않는 방법. “어떤 호구든지 오기만 해봐.” 까짓 영지전에 잃는 몇만의 에너지 포인트? 결투로 복수해 모두 뺏어오면 그만이다. 우진은 첫 영지전의 개시를 끊을 영주가 누가 될지 이제는 기대가 되었다. *** 랭킹 3,213의 차원 영지 코모드의 늪지. 영지의 주인인 코모드 족장은 길쭉한 몸처럼 길쭉한 송곳니를 지닌 트롤 종족이었다. “그흐흐, 좋은 먹잇감이군.” 코모드는 자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위치에 랭크된 신입 영지 아르달을 보며 눈웃음 지었다. 초보 영주들이 왜 보호 기간을 갖겠는가? 미리 대비하고 방비하라는 것이겠지만, 제대로 준비하는 영주는 드물었다. “강우진이라. 초보 중 초보군.” 지구 차원에서 처음으로 등록된 차원 영주다. 전에 한 번도 차원 영지를 다스렸던 경험이 없는 인물이니 제대로 준비했을 리가 없다. 준비되었더라도 영지전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놈들보다 먼저 노려야 해. 그흐흐.” 이런 영지는 먼저 줍는 놈이 임자다. 멋도 모르고 있을 때 에너지 배팅을 최고로 걸어 단번에 뜯어내야 한다. 잘 만하면 한 번에 300단계 정도 랭킹을 휙 올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코모드는 어서 새로운 영지 아르달의 보호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보호 기간이 종료되기 1시간 전부터 영지의 왕좌에 앉아 영지전 신청을 준비했다. 다른 경쟁자들보다 빨라야 한다! 시간이 되자 코모드는 기대에 부풀어 영지전을 신청했다. 두근두근 기대를 한 그는 곧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르달과의 영지전을 시작합니다.> “그하하하.” 코모드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어디 삥 뜯으러 가볼까?” 코모드가 왕좌에 앉아 영지전을 펼치는 전장으로 향했다. *** <코모드로부터 영지전을 신청받았습니다. 거절하시겠습니까?> <거절은 세 번까지 가능하며, 이후 강제적으로 집행됩니다.> <승리 시 4일의 보호 시간이, 패배 시 12일의 보호 시간이 적용됩니다.> “드디어 왔군.” 왕좌에 앉은 우진은 씩 웃었다. 그의 앞에 놓인 작은 의자. <영지전 지휘관> 그곳에 우진을 대신해 영지전을 수행할 비비가 당찬 표정을 하곤 앉아 있었다. “시원하게 말아먹고 와봐.” “흥, 이길 테니 걱정마셔용. 약속대로 이기면 에너지 절반은 나 사용하게 해주는 거죠?” 비비의 다부진 물음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무렴.” 이겨도 좋고, 져도 상관없다. 바로 결투를 통한 복수를 할 테니 말이다. < 114화 - 결투 > 끝 ⓒ 진설우 < 115화 - 결투 (2) > <최하 포인트 1만을 배팅합니다.> 10%만 걸고 싶었지만, 영지전의 최하가 1만이었다. <상대가 던전을 배팅했습니다. ‘서울역 1번 출구’를 배팅하시겠습니까?> “싫어.” 불확실한 전쟁에 던전을 걸 수는 없다. 우진의 거절에 상대가 다른 아이템과 장비, 심지어 영지의 주요 건물을 몇 배팅해 왔지만 그것도 모조리 거절했다. <1만 포인트를 건 영지전이 시작됩니다.> 결국 가장 기본적인 1만 포인트를 건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진은 왕좌에 앉아 느긋하게 영지전을 구경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지의 군사 건물들과 기본적인 보급 건물들을 모두 건설해 뒀기에 영지전에서도 활용이 가능했다. 비비는 나름 공부를 했는지 야무지게 진영을 키우고 병력을 늘렸지만 전투의 컨트롤에서 그 차이가 났다. 버티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패배로 끝이 날 듯 싶었다. 비비에겐 미안하지만 더 볼 것도 없었기에 우진은 상대 영주의 정보를 수집했다. “트롤이라.” 전략을 보며 상대 영주의 대략적인 성향은 알 수 있었으나 영주 개인의 무력이나 전투력 등은 정보가 없었다. 영지전은 영주의 무력이 아닌 영지가 가진 힘, 그 자체를 겨루는 것이니까. 알 수 있는 정보는 상대의 종족이나 이름, 랭킹 정도였다. 우진보다 순위가 1단계 아래에 있었으나 단 몇 포인트 차이로 수십 단계씩 랭킹이 차이가 나니 하위의 랭킹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우진처럼 개인의 무력이 72좌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해도 3,000대의 랭킹에 머무르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상대를 만나기 전엔 모를 일이었다. <영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1만 포인트를 잃었습니다.> <코모드가 승자의 권리를 실행합니다. 영지의 창고가 약탈당합니다.> <강화석을 잃었습니다. 래닌의 가죽을 잃었습니다….> “허, 이 새끼 봐라?” 영지전에서 승리 시 주어지는 승자의 권리. 어떤 것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코모드는 영지 창고를 약탈해 갔다. 우진의 인벤토리와도 같은 그곳에서 몇몇 재료 아이템을 빼갔는데, 별로 가치 없는 물건들도 포함된 것을 보니 임의 선택으로 약탈품이 지정되는 것 같았다. 운이 나빴다면 귀한 물건을 도둑맞을 뻔했다. “미리미리 빼놔야겠네.” 드래곤 하트라도 잃었다면 얼마나 아까웠겠는가. 물론, 우진도 래쉬모드에게서 빼앗은 것이지만 말이다. “두 배로 털어와야지.” 녀석이 털어간 약탈품을 체크하는 와중에 비비가 정신을 차렸다. 지휘관 좌석에 앉아 탁 풀려 있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더니 습기가 차올라 눈물방울을 터트렸다. “으아앙, 주인님.” 비비는 벌떡 일어나 우진에게 와 안겼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만큼 끔찍하고 허무함은 아니지만 그래도 패배가 좋을 리는 없었다. 굳이 그 더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고 우진은 비비에게 영지전을 대리하도록 했고 말이다. “괜찮아.” “흐에엥.” 비비는 정말 이기고 싶었는데 져서, 분함에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우진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뚝.” “흐윽, 흑.” 코를 훌쩍거리던 비비는 눈물을 멈추곤 조용히 말했다. “죄송해용. 이기고 싶었는데….” “괜찮아. 져도 돼.” “히잉, 그래도….” “어차피 복수할 생각이었어.” 우진의 말에 비비가 소매로 눈물을 닦고는 입을 삐죽였다. “그놈 혼내줘용.” “그럴 거야.” 우진이 비비의 볼을 꼬집어주고는 왕좌에 몸을 누였다. <코모드에게 결투를 신청하였습니다.> <패자의 복수를 실행합니다.> 우진의 몸이 사라지며 전장으로 소환되었다. *** “그하하.” 코모드는 광소를 터트렸다. “어디서 본 건 있는 모양이군.” 아르달의 영주 강우진은 어쭙잖게 전략가를 대리시켰다. 제 딴에는 영지전에 능한 자를 고용한 것이겠지만 코모드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영지전에 능한 제대로 된 인재는 몸값이 귀하다. 상위 영주들은 모두 전략가를 따로 두고 있지만 랭킹이 네 자리나 되는 하위 영주들이야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별반 승률이 좋지 못한 어중이떠중이거나 사기꾼일 뿐이다. 강우진이 별 쓸모없는 전략가를 내세운 덕에 영지전을 쉽게 이겼다. “그흐흐, 역시 초보들이 좋아.” 초보자들을 상대로는 항상 승률이 좋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강우진이라는 영주는 소심한 성격인지 최하인 1만 포인트만 배팅해 승리 보상이 적다는 것 정도였다. 약탈로 얻은 아이템들 또한 별로 귀한 것이 없어 아쉬웠지만 상관없다. 오랜만의 승리로 한껏 기분이 업 된 코모드에게 경사가 겹쳤다. <강우진이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응? 그하하하, 이래서 초보들이 좋아.” 졌으면 패배를 수긍하고 12일의 기간 동안 영지를 추스를 일이지, 꼭 이렇게 뭣도 모르고 덤빈다. 고맙게도 말이다. “감히, 이 코모드님에게 크크큭.” 영주마다 성격이 다르다. 본신의 무력은 비루하지만 지략만은 좋아 영지전에서 승승장구하며 고랭크를 차지한 자들도 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코모드는 영지전 능력보다 본신의 무력에 더 자신이 있었다. 트롤왕을 넘보던 대족장이었던 그가 전투력이 낮을 턱이 없었다. 제대로 된 전략가만 구했다면 지금쯤 세 자릿수의 랭킹은 쉽게 오르리라 자부하는 코모드였다. 결투는 보통의 영주들은 잘 하지 않는다. 변수가 너무 많고 보상이 큰 만큼 손해도 크다. 영지전이 푼돈을 건 장기판이라면 결투는 씨름판이다. 영지전보다 결투를 더 좋아하는 영주들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그흐흐, 제대로 한번 털어볼까?” 멋도 모르고 복수한답시고 결투를 신청한 것 같은데, 단연코 실수하는 거다. 코모드의 몸이 홀연히 사라져 전장으로 소환되었다. *** 우진은 얼음으로 뒤덮인 땅에 소환되었다. <승리 시 승자의 권리, 복수자의 응징을 실행하실 수 있습니다.> <패배 시 죽음을 경험합니다. 12일 후 부활합니다.> 알림음을 들으며 차원 영주들이 어지간해서는 결투가 아닌 영지전만을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러니 안 하지.” 결투에서 패배하면 죽음을 경험한다. 12일 후 부활이면 영지를 수습할 시간 자체를 모두 날리게 된다. 부활 후에 또다시 영지전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 제 목숨을 거는 일이니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을 이용한 영지전을 더 선호할 수밖에. “우습군.” 우진이 죽인 래쉬모드도, 쥬리엘도 부활한다. 그놈들도 이렇게 영지전에 목숨 걸며 엎치락뒤치락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한패였다면 아르펜이 점령당하는 것은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행성은 그저 에너지를 모으기 위한 사냥터. 스스로 차원 영주가 되어보니 느낄 수 있었다. 이 짜증 나기만 한 그들만의 룰을 말이다. 랭크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영주들 모두가 원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영지전을 착실히 진행하며 랭크에 오른다? “판을 아주 거지같이 짜놨어.” 아웅다웅 생존을 위해 분투했는데 어항 속 물고기가 된 기분이다. 화가 났다. 답답하게 짜인 그들만의 리그에… 그것도 이제 막 출발선에 선 듯한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엎어주지.” 규칙대로 순순히 따르는 성격이 되지 못한다. 깨부숴 주지. 이, 파괴신의 전승자가 말이야. 빙하로 둘러싼 대지를 밟은 우진의 앞에 트롤 족장 코모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흐흐. 신입 영주여, 하나 제안하지.” “……?”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트롤 녀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혈투에 보물이 빠지면 섭섭하지. 사나이끼리의 결투에 각자의 던전을 하나씩 거는 게 어떤가?” 뭐지? 이 호구는? 우진이 대꾸가 없자 코모드는 괜히 도발했다. “워어, 설마 질 것을 걱정하는 건가? 그딴 정신으론 고랭크에 갈 수가 없다고.” 우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걸지. 아니, 더 걸어봐.” “응? 정말인가? 그하하하, 화통하구만그래. 2만 포인트를 더 거는 건 어떤가?” “좋아.” 우진이 흔쾌히 수락하자 코모드가 속으로 음흉히 웃었다. 바보 같은 저런 호기로는 얼마 가지 않아 영지도 뺏기고 난민이 될것이 뻔했다. ‘그흐흐, 제대로 호구를 만났군.’ 코모드는 기대에 부풀어 던전을 걸었다. <지구 행성의 ‘서울역 1번 출구’를 배팅합니다.> <자쿠 행성의 ‘내시아의 기둥’을 배팅합니다.> ‘아르펜 행성이면 좋았을 것을.’ 우진은 속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단번에 아르펜 행성의 던전을 가진 영주를 만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원의 조각을 얻어 아르펜의 빈 던전을 구입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몰랐다. “그하하, 애송이 녀석! 결투를 시작해 볼까?” 코모드는 자신의 도발에 던전을 걸어버린 강우진을 비웃으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곳에서 쑥하고 빼낸 것은 가시가 박힌 몽둥이였다. 부우웅, 부웅. 허약한 인간족 따위. 진화한 트롤인 자신의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키에, 이제 막 초보 영주가 되었다는 것은 결투 경험도 일천할 터. “멍청한 애송이 놈.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하하.” 쿵, 쿵. 코모드의 내딛는 걸음마다 얼음의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주변으로 얼음조각을 내던졌다. 우진이 무식하게 뛰어오는 코모드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호구가 많진 않겠지.” 영주들이 모두 코모드와 같다면 금방 상위의 랭크에 닿을 텐데 말이다. 우진이 자신의 무기인 강철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소환되자마자 해머로 바뀐 무기가 달려오는 코모드의 몽둥이를 마중 나갔다. 콰아앙! “그윽.” 코모드는 키가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인간이 내지른 힘이 생각보다 상당해 놀랐다. ‘지구의 인간은 전투력이 상당하군.’ 하지만 코모드도 한때 종족을 이끌던 족장! 그 완력이 보통의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부우우웅, 쾅! 불행한 것이 있다면 우진이 보통의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 “그어억.” 몽둥이를 슬쩍 피해 휘두른 망치가 코모드의 무릎을 때렸다. 거구의 덩치가 휘청하며 바닥에 쓰러지자 곧장 무기의 형태를 도끼로 변환해 내리찍었다. 콰직! “그우어엉!” 고통 속에서도 코모드가 휘두른 몽둥이가 우진을 노렸으나 그의 머리맡에서 생성된 스피릿 아머에 가로막혀 튕겨져 나갔다. 투앙! 그 반발력에 몽둥이가 휘청이며 날아가자 우진의 도끼가 코모드의 어깨를 찍었다. “그어억! 자, 잠깐.”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듯 눈이 뒤집힌 코모드가 외쳤으나 우진의 도끼날은 쉴 틈 없이 그의 목을 내려쳤다. 콰작! “트롤이 좀 질겨야지.” 트롤을 상대하면 지구전 따위는 염두에 두면 안 된다. 체력도 얼마나 좋고, 재생력은 또 얼마나 괴물 같은지……. 치명상이라고 생각해도 잠깐만 시간이 지나면 회복하는 게 트롤이다.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이 제일이다. <레벨 업!> 회색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코모드의 시체를 보며 우진이 쓰게 웃었다. “경험치는 쏠쏠한데?” 차원 영주라서 그럴까? 레벨은 별것 없는데 경험치가 상당했다. <코모드와의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복수에 성공하셨습니다.> “이제 약탈을 해볼까?” 우진은 오랜만에 임모탈로 돌아갔다. < 115화 - 결투 (2) > 끝 ⓒ 진설우 < 116화 - 자쿠행성의 방문자들 > <결투 승리 보상 ‘내시아의 기둥’ 던전을 얻었습니다.> <결투 보상 3만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복수자의 응징을 취합니다.> <빼앗긴 1만 포인트를 되찾았습니다.> <약탈당한 아이템을 되찾았습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에 우진이 미소 지었다. 결투와 영지전의 기본 배팅은 1만 포인트로 같다. 영지의 힘으로 싸울지, 영주 본인이 나서서 싸울지가 다를 뿐. 추가로 더 배팅한 2만 포인트를 얻었고, 복수에 성공하며 잃었던 1만 포인트까지 되찾았다. <승리자의 권리를 실행합니다.> <창고 약탈, 영지 약탈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약탈에도 종류가 있었다. 영지의 재산과 영주 개인의 재산 중 어떤 것을 고를지 말이다. 우진은 영지 약탈을 선택해 보았다. <코모드의 늪지 5%를 빼았습니다.> <영지민 17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 <혈석 700포인트를 노획했습니다.> <오두막 두 채, 늑대 조련소를 노획했습니다.> 약탈한 물품들이 인벤토리에 저장되듯이 약탈 물품 관리라는 창에 저장되었다. 곧, 전장의 종료를 알리며 우진의 몸이 붕 뜨더니 시야가 흐려졌다. “후우.” 다시 우진의 시야가 잡혔을 땐 영지의 왕좌였다. “우앙, 주인님.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났쪄여.” 영지전처럼 의식만 전장에 소환되는 게 아닌, 우진의 몸 자체가 소환되었다. “그래. 잠깐 있어봐.” 우진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약탈 물품 관리 창에서 하나씩 약탈품들을 꺼냈다. <아르달의 영토가 4% 확장됩니다.> 아르달 전체의 지도가 보이며 서쪽 변방에 늪지가 생겨나 땅이 커졌다. 건물을 선택하자 상점에서 사서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맵에서 위치를 선정해 지을 수 있었다. 군사 건물 근처에 늑대 조련소를 위치시켰고 조금 특색 있는 오두막은 영지민들의 집들이 늘어선 공지에 추가시켰다. 혈석을 끄집어내자 영지 에너지 포인트에 합산되어 사라졌고 포로들을 꺼내자 우진의 앞에 소환되었다. “흐음.” 우진은 눈앞에 나타난 열일곱 명의 트롤을 보며 고민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들은 두렵고 불안한 눈초리였지만 당황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약탈을 시전하면 영지민들이 잡혀오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공손히 무릎 꿇더니 말했다. “영주여,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영지민들은 영주에게 충성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을 포로로 부리든, 영지민으로 두든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은 언젠가 말썽을 일으킨다. 무리지어 떠도는 난민들은 용병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영지민이나 여행자들이 종종 영주의 목숨을 노리기도 했다. 그래서 영지에 군대가 필요하다. 방문자나 침입자, 그리고 영지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영지민들이 고작 100명도 되지 않는데 포로를 열일곱 명이나 둘 일이 없었다. 영지민으로 받기도 찝찝하고 말이다. 우진은 고민할 것도 없이 흔쾌히 허락했다. “좋아. 털어놓고 가봐.” 그들은 300에서 400까지 수중에 가진 혈석을 지불하고는 영지를 떠나갔다. “주인님, 어땠어요?” “누구?” “영지전에 도전한 영주 말이에용.” “형편없었어.” “흐음.” 그 형편없는 놈에게 영지전에서 참패한 비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슬픈 표정을 하였다. “비비도 수고했어.” “져버렸는데….” “괜찮아, 잘했어. 2천 포인트 정도 쓰게 해줄게.” “정말이에요? 주인님 멋쪄요!” 우진은 피식 웃으며 집사의 권한으로 쓸 수 있는 에너지를 2천 포인트 분배해 줬다.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던 비비는 야무진 얼굴을 하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엔 꼭 이겨주겠어요! 내일 당장 할까요?” “아니야. 여유 있을 땐 내버려둬.” 12일의 보호 기간. 현실 시간으로치면 단 3일의 시간이다. 영지전을 신청하면 보호 기간이 사라지니 무한 전쟁이 가능하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에너지의 보유 총량으로 매겨지는 영지의 랭킹을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겼다.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우진의 레벨. 72좌와 맞닥뜨렸을 때, 적어도 예전의 무력은 모두 되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아직 완전히 동기화되지 못한 지구는 그들의 힘을 제약한다. 하지만 영지전이나 결투에서 만났을 때는 100%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우진도 모든 전력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리치 제니스부터 본 드래곤 용용이까지 말이다. 거기에 데스나이트들의 레벨도 올려 휘하에 더 많은 스켈레톤을 편성해야 했다. “어디 보자.” 우진은 이번에 새롭게 얻게 된 던전을 살펴보았다. 자쿠 행성의 내시아의 기둥. 지구의 던전이야 우진의 영향력으로 인해 아무도 던전에 입장하는 이들이 없었지만, 자쿠 행성이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곳의 각성자들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 할 터. 그 대비가 필요했다. 우진은 부랴부랴 던전에 에너지를 채워 넣고 리셋되는 몬스터들을 해골병사와 해골마법사들로 바꿔놓았다. 그저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낼 정도의 적은 수만 배치해 던전을 지키는 몬스터 리스폰 가격을 아꼈다. “어떤 놈들이 오는지 볼까?” 매번 탐험가이자 도전자의 입장에서 던전을 공략해 봤지, 주인의 입장으로서 도전자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내시아의 기둥을 통해 자쿠 행성의 각성자들이 던전에 발을 디뎠다. <‘내시아의 기둥’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자쿠 행성과 차원 영지의 동기화가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30일.> 왕좌의 뒤, 제단에 위치한 보라색 차원의 증명 옆에 초록색의 귀환석이 생성되었다. *** 길쭉한 몸에 넓은 귓바퀴, 푸른 피부에 직립보행을 하는 아인종. 짐승의 가죽옷으로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라티족 일곱이 내시아의 기둥을 통해 던전에 입장했다. “시체 인형이다. 머리통을 부숴라.” 무리의 리더인 레릭은 라티족 중에서도 특출난 전사. 두 발로 땅을 디딘 이후부터 전장을 전전한 그의 경험은 스켈레톤의 처치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도 모두 숙련된 라티족 전사들. 둥근 동굴 모양의 내시아의 기둥 내부를 청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즈아아앙. 입구에 생성된 붉은 포탈을 보며 레릭이 중얼거렸다. “천상 던전이다. 단단히 준비하고 돌입한다.” 일곱의 라티족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는 붉은 포탈을 통과했다. 잠깐의 어지러움이 가시고 나타난 곳은 황무지였다. 주변에 몬스터들은 없었다. “주변을 경계한다.” 천상 던전은 무엇이 튀어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더욱이 리셋이 일어났기에 정보가 전무하다. 공략만 이루어낸다면 앞으로 이 던전은 종족의 생존을 위한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이미 황폐화된 자쿠 행성에서 혈석만큼 귀중한 에너지원은 없으니 말이다. “철갑코뿔소다.” 저 멀리 덩치 큰 코뿔소 무리를 보곤 레릭이 신호하며 라티족 전사들을 이끌었다. 자쿠 행성에서도 출몰하는 짐승. 철갑코뿔소를 향해 다가가던 레티족은 곧 걸음을 멈춰야 했다. 끼아아악!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늘의 공포, 와이번이었다. “비룡이다!” 재빨리 엄폐물을 찾았다. 황무지지만 듬성듬성 나무와 바위들이 있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락샤!” 레릭의 외침에 주술사 락샤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허공에 대고 연주하는 듯한 그녀의 손가락이 몇 번 튕기더니 번개의 창이 나타나 와이번 하나를 저격했다. 파치직! 끼아악. 번개처럼 날아가 작렬한 힘에 와이번 하나가 눈을 까뒤집으며 추락했다. 하지만 아직 여덟 마리나 더 있었고, 다시 한 번 주술을 준비하는 사이, 와이번 무리가 일행을 덮칠 것 같았다. “어? 라이더다. 대응 준비!” 와이번 하나에 안장에 매달아져 있고 그 위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야생의 비룡도 위험하지만 라이더가 조종하는 것들은 더욱 위험하다. 라이더가 마법사라면 하늘에서 날려대는 마법만큼 짜증 나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와이번에 타고 있던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쿵! 흙먼지를 울리며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영지의 주인, 강우진이었다. “자쿠 행성이라.” 강우진은 상점을 뒤져 자쿠 행성의 언어 알약을 구입했다. 일곱 개 정도를 연달아 먹으니 그중에 눈앞의 모험가들인 라티족의 언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르달에 온 걸 환영하지.” 허공에서 이상한 알약을 몇 개 꺼내 먹더니 곧 유창한 라티족 언어를 쏟아내는 그를 보며 레릭이 바위 뒤에서 나와 모습을 보였다. “정체가 뭐지? 인간.” 짐작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천상 던전의 주인들 중엔 인간, 트롤, 오우거 할 것 없이 수많은 아인종과 지성 종족들이 있었으니까. “여기 보스.” 우진이 양팔을 벌려 땅을 가리켰다. 그 여유로운 손짓에 레릭이 기회를 노렸다. 보스를 잡으면 던전은 공략된다. 천상 던전이 주인과의 연결 고리를 끊고 혈석 광산으로 변모한다. “자쿠 행성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 우진의 말에 레릭이 자신의 검을 쥐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검은 쿠크리를 닮아 있었다.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순순히 대화해 줄 생각이 없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누가 대화를 하자고 했나?” “……!” 휘리릭! 우진의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뭉쳐 데스나이트들이 일시에 소환되었다. “사령술이다!” 짙은 사기를 내뿜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대전사에 버금가는 기세의 언데드 몬스터. 데스나이트의 등장에 라티족들이 동요했다. 고작해야 7인의 라티족이 공략하기엔 던전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50기는 넘는 데스나이트. “후퇴한다!” 레릭의 빠른 판단에 라티족들이 빠르게 몸을 빼냈다. 거리를 벌려 귀환 구슬을 사용해야 한다. “무조건 하나는 잡아와.” [사냥이다!] 우진의 명에 데스나이트들이 재빨리 유령마를 소환해 내달렸다. [키바, 나와 내기하지 않겠나?] 람손이 기세 좋게 치고 나가자, 키바가 유령 늑대를 타곤 으르렁거렸다. [애송이들.] 그들의 경쟁적인 움직임에 라티족은 재빨리 도망쳤으나 얼마 가지 않아 포위되고 말았다. 레릭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양손에 든 곡도를 휘둘렀으나 사슴 사냥하듯 몰아붙이는 데스나이트 무리에겐 역부족이었다. ‘이건 아니야.’ 레릭은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라티족의 대전사. 그동안 수없이 많은 던전을 공략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미친 수준이었다. 자쿠 행성을 점령한 던전들. 가끔 행성에 모습을 보이는 그 주인들의 전투력을 보면 오금이 저리지만 상대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상대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푸욱! “…라티의 혼….” 심장을 관통당한 창을 쥐고 마지막 주문을 외치려 했다. 모든 생명의 힘을 모아 터트리는 자폭의 비술. 스컥! 재빨리 다가온 알 아사드의 검이 레릭의 머리통을 몸과 분리시켜 버렸다. 우진은 그의 영혼을 봉인석에 봉인하고는 알 아사드를 보며 웃었다. “신병 받을 준비해라.” 알 아사드가 그 혹독한 신고식을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뼈에 사무친 고통의 순간이었다. 어차피 남은 게 뼈밖에 없지만…. “어? 왜 여섯이야?” 우진이 시체를 세어보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와이번을 타고 착지했던 곳 근방에 포탈이 열렸다. 우진이 그것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쯧, 한 놈 숨어 있었네.” 주술로 몸을 숨겼던 라티족 락샤가 귀환 포탈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하나 놓쳤다고 해서 크게 아쉬울 것은 없다. 자쿠 행성을 가이드해 줄 좋은 데스나이트 재료를 얻었으니 말이다. < 116화 - 자쿠행성의 방문자들 > 끝 ⓒ 진설우 < 117화 - 자쿠행성의 방문자들 (2) > 레릭의 일행이 다녀오고 난 뒤 더이상의 방문자는 없을줄 알았다. 지구에서도 귀환포탈을 이용할 수 있는 회수는 세 번뿐이었기에 상위던전의 공략에 신중을 기하기 마련이다. ‘내시아의 기둥’이 리셋되며 우진의 차원영지인 아르달이 자쿠행성에 링크 되었다.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 자쿠행성인이 공격해올 것만 염두에 뒀는데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이건, 뭐….”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도 방법이긴 하네.” 우진의 던전인 내시아의 기둥을 찾는 것은 자쿠행성인만이 아니었다. 자쿠행성은 이미 트라넷의 영향력에 모두 넘어갔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자쿠행성에 던전을 가진 차원영주들만 해도 수십 수백은 될 터. 아르달에게 귀속된 내시아의 기둥 인근에 던전을 가진 이웃 차원영주들이 우진의 영지를 찾은 것이다. <영주 ‘드레드’님이 방문했습니다.> “또, 오네.” 영주끼리의 대결엔 참 많은 가짓수가 있었다. 가장 최근 우진이 방문자의 입장에서 쥬리엘의 광야에 입장했을 때 떠올랐던 메시지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때 당시야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쥬리엘의 광야에 입장하셨습니다.> <미배치 상태로 ‘결투’, ‘영지전’모드가 선택 불가합니다.> <‘방문’, ‘잠입’, ‘공략’모드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우진은 그때 ‘영주’의 등급을 획득하지 못해 결투와 영지전 자체를 고를 수 없었다. 그것은 영주들끼리만 가능한 유희였으니까. 방문자라면 라티족처럼 공략만 가능했고, 영주라면 두 가지의 선택지가 더 추가되었다. 우진은 쥬리엘의 광야에 공략으로 도전했고, 지금 찾아온 불청객은 방문을 해왔다. 싸울 의사가 없는 평화적인 발걸음이지만 영주가 거절한다면 방문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잠입. 하지만 우진의 영지는 영지민들이 너무 적어 몰래 잠입하더라도 금방 들통이 날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주인님! 징그러운 문어가 또 왔쪄요!” “알아.” 영지의 관문에 모습을 드러낸 대형문어 드레드의 출현에 비비가 호들갑을 떨었다. “여기로 데려와.” 잠시 후 영지의 병력인 오크병사의 안내에 따라 드레드가 모습을 보였다. 커다란 황소의 몸통만 한 머리와 그것을 받치는 길쭉한 다리들이 쉴 새 없이 꿈틀대는 모습에 비비는 고개를 돌렸다. “또 왜 왔어?” “쿠루루, 이웃끼리 자주 왕래하는 건 무슨 의미겠나? 친하게 지내자는 것 아닌가?” “한 번 더 오면 게이트 오픈 후에 네 던전부터 박살 낼 거야.” 우진의 선전포고에 드레드의 몸이 꿀렁거리며 요동쳤다. “쿠루룩,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여기 이 선물을 깜박 했지 뭔가? 이것을 주려고 들렀지.” 드레드는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올 때마다 화친을 이유로 선물을 줬는데 그것은 방문을 거절당하지 않기 위한 핑계였다. 가져오는 선물들이 꽤 쓸만한 것들이라 우진도 굳이 막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다른 차원영주들과 꼭 전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말이다. 드레드는 꽈배기처럼 감았던 팔 하나를 펼치자 그곳에서 몽둥이같이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아이석상과 비슷하게 생긴 나무로 된 길쭉한 인형이었다. “그건 뭐야?” “쿠룩, 쿠루룩, 토템이야. 영지의 에너지 성장을 가속하지.” “고마워.” 우진이 흔쾌히 토템을 받아 식별마법을 시전했다. <포츠카의 기원> 영주성에 진열 시 영지 전체의 혈석 증가율을 가속한다. 혈초재생 + 1% 효과는 미비하지만 이런 종류의 아이템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쿠루룩.” 드레드는 거절이라곤 모르는 강우진을 묘한 눈으로 보았다. 벌써 세 번째다. 자신의 성의 표시에 받기만 할 뿐 권태로움이 가득한 염치없는 인간 영주. “왜? 줬으면 가봐.” “…….” 우진의 반문에 드레드는 뻘쭘하게 몇 초 서 있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쿠룩, 이쯤 되면 보답이라도 해줄 때가 되지 않았나?” “…….”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뭐, 이정도 정성이면 꿍꿍이가 뭐든,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되지 않을까. “뭐, 밥이나 같이 먹을까?” 드레드가 반색하며 춤을 췄다. 그 큰 몸을 꿀렁거리자 비비가 질색하며 우진의 뒤로 숨었다. “좋지, 좋아.” “음, 있어봐.” 우진이 차원상점에서 몇 가지를 사자 영주성에 커다란 식탁이 생겨났다. “뭐 먹을래?” “쿠루룩, 초대해준 주인의 마음대로.” 초대한 적은 없지만 어쨌든 영지의 주인 된 입장에서 우진은 메뉴를 골랐다. 한식으로 골라볼까? 전 차원을 아우르는… 없는 게 없는 차원상점답게 한식들도 모조리 구입할 수 있었다. 뭔가 매콤한 게 당기는데…. 우진은 익숙한 한식메뉴를 보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버렸다. “낙지볶음?” “그것이 뭔가? 쿠루루.” 우진의 물음에 드레드가 기대에 찬 기색으로 물었다. 드레드가 낙지를 같은 동족으로 여길까? 우진은 인상을 굳히고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 같아도 기분이 나쁠 것이다. “아, 아냐. 못들은 걸로 해.” 우진은 메뉴 중에 그저 손님맞이용 파티음식 세트라는 것을 구입했다. 촤라락. 테이블 위에 펼쳐지는 수십 가지의 음식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이런 비현실적 편리함이라니. 지구에서 먹어본 음식들도, 아르펜의 과일도, 그리고 어느 차원의 것인지 모를 생소한 음식들도 있었다. 우진은 그중 손 닿을 거리에 있는 귤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쿠루루, 손님대접이 융숭하구먼.” 드레드는 몸을 꿀렁거리며 손의 역할을 하는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음식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진이 귤을 씹어 삼키며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드레드는 그런 우진을 힐끗거리며 음식 먹기를 계속하다가 말했다. “이거, 민망해서 빨판이 다 벌렁거리는구먼. 쿠루룩.” “괜히 뜸들이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 드레드는 테이블의 냅킨을 집어 입을 닦았다. 문어발로 그 모양이니 우습긴 했는데 덩치가 하도 크다 보니 비비는 그것도 무서운지 고개를 홱 돌렸다. “쿠룩, 자쿠행성에 어떤 세력들이 있는지 아는가?” “알아.” “음? 쿠르르.” “토착민인 라티족, 검은모자연합, 붉은망치연합, 노란도마뱀연합이잖아.” “어떻게 알지? 쿠르륵.” 드레드는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자쿠행성에 아직 게이트도 연결되지 않은 신입 영주가 말이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쓸만한 정보원을 얻었거든.” “쿠루룩, 이런, 이런. 나보다 더 발 빠르게 다녀간 놈이 있는 모양이군.” 드레드는 슬쩍 그 큰머리를 숙여 보여주었다. 작게 새겨진 노란 도마뱀 모양의 그림. “어디서 다녀갔는지는 모르지만 세 가지 연합 중 난 노란도마뱀 연합의 대영주 라자쿠이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는 게 어떤가? 쿠루룩.” “왜?” “혼자의 힘으로 영지를 지킬 수 있겠는가? 쿠루룩,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나.” “혼자서도 지키는데 왜 힘을 합쳐?” “…….” “그리고 세력은 네 가지 아닌가?” “쿠쿠룩, 라티족들은 그냥 사냥감일 뿐이야.” 행성의 토착민들을 생각하는 차원영주들의 개념이 모두 저러할까? 아르펜에서 보아왔던 트라넷의 영주들도 아르펜의 생존자 연합들은 그저 사냥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차원영주들은 세 가지 연합으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토착민이야 사냥하고 싶을 때 사냥을 하면 되는 그저 야생의 사냥감 정도. 어쩌면 몰살시키지 않는 것은 개체 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을 지도 몰랐다. “마음에 안 드네.” 우진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차원영주보다는 지구의 행성 인이라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드레드의 말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쿠룩, 우리 세력이 가장 강대하다네. 내가 이렇게 제안하러 온 것은 바로 옆에 내 던전이 있기 때문이지.” 우진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자쿠행성에 던전이 몇 개지?” “172개라네.” “엥?” 우진이 깜짝 놀랐다. “왜, 그것밖에 안 되지?” “응? 왜라니, 보통 행성들이 다 그렇다네.” “…….” 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지구엔 던전이 몇 개인가? 지하철역마다 많게는 두 자릿수까지 입구가 존재했다. 그런 지하철역들이 지구에 몇 개나 되는지…. 지구의 던전 숫자가 비정상적으로 많다면 문제다. 그 수많은 던전에 차원영주들이 득실거린다면 끔찍하기만 했다. 생각해보니 아르펜에서도 던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았다. “쿠루룩, 어떤가? 우리 노란 도마뱀과 함께 하는 것이? 라자쿠이님을 본다면 분명 함께하고 싶을걸세.” “아니, 함께하는 일은 없어.” 우진의 단호한 말에 드레드가 몸을 떨었다. “쿠루룩, 이미 다른 쪽으로 마음이 기운 모양이군.” “걱정마, 어떤 쪽으로도 갈 생각이 없으니까.” 드레드의 몸이 출렁였다. “쿠루룩, 쿠쿠쿠, 재밌는 말이군. 혼자서 영지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은가?” “왜 못해.” 누가 쳐들어오던지 그대로 박살 내면 될 일이다. 우진은 영지의 에너지를 이용한 병력의 보충 외에도 강력한 권속들이 있으니 말이다. “쿠루룩, 초보영주 같은 발상이군. 게이트가 둘이면 한 곳만 지킬 수 있지. 셋이면 어떤가? 넷이면?” “…….” 드레드의 말에 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구의 던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곳에 공략이랍시고 들어올 간 큰 지구인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우진이 내시아의 기둥 외에 다른 차원에 또 다른 던전을 얻는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은 하나군.’ 이해했다. 우진은 드레드에게 물었다. “두 던전을 통해 동시에 방문자를 받으면 어떻게 하지?” “쿠루룩, 이거 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영주군.” 드레드는 몸을 꿀렁거리더니 크고 검은 그 두 눈이 우진을 노려보았다. “쿠룩, 마지막 호의로 대답해주지. 던전의 수만큼 영지가 생겨날 거다. 각각을 지키는 강력한 던전 관리자를 섭외해야 할 거야. 그들이 죽으면 던전을 잃을 테니.” 차원 영주의 하위 등급인 던전오너. 영주의 가신이기도 한 그들이 해당 던전을 통해 차원 영지로 흘러들어오는 방문자들을 저지한다. 우진이 여태 본 던전의 보스몬스터들은 모두 던전의 관리자, 던전 오너였다. “쿠루룩, 뭐,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영주라면 그런 패기를 가질 만 해. 쿠루룩, 몇 번 죽어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결투를 하다 죽거나, 영지전에서 패배해 차원 영지의 에너지를 계속해서 소모하거나, 결국 언젠가는 조바심이 들것이다. 그때가 되었을 때 동맹의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쿠루룩, 잘 생각해보게.” 드레드는 자신만만한 우진의 기세가 얼마 가지 않을 거라 여겼다. 조만간 자신의 영지를 방문해 라자쿠이 대영주를 소개해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 드레드는 꿈틀거리는 다리를 열심히 놀려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흥, 어디서 기분 나쁜 문어가.” 비비는 드레드가 있을 때는 한마디도 못하더니 그가 가고 나자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우진은 그가 남기고 간 점액질로 지저분해진 바닥 만큼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찝찝했다. ‘차원영주라.’ 차원영주들끼리의 무한 경쟁. 이 판을 깔아놓은 트라넷의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해봐야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제 한동안은 안 오겠져?” 어지간히 불쾌했는지 비비는 질색을 했다. 우진이 뜻을 확실히 전했으니 앞으로 방문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방문하는 영주들이 있으면 모조리 거절하도록 해.” “잠입하면 어쩌져?”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영지에 몰라 잠입하는 차원 영주? “죽여.” “알았쪄요.” 내시아의 기둥을 통해 우진의 차원 영지가 자쿠행성에 완전히 동기화 되어 게이트로서의 역할을 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30일. 자쿠행성의 수많은 영주들과 대면하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 “레벨업 좀 해야겠는데.” 아르펜 행성의 대마법사 리치 제니스. 우진의 가진 가장 강력한 마법전력이자, 최초의 스승을 만나야 할 때가 다가왔다. < 117화 - 자쿠행성의 방문자들 (2) > 끝 ⓒ 진설우 < 118화 - 리치 제니스 > 내시아의 기둥은 아직 동기화 중이라 모험가들의 공략을 받고 있긴 했지만, 목숨이 아깝지 않은 부나방들이 아니라면 섣불리 덤벼들진 않을 것이다. 덤벼봐야 한 곳에서만 모험가를 받으니 영지의 전력이 나뉠 일이 없었다. 53기의 데스나이트라면 든든하다. 레릭과 같은 모험가 무리 몇을 받더라도 수비해 낼 수 있었다. 지구의 던전은 사용할 일이 없으니 차원 영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서 사냥을 할까….” 방법은 많았지만 어떤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보호 기간을 포기하고 다른 영주들을 상대로 영지전을 걸어 재결투를 신청해 차원 영주들을 잡아 경험치를 먹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보호 기간인 12일. 지구의 시간으로 3일 동안 지하철역을 공략하면서 사냥해 오는 것도 한 가지 방법. “지금쯤 링크 중인 곳도 몇 있겠지?” 점점 더 난이도가 높은 던전들이 지구에 링크해 오고 있다. 세계의 각성자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미공략 던전들도 몇 있을 터. 던전 오너의 것이라면 그 자체의 몬스터만 소탕하면 되지만, 만약 차원 영주의 던전이 완전히 링크되어 게이트화된다면…. 일시적인 던전 브레이크가 아닌, 계속 몬스터를 뱉어내는 부화장을 제공하는 격이다. 더욱이 그곳에서 튀어나올 몬스터는 괴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사 인종인 엘프들이 튀어나와 지구인들을 사냥한다면… 아니, 아예 인간들이 튀어나와 같은 인간들을 사냥한다면 지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 번은 정리하고 와야겠어. 비비, 영지 잘 지키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겠쪄요. 그런 의미에서 1,000포인트만 더….” 우진이 피식 웃으며 집사의 권한으로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최대한으로 올렸다. “1,000 포인트만 마음껏 써. 나머지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주는 거야. 위험에 처하면 쓰도록 해.” “헤헤, 알겠쪄요.” 이 정도 대비면 내시아의 기둥을 통해 도전하는 모험가들은 충분히 막아낼 것이다. 뭐, 최악의 상황으로 동기화 중인 귀환석을 지켜내지 못하면 그저 던전 하나와 에너지를 잃을 뿐이다. 아쉬운 것은 없다. 더 큰 사냥터가 될 자쿠 행성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것뿐이다. 우진은 서울역 1번 출구로 향하는 포탈을 열어 그곳을 통과했다. *** 아르달길드의 부사장실. “후우.” 민찬은 전화를 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식을 기다리던 해민이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기다리래.” “…이거 큰일 아닙니까? 사장님 오시기 전엔 해결해야 할 텐데.” “후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민찬과 해민의 얼굴은 어두워져 갔다.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 젠장. 정부는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말이 바뀐대요?” “그 이야긴 그만하자.” “예에….” 이유야 잘 알고 있다. 우진이 던전에 들어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였다. 데스나이트 하나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아르달의 사무실에 선물을 두고 갔다. 사람 일곱의 수급. 기절한 직원이 여덟 명에, 그 자리에서 구토한 직원이 열다섯이다. 더는 놀랄 일이 있을까 싶었던 민찬에게도 그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임무 완수.] 데스나이트는 한마디를 남기고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뒤집어진 것은 아르달 사무실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자체가 요동쳤다. 국회의원들의 테러 징후 포착과 그들을 일망타진한 강우진의 뉴스가 도배된 가운데, 머리가 사라진 일곱 명의 시신. 내로라하는 재계의 인물들이 한순간에 암살되었는지라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소동 끝에 죽은 것과는 조금 다른 충격을 주었다. 암살 배후로 강우진이 지목되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이 들이닥쳤고 그들의 수급을 가져갔다. 곧 속보가 발표되어 그들이 이번 테러와도 연관되었다는 기사가 떴으나 여론은 좋지 못했다. 강우진이 국회를 점거하고 국회의원을 골라내 죽인 것은 테러를 막기 위한 급박한 상황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넘어가 줄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번 암살은 다르게 다가왔다. 일개 개인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죽일 수 있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강우진에 대한 두려움이 그에 대한 반감을 가져왔다. 엄연히 법이 있는데 그가 신이라도 되는양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취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분위기였다.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고 있으니 헌법을 개정하는 대국민 투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북한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아르달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법을 뜯어고쳐야 가능했다. 그것을 가능케 하려면 국민의 투표가 필요했고 말이다. 독립이 불투명한 상황. “어떻게 하죠? 준비는 그대로 합니까?” “…계속해야지.” 준비 단계에서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게 생겼으나 멈출 수는 없었다. “정부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어휴, 그래도 해야지.” “요즘, 돌 맞을까 봐 돌아다니기도 무섭습니다.” 해민의 말이 백번 공감되었다. 여론이 매우 좋지 못했다. 은근슬쩍 몰아가는 언론이 문제긴 했다. 그들의 뒤에 이번에 암살당한 재계 인물들과 관련된 회사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들도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암묵적 두려움이 그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힘과 능력을 보이는 강우진에 대한 두려움이 국민들까지도 불안하게 만들었고 말이다. 조금 더 상황이 지나면 아르달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축출될 상황이었다. “끙, 그래도 이강진 씨 덕에 얼추 틀은 완성했는데, 정부 협조가 없으니….” 아르달 시국의 영토는 서울역과 인근의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아르달길드 명의로 매입한 땅들. 국민들은 길드의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했다. 길드에 입사하는 것 자체가 아르달 시국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허용과 양국 간의 통행의 자유와 한화를 통화로 사용하는 것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대한민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 모든 내용을 포함하는 조약서가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체결될지는 미지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애초에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싶기도 했다. 저 위쪽의 북한도 헌법엔 우리나라 국토를 불법 점유한 단체로 규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일단 준비라도 철저히 해보자.” “예, 부사장님.” 민찬과 해민은 서로 복잡한 눈빛을 교환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졌을까? 그저 해머길드를 나와 아르달에 입사한 것뿐인데…. 다섯 명으로 시작한 작은 길드가 불과 몇 달 사이에…. “그나마 가족들이라도 데려와서 다행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우진의 가족과 성구, 해솔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길드의 직원들이 원하는 모두를 아르달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겨우 1백 명 내외. 직원까지 모두 합쳐도 겨우 500명을 넘을까 말까 한 인구였다. “길드 총회 전엔 나오시겠지요?” “그렇겠지.” 해머길드가 주관하기로 한 대한민국의 길드 총회. 주최야 해머길드에서 하지만 그것을 원한 사람은 우진이었다. “저희 해머길드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요?” 해민의 물음에 정민찬이 이마를 찌푸리며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뭐하긴, 강우진 욕하면서 총회 준비하고 있었겠지. 난 팀장이고, 넌 대리로.” “크큭, 그러고 보면 저희 지금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을, 아니,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수준인데요?” “그래. 제대로 성공했지. 너무 성공해서 이젠 무섭기까지 해.” 고속 승진의 수준이 아니다. 아예 번개 승진 수준. 그때 민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우승훈의 번호에 전화를 받았다. “어, 우 실장.” [지금 사장님 나오셨습니다. 사무실로 가는 길인데, 미공략 던전 리스트 뽑아놓으시랍니다.] “알았네. 잘 모시고 오게.” [걱정 마십시오.] 인근에 깔린 기자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 시위하러 온 종교 단체의 인물들도 있어, 충돌이라도 일어나면 우진의 성격상 국민 여론이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나빠질 수 있었다. “사장님 오셨다. 빨리 보고할 거 준비해라.” “넵!” 대충 얼개는 짜여 있기에 서둘러 준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진이 도착하자 주차장까지 마중 나간 민찬과 해민이었다. “뭘 나오고 그래. 별일 없지?” 별일이 없긴 왜 없는가.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정부도 난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암살건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거지요.” “죽일 놈 죽였는데 왜 그래?” 정도라는 게 있지… 그것을 넘어선 처사다. 법에 따라 절차를 밟고, 재판을 하고, 형을 집행해야 한다. 물론, 절대 사형선고가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우진의 행동은 살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약이고 뭐고 맺지 마, 그럼.” “예?” 나라 건국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나? 우진이 말을 뒤집는 걸 본 적이 없기에 민찬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그럼 독립은 취소입니까?” “그냥 한국하고 국교 맺지 마.” “…….” “내가 아쉽냐, 지들이 아쉽지.” 그럼 어떻게 하는가. 서울 한복판에 고립되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디서 건방지게 지들이 인정하고 말고야.” “…대한민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당장 한국에서 활동이 불가하고 수많은 던전의 이용도 불가하다. 사회 기반 시스템도 없으며 전기, 식수의 해결도 불가하다. 그저 서울 한복판의 작은 땅에 갇힌 난민 수준. “그냥 한국을 먹을까.” “아, 안 됩니다.” 우진의 그냥 툭 뱉은 말에 민찬이 깜짝 놀라 만류했다. 극한 상황이 사람의 잠재력을 깨우는가? 그는 필사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타개책을 생각해 냈다. “미국 정부를 이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미국? 이사는 안 간다고 말했다.” 차원 영지로 이어지는 던전인 서울역 1번 출구는 지켜야 했다. 우진의 말에 민찬이 고개를 저었다. “미국 정부를 움직여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겁니다.”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먹혀?” “먹히지요….” 민찬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어이없지만 현실이 그랬다. 우진은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 중간 다리를 해줄 사람이 한국에 있었으니까. “메르디 어딨어?” “사장님 동생분이랑 함께 있습니다.” “안내해. 그리고 지금 당장 미공략된 던전 리스트 다 뽑아와.” “예에.” 우진이 비서실장 승훈의 안내에 집으로 사용하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가장 아래층인 1층 전부를 아예 집처럼 꾸며놓았다. 그곳에 아르달 길드원의 가족들이 몇몇 이사와 있었는데 우진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101호라고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깔끔한 호텔 같은 느낌의 거실이 모습을 보였다. 초조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우진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우진아.” “응? 왜 그러세요?” 이수경은 아들을 보자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수아가….” “수아가 왜요?” 우진도 깜짝 놀랐다. “수아가 또 발작을 했구나, 흐윽.” 눈물을 쏟는 어머니를 꼭 안아주며 물었다. “수아 어딨어요?” “저쪽 방에 있다. 성녀님이 돌봐주러 가셨어.” “괜찮을 거에요. 괜찮아.” 우진은 어머니를 한동안 달래주며 메르디가 나오길 기다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가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그를 보곤 흠칫 놀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동생분의 증상은 조금 진정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수경이 성녀의 손을 잡곤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우진이 그런 그녀를 보곤 말했다. “메르디,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예에, 임모탈이여.” “사장실로 와.” 어머니의 앞에서 이야기하긴 불편했으니 우진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집을 나서는 그의 눈빛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118화 - 리치 제니스 > 끝 ⓒ 진설우 < 119화 - 리치 제니스 (2) >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비서가 가져다준 커피에서 오르던 김이 사라질 만큼 식었을 때, 성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수아님의 상태를 아셨습니까?” “대충 짐작만.” “…….” 메르디는 대답할 말을 찾기 위해 한동안 침묵해야 했다. 그래도 가족인데….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내가 뭘 어찌할 수 있는 게 있나?” “…….” 동생이다. 할 수만 있었다면 진즉 낫게 했겠지. 하지만 이건 치료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진이 수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도뿐이다. “어떤 분께서 오실지는… 저도 가늠하기 힘듭니다.” “난 괜찮아.” “…….” “수아가 힘들지.” “…….” 우진은 그저 씁쓸한 정도다. 정확히는 마음이 아픈지도 모르겠다. 그저 안타까울 뿐…. 어머니가 힘들겠지. 수아도 힘들고.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게 미안해할 것 없어.” 수아가 어떤 고통과 어떤 선택에 놓인지는 누구보다 메르디가 잘 안다. 어릴 적 그녀가 겪었으니까. 수아는 신의 씨앗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수아의 안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 그녀는 성녀로 각성할 것이다. 우진은 착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이대로 인간에서 멀어지는가…. “하실 말씀은 무엇이신지….” 우진의 표정이 워낙에 심각했기에 성녀가 눈치 보며 조심히 물었다. “아, 미국에 전화해서 한국 정부 압박 좀 하라고 해.” “예?” “내가 아르달을 세웠는데 남들이 인정하네 마네 하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메르디가 토끼 눈이 되었다. 그녀가 무릎 꿇었다. “임모탈이여, 참으십시오. 생명을 굽어 살피시어….” “그렇게 덥석덥석 무릎 꿇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우진이 인상을 팍 썼다. 안 그래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운데 성녀라는 여자가 신처럼 대하니…. “서로 귀찮지 말자고 하는 거 아냐, 좀 자유롭게 활동하려고. 그런데 한국이 자꾸 날 옭아매려고 해.” 우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우루하 제국과 같군요.” “음, 뭐 비슷하지.” 불사왕 임모탈에게 공작의 직위를 주고, 공주와 혼인시켜 주겠노라 별별 소리를 다하며 그를 제국에 두려다가 멸망한 불운의 국가. “절대 귀찮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성녀는 굳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3일 뒤에 보자고.” 보호 기간 12일. 지구의 시간으로 3일 뒤 차원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아르달길드야 원래 바쁘고, 성녀도 바쁘게 될 것이고, 우진도 그사이 최대한 많은 던전을 처리할 생각이라 바빴다. “3일….” 메르디는 조용히 되뇌었다. 3일 내로 아르달을 세계에서 인정하는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임모탈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 우루하 제국이 멸망한 게 강우진의 소행이었으니 말이다. 각자가 느끼는 무게는 조금 다른 3일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 우진은 공항에서 반가운 인물과 재회했다. “강 아우!” “백 형!” 백종도는 자신을 따라 손을 들어주는 강우진을 보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세계적인 스타가 자신을 알아주는 기분. “으하하. 이렇게 다시 보니 좋구만, 좋아.” “신세 좀 질게요.” “으엉? 신세라니. 당연히 도와야지!” 전세기를 빌려달라는 아르달의 요청에 백종도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우진의 옆에 선 홍성구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쪽이 불꽃성구 씬가?” “…그 유치한 이름은 뭡니까?” “요즘 SNS에 얼마나 유명한데. 으하하, 자자 출발 전에 사진이나 한 번 찍자고.” 백종도가 홍성구와 어깨동무하며 셀피를 찍었다. 배경에 어이없어 하는 강우진의 얼굴도 나왔다. “흐흐, 이거 대박이구만. 좋아요 100만도 문제없겠어.” “헤헤, 백 사장님 제가 퍼가겠습니다.” “으허허, 불꽃성구 씨 지원이면 좋아요 1,000만도 가능하겠는데?” “으헤헤, 제가 세계적으로 좀 유명하죠.” 금방 죽이 맞아 의기투합한 둘을 보고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백종도와 그의 전속 비서 정찬성 상무, 그리고 아르달의 강우진과 홍성구, 비서실장 우승훈이 비행기에 올랐다. “어디부터지?” “일본입니다.” 승훈이 태블릿 피시를 우진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화면에 세계지도가 떠 있었고 빨간 점이 퍼져 있었다. “총 몇 개야?” “32개입니다. 이 중 공략해 줄 것을 요청받은 것은 열두 개입니다.”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것밖에 안 돼?” “아직 시일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자력으로 해보고 싶겠지요.” 요청받은 열두 개도 거의 던전 브레이크가 임박한 던전들이다. 그것들의 동선과 시간에 따라 스케줄이 짜여 있었다. 가장 첫 번째가 일본. “파란 게 요청 안 한 것들이지?” 우진이 일본의 지도를 확대해 보았다. 빨간 점이 두 개, 파란 점이 네 개다. 지하철역도 많다 보니 리셋된 미공략 던전이 여섯 개나 되었다. 그중 브레이크가 임박한 두 개의 던전. 하나는 오사카, 하나는 도쿄에 있었다. “서울에서 그 난리를 보고도 아직 자력으로 깬다고? 전 세계 각성자 줄 세워서 스페셜 팀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 우진의 쓴소리에 우승훈이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저 묵묵히 듣고 있는데 한참 떠들던 백종도와 홍성구가 눈치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흠흠, 강 아우 왜 그러나?” “아뇨. 꼴이 우스워서요.” “뭐가 말인가?” “칼을 거꾸로 쥐고 욕심 부리는 게 웃기죠.” “흠, 몇 번의 던전 브레이크가 있었지만 결국 잘 막아왔으니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서도 투자하려는 게 아닌가?” “뭐,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이없긴 하네요.” 이렇게 될 줄이야 진즉 알고 있었다. 결국엔 우진이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고, 링크에 성공한 차원 영주들이 생겨날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차원 영지를 얻으면서, 이 더러운 트라넷의 구조를 조금씩 알게 됨으로 답답함이 조금 더 쌓일 뿐이다. 이미 막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나락을 향하고 있는 지구를 보면서도 아웅다웅하는 각 나라들의 행태가. 아니, 나락을 본 것은 우진만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종말을 알리며 경각심을 주기 위해 각성자 총회를 준비하라 한 건데 해머길드는 왜 아직 소식이 없을까? “백 형, 각성자 총회 언제한대요?” “응? 아직 열흘쯤 남지 않았나? 그런데 그건 왜 해머길드에 맡기는가.” “뭐, 지들이 한다기에요.” “에잉, 나한테 말하지 그랬나. 해머랑 같은 3대길드로 불리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KH를 따라갈 길드가 어딨다고. 아, 아우의 아르달은 이제 한국 길드가 아니니 하는 말일세. 하하하!” 백종도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재계 인물들의 암살에 KH 쪽 사람들은 없었다. 적어도 던전 관련된 사업이나 테러 조직의 후원에는 연관이 없는 기업이라는 말. “이번 던전에 같이 가실래요?” 백종도가 그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나도 끼워주나?” 강우진은 다른 각성자와 함께 팀플레이를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가 던전을 공략할 때 함께 팀을 이루는 사람은 홍성구와 최해솔이 유일했다. 그래서 강우진의 남자로 알려진 홍성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무시무시했다. 그가 올린 SNS의 사진이 벌써 20만 뷰를 기록할 정도로 말이다. “뭐, 3일 동안 세계 여행할 건데 같이 가죠, 뭐.” “으하하하, 이거이거 기대되는데.” 사람 좋게 웃는 그를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괜찮은 사람이다. 이해득실을 따졌으면 선뜻 전용기를 끌고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흐흐흐, 이 사실을 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야겠군. 아우, 사진 하나 찍자구.” “…….” 방긋 웃으며 카메라를 쭉 뻗는 백종도를 보며 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걸 왜 해요?” “왜 하다니, 정보화 시대 아닌가. 알려야 좋지.” “허, 뭐 중요한 거라고 그렇게 생중계를 해요. 나중엔 똥 싸는 것도 알리겠네.” “응? 어떻게 알았나?” “…….” 우진은 어이없어 하는데 백종도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정말 그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우진이 피식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다른 행성에 비해 수십 배에 달하는 던전을 보유하고도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초고속 네트워크 때문이 아니었을까. 행성의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을 10분도 되지 않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KH길드의 전용기가 간사이 공항에 착륙을 준비했다. *** 간사이 공항 대합실. 센세이길드의 A급 각성자 타쿠치는 공항에 바글바글한 사람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귀빈을 모시러 왔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SNS에 강우진 씨의 오사카 방문 사실이 올라왔습니다.” “음?” 타쿠치는 지원부 직원이 보여주는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장난스레 웃고 있는 강우진과 KH길드의 백종도 사장의 셀피. 그리고 그 아래 적힌 글귀. - 친한 동생 강우진과 함께 던전 클로징 투어. 첫 시작은 오사카에서…. - 어머, 강우진 씨가 지금 간사이 공항으로 오고 있대! 유치한 이모티콘까지 들어가 있는 한글을 번역할 필요는 없었다. 백종도 사장의 SNS에서 사진을 퍼온 계정의 주인이 친절하게 일본말로 적어놓았으니까. “누구 계정이야?” “사쿠라 아이 계정입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아이돌인 그녀의 SNS라면 소식이 퍼지는 데 단 몇 분이면 가능하다. 그 짧은 시간에 몰려든 사람만 수백 명. 그중 상당수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골치 아프군.” 센세이길드에서 최초 발견한 던전의 클로징을 의뢰한 귀빈을 모시는 자리인데 이렇게 정보가 새어나갔으니…. 타쿠치는 강우진을 데리고 간사이 공항을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저기 나옵니다. 어어?” “…….” 지원부 직원이 가리킨 곳을 보자 타쿠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귀빈을 안전하게 모시고 가고 말고 할 게 없었다. 키키킥. 해골병사들의 수만 해도 서른. 쇄골을 훤히 드러낸 그들이 뼈칼을 들고 앞장서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몬스터의 호위를 받으며 홍해를 가르듯 인파를 헤치고 나오던 강우진은 우승훈에게 말했다. “마중 나온다며?” “예. 나온다고 했었는데 제가 일본어가….” “어이구, 외교부장관한다고 하더만.” “…….” 승훈이 할 말이 없어 입을 삐죽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리 와봐.” “예?” “이거 마셔.” “예, 주십시오.” “먹여줄게.” “…….” 사장님이 왜 이러시지. 승훈이 수십만 가지 생각에 고민스러울 때 우진은 마개를 열고 그의 턱을 잡았다. “사, 사장니임? 꼬루록.” 승훈의 입에 언어의 물약을 먹여준 우진이 빈 병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콜록, 컥!” “이제 찾아봐.” 한참 기침하던 승훈이 주변을 둘러보다 눈이 동그래졌다. “이, 이건!”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눈앞에 보이는 글자들은 분명 일본어이건만 그 뜻이 이해가 되었다. “으윽, 갑자기 해골 부대라니.” “강우진 씨는 아예 대화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건 일본을 무시하는 거야.”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대화가 귀를 파고든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맙소사.” 승훈이 감탄만 하는 그때, 대기업의 상무답게 일본어 정도야 기본 탑재한 정찬성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이 센세이길드 분들입니다.” 그가 피켓을 든 무리를 가리키자 우진이 아직도 홀로 중얼거리는 승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에휴, 정 상무 아르달로 오는 거 어때요?” “하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백 사장님을 따라야지요.” 우진도 그저 농으로 해본 말이라 그저 피식 웃고는 센세이길드 사람들을 향해 갔다. < 119화 - 리치 제니스 (2) > 끝 ⓒ 진설우 < 120화 - 리치 제니스 (3) > 공략을 요청한 난바역. 우승훈은 험악한 인상을 들이밀며 유창한 일본어로 센세이길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말이 됩니까? 도와주러 온 겁니다. 그런데 합동 공략이라니!] [진정하십시오. 이것도 비지니스 아닙니까? 공략법이라도 알아야 이후에 혈석 채집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센세이길드의 요청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단 시간 안에 던전을 클리어하고 지구를 한 바퀴 돌 생각이기에 딱히 공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남길 수 있을까 싶었다. “이거 원, 물에 빠진 사람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것도 아니고.” “나니?” 승훈의 혼잣말에 그가 인상을 굳혔다. 결국, 혼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던지라 우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어쩌긴, 뭐.” 우진이 센세이길드 사람에게 물었다. “던전 사업도 좋지만 지구부터 구합시다.” “던전 클로징에 대한 보상은 일본 정부로부터 받지 않습니까? 저희는 비지니스를 말하는 겁니다. 먼저 제안을 한 것은 아르달입니다.” “응?” 우진이 승훈을 보며 물었다. “던전 섭외하고 스케줄 짠 거 누구냐?” “김해민 이사가 총괄했습니다.” 우진이 센세이길드 담당자에게 물었다. “조건을 자세히 말해봐요.” “공략을 관전할 길드 측 요원 1인을 대동한다입니다. 첫 공략에 나오는 모든 아이템과 혈석은 아르달 측이 가지고, 이후엔 7:3으로 나누는 겁니다.” 우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 승훈과 성구, 백종도를 보았다. 나쁘지 않은 계약이다. 최초 공략 후에 던전을 반복해 캐내는 건 모두 센세이길드가 알아서 하고, 그 수익만 나눠가지니 말이다. “괜찮네. 30%나 먹고.” “아르달 측이 70%입니다만….” “……?” 우진이 어리둥절해 하자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엔 몇 가지 조항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일본 측의 각성자 하나와 동행해 같이 파티를 이뤄 던전을 공략하며, 이후 운영권은 센세이길드가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그 수익금의 70%를 아르달이 가져오는…. ‘이 자식 사악하네.’ 민찬의 밑에서 오래 구르던 놈이라 그런가, 계약 내용이 아주 사악했다. 센세이 측의 입장에서도 공략하지 못하면 그저 아무것도 안 되지만, 성공만 하면 거저 6성 던전을 얻는 것이니 30%라 하여도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마음에 들어.’ 우진은 마음속으로 그저 김해민을 칭찬해 주고는 말했다. “얼른 준비하라 그래요.”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길드 관계자 뒤에 서 있던 타쿠치가 다부진 얼굴을 하곤 앞으로 나섰다. 애초에 그가 공항까지 마중 나온 것도 이유가 있었다. A급의 각성자이니 최소한 짐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네 명인가?” 우진과 성구, 백종도와 타쿠치. “가자고.” 우진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는 익숙한 듯 성구가 재빨리 뒤따랐고, 기대감에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한 백종도도 던전에 입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안한 얼굴의 타쿠치가 걸어 내려갔다. ‘진짜 이 인원으로 던전을 클로징한다고?’ 그동안 우진이 홀로 해낸 업적이 있긴 했지만 긴가민가한 것은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실패하면 자신 또한 죽게 될 테니 말이다. ‘이건 그냥 6성 던전이 아니야.’ 에너지 측정 수치상 분명 6성 던전을 넘어섰다. 보통의 난이도였다면 일본의 각성자팀으로도 공략 완수했을 것이다. 일본 최고의 각성자들을 뽑은 팀으로 세 번을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하여 브레이크만을 기다리고 있는 던전이다. 타쿠치도 먼저 두 번의 공략팀에 함께했기에 극악한 난이도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귀환 포탈도 쓰지 못하는 던전이니 공략하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기대도 되면서 묘하게 불안하기도 한 타쿠치였다. 던전에 입장하자 결계가 생성되었다. [여긴 시작부터 늑대인… 어?] 타쿠치는 두번의 경험으로 초반 던전 공략의 가이드를 자처하기로 했다. 막 던전에 대해 브리핑을 내뱉던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르륵. 지하철역에 그을음과 군데군데 불길이 남아 있었다. 불이 붙어 타고 있는 물체는 다름 아닌 늑대인간의 시체. [어, 어디 갔습니까?] “난 일본말 몰라.” 홀로 남은 백종도는 손에 들고 있던 날카로운 단검 하나를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은 타쿠치는 고개를 갸웃했다. “캐면서 따라오라더군.” 백종도는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덤벼드는 늑대인간이 1초도 되지 않아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불꽃의 홍성구는 과연 허명이 아니었다. 강우진이라는 거대한 산에 함께 있기에 관심도는 높았지만 세간의 평가는 그저 그의 파트너 정도였다. 하지만 홍성구 자체만도 대단한 전력. 그가 불꽃을 일으키며 달려 나갔고 우진도 데스나이트 20기만 소환해 던전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은 조심조심 전진하며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 시합을 하듯 빠른 속도였다. “백 형, 천천히 혈석이나 캐면서 따라와요.” 강우진이 그 말을 남기고 간 것이 불과 몇 초 전, 벌써 흔적도 보이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게, 뭔.] 어이없기는 타쿠치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그는 한국말이 서툴러도 듣는 데는 문제없어 백종도를 따라 늑대인간의 가슴을 갈라 혈석을 채집했지만, 곧 그것도 관둬야 했다. 바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수십의 언데드 부대를 이끌고 강우진과 홍성구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 가자고.” 그의 말에 타쿠치가 허리를 들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불과 5분이야, 5분이라고.] 던전에 입장한 지 5분. 지하철역 내의 기본 몬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 증거가 입구에 생성된 붉은 포탈. “조심해서 따라와. 제 목숨은 스스로 지키는 거다.” 우진이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는 가장 먼저 붉은 포탈을 통과했다. 타쿠치가 재빨리 뒤따랐다. 이번엔 진짜 던전의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즈아아앙. 포탈을 통과하며 일행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후끈한 열기였다. 매캐한 연기가 섞인 공기는 폐부를 찌르는 고통을 동반했다. “화산이네.” 꿀렁거리며 가스를 내뿜는 용암이 흐른다. 시뻘건 불의 계곡에 솟은 수십, 수백 개의 섬과 같은 바위. 일행은 지름 10미터 정도 되는 바위섬 위에 올라타 있었다. 아래는 용암이 들끓고, 저 멀리 귀환석의 위치를 나타내는 녹색빛은 멀기만 했다. [용암날치들을 처치하면 섬이 움직이며 다른 섬과 만납니다. 그렇게 해서 용암 지역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타쿠치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깨나? 날아가자고.] 우진이 씽씽이를 소환했다. 데스나이트 둘을 더 불러내자 그들도 유령마를 소환했다. [하지만 하늘로 이동하지 못합니다.] [왜?] [섬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면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타쿠치의 설명에 우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허공을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 “성구야.” “예, 형.” “지뢰모기라는 거다. 화산 지대에 사는데 막상 용암 근처엔 다가오지 않아.” “아하! 용암이라도 던질까요?” “아니, 번거롭게 무슨.” 우진이 돌쇠를 소환하자 그가 용암에 풍덩 빠지더니 곧 불타는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어어어!] 몸을 움직일때마다 불이 타올라 파이어 골렘 그 자체였다. 쿠웅, 쿵. 돌쇠가 그 큰 덩치를 움직일 때마다 공중에 떠 있던 지뢰모기들이 황급히 물러섰다. “자, 얼른 타. 뒤따라가자고.” 우진이 씽씽이에 타고 성구를 뒤에 태웠다. 백종도와 타쿠치는 데스나이트의 뒤에 타는 묘한 경험과 함께 허공을 걷는 유령마에 올라타 파이어 골렘 돌쇠의 바로 뒤를 따랐다. [허허, 이렇게 쉽게….] 타쿠치는 허탈한 음성을 뱉었다. 용암에서 훅 튀어 올라 공격하는 용암날치와 용암돌개는 기본적인 불의 내성을 가지고 있고, 몸을 이루는 열기로 인한 속성 공격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거기에 더해 공중엔 지뢰모기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으니… 아니, 폭발 물질이 모기인 줄도 우진이 말해준 지금 알았다. 그전까진 그저 하늘로 떠오르면 폭발하는 줄만 알았다. ‘굉장한 사람이다.’ 수천의 언데드를 거느리는 조직력이나 개인의 무력보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던전에 대한 지식과 해결법이 놀라웠다. 우진은 뒷자리에 앉은 성구에게 이것저것 손으로 가리키며 무언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타쿠치다.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던전에 대한 귀환 정보임은 알아챌 수 있었다. “우진사마, 그런 지식들은 어디서 배운 것이무니까?” “응? 뭐야, 한국말 할 줄 알아?” “조금 하무니다.” 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구긴, 사부한테서 배웠지.” “아아.” 강우진을 기른 사부는 누구인가? 타쿠치가 그저 감탄하는데 뒷자리에 앉았던 성구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형님, 사부가 있었어요?” “당연하지.” “우아…. 그럼 아르펜에 소환되셨을 때 사부에게서 마법도 배우고 다 하신거예요?” 우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다 독학이지.” 우진의 마법적 능력이야 모조리 게임 능력에서 비롯된 것. 그 작동법도 원리도 알지 못했지만 그저 배울 수 있었기에 익히고, 마법을 쓰고, 언데드를 거느리게 되었다. “헉, 그럼 마법이 아니라 무술 배우신 거예요?” 우진의 몸놀림이나 무기술은 숙련된 신체 각성자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능숙했다. “아니.” 무술 또한 우진이 지구로 돌아오며 레벨이 초기화되고 전승되면서 듀얼 클래스를 얻었기에 가지게 된 능력. “헉, 그럼 뭘 배우셨는데요?” “생존법.” “아….” 성구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심각한 얼굴을 한 우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광기와 살육.” “……!” 뭘 그런 걸 배우지? “주저하지 않는 단호함.” “…….” “압도적인 공포감.” “흐윽.” 우진이 저도 모르게 흘려버린 살기에 성구가 기겁했다. 뒤늦게 깨닫고는 기운을 수습했다. “아, 뭐 그런 거 배웠지.” “으으, 대단하신 분이셨네요.” “대단하시지.” “스승님은 그럼 아르펜 행성에 계세요?” “아니, 죽었어.” 성구가 아차 하는 심정으로 서둘러 수습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아니, 뭘. 원래 죽어 계셨던 분인데.” “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어리둥절해 하는 그를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곧 보게 될 거야.” 아르펜 행성의 대마법사이자 학자였던 그. 스스로 리치가 되어 200년간이나 트라넷에 대항해 왔던 마법사. 우진의 권속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그를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 “화염 마법이 특기니, 만나면 한번 배워봐.” “……그래도 될까요?” 성구는 벌써부터 오줌이 마려운 기분이었다. 우진의 교육 방식에 이제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괴물 같은 그가 스승이라고 말하는 존재는 대체…. “내가 하나는 장담하지.” “어, 어떤 거요?” “둘 중 하나야.” 우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 뒤에 탄 성구를 보았다. 잔뜩 움츠러든 그를 보니 웃음이 났다. 저런 겁쟁이를 스승님이 가장 싫어하긴 하지만, 뭐. 사람 성격 개조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시니까. “지구 최고의 화염 마법사가 되거나, 죽거나.” “…….” 결과가 너무 극단적인데? 성구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 120화 - 리치 제니스 (3) > 끝 ⓒ 진설우 < 121화 - 던전 클로저 > 센세이길드 회의실. 커다란 뿔이 달린 미노타우로스의 죽음으로 스크린에 비추던 화면이 꺼졌다. 영상을 쏘아 보낸 것은 다름 아닌 타쿠치의 손에 생성된 주먹만 한 푸른 구슬이었다. 귀환 포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절반의 값어치를 하는 영상 재생 구슬, ‘해리스의 추억’을 사용한 대가치고는 얻어낸 정보가 부실했다. “하아.” 센세이길드 사장의 깊은 한숨과 함께 회의실의 정적이 깨졌다. “이게 전부입니까?” “…예.” 사장의 말에 타쿠치는 본인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이번 던전 공략에서 그가 한 일은 딱 세 가지였다. 구경, 감탄, 녹화. 네 명의 인물 중 전투 요원은 성구와 우진이 유일했으며, 나머지인 백종도와 타쿠치는 그저 견학을 온 듯 뒤따르기만 했다. 홍성구마저도 거의 보조적인 입장이고 전투는 모두 우진이 주도했다. 아니, 그의 소환수들이 길을 뚫고 그들은 유령마에 타고 뒤따를 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공략할 수 있죠?” “…보셨지 않습니까?”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그럽니다.” “…….” 일본 최고의 각성자들로 팀을 이뤄 세 번을 도전했다. 그 모두 실패했기에 국제적인 요청을 한 상태다. 던전의 공략은 기대하지 않았고, 인근의 주민을 대피시키고 자위대 전력을 투입 대기 중인 위험한 던전이었다. 7:3이라는 수익 배분을 내건 아르달의 요청에 흔쾌히 수락한 것은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처치 불가의 폭탄을 보물로 만들어준다는데, 30%가 아니라 10%만 해도 이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광산화된 던전을 추가 공략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 공략법을 얻기 위해 이번 던전 공략에 타쿠치가 동행했다. 막대한 값어치를 지닌 ‘해리스의 추억’을 사용해 영상을 녹화해 온 이유이기도 했다. 문제는 공략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간단하고 압도적인 우진의 전투 스타일에 있었다. 그걸 누가 따라할 수 있겠는가. “이걸 발굴할 수 있을지….” 공략 횟수가 적을수록 아티팩트의 등장 빈도가 높다. 던전 브레이크의 위험도 없으니 공략만 하면 아티팩트 천지인데, 여전히 공략에 자신이 없었다. 이런 괴랄한 공략법이라니…. “후우, 해보는 수밖에 없지요. 강우진 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도쿄의 브레이크 임박 던전을 해결하고 중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벌써요?” “예.” “…….” 지하철역의 수만큼이나 던전 사업이 발달한 일본이다. 각성자들의 수도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그 비율이 상당히 많은 나라다. A급 각성자의 수도 한국의 세 배가 넘지만 그들 모두가 팀을 짜 도전했음에도 실패한 던전이 강우진 1인에 의해 클리어되었다. 그것도 통상적인 6성 던전 플레이 타임이라고 보기에는 가당찮게 이른 시간에 말이다. “일본의 망신이 아닌가? 그 하나가 나라 전체의 각성자보다도 낫다는 소리니….” 모두가 실패한 일을 너무 쉽게 해냈다. 중동에서 보여준 무식하리만치 잔인하고 거침없는 행보는 세계를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개인이 어지간한 국가의 무력을 넘어선 상태. 각성자라는 이름의 초인들이 득실거리는 이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특별한 각성자. 그런 강우진이 일본이 아닌 한국 사람이라니…. “한국이 부럽긴 처음이군.” 그가 일본인이었다면 일본은 다시 한 번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을…. “이제 한국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르달을 말하는 겐가? 그거야 아직 조약도 체결 전이라 한국 정부가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누가 누구를 인정합니까? 약자가 강자를요?” 직원의 말에 센세이길드의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개 길드가 국가를 천명하다니. 그런데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 국회에서 의논이 될 정도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건 아르달에 힘이 있어서였다. 던전이 존재하는 한 아르달은 대한민국보다 더 우위에 선 강자일지도 몰랐다. “잘하면 아르달을 본토로 모셔올 수도 있겠군.” 한국은 지금 재벌과 정치인들의 암살 스캔들로 시끄러웠다. 대한민국이 아르달을 거부한다면 일본으로 모셔와도 될 일이다. 아르달 자체가 가진 상징성과 전투력을 생각하면 일본은 몬스터라는 비를 피할 든든한 우산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수상을 만나야겠어.” 이건 길드의 이익이고 어쩌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한국과 아르달의 관계가 미묘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대일본 제국을 굽어 살피신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 오사카와 도쿄의 던전 두 개를 처리한 후, 중국에서 세 개를 클로즈했다. 다섯 개의 던전을 공략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중국 놈들 꼬장은 못 당하겠습니다.” 던전 개발 이익에 대한 지분 비율에서 이견이 있었지만 우진은 순순히 그들의 뜻에 따라주었다. 애초에 그놈들이 투명하게 정산해 비율대로 나누길 바라진 않았다. 브레이크가 임박한 던전. 그중 차원 영주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의 던전이 지구에 링크되기 전에 차단하는 것, 우진의 목적은 그것이다. 던전 클로즈로 인한 수익은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어휴, 사장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우승훈이 우진을 향해 진심으로 말했다. 일본과 중국을 거쳐 어느새 3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된 승훈이다. 이대로 지구를 한 바퀴 돌면 10개 국어쯤은 거저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참, 내가 약발로 외국어를 배울 줄이야.’ 던전에서 나오는 아티팩트는 비현실적인 것들이 많아, 통역 아이템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아예 스킬처럼 언어를 습득시켜 줄 줄이야. “이제 몇 개 남았어?” “일곱 개 남았습니다.” “흠, 다음은 어디야?” “델리입니다. 두바이에도 하나 있는데 파리의 던전이 급해서 경로가 조금 꼬였습니다.” 인도의 던전 하나를 처리하고 경로상 두바이가 가깝지만 아직 여유 시간이 있으니 그것을 제쳐 두고 파리로 날아가야 했다. 그곳은 던전 브레이크까지 고작 하루도 남지 않아 브레이크 이후 몬스터 소탕을 대비해 군인들의 배치까지 끝내놓고 있었다. 강우진이 어서 빨리 와주면 고마운 상황. “강 아우, 그런데 오퍼는 어쩔 생각인가?” “응? 오퍼요?” 우진의 되물음에 백종도가 염려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일본하고 중국에서 제시한 이주 건 말일세.” “아, 그거….” 일본 정부에서 보낸 고위 공무원들이 곧장 비행기를 타고 우진이 한창 공략 중인 중국까지 찾아와 감사패와 막대한 상금을 전하며 제안을 해왔다. 영토를 줄 테니 아르달 시국을 자국 본토로 옮기는 것은 어떤가 하고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대한민국과 미적지근하게 진행되고 있는 조약의 빠른 처리를 약속하며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대우해 줄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역시 일본 쪽이 낫지?” 백종도의 물음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거길 왜 가요.” “응? 역시 아우도 쪽바리들은 좀 그렇지?” 평소 반일 감정이 있었던 백종도가 반색하다가 곧 다시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럼 중국 쪽에 마음 기우는 건….” 중국이 강우진에게 제시한 조건이 파격적이긴 했다. 중국 정부의 특성상 국민투표로 붙일 것도 없이 우진이 수락만 한다면 아예 대한민국 영토의 두 배는 되는 땅을 아르달의 영토로 인정하고 나라로 대우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이 내건 통 큰 조건들을 생각하면 혹할 만한 제안들이 많았다. “거기도 안 가요.” 1초의 고민도 없는 우진의 대답에 백종도의 눈빛이 흔들렸다. “역시, 강 아우. 아닌 거 같아도 애국심이 있구만.” 애국심이라…. 성녀가 들었다면 뭐라고 답했을까. 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애국심은 무슨, 귀찮게 왜 옮겨요. 서울역도 거기 있는데.” 굳이 다른 던전을 하나 더 얻자면 차원의 조각이 필요했다. 뭐, 지구에 던전이 여러 개라면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이 던전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 자유롭겠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차원의 조각을 쓸 수는 없었다. “엥? 서울역 때문에 있는 건가?” “당연하죠.” 백종도는 고심하다 물었다. “1번 출구에 대체 뭐가 있기에 그러는가? 아, 물론 말 안 해줘도 되네.” 강우진이 이상호를 데리고 입장한 1번 출구. 던전의 특성상 안에서 일어난 살인을 알 길이 없지만, 그들의 던전 입장을 목격하고, 이후 1번 출구의 경비까지 해줬던 것이 KH길드의 식구들이니 길드마스터인 백종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때 당시엔 그저 최초 공략한 던전을 독점하기 위해 다른 각성자의 출입을 막는다고 생각하고 별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1번 출구를 보호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던전 안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기에? “영지에요, 차원 영지.” 어차피 길드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발표하려고 했던 이야기다. 굳이 숨길 것도 없었기에 우진은 시원하게 모두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백종도는 조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 아니, 다른가? 마치 산타 할아버지의 실체를 본 것 같은, 아기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비밀을 알아버린 아이가 된 기분이다. 정확히는 지구 종말의 기원일지도 모를 던전 생성의 이유를 알아버려 충격이 더 크지만 말이다. “강 아우, 원래 알고 있었어?” “몰랐죠.” “어허. 이거 원.” 너무 엄청난 일인지라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누가 알았겠는가? 던전이 왜 생겼고, 몬스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각성자는 왜 생겨났는가. 이에 대해 수없이 많은 의문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지만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우진이 알고 있다. “그럼 던전을 아예 사라지게 하는 법은 아는가?” “그거야 모르죠.” 우진이라고 어찌 모든 것을 알겠는가. 백종도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정말 지구가 구원받으려면 아마도 던전을 폐쇄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아참, 전에 던전 전문 연구가가 있다고 했는데 이름이….” “토플러 박사요?” 가만히 듣고 있던 성구가 불쑥 말하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이름이었다. “그래, 맞아.” “헤헤, 전에 티비에서 봤잖아요. 그분이 제일 유명할걸요.” 유명한 것만큼 연구에 성과가 있다면 충분히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확실히 입증되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그저 추측이나 가설만을 들어도 된다. 입증이야 우진이 직접 할 테니 말이다. “어디 사람이었지?” “영국인입니다.” “요번에 영국 던전도 있어?” “음, 없습니다.” 아쉽게도 이번 일정에 영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진이 승훈에게 지시했다. “초청장이라도 보내봐, 만났으면 한다고.” “넵.” 그와 만나는 것은 어쨌든 후일의 일. 지금은 브레이크가 임박한 던전을 클로즈하는 것이 급선무다. 차원 영지의 보호 시간이 모두 지나기 전에 말이다. 델리의 지하철역. 대부분이 지상에 위치해 있어 지하에 있는 역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인구에 비해 마크해야 할 던전의 수가 적다 보니 그간 인도는 국제적인 도움 없이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빈도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인구가 원체 많다 보니 고위 각성자의 수도 넘쳐 났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감당하지 못해 공략을 요청한 던전의 난이도는 상당할 듯했다. 난이도가 높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던전 자체의 에너지가 높다는 의미. ‘차원 영지일 수도 있겠는데?’ 우진과 성구, 백종도는 촉박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령마를 타고 목적된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슈누길드 소속 각성자인 블랑카와 함께 곧장 던전에 입장했다. <드레드의 해변가에 입장하셨습니다.> 우진의 예상대로 차원 영주가 있는 던전이었는데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 < 121화 - 던전 클로저 > 끝 ⓒ 진설우 < 122화 - 던전 클로저 (2) > “드레드?” 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꿀렁거리는 몸을 이끌고 영지를 방문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에 땅굴을 파고 있었어?” 동기화 시간을 생각하면, 그의 영지를 방문하기 전부터 이곳에 던전을 링크하기 시작했겠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별수 없었다. 우진은 여러 개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랐다. <공략 모드에 도전합니다.> <공략 성공 시 업적 포인트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저는 버프 계열의 능력자입니다. 제가 축복을 걸어드리겠습니다.” 던전에 입장하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블랑카를 보며 우진이 인상을 구겼다. 강화 계열이면 몰라도 축복 계열이라면 자신과 상극이었다. 시너지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다. “필요 없으니 그냥 얌전히 구경이나 해요.” “저 또한 A급 각성자입니다. 팀에 도움이….” 블랑카는 무시당한 듯해 항변했으나 우진은 이미 저만치 가버린 후였다. 블랑카의 뚱한 얼굴을 보며 백종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다리라면 그냥 기다리쇼.” 툭 내뱉는 그를 보며 블랑카가 고개를 돌렸다. 인도에서 나름 알아주는 비슈누길드의 엘리트 각성자인 블랑카는 영어는 물론,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에 능했다.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서포트형이면서 머리도 좋아 아시아권 각성자들의 정보를 꿰고 있었기에 상대가 누군지 잘 안다. KH길드의 사장 백종도. 강우진과의 친분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던전 공략에 그도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함께 팀을 이뤄 던전에 입장했는데 그래도 도움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블랑카의 유창한 한국어에 백종도가 답했다. “팀은 무슨, 한 5분 안 돼서 올라올 텐데.” 백종도의 말에 블랑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야 외부인이라 전투 방식을 보이기 싫어 그렇다 쳐도 백 사장님도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겁니까?” 단시일에 유명해진 강우진의 정보는 몇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폐쇄적인 던전 공략이다. 거의 대부분이 솔로 플레이고 팀을 이루더라도 같은 길드의 사람과 호흡을 맞췄다. 함께 입장한 백종도가 사냥에 참여할 뜻이 전혀 없는 것을 보니 그도 외부인 취급을 받는 모양이었다. 블랑카가 무슨 오해를 하든 백종도는 피식 웃었다. “갈 필요도 없어. 어차피 별로 도움도 안 되는데 가봤자 뭐합니까?” 백종도가 나서면 던전 공략 시간을 한 10초 정도 줄일 수 있을까? 어차피 그가 힘을 쓰나 안 쓰나 같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듯한 블랑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일본과 중국의 다섯 개 던전을 클로즈할 때 함께한 각성자도 모두 블랑카와 같은 반응이었다. 강우진의 비밀을 까발릴 듯 달려들어도, 결국 얻는 건 없을 것이다. 아니, 하나는 있나? ‘엄청 쉽고 빠르게 몬스터들을 쓸어버린단 거지.’ 백종도가 바닥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냥 이따 기록이나 잘하쇼.” 어차피 블랑카가 던전에 함께 입장한 것도 그저 강우진이 처치 곤란의 던전을 어떻게 공략하는지 그 방법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더욱 의문이었다. 전투에 가담하든 안 하든 자신은 목적이라도 있지, 백종도는 왜 함께 던전에 입장한 것인가? “아, 뭘 그렇게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그래. 난 그냥 놀러온 거야, 놀러.” “……?” “피크닉, 몰라?” 소풍이라는 거야 알기는 알지. 그걸 왜 미공략 던전에서 하냔 말이지. 엄마따라 시장 가는 것도 아니고, 이 위험한 데를 굳이 따라와서…. 지이잉. 마침 백종도가 앉은자리에서 머지않은 곳에 붉은 포탈이 생성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지하철역 내의 모든 몬스터 클리어. 고작 4분이나 지났을까? 뜨악한 표정의 블랑카의 얼굴을 보며 백종도가 피식 웃었다. “반응이 어떻게 저리 한결같아.” 일본, 중국에 이어 인도인도 리액션이 똑같다. 백종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엉덩이를 툴툴 털었다. “자, 갑시다. 이번엔 또 어떤 놈인지.” 잠시 후 강우진과 홍성구가 등장해 붉은 포탈을 통과했다. 위이이잉. 귀를 간지럽히는 이명이 지나고 난 뒤 드러난 풍경은 잔잔한 파도가 치는 해변이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성구였다. “와우! 형님, 여기 끝내주는데요?” 하얀 백사장과 투명한 파도가 치는 해변은 여느 관광지 부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인파가 닿지 않아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성구가 모래 위를 뛰어가다 커다란 집게발의 몬스터 크랩이 튀어나오자 소리쳤다. “형님! 여기 꽃게예요. 오랜만에 꽃게찜 어때요?” 성구의 해맑은 웃음에 블랑카는 식겁했다. 몸길이 50센티의 소형 몬스터이지만 일반적인 게라고 불리기엔 지나치게 크다. 더욱이 저 무시무시한 집게발은 사람의 뼈쯤은 그대로 바스라트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위험합니다!” 만만하게 볼 몬스터가 아니었다. 화르륵! 성구는 모래를 비집고 튀어 오르는 몬스터 크랩을 그대로 불살라 버렸다. “헤헤, 잘 익었네.” 고온에서 즉사하며 시뻘겋게 익어버린 크랩을 보며 성구가 단검을 빼 들었다. 그동안 몬스터 해체라면 이골이 난 그다. 당장에 갑각을 발라 잘 익은 살을 빼낼 자신이 있었다. “놈들은 무리로 다닙니다! 어서 벗어나십시오.” 블랑카의 우려대로 주변 모래사장 전체가 꿈틀거리더니 몬스터 크랩이 기어나왔다. 그 수가 얼핏 헤아리기에도 백이 넘었다. 집게발에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사지가 절단될 수 있어 위험한데, 출몰 개체 수는 라퀴에 버금가는 몬스터다. 비슈누길드가 한 번 도전해 보고 그 뒤에 다시 재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이유였다. 이곳은 치명적 공격력을 가진 몬스터들이 대량의 물량으로 출몰하는 곳이다. 동시에 달려드는 그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하기에 고작 10여 명의 파티로는 무리가 있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모래사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크랩들을 보며 성구는 당황… 했다기엔 지나치게 밝은 얼굴로 소리쳤다. “우와! 형님, 게 풍년이에요!” “잘 구워 와봐. 배 채우고 사냥 시작하자.” 우진도 게를 보자 군침이 돌았다. 촉박한 시간이지만 굳이 여유를 내자면 네 배의 시간 이득이 있는 던전 안이 낫다. 우진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테이블과 의자를 꺼냈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으며 업적 상점에서 시원한 맥주를 구입했다. “캬, 난 이게 좋더라.” 백종도는 머리통만 한 나무 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받고는 기대감 어린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미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 “…이게 무슨… 여긴 6성 던전인데.” “아,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양반. 여기 앉으슈.” “…….” 얼떨결에 자리에 앉은 블랑카는 곧 해변을 가득 메우는 불놀이를 봐야 했다. 화르르륵! “파이어 월도 이제 제법 쓸 만하네.” “헤헤. 감사합니다, 형님.” 우진의 칭찬에 뒷머리를 긁적거린 성구는 잘 익은 게들을 주워 와 껍질을 분리했다. 그 능숙한 손놀림과 웃으며 맥주를 들이켜는 모습을 보며 블랑카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여기 던전입니다.” “알아.” “이렇게 위기감 없어도 됩니까?” “굳이 쫄 이유는 뭐야?” “그야….” 던전 안이 위험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그렇다고 지금의 모습이 위험해 보인다고 하기엔…. “히야, 이거 대게보다 더 맛있는데?” 재벌 3세로 자란 백종도는 최고만 먹어왔다. 그런 그가 최근 우진과 함께 던전을 다니며 재미 들린 것은 그가 해주는 몬스터 요리와 어디서 꺼내는지 모를 술을 맛보는 것이다. 몬스터에 관한 우진의 지식은 해박했고 요리법도 괜찮았다. 또 지구에서 보지 못한 술맛은 어떠한가. “거, 외국인 친구도 너무 그렇게 인상만 팍 쓰지 말고 즐기라고.” 던전을 즐기라니…. 이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자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사투가 아닌가?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크랩들이야 정리가 되었지만 최종 목적지인 물속은 화염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블랑카의 말대로였다. 드레드는 바닷속에 용궁을 짓고 있었다. 수중이라는 특수한 지형 탓에 침입자들을 방어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인도의 각성자 팀들이 공략 성공하지 못한 이유였다. “수백, 아니, 수천의 해파리 떼를 뚫고 귀환석을 탈취하는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놈들이 쓰는 마비 독은 어지간한 해독제는 듣지도 않습니다.” 혼자만 심각한 블랑카의 말을 들으며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게살이 많아서 그런지 다리 하나만 뜯었는데도 제법 배가 찼다. “거, 한잔하고 있어. 수백, 수천이면 딱 좋지.” 이만한 몰이사냥이 또 있을까? “얌전히 물속에 있으면 얼마나 좋아?” 물은 육지 생물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훌륭한 방어벽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치명적 약점이 되기도 했다. 우진이 백이 넘는 크랩들의 시체를 매개로 모조리 해골마법사를 소환했다. 그중에 독 마법과 전격 마법을 쓰는 것만 남겨두고 모조리 소환 해제해 버렸다. 그렇게 우진의 옆에 모인 것은 20기의 스켈레톤 메이지. “낚시나 시작해 볼까?” 우진이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조금만 걸어도 수심이 금방 깊어져 허리까지 물이 찼다. 침입자의 등장에 물속에 사는 수십 종의 몬스터가 몰려들었다. 우진이 적당한 때에 포이즌 노바를 일으켰다. 푸화아악! 독이 물에 녹아 그대로 인근 바다를 오염시켰다. 우진이 마력을 퍼붓자 독은 더욱 지독해졌으며 넓게 퍼져 나갔다. 꾸르르륵. 독에 중독되어 둥둥 떠오르는 해파리 떼를 보며 우진이 해변으로 걸어나왔다. 몬스터가 뼈가 있느냐 없느냐는 상관없다. 그저 그들의 시체를 하나의 매개로 삼을 뿐이다. 우진이 둥둥 떠오른 각종 물고기와 게, 해파리 등을 해골마법사로 소환했다. 파파팍! 전격과 독 마법을 쓰는 놈들만 남겨 모으니 500여 기. “조져.” 키키킥. 스켈레톤 메이지들이 바다를 향해 전격 마법과 독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우진이 테이블로 돌아와 앉자 백종도가 히죽 웃었다. “강 아우는 사냥 참 편하겠어. 허허.” “뭐, 그것도 약한 놈들 상대할 때나죠.” 공격하는 쪽이든, 막는 쪽이든 우진만큼 다굴 사냥에 능한 사람이 있을까? 수천수만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던전은 오히려 우진에게 유리했다. 해골 부대가 다 처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강력한 소수의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이라도, 해골 부대는 무용지물이겠지만 우진에게는 강력한 데스나이트들이 있고, 본신의 무력 또한 나쁘지 않으니 걱정될 것이 없었다. “자, 우린 문어 자식 나올 때까지 한잔하죠.” “하하하, 좋지. 그런데 문어라니?” “이따가 보면 알아요.” 해골마법사들이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는 마법에 둥둥 떠오르는 몇몇 물고기를 보며 회 생각이 아쉬웠지만 독에 당했기에 먹지는 못한다. 그저 통통한 게살을 빼먹으며 던전의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정말 수천의 몬스터의 시체가 떠밀려와 아름답던 해변이 기괴하게 변한 이후에야 보스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살을 가르며 나타난 문어에게 해골마법사들의 마법이 쏟아졌지만, 간단히 생성된 보호막에 가로막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여덟 개의 다리로 물 위를 걸어서 해변에 도착한 드레드는 잔뜩 화난 음성을 토해냈다. [쿠루룩, 이게 무슨 짓이지?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싸움은 네가 먼저 벌였지. 누가 지구에 던전을 링크하래?] [쿠룩, 가소롭군. 지구 차원이 전부 네 것이라도 되는 양 오만이라니.] 행성 자체를 자신의 영지로 삼은 차원 영주는 없다. 하지만 눈앞의 강우진이라는 인간은 어찌 저리도 오만한가? [쿡, 겁도 없이 내 영지에 공략을 신청하다니. 무지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영지의 힘을 빌릴 수 있는 영지전이나 결투라면 모를까, 놈은 오만하게도 몇몇 동료와 함께 자신의 던전에 공략으로 입장했다. 스스로 ‘영주’에서 ‘모험가’의 신분으로 도전해 온 꼴. 자신은 영지의 모든 힘을 쏟을 수 있는 반면, 상대는 본신의 힘뿐이다. 놈을 죽이고 죽어 있는 시간 동안, 무방비에 처한 놈의 차원 영지를 약탈하겠다. [쿠루루, 나 드레드의 힘을 보여주겠다!] 붉게 변한 문어 머리를 자랑하며 주위의 마력을 끌어들이는 그를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유언 한번 유치하네.] 드레드. 그가 여덟 발로 선 시체 밭이 무엇을 의미할까? 저 수천의 시체가 내뿜는 힘을 감당할 수 있을까? 놈의 등장을 기다리는 사이, 가득 차오른 마력을 일시에 쏟아냈다. “시체 폭발.” 우진의 몸에서 마력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 122화 - 던전 클로저 (2) > 끝 ⓒ 진설우 < 123화 - 던전 클로저 (3) > 한 줌 영혼이 떠난 수천의 시체가 우진의 마력에 반응해 마지막 에너지를 쥐어짰다. 콰아앙! 귀를 찢을 듯한 폭발음과 함께 산화되어 버린 드레드는 한 줌의 경험치로 화했다. <레벨 업!> 80레벨까지 이제 네 번이 남았다. 근처에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음에도 일행은 별반 상처를 입지 않았다. 어마무시한 소리에 귀가 조금 얼얼했지만 그마저도 규모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경미한 피해. 지이이잉. 일행을 두르고 있는 반투명한 보호막은 폭발의 화력도, 시독도, 음파도 모조리 막아주었다. 두 손을 하늘로 떠받치고 있던 블랑카는 왈칵 피를 토해냈다. “쿨룩.” 무리한 마력의 사용으로 뒤틀린 속을 달래던 그는 원망이 담긴 눈으로 우진을 보았다.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드레드의 등장에 바짝 긴장해 보호막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폭발에 휘말릴 뻔하였다. 하지만 우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안 나서도 됐을 텐데.” “…….” 스피릿 아머. 우진의 곁을 떠도는 영혼 갑옷은 그가 위험하다 싶을 때 알아서 보호막을 형성한다. 레벨이 오를 대로 올라 어지간한 폭발은 모조리 막을 수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일행들도 보호되는 것은 당연지사. 굳이 나서지 않아도 피해가 없었을 텐데, 괜한 헛수고에 블랑카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하기는커녕…. “어휴, 맛있는 게 먹고 다 토하셨네.” “쯧쯧, 그냥 구경만 하라니까.” 홍성구와 백종도의 핀잔에 블랑카가 울상을 지었다. 잊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A급의 각성자들. 세계의 각성자들을 놓고 비교해도 수위를 다투는 자들. 저마다 제 목숨 부지할 가닥은 있는 자들이건만 괜히 오버해서 나섰다. ‘나서는 게 당연하잖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핑 도는 머리로 휘청하는데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몸속으로 훅 들어왔다. “후우.” 한결 편안해진 정신에 살펴보니 우진이 무언가 능력을 써서 자신의 기운을 북돋아준 것을 깨달았다. ‘능력의 끝이 어디지….’ 소환에 전투술에 마법, 치료까지… 능력의 스펙트럼이 어디까지인지… 우진이 몇 개의 기술을 가졌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스스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블랑카는 감사의 눈짓을 하곤 진정되기 시작하는 마력을 일으켜 스스로의 몸을 보살폈다. “자가 치료는 보기 드문데.” 그 모습을 우진은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버프 계열의 능력자이자 자가 치료까지 가능한 치료 마법사. 신성력에 의존하지 않는 능력자치고는 특이한 경우였다. “이름이 뭐랬어?” “블랑카입니다.” “한국말도 잘하고… 길드가 비슈누랬나? 얼마 받아?” “예?” “아르달로 와.” “…….” 블랑카는 다시 뒤틀리려는 기력을 진정시키며 우진을 보았다. 무슨 꿍꿍이지? 그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괜한 장난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뭐지?’ 아무리 위기감 없는 던전 공략팀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스카우트 제의라니? 하지만 블랑카는 길드를 옮길 생각이 없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길드마스터와 저는 막역한 사이입니다. 비슈누에 뼈를 묻을 겁니다.” “그래? 아쉬운데.” 우진은 입맛을 다셨다. 길드에 대한 의리도 있는 듯하니 더 탐났으나 굳이 더 권하진 않았다. “별수 없지, 그럼 마무리하러 가보자고.” 우진이 테이블과 의자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앞으로 나섰다. 폭발의 여파로 백사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져 있었다. 시체도, 수많은 혈석도 모조리 집어삼켜 버렸으나 전혀 아까울 것이 없었다. 우진은 그 호수의 한가운데 드레드가 죽으며 남긴 보라색의 보석을 보며 물 위에 한 발을 내디뎠다. <공중 걸음> 기력을 사용해 몸을 가볍게 띄워주는 전사 클래스의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지금은 레벨이 낮아 하늘을 걷는 건 무리지만 물 위쯤은 가뿐했다. 참방. 물이 닿았으나 발등을 넘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 위를 걸어간 우진이 보석을 잡았다. <차원의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우진이 씨익 미소 지었다. 드디어 하나를 얻었다. 아르펜으로 연결되는 던전을 드디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우진은 보라색 보석을 챙기고는 드레드의 용궁이 있는 바다 위까지 걸어갔다. 아래에 초록색의 귀환석이 보이자 공중 걸음을 유지하던 기력을 거두어버렸다. 동시에 몸을 무겁게 하는 스킬을 발동하자, 수심 아래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아직 살아남은 몇몇 해양 몬스터가 덤벼들었으나 가볍게 무시하며 귀환석을 탈취해 솟구쳤다. 푸하. 스탯을 지력과 마력에 몰빵했기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기력을 모두 소진하여 더 이상 공중 걸음을 발동하지 못해 물 위를 걸을 수가 없었다. “씽씽아.” 히이잉. 우진이 소환된 씽씽이를 타곤 일행에게 달려왔다. “자, 갑시다.” “엥? 보물찾기 안 하고?” 최초 공략 던전에 숨겨진 아티팩트들이 얼마던가. 우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물속에서 오래 못 버텨요.” 전사 클래스의 영향으로 일반인에 비해서는 엄청난 폐활량을 자랑하지만 잠수해서 견딜 수 있는 시간은 10분을 넘지 않았다. 탐색 마법으로 아티팩트의 위치를 뒤지며 찾기엔 바다가 너무 넓었다. “호흡 없이 수중을 돌아다닐 수 있는 버프가 있습니다.” “으응?” 블랑카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우진의 눈빛은 묘하게 반짝였다. ‘쓸 만한데?’ 버프 쪽으로만 본다면 우진에 버금가는 잡캐가 인도에 있었다. 던전의 공략을 무사히 마치고 나온 일행을 반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도의 언론사들, 고위 공직자들, 지역 유지, 비슈누길드의 사람들, 구경꾼들…. 평소였다면 빼곡히 들어찬 인파를 두고 유령마를 소환하여 곧장 공항으로 사라졌을 텐데, 우진은 이례적으로 그들이 준비한 차에 올랐다. 기다란 리무진엔 던전을 공략한 네 명과 비슈누의 길드마스터 카심이 탔다. [하하하, 처치 불가능한 던전을 이렇게 쉽게 클리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던전 클리어를 감사드린답니다.” 영어를 못하는 카심의 힌디어를 블랑카가 한국말로 통역했다. “음, 힌디어?” “예에.” 우진이 잠깐 업적 상점을 뒤적이다 힌디어의 언어 물약을 구입해 마셨다. 허공에서 쑥하고 약병을 빼내더니 마시는 그를 보며 카심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카심? 비슈누길드의 마스터?] [오! 신이시여. 힌디어를 배우셨습니까?] [지금 배웠지.] [……?] 카심이 고개를 갸웃하며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으나 우진은 굳이 그의 의문을 풀어줄 필요성을 못 느꼈다. 시간이 촉박한 그가 굳이 인파를 헤치며 느릿느릿 리무진을 타고, 수십 명의 인도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공항으로 향하는 건 한 가지 제안을 위해서였다. [비슈누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어떤가?] [어떤 제안을 말입니까?] 단 한 명의 각성자로 인해 세계 제일의 길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아르달의 제안이다. 길드 간의 사업 이야기에 카심이 눈을 반짝였다. [블랑카를 줬으면 싶은데.] [오, 그는 저와 의형제를 맺은 사입니다.] 카심의 난색에 블랑카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세계 최고의 각성자가 자신을 탐내고 있다. 이 얼마나 짜릿한 기분인가? [얼마를 원해?] [형제를 돈으로 팔 수는….] [이번 던전의 운영권 100%를 주지.] […….] 카심이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측정 에너지가 못해도 6성 이상 되는 던전이다. 그것에 대한 이권을 모두 주겠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심이 그 막대한 이득과 자신의 의동생이자 A급 각성자인 블랑카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순간…. [혀, 형님!] 당황한 블랑카의 음성에 속내를 들킨 듯한 카심이 뜨끔하여 거절의 말을 꺼내려 했다. [다음에 이런 던전 하나 더 생기면 클리어해 주고 운영권도 모조리 주지.] [크, 크흠.] 현재의 각성자들로 클리어가 불가능할 정도의 리스크를 가진 던전이라면 그것을 공략했을 때 얻을 이익도 막대하다. A급 각성자 하나를 내어주고 6성 이상급의 던전 두 개의 운영권을 얻는다라…. [하나 더.]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블랑카가 황당한 얼굴로 카심을 보았다. [혀, 형님.] 카심이 블랑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5년 전 그 일은 이제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나. 서로 마음의 빚은 청산하지.] 5년 전 인도에 던전쇼크가 휘몰아쳤을 때, 목숨이 위험했던 것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블랑카의 눈빛이 흔들렸다. [구해준 건 저 아닙니까?] 위기의 카심을 구해주고 고마움에 친히 자신을 의동생 삼지 않았는가? 카심이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은혜를 갚는단 핑계로 아우를 내 욕심에 잡아둘 수 있나? 더 큰물에서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허….] 우진이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둘이 알아서 정리하고.] 블랑카의 어깨를 짚었다. “아르달에 온 걸 환영하지.” “…….” “우와. 블랑카 씨 오기로 한 거예요?” 힌디어로 대화를 주고받아 무슨 말이 오간 줄 몰랐던 성구가 반색하며 블랑카를 보았다. 그가 보조해 주는 버프 마법은 다양성은 물론 효과도 좋았다. 개개의 무력을 반 배는 더 극대화시켜 줄 만큼 대단했다. 그가 아르달에 합류하면 우진은 몰라도 성구나 해솔 등 다른 각성자들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된다. “…상황을 보니 팔려가는 것 같군요.” 체념한 듯한 블랑카의 말에 성구가 웃었다. “헤헤, 팔려오면 어떻습니까? 저도 저당 잡혀서 이렇게 됐는데요, 뭐.” “……?” “죽어서 안 온 게 어딥니까? 으헤헤.” “……!” 블랑카의 동공이 흔들리며 카심을 보았으나 그는 애써 애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우진의 행동에 따라 연일 토픽이 쏟아졌다. 각국 유수의 언론사들이 일제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 기사로 낼 정도로 세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 브레이크 임박 던전의 연이은 격파! - 브레이크 임박 한 시간. 파리를 구하다. - 세계를 순회, 지구를 구하다. - 지구 최후의 보루, 던전 클로저 강우진! 강우진의 던전 순회 공략만큼이나 1분 1초를 바쁘게 보내는 인물도 있었다. 아르달의 부사장… 에서 총리가 되어버린 정민찬이었다. - 일본 아르달과 국교 수립. - 두바이 마호드 왕자 인터뷰 : 아르달은 형제의 나라. - 미합중국 아르달과 국교 수립, 동맹국으로의 입지 강화. - 델리의 영웅, 아르달. - 프랑스, 아르달로 국가 사절 파견. 한국에 협조 요청 중. ……. 강우진, 그리고 아르달. 중동을 휩쓴 그때부터 이미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절정에 이른 느낌이었다. 특히나 우진에 의해 중동에서 구함을 받은 종군기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호 언론 세력들이 그를 영웅화를 넘어 신격화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였다. 전 세계가 그들을 주목하니 아르달과 가장 가까운 나라. 대한민국도 요동쳤다. 청와대 대통령실. “하아, 이거야 원.” 대통령 김병만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조약을 체결하고 말고도 없겠구만.” “그렇습니다. 이젠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대통령과 대면 중인 국무총리도 고개를 저었다. 전 세계가 이미 아르달을 국가로 인정한다. 특히 미국은 최고의 친구이자 우방국이라 표방하며 미 대통령이 몇 번이나 공식 석상에서 밝힐 정도였다. 미국이 인정하고, 일본이 인정하고,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아르달을 국가로 인정한다. 그런데 한국이 별수 있겠는가? “국민 여론은 어떤가?” “당연하다는 분위기입니다.” “…….” 허락하고 말고가 아니다. 이미 아르달은 개별의 국가가 되어버렸다. 국민 여론도 그것을 당연시하는 정도라면…. 이미 막을 수 없다. “국민투표를 진행하게.” “알겠습니다.” 아르달은 이미 대한민국이 품기엔 너무 거대해져 버렸다. 품을 수 없다면 가장 가까이 옆에 두고 친구로라도 지내야 할 때였다. < 123화 - 던전 클로저 (3) > 끝 ⓒ 진설우 < 124화 - 리아 > 검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출국장을 빠져나왔다. 저마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들은 얼추 50명도 넘었으나 누구 하나 그녀에게 관심 갖는 사람이 없었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고 출국장을 한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또야?’ 여자는 인상을 한 번 구기고는 기자들을 지나쳐 걸어나왔다. 준비된 밴에 올라탄 그녀는 마스크를 벗었다. “어휴, 오늘도 강우진이야?” “어, 신디야. 그런 것 같더라.” 매니저의 말에 신디는 한숨을 쉬었다. “왜 맨날 나 올 때 외국 갔다 오는 거야?” “하하.” 매니저는 그저 허허 웃었다. 신디의 말처럼 항상 그가 때를 맞춰 외국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중국 일정이 많아 공항을 자주 이용하기에 이렇게 한 번씩 귀국 시간이 겹치는 일이 생겼다. “어휴, 무슨 기자들이 학습 능력이 없어.” 강우진이 공항을 이용하며 출국장을 통해 나온 적이 몇 번이던가? 거의 대부분 다른 루트로 빠져나갔는데 미련하게 거기서 기다리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길목마다 기자들 죄다 깔렸더라.” “…….” 매니저의 말에 신디가 입을 헤 벌렸다. 공항에 죄다 깔렸다면 그 인원이 몇이나 되겠는가? 못해도 출국장에 모인 것의 다섯 배는 될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해 이 정도의 취재 경쟁이라니…. “겨우 사진 하나 찍자고? 인터뷰도 안 하기로 유명한데.” “겨우라니, 아르달 국왕이신데.” “국왕….” 신디는 신음을 삼켰다. 대한민국에서 왕국이라니, 무슨 만화나 소설도 아니고 말이다. “허, 진짜.” 일반인에 비하면 연예인은 다른 세계 사람이다. 그런데 강우진은 그런 것을 초월했다. 인기 연예인인 자신이 보기에도 그는 별세계 사람이었다. “동창회 나오려나.” “응? 동창회라니?” 신디의 작은 혼잣말에 매니저가 물었다. 그녀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몰랐는데 같은 고등학교더라고.” “헐, 그래? 설마 나오겠냐.” “그치?” 신디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저번 동창회도 한국의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미뤄졌다. 그때 이후로 서울의 인구가 대거 빠져 어수선해 요즘은 정말 유령도시처럼 보이는 동네도 있었다. “어휴, 모르겠다.” 만날 인연이 되면 한 번은 보겠지…. 신디는 등받이에 머리를 붙이며 눈을 감았다. *** “어어? 나온다!” 별로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출국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익숙한 얼굴에 기자들이 난리를 떨었다. 찰칵찰칵!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걸어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 아르달의 홍성구와 우승훈, 백종도와 그의 비서 정찬성, 또 그들을 보호하는 경호원들까지. 그중 성구가 헤벌쭉 웃었다. “헤헤, 나도 유명해졌구나.” “사장님 제하면, 홍 이사님만큼 뜨거운 각성자도 없지요.” 우승훈의 추켜세움에 성구가 피식피식 웃었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부터 BB크림을 찍어 바르던 우승훈이다. 공항패션이라기엔 지나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우 실장님, 태가 나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제 비서실장 아니고 외교부장관입니다.” “헤헤, 그러고 보니 형도 참 출세했네요.” “하하, 이게 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장님을 보필한 공로가 아니겠습니까?” 승훈의 말에 성구가 속으로 웃었다. 뭐, 첫 만남이 그리 아름답진 않았지만 그가 그동안 고생한 건 맞으니 말이다. 승훈은 기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함박 미소를 짓고 포토 타임이라도 되는 듯 손을 흔들었다. ‘성공했어, 우승훈!’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다. 아르달의 외교부장관이다. 폰팔이 인생 8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성공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KB미디어 정신영입니다.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오늘신문 이호산입니다. 중국에서 마찰이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쉴 새 없이 떠드는 기자들을 보며 우승훈은 백종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걸음을 멈춰 섰다. 꼭 해보고 싶었다. “세 가지 질문만 받겠습니다.” 승훈의 말에 기자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었다. 간택을 바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이는 그들 중 예쁜 여기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웅미디어 이시연입니다. 강우진 씨는 어디….” “아르달 왕이신데 강우진 씨는 조금 그렇네요.” 승훈이 인상을 팍 쓰며 말을 끊자 그녀가 잠깐 당황하다 말을 이었다. “…아르달 국왕님은 어디 계십니까?” 왕이 사라진 나라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일까? 아니, 역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왕족도 아니고 신생 국가에서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는 인물이 현대에 나올 줄은 몰랐다.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던전에 계십니다.” “미국의 던전에 계시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승훈의 대답에 기자들이 패닉에 빠졌다. 강우진은 어딜 가고 나머지 일행만 귀국했단 말인가? “그럼 추후 귀국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승훈이 피식 웃었다. “모르죠. 이미 아르달에 와계실 수도 있고, 이후에 오실 수도 있고.” “……?” 뚱딴지같은 소리에 혼란에 빠진 기자들의 모습이 볼만했다. 승훈이 속으로 광소했다. ‘이 기분이야.’ 강우진을 보며 얼마나 따라해 보고 싶었던가? 승훈이 쿨하게 마지막 대사를 날렸다. “질문 셋 끝났습니다.” “저, 저기요. 한 말씀만.” 아쉬운 기자들이 다시 달려들려 했지만 경호원들이 곧장 차단했다. KH길드의 사람들과 인사한 후에 아르달에서 마중 나온 차에 오른 성구와 승훈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승훈이 형, 아까 형님 따라한 거죠? 질문 셋만 받겠습니다.” 성구가 성대모사까지 하며 흉내 내자 승훈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형님 진짜 아르달에 와 있을까요?” “모르죠. 그렇다니 그런 줄 알아야죠.” 우진 덕에 이제 10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된 승훈에게 그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기세였다. “가봅시다. 어쩌면 정말 먼저 와계실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네.” 성구와 승훈을 태운 차가 아르달의 영토, 정확히는 서울역 1번 출구를 향해 갔다. *** 하루 전. 마지막 일정인 LA의 던전을 클리어한 직후였다. <레벨 업!> ‘후, 이제 둘 남았네.’ 80레벨까지 이제 정말 두 번의 레벨 업만 남아 있었다. 몇몇 던전은 6성이라 부르기 힘들었다. 7성이라 불러도 이상치 않을 수준 높은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 다섯 군데. 우진이 아니었다면 처음으로 7성 던전의 브레이크가 다섯 번 일어났을 것이다. 주둔 중인 군대가 막기야 했겠지만 피해는 상당했을 것이다. ‘소모전은 위험해.’ 전장이 지구가 되어서는 위험했다. 싸우려면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 던전에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러자면 각성자 전력이 두터워야 하는데 지구의 각성자 수준은 그리 높지 못했다. 최근 들어 7서클 수준인 AA급의 각성자가 한둘씩 나오는 수준. 지구의 각성자들이 많아야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에 던전을 공략해 해치울 텐데… 언제까지 우진이 이렇게 세계를 돌며 던전 브레이크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엔 함께 막아야 한다. ‘뭐, 결국 내버려 둬야 하나.’ 성구 같은 잡초를 키워내야 했다. 온실 속의 꽃이 필요한 게 아니다. 블랑카처럼 싹수가 보이는 놈은 직접 데려다 키우고, 나머지들은 알아서 크도록 해야 했다. 스스로 지켜야지 개인에게 의존해서는 위험했다. ‘보모 노릇은 위험하지.’ 벌써 우진을 구세주마냥 떠들어대고 있다. 분명 위험한 신호다. 자생력을 기르기 위해선 내놓아야 한다. 물론, 지구가 온전히 트라넷에 삼켜지는 것은 막아야 하니 적절히 수를 조절해야겠지만 말이다. 이따금씩 일어나는 던전 브레이크는 백신이 되어줄 것이다. 심각한 수준의 몬스터만 우진이 처리하면 된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 “예? 형님은요?” “따로 갈 테니까 돌아가 있어.” 우진은 차원 영지에서 영지전이 벌어지면, 즉시 그곳으로 통하는 포탈을 생성할 수 있었다. 그의 기반이 있는 서울역 1번 출구로 되돌아가는 것은 지구의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는 일. 괜히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아니, 세계를 돌며 던전을 클리어하다 보니, 벌써 차원 영지의 보호 기간인 4일이 거의 임박했다. 일행과 헤어지고 우진은 곧장 포탈을 열었다. 지이이잉. 이제는 제법 익숙한 울렁임과 함께 차원 영지 아르달 왕좌의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니임!” 비비가 달려와 폴짝 안겼다. “별일 없었지?” “네. 헤헤, 그리고 저 이제 영지전 자신 있어요.” “응?” “깜짝 과외를 받았쪄요.” “과외? 누구한테?” “헤헤, 그건 비밀!” 영지전에 해박한 난민이 흘러들어 온 것인가? 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영지의 사정부터 살폈다. “인구가 꽤 늘었네?” “네, 정착금도 받지 않으니 소문이 났나 봐요. 대신 던전 개방을 하지 않아서 정착하는 난민이 대부분 전투력은 쓸모없어여.” 우진은 영지의 유일한 던전인 서울역 1번 출구를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이게 열려야 영지민들이 던전을 통해 지구의 인간들을 사냥하며 혈석도 벌고 할 텐데, 그러지 못하니 호전적인 난민들은 그저 거쳐 갈 뿐이었다. 정착하는 난민들은 대부분 오랜 떠돌이 생활이 피로한 이들과 평화적인 성향의 사람들. 던전 개방이 아니더라도 혈석 수입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크게 한탕이 안 돼서 그렇지 영지에서 혈초 농사를 짓는 것도, 몬스터를 기르거나 사냥하는 것도 소소한 벌이는 되었다. “이제 2분 남았네.” “헤헤, 이번엔 자신 있쪄요.” 자신만만한 비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기면 보호 기간을 4일밖에 적용받지 못한다. 영지의 힘을 이용해 전략을 겨루는 영지전. 영주의 힘을 이용해 무력을 겨루는 결투. 두 가지 모두 같다. 져야지만 12일의 보호 기간이 주어진다. 승리한다면 겨우 4일. 그 기간 중에 다른 세력에게 전쟁을 건다면 보호막은 사라진다. 예외가 있다면 패배에 대한 복수를 실행했을 때뿐이다. 가장 베스트는 비비가 패배하여 12일의 보호 기간을 얻고, 복수를 실행해 빼앗긴 포인트와 약탈품을 되찾아 오는 것. “헤헤, 얼른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한껏 기대한 비비의 모습을 보니, 패배 후 시무룩할 모습이 상상되어 안쓰러웠지만 별수 없었다. 우진 스스로 그 사지가 묶인 듯한 답답한 영지전을 다시 치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보호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영지전 신청을 받습니다. 결투의 신청을 받습니다.> <거절은 세 번까지 가능하며, 이후 강제적으로 집행됩니다.> 우진이 왕좌에 앉아 잠깐 기다리자, 곧 영지전 신청이 빗발쳤다. 그중 아무거나 하나를 골랐다. <리아와의 영지전을 시작합니다.> 왕좌에 앉은 우진의 시야가 휙 하니 넓어졌다. 넓은 땅이 모두 한눈에 보이며 비비와 상대 영주의 양 진영을 관전할 수 있었다. 우진은 그 와중에 상대의 프로필을 살폈다. “인간이네?” 상대 종족 정도는 나왔지만 역시나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전적 정도? <영지전 102승 542패> <결투 640승 230패> “호! 재밌겠는데?” 우진과 같은 스타일인 듯 영지전보다 결투의 승리가 더 많았다. 무력형 차원 영주라는 말. 상대의 전적을 보고 쫄 이유가 없었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 72좌가 와도 망설임 없이 복수를 실행할 것이다. “비비가 좀 버티네?” 한참이 지나도 전쟁이 끝나지 않자 우진이 지도를 살폈다. “허.” 우진의 표정이 웃는 듯 우는 듯 요상해졌다. 정말 족집게 과외라도 받았단 말인가? 전장이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124화 - 리아 > 끝 ⓒ 진설우 < 125화 - 리아 (2) > 비비가 이끄는 오크라이더 유격대가 상대의 기지를 터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와이번 둥지까지 테크트리를 올리더니 금세 적의 기지를 점령해 버렸다. <영지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영지전 보상 1만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승리자의 권리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창고 약탈, 영지 약탈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허?” 우진은 허탈한 음성을 내뱉으며 비비를 보았다. 전략관의 의자에서 일어선 그녀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고는 배시시 웃었다. “으헤헤헤, 1만 포인트는 나 주기로 했져?” “그, 그래. 누구한테 배운 거야?” “비밀이에요. 헤헤.” “재민이지?” “헉!” 깜짝 놀라는 비비를 보며 우진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쩐지 빌드가 낯익더라.’ 한국인의 특성일까. 고딩 정도만 되어도 어지간한 나라의 프로 게임단 준프로는 되지 않을까? 공부에 열중이던 재민이기에 게임을 그리 많이 즐기진 않았겠지만 비비보다는 훨씬 낫다. 전략 게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란 게 있으니 말이다. “헤헤, 재민이랑 계속 모의전을 했지용.” 우진이 지구에서 3일을 보냈으니, 비비는 차원 영지에서 12일 동안 연습을 한 셈. “아직 재민이한텐 안 되지만 더 연습하면 곧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흠, 아예 재민이 시켜도 되겠는데?” 어차피 영지전 따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하든 상관없다. “안 돼여! 내 포인트!” 비비와 우진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알림창이 떠올랐다. <무작위 선택, 영지 약탈로 승리자의 권리를 실행합니다.> <리아의 요새 7%를 빼았습니다.> <혈석 850포인트를 노획했습니다.> <건축물 용병 길드, 고블린 연구소를 노획했습니다.> <영지민 인간 14명, 고블린 3명, 엘프 1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흠, 나중에 너랑 재민이 중에 고민해 볼게.” “흥, 내가 재민이를 앞지르겠어용.” 비비의 당찬 다짐을 받으며 우진은 영지 관리를 실행했다. 승리로 인해 4일의 보호 기간을 얻었다. 지구의 시간으로 겨우 하루라 아쉽지만 잃을 것이 없으니 나쁠 게 없었다. 우진에게 필요한 것은 레벨 업을 위한 사냥 시간. 그저 하루마다 차원 영지에 들러 영지전을 받아주기만 하면 된다. 뭐, 영지전에 지더라도 결투에서 이겨 복수자의 응징으로 잃은 것을 되찾으면 되고 말이다. <리아님이 결투를 신청하였습니다.> <패자의 복수 발동, 강제적으로 결투를 집행합니다.> “이것 봐라?” 우진만큼이나 결투에 자신 있는 영주가 있었다. <전장 ‘황무지’에 소환되셨습니다.> <승리 시 승자의 권리, 복수자의 응징을 실행하실 수 있습니다.> <패배 시 죽음을 경험합니다. 12일 후 부활합니다.> 먼지바람이 부는 황무지에 덩그러니 소환된 우진은 전방을 보았다. 그곳에 잔뜩 화가 난 듯한 표정의 붉은 머리칼 미녀가 서 있었다. ‘총?’ 그녀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며 우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구의 것과는 생김새가 달랐지만 구식으로 보이는 그것의 용도는 분명 총과 닮아 있었다. 허리춤에 얇은 검을 차고 있었으나 주력 무기는 허벅지에 묶인 권총과 손에 들린 소총처럼 보였다. “쳇, 신입 영주한테 지다니. 그것도 인간한테 말이야.” “…….” 리아의 말에 우진이 대꾸 없이 그녀를 보았다. 자신도 인간인 주제에 태연히 저런 말이라니. “지구 행성? 요즘 가장 핫한 곳 출신이네. 이름이 강우진? 인사나 하지?” 리아의 말에 우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야? 같은 인간끼리 너무 쌀쌀맞은 것 아냐?” 리아는 기다란 장총을 옆구리에 받쳐 세워두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화륵. 손가락에서 불꽃이 뿅 하고 나왔다. 총과 검을 다루고 마법적 능력까지 있다. 우진이 팔짱을 끼고 그녀가 하는 양을 좀 더 지켜보았다. “뭐하자는 수작이지?” “헤에, 벙어리는 아니네? ”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주구장창 보게 될 텐데 친하게 지내잔 말이지.” “죽고 죽일 텐데 굳이 친해질 이유가 있나?” 우진이 실소했다. 어차피 영지전으로 만나게 되면 적이다. 굳이 죽일 놈과 친해질 이유도, 취미도 없다. 한데 리아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혼자서 깔깔 웃었다. “아, 정말 초보 영주 티가 나. 하하, 지구는 어때? 사냥할 만한가? 남는 차원의 조각으로 링크나 해봐?”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걸?” 우진의 말에 리아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호오, 뭐. 행성의 수호자쯤 되나 봐?” 고향 행성을 지키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더구나 지구는 아직까지 차원 영주가 깃발을 꽂지 않은 청정 지대. “포기해. 못 지켜.” “……?” “이 누나가 충고하는데 헛수고야.” 리아의 말에 우진이 인상을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는 그것을 바닥에 탁 던졌다. “후우, 그럼 시작할까?” 리아가 옆구리에 기대고 있던 장총을 쥐었다. 총구가 떨어진 담배꽁초 위에 닿았다.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우진을 보았다. “순둥이라 그런가? 장전을 고분고분 기다려 주고 말이야.” “…….” 우진은 그녀가 말이 많은 이유를 이제야 눈치챘다. 오랜만에 같은 인간 차원 영주를 만나서도, 지구에 대해 궁금해서도 아니다. 그저 전투 준비를 위한 시간 벌기용. 순순히 말려들었으니 순진하다 여길 만했다. 철컥. 그녀가 장전된 소총을 들고 우진을 겨눴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서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야?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허세 부리는 거야?” 딸깍. 총에서 들려온 작은 소리가 가져온 효과는 놀라웠다. 콰앙! 총구를 통해 뿜어져 나간 것은 총알이 아닌 연기였다. 쿠쿠쿠쿵! 마치 구름처럼 뭉게뭉게 자라나는 연기는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독성도 있는지 피부가 따끔했고 움직임이 굼떠지는 기분도 들었다. “하하하, 영지전은 좀 하더니 결투는 젬병인가 봐. 포기가 빠른데?” 우진은 연기에 가려 리아의 실체가 어딨는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도 사방에서 울리듯 들려와 시각, 청각이 모조리 봉쇄된 기분이었다. “누가 포기했다 그래?” “흐흐, 죽음의 구름이 펼쳐진 이상 넌 날 못 이겨.” 웅웅거리며 메아리치는 그 소리와 함께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타앙, 캉! 우진이 반사적으로 꺼내든 강철 지팡이로 총알을 막아내자 재밌다는 듯한 리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 수십 명이랑 싸우는 기분일걸?” 죽음의 구름에 몸을 숨기고 사방에서 교란해 공격한다. 차츰 피해가 누적되어 상대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죽음의 구름은 장전까지의 시간이 길어서 그렇지 한 번 발동되고 나면 리아에게 거의 90%에 가까운 승률을 가져다준 필살의 기술이었다. “수십 명과 싸우는 기분이라….” 슈아앙, 캉! 기습적으로 찔러온 리아의 검을 빗겨 막았다. 잠깐 모습을 보인 그녀가 훌쩍 물러나자 곧 연기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재밌네.” 우진이 죽음의 기사들을 소환했다. 휘리릭. 검은 연기가 뭉쳐져 데스나이트들이 속속 소환되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진은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아니라 정말 수십 명이랑 한번 싸워봐.” “흥! 하나씩 처리해 주지.” 상대에 대한 정보가 적어 소환 계열의 인간인 줄은 몰랐다. 리아의 콧방귀에 우진이 활짝 웃었다. 그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사악해 보였다. “수십이 모자라면 수백은 어때? 아니, 수천은?” 휘리리릭. 우진의 명령을 알아들은 데스나이트들이 휘하 해골병사들을 모조리 불러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당황한 리아의 음성이 들렸다. 죽음의 구름을 가득 메울 기세로 소환되고 있는 불사의 군대를 향해 명령했다. “저년을 잡아 와.” [왕의 적에게 죽음의 축복을!] 데스나이트들이 달려들어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길 잠시, 연기가 서서히 옅어졌다. [그르르.] 데스나이트들이 찌른 창들이 그녀의 몸 여기저기 박혀 서지도, 꿇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지탱하고 있었다. 우진이 리아에게 다가갔다. “충고?” “…….” 우진이 강철 지팡이를 도끼로 바꿨다. “네 앞가림이나 잘해.” 콰직! 우진의 도끼가 리아의 머리통에 틀어박혔다. 같은 인간? 지구의 수호자? 해봐서 안다고? 보잘것없는 차원 영주가 어디서 충고인가. <결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리아의 복수가 실패하였습니다. 승리자의 권리를 실행합니다.> <창고 약탈, 영지 약탈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우진은 창고 약탈을 선택했다. 리아의 영지 창고에 보관 중인 물품이 촤르륵 눈앞에 지나가더니 무작위로 몇 개의 물건이 선택되었다. 그중에 한 가지 물건에 눈을 크게 떴다. <스키아의 부츠> 모험가의 신, 스키아의 부츠였다. “운이 좋은데?” 그 자체로도 아주 좋은 신발이지만 이것이 우진에게 꼭 필요했던 이유는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 중 하나인 ‘트래쉬의 행진’을 만들기 위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이야 어디서든 모을 수 있지만 몇 가지 물건은 꼭 아르펜에서만 수집 가능했는데 스키아의 부츠가 그것이었다. 모험가의 신 스키아는 아르펜의 신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어차피 아르펜으로 향하긴 할 거지만 그전에 세트 아이템 하나는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만…. 이거 영지전을 잘하면 의외로 수월할지도 모르겠는데?” 계속 진행하자면 영지전을 연달아 치를 수 있었다. 연달아 승리하여 포인트를 얻어 그것으로 재료 아이템을 구입한다면…. 우진이 사용 가능한 상점은 두 가지다. 업적 포인트 상점과 차원 상점. 업적이야 우진이 사냥을 해야 모을 수 있지만, 차원 에너지는 영지의 가신들만으로도 모을 수가 있었다. “재민이 뭐하려나?” 우진이 기분 좋게 웃으며 약탈품을 정리하고는 성을 나섰다. 재민이가 오늘따라 왜 이리 예뻐 보일까? *** <결투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복수에 실패하였습니다.> <당신은 12일 뒤 부활합니다.> 점점 의식이 흐려진다. 대수로울 것도 없는 죽음이다. 벌써 수백 번 경험한 것이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익숙하거나 즐거울 리는 없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극한의 스트레스가 분노로 표출되었다. ‘개자식!’ 차원 영주들 사이에서 리아는 미친개로 소문이 자자하다. 영지전보다 결투를 더 선호하는 그녀는 혹시라도 영지전에서 지면 무조건 복수전을 신청했다. 거기서 져도 끝내 이길 때까지 결투를 신청한다. 그녀의 다음 타깃이 정해지는 순간이다. ‘지구 행성이라고? 두고 보자.’ 행성의 수호는 부질없는 짓이다. 결국, 자신이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차원 영지뿐. 고향 행성 따위는 누구나 가슴에 묻게 마련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고향을 파괴하는 것은 침략자가 아니다. 내부인에 의해서지…. 지구는 가라앉는 배다. 살기 위해 배를 수리하는 건 미친 짓이다. 각자 살길을 찾아야지. 수영을 하든, 배를 침몰시킨 침략선에 얻어 타든…. 리아의 의식이 완전히 흐려지며 짙은 허무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 125화 - 리아 (2) > 끝 ⓒ 진설우 < 126화 - 핏빛 동창회 > 차원 영지 아르달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리아에게서 뺏은 영토를 더하자 아르달 전체의 크기가 10%나 넓어졌고 용병 길드와 고블린 연구소도 배치했다. 산 위에 위치한 우진의 성에서 나오면 곧장 상가 거리가 이어졌다. 제법 구색을 갖춘 거리는 북적이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왕래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상가 건물들에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도 영지의 던전 에너지가 차츰 증가하는 중이었다. 거리를 지나쳐 가면 몇몇 영지민의 집이 나오고 산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군사시설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추가로 영지에 받은 난민들의 집이 그 주변에 지어지고 있었다. 재민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우진이 카페를 지나치다 걸음을 멈췄다. “어? 너 여기서 뭐하냐?”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 오셨어요?” 우진이 재민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휙 내부를 둘러보니 얼마 전 데스나이트들이 어울려 카드 게임을 하던 선술집보다는 훨씬 더 현대적으로 꾸며진 모습이었다. 이런 현대적 감성을 그리워할 존재라면…. “네가 지었냐?” “네, 비비 집사가 고르는 걸 도와줬어요. 지구랑 비슷한 취향의 행성들이 여럿 있었나 봐요.” 차원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건물의 양식은 수천수만 가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업적 상점엔 지구의 물건이 다수 있었지만 차원 상점에는 아직 없었다. 지구와 비슷한 행성의 물건들이 있을 뿐. ‘아직 온전히 동기화되지 않은 것과 연관 있나?’ 아직 지구와 다른 여타의 차원 간은 네 배의 시간차가 존재했다. 우진이 가진 내시아의 기둥을 통해 자쿠 행성과 링크되는 데 30일이 필요한데, 지구의 던전을 하나 구입하자면 120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자쿠 행성과 던전의 시간차는 0, 지구 행성과 던전의 시간차는 여전히 네 배다. 우진은 재민이 마시고 있는 커피를 보았다. “맛도 비슷해? 여기.” 한 손을 슬쩍 들고 카페 내부의 직원을 불렀다. 고양이 귀를 가진 수인족 소녀가 다가와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영주님께 인사드려요.” “그래. 나도 저거 하나 줘봐.” “저, 저걸 마시게요?” “응? 뭔데 그래.” 우진이 재민을 돌아보자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핀데요.” “피?” “네, 이것저것 마셔봤는데 인간 피가 제일 맛있어요. 직접 해칠 용기는 없고… 여긴 싸게 파니까.” “…별걸 다 파네. 나 커피 하나 줄래?” “네, 영주님.” 프릴 달린 예쁜 종업원복을 입은 수인족 소녀가 인사 후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옹기종기 테이블이 위치한 테라스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참 이상해요.” 카페에 앉아 한가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거리를 구경하는 것은 요즘 재민의 일상 중 하나였다. 처음엔 사람도 적었지만 이제 영지의 인구도 병력을 제외하고도 400명이 넘었다. “뭐가 이상해?” “어떻게 이런 세상이 있을 수 있지 싶어요.” 우진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거리를 보았다. 수인족은 그나마 인간의 생김새이기라도 하지, 오크들과 가끔 거리를 걷는 덩치 큰 트롤도 있었다. 아예 하체가 커다란 뱀 꼬리인 나가족도 있었고…. “할로윈 축제 중인 외국에 온 것 같아요. 영화 세트장에 온 것 같기도 하고.” “흐음.” 우진이 가만히 재민을 보았다. 얼굴이 전에 비해 더 하얗게 된 것이 어딘지 모르게 조금 병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분위기 자체는 많이 밝아져 있었다. “좀 살 만한가 봐?” “적응이 된 거겠죠?” 우진이 피식 웃었다. 재민의 말이 맞다. 다들 그렇게 적응하는 거니까. “누나는 언제 보러 갈 거야?” “형 오시면 물어보려고 했어요. 지구로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비비한테 말하면 서울역 1번 출구로 향하는 포탈 열어줄 거야. 가고 싶을 때 언제든 말해.” “후, 선글라스 하나 사야겠네요.” 우진이 실소했다. 낮과 밤이 의미 없는 차원 영지에서는 모르지만 지구에서 재민은 해를 볼 수가 없었다. 피부가 모조리 타버릴 테니까. “그보다 영지전은 어떻게 한 거야? 워크 좀 했나 봐?” “좀 했죠. 고3부턴 못 했지만.” “심심하면 네가 영지전 대신 할래?” “제가요?” “그래.” “그냥 프로게이머 쓰시면 안 돼요?” “그래도 되긴 한데 뭘 믿고?” “예?” 던전 출입이 가능한 각성자 중에 프로게이머 하나 없겠는가. “져도 돼.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야.” 우진의 목적이 랭킹의 상승에 있지 않았으니까. “흠, 그래요? 그럼 저야 좋죠. 비비 집사 이야기 들어보니 이기면 포인트도 주신다면서요? 엄청 자랑하던데.” “…음, 줄게.” 어쩌면 포인트 욕심에 비비가 하려고 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이기면 좋고 져도 뭐, 복수로 되찾아오면 본전이니…. “다음 영지전이 4일 뒤니까, 지구에서 하루 동안 보낼 수 있겠네. 누나 보러 갈래?” “네. 그러죠.” 재민이 테이블에 놓인 컵을 집어 남은 피를 들이켰다. 꿀렁꿀렁 피를 마신 입 주위로 핏자국이 뻘겋게 남아 있었다. 아쉬운지 입술을 핥았다. “하아.”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피를 들이켤 때 느껴지는 희열을 참긴 어려운지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가요.” 금방 정신을 차린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수인족 소녀가 커피 잔을 들고 왔다. “영주님, 여기 커피 왔습니다.” “음, 마시고 가자.” 우진이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고 재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아르달의 숙소. “응. 오늘 저녁 7시지? 응, 우진이는 못 가지. 응, 뭐 바쁘니까.” 지원은 전화를 끊고는 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 아직 약속 시간까지 꽤 많이 남아 있었지만 지원은 샤워를 했다. 솨아아아.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아르달 시국이 대한민국과 분리 중이다. 아직 이렇다 할 조약의 체결이 없어 국경도 모호하고 사람들의 왕래 또한 자유롭다. 제대로 협의가 이뤄지더라도 대한민국과 아르달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몇몇 과격한 종교 단체와 시민 단체에서 이것을 반대하고 있어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외출할 때는 많은 경호원이 붙었다. 우진의 가족과 그의 애인으로 알려진 도지원은 특급 경호 대상이었다.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수십 명의 경호원을 끌고 다니기가 민폐 같아 자의로 칩거 생활 중이었다. 최해솔이 길들여 오는 몬스터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소설도 쓰기에, 그리 외롭진 않았지만 갑갑한 것은 사실. 이번 동창회는 그녀로서도 기대되는 외출이었다. “하아, 우진이도 가면 좋을 텐데.” 애초에 강우진 때문에 열리는 동창회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어버린 그를 보기 위해 거의 전 졸업생이 모인다 해도 과언이 아닌 모임이다. 오죽했으면 연예인이 되고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신디도 모습을 보일까. 그들의 기대야 어떻든 간에 누구보다도 바쁜 강우진이기에 별수 없었다. “흐음.”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두른 채 욕실을 빠져나온 그녀는 깜짝 놀랐다. 거실의 소파에 전혀 의외의 인물이 앉아 있어서였다. “누나, 오랜만.” 재민은 어색하게 일어서며 한 손을 들었다. “하하.” 지원이 두 손을 모아 놀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금방 습기가 차올랐다. “재민아!” 그녀가 뛰어가 동생을 와락 껴안았다. 뭔가 물컹한 것이 닿아서일까? 샤워 타월이 풀어질 듯 위태로워서일까? 재민의 얼굴이 빨개졌다. “으윽, 누나.” “흐흑, 흑. 괜찮아, 괜찮아. 누난 다 이해할 수 있어.” 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누나 이것 좀 놓고….” “흡혈귀면 어때. 너도 똑같은 사람이야. 다르지 않아. 누난 너 안 버려. 흐흑, 밥은 먹고 다녀? 얼굴 하얘진 거봐.” 지원이 재민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괴로워할 동생을 생각하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야위고 창백해졌는지. “누나 이것 좀….” 재민은 흘러내리려는 샤워 타월을 잡아주었다. 동생이라 그럴까? 그녀는 크게 부끄럼 없이 흘러내리려는 타월을 추슬렀다. “흐윽, 알겠어.” “우진이 형도 있는데….” 괜히 재민이 더 민망해 얼굴을 붉혔다. “응?” 지원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우진이 히죽 웃으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역시 몸도 예뻐.” “…….” 봐봐야 흘러내리는 가운에 겨우 옆 라인뿐이지만…. 지원이 뻘게진 얼굴로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묵묵히 드레스룸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우진이 미소 지었다. “너네 누나 왜 저러냐?” “묻지 마세요.” 몰라서 묻는단 말인가? 재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아름다운 남매 상봉해라.” “가시게요?” “쉴 시간이 어딨어. 던전 돌아야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던전은 왜 그렇게 열심히 들어가세요?” 우진의 차원 영지에 있으며 이 세계의 변화에 대해 조금은 파악한 재민이다. 던전은 보통 혈석을 벌기 위해 간다. 지구에서는 그것이 돈이 되고, 영지에서는 포인트가 된다. 우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재민에게는 그저 아리송할 뿐이다. “레벨 업.” “레벨 업이요?” 우진이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고 재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레벨 업이면…. 더 수련할 게 남았단 건가?” 저렇게나 강한 사람인데도 아직 자기 향상을 위해 던전에 도전한다니… 저런 성실함이 있어서 지금처럼 강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깊은 허무의 공간에 출구가 생겼다. ‘으윽.’ 자아를 잃을 정도의 시간이었으나 출구의 빛에 가까워지며 옛 기억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살고 싶어.’ 출구의 빛이 온몸을 감쌌을 때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았다. ‘다신 죽고 싶지 않아.’ 긴긴 죽음의 시간을 지나 이상호가 부활했다. 익숙한 얼음의 성에 그가 납작 엎드렸다. “쓸모없는 놈.” “…….” 이상호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엘로가 아까운 포인트를 지출해 가며 되살린 놈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마, 맡겨만 주십시오. 이번엔 실수 없이 브레이크를 일으켜….” “멍청한 놈!” 이상호의 절실한 말은 이엘로의 호통에 뚝 그쳤다. 이제 그는 이전처럼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킬 수 없었다. 죽음과 부활을 겪으며 ‘지구 행성의 각성자’가 아닌 차원 영주 25좌의 대군주, 이엘로의 가신일 뿐이니 말이다. 지구에 더 이상 그의 ‘뿌리’는 없다. “이것을 가지고 자쿠 행성으로 가라.” 이엘로의 앞에서 둥실 떠오른 반지가 이상호의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자쿠이를 찾아 말을 전해라.” “하명해 주십시오.” “지구를 파괴하면 이페린 행성으로의 출입을 허하겠노라.” 뜻을 알 길은 없다. 그저 전하라 하니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너는 돌아오지 말고 지구로 가라. 지구인들을 분열시켜라.” “…지구엔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반지를 착용해라.” “…….” 이상호가 손바닥을 폈다. 알 수 없는 마력이 느껴지는 위험해 보이는 물건. 그가 천천히 폴리모프 반지를 착용했다. < 126화 - 핏빛 동창회 > 끝 ⓒ 진설우 < 127화 - 핏빛 동창회 (2) > 자쿠 행성에서 가장 높은 산 카오손. 그곳에 자쿠 행성의 가장 큰 세력 노란 도마뱀의 본거지가 있었다. 소속된 차원 영주들이 모두 모여 회동을 가졌다. 각양각색의 생김새를 가진 이들이 열여덟 명이나 모였다. 웅장한 기둥들이 늘어서 길을 만들었다. 그 위에 차원 영주들이 위치해 길을 걷는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요호호, 저 인간이 대군주인 이엘로님의 전령이라고?” “형편없는 녀석이군. 딱 봐도 소모품이야.”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확연히 들렸으나 대꾸하지 못했다. 아니,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높은 기둥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들 중엔 신장이 10미터가 넘는 타이탄도 있었고, 흉측하게 생긴 정체불명의 종족도 있었다. 그나마 인간의 생김새를 가진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도 내뿜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목을 받으며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부담되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커다란 기둥들을 지나 길의 끝에 위치한 가장 높은 탑. 카오손의 꼭대기 가장 높은 곳. 쿠르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골드 드래곤 라자쿠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엘로 님의 전령이 내게 무슨 일이지?]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소리에 이엘로의 가신 이상호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지구를 파괴하면 이페린 행성의 출입을 허락한다 하셨소.” [쿠쿠쿠, 이페린.] 아련한 그 이름에 라자쿠이가 몸을 떨었다. 기쁜 듯, 분노한 듯 한차례 드래곤 피어가 휘몰아쳤다. 연합의 차원 영주가 모두 무릎 꿇으며 버텨냈다. 이상호는 기절할 것 같은 아찔함을 겨우 참았으나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전투 와중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다른 말은 없었나?] “나를 지구로 보내주시오.” [어렵지 않지.] 라자쿠이는 활짝 날개를 폈다. 쭉 뻗은 날개는 50미터가 넘었고 그 사이로 드러난 동체도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그의 기지개에 차원 영주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지구를 접수한다.] “하면 이 행성은 어떻게 합니까?” 라쿠 행성은 노란 도마뱀 연합 말고도 검은 모자와 붉은 망치 연합이 있었다. 그들에게 주도권을 뺏긴다면 이 행성에서의 벌이가 적다. 하지만 이미 세 개의 세력이 공존하며 상당 부분 자원을 고갈했다. [주 사냥터를 지구로 옮긴다.] 이제 막 동기화도 마치지 않은 행성. 위험 부담이 많지만 그만큼 보상도 크다. 무엇보다 희생을 감수할 만한 목적이 생겼다. 이페린, 고향 행성으로 다시 돌아갈 길이 열렸다. *** 목동역 앞에 밴이 멈춰 섰다. “사장님, 여깁니다.” 승훈의 말에 우진이 의자 등받이를 일으키며 눈을 떴다. “6성이지?” “넵.” 목동역 4번 출구. 리셋이 일어난 지 7일이 지났지만 아직 공략에 도전한 적이 없는 던전이다. 최초 발견하여 우선권이 있는 KH길드가 에너지를 측정했는데 기존의 6성 던전보다 더 많아 선뜻 A급 각성자팀을 들여보낼 수 없었다. 탈출용 귀환 포탈을 가지고 공략에 도전해야 하는데 그 또한 비용이 만만찮아 최고의 드림팀을 꾸리는 와중에 아르달의 요청이 있었다. 아직 던전 브레이크까지 여유 시간이 많지만 우진이 공략해주기로 한 것이다. 운영 수익에서 지분을 나누기로 했지만 그런 것은 길드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우진으로서는 사냥터가 필요할 뿐. “종일 여기 돌 거니까, 애들끼리 돌아가면서 밥 먹고 그래.” “넵, 걱정하지 마십시오. 철통같이 지키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우진이 승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던전으로 향했다. <미비치의 초원에 입장하셨습니다.> <‘결투’, ‘영지전’, ‘방문’, ‘잠입’, ‘공략’ 모드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역시 차원 영주였네.” 6성 던전까지는 던전 오너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이상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것은 거의 차원 영주의 던전이었다. 이번 또한 다르지 않은 경우. 이런 차원 영주들의 링크가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결국 어느 하나가 연결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물론, 던전을 공략해서 링크를 끊으면 되겠지만 그사이 차원 영주가 지구에 현신해 저지를 만행이 염려되었다. 그들을 그저 그런 각성자나 몬스터에 비교하기는 급이 달랐으니 말이다. 쥬리엘이나 래쉬모드만 하여도 우진에 의해 쫓겨나지 않았다면 지구 멸망의 날이 훨씬 더 가까웠을 것이다. “뭐야?” 우진은 텅 빈 지하철역을 걸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던전에 아예 에너지를 투자하지 않은 것인지 리젠되는 몬스터가 하나도 없었다. 굳이 아래층까지 내려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공명음을 내며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포탈이 열려 있었다. “조무래기들은 필요 없다는 건가?” 던전의 몬스터 배치는 1차적으로 침입자를 거르는 역할을 한다. 어느 정도 검증된 자들만 차원 영지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장치다. 차원 영주의 성향에 따라 던전에 몬스터를 배치하는 대신 모조리 차원 영지로 끌어들여 처치하기도 한다. 우진이 포탈을 통과하자 푸른 초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만하게 굴곡진 땅들이 언덕을 만들어 시야를 좁게 했다. 주변을 둘러보곤 가장 높아 보이는 구릉지에 올라 사방을 살폈다. “뭐가 이렇게 황량해?” 우진은 몬스터라고는 찾을 수 없는 땅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 주인의 취향이 소수 정예만을 육성하자인가? 측정한 던전의 에너지가 범상찮았으니 전체의 전투력은 같다. 몬스터의 수가 많거나, 아주 강력한 몬스터가 몇 튀어나오거나. 아무래도 운이 없을 모양인지 후자인 모양이었다. 네크로맨서인 그에게 있어 절대 강자보다 만만한 다수를 상대하는 게 훨씬 더 쉬웠다. 죽는 족족 아군이 되거나 시체 폭발의 매개로 활용되니 말이다. 그렇다고 적이 강하다 하여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락토.” 검은 연기가 뭉쳐 창을 귀신같이 다루는 데스나이트 락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 로드.] 대인전에서 키바 못지않게 강한 죽음의 기사. 기마전이라면 비교할 것도 없이 그가 최고다. 혹시라도 차원 영지 아르달에 침입자가 발생할지 모르니 모든 데스나이트를 소환할 수는 없다. 내시아의 기둥을 통해 자쿠 행성의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공략에 성공이라도 한다면 동기화도 제대로 못 한 던전을 그대로 잃어버리니 말이다. 영 사냥이 어렵다면 20기 정도는 불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둘이 가보자.” [명대로.] 우진과 락토가 유령마를 소환해 올라탔다. 우진도 전사의 무기를 창으로 변화시키고는 초원을 달렸다. 목적지는 볼 것도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녹색 빛의 기둥. 저곳에 귀환석이 있을 것이다. *** 목동역 4번 출구 앞. “아으, 춥다.” “실장님, 저기 기자들 붙은 것 같은데요?” “뭐? 어디?” 우승훈이 주위를 살피니 갓길에 주차된 차에서 망원렌즈를 낀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냅둬. 한두 번이냐.” “네, 그런데 이렇게 다녀도 되는 겁니까?” “응? 뭐가?” “저희 독립했지 않습니까. 여긴 한국 땅인데….” 승훈이 직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야, 우리가 북한이냐? 뭐, 꼭 나라 다르면 전쟁해야 되냐.” “아.” “그리고 아직 조약도 체결되지도 않았는데, 뭐. 우리 아직 한국 사람이야.” 승훈의 말대로 그들은 아직 한국 사람이다. 다만 아르달이라는 국적을 추가로 취득한 이중국적자나 다름없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헌법을 개정하는 국민투표를 마치면 세부적인 조약을 체결할 것이다. 말이 좋아 다른 나라지, 로마 교황청과 비슷하게 운영될 것이다. 한국 국적을 가지면서도 길드에 입사하면 아르달 국민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퇴사와 함께 시민권은 박탈당하고 말이다. “어후, 법 생각하니까 머리 아프다. 좀 쉬자.” “네. 뭐 먹을 거라도 좀 사오겠습니다.” “그래.” 직원이 쪼르르 길 건너 편의점으로 달려갔고 승훈은 던전을 지키는 KH길드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아유, 하루 동안 볼 것 같은데 인사나 합시다.” “아, 예에.” 승훈의 지위는 낮지 않다. 낮기는커녕 아르달의 창립 멤버이자 우진을 직속으로 수행하는 비서실장이다. 항간에는 아르달 시국의 외교부장관에 내정되어 있다 하니, 평사원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높으신 분이다. 어색하게 인사하는 KH길드의 사람들과 승훈은 한참을 수다 떨었다.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컵라면에 김밥을 먹으며 떠들기 한참, 문득 생각나 시계를 보았다. “어? 왜 이렇게 안 나오시지?” “그러게요. 사장님 플레이 타임 생각하면 지나치게 늦네요.” “흐음….” 승훈은 묘한 불안감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최초 공략 던전이라고 하지만, 그간 우진이 보여준 기적에 가까운 던전 공략대로라면 벌써 마치고 나왔어야 했다. 입장한 지 여섯 시간. 안에서는 하루가 꼬박 지났을 것이다. 여태 이런 적이 없었기에 승훈은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굳게 닫힌 결계를 보았다. “어? 속보 떴네요.” “응? 소리 키워봐.” 휴대폰으로 티비를 보던 직원이 승훈의 말에 이어폰을 빼곤 볼륨을 높였다. -동시다발적인 던전 리셋이 일어난 가운데, 현재 집계된 바로는 서울이 열한 곳, 대구가 네 곳, 부산이 일곱 곳, 총 스물두 곳의 신규 던전이 생성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에너지 측정 결과 이 중 여덟 곳이 6성 던전 이상으로 추정되며…. “뭐야?” 승훈이 얼른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했다. 무작위로 일어나는 던전 리셋이다.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수의 던전이 리셋된 것은 처음인지라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허, 한국만 그런 게 아니네?” 뉴스보다 인터넷은 더 난리였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전부 던전 리셋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런, 서울에 방금 세 곳 추가됐답니다.” “뭐지? 무슨 일 일어나는 거 아녀?” 직원들이 불안함에 수근거렸다. 평소 리셋되는 던전을 차지하기 위해 길드들이 경쟁하는 것은 수요가 적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한꺼번에 일어나다니…. 묘한 위화감이 불안감을 불러왔다. 불안하니 찾게 되었다. “사장님….” 강우진은 또 오늘따라 왜 이리 던전 공략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가? 평소와 같지 않은 모습에 불안하기만 한 승훈이었다. *** 홍대의 길거리를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허억, 헉.” 어딘가 아파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심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초리가 흔들렸다. ‘방금 그건 진짜인가?’ 가짜라고 하기엔 머릿속에 주입된 지식들이 너무 생생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혜연이가 살 수 있어.’ 겨우 E급의 각성자인 그다. 어쩌면 이건 아픈 딸을 치료해 주기 위한 신의 자비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의 은총이든, 악마의 유혹이든 상관없다. 아픈 혜연이가 나을 수 있다면 말이다. ‘한다.’ 선택지 따위는 없다. 남자는 천천히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1번 출구는 방금 일어난 리셋으로 인해 경찰 인력들이 막아서고 각성자 관리국에서 나온 측정 장비로 에너지를 재느라 어수선했다. “어어? 물러나세요. 위험합니다.” 경찰의 제지에 잠깐 눈치를 본 남자는 상대가 한눈파는 사이 냅다 뛰었다. “어어? 저 사람 뭐야? 잡아!” 눈치챈 경찰이 나서기도 전에 남자는 계단을 구르듯 뛰어 던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127화 - 핏빛 동창회 (2) > 끝 ⓒ 진설우 < 128화 - 핏빛 동창회 (3) > 리셋된 지구의 던전에 링크하자 귀환석이 생성되었다. 아직 제대로 동기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120일을 기다려야 하지만 영지의 병사들은 곧 출격할 듯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요호호, 준비해라.” 차원 영주이자 거대한 거미 인간 샤로트의 말에 이상호가 긴장으로 굳은 몸을 풀었다. ‘지구로 돌아간다.’ 죽음과 부활로 무뎌진 이상호에게도 고향 행성이 주는 아릿한 감정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잠시 후, 붉은 포탈이 생성되더니 지나치게 불안해 보이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몬스터들을 보고 경기를 하더니, 곧 정신을 차리곤 눈치 보며 귀환석 쪽으로 다가왔다. “링커가 왔군.” 샤로트의 군대는 지구인인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가 귀환석을 쥐고 사라지자 샤로트가 웃었다. “요호호, 한번 판을 깔아볼까?” 행성을 식민지화한 경험은 많다. 초반의 희생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이후의 보상을 생각하면 감수할 만하다. 지구인인 링커가 알아서 결계를 열어준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직 지구가 완전히 동기화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 <지구 행성에 진입합니다. 74%의 능력을 구현합니다.> 강제적인 던전 링크의 단점이 이거다. 차원 영주인 그는 물론, 휘하의 몬스터 전체가 동기화율만큼 페널티를 받는다. 120일 동안 외부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링커에 의해 토벌되지 않은 던전의 결계가 사라졌다. 몬스터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사이 함께 빠져나온 이상호가 놀라 피신하는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 MBS 방송국 녹화장. 도재민은 길드에 부탁해 구한 표를 쥐곤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누나는 동창회에 갔고, 우진과 성구 등 친한 사람들은 모조리 던전 공략을 위해 나가 버렸다. 영지전까지 돌아가야 하니 남은 하루의 시간 동안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슬기가 벌써 데뷔까지 했다니.” 보고 싶었던 사람. 자신의 첫사랑이자 차마 잡지 못했던 그녀가 일주일 전 꿈을 이뤘다. ‘핫걸스’란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를 한 것이다. 오늘은 신인 걸그룹인 ‘핫걸스’의 음악 방송 녹화가 있는 날. 먼 발치에서나마 보고 싶었던 슬기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오, 오빠, 렉소 응원하러 오신 거예요?” “응?” 옆자리에 앉은 소녀가 용기 내 묻는 말에 재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하얀 피부에 잘생긴 그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자, 볼이 발그레해져 차마 눈을 못 마주치고 고개를 돌렸다. “여, 여기 렉소 오빠들 응원석인데….” “…….” 재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모두 저마다 같은 색깔의 풍선을 쥐고 있었다. “아니, 난 핫걸스 팬이야.” “핫걸스? 그게 누구지.” 이제 데뷔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보니 유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기를 논하기 이전에 인지도 자체가 전혀 없는 느낌. “너네 핫걸스 나오면 소리 잘 질러주고 그래.” “아, 알았어요.” 오빠들의 응원을 위해 이 위험한 서울의 방송국까지 온 소녀들답게 잘생긴 재민의 말에 바로 수긍했다. 잘생김은 권력이 되어 소녀들을 불러들였다. 자신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드는 그녀들을 보며 재민이 겨우 가쁜 숨을 삼켰다. ‘못 참겠어.’ 더 있다간 누군가의 목을 물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그럼 핫걸스 응원 꼭 해주기다?” “네. 알았어요, 오빠.” “그래.” 재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자 소녀들이 웅성거렸다. “꺄악! 사진 찍었어?” “와, 대박 잘생겼어. 대박!” “어디 연습생인 거 아냐? 핫걸스인가? 거기 회사 연습생 같은데?” “같은 회사 식구 응원 왔나 봐.” 흡혈귀가 되며 더욱 희고 고와진 재민을 철석같이 연예인 지망생이라 생각하는 소녀들이었다. “우와, 나 저 오빠 데뷔하면 갈아탈래.” “나 아까 악수했어. 하아, 향기 나는 것 같아.” 그녀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좌석 밖으로 사라진 재민은 적당한 자리에 서서 무대를 보았다. 사람의 얼굴을 식별하기엔 너무 먼 거리였지만 망원경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의 신체 능력은 이미 인간의 것을 초월한 지 한참이었다. 알 수 없는 몇몇 그룹들의 리허설이 끝나고 곧 핫걸스가 무대로 올랐다. 멤버가 세 명인 것은 재민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직 슬기만을 눈에 가득 담고 있었다. “야윈 것 좀 봐.” 원래 날씬하던 애가 다이어트를 더 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걱정과는 별개로 무대의상까지 입고 노래하며 춤추는 슬기의 모습은 예쁘게만 보였다. “하… 슬기야.” 그때 그녀를 붙잡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귀고 있을까? 아니, 너도 꿈이 있는데 괜히 발목을 잡았을지도 몰라. 그래, 지금 이대로가 적당하다. 이제 난 괴물이 되어버렸는걸. 슬기야, 멀리서나마 응원할게. 재민이 아련한 눈빛으로 무대를 마치고 내려가는 핫걸스를 보았다. 슬기를 보았으니 되었다. 더는 가수들의 무대를 볼 필요가 없었기에 방송국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뭐, 뭐야?” 크오오오! 괴수들이 도로에 득실거렸다. “던전 브레이크인가?” 우진의 차원 영지 아르달에서 보낸 시간이 적잖다. 몬스터의 등장이 별반 놀랍진 않았으나 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재민의 전투력은 크게 뛰어나지 못했으니. “얼른 도망쳐야겠네.” 끼오오! 괴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방송국 건물 옥상으로 비행 몬스터들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몇몇은 창문을 깨고 안으로 진입했다. “스, 슬기야!” 재민이 슬기의 걱정에 방송국 건물로 다시 내달렸다. *** “이야, 이게 누구야!” “하하, 반갑다. 도대체 얼마 만이냐?” 누군가에겐 추억이, 누군가에겐 동창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사회 인맥의 장이 되어줄 동창회가 시작되었다. 제법 돈을 썼는지 호텔 뷔페를 통으로 빌려 진행했는데 참석 인원이 200명이 넘었다. 졸업생 90% 정도가 참석한 대규모 동창회였다. 아직은 사회 초년생인 그들이 바쁜 와중에도 동창회에 모인 것은 그 유명한 강우진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서로 반가운 얼굴을 보며 인사하면서도 두리번두리번 강우진을 찾는 그들이었다. “지원아, 우진이 오늘 못 오지?” “응. 그럴 것 같아.” 회장인 남지혁의 물음에 지원이 답했다. 그때 실내임에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신디가 다가와 물었다. “왜 못 오는데?” “바쁘잖아.” “흐음, 그래?” 강우진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굳이 자신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신디는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괜히 스케줄까지 조정해서 왔네.’ 동창회 참석 시간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비워뒀다. 요즘 한창 주가 높은 연예인인 그녀에게 1분 1초가 모두 돈이다. “이여, 신디야. 이번에 찬조 세게 했던데?” “뭐, 그동안 참석 못 했으니까.” 회장 남지혁의 공치사에 신디가 손으로 선글라스를 쓱 밀어 올리며 고쳐 썼다. “그럼 반가웠어.” “어어? 벌써 가게?” “스케줄이 바빠서.” “어, 그래. 별수 없지. 아쉽다 야.” 남지혁이 떨리는 속마음을 감추며 태연하려 애썼다. 스물네 살의 청년. 한때 동창생이었으나 5년 동안 티비의 연예인으로만 보다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니 신기하고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잘 놀다 가.” “어, 내가 바래다줄게.” “그래, 그럼.” 신디는 굳이 마다치 않고 뷔페홀을 빠져나갔다. 남지혁이 배웅해 주기 위해 뒤따랐고 홀로 남겨진 도지원은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우진이 왔으면 좋았을걸.” 우진이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아는 지원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 옛 추억을 조금이라도 되살려 낸다면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 지금도 열심히 던전을 공략하고 있을 그에게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어?” 지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입구를 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신디와 지혁이 뭔가에 쫓기듯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었다. 곧이어 들이닥친 거미 떼들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사람의 머리통만 한 거미 수백 마리가 기어들어 오는 광경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요호호. 여기 인간들이 한가득이네.” 콧노래까지 부르며 등장한 거미 인간, 샤로트. 그녀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 드르르륵. 궤도가 미끄러지며 탱크들이 도로를 질주했다. 키에엑! 섬뜩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점령한 박쥐형 몬스터에 헬기 전력이 무용지물이었다. 빌딩 건물 사이사이를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며 엄폐하는지라 지상군의 대공사격에도 수를 줄이기 힘들었다. 문제는 적이 박쥐 몬스터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오오! 괴성과 함께 달려오는 거대한 몬스터 곰을 향해 탱크의 주포들이 불을 뿜었다. 콰콰쾅! 폭발의 여파로 도로가 헤집어지고 빗겨난 포탄에 맞은 건물의 벽이 무너졌다. 먼지를 피워 올리며 나타난 거대한 곰은 어깨가 뜯어지고 한쪽 팔이 날아간 처참한 모습이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그어억! 콰직! 덩치가 2층 건물만 한 곰이 휘두른 앞발이 주포를 이쑤시개처럼 휘게 만들었다. 다시 휘두른 앞발에 탱크가 뒤집어지며 궤도 바퀴가 헛돌았다. 콰콰쾅. 두 번째 집중포화에 머리가 깨진 곰이 바닥에 쓰러졌다. 겨우 잡긴 했지만 문제는 이런 몬스터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길! 이게 무슨 난리야.” 기갑부대를 이끄는 대장 한상필은 답답한 마음에 욕설을 뱉었다. 그간 브레이크로 인한 피해가 적었던 것은 미리 대비할 수 있어서였다. 임박 시간 즈음에 주변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고 군부대가 진을 이뤄 집중포화를 퍼부으면 된다. 그런데 그럴 만한 시간은 물론, 민간인들의 대피도 이뤄지지 않아 제대로 공격을 가하기도 어려웠다. 서울의 각지에 자리 잡은 군부대의 진압이 지지부진한 가장 큰 이유였다. “망할! 길드들은 뭘 하는 거야?” 군부대의 화력지원만으로는 몬스터를 모조리 토벌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건물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총과 대포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을 처치하기에 각성자 전력은 꼭 필요했다. 지금 서울은 물론 대구, 광주, 부산 할 것 없이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수없이 많은 던전이 일시에 브레이크가 일어나 병력이 모자랐다. E급 이하의 각성자는 총 든 군인보다 더 쓸모없다. 적어도 D급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터진 던전이 하도 많아 그 수도 충분치 않았다. 수적으로 안 된다면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하는 고랭크의 각성자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지사. 핵무기의 사용까지 고려하는 국가가 있을 정도니 더욱 그의 존재가 절실했다. “그는 아직인가?” 도로와 건물들을 점령한 몬스터. 이질적인 그 모습이 5년 전 던전쇼크를 떠올리게 했다. 세계는 지금 그 끔찍한 지옥이 다시 반복되려 하고 있었다. “대, 대령님! 저기 좀 보십시오.” “응?” 부관의 다급한 외침에 한상필은 목에 걸어둔 망원경을 잡았다. 가리킨 곳을 본 그는 침음성을 삼켰다. “으음.” 거대한 드래곤이 남산타워에 발톱을 박아넣고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서울을 굽어살피듯 착지해 있는 모습이 꼭 영화를 보는 듯했다. “저, 저렇게 큰 몬스터는 처음입니다.” 한상필도 처음이다. 곧 공군 전투기 두 대가 다가와 발사한 미사일이 남산타워의 괴생명체를 향했다. 콰아앙! 멀리 떨어진 기갑부대에까지 폭발의 여파가 미칠 정도의 공격이었으나 드래곤은 전혀 피해를 당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 정도 덩치에 보호 마법까지 펼치는 몬스터. 그저 영화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재앙이 될지도 모를 몬스터가 서울에 나타났다. < 128화 - 핏빛 동창회 (3) > 끝 ⓒ 진설우 < 129화 - 미비치 > 띠딕, 틱. 깜박이는 형광등에 핫걸스의 멤버들은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곧 꺼질 듯 위태로운 불빛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뭐야? 방금 느꼈어?” “지진 아냐?” 대기실엔 핫걸스 외에도 다른 신인 그룹이 몇 있었다. 슬기는 불안한 눈초리로 멤버들과 손을 꼭 잡았다. “괜찮을 거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상 대피를 알리는 사이렌이 요란한 빛을 뿜었다. 애애애애앵! “꺄아아악!” “뭐야? 뭔데 그래.” 갑작스런 사이렌 소리에 비명부터 지르는 사람과 우왕좌왕하는 이들로 대기실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당황하기는 핫걸스의 슬기도 다르지 않았다. 기본 교육 과정에까지 있는 대피 요령이 생각나 소리 질렀다. “대피소! 대피소 가야 돼요.” 던전쇼크 이후 서울에 지어지는 모든 건물엔 대피소를 신설하도록 하고 있었다. 슬기의 말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우르르 복도로 튀어나왔다. 대낮이지만 조명이 꺼져 어두운 복도가 더욱 공포심을 자극했다. 비상구 표시를 보곤 너도나도 뛰어갔다. 하나가 뛰자 우르르 뒤따르는 것을 보곤 슬기가 위화감을 느꼈다. ‘천천히 순서대로….’ 분명 질서를 지키며 이동해야 추가적인 사고를 막는다고 배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피 훈련을 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가 되니 너도나도 두려움에 살기 위해 먼저 내달렸다. “언니, 가자!” 슬기와 핫걸스 멤버들도 열심히 사람들의 꽁무니를 뒤쫓았다. 비상계단을 타고 우르르 내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일시에 멈춰 섰다. 쿠르르르! 절대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숨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쾅, 콰직! “끄아아아!” 보이지 않지만 계단 아래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누구나 떠올릴 만한 가장 기본이 되는 재앙. ‘던전 브레이크야.’ 방송국에 몬스터가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흐윽, 흑.” 방송 관계자도 다수 있었지만 걸그룹의 대부분이 10대, 20대 초반의 소녀들.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간신히 새어 나오는 비명을 참으며 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단 나, 나가죠.” 보이그룹의 멤버 도니의 말에 모두가 조용히 비상계단을 빠져나왔다. 층수를 보니 7층. “저쪽에 다른 비상계단이 있어요.” 도니가 적극적으로 나서니 모든 사람이 그의 의견을 따랐다. 몬스터에게 들킬까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다른 계단의 출입구를 열었으나 그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끄아악! 살려줘.” 콰직, 쿠르륵. 문을 열자마자 비상계단을 울리는 소리에 모두의 발걸음이 멈췄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보니 흐느껴 우는 여자가 대부분이었고, 몇몇은 얼이 나간 듯 멍하니 있었다. 그들 모두 도니를 보았다. “어떻게 하죠?” “왜, 왜 나한테….” 조금 더 적극적이었을 뿐, 그도 평범한 남자 아이돌이었다. 지금 상황이 두렵고 무서운 것은 매한가지. 방법을 물어봐야 그도 머릿속이 하얬다. 쾅, 쾅! 그때 비상계단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무언가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모두 본능적으로 문에서 멀어졌다. “저, 저쪽 방으로 가요.”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넓은 사무실이 나왔다. “이, 입구를 막읍시다.” 책상과 가구들을 옮겨 막은 입구에 안심이 되는지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불안감을 털어버리려는 듯. 몇몇은 또다시 소리 내 울었다. 슬기도 눈물짓는 핫걸스 멤버들을 부둥켜안으며 위로했다. “흑, 언니, 어쩌죠?” 아직 고등학생인 멤버들. 그나마 나이가 가장 많은 슬기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괜찮아. 걱정 마. 곧 누가 구하러 올 거야.” 각성자가 되었든 군인이 되었든, 곧 몬스터들이 소탕될 것이다. 대피소면 좋겠지만 지금의 사무실도 상관없다. 그때까지 안전하게 숨어 있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작은 일 하나가 너무 어려웠다. 쿵, 쿠웅! 거칠게 문을 부딪치는 소리에 모두가 경기하듯 놀랐다. “꺅! 어떻게 해!” “조용히 해! 모두 숨어!” 차마 문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모두가 멀찍이 떨어져 각자 몸을 숨기려 했다. 콰아앙! 가구들을 밀치며 거칠게 열린 문 너머로 거대한 흑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륵! “히익!” 흑표와 눈이 마주친 도니가 꿈쩍도 않고 몸이 굳어 버렸다. 크와앙! 달려든 흑표가 휘두른 발길질에 도니의 얼굴이 뜯겨져 나갔다. “……!”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 정적과 함께 찾아온 극한의 공포. 이건 영화도 재난 대비 훈련도 공포 체험도 아니다. 장난이 아닌 실제였으며 재앙이었다. 크와아앙! 포효에 몸이 굳은 사람들이 어쩌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흑표는 너무나 쉬운 사냥감들이 바글거리는 지구의 모습에 만족하며 천천히 살육을 시작하려 했다. 콰창! 창문이 깨어지며 박쥐 떼가 날아들었다. 그것들이 모두 뭉쳐 자리를 잡더니 곧 사람으로 변신해 버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도재민의 등장에 모두의 얼굴에 희망이 생겼다. ‘각성자다!’ 크르르. 흑표가 그를 노려보다가 선수를 쳤다. 훌쩍 뛰어올라 휘두르는 앞발은 쇠도 우그러뜨릴 힘을 갖고 있었다. 재민은 피하긴커녕 주먹을 휘둘렀다. 콱! 흑표의 체중을 담은 휘두르기도 매일 한 잔의 피와 함께 단련한 흡혈귀의 주먹을 이겨내진 못했다. 크왕! 당황한 흑표가 바닥에 착지하기도 전에 재민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콰직! 한 방에 즉사시키진 못해도 머리통을 뒤흔드는 충격 정도는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발차기는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쾅, 콱! 흑표의 정수리를 내리찍는 것으로 그 거대한 동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코트의 남자가 싸우는 와중에 떨어트린 검은 선글라스를 주워 썼다. “사, 살았다!” “흐윽, 흐으으응.” 자신을 구해주러 온 각성자의 존재에 사람들이 비로소 안심의 눈물을 흘렸다. 재민은 그 와중의 슬기를 찾았다. “슬기야?” “……!” 각성자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슬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낯익은 턱선이며 체형, 목소리까지…. “재민이?” 도재민이 슬기를 향해 다가갔다. 방송국 곳곳을 헤집었다. 드디어 찾았다. 이 난리 통에 아직 살아 있어준 것이 고마웠다. “슬기야, 오빠 왔다.” 도재민이 두 팔을 벌리고 장난스레 말하자 슬기가 눈물을 흘렸다. 자석에 이끌리듯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바보야, 내가 7개월 빨라.” 흐느껴 울면서도 대꾸하는 슬기를 보며 도재민이 짠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떨림이, 두려움이, 안도감이 모두 전해졌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흡혈귀가 된 몸을 저주라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중한 것을 지키게 해준 이 힘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 “와, 뭐야? 또 터진 거야?” 성구는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접한 소식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르달 근처는?” “최해솔 이사님이 수비 중이십니다.” 해솔의 능력은 B급. 하지만 이미 와이번 한 기까지 테이밍에 성공한 그의 몬스터 컬렉션은 A급의 각성자 열 명을 넘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디가 제일 심각하대요?” “아르달로 가셔야 합니다.” “응? 해솔이 형 있잖아요.” “지금 그 인근이 가장 시급합니다.” 아무래도 아르달 인근의 던전이 터진 모양. “지금 남산에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서울 각지에서 터진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들이 죄다 남산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지원팀 직원의 말에 성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형님은요?” “아직 던전에서 나오지 않으셨답니다.” “흐음.” 강우진이 없다면 자신이 나서야 한다. “갑시다, 아르달로.” 성구가 비장한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이번엔 기필코 제몫을 해내리라. *** 홍대입구역 인근 호텔. ‘으읍.’ 도지원은 답답함에 몸부림쳤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실 같은 거미줄이 몸을 칭칭 동여매여 고치가 되어버렸다. 그물처럼 짜인 거미줄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가관이었다. 하얀 고치가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 자신의 모습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숨 막혀.’ 겨우 숨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호흡하기 힘들었다. 그마저도 거미줄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로 인해 나른하고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잠들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기분. 거미 여왕 샤로트는 고치로 만들어 저장한 인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요호호, 이렇게 좋은 행성이 있었다니.” 사냥도 쉽고 얻는 것도 많은 인간이라는 사냥감이 아주 넘쳐나는 행성이다. 이렇게 좋은 사냥터에 아직도 터를 내린 연합이 없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 “행성의 가디언 수준들이 높은가?” 링크하는 던전마다 모두 동기화 전에 파괴되었다는 말. 자신의 연합인 노란 도마뱀은 페널티를 안고 편법을 동원해 강제 링크했다. 내부인의 도움을 받아 ‘침략’이 아닌 ‘초대’된 것. 물론 내부인인 링커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권좌를 가진 72좌의 대군주들밖에 없다. 그들만이 제약 없이 모든 행성에 링크할 수 있었다. “흐음, 이엘로님이 탐내는 행성이라….” 25좌의 이엘로가 링커를 만들어 도와줬기에 노란 도마뱀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샤로트도 지구 행성이 탐났지만 이엘로가 점찍었다면 자신이 욕심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곧 이곳은 권좌를 가진 대군주들의 세력 싸움의 장이 될 것이다. “자, 그럼 식민지화를 시작해 볼까?” 무력을 지닌 인간들을 말살시켜야 한다. 그래야 착취가 쉬우니까. 샤로트가 근처의 고치 하나에게 다가가 손을 내뻗었다. 고치가 사라지며 두려움에 질린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흐응.” 달뜬 신음을 흘리며 샤로트가 사람의 입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댔다. 꿀렁, 꿀렁. 샤로트의 입에서 전해지는 기분 나쁜 물체에 사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역한 듯 고통스러운 듯 핏줄이 터진 눈은 시뻘겋게 변했다. 샤로트가 입을 떼자 고치에 말린 사람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인간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영양분이었다. “흐응. 무럭무럭 자라나라, 아가들아.” 샤로트가 다음 고치를 향해 다가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도로 발전된 문명 행성을 파괴시키는 전략으로 타이탄족과 같은 거대 몬스터는 적절치 못했다. 오히려 살인 거미같이 작은 몬스터가 낫다. 샤로트의 자식이자 부하들이 빠르게 개체 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차원 영주들의 본거지 건설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차원 영지 미비치의 초원. 녹색의 빛기둥에 다다랐다. 무너진 고성에서 빛나는 기둥을 보며 버려진 성을 향해 다가갔다. 성곽이 무너진 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람. “뭐야? 혼자야?” 우진은 씽씽이에서 내렸다.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놈은 인간이다. 느낌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우진이 다가가자 상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가 미비치인가?” “…….” 대꾸 없는 상대를 보며 우진은 확신했다. 이곳 차원 영지의 주인. 얼마나 자신 있기에 부하들 없이 홀로 차원 영지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던전 에너지가 바닥났나? 그런 거라면 왜 겁도 없이 지구에 링크했을까? 미비치가 후드를 천천히 벗었다. “오랜만입니다.” “…….” 얼굴을 보인 미비치를 보며 우진의 얼굴이 굳었다. 그 반대로 상대는 미소 지었다. “참 오랜만이죠? 임모탈.” “…….” 반갑지 않은 얼굴에 우진이 쓰게 웃었다. “아르펜의 용사가 웬일이지?” “글쎄요.” 차원 영주 미비치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 129화 - 미비치 > 끝 ⓒ 진설우 < 130화 - 미비치 (2) > 미비치가 웃었다. “왜일까요?” “병신이냐? 내가 어떻게 알아.” “…….” 우진의 말에 미비치가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당신은 언제나 그랬죠. 역시, 역시! 임모탈.” 미비치의 음성은 비꼼이 가득했다. 우진이 인상을 구겼다. “성녀랑 같은 이유냐?” “성녀? 메르디? 호오, 그녀가 살아 있습니까?”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성녀가 죽은 줄 안다는 말인가? “하하, 그녀의 운명도 참 기구하군요.”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하지?” 우진의 성질에 미비치가 웃었다. “하하, 당신도 변하는군요?” “변해?” “조급하시잖아요.” “…….” 우진이 눈을 깜박였다. 내가? 조급했던가. 이내 인상을 풀곤 피식 웃었다. “뭐, 좋아. 인정. 조급하지.” “호, 인정하시는 겁니까? 임모탈의 이런 모습이라니. 아르펜의 원혼들이 봤다면 너무 놀라 부활할지도 모르겠군요.” 미비치의 말장난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놀고 싶다면 놀아주지. “성녀는 날 돕고 있지.” “호, 그녀가 배신했군요?” “배신자는 너지.” “…당신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연합에 힘을 보태지 않았던 임모탈이다. 아니, 오히려 반목하고 싸우다 겨우 상호 불가침을 맺었을 뿐이다. 아르달의 군주가 뻔뻔히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아르펜의 이름난 용사 중에 네 녀석이 제일 음흉했지.” “가장 이성적이었죠.” 미비치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트라넷에 붙었나?” “하하하하.” “머쓱한가 봐?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하하하하, 그런 게 아니죠.” 미비치는 한참을 웃었다. 그러더니 정색하곤 말을 뱉었다. “당신은 오해하고 있군요.” “…….” “트라넷은 애초에 대항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진이 그저 침묵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미비치가 아는 것이 많은 느낌.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알아서 정보를 뱉어낼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질서. 신조차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 “까고 있네.” “배신? 맞지 않죠. 그럼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 “전 아르펜을 위해 평생을 싸웠습니다. 결국,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적인 일. 당신은 싸우지도 않고 트라넷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뭐? 내가?” “지금 당신이 이곳에 서 있는 것이 그 증명이지 않습니까?” “…….” “왜 지구를 지키지도 않고, 차원 영주가 되었죠?” 차원 영주. 트라넷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구성원. 우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당신은 겁쟁이입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고향을 포기하다니.” 우진은 차원 영주가 되었다. 지구를 지켜내기 전에 미리 차원 영주가 되다니. 결국, 자신은 살 방도를 마련해 둔 것이 아닌가? 위정자들과 같은 모습에 그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뭐, 현명할 수도 있죠. 미리부터 포기하고 순응하다니.”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씹어뱉듯 하는 그의 음성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병신이냐?” “…….” “뭐가 순응이고, 뭐가 절대적 법칙이야?” “아직 현실을 모르는군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뭘 막아?” “지구가 트라넷의 영향력 아래 집어삼켜지는….” “왜 막아?” “예?” 미비치가 황당하다는 듯이 우진을 보았다. “내가 왜 막아?” “…….” 왜 막긴? 지구가 그의 고향 별이 아닌가? “차원의 존재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각별한….” “까고 있네.”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장검으로 변형했다. 적당한 크기의 바스타드 소드. 요즘 한창 재미 들린 무기. “쳐들어오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 “…….” “다 죽여주면 돼.” “그래도 결국 달라지는 건….” “트라넷? 뭐 법칙?”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부숴주지.” “……?” 저것이 차원 영주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그러면 당신도 위험….” “닥쳐, 병신아.” 우진이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앞으로 한 걸음 걸었다. “쫄뱅이는 평생 쫄뱅이로 살아.” “…….” “목숨이 아까웠다면 전쟁터에 서지 말았어야지.” “……!” 우진이 말과 함께 크게 뛰어올라 미비치에게 검을 내려쳤다. 까앙! 미비치가 로브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검을 빼 들어 막아냈다. 우진의 마지막 말이 파문이 되어 그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였다. 슈아악, 캉! 카앙! 우진의 거친 공격을 미비치가 반사적으로 막아냈다. 몇 번의 검격을 나누다 보니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요.” 그가 검을 떨쳐 내곤 걸리적거리는 로브를 벗어던졌다. “어쩌면 겁쟁이는 당신이 아니라 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비치의 말에 우진이 이죽거렸다. “당연하잖아.” “후.” 미비치의 입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검술은 언제 익히신 겁니까?” “얼마 안 됐어.” “훗, 어디 한번 겨뤄봅시다.” 미비치가 자세를 잡았다. 날카로운 기세가 그의 온몸에 서렸다. 아까와는 판이 다른 분위기. 아르펜에서 수위에 꼽히는 대검사, 미비치다. 우진이 듀얼 클래스를 이뤘다지만 아직 AA랭크에 불과하다. 이미 9서클의 경지, SS랭크의 대검사에 대적할 수준은 못되었다. “얘들아.” 우진의 부름에 데스나이트들이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 순식간에 30:1의 상황이 되자 미비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치사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우진이 씨익 웃었다. “병신.” “…….” 데스나이트 서른이 미비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중압감을 담담히 받으며 그가 미소 지었다. “뭐, 별수 없죠.” 상대는 어차피 네크로맨서. 죽은 자들의 왕. 아르달의 군주. 그에게 검을 꽂기 위해선 불사의 군대를 넘어야 했다. 그나마 리치는 없으니 가능할지도…. 이곳은 그의 홈그라운드, 미비치의 초원이었으니까. “흐으읍.” 그가 크게 심호흡했다. 푸스스. 그의 호흡이 계속될수록 무형의 기운들이 모여들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심상찮은 기세 변화에 우진이 인상을 썼다. ‘오래 걸리겠는데.’ 제대로 레벨도 되찾지 못한 상태인데 성가신 놈을 만났다. 저 정도 무력의 녀석은 흔치 않다. 트라넷의 72좌도 저 정도의…. 우진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하나 묻지.” “뭐죠?” 한껏 기세를 올리는 그의 눈빛은 이전과 다르게 약간의 호감이 묻어나 있었다. 임모탈에게 호감이라니… 미비치 스스로 놀랄 일이었다. “너 정도가 어째서 랭킹이 이따위지?” “후후.” 차원 영주끼리는 서로의 던전이나 영지를 방문하면 상대의 랭킹이나 이름 정도의 간략한 정보는 알 수 있었다. 미비치의 랭킹은 4,231위. 우진보다도 한참이나 낮은 순위다. “랭킹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영지전이 약한가? 결투를 하면 되잖아. 너라면 금방 트라넷의 72대군주와도 막상막하일 것 같은데.” “불가합니다.” “…?” “결투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할 겁니다.”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죽음이 두려운가? 그래서 결투를 꺼리는가? 미비치가 우진을 보며 말했다. “결투로는 결국 위로 향할 수 없습니다. 권좌에 도전하는 것조차 불가.” 미비치가 진심으로 말했다. “당신의 목적이 권좌라면 영지전을 더욱 중히 여기십시오.” 72개뿐인 권좌는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관리자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무력이 아닌 관리 능력이니까요.” “…….” “그럼 못다 한 싸움을 시작해 볼까요?” 미비치의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데스나이트들이 검은빛을 내뿜는 무기들을 들고 맞부딪쳤다. “관리자라….” 우진이 마법을 전개하며 미비치를 압박했다. 익숙하지 않은 전사 스킬로 상대할 만큼 만만찮은 상대가 아니었다. 영지 고유 스킬을 사용했는지 아르펜에서 상대했던 것보다 더 막강한 기운을 풍기는 녀석이니 말이다. 어쩌면 대기 중인 데스나이트들을 전부 불러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초원을 무대로 삶과 죽음을 초월한 기사들의 전투가 이어졌다. *** 목동역 4번 출구. “젠장.” 우승훈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욕설을 내뱉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던 뉴스도 끊겼다. 통신 시설에 문제가 생겼는지 인터넷이 먹통이 되어 스마트폰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급하게 자동차의 라디오를 틀어 소식을 전달받았다. 서울이 난리가 났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대구가, 광주가, 부산이 난리 통이었다. 일본도, 중국도, 미국도, 프랑스도 모두 브레이크가 일어났다. 「치치직, 몬스터들을 통제하는 강력한 보스를 치지직, 화력 무기가 통하지 않아, 치직.」 평소의 던전 브레이크와 다르다. 몬스터들이 어떤 존재에 의해 강력히 통제받고 있었다. 그냥 풀려도 위험한 것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동안의 몬스터 토벌이 사냥이었다면, 이제는 양상이 달랐다. 전쟁. 조직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놈들과의 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실장님, 이곳도 위험합니다.” “나도 알아.” 우승훈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장님은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서울 곳곳에서 좋지 못한 소식만 전해지고 있었다. 남산은 그야말로 몬스터가 떼로 몰려 있었고, 그 인근인 아르달도 걱정되었다. 몬스터들은 등장과 함께 날뛰지 않고 조직적으로 뭉쳤다. 그 질서 있는 움직임이 사람들에게 더 큰 공포심을 주었다. 꼭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폭탄을 마주하는 심정. 그런 현상은 서울 곳곳에서 일어났다. 목동야구장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사이클롭스를 중심으로 몬스터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뭉치는 것이다. 놈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목동역은 금방이다. 그나마 아직 무차별 공격이 일어나기 전에 피하는 것이 상책. “젠장, 철수하자.” 사장님만 믿고 더 기다렸다간 자신이 먼저 죽을 판이었다. “메모 할 거 하나 줘봐.” “예?” “어서 가져와.” “예에.” 부하 직원이 차에서 메모지를 가져오자 승훈이 재빠르게 현재 서울과 세계의 상황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조직적으로 뭉치고 있다. 남산에, 목동야구장에 홍대, 강남, 서울대, 수원화성에…. 라디오를 통해 전해 받은 서울의 소식은 자세하게, 세계의 소식은 간략하게…. 정보들로 가득 채운 메모지를 지하철역 입구에 테이프로 붙였다. “후, 가자.” “어, 어디로 갑니까?” “일단 아르달로 가자.” “네에.” 서울을 벗어난다면 가장 안전하겠지만 어디 의리 없이 도망쳐서야 쓰겠는가? 그래도 명색이 아르달의 외교부장관으로 내정된 사람이 말이다. 피난 가더라도 함께해야 할 것 아닌가. ‘홍 이사님이랑 최 이사님이면 어떻게 되겠지.’ 홍성구와 최해솔의 무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못 된다. 대한민국이 아닌 세계에 내놓아도 수위를 다툴 각성자. 더욱이 청와대 인근에 군부대도 많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사장님, 빨리 나오십시오. 저희 다 죽게 생겼습니다.” 아직 걷힐 생각을 않는 던전의 결계를 보며 염원하듯 말했다. 승훈과 직원이 모두 차를 타고 철수하고 난 한참 뒤에야 결계가 차츰 사라졌다. 초췌한 얼굴의 우진이 밖으로 나왔다. “뭐야, 다 어디 간 거야?” 힘든 싸움이었다.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피로라도 풀고 싶은 마음이건만 승훈을 비롯한 비서실 직원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응?” 우진이 벽에 붙은 메모지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쉬긴커녕,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위기였다. < 130화 - 미비치 (2) > 끝 ⓒ 진설우 < 131화 - 블러드 골렘 > “뭐가 이렇게 많아?” 우진은 세력을 이루기 시작하는 몬스터 무리를 보며 인상을 썼다. 놈들이 하는 짓은 아르펜에서와 다르지 않다. 영역을 차지하고 식민지를 건설할 것이다. 지구의 에너지를 빨아먹겠지…. “젠장, 미비치 자식.” 놈과의 싸움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시간만 버렸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데스나이트를 열 기나 잃어버렸다. “영지 고유 스킬이 성가셔.” 공략 모드는 모험가의 등급으로 영주에게 덤벼드는 것. 영지 고유 스킬을 쓸 수 있는 그가 유리한 것이 많았다. 그냥 지구나 아르펜에서 마주쳤다면 데스나이트 두엇만 붙여도 충분할 녀석이 열기나 되는 데스나이트를 함께 데려갈 정도로 가공할 힘을 발휘했다. “어디부터 정리하지?” 서울 인근의 몬스터 집결지는 일곱 곳. 보나마나 차원영주 일곱 명이 각자 자리를 잡고 식민지를 건설 중일 것이다. 놈들이 기지를 세우면 성가시니 최대한 빨리 처치해야 한다. “이 자식 휴대폰도 안 두고 갔네.” 던전에 입장하기 전, 승훈에게 휴대전화를 맡겨뒀었다. 기다리고 있어야 할 지원 팀들은 메모 하나 남겨두고 어디로 갔는지…. 다행인 것은 휴대폰 외에 우진의 통신 수단이 하나 더 있었다. [너 어디야?] 영지의 가신들과는 의지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영지전을 대리시키기 위해 전략관으로 임명한 도재민. [이, 이거 뭐지?] [너 어디냐고?] [헉, 죽을 때가 되니 이제 환청이.] [형이다.] […….]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재민의 의지가 쏟아졌다. [혀엉! 여기 난리났어요. 방송국에 갇혔어요.] [방송국? 너 사무실 아니야? 거긴 왜 갔대.] [누나 나올 때 같이 나왔어요. 저 지금 MBS예요.] 우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동창회에 간다던 도지원이 생각났다. [누난 어디로 갔어?] [예? BB호텔로 가셨는데….] 우진이 메모를 보곤 표정이 굳었다. 7곳 중 하나가 BB호텔이었다. [잘 숨어 있어, 돌쇠 보낼 테니.] [네에….] 파괴되어 부할까지 다시 부를 수 없는 데스나이트가 열 기. 우진이 가용할 수 있는 죽음의 기사는 44기. 아직 차원영지의 보호 기간이 남아 있으니 혹시 모를 공략에 대비해 수비를 위해 라티족 전사의 신입 데스나이트 레릭을 남겨두었다. 43기의 데스나이트를 소환하곤 돌쇠와 비비까지 불러들였다. “비비, 돌쇠 다 나와.” “우왕, 지구다.” 오랜만에 지구에 소환된 비비가 방긋 웃었다. 데스나이트들이 각자 휘하에 배속된 해골병사들까지 생각하면 가공할 병력. 불사의 군대를 나눠 일곱 곳을 동시에 청소한다. 데스나이트 열 기는 있어야 안정적으로 차원영주를 상대할 수 있을 터. 40기의 데스나이트를 네 팀으로 나누었다. “여기, 여기로 가.” [왕의 명대로!] 우진이 비비와 돌쇠를 보았다. “MBS로 가. 재민이 구해주고 거기 있는 놈 죽여 버려.” “헤헤, 알겠쪄용. 신난당!” 비비가 지팡이를 꺼내 타고는 돌쇠를 데리고 날아갔다. “키바, 아르달로 가. 성녀랑 싸우지 마.” […명대로.] 마뜩찮은지 반응이 미적지근했지만 명을 어길 리는 없다. 성구와 해솔이 어딨는지는 모르겠지만 메르디가 아르달에 있으니 크게 걱정은 없으리라. 권속들이 모두 떠나자 우진은 괜히 미비치가 떠올랐다. “젠장할 놈.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려야겠어.” 이미 죽였지만 한 번 더를 기약했다. 괜히 데스나이트만 잃고, 경험치도 얼마 되지 않는 녀석 때문에 아직 80레벨도 달성하지 못했다. 사냥 시간까지 잃었으니 손해가 막심했다. “이럴 때 제니스만 있었어도….” 리치 제니스, 스승님만 있었어도 차원영주 따위 문제겠는가. “가볼까?” 우진이 마지막 권속 씽씽이를 소환해 올라탔다. 히이이잉! 씽씽이가 도로를 질주했다. 몬스터들이 헤집어놓은 도로는 뛰어넘어 하늘을 달렸다. *** MBS방송국 2층 스튜디오. 쌓인 자재들 사이에 숨은 사람은 17명. 도재민은 이슬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꼭 지켜줄 것이란 마음이 전달되었을까?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겁나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했던 남자아이가 각성자가 되어 짜잔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로맨틱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머지 아이돌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왜, 나가다가 말아요?” 죽은 도니와 같은 그룹 멤버인 준성은 흥분해 있었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각성자가 몬스터를 해치며 잘나가다가 갑자기 멈춰서 숨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방송국 건물을 탈출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이렇게 숨어 있으니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재민이 다쳤잖아요.” 홀로 사람들을 지키며 몬스터들을 처치한 도재민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깨에 깊이 베인 발톱 자국에 배에도 구멍이 뚫려 겨우 옷을 찢어 붕대로 처치했다. “시발, 각성자가 다칠 수도 있지.” “뭐예요? 말이 심하잖아요!” “허, 너 신인이지? 무슨 그룹이야? 감히 선배한테….” 준성이 슬기를 보며 눈알을 부라렸다. 고교시절부터 한성질하던 슬기다. 발끈하려는 그녀를 도재민이 붙잡았다. “슬기야, 난 괜찮아.” “재민아….” “하아.” 재민은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다. 거의 한계에 다다랐는데 우진의 메시지가 왔다. 곧 지원 병력이 올 테니 더는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하아, 하아.” 상처가 힘든 게 아니다. 상처로 인해 회복을 원하는 몸이 문제다. 피……. 피가 고팠다. 점점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아찔함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재민아. 많이 안 좋아 보여.” “하아, 괜찮아.” “지랄하네. 빨리 회복하고 길이나 뚫을 것이지.” 준성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17명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대신 싸워주는 재민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과 각성자가 연예인, 그것도 스타인 자신들을 대신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재민도 준성의 말에 발끈했다. 막말로 그에게 슬기를 제외한 모두는 그저 혹이었다. “그럼 회복 좀 도와줄래요?” “흥, 역시 방법이 있었네.” 준성의 말에 재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굳이 기운을 감추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피 좀 줄래요? 피를 흡혈하면 상처는 금방 회복할 수 있어요.” “…….” 생각하지 못한 방법인지라 준성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희생하시죠?” “내, 내가 왜….” 준성이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재민의 눈빛이 너무 무섭다. 사지가 결박당한 채 자신을 노려보는 뱀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럼 그냥 입 다물고 있어요. 자꾸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허, 나 누군지 몰라? 나 준성이야, 준성.” 모를 리가 있겠는가, 가장 인기있는 남자 아이돌인데. 더 상대하기 싫어 재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를 보며 슬기가 다가갔다. “내가 줄게.” “뭐?” “내 피.” “…….” “나 헌혈도 자주 해.” 재민이 깜짝 놀라 슬기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걱정과 연민, 고마움이 뒤섞여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으으.” 그녀의 눈빛, 표정, 마음이 너무 힘들다. 유혹이 되어 재민의 욕구를 자극했다. 그녀를 물고 싶다. 피를 취하고 싶다. “아, 안 돼.” 그녀의 피를 마신다고 그녀가 흡혈귀의 꼭두각시가 되진 않는다. 하수인을 만들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었다. 그저 헌혈하는 정도의 피만 섭취하면 될 일이지만… 슬기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아, 안 돼.” 재민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슬기를 계속 보고 있다간 유혹에 넘어갈 것만 같았다. 상처 회복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이유로 자기 합리화를 할 수가 없었다. 피를 마시는 것은 그저 욕구를 위해서다. 이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슬기를 희생시키기 싫었다. 쿠웅, 쾅. 으르릉! 스튜디오 밖에서 들려오는 몬스터의 소리에 모두가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도재민에게로 향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이니까. 크르릉. 괴수의 숨소리가 가까워 오자 불안감이 커졌다. 참다 못한 슬기가 재민의 입에 자신의 팔뚝을 물렸다. “빨아.” “으어, 억.” 아, 안 되는데… 재민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의 송곳니는 이미 슬기의 팔뚝에 꽂혀 버렸다. “으으.” 쭉쭉 빨리는 피에 슬기가 어질한 기분에 신음했다. ‘다, 달콤해.’ 카페에서 판매하는 블러드커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황홀한 기분에 재민은 아찔한 기분이었다. 어깨의 상처가 빠르게 재생되고 복부의 상처가 매워졌다. “하아, 하.” 재민이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는 뒤늦게 후회했다. ‘내, 내가 슬기를….’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길이 없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슬기가 재민을 꼭 안아주었다.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저 무서운 괴물들과 싸워준 재민이 아닌가? 이 정도 피쯤이야 헌혈한다 생각하면 되었다. “…괜찮아.” “스, 슬기야.” “난 이해해.” “슬기야아.” 재민이 울먹이며 슬기를 끌어안았다. 우진이 형과 누나 외에 자신을 이해해 주고 믿어주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없는 기쁨이었다. “시발, 지랄말고 빨리 저 밖에 놈이나 처리해!” 괴물의 소리에 두려움이 극에 달한 준성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 진짜 말이 심하….” 상처를 재생하고 기운을 차린 재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서다 허공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지팡이를 탄 꼬마 숙녀가 그곳에 있었다. “사부, 찾았당!” “비, 비비집사.” 지원군이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슬기의 피를…. 비비가 지팡이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머리 뒤로 돌쇠가 빙글 맴돌았다. 위이이잉. “헤헤헤, 재민 학생. 무서웠쪄?” “네,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헤헤, 이제 걱정 마요.” 비비의 말에 재민은 안도감이 들었다. 이렇게 믿음직스러울 수 있을까?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인 것은 아니었다. “이 꼬맹이는 뭐야?” 도니의 죽음이 어지간히도 트라우마였는지,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준성은 지나치게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다. “넌 뭔데요?” “뭐? 쪼매난 게 나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나 준성이야, 준성. 이준성!” 그의 말에 비비가 볼을 부풀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구질구질하게 생긴 게.” “이 꼬맹이가! 미쳤어?” 준성이 인상을 쓰자 비비가 그를 찌릿 째려보았다. 꼬맹이는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죽고 싶어요?” “뭐?” “소원이면 죽어요. 그냥.” “뭐어….” 화를 내려던 준성이 눈을 까뒤집고는 쓰러져 버렸다. 악몽에 괴롭힘당하다 결국 스르로 생을 다할 것이다. “흥.” 기분이 상해 고개를 홱 돌린 비비가 재민을 보고 말했다. “얼른 나가요. 요 앞에 큰 고양이 한 마리 잡으러 가야 해요.” “네에.” 너무 크게 떠들어서일까? 흑표 세 마리가 스튜디오를 들어와 울부짖었다. 크르르. 인간이 여럿. 모두 먹어주마. “작은 고양이들!” 흑표의 시선이 작은 꼬마인간에게 향하자… 모두 눈을 뒤집고 풀썩 쓰러졌다. “재민 학생, 빨리 나가요.” “…….” 비비가 휘적휘적 걸어나가자 재민과 슬기가 뒤따랐다. 어정쩡하게 있던 사람들이 혹시라도 멀어질세라 뒤쫓았고 같은 그룹의 멤버가 준성을 업었다. “흐응? 시체는 버리고 와요.” “…….” 아직 숨을 쉬는데 어떻게…. “뭐, 헛수고하시던가.” 꿈이 끝나면 죽어버릴 인간이지만, 뭐 알아서 하겠지. 비비에게 중요한 것은 어차피 도재민 한 명뿐이다. 방송국을 나온 그녀가 넓은 야외 주차장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를 보았다. 그것을 지키고 있던 거대한 퓨마가 어슬렁 다가왔다. < 131화 - 블러드 골렘 > 끝 ⓒ 진설우 < 132화 - 블러드 골렘 (2) > “흐음, 큰 고양이네.” 비비의 짧은 감상에 거대한 퓨마 쥬피아가 으르렁거렸다. [날 그렇게 부른 녀석 중에 살아 있는 놈이 없지.] “흥.” 비비가 쥬피아를 보며 고개를 홱 돌렸다. [당돌한 녀석이군.] 쥬피아가 눈매를 좁히며 비비를 살폈다. 어슬렁 걸어오면서도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의 외형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오래도록 차원 전쟁을 치러온 그에겐 가당찮은 일이다. 심상찮은 기운을 풍기는 꼬마를 보며 다가가던 쥬피아는 몸을 멈춰 세웠다. 눈싸움하듯 노려보는 사이 세상이 변했다. 하늘에서는 그가 제일 싫어하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얼음계 마법?’ 쥬피아는 머리를 새차게 흔들었다. 느낌이 달랐다. 원소계 마법이 아닌, 정신계 쪽의…. 쥬피아의 노란 눈이 번들거렸다. 비비를 보며 그가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아까부터 인간과는 조금 달리 느껴지는 기시감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네 녀석, 몽마구나.] 인간이 아닌 악마였다, 그것도 꿈을 다루는 몽마 서큐버스. 쥬피아의 눈에서 빛이 내뿜어지며 세상을 비추었다. 눈이 사라지며 주변 풍경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리고 헤실헤실 웃는 비비의 모습이 보였다. “헤헤, 역시 혼자 있으니 잘 안 통하네요.” [조잡한 수.]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전투 와중이었다면 달랐겠지만, 여유가 있다 보니 비비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쥬피엘과는 어떤 사이예여?” 2좌 쥬피엘. 그의 언급에 쥬피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의 배다른 형제.] “헤에, 미친개와 형제라니. 모를 일이네요.” […….] 쥬피아는 황당한 눈으로 비비를 보았다. [지구 행성엔 마계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왜 나를 막아서지?] 쥬피엘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에 비비가 방실방실 웃었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좋지만,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일까? 1분 1초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님이 이 행성을 너무 사랑하셔서요.” [주인?] “아르펜에 안 가봤져?” [아르펜? 거긴 대군주들의 전쟁터가 아니었나.] “헤헤, 그럼 모르시겠네요.” [뭘?] “우리 주인님 엄청 무서워요.” […….] 이 꼬마 악마는 자신과 뭘 하자는 거지? “헤헤, 그럼 시작하죠? 괜히 나무에 잎이 나면 귀찮아질 것 같네요.” […….] 맞는 말이다. 이 나무는 에너지를 충당하는 수단이자 차원 영지와 이곳 행성을 잇는 거점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나무가 자라나 잎이 나기까지는 아직 하루가 꼬박 더 남았다. 쥬피아가 고개를 돌려 나무를 향해 돌아갔다. 대화가 아닌 폭력은 남의 손을 빌려도 충분했다. 무식한 쌍둥이 쥬피엘과 자신은 달랐으니 말이다. 크르르. 주위에 있던 부하 흑표들이 모조리 몰려들었다. 그 수가 얼추 200은 넘어 보였다. 몽마가 감당할 만한 숫자가 아니다. “헤헤, 돌쇠찡 교대!” 위이이잉. 돌쇠가 앞으로 나서며 골렘의 심장을 향해 주차장의 차량들이 끌려왔다. 끼기긱, 끼긱. 차량들이 짜부러지며 부서지고 단단해져 골렘의 몸체를 만들어냈다. 연료통이 찌그러지며 쏟아진 휘발유와 경유가 돌쇠의 몸 전체에 흐르며 냄새를 풍겼다. 쿠앙, 쾅! 돌쇠가 두 주먹을 부딪히며 흑표들을 향해 달려갔다. 쾅, 쾅! 그 모습을 지켜보며 비비가 재민에게 말했다. “재민 학생, 저 나무만 뽑고 집에 가요.” “예에.” 재민의 뒤를 따른 슬기와 아이돌 멤버들은 군소리 없이 기다렸다. 괜히 준성이처럼 조급하게 굴었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 아르달. 넓은 연병장에서 성구와 해솔은 불안한 눈으로 남산을 보았다. “저거 무너지겠죠?” “그럴 것 같네.” 던전쇼크 때 무너진 남산타워다. 서울의 상징이라 하여 다시 만들어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드래곤의 등장에 또 무너지게 생겼다. 성구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형, 저놈 꼬실 수 있어요?” “…어려울 것 같은데.” 거대한 동체의 드래곤을 무슨 수로 테이밍한다는 말인가? 척 보기에도 불가능했다. 그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는 와이번들이야 어떻게 몇 놈은 가능할 것도 같았다. “흠, 공중전은 아예 불리할 것 같고… 이쪽으로 쳐들어오면 어쩌지?” 성구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다. 폭격을 나선 전투기 세 대가 너무나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 미사일 공격은 놈들이 생성한 방어막을 뚫지도 못했고, 전투기는 드래곤이 쏘아낸 브레스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흥, 드래곤 따위 문제없다.] “오! 역시 기사님들.” 람손의 호방한 말에 성구가 눈을 반짝였다. 데스나이트 세 기가 먼저 아르달로 왔고, 나머지들은 서울의 몬스터들을 일시에 소탕한다고 하였다. 우진이 올 때까지 놈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상관없지만 만약 움직임을 개시한다면 여기 있는 죽음의 기사 셋과 성구, 해솔, 그리고 성녀 메르디가 함께 힘을 모아 이곳을 지켜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우진과 나머지 데스나이트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그런데 비비랑 돌쇠만으로 팀이 될까요?” 성구의 불안한 말에 성녀가 답해주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파괴의 거신과 환영의 마녀라면 충분하지요.” “흠, 그런가요? 그래도 이번에 브레이크로 튀어나온 게 차원 영주라면서요? 저런 놈들이 막 있다는 거 아녜요?” 성구가 드래곤을 가리켰다. “저 정도 잡으려면 기사님들 가셔야 하는 것 아닌가?” 메르디가 살포시 웃었다. “단일 전투력이라면 불사의 군대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파괴의 거신입니다.” “예?” 성구가 의아한 눈으로 람손을 보았다. 데스나이트들로부터 전투 지도를 받는 성구와 해솔이다. 그들의 압도적 전투술은 몸으로 겪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돌쇠가 그렇게 강했었나? 따로 수련 같은 것도 안 하던데. 메르디의 말이 틀리지 않은지 람손은 그저 침묵하다 한마디 했다. [용 잡이에도 돌덩이가 필요하긴 하지.] “음.” 성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진의 권속들이 워낙에 다들 한 가닥 하기에 돌쇠가 그리 강한지 몰랐다. 아니, 강한지는 알았지만 뭔가 조무래기들 전용인 줄 알았는데. “파괴의 거신은 불사의 군대에서 항상 선봉장이었어요.” 적으로 마주했던 옛날의 일이 떠올랐는지 메르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흠, 그런가.” 같이 사냥 다닐 땐 그럼 너무 쉬워서 그랬나? 돌쇠가 활약했다고 딱 떠오르는 장면은 미국에서 터진 브레이크를 홀로 막아낸 것뿐이었다. 보스는 우진이 잡았으니 조무래기들 청소 전용인 줄 알았더니…. “어어? 저놈들 움직이려나 본데요?” 남산에 집결 중인 와이번들이 하늘을 편대비행하며 맴돌았다. 심상찮은 움직임에 성구가 걱정스런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사장님이 빨리 오셔야 할 텐데….” “임모탈이여.” 해솔도 메르디도 어서 빨리 우진이 오길 바랐다. *** 검은 주차장이 더욱 검어졌다. 흑표의 시체와 피들로 낭자되어 피비린내를 풍겼다. 수하들이 모조리 죽을 때까지 쥬피아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야 에너지만 있다면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적이 지쳤다는 것. [기운이 다해 보이는군.] 쥬피아가 어슬렁 일어섰다. 형제와 다르게 자신은 이성적으로 싸움을 할 줄 안다. 에너지를 소모해 적을 지치게 만들었으니 충분하다. 기기긱, 끼익. 돌쇠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마찰음이 심했다. 불이 붙은 연료통이 있어 몸 구석구석 불타오르고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파이어 골렘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전에 비해 행동이 굼떠진 것은 사실. 휘이익. 쥬피아의 거구가 하늘을 날아 돌쇠를 덮쳤다. 콰앙! 거대한 앞발이 휘둘러질 때마다 몸체를 이루던 자동차 철판이 찢어졌다. 쿠앙! 꽝! 돌쇠가 휘두른 주먹을 고개를 젖혀 피해낸 쥬피아가 그대로 박치기하며 쇠로 만들어진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말과는 달리 전투 스타일은 저돌적이며 야만적이었다. [그르르.] 돌쇠가 울부짖으며 사력을 다했으나 쥬피아의 힘은 너무 강력했고, 공격 한번 스치기 힘들 만큼 빨랐다. 정말 문제는 스피드. 둘의 전력 차이는 구경하는 사람들도 확연하게 눈치챘다. “흐윽, 어떻게 해요.” “우린 죽었어.” 돌쇠가 죽으면 자신들도 죽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신들을 구해주러 와야 할 각성자도, 군대도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길, 외제차를 뭉쳤어야지.” 너무나 쉽게 찢겨 나가는 돌쇠의 몸을 보며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에 재민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비비 집사, 뭔가 수가 없을까요?” “헤헤, 왜 없어요.” 비비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 모습이 재민으로 하여금 걱정을 덜게 만들었다. “우리 귀여운 돌쇠찡 별명이 왜 파괴의 거신인 줄 알아요?” “거대해서?” “그것도 그렇지만 왜 파괴가 붙었겠어요.” “음. 글쎄요?” 재민이 어떻게 알겠는가, 아르펜 출신도 아닌데. “헤헤, 돌쇠찡이 화나면 정말 무서워요. 제가 왜 같이 팀으로 온 줄 알아요?” “그, 글쎄요?” “돌쇠찡 화나면 말리려구요. 헤헤.” “…….” “아, 저 고양이 이제 큰일났네.” 비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꽈아앙!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던 돌쇠의 몸이 폭발하며 몸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위이이잉. 돌쇠의 심장만이 허공에 떠 있자 쥬피아가 웃었다. [포기인가?] 임모탈의 권속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 위이이잉! 골렘의 심장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주위의 피를 빨아들였다. 쉬이이이이. 붉은 피들이 허공에 떠올라 회오리치듯 뭉쳐지는 광경은 그로테스크했다. 꾸르륵. 골렘의 심장을 중심으로 뭉쳐진 피들이 하나의 인형을 만들어냈다. 돌쇠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모습. 키가 2미터 정도 되는 인간의 형태였다. 주변에 흘린 피들로는 그 정도 크기가 한계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적의 피로 몸을 더욱 불릴 테니까. [끄어어어!] 돌쇠의 표효에 심상찮음을 느낀 쥬피아가 눈매를 좁혔다. [변신은 혼자만 가능한 게 아니지.] 쥬피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골격이 뒤틀리며 몸이 쪼그라들었다. 기이한 열기가 온몸에서 내뿜어졌다. 굽었던 뒷다리가 펴지고 앞발이 손이 되었다. 손톱은 길어지고, 꼬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라이칸 스로프. 반인반수의 고양이 인간의 형태로 변했을 때 대인 전투력은 더욱 월등하다. [핏덩이.] 쥬피아가 달렸다. 전보다 더욱 빨라진 스피드. 꽝 콰직! 그에겐 불행이지만 돌쇠의 변신은 차원이 달랐다. 여태 본 적 없는 빠르기. 꽝, 꽝, 꽈앙! 연속된 주먹이 쥬피아의 안면을 후려쳤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칼날과 같은 손톱을 찔렀으나 그대로 돌쇠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그 상태 그대로 피가 굳어버렸다. [윽?] 발톱이 달린 손이 몸에 쑥 들어가 박혀 버린 상황. 뭉텅이로 뭉쳐져 눈, 코, 입을 알 수 없는 형체 없는 그 얼굴이 웃었다.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꽝, 꽈앙! 돌쇠의 주먹이 쥬피아의 얼굴에 계속해서 내리꽂혔다. [자, 잠….] 꽈앙, 쾅! 뭐 이리 무식한 놈이 다 있지? 골렘은 심장을 파괴시키면 된다. 붙잡혀 버린 왼손을 대신해 오른쪽 손톱을 이용해 다시 심장이 있을 만한 곳을 찔렀지만 걸리는 것이 없었다. ‘심장의 위치를 바꾸는구나.’ 양손을 붙잡힌 쥬피아가 탄식했다. 돌쇠가 웃으며 그의 머리에 박치기를 시전했다. 쾅, 쾅, 쾅!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는 오뚝이가 저러할까? 펀칭 머신처럼 계속 넘어갔다 다시 돌아오던 쥬피아의 목이 꺽여 버렸다. 회색빛으로 사라져 버린 그를 보며 돌쇠가 울부짖었다. [그르르.] 적을 찢고 피를 마시고 싶다. 피, 피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자. 돌쇠의 시선이 재민과 생존자들을 향했다. [그르륵.] 쿵, 쿵! 사냥감을 발견한 듯 돌진하는 돌쇠를 보며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적아의 구분이 없는 것인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오는 그를 비비가 막아섰다. < 132화 - 블러드 골렘 (2) > 끝 ⓒ 진설우 < 133화 - 역병의 군주 > 비비의 맑고 큰 두 눈은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니, 마족이니 마력이라고 불러야 하나? 지이이잉. 피비린내를 풍기며 거칠게 달려오던 돌쇠가 멈칫했다. 차츰 느려지는 걸음. “우리 돌쇠찡. 착하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가 녹아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점점 작아지는 몸집. “우리 돌쇠 화났쪄?” [그르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산자에 대한 증오가 우리를 튀어나온 맹수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비비의 목소리는 따스한 기운이 되어 돌쇠의 심장을 어루만졌다. “누나가 이해해. 이제 화 풀자?” 비비의 조막만 한 손이 돌쇠의 머리에 닿았다. [그륵.] 츄르르륵. 골렘의 심장을 중심으로 굳은 피가 빠르게 녹아내렸다. 질척해진 핏물이 신발을 적시는데도 비비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위이이잉. 피가 사라지고 골렘의 심장이 빛의 구체가 되어 비비의 머리맡을 맴돌았다. 비비가 씨익 미소 지으며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주차장 한쪽의 차들을 가리켰다. 방송국 입구와 가까운 자리. 번쩍번쩍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들. “헤헤, 우리 착한 돌쇠. 저게 튼튼하데.” 위이이잉. 돌쇠가 차들을 몇 개 뭉쳐 아이언 골렘으로 화했다. “자, 그럼 나무 뽑고 주인님한테 가볼까?” [구오오오.] 돌쇠가 철그렁거리는 몸을 이끌고 지금도 자라나고 있는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 지원이가 참석했던 동창회 건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대한 빌딩 하나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주변의 건물도 쉴 새 없이 거미줄을 내뿜으며 돌아다니는 녀석들에게 점령되고 있는 상황. “귀찮은게 왔네.” 곤충형 차원영주들은 부리는 수하들도 대게 비슷한 성질의 것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번식이 빠르고 개체 수가 워낙에 많아 번거로운 것들. 하지만 우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적들. 슈아아앙! 꾸엑! 우진의 손에서 뻗어 나간 본스피어가 거미들을 꿰뚫었다. 몇몇 시체를 보자 그대로 스켈레톤 병사들을 일으켰다. 파팟! 현재 소모되고 있는 지배력은 모두 권속들. 최근 데스나이트가 된 라티족 전사 레릭을 제외하면 모두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이들. 그들은 딱히 네크로맨서의 절대적 의지인 지배력이 미치지 않아도 함께할 동료 그 자체. 그들을 유지하는 지배력은 모두 합쳐도 100도 되지 않았다. 우진이 추가로 소환할 수 있는 해골들은 못해도 2000기를 훌쩍 넘는다. “누가 더 빠른지 보자고.” 녀석의 번식이 빠른지, 우진의 소탕이 빠른지 말이다. 키키킥! 스켈레톤 병사들이 거미줄을 자르며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우진도 장검을 소환했다. 전사 클래스의 70레벨이 되며 형태변환 할수 있게 된 장검. 가장 기본이 되는 지팡이에서 창, 해머, 대검, 도끼, 활을 거쳐 7번째의 형태 변환. 활을 제외하면 모두 장병에 중병기였다. 가벼운 검을 잡고 휘두르니 마음먹은 대로 무기를 취할 수 있어 우진은 최근 검술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슈아악, 퍼억! 벽이며 천장이며 덕지덕지 붙은 거미줄을 자르며 전진하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거미를 베었다. 몸이 쩍 갈라졌음에도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녀석. 콰직! 우진의 발에 밟혀 그대로 터져버리며 명을 다했다. 누구나 생명을 취할 수 있고, 우진은 죽은 것들에 생을 불어넣어 줄 수 있었다. 퍼퍽! 거미의 시체가 터지며 매개가 되어 스켈레톤 메이지가 소환되었다. “모조리 태워.” 화르륵! 스켈레톤 메이지는 한가지 속성마법만을 사용했는데 소환할 때마다 달랐다. 우진은 아직 80레벨이 되어 리치를 거느리지 않아 그저 랜덤으로 소환할 수밖에 없다. 운좋게 화염 마법을 쓰는 해골마법사가 소환되었다. 우진이 자신의 그림자에 기생하는 가장 꺼림칙한 권속을 불러냈다. “깨비.” [크큭, 주인의 목소리도 까먹을 뻔 했군.] “닥치고, 지원이를 찾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깨비가 건물에 스며들며 도지원의 위치를 탐색했다. [이런, 이런. 좋지 못하군.] “왜?” [조금만 지나면 거미 밥이 될 것 같은데? 크큭.]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새끼거미의 부화 숙주로 사람을 쓰는 모양. 시간이 없었다. “들어와.” [크큭, 피앙세의 죽음으로 임모탈이 각성하는가?] “닥치고 돌아와.” [크크큭.] 깨비가 쑥하고 우진의 그림자로 복귀했다. 깨비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이 경험이 되어 우진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지원의 위치는 7층. 온통 거미줄 투성이인 연회장의 천장에 인간들이 고치가 되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바닥엔 갓 부화한 새끼거미들이 떼거리로 몰려있었다. 맑은 영혼의 기운이 느껴지는 지원을 향해 거미인간이 다가서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우진이 천장을 보았다. 전사의 무기가 해머로 변했다. ‘대지 강타’의 기운이 깃든 해머가 붉게 물들었다. 무릎이 굽혀졌다. ‘맹렬한 돌진’과 ‘도약’이 중첩된 힘이 우진의 다리에 모였다. 꾸아앙! 우진의 몸이 탄환이 되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바닥이 움푹 패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충격파에 유리창들이 줄줄이 깨져나갔다. 쿠쿠쿠쿵! 차례로 깨진 천장을 뚫은 우진의 몸이 단번에 7층의 바닥을 뚫고 올라섰다. 꾸르릉! 건물 전체가 흔들리며 요동쳤다. 거미 인간 샤로트는 터프하게 등장한 우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가 이내 웃었다. [요호호, 지구에 이만한 전사가 있었다니.] 지구행성엔 저렇게 수준 높은 각성자가 많은가? 그래서 차원영주들이 던전 링크에 애를 먹었던가? 저벅, 저벅. 우진이 말없이 걸었다. [요호, 전사들은 대게 조심성이 없지요.] 샤로트가 겁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우진을 향해 마법을 준비했다. 그런데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샤로트를 지나쳐 한 고치를 향해 다가가려는 강우진. 그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갈 듯하자 앙칼진 목소리를 뱉었다. [건방진!] 손을 내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자신만만하다는 것인가? 강제적인 링크로 동기화 비율만큼 손해를 봤다지만 그래도 차원영주인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는 행위라니? 즉시 두 손을 뻗었다. 파지직! 독니처럼 바짝 선 손톱이 우진을 낚아채기 전, 그의 주위를 맴돌던 유령갑옷이 작동했다. 강렬한 반발력과 함께 튕겨져 날아간 샤로트. [꺄아악!] 우진은 고치의 앞에 섰다. 찌지익! 두 손으로 파헤친 거미줄 너머로 거꾸로 매달린 도지원의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우, 우진아.” 팟! 우진이 가볍게 고치의 끝을 뜯어버리고는 지원을 속박하고 있던 거미줄을 뜯어냈다. “으윽.” 갑작스럽게 피가 돌아서인지 두 발로 서지 못한 도지원이 우진의 몸에 기댔다. 우진이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주었다. “우진아.” 울먹거리는 그녀의 음성에 우진은 안도했다. 늦지 않았다. “친구들이….” 우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치는 백여 개를 훌쩍 넘었다. 아직 그대로 매달려있는 것들도 있었고 아래가 터진 것들도 있었다. 터진 고치 아래는 어김없이 백골이 조각나 바닥에 쌓여있었다. 한때 자신의 동창이었던 자들. “늦었네.” 동창회에 왔다면 이들 모두를 구했을까? 선택을 후회해봐야 뒤집을 수도 없는 일. 뻔히 참석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세계 최고의 각성자인 강우진을 구경하기 위해 왔을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가 자신과 동창이었단 사실에 인증샷이라도 하나 남기고 싶어서였을까? [캬르, 감히 인간 따위가.] 우진이 먼저 간 친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는 하나 뿐이었다. [거미. 이름이 뭐지?] […어떻게 말이 통하지?] 문어 인간 드레드를 비롯한 몇몇 영주들의 끈질긴 방문에 몇 가지 언어의 물약을 먹었다. 그중 하나를 거미 인간이 쓰고 있을 뿐이다. [거미라 아이큐가 모자라나?] [크륵, 어디서….] [이름이 뭐야?] [노란 도마뱀 연합의 차원 영주 샤로트다.] [문어랑 같은 소속이었네.] 우진이 망치를 어깨에 들쳐멨다. 샤로트가 그런 그를 눈여겨 보았다. [드레드가 말한 신입 영주군. 강우진인가? 그래, 지구행성 출신이었다고 했지.] 샤로트는 우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자신의 연합에 가입시키기 위해 드레드가 애쓰다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했다. [너흰 다 죽을 거야.] [흥, 차원 영주에게 죽음은….] [부활하겠지. 그럼 또 죽일 거야, 또 부활하겠지. 그럼 또 뒤질 거야.] 부활할 때마다 계속해서 죽여줄 것이다. 결투를 받지 않는다면 자쿠행성의 던전을 찾아가 죽일 것이다. 차원 영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영주 등급을 빼앗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해줄 것이다. […….] [덤벼봐.] [알 수 없군. 겨우 작은 마찰이 아니었나? 이렇게까지 격렬히 막아설 이유가 있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무의미함을 알 텐데?] 드레드와의 마찰 때문에 이렇게 적대적인가? 아니면 고향행성을 침입했다는 이유로? 우진이 히죽 웃으며 망치를 들어 올렸다. [벌레를 죽이는데 이유가 필요하나?] […….] 쿠우웅! 우진의 망치가 바닥을 찧었다. 충격파가 바닥을 타고 흘렀다. 파삭, 팍! 새끼거미들이 그 충격파에 터져나갔다. 건물 전체가 울렸다. [감히, 나의 어린….] 샤로트는 분노로 눈을 까뒤집다가 깜짝 놀랐다. 배를 찢는 고통을 느낀 찰나 몸이 붕 떠올라 날았다. 콰직! 질주해온 우진이 어느새 해머에서 창으로 변한 무기로 샤로트의 배를 뚫어 건물 기둥에 박아버렸다. 샤로트가 네 개의 발을 들어 독침을 찌르려 했으나 우진은 창을 놓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크윽.] 벽에 틀어박힌 샤로트를 보며 우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도 미치긴 미쳤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지하지 못한 것일까, 분노가 약한 것일까. 벽에 걸린 샤로트를 보니 어렸을 적 방학숙제를 했던 곤충박제가 떠올랐다. [부활 날만 기다려봐. 곧 다시 찾아가 죽여주마.] 우진이 뼈의 창을 소환해 다트를 던지듯 동시에 던졌다. 파파팍! 날아간 뼈의 창이 샤로트의 몸 곳곳을 틀어박혔다. [이, 이 치욕을 반드시!] 콰직! 머리에 박힌 뼈의 창을 마지막으로 샤로트의 움직임이 멎었다. “우, 우진아.” 바닥에 앉아있던 지원의 곁으로 살아남은 새끼거미들이 몰려들었다. 새끼거미라고 하여도 가장 작은것이 사람의 손바닥만 한 놈이다. 큰놈은 사람몸통 정도로 큰 것도 많았다. 슈아아앙. 영혼 갑옷에 귀속되어있던 영혼이 창이 되어 날아갔다. 파삭! 스피릿 스피어에 맞은 거미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일어나라!” 파파팟! 우진의 부름에 새끼거미들이 매개가 되어 해골병사들과 해골마법사들이 일시에 소환되었다. 그 수가 500기가 넘었다. “청소해버려.” 키키킥. 해골들이 주변을 가득 메운 새끼거미들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청소가 끝나자 해골 병사들이 고치를 잘라내 사람들을 구출했다. “으으윽.” “흑, 흑. 우진아.” “고맙다. 하마터면 죽을뻔했어.” “괜히 왔어. 오는 게 아녔는데. 으윽.” “살았다. 흑, 살았어!” 우진의 기억은 15년의 세월이나 지났음에도 겨우 5년이 흐른 그들의 얼굴은 별반 변한 것이 없어 속속들이 추억이 떠올랐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익숙한 그 얼굴들. “…….” 오랜만에 만난 그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까? 좋지 못한 자리에서 불안으로 흔들리는 영혼들과 나눌 대화는 많지 않았다. “다음에 또 보자.” 히이잉. 씽씽이가 소환되었다. 우진이 지원의 허리를 안아 들고 씽씽이의 위에 올라탔다. 파시식. 거미들이 모두 정리되자 해골들도 모조리 소환해제 시켰다. 군단장들에게 귀속시키지 않은 해골들은 우진이 멀어지면 지배력에서 벗어나 그저 언데드 몬스터가 될 뿐이다. ‘곧 80이다.’ 권속들이 속속들이 사냥에 성공 하고 있는지 경험치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아직 서울은 위험했고 우진은 바빴다. 파앙! 씽씽이가 홀을 뛰어 창문을 깨고 질주했다. 유령질주를 통해 허공을 밟고 달려가는 그들을 겨우 살아남은 신디가 멍하니 보았다. ‘강우진.’ 신디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 133화 - 역병의 군주 > 끝 ⓒ 진설우 < 134화 - 역병의 군주 (2) > 아르달에 긴장감이 흘렀다. “어, 어쩌죠?” 해솔이 당황해 물었다. 남산을 거점으로 날아오른 와이번들이 하늘로 넓게 퍼져 무차별 사냥을 시작했다. 불행히도 몬스터는 하늘에만 있지 않았다. 지상엔 그보다 수배는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 있었는데 드래곤의 거친 함성에 맞춰 앞다투어 남산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의 집결 시간 동안 어느 정도 저지선을 형성한 군인들이 포격을 시작했다. “어쩌긴요. 할 수 있는 것만 해야죠.” 성구의 말에 해솔이 마음을 다잡았다. 어떨 땐 모자라 보이기까지 단순한 그였는데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되다 보니 그의 말만큼 도움이 되는 게 없었다. 그는 모자라서 단순한 게 아니었다. 우진에게 훈련되었다. “여기 오는 놈들만 막읍시다. 재주껏 용쓰다 보면 형님이 오실 겁니다.” 성구가 우진으로부터 선물 받은 검을 들어 올렸다. 화르르륵. 검이 불타올랐다. 아니, 불타오른 것은 무기만이 아니었다. 성구의 몸 전체가 불에 휩쓸려 타올랐다. “성녀님 저 죽을 거 같으면 좀 살려주세요.” “…맡겨주십시오.” 목숨 하나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생명줄 우진이 없기에 믿을 건 성녀 뿐이었다. “저부터 갑니다.” 불꽃 남자 홍성구가 앞으로 질주했다. 자신의 전투 스타일 상 아군과 함께 합격을 이루기보다 적진의 한가운데 파고들어 싸우는 게 나았다. 그가 퍼트리는 화염은 적아를 식별하지 않으니 괜히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광역 어그로에 특화된 각성자. “우리도 준비하죠.” 해솔이 자신이 테이밍한 몬스터들을 준비했다. 크르륵. 끼에에엑! 검치호 잭슨에 칼날부리 까마귀들, 철갑악어 등의 몬스터들이 총 출동했다. 그들 모두 일반의 몬스터들과 구분하기 위해 몸에 아르달의 표식을 프린팅해두었다. “투혼을 보여주자.” 크르륵! 최해솔의 별명이 사파리 주인이다. 오늘 그의 테이밍 몬스터들이 그저 관상용이 아님을 보여주마. 크오오! 기세를 드높이며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았다. [병졸들이여!] 데스나이트 셋이 휘하에 편성된 해골병사들을 소환했다. 어느새 50레벨에 이른 그들. 레벨당 10기씩. 휘하에 편성된 데스나이트도 500기를 넘다 보니 1500의 대부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튀어나와 버렸다. 케케케! 괴이한 울음과 함께 나타난 그들은 진형을 갖추는데 약속이나 한 듯이 성녀의 주위를 피해 자리 잡았다. 성녀가 눈치 보더니 후방으로 물러났다. “저는 부상자들을 돌보겠어요.” 언데드 몬스터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은 없다.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것은 성구와 해솔 뿐이지만 그들도 평소 해온 전투스타일이 거칠었기에 버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냅다 전장으로 달려간 뒤였다. [돌격!] [전열 유지!] 해골 부대가 나뉘어 일부는 돌격하고 일부는 후열을 유지했다. 한바탕 휘젓고 돌아올 성구가 재정비할 군진은 유지해야 했다. 화르륵. 콰쾅! 성구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그의 행적마다 불의 궤적이 피어올랐고 휘두르는 화염 검에 건물들이 터지고 불타올랐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무차별공격을 퍼붓는 것도 아니었다. 화르르륵! 건물과 건물 사이에 불의 장벽을 일으켜 몬스터들의 진로를 교묘히 바꾸고 있었다. 해골부대가 충분히 감당할수 있도록 전장을 좁히고 있었다. “후우우우.” 빠르게 소모되는 마력에 성구가 숨을 깊이 뱉었다. 그의 입김은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불태워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몬스터들로 인한 피로감이나 긴장감? “흐흐흐.” 성구는 웃었다. 몸이 떨린다. 두려움이 아닌, 희열로 온몸이 떨린다. “기분 최고야.” 각성자협회에 가서 정식으로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아르달에서 자체적으로 측정했을 때 성구는 7서클. AA급의 각성자로 판명 났다. 한국 내에서 국한할 것도 없이 세계에도 몇 없을 고위 각성자다. 자신의 손짓에 불길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가족들이 아르달의 지하대피실에 있다. 절대 밀릴 수 없다는 부담감도 들었지만 그보다 그들을 지킬 무력을 가졌다는 것이 더 컸다. 무기력하게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 싸울 힘이 있고, 당당히 지켜내고 있다. “다 덤벼!” 콰쾅, 콰앙! 성구의 화염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여기저기 폭발이 일었다. 키에엑! 그때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힌 와이번이 성구를 덮쳤다. 파아악! 위로 내뻗은 성구의 손바닥에서 불길이 폭사 되었다. 고온의 화염에 와이번이 숯검정이 되었으나 그 시체가 성구를 덮쳤다. “윽.” 거구의 몬스터에 깔렸으나 성구가 비집고 기어나왔다. 힘 하면 신체 각성자 부럽지 않게 강화한 그다. “으라차!” 몸을 일으키자 와이번의 시체가 들썩이며 옆으로 치워졌다. 크와아! 쉴 새 없이 덤벼드는 몬스터지만 성구의 눈엔 자신감이 넘쳤다. 6성 던전의 공략도 심심찮게 솔로 플레이로 완료하는 성구다. 한정적 마력을 가지고 적절히 스테미너를 분배하는 법도 터특한 그다. ‘다 덤비라 그래. 맘껏 날뛰어주지.’ 성구의 활약에 몬스터의 선발대가 와해되고 그것을 데스나이트들이 통솔하는 해골부대가 막아섰다. 요소요소에서 활약을 펼치는 해솔의 테이밍 몬스터들도 한몫을 했다. 그때 타워를 딛고 서 있던 드래곤이 표효했다. 크오오오오! 소리만 큰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이 담긴 충격파까지 발생해 군인들의 통신장비를 교란시켰다. 피어의 효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일제히 버프를 받은 듯 더욱 미쳐 날뛰었다. “이거 어쩌지?” 성구는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수가 더 많아진 듯하자 잠시 후퇴해야 하나 싶었다. 그의 느낌이 틀린 게 아니라 워낙에 요란하게 날뛰다 보니 골드 드래곤이 몬스터들을 모조리 성구가 지키고 있는 아르달쪽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반대편을 수호하던 군인들은 한결 숨을 돌린 상황이지만 성구는 몬스터들의 파상공세에 차츰 힘을 잃어갔다. ‘잠깐 회복이 필요한데.’ 전쟁터는 던전의 공략과는 또 달랐다. 사냥 중에 힘들면 몸을 피해 안전한 곳에서 휴식이 가능했지만, 전쟁은 한 발짝도 물러날 곳이 없다. 자신이 무너지면 뒤의 아군이 위험했다. 그리고 그 뒤에 자신들만 믿고 있을 가족들이…. ‘어쩌지?’ 너무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것일까? 아까부터 쥐어짜 낸 마력도 이젠 거의 고갈날 처지다. 생각이 많아진 성구가 움직임이 분주해지는데 하늘에서 콘크리트 더미가 떨어져 내렸다. [그오오오오!] 기운찬 함성과 함께 콘크리트 더미가 몸을 일으켜 전방의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지팡이를 타고 나타난 비비가 성구의 옆으로 날아왔다. “헤헤, 성구찡 수고했어.” “비비!” 성구는 비비의 모습이 더없이 반가웠다. 뒤를 돌아보니 해골 부대의 수가 배 이상 늘어나 보였다. ‘다른 기사님들도 왔구나.’ 데스나이트들에게 순수 지도를 받았던 성구다.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기에 안도감이 들었다. “형님도 왔어요?” “주인님은 아직 안 왔어. 좀 쉬고 와.” “네, 그럼 비비 뒤를 부탁해.” 전장의 막바지도 아니고 아직 몬스터들의 수는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괜히 방해될 바에야 후방에서 힘을 회복한 후에 오는 것이 낫다. 성구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 보니 성녀의 곁에 이미 방전해버린 해솔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이리 오세요.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후우, 네. 부탁드려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성구다. 마력을 쥐어짜 냈더니 속도 조금 울렁거리고 두통도 있었다. 성녀의 손길이 닿자 상처가 빠르게 재생하며, 마력도 안정을 찾아갔다.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차오르는 마력을 느끼며 물었다. “형님은 언제 오실까요?” “10분 내로 도착할 거에요.” 성구의 말에 대답한 것은 성녀가 아닌 도재민이었다. 슬기를 아르달의 대피소에 내려 주곤 뒤늦게 합류한 것이다. 차원영주의 가신이 되며, 우진과 수시로 의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셋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아닌 뱀파이어 하나와 꼬마 악마 하나, 데스 나이트 하나지만 말이다. “어? 재민 학생.” “오랜만이에요.” “하하, 좀 어때?” “이제 괜찮아요.” “그래. 기운 차려. 사람 아니면 어때? 재민 학생은 잘생겼잖아.” “…….” “선글라스도 멋지다, 이야.” 어딘가 치열한 전장과는 맞지 않는 대화 같지만 묘하게 우진을 닮은 듯해 재민은 피식 웃었다. 우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왜 이렇게 편한 느낌이지? “그나저나 저것들 다 어쩌냐? 여기야 막는다 쳐도 서울이 쑥대밭이 되겠네. 아주.” 저번의 던전 브레이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때보다 몬스터의 수도 더 많았고, 문제는 그것들이 명령을 받으며 조직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우진이형 오면 쓸어버리지 않을까요?” 재민의 말에 성구가 치료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님 오시면 어떻게든 하시겠지. 전에 들으니 리치 소환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던데.” 성구의 말에 치료하던 메르디가 움찔 놀랐다. 자신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며 마력회복을 돕던 기운이 크게 요동치자 성구가 뒤돌아보았다. “어?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지금 엄청 떨고 계시는데….” 메르디의 몸이 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본능적 반응에 메르디가 자신의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역병의 군주가 온다기에….” “예? 역병의 뭐요?” “임모탈의 군대에서도 악명높은 리치 제니스의 별명입니다.” 메르디는 치가 떨리는지 부들부들거렸다. “별명이 어째 조금….” “아르펜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죽은 인구가 몇인지 아십니까?” 국사지식도 약한데 다른 차원의 행성 역사를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몇인데요?” “2천만입니다.” “많네요….” “지난 200년간 리치 제니스가 죽인 인구가 몇인지 아십니까?” 어째 묻기가 껄끄러워지는데. “몇인데요?” “3천만입니다.” “…….” “그의 등장 자체가 역병. 역병의 군주라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성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쩌지? 형님이 리치보고 마법 배우라고 하셨는데…. 그런 엄청난 학살자를 형님은 스승으로 모셨고 지금은 권속으로 부리다니. “하하, 제니스님은 형님보다 더 엄청나신 분이네요.” 성구의 말에 성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임모탈이 불사의 군대를 일으킨 20년의 전쟁 동안 죽은 이들이 몇인지 아시나요?” 성녀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묻기 두려운데? 홍성구의 손가락을 접어 보였다. 리치가 200년 동안 3천만 죽였으면 20년이면…. “300만 명요?” 엄청난 수다. 하지만. “1억.” “…….” 아, 형님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구나. 실제로 아르펜에 남은 세력이 트라넷과 아르달 그리고 연합세력 셋뿐이라더니……. 거기서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계셨구나. “조, 조금 많네요.” “집계된 것만 그러니 추산으로는 더 많겠지요.” 성구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메르디가 우진을 보면 호랑이 앞의 강아지 마냥 쩔쩔매는 것도 이해가 갔다. “대재앙.” “예?” “임모탈의 걸음 자체가 재앙이었지요.” “음….” 성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형님, 저 형님을 계속 존경해도 되는 거겠지요? “누가 내 욕했냐?” “아이고, 깜짝이야!”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느라 미처 살피지 못해서였을까? 불쑥 얼굴을 내미는 우진의 등장에 성구가 화들짝 놀랐다. “히끅, 히끅.” 성녀는 아예 딸꾹질을 하며 토끼 눈을 하곤 어찌할 줄 몰랐다. 우진이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대충 놀았으면 이제 사냥이나 가자.” “네, 넵!” 성구가 벌떡 일어섰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할 때. “저, 그런데 형님. 그때 말씀하신 리치 소환은 이제 어느 정도 남았는지….” 우진이 씨익 미소 지었다. < 134화 - 역병의 군주 (2) > 끝 ⓒ 진설우 < 135화 - 역병의 군주 (3) > “그런 학구열 좋아.” “아니, 그래서 물은 게 아니라….” “너무 재촉하지 마. 오늘 중으로 나와.” “아니, 재촉하는 게….” 성구는 그저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려면 리치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어 물어본 것이지만. “내가 장담한다.” 아, 불안한데. “넌 살아만 남아라.” 우진이 성구의 어깨를 짚었다. “그럼 최고의 화염마법사는 너다.” “형님….” 아니, 그러니까 왜 마법을 배우는데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지…. “그럼 좀 더 쉬다 와.” “…….” 우진이 성큼 걸어 딸꾹질 중인 성녀에게 다가갔다. 찔리는 게 있는지 성녀가 움찔 놀라며 어찌할 줄 몰라했다. “아까 역사를 읊던데?”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성녀가 털썩 주저앉으며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반응에 우진이 뚱한 얼굴이 되었다. “…진짜 뒤지기 싫으면 일어서지?” 신을 모신다는 사제가 그것도 선택받았다는 성녀가 이렇게 넙죽넙죽 고개를 조아려도 되는 것일까? 우진은 성녀가 자신에게 극공의 예를 취할 때마다 신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는 인간이다. “예에.” 성녀가 벌떡 일어섰다. 우진이 인상 쓰며 물었다. 그가 궁금한 것은 뒷담의 전말이 아닌 아르펜의 역사였다. “아르펜에서 최초로 던전이 링크된게 200년 전이지?” “예, 그러하옵니다.” “지금처럼 차원영주들이 마구잡이로 들이닥친 게 언제부터야?” “100년 전이옵니다.” “…….” 우진이 시간계산을 해보곤 인상을 구겼다. 지구에 최초 던전이 생성된 것은 5년 전. 차원영주들이 슬슬 모습을 보인 건 최초 던전 생성 이후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으니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럼 아르펜은 100년이나 버틴 거네? 지구는 얼마나 버틸 거 같아?” “지구의 던전은 아르펜과 비교할 수 없이 많기에 가늠할 수가….” “음….” 지구의 네트워크는 월등하다. 행성 안에서 일어난 일이면 하루도 되지 않아 전세계가 알 수 있을 정도의 네트워크망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 지구인을 한뜻 한마음으로 뭉치게 하지는 못한다. 아르펜은 정보의 교환은 늦지만 그것을 조율하고 컨트롤하는 존재. 사람들의 믿음을 이끌어내고, 그들을 규합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우진이 아리아교단의 성녀 메르디를 보았다.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무엇입니까?” “수아의 각성을 도와.” “…….” 메르디가 깜짝 놀라 토끼 눈을 하곤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신의 말을 전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메르디는 본인이 겪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별수 없잖아.” 동생을 위해서도, 지구를 위해서도 별수 없는 일이었다. “구심점은 있어야지.” “…….” 우진의 말에 메르디도 침묵으로 동의했다. 스스로 사람들의 구심이 되려 했다. 압도적 무력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이끌려 했다. 하지만 세상이 보다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각성자들이 우진의 제어 하에 놓이기 전에 지구는 안에서부터 무너질 것이다. 도덕이 무너지고, 희망없는 절규가 세상에 퍼질 것이다. 그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줘야 했다. 우진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의 씨앗이 되어버린 동생. 어떤 신이 나올지는 모른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믿어왔던 여러 신들 중 하나인지, 누구도 인지하지도 못한 잊힌 고대의 신인지는…. 누군지 모를 신에게 선택되었다. 수아의 운명이 가혹하지만 선택지가 없으니 우진으로서도 별수 없다. “수아도 살아야지.” 신의 씨앗이 된 이상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거부할 수 없다. “악신이면 어찌합니까?” “풉.” 우진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신에게 선악을 나눈다?” “…….” “내가 믿으면 선하고 아니면 악한 거야.” “…….” 아리아의 성녀인 자신으로서는 듣기 싫은 말이지만 임모탈의 앞에 대꾸할 용기는 없었다. “악신은 없다. 수아의 각성을 도와.” 그녀가 신의 씨앗을 발아하며 미치지 않도록 돕는것. 아리아의 힘을 가진 성녀 메르디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성녀의 대답에 우진이 날뛰는 몬스터들을 보았다. “자, 그럼 용잡이나 하러 가볼까?” 우진이 남산에 자리 잡고 있는 골드 드래곤을 보며 히죽 웃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벌떡 일어서는 성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랑 해솔이는 주변 정리해.” “예에.” 아쉽지만 우진이 그리 판단했다면 위험한 일이다. 성구는 괜히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각성자에게 만용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드래곤 한 마리 잡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동료를 주렁주렁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시선을 끌어줄 죽음의 기사 열, 돌쇠와 지속적으로 그의 정신계를 공격해 혼란을 줄 비비, 그리고 자신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남산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버린 몬스터들로 커버해야될 지역이 많아 그의 권속들이 바빴다. “아니면 제니스를 부르면 되고.” 경험치가 끝을 향해 치 다르고 있었다. 앞자리가 바뀌기까지 몇 분이 남지 않았다. 경험치들은 주변에 널렸다. 오히려 서울에 집중적으로 터져준 던전브레이크가 기꺼웠다. 불사의 군대가 사냥하는 것도 그의 경험치로 화해 쌓인다. 우진이 레벨업을 단축하기 위해 직접 전장에 뛰어들었다. 슈아악! 우진의 손에서 뻗어 나간 뼈창이 몬스터들의 피륙을 꿰뚫었다. 우우웅! 스피릿 스피어가 이리저리 민첩하게 피해내는 하늘 박쥐를 끝까지 추격해 맞췄다. 콰직! 전사 클래스를 얻으며 가장 많이 사용한 무기인 도끼가 몬스터들의 대가리를 쪼갰다. 몬스터의 숨을 멈추게 하는데 많은 손짓이 필요치 않았다. 한두 번의 공방이면 우진의 곁에는 몬스터들의 사체로 가득했다. 그 압도적 기세에 몬스터마저 질렸을까? 주춤 물러설 조짐을 보이는 그들을 보며 우진이 웃었다. “어딜 도망가시나?” 촤르륵! 시체라면 많다. 뼈를 가진 놈들도 많고. 그것들이 매개라면 어디든 뼈의 장벽을 생성할 수 있었다. 몬스터의 퇴로를 막아버린 우진이 힘을 폭발 시켰다. 푸화악! 그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 녹색 연무가 몬스터들을 중독시켰다. 발에 채는 곤충형 몬스터들은 무기를 들것도 없이 독에 의해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아군을 신경 쓰지 않는 전투스타일이라면 단연 독보적 존재. 그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홍성구. “일어나라!” 푸확! 우진의 주위에 가득한 시체들이 폭발했다. 피와 육편을 날리며 일시에 200기가 넘는 스켈레톤 메이지가 소환되었다. 이제 개개의 레벨도 높아 스켈레톤 메이지 하나가 B급의 각성자에 육박했다. 그들이 던지는 마법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한 개체당 하나의 속성마법만을 사용한다는 단순함이었다. 하나의 마법을 사용하지만 그 수가 수십 수백을 넘어서며 다양성을 갖췄다. 화염에 빙결, 전격 마법에 바람속성, 그리고 독 속성까지 사용하는 다양한 마법 부대가 탄생했다. “폭격이다!” 키킥. 스켈레톤들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우진의 활약에 여유 있어진 데스나이트들이 해골 부대를 이끌고 남산을 중심으로 빙 돌며 몬스터들을 압박하는 포위진을 넓혀갔다. 99.9%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 남산타워를 박차고 날아오른 드래곤이 우진을 향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직접 나선 것이다. 그가 떠난 남산타워를 보니 기괴하게 변한 넝쿨들이 감싸고 있었다. 남산타워를 식민지의 중심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 하루가 지나면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그 전에 드래곤을 잡고 파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하늘 높게 날아오른 드래곤이 배를 부풀렸다. “곤란한데?” 브레스를 막을 수 있을까? 우진은 무사할 수 있다. 영혼의 갑옷이 그를 보호해줄 것이니까.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특히 아르달의 사람들은 어찌할 것인가? <레벨 업!> 더없이 반가운 그 소리에 우진이 즉시 그를 불렀다. “제니스.” 과감함과 살육을 가르쳐 준 스승. 파괴와 군림을 도운 최고의 보좌관. 한때 대 학자로 불리며 아르펜의 성인이었던 대 마법사. 무너져가는 아르펜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리치가 되어 광기에 사로잡힌 자. 불사의 마법사. 슈아아악! 허공에서 생겨난 검은 연기가 뭉쳤다. 검은 로브와 커다란 검은 지팡이를 든 해골. 스켈레톤 메이지와 비슷한 차림이었으나 압도적 존재감을 내뿜는 존재.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마스터! 아르펜은 구원되었나?] 이명이라도 인 듯 윙윙거리는 그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소름 끼치는 그 소리는 기차가 급정거하는 것과 닮아있었다. 간지러운 귀를 만지며 우진이 답했다. “그건 아직 이고 일단 저것 좀 막지?” 우진이 하늘을 가리켰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골드 드래곤 라자쿠이의 모습은 브레스를 내뿜기 바로 직전이었다. [나의 힘은 어디로 사라졌나?] “아차.” 우진이 서둘러 스킬창을 열어 ‘리치소환’ 스킬에 보너스 포인트를 투자했다. 1이 99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몇 번이나 번쩍 거리던 제니스의 몸은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그저 검은색 이었던 로브는 은은한 마법진이 새겨져 신묘한 분위기를 냈다. 그의 지팡이 머리엔 다섯 가지 보석이 박혀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푸아아아! 압력솥의 뚜껑이 열렸다. 눈을 감고 들으면 분명 그랬다. 정확히는 라자쿠이의 입에서 뿜어진 브레스가 지상을 향했고, 제니스는 우산을 뒤집어 하늘을 막았다. 콰콰쾅! 마력으로 만들어진 배리어가 드래곤의 배리어를 감당하고 있었다. 핵이라도 터진 듯 충격파가 일었으나 대부분은 역으로 반사되어 하늘로 향했고 지상에 온 충격은 미미했다. “안 늦었네.” [용용이의 친구가 필요한가?] “트라넷의 졸개다. 어차피, 못쓰는 놈이야. 그냥 죽여.” 차원영주는 죽여도 시체가 남지 않는다. 그저 회색빛으로 화해 사라질 뿐이다. 시체가 있어야 본 드래곤을 만들기라도 할 것 아닌가? [‘트래쉬의 집행’은 아직 인가?] “찾아봤지만 없었어.” 업적상점에도 차원상점에도 트래쉬의 세트아이템 중 무기인 집행은 없었다. 레시피도 없는 것을 보니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아한 무기. 제니스는 계속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의 대화 중에 드래곤이 천천히 하강했다. 라자쿠이는 자신의 브레스를 막아낸 불사의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지구에 이런 강력한 리치가 있을 줄이야? [동기화도 완료되지 않은 지구의 각성자가 어떻게 그런 힘을 손에 넣었지?] 라자쿠이의 말에 리치의 붉은 안광이 번들거렸다. [역겹구나!] 트라넷에 대한 제니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처리하고 다음에 이야기 하지.” [로드의 뜻대로!] 마스터라 불렀다가 로드라 불렀다가 제 멋대로인 리치다. 뭐, 우진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 애초에 리치로 200년을 존재하다 스스로 우진의 권속이 된 그다. 그저 이렇게 따라주는 것만 해도 고맙고 든든했다. [지옥불에 타 죽어라!] 화르르륵! 제니스의 지팡이에서 쏘아진 검은 불꽃이 라자쿠이의 날개에 명중했다. 지옥에서도 지지 않는 불꽃인 헬파이어의 전개라곤 믿기지 않게 빠른 캐스팅 시간. [크윽?] 화르륵. 날개에 붙은 불은 소화마법에도 꺼지지 않고 온 몸으로 번져나갔다. 후우웅, 후우우웅! 드래곤의 날개 짓에 자동차가 날아가고 가로수가 뽑혔다. 건물의 창이 뜯겨 날아가고 근처의 스켈레톤 메이지들도 이리저리 휩쓸렸다. 쿠아앙! 허공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날뛰던 드래곤이 바닥에 추락했다. 몇 개의 건물을 부순 후에야 바닥을 구르던 것을 멈췄다. 겨우 진화한 지옥의 겁화.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생명이 끝날 때까지 타올랐을 것이다. [감히! 나를 분노케 하다니.] 가벼운 마음으로 링크한 지구에서 이런 치욕을 겪을 줄이야. [이 정도 잔재주로는 나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미처 대비하지 못해 어이없이 헬파이어에 명중 당하고 말았지 그가 진심으로 마음먹은 이상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 이 도시를 전부 파괴해주마. 크어어어! 날개가 그을린 드래곤이 지구에 네발을 딛고 포효했다. 그 끔찍한 피어에 사물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귀가 없는 리치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앞에 오연히 서 있었다. [그하하, 화력이 부족한가?] 리치의 지팡이에서 마력이 뻗어 나왔다. 화르륵. 드래곤의 주변 곳곳에 불꽃의 싹이 타올랐다. 지면을 뚫고 올라온 불꽃이 자라나 꽃을 피웠다. 시뻘건 용암이 대가리를 내밀었다. 지옥불에 빠져 고통받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드래곤. 히드라가 제니스의 부름에 소환되었다. 크와아아! 정확히 100마리. 900개의 머리가 라자쿠이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 135화 - 역병의 군주 (3) > 끝 ⓒ 진설우 < 136화 - 메테오 > 꽈과광! 폭발의 여파는 굉장했다. 근처에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 수십 마리가 휩쓸렸다. 우진이 홀로 사냥하느라 주위에 군인과 그의 권속들이 없으니 천만다행. 후우우웅! 흔적만 남은 건물의 잔해가 뒤섞인 충격파가 사방에 비산했다. 먼지가 가라앉자 우진이 보호막을 거두고는 제니스에게 다가갔다. “봉인이 풀린 기분이 어때?” [사라진 시간에 감흥이 남아 있겠나?]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봉인의 방에 갇혀본 적도, 죽어본 적도 없으니 알 턱이 없다. “물어볼 게 많은데 일단 전장 정리부터 하자고.” [그것이 좋을 것 같군.] “람손 쪽과 함께 움직여.” [그리하지.] 훌쩍 사라지려는 그를 우진이 급히 붙잡았다. “아참, 사람은 죽이지 마.” [이해할 수 없는 말이군.] “죽이지 마.” […로드의 뜻이 그렇다면.] 휘리릭. 제니스의 몸이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뱉은 말은 지키는 리치니 사람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몬스터 토벌이 조금 느려지긴 하겠지만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모두 태울 순 없는 노릇이다. 우진이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서울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으리라. 그것이 가장 빠르게 몬스터를 토벌하는 길이니 말이다. “나도 좀 체크해 볼까?” 80레벨이 되었다. 그간 변화되어 온 전사의 무기가 또 한 번 진화하는 단계를 넘었다. 우진이 스킬창을 열었다. <강철 지팡이> 전사의 무기는 그의 친구이자 생명과 같다. 전사의 무기는 사용자와 함께 성장한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며 당신의 부름에 준비되어 있다. 효과 : 힘 +30, 민첩 +30, 체력 +30, 내구도 회복(해제 상태) 스킬 : 소환, 해제, 변형(창, 해머, 도끼, 대검, 활, 장검, 비도) “비도네?” 여덟 번째 형태 변환이 정해졌다. ‘힘 +5’로 시작한 버프 효과도 민첩과 체력이 붙으며 어느새 30까지 성장했다. 90레벨이 되면 더 늘어날 테니 무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증가하는 스탯치가 어마어마했다. 전사 클래스의 길을 간다면 전사의 무기는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다. 철그럭. 우진이 무기를 형태 변환하자 강철 지팡이가 사라지며 손아귀에 세 자루의 작은 비도가 생겨났다. 크기가 제각각이었는데 사냥용 단검으로 쓸 만한 한 뼘 길이의 칼날을 가진 것, 전체 길이가 한 뼘 정도로 작은 은장도만 한 것, 그리고 그 중간 크기의 비도까지 셋이었다. 샤락, 쉭. 우진이 몇 번이고 소환과 해제를 반복하며 무기를 사라지게 했다 손에 쥐었다를 반복했다. 자유자재로 사이즈를 변형해 비도를 던지기 좋게 손바닥에 소환할 수 있었다. “배울 수 있는 스킬은 뭐지?” 우진이 업적 상점을 열어 80레벨 제한이 해제된 전사 클래스 전용의 스킬들을 구입했다. <단검술>, <비도술>, <전장의 함성> 다를 것 없는 무기술 두 가지와 효과가 궁금한 스킬 한 가지. <전장의 함성> 분투 중인 전사의 외침은 아군의 사기를 드높인다. 효과 : 사기 증가, 전투력 증가 우진이 스킬을 보곤 미소 지었다. “집단 버프네.” 70레벨 구간까지는 전사 스스로를 강화하고 단련해 온 스킬들이 주류를 이뤘는데 80레벨에 처음으로 버프 스킬이 나왔다. 그것도 함성이 들리는 구간의 모든 아군에게 효과를 미치는 광역 버프다. 우진이 슬슬 정리되는 전장을 마무리할 겸, 새로 배운 무기술도 써볼 겸 남산으로 향했다. 라자쿠이가 심어놓은 넝쿨들이 타워를 옭아매며 자라나고 있었다. 녀석의 거점이 자리 잡으면 곤란하니 얼른 제거해야 했다. “어?” 우진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위화감에 멈칫했다. 그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드드드드. 감각을 집중하자 떨리는 공기의 진동이 느껴졌다. 구름의 모양이 조금 이상하다. 그리고 집중된 시야로도 보이지 않지만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존재감. “하아.”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트라넷을 극도로 혐오하는 제니스다. 아직 자리 잡지도 못한 아무런 기능도 없는 거점을 제거하기 위해 메테오를 전개하다니…. 이미 저건 막을 수도 없다. “남산타워를 다시 부숴트리는 게 나구나.” 5년 전 던전쇼크로 없어진 것을 서울의 심볼이라며 다시 세운 것이 몇 해 되지 않았는데…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자신이 될 줄이야. 불사의 군대가 저지르는 일도 오롯이 그의 책임. “타워가 아니라 남산이 사라지겠네.” 아직까지 메테오가 적중되기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우진이 서둘러 주변을 살펴보곤 유령마 씽씽이를 타고 내달렸다. *** 두두두두. 콰앙! 빗발치는 총성과 포탄 소리로 시끄러운 전장을 몇 대의 카메라가 비추고 있었다. 작은 모니터엔 전투가 코앞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지만 실상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먼 거리다. “휘유, 난리도 아니구만.” 1킬로미터쯤은 재빠른 몬스터나 비행형 괴수를 생각하면 그리 안심할 수 없는 거리지만 그나마 토벌이 거의 마무리되는 단계여서 그런지 위험부담은 덜했다. “피디님, 더 접근해 볼까요?” “됐어. 기다렸다가 포성 끝나면 가자.” “예에.” “세상 말세야, 말세.” 피디는 피크닉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곤 그저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어수선한 이런 세상에 특종이 다 뭐겠는가. 괜히 군부대가 정한 접근금지 선을 넘었다가 재수 없게 오발탄에 맞아 죽으면 억울함을 사정할 곳도 없다. “어? 뭔가 오는데요?” “뭔데?” “말인 것 같은데.” “뭐? 다그닥 다그닥? 페가수스라도 된다냐? 여기 옥상이야, 임마.” “지, 진짠데….” “하, 새끼.” 피디가 괜히 후배를 한번 째려보곤 의자에서 일어서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옥상의 난간 너머를 살펴보는 그의 얼굴이 굳었다. “말이네.” “거봐요.” “저거 누구냐? 누가 탄 거야?” “어… 가, 강우진 같은데요?” “어어? 진짜네?” 후배의 말에 피디의 입에 물렸던 담배가 떨어졌다. “야, 카메라 돌려!” 화면을 확대해 전장을 찍고 있던 카메라가 돌아가 허공을 유령 질주로 달려오는 강우진의 모습을 찍었다. 히이잉. 씽씽이가 옥상의 난간에 다다르자 우진이 훌쩍 뛰어내렸다. “이거 생방이에요?” 우진이 카메라를 가리키며 묻자 피디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시간은 아닙니다. 10분 정도 차이 두고 송출됩니다.” “그럼 늦네.” 우진이 인상을 찌푸리자 피디가 서둘러 말했다. “급한 용무십니까? 1분까지 줄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산에 운석 떨어집니다. 인근 주민들 알아서 대비하라 하세요.” “예? 운석이요?” “남산 주위에 방송팀 몇 개예요?” “네 팀입니다.” “연락되죠? 전부 전해요. 군부대 연락돼요?” “자,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연락처 알아서….” “됐어요. 직접 가는 게 빠르겠네.” 인근 주민들이야 남산에 라자쿠이가 몬스터들을 집결시킬 때 이미 대부분 피난을 갔다. 지금 메테오가 떨어지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다름 아닌 군인들이다. 히이잉. 우진이 할 말만 전하고는 씽씽이를 타고 군부대를 향해 사라져 버리자 피디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피디님! 이거 바로 공개합니까?” “…재성아, 나 강우진이랑 이야기한 거 맞지?” “예! 맞아요.” “허….” 후배 재성의 말에 피디는 꿈이라도 꾸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선배! 방금 영상 어떻게 하냐구요!” “어쩌긴 뭘 어째?” 피디가 즉시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속봅니다. 방금 들어간 영상이랑 같이 편집해서 바로 내보내 주세요.” 전화기를 붙잡고도 피디의 눈은 사라진 우진을 향해 있었다. “히어로 강우진이 드래곤의 운석 소환을 간파했습니다.” 못 하는 것이 없다. 그가 아니었다면 서울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서울에 나타난 일곱 곳의 몬스터 집결지를 강우진의 권속들이 나서서 처치했다. 군부대는 지금 나머지 잔당들을 소탕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산에 곧 운석이 떨어질 거랍니다. 그의 말대로 대피해야 됩니다.” 신뢰도를 따질 겨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강우진이 빈말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이미 세간의 인식이 그러했고, 사람들이 느끼는 그의 무게가 그러했다. 피디의 음성은 묘한 자부심으로 떨리고 있었다. 꼭 지구방위대의 대원이 된 듯한 기분이 이럴까? 그의 말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서울 방위에 크게 기여한 것이 아닐까? 피디가 된 것이 이렇게 보람찬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가 또다시 서울을 구해냈습니다.” *** “철수할 수 없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지휘관의 말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죽겠다면 말리진 않아요.” 우진이 손가락을 펴 하늘을 가리켰다. 물결치는 구름들. “10분쯤 지나면 당신 눈에도 보일 거야. 그리고 그때 후퇴하면 다 뒤져.” “…….”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물러나. 죽고 싶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어.” 우진이 자신의 뜻을 전했다. 괜한 목숨을 잃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그들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없다. 위험을 알려줬으면 됐지, 보모처럼 돌봐줄 필요까지는…. “그러면 몬스터들이 풀립니다.” “그건 내가 대신 막지.” “…….” “어쩔래?” “병력을 물리겠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얼른 가.” 우진이 그리 말하곤 군 병력의 가장 선두로 향했다. 후퇴를 돕자면 누군가는 막아서 몬스터들을 잡아둬야 했다. 떠나는 그를 보며 군인들이 경례하며 물러났다. 우진이 본스피어를 소환해 여기저기 던졌다. 촤르륵! 뼈가 자라나며 금방 얼기설기 엮인 뼈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범위가 범위다 보니 본월을 생성하는 것만으로도 상당량의 마력이 쑥 빠져나가 버렸다. 업적 상점에서 마력 포션을 꺼내 물며 중얼거렸다. “제니스 참, 사람 번거롭게 만들어.”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했으니 큰 운석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충격파는 무시 못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니스의 실력이 워낙에 좋아 마법의 정확도가 높으니 다른 곳에 떨어지는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남산타워는 거의 확정적으로 잃는다 봐야 했고 인근도 쑥대밭이 될 것이다. 인명 피해야 없겠지만 숲에 숨어들어 있는 몬스터는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우진은 놈들이 도망쳐 나오지 못하도록 뼈의 장벽을 둘렀다. 몬스터들의 저항이 거세면 모자라는 마력 대신 기력을 사용하는 전사의 스킬을 이용하며 상대해 냈다. 군 병력이 사라지고 우진이 홀로 남아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그때 검은 기류가 뭉쳐 리치 제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운석을 부르면 어떻게 해?” [그하하, 지구 방문에 노크라네.] 우진이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매너 한 번만 더 챙겼다간 지구가 아작 나겠네.” [그하하하, 인명의 피해는 없네.] 우진의 입에서 한숨이 베어 나왔다. “작은 거지?” [인사 차원의 작은 돌멩이일세.] 그 작은 돌멩이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품고 있어서 문제지. “아르달의 건물에 배리어를 써줘.” [건물 따위야 상관없지 않나?] “거기에 가족이 있어.” […실례했군그래.] 제니스의 몸이 검은 연기로 뭉쳐져 공기 중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우진인 한숨을 쉬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 작은 빛과 함께 떨어지는 그것은 정확히 남산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것이 눈에 보인 것과 충돌하기까지는 불과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꾸아앙! 충돌에 이어 뒤늦은 폭발음이 고막을 울렸고, 요동치는 대기 흐름에 영혼 갑옷이 작동하며 우진의 몸을 감쌌다. 남산타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초토화된 남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먼지와 함께 피어오른 버섯구름은 서울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 136화 - 메테오 > 끝 ⓒ 진설우 < 137화 - 메테오 (2) > 회의실의 커다란 티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남산에 출몰한 드래곤이 죽기 전 소환한 것으로 추정되는 운석이 떨어진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것처럼 남산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옛 타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초토화된 남산과 무너져 버린 건물들의 잔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도로는 서울이라곤 믿기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충격이 크진 않았다. 5년 전 던전쇼크라는 너무 큰 재앙을 겪은 경험이 있어서일까, 서울은 금방 안정을 찾았다. 시민들은 걱정하기보단 오히려 잘 이겨냈다는 자부심까지 생겨난 상황. -운석 소환을 예측하고 알려준 아르달의 강우진 씨의 제보에 시민들이 신속히 대피 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번 던전 브레이크에 가장 잘 대처한 도시가 서울로 뽑힌 만큼 강우진 씨의 소환수들의 활약으로 초기에 몬스터들을 토벌한 영향에…. 시민들이 제보한 듯한 짤막한 영상들이 차례로 재생되었다. 아이언 골렘이 몬스터와 싸우는 것에서부터 수천의 해골부대와 데스나이트가 합격해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장면까지. -충격파의 영향으로 진동이 천안까지 느껴질 정도의 이번 운석 충돌에도 아르달길드의 사유지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모습으로…. 헬기에서 촬영한 듯한 화면이 비춰지고 있었다. 남산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고 주변 건물도 모두 무너져 잔해로 어지러워 도로를 찾기가 힘들었다. 충돌 지점에서 멀어질수록 유리창 정도만 깨진 비교적 온전한 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르달 길드가 위치한 것은 폐허가 된 지점. 거대한 후폭풍이 아르달길드 소유의 토지와 건물들만 빗겨간 듯한 그림은 마치 먼지구름에 떠 있는 섬과 같은 모습이었다. 가라앉은 흙먼지도 빗겨갔는지 아르달만이 깨끗했다. -아르달을 보호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강우진 사장. 그가 아니었다면 서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아르달길드가 서울역이 아닌 도쿄, 혹은 LA로 이전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화면엔 자못 비장한 얼굴의 기자가 모습을 비춰졌다. -기존의 상식을 깨고 연일 던전이 터지며 몬스터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핵무기를 사용해 겨우 몬스터들을 토벌한 국가도 있습니다. 여러분, 국민 투표가 하루 남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아르달이라는 그늘 아래 놓일지, 떠나는 그를 지켜볼지는 여러분의 선택 에 달렸습니다. MBS 박성현이었습니다. 앵커의 말이 끝나자 정민찬은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껐다. 회의실에 자리 잡은 아르달의 핵심 멤버들을 돌아보며 그가 무거운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상황은 긍정적입니다만, 만약, 정말 만약에 내일 투표에서 반대가 많을 경우를 대비해야 합니다.” 검사직을 관두고 정식으로 아르달에 입사한 이강진 변호사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헌법 개정이 무효되면 결국 한국을 떠나야 하는군요.” 대한민국 내의 소도시 국가를 인정하는 내용의 헌법이다. 국민 투표까지 필요할 정도로 큰 건이고, 이것이 통과되어야 조약이 체결된다. 한국 안의 또 다른 도시 국가 아르달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강진의 가정은 당연한 것이지만 창립 멤버들은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아르달은 어디 안 갑니다. 지금 차지한 사유지를 그대로 영토로 합니다.” “예? 최악의 상황이면 결국은 떠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사장님이 안 떠나실 겁니다. 투표가 무효화되면 아르달은 반국가단체가 되는 겁니다.” “…….” 이강진이 멍한 얼굴을 했다. 우승훈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서울역 떠나지 말래요. 별수 없어요.” “허, 아무리 그래도 사정상….” “어휴, 이 변호사님도 적응하셔야 해요.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사장님이 안 가신다면 안 떠나는 겁니다.” “…….” 이강진이 회의장의 면면을 살폈다. 아르달의 부사장 정민찬, 지원이사 김해민, 비서실장 우승훈, 그리고 불꽃 남자로 더 잘 알려진 잡무이사 홍성구. 그들 모두가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사안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최악의 경우엔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영토 내에 다른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와 새롭게 주권을 행사하려는 작은 도시국가. 두 세력의 충돌로 빚어질 결과는 뻔했다. 작은 도시 국가의 승리. “사장님이 한국 정부 전체를 장악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한 플랜을 세워야 합니다.” 김해민의 말에 어처구니없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 반역이라도 하자는 말입니까?” “그 사태를 막자는 거지요.” “사장님을 설득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형님 설득하는 것보단 국가 전복이 더 쉽죠.” “…….” 가만히 듣고 있던 성구의 한마디에 회의장은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장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내일쯤 오신댔는데 더 빨리오실지도 몰라요.” “영국에서 하루 만에 오시는 게 가능합니까? 아직 도착도 안 하신 걸로 아는데…….” 아직 일정이 남은 것으로 아는데 아무리 빠른 비행기를 타도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사장님은 던전을 이용하십니다.” 이강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던전이 무슨 차원 이동 문이라도 됩니까?” “사장님은 그렇게 쓰십니다.” “…….” 할 말이 없었다. 강우진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강진이 머리를 굴리다 물었다. “혹시 서울역 던전 때문에 한국을 못 떠나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우진이 서울을 고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강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결국 투표가 가결되도록 빌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여론도 나쁘지 않고, 사전 조사 해 본것도 찬성이 압도적입니다. 아예 강우진을 한국의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강진이 담담히 자료를 읊었다. “어차피 서울을 떠나지 않는다면 아르달은 이대로 존속하면 됩니다.” “만약 한국 정부에서 압박을 가해오면요?” 이강진이 피식 웃었다. “국회의원 모가지를 딴 사람이 누굽니까? 지금 체포 영장이 나왔습니까, 여론이 좋지 못하길 합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오히려 죽은 국회의원과 기업들의 성화를 대한민국이 나서서 막고 있었다. 강우진을 보호하려는 움직임. “던전 브레이크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장님 건드릴 사람 없습니다.” “음.” 이강진의 말을 들은 정민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찰청에 있던 그이니 가장 잘 알 것이다. 찬성하면 아르달과 대한민국의 협정이 체결되는 것이고, 반대한다면 이대로 존속될 뿐이다. 무언가 불이익이나 압박을 가해온다면 그때 나서서 해결해도 될 문제다. 칼자루는 아르달이 쥐고 있다. “결국은 기다리는 일뿐이군요.” 내일이면 모든 것이 결정 난다. 이 문제의 핵심인 강우진은 지금 영국에 가 있었다. 그가 남긴 말은 ‘알아서 적당히’라는 주문뿐이었다. 정민찬이 아직 아르달의 사정에 어두운 이강진의 눈치를 슬쩍 봤다. ‘운석 소환 사장님이 하신 거 알면 뒤집어지겠네.’ 대충 눈치를 보니 창립 멤버들이야 어느 정도 어림짐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여론이 아르달에게 좋은 것은 순전히 드래곤이 남긴 운석 소환을 강우진이 미리 간파하여 사람들의 피해를 줄여서였다. “허흠, 사장님이 빨리 돌아오셔야 할 텐데.” 국가 준비를 위한 모든 것을 총리로 내정된 정민찬에게 일임한 그이지만 그래도 모습을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양지차였다. “어휴, 조금 천천히 오셔도 될 텐데.” 우진이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리치로부터 마법을 배우기로 한 성구만이 울상을 지었다. *** 지구에 이번 던전 브레이크로 터진 던전이 212개.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소환된 차원 영주 19의 존재. 그냥 모습을 드러내도 위험한 몬스터들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주는 기시감은 상당했다. 아니, 공포감을 느낀 곳도 있었던 모양. 러시아에 출몰한 차원 영주는 시베리아의 숲에 거점을 잡았고, 북한에 등장한 차원 영주는 주석궁에 자리 잡았다. 북한은 인민들의 목숨과 함께 평양을 잃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 일대를 터트렸다. 핵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몬스터들이지만 그 피해도 상당했다. 하지만 차원 영주가 아홉 명이나 등장한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서울에 일곱 명, 부산에 두 명. 우진이 발 빠르게 대처한 덕에 서울의 차원 영주들은 활동하기도 전에 모두 처치되었고 부산의 차원 영주들도 제거되었다. 자체의 여력으로 차원 영주를 사냥한 국가는 단 네 곳. 미국에 두 명, 일본에 한 명, 중국에 한 명. 그들은 각성자들과 군 병력이 합작해 성공적으로 토벌에 성공했다. 거점도 파괴된 상황. 문제는 유럽의 차원 영주들. 그리스와 독일, 영국의 두 곳. 거점을 중심으로 뭉쳐 얌전히 그것을 수비하는 몬스터들의 행동에 당장의 위협이 없다 생각했는지 신중론을 펼친 것. 천천히 조직된 병력과 각성자들의 연합이 토벌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의 시간이 지나 버렸다. 하루가 지나자 얌전히 뭉쳐 있기만 하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날뛰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거점의 완성. 차원 영주들마저 날뛰기 시작하니 유럽은 금방 패닉에 빠져들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몬스터들의 수는 줄지 않았다. 완성된 거점에서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 차원 영주는 일반의 몬스터들과 급이 달라 토벌 자체도 쉽지 않았고, 피해는 커져만 갔다. 거점이 완성되고 나니 속수무책으로 커지는 피해에 오히려 핵을 사용한 북한과 러시아보다 더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우진과 성녀가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반도의 30%가 몬스터에게 점령된 이탈리아 반도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자, 받아.” 우진이 내미는 보라색 보석을 보곤 성녀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차원의 조각은 그 존재 자체가 귀한 신물. “이 귀한 것을 어찌 제게….” “그때 빌렸잖아. 갚아주는 거야.” “…….” 아, 그때 돌려준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구나. 임모탈이 이렇게 정직할 줄이야. “제게 더는 필요 없습니다. 군주께서 가지시지요.” 성녀의 겸양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차원의 조각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러지 뭐, 잘 쓸게.” “…….” 그냥 떠본 것이 아닐까? 하란다고 저렇게 바로 가져갈 줄은…. “그보다 어떻게 생각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지금 상황. 아르펜하고 비슷하지 않아?” 이미 완성된 거점. 그곳에서 바로 생성되는 몬스터.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트라넷의 졸개들. “끔찍한 악몽이 떠오르는군요.” “그치? 지긋지긋했어.” 우진의 말에 성녀가 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르펜은 조금씩 조금씩 트라넷의 존재들에 의해 대륙을 빼앗겼다. 병력의 보충이 달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생존자 연합의 세력이 조금씩 쪼그라들 때 유일하게 드넓은 아르달을 지켜낸 존재가 바로 임모탈.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저것들도 무한대는 아니란 말이야?” 아르펜 행성에서야 자신의 영토를 침입하는 녀석들을 죽여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른 상황. 녀석들이 보다 많은 영토를 점령하기 전에 뿌리 뽑아야 한다. 추측키로 거점은 차원 영주의 힘을 사용케 해주는 용도. 에너지가 여유로우면 얼마든지 차원 상점에서 몬스터를 구입해 풀어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날뛰는 몬스터들이 인간을 사냥하면 에너지가 다시 축적되고, 그것으로 다시 병력을 불리고….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어떻사옵니까?” 우진이 비행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깜깜해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처럼 창에 비친 얼굴이 히죽 웃었다. “무한 리젠 사냥터를 선물받은 기분이야.” 에너지만큼 몬스터 뽑아서 공격해 보라 그래. 모조리 잡아서 경험치로 드셔줄 테니 말이야. < 137화 - 메테오 (2) > 끝 ⓒ 진설우 < 138화 - 거점 > 콜로세움이 점령당했다. 근처에 터진 수십 개의 던전에서 기어나온 몬스터들이 콜로세움에 집결했다. 가치가 남다른 유적지를 지키기 위해 정부는 군 병력의 투입을 망설였다. 각성자의 토벌팀을 꾸렸고, 몬스터 유인 섬멸 작전을 수립했고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무엇을 하든지 거점이 완성되기 전에 끝냈어야 했다. 하루가 지나자 콜로세움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는 빛을 뿜었고 얌전히 모여 동창회라도 하는 듯 보였던 몬스터는 일제히 난동을 부렸다. 아니, 그것은 진군에 가까웠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콜로세움은 놈들의 거점이 되었고 인근에 사람의 흔적이라곤 시체뿐이었다. 두두두두! 티티팅! 불을 뿜는 기관총과 돌격하는 몬스터들로 치열하게 대치 중인 전장. 크와아아! 거대한 오우거의 가죽은 총알로도 뚫어내지 못할 만큼 단단했다. 쿵, 쿵! 성큼성큼 뛰어 다가오는 오우거가 진영에 닿기 전. 콰아앙! 동시 다발적으로 쏘아지는 로켓 런처들이 오우거에게 명중했다. 여기저기 살점이 터지고 찢기고도 한참이나 전진한 놈이 쓰러지며 쥐고 있던 몽둥이를 던졌다. 커다란 몽둥이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총알을 날리는 창문으로 들어왔다. “크악!” “파비오!” 몽둥이에 기관총 사수가 그대로 절명했고 옆에 있던 파비오는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몽둥이에 한쪽 팔이 휩쓸려 찢겨 나가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머리도 터져 안면을 피로 적셨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출혈 과다로 곧 숨을 거둘 것이다. “내려가자. 조금만 참아.” “으으윽.” 안토니오는 파비오를 부축해 계단을 내려갔다. 몬스터의 진군은 끝이 없었고, 죽이고 죽여도 놈들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벌써 5일째 지속된 공방으로 로마 시 전체를 잃었고 민간인들을 합친 인명 피해는 공식 집계도 되지 않았다. 전선은 지속적으로 후퇴했고 놈들의 영역은 점차 늘어났다. 건물을 나와 후방의 의료병을 찾았다. 그곳엔 몬스터들의 공격에 부상당한 병사들로 가득했다. “으으, 어서 치료해.” “으아악! 살려줘.” 비명성이 가득 메운 그곳에 최후 명령이 내려왔다. “부상자들 수송차에 다 태워! 후퇴한다.” 후퇴 명령이 내려진 이상, 최후 저지선에 매설된 폭탄의 폭파까지 5분도 남지 않았다. “파비오, 조금만 참아.” “으으으.” 수송차엔 누워갈 공간도 없다. 의자에 앉은 채 의무병이 다급히 붕대를 감아 지혈했다. 하지만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보니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해 이것이 친구와의 마지막 이별인 듯싶었다. “젠장!” 안토니오는 욕을 내뱉으며 총을 쥐었다. 동료의 복수를 해주마! 마지막 한 발이라도 몬스터의 몸에 쑤셔 넣어주지. 투두두! 두두두! 병력의 후퇴를 위해 최후의 엄호사격을 시작했다. “안토니오! 어서 타.” 차량의 지붕에 기관총을 단 차량이 옆에 멈췄다. 안토니오가 차량에 타 급히 후퇴했다. 기관총 사수에게 물었다. “4분 남았네.” 곳곳에 폭탄을 매설해 뒀다. 진군해 오는 몬스터들에게 일격을 가할 것이다. 폭탄이 터지기 전에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빌어먹을.” 놈들은 조금씩 조금씩 활동 영역을 늘렸다. 명령을 받는 그들은 맹수가 아닌 외계의 부대나 다름없었다. 몬스터 사냥이 아닌 몬스터와 인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몬스터 로드들을 잡아야 하는데.” 몬스터 로드(Monster Lord). 던전의 보스 몬스터보다 더 상위의 존재. 밝혀진 것보다 베일에 싸인 게 많은 그들이 가져온 전쟁은 던전쇼크 이상의 위기감을 지구에 전했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네.” “예?” 안토니오는 처음 듣는 말인지라 동료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며 전선을 물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한국이 어딥니까?” 안토니오에겐 한국이라는 나라가 생소했다. 아니, 처음 들었다. “저런, 정확히는 강우진이 오고 있네. 아르달의 왕 말일세.” 아르달이라면 시사에 어두운 안토니오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중동의 메시아!” 그가 벌인 중동 테러 종식 전쟁은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군인인 안토니오의 관심 분야인지라, 일반인보다 그의 활약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끼이이익! 그들을 태운 차량이 거칠게 멈춰 서며 사람들이 차 바닥을 굴렀다. “X! 뭐야?” “오, 젠장! 몬스터다!” “사격 준비!” 이전에 없었던 공중 몬스터가 나타났다. 지상 몬스터들이 건물 사이사이를 막아놓은 바리케이드에 잠시 진군이 멈춘 사이, 하늘에서부터 그들의 습격이 시작된 것이다. 대피하던 차량이 멈춰 서고 사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몬스터들을 격추하는 존재가 있었다. 화르륵! 퍼퍼펑! 날아오른 수십 발의 마법이 하늘에 떠오른 몬스터들을 공격해 떨어트렸다. “각성자 부대인가?” “그, 그가 온 것 같습니다.” 안토니오는 홀린 듯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멀지 않은 거리다. 다연발 로켓이 불을 뿜는 것 같다. 날아오르는 마법들의 향연에 공중 몬스터들이 견디지 못하고 추락하거나 되돌아갔다. 히이이잉. 유령마 한 기가 도로를 달려오고 있었다. “오, 이럴 수가!” 안토니오는 믿기지 않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우진. 그를 살아생전에 만나게 될 줄이야! 우진은 차량이 멈춰선 곳까지 달려오더니 뒤에 탄 여인을 내려주었다. “애들 치료해. 난 곧장 가지.” “조심하십시오.” 성녀의 인사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녀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히이잉. 신성력을 풀풀 풍기는 성녀를 내리자 씽씽이는 10년 묵은 변을 본 듯 시원한 얼굴이었다. 우진이 바리케이드에 막힌 몬스터들을 향해 돌진하려는데 안토니오가 앞을 막아섰다. “아, 안 됩니다! 폭탄이 매설돼 있습니다.” “뭐? 터트렸어?” 오! 이럴 수가. 우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이탈리아어에 안토니오가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곧 터집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말을 이었다. “59초 남았습니다. 그 뒤에 진입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바리케이드로 인해 진군해 온 몬스터들이 밀도 높게 몰려 있다. 그곳에 매설한 폭탄이 터진다면 꽤 많은 수를 한 번에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진군하는 게 더 낫겠지만. “젠장! 메르디, 나중에 보자.” “예, 군주님.” 우진이 인상을 쓰며 씽씽이를 내달렸다. “곧 폭탄이….” 안토니오가 자신의 마음속 영웅의 무모함을 안타까워할 때 우진은 거리를 계산했다. “시간 안 되겠네.” 진입하기 전에 폭탄이 터질 것이다. 막아야 한다. 혹은 그전에 몬스터들을 모조리 처치하던가. “내 경험치.” 저리 몰려 있는 몬스터들을 폭탄으로 다 날려 먹다니…. 우진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몰이사냥에 특화된 권속이 있었다. “제니스!” 슈아아악. 검은 연기가 뭉쳐 우진의 옆에 리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 로드.] “전부 쓸어버려, 30초 내로.” 제니스가 전방에 자리 잡은 파괴된 도시를 보았다. 새것은 아니지만 뭐 그럭저럭 제니스의 마음에 들었다. [도시를 파괴하는 건 언제나 즐겁지.] 슈아아악! 제니스의 지팡이에서 불이 뿜어졌고 바리케이드 삼아 늘어선 건물과 장애물이 일제히 터졌다. 꽈과과광! 대규모 익스플로즌! 폭발에 이어 불길이 휩쓸었다. 화르르륵! 성구가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파이어 월. 불의 장벽이 몬스터들을 태우며, 폭발 시간이 남은 폭탄마저 발화시켰다. 콰콰쾅! 추가로 이어진 폭발에 금방 불길이 도시를 삼키기 시작했다. 우진이 데스나이트들을 불러냈다. 슈슈슉. [우오오, 전쟁인가!] [그리웠도다. 죽음의 향기!] [죽음은 언제나 숭고하지.] 소환된 데스나이트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증오와 질시가 기본적으로 내재된 그들. 새삼 지난 20년간 누구와 어울렸는지… 웃음이 났다. “익숙하지?” 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쟁을 앞두고 흥분한 그들처럼 웃었다. 씽씽이에 탄 채 강철 지팡이를 소환했다. 촤륵! 도끼로 형태 변환한 그것을 들고 우진이 씽씽이의 말고삐를 후려쳤다. “가자, 얘들아.” <전장의 함성에 아군의 사기가 오릅니다.> <전장의 함성에 아군의 전투력이 오릅니다.> 우진을 필두로 데스나이트들이 유령마를 달렸다. 차원 영지의 수비 대장으로 임명하여 혹시 모를 침략을 대비해 아르달에 남겨둔 키바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우오오!] [피의 축제다!] 흥분한 데스나이트들이 달려나가며 흔적을 남기듯 해골들을 소환했다. 뒷줄에 속속들이 소환된 스켈레톤들이 광기에 휩쓸려 달렸다. 키키킥! 돌격하는 불사의 군대를 보며 비행 마법으로 하늘에 떠 있던 리치 제니스가 웃었다. [전사로의 각성인가.] 우진을 보는 제니스의 붉은 안광이 번들거렸다. [확실히 오랜만이군.] 제니스가 지팡이를 든 반대 손으로 보석이 박힌 부위를 어루만지듯 쥐었다. 파지지직. 꺼림칙한 검은 기류가 부딪히며 튀었다. 제니스가 양팔을 벌렸다. 츄아아악! 뱀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기운이 도시의 하늘로 쏘아졌다. 공기 중에 녹아드는 그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장에 리치의 저주가 내립니다.> <적의 전투력이 저하됩니다.> <적의 행동력이 느려집니다.> [그하하, 어디 로드의 전투술을 볼까?] 듀얼 클래스라고 하였나? 세상에 우연은 없다. 어쩌면 이것이 그토록 염원하던 열쇠가 될지도 몰랐다. [그어어어!] 불사의 군대가 돌격하는 앞에 돌쇠가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를 합치며 거대한 골렘으로 화했다. 언제나처럼 선봉장을 맡은 파괴의 거신을 시작으로 불사의 군대가 진군했다. 콜로세움에 거점을 세운 겁 없는 차원 영주를 향해. *** “맙소사, 이건 꿈일 거야.” 안토니오는 어쩔 줄 몰라 머리를 부여잡았다. 너무 놀라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세계적 영웅, 강우진을 직접 만나다니! 아니, 그와 이야기까지 주고받다니!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어이, 안토니오. 그만 정신 차려. 여긴 전장이야.” “아, 미안…. 너무 놀라서.” 안토니오가 자신의 실수를 알곤 얼굴이 굳었다. 명예로운 군인인 자신이 톱스타에 열광하는 소녀처럼 들떴으니. 그것도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말이다. “모두 제 말을 들어주세요.” 성녀의 말에 차에서 내린 군인들이 그녀를 보았다. 강우진과 함께 온 미모의 여인.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의…. “저는 아리아 여신을 모시는 메르디예요. 여러분이 아리아의 존재를 믿어야만 제 힘이 닿을 수 있어요.” 굳이 아리아교의 신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해야만 신성력이 전해진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그녀만의 제약. “그럼, 여러분을 위해, 제 마음이 전해지길.” 메르디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차아아앙! 그녀의 몸에서 폭사된 빛이 사위를 밝혔다. “아….” 뿜어진 그 빛은 눈이 부시지 않았다. 포근하게 감싸는 그 기운이 몸을 정화하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옥죄던 전장의 스트레스가,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바닥을 기는 체력이 모조리 회복되는 기분. 아니, 기분뿐만이 아니라 실체였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진 빛은 수송 병력을 모두 감싸고도 남았다. 빛이 차츰 잦아질 때쯤. 부상병의 수송 차량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중 한쪽 팔을 잃었던 파비오도 있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안토니오를 찾았다. “안토니오!” “오, 파비오! 맙소사!” 안토니오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파비오를 보았다. 뜯겨 사라진 그의 한쪽 팔이 자라나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이럴 수가! 이건 기적이야.” 안토니오와 파비오가 멍한 눈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메르디를 보았다. 이제야 기억난다. 던전에서 최초로 발견된 인류, 미국의 SS급의 각성자. 그녀는 성녀 메르디였다. < 138화 - 거점 > 끝 ⓒ 진설우 < 139화 - 거점 (2) > 거점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 인간 사냥에 열중인 몬스터들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닐 필요는 없었다. 거점을 향한 직진 돌격! 차원 영주의 통제를 받는 몬스터들의 최우선 목표는 사냥이 아닌 거점 수비다. 이것은 행성 안에 자리 잡은 그들의 던전이나 마찬가지. 래쉬모드의 소환 마법진처럼 지하철역이 아닌 인위적으로 세워진 던전이자, 차원 게이트. 천천히 진군하자 우진의 예상대로 다른 쪽을 공격하던 몬스터가 떼로 몰려들어 앞길을 막았다. 그들이 죽는 족족 불사의 군대는 덩치를 불렸다. 우진은 레벨 업으로 오르는 모든 포인트를 지배력에 투자한다. 해골병사는 모조리 데스나이트 휘하에 배속하기에 그들을 유지하는 데 드는 지배력은 데스나이트 하나당 소모되는 1뿐. 단숨에 99레벨이 되어버린 리치 제니스의 휘하에 배속된 해골마법사들도 레벨당 10마리씩 990마리. 불사의 군대를 유지하는 데 드는 지배력은 데스나이트와 리치, 골렘, 꼬마 악마를 모두 합쳐도 100이 넘지 않았다. 나머지 지배력들이 소모되는 것은 또 다른 그의 부하들. 구오오오. 크어억! 죽은 모습 그대로 살아난 꼭두각시. 2천 마리가 넘는 좀비가 느리지만 쉼 없는 걸음으로 적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작은 덩치를 가진 놈들, 오우거 같은 대형의 몬스터들이 뒤섞여 좀비 군단을 이루고 있었다. 쾅, 콰앙! [쓰으읍, 하아아. 흥분된다. 흥분돼.] 오우거의 시체에 빙의한 깨비는 미친놈처럼 날뛰었다. 좀비로 부활한 놈들은 생전만큼의 신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깨비가 빙의하면 그 본신의 능력보다 더한 능력을 짜낼 수 있었다. 콰앙! 꿰에엑! 오우거에 빙의해 도로 표지판을 뽑아 둔기 삼아 휘두르는 깨비의 활약은 파괴의 거신 돌쇠에 버금갔다. 적진을 교란하는 데 저 둘의 콤비보다 더 적합한 이들이 있을까? 그들이 열어젖힌 길을 따라 불사의 군대가 진군했다. 시체와 시체를 넘어 우진은 콜로세움에 닿을 수 있었다. “엄청 키웠구나.” 콜로세움을 감싸듯 뿌리내린 나무는 어지간한 빌딩보다 더욱 높게 자라나 있었다. 우진이 올려다보니 거대한 타이탄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웅. 신장이 10미터를 가뿐히 넘는 녀석은 돌쇠에 버금가는 덩치였다. [라자쿠이님을 해치웠다는 게 네놈이구나!] 우진이 씽씽이에서 내리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보시다시피.” [쿠오오, 나 닉토르가 라자쿠이님의 복수를 해주마!] 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머리통이 그렇게 큰데 뇌가 없냐? 너 라자쿠이 이기냐?” [쿠오오오! 라자쿠이님은 대영주. 나보다 강하기에 그를 따르는 것이다.] “그놈 죽인 게 난데, 넌 나한테 되겠냐?” [쿠우우우.] 거인족 닉토르는 커다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이내 분노하며 무식하게 큰 망치를 들어 올렸다. [쿠오오! 감히 전사를 모욕하다니.] “이건 병신인가?” 우진이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이래서 거인족들이란…. “죽여.” [로드의 명이다!] 데스나이트들이 유령마에서 훌쩍 뛰어 몸을 날렸다. 후우우웅! [쿠우, 감히 날파리들이!] 닉토르는 열심히 망치를 휘둘렀으나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날파리라 하기에는 너무 치명적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죽음의 기사들이 거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서컥, 콰직! 신입인 알 아사드와 레릭을 빼면 하나하나가 S급을 넘어가는 전사들. 거인 하나 쓰러트리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락토의 창이 그의 미간에 꽂히며 거구가 쓰러졌다. “주변 정리해.” [로드의 앞에 죽음만이!] [살아 있는 것들을 치워라!] 해골과 데스나이트들이 남은 몬스터를 소탕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우진이 거점을 올려다보는데 제니스가 그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겹도록 봐온 흉측한 물건이군.] “이번에도 나올까?” [차원의 조각 말인가?] 우진이 서울과 부산의 거점 아홉 곳을 정리하며 세 곳에서 차원의 조각이 나왔다. 그리 낮지 않은 확률이니 기대해 봄 직했다. “그래. 어딘가에 쓰일 일이 많은 물건이야.” [트라넷의 연결 고리….] 제니스가 지팡이를 들어 불꽃을 일으켰다. 우진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됐어. 내가 하지.” 우진의 명령에 주변에 멍청히 서 있던 좀비들이 거점을 향해 달려가 얼기설기 매달렸다. 어차피 좀비들도 처치해야 하니 뭐…. 콰아아앙! 걸어다니는 시체들이 일제히 터지며 거점이 폭발했다. 그 파편들이 주변을 어지럽히며 떨어져 내리다 잠잠해지자 원형을 잃어버린 콜로세움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곳에 보라색의 영롱한 빛을 내는 보석이 둥실 떠 있었다. <차원의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던전을 구입하는 것 외에도 요긴하게 쓰일 일이 많을 것이다. 세 개가 넘으니 차원의 증명을 만들어 성녀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차원 영주로 만들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튀어나온 놈이 왜 여기에 거점을 만들었을까?” [이곳의 기운이 타이탄의 마음에 들었나 보군.] “흠, 동기화율 같은 건가.” 우진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서울역을 차원 영지로 삼을 때도 동기화율을 운운했다. 차원 영주들이 자리 잡은 거점들이 하나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나 유적지 같은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차원의 조각만 있다면 기존에 있던 던전 외에 새롭게 던전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래쉬모드처럼 거점 같은 게 만들어지면 곤란한데.’ 던전을 연구하는 박사라고 하였나? 미국에서 있었던 것처럼 인위적인 던전을 만드는 행위. 차원 영주를 불러들이는 소환 마법진을 준비하는 놈이 있으면 위험했다. 지금처럼 몬스터가 떼로 몰려나와 위치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뭐, 이미 그런 데가 많을지도….’ 어쩌면 지구에 조용히 돌아다니고 있을 차원 영주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우진이 고민해 봐야 이미 막을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근원적인 해결책이라면 지구에 더 이상의 던전 링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 우진으로서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일이었다. “자, 이만 정리하고 독일로 가자.” 차원의 조각도 하나 얻었고 수천 마리의 몬스터도 쓸어 담았다. 아직 독일에 하나, 영국에 두 개가 남았다. *** 제주 만장굴 매표소. 일곱 대의 컨테이너 트럭이 몰려오자 매표소 직원이 밖으로 나왔다. 트럭과 함께 온 세단에서 일단의 무리가 내렸다. 그중엔 직원들도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구면인 관리 공무원을 보며 물었다. “아니, 이게 다 뭡니까?” “아, 전에 공문 내려왔던 보수공사 일정이 당겨졌습니다.”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아직 관광객들이 있는데….” “하하, 미안합니다. 지금부터 관광객 받지 말고 이미 관광 중인 사람들은 천천히 내보내도록 합시다. 안내 방송 부탁합니다.” “예에, 그러지요.” “아, 그리고 여긴 이번 공사 책임자이신 이상준 소장님입니다.” 매표소 직원의 시선이 선글라스 낀 사내에게 향했다. 조금 차가운 인상에 쉬이 말 붙이기 힘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이상준이오.” “김태식입니다.” “그럼.” 이상준은 인사만 나누고는 인부들에게 트럭의 짐을 내리도록 지시를 내렸다. 컨테이너에서 줄줄이 나오는 정체불명의 박스들을 보며 김태식이 공무원에게 물었다. “저게 다 뭡니까? 전에 난간 보수공사하시던 분들도 아닌 듯한데….” “업체 바뀌었습니다. 너무 자세히 알려 하지 마시고 공사일정 동안 확실히 돕도록 하세요.” “예에, 그럽지요.” 또 리베이트 받고 업체 바꿨나 보군. 일반적인 난간 보수공사라고 하기에는 많아 보이는 짐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했다. 만장굴 주차장부터 보수공사로 인한 출입금지 표지판을 내걸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공무원이 돌아갔고 할 일이 없어진 김태식은 동굴 입구를 기웃거렸다. 인부들 힘이 얼마나 좋은지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박스들을 지고 잘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김태식에게 공사 책임자인 이상준 소장이 다가왔다. “공사 현장은 위험하니 물러나세요.” “아, 뭐. 심심하다 보니….” “물러나시오.” “어유, 알겠수다.” 김태식이 꿍얼거리며 물러나자 이상준이 몇몇 인부를 불렀다. “사람들 출입 철저히 막아.” “예, 사장님.” 이상준은 멀어지는 김태식을 한 번 보곤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조명이 비춰주긴 하지만 어둑한 동굴에 들어서자 선글라스를 벗었다. 감춰줬던 얼굴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화랑길드의 마스터였던, 이엘로의 가신 이상호였다. 인부들도 흩어진 화랑길드의 전 직원들. 동굴을 한참 걸어간 이상호는 상자들이 쌓인 곳에 도착했다. “열어.” “네.” 직원들이 상자를 열어젖혔다. 희미한 빛을 내뿜는 적색의 광물. 다름 아닌 혈석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상자가 수백. “…….” 이상호는 말없이 동굴의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엘로님을 부르기 위한 게이트. 거점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 독일. 폐허가 되어버린 대지. “여기 유명한 미술관이라고 안 했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흠, 뭐 알아서 잘 막았네.” 폐허를 분주히 오가는 헬기와 각성자들, 그리고 방독면을 쓴 군인들을 보며 느낀 짤막한 감상이었다. “괜히 헛걸음했네.” 경험치도 날렸고, 시간도 날렸다. 아르달에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한 독일이지만 우진이 오기만을 바라며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소형 전술핵을 동원해 몬스터 무리를 쓸어버리고 정예 각성자 부대를 이용해 차원 영주를 사냥했다. 아니, 지구인들이 명명한 ‘몬스터 로드’인가. 우진을 제외하고 몬스터 로드 사냥에 성공한 네 번째 국가에 이름을 올린 독일이다. 저 멀리 보라색 빛무리를 뿜는 보석을 회수하는 군인들을 보며 성녀가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회수하지 않으십니까?” 우진이 피식 웃었다. “내가 강도냐? 남 걸 뺏게.” “…….” 성녀가 조금 원망스런 얼굴로 우진을 보았다.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이 왜 자신이 가진 차원의 조각은 강탈해 갔는가. “야리냐?” “아니옵니다.” “내가 갚아준다고 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말은 안 했지. 원망 어린 눈빛이 거슬리는 거지. 우진이 찜찜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쨌든 영국도 더 늦기 전에 가보자.” “예, 군주님.” 우진과 성녀가 공항에서부터 타고 온 헬기에 오르려 할 때, 한 떼의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손에 쥔 카메라나 행색을 보아 말하지 않아도 언론인들로 보였다. “히어로! 오랜만입니다.” 개중 유난히 열띤 얼굴로 우진에게 다가와 넙죽 고개를 숙이는 이가 있었다. 우진의 기억력은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월등한 수준. “중동에서 봤던가?” “오, 맙소사! 하찮은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남자는 중동에서 우진이 구해준 종군기자 중 하나였다. “뭐, 바빠서 귀찮은 인터뷰 같은 건 사양하지.” “아닙니다. 어찌 귀한 분의 시간을 잡겠습니까. 그저 오신다는 소식에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사진도 찍고 말이야.” 우진은 자신을 향해 있는 수십 대의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기자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히 제가 어떻게.” 종군기자는 생명을 구해준 은인 앞에,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우진이 괜히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뭐, 사진이 대순가. 대신 부탁 하나 하지.” “오, 이런 영광을. 무슨 일이든 말씀하십시오.” 우진의 어깨동무에 기자가 전쟁터에라도 뛰어들듯 열렬한 얼굴을 했다. “영국에 아는 사람 있나? 찾아줬으면 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S.E.E의 일원이 그곳에 있습니다. 조니라고….” “S.E.E? 그건 뭐야?” < 139화 - 거점 (2) > 끝 ⓒ 진설우 < 140화 - 닥터 토플러 > “아, 그건 ‘Saviour of Eyes and Ears’의 약자입니다.” “눈과 귀의 구원자?” “예, 강우진님을 추종하는 모임입니다. 그때 구함을 받은 언론인들이 모인….” “…….” 우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기자를 보았다. 그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원하는 무엇이든, 부탁하신다면 신속히 도울 것입니다.” “흐음.” 언론인들의 모임이라. 자신을 추종하는 단체가 생긴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를 지나친 사생활 침해에 꺼림칙할 수도 있고, 넘치는 관심에 기분이 좋을 수도 있다. 혹은,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거나. ‘별걸 다 만드네.’ 우진은 피식 웃으며 기자의 어깨를 끌어 어깨동무를 하곤 손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팬클럽 같은 거지?” “비슷합니다.” “종종 이용하지.” “은혜를 갚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찰칵, 찰칵. 수십 대의 카메라가 빛을 뿜으며 그들을 찍었다. 짧은 만남이 지나고 우진과 성녀가 헬기를 타고 사라지자 기자는 빠르게 차량으로 돌아가 노트북을 펼쳤다. - 회원님들께 알립니다. 구원자로부터의 첫 지령입니다. 던전 전문가 토플러 박사를 찾아 만남을 성사시키시오. 기자는 가장 시급한 우진의 말을 전달해 놓고는 뒤이어 카메라에서 전송한 사진을 업로드했다. - 가보로 간직할 겁니다. 그분과 함께 사진을 찍을 줄이야….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기자는 황홀한 얼굴로 업로드된 게시물을 보았다. 빠르게 달리는 리플들을 보며 흐뭇함은 배가 되었다. *** <레벨 업!> 우진은 81레벨이 된 상태창을 열어 보너스 스탯을 모조리 지배력에 투자했다. “마무리해.” [로드의 뜻대로.] 불사의 군대가 남은 몬스터들을 처치하기 시작했다. 런던의 시계탑은 이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도시는 복구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민간인들의 대피가 늦어, 강력한 화기로 무장한 군 병력이 있음에도 공격을 망설여 벌어진 참사였다. “하나 나왔네.” 우진은 하나 나온 차원의 조각을 갈무리했다. 그때 영국 각성자 협회의 회장인 톰 클락슨이 다가왔다. “후, 역시 명불허전이시군요. 영국군도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강우진님이 아니었다면 피해가 더 컸을 것입니다.” “뭐, 서로서로 좋은 거지.” 저들은 도움을 받아 좋고, 우진은 경험치도 올리고 차원의 조각도 두 개나 얻어서 좋고 말이다. 로마에서 하나, 런던에서 하나를 얻었다. 한국에서 얻은 것까지 합치면 총 다섯 개. 드레드의 던전을 클리어하며 얻어놓은 것까지 하면 여섯 개였다. 여섯 개의 던전을 살 수도 있고, 세 개씩 묶어 차원의 증명을 만들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양. “그래서 제안합니다. 이번 사냥의 전리품들을….” “시체나 떨어진 아티팩트는 필요 없으니 전부 다 해.” 도시에 즐비한 몬스터의 사체와 그것을 뒤져 나올 혈석들을 캘 이유 따위는 없었다. 돈이라면 이미 차고 넘치도록 많으니까. 앞으로 아르달의 수익원이 마르는 날은 없을 것이다. 혈석이나 돈에 욕심을 낼 이유가 없었다. 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방금 얻으신 크리스털을 영국에 판매하시지 않겠습니까?” “뭐? 차원의 조각?” “오! 차원의 조각이라 불리는군요.” 우진이 보랏빛을 뿌리는 보석을 꺼냈다. 탐지 계열의 각성 능력이 없어도 확연히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 엄청난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다름 아닌 몬스터 로드들이 출몰하여 만든 기괴한 건축물에서 나온 보석. 벌써 미국과 일본, 중국, 독일이 차원의 조각이라는 이름의 저 빛나는 크리스털을 획득했다. 처음으로 던전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한 귀환 구슬과 같은 획기적인 아이템일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얻어서 연구해야 했다. 무슨 수를 쓰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말이다. 이글거리는 톰의 눈을 보며 우진이 피식 웃었다. “얼마에 살래?” “저, 정말 파실 겁니까?” “들어보고.” “…….” 우진이 이렇게 순순히 내놓으려 할 줄은 몰랐기에 톰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뭐야? 패도 준비 안 한 거야?” “아, 아닙니다. 제 권한에서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 의회로 가시겠습니까?” 우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지루한 협상을 하라고? 그럴 줄 알았으면 우승훈이나 정민찬을 데려왔지. “항공모함 하나 정도면 넘겨주지.” “…예?” “싫으면 말고.”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진의 제안이 너무 갑작스러우면서도 엄청난 것이었기에 톰은 계산 자체가 서지 않았다. “협상의 여지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 바빠.” “제발….” 애원하는 톰의 얼굴은 애처로웠다. 영국 정부로부터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우진이 선심 쓴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밀고 당기기는 그가 잘하는 것도, 그런 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필요하면 뺏었고, 필요 없으면 파괴하며 산 세월이 20년이니 말이다. 섬세하고 귀찮은 이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아르달을 만들지 않았나? “아르달에 가서 협상해 봐. 하나는 남겨둘 테니.” “……!” 톰이 눈을 빛냈다. 그럼 하나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연구용 샘플은 많을수록 좋다. 잘하면 협상을 통해…. “알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일 봐.” “왕궁에 가시지 않겠습니까? 초대가 있었습니다.” “보고 싶으면 오라 그래.” “여왕님의 초대입니다.” “그게 왜?” “…….” “…….” 우진이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목마른 사람이 오라 그래. 난 따로 만날 사람이 있으니 말야.” 톰은 쿨하게 돌아서는 우진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후우, 뭐 내 손은 떠난 문제 같군.” 항공모함을 요구하다니… 영국의 각성자 협회 회장인 톰의 권한을 떠난 문제. 다른 나라들도 눈독을 들일 수 있는 상황이니 최대한 빨리 협상 전문가를 아르달로 파견해야 한다. 톰이 떠나는 기척과 함께, 사냥을 끝낸 불사의 군대를 모조리 차원 영지로 돌려보냈다. 유령마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야 부서진 도시의 외곽에 닿을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군주님.” “넌 안 바쁘냐?” 안 바쁠리가 있겠는가, 난리 통에 환자가 몇인데. “중요한 일인 듯하니 저 또한 동행하겠습니다.” “뭐, 그러던가.” 성녀가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따라오려 한다. 그녀로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르펜의 구원을 위한…. 지구에서 던전에 관한 가장 깊이 있는 지식을 축적한 학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아까 그 기자는?” “차를 가지러 갔습니다.” “그래?”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영국인 기자 조니가 낡은 SUV 한 대를 가져왔다. 운전석에서 내린 그가 우진의 앞에 넙죽 고개를 숙였다. “누추하게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 그렇게 고급지게 살진 않았으니까.” 전쟁터를 전전하던 삶은 고급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르달을 모두 차지한 이후에는 뭐, 황제가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았지만 말이다. 우진이 딱딱한 시트에 앉자 곧 차가 출발했다. 런던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자 4층 정도의 건물이 빽빽이 늘어선 주거지가 모습을 보였다. “던전쇼크 이후 새로 조성된 도시입니다.” 지하철을 가진 나라는 다들 비슷한 것 같았다. 역세권. 던전과 멀어질수록 안전하다. 던전 공략을 업으로 삼는 던전 관련 산업의 길드나 회사들이야 그 근처가 좋겠지만 뭐, 일반인의 주거지는 역과 멀어질수록 안전했다. 건물들 사이의 좁은 도로를 달려 정차했다. “저 건물입니다.” “전혀 연구소같이 안 생겼는데?” “연구소는 이번에 파괴되었죠. 저긴 토플러 박사의 집입니다.” “흠, 그래?” 우진은 조니의 안내를 받으며 토플러 박사의 집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한참 후에야 박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뉘시오?] 익숙한 목소리다. 티비에서 봤으니 말이다. “강우진입니다.” [……들어오시오.] 삐이이! 잠금장치가 해제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청소라는 것을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저분한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진이 등을 돌려 조니를 보았다. “이만 돌아가도 좋아.” “저….” “뭐? 말해.” 망설이던 조니가 용기 내 말했다. “셀피 한 장 찍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우진이 흔쾌히 수락하자 조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너도 이리 와.” “…….” 가만히 옆에 있던 성녀까지 합세해 사진을 찍었다. 찰칵! “감사합니다.” “아냐, 다음에 또 부탁하지.” “저,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SNS 계정을 만드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S.E.E와의 좋은 채널이 되어줄 겁니다.” “생각해 보지.” “감사합니다.” 말만 하면 감사하다고 하는 게 어째 조금 익숙한데? 임모탈을 추앙하던 아르펜의 그 단체들처럼 말이다. 우진과 성녀가 어질러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그리 넓지 않았다. 부엌이 딸린 거실과 문 너머의 침실로 보이는 공간이 전부. 토플러 박사는 부엌에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한국말 잘하네.” 우진이 자리에 앉자 토플러가 뜨거운 물을 찻잔에 따랐다. 멀뚱히 서 있는 성녀를 보며 말했다. [성녀님도 자리에 앉으시지요.] “…….” “…….” 우진의 표정이 굳었고, 성녀가 깜짝 놀랐다. 먼저 반응한것은 우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환된 단검이 토플러의 목에 겨눠졌다. [아르펜어를 어떻게 알지?] [배웠을 뿐이지요.] 배워? 가본 적도 없는 아르펜 행성의 언어를? [차원 영주인가?] [아닙니다.] [그럼 뭐지?] “한국말로 하셔도 됩니다.” “허.” 우진이 기가 찬지 토플러를 노려보았다. 마주보는 그와 두 눈이 마주쳐 한동안 눈빛이 얽혀들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놈이다.’ 협박 따위가 통하지 않을 놈이다. 이 찝찝함은 뭐지? 우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토플러를 보며 전사의 무기를 창으로 변형했다. 쉬이 건들 수 없는 분위기는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를 보는 듯했다. 우진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네놈, 정체가 뭐지?” 한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가본 적도, 세상에 알려진 것도 별로 없는 아르펜의 언어를 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하찮은 것. 우진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어째서 영혼이 없지?” 닥터 토플러. 그에게서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다. 검으면 검은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우진은 여태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동물과 몬스터, 심지어 곤충에게서까지 영혼을 보고 느낀다. 차원 영주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영혼 없는 인간은 결단코 본 적이 없었다. 미지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 정보의 부재가 주는 두려움은 어느 정도일까? 심각한 표정의 우진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에 반해 토플러는 넉넉한 웃음마저 짓고 있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강우진님과 저의 목표는 같습니다.”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타 차원의 인간입니다.” 타 차원? 아르펜과 같은 다른 차원 행성의 인간? 그렇다면 어째서 영혼을 느낄 수 없는 거지? 우진이 느끼는 위화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죽이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게 물을 것이 있지 않습니까?” “…….” 우진이 눈매를 좁혔다. 닥터 토플러. 우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방송 프로에 나와 던전을 연구했다며 떠들어대던 그의 모습은 꾸며진 것이다. 그는 언론에서 알린 것 외에 훨씬 더 많은 차원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역소환하곤 자리에 앉았다. 영혼이 있든 없든,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다. “아는 것 전부 지껄여봐.” 우진의 험악한 눈빛이 토플러 박사에게 고정되었다. < 140화 - 닥터 토플러 > 끝 ⓒ 진설우 < 141화 - 닥터 토플러 (2) > “당신과 저의 목표는 같습니다.” “지구 방위?” 토플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각자의 행성을 지키는 거지요.” 쪼로로. 뜨거운 물을 머금은 티백이 뽀얀 차를 우려냈다. 우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언제부터 지구에 있었지?” “제 나이를 물으신다면 45살이군요.” “장난해?” “진지합니다.” 우진이 그를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던전쇼크가 일어날 걸 알지 않았나? 왜 알리지 않았지?” “미치광이 소리를 들었겠지요.” “흠, 그건 그래.” 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방송에 나와서 풀어놓은 추측들은 뭐야?” 던전에 관한 최고의 연구가. 토플러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며 던전의 생성 요인과 몬스터들의 상관관계를 늘어놓았다. 더욱이 던전 산업을 규탄하며 그것이 던전의 리셋을 가속한다고 주장했다. “전부 사실입니다.” 추측이 아닌 진실. 토플러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직접적인 경험? 목격? “왜 조금씩 정보를 풀지?” “모두 말해봐야 믿지 않을 테니까요.” “지금은 어때?” 토플러 박사는 영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던전에 관한 연구의 대가로 알려졌다. 5년 전과 지금은 인지도나 발언의 무게 자체가 달랐다. “대책 없는 문제 제기는 혼란만 야기할 뿐입니다.” 그것도 맞는 말. 우진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 말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해 봐.”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던전이 생기기 시작한 행성의 말로는 이미 아르펜을 통해 목격했다. 성녀 메르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진이 차를 호로록 마시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뭐, 좋아. 돌아가는 분위기 보면 넌 내가 올 줄 알았나 보지?” “누군가를 기다리긴 했습니다.” “그게 꼭 나는 아니었다?” 토플러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우진이 질문을 이었다. “네 행성의 이름은 뭐지?” “나중에 알려드리지요.”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아. 네가 어떤 행성의 인간이건 상관없어.” 아르펜 출신의 성녀와도 손을 잡았다. 굳이 타 차원의 존재와 연대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물론, 아직 꺼림칙한 게 더 많았지만 말이다. “서로 필요한 걸 나누자고.” 우진이 그간 20년 동안이나 갈구했지만 해소하지 못한 물음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난 지구에 더 이상 차원 영지들이 링크되지 않기를 원해. 아니, 지금 링크된 던전도 싸그리 없애고 싶어. 방법을 알고 있나?” 우진의 목소리에 담긴 살기가 느껴졌다.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신원이 불확실한 타 차원의 인간과 굳이 손잡고 연대할 필요가 없다. “물론입니다.” 우진이 눈을 빛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어떻게 하지?” “트라넷의 실체를 아십니까?” “어렴풋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것의 의미. 트라넷으로 인해 행성 간의 초자연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습니다.” “차원 이동.” “맞습니다. 불안정한 초기 링크로 인해 차원 이동된 생명체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진이 그랬다. 아르펜으로 차원 이동했으니 말이다. 마치 자신의 과거까지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나를 오래도록 감시해 왔나?” “그럴 리가요. 뉴스로 들었을 뿐입니다.” 우진에 관한 이야기는 세계 각 언어로 번역되어 뉴스에서 다루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저는 강우진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제 고향 행성을 치유해 줄 누군가를 기다렸을 뿐이지요.” “뭐, 좋아. 누굴 기다리는지는 몰라도 내가 아르펜에 갔다 온 건 사실이지.” “짐작했습니다. 비슷하게 타 차원으로 이동한 사람이 많겠지만 생존자는 찾기 어려울 것 같군요.” 누군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우진만이 지구로 돌아왔다. “트라넷이 초자연적 네트워크라면 차원 영지는 행성 간의 중간 연결점 정도가 되지요.” “난 방법을 물은 것 같은데?” 우진의 말에 토플러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성질 급한 이를 상대하는 데 원론적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썩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링크를 막자면 방화벽을 키워야지요.” “어떻게 하지?” 토플러가 성녀를 힐끗 봤다. 우진의 시선도 그를 따라 그녀에게 닿았다. 우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신….” “방화벽이 약하면 뚫리고, 굳건하다면 막겠지요.” 지구엔 신이 없다. 아니, 이제 막 깨어나려 하나? 하지만 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링크가 일어났기에, 예방은 의미가 없었다. “링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 거리를 초월한 행성 간의 이동을 가능케 해주니까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끊어내지?” “지구는 이미 끊어낼 수 없습니다.” “…….”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화 끝났군.” 차창. 그가 창을 꺼냈음에도 토플러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당신은 제게 영혼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래.” “저는 당신에게서 희망을 찾았습니다.” “무슨 말이지?”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으니까요. 당신은 제가 찾던 사람에 가장 근접한 존재입니다.” “어쩌지? 넌 내게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토플러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을 기다렸는지는 상관없다. 우진에게 그의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가치 없는 관계를 이어나갈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진의 창이 움직이기 전 토플러가 말했다. “진정한 문제는 링크가 아닌 그것을 악용하는 존재들입니다. 차원 영주말입니다.” 차원의 연결점을 관리하는 그들이 행성 자체를 탐한다. 모든 비극은 그 욕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그놈들을 무슨 수로 막지?” “그들이 바이러스와 같이 질기다면 백신이 되어주십시오.” “…….” 우진이 인상을 굳혔다. “당신은 이미 스스로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 아르펜의 대학자. 스스로 리치가 되어 오래도록 트라넷의 공세를 막아온 그의 스승이 한 말이 떠올랐다. ‘트래쉬의 집행.’ 문제는 그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 토플러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알려줄 생각은 없는 듯싶었다. 팟! 토플러가 자리를 박차고 침실로 뛰었다. “더 있다간 죽일 것 같으니 첫 만남은 이만하도록 하지요.” “허!” 방심하는 사이 어느새 도망친 그를 보며, 우진이 헛숨을 내뱉었다. 문을 통과한 토플러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우진이 많이 봐왔던 기현상. “던전이네.” 던전은 최초 입장 이후 30초가 지나면 결계가 생겨 외부와 차단된다. 우진이 재빨리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여기서 기다려.” 성녀를 남겨두고 던전에 입장한 우진은 침실을 두리번거렸다. 슈슉. 문에 결계가 생겨난 것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새끼가.” 영혼을 볼 수 없으니 어디에 숨은 것인지 감지도 할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우진이 여태 드나들었던 곳 중에 가장 작은 공간의 던전이라는 것이다. 콰다당. 우진의 발길질에 침대가 거칠게 밀려났다. 콰직! 하나 있는 옷장에 창을 마구 쑤셨으나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단출한 침실엔 침대와 옷장, 그리고 책상 하나뿐. “허…. 뭐하는 놈이기에.” 이제 던전 만드는 건 아무것도 아닌지, 개나 소나 던전을 인위로 만들고 있었다. 지하철역이 아닌 곳의 인위적 생성이야 이제 놀랄 것도 없는 일이지만, 함께 입장한 사람이 사라진 것은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일이었다. 혹여, 투명화 능력을 발현한 것은 아닌가 싶어 방 안을 가득 메우도록 독을 살포해 보기도 하고, 스피릿 스피어로 사방을 동시 공격해 보기도 했다. “뭐하는 짓인지….” 던전에 함께 입장한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 겪는 기현상. 우진의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녹색의 귀환석에 닿았다. 몬스터도 없고, 차원 영지로 향하는 포탈도 없는 그저 침실뿐인 공간. 우진은 더 찾아봐야 토플러의 자취를 좇을 수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귀환석을 들고 던전을 빠져나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보다 뭐 짚이는 거 없어?” 성녀의 고운 눈썹이 휘었다. 그녀로서도 토플러가 이상하긴 했으나 딱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의 내릴 수 없었다. “특별한 건 느끼지 못했습니다.” “후, 제니스.” 슈아아악. 검은 연기가 사라지며 리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니스는 소환되자마자 성녀를 보곤 인상을 찌푸리더니 한 발 옆으로 물러섰다. 우진이 그를 보며 물었다. “그때 기억나?” [언제를 말하는 건가?] “스스로 내 권속이 되었던 날.” […….] 우진의 얼굴은 진지했다. “왜 그랬지?” [로드에겐 특별함이 있다.] “그땐 없었잖아.” 토플러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 한 가지. [신들의 축복은 로드의 특별함이 아니다.] 영혼의 색을 보는 것은 신들과 대면한 이후에 받은 능력이다. 그 이전에 제니스가 스스로 그의 종을 자처한 것은 다른 이유. [네크로맨서로서 궁극에 이른 이는 손에 꼽는다. 로드는 결국 이뤄냈으니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네크로맨서….” 네크로맨서로서의 자질. 우진은 궁극에 이르렀고,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보았다. 트래쉬의 진전을 이을 준비가…. “결국 집행을 찾아야 한단 거네.” [수수께끼보단 일단 퍼즐을 맞추는 게 먼저지 않겠나.]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 투구와 갑옷, 벨트와 장갑, 그리고 부츠까지. 다섯 세트 아이템을 모으는 것이 먼저다. 아직 정체조차 모호한 트래쉬의 집행은 그 이후의 일. “돌아가자.” 우진이 차원 영지 아르달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 아르달 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승용차의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정민찬과 우승훈은 말없이 웃었다. 정부와의 조약은 성공적으로 체결되었다. 애초에 칼자루를 쥔 쪽이 명확한지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이구, 이제 장관님이라 불러야 하나? 그 많은 외국어는 언제 또 배우셨데요? 정말 수고했어요.” 민찬의 말에 우승훈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아유, 정 총리님이야말로 고생하셨지요.” “헛허허! 정 총리!” 스스로 되뇌어 봐도 웃겼다. 이만한 승진까지 바라지도 않았는데, 총리가 되다니…. 그것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신생 국가의 초대 총리다. 애써 침착하려 해도 불끈거리며 피어오르는 공명심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엇? 사장님 영국 일정 끝나셨나 본데요.” “응? 아직 아무런 연락 없으셨는데요.” KH길드의 전용기를 타고 갔다. 우승훈이 모셔야겠지만 그는 할 일이 있었기에 부하 직원을 보냈는데 아무런 연락을 받은 게 없었다. “여기 보세요.” 승훈이 내미는 휴대폰을 보니 우진과 성녀, 그리고 영국인 기자 조니가 함께한 사진이 SNS에 올라와 있었다. “제가 또 외교부장관답게 국제적 친분이 많지 않습니까? 사장님 중동 가셨을 때 인연 있었다는 기자분 같은데, 또 어떻게 알고 저한테 친구 신청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제 SNS 친구입니다.” “허허, 영국 거점까지 정리하셨으면 곧 오시겠군요.” “그렇지요. 얼른 가서 오늘의 업적을 보고해야겠군요.” “후후, 드디어 큰일 하나를 해냈습니다.” 정민찬과 우승훈은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중대한 건을 해치웠다. 뭔가 세계사에 길이 남을 큰 사건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 정민찬은 보고를 위해 멀미도 잊고 조약서를 다시 한 번 정리했다. 그들을 태운 차량이 아르달의 정문에 도착했는데, 그 앞에서 실랑이가 있었다. “아, 못 들어온다니까요.” “오우, 여기 아르달 아닙니까? 나 사장님 알아요.” “아, 사장님은 당신 같은 사람 몰라요.” “온다고 약속했어요.” “아, 예약된 약속 명부에 없으시다니까, 정말.” “나 몰라요? 나 인도에서 유명해요.” “인도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정문을 지키는 경비 직원과 외국인의 실랑이가 한참이었는데 다행히 우승훈과 구면이었다. 창유리가 내려가며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블랑카!” “오, 승훈!” 약속을 위해 인도의 비슈누길드를 떠나 한국으로 온 블랑카였다. < 141화 - 닥터 토플러 (2) > 끝 ⓒ 진설우 < 142화 - 원정대 > 민찬의 예상대로 우진은 이미 아르달에 복귀해 있었다. 런던에서 서울까지 걸리는 시간이 5분도 되지 않으니…. 어쩌면 문명의 이기의 가장 마지막에 던전이 자리한 것일지도 몰랐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 블랑카가 가슴을 당당히 펴며 사장실로 들어와 우진의 앞에 섰다. 함께 들어온 민찬과 승훈을 보며 그가 물었다. “왜 같이 오냐?” “오다가 입구에서 만났습니다.” “흠, 다들 앉아.” 우진의 말에 그들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비서실 직원이 들어와 차를 내어주었다. 아르달은 요즘 부쩍 방문자가 늘었다. 서울 하늘 아래, 가장 안전한 땅이 서울역 인근인 아르달의 사유지다. 길드 업무에 관한 공개 채용이 없음에도 문의하기 위한 사람과 거지들이 몰리는 터라 블랑카도 그중 하나인줄 오해받고 제지당했다. “너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입구에서 경비가 막았습니다. 서러웠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취급하는 그들의 모습에 블랑카는 적잖이 섭섭했던 눈치였다. 우진은 피식 웃으며 그를 응시했다. “까고 있네. 너 인도에서 안 오려고 했지?” “마, 말도 안 됩니다. 나는 오고 싶었습니다.”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확신이 들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어떤 고민과 미련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왔으니 되었다. 꽤 괜찮은 버퍼를 얻었다. “비슈누 마스터가 전하란 말 없었어?” “약속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델리의 던전 하나와 바꾸기에 그는 고급 전력이다. 비슈누의 마스터도 블랑카를 대신해 내어줄 패를 한참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와중에 던전이 또 터졌고, 몬스터 로드들이 나타나 군대와 같이 싸웠다. 인도에 그런 재앙이 터진다면?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해 황급히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블랑카를 보낸 것이리라. “두 번이었지?” “그렇습니다.” 인도에 비슈누길드가 감당하지 못할 던전이 리셋되면, 그것을 처리하고 운영권 100%를 주기로 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 던전의 운영권 따위는 그저 부수입. 진정 절실한 것은 우진이 두 번이나 인도를 재앙에서 구해줄 것이란 사실이다. “뭐, 좋아. 어쨌든 아르달에 온 걸 환영하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옆에 있던 정민찬이 웃으며 블랑카와 악수했다. “환영합니다. 정민찬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국말을 굉장히 잘하시는군요.” 블랑카는 인도에서 유명한 각성자다. 정민찬도 그가 누구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를 스카우트했다는 소식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상황. “사장님, 블랑카 씨 대우는 어떻게 합니까? 아르달 소속으로 되는 겁니까, 파견입니까.” “볼모냐, 노예냐라….” 우진의 말에 정민찬이 애써 웃으며 이마에 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빌리든 팔려왔든 상관없지. 적당히 하고 싶은 대로 대우해 줘.” “…….” 우진이야 블랑카의 소속이 어떻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블랑카라는 버퍼를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모든 일이 끝마친 후라면 그가 인도로 돌아가든, 아르달에 남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하, 그 건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우진이 대충 대답해 주고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싱글벙글한 민찬과 승훈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너넨 왜 실실거리냐?” “오늘 조약문 확정하고 오는 길입니다.” 민찬이 서류 가방을 열어 두툼한 종이를 꺼내들었다. 건네주려는 것을 손바닥을 들어 만류했다. “추려서 말해.”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뭐?” “대한민국이 아르달 시국의 독자적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또?” “헌법을 개정해 이중국적을 허용했습니다. 아르달 국민이 되어도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했네.” 드디어 바티칸과 같이 유지되게 생겼다. 아르달 시국 자체를 직장처럼 출퇴근해도 되는 상황.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누릴 모든 것을 누리면서 동시에 아르달의 국민이 된다. 기존에 불안해하던 직원들의 걱정을 덜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장님 덕분이지요. 이제는 국왕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폐하, 임마.” “…….” 먼저 장난을 걸었던 민찬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우진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민찬이 더듬거렸다. “예, 폐하.” “농담이야, 임마.” “하하.” 농담 아닌 거 같은데…. “뭐, 독립한 것도 편하려고 한 거니, 맘대로 불러.” 그때 비서실 직원이 노크 후 들어왔다. “홍성구 이사, 방금 도착했습니다.”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실에서 시간을 죽인 것도 성구가 돌아오길 기다린 것이다. “어디 가십니까?” “훈련 가야지. 얼추 다 모였는데.” “음. 그전에 개국 선언만 하시고 가시면 안 됩니까?” “네가 해. 총리시켜 줬잖아.” “…그래도 입헌군주국인데 한 말씀은 해주셔야지요.” “그래, 그럼 지금 준비해. 한 며칠 자리 비울 테니까.”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정민찬은 우진의 성격을 알기에 재빨리 준비를 위해 사장실을 나섰다. 승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해머길드에 연락 한번 해봐라. 길드 총회 한다면서 왜 아직도 연락이 없어?” “아!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승훈이 인사하고 나서자 블랑카도 슬쩍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저도….” “넌 있어.” “예.” 블랑카는 다시 소파에 앉아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저는 볼모입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해.” “…….” 뭐, 이런 반응이 다 있지? “저는 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누가 뭐라냐.” “저는 제 자유의사로 아르달에….” “괜히 제 발 저리지 말고 있다가 애들 오면 인사나 해.” “…예에.” 곧 던전 공략을 끝낸 성구와 해솔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형님, 저 찾으셨다구요?” “그래. 이리 와 앉아.” “어, 블랑카?” “오랜만입니다.” “헤헤, 이제 온 거예요?“ “예, 전 제 자유의사로 아르달의 국민이 되었습니다.” “……?” 성구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옆에 있던 해솔이 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환영합니다.” “아, 예.” “동지여.” “…….” 맞잡은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이 격한 반가움은 뭘까? 해솔과 성구가 앞으로 함께 하게 될 블랑카를 아끼는 사이 성녀도 사장실을 찾았다. 그녀의 방문에 우진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수아는 어때?” “탈피를 앞두고 있습니다.” 신녀? 성녀? 무엇이 되었든 이제 막 깨어나려는 신의 대리인이 될 것이다. 버티지 못하면 죽을 것이고, 버티면 각성할 것이다. 주기적 발작이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 적응 단계다. 우진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다 모였네. 앉아봐.” “…….” 아르달 소속의 각성자가 모두 모였다. 누구 하나 무시 못 할 능력과 랭크다. 수가 적어서 그렇지 수준만 보자면 어지간한 대 길드에 맞먹었다. 애초에 우진 혼자서 길드를 넘어 국가에 버금가는 전력이지만 말이다. “이번에 나랑 다른 행성에 원정 간다.” “아르펜이요?” “거긴 아직이야.” 아르펜의 던전을 이제 막 하나 구입했다. 도전자들이 얼마나 들락거리는지 차원 영지를 지키기 위해 키바가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자쿠 행성으로 간다.” “흠.” 말해봐야 정보가 없다. 그저 우진이 알려주는 대로 따를 뿐. “이번에 지구에 링크한 라자쿠이라는 노란 도마뱀 연합이 주둔하는 던전이다. 여기 가서 사냥을 할 거야.” “저희도 말입니까?” 해솔의 물음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터가 되더라도 놈들 본진이어야지. 지구에서 싸워야 되겠어?” “맞는 말씀입니다.” 강력한 화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홈그라운드가 유리하겠지만, 전투의 승패와 상관없이 그로 인한 지구의 피해는 불가피했다. 전쟁의 무대는 적의 앞마당이 되는 게 나았다. “파티를 셋으로 나눌 거야. 난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너흰 함께 움직이며 호흡을 맞추며 사냥한다.” “나머지 하나는 뭐예요?” “뭐긴.” 우진이 씩 웃으며 성구를 보았다. “성구, 넌 제니스와 같이 다니면서 배운다.” “…….” 드디어 왔는가. 성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본래 군용 부지였던 아르달은 세 곳으로 구역을 나눌 수 있었다. 학교처럼 지어진 단순하고 거대한 건물과 연무장, 그리고 한쪽에 마련된 일명 ‘최해솔 사파리’는 비상시에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몬스터들의 격리소였다. 연무장에 아르달의 전 직원이 모두 모여 있었다. 민찬이 급하게 초청한 기자들도 곳곳에 모습을 보였다. 단상에 마련된 의자엔 창립 멤버들과 핵심 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강우진은 빼곡히 자리 잡은 사람들을 보며 옆에 앉은 민찬에게 슬쩍 물었다. “이렇게 많았어?” “철저히 가려 뽑은 인재들입니다.” “…….” 그 인재가 천 명에 육박할 줄은 몰랐다. 각성자는 열 명도 되지 않는데 지원부서의 인력이 이렇게 많을 줄은……. “각성자 더 뽑아도 되겠는데.” “안 그래도 지원자가 폭주 상태입니다. B급의 고위 각성자들도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아르달은 현재 최고의 길드이다. 아니, 이제 국가가 되었으니…. 우승훈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지나 연병장을 울렸다. “아르달의 개국 선언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급하게 작성한 식순을 훑던 승훈은 어깨에 올려진 손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우진이 서 있었다. “비켜봐. 하루 종일 걸리겠다.” “예.” 우진이 단상을 지나 앞으로 나왔다. 마이크 따위는 필요 없다. 샤라라락. 우진의 곁으로 검은 연기들이 뭉쳐 그의 권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이이잉. “재민 사부랑 놀고 있는데 왜 불러요?” [마이 로드!] [이 람손님의 해머가 필요한가?] [그하하, 이번 사냥은 인간인가?] 저마다 왁자지껄 떠드는 그들이 소환되자 넓은 단상이 꽉 찼다. “모두 조용히 해봐.” 우진이 무대 아래 직원들을 보았다. 부사장이자 총리 예정인 정민찬이 알아서 뽑은 이들이지만 결국 아르달의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 무리가 모였으면 리더의 가치 정도는 공유해야지. “5년 전 아르펜에 소환되어 20년을 죽음과 함께했다.” 마이크 없이도 우진의 목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은은한 마력을 담은 그 음성은 모두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 “아르펜을 집어삼킨 괴수들이 지구를 노린다.” 말하고 보니 열받네. 우진의 목소리가 한층 격앙되었다. “함께 싸우는 자, 동료가 될 것이고, 도망치는 자, 죽어서 동료가 될 것이다!” [구오오오!] 데스나이트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조금 겁먹은 듯한 직원들을 향해 우진이 말을 이었다. “아르달이 가장 안전한 벙커라 생각하고 온 놈이 있다면 착각이다. 여긴 전쟁터의 최선봉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우진에게 원한이 사무친 차원 영주들이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 이번에도 서울에 가장 많은 몬스터 로드가 모습을 보였고 말이다. “아르달의 이름 아래 모인 자, 모두 전사가 될 것이다!” 살아서도, 그리고 죽어서도. “죽고 싶다면 도망쳐라.” 겁먹고 도망쳐도 상관없다. 그러라고 겁주는 것이니까. 용기 없는 자는 언데드가 되어 따르는 것이 낫다. 아르달은 한 발짝 앞이 지옥인 낭떠러지의 끝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가장 가까이 있는 땅. 함께한다면 우진은 그들과 같이 죽음의 문턱을 보기 좋게 넘어버릴 것이다. “아르달의 개국을 선포한다.” 핼쑥한 얼굴의 사람들을 보며 우진이 선언했다. < 142화 - 원정대 > 끝 ⓒ 진설우 < 143화 - 원정대 (2) > 서울역 1번 출구 앞. 벌떼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포장마차 하나를 두고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빙 둘러 운집했는데 그들 모두가 기자였다. 전 세계 언론사가 모두 모인 듯했다. 세상의 누가 있어 이 정도 수의 기자를 몰고 다닐까. 쉴 새 없이 사진기의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 하나 접근하진 못했다. 우진은 포장마차에서 어묵 꼬치를 빼먹고 있었다. “여기 괜찮네.” “국물도 좀 드십시오.” 우승훈이 종이컵에 살뜰히 어묵 국물을 담아 내밀었다. 우진은 멀뚱히 서 있는 성구와 해솔, 블랑카와 메르디를 보았다. “너네도 먹어.” “예? 바로 던전 가실 거 아닙니까?” “가긴 가지, 한 사람 더 합류하면.” “어? 형님, 누구 또 오기로 한 사람 있어요?” “있지.” 성구의 물음에 우진의 시선이 우승훈에게로 향했다. “연락했지?” “예, 연락했습니다.” 잠시 후, 기자들 틈을 비집고 거구의 사내가 나타났다. “여, 강 아우.” “백 형 왔어?” 싱글벙글한 백종도와 그의 비서 정찬성이 다가왔다. 백종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묵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어? 백 사장님이 웬일이에요?” 성구의 물음에 백종도가 씩 웃었다. “웬일이긴, 우리도 이제 한 팀 아닌가, 한 팀. 으하하.” 아, 사장님이 불렀구나. 엄청나게 마음에 드셨나 보네. 같이 원정대에 끼워줄 만큼 말이다. “아, 탱커가 없어서.” 우진의 말에 성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저 있지 않습니까?” 우진이 피식 웃으며 어묵 국물을 호로록 마셨다. “넌 따로 훈련해야지.” “…윽.” 정말 죽었구나, 이제! 성구가 울상을 짓는데 우진의 시선이 해솔에게로 향했다. “몹 몰이 겸, 무전 통신기 하나.” 블랑카를 보며 웃었다. “자가 치유하는 보조 탱커에 버퍼 하나.” 메르디와 눈이 마주친 우진이 입을 열었다. “목숨줄 연명해 줄 힐러 하나.” 그의 말이 끝나자 성구가 눈을 반짝였다. “형님, 딜러가 없잖아요. 역시, 제가….” “섭외해 놨어. 넌 따로 교육.” “흐윽…….” 벗어날 수 없구나. 아, 벌써 무섭다. 우진이 꼬치에 꿰인 어묵을 마저 입에 쏙 집어넣고는 승훈에게 눈짓했다. “얼마입니까?” “만 원이에요.” “허, 하나에 이천 원이나 해요?” “예에.” 승훈이 투덜거리며 아주머니에게 돈을 지불하고는 바로 앞의 서울역 1번 출구로 향했다. 그들이 떠나자 기자들이 우르르 포장마차로 몰려갔다. 찰칵, 찰칵. 우진이 먹고 남은 꼬챙이부터 포장마차까지,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지 않아도 잠시 후 포털에 올라올 기사 제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난리를 보며 우진이 슬쩍 승훈에게 물었다. “여기 한국 땅이지?” “예.” “여기 사버리라 해.” 승훈이 씩 웃었다. “역시, 사장님도 어묵 하나에 이천 원은 너무했다 생각하셨군요. 이 근처 땅도 다 매입해서 제대로 세금을 때리도록 하겠습니다.” 따악. 우진의 손이 승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내가 너냐? 그냥 이 주변 땅 다 매입하라 그래. 혹시 던전에서 뭘 빼내올지도 모르니까 말야. 공간이 필요한 거야, 공간.” “네에….” 승훈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던전에 입장하려는 그들을 배웅했다. “사장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KH길드의 상무 정찬성이 백종도를 보며 걱정을 내비쳤다. 그가 특유의 웃음을 뱉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하, 별 걱정을 다하네. 지구 최강, 강 아우랑 같이 가는데.” 그러니까 걱정되는 겁니다, 사장님. 정찬성의 염려스런 눈빛을 듬뿍 받으며 일행이 던전으로 입장했다. 그들을 배웅한 우승훈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것의 의미를 묻는 정찬성과 눈이 마주쳤다. “뭡니까?” “백 사장님 어묵 하나 이천 원.” “…외교부장관 되실 분이.” “어허, 계산은 철저해야죠.” “…….” 판매원 경력 8년의 인생역전 우승훈. 그의 칼 같은 계산에 정찬성이 지갑을 열었다. *** 베일에 싸여 있었던 서울역 1번 출구. 무수한 말이 쏟아진 문제의 던전이다. 강우진이 공략한 후, 안에 캐도 캐도 아티팩트가 쏟아져 나온다든지, 그가 불법적으로 살인한 시체를 유기한다든지, 뜬소문이 가득한 던전. 물론 몇몇 지인은 정체를 알고 있었다. 강우진의 차원 영지. 일행 중에 모르는 이는 블랑카뿐. “어? 사장님 포탈이….” 우진의 입장에 던전에 설정해 놓은 몬스터들은 리젠되지 않았다. 곧장 차원 영지로 통하는 붉은 포탈의 모습에 블랑카가 의아한 기색을 했다. 그의 사장이 부하 직원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고 말이다. 슈슈슉. 우진이 포탈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일행들이 하나둘 뒤 따랐다. “으음.” 블랑카도 포탈을 통과해 들어가 보니, 높은 천장을 가진 건물 안이었다. 궁전 같은 거대한 홀. 눈앞의 왕좌.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세 개의 붉은 포탈. 두리번거리던 블랑카의 시선이 왕좌에 앉은 우진에게로 향했다. “차원 영지 아르달에 온 걸 환영하지.” 우진의 웃음에 일행은 묘하게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세계는 몬스터들을 부리는 새로운 종의 몬스터의 출현에 별별 말을 가져다 붙였다. 몬스터 로드. 그것으로 불리고 있는 차원 영주다. 우진이 던전을 소유한, 차원 영주라는 사실은 아르달의 각성자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블랑카만 빼고. “서, 설마.” “허허, 외국인 친구랑 나만 몰랐나 보군.” 백종도도 우진의 정확한 실체는 몰랐다. 그가 던전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았지, 차원 영주일 거라곤…. “견학 시간 한 시간 주지. 구경해.” “허허, 강 아우. 정말 여기가 차원 영지인가?” “궁금한 건 비비한테 물어보세요.” 우진은 왕좌에 앉아 할 일이 있었다. 비비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일행들을 보았다. “헤헤, 저 따라오세요. 구경시켜 드릴게요.” 일행들이 비비를 따라 왕궁을 나서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재민이 나타났다. “사내놈이 뭔 부끄럼이 그렇게 많냐?” “하하, 그러게요.” 아직 자신이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임이 생소한 재민이다. 스스로가 그럴진대 남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지금은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용기가 조금 부족했다. “쯧, 배우라고 한 건?” “모두 익혔어요.” 포인트를 이용해 구해다 준 수십 가지의 스킬. 뱀파이어 클래스만 배울 수 있는 상당수의 스킬을 배웠다. “제대로 쓰는 건 또 다르지.” “연습하고 있어요.” “현실은 보다 가혹해서 연습 시간을 그리 많이 주지 않아.” “노력하고 있어요.” “노력으로 부족하지.” “그럼 노오오오력?” 우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맞을래?” “죄송합니다.” “한 시간 뒤, 자쿠 행성으로 출발한다.” “예에?” 재민이 화들짝 놀랐다. “최고의 팀원을 섭외했지. 같이 굴러봐.” 바로 실전이라니…. 재민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데 우진이 한마디를 툭 뱉었다. “또 징징거리며 구경이나 할래?” “…….” 힘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가족을 지키려면…. “안 죽게 세팅했으니까 걱정 마.” 아, 그래도 형님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구나. 고랭크인 A급 각성자들 파티에 끼어 버스만 타면 되는 건가? 우진이 그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너만 잘하면 말이야.” “…….” “못하면 전멸이지.” “…….” “넌 죽어도 내가 포인트로 살려내겠지. 하지만 나머진 그냥 끝이야.” 아, 뭐 이렇게 부담을 주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재민은 턱이 덜덜 떨렸다. 공격수인 그가 삐걱되면… 결국 파티가 전멸할지도 몰랐다. 자쿠 행성에 무엇이 존재할지 모르니 말이다. “그럼 준비해라. 방어벽은 만들고 가야지.” “네, 형.” 영지의 보호 기간이 임박했다. 일행들에게 한 시간을 준 것은 영지전을 할 시간이 필요해서다. 재민이 전략관의 자리에 앉자 곧 상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누가 되었든 상관없었기에 우진은 대충 선택해 재민과 매치시켜 주었다. 져도 좋고, 이겨도 좋다. 그는 영지전을 관전하지 않고 영지의 상태를 살폈다. 왕좌의 옆에 생성된 세 개의 포탈. <지구 행성 - 서울역 1번 출구> <자쿠 행성 - 내시아의 기둥> <아르펜 행성 - 라앗의 신전> 아르펜 행성의 곳곳에 존재했던 수백의 신전. 그것들 하나하나가 던전이다. 옛 아르달의 영토에도 몇몇이 존재했기에 트라넷의 존재들이 노리고 끊임없이 전쟁을 걸어왔고 불사의 군대는 그것을 격퇴했다. <아르펜 행성과 차원 영지의 동기화. 남은 시간 29일 17시간….> 차원의 조각 하나를 지불하고 구입한 아르펜의 던전. 그곳으로 돌아가기 전, 자쿠 행성을 모조리 휩쓸어줄 생각이었다. 90레벨에 도달하면 좋고, 안 돼도 상관없다. 노란 도마뱀이건 뭐건, 이것은 강우진이 전 차원 영주에게 전하는 선전포고였다. 지구를 건드리는 차원 영주나 연합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 내시아의 기둥으로 통하는 포탈 앞에 일행이 모였다. “다 준비됐냐?” “예! 준비됐습니다.” 우진이 면면을 살폈다. 성구는 제니스와 따로 면담을 가질 것이니 제외하고, 테이머인 해솔과 버퍼인 블랑카, 신체 강화 각성자인 백종도에 힐러인 메르디, 거기에 이제 막 꽃피려는 뱀파이어 도재민의 파티다. 이 정도면 몇 번 합을 맞추다 보면 어지간한 차원 영주도 레이드해 볼 만한 전력이다. 물론, 도재민의 급성장이 아주 필수적이지만 말이다. 우진이 주의를 시켰다. “엥간히 맛나 보이는 건 모조리 빨아먹어.” “…….” 도재민이 울상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몬스터를 흡혈하는 건 좀…. “강해지기 싫냐?” “아니에요.” 도재민은 뱀파이어. 일반적인 강화석으로 스탯을 증가시키지 않았다. 죽은 전사나 마법사… 적들을 처치해 그들의 피를 먹고 힘을 흡수한다. 그렇게 뱀파이어의 스탯은 오른다. 자신이 죽인, 흡혈한 적들의 수에 비례해서…. 우진이 재민의 급성장을 기대하는 이유이자 이번 파티의 핵심 이유였다. “좋아. 그럼 던전 통과해 들어가면 알아서 사냥한다. 특이점이 있을 때만 연락해.” “네!” 성구와 제니스를 함께 붙여두기에 우진과 연락 수단이 있었고, 영지의 전략관으로 임명한 도재민과도 공간을 뛰어넘어 의사소통이 가능했기에 문제없다. 행성의 어딘가에 있기만 하면 서로의 연락 걱정은 없었다. “자, 그럼 가자.” 우진이 활성화된 내시아의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에 몸을 내맡겼다. 그로서도 처음으로 향하는 자쿠 행성. 지이이이잉. 포탈을 통과해 들어가니 우뚝 솟은 거대한 기둥과 분수처럼 그것을 감싸고 있는 넓은 결계의 모습이 보였다. 도전자가 일정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결계가 생성되며 던전화된다. 지구의 지하철역과는 다른 구조지만 쓰임새는 같다. 동기화를 마쳐서 그런지 우진의 등장에 결계가 옅어졌다. “지구에서라면 우리가 몬스터 취급이겠지?” 던전 브레이크와 다를 게 전혀 없다. 침략자로 입장이 바뀌었을 뿐이다. 오랜만이라 그럴까? 우진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묘한 설렘을 느꼈다. “모조리 잡아 죽이는 거야.” 지구의 강우진이 임모탈로 돌아가는 기분. 그가 던전의 경계를 넘었다. 크르륵. 구룩, 구룩, 구룩. 우진을 맞이하는 것은 기괴한 소음을 내는 각양각색의 종족이었다. 그중 녹색의 리자드맨 하나가 뱀의 꼬리로 된 몸을 흔들며 앞으로 다가왔다. 검은 왕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무시할 것이 못되었다. 일행이 바짝 긴장하는데 우진이 마주 걸어나갔다. [환영하지, 전사여!] [누구지?] [나는 검은 모자 연합의 수장 첸님을 모시고 있는 차원 영주 니갈이다.] [날 기다린 건가?] [그렇다! 노란 도마뱀을 궤멸시킨 그대의 무용담은 들었다. 첸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대에게 아주 높은 자리….] 팟. 우진의 손에 소환된 전사의 무기는 도끼의 형태였다. 후우웅, 콰직! 리자드맨 니갈의 머리가 허공을 솟구치더니 바닥을 굴렀다. 몸과 분리된 그의 머리에 붙은 눈이 데굴 굴러 우진을 보았다. [……무슨 뜻이지?] [뭐긴, 파티 시작이지.] 우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씨익 웃었다. 그의 뒤로 불사의 군대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 143화 - 원정대 (2) > 끝 ⓒ 진설우 < 144화 - 자쿠행성 > 니갈의 몸이 회색으로 변해 사라지며 남은 것은 그와 함께 온 몇몇 차원 영주와 그들의 수하인 몬스터 부대뿐이었다. 키키킥. 순식간에 정리된 전장엔 해골들의 웃음소리만 남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살육에 일행들이 어리둥절해 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우진이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예정대로 세 무리로 나누지. 각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네, 형님.” “알겠습니다.” 성구는 문제없다. 따로 움직인다곤 하지만 사냥이 아닌 훈련이 목적. 우진과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재민을 보았다. “4일 뒤 찾아가마. 그때까지 열심히 해봐.” “네, 형.” 그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부담감이 심하지만 결국 해낼 수밖에 없었다. 재민이 영지전에서 승리하며 4일의 보호 기간을 얻었다. 우진이 그때 시간을 맞춰 일행에게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럼 가봐.” “음, 어디서부터 사냥을 해야 할지….” 우진이 내시아의 기둥을 가리켰다. “던전을 공략해도 좋아. 공략과 동시에 링크는 깨질 테니.” 자쿠 행성에 던전을 가진 모든 차원 영주의 링크를 해제시켜 버릴 것이다. 그사이 사냥으로 얻는 경험치가 주목적이고 말이다. “막막하구만그래.” 백종도는 드넓은 초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포탈을 통과하며 현대 문명의 이기는 하나도 가져오질 못했다. 네비게이션도 없고 지도도 없다. 별자리도 다르고 하루의 시간도 다른 낯선 땅에서 적과 싸워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적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때 해솔이 작은 새를 한 마리 보듬어 왔다. “이 녀석이 길을 알려줄 거예요.” “호오?” 해솔의 능력은 테이밍. 그리고 집중적으로 연습한 텔레파시. 다섯 명 정도는 별 무리 없이 실시간 대화가 가능한 그의 텔레파시 능력은 테이밍의 기본인 교감과 합쳐져 동물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시너지를 낳았다. 작은 새가 보고 느낀 이 세상을 해솔은 어느 정도 공감하고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던전의 위치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럼 사장님, 힘내십시오.” “4일 뒤 뵙겠습니다.” “그래. 다들 죽지 마라.” 일행이 떠나가자 남은 건 불사의 군대와 성구뿐이었다. “우리도 가자.” “예? 저도 같이요?” “던전 발견하면 난 공략에 나설 거야. 넌 밖에서 수련토록 해.” “아, 네. 형님.” 우진이 불사의 군대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생명의 기운을 찾아라!” [왕이 명하신다!] 데스나이트의 지휘하에 스켈레톤들이 진군했다. 행성을 활보하는 몬스터들을 찾아 죽이는 것 외에 던전 안의 몬스터들도 찾아야 할 터. “깨비, 던전을 찾아.” [크큭, 변했군.] 아르펜에서는 소극적으로 자신의 땅만 지켜내던 임모탈이 적을 찾아 직접 움직인다. “헛소리 말고 찾아.” [주인의 뜻대로. 크큭.] 그림자에서 깨비가 빠져나가며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우진이 씽씽이를 소환해 오르자 성구가 뒤에 타려다가 발길에 막혔다. “뭐하냐?” “예? 저도 태워주시는 것 아닙니까?” “넌 지금부터 숨 쉬는 모든 순간이 훈련이야.” “예?” “재주껏 살아남아 봐. 난 정말 간섭 안 할 테니.” “……?” 어리둥절한 얼굴의 성구를 남기고 우진이 씽씽이를 움직였다. 멀지 않은 곳에 건설 중인 도시가 있어 불사의 군대가 그리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성구의 옆에 검은 연기가 뭉쳐지며 리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내게 배움을 자청한 건방진 놈이 누구냐!] 희번덕거리는 붉은 광망은 광기에 차 있었다. 성구가 실쭉한 표정을 지었다. 알면서 왜 묻는가? “…전데요.” [그하하, 자격을 시험해 볼까?] 리치의 지팡이에서 불이 뿜어졌다. 콰쾅, 쾅! 갑작스럽게 시작된 폭발은 재빨리 몸을 피한 성구를 쫓아 연달아 터졌다. “으윽, 미친!”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직격하면 인간의 몸은 절대 버텨낼 수 없는 마법 수준이다. 장난이 아니라면 정말 자신을 죽이려는 셈이다. [그하, 칭찬인가?] “…….” 폭발의 연기를 비집고 불쑥 머리를 내민 리치의 말에 성구는 질색한 얼굴을 했다. 이후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화르르르륵, 콰아앙!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으니까. *** 우진은 후방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잠시 추억에 잠겼다. “후후.” 자신은 살아남았고 강해졌다. 성구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식민지인가?” 우진은 건설 중인 도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도시의 중앙에 생성된 인공적인 거점이 눈에 보였다. 거점을 중심으로 일정 반경은 차원 영주의 힘이 닿는 공간. 행성 안에 세운 차원 영지와 같다. 말 그대로 거점 도시. 차원 상점을 통해 건물을 사거나, 수비 병력을 구입해 배치할 수도 있었다. 영지민들을 이주시킬 수도 있었고 말이다. 초원에 세워진 것은 성이었다. 도시 전체가 바위와 철이 융화된 기계 요새와 같았다. 스켈레톤들이 천천히 진군하는 와중에 성에서 커다란 바위가 날아들었다. 콰쾅, 쾅! 날아온 것은 바위만이 아니었다. 가시 달린 포환이 바닥에 처박히자 폭발음과 함께 파편을 날렸다. 그것에 맞은 해골들이 한 번에 쓰러질 정도로 가공할 공격이었다.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적들의 공성 무기를 보니 꾸물대다간 피해가 누적될 듯했다. “돌쇠야.” 위이이잉. 소환된 돌쇠가 우진의 뜻을 알고는 주변에 떨어진 바위와 철포탄의 파편들을 끌어모아 거대한 신형을 만들어냈다. [그오오오오!] “길을 터라.” 우진의 명령에 거구의 골렘이 달려나갔다. 쿵, 쿵! 내딛는 걸음마다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진동을 냈다. 그 위세에 성에서 쏘아진 바위들이 돌쇠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꽤 정교한 조준력. 콰아앙! 바위가 돌쇠의 머리를 깨부수며 바닥에 처박혔지만 돌쇠의 진군은 멈추지 않았다. 그그그긍. 바닥에 처박힌 바위가 인력에 이끌리듯 진동하더니 돌쇠의 몸으로 끌어당겨 뭉쳐졌다. 깨진 머리가 대치되었고 팔다리가 더 길어지고 가슴이 두터워졌다. 더 커진 파괴의 거신이 진군했다. [구오오!] 돌쇠가 몸체를 더 불릴 때마다 뭉텅이로 마력이 빠져나갔으나 상관없었다. 포션을 마셔도 되고, 영혼 갈취로 회복해도 된다. 콰아앙! 어느새 성벽까지 돌격한 돌쇠가 큰 몸을 부딪쳤다. 성벽이 무너지며 공간을 만들어냈고, 무너진 돌과 금속을 흡수해 몸체를 불리며 더 크게 자라난 돌쇠가 난동을 부렸다. “돌격해서 쓸어버려!” [돌격이다!] [크하하, 속도를 내라!] 데스나이트들이 유령마를 소환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천천히 씽씽이의 머리 위에 비비가 소환되었다. “우리도 여기에 거점 도시 하나 만드는 게 어때여?” “뭣 하러?” “음, 으음. 하나 있으면 좋잖아요.” 우진이 피식 웃었다. “성 꾸미기 하고 싶구나?” “헤헤헤.” 정곡을 찔린 듯 비비가 배시시 웃었다. 차원 영지 아르달의 곳곳에 손길이 묻어 있다. 용돈처럼 타간 포인트를 성 꾸미기에 전부 사용하는 그녀였다. “아르달로 충분하잖아?” “피, 너무 좁아요.” “…….” 도대체 얼마나 큰 걸 원하는 거지? 우진은 저 앞의 거대한 성을 가리켰다. “성은 말이야.” “네.” “꾸미는 것보다 파괴하는 게 더 즐겁지.” “…치.” 우진의 말에 비비가 새초롬한 눈을 뜨곤 등을 돌려 부서지고 있는 성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맑은 웃음이 내걸렸다. “헤헤, 그건 그래요.” “가서 레벨 업이나 해.” “네에. 헤헤.” 환영의 마녀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네크로맨서 임모탈의 강함은 결국 그의 군대에서부터 비롯된다. 권속들의 수가 워낙에 많으니 그들의 레벨도 관리해 줘야 했다. 전쟁은 최고의 무대였고, 자쿠 행성은 싸울 상대가 많았다. 권속들의 레벨 업 중에도 그들의 경험치가 우진에게 보내지니,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경험치가 증가 중이었다. 하지만 직접 움직일 때에 비해서는 적은 양. “나도 슬슬 움직여볼까?” 우진을 태운 씽씽이가 내달렸다. 무너진 성벽에 근접했을 때 알림이 떴다. <리아의 거점 ‘전진 요새’에 진입하셨습니다.> <그녀는 죽음의 허무를 헤매고 있습니다. 영지전과 결투의 선택이 불가합니다.> <공략 성공 시 ‘파괴’가 가능합니다.> 우진은 떠오르는 메시지에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기계문명으로 꾸며진 도시가 어쩐지 낯설지 않다고 여겼더니 호기롭게 자신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차원 영주, 리아의 거점이었다. 동시에 차원 영주의 죽음이 왜 끔찍한지 알 것 같았다. ‘죽어 있는 동안 정말 탈탈 털리겠네.’ 12일의 보호 시간엔 함정이 있었다. 영지전과 결투의 신청이 면제될 뿐. 던전이나 거점을 공략해 오는 도전자나 모험가들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영지의 방비가 튼튼하거나 키바처럼 훌륭한 전사를 수비 대장으로 임명해 놓은 것이 아니라면 털릴 수밖에 없었다. 던전의 공략은 결국 행성과의 링크가 끊어짐을 의미했다. 차원의 조각 하나를 그대로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거점은 던전이 아닌 곳에 세워진 게이트. “파괴할 수 있다 이거지?” 우진의 얼굴에 웃음이 내걸렸다. 던전도 파괴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구의 모든 던전을 파괴한다면 차원 영주들의 링크를 모조리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빼내 들고 돌진했다. “크아악! 막아라.” “더러운 언데드 놈들!” 악다구니를 쓰며 막아내고 있는 리아의 영지민들은 다름 아닌 인간. 티티팅! 건물 곳곳에 배치된 인간들이 지구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없을 정도로 조잡한 원시적인 총을 이용해 사격했다. 우진에게도 총알이 쏘아졌으나 영혼의 갑옷에 막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지구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우진이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슈아아악! 우진이 날린 본 스피어가 그들을 꿰뚫었다. “몬스터.” 어쩌면 그것의 정의를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침략자로 말이다. 적들의 악다구니가 느껴졌다. 벌써 상당수가 죽어 그들의 영혼이 부르짖는 게 보였다. 이런 생지옥은 오랜만이었다. 우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곳인데 다시금 그곳의 향수가 느껴지니, 이토록 흥분되는 마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부정할 수 없다. “후우, 주체할 수 없군.” 길들여진 것인지, 본능인지 알 길이 없다. 괴물은 다름 아닌 자신인지도 몰랐다. “모조리 파괴하라.” 우진의 몸에서 뻗어 나간 마력들이 도시 곳곳에 산재한 시체들에게 작용했다. 꽈아아아아앙!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간 시체들의 폭발에 도시의 한쪽이 폭삭 주저앉았다. 키키키킥. 건물의 잔해에 깔렸던 해골들이 비집고 올라와 멀쩡한 도시들을 향해 다시 돌격했다. 스스스슥! “후우우우우.” 우진은 깊은 한숨과 함께 주변을 가득 메울 정도로 일시에 생겨난 적들의 영혼을 빨아들였다. 바닥을 쳤던 마력이 빠르게 치솟아 올랐다. 요란한 피의 축제는 자쿠 행성의 초토화를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 리아의 전진 요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위산. 그곳에 주변에 동화되어 위장한 라티족 주술사 락샤가 있었다. 귀기가 서린 듯 푸른빛이 감도는 그녀의 눈은 치열한 전장… 아니, 학살의 현장을 생생히 관찰하게 해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곡도를 들고 종횡무진하는 검은 옷의 기사에게 닿았다.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지만 용맹함과 포악함은 전에 비할 바 없이 커진 존재. “레릭….” 라티족의 위대한 전사가 적의 수족이 되었다. 라티족 주술사 락샤는 전장을 한눈에 담았다. “포식자를 집어삼키는 포식자….” 어쩌면, 정말 어쩌면 신의 예언이 실현될지도 몰랐다. < 144화 - 자쿠행성 > 끝 ⓒ 진설우 < 145화 - 자쿠행성 (2) > 우진이 거점 중심 건물 앞에 섰다. 철로 만들어진 탑의 꼭대기에서 녹색의 빛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주인 없는 거점을 공략했습니다.> <파괴, 점령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점령이라.” 차원 영주가 죽어 있는 상태라 그럴까? 우진은 한 가지 선택지를 두고 잠깐 고민했다. “주인님! 이거 저 주세요. 이 성 저 주세요옹.” 비비가 발을 동동 굴렀으나 우진은 결정을 내렸다. “의미 없어.” “피이.”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가? 다른 차원 영주들처럼 랭킹의 상승? 순위를 상정하는 중요한 지표인 에너지를 늘리기 위한 식민지와 여러 던전의 건설, 그리고 무한 약탈…. 행성 간의 지배가 목적이 아니다. “파괴하지.” 우진은 파괴를 선택했다. 쿠르르르, 콰아앙! 철탑이 와르르 무너지며 폭발했다. 여기저기서 추가적인 폭발이 일며 도시 전체가 무너져 파괴되었다. <차원의 조각을 습득했습니다.> <파괴 보상 5만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차원 영주 ‘리아’의 창고를 약탈합니다.> <라임의 저주받은 목걸이를 입수합니다.> <우람하고 길쭉한….> <…….> 랜덤으로 약탈한 아이템들은 자동으로 우진의 인벤토리로 수납되었다. 어마어마한 수량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마어마하구만.” 죽어 있는 동안, 정말 탈탈 털리는 구조. 우진은 그녀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영지전이 아닌 결투로는 결코 랭킹을 올릴 수 없다는 말. 죽음에 대한 리스크가 너무 크기에 결투보다 영지전을 더욱 선호한다. 제대로 된 전략관을 갖지 못하거나 리아처럼 랭킹을 포기한 채 결투를 선호하는 영주가 아니라면 결국엔 영지전의 실력 향상에 올인하게 되어 있다. 리스크를 최소로 줄이면서 에너지를 모으기엔 그것이 낫다. 더불어 던전을 통한 사냥터의 개방으로 영지민들의 세금도 쏠쏠하고 말이다. “안 죽으면 되잖아?” 우진은 피식 웃었다. 죽지 않으면 얻는 게 더 클지도 몰랐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진 것이다. 이길 수밖에 없다. 모든 거점과 던전을 공략해 줄 것이다. 그래서 링크를 원천 봉쇄해 주지. 우진 혼자서 안 된다면 그의 세력으로, 지구의 연합으로 말이다. 주변인들이 제 몫을 해줘야 할 때가 생길 터. “잘 크고 있으려나.” 파티가 손발이 맞기까진 조금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재민이 녀석, 잘 어울릴까 모르겠네.” 은근히 소심한 그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걱정도 조금 되었지만, 결국 스스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 쿠쿠쿵. 백종도의 주먹에 결국 머리통이 바스라져 쓰러진 오우거를 보며 모두의 시선이 재민에게로 향했다. “…….” “어서 빨고 이동하시죠.” 최해솔의 말에 재민이 울상을 짓다가 결국 오우거에게 다가가 목을 물었다. 꿀렁, 꿀렁. 거부감과는 별개로 피 맛은 달콤하다. 인간의 것과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몬스터의 피도 적지 않은 쾌감을 선사했다. “으으으으.”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넘치는 기분이다. 오우거의 파워가 느껴진다. 부들부들 떨던 재민의 몸이 진정되었다. “하아, 이제 됐어요.” “저쪽입니다. 가시죠.” 해솔의 주위로는 이미 상당수의 몬스터가 따르고 있었다. 멀리 시야를 밝혀주고 위험을 알려줄 작은 새와 같은 비행형부터 추격하는 데 쓰일 늑대 같은 맹수형까지. 하지만 해솔의 진정한 능력은 급작스런 전투 와중에 발휘된다. 크와아아! 갑작스럽게 땅이 솟구치며 공격해 오는 두더지형 몬스터들을 보며 해솔은 텔레파시를 전개했다. 능력의 진화를 거두며 이룬 성과. [생각의 공유.] 해솔은 사람들의 의사를 묻고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사람들에게 공유해 줄 수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순간적인 작전이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흐압!” 백종도가 두더지 한 마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블랑카도 호신용 봉을 꺼내들어 자신을 비롯한 모두에게 신속의 버프와 굳센 힘의 버프를 걸었다. 재민은 자신을 향해 달려들어 날카로운 발톱을 찔러오는 두더지의 팔뚝을 물었다. 꿀렁, 꿀렁. 캬악, 캭! 그대로 피를 빨자 두더지가 발악하며 사지를 흔들었다. 그 난동에 상처를 입었으나 흡혈의 영향으로 빠르게 재생되며 아물었다. 버둥거리던 몬스터의 움직임도 둔해지더니 이내 비쩍 말라 죽어버렸다. 입가에 피를 흘리며 두더지를 바닥에 버린 재민이 몸을 떨었다. “으으으.” 느껴진다. 땅두더지의 강인한 악력이! 허공에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움직이니 뚜둑 소리가 났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해솔의 텔레파시. [전방에 재민이 맡아.] 시뮬레이션처럼 각자의 역할이 명확하다. 그대로 수행하면 딱 좋지만…. “크으으.” 눈이 붉어진 재민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하, 또 폭주네.” 해솔이 고개를 절레 저으며 일행을 모았다. “어서 따라붙죠.” “그래야겠군.” 피를 흡혈하며 그들의 힘과 함께 흉폭함을 얻는 듯, 한 번씩 피에 취해 저렇게 발작하듯 날뛴다. 앞쪽에 갑작스레 몬스터가 많아졌는데 혼자 내버려두기엔 아직 위험했다. 도재민은 강우진이 아니니까. 일행이 그를 보조하기 위해 빠르게 달려나갔다. 한참을 폭주하는 재민과 그에 맞춰 사냥하던 일행의 주위로 몬스터의 시체가 가득했다. “후우, 어째 좀 수가 많아지는 것 같은데?” “큰일이다. 앞쪽!” 블랑카의 말에 최해솔이 주위를 살폈다. 매의 시야를 공유해 살피는데…. “이런.” 하늘로 솟구치는 녹색의 빛은 차원 영주의 거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 각양각색의 몬스터가 많아진다 싶었더니 거점의 근처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더 다가가는 것은 위험해요.” 메르디가 엄중히 경고했으나 블랑카는 고개를 저었다. “늦었다. 저길 봐라.”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적의 대규모 비행 몬스터가 날아오고 있었다. “사장님 불러야 하는 거 아녜요?” “쟤가 저 상태인데?” 백종도가 아직도 폭주 상태인 재민을 가리켰다. “크르으으으.” 벌겋게 변한 눈은 절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해솔은 점점 다가오는 대규모 공중 몬스터를 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일단 튀죠?” “그러는 게 좋겠어.” 백종도가 재민을 붙잡았다. “크악, 큭!” 본능적으로 자신을 잡은 팔뚝을 깨물던 재민의 치아가 툭하고 부러졌다. 검게 변한 그의 팔은 아직 성장하지 못한 흡혈귀의 이를 허용할 만큼 물렁하지 않았다. 극강의 신체 능력 각성자가 백종도였다. “일단 숨었다가 저 거점을 주위로 조금씩 유인해 내서 처치하죠.” “좋아.” 작전이 정해지자 일행이 빠르게 움직였다. *** 죽는다. 이러다 정말 죽는다. “후우.” 성구는 모든 감각을 집중해 리치의 지팡이를 쫓았다. [멍청이는 매도 듣지 않는 겐가?] 화르륵, 쾅! 성구가 이를 악물로 화염 공격을 피해냈다. 누가 있어 저 거대한 불덩이를 그저 매 정도로 취급하는가. 저건, 맞으면 그대로 불타 죽는다. [언제까지 비겁하게 도망만 다닐 텐가?] 화륵, 콰쾅. 쾅! 무슨 다연발 로켓포도 아니고, 쉴 새 없이 뿜어지는 불길이 화염방사기 수준이다. 그것도 원거리, 근거리 가리지 않고 날아오며 조금의 쉴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이게 뭘 가르치는 거야.’ 최고의 화염 마법사가 되게 해준다더니, 이건 그냥 못 죽여서 안달 난 수준이 아닌가? 성구가 눈치를 보더니 바닥을 구르고 굴러 나무 꼬챙이 하나를 주웠다. “후우우우.” 몸 안의 마력을 폭발시키며 불꽃을 일으켰다. 화염에 휩싸인 검을 들고 리치를 향해 돌진했다. [그하하, 이제 해볼 마음이 들었나?]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향해 화염검으로 변해 버린 나무 꼬챙이를 휘둘렀다. “차아아!” 화르륵. 그대로 화염을 베며 달렸다. 리치가 바로 눈앞이다. 이렇게 가까이 근접하기는 처음. “죽어!” 성구가 악다구니를 쓰며 검을 휘둘렀지만 불은 그대로 리치가 뻗은 손에 가로막혔다. 앙상한 뼈마디로 이루어진 그 손이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뜨겁지도 않은지 미동도 하지 않는데 검을 이루던 화염이 리치에게 빨려들어 갔다. [화마는 적아를 가리지 않지.] “……?” 너무 뜬금없는 소리에 성구가 잠시 방심하는 사이, 폭발이 일었다. 꽈아앙! 화마에 휩싸인 그가 하늘을 날았다. “으으.” 아찔한 기분과 함께 잠깐 의식을 잃었나 보다. 멍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니 몸이 떨어지고 있었다. “죽….”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다. 황급히 사지를 버둥거리며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하늘을 날 수는 없는 일. 퍼어억! 바닥에 처박힌 성구가 엄청난 통증에 두 눈을 부릅떴다. “젠장!” 엄청난 고통이 나른하던 그의 감각을 일깨웠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았다. 성구의 몸은 10미터쯤은 자유낙하해도 견딜 정도로 단단하고 튼튼해져 있었다. 그동안 힘과 민첩, 그리고 체력의 강화석을 꾸준히 섭취한 덕분이었다. “후우.” 손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했다. 사력을 다해 봤고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오늘 훈련은 끝이구나. 성구가 하늘을 보았다. 거기서 떨어지는 거대한 화마가 있었다. [포기했느냐? 감히 전장에서 생을 포기하느냐?] 화르륵. “제길!” 미쳤다. 저 리치는 미친 게 틀림없다.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 황당함과 다급함. 그 뒤를 이은 생에 대한 절박함이 기력이 다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 줌의 마력이 반응하며 사방의 불꽃을 빨아들였다. 후우우웅. 겉보기에는 주변의 불길이 성구의 몸을 태우는 듯 했지만 반대였다. 성구의 화염 흡수. 바닥 쳤던 마력이 회복되며 몸에 활력이 돌았다. 황급히 일어섰지만 화마는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할 수 있을까?’ 자신의 화염검을 흡수해 버리던 리치의 수법이 떠올랐다. 화염 마법은 마력을 불태워 일으킨다. 성구가 가진 마력이 다르고, 리치가 가진 마력이 다르다. 같은 불이라도 성질이 다르기에 그것을 이용하기는 극도로 어렵다. 엄청난 마력 컨트롤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길.’ 성공의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해야만 살아남으니까. “으아아아.” 성구가 양팔을 뻗었다. 화염구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뜨거워지는 두 손으로 마력을 느끼려 애썼다. 화르르륵. 손을 태울 듯 넘실거리던 불꽃이 성구에게 빨려들어 왔다. [그하하, 겨우 기본은 익혔구나.] 성구는 몸속을 가득 메운 불꽃의 기운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희열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것이 제니스의 마력.’ 불꽃은 날리고 그 매개가 되는 마력만을 흡수했다. 우리에 갇힌 야수마냥 날뛰는 제니스의 마력이 느껴진다.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귀중한 하나를 배웠다. “감사합….” 화르륵. 인사하려는 성구를 향해 아까보다 더 크기는 작지만 폭발력을 담은 화염구가 날아들었다. 콰아아앙! [누가 끝이라 하였나?] “젠장!” 불꽃에 머리가 그슬린 성구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죽을 때까지 몰아붙일 작정이구나! 투기에 가득 찬 성구가 제대로 해보려는데 우진이 가로막았다. “밥 먹고 하자.” “…언제 오셨어요?” “너 하늘 날 때?” “구해주시지 그러셨어요.” “네가 애냐?” 보통 애가 아니라도 그런 상황이면 구해주지 말입니다. “대충 먹고 이동하자.” “네에.” 흐름이 끊겨서 그렇지, 성구는 휴식이 반가웠다. “으윽?”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마력이 들끓었다. 울컥하고 피를 토할 것 같아 얼른 제자리에 앉아 마력을 다스렸다. ‘아, 형님이 알고 끊었구나.’ 성구가 눈을 떴을 땐 우진이 불가에 앉아 꼬챙이에 꿴 정체불명의 고기를 뜯고 있었다. “먹어.” 하나를 휙 던져 주자 성구가 받아들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우진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흐음.” 불길도 사그라지고 전장이 정리되었다. 권속들을 모두 역소환시키고 성구와 우진 둘만 있다 보니 만만해 보여 새로운 적이 출현한 것일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 145화 - 자쿠행성 (2) > 끝 ⓒ 진설우 < 146화 - 자쿠행성 (3) > 접근하는 무리를 보곤 우진의 눈썹이 휘었다. “뭐야?” 경계심 가득한 그들은 다름 아닌 엘프족. 우진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제니스.” 슈로로록.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난 제니스가 우진의 앞에 섰다. “처리하고 성구랑 따라와.” 배도 채웠겠다. 이제 다시 사냥을 재개해야 할 때다. [로드의 뜻에 따라.] 화르륵. 리치의 지팡이에 검은 불꽃이 넘실거렸다. “성구야 이따가 보자.” “우적, 우. 네에, 엉님.” 성구는 격렬한 움직임에 소모된 열량이 많은지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삼켰다. 엘프들은 우진이 움직이자 우르르 몰려가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제니스의 불꽃이 작렬하기 전 아주 미묘한 타이밍이었다. “뭐야?” 잘생긴 은발의 엘프 사내가 무릎 꿇은 채 말했다. “존귀한 분께서 행성을 방문하셨다기에 존안을 뵙기를 청합니다.” “…….” 우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엘프는 오랜만이다. 별별 시답잖은 소리를 덧붙이는 저들의 아부도 간만이고 말이다. “뭐 어렵겠어. 봐.” “허락해 주셔서 감읍하옵니다.” 은발의 엘프가 몸을 일으키며 그를 보곤 다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우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됐지?” “예에, 존귀한 분께 저를 소개….” “싫어.” 우진이 말을 끊자 엘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 그의 비위를 건드렸을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중일 것이다. “볼일 다 봤으면 그만 죽어.” 우진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리치의 지팡이가 불을 뿜었다. 화르륵! “크아아악!” 해골의 눈두덩이에 자리한 붉은 광망이 흔들거리며 꼭 웃는 것 같았다. [엘프의 비명은 늘 정겹지.] 엘프 셋이 불시에 당해 불붙은 몸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물의 마법을 전개해 봐도 지옥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저, 저는 붉은 망치 연합의 수장 모르포님을 모시는….” 퍼어엉! 두려움에 말이 떨리는 엘프의 머리가 그대로 폭발하며 불길이 치솟았다. 전류가 흐르듯 스파크를 튀기는 지팡이를 든 리치의 붉은 안광이 성구를 향했다. [두려움만큼 잘 타는 재료도 없지.] “우웅?” 뭘 태운다구요? 성구는 입안에 든 고기를 빠르게 씹어 꿀꺽 삼켰다. 그사이 리치의 말은 이어졌다. [적을 공포에 떨게 하라. 너의 무대가 될 것이다. 그하하.] “…….” 입안에 음식을 삼키고도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성구였다. 살아남은 엘프는 둘.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겁니까? 자쿠 행성을 근거지로 삼는 세 연합을 동시에 적으로 돌리다니!” 분노에 찬 그의 말에 우진이 발길을 멈췄다. “그게 뭐?” “당신의 광오함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겠소!” “넌 못 봐.” “…….” “지금 뒤질 테니까.” 꽈아아앙. [그하하, 자쿠 행성을 구원할 때다.] 리치의 광소와 함께 그의 휘하에 배속된 해골마법사들이 우르르 소환되었다. 키에에. 기괴한 웃음과 함께 등장한 스켈레톤 메이지는 모두 화 속성의 마법사. 각자 미묘하게 다른 마력을 가진 그들의 두 손에 뭉친 불덩어리가 모조리 성구를 향했다. “……!” 아니, 왜? 아르펜을 구원하는데 왜 날 공격해? 콰콰쾅. 다시 시작된 수련을 뒤로 하고 우진이 발길을 옮겼다. 노란 도마뱀에 검은 모자든 붉은 망치든 상관없다. 모조리 파괴하고 모조리 뺏어주마. 놈들을 발판으로 트라넷의 모든 차원 영주를 처치해 버릴 테다. *** 락샤는 바람의 정령과 함께 하루를 꼬박 달렸다.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탑이 보이자 더욱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마을의 상징. 라티족이 대대로 기원제를 지내는 고대의 기둥을 차원 영주들에게 모두 뺏겨버리고 인공적으로 쌓은 탑이다. 그 주위로 넓은 돌과 나무, 흙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로 향하는 숲에 진입하자 라티족 전사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락샤!” “리비토.”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무녀님께 가야 해.” 락샤의 다급한 표정을 보곤 리비토가 길을 내어주었다. 숲길을 내달려 탑의 중심부에 도착하자 늙은 라티족 여인이 그녀를 맞이했다. “락샤.” “츠츠샤 무녀님!”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 놀라느냐? 조금 진정하거라.” 츠츠샤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락샤는 흥분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걱정과 불안이 옅어지는 기분. 하지만, 위기감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리아의 요새가 무너졌어요.”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다시 전쟁이 시작된 게냐.” 연합은 서로를 물고 뜯으며 반목한다. 그들 세력 싸움의 틈바구니에 끼인 라티족은 생존했다기보단 그들의 관심에서 잊혀졌다는 것이 맞는 표현. “아니에요. 연합이 아니라 레릭을 해치운 그 새로운 포식자였어요.” “응? 그가?” 신에 근접한 존재들. 던전을 가지고 거점을 세우며 신의 기적을 이뤄내는 그들. 세 곳의 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새로운 포식자의 등장은 오랜만이었다. “리아라면 검은 모자 소속이 아니더냐?” “네, 문제는 그가 모르포님도 건드렸어요.” “붉은 망치까지….” 츠츠샤 무녀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염탐꾼들이 보내온 정보엔 그가 노란 도마뱀 연합과 마찰 중이라 하였는데…….” 세 연합과 마찰이 있다는 것은 자쿠 행성의 모든 포식자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 “그도 곧 잊혀지겠구나.” 츠츠샤의 말에 락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릭을 해치운 자였어요! 무녀님, 전설로 내려오는 그일지도 몰라요.” 최고의 전사 레릭이 그의 손에 죽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락샤이기에 그 광경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의 압도적 강함과 기세가. “무슨 전설 말이더냐?” “포식자를 집어삼키는 포식자가 나타나 행성을 구원할 것이란 전설이요!” 흥분으로 떨리는 락샤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츠츠샤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이 가여운 것.” “왜 그러세요?” “그 전설은 잘못되었단다.” “예?” 츠츠샤는 이 어린 라티족 주술사를 어루만졌다. “그 전설은 희망을 위해 꾸며진 말이란다.” “예?” “구전되어 오는 진짜 전설이 무언지 아느냐?” “…….” “포식자를 집어삼키는 포식자가 나타나는 날 행성의 종말이 다가온다.” “……!” 구원이 아니라 종말이라니! 락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가 전설의 포식자가 아니길 빌어야겠지.” 행성의 끝을 함께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흐흑, 저흰 어쩌죠?” 희망이 없다. 절망뿐인 행성의 미래에 락샤는 흐느껴 울었다. 미처 자신의 그림자가 웃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말이다. *** 락샤가 집에 칩거한 지 이틀이 지났다. 부쩍 야윈 그녀의 앞에 어머니와 다름없는 츠츠샤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락샤, 한술 뜨려무나.” “…괜찮아요.” 힘없이 웃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츠츠샤는 자신이 괜한 말을 전한 것은 아닐까 후회했다. 강한 아이라 이겨낼 줄 알았다. 헛된 희망이라도 마음에 품도록 그대로 둬야 하는 것이었을까. 락샤는 마음부터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구르르릉. 그때 진동과 함께 창이 떨렸다. 츠츠샤와 락샤가 놀라 서로를 마주보는데 요란한 종소리가 곧 귀를 시끄럽게 했다. 침입자를 알리는 신호. “나가봐야겠구나.” 츠츠샤가 밖으로 나오자 마을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숲 너머에는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아이들을 한쪽으로 모아 피난 갈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녀가 주위를 분주히 뛰어가는 라티족 하나를 붙잡았다. “무슨 일인가?” “아, 무녀님. 숲 너머에서 대규모 언데드 부대가 진군 중입니다.” “하아, 이게 무슨.” 포식자들은 서로 연합을 이루고 저들끼리 세력 싸움을 하느라 바빴기에 소수만 남은 라티족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군대를 보내는 것은 근 10년 동안은 없었던 일. “무슨 일이래요?” 집에서 나온 락샤의 말에 걱정스레 답했다. “침입자가 발생했다는구나. 너도 어서 몸을 피하거라.” “아니에요. 전사들을 돕겠어요.” 락샤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것이 목숨을 내건 주술사의 마지막임을 직감해 츠츠샤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려무나.” “네, 어머니. 감사했어요.” 락샤는 진심으로 츠츠샤에게 인사했다. 그간 자신을 키워주고 주술의 은혜를 베푼 그녀는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락샤가 달려가니 숲을 덮친 화마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그곳에 은신하고 있던 라티족 전사들도 황급히 몸을 빼내 마을 앞에 진을 꾸리고 있었다. 최후의 발악이자, 어린 라티족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한 마지막 일전이었다. “락샤!” “리비토, 어떤 자들이지?” “이 근처에선 본 적 없던 포식자의 부대다. 해골이더군.” “해골….” 레릭을 해치운 그자가 틀림없다. 그가 벌써 이곳까지 진군해 오다니… 그사이에 있는 포식자들의 기둥과 도시들은 어찌되었을까. 키키키킥! 곧, 해골 특유의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숲을 헤치며 우르르 대규모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령마를 탄 검은 갑주의 기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돌진하려 했다. “칫, 시간을 벌어야 해.” 리더인 리비토의 말에 모든 전사가 투지를 불태웠다. 그때 불사의 군대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자. 강우진이 씽씽이를 몰아 앞으로 나왔다. “여긴 뭐야?” 그가 조잡해 보이는 탑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거점 도시가 아니었다. “행성인들이군.” 우진은 그림자를 불러 들였다. “왜 경험치도 얼마 안 되는 이런 데를 안내하고 그래. 돌아와.” 명령에 따라 락샤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깨비가 쑥 하니 빠져나와 우진의 그림자로 흡수되었다.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그대로 정보가 되어 뇌리에 흡수되었다. “흐음, 토착민들 피난지구만.” 임모탈이 불안한 눈초리로 불사의 군대에 마주 선 라티족 전사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의 조잡한 마을도. 그의 입술에 미소가 내걸렸다. “쓸어.” 작은 경험치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괜히 동선이 꼬였으니 이거라도 수확하고 가야지. 행성인이라고 혈석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업적 포인트가 올라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케케케! 군대가 진군하려는데, 라티족 전사들의 앞에 검은 연기와 함께 데스나이트 하나가 소환되었다. 쿠웅! 그의 한쪽 무릎이 굽혀져 바닥에 닿으며 허리를 숙였다. [왕이시여!] “레릭?” 지배력에 굴복하여 자신을 따르는 종. 녀석을 유지하는 데 지배력 포인트가 320이나 든다. 차차 줄어들고 있는 중이지만 말이다. [아량을 베풀어 이들을 살려주소서.] “호오.” 아직 자신에 대한 완전한 굴복이 이뤄지지 않아서일까? 감히 왕 앞에 자신의 뜻을 전하다니. “재밌네.” 우진이 씽씽이에서 내려 걸어갔다. 레릭의 뒤로 라티족 전사들의 술렁임이 피부로 전해졌다. 우진은 천천히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반항기 가득한 권속과의 밀당도 오랜만이구나. “싫다면?” […….] “내가 동족을 죽이라 한다면?” [죽이겠나이다.] “호.” 레릭이 자신의 휘어진 검을 바닥에 꽂고는 두 손으로 엎드려 머리를 찧었다. [뭐든 하겠나이다.] 우진의 귀로 익숙한 알림음이 느껴졌다. <데스나이트 ‘레릭’이 간절히 바랍니다.> <레릭의 복종심이 높아집니다. 소모 지배력이 감소합니다.> 우진이 피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츠츠츳. 불타는 숲을 뚫고 진군해 온 불사의 군대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우진과 레릭만이 마주 보고 있자 그의 머리가 다시 한 번 바닥을 찧었다. <레릭의 충성심이 높아집니다. 소모 지배력이 감소합니다.> <레릭의 신뢰가 두터워집니다. 소모 지배력이 감소합니다.> 레릭을 유지하는 데 들던 소모 지배력이 빠르게 줄어들더니 종래에는 1이 되었다. “흠, 좋아. 돌아가지.” 우진이 긴장한 얼굴의 라티족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등을 돌렸다. [왕의 아량에 충성의 검으로 보답을….] 레릭이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고, 우진이 열 걸음쯤 물러났다. 그의 등을 보고도 라티족 전사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락샤만이 흐르는 눈물로 연기가 되어버린 레릭의 자취를 쫓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진이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잠깐.” 등을 돌린 그의 시선이 탑의 꼭대기에 머물렀다. ‘낯익은데?’ 안력을 돋운 그의 시야에 탑에 내걸린 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훼손된 트래쉬의 수호> 우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냥 돌아갈 수 없겠는데? < 146화 - 자쿠행성 (3) > 끝 ⓒ 진설우 < 147화 - 트래쉬의 수호 > “레릭.” [부르셨나이까?] 우진의 부름에 레릭이 검은 연기와 함께 등장해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걸 가져와.” […….] “막아서는 놈은 모두 베어라.” […명을 따릅니다.] 탑의 상단에 걸린 깃이 무엇인지 알기에 잠시 망설였으나 곧 몸을 날렸다. 탑을 향해 날아가다시피 한 레릭이 펄럭이는 천 조각을 가져왔다. 마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라티족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우진은 레릭이 공손히 바치는 천 조각을 받아 쥐었다. 그러자 라티족 전사들이 두려운 기색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트래쉬의 수호.’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 중 수호 망토. 그것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멈추시오!” 우렁찬 소리와 함께 등장한 라티족 노인에 전사들이 분분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족장님.” 무리의 최고 어른이자 그들의 리더. 페피오 족장은 우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것은 파괴신의 신물! 하찮은 포식자가 취할 물건이 아니다!” “파괴신을 아는가?” 우진의 물음에 페피오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오만방자한 포식자 놈들도 무서워 도망치는 태초의 신 중의 신.” “…….” 우진이 미소 지었다. “내가 이걸 가져가겠다면 막을 건가?” […….] 우진의 물음에 레릭이 더욱 긴장했다. 막겠다면 모조리 죽을 것이다. 페피오 족장은 코웃음 쳤다. “흥! 포식자 놈들이 신이라도 되는 양 우쭐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신의 기물. 취하는 순간 저주로 몸이 녹아내릴 것이다.” 우진이 눈을 빛냈다. ‘몸이 녹아내려?’ 차원 영주가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을 취하면 몸이 녹아내린다라…. <훼손된 트래쉬의 수호> 트래쉬의 수호 갑옷과 망토. 흉갑과 견갑은 사라지고 해진 망토만이 남았다.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효과 : 지배 + 100, 봉인, 봉인, 봉인 스킬 : 무한의 영혼 저장, 봉인, 봉인 세트 효과 : 봉인 많은 효과가 있지만 훼손된 상태라서 그런지 대부분이 봉인되어 있었다. 그나마 있는 지배 스탯의 보정치도 원래 옵션에 비해 한참이나 낮은 수치였다. 영혼 갑옷을 통해 우진의 주위를 맴도는 영혼의 개수에 제한이 없어졌다. 항상 착용하고 있어야겠지만 이것만하여도 엄청난 스킬이다. 수만의 영혼을 저장해 두면 이후 기습적인 공격이나 습격은 모조리 막아낼 수 있다. 핵폭탄이 터져도 영혼의 보호막이 견뎌내 줄 것이다. 그야말로 트래쉬의 수호 아이템. 우진이 히죽히죽 웃으며 낡은 천을 보고 있자 페피오의 옆에 있던 라티족이 귓속말했다. “어쩌죠? 저걸 뺏기면 저희는 평생 유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트래쉬의 수호를 깃발로 내건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음울한 저주를 내뿜는 신물인지라 삿된 몬스터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포식자들이 무리를 이끌고 공격해 들어오면 그도 별수 없지만 말이다. “걱정 말거라. 취하는 순간 저주로 죽게 될 것이다.” 페피오는 확신했다. 일생 동안 세 번의 차원 영주가 저것을 취하는 것을 보았고 세 명이 죽었다. “오히려 잘됐군요.” 마을을 위협했던 포식자가 독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모두의 눈이 우진과 그의 손에 들린 망토로 향했다. 펄럭. 한 번 허공에 먼지를 턴 우진은 그것을 목에 둘러매었다. 견갑이 없으니 태가 안 났으나 그 효과는 확실한지라 즉시 스탯이 오르며 스피릿 아머의 귀속 영혼의 제한 수가 사라졌다. 우진이 만족스런 웃음을 내짓는데, 페피오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저, 저주가 어찌하여….” 지난날의 기억을 들춰보아도 망토를 두른 모든 이가 죽었다. 그런데 눈앞의 포식자는….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놀라는 그에게 우진이 말했다. “이건 내가 가져가지. 불만 있으면 빨리 말해.” “…….” 불만 있다 그러면 죽일 거면서. “그냥 가시오.” “좋아. 다음에 마주치지 말자고.” 전쟁 없이 좋은 전리품을 얻었다. 영혼의 개수 제한도 풀린 마당에 라티족들의 영혼을 채집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몬스터야 많다. 우진이 기분 좋게 돌아가자 페피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설이….” “족장님!” 락샤가 달려와 족장을 부축했다. “파괴신의…. 결국 행성이 파괴되고 말 게다.” “…….” 포식자를 집어 삼키는 포식자. 새로운 파괴신의 진전자가 자쿠 행성에 나타나 그의 유물을 거뒀다. 사라진 강우진을 살피는 락샤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 3일간 거점 주위를 돌며 몬스터들을 사냥했지만 함정이었다. 점점 손발이 맞아가며 자신감이 올랐을 때 적의 빈틈을 노렸고, 역으로 궁지에 몰렸다. “제길.” 백종도가 욕설을 뱉었다. 블랑카의 버프를 받고도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위이이잉. 메르디의 기도로 몸에 활력이 돌며 치료되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진즉 죽었어도 이상치 않았으리라. “한계네요.” 극한의 상황에서도 해솔은 차분히 무리를 이끌었지만 이제 정말 방법이 없었다. 이미 쌀독에 빠진 쥐 꼴이었다. 발버둥 쳐 봐야 독 안이다. “임모탈은 아직입니까?” 메르디의 말에 재민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연락했지만 거리가 꽤 있나 봐요. 반나절은 걸린대요.” 어떻게 보면 자신 때문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스탯의 영향인지 전투에 대한 자신감이 과해졌다. 피의 갈망은 커져 갔고 강함에 취해 미쳐 날뛴 도재민이다. “제 잘못이에요. 좀 더 신중해야 했어요.” “아니야. 내 판단이었어. 자책할 필요 없어.” 해솔의 말에도 재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버티지도 못했어.” 해솔의 말대로였다. 재민의 가히 폭발적인 공격력이 없었다면 여태 여기 있지도 못했다. “죽은 것도 아닌데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깝다. 최대한 버텨보자.” “네, 형.” 도재민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실수는 실수고, 팀원들이 있는데 벌써 죽을상을 지을 순 없다. 어려워 보이지만 최대한 강우진이 올 때까지 버텨봐야지 말이다. 쿠에에에! “또 몰려오나 보네. 준비하자.” “네!” 서로에게 목숨을 내맡겨야 하는 긴박한 전장을 함께해서일까. 파티의 신뢰는 3일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어져 있었다. 엄청난 적의 물량 공세에 협곡으로 도망친 것이 실수였다. 점점 길이 좁아져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 효율적이었으나 도망칠 곳 또한 없었다. 쉴 새 없이 전투를 벌여야 하니 지칠 수밖에 없는 노릇. 메르디와 블랑카의 보조 마법으로 인해 겨우 버틸 뿐이었다. 백종도와 도재민이 달려오는 오크 부대를 보며 앞으로 나섰다. “치료 마법도 듣지 않으니 절대 무리하지 마.” “네, 형.” 흡혈귀가 되어버린 재민은 메르디가 치료할 수 없다. 스스로 흡혈해 치료하거나 블랑카가 걸어주는 재생 회복 같은 보조 마법밖에 듣지 않는다. “그럼 가보자.” “네.” 백종도가 주먹을 검게 물들이며 달려나갔고 도재민은 그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치달렸다. 전에 비하면 확연히 달라진 움직임. 팟, 팟! 전방의 적과 부딪힐 듯 다가간 재민이 내지른 손날이 정확히 오크의 목줄을 꿰뚫었다.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손톱은 훌륭한 검이 되어주었다. 꾸어어! 재민이 압도적인 빠르기로 오크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는다면, 백종도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걸리는 모든 것을 깨부쉈다. 쾅, 쾅! “흐흐. 어디 누가 지치나 해보자.” 백종도의 강화 능력에 블랑카의 버프까지 더해지자 이제는 정말 강철 인간이라 해도 될 만했다. 둘의 활약에 오크들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갔고 조금씩 일행은 협곡 안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시체가 산에 이르자 그들도 공세를 늦췄다. 그사이 뒤로 물러난 백종도에게 메르디가 기운을 불어넣는 축복을 걸어주고, 재민은 숨이 붙은 오크 하나를 끌고와 그의 피를 빨아먹었다. “이제 정말 막다른 길인데 어쩌지?” 해솔은 뒤를 힐끗 보며 걱정 가득한 음성을 뱉었다. 시체를 치워내면 또다시 공세가 이어질 것이다. 오크들은 그의 테이밍 능력도 잘 듣지 않는다. 온갖 집중력을 발휘한다면 한 마리 정도는 테이밍할 수 있겠지만 그래 봐야 전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크들이 요새를 이루고 있는 거점을 목표로 잡은 게 실수였다. “안 되면 절벽이라도 타야지 뭐.” “하늘 잠자리들이 가만 안 있을 텐데요.” “저놈들보다는 그래도 적잖아.” 애초에 협곡으로 도망친 것도 하늘에서 공격해 대는 하늘 잠자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생긴 건 곤충인데 크기는 헬기만 한 녀석들은 거미와 같은 다리로 적을 낚아채 공중을 날며 씹어 먹는다. “후, 차라리 오크들을 상대하는 게 낫겠어요.” 괜히 절벽을 오르다 잠자리에 낚아채이느니…. 시체를 대충 치운 오크들이 마지막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진군해 왔다. 까맣게 몰려 있는 그 수많은 병력을 보니 절로 기가 질렸다. 그렇게 죽이고 죽였는데도 저런 병력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공포스러웠다. “후, 자 다시 가보자.” 백종도가 투지를 불태우며 앞으로 나서다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게 뭐냐?” “어? 형님이 벌써 오신 건가.”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빨간 불덩이를 재민도 눈여겨보았다. 적의 추가 공격이 아니라면 무조건 아군. 불덩어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내 그 형체를 알 수 있었다. “…성구 형 같은데요.” “성구 씨 맞네.” 재민의 말에 종도가 동의했다.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성구는 오크 부대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콰아앙!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치솟는 불길과 그 충격파로 인한 뜨거운 바람이 협곡에 휘몰아쳤다. “으윽.” “저, 저것 보세요.” 해솔이 경악한 얼굴로 앞을 가리켰다. 화르르르륵! 협곡을 가득 채운 열기에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쾅, 콰쾅! 성구의 손짓 발짓에 따라 불길이 자유롭게 노닐며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웠다. 최해솔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성구 씨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자신과 던전 공략을 다니던 그 얼빠져 보이던 홍성구가 맞는 것인가? 화르륵. 불길을 해치며 걸어오는 성구를 보며 재민이 반갑게 튀어나갔다. “성구 형! 어떻게 된 거예요?” “후우, 어떻긴. 형님이 나 먼저 보냈어.” “아….” 성구는 머리칼에 아직 붙어 있는 불을 손으로 툭툭 두드려 끄고는 대뜸 물었다. “좋은 소식하고 나쁜 소식이 있어.” “뭐, 뭐예요?” “뭐부터 들을래?” “좋은 소식이요.” “형 이제 짱 세졌어. 막 하늘도 날아다녀.” 도재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의 인생에서 홍성구란 인간이 이렇게 멋져 보일 순간이 오다니. “전에 이야기했던 그 리치한테 배운 거예요?” “그래.” “나쁜 소식은요?” “그 리치가 날 죽이려 해.” “예?” 성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늘 저 멀리 날아오는 검은 물체가 보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 “젠장, 나 먼저 간다.” “저, 저희는요?” “같이 가야지.” “……?” 막다른 길인데, 어디로? 더 묻기도 전에 성구는 깊이 호흡하더니 불길 너머의 협곡을 향해 질주했다. 꽈아앙! 성구의 걸음마다 불길이 치솟으며, 협곡을 가로질러 거점을 향해 거대한 불의 협로를 만들어냈다. 일행들이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협곡을 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 147화 - 트래쉬의 수호 > 끝 ⓒ 진설우 < 148화 - 트래쉬의 수호 (2) > 꾸우웅! 돌쇠의 무쇠 주먹에 상대가 나가떨어졌다. 쿵, 쿵. 후우우웅, 콰앙!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하게 뛰어 넘어진 상대의 위로 떨어져 내린 돌쇠는 그대로 압박해 대가리를 바닥에 찧었다. [크으으.] 돌쇠에게 깔린 드레이크는 악어와 같은 입을 비집고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어디서 이런 괴물같은 놈들이 나타났지? 돌쇠에게 완전히 짓눌린 드레이크를 향해 우진이 다가왔다. “노란 도마뱀 쪽?” [그르륵, 검은 모자 연합이다.] “어? 도마뱀은 다 그쪽 연합으로 가는 거 아녔나.” [그르르르.] 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망토를 벗었다. “뭐, 아무렴 어때.” 트래쉬의 수호 망토를 드레이크의 콧잔등 위에 걸쳤다. 그러길 잠시 기다려 봐도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질 않았다. “흠, 착용해야 하나.” [크크, 멍청한 놈. 누가 코드도 없이 그딴 저주받은 물건을 취하겠나.]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지 알아?”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이 아닌가?] “아, 네. 코드는 뭐야?” [자격 없는 자가……. 내가 순순히 대답할 줄 알았더냐?] 드레이크는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으르렁거리며 입을 닫았다. 우진이 피식 웃고는 그의 콧잔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렇게 멍청하니 드레이크들이 드래곤 일족에 끼지도 못 하는 거야.” [그르륵.] 우진이 돌쇠를 보았다. “죽여.” [그어어어.] 콰앙, 콰앙, 쾅! 돌쇠의 강철 주먹이 밑에 깔린 드레이크의 머리를 연속으로 내리쳤다. 짓이겨져 터진 머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회색빛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자격이라.” 중얼거리는 우진을 향해 데스나이트 람손이 다가왔다. [마스터, 도시는 어찌합니까?] “파괴해.” [마스터의 뜻대로.] 람손이 사라진 후 그의 곁에 리치 제니스가 모습을 보였다. 우진이 뜻밖이라는 듯 그를 보았다. “애들 구해주러 가라니까.” [그하하, 그놈을 먼저 보냈다.] “성구? 되겠어?” [충분하지.] 뭐, 성구가 벌써 그렇게 발전했나? 고작 3일인데. 어쨌든 우진은 제니스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제니스, 내 권속이 될 때 말했지. 내가 특별하다고 말이야.” [로드는 특별하지.] “그게 이것을 입어도 안 죽는 거였어?” 우진이 손에 쥔 트래쉬의 수호를 내밀었다. [……그렇다. 트래쉬의 저주가 빗겨간 존재.] “흠.” 200년이나 아르펜의 침몰을 지켜본 제니스다. “내가 처음이었나? 이걸 취한 게.” [열두 명의 트라넷의 졸개들이 그것을 탐했고, 모두 사라졌다.] “죽었단 말이야? 놈들은 어차피 살아나잖아.” [죽음이 아닌 소멸.]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트래쉬의 집행을 찾으란 건가?” 우진이 아르펜에서 모았던 유물은 모두 방어구. 자신을 지키는 것들이지, 적을 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마스터의 권속이 된 것도 그 이유…….] 아르펜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리치가 된 제니스다. “뭐, 좋아. 구경해 본 적도 없는 집행이지만 차원 영주란 놈들을 모조리 잡다 보면 어떤 놈 창고에선 분명 나오겠지.” 우진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마리를 찾았으면 되었다. 물론, 실체가 불분명한 무기보다 트래쉬의 나머지 세트 아이템을 모으는 게 먼저지만 말이다. [마스터께 청이 있다.] “뭐, 말해.” [그놈을 이곳에서 키워봐도 되겠나?] “성구?” [마법의 재능만으로 보면 마스터를 뛰어넘는 감각…….] 아, 왠지 샘나는데? 성구 자식, 제니스가 저토록 인정하는 재능이라니. “맘껏 굴려.” [마스터의 첫 번째 살아 있는 수하를 만들어 주겠다.] “뭐, 죽으면 두 번째 리치인가?” [그것도 괜찮을지도.] 우진과 제니스가 마주 보며 씩 웃었다. [그하하, 그럼 녀석의 뒤를 봐주러 가도록 하겠다.] “그래, 가봐. 내가 가거든 여기 놈들 살아나는 족족 죽여버려.” 우진이 자쿠 행성을 초토화시키고 던전을 모두 공략한다 해도 또 새로운 차원 영주들이 링크해 올 것이다. 그것들은 좋은 연습 상대이자 경험치. 수련을 하자면 알맞은 대상이 될 것이다. “나도 슬슬 몇 놈 더 잡고 가봐야겠네.” 차원 영지의 보호 시간이 다 되어간다. *** 거점이 무너져 내렸다. 성녀는 차원의 조각을 잘 갈무리했다. “후우, 끝냈다.” 도재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로 벌러덩 누웠다. 탈진 직전까지 가기는 백종도도 마찬가지였다. 전장의 최선두에서 섰던 둘이니 피로가 가중되었다. “이번엔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해솔이 미안함을 담아 사과했다. 자신의 테이밍 능력은 유사인종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 단순한 사고의 몬스터나 야수형이 그에게 더 적합한 것. 지구에 있을 잭슨이라도 데려왔다면 덜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 파티에서 해솔의 존재감은 극히 낮았다. 유용한 것이 있다면 그의 텔레파시 능력으로 인한 사고의 공유 정도? 무전기 정도의 역할은 해주었다. “미안할 게 뭐 있나? 해솔 씨 없었으면 저 많은 전리품 수거를 어떻게 했겠어?” 두더지들이 시체를 헤집어 혈석들을 모아 나르고 있었다. 적에게서 뺏은 수레에는 막 수거하기 시작한 그것들이 가득 쌓이고 있었다. 지구였다면 던전 한두 개 털어서는 모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 “아티팩트도 굉장히 많아요.” 블랑카는 탐지 마법을 전개하며 신이 나 떠들었다. 혈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티팩트. 숨겨진 능력을 가진 물건들이 그야말로 발에 채는 상황이다. “후, 일단 조금 쉬고 탐색하자고, 강 아우도 온다고 했으니.” “네. 그런데 아까 그 화염 각성자는 괜찮을까요?” 블랑카의 조심스런 물음에 백종도가 피식 웃었다. “누구? 성구 씨?” “예에. 조금 급박해 보이던데…….” 거점을 초토화시켜 놓고, 주인인 차원 영주를 불태워 죽이곤 리치에게 쫓겨 저 멀리 사라진 성구였다. 아니, 눈에만 안 보일 뿐이지 간혹 폭발음이 들려오는 걸 보니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걱정 마. 성구 씨 튼튼해.” “허허, 하지만 저희가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지. 뒤쫓는 몬스터가 꽤 위험해 보이던데…….” 블랑카의 말에 해솔이 웃었다. “몬스터 아닙니다. 사장님 소환수입니다. 리치요.” “예에? 그게 리치였습니까? 너무 빠르게 사라져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블랑카가 머리를 긁적였다. 해솔이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성구 씨 평소엔 어리바리해 보여도 사장님 옆에서 가장 오래 버틴 사람입니다.” “…….” 블랑카가 ‘그게 왜?’ 란 얼굴을 했다. “사건 사고도 큰 것만 터지는 사장님 옆에서 여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 그 실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자신들이 쩔쩔매던 적을 한 번에 불태워 죽여 버린 그니까. 백종도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역시 몰이사냥엔 마법인데 말이야.” 왜 자신의 능력은 신체 강화인지……. 물론, 이것이 나쁜 건 아니다. 백종도 스스로도 꽤 만족했고 말이다. 특히 밤에 이 강화 능력은 제대로 빛을 발휘한다. 재민이 아까 그렇게 멋있고 다급해 보였던 성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성구 형도 수련 끝나면 합류하겠죠.” “허허, 성구 씨 보조 맞추려면 우리도 제대로 수련해야겠는데.” 이들의 등급은 A급. 성녀가 SS급이다. 홍성구도 SS급의 9서클 마스터가 되어 합류한다면 과연 그에 보조를 맞춰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실제로 일행 중 유일하게 성녀만이 지치지 않고 있었다. 여태 이 인원으로 사냥을 전개한 것도 그녀의 치유와 축복의 영향이 컸다. 순리를 역행한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재민만이 성녀와 상성이 좋지 않아 효과를 못 받아서 문제지만 말이다. “자, 이제 아티팩트도 모아보자고.” “가봅시다.” 해솔이 테이밍한 두더지들이 시체를 뒤져 혈석을 모으지만 아티팩트까지 챙기진 못했다. 직접 수거하는 수밖에 없으니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때 우진이 불쑥 나타났다. “사장님!” “형님!” “아우 왔어?” 모두가 우진의 등장에 반가운 기색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며칠 못 봤다고 이렇게 반가워해? 약탈 나가는 길이야?” 우진의 말에 블랑카가 고개를 저었다. “전리품 수거입니다.” “가식은.” 우진이 초토화된 거점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즐비한 몬스터들의 시체. “죽이고, 부수고 뺏고.” “…….”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부정하고 싶을까. “약탈은 약탈이지.” 사장님은 악당이 되고 싶으신 건가? 블랑카는 괜히 욱해서 한마디 했다. “저희가 지금 나쁜 짓을 한다는 것입니까?”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약탈이 나쁘데?” “…….” 왜 반박할 말이 안 떠오를까? 블랑카는 뭐라 항변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 없는 우진의 얼굴을 보자면 그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재민이는 나랑 잠깐 영지에 들리고, 나머지는 어떻게 할래?” 우진이 파티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계속할래요? 지구로 돌아갈래요? 4일 지났으니 지구는 하루 지났겠네.” 우진의 말에 블랑카가 반색했다. “돌아가도 됩니까?” “너흰 안 되고. 종도 형 보고 묻는 거야.” “…….” 쳇, 처음부터 그리 말하던가. 블랑카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음, 나는.” 백종도는 파티를 보았다. 모두가 아르달의 사람들. 우진이 자신의 의사를 묻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자신은 외부의 사람. 백종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만한 사냥터를 포기하면 안 되지.” 이들과 구르다 보면 백종도 자신의 능력도 향상될 것이다. 이곳은 지구와 차원이 다른 수준의 몬스터가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곳이고, 무엇보다 목숨줄은 확실하게 챙겨줄 성녀가 있으니 말이다. “좋아요. 그럼 사냥하시고, 길드 총회 있을 때 지구로 갑시다.” “좋아.” “그럼 아이템 채집이나 해. 난 잠시 볼일 보고 올 테니.” 우진이 허공에 손짓하자 붉은 포탈이 열렸다. 지이이잉. “재민아, 가자.” “네, 형.” 재민과 우진이 포탈을 통과해 사라졌다.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남은 이들도 알고 있었다. 우진의 차원 영지 아르달. 행성 간을 오가며, 차원 영지를 소유한 인간. 백종도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난 신과 호형호제하는지도 모르겠군.’ 그들이 거점을 뒤적거리는 사이, 우진과 재민은 차원 영지에 도착했다. “10분 남았네. 몸 풀고 천천히 해.” “네, 형. 그런데 부탁이 있는데…….” “뭔데?” 재민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포인트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응? 뭣하게?” “아이템 좀 맞추려고…….” “아.” 우진이 곰곰이 턱을 쓸었다. 아이템에만 의존하는 건 나쁘지만 언젠가는 능력에 맞는 장비를 갖춰야 한다. 본신의 능력의 활용도 중요하지만 적재적소에 아이템도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 법. “내가 줬던 걸로는 모자라?” 재민이 전략관을 맡으며 영지전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잦았다. 일정 포인트를 그에게 승리 수당으로 줬기에 꽤 많은 포인트를 쌓아뒀을 텐데. “제가 봐둔 게 조금 비싸서요.” “좋아. 사고 싶은 것 사.” “네, 감사합니다.” “일단 보호 시간부터 리셋하자.” “네, 형.” 재민이 전략관의 의자에 앉고, 우진이 왕좌에 앉았다. 보호 기간이 끝나고 적당한 대전 상대를 찾기 위해 영주들의 목록을 쭉 펼쳐 봤을 때였다. <차원 영주 리아로부터 결투를 신청받았습니다.> “뭐야? 이제 살아난 건가?” 우진은 분개하고 있을 그녀를 상상하자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당돌하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해야 할까? 복수심에 분노하고 있을 그녀가 눈에 선했다. <결투를 받아들였습니다. 전장으로 이동합니다.> < 148화 - 트래쉬의 수호 (2) > 끝 ⓒ 진설우 < 149화 - 아르달 in 서울 > 얼음의 대지에서 리아와 마주 섰다. 그녀가 아주 분노했을 것이라는 우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리아는 대뜸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제안 하나 하고 싶은데 어때?” “결투를 신청해 놓고 제안?” “우린 접점 행성이 없으니까. 네가 자쿠 행성의 거점을 파괴했잖아.” 차원 영지에 방문하는 것도 던전에 직접 가야 하니, 그녀와 대면할 수 있는 방법은 영지전과 결투뿐이다. “복수가 아니고, 제안?” “솔직히 부활 후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어. 그 정도 무력이면 행성을 지키겠노라 만용을 부릴 만해.” “만용이라….” “아, 미안. 강하고 말고를 떠나 어차피 그건 불가능한 거니까.” “또 죽고 싶어 안달 났냐?”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꺼냈다. 그녀의 수법은 전과 다르지 않으리라. 담배를 꺼내 피진 않았지만 어차피 지금 하는 대화도 결국 시간 벌기용에 지나지 않으리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워어, 진정해. 내 제안은 동맹이다. 너 정도의 무력이라면 확실히 검을 맞대는 것보단 손을 잡는 게 이득이지.” “배알도 없냐? 내가 죽인 게 얼만데.” “너 정도의 강자와 손잡는다면 그 정도 포인트는 아깝지 않다.” “…….” 우진의 눈썹이 씰룩였다. 무슨 생각으로 태연하게 자신을 죽이고 거점을 약탈하고 뺏은 적에게 손을 내미나 싶었더니, 죽은 영지민과 부하 모두를 그저 포인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 많은 포인트를 획득한다면 언제고 다시 살 수 있는 물건들. “거절하지.” 우진이 도끼를 쥐었다. 리아가 웃었다. “거절할 수 없을 텐데.” “……?” “난 널 이기지 못해. 하지만 네 주위의 인간들은 다르지.” “…….” 우진이 도끼를 든 채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접근에도 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협박이 어설프지 않아?” 우진이 도낏자루를 치켜들었다. “설마 끝까지 지구에 링크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건가?” 대단한 자신감이다. 일개 개인이 그 수많은 던전을 모두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말이다. 리아의 이죽거림에 우진이 코웃음 쳤다. “뚫리겠지.” “……?” 리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가 일었다. “그런데 왜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지? 주위 사람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건 안 되지.” 가족과 수아, 그리고 이제는 제법 정이 붙어버린 아르달의 사람들은 지켜내야 한다. 우진 스스로가 그러길 바라니까. “하면 왜….” “너 아니라도 그런 협박하는 놈들이 한 트럭이라서.” “……!” “다음에도 패기 있게 덤벼봐.” 우진이 손에 쥔 도끼가 리아의 머리통을 쪼갰다. 애초에 싸울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 진심인지 리아는 너무 허무하게 공격을 허용하곤 회색빛으로 화했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자의 권리를 실행합니다.> <창고 약탈, 영지 약탈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꽁승이네. 창고 약탈이지.” 스키아의 부츠같이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을 만드는 핵심 재료가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그것이 아니라도 귀한 보물을 얻는다면 영지를 터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었다. “제깟 년 하나 제해봐야 같지, 뭐.” 우진을 노리는 사람이 어디 리아 하나일까? 그녀 하나를 회유해 봐야 어차피 적은 많다.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이와 동맹하느니 차라리 적으로 남는 게 낫다. “아예 콱 밟아버려야 하는데….” 우진은 괜히 입맛을 다셨다. 죽은 영주의 거점이나 차원 영지만큼 쏠쏠한 약탈처는 없다. 리아의 다른 거점 도시나 던전을 알고 있다면 바로 가서 털어버릴 것인데, 아쉽기만 했다. “쳇, 아이템도 별거 없네.” 별 볼일 없는 아이템으로 약탈이 완료되자 우진의 시야가 다시 자신의 차원 영지로 돌아왔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재민이 기다리다 물었다. “형, 영지전 더 할까요?” “아냐, 보호 시간은 얻었으니까.” 결투든 영지전이든 승리하면 4일, 패배하면 12일의 시간을 얻는다. “저 그럼 포인트는….” “빌려 쓰도록 해. 얼마나 필요해?” 나중에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면 어차피 재민이 영지전을 이용해 벌어다 줄 포인트다. 미리 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17만 포인트예요.” “응?” 생각보다 많은 액수에 우진이 되물었고 도재민도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어렵겠죠?” 어지간한 차원 영지를 살 정도의 포인트.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주는 건 문제되지 않는다. 성구나 재민이나, 우진의 주변인들이 커줘야 리아 같은 무리들의 준동에도 가족을 지키고, 아르달도 지킬 것이 아닌가. 우진이 지박령처럼 그들에게 꼭 붙어 있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만, 그 정도 포인트나 투자해서 얻고 싶어 하는 아이템이 뭔지 궁금할 뿐이었다. “뭘 사려던 거야?” “뱀파이어 로드의 심장이요.” “뭐?” 우진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제가 천천히 모아서 살게요.” 재민은 무리한 부탁을 한 듯싶어 후회했다. 강우진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것만 하여도 분에 넘치는데 괜히 떼를 쓴 모양이었다. 자신의 약함을 뼈저리게 느껴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낳은 조급함일지도 몰랐다. “기다려 봐.” “예?” 차원상점을 뒤져 뱀파이어 로드의 심장을 찾았다. ‘20만이나 하네.’ 그간 재민이 수중에 3만 포인트나 모아두었던 모양. 우진이 그것을 구입했다. <뱀파이어 로드의 심장> 키에트 백작의 심장. 그의 생전 지위를 물려받는다. 재민은 본래 하급의 뱀파이어에게 물려 그의 하수인이 되어버렸다. 그를 죽이고 피의 의식을 진행해 힘을 뺏고 스스로 뱀파이어가 된 것이다. 아무리 몬스터의 피를 빨아먹고 성장해 봐야 한계는 있는 법. 보다 높은 상위의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서는 또다시 피의의식이 필요했다. 뱀파이어 귀족의 심장. 재민이 노리는 것은 백작 이상의 로드라 불리는 자들의 심장이다. 뱀파이어 로드는 대상의 피를 취하고 피의 유대를 통한 하급 뱀파이어를 거느릴 수 있었다. 그저 피 빨아먹는 몬스터일 뿐인 하수인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종족을 휘하로 둘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뱀파이어 가문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로드. 부하 욕심이 아니더라도 로드가 되면 성장 가능 한계치가 달라졌다. 100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두 배, 세 배로 늘어나는 격. “먹어.” “…감사합니다.” 우진이 아무렇지 않게 내미는 심장을 보고 재민은 거절하지 않았다. 감사함은 후일 목숨으로 갚으면 되었다. 지금 필요한 건 힘이고, 눈앞의 심장이다. “의식 마치면 돌아가서 제대로 한번 흡수해 봐. 곧 다른 행성으로 갈 거니까.” “다른 행성이요?” “아르펜.” “아.” 재민도 아르펜 행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함께 파티 사냥을 하며 친해진 성녀로부터 고향인 그곳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으니 말이다. “형은 사냥 더 안 하세요?” “내 걱정 말고 너나 잘해.”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빨리 의식이나 치러.” 우진은 혹시 모르니 피의 의식만 보고 지구로 갈 작정이었다. 우진에게 사냥터가 자쿠 행성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감당 못 할 지구의 여러 던전을 공략해 놓는 것도 중요했다. 아르펜으로 향하면 며칠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전에 급하게 브레이크가 임박한 던전들은 처리하고 떠나야 했다. 스아아아. 죽어서도 펄떡 뛰는 심장을 쥐자 그곳에서 뿜어져 나온 피의 안개가 재민에게로 흡수되었다. 무사히 의식을 마친 그는 무언가 분위기가 달라져 보였으나 변화는 미미했다. 출발선은 조금 어긋났지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변화는 더욱 커질 것이다. 전에 비할 바 없이 더 큰 성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럼 수고해라.” “네, 형.” 이전과 다르게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얼굴의 재민은 인사 후 자쿠 행성으로 향하는 포탈을 통과했고, 우진은 서울역 1번 출구로 향하는 포탈로 들어섰다. “어? 사장니임… 국왕님, 벌써 나오십니까?” 서울역 1번 출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우진을 맞이했다. 아직은 어색한 국왕이란 호칭이 부르는 사람은 어색한데, 듣는 당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승훈이는?” “외교부장관님은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셔서 본관으로 가셨습니다.” “그래?” “지금 연락해 볼까요?” “아냐, 됐어. 코앞인데 뭐.” 우진이 출구를 나와 이제는 익숙해진 잠복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세례를 받으며 아르달의 본관 건물로 향했다. *** 아르달의 본관 건물 한쪽에 배정된 외교부. 그중 사무실 한 칸은 외교부장관 우승훈의 집무실이었다. “히야, 원하는 것도 많네.” 승훈은 각국에서 보내온 협상안을 훑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들은 아직도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장관님, 총리실에 막 사절단 도착했답니다.” “흠, 알겠어요. 가봅시다.” 승훈이 직원과 함께 총리실을 찾았다. 그곳에 이미 아르달의 총리 정민찬과 일본 카네다길드의 이사, 미국 베드섹터길드의 이사, 그리고 영국의 사절단이 와 있었다. [반갑습니다. 외교부장관 승훈입니다.] 우승훈은 유창한 외국어로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전혀 어색함 없는 언어 구사에 통역은 필요가 없었다. 정민찬이 옆에 앉은 승훈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우 장관, 이번 협상은 평….” “총리님.” 승훈이 정색하곤 민찬을 보았다. “저를 믿고 이번 협상은 맡겨주시지요.” “응?” 민찬은 진지한 얼굴의 그를 보곤 잠깐 갈등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듯, 우승훈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아르달 조약을 체결할 때도 우승훈과 손발을 맞춰봤기에 그가 이런 쪽으로 전문적이진 않아도 크게 실수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같이 있으니 혹시 모를 일에 대해서는 즉시 바로 잡아 주면 되었다. “알겠네. 최종 결정은 나와 논의하세.” “그야 물론이지요.” 국왕을 두고 아르달의 직접적 운영은 총리가 모두 총괄한다. 대통령과도 같은 권한을 지닌 민찬의 영향력은 이곳에서 절대적이었다. 그 작은 나라인 아르달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굉장하니, 초대 총리인 정민찬에 대한 각국의 관심도 대단했고 말이다. 승훈이 일본에서 온 카네다길드의 사람들 앞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준비한 자료와 요구는 모두 읽었습니다. 6성급 이상의 던전 출현에 대한 사전 알림과 협동 공략에 대한 사안은….] 승훈이 능숙하게 리드하자 민찬이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름 자료 준비도 꼼꼼하고, 협상의 주도권을 뺏어오는 것도 능했다. 승훈은 던전에 관한한 아르달은 외부의 어떤 단체나 국가와 견줘도 절대적 갑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적절히 이용했다. 카네다길드와 던전 공략의 상호 협력과 이후 운영 지분의 배분에 대해 마무리한 후, 미국의 베드섹터길드와 마주했다. [제안하신 영화제작에 관한 건 사장님이 거절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아울러 현재 저희 아르달은 타이탄길드와 동맹상태로….] 30분도 넘게 열정적으로 말을 주고받던 그들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조율을 미뤘다. [후, 내일 다시 논의하도록 하죠.] 베드섹터는 타이탄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대형 길드. 협상이 쉽지 않았다. 승훈이 영국에서 온 협상단의 앞에 앉으며 먼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런 자료도 보내주지 않고 덜컥 방문부터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우진 사장님이 아르달….] [어허! 국왕입니다.] [강우진 왕이 말하길, 본국의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라 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 사장님이 보내셨군요.] 우승훈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래, 무엇 때문에 오셨죠?] [단도직입적으로 차원의 조각을 구입하고 싶습니다.] [아, 아이템 구입하러 오셨군요.] [예, 협상은 아르달에서 하라고 했습니다.] 아, 사장님이 드디어 나 우승훈의 능력을 인정하셨구나. 이런 일도 맡기고 말이다. 그가 기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래, 얼마까지 알아보셨어요?] [아르달의 왕이 제안하길 항공모함 한 척이라 했습니다.] [예? 뭐라구요?] 승훈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눈의 그가 정민찬을 보았다. ‘차원의 조각이 뭡니까? 귀한 겁니까?’ 입으로 묻지 않아도 승훈의 놀란 얼굴이 격렬히 묻고 있었다. < 149화 - 아르달 in 서울 > 끝 ⓒ 진설우 < 150화 - 아르달 in 서울 (2) > [하, 항공모함을 제시했다고요?] [예, 그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영국 왕실과 정부에서도 검토한 결과, 차원의 조각은 충분히 귀한 물건이지만 항공모함 자체를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판단되어 향후 5년간 동해에 주둔하며 아르달의 방위를 담당하는 쪽은 어떤지….] 너무 엄청난 제안에 승훈이 입을 쩍 벌렸다. 생각하지 못한 일인지라 혼란스러워 놀란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말았다. 스스로 페이스를 잃고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거나 다름없는 일. [항공모함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아르달과 정부가 협약하여 5:5로 지급하는 것으로 한다면, 5년간 주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 건은 제가 정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차후에 국왕님을 뵙고 다시….] 이야기를 하려던 승훈이 갑작스럽게 열리는 문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기다렸던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다 있었네.” “오셨습니까?” 정민찬이 우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항공모함이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저리 쉽게 질러버리다니, 차원의 조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우진은 영국에서 온 협상단을 보더니 대뜸 물었다. “한국말 해?” “할 줄 압니다.” 백발 영국인의 입에서 나온 유창한 한국말에 승훈이 벙찐 얼굴이 되었다. 영어를 할 생각만 했지 상대가 한국어를 할 줄은 꿈에도 모른 그였다. “그냥 하나 줘봐, 이거 줄 테니.”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차원의 조각을 꺼내 쥐었다. 영롱한 보랏빛을 내뿜는 그것은 일반인들도 이상함을 느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으음, 항공모함을 유지 운용하는 데 드는 인력은 수천 단위입니다. 아르달에 인수인계한다고 하여도 그럴 만한 인원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냥 배랑 안에 든 물건만 남겨. 사람은 필요 없어.” “……?” 아르달에 그럴 만한 인원이 있나? 한국 자체에도 항모를 운용할 전문 인력이 없을 텐데? 아니, 항공모함을 가져본 적도 없는 작은 나라에서 왜 그것을 욕심내는지…. “내가 알아서 해. 살 거야 말 거야?” “…연구의 목적으로 차원의 조각이 필요하지만 아직 어떠한 물건인지 제대로 모….” “다른 행성으로 통하는 차원 게이트를 구입할 수 있지. 던전을 소유할 수 있단 거야, 이거 하나로.” “…….” 우진의 말에 협상단은 물론, 미국과 일본의 길드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도 외부에 발표는 하지 않고 있지만 차원의 조각을 습득하고 있었다. 지금 그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인데…. “살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다른 데 팔고.” 우진의 강짜에 협상단이 난색을 표했다. “본국과 논의가 필요합니다. 내일 최종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 그 시간을 살 수 있겠어?” 강우진의 하루 시간은 얼마나 될까? 몇 시간 만에 던전을 공략해 버리는 그다. 3일 동안 전 세계를 돌며 완파한 던전이 몇 개인가? 그런 그를 하루 동안 잡아둔다? “감당할 수 있겠어?” “사, 삼십 분만 주십시오.”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카네다랑 베드섹터? 30분 내에 결정하면 하나 팔지. 아, 일본은 항모가 없네.” 우진이 미국의 베드섹터길드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가 급히 전화기를 꺼내는 모습에 영국의 협상단이 벌떡 일어섰다. “사겠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결국 살 거면서 튕기기는. “항모 가져와.” 우진이 차원의 조각을 협상단의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 그가 영문을 몰라 우진을 보자 어깨를 으쓱했다. “가져가.” “…이대로 말입니까?” 무슨 거래가 이런가? 이제 막 결정했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 귀한 것을 덜컥 내줘도 된단 말인가? 우진은 협상단의 걱정을 일소해 주었다. “들고 튀어봐, 영국을 지도에서 지워주지.” “…….” “그럼 다들 나가 봐. 아니, 늬들이 사장실로 와.” 우진이 민찬과 승훈을 보고 말하곤 총리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 한동안 정적에 휩싸인 사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우승훈의 폐부로 빨려들어 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항공모함이 왔다 갔다 하고… 수천 수조 원의 돈 단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한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기분이 이럴까? 그 중심에 선 듯한 느낌에 승훈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는 중이었다. “자, 그럼 베드섹터 쪽과의 협상은 내일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하죠.” 민찬이 정리 후 사람들을 내보내고 승훈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휘유, 국왕님은 항모를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는지.” “그냥 갖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으음.” 승훈의 그냥 한 말이 왠지 신빙성이 있어 민찬은 신음했다. 뭐, 지금 가서 물어보면 될 일. “어, 왔냐?” 우진은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는 그들을 맞이했다. “다른 일행분들은 안 오셨습니까?” “걔들은 아직 구르고 있지. 길드 총회 한다더니 왜 이렇게 차일피일 미뤄?” “그게 규모가 너무 커졌습니다.” “무슨 말이야?” “전 세계의 길드가 모두 관심을 보이며 참석을 희망하는 터라.” “쯧, 그래서?” “해머길드에서도 최선을 다 하는 모양입니다. 일단 예정일이 보름 뒤입니다.” “너무 늦는데?” 총회 끝내고 아르펜으로 가려고 했더니 말이다. “이래서 다른 데 일 맡기면 안 돼.” 우진이 듬직한 그의 부하 정민찬을 보았다. 모든 일 처리에 제약이 없으라고 나라도 만들고 총리까지 시켜줬다. “6일 뒤로 잡아. 그때 길드 사람 다 모아서 이야기 한 번 하고 아르펜으로 원정 간다. 올 사람은 오고 못 오면 뉴스로 보겠지.” “…갑자기 그렇게 촉박하게 일정을 주시면….” “여태 기다렸으면 됐지. 해머 애들 너무 느려. 네가 진행해.” “…….” 까라면 까긴 해야 하는데 앞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항공모함은 왜 필요하신 겁니까?” “아, 실험해 볼 게 있어서.” “골렘을 만드시려는 겁니까?” “응? 돌쇠야 고철만 줘도 되는데 항모를 왜 사와.” 굳이 골렘의 재료로 쓰자고 비싼 항모를 사올 이유는 없다. 민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덩그러니 항공모함만 가져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 큰 걸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한데….”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건 네가 채워야지.” 사소한 걱정은 대신해 줄 사람이 있는데 굳이 그가 할 필요가 없었다. “…….” 민찬은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아니면 따로 채워도 되고.” “혹시? 그 차원 영지의?” “그래. 지구인만으로 전쟁이 버거울 수도 있지.” “…….” 우진이 승훈을 보았다. “너 SNS 할 줄 알지? 내 거 가입 좀 해봐.” “예에? 사장님이 SNS를 말입니까?” 승훈이 깜짝 놀랐다. “내 휴대폰 가져와.” “넵.” 승훈이 우진의 휴대폰을 만지며 SNS에 가입시켰다. 아르달이라는 나라 자체가 등록되지 않았으나, 한국인으로서의 이중국적자였기에 그곳으로 가입했다. “…해서 이렇게 글 올리시면 됩니다.” “음. 좋아.” “아르달 공식 계정에 사장님 가입 소식 알리겠습니다.” 우승훈의 빠른 대처로 우진의 휴대폰은 갑자기 부르르 진동을 토해냈다. 띠링, 띠링. <빛바라기님이 당신을 팔로우합니다.> ……. “뭐야?” “아, 알람 끄겠습니다.” 이 와중에도 팔로우 수는 초 단위로 수십 개씩 증가하고 있었다. ‘내 거 추월하는 건 순식간이겠네.’ 유명 연예인만큼이나 많은 수의 팔로우를 보유한 우승훈이지만 강우진에게 추월당하는 것은 순식간일 듯싶었다. “이건 나중에 써먹고, 브레이크 임박한 던전 없어? 공략 요청 들어온 거.” “음, 그게….” 민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브레이크 임박한 게 몇 개 있긴 한데 전부 공략 요청이 없습니다.” “자력으로 처리하겠단 거네.” “예에,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오늘 보니 사장님이 아까 보여주신 차원의 조각 때문인 듯싶습니다.” “흠….” 우진이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욕심이 화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자업자득. “배탈 날 텐데.” “예에?” “아니야. 내버려 둬.” 어차피 강우진이 모든 던전을 틀어막을 순 없다. 터지는 곳은 터질 테고 지켜내는 곳은 지켜낼 것이다. 정 급하면 지원 요청을 할 테니, 자생력을 갖추는 것도 괜찮았다. “길드 신입 각성자 모집은 어떻게 됐어?” “모집 서류가 폭주 중입니다. 어차피 사장님이 뽑으실 테니 시간만 정해주시면 면접 시간 통보토록 하겠습니다.” 서류야 필요 없다. 성장 가능성은 그의 던전 클리어 이력과는 상관이 없다. 홍성구가 세계 탑 레벨의 각성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우진이 직접 보고 뽑는 수밖에 없다. “그럼 3일 뒤로 해. 그럼 할 말은 다 전했으니 난 간다.” 이후의 일처리는 이제 남은 자들의 몫.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차원 영지로 간다.” “그전에 사진 한 장 남기시지 말입니다.” “응?” “본인 인증 같은 거 말입니다. 사장님 SNS에 게시글이 하나도 없어서 말입니다.” “뭐, 찍어봐.” “고개를 이쪽으로 좀 틀어주십시오. 예, 그렇게.” 승훈이 우진의 자세를 잡아주고는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찰칵. “그럼 올려놔. 난 간다.” “예에, 살펴가십시오.” “그리고 넌 외교부인가 뭔가 때려치우고 비서 일이나 계속해. 다른 애들 보니까 어색하더라.” “…….” “아까 보니 협상도 잘 못 하더만. 소질이 없어 소질이.” 국왕님, 그 소질 없는 사람한테 휴대폰 산 당신은요? “그럼, 진짜 간다.” “예에.” 서울역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우진이 차원 영지로 향하는 포탈을 열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저 그런데 승진입니까, 강등입니까?” “음…. 승진 같은데.” 아르달 국왕 직속의 비서실장. 우승훈이 우진의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SNS에 업로드했다. *** - 아르달 길드 신규 각성자 채용! - 현대판 노아의 방주, 아르달 국적 취득의 유일한 기회. - 아르달 왕국 항공모함 양도 계약 체결…. - 국적 불문, 항공모함 탑승 경험 우대. 지원부서 모집. - 특집, 강우진 SNS를 시작하다! ……. 수십, 아니 짜깁기 기사까지 더하면 수백의 기사가 쏟아지고, 실시간 검색어는 또 강우진과 관련해 도배되었다. 신디는 휴대폰을 들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동창회의 충격 때문에 모든 활동을 접고 정신과 치료를 겸하며 집에서 쉬고 있는 그녀였다. “나도 지원해 볼까?” 연예인이 무슨 소용이고, 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인데. 돈이 지켜주던 시대는 이제 끝을 향해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강우진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찡했다. 신디는 휴대폰의 주소록을 스크롤해 도지원을 찾았다. 전화 버튼을 누르려던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파묻었다. “하아, 미쳤나 봐.” 도지원이 미치도록 부럽다. “에휴, 정신 차리 자.” 임자 있는 남자를 마음에 품어 뭣 하는가? 그냥 그가 자꾸 생각난다 뿐이지 한눈에 반했다거나, 사랑에 빠졌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동경? 팬들이 자신을 보며 느낄 감정들을 신디는 우진을 보며 느끼고 있었다. 남자를 향한 이 정도의 호감이나 관심은 그 이전에도 느껴보았던 그녀다. 한순간 흘러갈 이 감정에 인생을 내맡길 정도로 그녀는 열정적이지 않았고,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정도의 이성은 갖추고 있었다. “어휴, 슬슬 활동이나 다시 해야지.” 휴식도 적당해야지, 평생 쉬는 수가 있었다. 휴대폰을 베개에 던져 두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캬아.” 냉수를 마시니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 신디는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니? 말을 해, 신디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지원의 목소리에 신디는 어쩔 줄 몰라 했다. < 150화 - 아르달 in 서울 (2) > 끝 ⓒ 진설우 < 151화 - 각성자 모집 > 우진은 차원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전략관인 도재민을 향해 의지를 보냈다. [재민이 뭐하냐?] [덩치 큰 곰 때려잡고 있어요.] [포탈 수비는?] [어? 수비해야 되는 거예요?] 당연하지. 복귀용으로 열어둔 귀환 포탈은 차원 영지 아르달의 영주성에 곧장 이어져 있었다.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그의 탓도 있는지라 그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전리품들은? 그거 옮기라고 열어뒀더만.] [아, 그런 거였어요? 어쩐지 저 다시 돌아오고도 안 사라지더라구요.] […….] [수레에 싣고 다니고 있는데 너무 많아요.] [기다려 봐.] 우진은 좀 더 수월한 방법이 없을까 찾아보다가 영지 관리에서 해답을 찾았다. 가신들의 재량으로 쓸 수 있도록 포인트를 지정해 주는 관리 칸에서 전략관인 재민에게 영지창고에 대한 접근 권한을 주었다. [인벤토리 열어봐.] [예? 인벤토리요? 우왁! 이게 뭐예요?] [전리품 싹 다 거기로 넣어.] [와, 대박. 우와, 신기하다.] 재민은 연신 감탄사를 흘리면서도 전리품을 모조리 창고로 넣고 있는 중인지 우진의 인벤토리에 새로운 아이템들이 속속 업로드되고 있었다. “흠, 영지 관리라….” 영지민들이 던전을 통해 행성을 탐험, 사냥하고 혈석과 아이템을 벌어온다. 영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으면서 포인트를 올리며 랭킹을 상승시킬 수 있다. 그저 관리만 하면서 말이다. “뭐, 이건 이거고.” 우진은 인벤토리를 보며 필요한 아이템이 있나 전리품을 감상하다가 와이번 하나를 불렀다. 등에 안장이 달려 있는 놈과 함께 자쿠 행성으로 향하는 포탈을 통과했다. 포탈을 통과하자마자 그대로 없애버리고, 깨비를 불러 주변을 탐색하도록 했다. “던전도 좋고, 거점도 좋아. 아무거나 찾아와.” [크큭, 그러지. 아주 아주 좋은 먹잇감을 물어오지.] 우진은 깨비의 기분 나쁜 웃음을 애써 무시했다. 스스로 살육에 미친 권속을 뽑으라면 주저 않고 깨비를 꼽을 것이다.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로 내모는 듯한 그가 꺼림칙한 우진이었다. “나도 가볼까?” 우진이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다. 키에엑! 포효한 와이번이 뒷다리에 힘주어 힘껏 점프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잠깐의 시간 동안 꽤 높이 떠오르더니 우진의 의지대로 방향을 잡아 날았다. 슈아아악. 귓등을 때리는 바람 소리에 고막이 얼얼했으나 참을만 했다. 어차피 더 심해지면 자동으로 영혼의 보호막이 작동할 것이었다. 한참을 날아가던 우진의 눈에 폭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적의 거점이 눈에 들어왔다. *** 붉은 망치 연합의 차원 영주 조셉은 자쿠 행성에 건설된 자신의 거점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에 얼른 그곳으로 왔다. “감히 어떤 놈이 나의 거점을 공격해! 어디 연합이냐?” 거점의 관리를 맡긴 가신이 고개를 조아렸다. “연합이 아닙니다. 최근 자쿠 행성에 웬 미친놈이 하나 왔는데 그쪽인 것 같습니다.” “노란 도마뱀 죄다 박살냈다던?” “예에.” 차원 영주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최근 동기화가 진행 중인 지구라는 행성에 노란 도마뱀 연합의 영주가 모조리 쳐들어갔다가 비명횡사한 일은 말이다. 지구 행성에 링크한 각성자는 그곳 출신의 강우진이라는 차원 영주가 유일. 그가 앙심을 품고 자쿠 행성에 복수하러 왔다는 소식은 붉은 망치 연합도, 검은 모자 연합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감히! 요새의 대 방어 무기를 작동해.” “그것이… 벌써 파괴되었습니다.” “뭣이?” 요새의 최후 병기인 그것이 파괴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비병들은 그럼 얼마나 남았나?” “거의 살아 있습니다. 적의 공세가 워낙 치열해 감히 접근도 못하고 있습니다.”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마지막 병기가 파괴되었는데 수비병들이 거의 살아 있다니…. “그럼 누가 싸우고 있단 말이냐?” “…처들어온 놈이 둘인데 둘이서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 잘못 들은 것인가? 조셉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둘이 싸워?” “예에.” 미친놈들인가? 싸우려면 널린 게 땅인데 왜 여기서 싸운단 말인가? 쿠르르릉! 성이 흔들리는 소리에 조셉이 인상을 썼다. “감히 이놈들이!” 괜한 남의 싸움에 자신의 도시가 파괴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분기탱천한 조셉이 성을 박차고 나섰다. 자신의 무기인 거대한 지팡이를 들고 높은 탑으로 올라섰다. 콰아앙. 쾅! “소형 파이어 골렘인가?” 인간형 정도 크기의 불타는 파이어 골렘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셉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쾅, 콰앙! [그하하하.] 광소와 함께 뒤에서 연신 폭발음을 일으키며 무차별 마법을 난사하는 자는 살아 있는 자가 아니었다. “리치?” 조셉이 상황을 파악했다. “강우진이란 놈이 네크로맨서라더니, 정체가 리치였구나!” 스스로 리치가 된 독한 놈이 차원 영주가 되었다니. “아, 아닙니다. 강우진이란 영주는 인간이고, 저건 권속이랍니다.” “뭐?” 조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리치가 쫓고 있는 앞에 놈은 무엇인가? “어, 어? 이쪽으로 옵니다.” “감히!” 조셉은 지팡이를 들고 마력을 끌어모았다. 행성이 망하기 전, 열 손가락에 꼽히던 대마법사가 그다. 감히 리치와 정체불명의 파이어 골렘 따위가 자신의 거점을 난장판으로 만들다니. 화르르륵! 지옥의 겁화도 살라버릴 듯한 극강의 열기가 모여들었다. “재로 만들어주마!” 슈아아악! 드래곤 브레스처럼 뿜어져 나간 그 열기는 파이어 골렘으로 추정되는 괴 생명체에 그대로 직격했다. 농담이 아니라 드래곤의 브레스에도 필적하는 조셉의 필살기. 하지만 놈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내성이 대단했다. 슈슈슉! 열기를 뚫고 그대로 돌진한 놈이 확 커지더니 불주먹을 내 뻗었다. “감히!” 얼른 보호막으로 틀어막았지만 조셉은 근 10년간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경험을 해야 했다. 콰앙! 보호막째로 그의 몸이 탑에서 날아가 성의 외벽에 처박혔다. “이런 치욕이 있나!” 벌떡 일어난 그가 상대를 찾는데 그것은 이미 머리맡에 와 있었다. 정수리를 향해 내려찍는 발길은 불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콰직! “더럽게 뜨겁네.” 투덜거린 성구는 조셉의 머리통이 터지며 그의 몸이 회색빛으로 화해 사라지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차원 영주였어?” 차원 영주라는 것이 이렇게 약한 존재인가? 잠깐의 고뇌가 스쳐 지나간 성구의 뇌리에 제니스의 약속이 떠올랐다. 차원 영주나 던전의 파괴 시 10분간 휴식. 성구가 하늘을 보니 불꽃으로 만들어진 긴 몸의 화염용이 생성되어 있었다. 저건 유도 속성이라 도망쳐도 끝까지 따라온다. “10분 휴식! 저 이놈 잡았어요.” [그흐흐, 아쉽구나.] “…….” 아쉽다니, 정말 죽일 셈인가. 대꾸할 기운도 없고, 시간도 아깝다. 성구는 얼른 자리를 깔고 앉아 아직도 후끈한 주변의 열기와 몸에 남은 화염을 흡수했다. 그사이 리치는 도시를 향해 화염용을 내보냈다. 콰콰쾅. 화염용이 지나는 길마다 불길이 치솟고 건물들이 무너졌다. ‘으음.’ 몸 안에 충만한 화력을 느끼며 성구가 눈을 떴을 땐, 리치와 함께 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어? 형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이제 제법 하네.” “헤헤.” 차원 영주를 때려잡을 정도면 엄청난 발전이다. 우진이 씩 웃으며 리치를 보았다. “제대로 해, 제대로.” [그하하,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참이다.] 저기요 형님, 해골님아. 무슨 대화를 그리 재밌게 하시죠? [이제 실전으로 해볼까?] “여태 실전 아니었….” [실전만큼 유용한 훈련이 어딨나? 그하하.] “저 누구랑 대화하는….” 우진이 혼란스러워하는 성구와 신이 난 제니스를 보며 말했다. “이왕 할 거 주변 정리도 좀 하면서 해.” [그하하, 좋지. 특혜를 주지. 차원 영주나 거점 다섯 개를 파괴하면 10분간 휴식.] 성구가 울상을 지었다. “아, 고마워서 눈물이….” [10초 후 죽여주마!] “젠장!” 콰아앙! 성구의 몸이 폭발하듯 치솟아 올랐다. 잠깐 사이에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성구를 보며 우진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로켓이 따로 없네.” 슬슬 주변에도 쓸 만한 각성자들이 생기고 있었다. 키아아악! 하늘에서 배회하던 와이번이 포효하며 내려와 머리를 숙였다. 우진이 안장에 올라 하늘로 치솟았다. “재민이는 얼마나 컸으려나?” 뱀파이어 로드의 심장을 취하고 피의 의식을 진행했다. 휘하에 군단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외에도 그의 피지컬의 성장 한계치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전과 기대치가 다른 것. 우진이 괜히 설레는 기분으로 재민을 향해 와이번을 몰았다. *** 이성을 잃어버릴 듯한 광기는 없다. 적을 향해 어쭙잖게 달려들지도 않는다. “흐흐흐.” 이젠 항상 미쳐 있으니까. 콰쾅, 쾅! 재민의 움직임마다 피가 터져 나갔다. 이젠 혼자도 아니다. 그으으. 피의 종속에 사로잡힌 그의 하수인들이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하고는 좀비마냥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크도 있고, 고블린도 있고, 심지어 오우거도 있었다. 재민은 물어뜯긴 시체들로 아비규환이 된 전장을 걸었다. 그의 붉은 눈은 전에 비해 더욱 깊어졌고, 더욱 매서워져, 이제는 위엄마저 느껴졌다. 얕잡혀 보일 수는 없다. 하수인은 모두 그의 종속이지만, 동시에 언제든 달려들 수도 있는 도전자들. 재민이 자신을 물었던 뱀파이어를 죽이고 피의 계승으로 그의 힘을 흡수했듯이, 자신에 의해 탄생한 하수인들도 주인이 빈틈을 보이면 언제든 도전해 올 것이다. “으으으.” 재민의 걸음이 신음하는 인간에게 멈춰 섰다.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한쪽 팔도 짓이겨져 움직이지 못했다. 피가 낭자한 얼굴 사이로 빛나는 두 눈은 두려움이 가득하면서도 동시에 독기가 있었다. “살고 싶나?” “사, 살려주오.” 독기는 애원이 되어 눈물을 글썽였다. 두려움도 좋고, 생에 대한 애착도 좋다. 그것이 충성심의 한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차원의 영지에 떠도는 난민들에게도 죽음은 소멸을 의미하는 것. 재민이 자신의 손을 깨물어 피를 내고는 손에 묻은 핏방울을 죽어가는 인간 전사의 입술에 묻혔다. “으으으으.” 부릅뜬 두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아아!” 비명을 내지른 사내의 몸이 검은 피에 휩싸이며 터져 버렸다. 그의 육편들이 수십의 검은 박쥐가 되어 재민의 주위를 맴돌았다. 찌지지직. 박쥐들이 재민의 앞에서 뭉쳐 죽어가던 전사의 모습으로 화했다. 전에 비해 흰 얼굴과 잘린 다리가 재생된 말끔한 모습. 핏기 없는 보랏빛 입술이 그의 바뀐 인생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름?” “카발.” 갈라진 그 목소리에서 전해진다. 재민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그리고 피에 대한 갈망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틈을 보이면 먹힐 것이다. “꿇어라.” 재민의 말에 카발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괴수 같은 하수인과는 다른 존재. 새로이 탄생한 피의 가문 도재민의 첫 번째 일족. “적의 피를 취하라.” “캬아.” 재민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카발은 전장을 향해 그대로 튀어갔다. 이성으로 통제하기엔 그의 몸이 너무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재민은 자신의 옛 모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부하가 생긴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쾌감을 선사했다. 재민이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나 멋있었어.’ 점점 밤의 귀족이 되어가고 있는 재민이었다. < 151화 - 각성자 모집 > 끝 ⓒ 진설우 < 152화 - 각성자 모집 (2) > “잠깐 휴식하겠습니다.” “휴우, 정비하자고.” 해솔의 사인에 백종도가 긴 한숨을 토해내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능력을 각성하고는 그간 난이도 있는 던전만을 돌아다니며 꽤 고난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건만, 자신만의 착각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요 며칠 겪은 자쿠 행성에서의 사냥은 그를 연일 한계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에 비해 능력의 진화가 이루어지려는 조짐도 보였다. 긴장의 연속으로 스트레스도 컸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변화. “할 만해요?” “오, 강 아우. 언제 왔나?” 백종도는 불쑥 나타난 강우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까요. 그보다 어때요?” “좋은 자극이 되고 있지.” “원하면 같이 다녀도 돼요.” 우진의 말에 백종도가 고개를 저었다. 외부인이 계속 같이 껴서야 되겠는가. “아니야. 이번 원정으로 얻은 게 많아. 길드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럼 그러세요.” 굳이 잡지 않는 우진이었다. 각성자가 모자라면 또 뽑으면 된다. 성구나 해솔, 블랑카처럼 말이다. 백종도는 못내 섭섭한 눈치였으나 그도 KH길드를 버리고 우진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는지라 더 말하지 않았다. “재민이는 어디 갔어?” 우진의 물음에 전장을 정리하다가 다가온 해솔이 답했다. “요 앞에 요새 하나 공격 중입니다.” 해솔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얕은 산 위에 자리한 성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예.” “흐음.”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심장을 이용해 피의 의식을 치뤘다고는 하지만 벌써 혼자 차원 영주의 거점 도시를 공격할 정도로 성장하다니. “정찰 목적으로 간 거니 괜찮습니다.” “정찰이 아닌 것 같은데?” “예?” “한바탕하고 돌아오네.” 우진이 턱짓하자 해솔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날아오는 박쥐 떼가 보였다. 그런데 그 밑에 몬스터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쫓기고 있나 봅니다.” “아닌 거 같은데.” “예?” “됐어. 일 봐.” “예에.” 우진이 그들을 향해 마중 나가자 그 앞에 박쥐들이 떼로 몰려와 뭉치며 도재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 비해 차분해진 듯, 조금 무거워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진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지어졌다. “저건 뭐냐?” “혼자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요.” “흐음.” 구어어어. 좀비마냥 눈이 뻘개서 다가오는 하수인들을 보니 조금 위험해 보였다. 못해도 300이 넘는 숫자. “캬악.” 재민의 옆에 박쥐들이 뭉치더니 카발이 우진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제 딴에는 주인을 향한 충성심의 발로 같지만. 슈아아악! 검은 연기가 뭉치더니 거대한 해머가 되어 그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하찮은 모기가 왕께 무슨 무례인가!] 람손의 해머에 머리가 으깨지고도 카발은 살아 있었다. “너 감당할 수 있겠냐?” 우진의 물음에 도재민이 영문을 몰라 그를 빤히 보았다. “나 따라하는 거 같은데 별로 좋지 않아.” 우진도 지배력을 초과하는 언데드는 거느리지 않는다. 통제를 벗어난 그들은 그저 몬스터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재민이 만들어낸 하수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들. 언데드들이 산 자에 대한 증오심이 있다면, 하수인들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피에 대한 갈망이 끊이지 않는데 로드인 재민이 그것을 얼마나 억제시킬 수 있겠는가? “하, 할 수 있어요.” “정말?” “······.” “자신 있게 말해.” “자, 잘 모르겠어요.” 우진이 저장된 영혼을 발사했다. 적을 맞출 때까지 따라가는 유도미사일, 스피릿 스피어가 하수인들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슈슈슈슉! 퍼퍽! 여기저기서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하수인들이 머리통이 터지며 고꾸라졌다. 자신이 이룬 뱀파이어의 군단이 너무 쉬이 무너지자 도재민은 허탈한 기분마저 느꼈다. 우진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재민아.” “예, 형.” “수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한 놈부터 잘 다스려 봐.” “······.” 온전히 지배하에 놓지 못하는 권속은 없느니만 못하다. 으깨진 머리를 급히 재생하느라 에너지를 상당히 소모했는지 더욱 핏기 없어진 카발이 두려운 눈으로 우진을 보았다. “저런 놈들도 안 돼.” 겨우 한 대 맞았다고 저렇게 겁먹다니 말이다. 권속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주인을 지킬 정도는 되어야 했다. 지레 겁먹고 꼬리를 마는 놈은 없는 게 낫다. 화르륵! “끄어억!” 우진이 쏘아 보낸 스피릿 스피어가 카발의 몸을 꿰뚫고는 그대로 폭발하며 타올랐다. “······.” 자신이 만들어낸 부하들이 1분도 되지 않아 모조리 전멸해 버렸다. 도재민의 귀로 우진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백날 거느려봐야 네가 약하면 소용없어.” 맞는 말이다. 로드라는 권력은 언제든 피를 나눈 뱀파이어 가문의 일원에게 뺏길 수 있는 자리였다. “세력을 이루더라도 천천히 잘 골라서 하는 거야. 날 봐.” “형은 많잖아요.” 우진이 피식 웃었다. “해골이나 좀비는 소모품이고, 권속들을 봐.” 20년이다. 우진이 지내온 시간을 생각하면 고작 54기의 데스나이트는 너무 적은 숫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그래.” 우진이 재민의 머리를 헝클이며 쓰다듬었다. “그리고 눈알에 힘 좀 빼고.” “···네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툭 치고는 일행들을 보았다. “지구 시간으로 6일 뒤, 그러니까 24일 뒤 길드 총회다. 그전까지 최대한 이 행성의 던전과 거점을 파괴한다.” 드디어 d-day다. 메르디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다음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알면서 뭘 물어?” 메르디의 눈망울이 흔들렸고 우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아르펜으로 간다.” 드디어 간다. 고향 생각에 스스로 몸을 내던져 지구까지 오게 된 그녀다. 이제 곧 돌아간다는 생각에, 암울한 행성을 구원해 줄 조력자와 함께한다는 것이 감격스러운 그녀였다. 무엇보다 믿기지 않는 것은 그 조력자가 임모탈이라는 것이지만 말이다. ** 재민을 위시한 파티원들이 하나하나 던전과 거점을 공략해나갈 때, 성구는 살기 위해 차원 영주들을 쳐부쉈다. 재민일행이 하나를 공략할 때 그는 셋을 공략했다. 그사이 우진은 떨어진 이삭을 줍는 수준으로 차원 영주들을 압박했고 말이다. 기둥으로 이루어진 던전 자체의 수는 지구에 비해 월등히 적었으나 차원 영주들 스스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게이트인 거점의 수는 꽤 많았다. 거점은 장단점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행성 내에서 차원 영지를 구축한다는 것 자체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기껏해야 동시에 열 명 정도 입장할 수 있는 던전처럼 도전자의 수를 제한할 수 없으니 수비에 많은 병력과 시설을 갖춰야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다. 던전은 각성자만이 출입할 수 있지만 거점은 능력이 없는 자들도 드나들 수 있었다. 우진이 지구에 거점을 만들려는 이유. 수중의 차원의 조각도 이제 스무 개를 넘어 가니 하나쯤 거점생성에 쓰는 것은 손해도 아니었다. 우진은 틈틈이 영지전을 치렀으며 재민은 한 번을 안 지고 모두 이겼다. 그리고 12일 뒤, 지구시간으로 3일 후. 우진이 서울역 1번 출구를 통과했다. “앗! 국왕님.” 대기 중이던 직원이 우진의 등장에 허둥지둥하다가 우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넵, 방금 나오셨습니다. 넵.” 비서실장으로 회귀한 우승훈이지만 그땐 사장 비서실이었고 지금은 국왕의 비서실이다. 급이 다르니 어쩌면 장관보다도 더 요직일지도 몰랐다. “뭐하러 전화해. 바로 들어갈 건데.” “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직원을 몇 번 놀리다가 우진은 발길을 옮겼다. 정장 입은 경호원 열둘이 우진을 따라나섰다. “오늘은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면접날이라 그렇습니다.” “아.” 길거리에 바글바글한 사람이 모두 아르달에 입사하기 위한 이들인가? 우진이 정신을 집중해 그들을 살피니 대부분 11에서 30정도 사이의 레벨이었다. F, E급의 각성자들. “강우진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사진하고 똑같아.” 그들의 수군거림이 귓가에 닿았다. 중요 인물인 줄 뻔히 알게 경호원 열두 명이 호위하는데 모르면 이상했다. 우진이 아르달의 정문에 도착했을 땐 총리 정민찬과 우승훈을 비롯한 직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늘 면접 맞지?” “네, 사장님. 아직 입장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아르달의 정문 앞에는 마치 시험장 앞의 수험생처럼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꼭 한국인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르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도 많았다. “바쁘니 지금부터 뽑자.” “예에? 아직 등급별로 나누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 시간이었다. 우진이 이렇게 일찍 올 줄 알았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일찍 공고할 것을······. “됐어. 등급이 뭐가 중요해.” 우진은 정문의 담벼락에 올라갔다. “조용!”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이목이 우진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의 음성은 마력을 담고 있어 저 멀리 뒷줄의 사람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내가 뽑으면 아르달의 국민이자 각성자가 된다. 선별을 시작하지.” 면접이 아닌 선별이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이들을 뽑기 위한. 우진은 관찰과 분석 측정 등의 기초적인 스킬들을 섞어 사람들을 훑었다. “거기, 거기, 거기. 통과.” “저요?” “어어?” 갑작스럽게 시작된 상황에 지목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으나 곧 희열에 차 정문을 통과했다. 아르달의 각성자 지원은 세계 최고라 할 만했다. 다름 아닌 최고 각성자 강우진이 훈련시키며 각성자 하나당 붙은 지원 인력들도 다른 길드보다 훨씬 많았다. 우진은 쭉 훑어보다가 선을 그었다. “좋아. 여기까진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뒤쪽 사람들 앞으로 와.” 우진이 지목한 500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중 용기 있는 자가 목소리를 냈다. “이, 이러는 게 어딨습니까?” “맞아요. 어떻게 사람을 한 번 보고 판단합니까?”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럼 늬들이 왕 하던가.” “······.” 뭐 이런 막무가내의······. “저희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뽑히기만 하면 잘할 자신 있습니다. 시험이라도 보게 해주십시오.” 강우진의 눈에 드는 게 시험 그 자체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이들을 뽑더라도 성향이 맞지 않아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도 생기게 마련이다. 검술을 잘한다고 해서 모두가 최고의 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재능과는 별개로 사람 개개인의 성향이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1차적으로 재능만을 보고 뽑는 것인데······. “좋아. 기회는 주지.” 말을 해서 못 알아먹는 사람들에게는 보여주는 게 차라리 나았다. 슈슈슉! 정문 앞에 데스나이트 알 아사드가 소환되었다. AA급인 7서클 수준에 겨우 도달했던 그다. 죽음의 기사로 다시 태어나며 8서클 S급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이정도면 충분했다. “시간 없으니 상대로 30초 버티면 통과. 대신 대가는 목숨이다. 도전할 사람?” “······.” 사람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목숨 걸고 도전하라니······. 죽거나 30초 버텨 입사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몇몇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련 없이 떠났고, 대부분은 가만히 선 채 눈치만 보았다. 강우진이 뭔가 다른 방법을 제시해 주길 기다리는 듯 보였다. “내가 도전하지.” 그때 저 뒷줄에 있던 각성자 하나가 호기롭게 나섰다. 우진이 그를 관찰하곤 눈썹을 꿈틀거렸다. “호오, 7서클이라.” AA급의 각성자가 등장할 줄이야. 우진은 처음 보지만 다른 이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김강철이다!” “맞아. 김강철이야.” 강우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랭킹 1위. 어느 길드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 각성자, 김강철이 나타났다. < 152화 - 각성자 모집 (2) > 끝 ⓒ 진설우 < 153화 - 지구의 신 > “김강철?” 우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들어는 봤다. 대한민국에서 A급에 가장 빠르게 오른 각성자이자 길드를 설립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길드에 가입하지도 않은 괴짜 각성자. 제법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는 반쯤 벗겨진 머리에도 선 굵은 얼굴에 호감형의 사내였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겠소?” “왜? 입사하게?” “내가 원하는 것은 아르달 왕과의 대화요.” “그런 거면 나중에 와.” “…나 김강철이오.” “알아.” “…….” 우진이 담장 아래의 경호원들을 보았다. “쟤 끌어내.” “예에.”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나가주십시오.” “…….” 김강철이 입을 꾹 다물고 요지부동이자 경호원들도 어쩌질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라는 각성자가 제 발로 가지 않겠다면 일반인인 그들이 어쩔 수 있겠는가. 그들이 머뭇거리자 우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김강철이 담장 위의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30초를 버티면 내게 대화의 시간을 내어주지 않겠소?” 우진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번지수 잘못 짚었어. 바쁘니까 나중에 와.” “지금이 아니면 만나기 어렵지 않소?” “안 만나면 되겠네.” “…….” 김강철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강우진이 던전에 들어가면 언제 다시 마주칠지 몰랐다. “잠깐이면 되오.” “성가시네.” 우진이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도 작은 덩치는 아닌지라 김강철과 마주 서자 위압감이 심상찮았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주위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내주었다. “이 새끼, 골 때리네. 하고 싶은 게 뭐야? 면접?” 우진의 말에 김강철이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내겐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곤란하오. 잠깐의 시간이면 되니 대화를…….” 차앙. 우진이 소환한 장검을 휘두르자 김강철이 반사적으로 품 안의 단검을 뽑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짓이오?” “사장님 특별 면접을 시작하지.” “…….” 우진이 말을 이었다. “30초 버티면 살아서 입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까앙. 김강철의 항변은 이어지지 않았다. 바짝 다가온 우진의 검격에 말은커녕 숨조차 함부로 내뱉지 못했다. 카앙, 캉! 갑작스러운 칼부림에 주위 사람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진짜 죽이려 해.’ 김강철은 목숨의 위협을 느꼈고 강우진은 눈을 빛냈다. ‘제법 쓸 만해.’ 10초. 우진의 검이 변화했다. 슈슉, 촥! 보다 빨라진 움직임에 김강철의 손발이 어지러지며 여기저기 조금씩 피가 터졌다. 가죽이 얕게 베인 정도. ‘봐주고 있었어?’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크게 공격을 허용했다. 푸욱! “젠장!” 어깨를 찌른 검에 김강철이 악다구니를 쓰며 단검을 찔러왔다. 싸울 줄 알았으면 그도 무기를 가져왔을텐데 그러질 못한 게 아쉬웠다. 그가 휘두른 단검은 우진의 옷깃조차 스치질 못했다. 콰당! 우진의 발길질에 넘어진 그가 자세를 바로 잡기도 전에 날아온 로우킥에 다시 고꾸라졌다. “으윽!” 진짜 불행은 두 번째로 날아온 게 킥이 아니라 검이라는 것이다. 서걱! “크아아악!” 우진의 검에 김강철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미, 미쳤어.” “난 갈래.” 난리 난 구경꾼들이 도망치듯 멀어지느라 주변이 아비규환이 되었다. 우승훈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정민찬은 이마를 짚었다. 사장님이 또 사고를 치셨다. 김강철을……. 푸욱! “크억!” 검은 멈추지 않았다. 김강철의 팔뚝 힘줄을 끊어내고 반대편 어깨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대로 관통한 검날이 바닥에 꽂혔다. “으으으으.” 흘러나온 피가 주변에 낭자하는데 우진이 쪼그려 앉았다. “30초 지났는데.” “미, 미친놈.” 김강철의 말에 우진이 히죽 웃었다. “이대로 죽이긴 아까우니 면접 통과!” 우진의 발랄한 말에 김강철이 악다구니를 썼다. “흥! 그냥 죽여라.” “응, 그럴 거야.” “…….” 어차피 죽으나 살아 있나 상관없다. 죽어서 더 편한 놈들이 있기도 하고……. 우진이 그의 어깨에 박힌 검을 잡았다. 위치가 절묘해 그대로 내리누르면 작두처럼 목을 분리시킬 것 같았다. “자, 잠깐!” “뭐? 유언은 짧게 해.” “사, 살려주시오.” “허.” 그래도 대한민국 1등 각성자라고 하지 않았나? 뭐 이렇게 기개가 없지? 우진의 눈빛을 읽었는지 김강철이 빠르게 말을 뱉었다. “길드에 입사하겠소.” “그래. 죽어서 입사할 거야.” “사, 살아서 하고 싶소.” “소?” “싶습니다.” 다급함이 느껴졌다. 우진은 마뜩찮은지 인상을 구겼다. “너 같은 놈은 그냥 죽여서 부리는 게 편한데?” “안 됩니다. 전 지구를 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허, 참. 허언증 있냐?” 우진이 검을 다시 쥐자 그가 최후의 수단을 발휘했다. “토플러 박사의 전언을 위해 왔습니다.” “그 새끼 어딨어?” 우진의 반응은 꽤 격앙되어 있었기에 김강철은 너무 준비를 소홀히 하고 이곳에 온 것을 후회했다. ‘그냥 말만 전하면 된다더니.’ 어쨌든 상황은 크게 나빠졌고, 토플러 박사에 대한 강우진의 감정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어딜 보나 김강철에게 불리한 상황. “일단 안으로…….” 주변에 아직 보는 눈이 많았다. 우진이 괜히 신경질적으로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크읍.” 검을 역소환하고는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이 도망치고 겨우 십여 명만이 두려운 눈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거기들.” “예?” “저, 저희 말입니까?” 우진의 지목에 사람들이 떨리는 음성을 내뱉었다. “그래. 전부 합격. 들어와.” 우진이 등 돌려 정문을 향해 갔고, 구경만 하고 있던 알 아사드가 넝마가 되어버린 김강철의 다리를 집어 들어 어깨에 들쳐 멨다. “크어억!” 다리뼈가 기괴하게 비틀렸으나 알 아사드는 아무렇지 않게 우진의 뒤를 따랐다. “좀 조심히 다루시오!” [피와 살이 있음을 감사하라.] “…….” 잠깐 내비친 알 아사드의 섬뜩한 기세에 김강철은 입을 다물었다. 나름 대한민국 1위 각성자의 유명세라던가, 대우 같은 건 아르달에 없었다. “드, 들어가야 하나?” “도망칠까?” 면접을 보러 왔다가 남아 있던 각성자들이 뚝뚝 떨어지는 피로 이어진 길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정문 너머에는 앞서 뽑힌 이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 합격자분들은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우승훈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며 갈등하는 그들을 끌어들였다. 경호원과 직원들이 빠르게 정문 앞을 청소했고, 아르달의 각성자 신규 채용은 김강철 제외 23인으로 마무리되었다. *** 사장실에서 국왕 집무실로 바뀐 그곳에서 아르달의 주인과 당장 응급실로 가도 시원찮을 환자가 독대했다. “바쁘니 빨리 말해.” “…치료해 주지 않으십니까?” “어차피 죽일 건데, 뭐.” “…….” “뭐해?” “그럼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그냥 죽어.” 우진이 허공에 손을 뻗자 전사의 무기가 단검의 형태로 소환되어 잡혔다. “마, 말하겠습니다.” “듣기 싫어졌어.” 우진이 한 발짝 다가오자 그가 빠르게 말을 쏟았다. “지구를 트라넷에서 구해내려면 코드를 모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소개가 빠졌네?” 우진의 발걸음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이 반짝였다. 김강철의 목젖이 움직이며 두려움 가득한 침을 꿀꺽 삼켰다. “기, 김강철. 소속은 없습니다. 아니, 문 월드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문 월드?” 우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김강철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게 뭐지?” “토플러 박사가 속한 단체입니다.” “그게 그들의 행성인가?” “…그렇다고 추정됩니다.” 우진은 토플러 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우진은 트라넷과 지구의 모든 링크가 끊기길 바란다. 토플러는 그들의 행성을, 그리고 눈앞의 김강철은 지구를 지키기 위한다고 하는데……. “코드는 뭐야?” “모릅니다. 그저 그가 이 말을 전해 달라 했습니다.” “코드라.” 우진이 턱을 매만졌다. “뭐, 알겠어.” “휴우, 그럼 이제 치료를…….”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이제 죽어서 봉사해야지.” “……절 죽이시면 문 월드와 연락할 수단이 끊기실 겁니다.” “답답하면 다시 연락해 오겠지.” “…….” “너같이 신용 안 가는 놈은 그냥 죽어서 부리는 게 편해.” 편하자고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저 나쁜 놈 아닙니다. 그럼 살려주시면 아르달에 입사하겠습니다. 제 개인적 활동만 허락해 주십시오.” “허, 참.” 승훈이 같은 놈이 여기 또 있네. 아니, 속을 알 수 없으니 그보다 더 나쁜 놈인가? 곧 죽어가는 와중에 이 무슨 황당한 제안인가? 역시 이런 놈들은……. 우진이 단검을 들어 올렸다. “자, 잠깐! 아르달에 가입하겠다니까요?” “그렇게 해줄 거야.” 아니, 죽어서 말고 살아서. 김강철이 다급하게 할 말을 찾았으니 우진의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죽일 것만 같았다. 뭐, 이런 악마가 다 있지? 우진이 검을 내치기 전 문이 열렸다. “뭐야? 아무도 들이지 말라니까.” “사, 사장님, 그게.” “뭐?” 우진은 다급한 얼굴의 승훈을 보며 되물었다. “아가씨가 깨어났습니다.” “아가씨?” “강수아님 말입니다.” “…….” 우진은 손에 쥔 단검과 바닥에 누운 김강철을 보았다. “충성을 다할 테니 살려주십시오.” “…….” 이렇게 가벼운 놈을 뭘 믿고 살려줄까? 어떻게 이런 자가 가장 먼저 A급의 각성자가 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길드의 지원도 받지 않고……. “문 월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그들이 김강철을 후원했다. 돈? 아니다. 토플러 박사는 집 안에 버젓이 던전을 만들어놓은 자다. 우진이 뒤쫓아 입장했으나 어딘지도 모르게 사라졌던 수상한 녀석. 적어도 우진보다는 던전의 원리나 비밀에 접근한 존재. 그들이 김강철을 키웠다. 무엇 때문에? “사장님, 어서…….” “그래.” 우진이 단검을 역소환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는 데스나이트를 만드는 것이 낫다. 하지만 아직 인질로서 김강철의 효용 가치가 더 있을지도 몰랐다. “넌 조금 이따가 보자.” 우진이 우승훈을 보았다. “감시하고 있어.” “넵.” 우진이 문을 열고 나가자 승훈과 김강철만이 남았다. ‘으으.’ 우승훈은 한쪽 다리가 잘리고 오른팔도 너덜너덜한 김강철의 몰골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잠깐 쳐다본 것만으로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데 그는 아프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누워 있었다. “이보게.” “비서실장입니다.” “그래 뭐, 어쨌든.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 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저런 말이 나올까? 승훈은 꺼림칙함과 궁금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물었다. “뭐요?” “세상에 우연 같은 게 존재하는가 말이야.” “아, 뭐래?” 별 시답잖은 소리나 늘어놓다니. 승훈이 짜증을 팍 부리는데 돌멩이 하나가 날아왔다. “어?” 퍼억! 날아오는 것을 봤으나 피하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만신창이가 된 어깨를 가지고 손목의 힘만으로 던지는 돌이었으나 AA급의 각성자가 던진 거니까. 털썩.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진 그를 보곤 김강철이 허공에 손을 뻗어 포션을 꺼냈다. 아공간에서 꺼내는 그 모습이 인벤토리와 같았다. 치이이익. 상처 곳곳에 뿌린 포션에 금방 기력이 돌아왔다. “신이 굽어살피시는군.” 김강철이 창문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 153화 - 지구의 신 > 끝 ⓒ 진설우 < 154화 - 지구의 신 (2) > 수아의 방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우진의 등장에 비켜서는 그들의 틈에 도지원과 신디의 모습이 보였다. “우진아….” 지원의 목소리엔 안타까움과 걱정이 가득했으나 우진에겐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아니, 위로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다. 의식 없던 수아가 깨어났을 뿐이다. “이따가 보자.” “으응.” 우진이 사람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어머니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우진아… 수아가, 수아가 엄마를 몰라봐. 흐윽.” “괜찮아요.” 우진은 어머니의 등을 토닥였다. 일시적 기억상실? 신의 말을 전하는 신녀가 되었다 해도 모든 기억이 지워져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는 없다. 기억상실이 아니라 그녀의 몸을 빌려 나타난 존재의 아우라가 작은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신녀의 몸을 빌린 신의 현신. 소녀는 지금 그의 동생 수아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신, 그 자체였다. “잠깐 비켜주시죠.” 이수경은 걱정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지만 그녀가 있어봐야 별수 없었기에 방을 나섰다. 방 안에 둘만이 존재하자 그녀의 감겼던 눈이 떠졌다. 눈빛은 너무 밝아 마주볼 수 없을 정도의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기소개 정도는 하지?” […….] “이름 몰라? 하나 골라봐. 예수, 석가모니, 알라, 음, 또 뭐 있지?” 우진의 이죽거림에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는 귀를 통해 전달되지 않았다. [이제 막 태동한 행성에 자라난 씨앗에 무슨 이름이 있을까.] “호, 무명의 신. 그런데 막 태동해?” 지구에 신이 없었을까? 처음의 신이라니…. [첫 발걸음에 그대를 만났으나,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우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알기 쉽게 풀지?” [그대의 행적을 지켜보노라.] “…….”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하아, 신들은 하나같이.” 아르펜에서 만났던 신들도 그렇고, 왜 하나같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지 모를 일이다. “으음.” 신음과 함께 쓰러진 작은 소녀는 그의 동생 수아로 돌아왔다. 그녀의 주위에 존재하던 압도적인 마력도 사라졌다. 우진이 넘어지려는 그녀를 받쳐 안았다. “으윽.” 실눈을 뜬 수아가 가물거리는 시야로 우진의 모습이 보이자 힘겹게 입술을 뗐다. “오빠….” “그래, 오빠야.” 고생했다. 버텨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수아는 용케 견뎌냈고 신의 목소리를 전했다. 단숨에 5서클의 능력자가 되어버린 강수아. 지구의 등급으로 따지면 무려 B급의 각성자다. “오빠, 나 꿈에서….” 우진이 수아를 꼭 안아주었다. “잘 참았어.” 견뎌준 것이 고맙고 살아남아 준 것이 고마웠다. 우진의 낯선 행동에 수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꿈에 나온 친구 이름이 뭐야?” “응? 이름은 모르겠는데….” “알겠어. 어머니 불러줄 테니 조금 쉬어.” “응.” 5서클의 사제 능력. 기도를 통한 능력 발현으로 수아는 남다른 존재로 성장할것이다. 아리아 교단의 성녀인 지금의 메르디처럼 말이다. 우진이 밖으로 나왔을 때 다급한 얼굴의 직원들이 뛰어왔다. “크, 큰일입니다. 김강철이 도주했습니다.” “…….” 우진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방금 나온 수아의 방을 돌아보았다. “우진아.” 지원의 부름에 우진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순백색의 영혼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중에 봐야겠다.” “응, 그래.” 우진이 지원의 머리를 한번 헝클어주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지원의 옆에 신디가 조막만 한 소리로 물었다. “후, 우진이 엄청 바쁘네.” “응, 그렇지.” “넌 아무렇지도 않아? 발표 나긴 애인인데 실제론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하하, 난 괜찮아.” 빈말이 아니다. 도지원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강우진이 바쁜 것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구해준 그에게 괜한 투덜거림으로 마음 쓰게 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 아닐까? 지원은 그저 이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바쁘고 위험한 사람. 그는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니까. “에이, 너 뽀뽀는 해봤어?” “으응?” 신디의 물음에 지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곤 주위를 둘러보다가 민망함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의식불명이던 수아가 방금 깨어난 자리다.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원의 손에 이끌려 일단 그곳을 벗어나는 그녀들이었다. “어휴, 너도 참 힘들겠구나.” 신디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의 연인이지만 사랑받고 살기는 힘든 것 같았다. “그런데 너 집엔 언제 가?” “어? 내, 내가 있어 불편해?” “그런 건 아니지만.” 지원의 기습적인 질문에 당황하여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전화가 온 신디였다. 동창회 날 겪은 일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쉬고 있던 그녀다. 불안 증세가 있는지 아르달에서 요양할 수는 없는지 도움을 청해온 것이었다. 도지원은 총리인 민찬에게 허락을 받았고 신디를 초청했다. 그렇게 함께 지낸 것이 벌써 3일째였는데 지원은 왠지 이 동거가 오래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휴, 히어로의 애인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구나.” “…….” “난 죽어도 못하겠다.” 신디의 말에 지원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 우진은 깨진 창문 너머로 부산스러운 연병장을 보다가 쓰러진 우승훈을 보았다. “의식은 없지만 아직 살아 있습니다.” 경호원의 말에 우진이 주위를 맴돌던 영혼 하나를 승훈에게 흡수시켰다. “으으.” 기력을 회복한 승훈이 신음과 함께 일어섰다. “사, 사장님. 아니, 국왕님.” “어떻게 된 거야?” “시답잖은 말을 하다가 녀석이 갑자기 뭔가를 던졌습니다. 그 뒤로는 잘….” “무슨 말?” “기억이 잘… 아! 세상에 우연이 있나 없나 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우연이라.” 우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문 월드라고 하였나? 김강철을 지원하며 토플러가 속해 있는 그 단체. 녀석들은 우진과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실체를 어둠 속에 숨겨둔 채 말이다. “몸조리나 좀 해. 운동도 좀 하고 말야.” “…….” 운동한다고 각성자를 무슨 수로 이기는가? 애초에 아르달에는 김강철을 감시할 만한 인력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저항불가일 것이란 강우진의 방심도 한몫했고 말이다. “뭐, 쉬도록 해. 넌 민찬이 내 방으로 부르고.” “옙!” 수행비서 하나가 뛰어 나가기 전에 뒷걸음질 쳤다. 부를 것도 없이 소식을 듣고 정민찬이 달려온 참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되긴, 김강철이 수배 때려.” “예에? 무슨 죄목으로…. 사정만 본다면 사장님이… 국왕님이 김강철 씨를 납치한 것 같이 보일 겁니다.” 면접장에 나타난 그와 다짜고짜 싸우다가 반신불수로 만들어 아르달로 끌고 갔으니 말이다. 우진이 곤란한 듯 턱을 쓰다듬다가 휑한 창문을 보았다. “기물 파손으로 해.” “…….” 죄야 만들면 그만. “대한민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잡으려는 게 아냐. 그냥 그렇게 때려.”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민찬이 뜻을 알아차렸다. 수배령이 내려지면 용의자 스스로가 눈치 보게 되어 있다. 들키지 않으려 더욱 조심할 것이고 행동의 제약이 생기게 마련. 우진은 김강철의 활동을 억제할 생각이었다. “길드 총회 설명 잘 준비해. 3일 뒤에 나올 테니까.” “예, 이미 세계 유수의 길드에서 사람들이 속속 한국에 입국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KH호텔에서 제공했습니다.” “그런 건 알아서 하고. 이번에 뽑은 신입들은?” “신원 조회랑 각자 가진 능력 평가를 진행 중입니다만….” “내 방으로 들여보내. 3일 정도 훈련시키고 올 테니까.” “…….” 말이 3일이지 던전 안이라면 12일의 시간이다. 이제 막 입사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그들이 강우진과 함께 던전에 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아직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좀 더 준비한 후에 투입되어야 적응에 문제가….” “민찬이.” “넵.” 총리 정민찬의 말은 우진의 말 한마디에 끊겼다. “잘 적응한 놈이 전장에서 살아남겠지. 맞아.” “네.” “잘 적응하려면 잘 훈련해야 하고 말이야.” “그렇지요.” “내가 데려가는 덴 전쟁터가 아냐. 사냥터지.” 사람에 따라 사냥터가 아닌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민찬은 굳이 반박할 말을 떠올리진 않았다. “곧장 준비시켜 올려보내겠습니다.” “오래 안 기다릴 테니까 빨리 준비시켜.” “넵.” 우진이 할 말을 모두 했다는 듯이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올라가버렸다. “휘유.” 정민찬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김강철의 도주 때문인지, 강수아의 의식 회복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강우진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날카로웠다. 민찬은 곧장 신입들이 대기 중인 회의실로 갔다. 그들은 나눠준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사인과 동시에 아르달의 국적을 취득한다. 아르달의 국민이 되는 것이지만 하는 일은 여타의 길드와 다르지 않았다. 던전의 관리와 공략, 그리고 몬스터 브레이크 시 토벌. 다른 것이라면, 길드가 각국의 관할구역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아르달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정도. 아니, 이제는 타 차원의 행성까지…. “모두 주목 바랍니다.” “…….” 스물세 쌍의 불안한 눈초리가 정민찬 총리에게 향했다. “여러분들은 지금 곧장 국왕님을 따라 던전에 입장하게 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 아직 계약서에 사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아직 입사 여부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던전행이라니.” 민찬이 곤란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최대한 새겨들으셔야 생존확률이 높아집니다. 던전에 입장하시면 국왕님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말 것이며, 죽음의 기사를 위시한….” “이봐요! 여긴 인권도 없어요?” “너무 강제적이란 생각 들지 않나요?” “이런 길드 전 입사 안 합니다. 나가겠으니 보내주시죠.” “…….” 면접 통과자들의 불만이 이어지자 민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사람들은 뭔가 착각들을 하고 있구나. 그때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강우진이 들어왔다. “다 모여 있네.” 굳이 기다릴 마음이 없었는지 곧장 찾아온 우진이었다. “다 모였으면 가지.” 지이잉. 우진이 아르달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갑작스레 생성된 그것에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전 빠지겠습니다.” “…?”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대로?” “예?” 우진이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난 지구를 지키고 싶어. 늬들은 어때?” “…….” 갑작스럽게 이 무슨 거창한 말인가? 모두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데 우진의 음성이 이어졌다. “무임승차할 놈들은 돌아가도 좋아.” “저, 정말 가도 됩니까?” “물론. 대신 지구 밖으로.” “그, 그게 무슨….” 우진이 피식 웃으며 포탈의 앞에 섰다. “죽어서 스켈레톤으로 통과할 사람들은 앉아 있고, 살아서 갈 사람들은 일렬로 줄 선다. 실시.” “……!” 쿠당탕! 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앞다투어 책상을 밀치고 뛰어와 줄을 섰다. “번호.” “하나.” “둘.” ……. “스물 셋, 번호 끝.” 우진이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아르달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하지.” 우진의 목소리가 지옥의 입구를 지키는 악마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아르달의 신입 각성자들은 시뻘건 포탈을 지옥의 입구라도 되는 듯 죽을상을 하곤 포탈 입구를 통과했다. < 154화 - 지구의 신 (2) > 끝 ⓒ 진설우 < 155화 - 우리는 신입 > 붉은 포탈을 넘은 그들은 위험한 던전이 있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잘 꾸며진 성의 모습이 나타나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잔뜩 겁을 준 것과는 다르게 강우진도 의외로 소탈한 모습이었다. “쭉 서봐.” “…….” “질문 있습니다.” “질문 안 받아.” “넵.” 까칠한 것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너 앞으로 나와봐. “네.” 우진이 맨 앞의 사내를 물끄러미 보았다. “E급?” “네, 맞습니다.” “능력이 몇 개야?” “세 개입니다.” “해봐.” “여기서 말입니까?” “그럼? 어디서 해? 빨리 해봐.” “넵!” 김준용은 간단한 전격계 공격 마법과 물건을 움직이는 염동력, 거기에 신체 능력을 조금 향상시켜 주는 버프를 발휘했다. “참 잡다하게도 익혔네.” “죄, 죄송합니다.” 그가 익히고 싶어서 익힌 게 아니다. 자연적으로 각성한 능력이 전혀 연관이 없는 것들이 나와서 문제지. 어느 능력을 집중해서 키워야 할지 망설이다 보니 성장이 늦은 각성자였다. 흔히 말하는 잡캐. “죄송할 게 뭐 있나?” 잡캐야말로 우진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능력의 강화야 어차피 죽도록 구르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재주야 많으면 좋은 것. 스킬북이 아닌 선천 각성 능력의 종류가 셋이면 준수하다. 성장 가능치가 높다. “이걸 먹어.” 우진이 차원 상점에서 김준용에게 맞는 강화석을 구입했다. 업적 상점에서 구입하는 것들은 양도가 불가했지만 차원 상점에서 사는 물건들은 타인에게 넘겨줘도 고유의 능력이 유지되었다. 영지에 있는 잡화점이나 강화석 상점, 무기점 등도 차원 상점에서 떼 오는 물건이 다수 있었다. “이, 이게 뭡니까?” “질문 안 받는다.” “…….”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김준용이 울상이 되어 강화석을 받아 들고 있자 옆에서 지켜보던 각성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화석 같은데 군소리 말고 흡수하게.” “저, 정말입니까?” 믿기지 않는 듯 강화석을 쥔 김준용이 어리둥절해 하다가 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맞으니까 빨리 먹어. 그냥 죽이기 전에.” “……!” 이건 친절한 건지, 살벌한 건지. 김준용이 강화석을 흡수하고 눈을 떴을 땐 그 앞에 몇 개가 더 놓여 있었다. “차례로 다 먹어.” 고개를 돌려보니 그사이 다른 사람들도 강화석을 흡수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막 퍼줘도 되는 건가?’ 질문하고 싶었지만 또 혼날 것 같아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미비한 증가치를 보이는 것들도 워낙에 고가라 효율이 떨어져 김준용에게는 사치품이나 다름없었는데, 오늘 무슨 복인지 강화석을 연달아 흡수하게 생겼다. 얼마나 고급의 강화석인지 흡수할 때마다 힘이 증가하는 것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도대체 몇 억이야?’ 꿈에도 못 꿀 아이템을 막 퍼주는 모습에 악마로 보이던 강우진이 이제는 천사로 보였다. “빠짐없이 익혀.” 우진이 연달아 준 것은 몇 개의 스킬북이었다. 보잘것없는 능력을 가진 것들도 억은 우습게 여기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 그가 소모한 아이템들은 수억, 아니 수백을 호가할지도 몰랐다. 겨우 E급인 각성자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치기엔 너무 과분한 선물. ‘츤데레가 틀림없어.’ 대충 파악이 될 듯했다. 강우진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말이다. 김준용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우진은 묵묵히 스물세 명의 신입이 강화석과 스킬들을 모두 익히길 기다렸다.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필요한 능력들과 최소의 능력치 수준은 되어야 훈련을 하든 뭘 하든 할 것이 아닌가. 그들이 가진 능력의 종류나 가짓수로 그들의 전투 스타일이나 성향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충 다 배우게 하고 풀어놓으면 어떻게 키워야 할지 보이게 마련이다. “자, 다 했으면 이제 훈련장으로 간다.” 우진이 돌아올 때 썼던 포탈은 닫아뒀기에 자쿠 행성으로 가려면 내시아의 기둥을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따라 포탈을 통과하자 거대한 내시아의 기둥이 자리한 던전으로 이동했다. 영역을 벗어나자 비로소 자쿠 행성에 첫발을 디딘 신입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는데 두려움과 설렘, 긴장, 기대와 자신감 등이 버무려진 오묘한 얼굴들이었다. 무섭기도 한데 방금 흡수한 강화석의 효과와 새롭게 익힌 스킬들을 써보고 싶은 모양. 하지만 우진이 그들을 하나하나 지도하기에는 효율이 떨어졌다. 이런 일을 대신하기 위해 미리 키워놓은 부하도 있고 말이다. 카아아악! 하늘을 찢는 괴성과 함께 맹렬히 접근해 오는 와이번을 보며 신입들이 수군거렸다. “몬스터다! 와이번이야!” “젠장, 처음부터 너무 강한데?” “아니야. 저기 봐. 사람이 탔어.” 소풍이라도 나온 듯 웅성거리는 그들을 보며 우진은 피식 웃었다. 무럭무럭 자라거라. 우진의 부름에 와이번을 타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최해솔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신입들이니 잘 가르쳐 주고 특성 파악해.” “넵.” “지구 귀환까지 12일 남았다. 얘들은 앞으로 네 직속부대원들.” “직속부대!” “텔레파시 익힌 거 이제 제대로 써야지.” 해솔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부대 지휘를 위해 익힌 텔레파시 능력. “어느 정도까지 훈련하면 됩니까?” “뭐, 알아서 해. 적당히 쓸 만할 정도면 뭐.” “…적당히.” 조용히 말을 곱씹는 해솔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럼 수고해라.” “넵!” 우진이 유령마 씽씽이를 소환해 타고는 해솔이 온 곳과 반대 방향으로 훌쩍 가버렸다. 낯선 행성에 내버려진 23인의 신입을 보며 그는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간신히 억눌렀다. ‘신입이다.’ 얼마 만인가? 군 현역 시절 후배들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자신의 직속 부하들! 마치 특공대의 대원의 받은 기분. “4열 종대로 헤쳐모여.” “……?” 어리둥절한 그들을 보며 해솔이 씩 웃었다. “동작 봐라.” 뭉기적거리며 움직인 그들 중 맨 앞줄에 있던 김준용이 물었다. “저, 최해솔 이사님 아니십니까?” 아르달에 입사를 원해 면접에 참가한 그들이다. 그곳의 몇 안 되는 각성자 중 하나인 최해솔도 이미 유명인. 그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렇다.” “헤헤, 잘 부탁드립니다.” “…….” 해솔이 김준용의 내뻗은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슈우욱, 퍼억! 해솔의 주먹이 김준용의 손을 지나 복부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명령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 “끄으윽.” 바닥을 기는 김준용의 신음만이 들리는 가운데 신입 각성자들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여긴 인권 알기를 왜 이렇게 우습게 아는 거지? “이익, 갑자기 뭡니까? 사장님께 훈련받게 해주시죠.” 괜히 센 척하는 것 같은 최해솔보다는 아낌없이 아이템을 막 풀어주는 강우진이 천배 만배는 나아 보였다. 김준용의 악다구니에 대답 대신 해솔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퍼억. “커윽!” 3미터나 날아간 준용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신음했다. “기지도 못하는 것들이 날려고 하면 쓰나.” 강우진에게 훈련을 받는다?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버티지 못하면 정말 죽도록 내버려둘 사람이 아르달의 국왕 강우진이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차별 없이 대하니까. “기지 못하는 너희들을 걷도록 만들어주지.” “…….” 국왕님의 명령이 있었다. 적당히 쓸 만한 각성자로 만들라는……. “너희들은 12일의 기간 동안 B급의 각성자를 목표로 지옥의 훈련을 시작한다.” “……?” 대부분이 E급, 몇몇만이 D급의 각성자인데 갑자기 B급을 목표로 한다니? 그 정도면 어지간한 길드의 이사급이다. “훈련을 시작하지.” 키아아악! 어딘지 모르게 신나 보이는 최해솔의 경쾌한 음성에 화답하듯 와이번이 길게 울부짖었다. *** 넓은 대지에 용암이 들끓었다. 화산이 분출한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피해도 소용없고, 피할 수도 없다. 용암 사이로 머리를 삐죽 내민 화염룡 히드라는 쉴 새 없이 불을 뿜었고, 그 후끈한 대지를 날아다니는 화염 브레스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1생 1사의 존재가 있었다. “성구, 이제 좀 하네.” [그하하, 화염에 대한 적응이 빠른 녀석이다.] 화속성 마력에 대한 성구의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신이 만든 불덩이에 화상을 입는 마법사는 없다. 자신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염은 온전히 스스로의 통제하에 있으니 말이다. 사람마다, 그리고 마법의 매개마다 다른 그 마력에 동화되어 분석 재배열하면 상대의 공격도 제 것마냥 흡수하거나 다룰 수 있었다. 성구의 경지가 그 초입에 다다른 수준. “그렇게 마법사 마법사 하더니. 소원 성취했네.” 다급한 얼굴로 여기저기 도망치는 성구의 얼굴을 보면 과연 행복한 것인가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그가 평소 떠들던 목표는 이뤄주었다. “11일 남았어. 그때까지 잘 가르쳐 봐.” [그하하, 지옥불에 구워도 멀쩡하도록 만들어주지.] 우진이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니스의 말이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 거점의 공략에 4일이 걸렸다. 붉은 수염이 인상적인 오우거가 영주로 있는 거점 도시였지만 도재민과 파티원들의 지속적인 게릴라전술에 결국 차원 영주를 유인해 잡아낼 수 있었다. 차원 영주가 없는 거점은 공략하기 쉬웠다. 차원 상점을 이용한 병력의 충원이 차단되니, 천천히 공격하면 적의 수는 차츰 줄어들 테니 모조리 처치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거점을 지키는 수비 병력이 모두 정예는 아니니 말이다.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재민아, 그만 놀고 빨리 가자.” “네, 형님들.” 도재민의 행동은 전보다 여유가 있었고, 전투는 안정적이었다. 밤의 귀족으로서의 위엄은 살짝 잃은 듯했으나 그의 존재감은 더욱 돋보였다. “휘유, 아르달엔 죄다 괴물들만 있어.” “하하, 종도형님도 아르달에 오세요.” “딸린 식구들이 몇인데 그럴 수야 있나.” “헤헤, 이것만 빨고 이동하죠.” 백종도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아르달엔 괴물들만 있는지 지금도 행성에서 번지는 들불의 주요 원인을 제공하는 홍성구도 그렇고, 이제 자신의 공격력을 가뿐히 넘어버리는 도재민도 그렇다. 성녀의 강력한 신성력은 숨만 붙어 있는 존재라면 언제든 다시 회복시킬 정도였고, 블랑카의 능력 향상은 더뎠으나 그도 점점 파티와 어울려 가고 있었다. 도재민은 쓰러진 트롤들의 피를 흡혈했다. 그들의 능력 일부를 이어받아 스탯도 증가하고 재생력도 조금 더 오를 것이다. “이제 잘 먹네.” 유령마를 타고 나타난 우진이 훌쩍 뛰어내렸다. “어, 형. 오셨어요? 벌써 영지전 할 때 됐어요?” “그래. 시간 조금 남았으니 먹던 거 마저 먹어.” “네, 형.” 도재민이 다시 트롤의 목덜미를 물고 피를 빨았다. 이제 뱀파이어라는 자각이 생긴 것인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옅어진 것인지 제법 흡혈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였다. 백종도는 적응되지 않는지 영 꺼림칙한 얼굴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우진이 그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2일 남았어요.” “휘유, 벌써 그렇게 됐나?” 지구 시간으로 일주일이 넘었다. 이곳의 시간 개념으로 거의 한 달에 이르는 기간. 그것도 이제 2일 뒤면 지구로 귀환한다. 그동안 백종도 스스로 이룬 것도 적지 않았으나 주변에 워낙 괴물같이 성장하는 이들만 있었기에 상대적 상실감이 조금 있었다. “형도 아르펜 넘어갈 때 1차로 같이 가실래요?” “후후, 말만이라도 고맙지만, 어디 그럴 수야 있나. KH길드도 정식으로 원정대를 꾸려 봐야지.” 아르펜은 자쿠와는 또 사정이 달랐다.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차원 영주들은 반수 이상이 72군단장. 우진이 지구에서 노란 도마뱀 연합을 쓸어버리면서 수비에 공백이 생겨버린 자쿠 행성과는 또 다른 난이도의 차원이었다. “뭐, 그럼 2일 뒤에 뵙죠.” “그러세.” 우진은 이제 익숙한 듯 도재민을 데리고 포탈을 열어 차원 영지로 향했다. < 155화 - 우리는 신입 > 끝 ⓒ 진설우 < 156화 - 우리는 신입 (2) > ‘죽는다.’ 김준용은 벌써 그 생각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지 셀 수 없었다. 끈적한 땅과 시야를 가리며 자라난 빽빽한 나무는 저절로 짜증을 유발했다. 키아악! “제길.” 리자드맨의 울부짖는 저 소리도 이제는 귀에 익었다. 사냥감을 발견해 동료를 모으는 소리. 불행히도 그 사냥감은 인간. 자신을 비롯한 아르달의 동료들이었다. [9시 방향 목표 둘, 트랩 설치 후 3시 방향으로 퇴각.] ‘젠장.’ 머릿속을 울리는 해솔의 명령에 준용은 서둘러 마법 함정을 설치하고는 자리를 옮겼다. 불평불만과는 다르게 그의 발걸음은 수풀을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은밀했다. 콰쾅! 트랩이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해솔의 추가적인 명령이 머리를 울렸다. [7시 방향 팀과 합류. 백병전에 참여한다.] 준용은 서둘러 방향을 잡았다. 트랩이 터진 곳과 멀지 않은 거리. 캬아악! 그곳에 동료들이 있었다. “하압!” 기합과 함께 뛰어든 준용의 손에는 조잡한 검이 들려 있었다. 얼마 전 리자드맨에게서 뺏은 무기인데 무게중심도 잘 잡혀 있고 적당해 꽤 쓸 만했다. 콰직! “뒈져라, 좀.” 질긴 가죽에 걸린 검을 뽑기 위해 발길질한 준용이 발악하며 마력을 모아 전기 충격을 뿜어냈다. 파지직! 여기 오기 전, 그는 E급의 각성자로 전기 충격과 염력을 이용한 후방 공격수 역할을 많이 수행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병과 따위는 의미 없었다. 역할은 있지만 하는 일은 그때그때 다르다. 칼질도 하고 구르고 마법도 쓰고 함정도 깐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원이 오만 잡기를 다 익혀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썼다. 아니, 적응이 빠른 이들만 살아남았다. 그의 주변엔 일곱 명의 동료들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후우우.” 살벌한 김준용의 눈빛이 전장을 훑었다. 열두 마리의 리자드맨이 난자당해 죽어 있었다. “잘했다.” 육성으로 들려온 말소리에 준용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미소까지 띄고 있는 최해솔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살기가 가득했다. “눈 깔아. 불만 있으면 덤비고.” “…….” 준용은 마지못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덤벼봤지만 허사였다. 아직 그는 최해솔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다. 테이머 주제에 전투술은 얼마나 능숙한지…. “좋아. 오늘 사냥은 이대로 마치고 캠프로 돌아간다. 전리품 챙겨.” “…….” 모두가 말없이 능숙하게 리자드맨을 해체하여 혈석을 캐내고 그들이 사용하던 무기와 방어구를 챙겼다. 이제는 육성 대화가 더 어색할 지경. 해솔의 텔레파시 능력은 부대 지휘에 있어 최고의 효율을 발휘했지만 그 당사자들에게는 꼭두각시가 된 듯한 더러운 기분을 안겨주었다. “복귀한다.” 크아아앙. 정글에서 길들인 퓨마의 등에 올라탄 해솔을 선두로 은밀하게 위장된 바위틈의 캠프로 돌아왔다. 그곳엔 그들 외의 손님들이 와 있었다. “준용아!” “이수진!” 반갑게 소리치는 이들은 얼마 전 해솔이 수습해 갔던 그들의 동료였다. “어? 어떻게….” 팔다리가 잘리고 곧 죽어도 이상치 않을 상처를 입었던 그들이…. “성녀님이 치료해 주셨어.” “허,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고작 며칠을 굴렀을까? 이제 겨우 6일이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동질감과 전우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장의 스트레스와 그들을 내모는 최해솔이라는 악마적 존재로 인해 서로 간에 끈끈한 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가 모두 살아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말이다. 최해솔은 그들의 반가운 해우에 찬물을 끼얹었다. “4열 종대.” “…….” 해솔의 명령에 신속히 움직여 오와 열을 맞추는 그들이었다. “국왕님이 보내주신 보급품이다. 모두 본인 이름에 맞게 가져간다, 실시.” 캠프의 한켠에 쌓여 있는 보급 상자에는 각기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모두 같은 내용물이 아니라는 의미. 그들이 꽤 큰 상자를 들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자 해솔이 명령했다. “강화석과 스킬북은 모두 흡수하고 장비를 착용한다, 실시!” “실시!” 상자를 연 준용은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주먹만 한 강화석을 든 그의 눈이 복잡해졌다. 전에는 어렴풋이 비싸구나 싶었는데 이제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동안 죽음의 순간을 넘나들며 마력 제어와 감지 능력 모두 향상된 효과. ‘역시 국왕님이시다.’ 이렇게 귀한 것을 선뜻선뜻 내어주다니 말이다. 강화석을 모두 흡수하고 스킬북 세 권을 추가로 익혔다. ‘이 능력은!’ 스킬북에 마력을 주입하면 그곳에 담겼던 지식이 흡수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능력의 발현 모습에 김준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나같이 자신이 꼭 배우고 싶었고, 필요했던 능력들. ‘날 지켜봐 주신 게 틀림없어!’ 언론에서는 강우진의 압도적인 무력은 인정하면서 패도적인 성향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흘리지만, 겪어보니 알겠다. 그는 자상한 남자다. 말단 신입 각성자들도 하나하나 챙겨줄 만큼 말이다. “오, 이럴 수가.” “딱 필요한 것들이네.” 다른 동료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 모두 이 안성맞춤 보급품에 신이 났다. 스킬북만이 아니었다. 장비들도 남달랐다. “와, 이 슈트 봐.” “검이야. 딱 좋아.” 리자드맨의 검을 주워 사용하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개개인의 성향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두에게 꼭 맞는 무기가 들어 있었다. 마치 오토바이 슈트처럼 딱딱한 그것은 몸에 딱 달라붙으면서도 주요 부위엔 금속으로 덧대어져 치명상을 피하기 좋은 갑옷이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조화된 갑옷의 어깨와 가슴엔 고양이가 하품하는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차원 영지 아르달의 고유 문양. 장비에 이어 소모품도 여러 가지가 구비되어 있었다. 급할 때 쓰일 값비싼 포션과 해독제,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는 몇몇 아티팩트. ‘국왕님의 은혜가….’ 준용은 몸의 경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길드가 이토록 지원해 줄까? 고작 E급의 각성자인 그에게 말이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대우. “빨리 착용한다!” 산통 깨는 훈련교관 겸 직속상관인 최해솔만 아니라면 지금의 희열을 좀 더 느끼겠건만 아직 지구 귀환까지는 6일이 남아 있었다. 최해솔은 엄한 얼굴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소 지었다. ‘다들 기뻐하는구만.’ 해솔은 23인 신병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파악했다. 그들의 전투 스타일에 적합한 무기와 스킬들을 구상했으며 또, 그들의 능력을 측정해 보고서를 올렸다. 강우진이 흔쾌히 차원 상점에서 무구들과 아이템을 구입해 보내주었다. 값어치로 따지자면 몇억이나 할지 모를 가치의 물건들이지만 앞으로 그들이 해낼 일을 생각하면 아깝지 않은 투자였다.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 “…….” 해솔의 특공대가 단련에 박차를 가했다. *** 약속한 12일이 모두 지났다. 차원 영지 아르달에 포탈이 열리고, 해솔을 위시한 23인의 각성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빛부터 다른 그들이 내뿜는 아우라는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훈련을 모두 마쳤습니다.” 해솔의 보고에 왕좌에 앉은 우진은 차원 상점을 열어 강화석을 구입했다. 흡수 대기 시간이 지날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주는 게 좋다. 능력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개인 능력인 스탯의 향상도 전투력에 큰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다들 수고했어.” 무심한 듯 시크하게 훈련 보상으로 강화석을 내어놓는 우진을 보며 신입들의 얼굴이 먹먹해졌다. 특히 그중에서도 김준용은 거의 울먹이기 직전이었다. ‘자애로우신 분! 이분이야말로 이 시대의 왕이다.’ 지옥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교관인 최해솔에 비할까. 모두 훈련을 위해 그렇다고 하지만 유난히 많이 대들었고, 그만큼 맞은 김준용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공사 구분도 못할 철부지는 아니기에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챙겨 먹도록 해.”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위해 이렇게 막 주셔도 되는 겁니까?” “투자야, 투자.” “아아.” 역시, 배포도 남다른 왕중의 왕. 준용이 감동했고, 우진이 히죽 웃었다. 지금 죽어봐야 한 줌 시체밖에 되지 않는다. 적어도 7클래스인 AA등급 정도는 되어야 데스나이트로 재활용이라도 하지……. “해솔이.” “넵.” “뭐, 팀명 같은 거 생각해 둔 거 있어?” “아직 없습니다.” 우진이 신입 각성자들을 훑어보았다. “뭐, 좋은 팀명 없나?” 우진의 말에 준용이 가장 먼저 의문을 표했다. “저희는 한 팀으로 활동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해솔이 지휘한다.” 우진의 말에 준용을 위시한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쳇, 싫지만 국왕님의 명령이라면.’ 우진이 고민에 빠져 왕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는데, 김준용이 손을 번쩍 들었다. “뭐?” “팬텀 어떻습니까?” “팬텀?” “죽어 유령이 되어서라도 국왕님의 주위를 맴돌며 지켜드리는 친위 부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죽으면 영혼 갈취를 하라는 건가? 소멸 당할 텐데…. “뭐, 좋아. 유치하고 딱 좋네.” 우진이 부대의 앞에 있는 해솔을 보았다. “팬텀부대로 하지. 그 아래 팀이야 알아서 만들고 사령관은 최해솔.” 해솔이 눈을 빛냈다. “아르달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죽어서 모시려고 해.” “…….” 죽어서 지배력 포인트를 소모해야 되는 녀석들보다는 살아 있으면서 알아서 움직이는 게 편하지. 그때 열린 포탈을 통과해 백종도와 도재민, 블랑카와 메르디가 나타났다. “후우, 드디어 끝이군.” “고생하셨어요, 다들.” 아르달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리는지 일행은 서로를 격려하다가 왕좌에 앉은 우진과 그 앞에 사열해 있는 신입들을 보았다. 그들도 한 번씩은 일면식이 있었다. 다 죽어가는 몰골을 하고는 성녀의 치료를 받기 위해 와이번에 매달려 왔었으니까. 개중 몇몇이 성녀를 보며 감사의 눈인사를 전했다. “인사는 나중에 늬들끼리 하고. 이제 지구로 돌아가자.” “어? 성구 형 안 왔는데요?” 도재민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성구 죽었어.” “예에에에?” 도재민은 물론,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우진이 히죽 웃고는 서울역 1번 출구로 통하는 포탈 앞에 섰다. “농담이야. 성구는 나중에 아르펜 갈 때 합류할 거니까 일단 지구로 가자.” “휴, 그 리치한테 정말 죽은 줄 알았잖아요.” 성구를 추격하던 제니스의 위세가 워낙에 흉흉했기에 정말 죽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도재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진을 뒤따랐다. 김준용은 포탈을 통과해 서울역 1번 출구를 지나 서울 땅을 밟았다. ‘상위 던전의 구조와 같아.’ E급의 각성자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상위 던전의 구조와 닮아 있었다. 차원 영지 아르달이 말이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상위 던전이 맞을 것이다. 준용의 눈이 앞서가는 강우진의 등에 닿았다. ‘국왕님의 정체는….’ 하는 행동마다 파격을 일으키며 세계를 놀라게 하는 강우진의 정확한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밀고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좌우로 갈라진 그들의 사이를 걷는 기분이 마치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식의 환영 같아 김준용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고작 E급의 각성자. 광산이나 돌던 자신이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아르달의 각성자로서 말이다. “어?” 길을 따라 아르달의 정문에 운집한 사람들을 보곤 준용이 눈을 크게 떴다. “아이고, 준용아!” “엄마?” 준용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새롭게 입사한 각성자들의 가족들까지 모두가 모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데 정민찬 총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르달의 군인이 될 분들의 가족들도 아르달의 시민 자격은 충분합니다.” “아….” 정민찬은 새로 입사한 각성자들의 가족을 모시는 것은 물론, 생활에 필요한 금전적인 부분까지 모두 처리해 두었다. 그들을 앞으로 신용카드와 전용차와 개인 기사까지. 자쿠 행성에서 12일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지구에서는 3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 모든 준비는 단 3일 안에 이루어졌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민찬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귓속말했다. “볼모?” “하하하, 가족분들을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켜드리기 위함입니다.” 정민찬이 윙크했고 우진이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민찬이가 일 잘해. 총리 시킨 보람이 있어. < 156화 - 우리는 신입 (2) > 끝 ⓒ 진설우 < 157화 - 비비캐슬 > “그래. 그 안전 말이야.” 우진은 그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가족들이 안전할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원들뿐만 아니라 우진도 어머니와 수아가 있으니 말이다. “김강철은 어떻게 됐어?” “종적을 완전히 감췄습니다.” “쯧.” 녀석은 언제고 다시 접촉해 올 것이다. 굳이 먼저 놈을 붙잡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으니 말이다. “길드 총회는?” “저녁 7시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직 넉넉하네.” 지금 시간이 오전 9시가 조금 넘었으니 저녁까진 꽤 넉넉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정박 중입니다.” 아르달의 건물로 향하던 우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벌써?” “예, 그런데···.” “왜? 무슨 문제 있어?” “인수를 위해 미리 직원들을 부산에 파견했는데 항공모함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 합니다.” “헌거 줬구만.” 5년 전, 퇴역 예정이었던 항공모함을 인도의 요청으로 빌려준 영국이다. 이번에 협상을 하며 그것을 한국에 보내온 것이다. 정민찬이 조금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드시면 재협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굴러는 가지?” “예?” “움직이냐고.” “움직이긴 합니다만···.” “그럼 됐어.” 애초에 탑재 무기의 성능이나 종류를 따진 게 아니니 말이다. “함재기 상태도 영 부실하고, 추가적인 무기 탑재와 조종사를 비롯한 인력을 배치하자면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번 계약에서 호위함들의 구입도 배제되어 제대로 전단을 만들자면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의 돈을···.” “그런 건 필요 없어.” 항공모함이 함재기가 없으면 어쩌자는 건가? 호위함들은? “그럼 그냥 움직이는 아주 큰 배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데···.” “그게 가장 중요하지.” “······?” “움직이는 땅.” “예?” “6시까지 돌아오마.” 우진이 아르달 사파리의 와이번 우리로 향했다. “어, 어디가십니까?” “새집 청소하러.” “······?” 헛것을 들었나? “천천히 이사 준비해.” “서, 설마···.” 우진이 씩 웃어주고는 와이번 하나를 꺼내 올라탔다. 키아아악!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와이번이 우진을 태우고 멀어지자 백종도가 깜짝 놀라 정민찬에게 다가왔다. “아니, 정 총리. 강 아우 어디 가는 겐가?” “···항공모함 인수하러 가신답니다.” “응?” 정민찬이 휴대폰을 열어 부산에 내려가 있는 김해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민아, 사장님 방금 내려가셨다.” [아, 그렇습니까? 도착 시간 몇 시예요? 뭐 타고 가셨대요?] “와이번 타고 가셨다.” [예? 그럼 마중을 어디로···.] “끙, 수고해라 그럼.” [초, 총리님?] 정민찬이 전화를 끊고는 일행들을 보았다.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신입들, 닫힌 정문 너머에서 사진을 찍어대는 기자들, 그리고 얼떨결에 따라들어온 백종도와 도재민까지도. “그런데 성구 씨는 못 봤습니까?” “아, 성구 형 훈련 남았대요.” 도재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6성 던전도 홀로 클리어했던 성구니 크게 위험은 없을 것이다. “성구 형 죽을지도 몰라요.” “···자쿠 행성이 그렇게 위험합니까?” “아니요. 제니스님이 성구 형이랑 숨바꼭질하고 있거든요.” 숨바꼭질을 하는데 왜···. 어리둥절한 정민찬을 두고 도재민이 발길을 옮겼다. “전 그럼 누나한테 가볼게요.” “이런, 막 전장에 다녀온 분들을 두고 너무 잡아뒀군요.” 본래 던전을 탐험하고 온 각성자들의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정민찬이 최근 강우진과 홍성구 등만 지원하다 보니 잊고 있었다. “얼른 쉬세요. 그런데 재민 씨는 이제 낮에 돌아다녀도 괜찮나요?” 재민이 씩 웃었다. “뭐, 기운이 좀 빠지긴 하지만 죽진 않아요. 이제, 헤헤.” 뱀파이어 로드다. 귀족 중의 귀족. 태양의 저주에 소멸되기에는 그 존재 자체가 너무 귀했다. “나도 가봐야겠군. 저녁 총회에 참석하려면 말이야.” “예, KH 쪽에 연락해 뒀으니 곧 모시러 올 겁니다.” 백종도를 배웅한 민찬은 이마를 찌푸렸다. “하아, 이사라니.” 여태 자신이 내뱉은 말은 그대로 실현한 우진의 성격을 보아 이사는 확정이다. 딸린 식구만 천 명이 넘는데 옮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 부산 정박 중인 항공모함 인빈시블 관제탑. 김해민이 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음. 이거 독도함보다 크나?” “예에, 조금 더 큽니다.” 이번에 아르달 시국으로 영입한 전문가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였다. 크긴 크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런데 짧아서 비행기 띄울 수가 있나···.” “어차피 저희 시국에 조종사도 없지 않습니까?” “뽑으면 되지.” “수직이착륙기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냥 지금처럼 헬기들 운용하면 안 됩니까?” 지금도 주 갑판에 배치된 15대의 헬기. “모르지. 뭘 하시려는지···. 어휴, 사놓고도 막막하네 이건.” “어서 인력을 충원해야지요.” 김해민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항공모함의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도 않았건만 원래 있던 승조원들이 모조리 빠져나가 버렸다. 영국 소유이지만 지난 5년간 인도에서 운용했던 것. 그들은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인도로 돌아갔다. 이의가 있으면 영국 정부에 요구하라고 말이다. “이건 뭐, 엿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해민과 함께 부랴부랴 부산에 내려온 아르달의 인원은 30명. 이 항공모함을 굴릴 정도로 인력을 충원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몇 세대는 뒤처지는 무기들을 바꾸고 승조원들을 훈련시키고, 호위함들도 추가로 구매하고 제대로 전단을 꾸리려면···. 아니, 애초에 작은 나라인 아르달에서 항공모함이 왜 필요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끼아아악. 몬스터의 괴성에 해민이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국왕님 오셨나 보다. 나갑시다.” “네, 이사님.” 관제탑을 내려가자 갑판 위에 가뿐히 착지하는 와이번이 보였다.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린 우진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해민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여긴 줄 아셨습니까?” “이 배가 제일 크던데?” “······.” 우진이 해민과 함께 온 중년인을 보자 그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박길수입니다. 해군 소령 출신입니다. 장교 시절, 파견으로 6개월 항모 경험도 있습니다.” “오, 경험자.” 우진이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부랴부랴 뛰어오고 있는 나머지 직원들을 해민이 소개했다. “여기 세 명은 헬기 조종 면허 있습니다.” “헬기?” 우진이 힐끗 주기되어 있는 헬기를 보았다. “쓸 일 있겠어?” 돌쇠한테 던져 주지 않으면 말이다. 해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헬기가 아니면 수직이착륙기라도 매입 계획이십니까?” “수직이착륙기라.” 우진이 고개를 슬쩍 돌려 얌전히 앉아 있는 와이번을 보았다. 그것의 덩치는 전투기나 헬기에 비해 결코 왜소하지 않았다. 몸집이 큰 놈도 있어 사람 여럿 태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여기 있네.” “······.” 상상해 본 적 없다. 항공모함에 와이번이라니···. 그런데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저기가 적당하겠네.” 우진이 관제탑 쪽으로 향하자 해민과 길수가 따라붙었다.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냐, 됐어.” 우진은 관제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곳에 우뚝 섰다. “되야 할 텐데.”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차원의 조각을 꺼내들었다. 거점 생성의 조건이나 방법을 알지는 못했다. 다른 차원 영주들도 했으니 그저 자신도 가능하다는 것만 알고 있다. “안 되나?” 차원의 조각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어도 별 반응이 없자 우진이 하나를 더 꺼냈다. 정 안되면 세 개를 합쳐 차원의 증명을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차원의 조각 두 개를 한 손에 쥐자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차원의 조각 2개를 합쳐 차원의 파편을 생성하시겠습니까?> 쉽게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우진이 두 개의 조각을 합쳐 파편을 만들었다. 길쭉한 수정 탑처럼 생긴 차원의 파편은 작은 완드 정도의 크기였다. 우진이 그것을 관제탑 앞에 박았다. <거점을 생성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차원의 파편에서 흘러나온 빛이 홀로그램처럼 여러 가지 상징물을 띄웠다. 슬롯머신의 그림이 넘어가듯 차례로 바뀌던 모습이 나무 모양에서 멈췄다. <지구에 생성 가능한 거점 상징물이 제한됩니다.> 모습이야 아무렴 어떤가? 움직이는 항공모함에 거점이 생성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차원 영주 강우진의 거점 도시를 생성합니다. 남은 시간 24시···.> 차원의 파편에서 흘러나온 빛과 함께 그것을 씨앗으로 나무가 자라났다. 잭과 콩나무처럼 순식간에 커진 나무 덩굴이 관제탑을 빙글 돌아 위로 올라갔다. “어어?” 해민을 위시한 직원들이 깜짝 놀라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루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해.” “···예에.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긴, 새집이지.” 관제탑을 모두 감싸버린 뿌리와 서서히 자라기 시작하는 나무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던전과 거점은 모두 차원 영주의 힘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포인트를 이용해 무엇이든 가능하다. 상징물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 내라면 말이다. 이곳에서 우진은 신과 같다. 포탈을 통과해야만 갈 수 있는 차원 영지는 오직 각성자의 출입만을 허락했다. 하지만 행성에 만들어버린 거점 도시는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의 출입도 가능한 공간. 아르달의 식구들이 머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차원 영주의 힘이 보호하는 강력한 거점 도시에 말이다. 이동이 가능한 강력한 요새 도시를 구축하기까지 하루가 남았다. “청소부터 해볼까?” 갑판은 넓었으나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다는 생각을 하면 좁게 느껴졌다. 위이잉. 돌쇠가 소환되자 우진이 해민을 보았다. “아까 헬기 조종사 몇 명이라고?” “셋입니다.” “나머지는 필요 없네 그럼.” “네?” 소환된 돌쇠가 우진의 의지대로 헬기들을 향해 돌진했다. 쯔으응, 쿠쿵! 헬기들의 철판이 우그러지며 뭉쳐져 아이언 골렘이 만들어졌다. 갑판의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고철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 저 비싼 걸···. 그냥 옆으로 옮길 거면 차라리 팔게 놔둘 것이지. 돌쇠가 헬기들을 하나하나 옆으로 치울 때마다 해민의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 제주도 만장굴. 평평한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동굴의 곳곳에 배치된 혈석이 마력을 공급하도록, 그것들을 관리한 지도 벌써 며칠째. 마법진의 불이 꺼지며 포탈이 생성되었다. ‘드디어.’ 이상호는 포탈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를 따르는 화랑길드의 직원들도 눈치껏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지아아앙. 포탈이 출렁이더니 이엘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동굴이 어둡고 습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제법 쓸모가 있구나.] “영광입니다.” 이엘로는 마법진으로부터 퍼져 나간 빛이 동굴을 천천히 장악해 가는 것을 느꼈다. 이상호가 소환 거점을 만든 덕에 무사히 지구에 현신했다. 자신의 차원 영지에서 지구로 바로 올 수 있는 던전을 획득했다. 이엘로는 곧장 지구 정복을 시작하지 않았다. [임모탈의 정보를 가져와라.] “명을 받듭니다.” 이상호와 그의 부하들이 조심스럽게 동굴을 벗어났다. 이엘로는 신중했고, 그를 따르는 지구인들이 있었다. [지구.] 이엘로는 아직 동기화되지 않아 100% 힘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행성에 마력이 충만해질 것이다. 아쉽긴커녕 넘치도록 기뻤다. [드디어 돌아왔는가?] 오래도록 봉인되어 왔던 행성. 그 시작점으로의 귀환이었다. < 157화 - 비비캐슬 > 끝 ⓒ 진설우 < 158화 - 비비캐슬 (2) > KH호텔. 초대받은 사람만이 본 회의장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내용에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주최의 핵심인 강우진이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저녁 파티처럼 꾸며진 홀에 사람들이 끼리끼리 뭉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려진 뷔페 음식에 열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 초대받은 하나하나가 세계의 내로라하는 각성자들. 혹은 그들 길드의 핵심 인사들. 강우진이 주최하는 모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들. 중소 길드는 아예 들어오지도 못했다. 그들의 불만이 있긴 하지만 별수 없는 일. 정민찬은 사람들 틈에서 유난히 어깨가 처져 보이는 남자를 향해 미소 지으며 다가갔다. “아이고, 박 사장님 아닙니까?” 해머길드의 사장 박상오가 음료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했다. “흠, 큼. 정 총리님 아닙니까.” “하하하. 예, 제가 아르달의 총리입니다.” “…….” 한때 사장과 휘하 지원부서의 팀장이 어색한 해우를 했다. “이번에 총회 진행 때문에 고생하셨지요?” “말도 마십시오. 여기저기서 초대 협박에 테러 예고도 하고, 청탁에….” 박상오는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눈은 퀭했고 피부도 상한 것이 부쩍 늙어 보였다. “괜한 욕심을 부렸습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민찬이 박상오의 고생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장소를 섭외하고 초대장을 보내고 짠 하고 여는 생일 파티 같은 게 아니다. 강우진이 주도하는… 그것도 아르펜과 현재 던전에 대한 모든 정보를 풀기로 한 총회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고 초대장을 따내기 위한 청탁과 협박에 시달리다 보니, 안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신경 쓰느라 장소 물색부터 경호 문제에…. 시간이 지체될수록 뜨거워지는 세간의 관심과 비례해 해머길드에 대한 비난도 끊이지 않고 말이다. 너무 걱정이 많아도 일의 추진이 어렵다. 박상오가 그랬다. KH길드가 나서서 총회의 운영을 하겠다 나섰을 때 박상오는 그간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기라도 하듯 당장 넘겼다. KH호텔로 장소가 정해지고 초대장이 새로 발송되었다. 우습게도 이메일로 말이다. 그간 박상오가 기했던 정성과 준비가 허무할 정도로 허술한 운영. 불만과 협박이 최고조로 달했으나 KH길드도 아르달도 잡음을 모두 무시했다. “한데,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뭘 말이죠?” “몇몇 길드에서는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 자체를 무시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초대는 세계의 모든 길드에 했죠.” “아니, 그건 SNS에 공지 올린 거고….” “그거면 충분하죠.” “…….” 각성자 세계의 VIP들을 상대로 하는 일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중국의 몇몇 거대 길드는 정식적인 초대를 하지 않아 심기가 불편한지, 아예 참석도 하지 않았다. 박상오는 지난 고생이 떠올라 이런 길드들의 알력에 치가 떨렸다. “지들이 안 온 거죠.” “아….” 정민찬이 그가 알던 이가 맞는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이 어마어마한 배포는 뭐란 말인가? 그때 덩치 좋은 사내가 다가왔다. “아오, 정 총리.” “백 사장님.” KH길드의 사장 백종도가 어깨를 주무르며 다가왔다. “하도 빡세게 굴렀더니 자도 자도 몸이 찌뿌듯해.” “하하, 엄살이 심하십니다. 안 그래도 등급 측정에서 AA급으로 판정받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으잉? 그 소식이 벌써 그리 갔나?” “기사가 쏟아지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으하하. 그건 그래.” 백종도는 길드로 돌아와 등급 측정을 다시 했다. 이번 원정 수련의 성과를 보기 위해서인데, 뜻하지 않게 AA급의 등급에 오른 것이다. 강우진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 최초. “재민이도 AA급은 나올 테고, 성녀님이야 뭐 S급 이상이시고, 블랑카랑 해솔 그 친구도 AA급 되지 않았나?” “아직 측정 전이라 모를 일이지요.” “크큭, 아르달이야말로 겸손이 지나치구만. 측정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성구 아우는 무조건 AA급 이상 아닌가?” “…….” 정민찬이 말없이 그저 미소 지었다. 홍성구의 성장 속도는 가히 세계 최고. “물론 살아서 온다면 말이야. 하하하.” “…….” 백종도의 농담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정민찬이었다. 그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상오가 놀란 눈을 치떴다. “아르달의 각성자들이 모두 그 정도입니까?” “응? 박 사장은 잘 모르나 보구만. 이번에 뽑은 신입들도 다 만만찮아 보이던데 말이야.” “허….” 아르달은 무슨 괴물 양성소인가? 어디서 그런 인재들을 다 스카우트하지? 박상오의 눈에 인재 발탁의 귀재였던 해머길드 시절의 정민찬 팀장이 들어왔다. 지금은 아예 길드를 옮겨 아르달의 부사장이 되었다가, 이젠 개국까지 해서 총리에 이른 인물. ‘크, 놓치는 게 아니었어.’ 그때 잡았어야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모든 지원을 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를 남겨봐야 소용이 없었다. “아, 사장님 오시나 봅니다.” 분주해진 입구와 카메라 플래시에 정민찬이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홀에 모인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입구 쪽으로 온 민찬이 그곳에 서성이는 우승훈을 보곤 물었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나?” “대기실로 모셨습니다. 빨리 준비하라십니다.” “크음. 자료 준비는?” “이미 철저히 마쳤습니다.” “그래. 우리도 얼른 갑세.”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건만 뭐가 그리 급한지……. 둘이 대기실로 향하고 연회장엔 곧 길드 총회가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렀다. *** 대학의 강의장 같은 공간에 사람들이 빽빽이 자리해 앉았다. 자리가 불편하다고 토로하는 자들은 없었다. 몇몇 길드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도 있을 것이다. 그들끼리 알음알음 알고 있는 것들도 이번에 강우진의 입을 통해 전 세계에 모두 공개될 것이다. 그것이 줄 파장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는 무대로 정민찬이 올라왔다. “아르달의 총리 정민찬입니다.” 여유 있는 웃음을 짓고 있었으나 속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세계가 주목하는 자리에 오르리라곤 말이다. 성공하고 싶었지 야망이 이렇게 크지는 않았는데 강우진을 만나고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국왕님이 오르기 전, 그간 저희가 알아낸 던전에 대한 간략한 정보 공개가 있겠습니다.” 민찬은 준비한 PPT 화면을 띄웠다. “트라넷. 이 단어가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처음 사용한 것은 저희 아르달의 왕이신이 강우진님을 통해서입니다.” 화면에 트라넷이라는 단어와 함께 그 주위로 위성처럼 가지치기한 여러 행성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행성간의 네트워크로 봅니다. 도로가 뚫리는 거죠.” 화면이 넘어갔다. 지난 세계적 브레이크 때 나타난 몬스터, 특히 드래곤의 모습과 그것을 지키듯 감싸고 있던 거대한 나무들. “이것을 타고 차원 영주, 속칭 몬스터 로드라는 자들이 침공합니다. 몬스터는 그들의 병력이죠.” 그리고 이어진 지하철역들의 모습. “차원 영주들은 저마다의 독립된 차원 영지를 가집니다. 바로 상위 던전이죠. 그리고 출입문과도 같은 던전을 소유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단번에 문을 열고 지구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바뀐 화면에 나타난 녹색 보석. “던전이 출입문이라면 이 귀환석은 열쇠와 같습니다. ” 성공적인 공략으로 인한 던전의 광산화, 혹은 브레이크. “현재 30일의 동기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열쇠를 뺏지 못하면 저들은 문을 열겠지요. 그것이 던전 브레이크입니다. 열쇠를 뺏으면 그 공간의 에너지가 다할 때까지 몬스터들이 반복 출몰하는 광산이 됩니다.” 성급한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고 질문했다. “30일의 공략 여유 시간 없이 터진 지난 던전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뒤에 바로 나오죠.” 정민찬이 화면을 넘겼다. “집주인이 열어준 겁니다. 지구인이 그들을 향해 문을 연 것이죠. 국왕님에 의해 제지된 전 화랑길드의 사장 이상호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어, 지난번 강우진의 미국 방문 때 미사일 테러와 아이언 골렘 돌쇠의 몬스터 사냥이 동영상으로 재생되었다. “이곳은 농장이었습니다. 지하철역이 아닌 곳에 생성된 최초의 던전으로 리버스 조직과 리올라 박사의 연구가 진행되던 곳이었습니다. 결과는 보시다시피 성공했지요.” 지하철역만을 막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방법은 있을까? 위기감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럼 아르달의 국왕님을 모시겠습니다.” 우진의 등장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자리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강연 무대에 오른 그는 그것을 보고 좋다거나 싫은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혹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 “자, 다들 앉고. 내가 누군지는 알 테니 소개 생략하고 하고 싶은 말 전합니다.” 우진이 품에서 보라색의 보석을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을 내뿜는 그것은 막대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요번 난리 때 이거 주운 나라 있죠? 영국은 내게 사갔고.” 지금 다방면에서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것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우진이 정보를 공개하려 하고 있었다. 수십, 아니 수조 원의 가치가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 “이거 세 개 모으면 차원 영주가 될 자격이, 그리고 하나를 쓰면 던전을 얻는 데 쓸 수 있습니다.” 참지 못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고는 말했다. “강우진님은 그럼 차원 영주입니까?” “물론.” “…….” 회의장이 술렁였다. 그리고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일개 개인의 무력이라고 하기에 강우진은 불가해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너무 치사한 것 아닙니까? 이 엄청난 이익이 나는 것을 선점하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우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익?” 그가 피식 웃었다. 권력을 쥐는 것이 이익이라면 우진은 그것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책임을 느끼고 있음 또한 사실. “너도 하나 줍지 그랬어?” “…….” 조금은 얄미워 보이는 그 말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은 정민찬이 실소했다. 참 강우진다운 대답. “중요한 건, 지구에 길이 열렸고 놈들의 침략이 계속된다는 거지. 이익 따위를 보고 싶은 게 아냐. 그럼 뭣 하러 여기서 떠들어?” 웅성웅성. 술렁이는 분위기에 우진이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내 가족을 지키는 거야. 작게는 지구를 지키는 거지. 그냥 지구를 지키는 거야. 작게는 내 가족을 지키는 거지.” 아, 앞뒤가 바뀐 것 아닌가? “방법이 있습니까?” “있지.” 강우진이 당당하게 말했다. “항공모함을 하나 샀어. 거기에 가족들을 데려가 지킬 거다.” 우진의 말에 누군가 ‘노아의 방주’라고 중얼거렸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조금은 날카로워졌다. 이상 신호에 정민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권력자가 위선을 행하는 것은 굳이 악으로 볼 필요도 없건만, 강우진은 너무 솔직한 것이 아닐지…. “혼자만 살겠다는 겁니까?” “아니, 이건 경고야. 내 적은 차원 너머에만 있지 않으니까.” 경고. 세계 최고의 각성자 강우진이 절대 가치로 여기는… 가장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것이 가족이다. 그러니 건들지 말라. “사람들 불러서 괜히 주절주절 떠드는 건 이 말을 하고 싶어서야.” 강우진이 술렁이는 좌중을 훑어보고는 말을 전했다. “적이 몰려오는데 어떻게 해야겠어?” 방법이 있는 건가? 아니, 그것을 몰라 모두가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닌가? “길을 줄이고 몰려오는 적과 싸운다.” 지금 현재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니, 전혀 획기적이지 않은 상투적인 말. 지금처럼 던전의 링크를 줄이기 위해 공략에 최선을 다하고, 부득이 터지는 브레이크는 힘을 합쳐 막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 세계가 하나로 뭉치자는 제의. “혼자만 살 방도를 마련해 놓고 우리 보고 총알받이가 되란 겁니까?” 누군가 분노에 찬 그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우진이 당당히 소리쳤다. “선봉은 내가 선다.” < 158화 - 비비캐슬 (2) > 끝 ⓒ 진설우 < 159화 - 비비캐슬 (3) > 협회에 참석한 절반이 넘는 사람이 외국에서 온 각성자 대표들. 그중 일본인 하나가 소리쳤다. "결국 전리품을 독점하겠다는 것 아니오?" 말이 좋아 선봉에 선다지, 모든 공로를 독차지하겠다는 속내일 수도 있다. "그럼 네가 서." "...그게 무슨.." "대신 앞서 갈 사람 있으면 가. 안 말려. 앞에서 뒤지면 그때 내가 가면 돼." "..." 할 말이 없다. 강우진의 압도적 무력. 그게 문제다. 강우진이 없으면 전쟁 자체가 성립되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뒤만 쫓자니 손에 떨어지는 게 적고... "뭐가 그렇게 욕심이야?" "..." "나 말고 상황이 별로 심각하지 않나봐? 세계 인구가 90%가 사라지는데 난 앞으로 한 달로 보는데 말이야." "..." 강우진의 말에 술렁이던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괜히 욕심내지 말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고." 우진의 말에 적지 않는 사람이 고민에 빠졌고, 몇몇은 크게 놀랐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메르디의 놀람은 상상을 초월했다. '임모탈이 협의를..'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아마 아르펜의 그 누구에게 이야기해 봐도 말도 되지 않는 농담이라며 핀잔만 들을 것이다. "억지로 희망적인 말 하지 마십시요. 소모적인 전쟁을 해봐야 결국 파멸만 기다리고 있을 뿐 아닙니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누군가의 질문에 우진이 빙긋 미소 지었다. "말세지, 말세. 희망이야 있지. 던전을 없애버릴 방법을 찾을 거야. 그때까지 버텨야지. 별수 없잖아?" 우진이 좌중을 훑어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쉽게가고 싶은 놈도 있을거야. 이상호처럼 차원 영주들 틈에 붙으려는 놈들, 제 목숨 구하자고 지구 팔아먹을 매국노들 말야." "..." "분명 생길거야. 그놈들부터 먼저 죽여주지." 우진의 말이 끝났음에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손익계산을, 누군가는 비장한 각오를, 또 누간가는 혼란스러움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채 말이다. "이상 정보 오픈 끝, 지구 구하기 전 가이드 끝." 무거운, 아니, 비장하기까지 한 주제이건만 우진의 쾌활한 목소리만 듣자면 희망이 싹트는 듯했다. "전 지구의 각성자들이 던전 리셋을 공유하고 공략에 최선을 다한다." 적이 침투해 오는 길목을 좁히고.. "던전 터지면 재원 아끼지 말고 몬스터 말살에 최선을 다한다." 합심해서 적을 처치하고. "최선의 방어는 공격. 그리고 던전을 아예 폐쇄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최근 트라넷에 잠식당한 아르펜을 원정한다." 우진이 스스로에게 말하듯 되뇌었다. "내일 아침, 난 선발대를 이끌고 아르펜으로 출발한다. 돌아올 때까지 지구를 잘 지키도록해." "..."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집 지키란 수준이 아닌데... "질문은 정 총리에게 하도록." 우진이 뒤돌아 무대를 벗어난다. 민찬이 어두운 얼굴로 그 빈자리에 올랐다. "질문 있소!" "나부터요. 선발대 구성원은 어떻게 됩니까?" "아르펜 원정에서 챙기는 전리품의 소유권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민찬은 아찔한 얼굴이 되었다. '아...' 도망치고 싶지만 어차피 뒷수습은 정민찬의 몫. 그가 하나하나 사람들의 질문에 응하기 시작했다. *** KH호텔을 벗어난 우진은 곧장 아르달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을 찾았다. 수아는 덩치가 커진 강아지 복희를 쓰다듬으며 놀고 있었고 어머지는 그런 딸을 눈에 한가득 담은 채 시선이 떠날 줄 몰랐다. "왔니?" "네. 수아야." "응? 오빠." 수아가 쪼르르 달려 우진에게 왔다. 복희도 꼬리를 살랑 흔들며 끙끙 소리를 냈다. "요즘도 이상한 꿈 꿔?" "아니, 요즘은 나 꿈 안 꿔." 각성하고 나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수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성력을 사용하게 되었고, 가끔 신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능력은?" "헤헤, 나 귀신 같아." 수아는 푸르게 물든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축복이 담긴 기운이 우진을 보곤 자석을 밀어내듯 반응했다. "다른 사람들은 막 이렇게 하면 좋아하는데 오빠는 안 되네." "오빠는 조금 달라. 그보다 우린 내일 이사 가야해." "응? 갑자기 웬 이사니?" 우진의 말에 격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머니 이수경이였다. "배 하나 샀어요. 거기서 살 거에요." "베에서 어떻게 사니?" "음, 좀 커요." "요트같은 거니? 막 안에 부엌도 있고.." "비슷해요." "...알겠다." "더 안 물어요?" 이수경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안다. 얼마나 가족을 생각하는지도 말이야. 다 이유가 있겠지." "..." 우진이 그저 미소지었다. 수아는 능력을 각성했다. 차원 영지로 데려가자면 못갈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이수경은 달랐다. 그녀의 레벨은 2다. 10레벨이 되어 1서클은 되어야 능력이 생기는데, 그녀의 성장속도로 보면 각성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우진이 유사시에 위치를 이동시킬수 있는 항공모함을 산 것도, 그곳에 거점도시를 건설하는 것도 모두 이수경을 위해서였다. 그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그동한 축척한 영지의 포인트를 이용해 거점을 수비할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그렇게 알고 계세요." "그래. 바쁘면 어서 일 보거라." 이수경은 아쉬운 눈빛이었지만 괜한 기색을 보여 시간을 뺏을세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우진은 그 마음이 느껴져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로서도 그리 여유는 없었다. 한손으로 열손을 막을 수는 없다. 적은 많고, 지구로 통하는 입구는 수백이 넘는다. 그 모든 던전을 시간에 맞춰 클리어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점차 전장은 던전이 아닌 지구로 옮겨질 것이다. 그전에 적어도 용용이는 소환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아의 몸을 빌어 현신한 신의 존재가 궁금했지만, 그녀가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알 방법이 없다. 이름도 모르지만 딱히 해로워 보이지는 않는 존재. 아르펜의 원정에서 거기 남은 연합군을 구해내고 나면 메르디로 하여금 수아에게 성녀로서 갖춰야할 것들을 배우게 할 셈이었다. 우진이 다음에 들린 곳은 지원의 방. 노크 후 들어서는 우진의 모습에 도지원이 허둥지둥했다. 그가 지원과 함께 있는 신디를 슬쩍 보았다. "응? 쟨 아직 안갔냐?" "그때 받은 충격도 있고, 여기가 가장 안전하니까.." 안전이라.. "우리 이사 갈 건데?" "응?" "어디? 어디로 가는데?" 깜짝 놀란 신디가 묻자 우지닝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배 하나 샀어. 거기로 옮길거야." "헐, 설마 항공모함?" 우진에 관한 뉴스라면 분 단위로 나오고 있다. 항공모함의 구입 건은 며칠 전부터 떠들썩하던 이야기. "응." 우진의 말에 신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야? 할 말 있으면 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있지 말고." "나도 가도 돼?" "넌 활동 접었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르달 직원만 태울거야." 정확히는 아르달에 취업하며 국적을 받은 이들과 그 가족들만 말이다. 나가서 싸우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가족만이라도 철저하게 지켜준다는 안배였다. "난 안돼?" "넌 뭐 할 줄 아냐?" "응?" "쓸모없는 애를 뭣 하러 태워?" "..." 신디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이었다. 어디 가서 쓸모없는 취급을 당해 봤을까? 자존심이 상한 듯한 그녀를 보며 도지원이 중재했다. "신디 지금 치료중인데..조금 나아 질때까지만 안될까?" "무슨 치료?" 우진의 시선이 신디의 위아래를 훑었다. "흠.어디 아파 보이진 않는데." "그때 받은 정신적 충격이.." 지원의 변호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애도 감당하는데 너무 징징거리는 거 아니야?" 우진의 말에 신디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얼마 전 보았던 수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도 안다. 정신적 충격쯤은 인지할 수도 없을만큼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배부른 소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신디의 눈이 빨개졌다. "그래 내가 철없었어." "알면 됐어." 어쩜...한마디도.. "나 갈게." "그래. 다음에 보자." 신디가 애써 울음을 삼키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신디야!" 지원이 따라가려는 것을 우진이 팔을 붙잡았다. "아. 이거 놔." "가서 뭐하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일까? "너무 심했어. 조금 부드럽게 이야기해도 됐잖아." 강우진은 너무 곧다. 지원의 원망 어린 눈초리를 흘려 넘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왜?" "...됐어. 이거 놔. "흠." 지원이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이럴 때 보면 너무 무서워. 나도 쓸모없으면 버릴 거니?" "아니, 영혼의 무게가 다르니까." "...?" 지원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신디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나갔다. 혼자 남은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형, 조금 심하셨어요."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도재민을 보며 우진이 떨떠름하게 그를 보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쭉이요." "좀 컸다?" 은신이 거의 깨비급은 되는 듯했다. "헤, 그보다 성구 형님은 언제 오시죠?" "아, 뭐. 대충 올 때 됐는데." 수련을 마무리하고 온다고 했으니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하루 안엔 올것이다. 아르펜 원정에 성구와 제니스는 무조건 필요했으니 말이다. *** "흐흑." 문을 나서자 신디는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그녀도 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맞지 않는 투정이란 걸 말이다. "어어? 저기요." 울면서 뛰쳐나가는 그녀를 지나던 직원이 불렀으나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쁜 놈. 흐으엥."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잠시나마 저런 차가운 남자에게 이끌렸다니 더욱 화가 났다. "지금 나가시면.." 직원들의 부름에 괜히 지금의 상황이 민망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 쪽팔려!' 얼른 나가서 매니저를 불러야겠다 생각한 그녀가 정문을 향했다. 벽을 따라 난 길을 돌아 문 앞에 섰을때, 수십 대의 카메라가 일제히 셔터를 눌렀다. 그녀를 찍었다기보다는 그저 대기하고 있다가 나오는 사람을 노렸을 뿐이다. 그 와중에 걸려든 것이 신디일 뿐이고. "와, 뭐지? 신디 아냐?" "대박! 지금 우는 거야?" "아르달 왕과의 스캔들인가?" 찰칵, 찰칵! 연달아 터지는 셔터에 흐르던 눈물도 멈췄다. 예상 못 한 기자들의 운집에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이 되었다. '아, 안되는데.' 뒤늦게 찾은 이성에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쪽팔리고 당황스럽고, 황당하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추한 모습은 둘째 치고 저 기자들이 쏟아낼 찌라시에 자신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떠들기도 좋게, 가장 핫한 아르달에서 눈물 범벅이 되어 뛰쳐나오는 연예인이란..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가 몸을 홱 돌렸지만 등 뒤로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공황장애라도 올 것만 같았다. 세상이 핑핑 어지럽다. 그 때 하늘에서 내려온 따듯한 불이 그녀를 감쌌다. 화르륵. "..." 그녀가 돌아보자 그곳에 불타는 사람이 있었다. "어? 왜 울어요?" "...흐윽, 가앙우, 흐윽응 나쁜 새끼, 흐응, 기자들 카메라로, 으에엥." "흐음. 울지 마요." 불의 인간. 성구의 주위로 흐르던 불꽃이 사그라 들더니, 다른 곳에서 발화했다. 퍼퍼퍽! "어어?" "악, 뭐야!"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폭발하며 렌즈와 메모리가 타버렸다. 신디가 너무 놀라 성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헤헤, 유리걸스 맞죠? 들어가서 사인이나 해주시죠?" "..." 홍성구의 해맑은 웃음이 신디의 눈망울에 가득찼다. < 159화 - 비비캐슬 (3) > 끝 < 160화 - 비비캐슬 (4) > 우승훈이 아르달의 복도에서 마주친 홍성구를 보곤 활짝 웃었다. "오셨습니까?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휴, 말도 마요. 그런데 오늘 뭐 했어요? 연예인 와 있던데." "예?" "그 있잖아요. 유리걸스 신디 씨. 사인도 받았는데. 헤헤." 성구가 종이를 펄럭이며 해맑게 웃었다. "아..국왕님이랑 도지원님하고 고교 동창이랍니다. 며칠 전에 놀러오셨는데." "우와! 형님이 연예인하고 친구였어요?" "예..뭐." "대박이다. 연기로 전향하고 요즘 인기 쩔지 않아요?" "아, 뭐..." 인기 쩔기는 연예인보다 아르달 왕이 더한데... "햐, 좋겠다. 형님은 밥도 같이 먹어봤을 거 아녜요." "흠, 마음에 드시면 데이트 신청해보시지 그랬습니까?" "헐, 제가 무슨 연예인이랑." "..." 우승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부끄러워하는 성구를 보았다. 자기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명성에 대해 자각이란 것이 있는 인간일까? "홍 이사님 정도면 거절하지 않을 텐데요?" "예이, 제가 무슨. 헤헤. 사인 받았으니 됐죠. 뭐." "..." 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유명한지 모른단 말인가? 불꽃 남자하면 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건만.. 아니,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홍성구다. 그런데 이렇게 자각이 없으니. "형님은요?" "짐무실에 계십니다." "네, 그럼 다음에 봐요." "네, 이사님." 성구는 신디의 사인을 품 안에 고이 접어넣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아르달 국왕의 집무실. 노크 소리와 함께 입장한 성구의 눈에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우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왔냐?" "네, 형님." "제니스가 가래?" 제니스란 말에 성구의 인상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뭐, 이제 어디 가서 죽을 정도는 아니래요."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 제니스가 그리 말했다면 정말 제 몫은 해낼 것이다. "수고했다." "헤, 근데 왜 이렇게 다 모여 있어요?" "너도 앉아봐." "네." 성구가 재민의 옆에 앉았다. 그 맞은 편에 블랑카와 최해솔이 앉아있었다. "메르디만 오면 되네." 우진의 말에 성구가 물었다. "왜 이렇게 다 모인 거예요?" "왜긴, 원정 전에 소집이지." "흐음, 자쿠 행성하고 달라요? 그냥 저번처럼 가서 난장 피우고 오면 되는 거 아닌가?"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르지, 만만찮은 놈들이야. 거긴 72군단장들의 던전이 셀 수 없이 많으니 말이야." "그게 뭐예요? 강해요?" "차원 영주 중에 포인트를 가장 많이 가진 72명." "포인트 많으면 전투력도 커요?" "비슷하지. 포인트로 병력을 사서 충원해. 근데 놈들은 포인트가 닳을 일이 없지. 던전이 많거든." 차원 영지가 크고, 가진 던전이 많으니 영지민들이 세금으로 바치는 포인트도 많다.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은데 어쩌겠는가. "재벌이 돈 막 써도 티 안 나는 거랑 같은건가." "뭐, 비슷해." 그때 문이 열리며 베르디가 들어왔다. "임모탈께서 유일하게 싸움이 되었던 이유도 병력 충원이지요." 아르펜을 삼분했던 세력. 토착민이랄 수 있는 연합과 트라넷의 차원 영주들, 그리고 아르달을 차지하고 요지부동인 임모탈. 뒤의 두 세력은 싸워도 병력이 줄지 않는다. 하지만 연합은 병력의 충원이 더디니 싸움이 점차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임모탈도 사라졌으니, 연합이 쇠락하는 것은 순식간. "왔으면 앉아." "...." 메르디는 자리에 앉기 전 사람들을 향해, 정확히는 강우진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아르펜의 구원에 이토록 나서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뭐, 서로서로 돕는 거지." 성녀도 우진의 일을 도왔다. 어차피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도 찾아야 하니 아르펜으로 가는 것은 당연할진데, 메르디에게는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구의 행성인들, 그리고 임모탈의 원조를 받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 예지의 여신 아리아의 선견지명이 놀랍기만 하다. "그럼 먼저 작전 설명부터 하지." 우진의 간단히 생각해 본 계획을 꺼내놓았다. "내 차원 영지를 통한 아르펜과 지구의 게이트 확보는 끝났고." 간간히 도전자들이 있긴 했지만 키바가 그들을 모두 물리치며 아직까지 귀환석을 잘 지키고 있었다. 우진이 설명을 이었다. "먼저 선발대로 나와 성구, 메르디, 재민이가 넘어간다." "저흰 언제 갑니까?" "이틀 뒤에 와. 그쪽 시간으론 8일이 지났겠지. 그 사이 우린 살아남은 연합세력을 찾고 아르펜 수복의 전진기지가 될 거점 도시를 세운다. 거기가 베이스캠프가 될거야." 포탈을 통과해 곧장 지구와 아르펜을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 블라캉와 해솔이 신입들 데리고 넘어와. 이후엔 구출조와 섬멸조. 그리고 탐색조로 나눌 거야." 모두가 우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구출조에 해솔과 블랑카, 메르디, 그리고 팬텀부대가 함께 활동해." 가장 시너지가 좋을 것이다. 블랑카의 버프도 그렇고 메르디의 강력한 힘과 해솔의 통제력이면 팬텀부대가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성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재민 학생하고 저는 그럼 탐색조에요?" 우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랑 재민이는 섬멸조, 차원 영주들의 거점과 던전들을 하나씩 파괴해." "예에?" "둘만으론 어려울 거야. 아르펜의 연합과 힘을 합쳐. 주도하는 건, 늬들이 해야 할 거다." 아르펜의 살아남은 연합 세력과 반격을 위한 공격 부대를 조직한다. 아직 약한 팬텀부대를 공격조에 포함하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몰랐다. 현재 그 조건에 맞는 것은 성구와 재민 정도. "그럼 형님은..." 우진이 씩 웃었다. "난 보물찾기를 해야지." 물론, 그냥 얌전히 찾는 것은 아니고... "죄다 파괴하면서 말이야."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성구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놀아도 돼요?" 그간 사람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의 치열한 1분 1초를 살았던 성구다. 하지만... "이사 준비해. 부산으로 갈거야." "...?" 자쿠 행성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성구만 모르고, 나머지는 알고 있는 사실. "그럼 해산해." "으잉?" 영문을 몰라 하는 성구를 해솔이 챙겨 자리를 벗어났다. 하나둘 나가는데 우진과 메르디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넌 안가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신탁이 있었습니다. 전해야 할 듯하여.." "말해봐." "...." 메르디가 우물쭈물 하다가 이내 옅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 제주 만장굴. 공사를 이유로 막아놓은 바리케이드가 소란스러웠다. "야, 공사 얼마나 진척했는지 구경만 한다니까?" "출입 불가합니다." "내가 여기 근무한 지만 10년이 넘었어!" 김태식의 강짜에 직원들이 요지부동으로 막아서고 있는 지 벌써 30분째. 마침 외부로 나섰던 검은 세단이 들어오다가 입구에서 멈춰 섰다. 지이잉. 창이 내려가고 나타난 이상호의 얼굴에 김태식이 얼른 다가왔다. "아이고, 이상준 소장."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글쎄 공사 진척이 어찌되는지 구경 좀 한다니까 이렇게 가로막지 않나." "그게 왜 궁금하죠?" "당연히 궁금한거 아닌가? 내가 10년이나 있어봤지만 이렇게 보수공사를 한 적이 없어. 자꾸 들어가는 물건들도 그렇고..." "보여 드리죠. 타세요." "하하, 역시 소장이라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 구만." 김태식이 이상호의 옆자리에 탔고, 입구를 통과한 차량이 주차장에 주차했다. 이상호를 따라 발길을 옮기는 김태식이 말을 쏟았다. "뭐, 이소장이 잘하겠지만, 그래도 소중한 천연기념물 아닌가? 훼손될까 염려돼서." "암요. 잘 압니다. 자, 가보시죠." 이상호의 어두운 분위기에 조금 마음이 위축된 김태식이지만 흔쾌히 그의 뒤를 따랐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공사를 구경 온 그였다. 완강히 막으니 오기가 생겨 생떼 부려 본 것이고 말이다.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김태식이었다. 일전의 보수공사에사도 기존의 매표소와 식당의 직원까지 모두 내보내고 이렇게 폐쇄적으로 공사를 진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심쩍은 것이 많지만 그렇다고 공사 책임자의 앞에서 그대로 말할 수도 없고... 그저 자신의 눈으로 잘되고 있나 확인하고 싶은 그였다. "자, 내려가시죠." 만장굴로 통하는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는 김태식은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키엑, 키익! 동굴을 울리며 들려오는 소리에 머리가 쭈뼛 선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시죠?" "바, 방금 소리 못 들었나?" "무슨 소리요?" "으음, 바, 박쥐인가?" 이상호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했다. 휘이익, 퍼억! 공중에 붕 뜬 몸이 의지를 벗어나 계단을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퍼억! 충격과 함께 아짤한 김태식이 소리를 질렀다. "으어억, 아이고 나 죽네. 좀 도와주게, 나 좀..." 애원의 손길을 내밀던 그는 곧 표정을 굳혔다. 지나치게 활짝 웃는 이상호의 얼굴이 기괴하게 보였다. "자, 자네.." "제 몸도 못 지키는 주제에 천연기념물은 무슨." 차갑게 말한 이상호가 그를 지나쳐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키에에엑! 그가 사라진 동굴에서 섬뜩한 괴성과 함께 나타난 몬스터가 김태식을 낚아챘다. "으아아악!" 콰직, 콱! 마지막 비명과 함께 괴물들의 먹이가 되어버린 그를 뒤로하고 이상호는 냉기로 가득한 만장굴의 중심에 다다랐다. 그곳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왕좌에 이엘로가 앉아 있었다. [임모탈은?] "거점 도시로 근거지를 옮기고 있습니다." [거점도시?] "예, 항공모함에..아니, 움직이는 배에 거점을 건설 중이랍니다." [다른 소식은 없는가?] "아르펜 행성으로의 원정에 나설 거랍니다." [아르펜 행성!] "예에, 내일 아침 출발한다고 합니다." [후후후, 어리석은...행성을 비우다니.] 이엘로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이상호를 보았다. 짧은 시간에 물어온 정보의 양이 상당했다. [네 녀석도 쓸모가 있을 줄이야.] "..." 잠깐 서귀포 시내의 피시방에 다녀온 이상호는 인터넷과 뉴스이 존재를 이엘로에게 알려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상을 주지.] "감사하옵니다." 이상호가 무릎을 꿇었고 이엘로가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뻗쳐 나간 빙하의 기운이 그의 코를 통해 흡 수되었다. "흐읍." 몸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빙하의 기운과 떠오르는 몇 가지 능력들에 이상호의 눈이 희열로 번들거렸다. "더욱 충성하겠습니다." 당분간은 티비나 스마트폰의 존재는 밝히지 않아야겠다. *** <거점이 생성되었습니다. 이름을 정해주십시요.> 하루가 지나고 활짝 만개한 덩굴나무를 보며 우진이 턱을 매만졌다. 그때 소환하지도 않은 비비가 뿅하고 튀어나와 방방 뛰었다. "나 줘요. 나 줘! 나 준다고 했잖아요." "으음." "히잉, 나 줘요." 다리에 매달리는 비비를 보며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거점의 통제권을 넘겨야 한다. 그를 대신해 포인트로 병력을 소환하여 방어에 운용하려면 말이다. "뭐, 좋아 대신 꾸미는 데 쓰는 포인트는 얼마 안줄거야." 또 차원 영지처럼 꽃밭을 만들어 놓으면 곤란했다. "물론이져!" "방어에는 모든 포인트를 다 써도 좋아." "걱정 붙들어 매세용!" 포인트 따위 다 쏟아부어도 상관없다.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게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좋아, 거점을 맡기지." "야호! 주인님 너무 좋아!" 비비가 폴짝 폴짝 뛰었다. 하늘을 나는 공중요새. 비비캐슬의 출현이었다. < 160화 - 비비캐슬 (4) > 끝 < 161화 - 아르펜 입성 (1) > 이름 없는 버려진 신전. 몇 개의 기둥과 무성한 잡초. 그리고 건물의 부속이었던 돌무너기. 그 틈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밖으로 나왔다. "후우웁." 크게 숨을 들이키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강우진. "오랜만이네." 우진이 구입한 '라앗의 신전'은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어 가리는 것 없이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보였다. 물론 그 광경이 썩 좋진 않았다. "으으, 여기가 아르펜이에요?" "너무 삭막해 보이네요." 성구와 재민이 우진의 뒤를 따라와서는 주변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저기벗겨진 산들은 불탄 나뭇가지와 동물인지 괴물인지 모를 것들의 뼈와 시체로 악취를 풍겼다. 그 중에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시체들도 부지기수였다. "내 던전 들어오려고 싸움이 났나보지." 버려진 라앗의 신전을 우진이 구입하면서 던전 리셋이 일어났을 터. 공략을 위해 순거를 정하는 룰이 없다면 강한 놈부터 도전하는게 순리. 한바탕 싸움이 난 것처럼 보였다. "...." 가장 후열에 따라 나온 메르디가 주변의 참상을 보곤 침음을 삼켰다. 우진은 무너져 입구조차 알 수 없는 신전을 내버려두고 물었다. "여기가 어디쯤인 거 같아?" "라앗 고원의 서부 같습니다." "..." 우진이 아무 말 없자 메르디가 그의 안성을 살폈다. 뚱한 표정의 그가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냐? 연합 애들 어디가면 찾을수 있겠어?" "아...동북부로 향하면 옛 아르달이, 북부로 향하면 연합세력의 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좋아, 일단 가보자고." 우진이 성구와 재민을 돌아보았다. "둘 다 날 수 있지?" "예, 형님." "네, 형." 그들의 대답에 우진은 씽씽이를 소환하고는 올라탔다. "뭐해? 이리 와." "예? 예에.." 메르디는 우진의 부름에 겸역쩍어하며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씽씽이에 올라탔다. 히이이잉! 성녀가 탑승한 것이 못마땅한지 씽씽이가 거친 콧바람을 뿜어냈으나 크게 날뛰지는 않았다. "아르달은 다음에 둘러보고, 일단 연합들 땅에 가보자고." 궤멸되었든, 남아 있든 확인을 해보자면 직접 가봐야 했다. 그래야 어디가서 거점을 세울지도 정하고 말이다. "아차, 그전에..." 또 이렇게 아르펜에 귀환했다고 환영선물을 깔아뒀는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일어나라!" 촤아아악! 우진의 몸에서 빠져나간 마력이 시체가 뒹구는 주변을 휘몰아치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구어어어! 기동력이 빨라 보이는 녀석들은 좀비의 모습으로, 나머지는 스켈레톤 전사들로 변모했다. "가자." 씽씽이가 질주하는 가운데 빨갛게 불타는 불길에 몸을 내맡긴 성구가 로켓처럼 하늘을 날았고, 박쥐로 변신한 재민이 그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탄생한 수백의 언데드 부대가 그 뒤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렸다. 무섭게 질주하는 씽씽에 올라탄 메르디가 떨어질 세라 우진의 허리춤을 더욱 세게 끌어앉았다. *** 거대 사마귀 베직들이 사람들을 쫓고 있었다. 케륵! 독이 든 침을 질질 흘리면서 가는 다리를 쉴 새 없이 놀리며 다가오는 놈들에게 따라잡히는 순간, 죽음이다. "힘을 내시오!" 도망치는 사람들의 가장 후미에 자리한 대머리 장한이 크게 소리쳤다. "흐아압!" 대머리 장한의 손에 들린 메이스가 휘둘러지며 베직의 머리통을 으깨놓았다. 단번에 셋을 처치한 그의 머리 위로 또다시 하나가 높이 날아올랐다. "타우릭님 위에요!" 소녕의 외침에 타우릭이 반사적으로 메이스를 휘둘러 베직의 몸통을 처 냈다. 낫과 같은 갈고리 손이 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얕은 상처와 함께 붉은 실선이 대머리에 길게 그어졌다. "이크! 어서 도망치거라!" 타우릭은 몸을 돌려 다시 속도를 올리며 메이스를 들지 않은 손으로 대머리를 잡았다. 우우웅. 신성한 빛과 함께 머리의 상처가 말끔히 나았다. 뒤쳐진 소녀 하나가 넘어지자 감사 안아 옆구리에 끼고 달렸다. "흐윽, 타우릭님." "울지 마라 꼬마야." 우우우웅 타우릭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앞서 달리던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을 감쌌다. "힘을 내시오!" 죽기 살기로 달렸다. 그래서 쏙 살아야 한다.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저마다 한둘씩 둘러업은 아이들을 더욱 소중히 끌어안았다. "우린 죽는 건가요?" 옆구리에 안긴 소녀의 물음에 타우릭은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그 얼굴로 미소 지었다. "걱정 말거라! 간절히 바라고 버티면 기적이 일어날 게다." "흐흑, 네! 제가 뛸 수 있어요." 타우릭이 달리던 와중에 내려주가 소녀는 곧 뜀박질해 어른들의 뒤로 붙었다. 뒤쫓는 베직은 스무마리. 근처에서 추격전 소리를 들은 놈들이 더 몰려오겠지만 도망치면서 싸울 수 밖에 없다. 지금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을에 남아 있던 자들. 싸우자면 못 싸울 것도 없지만 아이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힘들어도 지금처럼 도망치며 타우릭이 후미에서 놈들을 조금씩 잘라내는 수 밖에 없었다. 콰앙, 콰직! "질긴 녀석들 같으니라고!" 타우릭의 메이스가 휘둘러질 때마다 베직들이 죽어나갔다. 상처입으면 스스로 치료했다. 두 마리를 더 처치하고 다시 달리려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왜 멈추..." 달리기를 포기한 사람들 무리에 합류한 타우릭은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열두 마리의 거미같은 촉수 괴수 란처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케에엑! 그사이 따라잡은 베직들이 사람들을 포위했다. "타우릭님..."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내리고 허리춤의 무기를 잡았다. 모두가 전멸하더라도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니, 전멸은 하지 않을 것이다. 스키아 신의 수도사 타우릭은 죽지않을 것이니 말이다. "스키아시여..." 타우릭이 조용히 기도하며 메이스를 붙잡았다. 이 순간에 절망하고 포기하기엔 너무나 고되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감싼 옷들이 펄력였다. 전투 와중에 모두를 보살필 수는 없다. 그 틈에 아이들이 죽을 것이고 또 슬픔이 찾아오리라. 미리 분노하여 적에게 공포를 선서해주리라. 후우우우웅. 타우릭의 몸에 분홍빛 찬란한 빛이 강림했다. "타우릭님! 저기!" 그때 소녀가 소리쳤다. 후아아아앙. 하늘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거미 요괴 란처들에게로 말이다. 콰아앙! "으응?" 타우릭의 놀란 눈이 커졌다. 쐐에에엑! 콰직! 달려들은 베직의 머리통을 정확히 꿰뚫은 화살에 타우릭의 시선이 그 방향으로 돌아갔다. "아, 신이시여..." 살아남은 몇 안되는 영웅들. 적의 근거지를 급습해 마지막 희망인 차원의 조각을 수집하는 연합의 영웅들이 도착했다. 마도사 그레엄과 엘프 로드 이타샤가 등장한 것이다. "살았다!" "그레엄 님이셔!" "은빛 화살이야!" 그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던 몇몇 어른이 얼굴을 알아보곤 환호했다. 그들이 달려와 합류하자 베직과 란처들을 처치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타우릭은 기쁜 얼굴로 둘을 맞이 했다. "때마침 잘 와주었소!" "고생하셨소. 마을은 어찌 되었소?" 그레엄의 물음에 타우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신처 마을이 발각되어 파괴되고 절잔이 죽어버렸다. 겨우 이곳에 있는 서른 명 정도가 전부다. 그중에 절반이 아이들. "제길! 베직 놈들, 이제 눈에 안 띄는 곳이 드물어." 고운 얼굴의 미녀 엘프 이타샤가 욕설을 내밭었다. 숲은 파괴되었고, 살생을 꺼리는 엘프들은 이제 이 행성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전사들만이 생을 이어갈 뿐. "고슈슈의 거점을 공격하러 간 나머지 분들은 어찌되었소?" 타우릭의 물음에 그레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략은 실패하였소. 나머지 동료들도 일단 흩어져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소." "으음.." 절망뿐인 소식에 타우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고슈슈는 이 일대에 새롭게 거점 도시를 세운 차원 영주다. 그의 영지에 기거하는 몬스터들이 점점 세력을 불리며 잠식하고 있는 상황. 놈의 거점을 파괴해야 몬스터의 증식을 막고 조금 숨통이 트일 것인데, 실패했으니 이제 이곳도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땅을 찾아야할 터였다. 타우릭이 머무르고 있던 곳만이 아닌 다른 마을들도 모두 습격을 받았을 타, 용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들을 구원하러 간 모양이었다. 키에에엑! 그때 긴 괴성과 함께 공중에서 거대한 생명체가 나타났다. "제길! 페리스요!" 하늘을 나는 거대한 가오리. 날아오르면 해를 가릴 만큼 커다란 녀석. 덩치만 본다면 드래곤에 필적하는 공중 몬스터였다. 놈이 진정으로 두려운 이유는 몬스터 놈들의 수성선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슈슈슉 페리스의 위에서 베직들이 얉은 잠자리 같은 날개를 펼치며 떼거지로 몰려왔다. 두두두두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축이 흔들리더니 두더지 몬스터 투돈이 여기저기서 머리를 치켜들었다. "하, 고슈슈 군대의 공세가 상상을 초월하는군." 그 압도적인 몬스터의 수에 타우릭과 그레엄, 이타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망치자면 못 할 것이 없지만, 서른 명의 사람은 죽는다. 싸워도 그들의 안전을 책일질 수도 없고.. 무엇보다 힘든 것은 훗날 용사가, 대 마법사가 될지도 모를 아이들의 목숨이 부질없이 져 버린다는 것이다. "후퇴합시다." 이타샤의 말에 그레엄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도사 타우릭의 굳게 다문 입술이 열리려는데 그의 투박한 손에 여린 감촉이 전해졌다. 꼬마가 손을 잡고는 울먹이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린 죽는 건가요?" "..." "기적은 없나요?" "..." 제 미래를 아는지 울먹이는 꼬마를 보며 타우릭이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싸웁시다." "무리요." "하면 두 분 께서는 몸을 피하십시요. 저는 최대한 이들을 지키겠습니다." 타우릭의 말에 그레엄이 진중히 말했다. "스키아의 몽크가 제 몸을 함부로 쓰지 마시오. 보다 큰 일을 하셔야 할 분이 이렇게 부질없이 죽게 내버려 둘수는 없소." 타우릭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다.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내 사명이오. 더 큰 일은 없소." "허..." 타우릭의 고집에 그레엄이 고개를 저었다. 설상가상으로 페리스 두 마리가 더 등장해 베직들을 낙하시키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사마귀 몬스터의 모습은 결코 아릅답지 못했다. "이곳에서 죽는 게 스키아님의 안배라면 마다하지 않겠소." 타우릭의 굳은 말에 그레엄이 자신의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할 수 없구려." 아르펜의 생존자들을 위해서도 타우릭은 꼭 필요한 인재. 성녀가 사라진 지금. 그만큼 치료 마법에 능통한 영웅은 없었다. 그를 돕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몬스터 떼를 물리치고 도망치자면 차원 영주 고슈슈가 직접 모습을 보이기 전인 지금이 마지막 기회. 화르륵. 그들이 전투를 준비하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하늘에 떠 있는 페리스 하나가 큰 폭발과 함께 불길이 일어 서서히 추락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이윽고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며 능선 너머로 대규모 언데드 부대가 출현해 달리고 있었다. 그 부대의 선두에서 유령마를 달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데스나이트들. "맙소사." 이타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임모탈의 부대요!" 그레엄이 소름에 지팡이를 떨궜다. 부질없다. 살려는 발악 자체가 무의미해져 버렸다. 희망의 아이콘 타우릭마저 고개를 떨구었다. "기적은 없는가..." 이곳에서 임모탈의 부대를 만나게 될줄은... 돌격해 보은 대규모 언데드 부재의 위용에 마을 사람들도 절망해 털석 주저앉았다. 무기를 들 기운도 없다. 남은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일 뿐. 그때 꼬마가 소리쳤다. "성녀님이다! 메르디님이야!" ".....!" 꼬마의 외침에 타우릭의 고개가 들렸다. 언데드 부대의 후열. 거대한 유령마를 타고 느릿하게 걸어오는 임모탈. 믿을 수 없게도 그 뒤에 성녀 메르디가 타고 있었다. "젠장! 성녀님을 납치해 간 것이 임모탈이었나?" 그들의 희망이었던 성녀가 감감무소식인 지난날 얼마나 힘들었는가. 그런데 임모탈이 개입해 있었을 줄이야. 타우릭이 임모탈을 노려보는 사이, 지척에 닿은 언데드 부대가 그들을 통과해 베직들을 향해 돌격했다. < 162화 - 아르펜 입성(1) > 끝 < 162화 - 아르펜 입성(2) > 키키킥. 스쳐 지나가는 해골들의 소름끼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저 엘프 년 구면인가?] [으하하! 축제다, 축제!] [내기는 어떤가? 항상 그래 왔든 내가 승리해 주지.]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데스나이트들을 보며 숨을 멈췄다. 긴장감 없는 그들의 대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안다. 웃으며 목을 날릴수 있는 자들이 그들이다. 임모탈의 군대. 죽음의 집행자들. 그들이 사람들을 그저 스쳐 지나갔다. 구어어어! 해골들도, 흉물스러운 좀비들도 그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스쳐 지나갔다. 퍼퍽! 콰직! 베직들과 투돈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아니, 쓸려 나갔다. 한바탕 그들의 부대가 휩쓸고 지나가자 사람들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후아." 위압감에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어찌된 일이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적개심이나 증오심에 대단했던 밈모탈의 군대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들만 쏙 빼놓고 지나가다니... 그보다 임모탈이 성녀를 납치해 데리고 나타나다니. "저기 보십시오. 성녀님을 구출해 내야 합니다." "군대와 멀어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요." "하지만 놈에겐 다른 권속들도 있을 터인데..." 쉬이 결정하지 못한 채 어물어물하는 사이 임모탈을 태운 유령마가 근처에 당도했다. "여어, 오랜만인데." 이름들이야 모르지만 우진의 기억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얼굴들에 반갑게 손을 들었다. "..." 그 모습에 타우릭을 비롯한 영웅들이 바짝 긴장한채 노려보았다. "성녀님을 납치해서 뭘 했지?" "납치는 무슨." 우진이 메르디를 내려주었다. 그녀는 울컥한 얼굴이었는데 이렇게 살아남아 준 사람에 대해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늦어 죄송합니다. 아르펜을 구원하기 위해 지구 행성의 원군을 데려왔습니다." "무슨 말이오?" "임모탈께서 아르펜의 수복을 돕기로 하셨습니다." "....!" 메르디의 말에 타우릭과 그레엄, 이타샤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며 그녀가 눈물 고인 눈으로 웃음 지었다. 자신도 많이 놀랐지. 믿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재앙이나 다름 없던 임모탈ㅇ 우군이 되었으니 말이다. "성녀가 죽었다!" "임모탈의 꼭두각시가 되었어!" "이 간악한 놈!" 분기탱전해 무기를 쥐는 그들을 보며 메르디가 당황했다. "아니, 오해입니다. 정말 연합을 돕기위해..." "헛소리 마라! 분명 그림자 유령이 조종하는 게 틀림없다." "아아, 아리아의 성녀가 이렇게 가다니." 타우릭은 진심으로 슬픈지 눈물마저 흘렸다. "진정 오해십니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 정말 임모탈께서 저희를..." "그래, 환영의 마녀야! 저건 환영이 틀림없다." "아아, 스키아시여. 제게 힘을 주소서." 우우우우웅. 분홍빛 광휘에 휩싸인 타우릭이 울분을 쏟아내기 위해 당장에라도 달려들 태세였다. 분개하는 그들과 당황하는 메르디를 보며 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뭘, 구차하게 설명하고 있어?" "오해를 풀어야..." "말로 해서 풀릴 게 아니면." 우진이 씽씽이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전사의 무기를 소환했다. 그의 얼굴에 장난 스러운 미소가 내걸렸다. "몸므올 깨닫게 해주면 되지." 우진의 전투 태세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타우릭이 앞서 나왔다. "이 날을 꿈꿔왔지. 군대 없는 임모탈을 제거할 기회를 주다니. 이것이야말로 스키아님이 내게 안배한 삶이 아니겠는가?" 타우릭이 돌진했다. 그동안 임모탈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그의 수만 불사의 군대와 권속들 때문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저 멀리 트래넷의 군대를 없애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기회라면 기회. 후우우웅, 콰앙! 그의 메이스가 우진의 강철 지팡이에 가로막혔다. 모험의 신 스키아의 수도사. 몽크 타우릭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그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슈아아악, 콱!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진이 힘껏 밀자 뒤로 주르르 밀려난 타우릭의 무릎으로 강철 지팡이가 강타했다. "크어억!" 힘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압도한다. 임모탈의 힘이 이렇게 강했었나? 그리고 연달아 날아온 공격은 민첩하기만 했다. 모든 힘을 쏟아부든 이타샤의 민첩성을 보는 듯했다. 콰직 콱! "...." 잔인한 손속은 그대로인이 임모탈의 강철 지팡이가 타우릭의 무릎을 아예 깨부수고 연달아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민머리에 피가 터졌으나 겨우 죽음은 면했다. 하지만 기절까지는 막지는 못했는지 흰자위를 보이며 쓰러졌다. 그를 뒤로하고 우진의 신혀잉 곧장 그레엄에게 쇄도했다. "헛!" 파팟! 그레엄의 신형이 한순산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조금 떨어진 곳에 다시 나타났다. 근거리 순간이동 블링크. 하지만... 슈아아악! 우진의 영혼 갑옷에 머물러 있던 영혼 다발 수십이 창이 되어 그레엄을 쫓았다. "허헛!" 목표를 맞추기 전까지는 계속 추격해오는 영혼의 창을 피해 그레엄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이, 활로 변한 전사의 무기를 쏘아낸 강우진. 퍼어억! "크아아악!" 방어 마법을 전개했음에도 어깨가 터져나간 그레엄이 바득을 굴렀다. "아버지의 원수!" 이타샤. 겨우 60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가 나이에 맞지 않게 로드직에 오른 것은 조상님들의 무수한 희생 대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 임모탈! 카앙, 캉! 이타샤의 양손에 들린 단검이 춤을 췄으나 우진도 어느새 단검으로 변한 전사의 무기를 잡고 맞상대했다. 휴아악, 캉, 쉬식, 슉! 네 개의 단검이 교차하며 둘의 공방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날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이타샤에 비해 손색없는 빠르기. 임모탈이 이렇게 빨랐었는지 꿈에도 몰랐다. 여태 그가 직접 전투에 나서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이타샤가 모를 만도 했다. 막상 그의 악명을 무수히 전해만 들었지 직전 전장에서 마주친 것은 두 번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 콱! 잠깐의 빈틈을 파고들어 임모탈의 발차기가 이타샤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으윽." 적지 않은 충격은 승부를 내기 충분한 유효타였다. 슈슉, 샥! 강우진의 단검이 춤을 추자 이타샤의 몸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며 피가 솟구쳤다. 콰직! 마지막으로 단검이 이탸사의 양쪽 어깨에 박히며 그녀의 팔을 원천 봉쇄했다. "아악!" 발악하려는 그녀의 다리를 로우킥으로 걷어찼다. 힘 조절을 안 한 것인지 못 한 것인지, 이타샤의 정강이가 기이한 각도로 부서지며 신형이 허물어졌다. "개자식!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이타샤의 발악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과거는 그냥 잊자고." "가족을 죽인 원수를 잊어?" "너도 내 권속들을 헤쳤잖아." "..." 이타샤가 임모탈의 군대를 헤쳐봐야 얼마나 활약했겠는가? 그와 마주쳤을 때는 그저 후방 부대일 뿐이었던 그녀다. "영혼도 없는 언데드 따위 해치운 것이 어찌 가족을 잃은..." "아 몰라. 나한테도 소중해." "가증스런..." "서로 원수니까 쌤쌤하자고." "...." 그녀의 어깨에 박아 넣은 전사의 무기를 역소환하자 벌어진 상처 사이로 더욱 피가 솟구쳤다. 우진이 슬쩍 뒤돌아보자 희게 질린 메르디와 아예 공포심에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떠는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도와줘 볼까?" "...조금만 자비를 갖추시어..." 메르디가 우진을 보고 무어라 꿍얼거리려다가 그만두었다. 셋 다 목숨은 붙어 있다. 사지가 멀쩡치 못해서 그렇지. "알아서 정리해." 우진이 씽씽이에 다시 올라타고는 제니스와 돌쇠를 소환했다. [아르펜의 구원은 아직인가!] 우진이 씩 웃으며 저 하늘에 성구와 치열한 공방 중인 페리스를 보았다. "이제 시작해야지." [....] 제니스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지독한 삶으로부터 구원해 주마!] 제니스의 지팡이가 불을 뿜으며 저 멀리 까맣게 몰려오는 엄청난 규모의 베직을 향해 무차별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영혼수집부더 해볼까?" 부서져 대부분의 능력이 봉인되긴 했지만 트래쉬의 수호를 가진 우진이다. 영혼 갑옷에 귀속할 수 있는 영혼의 개수가 사라진 마당에 저 수백 수천의 재료가 더없이 반갑게 느껴졌다. 대군들을 이끌고 나타난 차원 영우 고슈슈의 모습도 보였다. "가보자 돌쇠야." [위이이잉] 돌쇠의 신형이 전장에 흩어진 피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비비가 없으면 좀처럼 진정시키기 쉽지 않은 블러드 골렘이지만 미쳐 날뛰는 세상에 경고를 주기엔 이만한 전사도 없었다. 강우진의...아니, 임모탈의 불사 군대가 아르펜에 귀환했다. *** 거대 사이클롭스 고슈슈는 피범벅이 되어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좋지 못한 놈이 돌아왔군." "반가우면서 뭘 그래?" "쿠루, 영역을 정해라. 침입하지 않겠다." 우진은 도끼를 어깨에 걸쳐 메고 그의 하나뿐인 눈앞에 섰다. "어쩌지?" "뭘 말이냐?" "이 행성 전체를 차지하고 싶은데 말이야." "..." 고슈슈의 큰 눈이 끔벅 감겼다. "아르펜의 코드가 목적인가?" "...." 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코드란게 뭐지?" 고슈슈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 임모탈을 아울러 보았다. "그렇군. 모르니 쓸모없이 행성인들을 도우려 하지." 알았다면 보다 영이전에 힘을 쏟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임모탈은 차원 영주라고 보기에는 행동이 많이 독특했으니 말이다. "좀 친절히 말해주면 덧나냐?" "왜 그래야 하지?" 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끼를 쥔 손을 힘껏 내려쳤다. 콰직! "스무고개를 하려거든 그냥 꺼져." 사이클롭스의 머리에 박힌 도끼에 그의 몸이 회색빛으로변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짜증나네." 어쩌면 그 코드란 것 때문에 트라넷의 72군단장이 죄다 아르펜에 몰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쿠 행성엔 상대적으로 약한 차원 영주들만 있었으니까. 우진이 손을 털고른 재민과 성구를 보았다. "할 만해?" "뭐, 별다를 건 없는데요?" 우진이 사라진 고슈슈와 그 주변을 가득 메운 몬스터 사체를 훑어보았다. "이놈은 조무래기 수준이야. 너무 긴장 풀진 마." "네 형님." "네, 형." "그럼 주변 정리해. 쓸 만한 것 있으면 줍고." "넵!" 그들이 멀어지자 우진도 주변을 떠도는 영혼들을 죄다 흡수했다. 그리고... 파파팍! 키키킥! 수천의 해골이 다시 일어서 병력의 보충을 끝냈다.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을 모두 빨리 모아야 하는데." 세트 아이템을 모조리 모아야 불사의 군대를 지금보다 더욱 크게 유지할 텐데 말이다. 우진이 메르디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타우릭과 그레엄, 이타샤의 상처를 회복시키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축복하고 있었다. 그 신성력이 가짜가 아님을 알고는 타우릭 일행은 떨떠름한 얼굴로 우진을 맞이했다. "왜...왜 우리를 살려두었소?" "죽여줘?" 아니, 그렇다고 죽여 달란 소리는 아니지 않는가? 그저 이유가 궁금했을뿐. "왜 연합을 돕느냔 말이오." "뭐, 안 될 거라도 있나?" "..." 임모탈, 강하고 재수 없는 건 여전하군. "청소는 내가 대신 해줄테니, 늬들은 그냥 방해만 하지마." 모조리 사냥할 것이다. 적어도 지구로 귀환하기 전에 용용이는 함께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진이 제 말을 마쳤다는 듯이 멀어지자 사람들의 성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성녀님, 저 사람은 영웅인가요?" 꼬마의 물음에 그녀가 어색히 웃었다. "...글쎼.." 이타샤사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속을 알 수 없어. 분명 화를 끼칠게 틀림없어." "글쎄요." 성녀가 조금은 슬픈 눈으로 우진을 보았다. '신탁을 듣고도..' 그녀는 아리아의 말을 전했다. 그럼에도 우진의 행동은 바뀌지 않았고, 아무런 꺼리낌 없이 아르펜에 입성했다. 그의 진심은 모르지만, 그에게 감사한 것은 사실. 메르디가 꾸벅, 그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162화 - 아르펜 입성(2) > 끝 < 163화 - 재건(1) > 고슈슈의 군대가 궤멸했다. 격퇴도, 후퇴도 아닌 궤멸. 사라진 그의 영역에 자리 한 것은 시체들과 그 위에 선 언데드, 그리고 불사의 군대를 이끄는 임모탈. 어리둥절하던 것은 고슈슈의 공세로 여지거지 피란했던 사람들이었다. "믿을 수 없소. 분명 이건 재앙의 전조요." "맞소. 임모탈이 무엇 때문에 우릴 도와준다는 거요?" 임모탈을 향한 사람들의 두려움이나 거부감은 본능에 가까웠다. 아르달과의 전쟁에서 죽은 이가, 시체도 남길 것도 없이 언데드가 되어버린 가족이 몇이던가. 겨우 겨우 모여든 사람들이 쉬쉬하며 저마다. 불안해했다. 지금의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는 그동안의 연합의 희망이 되어온 영웅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의 본신이 뭐란 밀이오?" "믿기지 않소. 대가 없는 호의라니." 그 논란의 중심에는 성녀가 있었다. 메르디는 혼란스러운 사람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본인도 놀랍고 놀라웠으니 말이다. 그녀가 모여든 영웅 여섯 명을 바라보았다. 그레엄과 타우릭, 이타샤 외에도 혼슈 왕국의 젊은 왕 콘스와 오크 대족장 쿠르가, 드워프 왕 라울이 있었다. "여러분들께서 아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그녀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임모탈도 우리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농담이 지나치시오. 아리아의 목소리여!" 사람들의 격한 반응에 메르디가 차분히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여신의 안배에 따라 지구로 향했고 그곳에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임모탈의 본모습을 보았습니다." "....." 침묵 속에 드워프 왕 라울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덜 무모하고, 덜 잔인하고, 덜 포악했소?" "그는 지구에서..." 곰곰히 생각하던 메르디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는 지구에서도 무모했고, 포악했으며 막무가내였다. "거보시오, 임모탈은 임모탈이오. 재앙 그 자체. 그의 변덕에 춤추며 기뻐하기엔 우린 너무 많은 희생을 치뤘소."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가 우리를 돕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 맞다. 고슈슈의 거점이 지금 무너지는 중이었고, 그의 던전도 공략당해 아예 발 디딜 틈을 없애 버렸다. 그가 다시 아르펜으로 오려면 다른 던전을 통해야 할 테니, 그 또한 한참 뒤의 일이다. 이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하던 차원 영주 하나가 사라진 셈.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던 그들이 이곳에 모여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공포와 피곤에 지친 사람들이 거진 1천여 명. "그가 희망이에요. 여신도 그것을 말했어요." 메르디의 호소에 영웅들은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사실이 그렇든 말든, 임모탈에게 쌓인 감정과 원한은 너무 컸다. 그리고 걱정과 불아을 감출 길이 없었다. "와이번을 쫓자고 드래곤을 불러들이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소." "맞소. 우리의 미래를 너무 그에게 맡기는 것도 불안한 것은 사실." 메르디가 조금 어두운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일정부분을 희생하고 있다는 거에요." "허..임모탈이 우리를 위해 무슨 희생이오?" "..." 그들이 대책 없는 토론을 하는 와중에 유령마 하나가 질주해 왔다. 임모탈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무기를 잡는 그들이었으나 그것이 다였다. 그의 등장만으르도 손등에 땀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여어." 우진이 훌쩍 씽씽이에서 뛰어내려 그들 틈에 끼었다. "다들 뭐하냐?" "...." 서로 눈치를 보거나 바닥만 훑어보는 그들을 보며, 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분위긴?" 우진의 장난스런 말에 영웅들이 바짝 긴장하며 분위기가 팽팽해졌으나 메르디가 조용히 말했다. "임모탈님의 도움에 아직은 어색하여..차차 적응하..." "아아." 우진이 씨익 웃으며 눈을 못 마주치는 그들을 보았다. "죽네 사네 싸우다가 갑자기 친한 척해서 그래?" "..." "동맹이야, 동맹. 원한 없는 사람들이 어딨어? 애들처럼 그러지 마." 우진의 시선이 그들을 쭉 훑다가 이타샤에게 멈춰 섰다. "넌 계속 까불어라?" 우진이 두 손가락을 펴고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가 그에게로 향해 보였다. "계속 그렇게 노려봐. 아주, 뼈를 발라줄 테니까." "...." 자존심에 차마 피하지는 못하지만 이타샤의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렸다. 임모탈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고 말이다. "늬들만 원한 있는 거 아니잖아? 나도 묻겠다고. 그러니 그냥 참아. 정 마음에 안 들면 덤벼도 돼. 한둘 더 죽인다고 표 나겠어?" "...." 저런 말을 태연히 할 수 있는 것은 행성 통틀어 아니, 차원 안에도 임모탈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죽고 싶어 안달 난 게 아니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응?" "..." "대답 안해?" "...알겠다." 마지못해 쥐어짠 이타샤의 말소리에 우진이 씩 웃었다. "좋아. 그럼 거점에 대해 의견 내봐." "무슨 거점 말이신지?" "전초기지를 세워야 할 것 아냐? 연합 세력 끌어모아야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들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흩어진 연합을 다시 구축한다라... "수비하기 좋은 곳을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워프 왕 라울이 바닥에 슥슥 지도를 그렸다. "여기 이곳에 깊은 협곡이 있소. 사람들을 모으기엔 이곳이 적당하오." 우진이 지도를 보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저긴 어디야?" "소로스 산이오. 뾰족 솟은 본산 외에 주변의 지형이 탁 트여 있어 적에게 노출되기 너무 쉽소." "탁 트여 있다라..." "지대가 높아 방어에 용이할지는 모르나 보급을 생각한다면 고립되기 쉬운 곳이오. 무엇보다 거긴 쥬리엘의 거점이 위치한 곳이오." "저기가 개집이란 말이지?" 트라넷의 대군주. 2좌 쥬리엘. 우진이 웃으며 지도에 꼬챙이 하나를 주워 꽂았다. "여기에 거점을 세우지." "거긴 말하다시피..." 라울은 항변하려다 우진과 눈이 마주치곤 입을 다물었다. "청소는 내가 해. 이사 준비나 하라고." "....." 우진이 말을 마치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두 동생을 불렀다. 화르륵. 불꽃이 내려앉더니 작은 폭발과 함께 불길이 사그라진 곳에서 푸근한 인상의 사내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찌지지직. 박쥐 떼가 날아와 뭉쳐져 사람으로 변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홍성구와 도재민의 등장에 영웅들이 어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앞으로 같이 다닐 일이 많을 텐데 안면 텨 두라고." "헤헤. 잘 부탁드립니다." "잘 지내봐요." 그들의 어리숙한 인사에 우진이 남몰래 미소 지었다. 자신이 그 옛날 고 3시절 아르펜에 소환되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 끔찍하던 시간들이. "어? 형 어디 가세요?" "입주 청소라거 간다." "예에? 여기도 아파트가 있어요?" "..." 대꾸할 가치도 없는지 우진이 손을 휘적 흔들어 주고는 씽씽이를 타고 멀어져 가버렸다. "헤헤, 분위기도 어색한데 저희 한잔 하면서 소개나 하죠?" "...." 성구의 말에도 어색해하는 사람들을 보곤, 그가 재민을 보았다. "재민아, 영치 창고에서 뭐 좀 꺼내봐. 술하고.." "네에..." 우진이 권한을 줬기에 도재민은 영지 창고 일부분을 쓸 수 있었다. 전리품을 수거해 저장하는 용도였지만, 반대로 빼내는 것 또한 가능한 일. 재민이 술과 음식들을 줄줄이 꺼내는 사ㅇ, 성구가 부저린히 한 잔씩 잔을 채웠다. "자, 마셔 볼까요?" 한 잔씩 돌린 서욱가 해맑게 웃었다. 이제 아릿한 추억이 되어버린 지난날의 대학 생활은 헛되지 않았다. 어색한 사이끼리 친해지는데 술과 게임만큼 더 좋은 게 있으랴? "자자, 이왕 꺼내는 거 왕창 꺼내서 다 나눠 먹자." 모여든 사람만 2천 명. 차원 영지의 창고는 보가 방대하다. 그 정도의 인원이 먹을 식량쯤은 차고 넘친다. 도재민이 아낌 없이 음식들을 꺼냈고, 마을 사람들은 오랜만에 허기를 달랬다.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은 어쩌면 복수보다 허기의 해소와 안전일지도 몰랐다. 몯가 살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이 인생일지도... 죽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의 그늘에 있더라도 말이다.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 성구의 광란의 주도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 소로스 산 정상. 기막힌 얼굴의 쥬리엘이 언데드 대군을 이끌고 온 네크로맨서 강우진을 보았다. "이해할수 없군." "뭐가?" "무슨 원수를 졌다고 차원 영주끼리 이리 소모적인 싸움을 하지?" "소모적이라 생각해?" "소모적이지. 아무런 이득도 없이 포인트만 낭비하지 않나?" "흐음."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죽음을 배제한다면 그 이후의 가치는 무엇으로 매길까? 차원 영주들의 사고방식은 어쩌면 조금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진이 슬쩍 던져보았다. "코드란 것 네게 있나?" "왕좌가 탐났던가? 그런 놈이 왜 이런 짓을 하지?" 우진이 눈을 빛냈다. "네놈이 2좌였지?" "랭킹에 어둡군. 하나의 왕좌를 뺏었지. 이제 3좌다." 이해했다. 트라넷의 72군단장. 1개의 왕좌부터 72개의 왕좌까지. 몇 개를 가졌으냐에 따라 나뉘는 그들만의 랭킹. 그들의 자리를 뺏자면 포인트를 축적해, 랭킹 73위는 되어야 1좌에 도전자격이 생기는 것. "아직 찾지 못한 코드가 말야..." 우진의 중얼거림을 쥬리엘이 잘도 받아줬다. "아, 그 코드 말이군. 아아, 그것을 얻기 위해 아르펜에 다시 돌아온 건가?" "코드가 다 같은 코드가 아닌가?" "무슨 소리. 코드마다 다 권한이.." 말을 하던 쥬리엘이 인상을 굳히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놈, 코드에 대해 모르는 구나."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면 떠봤겠냐?" "감히! 가아암히!" 속았다는 생각에 쥬리엘이 광분했다. 우진이 피식 웃으며 전사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강아지 담당은 우리 비비가 딱인데." 비비가 있었다면 환영으로 홀려,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수 있지 않았을까? 우진은 아쉬워하면서도 이내 털어버렸다. '비비도 제 할 일이 있지.' 신나서 거점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차원 영이즐 꾸민 경험도 있으니 제법 훌륭하게 해내리라. "이노오옴! 날 속이다니!" "네가 속아준 거지." "크아악!" 우진과 쥬리엘이 한 대 맞부딪쳤다. *** 비비는 거점의 상징물로 자라난 덩굴 나무에 가려져 꼳 뿌리속 집처럼 되어버린 관제탑에서 드넓은 항공모함을 보고 있었다. "흐으음." 갑판은 넓었고 대부분의 생활 시설은 선실 내에 있었다. "비비, 뭘 그렇게 고민해?" "아, 수아." 비비는 자신과 비슷한 키의 수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 꼬마 숙녀는 자신이 그 고양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지금은 그저 둘 다 작은 소녀의 모습이다. "어떻게 꾸밀까 고민하고 있었져." "아하." "수아는 항공모함이 뭐하는 건 줄 알아?" "항공모함?" 수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유치원생인 그녀가 알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일까? 이름 모를 지구신의 신녀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상식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항공기는 아는데." "항공기?" "비행기랑 같은 뜻인데 어려운 말이야." "아하, 그래서 항공모함이구냥." 비비가 드넓은 갑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항공모함이 그런 뜻이었군. 항공기가 비행기니까. "비행모함이구나. 모함이 뭐지?" 비비가 고개를 갸웃하며 활성화된 거점의 권한을 실행해 상점을 훑었다. 이 투박한 거점 도시를 개조해 줄 전문가가 필요했다. <노삼> - 1,400p 검은 광산 일족의 드워프 기술자. 마법적 기계장치와 건축에 능하다. 설계 기능 - 비행정, 기계 골렘, 전차... 건축 가능 - 공성용 발칸포, 수성용 산탄... "찾았당!" 항공모함을 꾸며줄 인재를 찾았다. 비비는 고민 없이 포인트를 소모해 인재를 등용했다. < 163화 - 재건(1) > 끝 < 164화 - 재건(2) > 기계공학의 달인 드워프 노삼은 항공모함의 이곳저곳을 탐방하고는 비비에게 돌아와 아뢰었다. "훌륭합니다. 지구 행성의 기술력이 놀랍습니다." "그래영? 그럼 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을 날기엔 부적합해 보입니다만... 그보다 물 위를 떠다니는 용도로..." "뭐예요? 못 난다는 거예요?" 비비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보자, 노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차원의 난민인 그에게 거점 관리인은 차원 영주 다음으로 높은 신분. "해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얼른 고쳐봐요. 지금은 고장 나서 못 나는 것 같으니까." "...." "못 고친다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해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포인트의 사용은 무한대로 약속받았으니까." "허억." 노삼은 비비에게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차원 영주로부터 무한대의 포인트 사용을 허가받았을 정도라면 그녀는 핵심 가신 중의 하나다. 강우진이라는 차원 영주의 총애를 받고 있는 가신. 이를테면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다. 그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이 전혀 없다. "곧 설계도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기대할게요." 비비는 기대감에 눈동자를 반짝였다. 노삼이 꾸벅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가는데 입구에서 정민찬과 마주쳤다. 어색히 인사하고 지나친 그가 비비에게 다가왔다. "비비 집사, 갑판에 생겨난 것들이 도대체 뭡니까?" "뭐긴요? 꼭 필요한 건물들이에요." 차원 상점에서 구입한 여러 건축물들이 갑판에 지어지고 있었다. 새롭게 고용한 인력과 차원 영지 아르달에서 건너온 영지민들이 자연스럽게 오가오 있었다. "아니, 갑판에 저리 건물들을 지어버리면 비행기는 어떻게 합니까?" 활주로를 다 차지해 버리면 지금처럼 몇 대의 헬기만을 운용할 것인가? 민찬은 비비의 계획이 무언지 몰라 그녀를 찾은것이다. "아, 걱정 말아요. 주인님이 헬게라는 거는 돌쇠 주기로 했고, 와이번 편대를 운용한다고 했어요." 이미 우진에게 언질을 받았던 비비다. 수직이륙이 가능한 와이번에게 긴 활주로는 필요 없었고, 거점 도시의 외관을 꾸미는 것은 그녀의 재량껏이라고 말이다. "흐음, 확실히 와이번이라면." 잠시 상상해 본 민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과 지어지는 건물들의 관계란... "그런데 카페랑 디저트 가게는 왜 갑판 위에..." 와이번 둥지나 훈련소의 건축은 이해가 되나, 왜 굳이 카페가 가장 클까? "제일 중요한 거니까요." "...." 비비의 당당함에 민찬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기존 항공모함 선원들의 식당이나 놀이, 문화시설은 모두 갑판 아래 선실에 있었다. 하지만 비비는 전투와는 무관해 보이는 건물들로 갑판 위를 채웠다. 그리고 차원 영지에서 건너온 이종족들의 모습에 아직 적응되지 않은 어색한 아르달 국민들과 마찰도 우려되었다. "그보다, 기존 국민들과 차원 영지민들 사이의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는데..." "아 참, 언어의 알약도 팔아야겠네요." 명쾌하다. 아니, 이렇게 손쉬운 방법이? 민찬이 할 말을 찾지 못하는데, 비비는 즉시 차원 상점에서 언어의 알약을 파는 가게를 하나 구입해 관제탑 아래에 떡하니 건설해 버렸다. 어차피 거점 도시는 포인트의 소모로 지어진다. 설계도만 완성되면 개조하는 것은 하루면 될 일. "저 아래 건물에서 알약 사서 먹으라해용. 혈석 지불하고요." 아르달의 총리 민찬은 거점의 통제권을 가진 비비와 한동안 이야기하며 여러 문제점을 논의했다. 행성에 존재하는 차원 영지의 전초기지인 거점. 행성인들과 기존 영지민들 모두에게 혈석을 거둬들일 수 있는 도시가 지구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이잉. "어? 저건 뭡니까?" 관제탑 아래의 갑판에 새로운 포탈이 생성되었다. 그 옆에 있는 붉은 포탈과는 색이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주인님이 아르펜에 거점을 세우셨나보네요. 아직 활성화 전이지만." 항공모함엔 몇 개의 포탈이 있었다. 차원 영지 아르달로 향하는 것과 서울역 1번 출구로 향하는 것, 그리고 자쿠 행성의 내시아의 기둥으로 연결된 것.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포탈이 활성화되면 아르펜으로 향하는 포탈까지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저길 통과하면 아르펜으로 바로 갈수 있다는 거죠?" "음, 그래요. 저나 주인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말이에요." "국왕께서 거점 건설에 성공하셨군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강우진에 대한 신뢰는 비비가 제일 깊었다. 그의 첫 번째 권속이자 가장 오래도록 옆을 보좌해 온 그녀니까. 민찬이 웃으며 말했다. "후발대를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최해솔과 블랑카, 그리고 팬텀부대가 넘어갈 날이 머지 않았다. "그래용." 비비는 대충 대답하고는 차원 상점을 열어 항공모함을 치장하기에 열중했다. 영지의 포인트가 빠르게 하락 중이었다. *** 소로스 산의 꼭대기에 나무가 심어졌다. 빠르게 자라나는 그것을 보며 이타샤는 경악했다. "어찌하여 세계수가..." 생명의 나무. 세계와 소통하는 어머니 나무 세계수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죽음을 연구하는 네크로맨서에 의해 심어졌다. 물론, 누군가에겐 큰 의미보다는 그저 거점의 심볼일 뿐이었지만, 그것을 보며 느끼는 것은 개개인마다 달랐다. "연합 문양이 뭐였지?" 우진의 말에 아르펜의 영웅들이 놀랐다. "뭘 그렇게 놀래? 깃발이라도 내걸어야 모여들 거 아냐?" 소로스 산을 차지한 것이 누군지는 알려야 한다. 애초에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것은 적을 염두해 둔 것보다 살아남은 연합의 생존자들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 그렇지요. 연합이 건재함을 알려야지요." 당황스러운 것은 그것이 임모탈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 누구보다 이성적이며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일지도 몰랐다. 메르디가 우진을 보며 제안했다. "아르달의 깃도 올리시지요." "음, 그럼 사람들이 안 올 텐데?" "아..." 메르디가 탄식했다. 주변 영웅들의 표정을 살펴도 임모탈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과 경계를 알 수 있었다. 새삼 자신의 의식이 얼마나 변한 것인지 깨달았다. '강우진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아니, 나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연히 생각해 온 무시무시한 네크로맨서도 아니고, 적어도 대화가 통하지 않을 사람은 아니다. 지구에서 그의 곁에서 머물며,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이걸로 내걸어." 우진은 인벤토리에서 비비가 구입해둔 깃발을 내어주었다. 포효하는 고양이의 그림이 그려진 것. 기존 아르펜에서 아르달을 상징하던 무시무시한 문양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리시아의 대사제는 아직 살아 있나?" "그 분은 불사의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내가 죽였나 보군. 우진이 쓰게 웃었다. "후임 있을 것 아냐?" "...." 지구에 우진과 함께 있다가 돌아온 메르디다. 그녀로서도 알 도리가 없는 물음. 대답이 나온 것은 이타샤의 입술에서 였다. "리시아의 성물을 이어받은 대사제라면 북부 린타도시에 있다." "호오, 좋아. 길 안내해." "내, 내가 왜..." "그냥 가지?" "...." 이타샤가 인상을 구기면서도 별수 없이 나섰다. "거점 활성화 하루 남았다. 잘 지켜." 이제 막 거점을 생성했다. 활설화 되기 전까지 우진이 이곳에서 할 일은 없었다. 도시의 구축이야 차원 상점을 통하면 될 일. 그사이 필요한 아이템이라도 수집하는게 나았다. "주변 정리하면서 잠시 쉬어. 다녀오지." 고슈슈의 군대가 궤멸당하고, 쥬리엘의 거점마저 뺏었다. 이 일대의 차원 영주 둘이 죽었으나 아직 그의 부하들이었던 몬스터들이 널려 있는 상황. 차원 영주도 없는게 그것들의 정리를 위해 우진이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그정도라면 성구나 아르펜의 영웅들만으로도 충분히 처치가 가능했으니 말이다. 베이스 캠프로 삼을 만한 거점이나 마을이 있느나 없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소로스 산을 중심으로 몬스터 소개를 시작하면 된다. 이후에 차근차근 차원 영주들의 던전과 거점을 뺏으며 반격을 시작하고 말이다. "자, 그럼 가자." "..." 이타샤는 세계수를 한 번 다시 돌아보곤 몸을 띄웠다. "따라와라." 바람의 정령이 함께하는 듯 회오리바람에 갇힌 그녀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우진이 씽씽이를 소환해 뒤를 쫓았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메르디가 깃발을 펼쳤다. "음? 그것이 정년 아르달의 문양이오?" "뭔가 조화가..." 누가 고양이 그림을 보고 아르달을 또올릴 수 있을까? 이미 몇 번 봐온 적이 있던 메르디도 살풋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걸어둡시다." "으음." "아르펜 연합과 아르달의 동맹을 알려야지요." 소로스 산꼭대기에 자라난 세계수 앞에 두 세략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내걸렸다. "그런데 임모탈이 리시아의 대사제는 왜 찾는 거요?" "그야..." 사람의 행동을 예측할 땐 종종 과거의 행적을 떠올리곤 한다. 지난날... 강탈과 살인, 협박뿐이니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특히 그는 신을 모시는 사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설마...또 리시아 신의 성물을 강탈하려는 건.." 스키아 신의 수도사인 타우릭은 와락 표정을 구겼다. 그도 경험이 있었다. 신전의 성물인 스키아의 부츠를 벗겨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그의 성물 수집욕은 아직도 그대로인 듯하오." 한때 말이 많았던 임모탈의 이상수집. 세계수의 가지를 부러뜨려 가고, 각 신전의 성물들을 강탈해 가고...온갖 보물들을 모으는 데 열을 올렸던 임모탈과 그의 군대였다. 타우릭은 문득 자신의 부츠를 보았다. 모험가의 신답게 지치지 않고 달리게 해주는, 스키아의 부츠. 성물은 새로운 대사제가 출현하면 새롭게 만들어진다. 전대의 보물이 임모탈에게 강탈당하고 스물한 번째로 만들어진 자신의 부츠다. 스키아 신을 모시는 첫 번째 수도사임을 증명하는 보물. "어째서 이건 탐내지 않지?" 성물 수집욕이 그대로라면 타우릭, 그의 것을 먼저 탐낼 터인데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 찜찜했다. "흐음, 모를 일이군." 그가 리시아의 대사제를 왜 찾아가려하는지 모르겠지만 전처럼 다짜고짜 강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래도 동맹이니 말이다. 아마도... *** 북부의 가장 거대한 호수. "저기가 린타 호수인가?" "그렇다." "저기에 도시가 있다고?" "연합 최수의 도시다. 하지만 선택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지." 바다처럼 넓은 린타 호수. 그 가운데 오롯이 떠 있는 푸른 섬. "선택받은 사람?" "린타 호수에 사는 수룡들이 침입자를 불허한다." 린타 도시가 차원 영주의 공세를 비켜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합에서조차 출입이 가능한 자는 별로 없었다. 그들만의 은신처이자 연합 최후의 보급처. 린타 섬의 식량은 연합의 주요 보급품이었다. 호숫가 나루터에 내려앉은 이타샤는 우진을 돌아보았다. "나 또한 출입을 허락받지 못해 저곳엔 갈 수 없다. 린타 섬의 감시선이 우릴 보았으니 잠시 후 말을 전할 사람이 나올 것이다." 우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때까지 기다려주자고?" "리시아의 대사제를 만날 유일한 방법이다." 린타 섬으로 갈 수 없으니 그쪽에서 나오라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우진은 피식 웃으며 이타샤의 옷깃을 잡았다. "무, 무슨 짓이지?" "세상 사는 데 유일한 방법 따위는 없어." 길과 길이아닌 것이 있을 뿐이지. 길을 다라 걷기보다 길을 개척한 적이 많았던 임모탈이 이타샤의 뒷목을 잡은 채 씽씽이를 타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수, 수룡들의 공격이..." 대롱 매달려 하늘을 날아오른 이타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호숫가에 소용돌이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열일곱. 수룡들의 브레스가 준비중이었다. < 164화 - 재건(2) > 끝 < 165화 - 신탁(1) > 푸후우! 호수의 물이 승천하듯 솟구쳤다. 수룡들이 뿜어낸 브레스는 물줄기 하나 하나를 날카로운 바늘과 같은 암기로 만들어냈다. 수십 수억의 발의 날카로운 바늘이 날아드는 광경을 보며, 제정신을 유지하는 거란 힘든 일이었다. 엘프 로드 이타샤도 허공에 대롱 매달린 처지에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아찔한 기분이었다. 몸은 뻣뻣하게 굳고, 너무 놀라 호흡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날카로운 기운을 품은 수십 발의 물방울이 몸을 난도질할 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파파파파파팍! 이타샤는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혀 부서지는 물방울들을 보며 멈췄던 숨을 내뱉었다. "후아." 투두두두둑. 처마 밑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을 구경하는 기분이 이럴까?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보호막에 부딪혀 사방으로 비산하는 물방울들이 어떤 위력을 담고 있는지 알기에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별거 아니네." 이타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하늘을 날고 있는 사내. 임모탈. 이보다 더 무모한 자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수룡이 지키는 린타 도시를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가려 하다니...트라넷의 차원 영주들도 마다하는 일을 말이다. "브레스가 끝이 아니야!" 영혼 보호막으로 브레스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 치더라도 린타 호수의 수룡이 위험한 이유는 수십 가지가 넘었다. "왜? 수룡이 날기라도 해?" "그렇다." "...뭐?" 우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이타샤를 보았다. "날아?" "어, 어서 피해야 한다!" 다급한 말에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날아다닐 거면 왜 수룡인가? 그냥 비룡이라고 하지... 푸아아아! 소용돌이가 갈라지며 용의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크아아아! 괴성과 함께 수면을 박차고 나온 용은 몸이 어찌나 긴지, 머리가 코앞까지 다다랐는데도 아직 꼬리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윽!" 우지닝 급히 몸을 틀어 날카로운 이빨을 빗겨갔다. 기다란 몸과 메기처럼 긴 수염을 가진 수룡은 드래곤이 아닌 흡사 전설의 용을 닮아 있었다. 열일곱이나 되는 그것들이 헤엄치듯 하늘을 날아올라 우진을 공격해 오자 버텨낼 제간이 없었다. '영혼이 먼저 소멸하겠어.' 영혼 갑옷은저장된 영혼만 충분하다면 자동으로 우진을 지키기 위해 보호막을 형성한다. 그런데 계속된 위협에 영혼들이 빠르게 소멸하고 있었다. 아르펜에 입성하고 나서부터 꾸준히 모아온 영혼들이 아깝게 사라질 상황. 우진으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당혹감이었다. "젠장!" 서둘러 방향을 틀어 린타 호수의 상공에서 벗어났다. 튕겨지듯 바닥을 굴러 착지하고 보니 하늘을 유영하는 열일곱마리의 수룡이 우진을 노려보다가 다시 수면을 통해 들어가 버렸다. 촤아악! 호수 물이 파도가 되어 땅을 적셨다. "큭, 뭐야?" 벌떡 일어선 우진이 출러이는 호수를 보았다. "컥, 내가 뭐랬나?" 덩달아 바닥을 구른 이타샤가 우진을 나무랐다. 호기롭게 나선 것 치고는 허무한 결말. 우진의 이마 주름이 깊어지자 이타샤도 뭐라 한마디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임모탈의 심기를 거슬려 봐야 좋을 것이 없다. 수룡들이야 어차피 재해 수준의 무력. 오죽했으면 트라넷의 차원 영주들도 이곳만을 내버려 두었을까? 임모탈이라고 별수 있을까? 이타샤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으며 슬쩍 그의 안색을 살폈다. "...?" 웃어? 분명 웃고 있는건가? "재밌네." 우진은 짧은 감상과 함께 전사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설마 또 도전하려는가? 린타 호수의 수룡들을 향해? "무, 무모하다!" "해봐야 알지." 첫 드래곤을 잡을 때도 힘들긴 했지만, 이후 몇 번의 사냥은 모두 쉬웠다. 한 번에 열일곱 마리나 되는 놈을 상대하는 게 부담스럽지만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도 혼자가 아니니 말이다. 슈슈슉. 우진의 주윌 검은 연기가 속속들이 뭉치며 데스나이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잡이인가?] [드래곤은 오랜만이군.] [여긴 린타 호수인가....] 데스나이트가 되어 우진과 함께 하고 있지만 종족도 성향도 모두 제각각인 그들이다. 생전의 기억 또한 모두 다르니 몇몇은 린타 호수의 수룡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이나 관계가 어떻든 간에 우진이 돌격을 명했다면 망설임 없이 치고 나갈 것이다. [그하하, 용용이의 친구가 생기려는가?] 우진의 옆에 소환된 리치 제니스의 도움이라면 동시에 놈들을 사냥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디버프 마법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리치의 도움이 있다면 말이다. 위위윙. 거기에 더해 돌쇠가 합류한다면 금상첨화. 용용이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지금도 용잡이엔 충분한 전력.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서려던 우진이 호숫가에 우두커니 섰다. "다시 가볼..." 호기럽게 나선 우진이 말을 삼켰다. 싸아아. 물살을 헤치며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의 선두엔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이 타고 있었는데 어설프게 큰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의 생김새가 낮이 익은지라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배가 나루터에 정박하고, 난간에 놓인 사다리로 소년이 내려와 우진에게 다가왔다. 그의 주변에 늘어선 데스나이트들을 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소년은 우진의 앞에 서더니 꾸벅 인사해 왔다. 꼬깔 같은 모자가 흘러내릴 듯 위태했으나 머리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임모탈이시지요?" 소년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청아한 목소리에 우진이 눈을 빛냈다. "리시아의 대사제냐?" "그렇습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나왔지?" "초대하지 않았어도 오셨을 것 아닙니까?" "....." 우진이 말없이 소년을 응시했다. "저 하나의 희생으로 린타 섬을 지킬 수 있다면 가치가 충분합니다." "내가 왜 널 죽이러 왔다고 생각하지?" "리시아의 장갑을 받아가실 것 아닙니까?" 소년이 리시아의 장갑을 내밀었다. 보듬는 모든 씨앗을 싹 틔우고,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힘이 깃든 신물. 풍요의 신, 리시아의 보물. 확실히 그것을 잃으면 대사제로서의 권위는 훼손되는 것. 아니, 가치에 따라서 죽음보다 더한 모욕일 수도 있었다. 그런 귀중한 보물을 제 손으로 내밀고 있으니.. "..." 당돌하다고 해야 할까? 현명하다고 해야 할까? "잘 쓰지." 우진은 망설임없이 장갑을 받아 들었다. 누군가에겐 트래쉬의 징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 아이템. 누군가에겐 대사제의 증표와도 같은 아이템. 리시아의 대사제인 소년은 전혀 아까울 것 없다는 얼굴이었다. "신탁이 이루어져 원하는 바 이루시길." "신탁이라..." 우진이 쓰게 웃었다. "리시아는 뭐라디?" 우진의 물음에 소년이 희미하게 웃었다. 신을 모시는 사제들에게 신을 대면한 자, 임모탈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젯밤 그에 대한 신탁이 내려왔다. "그저 보물을 내어주라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원하는 바 이루어질 거라고..." "...." 우진이 물끄러미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트래쉬의 수호, 행진. 징벌의 가장 중요한 아이템 셋을 얻었다. 이제 둘이 남았다. 우진은 권속을 모두 역소환하고는 린타 호수를 뒤로했다. *** 소로스 산의 새로운 거점. 자라나는 세계수와 그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집을 짓는 사람들 사이로 두 상의 깃발이 내걸렸다. "저게 그거지?" "그렇다는구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의 정체는 연합을 상징하는 문양 옆의 깃발. 포효하는 귀여운 아기사자. 아니 어떻게 보면 호랑이. "저게 임모탈의 상징이라니 무슨 의미겠나?" "세상을 향해 일갈하는 게 아닌가?" "그냥 하품 같은데.." 공통된 주제는 모두가 임모탈의 상징기에 대한 추측들. 귀여워 보이는 그림과 매치되지 않는 임모탈의 모습에서 오는 부조화가 사람들의 궁금증을 키웠다. "사자가 틀림없어." "무슨 소리! 딱 봐도 호랑이구만." 사람들 사이에 가장 불붙는 주제였다. 그중 가장 안달난 사람이 혼슈 왕국의 젊은 왕 콘스였다. 구전으로만 들어왔던 임모탈을 본 것도 처음이고, 그가 거느린 불사의 군대가 싸우는 것도 처음 보았다. 아버님에게 전해 들은 것과는 많은 것이 다른 임모탈. 그의 존재는 젊은 지도자 콘스이 호기심과 동경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소로스 산의 주변엔 얼기설기 통나무로 지어진 망루가 수십 개 세워졌는데 곳곳마마 연합과 아르달의 깃발이 쌍으로 내걸려 있었다. 망루에 직접 오른 콘스는 저 멀리 다가오는 불꽃을 보곤 환하게 웃었다. "성구님이 돌아오시는군." 임모탈과 함께 온 영웅들도 법상찮은 자들이었다. 뱀파이어 로드에 불의 정령이라니. 과연 임모탈의 동료라 할 만하지 않는가? 술은 또 얼마나 잘 마시며, 어깨춤이 절로 춰지는 주도는 어떠한가? 콘스는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 불의 정령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성구님이 돌아오신다." 그와 술을 나누며 제법 친해진 콘스다. 서둘러 망루를 내려와 격하게 팔을 흔들며 환영했다. 하늘을 날던 불의 궤적이 그를 발견하고는 그이 앞에 착륙했다. "콘스." "수고하셨습니다." "헤헤, 수련 전에 조금이라도 더 연습해 놔야죠." "역시." 저렇게 강한데도 아직도 수련을 생각하다니.... "성구님께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뭐요? 그보다 거점 세운지 하루 다 돼가지 않아요?" "음? 거의 다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콘스가 저 멀리 하늘에 뜬 해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이었다. "가면서 이야기해요." "에에." "물어보고 싶은 게 뭐예요?" "저 아르달의 문양이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사람들이 참 궁금해 합니다." "응?" 성구가 깃발을 한 번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보고 떠오르는 첫 번째 인물이 비비인데... "고양이일 걸요." "예에?" "고양이 몰라요?" "알긴 알지만..." "맞을 걸요." "...." "아마도요?" 성구의 대답에 콘스사 찝찝한 얼굴이 되었다. 무언가 자신의 기대가 배신당한 기분? 뾰로퉁한 그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르달에도 걸려 있는 깃발이지만 어떻게 만들어진지는 자세히 묻지 않았기에 성구도 몰랐다. 그저 그림을 보면 비비가 가장 먼저 떠오를 뿐. "하하, 성녀님은 알고 있을 걸요?" "그렇군요! 어서 메르디님께 가봐야겠습니다." 어차피 거점의 완성을 지켜보기 위해 모든 영웅이 소로스 산의 정상으로 오르고 있었다. 일반인들에 비해 신체 능력이 월등한 그들이기에 잠깐의 등산으로 꼭대기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응?" 성구는 먼저 도착해 있는 재민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곤 다가갔다. "재민! 무슨 일 있냐?" "형." "어, 무슨 일이야?" "신탁 들으셨어요?" "....?" 성구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재민이 세계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메르디를 슬쩍 가리켰다. "우진이 형 아르펜으로 오기 전에 아리아 신이 신탁 내렸데요." "그게 왜?" 신이 신탁 내리는 거야 애들이 학교가는 것마냥 당연한 것 아닌가? "아리아 신이 예지의 신이래요." "응?" 예언이라는 말인가? 덩달아 표정이 심각해진 성구가 물었다. "뭐랬는데?" "그게..." 재민이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 165화 - 신탁(1) > 끝 < 166화 - 신탁(2) > "마침내 답을 찾았으나 길을 잃을 것이다. 허상과 진실은 같으니, 삶과 죽금 또한 선택이리라." 귓가로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에 성구가 고개를 돌렸다. 메르디를 보며 물었다. "아리아 여신이 형님한테 전한 말이에요?" "네. 맞아요." "그게 왜 나빠요?" 성구의 해맑은 물음에 메르디가 이마를 찌푸렸다. 재민 또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긍정적이진 않죠." "그래? 흠. 형님은 뭐라셔?" "그건 저도 잘..." 재민의 시선이 메르디에게로 향하자 성구도 그녀를 ㅂ았다. 말을 전한 것이 성녀이니 우진의 대답을 들은 것도 그녀일 것이다. "임모탈께서는..." 성녀는 뜸을 들이다 그때를 또올리고 말을 전했다. "재수 없게 답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연합 수습이나 잘 하라고..." "...." 형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군. 성구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별일 없겠네요." "...." 성구의 결론에 메르디가 입을 다물어싿. 할 말이 없다. 강우진 외에 예지의 신 아리아의 말을 그저 걱정, 아니, 기우 정도로 치부하는 인간을 또 보게 될 줄이야. "형, 예지의 여신의 말이에요. 허투루 들을 게 아니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죠." 재민의 말에 메르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임모탈의 주변에도 정상적 사고의 인간이 있었군. "신이 어쩌구 하는 건데 우리가 뭘 대비하냐." "신탁을 해석하고 위험을 줄이..." "에이, 몰라. 복잡하게. 난 신보다 형님을 더 믿어." "...." 성구는 손을 휘적 젓고는 완성되어가는 거점을 향해 다가갔다. "난 또 중요한 신탁이라고." 아니, 그러니까 중요한 게 맞다니까. "죽냐 마냐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형님은 안 찝찝하세요?" 재민의 말에 성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죽으려면 벌써 타 죽었겠지." "형..." 깊고 깊은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더 따져 물을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음을 초월한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냥 생각을 안 하는게 맞는 것 같다." "네, 형." 역시 강우진에 대한 믿음의 차이인가? 도재민은 성구의 말에 깊이 반성했다. 성구 형은 누구보다도 그를 믿고 있구나. "자꾸 생각하면 머리 아프니까 말야." "어?" 이유가 이상한데? 누구보다도 우진의 곁에 오래도록 머물렀던 홍성구다. 그를 옆에서 지켜보며 신뢰가 쌓인 것이 아니라, 그저 뇌가 맑아진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으나 결론 없는 토론은 나누고 있을 만큼 한가한 상황은 아니었다. "어떻게 되겠죠. 뭐." 이것은 위로일까? 재민의 말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메르디였다. 아리아 신의 예지가 틀린 적은 없다. 그녀가 전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진이 오래도록 찾아온 보물. 그것을 얻게 되면 지루고 돌아갈 길을 잃을지도 몰랐다. '끔찍한 일.' 성녀 메르디는 이미 겪어보았다. 차원의 조각을 모아 구원을 청하기 위해 스스로 차원 영주가 되었을 때 말이다. 다른 영주들의 공격에 포인트를 소모해가다가 던전을 잃고, 결국 고향 행성인 아르펜으로 올 방법 자체를 잃어버렸었다. 겨우 영지를 버리고 지구로 향했던 그녀가 이렇게 아르펜으로 돌아온 것은 긴 시간이 지나서였다. 신탁의 해석 또한 우진에게 전한 그녀였다. 물론, 돌아온 말은 곱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쩌라고?" 임모탈은 스스로 마음먹은 대로, 결정하는 대로 행동할 것이다. 메르디의 말이 그의 행동을 바꿀 계기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야.' 문제는 그저 점집의 운세로 치듯 가벼이 여기는 아리아의 신탁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아의 예지는 빗나간 적이 없다. '내 걱정이 주제넘는지도.' 본인이 신경 쓰지 않는데, 메르디가 나서서 걱정하는 것도 우습게 여겨졌다. 아르펜의 평화와 강우진의 안위를 동일 선상에 놓고 있는 듯해 화들짝 놀랐다. "저기 형님 오시는데요?" 성구의 말에 활짝 핀 세계수 아래 모인 이들이 하늘을 보았다. 유령 질주를 통해 내달리는 유령마 위에 올라탄 우진과 매달린 채 끌려오는 이타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다다르자 이타샤는 훌쩍 뛰어내려 스스로 착지했다. 우진도 유령마에서 내려 거점의 심볼을 보았다. "딱 맞춰서 왔네." 아르펜의 게이트를 두 개 가지게 되었다. 던전은 어차피 차원 영지의 수비병들이 지킬 테고, 거점은 앞으로 연합 세력들이 지켜줄 것이다. 길을 잃을 이유 따위는 없으리라. "가신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메르디의 물음에 우진의 눈썹이 휘었다. "잘 받아 왔지." "아..." 짐작은 했지만 정말 성물을 뺏으러 갔었구나. 장난스레 장갑을 꺼내 흔드는 것을 보며 메르디는 눈을 감았고, 다른 영웅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중 특히 스키아 신을 모시는 수도사 타우릭은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동맹을 맺은 마당에 무슨 억사심정이 있어 성물을 모은단 말이오?" "필요하니까." "....." 도둑질도 당당하면 할 말이 없다더니, 타우릭의 심정이 딱 그랬다. "스키아 신의 보물도 탐내려고 그러시오?" "네 건 이미 있어." "..." "없었으면 달라 했겠지." 말하는 투는 꼳 맡겨놓은 물건 돌려받는 느낌. "그런 의미에서." 강우진이 메르디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아리아의 신물, 왜 안보여?" 갑옷인 트래쉬의 수호는 이미 얻었기에 고치면 될 일이고, 장갑과 부츠의 재료 아이템도 얻었다. 남은 것은 투구와 벨트. 예지의 여신 아리와 세월의 신 해리스의 성물이 필요했다. 아리아의 성녀인 메르디가 그것을 들고 다니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말문을 열었다. "선대의 성물을 임모탈께서 가져가신 이후..." 신은 자신을 섬기는 가장 가까운 종에서 성물을 내려싿. 성녀든, 대사제든, 일들 수도사든 자신을 대신할 위엄을 보일 자에게 증표로서 힘을 실어준다. 아리아의 전대 성녀는 성물을 뺏겨 힘을 잃은 이후 그녀의 제자였던 메르디가 지금의 성녀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그녀... "대신전이 적진에 있는지라 완전한 계승을 하지 못했기에 아직 제겐 성물이 없습니다." 그녀는 성녀의 상징인 그것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직 받지 못한 것이다. "뭐, 내가 찾아줄게." "..." 찾아주고 뺏을 거면서. 메르디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강우진은 기분이 좋았다.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을 만들기 위한 아이템도 착착 수집중이고 거점도 생성되었다. 게이트를 확보했으니 본격적으로 아르펜의 수복을 돕고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을 완성할 때였다. 아직 수수께끼인 트래쉬의 집행이 문제지만 차차 답을 찾을 것이다. "그럼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해 보자고." 우진이 거점의 완성과 함께 차원 상점을 열었다. 세계수의 아래 소로스 산의 거의 대부분이 영역으로 지정되었다. "일단 성을..." 우진이 성벽을 구입하고 영역의 경계에 성벽을 지어싿. 쿠쿠쿵! 마술이라고 부린 듯 산 아래 성벽들이 우뚝 솟아나 서로 이어지며 경계를 내달렸다. 믿기지 않는 기적에 사람들이 놀라 그 광경을 구경하기 바빴다. "길도 정비하고.." 빠르게 소모되는 포인트였지만 그동안 축척한 게 꽤 되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거점 도시의 상점과 세금으로 거둬들을 혈석을 생각하면 이것은 투자로 보아도 무방했다. 연합이 거점에 튼튼히 자리잡아야 수비도 해내며 세금도 거둬들일 것이 아닌가. 안정적인 거점의 제곡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벽이 생기며 경계를 아우르자 곳곳의 땅이 드러나며 다져졌다. 연무장도 되고 광장도 되어줄 몇몇 공간이 만들어지고 넓은 대로가 이어졌다. 나무가 사라지고 바위가 옮겨지며 집들이 지어졌다. 여기 저기 시설들이 들어서 금방 마을이 완성되고, 그런 마을들이 몇 개나 더 생겨났다. 소로스 산의 요소요소마다 망루가 서고 병영이 자리하며 하늘을 지켜줄 와이번 둥지도 네 곳이나 만들어졌다. 엄청난 포인트를 썻으나 아직 절반이 남아 있었다. "이쯤하면 기반은 닦았나?" 애초 소로스 산을 거점으로 삼을 때, 가장 우려했던 보급은 문제될 것도 없었다. 거점 도시의 상점에서 구입하면 될 일이니 혈석만 있다면 모든 것을 살 수가 있다. 무엇보다 은신처로서의 기능은 필요가 없다. 숨기고 도망치며 저항하는 것이 아닌 반격의 교두보다. 적들의 눈에 띄든 말든 관계없었다. 전쟁터는 이곳이 아닌 적진에서 열릴 테니 말이다. 우진이 상점을 닫고 주위를 둘러봤을 땐 모두가 무릎 꿇고 있었다. 재민과 성구 또한 얼떨떨한 얼굴로 우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혀, 형님." 잠깐 동안 소로스 산은 너무 많은 것이 변해 버렸다. "신..." 재민의 중얼거림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신이 있다면 그가 아닌 차원 상점을 만든 존재일 것이다. 자신은 그저 이용자일뿐. 하지만 아르펜의 주민이었던 자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하냐, 늬들?" 무릎꿇고 고개 숙인 그들을 보며 우진이 어이없이 물었다. 파괴가 가장 어울리는 자가 일으킨 창조에 신을 모시는 자들이 경배했다. "야야, 일어나." 우진의 말에도 그들이 감히 고개를 들디 못하자 목소리가 낮아졌다. "뒤지기 싫으면 일어나지?" "예에." 영웅들이 일어서며 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특히 버럭 화를 냈던 타우릭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낮간지럽게 왜 부끄럼 타냐?" "창조신의 기적을 눈앞에서 보게 되어...." 말끝을 흐리는 타우릭을 보며 우진이 혀를 찼다. "기적은 개뿔." 이것이 기적이라면 트라넷의 차원 영주들 모두가 신이란 말인가? 우진이 신처럼 주무를 수 있는 공간은 오직 심볼의 영향력 아래 놓인 거점 도시뿐이다. "음?" 우진은 거점 도시의 상태를 나타내는 정보창에서 갑작스럽게 빠져나간 포인트에 어리둥절했다. 남아 있던 절반 중 도 절반이 쓰인 것이다. 우진이 아니라면 포인트를 사용할수 있는 것은 두 존재뿐. 지구의 거점 도시를 맡긴 비비와 차원 영지의 수비를 맡긴 키바뿐이다. 이렇게 갑자기 큰 포인트를 쓸 정도라면 수비병의 대대적인 충원이라도 있었다는 이야기. 지이잉 세계수의 앞에 두 개의 게이트가 열렸다. 차원 영지로 가는 것과 지구의 거점으로 향하는 것. 우진이 어디로 향할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 활성화된 포탈이 빛을 발하더니 사람이 튀어나왔다. "어? 국왕님." 포탈을 타고 줄줄이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최해솔과 블랑카, 그리고 팬텀부대원들이었다. "뭐야? 지구 족은 별일 없는거야?" "별일이요? 예에, 별일 없습니다. 게이트 활설화되자마자 넘어 왔습니다." 지구의 거점이 무사하다면 포인트가 쓰인 곳은 차원 영지인가? "그래. 인사하고 임무 준비하도록." "엡." 우진이 메르디를 보았다. "난 영지에 잠깐 다녀오지. 애들하고 주변 정리하면서 연합세력들 모아." "아..." 우진이 차원 영지로 향하는 포탈을 넘어가자 성녀는 왠지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뛰었다. '무사히 귀환하소서.' 성녀는 마음을 졸이게 하는 걱정이 아르펜을 위한 것읹, 강우진을 위한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 166화 - 신탁(2) > 끝 < 167화 - 공중폭격(1) > 슈슉! 우진이 차원 영지에 도착했을 땐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고서이 그를 반겼다. 하지만 성을 나서자 보인 마을의 풍경은 달랐다. 화르르륵. 불타는 집들과 여기저기 널린 시체는 분명 모험가의 도전을 막아낸 모습. 아직 수습하지 못해 여기저기 널린 시신들과 오가는 병사들. 부서진 집들을 보면 싸움이 일단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키바." [마이 로드] 검은 기류와 함께 뭉쳐진 키바가 우지느이 앞에 무릎을 끓었다. "꽤 센 모험가들이 왔나 봐?" [반란이 있었다.] "반란?" [차원 난민들에 의한 반란은 종종 일어났었다.] "흐음."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차원 영지를 위협하는 요소는 타 영지의 전쟁이나 결투 신청, 던전을 통한 모험가들의 도전 외에도 또 있었다. 이주해 온 차원 난민의 반란, 혹은 의도적인 영지 강탈범들. 차원 난민과 영주의 차이는 영지를 소유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무력이 강한 떠돌이들은 많다. 당장 우진만 하여도 영지를 잃고 차원을 떠돌게 되면 그리될 터. 세력을 이루고 용병단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전전하며 분란을 일으키는 녀석도 많았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약해서가 아닌... "내가 만만해 보인다 이거지?" [설마! 누가 로드를 만만히 본단 말입니까?] 키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시체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의도적으로 접근한 놈들입니다. 리아의 사주를 받은 용병대같습니다.] 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걘 뭔데 자꾸 날 노리냐?" 영지전도 안 되고 결투도 안되니 이젠 끄나풀들을 풀어 영지의 빈틈을 노려리는 수작 같았다. 고향 행성인 지구를 절대 지킬수 없다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본인의 말을 증명하고 싶어서인지 내내 우진의 아르달을 괴롭히고 있는 리아였다. 키바와 같은 데스나티으가 없었다면 어쩌면 영지를 강탈당했을지도 모르는 일. 우진의 든든한 권속들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끈질긴 공세가 통했을지도 몰랐다. "놈들 제압하는 데 조금 힘들었나봐?" [조금의 병력 충원은 있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포인트가 어디 갔지?" 포인트의 사용 내역이야 왕좌에 앉아 영지 관리 창을 띄워보면 알게 될터. 돌아서려는 우진을 보며 키바가 불쑥 말했다. [로드와 함께 전장을 달리고 싶다.] "...." 우진이 키바를 보았다. 덩치 큰 데스나이트의 간절한 열망이 느껴졌다. 차원 영지 아르달을 잇는 던전들을 통해 공격해오는 모험가는 소수. 간혹 반란이 일어나지만 그 또한 손에 꼽을 정도. 영지의 수비대장이라는 책무는 키바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그를 너무 홀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바꿔주지." [로드의 전장에 피의 융단을 깔아주겠다!] 불사의 군대. 가장 강한 데스나이트. 선봉장 키바다운 호언. "그거 마음에 드네." 우진이 씩 웃으며 키바와 일별했다. "곧 대타하고 바꿔줄 테니 조금만 있어 봐. 다음 전장은 함께다." [로드의 명을 기다린다!] 우진이 영주성의 왕좌로 돌아와 앉았다. "어디보자." 병력의 충원을 위해 사용되는 포인트가 제법 되었지만 영지와 거점의 세금이 있었기에 상충이 가능했다. 예상 가능한 지출과 수입들. 한 번에 많은 양의 포인트가 빠져나간 출처를 파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비비네." 비비가 맡고 있는 지구의 거점 도시 '비비캐슬'의 개조 비용으로 상당량의 금액이 소모되었다. 어차피 포인트야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상황. 앞으로도 지구의 혈석들도 거점에서 거둬들을 것을 생각하면 이정도는 애교다. 우진이 아르펜에 건설한 소로스 거점보다 절반 가량이나 적은 양이니까. "한 번 보고 가자." 훅 빠져나간 포인트가 혹, 적의 침입으로 인한 병력 보충은 아닐까 염려했는데 기우였다. 곧장 아르펜으로 돌아갈까 생각해 봤지만,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증이 일어 우진은 비비캐슬로 향하는 포탈을 통과했다. *** 펄럭. 하품하는 고양이 깃발이 바람에 나부껴 세차게 펄력였다. 포탈을 통해 나온 우진은 어리둥절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많이 변했네?" 휑하던 갑판에는 마을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여러 건물이 늘어서 있어, 탁 트였던 갑판의 시야를 막았다. 건물의 양식이 현대적인 것들도 있고, 아르달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어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비비." "주인님!" 우진의 부름에 검은 연기가 펑 터지며 비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헤, 어때요?" "뭐, 예쌍 그대로네." "헤헤." 비비가 처음 아르달을 어찌 꾸몄는지 생각해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 하지만, 포인트를 모두 카페나 상점들의 구입비용으로 사용하라고 권한을 준것은 아니었다. "수비 병력은?" 거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움직이는 요새다. 안전을 위해 방어 시설이 가장 중요한 요소.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며 비비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질렀져." "...."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모양을 보니 방어 시설에 과투자하느라고 포인트를 많이 소모한 모양이었다. 소로스 산과 비교해 이 항공모함은 엄청나게 작은 면적이다. 이것을 개조하는 데 소로스 거점을 건설하는 것의 절반 정도 포인트를 사용했다고 하니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주인님. 따라와 보세요." 자신이 만든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아이라도 된 듯 비비는 신나 보였다. 우진이 그녀를 따라 관제탑으로 오르는데 그사이 정민찬과 마주쳤다. "구, 국왕님!"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얼굴이 희게 질린 민찬을 보며 우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머, 멀미가." "허, 뱃멀미하냐?" 그러고 보니 진동이 느껴지는 것이 항공모함이 어딘라고 이동 중인 것 같았다. "배, 뱃멀미면 다행이겠지만...우욱.." 민찬이 서둘러 입을 막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우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비비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한 번에 이사하려고 서롤로 가고 있지용. 지금 대전 지나고 있다용." "음. 한 번에 이사하면 좋...대전?" "넹, 헤헤. 제가 고장 난 걸 고쳐서 이제 다시 날 수 있어용." "...." "고장 나?" 건조된 지 꽤 되긴 했지만 고장 나진 않았을 텐데...우진이 관제탑에 올라 창밖을 보았다. 키에엑!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그들의 괴성은 와이번이었다. 항공모함 주변을 호위하듯 날고 있는 것만 열두 마리. 그 등에는 사람이라기엔 조금 이질적인 종족들이 탑승해 있었다. "라티족들이라면 와이번 라이더의 재능이 뛰어나다용. 호위와 정찰을 위해 항상 주변을 순회하도록 지지했져." 비비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또 사방에 포격이 가능한 대포를 달았어용. 기술자 노삼이 지구의 기술을 적용해 새로 만든 거라 이름이 없는데, 주인님이 하나 붙여 주시죵?" "...." 비비는 그러면서 눈앞에 홀로그램을 띄우고는 개조된 항공모함의 전체 설계도면을 보여주었다. 앞뒤 좌우로 빼곡히 달려 있는 대포만 120문. 문제는 그 포신이 옆에만 달린 게 아니라 바닥에도 달려 있었다. 고슴도치를 거꾸로 뒤집어 놓는 듯했다. "언제든 출동 가능한 와이번 착륙지도 저쪽에 있다용." 창문 너머 비비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쪽 갑판은 건물들이 없이 비워져 있었는데, 작은 산을 옮겨 놓은 듯 괴상한 언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곳곳에 와이번들이 똬리를 틀고 쉬고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 40마리가 넘었다. "몇 마리냐?" "정찰 중인 와이번까지 총 107마리에용." 비비는 나 잘했죠? 하는 얼굴로 눈을 빛내며 우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요새의 수비를 부탁한다고 했으니 이정도 방비야 당연한 일. 그런데.. "지금 하늘을 난다는 것 맞지?" "그렇죠." 우진이 덤덤히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자 비비가 감췄던 이야기를 더 꺼내려 하였다. "흠, 수성병기가 모자란 듯싶어 몇가지 무기도 더 개발 중이에용. 그리고 포인트를 소모하긴 하지만 적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막이 상시 작동 중이며..." "아, 그만 이야기해도 돼." 우진이 비비의 머리에 손을 척 얹었다. 과잉 투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가족의 안전과 연관된 문제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아주 잘했어." "헤헤." 우진이 비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저 멀리 풍경을 보았다. 나는 와이번 너머도 구름과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햇살이 눈부셨다. 어떻게 항공모함을 공중요새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우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마음에 들어." 위기 상황에서 도망치자면 바다라는 제약이 있기보다 하늘이 더 좋지 않겠는가? 우진의 칭찬에 비비도 덩달아 웃었다. *** 소로스 거점. 인근의 몬스터 토벌이 거의 완료되어 근처의 생존자들이 합류함에 따라 거점 인구도 점점 늘어나는데 상대적으로 성구와 재민은 할 일이 줄어들었다. 잔챙이 몬스터쯤이야 그들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 아르펜의 행성인들과 아직 실전 경험이 많이 부족한 팬덤부대에 양보해도 될 일. 위험한 전투 와중일 때는 쉬고 싶었는데, 막상 쉬고 되니 심심한 그들이었다. "아, 형님 언제 오실까?" "그러게요. 형도 구르는 게 익숙해졌나 봐요." "익숙해지긴." 성구는 시려오는 코끝을 문질렀다. 재민이 말을 이었다.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 노예까 갑자기 자유인이 되면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족쇄 채운대요." "내가 노예냐?" "그건 아니지만..." "짜식이, 기어올라 아주." 성구의 말에 재민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은 아닌데.." "하, 그러고보니 제니스님 보고 싶긴 하다." "...." 노예 맞네, 이거. 재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성구의 옆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그렇게 죽을 위기를 겪고도 보고 싶다니..마조인가? "아, 라면에 김밥 먹고 싶다." "그러게요." 성구의 말에 재민도 동조했다. 아르펜의 음식이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거점을 이용해 구입하는 음식들도 먹을 만했다. 하지만 역시 토종 입맛의 성구과 재민은 밥 생각이 드문드문 들었다. 특히, 자주 먹던 라면은 생각만으로도 군침 돌게 만들었다. "잠깐 지구 갔다가 올까?" "우진이 형이 혼내면요." "...그냥 참자." 김우진이 돌아오면 수시로 지구에 왔다 갔다 해도 되는지 꼭 물어볼 것을 다짐했다. 주변 몬스터 청소하라는 말만 하고 갔으니, 숙제를 다 한 학생이 할 일이 없어져 공허하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엘프 로드 이타샤가 둘에게 다가왔다. "지구의 영웅분들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십니까?" 우진에겐 까칠하며 경계심이 가득한 이타샤지만 성구와 재민에게는 덜했다. 오히려 호의적인 편. "아, 이타샤. 라면 이야기 중이었어요." "라면이요?" "네. 면 요리인데 엄청 맛있죠. 지구 요리인데 여기선 구할 수 없네요." "흐음. 지구의 행성은 아직 동기화가 덜 되었다고 했지요." "그렇죠." "동기화만 끝나면 상정에서 지구의 물건을 살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없는 것이 없는 차원 상점이다. 동기화가 완료된 아르펜의 것은 있지만, 지구의 것은 없다. 물론 비슷한 것은 있지만.... "어? 그럼 동기화되면 이제 지구 물건도 포탈 통과할수 있는 거네요." "아마도?" 재민의 말에 성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와, 그러면 형은 여기에 뭐 가져오고 싶어요?" "난 차." "전 컴퓨터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타샤사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지구엔 신기한 것들이 많겠군요." "당연하죠." "저도 그때가 되면 지구의 요리를 한번 맛보고 싶군요." "그때 되면 그럼 제가 라면 하나 대접해 드릴게요." "오! 라면이라니, 기대됩니다." 들뜬 이타샤의 얼굴을 보며 성구가 음흉이 웃었다. "불새볶음면이라고 아주 기막힌 라면이 있어요. 꼭 대접해드리죠." "...." 성구의 말에 뜨악한 재민의 눈동자가 흔들려싿. 슬쩍 이타샤를 보니 신난 표정이다. 가식 없이 웃는 그 모습과 가식 가듯한 웃음을 짓는 성구의 얼굴이 대비되었다. "정말 먹어보고 싶군요." "흐흐. 저도 꼳 먹여주고 싶어요." 악마다. 성구 형 악마가 되었구나. 재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167화 - 공중폭격(1) > 끝 < 168화 - 공중폭격(2) > 우진은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비비캐슬을 대충 보곤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가 알아서 잘해주고 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듯싶었다. 있다면 포인트가 떨어지지 않도록 채워야 하는 일. 투자도 좋지만 모두 써버리면 병력의 충원도, 운용도 안 되니 말이다. 그렇게 관라하지 못해 영지를 잃은 영주들이 부지기수였다. "앞으로도 이렇게 해. 거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가족을 위새허도, 또 우진의 귀환을 위해서도 말이다. "알았다용." 우진이 일어나거 가려는데 비비가 홀로그램을 보며 소리쳤다. "어? 주인님. 또 던전이 터졌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항공모함의 함장인 박길수와 설계와 보수를 담당하고 있는 노삼이었다. "국왕님을 뵙습니다!" "영주님꼐 인사드립니다." 허둥지둥 등장한 둘의 모습에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밑에 볼 수 있나?" "옙!" 박길수가 즉시 관제탑의 화면에 항공모함 아래의 지도를 띄웠다. 화면을 확대하자 꽤 고해상도의 영상이 생생히 보였다. "세 군데쯤 되나?" 여전이 어두운 얼굴로 관제탑으로 돌아온 정민찬이 힘없는 목소리로 우진의 말을 받았다. "최근에 예고 없는 던전 브레이크가 빈번하 일입니다. 한국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다른 덴?" "한국은 하루 이상 토벌이 지연된 적이 없지만, 몇몇 나라에선 몇 시간씩 몬스터들이 주요 건물을 점거하여 농성한 적도 있습니다." 우진의 눈썹이 휘어졌다. "또 거점이 생긴 적 있나?"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도는 종종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중국에서 거점 생성을 방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왜?" "추측기로는 차원의 조각이 목적으로 보입니다." "쯧." 우진이 혀를 차곤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리될 것이란 건 예상했다. 지구의 수호니 인류 평화니 떠들어도 욕심에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엔 제 살을 깍아먹고 부질없다는 걸 알겠지만 말이다. 지구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겠다는 것도 어쩌면 자신의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아래부터 정리해야겠네." "주인님 바쁜데 나한테 맡겨주세요!" "네가?" 전장에 함께한 지 꽤 되어서인지 비비의 레벨이 그리 높지 못했다. 괜히 토벌에 나섰다가 다칠지도 모를 상황인데.. "이 거점 도시로 공격하면 된다용." "아..."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는 거점 도시. 감당하지 못할 적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항공모함에 거점을 설치할 생각을 했는데, 바다가 아닌 하늘을 날아버리게 되었다. 거정에 달린 무기와 병력들을 수성전에만 쓸 것이 아니라 공성전이나 적을 향한 공격에도 활용할 수 있는 것. "괜찮은 생각이야." "내가 해도 되겠어요?" "좋아. 맡기지." 어차피 예기치 못한 던전 브레이크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우진이 일일이 대처할수는 없다. 우진이 해야 할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 대체할수 없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 '트래쉬의 집행.'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를 트래쉬 세트 아이템들부터 되찾아야한다. 그가 있을 곳은 지구가 아니라 아르펜이다. "비비." "네, 주인님!" "절대 거점을 잃지 마." "맡겨두라용!" 비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우진은 포탈을 타고 아르펜으로 넘어가 버렸다. "흐흐, 시작해 볼까요?" 비비가 관제탑 아래 화면을 보며 웃었다. *** 대전역 인근 분식점. 떡볶이를 먹던 고등학생 셋이 지하철 역 근처에선 쉽게 볼 수 있는 각성자 무리를 보곤 감탄했다. "후, 나도 능력이나 하나 각성하면 인생역전인데." "풉, 각성은 무슨. 로또를 사라. 그게 더 확률이 높겠다. "아, 새끼. 인생 몰라. 4반 경수도 얼마전에 각성해서 쩔잖아." "하긴." 요즘 학생들에겐 능력의 각성은 로도 당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행운이다. 공명심 없는 남자 말고, 영웅심리 없는 아이 없으니 말이다. "야야, 하급 각성자야 어차피 노가다야 노가다." "괜히 쓰리디냐?" 낮은 등급의 각성자는 인기 없는 연예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연습이 고되다 하여도 스타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야, 능력만 각성하면 아르달 면접가면 되잖아. 이번에 보니까 허접들만 죄다 뽑은 것 같던데." "뭔, 감춘 게 있겠지." "맞아. 무슨 공장도 아니고 들어가기만 하면 며칠 만에 떡하니 상급 각성자 만들어내는 게 가당키나 하냐?" 당연한 논리다. 뭔가 잠재력이 있었읜 채용했고, 그것을 꽃피워 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가.." 각성자가 꿈인 민재는 그저 볼을 긁적였다. "야, 넌 공부도 잘 하는게 무슨 각성자냐." 예나 지금이나 공부가 절대적 척도가 되지는 못하지만 출세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 되어주는 건 마찬가지다. 몬스터들이 날뛰는 이 세상에도, 아니, 이런 세상이기에 더욱어. "후우, 먹고 학원이나 가자." 민재와 친구들이 떡볶이에 튀김을 흡입하고 일어서려는데 입구에서 그대로 멈춰섰다. 아니, 얼어붙었다. 크르르! 몬스터들이 일상이 된 세상이다. 하지만 티비에서나 보던 그것들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어떤 느낌일까? 쿠오오! 거대한 괴수가 망치인지 쇠뭉둥이인지 모를 그것들을 높기 치켜들고는 내려치려했다. "도, 도망가!" 얼어붙은 입을 벌리고 겨우 소리친 것이 촉매가 되었을까? 친구들의 몸이 움직였다. 쿵, 쿵!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위압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달리기는 느렸다. 민재와 친구들은 죽기 살기로 뛰어 겨우 녀석에게서 점점 멀어질 수 있었다. "헉, 헉! 뭐지?" "이 인근 던전 터졌나 봐." "대피소 어디지?" "후, 몰라 휴대폰도 떨어뜨렸나 봐." 그동안 운이 좋았는지 셋 모두 몬스터를 보는 것은 처음.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또다시 괴수들이 나타났다. 크르륵. 브레이크가 일어났는데 몬스터가 하나만 출몰할 리가 없었다. 아까 본 녀석과 비슷한 생김새의 놈들이 넷이나 더 나타났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 세 마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각 방위를 점하고 다가왔다. "시, 시발." "...." 민재의 욕설에 친구들은 대꾸할 힘도 없었다. 브레이크는 당장 일어났고, 대피소는 찾지도 못했는데 몬스터들에게 사냥감으로 찍히고 말았다. "좆됐다." "미, 민재야. 우리 어쩌지?" "어쩌긴, 죽겠지." 웃기게도 죽음을 예감하자 떨리긴커녕 더 담담해졌다. 어차피 죽을 건데 무서울 게 뭐 있겠는가? 두려움이 걷히자 보지 못하던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군대는 아직이야. 주변에 사람은 우리뿐이야.' 출동 중인 건지 아닌지 포격 소리는 귓가에 들리지도 않았고, 주변에 전투중인 듯한 소음도 없다. 그저 사람들의 비명과 몬스터들의 괴성이 들릴 뿐이다. 브레이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상황. 겨우 넷뿐인 괴수는 더 늘어날 것이고 살 확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죽나 보다." "미, 민재야, 우리 어떻게 해."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으윽." 진심으로 바랐다. 자신에게 능력이라도 있었다면 자력으로 탈출을 하든, 싸워보기라도 하든 할 텐데, 그저 학원 가던 평범한 고등 학생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죽어서 뭐라 말해야 할까? 하필이면 대전역을 지나다가 배가 고파서 떡볶이를 먹은 게 죄일까? "젠장." 간절하다. 정말 자신이 각성자였으면이 순간이 이렇게 무력하지는 않을 텐데. 뱀 앞에 개구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쿠와아! 괴수들이 점점 방위를 좁히고 다가오다 커다란 무기를 들고 내려찍었다. 피떡이 되어 시체도 온존히 못 남기고 죽겠구나. "젠장!" 평소라면 기겁했을 행동이었으나 두려움에 서로 맞잡은 친구들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파팟! 기적이 일어났다. 팅! 알 수 없는 힘에 가로막힌 무기가 공기 중에서 튕겨졌다. "....!" 너무 놀란 민재가 눈을 부릅떴다. "미, 민재야!" "뭐, 뭐지? 너 봤어?" "왜 저러지?" 친구들의 당황성이 들리지 않았다. 민재는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나 각성했어.' 느껴진다. 아니,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다. 방금 생성한 보호막의 활용방법이. 쿠룩? 어리둥절해 하던 괴수가 다시 무기를 휘둘러 왔다. 티잉! 다시 한번 펼쳐진 보호막에 그것들이 흉성을 폭발시켰다. 쿠아아! 막아서면 부숴주면 될 일. 쾅, 쾅! 쉴 새 없이 두들기는 무기에 보호막이 얼마 버텨내지 못할 듯했다. "으윽." 머리가 깨어질 듯한 고통에 인상을 구기며 악다구니를 썼다. 버티지 못하면 죽는다. 이제 겨우 능력을 각성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키아아악! 그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재는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결국 죽을 운명이란 건가?" 하늘을 까맣게 물들인 검은 새들이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뉴스에서도 본 적이 있고, 요즘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몬스터 도감에도 나온 인기 있는 몬스터였다. 와이번. 인기가 있다뿐이지 놈들이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 머리통을 뼈째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녀석들. 이건 방법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 백 마리가 넘었다. "후아." 터엉! 보호막이 터졌다. 후들거리는 몸이 한계를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각성한 능력을 발휘할 힘도 없다. 털썩 주저앉은 민재와 친구들을 향해 다가오던 괴수들이 불현듯 자신들을 끌어당기는 힘에 하늘로 붕 떠 버렸다. 키아악! 와이번들이 낚아챈 그것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바닥으로 내동탱이쳐졌다. 화르륵, 쾅! 그뿐만이 아니라 와이번의 등에 탄 이상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한 몬스터들을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미친 듯 도망치다 포위되고 하늘에서 와이번 떼가 나타나고, 능력을 각성하고... 또 지금은 주변 도로를 점거하며 몰려드는 몬스터 떼. 와이번 하나가 다가와 민재와 친구들 곁에 내려앉았다. 푸른 피부에 넓은 귓바퀴를 가진 괴상한 라티족 라이더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구조한다. 타라." 생김새와 다르게 언어의 알약으로 인한 유창한 한국어에 놀란 민재와 친구들이 서둘러 와이번의 등에 올랐다. 키아악! 와이번이 날아오르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악을 썼다. 화르륵, 쾅!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룡의 등에는 라티족 라이더들이 하나에서 둘 이상 타고 있었는데 모두 마법을 쓰는지 아래를 향해 쉴 새없이 발사하고 있었다. 몇몇은 미사일로 보이는 포탄을 아래에 그저 떨어트리기도 했다. "..." 얼핏 아래를 내려다보았던 민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운이 나빴던 게 아녔어.' 운 나쁘게 괴물들의 눈에 자신들만 발견되었다고 생각했다. 화르르륵. 불타는 도시가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과 친구들이 몇 안되는 생존자임을. 이미 도시의 도로마다 몬스터들로 넘치고 있었다. **** 얼음으로 완전히 뒤덮어 버린 동굴. 쾅! 쩌저적! 분노한 이엘로가 발을 구르자 얼음이 갈라지며 동굴 전체가 진동했다. 그 앞에 무릎 꿇은 이상호의 몸도 절로 떨렸다. "신이 없다니!" "송구하옵니다." 이상호는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신이 없는데 왜 자신이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찾아라! 반드시 찾아와라!" "예에." 불가능을 말해 자신의 목숨을 시험할 정도로 이상호는 멍청하지 않았다. 즉시 대답하자마자 자리를 떠났다. 있지도 않은 지구의 신을 찾으러. "코드가...코드가..." 이엘로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돌아왔는데 코드가 없단 말인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지구에 코드가 없을 리가 없다. < 168화 - 공중폭격(2) > 끝 < 169화 - 공중폭격(3) > -이번 대전역 브레이크 사태는 군과 각성자 관리국의 소통 부재로 인한 재앙이며 사상자 집계에 따르면... 차분히 읆조리는 앵커의 멘트가 귀를 간지렵혔다. -아르달의 국왕 강우진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그들이 인수한 항공모함이 공중에 등장, 수십 마리의 와이번 라이더가 대전역 인근의 몬스터를 토벌... 신경 회로가 이어지듯 서서히 머리가 밝아지며 기억이 떠올랐^다. "헉!" 민재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상체를 가리고 있던 얇은 담요가 떨어지며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늘어선 침대와 몇몇 사람, 그들와 마찬가지로 누워 있던 자신의 몸. -예고 없는 브레이크로 인해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때, 지구가 아닌 아르펜의 구원에 물적, 인적자원을 쏟는 것에 대해 좋지 못한 여론이 형성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벽에 걸린 티비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도 언제나 뉴스로 보았던 던전 브레이크 소식.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엔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 그것도 간발의 차로 목숨을 구했고, 아마도 여기는 병원. "다 나았네." "...." 고개를 돌린 민재의 눈에 허리춤 밖에 오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누구...?" "수아야, 헤헤, 내가 기도해 줄게." 수아는 대뜸 민재의 손을 잡더니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손으로 전해는 충만한 에너지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기운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아, 다 됐당. 이제 씩씩하게 집에 가요." "고, 고맙다."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사한 민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가득 찬 것을 느꼈다. '축복인가?' 이제 막 방어막이라는 능력 하나를 각성한 민재였지만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소녀가 펼친 능력은 분명 축복이었다. "어? 민재야?" 문을 열고 들어온 친구들이 민재의 모습에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그 옆에 있는 수아를 보곤 꾸복 인사를 하는 것이, 길 다가 선생님을 마주친듯 조심스러웠다. "그럼 다음에 봐, 아저씨들." 수아가 손을 흔들려 나가자 친구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안녕히 가세요." "쟤, 누구야?" "쟤라니!" 민재의 물음에 친구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아르달 공주님이시다." "응?" "강우진님 동생분이라고." "...음, 어어? 뭐?" "저분이 강우진님 동생분이시라고." "헐." 민재는 어이없는 기분에 수아가 나간 문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도 따뜻한 손은 여태 느껴보지 못한 편하고 좋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강우진의 동생이라니... 연예인과 마주친 느낌이었다. "너 기절하고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그보다 여기 어디냐?" 어리둥절한 민재의 물음에 친구들이 달뜬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 어딘지 모르냐? 휴대폰이라고 가져왔으면 인증샷이라도 찍었을 텐데." "어디 병원인데 그래?" "병원은 무슨, 여기가 비비캐슬이야." "뭐?" "비비캐슬! 아르달 항공모함이라고." "....헐."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사정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들은 조금 신난 듯 들떠 있었다. "엄청난 일이야." 영화 속 주인고잉 된 기분일까? 그런 그들을 보며 민재는 침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엄청난 일을 겪었지." "...." 들떴던 친구들의 얼굴이 침울해지는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구원이 필요한 것은 아르펜이 아닌 지구가 아닌가 합니다. 국제적 여론이 아르달에 묻고 있습니다. 진정 아르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지구입니까? 아르펜입니까? 앵커의 말이 귀를 파고든다. 죽을 뻔했다. 뉴스로 들을 땐 몰랐지만 직접 겪어 보니 상황이 달랐다. 친구들도 본인이 그 위급한 상황에서 구출된 것이 아니라면, 공격받은 곳이 대전이 아니라면, 지금 계속해서 신난 기분일지도 몰랐다. "많이 죽었던데.." 침울한 친구의 말에 잠시 억눌렸던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내 가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민재의 심장을 방망이질하게 했다. "일단 집에 가자." "그래, 그런데 어떻게 가지?" "여기 서울이야, 아까 착륙했어. 버스타고 가야지 뭐." 민재가 기절했던 시간 동안 친구들은 이미 항공모함의 착륙까지 구경했던 모양. "차비는?" "....."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살피던 친구들은 돈 가진 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비, 빌려주시겠지?" "그렇지 않을까?" 염치는 없지만 구해주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차비쯤은 대주지 않을까? 민재와 친구들이 방을 나섰다. *** 제주도 서귀포시의 피시방. 딸각, 딸각! 현란하게 움직이는 마우스와 보조를 맞추든 키보드 위의 손가락이 춤추고 있었다. <5픽탑이요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렇지!" 이상호는 또 업적을 올린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현실이 게임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공평한 현실에 비해 게임은 얼마나 공평한가? 같은 것을 쥐고 시작해 노력 여하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씹어먹을 강우진 놈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사장님, 찾은 것 같습니다!" 한창 게임하던 이상호가 게임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고 물었다. "뭔데?" "나이 70 먹은 노인인데, 신의 기적을 받아 발기부전이 치료됐답니다. 과부 열둘을 하룻밤에 상대했답니다." "출처가 어딘데?" "갤러리인데.." "무슨 갤러리?" "허언증 갤러리입니다." "...." 마우스를 움직이던 이상호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자신의 부하 직원이 들어왔다. 이런 것들을 믿고 길들을 이끌었으니 회사가 망했지. "뒤질래?" "다시 찾겠습니다." "후우." 이상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물고는 다시 게임에 집중하려 했다. "사장님 찾았습니다." "넌 또 출처 어디냐?" "뉴델 신문 기사입니다." 출처부터 묻는 이상호의 말에 자신있게 대답한 직원을 보았다. 그래, 저 놈은 그나마 좀 똘똘한 놈이었지. "내용 읇어봐." "이번 대전역 터질 때, 아르달 항공모함이 개입했지 않습니까? 고딩 셋이 운 좋게 살아서 그곳에서 탑승했답니다. 치료받고 집에 가기 전에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강우진이나 아르달을 주시하며 동태를 삵피고 있긴 하지만 지금 찾는 정보는 그게 아니었다. 신, 혹은 신의 기적이라 불릴 만한 불가사의한 일을 일으키는 놈들을 찾아야 했다. "그게 왜?" "여기 인터뷰 내용 좀 보시면..." "아, 새끼." 이상호는 귀찮은지 신경질 적으로 게임 캐릭터를 안전한 집으로 귀환시켜 놓고 부하 직원의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데?" "여기." 마우스를 쥐고 휠을 끽끽 내리더니 짚어주는 글을 읽었다. -제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리는데 몸이 치유되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아기 천사가 내려다보는.... "음." 각성자 중에는 힐러도 많고, 버퍼도 많다. 그것이 신의 힘을 빌려 발현한 것인지, 자가 치유력을 높여주는 것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직 지구의 각성자 중에 신성력을 쓰는 각성자는 없다. 지구인이 아닌 사람 중에는 유명한 성녀 메르디가 있지만 애초에 그녀의 출신은 아르펜. "조금 약한데?" 아르달 내에서 신성력을 사용한 듯한 문구를 발견했다지만 이것만으로 이엘로에게 보고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조사해 볼 가치는 있지 않습니까?" "뭐, 알아서 자료파봐." "넵." 이상호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고는 게임을 했다. 그의 부하 직원 십여 명이 웹서핑을 하며 자료를 구하고 있었다. 이엘로의 충직한 지구인 가신 이상호는 오늘도 정보화시대의 혜택을 누리며 편하게 정보를 수집 중이었다. *** 서울력 인근의 아르달 영토. 그 위에 덩그러니 세워진 비비캐슬은 도시의 풍경과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육지의 항공모합만큼이나 이상하면서도 웅장하고 멋진 관경이 있을까? 박물관에 온 듯, 산처럼 큰 그 구조물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사가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총리 정민찬은 기자들을 초청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고고한 학처럼 인터뷰를 모조리 거절해도 딱히 아르달을 압박하거나 제재할 나라가 있을진 모르겟지만 국제적 여론지 좋지 못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고 없는 던전 브레이크의 공포에 질려 있었다. 불시에 찾아오는 재앙과 같은 상황이지만 대비만 충분하다면 막을 수 있는 이 상황에 대해 너도나도 그 대비책으로 아르달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아르달의 강우진. 여태 예기치 못한 사건마다 나서서 막아주며, 해결해 주던 그의 부재가 주는 불안감은 세계, 특히나 한국인에게 심하게 나타났다. '강우진이 옆에 있는데 막아주겠지.' 란 생각이 '다 죽게 생겼는데 어디서 뭐하는 거야?' 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강우진에게 그대로 보고하면 돌아올 대답은 뻔했기에 중간에서 적당한 조율과 원만한 해결에 대한 책무가 있는 민찬이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펜 원정을 후일로 미룰 수는 없는 일입니까?" "지구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곳에 던전으로부터 벗어날 해결책이 있고, 국왕님은 그섯을 찾고 계십니다." 민찬이 적절히 답하고는 다음으로 넘겼다. 기자 하나가 손을 들고, 그가 가리키자 질문했다. "일각에서는 아르달의 아르펜 이주설을 펼치고 있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아르달은 이미 강우진의 방주를 완성했지 않습니까?" "...." 아르달의 총리 정민찬이 질문을 던진 기자를 노려보았다. 강우진의 방주. 노아의 방주를 빗대어 요즘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리였다. 전략적 거점 도시인 항공모함 비비캐글을 이르는 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지구인들에게 강우진이 만들고 지키는 비비캐슬은 어쩌면 재앙을 빗겨갈 동아줄로 보일지도 몰랐다. 거금의 거부를 약속하며 비비캐슬에 오르길 희망하는 재력가들이 줄을 선다는 가십 기사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더불어 정민찬이 가장 경계하며 가장 거북해하는 말. '국왕님의 노고를 안다면 절대 할 수없는 말을...' 누구보다 지구를 지키기 위하는 것이 강우진이다. 정민찬은 솔직히 국제 정세의 약화보다 그가 실망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사람들의 이러한 이기심에 우진이 실망해 지구를 버릴까 두려웠다. 그들의 잣대로 비우어 보면 아르달의 왕이 지구를 구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차원 영주인 그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아르달의 길드원들은 안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략적 요새입니다. 방주라는 말을 듣기 거북합니다. 다음 질문." 기다리고 있던 기자 하나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전략적 요새라고 하셨는데 대전역 사태처럼 한국 전역을 배회하며 브레이크를 대비해 몬스터 토벌을 진행할 계획이십니까?" 민찬이 슬쩍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어디든 달려가 몬스터를 토벌할 것입니다. 한국이 아닌, 전 세계 모든 곳을 말입니다." "그것은 조금 위험한 발언 아닙니까? 아르달의 모든 시설과 인적자원들이 비비캐슬로 이주 중인 것으로 압니다. 한국을 비워버리겠다는 말입니까?" "버리다니요. 지구를 지키려 하는 거지요." "한국인이 아닙니까?" "지구인입니다." "...." 질문이 끊긴 기자를 보며 민찬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대한민국은 아르달에 기대는 안일한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나라는 스스로 지키는 것이고, 저희는 도움을 줄 뿐입니다." 자주국방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일까? 아니면 급하니 떼를 쓰는 것일까. '괜히 저질렀군.' 민찬은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말을 쏟는 것을 바로 후회했다. 국제적 정세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인들에게 아르달은 비호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겼다. '내일 기사가 거정이군.' 기자들의 노트북과 수첩이 오가는 볼펜 소리가 그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 169화 - 공중폭격(3) > 끝 < 170화 - 아리아 신전(1) > 민찬이 기자들을 쭉 훑어보았다. "산불이 났습니다. 기자님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도 맨 앞에 앉은 기자 하나가 얼떨결에 답했다. "불을 꺼야지요." "불이 아니라 화산이 폭발하는 거라면요?" 민찬이 눈이 그 젋은 기자와 마주쳤다. "도망가야겠죠." "나중에 도망갈 곳이 없다면 어쩔 겁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역활이 다르단 겁니다." 민찬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화재 현장에만 가도 구조팀이 따로있고, 소화팀이 따로 있습니다." "..." "아르달의 왕께서는 화산보다 더 자주 터지는 던전을 아예 막을 방법을 찾고 계십니다. 최대한 버티고 막아서는 것은 우리들이 대신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젊은 기자가 냉소적인 얼굴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못 알아들었습니까? 요즘은 초졸도 기자로 받아줍니까?" 민찬의 공격적인 말에 기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정도로 못 알아 듣는 사람 있습니까? 아르달의 입장이 뭐냐는 말입니다. 이대로 한국 사람들 다 죽을 때까지 그 방법이란 거 찾으로 다닐 겁니까?" 화난 그의 말에 민찬이 자리에서 잃어섰다. 이성 잃은 기자만큼 추한 것도 없고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도 드물다. "저, 저기 제가..." 기자도 흥분해서 쏟은 자신의 말을 주워 담기 위해 대뜸 일어섰으나 민찬이 그를 노려보았다. 국왕님이였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이런 이기적인 어리광을 끝까지 받아주어야 하는 걸까? 거참, 아르달 총리도 할게 못 되는구만. "못 알아처먹었으면 수준 맞춰 알려줄게." 민찬의 거친 말에 당사자는 물론, 다른 기자들도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칭얼거리는 것도 정도껏 해. 네 목숨은 스스로 지켜. 네놈들의 징징거림 없어도 아르달은 사력을 다해 지구를 구하려고 애쓰니까 말이야." "...!" 민찬이 등을 돌리고 기자회견장을 나서려 하자 우승훈이 재빨리 다가와 귓속말했다. "이대로 나가도 괜찮습니까?" "후, 될 대로 되겠지." "....." 아, 총리님도 스트레스가 상당하셨구나. 우승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뱉은 말이니 뭐.. 더군다나 이중국적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은 한국보다는 아르달이라는 신생 국가의 국민 아닌가? "기자회견 마치겠습니다." 승훈의 말에 기자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시작보다 끝이 더 어수선한 기자회견이 막을 내렸다. - 아르달 독자 노선 감행, 한국과의 협조는? - 국민의 요청 묵살, 국회 아르달 국민의 한국 시민권 유지 고심. - 아르달 총리 선언! 한국이 아닌 세계를 위한 것. 분 단위로 올라오는 카피캣 기사들을 모두 재해도 아르달이라는 키워드만으로도 수십 개의 다른 기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고 있었다. 모니터에서 눈을 뗀 정민찬은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댔다. "후우." "많이 힘드십니까?" 우승훈의 말에 민찬이 피식 웃었다. "몰라주는 게 답답하군." 지구를 구하고 싶다. 한국도 중요하다. 하지만 숲이 모두 불타는데 나무 한 그루 구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결국, 중요한 건 불을 끄는 일이었다. 그것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는게 강우진인데... "뭐, 상관없지 않습니까?" "응?" "국왕님 하신 이야기 잊으셨습니까? 나라도 없고, 도덕도 무너진 세상이 올 거라고.." "으음." 분명 그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위기감을 고취시키려 하는 소리인 줄 알았으나, 지금은 그것이 마냥 위협으로만 생각되지는 않았다. 실제 일어날지도 아니, 이렇게 불안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국가가 신뢰를 잃으면 무정부 상태는 예상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 무서운 것은 그 시기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지금도 괜찮아요." "무슨 말인가?" 우승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무슨 주제가 된다고 인류 수호니 뭐니 하겠습니까? 그냥 국왕님 수행이나 잘하면 되지요. 제 그릇은 그정도뿐입니다." 휴대폰 판매원에서 창립 멤버로 들어와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나라의 국왕 전속 수행비서가 되었다. 이정도면 출세할 만큼 출세했다. 아니,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더욱 높은 자리에 앉았다. 욕심부릴 것도 없고, 부담감을 가질것도 없다. 언제나 그래 왔든 강우진 심부름이나 잘하고,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 우승훈의 생각은 그때와 같았다. "자네도 참..." 정민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르달의 총리, 그것이 주는 부담간과 책임감에 요즘 힘들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그래, 우리는 국왕님을 따르면 될 뿐이야." "그렇죠." 강우진이 사고치고 자신들이 수습했다. 이번엔 정민찬이 일을 벌였지만... "잘 지르셨습니다. 저도 속이 후련했습니다." "후후." 괜한 소리로 기자들을 적으로 돌렸나하는 후회가 조금 위로가 되었다. "단언컨대 국왕님이 기자회견을 한 것보다, 100배는 더 관대하셨습니다." "승훈이 자네. 허허." 민찬은 허허롭게 웃었다. 이래서 국왕님이 우승훈을 곁에 두시는구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아리아의 신전으로 찾아 향하는 길. 질주하는 유령마 씽씽이에 올라탄 우진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아, 귀 간지러 죽겠네." "조금 쉬다 가시겠습니까?" 등 뒤에서 떨어질세라 꼭 붙잡고 있던 메르디가 물었다. "아냐, 됐어." "...." 침묵에 우진이 슬쩍 뒤돌아보니 얼굴이 희게 질린 메르디가 보였다. 자기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쉬고 싶었군. "...쉬다가지." 우진이 씽씽이를 멈춰 세우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얕은 구릉지와 바위 무더기를 끼고 샘물이 흘렀으나 썩었는지 고약한 악취를 풍겨 먹을 것은 못 되어 보였다. "깨비, 주변에 던전이나 거점이 있나 알아봐." [그러지.] 그림자에서 깨비의 본신이 빠져나가며 주변의 지형을 훑었다. 피해 가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있으면 처리하고 갈 생각이지. 우진이 인벤토리를 열오 물과 간단히 요기할 음식을 꺼내려... "다 먹었군." 인벤토리를 통한 영지 창고의 권한을 나눠준 것은 재민이뿐이다. 많은 인원이 모인 연합의 생존자들에게 보급하느라 재워두었던 음식과 물을 다 쓴 모양이었다. 이제 거점 도시가 활성화되어 굳이 창고를 털 필요도 없이 혈석을 지불하고 도시의 상점에서 구입하면 되겠지만 말이다. "어디 보자." 우진이 업적 상점을 열고는 음식과 물, 의지와 테이블 등을 구입하여 눈 앞에 펼쳐 놓았다. "...." 묵묵히 구경하는 메르디를 보며 우진이 고개를 까닥했다. "앉지?" "네에." 메르디는 신성력을 사용했다. 아리아의 축복. 우진의 권속들과는 상극인지로 유령마에 타고 있을 때는 아리아의 힘을 전해 받지 못해 익숙하지 않은 승마에 멀미가 났던 터였다. 내리자마자 연거푸 축복의 기도를 올리곤 자리에 앉았다. "임모탈께서는 거점이 아님에도 창조의 힘을 발휘하시는군요." "뭐, 조금 다른 거지." 업척 상점과 포인트 상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석이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신처럼 말입니다." "응? 정확히 말하면 이건 창조가 아니라 구입이지." "저 또한 포인트 상점을 이용해 봤었지요." "...." 메르디는 포인트 상점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자격을 잃었지만 한때 차원 영주였던 그녀니까 말이다. "놀라운 일이지요. 신의 이적을 따라 할 수 있다니.." 그런가? 우진은 그저 아이템샵 정도로 생각했던 지극히 당연한 시스템을 메르디는 신의 기적이라 부르고 있었다. "세계수를 심고, 성과 집을 만드시고, 빵과 음식을 창조하시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우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메르디가 신중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임모탈께서는 이미 신이신지요?" "신이라..." 우진이 물 한 잔을 비우고는 빵을 떼 입안에 넣었다. 차원 상점이든, 업적 상점이든 구입한 것을 현실에 내어놓는다. 창조라 불릴 만한 일.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할까? 아니, 이것이 오해일까? "신이 뭔데?" "..." 신을 모시고 숭배하는 성녀에겐 너무 단순한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고차원적인 질문이었을까? 메르디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고, 침묵만 길어졌다. [동쪽에 던전이 하나 있다.] 정찰을 마쳤는지 돌아온 깨비의 말에 우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뭐, 정리하고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예에." 우진이 씽씽이를 타고 멀어지자 메르디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 고민을 거듭했다. 쉬이 답을 내려지지 않는 문제에 그녀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 거점 도시 요로스. 요소마다 마련된 연무장 겸 광장의 한 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불구경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불덩이가 커졌다가 줄었다하는 것이 마차 풀무질하는 대장간의 불꽃처럼 호흡하고 있었다. 화르륵. 불길이 가시며 그곳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휘유, 잘 안 되네." 성구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불꽃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몸 자체가 타오르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스스로 불꽃으로 화한 성구의 몸집이 조금씩 커지는 듯싶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사람들, 특히나 아이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유심히 보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까지 올리고 있었다. "뭐하세요?" 지나가던 도재민의 물음에 기도하던 소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 재민 백작님." 밤의 귀족, 도재민은 백작의 피를 이어받은 뱀파이어 로드다. 연합에서도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그는 이미 유명인사. 임모탈의 가신으로 알려진 도재민과 홍성구, 그리고 블랑카와 최해솔, 팬텀 부대는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정령님을 보고 소원을 빌고 있었어요." "...정령님이요?" "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는 홍성구를 힐끗 보았다. "아, 뭐..." 정령이라고 부르니 꼭 그렇게 보이기도 했는데... "임모탈님은 무서운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대단하신 분 같아요. 백작님도 그렇고, 불의 정령왕도 그렇고 하나같이 강한 사람들만 가신으로 두고 계시잖아요." "예, 뭐 그거야..."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지만 구구절절 대꾸하기도 애매해 재민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 행성의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알 듯했다. "뭐, 그럼 계속 구경하세요." "네, 백작님." 재민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집중하는 성구를 대단하게 보았다.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못 할 텐데.' 집중력이 굉장하다고 해야 할까? 주변 상황에 대해 무신경해졌다고 해야 할까? 도재민은 고개를 절레 흔들며 자리를 떴다. '우진이 형은 잘 도착하셨으려나?' 메르디를 아리아의 정식 성녀로 만들어 성물을 받게 하려고, 정확히는 성물을 뺏기 위해 아리아의 신전으로 향한 것이 이틀 전이다. 적진의 한가운데인 그곳이지만 어쩐지 우진이라면 안심이었다. '아리아 신 것만 얻으면 이제 하나 남았댔나?' 우진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그랬다. 세월의 신 헤리스의 성물만 얻으면 세트 아이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다고 말이다. 던전을 없앴지로 모를 힌트가 그것에 달렸다는데 어서 빨리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아르펜의 파견도 나름 나쁘진 않지만 지구가 벌써 그리운 재민이었다. 우진이 형은 이런 외로움을 참고 어떻게 20년을 보냈는지.... < 170화 - 아리아 신전(1) > 끝 < 171화 - 아리아 신전(2) > 소로스 산의 정상에 커다랗게 자라난 거점의 심벌. 세계수의 아래에 살아남은 엘프들의 로드이자, 은빛 화살로 더 많이 불리는 이타샤가 누워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문드문 내리쬐는 해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 나무의 숨소리를 듣고 느끼고 있노라면, 그 옛날 선조들이 노래했던 숲지기의 시대가 그려졌다. 평화로웠던 그 당시를 살아보지도 않았건만 그리워지는 건 그녀의 핏속에 흐르는 본능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뭐하세요?" 조용한 과거와의 조우은 도재민의 방문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아, 재민 백작님." 인간이었지만 흡혈귀가 되어버린 지구의 인간. 임모탈의 여인의 동생이라는 기괴하고 위험한 포지션을 가진 사내. "낮잠 중이었어요?" "아니요. 세계수의 숨을 느끼고 있었지요." "훔, 그냥 거점 심벌인데..." "제겐 특별한 존재죠." "...." 재민이 커다랗게 자라난 나무를 그저 묵묵히 보았다. 덩달아 심각해진 그를 보며 이타샤가 먼저 웃었다. "후후, 그보다 무슨 일로 절 찾았나요?" "아, 타우릭이 영웅들을 모두 부르고 있어요." "네." 이타샤가 도재민과 함께 세계수의 근처에 지어진 커다란 성으로 발걸음했다. 임모탈이 창조한 성은 열도 안 되는 영웅들이 자리하기에는 너무 넓어 휑한 느낌마저 주었다. "은빛 날개여." "무슨 일이죠?" 이타샤는 모든 영웅이 한데 모인 것을 보며 의아해 물었다. 개별적으로 팀을 이워 소로스 산을 중심으로 몬스터 토벌을 진행했던 그들이다. 이렇게 소집된 것도 며칠만의 일이다. "남쪽 나로우 고원에 대규모 몬스터가 집결하고 있소." "...최근 들은 가장 최악의 소식이네요." "촤악은 그 다음이지." 타우릭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소로스 산과 보름 정도 떨어지 나로우 고원이 위차한 지도였다. 한때 인간들의 왕국이 자리 잡았던 그곳은 현재 우논이라는 차원 영주가 다스리는 땅이 되어 있었다. "우논의 군대뿐만이 아닌 시라오, 파투, 레이아, 공공의 군대가 모두 집결하고 있지." 타우릭의 말에 이타샤의 두 눈이 툭 튀어나올 득 커졌다. "맙소사, 차원 영주들이 힙을 합친다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그렇다네." "...." 차원 영주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 원수지간 처럼 매번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영역을 두고 다툼은 항상 있어 왔다. 행성인들의 세력은 연합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 저들은 그들만의 전쟁을 해왔고, 행성인들은 사냥감일 뿐이었다. 그들이 협력했다면 아르펜 멸망은 1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갑자기 왜 돌발 행동을 벌이죠?" 이제 와 미약하게 살아남은 연합의 세력들이 다시 뭉쳐지는 게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될까? 관심의 축에도 못 낄것이다. 차원 영우 고슈슈와 쥬리엘의 군대가 궤멸한 것이 그들에게 경각심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들은 이전에도 빈번히 일어났으니 말이다. "모르지. 짐작한다면 그의 귀환이 이유일지도..." "임모탈..." 트라넷의 차원 영주들에게도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존재. 임모탈의 등장에 갑작스럽게 그들이 힘을 뭉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차원 영주 하나도 크게 부담스러운데, 다섯이나 되는 놈들이 힘을 합쳤다면 연합의 세력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 바람을 막아줄 존재는 지금 메르디와 함께 아리아 여신의 신전을 찾아 나로우 고원 너머의 적진 깊숙한 곳에가 있었다. "임모탈이 없다면 이 요새를 지키기 힘듭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야 합니다." 혼슈의 왕 콘스의 말에 대마법사 그레엄이 동조했다. "맞소. 애초에 소로스 산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엔 너무 취약했고. 고립의 위험이 있으니 먼저 근거지를 옮겨야 하오." "안 돼요. 거점을 그렇게 쉽게 버리면 어쩝니까?" 성구가 버럭 소리 질렀다. 거점은 단순히 혈석을 이용해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인인 그들에게는 고향 행성으로 향하는 게이트였고, 접점이었다. "불의 정령왕의 말이 맞습니다. 세계수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불의 정령은 아닌데...." 이타샤의 말에 성구가 중얼거렸고, 그레엄이 진중히 설듯했다. "엘프 로드여, 이것은 세계수라 부르기 무리가 있소." "아니요. 세계수가 맞습니다." 성구의 말은 무시했고, 그레엄을 향해 확신에 찬 대답을 들려주었다. "으음." 현존하는 엘프들의 로드가 세계수가 맞다는데 인간 마법사인 그가 더 이상 뭐라 항변하겠는가? 하지만 그서을 위해 이곳에서 모두 떼로 몰상당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방법이 없지 않소? 우논은 무려 36좌의 고위 군단장이오." "...그가 세워낸 도시니 그가 지켜줄거에요." 임모탈에게 의존하는 듯해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실이 그러한지라 이타샤가 조용히 읆조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재민이 나섰다. "제가 연락할 수 있어요." "오오!" 아르달의 전략관으로 임명된 도재민이다. 차원 영주 강우진과는 의지를 주고 받을수 있는 사이. "위급한 상황이 되면 귀환 포탈을 통해 당장 이리 올 수 있을 거예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암울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반전되었다. 임모탈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패색이 짙던 전장의 걱정이 사라져 버렸다. 그라면 문제 없을 거란 믿음이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상황. "어저 이 사실을 알려주시오." 그레엄의 재촉에 도재민이 서둘로 우진을 호출해 보았다. [우진이 형.] [...] 모두의 기대 어린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상황에서 연달아 그를 불러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람들의 기대가 의혹으로 변하는 순간, 재민은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핞았다. '다른 차원에 계시면 안 되는 건가?' 전략관으로 임명되긴 했지만 차원 영주의 권한이나 의사소통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재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던전 공략 중이신가 본데요?" "흐음. 던전에 입장하면 연락이 되지 않는 게요?" "그런가 봐요." 어딘지 믿음이 가지 않는 재민의 대답에 분위기가 요상해지는데 타우릭이 정리하고 나섰다. 임모탈도 없고 성녀도 없는 지금 스키아 신의 첫 번째 수도사는 모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곳에 터를 잡는데 임모탈의 독단이 있긴 했지만 우리 모두 동의한 일이오." "...." "반격의 가치를 내걸로 이곳에 거점을 마련했는데 적의 회동 한 번에 겁먹고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오." "맞아요." 이타샤의 호응에 가만히 듣고 있던 오크 대족장 쿠르가도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쿠르, 도망만 치다 죽을 수는 없소. 이제 생존이 아닌 승리를 위해 싸워야 할 때요." 후일을 도모한단 이유로 얼마나 많은 동료를 뒤로하고 도망쳐야 했었나? 그렇게 쌓아 올린 희생이 지금의 시간을 기다려서인지도 몰랐다. "아르달과 연합의 동맹이오. 그가 돌아오기 전 이 거점 하나 지켜내지 못한다면 동맹의 이유가 없소." 드워프 왕 라울도 나섰다. "싸웁시다! 요새를 개조하고 흩어진 연합의 세력을 빠르게 모은다면 방어해 내지 못할 것도 없소." 의견이 한데 모아지는 듯하자 타우릭이 선언했다. "거점 방어를 준비합시다." "우오오!" 더이상의 후퇴는 없다. 반격의 칼을 얻었는데 무겁다하여 칼자루를 놓아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날카롭게 위협적인 임모탈이라는 칼이 서둘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흙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끈적하고 기분 나쁜 대지. 키 큰 나무들은 썩어 있었고 가지를 뒤덮은 정체불명의 곰팡이 같은 이끼는 해를 가렸다. 음습하고 악취 나는, 아니 독기마저 품어 생명 자체가 살지 않는 숲을 지나며 우진은 투덜거렸다. "그 누님은 왜 이런 데 신전을 세워두고 그래." 우진의 불평에 연신 신의 가호를 부르며 축복으로 몸을 보호하던 메르디가 답했다. "여신께서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으셨기에 가혹한 환경에 스스로를...." 우진이 메르디의 말을 끊었다. "저어내지 마." "...지어낸 것이 아니라 전해져 내려오는..." "아, 됐어. 그냥 가져다 끼운 말이 무슨 법이라도 된다고." "...." 항변할 말이 가득했지만 메르디는 애써 말을 아꼈다. 우진이 아니었다면 적진을 너머 이곳에 당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냥 걸어오기만 해도 두 달은 걸릴 거리를 오는 길에 마주친 던전과 거점을 모조리 파괴하며 한 달 만에 도착했다. 그냥 유령마를 타고 달렸으며 두 배는 더 시간을 아꼈을 것이다. "이런 기괴한 데는 처음 들어보네." 우진이 주변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굵기는 사람 허벅지 만 한 갈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났다가 죽어 밑동만 남아 있었고, 화석이 된 듯 바닥에 깔린 생물들의 표피는 징그러운 것들 뿐이었다. 와이번 정도의 덩치를 가진 잠자리 사체에, 팔이 여덟 개였던 곰의 뼈, 그리고 죽은 나무들의 예사롭지 않은 덩치들까지. 거인과 돌연변이의 마을이 있다면 꼭 이랬을 것이다. "킁, 이건 석유도 아니고 뭐야?" 바닥을 적시는 검고 끈끈한 액체는 뭔지 모를 위화감을 들게 만들었다. "거의 다다른 듯합니다. 저곳입니다." 여신의 이끌림대로 미로 같은 숲길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 할수 있었다. 기분 나쁜 숲이 끝나고 검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는 대지도 지나 나타난 것은 거대한 구덩이였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깊게 파인 크레이터 가운데 검은 이끼로 뒤덮인 작은 건축물이 보였다. 언뜻 보기엔 뾰족한 바위로 보이는 그것은 주변의 풍경과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뭐야? 저건." "아리아 여신의 신전입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우진이 천천히 크레이터의 가장자리를 내려갔다. 푸시시. 우진의 발길이 닿을 때마다 바스라지는 듯 땅이 푹 꺼졌는데 연약한 그 대지 사이로 돌부리들이 발에 턱턱 걸렸다. "뼈네?" 돌부리라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뼈. 동물인지 사람의 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수천, 아니 수만이 될지도 모를 뼈가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 우진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는 메르디의 표정도 절로 심각해지긴 마찬가지. "너 전에 여기 와본 적 있냐?" "처음입니다." 정식으로 성녀가 되기 위해 한 번은 오겠지만 메르디는 지금이 그 첫 번째 방문이었다. 아리아의 가장 가까운 종이 되는 증표인 성물을 받으러 가는 길. "이거 이거.." 예지의 여신 아리아. 그녀의 신전이라 하기에는 무언가가... 우진과 메르디가 깊고 넓은 구덩이의 중심지, 검은 쇠뿔 기둥 같은 건축물 앞에 섰다. "언밸런스하지 않아?" "..." 우진의 물음에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아리아의 신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여신의 계시와 같은 이끌림에 이곳으로 오는 길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뿐. 즈즈즉. 검은 이끼들이 찢어졌다. 그것은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벌어져 공간을 만들어냈다. 투슈웅! 이끼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보이는 모습에 우진이 침묵했다. "...." "여신이시여." 문이 열림과 동시에 충만히 전해지는 여신의 기운에 메르디가 절로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했다. 그녀의 반응에 우진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위화감이 절정에 다다름을 느꼈다. "우주선이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부딪혀 보면 될 일. 우진이 문을 넘어 한 발 걸음을 내디뎠다. < 170화 - 아리아 신전(1) > 끝 < 171화 - 아리아 신전(2) > 소로스 산의 정상에 커다랗게 자라난 거점의 심벌. 세계수의 아래에 살아남은 엘프들의 로드이자, 은빛 화살로 더 많이 불리는 이타샤가 누워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문드문 내리쬐는 해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 나무의 숨소리를 듣고 느끼고 있노라면, 그 옛날 선조들이 노래했던 숲지기의 시대가 그려졌다. 평화로웠던 그 당시를 살아보지도 않았건만 그리워지는 건 그녀의 핏속에 흐르는 본능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뭐하세요?" 조용한 과거와의 조우은 도재민의 방문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아, 재민 백작님." 인간이었지만 흡혈귀가 되어버린 지구의 인간. 임모탈의 여인의 동생이라는 기괴하고 위험한 포지션을 가진 사내. "낮잠 중이었어요?" "아니요. 세계수의 숨을 느끼고 있었지요." "훔, 그냥 거점 심벌인데..." "제겐 특별한 존재죠." "...." 재민이 커다랗게 자라난 나무를 그저 묵묵히 보았다. 덩달아 심각해진 그를 보며 이타샤가 먼저 웃었다. "후후, 그보다 무슨 일로 절 찾았나요?" "아, 타우릭이 영웅들을 모두 부르고 있어요." "네." 이타샤가 도재민과 함께 세계수의 근처에 지어진 커다란 성으로 발걸음했다. 임모탈이 창조한 성은 열도 안 되는 영웅들이 자리하기에는 너무 넓어 휑한 느낌마저 주었다. "은빛 날개여." "무슨 일이죠?" 이타샤는 모든 영웅이 한데 모인 것을 보며 의아해 물었다. 개별적으로 팀을 이워 소로스 산을 중심으로 몬스터 토벌을 진행했던 그들이다. 이렇게 소집된 것도 며칠만의 일이다. "남쪽 나로우 고원에 대규모 몬스터가 집결하고 있소." "...최근 들은 가장 최악의 소식이네요." "촤악은 그 다음이지." 타우릭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소로스 산과 보름 정도 떨어지 나로우 고원이 위차한 지도였다. 한때 인간들의 왕국이 자리 잡았던 그곳은 현재 우논이라는 차원 영주가 다스리는 땅이 되어 있었다. "우논의 군대뿐만이 아닌 시라오, 파투, 레이아, 공공의 군대가 모두 집결하고 있지." 타우릭의 말에 이타샤의 두 눈이 툭 튀어나올 득 커졌다. "맙소사, 차원 영주들이 힙을 합친다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그렇다네." "...." 차원 영주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 원수지간 처럼 매번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영역을 두고 다툼은 항상 있어 왔다. 행성인들의 세력은 연합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 저들은 그들만의 전쟁을 해왔고, 행성인들은 사냥감일 뿐이었다. 그들이 협력했다면 아르펜 멸망은 1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갑자기 왜 돌발 행동을 벌이죠?" 이제 와 미약하게 살아남은 연합의 세력들이 다시 뭉쳐지는 게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될까? 관심의 축에도 못 낄것이다. 차원 영우 고슈슈와 쥬리엘의 군대가 궤멸한 것이 그들에게 경각심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들은 이전에도 빈번히 일어났으니 말이다. "모르지. 짐작한다면 그의 귀환이 이유일지도..." "임모탈..." 트라넷의 차원 영주들에게도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존재. 임모탈의 등장에 갑작스럽게 그들이 힘을 뭉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차원 영주 하나도 크게 부담스러운데, 다섯이나 되는 놈들이 힘을 합쳤다면 연합의 세력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 바람을 막아줄 존재는 지금 메르디와 함께 아리아 여신의 신전을 찾아 나로우 고원 너머의 적진 깊숙한 곳에가 있었다. "임모탈이 없다면 이 요새를 지키기 힘듭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야 합니다." 혼슈의 왕 콘스의 말에 대마법사 그레엄이 동조했다. "맞소. 애초에 소로스 산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엔 너무 취약했고. 고립의 위험이 있으니 먼저 근거지를 옮겨야 하오." "안 돼요. 거점을 그렇게 쉽게 버리면 어쩝니까?" 성구가 버럭 소리 질렀다. 거점은 단순히 혈석을 이용해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인인 그들에게는 고향 행성으로 향하는 게이트였고, 접점이었다. "불의 정령왕의 말이 맞습니다. 세계수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불의 정령은 아닌데...." 이타샤의 말에 성구가 중얼거렸고, 그레엄이 진중히 설듯했다. "엘프 로드여, 이것은 세계수라 부르기 무리가 있소." "아니요. 세계수가 맞습니다." 성구의 말은 무시했고, 그레엄을 향해 확신에 찬 대답을 들려주었다. "으음." 현존하는 엘프들의 로드가 세계수가 맞다는데 인간 마법사인 그가 더 이상 뭐라 항변하겠는가? 하지만 그서을 위해 이곳에서 모두 떼로 몰상당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방법이 없지 않소? 우논은 무려 36좌의 고위 군단장이오." "...그가 세워낸 도시니 그가 지켜줄거에요." 임모탈에게 의존하는 듯해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실이 그러한지라 이타샤가 조용히 읆조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재민이 나섰다. "제가 연락할 수 있어요." "오오!" 아르달의 전략관으로 임명된 도재민이다. 차원 영주 강우진과는 의지를 주고 받을수 있는 사이. "위급한 상황이 되면 귀환 포탈을 통해 당장 이리 올 수 있을 거예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암울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반전되었다. 임모탈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패색이 짙던 전장의 걱정이 사라져 버렸다. 그라면 문제 없을 거란 믿음이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상황. "어저 이 사실을 알려주시오." 그레엄의 재촉에 도재민이 서둘로 우진을 호출해 보았다. [우진이 형.] [...] 모두의 기대 어린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상황에서 연달아 그를 불러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람들의 기대가 의혹으로 변하는 순간, 재민은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핞았다. '다른 차원에 계시면 안 되는 건가?' 전략관으로 임명되긴 했지만 차원 영주의 권한이나 의사소통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재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던전 공략 중이신가 본데요?" "흐음. 던전에 입장하면 연락이 되지 않는 게요?" "그런가 봐요." 어딘지 믿음이 가지 않는 재민의 대답에 분위기가 요상해지는데 타우릭이 정리하고 나섰다. 임모탈도 없고 성녀도 없는 지금 스키아 신의 첫 번째 수도사는 모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곳에 터를 잡는데 임모탈의 독단이 있긴 했지만 우리 모두 동의한 일이오." "...." "반격의 가치를 내걸로 이곳에 거점을 마련했는데 적의 회동 한 번에 겁먹고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오." "맞아요." 이타샤의 호응에 가만히 듣고 있던 오크 대족장 쿠르가도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쿠르, 도망만 치다 죽을 수는 없소. 이제 생존이 아닌 승리를 위해 싸워야 할 때요." 후일을 도모한단 이유로 얼마나 많은 동료를 뒤로하고 도망쳐야 했었나? 그렇게 쌓아 올린 희생이 지금의 시간을 기다려서인지도 몰랐다. "아르달과 연합의 동맹이오. 그가 돌아오기 전 이 거점 하나 지켜내지 못한다면 동맹의 이유가 없소." 드워프 왕 라울도 나섰다. "싸웁시다! 요새를 개조하고 흩어진 연합의 세력을 빠르게 모은다면 방어해 내지 못할 것도 없소." 의견이 한데 모아지는 듯하자 타우릭이 선언했다. "거점 방어를 준비합시다." "우오오!" 더이상의 후퇴는 없다. 반격의 칼을 얻었는데 무겁다하여 칼자루를 놓아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날카롭게 위협적인 임모탈이라는 칼이 서둘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흙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끈적하고 기분 나쁜 대지. 키 큰 나무들은 썩어 있었고 가지를 뒤덮은 정체불명의 곰팡이 같은 이끼는 해를 가렸다. 음습하고 악취 나는, 아니 독기마저 품어 생명 자체가 살지 않는 숲을 지나며 우진은 투덜거렸다. "그 누님은 왜 이런 데 신전을 세워두고 그래." 우진의 불평에 연신 신의 가호를 부르며 축복으로 몸을 보호하던 메르디가 답했다. "여신께서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으셨기에 가혹한 환경에 스스로를...." 우진이 메르디의 말을 끊었다. "저어내지 마." "...지어낸 것이 아니라 전해져 내려오는..." "아, 됐어. 그냥 가져다 끼운 말이 무슨 법이라도 된다고." "...." 항변할 말이 가득했지만 메르디는 애써 말을 아꼈다. 우진이 아니었다면 적진을 너머 이곳에 당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냥 걸어오기만 해도 두 달은 걸릴 거리를 오는 길에 마주친 던전과 거점을 모조리 파괴하며 한 달 만에 도착했다. 그냥 유령마를 타고 달렸으며 두 배는 더 시간을 아꼈을 것이다. "이런 기괴한 데는 처음 들어보네." 우진이 주변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굵기는 사람 허벅지 만 한 갈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났다가 죽어 밑동만 남아 있었고, 화석이 된 듯 바닥에 깔린 생물들의 표피는 징그러운 것들 뿐이었다. 와이번 정도의 덩치를 가진 잠자리 사체에, 팔이 여덟 개였던 곰의 뼈, 그리고 죽은 나무들의 예사롭지 않은 덩치들까지. 거인과 돌연변이의 마을이 있다면 꼭 이랬을 것이다. "킁, 이건 석유도 아니고 뭐야?" 바닥을 적시는 검고 끈끈한 액체는 뭔지 모를 위화감을 들게 만들었다. "거의 다다른 듯합니다. 저곳입니다." 여신의 이끌림대로 미로 같은 숲길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 할수 있었다. 기분 나쁜 숲이 끝나고 검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는 대지도 지나 나타난 것은 거대한 구덩이였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깊게 파인 크레이터 가운데 검은 이끼로 뒤덮인 작은 건축물이 보였다. 언뜻 보기엔 뾰족한 바위로 보이는 그것은 주변의 풍경과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뭐야? 저건." "아리아 여신의 신전입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우진이 천천히 크레이터의 가장자리를 내려갔다. 푸시시. 우진의 발길이 닿을 때마다 바스라지는 듯 땅이 푹 꺼졌는데 연약한 그 대지 사이로 돌부리들이 발에 턱턱 걸렸다. "뼈네?" 돌부리라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뼈. 동물인지 사람의 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수천, 아니 수만이 될지도 모를 뼈가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 우진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는 메르디의 표정도 절로 심각해지긴 마찬가지. "너 전에 여기 와본 적 있냐?" "처음입니다." 정식으로 성녀가 되기 위해 한 번은 오겠지만 메르디는 지금이 그 첫 번째 방문이었다. 아리아의 가장 가까운 종이 되는 증표인 성물을 받으러 가는 길. "이거 이거.." 예지의 여신 아리아. 그녀의 신전이라 하기에는 무언가가... 우진과 메르디가 깊고 넓은 구덩이의 중심지, 검은 쇠뿔 기둥 같은 건축물 앞에 섰다. "언밸런스하지 않아?" "..." 우진의 물음에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아리아의 신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여신의 계시와 같은 이끌림에 이곳으로 오는 길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뿐. 즈즈즉. 검은 이끼들이 찢어졌다. 그것은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벌어져 공간을 만들어냈다. 투슈웅! 이끼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보이는 모습에 우진이 침묵했다. "...." "여신이시여." 문이 열림과 동시에 충만히 전해지는 여신의 기운에 메르디가 절로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했다. 그녀의 반응에 우진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위화감이 절정에 다다름을 느꼈다. "우주선이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부딪혀 보면 될 일. 우진이 문을 넘어 한 발 걸음을 내디뎠다. < 171화 - 아리아 신전(2) > 끝 < 172화 - 수성전(1) > 슈슝! 우진과 메르디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히며 외부와의 공기를 단절시켰다. 지이잉. 이명과 함께 찾아온 두통에 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뭐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주변을 관찰했으나 바뀐 것은 없었다. 깔끔하게 자리한 복도와 아래로 향하는 거대한 구멍과 사다리는 전형적인 우주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외부가 아닌 내부. "...."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람손." "...." 우진의 부름에도 그의 권속 람손은 기척조차 없었다. "돌쇠야, 제니스!" "...." 권속들에게 닿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로 남아 공간을 울렸다. "아리아 여신의 목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 우진이 되돌아보니 메르디의 몸을 감싸고 있는 은은한 기운이 보였다. 빛으로 실체화된 그것은 마력이 충만합을 알 수 있었다. "재밌네." 아리아, 그녀의 절대 공간이라는 건가? 우진도 여신의 신전은 처음 방문인지라 아는 게 없었다. 짐작만 할뿐. 지구에서도 아르펜에서도 그의 권속들과 멀어진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있나?' 레벨의 초기화. 자격이 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모두 봉인되어 있었다. 아직 90레벨이 되지 않아 만날 수 없는 용용이처럼 말이다. "넌 네 볼일 봐." "임모탈께서는...?" "난 내 할 일하고." "..." 아리아의 신전에서 임모탈이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메르디가 불안한 눈빛으로 가만히 서있자 우지닝 아래로 향하는 입구를 보곤 턱짓했다. "가봐." "조금 이따 뵙지요." 메르디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충만한 아리아의 기운을 따라 이동하자 우진은 본격적으로 신전의 내부를 살폈다. 밖에서 보이던 뾰족한 공간 그대로 넓지 않은 실내. 결국, 가운데 뚫린 구멍을 통해 내려가야 할 모양. 사다리를 잡자 차디찬 감촉이 전해져 왔다. 통, 통. 한 계단씩 내려갈수록 견갑이 벽에 부딫혀 소리를 냈다. 메아리치는 소리가 묘한 울림으로 마음에 담겼다. 툭. 한참을 내려가다 나오는 탁 트인 공간에 우진이 나래로 눈길을 주었다. 둥근 구멍을 통해 더 이어진 사다리 너머로 끝없이 내려가는 메르디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녀의 목적지는 더 깊은 모양. 우진은 일단 발이 닿는 아래층에 내려선 채 벽을 더듬었다. 척. 투퉁. 딱히 손에 걸리는 스위치도 없는데 저절로 실내가 환해졌다. 갈 길 잃은 주먹으로 괜히 허공을 한번 움켜쥐곤 주변을 휘이 둘러보았다. "이렇게 커?" 천잘과 바닥에 뚫린 구멍 사이로 앙상한 뼈대의 사다리가 서 있었다. "진짜 우주선인가?" 차원 영지를 가지며 별별 차원들의 이상한 생물들과 신기한 물건을 많이 봐서 그럴까? 아르펜에서도 발견된 우주선으로 추정되는 건축물의 발견은 그리 놀랍진 않았다. 이게 지구의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아리아의 신전이라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우진은 정체를 알수 없는 테이블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위잉. 청명한 소리와 함께 그 위로 떠오른 화면을 보자 우진이 씩 미소 지었다. "재밌네, 재밌어." 터치 스크린에 떠오른 알 수 없는 기호와 문자들. 영어도 한글도 아니다. 읽을 수 없지만 익숙한 기부닝 든다. "컴퓨터라." 지난 20년간 아르펜에서 느껴본 기분 중 오늘이 가장 특별했다. 이것이 지구의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기묘한 기분이 들까? 지구와 아르펜의 연결점? 아니면 그저 지구의 과학 문명과 닮은 과거 문명을 가진 아르펜의 고대 유산일까? 터치스크린을 아무렇게나 꾹꾹 눌렀다. 경오음인 듯한 알림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오는데로 손가락은 멈춤이 없었다. "그냥 부숴버릴까?" 그렇게 마음먹을 때 테이블에서 나온 빛이 홀로그램을 만들어냈다. "뭐야? 다 듣고 있었던 거야?" 우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빛 덩어리들이 만들어낸 구면의 여인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오랜만이군요.] "두 번째지." 우진은 아리아와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어디가 진짜야? 꿈? 아니면 홀로그램?" [진짜가 중요한가요?] "뭐, 중요치 않을지도 모르지." 불분명한 실체의 정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일이 많긴 했다. 특히 지금의 우진에게는 말이다. "정체가 뭐야?" [예지의 여신, 아리아라 불리죠.] "뭐, 예측 프로그램 이런 건 아니지?" [모르죠.] "골때리네." 우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좋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보면 대답해 줄거야? 아니면 그때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다가 갈 거야?" 지난번 아리아와의 첫 대면. 꿈인지 다른 차원인지도 불분명한 그곳에서 만난 그녀와의 대화가 우진으로서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분은 꼭 교장실로 불려가 칭찬받는 초등학생처럼 낯설고 거북한 경험이었다. 주목하고 있으니 열심히 하라는 격려? "아니, 이제 그때처럼 훌쩍 갈 수 없는 건가?" 우진이 씩 웃으며 홀로그램이 자리한 테이블과 주변을 돌아보았다. [.....]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다 부숴버리기 전에." [좋아요. 하지만 질문할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코드란 게 뭐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죠. 당신은 지구의 코드를 가지고 있죠. 행성의 거주증 그 자체죠. 국적이랄까요?] "...예상치 못한 대답인데? [....] 우진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겨우 그것을 얻기 위해 차원 영주들이 이 난장을 피우는 거야?" [그들이 찾는 것은 마스터 코드.] "마스터 코드?" [거주가 아닌 지배를 위한 자격이죠.] "골때리네. 신이 되겠단 건가?" [...] 아리아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에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코드를 얻는 방법이 뭐야?" [짐작하고 계시잖아요.] 차원 영주들이 한 일이 무엇일까? 던전을 차지하고 거점을 짓고 행성의 곳곳을 누벼 찾는다. 파괴하고 살육하며.. "코드를 가진 자를 죽인다?" [맞아요.] "좋아, 행성에 코드는 하나인가?" [하나일 수도, 여러 개일 수도 있죠.] "아르펜은 몇 개지?" [다섯이에요.] "아리아, 스키아, 리시아, 해리스, 쿠어스인가?" [...맞아요.] 아르펜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 그중 다섯은 다름 아닌 트래쉬 세트 아이템을 만들기 위한 하위 재료로 필요한 성물들의 출처였다. "지금 나만 소름 돋는 거 아니지?" [....] "트래쉬. 이것도 코드인가?" [히든 코드. 서로의 합의에 의해 봉인된 권환이죠.] 오랜 수수께기. 우진이 떨리는 속마음을 감추고 물었다. "집행, 어디서 얻지?" [...아르펜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열쇠일 뿐이에요. 진정한 히든 코드의 완성은 다른 곳에 있죠.] 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구에서 아르펜으로 소환당한 우진. 네크로맨서, 그리고 그에 특화된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들. "지구에 있단 건가?" [...] 우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난 얼굴이 아리아를 노려보았다. "대답해!" [맞아요.] "히든 코드로 할 수 있는 게 뭐야? 그것도 지배자가 되는거야? 신?" [...] 홀로그램이 깜박거렸다. [지배 권한과는 거리가 있죠. 그것의 용도는 삭제.] "삭제 권한이라." 찾던 거다. 우진이 원하던 것이고, 제니스가 그토록 부르짖던 트래쉬의 집행 역활이다. 수수께끼도 풀렸다. 지구에 답이 있다. 우진이 후련한 얼굴로 뒤돌아서려는데 홀로그램의 입술이 움직이며 웅웅거리는 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많은 경쟁자가 당신이란 존재를 경계하기 시작했어요.] "주목받던 거야 항상 있어 왔던 일이지." 전 차원 영주들이 우진을 적대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과는 별개로 아리아의 거정은 컸다. [당신의 출입구를 노리는 자들이 많아요.] "거점을 말하는 거야? 귀환 포탈을 이용하면 돼." [...당신은 아르펜의 코드가 없어요. 이곳에선 귀환 포탈을 이용할 수 없어요.] "..." 그건 문제가 조금 심각한데? "정말?" [네.] "...." 차원 난민들이나 영주들이 고향 행성이라는 곳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주 코드. 우진이 그동안 지구에서 제약 없이 귀환 포탈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지구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탈을 사용할 수 없다면 영지로 가기 위해 던전과 거점의 게이트를 통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 지난 20년간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메르디는 아직이야?" [곧 올라올 거예요.] 우진이 초조한 가운데 불현듯 떠올라 되물었다. "신탁..지금 상황을 놓고 한 말이야?" [...그래요. 서둘렀어야 했어요.] 답을 찾았으나 길을 잃는다고 했던가? "하... 두루뭉술하게 말고 좀 직접적으로 말할 순 없나?" [...]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홀의 중앙 부위의 원판이 쑥 하고 올라왔다. 그곳에 메르디가 서 있었다. 반짝이는 서클렛을 쓴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반갑다. 우진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에 보지." [행운을 빌어요.] 우진과 메르디가 탄 원판이 엘리베이터처럼 위로 쑥 올라가 사라져싿. 아무도 없는 가운에 홀로 남은 아리아의 홀로그램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행운을 빌어요.] 공격받는 것은 차원 영지로 향할 입구만이 아니었다. 지구로 향할 출구까지도 위험하니.. 지구를 구하는 것은 많은 운을 필요로 하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르펜은 구원받을 것이다. 임모탈이라는 영웅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의 분노가 오롯이 아르펜에 게이트를 가진 차원 영주들에게로 향할 것이다. *** 소로스 거점. 무거운 분위기가 가라앉다 못해 험악해지는 데는 열흘이면 충분했다. "놈들의 군세가 10만을 넘었소! 결단을 내려야 하오!" "이미 결정된 것 아닌가요? 이 거점을, 세계수를 지켜야 해요." 이타샤의 말에 그레엄이 고개를 저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오. 요새의 성벽을 믿고 버티기엔 병력의 차이가 너무 심하오. 더욱이 임모탈은 아직까지 연락이 없지 않소?" "...도망치면 방법이 있나요?"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소?" "임모탈만 있었어도..." 거점 도시의 특성을 살리려면 주인이 있어야 포인트를 쓰든 말든 해서 병력의 충원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 이타샤가 뒤를 돌아 높이 솟아난 세계수를 보았다. '어머니...' 그때 한쪽에 의기소침하게 앉아 있던 재민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네, 형!"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의지로 주고받아야 할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 잔뜩 상기된 얼굴의 재민이 의지로 우진과 대화를 주고받곤 모두에게 전했다. "연락이 닿았어요! 지금 오는 길이에요." "아, 형님 참. 애간장 태우는구만." "아..." 성구가 중얼거렸고, 이타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도했다. 아버리를 죽인 원흉, 그의 귀환이 이리도 반가운 것은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그런데 일주일은 걸릴 것 같아요. 전속력으로 오신다곤 하는데..." 워낙에 먼 거리다 보니 되돌아오는 데만 해도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웃는 듯 우는 듯 애매한 표정의 사람들을 보며 타우릭이 분위기 수습에 나섰다. 어쨌든 암울하던 상황에 희망이 생겼다. "일주일간 거점을 지켜봅시다." 강우진의 귀환까지 이 거점을 지키며 버텨야한다. 연합을 위해, 동맹인 아르달을 위해서도 말이다. < 172화 - 수성전(1) > 끝 < 173화 - 수성전(2) > "여신을 만났다구요?" "그래, 왜 놀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만나셨다니 놀랍지요." 메르디의 반응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넌 한 번도 못 봤다 말야?" "예, 전 그분의 목소리만..." 우진이 고개를 절레 젓고는 씽씽이를 소환했다. "아무튼 빨리 가봐야겠다. 그 신탁인지 뭔지 짜증나게도 진짜 같으니까." "...." 우진의 의식 너머로 영지의 가신 도재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뭐하냐?] [혀엉!] 격하게 반기는 그의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무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상황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최대한 버텨봐. 빨리 갈 테니까.] [네, 거점은 무조건 지킬게요.] 던전 하나에 거점 하나. 두 개의 게이트가 있지만 주변 차원 영주들이 작심했는디 힘을 합쳐 공격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것도 실패 없니 한 번에 몰아내려는 듯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서둘러 가야겠어." "상황이 많이 나쁩니까?" "나로우 고원에 몬스터 10만이 모였다는군." "그럴 수가..." "소로스 산이랑 가까워?" "땅을 딛고 사는 녀석들도 일주일이면 달려갈 만한 거리지요." "일주일이라..." 그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연합의 세력만으로 10만의 몬스터 대군을 어떻게 막겠는가? 더욱이 차원 영주들도 직접 행동에 나설 것이 뻔한데 말이다. "우린 날아가야겠네." 우진이 씽씽이의 위에 올라탔다. "뭐해?" 우진이 멀둥히 서 있는 메르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얼떨결에 손을 잡은 그녀가 그의 뒤에 올라탔다. 푸르륵.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신성력의 기운에 씽씽이가 투레질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꽉 잡아. 떨어지면 버리고 갈 거니까." "예에." 꼭 말을 해도... 빈 말이 아닌 것을 알기에 메르디가 우진의 허리춤을 꼭 안았다. 슈아아악. 허공을 밞고 날아오른 유령마가 하늘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 망루에 오른 타우릭이 해지는 석양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화르륵. 하늘에서 내리꽂힌 불덩어리가 망루의 위에서 사람으로 형상화해 가볍게 내려앉았다. "불의 정령왕이시여." "아, 정령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아, 됐어오. 그보다 어때요?" 성구는 왠지 놀림받는 것 같아 인상을 팍 쓰고는 서둘러 용건을 전했다. "좀 보여요?" "으음, 계속해서 병력이 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몬스터들이 어디 고향에서 상경해서 모여드는 것이 아니다. 차원 영주들의 거점, 그들은 자신의 포인트를 이용해 병력을 찍어내고 있었다. "언제쯤 움직일까요?" "제가 예지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알겠습니까?" "흠, 형님 올 때까지 안 왔으면 좋겠다." 성구의 중얼거림에 타우릭이 마음으로 동의했다. 그렇게만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이 10만이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숫자였다. 지금 요새에 모여든 이들 중에 아이와 힘 없는 부상자들을 제외하곤 싸울 수 있는 병력은 고작해야 3천여 명. "일단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말해줘요." 지구에서 온 불의 정령은 전부터 그것이 왜 궁금할까? "놈들이 움직여 봐야 요새까지 당도하려면 일주일의 사간이 있습니다." 임모탈이 돌아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그정도. 타우릭을 비롯해 요새의 사람들이 그나마 희망을 가지는 이유였다. 선발대 정도를 막아내고 있으면, 그 뒤는 임모탈이 해결해 줄 것이란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일 모르잖아요. 놈들 움직이기 시작하면 저라도 나서서 늦춰봐야죠." 10만 대군이 진격해 오는데 혼자서 그 행군을 늦추겠다는 말인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여기 날리면 전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해요. 그게 더 두렵죠." "..." 생각해 보면 그는 지구인. 지금이라도 포탈을 통해 지구로 도망쳐도 상과없는 그가 아르펜을 위해 싸워주고 있었다. 타우릭은 뭉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불의 정령왕의 용기와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에이, 감사는 무슨." 성구는 손사래 쳤다. 다 각자의 목표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아르펜의 구원과 생존을 위해, 성구는 집으로의 귀환을 위해서 말이다. 지금 게이트 앞의 포탈은 거점의 주인이 부재중이라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애초에 누구 하나를 거점 수비의 책임자로 임명해 놓고 갔다면 포인트도 쓸 수 있고, 게이트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을텐데...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고, 한시라도 빨리 우진이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 라울 왕이 불의 정령왕을 찾는 것 같던데 가보시지요." "흠, 그래요?" 성구는 드워프 왕이 무슨 볼일로 자신을 찾는지 궁금했다. "그럼 놈들 움직이면 바로 알려줘요." "예에, 그러지요." 모험가의 신, 스키아의 신도들이 적진을 염탐중이니 소식이 들려오면 당장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화르륵. 성구의 몸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그의 몸이 그대로 타올랐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망루 위를 날아간 그가 외성벽 중 하나에 내려섰다. 키 작은 드워프가 여럿 모여 성벽마다 수성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혈석으로 작동하는 마법 무기들도 있었고, 원시적인 형태의 것들도 몇 있었다. 찬물 더운물 가릴 것 없이 무기란 무기는 죄다 배치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라울, 날 찾았다면서요?" "오오, 지구의 정령왕." "..." 이제는 그러려니 해야 할까? 성구는 무시하고 되물었다. "용건이 뭐예요?" "재미난 물건을 발견했다네. 정령왕에게 꼭 들어맞을지도 몰라서 말이야." "뭔데요?" "같이 가보세나." 라울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외성벽에서 한참 오른 산 중턱 공터였다. "이곳은 마법사들의 연구실들이 자리한 곳이네." 우진이 요새를 구축하며 여러 가지 건물도 함께 지었는데 그중 하나였다. "재미난 물건이 하나 있지 뭔가? 지구의 정령왕이 마침 불의 원소를 다루니 안성맞춤이다 싶어서 개조했다네." 라울은 자랑스럽게 연구소의 앞에 놓인 둥근 원통을 가리켰다. "흠, 이게 뭐였죠?" "마력 증폭기였다네. 개조하여 마력을 더욱 키워주는 놈이 되었지. 저기서서 증폭된 화력을 쏘아 보낸다면 멋진 무기가 될 걸세." "호오." 성구가 둥근 단상 위에 올라섰다. 위잉. 전체가 복잡하게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오묘한 느낌을 들게 해주었다. 앞에 있는 수정구를 잡고 보니 전방으로 둥근 원통이 포신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사람 하나는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뻥 뚫린 그 구멍에도 갖가지 마법진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몇 배나 증폭된대요?" 성구는 질문을 하면서도 슬쩍 마력을 밀어 넣어 보았다. 화르륵! 작게 빠져나간 기운이 수정구를 타고 포신을 돌아 발사되었을 땐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타났다. 쿠우우웅! 불꽃이 엄청난 폭발과 함께 긴 꼬리를 남기며 하늘로 솟구쳤다. 깜짝 놀란 성구가 수정구에서 손을 떼곤 어이 없다는 얼굴로 라울을 보았다. "드하하. 드워프의 마법 공학은 따라올 종곡이 없지. 정확히 위력을 아홉배 증폭한다네." "몇 배라고요?" "아홉 배." 자랑스레 손가락을 아홉 개 펼쳐 드는 라울을 보며 성구가 질린 얼굴로 증폭기를 보았다. '이거 물건이긴 한데.' 내구성의 문제겠지만 위력만 놓고 보자면 엄청난 무기였다. 꼭 필요한 아이템을 얻은 느낌. 아쉬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고정형 수성 무기라는 것이다. "혹시 이거 들고 다닐 수 있게 작게 만들 수 있나요?" "휴대용 증폭기? 마법사 지팡이를 말하는 겐가?" "아...."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이유가 증폭기의 역활이었나? 성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워프왕 라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팡이로는 이 같은 위력을 낼 수 없네. 고작해야 세 배 정도 증폭시킬 수 있을 뿐이지." "...." 귀가 잘못된 건가? 고작 세 배? "세 배라고요?" "그렇다네. 지팡이로는 이 같은 위력을 낼 수 없네." "그거라도 좋아요. 만들어줄 수 있나요?" "음? 재료만 충분하다면야..." 라울이 성구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곤 피식 웃었다. 어떻게된 마법사가 지팡이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았을까? 아니, 정령이라서 그런가? "다른 영웅들에게 재료를 얻어 만들어주겠네." 라울의 말에 성구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상기되었다. 이거라면 우진이 돌아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늘을 달리던 씽씽이가 멈춰 섰다. "...." "...." 눈 앞의 광경을 보곤 우진도 메르디도 누구 하나 먼저 말문을 열지 못했다. 키아아. 하늘을 가득 메운 잠자리 모양의 몬스터들, 그리고 그 아래에 대지의 지상형 괴물들까지. "10만 대군 모였다는 게 거기가 아니라 여기였나?" 우진은 어이 없다는 얼굴로 몬스터 부대를 보았다. 수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개체였다. "길을 막겠단 건가?" 우진이 거점으로 향하는 것을 지연시키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처치하려는 목적인지 엄청난 규모의 몬스터가 자신을 노리고 몰려든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마음이 급할 땐 더욱 말이다. "제니스, 길을 터." [로드의 앞길을 막는 자! 누구인가?] 쿠아앙! 소환된 제니스가 뿜어낸 화염이 전방으로 쏘아지며 수백 마리의 잠자리를 불태워 버렸다. 뻥 뚫린 그 대지를 씽씽이가 질주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몬스터들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슈슈슉! 방해는 하늘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지상에 있던 몬스터들이 독침을 쏘거나 주술 마법을 날리는 등, 갖가지 방해를 일삼고 있었다. "아, 성가시게 구네." 돌파하자면 차라리 하늘보다는 지상이 나을 듯했다. 우진이 혼사서 감당하기에는 적의 수가 너무 많았고, 뒤에 메르디를 태운 상태에서는 힘을 쓰기에도 까다로웠다. 그녀의 신성력과 우진의 네크로맨서 마법은 서로 상충해 위력을 반감시켰다. 싸워서 길을 열자면 성녀가 아닌 자신의 권속들과 함께하는 게 나았다. 씽씽이가 바닥에 내려앉자 주변에 있던 몬스터가 떼거리로 덤벼들었다. 콰앙! 우진의 주위에 맴돌고 있던 영혼들이 일시에 폭발을 일으키며 몬스터들을 밀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에 착지한 임모탈이 권속들을 소환했다. "얘들아!" 주인의 부름에 차원 영지를 지키고 있는 키바를 제외한 모든 데스나이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흐읍, 전장의 향기.] [무엇을 하면 되나?]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빼어 들고 앞을 가리켰다. "소로스 거점까지 직진이다." [전투다!] [죽음의 축복을 내려주마!] 미친 듯이 질주하는 데스나티으들이 질주하자 전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몬스터가 속절없이 쓸려나갔다. 겨우 이런 피라미들로 임모탈의 앞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조금의 시간을 지체했지만 그와 반대로 얻은 것도 있었다. "제니스, 마음껏 날뛰어도 돼." [마음에 드는 명령이군.] 피아 식별을 할 필요 없이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는 제니스의 마법에 몬스터들이 불타오르며 차곡차곡 경험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저기! 트라넷의 군단장이에요." 익숙한 깃발에 메르디가 경악해 소리쳤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하늘을 나는 거대한 가오리 몬스터 패리스의 배에 낯익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일락인가? 44좌의.." 우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트라넷의 졸개니, 군단장이니 떠들어 댔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44개의 다른 차원에서는 신으로 군림하는 존재. 이곳 아르펜에서 45번째 신의 자격을 얻기 위해 코드를 찾고 있는 차원 영주. "별..."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고귀하다. 특별하며 신성하다. 그리고 우습다. "...시덥잖은." 자신 하나 몰락시키자고 신적 존재로 군림하는 이들이 서로 힘을 합치고 있었다. 그들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메르디, 알아서 따라와." 우진이 메르디를 바닥에 내려주고는 고삐를 틀어쥐었다. 푸르륵! 투레질한 씽씽이가 허공을 질주해 일락의 페리스를 향해 내달렸다. < 173화 - 수성전(2) > 끝 < 174화 - 수성전(3) > 일락. 44개의 관리자 코드를 가진 그가 아르펜에서 식민지를 건설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르펜의 코드를 가져 이곳의 관리자로 거듭는 것. 자리는 단 다섯. 관리자 코드는 항상 제한적이고, 경쟁은 치열했다. 권자를 가진 차원 영주들이 유독 아르펜 행성에 많은 것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관리자 코드를 노려서다. 다른 곳과 다르게 이곳은 신이 너무 많고, 그들 중 진짜 코드를 가진 자를 가려내는 것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2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느긋하게 코드를 즐기는 것은 영생에 가까운, 아니, 죽음이 더이상 끝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것이 큰 즐거움과 목적성을 부여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눈앞에 예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가오리 페리스의 드넓은 등에 호화롭게 꾸며진 왕좌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던 일락이 하품하며 일어섰을 때, 주변에 시립해 있던 호위들이 함께 움직였다. 일락의 일곱 기사. 그의 수족들인 만큼 일곱 명의 기사는 그를 왕좌에 올린 일등 공신들이었다. 왕좌를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나오는 일락이 어수선하게 흩어진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 네놈이 항상 눈에 거슬렸었지." 씽씽이의 등에서 훌쩍 내려서는 우진을 보며 이죽거렸다. "오랜만이네." 우진이 성의 없이 손을 한 번 들러주고는 그의 뒤에 시립한 일곱의 기사를 보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패리스의 등 뒤에 착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저들 때문일 것이다. 일락은 자신의 수호 기사들을 너무 믿고 있었다. 우진이 씽싱이의 등에서 내려섰다. "쿠쿡, 웃기는군." 일락은 우진의 여유가 우스웠다. "뭐가 웃겨?" "네놈의 여유가 우습지." "전에 나한테 죽은 놈 아냐? 여유롭지 못할 게 뭐야?" 우진의 기억 속 일락은 정확히 자신에게 세 번 죽었다. "죽음은 아주 귀한 경험이지.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네놈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디 말이야." 일락은 지금의 상황이 즐거웠고, 또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여유롭기만 한 임모탈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조급해하는 모습을 차차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리라. "어떤 준비를 했든 그건 실수지." "크큭, 오만한 모습도 참 한결같아." "자신감이겠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했나 보군." 일락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우논이 주변의 영주들과 모여 네놈의 거점을 공격 중이지. 셀락은 네놈의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특공대를 조직했고 말이야." "아주 안달이 나셨구만." "크큭, 맞아. 아주 지랄 마지. 왜 쓸데없이 파괴신을 깨우려 하는지 말이야." 일락의 입에서 파괴신 트래쉬가 흘러나오자 우진이 웃었다. 녀석들이 경계하고 있다. 아니, 이 정도면 두려움이라고 해야 하나? 달리 생각하면, 트래쉬의 집행은 확실히 놈들엑 위협이 되는 물건임과 동시에 이 지긋지긋한 차원 간의 전쟁과 약탈을 멈추게 할 해답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네 녀석 하나만을 해치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녀석들은 너무 겁먹고 있어. 고작 인간 하나에 말이야."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일락은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무슨 수로?" "크큭, 네놈은 내가 허술해 보였겠지." 일락은 양팔을 들어올렸다. 드넓은 패리스의 등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와 둥근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니지. 네 녀석은 제 발로 함정에 기어들어 온 게야." 일락은 승리의 미소가 서린 얼굴로 우진을 보았다. 어서 당황해라. 어서 초조해하거라. "위협이 되어야 함정이지." 우진의 여유로움에 일락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아. 저놈의 허세는 한결같군. "이 보호막은 소환을 방해한다." "그래서?" "크큭, 네 녀석의 권속들은 누구도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없다." "..." 우진의 침묵에 일락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이제야 이해가 되나? 권속 없는 네크로맨서의 목을 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지." 일락이 우두커니 서 있는 우진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우논도 그렇고, 셀락도 그렇고, 권자를 가진 대군주로서의 위엄이 부족했다. 겨우 애송이 차원 영주 하나에게 쫄아서 그 주변을 공격해 고립시킬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그런건 겁정이들이나 하는 일. 자신은 임모탈을 연구했고, 그 사낭법을 찾아 직접 사냥에 나섰다. "놈의 목을 가져와라." [명령에 따릅니다.] 일곱 명의 기사가 우진을 향해 느릿하게 다가왔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그를 보며 일락이 픽 웃었다. "그래도 포기는 빠르군그래." "...." 하나, 둘....여섯, 일곱. 갑옷이라 불릴 만한 것도 없이 정장과 비슷한 옷을 입고 얕은 검을 든 그들은 얼굴도 비슷해 쌍둥이라 불러도 이상치 않은 생김새였다. 확실히 개개인의 무력은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포악한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에도 꽤 버텨냈었던 것 같다. 슈아악. "크하하하!" 호위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에 일락이 포효하듯 소리 내어 웃었다. 승리다. 멍청한 우논과 셀락이 임모탈이라는 애송이 차원 영주가 무서워 그 주변을 정리하고자 괜한 포인트를 허비할 때 자신은 해냈다. 직접 이 골치 아픈 네크로맨서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대군주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위상은... 차창, 캉! 우진의 손에 쥐어진 전사의 무기가 장검의 형태로 변환되어 쥐어졌다. 소환된 것과 휘둘러진 것은 거의 동시지간. 저항을 포기한 듯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갑작스럽게 반격해오는 것에 당황했는지 기사 하나가 주춤하는 사이 우진의 검이 파고들었다. 촤아악! "끄윽." 목을 관통해 버린 검에 놀라는 거솓 잠시, 순식간에 신형이 무너지는 한 녀석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의 기사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카캉, 촤악! 방심하지 않았다고 해도 역부족. "으윽." 우진의 검이 지날 때마다 피가 튀며 호위 기사들이 쓰러졌다. 승리의 미소로 입이 찢어질 듯 웃던 일락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 무슨." 네크로맨서 따위가.. 시체나 조종하고 죽은 기사들이나 데리고 다니던 놈이 언제 저런 검술을 익혔단 말인가? 차원 영주가 되고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젠장!"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놈이 마지막 호위 기사마저 처치하고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뭣들 하느냐! 나와서 저놈을...." 급히 자신의 수비병을 불러보려 했지만 포기해야 했다. 지이잉. 패리스의 등 위에 드넓게 쳐진 보호막이 차원을 막론하고 소환 행위 자체를 막고 있었다. "왜? 뭐가 급한가 봐?" "..." 우진의 말이 얄밉다, 저 재수 없는 자식에게 또 당하게 되다니.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짜증나는 것은 자신을 세 번이나 죽음에 이르게 한 녀석을 여태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 진즉에 연구하고 놈에게 복수했어야 했는데...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아 복수보단 무관심을 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일락은 도망치기를 포기하고 마주서서 우진을 노려보았다. 방법이 없다면 최소한 추해지지는 말아야겠지. "진즉에 네놈을 죽이지 못한 게 아쉽군." "그러게." 우진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아르펜의 상당 부분인 아르달 지역을 영역으로 선포하고 왕이 되었을 때도 차원 영주들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 인간이었다면 복수에 칼을 갈았을 텐데, 벌써 수백 수천 번 죽음에 이르러 무뎌져서일까, 그들은 복수심보다는 포인트의 손해를 더욱 꺼렸다. 우진은 더러워서 피하는 똥 같은 존재였다. 재깟 놈이 인간인 이상, 언제고 세월이 지나면 죽고 사라질 테니 말이다.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왕 노릇에 심취한 줄 알았던 놈이 뒤에서 앙큼하게 파괴신의 부활을 노리는 걸 알았다면 진즉에 해치웠을 텐데. 파괴신에 관한 일이라면 지금처럼 차원 영주들이 합심했을 것이다. "네놈 말대로 실수했군. 준비가 미흡했어." 일락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이놈들은 확실히 착각하고 있었다. "그 준비 자체가 실수라는 거야." "...." 알아듣지 못한 일락이 인산을 찌푸리자 우진이 더욱 짙게 웃었다. "내겐 맛있는 밥상처럼 보이거든." "무슨 말이지?" "몰라도 돼." "...." 우진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일락의 목을 지나 잔인한 결과를 얻어냈다. 순식간에 참수당한 그의 신형이 회색 빛에 휩싸여 사라져버렸다. "몰이사냥도 이런 몰이사냥이 있나." 아르펜을 휩쓸며 하나하나 찾아도 모자란데 수만 수십만이 몰려와주니 더없이 고마울 뿐이다. 우진이 이죽거리며 시체가 남아 있는 호위 기사 일곱을 좀비로 일으켜 세웠다. 녀석들을 움직여 패리스의 머리 부위로 가개 하였다. 구어어. 거대 가오리의 머리에 안착하자 엎드리는 녀석들을 보곤 시체 폭발을 일으켰다. 꾸아앙! 폭발과 함께 크게 요동친 몸체가 바닥을 향해 추락하자 우진이 씽씽이를 소환해 올라탔다. 떨어지는 와중에 지면을 가득 메운 몬스터 대군이 보였다.아르펜의 전 차원 영주들이 자신을 노린다고? 이거 고마워서 어쩌지? "폭렙을 시작해 볼까?" 이미 죽어 전장을 떠도는 영혼들이 블랙홀레 빨려들 듯 우진에게로 모여들었다. *** 화르륵, 콰앙! 몸 안에 분출된 마력이 지팡이를 한번 경유해 증폭된 화염 마법의 위혁은 충분히 파괴적이었으나 성구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젠장!" 한 시간 남직, 거의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죽인 몬스터가 1천을 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굳어진 인상은 펴지지 않는 것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녀석들 때문이다. 바다에서 한 바가지 물을 퍼낸 정도일까? 대부대의 진군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녀석들은 동료의 시체를 수숩하기는 커녕 밞고 넘어 진군해 오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는데." 녀석들이 대규모 무리 이동을 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출동한 성구다. 차원 영주들에게 걸리지 않도록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 5일 정도 후면 대부대가 소로스 거점에 닿을 것이다. 성벽을 믿고 수성전? 불가능하다. 소로스 성은 반나절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발길을 막는 것 정도도 되지 못했다. 슈아악! 하늘에서 몰려온 박쥐 떼가 성구의 옆에서 뭉쳐지며 재민이 모습을 ㄷ러냈다. "형! 우논이 직접 오고 있어요. 빨리 피해야 돼요." "후, 알겠어." 10만이 넘는 병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선발대와 후발대가 하루 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큰 규모였기에 여기저기 산발적인 게릴라 공격을 가능케했다. 그 대부다를 이끄는 차원 영주들에게 걸리면 위험하니 도재민이 한 팀이 되어 그들의 동향 파악에 모든 힘을 쏟고 있었다. 우울해 보이는 성구를 보며 재민이 위로했다.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후, 내 기분이 어떻게 할 문제가 아냐. 이러다 정말 다 죽게 생겼어." "그야..." 성구는 낙담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화가 날뿐. "형, 몬스터보다 주변 지형을 공격하는 건 어때요?" "뭔 소리냐?" "지형을 변형해 진군을 늦추는 거죠." "으응?" 성구가 두 눈을 동그렇게 떴다. 길을 없애버리면 녀석들이 어떻게 대처할까? 어떻게 대처하든 말든 그자체로 진군 속도는 늦어진다. "역시! 배운 놈은 다르구나!" "하하..." 배우긴 대학까지 간 성구 형이 더 배웠겠지만...재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피하죠." "그래. 주변 정찰부터 다시 해야겠다." 성구와 재민이 서둘러 몸을 피했다. 진군 방향을 예측하기는 쉬었다. 목적지가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 사이의 길 중에 험해 보이는 지형을 골라 끊어놓는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우진의 귀환 약속까지 5일이 남은 날이었다. < 174화 - 수성전(3) > 끝 < 175화 - 수성전(4) > 크르륵. 삐죽 솟은 송곳니 사이로 위협적인 소리를 흘리며 진군 중인 몬스터들. 걸어다니는 뿔소. 미노타우로스 전사들이 수천 명에 달했다. 그들 사이에 코끼리보다 큰 덩치의 코뿔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밧줄로 엮인 몸엔 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커다란 코뿔소의 등 위에 나무로 짜 맞춘 평상이 달려 있었는데 괴물 군단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상당한 미남자가 드러누워 있었다. 쿠우웅, 쿠우웅. 코뿔소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평상이 크게 출렁거렸다. 난간 없는 그 자리에 누워서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그가 혹시라도 떨어져 내릴까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은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른, 얇은 마의를 입은 그가 36좌의 대군주 우논이었으니 말이다. 두 손을 뒤로 하여 팔베개를 하고는 눈을 감고 다리를 꼬고 있었다. 주변의 풍경만 아니라면 소풍을 왔거나 시골 농사꾼이 잠시 쉬는 모양새였다. 슈아악. 푸른 하늘 위에 점이 생겨나더니 점점 다가왔다. 검은 날개에 날렵한 인상을 지닌 하피 여왕 시라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그녀가 새의 발톱 같은 다리로 평상의 끝을 움켜쥐며 착지했다. "시라오인가?" "우논, 한가롭게 누워 있을 때가 아냐." 우논이 슬쩍 감았던 눈을 떠 시라오를 흘겨보곤 다시 눈을 닫았다. 그 모습이 답답한지 하피 여왕이 볼을 잔뜩 부풀렸다. "우노온, 지금 놈들이 또 길을 끊었단 말야." "그리 급하게 굴 필요 없잖아. 어차피 죽을 놈들이야." "임모탈이 접급하고 있다구!" 우논이 팔배게를 풀고는 자리에 앉았다. 물푸레나무로 만든 평상에서 그 내음을 맡으려 누워 있는 것은 그의 오랜 취미 중 하나였다. "어차피 놈과 부딪히게 되어 있어." "그러다 녀석이 지구로 가버리면 어떻게 해." "아닐걸? 녀석은 아직 열쇠도 갖추지 못했어." "흐음, 그걸 어떻게 알아?" "있었다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테니까."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의 효과는 크다. 불사의 군대의 힘을 몇 배나 증폭시질 정도로 말이다. 세트를 모두 갖춘 임모탈의 군대에게 아르달이라는 광대한 영토를 내어주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정도. 차원 영주들의 집중적인 공격이 있다곤 하지만 이렇게 진격이 느린 것은 그가 아직 모든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우논은 걱정되지 않아?" "염려는 되지." "그가 지구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시라오의 말에 우논이 피식 웃었다. "하긴." 그가 지구인인 줄 알았다면 진즉 제거 대상이었을 것이다.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을 갈망하는 네크로맨서는 많았고, 그도 그중 하나인 줄 알았다. 아르펜인이라면, 가장 중요한 집행은 엊디 못할 테니 말이다. "우논은 오래 살았으니 알겠네? 트래쉬의 봉인식 때도 있었어?" "아니, 그땐 나도 없었지." "그렇게나 오래된 일이구나." 하피 여왕 시라오는 어느새 날개를 접고 평상의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안 가?" "우논이랑 이야기하니 마음이 편해졌어. 어쨌든 임모탈이 지구로 보내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래." 녀석을 죽여도 되살아난다. 차원 영주가 되었으니까. 차원의 파편을 얻은 그들에게 불멸은 오래도록 지켜온 그들의 규칙이자 약속. 굳건한 체제의 빈틈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와 약삭빠르게 이용하려는 느낌이다. 놈을 제거할 수 없다면 애초에 기회를 주면 안된다. 이곳 아르펜은 녀석의 감옥이 될 것이다. "그런 우논은 지구에 언제 갈 거야?" "지구의 코드는 하나야. 관심 없어." "아르펜에 계속 있겠단 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아르펜은 아직 네 개의 코드가 더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이곳의 코드를 얻은 차원 영주는 아직 한 명밖에 없었다. 72좌의 대군주만이 유일하게 아르펜의 마스터 코드를 선점했다. "흐흠, 그럼 나도 우논을 따라 여기 있을까?" "그러지 않아도 돼." "힝. 우논이 포기할 정돈데 내가 지구에 가서 경쟁이나 되겠어? 더군다나 거긴 아직 동기화도 제대로 이뤄어지지 않았는데 말이야." 동기화 전의 행성이다. 코드를 찾아봐야 개화하지 않았을 테니 의미가 없었다. 그것을 뺏으려는 모든 차원 영주들의 공격을 감내해야 되니 말이다. "뭐, 남으려면 남던가." "히잉." 시큰둥한 우논의 말에 시라오는 볼멘 소리를 냈다. "그런데 우논, 정말 그가 트래쉬의 집행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불가능하겠지." "...?"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를 잡으려고 안달이란 말인가? 포인트까지 허비해 가며 말이다. 시라오는 오늘 그와 대화하며 가장 진지한 얼굴을 보았다. "위험해. 트래쉬는 그냥 그대로 잠들어 있어야 해." "우논...." "파괴신의 부활은 절대 있어선 안돼." "...." 진지한 그 얼굴에서 감춰진 두려움을 느낀 듯해 시라오능 저도 모르게 떨었다. 36개의 마스터 코드를 가진 대군주 우논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 그저 먼 옛날 이야기처럼 들어온 파괴신의 공포를 간접적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 크와아! "막아! 놈들의 눈을 노리고 쏴버려!" 소로스 거점이 불타고 있었다. 병사들이 치열하게 사투하고 있었으나 물밑듯이 밀려오는 병력은 끝을 알수 없었다. 공성 장비도 필요치 않았다. 산처럼 쌓인 시체가 사다리가 되어 성벽을 넘어오는데 손쓸 방법도 없다. 그 우악스런 공성에 질리기도 전에 죽어버려 목숨을 내어준 자가 벌써 수백을 넘어섰다. "이러다 안 되겠어요." "외성은 한계에요. 내성으로 후퇴해야 해요." 적은 압도적인 수로 사방에서 파상 공세를 이루고 있었다. "내성으로 후퇴하면 완벽하게 고립될 뿐이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 곳을 돌파해 이곳을 벗어나야 하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타우릭은 도재민을 찾았다. 강우진과 유일하게 연락이 닿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거의 다 오셨대요. 조금만 기다리면..." "...벌써 약속한 날이 2일이나 지났소." "맞소. 더 이상 그를 신뢰할 수가 없소이다." 그레엄을 비롯한 몇몇의 영웅들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대비하며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은 이틀이나 지났고, 적은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곧 죽음의 위기가 남의 일이 아닌 상황에서 그가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거의 다 오셨다고." 도재민도 할 말이 없었다. 우진이 약속한 일주일은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고, 이틀이나 더 지났다. 다행인 것은 성구의 엄청난 활약으로 진군을 늦춰 하루가 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놈들이 공격을 개히한 것은 겨우 다섯 시간 전. 다섯 시간 안에 외성이 그대로 궤멸 상태에 빠졌다. 그것도 차원 영주들은 본격적으로 나서지도 않고 았었는데 이런 결과였으니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스키아의 몽크여! 지금 벗어나지 않으면 모두 죽소이다." 대마법사 그레엄의 말에 타우릭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백 수천의 목숨이 달린 결증을 하는 게 괴롭고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화르륵. 그때 산 중턱의 연구실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콰아아앙. 솟구친 불덩이는 폭죽처럼 올라가 하늘에서 터져 날카로운 불의 비를 내렸다. 푸슈슈슈슉! 마치 수천 명이 쏘아내는 불화살처럼 적진에 떨어진 마법의 위용은 대단했다. "...." 타우릭은 그 광경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홍성구. 지구에서 온 불의 정령왕이 아니었다면 적의 진군을 이렇게 지연시키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나마 이렇게 싸워볼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또 미래를 위한다는 핑계로 저 멀리 도망치고 있을지도... 타우릭의 입술이 열렸다. "도망쳐 봐야 미래는 없습니다. 여기서 분열하면의 자멸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누군 도망치고 누군 남아서 싸우고...제대로 통제가 될 리 만무했다. "외성을 버리고 내성으로 병력을 물리고 수비에 집중합시다." 타우릭의 말에 몇몇이 불만이 있는 듯했으나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 "그레엄, 병력을 물릴 수 있도록 방어막을 부탁드리오." "알겠소이다." 대마법사 그레엄의 마법은 꼭 필요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소로스 산은 성벽을 넘기도 전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잠자리 떼에 죽었을 것이다. 타우릭이 재민을 돌아보았다. "백작께서는 영웅들의 후퇴를 알려주시지요." "네에." 재민이 손을 한 번 떨치자 그의 소매에서 찢어져 나온 박쥐 떼들이 지금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연구소와 거점의 방어막을 중심으로 한번 버텨봅시다." 세계수가 펼치는 방어막과 연구소에 위치한 마력증폭기로 인한 성구의 화염 마법으로 어느 정도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기지 못하는 싸움, 중요한 것은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가웅진이 돌아오는 것이다. '제발 빨리요.' 재민은 간절하 염원을 담아 우진에게 의지를 전했다. *** 콰콰쾅! 우진의 몸에서 뻗어 나간 영혼의 창들이 사방을 강타하며 적의 몸을 꿰뚫었다. 잠깐 사이 망자가 되어버린 그들의 몸을 매개가 되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끊이지 않는 사체 폭발. 쿠콰콰쾅! 임모탈의 진격에 적진은 피와 육편, 비명, 그리고 그를 따라는 불사의 군대의 미친 웃음소리뿐이었다. "신이시여..." 그 뒤를 따르는 메르디는 그동안 그녀와 연합들의 관념 속에 오래도록 자리잡은 임모탈의 본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잔인하고 포악했으며, 거침없었고 강했다. 그의 군대는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본질적인 분노를 마음껏 표출했으며 몬스터들은 동정이 느껴질 정도로 살육당했다. 그 길을 따르는 메리디는 최근 보고 느낀 강우진과의 괴리와 거리감에 말수가 줄었다. 그를 대하기게 이전처럼 자연스러울지 자신이 없었다. 독과 시체, 영혼들의 절규가 가득한 진군이 멈춘 것은 고작 하루도 남지 않는 거리에서였다. 정렬된 몬스터들이 대치하여 기다린 가운에 그 선투에 붉은 머리칼의 자신의 남자가 나섰다. "크크큭, 이게 누구신가? 임. 모. 탈! 죽은 자들의 왕이여!" 이죽거리는 그를 보며 우진이 성큼성큼 걸어 나섰다.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녀석이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나다니 고마운 일이다. "셀락." 트라넷의 대군주 27좌. 녀석이 이틀 전 아르펜의 던전인 라앗의 신전을 공략 성공했다. 키바도 녀석을 막아내질 못했다. 잔뜩 화가 난 우진의 얼굴을 보며 셀락은 비웃음이 짙어졌다. "뭘 그리 화내는가? 영지를 비운 네 잘못이지 않나?" "..." 알 것 같다. 차원 영주들이 왜 쉬이 던전 밖으로 잘 나서지 않는지, 왜 굳이 영지민들이나 영지의 병력들을 이용해 주변을 탐색하고 약탈하고 사냥하는지 말이다. 코드가 없는 행성에서는 귀환포탈을 사용할 수 없으니 던전와 거점을 지키자면 차원 영지의 근처에 있어야 한다.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수비 대장을 여럿 두든지 말이다. 키바가 당한 것을 보면 아르달의 포인트를 모조리 소모시킨 모양. "난 네놈이 이해가 안다. 왜 굳이 잊혀진 파괴신의 자취를 쫓지? 신이 될 수 있지 않나? 영생이야." 셀락의 말에 우진이 가만히 전시의 무기를 도끼로 변형시켰다. 녀석의 머리통을 쪼개주어야겠다. 우진의 살기에 셀락이 히죽 웃었다. "고향 행성을 어지간히 지키고 싶은가 보군." "당연한 것 아닌가?" "지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네 스스로 고향 행성의 신이 되어버려." "뭐?" "난 내 고향 행성이 동기화되던 날, 가장 먼저 신을 죽였다. 그리고 내가 신이 되었지. 쿠쿡." "...." "파괴신이니 뭐니 잊어버리고 신이 되라고. 그것이 더 빨라, 내 고향 행성은 더없이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 희생은 잠깐이고 평화는 영원하지." "..." "지금이야 내 말이 귀에 차지도 않겠지만 내 충고 깊이 새겨들으라구. 언젠가는 내게 감사할 날이 올 테니 말이야." 우진이 굳었던 인사를 펴고 히죽 웃었다. < 175화 - 수성전(4) > 끝 < 176화 - 본 드래곤(1) > "신이 되어라?" 우진의 반문에 셀락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고집불통에 제어 불가능한 임모탈이 자신의 말에 설득당하는 것인가? "그래! 내 고향 행성을 다른 놈들에게 뺏길 바에야 내가 지키는 게 낫지 않은가?" 지켜낸다라. 그것을 지켜낸다고 해야 할지, 남이 지배할 것을 자신이 대신 지배한다고 해야 할지... "확실히 신 같아 보이긴 해." "무슨 의미지? 이 전쟁을 멈추겠다는 건가?" 셀락이 조금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우진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병신이 병신 같은 소리하고 있네." "...." "덤벼, 병신아." 셀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이...감히." 분노한 셀락의 어깨가 터져 나갔다. 솟구쳐 나온 날개가 한없이 커지더니 활짝 펴졌다. 그 크기가 10미터가 넘었다. 트득, 투툭. 커진 것은 날개만이 아니었다. 셀락의 신형도 큰 날개에 조화를 이루듯 서서히 커져 보통 사람보다 세 배는 몸이 자랐다. "감히 네놈이 나를 능명하느냐!" 분노한 셀락이 발을 굴렀다. 쿠우우웅. 땅이 진동하며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진형을 이루고 있던 그의 군대가 곧 돌격할 듯 기세를 드높였다. "부질없는 이상을 바라는 네놈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 파괴신이라니...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츄아아앙. 셀락이 허공에 손을 뻗자 그의 무기인 창이 튀어나왔다. 번개의 힘을 담은 창은 새하얀 전기를 흘리며 위협적인 소음을 흘리고 있었다. 파지직. 그런 셀락의 눈앞의 작은 바늘이 보였다. 슈아악, 파치직! 반사적으로 휘두른 번개의 창에 부딪혀 튕겨 나간 건 우진이 던지 본스피어였다. "이놈!" 셀락이 흉성을 폭발시키며 활짝 편 날개를 접었다. 쿵, 쿠웅! 덩치는 타이탄처럼 큰데 빠르기는 엘프 못지않았다. 트라넷의 대군주들 중에서도 전투력만을 보자면 수위에 꼽히는 그다. 더욱이 일전의 그는 임모탈과 세번 부딪쳐 세 번 다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들의 전투는 언제나 소모적인 결과물뿐이었다. 녀석은 죽은 몬스터를 다시 일으켜 병력으로 쓰는데 차원 영주들은 모두 포인트를 소모해 새로운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그것이 임모탈을 거꾸러트리기 이전에 기피한 이유. 이득 없는 싸움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녀석을 제거할 이유가 생겼다. 굳이 아까운 포인트를 아낌없이 투자하자면 녀석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불사의 군대는 병력의 무제한 충원에 의한 지구력 싸움에 능한 것이지 절대적 전투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수천 수만의 몬스터와 함께 왔으니 그들이 불사의 군대를 도맡는 사이 자신이 임모탈을 죽이면 된다. 술사인 네크로맨서만 죽이면 언데드따위야 사냥감 수준밖에 안된다. "나의 모든 힘을 보여주마!" 이해득실을 땆 적당히 맞춰주는 싸움이 아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녀석을 찢어 죽이리라. "도망쳐 봐도 이미 늦었다!" "뭐래, 병신이." "...!" 어느새 자신의 귀 옆에 나타난 강우진이 휘두른 검을 겨우 막아낸 셀락이 번개창을 휘둘렀다. 파지직! 하늘을 훑고 지나간 전격의 파편들이 위협적으로 흩어졌다. "이놈이!" 셀락이 재빨리 임모탈의 자취를 찾았으나 그는 어느새 자신의 다리에 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 콰직! 이렇게 재빠른 놈이었나? 그어어. 주변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서 셀락을 향해 달려오더니 그의 다리에 덕지덕지 붙었다. "이, 하찮은 언데들이!" 후우우웅! 셀락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다리를 털어 엉겨붙은 녀석들을 떨쳐 내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폭발이 빨랐다. 꾸아앙! 걸어다니느 시체 좀비들이 터져나가며 셀락의 다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슈아앙! 빛의 화실이 날아와 그의 날개를 꿰뚫자 허우적거리던 몸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크윽." 이 무슨 추태인가! 아르펜의 마스터 코드를 얻었다면. 이깟 상처 따위야 금방 재생할 수 있을텐데..이 행성의 모든 것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텐데 말이다. 추락한 그의 머리맡에 강우진이 걸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전사의 무기가 활에서 도끼로 변했다. "나는 반만 보여주마." "..." 우진이 도끼를 쳐들자 셀락이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 힘을 숨기고 있었나?" 어딜 봐도 네크로맨서의 움직임이 아니다. 놈이 전사였나? 우진이 히죽 웃었다. "병신." 콰직! 떨어져 내린 도끼가 셀락의 머리를 쪼개고 그의 몸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그가 죽었지만 수천의 군대는 아직 그대로 있는 상황. 지휘관이 죽었음에도 놈들은 당황하거나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살기를 피워올리며 돌진해 왔다. 저런 모습 때문에 차원 영주들이 몬스터를 부하로 부리는 것이리라. 그저 명령만 있다면 두려움 없이 전진하는 괴물들을 보며 우진이 더없이 환영했다. "와라, 제물들아." 그의 권속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날이 머지않았다. **** 콰콰쾅! 수십 다발의 화염구를 쏘아 보낸 성구가 증폭기에서 내려왔다. "으윽."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는 그를 도재민이 재빨리 부축했다. "혀엉. 괜찮아요?" "으응." 전혀 괜찮치 않은 얼굴의 성구가 애써 웃어 보였다. 새하얗게 질린 그를 보며 그레엄이 깜짝 놀랐다. "마력을 안정시키시오." "예?" "마력의 폭주가 올 수도 있소. 어서 이리로!" 성구가 그레엄의 도움을 받아 마력 안정화에 들어갔다. 차분이 앉아 들끓는 속을 진정시키는데 그레엄이 혀를 찼다. "쯧, 난 당신이 정령왕이 아닌 걸 알고 있소." "...?" 너무 당연해서 성구는 대답할 말은 찾지 못했다. "도대체 당신에게 마법을 가르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구려." 우진에게 배웠다고 해야 하나, 마법서로 배웠으니 책으로 배웠다고 해야하나...성구가 고민하는데 그레엄의 진중한 꾸짖음으 계속되었다. "그는 마법사의 자격도 없소. 조화를 이루어야 할 마력이 온통 화기에 집중되어 있소. 조금만 균형이 무너져도 온몸이 한 줌 재로 남기지 못하고 타버릴 것이오." "어...음."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스스로 깨우쳐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까? 리치라는 아주 욕 나오는 스승님이 계서서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신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제 대충 된 것 같소. 마력 회복술을 운용하며 쇠약해진 몸을 정비하도록 하시오." "아, 감사합니다." 성구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레엄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대마법사가 될지도 모를 엄청난 자질의 인재가 불덩이가 뿜는 반쪽짜리가 되어버려싿. 안타까울 일이었다. "도대체 스승이 누구요? 지구의 마법사는 모두 이렇게 마법을 운용하오?" "아..스승님이라고 하긴 그런데 아르펜 사람이에요." "으응? 누구요? 내 당장 만나 따져 묻고 싶구려." 그레엄이 깜짝 놀라며 짙은 호기김을 발하자 성구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제니스라고...그런데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의 말에 그레엄이 겸연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험험, 안타까운 마음에 고인을 욕되게 하고 말았구려, 미안하외다." "아뇨. 곧 만나게 해드릴게요." "...."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인이 된 사람과 곧 만나게 해준다고 하면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인가? '농담'과 '암살 예고' 사이를 고민하게 하는 성구의 말에 그레엄은 요상한 얼굴이 되었다. 불의 정령이랑 다를 바 없는 이 요상한 반쪽짜리 지구인 마법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레엄이 고민하는 사이 도재민이 소리쳤다. "오셨어요! 형님이 오셨어요." "으응? 어디?" 없던 기운도 샘솟는지 성구가 벌떡 일어나 우진을 찾았다. 하지만 의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차원 영주인 그가 가신으로 임명한 도재민뿐이었다. "이제 코앞이래요." "하, 이제 끝이구나."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서 그렇기 성구는 솔직히 내외적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이제 한시름 놓나 싶었는데 그레엄이 거점 아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끝은 끝이구려." "그렇죠?" "우리 목숨이 말이오." "네?" 어리둥절한 성구가 그레엄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주었다. 쿠오오오. 저 멀리서 확실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것. 빨갛고 노란 두 마리의 드래곤이 날아오고 있었다. "보호막으로 어떻게 안 되겠죠?" "내 보호막은 드래곤의 브레스까지 막아줄 수는 없소." "하하." 성구는 저 드래곤들이 숨을 토해내기 전에 우진이 모습을 드러내길 빌었다. *** 우진은 자신이 앞을 가로막은 우논과 시라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네 한 번에 덤비지, 차례로 뭐하는 거냐?" "글쎄." 우논은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시아인과 닮아 있었다. 얇은 마의를 입은 그를 보면 꼳 중세에 살았을 선조들을 보는 듯해 기분이 묘했다. "됐고, 빨리 덤벼." 이놈들만 넘으면 이제 거점이 코앞이다.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차원 영주들이 그곳으로 바로 안 가고 자신에게 온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몬스터 부대야 힘들긴 하겠지만 연합에서 어떻게든 막아낼 테니 말이다. "뭐가 그리 급할까?" 우논의 느긋함이 우진의 신경을 거슬렀다. "동료들이 걱정되나?" "...." "그립구만, 남을 걱정하고 위한다는 그 마음이." 너무 오래되어 이젠 느낄 수도 없는 감정들. 우논이 씁쓸히 웃으며 우진을 보았다. "이미 파투와 레이아가 갔다네." "그 도마뱀들이?" 인간에 비할 바 없이 강력한 생명체인 드래곤이지만 어쩐 일인지 대군주들 사이에서는 그리 서열이 높지 않았다. 영지전을 드래곤보다 인가닝 더 잘해서 그럴까? 유독 트라넷의 대군주들 사이에선 인간이 많았다. 오랜 역사 이래 인간은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며, 관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왔으니 말이다. 드래공는 썩 좋은 리더가 되어줄지 알 수 없었다. 지배보다 공포와 군림이 더 어울리는 종족. 6좌와 9좌였던가? 그들이 거점으로 향했다면... "지금 곧장 가도 10분은 걸릴 테지. 녀석들이 거점을 초토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지금 가도 아슬아슬하다. 아니, 늦을지도 모른다. "자, 날 상대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우논. 육체술의 국에 이른 그를 상대하는 건 데스나이트들의 힘을 빌려도 힘들다. 하물며 혼자도 아니고 미노타우로스로 이루어진 대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조급함이 드나?" 녀석이 노리는 게 이거였나?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여보자고? 느긋함에 비해 준비성이 귀엽게 느껴졌다. "이거야 원." 우진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딱 적당해." "...무슨 말이지?" "5퍼센트 정도 모자라거든." "...?" "곧 들어올 거야. 네가 준비해 뒀으니 말이야." "..." 뜻을 알기 위해 우진을 응시하던 우논의 고개가 꺽일 듯이 하늘을 향했다. 맑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 쿠아아아아. 대기를 가르며 떨어져 내리는 운석에 우논이 두 눈을 부릅떴다. 운석 소환 마법을 언제 전개한 거지? "이미 늦었어." "....." "네 말대로 급한 건 난데 여기서 한가롭게 너랑 이야기해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이거였나? 역으로 당한 느낌이다.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것만 임모탈이 역으로 이용했다. 준비 시간이 긴 운석 소환 마법을 미리 전해개 놓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논이 주먹을 쥐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떨어져 내리는 운석이 몬스터도, 불사의 군대도 궤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논이나 시라오는 건재할 터. 임모탈의 발목을 붙잡기는 충분한 전력이고, 그사이 녀석의 거점은 사라지고 아르펜에 갇히게 될것이다. 새로운 던전이나 거점을 얻기 전까지 말이다. [그하하! 친구를 위한 제물은 이것이 마지막인가?] 자신의 임무를 훌륭이 완수한 제니스가 곁에 나타나 재빨리 방어막을 펼쳤다. 우진이 때를 맞춰 자신을 뒤따르던 데스나이트들과 불사의 군대를 역소환시켜 버렸다. 콰콰쾅! 지면과 충돌한 운석이 엄청난 후폭품을 일으키며 몬스터 부대를 휩쓸어버렸다. < 176화 - 본 드래곤(1) > 끝 < 177화 - 본 드래곤(2) > 두려움. 언제나 피식자에게만 해당되던 그 감정들을 포식자인 그들이 느끼고 있었다. 구오오오! 흉폭하던 그 음성이 지금은 구슬프게만 들려왔다. 수천의 미노타우로스 부대가 혼란에 사로잡혀 사방으로 날뛰며 우왕좌왕했다. 압도적인 우주적 경이 앞에서는 그들도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먼지, 아주 작은... 꾸웅. 단 하나의 운석이었지만 그것이 지면에 닿으며 낳은 엄청난 충격파와 에너지가 그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쿠아아아앙! 분출된 충격파가 멀리 도망치던 놈들까지 집어삼켜버렸다. 쿠우우우. 시체조차 남지 않은 공간은 커다란 크레이터를 만들며 파괴적인 마법의 흔적만을 남겼다. 그 원인을 제공한 이가 펼치는 보호막 속에서도 충격의 여파가 느껴질 정도. 푸시시식.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제니스의 보호막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꾸앙! 오직 한 점에 집중된 우논의 발차기에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가 이리 급해?" 우진의 말에 우논이 인상을 썼다. "아까운 포인트를 소모했군." 애초에 임모탈을 잡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온 것이 무의미했을까? 어쩌면 셀락처럼 특공대를 꾸려 그의 던전을 지속적으로 공략하는 게 나을 뻔했다. "포인트라..." 녀석에게 사라진 몬스터 대군은 그저 아까운 포인트에 지나지 않았다. 우진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로 보였고 말이다. "느껴지지 않아?" 그가 양팔을 벌렸다. 열기를 머금은 후끈한 공기가 먼지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 우논이 그런 우진을 노려보았다. 어이없게도 자신의 대군이 일거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지만 임모탈 또한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아주 잠깐만 그의 발목을 잡아두면 된다. 드래곤 파투와 레이아가 녀석의 거점에 거의 다다랐을 테니 말이다. "네놈도 부하들을 모조리 잃게 될 것이다." "어쩌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초조함을 유뱔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츠츠츠츳. 먼지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싿. 뭉쳐지는 그것들은 수천수만을 이루던 몬스터들의 뼛가루. "...." 우논이 인상을 썼다. 감정 변화가 크지 않은 그가 보이는 이례적인 표현. 곁에 내려앉은 하피 여왕 시라오도 우진을 노려보았다. "우릴 상대하려면 만만찮을걸?" 불사의 군대는 건재하다. 다시 소환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우논과 시라오, 둘뿐이라 해도 임모탈을 상대로 어느 정도 시간을 끄는 건 가능했다. "네놈들은 내 상대가 아냐." "....." 우진의 말에 대꾸하기도 전에 뭉쳐진 뼛가루들이 형상을 만들어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에 뻗은 척추에 갈비뼈가 자라난 골격은 살아생전 그 거대한 덩치를 가늠케 했다. 뼈만 남은 날개는 날카롭게 벼려져 그 자체로 훌륭한 무기. 거대한 머리의 푹 꺼진 눈두덩이에는 반딧불 같은 붉은 안광이 거대해져 빛을 뿜었다. [쿠오오오오오오!] 불사의 군대. 최고의 문제아, 용용이가 길게 포효했다. [쿠루루.] 긴 목을 빼들도 거대한 머리가 우진을 향했다. [나를 부른 자여, 소원은 무엇인가?] 익숙한 음성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비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주 볼을 부비고 난리가 났을 터였다. "저것들 죽이고 따라와." [쿠루루.] 고개를 돌린 용용이의 시선이 시라오와 우논에게 닿았다. [소원은 접수되었다.] "조금 이따 보자고." 우진이 씽씽이를 소환하고 올라탔다. 히이잉. 하늘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그의 곁에 제니스가 비행 마법을 전개했다. [저 뼉다구, 치매는 여전하군. 그하하.] "좋잖아." 우진이 피식 웃었다. 너무 오래 살아 망각의 저주를 벗어난 최초의 드래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용용이가 반갑기만 했다. 유령마와 리치가 빠르게 전장을 벗어날 듯하자 시라오가 급히 날아오르려 했다. 콰직! [어딜 가려는가? 귀여운 새여." "이익, 놔!" 시라오가 발버둥 쳤으나 용용이는 움켜쥔 그녀를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슈아악, 쾅, 쾅! 우논도 급히 발길질을 해봤으나 죽은 드래곤의 뼈는 단단하기만 했다. 콰직. 하피 여왕을 비스킷마냥 물어뜯은 용용이는 발을 강타하는 이를 찍어 눌렀다. 콰앙! 하지만 체술을 극한으로 익힌 우논의 몸놀림은 예사가 아니었고 손아귀에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쿠룩...] 화난 용용이가 한숨과 함께 몸을 움크러트렸다. 앙상한 뼈마디의 날래가 감싸 잠자스 우그린 용을 보며 우논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뭐 이딴..." 임모탈,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의 권속도 모두. 전투 의지가 없어 보이는 용용이를 제쳐 두고 이미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우진과 리치를 보았다. 콰직! "..." 잠깐, 아주 잠깐 한눈을 돌린 사이, 그의 배 아래를 뚫고 갈고리같이 생긴 긴 뼈가 튀어나왔다. [쿠루루.] 손톱에 낀 우논을 들어 그를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목과 몸을 분리시켜 버렸다. 회색빛으로 변해 사리지는 그 때문에 입맛을 다신 용용이가 저 멀리 날아가는 우진을 보았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쿠웅. 쿵. 곧 우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네발로 뛰는 모양새가 엉성했지만 그 덩치가 워낙 압조적이었기에 우습기보다는 공포스러웠다. [아쉽군. 쿠루루.] 용용이는 괜히 뼈뿐인 앙상한 것을 퍼덕거렸다. 제 기능을 잃어버린 날개가 애처로워보였다. *** 파투와 레이아.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던 골드 드래곤 라자쿠이와 마찬가지로 드래곤 종족의 차원 영주들. 그들 중 유일하게 코드를 가진 대군주가 파투와 레이아다. 약탈보다는 군림과 상납받는 것을 즐기던 그들이 던전을 벗어나 우진의 거점을 노리고 있으니.... "트래쉬가 그렇게 겁난다 이거지?" 트라넷의 대군주가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해 올 정도로 말이다. 저 멀리 소로스 산의 뾰족한 산세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접근 중인 두 마리의 커다란 동체도 보였다. 얼마나 컸으면 이 거리에서 그들의 몸집이 보일까. [또 쓸모없는 드래곤인가?] 제니스는 아쉬운 듯한 눈치였다. 차원 영주들의 시체는 남지 않으니 저들을 잡아도 쓸모가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자처하는 것은 아니지만 드래곤은 여러모로 좋은 부자제를 남기는 몬스터였다. "뭐 어때, 용이나 사람이나." 트라넷의 대군주일뿐. 죽여야 함에는 변화가 없다. [좋지 않군.] 제니스가 마력의 파동을 감지하고 위험을 알려왔다. 활처럼 굽은 드래곤들의 배가 빵빵했다. 공중에서 그대로 브레스를 뿜으려는 모양. 이미 늦은건가. "...저 위로 블링크하자." 단거리 순간 이동. 시야가 닿고, 마력의 제어가 미치는 범위 내에서라면 어디든 가능했다. 우진의 최고이자 최악의 마법사를 동료로 두었고 말이다. [좋은 생각이군.] 제니스가 씽씽이 등에 탄 그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어서!" [아직 범위에 들지 않았다.] "...." 우진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빵빵해진 드래곤의 배가 유독 크게 보였다. "아직 멀었어?" [조금만 더...] 그때 뒤로 젖혀졌던 드래곤의 머리가 아래를 향하며 크게 벌린 아가리로 시뻘건 화염이 쏟아졌다. 거점의 심볼, 세계수를 향해 레이저처럼 뻗어나가는 브레스를 보며 우진은 심장이 철렁이는 기분이었다. 게이트를 잃으면 지루고 돌아갈 수 없다. 새로운 던전을 얻으면 그뿐이지만. 동기와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나... "어서!" 고함과 함께 제니스와 그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둘이 떨어져 내린 것은 드래곤들의 머리 위. 우진이 자유낙하하며 전사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도끼로 변한 그것을 레드 드래곤 레이아의 머리를 향해 내려찍었다. "막아!" 우진이 간절함을 담아 명령했다. 제니스의 보호막이 세계수를 지켜줄수 있기를... [늦었...] 제법 먼 거리를 순간 이동해 오느라 마력의 소비가 극심했다. 한순간 찾아온 마력 탈진. 재빨리 끌어모아 보았으나 드래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미미한 양. 한편, 브레스를 쏟아내느라 무방비가 된 레이아는 우진의 분노의 도끼질에 머리통을 내어주고 말았다. "쿠아아!" 괴성을 지르는 레이아와 도낏자루를 쥔 우진이 함께 떨어져 내렸다. "...." 우진의 시선이 세계수를 향했다. 브레스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그의 거점은 활활 타오르지... 않았다. [기적이다.] 연합에서 막아냈다. 우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레이아의 머리에 박힌 도낏자루를 빼어냈다. "파투를 떨어트려." [어려울 것 없는 일.] 제니스가 다른 하나, 골드 드래곤 파투를 향해 차오른 마력을 모조리 쏟아 붓기 시작했다. *** 꾸우웅. 저 멀리 떨어진 운석은 소로스 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쉴 새 없이 밀어붙이던 몬스터들의 공세가 잠싼 늦춰질 정도. "이건 제니스야! 스승님이 오셨어." 이 정도 운석 소환 마법을 저런 딜레이로 펼칠 수 있는 것은 그밖에 없다. 성구가 희열을 담아 소리쳤다. 그 모습에 그레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승님은 돌아가셨다지 않았나?" "죽으셨긴 했는데 아직 팔팔하세요." 지구의 언어 체계는 아르펜과 다른 건가? 죽음에 대한 정의가 다른 걸까? 그레엄이 인상을 쓰는데 옆에 있던 재민이 웃었다. 우진의 등장만으로 그를 옥죄던 긴장감과 중압감. 책임감이 덜어진 기분이다. "제니스는 리치예요." "리치?" 그레엄이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리치라면 확실히 죽었어도 마법 스승이라 불릴 만하지... "리리리리, 리치?" 그레엄이 화들짝 놀랐다. 임모탈과 함께 다니는 리치라면 그밖에 없었다. "여, 역병의 군주가 스승인가?" 최악, 최강, 최고의 마법사. 존재 자체가 재앙. "맙소사...." 경악하는 그레엄을 보며 성구가 히죽웃었다. "헤헤, 스승님이 여기서 더 유명하신가 보네요." 유명하지, 나쁜 쪽이어서 그렇지. "오시면 인사시켜 드릴게요." "....." 도망가야 하나? 그레엄이 진지한 쓸데없는 고민을 ㅎ는 가군에 재민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거, 형님 아녜요?" "으음, 맞네." 하늘 위를 질주해 오는 모습을 보곤 성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행 마법으로 쫓아오는 리치를 하도 보아왔던 터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는 씽씽이고, 하나는 리치의 비행이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강우진이 돌아왔다. 거점을 온전히 지켜내는 한 그가 돌아오면 파괴된 성의 복구쯤은 일도 아니었다. 병력의 충원도 가능하고, 지금 외성을 넘어 신나게 달려오고 있는 몬스터들도 문제가 이니었다. 물론 하늘 위에 떠 있는 두 드래곤도 말이다. "어?" "어어?" 무심결에 하늘을 보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브레스요!"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대마법사 그레엄 이었다. 반사적으로보혹을 펼쳤으나 그것은 너무 쉽게 그레엄에 친 보호막을 깨트려 버렸다. 레이아가 뿜은 브레스가 향하는 것은 세계수. "...." 성구가 달렸다. 저곳을 잃으면 지구를 잃는다.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니, 약간 자신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든 되겠지.' 화르륵. 한 발 한 발 뛰던 몸이 불길헤 휩싸였고 빠르게 날아 세계수의 앞에 자리했다. 코앞에 다가온 브레스를 향해 불타는 성구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 177화 - 본 드래곤(2) > 끝 < 178화 - 용의 후예 (1) > 뜨겁다. 불을 다루며 잊어버린 줄 알았다. 지금 두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은 단순히 불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지옥의 겁화마저 소화시켰던 자신이다. 이깟 브레스에 질 수 없다. 레드 드래곤의 숨결 또한 불이니 흡수할 수 있었다. '녹는다.' 흐물거리며 사라지는 두 손을 보자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던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 죽는다.' 두려움을 느낀 순간, 브레스는 더이상 참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화아악! 덮쳐 오는 불길에 손발은 물론 머리털도 모조리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 두 눈에 보이는 건 시뻘건 불길 외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아아...' 영혼마저 타버릴 듯 강렬한 화염 속에 아찔한 정신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아득해지는 기억들과 지난 삶들이 스쳐 지나갈 때 목소리가 들렸다. '성구야.' 익숙한 목소리. 부모님의 목소리인가? 천사의 목소리인가? '성구야!' 귀를 통해 들리는가, 머릿속을 울리는 망상인가. 꺼져 가는 의식에 성구가 정신을 잃었다. *** 후우욱.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후끈한 공기에 어지간한 사람은 근처에 접근도 할 수가 없었다. [비켜라!] 리치 제니스가 중첩된 보호막을 생성하며 브레스를 막아냈다. "성구야!" 황급히 달려온 우진이 브레스에 녹아 흐물흐물한 그를 보았다. 멍청하게 귀여운 녀석, 자신의 말을 유독 잘 따르던 녀석... 왜 저리 무모한 짓을 했을까? 우진의 시선이 바람에 나부끼는 세계수로 향했다. 그 앞에 생성된 포탈들의 빛이 오늘따라 오묘해 보였다. 거점을 지켰다. "성구야." "...." 대답 없는 그의 영혼이 애처로운 듯 떨었다. 우진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르펜에서 죽는 건 아닌가 불안했던 20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아르펜에서 눈을 감은 첫 지구인이 성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걱정 마라." 우진이 불가에 앉았다. 그의 손바닥이 불꽃으로 화해 녹아버리려는 그의 몸으로 향했다. "제니스, 모든 권속을 부려라." [로드...무엇을 하면 되나이까?] 우진의 옆에 내려앉은 리치의 광망이 성구를 스쳤다가 주인에게 머물렀다. 장난기 가득하던 평소의 음성이 아니었다. "아르펜의 모든 차원 영주와 몬스터를 멸하라." [로드의 뜻에 따라..] 제니스가 뒤돌았다. 외성으로 향하는 그의 로브 자락이 희열로 떨렸다. 드디어 아르펜의 구원인가.. 임모탈에게 반한 모든 존재를 삶으로부터 구원해 주리라... "혀, 형..."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가온 재민을 보며 우진이 짧게 말했다. "성구 살려야겠다. 넌 지구로 먼저 가 있어." "저만 어떻게..." "여기가 이 꼴인 거 보면 지구도 별로 좋지 않을거다. 가서 지켜." "제, 제가요?" 도재민이 당황했다. 뱀파이어 로드의 피를 이었다곤 하지만 자신은 강우진이 아니다. 지구를 지키니 마니 할 배짱도 없고 힘도 없었다. 우진의 진지한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수아...무슨 일이 있어도 수아를 지켜." "...넵." "금방 갈 거야. 그때까지 부탁한다." "네, 형." 도재민이 서둘로 게이트로 향했다. 우진이 승인하자 그의 몸이 포탈 너머로 향했다. 비비가 다스리는 항공모함, 비비캐슬로 말이다. "후..." 지금 당장 지구로 건너가 차원 영주들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화르륵. 아직 꺼지지 않은 불길이 성구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젠 정말 불의 정령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몸이 전부 녹아버린... 그의 영혼은 그저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죽지 마라." 이 녀석 하나 구하지 못하고 무슨 지구를 구하겠는가? 휘아앙. 우진의 몸 주위를 맴돌던 악령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슈아앙. 검은 악령들이 맴돌며 성구의 영혼을 핍박했다. 거기서 벗어나지 말라는 듯. "...." 우진이 두 손을 뻗고는 그대로 굳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악령들이 성구의 영혼을 해치지 못하도록. 슈아앙. 우진이 이별 준비가 되지 않은 성구를 붙잡아두는 그때, 골드 드래곤 파투가 포효했다. [쿠오오오!] 레드 드래곤 레이아가 임모탈의 공격에 쓰러졌다. 분노한 파투가 외성에 내려앉아 울부짖자, 그에 영향을 받은 몬스터들이 혼란이 멈춘 듯 다시 모여들었다. 끝나지 않은 공성을 계속 할 때다. 거점의 세계수를 무너뜨릴 때까지 말이다. [드래곤 따위가 왕의 앞에서 짖는가!] 제니스가 걸었다. 검은 기운을 흘리는, 여과 없는 살기를 흘리는 그의 걸음에 연합의 영웅도 사람들도 기가 질린 듯 물러나기 바빴다. 슈아아악. 그의 뒤로 하나둘, 검은 기류가 뭉쳐 데스나이트들이 소환되었다. [로드께서 명하셨다.] 제니스의 말에 람손이 받았다. [아, 모두 들었지.] [용용이는 어딨는가?] [마음껏 싸우겠군.] 제 하고픈 말을 저마다 한마디씩 쏟는 그들의 뒤로 해골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공간을 찢고 나오는 그들의 수는 수백 수천을 넘어 금세 만을 이루었다. [용부터 잡아야겠군.] 슈아아. 리치의 뒤로 수천의 해골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휘하에 편성된 마법 병력들. 슈아앙! 그들이 일제히 쏘아올린 각양각생의 마법이 골드 드래곤 파투에게로 향했다. 퍼퍼펑! 쉴드 마법을 전개한 드래곤에게는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공격들, 근처에 있던 애꿏은 몬스터들만이 적중당해 고통으로 몸서리쳤다. "임모탈, 용서치 않겠다!" 수십 수백..아니, 얼마를 살아왔을지도 모를 차원 영주들에게 죽음이 특별한 의미를 가질까... 레이아와 파투. 적어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약한 이간이야 수십 수백 번을 죽었겠지만 애초에 드래곤인 그들은 죽음을 경험한 순간이 손에 꼽을 정도다. 분노함은 당연했다. 위이잉. 파투의 배가 불러오며 한껏 숨을 들이켰다. 브레스를 뿜어 해골들을 모조리 날려주마. 분노한 용의 아가리가 소로스 산의 정상을 향할 때,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게 산 아래에서 뛰쳐 오른 거대한 동체가 있었다. [동족인가!] 숲을 부숴버리며 돌진해 온 용용이가 그대로 뛰어올라 브레스를 뿜기 전 파투의 위로 올라탔다. 앙상한 모양이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그의 갈고리 같은 발은 파투의 머리를 내리눌러 땅에 처박헤 했다. [그르르....소원은 무엇인가?] 포식자가 먹이를 먹기 전 감상하는 것이 이러할까... 두 존재의 눈이 마주쳤다. "에이션트..." [소원은?] "내 위에서 비..." 콰직! 힘껏 움켜쥔 발톱에 파투의 머리통이 바스러졌다. 꾸앙! 그의 몸 안에 뭉쳐 들었던 숨결과 마력이 둑 터진 댐처럼 주위를 휘몰아쳤다. 바로 아래에서 폭풍이 몰아쳐도 용용이의 신형은 그저 잠깐 하늘 위로 떴을 뿐. 초토화된 대지에 내려앉은 본 드래곤이 고개를 들어 주변에 널부터런 몬스터들을 보았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죽음이 소원이라면 이뤄주마. [구오오오!] 용용이의 포효에 몬스터들이 질겁하며 도망쳤다. [사냥이다!] 그 뒤로 유령마를 소환해 달리는 데스나이트들이 전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 "끝났다."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신호가 되어 온 몸을 옥죄던 긴장감을 날려버리는 기분이었다. 도망치는 몬스터들... 멀어지는 함성. 다친 동료들... "전장을 수습합시다! 부상자들을 모으시오!" 스카이의 첫 번째 수도사 타우릭이 고함질렀다. 정신 차란 몇몇이 서둘러 부상에 신음하는 동료들을 모았다. "....결국 지켜냈군요." 어느새 근처에 다가온 은빛 화살 엘프 로드 이타샤의 말에 타우릭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지켰지요." 임모탈이 늦지 않게 와주었다. 아니,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켜냈다. "불의 정령왕...살 수 있을까요?" "모를 일이지요." 거점의 앞에서 명상하든 자리 잡은 우진과 그 아래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점점 더 크기가 줄어드는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정령의 죽음과 같아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미 죽은 건지도...' 그 앞에서 살리려 노력하는 임모탈의 얼굴이 너무 진진해 차마 내뱉을 순 없었다. 그런데 이타샤가 주변을 둘러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성녀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그야...." 타우릭이 말을 삼켰다. 우진와 함께 떠났던 메르디인데 그 혼자 돌아왔다. 물어볼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에 임모탈이 하는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아직 아니야.' '그가 부르고 있어.' '힘을 내.' 귀를 간징이는 소리에 성구가 눈을 떴다. 아니, 눈꺼풀이 들렸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의식이 깨어났다는 것. "정신 드냐?" [혀, 혀엉.] "그래, 그래." 성구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어어, 가만있어. 똑바로 하늘만 봐." 서둘러 말하는 우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피어난 걱정이 진심인 것이 느껴진다. [형, 저 살아 있는 건아요?] "아직은. 근데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 [....] "일단 보험 하나 들자." 우진은 성구의 의식이 있는 와중에 서둘러 그를 차원 영지의 가신으로 임명했다. 도재민에 이어 지구인으로서는 두 번째 임명. <'홍성구'를 아르달의 기사로 임명합니다.> [저 기사 되는 건가요?] "그래. 그래도 죽으면 안 돼." 말 그대로 보험이다. 일이 잘못되어 성구가 죽어도 영지의 가신이 된 이상 포인트를 소모해 살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부활된 그가 옛 모습 그대로일지는 알 수 없다. 또, 죽음의 순간 고유 식별 코드를 잃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지구의 고유 코드. 동기화의 시간 없이 행성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 요건. 코드를 잃는 순간, 외계인이나 몬스터나 다름없는 처지다. "널 살릴 거야. 방법은 두 가지야." [뭔가요?] "이대로 영혼이 소멸되기 전에 널 리치로 재탄생시키는 거야." 이 형님, 왜 이런 말을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는 걸까? [.....다른 건 없나요?] "극복해 내는 거지. 드래곤의 숨결 따위, 녀석의 저주 담긴 용언 따위 이겨낼 수 있는 몸으로." [그게 더 나은 거 아닌가요?] "대신 고통스러워. 아주 고통스러우면서도 성공 확률은 희박해." [....] 뭐 이런 선택지가 다 있지? 왜 인생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선택만을 강요하는가? [형, 저 아직 모솔이에요...] "음." 진지하던 우진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녀석 농담할 정도면 이제 제법 여유를 찾았구나. 시체라 불릴 정도로 몸뚱이 자체가 소멸당한 주제에 말이다. "그래, 역시 리치가 되는 게 코드를 잃지 않으면서 더 안전한..." [안 돼요.] "...." [해볼게요. 극복할 수 있어요.] "...." [연애는 하고 죽어야죠. 해골로 부활해서 뭐해요.] "...." 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성구 녀석... 진심이구나. "좋아."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드래곤의 심장을 꺼내 들었다. 미비치의 연구실에서 운 좋게 구할 수 있었던 보물. "드래곤의 저주 따위 극복해 내는거야." 도마뱀의 저주 따위 넘어주지. [네.] 우진이 드래곤의 심장을 성구의 영혼 위에 놓았다. "넌 할 수 있을 거다." 아니, 해내야만 한다. 고향 행성의 코드를 찾아 떠도는 불쌍한 차원 난민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용의 저주 따위, 용인이 되어서라도 넘어주지.... < 178화 - 용의 후예 (1) > 끝 < 179화 - 용의 후예 (2) > 세계수 앞에 성화가 켜졌다. 검은 불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악혈이 실체화하며 색을 띈 것. 가까이 다가서면 흐물거리며 유영하는 악령들이 보였다. 그 안에 품고 있는 새하얀 불꽃이 있었다. 조금씩 녹고 있는 드래곤의 심장과 그것을 장작 삼아 타오르는 하얀빛. 우진은 불타오르는 그것 앞에서 벌써 십여 일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롯이 악령들에게 집중하느라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들만의 싸움은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열흘이 넘자 이내 연합의 영웅들도 각자의 일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우진이 알아서 거점의 신묘한 힘을 발휘해 소로스 요새를 고쳐 주면 좋으련만, 그럴 시간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인력으로 수리했다. 20여일이 지나가 대강의 경비가 끝났다. 수만이 넘는 몬스터의 시체는 한데모여, 거대한 산을 이루었고, 산의 곳곳은 피에 물든 얼룩이 남아 있었다. 임모탈이 요지부동이지만 휘하 불사의 군대는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몬스터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에 숨어서 겨우 살던 연합의 사람들이 소소르 산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의심 많은 이들은 어느 차원 여주가 계획한 함정일지도 모른다며,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기도 했다. 영웅들과 연합의 세력들이 차츰 활동 범위를 넓혀 그런 이들을 구조해 내며 세력을 키웠다. 블랑카와 최해솔이 이끄는 팬텀부대 또한 적잖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 후발 부대는 아직이군요." "....흠, 우리가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아르펜을 구원하기 위한 지원부대. 강우진과 홍성구, 도재민이 1차로 넘어 왔고, 2차로 넘어온 것이 팬텀부터다. 모두가 아르달의 일원들. 개발과 선점 등, 별별 목적을 가지고 아르펜으로 먼저 넘어오길 원했던 각국의 길드들이 많았는데, 아직 아무도 넘어오고 있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오기를 포기했던가, 올 수 없는 이유가 생겼던가. "지구에도 뭔사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홍성구가 사경을 헤메고 있고 도재민은 급히 게이트를 넘어 지구로 귀환했다. 국왕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여러 거지 짐작이야 가지만, 그저 기다리는 것빡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애초 계획처럼 팬텀부대원들을 훈련하며 연합을 돕는 일. "나 불안해요. 우리 집으로 못 가면 어떻게 해요?" "괜찮아요, 블랑카. 국왕님이 누굽니까? 없는 길도 뚫어낼 겁니다." "후우, 나 요즘 꿈에 어머니 나와요. 너무 불안해요" "...." 해솔이 차분히 그를 달래며 타우릭을 만나러갔다. "아, 캡틴 해솔. 무슨 일이죠?" 타우릭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지구에서 임모탈과 함께 넘어온 괴짜들 중에서 해솔과 팬텀부대원들은 조금 특별했다. 그들은 잘 훈련된 레인저부대를 보는 듯, 단결력이 좋고, 작전 수행 능력이 우수했다. 탐색과 구조에 특화된 인력들. "성녀늠은 아직 못 찾았나요?" "흐음...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 연합에서 아르달의 사람들 빼고 가장 익숙한 사람이라면 성녀 메르디다. 그런 그녀가 실종된 지 벌써 수십 일이 지났다. 아리아 신전을 찾아 강우진과 단둘이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몇몇 부정적인 사람은 메르디가 임모탈에게 살해당햇을 것이란 헛소문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당사자는 미동도 없는 상태니 해명할 길도 없고... "타우릭!" 그때 성벽 길을 사뿐히 넘어 뛰어온 이타샤가 그들의 앞에 착지했다. 어딘가 들떠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상기되어 있었다. "아리아의 성녀가 돌아왔어요!" "오오, 정말이오?" "지금 저 아래 오고 있어요." "아르펜의 모든 기운이 우리를 돕는군요." 성녀가 돌아왓으니 그동안 차도가 없었던 부상자들에게는 신의 구원자가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메르디만큼 신성력이 강력한 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아리아의 성물을 취했을 테니 그 힘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몰려든 영웅들이 아리아의 성녀를 맞이하기 위해 뛰어내려갔다. 그녀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그리 밝은 얼굴이 아닌 메르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아의 목소리여, 어찌된 일이오?" "스키아의 몽크." 메르디의 음성이 어딘지 모르게 처연했다. "시일이 촉박해 임모탈이 먼저 갔아오. 저는 뒤늦게 따라오느라..." "오오, 그랬구려. 고생하셨소. 정말 고생하셨소." 타우릭이 메르디를 격하게 반기면서도 곧바로 부탁을 해왔다. 전하기 어려운 말이 있다면 리더가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일. "지금 막 당도한 터라 염치없는 건 알지만,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이 있소. 아리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메르디가 힘없이 웃고는 타우릭을 따랐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무사히 오셔서 너무 기뻐요." "성녀님, 감사해요."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면서도 메르디는 그저 미미하게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미소였다. *** 금방 깨어날 것 같던 우진은 스무날이 더 지나서도 그대로였다. 사람이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며 어떻게 그 많은 날을 한 자세로 유지하며 있을까 싶지만, 임모탈의 지난 세월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걱정하기보다는 행성의 안위를 더욱 걱정했다. 대지각변동. 임모탈의 재등장과 와해된 연합의 재 결성, 그리고 아르펜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차원 영주들의 잇따른 몰락. 불사의 군대가 휩쓴 전장이 행성의 3분의 1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바꿔 말해 그 넓은 지역을 초토화시킬 동안 임모탈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사그라드는 생명의 불꽃 하나를 지키기 위해 말이다. 그런 그를 보는 여인이 있었다. '임모탈.' 메르디는 거의 녹아버린 드래곤 하트와 작아져버린 불꽃과 검은 악령들, 그리고 그 앞의 강우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원망스럽다. 신께 모든 것을 바치고 난 뒤 처음으로 그녀가 원망스럽다. 메르디로서는 이번 신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펜을 위해 소로스 산의 세계수를 불태워라. 겨우 피어난 연합의 희망을 어찌 제 손으로 태운단 말인가? 더욱이 이 점은 강우진과 차원 영지를 잇는 마지막 게이트다. 이것을 없애면 그는 아르펜에 갖히게 된다. 다른 던전을 얻기 전까지 말이다. 여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았다. 괴롭다. 마음속 고뇌와 번뇌가 아우성치며 그녀를 힘들게 했다. "여기서 뭐하냐?" "...!" 메르디는 너무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히끅." "뭐냐?" 강우진은 딸꾹질하는 메르디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변태도 아니고 뭘 훔쳐보고 있었어?" "벼, 변태라니요. 히끅." 메르디는 괜히 얼굴을 붉히며 우진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 미안함과 동시에 두근거리는.... "그런데 이제 움직이시는..." 메르디는 슬쩍 그의 등 뒤를 보니 어느새 자취를 감춘 악령들과 녹아 없어진 드래곤의 심장. 그 자리엔 빨갛고 하얀 작은 불꽃이 촛불처럼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뭐, 대충 끝났어." "성구님은 어찌되셨는지요?" "이제 제 놈이 알아서 하겠지. 아, 잘 나와야 할 텐데." ".....?" 메르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이신지..?" "죽어보지도 않고 다시 태어나는 건데, 성형 좀 하고 나오겠지." "....?" 여전히 어리둥정한 말에 메르디가 의문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자 우진이 화제를 돌렸다. "성물 내놔." "...." 메르디가 망설여싿. 깨어나자마자 다짜고짜 성물을 달라 하니... "빨리 내놓지?" "이, 잃어버렸습니다." "흐음." 불쑥 얼굴을 ㄷ르이밀고 메르디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을 마주 보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뭐, 좋아." 우진이 순순히 한발 물러섰다. "돌아올 때까지 찾아놔." 아리아의 성물 외에 아직 하나 더 얻어야 할 것이 있었다. "어, 어딜 가시는지요?" 지구로 가버릴까?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눈의 그녀를 보며 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디 가긴. 해리스 추종자 잡으러 가야지."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의 하위 재료인 다섯 가지 성물. 벨트의 재료가 되는 그것과 아리아의 서클렛만 있으면 모든 것을 얻게 된다. 나머지 재료 아이템이야 전 차원에 널린 것인지라 포인트를 이용해 구매하면 그만이다. "아, 그리고 돌아올 때까지 거점 잘 지켜." "...." "대답 안 하냐?" "예에?" "그럼 믿고 간다." "...." 우진이 발길을 옮기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성녀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앉았다. "여신이시여...." 그녀의 고뇌가 깊어졌다. *** 끼아아악! 와이번의 괴성이 따갑게 귀를 찔렀다. 슈아아아. 차라리 비룡의 소리가 낫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는 그것에 익숙하다 생각한 엘프에게도 괴로운 것이었다. "왜, 왜 제가 따라가죠?" 맞바람에 안명 피부마저 쭈그러들어 불썽사나운 그녀가 불만이 가득한 투정을 뱉었다. "제일 할 일 없어 보이던데." 별것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임모탈의 말에 이타샤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왜 할 일이 없어요!" "한가한 애가 길잡이 해야지." "....그러니까 제가 왜 한가하냐구요." "이쪽 길, 맞아?" 빠르게 발아래를 스쳐 지나가는 지면을 보며 우진이 넌지시 묻자 불만에 가득찬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곤 말했다. "저쪽이에요. 저기 바위산을 지나가야 해요." "눈 밝은 애가 길잡이 해야지." "...." 임모탈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괜히 애꿏은 입술만 깨물었다. "세월의 신이라..." 아르펜의 마스터 코드를 가진 다섯 명의 신. 그 마지막 성물을 손에 넣기까지 이제 며칠이 남지 않았다. *** 지글지글. 모닥불에 지져지는 고기가 기름을 뱉어내며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우왕, 엄청 맛있겠당." 삼삼오오 모여든 아이가 여섯. 불가에 둘러앉아 저마다 고래를 꿴 꼬치를 들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다 익은 꼬치를 깨물어 입에 넣어 씹었다. "우왕, 진짜 맛있다!" "와, 진짜야." 너도 나도 한입씩 베어 오물오물 씹는 아이들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른들을 따라 여기저기 숨죽여 피난하기 바빴던 아이들이다. 적응이 얼마나 빠른지 소로스 산에 정착하고는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가 아이들의 얼굴에 사라졌던 미소가 돌아오고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피어난 것이다. 아이 하나가 자랑하듯 말했다. "나 엄마한테 들었어." "뭐가?" "여기서 불의 정령왕이 죽었데." "진짜?" "응. 그래서 이렇게 불꽃이 남아 꺼지지 않는 거래." "우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다. 광장에서 이상한 쇼를 보여주던 지구에서 온 불의 정령왕은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 그가 죽어서 이곳에 불꽃을 남겼다니.. "그래서 고기가 맛있게 익는구나!" "우리 내일 또 여기서 구워먹자." "응. 그러자." 죽음과 이별에 너무 익숙한 세계를 살아가는 순수한 아이들이 내일의 놀이를 위해 꾀죄죄한 손가락을 꺼낸 저들끼지 약속했다. 화르륵. 불꽃은 여전히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며 숨 쉬고 있었다. < 179화 - 용의 후예 (2) > 끝 < 180화 - 마지막 성물 (1) > 세월의 신 해리스. 아르펜의 탄생과도 함께 한다고 알려진 그는 신도가 많지 않았다. 아니, 신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일반인들은 존재조차 몰랐다. 그저 해리스를 모시는 사제들만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포교활동 대신 은밀히 전 대륙을 여행하며 자신의 후계를 이을 자들에게만 문호를 열 뿐이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몇몇 종족들과 학자들만이 해리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폐쇄적이며 알려지지 않은 신의 본단이 위치한 것은 얼음으로 뒤덮인 대지. 투투투투. 그 위를 유령마 씽씽이가 날고 있었다. "하아." 새하얀 입김을 내뿜는 여인은 이타샤. 해리스의 본단 위치를 알고, 시력이 좋다는 이유로 또다시 길잡이로 따라온 엘프 로드였다. "이리로 가는 게 맞아?" "네, 맞아요." "아무것도 없는데." 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씽씽이의 걸음을 멈춰 세우진 앉았다. "얼음의 대지, 그중에서도 가장 춥고 깊은 곳에 해리스의 신전이 있어요." "그게 어딘데?" "저기 보이네요." 이타샤가 가리킨 곳을 보던 우진이 눈을 빛냈다. 평평한 대지에 우뚝 솟은 거대한 얼음산이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두 눈은 조금씩 커졌다. 산이 아니었다. "얼음성?" "네, 맞아요." 너무 추워 생물도 살지 않는 그곳에 얼음의 성이 자리해 있었다, 소로스 산에 견줘도 될 정도의 거대한 성이. "허." 웅장함을 넘어섰다. 그 압도적이 크기에 우진이 질린 얼굴을 했다. 사정은 이타샤도 다르지 않았다. 조상님들의 입을 빌어 구전으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뭐, 가보자고." 성을 한 바퀴 빙 둘러서야 중턱쯤에 난 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 유령마를 근처로 몰아가자 사람 하나가 드나들 수 있는 아주 작은 문이 보였다. 쾅쾅! "잠겼나 본데요?" 문을 두드려 본 이타샤가 뒤돌아보자 우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비켜봐." 문고리도 없었고 열쇠 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문제 손바닥을 대자 차가운 한기가 여과 없이 전해졌다. 위이이잉. "자, 잠깐..." 주위의 마력이 꿈틀하는 느낌에 이타샤가 만류하려는데 우진은 손바닥에 모여든 힘을 그대로 폭파시켰다. 꾸앙! 충격과 함께 터져 나간 문은 안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열렸네." "왜 이렇게 무례해요?" "노크라도 하고 기다려?" "..." 말을 말아야지. 예의와 예절을 가르치기엔 임모탈은 적절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타샤가 그저 볼을 부풀리곤 고개를 돌렸다. 무시한 우진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긴 계단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어두워." "기다려 보세요." 이타샤가 우아한 손짓과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파팟. 두 손바닥 위에 빛으로 만들어진 작은 요정이 나타나 생긋 웃더니 일행의 앞으로 날아올랐다. "빛의 정령이에요." "안 물었어." "어휴..." 이타샤가 고개를 절레 흔들며 앞서 걸었다. 계단은 지루할 만큼 길게 이어졌고, 끝나는 곳엔 자시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아까와 다르게 철문엔 움푹 들어간 손잡이가 있었는데 힘을 줘봐도 열리진 않았다. "또 터트리실 건가요?" "당연하지." 위이잉 우진이 손바닥을 그 앞에 가져다 대며 마력을 응집시켰다. 하지만 폭발이 일어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취이익, 위잉! "...." 열린 문틈을 그저 바라보고 있자 이타샤가 고개를 돌렸다. "뭐해요? 안 들어가요?" "들어가야지." 위잉, 취익! 안으로 들어서자 곧 문이 다시 잠겼다. "...."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고, 이타샤가 당황했다. "뭐, 뭐죠? 바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밖과 단절되어 버린 이 신전이라 불리는 공간은 임모탈의 힘만을 제약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타샤도 잃어버린 힘과 이질적인 느낌에 허둥지둥 거렸다. "나, 나가요. 위험해 보여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힘의 상실이 주는 위험성에 흥분한 듯했다. "괜찮아. 원래 이런거야. 성물만 찾고 나갈 거야." "하지만..." 이타샤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임모탈의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만 이상한 것은 아닌 모양. 우진은 익숙한 듯 걸음을 옮겼다. "우주선 모양은 아니고..." 천장에 달린 등이 아리아 신전의 그것과 같았다. 스키아나 리시아, 쿠어스의 신전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왜 다섯 명의 신이 아르펜의 마스터 코드를 가졌는지는 여전이 의문이지만... 긴 복도가 이어지고 교차로가 나타났다.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뉜 듯 벽면을 따라 문 같아 보이는 것이 많았지만 어디 하나 열린 곳은 없었다. 퉁, 퉁! 주먹으로 내리쳐 봐도 쉬이 뚫릴 것 같지는 않았다. "계, 계속 가도 될까요? 함부로 들어와서 해리스 신이 화난 건 아닐까요?" "모르지." 힘의 공백 때문인지 유난히 많아진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탐색을 이어갔다. 아니,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대사제를 찾기 위한 숨박꼭질이 계속되었다. "이거 원." 능력이라도 있다면... 깨비라도 이용해 주변을 탐색해 볼 것인데, 그러지 못하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가며 긴 복도를 오가는 와중에 손잡이가 다르게 생긴 문이 있어 열어 보았다. 푸슉. 잡은 것을 살짝 내리기만 해도 자동으로 열리는 문 너머는 우진에게는 익숙한, 이타샤에게는 낯선 공간이었다. "당구대에, 냉장고에..." 제법 넓은 그곳은 척 보아도 휴게소를 겸하고 있어 보였다. 우지닝 냉장고를 열어보자 익숙한 상표의 콜라를 발견할수 있었다. "이거 원..." 캉, 칙이익. 능숙하게 캔을 따 그것을 마시자 이타샤가 깜짝 놀랐다. "도, 독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너도 마셔봐." 엉겁결에 던진 콜라를 받은 이타샤사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며 어리둥절해했다. 틱, 틱. 어떻게 따는지 몰라 헤매는 그녀를 보며 피식 미소 짓고는 주변을 탐색했다. 소파와 티비로 보이는 스크린 너머로 라커 룸이 보였다. 라커에 적힌 이름이 낯익은 것 같아 우지닝 눈을 가늘게 떴다. 읽을 수 있는 문자는 셋. "소리에, 이엘로, 강, 나타무베...." 여덟 개 정도는 되어 보이는 라커, 영어와 비슷했지만 그것이 영어인지는 확실할 수 없어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몰랐다. 우주선이었다면 승무원이었을 테고, 이것이 건물이었으면 관리인이었을 터. 라커를 열어보았으나 모조리 비어 있었다. 휴게소의 물건을 뒤져 보면서, 딱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구와 연관이 있다.' 우진이 대충 탐색을 마친 듯 이동하려는데 이타샤사 캔 따기에 성공했다. "우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것을 들이켠 그녀가 한 모금, 두 모금을 마시다가 공중에 그것을 뿜었다. 푸우우. "으윽! 역시 독이!" 목을 간질이는 탄산의 공격에 자신의 새하얀 목을 잡고 뒹굴거리던 이타샤가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압력에 굴복해 입을 벌렸다. 끄어억. 바닥을 구르다 당황한 듯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는 그녀를 보고 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만 까불고 나가자." "...." "뭐하냐?" 민망함게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기 움직였어요!" "응?" 이타샤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주방 위의 천장에 작은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호오." 누군가 있긴 있는 모양. 우진이 렌즈 앞에 다가가 히죽 웃었다. "초대를 했으면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 하지?" 정확히는 초대한 것이 아니지만 우진은 이 불친절한 신전의 주인을 향해 경고도 보냈다. "저기 보니 연장 있더라. 안 나오면 지금부터 부수고 다닐 거야." 카메라를 보며 윙크해 주고는 휴게소의 한 곳에 있던 연장 가방을 챙겼다. "뭐해? 너도 들어." "네에." 우진이 그 안에서 기다란 노루발장도리를 꺼내 들고는 나머지 가방을 모두 이타샤에게 넘겼다. "끙." 꽤 무게가 나가는 것인데 여자인 그녀가 들어도 그리 무거워 보이진 않는 모양. 마력이 사라졌다 뿐이지 단련된 엘프 로드의 힘은 여전한 듯했다. "자, 슬슬 시작해 볼까?" 모든 문이 잠겼다면 강제로라도 따주지. 우진이 휴게소를 나와 잠긴 문을 찍으려는데 복도에 불이 켜졌다. 정확히는 바닥에 화살표로 표시된 유도등. "호로, 진즉 이럴 것이지." 우진과 이타샤가 그것을 가리키는 대로 향하자 미로 같은 곳을 지나 제법 넓은 복도가 나왔다. 취익. 양쪽으로 열린 문을 통과해 협소한 공간에 몸을 내맡겼다. "지, 지반이 흔들려요." "엘레베이터라는 거야." "...." 당황한 듯 손잡이를 잡는 이타샤의 모습이 웃겼다. 위잉. 열린 문을 나서자 거대한 홀이 나왔다. 우진이 야구 배트처럼 긴 노루발장도리를 들고 걸어나갔다. 여기저기 컴퓨터처럼 보이는 스크린이 놓인 자리들. 그중에 척 보기에도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의 화면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곳엔 대머리 남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어떻게 해요? 갇혔나 봐요." "넌 저기 가 있어." "네에..." 우진이 호들갑 떠는 이타샤를 멀어지게 하고는 화면을 응시했다. "해리스?" [그래요.] "왜 사제들이 없어? 아니, 승무원들이라 해야 하나?" [...둘 다 그리 적절한 말은 아니지만, 왜 사람이 없냐고 묻는 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죠.] "수수께기 놀이 할 마음 없으니 벨트나 내놔." [흐음, 궁금한 게 많으실 텐데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요?] "대답해 줄 모양인가 보지?" [물론이지요.] "그럼 아르펜의 고대 문명이 지구와 관련있나?" [저는 기록을 할 뿐, 열람할 권한은 없습니다.] "이...." 하, 욕을 해봐야 뭐하겠는가. 괜한 헛심을 쓸 바에야 무시하는 게 났다. 뭐, 묻지 않아도 사실 별 관심도 없다. "벨트나 내놔." [드릴 순 있지만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시간이 되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시간?" [....] 대답 없는 스크린 속 대머리 남자를 보며 우진이 욕을 뱉었다. "죽고 싶어?" [시스템의 종료를 원하신다 해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 물리 서버에는 접근하실 수 없습니다.] "...." 우진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시스템? 네놈 신들, 목적이 뭐야?" [아르펜의 유지와 보호, 그것이 전부입니다.] "어휴." 우진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리아 보다 말이 더 통하지 않는 신은 처음이다. 행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신이 방화벽이라고 했던가. 신이란 것들이 맨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질 않나, 이놈은 딱딱하게 말하면서 사람 약 올리질 않나. "안 준다면 내가 찾아주지." [찾으실 수 없...] 콰직! 우진이 손에 든 장도리의 뾰족한 부위를 스크린에 꽂아 넣었다. 피지직. 스파크가 튀며 꺼진 화면을 대신해 옆자리에 빛이 들어왔다. [찾으실 수 없습니다.] "하." 우진이 켜진 화면을 다시 깨부수자 또 다른 스크린이 켜졌다. [대기하십시요. 시간이 되면 '키'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찾아 간다니까!" 콰직! 여기저기 스크린을 깨부수는 우진을 한켠에서 가만히 서 있던 이타샤가 멀뚱히 보았다. 저렇게 흥분된 모습의 임모탈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 소로스 산의 세계수. "이놈들! 여기서 고기 구워먹으면 혼난다!" "으악, 군인 아저씨다." 최해솔과 팬텀 부대원들의 등장에 불의 정령왕의 마지막 숨결이라 이름이 붙여진 꺼지지 않는 불가에서 놀안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어휴, 국장님은 또 언제 돌아오실지." 아르펜으로 건너오고 난 뒤부터 우진을 볼 새가 없었다. 도재민은 지구로 먼저 귀환했고, 성구는 한 줌 불꽃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위이잉. 진동하며 은은한 빛을 흘리는 포탈이 눙파에 있지만 건너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누구냐! 어? 성녀님." 해솔은 세계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메르디를 보며 미소 지었다. 지구에서도 그렇지만 아르펜에서도 그녀의 기적과 같은 치료는 대단한 것이어서, 연합의 사람 모두가 좋아했다. "세계수와 나눌 이야기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예? 아... 뭐, 그러십시오." 해솔이 보기엔 그저 거점을 상징하는 심볼일 분이었지만 아르펜의 사람들에게 세계수는 특별한 존재.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음. 뭐, 그러지요." 해솔이 팬텀 부대원들에게 눈짓하고는 멀어졌다. 세계수의 앞에 홀로 남은 성녀가 무거운 얼굴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 180화 - 마지막 성물 (1) > 끝 < 181화 - 마지막 성물 (2) > 신은 항상 옳은가? 그런 고민이 든 순간, 괴로움이 함께 생겼다. 정체성이 흔들릴 정도의 큰일. "하아." 고민을 거듭해 봐야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불을 지르라니.... 신은 무엇 때문에 그런 신탁을 내렸는가? 강우진을 지구로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혹은 그와 대척하기 위해서? 신탁의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메르디는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인생에서 한 번도 풀어본 적없던 의심. 여신의 말은 항상 옳으며 이것을 따라야 하는가? 자신은 예지의 여신의 성녀인가, 그저 꼭두각시인가... 메르디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선 채 세계수를 보았다.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변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이건 아니야." 세계수를 불태우는 의미가 무엇인가? 던전 '라앗의 신전'이 셀락에게 공략당하며 유일하게 남은 것이 소로스 거점. 그것의 심벌인 세계수를 불태우는 것은 지구와 아르펜의 연결점을 끊어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지구로 돌아갈 게이트를 읽은 임모탈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지구와 아르펜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메르디는 생에 최초로 여신의 목소리대로가 아닌 독자적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난 못해." 그녀의 선택이 낳은 변화는 적지 않았다. 슈우우우. "아아..." 신벌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머릿속에 있는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다. 고통과는 다른 허무감과 무력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간 느낌과 함께 메르디는 사라진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의 생과 함께한 너무나 익숙한 힘이었으니. "내가 여신을 등졌구나..."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힘없이 두 손을 보았다.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저버렸으니... 오히려 신성력을 거두어 간 것에 감사했다. 벌을 받음으로써 신의 뜻을 어겼다는 죄책감이 조금 옅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걸로 됐어." 임모탈이 길을 잃을 것이라는 여신의 신탁이 틀렸다. 아니, 자신이 그렇게 했다. 강우진은 여전히 지구로 오갈 수 있으며 중요한 무언가를 잃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아." 무릎 꿇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세계수를 보았다. 바람에 물결치느느 나뭇잎들이 자신의 마음을 조금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바람에 물결치는 나뭇잎들이 자신의 마음을 조금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 아래 일렁이는 성구의 불빛도.... 지이잉. 그때 포탈이 빛을 발하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모타..." 메리드가 혹, 그의 귀환일까 반갑게 일어섰지만 그곳을 통해 나타난 사람은 전혀 다른 이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명. "후우, 여기가 아르펜인가?" 성녀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누구시죠?" "아, 성녀님이시군요. 저번 뉴욕의 포럼 때 뵈었지요. 나카무라입니다." "아..." 기억이 난다. 아르펜을 구원하기 위해, 지구의 각성자들을 모두 모아 간절히 원정대 조직을 건의했을 때 지구의 이익을 설명하며 반대했던 일본의 다켄길드의 사람이었다. 강우진의 등장으로 아르펜의 원정대의 조직이고 나발이고 모든 계획이 공중분해 되어버렸던 기억이... "후발대가 왔군요." "그렇습니다. 아르펜의 구원을 위해 지구의 후발대가 막 도착했습니다." 나카무라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 원정대의 책임을 맡은 다켄길드의 마스러 나카무라입니다." 그가 내민 손을 얼떨결에 잡은 메르디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예지의 여신의 은총이 없더라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경계심. "저희가 후발대 1차 요원들입니다. 곧 2차, 3차에 걸쳐 지구인들이 아르펜을 위해 건너올 겁니다." "...반가운 일이군요." 바라 마지않던 일이다. 지구의 각성자들이 아르펜을 위해 싸우러 와준다는데 고맙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의 번들거리는 눈빛이었다. "일단 이곳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 일대는 이미 임모탈의 군대가 휩쓸어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 없습니다. 그보다..." 메르디가 말을 삼키곤 잠시 뜸을 들이다 곧 대화를 이어나갔다. "연합의 영웅분들과 이야기 하는 게 좋겠군요." "아... 그렇지요. 영웅분들이 계셨지요. S급에 이르는 각성자들이라..." 나카무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함꼐 온 일당백의 정예들. 그리고 아르펜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 요원들. "자, 그럼 아르펜 수복을 시작해 볼까요?" 아르펜에 넘어온 다켄길드의 일본인들이 주변을 빠르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 [삐이익. 예측 시뮬레이션을 벗어난 변수 발생.] 반복적으로 답답한 소리만 해대던 스피커에서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진이 인상을 팍 구겼다. "무슨 개소리야?" 치지직. 부서진 모니터들 사이에 선 우진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세월의 신은 지칠 줄 몰랐고, 인간은 쉬이 지쳤다. [기록과 다른 변수 발생. 새로운 분기점의 시작.] "...." 우진이 인상을 팍 구겼다. 신인지 뭔지 하는 이 녀석들의 정체가 무얼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미나 그중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것들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며 제 할 말만 내뱉을 줄 안다는 것이다. 아주 불친절하고, 목적도 알 수 없는 놈들.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시간이 되었습니다.] "...." 푸시시.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해치가 열리며 엘리베이터 같은 것이 내려왔다. 사람이 타기엔 지나치게 작은 그 공간은 유리로 만들어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품처럼 조명을 받고 있는 물건. "해리스의 벨트." [마지막 열쇠를 드리죠.] 푸시시. 유리창이 열리며 손만 뻗으며 닿을 거리에 해리스의 신물이 들어 있었다. "...." 이유가 뭘까? 모든 것엔 인과관계가 있다. 우연이라 생각했던 일들도 돌이켜보면 원인이 있었다. 이렇게 쉽게 내어줄 신물이었다면 해리스는 왜 뜸을 들였을까? 신전을 난장판으로 깨부숴도 제지하지 않았던 해리스다. 답답하게 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면 그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하나만 묻자." [새로운 분기의 시작으로 데이터가 없습니다. 저는 기록만 할 뿐 예측은 다른 분야입니다.] "...." 모니터의 대머리 사내를 쥐어 패고 싶다. 그가 실물로 모습을 드러내면 다짜고짜 한 대 때릴 만큼 얄밉다. 누가 미래를 알고 싶다고 하였나? "그렇다고 옛날 일 물었다고 대답해주지도 않았잖아?" [그렇군요.] "장난하..." [변수로 작용할 어떠한 말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기록만 할 뿐, 당신의 여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세월의 신 해리스의 말은 이제 우진의 화를 돋우기보단 그저 포기하게 만들었다. 저 뻔뻔스런 대답은 몇 시간전부터 일관되어 있었다. "이미 충분히 내 행동을 바뀌게 만든 것 같은데?" [....] 또 침묵이다. "어휴, 됐다. 말을 말자." 우진이 해리스의 벨트를 쥐어싿. 트래쉬의 방어구 세트를 완성시킬 수 있는 하위 다섯 개의 아이템을 모두 모았다. 나머지 재료들이야 차원 상점이든,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아르펜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들. 이제, 지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우진이 신물을 손에 넣자 닫혔던 출입구가 열리며 긴 복도가 드러났다. 천천히 걸어가자 한쪽에서 조용히 기다리고있던 이타샤가 불쑥 나타났다. "가자." "..." 이타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임모탈의 얼굴을 살폈다. 저게 몇 시간 동안이나 난폭하게 발광을 해대던 사람이 내뱉을 말인가. "해결하지 않고 가도 되나요?" "뭐가?" "궁금한 게 많잖아요." "물어도 대답 안 해주는데, 무슨 수로?" "...."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니 할 말이 궁색해졌다. 이타샤는 자신의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임모탈의 행동에 한마디 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을 얻기 위에 저것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었나요?" "혹시 싶어서 그러긴 했지, 그냥 기다리자니 심심하기도 했고." "...." 역시 임모탈의 폭력성은 타고난 것일지도 모르겠군. 이타샤가 강우진에 대해 다시 한 번 정의 내리려 할 때였다. "이미 여기 온 목적은 모두 이뤘어." 해리스와 대화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의 신물을 얻기 위해 왔을 뿐. 그와의 대화에서 답답하던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더 복작해진 마음이다. 그렇다고 크게 신경 쓰거나 스트레스 받기엔 강우진의 신경이 너무 굵었다. "우린 빨리 돌아가자고." "네..." 괜히 해리스의 쓸데없는 행동이 짜증날 분이다. 서두르는 우진의 뒤를 엘프 로드 이타샤가 뒤따랐다. 치지직. 부서진 스크린들을 제외한 모든 화면에 대머리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대의 여정이 이번에 마무리되길...] [치지직, 강우진....] 기계음이라고 하기엔 해리스의 음성이 너무 간절했다. *** 팬텀부대. 아르달의 공개 채용으로 발탁된 인재들... 이라 하기에는 전부 강우진와 김강철의 뜬금없는 싸움에 미쳐 도망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은 하위 각성자들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B등급. 팬텀 부대원 중에 가장 낮은 자의 랭크가 무려 B였다. 어지간한 길드에 입사하면 이사 대우를 받을 만한 고랭크. 고작 몇 달의 시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속 성장이었으나 아르달의 믿기지 않은 각성자 지우너을 생각하면 꿈뿐일 일은 아니었다. 기본 스탯을 올려주는 강화석에, 능력을 개화시켜 주는 스킬북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고작 E, F 정도의 하위 랭크 각성자에게도 모두 같이 말이다. 최해솔을 대장으로 개편된 팬텀부대의 아르달에 대한 충성심과 훈련도는 매우 높은 상태. 그렇다고 해도 불사의 군대보다는 전투력에서 밀리다 보니 고립된 연합의 세력을 구출하거나 재건을 돕는 것이 주 역활. 소로스 거점에 남아 있는 일들이 많았는데... 최근 들어 트러블이 많아졌다. 출신 행성도 다르고 종족마저 다른 연합의 세력과의 분쟁은 아니었다. 문제는 같은 행성 출신의 지구인들과 발생했다. 팬텀 부대원의 수석대원 김준용이 다켄길드의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저것들 뭐냐? 무슨 군인이 저래?" "군인 아니라던데요." "그럼 뭐냐?" "연구원이라던데요." "....그러니까 연구원들이 아르펜 원정에 왜 왔냐고?" "그야..연구하러?" "어휴, 그러니까 뭘?" "제가 어찌 압니까?" "...." 하긴, 자신도 모르는데 알고 있는 게 웃겼다. 버럭 하는 동료에게 괜히 어색한 헛기침을 한 번 해주곤 김준용이 성큼성큼 걸었다. "어? 어디 갑니까?" "답답한 놈이 우물파야지." "예?" "궁금해서 물어보러 간다." 선천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건지, 김준용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꼭 묻고 해결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저기요." "..." 불쑥 나타난 그를 보며 경계 가득한 눈빛을 보내던 다켄길드의 연구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왜 그러시오?" "뭐 연구하는 거예요?" "...주변 지형을 탐색하고 있소." 그건 말 안 해줘도 알 것 같았다. 포탈은 기본적으로 지구의 물건을 가져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혈석을 에너지 원으로 쓰는 이상한 장비를 만들어 청진기를 대보듯 쉴 새 없닌 여기저기 땅을 쑤시고 다니는 그들이었다. 김준용이 궁금한 것은 이유. "그건 왜요?" "그래야 튼튼한 성을 지을 것이 아니오?" "이미 성 있는데요?" "..." 소로스 산은 이미 거점으로서 성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으시오? 그저 위에서 조사하라니 조사하는 거지." "아, 뭐." 상대가 화를 내니 괜히 머쓱해져 준용이 물러났다. 멀찍히 떨어지는 그를 보며 다켄길드의 연궈원들이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속삭였다. "눈치챈 것 아니겠지?" "아닐 거야. 눈치챘다면 뭔가 낌새가 있었겠지." "흠, 그보다 석유 매장량이 상상 이상이네. 미국의 협조도 받아낼 수 있겠군." "잘된 일이지. 여간해선 안 움직이는 놈들이니, 미국뿐만 아니라 여러 길드가 협조할 걸세." "후후. 우리 길드가 선발로 온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군." "왜 아니겠나? 다시 한 번 제국의 영광을 펼치라는 천황폐하의 은덕이지." "데이터 기록이나 꼼꼼히 함세." 연구원들이 바쁘게 지하자원의 매장량과 위치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숨겨왔던 일본의 제국주의가 다시 한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포탈 너머의 행성 아르펜에서, 그곳의 주인인 아르펜의 연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 181화 - 마지막 성물 (2) > 끝 < 182화 - 분기점 (1) > 다켄길드의 마스터 나카무라는 세계수 앞에서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카무라, 여기 계셨군요." "아, 타우릭 수도사님." 나카무라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보았다. 강우진이 자리를 비운 지금, 연합의 실세 중의 실세인 타우릭. 스키아의 첫 번째 수도사. "한데 무슨 일이시죠?" "아, 2차적인 추가 파병은 언제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흠... 지구의 하루가 이곳의 4일 이니 아마 곧 파병 인원들이 올 겁니다."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소로스 거점의 인근에 생존 중이던 연합의 종족들은 거의 대부분 구조되었다. 임모탈의 불사의 군대가 근처 몬스터의 씨를 말리곤 한없이 남쪽으로 진군 중인지라, 지구의 동맹군들이 넘어오면 북쪽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그보다 보상에 관한 건 의논을 해봤습니다만..." 타우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목숨을 걸고 전쟁을 도와주는데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나카무라의 제안을 듣고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은근히 기대를 담은 나카무라의 말에 타우릭이 조심히 대답했다. "일부 영토의 양도에 대해 왕들의 동의를 얻었소. 하지만 어디를 나누게 될지는 행성의 절반을 수복한 후에 논의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흠." 나카무라가 턱을 긁적였다. "뭐, 좋습니다. 공에 눈이 멀어 제각각 싸워서는 안 될 일이지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돕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나카무라이 웃음에 타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모탈께서도 돌아오면 그와도 논의해 보시지요." "...." 임모탈 강우진. 아르펜 수복의 공로를 따지자면 그가 절대적이다. '눈엣가시 작은 녀석.' 뉴욕에서 마주 쳤을 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체육복 차림으로 나타난 오만하기만 한 놈. "물론이지요. 제대로 된 군대의 조직은 2차 파병군이 오는 대로 시작하지요." "예. 그럼." 타우릭이 자리를 떠나자 나카무라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쯧쯧, 욕심은..." 힘없이 지키지도 못한 땅. 그 수복을 도와준다면 그게 자신들의 땅이지, 왜 옛 주인인 그들의 것이란 말인가? 그저 목숨 부지시켜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건만... "후후, 기다려지는군." 임모탈이 문제라면 영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카무라가 품에서 보라색 보석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상호.'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와 은밀한 제안을 건넨 상대가 쥐어준 보물. 지구에서 가장 핫한 던전 전리품이자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차원의 조각.' "후후후." 세계수를 올려다보는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문구를 볼 때마다 움찔움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 없는 거점을 발견했습니다.> <파괴, 점령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어깨춤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임모탈이 허술해도 이렇게 허술할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거점의 관리인도 지정하지 않거 자리를 비우리라곤 말이다. 아니, 그 외의 다른 차원 영주의 접근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었거나... '대일본제죽의 부활이다.' 나카무라는 한국에서 건너온 그를 만났던 그날을 떠올랐다. *** 도쿄 다켄길드의 사무실. "젠장! 하반기 매출이 이게 뭔가?" 길드의 마스터 나카무라의 호통에 임원들이 눈치 보기 바빴다. 능력자들의 집합인 길드와 던전에서 얻은 부산물들을 가공 판매하는 기업체까지 함께 운연하는 다켄길드이기에 실적에 민감했다. 시장의 팽창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업종이기에 한 번 삐끗하면, 곧 후발 주자들에게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임원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혈석 배터리 시장의 포화로 성장치는 꺾였습니다만, 여전히 경쟁사들과 비교해 시장정유율은 다켄길드가 우위에 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미국은 벌써 특허 등록한 혈석 무기들만 수십 가지가 넘는데 언제까지 배터리 하나 붙잡고 만족할 생각인가?" "....." 씨근덕거리던 나카무라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서인지 임원들이 저마나 머리를 굴리다 하나가 제안했다. "아르펜 원정에 참가는 어떻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리스크가 크지만 선발 주자로 나서는 것이 후일 얻게 된 보상도 클 것입니다." 전쟁응 큰돈이 든다. 그 많은 인적, 물적 자원들을 모조리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괜히 전쟁에 천문학적인 액수가 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르펜 원정은 위험하다. 아르달길드가 주도하고 있는 그것에 괜히 끼었다가 손개만 보고, 얻게 될 이득은 아주 적을 수도 있었다. 아르펜의 구원을 도우며 몬스터들을 함께 막았다는 고마움? 존경심? 하잘것없는 것들이다. 돈이 되지 않기에 움직일 수 없고, 위험 부담이 많기에 세계가 움직이면 그때 동참하면 되는 것이다. 짜증과 침묵만이 감도는 회의장 뒤에 시립해 있던 비서실장이 나카무라에게 다가와 귓속말했다. "일전에 연락된 그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음." 회의장을 한번 살핀 그가 호통 쳤다. "비행기든 뭐든 돈이 될 만하나 것들은 닥치는 대로 기획서 올리도록 하세요. 선점이 중요합니다, 선점!" 쓴소리를 하곤 회의장을 떠나는 그를 비서실장이 바짝 뒤따랐다. "물건을 가져왔던가?" "마스터를 뵙고 확인시켜 준답니다." "으음." 요즘 각성자 세계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아이템. 아르달길드와 몇몇 국가에서만 얻어 연구가 진행 중인 차원의 조각을 얻기 위해 다켄길드는 다방면에서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연락이 닿은 브로커와의 만남이 드디어 오늘에서야 성사되었다. 접객실로 들어선 나카무라는 마법사 로브를 입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내를 보곤 미소 지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심부름꾼? 아니면 아바타인가?" 질문과 함께 여유로운 몸직으로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를 보며 사내가 후드를 벗어젖혔다. "이상호요." "흐음, 이름을 물은 게 아닐 텐..." "대한민국의 주작길드라면 아시겠소?" "다, 당신이 어떻..." 죽었다. 분명 죽은 사람이 어떻게 눈앞에 있다는 말인가? "놀랄 것 없소, 죽은 것은 사실이고 되살아났을 뿐이니까." "....." 너무나 충격적인 그 말을 믿을 나카무라가 아니었다. 언뜻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만 하여도 변장에 관한 수십가지 방법이었다. 상대는 누구인가? "그렇게 머리 굴릴 것 없소." "....." 이상호는 나카무라가 당황스러운 마음을 수습하기도 전에 품에서 물건을 꺼냈다. 보라색의 영롱한 보석 두 가지. "이것은 차원의 증명이고 이것은 차원의 조각이오." "....!" 그토록 구하길 갈망하던 것을 이렇게 선뜻 가져오다니? 상대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 아니, 죽었다 살아났다는 허무맹랑한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고, 나 또한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될 일이니 서로에게 해가 될 게 없소." "...." 나카무라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차원의 증명을 보았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지만 아주 강력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홀릴 듯한 보라색이 그의 눈길을 잡아두고 있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아르펜으로 가 거점 하나를 뺏으면 되오." "...그것으로 얻는 게 무엇이오?" "쯧, 너무 자세히 알려 하는군. 강우진의 거점을 뺏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오." "...." 나카무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굴렸다. 강우진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은 연일 헤드라인 뉴스로 등장하기에 그에 대한 정보는 많다. 그중 이상호가 그의 손에 죽었을 것이란 루머도 있었던 기억이... "...아르달과 적대하기는 어렵소."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아르달과 척을 지는 건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후후." 이상호의 웃음에 나카무라는 오싹한 기분이었다. 고작 B급 각성자라고 알려진 그다. 그런데 그가 내뿜는 기세가 A급 각성자인 자신을 능가하고 있으니.... "영생을 얻는데 손해가 무슨 말이오?" "영생..." 나카무라의 시선이 차원의 증명에 머물렀다. 천천히 내뻗은 그의 손이 그것을 붙잡았다. *** 제주 만장굴. 이제는 한기를 감추기 어려워 동굴의 입구마저 얼어붙어 있었다. 이미 일반인의 신체 능력은 예전에 초월한 그인지라 이상호는 거리낌 없이 동굴의 길을 걸었다. 중심부에 다다르자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그곳에 얼음 인간 이엘로가 권좌에 앉아 있었다. 이상호가 그의 앞에 오체투지했다. "주인이시여." "일은 어떻게 되었지?" "임모탈이 지구로 돌아고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쭙잖게 확신하는구나." "...믿어도 되나이다. 이중 삼중으로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 바닥에 엎드리고 있어도 이엘로의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두려움에 몸을 떠는데 그가 말했다. "좋아, 믿어보지." "가, 감사드립니다." 이미 한 번 죽어 코드를 잃어버린 이상호다. 지구인도 뭣도 아닌 그가 의지할 것이라곤 이엘로가 유일했다. 그에 대한 맹목적 충성만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켜 준다. "지구의 신은 찾았는가?" "그것은 아직..." 찔끔한 이상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호통이 두려웠으나 이엘로는 의외로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아니, 관대하기까지 했다. "임모탈의 개입만 막는다면 그것은 천천히 진행해도 좋다. 아니, 내가 직접 나설 때이다." "예에?" 여태 숨어 있던 그가 세상에 나선다니... 몬스터 군단을 이끈 정복 전쟁을 의미하는가? "곧 모든 차원 영주가 지구의 신을 노리고 나설 것이다. 그것을 대비하라." 무엇을 대비하란 말인가? 그들보다 먼저 지구의 신을 찾는 것? "...종이 우매하여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파괴와 살육이 아닌 지배를 할 것이다." "...." "지구인들을 지배할 것이다." 이상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곧 동기화가 완료된다. 아무런 제약 없이 지구의 신을 노리고 차원 영주들이 넘어온다면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임모탈이 게이트를 잃어 지구로 돌아올 수 없다면 말이다. 암울한 혼란기에 바라 마지않는 영웅이 나타난다면... "아..." 감춰진 뜻은 상관이 없다. 어떤 가면을 쓸 것인가? 침략자가 될 것인가? 구원자가 될 것인가? 이엘로는 힘을 모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구인들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까지... *** 소로스 거점의 일주일이 지났다. 약속된 시간이 넘어서도 2차 파병은 없었고, 다켄길드의 마스터 나카무라도 당황스러운 입장이었다. "아무래도 2차 파병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라니요?" "음, 모르겠습니다. 게이트의 권한을 가진 강우진 씨가 자리에 없으니 되돌아가 확인해 볼수도 없고..." "난감하군요." 말과는 달리 타우릭은 그다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지구에서 도와주겠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이미 강우진만으로도 아르펜의 수복에 문제가 없는 일. 지금 당장은 지구인들의 도움이 크게 필요치 않았다. 불사의 군대는 전보다 더욱 세를 불리고 있는 중이었고, 언젠가는 아르펜의 모든 몬스터의 씨를 말릴 것이다. 던전이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새로운 차원 영주들과 몬스터들이 출몰할 것인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연합과 지구인들이 해야 할 일은 던전이 링크되기 전에 공략해 사전 차단하는 일. 아르펜엔 던전이 너무 많았고 연합의 세력은 너무 적었다. 이것은 강우진도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많은 수의 각성자와 연합의 영웅들이 필요한 일이었다. 답답한 심정과는 다르게 나카무라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파병은 없다.' 애초에 2차 파병 따위는 없다.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것은 자신들이 유일하다. 지구에서는 추가적인 어떠한 계획도 없다. '조사는 이미 끝났다.' 인질로 사로잡을 자들과 함께 이익을 나눌 자들, 그리고 지배하에 부릴 자들을 나눴다. 대강의 파악은 끝이 났고 이제 실행만이 남았다. 타우릭을 비롯한 수뇌부가 모두 모인 지금이 가장 적기. "흠, 최해솔 대장? 이리 와 주십시오." 나카무라가 환히 웃으며 팬텀부대의 수장 최해솔을 불렀다. 가장 먼저 제거해야할 표적. 나카무라의 뜬금없는 제안에 해솔이 떨더름한 얼굴로 답했다. "할 말 있으면 니가 와요." "...." 건방지긴 아르달의 사장이나 부하나 거기서 거기다. 그래, 가주지. 나카무라가 미소 지으며 해솔을 향해 다가갔다. < 182화 - 분기점 (1) > 끝 183. 분기점⑵ 해솔이 움찔 몸을 떨었다. 본능적인 경계. 자신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카무라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그것이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할 이야기 있으면 거기서 하시죠?” 조금 날카로운 해솔의 말에 나카무라의 발걸음이 멈췄다. “뭐, 이 정도로도 충분하죠. 마침 해가 길군요.” 대화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해솔이 눈살을 찌푸리다 몸의 변화에 움찔했다. “무, 무슨 짓을 했지?” 움직여보려 했으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꼼짝할 수 없는 몸. 나카무라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림자가 닿았을 뿐입니다.” 길게 뻗은 나카무라의 그림자가 해솔의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익.” 나카무라는 일본에서 수위를 다투는 거대 길드의 마스터다. 그의 랭크와 능력은 꽤 유명했는데 이제야 생각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그가 자신을 공격해 올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자랑인 각성자, 다켄길드의 마스터. 그림자 닌자 나카무라. “으으윽.” 해솔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음직이려 했다. 방심해서 당했다곤 하지만 그도 아르달에서 고된 훈련을 겪으며 A급에 오른 각성자. 안간힘을 쓰자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런….” 해솔과 같은 고랭크의 각성자를 묶어둘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20초 정도. 하지만 그를 붙잡기엔 충분한 시간이 다. “으윽” 어느새 다가온 다켄길드의 대원들이 해솔을 포박했다. 그중 하나가 주사기를 찔러 약물을 주입하자 마취라도 당한 듯 그대로 눈을 뒤집고 축 처져 버렸다. “무, 무슨 짓이오?” “이렇게 상황 파악이 늦어서야.” 당황한 타우릭을 보며 나카무라가 웃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아르펜을 다켄길드가 도와주겠소.” “그 말이 아니오. 왜 같은 지구인을 공격하는 것이오?” “공격이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아르달이 하던 일을 우리 다켄길드가 물려받아 하는 것뿐이오. 이젠 우리가 그대들을 지켜주겠소.” 타우릭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워프 왕 라울이 고개를 젓고 있었고, 오크 대족장 쿠르가도 화난 얼굴로 콧김을 뿜고 있었다. 혼슈 왕국의 젊은 왕 콘스는 얼굴이 뻘게져 있었고, 대마법사 그레엄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성녀 메르디는….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뿐.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대답이 충분했다. 타우릭이 나카무라를 보며 두 주먹을 말아 쥐고 올렸다. “동맹이 필요하지, 보호자가 필요치는 않소.” “이거야 원.” 나카무라가 어이없다는 한숨을 픽 뱉었다. 이미 모든 영웅의 능력들은 파악을 끝냈다. 주변을 포위한 다켄길드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길드 최정예 요원들. 이들만으로도 일본의 상위 각성자 3할의 전력은 될 것이다. “이들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전투가 시작되면 곧 사람들이 몰려들 걸세.” 타우릭이 몰려드는 다켄길드의 사람들을 보며 점잖게 타일렀다. 지금이라도 내부 분쟁을 말릴 수 있다면 그러는 것이 낫다. 다켄길드와 아르달의 알력이라든지 하는 관계는 모른다. 내력을 모르니 싸음 자체를 말리는 게 나은 것은 당연한 일. 아직 임모탈도 돌아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카무라가 광소했다. “크콕, 그간 왜 내가 시간을 끌었는지 전혀 모르는군.” 그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시간이 되었다. 〈거점의 점령을 완료하였습니다.〉 주인 없는 거점이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그곳에 적립된 포인트에 나카무라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별 힘도 쓰지 않았건만 엄청난 보물을 얻었다. 이미 도쿄의 지하철역 하나를 영지로 삼으며 차원 영지를 갖게 된 그다, 거점의 효용성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새로운 병력의 충원이군.” 상점에서 구입 가능한 목록이 제한적 이었다. 그중에서 고블린 부대 수천을 일시에 구입하자 세계수 앞에 검은 포탈이 생성되더니 녹색의 꼬마 괴물들 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미, 미친.” 콘스의 목소리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지구인 중에 차원 영주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왜 못 했을까? 거점에서 그는 신이나 다름없다. 콘스가 뒤돌아서는데 거대한 벽이 나타나 그들을 포위했다. 쿠쿠쿵!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불쑥 성벽이 솟아나는 그 광경은 신의 이적이라 해도 전혀 이상치 않았다. “크하하, 모두 사로잡아라.” 나카무라의 명령에 고블린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솟아난 성벽이 그대로 감옥이 되었다. 캉, 캉. “젠장!” 드워프 왕 라울이 벽을 내려치던 망치를 내던졌다. 수백 번을 쳐도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다니.” 그의 허탈한 음성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제 탓이에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메르디가 힘없이 대답하자 타우릭이 위로했다. “어찌 성녀의 탓일 수 있단 말이오.” “제가 여신의 말을 어겨버려….” 들었어야 했다.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를 해봐도 남는 건 없었다. 그녀의 신탁대로 임모탈은 게이트를 잃었고, 자신은 힘을 잃어버렸다. 이제 성녀도 뭐도 아닌 그저 무능력한 여자일 뿐이다. “자책하지 마시오. 예지의 여신이 그러하다면 어차피 이리 될 일이 아니었겠소?” 타우릭의 말에도 메르디는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나저나 해솔 경의 상태가 좋지 않구려, 3일이 지났는데도 의식이 없으니.” “그들이 독약이라도 쓴 것이 틀림없어요.” “하지만 어떤 독인지를 모르니….” 해솔의 텔레파시 능력이라면 외부와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이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 소로스 산 아래 숲 지대. 김준용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 거점의 동태를 살폈다. 2만은 넘게 불어난 고블린 병사가 성벽 구석구석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 틈에 연합의 사람들 또한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다켄길드 놈들이 어떤 거짓말로 사람들을 구슬렸는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쪽바리 새끼들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 놈들이 퍼트린 임모탈의 배신이라는 유언비어에 황급히 몸을 피한 팬텀부대지만 대장인 최해솔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죽었거나 놈들에게 사로잡혔을 것이 분명한 상황. 준용이 정찰을 마치고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블랑카 부대장.” “준용, 어떻습니까? 해솔 보입니까?” “아뇨, 어딨는지 없어요.” “큰일입니다. 해솔 위험해요.” 블랑카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옹기종기 모인 팬텀 부대원들 또한 마찬가지 였다. “사장님 돌아와야 해요. 아니면, 해골부대라도 다시 돌려야 해요.” 팬텀 부대원들만으로 해솔을 구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추가 병력이라면 제니스가 이끌고 있는 불사의 군대와 해리스의 신전을 찾아간 강우진. 어느 쪽이든 하나만 있으면 좋으련만 둘 다 감감 무소식이었다. “젠장.” 준용이 욕설을 내뱉었다. A랭크에 올랐건만 뭔가 크게 달라지는 게 없었다. 하위 각성자건, 상위각성자건 어차피 작은 인간에 불과했다. 여전히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거점을 가진 차원 영주란 존재는 한낱 각성자가 덤비기엔 너무 강력한 존 재였다. 그때 수풀이 혼들리며 무언가가 쿵 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방심하고 있던 팬텀 부대원들이 바짝 긴장해 물체를 경계하는데 모두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늬들, 여기서 뭐하냐?” “국왕님!” 유령마에서 훌쩍 뛰어내린 우진이 격하게 자신을 반기는 그들을 보곤 피식 웃었다. “흐혹, 사장님 나빠요.” 블랑카가 우진을 보며 너무 벅차올라 울었다. 왜 이제야 나타났단 말인가…. “그만 짜고 이리 모여봐.” 우진의 앞에 모인 팬텀 부대원들을 보며 물었다. “누구한테 당한 거야?” “어? 알고 계셨습니까?” 알지, 상태창에 거점이 뺏겼다는 알림이 뜨니까. “누구냐고.” “다켄길드의 나카무라입니다.” “흐음.”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로스 거점을 잃었다는 알림을 받았을 때 트라넷의 대군주들 중 하나일거라 생각했더니 아니었다. 거점은 공격당하지도 않고 뺏겼다. 지구인에 의해. “어이가 없네.” 우진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인지라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되찾으러 가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준용이 크게 놀랐다. “계,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맞습니다! 해솔 잡혔습니다. 위험합니다.” 블랑카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가자.” “그러니까 계획을….” 준용이 어이없다는 음성을 홀리는데 우진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따, 따라갑시다.” 저렇게 단신으로 당당하기도 쉽지 않고, 저렇게 믿음직스럽기도 힘들 텐데 신기한 일이었다. 불사의 군대가 없어도 강우진의 뒤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딱히 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 소로스 거점 꼭대기. 세계수의 앞에 지어진 커다란 궁전. “마스터, 강우진이 나타났습니다.” “후후후, 강우진?” 권좌에 앉아있던 나카무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왜 강했는지 이제는 안다. 그가 왜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을 손에 넣었는지도 이제는 이해한다. 차원 영주. 녀석은 신의 영역에 한 발을 걸치며 인간들과 경쟁했다. 이 얼마나 불공평 한 일인가? 그러면서 잘난 척을 해댔으니…. “가야지. 암, 마중 나가야지.” 나카무라가 웃으며 권좌에서 일어섰다. 자신 또한 차원 영주. 병력의 충원만이 아니라 넘치는 포인트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켰다. 5급의 각성자?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과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이제 그와 자신의 위치는 같다. 아르달의 왕? 건방진…. 녀석을 죽이고 자신이 새로운 왕이 되리라. 궁전을 나선 나카무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냐?” 궁전의 앞마당에 넓게 펼쳐져 있던 일본풍으로 꾸민 정원이 쑥대밭이 되었다. 그 가운데 강우진이 서 있었다. 감옥에 갇혔던 아르펜의 영웅들 또한 초췌한 얼굴로 그의 주변에 서 있었다. “어떻게….” 보고받은 지 몇 분이 지났는가? 그가 왜 이렇게 빨리 이곳에 나타날 수 있지?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강우진이 성큼 성큼 다가왔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심장이 요동쳤으나 나카무라는 애써 마음을 굳게 먹었다. 녀석과 자신의 차이는 없다. 차원 영주 대 차원 영주로 붙어볼 만하다. 잔챙이들 따위야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몇 분 안에 정리할 수 있으리라. 나카무라의 얼굴에 다시금 여유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후후, 아르달의 왕.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걸?” “…….” 우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나카무라도 물러서지 않았고 둘의 거리가 2미터쯤 되었을 때에야 발걸음이 멈춰 섰다. 나카무라가 희열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닿았다.” “뭐가?”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와 나의 그림자가 닿았다.” “…….” 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둘의 대치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나카무라의 그림자 묶기는 강력하다. 해솔도 꼼짝없이 당했으니까. “뭐래?” 우진이 다시금 한 발 내디뎠다. “어어?” 나카무라가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째서 움직이지?”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오르며 주춤 뒷걸음질 쳤으나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어째서 안 움직이지?” 자신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 묶기에 당한 것처럼……. “너 약하냐?” “…….” 우진이 씩 웃으며 나카무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림자 도깨비를 가진 자신에게 그림자 묶기라……, “누가 줬냐?” “차원의 증명.” 다켄길드가 자력으로 세 개나 모았을리는 없다. 그들이 모았다면 벌써 지구엔 차원의 조각이 수십 개가 넘는다는 의미. “마, 말할 수 없다.” “그럼 하지 마.” 우진이 그의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184. 얼음 군주(1) “아쉽군.” 말과는 다르게 별로 아쉬울 것 없는 우진의 얼굴이 나카무라의 흔들리는 동공에 담겼다. “미, 미안하다. 잠시 내가 욕심을….” 나카무라의 애원에도 우진의 눈빛은 혼들림이 없었다. “그냥 가라.” 쓸데없이 차원의 중명을 얻어 자신의 거점을 차지할 게 뭐란 말인가? 외부의 적을 방비할 생각만 했지, 내부의 적에 대해 너무 안일했다. 긴 지구의 역사 아래 인간을 가장 많이 해친 이들이 누구겠는가. 몬스터? 던전쇼크 이후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두려움 가득한 위기감이 서로를 뭉치게 했으나, 안타깝게도 인간을 가장 많이 살해한 것은 같은 인간이다. 각자의 집단으로 분리되어 반목을 거듭해 오며 서로를 죽이고 해쳤다. 잠깐 외부의 커다란 적이 나타나 손을 잡았으나 그것도 이제 변화의 조짐을 맞이한 듯싶었다. 지구인과 차원 영주들의 싸음이 변질될 것이다. 적아의 구분이 모호해지며, 끼리끼리 뭉친 알력 다툼이 되고 말 것이다. 눈앞의 나카무라란 녀석처럼 말이다. “으으윽. 그, 그만.” 녀석이 비명을 질렀으나 우진의 손아귀는 멈출 줄 몰랐고 곧 머리가 터질 듯 두통이 몰려왔다. 죽는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 나카무라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이길 수 없다. ‘시발 같긴….’ 차원 영주라고 다 같은 게 아니었다. 이기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파직! 〈거점을 공략하셨습니다.〉 〈파괴와 점령을 선택하십시오.〉 우진이 점령을 선택하자 가지고 있던 차원의 조각 하나가 사라지고 대기 시간이 나타났다. 하루. 거점의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 또다시 하루의 기다림이 필요해졌다. “짜증나네.” 별스러운 놈 때문에 괜한 시간을 허비하게 생겼다. 우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또 무슨……, 어휴.” 세계수 앞에 지어진 거대한 궁전을 보며 우진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거점을 온전히 점령해 봐야 알겠지만 여기저기 포인트도 상당히 쓴 모양. 다켄길드라고 했나? 돌아가면 이자까 지 쳐서 받아내야 할 듯싶었다. “뭐해?” “예?” “다들 할 일 해.” 타우릭을 비롯해 갇혔다가 막 구원받은 이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보며 우진이 성 밖 쪽으로 턱짓했다. 고블린과 연합의 세력들이 서로 싸우기도 했고, 합심해서 내성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개판. 우진은 그 사이를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와 소로스 산의 정상에 오른 것이다. “다 죽게 놔둘 거야?” “아!” 연합의 영웅들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서자 남은 것은 팬텀 부대원들과 성녀뿐이었다. “어이, 해솔이.” 우진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최해솔을 흔들며 불러보았으나 그는 꿈쩍도 않고 있었다. 코에 손을 대어보면 숨은 쉬는데 의식이 깨어나질 않았다. “이거 왜 이래?” “지구인들이 주사를 놓았습니다.” “흠.” 마취제인지 수면제인지 모른다. “메르디, 얘 깨워봐.” “할 수 없습니다.” “응?” 현대 의학으로 불가능한 일들도 가능케 하는 성녀다. “죽은 거 살리란 것도 아닌데 왜 못 해.” “여신께 버림받았습니다.” “옹?”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메르디가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보였다. “…해서 신탁을 따르지 아니해 일이 이 지경으로 되었습니다, 흐옥.” “음.” 메르디의 장황한 설명에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니가 불태우든 얘네들이 넘어오든 똑같잖아.” “예에?” “어차피 동기화까지 하루가 필요 해….” “아.” 우진이 거점을 차지한 나카무라를 해치우는 데 소요된 시간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끽해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잘했어.” “예?” “네가 불태웠다면 많이 화났을 거야.” “…….” 그래, 그랬었지. 임모탈을 감당할 길이 없어 신탁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고 말이다. 임모탈의 분노는 피했으나 한 시간을 잃어버렸다. “사장님, 해솔 어떡합니까? 죽습니까?” 블랑카의 말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약효 다되면 깨어나기야 하겠지.” 무슨 약인지는 모른다. 그저 아직 안 죽은 것을 보면 죽기야 하겠나 싶었다. “다켄길드 놈들 보이면 잡아와. 무슨약인지 알아야 처치를 하지.” 거점이 완성되면 게이트를 타고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해독약이든, 각성제든 그곳엔 있을 테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메르디의 말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 메르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임모탈이 이런 관대함이라니…. “그보다 능력 자체를 잃은 건가?” “…….” “…예에.” 우진이 아리아의 서클릿을 꺼내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메르디가 눈을 치떴다. “만져 봐도 아무런 느낌 없어?” “기운이 느껴지긴 하지만…. 전과는 다릅니다.” “홈, 마력은 느낀단 거네.” 우진의 눈에 보이는 메르디의 레벨은 그대로다. S급에 이르는 각성자가 그대로 스킬만 잃어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 누님, 속 좁네.” 아리아를 누님으로 불러야 할지 기계덩어리라고 불러야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 “실업자네, 이제. 내 밑에서 일해라.” “예에?” 성녀가 신성력을 잃었는데 그리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거점 완성되면 여기나 지켜.” 거점의 관리인을 임명해 놓고 가지 않은 것이 실책이다. 내외부의 문제에 대해 즉각 대응하자면 우진이 항상 이곳에 붙어 있던가, 새로운 관리인을 임명했어야 했다. “난 지구로 간다.” “…….” “대답 안 하냐?” “…….” 메르디의 혼들리는 눈망울이 우진을 응시했다. 거점을 맡긴다고? 자신을? 뭘 믿고 말인가? “저를 믿으십니까?” “허.” 우진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이야?” “제가 임모탈을 또다시 배신할지도 모를 일이 아닙니까?” “그게 왜?” “예?” 우진이 메르디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고작 한 뼘 거리. “아르펜 도와달란 게 너 아냐?” “…맞습니다.” 괜히 부끄러워 겨우 대답한 메르디. “니가 배신하면 난 아르펜을 버리면 돼. 게이트 닫히든 말든 말야.” “아….” 그런 뜻이었구나. 메르디는 이해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일봐.” “…예에.” 우진은 궁전의 옆 담장에 쓸데없이 꿋꿋하게 피어나 있는 불길을 향해 다가갔다. “이 자식, 아직도 안 깼네.” 화르륵. 불길은 사람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바람에도 혼들리지 않던 것이 일렁거리며 춤췄다. “욕심도 많네. 알아서 적당히 깨어나 면 넘어와라. 먼저 가 있는다.” 화르록. 우진이 픽 웃고는 뒤돌았다. 드래곤의 심장을 먹고 소화된 지 한참이 지났을 텐데도 아직도 탈피하지 않고 있는 것은 욕심이 커서일 것이다. 보다 완벽하게, 보다 강해져서 태어나기 위해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 우진은 거점의 봉인으로 쓰지 못하는 차원 상점을 대신해 그간 쌓이고 쌓인 포인트를 쓰기 위해 업적 상점을 열었다. 지금도 전쟁 중인 불사의 군대로 인해 업적 포인트는 꾸준히 쌓이고 있었다. “이제 장비를 되찾아 볼까?”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 차원 상점에서도 업적 상점에서도 팔지 않는 그 핵심 재료가 되는 기본 아이템을 모두 모았다. 그것 외의 재료들은 모두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들. 포인트를 아낄 것도 없이 우진이 재료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산처럼 구입한 것들을 조합기에 하나하나 넣고 아이템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 하루가 지났다. 나카무라에 의해 일어난 임모탈의 배신이라는 헛소문은 진정되었고 연합은 재정비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사로잡은 다켄길드의 녀석들의 말에 의하면 해솔에게 주사 된 것은 해독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 약효가 다하면 깨어난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정신없는 사람을 업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정말 후회 안 하냐?” “넵. 대장님 깨어나면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팬텀부대 전원이 남기를 결정하자 우진은 별말 없이 허락했다. 지구가 지금 당장 위험한 것도, 그들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우진의 목적은 지구에 있다는 트래쉬의 집행에 대한 단서를 찾는 것. 그 혼자만 넘어가도 될 일이었다. “너도 게이트 잘 지켜라.”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다부진 메르디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해솔이 일어나면 넘어오고, 성구 깨어나면 재도 바로 오라고 전해.” “네에.” “그럼 가볼까?” 사건사고들이 있다 보니 불사의 군대가 휩쓸고 간 지역들이 꽤 되었다. 이 근방에는 차원 영주는 물론 몬스터도 씨가 말라버린 상황. 우진이 불사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역소환된 이들이 그의 곁에 검은 연기로 화해 휘돌다가 뭉쳐져 사라졌다. 소환의 방에 가득 찬 권속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떼려야 텔 수 없는 사슬들로 연결된 우진과 그들.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넵.” 우진이 아르펜 영웅들의 배웅을 받으며 게이트를 넘었다. *** 아르달의 공중요새 비비캐슬. 총리실에 앉은 민찬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아르달에서 강우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절대적인 그의 부재는 많은 문제를 낳았다. 차원 영주와 몬스터라는 지구를 위협하는 존재들에 대해 지구인들이 아르달에 기대하는 역할이 있으나 그것을 해소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요새를 이용해 포인트를 소모해 가면서 몬스터들을 토벌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일개 길드 수준의 무력. 거점 생성을 시도하는 차원 영주 하나도 물리치기 버거웠다.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아르달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는 상황. 정민찬의 스트레스도 덩달아 커져 갔다. 삐이. 「총리님, 비비님 방문입니다.」 인터폰 소리에 민찬이 헝클어졌던 머리를 매만졌다. “들어오시라 하세요.” 딸칵. 문이 열리며 총총걸음으로 총리실로 들어온 비비는 혼자가 아니었다. 소꿈친구마냥 따라다니는 강우진의 동생 수아와 그의 보디가드마냥 항상 함께하는 도재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냥 따라온 우승훈도 말이다. “음, 어쩐 일이십니까?” 비비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베이징으로 가고 있죠?” “예에, 중국 정부와 협력해 그곳의 거점을 처리해야 합니다.” “거긴 못 가요.” “예에?” “그 거점은 트라넷의 군단장이 세운 거예요. 위험부담이 커요.” “하지만 이미 약속된 일입니다. 아르달이 나서지 않는다면 국제적 비난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몸을 사린다고 난리다. 이번 건마저 나서지 않으면 지구 수호 국가라는 아르달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찬의 걱정과는 다르게 비비는 단호했다. “불가.” 추가적인 설명은 도재민이 이었다. “정 총리님, 저도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너무 위험해요.” “하아.” 아르펜에서 먼저 돌아온 도재민이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새가슴이 되어, 위험한 일은 죄다 만류하고 강수아의 옆에만 붙어다니는 그다. “아르달의 존재 이유가 걸린 문제입니다. 피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정민찬의 진지한 말에 비비가 장난스레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아, 몰라요. 지구 수호보다 난 주인님 말 듣는 게 먼저예요.” “하지만….” 우승훈이 복잡한 얼굴의 민찬을 위로했다. “총리님, 우리 초심을 잃지 말죠.” “옹?” “아르달의 건국 이념이 뭡니까?” “그야 세계 평화와 지구 방위의….” “에이, 그건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짐작하는 거고요.” 민찬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 벌써 꽤 과거가 되어버린 듯한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나의 군 면제와 원활한 던전 공략.” 우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초에 아르달은 거창한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강우진의 케어와 잡무 처리. 그것을 위해 존재했다. “허허.” 민찬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스트레스가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185. 얼음 군주(2) 아르달의 행보가 바뀌었다. 지나치리만큼 안전 지향적이고 혈석 채집에만 열을 올리는 그들을 보고 몇몇 언론은 일제히 비난을 쏟았다. 그럼에도 아르달은 무대응. 누구 하나 용기 내어 던진 돌이 이제는 무더기로 향했으나 아르달은 초지 일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갔다. ‘국왕님의 부재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론이 잠잠해지기는커녕 강우진의 행보에 대한 비난까지 이어졌다. 아르펜엔 왜 갔는가? 지구를 비워두고 다른 행성의 안전을 도모하는 그가 옳은가? 세계는 불안한 지금의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전쟁을 잠식시킬 영웅이든, 책임을 물을 희생양이든……, 지나칠 정도의 무대응을 일삼는 아르달은 한 가지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총리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김해민이 소리 질렀다. “김강철의 꼬리를 밟았습니다.” “응? 어디야?” 한마디 하려던 정민찬은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런던입니다.” “런던? 영국?” “네, 맞습니다.” “젠장할 놈.” 강우진이 지시 내린 몇 가지 사항 중 하나. 놓쳐 버린 김강철과 토플러 박사의 위치를 찾는 데 몰두한 이후 처음으로 단서를 찾았다. “역시 토플러 박사와 연관이 있었군.” 강우진이 괜히 지시를 내린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런던이라면 토플러 박사가 자취를 감춘 마지막 장소다. 그곳에 김강철이 나타났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 그래?” “영국 정부에서 입항 허가를 내줄 지….” 하늘을 배회 중인 공중요새. 한 번 틀어진 국제적인 여론이 그러 했다.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아르달을 반기는 나라는 적었다. 특히 영국과 같이 각성자 강국들은 더욱 심했다. 차원의 조각이라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인해, 지구로 넘어오는 차원 영주의 거점 파괴도 협력 없이 자력으로 해결하려는 국가도 많았다. “협상해 봐야지.” 어차피 정민찬이 하려는 일이 그것. 아르달이 몸을 사릴 뿐이지, 무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운용 중인 와이번 부대만 하여도 어지간한 약소국의 군사력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일단 기수를 돌리자고.” 지금 공중요새가 떠 있는 곳이 인도양. 민찬은 곧장 비비를 찾았다. 공중요새 비비캐슬에서는 신적인 존재. 거점의 영향력 아래 놓인 범위에서는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비비였다. 거점의 이동 또한 그녀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고 말이다. 민찬이 비비를 찾은 것은 갑판 위였다. 통제실에서 내려다보면 작은 마을처럼 보이는 그곳. 실제 건물들 사이의 길을 걸으면 하늘에 떠 있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갑판의 가장자리, 큰 테라스를 가진 카페에 도착했다. “총리님, 오셨어요?” “아, 엡. 어머님.” 정민찬이 공손하게 강우진의 어머니 이수경에게 고개를 넙죽 숙였다. “아유, 그러지 말라니까요.” “아닙니다. 제가 어찌….” 호칭도 편하지 않은 민찬이다. 낯간지럽다는 이수경의 만류로 겨우 ‘어머님’ 정도로 부르고 있는 그였다. 지금도 그의 방문에 자리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서 마중 나온 그녀가 영 불편했다. “굳이 이리 환대 안 해주셔도 됩니다.” “호호, 총리님같이 높으신 분이 왔는데 그럴 수야 있나요.” 아, 어머님…. 당신 아들이 저보다 더 높습니다. 수차례 말해봐도 변화가 없음을 알기에 그저 말을 삼킨 민찬이었다. “늘 먹던 걸로 준비해 드리면 되죠?” “네에…. 저, 비비 양에게 용무가 있 어서….” “어유, 내 정신 좀 봐. 얼른 가보세 요. 바쁘신 분을 제가 붙잡아 뒀네요.” “아, 아닙니다. 그럼.” 이수경이 민찬의 손을 놓아주고는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 아르달의 가장 높은 직위의 사람은 정민찬이었다. 강우진은 그냥 아들이니까…. 정민찬이 인사하고는 테라스로 다가갔다. 그곳에 한가로이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수아와 비비가 있었다. 그 옆에 똑 붙어 있는 도재민의 모습도 보였고 말이다. 그는 더 이상 태양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햇빛을 받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비비 양, 요새를 런던으로 옮겨야겠습니다.” “런던이요?” “예, 그곳에서 김강철의 흔적을 찾았 습니다.” “흐음, 전에 도망친 그 사람이군요. 좋아요.” 주인님이 도로 잡으라고 했던 인간이다. 비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요새를 음직였다. 작은 흔들림과 함께 비비캐슬이 천천히 이동을 시작 했다. “응? 수아, 어디 안 좋아?” “아, 아니.” 아니라는 말과는 다르게 수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괜찮던 그녀의 얼굴색이 변하자 도재민이 깜짝 놀랐다. “무, 무슨 일이죠?” 강우진에게 수아의 호위를 부탁받은 도재민이다. 처음 보는 그녀의 변화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정민찬이나 비비의 얼굴엔 걱정은 가득했지만 딱히 놀라워하지는 않고 있었다. “신탁이에요.” “아….” “자리를 옮기죠.” 식은땀을 홀리며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는 그녀를 들쳐 업은 비비가 총총거리며 카페 한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 다. 그들이 떠난 테라스 한쪽에 음료를 마시고 있던 사내가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화면에 찍힌 그것은 방금 수아의 모습. 사진을 첨부해 메시지를 전송한 사내 [목표로 추정됨. 검중 바람.] 전송이 완료되고 음료를 마저 마신 사내의 뒤로 한 여인이 다가왔다. “숭호 씨, 점심시간 끝이에요. 얼른 가봐요.” “아, 예에. 팀장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승호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의 밀실. 수아의 몸에서 강력한 마력이 분출되었다. 겨우 눈을 떴지만 귀기 서린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수아가 아니었다. [운명의 시간이 되었다.] 그녀의 조막만한 입술은 가만있는데 머리를 울리는 둣한 그 소리는 주변이 모두가 들었다. “무슨 시간이죠?” […….] 민찬의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언제나와 같다, 제 할 말만을 할 뿐. [변화의 시작일지, 굴레의 반복일 지….] “…….” 대답해 봐야 의미 없음을 알기에 모두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저 지금의 말을 기록할 뿐이다, 강우진이 돌아오면 알려줘야 하기에. […….] 공중에 떠올랐던 수아의 몸이 차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녀를 안아 든 비비가 조심스럽게 뺨을 어루만졌다. “가여운 것.” 주인님의 동생. 어쩌다 지구의 신이 수아를 선택했을 까? 아직 어리기만 한 그녀를 말이다. 비슷한 또래처럼 보이지만 자신은 200년 이상을 산 악마 서큐버스. 그녀가 가엽고 딱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촉촉하던 비비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부릅떠졌다. “비비 양, 왜 그러십니까?” 민찬이 놀라 물었으나 비비가 손을 뻗어 그의 접근을 막았다. “어어….” 그리고 탄성을 내뱉더니 몸을 비틀었다. 파파팟! 그녀의 팔이, 다리가 터졌다. 피의 파편… 대신, 검은 연기로 화해 몸 곳곳이 터져 나갔다. 화르록. 검은 연기로 되돌아간 그것들이 다시 뭉쳐지기 시작했다. 이전과 다르게 커다란 키, 커다란 몸집. “아아.” 역소환되었다가 다시 소환되듯 나타난 비비. “헉.” “으억.” 기절한 수아를 대신해 민찬과 재민이 변해 버린 비비의 모습에 기함을 토했다. 쭉 뻗어 늘씬한 다리, 커져 버린 키와 함께 큰 가슴과 엉덩이…. 본래도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인간이 맞을까 싶을 정도의 외모. 성녀 메르디와는 다른 쪽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색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엉덩이 뒤로 가늘게 뻗은 검 은 꼬리…. “하아.” 신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달뜬 음성을 뱉은 그녀가 볼을 부풀렸다. “이거 곤란하네요.” 목소리마저 매혹적으로 변한 그녀의 음성이 귀를 녹일 듯했다. 민찬과 재민은 고개를 돌릴 생각도 못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비비가 그 둘을 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희도 곤란해요, 이것 참. “큰일이에요.” 비비의 말에 두 사람이 홀린 둣 중얼 거렸다. “커지긴 커졌는데….” “동해물과 백….” 아직 정신 못 차린 둣 중얼거리는 둘 을 보며 비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신차려요!” “어육.” “헉.”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지구의 동기화가 완료됐나 봐요.” “예?” 민찬이 되물었다. 비비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기절한 수아를 되돌아 보았다. 지구의 신이 말한 운명의 시간이 이 것인가? “차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구요.” “…….” 민찬도 재민도 심각한 얼굴을 했다. 지금도 차원 영주들의 출몰이 빈번하건만 아예 차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 면…. 그간의 침공이 탐색전이었다면 이제 부턴….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 “막아!” “끄아악.” 투두두두두. 총알이 빗발치고 능력자들의 용감한 돌진은 무모한 죽음이 되었다. 적은 강력했고, 동시다발적으로 세계에 출몰했다. 제2의 던전쇼크. 세계의 언론들이 그 명칭을 사용하며 연일 사건 사고를 담았지만 토픽에 오르지는 못했다. 수천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현장도, 도시 하나가 통째로 증발해버리는 기현상도 그러했다. 지구 전체가 난리였다. 기업의 오너들이나 사회 지도층이라 부르는 부를 가진 몇몇은 벌써 안전지대라 할 수 있는 지하철역을 가지지 않은 후진국으로 대피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공략된 던전은 안전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나는 리셋으로 인해 각성자들은 쉬이 도전하지 못했고, 그렇게 방치된 던전에서는 고작 하루 뒤 차원 영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그들만이 아닌 던전 오너와 각각의 차원 난민들 나타났는데, 문제는 이들 모두가 몬스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과 쏙 빼닮은 종족들도, 심지어 인간으로 분류될 차원 난민들도 지구에 발을 디디며 인간들 틈에 섞여 들 어갔다. 이전의 던전쇼크는 재앙도 아닐 정도의 대재앙. 누가 누구를 돕는 것도 사치인 그 상황에서 비비캐슬은 런던의 상공에 닿았다. “영국 정부는 아직도 무응답인가?” “기다리랍니다. 곧 입국 허가가 날 겁니다.” 지상을 관찰하는 확대 카메라로 보이는 사정은 굉장히 나빴다. 지옥도. 몇 개의 던전이 터진 것인지, 인간보다 몬스터가 더 많아 보이는 런던은 무법지 그 자체였다. “후우, 어서….” 김강철을 찾으러 왔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 월드의 비밀을 밝혀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지구 전체가 멸망하게 생겼다. 아니, 어쩌면 지구가 아닌 인류만의 멸망일지도 모를…. 아르달의 핵심 인물들이 통제실에 모여 영국 정부의 허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 비비와 도재민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이 돌아오셨어.” “혀, 형님.” 차원 영지로 돌아오자마자 가신인 그들에게 의지를 담아 메시지를 보낸 우진이다. [지구는 좀 어때? 안 바쁘면 포인트 좀 모으고 가려는데.] “바빠요. 큰일 났어요.” “주인님, 동기화가 끝났어요.” 동시에 대답한 둘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진이 침묵했다. [많이 나빠?] “네! 여기저기서 던전이 쉴 새 없이 터지고 있어요. 지하철 없는 데로 사람들 피신한다고 난리예요.” [너흰 어딘데?] “런던이에요.” [그럼 그리로 갈게.] “예, 얼른 오세요.” 도재민의 말에 우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정민찬이 사색이 되어 대답했 다. “국왕님이 이리로 오시면 서울역에 파견 중인 직원들은 어쩝니까?” “아!” 도재민이 즉시 사정을 전하자 우진이 되물었다. [거기 누가 있는데?] “우 실장님 가셨어요. 한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아, 성가신 놈일세.] 고민을 짧게 마친 우진이 답했다. [난 서울 갔다가 간다. 너흰 거기 몬스터 쓸어버려.] “하지만 아직 영국 정부에서 입국 허가를….” 재민의 말에 우진이 고민 없이 답했다. [내가 허락한다. 가.] “예, 형.”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에 재민은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모두를 돌아보았다. “쓸어버리래요.” 정민찬이 즉시 통제실의 마이크를 켰다. “와이번 부대, 출동 준비! 포 가동 준비!” 공중요새의 바닥에 달린 포신들이 지상을 향해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186. 얼음 군주(3) 서울역. 다행히 아직 공략당하지 않은 그곳에 강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이래도 돼?” 던전쇼크 이후 많이 바뀌어 버린 곳 이었지만 지금은 또 변해 있었다. 옛 아르달이 길드 사무실로 쓰던 사 무실은 무너져 내려 있었고 연병장은 초토화되었다. 지난 5년간 축적된 경험으로 브레이 크 이후 중장비를 동원한 복구에 상당 한 기술을 쌓은 인류지만 서울역 주변 은 황량하기만 했다. 몬스터의 공습이 아직 끊이지 않은 것이라면 이해할 법도 했건만, 주변에 서 다시 도로를 닦고 건물의 잔해를 치우는 장비들을 보자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들 땅 아니라 이거지?” 서울역 인근 부지는 모두 아르달의 영토다. 그곳만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 우진의 발길이 무너진 건물들로 향했 다. 북적이는 사람들 소리에 그쪽으로 넘 어갔다. 포클레인 한 대가 잔해를 치 우는 가운데 임시로 지은 듯한 천막 아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팔자 폈네.” 세상이 난리 통이라는데 천막 그늘 아래서 한가롭게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는 우승훈이었다. 「치직,다음 사연입니다. 경주에 계 시는 오미순 할머니가….」 “야,일어나 봐.” “어? 어어? 사사,아니,국왕님.” 우진의 등장에 고개를 돌린 우승훈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작업 중이던 직원들이 무슨 일인가 싶 어 보다가 그의 얼굴을 보곤 저마다 달려오느라 부산을 떨었다. “여긴 왜 복구하냐?” “예? 뭐,살릴 물품들은 살리고,던전 근처에 베이스캠프 하나는 있어야 하 지 않겠습니까?” “됐고,공중요새로 돌아갈 테니 모두 집합시켜.” “예에? 전 한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위해 여기 남아서 할 일이….” “딱 봐도 할 일 없어 보이는데?” “아닙니다. 제가 여기 있는 그 자체 가….” 자신의 말대꾸에 우진의 눈썹이 휘어 지자 얼른 알기 쉽게 풀어 설명했다. “볼모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르달이 한국을 아예 등진 것은 아니 다.” “볼모? 니가?” “……예에. 국왕 비서실장 정도는 남 아 있어야죠. 뭐,직급 중에 제가 제일 도움이 안 되니 이런 일이라도 해야 죠 각성자가 아닌 우승훈이다. 정민찬과 김해민을 빼면 창립 멤버로 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그다. 직위 에 비해 아르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 중은 낮다. 스스로 역할을 찾다 보니 하는 일은 보잘것없던 그이기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이런 역할을 자처했 다는 게 기특했다. “괜찮으니 짐 싸.” 관계 개선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공 중요새에 모두 모아놓고 우진이 마음 놓고 활동하는 게 더 편했다. 그의 지시로 서울역에 남아 있던 아 르달의 직원이 전부 모였다. 스물다섯 명의 사람들 중에 각성자는 단 한 명 도 없었다. 일반 직원들이야 정민찬이 알아서 충 원하는 것이고 각성자의 모집은 우진 이 모두 도맡아서 했기에 새로 뽑은 이들은 팬텀 부대원으로 끝이었다. 인간 종족이 아닌 각성자들이 공중요 새에 고용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엄 밀하게 따지면 차원 난민들. 지구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희 어떻게 가죠?” “어떻게 가긴….” 대수롭지 않게 말한 우진은 그들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각성자가 아니면 포탈을 통과할 수 없다. 차원 영지를 거치면 곧장 공중요새로 향할 수 있는 데,이들을 데려가자면 물리적인 수단 밖에 없었다. “날아가야지.” “예? 대부분 항로가 폐쇄되었는데….” 공중 몬스터의 증가로 비행기의 이용 위험이 높아져 대부분의 항공사가 운 행을 중단했다. 몇몇 회사가 기세 좋게 운행하고 있 긴 하지만 인천공항에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용용아.” 우진의 부름에 무너진 건물 더미 위 로 검은 연기들이 뭉쳐졌다. [소원은 무엇인가?] 심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본드래곤이 소환되었다. 박물관 화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뼈뿐인 그것이 난 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저, 저거 날 수 있는 겁니까?” 우진이 오만한 자세로 서있는 용용이 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방법이 없진 않지.” 우진이 용용이에게 다가가는데 갑작 스럽게 머리를 치켜세웠다. [쿠르르.] 위를 응시하는 듯한 그의 시선이 향 한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지랄 맞은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하늘에 구름 한 점뿐. “호오?” 우진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확연 히 느껴지는 기운은 심상찮은 것이었 다. [이브리트다.] “그래?” 용용이의 확인에 우진이 그답지 않게 슬쩍 표정을 굳혔다. “이거 버거운 놈이 왔네.” 칼날부리 까마귀들의 제왕. 불사조 까마귀 이브리트. 키아아! 괴성과 함께 나타난 거대한 동체는 타오르듯 물결치는 검은 털로 뒤덮여 있었다.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70좌라….” 70개 차원에서 신으로 숭배받는 존재. 이브리트의 등장에 우진이 인벤토리 에 두었던 장비를 모조리 꺼내 착용했 다. 제주 만장굴. “때가 되었다.” 그간의 긴 기다림 중에 지구로 현신 한 이후는 찰나의 시간이었을지 모른 다. 하지만 이엘로에게 있어 만장굴에 서 그저 웅크리고 있었던 시간은 억겁 보다 느리게만 느껴졌다. 모든 것의 방점을 찍을 날이 밝았다. 띠링 띠링. 휴대폰을 열심히 보고 있던 이상호가 보고했다. “서울에 검은 괴조가 출현했답니다.” “가져와라.” 그가 건넨 휴대폰의 사진을 보곤 이 엘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브리트군.” 70좌의 아주 성가신 존재. 권좌를 가진 대군주들의 순위가 무력 이나 전투력만으로 매겨지진 않는다. 랭킹은 어디까지나 관리 능력이 누가 더 우세한가 이고,권좌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했다. 강한 놈이 적게 가질 수도 있고,약 한 놈이 많이 가질 수도 있었다. 이브리트는 전투력만으로 놓고 보자 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군주. 25좌인 자신 또한 전투력 면에서는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 자신만만한 얼 굴의 이엘로가 만장굴을 나섰다. “느긋하게 사냥을 시작해 볼까?” 행성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지구. 동기화가 완료되었으니 마스터 코드 를 노린 영주 수백이 모일 것이다. 그 들 중 최고가 되자면 행성인들을 우군 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악당을 해치우고 구세주가 되어주마. “적당해. 아주 적당해.” 이브리트는 악당의 역할에 아주 충실 한 존재. 현존하는 지구의 전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애써봐야 체력을 빼앗는 정도 일 것이다. 그때 자신이 등장해 처치 하고 지구의 영웅이 되면 된다. 그의 지구인 가신,이상호가 그 물밑 작업도 이미 마쳐 놓았으니 말이다. 키아악! 이브리트의 강림은 혼자가 아니었다. 수천이나 되는 까마귀 떼와 함께 등 장한 그는 서울 일대를 휩쓸었다. 하늘을 장악해 버린 검은 새 떼가 빌 딩 사이를 요리조리 날아다니며 사람 들의 심장을 빼내 먹었고,자동차며 가스배관을 건드려 폭발을 일으켰다. 퍼엉! 콰앙! 폭발에 휩쓸려 까마귀 몇이 터져 나 갔으나 그야말로 소수. 검은 폭풍처럼 휩쓴 그들이 둥지를 튼 것은 한강에 뜬 밤섬이었다. 쿠우옹! 드래곤에 필적하는 거대한 덩치의 불 사조 까마귀,이브리트의 착지에 밤섬 을 가로지르는 교각이 고꾸라졌다. 쿠쿠쿵! 섬을 강 위에 뜨게 만들어버린 그는 곧장 가시나무를 심었다. 류아악! 거대하게 자라나는 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를 높였다. 동기화가 완 료되어 심벌의 제한도 없었다. 점점 굵어진 기둥은 밤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육중했고,뻗어나간 가 지가 한강 너머에 닿을 정도로 길어졌 다. 이파리가 없어 더욱 기괴한 가시나무 위에 이브리트가 착지했다. 도저히 지구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나무가 생겨나는 데엔 10 분도 걸리지 않았다. 키아아아. 나무의 꼭대기에 올라보니 서울의 모 습이 한눈에 보였다. 주위 던전의 입구만 수백 개.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의 기운만 수백 만.... 이브리트가 포효했다. [이곳을 이브리트님의 영토로 선포하 노라!] 그의 광포한 말은 지구의 언어가 아 니어서 괴성처럼 공기를 울리며 서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단 한 사람,그 뜻을 알아들은 이가 있었다. “개소리 하고 있네.” 유령마에서 훌쩍 뛰어내린 우진이 가 시나무 위에 착지했다. 워낙 큰지라 가시라 해도 거의 사람 하나랑 맞먹는 크기로 듬성듬성 자라나 그가 내디딜 공간은 충분했다. [네크로맨서….] 이브리트의 붉은 눈이 감겼다 떠졌 다. 흉폭한 그의 눈빛이 우진에게 쏘아졌 다. [굴종할 것인가? 사냥당할 것인가?] “사냥이지.” [용기에 보답해 주마.] 이브리트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거 대한 그것에 달린 털들이 바짝 곤두서 며 예리한 칼날이 되었다. 한 번만 스 쳐도 온몸이 걸레짝이 될 듯했다. 그 위협적인 모습만큼이나 우진은 감 각을 예리하게 벼리며 바짝 긴장했다. “이거 홍분되네.” 이브리트를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그저 제니스나 용용이를 통해 듣기만 했을 뿐. 직접 보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닌 녀석이다. 그를 상대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자신 있었다. 혼자가 아니니 말이다. 슈아악,콰직!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속 도로 대쉬한 이브리트의 한쪽 날개가 덮쳐 왔다. 훌쩍 뛰어올라 피한 우진은 날개 없 이 추락했으나 곧 유령마 씽씽이나 나 타나 그의 몸을 받쳤다. 키아아! 괴성만큼이나 날카로운 칼날들이 우 진을 향해 빗발쳤으나 영혼의 갑옷이 작동해 그것들을 모두 막아냈다. 그가 밤섬 아래로 향하자 이브리트가 자유 낙하하듯 떨어지며 몸을 회전시 켰다. 슈슈슈숙! 보다 강한 기운을 품은 털들이 비처 럼 쏟아지자 영혼의 갑옷은 차마 그것 들을 모두 막아내지 못했다. 츠츠촛! 몇 개의 칼날이 우진의 곁을 스쳐 가 며 상처 입혔다. 즉시 수집한 영혼들 이 흡수되며 치유되었으나,이 정도로 만만찮은 상대는 오랜만이었다. 네크로맨서로서 오를 수 있는 궁극에 이르고 나서는 말이다. “지금.” 아래로,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 기 다리고 있던 제니스와 해골마법사들이 이브리트 하나만을 노리고 마법을 난 사했다. 화르륵! 그러나 지옥불도 검은 털을 그을리기 만 할 뿐 태우진 못했다. 그때 여기저 기서 소환된 데스나이트들이 이브리트 의 몸에 달라붙었다. [잔챙이들.] 이브리트가 몸을 털어버리며 크게 괴 성을 질렀다. 키아아아! 그 피어에 영향을 받을 언데드들이 아니었지만,소리가 향한 것은 애초에 그들이 아니었다. 끼아악! 칼날부리 까마귀들 수천이 날아올라 시야를 어지럽히며 언데드 부대를 압 박했다. “해보잔 거지?” 수에서 밀릴 자신이 아니다. 우진이 즉시 불사의 군대를 소환하자 밤섬이 해골병사들과 검은 까마귀들로 뒤섞여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거의 다다른 이브리트 를 향해 거대한 본드래곤이 아가리를 벌려 목을 물었다. 쿠우우응! 한데 뒤섞여 바닥을 구른 두 거구에 주변의 나무들이 짓이겨 나가 섬의 귀 퉁이가 물에 잠겼다. 끝까지 물어뜯은 목줄을 놓지 않는 용용이를 보며 우진 이 소리 질렀다. “좋아. 그대로 잡고 있어.” [구오오오!] 길게 늘어뜨린 가시나무를 타고 질주 해 오는 강철 인형이 높이 뛰어올라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이브리트 의 정수리를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꾸아앙! 한강 물이 요동칠 정도의 충격파를 낸 공격이었으나 이브리트를 차원 너 머로 내쫓는 데는 충분치 않은 공격이 었다. [감히!] 힘껏 날갯짓한 까마귀의 신형이 하늘 로 솟구쳤다. 쿠앙,쿵! 가시나무 여기저기를 부딪치며 날자 매달려 있던 용용이마저 바닥에 곤두 박질치고 말았다. 키아아아아! 가시나무보다 더욱 높이 날아오른 이 브리트의 괴성에 지금도 쉴 새 없이 리셋이 일어나는 몇몇 지하철역이 반 응했다. 187. 블러드 드래곤(1)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 다.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온몸을 울렸 다. 쿠쿵,쿵! 충돌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니 적의 출 처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릴 필 요도 없었다. 눈을 두는 모든 곳에 적이 모습을 보 종족을 가릴 것도 없다. 오크,오우거,엘프,심지어 인간까 지…. 이브리트의 부름에 응답한 차원의 피 조물이 모두 강우진과 불사의 군대를 대상으로 돌진해 왔다. 서울 전역의 던전에서 기어나온 몬스터들이 도시 파괴를 멈추고 임모탈을 향했다. 쿠쿵,쿵. 차들로 북적일 도로는 거대한 몬스터 들의 행군에 몸살을 앓았고,대치 중 이던 군인과 각성자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이 보기엔 후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결집이다. 몬스터들이 모조리 밤섬으로 몰려들 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자리한 강우진이 사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도 적,저기도 적. 온통 눈을 시뻘겋게 해선 원망일지, 본능에 의한 흥성일지 모를 살기를 쏘 아 보내며 짓쳐들어오는 녀석들이 가 소롭다. “전 차원의 쓰레기들이 몰려올 기세 구만.” 차원 난민. 코드를 잃어 고향 행성 자체가 소멸 당한 불쌍한 존재들이라고 해야 할까, 포인트만 있다면 언제든 소환해 부릴 수 있는 꼭두각시라 해야 할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며 달려드는 녀석들을 고분고분 말로 설득할 정도로 우진의 성격이 인 자하진 않았다.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 죽음을 거부한 존재들의 왕. “깨끗이 청소해 주지.” 죽음으로…. 슈아아아! 우진의 주위로 실체화한 영혼들이 휘 돌며 거대한 영혼 보호막을 만들어냈 다. 지이이잉. 견갑에 달린 망토가 찢어질 둣 펄럭 였다. 〈트래쉬의 수호〉 파손된 갑옷이 완성되며 모든 봉인이 풀렸다. 영혼들을 무한대로 수집해 종 속시킬 수 있으며 그 힘을 세 배까지 끌어올리는 기물. 우진의 신발 또한 바뀌어 있었다. 〈트래쉬의 행진〉 내딛는 걸음마다 죽음의 기운을 남기 며,언데드들의 전투력을 배가시킨다. 그리고 그가 밟은 땅은 독으로 오염되 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유 혹한다. 해골이 장식된 벨트. 〈트래쉬의 위엄〉 파괴신의 위엄 앞에 굴복할 종속들이 늘어난다. 단 하나의 아이템으로 지배력을 두 배나 중가시켜 주는 효과를 낸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나머지 두 가지. 영광과 징벌을 맞추기 위한 하위 재 료 아이템을 구하지 못한 것이다. 공중요새의 방어를 위해 차원 영지의 남은 포인트를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 었다. 개인 상점에서 업적 포인트를 모두 털었음에도 단 세 가지 아이템을 완성하는 데 그쳤다. 다섯 가지를 모두 모아 발휘될 세트 효과를 기대한다면 불사의 군대는 지 금보다 더욱,질적으로 양적으로 강력 해질 것이다. “가볼까?” 슈아아악. 보호막이 걷히자 아귀다툼을 벌이는 언데드들과 몬스터들의 전장 소리가 귀를 울렸다. 후우욱! 우진이 발길을 내딛자 그의 걸음에 영혼이 몰려들어 걷도록 해주었다. 트래쉬의 행진으로 인해 씽씽이를 타 지 않고도 유령 질주를 사용할 수 있 어 이제 그에게 공중은 아무것도 아니 었다. 어디든 걷고 싶은 곳을 걸으면 된다. 허공을 뛰어 도약한 우진이 한강 위 에 놓인 악어 떼를 밟고 넘어오는 오 크전사들에게로 향했다. “이건 어떻게 써야 하나.” 우진의 손에 소환된 전사의 무기가 들렸다. 슈아악! 길어 늘어선 채 오크 하나의 머리를 감싸는 그것은 다름 아닌 채찍. 90레벨이 되며 형태 변환이 가능해진 채찍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화와 함 께 날카로운 절삭력까지 갖추고 있어 지나는 모든 것을 베어버렸다. “크아악.” 비명 지르는 오크들이 숨을 거두기 무섭게 시체가 터지며 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키킥. 두 배 이상 늘어난 지배력. 적들은 하나하나 죽어갔고 불사의 군 대는 하나씩 수가 늘어갔다. “네크로맨서를 죽여라!” “저놈을 잡아라!” 인간들도,엘프들도…. 심지어 드워프 전사들까지도 한강을 건너오기 시작했 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이곳이 서 울인 줄 몰랐다면 여기가 그들의 주둔 지라 착각할 정도였다. 파팟,팟! 저 멀리 빛기둥들이 연달아 올라오는 것을 보면 서울의 던전들은 심심찮게 리셋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기화의 시간도 필요 없이 몬스터들 이 기어나오니 길드고,군대고 막을 재간이 없었다. 피난 갈 시간도 부족해 고립된 사람 들이 숨죽이고 있는 상황. 70좌의 대군주. 이브리트의 권능에 그 모든 몬스터가 밤섬으로 집결하고 있으니 오히려 서울의 시민들은 도망 갈 시간을 번 셈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몬스터들이 진군해 가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고,몇몇은 피난을 포기하고 그저 구조를 기다렸 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밤섬을 구경하며 촬영했다. [쿠오오! 키바가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아쉽군.] 데스나이트 람손이 아쉬운 둣 망치를 휘둘렀다. 전장이 꽤 익숙한 죽음의 기사들도 끝없이 몰려오는 적들을 맞 이하긴 오랜만. 죽이고 죽여도 끝이 없는 데다,살아 있는 자들의 두려움과 광기가 전장의 공기를 무겁게 하며 농도를 더해갔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마음껏 그 기분에 취했다. 화르르,광! 여기저기 피어난 지옥룡 히드라의 입 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커다란 지팡이에서 연신 마법을 난사 하는 리치 제니스의 얼굴은 짙은 마력 으로 전체가 붉게 보일 지경이었다. [오너라! 구원해 주마!] 살아서 고통이라면 죽여서 구원해 주 마. 리치의 마법이 끊일 줄 몰랐다. [구오오!] 채채채챙,티팅! 거대한 아이언 골렘이 움직일 때마다 밤섬의 나무들이 쓰러졌고 시체들이 쌓여갔다. 문명을 가진 몬스터들이 죽으며 떨어 트린 검과 방패 따위의 쇠붙이가 자석 에 이끌리듯 골렘의 덩치를 불려갔다. 쌓이고 쌓인 시체가 한강을 채우고, 홀러나온 피가 붉은 강을 만들어냈다. 쿠우우응!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날뛰는 거대 한 존재. [소원이 무엇인가?] 본드래곤이 대답 없는 질문을 이으며 피식자들을 씹었다. 과광! 붉게 물든 물보라가 요동치며 사위를 적셨다. 어느새 주위엔 언데드와 시체뿐이라 여겨지는 그때. 하늘로 치솟았던 불사조 까마귀,이 브리트가 수직 하강했다. 쿠아앙! 뛰어오른 본드래곤의 몸통 박치기로 가시나무 기둥에 처박힌 이브리트가 날린 날카로운 털뭉치들이 피아를 가 리지 않고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슈아아악! 뱀처럼 날아온 채찍은 까마귀의 목을 감쌌다. “잡았다…. 어?”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던 우진이 이 브리트가 점프하자 거력에 이끌려 채 찍째로 딸려 올라갔다. “허,참.” 채찍의 날카로움도 이브리트의 살은 커녕 털끝 하나 베어내지 못했다. 우 진이 매달려 있건 말건 솟구치는 이브 리트의 속력은 더욱 빨라졌다. 이대로 끌려가다간 방법이 없다 싶어 무기를 소환 해제시키고 가시나무 가 지 위에 착지했다. 슈아악! [좀더 재롱을 지켜보는 것도 좋겠지.] 하늘 높이 올라가버린 이브리트의 말 에 우진이 고소를 머금었다. 놈은 자신이 힘을 빠지길 기다리고 있다. 주변에서 리셋이 일어나는 던전들도 놈이 뭔가 수를 부린 것이 틀림없다. 70 좌. 70개의 행성의 코드를 가질 동안 얼 마나 많은 포인트를 축적했을까? 놈이 그것을 모두 쓴다면 얼마나 많은 군대 를 동원할 수 있을까? “지금은 안 되겠다,이거지?” 자신이 힘이 빠지길 기다리고 있음은 녀석의 한계 또한 고백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이브리트는 자신의 전력 밑이 다. 우진이 가시나무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죽은 시체들이 즐비한 가운데 불사의 군대가 살아남은 적들을 도륙하고 있 었다. 시체가 다리가 되어 꽉 막혀버린 한 강의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진군해 오 고 있었다. 우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소환.” 슈아악. 해골들이, 데스나이트가,리치에 본드 래곤까지도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밤섬에 남은 것은 우진뿐. “네크로맨서의 마력이 다했다!” “놈을 잡아라!” 몬스터들이…. 정확히는 차원 난민들 이 달리기 시합하듯 내달려왔다. 섬에 도착해 가시나무를 오르는 놈들 부터,성급하게 화살과 투창을 날리는 녀석들까지 수천,아니,수만에 이르는 병력들이 모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력이 부족하다고?” 우진이 두 손을 아래로 향했다. 시체와 울부짖는 영혼들이 저리도 많 은데 부족할 리가 있나? “시체 폭발.” 꾸아아아앙!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이 모조리 터져 나가며 사위를 집어삼켰다. 터진 것만큼이나 더욱 많은 시체가 생겨나 사방에 피와 육편을 뿌려가며 지옥도 를 연출했다. 중발. 그 폭발의 여파에 밤섬이 사라졌다. 쿠우우옹. 크게 진동한 가시나무가 쓰러질 듯하 면서도 그 뿌리를 더욱 단단히 지면에 박아 넣었다. 한강물이 중발하듯 사라졌고 곧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밀려드는 파도의 빛깔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우진의 눈에 보이는 수만의 영혼이…. 슈아아아. 모조리 빨려 들어와 트래쉬의 수호 아래 모여들었다. 수백의 영혼을 그대 로 흡수하자 바닥까지 떨어졌던 마력 이 일시에 회복되었다. 해골 소환을 시전하자면 굳이 매개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사방에 널린 게 피와 뼈와 시체였으니…. “소환.” [구오오!] 다시 소환된 불사의 군대가 포효하며 다시 밀려들어 오는 몬스터들을 맞이 하기 위해 군진을 이뤘다. 우진의 시선은 하늘에서 배회하는 불 사조 까마귀를 향했다가 울부짖는 본 드래곤에게로 옮겨갔다. “용용아,후반전이다.” [소원은 무엇인가?] “네 소원은 뭐지?” 수다스럽던 치매 드래곤이 침묵했다. 우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최악 최강의 권속. 그리 길지 않은 침묵이 지나고 수천 년을 품은 욕망을 뱉었다. [내게 날개를 달라.] 날지 못하는 용이 어디 드래곤인가? “기꺼이 주지.” 우진이 미소와 함께 아이언 골렘을 보았다. [구어어.] 쿵,쿵. 쿠쿵. 아이언 골렘을 이루던 갑옷 같은 철 덩어리들이 한둘 떨어지더니 이내 반 딧불 같은 골렘의 심장만 남은 돌쇠가 주변의 피를 빨아들였다. 슈아아악! 피의 안개처럼…. 회오리처럼 모여든 피들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본드래 곤. 거대한 갈비뼈의 사이에 자리 잡은 골렘의 심장이 주변의 피를 모조리 빨 아들일 둣 흡수했다. [그어어어어어.] 울부짖는 용이 몸을 활짝 펼쳤다. 앙 상한 뼈마디에 얼기설기 붙은 피가 딱 지가 되어 살을 이루었다. 뼈창처럼 보이던 날개에 피막이 생겨났다. 붉어진 삐와 콧잔등뿐이던 그것에 피 가 뒤덮였다. 슈아아. 한없이 빨아들인 피…. 피.... 수만의 재물을 바쳐 최악의 권속들이 힘을 합쳤다. [쿠오오오!] 울부짖는 블러드 드래곤의 피어는 진 군해 오던 몬스터 대군들이 움찔할 정 도의 기세.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대 소원은 무 엇인가?] 늠름한 에이션트 드래곤의 부활에 우 진이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손가락 하 나를 하늘로 가리켰다. “까마귀를 잡아와.” [기꺼이.] 쿠우응! 큰 족적을 남긴 도약과 함께 블러드 드래곤이 날아올랐다. 다시 바닥까지 떨어져 버린 마력을 영혼을 보충해 채운 우진이 자신의 지 배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주변의 시 체들을 부렸다. 파파팟! 연쇄 폭발하듯 터진 그것들을 찢고 나온 것은 스켈레톤들. 네크로맨서가 지치길 기다린다고? 두 배로 불어버린 불사의 군대가 임 모탈의 명령을 기다렸다. “쓸어버려.” [쿠오오!] 우진의 명령에 포효하는 데스나이트 들과 그들을 따르는 스켈레톤들이 사 방을 향해 돌격했다. 188. 블러드 드래곤(2) 슈아악. 거대한 붉은 동체가 하늘을 날고 있 었다.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용용이라 불리기 전의 이름 따위 기 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속에서 피를 휘돌리는 골렘의 심장이 익숙하 다. 에이션트 드래곤. 용솟음치는 피가 자신의 자아를 되찾 아 주는 것만 같았다. 슈아악!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른 드래곤이 하 늘에서 선회 중이던 이브리트와 맞닥 뜨렸다. [해괴한 놈이군.] 그의 짧은 감상에 용용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콰직! 피하려 마음먹었건만 그럴 수 없었 다. 피와 날개를 찾은 용용이의 움직 임은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 힘은 얼마나 강력해진 것 인지 칼날과 같은 털과 가죽을 찢고 이빨이 이브리트의 날개에 박혔다. 깨무는 단순한 동작이 주는 데미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과직! 발톱으로 이브리트의 몸통을 단단히 쥔 용용이가 이빨에 꽉 낀 날갯죽지를 물고 허리를 비틀었다. [크아악!] 괴성만큼이나 큰 파열음과 함께 날개 가 찢겨 나간 이브리트가 버둥거렸다. 후우응,후우응! 한데 뭉쳐 추락해도 이상치 않았으나 용용이의 힘찬 날갯짓에 거구의 두 동 체가 하늘에 떠 있을 수 있었다. [이런 무식한!] 콰직! 입안에 가득 든 날개를 뱉어버린 용 용이가 고민할 것도 없이 이브리트의 머리통을 깨물었다. [어이가 없군.] 드래곤의 악취가 느껴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혈향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컴컴한 동굴에 들어온 듯 용용이의 입에 머리째로 물 려버린 몸이 불타올랐다. 화르륵. 검은 몸 전체가 타오르며 떨어진 날 갯죽지에서 피어난 불꽃이 다시금 깃 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날개. 불이 꺼지면 재생이 완료되리라. 입안 가득 느껴지는 열기에 진즉 뱉 어도 이상치 않았지만 죽은 드래곤에 게 불타 상처 입을 입천장 따위는 없 었다. 콰드득! 화끈한 열기와 함께 그대로 뜯어내 버린 까마귀의 머리통을 꿀꺽 삼켜버 렸다. 파파팟. 이브리트의 몸이 회색빛으로 화해 사 라지자 블러드 드래곤이 포효했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용용이가 다 시금 낙하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주춤 했다. 명령 앞에 맹목적으로 돌격하던 이들 이 자신의 목숨을 걱정할 때,전투는 끝이 났다. 우왕좌왕하는 그들을 보며 우진이 팽 팽하던 긴장을 풀었다. “잡았나 보네.” 이브리트를 잃은 그들은 군대가 아니 었다. 불사의 군대 앞에 학살당하는 한낱 몬스터. 우진의 추측에 화답하듯 블러드 드래 곤이 그의 곁에 착지했다. 쿠우옹. 한강 물이 요동치는 가운데 주변은 시체들로 군데군데 섬이 생겨날 정도 였다. 트래쉬의 세트를 모두 완성했다면 그 들 모두를 언데드로 부활시킬 수 있었 을지도 모를 일. 블러드 드래곤이 시체들을 밟고 선 채 머리를 쭉 내밀어 물었다. [소원이 무엇인가?] 우진이 피식 웃으며 뿔에 손을 대었 다. “한번 날아보자.” 그가 훌쩍 뛰어 용용이의 등에 올라 탔다. 쿠우응! 힘찬 도약과 함께 거대한 드래곤이 날아올랐다. 대피소. 우승훈과 직원들은 밖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거대한 모니터 화면과 전파가 끊어지지 않은 라디오 소리에 집중했 다. 「놀랍습니다. 아르달의 모든 힘은 국왕에게 있다는 총리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나요? 최악이 되어버릴 뻔한 던 전 브레이크로부터 그가 서울을 구해 냈습니다.」 “허,진짜. 할 말이 없다.” “시발,왜 이제 돌아온 거야?” “아아,동민아. 내 새끼이…. 흐흑.” 환호하고 절규하고 불만이 가득한 사 람들의 소음 속에 우승훈은 직원들과 함께 조용히 대피소를 빠져나왔다. 폭격을 맞은 듯 엉망이 되어버린 거 리는 군인과 각성자들이 삼삼오오 몰 려다니며 혹시 남았을지 모를 몬스터 들을 소탕하며,부상당한 사람들을 구 조하고 있었다. “후우,정말이지 국왕님은 엄청나신 것 같습니다.” “새삼 아르달의 국민이라는 게 자랑 스럽습니다.” 대피소에서는 괜히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밖으로 나와서는 너도 나도 한마디씩 했다. 강우진이 아르펜으로 넘어간 뒤로 은 근히 아르달을 압박해 오는 국제적인 여론 몰이에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터 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한국. 배신이니,변절이니,심지어 빨갱이 소리까지 해대며 아르달을 깎아내리고 폄하하는 통에 언론들의 밑바닥까지 본 듯해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어어? 실장님 저,저기!” “어?” 어느 직원이 가리킨 방향을 보자 거 대한 몬스터 하나가 바닥으로 내려오 고 있었다. 쿠우응. 드넓은 10차선 도로가 비좁아 보일 정도의 덩치를 가진 그것. 착지하자마자 널브러진 차들을 헤치 며 걸어오는 존재를 보며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아파트가 기어오는 것 같아.’ 그 압도적인 크기와 위압감에 얼어붙 은 그들의 앞까지 당도한 블러드 드래 곤이 머리를 쭉 내렸다. 미끄럼틀처럼 목을 타고 중간까지 내 려오다가 머리 위에 선 우진을 보곤, 직원들의 얼굴에 팽팽했던 긴장과 두 려움이 걷혔다. “국왕님!” “타라. 가자.” 아무렇지도 않은 우진의 말에 딱딱하 게 굳은 그들 사이에서 우승훈이 재빨 리 발길을 옮겼다. “어디로 타면 됩니까?” “아….” 발톱 하나가 사람 몸통보다 컸으므 로,일반인이 블러드 드래곤의 등 위 에 오르자면 암벽등반을 해야 할 판이 다. 우진이 손을 뻗자 부드럽게 감싼 마 력의 손길이 그들의 몸을 들어 용용이 의 등에 안착시켰다. “허어.” “。욱 ” 기대와 달리 진하게 느껴지는 혈향에 몇몇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몇은 헛구 역질을 심하게 했다. 우진이 뒤를 돌아보곤 고개를 갸웃했 다. “출발도 안 했는데 멀미해?” “하하. 그, 그렇지요.” 우승훈이 본인도 파리해진 안색을 하 곤,어색히 웃으며 맞장구쳤다. 우진이 피식 웃고는 그들을 모두 감싸는 보호 막을 만들어냈다. 쿠우응. 블러드 드래곤이 땅을 박차고 도약하 자 역한 피 내음을 신경 쓸 겨를 따위 는 없었다. 보호막이 바람을 막아준다 곤 하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체를 붙잡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블러드 드래곤이 훌쩍 떠나버린 서울. 방송용 헬기가 전장의 소음이 잦아든 르달의 강우진 국왕은 아무런 코멘트 없이 자리를 떠난 가운데 군과 길드들 로 꾸려진 복구반이….” 여기저기 비추는 카메라들 사이로 몬 스터라 불리기엔 지나치게 인간과 닮 은 이종족들도 보였다. 아니,이종족이라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도 다수. 카메라가 우뚝 솟은 가시나무를 담았 다. 거대하고 거대한 비현실적 상징물. “진정 외계 행성의 침공이 본격화되 려는 걸까요? 한국은 이제 서울을 버 려야 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나치게 많은 던전. 지배자가 되리라. 쩌저정. 이엘로 주변의 땅이 얼어붙더니 얼음 기둥이 솟아나 그를 태우고 가시나무 를 향해 뻗어나갔다. 얼음의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이상호도 어수선한 도로를 걸 었다. ‘생각보다 조용한데?’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주는 묘한 위 화감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널브러 진 시체들과 부서진 건물들이 분명 이 곳이 전장이라고 말해주고 있건만 지 나치게 조용했다. 포탄 소리도,괴성도 들려오지 않았 띠링 띠링. 울리는 알림에 휴대폰을 꺼내본 이상 호의 표정이 굳었다. [강우진이 벌써 털었습니다. 후퇴 요 망.] 부하 직원이 보내온 메시지에 이상호 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서둘러 인터넷에 접속해 보니 속보로 서울의 대규모 브레이크와 이브리트를 해치우는 정체불명인 붉은 용의 전투 를 담은 영상이 링크되어 있었다. “제길,한발 늦었어.” 이중으로 장치를 했건만 강우진이 아 르펜을 벗어나 귀환하고 말았다. “망할 쪽바리 놈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이 라도 지연시켜 주리라 기대했건만 그 들이 벌어다 준 시간은 채 하루도 되 지 않을 듯싶었다. 이미 전투가 종료된 상황. “이엘로님,지금은….” 분수에서 뿜어지는 물줄기마냥 뻗어 나간 얼음 기둥…. 아직도 자라나고 있는 얼음의 기둥은 그를 가시나무 근처로 데려가고 있었 다. 이미 끝나버린 전장에 얼음 인간의 출현이 알리는 것은…. “젠장!” 구원자가 아닌 새로운 침입자의 등장 이었다. 쿠우우옹. 거대한 하늘 요새가 휘청거렸다. 한쪽에 비워둔 갑판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와이번들을 내쫓고 착지한 블러 드 드래곤의 등장에 비비캐슬이 들썩 였다. “우웨에엑.” 이제 토할 기력도 없을 것만 같았건 만,착지와 동시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의미 없는 헛구역질을 하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우진이 훌쩍 뛰어 내렸다. “주인니이 임!” 한걸음에 달려나와 품에 안기는 서큐 버스. 비비의 포옹에 우진의 표정이 굳었 다. 그녀의 야한 의상이 문제는 아니었 다. 이제 꼬마 악마라 부를 수 없는, 아르펜에서야 익숙하게 보아온 그녀의 모습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동기화가 끝났구나.” “네. 이제 모든 힘을 쓸 수 있어요.” 자랑스레 말하는 비비의 말이 기쁘게 만 들리지는 않았다. 환영의 마녀의 힘은 강력하지만 그녀만 힘을 되찾은 건 아니니 말이다. 전 차원의 영주들이 지구에서 제 집 처럼 힘을 쓸 것이다.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정민찬의 인사와 그 옆에 서 있는 수 아와 어머니,그리고 그 뒤를 든든하 게 지키고 있는 도재민과 도지원까 지…. “고생했다.” 어머니의 말에 우진이 씩 웃었다. 옆 에서 손 잡고 있는 수아는 며칠 오빠 얼굴을 못 봤다고 어색한지 낯설어했 다. “어미는 나중에 보고 일 보거라.” 괜히 바쁜 시간을 벳을세라 얼굴만을 확인하곤 어머니가 먼저 자리를 피했 다. “저,국왕님. 먼저 만나보셔야 할….” 우진이 정민찬과 악수하며 말을 잘랐 다. “다켄길드는 왜 보낸 거야?” “예? 후발대로 게이트 사용 협조를 부탁해 와서….” 그들의 배신은 아직도 모르는 모양. 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 다. “뭐,그 이야긴 나중에 하고. 서울처 럼 터진 데가 몇 군데야?” “거의 전부입니다. 아직도 수습 못 한 도시들이 많습니다.” 다행히 영국은 이제 어느 정도 막바 지에 접어든 상황. 애초에 런던을 비 우고 지하철역이 없는 대규모 거주지 로 민간인들을 모두 이주한 덕이었다. 인명 피해 걱정 없이 화력 무기를 마 음껏 사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영국은 그래도 비비님께서 활약해 준 덕분에 막바지입니다.” 우진이 돌아보자 비비가 활짝 웃었 다. “내가 차원 영주 하나를 끝장냈어 요.” “잘했네. 그럼 제일 가까운 브레이크 도시가 어디야?” “그리스입니다. 지금 이동 중입니다. 그보다 먼저 만나셔야 할 사람이 있습 니다.” 비비캐슬은 지금 하늘을 운항 중이었 다. 목적지는 그리스. “누군데 그래?” 정민찬이 조심스레 답했다. 영국의 브레이크를 소탕하고 그 와중에 강우 진을 만나기를 청하며 비비캐슬에 탑 승한 인물. “김 강철 입니다.” “호오.” 우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 발로 찾아왔단 말이지? 189. 문 월드(1) 접견실이라 하기에는 너무 식믹한 공간. 창문 하나 없이 외부와 철저하게 격 리된 방은 고작 두 개의 의자가 전부 였다. 그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남 자. 끼이익. 김강철은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강우진이 모습올 보이자 자리에서 일 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말에 우진이 씩 웃었다. “간 크네.” 그렇게 당하고 겨우 도망쳐 놓고는 제 발로 이렇게 찾아오다니 말이다. 우진이 의자에 앉자 김강철도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할 말이 뭐야?” 여전히 단도직입적인 그의 물음에 웃 거나 뜸을 들이거나 상대의 의중을 파 악하기 위해 탐색하는 일체의 행위 자 체는 시도하지 않았다.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누구? 토플러?” “직접 오라고 그래.” “아직 올 수 없습니다.” “흐음.” 우진이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우습게도 불편한 자리가 고민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왜 못 와? 죽을까 봐?” “죽일 생각이십니까?” “뭔가를 숨기고 접근하는 놈들올 좋 아하지 않아. 너도 그렇고 말이야.” 우진의 은근한 협박에도 김강철은 태 연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런 상황 자 체를 받아들인 둣 죽음마저 초월한 담 “당신과 저의 만남은 처음이 아닙니 다.” “알아. 전에 봤잖아.” “아뇨. 지금 이 자리가 말입니다.” 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불 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둣 분위 기가 험악해졌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앞에서 그렇게 지껄이는 놈들은 전부 죽었지.” “또 이 자리가 반복되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알아듣게 이야기 해.”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높아진 눈높이만큼이나 팽팽한 긴장 감이 김강철을 압박해 왔다. “그들의 예언대로 당신의 행동은 언 제나 똑같군요.”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는데?” 말뿐이 아닌지 우진이 손올 활짝 펼 쳤다. 위이이잉. 그의 손 안에 뭉친 마력의 덩어리에 김강철은 잠시 눈빛을 주었을 뿐,혼 들림은 없었다. 자신의 역할이 여기까지라면 죽어도 좋다. 다만,아쉬운 것이 있다면 지구의 구 원을 보지 못한다는 것. “지구를 구하는 데 제 목숨이 필요하 다면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꼭 전할 말들이 있습니다.” 김강철은 말을 빨리했다. “당신은 정해진 운명의 시간보다 지 구로의 귀환이 늦었습니다.” 아르펜에서 지구로 돌아온 것을 말하 는 건가? “그래서?” “어쩐 일인지 이엘로의 등장이 빨라 졌습니다.” “이엘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 같다. “안타까운 것은 빨라진 탓에 당신이 아직 자격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것입 니다.” 우진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싫다. 꼭 자신의 머리꼭대기에서 노는 듯한 ^들이. 운명,계시,예언,신.... 싫어하는 것들을 종합 선물세트로 쏟 아내는 김강철의 입을 당장에 틀어막 아 버리고 싶다. 무엇이 운명이란 말인가? 자신은 정해진 길을 따라 걷는 자가 아니다. “당신이 준비가 되었을 때 토플러 박 사가 접촉해 을 것입니다. 문 월드와 지구 모두를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오 로지 당신뿐입니다.” “그런 놈들이 지들은 정체를 꽁꽁 감 추고 있어?”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메르디처럼 모든 것을 꺼내 보여야 할 것 아닌가? 우진에게 있어 문 월드는 불가해의 차원이었다, 그곳에서 왔다는 토플러는 영혼이 보이지 않는 첫 번째 인간이었 으니.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에 대해서는 두려음과 거부감을 느끼 게 마련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동맹을 위한다면……, 같은 목적을 바란다면 이 이해 불가능한 상황을 먼저 설명해 줬어야 한다. 지금처럼 본인이 아닌 김강철이라는 전령을 보내서가 아니라. 위이 잉. 우진의 손에 뭉쳐진 마력의 덩어리가 굳었다. 한 번의 주먹으로 머리통을 깨부술 만한 위력이 담긴 그것이 휘둘 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전할 말입니다.” 그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다가올 운 명에 순응했다. “당신은 왜 레벨 업을 하는지,이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신 적이 없습니까?” 김강철이 눈을 감았다.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 성서처럼 믿고 따랐던 예언서…. 신 과 닿아 있는 그들을 믿고 지구의 구 원올 바라 마지않던 자신의 역할은 이 것으로 끝이다. 위이 잉. 뭉쳐졌던 마력이 흩어졌다. 감았던 눈에 힘을 풀어 실눈을 떴다. 멍한 얼굴의 강우진이 보였다. 제대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 김강철은 질문도 대꾸도 하지 않았 다,그저 기다릴 뿐.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혼란스러운지 초점 없는 강우 진의 눈동자가 혼들리고 있었다. ‘왜 나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지?’ 비현실적인 현상. 아니,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레벨 업이라니…. 게임도 아니고 말 이다. 의문이 생기자 꼬리를 물었다. 왜, 아르펜으로 소환되었는가,아르펜 과 지구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토플러…. 어디서 만날 수 있지?” “준비가 되면 찾아올 것이라 했습니 다.” “준비라….” 레벨 업을 말하는가,열쇠라 불리는 트래쉬의 집행을 말하는가. 수호를 비롯한 방어구들은 모두 아르 팬에서 얻은 보물들을 가공해 얻올 수 있는데 집행은 어찌하여 지구에서 얻 을 수 있는가? 지구와 아르팬은…. 고민은 끝날 줄 몰랐고 생각은 막힘 이 없었다. 해답은 찾을 길이 없고,시 간은 많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필요하다면,선택이 아 닌 둘 다 갖추면 될 일. “년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체념한 듯한 김강철의 얼굴에 감정이 피어났다. “죽이지 않으십니까?” “내가? 왜?” 언제는 이유를 가지고 살인을 저질렀 나. “뒤가 구리면 그때 죽이기로 하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저 죽일까? 김강철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지 않는 한,문 월드에서 보낸 전령인 그와 반 목할 이유 따위 없다. 쿠쿵. 닫혔던 문이 열리고 강우진이 방을 나서자 김강철이 훌린 둣 의자에서 일 어섰다. “…바뀌었다.” 성서와 다름없던 운명의 서의 마지막 장이 덮였으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 다. 이후의 삶을 생각해 본 적 없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구원자를 지켜 볼 수 있으리라. 걱정스레 기다리고 있던 정민찬이 물 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 강우진이 아직도 머리가 아픈지 관자 놀이를 꾹 눌렀다. “김강철이 그대로 가둬놔.” “탈출하고자 하면 가능할 텐데요?” 고위 각성자인 그가 몰래 탈출하고자 하면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나가고 싶으면 나가겠지, 남고 싶으 면 남겠고.” 가든 말든 상관없다. 적어도 진실을 감추고 있는 문 월드 의 의지는 읽을 수 있을 테니. 볼모로 남든,떠나서 뒷일을 도모하 든 말이다. “그리스는 언제 도착해?” “세 시간 후입니다.” “흐음.” 99레벨까지는 이제 코앞. 사냥을 해야 할까? 남은 트래쉬의 세 트 두 개를 얻기 위해 포인트를 벌어 야 할까? “둘 다 하지 뭐.” “예?” “재민이 나한테 오라 그러고, 년 할 일 해.” 우진이 그리 말하고는 휘적휘적 걸어 갑판 위로 향하는데 정민찬이 아직까 지 뒤따르고 있었다. “년 할 일 하라니까?” “사장님 일 돕는 게 제 할 일이죠.” “할 일 없구나.” 총리라고 무슨 대단히 바쁜 일이 있 을까? 공중요새는 여기저기 큰 브레이크가 일어난 도시를 항해하고 있었고,전투 는 비비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저 타 국가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 으면 스케줄을 조정해 항로를 정하는 것 정도. 그마저도 부하 직원들이 알아서 하고 있다. “편하고 좋네. 보니까 아주 시커떻게 구린 놈들도 보이던데, 직원 단속이나 해.” “예에?” 우진이 오가는 와중에 영혼의 색이 너무 구려 악취가 나는 놈들이 더러 있었다. “직원들 너무 막 뽑은 거 아냐?” “…즉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정민찬이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 지원부의 인재들 은 모두 자신이 뽑았다. 천 명이 넘는 사람을 꼼꼼히 살펴보고 채용했으나 놓친 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진은 황급히 집무실로 향하는 그를 뒤로하고 갑판의 한쪽 귀퉁이,와이번 둥지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용용이에 게로 다가갔다. [그대 소원이 무엇인가?] 우진이 피식 웃으며 돌쇠와 비비를 소환했다. 파팟. “아앗,주인님.” 통제실에서 놀고 있던 비비가 갑작스 럽게 소환되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비비,난 할 일 있으니 용용이랑 돌 쇠랑 힘 합쳐서 차원 영주들 쓸어버 려.” “오호,맡겨주세용.” 뒤이어 데스나이트들과 제니스를 소 환했다. 슈아아악. 둥장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내 뿜는 그들을 보며 우진이 굳은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보이는 놈들은 죄다 쓸어버려.” [로드의 명에 따라….] 이들의 사냥으로도 자신의 경험치는 오른다. “형,찾으셨어요?” 때마침 도재민이 다가오자 그를 데리 고 포탈로 향했다. “년 나랑 좀 가자.” “아르팬이요? 해솔 대장하고 성구 형 데리러 가요?” “개들이 애냐. 올 때 되면 오겠지.” “그럼 어디 가요?” “포인트 올리러.” “예?” 의문스러워하는 재민을 데리고 도착 한 곳은 차원 영지 아르달. [마이 로드….] 주인 없는 성을 굳게 지키고 있던 키 바가 그의 등장에 무릎 꿇었다. “음,다음엔 진짜 전장에 데려다줄 게.” [명을 기다립니다.] 누구든 키바와 교대해 줘야 할 둣싶 었다. 신나게 날뛰는 다른 데스나이트 들에 비해 간간이 던전을 통해 도전해 오는 모험가'을 맞이하는 게 전부니 말이다. “재민아.” “네, 형.” “포인트가 필요해.” “음…. 뭘 할까요?” “무한 영지전이다.” 우진의 말에 재민이 씩 웃었다. 백작의 피를 이어받아 뱀파이어 로드 가 되었다. 태양의 저주도 벗어나고 피의 갈망 또한 충분히 통제 가능해졌다. 인간과 다를 바 없었으나, 힘과 반사 신경,시 력…. 모든 능력은 이미 인간의 수준 을 벗어난 지 한참 전. “맡겨주세요.” 제대로 피지컬의 폭발을 보여주마. 도재민이 전략관의 의자에 앉았다. 우진이 왕좌에 앉고는 이름을 볼 것 도 없이 영지전을 신청했다. 거부해도 상관없고 받아도 상관없다. 전 차원의 영주들을 모조리 털어줄 작 정이었다. 트래쉬의 남은 두 가지 세트 방어구 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포 인트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리아님에게 영지전을 신청하셨습니다.〉 그저 막무가내로 고른 상대의 이름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또 얘네.” 전 차원을 향한 우진의 전쟁이 시작 되었다. 끼아앙, 깡. 쇠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며 공방을 가득 채웠다. “토플러님, 배식이에요.” 구겨진 철판 조각을 펴던 망치질을 멈춘 토플러가 작은 바구니를 가져온 아이를 보며 웃었다. “고맙구나,소소.” 소소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꾸벅 인 사하고는 다른 바구니를 들고 종종걸 음으로 사라졌다. “휘유.” 고된 노동의 한숨과 함께 가져온 것 을 열어젖히니 물이 담긴 수통과 정체 룰 알 수 없는 죽이 담긴 그릇이 나왔 다. “으음.” 아무런 맛도 없는 죽을 퍼 입안에 넣 자 씹을 것도 없이 흘러들어 갔다. 볼 품없지만 감사한 식사 시간은 길지 않 았다. 물을 깨끗하게 비운 토플러가 창밖의 까만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기대감 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후우,이번엔 반드시….” 이곳은 이미 한계다. 이번에도 리셋이 일어난다면 문 월드 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를 일. 모든 것은 키를 가진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190. 문 월드(2) “좀 쉬자.” “네,형.” “몇 연승이지?” “75 연승이요.” 아직도 크게 지쳐 보이지 않는 재민 을 보며 우진이 혀를 내둘렀다. “안 지치냐?” “헤헤,겨우 하루 게임한 거 가지고.” “그래,게임….” 재민의 말에 우진이 씁쓸히 웃었다. “그럼,계속할래?” “네. 힘들면 쉴게요.” “그렇게 해.” 우진이 할 일이라곤 영지전에 불복해 결투를 신청해 오는 차원 영주들을 상 대해 주는 것뿐이다. 그것도 호전적인 몇몇일 뿐 대부분은 영지전에서 패배 후 복수를 신청하지 않았다. 재민이 다시 영지전으로 곧장 빠져드 는 것을 보면서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 섰다. 왕좌에 앉아 차원 상점을 뒤지며 포 인트가 쌓이는 대로 재료 아이템을 샀 지만 아직 하나의 아이템도 완성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동기화가 완료된 지구와 차원 영지 간의 시간 차이는 없다. 이곳에 서 하루를 보냈으니 지구도 하루의 시 간이 흘렀다. “한번 다녀올까?” 행성끼리의 차원 사이에 끼인 공간이 차원 영지. 이곳에서는 영지의 가신들과 메시지 가 가능했다. 아르펜의 메르디 쪽도, 지구의 비비 쪽도 별말이 없는 걸 봐 서 큰일은 없는 모양. 복수 신청에 대한 결투야 키바가 대 신 치르면 될 일이다. 그마저 패배하면 그때 돌아와 갚아주 면 그만. 우진은 아르펜의 소로스 거점으로 향 하는 게이트의 앞에 섰다. 지이잉. 포탈을 통과해 도착한 소로스 거점은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것이 그 으로 하여금 실망감을 들게 하였다. “뭐야? 아직이야?”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작은 불꽃을 보며 우진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성 구 녀석,얼마나 욕심을 부리기에 아 직도 발화 중일까. “내 말 들리면 적당히 하고 나와.” 화르륵. 들리는지 마는지 성구는 말이 없었 고,임모탈의 등장에 호들갑 떠는 사 람들 사이로 메르디가 모습을 보였다. “임모탈이시여.” 유난히 반가워하는 기색이 느껴져 우 진의 마음이 싱승해졌다. 평생을 바쳐 온 신께 버림받아 힘을 잃어버린 그녀 가 마음 쓰였다. “별일 없지?” “예에. 어쩐 일인지 아르펜에 던전을 사는 차원 영주들이 눈에 띄게 줄었습 니다.” 공략된 던전만 하여도 수십 개. 리셋이 일어날 만하건만 간간이 일어 나는 것도 힘없는 하위 영주들이거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던전 하나 구입한 던전 오너들의 것이었다. 그들 정도라면 연합의 영웅들만으로 도 충분히 공략이 가능하다. “그렇겠지,난다 긴다 하는 놈들이 전부 지구에 와서 설쳐대니까.” 지구의 각성자 전력도,화력 무기를 기반으로 한 전투력도 우수하다. 아직은 잘 막아내는 듯싶지만,소모 적인 전투로 인해 언젠가는 차원 영주 들이 승리할 것이다. 아르펜의 전쟁이 200년이나 계속되어 온 것을 생각하면 차원 영주들의 소모 적인 공격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 다. 그들은 느긋할 뿐이다. 조급한 것은 수비해 내는 지구인들. 행성을 떠나와 이곳 아르펜에 거주 중이던 지구 출신 또한 다르지 않았 다. “국왕님!” 블랑카와 팬텀 부대원들의 격한 반가 움에 우진이 피식 웃었다. “해솔이는?” “깨어나셨습니다.” 팬텀부대의 부대장 준용의 말에 우진 이 두리번거렸다. “어딨냐?” “…이 편지를 두고 떠나셨습니다.” “응?” 그가 건네주는 편지를 넘겨받았다. 글귀는 짤막했으나, 해솔의 마음이 전해지기는 충분했다. -지금의 저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 다. 짐이 되느니 죽겠습니다. 강해져 돌아오겠습니다. 우진이 편지에서 눈을 떼곤 훗,하고 웃음을 지었다. “이거 자살 예고냐?” “그,그런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쓸데없이….” 우진이 해솔에게 바란 것은 강한 전 투력이 아니다. 전략,전술의 해박한 지식과 텔레파시 능력에 기반한 효율 적인 각성자 부대의 운용이었다. 전력 증강을 원한다면 팬텀 부대원들 을 굴렸어야지…. “너흰 요즘 할 일 없지?” “예? 예에…. 뭐….” “그럼 돌아가자.” “예에?” 잠자코 듣고 있던 블랑카가 되물었 다. “아르펜의 구원은 어찜니까? 우리 도 와야 합니다. 동맹입니다.” “지구가 더 위험해.” “짐 싸라. 돌아가자.” “해솔 대장이 아직 안 왔는데….” “뭐,올 때 되면 오겠지.” 우진이 슬쩍 불꽃을 보았다. “너도 늦지 말고 와라.” 화르륵. 우진이 곧장 게이트로 들어서려 하자 메르디가 머뭇거리며 눈앞을 왔다 갔 다 했다. “왜 그래?” “임모탈님께 청이 있습니다.” “뭐야?” “제게 세례를…. 내려주시면 안 되겠 습니까?” “응?”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우진이 눈을 동 그랗게 떴다. “무슨 개소리야?” 메르디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개소 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실해 버린 빈자리가 주는 공허는 그녀에게 고통 그 이상이었다. “트래쉬의 가호를 제게….” “흐음.” 우진이 턱을 매만지며 그녀를 바라보 았다. 자신이 뭐라고 그녀에게 트래쉬 의 가호를 내릴 수 있을까? “난 사제가 아냐.” 맞는 말이다. 그의 전진자이지…. 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 그녀의 눈에는 임모탈이 그렇게 보였다. 그렇기에 더 간절했다. 메르디가 다른 신을 모신다고 하면 그들이 받아줄까? 아리아로부터 버림 받은 자신을 말이다. 어느 신이 기꺼이 받아줄까. 임모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똥 마련 강아지처럼 봐도 나 도할 줄 몰라.” “그냥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되 옵니다.” 어떤 은혜를 말하는 걸까? 우진은 고개를 절레 흔들며 그녀를 보았다. 해달라는데 해주지 뭐. “안 돼도 몰라.” “원망하지 않사옵니다.” 우진이 그녀의 앞에 섰다. “꿇어.” 살포시 무릎 꿇은 메르디가 그의 앞 에 고개 숙였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 리를 짚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우진은 트래쉬에 대해 한 번도 종교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저 그의 유산을 물려 받은 훈계자쯤으로 생각했지…. 처음 하는 포교. 방법을 알 턱이 없으니 형식도 없다. “트래쉬의 사제로 임명한다.” 우진의 말이 끝났음에도 아무런 변화 가 없었다. “뭐,안 되나?” 괜히 멋쩍은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 다. “너무 실망하진 마.” “아,아닙니다.” 그때 팬텀 부대원들이 게이트 근처로 모여들었다. “국왕님,준비 끝났습니다.” “그래,가자.” 메르디가 우진의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뭐,그래.” 게이트가 있으니 오고 가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될까? “그동안 잘 지키고 있어.” “예에.” 소로스 거점의 관리인인 메르디다. 포인트를 소모하긴커녕,소속된 거점 병들과 연합군들의 세력으로 혈석을 모아 바치는 통에 오히려 증가하고 있 었다. 이런 흑자 거점들을 수십,수백 개 가지고 있을 트라넷의 대군주들을 생 각하면 왜 그토록 몬스터들을 쏟아내 면서도 아까워하지 않는지 알 만했다. “그럼 다녀오지.” 그가 게이트를 통과할 때까지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여신 아리아로 부터 비롯된 예지의 힘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강우진을 다시 보기 힘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부디 승리하소서.” 그가 침략과 약탈만이 존재하는 이 차원의 전쟁을 끝내주길…. *** “후아,이게 얼마 만의 지구야?” “와이번이다!” 공중요새에 발을 디딘 팬텀 부대원들 은 감격해하며 바닥에 입맞춤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부대원 전부가 와이번 라이더로 교육 받은 그들에게 드넓은 갑판의 한쪽에 마련된 와이번 둥지는 친숙함 그 자체 였다. “오셨습니까?” 언제나처럼 부리나케 마중 나온 정민 찬을 보며 우진이 평소와 다를 바 없 는 안부를 물었다. “별일 없지?” “있습니다.” “뭔데? 김강철이 또 튀었어?” “아닙니다.” 우려와 다르게 김강철은 아주 얌전히 있었다. 감금과 다름없는 그 접견실에 말이다. “그럼? 비비하고는 어디 갔어?” 혹시 불사의 군대가 고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으나 빗 나갔다. “지금 전장 수습하고 복귀 중입니 다.” “그럼 뭐야?” “첩자를 잡았습니다.” “뭐야,난 또 큰일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우진의 반응에 정민찬 이 정색하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작 게 소곤거렸다. “이상호와 연관이 있습니다. 조사해 본 바 지원자가 없던 아르펜 원정에 다켄길드가 갑작스레 나선 것도 그와 의 뒷거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상호? 그게 누군데?” 정민찬이 침착히 이야기해 주었다. “국왕님께 죽은 전 화랑길드 마스터 입니다.” “그래? 어디 차원의 파편이라도 얻었나.” 전혀 놀라워하지 않는 우진의 반응에 정민찬이 침음을 삼켰다. 하긴,몬스터 들이 날뛰는 이 세상에 부활이 대수로 울까? “그것까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문 제는 그 이상호가 이번에 서울에 나타 난 차원 영주 이엘로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민찬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 다. “가신이 되었구만.” 이상호의 부활이 이해되었다. 가신의 부활이라면 포인트의 소모만 으로 가능했다. 그가 아니꼽다면 차원 영주 이엘로를 죽이면 될 일.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걸 보십시오.” 정민찬이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화면 엔 멀리서 찍은 듯한 서울의 모습이 내비쳤다. “저걸 아직 해체 안 했네.” 중요 몬스터들은 모두 처리했기에 상 징인 가시나무는 한국에서 알아서 할 줄 알고 내버려 두고 온 우진이다. 그런데 그 가시나무가 얼어 있었다. 더불어 한강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가시나무의 가지 위에 얼음으로 만들 어진 인형이 두 팔을 벌리고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재가 이엘로야?” “그렇습니다.”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데….” “다음 영상을 보십시오.” 우진이 다음 동영상을 재생시키자 좀 더 가까이서 찍은 듯한 그의 모습과 이상호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엘로님은 지구인들을 돕기 원합 니다. 차원의 괴물들에 맞서 지구인들 을 지켜주시길 원합니다. 여기 신의 강림과 다를 바 없는.......」 이상호의 연설 영상을 보며 화면에 가 있던 우진의 시선이 민찬에게로 향 했다. “뭐라는 거야,얘?”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정작 문제 는….” “뭔데?” “벌써 몇 개의 국가에서 방위 동맹을 진행 중이란 겁니다.” “얘랑?” “예에….” “허,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불규칙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켰던 이 상호다. 녀석이 어떻게 그런 짓이 가 능했는지 되짚으니 뒤에 이엘로라는 차원 영주가 있었다. “첩자란 놈,어딨어?” “격리시켜 두었습니다.” “가자.” 우진이 앞장서 수용소로 향했다. “지금 어디지?” “대만 상공입니다.” 첩자를 강금시켜 둔 방까진 금방이었 다. “문 열어.” 치이익. 닫혔던 철문이 열리며 불안한 얼굴의 남자가 강우진을 보곤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나는 할 말이 없다. 내 입을 열 지는 못….” 말과는 다르게 심하게 떨고 있는 그 를 보며 강우진이 손바닥을 휘둘러 주 었다. 빠악! 따귀인지 주먹인지 모를 한 방에 입 안이 터진 그가 구석에 처박혔다. 쓰 러진 머리통을 잡고 일으켜 세워 자신 의 눈앞에 마주하게 했다. “이름?” “으으,이승호입니다.” “착하네.” 우진이 그의 머리통을 붙잡고 있던 손바닥에 힘을 풀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이승호가 턱을 덜덜 떨었다. “민찬이,휴대폰 줘봐.” “예? 예에.” 건네받은 휴대폰을 내밀었다. 두려움 에 눈빛이 흔들리는 그를 보며 우진이 웃었다. “너네 사장한테 전화 걸어.” “예에?” “휴대폰 부쉈다며? 이걸로 걸어.” 이승호는 정체가 탄로나자마자 자신 의 휴대폰을 부숴 증거를 없앴다. “걸어,빨리.” “예,예에.” 껄렁한 말에도 엄청난 위압감이 든 다. 세상에 본 적 없는 사이코패스와 마주한 느낌이다. 눈앞의 놈은 웃으며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우진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순간 도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마치 죽음이 성큼 다가온 기분…. 죽음을 수확해 간다는 신화 속의 사 신을 마주한 기분. 띠리리. 몇 번의 벨소리가 울리고 익숙한 목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다.” 「네가 누군데?」 “우진이다.” 「우진? 음…. 기억이….」 「강우진? 이런 개XX,무슨 친구한 테 전화 걸 듯하고 있어. 이 미친 XX 가,왜 친한 XXX!」 이상호의 당황스러운 마음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우진이 입가에 미소 를 지었다. “곧 간다. 뒈질 준비해라.” 감히 수아를 노려? 지구의 신을 찾고 있다고? 차가운 얼굴의 우진이 욕설이 난무하 는 전화기를 내렸다. 191. 트라넷 (1)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미리 제거해야지.” 수아를 지켜야 한다. 그렇기에 우선 적으로 처치해야만 한다. 강우진의 생 각은 확고했다. “서울로 가자.” “알겠습니다.” 민찬이 수긍하며 항로가 결정되었다. 쿠우응. 비비캐슬이 기우뚱하다 다시 제자리 를 찾았다. “애들 왔나 보네.” 이 큰 요새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라면 용용이의 착지뿐이었다. 우진이 갑판으로 나와 보니 불사의 군대가 대만에 거점 생성을 시도하던 차원 영주를 해치우고 돌아와 있었다. “주인니 임!” “비비,준비해. 이엘로 잡으러 간다.” “오홍,대군주군요.” 차원 영주들 중에서도 72명의 대군주 는 강력한 존재들. 비비는 이엘로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 다. “성가신 놈이네요.” “놈에게 이상호가 붙었어. 더 곤란해 지기 전에 제거하는 게 맞아.” 한 번의 죽음으로써 지구의 코드마저 사라져 버린 이상호란 존재는 그저 차 원 난민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유일한 강점이라면 전 화 랑길드의 마스터를 지낸 탓에 지구인 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엘로를 지지하고 나선 다. 혼란스런 지금의 상황에서 우호적인 차원 영주의 존재를 지구인들은 어떻 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을 옆에서 돕고 있는 이상호란 존재는 이엘로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을 한껏 낮춰줄 것이다. 거기엔 강우진이란 존재도 한몫했다. 휘하의 불사의 군대. 몬스터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존재 가 용납되는 것은 강우진이라는 지구 인이 수장이며, 제어 가능하고 적이라 할 수 있는 몬스터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엘로가 노리는 것이 그것이라면…. “성가실 수도 있겠어.” 이미 동조한 이들이 그 앞길을 가로 막는다면…. 어쩌면 차원 영주들을 등에 업은 지 구인들의 진영 전쟁으로 변질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황이 영 나쁘지만은 않았 다. 불사의 군대가 부지런한 사냥으로 그 간 쌓은 업적 포인트가 꽤 되었다. 영 지전으로 벌어들인 포인트도 꽤 모인 상황. 업적 상점과 차원 상점 둘 모두를 이 용해 트래쉬의 세트를 위한 재료 아이 템을 구입했다. “겨우 하나 더 맞추네.” 우진이 검게 변한 장갑을 꼈다. 〈트래쉬의 징벌〉 풍요의 신 리시아의 보물이 파괴신의 힘을 입었다. 보듬는 모든 씨앗에 싹을 퇴울 수 있 는 힘이 깃든 신물이 보듬는 모든 것 에서 영혼을 수확할 수 있는 재앙의 아이템으로 변했다. 이제 방어구 세트 아이템은 투구 하 나만 남았다. 네 개의 장비를 되찾자 충만한 자신 감이 차오르는 기분이다. 계속 영지전으로 수고해 주는 재민이 있기에 곧 모든 장비를 착용할 수 있 을 것이다. 집행을 얻기 위한 다섯 개의 열쇠가 모두 모이는 것. 트래쉬의 힘의 강림이 그리 멀지 않 았다. “도착 전에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네,주인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맵!” 우진이 비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 어 주고는 포탈을 통해 차원 영지로 향했다. 1분 1초라도 아껴 포인트를 모은다 면,도착 전에 트래쉬의 마지막 세트 아이템인 영광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 랐다. *** 밤섬이 있었던 한강. 그 위에 자라난 가시나무와 그것을 뒤덮어버린 얼음. 새 둥지처럼 지어진 얼음의 궁전에 이엘로는 광분했다. “젠장할!” "……." 화난 그의 기색에 궁전이 부르르 떨 었고 그 아래 넙죽 엎드리고 있는 이 상호는 숨죽여 그의 분노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강우진이 이리로 온다고?” “예에,하지만 녀석도 다짜고짜 전투 를 걸어올 순 없을 것입니다.” “왜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아서 그렇지 일본과 방위조약 체결은 영향 이 큽니다.” 발표가 없어서 그렇지 이미 일본과 이엘로 양자 간의 방위조약 체결이 성 립되었다. 아르달이라는 강력한 신생국가와 동 맹 관계인 한국을 부러워한 일본인지 라 조약은 의외로 쉽게 성사되었다. “한국과의 협조도 긍정적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됩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강우진의 아르달보 다 오히려 이엘로를 더 환영하는 몇몇 도 있는 상황. 한국 정부의 수뇌부들 에게 제대로 입맛을 맞춰주고 있는 이 상호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의 이런 노력들이 이엘로의 짜증을 줄여주는 효과는 전 혀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원흉은 강우진. “그놈이 그런 것들을 고려할 놈이더 냐?” “그야….” 방송 카메라가 전부 찍고 있는데도 무차별 폭행을 가하는 놈이다. 악질 테러리스트라곤 하지만 아무런 절차도 없이 그저 전쟁을 일으켜 버리는 놈이 다. 그런 놈이 과연…. 이상호의 표정도 어두워지자 이엘로 는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계획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져 버렸 다. 좀 더 기다리고 기다렸어야 했는데, 이브리트가 그렇게 무력하게 질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강우진도 이미 떠나 버린 서울에 홀로 모습을 드러냈으 니…. 새로운 차원 영주의 등장으로 혼란스 러운 상황을 잘 정리한 것이 이상호.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설픈 출사표로 세상에 등장하고 보 니 다시 음지로 숨어들지도 못하는 상 황. 설상가상으로 강우진이 직접 돌격해 오고 있었다. “바,방패막이를 세워야 합니다.” “말하라.” “긍정적으로 이야기 중인 몇몇 한국 의 단체가 있습니다. 이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면 강우진도 함부로 공격하지 는..” “시끄럽다!” 파아앙! 고함 한 번에 담긴 충격파가 이상호 를 얼음의 벽으로 처박히게 만들었다. “쓸모없는 놈.” 지구인 출신의 가신은 이제 쓰임이 다한 듯싶었다. 인의적인 개념을 들이밀기엔 상대가 너무 좋지 못했다. 강우진이 그런다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을까? 놈과의 싸음은 피할 수 없다. 다만 쉽게 쉽게 갈 수 있었던 싸움 이,꼬이고 꼬여 정면으로 맞붙게 되 었으니 아쉬울 뿐이다. 다 구워진 고기를 그저 집어 먹기만 을 기다렸는데 이건,스스로 구워 먹 어야 할 판이다. “할 거면 확실히 해주지.” 대군주 이엘로. 25개 차원의 코드밖에 수집하지 못한 그지만,상위의 대군주들보다 많은 것 이 있었다. 연합이라는 이름하에 모인 그 휘하의 차원 영주. “모조리 소집해 주지.” 가장 중요한 차원의 코드를 얻기 위 한 전쟁을 위해 이엘로가 전사들을 소 집하기 시작했다. 자쿠 행성 노란 도마뱀 연합의 라자 쿠이를 비롯한 영주들,린타 행성의 이스랄 연합,주주로 행성의 연합……. 그리고 지구에서는 처음으로 그에게 충성을 바친 차원 영주 나카무라까 지…. 전력의 상하와 관계없이 모든 차원 영주에게 이엘로의 소집령이 떨어졌다. 세종시 신 국회의사당. “이,이거 어쩌지요?” 불안함이 그대로 묻어 있는 비서실장 의 귓속말에 김병만은 침음을 삼켰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운명과 함께할 대 통령은 자신이란 말인가? 지금 한국의 상황은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듯 위태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이엘로 측의 협상안을 받아들 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시민들의 불안함이 큽니다.” “안 될 말입니다. 예고도 없이 강제 주둔 중인 그들의 말을 들어주다니요.” 여러 의원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 며 의견을 세웠다. 검은 불사조 이브리트의 출현과 서울 의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는 갑자기 나 타난 강우진이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그가 떠나자마자 나타난 이엘로. 이상호라는 전 화랑길드 마스터를 보 좌관으로 둔 특이한 차원 영주는 의외 로 말이 통했다. 동맹을 제안하는 그를 두고 국회는 옥신각신….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데 그의 거점 아래로 갑작스레 몬스터들이 모 습을 드러냈다. 전에 서울을 침공한 적 있던 드래곤 라자쿠이도 나타난 상황…. 그렇게 모습을 보인 차원 영주들이 서울 곳곳에 거점을 세워버렸다. 그것 이 활성화되면…. “하루 만에 서울이 이미 넘어갔습니 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애초에 동맹을 제안한 저들의 술책 에 말려든 겁니다. 어물쩍하는 사이 저들이 이미 진을 형성해 버렸지 않습 니까?” 동맹을 제안하는 척하면서 침공의 전 초기지를 세우는 기만책에 당했다는 의견.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들과 손을 잡 아야 합니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그들과 동맹 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 “그 제안도 어찌 믿습니까? 얼음 덩 어리인 저게 어디 인간입니까?” “이미 일본도 손을 잡았어요! 저들과 전쟁하자면 일본과도 적대하는 겁니 다.” “일본이 무서워서 서울을 차지한 그 들을 놔둡니까?”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는 의원들을 보 며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졌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동맹을 제안하면 서 안방을 차지한 이엘로. 그 행위 자체가 침공인데 그와 손을 잡아야 할지…. 군세를 늘리는 행동이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잠자코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 불만이 었는지 의원 하나가 쏘아붙였다. “뭔가 대책이라도 내놓아 보세요.” “저들의 동맹 진위가 어떻든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대통령의 말에 즉시 몇몇이 반발했 다. “이엘로라는 차원 영주를 적으로 규 정하는 발언입니까?” “조용히 좀 하세요. 그저 사실을 이 야기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이며 현재의 상 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의 문제는 동맹이든,기만에 의 한 침략이든,모든 주도권이 저들에게 불안감 속에서 동맹 제안이라는 이엘 로의 말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저희는 이미 아르달과도 동맹 관계 입니다. 만약 아르달과 이엘로가 반목 한다면 어찌합니까?” 대통령의 물음에 아까부터 호전적인 의원 하나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제멋대로인 아르달 국왕을 믿느니 이엘로가 낫지 않겠습니까? 그는 통제 불가입니다.” 대통령 김병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에게 주도 권은 없습니다.” 눈물이 나지만 사실이다. “아르달의 공중요새가 접근 중입니다.” 대만에서 기수를 돌려 북상하고 있는 공중요새다. 문의를 넣었으나 아직 아 르달의 공식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추측키로 한바탕하려는 것이 틀림없 었다. “아르달과 이엘로의 전쟁입니다.”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이건만 주 체는 다른 이들. 그 싸움을 말릴 힘도,끼어들어 누군 가를 편들어 줄 단결력도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서울 시민들의 피난에 전력을 다합 니다.” 대통령의 말에 의원들이 길길이 날뛰 었다. “지금 서울을 버리자는 말입니까?” “대통령으로서 할 소리입니까?”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들을 보고 김 병만이 일어섰다. “지금 저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 국회가 떠나버린 서울엔 피난 여력이 없는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지도층이 라 할 만한 사람들은 이미 역세권과 애저녁에 멀어졌다. “서울을 버리자는 게 아닙니다.” 김병만의 눈가에 참고 있던 이슬이 흘러내렸다. “국민이라도 살리자는 겁니다.” 192. 트라넷 (2) “토플러 박사님!” “응? 무슨 일이냐?” 토플러는 평소와 다르게 다급한 목소 리에 덩달아 조급해져 물었다. 결정의 날이 다가와서인지 요즘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강우진과 이엘로가 만나려 해요.” “뭐엇?” 토플러 박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둘은 아직 만나기 일렀다. 아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정해진 길 을 빗겨간 지금의 상황이 불안하고 조 마조마했다. “이 변수가 무슨 일을 낳을지….” 계획대로 진행되진 않았지만,여태의 계획이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기대감 도 드는 것이 사실. 강우진이 자격을 갖추기 전에 이엘로 를 만난다. “토플러호를 준비시키게.” “옛?”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토플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생을 바쳐 온 낡은 연구실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문 월드에 미래는 없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곧장 대응할 수 있는 그곳에 있어야 했다. “지구로 가야겠다.” 토플러 박사가 하늘 위로 보이는 검 은 행성을 올려다보았다. *** 포탈을 나온 우진은 정찰 병력들이 찍은 서울의 모습에 눈을 끔벅였다. “하루 새 이만큼 불었다고?” “…예에,수원에 진을 치고 있던 한 국 정부군도 전선을 후퇴해 평택까지 내렸습니다.” "흠." 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화면에 비 치는 서울은 이미 몬스터들 천국이었 다. 아니,차원 영주로 보이는 놈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거대 문어 괴물 드레드와 골드 드래곤 라자쿠이같이 익히 아는 이들도 보였다. 그 전,서울의 던전 브레이크도 이엘로가 주도한 것이 틀림없는 상황. “이브리트보다 더 심각한 놈이네,이거.” 차원 영주들이 많다. 몬스터들을 통솔할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그들. 대군주인 이엘로만 잡아서 될 일이 아니다. 그를 따르는 수십의 차원 영 주를 모두 처치해야 한다. 서울에 밀집한 채 일전을 준비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누군지는 말 하지 않아도 뻔했다. 자신을 노리고 있다.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말이다. 뻔한 함정을 바라보는 우진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것으로 만렙이다.” 99레벨을 달성할 제물들이 알아서 모 여 있다. 걱정이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여기 저기 다니며 사냥해야할 수고로움을 덜 뿐이다. 지금도 영지전에 매진하고 있는 재민 이 덕에 영지 포인트도 쌓이고 있고, 서울 탈환으로 얻게 될 업적 포인트도 어마할 터. 차원 상점이든 업적 상점이든 하위 재료를 구입할 충분한 포인트를 모으 게 된다. 전투가 끝나면 나머지 아이 템인 트래쉬의 영광을 얻게 될 것이 다.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을 모두 모으는 것이 단서일지,99에 이르러 다시 한 번 궁극에 이르는 것이 단서일지 모르 지만 둘 다 달성한다. 트래쉬의 집행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착륙할 필요 없어. 다녀오지.” “예,다녀오십시오.” 우진이 민찬의 어깨를 툭 치고는 갑 판으로 나아갔다. “오빠.” “응? 왜 나왔어. 안에 있으라니까.” “그냥….” 우진이 수아를 번쩍 들어 올려 어딘 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을 마주했다.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안 가면 안 돼?” “응?” “아,아니야.” “짜식,어머니랑 안에 있어. 괜히 밖 에 나오지 말고.” “으응." 우진이 수아를 내려주고는 발걸음을 뗐다. “빨리 가요,주인님.” 마스터와 함께하는 오랜만의 전장에 한껏 들뜬 비비가 재촉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죽음의 기사들과 리치 제니 스도 함께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다.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 “그래.” [만일 집행을 얻을 단서를 찾지 못한 다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해도 얻을 수 없다면…. 리치 제니스의 걱정을 우진이 일축했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로드.] 다른 기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골격의 데스나이트. “키바,오랜만에 나오니 어때?” [마스터의 명을 수행할 뿐.] 내심 차원 영지 안에서 수비 역할만 하느라 답답했을 텐데도 티 내지 않는 키바였다. 우직이 그의 뼈를 한 대 툭 쳐 주고는 블러드 드래곤을 향해 다가 갔다. [소원은 무엇인가?] 막상 들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소원을 묻고 다니는 치매 걸린 드래곤. 그리고 그의 피가 되어준 골렘 돌쇠. “마음껏 날뛰어 버려.” [기꺼이.] 블러드 드래곤이 다이빙하듯 갑판 밖 으로 벌렁 넘어갔다. 슈아악. 날개를 활짝 펼치자 추락하던 거대한 몸체가 활강하며 서울을 향해 날아갔 다. “우리도 가자.” [우오!] 우진이 씽씽이를 소환해 올라탔다. 데스나이트가 모두 각자의 유령마를 타고 갑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후훗.” 이제 어린 티는 찾아볼 수 없는 비비 가 지팡이를 소환하더니 그 뒤를 따랐 다. 환영의 마녀의 진실된 위력을 보 이리라. “후,저흰 요새 방어에 주력합니다.” “넵!” 민찬의 명령에 직원들이 일사불란하 게 움직였다. 와이번을 하나씩 지급받은 팬텀 부대원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했다. 전투에 나서지 말고 요새만 방어하라는 국왕의 명령이다. 경험치를 독식하기 위해서기도 하고,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수아를 지키 기 위해서기도 했다. *** “놈이 오는군.” 이엘로가 가시나무의 중간에 위치한 궁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성가신 가시를 제거하고 오염 된 지구를 구원할 때로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신을 따르 는 수십의 차원 영주들에게 명령했다. “임모탈을 죽여라.” 놈을 죽이고 지구의 코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이 위태로운 지구를 구하고 지배하는 길. “우오오!” 골드 드래곤 라자쿠이가 건물 옥상을 박차 올라 솟구쳤고 공중전이 가능한 몇몇 차원 영주와 날개 달린 몬스터들 이 날아올랐다. 콰광! 골드 드래곤과 블러드 드래곤이 충돌 후 어우러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세월을 감당하긴 너무 어리구나.] [흥,추악한 핏덩이가!] 쿠옹,쿵! 도로가 엉망이 되고 부딪히는 건물들 이 주저앉았다. 드래곤들의 싸음을 시 작으로 양 진영의 군대가 충돌했다. [병사들이여!] [모조리 살육하라!] 데스나이트 부대에 예속된 해골병사 와 해골마법사들이 모조리 소환되자 어지러운 전장이 한층 더 혼란스러워 졌다. “임모탈….” 이엘로의 입술을 비집고 씁쓸한 음성 이 새어 나왔다. 그가 임모탈이 아닌 강우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어쩌면 함께 큰 그림 을 그릴 수 있었을지도…. 같이할 수 없다면 그의 몫까지 대신 하리라. “죽여주마.” 놈을 죽여서라도…. “오,옵니다!” 성난 기세 그대로 거침없이 하강해 오는 강우진과 데스나이트 부대를 보 며 이상호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 쳤다. "……." 쯔즈즈증. 이엘로의 손에서 자라난 얼음의 칼날 이 켜켜이 쌓여 커지자 거대한 톱날 검이 만들어졌다. 츄아아악. 얼음 궁전을 밟고 도약한 이엘로의 신형이 송곳과 같은 기세로 솟구쳤다. 까아앙!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대검의 형태로 변환해 그의 공격을 막아섰다. 카앙,광! 점점 힘이 실린 공격은 주변에 충격 파를 내며 울려 퍼졌다. 죽은 자들의 왕. 누구보다 그를 신뢰하기에 데스나이 트들이 그대로 지나쳐 전장이 벌어진 아래로 착지해 갔다. “이,이,이놈들이!” 이상호가 양팔을 내밀고 염동력을 사 용하려 했으나…. 과직! “크아악!” 우악스런 도끼가 지나가며 두 팔이 뚝 떨어져 내렸다. [소리쳐라.] 흉측하게 솟구친 어금니를 드러내며 중얼거리는 데스나이트 키바. [나의 왕이 오신다.] 왕의 행차에 행진곡이 빠질쏘냐. [더욱 소리쳐라!] 츄악! 거대한 날이 그의 목줄기를 지나쳤 다. 살육과 광기의 비명으로 왕의 길을 열어라. 키바의 도끼가 춤추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검격보다 더욱 성가신 것은 조각조각 난 얼음의 파편 들이 비도처럼 날아와 부딪친다는 것 이다. “제법 하네?” 이죽거리는 말에 이엘로의 투명한 얼 굴이 움직였다. "……." 대답 없는 그를 보며 우진이 눈을 가 늘게 떴다. “언제 본 적 있나?” “자아를 잃어버린 네놈과 나눌 이야 기 따위는 없다.” 나눌 것은 목숨을 건 전투뿐이다. 차원의 파편을 얻으며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하겠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다. 모든 것은 끝이 나고 제자 리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지배자로 영생하리 라…. “개소리 하네.” 자아를 잃어버려? 내가 잃어버린 게 자아라면 네놈은 목숨을 잃게 해주마. 콰아앙. 우진과 이엘로의 검이 다시 부딪치기 시작했다. *** 문 월드. 3번 게이트 이륙장. “출격하실 수 없습니다.” “뭐? 내가 누군지 잊었나?” 어이없어 하는 토플러의 음성에 게이 트 관리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토플러 박사님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럼 당장 열게. 우리의 미래와 생 존이 달린 문제네.” “의회에서 사용 승인을 먼저 받아오 십시오.” “뭐어?” 토플러 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의회에서 막았구나. “저를 설득해 봤자 별수 없습니다. 의회에 출석하시는 게 더욱 빠르실 겁 니다.” "……." 게이트 관리자는 자신의 직분을 다할 뿐이다. “젠장.” 토플러 박사가 발길을 돌려 의회로 향했다. 온실처럼 유리창으로 둘러쳐진 투명한 벽과 천장 너머로 밝은 별들이 쏟아질 듯 내리찍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별 하나. 죽어가는 검은 행성이 그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의회의 앞을 지키고 있던 군인이 그 의 등장에 바짝 긴장했다. “당장 열게!” “출입 허가를 먼저….” 푸슈웅. 군인이 절차를 따지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보이는 의회 의 회의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원형으로 앉아 있는 열두 명의 의원들. 그들이 박사를 맞이했다. “왕복선 사용을 허가해 주십시오.” 토플러의 단호한 음성에 늙은 의원 하나가 말문을 열었다. “박사가 갈 곳은 지구가 아니라 격리 소요.” “뭐요?” “멋대로 삭제 관리자와 접촉을 했더군.” "……." 다른 의원 하나가 말을 받았다. 날카 로운 인상의 중년 여인은 화를 숨기지 않은 얼굴이었다. “잘도 위험한 일을 멋대로 꾸미고 있 었더군요.” “우리 문 월드의 생존을 위한 일이오!” “허,생존을 위해 파괴신을 부활시킨 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콰앙!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붉은 머리 중년인이 책상을 내리쳤다. “의장 슈렐트….” “박사의 이론은 그럴 듯하나 위험부 담이 너무 크오.” 그랬지. 그래서 계획만 있을 뿐 아직 실행 허 락을 받지 못했다. 토플러 박사가 의 회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강우진과 접촉을 시도한 것도 이들의 반대 때문 이다. “충분히 실행 가능한 계획입니다! 더 이상 복구 관리자를 지원해 봐야 의미 없는 시간만 버릴 뿐입니다.” 격앙된 음성을 내뱉는 토플러 박사를 보며 슈렐트 의장이 차분한 어조로 설 득했다. 그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때때 로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가 있 었다. “박사의 계획은 좀 더 보완한 후 다 음 분기에 실행해도 늦지 않소.” 의장의 말에 토플러 박사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문 월드에 미래가 있 나? 이미 자원은 고갈되었고,더 이상 자력으로 살아날 방법이 없다. 두려움에 한발 나아가지 못하면 제자 리에 선 채로 죽고 말리라.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는 없을 지도 모르오!” “박사의 무모한 행동에 이미 변수가 발생했소.” 강우진이 열쇠를 가지지 못한 채 이 엘로와 만났다. 이것이 낳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의회는 지금 신경이 잔뜩 곤두선 상태. “박사를 잠시 격리소에 수용토록 하 겠소.” 의장의 선언에 군인들이 토플러의 양 팔을 붙잡았다.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요.” “말이 힘이 없다 하여 사자의 등 위 에 올라탈 수는 없소.” 자신들을 구원해 줄…. 문 월드의 희망은 여전히 그다. 허망하게 끌려가는 토플러를 보며 의 장이 마이크에 대고 의회의 결정을 전 했다. “레이온호를 지구에 보내 이엘로의 승리를 도우시오.” 까마득히 많은 리셋이 증명하듯, 언제나 그래 왔듯이…. 193. 트라넷 (3) 콰콰쾅! 사방으로 비산하는 얼음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주변을 초토화 시켰다. 쿠우응! 검이 부딪칠 때마다 몸 전체를 울리 는 충격파도 상당해 흙먼지가 끊이지 않았다. 격렬한 싸움을 이어가는 둘에게는 몬 스터도,불사의 군대도 어느 하나 근 접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주변은 차츰 불사의 군대 가 우위를 점하는 상황. 적아가 뒤섞인 난전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전장. 조금 여유 있어진 데스나이트 한둘이 강우진과 이엘로의 근처를 맴돌았다. [우리가 도울까?] [왕의 전투다.] 거대한 어금니를 가진 덩치 큰 데스 나이트. 키바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강우진을 그저 지켜보았다. 죽음의 군대의 사령관. 네크로맨서인 그가 진정한 전사로 거 듭나려 하고 있었다. 스스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싸음 에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 [주변을 정리하고 왕의 싸음을 보겠 다.] [그렇게 하지.] 키바의 말에 삼삼오오 모였던 데스나 이트들이 휘하의 해골병사들을 데리고 주변의 정리에 나섰다. 쿠아앙! 거대한 빌딩의 외벽에 처박히며 건물 과 함께 바닥을 구르는 존재. [여섯이다.] 거대한 이빨들로 씹어 삼켜버린 여섯 번째 차원 영주를 뱉어내며 블러드 드 래곤이 포효했다. 획 고개를 치켜들어 미치광이 마법사를 찾기 위해 두리번 거렸다. 인간이라 하기에는 조금 위험한 분위 기를 풍기는 존재. 콰콰쾅! 꽃처럼 피어난 지옥룡 히드라의 머리 들이 일제히 화염구를 토해내며 주변 을 불바다로 만들어냈다. 그 와중에 문어 구이가 되어버린 드 레드를 밟고 선 붉은 안광의 해골이 히죽 웃었다. [난 일곱이다.] [흥.] 눈이 마주친 드래곤이 포효하며 다시 날아올랐다. [클클, 피 먹은 드래곤이 날뛰어 봤 자지.] 용의 숨결도 잃은 덩치 큰 도마뱀과 의 내기에서 지기엔 리치의 자존심이 아깝지. [피어나라.] 화르록. 리치의 손길에 따라 무너진 건물 잔 해 곳곳에 히드라의 머리가 용솟음쳤 다. [지옥을 보여주마.] 지옥불을 뿜는 지옥롱이 서울을 불지 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꽝! 폭발과 함께 멀어진 이엘로를 노려보 는 우진의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생각 이상인데?” “흥.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 르는 놈이 제법 하는구나.” 아까부터 거슬리는 이엘로의 말에 우 진이 답했다. “왜 계속 아는 척이야?” "……." “사실이니까.” "……." “널 알고 있다,강우진.” 이엘로를 노려보는 우진의 눈매가 한 층 더 매서워졌다. 임모탈로 불렸던 그다. 그의 이름을 아는 차원 영주들이 몇 이나 될까? 지구에서야 워낙 유명한 우진이지만 이엘로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은 조금 달랐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닌 느낌…. “너의 존재 목적은 내게 키를 넘기는 것이다.” “트래쉬의 집행?” “잘 아는군.” 이엘로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촤차창! 파편이 떨어져 나가 작아진 그의 얼 음검이 다시 자라나 커졌다. “지구를 위해 이제 그만 죽어라.” 슈아악! 확 짓쳐들어오는 이엘로의 검이 우진 의 머리를 노렸다. 카앙! 전사의 무기를 들어 그것을 빗겨 막 는 얼굴은 전보다 더욱 복잡해져 있었 다. “하나는 확실해.” 어지러운 생각을 쫓으려는 듯 우진이 말문을 열었다. 카앙,쾅! 둘의 검이 그 사이 세 번이나 부딪히 길 반복했다. “뭐지?” “넌 내 손에 뒤진다는 거지.” “흥. 넌 이미 한계다.” 강우진을 처치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은 이엘로다. 그간 그가 준비해 온 것들만 한 세월. 자신이 패배하는 시뮬레이션은 없다. 놈을 잡고 권한을 이양받는다. 그것이 지구를 구하고 전 차원을 위 한 일이 될 것이다. “하압!” 이엘로의 검이 다시 강우진을 노렸 다. *** 유리로 만들어진 케이지 안. “젠장!” 토플러는 답답한 마음에 욕이라도 뱉 지 않고는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의회는 모른다. 지금 이 변수가 얼마 나 중요한 열쇠가 될지 말이다. 지나치게 검증된 길만 걸으려 하고 있다. 끊임없이 오류를 수정하고,수없 이 반복해 왔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아 닌가? 언제까지 희망의 불빛 앞에서 멈춰 서야 하는가? 토플러는 그의 일생이 모두 지나기 전에 그곳에 닿고 싶었다. 그래서 강우진을 만났다. 파괴신의 씨앗을 말이다. 위이잉. 불투명하던 유리의 한쪽 면이 밝아지 며 투명해졌다. 밝아진 시야 너머엔 의장인 슈렐트가 서 있었다. “슈렐트,지금이라도 레이온호를 멈 추는 게 좋아요.” “하아,토플러. 자네의 능력을 인정치 않는 것은 아니네. 하지만 좀 더 신중 을 기할 필요가 있어.” “그러기엔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두어 번의 리셋은 감당할 수 있네.” “그전에 자연사로 죽겠군요.” "……." 부정할 수 없다. 토플러도 슈렐트도 이미 늙은 몸이니까.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것 아닙니까?” “말을 가려서 하게.” 그의 도발에 슈렐트의 얼굴이 당장에 험악해졌다. 표정으로 대꾸하듯 토플러 도 표정을 사납게 구겼다. “수십 번 반복했습니다. 실패를 인정 하고 방법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닙니 까?” “실패가 아닌 미완성이지.” "허…." 토플러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복구 관리자를 깨워 시스템을 정상화 하려 했다. 빼앗긴 고향을 되찾으려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 다시 원점에서 모든 것을 시작했지만 지나온 길을 답습하는 것에 그쳤다. 그사이 문 월드의 역사는 흘렀고 이 제 변화를 꾀하기엔 두려워하는 늙은 이들만 남았다. 리셋과 함께 그들은 다시 시작하지 만,문 월드의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 말이다. “자네의 이론은 너무 위험성이 커.”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 니다.” “자네의 상상에 문 월드의 미래를 베 팅하자는 건가?” “이 망할 생명 유지 장치가 미래입니 까?” 토플러가 발을 굴렀다. 사방이 유리다. 유리 너머는 벽이다. 그 너머는 우주공간일 뿐…. 달에 살고 있지만 정복하진 못한 인 류. 그 인류를 이어온 새 생명들. “아이들을 후손들을 생각해서라도 제 가 준비한 방안의 실행을 의회에서 논 의해 주십시오.” "……." “둘 모두 필요합니다. 애초에 삭제 관리자와 복구 관리자는 함께 소환되 어야 합니다.” “그러기엔 이미 늦은 듯하군. 둘의 싸움이 이미 시작되었네.” "……." 전자는 기억을 잃었고 후자는 일부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 이미 틀어져 버린 둘을 소환하는 것은 그야말로 파 멸을 야기한다. 누굴 선택하고, 누굴 버려야 할지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지이잉. 슈렐트가 뒤를 힐끗 보았다. 문이 열 리며 들어서는 군인을 보며 다시 시선 을 토플러에게 주었다. “결과도 이미 난 듯하군.” “아….” 토플러 탄식했다. 두 명이 각기 다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 가 죽고 하나가 두 열쇠를 쥐었다. “어떻게 되었나?” “그것이….” 보고하기 위해 슈렐트 의장을 찾은 군인이 어두운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레이온호가 도착하기도 전에 결과가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누가?” *** 얼음 칼날들이 사방으로 튀며 날카로 운 발자취를 남겼다. 그중 상당수가 우진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고 그것들 모두 저절로 작동하는 영혼의 방패에 가로막혀 상처 하나 주지 못했다. 투투투퉁. 그 파편의 개수만큼이나 저장된 영혼 이 제 역할을 마치곤 사라져 버렸다. “한계라고?” 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필 시 이것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트래 쉬의 수호 덕에 무한대로 저장할 수 있는 영혼이지만 잦은 보호막 발동으 로 거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영혼이 없으면 보호막 생성도 문제지 만 단시간에 마력을 보충하는 게 더욱 문제였다. 불사의 군대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다고 해도 그 마력은 모두 네크로맨서 인 강우진에게서 나오니 말이다. 모든 것의 원동력이자 에너지가 되는 것이 수집한 영혼들이다. 투투퉁,피숙! 파편을 막아내던 영혼들 사이로 날카 로운 얼음 송곳 하나가 우진의 옆구리 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으로 입힌 그 상처에 이엘로가 미소 지었다. 츄아앙! 톱니처럼 달렸던 얼음 파편들이 모조 리 떨어져 나가며 긴 얼음의 창이 나 타났다. 그것을 쥔 이엘로가 강우진을 향해 돌진해 왔다. “끝이다.” “설마.” 영혼을 모두 소비해 버렸다곤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롭다. 강우진의 그 태 연함에 이엘로는 잠시 숨겨진 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닌가 흠칫할 정도였다. 쿵! 대검을 들어 얼음의 창을 막아낸 우 진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녀석이 가진 마력만 모두 소비하면 이 제 한낱 각성자에 지나지 않는다. “허세는.” 콰앙,쾅! 쉴 틈 없는 공격에 강우진이 연신 뒤 로 밀리며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지독한 놈.’ 이엘로는 쓰러질 듯 끝까지 버티는 강우진을 몰아치며 혀를 내둘렀다. 녀 석 하나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 월을 준비했고 또 얼마나 많은 포인트 를 소비했는가? 죽은 자들을 부리며 그들의 영혼을 이용하는 녀석의 능력은 사기라고 봐 야 했다. 다단한 껍질 하나를 벗기는 데 25좌인 자신이 그간 이룩한 포인트 의 대부분을 쓸 정도니 말이다. “후욱,후.” 이제 지치는지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며 이엘로가 부서진 얼음의 창을 새 롭게 만들어냈다. 쩌저정! “이제 정말 끝내지.” “설마.” "……." 허세다. 녀석은 지금 모든 마력과 기 력이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점점 올라가는 놈의 입꼬리다. 슈아악! 마지막 돌진을 감행하는 이엘로의 눈 에 강우진의 웃는 얼굴이 유난히 크게 들어왔다. “구십구다.” "……?" 〈레벨 업!〉 파팟. 떨어졌던 기력과 마력이 일시에 차올 랐다. 거의 부서질 듯 약해졌던 전사 의 무기도 내구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 꼈다. 후우옹! 도끼로 변한 전사의 무기가 창을 앞 세워 돌진해 오는 이엘로의 몸통을 쪼 겠다. 파앙! 녀석의 몸 자체도 얼음. 터져 나간 파편이 그대로 몸을 난자 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마력을 이용한 기본 보호막을 시전하 진 않았다. “쓸데없는 저항을….” 부서진 이엘로의 몸에 다시 얼음이 엉겨 붙어 아무렇지도 않게 재생되었 다. 막대한 포인트가 소모되는 일이지 만 상관없는 듯했다. 그런 이엘로에게서 거리를 벌리기는 커녕 전사의 무기마저 내팽개친 강우 진이 그의 몸을 잡았다. 심장도 급소도 없는 얼음 인간. 녀석을 어떻게 잡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모든 마력을 일시에 소비해야지만 쓸 수 있는 까다로운 권능. “징벌이다.” 슈아악. 이엘로의 몸에 닿은 우진의 장갑이 검게 물들었다. 모든 마력을 태워 대상의 영혼을 파 괴하는 징벌을 내린다. “끄아악!” 검게 물든 장갑에 잡힌 이엘로의 몸 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누가 이겼나?” “사, 삭제 관리자가 이겼습니다.” "……." 기록에 없던 일. 전에 일어난 적 없던 변수의 발생에 슈렐트의 얼굴이 굳었다. 머릿속도 백 지장과 마찬가지. 자연스레 시선이 토플러를 향했으나 그의 얼굴 또한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멍했다. 토플러가 바란 것은 둘 모두의 생존 이다. 하나가 죽어버린 이상 이미 그의 계 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박사! 당신이 모든 걸 망쳤구려.” 슈렐트의 호통에 토플러 박사가 고개 를 들었다. "……." “곧 그가 강림해 전 차원을 장악하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없소!” 그의 손에 차원의 모든 통제권이 넘 어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 유일한 수단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지만,복 구 관리자가 죽어버렸으니…. 망연자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토플러 가 벌떡 일어섰다. “아,아직 방법이 있을지 모릅니다.” 194. 트라넷 (4) “뭔가?” “삭제 관리자를 설득하겠습니다.” “기억도 없는 그가 뭘 한단 말인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미쳐 버린 그 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흥분한 슈렐트 의장을 토플러가 차분 히 설득했다. “이미 키를 가진 건 그입니다. 그를 불러 리셋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만나면 다짜고짜 죽이려 드는 그를 무슨 수로 설득한단 말인가! 녀석은 말이 통하지 않아.”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 슈렐트가 노려보았으나 토플러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설득할 수 있습니다. 지구로 가야 합니다.” "……." “이미 다른 선택지는 없지 않습니 까?” “이익….”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의회에서 논의….” “의장!” 토플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다 죽일 셈입니까? 망설일 때가 아 니라 한발 나아가야 할 때요!” 전례 없는 일이다. 이엘로가 기록보다 일찍 세상에 모습 을 드러냈다. 강우진이 키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조우했고 어처구 니없는 결과가 빚어졌다. 원인을 찾자면 여러 가지겠지만 토플 러 박사의 독단적인 행동도 그중 하나 일 것이다. “박사가 저지른 일이니 책임지고 수 습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열어주게.” 슈렐트 의장의 명령에 유리문이 양쪽 으로 열리며 토플러 박사는 자유의 몸 이 되었다. 그가 즉시 옆에 대기하고 있던 군인 에게 부탁했다. “토플러호를 준비시켜 주게.” 한시라도 빨리 지구에 당도해야 했 다. 차원 관리자가 그들의 지구에 도착하 기 전에 말이다. *** 쩌저정! 얼어붙은 한강이 녹아내리기 시작했 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난 가시 나무를 뒤덮은 얼음 가시도,얼음의 성도 점차 녹아 바닥으로 추락했다. 화르르르록! 여기저기 미친 듯이 불을 뿜는 지옥 룡 히드라들의 불길이 그것을 더욱 가 속화시 켰다. “후우.”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모든 마력이 소 멸되어버린 우진은 주변에 떠도는 몬 스터들의 영혼을 다시 채집했다. “쓰읍.” 한껏 몰려드는 그들을 모조리 흡수하 자 바닥을 쳤던 마력이 서서히 회복되 기 시작했다. 형체도 없이 녹아버린 이엘로가 남긴 것은 축축이 젖은 땅뿐이었다. 우진이 괜히 바닥을 발로 찼다. “뒤질 거라 했지?” 발동 조건이 까다롭지만 트래쉬의 징 벌은 강력하다. 자연계로 이루어진 육 체라고 파괴신의 징벌을 빗겨갈까? 주변을 가득 메웠던 몬스터들과 휘하 차원 영주들은 얼추 정리가 된 상태. 그 많던 몬스터들을 해치웠기에 차곡 차곡 경험치가 쌓여 마지막 레벨 업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슈아악. 우진의 곁에 검은 연기가 날아와 뭉 쳐지더니 리치 제니스가 모습을 드러 냈다. [집행은 어찌 되었나?] “글쎄.” 이렇다 할 변화는 없다. 우진이 조심스럽게 상태창을 열어보 았으나 99로 바뀌어 버린 레벨과 상승 한 몇 가지 능력치 빼고는 특별한 것 이 없었다. “레벨이 아니라 트래쉬의 세트 아이 템을 모두 모아야 하나?” 엄청난 물량의 사냥으로 쌓인 업적 포인트도 어마어마한 상태. 지체 없이 업적 상점을 열어 트래쉬의 영광을 만 들기 위한 재료들을 구입하기 시작했 다. “얼추 다 사겠네.” 업적 포인트의 소모만으로 다 구입 가능하면 영지 포인트는 더 이상 애써 모을 필요가 없다. 아직까지도 홀로 영지전을 치루는 재 민이 덕에 계속해서 상승 중이지만…. “어디 보자.” 우진이 구입한 재료 아이템들과 아리 아의 성물을 집어 들고 조합상자에 넣 었다. 조합을 누르자 수십 가지의 재료가 섞이더니 해골이 박힌 왕관 같은 서클 렛이 만들어졌다. “트래쉬의 영광.” 우진이 인벤토리에서 그것을 꺼내 써 보았다. 트래쉬의 영광,수호,징벌,위엄,행 진. 다섯 가지 방어구를 모두 갖추자 봉 인되었던 세트 효과들이 속속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지배력이 상승해 기존에 이루던 불사 의 군대를 다섯 배나 더 키울 수 있으 며,언데드들의 절대적인 전투 영역인 죽음의 필드를 소환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아르펜을 호령하던 임모탈 의 기존 능력치를 모조리 회복했다. 조급했던 마음이 말끔히 사라지는 기 부 하지만 곧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안 되네.” [집행은…….] 세트 아이템을 모두 모으고 듀얼 클 래스로 99레벨에 올랐다. 그럼에도 트 래쉬의 집행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지구의 마스터 코….] “그만.” 그가 제니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해.” […….] 무표정한 우진의 얼굴을 보며 제니스 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차분히 가라앉은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 졌다. 전장을 함께해 온,지난날 그를 가르 쳐 온 스승이 아니었다면 그 분노를 직접 눈으로 봐야 했을지도 모를 일. “천천히 찾아보지.” [로드의 뜻대로.] 슈아악. 제니스의 몸이 검은 연기로 화해 회 오리 돌듯 사라져 버렸다. 여기저기 무너지고 초토화된 서울의 광경에 우진이 씁쓸히 웃었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다. 몬스터라고 하기엔 유사 종족들도 뒤 섞인 여러 시체가 나뒹구는 그곳에 살 아 있는 자는 오직 그 한 명이었다. 기분 나쁘지만 익숙한 기분. “일어나라.” 우진의 명령에 시체들이 터지며 해골 병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전보다 많은 스켈레톤을 통솔할 수 있게 된 데스나 이트들의 휘하로 배치시키며 줄어든 불사의 군대를 충원했다. [왕이시여.] 그의 곁으로 다가온 키바를 마주 보 았다. 큰 어금니가,흔들리는 붉은 안광에 서 걱정이 묻어났다. “다음에 부를게.” [왕의 뜻에 따라.] 슈아악. 그를 시작으로 모든 데스나이트가 검 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쿠우응. 처박힌 것인지 착지한 것인지 모를 충돌음을 내며 근처에 내려앉은 블러 드 드래곤을 보았다. […….] 평소와 다르게 말이 없는 그에게 우 진이 역소환을 명령했다. 위이이잉. 피 안개가 피어오르며 본 드래곤을 감싸고 있던 피딱지들이 떨어져 나갔 다. 골렘의 심장인 돌쇠가 우진의 곁 을 몇 번 맴돌다가 사라졌다. 본 드래곤마저 검은 연기로 화해 사 라지자 우진의 곁에는 비비만 남아 있 었다. “주인님. 돌아가요.” “…그래.” 우진이 씽씽이를 불러 타고는 하늘 위에 떠 있는 공중요새로 향했다. 집행의 단서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아니, 그것이 답이라면 얻지 못해도 상관없다. *** 검은 대기를 가로질러 죽어버린 땅에 토플러호가 착륙했다. 피유우응. 추진 엔진이 꺼지며 내려앉은 그곳은 지구. 푸슈응. 토플러호의 바닥이 열리며 사다리가 내려왔다. 텅,텅. 지구의 공기는 더 이상 인간에게 숨 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주복을 입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이는 다름 아 닌 토플러 박사. 투욱. 그가 지구의 땅을 밟자 먼저 지구에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레이온호의 군 인들이 다가왔다. “박사,이야기는 들었소.” “레이온 대령,시간이 얼마 없소.” “이미 목표물까지의 통로를 확보해 뒀습니다.” 레이온 대령의 일 처리에 토플러 박 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작전은 간단하오. 내가 접속해 설득 에 성공하면 대령은 그를 구출해 내도 록 하시오.” “곧장 그를 구하는 게 낫지 않습니 까?” “그는 아직 아군이라 할 수 없소. 무 슨 짓을 할지 모르니 먼저 만나 대화 를 하는 게 먼저요.” “음,알겠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에너지의 밀집이 심상잖습니다. 차원 관리자의 강림이 준비 중인 것 같습니 다.,’ “알겠소. 파악된 위치는 어디요?” 레이온 대령이 손목에 달린 태블릿을 건들자 홀로그램 지도가 나타났다. 그 곳에 반짝이는 점 하나를 보며 대답했 다. “서울역 1번 출구입니다. 손실률 28%입니다.” “알겠소.” “만약 설득에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 까?” "……." 리셋을 위한 코드를 이엘로가 아닌 강우진이 가졌다. 이미 망가져 버린 지구를 되돌리기 위해선 그가 필요하 다. “강제로라도 그가 필요하오.” “음.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합시다.” 대령과 토플러가 악수하곤 헤어졌다. 레이온호는 목표 지점으로,토플러는 우주선을 이용한 차원 접속기로…. *** 공중요새 비비캐슬. 심상찮은 강우진의 분위기에 정민찬 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보고를 뒤로 미루었다. 둘의 전투가 시작되기 얼마 전,일본 이 이엘로와의 동맹 사실을 공표하며 아르달을 향해 강력한 성명 요구를 해 왔다. 전쟁마저 불사할 그들의 기세에 난감 해 하는 정민찬이었으나,무시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괜히 보고했다가 우진이 다짜고짜 일 본 침공이라도 하면 더욱 곤란한 상황 에 처할 테니 말이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주인님을 가만히 내버려 둬.” “예에.” 덩달아 심각해진 비비의 음성에 민찬 이 수긍했다. 우진이 공중요새에 도착 하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어머니도, 수아도 아닌 김강철을 가둬둔 격리소 였다. 끼이익. 얌전히 앉아 있는 그를 보며 강우진 이 다짜고짜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과당. “크윽” 볼썽사납게 나뒹군 그의 멱살을 우악 스럽게 잡아 올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문 월드 녀석들,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지?” “큭,내게 물어봐야….” 콰당. 다시 거칠게 그를 바닥에 패대기친 우진이 으르렁거렸다. “녀석들을 불러와.” “그러려면 지구의 신녀를 찾아가는 게 먼저지 않나?” 지구의 신녀란 말에 우진이 다짜고짜 그의 목줄을 쥐었다. 가볍게 들어 올 려진 김강철이 목을 옥죄어오는 손아 귀에 컥컥거리며 발을 바동거렸다. “뒤지고 싶지?” “크윽,지,지구의 신이 그들의 세상 에 있는….” 숨이 막히는지 더 이상 숨을 쉬지 못 하는 그를 내려주었다. 우진의 눈매가 좁혀지며 이채를 띠었다. “문 월드에 지구의 신이 있다고?” “크윽,그렇게 알고 있다.” "……." 집행이 차원의 연결을 끊어낼 수 있 는 유일한 길이라면 반드시 얻어야 한 다. 하지만 그것이 지구의 마스터 코 드... 자신의 동생을 필요로 하는 일 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동생을 구하면서 지구를 구할 방법이 있다면…. “문 월드…. 어떻게 가지?” 차원 상점을 아무리 뒤져도 문 월드 로 통하는 던전을 찾을 길이 없다. 던 전이라도 있어야 링크를 할 것이 아닌 가? 끼이익. 그때 닫혔던 문이 제멋대로 열리며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 “다시 뵙는군요.” 토플러 박사의 인사에 구겨진 우진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문 월드로 나를 안내해라.” 그곳에 지구의 신이 있다면…. 동생 을 대신해 그 신을 죽이리라. 그래서 마스터 코드를 얻으리라. “일반적인 방법으론 그곳에 갈 수 없 습니다.” “안내하는 게 좋을 거야.” 우진이 한 발 다가섰다. 그 한 걸음 이 주는 위압감에 절로 움찔한 토플러 박사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자신도,문 월드에게도 더 이상 뒷걸 음질 칠 여유가 없으니 말이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전 에 제 말을 모두 들어주셔야 합니다.” “필요 없어.” “차원의 발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차원 간 이동인 던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모든 것의 진실 이기도 합니다.” 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트라넷의 기원…. 알고 싶지 않으십 니까?” “개소리 하지 말고 문 월드로 가는 던전이나 말해!” “문 월드에 던전은 없습니다.” 우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날 소환이라도 해!” 아르펜에서 그러했듯,소환에 응하면 된다. 하지만. “아쉽지만 소환으로도 갈 수 없습니 다. 포탈도 없고, 차원 이동도 되지 않 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우진의 눈매가 꿈틀 거렸다. 방법이 없었다면 김강철도 토플러도 이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뭐지?” “로그아웃입니다.” "……."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는 강우진의 눈 빛을 토플러는 담담히 받으며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전에 부디 제 말을 들어주시기 바 랍니다.” "……." “트라넷. 인류의 미래를 건 행성 간 초월 이동의 기원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진이 토플러를 향해 한 발 내디뎠 다. 195. 트라넷(5) 바짝 긴장한 토플러 박사가 어깨를 움츠렸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제대로 숨도 쉬 어지지 않았다. 토플러 박사의 앞에 선 우진이 우두 커니 그를 노려보았다. 주먹을 휘두르면 닿을 거리. 김강철은 자신이 막아서야 하나 말아 야 하나 고민했지만,분위기가 분위기 인지라 그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 었다. 격리실 안의 모든 존재가…. 사물 이…. 공기가…. 강우진의 힘 앞에 고개를 조아린 기 분. 그의 입술이 열렸다. “딱 5분 주지. 설득하지 못하면 죽을 거야.” 의외의 기회. 반짝이는 눈빛의 토플 러가 즉시 말을 뱉었다. “이 세계는 거짓입니다.” “방금 한 말 취소하고 싶군.” 우진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5분이 고 뭐고 지금 당장 궤변을 늘어놓는 토플러 박사를 한 대 치고 싶었으니. “…계속해도 됩니까?” “20초 지났네.” 우진의 말에 토플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지구와 문 월드 모두의 미래 가 걸린 일일지도 모른다. “2529년. 전쟁과 자원 고갈로 지구는 더 이상 인류가 생존하기에 어려 운…." 심각한 토플러 박사의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우진의 표정을 보며 김강철은 불안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지루한 강의를 강제로 수강당하는 기 분이 이러할까? 안타까운 것이 있다 면,5분이 지났을 때 목숨이 다할 것 만 같은 불안감이었다. 지구의 멸망과 인류의 이기심으로 빚 어진 분쟁에 대해 열띤 목소리를 쏟아 내던 토플러를 결국 제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박사님. 말씀을 간략히 줄이시는 게……." “응?” 김강철의 말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 “3분 남았네.” "헉," 신음을 삼킨 토플러가 생각없이 뱉은 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고 간략하게. “지구가 망했습니다. 새 터전이 필요 했습니다.” 우진은 아르펜의 신전들에서 느낀 위 화감을 떠올렸다. “그게 아르펜?” “맞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동할 방법 이 개발되었음에도 터전이 준비가 되 지 않았다는 거였지요. 테라포밍이 여 전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인류는 기다 릴 수밖에 없었고 그 중간 기착지로 가상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쉽게.” “아르펜이 지구처럼 되기 전에 가상 세계에서 기다렸습니다. 집이 완성될 때까지 임시 가옥에서 지낸 것이지요.” “그게 지금 여기다?” “맞습니다.” “그래서?” “예?” 보통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예 상치 못한 반문에 토플러가 멍하니 되 물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날 이 세계 에서 꺼내준다고? 새집이 완성됐으니 가자는 건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문제가 생겼습 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이런 개판이 일어 나는 것이겠지. “욕심을 부리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 작했고 몇 개의 가상세계가 더 만들어 졌습니다. 그 수가 모두….” “72 개군.” “…맞습니다. 가상세계지만 신과 같 은 힘을 부리는 자들이 생겼고 그들은 진짜 신이 되길 갈망했습니다. 보다 근원적인 힘과 권한을 가진 코드에 대 한 탐욕이 심해졌고 수없이 많은 차원 전쟁이….” “결국 치고박고 싸운 거네.” “…예에.” “이게 가상이라면 죄다 깨워서 가면 되지,왜 망설이지?” “거기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지?” “새로운 터전의 테라포밍이 아직 완 성되지 않았습니다.” "……." 우진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토플러를 보았다. “하지만 실마리는 찾았습니다.” “뭐지?” “트라넷. 행성 간 이동 네트워크를 통한 방법으로 테라포멍을 완성할 수 있….” “알아듣게 설명해.” “지구의 물질을 소립자로 바꿔 아르 펜으로 전송한 뒤 구현하는 겁니다.” "……." “지구에서 로그인해 아르펜에서 로그 아웃하는 거지요.” “포탈을 말하는 건가?” “거기서 실마리를 찾았지만 차원 이 동은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상 세계의 차원 간 이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지요.” 우진이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보았 다. “5분 다 지났네.” “……죽일 겁니까?” “잘 아네.” “안 됩니다.” “왜? 전처럼 도망쳐 봐.” “도망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상지구도 현실의 지구도 모두 살려 야 합니다. 이미 코드를 잃어버린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이 가상에만 존재하 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게 내버려 두면 되잖아.” 가상과 현실의 정의가 필요할까? 우 진이 느끼기엔 하등 쓸모없어 보였다. 산 놈은 이승이 집이고 죽은 놈은 저 승이 집이다. “당신의 지구와 나의 지구는 같은 위 험에 처했습니다.” 전에도 했던 말. 서로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토 플러 박사의 말이 귓가에 다시 맴도는 것 같았다. 그때도 그게 귀에 거슬렸 다. 자신은 감추면서 원하는 결과만 이끌 어 내려는 듯한 모습에 거부감이 들었 다. “들어는 보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찜찜한 녀석과 의 동맹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라면 해 주지. 그 다가올 위험이 무엇인지 들 어보고 말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관리자 코드를 가 진 자들을 지켜봐 왔습니다. 수십 번 을 반복한 리셋와중에도 스스로 진화 하여 절대자를 넘보는 존재가 있습니 다.” “절대자라….” 목표가 그것일까? 아등바등 차원 영 주들이 서로 경쟁하는 지향점이? 그것 에 가장 가까이 닿은 존재라면. “72좌겠지.” “만나본 적 있으시겠지요.” “뭐? 내가?”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눈빛을 받은 토플러 박사는 침을 꿀끽 삼키며 답했다. 그가 강림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차원 관리자 말입니다.” 모든 것을 총괄하는 그가,모든 것을 가능케 할 코드를 손에 쥐면 절대자로 거듭난다. 전 차원을 아우르는…. 모든 것의 신 이 된다. “…차원 관리자?” 우진이 그와의 만남을 떠올려 보았 다.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르펜에 소환된 이후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부 단히 노력했다. 악다구니에 가까웠던 그 노력의 결과 만난 이가 차원 관리자. 그의 도움으로 지구로 귀환할 수 있 었다. “말의 아귀가 안 맞는데? 그런 놈이 날 왜 지구로 돌려….” 우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토플러 박사가 답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 았다. 지금쯤 레이온 대령이 서울역에 도착했을 것이다. “당신이 가진 코드와 열쇠가 필요했 으니까요.” "……." “흩어진 고유 코드가 있습니다. 당신 이 가진 것은 삭제 코드…. 차원 관리 자가 노린 것은 완성된 삭제 코드입니 다.” “트래쉬의 힘이군.” “맞습니다. 그는 모든 코드를 가지려 하죠.” 가상세계에서의 인간이 한낱 파일에 불과하다면 그 죽음은 삭제 그 자체. 죽은 자들이 모이는 공간. 그것을 역 행해 다시 끄집어낼 수 있는 존재. 네크로맨서. 우진은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던 위화 감이 옅어진 기분을 느꼈다. 막연하던 대상이 정해졌다는 생각 덕분일까? “좋아. 내게 원하는 걸 말해.” “그가 강림 전입니다.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냈어야 하지만 이미 놓쳐 버렸 습니다. 이 가상지구는 희망이 없습니 다. 새롭게 리셋해야 합니다.” “방법을 말해.” “문 월드의 사람들이 당신을 로그아 웃시킬 겁니다. 깨어나는 순간,코드에 실린 기억들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려 줄 겁니다.” 스킬북을 열람하면 자동으로 지식이 심어지듯….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 론…. 봉인된 기억이 풀리는 것처럼 떠오를 것이다. “이엘로에게서 얻은 복구 코드에 방 법이 있습니다.” 이엘로를 죽이고 얻은 복구 코드.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뭐지?” “복구하게 되면 이미 죽어버린 사람 들 또한 되살아날 테지요.” 온전히 시간을 되감아 버리니까. 롤 백과 같다. 모든 것이 과거로 되돌아 간다. 그사이 발생하는 찌꺼기들은 차 원 난민이 되거나 어딘가를 떠돌게 되 겠지…. “이 지구를 복구하기 위해선 지구의 코드가 필요합니다.” "……." “그것을 가지십시오.” 우진이 가만히 선 채 미동도 하지 않 았다. “어차피 되살아납니다. 망설일 것이 없습니다.” “후.” 토플러의 간절한 부탁을 그저 웃음으 로 대꾸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래서 더욱 소 름 끼치는 눈빛이 토플러에게 향했다. “마지막 유언이라 생각하지.” “제발 생각을……." 바뀌지 않는다. 강우진의 표정이,목 소리가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토플 러가 운명을 직감했다. “리셋 외에 방법이 없습….” 해결책은 되어주지 못하지만 최악을 막아서는 유일한 방법. 시간을 거슬러 새롭게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슈아악. 강우진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시험지를 다시 풀기보단 찢어버리는 선택. 과앙! “가십시오!” 자신을 대신해 막아서는 김강철에게 고마워하거나 감격해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A랭크의 각성자지만 강우진을 상대로 몇 초나 버틸 수 있을까? 토플러가 잽싸게 달려 화장실 문고리 를 잡았다. “곧 당신을 로그아웃시킬 겁니다. 부 디 제가 한 말들을 잊어버리지 않길 바랍니다.” 끼익. 문이 열렸고 토플러가 안으로 들어갔 다. 우진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김강철을 걷어찼다. “놔.” 콰앙. 벽에 처박힌 그가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으으윽." 충격이 상당한지 일어날 생각을 못하 고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우진은 서둘러 닫힌 화장실 문을 붙 잡았다. 턱! 종아리에 느껴지는 힘에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렸다. 머리가 깨진 듯 얼굴 가득 피를 범벅한 김강철이 필사 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당신뿐입니다. 제발…. 구해주십시오.” 누구를? 제 놈들만 생각하는 건 이놈이나 저 놈이나 모두 같구나. 우진이 거칠게 김강철을 걷어차고는 부셔질 듯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쾅! 문 너머로 토플러 박사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 음 침한 녀석이 제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 다. 던전도 없이 멋대로 차원 이동…. 아 니,로그아웃이라고 불러야 하나? 우진이 애꿎은 김강철을 노려보았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털 한 올에까지 도 모두 극도의 분노가 맺힌 기분이 다. “목적이 같지 않아.” 절대자의 강림을 막고 지구를 지키는 게 목적이라고? 녀석들이 원하는 것은 제대로 들었 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가 자신의 목 적이 되지는 못했다. 놈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리셋? 허!” 가당치도 않는다. 되돌아가 무엇을? 다시 그 고통스런 20년의 방황과 귀환 후의 엉망이 되어가는 지구를 지켜보 자고? 자신의 목표는 다르다. “끊어주지.” 문 월드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 다. 자신의 지구를 지킨다. 모든 던전을 없애 타 차원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 고 자신만의 지구를…. 이 지구를 지 킨다. “모조리 죽여주지.” 가장 자신 있는 방법으로. 트래쉬의 집행을 얻을 길이 수아의 피를 보는 방법뿐이라고? “이제 필요 없다.” 집행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해도. 스스로 트래쉬가 되어 놈들에게 집행 해 주마. 우우우우. 강우진의 분노에 그의 주변을 항상 맴돌던 악령들이 모습을 보였다. 울부짖는 그들의 소름 끼치는 소리에 도 우진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 다. 수천수만의 악령이 자신에게 들러붙 어 있다. 수를 셀 수도 없다. 그 무게를 짊어지고 온 그다. 울부짖으며 주위를 맴돌던 악령들이 언제나 그래 왔듯이 다시 모습을 감추 기 시작했다. 전과는 조금 다르게…. 그가 착용하고 있는 트래쉬의 세트 아이템들에 나눠서 말이다. 투웅. 강우진이 문을 나섰다. 196. 파괴신(1) 잔뜩 인상을 쓰고 문을 나서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이 었다. 정민찬에 우승훈,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김해민에 블랑카,비비까지…. “왜 이렇게 몰려 있어?” “괜찮으십니까? 안에서 소리가….” “안에 놈 치료해 줘.” 치료 능력이 있는 블랑카가 눈치껏 격리소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우 진을 뒤따랐다. “왜 이렇게 졸졸 따라와?” “음. 사장님,괜찮으십니까?” 정민찬이 용기 내 묻자 그가 인상 쓰 며 되물었다. “안 괜찮을 건 뭐야?”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우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마다 울상인 그들의 얼굴에는 공통 점이 있었다. 하나같이 자신을 걱정스 레 쳐다보는 눈빛. “설마 날 걱정하는 거야?” “허,참.” 우진이 피식 웃었다.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세상 살다 자신이 저런 눈빛을 받을 줄이야. 아니, 언제나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 신을 바라봐준 존재가 있긴 했다. ‘어머니 아니곤 처음이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가? 이미 이들도 가족이라 불러야 마땅하 니 말이다. 가진 힘의 여하에 관계없이 걱정이 될 수도 있다. 그게 신선한 기분이었다. 모두를 지 켜준다 생각했건만 그들의 걱정을 받 고 있었다. 싫지만은 않은 느낌. “다들 답답하지?” “네? 넵!” 대답하는 정민찬의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넘쳤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답답하기론 그가 제일 심했을 것이다. 하도 자주 연락을 해서 이제는 무덤 덤하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세계 각국 의 주요 인사들이 연락해 지원 요청이 나 국왕과의 약속을 잡으려고 드니 말 이다. 그들의 생각에,아니, 세상 모든 사람 의 생각에는 던전 브레이크라 통칭된 몬스터 러시의 최선봉에 강우진이 있 으며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 추측하는 모양이었다. 실제 정민찬도 그리 생각하고 있으 나,우진에게 답을 물어 그들에게 전 해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그들의 요청과 비난, 협조와 협박을 사전 차단해 강우진의 활동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몬스터 와의 전쟁이 종식될는지 궁금하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 “모여봐.” 한결 부드러워진 우진의 표정에 덩달 아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 나….” 생각해 보면 자신도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화가 났던 것 아닌가? 똘망 똘망한 눈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을 보며 어느 정도 말을 정리했다. 남에게 설명해 보이려 하니 얼추 자 신도 정리가 되는 듯싶었다. “현실 지구가 2529년이래. 여긴 가상 으로 만들어진 세계고 말이야.” “예에?” 모두가 깜짝 놀라는데 승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럼 저희는 뭡니까?” “현실에서 접속한 사람들이래. 아니 면 가짜거나.” 심드렁한 그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이해되지 않는 지금의 말을 곱씹었다. 우진은 그들의 이해도와는 상관없이 정리된 말을 쏟아냈다. “이런 가짜 세계가 72개 있어,지구 는 그 중 하나고. 아르펜도 그중 하나 겠지. 전에 갔었던 자쿠도….” “그,그럼. 차원 영주들은 뭡니까? 차 원 영지는 또 뭐고,던전은 또….” “차원의 틈새. 뭐,작은 행성쯤 되겠 지. 그 주인이 차원 영주고 말야. 전부 지구에서 접속 중이겠네. 생명유지 장치 달고 겨우 부지하는 정도겠지.” 너무 진지해 장난 같기도 한 그 말들 을 듣고 있자니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어 속까지 메스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각성자들이 접속한 인간. 그렇 지 않은 자들이 가상인간…. NPC란 말입니까?” 유난히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민찬을 보며 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자격으로 나눈다면 그 가설도 일리가 있으나 진실은 모르는 일이다. 말을 하는 우진도 100% 토플러 박사의 이 야기를 믿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냥 들은 이야기가 그래. 뭐…. 스 스로가 좀 가짜같이 느껴져?” 민찬이 정색하곤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우진이 피식 웃었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삶을 산다. 이런 이들을 1과 0의 집합체만으로 정 의할 수 있을까? 이들이 가짜라고 정의할 것이 아니 라, 이들을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나 존 재가 있다면 그들을 신으로 정의해야 할 일이다. “들은 이야기라면…. 누구에게 들었 습니까?” “토플러 박사.” “그를 만났습니까?” “멋대로 게이트 열고 오더군. 2529년 의 지구에 사는 인간이래.” 황당한 이야기에 절로 묻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서로 왕래가 가능한 겁니까?” “모르지.” “헐.” 무책임하다고 해야 할까? 그냥 생각 이 없다고 해야 할까? 쉬이 받아들이 기도 어려운 이야기를 잘도 뱉어놓고 태연한 우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가 씩 웃으며 모두의 얼굴을 한 번 씩 쓸어보았다. “내가 확인해 보러 가려고.” 민찬은 우진을 말려야 하는 것이 아 닌가 싶었지만 말을 꺼낼 순 없었다. 혼란스럽다. 이 세상이 가짜라니…. 내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니…. 다른 국가의 지원 요청이라던가,일 본의 선전포고,심지어 몬스터들의 던 전 브레이크도 크게 중요치 않게 느껴 졌다. 모두 가짜라지 않은가…. 그것을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 이라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우승훈이 불쑥 물 었다. “국왕님,믿을 만한 말입니까?” “모르지.” “음,괜히 막 사기 치고 그런 거 아 닐까요? 제가 많이 쳐 봐서 아는데 조 금 구린 냄새가 나는데요?”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사기면 죽도록 패고 와야지.” “하하….” 승훈은 우진에게 휴대폰 하나 속여 팔았다가 된통 맞았던 기억이 떠올라 괜히 어색하게 웃었다. “확인해 볼 가치는 있어.” “사실이면 어찌합니까?” “뭐,어쩌겠어.” 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승훈이 침 을 꿀끽 삼켰다. 우진이 괜히 긴장한 사람들을 돌아보 며 아끼던 말을 꺼냈다. “내가 없는 순간 해줘야 할 일이 있 어.” “말씀해 주십시오.” “수아를 지켜.” “당연한 말씀입니다.” 강우진의 가족만큼 1급 경호 대상이 또 있을까? 정민찬의 고민 없는 대답 에 우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모든 걸 잃어도 수아를 지켜.” 우진의 시선이 비비에게로 향했다. “알겠지?” “네,주인님.” 수아가 지구의 신을 대리한다면…. 코드를 노리는 차원 영주들의 공세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코드를 넘겨줄 수도,수아를 잃을 수 도 없다. “애들도 돌아오면 내 말 꼭 전해.” “넵." 도재민이 아직도 영지전을 진행 중인 지 포인트가 차근차근 쌓이고 있었다. 소식 없는 성구와 편지만 남겨두고 훌 쩍 떠나 아르펜의 어딘가에 있을 최해 솔의 복귀는 또 언제일지. “사장님은 어디 가십니까?” “가기 전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말이 야.” 문 월드 녀석들이 로그아웃을 도운다고? 타의에 의한 소환은 한 번이면 족하 다. 2529년의 지구에 볼 일이 있다면 제 발로 갈 것이다. 우진이 유령마를 소환해 올라탔다. “비비.” “네,주인님.” “혹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불사의 군대를 부탁하마.” 언데드나 권속들을 소환하자면 네크 로맨서의 마력을 소비하게 된다. 특히 나 용용이 같은 경우 몸집도 워낙에 크다 보니 전투 중 파괴되는 족족 재 생시켜야 하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마 력도 상당하다. 불사의 군대가 왕인 우진에게서 멀어 져 활동하기 힘든 이유였다. 가끔 지휘권을 리치 제니스에게 넘겨 멀리까지 움직이게 두기도 하지만,영 혼 갈취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그에 비 해 마력이 모자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비비는 공중요새의 거점 관리 인으로 임명되어 있다. 우진이 주위 영혼들로부터 마력을 끌 어다 쓰는 것처럼 비비 또한 거점의 포인트로 마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거점의 근처에 있는 한 말이다. 비비가 지원해 주기만하면 불사의 군 대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럼 금방 확인하고 올 테니 수아 잘 지키고 있어.” “네,주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지키겠습니다.” 훌쩍 몸을 띄워 날아가는 유령마를 보며 저마다 손을 흔들었다. 사정을 아는 몇몇은 지구의 신녀를, 모르는 몇몇은 그저 우진의 가족을 지 키기 위한 사수전의 시작이었다. 푸숙. 접속기에 연결되었던 코드가 뽑히며 토플러 박사가 눈을 떴다. “으음.” 신음하는 그에게 대원 하나가 물병을 내밀었다. “고맙네.” “설득은 잘되셨습니까?” “흐음. 잘 모르겠네.” “예?” 박사의 애매모호한 말에 깜짝 놀랐 다. “코드가 없으면 무슨 수로 행성을 복 구시킨단 말입니까?” “으음.” 가상 서버들을 리셋시키기 위해서 그 들이 필요한 것은 단 두 가지. 복구 코드와 행성 코드. 우진이 가진 것은 삭제 코드와 이엘 로를 죽이고 얻은 복구 코드가 전부 다. 행성 코드를 가진 것은 72군주들뿐. 토플러 박사가 할 일은 강우진을 설 득하여 지구의 코드를 습득해 1좌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그를 로그아웃시켜도 쓸모가 있었다. 행성 코드 없이 삭제 코드와 복구 코 드만을 가지고 와봐야 칼과 냄비만 주 고 요리를 해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이라도 중단해야 하는 것 아닙 니까? 괜히 파괴신의 강림을 부추기는 게 아닌지….” 힘겹게 버텨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삭제 코 드를 가진 강우진은 다루기 어렵고, 애초에 접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희망은 이엘로에게 있었건만…. 불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며 토플러가 쓰게 웃었다. 독단적으 로 일을 벌였으니 욕을 먹어도 싸다. 하지만 혼자서 책임을 지고 싶어도 이미 일이 커져 버렸다. “김강철에게 지령을 내려야겠네.” “준비하겠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 했다. 강우진이 행성 코드를 가지지 않은 채 로그아웃하는 최악의 사태를 말이 휘이이이. 모래바람만 덩그러니 부는 사막뿐인 곳에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와 버 려진 건물 두어 채가 눈에 들어왔다. 유령마를 세운 우진이 훌쩍 뛰어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래뿐. 인기척을 찾을 수 없었으나 신중을 기했다. “깨비.” [크큭,나를 불렀나?] “주위에 사람이 있나 찾아봐.” [제물이 필요한가? 아니면 피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찾아.” [크크,분부를 따르나이다.] 웃음기 가득한 깨비의 말에 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도록 하려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은 게 아닌가. “시작해 볼까?” 우진이 업적 상점에서 구입한 봉인석 과 귀환 구슬,그리고 소환석을 꺼냈 다. 집에 가기 위해 아르펜에서 생존한 지 20년이나 지나 겨우 찾은 방법. 세 가지 물질을 한데 모아 깨트렸다. 파아아아. 가루가 되어 부서진 그것들이 연기처 럼 흩날렸다. 곧 우진의 눈앞에 뭉쳐 지더니 화악 빛을 토해냈다. 후우우응! 빛 덩어리. 갑옷을 입은 빛 덩어리가 입도 없이 잘도 말문을 열었다. “그대 궁극에 이른 전사여….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변함없는 그의 말에 우진이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72좌. 모든 행성 코드를 가진…. 절대자에 가장 근접한 자. 차원 관리자를 향해 말했다. 197. 파괴신(2) “지구.” “이곳이 지구다.” 우진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짜 말고.” 대답 없는 차원 관리자를 응시했다. 붉은빛은 초월체를 보는 듯했다. 그 위에 걸친 갑옷은 무슨 효용이 있는 것인지…. 그저 인간을 흉내 낸 것인 지,아니면 무슨 다른 기능이 있는 것 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왜 대답을 못 해?” “무엇이 가짜고 무엇이 진짜인가?”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뒤흔 들었다. 즉시 답하려던 우진은 말을 삼켰다. 가짜와 진짜의 정의는 무엇인가. 가상과 현실의 정의는 또 무엇인 지…. 고뇌에 빠지자 우진이 생각을 쫓으려 머리를 털었다. 하등 중요치 않았다. “문 월드. 그곳으로 보내줘.” “갈 수 없다.” 차원 관리자의 말에 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토플러의 말이 진짜였나? 정말 이 세 상이 가짜라는 게 진실일까?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어 가상의 결과물인 차 원 관리자는 현실인 문 월드로 자신을 보낼 수 없는 것인가? “왜지?” 침묵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차원 관리자도 방법이 없다면 그와 남은 볼일은 한 가지뿐. 슈아악.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소환해 들었 다. “죽어줘야겠어.” 대답 없는…. 빛으로 이루어져 그 표 정도 알 수 없는 녀석이 움직였다. 아 니,꿈틀거렸다고 해야 하나? 츠츠촛. 심상찮은 기운을 뿌리며 커진 빛이 커졌다. 번개가 압축된 듯 엄청난 에 너지를 발산하며 뭉쳐진 빛 덩어리는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골렘의 현신을 보는 듯했다. 헐렁한 조끼를 입은 것처럼 보였던 갑옷은 덩치를 키운 차원 관리자의 몸 에 꼭 맞는 견갑이 되었다. 길쭉이 뻗 어 나온 팔과 다리 덕에 키가 3미터는 되어 보였다. 쿠르릉. 몸을 움직일 때마다 번개가 치듯 스 파크를 뿜는 그의 몸은 겪어보지 않아 도 폭발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음이 느 껴졌다. “도전이라면 환영하지.” 자신만만한 72좌의 말에 우진이 진지 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이길 수 있을까? 너무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어 서일까? 싸워보기도 전에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흥.” 불안감을 내쫓듯 우진이 크게 몸으로 돌진했다. 놈이 빛이면 어떠랴. 죽이면 그만이 다. 과지직! 72좌의 팔뚝을 꿰뚫은 전사의 무기가 그대로 쑥 들어가 버렸다. 저항 없이 들어간 창이지만 빼내려고 하니 콘크 리트에 박힌 듯 빠지지 않았다. 쿠르릉. 상처라고 해야 할지,틈이라고 해야 할지. 녀석의 팔뚝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인력으로 창을 끌어당 기고 있어 꼼짝달싹 못 하는 상황. 슈아악,쾅! 녀석의 주먹이 우진의 옆구리를 그대 로 후려쳤다. 퍼억! 사막 언덕에 부딪치며 모래와 함께 파묻힌 그가 곧장 솟구쳐 다시 달려들 었다. “소환.” 우진의 손에는 해제했다가 다시 소환 한 전사의 무기가 대검의 형태로 변환 되어 들려 있었다. 무기의 회수가 자유로운 전사의 무기 를 활용한 전투술은 무궁무진하다. 츄아앙! 대검이 거대한 팔뚝을 잘랐으나 물을 자르듯 너무나 쉽게 그것을 지나쳤다. 잘린 팔은 절단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쉽게 다시 붙어버렸다. 슈아앙,쥬앙! 목을 베어도,다리를 잘라도 마찬가 지.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해 칼질을 하는 듯 너무 무력하기만 했다. 콰아앙! 잠깐 방심한 사이 다시 날아든 녀석 의 주먹에 저 멀리 날아가 처박힌 우 진은 입안으로 들어간 모래를 뱉으며 일어섰다. 충격은 없다. 영혼의 갑옷이 작용해 그 충격량만큼 영혼이 소멸되어 버렸 을 뿐. “젠장.” 인간도 아니고,몬스터도 아니다.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 초월체라고 불러야 마땅할 녀석을 어떻게 상대해 야 할까? 몸 자체가 빛 덩어리인데 말 이다. “성가신 놈이네.”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활로 변환했다. 슈아앙,슈숙! 시위를 당겼다 놓는 것만으로도 빛의 화살이 생성되어 녀석에게 박혔다. 날 아간 화살은 자기장에 가로막힌 둣 천 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종래에는 몸에 흡수되어 버렸다. 슈숙,슝! 어차피 물리적인 공격도 먹히지 않 고,빛의 화살 또한 무소용이다. 권속들을 불러 녀석을 상대할까? ‘소모적 이야.’ 해골 부대들이,데스나이트들이 얼마 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용용이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 을 것이다. 리치 제니스를 부를까도 생각해 봤지 만 우진은 포기했다. ‘마력을 아낀다.’ 실체를 가진 몸이 없더라도 녀석의 영혼은 있을 터. 트래쉬의 징벌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슈아악! 여러 개의 단검으로 변환한 무기가 날아들자 차원 관리자가 주먹을 들어 하나를 막아냈다. 츠아앙! 빛의 손이 거머쥔 단검 하나. ‘갑옷?’ 나머지 녀석의 신체를 노리고 날아간 것들은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상처 하나 없는 몸은 관통보다는 그냥 통과 시켜 줬다는 게 맞을 것이다. ‘갑옷 안에 핵이 있다?’ 그럴 듯했다. 자연계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체는 중 심구의 역할을 할 핵을 가진다. 그것 이 아니라면 그저 유령이나 영혼으로 불려야 할 판. 유일한 약점을 갑옷으로 가리고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녀석이 자아를 가진 이상 영혼은 존재할 터. 츄아악! 단검들이 사라지며 어느새 우진의 손 에는 채찍이 들려 있었다. 변화무쌍한 전사의 무기가 갖가지 형태로 변하며 그의 전투를 자유롭게 했다. 뱀처럼 굽이쳐 날아간 채찍이 차원 관리자의 갑옷을 휘감았다. 녀석이 갑 옷을 벗어 던지지 않는 이상 놈을 속 박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 후우옹. 채찍을 잡아당기자 녀석에게로 끌려 가듯 휙 몸을 날릴 수 있었다. 빠르게 다가간 그 상태 그대로…. 콰앙! “크윽” 차원 관리자의 주먹에 다시 모래밭을 나뒹군 우진이 찢어진 입안에서 비릿 하게 느껴지는 피를 뱉었다. 마지막 남은 영혼까지 소멸되어 버렸 다. 영혼의 갑옷이 없었다면 진즉에 녀석의 주먹 한 방 한 방이 크게 아팠 을 것이다. 여태 싸워온 상대와는 차원이 다른 파워. “짜증 나네.” 생긴 건 주변에 전류 공격이나 응축 된 에너지를 폭발해 엄청난 마법 피해 를 줄 것 같은 녀석이 해대는 공격은 그저 주먹질이 전부다. 녀석의 신체는 그저 물리 공격을 아 예 무시해 버리는 신체 그 이상 그 이 하도 아닌 느낌. “새끼.” 우진이 다시 돌진해 갔다. 마력을 이 용해 놈을 속박하면 좋겠지만 단 한 줌의 마력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트래쉬의 징벌 자체를 발동시킬 수 없으니 말이다. “네 녀석의 수법을 알고 있다.” “그래?” 우진이 씨익 웃으며 입가에 묻은 피 를 닦았다. “막아봐.” 툭,툭! 모래를 박차며 다시 달렸다. 후우옹. 아예 자세를 잡고 주먹을 치켜든 차 원 관리자의 움직임이 심상찮았다. 여 태 휘두른 주먹이 그저 파리를 쫓듯 가볍게 상대한 것이라면 이번엔 진짜 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것이다. 아니, 뼈 걱정하기 전에 목숨부터 걱정해야 할 판. 퉁! 우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차 원 관리자의 몸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미 소가 지어져 있었고,차원 관리자의 그림자 또한 미소 짓고 있었다. 쿠우욱. 주먹을 내뻗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 잡아끄는 듯한 느 낌…. 몸이 어딘가에 꽉 낀 듯한 느 낌…. 턱. 갑옷에 매달린 우진이 씩 웃었다. 한 탬 거리에서 마주 보는 차원 관리 자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알고 있다고 다 막을 수 있는 게 아 니야.” 전격체인 주제에 갑옷을 두르고 있어 그림자가 생겼다. 그리고 깨비는 언제 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말이다. “잘 가라.” 우진의 손이 차원 관리자의 머리를 짚었다. 슈아아아아! 모든 마력이 일시에 빠져나가며 공허 한 공백이 찾아왔다. 그 기분 나쁜 공 백을 차원 관리자를 상대로 이겼다는 승리감이 가득 채웠다. “꾸어어어어!” 트래쉬의 징벌에 빨려들어 가는 녀석 의 영혼을 보며 우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터엉. 녀석이 두르고 있던 갑옷이 떨어져 내렸고,붉은 빛무리가 모조리 빨려들 어 갔다. “후우,끝이군.” 저장된 영혼이 주먹 몇 번 받아낸다 고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주변에 시 체나 영혼이라도 있으면 빨아들여 비 워진 마력을 채우겠건만 애초에 인적 이 드문 곳을 찾았기에 아무것도 발견 할 수 없었다. 절대자의 강림을 막았다. 지구에 큰 위협거리가 될 녀석을 막 은 것이다. 녀석이 부활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할 터. 이엘로나 차원 관리자 나 성가신 녀석들이 부활해 다시 난장 을 피우기 전에 문 월드로 향할 방법 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 있다는 지구의 신을 죽이고 코드를 갈취한다. 코드도 얻고,수아도 지킬 방법. “씽씨….” 유령마 씽씽이를 불러 되돌아가려던 우진은 바닥에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마력 반응에 눈을 크게 떴다. 츄아아아아. 공중으로 떠오른 갑옷 안에 푸른 빛 덩어리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파랗게 빛나며 다시 만들어진 초월체. 끊임없이 주위 에너지를 모으듯 커지 는 존재감은 우진을 불안하게 만들었 다.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 초월체가 마침 내 터지고 말았다. 주변 모든 것을 집 어삼키며 말이다. 꾸아아앙! 거대한 모래 폭풍이 잔뜩 피어오르며 먼지구름이 해를 가리고 시야를 어둡 게 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사막 의 한가운데 다시 붉은색을 찾은 차원 관리자가 점멸하듯 빛을 내뿜고 있었 다.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힘을 소진했지만 승리했고 살아남았 다. 지구를 비롯한 72개 차원의 코드 를 모두 모았다. 이제 그의 할 일을 마치기만 하면…. [크크큭.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 가?] 어두워진 공간 자체에 커다란 눈이 생겨나 차원 관리자를 내려다보며 웃 었다. 그림자 도깨비 깨비가 음흉히 웃으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죽음의 형벌에서 깨어나 나의 존재 를 다시 세상에 드러내리라.] 깨비가 차원 관리자의 몸을 회오리치 듯 압박했다. 검은 그림자가 그의 붉 은 빛무리와 섞여 들어갔다. 점점 검어지던 그것이 어느새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크크크크.” 쭉 찢어진 입을 비집고 어둠이 웃었 다. 시체들의 몸을 빌린 강림? 비교할 수 없다. 온전한 부활. 네크로맨서의 힘을 빌린 불완전한 존 재로의 소환이 아닌 완벽한 부활. “크하하하하!” 태초의 세상을 창조한 존재…. 차원의 절대자가 긴 시간을 지나 강 림 했다. 아르펜 행성,소로스 산 정상의 세계수 “아….” 성녀 메르디는 안타까운 음성을 뱉었 다. 창백하리만치 투명한 피부의 남자 가 자신의 앞에 서 있다. 손을 내밀어 봤지만…. 슈아아아. 검은 연기가 되어 흡수되듯 자신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아아….” 영혼이 보인다. 죽은 자들의…. 비통 한 절규를 흘리는 영혼들이 눈에 보인 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들의 절규에 눈을 감아버리고 싶지만 메르 디는 꿋꿋이 버텨냈고 적응하려 애썼 다. “후우.” 도움을 주고 싶어도 어찌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가 모시게 된 신은 예 지의 여신처럼 친절하지도,일일이 신 탁을 내리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어느 순간 영혼들이 보였고 그들을 보듬어주려고 해봤자 연기가 되어 사 라져 버리게 할 뿐이었다. 긴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성 녀님.” “해솔 대장님!” 강우진을 따르던 지구인 남자. 최해솔이 돌아왔다. “어디를 갔다 오신 거예요?” “…국왕님께 도움이 될 만한 힘을 찾 느라.” “그 힘은 찾으셨나요?” “예에.” 시원하게 대답하는 해솔의 얼굴엔 자 신감이 가득했다. 그때 세계수 앞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바람과 함께 획 하니 꺼져 버렸다. 화르록! 그러더니 곧 그곳에 불길이 치솟으며 사람모습의 그림자가 보였다. 198. 가상과 현실의 경계(1) 비비캐슬 관제탑 회의실. 대형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앵 커의 목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고비사막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에 의해 강력한 모래 폭풍이 지나 간 가운데 던전 브레이크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단을 파견 중입니다. 폭 발 직전 위성사진이 도착했으며…. 다 음 소식입니다….」 이전 같았으면 속보로 다뤘을 이야기 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보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워낙에 많은 던전 브레이크가 주변 곳곳에서 일어나니 한 나라가 멸망할 정도의 강력한 차원 영주가 강림해야 속보로 보도될 정도였다. 흐릿한 위성사진 속에 찍힌 인영을 바라보는 아르달 사람들의 표정은 좋 지 못했다. “국왕님 같지 않습니까?” “음….” 침묵을 깨는 우승훈의 말에 모두가 침음에 잠겼다. “어? 인터넷에 좀 더 자세히 나와 요.” 고비사막의 폭발이 거의 핵폭탄급이 었기에 관련 자료가 빠르게 업로드되 고 있었다. 위성사진이 아닌 영상 하나를 재생시 켰다. 「오,쉣! 뭐야? 페가수스야.」 촬영자의 음성인지 화면은 하늘을 질 주해 가는 유령마를 찍고 있었다. “저거 씽씽이 맞죠?” “맞네….” “여기 위치가 어디죠?” 영상과 함께 올려진 글귀를 보니 중 국이었다. “맞네. 서쪽으로 가고 있었대.” "….” 정민찬이 잠깐 침묵하다 물었다. “살아계시겠죠?” “당연한 소릴 하시네. 저희 국왕님 미사일 맞고도 멀쩡하셨던 분인데, 하 하.” 우승훈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조금 안심하는 기색이 흘렀다. “주인님은 살아 있어요. 제가 존재하 니까요.” "아,역시.” 비비의 말에 확실히 안도감이 들었 다. “휴,요즘은 왜 이렇게 작은 거 하나 하나에도 마음을 졸이는지.” 민찬이 아직도 콩닥거리는 가슴을 겨 우 진정시켰다.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 마냥 우진이 어디 갈 때마다 마음 졸 이는 그였다. “그럼 문 월드인가 그 차원으로 가신 건가?” 차원 영지도 가고, 아르펜에도 종종 가는 우진이기에 놀랍지는 않은 일. 하지만 그가 가져올 진실의 조각이 겁 났다. “그렇죠. 진짜 여기가 가상이면 어쩌 죠?” 승훈의 걱정에 민찬이 가라앉은 목소 리를 뱉었다. “우리도 가짜겠지.” “흐음….” 가상이 사라지고 현실만 남는다면 각 성자들만 깨어나게 될까? 각성자가 아닌 민찬도,승훈도,해민 도 복잡한 얼굴로 침묵했다. 「속보입니다. 고비사막 폭발의 조사 를 위해 파견되었던 중국 림섬길드의 대원들과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이들 이 보내온 영상….」 앵커의 말과 함께 영상이 화면을 가 득 채우고 있었다. 아직도 시야를 뿌옇게 흐리는 먼지들 은 마치 안갯속을 걷고 있는 듯했다. 「앞쪽에서 강력한 마력 감지.」 「비키세요.」 승훈에게는 모국어처럼 들리는 중국 어가 흘러나오고 곧 능력자가 힘을 펼 친 듯 주변 공기의 흐름을 제어해 먼 지를 한데 뭉쳐 날려버렸다. 맑아진 시야 너머로 보이는 그것은 조끼 같은 갑옷을 입은 채 우람히 서 있는 커다란 인영. “골렘인가?”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유사 인종 같지도 않은 그것 은 생물보다는 무생물에 가까운 몸체 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골렘인 돌쇠처럼 말이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몸을 이루는 검 은 것들이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를 정 도로 들끓으며 자기들끼리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석유를 뭉쳐 놓은 것 같기도 했고, 검은 구름이 모여든 것 같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이다. 후우우응,광! 몸을 일으킨 정체불명의 괴물이 휘두 른 손짓에 전방에 있던 대원들이 모조 리 충격을 받고 날아가 버렸다. 「크크큭.」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는 그것이 촬영 을 하던 대원마저 해치웠는지 여기저 기 흔들리던 카메라의 초점이 땅에 처 박히며 영상이 끊어졌다. 「중국 당국은 이를 새로운 차원 영 주의 출현으로 보고 대책반을 꾸리는 한편,전술핵의 사용 승인을 검토 중 인 것으로…….」 “헐,뭐야? 겨우 저 정도 가지고 핵 사용까지 고민하는 거야?” 민찬이 어이없어 하는데 곧 회의실로 직원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총리님,중국 공안으로부터 지원 요 청 입니다.” “저것 때문에 그래?” 방송 화면을 가득 채우는 영상 속 괴 물의 캡쳐본을 가리키자 직원이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방송 보도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막무가내 로 도시를 파괴하며 장가구 서측까지 당도했답니다.” “…속도가 너무 빠른데?” “것보다 저희 지금 국왕님 안 계시잖 아요.” “그렇지.” 김해민이 얼른 뉴스 화면을 조작해 컴퓨터 화면을 띄웠다. 지도를 활성화 해 보고 표정을 굳혔다. “진행 방향이 일직선인데요.” 정민찬이 빨갛게 그은 선을 보곤 침 음했다. “음,베이징이 코앞이군. 이러니 똥줄 탈 만하지.” “아뇨,그 뒤를 봐보세요.” 김해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연 장된 일직선 위에 위치한 도시를 보곤 민찬도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서울…. 아니,우릴 노려?” 불안한 추측이지만 왠지 맞을 것 같 은 느낌. “폭발과 함께 엄청난 놈이 나타났고 국왕님은 사라졌다라….” 겨우 진정됐던 불안감이 더욱 커지는 민찬이 었다. 그때 다시 다른 직원이 들이닥쳤다. “총리님,대한민국의 연락입니다. 부 산에서 대규모 브레이크가 일어나 도 움 요청입니다.” “총리님, 뉴욕에서….” 저마다 전화기를 붙잡고 들이닥치는 그들을 보며 민찬이 관자놀이를 지그 시 눌렀다. “국왕님도 안 계신데 우리가 뭘 할 수 있다고….” 강우진 1인 군단이나 다름없는데 꼭 그의 부재중에 전 세계에서 약속이라 도 한 듯 미친 듯이 몬스터들이 나타 나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계가 진짜여도 문제 고,가짜여도 문제였다. *** 팔다리가 없어진 기분이다. 아니,몸 자체가 사라져 버린 건가? 환청이 들린다. 살려줘. 우릴 버리지 말아요. 지킬 수 있었잖아! 돌아가지 마! 살고 싶어요. 살려줘요.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목소리,모 습…. 또,꿈인가? 또 이 지독한 악령들의 괴롭힘에 이 끌린 것인가? 흐릿해진 시야로 보이는 절규하는 영혼들이 우진에게 다가왔다. 얽히고설켜 지옥에서나 볼 법한 이들이 그의 몸을 더듬었다. 간지럽고 뜨거운 느낌? 웃긴 것은 그에겐 몸이 없다는 것이 다. 의식이 있고 자아가 있는데 자신의 몸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공기 중 에 녹아들어 사위를 살피듯 악령들만 보일 뿐. 허공에 헛손질하는 그들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아니,그토록 갈망해 왔던 소원일지도 몰랐다. ‘자유다.’ 자신을 옭아매던 모든 것에서부터 자 유로워진 기분. 해방감. 지금이라면 저 악령들의 아우성으로 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가자.’ 나가려 했다. 나가려 했는데…. 화아악. 나비가 날아와 우진의 앞에 섰다. 찬 찬히 흔드는 날갯짓이 가루가 되어 흩 어졌다. 곧 나비는 사라지고 소녀가 나타났다. 얼굴이 낯이 익다. 폭탄 테러에 희생 된 소녀. 고마워요. 바닥을 기던 팔 없는 시체가 가루가 되어 우진의 앞에 나타났다. 죽음의 순간 잘렸던 팔이 다시 생긴 멀쩡한 모습. 당신과 함께 싸워 영광이었습니다. 기억난다. 용병 시절 자신과 함께 전장을 누볐 던 자유 기사. 머리에 피를 흘리던 노인이 연기가 되어 우진의 앞에 나타나 고개를 숙였 다. 원망하지 않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자신의 손에 죽어간 수천의 사람들 중 하나겠지…. 죽은 모습 그대로 그를 괴롭히던 악 령들이 저마다 본래의 모습으로 바뀌 어 눈앞에 나타났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웃는 그들의 모 습에 우진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어 떠한 표정을 지을지 감을 잡을 수 없 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아줘 고맙소. 하나하나가 그리 말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는데…. 무의 공간. 실체도 불분명한…. 자신의 존재 자 체를 인지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주 변을 둘러싼 영혼들이 존재를 증명해 주었다. 지켜주지 못한 그 생명들이 자신을 바라봐 주고 있었다. 마치 지켜주듯이…. *** 황폐화된 분지로 레이온호가 착륙했 다. 푸슈욱. 문이 열리자 내려온 계단으로 방독면 을 쓰고 무장한 군인들이 재빨리 나왔 다. “대령님,수레 준비되었습니다.” 환자 호송용 들것처럼 생겼는데 저절 로 공중에 떠 있는 그것을 수레라 불 러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박사로부터 연락은?” “설득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음."' 신음과 함께 레이온 대령은 팔목에 달린 조작 장치를 실행했다.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나고 토플러 박사의 모습 이 보였다. “박사,코드를 가지지 못하면 로그아 웃시켜봐야 의미가 없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강철로 하여금 코드를 습득하도록 지시했습니 다. 그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음,알겠소. 그럼 복구 코드부터 구 출토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코드 획득 시 즉시 통 신하겠습니 다.」 지구 행성 코드와 복구 코드가 필요 하다. “김강철 위치는?” “서울역 입니다.” 다행히 같은 섹터에 위치해 있었다. “수레 하나 더 준비시키게.” “넵 레이온호에서 하나의 수레가 더 내려 오고 대원들이 준비되자 레이온 대령 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황무지가 되어버린 길을 10여 분 걷 자 뜬금없이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 타났다. 군데군데 무너지고 까져 형편 없었으나 사람이 걸어서 오가기엔 충 분한 땅굴이었다. 입구에 돌입하기 전 레이온 대령이 대원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방어 시스템의 무력화 시간은 단 10 분이다. 둘을 모두 구하려면 빠듯하게 움직여야 할 거다.” “넵!” “대령님,무력화 준비 완료되었습니 다.” 레이온 대령이 무너진 계단의 천장에 쓰인 희미한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 았다. 세월의 흔적에 닮고 닮은 그 글자는 분명 서울역이라 쓰여 있었다. 제대로 찾았다. 이곳에 강우진의 본 체가 접속해 있다. 그를 구출해 빼내 오면 된다. “시작해.” “'맵!” 대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10분 동 안 가디언들의 활동을 멈춰줄 무력화 장치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 공중요새에서 가장 경비와 보안이 삼 엄한 곳은 다름 아닌 수아의 방이다. 요즘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 고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이어나가는 수아는 괴롭기만 했다. 그렇다고 제 기분만 표출하기에는 너 무 철이 들어버렸는지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 혼자 애쓰고 있었다. “수아야,많이 답답하지?” “아니야,엄마.” 보호를 위해서지만 혼자서만 지낼 수 는 없는 노릇이니 이수경이 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는 왜 날 안 찾아와?” “응? 오빠가 바빠서 그렇지 않을까?” 이수경이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강우진이 의도적으로 수아를 멀리하 는 것을 쪼그만 것이 그대로 느낀 모 양이었다. “후,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지원이 언니는 언제 와?” “곧 올 시간 됐을걸?” 벌써 수십 번은 했을 대화를 오늘도 어김없이 주고받는 모녀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지원이니?” 이수경이 반갑게 문을 열어주었는 데…. “실례하겠습니다.” 낯선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매일 식사와 청소를 해주는 직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경호원과도 멀어 보이는 사내…. 이수경이 본능적으로 수아를 뒤로 숨 기며 그를 경계했다. “누구시죠?” 사내가 인상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 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김강철입니다.” “무,무슨 일이죠?” “세상을 구하러 왔습니다.” 김강철이 웃으며 한 발 다가왔다. 199. 가상과 현실의 경계(2) “대령님,무력화 시스템 가동 준비되 었습니다.” “지구 코드는?” “지령 전달했고 5분 내 김강철이 획 득할 거랍니다.” “좋아. 돌입한다.” 10분. 강우진을 먼저 빼내고 김강철을 빼내 면 된다. 어지러진 세상을 말끔히 되돌리고 다 시 시작할 것이다. 레이온 대령을 위시한 대원들이 서울 역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 이수경은 수아를 뒤로 숨기며 떨리는 음성을 뱉었다. “무, 물러서시죠.” “괜찮습니다. 금방입니다.” 김강철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섰다. 즐겁지도,괴롭지도 않다. 그저 해야 할 일이니 할 뿐이다. “안 된다,이놈아!” 위협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느껴졌다. 자식을 지키려는 부모 의 본능적인 행동. 이수경이 김강철을 와락 끌어안았다. “수아야,도망쳐라!” “엄마아!” “어서어!” 이수경의 호통에 수아가 쭈뼛거리며 입구 쪽으로 우다다 달렸다. 문 너머 로 경호원들이 쓰러져 바닥을 나뒹굴 고 있었다. 일반인이 A급의 각성자를 몇 초나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아악!” 김강철이 간단히 떼어내 밀치자 비명 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지는 이수경이 었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운명은 반복된다. 자신은 더 이상 존 재하지 않을 이 세상에 그녀 또한 지 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저지르는 죄들도 사하여진다. “칫.” 잠깐의 시간이지만 수아가 문을 빠져 나가긴 충분한 시간. 김강철이 서둘러 뒤쫓았으나 문을 나 서자마자 멈춰서고 말았다. 방으로 오 던 도지원과 신디,그리고 그 뒤에 숨 은 수아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뭐죠?” “저 사람,김강철 아냐?” 늘씬한 두 미녀의 수다에 김강철이 인상을 굳혔다. “저 사람들은 뭐죠? 당신이 그랬나 요?” “뭐야아.” 다부지게 따지고 있지만 그녀들도 무 섭기는 매한가지. 괜히 놀러왔다가 쓰러진 경비원들과 쫓기는 수아,그리고 격리소에 갇혀 있었던 대한민국 최고 각성자라는 김 강철을 마주했다. 누가 보더라도 의심스럽고 무서울 상 황. "쯧." 김강철이 앞으로 달렸다. 약속한 시 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거짓 세상에 서 구원받기 전에 코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 큰 눈망울에 눈물이 고인 아이. 팟. 김강철의 손에 작은 송곳이 들려 있 었다. 작디작은 생명을 앗아가기에 이 것이면 충분하다. “아아악!” 성난 들소 같은 김강철의 돌진에 도 지원과 신디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 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화르륵. 그 신호가 그들을 살렸다. 화악! 후끈한 열기에 실눈을 뜬 신디는 불 을 보았다. 김강철이 불타오르는 듯 보였으나 이내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불덩어리와 한데 엮여 치고박고 있었 다. 화르륵,퍽! 불덩어리째 휘둘러지는 팔다리가 점 차 실체를 갖기 시작했다. 도포와 비슷한 붉은 옷을 입은 남자. 새하얀 피부에 머리,눈썹에 눈동자 까지 붉은 특이한 미남자였다. “비켜라. 세상을 구하는 일이다.” “설마요.” 붉은 머리 남자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배시시 웃었다. 누가 보더라도 힘없는 여자 셋을 핍박하려한 현장. 세상을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 였다. “시간이 없어!” 붉은 머리 남자의 미소가 김강철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만하시죠.” “비켜!” 다급한 김강철에 비해 남자는 시종일 관 여유가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하는 몸짓. A급 각성자를 저리 여유 있게 상대 하는 원소계 불의 속성을 가진 각성 자. “안 되겠네.” 화르르록. 남자의 손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리듯 타오르더니 김강철의 몸을 옭아댔다. 몸을 칭칭 감은 불꽃의 띠가 조여지자 사지가 모두 봉쇄되어 바닥에 나뒹굴 고 마는 김강철이었다. “이이익.”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포 기한 눈빛이 아니다. 그의 입술이 조 금 오무려진다 싶은 순간,반짝이는 바늘이 수아의 머리를 노리고 쏘아졌 다. 푸숙. “어딜.” 화륵! 수아의 앞에 나타난 불꽃 장막. 바늘은 목표에 닿기도 전 고열에 녹 아버렸다. “흐음,태울까 말까.” 화염 고리가 지금은 그저 묶는 역할 을 할 뿐 포박된 김강철에게 따뜻하다는 느낌 정도만 줄 것이다. 하지만 성질을 조 금만 변화시키면 한 줌의 재만을 남기 고 모조리 태워 버릴 만한 고열을 지 닌 불의 밧줄. 하지만 남자의 고민은 의미가 없어졌 다. “아,안 돼!” 흠칫 몸을 떤 김강철이 발버둥 쳤다. 그의 몸이 천천히 회색으로 변하더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스 르르 사라져 버렸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 존재들은 남자 도 많이 보아왔다. “어? 차원 영주였나?”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향해 도지원과 신디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가,감사합니다.” 아르달에 이주한 지 벌써 수십 일이 지났다. 웬만한 각성자는 모두 알고 있는데 눈앞의 남자는 처음 보는 이였 다. “에이,형수님. 저예요.” “예?” 깜짝 놀라는 도지원과 신디를 보며 붉은 머리칼의 미남자가 씩 웃었다. “성구예요, 성구.” 브레스의 저주를 이기고 스스로 용인 이 되어 나타난 불꽃 남자 흥성구. “서,설마.” “헉!” 도지원과 신디가 믿기지 않는 듯 고 개를 도리질 쳤다. 성구가 이렇게 잘생길 리가……. *** 서울역. “서둘러!” 레이온 대령의 재촉에 대원들이 발걸 음을 재촉했다. 어둑한 통로를 자기부 상 수레의 앞에 달린 불빛에 의존해 내달렸다. “목표 좌표 다 와갑니다.” 지하철 역사 안. 길게 늘어선 캡슐과 배선들. 하나하나의 캡술마다 저마다의 번호 가 쓰여 있다. 그중 하나. G-529. 캡슐 너머로 보이는 동양인의 얼굴을 보며 레이온이 명령했다. “해치 분리 시작해.” “앱 대원들이 서둘러 분리 장비들을 부착 했다. 위이이잉! 한두 번 연습해 본 솜씨가 아닌지 손 발을 척척 맞춰 순식간에 캡술의 뚜껑 을 잠그던 모든 고리를 해제했다. “열어.” 푸슝,취이이익. 빠져나온 공기와 함께 캡슐 안에는 나신의 남자가 보였다. 입이며 귀며 호스가 꽂혀 있다. 머리와 심장,신체 주요 부위마다 장치가 부착되어 거미 줄에 걸린 모습마냥 징그러웠다. “해체해.” “템!” 연결 장치들을 모조리 해체하고 꺼내 수레에 태워 나가면 된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겨우 3분 30 초. 파지지직! “아악!” 장치에 손을 댔던 대원 하나가 스파 크와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왜 그래?” “모, 모르겠습니다.” “절단기로 잘라!” “예!” 손으로 안 뽑아지면 잘라서 가면 될 일. 하지만…. 파지직! 알 수 없는 전격 보호막에 절단기를 잡은 채로 감전되어 몸을 떨었다. “으어어어어!” “젠장!” 레이온이 몸을 날려 대원을 떨어트렸 으나 이미 의식을 잃어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출해 낸 레이온 대령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었기에 혼란스러운 그였다. 치치치직. 전류에서 나는 것인지 거뭇한 연기들 이 나신인 남자의 몸 주변을 아른거렸 다. “강력한 락이라도 걸려 있다는 건 가?” 매번 이엘로만 구해보았지 강우진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것은 그도 처음이 다. “대령님,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 다.” “젠장!” 해결법이 없으니 더 있어 봐야 시간 낭비. 더군다나 대원 둘이 이미 의식 불명이다. “애들 태워. 김강철부터 구한다.” “템!” 남은 대원들이 쓰러진 둘을 한 수레 에 싣고 서둘러 김강철의 캡슐을 향해 나아갔다. *** 어둠. 사실 밝은지 어두운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공허의 공간에 작은 빛이 새어 나왔다. ‘아.' 빛과 함께 확실히 인지되는 어둠. 그 리고……. “우웨엑!” 울렁임을 참지 못해 속엣것을 그대로 토해냈다. “옮겨. 시간이 없다.” 레이온의 말에 깨어난 김강철이 게슴 츠레 깜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원들이 자신을 들어 수레에 태운다. 누운 채 보이는 천장이 낯익다. ‘지하철.’ 문 월드인가? 이곳이 진짜 지구인가? 가짜의…. 허상의 굴레에서 드디어 벗어난 것인가? 김강철이 눈을 감았다. ‘나는 구원받았다.’ 안도감과 동시에 잊었던 것이 떠올랐 다. 벌떡 눈을 뜬 그가 말했다. “지구… 코드 획득에 실패… 했습니다.” “뭐?” 잠깐 우뚝 멈춰선 레이온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젠장,일단 빠져나간다.” 10분 안에 빠져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디언들이 활동을 재개한다. 대원들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 공중요새 비비캐슬. “휴,큰일 날 뻔했습니다.” 뒤늦게 온 정민찬과 대원들이 수아와 타박상을 입은 이수경을 위로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외부인의 침입,아니,가둬두었던 김 강철의 기습에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형님은 어디 가셨데요?” “으음.” 성구의 물음에 정민찬이 신음했다. 워낙에 많이 바뀐 홍성구인지라 그의 말투가 아니라면 정말 딴 사람인 줄 알 뻔했다.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바 뀐 그였다. “문 월드에 확인해 볼 것이 있다고 가셨습니다.” “거긴 또 어디 차원이래요?” “그것이….” 잠시 망설이던 정민찬이 우진에게 들 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담담히 듣 고 있던 성구는 별반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그럼,형님 돌아오실 때까지 수아 양 지키고 있으면 되네요.” 외모만 바뀐 게 아니다. 더 단순해져 돌아왔다. “아,네. 그렇긴 한데….” 정민찬은 김강철의 급습에 당황한 나 머지 코앞에 닥친 문제를 지금에서야 떠올렸다. “지금 심상찮은 차원 영주 하나가 저 희 요새를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마 목표는….” 말하지 않아도 얼추 짐작이 되었다. “마중가야겠네요.” 성구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남자였 던가? 그의 자신감에 정민찬이 조금 다른 의견을 냈다. “그보다 요새를 이동해 피하는 건 어 떻습니까?” “에이,싸워 보고 안 되면 도망치죠 뭐.” 믿음직스러운 게 아니라 그저 무모한 것일지도…. “아,해솔이 형도 곧 올 거예요. 비비 양.” “말해라.” “헤헤,쑥쑥 자라니까 적응이 안 되 네.” 키도 발육도 남달라진 비비를 보며 성구가 어색히 웃었다. “해솔이 형이 친구들도 좀 데려오는 데 요새를 바다로 옮길 수 있어요?” “가능하다.” “그럼 부탁해요. 전 일단 탐색전만 간단히 해보고 오죠.” 갑판으로 나온 성구의 몸 전체가 붉 게 변한다 싶더니 훌쩍 하늘을 날아가 버렸다. 불사조 같은 그 모습에 아르달의 사 람들은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저희도 인천으로 향합니다.” 어차피 서울 인근의 수도권 전체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가장 가까운 바 다라면 서해. 비비캐슬이 기동해 그쪽으로 이동했 다. 이후 블랑카를 위시한 팬텀 대원들 전부를 수아의 경호에 투입해 버렸고 혹시 모를 차원 영주들의 급습은 불사 의 군대와 라티족 와이번 부대,그리 고 요새 자체의 방어 시스템을 가동하 기로 하였다. 비전투요원들은 모두 갑판 아래의 대 피소로 향했고, 비비캐슬은 비상경계 태세를 마친 채 서해 상공에 도착했 다. 쥬아아앙. 포탈이 일렁거리더니 최해솔이 모습 을 드러냈다. 민찬이 그를 격하게 반겼다. “해솔 씨!” “늦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해솔 대장이 왔으니 안심 입니다. 부대 지휘를 맡아주십시오.” 전투 지휘라면 총리인 그보다 장교 출신의 최해솔이 월등하다. 더욱이 그 것을 위한 집단 텔레파시 능력까지 갖 춘 인재가 아닌가. “아,그보다 제 친구들부터….” “넵. 아르펜의 동맹군 분들이 오시는 가 보군요. 정말 다행….” 정민찬은 일렁이는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들을 보며 입을 따악 벌 렸다. 슈아아아악! 찢어질 듯 커진 포탈을 뚫고 끊임없 이 하늘을 헤엄쳐 튀어나오는 거대한 몸체. 쿠오오오오! 괴성과 함께 긴 몸체를 끄집어 내 공 중요새를 한 바퀴 배회하다가 바다로 뛰어드는 존재. 드래곤과는 조금 생김새가 다르고, 오히려 전설 속의 동양 용과 비슷한 모습. 쿠오오오! 문제는 한 마리가 아닌 무려 열일곱 이라는 것. 갑판 위의…. 전자포대 위에 배치된 전투 인력들 이의…. 와이번과 함께 출격 대기 중인 라티 족이 모조리 놀랐다. 불사의 군대의 핵심 전력인 데스나이 트들도…. [놀랍군.] 200년이나 아르펜을 지켜온 리치 제 니스도…. [수룡이라니….] 아르펜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들을…. 그간의 고생이 스쳐 지나가는 듯해 해솔이 힘없이 웃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입니다.” 200. 리커버(recover)(1) "어디 있나?" 우주선의 해치가 닫히며 쓰고 있던 헬맷을 벗은 토플러 박사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초초해 보이는 그의 인상을 살피며 레이온 대령이 씁쓸한 얼굴로 대꾸했다. "회복실에 있습니다." 그 표정에서 많은 것을 느낀 토플러 박사는 암담한 마음을 가지고 회복실의 문을 열었다. "바, 박사님." 조금 더 늙은 모습이지만 익숙하게 보아오던 박사의 모습에 김강철은 감격한 모양이었다. 자신이 진짜 세상에서 눈뜬 것이다. "지구의 코드는 어떻게 되었나?" "...실패했습니다." "하아." 토플러 박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되면 복구 코드를 가진 강우진을 깨워봐야 무슨 소용인가? 롤백을 일으키려 해도 그 기준점이 되는 행성 코드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박사님, 세상을 굳이 되돌릴 필요가 있습니까?" "뭐?" "저처럼 모든 사람을 구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하아." 김강철의 말에 토플러가 고개를 절레 저으며 한숨 쉬었다. 이미 자원이 고갈되어 생명의 터전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 수천수만의 사람을 모두 각성시키면 어쩌잔 말인가? 외부 요인 때문이 아니라 자멸하고 말 것이다. 가상의 세계에서도 서로 권력과 아귀다툼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말이다. 김강철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아, 달 기지로 가면 적응 센터에서 모두 교육...." 토플러 박사는 말을 하다 말고 벽면의 시계를 보았다. 무력화 시스템의 재가동까지 아직 조금의 여유 시간이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였을까? 의회의 말대로 충분히 실험하고 대비하였어야 했나? 강우진과 접촉한 작은 행동이 나비효과가 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잘 듣게." "네, 박사님." 토플러 박사의 말을 경청하는 김강철의 표정은 신을 마주한 듯 경건하기만 했다. "가상의 세계에 접속하면 아바타가 생기지. 우리는 로그인이라 부르네." 김강철도 익히 안다. 가상의 지구를 생각할 것도 없이 게임을 생각하면 쉬우니까. 아니, 자기 자신이 이미 산증인이다. "저는 드디어 로그아웃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네." 김강철은 가상세계에서의 탈출이라 생각하겠지만 이곳이 꼭 살기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항상 생존을 생각해야 하고 이제는 날아가 버릴지 모를 희망을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다. "만약 말일세. 가상의 세계에 있는 그것들을 이 세상에 로그아웃시키면 어떻겠나?" "예?" "말 그대로네. 로그인한 사람이 로그아웃하는 게 아니라, 그 세상의 것을이 현실에 나타나면 말이야." "그야......" 가상이 왜 가상인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 속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도 이 현실에 로그인할 수 있다면 어떻겠냔 말일세." "......." 김강철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발상. 가상세계의 사람이 현실로 로그인하는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무에서 유의 창조? 강림? "우리가 가상의 지구로 갈 수 있듯이 가상의 것도 이곳으로 불러올 수 있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린 가상지구를 이 태양계에 불러올 것이네. 그곳이 새로운 지구가 되겠지." 자원 고갈로 이미 황폐화되어 버린 지구의 인류를 구할 마지막 수단. 가상현실을 통한 테라포밍.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대로 있겠지." 테라포밍을 위한 행성은 지구가 아니다. 이것은 새로 만들어질 지구로 향하기 전 인류가 잠들어 있는 방주일 뿐이다. "화성을 테라포밍할 걸세." "허.... 그렇게만 된다면...." 인류는 새 지구를 얻을 것이고 가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새 터전인 그곳에서. "그래서 리셋이 필요하단 말일세." "......?" "이미 멸망으로 치닫는 지구를 불러온들 무슨 소용이겠나?" 던전의 발생.... 이미 전쟁이 심화되어 여기저기 파괴되어 버린 가상지구. 그것을 버리고 새 지구를 구해야 한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리셋. "...그렇군요." 왠지 맥빠진 음성. 반복되어 가는 인생의 이유를 알았으나, 후련함보다 공허함이 더욱 컷다. 진실된 세계에서 눈뜨고자 했고 그것을 이뤘지만, 실제 세상은 이미 폐허였고 가상의 세계를 바라고 있었다. "72좌가 트라넷의 세상을 온전히 장악해 버리면 우린 더 이상 그곳에 로그인할 수도 없고, 마지막 희망인 테라포밍도 시도조차 못 한 채로 끝이네." "그들도 인간이 아닙니까?" 가상의 세계들이 수면 중인.... 트라넷에 접속 중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박사님, 레이온 대령님 호출입니다. 무력화 장치 준비 완료되었답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음성에 토플러 박사가 김강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트라넷은 어쩌면 인간이 만든 게 아닐지도 모르네." 화성과 지구의 순간 이동 네트워크를 연구하다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 어쩌면 인류는 우연한 기회로 트라넷에 한발을 걸친 것일지도 모른다. 인류와 인류가 아닐지도 모르는 우주적 존재와의 생존을 위한 싸움은 아지도 진행 중이었다. 그것을 뒤엎고 판을 새롭게 시작할 유일한 열쇠를 구하려 갈 때이다. "쉬고 있게나." 김강철의 역할은 끝났다. 리셋된 지구에서 문 월드의 메시지를 받고 추종할 새로운 사람을 물색할 것이다. *** "무력화 장치 가동합니다." "좋아. 돌입한다." 레이온 대령의 명령에 대원들이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반복된 전쟁과 자원 고갈로부터 이곳은 훌륭한 벙커의 역할을 해주었다. 어두운 길을 불빛에 의존하며 재빠르게 강우진의 캡슐까지 당도했다. "절단기 준비해!" "넵."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캡슐째 뜯어버릴 생각인지 거대한 기계절단기를 가져왔다. "해치 열어!" "넵." 대원들이 어설프게 닫아놓은 캡슐의 윗뚜껑을 다시 열었다. "헉." 열려진 뚜껑 너머를 본 대원이 화들짝 놀랐다. "없습니다." "뭐?" 레이온 대령이 다가가 보니 캡슐은 텅 비어있었다. "이, 이게 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령님, 어떻게 합니까?" "이익." 레이온 대령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혼란스럽기는 그도 마찬가지라 생각이 복잡해졌다. "찾아.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넵!" 대원들이 서둘러 휴대용 조명을 켜고는 주변을 탐색했다. "설마...." 레이온은 홀린 듯 비어버린 캡슐을 보았다. 그 누구도 자력으로 깨어난 사람은 없었다. 인류가 트라넷에 접속한 이래 단 한 명도.... *** 끼이익. 부서진 그대로 덜렁덜렁 달린 문을 열고 나온 토플러 박사는 주변을 살폈다. 한바탕한 격리소 안은 난장판이었다. "후우." 이젠 자신의 손에 모든 게 달려 있다. 레이온 대령이 복구 코드를 구하는 사이 자신은 서둘러 지구의 마스터 코드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격리실 문을 나선 그는 몸을 그대로 굳히고 말았다. 경계를 서고 있던 팬텀 대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여들었다. "누구냐?" 총을 겨누면 차라리 마음 편하련만 그들은 묻는 것도 동시에 움직여 자신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으윽." 거칠게 바닥에 패대기치더니 수갑으로 손과 발을 결박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포박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능력을 사용했다. "허으."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과 함께 축 처진 토플러 박사를 잡은 팬텀 대원들이 서로를 마주봤다. "그런데 누구죠?" "모르지. 부대장에게 데려가 봐." "넵." 아무도 없는 격리실에서 튀어나온 것 자체가 수상했다. 블랑카는 잡혀오는 토플러 박사를 보자마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닥터 토플러!" "......." 혀까지 굳은 듯 무력하게 사로잡힌 토플러 박사는 힘없이 웃었다. 아니, 웃으려 했으나 얼굴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이미 팬텀 부대원 대부분의 수준이 A급. 몇몇은 S급에 닿아 있는 바, 간단한 수준의 속박 능력이 아니었다. "왜 왔습니까?" 블랑카의 물음에 대원 하나가 눈치껏 얼굴의 속박을 풀었다. 마비되었던 혀가 움직이며 토플러 박사가 겨우 말을 뱉었다. "지구를 구하려 왔소." "흐음, 그런데 왜 몰래 왔습니까?" "몰래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의 정보 압니다. 문 있으면 사라집니다." "......." "국왕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강우진은 어디 있소?" "국왕 문 월드 갔습니다. 당신 그때까지 저기 매달립니다." 토플러 박사의 행동 패턴은 많지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그가 어떤 문이든 자신의 던전처럼 만들어 사라져 버리는 것 말이다. 블랑카가 손짓한 것은 관제탑 너머의 길쭉한 안테나였다. 저곳이라면 함부로 도망쳐 나갈 수 없다. 토플러 박사를 잡아두기엔 안성맞춤인 장소. "감시 잘합니다." "넵, 부대장님." 팬텀 대원들이 토플러 박사를 끌고 안테나에 묶으러 갔다. "이럴 시간이 없소. 지금 당장 지구를 구해야 하오."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킵니다." "......" 블랑카의 눈짓에 대원이 그를 다시 마비시켰다. '허, 이게 무슨 일인지.' 황당해도 이렇게 황당할 수가 없었다. 강제로 로그아웃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는 지구의 코드가.... 안테나에 매달린 토플러 박사의 눈에 저 멀리 수평선이 들어왔다. 너무 멀어 겨우 점으로 보이지만 확연히 느껴지는 존재감. '절대자....' 트라넷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자. 그 존재가 부활하고 말았다. 그가 지구의 코드를 가지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전에 리셋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어야 할 터인데 이렇게 잡혀 있으니.... *** 공중요새의 갑판에 불꽃이 내려앉았다. 화르륵. 사람으로 변한 불 그 자체. 홍성구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위험한데요? 타격을 입긴 하는데 다 흡수해요." [자세히 말하라.] 옛 제자에서.... 이제는 용인이 되어 버린 성구를 보며 제니스가 재촉해 물었다. "음, 데미지를 받는 것 같긴 한데 일정한 수준을 넘지 않으면 금방 회복하는 것처럼 보여요." 듣고 있던 민찬이 심각하게 물었다. "어떻게 해치울 가망이 없습니까?" "안타깝게도 제 공격은 녀석의 한계를 넘지 않나 봐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최해솔의 자신만만함에 그의 얼굴에 조금 희망이 생겼다. [로드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냉철한 제니스의 말에 민찬이 동조했다. "도망칩시다. 가능성이 낮다면 전력을 보존하는 게 좋습니다." 수아를 지켜야 한다. 우진으로부터 떨어진 명령이다.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결국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견이 갈려봐야 해결이 안 납니다.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 다수결로 합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전 찬성이에요." 반대의 제니스와 긍정하는 성구, 다수를 보며 결국 투표를 시작했다. "자, 둘 중 하나입니다. 후퇴하실 분 손 들어 주십시오." 제니스와 비비, 민찬과 몇몇이 손을 들어올렸다. [로드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맞아. 주인님의 말을 따라야 해."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것을 희생하더라도 강우진의 마지막 명령을 지키는 게 중요해 후퇴하려는 것이다. "자, 그럼 싸우실 분. 손들어 주십시오." 탐색전을 하고 온 성구와 해솔이 손을 들었다. 민찬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럼 후퇴하는 쪽으로...." [가당찮다.]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에 민찬이 찔끔하여 돌아보니 한쪽에 도열해 있던 데스나이트들이 모두 손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본드래곤 용용이마저 슬쩍 날개를 올리고 있었다. "아, 저......." [싸운다.] 죽음의 기사. 그들의 리더 키바가 나섰다. 즉시 제니스가 붉은 안광을 번들거렸다. [마스터의 명령이 우선이다.] [불명이 아니다!] 그의 음성은 단호했다. [싸운다. 싸워 이겨 지켜낸다.] [.......]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데 키바가 말을 이었다. [임모탈은 죽지 않는다.] 모두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 두 존재의 충돌과 폭발, 그리고 생존한 존재는 지금 돌진해 오고 있는 어둠의 기운을 풍기는 차원 영주뿐. 강우진의 행방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꾹꾹 누르며 감추었던 것을 그는 당당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임모탈은 도망치지 않는다.] 제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잊고 있었군.] 키바가 자신의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싸워 승리하라! 나의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전장을 정리하고 왕을 기다리면 될 일. [우오오오!] 데스나이트들이.... 불사의 군대가 사기를 불태웠다. 201. 리커버(recover)(2) 긴긴 시간이 지났다. 감각이 없으니 시간의 흐름을 알 길이 없다. 그저 너무 많은 생각이 얽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되었을 때.... 공허함만이 남게 된 그때 문득 깨닫게 되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어딜 가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선 채 변화도 없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미쳐 버려도 좋을 정도의, 부동의 시간이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고맙다.' 주변을 감싸는 수백수천의 존재. 하나하나가 느껴진다. 스스로를 잊을 만큼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주변을 지키는 저들의 존재는 아직도 확연하다. 악령? 티 없이 맑은 영혼들이 타락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줄 알았다. 터무니없는 착각. 저들은 그저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파아앗. 빛이 눈을 찌른다. 눈? 내게 그런 게 있었나? 실체 없는.... 인지할 수 없었던 스스로에 대해 생각했다. 떠올리고 떠올리려 애썼다. '강우진.' '임모탈.' '테라포밍.' 흩어진 파편들이 흡수되듯 하나하나 맞춰가는 기분.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그 조각들이 서로 다른 판에 존재하던 것들. '나는 누구지?' 행성 간 물질 전송 시스템을 연구하던 과학자? 고등학생 때 아르펜으로 소환되었던 네크로맨서? '나는....' 태초에 생겨난 세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었던 공간.... 무한히 확장하던 그 공간에 주인이 생기고 계급이 나누어지고.... 그 모든 것을 파괴한.... 삭제 권한을 가진 최초의 절대자. 파괴신 트래쉬. '나는....' 혼란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이 좁디좁은 하나의 판에 맞춰지려 하니 서로서로 부딪히고 깎여 나갔다. 판이 점점 넓어지며 조각들이 자리를 잡았다. 영혼을.... 어설프게 짜 맞추어진 그의 자아가.... 자리 잡을 그릇이 만들어졌다. 파아앗! 눈을 떴다. 몇 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고성. 포근하고 익숙한.... 동시에 아주 강력하게 거부감이 드는.... "혀, 형?" 동생? 묘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에 그를 보았다. 퀭한 눈의 백안 소년. "재민이?" "네, 형! 괜찮아요?" "......." 알 수 없다. 괜찮은지.... 어떤지.... 아니, 자신이 무었인지도. "문 월드에 다녀오신 거예요?" "문 월드?" 기억난다. 문 월드에 가고자 했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어느 세상이 거짓인지 밝히기 위해. 동생을 지키고 주변의 사람들을 지키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흘렀지?" "보름이요." "......." 보름이라.... 강우진. 그래, 강우진의 기억이 말한다. 차츰 돌아오는 몸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죽어 있었군." "예에?" 느릿느릿하던 사고가 빠르게 이뤄졌다. 멈췄던 기억이 이어지며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지구는?" "...처첨해요. 비비캐슬의 동력을 대려고 제가 영지전을 쉴 수가 없어요." 강우진이 없는 이상 그 수천수만 불사의 군대를 유지하려면, 저검 포인트가 필요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물론, 비비캐슬의 방어 시스템에도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혈석 채집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포인트를 벌어야 할 것. 도재민이 그 역할을 위해 쉴 새 없이 영지전을 행한 모양이었다. 다른 차원 영주의 영지를 약탈해 비비캐슬을 위해 쓰고 있었다. "가야겠다." "예? 어딜요?" 우진이 뒤돌았다. 굳게 닫혀 있던 그 문은 이미 빗장이 풀려 있었다. "가보지 못한 곳." 느낌이 온다. 아니,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인지 조작된 것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다만,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직감이라 불러도 좋고, 운명이라 불러도 좋다. 강우진이 차원 영지의 뒤에 나란이 자리 잡은 세 개의 문 중 봉인이 풀린 문을 열러 젖혔다. *** "박사는 아직인가?" "탈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 참." 토플러가 지구 코드를 구하기 위해 트라넷에 접속해 있다. 그가 직접 가지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 누군가가 대신 획득하게 되면, 그 사람을 로그아웃시키는 것이 계획. "박사를 강제 로그아웃하게." "하지만 그러면 다시는 트라넷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이미 끝난 게임이 아닌가?" 토플러 박사가 성공해 지구의 코드를 획득한다 해도 이미 리셋은 실패했다. 복구 코드를 가진 강우진의 몸이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박사를 깨워 한시라도 빨리 지금의 문제를 의논해야 한다. "통신 완료했습니다." 토플러 박사의 우주선은 트라넷 접속을 위해 출동해 있었다. "우리는 달 기지로 복귀한다." "넵." 레이온의 명령에 서둘러 이륙 준비를 하던 중 밖의 상황을 살피던 대원이 소리쳤다. "레이온 대령님, 생명체가 접근합니다."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지구에 살아 있는 생명체가 어딨다고 저딴 보고가 올라오는가? 살아 있는 것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모두 캡슐 안....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레이온호의 군인들뿐이다. "가디언 아니야?" 그 몹쓸 기계장치들이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면 이해가 가지만.... "직접 보십시오." 대원의 말에 화면에 비친 경계 카메라를 본 레이온 대령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정말 생명체다. 그것도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 황폐화된 지구에. 2529년의 지구에 문 월드의 인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이다. 공기정화장치도 덮어쓰지 않은 정체불명의 사내는 거적때기 같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마치 서부영화에서 보던 부랑자와도 비슷한.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지금의 지구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 이질감은 괜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키웠다. "뭐지?" 두 발로 걸어 다닌다고 모두 사람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사람이라고 하여 모두 우호적이며 안전할 것이란 생각 또한. "경계 발동!" "넵!" 레이온호의 모은 이가 훌륭한 군인. 무장까지 걸린 시간은 수초에 지나지 않았다. "해치 열어." 푸슈욱. 레이온 대령이 호흡기가 달린 헬맷을 쓰고 무장한 대원 넷과 우주선을 내려갔다. "멈춰라." 확성기를 통해 쩌렁쩌렁 울리는 레이온 대령의 경고성에도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멈추지 않았다. 투두두두두두! 하늘을 향해 경고사격을 발사하자 그제야 상대가 멈춰 섰다. 그 거리는 불과 20미터. 정체를 식별하기에는 충분한 거리. "정체가 뭐지? 인간인가?" 대령을 위시한 대원들의 총구가 상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답 없는 사내를 보며 레이온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두려움, 경계, 혹은 조심성. 녀석에게는 낯선 곳에서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이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리만큼 당당한 태도는 놈이 이곳의 주인인 양 당연한 분위기였다. "인간이 아닌가?" 물음에 대한 답이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멈췄던 걸음이 다신 옮겨졌다는 것뿐. 한 걸음, 한 걸음. 레이온은 미지의 존재가 주는.... 인간이 당연히 느껴야 하는 감정을 겨우 억눌렀다. "멈춰라!" 투두두두두! 다시 한 번의 경고사격에도 녀석의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제길! 쏴버려." 투두두두! 대원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충전된 레이저의 잔량이 빠르게 줄어들며 빛을 내뿜었다. 티디디딩. 폭발음 대신 이상한 공명음과 함께 상대는 빗발치는 총알의 세례에도 전혀 타격이 없었다. 아니, 공격 자체가 보호막에 가로막힌 듯 튕겨져 나가는 모습. "뭐야!" 레이온이 신경질적으로 허리춤의 권총을 뽑았다. 레이저가 이닌 총알이 장전된 원시적인 화약총. 타앙, 탕! 정확히 날아간 총알이 그의 미간을 뚫어 버리기 전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 하늘로 솟구쳤다. 타앙, 타앙! "이익...." 아직 총알이 남았지만 더 발사할 수 없었다. 쏴보란 듯이 미간을 들이민 상대의 얼굴이 코앞이다. 총구가 이마에 닿을 듯 말 듯했다. "누, 누구냐?" 레이온이 떨리는 음성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문 월드 놈이겠지?" "......." 상대의 입에서 나온 언어를 알고 있었다. "토플러는 어디 있나?" 레이온이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작전 설명 중 본 적이 있다. 이번 계획의 목표물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강우진...."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자력으로 로그아웃을...." 중얼거리는 레이온을 보고 강우진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대로 왔군." 유령 같던 녀석들의 실체가 눈앞에 있다. 확연히 느껴진다. 레이온의.... 그 뒤에 있는 대원들의 영혼이 말이다. *** 장대 같은 안테나에 시체처럼 걸려 속박된 지도 벌써 나흘이나 흘렀다. 블랙아머로 명명된 정체불명인 차원 영주의 등장에 중국이 초토화되었다. 일직선으로 내달려 서해에서 부딪친 아르달과 그의 싸움은 사흘을 끌었다. 푸아아아! 하늘을 날아다니며 브레스를 뿜어내는 수룡은 전설 속 청룡이 출현한 듯 굉장히 압도적인 모습을 내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블랙아머의 강력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것. [크하하하하.] 싸움을.... 파괴를 즐기는 듯한 녀석은 느긋했고 열일곱이나 되던 용의 수는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녀석은 휘하의 몬스터 없이 홀로 싸웠고, 불사의 군대는 차츰 수가 줄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광경을 모두 눈으로 담은 것이 토플러 박사. 네크로맨서가 없는 언데드들의 에너지원을 위해서는 거점의 근처여야 했고, 비비캐슬은 항상 전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구 멸망을 이렇게 눈으로 담는가?" 리셋은 커녕 지구의 코드마저 눈앞에 다시 부활한 절대자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 이제 더 이상의 리셋도 시도도 없다. 아니, 트라넷에 로그인 자체도 불가하게 될 것이다. 접속 중인 수만 인류의 운명조차 알 수 없다. 오로지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절대자의 뜻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내가 실수했구나." 의장의 말이 맞았다.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확실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의회가 잘못된 게 아니었다. 경솔한 행동으로 강우진과 접촉했고 무시 못할 나비효과를 만들어냈다. 애초 본래의 계획대로 테라포밍을 위한 충분한 실험 후에, 이엘로를 각성시켜 지구를 리셋시켰어야 했다. 절대자의 공세를 나흘이나 막아낸 것만 해도 대단했다. 아르달이 무너지면 지구 전체가 초토화되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대적할 적수가 없다. 쿠우웅! 상처 입은 본드래곤이 갑판에 내려앉았다. 거점의 심벌인 관제탑에 얽힌 덩굴나무가 빛을 발하며 에너지를 소모해 본드래곤의 상처를 빠르게 재생시켰다. [내게 날개를 달라!] 휘아아아! 에너지를 회복한 돌쇠가 핏덩이가 되어 본드래곤을 감쌌다. 벌써 일곱 번을 넘게 본 광경. 블러드 드래곤도 블랙아머의 적수가 되지 않음을 안다. 그저 버틸 뿐. 그마저도 거점의 에너지가 거의 바닥을 보이는 듯 불사의 군대는 충원도 더뎠다. "끝이구나." 이미 지친 사람들과 줄어버린 언데드. 가상의 지구도, 인류의 마지막 인큐베이터가 되어준 지구고 이제는 끝장이다. 파팟. "으음." 회색처럼 녹아내리는 자신의 손을 보며 토플러 박사가 신음했다. 그의 조수가 강제 로그아웃을 시도하는 모양이었다. "실수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이제 트라넷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다. 인류를 위한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듯 싶었다. 파파팟! 흐려졌던 의식과 함께 돌아온 감각에 눈을 떴다. "으음." 뜯어진 캡술의 뚜껑 자국이 보였다. 몸을 일으킨 토플러 박사는 팔짱을 끼고 서서 묘한 웃음을 흘리는 사내를 보고 기겁했다. 202. 리커버(recover)(3) 토플러 박사가 안색을 고쳤다. 자신의 설득이 먹혔을까? 진실된 세상에 눈을 뜬 강우진은 지금 어떤 심경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뭘 말이지?" "리셋에 대해.... 하긴, 지금은 이미 의미가 없군요." 복구 코드를 가진 강우진이 지구의 코드까지 가지고 로그아웃하기를 바랐다. 로그아웃 자체는 완료한 듯 싶으나, 지구의 코드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회수해야 할 김강철이 실패했고, 자긴도 강제로 로그아웃 당했다. 이제 다시 트라넷에 접속도 못하는 처지. 토플러가 진지한 얼굴로 강우진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르달의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코드를 획득하게 한 다음 그자를 로그아웃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토플러의 열정적인 말에 강우진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부하를 시켜 동생을 죽이도록 하라?" "...아니죠. 코드를 획득해 지구를 전쟁 전으로 되돌리자는 것이죠." "우습지도 않네." "각성하십시오. 그곳은 어차피 가상입니다. 리셋과 동시에 동생분도 다시 살아 계실 겁니다. 죽이자는 게 아닙니다. 지구를 구하자는 것이죠." 강우진이 침대에 비스듬히 몸을 일으킨 토플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착각하고 계시네." "......." "내 목적은 트라넷과 지구의 링크를 끊는 거지, 네놈들 지구 따위는 관심 없다." "......." 토플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로그아웃한 강우진의 기억이 여전히 불안정하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가상은 언제든 되돌릴 수 있지만 현실은...." "그만해 둬." 강우진이 토플러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그냥 확인해 보고 싶어서 온 거야." "......?" 무슨 소리지? 제 발로 찾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레이온 대령이 강우진을 로그아웃 시켰을 텐데? "네놈 영혼을 말야." 토플러 박사를 바라보는 우진의 눈이 웃고 있었다. 마음 한편에 돌을 눌러놓은 듯 하던 찝찝함이 해소되었다. "어, 어딜 가십니까?" "내 할 일 해야지." 우진이 뒤돌아서자 토플러 박사가 손가랄을 뻗어 그를 가리켰다. "어서 잡지 않고 뭣하나?" "......." 그의 재촉에도 주변의 군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레이온 대령도 마찬가지. "레이온 대령! 뭣하는 게요?" "포기하시오, 박사." "......?" 복구 코드를 가진 그다. 지구 코드를 획득하든 못 하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돌려야 한다. "이익! 이대로 가버리면...." 복구 코드가 있어야 리셋을 실행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침대를 내려온 토플러 박사가 우진을 향햐 뛰어갔다. "거기 서시오!" "......." 우주선의 외부로 나가는 계단에 선 우진이 뒤돌아봤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어어?" 자신이 붕 뜨는 기분에 토플러는 신음을 냈다. 느낌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마치 공중 부양을 하듯이 말이다. "따라오지 마. 네게 확인할 건 끝났다." "어, 어떻게...." 토플러 박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우진을 귀신 보듯 했다. 무슨 수를 썼기에 이런 초능력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마치 가상지구의 능력자들처럼.... "그럼 집으로 돌아고도록 해, 달나라 여러분들." 우진이 계단을 내려가 버리자 공중에 떠 있던 토플러를 속박하고 있던 힘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혼란스러워하는 토플러를 레이온 대령이 부축해 일으켜 세워줬다. 자신도 불과 몇 분 전 박사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오. 포기하시오, 박사."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 명시되어 있지 않소? 가상세계의 것이 현실에 나타날 수 있다면.... 테라포밍의 시작이다." "그치만...." 부작용? 아니면 예측하지 못한 변수라고 해야 할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초능력까지 함께 실현되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이, 이럴 때가......." 토플러 박사가 홀린 듯 계단으로 뛰쳐 갔다. "박사님! 호흡기를!" 병사의 만류를 들었는지 몰랐는지 그는 계속해서 뛰어 내려갔다. "흐읍." 텁텁하고 시큼한 먼지들이 입안을 금세 까슬거리게 만들었다. 아직 얼마 가지 못한 강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기다려 주시오! 콜록." 기침을 하면서도 뛰어 강우진에게 다가갔다. "뭐지?" 강우진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알려줘야 하나?" "무엇을 하시려는지만 알려주십시오." 무엇을 한다라.... 강우진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이 밝은 빛을 뿌렸다. 아름다운 그 광경과 대비되어 보이는 흙바닥은 검게 죽어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 "돌아가야지." 링크를 끊는 법 따위는 이미 알고 있다. 깨어나는 순간 머릿속에 지식이 틀어박혔다. 마치 스킬북을 익히듯이 말이다. "제가 깨어나기 전 가상지구는 이미 멸망 직전이었습니다. 돌아가 봤자 아르달의 사람들은 이미...." 토플러 박사가 눈치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봤어?" "......." "죽는 것 봤냐고." "마지막 순간까지 보진 못했지만 절대자를 막기엔 역부족이었......." 토플러는 말을 삼켰다. 깊고 깊은 우진의 눈을 보고 있자니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보지도 않은 미래를 어찌 알아?" "......."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아이들이 아냐." "설령 아직 버티고 있다고 해도 다시 로그인할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김강철이 다시 링크할 방법이 없듯 강우진도 방법이 없다. 정해진 출구를 통해 빠져나온 게 아닌 토플러도 마찬가지. 이미 그들은 그쪽 세계에 걸치고 있던 한쪽 발을 빼버린 상태다. "내가 못 가면...."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쪽에서 오라 해야지." *** 비비캐슬의 보호막이 손상되었다. 쿠우웅! 크게 흔들리는 동체에 오새의 건물들이 요동쳤다. 그 안에 대피하고 있던 사람들도 불안에 떨었다. "방법이.... 없는 건가?" 정민찬이 절망적인 목소리를 흘렸다.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블랙아머의 강력함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모두 지쳐 갔고.... 불사의 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너지가 모자라다.] 그들의 핵심. 강우진이 없다. 적의 시체로 병력을 충원하고 적의 영혼으로 부족해진 마력을 충원해 줄 존재가 사라졌다. 네크로맨서가 없는 언데드 군단은 그 수가 하나씩 줄어들어 이제는 권속들만 남은 수준. 네크로맨서와 함께일 때는 걱정 없이 마법을 난사하던 리치도, 주인 없이는 마력을 안배하며 뒤에서 견제해 주는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지치지 않는 체력의 데스나이트들도 방어를 염두에 둬야 할 정도로 공격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가 없었다. 본드래곤과 골렘 또한 부서진 몸체를 재구성해 줄 마력이 부족해 무너진 몸을 재생시키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하하하.] 말을 할 줄 모르는지, 말을 하기 싫은 건지 괴상한 웃음만 흘리는 블랙아머가 여기저기 주먹을 뻗을 때마다 검은 에너지 구가 날아들어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콰아앙! 비비캐슬의 선체에 커다란 구멍이 나며 그곳에 있던 운 나쁜 직원들이 뭉텅이로 하늘 아래로 떨어졌다. "꺄아아아!"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을 향해 날아가는 불사조 하나. 화르르륵. 불의 고리로 그들을 하나하나 감싸 날아오른 불사조가 갑판 위에 착지했다. "고,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를 받을 정신도 없다. 아르달이 일주일이나 블랙아머의 공세를 막아낸 데는 홍성구와 최해솔의 공이 가장 컸다. 상처 하나 없는 성구의 얼굴이지만 그것은 신체적 특징에 기인한 것일 뿐, 속으론 굉장히 지쳐 있었다. 무리한 정도를 한참 넘어 가의 한계에 다다른 수준. "하아, 뭔가 방법이 없나?" [그하하하!] 콰앙, 쾅! 날아오른 수룡과 얼기설기 어우러진 블랙아머가 공수를 주고받았다. [구오오오!] 수룡이 긴 비명을 흘리며 적의 주먹을 견디지 못하고 힘을 잃었다. "마지막 수룡이......." 최해솔이 절망한 듯 중얼거렸다. 아르펜에 남았던 지상 최강의 생명체가 숨을 다했다. [그르륵!] 성구의 시선에 갑판 한쪽에 부서진 블러드 드래곤이 들어왔다. 거점의 에너지를 모조리 소모해 버려 본드래곤의 신체를 재고성해 줄 마력이 모자랐다. 한쪽 날개가 찢어져 버린.... 여기저기 붙은 블러드 골렘의 피딱지가 파여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는 본드래곤이 포효했다. [드래곤은 죽지 않는다!]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에이션트 드래곤의 간절한 소망. 죽어버린 동족들.... 변절한 그들.... 잊으려 애쓴 그 치욕의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면.... 함께 사라져 주마. 웅크리고 있던 용용이가 일어섰다. 긴 목에 달린 거대한 대가리가 홍성구를 향했다. 부리부리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그를 보았다. 동족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소원이 무엇인가?] "소원은...." 성구가 블랙아머를 보았다. "저 녀석 좀 치웠으면 하는데." [소원을 들어주마!] 간절한 소망을 이룰 때다. 다시 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거 한 번 더 날고 싶었다. 그저 또 한 번 느끼고 싶었다. [내게 마지막 숨을 달라!] 하늘을 날고 숨 쉴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죽은 드래곤인가? 이름마저 잊어버렸으나 죽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네요." 씨익 웃은 성구의 몸이 불꽃으로 화했다. 연기 같은 불꽃이 용용이의 콧구멍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쿠오오!] 길게 포효하는 드래곤을 향해 제니스가 손을 뻗었다. [내 모든 힘을 주마!] 바닥난 거점의 에너지를 대신해 자신의 라이프 베슬에 담긴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최르르륵! 여기저기 까지고 부서진 용용이의 몸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오직 승리만이 죽음을 빗겨가리라!] 데스나이트들이 뛰어들어 저마다 손을 뻗으며 본드래곤에게 마력을 전했다. 적이 강력하다 하여 후퇴는 없다. 승리 아니면 죽음. 이미 죽은 그들에게 두 번의 죽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쿠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한 듯 날아오른 블러드 드래곤의 도약에 비비캐슬이 휘청였다. [그흐흐흐.] 이미 해치워 버린 열일곱 마리 수룡의 다음 주자로 나선 핏내 나는 드래곤의 모습에 블랙아머가 웃었다. 그저 조금 얻어맞으면 또 하늘을 나는 배 위로 올라가 고쳐서 올 끈질긴 놈. [그릉, 그릉.] 그놈의 상태가 조금 달랐다. 무자비하게 육탄 공격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날갯짓하며 자신을 노려볼 뿐. 불룩이는 배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숨을 쉬고 있었다. 죽어버려 뼈밖에 없는 녀석이 말이다. 피 거죽을 덮어쓴 가짜가 말이다. 놈의 붉은 안광이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 블랙아머는 심상찮음을 느꼈다. 녀석의 배가 신경 쓰였다. 주기적으로 천천히....... 느릿하게....... 마치 용광로의 온도를 높이는 풀무질 처럼.... [난 살아 있다.] 살이 발라지고, 심장이 도려내졌다. 이름을 잊고, 과거를 잊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쿠오오오오!] 드래곤이 태양을 토해내듯 아가리를 벌렸다. 쿠아아아아아! 엄청난 열기와 충격파가 휘몰아치며 블랙아머를 덮쳤다. [크윽.] 콰아앙! 마주 쏘아 보낸 검은 기운이 충돌했다. 줄다리기를 하듯 한데 엮인 검고 붉은 기운이 서로를 집어삼키려 엎치락뒤치락했다. 쿠아앙! 핵폭발이 일 듯 엄청난 충격과 폭발의 후폭풍에 사위가 빛으로 터져 나갔다. "크으윽!" 비비캐슬이 그 충격에 밀려 땅 아래로 추락했다. 이대론 요새에 탄 모든 사람이 죽을 판. "앗!" 비비는 거점에 차오른 에너지를 느끼곤 곧장 보호막을 발동했다. 차원 영지에서 지금도 쉴 새 없이 영지전을 벌이고 있을 도재민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해하며 말이다. 콰아아앙! 보호막이 발동했으나 추진력을 얻진 못하고 땅으로 그대로 추락했다.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브레스의 후폭풍이 지나갔다. 충격에 쓰러진 사람들이 부지기수. [승리하였는가?] 데스나이트들과 비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라앉지 않은 먼지들로 시야가 가려진 하늘에서 뭔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 동체. [그흐흐흐.] "......." 블랙 아머. 녀석은 정말 초월체일지도 몰랐다. 그 브레스에도 살아남은 녀석이 비비캐슬을.... 정확히는 그 안에 타고 있을 지구의 코드를 노렸다. [재미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적이 없음을 아는 것일까? 녀석의 첫마디에 비비는 울상이 되었다. 강림하는 천사의 날갯짓처럼 천천히 비비캐슬을 향해 하강하는 녀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곧 그 절망뿐인 얼굴에 놀람이, 기쁨과 반가움이 번져 갔다. *** 토플러가 무릎을 꿇었다. "제발 생각을 다시 해주십시오.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가상의 지구는 이미 파괴되었습니다. 아니, 파괴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깨끗한 지구를 맞이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황폐한 지구를 떠나 새로운 곳을 바랐다.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그 지구를 말이다. 전쟁으로 상처 입고 무너진 지구가 아니라 말이다. "리셋해야 합니다." 확고한 토플러의 말에 우진이 씩 웃었다. "이봐, 박사." "예." "인생은 직진이야, 직진." "......." "되돌리고 싶다고 되돌리고 말고 할 게 아니란 말야." "하지만...." "과거를 살고 싶은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제." 우진이 전사의 무기를 소환했다. 츠츠츠츳. 소환된 무기가 길어져 거대한 낫이 되었다. 베어 버리는 모든 것을 죽일 수 있는 무기. [트래쉬의 집행.] 그 강력한 힘과 권한이 향하는 것은 생명이 아닌 행성이 될 수도.... "앞으로 가는 거야. 뒤가 아니라...." 우진의 손에 들린 트래쉬의 집행이 휘둘러졌다. 파아앗! "크윽!" 빛이 터졌다. 너무 강렬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끝없이 뻗어 나갔다. *** 문 월드, 지구 관측소. "의장님! 나와 보십시오." 굳이 의장을 찾을 것도 없었다. 문 월드의 주민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상들의 고향이자 죽어버린 검은 별. 인류의 인큐베이터. "맙소사......." 검은 지구가 색을 찾고 있었다. 마치 검은 종이에 물감을 떨어뜨리듯.... 번져 나간 빛이 지구를 푸르게 만들고 있었다. 그림을 보는 듯.... 컴퓨터 그래픽을 보는 듯 비현실적인 그 현상에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기 바빴다. ***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찮다. 블랙아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 "어지간히도 재밌다. 그치?" [.......] 언제 온 것일까? 블랙아머의 뒤에 선 강우진이 트래쉬의 집행을 휘둘렀다. [크아아아!] 피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다. 단번에 베인 블랙아머의 검은 몸이 연기가 되듯 사라져 버렸다. 그 안에서 나온 한 줌의 그림자가 우진에게로 흡수되었다. "......." 잠깐 스쳐 지나간 씁쓸한 표정. 우진의 눈에 바닥에 착지한 비비캐슬의 아르달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공중요새와 멀지 않은 땅. 그곳에 찾지해 있는 우주선이 보였다. 그 근처에 넋이 나간 듯 멍청히 서있던 토플러 박사와 눈이 마주쳤다. "거봐. 다 살아 있네." 아르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구도.... 하늘에 떠 있던 우진의 신형이 천천히 내려와 땅에 닿았다. 환상을 깨버린 지구에 디딘 인류의 첫 발자국이었다. 에필로그 지하철역이 입구가 되어 세상에 몬스터들이 쏟아졌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고, 제법 잘 싸워냈다. 그럼에도 70억에 육박하던 인구가 반토막이 나는 덴 5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법 법칙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나는 몬스터들. 인류는 던전을 탐험했고, 성과를 냈으며, 그것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혈석이라는 신 자원에 열광했으나, 곧 더 큰 절망을 맛봐야 했다. 트라넷과 지구의 완전한 동기화. 그 이후 무차별적인 차원 영주들의 등장으로 지구의 주인이 바뀌는 듯 했다. 수도를 잃어버리지 않은 나라가 드물 정도였고, 절반이 넘는 국가가 정부를 잃고, 국민들은 난민이 되었다. 몬스터.... 단순히 몬스터라 뭉뚱그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생명체가 지구로 몰려들었다. 엘프, 드워프, 오크 등의 유사 인종 부터, 심지어 인간까지.... 지구를 차지하기 위한 수십 수백 종 간의 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려는 찰나, 세상의 모든 던전이 리셋되었다. 깨끗한 리셋. 차원의 통로였던 던전이 사라지자 인류는 다시 희망을 품었다. 침략자인 타 차원의 난민들을 몰아내기만 하면 다시 평화가 도래할 듯 했다. 하지만 차원 전쟁이 끝났다 뿐이지 지구 안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생존을 위한 차원 난민들과 본래의 주인이었던 인간들의 전쟁이 남아 있었다. 몬스터와 인류로 구분 지어졌던 피아의 식별도 이제는 애매해져 버려 앞으로 또 긴 피의 시간을 지나야 할 듯했다. 하지만 아르달의 전쟁 불허 선언으로 강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모든 국가가, 모든 차원 난민이 그 결정에 수긍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달의 결정에 반박하며 홋카이도에 자리 잡은 다크 엘프들과의 전쟁을 시작한 일본이 참혹하게 멸망했다. 모든 국가의 역량을 쏟아부은 전면전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선전포고한 일본 정부의 총리부터 시작해 가담된 모든 인원의 암살로 전쟁은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오든 전쟁의 시작을 알렸던 당사자는 다음 날 암살되었으며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원 난민이라 하여도 예외는 아닌지라 남의 국가를 침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가차없이 응징이 가해졌다. 파괴신. 조금씩 퍼져가던 그 이림이 지구에 뿌리내린 모든 종족에게 각인되었을 때, 그의 군림 아래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전쟁의 억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으니, 암암리에 일어나는 테러와 영토 분쟁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지구의 모든 지성체가 이 문제에 대한 협으를 필요로 했으며 중재할 수단을 원했다. 이미 최강국이랄 수 있는 아르달을 중심으로 지구연합이 만들어진 것은 당영한 수순. 이들의 수장을 맡은 이는 국왕이 강우진이 아니었다. 세계 평화 협의 기구인 지구연합의 초대 의장을 맡은 것은 다름 아닌 아르달의 총리 정민찬. 줄어버린 인구 만큼이나 늘어나 버린 차원 난민들의 평화를 위해 그가 애쓴지도 1년. 파괴와 살육, 전쟁과 테러의 위협에서 해방되어 달콤했던 평화의 기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파괴신이라는 단어가 희미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과 몬스터를 죽였는지, 불사의 군대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서 어떤 자들의 숨을 거둬들였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았다. 차원 간의 연결에서 지구를 해방시키고 군림한 절대자. 강우진은 파괴신이 아닌 지구를 구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두려움보다는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버린 그의 행방은 몇 개월 전부터 묘연한 상태. 화창한 봄날 광자에 모인 수천명의 사람이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수십 대의 카메라 드론이 지구 곳곳에 지금의 연설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같이 역사적인 날 그분이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간 받은 스트레스가 굉장한지 1년 새 10년은 늙어버린 정민찬이 잔잔한 목소리를 마이크에 흘렸다. "오늘은 지구연합이 출범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입니다." 누군가는 차원 독립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신기원이라 불렀다. 새로운 지구의 역사를 시작한 지 1년째 되는 날. "또한 오늘은 구인류와 만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민찬이 단상에서 한 발 물러나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 서울역이 버티고 있었다. 현실세계에 덧씌워진 가상세계. 가상과 현실을 굳이 정의해 나눌 필요는 없다. 차원이 다른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져 현실이 되었다. 사라져 버린 던전을 대신해 지하철역 아래엔 인류가 잠들어 있다. 캡슐에 앉아 새로운 터전을 기다리며, 여전히 꿈꾸면서 말이다. 그동안 지구연합의 질서가 잡혀져, 여러 종곡 간의 평화 협정이 잘 수행되어 왔다. 각 대륙마다 깨어날 그들의 적응을 돕는 센터가 건립되었고, 구출 인력도 모두 훈련이 끝났다. 아직도 환상 속에 잠들어 있을 구인류를 꿈같은 현실로 불러들일 때가 된 것이다. "지금부터 구인류 구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민찬의 선언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피조물과 조물주의 만남 따위는 없다. 인간이 인간을 구해낼 뿐이다. *** 부우우우웅. 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밴 안. 핏. 민찬의 연설이 나오는 텔레비전 화면을 꺼버린 신디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뉘였다. "지원이 얘는 날 한번 기가 막히게 잡았네." 구인류를 만나느니, 신기원이 1년째를 맞이했느니 하는 이런 날에 팬미팅이라니 말이다. "차 돌릴까요?" "나도 안 가면 누가 가? 다들 바쁜데." 지인들이 누구 하나 안 바쁜 사람이 없다. 세계적인 가수로 발돋움한 신디 자신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워낙에 대단한 사람들 뿐이니.... "승훈이 오빠도 오늘 못 오죠?" "예? 승훈 씨 오늘 생방송 있지 않습니까." 매니저의 말에 도지원이 다시 티비를 켰다. 핏. <월드 버러이어티, 우승훈 쇼! 오늘은 뜻깊은 날이죠. 귀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시죠. 달 기지의 토플러 박사입니다.> 화면엔 패널들의 박수와 미소를 받으며 등장하는 토플러 박사의 모습이 비쳤다. <우주선을 타고 오지 않은 최초의 우주인이라죠? 미래인이라고 해야 하나요?> 우승훈의 농담에 박사와 패널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농담이라 해서 거짓은 아닌 이야기. 토플러는 역사적인 그날, 지구에 존재했었다. <박사님, 그때의 일을 좀 더 말씀에 주시죠.> <다시없을 신비로운 이야기죠. 사실 아직도 지금 이 자리가 믿기지 않을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게 환상처럼 보이세요? 꿈에서 깨고 싶으세요? 레드썬?> 까불거리는 우승훈을 보며 그저 한번 웃고는 토플러 박사가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요. 그만큼 고정관념이 무섭다는 겁니다. 허상과 실체의 경계는 사실 무의미 할지도 모릅니다. 믿는 순간 생겨나고, 잊는 순간 지워지는 것이 많죠.> <철학적이시네요. 달 기지의 우주인들은 요즘 어떻습니까?> <하하, 평소와 다름없지요. 이번 구인류 구출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성 탐사선이 도착할 쯤이 되고 있어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있죠.> <박사님은....> 핏. 신디가 화면을 끄곤 피곤한지 다시 눈을 감았다. 지구에 존재하는 이종족만 수십. 그들 모두와 대화가 통하는 우승훈이다. 파괴신에게 재고 폰을 팔아먹을 정도의 말발을 패시브 스킬로 보유한 그인지라 전 세계적인 토크쇼의 진행자로 출세한 것이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어유, 승훈이 오빠는 못 오겠고...." "남자친구분께 연락해 보지 그러십니까?" 매니저의 말에 신디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어휴, 세상에서 제일 바쁜 백수께서 제 전화를 받겠어요?" "훗." 그녀의 대답에 매니저가 웃음을 흘렸다. 뚜루루루. 말과 다르게 전화를 걸어보던 신디는 여전히 받을 생각이 없는 수화음을 경청했다. 콰아앙, 두둥. 그때 차가 흔들거리며 진동했다. 창밖을 보니 멀지 않은 빌딩의 옥상에서 연기가 치솟는 것이 보였다. "어이쿠, 테러인가 봅니다." 특정 국가를 정하지 않은 산발적인 테러는 여전히 풀지 못한 지구연합의 숙제. 강우진이 자취를 감춘 요즘은 더욱 빈번히 활동하는 테러리스트들이었다. 화르륵! 검게 불타오르던 빌딩의 옥상을 향했던 신디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가 이내 반들을 그리며 눈웃음 지어졌다. 화르르르륵. 검은 연기들이 한데 모아져 하늘로 쭉 올라가 버렸고 불길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한곳으로 뭉쳐 불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여튼, 제일 바쁘다니까." 신디는 여전히 수화음이 이어지는 휴대폰을 종료했다. 그래도 한국에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설렘이 들었다. 돈도 안 받으면서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불꽃 남자.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백수 남친. 오늘은 얼굴을 볼 모양이었다.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스케줄 다 취소해 줘요." "예에?" 깜짝 놀란 매니저지만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지 곧 수긍하는 그였다. 슬쩍 룸미러로 본 신디의 얼굴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 슥스슥. 익숙한 손놀림으로 책 속지에 사인을 했다. "작가님, 너무 예뻐요." "하하, 네에." 덕담에 기분 좋은 미소로 답하고 악수까지 했다. 다음 줄에 있던 독자가 가져온 책을 내밀었다. "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바둑이." "......." 유려한 몸짓으로 검은 선을 남기던 펜이 우뚝 멈춰 섰다. "누구라고요?" "바둑이요." "헉." 도지원이 벌떡 일어섰다. "그, 하차 댓글 달아주신...." "하차하고 안 보려고 했는데 다음 편이 또 궁금하고.... 뭐, 그러다 보니 다 보게 되고.... 뭐, 또.... 재미로 신청했는데 팬미팅에 당첨도 되고...."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그를 보고 도지원이 환하게 웃었다. 200화가 연재되는 동안 한 편도 빠지지 않고 하차 댓글을 단 그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정말 반가워요." "예?" "진짜 궁금했거든요. 헤헤." 도지원의 티 없이 맑은 웃음에 바둑이라는 명찰을 목에 건 사내는 괜히 뻘쭘해졌다. 이렇게 격한 반가움이라니? "정말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작가 후기로 적지, 왜? 어리둥절해 하는 사내를 향해 도지원이 맑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힘이 되었어요." "흠흠." 괜한 헛기침을 흘리는 그의 뒤로 쭉 늘어선 독자들의 줄을 무시한 신디가 모습을 보였다. "지원아! 완결 축하해!" "어? 신디야." 깜짝 놀란 지원가 사인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신디 아냐?" "어? 정말이네. 둘이 친구라더니 진짜 친한가 봐." 쑥덕이는 사람들을 보며 지원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기실에 해솔 씨랑 재민이네 와 있어." "으응. 얼른 끝내고 와." 신디가 독자들을 향해 꾸벅 인사하고는 바쁜 지원을 배려해 마련해 둔 지인 대기실로 향했다. "어이구, 우리 자기. 그냥 앉으라니까." "아니야. 앉아 있는 것도 허리 아파." "어유, 어떻게 해." 대기실 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신기가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어? 누나." "언니이!" 깜짝 놀라는 도재민과 마찬가지로 놀라움과 함께 반가움에 활짝 미소 짓는 슬기가 있었다. "험험. 오셨습니까?" "네에." 재민과 슬기의 애정 행각에 뻘줌했는지 은근히 반가워하는 해솔과 인사하곤 슬기의 손을 맞잡았다. "언니이이!" "어유, 기집애. 이제 막달 아냐?" 신디의 시선이 불쑥 튀어나온 슬기의 배를 향했다. "으응. 다음 달 12일이야." "집에 있지 그랬어?" "에이, 그래도 지원이 언니 팬미팅인데 어떻게 그래." "어이구, 시누이라 이거지?" "어머, 아냐아." 눈웃음 지으며 해후하는 그들을 보며 그저 흐뭇하게 웃기만 하는 도재민이었다. "넌 아빠 되니 좋냐?" "헤헤, 좋죠." "으이구. 그런데 우진이는?" "형이요? 형은 못 오죠. 그 먼 데를 갔는데." "누가 못 온다고 그러니. 지금쯤 도착했냔 말이지." "어....... 음, 잘 모르겠는데." 도재민의 말에 신디가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이구, 색시 바보한테 뭘 바래." "헤헤." 핀찬 들으면서도 마냥 좋기만 한 재민이었다. "우진이 형 걱정이 제일 쓸모없잖아요. 잘 도착하셨겠죠. 헤." "하긴...." 지구에.... 아니, 태양게에서 강우진 걱정만큼 제일 쓸데없는 게 있을까. *** "화성 궤도 진입 완료했습니다. 천천히 접근합니다." "음, 좋아. 본부에 송신해." "넵." 삐이! "신기원 1년 5월 29일 11시 00분 레이온호 화성 궤도 진입 완료. 공전하며 탐사 시작." 분주한 대원들을 보며 우주선의 함장 레이온 대령이 발길을 옮겼다. "후우." 산전수전 다 겪은 레이온이지만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떨렸다. 삐이. 초인종 같은 벨을 누르자 작은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들어와.> 피슝! 문이 열리며 절도 있는 걸음으로 입장한 레이온이 강우진의 앞에 섰다. "후욱." 물구나무서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우진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는 근처의 수건을 주워 대충 얼굴의 땀을 닦았다. "뭐야?" 딱딱한 차렷 자세를 유지한 레이온이 보고를 올렸다. "화성 궤도에 진입 완료했습니다. 공전하며 행성 전체를 스캔할 생각이며, 정화한 조사 후 착륙선을 보내...." "아, 1절만 하고." "......." 우진이 대충 머리의 땀마저 털고는 씩 웃었다. "도착했단 말이지?" 성큼성큼 나아가는 그의 발길을 따라 걷는 레이온이었다. 뭔가 불안한데? 항상 무언가 일을 만들어내는 사내였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에 푸른 행성의 모습이 보였다. 우진의 눈이 더없이 반짝였다. 트라넷이 사라진.... 포탈이 사라진 이 세상에 행성을 오고 갈 유일한 수단은 우주선 뿐. 문 월드의 진보한 기술로 그나마 이곳까지 오는 데 몇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도착했네." 우진의 눈에 희열이 차 있었다. "아르펜에." "......." "문 열어." "예에? 공전하며 위성 조사 후...." "그냥 깨고 갈까?" ".......준비하겠습니다." 레이온이 졌다는 듯이 돌아섰다. 잠깐의 준비가 끝나고.... 우주선에서 착륙선이 발사되었다. 푸슝! 천천히 분리된 착륙선은 화성의 중력에 이끌려 점점 더 가속도를 높였다. 충분히 열기와 압력에 견디도록 설계된 것이지만 분리된 지 1분을 넘기지 못했다. 꽈아아앙! 터져 나간 파편들이 불꽃을 흘리며 낙하했다. 그 폭발과 함께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하얀 무언가가 팽창했다. "으음." 착륙선을 찢고 나온 본드래곤을 보고 레이온이 침음을 삼켰다. 굳이 보지 않아도 신나 하는 표정으로 그 등 위에 올라타 화성으로 향하는 우진의 모습이 그려졌다. "공전 궤도를 유지한다. 관측 위성 분리도 시작한다." 화성.... 아니, 지구와 함께 테라포밍 된 아르펜의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진을 태운 본드래곤이 낙하를 멈추고 활강하기 시작했다. 포탈이 사라졌으나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킨 그였다.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서울역 네크로맨서>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