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서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 라플 헤제로이스 다플리제 카므디은 세론이 예언하기를 장차 세상의 혼란이 도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혼란은 사악하지 않은 인간의 손에 의해 시작되고 어리석은 인간이 많이 죽고 그 피가 강을 이루어 붉은 닭이 이지러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어 그 불행이 계속될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불행은 역시 인간인 구원기사에 의해서 종료될 것이며, 위기의 정확한 그 때를 알 수 없으니 이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며, 인간은 항상 깨어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라플 헤제로이스 다플리제 카므디은 세론의 예언이다. -키나 드리아스의 서- 1. 할 일 없는 마법사의 하루. "사부님. 오늘로 저는 세상에 나갈까 합니다." 밝은 햇살을 듬뿍 받으며 이제 겨우 18세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손에는 떡갈나무로 만든 투박한 지팡이를 지고 있었고, 옷은 검은 색이 낡아 회색을 띄고 있었다. 소년의 머리는 밝은 갈색으로 평범 그 자체였다. 이 소년은 자신의 말에 상당히 자신이 없는 듯 큰 갈색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맘대로 해라. 내가 언제 너한테 이래라 저래라 했냐?" 사실, 난 이 제자놈이 어떻든 상관은 없었다. 처음부터 제자가 되겠다고 조른 놈도 이 녀석이다. 그러니 먼저 떠나도 할 말은 없는 거지. 잉. 그럼 앞으로 청소랑 빨래는 누가 하지..음. 이 나이 되어서 해야하나... "사부님! 전 열심히 세상에서 사부님의 이름을 드높이도록 노력할 겁니다!" 내 제자는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려 하는 구나. 이거 참. "그래? 그래, 내 이름을 뭐라고 할 셈이냐? 앙? 나 너한테 이름 알려준 적은 없는데?" 그렇다. 이 바보 제자 - 이름은 세이키르인데 난 발음이 힘들어서 세이라고만 했다 - 는 내 이름을 모른다. 그냥 가르쳐 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제 잘 기억도 안 난다. 나이 먹어 봐라. 다 이렇게 된다. 그래서 세이 이 녀석은 나를 사부님이라고만 부르니 내 이름을 알 턱이 있나. "...그러네요." 이제 알았냐? 바보야. "그럼, 사부님의 모습을 열심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럼 아는 분도 계시지 않을 까요?" "이놈, 세이야..." "네." "네놈의 무식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냥 산 속에서 조용히 공부했다고 해! 알았냐? 난, 내 이름도 기억 안나 임마! 그냥 살어! 너가 풀을 뜯든 물을 마시든 내 이름 나도 모르고, 난 세상과 인연 끊은 지도 오래야, 나랑 친한 인간도 없었다구!" 이쯤되면 이 녀석의 반응이 온다.. "잉...사부님 너무해요.. 그래도 그렇지. 소리를 지르시진 마시라구요. 귀 아프잖아요." "그래 이 녀석아, 나가서 괜히 실력이나 뽐내지 마라. 알겠냐?" "네! 사부님의 충고,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새 희희 낙낙 이로구만. 쯔. "사부님. 저 이만 가볼래요. 그럼." "그래 잘 가라." "꼭, 놀러 올께요~" 저 녀석 지금 소풍 가냐? 난 한참 녀석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아침은 정말 세이 녀석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뭐냐... 앞으로 밥은 누가 하냐구. 에이구. 사실 나는 올해로 120세다. 음. 좀 나이가 많다. 모든 인간의 평균 연령보다 한 50세 정도 더 산 편이다. 나도 이제 내가 살날 얼마 안 남은지도 안다. 살만큼 살았지.. 하지만 저 세이 녀석 만났을 때가 112살 때인데... 정말 8년이라는 세월은 정말 빠르게 흘렀구나. 하늘은 파랗고 내 마음도 파랗고...뭐냐..이건...하여간, 이제 다시 난 혼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친구들은 많았다. 개중에 희귀한 엘프도 있었지. 음. 사실 그녀랑은 사귀는 사이 즉, 애인사이이기도 했다. 한 40세쯤 해서 헤어졌지만 말이다. 왜냐면...음. 당시의 난 일종의 엄청난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 세상을 구하자!' 뭐, 헛소리는 아니고, 정말 세상을 구하기 위해 그녀와 헤어지고 혼자 용감히 당시의 마족과 계약한 파시카의 왕을 처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정말 미쳤나 보다. 에구 귀찮게스리. 하여간 엘프는 오래 사니까 그녀는 살아있을 것이다. 당시의 난 정말 무섭도록 냉정하고 정의감에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에휴.. 그래서 그런 이름도 붙었지.. 마법사 라플 헤제로이스...어쩌구.. 다음은 나도 몰라.. 이름보다 더 유명해 졌으니까.. 절대 다시는 그런 쪽팔리는 짓은 안 해! "밥이나 해볼까.." 그러고 보니 밥 해보는 게 8년 만이지.. 가만.. 재료가 있던가? 차라리 요리 책을 찾아보지..음. "어디더라.." 찬장의 위쪽 세이 녀석의 손때가 묻은 책이 하나 나왔다. 요리 책이었다. 응? "이건 뭐냐?" 아래, 왠지 오래되어서 표지까지 없어진 책이 나왔다. 뭐더라? 책을 펴보니(먼지는 정말 엄청났다..켁켁) 무슨 요리책 같았다. 기뻐... "오늘은 이걸로 하자!" "요리는 즐거운 것이다!(자기 암시성 발언) 라라라... 즐거울 리가 없잖아! 근데, 재료가 이게 뭐야! 드래곤 하트에, 푸른 강의 물, 그리고 붉은 피 조금.. 꼭, 본인의 것...이런!... 내 피가 요리에 왜 필요하냐.. 특식인가.. 하여간. 아야야!" 더럽게 아팠다. "음 이제 그럴 듯한 냄새가 나네.. 쳇. 이런 무서운 요리 다시는 안 만든다... 책을 팍 불태워야지~" 음. 잘 타지도 않네... 그나저나 요리는 요상하게도 계속 쫄더니 아주 조금.. 겨우 한 국자만큼 남는 것이었다. 이거 먹고 굶어죽겠어. "여하튼 대충 익은 거 같으니 먹자." "우잉, 돌아와 세잉... 제자 하나 더 거둬야겠다. 흑.." 요리 잘하는 놈으로. 눈물 젖은 요리를 먹어보지 못한 자는 그 맛을 모른다. 맛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지독했다. 하지만 어차피 한 국자이니까...버리고 자시고 할 일도 없고...엥.. "이제 명상이나 해야지." 피곤한 하루였다. 요리에 방 청소...허...나이 먹어서 왠 고생이냐.. 그때 그 엘프.. 이름이 뭐더라... 확실히 잡아서 애 하나 둘 났어도 편하게 공양 받고 사는 건데.. 아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암. 뭐가 암이야.. 내가 이런 노인네인데. 우씨 그녀가 나를 받아주기나 하겠어? 에이. "명상이 안 된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그치만... 세이가 가서 약간은 슬프기도 하고 엥...늙으면. 그저 고생이라 니까...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제자가 하나 있었던 듯도 하고.. 고저 늙으면 치매야..치매. 그날의 꿈은 정말 좋은 꿈이었다. 내가 마왕에게 쫓기면서..마왕은 국솥이라는 엄청난 무기로 나를 고문했다. 개꿈이다...우.. 밝은 아침은 흔히들 신의 축복이라고 한다. 사실 신의 저주로 비라도 내려봐라, 나처럼 힘없는 늙은이는 밖에 나가기도 싫다구.. 그러므로 이런 날씨가 앗싸리, 좋은 날은 밖에 산책 나가고 싶은 거지. 음 하하하. "자 세수도 간만에 해볼까나?" 세수 안 한지 언~ 몇일은 지난 거 같다. 그리고 굶은지도 며칠.. 이러다 죽겠다. "어푸 어푸.. 하!" 오늘 따라 기분이 좋고, 몸의 힘도 무럭 무럭 ...가만... 수염 색깔이 ...이상타... 난 그날 생애를 통들어 가장 이상한 걸 볼 수 있었다. 약간 더러운 물 속에 비치는 어디선가 본듯한 작은 소년의 얼굴...웅.. 어디서 봤더라.. 가만, 왠 소년이 수염이 있냐??@!!! 거울 마법을 사용해 본 나의 얼굴은...이제 십 오륙세 나 된 듯한 작은 소년이었다. 머리는 한창 젊었던 시절의 실버 브론드... 사실 흰색이나 별 차이 없지만, 빛이 나고 약간 금빛이 난 다는 차이가 있지... 게다가 주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 욱! 말도 안돼! 그렇다고 마법력이 줄어든 건 절대로 아니고..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거냐.. 난 모르다! 이유는 아마도 그 국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괜히 태웠다. 팔았으면 돈 좀 됐을 텐데.. 우시... 그러고 보니 난 젊었을 시절 세계 평화를 위해 일만 열심히 했다. 마족을 봉인하고 드래곤과 싸우고 나쁜 상인을 처벌하고 세상에 그 드높은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이제 남은 게 뭔가? 무척이나 맛이 요상스런 죽! 뿐이지 않는가. 고로 나는 이제 젊어졌으니 열심히 놀것이다. 적어도 놀고 나면 남는 거라도 있겠지. 그리고 엘프랑은 상종도 안 할 것이다. 그녀(아직도 이름이 기억 안난다.)는 내가 나이를 먹어도 그녀는 젊은 모습 그대로였으니 내가 더 늙었으면 나를 버렸을 것이다. 고로 고로, 나는 인간 여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애 하나둘 나아서(가족 계획!!!) 늙어서는 편하게 공양 받으면서 살 꺼다. 돈도 많이 벌어야지. 그리고 절대로 남들 앞에 나서는 쪼~~옥 팔리는 짓은 안 할 것이다. 이제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난 모른다 이거다. 음하하! 나는 짐을 꾸렸다. 마법사의 생활은 이제 안녕이므로 마법과 관계된 것들은 싸악 빼고, 문을 잠그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찰라, 생각해 보니, 늑대라도 만나면 큰일이므로, 잘 안 드는 녹슨 단검 하나를 챙겼다. 그러고 나니 영락없는 거지...는 좀 심하고, 불쌍한 여행 소년으로 보였다. "우악... 여긴 왠 사람이 이렇게 많냐... 확실히. 예전하고는 다르네. 하유." 거의 70년 전에 오고 안온 이 마을의 이름은 베이크. 이상한 이름이다... 하여간 그 동안 몰라보게 사람이 버글버글 해져서 거의 앞에 뭐가 있는 지 안보일 지경이었다. "저기봐, 오늘의 최고 노예 경매시장이 곧 열린데. 구경가자구." 가만... 난 노예 시장 같은거 예전엔 본 적이 없는데? 우째 이상한... 여하튼 사람을 따라가자구. "저기 봐. 정말 아름다워. 최고의 홀이야. 베이크에서 가장 아름다워!" "그러게 말야. 오늘은 무슨 노예가 나올까?" 난 노예 같은 건 잘 모르는데...하여간 멋진 홀이긴 하다. 그 베이카 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매장은 정말 아름답기는 했다. 가장 순도 높은 대리석으로 기둥이 되어있고, 흑요석으로 검은 무늬가 이루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마법의 등은 정말이지 내가 볼 때는 별로 였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무척이나 굉장해 보일 만 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기어 나온거냐. "자 조용히 해주십시요. 베이카의 긍지 높은 시민여러분" 장내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떠드는 몰상식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니, 한 쪽 에는 왠지 부유해 보이는 돼지들이 죽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난 원래 귀족이었지만, 별로 귀족을 좋아한 적은 없었다. "오늘도 이곳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정말이지 근래에 보기 드문 멋지고 아름다운 놈들이 많이 있답니다. 여러분들의 눈이 호강하게 되리라는 것은 정말이지 틀림없답니다. 그리고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규칙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회자는 그래도 제법 근사한 얼굴을 하고 검은머리는 뒤로 몽땅 넘겨져 있었다. 뭐 멋있기는 하구만.. 나도 해볼까, 올빽 머리. "그럼 일반 경매 형식으로 진행이 되고, 저희 경매장만의 재미있는 규칙은 바로, 신분에 구애 없이 돈만 있다면 노예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딴 경매장은 신분에 관계가 있나? "그리고, 만약, 돈이 없는데 사고 싶다면 노예의 주인에게 결투를 신청하시어, 싸워 승리하면 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건 좀... 웃긴다. 그럼 힘있는 놈은 장 땡이라는 거잖아... 그러나 곧 옆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 내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대개의 용병들이 뭐 하러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냐는 것이었다. 뭐. 나야 상관없는 일이지. 즐겁게. 즐겁게. "그럼 첫번째 노예입니다. 아직 청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대려다가 일하시는 데 부려먹으면 딱 알맞은 소년입니다. 게다가 어설프지만, 마법도 약간 하는 소년입니다! 가격은 50메장(돈의 단위)부터입니다!" 나는 그 불쌍한 소년을 보고 눈치 채버렸다. 이들은 일반 사람을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일도 한다는 것을... 왜냐구? 단상위의 소년은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로... 세이였다. 이 어벙한 자식...우쩌다가... 보통의 마법사는 엄청나게 체력이 약해서 검사의 보조 없이는 싸움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세이는 아직 견습 마법사...당연하지.. 저런 바보.. 물론 나는 음 하하하 문제없어! "어쩐다.." 다행히, 돈은 별로 올라가지 않았다. 100메장에서 머물고 있었다. 늙은이가 무슨 돈이 있냐? "나중에 꼭 받아 낼 테다. 우씨." 나는 당당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110메장!" 주변 사람들이 날 쳐다보았다. 세이 녀석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날 바라보지도 못했다.. 쯔.. 팅팅 부은 동태 눈이구만. "네. 110메장 나왔습니다. 다른 분 없습니까?" 없어라..없어라...없어라. "쳇. 200 메장." 허걱! 나만 놀란 게 아니었다. 다 놀랐다. 모두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후드를 뒤집어쓴, 그러니까 다분히 마법사로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자였다. 게다가 뒤에는 젊은 검사 둘이 서 있었다. 무엇보다 둘은 강해 보였다. "200메장입니다. 다른 가격은 없습니까?" 있을 턱이 있나... 이런 터진 놈을 누가 사려고 해..저 미친놈만 빼고. 할 수 없지. 돈도 없지만, 제자를 노예로 팔 수 야 있나. "돈이 없으니 결투를 신청합니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시는 이런 쪽 팔리는 짓 안 할라고 했는데. 주변 사람들의 친절한 격려의 말들이 들려왔다. "야, 꼬마야, 정신차려, 만약 지면 돈도 니가 내고 노예도 뺏긴다구." "어린 게 겁도 없네." 곧이어 후드 뒤집어 쓴 자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좋다. 샤므. 가서 싸워라." 샤므라는 남자 검사는 검을 뽑지도 않고 나왔다. 날 무시하는 게 역력했다. "내 이름은 아젠의 기사 샤므 키사리온이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예의는 있는 놈이구만... 가만, 아젠의 기사? 뭐더라...에. 또. 그러니까. 모르겠다. 치매야. 하지만 일반 베이카 시민 여러분은 무척 잘 아는 듯 했다. "아젠의 기사래. 그 불패의 기사단. 저 꼬마 오늘 살아 돌아가기는 글렀군.." 고맙구만. 고마운 정보를 들려줘서. 난 제법 낭랑한..그래봐야 어린 목소리지만 친절하게 내 이름을 말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아까 앞에서 설명했듯이 난 한때 귀족이라 이름이 거창하다. 뭐 내가 바란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아젠의 기사가 뭔지 대충 생각이 났다. 아젠의 기사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는 이렇게~~ "오랜 세월의 원을 그려 그 세계의 정점에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푸른 강물에도 그 이름이 빛나며 천지간에 가장 위대한 기사의 이름을 가진 자 아젠의 이름을 따라, 그 뒤를 쫓는 위대한 자 샤므 키사리온(사실 이때까지 나는 숨도 안 쉬고 말했다.)이여, 여기 그대에게 결투를 청하는 자의 이름은 정말 보잘것없는 자요, 세상을 등지고 그 빛을 보지 않고 어둠을 살아가는 하찮은 일반 사람의 하나로서 위대한 신의 가호를 받아 연명해 가는 그 이름도 하찮은 자, 퓨제르의 가호를 입은 자. 세상에는 헤젤 라 프라오이디스 세론이라는 이름을 받은 자입니다." 헥헥.. 나의 엄청나게 길고 무슨 뜻인지 잘 모를, 사실 나도 잘은 모르는 소개를 받은 아젠의 기사 샤므 어쩌고는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나의 호흡력에 놀란 것이겠지. "이거 결투가 아니고 변론 대회였냐?" 라는 일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젤 라 프라오이디스 세론. 당신의 박식함에 놀라며 결투를 거두어주기를 원하오." 아주 정중하게 나에게 말했다. 저런. "당신같이 어린 사람에게 내 칼은 너무 매정하오." 이 사람 말투가 장난이 아니여.. 한마디로 왕 입니다요. "미안하지만, 에젠의 기사여. 나는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나는 저 소년이 꼭 필요합니다." 밥먹는 데. 사람에게 무릇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자고, 노는 거다. 그렇지만, 나의 예전 버릇이 나오는 것은 아주 안 좋은 징조다. 쇼맨쉽이 너무 강해서. "그럼 검을 뽑으시지요." 이 자는 나에게 정말 깍듯이 존대 말을 해준다. 정말 좋은 사람이다. 음. 좋아할 때가 아니지. 가만, 검? 이 녹슨 검? 오~ 노우! "..." 나는 멋지게 나의 녹슨 검 1호를 꺼냈다. 주변에서 감동했는지 엄청난 소리들이 들려온다. "우와, 저게 검이야, 녹이야?" "글쎄 저런 걸로는 종이도 안 잘라질 텐데. 불쌍해라. 돈이 없나 보지?" "쯔. 저 꼬마 오늘 완전히 죽었구만." "안됐어." 아젠의 기사 샤므도 놀란 듯 했다. 나의 검의 위용에 놀란 것이겠지. "...그게 검이냐?" "그렇습니다. 그럼. 먼저 공격하시지요." 또 버릇이 나왔다. 선제 공격을 하라는 거야.. 근데 난 마법사인데 왜 마법을 안 쓰냐고? 그야... 마법 때려칠려고 지팡이도 안 가져 왔지. 지팡이는 정신집중을 위해 꼭 필요하지. 뭐 나야 없이도 쓸 수 야 있지만, 웅. 모르겠다. 그냥 조용히 살라 그런다. 왜! "그럼. 봐주지 않는다." 아젠의 기사의 검이 순식간에 나의 머리위로 다가 왔다. 머리를 쪼갤 듯이. 저런. 나는 단검을 휘둘러서 막을 엄두가 안 나서 조용히 옆으로 피했다. 이 녹슨 검 1호로 마주쳤다간 검 날라간다. 검은 다시 나의 허리 쪽을 공격해 왔다. 나는 나의 독창적 검술을 펼쳤다. 이건 예전에 쓰던 건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이름하여 '날라 치기' 음. 이름이 좀. 하여간 나의 위대한 점프로 샤므의 어깨를 노렸다. "야압!" "챙!" 웅... 나의 검을 잘도 막는 구나... 역시 아젠의 기사네. 하지만 샤므도 놀란 듯 했다. "나한테 덤빌 만은 하군." 사실, 내가 먼저 결투 신청을 했지만, 그래도 나온 것은 샤므이니까 샤므가 나한테 덤빈 거 아닌가...? 나는 다시 공격을 가했다. 이번 거는 잘 먹혔다. 예전에 이 검을 막은 사람이 딱 4사람이니까. 우 히히히. 이른바 검의 종가라고 불렸다고 바로 슈알렌의 왕가 검술이다 이 말이야. "앗!" 나의 검은 가볍게 그의 팔을 스쳐갔다. 내 검이 녹이 슬어서 그의 팔에는 약간의 긁힘만을 내었을 뿐 이었다. 상처보다는 파상풍걱정을 해야할 듯. "놀랍군. 샤므를 이기다니." 후드맨이었다. 아젠의 기사는 많이 놀란 듯 했다. 저런. 하지만 이 나에게 졌으니 영광으로 생각해도 될텐데. "안됐군. 애한테 지다니." "저 꼬마 의외인데." "여하간 저 꼬마 횡재했군." 다시 마을 주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같이 샤므를 조롱하지 않고, 나답게 우아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아젠의 기사 샤므 키사리온 이여. 오늘의 결투는 나에게 행운의 여신이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결코 당신의 실력이 미숙해서가 아닙니다." "....헤젤 라 프라오이디스 세론. 그대의 검은 마치 하나의 섬광과도 같군요. 그럼 잘 구경했습니다." 역시 예의로 똘똘 뭉친 검사였다. 대단해. 흠. 곧이어 후드맨이 200메장을 치루고 나가 버렸다. 덕에 나는 세이를 무사히 인수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저 세 사람 나가는 것도 예술이다. 나도 한번 해봐야지. 음.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잉. "예, 소년 기사님, 이 꼬마는 좀 버릇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사님의 실력이라면 문제 없으시겠죠?" 올빽의 말이었다. "아 걱정 마세요." 주민들의 생각은 불쌍한 어린 소년에서 재수 없는 내지는 매우 놀라운 놈으로 격상 된 듯 했다. 이런걸 격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야. 난 세이를 끌고 여관으로 갔다. 잘자라 꽃아 여관이라는 정말 이상한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선 제일 싼 여관이었다. 세이는 시종일관 칙칙하고 살기 띈 눈으로 날 보았다. 짜식 이런 눈도 할 줄 아네. 흠. "야. 좀 누워라. 상처가 덧 난다구." "날 왜 샀지?" 세이는 왠지 울 것 같아 보였다. 쯔, 원래 눈물도 많은 녀석인데. 그러고 보면 8년간 정도 많이 들어서 거의 손자 같은 녀석이었다. "세이. 걱정 많이 했다. 마법으로 치료 해 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내성이 사라지니까 아파도 좀 참고 있어라. 뭐, 시간은 많으니까. 세이? 왜 그러냐? 좀 놀랬구나. 뭐 다 네 탓이니까, 놀랄 것도 없어. 알겠냐?" 이 때 세이의 얼굴은 정말 굉장했다... 그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세이가 없어서 요리하다가 이 꼴 된 건 절대 말 못 해! "당신 누구야!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노예시장에선 본명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니 스승이다 임마... 그치만 믿을까 싶지도 않는데. "음. 그러니까. 세이. 소리지르면 몸에 안 좋다. 나는 네 스승이다. 뭐 구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다친 게 불쌍해서 봐준 거다. 그리고, 너 말야, 내가 마법 쓰는 거 티내지 말랬잖아. 내 말을 왜 그렇게 안 듣냐? 너 바보냐?" 세이는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나를 누워서 올려보았다. 세이는 울기 시작했다. 이 녀석 미친 거 아냐? 허걱! "흐...엉.. 사부님 이시군요. 엉... 사부님. 사부님 얼마나 무서웠다구요. 그 녀석들 다 없애 버려요.. 엉. 엉엉.. 너무해요. 이렇게 놀래 키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사부님 왜 이렇게 어려 보여요. 회춘 하셨나요? 헤헤." 의외로 세이 이 녀석은 사람을 너무 잘 믿었다. 이러니 잡혀가지. 쯔. "인석아.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 알았냐? 가서 수프 가져 올 테니 고만 울어라. 알겠냐?" "네. 헤헤헤." 못난 내 제자.. 에이구. 아무래도 저 녀석 집까지 내가 데려다 주어야 하겠다. 18살이나 먹은 녀석이. 쯔. 그나저나 이렇게 내 애제자(?)를 두들겨 놓고서도 무사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으 흐흐흐. 그러나, 귀찮다.. "자 여기요. 수프 이인 분입니다. 근데, 너 정말 귀엽게 생겼구나." 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상당히 맘에 드는 거 같았다. 사실 나는 한 이쁨 하지. 하하하. "근데 아까 같이 올라간 청년은 누구니? 네 하인이나 노예 그런 거니?" 궁굼한 게 많군. 아줌마. 그러나 많이 알면 다치는 법이야. "저와 잘 아는 사이예요. 지금은 다쳐서 저 모양이죠. 그래도 꽤 믿음직 스러운 데도 있다구요. 그렇게 안보이기는 하지만요. 저렇게 멍청해 보여도 사실 요리솜씨는 최고 랍니다. 헤헤헤." 아줌마는 나의 제자 자랑하기를 들으면서 사과 하나를 더 꺼내주었다. "귀여운 손님에게는 서비스다. 맛있게 먹고. 알겠지?" 어딜 가나 이런 좋은 사람이 있는 법이지. 하하하. 내가 식사를 들고 올라가서 보니, 세이 녀석은 그야말로 귀엽게 잠들어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된 것도 내 탓이 크다. 산 속에서 8년 동안 두 사람만 생활했으니, 어련하겠는가. 거기다가 마법은 원래 실전과 수련을 통해서 다듬어 지는 것이고. 음. 내 탓이로소이다. 녀석을 만나게 된 날이 떠올랐다. -나 혼자 에요.- -그래서?- -절 제발 죽여주세요. 할아버지는 절 그렇게 죽여주실 수 있죠?- -내가 왜?- -절 죽이면 돈도 뺏을 수 있고,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울릴 수도 있으니까요.- -어째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그건 그렇고 왜 이런데 혼자 있는 거냐?- -전 버림받았거든요. 다들 동생만 좋아해요. 전 필요 없대요.- -이름이 뭐냐?- -세이키르요. 웃기는 이름이죠?- -오늘부터 세이라고 부르마. 너의 아버지가 너를 소중히 여기게 될 때까지 내가 너를 보살펴주고 아버지처럼 대해주마. 제자가 되려무나.- -제자요?- -그래 제자. 내 아래서 마법을 배우면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을 꺼다. 그리고 앞으로도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정말 아버지가 저를 인정해 줄까요?- -그건 모르지만. 적어도 나라는 사람을 서로 인정하고 아껴주는 상대가 될 수 있겠지. 인간은 누구나 지켜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하단다. 너는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뿐이지. 따라서 죽어야 될 이유 같은 것은 없단다. 넌 적어도 사람이니까. 헛소리가 되기는 했지만 이해는 되겠지. 자, 내가 싫으냐?- -아니요. 전 제자 하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내가 처음 본 세이는 왠지 가슴 그득히 슬픔을 안고 있었다. 이제 겨우 열 살 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슬프고 고난을 겪는 얼굴이었다. 난 내가 생각났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러나 마법을 익히기엔 늦은 나이에 마법을 익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살던 그 날들을. 나는 단지 세이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조할 수 있었다. 그의 아픔은 어린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아픈 것이었다. 세이의 등에 아직도 남아있는 검의 자국은 그의 아버지의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난 세이가 불쌍했던 것이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업신여김을 당한 그가. 불쌍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소중한 한 사람으로 나의 아이처럼. 아이가 없어서 느낄 수 없을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난 세이가 정말 잘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역시 현장 학습을 받지 않아서 인가. 세이를 건드리다니 죽음이다. 후후후. 나를 건드리다니. 단, 지금은 귀찮으니까 잊자. 잊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뭐. 훗. "세이야 스프 먹고 자야지. 안 먹으면 다 식어요." "웅... 스승님. 저요, 저요." "왜?" "다행이에요. 스승님을 만나서." "거 녀석 참. 쑥쓰럽게. 헐." 녀석은 나를 잠시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심각한, 매우 진지한 어조로 나에게 물었다. "근데. 사부님." "왜?" "왜 그렇게 젊어지신지는 몰라도 말투 안 고치면 큰 봉변을 당할 거 같은데요. 너무 노인네틱해서." "나 원래 노인인데?" 세이는 잠시 나를 응시하고 아주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겉모습은... 저보다 어려 보여요." "그런가... 할 수 없네. 그럼 내가 어린 시절에 쓰던 말투를 쓰면 되나?" "그렇죠! " 나는 좋아하는 세이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난 그 말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중독성이 엄청 강한데. 할 수 없지. 세이는 그래도 뭔가 나보다는 세상에 대해서 들은 게 있을 테니까. 세이와 나는 맛난 스프를 먹고 사과는 세이를 줬다. 원래 나는 딱딱한 걸 싫어해서. 좀 너무 한가? 여하간 나이가 젊어져도 사람의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음. 바꿔야 하겠지만. 내 덕에 세이 이 녀석도 유동식(?)을 더 잘 먹게 되었으니.. 쩝.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이었다. 숫자는 셋. 그리고 중장비를 한 자가 둘이었다. 나야 뭐 지금은 이렇게 퇴물이지만 예전에는 국왕의 군대와 싸우는 굉장한 사람이었다구. 음 후후. 음. "달칵." 들어온 일련의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후드맨, 샤므 키사리온, 그리고 또 다른 기사였다. 음. 완벽한 팀이다. 폼나지, 음침하지, 멋있지. 꼭 마왕 삼총사 같군. 이런 말하면 싫어하겠지만. 후. "무슨 일이지요?" 나의 어렸을 말투인데. 세이의 반응... 엄청 실망한 듯하군. 좀 이상한가? "우린 그 노예를 만나러 왔다. 별다른 해를 가하지는 않을 테니, 말을 할 수 있게 해다오." 나 못지 않은 샤므의 말투였다. 건방지게 들리는데, 내가 말할 때도 저렇다면 역시 고쳐야겠군. 일단 듣기에 재수 없다는 것. "세이는 노예가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하시군요. 사실 저랑 좀 아는 사이인데, 곤경에 처한 것을 우연히 알고 구해준 것 뿐 입니다." 이건 좀 낫군. 하지만 역시 애가 할 대사는 아닌 듯 했다. "어휴. 그 말투 좀 집어치우세요. 저는 세이에요. 그리고 노예도 아니구요. 그리고 사실 전 이분 제자 에요." 무척이나 뿌듯하게 이야기하는 내 제자. 그치만 이 상황에서는 그런 말을 안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데. "에...그러니까." "농담하는 것이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말투였다. 뭐 너무 하잖아. "제 검술을 보셔서 알겠지만, 사실은 검술 스승입니다. 그냥 나이를 떠나 사제지간을 맺기로 하였죠. 뭐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경청하겠습니다." 역시 난 안돼. 꺼이 꺼이. 세이 녀석이 나를 멍한 얼굴을 해서 쳐다본다. 역시 나는 사기술 이라도 가르쳐서 애를 내보냈어야 했던 것이다. "흠.. 그렇소? 좋소. 세이. 묻건 데, 당신의 스승. 그러니까 검술 말고 마법 스승은 누구시지?" 나요! "에? 예. 이름을 몰라요." 정직한 녀석. 하지만 샤므 키사리온의 공격은 계속된다. 땡~! 일회전 시작! "그럼 인상착의는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저요! 날 보면 알 수 있지! 역시나, 세이는 날 한 번 보고 다시 말했다. "그냥 평범한 인상이시죠...그러고 보니 흰머리에 흰 수염. 주름진 얼굴에 에 또, 마른 체구이시구요." 샤므는 김이 빠지고 있었다. 저런 그야말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면 나라도 화가 나지. 그 때 후드맨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지금 옆의 이 소년처럼 은발이었던가요?" 나 같은 은발이 또 있었나? "예. 젊었던 시절에는 꽤나 잘 나가는 미남이라고 항상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 하셨었죠.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내 제자는 너무 정직한 게 탈이었다. "이 근방에 있는 은거한 마법사라면 한 70년 전쯤에 은거한 대 마도사 밖에는 없지. 그런데 자네가 마법을 갓 배운 신출내기라 한번 추론해봤을 뿐이야. 자네 스승인 게 틀림없군." 날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는 이 이야기를 아주 음침하고 탁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니 무척 속이 역겨워 졌다. 난 저런 놈 모르는데 말이다. "스승님을 아세요?" 내 사랑스럽지만 무척이나 정직한 세이는 호기심에 빛나는 얼굴을 하고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하고선 그 후드맨을 지켜보았다. "짐작만 할뿐이지만, 이젠 거의 확실해. 자네 스승은 세기의 대 마도사이자, 영웅중의 영웅이고 위대한 예언가이기도 한 바로 마법사 라플 헤제로이스 다플리제 카므디은 세론이다."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이번엔 내 바보제자( 이 녀석은 그게 누군지도 모른다. 그냥 이름 긴 놈 정도로 아는 듯하다.)를 제외한 두 명의 검사가 놀랄 차례였다. "우리가 찾고 있는 마법사가 바로 그 분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살아있다면 거의 백 이십 세라구요.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맞습니다. 이 소년의 스승이 우연히 늙은 노인으로 돌팔이였던 것이겠죠." 나 늙었고, 돌팔이다 그래!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잖아! "시끄러워.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여지껏 내 얘기 틀린 적 있었냐?" "하지만, 딜로이쳐님. 절대 그렇게 오래 사는 인간은 없어요. 그게 드래곤도 아닙니다. 안 그런가?" "맞아. 샤므. 딜로이쳐님, 다른 마법사일 겁니다." "정말 드래곤일지도 모르지." 다들 심각한 어조로 별 헛소리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이봐, 여기 날 보고 말해! "사실은 신이 아닐까?" "신에 근접한 인간이라니까. 틀림없이 지금쯤은 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헛소리들 하지 말게 그는 분명히 마법사이고 놀라운 사람일 뿐이야. 아직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헛소리들을 하지 말라고!" 세 사람의 재미있지도 않은 논쟁이 시작되자 세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허걱. "정말 백 이십 세에요?" 나는 세이에게는 내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그랬었어. 이름도 안 가르쳐 줬는 데 그런 걸 이야기 했을 리가 없지. 그랬었지. 어쩐지 예감이 안 좋더라니. 어떻게 할까? 그냥 그렇다고 하고 힘을 좀 뽐내? 아냐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도 있다구. 그런 거 못 참아. 다시는 구경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명심했잖아. 제는 내 제자이고 그러니까 내 말을 들을 거야 그러니까 맛있는 밥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그리고 그 재료는 내가 사와도 되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세이는 내가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곤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위대한 마법사라는 건 뻥이죠?" "..." 난 일생일대의 충격에 휩싸여야만 했다. 저런. 스승의 권위가 하락하는 군. 물론 내가 존경받을 만한 짓을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세이는 내 맘도 모르고 웅... "저기요." 세이가 세 사람에게 한 말이었다. "뭐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스승님은 아닌 거 같아요. 우리 스승님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면 제자가 이 모양일리 없잖아요? 그리고 우리 스승님은 건강이 나쁜 할아버지이기는 하시지만 정의감에 불타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얼마나 냉소적인 분 이신데요. 뭔가 잘못 아셨나 봐요. 헤헤헤." 세이는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이야기했다. "그래? 하긴 그 분의 제자라면 뭔가 특별한 점이 있어도 있어야지. 그럼 잘 있게나. 편하게 쉬도록 하고. 그럼 우리는 가보지." 후드맨은 우리에게 당부 한가지를 남겨놓고 떠났다. 그건 자신들이 그런 걸 물어봤다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뭐 어려울 것도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뭔가 엄청난 일을 한것 같았다. 마왕의 음모에 한 중심에 선 기분이랄까? "저기, 스승님, 앞으로 스승님을 뭐라고 불러야 되요? 아무래도 스승님이 저보다는 어려 보이니까요." 세이 녀석의 머릿속은 아까의 사람들보다 지금의 명칭문제가 더욱 중요한 모양 이였다. 뭐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 그리고 곧 나는 난관에 부딪쳤다. "스승님,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잠깐 귀족도 해보았다구 하지 않으셨어요?" "그랬지. 근데 왜?" 그게 중요하냐? 별로 중요할 일도 없을 꺼 같은데. "그렇다면 귀족과 그 신하 하면 어떨까해서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으세요?" "너랑 나랑 같이 여행이나 하자는 거냐?" 세이는 곧이어 빙그레 웃었다. 다음달이면 18살이 되는 녀석의 미소는 정말이지 순수했다. 내 손자라니까. 헐. 할 수 없지. 토끼 같은 새끼들은 좀 있다가 해도 되니까 그 동안은 이 녀석의 장단에 맞춰 주는 것이 좋겠어. "좋아. 그럼 무슨 귀족으로 할 테냐? 너가 골라 봐라." "그런 건 유식한 스승님이 하세요. 아예 예전에 쓰시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어때요? 어차피 오래 전 일이라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세이 녀석은 은연중에 내 나이가 평균연령보다 많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러면 이름을 외우기가 힘들텐데." "저도 명색이 마법사라서 어느 정도 어려운 것도 외울 수 있다구요. 맏겨만 주시라구요!" 정보 배달 길드 협회 직원 같다. 하여간 나는 예전에 많은 사람들 속에 쌓여 불리던 그 이름을 세이에게 알려줬다. 아직도 내가 있던 그 나라가 있으면 좀 문제가 생길 것도 같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마법사는 상상력이 아니라 계산력과 냉정함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니까. "웃기는 이름이네요. 프라오니스 드발리제 세론 피스트리에카이라니. 그럼 아까의 헤젤 라 프라오이디스 세론이라는 이름은 별명이에요?" "그거? 예명이야. 일종의 어린 시절의 별명이기도 하고, 뭐 프라오니스라는 이름보다는 헤젤이라고 불릴 때가 많아서 잊고 있었지만 말야. 일종의 직위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세이의 얼굴은 그야 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난 모르는 일이에요. 이해 안가요. 이런 거 말야. 헐.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주제에 나를 힘겹게 말똥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인석아. 잠이나 자!" 세이는 오늘 좋은 경험을 했다. 어디 가서 그냥 몰매를 쓰러지도록 맞는다는 것은 정말 돈주고도 하기 힘든 것이다. 사실 마법사는 그 엄청난 수련 때문에 육체를 수양할 시간이 없다. 난 언제 했냐고? 그건 아무에게나 알려주는 게 아니다. 후후후. 하여간, 세이도 오늘은 심신을 단련해야 할 필요를 느꼈겠지. 아니면 위대한 검사를 친구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을 것이다. 세이 녀석은 사실 마법력이 결코 약하지 않다. 아까 얼빵한 후드맨이 말했지만, 내 제자가 그렇게 멍청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세이 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사람과의 대전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결코 약해서 당한 게 아니라 경험 부족이라 이거지. 앞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최고의 마법사는 힘들더라도 좀 훈련을 시켜서 단련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렇게 자신의 여행동기를 합당화 시키는 중이다. "근데 앞으로 어디로 갈 생각이냐?" "모르겠는데요?" 곧이어 나의 제자의 머리에서는 경쾌한 타격음이 들렸다. "팍!" "왜 때려요!" 난 세이를 노려보았다. "바보녀석아, 귀족어르신에게 너는 몰라요, 그러냐? 이거 완전히 악당과 바보 부하의 대화 같잖아!" 사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것도 재미는 있겠어.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나는 속이 정말로 끓어올랐다. 이 녀석에게는 마법하나 익히게 하는 것보다 귀족의 우와한 말투를 익히게 하는 것이 백 배나 힘들었다. "그렇지만 다짜고짜, '공작님, 저는 잘 모르옵니다.' 이런 소리가 튀어나올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왠 공작이에요! 그냥 평범한 남작이나 자작 하다못해 백작도 많은데, 하필 공작이에요!" 녀석의 반항은 계속된다. "게다가 공작은 왕자와 대등한 위치로 후작보다 높고, 선왕의 형제들에게 주어지는 거래면서요! 그런 대단한 사람 흉내를 어떻게 내실려고 그러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작에게 하는 신하(하인과 같지만, 일부러 신경 끄고 있는 듯 하다. 이것도 다 나와 지내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겠지.)의 말투는 왜이리 어렵고, 제가 왜 귀족 체계나, 심지어는 왕실의 존칭까지 외어야 하냐 구요!" 말 한번 더럽게 빨리 하네. 그 속도로 주문을 외우면 너 지금쯤 성공했겠다. "세이야, 기왕 귀족 흉내를 내기로 했으면 그럴싸하게 내야되는 거 아니냐? 게다가, 내가 알기로 아직 내 영지도 있던데? 그럼 흉내낼 만도 하잖아." 세이는 그러나 더욱 화가 났다. "그렇죠. 그게 이른바 피의 공작이라 불리는 전쟁의 화신이라는 위대한 왕의 측근, 피스트레이카 공작이라는 게 문제죠. 확실히 성도 같구요. 아들이라고 우기기라도 할 생각이에요? 제가 들었을 정도면 굉장히 유명한 사람인데!" 난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거 괜찮은 생각이다. 머리 좋구나 세이. 확실히 좋은 생각이야. 허허허." "그 허허허 웃음도 그만 두시라구요, 겉모습은 나보다 어려 보이면서 왠 허허허 웃음 이냐구요! 당치 않은 소리 그만 두시라고요!" "해보기 전에는 모르잖아. 어서 가자, 피스트레이카 영지로. 후후후. 재미있을 꺼 같지 않냐?" 세이는 스승을 아주 원망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래봐야, 니가 무슨 힘있냐? 헤헤헤 여하간 우리는 곧바로 짐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공작의 영지로 말이다. 2. 공작의 영지. 세이 이 녀석은 여전히 불만이 많았고 나는 이 녀석을 투덜이 라고 불러야 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정도였다. 여하간 이 녀석은 장래의 꿈이 마법사인 만큼 틈틈히 나에게 마법도 배우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 녀석의 마법재능이라는 것이 매우 한심하다. 과거의 나에 비하면 구제불능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듯한 실력이다. "인석아! 너는 이것도 못하냐? 앙?" 나는 녀석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여행은 비교적 지루한 편이고 해서 한마디로 심심했던 것이다. "전. 너무해요." 요즘 녀석이 잘하는 단골 대사다...욱. 저렇게 처량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중얼 중얼. "뭐가 말야?" "사부님은 그런 식으로 절 구박하는 게 재미있는 거죠!" 사실 그렇기는 하지. "아니야. 네가 워낙 한심해서 그러잖냐? 이제 한 달이면 18살인데 말야." 제자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부님은 고작해야 16으로 보인다구요." 나의 약점이다. "할 수 없잖냐? 그보다, 너는 공작에 대해 들은 거 있으면 좀 말해봐라."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우히히. "저도 그렇게 자세히는 모르지만, 엄청난 놈이래요. 뭐가 뭔지는 몰라도 전투나 싸움에 있어서는 거의 따라올 사람이 없대요. 그리고 그 엄청나게 잘생긴 외모로 하여금 많은 소녀들의 가슴을 불타게 한다나 어쩐다나? 그리고 성격은 극도록 피폐해서, 정말 곁에 가면 찬바람이 쌩쌩 분대요. 그 뿐이 아니라, 명리에 초연해서 인지, 성격이 더러워서 인지는 몰라도 왕과의 사이는 극도로 안 좋대요. 우습죠?"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를 우습다고 들어줘야 하다니.. 내 신세야. 이거 완전히 바보 되겠다. "그래서, 넌 그 공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냐?" "제 말은 즉, 숨겨둔 자식 같은 것은 절대로 없을 거라는 거죠. 차라리 헤어졌던 먼 친척이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네 머리에서 나오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넌 그런 냉혹한 녀석이 친척이랍시고 나타난 사람을 그냥 가만히 두겠냐? 이런 바보." 제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꽤 영리한 녀석인데 말야... "그렇다면 차라리 고용해달라는 것은 어떨까요? 일단은 마법사이니까." 이건 좀 그럴듯하긴 하네. "하긴 내가 좀 위대한 마법사지. 허허허." "...그만 두죠. 어린애를 누가 써요?" "이 자식이!" 난 그래도 그럭저럭 재미는 있었다. 사실 뭐 뚜렷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녀석 집은 어디 있는 지도 모르고.. 가만? 집? "야, 세이. 네 집은 어디냐?" "하하하, 열살 짜리가 얼마나 기억력이 좋겠어요? 그냥 주변의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밖에는 기억 안나요." 정말 바보였구나. 하지만, 그렇다면 부모 입장에서 보면 난 완전히 납치범 아냐? "그럼 기억날 때까지 여행이나 다니자. 어떠냐? 그리고 일단은 그 공작의 영지도 가보고.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랜 옛날에 거긴 진짜 내 영지였거든.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겠지. 안 그러냐?" 난 제자와 그렇게 공작의 영지로 향하게 되었다. 으하하. 피스트레이카는 공작의 영지인 만큼 엄청나게 크다. 일단 4개의 주된 령으로 되어있고, 소속 관리가 다스리게 되어있다. 공작은 수도로 가는 일이 많고 더군다나 현 공작은 전투로 인해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관리들이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긴 경치도 좋네요. 아름답기도 하구요. 정말 저희 오두막이 있던 곳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데요?" "이곳은 바로 전 대륙을 털어서 가장 아름다운 영지들 중 하나다. 사실 이쁘기는 하지. 그치만. 여름 되면 홍수걱정 해야되고 겨울에는 눈도 엄청나게 쏟아 붇는 다고. 난 이곳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제자는 나를 물끄러머니 쳐다보았다. "근데 왜 그렇게 그리운 얼굴을 해요. 쳇. 거짓말." 제자녀석 눈치하난 더럽게 빠르군. 이곳은 나의 고향이고 내가 직접 다스리던 영토였다. 그러니 그리운 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보다는 보고 그 아름다움을 감탄하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으하하. 난 사실 젊은 시절에는 세계평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 "스승님, 그럼 우린 그냥 구경만 조용히 다니도록 해요. 알았죠?" "그러지 뭐. 할 일도 별로 없지 않느냐? 허허허." "또.. 허허허 웃음인가요?" 세이 녀석과 내가 다시 웃음문제로 즐거운 토론을 하려는 찰라, 먼지를 사방에 날려 공해문제를 심각하게 하는 녀석들이 다가 오고 있었다. "멈춰라!" 분명, 우리보고 한 말이었다. "?" "스승님, 왜 우리를 서라고 하는 걸까요?" 내가 아냐! 화려한 은빛의 갑옷, 그리고 그 아름다운 청색의 마법 문양,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고 일컬어지는 바르하잔의 빛. 피스트레이카의 최고 기사단이었다. 음. 역시 배경 설명은 힘들어. 그건 그렇고 왜 우리를? 설마... 내가 최고의 마법사라는 것을 눈치챘나?? "거기 멈춰라!" 당연히 소년 이 인조는 멈출 수밖에. "무슨 일이시죠?" 세이가 일단은 나이가 나보다 많아 보이므로 말을 걸었다. "혹시, 이 근처에서 은발의, 그래 이 소년과 비슷한 은발의 소녀를 보지 못했는가?" 기사는 괴상한 말을 물었다. 은발이 그렇게 흔하나? 게다가 소녀라니, 좀...이상한데? 뭐가? 하여튼. "아무도 못 봤는 데요...?" "그래? 음... 이봐, 일단은 이 소년이라도 데려간다!" "예? 안돼요! 어디를 데려가겠다는 거에요!" 세이가 발광을 시작했다. 걱정마라. 이번엔 노예로 가는 건 아닌 거 같으니까. "이렇게 어린애를 어딜 데려간다는 거에요?" "이봐, 그 애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는 마. 단지 의식에 필요한 사람이 없어져서 그래. 알겠어? 우린 바르하잔의 기사단이다. 반항 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세이. 그냥 따라가자. 죽고 싶지 않지?" "응?" 기사단은 이내 우릴 말에 싣고 피스트레이카의 성도로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난 매달린 상태라 기분이 가히 좋지 않았다. '저기 좀 천천히 달릴 수는 없는 거냐고! 으엑...' 공작의 저택. 아니 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저곳은 원래 어느 나라의 성이었던 것을 빼앗아서 공작의 성으로 개조했던 것이다. 물론 왕이 없는 성은 왕궁이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리고 나와 세이는... 감옥에 들어가 있다. "저기.. 스승님, 우리 왜 감옥에 갇혀 있는 거지요?" "조용히 해. 곧 뭔가 일어날 테니까. 사실 이런 구경은 돈주고도 못한다고." "으엥. 무슨 소리에요?" "꼬만, 몰라도 돼." 세이는 감옥의 구석에 쳐박혀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재미있을 텐데. 난 별수 없이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야. 세이야, 왜 은발을 잡는 건 줄 알아?" "몰라요. 훌쩍." "이 나라 공작도 은발이야. 대대로. 근데, 사실 여기에는 전설이 하나 있는데, 그 전설에 따르면 공작은 신의 축복으로 은발이 되었지. 그런데." 세이는 이제 신기한 전설이야기를 듣는다는 기대에 눈이 초롱초롱 해졌다. "근데 뭐요?" "너는 신의 축복이라는 은발이 더 있다는 것을 공작이 용서하겠어?" 세이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상관없잖아요?" "뭐, 하여튼, 역대의 공작들은 그렇지가 않았지. 그래서 공작의 적통 핏줄을 가진 자만이 잡을 수 있다는 검을 은발의 죄인들에게 잡게 했지." "그..그렇구나. 근데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죠?" "죽어." 세이는 곧 조용해졌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엉.. 엉.. .스승님. 그 동안 고마웠어요." 나는 이 바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말 내달이면 18되는 거냐? 얼마 후에 기사단 녀석들이 왔다. "이봐, 나와!" 나는 당연히 끌려나갔다. 공작의 저택에는 무수하게 많은 기사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칭 공작의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여자아이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은발. 그래서 은발이되 공작의 계승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 지를 나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다나 뭐래나..하여간. 그나저나 난 이런 거 싫어하는 데 말야. 하여간 역대로 공작들 중에 제 정신 인 놈들은 없었지. 나만 빼고. 우히히. 아니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역시 정신이 제대로 라고는 보기 어려운 거야. 그렇다면... "지금 여기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소녀 이슈린양이 등장합니다." 곧 한 쪽 계단에서 어여쁜 은발의 소녀가 나타났다. 세이가 중얼거렸다. "예쁘기는 한데, 스승님 머리색이 훠~월씬 예뻐요." 당연하지. 후후후. "그리고 피스트레이카 공작 전하이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요." 중앙에서 내려오는 은발의 청년은 약간 권태롭다는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피의 공작이자 적군에게는 공포고, 왕에게도 위협적인 사내였다. "공작 각하 만세!" 역시 세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이 자식의 수다는 도대체 누굴 닮은 걸까? "닮은 걸로 치자면 공작쪽이 훨씬 스승님을 닮았는데요?" "아 됐어. 그나저나 이번의 멍청한 아가씨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계승권을 주장하시나?" 성격한번 죽이는군. "피스트레이카 공작! 나는 바로 저 먼 옛날의 위대한 공작 프라오니스 드발리제 세론 피스트리에카의 후손입니다." 이번에 나는 멋지게 마시던 냉수를 뿜어버렸다. "푸-웃!" 주변의 기사단의 눈총이 느껴졌지만...세이도 엄청 놀랐는지 눈을 똥그랗게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거 스승님의 가명이잖아요!" "시끄러." 음... 뭔가... 난 여자라고는 오직 그 엘프 처녀 밖에는... 하지만 저 소녀는 아무리 봐도 엘프와 혼혈로는 보이지 않는다구.. "재미있군. 그대는 그렇다면 당연히 성검을 잡을 수 있겠지? 어떤 자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위대한 그 공작만을 기다려온 그 검을 말야." 공작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쳐졌다. 불길해. "그렇다!" "성검 가져와. 자신 없다면 딴 애송이를 시켜서 공포를 맛보게 해주지. 어때? 크크큿." 곧이어, 병사들에 의해 아름다운 검 하나가 홀에 등장했다. 그 검은 주변의 공기를 아름답게 받으며 마치 신의 기적처럼 찬란한 무지개 빛을 뿌렸다. 그리고 내가 호명되었다. "거기, 소년. 이 검을 잡아서 살아난다면 살려주지." 날 보면서 그 공작은 비웃었다. 난 차가운 눈을 했다. 근 오십 년간 그런 표정을 지은 일은 없었다. "어리석군. 이런 광대노름이나 하고.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지?" 대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작은 재미있는 얼굴을 했다. "꼬마 주제에, 우리 영지에서 은발은 다 죽는다는 것을 몰랐나?" "그런 법이 있는지 몰랐지. 어리석은 나하르의 자식이여. 넌 이 검을 잡지 못할 테지.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는 건가?" 좌중이 조용해 졌다. "쫑알 쫑알 떠드는군. 꼬마. 어떻게 죽고 싶은 거냐? 앙?" 그의 은발에선 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죽이는 거라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세이는 역시 안절부절 해가면서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죽는 거라면 여기선 싫어요." 그 은발의 소녀도 나를 비웃어주었다. "이거, 참. 다른 날 올걸 그랬나요? 당신도 공작의 핏줄을 이었다는 증거가 있나요? 후후후. 나는 이 백색의 휘장이 있는데." 이번엔 그 은발의 귀공자, 공작은 깜짝 놀랐다. 오늘 여러 모로 놀라는 군. "그건..!" 나는 그 휘장을 응시했다.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물건이었다. "사부님 저게 뭐예요?" "모르겠는데..." 그 소녀는 이번에 나를 비웃기 시작하였다.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하는 사람 이로군요. 어서 도망이나 가시죠. 후후후. 이제 당신이 설 자리는 없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그렇게 죄가 되는 지는 몰랐는데? 그리고 나는 한번도 공작의 후손이라고 한 적이 없어. 핏줄 어쩌고 한 적도 없는. 한마디로 여행자야." 이번에는 한 기사가 나를 제지했다. "이봐, 꼬마야, 말투가 너무 건방지다." 나는 그 백색의 휘장이 무언지 궁금했다. 뭘까? 뭘까? "정말 당신이 공작의 후예라면 저 검을 집어보시오." 공작은 내뱉듯이 말했다. 말투가 상당히 부드러워진 것을 보면 상당부분 그 소녀를 인정하는 듯 했다. 소녀가 다시 말했다. "먼저, 공작님의 시범을 보고 싶군요." 소녀의 아름답고 깔끔한 얼굴에는 사악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그 악의의 미소는 공작을 향하고 있었다. 공작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을 한번 바라보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공작은 검에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느렸고 그의 호흡은 반대로 점차 빨라졌고, 소녀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어서 뽑아 보시죠." "사부님. 저 공작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 같아요. 왜 그렇죠?" 나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공작에게 다가갔다. 방의 분위기가 온통 공작에게 집중되어 아무도 나의 일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두지 그러나. 자넨 그 검을 만지는 순간 죽어. 약속의 이행에 따라. 알면서 죽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지." 나는 공작의 굳은 팔을 만졌다. 검은색 빌로드 천의 느낌이 손끝을 자극했다. 공작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놀랄 것 없네. 진정한 공작의 후예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지. 난 예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고. 그리고 자네의 염려와는 달리 저 소녀도 공작의 후예는 아냐. 내가 볼 땐, 북방의 도시에서 온 듯 하이. 그렇지 않은가?" 은발의 소녀는 나를 응시했다. 얼굴은 약간 굳어있었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넌 누구지? 왜 다된 밥에 재를 뿌리나?" 어디 밥했나? 나 좀 줘봐라. 배고파. "난 그냥 여행자. 이곳의 경치를 구경하러 왔었을 뿐이야. 그리고..." 검을 지긋히 바라보았다. 검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검의 떨림과 공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검의 물소리. "아니. 아니야. 그보다 자네는 누구의 명령으로 공작을 죽이려 했었나?" 그제서야 공작은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흥. 가짜는 사라지는 것이 좋지. 애초에 폐하가 약속했던 작위는 너의 것이 아니니까, 그 공작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의 모든 것은 다시 폐하께 가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나는 소녀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폐하의 이른바 사절단이셨군요. 몰라 뵈었습니다. 아주 어린 소녀가 힘드셨겠군요." 나의 말에 공작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보았고, 소녀는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수상하군. 내가 사절단이라는 사실까지 알다니.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듯 한데?" 소녀는 이제 안색이 거의 굳어질 대로 굳어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심각할 대로 심각해져있었다. "그게 무슨 조직이던 나에겐 중요한 일은 아니지. 폐하께서 나를 처단하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이런 방법을 썼나?" 공작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이게 세이가 말한 바르하잔의 빛의 그 정점에 서 있는 자의 얼굴이었다. "폐하께선 너 같은 무관은 처참하게 죽을 수록 좋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지." "그럼 넌 이제 너의 정체가 탄로 났는데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보는가?" 공작은 검을 빼어들었고, 기사들도 검을 들고 준비했다. "공작. 너무 어리석군. 내가 이렇듯 술술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나? 내가 너희들 같은 조무래기 몇은 그냥 황천으로 보낼 수 있다고." 소녀의 입가엔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난 그러나 궁금한 건 못 참는다. "음.. 근데, 그 휘장이 뭐냐고?" 일동의 시선이 나에게 모여졌다. 이거 쑥쓰럽네. "정말 웃기는 여행자 나리로군. 이 휘장은 프라오니스 드발리제 세론 피스트리에카의 유품이야. 이런 것도 모르다니. 정말 한심하군." 유품? 누가 죽어야 생기는 그거? "잠깐, 싸우는 건 나중에 해도 상관없잖아. 유품이라니, 그가 죽기라도 했단 말야!" 소녀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공작의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졌다. "전설에는 다시 그의 영지로 돌아갔다고 되어있지만, 내가 공작의 후손이 아닌 것처럼 사실은 전사하셨다. 살아있다면 120세쯤이 되었겠지. 사악한 마왕과 싸우곤 전사하셨다고 알고 있다." 난 어이가 없어졌다. "이봐...아니야. 이런 건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해. 음." 난 혼자서 중얼거리면 검의 앞에 섰다. 다시 검의 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려왔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였던 나의 친구. 나는 나의 친구를 끄집어 올렸다. 검은 서서히 내 손에서 찬연히 빛나기 시작했다. 눈이 부시지 않은 그 신비한 빛을 뿌리면서 주위를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검 날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멀쩡하군. 좋아. 사실 그 공작 죽지 않았거든." 일동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각자의 눈동자를 두 배쯤 확대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멀쩡하게 빛나는 나의 검도 보면서 놀라는 듯 했다. 세이 녀석의 눈동자는 아마 그 누구보다도 거대했으리라. 세이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가명이 아니었군요!" 세이 녀석도 바보는 아니니 내 나이가 백 이십 세. 공작도 백 이십 세. 그리고 저 검을 잡는 건 오직 공작의 후예 뿐 이라는 것을 아니까, 별달리 설명해주지 않아도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말을 모두 듣지 못했다. "이거, 너무 빛나는데. 음." 나는 검을 다시 석실에 박아 넣었다. 내가 손을 떼자 빛은 씻은듯이 사라져버렸다. "당신이 진정 공작의 후손이십니까?" 정확히는 공. 작. 이다. 하지만 나는 오류를 바로 잡아 더 귀찮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공작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난 그에게 다시 말해주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말야. 난 공작을 할 생각이 없어. 그냥 너가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다시 전쟁이나 사무를 보기는 싫다 이 말이야. 하지만, 넌 언젠가 너가 죽인 무고한 사람들의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절단의 백의 아가씨." 그 은발의 소녀는 화들짝 놀라는 듯했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 사절단에서의 내 이름을?"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다음에 다시 음모를 꾸미든 어쩌든 알아서 하라고. 난 공작 따윈 하고 싶지 않고. 이미 이건 나의 영토라고 볼 수 없는 거야. 무슨 소린지 아나?" 먹을 것도 안 생기는 데다가 사람들이 왠 요구하는 게 그렇게 많은지. 쳇. "모르지요. 그보다, 당신은 정말 누구죠? 아직 어린 나이로 나의 정체를 알고 저 검의 주인이라니." 소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이 진정 공작가의 후예라면 내가 공작을 해야 할 이유가 없소." 공작도 주절거렸다. "난 원래가, 이런 일은 싫다. 이해 못해도 할 수 없지. 하지만 이 검은 이제 내가 회수해야 하겠다. 너무 많은 시간을 홀로 지내게 하였으니." 난 검을 바라보았다. 이 때 세이의 말이 들려왔다. "아... 그래도 당분간은 여기 있어요. 네? 사부님. 전 다시 노숙과 야영을 반복하기는 싫다구요. 네?" 세이는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무시.. "백의 아가씨. 내가 당신을 아는 것은 대대로 사절단의 둘째인 백의 자리는 백색의 아가씨가 하는 거라서 알고 있기에, 짐작으로 말한 것 뿐이요. 뭐, 내가 궁정의 기밀에 정통한 건 아니라고." 흐흐흐. 나의 미소를 보는 순간 소녀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좋아. 어찌 되었던 상관은 없겠지. 내가 널 살려 둘 것 같은가? 공작의 후예여." 백의의 소녀는 차가운 미소를 흘리면서 유백색의 단검을 꺼냈다.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가씨가 아까 도망갈 자신이 없으면 왜 왔겠냐고 물었지? 그 말을 그 대로 전해주지. 꼬마야." 나의 입에서는 고대의 주문이 흘러나왔다. 뭐 정신집중도구가 없기는 하지만, 워낙에 실력이 큰 차이를 보이니까. -슈엘. 리즈. 카네.- "그....런! 넌 마법사!" -속박의 인.- "으 악!" 소녀는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메~롱." 모두의 얼빵한 얼굴이 지나갔다. 그 소녀는 내가 급조한 마법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나는 공작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정말 공작의 후손이시라면 어서 공작을 맡도록 하시죠." 난처한데... 나의 이런 난처함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애제자의 수다가 들려온다. "사부님, 사부님. 그건 무슨 주문이에요? 전 그런 거 안 배웠다구요! 제가 평소에 외우는 건 엄청나게 길고 긴 주문인데 말이죠. 네? 사부님!" 아이구... 시끄러 왜 둘 다 떠드는 거냐! "일단, 공작. 나는 공작 짓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어. 이곳에도 단지 구경왔는데 잡혀서 이곳에 온 것 뿐이라구. 그리고 자네가 공작을 해도 괜찮아. 사실 원래 자네의 가문에게 공작의 자리를 인계했거든.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그리고 세이야. 그건 언령 마법이라는 건데. 너는 택도없다! 너처럼 기본 마법도 흔들리는 놈이 무슨 수로 최고난이도의 마법을 쓰냐. 앙?" 나의 이 엄청난 연설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만족하지 못하였다. "절대로 제가 있는 한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나갑니다." 이봐. 내가 그렇게 좋냐? "에휴. 그럼 절충안을 내 놓을 께. 그건 어때?" "스승님! 절충안이 뭔지 몰라도 주식은 해결해야지요!" 이봐. 넌 뭐가 그렇게 좋니? 앙? "절충안이라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공작은 본인의 짧은 은발을 젖히면서 말했다. 짜식, 더럽게 잘생겼군. 좋겠다. 누구는. "그러니까, 나는 일선에서 물러나시겠다. 이거지. 사실 이제는 이것저것 싫거든." 그리고 나는 회한에 젖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흐흐. "근데,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당신이 더 어려 보이는 데 왜 스승이 되지요? 그리고 대 마도사와 정확하게 무슨 관계입니까? 손자입니까?" 궁금한 게 많은 거 같군. "스승님은 울트라 캡숑 나이가 많아요!" 세이.. 세이. "야, 세이야. 조용히 하거라." "네... 괜히 나만 가지고 그래." 너만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 성격이 원래 이런 것을 어쩌겠느냐? "흐흠. 사실 제가 겉보기엔 차밍한 나이로 보이지만, 사실은 제가 바로 그 대마도사 입니다. 라플 헤제... 라는.. 정확한 별칭을 외기는 힘드니 멋대로 생각하시죠." 이젠 놀랐겠지. 허허허. "농담하지 마시고. 알겠습니다. 손자분이시군요. 그럼 지금은 나이가 아직 어리니 제가 계약에 따라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그럼 맡겨만 주십시요!" 이거... 참, 뭔가 잘못된 거 같지. "그나저나, 요즘 정세는 어때?" 화제를 돌려서 근래의 정치상황에 대해 물었다. "국왕 폐하의 권한이 사실상 매우 축소되었습니다. 왕비 안느 비의 친정인 후토슬레이즈의 힘이 더욱 강대해졌죠. 그리고, 불패의 기사단 아젠 기사단의 당주가 실종 되었습니다. 아마도 반파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그 외에는 외국의 강대국 나바스의 군대가 더욱 확충되었고, 국경에 있는 이즈프의 요새에 나바스 3대 기사단의 하나인 푸른 기병단이 주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 황제가 옹립된 사건도 있지요. 그 외에는.." 너무 길다. "마도의 동향은 어때?" 내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힘쓰던 시절 가장 피곤했던 게 마도의 마왕을 해치우는 일이었다. 알기나 하니? "예. 마도에서는 나바스 측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듯 합니다. 강대한 군사력과 금전력이 탐나는 것이겠죠. 그리고 근래 신경 쓰이는 나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건 또 어떤 인간이 세운 나라래니? "그 곳의 지도자가 놀랍게도 절대 마법 무위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법을 잘 쓴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대를 거듭할 수 록 그 힘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마법사가 어느 정도 강력해지면 마법에 대한 저항능력을 보유하게 되지만, 하지만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법무위 능력! 그게 사실이라면!" "짐작하시는 대로 마도와의 개입도 조사했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도는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스승님, 절대마법 무위 능력이 왜 마도에서 주시해야 해요? 그리고 마도가 뭐예요?" 너... 내가 가르쳐 줄 때 졸았냐? 난 제자의 멍청함을 내 탓으로 돌리면서 다시 성심 성의껏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까, 마도는 마왕이 지배하는 곳으로, 이른바 마족의 천국이다. 그리고 지금은 마왕이 봉인되어서 현재는 마도 공작이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절대 마법 무위 능력이라는 것은, 모든 마법이 듣지 않지만, 본인은 쓰는 데 있어서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탐나는 능력이지. 그리고 열심히 마법을 익히면 절대 마법봉인을 풀 수 도 있다." "풀어서 뭐해요?" 넌 그러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마왕의 봉인이 풀리게 되겠죠. 그러면, 세상은 다시금 혼란에 뒤덮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과연, 공작 노릇도 할 만 하다. 그러니 너 계속해라. "맞다. 그러니까, 그건 매우 위험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 세이는 그제서야 이해한 듯 했다. "그렇다면 별 문제는 없군. 사실 국내 정세야 자네가 더 잘 할 수 있을 거 아닌가?" "스승님... 제발 조금이라도 어린이 말투를 애용해 주시지요."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정통성을 확보한 사람이 낫죠." 그게 아니겠지. "자네, 사실은 그게 아니지 않나? 앞으로 사절단이 실패했으니, 앞으로 다른 자객을 보낼 수 있다는 그것 아닌가? 심하면, 나바스 같은 나라에 부탁해서 처리하려고 할 수 있으니까. 안 그런가?" 어때? 정곡을 찔렀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요. 제가 현실적인 공작을 할 테니, 부탁입니다. 제가 혹여 목숨을 잃게 되면, 공작가를 부탁 드리죠." 꼭 그렇게 비장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구. "스승님! 나빠요! 사람을 그런 식으로 내몰다니!" 이봐.... 제자야, 넌... 사람이 너무 좋다. "자네가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일에 나는 끼고 싶지 않네." 당연하지. 이제 와서 내가 왜 쓰잘 데 없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데? "스승님. 우린 갈 데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여기 있어요. 네?" 너... 집잃은 강아지냐? "앙... 스승님. 앞으로 제가 맛난 요리 해드릴께요~ 참, 스승님이 젤루 좋아하는 연어 스테이크 해드리죠. 뭐, 어려울 꺼 있나요?" "뼈 없는 걸로." "네~" 이렇게 나랑 세이는 왕국에 남게 되었다. 난 요리에 너무 약해. 하지만, 그 연어의 부드러운 살이 입안에 향긋하게 퍼지면... 아... 어떡해.. .먹고 싶어. "사부님!" 저 제자 녀석에게 나는 너무 약하단 말야... 하기사, 손자에게 혼내는 할아버지 봤냐? "왜?" "저기요! 공작님이, 글쎄. 그러니까." 말을 해라. "저한테 검을 가르쳐 주신데요!" 검의 종류 같은 거 말야? 그런 거라면 나도 잘 알지.. 검에는 대검, 중검, 소검, 단검이 있다. 뭐, 이런거 아냐? 할버드 같은 것은 절대루 검이 아니다. 도끼류에 속한다. 랜서도 아니다. 그건 창이다. "그래서?" "너무 기쁘잖아요!" 마법이나 잘 해보지 그래...? 뭐, 하겠다는 데 말릴 내가 아니다. 검이 그렇게 하루 이틀에 잘 될꺼 같으면 진작 가르쳤겠다. 이 바보야. "그래. 열심히 해보렴. 마법사에게도 체력은 중요하니까 말야." "스승님도 하실래요?" 난, 무척 검을 잘 다룬다고 보는데. "난 글이나 읽는 편이 좋다. 그럼 가봐라. 열심히 하도록 해라." "예이~." 아주 뺨이 붉게 물든 거 하고는... 쯔.. 창을 바라보니 녀석이 좋아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인다. 주변에는 바르하잔의 기사단이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한심한 녀석. 최고의 기사단에서 저런 조잡한 행동을 하면 우스개 소리가 되는 것을 모르나.. 그러나, 잘못은 스스로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 뭐, 개중에 나쁜 놈만 있는 것은 아닐테니.. 케잔이라는 아주 작은 나라와 교전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기강이 삼엄한 편이다. 나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마는. "실례합니다. 손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요?" 하얀 레이스 치마를 두른 하녀의 모습이 내 눈에 비춰졌다. 그러고 보니, 반짝이는 금발하며, 누구랑 참 많이 닮았다. 나의 고지식하고, 똑똑한 엘프..나의 엘프. "아니, 아무 것도. 그만 가보시죠." 나는 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본 것은 더 먼 곳의 풍경이다. 이 곳의 계절은 아직 여름이다. 늦여름. 아무래도 남쪽이니 계절이 늦다. 먼 평야에는 푸른 물결이 일고 있었다. 곧 금색으로 일렁거리리라. 그리하면, 엘프들도 집으로 돌아간다. 엘프는 추위에 약한 편이라, 겨울은 숲에서 보낸다. "야, 어디서 저런 미소녀가 생겼어?" "얘는, 남자애야." 신나게 떠드는 군. "어머머! 믿기 어렵다. 같이 있던 그 애는 형이니?" "전혀 안 닮았잖아. 그 쪽은 크면 남자다울 꺼 같지?" "그렇지. 참, 공작님의 양자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뭔가... 이야기가.. 내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수근거림이 멈췄다. 노인네라고 해서 귀가 다 어두운 것은 아니란 말이다! "얘! 돌아봤어!" 에휴... 역시 어린 처자들은. 그럭저럭 성에서 한 삼일을 보냈다. 예상대로 세이는 요즘 어깨가 축 늘어져 다닌다. 스승된 도리로 응원이나, 위로를 해줘야겠지? "세이야. 연어 스테이크는 언제 해줄래?" 세이는 금새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 되었다. 불쌍한 놈. "스승님. 전 요리 밖에 소질이 없나봐요." 이봐... 그렇게 까지 할 껀 없다구. 그래도, 넌 요리뿐만 아니라, 청소도 기가 막히게 해낸다고! "알아요. 전 무능하죠. 그래도. 힘내서 살려고 했는데.." 이봐... 세이. "그래서, 부모한테도 버림받은 것이겠죠. 흑..." 야. 울지 말라고! 젠장, 연어요리는 언제 먹어보냐. 일단 달래고 보자. "세이야." "무능한 제자를 두게 해서 죄송해요." "넌 원래 내 제자로 들어오면서 마법사가 된 거야. 맞지?" "네.. 흑.." 콧물이나 닦아라. "그러니까, 검술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그리고 넌 그렇게 못하는 거 아니라고. 사실 따지고 보면 네 나이 또래 치고는 잘하는 거야. 그러니 실망 할 껀 없다고." 세이는 고개를 내려 나를 내려보았다. 기분 더럽네.. "하지만, 스승님, 전 이기고 싶어요. 하다못해 견습 기사라도요." 제자의 소원이 너무 크구나! "음...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녀석, 금새 눈이 초롱해지는 구나. "스승님!" "어려 운 건 아니고 나한테 설명만 들으면 이길 수 있어. 요컨데, 넌 요령이 부족한 거니까." 나는 필살 승리 전략을 알려 주었다. 무지막지하게 강한 방법이지. 흐흐흐. "스승님, 너무 치사한 거 같은데 그래도 될까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헐. 오늘도 나는 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제자가 내가 시킨 대로만 하면 필승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과연? 나처럼 치사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예상대로 녀석의 얼굴을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날은 다시 밝고 다시 세이의 검술 공부가 시작되었다. 상대편에서 한 건장한 사내가 나왔다. 이건... 견습기사가 아니라, 완전히 전문 기사잖아? 뭐, 내가 가르쳐 준대로 하면 마법기사가 아닌 다음에는 걸리게 되어있으니까. 뭐. 마법기사가 어디 흔하냐? 이어 둘이 인사하고 파이팅 포즈에 들어갔다. 내가 보니, 세이 녀석 역시 내가 알려준 대로하기 시작했다. 주문을 외울 때,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그 특이한 마법력의 색을 볼 수 있다. 세이의 마법력 색은 예쁜 분홍색이다. 곧이어, 마법의 실현이 되었다. 덩치의 앞쪽, 그러니까, 세이의 뒤편에 절세의 미녀가 나타난 것이다. 헐. 예나 지금이나, 금녀의 규칙은 잘 지켜지고 있는지 실험이라 고나 할까. 허허허. "스승님. 좀 제대로 된 방법은 없나요?" "왜? 볼이 부었냐? 이겼으니 됐지. 안 그래?" 세이는 확실히 뿔이 났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겁했다구요." "야, 싸울 땐, 비겁이고 뭐고 없는거야. 바르하잔의 기사단은 실력은 최강인데, 왜 항상 아젠의 기사단을 만나면 깨지는 줄 알어?" "왜여?" "그건, 전략에 문제야. 싸울 땐, 전략이고 뭐고 없어. 알겠어? 전쟁에선 정직한 놈이 지는 거야." 하지만, 너한테는 무리겠지. 아직 어리니까. 후후후. "감동적이군요. 과연, 대단하십니다." 재수 없는 시키... 저 자식은 공작의 심복으로 노예시장의 올빽 머리와 같은 머리를 하고 있다. 하는 말마다 느끼함이 느껴지는 걸 보면 그것도 재능이야. "뭐가 말인가?" "아직 어린 분이.. 그러고 보면 하인들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니군요. 전 사실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여러 가지 설이 있지. 양자설, 숨겨논 아들설, 애인설. 끝에 껀 좀 기분이 나빠. "무슨 이야기인줄 모르겠군. 할말없으면 나가주시지." 나는 나가라는 메세지를 열심히 보냈다. 용서 못하지. "이것 참, 서운하군요. 하지만, 정말 감동적인 대결이었습니다. 여자를 보고 놀란 틈을 타서 검으로 겨눠 버리시다니. 실전이었으면, 죽은목숨이죠." 이봐... 너 한테 그게 무슨 소용이냐? 세이는 나의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모를 리가 없지. 지도 마법사인데 나의 기를 못 느낀다면. "우리 나라에는 마법사가 많은 편이지만, 환영 술사는 흔치 않죠. 굉장한 분입니다. 근데 두 분이 형제입니까?" 웃겨... 제자와 스승! 보면 모르냐? 아, 모를 수도 있군. "너한테 일일이 대답할 의무는 없겠지. 안 그래?" 반말. "이것 참. 절 너무 미워하시는 군요. 그럼 안녕히 계시구요. 하하하. 그럼 이만." 재수 없다! "야, 세이." "소금 뿌리라구요? 알았어요." 역시 내 애 제자다! "스승님이 처음에 싫어하실 때는 그냥 그러시려니 했는데, 정말, 이틀만에 정 떨어지는 사람이네요. 느끼하고, 능글맞고, 느글거리고, 능지처참해도 시원찮은 ..." 야, 그건 좀 심하다. "스승님, 그보다 진짜, 제가 그 기사에게 정식으로 대결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무슨 정식시합을 할 수준이 되기나 하냐 너가? "모든 일에 속성이란 없는 거야. 그저 열심히 일하고 배우는 게 최고다." "그래도 이기고 싶어요." 젠장.. 제자의 얼굴을 보니 거절도 못하겠구. 난 너무 물러서 탈이지. "송아지 안심." "우... 할 수 없죠. 그렇게 할 께요." 끼요~! "좋아. 넌 마법사야. 맞지?" "네." "그렇다면 이점을 살려야지. 원래 검사도 아닌 게 검으로 굳이 이길 필요는 없는 거야. 안 그래?" "네..." 그래도 검으로 이기고 싶은 건가? "당연히, 너는 기본기를 익힐 시간도 뭣도 없었지. 안 그래?" "네.." 얼굴이 어둡구만. 귀여운 것. "그럴 경우 상대보다 월등한 검술을 익히면 되는 거야. 뭐, 내가 볼 땐 고급 검술을 확실히 익힌 놈은 없는 거 같으니까." 녀석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인석아... 그러다 고개 빠져. "하지만, 주위에 검술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는 걸요? 자신의 검술은 굉장히 비밀로 하잖아요. 배우기도 까다롭고." 이봐, 내가 있잖아. "야, 마법사는 너 같은 놈이라도 머리는 무지 좋아야 해. 즉, 시간만 있으면 배울 수 있어. 그리고 전적으로 내가 그 대단한 검술을 아니까, 나한테 한시간 배우고 혼자 밤새서 연습하면 잘 할 수 있어. 실력이 커버되지. 단, 실력이 무지 많이 차이나는 아젠의 기사들이나, 바르하잔의 정규 멤버, 흰색의 기사에게는 개기지 마. 알겠어?" "네~~~" 녀석. 입이 째지는 구만. 나야 뭐, 송아지 고기 먹고, 잘됐지. 뭐. 후. 녀석, 마법사가 되기 싫은 건가? 다음날의 결투.. 아닌 대결에는 나도 나갔다. 예상대로 규칙과 정의를 중시하는 바르하잔의 기사단은 세이가 나가자마자 응원을 해댔다. "야, 꼬마! 그런 실력으로 여기 또 오냐? 여자나 만들지 그래?" "쳇, 재수가 없으려니까." 두고봐라.. 내 제자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다시 대련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아주 자진해서 그 덩치가 나왔다. "건방진 꼬마! 감히 공작님을 배후에 업고 간악하고 비열한 짓을 하다니. 없애 주마." 분위기 참, 좋다. "..." 세이는 날 바라보았다. 대신 싸워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밤샌 보람이 없지. "잘해봐라." 멀리 창 쪽에는 공작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뭐가 그리 심심하냐? 애들 경기나 보고. "뒈져라 꼬마 새끼!" 그런 험한 말을! 세이는 검을 들고 적당히 거리를 지키면서 녀석이 사정권에 들어오자 내가 가르쳐준 슈알렌 왕가의 검술로 반격을 시작했다. 녀석이 제법 총명해서 잘 할 거 같다. "..." 녀석, 싸움에는 기합이 중요한데 말야.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녀석의 검이 오른쪽으로 분산되는가 싶더니 다시 아래쪽을 노리기 시작했다. 슈알렌 왕가 검술의 특징은 화려함도 그만이지만, 그 실용적인 눈속임은 이루 말할 때가 없다. 아무래도 왕족이 쓰다 보니, 강한 암살자를 상대하는 실용적인 검술이 된 거겠지만 말야. 지금은 망한 나라지만 서도. "이런!" "야, 봤어! 금방 검이 사라졌어!" "사라진 게 아니고, 뒤로 빠진 거야!" 개중엔 좀 볼 줄 아는 놈도 있기는 하군. 아주 바보만 모아 놓은 건 아니었어. "젠장, 무슨 비전을 숨겨둘 줄은!" 반응이 꽤 괜찮네. 후후후. 덩치도 꽤 하는 실력인 듯 했다. 어제는 너무 허무하게 당했지. 허허허. 그러나 당혹한 표정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쫓기게 될 껄? "젠장!" 후. 열심히 해봐라. 세이의 검이 다시 그의 머리를 지나가면서 덩치의 머리가 약간 잘려 나갔다. 검 정말 잘 드네. 그리고 다시 쇄도하는 검을 이미 덩치는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단, 내가 주위를 준 것은 이렇다. 절대 검을 맞대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면, 세이 쪽이 힘이 없지. 부딪혔다가는 끝장이다. "내가 졌다." 앗, 어느새 상황 종료! 세이의 승! "아..." 멍충이. 이럴 땐, 뭐라고 해야지. "하지만, 이런 검술을 가지고도 그런 마법을 쓰다니, 날 놀리는 건가?" 으.. 화났잖아. "아.. 전... 그러니까.." 세이 녀석. 그럴 경우에 팍 쏴줘야지! "좋아. 나랑 싸워 보자!" 이번엔 흰색 휘장이 있는 이른바 정규 나이트가 나오셨다... 저 녀석. 비겁하군. 검배운지 이틀 된 놈한테. "아.. 난..." 세이야... 할 수 없군. 내가 나서야지. 야.. 비켜라.. 우.. "잠깐, 기다리시지요." "뭐야. 꼬마. 이번에 공작의 양자라는 녀석인가?" 이봐... 따지고 보면 공작이 나의 양손자쯤 된다고. 모르면 그저 조용히나 하라구. "뭔가 잘못 생각하시는 듯 해서 나왔습니다." 바람이 불고 나의 머리카락이 이 열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차갑게 휘날렸다. 멋지지? "뭘 말이냐? 공작의 손님이라고 해서 다를 껀 없어. 그리고 너처럼 어린애는 낄 데가 아니지." 정규기사는 심히 기분이 나쁜 듯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그의 종자 뻘도 안 되잖어.. "허허허. 진정하시지요. 기사님의 뜻,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허나, 원래 세이키르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것을 뭐라 하시지 않으시겠죠? 댁도 전쟁에 나가 봐서 아시겠지만, 어디 전쟁에서 정당한 방법으로만 이깁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 마법이 그리 비겁한 것도 아니죠. 단지, 세이키르는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 외에는. 안 그렇습니까?" 안 그럴 리가 없지. "그 점은 나도 인정한다. 꼬마. 하지만, 그런 검술을 숨기고 굳이 마법을 쓸 필요는 없지 않느냐?" 훗. "사실 그 검술도, 세이키르가 검술로 이기고 싶다기에 어제 배운 것입니다. 뭐, 탓하려면 가르쳐 준 저를 탓하시지요." 그 기사의 얼굴은 당혹과 기괴함이 어렸다. "말도 안돼. 너 같은 꼬마가. 무슨." 자꾸 꼬마 꼬마 할래! 약을 잘 못 먹어서 이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란 말이다! "좋습니다. 그럼 저랑 한판 해 보시겠습니까?" 세이가 나를 불안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염려 마라. 이 스승님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대 마도사 님이 아니시더냐? "좋아. 꼬마. 후회하지마." "저한테 지면, 어찌하시렵니까?" 그는 크게 웃고 말했다. "나, 백색의 기사, 자이츠는 네 종이 되겠다. 맹세하마. 후후후." "좋습니다. 제가 지면, 저도 그리 하죠." "그럼 널 꼬마 종자로 해야겠구나. 하하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자이츠와 나는 장소의 대각선으로 섰다. 응원석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은발의 공작과 그 수하도 나와 있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스승님! 잊지 않을께요!" 젠장.. .스승을 못 믿는 제자라니. "어머, 깜찍한 도련님, 기사님 한테서 열심히 도망다녀. 얼굴이 상하면 안 좋다구." "다쳐도 이 누나가 호~ 해줄께, 안심하고 싸워." 이런 쳐죽일 것들... "좋아. 꼬마, 먼저 덤벼라." 평소의 냉정한 나라면 아마도 그냥 선수를 양보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무지 열 받았단 말이다! 어떻게 당하는 지도 모르게 없애주지. 그러고 보니.. 난 공작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좋아. 결정했다. 공작가문 검술로 상대해 주지. "훗.." 나의 검은 빠르게 적의 옆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검이 맞부딪쳤다. "꼬마, 힘이 부칠텐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밀어 부쳤다. 그리고 그 오묘한 옆구리를 빼면서 몸을 뒤로 서서히 빼서 적에게서 가볍게 검을 옆을 꺽었다. 자이츠의 검은 나를 스쳐 뒤로 빠졌고, 나의 검은 그의 옷을 가르고 있었다. 물빛 소리가 들렸다. "햐얍!" 그리고 그의 흰색 후드가 찢어지고, 그의 몸 뒤로 돌아간 나는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정확히 그의 목숨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겼군. 안 그래?" 좌중은 조용해 졌다. 서서히 침묵으로 감돌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려서 검으로 내 검에 맞부딪쳤다. 그러자, 내 검과 그의 검이 맞부딪치면서 투명한 음이 났다. "어리석군." 나는 그의 검과 마주보면서 힘으로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행동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의 검은 서서히 아래도 밀리고 있었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그리고 나는 그의 몸을 발로 차버렸다. 검이 떨어져 나가고 그의 몸은 아래로 나뒹굴었다. "난 패배를 자인하지 않는 녀석만큼 싫은 녀석은 없다. 꺼져라. 넌 내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놈이다. 세이. 가자. 앞으로 검술은 내가 가르쳐 주마." 나는 화가 나서 몸을 획 돌려 버렸고, 쫄은 세이는 내 뒤를 쪼르르 달려왔다. 그날은 정말 기분 잡치는 하루였다. 세이는 내게 계속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서 거대한 식당에 세이, 나, 공작 이렇게 셋이서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이거 참, 송아지 고기네. 맛있겠다." 세이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기 스승님. 화 안 나셨어요?" 녀석.. 아직까지 내 눈치를 봤군. "세이야. 너 혹시 여자와 아이스크림의 관계를 아니?" "네? 둘 다 아름다운 것?" 으이구.. "안 예쁜 여자도 많어. 그런 게 아냐. 화난 여자에게 아이스크림을 앞에 가져다주면 어느새 여자는 화가 풀려. 왠 줄 알아?" "왤... 까요?" 넌..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여자는 그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을 보지 못하고 먹어버린다는 거야. 사실, 이건 모든 인간이 그래. 나도 맛있는 것을 보면 화가 사라진다구." "아항, 스승님은 단순 하시군요?" 으... 너보다 단순한 녀석은 못 봤다. "하하하. 재미있군요. 저도 앞으로 아이스크림을 많이 준비해 두어야 하겠군요. 뭐, 비싸서 여자들이 먹는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그럴 수 도 있군." 공작은 여전히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단 말야. "참, 오늘 일은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사실, 이번 일 덕에 제 일이 수월하게 될 것 같군요." 무슨 일? "다름 아니라, 제 양자로서 제가 이번 전쟁에 출정해서 비운 영지를 관리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음모가 있을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싸우는 건데.. 쓰벌... "하지만... 누가 그걸 수긍할까요?" "이번 일로 자이츠는 확실한 종이 되었다고 봐도 무관합니다. 사실 저라도 그렇게 빠른 시간에 상대를 제압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가 승복을 안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너가 나랑 싸우면 이길 꺼 같냐? 천만에. "스승님, 그렇게 해요. 좋잖아요!" 야... "그렇다면, 제 양자로서 제 사후 다시 권리가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헌데 뭐라고 불러야 하죠? 세이의 이름 말고 한번도 이름을 들은 적이 없어서..." 대마도사 님이라 불러.. "프라오니스야." 젠장 기분 나쁘군. "하지만, 그 이름은 곤란합니다. 아직도 그 위대한 대 마도사를 공경하고 잊지 않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뭐 어때? 원래 내 이름이라구. "할 수 없군요. 그냥 조부의 이름을 따랐다고 하죠. 뭐. 그럼 그렇게 된 겁니다." 가만... 뭔가.. 이건 아니라구.. 난 놀고 싶단 말이다! 3. 세이의 정신개조 운동. 세이는 오늘도 공부한다. 열심히! 부지런히! 더 열심히 해야 할텐데... 걱정이군. "저기.. 이거 천 번 휘둘리기는 너무 한 거 아네요? 모래주머니도 들었는데." "세이야. 저번에 너가 이긴 건 순전히 눈속임이야. 그러니까, 한 두세 번만 싸워보면 네 약점 따위는 들통 난다고. 그러니까 기본을 열심히 닦는 수밖에 없어. 알겠냐!" "에휴.. 알았어요. 그치만, 마법 주문 외는 건 빼주시면 안돼요?" "세이야, 넌 마법력도 형편 없는 게 검술을 외운다고 한 발상부터가 괘씸해. 그러니까, 알아서, 열심히 익혀야지. 안 그래?" 세이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역시 난 훌륭한 교관이라니까. 후후후. 나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다! "저... 실례...합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한테 어제 무참히 깨진 기사가 있었다. 자이츠. 나랑 싸워서 진 녀석 아냐? "무슨 일 이신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전, 앞으로 당신의 종자를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요." 종자! 야! 내가 기사로 보이냐! "전 기사가 아닌데요. 그건 좀 곤란하군요." 세이는 묵묵히 검만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마 겁나는 거겠지. 짜식 낼모레면 18살 짜리가 저리도 겁이 많아서야... 쯔.. "전...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제 무능함을 깨닭았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이런.. 이런 나이 먹은 아저씨가 이러면 내가 난처해지는데. "제발.. 용서해 주십시요." "됐어요. 전 원래, 그런 일로 꽁하는 성격이 아니고, 사실 따지고 보면, 제 사악한 방법도 한 몫 했죠. 뭐. 그리고 그런 일은 용서받고 말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 알겠죠?" 자이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내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앉았다.. 아니, 무릎을 꿇었다. "제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요. 당신의 종자가 되어, 당신이 허락하는 한,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이봐.. .그런 건 왕 앞에서나 하라구. "이거...참. 곤란하네." 어쩔까나... 세이를 처다 보니 한눈을 팔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나는 어차피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옆에 사람이 있어봐야 귀찮기만 해. 그러니까, 세이의 종자나 해봐. 봐서, 내가 검술도 가르쳐 주지. 뭐." 선심이다! 하지만, 긍지 높은 기사가 어쩔까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이런 황당할 데가! 난 그냥 삐져서 가길 바랬는데. 으이구.. 이제 어쩌니? "좋아. 그럼 자이츠. 어서 거기 쇠 덩어리들 달아. 팔이랑 다리에. 그리고 검 들고. 그래, 그렇게." "저, 이런 것으로 무엇을. 굉장히 무겁습니다만." 야, 나의 경륜을 우습게 보지마. 이래 보여도 아젠의 기사도 하루 아침 식사거리도 안 된다는 것이 정설이지. "자이츠. 왜 아젠의 기사보다 바르하잔의 기사단이 약하다고 생각해?" "실력 문제가 아닐까요?" 실력도 달리긴 하지만. "아냐. 가장 큰 문제는 전략이야. 그리고 그 다음 문제는 체력이지. 그리고 다음 문제는 기술이야. 임기응변 능력이 없어. 그게 왜 그런 줄 알아?"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점은 맘에 드네. "모르면 가르쳐 주지. 기본기가 안 되어 있어서야. 모든 검술은 무릇 기본기에서 파생되는 거라구. 그러니까, 기본기를 잘 아는 머리 좋은 놈은 검술을 몇 개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야. 몸에 검술이 일단 베고 나면 천하무적이라는 것이 사실이지." 참고로 내가 그런 류에 속하지. 허허허. "그런..." 몰랐지? 그럼 열심히 휘두르라구. "그럼 천 번 실시!" 그리고 나는 몸을 돌려 준비된 의자에 앉아 준비된 탁자에 준비된 음료수를 마셨다. 후후후. 나야말로 준비된 교관 아니겠어? 한 500번쯤 되자, 둘의 몸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래도 내가 사정을 감안해서 세이의 몸에는 모래를 달았는데. 녀석은 역시, 빨리 지치는 구나... "헥, 498, 499.." 옆의 자이츠는 그런 대로.. 지금쯤 엄청 후회하고 있겠지. 괜히 한다고 했다고. 허허허. 그게 다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다. "좋아. 잘 하고 있어. 세이는 호흡을 조절해. 그러니까, 검을 내지를 땐 숨을 쉰다는 생각을 하면 잘 될 꺼야." "네.." 짜식 아주 땀으로 범벅 했군. 아직 여름이라 더운데 말야. "자이츠, 검을 집는 자세가 안 좋아. 그렇게 잡으면 검이 쉽게 밀린다. 좀더 안으로 당겨 잡어." 이렇게 충고도 해주고. 허허허. 늙은이의 앞날에 이렇게 후학을 가르치는 재미가... 짭짤하단 말야. "이거 바쁜 건가요?" 응? 피스트레이카 공작이시군. "무슨 일이야? 출정 준비가 바쁘지 않아?" "보다시피, 자이츠가 사실 저희 정예중 한 명이라, 인원을 맞추는 것 때문에 바쁘지요. 하지만, 상관은 없겠죠. 그보다, 오늘 저녁에 시간 비워 두십시요." "왜? 데이트 신청이라도 들어왔어?" 예쁜 처자라면 한 번 생각은 해 보지. "하하하. 농담이 재미있군요.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지요. 저의 양자로. 뭐, 옷은 준비되어 있으니, 늦지만 마십시요." 이런 능구렁이를 봤나! "근데, 보통 파티가 그렇게 하루 이틀 만에 결정되나?" 나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때, 그 사절단의 한 사람을 붙잡았을 때부터 계획한 건데요. 이거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 드리죠." 웃냐! 남은 싫은 것이 안 보이느냐? "사과 어디있는데.." "네?" "사과 드린데며!" 그는 약간 황당해 하면서 다시 성으로 사라졌다. 나는 화풀이 대상을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야! 빨리 해! 뻘건 얼굴로 무도회에 갈래! 빨리 하고 마사지 받아서 진정시킨 뒤에 옷 입고 가야지!" 에잉. 화나. "자이츠님, 괜찮아요. 원래 저래요. 우리 스승님은 원래 저렇게 택택거려도 다치면 마법으로 치료도 해주시고 그래요. 물론 내성이 생긴다고 잘 안 해주시긴 하지만요. 그리고, 옷도 손수 꼬매 주시기도 하는 걸요?" 그 옷 이야기는 하지 마라! "쿡.. 옷을 꼬매요?" 으... 웃지마..잉.. 그럴 수밖에 없잖아. 애 키우는데 완전히 아줌마 다 되더라, 그렇다고 애를 빨래를 시키니, 아니면 바느질을 시키니? 아무래도 숲에 혼자 살던 마법사는 화장실도 안가는 줄 아는데. 절대 아냐! "젠장." 오늘 완전히 구겨지는 구나. 욘석들, 더 조져 주마. 감히 교관에게 개기는 엄청난 발상을 하다니... 창이 배 밖으로 삐져 나오나 보지? "야." "예?" "둘 다 백 회 추가." 둘의 얼굴은 이내 일그러지고 다시 조용해 졌다. 정적이 감돌았다. 아... 얼마만의 평화인가. 이곳은 나의 고향이다. 기분 좋은 향기가 흘렀다. 여름은 이게 좋지. 암. "저.. 공자님. 여기 음료수를 준비해 왔습니다." 검은 색 제복에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하녀였다. 여기 하녀는 미모가 기준인가 보지? 나야 미녀를 밝히는 편이 아니라 말야. 사실, 세계 정복 하니라 그런 건 신경도 안 썼지. "그리고 여기 오늘 오실 손님 명단입니다. 공작각하께서는 가급적이면 외기를 희망하신다는 전언이셨습니다." 윽... 이걸 다 외란 말인가. "킥. 샘통이다." "들리면 어쩔려고..!" "괜찮아요. 지금쯤 눈앞이 노래서 아무 것도 안 들리실 껄요?" 다 들려! "흠." 다시 조용해 졌다. 어디.. 목록을 살펴볼까? 이거야 원, 옛날하고 별 다를 껀 없군. 그보다 당시의 대 귀족은 이제 하나도 없다는 것이 특징인데... 어디.. 그 외에 특이한 인간은 없군. 물론, 귀신도 없군. 야, 이렇게 썰렁한 농담을 다 하고 내 정신 상태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군. 뭐, 이런 일이 한 두 번도 아니고... 정신 차려야지. 아유... 나야 뭐 원래 한 미남 했지! 후후후. 하지만, 내 젊은 시절에는 내 미모를 돌아볼 여유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왜냐면, 당시, 나는 뭐, 엄청 바쁘고, 일만하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음... 하여간 그랬다. 근데 왜 대 귀족이 없는 걸까. "야, 자이츠." 나보다 배는 나이 많아 보이는 자이츠는 내게 반말을 듣고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개기면, 또 백 회 추가할까 싶어서인가 봐... "말씀 하십시요, 로드." 로드... 좋은 말이다. "크리에이즈가나, 바룬흐즈 가는 없어졌나?" 둘 다 내 친구의 가문으로 당대의 명문가였다. 처음부터 명문이었던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유명해져서 귀족이 된 것이야. "네. 그 가문들은 아마 개국 공신 가문인데, 한 때 반역으로 없어졌지요." 뭐, 대 귀족 가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에잉. "그래... 용케 피스트레이카는 남아있군." 난 아름답게 빛나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뭐, 하기사 내가 예전의 국왕이 나를 무척이나 걱정해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가 위기에 처했던 것은 다 내 친구들의 배신 때문 이였지. 뭐, 그런 거다. "자, 이제 그만 하고, 무도회에 갈 준비나 하자. 녀석들 어서 검 내려놓고. 아, 그 모래주머니랑, 쇠는 그냥 차고가." 둘의 얼굴은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스승님! 이걸 차고 어떻게 밥을 먹어요!" 그게 다 수행이니라. "저, 이러면 춤추기 힘든데..." 이럴 때 나는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궁시렁 거리지 말고, 실시!" 허허허. 난 역시 준비된 교관이란 말야. 무도회라... 가본지 한 백년 된거 같은데. 새삼스럽게 패션의 진보를 느끼고 있다. 무서운 일이야. 어느새 저렇게 많이 발전했냐? 오래 살고 볼일이야. "춤 안 추니? 여자들이 널 쳐다보잖아?" 세이는 입만 내밀고 있었다. "움직이기도 힘들어요. 그리고, 여자들은 공작의 양자라는 스승님을 보는 거라구요. 그리고 자이츠도요. 자이츠가 알고 보니 유명한 가문 출신이래요. 하지만 저래 서야... 춤을 출 수도 없을 테지만요." 오 그랬어? 다음엔 더 잔뜩 달아 줘야 겠군. "그러냐? 흠. 나야 뭐, 원래 한 미모 하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이 결혼할 생각이 없다 했더니, 저런 애인이 있군요. 양자라고는 해도 의심스럽지 않아요?" "전 숨겨 논 아들이라고 보는 데요. 머리색도 똑 같고. 어머머...애인이라니, 남사스럽게스리. 호호호." 남사스러운지 알면 들리지 않게 말하셔야죠. 그리고 문이 다시 열리고 시종장의 말이 들려왔다. "키히 크리시아 휘젠님. 입장!"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그녀는 당당히 들어왔다. 키히... 키히. "세상에, 여기에 국왕파의 마도사가 들어오다니, 놀랍군요." 자이츠의 얼굴에는 미미한 놀람이 스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키히를 알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달려갔다. "키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면서 나는 그녀의 정면에 설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예전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희귀한 하이 엘프. 그리고 인간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모습. 뾰족한 귀는 머리 장식으로 가리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금발을 날리면서 그 곳에 그렇게 서 있었다. "무례하군! 이분은 왕실 대 마도사 휘젠님이시다!" 한 기사가 나의 앞을 막아섰다. 키히가 보이지 않았다.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목소리, 지극히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내 머릿속에 울리는 그 목소리는 나를 현실의 세계로 끌어올려 주었다. 그녀였다. 바로 그녀는 나와는 다른 종족. 내가 사랑하고 사랑 받은 사람. 하지만, 그녀의 곁을 떠난 것은 나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아는 사람으로 착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난 고개를 돌리고 세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무겁고 슬펐다. 외로웠다. 이젠 아무도 나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승님, 누구에요? 듣자하니, 마법사라던데. 라플 이후로는 최고라던데요?" 그렇겠지. 엘프의 정신은 인간보다 훨씬 강력하니까. "그래. 뭐, 하지만, 내가 더 강하니까 걱정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갔다. 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데. 그녀를 떠난 그 순간부터. "키히님?" 그녀는 사람들을 헤치고 내게 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푸른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 제가 다른 사람하고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데... 누구랑 착각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린 공자." 어린... 음. "아, 그냥 지나가는 바람에 홀린 거 같습니다. 당신과는 전혀 다른 그녀는 엘프입니다. 아름다운. 그러나 아주 지적이죠. 저와는 많이 다른 분이십니다." 나는 공손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역시... 그가 나를 떠난 이유가 이거였군. 말해 봐요, 어린 공자, 그대의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지요?" 엥? 저의 할머니는 무척이나 나이가... 음..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제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스승님, 아는 여자에요?" 네 옛 애인이다! "아, 저.. 워낙 오랜 일이라... 근데, 그건 왜?" "넌 그의 손자가 틀림없어.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렇군요. 그런 거 였군요. 난 알고 있었는데. 그가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전 이제껏 그를 위해 산 나는 뭐가 되나요? 하... 작은 공자 이야기 해주셔요. 그녀는 나보다 아름다웠나요?" "....키히... 당신보다 아름다운 인간은 없습니다. 당신의 얼굴에 항상 빛이 스러지지 않는 것처럼, 제 사랑은, 제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오랜 동안 그대의 모습을 잊은 적은 없습니다." 이름은 잊어먹었었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던가요? 그건 그가 나한테 레이디 신청을 하면서 한 말이에요... " 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푸른 눈은 폭풍우 치는 바다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걱정, 혼란, 슬픔. "키히.. 전... 라플은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두고 죽을 수 없지요. 죽는 것도 함께, 영원히 함께 세상의 평화를 지키자고 약속 했었죠." 이런 웃기지도 않는 약속을 했었지... 으. 다신 이 짓 안 해! "당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을지.. 알 수 있어요. 전, 그를 사랑했었습니다. 그가 배신으로 죽는 그 순간에도 ... 그는 내 마음속에 살아있었지요." "키히...!" 난 그녀의 눈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하지? 난 젊어졌다고? 젊어지다 못해서 어려졌다고 하리? 난...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건가... 어리석은 나는... 왜? "스승님..." 공기가 너무 답답했다. 난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알았어야 했는데... 공기가 시원하게 나의 폐부에 스며들었다. "스승님, 스승님, 괴로우신 거지요?" 그럼 내가 편해 보이냐? 녀석... 날 걱정하는 거구나. 어린 것이. "내가 네게 괜한 걱정을 끼쳤구나. 걱정 마라. 난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아. 한 번 헤어졌던 여자다. 미련은 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냐." "왜, 애써 참으려 하시는 거죠?" 제자의 걱정스런 눈동자가 내 몸에 와 박혔다. "그건.. 너도 커보면 안다. 아직은 어리니까. 허허허.." 사랑을 하기엔 너무 늙어버렸다... 겉이 젊다고 속도 젊은것은 아니다. 두려운 거다. 난. 그녀가 진실을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지만, 만약 못 알아차린 다면... 그 땐 어떻게 할까 하고. "이제 그만 들어갈까? 너에게 주문을 알려줄 것도 있고. 물체 이동 마법이다. 이번엔 좀 어려우니까, 각오 좀 하는 게 좋을 꺼다. 후후후." 별이 흐르고 붉은 달은 더 진한 빛을 냈다. 그리고 내 마음도 서서히 잠들고 있었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때론 인간은 잔인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니까. "바로 이 소년이 제 양자이며, 동시에 저의 후임으로 공작이 될 사람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여기 모인 사람 대부분은 반 국왕파이니, 뭐 나를 향해 질시를 퍼부울 만큼 간덩이가 부은 인간은 없으리라. "자 그럼 재미있게 즐겨 주십시요!" 그럼 재미없게 노니? 넌? 하여간 어린것들 생각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어쩔 수 있나. 이 좀 더 세월에 익숙한 내가 이해할 도리밖에. 흠. 그나저나 사람들 무지 많군. 하여간 젊은 것들은 시간이 남아돈다니까. 키히는 기둥에서 사람들의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나저나 왜 엘프인데 인간의 편에 붙었을까.. 그것도 국왕편에. 이해할 수 없다니까. 아까 배신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그거랑 관련이 있나? 늙으면 괜시리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 에잇. "스승님, 여자들이 많네요." 세상의 반은 여자이니라. "너도 가서 좀 먹고 그래라. 춤도 추고. 아, 너 춤출지 모르지? 춤출 상황도 아니지만." 가르쳐 준 기억이 없당... "네. 사부님. 정말 빨리도 기억해 내시는 군요." 미워용~ 하는 얼굴이.. 음. 찔려. "아하하. 그래. 그럼 우리 여기서 원 없이 먹어보자 꾸나!" 세이와 나는 멋진 폼으로 탁자에 섰다. 그리고 꾸역꾸역 먹어대기 시작했다. 한가지 내가 간과한 것은 평소 나와 세이가 먹던 것이 유동식이라는 것. 그거 잊은 죄 밖에는... 흑. 흑. 흑. "스승님... 화장실이 어디죠?" "그냥 적당히 해결하자." "좋은 생각이네요." 제자와 나의 얼굴은 푸르죽죽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이 팩인가...으. "사부님.. 밀지 마요. 쌀 거 같아요." 나도 매 한가지다. 이놈아! "어디 가시나요? 이번 무도회의 주인공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리를 멈출 수 있다면 큰 오산이다. "아, 급해요.." 나와 세이는 직행으로 뛰었다. "사부님." "왜?" "아까 그 사람 화난 거 같던데." 화나건 말건 내 하곤 관계 없당. 후후후. 그나저나...저 흰 그림자는 뭐지? 아직 여름이니까, 설마 그건 아니겠지? 이쪽에서 사양이야. "세이야. 저거 봐라. 귀신이다." 놀라봐라. 녀석. "네? 어디요? 응...? 으.. 읍!" 세이의 입은 내 앙증맞은.. 윽... 에 막혀 버렸다. "조용히 해. 놀라면 어떻게 할려고. 설마 진짜 귀신이겠냐? 자 이때다 마법을 시험 해 볼 차례다. 은신 마법을 써라. 알겠지?" 세이의 고개가 끄덕여 지고, 나는 손을 풀어주었다.. 에이 드러버. 침 묻었다. "사부님.. 제 옷에 닦지 말아요..." "어서 주문이나 외어." 못하면 바보라고 놀려먹어야지. 후후후. [어둠으로 가리다. 은. 신. ] 효과가 가는 군. 단, 이 녀석의 마법력을 생각해 볼 때 지속 시간이 엄청 짧을 거 같다. "사부님. 잘 된 거 같죠? 헤 헤 헤." 칭찬 해 달라 이거냐? 어린 것... "가자." 정원의 풀을 따라 죽 걸어가 보니 아까의 하얀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백의 아가씨, 왕의 사절단, 그 은발 소녀였다. 성에 마법진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내가 만든 마법진은 드래곤도 가둘 수 있다. 아마, 이 아이는 그것을 모르고 마법으로 깨려고 하는 것이리라. 흠. 나와 세이가 괜히 마법을 걸었다고 후회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세이 녀석을 잡고 풀의 가상에 바짝 붙었다. 또 다른 은신마법을 사용하는 자였다. "스승님, 누구죠?" "마법으로 모습을 가렸는데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니?" "아뇨..." 에잉. 바보녀석. 이런 멍청한 점도 나를 꼭 닮았단 말야. 하하하. 곧이어, 은신 마법을 사용한 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백의 아가씨. 괜찮은 건가요?" 젠장. 키히 였다. 백의 아가씨는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다. "누구...?" "나에요. 키히 크리시아 휘젠. 구하려 왔어요." 그랬군. 그랬었다. 괜히 그녀가 이곳까지 와야할 이유가 없었지. 흠. "휘젠님! 안됩니다. 이곳에는 아주 무서운 마도사가 있습니다!" 저요! "사부님,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바보... "그런 문제를 이야기 할 때가 아니지요. 마법진을 풀겠습니다." 무리무리무리. [속박의 인. 그것을 무. 로 돌려라.] 그녀의 마법력은 오렌지 색인데, 오렌지색의 빛이 나의 마법진에서 튕겨 나가면서 백색의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알람 마법까지 걸어놨나... 쳇. "스승님. 이젠 어쩌죠?" 백색의 아가씨는 구하기 틀렸지 뭐. 도망가게 내가 냅둘 꺼 같니?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자." "그게 아니라... 좀 있으면 마법이 풀리거든요." 냥! "이런, 알람마법이라니! 휘젠님 이라도 어서 도망치십시요!" 이거야 원. 충성심이 갸륵하군. 멀리서 기사들의 발굽소리가 들린다. 기사의 옷은 쇠로 되어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이상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나거든. "스승님, 왜 저 여자 안 움직이죠?" 내가 아냐! 그보다 그녀는 메테오 자다가 맞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유백색의 빛나는 검.. 푸른 공기... 그가 여기 있었어? 아...." 무슨 소리야. 역시 엘프는... 인간의 정신 회로로는 이해하기 힘들테니까. "거기 누구냐!" 젠장...기사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어서!" 그때랑 같다. 나는 그녀를 도망가게 했었지. 친구들의 배반으로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 때도 그랬었다. "키히. 이젠 괜찮아요. 어서 도망가요. 당신은 이곳으로 와서는 안됩니다." "라플. 아니에요. 저는 당신을 구해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워. "미안, 키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저를 미워해 주십시요. 키히. 나는 꼭 마왕을 처치할 테니까. 원래 영웅은 승리하는 법. 나의 엘프. 어서 가세요. 전 괜찮습니다. 늦게 가면 눌린 북어포가 될지도 몰라요." 나는 그녀를 향해 좀처럼 짓지 않던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엘프라 울지는 않았다.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고, 돌이 하나씩 나를 스쳐지나갔다. 내 쪽의 돌도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보고 미소지었다. " 라플은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두고 죽을 수 없지요. 죽는 것도 함께, 영원히 함께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겁니다. 안녕히." [전. 이. 이. 동.] "안녕. 내 사랑." 이게 그러니까 내가 27살의 일이었지. 그러고 보니 그때 내 휘장을 준 거 같기도 해. 음. 그랬었어. 그보다 그녀가 위험하다. 아무리 마법사래도 저런 최상의 기사를 상대로는 무리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바르하잔의 기사들이 멈춰 섰다. 당연히 나를 보고. 후후후. "아, 공자님, 이곳에서 뭘 하십니까?" "아하하. 보다시피 이곳의 마법진을 점검하려 한 것뿐입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알람 마법도 걸어 놨군요. 하하하. 내가 이렇다니까. 그저 늙으면 죽어야지. 하하하." 너무 연기하는 티가 나나? "사부님." "아, 그랬군요. 앞으로 주의해 주십시요. 여기엔 요인들도 많이 와 계시니까요. 그럼 이만. " 그리 쉽게 믿다니. 나도 연기에 소질이 있어.. 음유시인이나 할 껄 그랬지? 기사들은 다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사라져 갔다. "백의 아가씨. 쓸데없이 힘 소모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있어요." 나의 친절한 미소에 그녀는 무척이나 감격한 듯 하다. "이 비열한 악의 마법사! 어서 나를 풀어놓지 못할까! 넌 그 어린 얼굴도 마왕과 계약한 게 틀림없어!" 이봐... 내가 마왕을 헤쳤어. 잘 봉인해서 짱 박아 뒀다고. "뭐,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해주지. 너 그 동안 목욕도 못했으니 냄새가 장난이 아냐! 여자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스승님... 저속해요. 저열하고, 비열하고, 저질이에요." 나도 알어 마. "구해 주신 겁니까? 공자." 어느새 그녀의 마법도 풀려서 우리 앞에 그 초절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과연 엘프는 다 이쁘다니까... 에잇. "아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불만 있는 놈은 다 나와. 죽을 준비하게. 안, 난 담배하고 밥을 준비하지. 후후후. "당신은... 아니요. 아닙니다. 고마워요." 그녀의 눈동자가 별을 받아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엘프의 눈동자는 신의 축복으로 다른 이 종족과는 달리 투명함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꽤 뚫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윽. 키도 그녀가 더 크다니. "정말 닮았어." 그렇지. 뭐. 내가 그 본인인데... 에잇. 괜시리 젊어져서 손해 보는 게 한 둘이 아니야. "가보시지 않으셔도 됩니까? 당신은 왕국의 첩자로 온 것인데요." 그녀는 내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 전 엘프 면서도 왜 이러고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그리고 조용히 정원의 숲으로 사라져 갔다. "우... 역시 엘프네요. 멀쩡한 길 냅두고 풀밭으로 가다니. 풀들이 비명 안지르나?" 너의 그 사고 방식이 나는 더 존경 스럽다. "그럼 백의 아가씨는 여기서 좀 힘 좀 쓰고. 아, 물 가져다줄까?" "됐다! 이 비열하고, 저열하고, 저질이고...!" "세이한테 그새 배우다니.. 학습능력이 뛰어난 인형이로군. 후." 그리고 나는 그녀의 칭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이를 끌고 다시 무도회장으로 걸어갔다. "사부님... 인형이라니. 너무 예뻐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너 같은 꼬마는 몰라도 된다." 제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나는 깨끗이 무시하고 발바닥에 땀나서 신발을 벗고 땀을 말리고 있었다. "로드! 뭐하십니까?" 이미지 완전히 구기는 순간이고만. "아. 발 말려..." "네?" 잠시 그는 당황한 듯 했다. 이 때 나의 연타 공격! "자이츠... 나 화장실도 가.. 몰랐지?" 자이츠의 얼굴에는 일말의 존경심이 떠올라 있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하는 그런 얼굴. "스승님, 그럼 내일 그 백의 아가씨 심문하실 거예요?" "심문이라니. 나 같은 고상한 사람에게는 그런 무지막지한 게 안 어울려." "고상..." 자이츠 녀석, 내일 뺑뺑이 준비! 무도회는 피곤한 일이다. 사실 저녁에 시작해서 밤새 놀고 마시고, 떠드는 아주 피곤한 작업이 아닌가? 난 개인적으로는 무도회가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흑. "에그국! 거기 주물러!" "스승님... 언제는 자신이 전천후 마법사 기사라면서요.." 그런걸 일일이 기억하는 게 아녀! "너도 나이 먹어봐라. 이렇게 힘들어져. 뼈마디 쑤시고.." 제자의 빈정거림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나쁘다니까. 에잉. 나이는 먹어 가주고 되게 구박하네 그려. 흠. "너희들! 그래도 오늘 연습은 시행한다! 내 사전에 쉬는 날이란 없어!" 괜히 심통... 제자들이 -뿌듯..- 검을 휘두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노인네답게 양지의 따뜻한 구석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헥.. 헥..." "..." 자이츠와 세이의 얼굴에는 땀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후후후. "스승님. 질문 좀 할께요." 어라라. 녀석이 질문을 하다니...! 오늘 저녁 요리가 궁금한가? "뭔데?" "스승님은 몇 년이나 수련했어요?" 날카로운 질문이군. 고로, 난 얼마나 해야 되요? 이런 거 맞냐? "음. 3살 때부터 검을 들었지. 한 십년 휘두르다가 한 이년 정도는 기사도를 배우느라 수련을 게을리 했다. 그 후로 한 다시 5년 정도는 마법을 공부하다, 검도 배웠지. 그 이후로는 한 40년쯤 검과 마법을 동시에 휘두른 거 같다. 보이지 않는 괴물들을 단신으로 물리치고 살았지. 뭐, 대략 그렇다. 그 이후로는 마법 연구를 했고. 더 알고 싶은 거 있냐?" 예상대로 세이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그럼 나도 그렇게 오fot동안 검술을 수련해야 되요?" "모든 일에 속성은 없느니라. 후후후." 자이츠는 그래도 좀 빠르겠지. 아무래도 기본이 되어있으니까. 하지만 세이 녀석은 아직 멀었지. 포기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라나?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내 팔에 돋는 이 미묘한 변화를 본다면 이 녀석은 내가 이 성에서 가장 싫어하는 올빽 멀리였다. "아, 난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닌데 말야." "네. 하하하. 그나저나 공작님께선 오늘 점심 후에 이노르 지방의 반란 진압을 떠나신다고 하십니다. 그 동안의 이곳 공작령에 대해서는 전권을 공자님께 위임하신다는 전언이 계셨습니다." 나 그런 귀찮은 거 싫다... 그렇다고 씨가 먹힐 리도 없지만. "뭐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은 없겠지?" 그는 그 느끼한 올빽 머리를 짚으면서 말했다. "아뇨. 후후후후. 저희 피스트레이카 영지는 원래 공작의 결정을 통해서만 거의 모든 일이 결정됩니다. 사실 공작이 과다한 중책에 시달리고 있죠. 뭐, 과로사한 공작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걸 꼭 지금 말하니? 이런 늙은이를 어더렇게 부려먹을 라고! 작은 방안, 나는 내 신세와 인생의 허무함을 한껏 맛보고 있었다. "스승님... 도와 드릴까요?" 세이 녀석이 나를 측은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내 앞에 쌓인 서류들을 응시했다. 왠 결재 날께 이렇게 많은 거냐? "넌 사고나 치지 말고 가봐라. 그거 어지르지 말고. 가서 마법 주문이나 외어라. 아냐, 그냥 여기서 외어라. 알았지?" "이...잉.. 노는가 해서 기뻐했더니." 이 녀석은 노는 거 너무 좋아해. "붉은 달이 파란 호수를 치고 다시 차고 이지러지고 다시 차고 푸르게 되고 붉게 물들고 사라지게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묻고 슬프게 사라지는 모든 것도 알지 못하리라. 알지 못하리라." "우와~! 스승님. 노래도 할 줄 아세요?" "아... 배운 거야." 그래. 원래는 난 노래 같은 거 알지 못했지. 우연한 기회에 이것 저것 알게 되었지만 말야. "누구한테요?" 녀석아... 박수까지 치고 뛸 필요는 없잖아. "알 거 없어."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군요. 어린 소년의 목소리답지 않군요. 이번에 새로 온 공작의 양자라더군요." "후후후. 그걸 믿으십니까?" "네?" 잠시 놀람이 스쳤다. 그럼 거짓이라는 건가? "저 소년은 직계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피스트레이카 공작의 정통 계승자에요." "저 노래.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을 처치한 자가 불렀던 노래죠. 힘을 봉인하는 노래. 라플 대 마도사의 주문입니다." "그런...!" "신경쓰지 마십시요. 이제 그 누구도, 설사 그가 살아 돌아 온다해도. 우릴 막을 수 없습니다." "전... 모르겠습니다." 흑발의 사내는 조용히 웃었다. "몰라도 괜찮아요. 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 일에는 우리의 중대한 운명이 걸려 있는 겁니다. 명심해요. 하지만, 잊어요." "레인... 잊지 마십시요. 우리의 주인이 깨어나실 날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 전에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비장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각오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증명같았다. "물론이죠. 세상의 약속된 운명을 지키는 겁니다." "약속을...!" "운명을...!" 문을 열자 아까의 탁한 공기가 사라진다. 문은 이계로의 입구라는 어떤 마도사의 말이 스쳐지나간다. 아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가 정말 공작의 후예라면 이번 일은 상당히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쉬울 리가 없다. 위대한 마도사의 후예라는 것 때문에라도 어리석은 기사들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핏줄 따위 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위대한 공작도 자신의 아이를 버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가문이 멸문을 당했어도 그는 일말의 후회를 하지 않았다. 어리석기는... 그 아이만 얌전히 내 놓았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텐데. "아, 죄송합니다." 하녀의 하얀 앞치마에는 금방 부딪힌 충격으로 물이 묻어버렸다. "괜찮아." "그럼 공작님. 실례하겠습니다." 저 앞치마가 더럽혀진 것처럼 앞으로의 트라이너는 피로 물들게 될 것이다. 후후후. "그럼 가볼까?" 4. 여자란 말이지. "스승님." 오늘도 역시 세이의 목소리에 잠을 깨야 하는 나는 처량하다. 더군다나 바로 어제 공작이 떠났다... 흑... 그 덕에 나는 일 더미에 파묻혀야 했다. 이렇게 불쌍한 장면을 보게 된다니. 댁들은 양심도 없는 거라고. "나 바쁜 거 보이지?" "예... 하지만!" 나이도 많이 처먹은 놈이 왜 또 저러냐. 나를 좀 본 받으라고. "에휴. 제자에게 이기는 스승 없다. 그래. 무슨 일이냐?" "검술은... 쟈이츠랑 하면 잘 되요. 그가 잘 도와주거든요." 임시 종자에서 내 제자로 한 단계 올려줬다. 늙은 생강은 의외로 맛있다. "근데 또 뭐가 문제냐? 마법은 외우는 수밖엔 없고, 검은 휘두르는 수밖엔 없다." "그게 아녀요." 그럼 뭐냐!!! 이놈! 늙은이를 미치게 할 셈이냐! "스승님." 쟈이츠의 목소리가 나의 귓전을 간지렵혔다. "왜?" "세이님은 짝사랑하는 분이 계시다고 합니다." 이때의 나의 놀람... 말하지 않아도 알지? 갑자기 왠 짝사랑! 내 첫사랑은 그러니까 아마도 20세 전후의 일이었지. "스승님.. 그렇다고 입만 벌리지 마세요. 턱 빠져요." 그래도, 난 틀리 안 낀다. "좋아. 근데 뭐가 문젠데?" "저..." 얼굴이 빨개지고, 눈동자는 빨갛게 되는 걸 보니.. 토끼다. "말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나의 폭주는 가히.... "죽어!" 나의 이 애 제자를 흠씬 두드려 팬 뒤 약간 양심의 찔림을 느꼈다. 참고로 난 얼굴은 안 때린다. "으..." "험! 그래. 어떤 처자냐?" 얻어터진 자식치고는 말 잘한다. "그러니까, 아주 예뻐요. 머리는 크림처럼 부드러워 보이고요, 반짝거려요." 난 대뜸 한마디 해주었다. "대머리냐?" 쟈이츠는 입을 가리고 큭큭대고, 세이는 날 노려보았다. "여자는 대머리 없어요. 스승님." "그냥 밀어볼 수 는 있잖아." "넘어가요." "그러지 뭐. 그리고?" 세이는 다시 아까의 충격에서 벗어나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스리. "얼굴은 그러니까.. 무지 이쁘고, 목은 가느다랗고, 예쁘고. .그리고 또.. 음." 내가 다시 한마디 해주었다. "그래, 안고 싶다 이거냐?" "스승님! 무슨 소릴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난 손으로 그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젠장, 좀 있으면 결박 마법도 써야 겠군. "그러니까, 여자랑 남자의 관계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스승님이 차인 이유를 알겠군요." 야, 눈이 무섭다 임마. "난 말야... 차인 게 아니고. 찼어. 그리고 그 땐 참, 순진했다고." 세계평화랑 결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럼 왜 이렇게 된 건가요?" "누가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됐냐? 늙으면 다 이렇게 삶의 지혜를 습득하는 거야." "전 스승님처럼은 안 될래요." 다시 흠씬 두들겨 패고, 말을 시켰다. "그런 거 말고, 좀, 나한테 맞게 설명해. 어느집 아가씨고, 가문은 어떻고, 재능은 뭐고 라고 말야." 이래뵈도 120살이나 살아서 순진과는 담쌓고 살았단 말이다. 세이야, 너도 백살 넘어봐라, 알 거 모를 거 다 알게 된다고! "아, 모르는 데요?" 아.. 내 제자를 여지껏 제가 뭘 가르친 겁니까! 신이셔. "쟈이츠. 자네라면 알 듯도 하군. 누군가?" 나의 이 노인틱 말투에 쟈이츠는 상당히 익숙해 졌다. "예. 휘몬 가의 여주인이십니다." 여주인... 미망인 혹은, 외동딸? "쟈이츠님! 왜 알면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갠 원래 그렇단다. "시끄러. 물어봤으면 가르쳐 줬을 꺼 아니냐. 너가 안 물어 보니까 안 가르쳐 준거지. 그보다, 그 집안은 뭐 하는 집안인가?" 쟈이츠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도 약간 깔고 대답했다. "네. 휘몬가는 원래 정통적인 학자 집안으로 대대로 궁정학사를 겸임한 집안입니다. 그러다가 저번 휘몬경이 죽고, 그 아내가 가문을 이어받았죠. 집안의 대가 끊긴 셈이죠." 그랬군. 미망인이라. "결혼한 여자래. 포기해. 야. 깔린 게 여자야. 너 정도면 골라잡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야 할 수 있잖아?" 이게 바로 훌륭한 스승의 대사다. 그러나, 녀석은 스승의 깊은 뜻은 몰라보고 문닫고 뛰쳐나갔다. "음... 세계 평활 버리니 다른 게 속썩이는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쟈이츠 넌 그냥 조용히 검이나 휘둘러! 괜히 이상한데 관심 가지지 말고. "가서 공부나 가르쳐 줘. 인생상담은 빼고." "네." 과연.. 바르하잔 정규 기사군. 나는 살짝 쟈이츠의 뒤를 밟았다. 미행이라고. 녀석은 쟈이츠에게 묻기 시작했다. "쟈이츠. 저기 말야." "모르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존대 말은 하지 말고. 그러니까.. 그녀.. 그러니까, 휘몬 가의 그 분은 어떤 분이야?" "스승님께선, 잡담은 금하셨습니다. 어서 공부하십시다." 역시 멋진 놈이다. 후후후. "..." 녀석, 입나왔군.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여지껏 저런 말로 자이츠를 괴롭힌 거지? 음... 방해나 해볼까? 예로, 피아노를 튕기면서 노래를 부르면 엽기겠지? 흐흐흐.... "콱! 나는 오늘도 쥐를 쫓는다! 퍽! 미끄러졌다! 찍! 죽었다!" 이런 시시껄렁한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의 공부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면서 초 절정 재수 없는 성 제일의 재수탱이가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일을 다하셨나보죠?" 전직 공작이다. 이 정도 못해서야. "자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래 무슨 일인가? 그대는?" 그래도 예의를 지키는 내가 얼마나 멋진가! "네. 사실은 소작주가 와있습니다. 공작님이 안 계시니 공자님이 가보셔야 합니다." 여기 언제부터 소작주랑 만나는 민주적인 곳이 된 거냐? 이 자식, 날 골탕먹이려는 거군. "가주지." 피아노 뚜껑을 덮고 난 일어서 그를 따라갔다. 도달한 곳에는 소작 감독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거기에 어린 소녀 하나도 있었다. "아직 애잖아!" 소작감독인의 한마디였다. "... 뭐, 그렇긴 하네만. 자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당장 해약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작인 옆의 어린 소녀를 보면서 나도 말했다. "넌 더 어리군." 복수다...! "공작님은 안 계신가요?" "안됐지만, 현재 공작님은 출타 중이십니다." 올빽은 재수 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 자식 전형적인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형이군... 쯔... "그런... " 흥. 전직 공작인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내가 공작의 후예이니. 내게 말해보시오." "예...? 어찌 어린 분한테... 제 막내 에밀보다 어린데." 내가 좀 그렇게 어려 보인다고 무시하지마.. "상관없네. 자네의 고민, 내가 해결해 주지. 안되면 내가 공작에게 편지를 쓰면 되고. 그렇지 않겠나?" "저희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뜸 한다는 소리가 밑도 끝도 없이 살려달라니? 소녀는 침착하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단, 아주 슬퍼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살인, 강도, 납치, 단, 여기서는 납치 가능성이 크지. "다름이 아니고, 저희 마을에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온 몸이 썩어 들어가면서 한 보름 뒤에는 죽어버립니다." 내 탓은 아니지... 음. 그리고 참 희귀한 병이로군. "그래서, 이 소녀의 부모도 그 병을 앓고 있나?" "예. 지금은 마을 회관에 격리해 두었습니다만..." 이거야, 혹시 마법사가 탐구심이 엄청나다는 거 알아? "좋아. 내가 가보지. 그 증세에 대해 이야기 해보게. 아이야." 그 소녀를 난 아이라고 불렀다. "네..." 띠껍냐? 난 이렇게 어려 보여도 사실은 네 나이의 무려~~~ 10배쯤은 된다구! 증세는 이렇다. 이 병의 초기에는 그냥 온몸에 열이 솟고, 그 다음에는 머리에 붉은 반점이 나타난다. 이것이 한 3일 후에는 온몸에 확산이 되고, 그 다음 5일이 지나면 다시 검은 색으로 변하는데, 이 때부터는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다시 3일 후에는 피를 쏟는다. 그리고 며칠 뒤엔 죽고 만다. 간단해서 좋긴 하군. "흠." "끔찍하군요. 공자님, 가지 않으심이." "자네나 가보게. 나는 괜찮아." "..." 올빽 머리는 멋지게 뒤돌아 가보았다. 겁장이는 아니다. 난 자고로 돈하고, 먹는 거, 생명에 관해선 관대한 편이거든. "그 분은.. 가시는군요. 공자님도 괜히 가셔서 병이나 얻지 마시고 가보세요." "아. 아이야. 난 괜찮으니 어서 네 엄마한테 안내해라." "..." 그녀의 동그란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키히가 또 생각난다. 제기랄. 요즘은 일을 해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군. "유니?" 왠 감색 머리를 한 소년이 여자아이를 보면서 말했다. "응. 카이. 잘 있었어?" "뭐. 그보다 이 앤 누구야?" 애 아니다.. 꼬마야. 너보다 10배는 나이가 많아. "성의 공자님이셔. 특별히 와주셨어." "특별히는 아니고 내가 심심해서 일 뿐이야." 집의 구조는 단순, 지저분, 오염되어 보였다. 젠장, 없는 병도 생기게 생긴 동네다. 요즘 전염병이 트라이너 전체를 돌고 있다고 한다. 아마.. 이런 열악한 환경 때문이겠지. 기분 더럽군. 대체 난 왜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한 건지. "더럽군.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다." "네. 하지만, 전염병하고 청소하고 무슨 관계가 있죠?" "애들은 몰라도 돼." 이게 즉효다.. 단, 내가 어린애 모습이라는 걸... 잊고 말았다. "저, 공자님도 애잖아요." "이럴 땐 보통 묻지않는 게 예의지."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걸레를 빨러 갔다. 그리고 나는 환자의 방으로 갔다. 온 몸에는 더러운 오물이 묻어있었고, 검은 반점이 돋아 있었다. 그리고 더러운 모포가 덮혀 있었다. "쳇. 그럼 진맥해 볼까." 대충 병명은 짐작하고 있었다. 이 병은 인간이 앓은 적은 없었다. 그러니 국가에서도 속수 무책이고, 병이 사라지는 겨울이 되기까지 조용히 있는 거다. 이 병은... 음.. "거기 모포 깨끗한 건 없냐?" "네..." 할 수 없지. "그럼 가서 성에서 깨끗한 모포 십 여장 가져오라는 전갈을 보내라. 그래. 자이츠와, 세이도 오라는 전갈도 보내라. 세이에게는 여기 써주는 종이를 건내 주어라." 그리고 나는 다시 물수건을 정성 들여 환자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모든 병은 환경에서 온다. 훗." 그래. 그렇다. 그리니 청소를 잘해야. "저, 안 무서워요?" 아까의 꼬마다. 이름이 카이? "그래. 카이야. 무섭고 자시고, 난 원래 간덩이가 배 밖으로 뛰쳐나왔지. 그래서 마왕이랑 세세세도 하고 놀았단다." 농담이지. 세세세는 무슨. 죽도록 노려보고 욕하고 싸우고. "정말요? 하지만, 마왕은 라플이라는 대 마도사님이 죽였잖아요?" "...그래...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괜히 죽였다는 생각도 들어." "왜요?" 너 같은 꼬마가 백살이 넘도록 살은 내 심오한 뜻을 알 거 같으냐? "알 거 없다. 그보다. 이 걸레 다시 빨아와라." "네~!" 소년이 나가고 나는 물을 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을 피워서 방을 따뜻하게 했다... 는 어디까지나 환자 입장이고.. 내 입장은 전혀! 더워 디비져 죽겠다! "이 병은 이래서 문제야..." "이 병을 알아요?" "뭐, 그런 셈이지." 내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작을 넣어서 계속 불 때고 물 끓이고, 이것저것하고, 그러다 보니, 세이랑 자이츠가 왔다. "스승님, 이런 곳엔 왠 일이에요? 거의 우리 산 속 오두막 크기네." 거긴 그래도 아주 깨끗했단다. "그래, 내가 써준 건 다 사왔느냐?" "네. 뭐하게요?" "음. 뭐, 별건 아니다. 이 병을 치료하려는 거지." 세이 녀석 놀라는군. "우와~ 뭔지 몰라도 스승님이 의술에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이건 의술이 아니다." 세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병신 같군. "마법에 의한 중독 증상이다." "네!" 모두의 놀람을 뒤로하고, 나는 세이가 가져온 재료로 약을 배합했다. 그리고 잘, 쌓다. 약은 포장지를 어떻게 싸는냐가 가장 중요하다. 아닌가? "자, 내가 정화 주문을 외어주면 어머니 약을 잘 꼬박꼬박 드려야 한다. 알겠니?" "네. 그보다, 마법 중독이라면 전염이 될 리가 없잖습니까?"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마족은 대개의 경우 특유의 독을 가지고 있다. 그 마족과 접촉시 인간은 마법 저항 능력이 없는 경우 병에 걸리지. 뭐, 그런 거야. 대부분 그냥 금방 낫지. 하지만, 이 경우는 직접 마족의 피를 흡수했을 경우 나타나는 증상이야." 무슨 소린지 겨우 세이 정도만 이해했다. "그러니까, 이건 마력 중독 증상이군요!" "뭐, 그런 거지. 마족의 피는 마력을 담고 있으니까. 인간이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해." "그럼 전염은 왜 되는 거죠?" 유니는 궁금한 게 많은 소녀군. "전염은 되지 않아. 원래는. 단, 다른 바이러스에 섞었을 경우는 문제가 틀려지지. 단, 이 정도 마을을 초토화 시킬려면 마족 한 마리 족쳐야 되는데 말야." 자이츠의 제제가 있다. "스승님, 바른 언어." "그래..." 으... 왠지 쪼는 느낌이 든다. "그럼 전 왜 부르셨습니까?" "그야, 나서서 싸우는 덴 너가 가장 적격 이잖냐?" 어두워지는 쟈이츠의 얼굴. 갈등 때리고 있군. "스승님, 전 마족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야. 쟈이츠. 너 되게 멍청하다." "네?" "대 같은 종족용 병기로 같은 종족을 사용하는 종족은 인간밖엔 없어. 너 사슴끼리 싸울 때 다른 사슴 시키니?" 비유가 좀 이상한 거 같긴 하다만. 뭐, 괜찮겠지. "아니라고 봅니다만." "마족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극히 개인적이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종족끼리 죽이긴 해도 자신의 종족을 희생시켜서 까지 인간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그냥 와서 죽이면 한 마리면 이 정도 마을 정도야 초토화되는데 뭐 하러 자기 멀쩡한 종족을 죽이니? 그리고 마족은 희귀한 종족이야. 종족 보전 본능이 강하다고." "그러면.... 그건." 숨차다... 임마. "인간에 의한 살인이지."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나는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쟈이츠를 볼 수 있었다. 뭐, 꼭 인간이 아닐 수도 있지만. 뭐, 그런 거지. 마을 회관은 내가 배포한 이른바, 마법력 해소제를 먹고 다시 얼굴이 재색을 찾는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일 단계 해결이지. 뭐.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마을 촌장은(성에 왔던 그 놈이 아니라.. 좀 더 나이 지긋한, 그래봐야 내 나이의 절반정도?) 나에게 최대한 협조하려고 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런 작은 마을입니다. 저희야 뭐, 그냥 이대로 사는 거죠. 그런 마을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빨리 끝나서 다행입니다." 촌장의 얼굴은 환한 빛을 띄고 있었다. "하긴, 이미 죽은 사람은 빨리 잊는 게 좋지." 다시 성으로 돌아와서 이번 일을 분석해 보았다. 어디선가 뭔가 이상한 일이 있다는 것이고, 왠지 모르게, 결코 나와는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뭔가 희뿌연 것에 가로막힌 듯 했다. "세이. 난 좀 그 백의 아가씨를 만나러 갔다 오마." 이른바, 세상에서 마스터 마족 셋이 와도 못 뚫는... 어라라? "거기 누구냐!" 정말... 마족 티를 풀풀 풍기는 놈들 셋이 그 백의 아가씨를 가둔 마법진을 와해하려고 별 짓을 다하고 있었다. 먼저 밤의 기운을 받아 한 놈은 검어서 안보이고, 한 놈은 얼룩이, 한 놈은 털 둥이... 라고나 할까.... 역시 밤에는 산책이 최고야! "흐흐흐. 왠 꼬마냐? 죽여버리겠다." 마족의 파괴적 성향은 예나 지금이나 왜 변함이 없는 건지... 원. 물론 생긴 거와는 달리 아주 상냥한 마족도 있다. 그러나, 죽이는 걸 좋아한다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것도 좋겠지만, 댁이 죽는 게 더 재미있겠지." 나는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꼬마라고 한 대가는 비싸다. [파. 멸. 의. 손.] 뭐, 초급은 아니니까, 만족하라고. "젠장! 이놈 마법사다!" "보통 놈이 아냐!" 놈이라니! 쟈이츠가 들으면 바른 언어 어쩌고 할 껄? 너, 앞으로 조심해. "끄악! 킬트! 마법을 써!" [붉. 은. 눈.] 정말 대마법사가 상대가 마법 주문을 다 끝낼 수 있게 기다려 준다는 망상을 하는 거 아니지? "훗." [죽. 음.] 이건 좀 고 난이도야. "퀙!" 한 놈은 해결했고. 마족은 재생력이 인간보다는 좋아서 빨리 없애야 한다고. 검을 뽑고! "흑으로 돌아가라!" 검은 마족을 베어버리자, 나의 예쁜이 검(녹슨 검 1호 ; 어쩌면 파상풍에 죽은 건지도 몰라.)이 그 마족을 분해해 버렸다. "젠장!" "튀자! 두고봐라 인간!" 인간이야 대륙에 널린 게 인간이잖아. 기왕이면 깜찍하고 아름다운 인간이나, 마법력이 강한 인간이라든지. 왜 독창성이 부족한 거냐? "안녕~ 내 꿈 꿔!" 흐흐흐. "어때. 재미있었나?" 나는 그 백의 아가씨를 봤다. "대단하군. 나 같은 건 한 접시 꺼리도 안되겠어." 난 식인 취미는 없어. "디저트 정도로 해두지. 그래, 저들은 왜 온 거지?" "..." 뭐, 난 대충 짐작하고 온 거니까, 뭐. 말 안 해도 상관없어. "참, 그 병 고쳤어. 마법 중독 증상. 뭐, 내 손에 걸리면 아무 것도 아냐." "...." 묵비권을 행사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내 그대의 눈동자의 떨리는 것을 보았으니... 뭐, 내가 또 한 눈치 밥하지. "그래. 뭐, 잘 지내고. 밥은 특식으로 너 주는데 왜 남기는 거야?" "난 원래 소식을 하는 편이다." "그래? 그럼 ... 다음부터는 양 보단, 질이군. 알았어." 나는 손을 흔들어 주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서류에 사인하면서 나는 정말 곰곰히 생각했다. "저 건방진 처자를 어이할꼬? 후우..." "스승님." 세이가 서 있었다. 이 녀석만 오면 일이 꼬이는 거 같아. "왜 또 왔냐?" "세이는 말이죠~ 그 분이랑 꼭 한번 만남의 자리를 가지고 싶거든요~" 너 혼자 가져... 으... 나 일하는 거 안보이냐! "오늘은 이만 밤이니 물러가고, 내일 와라." 그러나 세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스승님, 우리 그녀를 초대해서 무도회를 여는 건 어때요?" 그러지마... 재정담당관의 머리가 뽀개진다. 무도회 하나 여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아니? "그건 안돼." 하루 일을 공치면 다음날 죽어나간다고. "스승님..." 세이의 하고싶어 광선이 눈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으.. 이거에 무너지면 안돼! "스승님, 괴롭히지 말고 세이님도 가서 주무십시요." 자이츠가 어느새 어두운 방안에 칙칙한 검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야.. 어둡다. "근데 무섭게 시리 왠 검은 옷인가?" 자이츠는... 쑥쓰러워 하면서 말했다. 저 덩치에 쑥쓰럽다니. "잠옷인데요? 아내가... 해준 겁니다." 아항.. 잠옷? 엉? 아내? "너 결혼했냐?" 나의 놀라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리요! "예. 모르셨었습니까?" 하긴, 나이가 삼십이 다 됐으니... 쳇. 내가 너 만할 땐 임마~ 세상의 평화를 위해 싸우고, 여행하고 다녔다. 마... 흑... 말하고 나니 더 비참해진다. 혹시 나 나이 무지 많이 먹은 노총각인거 아냐? "그래. 언제 한번... 그래! 자네 부인이랑 그 무슨 경의 미망인이랑 초대해서 같이 식사나 하지. 뭐, 구실은... 그래, 자네가 알아서 적당히 생각해 보고. 식사야 뭐 별 돈 드는 게 아니니까." 이건 내가 생각해 봐도... 흐뭇.. 자이츠도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예.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성에는 기사의 부인이 들어올 수 없다지? 이거야 원. "스승님! 사랑해요~" 그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 조용히 하고 잠이나 쳐자. 며칠 후, 내가 마족 마법중독 사건과 3인조 강도 떼에 대한 정신적 심리적 고충을 겪으면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차가 당도했다. "에휴휴. 벌써 시간 됐나?" "주인님, 손님 분들이 도착했습니다." 하녀야... 나도 안다. 그 휘든경 미망인은 자이츠의 부인이 혼자가면 쑥쓰럽다고 온 것이다... 그나저나 금녀하는 바르하잔 기사단에서 어떻게 결혼했을까. 궁금. "어서오십시요. 부인.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쟈이츠의 얼굴은 싱글거리고 있었다... 짜샤, 그렇게 좋냐? 온 여인은 둘, 하나는 자이츠 부인이다. 한 명은 하얀 모자에 연한 노랑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한 명은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 부인은 그야 말로 미인이였고, 흰 모자를 입은 여인은 뭐랄까. 건강녀? "초대해 주셔서 삼가 감사합니다. 옛 주군의 성에 오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흰 모자 여인은...여기사였단 말인가! "오, 부인은 여기사였습니까?" "예. 훗." 오.. .그래서 저 미련 곰탱이 에게도 아내가 있는 거구나. 몰랐어. "여기사는 되기 힘드셨을 텐데..." "아뇨. 저희 가문이 원래 검가라서요." "아항." 무슨 검가 출신이라면 여자도 검을 잡아야 하니까.... 음. 검이 보기보다 꽤 무거운데 말야. "그럼 이쪽 분은 휘든 부인이십니까?" 어려 보이시는 데. "예." 그녀는 그냥 짧게 대답하고 입을 다시 꾹 다물어 버렸다. 나에 대한 태도점수는 가히 빵점이당. 이런 여잘 좋아하다니, 눈이 뼜군. "저.. 저... 저.." 으이구.. "이 쪽은 쟈이츠의 선배인 마법사입니다. 이름은 세이... 이고요."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남편으로부터 편지에서 많이 나오시더군요. 좋은 분 이시라고요?" 기사답지 않은 섬세함...날 놀라게 하는 하루가 될 거 같군... 심장병으로 죽지나 말아야 할텐데. 내가 만나본 여자들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자면... 먼저, 키히양.. 뭐, 그녀야 사람이 아니니 제끼자. 그럼 뭐... 음.. 음... 없다.. 없다니! 난 도대체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지까지 만난 대부분의 이성적인 존재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 사람이 아니고, 엘프, 드워프, 드래곤, 마족... 마족이 한 90%정도지. 음. "저, 이것도 드셔보세요~" 으... 밥이 안 넘어 간다. 세이야.. 꼭 아기새가 짹짹거리는 거 같다. 마. "나도 그거 먹고 싶은데." 세이가 째려보았다.. "스승님은 나중에 먹어도 되잖아요?" 내가 이러고 산다니. 벌써 여자밖에 모른다니. 이건 비극이다. "스승님 이거 드시죠." 쟈이츠가 내게 커다란 고기 찜을 내밀었다... 야.. "아~" 으... 밥이 솓구쳐 오른다. "냠!" 내게 주던 고기찜은 어느새 그의 옆에 앉아있던 쟈이츠 부인의 입으로 넘어갔다... 내 고기! "와 , 맛있다. 당신도 스승님만 챙기지 말고, 나도 좀 줘가면서 먹어요!" "여보.." 이봐. 둘 다 나가서 깨 좀 뿌려. 여기 깨밭 만들일 없다고! "휘든 부인께서는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시나 보죠?" 나의 얼굴을 보라...기껏 초대해줬는데 밥 맛 없게 먹는 인간들이 난 젤루 싫다. 참고로, 이 여인네가 바로 그거야! "아니요. 전 원래 많이 못 먹어서." 음... "그럼 정원이나 산책하시죠. 세이도 마침 다 먹은 거 같으니. 세이야, 가서 안내해라." 흥. 세이 녀석이 불쌍해서 그러는 것 뿐 이라고! "네!" 세이의 얼굴에는 입이 귀에가 걸리는 괴기를 출현해 내고 있었다. 야, 특허 신청해라. 임마. "그럼 쟈이츠 부인. 나도 다 먹었으니 일어나 보겠습니다. 뭐, 저야 워낙 일이 많아서." 나는 우와하게 일어나서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 앞에는 마을의 소녀가 있었다. "어라라? 너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유니는 역시 지저분한 갈색 갈 옷을 입고 있었다. 뭐, 옷이야 어떻게 되었던 상관없지만... 좀 빨면 안되냐? "유니는 성주님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저번에도 밝힌바 있지만, 여기 성주는 지금 출타중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님이라면 제 부탁을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짝 반짝 광선이네... 뺨은 붉게 물들어 있고. 역시 어린것들이 좋다니까. "뭔데?" "저의 일자리를 구해 주세요. 전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빨래, 청소, 요리랑, 또..." "음. 하지만, 넌 너무 어려서 시킬 만한 일이 별로 없는걸? 여긴 또 사람들도 많잖아?" "하지만...!" 왜 이렇게 되는 거냐? 뭔가 이건 아니다 싶고. "돈이 왜 필요한데?" "세금을 낼 돈이 없어서요. 동생이 이번에 유니트 칼의 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입학금도 마련해야 되거든요." 유니의 얼굴에는 검은 기운이 돌았다. 저런.. 근데 유니트 칼이라면 내가 세운 마법학원 아냐? "동생이 유니트 칼에? 마법적 재능이 있나보지?" "네!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요. 벌써 처음 단계의 기초 마법을 배우고 있는 걸요? 이론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요. 정말 대단하죠?" 대마법사인 나를 앞에 두고 하는 소리야? 흠. "그래? 하지만, 그곳은 무료가 아니었나?" 내가 설립했을 땐 말야~~벌써 언 1세기 전의 일이군... 그 동안 물가 상승이 있었을 수 도 있으니까... "예? 아니여요. 귀족의 자제들만 무료에요." 귀족이 부자인데? 음... 뭔가 잘못된 거 같군. "그렇담, 내가 그 돈을 내 주지. 대신 졸업 후에 우리 성에서 일한다는 조건으로. 어때?" "네?" 유니의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랐다. 뭐 얼마가 들든 간에,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너의 일자리는 내가 알아 봐주지."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왜? 어린애들은 나라에서 육성, 보호해야 한다고. "무슨 일인데요?" 그녀의 얼굴에는 빛나는 홍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음.. 그냥 여러 가지 잡일. 그냥 내 조수나 해. 사실 조수가 필요했거든. 잘 됐어. 요즘 세이 녀석이 검술 공부 중이라, 내가 심심했거든." 뭐가 심심했냐고 묻지 마라!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유니는 정말 귀엽단 말야. 흠. 흠. 아니지,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란 말야. 키히가 알면 맞아 죽을 꺼야. 헤. "백의 아가씨 요즘 즐거우신가?" 정원 한 쪽에 마법진으로 가두어져있는 그녀는 초연하게 서있는 모습이었다. "즐겁고 말고가 없죠. 그나저나 여긴 또 왠 일이죠?" "그냥 궁금한 게 떠올라서." 나는 빙긋 빙긋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다름이 아니고, 키히... 그녀는 어떻게 국왕 편에 서게 된 거지? 혹시 다른 공작가가 망하게 된 이유가 키히의 힘 때문인가?" 굳이 마법이나 그런 능력이 아니라 계략이랄까. "왜 그런 것을 묻는 거죠? 당신하고 상관없잖아요?" "음. 상관이 있거든. 그래서. 사실 키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말야. 하하하." 그녀의 눈동자엔 누구나 알 수 있는 불신이 떠올라 있었다. "거짓말." 이보게나~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것도 나아쁜 일이에요~~ 늙은이 말을 들어야지! "갇힌 아가씨한테 거짓말해서 나에게 돌아올 이득이 어디 있겠나? 헐... 아가씨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 군." 그녀의 얼굴에는 계속 불신이 써져 있었다. "에휴휴. 할 수 없군. 지금 황제 이름이 뭐지? 다니온 황제로부터 몇 대나 내려 온 건가?" "4대 째에요. 성왕 다니온 폐하로부터 직계로 이어져 왔죠. 근데 그건 왜?" 옹. "아니 그냥 물어봤어. 그럼 심심하면 불러. 저번처럼 골빈 마족 나타나면 부르라고. 내 달려와 없애주지. 뭐, 널 여기서 빼낼 놈은 없을 테지만 말야." "대단한 자신감 이로군요. 어디서 그런 자신감을 얻는 거죠?" 당연히 이 빼어난 실력! 이지. "내가 원래 대 마법사라 말야. 키히보다 내가 강해." "자꾸 휘젠님 보고 이름을 부르지 말아요! 그리고 휘젠님은 누구보다 강력한 분이라고요! 인간이 어찌 무한의 생명을 사는 엘프에게 이길 수 있겠어요!" 이거야 원. 키히 광신도로군. "이봐, 백의 아가씨. 라플은... 그래, 라플은 뭐지? 그도 인간인데. 키히보다 강했잖아." 나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분만이 휘젠님의 생의 목표가 될 수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설사 그 사람이 지금 살아있어도, 휘젠님이 훨씬 강할 꺼예요!"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야. 나야말로 묻고 싶군. 왜 인간이 더 강력한지 왜 모르는 건지. 쯔. 키히도 그랬지만. 정말. 종족이 다르면 이해 할 수 없다니까. 어느 누구도 인간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지. "그래.. 그녀도 그런 말을 했었어."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어째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가. "라플. 전 언제가 당신을 꺾을 거예요." "후후후." "맨날 웃기만 하고! 도대체 인간이면서 나보다 더 엘프 같은 그 태도는 뭐죠?" 삐진 그녀의 얼굴이 참 귀엽단 말야. 헤헤헤. "귀여워서." 얼굴이 빨개진 그녀를 뒤로하고 난 다시 마법서로 눈을 돌렸다. 엘프는 천성적인 특성 덕에 공격계 마법을 사용하길 꺼린다. 인간은 하지만, 끝없이 잔인해 질 수 도 있고, 무대포 적으로 덤빌 수 도 있다. 얼마나 재미있나? 난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참 맘에 든단 말야. "내가 죽어도 말야. 키히. 그대는 영원히 살겠죠? 그럼 전 그 상황에서 정지해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대는 그렇지 않죠. 끝내는 절 꺾지 않겠어요?" "싫어요. 그런 것은. 당신을 이기고 싶지는 않아요." "아까는 꺾고 싶다면서요." 그녀는 팔을 내 어깨에 올렸다. "그러니까, 지금 보다 더 강해져야 해요."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어떻게 저런 한심한 생각들을 할 수 있나. "후후후. 당신은 정말...엘프 답지 않아요." 이런 닭살 발언들을 했었지... 응? "이런 나 혼자만의 사색에 빠졌었군. 미안하구만. 허허허." "나이도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사람이 왠 허허허 웃음이에요!" 이봐... 너보다 몇 배는 더 먹은 거 같은데? "사실 난 차밍하게 늙은 백대라...음." 그녀의 얼굴은 굳어졌다. "농담하러 오신 거면 가보세요! 보다시피 도망도 못 가니까. 흥.!" 이거 참... 내가 심심한 거 어떻게 알았냐? "이거 참. 그럼 난 가보죠. 엉?" 백의 아가씨가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신가 보죠?" 휘든 부인과 세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세이, 여긴 왠 일이지?" 세이의 얼굴은 칙칙...음. 잘 안 되는 가 보군. 밀어 줬건만. 이제부턴 다 네 책임이다. "에.. 여기가 제일 멋진 정원이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여기 포로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하고 쪼려는 찰라, 휘든 부인이 백의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너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는 사이라는! "언니..." 백의 아가씨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공자. 왜 제 동생이 여기 이렇듯 갇혀있는 거죠?" 그건... 별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음. 음. "세이 나중에 나 좀 보자." "네..." 세이의 얼굴이 착 가라앉으면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불쌍한 놈. "에.. 그러니까, 부인의 동생 분께서는 아주 사소한 실수를 공작에게 하셨거든요. 죄목도 다양합니다만, 어떤 거부터 들으시렵니까?" 이럴 때일 수록 유머감각을 발휘해야~ "무순위 추첨이 좋겠군요." 보통이 아니군. "좋습니다. 공작후예 사칭, 이른바 사기죄, 협박죄, 살인미수 등입니다. 뭐, 나열하고 보니 별로 없군요." "풀어주면 안되나요?" 무리무리무리.. "공작에게 직접 부탁하시죠." 뭐 이렇게 되는 거지. "네..." 그녀는 조용히 입술을 무는 거 같았다. 불쌍하긴 하지만, 이런 인간 폭탄을 풀어 놨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러면 할 수 없군요. 저라도 보살피게 해 주시겠어요?" 무슨 소리지... "이 성에 머무르겠어요. 허락해 주십시요." 의외로... 강한 타입이잖아. 아니면 뻔뻔하거나. "마음대로 하시죠. 부인." "네. 고맙군요. 하지만, 그 노인네 틱한 말투는 그만 두십시요." 내가 원래 노인네야! "고마워요. 스승님." 세이 녀석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나의 그날 저녁식사는 무척 푸짐했다. 허허허. "저, 차 드릴까요?" 새로 온 꼬마, 유니가 내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다. 옷은 내가 지시한 대로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확실히 깔끔해 보이는 군. 멋졍. "응, 괜찮아. 그보다 아까 과자가 있던데, 갖다 먹어." "네~!" 유니는 벌써 반나절만에 내 습성을 파악한 듯 하다. 난 원래, 혼자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다 세이의 영향이지. 유니가 귀엽고, 꼭 손녀 같다고나 할까? 허허허. "스승님, 다 늙어서 왠 어린애래요?" 죽어 임마! "허! 내가 원래 자선사업에도 관심이 많다. 불만 있음 말해봐!" 세이가 눈동자를 게슴츠레하게 뜨고 종알거렸다. "변태." 세이가 얻어터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당. "쟈이츠, 부인도 당분가 이곳에 머물도록 하지 그러나?" 쟈이츠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녀도 자신의 일을 해야 하거든요. 옆 영지의 호위무사로 있습니다." 흠... "원래는 우리 성 기사였다면서?" "파견 근무 중이거든요." 에 뭐야. 그렇다면 언젠가는 온다는 거잖아. 뭐, 쟈이츠는 좋겠다. "그나저나, 그 소녀는 뭡니까?" "응? 누구?" "평민 소녀로 보이던데. 맞습니까?" 유니 말이구나. 흠. 난 또 뭐라고. "그냥 갠 내 잡일을 도와주는 애야. 뭐, 그 애 집에도 자주 가는 걸? 사실 내 일이 바쁘잖아." 쟈이츠의 머리를 한대 갈겨 주고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요즘 완전히 일에 치여 사는 거 같은데... 이게 다 그 썩을 놈 때문이당. "저기, 이거 제가 구운 쿠키인데..." 유니야! 나주는 거야! 고마워! "세이님 좀 전해 주세요." 콰쾅~!! 어디서 들려오는 레퀴엠. 마치 장례식의 한 순간같다. "갠 왜?" 내 눈썹은 역십자 꺽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표정이네요. 그냥 그런 거 묻지 말고 주세요. 네?" 음.. 음... 난 내 외모가 꽤 예쁘다고 생각하는 데 말야. "난? 나도 쿠키 좋아하는데." "그야, 공자님 껀 따로 있어요~" "다녀오지." "이거야?" "네. 그럼 전 이만 집에 가 볼 께요." 내 눈앞에는 부스러기 쿠키가 놓여 있었다. "아, 인생의 덧없음이라니. 난 누굴 위해 울어야 하는가. 쿠키를 위해. 쿠키를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흑.. 흑..." 그날 난 이불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군." 나의 저기압을 눈치챘는지, 세이와 쟈이츠는 도란도란 거리고 있었다. 한 쪽에 앉은 휘든 부인은 우와하게 깨작거리고 있었고, 난 앞의 새우와 필살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유백색으로 샹드리에를 바꿔 보는 게 좋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난 여전히 저기압의 기압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 꼭 붉은 색의 불 아래선 돼지고기가 된 기분이라서요." 난 팍 쏘아주었다. "원래 고기가 제일 싱싱해 보이는 게 붉은 색 아래서 거든요." 식사는 다시 조용해 졌고, 쟈이츠와 세이의 목소리가 모기만하게 들려왔다. 원래 늙으면 귀가 밝아진다. "쟈이츠 어떻게 된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근데 모르겠는데요." 어찌 어린 것 들이 너희들 나이의 배가 넘게 산 나를 이해하겠어? "분명히 먹을 꺼 때문일 텐데." 역시 세이. 정확하게 짚는군. "험! 다들 식사 계속 하라구. 난 이만 일어나 가 볼 터이니. 그럼." 우와하게 일어난 나는 그대로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 책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난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벌로 세상에 홀로 길을 잘못 들어 내려온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잉... "이렇게 이쁜 천사 봤어? 흑.." 내 눈에 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엉? 저거 분명히...마법초 아냐? 저런 구석에 어떻게 저런 게 재배되고 있지? 정확히는 자라고 있는 거겠지만. 참고로, 마법초는 그 특유의 빛을 내기 때문에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다. "가봐야지~" 간만에 재미있는 일이다. 성의 북쪽 첨탑과 굴뚝 사이에 아주 작은 공간이 있는데, 이층 정도 되는 높이로 그 예의 마법초가 재배되고 있었다. 이곳에 마법사는 마을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카와세리크 잎이 아닌가!" 그곳엔 푸른빛을 내는 카와세리크 잎이 잔뜩 나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엉겅퀴와 같은 마녀가 쓰는 마력초로 불길한 암시, 저주를 내릴 때 사용되는 것이다. 주로 멀리서 지시할 때 나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혹시, 누군가가 누구를 저주하기 위해서 심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가와세리크 잎은 위험한 잎이다. 마족의 양식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마족들이 종종 들르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마족은 이곳에다 알을 낳기도 하는데.. 가만.. 알? 구석에 작은 얼룩무늬의 작은 알이 있었다. 계란보다 작은 크기인 것을 봐서는 페르소의 한 종류로 보였다. "페르소라니... 도대체..." 누군가 내 머리를 때린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5. 카와세리크 전설 한 지방에 라플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그 중 카와세리크 전설이라는 것이 있다. 그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엘프를 위해서 카와세리크라는 독초를 풀로 이어 옷을 만들어 입고 마족에게 사정했다는 데서 비롯된 전설이다. 그러나, 전설과는 달리 진실은 그 카와세리크 잎으로 라플이 고문당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으... 머리를 때리면 어떡 하냐! 가뜩이나 치매기가 있는데!" 나는 아픈 머리를 싸면서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토끼눈을 한 마족이 서 있었다. "케케케.. 어떡하지! 인간이 안 쓰러져!" 이런 어벙한 마족을 봤냐! "보통 그런 걸로 안 죽어. 기절도 안 하지. 몰랐냐?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군." "으... 분하다. 인간 따위에게 지식을 얻다니." 마족 답지 않은 마족이군. 이렇게 어벙하다니. "뭐, 상관없겠지. 그보다 여긴 왠 일이지?" 그 마족은 뾰족한 갈색 귀를 가지고, 온몸에는 반점이 돋아나 있었다. "내 알을 가지러 왔다." "얼른 가져가라. 뭐, 빨리 가져가는 게 좋다고." 마족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 누굴 닮았어." 초 절정 미남 나를 닮은 그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군. 후후후. "라플.. .그를 닮았다." 내가 그야. 가만! 너 그를 어떻게 아는 거냐? "그라면, 내 주인을 도울 수 있을 텐데." 마족 하곤 연관하지 않겠다고. 이젠 그런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고! "어서 가. 잘 가~" 거의 마족을 떠밀어서 내보냈다. 후후후. 이젠 귀찮은 일에 안 휩쓸릴려고 이런 짓도 한다. 왜. "인간. 왜 나를 헤치지 않지?" "그냥. 내게 피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는 날 한참 바라보더니 사라졌다. 뭐, 좋은 일 했군. 가와세리크 잎은 추억의 물건이긴 하지만, 냅두면 저런 얼빵한 마족이 계속 들어 올테니. "없애주지. 후후후후." 가와세리크 잎을 없애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요 근래, 느끼는 일이지만, 뭔가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뭐지? 이 위화감은. 방으로 다시 돌아온 내게 유니는 또 뭔가 말을 걸었다. "거기 비켜 주실래요? 청소해야 되니까.?" 유니였다. "엉. 그보다 일은 힘들지 않아?" "별로요. 여기 음식이 맛있어서. 괜찮아요." 그런 문제하고 별 연관이 없어 보이는 데. "그래.. 그럼 됐네..." "참, 공자님은 아는 것도 많으시죠? 그럼 혹시 가와세리크 전설을 아세요?" 모를 리가 있나. 내 이야기인데 말야. "라플의 이야기 말야?" "네~" "그건 왜?" "이번 마을 축제 때 그걸 한데요. 전 꼭 엘프 아가씨 역을 하고 싶어서요." 쓸데없는데 열 올리는 군. "이야기... 해줘?" "네." 뭐, 안될 것도 없지. 벌써 한참 전의 일이잖아.. 이젠 잊을 때도 되었어. 안 그래? "그러니까.. 그건 벌써 몇 십년 전의 일이지... 라플이라는 마법사와, 엘프 아가씨, 그리고 지미르라는 청년 검사 셋이서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여행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엘프 아가씨가 병에 걸렸지. 숲에서 마법 약초에 닿아서 그만 독에 중독 되고 만 거야. 지금이야, 일반 숲에 마법 약초가 있지 않지만, 예전에는 정말 무지무지 하게 많았거든. 하여튼, 그녀가 쓰러지고 두 명의 청년은 해독약을 찾아야 했어. 그리고 그 때, 마족 중에 동쪽 숲을 지배하는 자가 협상을 제시해 왔지. 라플을 보내주면 자신들이 해약을 그녀에게 주겠다는 것이었어. 라플은 당연히 갔지. 그 멍청한 사내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간 라플은 그만, 마족에게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어. 왜, 마왕을 무찌르려는 것이니 하면서, 카와세리크 잎으로 만든 옷이 입혀지고, 그는 죄수들보다 더 괴롭힘을 당했지. 그러나, 죽지는 않았지. 왜냐면, 원래, 그 약에는 주술이 걸려있었는데, 그 엘프가 그 약을 먹으면 그의 목숨이 사라져 버리는 그런 주문이었던 거야. 라플이 자신을 위해 갔다는 소릴 들은 엘프는 약을 먹지 않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마족에게 찾아갔지. 동쪽 숲을 지배하는 마족은 이 엘프와, 목숨도 마다치 않는 어리석은 두 남녀를 신기하게 생각했어. 그래서 약속했지. 너희들의 사랑이 백년동안 변치 않는다면, 그 독은 영원히 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유니는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라플은...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도 라플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내기는 마족이 진 것이지." "썰렁한 이야기네요." 썰렁하다니! 아까 그 이야기에 열 올린 건 누구고! "그래. 어리석은 연인의 이야기지." 더불어, 마족과 계약하는 놈이 미친놈이라는 좋은 교훈을 얻게 해준 모험이라고나 할까. "사실, 그 이야기에는 후속 편이 있어." "뭔데요?" "그 라플이라는 대 마법사는 마족을 토벌하면서 그 마족이 사는 동쪽 숲은 없애지 않았어. 이유는 백년 뒤에 엘프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라는 생각이었거든." "음.. 그럼 그 엘프는 그 숲을 없앴나요?" "나도 그건 잘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그 마족은 분명, 그 동쪽 숲의 주인의 부하 중 하나였다. 왜 내 성에다 알을 낳아둔 거지? 음... 그 마족에게 무슨 일이 있기는 한가보군. 나하곤 이제 상관이 없는 일이지. "근데 마을 축제라니.. 그게 또 뭐냐?" "헤헤헤. 참, 세이님 에게도 연극에 한번 도전해 보라고 하세요!" 목적은 이거였군. 남의 과거지사까지 꺼내게 하더니 말야. "그러지 뭐. 녀석도 노는 건 좋아하니까 말야. 대신, 안 간다고 해도 난 모르는 일이야!" 그녀는 여전히 빙긋 웃었다. "제...엔...장.." 여성에게 주목받는 것이 남자들의 꿈인데 말야. 아이고... 이젠 남자구실도 못하는 구나. 하기사, 이 나이에 주목 받아봐야 뭐 하겠어. "세이야.. 검술은 잘 되어 가냐?" "아뇨.. 마법 스펠 외는 거라도 빼주시면 당장 에라도 위대한 검사가 될 거 같아요." "야, 원래 위대한 검사는 똑똑한 법이야. 그리고 스펠을 외우면서 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누가 그래요!" 저요! 불쌍하게 검을 수련하는 세이를 뒤로하고 난 다시 가와세리크가 심어져 있던 곳으로 왔다. 뭐, 더 이상 볼일은 없지만... 그래도... 차라리 여기에다 풀이라도 심어볼까 하고... 나는 주머니에서 씨를 꺼냈다.. 항상 상비되어 있는 씨는. "먼저, 식충식물... 그리고, 만드라고라스, 세콰이어.. 어, 이건 좀... 바오밥.. 이건 좀 무리다. 음." 어디 괜찮은 풀 없나... 난 왜 이런 것만 들고 다니는 거냐. "어라라? 가와세리크.. 다 없앴어요?" 마족이었다. 음. "아, 그거, 좀 귀찮은 식물이잖아. 그나저나 뭘 심어보는 게 좋을까.." "음... 아! 저한테 지금 기가 막힌 씨앗이 있는데. 절 해치지 않는 대가로 드리죠." 뭐...이상한 거 아냐? "최고의 독약 원료, 펨니코안이에요. 잘 키우면 여럿 그냥 죽이는 건 시간 문제가 되지 않지요. 적극 추천합니다!" 사양합니다. "아, 됐어. 맞아. 혹시 근래에, 마족들이 실종된 일이 있어?" "네? 아, 그러고 보니.. 3명 정도가 실종 되었지만요. 뭐, 어디서 놀고 있겠죠. 워낙 놀기 좋아하는 녀석들이라." 3명 정도면, 마을 하나 오염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 혈액만 뽑아서 사용하지만 말야. "아무래도 그들 다 죽은 것 같은데." "네?" 뭐, 다 짐작이긴 하다만. "최근에 마을에서 마력 중독 사태가 있었거든. 아무래도 희석시킨 피를 우물에 푼 거 같아서 말야." 마족의 얼굴이 쟂 빛을 띠었다. "그런... 혹시.. 아, 저 가보겠어요. 알아보고 연락 드릴께요!" 내 연락처는 아시나.. 쯔.. 마족 성격 급한 게 어디 오늘내일 일인가? "내 신세야...이리저리 치이고 무시당하고.." 나는 별을 바라보면 한숨 지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끼요~!" 중얼거린 게 아닌가. 하여지간에.. 마을이 온통 ..아니지, 영지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있었던 마을 식중독 사건에도 불구하고, 역시 인간은 노는 유희의 인간이다... 세이 녀석은 휘든양에게 같이 축제에 갈 것을 중용하고 있었고.. 나야 뭐, 원체 노는걸 싫어하는 인간이니 말야. "휘든양? 여기서 뭐 하십니까?" 휘든양은 내 서재에 조용히 서 있었다. "제 동생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어야 하나요?" 내가 알 리가 없습니다요.. "글쎄.. 아마, 공작이 오면 어떻게든 하겠지요." "그는 분명 제 동생을 죽이려 들 거예요. 부탁이니... 이대로 풀어주시면 안되나요?" 그게.. 나도 풀어주고 싶다만. "음. 좀 곤란하군요. 사실 몇 가지 의혹을 받고 있어서.." "누구한테요?" 저요! "하여튼, 부인은 그냥 가만히 계셔주시죠. 안 그러면 이곳에서 나가셔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축제나 즐겨보심이 어떠실런지...?" 그녀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나가 버렸다. 참을성이 부족하군. "그럼, 난 일이나 해 볼까? 축제란 게 돈이 얼마나 드는지 모르나 보지..." 괜시리 나만 힘들단 말씀..! 힘들게 일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정원에 간 나는 휘든 부인의 목소리와 세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휘든 부인.. 곤란해요. 저도 해드리고 싶지만, 사실 전 스승님의 실력에 발톱에도 못 미쳐요." 어라라? "하지만, 당신보다 공자가 더 어리잖습니까?" 일단 겉모습은 그러하지. "네.. 그렇지만... 하여튼 안 되는 건 안 되요. 설사 제가 할 수 있다 해도, 제 스승을 배신할 수 는 없어요." "그는 스승이 아니라, 스승의 손자 아닌가요?" 뭐, 아무도 못 믿는 사실이지만, 세이는 내 제자 맞아. "에휴... 이해도 못하실 테니.. 말도 못하겠구.. 하여간, 맛있는 거나 갖다 드릴 테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그리고 세이는 휭하니 가버렸다. 의외로... 세이 녀석.. 아직 정말 사랑이 뭔지 모르는 군. 아직 애라니까. "휘든 부인." "...!..." 뭘 그렇게 놀라시나...? 죄진 게 많으시군. "키히 휘젠을 아나요? 제 동생은 그분의 제자에요! 건드리면 용서하시지 않으실 거예요!" 그 휘젠이 바로 내 옛 애인이라니까.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사실 그 휘젠님이 오신 적이 있었죠. 근데 멋지게 실패 하시던데요?" 경악. "그럼 당신은.. 혹시 마족 인가요?" 아니, 마족이 그렇게 흔하니? "이 마법진은 마스터급의 마족 3명이 몰려와야 간신히 해체할 수 있을 껄요? 그리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나한테 들키겠지. 중간에 정신집중이 흐트러지는 날에는 그냥...콱!" 이지.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지만, 걱정하지 마시지요. 내가 죽게 하지는 않을 테니. 뭐, 나 빼곤 저 마법진을 해제할 수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녀는 이내 나를 노려보고 사라져갔다. 이거, 미움을 산 듯 하이. 아, 이래서 인기인은 괴롭다니까. "그럼 백의 아가씨에게 놀러가야지~~" 그녀는 역시로 나를 노려보았다. 한 자매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재능. "어이!~" 그냥 불러봤어. "왜 온 거지?" 이젠 반말하네..그려. "정말 키히의 제자야?" "그렇다. 그렇다면 어쩔 셈이지?" 뭐, 그럼 내 제자도 되는 셈이라. "그럼 풀어줄려고." 좀 의외였나? 그녀는 약간 놀란 눈을 하고 날 쳐다보았다. "어째서지? 그 분의 제자라는 사실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 때도 알았지만, 넌 분명히 젊기는 하지만, 스승님 보다 실력이 있지는 않다. 물론 확실히 천재란 이런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그런데...어째서지?" 키히를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나... 음... "글쎄.. 너까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할 이유는 없거든. 그러나, 내가 풀어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내가 좀 곤란해져.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알 리가 있나? "글쎄... 공작의 양자라는 입지 때문이라면... 국왕폐하에게 협력한다면, 그 정도야 상관없지." 근데.. 난 그것도 좀 곤란해. "뭐, 그건 좀 곤란하고, 대신 작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어?"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상한 부탁이면 안돼." 누가 잡혀 있는 건지.. 원. "별거 아냐, 그냥, 나랑 같이 마을 축제에 가면 돼. 그리고 바로 헤어져서 도망가는 거야. 나는 어차피 여기서 떠날 이유가 없으니까. 사실 잡기도 내가 잡았잖아. 안 그래?" 그녀의 얼굴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싫음 관두고." 늙은이 하는 말에 의심을 갖지 말라. 이거야. "좋아. 그렇게 하지." 그래서, 나는 아주 가볍게.. 나의 피를 약간 묻혀서 마법진을 없애버렸다. "피의 주문인가?" "뭐, 그냥 여러 주문 외우기 귀찮잖아." "..." 그녀의 얼굴에는 별난 놈이라는 말이 새겨지고 있었다. 우리는 곧장 마을로 갔다. 마을은 정말... 축제다웠다. 사람들은 웃고 있고,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 쪽에서는 춤을 추고 있었다. "자, 어서 도망가라고." "...그래." 고맙다는 말도 안하고 급히 가다니.. 엉? 그녀가 가는 쪽에 한 인영이 보였다. 뒤를 돌고 있지만, 틀림없는... 키히였다. "이런!" 원래 키히는 착하고 밝고 아름답지만...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더군다나 지금까지의 그녀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매우 잔혹하게 반 국왕파를 숙청했다고 한다. 일련의 생각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그녀는.. 설마, 사람들을 죽인걸까? 마족을 죽여서.. 그 피를 우물에 탄 걸까? 그래서 공작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 걸까...? 응? 그런 거야? 곧 이어 나는 키히의 손에서 빛나는 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준지는 백의 아가씨 에게였다. "젠장!" 늙은이를 고생시키다니! [물. 의. 방. 어. 막] "꺄악!~" 백의 아가씨 옆으로 불 화살들이 솓구쳐 올랐다. 그리고 백의 아가씨는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아마.. 스승이 공격할 줄은 몰랐겠지. "젠장! 키히! 이게 무슨 짓이냐!" 난... 열 받았다. 키히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물의 방어막... 대단하군. 그의 실력보다.. 대단한 거 같은데?" 그녀야? 정말...? 아냐.. 저건.. 저건. "하지만, 이 애는 죽어야 해. 그리고 너도. 넌 그가 아니니까." 무슨 소리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 키히. 어째서.. 어째서. "무슨 짓이야! 이 앤 너의 제자다!" 그녀는 엘프 특유의 싸늘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제자? 후후후... 그래. 제자. 그러나 이 아인 내게 방해가 된다. 그래서 없어져야 해. 이번에 정말.. 죽인다." 정말.. 정말.. 키히인거야? 아니지? 그렇지? 그냥 괴물이 아냐? [불. 의. 화. 살]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스승님..." 안돼! [물. 의. 방. 어. 막] 주문을 펴서 그녀를 보호한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눈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나. "키히...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응?" 키히의 푸른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무엇을 말이지 공자? 왜, 나를 방해하는 것인가? 너는 죽이고 싶지 않다. 넌 그의 손자이니까.." "키히.. 난.. 아냐.. 아냐. 넌.. 넌, 내가 아는 그 키히가 아냐!" 그럼.. 이건 누구야? 뭐지? 응? "흥... 인간들이란,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려 하는 군." 키히... 난.. 난.. 널... 사랑했었는데. -너희들의 사랑이 백년동안 변치 않는다면.. 독이 발작하지 않을 것이다.- "캬악~!" 키히가 허물어지듯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는 검은 반점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건.. 이건. "키히!" 난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맥을 짚었다. 한눈에 이것이 무슨 증상인줄 알 수 있었다... 이건... 그 때 그 독이다. 아직 백년이 지나지 않았다. 아직 한 3년정도 남았다. "어라라? 스승님! 이게 왠 굿이에요?" 이런 상황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네가 존경이다. "맙소사! 엘류시아!" 휘든 부인은 황급히 백의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맙소사! 이 피 좀 봐!" 희미한 그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나보다.. 스승님을..." 이 독은 한때 나를 절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의학을 공부하게 만든 계기가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늙으면,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 그녀가 목숨을 잃게 될까 봐. "키히.. 키히.. 걱정 마. 이번엔 치료할 수 있으니까..." 내 눈에는 그녀의 머리카락 얼굴조차도 애처로워 보였다. 이 독이 발작했다는 것은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거나.. 변했다는 이야기다. "이번엔.. 널 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황급히 그녀를 평평한 땅에 눕히고 세이에게 약재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한시가 급하다. 그리고, 주변의 흙을 긁어모았다. "뭐 하는 겁니까! 그보다 의원은 어디 있죠? 제 동생을 치료해야 해요!" 휘든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키히가 먼저요." 그녀는 열에 들뜬 듯 했다. 이 독은 엄청난 고열과 고통을 수반하며, 발작 후 고작 30여 분 만에 사망하고 만다. "스승님! 약병을 가져 왔어요!" 제자도 뭔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나 보다. "좋아." 이젠 모든 게 준비되었다. 예전처럼 허무하고 어리석게 빌기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보다는 낫다. 이젠 그녀를 살릴 수 있다. "이젠 키히를 성으로 옮겨라. 배개는 좀 높다 싶게 하고. 그리고 방은 따뜻하게 해야 한다." "스승님, 하지만, 지금은 더운데요?" "그래도 불을 때는 게 좋아." 그리고 나는 그제야, 백의 아가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이젠 괜찮아. 하지만, 도망치게 하려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군." 휘든부인이 나를 의아한 듯이 쳐다보았다. "뭐, 그렇게 놀란 얼굴로 쳐다보지 말라고. 난 원래 심경의 변화가 급격한 놈이니. 흥." 누누히 이야기 하지만, 늙은이를 괴롭히면 못써요. "공자님. 마을에서 변고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쟈이츠였다. "별거 아냐. 좀 피곤하군. 부탁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요." 나는 손으로 키히의 방을 가리켰다. "저 방을 지켜 줘. 아무도 못 들어가게. 독은 다 치료했지만...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마법 방어막으로는 안심이 안돼." "예. 알겠습니다." 제자인 세이는 나를 멀뚱거리고 쳐다보았다. "왜?" "그녀랑 아는 사이에요? 엘프잖아요." "됐네... 알 거 없어." 내가 몸을 돌려 가려는 찰나, 유니가 나에게 충격 발언을 했다. "꼭 노인네 같아." 흥! 나 원래 노인네다! 난 서재로 가서 편안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중얼거렸다. "이젠.. 괜찮아. 괜찮아.. 이번엔 살렸어. 그래. 그래.." 그리곤 곧바로 잠에 들었다. "응...으..." "엘류시아! 정신이 드니?" 눈을 뜨니.. 그리운 언니가 초췌한 모습으로 있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위급한 순간에 물의 방어막이 나타났기 때문에.. 근데 그 공자는 어째서 반격을 하지 않았던 걸까... 그리고 왜.. 날 살린 것일까? "언니.. 휘젠님은요?" 언니의 눈에는 한순간 증오가 떠올랐다. "그녀는 널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왜 그녀를 걱정하는 거지?" 그래도 나의 스승님입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겠지요. "언니도 참. 휘젠님을 항상 번거롭게 해드린 사람이 바로 저에요. 사절단 중에서도 가장 못난 걸요?" 언니는 나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이젠 그녀를 스승으로 모시지 마라. 차라리 내 영지에서 위험한 일 하지 말고 살자. 응?" 언니는.. 내게는 참, 자비롭단 말야. 후후훗. "그보다, 그 공자는요?" "아, 글쎄, 너보다 휘젠님을 먼저 치료하더구나. 그리곤 너를 치료했다. 지금은 아마 서재에 있는 거 같던데. 왜?" 그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겠지. 근데 왜.. 속이 쓰리지? "저 잠깐 다녀올께요." 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재로 갔다. 걷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사실, 나야 뭐, 별로 다친 것도 아니니까.. 서재로 가던 중, 공자의 기사가 방을 지키고 있었다. "저.. 이방에 누가 있나요?" "키히 휘젠입니다." 그렇구나. 다시 걸음을 옮겨 방을 찾았다. 이곳의 지형은 침투할 적부터 외어두었기 때문에... 이럴 때 쓸모가 있을 줄은...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괜찮아. 괜찮아.. 이번엔 살렸어. 그래. 그래.." 그의 은발은 아무렇게나 쇼파에 어지러져 있었고, 몸은 꽤나 지저분했다. 그리고 피곤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어릴 적 스승님의 방에 가면 항상 있었던 그 초상화의 인물과 똑같았다. "키히.. 키히.." 왜.. 가슴이 저린 걸까...? 응?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아마 이럴 때 쓰는 걸 꺼다.. 나의 아름다운 휘든 부인은 시무룩해져서 동생을 간호하고 있었고, 사부님은 모두를 치료한 뒤, 휘적거리면서 방으로 가셨다. "쟈이츠." "왜요?" 쟈이츠는 방을 지키고 있었다. 이 방에는 엘프가 있다고 한다. "이방에 들어가 보면 안될까?" "음.. 곤란합니다." 그려? 할 수 없지...궁금했는데. 스승님이 왜 그렇게 힘들게 보이는지. "그나저나, 스승님이 외라고 준 스펠 북은 다 외우셨습니까? 오늘 축제에 가는 조건 이잖습니까?" 그렇다! 윽! "어라? 여기서 뭐하세요? 세이님?" 유니가 방긋거리고 있었다. "응.. 그나저나, 너 오늘 저녁엔 뭘 하는 게 좋을까?" "도와 드릴까요?" 윽! "그래도 상관없지만... 내가 시키는 것만 해." "야, 낭만적이다... " 뭐가....말이냐. 얼굴에 따뜻한 빛이 비춰서 나는 간신히 아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소요를 들을 수 있었다. "스승님이 밥을 굶었어! 저 안에 있는 것은 틀림없이 스승님의 탈을 쓴 괴물이야! 자, 어서 한번에 들어가는 거야!" 이봐...멋대로 죽이지 말아달라고. "야, 세이. 아침은 죽으로 해줘." 문을 열고, 험악한 인상으로 노려보자, 유니, 세이는 단숨에 쫄아 들었다. "그리고, 참, 세이 너, 스펠북은 다 외었겠지? 아무리 지구가 무너져도 넌 그걸 외어야 해. 알았어?" 그리고 뒤돌아 쟈이츠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세이와 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족도 흡수한거야!" "좀.. 비약 아닌가?" 난 천천히 쟈이츠에게 인사하고 그에게 그만 가서 쉬라고 했다. 그리고 마법을 풀고 그녀에게 가보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부기가 다 빠지지 않아서 일어나기도 힘들 것이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마터면 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 "... 독이 발작하다니..." 키히의 입에서 나온 탁한 목소리는 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째서 나를 구한 거지? 아니 그보다, 이 독에 대한 해독제는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없는데..." 그렇지.. 난 평생.. 그녀에게 내 진짜 정체를 밝혀선 안 되는 걸까? 밝혀도 믿지 않는다면.. 연기하는 것이 좋겠지. 그녀는 예전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나으니까. "예전에.. 라플.. 제 조부께서 그 해독제를 항상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에 변고가 있다면... 언제든지 치료하도록..." 그녀는... 나와 그 마족의 거래를 알지 못했다. "그렇구나.. 그랬어.. 그는.. 어떻게 죽었지? 살아 생전 행복했니? 날... 잊기나 한 건 아니지?" 어떻게 널 잊니... 그리고, 행복할 수 없다. 너가 없는데. "행복하게 잠드셨습니다. 그리고, 키히님을 항상 염려하셨지요." 하지만, 이름은 잊었다...그녀는 나를 보고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그의 아내는 굉장한 미모였을 꺼야. 너같이 예쁜 애를 낳다니... 그래. 그랬구나. 후후후.. 흑.. 윽. 흑... 나.. 나.. 그가 살아있을 꺼라고 항상 생각했어.. 어리석지. 인간은 그렇게 오래 못 사는 데... 난.. 엘프인데.. 그래도 그는... 날 사랑했어. 나도 그를 사랑했단 말야. 그치만... 그래도 난.. 난... 잊을 수가 없었단 말이지. 지금도 그렇고.. 아마 영원히 그럴꺼야... 그치만.. 그는 이제 없어. 그렇지?" 그녀는 울고 있지만.. 예전처럼 난 그녀를 달랠 수 가 없었다. "키히님..." 그녀의 작은 머리를 안고 슬픔에 빠진 그녀를 웃게 할 수 도 없고.. 예전처럼 토론을 벌일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다만, 행복하길 빌 뿐이겠지. 나는 그녀가 울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울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다시 방을 나왔다. 난 그녀에게는 고작해야 예쁜 애 정도니까. "아...!" 백의 아가씨였다. "스승님은 괜찮으신가요?" "지금은 가지 않는 게 좋아. 좀 있다가 점심때 이야기 해보지 그래?" 그리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가고 있었다.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내게 말했다. "저.. 고마워요." 겨우 고맙다는 소릴 듣는 구만... 하하하...그리고 나는 다시 서재로 가서 오늘의 할 일. 엄청나게 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며칠 놀면 이렇게 된다.. 흑.. 키히.. 내가 더 울고 싶다. "언제 다 하냐..." 허망..허망.. "저.. 유니에요. 이 차 드시고 하세요." "누가 만든 차야?" "네? 제가 만들었는데요?" 음.. 먹지 말아야지. "아, 그래? 두고 가." 그녀가 나가자, 난 바로 그 컵의 내용물을 비료로 썼다. 이 화분은 날이 갈수록 노래지는 것이... 황달이다. "다음엔 간유나 사올까...(주 : 황달엔 간유가 좋습니다. 단, 간에다 우유 섞은 거 아닙니다요~~)" 보통 이곳에 온 이후로 이렇게 조용한 적은 처음이었나 싶다. 밖에는 정겨운 세이 기합 받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서류 정리를 백의 아가씨 시켰다. 엘류시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단다... 그런데, 이 처자는 일 처리 참 잘한단 말야. 후후후. "확 스카웃 해버려?" "무슨 소리지요?" 키히였다. "아, 키히님, 다름 아니라 저 백의 아가씨 제가 스카웃 해버릴까 해서요. 하하하." 난 대단히 멎적게 웃었다. "그러세요." 엉? "네? 하지만, 사절단... 인데." "그것 보단, 당신 아래 있는 것이 안전하겠죠. 공자. 제가 볼 땐 당신의 마법실력은 왕년의 라플을 압도하니까..." 힘하고, 안전이 비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음.. 저야 좋지만.. 키히님은 앞으로 어쩌실겁니까?" 그녀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저야, 다시 성으로 돌아갈 겁니다. 할 일도 있고. 당신은 당신 조부의 복수를 바라지 않나 보죠?" 나야, 워낙에 건망증이 심하니까. 천재는 원래 그런 거라고. "별로... 원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리고 전, 몰랐는데요? 누가 그랬던지.. 워낙 오래 전 일이잖아요." 그녀는 투명한 눈으로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전 엘프.. 당한 것은 반드시 돌려주는 종족입니다. 용서할 수 가 없어요." 엘프가 그렇게 집요한 종족인지는.. 몰랐는데.. 헤겍! "저기.. 조부님이 당신에게 나쁘게 한 거 많지 않았나요?" 그녀는 처음으로 나에게 미소지었다. 뭔가. "사랑하니까요." 그리곤 다시 일어서서 가버렸다... 남겨진 나의 가슴 찢어지는 건 안보이냐! 젠장. "야! 세이! 한바퀴 더 돌아!" "엥? 스승님! 다 돌았는데 왜요?" "그냥! 내 기분이 더러워서 그런다. 왜! 불만 있냐!" "스승님.. 너무해.. 나만 미워해.." 에잇! 늙은이 마음이 편치 않군! "공자님. 대 상인이 공자님께 신기한 물건을 진상하러 왔습니다만.. 보시겠습니까?" 어라라? "우와! 전 보고 싶어요. 스승님~~" 세이 녀석.. 하여간 신기한 건 되게 좋아하네. "전 반대입니다." 엘류시아는 정색을 했다. "엉? 왜?" "수도 근방의 영지에서 보고된 바에 따르면, 영주나, 혹은 영주의 측근을 죽이는 암살자들이 대 상인으로 변장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상인의 출입이 많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에잉.. "그런 거 다 따지다간 세이 한테 맞아죽어요. 들여보내. 언능." 그렇게 대 상인은 들어오게 되었다. "공자각하. 이번에 제가 아주 특이한 물건을 사들였사옵니다만... 이것을 각하께 진상하고저.. 하옵니다." 마른 형의 상인이라니.. 신선하군. "무엇이지?" "거울.. 거울입니다..." 요놈 봐라.. 사람 놀리냐! "그래? 거울이 특이하다니 것도 이상한군. 보여봐라." 그는 갑자기 사색이 되었지만... 이내 물건을 조심스럽게 헝겊을 풀었다. "이 거울은.. 바로. 진실의 거울입니다." 일동은 조용히 그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은 주변 장식이 그냥 평범하진 않았다. 확실히... 보통 사람이 보면 그냥 그렇게 보이겠지만, 이 거울의 장식은 아주 오래 전 건국 초기 전의 양식 이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울이로군." 나는 아주 신기해하면서 상인에게 물었다. "그럼, 이곳엔 진실이 비춘다는 것이야?" "그게... 그렇지가 않고, 괴물만 비추어지더군요. 괴물이 아니라면, 무슨 생물.. 하여간, 인간으로 비춰지는 모습을 보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일행은 모두 이 거울이 마귀의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난 이들의 무식함에 웃어주고 싶었지만... 뭐, 이런걸 아는 쪽이 이상한 거지. "이 거울은 원래 사람의 본래 모습. 즉, 내면 깊숙한 곳을 비추는 것이다. 그러니 괴물이 비추어질 수밖에. 아마, 자네 수행원들이 주로 이 거울을 보았겠지? 그들은 혹, 다 검사가 아니었나? 용병이거나." 상인의 얼굴에는 놀람이 스쳐갔다. "그러하옵니다... 대단하군요." 뭘...에이 쑥쓰.. "좋아. 야 한번 세이 너도 비춰봐." "만약에.. 괴물이라도 뜨면.. 으.." 굼벵이 아닐까...괴물은 네 성격으로 봐선 아무래도 무리란다. "재미있군요." 백의 아가씨의 얼굴에는 흥미가 스쳤다. "으... 좋아!" 세이는 거울의 앞에 섰다. 그러자 거울이 일렁이면서 하나의 모습을 형성했다. 6. 진실의 거울. "우헤헤헤! 저럴 줄 알았지!" 세이의 얼굴은 구겨지고 말았다. 거울에는 초록색의 애벌레가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도 비춰보세요!" 어라라... 이거 참. 왜 나까지 덤테기 씌우니? "제가 먼저 해보죠." 쟈이츠가 거울 앞에 섰다. 곧이어 거울이 일렁거리면서 굳은 바위가 나타났다. "뭐, 돌탱이 아니랄까봐.." 나야 뭐, 그 뜻은 알지만, 이들이 자만 할 까봐 일부러 알려주진 않았다. "어디.. 이번에..는... 어?" 키히가 조용히 거울의 앞에 섰다. "저도 궁금하네요." 거울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 모두 놀라면서 키히에게 물었다. 도대체 누구냐고...나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거울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고 말았다. "휘젠님. 그분은... 분명 스승님 방의 초상화의 주인공이 아닙니까?" 키히는 미소지었다. "응. 그래. 이 사람... 라플..." "나만! 나만 억울한 거 같아요!" 정신 차려라.. "괜찮아.. 나 돌탱이야..." 상당히 상심했군. "저는 무엇으로 나올까요?" 엘류시아는.. 글쎄...? "어머머! 이건... 도대체 뭐죠? 검... 아닌가요?" 그러나 차가운 느낌이 들지 않는 걸로 봐선... 좋은 거다. "좋은 거야. 엥! 야 세이!" 세이는 거울을 내게 들이대었다. 젠장! "어라라? 스승님.. 왜 아무 것도 반응이 없죠?" 세이의 말대로 거울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야, 잘 봐. 변함없는 마음! 바로 이거 아니겠어?" "스승님.. 땀 흘러요." 죽... "공자.. 거울이..." 거울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이야~ 드디어 찾았다. 라...읍... 왜 그래요!" 난 재빨리 마족으로 보이는 프이의 입을 특어막었다. "시끄러! 프이. 무슨 일이지?" 모두의 당황스런 시선을 뒤로하고... 난 프이에게 질문했다. "엉?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왜 그렇게 젊어졌어요?" "그건 나중에 말해 줄테니.. 무슨 일이야?" 빨리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 "흐응.. 당신이 그렇다면야. 좋아요. 당신의 친우이자, 저의 주군이신 랄케님의 말을 전하죠." "좋아. 전해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도와줘!" 조용... "그게 끝이야?" "네!" 이런 젠장... 뭘, 도와 달라는지 이야기해야 할 거 아냐! "랄케는 어떻게 되었는데 그래?" "멋지게 잡혀가셨어요. 누군지는 모르고. 뭐, 아무래도... 마족의 짓이 아닐까 싶어요." 너도 마족으로 보여 임마... "저.. 스승님.. 이거 마족 아닌가요?" "어머머? 별 꼴 다보겠네. 너 그 때 그 꼬마 아냐? 짜식. 더럽게 많이 컸다. 너 어렸을 땐 내가 너 똥 지저귀도 갈아주고 그랬어. 마." 단, 이틀... "좋아.. 그래서, 어디서 납치된 거야?" "몰라요. 그냥 저한테 메세지가 들어와서요. 제가 옆에 있었다면, 그렇게 잡혀가시진 않았겠죠." 가만.. 가만.. "그럼 잡혀간 건 어떻게 아는 건데?" "음... 짐작으로요." 죽일테다...키히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그럼 수도로 가봐야 하겠군요. 그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만... 그리고, 엘류시아는 저 공자 옆에 남도록 해. 어차피 성에 돌아가도 처벌을 면할 수 없다면.. 여기 있는 편이 나을 거야. 그럼." 그녀는 주문을 외었다. [전. 이. 이. 동] 항상 생각하는 건데 말야...마법은 정말 매정하다. 난 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마법에 걸려있어. 알아?" "네?" 아마, 랄케가 자기를 잡아간 사람이 누군지 모르게 하려는 거 같다. 그럼 뭐, 범인은 누군지 알만 하군. "프이. 가봐. 니 주군. 무사해. 그리고, 그 메세지는 잘못 전달 된 거야. 그냥. 해본 소리라고. 그래..! 하이텐의 저택에 가면 있을꺼야. 그럼. 가보도록." "흐 응... 그렇게 할께요. 그럼 빠이~!" 다신 오지마. 에잉. 그래서 거울의... 가만... 가만... 지금 거울에 내가 정면으로 서 있잖아! "스승님? 이게 뭐에요? 스승님은 이상한 게 뜨네요."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는... 정지된 사물이 아닌... 별들과 하늘, 해, 바람이 불고 있고,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약속의 시간이 도래하였다.- 진실의 거울은... 내 내면의 세계가 아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었다. 다행이지 뭐. 약속의 시간이라는 이야기는... 밥 때가 다 되었다는. "스승님.. 갑자기 무지 밥이 먹고 싶어요." "나도... " "유니도요!" 우린 그렇게 밥을 퍼먹었다.. 저거 혹시 식욕을 돋구는 마법 거울 아냐? 이런 의심을 하면서 밤에 잠이 들었더니 매우 재미있는 꿈을 꾸었다.... 거울이 나에게 밥을 먹이는. "진실의 거울이에요. 제가 선물 할께요." "필요 없어요. 가져 가십시요." "라플... 그렇지만, 이건 당신을 위해서 내가 동료를 죽여가면서 만든 거라구요!" "누가 그런 일 하라고 했습니까? 당신은 마족. 나는 인간. 뭐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당신이 나한테 잘 하는 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만 두시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이 거울은.. 그래요. 이걸 받아주시면.. 좋겠어요. 당신이 세상에 있다면, 언젠가 이 거울은 당신에게 갈 테니까.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진실만을 알려줄 거에요." "후.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마족이야." "헉!" 이불이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뭐였지? 그러고 보니 뭔가 엄청 재수 없는 꿈이 떠오른 듯 하다. 저 거울의 이름은 진실의 거울.. 지금은 아무 것도 비춰지지 않는... 그나저나 이게 어찌된 일인지... "일어나셨습니까?" 유니였다. "응. 아침은 굶을 꺼니까, 알아서 먹으라고 해." "네." 유니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다시 방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근데, 나 마족이랑 아는 사이였나? 이거 참... 난 마족 죽이는 것을 생의 보람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말야.. 이게 도대체... "에이.. 모르겠다. 일이나 하자." 오늘의 안건들... 정말 기가 막혔다. 별 해괴한 것들이 다 올라와 있었다. 축제 기간에 쓴 것들이라서 그런지, 완전히 반 장난으로 쓴 것들이 대부분 이였다. 그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공자의 아침식사를 평생 먹어보고 싶다는 것인데... "나 아침 굶는데..." 그럼 이 사람은 평생 굶어야 하나...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오도록." 엘류시아는 하얀 머리를 날리면서 들어왔다. 그냥 들어오면 안되나? "무슨 일이지?" "전 구체적으로 이 성에서 무슨 일을 할까 물으러 왔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켜 주십시요." "흠..." 시킬 만한 일이 너무 많아서 생각이 안 난다... 뭐가 좋을까나. "그래, 혹시, 토목공사에 참여한 적 있나?" "네? 성을 짓는 일 같은 거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내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당혹해 하면서 말했다. "해 본 일이 없어서..." 그랬군. 그럼 약초나 캐라고 시킬까..? "그럼 여기 집사 할려?" 바로 이거야! "네? 집사라면 집을 지키고..." "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사실 너도 봐서 알겠지만, 세이나 자이츠는... 전형적인 다혈질이라 침착하고 냉정한 일에는 걸맞지 않지. 안그래?" 그녀의 얼굴에는 별 표정이 스쳐지나 가지 않았다. 사실, 얘네들의 칭호는 바로, 냉정 아냐.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빠르면 빠른 게 낫지. 그럼 당장 시작하라고." "네." 아, 오늘은 사람들 교통정리를 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겄구나... 난 즉시 생각난김에 유니를 불렀다. "아, 유니야, 오늘은 정말 평화로운 거 같지 않나?" "그렇네요. 그나저나, 제 쿠키 맛있데요?" 싫은 기억이 떠올랐다. "세이는 원래 쿠키 좋아하지." "아이 좋아. 잘 됐다. 어? 누가 말을 달리면서 이곳으로 오는 데요?" 창 밖에 붉은 말을 탄 병사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손으로 기를 들어보였다. 그 기는 왕의 기였다. "피스트레이카 공작의 영지의 관할인은 왕명을 받으라!" "어떻게 왕의 이름을 받으라는 건지... 원." 손을 들어서 받아야 하니? 세이가 옆에서 참견했다. "어서 나가봐야지 않아요?" 지가 들어오겠지. "전, 국왕폐하의 명령을 받고 공작 영지의 관할이신..." 내가 말을 받아주었다. "프라오니스요." "프라오니스 공자에게 명을 전달하러 온 사자입니다." 으르렁. "삼가 명을 받사옵니다. 말씀하시죠."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펴면서 말했다. "피스트레이카 공작 영지에 있는 공자는 즉시 병사를 이끌고 대리아 국의 잔당 소탕에 나서라." 호호... "제가 직접 가야 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저는 가보죠. 참, 전하의 개인적인 전언을 드리죠. 잘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이만..." 사신은 정말 모두의 마음에 기이한 느낌만 주고는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빠르다. "그래. 그런데, 누가 가냐?" "스승님은 어려서 맞는 갑옷도 없을텐데." "세이야.. 원래 사령관은 뒤에서 폼만 잡아도 돼." "스승님은 잡을 폼이 없잖아요?" 죽고싶나... 그렇게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나의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챈 휘든 부인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는 병사를 모을 일이 문제군요. 공작님이 쓸 만한 병사를 다 데려 가시고, 사실 정규 기사는 여기 계신 자이츠님 밖에는 없잖습니까?" 그렇네. 이 자식 알고 보니 정규기사지. 하도 멍청해 보여서 잊고 있었다. "어쩌죠?" "유니는 그런데 가고 싶은데." "이봐. 넌 참고..." "왜! 유니는 어리다고 구박하는 거예요! 그러는 공자님은 저보다 어려 보인다고요!" 어린애는 말 잘들어야지...그리고 난 사실 차밍한 백대라. "네 네.. 유니님 말은 잘 알겠지만... 그렇긴 해도 갑자기 군대를 만들면.. 가만. 나 만들어볼까? 대신 남들로부턴 엄청 욕을 먹기는 할텐데... 어때?"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어떻게 군대를 만든다는 것인가요? 마법으로는 오래가지 않는데... 그리고 한번 칼 맞으면 사라지는.. 즉 환영 이잖습니까?" 나는 유연하게 손을 내 뻗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욕을 먹기는 한다는 거야. 용아병 까지는 무리라도, 해골병사는 껌이거든. 할까?" 엘류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흑 마법입니다." "그래? 난 그런 줄 몰랐어." 태연을 가장한 사악함이라는 거지. "그 뿐 아니라 마도 세계에서 추방될 수 도 있습니다. 마법사가 길들에서 추방된다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 지는 아시죠?" "흠. 미안하지만, 난 길드에 들어있지는 않아. 그러니 꺼리낄 껀 없군. 까짓 욕먹는 거야, 별 거 아니니까. 좋아. 어둠의 자식들로 하지." 다시 엘류시아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마법의 반작용은 어떻고요!" 나는 세이가 질색하는 무지막지하게 사악한 미소를 흘렸다. "너 같은 미숙 마법사나 그러지. 후후후." 그녀가 발끈 하던 말든.. 물론 세이 녀석 지금쯤 방 분위기 갱신에 힘 좀 쏟고 있겠군.. 흐흐흐. "응?" 거울에서 뭔가 검은 손가락이 나오고 있었다. "누가 보면 공포에 질려서 도망가겠네. 야. 나올려면 빨리 나오지 그래?" "케케켁... 재미있는 인간... 여전하군." "흥. 뭐, 그런다고 겁에 질리진 않으니까 염려 놓으라고. 나올 수 도 없는 주제에..." "그렇지. 네 덕에. 그나저나, 병사를 만들려고?" "그래. 거울 요괴 같은 너를 보면 항상 한숨만 나온다. 너 같은 놈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지만 서도 너가 하면 빨리 할 꺼 같아서." "흥... 그냥 부탁해. 부탁." "뭐. 어제야 너가 거기 있는 거 생각났어." "미안해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 거울. 기분 나쁜 추억이 가득 들어있어. 그래서 사실 널 거기다 가둔건 데. 쳇. 설마 쫓아 올 줄은..." "무슨 소리야? 내가 정겹지도 않아?" 누가 마족 자식을 정겨워 하냐! 시커먼 마족따윈 마도에나 있으면 된다고! "닥쳐..." "삐지니까 귀엽잖아?" 거울을 팰 수 도 없구. "너무 그렇게 하다보면 거울 깨는 수가 있다..." "그건 좀 곤란하다. 사실 요즘 바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주던데." 녀석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냈다. 어두운 방에서 거울이 이런 목소리로 말한다면. 확실히 마법사는 담력이 세야겠지? "재미없음 알아서해." "마도 공작자식. 뭔가 일을 꾸미나 보더라구." "이젠 나 그런 일엔 안 껴." "헤헤... 알았어. 전쟁이나 잘 하라고. 난 남들의 진실만을 알려 주니까. 너의 진실이야 난 모르지. 뭘지. 혹시 너야말로 마왕 아냐?" 거울을 흰색 천으로 가려버리고 나는 다시 서류 정리에 나섰다. 그럼 얼마나 병사를 만들어야 하나. 에휴. "스승님. 정말 해골로 병사를 만들어 낼 꺼 에요?" 녀석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한다면 한다." "그래서요. 굳이 그래야 한다면 제가 출전할 께요. 스승님. 스승님이 남한테 욕 먹는게 싫어요." 뭐야... 이거, 스승을 존경하기는 하는 구나. "어린데다가 욕까지 먹으면 너무 불쌍하니까." "너, 좀 혼좀 나라." 녀석을 몇대 갈기고 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고 있었다. "강한 거라면, 무엇이 있을까나... 음. 드래곤? 화력이야 좋지만, 한번 변 보면 장난이 아냐.. 먹는 식비도 가히 상상을 불허하고, 비용 면에서 안 좋아. 에잉. 역시 해골병사가 좋은데. 먹지도 않고." "스승님... 그러지 말고, 병사를 모아요. 아, 그 상인한테서 용병을 사는 게 어떨까요?" 에...? 그런 방법도 있군. 그치만.. 용병이라니. "하지만, 용병을 고용한 돈이 있을까?" "그...런 건 저가 알 리가 없죠." 네 그럴 줄 알았다. "이 거울을 팔까? 특이한 거울이니까, 돈이 많이 나올텐데..." "캬앗! 그만둬!" 세이는 조용히 현실 도피했다. 거울이 말하는 건 처음 본 거군. "왜? 어차피 팔아도 다시 나한테 온다면.. 뭐 상관없잖아?" 돈도 되고, 잃는 건 없고. 이거야말로.. 확실하다. "난 여러 가지를 알고 있고.. 또 유식하고, 거울 고유의 기능뿐 아니라, 상담의 역할도 하는데..." "그래도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역시, 돈. 돈이지." 거울은 일렁이면서 발광을 시작했다. "야, 그러지 마라. 치사하게. 나도 마족이지만, 나보다 심한 놈은 너밖에 없다. 어, 그러지 말라니까! 당장 내려놔! 알았어! 돈 내가 댈게! 젠장!" 후후후. "진작 그럴 것이지." "거울 등치는 건 너 밖에 없을 거다.." "뭐, 인생을 비관할 필요는 없지." 우는 거울은 보석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참, 다양한 기능이 있단 말이다. 후후후. "좋아. 고맙게 쓸게." "흐흐엉... 왜.. 왜.. 날 저런 놈한테 보낸거에요... 잉... 잉..." 후후후. 난 세이는 젖혀 두고, 엘류시아에게 보석을 넘겼다. 당연히 그녀야 기뻐했지. "어머! 이건 도대체... 이건 사안의 진주?! 이건, 프랄리의 다이아...! 그리고, 이건 샤트안의 눈물.. 이렇게 비싼걸.. 다. 어디서...?" 엘류시아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떠올라있었다. 당연하지. 이건 이른 바 마족의 물건들이니까. 마계의 보석이잖어. 히히히. "됐어. 출처는 따지지 말고, 가서 팔아와. 그럼 그 돈으로 용병을 고용할 수 있지. 후후후." 내 사악한 미소는 모두에게 어떤 불길한 그림자를 남겼나 보다. 엘류시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직도 내 인성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했군. "으...분명히 누군가에게 협박해서 삥 뜯은 걸 꺼야.." "아... 스승님은.. 그럴 분이.. 아닐 껍니다." 쟈이츠의 비 확신하는...음. "너무 사람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 어라? 유니.. 네가 왠 일로? "저 분은 저희 어머니도 고쳐 주셨단 말이에요." 오.. 그런 일도 있었지. "그리고! 무척이나 자상하세요. 제 동생도 마법학원에 보내주셨단 말이에요." 음. "또, 갖은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신다고요! 도대체 밤마다 누가 밤새가면서 일한다는 거 아세요!" 아... 이게 삶의 기쁨이지. "단, 인간성은 좀 문제지만." 커흑...! "됐어. 엘류시아는 갔다오고. 쟈이츠는 남은 기사들을 집합시켜서 일단, 출전할 만한지 살펴보고, 저녁까지 나한테 보고해. 그리고, 세이는... 음... 마법 도구를 챙겨 놔. 여차하면, 정말 해골병사를 써야 하니까." "웅..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뭐냐. 음 허허허! "이렇게 웃고 싶당..." 나는 그럭저럭 또 바쁜 하루가 가는 것을 느꼈다.. 내 인생 돌리도! 간신히 젊어졌다 싶었는데, 전쟁이라니. 너무 하잖아! "이게 다야?" 나는 내 앞에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보면서 엘류시아에게 말했다. 거울이 뱉어낸 보석의 가치는 어마어마하여 대략 하나의 군단-그러니까, 대충 엄청 많은 병사를 말하지...자세한 건 나중에 생각하라고.- 을 고용할 만큼이었으나.. .이 근방은 원래, 공작 소유의 기사단이 있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양의 기사, 용병이 존재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무리입니다." 나도 알어.. "할 수 없네. 우리, 잘해보자. 넌 이곳을 단신으로 방어해. 난 젊은 혈기를 믿고 적들과 싸워보지." "그게 작전입니까? 하여간, 저들에게는 고용목적을 말해주시죠." 어려운 일은 아니지. 대략 20명이니...음. 개인지도 해주리? "좋아. 자, 날 보시게나." 음. 이 말투는 저들의 시선을 끄는 데 실패했다. 아! 세이버전으로 해볼까? "아저씨들, 저는 프라오니스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께요~" "공자...?" "휘익~ 꼬마 귀엽다!" "재롱 떨어봐~" "이쁜짓!" 죽여 줄테다... 특히, 저 뒤에서 이쁜짓 한 자식. 나는 말투를 백팔십도 전환했다. "내가 바로, 여러분의 고용주인, 프라오니스 공자이시다. 앞으로 잘 부탁할 필요도 없겠지. 난 여러분을 돈주고 샀으니, 돈만큼은 일해다오. 작전 목표는 반란 진압. 작전은.." 황급히 엘류시아가 속삭였다. "이곳에서 그런 작전을 말하면 적에게 노출됩니다." 난 그녀를 콧김으로 무시해 주고 말했다. "작전은! 먹은 만큼 일 한다로 한다! 이상! 해산! 각자 휴식하고, 밥은 저기 식당에서 먹도록!" 그리고 나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엘류시아는 당혹해 하는 용병을 상대로 뭔가 말을 하는 듯 했지만...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보다... 상당히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예쁘다... 어디.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이쁘지? 당연히 유니 님이시지. 후훗!" 쯔..말기다. "발광 하냐? 닥쳐. 나도 미적 감각이 있다고." 녀석...이해한다. "흐헥! 말하는 거울이다!" 유니는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나는 거울의 윗테를 잡으면서 위로했다. "힘들었지?" "그래." "괜찮아. 가끔은 그런 애들도 현실의 매정함을 알아야 해." "..." 캬캬캬. 그날의 차는... 거의 원액 그대로 였다. "유니야, 이건 좀 심하지 않니...?" "몰라요. 전, 전... 거울조차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미모인데. 이런 거 잘 해서 뭐해요?" 증상이 심각해졌다. "왜, 세이는 이런 거 모르지? 흐응..." 아... 갑자기 세계통일이 부르짖고 싶다.. 아.. 아.. 언제나 세계는 통일이 될까... 20명이라는 건 그래도 견딜 수 가 있었다.. 그런데...쟈이츠의 보고는 더욱 심각했다. "그러니까...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단, 10인?" "예. 그 외에는 취사병, 의무병입니다." 이럴수가... "합치면 30명이네...이거야 원. 그래도 짝수는 맞췄다." "네?" "아냐.. 신경 쓰지마. 그나저나. 그 숫자는 성 방위 병력을 뺀 숫자지?" "그렇습니다." "그냥 다 빼버려. 성 방위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자이츠의 얼굴에는 의아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누가.. 있어봐야, 어린애와, 여자입니다." "그, 여자야. 엘류시아와 휘든 부인. 자매보고 성을 지키라고 하지. 뭐." "하지만..." "엘류시아는 백의 아가씨. 이른바 왕의 사절단이야. 이 정도도 못할 리가 없지. 그리고, 사실 쳐들어 올 데도 없고. 있으면, 반란이나, 반역, 아님 왕... 뭐, 그렇겠지." 그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표정이 떠오르다가 힘겹게 한마디했다. "외부에 나간 병력을 환수할까요?" "어라? 너한테 그럴 권한이 있기는 하냐?" "있기는 있죠. 이렇게 보여도 부단장이거든요." 음.. 보기 보단 놀랍기는 하군. "됐어. 그럴 필요도 없어. 그냥 엘류시아가 알아서 하게 냅 둬. 우린 30명 데리고 나가는데 뭐." 쟈이츠의 얼굴에는 빠르게 동공확대라는 사후에 자주 나타나는 아주 희귀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정말... 반란군을 상대로 단, 30명으로..." "뭐, 못할 것도 없지. 걱정마. 내가 대 마도사라니까?" 불신의 얼굴. 역시 믿지 못하는 거군. "스승님. 저 왔어요~" "오, 왔느냐? 지시한 재료는 모아 뒀니?" "네. 그나저나, 납골당의 재로도 될까요?"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불신... "좋아. 여기 거울... 진실의 거울이야. 이걸로 적어도 들어오는 침입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 그냥 멀리서 비추기만 해도 돼. 그리고 절대로 안 깨지고. 이 정도면 ... 가히 국보급이지."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롱.." 의심의 눈초리... "야, 그러지 말고, 내일 출병할려면 일도 해야 되는데, 어서 가봐들." 밀리는 일감이 장난이 아닐텐데.. 흑... 난 어쩌라고. "좋아! 벼락치기 도장 권이다!" 그날 저녁, 난 정말 많은 수의 서류를 해치웠다.. 장하다. 사열식을 하는 거 같진 않지만, 아주 삐뚤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정렬!" 그러지 않아도 정렬해 있군... 흠. "바로 오늘 출병한다. 성의 수비는 집사, 엘류시아가 맡고, 공작업무 대행은 휘든 부인이 하신다. 앞으로 성의 사람은 그녀에게 문의하도록. 그리고, 궁금한 일은 나한테 편지 쓰도록. 그럼 이만. 우리는 트라이너의 병사로서 열심히 많이 싸우고 오자!!!" "와.. 짝 짝 짝.." 짝 짝 짝도 입으로 하다니... 저, 시큰둥한 표정을 보면.. 참. 예전엔 안 그랬는데.. 힝.. "야, 가자. 그럼 엘류시아." "네." "부탁한다." 이렇게, 정확한 숫자는 전투병력 30인, 의무병1명, 취사병1명, 대장(나지.), 부단장(자이츠), 곁다리...세이. 이렇게 35인의 긴장감 결여 군단의 파병이 시작되었다. 걱정되지...음. 그래서 나는 장장 58권의 마법책에 있는 스펠들을 외었다.. 하, 난 정말 대단해. "스승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 말해보거라, 제자야." 잠시 세이의 침묵이 이어졌다. "스승님... 그 말투는 집어 치우래니까요." "알어. 그나저나, 뭐?" "기초 마법 상식.. .스승님이 그거 보실 나이인가요?" "야, 세이야. 내 수준에 맞는 마법책이 뭐가 있을 꺼 같니?" 세이의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웅.. 웅..." "관둬...니가 알 리가 없지. 내 수준의 맞는 마법책은 말이다. 모두 엄청나게 두껍거나, 비싸거나, 잘 없어지는 낡은 것들이란다. 그래서 아예, 니 수준에 맞추었지. 넌 수행을 게을리 하면 안되잖아." 세이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자이츠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 좋은 스승을 두셨군요. 근데, 검 스승이 아니었습니까? 마법을 쓰는 건 못 본 거 같은데..." 핫... 들켰다. "에, 겸사겸사.." "아항.. 그러나, 마법은 단기에 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나는 자이츠의 얼굴을 째려보면서 말했다. "이 세상엔, 몰라도 되는 게 더 많아. 길이나 잘 살펴!" "네..." 음. 난 역시 아주 조금.. 독재 스타일 인 거 같아.. 후후후. 아주 약간. 우리 일행은 정말 별 일없이 목표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 근방은 대개가 목초지로 되어 있어서, 말이 달리기엔 정말 좋은 지형이다. 나야 원래가 한 재능이지...흠. "스승님.. 말 타는 건 역시 어려워요. 벌써 엉덩이가 아프다구요. 쉬었다 가요. 휘든 부인이 만들어 주신, 맛난 샌드위치도 먹어요. 네?" 초롱 초롱.. "저.. 저희는 소풍 나온 것이 아닙니다만... 언제 어디서 적의 습격이..." "야! 쉬어! 다 편하게 자리 깔고, 잠시 쉬었다 간다. 점심 식사를 실시!" "와! 세이는 정말 기뻐요!" 자이츠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이길 수 있을까..." 당연하지. 이 위대한 대 마도사님이 이끄시는 데. 후후후... 나의 이 엄숙한 명령을 들은 사람들은 다 같이 맛난 도시락들을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이츠가 데려온 정규기사들은 모두 뭘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이봐, 밥 먹어. 뭐해? 뭐라도 먹어두는 것이 좋다고." 자이츠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벌써 이렇게 먹으면.."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라고. 허허허. 젊은 사람이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세이는 나를 보고 눈길 한번 주더니, 이내 생선을 튀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건 언제 준비해 온 거지...?" 자이츠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나 외의 용병들은 각자 맛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규기사단은 마른 어포를 씹고 있었다... 육포도 있었다... "맛없겠다. 저기, 자이츠. 이 생선도 좀 먹어요." "저... 생선 냄새를 풍기면 다른 괴물이나, 산적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만..." 결론은 안 된다는 거지.. "괜찮아. 우리의 적은 산적이나 괴물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반란군 아냐?" "그런.. 문제가 아닌데..." 우리는 무시해 주었다. "아, 멋진 하늘... 스승님, 졸려요." 식곤증이다. "야, 참아. 좀 있으면 적군 세력범위야." "웅.. 그럼 기대서 졸면 안되나요?" "당연하잖아." 왠지 정규기사들은 불만이 있는 듯 했다. 뭐, 나야 원래 저런 놈들 데리고 다니는 일이 하도 오랜 만이라... "잠깐 공자. 나 좀 봅시다." 자이츠는 마침 세이와 함께 내가 시킨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왜?" "보자면 보는 거지!" "응. 지금도 보고 있잖아. 말해봐." 그의 얼굴엔, 긍지 높은 바르하잔의 기사단이 왜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늙어보면 다 알게 되 있어. "난, 어린애 따위가 이런 기사단을 지휘하는 게 맘에 안 들어!" 뭐야... 난 너의 할아버지 뻘 이라고. "그런 거였어? 나중에 서면(서류)으로 제출하도록. 이상." 그는 왠지 열 받은 듯... "뭐야! 뭐가 이상이야! 꼬마 주제에! 결투다!" 사실은 밥 때문에 열 받은 게 아닐까... "흥... 그거 지금 진심이야?" "그렇다!" 좋아. 뭐, 나야 거절할 필요는 없네... "좋아. 그렇지만 우리편끼리 싸워서 전력을 감소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어. 너랑 나랑 저기 오는 정찰조를 누가 많이 죽이나 할래?" 내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본 사람은 많았다. 용병들이야, 원래 군기가 없기로 유명하지.... 하지만, 기사단은, 일종의 비웃음으로 보고 있었다. "흥, 지금 무슨 정찰조가 있다고 그러지?" "좋아. 내기는 내가 이기겠군. 그럼 난 다녀오지." 실력을 보여줄 필요는 있겠지. "어라? 스승님 어디 가세요?" "아, 잠깐 기다려. 피래미 처치하고 올 테니." "네!" 나는 전투에 대비해 마법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즉시 검을 집어들고, 나의 검에서 뿌려지는 물빛을 감상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허허허... 역시 늙은 생강이 맵지." "저 앞에 뭔가 움직인 거 같습니다." "야, 이 거리에서 뭐가 보인다 그래?" "그렇긴 하지만.. 엉?" "으악!" 나의 검이 그의 이마에 꽂혔다. 그리고 피가 쫙 튀겼다... 젠장, 나도 녹슬었군. 예전엔 피도 안 튀게 했는데.. 쯔...정찰조는 총 6명이었다. "적은 단 한 명이다!" "미안하지만, 죽어줘야 겠어." 한 명이 재빨리 신호탄을 쏘아 올리려 했다. 나는 그의 팔을 잘라버렸다. "으악!" "왜 그렇게 비명이 단일 한 거야? 쿼악, 큭, 꽤액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데 말야.. 흥." "살려줘..." 한 병사가 잘라진 팔을 잡고 나에게 사정했다. 난 그에게 싸늘하게 웃으면서 그의 가슴을 발로 밟아 버렸다. 뼈가 부서지면서 죽는소리가 났다. 후후후... "어때? 내가 이겼지?" 난 그 기사의 앞에 머리 6개를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모두의 얼굴에는 공포가 어려있었다. "스승님! 이게 대체 뭐여요!" 윽.. 세이야... 나도 말야, 가끔은 폼 좀 잡아보자.. "저기.. 이건 그러니까.. 그래서.. 에... 또.. 그러니까." "변명은 됬다구요! 이렇게 할 필요 까진 없잖아요! 누가 시키기라도 했어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떨고 있었다.. 젠장. "그렇습니다. 공자님은 유일한 후계자. 만에 하나 다치기라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쩌긴, 치료하지. "어휴! 그런 게 아니라구요! 스승님은 원래 잔혹한 일면이 있어서! 문제라고요! 제발 부탁인데 한 칼에 끝낼 수 도 있는데 왜 그러셨어요!" "저기.. 난... 그러니까." 병이 도졌지. 뭐. "이 사람들이 마족이에요? 왜 쓸데없이 이렇게 까지 죽이시는 거에요!" "에구.. 이젠 그만해라..." 그 날.. 난 그렇게 제자 앞에서 쥐처럼 떨어야 했다. 쥐가 떨 수 있다면 말이지. 잉. 그렇게 나의 평가가 나름대로 내려진 듯 하다. 일단, 용병들 사이에선, 나사 하나 빠진 미친놈... 음.. 그리고, 기사단들 사이에선 아무리 강해도 애는 애다.. 건드리는 놈이 미친놈이다라는 평가... 흑... 뭐냐! "공자님. 정찰조의 이야기에 따르면, 적 본진에서 3~4k 떨어진 곳에 기사의 무리가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오... 그런데? "으... 그러니까, 작전을 지시하셔야죠." 이놈도 드디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눈치챘나...? "음. 자이츠. 작전은 내가 알려 줬었어." 그의 얼굴엔 언제요 라는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먹은 만큼 일한다. 왜?" 나의 이 순진 무구한 눈동자를 받은 그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간부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그래 봐야 몇몇 조용히 앉아서 그냥 환담을 주고 받는 거지만. "우린 치명적으로 병력이 적으니, 몇으로 나눈 다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나한테 개겼던 그 기사로군. "그렇다면 어느 쪽에서 치는 것이 좋을까요?" 자이츠.. 그런 건 어디서 치나 똑 같지 않을까? "그냥, 정면 공격하죠. 스승님." 세이는 전쟁을 본 적도, 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 정면 공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행위인줄 알 리가 없지. 쯔... "좋아. 정면 공격으로 하자. 그리고, 나랑 세이가 적을 유인한다." 모두의 얼굴엔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설사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이봐, 안 그럼 이길 확실한 방법이 있어?" "..."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꼭 이렇지.. 죽기는 싫어가주고. "난 있어. 그러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하자고. 안되면 도망치면 그만이지. 뭘 걱정하나." "그런.. 방법이 통할 리 없는데.." 정말 걱정만은 많이 한다니까. "좋아. 그럼 다들 정면에 대기하고, 나랑 세이는 마법으로 뒤편으로 가서 적을 교란한다. 신호가 나오면 공격하도록." "저, 신호는 무엇입니까?" 자이츠였다. "어, 보면 알어. 그럼. 이만. 각자 위치로 가서 전투준비 하도록." 뭐, 이런 거지. 이걸로 확실하게 저들의 군기를 잡을 수 있다면 좋겠당. "세이. 공간 이동 마법은 확실히 익혔겠지?" 도망치는 데 유리하니까, 열심히 외어두라고 했었지... "네. 일단, 실패만 안 하면..." 흠. "좋아. 가자!" 마법으로 적의 뒤편, 얕은 구릉에 당도하여 적을 살피니 마치 진짜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우리편? 새털구름 같다. "스승님. 적이 참 많네요." "이중에 한 반은 우리가 죽여야 된다." 세이는 나를 순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네? 무리라고 보는데요." "너야 무리지." "스승님은 가능해요?" "당연하잖아." 세이는 날 절대 불신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거야 원, 요즘 스승의 권위가 무너진다더니.. .이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은... "좋아. 시작한다. 넌 처음 마법은 가벼운 화염계로 한다. 그리고 다음은 빙계 마법을 쓰렴." "네!" 대답은 참 잘한단 말야...붉은 화기가 모여들면서... 나도 주문을 준비해야지..엉? [화이어 블레이드!] ...화가 나네. "왜 때려용!" "야, 내가 쓰라고 한 건... 공격계 마법이야! 인석아! 다시해!" "이...잉... 알았어요." "엘류시아, 밖에 무슨 일이 있나본데?" 밖을 보니,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휘젠님의 제자들.. .즉, 나의 선배들이었다. 그리고, 사절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큰일이다.. 유니는 어서 그 거울을 가져와. 그리고 언니는 방으로 피해 있어." "엘류시아..." "녀석들.. 셋이나 오다니...날 죽일 것인가? 쳇." 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나와는 불과 하나의 얇은 벽을 사이로 있었다. 위치는 많이 차이 나고 있지만. "무슨 일이지? 흑, 청, 적?" "무슨 일일까... 글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넌, 사절단의 긍지로운 이름을 무너뜨렸다. 전하를 곤경에 빠지게 했고, 적에게 결탁했어." 청... "미안하지만, 휘젠님이 허락한 일이야. 난 왕의 부하가 아니다. 휘젠님의 제자일 뿐이야." "어리석군. 백. 이렇게 죽어야 한다니. 크크큿..." "피는 어떨까? 역시 흰색일까..." 그들은 동시에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유니가 시키는 대로 잘 하고 있을까...? "거울아! 빨리 빨리! 엘류시아 언니를 도와줘!" "뭐야? 그 허연 가시나가 어찌 되기라도 했나? 나하곤 상관없는데." 유니는 거울을 째려보았다. "유니는 너 같은 거울이 제일 미워! 너 공자가 우릴 도와줄 거라고 했잖아!" "허...이거 참. 라플 녀석... 나보고 어쩌라고. 할 수 없지. 좋아. 힘들겠지만, 그 녀석들을 비춰봐." 유니는 잘 하고 있었다. 힘겹게 거울을 들고 성의 창문에서 이들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 곳에 그려진 모습은... "너... 청, 사람이 아니었어?" 청은, 내가 알기론 사절단 중에서는 가장 긍지가 높기로 소문난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거울에 비추고 있는 그 모습은,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물체도 아니라.. 마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족!" 거울의 텁텁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마족이라면, 거래 성립이다. 녀석은 내가 먹어주지. 후후후." 거울에서는 검고 검은 암흑의 선이 뻗어져 나왔다. 그리고 청의 가슴을 뚫었다. 나머지 사절단은 구경할 수밖엔 없었다. 그 가공할 만한 어둠의 힘. "청!" 그리고 청은 몸을 꿈틀거리면서 거울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마족의 날개가 뻗쳐 나왔지만, 힘없이 늘어졌다. "어떻게...!" 그리고 우리는... 거울 속으로 끔찍하게 씹혀 들어가는 한때는 청 이였던, 마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승님. 다시 할께요!" 이번엔 제발 실패하지 마라.. 이러다 밤 되겠다. [화. 염. 의. 화. 살] 제대로 들어갔다! 얇고 얇은 화살이 적진 쪽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나의 주문이 곧이어 이어졌다. [힘. 의. 증. 폭. 힘. 의. 변. 화. 확. 장] 이른 바, 힘의 확장 주문이지... 간단하지만, 시술자가 둘이어야 한다는 단점이... 하여간, 순간적으로 적진의 막사는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열 때문에 주변에서는 치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좋아.. 성공했다." "스승님! 저거 보세요! 제 화살이 저렇게나 강하다니...!" 말을 말자... "됐어. 다음 주문이나 해야겠군." 적들은 갑작스런 적의 공격에 불을 끄려고 물을 퍼붓고 있었다. 그래도 불은 꺼질 기미를 보이진 않았지만. [빙. 계. 의. 겨. 울] 차가운 바람이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적들의 막사는 다시 하얀 막으로 뒤덮였다. 차갑고 추운 겨울이 그들에게 닥친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까지도 우리 편 병사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 세이. 이젠 가보자." "스승님..." 세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마법은 이렇게 항상 무서운 건가요?" "녀석도 참. 항상은 아니다. 반대로 희망을 줄 수 도 있지. 예로, 우리 병사들은 쉽게 싸울 수가 있을 테니까. 안 그러냐?" 세이는 평생이 가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너도 한 백살 쯤 되면 이해할 수 있어. "세이는.. 모르겠어요." 세이가 아니라 쟈이츠도 이해하지 못할 텐데 뭐. 흠. "좋아. 일행에게 가자." 일행은 얼빠진 표정을 하고 적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봐! 노려본다고 뭐가 나와? 가서 싸우라고!" 자이츠는 비교적 일찍 정신을 차렸다. "저... 저...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저 마법은 대체...! 저희 나라가 마법 강국이라곤 하지만, 저 정도 마법은....!" 대마법사는 괜히 하는 게 아니란다. 아그들아. "저, 공격하십시다." "와.. 아."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적진의 뛰쳐나오는 동상 환자들과 격돌했다. 애초부터... 웃기지도 않는 싸움 이였지. "저, 하지만, 이제 저 땅은 쓰지 못하나요?" 이봐.. 내가 괜히 대 마법사 냐니까! "아니. 다시 쓸 수 있는데 단 1년도 안 걸려. 어차피, 자연계 마법이니까. 여기에 암흑마법이라도 썼다면, 회복되는 데 한 10년 걸렸겠지. 뭐, 당연한 일이야. 후후후." 내가 이렇게 의기양양하고 있을 때 세이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스승님.. 전, 마법 안 배울래요." 메야? "갑자기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잖아요. 저 저런 건 싫어요." 화나네...그럼 검을 쓰는 건 안죽냐? "어차피,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다 똑 같다.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사용 하냐 이겠지. 그렇다면, 검은 사람을 죽이지 않느냐? 왕이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까, 그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냐! 하물며 지나가는 개미를 잡는 것도 살해다. 그러나, 그 살해를 어떻게 본 받아서 확실하게 익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너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지도 않은 힘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지! 너가 그 정도 수준이 될려면, 백년도 빠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싸우는 곳으로 가버렸다. 뒤에서 세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저 녀석 너무 과잉보호로 커서.. 에잉... "스승님.. 잘 못 했어요." 그날 우리가 야식을 먹고 있을 때, 세이는 내게 다가와 힘겹게 말했다. "괜찮다. 너가 너무 순진해서 그렇단다. 아직은 세상을 보지 못했으니까. 난 되도록 이면 네가 이대로 이길 바란단다. 내가 널 끝까지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구나." 녀석의 갈색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누가 보면, 동생이 형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보이겠지. "스승님..." "그래도 스펠은 다 외어둬야 한다." 난 한치의 양보도 없는 인간이었다. 후후후. 유니는 그만 거울을 떨어뜨려 버렸다. 거울은 높은 성에서 땅으로 급속도록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긴 냈으나, 깨지지 않았다. "세상에...." "크크크... 이젠 마족은 없군. 인간의 살을 씹어본 것도 꽤 오래 전 인데... 먹어 치워줄까? 허연 아가씨. 니가 원한다면, 먹어 줄 수 도 있어. 저 자식들이 방해되잖아. 안 래? 크크큭..." 흑과 적은 뒤로 뒷걸음 쳤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어려있었다. 한 때 동료였던 사람이 마족이었던 사실보다는 닥친 자신의 위기가 더 문제였다. "그만둬..." "쳇, 재미없어." 난 적과, 흑을 바라보았다. "사절단 내에서도 마족이 있다는 건... 아마, 상당부분 마족이 침투해 있다는 이야기일 꺼야. 아마 안느비 쪽이 수상해. 그 부분부터 조사해봐. 난, 여기에서 떠날 수 없으니까." 내 생명을 나보다 어린 꼬마가 구해 주었으니까. "좋아. 백.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그리고, 휘젠님이 연금 조치되었다. 이번 사건에서 실패를 책임지시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널 해치우러 왔던 거야. 이해해 줘." 연금...! 그런. 휘젠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그래도 누구도 그분을 어쩌지는 못하니까. 너하곤 입장이 다르지. 그리고, 피스트레이카 공작에 관한 몇 가지 수상한 자료를 입수했어. 조심하는 게 좋아." "흑. 그런 건 왜 알려 주는 거지?" 그는 미소지었다. "동료였잖아. 그리고, 어차피 우린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안느비가 왕의 세력 구심점인 우리 조직을 남겨 둘 리가 없어. 지금도 상당 부분 감소되었지." 그런... 그런. "차라리.. 여기 남아. 응?" 둘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휘젠님은 왜 널 여기 남으라고 했을까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어. 이곳은 예전의 대 마도사 라플의 땅... 그리고, 아주 좋은 곳이야. 우리까지 여기 남으면.. 휘젠님은 무사하지 못해. 그럼 잘 있어." "흑!" "안녕, 내 귀여운 동생. 후후후." "적! 언니! 가지마! 아!" 둘은 황급히 말을 달려 사라져 버렸다... 흑과 적의 쓸쓸한 눈동자가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유니의 걱정스런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언니 괜찮아?" "그래. 우리, 공자가 올 때까지 성을 지키자. 알겠지?" "응..." 은발의 귀공자.. 어서 와요. 공자가 없는 성은.. 너무. 너무. 무서워요... 거울의 외침이 울렸다. "야! 꺼냈으면 넣어 놔야지! 언제까지, 성밖에 버려 둘래! 앙!" 그 소리는 무시한다. 7. 연기와 재. 라플은 나의 얼굴을 한번보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남들이 하는 흔한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울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러하듯. 그가 다시 내게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나를 구하러.. 하지만, 그는 이젠 다시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없었던 걸까? 응? -회상- "공자. 다음 진격에 관한 회의를 열까 합니다. 어서 오시죠." 열면 열지 열 까는 뭐냐? "오, 그래? 어서 가자. 세이!" "네! 지금 밥 다됐어요!" 나는 쟈이츠의 부관을 쳐다보고 다시 말을 정정했다. "밥 먹고... 하자." "...네..." 어제의 격전 따위는 이미 우리일행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가볍게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긴장감 결여 군단이랄까. 이건 나와 용병들 뿐 이고, 사실, 바르하잔의 정규기사 여러분은 몸이 완전히 굳어있었다. "야, 역시 세이, 너의 그 연어 구이는 정말 맛있구나. 그보다, 오늘 저녁은 뭐냐?" "에, 호박국이요. 아까 보니까, 호박이 있길래 따 왔거든요." 짜식, 아주 주부의 습성이 온 몸에 베었군. "좋아. 기대하지." "기대하진 마시고, 그냥 드세요." 음... 녀석이 자신 없어 하는 요리가 있다니.. .이건 좀 의외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어디를 공격하는 거예요? 사실 저번 전투는 전쟁도 안하고 이겼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랬나?" 세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죠. 스승님, 그거 벌레잖아요." 헉! 먹을 뻔 했당... "오냐. 그나저나, 피해 상황은 어땠지?" "응... 아, 달려가다가 넘어진 사람이 하나 있어요. 그리고 중상자가 한 명 있죠." 중상? 그런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자다가 굴렀데요." 음... "작전회의를 재개합니다." 쟈이츠는 짐짓 그답지 않은 심각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나야 뭐, 사실 전투 요원이 있어야 전투를 하지... "이번 반란에 대해서 저희 공작가의 입장을 상대편 반란국에 통보하겠습니다." "통보? 무슨 소리야?"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했나본데... "네. 적의 수괴로 있는 사령관이 전, 대리아 국의 왕자가 이끌고 있기 때문에, 상당부분 대의 명분을 의식해야 합니다." 음... 나야 뭐, 강한 힘으로 밀어 부치는 외교는 잘 하지만.... 음. "그러니까, 형식은 대충 갖춰야 된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난 아무래도 머리가 너무 좋아. 혹시 천재가 아닐까... 그보다, 대리아의 왕자라.. 옛날에 그 아버지는 본 적이 있지. 나 대마법사야! 설마, 내가 그런 왕도 못 만나봤을 꺼라 생각하는 거 아니지? 세이! "왜..요?" 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세이는 나에게 반문했다. "음... 너 말야, 대리아의 왕자가 어떤 사람인 거 같니?" 세이는 고민했다... 또 고민했다.. 또 고민했다. 보다 못한 쟈이츠가 나섰다. "저, 정보에 따르면, 대리아국의 왕자는 3왕자로, 능수능란한 수완가에 천재적인 검술 실력, 완벽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거야 원. 그 아버지는 완전히 빙신이었는데. "혹시, 거기다가 따르는 사람도 엄청 많고... 그거 아냐? 있기만 해도 빛나는 그런. 맞지?" 쟈이츠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몰락 왕족입니다." 흐..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 왕자의 기를 꺽어야 할라나...흠. "이번에는 우리 악역이 되야 할 듯 하구나. 세이." "스승님은 항상 사악하셨어요." 예끼 이놈! 난 말이지 네 나이 때 세상의 평화를 위해 고전 분투 했단 말야! 이 정도의 애교는 봐주라고! 기본적인 작전은... 음.. 생각 안 난다.. 난 어디 그 반란군의 요새에 가보기나 했냐? 지형을 봐야 뭐가 떠오르든가 말든가. 듣기로는 산악지역이라는데. 어느새 우리는 목표지점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공자. 곧 근처의 마을에 도달합니다. 그곳에서 하루 쉬고 정보를 수집하도록 합시다." 뭐, 그런거지. 그나저나, 예전에 마을에 갔을 때는 모두 나의 추종자가 많던데. 하기사 지금이야 나를 기억하는 이는 많아도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은 없을 꺼 아냐? "드디어 여관에서 발뻗고 잘 수 있네요. 헤헷." 이봐, 세이. 넌 항상 내 배 위에 다릴 올려놓고 자지 않았어? "방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쟈이츠의 얼굴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이봐, 지나친 흥분은 건강에 해롭다고. 하기사, 마을에 있는 여러 여관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만하군. "말했지만, 지금은 일드의 축제가 있어서 사람이 만원이라고요. 아무리 전쟁중이라고 해도, 이곳의 축제는 열려요. 알겠어요!" 흠. 축제라. "할 수 없지. 뭐. 쟈이츠." "네... 제가 공자님과 세이님 만이라도 방을 얻어서, 꼭 안전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아, 괜찮아. 그냥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데." "무엇 말씀이십니까?" "이 근처에 오래된 고성이 있어. 그 곳에서 지내면 될 거야. 어차피 하루고. 그리고, 그 곳 의외로 시설은 완벽하거든." 나이가 들면 이곳 저곳을 여행하기 마련이지. 나도 그런 유형이고. 헐.. "그럼 세이야. 가자. 허허허." "그, 허허허 웃음 이제 안 한다 싶었는데.. 무슨 음모라도 꾸미세요?" 어디 조용한 숲 속에 회 떠져서 사라지고 싶은가 보지? 후후후. 일행은, 일행이래 봐야, 별 시시껄렁한 녀석들, 용병과, 기사들, 사병. 이렇게 있으니.. 영락없는 패전병 같았다.. 쯔. 하여간, 일행은 내가 지시한 고성의 앞에 섰다. 마을에서도 보이는 곳이었고, 마을사람들은 그 성을 이렇게 불렀다. "대마도사 라플의 성이로군요. 마법으로 지어졌다는..." 정확히는 마법으로 짓지는 않았지. 진 뒤에 마법을 걸었지. "쟈이츠. 그럼 사람 숫자는 대충 맞게 센 거야?" "예. 낙오자는 한 명도 없군요." 헤헤. 좋아. 근데.. 뭔가.. "이 성에는 주문이 걸려있다고 다들 그러던데.. 스승님은 주문을 알긴 아세요?" 의심의 눈초리.. 가만.. 주문. "주문이라..." 쟈이츠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됐습니다. 이 근처에서 야숙하죠." 그리고는 텐트 장비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봐.." 나의 절절한 눈빛은 다 씹히고 있었다.. 쳇. 난 문에 다가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런데! "끼이이익이...익." 정말 듣기 싫은 소리가 난다... 너무 오래 되어서 기름칠도 안 되어있군... 마법의 주문은 없다. 단, 내가 열어야 한다는 점이랄까. "어라라? 스승님! 마법이 안 걸려 있었나봐요!" 그랬던가. "이봐. 그보다, 이곳의 청소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용병 대장은 쟈이츠의 손을 부여잡고 절절하게 중얼거렸다... 한 손에는 걸레, 한 손에는 터리개를 든 그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청소 감독은 단연, 세이가 맡았다. 간만에 성 청소 다하는 군. 흐흐흐헤. "스승님." 세이가 다가왔다. "어? 왜?" "너무해요!" 두두두 달려가는 세이를 바라보면서... 오늘 저녁은 이 성에 있는 마법에 걸린 식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죽이로군." "죽이네요." "죽고싶다.." "죽을 수 도 있을지..." 모두는 죽으로 시작하는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앞의 죽을 바라보았다. 죽은 각각의 독특한 색채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스승님, 맛있네요?" 그렇지. 세이는 나와 함께 유동식만 먹어댔으니... 잘 먹을 수밖에. "이게 맛있습니까?" 그렇다.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화려한 식단을 자랑한다. 멧돼지 한 마리는 좀 심하지만, 적어도 꼬끼요 두 마리는 기본인데... 난데없이 죽을 내놓았으니. "이 성엔 죽 밖엔 없어. 아, 스프도 있는데. 스프 먹을래?" "스승님! 과일도 있어요. 바나나, 오렌지, 수박, 토마토." 과일은 다 팍 익은 것들만... 상비되어있다. "저, 저희는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제 부하들이 빵을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용병 대장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어렸다... "응? 그럼 가서 사오면 되잖아. 돈이 없어? 저기 창고에 돈 쌓여 있으니까, 맘대로 꺼내서 사와. 쟈이츠도 가서 사와." 둘의 얼굴에는 감격이 어렸다... 쓸데없는 일에 감격하는 구만. 날이 깊도록 그들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축제를 구경하고 올려는 모양이었다. 짜식들. 고저 노는 것은 되게 좋아한단 말야. 흥. "오늘 저녁 늦게나 올 거 같으니, 각자 아무 방에나 들어가서 자도록." "예!" 나름대로 방을 찾아서 사라져 갔다... 그런데, 내 원래 방은 원래가 상당히 아늑하다는... "자. 자자." 오늘 하루는 상당히 피곤했으니... 내일은 세이 녀석이나 괴롭힐까.. 흥. "좋아. 경의 말대로, 난 꼭 성공하고 말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예. 잘 하셔야 합니다." 무슨 소리야? 곧이어 들리는 젊은 청년의 목소리... 엄청 컸다.. "라플, 대마도사이시여! 부디 저에게 당신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요!" 유산? 누구 죽었냐! "누구야!" 난 마법의 창 아래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그 바로 아래에 두 사람의 형체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반짝이 발랐나? "응? 왠, 애가 나오지?" 감히! "거기, 늙은 것과, 젊은 것은, 나의 숙면을 방해하지 말고! 꺼져!" 화났다. "뭐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이봐, 머리에 피 마르면 죽어! "흥! 늙다리 주제에!" 나도 늙다리지만, 너의 나이의 두 배... 마땅히 존경받아야지. 암. "이런! 이 사악한, 너, 라플이 봉인한 괴물이지!" 이봐.. 내가 마왕을 봉인했데두.. "헛소리! 조용히 꺼져!" 잘생긴 젊은 청년은 무척이나 당황한 듯 했다... "카른 경... 그만 고정하시지요. 아무리 봐도 어린애인데. 그리고, 이곳은 마법의 성... 우리로서는 당해도 할 말이 없잖습니까?" "전하.." 전하라.. 전하라고 할 수 있는 계층은 왕족, 왕 뿐 아냐? 뭐, 반란군의 수뇌보고도 그런 말을 하기는 하지만. "저, 이곳은 마법사의 성.. 당신은 그와 무슨 관계이십니까?" 본입니다당... "그 쪽이야말로, 엄청 수상하신 데. 누구시지?" "아, 제가 실례를 했군요. 저는 대마도사의 도움을 받으러 온, 대리아의 3왕자입니다. 이름은, 레..." 이제 그만. 왕족이름은 외기 힘들다고. "좋아. 대리아의 3왕자. 여긴 왜 왔지?" "당연히, 라플의 유산을 얻으러 왔습니다." 보통의 몰락 왕족이 흔히 하는 방법이란 게 다 그렇지 뭐. 고대의 신병기를 찾는다든지. 아니면 위대한 마법사를 영입한다든지.. 뭐, 나야 그런 걸 믿을 나이는 오래 전에 지났지. "에, 라플이 트라이너의 공작이라는 건 아시나? 그런데도 도움을 요청하다니. 어이없군." 갑자기 그 청년 왕족의 얼굴에는 비장미가 넘치기 시작했다.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두 손은 불끈... 화장실이라면, 마을에 많지. "라플님은 공정하고, 정의를 사랑하시는 분 이셨습니다. 결코, 저를 모른 척 하지는 않으실겁니다." 아까는 죽었대며...그리고 나 그렇게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야. "이봐, 라플이 공정하다니..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리고, 정말 공정하다면, 하찮은 인간사에 개입할 리가 없잖아. 어찌됐던, 아무리 너희가 정의롭다고 해도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게 국가라고." "그런...!" 왕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너, 트라이너의 사람이 아무리 트라이너가 싫어도 멸망까지 시키려고 하겠어? 그럴바엔 그냥 자기가 때려 엎지. 안그래?" "트라이너는 치졸하고, 치사하고, 사악하고, 음흉하고, 흉칙하고, 변태 같은, 지상의 그 어떤 말로도 그 악한 국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타오르네 그려. "에... 글쎄.. 하지만, 나라란 말야. 치사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해요. 너희나라가 그랬듯이. 너희 아버지인 선왕은 이상주의자였었지. 국왕의 자리엔 이상주의자는 어울리지 않아." "그렇지 않습니다!" 흥. "좋아. 그런 너는 너가 단지 국왕의 핏줄이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주위의 사람이 죽게 만들었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어? 또, 너 자신이 그 일에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어. 안 그래?" "아닙니다.." 고개가 수그려졌다. "그리고, 유능한 사람이 왕이 되려 한다면, 반역으로 몰겠지?" "아니에요.. 그런.." "흥. 거짓말.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보다 못한 카른이라는 사람이 나섰다. "전하! 이는 바로 시련! 시련인 것입니다. 저 소년의 정체는 바로, 라플이 봉인한 악마!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서 영혼을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다!" 비약이 너무 심하다.. "이봐, 늙은이는 가만있으라고...엉?" 저 아래에서 쟈이츠와 용병대장외 3인이 올라오고 있었다. 뒤에는 포대자루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저 유명한 빵 푸대인 듯...입에 물고 있는 것은..빵? "공자, 이분들은 누구십니까?" 난 태연하게 말했다. "응. 대리아의 삼 왕자와, 그의 충실한 수하, 카른 경이셔. 인사해." "아, 그렇습니까. 만나게 되어... 반가 울 리가 없잖습니까! 뭐해! 어서, 칼 뽑아!" 그러나. "적의 왕자! 우물우물. 어서 나의 검을 받아라! 우물우물. 젠장, 빨리 씹어먹어야 되는데.." 쯔. 하나도 안 멋져 보여. "으... 너희들은 트라이너의 정규군! 좋아. 난 오늘 하나라도 더 베어 선왕의 복수를 하겠다!" 이봐... 정규군이라니. "저, 우린 정규군이 아니라, 용병인데..." 용병대장은 푸대를 내려놓으면서 멎적은 듯이 중얼거렸다. 이럴 때, 내가 빠질 수 있나. 난, 재빨리 주문을 외고, 아래로 내려갔다. "윽! 드디어, 트라이너가 마족과 계약을 맺었구나." 이봐. 억측은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 구나. "에휴휴. 됐어. 난 마족아냐. 그보다, 라플의 유산이고 뭐고 없으니 가보라고. 여기서 니들 다 죽일 수 있는데. 어쩔까? 살려줄까?" 나의 무지막지한 살기를 감지했는지. 카른과 왕자의 단막극이 시작되었다. "전하! 제가 이곳을 막을 터이니... 부디 전하는 무사히 돌아가셔서 저의 원수를 갚아 주십시요!" 이봐...이봐... "카른경!" "전하.. 전 이렇게 갑니다... 선왕의 복수는 아직 늦지 않습니다!" "흑흑.. 그대 원수는 내가 반드시 죽이리라..." 우리 일행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기.. 원래 저럽니까?" "왜, 쟈이츠도 보고 배울려고?" 쟈이츠는 심각하게 눈썹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농담하십니까?" "대리아국의 선대국왕이 지독한 기사도 광이었지... 내 어렸을 적, 옛날이야기를 무지 좋아했거든.. 아무래도 신하나, 자식에게 악영향을 끼친 것이지..." 우린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었다. "시끄럽다! 선왕을 모욕하지 말라!" "에구... 너네들 안 괴롭힐 테니까.. 그만 가봐. 차비는 안 대주니까 그렇게 알고." "뭐야! 우리를 우롱하는 거야!" 우롱차는 건강에 좋습니다. "우롱은 무슨... 가서 정말 정식으로 붙자고. 여기서 다 죽이면 내가 나쁜 놈이지. 안 그래?" 약간 이상한 이론이었지만. "공자. 살려보내시면 안됩니다." 의외로, 이 말은 용병대장의 입에서 나왔다. "헤에.. 왜?" "손쉽게 이길 수 있는데 왜 굳이 힘들게 이기시려 하십니까?" 그러니? "글쎄.. 난 최근 아주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 "네?" 흐흐흐. 영문을 전혀 모르는 대리아의 왕자와, 카른경, 쟈이츠는 멀뚱거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니?" "뭐가 이상하단 건지.. 도통..." 쟈이츠는 모르지. "좋아. 쟈이츠. 진실의 거울에 이들의 모습이 뭘로 비춰졌을 꺼 같지?" "그때 그 상인이 이야기하기로, 괴물의 모습으로 비춰졌다고..." "그렇지. 그런데, 그 중, 괴물이 아니라, 마족인 놈이 섞여 있다면..?" 쟈이츠의 얼굴에는 당혹이 스쳐 있었다. "저희중에!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건 아냐. 그렇다면, 내 영지에 들어오는 순간 알아챘지. 이곳에 잠입한 정도의 마기를 풍길 정도라면, 아주 큰놈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 무슨 낚시 광 이야기 같다만... "그럼.. 누가..." 나는 용병 대장을 바라보았다. "빵 씹느라 고생했다. 원래는 사람고기 밖엔 안 먹을 텐데... 안 그래?" 용병 대장의 얼굴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내가 마족이라니.. 무슨." "증거가 있어. 난 주변엔 강한 마력을 감지할 수 있거든. 특수기야. 뭐, 난 어떻게 저렇게 되나 하고 고민해봐야 필요 없는 짓이지. 왜 접근했지?" 용병대장의 얼굴은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몸이 서서히 변환하였다. 눈동자 없는 하얀 찢어진 눈에 붉은 몸. 하얀 멀리를 가진, 거대한 손톱, 발톱의 주인으로 변하고 있었다. "으악! 카른경...!" "전하.. 걱정.. 마십시요!" 겁먹어서 쫄았군. "쟈이츠는 검 집어넣어 둬." "하지만..!" "안 위험해." 곧이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나의 친우. 내 이렇게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다니..후후후." "난 마족 새끼와 친구인적 없어." "이것 참. 섭하게스리. 그러지 말게. 내 그대를 얼마나 끔찍히 생각하는지 모르나?" 나의 얼굴은 점점 찌그러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이 끔찍하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그보다, 왜 저런 잡데기를 꼬여낸 거지?" 그는 빙글거리면서 웃었다. "그야, 네가 편하게 이기는 걸보고 싶으니까. 그렇지." "내가 마족의 대부분을 봉인했다는 거.. 잊은 건 아니지?" "아이쿠 무서워라. 하하하. 난 신경 안 써." 뻔뻔한... "뭘 꾸미는 지 모르지만, 이만 가줬으면 좋겠어. 이젠 마족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닭았거든." 그는 조용히 웃었다.. "좋아. 네가 옛정을 생각해서 대리아의 왕자를 죽이는 게 싫다면, 대신 내가 가서 대리아를 없애드리지. 캬캬캬캬..." 그 붉은 마족의 등에서 마력의 에테르가 집중되면서 거대한 날개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하늘로 날라갔다. "짜식. 예전이나 지금이나 먼지 푹푹 날리는 것은 변함없군. 어라? 아직도 안가고 있었어? 저 녀석 진심이야. 아마, 대리아라는 지방은 사라지게 할걸? 하여간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말야." 두 사람은 황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쯔.. 이미 늦었는데. "저, 공자님. 도대체, 뭐 하는 마족입니까?" 나는 쟈이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옛. 친구였어. 마족인 줄 모르고 친구가 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열 받아. 에잉." 나는 몸을 돌려 다시 성으로 들어갔다. 아마, 한 일주일 뒤면 우리에게 대리아의 처참한 멸망 소식을 들을 것이다. 젠장...! 상황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처참했다. 대리아 반군의 거점이라는 그 곳에서 우리 일행이 본 것은, 스켈톤 부대가 싸운 광경이었다. 대리안 반군도 꽤나 강했던 듯 하지만, 죽지 않는 병사를 싸운 다는 것이 무리였다... 그리고, 마족의 후원을 받는 스켈톤이라니. "스승님... 그 마족 인가요?" "그래. 너도 몇 번 본 적 있잖아?" "네... 그렇게 무서워 보이진 않았는데..." 그 때야 거의 푼수 수준 이였지. "괜찮아. 다음에는 따끔하게 경고하마." "네... 정말..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군요." 곳곳에는 연기가 타오르고 있었고, 아직도 붉은 불씨가 남아있는 곳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불로 언데드를 죽여보려 했었음이라. "처참해..." "남은 게 없군요. 반군이라지만, 언제 우리도 저 꼴이 나지 않을지..." 트라이너가 그렇게 부패했던가... "여하튼, 이건 뭐라고 보고해야 할까요, 공자." 쟈이츠의 얼굴에 어린것은, 일말의 가책 이였다. 좀 더 빨리 서둘렀다면. 아무일도 없었겠지. 나도 참으로 어리석어. "정체불명의 소멸... 이렇게 해야지. 저기.. 그 왕자가 있군." 대리아의 반군 수장, 3왕자였다. 그의 옆에는 카른경이 죽어있었다. 아마도.. 약간 늦게 도착한 듯 했다. "스승님.. 아는 사람이에요?" "아, 친구 아들이야. 뭐... 그렇지." 대리아의 전 왕은.. 나와 한때 모험을 같이 했던 친우였으며, 키히를 사이에 두고 싸우기도 했던 사람이다... 막판에 배신을 때리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원망하지 않았다. 이곳엔 나의... 오래 전 나의 영상이 그림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좋아. 우린 정리하고 바로 출발한다. 그리고, 중앙에의 보고는 길드에 의뢰 하도록 하자. 가자." 나는 허허로운 구름을 보면서... 정말.. 키히가 보고 싶었다. "허허허. 아름다운 구름이구나..." "스승님. 왜 또 폼잡고 그래요?" 으. 대충 왕자와 그 신하인 카른의 시체를 묻어주고, 대충 행장을 꾸렸다. 살아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검게 탄 바닥에, 나무가 타서 곳곳에는 원형대로의 재가 쌓여있었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화석이 되어서 오랫동안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피스트레이카 공작가의 젊은 공자가 글쎄, 대리아의 반군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거 아녜요." "세상에.. 이제 겨우 15세짜리가 말이죠." 더하기, 100하고도 5살 더 더해야 한다. "하여간, 피스트레이카가는 역시 대단한 무가에요." "반 국왕파에서 공작을 끌어들이려 한다던데. 이젠 공자까지.. 대단해요." "스승님. 저희 얘기 맞아요?" 아마도..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스프를 떠먹자,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 그렇게 살벌하지 않은데..." 누가 뭐라고 했나 보군... 쯔... 이곳 여관은 의외로 큰 홀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슨 공연이라도 하나 봐. "여기 홀은 왜이리 커?" 쟈이츠가 냉큼 대답했다. "그게, 원래 이곳에서 무술대회로 신랑을 정하는 이상한 풍습이 있습니다." 신기하군. 아직도 그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신랑을 정하다니. "스승님. 보고 싶어요." 이봐.. 니가 봐서 어쩔라고. "그러고 보니, 이번 해에 시집가면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무술대회를 열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에... 뭐, 이곳 특유의 풍습이죠." 쟈이츠는 은근히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군. "그럼 저건 뭐지? 신랑 구함. 보수 1200메장. 비싸네?" 신랑을 돈주고 사는 건가...? 어느새 세이는 옆에 앉은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게.. 우리 마을 최고의 미인보다 이쁜 타지 여자가 왔는데, 얼마나 이쁜지... 그런데, 그녀가 신랑감을 찾는다는군요. 문제는 불길한 달이라는 거지만..." 미모냐, 불행이냐 이거군.. 흠. "재미있는 풍습이네... 그래.. 구경이나 하자. 허허허." 물론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불길한 달의 유례는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엘프가 갑자기 마작을 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어이없는 유례였다. 물론 생긴지도 얼마 안되었으니까.. 문제는 그 불길한 달을 만든 게 바로 나였다. "스승님. 무슨 생각하세요?" "이곳의 유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제자의 눈에는 강력한 호기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제가 알기론, 대 마도사 라플의 예언 때문 이였다고 합니다. 세이님." 쟈이츠는 짐짓 개 폼 잡고 이야기했다. "예? 하지만.. 라플은... 음." 세이는 날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에, 그러니까, 이 근방에서 마족을 잡던 라플은 실수로 자신의 마법 지팡이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근방에 나무를 잡았지. 그거라도 지팡이로 써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일어났다. 그가 잡은 지팡이는 지팡이가 아니라...." "아니라?" 세이야.. 꼭 그렇게 듣고 싶은 거냐? "음... 부지깽이였다." 흥미를 잃은 얼굴... "그게 어때서요? 별로 전설의 소재는 아닌 듯 한데." 쟈이츠도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제가 아는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듯 하네요." 당연하지. 원래 와전되는 법이지. "그것을 들고, 어쨋든 마족을 다 해치웠을 무렵에 인간들이 나왔지. 주로 이곳의 선조들일 것이다. 그들은 부지깽이를 들고 어두운 망토를 두른 라플을 보고 놀랐단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전문 난로 청소부! 였다." 잊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상한 오해를 받고 '오늘은 불길한 날이다' 라고 외쳐 댔지.. 그런데, 그게 또 와전되어서 불길한 달이 되고, 그 불길이 항상 그러하게 되었지... 뭐, 자신의 잘못은 대충 감추려 하는 게 정상이지." 음. 왠 전운이 감도는 것인가. "스승님. 쓰잘데기 없는 소리하면 나쁜 사람이에요!" 이봐.. 열 여덟이나 먹은 놈이 그런 유아적 소리를. "아, 저기 소녀가 나오는군요." 쟈이츠의 주위환기로 인해 나는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헉. "여러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랑 대결하여 이기신 분은 저의 남편이 됩니다! 지참금은 무려 1200메장! 도전 하십시요!" 헤에.. 확실히 미인인 거 같기는 한데.. 왜, 저러고 있는 지 모르겠군. "자네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떤가?" 검은 구렛나루를 기른 한 느끼한 남자가 쟈이츠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전... " "괜찮아. 미인을 얻기 위해서라면 설사 불길한 달도 무시할 수 있다고." "전, 유부남인데요?" 오, 그 수많은 여인들의 유혹을 일거에 없애는 주문... 난 유부남이다! 쟈이츠 녀석.. 하긴, 한 등빨 하게 생기긴 했지. "음.. 스승님. 스승님은 어떠세요?" 으윽! 안돼! 나이 차가 너무 난다고! 그건 범죄야! "곤란하지..." "흐응. 재미없어." 이 썩을 녀석은 세상을 재미로 사는 거냐! 이러니 여태, 멍청한 게지... 엉? 저 녀석은 우리 용병단원 아냐? "아가씨! 제가 도전해 보겠습니다!" 이름도 없는 녀석인데... 음. "좋습니다. 간단한 소개 좀 부탁 드리죠." "전, 저기 있는 위대한 피스트레이카 공자님의 일행입니다! 직업은 용병, 나이는 32세! 아직 미혼! 여자는... 모른다!" 이봐... 이봐.. 쪽 팔리게 시리 완전히 시선 집중... 음.. 사람들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들리면서 주변이 쫘악 갈라졌다. "세상에... 그 악의 화신 맞죠?" "대리아의 영토에서는 향후 30년간 풀 한 포기 날 수 없을 거라던데..." "어리게 생겨가 주고, 아주 악독한 모양이죠?" "마족과 계약했다는 말도 있던데." "피하는 게 상책이죠." 이봐... 음. 세이가 들었던 소리가 이런 거였구나...아, 혹시. "저기, 세이야, 혹시 공자를 너로 아는 거 아냐?" "...맞아요..." 불쌍한 세이.. 하기사, 나처럼 어린애가 정말 공자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뱃속에서부터 마법을 익힌다 쳐도 15세 정도에 마법을 잘 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지. "옆에 있는 애는 틀림없이 노예나 뭐 그런 걸 꺼여요." "맞아. 틀림없어." 이봐... 이 고귀함 그 자체인 내가... 왜. 주변이 술렁거리자 단상 위의 소녀는 손을 가볍게 들었고, 주변은 다시 삽시간에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저는 파라하시아 코테시아. 옛 대리아 출신 사람입니다." 순간, 한기가 드네. "전 원래는 제 남편감을 찾아, 제 부모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지금 할 수 있겠군요." 뭔 소리니? [얼. 음. 의. 화. 살] 주문이 가동되고 빠르게 엷은 하나의 은선이 세이를 향해 날라 왔다. "으에엑!" 세이야.. 마법사는 말이지... 되도록이면 폼을 잘 잡아야 해. 진정한 대 마도사는 폼에 죽고 폼에 산단다. 문제는... 세이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마법으로 막을 시간이 없었다는 건데. 난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구절을 떠올리면서 세이의 앞을 막아섰다. 곧이어 차가운 감촉이 뚫어...야 되는데.. 어라라? "왠 놈이 방해냐!" 놈이라고는 좀 보기 어려운 절대 사람이 아닌 마족이 서있었다. 그 마족이었다. "미안. 내 친구가 다치는 꼴은 보고싶지 않아서 말야. 크크크... 그나저나, 제자 앞을 막아서다니, 너는 무슨 형상기억합금으로 되어있는 줄 아니?" 마족에게 설교 받는 날이 올 줄은. "이봐, 난 니 친구 아니니까!" 주변에는 이런 나의 외침을 묵살하고, 아주 살벌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마족이다! 어서 신관을 불러와!" "으악 사람 살려!" "아가!" 전쟁 났냐. 하긴, 뭐, 전쟁보다 더 무서운 놈이긴 하지... "마족과 계약을 맺었다는 게 사실 이였군." 이봐! 왜곡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는 잘못된 길로 가는 척도야! 왜 루머성 발언이 위험한 지 모르는 거야! "스승님... 몰랐어요. 언제 계약하신 거에요?" 이자쉭이 죽을 것을 살려놨더니....! "너, 당장 꺼져. 난 마족을 아주 싫어한다고!" 그는 마족 주제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너무 하는군... 난 자네의 생명을 구해 준건데. 이런 걸보고, 자네 느끼는 건 없나? 양심의 가책 안 느껴? 그리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다 누구 탓인데 그래?" 이봐.... 제발 마족 주제에 친하게 굴지 말아 줘! 플리주! "으... 그래도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오! 아냐! 우린 하나야!" 으...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마족과 계약을 맺고, 대리아의 훌륭한 왕자를.. 나의 약혼자를 죽인 댓가를 치루어라!" 저기. "에이. 뭐냐? 그거 내가 멋대로 죽인 건데. 짜식들 아주 영화 찍더라. 아항. 네가 파라하시아인지, 파슬리인지 구나. 흠. 녀석 죽을 때 중얼 거리더라. 뭐. 나야 원체 해부를 좋아하거든." 오오옹! "그만둬! 너, 저 여자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고! 너희 마족들은 왜 그렇게 멋대로 생각하는 거야!" 그는 다시 침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리세계와 인간세계의 가치관은 달라." "그러니까, 친구도 될 수 없어." "그렇지 않아. 넌 엘프를 애인으로 가지고 있잖아. 걘 되고, 난 왜 안 된다는 거지?" "스승님.. 분위기가 야시꾸리 한 것이." 주변에는 어느새 신관들이 들러리처럼 서있었다.. 윽... "쳇. 이만 난 가봐야 겠군. 잘들 놀라구." 원흉이 도망간다. "아앗! 놓쳤다. 저 녀석들이라도 잡아라!" "저흰 피스트레이카 공작령의 사람입니다. 신관의 지배에 응할 의무가 없습니다." 쟈이츠 녀석, 땀빼면서 이야기하는 군... 그려...그려. "그러나, 그는 마족! 혹시 저 소년도 마족의 후예가 아닌지...!" "저, 이분은 대 마도사의 후예이십니다." 황급히 쟈이츠가 변명했다. "오옷! 혹시, 정말 대마도사의 후예라면, 우리 신전에 있는 그 마법의 문을 열 수 있을 텐데... 증명할 수 있겠소?" 회색의 법복을 입은 신관은 나를 무지 무시하는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신전이라니.. 혹시, 라플이 세운 신전을 말하는 겐가?" 동료 수사가 이야기했다. 8. 열어선 안 되는 문 나는 그 문을 봉인하였다. 이곳은 오직 나의 의지와, 피가 합쳐졌을 때 열리도록 되어있다. 이대로 내가 결혼하지 않고 죽는다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 문에는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유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이 열리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이 없다. 이곳의 마법은 무려 모든 범위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난, 이곳을 잊을 것이다. 그래야, 열려 하지 않을 것이니까. -어리석은 마법사- "그렇습니다. 그 곳을 열 수 있는 자는 오직, 라플의 피 뿐 아닙니까?" 내 몸의 피가 굳는 듯 하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주 무서운 것이 있다하지 않았는가?" "상징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유용하다는 게 바로 그거죠." 멋대로 해라.. 멋대로. "가자!" 우리 일행은 끌려가고 있었다... 의외로 쟈이츠와 세이는 신이 난 듯... 이 녀석들, 스승의 몸에서 피 빼는 것이 그리도 즐겁단 말이냐.. 흑. "이젠 나도 몰러!" 나의 이 뼈아픈 절규를 들으라.. 얼마나 아름다운가...흑. "스승님.. 정말, 스승님의 취향이 묻어나는 곳 이로군요." 세이는 나를 보지 않고 멍하니 서서 말했다. 나의 취향? 난 무조건적으로 연녹색을 사랑한다... 그래서 신전답지 않게스리, 연녹색이 되었다는...아주 슬픈... "아, 이곳입니다. 이곳 신전의 문을 열어 주십시요." 무리야... 이젠 안 열기로 했거든. "뭐, 열지 않으려 한다면 방법이 없군. 야, 죽여서라도 열어야 한다." 이봐! 댁들은 양심이 있는 거야! "도대체 이곳은 왜 열려는 거지? 그러다, 별 하잘 것 없는 거 나오면 어쩔라구." 어쩌긴.. 그냥 튀어야지. "우린 트라이너에 가장 필요한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지금이 그 때야." 왠... 개혁론자들이 이곳에 다 모인거냐? "스승님은, 원래 고리타분하세요. 이해하세요. 그보다, 스승님. 뭐가 들었는지, 저라도 알려주시면 안 되요?" 나는... 왠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좋아. 열어주지. 대신 난 책임 없어!" 나는 손에서 피를 뽑았다. 그러자 피가 연녹색의 문에 쫙 튀겼다.. 으.. 어지러. 빈혈이 장난이 아니군. "열려라.. 참깨." 정말 고전적이지 않은 주문이지 않은가! 아.. 이런 내가 정말 싫다. "우앗! 문이 열린다!" 그리고 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고, 어두운... 그러고 보니.. 내 목소리를 내가 듣다니 이상한데. [이 곳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이든지 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난 이문을 봉인했다...이곳을 여는 자, 어쩌면 나의 후손, 혹은 나여. 이젠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는가?] 그래.. 이런 웃기지도 않는 개 폼 대사를 남발했었다는... 응? "켈켈켈~ 마도 공작이 원하시는 것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 어서 털자!" 마족 등장인가? 허무하군. "스승님!" 나는, 멍하니 그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쾌액!~" 괴물은 그곳에서 문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스러져 갔다. 그래. 이곳엔 마법도 걸려 있었지. "저것은 존재 부정의 마법! 그럼 혹시 저 문안에는 댁밖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거요!" 아마.. 그렇지. 이거야 원. "예 또... 그렇죠." 나의 이 또랑또랑한 눈을 본 그들은 좌절했다. "이런 어린애가 뭘 할 수 있겠어! 분명 원하는 거라곤, 사탕이나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이런.. 신이여!" "저, 신관님 설사, 죽더라도 저도 같이 들어 가보겠습니다." "저도 들어갈 테니. 맡겨 주십시요!" "아니.. 됬네. 좋아. 이봐 꼬마야." 죽을 준비해라... 난 밥을 준비 할 테니. 허허허. 이 나이에 이렇게 무시당하고 사는 구나. 그저 나이가 많으면 찬 밥 신세다. "왜여?" 나는 삐딱하게 대답했다. "넌, 세상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선발된 것이다. 차후 어떤 위험한 일이 있더라도... 꼭! 이것만은 잊어선 안 된다." 사명감에 불타는 것도 좋고, 진지한 것도 좋은데... 단, 난 꼬마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대 마도사 님이시다! "뭘요?" 생각이 삐딱선을 타고 있다. "지금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평화와 세계의 모든 사악한 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것... 알겠지?" 그런 게 어디 있냐? 에잉... 이곳을 만든 것은 나지만, 이런 쓰잘 데기 없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평화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거란 말이다. "그럼 들어가 보죠." "스승님. 무사하셔야 합니다." 역시.. 이래서 제자를 키우지. 후후후. "그래. 걱정 말거라." 문안에는 어두운 석실이었다. 하도 오랜만에 와서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설립자가 길을 잃어서야 명분이 안 서지. 흠. "자, 다음에서 꺽으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문이 나오는 군." 세계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 일라나...음. 성검? 무기? 아무래도... 쓸만한 건 없는 거 같은데. "에험. 나, 라플의 이름으로 명한다. 문아, 내가 왔으니 그 문을 열어 나를 반기라." 서서히 거대한 녹색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하나의 단상이 있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왜 다시 이곳에 왔는가.]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엔 그가 있다. 내가 봉인한 마왕의 정신체가 이곳에 남아 있다. "아, 별건 아니고... 난 원래 이리저리 밀려다니잖아. 너처럼 한가하게 땅 따먹기 할 시간이 없다고." [어째... 넌 많이 변한 거 같군. 더 어려지고, 생각이 무척이나... 음.. 모르겠어. 너의 생각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듯 하군. 정의롭고, 사명감에 불타는 라플은 어디 있나?] 역시.. 마족의 둔팅한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나 보군. "그냥 요리 한 번 잘못해서 이 꼴이 됐어. 왜 젊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참, 마도공작이 너의 부활을 준비하던데." [하하하... 어리석은 짓.. 난 쉬고 싶다. 다시 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아.] "그래. 넌 원래 무지하게 게으른 자식 이였지." 낮게 천장을 울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지?] "뭐, 앞의 신관들이 세계평화를 위해서 필요한걸 가져오라는데.. 여긴 사실, 너하고 금기서 몇 가지밖엔 없잖아. 이젠 어쩌나.. 흠." 잘못하면 마족과 결탁했다고 해서 죽을 수 도... 뭐, 내 실력에 죽을 때까지 있지는 않겠지만... 입장이 문제지. [글쎄... 평화란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무엇인가에 의지하려 하다니.. 별로 변한 게 없군.] 역시 이 친구는 맘이 잘 맞아. 나하고 사상이 비슷하거든. "그래도 머리를 짜봐." 미치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고. [흠..] 그렇지... 좋은 수가 생각났다. 단, 그 방법은 상당히 위험요소가 큰데. "어이. 자네, 피오르카 기억하지?" [그러네만...] 피오르카는 나를 종종 괴롭히는 마족이지. 뭐, 나는 원래 마족한테 인기가 더 많아. 제길. "그 녀석, 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녀... 나를 친구로 생각한데나?" 흐흐흐. [건방진 놈!] 그러면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군. "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겨우 600년 짜리 마족 치고는 엄청 건방지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막하고.. 내가 걔 때문에 얼마나 괴롭다고." 흐흐흐...약간 변태 같은 웃음이지만. [그냥 날려버려! 너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치만.. 피오르카는 너의 자식이잖아." [그런 자식은 필요 없다! 나의 친우를 괴롭히다니! 내 손수 응징하리라!] 흐흐흐. 내 계획대로 되어가는 군. "그치만, 넌 여기 있잖아. 나갈 수 도 없고.. 나가기도 싫다면서?" 조용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제 반응이 오겠군. [할수 없군... 그렇다면 내보내 다오. 내 그 녀석을 흠씬 패주지.] "좋아. 하지만, 그냥 나가면 마족이 알아 챌테니, 내가 마력 히든의 마법을 걸어 줄께." [좋아. 내, 이젠 마왕 안 할테니까. 질색이야. 그런 귀찮은 짓은.] 왜냐고? 나는 용사에 지쳤고, 마왕은 마왕에 지쳤다고 할까.. 다 불쌍한 인생이지. 하늘에는 붉은 기둥이 생기고, 신전의 색이 온통 피 빛으로 물드는 착각에 휘말린 듯 했다. 그리고 신전 내부의 중앙 홀에서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마법진은 어느새 하나의 형상을 형성하고, 그를 봉인했던 12가지의 마법도구들은 힘을 잃고 다시 공간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됐어." 마법진의 가운데, 나와 같은 은발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수정의 눈을 가진 그는 바로 나의 친우이며, 나와 목숨을 걸고 한때는 싸웠던 마도와 그 외 이 대륙과 이 세상의 마왕인 아이테리스였다. "아...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는데, 어울리나?" 언제나 그렇지만, 참 정중하시기도 하시지. "그렇지. 자네도 건강해 보여서 좋군." "이거야, 원. 좀 더 어리게 변신할 것을 그랬어. 이건, 너무 재미 없지 않나? 자네가 이렇게 어려 보여서야." 그는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마족이라기 보다는... 한떨기 제비 같은. "그렇지. 자넨 원래 이렇게 느끼한 놈이었어." 그는 호탕하게 웃지 않는다. 늘. 닭살스럽게. "하아? 그랬던가. 후후후. 그래도 괜찮아. 자네가 이렇게 있는걸... 이거야 원. 이번엔, 키히의 방해를 받지 않고 즐길 수 있겠어. 안 그래?" 누구 멋 대로냐! "다시 봉인해 주지." "아쉬운 건 자네잖아. 그보다, 어쩌다 이렇게 어려졌나?" 에.. 요리를 못해서..아? 그 붉은 책? "그러니까, 붉은 책에 있던 요리를 해서 먹었지, 재료는 대충 기억이 나긴 하는데. 드래곤 하트에 내 피에 재료는 일단 뭐 그런 거였는데..." 그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기분 나뻐! 웃지마! "하..자네.. 그 책은 나도 약간 알지. 여기서 나갈 때, 마족의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해서 그 책을 가져가지 않았나? 그 유명한... 생명의 서. 근데 그 책은 어쨌나?" 흐엑! 생명의 서! 마법을 배우는 사람의 꿈의 책이잖아! 이럴 수가! "태..웠다는..." 그의 질타가 들려왔다. "잘한다. 자네 원래 맹한 놈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에휴. 이보게, 그 책은 대륙에서 죽음의 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책이란 말야. 어쩌다 그런 짓을 했나." 미안! "괜찮네. 뭐, 죽음의 서가 등장할 일은 없을 테니." 그건 그래. "빙긋~"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번만 더 그렇게 웃으면... 나, 폭주할지도 모르네." 엥? 왠 폭주?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그래? "그럼 이만 나가보지. 근데 자네를 뭐라고 소개할까? 신의 사자 어때?" 그는 미소지었다. "마왕이 신의 사자라...꼭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럼 좋아. 그리하지." 이리하야.. 우리는 다시 문을 봉인하면서 신전을 나섰다. 밖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운집해있었다. 다들 그렇게 한가한가? "스승님!" 세이다. 저렇게 반가운 듯이 나오다니..흑.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거죠?" 니 눈엔 이 옆에 있는 마왕이 사람으로 안보이나...? "근데, 옆의 이 사람은 누구 에요?" 마왕이라고 하지. 어쨌든 마신이 보낸 사자도 일단은 신의 사자잖아? "음. 신의 사자. 아이테리스야." 악의 화신이라고도 하지. "오오~ 바로 이분이 신이 우리에게 준 신의 사자!" 착각은 자유니까. "에 또, 멋대로 생각하라고." 모두들... 정신이 없군. 아이테리스는 그 특유의 정중한 말투 덕분에 정말 신의 사자인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를 스쳐 지나가는 신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젠장, 저 꼬마가 쓸데없는 짓을 했어." 난 대마도사지, 꼬마가 아냐! "스승님. 그럼 우리는 다시 영지로 돌아갈 수 있겠네요." 음. 그래 야지. "쟈이츠. 어서 떠나자." 쟈이츠는 이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행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역시 잽싼 놈이지. "근데, 저 사람... 정말 신의 사자입니까? 아무리 봐도 제비로밖엔..." 쟈이츠의 눈이 개중에서 가장 정확하다. "그거야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용병단을 다시 정렬시키고, 우리는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 찰나에, 아이테리스의 외침이 들렸다. "왜 날 또 버리는 건가? 라플." 헉...! 미친...여기서 그 이름을 이야기하면 어떡 하냐! "에..또.. 같이 갈래?" 그는 빙긋이 웃었다. 내 그를 만난 뒤로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좋아. 라플. 나의 친우." 에휴휴... 신관들의 벙찐 얼굴을 뒤로하고... 난 그렇게 좌절하면서 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각하... 라플의 녹색신전이 열렸습니다." 붉은 주단을 입은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게 어찌된!" "그래서 급히 근처에 있던, 2급 마족을 투입했습니다만... 신전의 결계에 존재조차 소멸되었습니다." "어리석은... 그래, 그곳에 누가 들어갔나? 문을 연 것은 누구지?" "일전에 보고 드린 바 있는 피스트레이카 영지의 새로운 공자라고 합니다. 이름은 프라오니스." 프라오니스...라는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 그가 라플의 진짜 후예인가 보군." "그렇게 추정됩니다만.. 사실, 녹색의 신전에서 데리고 나온 자칭 신의 사자라는 자는 그를 라플이라고 불렀습니다." 재미있어. "그래? 그에 대해 면밀히 조사 해 보도록 하고, 만에 하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가 정말 라플이라면,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섣불리 건드리지 말도록." "예. 친애하는 공작전하." 부하가 문을 나가고,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인간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시 어려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 생명의 서로 인한 거라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아직 나바스에서 죽음의 서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좋아. 어찌되었던...마왕은 곧 부활하실 수 있다. 그가 어디 있는 지만 찾을 수만 있다면.. 라플.. 이 사악한 마도사. 정신체만 따로 봉인하다니." 나의 평생의 숙적. "널.. 없애버리겠다. 날 주인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마족으로 만들다니." 방문에 기척소리가 났다. "누구냐?" "접니다. 제가 잠입하여서 정보를 알아낼까요?" 켈 족으로는 상당히 유능한 녀석이다. 민정과 같이 있던 종족이다. 그러나 그를 신용할 수는 없다. "넌 무리야. 일단, 그 털을 어떻게 다 가릴래?" "음... 깍을 까요?" 켈족은 충성스럽다. 그리고 싸움도 잘한다.. 그러나, 멍청하다. "관둬." 아.. 이런 녀석을 데리고 마도를 이끌어 가는 일은.. 정말 피곤한 일이다. 빨리 민정이라도 돌아오면 그래도 편할 텐데... 요즘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냐. "에, 참, 저희 켈족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장차, 트라이너의 왕위 계승을 놓고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고, 나바스는 이 사실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원래, 나바스가 좀.. 둔팅이만 모여있는 곳이잖아. 자칭 정보력 최고, 사실은 멍청한 놈들의 집단이지. 쓸데없이 덩치만 큰 나라. "나바스에 지원하는 것은 어떻게 되었나?" "황제와 태후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라, 둘을 이간질하는 것이 쉽지 않을 듯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태후 쪽의 가문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에 비하면, 황제의 가문은 쉬쉬하곤 있지만, 어머니 쪽이 대한민국의 왕족이니까요." 그랬던가... 그래서, 절대마법무위능력이 있겠구나. "좋아. 예의 주시하도록. 그 황제의 능력이 더 궁금하군. 철저히 조사해." "예." 근데, 어떻게 털 복숭이 들이 조사를 했지? 오늘도 변함없이 날씨도 좋고, 푸르고, 하여튼 세계의 그 유치찬란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아름답다. "스승님. 이제 서서히 궁금증이 도지는 데요?" "허허허. 궁금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알아보거라. 혹, 마법에 대한 것이냐?" 세이는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면서 소근거렸다. 사내자식이 이러는 거 하나도 안 반갑다. "스승님. 저 자칭 신의 사자 말이에요.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보통, 신의 사자란 채식주의자 아닌가요?" 어디서 그런 지식을 익혔냐... 그걸 누가 알겠어? "그리고, 근육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생긴 거하곤 다르게. 사실 말이 안되잖아요. 그리고, 말도 왠지 험하고, 예의도 없고... 혹시..." 눈치챘나보구나. "사기꾼.. 아닐까요?" 음. 뭔가 너의 머리를 한 번 들여다 보고 싶구나. "아닌가요?" "아냐." 세이는 얼굴에서 입을 비죽거리는 특이한 행동을 보이면서 밥을 준비하러 갔다. 벌써 성에 도착한지 3일 째건만. 아직도 서류는 줄어들지 않으니. "여기 계셨군요. 아까, 사신 편으로 공자님의 전승소식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응? 엘류시아가 내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나 보군. 사실, 내 거울을 내팽겨 둔 건 괘씸하지만.. 그래도 별 일은 없었잖아? 그리고 왠지 샘통이기도 하고. 키키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예. 사실, 저의 개인 적인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왕성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피스트레이카 공께서 반란을 일으키신 듯 하다고 합니다." 소리인가, 효과인가.. 쿠궁. "무슨 소리인가!" 나는 흥분해서 외쳤다. "잔센이라는 작은 마을이 본거지라고 합니다. 이 점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왜, 본거지를 놔두고, 멀리 떨어진 잔센이라는 마을에서 일으켰지? "흠.. 아직 공표는 안된 상태이지?" 뭔가 이상하다. 이해할 수도 없다. 공작은 절대 멍청한 인간이 아니다. 왜 그런짓을 했지? "예. 하지만, 앞으로 이삼일 뒤면 소문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흐흠... "좋아. 알았다. 가보도록." 그녀가 나가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흠... 오늘 저녁은 뭘 먹지?" 그렇다.. 오늘은 기분 나쁜 생각을 하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다.. 흑. "그래. 오늘 이렇게 회의를 소집한 것은 경들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다. 지금 피스트레이카 공작인 나의 의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본거지는 서쪽 해안의 잔센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된 참가인원들은 속속들이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군대가 몰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은 아직 이 사실을 공표하진 않은 상태이다." 내 앞에는 주욱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그렇지.. 쟈이츠는 원래가 기사단이니까.. 그것도 간부급 아냐. "반란이라는 거지. 자네들 의견을 내놓게나." 그리고 나는 종이 쪽지를 모두에게 돌렸다. "저, 공자님!" 어떤 기사였다. 누군지는 모른다. 뭔가 비장해 보이는군. "뭔가?" "전, 이 색깔 맘에 안 듭니다. 노란색으로 바꿔주세요." 아, 이 어두운 분위기에서 갑자기 이게 왠 색깔 론인가! "그냥 써." 한마디로 정치분규를 종식시키고,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세이는. "음... 음.. 음. 모르겠다." 역시나. 아무생각이 없었다. "엘류시아, 의견을 말해보도록." "예. 전, 당장 왕의 편이나, 공작 측으로 갈 건 없다고 봅니다." "이유는?" 여기선 좀 진지하게 하지그러냐? 맨날 안 진지하니까 다 그래도 되는 거 같냐? "예. 어차피 반란이라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쪽이 좋습니다.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고 이기는 쪽에 편승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기사가 의의를 제기했다. "우린 응당, 피스트레이카 공작가의 기사이니, 그 분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요!" 글쎄. 그건 장담 못하겠다. 그가 진짜 공작도 아닌데 말야. "저의 의견도 그렇습니다. 비록 전하가 아주 좋은 성군은 아니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군은 아니지 않습니까?" 흠.. 저런 이야기를 일반적으로 막하나 보지... 음. "그래. 여러분 중 또 다른 의견?" 이제는 정말 조용해 졌다. 여긴 몇 놈만 항상 떠드나 보지? "어찌 되었던, 우리도 왕의 반군으로 생각될 테니, 우리도 공작의 편에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쟈이츠의 의견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모인 사람 중에 전직 기사인 사람들은 당연히 공작의 반란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있었고, 그 외, 엘류시아 등의 상관없는 사람들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의견이었다. "흠.. 응? 지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세이는 어디 있는 거지? "그러니까, 아저씬 나쁜 사람 맞죠! 사기꾼..." 앞의 자칭 신의 사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흠.. 그건 아닌데. 난 나쁜 사. 람. 이 아냐." 왠지 이상한 곳에 액센트를 준 듯 한데, 잘 못 들은 거지? 사람이 아니라거나, 그렇진 않을꺼아냐? "스승님한테 말해서 아저씨 혼내 주라고 할 래요!" "너 애 같구나. 너의 스승은 너 만한 나이에 많은 일들을 했었지. 후후후. 너는 정말. 스승에게 고민만 끼치고 있는 게 아니냐?" 윽.. "아니에요!" "하긴... 흠..." 젠장, 이런 나쁜 아저씰 봤나. "아저씨가 정말 사악하다면, 전 스승님을 대신해서라도 댁을 없애야 겠어요!" 손이 떨리고 있지만 그래도 스승님께 전수받은 마법으로 헤치울 수 있겠지! "흠.. 재미있군. 너, 그보다, 너의 정체를 스승이 알긴 하냐?" 무슨 소리? "헛소리하지마! 그게 바로 논점 회피의 오류라는 거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흐흐흐.. 너 같은 꼬마가 그의 옆에 오래 있으면 내가 곤란해 진다구. 넌 언젠가 스승을 헤칠 것이다."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렸다. "헛소리하지마. 윽!" 갑자기 그의 검은 손이 나에게 뻗쳐왔다. 검은손? 내 눈을 믿지 못할 만큼 그의 얼굴은 흉칙했다. 검은 모습의... 마족 이었다. [어..얼..음...큭..] "주문을 외울 려고? 어림없지... 후후후." 으... [얼. 음. 의. 화. 살!] 죽어라! 화살은 바로 그의 목에 꽂혔다. "죽었다!" 화살이 꽂힌 채로 그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공포와, 무서움이 감돌았다. "내가? 후후후... 역시, 그의 제자답군...후후후. 하지만, 이 마왕인 나를 고작 그런 장난감 화살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마왕....!" "그래. 꼬마야.. 후후후. 마법은 이렇게 쓰는 거야.." 그는 두 손을 내 목을 잡으면서 주문을 외쳤다. [어둠의 제왕인 나의 말을 들으라. 나 마왕이 너에게 명한다. 이 소년을 감싸 나를 괴롭히는 것을 없애라! 암흑이여!] 그의 검은 손은 더더욱 검게 물들고, 차가운 기운이 나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나를 내 던졌다. 그리고, 검은 것이 나의 온몸을 찔러갔다. "으악!" "후후후..." 그는 나의 몸에 난 검은 상처에서 피를 손으로 찍었다. "너도, 피는 붉구나. 그러나, 죽어라. 넌, 죽어줘야 해." 스승님의 모습이 스쳐갔다. -전, 스승님이 제일 좋아요.- -허허허. 녀석하고는. 그러면 열심히 마법을 익히렴.- -네.- -그래야, 스승님을 죽일 수 있잖아. 안 그래?- "아냐! 그게 아냐!" 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무언가 잊은 것이 있었다. 왜, 왜 그런 거지? 난, 누구였을까. 왜 여기서 이렇게 있는 거지? 응? "세이!"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 난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애초애 그 문을 열게 된 건 외였을까. 난 끈임 없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살아 있을 꺼야. 그래. 녀석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치기라도 했으면, 나는 내 긍지와 모든 것을 걸고,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사람 중의 하나이니까. "세이! 젠장, 비켜!" "공자님!" 엘류시아는 저 멀리서 나를 부르고 있었고, 나는 쟈이츠를 밀치고 마법 결계를 뚫기 위해서 마법을 썼다. [불. 타. 는. 도. 끼] 문이 부서지고, 동시에 탁한 냄새가 났다. 피 냄새였다. "맙소사...!" 검은 마족이 서 있었다. 눈이 6개이고, 날개는 3장인 지상에서 가장 강한 마족이며, 모든 마족을 다스리는 자. 아이테르, 마왕. "흠. 너무 일찍 왔어. 하지만, 이 녀석 곧 죽을 테니까 기다려." 세이의 몸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족의 정신파 공격과, 독을 맞을 탓이었다. 그보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이... 저, 마족, 어디서 나온 거야!" 엘류시아는 재빨리 전투 자세를 취했다. 난 세이에게 달려갔다. "세이.. 세이! 대답해라!" 세이의 검으스름한 입술은 힘겹게 움직였다. 눈이 뒤집혀가고 있었다. "스...승..." 나의 눈에선 분노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 내 잘못이다. "...너, 아이테르. 날 화나게 했겠다." 한 때 친구라 해도, 역시 마족은 마족...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제자를 다치게 하다니! 그는 빙그레 미소지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봐, 난 널 구하려 한 거야." "그래.. 너희 마족은 그런 식이야. 항상 자신에 우선해서 판단하지. 그래...좋아. 널 죽여 버려주마." "어리석은 소리. 그럼 너도 무사할 순 없어!" "웃기지 마라!" 난 마법어를 시동하였다. "여기서 그런 마법을 쓰면!" 주변에 푸른빛의 막이 쳐지고, 동시에 하늘의 검은빛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천. 공. 을. 가. 르. 는. 파. 멸. 의. 힘] 시동어가 끝나자마자, 거대한 검은빛이 마왕을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참할 만큼 아름다운 검은빛이 퍼져나가고, 마왕의 하얀 피가 사방에 튀기기 시작했다. "끄악! 그만둬! 라플! 이러면 너도....! 라플!" "으 하하하! 죽어라! 죽어!" "꺄약!" 검은 날개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었다. 좋아했던, 절대 배신하지 않았던 내 친구. "젠장! 넌 후회할 거다!" 후회는 항상 한다! 하지만 더 하지 않도록... 널 없애겠다! 아이테르는 도망치기 위해 날개 짓을 했다. 거대한 에테르의 날개는 상당부분 찢겨졌지만, 그래도 날고 있었다. [천. 상. 의. 검. 은. 화. 살] 나의 마법어가 발현되자마자, 검은 화살이 그의 몸에 가득히 박혔다. 그리고 마왕은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재가 소멸되기 시작했다. "라플.. 넌, 후회할 것이다." 친구는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난, 살만큼 살았다. 설사, 이 다음이 어떤 길이라도." 난 그의 머리를 짓이겨 버리고 화염으로 불태워 버렸다. "엘류시아." "아.... 이런... 네?" 그녀는 당혹해 하는 것 같았다. 아마 어리게 보이는 내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겠지. "오늘로, 마왕이 교체되었다." "네?" "...마왕이 봉인 된 이유를 아나?" "모르겠는데요..아마,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후후후. 그래. 이유는 마도 공작도 모르는 사실이었지. 하지만,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그 위대한 대 마도사도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하하하..." 그녀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이를 고치러 가자. 아마, 녀석 울고 있을 꺼야." 세이의 상처는 위중한 상태였다. 일단, 갈비뼈가 여섯 대 나갔고, 척추 뼈가 3개 돌아갔으며, 약간의 경미한 뇌진탕에 과다 출혈, 방광이 터지고, 손과 발의 신경 기관이 손상되었다. "살아있는 게 용한 정도라며? 대단해." "그래. 성도 무지 많이 부서졌잖아." "흠.. 공자님... 역시 소문대로 인가보다." 하녀들은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 걸까.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공자님... 여기 계셨습니까?" 쟈이츠였다. 쟈이츠는 온 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아, 쟈이츠. 이젠 좀 괜찮나?" "워낙, 순식간에 끝나서 별 고통은 없었습니다." "..." 한 동한 쟈이츠는 그대로 조용히 서 있었다. "...녀석은 무사할 꺼야... 그렇지?" "네." 세이는 작은 방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주변엔 의사들이 있었고, 한 쪽엔 피를 뽑아낸 검은 대아가 보였다. 사방에 피가 튀겨 있었고, 세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서 시려 보였다. "아, 오셨습니까. 공자." "좀 괜찮나?" "예.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두 달간은 요양을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 세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 녀석은 처음 나와 살기 시작했을 땐 무지 귀여웠는데, 지금은 이런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스... 승.... 님?" 탁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난 저도 모르게 눈에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세이..." "울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 마족 어떻게 되었어요? 저 때문인가요?" "내가 죽였다. 걱정 말거라.." "스승님.. 옆엔 제가 있어야 되는데.. 헤헤헤...그 마법 꼭 가르쳐 주셔야 해요. 약속이에요." 세이는 싱긋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들어와." 서재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엘류시아였다. "무슨 일이지?" "저, 그 마왕에 관한 이야기 말씀입니다." 뭔가 눈치를 채긴 했군. 못 알아채면 사절단 이름 내놓아야 하겠지만. "응?" 그녀의 안색은 약간 파리해져 있었다. "설마, 공자님이... 라플은 아니시겠죠?" 항상 애 취급하던 그녀의 얼굴은 약간 굳어있었다. 그리고 조소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끌끌끌... 그걸 이제야 아셨나?" "조용히 해." "암. 그래야지. 후후후." "거울 필요하면 이야기해. 엘류시아." 그녀의 얼굴에는 백 배 사양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에엣! 전, 싫어요!" 나라도 싫어. 거울아, 거울아. 넌 정말 불쌍한 놈이로구나. "할 수 없지." "라플 맞죠?" "맞다면, 뭐가 달라지지? 난, 이대로 살고 싶은데 말야."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휘젠님은 라플이 죽었다고 그러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그 보다 강한 마법사라니!" "그랬지.. 그녀가 본 라플은, 죽었다고 보여졌지." "무슨 소리죠?" 엘류시아에게 이야기해도 이해하지도 못할 텐데. "됐네. 가서 일이나 해. 그보다, 그 일련의 반란 사건에 대한 대책이나 세워야지." "네.." 엘류시아가 나가고, 거울은 조용하게 말했다. "앞으로 곤란해지겠군. 안 그래?" "그렇지. 마왕을 죽였으니... 어쩔 셈이였어? 여전히 욱하면 다 부셔버리는 건 여전하군." "할 수 없지..." 거울이 하는 이야기에 맞장구나 쳐주어야 하는 내 신세도 여전해. "난, 자네를 완전히 지켜줄 수 없어. 맹약에 따라. 그나저나, 난 마족 아닌데... 저 가스나는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쳇. 날 물로 보지 말라구." 누가 물로 봤다고... 흥. 그리고, 넌 마족 맞어. 9. 반란. 전쟁은 어느 상황에서나, 불행한 것이다. 불행해 지고 싶다면 싸워라. 이 세상에 행복해 지는 전쟁 따윈 없다. 평화를 찾기 위해 싸운 다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항상 싸운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기왕 전쟁을 한다면 이겨라. 그것은 어쩌면 행복할 지도 모른다. -어느 책- 마왕과의 싸움에서 많은 성에 피해 때문에 당장 출전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승기를 업어 당분간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엘류시아의 의견처럼 오래 가지 못할 일이었다. "조만간, 왕성에서 사람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항복하라든지, 싸우든지 둘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우린 아무 것도 하지 않았잖습니까?" 엘류시아는 쓴 미소를 지었다. "백의 사절단인 제가 도피해 있고, 반란군 수장인 피스트레이카 공작의 영지입니다. 더군다나 공식적으로 양자인 후계자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의 점령을 맡은 사람은 아마도 강한 자, 그것도 왕성 내에서 실세일 확률이 높습니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궁전에 가본 적도 별로 없고, 있어봐야 쟈이츠 정도랄까? "아마, 카릿장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황제의 친우이고, 대마도사의 양자입니다." 양자? "아니, 그 아름다운 엘프 처녀에게 왠 애가...? 그럼 10요? 카릿 장군이라는 사람." 너 바보지? 엘프가 나이가 보통 사람의 몇 배라고 생각하는 거냐? "돌픈경. 대마도사의 나이는 무려 300여세로 추정됩니다." 추정이지... 정확한 나이는 아무도 모르지. 나보다 많은 건 확실해. "허걱! 야, 사진 떼!" 뭐냐. "여하튼... 당장, 적들의 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어느 쪽 편을 들어도 안될 판이군. "공작 각하로부터의 전령은 없나?" "그게... 없습니다. 사실, 개인적인 방법으로 잔센지역에 연락을 시도했습니다만.. 방비가 너무 철저해서 접근도 불가능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정리를 했다. 그렇다면, 우린 양쪽의 적이란 이야기잖아? "할 수 없군." "하명 하십시요." "공격하는 자는 설사 그 어떤 자라 하여도 적으로 간주한다. 피스트레이카 공작도 우릴 별로 살려둘 생각은 아닌 듯 하다. 그리고, 왕은 아마 우리 영지부터 치고 싶어할 테고." "휘젠님과 이야기 해보면..." "엘류시아." "네." 여기서 그녀가 뭔가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걸 수정해 주어야 겠군. "그녀는 공과사가 뚜렷한 인물이야. 우리가 사실 그 쪽에 붙어도 이득 될 게 없다고 생각 할 것이야. 그러니... 앞으로의 전쟁에 대비해서 마을의 사람들은 대피할 장소를 마련하고, 성벽의 보수에 들어간다. 우린 상당 부분 지체했지만, 지금이라면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엘류시아는 나와 함께 마법진의 준비에 들어간다." 그녀는 약간 놀라면서 물었다. "마법진? 그걸 왜 공자님이 준비하십니까?" "내가 바로 마법사거든. 그럼 부탁하네. 그리고, 쟈이츠가 당분간은 지휘를 부탁하지. 아무래도 용병이나, 병사동원은 자네가 낫겠지." "알겠습니다." 적이 올 경우, 얼만큼의 병사를 모아야 하냐면, 일단, 왕의 병사는 기마대 1부대와 보병 대략 1만 명 정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기마대가 천명이라면, 흠. 모르겠다. "택도 없이 모자라겠군. 정말 해골병사라도 써야 할 판국이니..." "공자. 어느 곳에 설치하실 생각이십니까?" "아, 그냥 중앙에 설치하는 것이 안전하지." "마력소모가 큽니다. 더군다나, 두명 가지고는..." "아, 엘류시아는 그냥 마법진만 그려주면 되는 데... 마력은 내가 다 할 꺼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나는 뒷짐을 하고 천천히 걸어서 지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철문의 앞에 다다렀다. "이곳은...어디입니까?" "음. 이런 성에는 이런 마법진을 그릴 수 있는 곳을 준비해 두기 마련이지. 그럼 들어가자고." 철문은 오래 되어서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우와~" 엘류시아는 그 크기에 감탄 한 듯 했다. "대단해요. 어떻게...그리고, 이곳에는 여러 가지 마법진이 그려져 있네요?" "음. 나의 스승님이 그려두신 거지. 자, 이곳의 마법진을 활용하면 되겠군. 음... 거기, 그래, 그곳의 위치를 바꿔야 해." [오. 래. 된. 힘. 이. 여. 깨. 어. 나. 라] 마법진에서 오렌지색 빛이 나면서 순간적으로 성을 감쌌다. 이 마법은 대단위 방어마법으로 마법진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마력 소모가 엄청나서 대부분의 하위 마법사는 단, 30분도 버티지 못한다. "음. 됐다. 올라가자. 그리고, 또 준비할 것이 있으니까." 그 위층에는 거대한 음식 창고가 있었다. 나는 다시 마법을 걸었다. "그 마법은 무엇입니까?" "음식 보관 마법이야. 마력소모가 없는 기초적인 마법이야." "저, 왜 이런 일을." "장기전에 대비해야지.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준비 없이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결말이 나지 않겠어?" "그렇군요." 엘류시아야... 왠 생각을 많이 하니. 요즘엔 여자 대머리도 많다더라? "스승님?" "이젠 일어나 앉을 수 도 있는 거니?" "네. 유니랑이 와서 놀아주기도 하는 걸요?" 흠. "그래. 너의 그 레이디는 뭐하시고?" "음... 엘류시아의 누님은 음식을 돕고 계세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신다나요? 자기 먹을 음식이 이상하면 안 된다나..." 헤.. 의외로 깔끔한 성격이군. 날 좀 미워해서 그렇지. "엘류시아님도 오셨군요." "네. 빨리 회복하시죠." 안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후후후. 보고 싶군. "스승님." "응?" "고마워요." 녀석... 스승의 눈에서 눈물 빼는 군. "공자님!" "쟈이츠 무슨 일입니까?" 쟈이츠는 손에 얇은 종이를 쥐고 있었다. "국왕의 군대가 잔센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는 믿을 수 있는 정보원의 보고입니다." 우리도 정보원이 있기는 하구나. "흠. 잔센보다 이곳이 먼저니,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참, 지휘관은?" "엘류시아님의 의견대로 카릿 장군입니다. 기마대 2기에 보병 2만, 마법사단이 1개 있습니다." 많다. 많어. 나는 허무한 어조로 말했다. "대군이군." "다시 방안을 구성해 볼까요?" "아니 괜찮아. 여기 도착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고작 3일이다. 사람들은 성안으로 모두 피신시키도록 하고. 영지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내로 옮기도록. 당분간은 불편할 테니, 필수품이나, 귀중품은 성으로 옮기라고 하도록." "알겠습니다." 반란 진압군이 그렇게 대부대일 필요는 없는데... 피스트레이카 공작의 위명이 그렇게 대단한 모양이군.. 그렇긴 하지. 대마도사의 후예이며, 하나 남은 대공작, 개국 공신가문이니까. "음. 전, 앞으로 뭘 할까요?" "아... 대단한 일은 없고. 식량을 더 모아둬야 할 듯 하군. 사람들의 식량도 여차하면 조달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는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나와 세이는 망루에서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까맣군요." "나 목욕 잘했어." 세이는 망원경을 물어뜯는 기교를 선보였다. "적 말이에요!" "아픈 녀석이 힘도 좋구나." "저하곤 상관없어요!" 그럴테지. 흥. "저도 싸우게 해주세요." "세이야. 맘은 고마운데, 아프면 집중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관두고 조용히 엎어져서 자라." 웅... 하는 세이의 얼굴은 한 마리의 표호하는 곰 같았다. 세이가 망원경을 물어뜯는 것보다 더욱 걱정되는 일은... 바로 눈앞의 까맣게 밀려오는 적군이었다. 갖은 깃발의 색은, 아마도 우릴 겁주려는 연막탄이 아닐까. "하나의 대장군에 5명의 소장군이군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아마, 정면 돌파를 택할 가능성이 클 껍니다." 쟈이츠는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실, 저 정도 부대가지고 우리 성 하나 함락하는 데야 몇 초 걸리지도 않을 텐데. 흠. "뭐, 걱정은 천천히 해도 괜찮잖아. 좀 있으면 사신도 들어오겠지?" "아마 그렇겠죠." 쟈이츠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의 그 사랑스런 마누라는 어때? 위험하진 않겠어?" 그의 얼굴에는 검은 기운이 드리워졌다. "사실, 소식이 끊겼습니다." 알만하군... "그래, 구할 방법은 있고?" "아뇨. 하지만, 전 개의치 않습니다. 저와 그녀는 기사. 이런 일쯤은 예상하고 있어야 하는 일이죠." 이봐.. 지금 고대 소설에 나오는 영웅의 기사들..이냐? "난, 영웅이 아냐. 쟈이츠. 그래서 한 불쌍한 기사의 아내를 못 본 척은 할 수 없다고." "그래도 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흠... 하긴, 그렇긴 하네.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일단 뭐가 속에 차야 생각이 나지. 그저, 늙으면 밥 생각이 간절하다니까." 뒤에서 쟈이츠의 독백이 들려왔다. "움...그래도 난 기대는 했건만..." 당분간, 이성의 방위에는 문제는 없었다. 겉보기엔 저번의 마왕 소동으로 -난 이것을 소동으로 치부해 버렸지만...- 성의 첨탑과, 망루 등은 형편없이 부서져 있었다. 그러나 뭐, 그래도 성 같기는 하고, 마법진도 끄덕 없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위대한 대 마도사님이 계시지 않냐...! 허허허." "사부님... 안 추워요?" 세이였다.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저번에 망루에야, 내가 마법으로 올려준 거지만, 용케도 올라왔는데? "응? 너 아직 돌아다니면 안 되는데..." "걱정 되서요. 생각해 보니 그렇잖아요. 나이만 더럽게 많은 꼬마로 보이는 노인네 하나와, 아내를 적진에 버려 둔 멍청한 기사, 왕을 배신한 띠벙한 여인네, 그녀의 갸날픈 언니... 그리고, 입이 많이 험한 거울... 그 외에 다수의 멍청한 용병단." 나는 세이의 말을 빨리 잘랐다. "야, 고만해라.. 언제까지 할래. 그러단, 우리 집 강아지도 나오겠다." 세이는 큰 갈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우리 성에는 강아지는 없어요." 땀이 흘렀다. "그래... 잘 봐둬라, 저 앞의 병사들을.." 왜 이런 얘기가 나왔냐. "사부님. 말을 회피하는 것은 논점 회피 오류라는 거 아세요?" 음... "공자님! 왕가의 문장을 단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긴.. 내가 무슨 힘있냐? "들라 이르라!" "...그냥 들어오라고 하면 되지, 왠 들라?" 용병 주제에...아... 여기 기강이 말이 아니구나...! "사부님... 그런 어린애 꼴을 하고선, 그런 근엄한 표정 지어봐야... 헛수고 에요." 나도 알어! 임마! 사신의 유형은 셋으로 나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기준인데... 먼저, 첫째는 지독히도 똑똑한데다가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서 타협이란 것은 멀리멀리 날려버린 유형이고, 둘째는 비열하고,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놈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유형의 인간은 이 앞에 앉아있다...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인간이다. "그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나의 이 엄숙한 한 마디로 좌중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귀엽군." 큭억!! "무례하십니다. 이분은 피스트레이카가의 공자님 이십니다." 쟈이츠의 엄숙한 지적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의 충격은 지나가지 않았다.. 귀엽덴다. 나이 백 이십 먹어서 들어봐라...충격이다. 아, 나의 고백. 저는 그 때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아, 그랬었죠? 하지만, 제가 알기론 정통성 없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신의 찢어진 눈매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젠장. "허허허..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잘 못 아셨습니다. 제가 진짜 공작의 후예입니다. 이점은 공작 후예연구원에서 보증합니다." 웃겨 볼라고 한 말이었다. 분위기 한 번 띄워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그랬습니까?" 사신은 점잖게 한 마디 하고, 다시 차를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우리 편 방청석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띠벙한 쟈이츠의 한 마디가 지나갔다. "그런 재단이..." 옆의 용병의 어퍼 후려 차기의 기술이 화려하게 펼쳐지자, 다시 좌중은 조용해졌다. "근데, 그 증거는 있습니까? 전 황제저하에게 보고해야 하는 임무가 있어서.. 후후후." 뭐야!!! 나의 이 순진 무구한 얼굴을 보고 그런 말이 나와! "허허허... 흥미롭군요. 그런 게 있다면 제가 먼저 들고 갔겠죠." 그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친자가 아니죠. 확실하게. 그리고, 후예나, 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몸을 약간 뒤로 빼고 편하게 앉았다. "다만?" "제가 본인 이라서요." 이번엔 많은 사람이 벙찔차례군.. 이럴땐 무슨 효과 없냐? 쓸쓸하군. "제가 라플, 피스트레이카 공작입니다." 자, 이젠 여러분 놀라실 시간이에요~~ "흠.. .증거는 있습니까?" 엉? 놀라지도 않네. "음... 이곳을 앞의 대군으로 쳐보면 아실 겁니다. 제가 진짜인지 아닌지." 그는 빙긋이 웃었다. "회담 결렬이군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는 일어서서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그리고 쟈이츠의 질책이 이어졌다. "왜 그런 헛소리로 무덤을 파십니까!" 나 헛소리 안 했는데.. "맞습니다! 공자! 어쩌자고... 만에 하나, 정말, 피스트레이카 공작이 알게 되면, 당장에 척살 대상에 오르게 될 겁니다!" "엥?" 엘류시아는 나를 향해 핏대를 올리고 있었고, 쟈이츠는 말 그대로 조용해졌다. "할 수 없잖아.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멋지게 싸워주지 뭐." "하지만, 같은 나라 군인끼리 싸운다는 것은..." "괜찮아. 적이 우리를 치지 못하는 대신, 우리도 그들을 공격하진 않을테니까. 후후후."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았다. "비상! 비상! 적군이 진격해 온다!" 용병답게 쌈박한 대답이 들려왔다. "알았어! 밥 마저 먹고 갈 께~" 이봐... 우리 지금 전쟁하는 거 아냐? "이게 다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부님..." 허걱...! "아, 적들이 오니, 마법진을 가동해야겠다. [오. 래. 된. 힘. 이. 여. 나. 의. 이. 름. 을. 받. 아. 다. 시. 나. 에. 게. 오. 라.] 하늘에 최고급 마스터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진이 그려지고, 테가 무려 열 개나 되는 마법진이었다. 허허허. 젊은것들은 이런 걸보고 본 받아야지~ "좋았어!" 적들은 떼거지로 몰려오다가 하얀 막을 찔러보곤 질겁한다. 안 찔러지니까 통과는 당연히 못하고. 난 그래도 마법사단이 있으니까, 알아볼 줄 알았는데...응? 그래. 엘류시아는 알겠지? 물끄러미 엘류시아를 응시했다. "무슨.. 무슨 마법진이 저렇게 거대하죠? 어떻게 저게..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줄 알았는데..." 뭐, 그 이론을 쓴 게 바로 나! 아니겠어? "왜, 이상한가?" "아니요... 저것의 지속시간은 얼만큼이죠? 마나의 사용이 급속할 것 같은데..." "응... 한 200년 정도? 내가 해제하지 않으면..그 정도 까진 갈 꺼야." 턱 빠지겠다. "말...도 안돼요! 그게 상식적으로도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이때 나의 대답은 이렇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단다." "사부님! 드디어, 그 이름 긴 방어진을 하셨군요!" 오, 세이야.. 넌 역시 수행의 성과가 있구나. 이젠 쓰잘 데기 없는 검은 접고 다시 마법 수행을 하렴. "허허허.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나니까 가능 한게 아니겠느냐? 음 하하하!" "..." "..." 좀 오버했군. "그럼 이대로 적군은 진격을 못하는 겁니까?" "뭐, 좀 있으면 물러나서 상황을 보겠지. 언제쯤 마법이 풀릴까 하고. 뭐, 그 동안 우리는 ...땅 따먹기 라도 하면서 놀까?" "요즘 누가 그런 걸 합니까? 무투회 이벤트나, 먹기 대회를 열자구요." "좋은 생각이야!" "오~ 당장 행사위원회를 준비하자고!" "난 무대 세트를 만들지!" 야... 지금 전시야. "저 용병 하루에 얼마냐?" "뭐, 거의 자원병이니까.. 동네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이지요. 따라서 보수는 후하게 쳐봐야...한 10메장 정도입니다." 쟈이츠.. 너무 짠 거 아냐? 에 휴휴휴. 너도 양이 먼저냐? 질이 중요하다고. "이번에 행사엔 상금 많이 걸어." "알겠습니다." 역시 우린, 긴장감 결여 군단 이였던 것이다. 흑. "사부님! 저도 무투회에 참가 할래요!" 맘대로 해. 단, 그 때까지 부러진거 다 나으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전, 망루에 있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아냐. 엘류시아도 언제 놀겠어. 거울 올려놔. 떨어져도 안 깨지니까.. 안심 푹 놓고." 엘류시아는 빙그레 웃었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엥? 하여간, 엘류시아는 후다닥 가버렸다. 먹기 대회에라도 나갈려나 모양이지? 하긴, 저번 마을 축제도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 흠. "그럼 우리의 적은 참...불쌍한 거네?" 지평선 반대쪽에 서 있는 그들은, 왠지 모르게 불쌍해 보였다. 쯔... "그게 무슨 소리인가!" 구렛나루가 왠지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축..제를 준비하는 거 같습니다." "페롤경! 경은 분명히 피스트레이카 영지는 매우 파괴된 모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 분명히 그러하였습니다." 음침한 마법사가 끼어 들었다. "마법의 힘입니다. 아주 강력한 마법진입니다. 지금 그 정확한 힘의 계산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얼마 뒤면 보고가 올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저 축제를 준비하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이요!" "...아마, 뭔가 믿는 게 있는 게 아닐까요? 어찌되었던, 저곳은 지형적으로 탁트인 지형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점령당한 적이 없는 불패의 땅이니까." 모두의 머리속엔 한 위대한 마법사의 이름이 새겨졌다. 라플. "잠깐 기다리십시요. 무슨 생각들을 하고 계신 겁니까? 어차피 마법이라면, 저런 거대한 방어진이 오래 갈 리가 없잖습니까!" "흠... 그렇지." "그때를 노려 치는 것입니다." 모두의 고개는 끄덕여지고, 이렇게 회의는 쫑 났다. "흑... 괜찮아?" 앞의 흑의 얼굴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너나 조심해." "하지만... 하지만..." 흑은 그의 손을 들어 내 얼굴에 묻은 검뎅이를 닦아주려 했다. "내 손은 이미 더럽네. 하하하." "흑....흑..." 갑자기 흑이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 나도 들을 수 있었다. 그 미세한 소리를. 천천히 흑은 바닥으로 붙었고, 나 역시 따라 붙었다. "키키키키." 어디서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흑은 나를 바라보았다. 항상 우리가 넷 이였을 때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키키키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나와 흑은 개인적인 볼일을 마치고 피스트레이카의 영지에서 성으로 돌아왔을 때 흑은 안느비에 관한 사실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은 그를 죽음으로 몰기에 충분한 사건 이였다. "안느비는 사람이 아냐. 어쩌면 마도의 끄나풀일 수 도 있어. 그리고, 대한 민국과 전쟁을 벌이려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안느비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걸로 봐선 마도의 입김이 작용하는 거겠지." "맙소사...! 흑, 그걸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또, 도움을 받을 수 있겠어? 또, 휘젠님은 현재 사신으로 가셨다가 오는 중이잖아!" "휘젠님도 믿을 수 없어." "뭐야!" 흑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뜻...? 그렇게 이야기하고 누구에게 도움을 얻을까 생각하던 중에 알폰소 공이라고, 기사 중에 긍지 높은 사람을 선택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대체 저게 뭐야..응?" "알폰소야." 흑을 이만큼 상처 입히고, 우리의 어떤 공격도 먹지 않은 저 괴물이 바로 알폰소였다. "젠장..." 난 조용히 흑이 시키는 데로 서 있었다. 그런데... 내 어깨위로 뭔가 차가운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흑...여기 물이 떨어져." "어쩌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저건 틀림없는 하수도야." 흑은 조용히 하수도를 열었고 나를 먼저 올려 주었다. 알폰소의 저택에 이런 지하가 있다는 것도 의외지. "키키키키..."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서!" 곧이어 커다란 낫 같은 팔을 든 마족이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그 기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키키키키...." "어서! 적! 어서 올라가!" "흑! 너도 어서!" 흑은 날 보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한다. 적. 꼭 무사해라." "아냐!" 난 정신없이 달렸다. 누구에게 가야하지? 이젠... 흑..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딜 그렇게 정신없이 가지?" 사람이다! 뭔가 내 가슴에 꽂혔다. 나는 정면의 물체들을 바라보았다. "...!" 한 사람이 내게 미소짓고 있었다. 휘젠님이셨다. 그리고 나는 곧 바로 내 가슴팍에 젖어드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휘젠...님.. 컥..어째서..." "너흰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나의 눈에는 힘 잃고 쓰러지는 발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휘젠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잘 가." 앞의 그 괴물.. 그래. 저건 바로 그 말로 만 듣던 괴물을 볼 수 있었다. 적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괴물은 나를 노리며 서서히 맴돌고 있었다. "...좋아." 괴물이 날아오르면서 그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나는 재빨리 검은 색 옷을 괴물에게 집어던지고 옆의 창구로 몸을 날렸다. 그곳에 쌓여있던 상자들이 힘없이 부서졌다. 그리고 상처부위에는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난.. 흑이다." 난 다시 괴물이 다가 오는 게 보였다. 내 단벌 흑의는 갈갈이 찢겨 있었다. "백치들이 헝겊놀이를 좋아하는데 말야. 하하하..." 난 상자를 보았다. 뭔가 던질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하나가 보였다. 녹슨 창 하나였다. 난 그것을 들었다. "죽어라. 괴물새끼!" 괴물의 몸에서 탁하고 비린내가 물씬 났다. 역겹긴 했지만.. 살아남아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이건 뭐지?" 아까 상자를 치운 곳에는 작은 구멍이 아래를 향해 나있었다. 난 조용히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한 점이 많았다. "음?" 지하도였다. 꽤나 아래쪽으로 연결된.. 내가 모르는 걸 보면 아마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숨을 몰아쉬고 기둥 뒤로 숨었다. "..야." "케빈. 하지만, 이런 곳에 뭐 털게 있냐?" "모르는 소리! 하긴.. 좀 으스스하긴 하다. 여기 괴물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으니까." 어린 아이 둘이었다. 어딜 봐도 인간으로 보이긴 하는데 아이들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야, 어서 가자." "허허. 좀 있어보래니까. 응? 저기 마기가 느껴지는데?" 마기! 설마, 마족이...! "젠장. 정말 괴물이 있을 줄은... 준비해." "응. 케빈." 내 그 소년들이 가리킨 쪽은 바로 내 뒤였다. 그렇다는 것은. 등이 서늘해 왔다. 뛴다! "키키키키...." 나는 재빨리 창으로 녀석을 한대 쳤지만, 이내 창은 오래 되어서 그런지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팔에 맞아 아래로 뒹굴었다. "사람이 있어! 빨리 해!" [빛. 이. 여. 나. 에. 게. 오. 라] 케빈이라는 소년은 손에서 작은 물병을 꺼내서 괴물에게 던졌다. 그리고, 살린 이라는 소년의 손에서는 작은 구체가 형성되어 그 괴물에게 날라 갔다. "키...익." 괴물은 서서히 녹아 내렸다. "고맙다..." "뭘요. 다 돕고 사는 거죠. 근데, 아저씨도 동업자이신가 보죠?" "아니..." "케빈! 실례야!" "넌, 신관이냐?" 살린의 얼굴에는 붉은 빛이 띄어졌다. "한때는요. 지금은 아니에요. 그보다, 정말 이런 괴물이 득시글댄다면 나도 대책이 없다고. 빨리 나가자. 아저씨 부축해 드릴께요." 나는 그 때 만큼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적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성벽에 목만 애처롭게 적이 우는 것처럼 달려있었다. "야야야얍~~~" 세이의 빈약한 외침만큼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정말이지... 저렇게 내가 가르쳐 준걸 다 잊다니... 자세정도는 안 되는가? 적어도 폼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우앗!" 미끄러졌다. "저... 다음엔 제가 나갑니다." 쟈이츠도 딱 하다는 듯이 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동정의 눈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저 녀석은 불쌍하단 말씀. "음...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라고." 엘류시아는 정말 먹기 대회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다크호스가 다타났다는 둥 어쨌다는 둥... 흐... "왜들 저렇게 축제에 목숨을 거나 몰라..." 이쯤 되면, 적군은 애가 타고 단단히 타겠지...히히히. "사부님...졌어요." 그 실력으로 이기길 바라는 네가 나쁜 거란다. 사람은 마땅히 뒤돌아야 할 때를 알아야지. "다음에 이기면 되지. 뭐." "잉..." 나잇살이나 처먹어 가지고서 하는 꼬락서니하곤.. 쯔... "와야!" 기사단 쪽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아마... 쟈이츠가 선전을 하고 있나 보군. "쟈이츠!" 쟈이츠 녀석...부인도 적진에 있다는 놈이... 태평하구나. 하늘엔 구름이 흐르고... 이렇게 평화스러운 환경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떠들고, 어린애들은 웃고, 마시고... 아, 정말... 밖에 2만이 넘는 군대만 없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저, 공자님." 엘류시아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아, 무슨 일인지..." "저, 먹기 대회 안 나가 실래요?" 저렇게나 수줍은 표정으로 저런 험악한 대회에 나가자고 하다니. "아, 전, 항상 적의 침공에 대비해야 합니다." 배불러서 죽겄다. "그래도..." "세이나 데려가요." 세이는 그녀에게 끌려갔다. 정말이지.. 왜 이런 소모성 놀이를 개발 해낸 거지? 흥. 그나저나, 공작은 무슨 생각으로 반란을 일으킨 거지? 생각 1. 맛이 가서. 생각 2. 갑자기 세계정복을 하고 싶어서. 생각 3. 평소 왕에게 불만이 많아서. 생각 4. 왕이 되면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웅..1번이나, 4번인 거 같군...흠.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이쁘지?" 미인 대회도 하고.. 좀... 살인날 분위기가 흐르긴 하지만. "그런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도록 훈련받았어. 나도 바보 거울은 아냐. 난 그냥 거울이 아니라니까." 누가 뭐랬냐... "시끄러! 거울이면 거울 답게!" "젠장! 난 거울 아냐! 그럼 된 거잖아! 제발 나한테 묻지 말아다라라라라!" 거울아... 사투리 튀어나오잖니. "에잉.. 재밌어 보였는데 말야." 이렇게 오늘도 또 하루가 허무하게 지고 있었다.. 이건 허무를 지나 허탈해...이젠 좀 제대로 일할 수 없나... 전쟁은 그렇다 치고... 쟤네들 양식도 안 떨어지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겠군. 그런 분위기야. 게다가 먹기 대회까지 했다는 것을 알면 뒤집어 지겠지...뭐, 이러다 보면 뭔가 일이 나겠지. 반란군이 왕성을 점령하든지 그 반대가 되든지.. 이대로 한 200년은 끄덕 없으니..흥. 아, 내가 그렇게 오래 못 사는데... "스승님~~" "세이야, 오늘은 또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냐?" 세이는 갑자기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스승님...모르겠는데요?" 에휴...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그래. 마법 스펠 이번 꺼는 다 외었느냐?" "네. 스승님. 전 아무래도 마법에 더 소질이 있나봐요" 글쎄다... 그건 봐야 알지. "그나저나, 휘든 부인은 어쩌고 계시냐?" "예? 몰라요." 매정하고, 매우 간단하게 말해버리는 군. 이봐, 너 그 사람 좋아하지 않았냐? "그보다, 유니가요, 거울 변론대회에서 우승했지 뭐 에요?" 그건 또 뭐 하는 대회냐? 이젠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게 뭐냐...?" "거울과 이야기해서 거울이 패배를 시인하면 된다나 봐요. 아무튼 이번 대회에서 가장 히트였어요." 어떻게 이겼는지 듣고 싶지도 않군. "그래...그보다, 왜 오늘 아침은 안주는 거냐?" "참. 죽을 쒀야지. 좀 기다려 주세요~" 저 녀석, 뭐가 그렇게 좋은 거냐....? "공자님." 엘류시아였다. 얘만 오면 불길해지지. "무슨 일인가?" "네. 다름이 아니고, 적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허걱! 이렇게 빨리? "어떻게 된 거야? 적어도 몇 달은 있을 꺼 같더니?" "믿을 만한 정보원의 이야기로는 수도 근처까지 반란군이 진격했다고 합니다." 이번엔 내가 일어날 차례였다. "그렇게 쉽게 진격하다니! 말이 되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공작일행은 엄청난 대군에, 각처의 귀족을 포섭했다고 합니다." 이런 젠장. "이곳을 지날 확률은 없군. 그래서 후퇴하는 거군." "그런 거 같습니다. 공자님 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나야 뭐... 흠... "전령을 보내서 앞에 가는 군대에 서한을 보내." "알겠습니다. 무슨 내용을 보낼까요?" "난 예전에 트라이너의 왕과 약속한 바가 있다. 대륙의 평화와 트라이너의 존속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힘을 빌려주겠다고.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이상. 나라도 가서 싸워야 한다. 이 사실을 공표해라." "공자! 하지만, 이번 반란은 공작님이 일으키신 겁니다!" 난 쓴웃음을 흘렸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우리 공작가의 묵시적인 약속이다. 그럼 준비하도록." "각하..." 엘류시아가 나가고, 나는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지팡이가 있는 편이 마법 소모가 적어진다. 나야, 그 정도에 흔들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에 대비할 필요는 있겠지. "공자님! 말도 안됩니다!" 기사들은 당연히 일어서서 반대하고 있었다. "아, 걱정 마. 나만 가면 되니까." "말도 안됩니다. 혼자 가신다는 것은 더더욱." 난 세이를 쳐다보았다. "내 제자랑 나만 가면 되. 너희들은 그와 주군의 관계를 맺었으니. 나는 트라이너의 신성한 검 앞에서 맹세했다. 그러니, 그 맹약을 지켜야 한다." "..." 쟈이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스승님. 전 괜찮아요." "안 물어 봤어 임마." 엘류시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 공자님을 따르겠습니다." "엘류시아는 여기 남아. 마법진을 유지하려면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거대 마법진을 나가서 아무런 다리 없이 운영할 수 는 없어." 모두는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저희 용병대는 공자를 위해 가겠습니다. 저희가 계약을 맺은 상대는 공자님 이시니까요." "필요 없어요. 사실, 이곳 성이 더 위험할 지도 몰라. 그러니까, 쟈이츠가 남아서 이곳을 방어해야 한다는 거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쉰 소리. 썩은 소리. "틀림없이. 공작은 이곳을 친다. 항복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야." "예?" 다 놀라는 눈치로군. "뭐. 믿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뭔가 꺼림칙하다고. 이렇게 일찍 방어진을 돌파할 수 는 없어. 그리고, 대한민국과의 교전도 그렇고. 나바스는 대한민국의 편을 들고 있으니. 전쟁이 장기화 될수록 우리가 불리해 지지. 하지만, 이번 일들의 정점에는 공작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모두는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늙은이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고. "좋아. 내가 상세한 지시는 엘류시아와, 쟈이츠에게 알려 줄 테니. 그렇게 알도록." 쟈이츠와 엘류시아는 서재에 서있었다. "이건 무리입니다." "쟈이츠. 괜찮아. 난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대 마도사님이시라니까. 허허허. 세이는 그래도 지 앞가림은 할 줄 알아. 그러니 내가 데려가는 거고. 다음에 올 때는 모두, 내가 데려가도 괜찮을 정도로 강해지도록." 엘류시아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작은 반지를 건네주었다. "엘류시아. 이걸 받아. 이 반지는 마치 내가 여기 있는 효과를 주지. 뭐, 이 반지는 너 스스로의 의지로 빠지지 않는 이상 빠지지 않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리고 쟈이츠."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너의 부인. 구할 수 있으면, 구해보마. 하지만, 기대는 하지마. 그리고 절대 명심할 점이 있어." "하명 하십시요." "너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아라." "예." 쟈이츠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흘렀다. "엘류시아. 너는 너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성에서 어떤 사람이라도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면 반드시 베어버려라. 쟈이츠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할 테지만, 너라면 할 수 있을 테니까." "공자?" "수상하니까. 만에 하나 정 모르겠다면, 거울을 이용하도록. 그 거울은 마족은 아니지만... 위험한 물건이야. 마족의 천적이지. 그럼. 반드시 내가 지시한 것들을 명심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석양이 깔려서 성벽이 붉게 빛날 때 쯔음, 나와 세이는 다시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10. 흑 피가 흘렀다. 마왕은 나에게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도 그에게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없는 것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난 살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강렬히. 살고 싶은 욕망은 나를 이기게 해주었다. 마왕은 나에 의해 봉인 당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고, 힘도 나뉘어졌다. -여행자- "사부님... 근데, 왕군은 분명히 말로 이동했죠?" "응. 근데 왜 그러느냐?" "우린 걸어가잖아요. 이래서 언제 따라잡아요!" "야, 적에도 보병은 있잖아. 그리고, 우린 둘이니까, 쉬지 않고 가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그리고, 중간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우리야 편하지. 쉽게 따라잡으니까. 안 그래?" 세이는 소리를 질렀다. 짜식, 입 큰 거 자랑 하냐? "안 그래요! 무엇보다 힘들어요!" 그게 속셈 이였지? 다 알고 있다. "어디 보자.. 응?" 옆에는 쭉 오솔길로 되어 있어서, 적들이 숨어있기엔 좋은 상황이었다. 아마... 적인 듯.. "적이다." "으.. 스승님... 그런 거 안나올 꺼 라고 했잖아요!" 말처럼 쉬운 게 없단다. 제자야. "우리는 이세상의 가장 강력한! 라플의 의적단이다!" 왜 하필 내 이름을 도용해서. "언제 저런 조직을 결성하셨어요?" "조용히 해....." 나의 심기를 한껏 어지럽히는 특수기를 남발하면서 라플의 의적단은 우리를 위협했다. "돈 내 놔!" 사람을 해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사부님. 어쩔까요?" "글쎄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어딜 보나, 마법사 일행으로 보이진 않나...? 좀 어려 보이긴 하는 군...흠. "사부님, 그냥 쓸어버리시죠."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제자야." "아항.. 그러시나요...?" 왜 비꼬는 투로 들리나? "근데, 얼마나 내 놓아야 하며, 왜 주어야 하고, 라플이라는 이름은 왜 붙었고, 왜 의적단이라는 이름인지, 나에게 설명을 해 주셔야 겠습니다." "꼬마녀석은 조용히 해!" 꼬마... "흐익! 저기, 우리 스승님 화나셨다!" "우오오옹~!" 불받은 마법사는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나는 마법을 날리기 시작했다. "사 원소 마법이다!" "스승님~~" [불. 물. 흙. 바람.] 사원소 마법의 특징은 아주 막 간다는... 주변이 순식간에 황폐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날라 가고 쓸려가고 묻히고 불타고... "으악! 스승님! 그만해요!" "쳇." 나는 산적을 째려보았다. "지금 댁들의 눈에 있는 이 사람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야! 꼬마가 아니란 말이다!" "으악! 괴물 꼬마다!" 괴물...꼬마 라고라...오늘 무덤이 가깝구나! 죽어! "스승님! 마법을 아끼셔야죠!" 세이의 간절한 부탁에 나는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저..." 누가 나를 부르는가! 이 위대하고 위대하며, 세상의 빛보다 더 아름다운 나를! "어, 누구세요?" 세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우리 오른쪽에는 세 사람이 서있었다. 둘은 아직 성인도 아닌 세이 또래였고, 한 명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칙칙하다." "스승님!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된다구요! 지금은 그리고 저렇게 어둡고 칙칙한 옷을 입는 가을 이라구요!" 이봐. 세이야. "전 케빈. 이쪽은 살린입니다. 이쪽은..." 꼬마들의 이름은 케빈과 살린이었다. 살린이라는 이름은... 사리리르라는 이름의 약칭이 아니였던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그냥 조용히 있었다. "그냥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요." 이름도 더럽게 길군. 그냥 검은 옷을 입은 남자라니.. 성이 어디서 어디냐? "마침 산적을 보고 피해 있던 참이죠. 하하하.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마법은 현재엔 실전된 4원소 마법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사용하실 수 있죠?" 그야, 내가 대 마도사이시니까. 후후후후. "뭐, 수련을 열심히 했으니까." 세이는 땅파고 있었다. "뭐하냐?" "스승님이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걸 보니.. 전 아직도 한 300년은 수련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당연하잖아! "그보다, 살린은 신관이신가 보군요." 살린의 얼굴은 약간 붉어졌다. "지금은 아닙니다." 흠...지금은이라. 그럼 예전에는 신관이었다는 이야기잖아. 나를 속일 순 없지. "하지만, 사리리르라는 이름은 대 제사장에게 붙는 칭호인데..." 수상해라는 얼굴로 노려보는 중. "어떻게...! 아냐..아니에요. 전, 파문 당했거든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히 말려드시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의역하면, 제발 말려들어 달라는 말로 들리네. "저.. 스승님. 그게 뭐 에요?" "그게 바로 그것이야." "그러니까, 그것이 뭐냐구요." "내가 어떻게 알어?" 밥탱이 대화가 되었다. "그래. 무슨 일이신가? 예까지. 지금은 전시라서 바쁘실 텐데.." 두 명의 소년은 그냥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분이 피스트레이카 영지에 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데요." 엉? "헤에. 누굴 만나려고?" 그냥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낮고 깊숙한 저음으로 말했다. "엘류시아라고 합니다." 엉? "댁, 혹시 흑의 사절단이요? 키히 크리시아 휘젠 휘하의. 거참...내가 없을 때 우리 영지에 와서 한 판 했다고 하더니." "에엣! 스승님! 이분이 바로 엘류시아 누나의 꼬봉이에요?" 꼬봉... "난 그녀의 부하가 아니다." 뭐. 그렇지... 도대체 내 제자는 일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아나.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내가 바로 그녀와 이야기하게 해 줄 수 도 있는데..." 모두의 눈이 동그레졌다. "예?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누나는 저 멀리 영지에 있는데." 흥. 나 같은 대 마도사님이시라면 가능하지. 후후후. "자, 흙에 물을 채워보자." "저기 시냇물 있는데요?" 끅.. "자, 그럼 시간은 얼마 줄 수 없으니... 이야기 해 보지." "당신은 누구시요?" 나는 빙긋이 웃었다. "댁들이 죽이려는 자. 뭐, 공자라고 해두지." 흑의 얼굴이 흐려졌다. "자, 준비하라고!" 나는 반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엘류시아!" 곧이어 반지에서 빛이 흘러나와서 시냇물에 투영이 되면서 물에 엘류시아의 모습이 비춰지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나나 일행은 그냥 물에 그녀의 모습이 비추는 것 뿐이지만, 엘류시아는 갑자기 내 얼굴만 허공에 나타났으니. 뭐. "공자님. 무사하시군요. 별일 없으십니까?"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지. 그보다, 여기 자네를 만나려는 사람이 있어. 이름은... 그냥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라네." "네...?" 흑은 시냇물 앞에 섰다. 그리고 탁탁하고 물기 없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백... 나다." "흑? 무슨 일이야?" "적이... 죽었다. 휘젠님이 죽인 거야." 휘젠이라면.. 키히가? "그게 무슨 소리야!" "조사하던 중에.. 안느비 쪽에서 마도와 결탁한 사실이 드러났어. 알폰소님도 사실은 마족이였고..." 이거.. 우리가 들어선 안되는 내용인데.. "아마 날 제거하려고 할꺼야... 그리고, 근처까지 온 거 같아. 마족들이 말야. 엘류시아. 너만 믿는다. 휘젠님은... 우릴 모두 죽이려 하고 있어.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휘젠님을 믿지마... 절대." 나야 뭐... 이럴 때는 역시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을 감사해야겠군.. 그냥 섭섭한 마음 뿐. 하기사, 한 번 엘류시아를 죽이려 했었으니까... "...흑...어떻게.. 그런..."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공자님." "시간 다됐어." 물이 다시 흐려지면서 다시 일반의 시냇물로 돌아갔다. "흑. 점점 땅파는 건 좋은데... 어쩔 껀가? 나의 영지로 갈 생각인가?" 흑의 눈에는 이채가 어렸다. "아니. 난 다시 성으로 돌아가 친구의 복수를 할 것이다. 그리고, 휘젠님이 왜 그런지도 알아야해." 난 대충 짐작하고 있지만. 뭐,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야. "무리야. 자네 힘으로는 근처에 가기만 해도 알 수 있을 껄.." "스승님. 저희는 어차피 왕성으로 가야 하잖아요." "그래. 반란이 일어난 것은 알고 있지?" 흑의 고개가 들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거야 원... "그러니까, 나의 양부뻘 되는 피스트레이카 공작이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 그리고 현재 왕성으로 진격중이야. 난 그것을 막기 위해 성으로 가고 있는 중이고. 뭐, 불만 있으면 말하라고. 단, 데려가 달라고 하면. 뭐, 그럴 수 도 있지." 인심쓴다. 나, 무지 착해진 거 같지? "저.. 괜찮으시다면, 저희 둘도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케빈이었다. 난 애들은 취미에 없는데. 귀찮거든. "흐흥... 케빈군과 살린군?" "예. 저희는 이번 반란과, 수도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봅니다. 나바스에선 저번에 고위 귀족이 마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트라이너라고 그렇지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제 생각엔 안느비 자체가 그 마족인 거 같습니다." 얼레레? "뭐, 그렇게 될 수 도 있지. 일단은 우린 왕성을 지키는 게 목적이니까. 그럼, 같이 가지 뭐. 자넨 어쩌겠나, 흑."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야, 우리는 다시 성을 나서게 되었다. 아마도. 어떤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난 키히라는 인물에 대해서 걱정과 함께 불안이 솟구치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오랫동안 혼자 지내야 하겠지... 그럼 어떻게 할려고 그러지요?" "그 때는 그 때일... 전, 지금이 소중하답니다." "내가 오래 살아야 하겠군. 하하하." "괜히 마족이나 찾으러 다니지 않으신다면 말이죠." "하하하... 그래. 키히. 그러지. 내 친구들은 요즘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거 같던데.. 왜 그러지?" "모르죠. 전, 그냥 단지 당신의 키히니까." "헉.!" "웅..." 아직 밤 이였다. 다섯 명으로 일행은 불었지만, 속도는 나름대로 빨라졌다. 이곳은 여관이다. 그리고, 주민들도 서서히 전쟁에 공포에 시달리는 거 같았다. 수도로 올 수 록 이 모양이라니... "케빈... 아마.. 그럴꺼야." "....이지만, 죽여야만 해." 어린애들이 밤중에 살벌한 소리를 하고 있군. 나와 세이는 잠만 잘 자고 있는데 말야. "에잇." 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수도로 갈 수록 뭔가 불행이 엄습하는 거 같았다. 키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스승님! 저기 저게 바로 전쟁이라는 거군요!" 어느새 수도에서 가까운 요새에 못 미친 곳의 언덕에 도착한 일행은 이미 교전중인 대 부대를 볼 수 있었다. "저게 공작의 군대로군요. 무척 훈련도 잘 받았고, 강해 보입니다." "아마도... 왕의 부대가 이길 가능성이 적겠습니다." 케빈과 살린은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세이의 말은.. "우와~ 깃발이 엄청 많네요!" 였다. "어쩌시렵니까?" 흑은 조용히 내려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수도로 잠입해야지. 그래서 휘젠님과 이야기 해봐야겠어." 무리가 아닐까. "글쎄... 같이 가자고." 휘젠의 마력이면 저 정도의 부대는 끄덕 없었을 텐데... 왜 힘을 쓰지 않는 건가.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불안해지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이 녀석은 구경만 잘 하고 있었다. 이젠 아주 도시락까지 꺼내고 있었다. 가만... 우리가 떠난 지 며칠 째인데... "세이야. 그거 썩지 않았냐?" "네? 엉... 에이. 쉰내. 괜찮아요. 다시 데워먹으면 되니까." 난 절대로 안 괜찮아! "참, 흑은 어디 가는 겐가?" 그는 눈을 빛냈다. "공작을 암살하러 갑니다." 왠만 하면 밤에나 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는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기 까지는 좋았다. "으웩!" 병신... 흑, 미끄러져 실족하다. 다 알려라. 알려. 너 정말 스파이 맞냐? "으..." "이봐, 좀 천천히 움직여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텐데 말야. 어디 급한 일 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짤린 첩보원." "사부님.. 너무 심해요. 좀 유화된 표현을.. 음. 그래! 명퇴 스파이는 어떨까요?" "아니면... 그래. 살린 살려줘는 어때?" 왜...! 그런 표현이 나오는 거냐! 케빈! "지금 아픈 사람 앞에 두고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헉... 이제야 눈치 채시다니. 잽싸군. "저.. 흑. 많이 아파요?" "그렇다." 저렇게나 진지한 어투로 아프다고 하는 스파이는 처음이야. 아니지. 이젠 짤렸으니. 저렇게 행동해도 되는 걸 꺼야. "음. 할 수 없네. 우린 우리의 길을 갈 테니. 잘 있게. 권투를 빌어!" "무슨 짓이야!" 세이는 빙긋이 웃으면서 뒤돌았다. "농담이지요. 헤헷~" 으... 세이녀석. 18살이나 먹어 가주고 한다는 짓이... 이 모양. "어쨌든 지금 가는 건 무리니까... 당장은 아마도 그냥 쉬고 전황을 살펴보자고." "하지만, 누워 있는다 해도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소. 난 잠입을... 흐억!" 케빈이 재빨리 부축하면서 말했다. "흑. 괜찮아요. 원래 악당은 가만히 있어도 필요한 정보를 다 알 수 있거든." 무슨 소리야. "뭔소리야! 케빈!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럼 그럼. "아까도 말했지만, 악당은 원래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야. 아는 것과 알게 되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으... "스승님. 이들과 동행하기가 싫어지는 데요..." 나도 싫다. 제자야. "... 근데 왜 내가 악당이지? 차라리 저 피스트레이카 공작가의 공자라면 그래도 괜찮을 거 같은데." 케빈은 빙긋 웃었다. "원래 악당은 검은 색 옷을 입잖아요. 그치 살린?" "맞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그러네. 하하하." 맑고 맑은 하늘이었다...그리고 나와 세이는 조용히 걸어갔다. 더 이상 이들과 이야기 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가자. 세이야..." "예. 스승님." 그렇게 나는 제자의 손을 잡고 열심히 걸어갔다. "작은 마을이로군요. 아마, 여관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흑은 항상 정중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에이. 설마. 악당은 어느 상황에서도 노숙을 하진 않아." 흑이 불쌍해졌다... "그러니까! 난 악당 아니라니까!" "응 그래. 악당은 아니지." 살린의 손을 잡고 케빈은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어둠의 자식." 쯔... 하여간, 바로 옆에 여관이라고 쓰여진 곳으로 우리 일행 다섯 명은 들어갔다. "음. 애들은 안 된다." 난, 댁보다 거의 배는 넘게 산 거 같은데. "저... 하지만, 여기 검은 옷을 입은 분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나요?" 주인은 살린의 말에 따라 유심히 그를 쳐다보았다. "흐음... 아냐. 내 눈은 못 속여! 썩 가라! 어른이 없이 애들끼리 묵으려 하다니!" 내가 나서야 겠군. "저, 주인장. 사실은..." "꼬만 저리가!" 큭.... "스승님. 우리 이젠 어쩌죠? 이 마을엔 이 여관뿐인 거 같은데..." "제자야. 괜찮다. 그보다, 이곳의 촌장의 집에 가서... 엉?" 저 멀리... 말발굽의 소리가 들려오면서 한 떼의 군사들이 들어 닥치고 있었다. 그리고, 깃발에 새겨진 문장은 바로 피스트레이카의 문장이었다. 허걱...! 사람들은 재빨리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상에... 그럼 우린? 방도 없이. "말을 멈춰라!" "예!" 제일 앞에 있던 사람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정확히 흑과 눈이 마주쳤다. "거기 검은 옷 입은 사람! 넌 뭐냐? 감히 피스트레이카의 문장을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다니! 죽고 싶냐!" 윽... 난 재빨리 흑에게 눈 신호를 보냈다. 참어! "후후후... 난 바로 너희 공작을 죽이러 온 자객이다!" 요즘 자객은 피켓 들고 광고하나 보지...? "저기... 저기..." "죽여라! 저놈들도 한패가 틀림없다!" 검은 옷 입은 사람과 한패라니... 아. 흑, 넌 어쩌자고 그렇게 다혈질인 게냐. "바라던 바다!" 이렇게 된 이상... 싸워야겠지.. 아, 난 이렇게 무작정 싸우는 게 제일 싫던데... 세이도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웅... 검술로 해야하나... 마법으로 해야하나..." 난 그냥 열심히 검을 휘두를까... 하다가.. 가만, 내가 재들이랑 뭐 하러 싸우냐? 내가 원래 공자인데. 훙. "오해가 있으셨군요. 전 바로 피스트레이카가의 공자, 프라오니스입니다. 제 얼굴을 모르시지는 않으시겠죠? 예전에 한 번 뵌 적이....엉?" "죽어라! 검정 놈!" "누가 할 소리! 넌 지나가는 닭이다!" 왠 닭? "거기서 닭이 왜 나오는 걸까요...?" 그보단... 우리가 포위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나...? "좋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케빈은 있는 데로 한 인상을 굳혔다. "항복할래~" "..." 사령관은 잠시 말을 잃었다. "저놈들은 다 바보다. 모두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믿어달라. 흑흑흑. "스승님... 생각해 보니, 저 검을 안 가져왔어요. 평소엔 검이 아니라 목검으로 연습했잖아요..." "그럼 마법을 쓰거라..." "넵!" 세이는 주문을 외었다. [엣. 취] "그게 무슨 주문이야!" "재체기가 나왔다구요! 어쩌겠어요!" 그 사이 살린은 신성마법을 구현해 내고 있었다. 믿을 놈은 이놈밖엔 없군. [회. 복] 다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나, 과연 여기서 뼈를 묻는 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역시로 병사들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숨막히는 긴장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일행이었다. "케빈! 검은 안 가져 온 거야?" "응. 살린, 미안해. 대신 검 좀 만들어 줘!" "으... 마법력 소모야! 너, 나중에, 알지?" "그럼 그럼~" 모험가가 검도 없이 다니다니... 무엇보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환. 상. 구. 현. 술] 살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에서 약한 빛이 나오면서 점점 대지에 닿았다. 그리고, 하나의 검이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무늬가 형성되면서 그 검은 조용히 케빈의 손에 닿았다. "아야~ 야, 살린 넌 다 좋은데, 왜 아직도 검 손잡이를 내 손으로 오게 못하는 거야! 꼭 칼등 잡게 해야겠어! 그리고 말야! 왜 검 집은 못 만드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다. "미안... 내 실력이 딸리는 게 아니라... 원래 그래." 그렇다... 혹시나 하겠지만, 사실 마법이란 게 어딘가 한구석 꼭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 "이 놈들! 우린 무시 하냐! 얘들아! 쳐라!" "예~" 여기서 한가지 놀란 것은 케빈은 그러니 저러니 해도 꽤나 괜찮은 실력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슈알렌 왕가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세상에...그치만.. 어설프고.. 어정쩡하고도, 얼빵했다. "좋아! 검술이다! 죽어봐라!" 내 검은 녀석들을 향해서 서서히 찔러 들어갔다. 세이는 주문을 외었다. [얼. 음. 의. 화. 살] 기본 주문이군. "넌! 마법사가 아닌가!" 난 하마터면 네...라고 할 뻔했다. 그러나, 대마법사라고 안 했으니까... 참을 수 있었지. "음... 지겹군." 나는 조용히 필살의 마법을 외었다. [죽. 음. 의. 공. 간. 하. 강] 대단위 공격 마법이다. 흐흐흐... 순간,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몸에선 작은 빛이 나고, 하늘에서 검은 기운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가고 이었다. "죽어라..." 흑은 막 죽은 시체의 머리를 잔혹하게 밟았다. 그리고 살린은 눈이 똥그래 졌고, 케빈은 중얼거렸다. "역시, 악당 이래도. 처음에 만났을 때도 피칠 하고 있었잖아. 분명히 어디서 한 건 한 게 틀림없어." 흑이 나중에 그러기를, 본인의 피라고 했다. "정말...그럴지도..." 마법을 쓴 사람은 난데.... 그러나, 덕분에 우리는 여관에 머물 수 있었다. "살려주십시요! 저흰 그저!" 그러게, 사람은 평소에 잘해야 한다. "스승님... 우린 그렇게 안 무서운 데 말이죠..." 글쎄 말이다. 여하튼, 나는 곤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케빈과 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쌍하지도 않아?" "뭐가 불쌍해! 어서 죽여!" 무지 살벌하다.. "알았어... 날 원망하렴... " "자. 잘했어. 이제 확실히 죽었다. 좋아. 담부터 또 벌레 키우고 있으면 나한테 혼날 각오해!" "웅..." 그냥 잠들자...그날 난 악몽을 꾸었다... 거대한 개미가 날 쫓아왔다... 헉.. "스승님! 일어나시라고요!" 눈을 뜨니, 세이가 방긋거리고 있었다. 이 자식은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역시 젊은것들은... 니도 늙어봐라. 저혈압 환자들은 원래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극도록 기분이 나쁘다고! "엥.... 스승님. 왜 때려요!" "즐거운 아침, 상쾌한 하루~!" "암 상관도 없잖아요!" 나는 세이를 지긋이 응시했다. "잘 보아라. 어떤 고문에 보면 어떤 일이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너가 맞을 만한 그 어떤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안 그러냐? 그런 경우, 넌 내 제자이고, 나이도 100살 가량 어리다는 점을 보면 너는 맞을만 하니까, 맞았다는 이야기지. 이해가 안가냐?" 제자는 어느새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가 말을 말지..." 건방진 제자 놈. 업어서 키워놨더니 은혜를 모르고! 스승은 제 이의 어버이란 말이다!!! 가만.. 어버이란, 아버지, 어머니를 말하는 거잖아? 그럼... 스승은 양성체란 이야기가 되는 건가! 허헉! 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무서운 일이다... 앞으론 스승 하지 말던가 해야지..." 땀을 닦고 나는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아, 상쾌한 아침... 벌써, 새벽 다섯 시로군.. 후훗...엉?" 어둠속에서 새까만 인파가 밖에 운집해 있었다... 피스트레이카 군이었다. "이거... 편히 쉬기는 글렀군. 아니지.. 차라리 저 속에 공작이 있기를 바래야 하나?" 문이 벌컥 열렸다. "스승님! 제자가 물을 길러 갔더니... 글쎄.. .글쎄..." "적이 있다는 이야기렸다?" "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보인다. 마. "그렇담. 우리 일행을 이르지만 깨워야 한다는 거지?" "제가 깨울 테니까 대책 좀 세우세요." 제자는 두두두두 달려가서 사람들을 패대기쳤다. 확실히... 일어날 수는 있겠군. 반응도 참 다양했다. 삼인의 반응을 보자. "왜 쳐!"(케빈, 그리고 맞 대응한다.) "어... 어..."(살린... 아직 잠이 덜 깼다.) "후훗. 어림없어."(흑... 역시, 피했다.) "근데 무슨 일이야!"(동시에.) "밖에 적이 깔렸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상태는 심각했다. 졸기 시작했다. "웅... 난 10분만 더 잘래. 미안...코..." 살린 에게는 나의 어퍼컷이 날아갔다. "욱!" "일어나. 안 그러면 매운 맛을 보게 될 꺼야." "이미..크헉... 보고 있어." 다시 우리 일행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제일 도움 안 되는 인간은 역시, 흑이었다. "다 죽여버리면 되지!" "누가?" "너가." 음.... "흑. 너무 하잖아! 여기 있는 프라오니스는 너와 같은 악당이 아냐!" 케빈이 날 편들어주다니... 이런 일이.. 살다살다 보니 별 일 다 보는 군. "저.. 그 기준이 뭐지? 케빈?" 그는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응. 넌 예쁘잖아." 울고 싶다. 마. 다 죽여 버릴꺼다! 남자한테 이쁘다고 하는 건 실례라구! 그리고, 늙어서까지 그런 소리 듣고 싶겠냐! 가끔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라고! "스승님..." 세이는 조용히 우물거렸다. "왜? 세이야. 걱정하지 마라. 이 정도 공격에 쓰러지거나 당황할 내가 아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세이는 가만 가만 말했다. "사실 이쁘기는 하죠. 에, 살려주세요!" 음.. 죽일 수도 없구.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잖아!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지." 살린이었다. 호, 케빈과는 달리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성실함을 보이는 군. "근데, 밖에 있는 적이 우리를 노리는 걸까?" 흑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우리를 노리는 지 어떨 런지는 확실치 않았다는. 그렇다면, 왜 그들은 거기 있을까? 몇 가지 추론 할 수 있다. 먼저, 여기가 고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군. 둘째, 여기에 보물이 있다는...!!! 역시 말도 안 된다. 셋째, 이곳이 군사 요충지라는...!!! 확인이 안 된다. 넷째, 그렇다. 적 사령관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음... 고민하지 말 껄. 괜히 뇌세포만 고되게 했군. "스승님! 그럼 우리 이대로 조용히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바보야. 어제 그 상황을 사람들이 다 봤는데, 어떻게 우리가 무사하겠느냐." "웅.. .그렇구나. 케빈은 어떻게 생각해?" 의도적으로 흑에게는 아무도 묻고 있지 않다. "우리의 목적이 왕성으로 가는 것이니까, 왕군 이라면 당연히 합류해야 하고, 피스트레이카 군이라면 도망쳐야지." 그럼 누가 알아보냐!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야. 그러나, 곧 적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아젠의 기사단이다! 당장 마을 주민은 모두 광장에 모여라!" 라고... 어떤 병사가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우린 안 나가도 되겠지? 마을 주민은 아니잖아." 웅... "변장 좀 하고 나가자고...." 우린 변장을 했다. 먼저 세이는... 농부의 모습으로, 케빈과 살린은 수도승의 모습으로, 흑은 은신술로 숨어버렸고, 나는 왜 여장인게야! "답답해..." "조금만 참으라고요, 스승님. 금방 가겠죠. 안 그래요?" 그러면야 다행이겠지만... 아젠의 기사단인지 뭔가는 나와서 별 시덥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중얼대다가 나가 버렸다.... 잠깐, 왕성은 뭔가 수상하다. 그렇다면, 왕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아젠의 기사단에는 뭔가 문제가 있거나 한 건 아닐까? 흐흠... "스승님, 어디서 폭음이 들리지 않았나여?" 그렇다. 어디서 미약한 폭음이 들리면서. "아젠의 기사단장! 난 널 없애러 온 자객이다!" 흑... 맞지? 엉? "스승님, 흑이 아니네여?" 그렇다... 누구시길래 저런 흑과 같은 멍청한 짓을 하는 거람. 흑의 여동생 혹이 아닐까...? "어리석군..." 아젠의 기사단장은 멋지게 한 바퀴 돌면서 가볍게 칼을 피했다. 그리고 높이 뛰어올라 그 자칭 자객의 앞까지 뛰어 갔다. "헉!" 둘의 싸움은 정말 뻔한 싸움이었다. 우리 일행은 손털고 이만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오늘 메뉴에 대한 집중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 흑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 사람이 아니다!" 저 녀석이라면, 누구? 기사단장? "무슨...?" 갑자기 기사단장에게 목이 졸려있던 그 자객의 눈이 빛나면서 기사단장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어깨에서는 뿔이 솟아나는 절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마족이군." "저게요?" 세이야... 접때 본 그 마왕은 말이지... 아주 아주 센 거란다. "에이. 약해 보이는 데요?" "마족은 귀가 밝단다. 몰랐지?" 마족은 정확히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세이를 째려보고 있었다. "쿠악!" 갑자기 기사단장에게서 멀어져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세이의 열열한 관심 덕에, 우리는 곧장 마족과 싸울 수 있었다. "우엥! 사부님 살려주시소!" 모르는 놈이다. "이 사악한 마족! 여기가 어디라고! 꺼져라!" 아젠의 기사단장은 의외로 힘이 넘치나 봐. 난 그냥 이렇게 조용히 있을란다. "크크크... 꼬마, 넌 다른 마족을 본 일이 있나보지? 크크크." 음. 마왕. "사부님 치사해요!" 뭐, 소년은 여행을 떠난다고들 하잖아. 지금이 그 때인 거 같군. 흠. "어디가여!" 알 거 없다. "크크크... 꼬마, 죽어라." 어이, 형씨. 꼬마를 적당히 괴롭히는 건 좋은데 말야... 난 서서히 그 망할 자식에게 걸어갔다. "좋아. 이젠 나 이쁘다고 안 놀릴 거지!" "예. 사부님 말 잘 들을 테니까 제발 살려 주시소!" 후훗. 그래야지. "좋아. 응? 거기 기사단장 아저씨는 뭐 하는 거야?" 그는 검을 들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설령 마족이라 하더라도 무방비의 적에게 공격할 수 는 없다." 훌륭한 기사 정신. 역시, 아젠의 기사단장이시군. "좋아! 야, 거기 하급 마족 나부랑이야, 덤벼." 당연히 마족은 열 받는다. 왜 그렇게 악당은 신경회로가 단순한 걸까? 항상 마족이 강한 데도 진다. 그들은... 왜 지나? "크크크... 죽여주마." 나는 조용히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었다. 음... 주문은 무지 간단하다.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그대여(마족에게 그대라니, 닭살 뻗치는 군.). 흙의 먼지로 돌아가서 다시 사라지리라." 그리고 땀을 훔친다. "힘들었어." 마족은 사라졌다. 그냥 한 순간에, 존재가 부정되어 버린 것이다. "우엑! 스승님! 흙 먹었잖아요!" 음... 그런가? 아젠의 기사단장 외의 수많은 사람들 포함해서, 케빈과 살린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 그런 주문은 들어 본적이 없어요. 아니.. 주문 맞아요?" 살린.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친다. "훗. 다 이 내가 대 마도사님이니 가능한 일이지." 케빈이 나섰다. "그러게 내가 이야기했잖아. 원래 미소년은 신비한 능력이 많은 법이다." 그건... 아니다. "넌... 그건, 마족이나 하는 주문이 아니던가! 이른 바, 언령 주문!" 말의 힘..을 이용한 주문이지만, 그런 걸 다 알다니. 귀찮게 되었군. "그걸 알아차리다니. 훗. 죽어줘야겠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난 사람 맞아요. 피스트레이카 공작가의 프라오니스다. 지금 왕성에 가는 도중이다." 그럼 그 주문은 뭐지 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군. 난 친절한 사람이니. "음. 그 주문은 그냥 해 봤는데, 죽네? 사실 지금 외다 만 주문이 있는데 어쩐다. 대책 있으면 말해봐, 세이야." 세이는 머리를 싸맸다. 계속 고민한다. 얼굴에 문자가 새겨진다. 모른다. "그냥 가자. 나중에 쓰지 뭐. 그나저나, 그런 파괴 마법을 어디다 쓴 다냐.." 11. 마왕 탄생. 왜, 그 수많은 용사들은 마왕을 단지 봉인하기만 했나? 마왕의 힘은 마치 몸에 기생하는 병과 같다.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다시 옮겨진다. 그처럼, 마왕을 죽인 자는 마왕이 되는 것이다. 그 사악한 존재가 영원히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단지, 봉인 될 뿐. 그래서 그 위대한 마법사, 라플도 마왕을 단지 봉인했을 뿐이었다. -마왕에 관한 동화- 갑자기 아젠의 기사단장이 우릴 막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공자. 지금 혹, 피스트레이카 영지에서 공작을 도우러 온 거라면 보낼 수 없소." "저.. 난 도우러 오긴 왔지만, 왕성 쪽을 도우러 왔는데요?" 그는 얼굴을 굳혔다. "거짓말 하지마라. 왕성 쪽은 예전에 점거되었다. 그리고, 피스트레이카 공작은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현재 왕의 생사는 불분명하고,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런...! 어느새 이야기가 그렇게 까지 진행되었냐! 가만... 키히는? "혹시, 키히의 생사를 아십니까!" "응? 키히 크리시아 휘젠을 말하는 것인가?" 그의 얼굴에는 잠시 생각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현재 실종되었다. 아마, 어딘가에 은신하고 때를 기다리는 것 같지만. 뭐, 어쨌든 모두들 그녀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얼마 안 있어서 다시 중앙에 복귀하겠지. 그만한 마도사가 없으니까." 에, 또. 그렇습니까? 무사하다니 다행이지만... 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인가? [이 편지는 아마도 너 외에는 아무도 읽을 수 없을 거야. 너가 살아있었다는 것도. 그녀가 끝까지 너라는 사람을 그리워했다는 것도. 라플. 넌 위대한 마도사가 되었구나. 음... 하지만. 난, 너에게 못할 짓을 했어. 다 이해해 주길 바래. 이게 모두 다 키히를 뺏기 위해서였지만. 난, 무엇을 가장 소중히 해야 했는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지. 아무도 모르게 하겠어. 라플, 난 너의 왕이 되길 바랬다. 난 너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걸까? 너와 약속했건만. 너가 왕위를 포기했다는 것도, 너가 원래는 왕이 되었어야 했다는 것도. 다, 잊으려 했건만, 할 수 없었다. 난 이리도 무능한 왕이었던가? 라플. 너에게 한가지 약속할 수 있다. 이번의 마왕을 처치해 준 대가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너의 공작가의 영속과, 키히의 안전을 약속하겠다. 그리고, 한가지. 난 아마도 죽, 널 그리워 할 것이다. 용서해다오. 때로 남겨진 자가 더 괴로운 것이다.] 라는 꾸질 꾸질한 편지 한 통만을 왕에게서 받고, 난 아마 친구의 나라를 지키겠노라고 맹세를 했었다. 그러니, 대 마도사의 이름을 걸고, 지켜야 했는데.. 어쩐 다냐. "스승님? 무슨 생각하세요?" 음. 괴로운 생각, 음침한 생각, 더러운 생각. 왠지 뭔가 생각 날 듯 한데... 뭐, 좋아. 공작을 일단 만나봐야 하겠어. "수도로 간다." "난 당신을 막을 것이요!" 난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막아도 좋아. 하지만, 너 같은 기사가 나를 막으리라 보는가? 그리고, 난 그와 타협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명심해라. 난 왕의 부하이지, 공작의 부하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말을 달려서 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왕성은 음울해 보였다. 예전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누구냐!" 경비병의 단골 대사다. 그럼 당연히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피스트레이카의 프라오니스다. 양부를 만나러 왔다. 그가 아직 나의 양부이기 때문에, 나를 막을 권리는 너에게 없다." 그는 정중하게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 가십시요. 공자님." "일단은, 공자라고 해 주는군요." "아직 정식으로 대관식을 하지는 않았잖아." 세이는 가만 가만,... 가만, 왠 혹이 이렇게 많아! "케빈과, 살린은 여기 무슨 일이고.. 흑, 언제 따라왔어." 그는 인상을 팍 썼다. "잠입한 거다. 오해 없길 바래. 순전히 너의 일행으로 보임으로서 잠입한 것이다." 어련 하실까... 우리 일행은 대전으로 안내되었다. 성의 곳곳에는 파인 곳이 많았고, 주변에는 병사들이 바쁘게 뛰어 다녔다. 대전은 그 때와 꼭 같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곳이었다. "잘 왔구나. 사실, 너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다니, 고맙구나." 뭘 연락이 안 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겠지. "예.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는 피스트레이카가의 국왕에 대한 맹세를 져 버린 이유에 대해 묻고자 왔습니다." 그는 의외로 인자한 미소를 띄었다. "음. 그래. 좋아. 너도 키히 크리시아 휘젠을 알고 있겠지?" 그녀 이야기가 여기서 뭐가 중요하냐! "예. 그렇습니다만, 상관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사실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그는 조용히 밖을 건너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내뱉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왕을 조종해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왕이 마족이었다. 아마, 진짜 왕은 제거했던 거겠지." 그런...! "키히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조소하고 있었다. "너도 라플의 손자이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키히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라플을 죽게한 트라이너의 인간들과, 모든 인간을 증오하고 있다. 그 증오는 결국 그녀를 마족과 손잡게 만들었지." 갑자기 흑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역시 그랬군요... 사실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는데. 혹시 안느비에 대해서 조사해 보셨습니까?" 그는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지. 안느비. 이런 곳에 사절단이 와있는 지는 미처 몰랐군. 그래. 할 수 없군. 죽어라." 한 쪽에서 작은 화살이 흑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서 가볍게 흔들었다. "화살이 사라졌어! 우와! 스승님! 나중에 찜!" 너가 배우기엔 백년도 모자를 텐데... "대단하군. 그냥 평범한 어린애 인줄 알았는데. 역시 라플의 진정한 손자라 이건가?" 나의 눈은 천천히 굳어지고 있었다. "너도. 마족과 계약했군. 그렇지?" 그는 처음엔 낮게 웃다가 천천히 목소리가 커져서 대전을 울리게 되었다. "하하하.. 이거 참. 그래. 그렇지. 이거 혹시 내가 어떤 마족과 계약했는지도 아는 거 아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닥의 아름다운 그림이 들어왔다. 처음 내가 그와 맹세하고, 마왕을 무찌르자고 맹세한 이곳에, 마족과 계약한 더러운 인간이 우글거렸다. "안느비이겠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공작의 옆에 한 여인이 섰다. 그녀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으로 올리브색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즉, 누런 색. 노란 색이 아니다. "이거야, 천재 양자를 두셨군요. 공작. 너무 똑똑한 꼬마는 안 좋아요. 이 예쁜 누나가 혼내 줄 꺼에요~ 후훗." 어리석은 일이다. 왜 이렇게 더럽게 꼬이는 거지! "젠장.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 좋아." "스승님. 세이는 무서워요." 케빈은 살린에게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기습 준비를 하는 듯 싶었다. "안느비. 아니, 마족 푸헬리시타르. 나에게 거역하면 넌 흙먼지로 돌아간다. 인형이여. 나에게 거역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싶나?" 나는 이렇게 개 폼 잡고 말했다. 훗. 니들 다 감동했지? 나의 목소리는 음산하게 울리고 있었다. 세이가 비명을 질렀다. "스승님! 지금. .지금.. 스승님.." 나는 세이를 돌아보았다. "변성기인가요?" 죽고 싶다... "그랬던가... 이거 참. 계란을 많이 먹으라고." 흑. 너도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구나. "뭐야! 내 이름을 알다니! 넌 보통 인간이 아니구나. 하긴, 그 라플의 자손이니. 여기 있는 가짜하곤 틀리겠지?" 그녀는 단상에서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꼬마야, 나와 계약하지 않겠느냐? 저런 허접한 인간 따위 내버려두고 말야. 후후후. 그럼 세계 정복도 할 수 있는데 말야." 난 꼬마 아니다. 이젠 마족까지. 흑. 서럽다. "잠깐! 당신 거기 서!" 세이였다. "흠. 뭐냐 넌?" "스승님은 지금 사춘기라, 민감하다고. 계약하자는 둥 어쩌자고 이야기하면 섬세한 정신이 오염되고 말아. 알았지?" 이미 오염되는 거 같다. "세이! 조용히 해!" "거봐. 케빈. 내가 뭐 랬어. 사춘기." "흠." 도무지... "푸헬리시타르. 이름 좀 바꿔라. 에잇. 그래. 푸헬이라 불러 주지. 너무 어려워서 말야." 그녀는 내게 다가왔다. "날 유혹하는 건가? 아직 어린데 보통이 아니시군." 그럴 리가 있나.. 엉? "안느! 무슨 짓이야! 넌 이미 나와 계약했잖아!" 마족은 그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봐, 바보. 나도 미적 감각은 넘친다고. 같은 은발이라면, 이쪽이 낫다고. 아직 어리고. 훗. 귀찮아. 너도 죽여줄까?" 음... 음... "푸헬. 한가지 너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난, 널 죽일 수 있어." 그녀의 표정은 절대 웃기지 마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겉만 십대고 속은 백대다! 젠장. 백살 넘어봐! 다 똑같다. 뭐! 백 구십 구 세까지는 다 백대다! "흠. 흠. 귀여워라. 누나가 어떻게 이뻐해 줄까?" 무시당하고 있군. "좋아. 어리석은 푸헬리시타르. 나의 눈을 보라. 나는 너희를 있게 한자. 너희를 흙에서 끌어 올린자. 너희는 역시 내가 죽으면 먼지가 되는 것들." 그녀의 눈동자가 확대되었다. "나, 너에게 명한다. 영원한 봉인처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다시 생명을 주기 전까지 지옥 속에 잠들라." "아냐.. 아냐!" 그녀의 손끝은 점차 흙으로 변해갔다. "스승님." "왜?" "저 또 흙 먹었어요. 다음 부턴 좀 멀리서 하세요." 윽... "안느!" 동시에 그의 모습도 재로 되어가기 시작했다. 마족과 계약한 인간의 말로다. 더 상위의 종족이 사망하면, 죽고 만다. 인간과 달리 마족은 초유의 정신체이다. 인간이 소멸한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지만, 마족이 죽으면 인간은 죽는다. "프라오니스... 어떻게...!!!" 그는 아래 먼지가 되었다. 대전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어떻게 된 거죠? 당신. 상위 마족인가요? 제가 배운 바로는 하위 마족을 없앨 수 있는 건 오직 그보다 높은 마족인데. 푸헬리시타르라면 저도 알고 있어요. 본 건 처음이지만. 예전에 한 500년쯤에 지상을 휩쓴 마녀죠. 근데, 어떻게 당신이 존재의 주문을 사용해서 그녀를 없앨 수 있는 거죠?" 음. 음. 사실대로 알려주면 이들은 기절하거나, 죽자고 덤빌텐데. 쯔. "사실. 우연한 기회에 마족을 한 마리 죽였어."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우연히 마왕이었지. 뭐. 하하하... 사실 뭐, 마왕이라는 건 잊은 건 아닌데 워낙 눈 뒤집히는 상황이어서 이성을 잃었지. 뭐. 걱정하진 말아요. 난 워낙에 위대한 대 마도사 님 이시라서 그런 마의 힘에 정신을 잃을 리는 없으니까. 난 그 마왕보다 마력이 강하거든." 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미남은 승리한다."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요. 마왕은 이미 라플이 봉인했어요. 그리고, 무슨 방법을 쓴 건지는 몰라도. 마왕을 없애고 멀쩡하고 존재하는 인간은 없어요. 더군다나, 당신은 저보다 어리잖아요." 음. 그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곤란한데.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그보다, 어쩌죠? 왕이 죽은 거라면.." 난 그보다는 더 심각한 일들이 걱정인데. "그거야, 대충 알아서들 정하겠지. 이젠 나의 친구의 후손이 죽은 이상.. 아, 작은 어린 왕자가 있다면서? 흑은 알 거 아냐?" "음. 그렇지. 그를 왕위에 올리겠군. 하지만, 그는 스승님의 손에 있다. 같이 도망친 거 같아." 그럼.. 키히를 찾아야 하는 거로군. "좋아. 그럼 왕자를 찾으러 가자." "오케바리! 근데, 스승님.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걸.. 내가 알 거 같냐? 음.. 먹구름이로군. 젠장. "좋아. 일은 아젠의 기사단장에게 맡기자. 그에겐 정직함이 넘쳐흐르니까. 그럼 편지 써놓고 가자!~!!" 이렇게 되었다. 정말로 무책임하군. 나이를 먹으면 어려진다니까! "스승님... 너무 다리가 아파요. 너무 힘들다고요. 왜 우리가 이런 곳으로 가야 하냐 고요.. 엥...엥..." 녀석이 발광을 한다. 이럴 땐 그저 매가 최고다. "어이, 거기. 흑. 왜 그러고 있어?" "보시다시피. 흔적을 추적할까하는 거야." 가만... 흔적을 추적하면 하는 거지. 왜 할까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거냐! "응. 가만, 살린. 우리의 여행의 목적을 아직 이들에겐 밝히지 않았잖아?" "응. 케빈. 하지만, 굳이 알려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없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어? "왜 그렇게 꿍얼대는 거야... 난 다리가 아퍼 죽겠다고." 세이녀석을 봐서 좀 쉬어 가야 하겠는데... 이 숲이 문제다. 이런 칠흙 같은 숲의 상황에서는 도무지 적을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뭐, 나 같은 대 마도사님이 계신데 지들은 걱정할 일이 없겠지만 말야. 훗. "좋아. 모두 들어봐. 사실 우리는 엄청난 일을 쫓고 있었어." 왠지 귀찮아 지는 것이.. "케빈, 그런 대단한 일이라면 우리에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냐?" "그게.. 난 너희들이 정의의 편이라는 것을 확인했어." 그런 걸 확인할 만한 일이 있기는 했나? "뭔데? 꼬마들이 정의의 편이라.. 흠. 하긴 이렇게 어려서야 악에 물들 시간도 없겠지만 말야." 난 꼬마 아니다. 크악...! "그런게 아냐! 케빈이 본 바로는, 저기 프라오니스는.. 미소년! 어떤 악의 사자가 이렇게 이쁘겠어!" 조용해진 일행은 점점 빠른 걸음으로 숲의 중앙부분을 지나게 되었다. "스승님... 잉..잉.." "에구구. 알았어. 쉬었다. 가자.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지. 뭐." "냇가가 있던데, 그곳 근처에 잡으면 안될까?" 케빈은 아까부터 좀 씻고 싶어.. 라는 얼굴. 가만, 여기 왜 시커먼 남자 녀석들밖엔 없는 거냐...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여행할 때는 그래도 여자들이 있기는 했는데 말야. 에잉. "그곳은 위험해. 상식적으로 동물들이 이용하는 곳이 아마 그 냇가일 꺼야. 밤새도록 동물과 접전을 벌이고 싶다면 나야 말릴 수는 없지." 흑은 실실 비웃으면서 말했다. "자, 이제 좀 쉬라고. 망은 누가 먼저 볼까?" "그보단 우리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이야기나 하고 놀자." 실실 웃는 살린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내 뻗어서 쿨쿨 자는 녀석도 있지만... 쳇. "이거야 원. 탁아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흑은 실소하면서 주위를 둘러본다고 서둘러서 자리를 떳다. 그리고 케빈과, 나, 살린이 남았당. 살린은 갑자기 무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사실 우린 신탁을 받았어. 난, 모두의 예상처럼 신관이고. 그리 높은 직책은 아니지만, 장래엔 대 제사장이 되기로 되어있어.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신탁이 나에게 내려졌지." 궁금... 하진 않지만. 안 들어주면 애들은 다 삐지고 그러니까. "그 신탁이라는 게 혹시 인류를 구해라... 이런 거 아니지?" 그의 얼굴에선 미소도 떠오르지 않았다. "비슷해. 마왕이 부활한다는 거야. 그리고 빠른 시일 안에 세상에 혼돈에 잠기리라는 것도 예언되었지." 가만... 마왕은 내 손으로 봉인했고, 그 정신체는 소멸 된데다가, 그 힘은 나한테 있는데... 뭐가 부활 할 수 있다는 거야? "훗.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으니 놀라운 모양이지? 난 성기사단의 일원이야." 농담이지...? "농담이야. 설마 내가 무슨 재주로 성기사단이 되겠어? 난 그냥 견습이야. 견습. 후후후." 이 자식들이...! "가만. 그런 문제가 아니라, 내가 아는 이야기는 좀 다르다고. 일단 마왕의 힘과 정신이 분리가 되었어. 그런데 무슨 수로 다시 부활시킨다는 거야?" 조용... "그런걸 알 리가 없잖아?" 역시나... "좋아. 그렇다면 그건 마도 공작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그렇다면 이미 마왕의 정신체는 소멸되었어. 내가 죽였고, 확실히 내가 그 힘을 물려받았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뭘 부활시킨다는 거야? 마왕이 여럿 되냐?" 조용... "음. 하지만 너가 죽인 게 정말 그 마왕인지 확실치 않잖아. 그리고 마왕은 아직 봉인되어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다면 너가 죽인 건 그 마왕이 아니라 그냥 고위 마족이라는 거지." 음. 음. 사람 말을 뭘로 아는 거야! 그리고 나는 정말 라플이란 말이다. 내가 어려 보인다는 건 인정하지만 말야. 훌. 그래도 믿어줄 수는 있잖아! "맞아. 맞아. 그러니까, 우린 마도 공작의 음모만 분쇄하면 된다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뭐가 음모야?" 흑이 슬슬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건 뭐야?" "불피워서 몸이라도 좀 따뜻하게 해야지. 여기는 나무가 높고 숲이 깊어서 연기가 잘 퍼지지도 않거든. 근데, 어떻게 피워야 하나?" 여기 마법사 있다. 뭐. "자, 앉아. 수고했네? 그나저나, 근처에 이상한 것들은 없어?" "음... 글쎄. 그보다 해가 좀 늦게 지는 거 같다." 그런가? 난 밤 같은데... "해가 어디 있어? 난 보이지도 않는 구만. 그냥 어스프름 한데....왜 들 그래?"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케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우리 눈에 이상하게 해가 보이는 건지, 아니면 너의 눈에만 해가 안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린, 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어?" 살린의 손은 작은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서서히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젠장..." "그게 반 마법인가?" 흑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그의 멍청함이 드러나는 순간... "흑. 빛이 밝혀지잖아. 저건 아주 초보적인 주변을 환하게 하는 마법이라고." 흑은 조용히 생각하는 듯 했다. "가만. 그럼 정말 이상한데? 지금 저렇게 환한데 빛이 나다니.. 그렇다면..!" 지금이 밤이라는 내 말이 맞다는 거지. 그리고 주변의 이 불온한 기운들도 말야. "세이. 일어나." "우..웅.." 음... 이 녀석...! "세이! 아침 준비해야지!" "에! 스승님... 어라라? 다들 왜 그러고 있어? 아직 밤이잖아?" 케빈의 입술이 바싹 마르고 있었다. "전사 하나에, 사제 하나, 마법사 둘. 스파이 하나..." 아주 미묘하게 배런스가 안 맞는 군. 즉, 실제로 싸우는 건 전사니까... 할 수 없지. "케빈. 내가 검을 들고 싸우지. 그럼 되겠지. 모두 준비해. 우린 완전히 포위 당했어." "스승님. 근데, 어떻게 알아요?" 다 내가 유능해서이지. "온다!" 케빈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거대한 머리에 거대한 세 개의 뿔을 가진 괴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두 다리를 가진 소의 형상을 한 괴물이었다. "음. 저건 틀림없이...!" "모르는 괴물이야." 살린의 말을 케빈이 받았다. 어디서 저런 게 때 거지로 튀어나왔지? 적은 한 8쯤 되어 보였다. "웅.. 세이는 무섭다고요..." 그건 안 봐도 알아. "자, 케빈. 한 마리도 상대하기 힘들 꺼 같은 녀석들이 사이 좋게 여덟 명이 나타났어. 우린 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케빈은 비장한 각오라도 하듯 외쳤다. "도망가는 거 어때?" 흑은... 나서서 작은 단검을 던지고 있었다. 그의 검은 정확하고 빠르게 괴물의 허리로 날아갔으나, 박히지도 않았다. "젠장...!" 그 말은 내가 하고 싶다. [차. 가. 운. 바. 람. 이. 여. 이. 곳. 으. 로] 세이는 재빨리 빙설계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녀석들의 움직임이 약간 둔해졌다. 케빈은 툴툴거리면서 빙설계 주문을 개중에선 그래도 가장 많이 맞은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호빵 같군. "우오오오!" 이건 괴물의 비명이 아니라... 케빈의 기합... 살린도 뭔가 준비하더니 밝은 빛을 퍼지게 하였다. "아앗!" 응? 괴물과 우리들은 동시에 살린의 비명에 놀라 바라보았다. 그는 아연실색한 얼굴을 하면서 허망하게 외쳤다. "왜 그래!" 케빈은 검으로 괴물의 팔을 막으면서 주절거렸다. 이봐, 작전 시에 잡담은 금물이야! "그러고 보니, 아까 배낭을 흘린 거 같아!" 조용... "저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일단은 이기고 보자고. 세이!" 세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얼음 화살을 쏘았다. "쿠 워워워워!" 갑자기 주변의 새들이 일시에 날아오르고, 거대한 붉은 기둥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처음 보는 괴물이었다. "저게.. 뭔지 아는 사람.. 손들어." 흑이 손을 들었다. 놀랍다... "실험체야. 내가 성에 잠입했을 때 본 적이 있어." "그럼 저건!" 케빈이 우물거렸다. 뭐라고 하려는 건지... "악의 무리!" 이봐. 그건 좀. "스승님! 빨리 주문을...!" 나는 다시 주문을 외는 준비에 들어가고, 케빈은 꽤나 믿을만하게 달려나갔다. "우 워워워워...!" 괴물과 못지 않은 소리군. "케빈! 네 목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되잖아!" 흑의 단검이 다시 날아가고, 하나같이 박히지 않았다. "흑은 세이와 살린을 보호해!" 나는 녀석의 뒤꿈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케빈이 녀석의 무릎에 칼을 꽂기가 무섭게 휭 소리와 함께 멀리 날려갔다. "케빈! 젠장...!" 황급히 살린은 회복 마법을 외쳤다. 케빈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흑은 단검이 떨어지자, 돌멩이를 날리고 있었다. "꽤나.. 날렵하긴 하네. 괴물을 다 피하고 있으니 말야. 젠장..." 괴물은 왠지 화가 난 듯 크게 한번 땅을 구르고 뛰어 올랐다...? "으엇!" "세이!" 녀석은 세이의 앞에 뛰어 내렸다. "으...아... 스승님...." 바람이... 불지 않았다. 녀석의 작은 몸에 그 흉칙한 괴물의 손가락이 닿으려 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굉장히. "으....으..." "제장! 세이...프라오니스?" 살린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작게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있는 힘을 짜내서 외쳤다. "살린은... 케빈의 옆으로 가서 방어막을... 부탁..." "알았어!" 내 몸에서 순시간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 했다. 그러나, 서서히 몸은 편해져 갔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스승님! 살려 줘요!" 세이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황급히 케빈의 몸 근처로 옮겼다. 흑은 그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즉시 스펠을 시작했다. [내. 몸. 을. 뒤. 덮. 으. 라] "그게 방어 주문인가?" "예. 그나저나 이 소름끼치는 기운은... 도대체." "글쎄. 처음 보는 힘이야." 눈앞에 멀쩡하게 서 있던 프라오니스는 괴물의 눈앞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괴물은 그를 바라보았다. [나. 를. 거. 역. 하. 는. 것. 은. 모. 두. 없. 앤. 다] 차가운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어찌 들으면 꽤 큰 소리지만, 울림이 없었다. "뭐야....!" 거대한 검은빛이 하늘에서 그 괴물을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엄청난 폭음이 작열 했다. "으악!" "젠장! 방어막이!"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한 때는 숲이라 불리 웠던 것들이 눈앞에 드러났다. "이건...!" "프라오니스와 세이는?" 케빈은 조용히 물었다. "정신 차린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갑자기...?" 한 인영이 신의 기적처럼 환한 빛을 받으면서 서 있었다. "프라오니스!" "내가.. 뭘 한 거지?" "프라오니스가 한 거잖아! 그나저나... 아, 세이!" "...우...으... 응...앙!" 세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다행이 검게 그을렸을 뿐, 다친 흔적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그건 뭐야! 그런 마법 따윈 듣지도 못했어!" 흑은 조용히 살린의 말을 경청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음. 읽은 건 아니고?" 살린의 눈에서는 강렬한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아마도, 내가 잘 못 생각 한 거 같아. 넌 뭔가 아주 수상해. 들은 것처럼, 단지 라플의 손자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야. 아니야?" 음. 적중하는 이야기지만... "아, 아직도 몰랐어? 내 사부님이 바로 라플이셔." 세이는 방긋 방긋 마른 빵을 집어들고 웃고 있었다. 역시, 약간 덜 떨어진 듯 보이지. "그런데 왜 이 프라오니스에게 계속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살린... 이건 완전히 고문 분위기잖아? "좋아. 좋아. 다 이야기하지. 난 바로 라플이야. 보시는 데로 어린아이이긴 하지만." "뭐야...!" 케빈이 소리를 갑자기 질렀다. 야, 애 떨어져. 서서히 케빈은 나를 노려보기 시작하고, 살린은 조용히 그저, 묵묵히 빵을 씹을 뿐이었다. "내 빵 먹지마! 살린!" 어이, 먹는 거 가지고 치사하게들 싸우지 말라고. 헉. 케빈. 무섭다 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알았어! 네 정체를!"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이젠 겁난다. 노인네를 고문하는 게 아니야. 너네들은 경로 사상도 모르냐? "뭔데?" 그는 나를 아주 열열한 눈빛 광선으로 따뜻하게 쪼여준 뒤, 아주 무게 잡고 말했다. "하늘이 내린 용사가 아닐까?" 다시 우린 케빈을 무시하고 짐을 꾸렸다. 괴물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곳에서는 아무리 해도 밥 먹을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세이의 위의 능력은 경이롭다. 숲은 고요했다. 반 마법인지 뭔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는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즉, 자고 싶어도 환해서 못 잔다는 것이다. 흑이야 워낙 스파이 수업을 많이 받아서 별 영향을 못 느끼는 듯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세이? 그 녀석이 사람이냐? "얼마나 가야 마을이 나올까요? 마을은 그렇다 치고, 그 여 마도사.. 이름이 뭐였죠?" 세이의 어리숙함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키히 크리시아 휘젠. 엘프니까, 이런 숲쯤은 금방 지났겠지. 문제는 누가 이 마법을 쳤냐는 건데... 다들 수면 부족이지?" 그래 봐야 살린과 케빈 뿐이지만. "그보다, 우리가 찾는 게 있는 거 같군." 흑이 숲가에 있는 작은 조각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어이, 뭐라도 발견한 거야? "흑도 도움이 될 때가 있긴 있군요! 어둠의 자식도 하기사..." 케빈이 조잘거리는 동안, 나도 그 작은 조각을 살펴보았다. 분명, 숯이었다. "숯이 이런 숲에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여기 산불이 난 거 같지도 않고 말야. 아마 연기 없이 불을 피우고 싶었던 거 같은데? 잘 찾아보면 야영 장소가 나올 거 같군." 흑은 그러면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스파이가 맞긴 하나봐. "사부님.. 좀 춥지 않아요?" 글쎄..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하는데. "지도를 보면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없어진 마을이야. 폐허도시지." 왜 폐허인지, 그런 건 물론 지도에 나와있지 않다. "살린, 어떻게 할까? 폐허로 갔을 확률이 높잖아?" 케빈은 살린을 바라보면서 옆의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나뭇가지는 비정상적으로 꺽여 있었다. 사람이 지나갔다는 말 이렸다. "그렇지. 일단 그리로 가야겠어. 흑은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 뭐." 그런...! 너희들은 흑이 무슨 개라도 되는 줄 아냐! 우리는 점점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흑도 우릴 따라오리라는 희미한 믿음을 가지고 점점 길에 근접해 갔다. 작은 길이 생긴다 싶더니 어느새, 공터와 함께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해. 찾았군." 케빈은 긴장된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나와 세이도 그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말탄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었다. "저게... 반란군인가? 왕자는 무사 하실까?" 흠... 살린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그보다, 저 중앙에 있는 건물이 신경 쓰이는 군. "저 건물에서 왜 검은 연기가 나오는 거에요?" 세이는 나에게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시체를 태우는 거야." 잠시 침묵...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 젠장. "이, 나쁜 놈들!" 갑자기 우리의 정 반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러 퍼지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인 흑이 뛰쳐나왔다. 언제 거기 까지 간 거냐? "빠르네요. 거의 숲을 한바퀴 돈 거잖아요. 역시 악의 일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케빈. 그건 아니다. "잡아라!" 말 탄 기사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소리가 울리고, 흑을 향해 순간 30여명의 인간들이 한꺼번에 들이 닥쳤다. 흑의 절대절명 위기다... "왠지 죽게 내버려두고 싶은데요?" 살린이 조용히 기도 준비를 하면서 씁쓰레하게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용감하잖아?" 나도 마법 주문을 외우고 정확히 작은 불의 공을 녀석들의 한 가운데에 떨어뜨렸다. 불길이 치솟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혼잡에 휩싸였다. [얼. 음. 의. 화. 살] 세이도 주문을 외웠지만.. 실패. "자 간다! 우 워워워!" 케빈의 기합을 없애는 마법을 궁리해야겠군. "마법사다!" 건물은 대략 5층 정도의 크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가 키히가 있는 장소인 건 틀림없는데 이 소동이 났는데도 아무도 안 나오는 것은 좀 이상하다... "크악!" 비명이 울러 퍼지고, 내 마법이 다시 날아갔다. 5대 30이라는 확실히 절망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내가 대 마법사이고, 그 곳엔 마법사는 한 명도 없었다. 있는 거하고 없는 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사부님! 저기 좀 봐요!" 건물의 가장 위에서 세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두 명은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젖 먹던 힘을 다해서 소리쳤다. "키히!" 키히는 방그레 웃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피해!" 나는 재빨리 일행의 위로 마법 방어막을 쳤다. 하지만 그 많은 인원을 순식간에 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지면서 검은색의 화살이 날아와 사람들에게 박혔다. "키히! 무슨 짓이야!"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늦었어. 꼬마야. 아니, 피스트레이카 공작. 넌 쉽게 잊은 건지도 몰라도... 엘프는 말이지. 아무 것도 잊을 수 없어. 배신한 자들과 그리고 사람들.. 모두 용서하지 않아."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내 뿜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은빛의 머리를 하고 약간 멍한 얼굴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스승님의 양부 뻘 아닌가요?" 정확히는 내 손자뻘이라고.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그만 둬! 이젠 다 끝이잖아!" 그녀는 방긋 거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차가운 미소를 흘리면서 거대한 마법의 기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검. 은. 파. 멸. 의. 힘. 이. 다. 시. 세. 상. 에. 나. 타. 난. 다] 그것은 고대 잊혀진 주문 중에 하나로 고대 마족의 파멸을 불러왔던 절대 궁극의 마법 주문이었다. 검은 색의 기류가 대지에 감돌고 주변의 시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몸은 점점 사라져갔다. "사부님...?" 세이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살린의 얼굴은 우울해졌다. "이젠 끝이군요. 전 저걸 막을 주문 따윈 알지 못해요." 흑은 우리 옆에서 조용히 그 어둠의 홀을 바라보았다. 그건 정확히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타원의 고리로 생성되고 있었다. "어둠의... 마법..." 살린의 중얼거림이 들리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 저게 정말 발동되면 아무도 남을 수 없었다. "세이. 방어 자장을 펼쳐. 그리고 살린은 부유 마법을 준비해. 모두 띄울 수 없어도 노력하는 거야!" 살린은 재빨리 기도를 준비했다. 그리고 나도... 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깃든 어둠과 그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그 깊은 파멸들의 조각들을 이어, 세상의 어둠과 평안의 존재의 증명자의 이름을 받아... 여기 명령한다!" 세이의 방어막이 쳐졌다. 나는 마법으로는 절대 저것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힘을 쓸 수밖엔 없었다. 옆에 검은 날개를 가진 녀석이 나타났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넌 거봐. 우린 하나 랬잖아? 안 그래? 후후후..." 그의 목소리를 애써서 무시하면서 나는 그 것을 외웠다. [당신의 이름은 뭐지?] 나의 이마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다. "마왕, 프라오니스다." 내 손은 허공의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내 입에서 그 목소리가 울러 퍼지고, 모든 마법의 존재들의 우두머리의 마법이 터져 나왔다. "사라져라! 어둠의 마법이여!" 내 이름의 실현으로 인해서 하늘은 더욱 어둡게 물들고, 마력의 파장에 의해서 땅이 파여져 나가고, 나무가 뽑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행의 눈에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어리고 있었다. 키히는 안간힘을 쓰면서 마법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엘프였고, 어둠의 마법을 완전히 실현할 수는 없었다. 한차례의 부딪힘과 굉음이 세상에 울러 퍼지고, 수많은 나뭇잎이 세상에 뿌려지면서 서서히 잠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키히를 응시했다. 그녀의 마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고대의 마법은 서서히 소멸해 갔다. 세이 등의 모든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그저 내가 무슨 주문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으로 만들어진 마법들이 전부 소멸하고 있었다. 검은 색의 링은 점점 하나의 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키히... 이젠 어쩔 셈이지?" 내 몸은 서서히 떠올랐다. 그녀와 나는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내 주문을 없앨 수 있지? 아.. 아냐. 좋아. 그래. 하지만, 넌 날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라플의 의지가 있으니까! 난 그의 의지를 이어 받았다. 그러니까, 넌 절대 나를 이길 수 없을 꺼야. 좋아.. 오늘은.. 그래. 이번은 내가졌다. 하지만... 결코 너가 마지막에도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꼬마야 기억해라. 나 키히 크리시아 휘젠의 분노를..." 그녀는 옆의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 소년이 아마도 왕자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이 마법이 아닌 어둠의 마법을 사용해서 사라졌다. 옆에 있던 내 손자뻘 되는 녀석은 나를 잠시 응시했다. "다시... 만나게 되겠군." "그렇겠지." 그는 미소짓고 사라졌다. 어떻게 키히가 어둠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나는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님! 이제 그만 내려와요! 목 빠지겠어요!" 세이는 나를 정말 목 터져라 불렀다. 나는 아래로 서서히 내려갔다. "어떤 마법이에요? 우와! 나도 배우고 싶어요!" 참아라... 그건 어둠의 마법이다. "꼬만 몰라도 된다." 옆에서 사악한 웃음이 들려 왔다. 세이는 멍하니 내 옆에 어느새 나타난 녀석을 바라보았다. "마족 이잖아요!" 그렇지. 마족 맞지. "맞아. 이 녀석.. 아예 소멸해 버리고 싶다... 꺼져!" "헤헤헤... 알았다고. 그럼. 다음에~" 살린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케빈은 뭔가 큰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렇구나. 이제 보니 정말 대단한 용사에겐 마족도 한 편이 될 수 있는 거구나." 어이.. 어이.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냐! "키히님...은 왜... 그러한.." 흑은 망연 자실 허공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세이는 내게 방긋 웃으면서 말해 주었다. "스승님. 그럼 우리 이제 영지로 가요. 네?" 그래야 할 것이다. 이거야 원... 마법의 부딪힘으로 인해서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이 주변에 다시 싹이 나는 날은 언제인가? "그래. 가자. 이젠 다 끝났구나." 잠시 폐허가 된 폐허 마을을 나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세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키히에 대해... 이젠 잊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나의 영지인 피스트레이카의 영지로 온 것은 거의 두 달이 다 지날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앙에 대한 소식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아젠 기사단장인 그가 왕위에 올랐고, 마도 공작은 귀순(?)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도는 결국 고대 시대이전의 평화를 찾았다고 한다. 나바스의 황제에게 잠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만났던 일을 생각해 보면 녀석은 확실히 건방진 놈이었다. 날 감히 애라니? 그리고 나는 바로 영지로 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리고 다시 내 친구의 후예가 왕이 되기 보다, 아마도 아젠 기사단장이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유능하니까. 피스트레이카 영지도 평화를 되찾았다. 키히가 없고, 내가 마왕이 되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뭐, 마왕이라고 해서 살육하고 놀고먹고, 세계 정복을 꿈꾸는 건 아니다. 나처럼 인생이 귀찮은 놈도 가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내가 마왕이라는 걸 아는 마족은 그 녀석 빼곤 없으니까. 그리고 녀석은 엄밀히 마족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마족은 나와 싸워보기 전엔 모를 테니까. "평화롭군."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 좋은데.. 스승님 같이 어린애가 그런 말을 하면요, 모두 이상하게 생각 한다고요! 세상에 젊디젊은 외모를 하고선 양지에서 뒹굴고 있다니!" 너도 나이 먹어 봐라. 양지에서 굴러다닌 것이 인생의 기쁨이다. "좋은 데 뭘. 얘들 뛰어 노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너." 연병장에서는 기사단이 뒹글 거리고 있었다. 아, 평화롭다... "욱... 저 사람들은 스승님 때문에 특훈 이잖아요! 바르하잔인지 뭔지 몰라도 갑자기 견습이 어떻게 갑자기 강해져요! 무리라고요!" 나는 세이의 머리에 가볍게 충격 마법을 사용했다. 녀석은 계단 다섯 개를 거뜬하게 굴렀다. "꽤액!" "아.. .평화롭다." 킬킬킬. 노인네를 놀리면 못 쓴다. 소리지르면 얼마나 귀가 울리는 데. 훗. 가서 서류나 처리해야겠군. 역시 나는 관료 스타일이란 말야. 근데 자이츠 넌 왜 따라오니? "공자님." 쟈이츠는 뭔가 심각한 일을 내게 이야기하려는 듯 손을 꿈지락거렸다. 니가 그러면 얼마나 무서운 줄 아냐? "뭔데?" "중앙에서 공자님을 공작으로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공작은 폐하라는 군요." 그렇군. 하기사... "그래. 맘대로 하라고 하지 뭐." "그리고..." 뭔가 상당히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뭐, 할려면 빨리 해." 그는 아주 머뭇거리면서 아주 좋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는 아주 고급 종이었고, 매우 부드러웠다. 꼭 비단 갔구만. "오, 이건 뭐야?" 잠시 뇌에서는 입력 처리가 안되고 있었다... "예. 공자께서 공작이 되기 위해서는 본래의 의무를 하라는 명령서지요." 그래. 그런데 왜 내가 이 나이에 내가 세운 마법 학교에 가야 하냐고! 너 같으면 백 이십 세나 되어서 꼭 가야겠냐! "내가 왜? 너무 유치해서 못 가. 중앙엔 그렇게 이야기하라고. 내 능력을 봤으니 알 꺼 아냐. 날 기껏 다시 교육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리고 나는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쟈이츠는 조용한 어조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인질의 목적이 있는 거 같습니다. 강하니까, 더 더욱이죠. 피스트레이카가문이 반란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님이 그걸 처리하셨으니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죠." 공작을 갑자기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아주 효과적인 저주 몇 개를 시험해 보고 싶다. "그래서? 가서 필요도 없는 마법 수업을 들으란 말야?" 그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정말 필요 없잖아? 내가 가야할 이유도 없고. 안 그래? 그럼 굳이 학교가 아니라 다른 걸 해도 되잖아?" 쟈이츠는 이젠 나도 몰라 라는 얼굴이 되었다. "안가는 걸로 해. 그리고 난 일해야 되니까 나가보라고." 노인네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다니, 괘씸하군. 기껏 왕 시켜 줬더니 말야. 흥. 근데, 난 그날 저녁 내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그건 케빈과 살린 때문이었다. "마법 학원. 라플인 너의 할아버지가 세우신 그 곳에 키히의 마법의 비밀이 있다고 흑이 전해 달랬어. 그는 그 후에 우리랑 헤어졌고." 오랜만에 온 케빈이 한다는 소리는 확실히 아름답고 퍼펙트한 내 인생의 먹구름이다. "엘류시아는 알고 있어?" 엘류시아는 같은 멤버이고, 키히의 제자였다. 그럼 알고 있겠지?" "음.. 그건 잘 모르지만, 자주 그곳에 가셨던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으시곤 했죠. 그곳은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인데..." 뭐야. 이거 나 정말 이 나이에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거야! "좋네요. 사부님. 마침 거기 오라는 제의도 받았겠다. 거의 완벽하게 잠입할 기회네요." 죽어.. 세이. "하지만, 공작님. 한가지 유의하십시오. 절대 마법의 강함을 드러내시면 안됩니다. 되도록이면 평범하게 행동하세요. 만에 하나 당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냥 두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뭐, 내 강함을 아는 사람은 몇 명뿐이잖아. "할 수 없지. 좋아. 세이. 너도 간다." 세이는 나를 똥그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제가요...?" 그럼. 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쯔... 케빈의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나와 살면서 학교가 뭔지 모른다. 쯔... 12. 드 세메라베 트라이너의 많은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 이곳에 학교를 설립한다. 이곳이 부디 많은 사람들의 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곳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마법을 익혀 나라의 보탬이 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희망하노니, 여기 유니트 칼의 마법 학원 드 세메라베를 설립한다. 부디 많은 사람의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라플- 우리는 길에 올랐다. 수도까지 한 보름정도 놀면서 가면 넉넉히 갈 수 있는 길이다. 세이녀석은 학교가 뭔지 몰라서 기뻐하고 있었고, 아마도 노는 곳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에는 살린과 케빈이 덤탱이로 끼어 있었다. 영지의 일은 항상 그렇듯이 엘류시아와 쟈이츠에게 맡겨 놓았다. "무책임한 스승님." 세이는 조용히 입을 비죽거렸다. 뭐, 니가 삐져 봐야 뾰족한 수가 있겠어? 그나저나, 케빈이나 살린이 학교에 다니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살린, 너는 신관인데 어떻게 학교에 다닐려고 해?" 살린은 방그레 웃었다. "그야 난 학생으로 가는 게 아니지. 거기 전문 신관으로 가는 거야. 거기도 신성한 의식이나, 집전에는 필요하잖아? 안 그래? 그리고 프라오니스. 사실 너가 공작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너가 반말하는 거 기분 나빠. 앞으론 형이라고 불러. 세이가 우리 중에선 가장 나이가 많다고. 나나 케빈은 17세. 세이는 18세. 넌 15세. 어때?" 뭐가? 내 나이는 너가 말한 거에 정확히 백하고도 다섯을 더 더해야 한다고. "어, 그럼 나보고 형이라고 해야되네?" 잠시 케빈은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길을 재촉했다. "나이를 뛰어 넘은 교제도 있는 거야. 살린. 어서 가자." 이봐... "그럼 케빈은 학생도 아니면 뭐야? 경비병?" 딱이군. 세이의 날카로운 직관이군. "나? 나는 학생으로 가는 건 아니지만... 글쎄. 신전 기사단의 수행을 위해서 학교에 가는 거니까.. 학생이나 다름없지." 그런 것도 있냐. "그나저나.. 이렇게 애들만 덜렁거리고 가도 되는 거냐고.." 살린이 투덜거렸다. 역시 세상 물정에 밝은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긴 하군. 흠. 하지만 말야. 걱정마라. 대 마법사님이 함께 잖아. 자신을 가지라고. 후후후. 최고의 스승이 여기 계신데 굳이 학교까지 그것도, 내가 설립한 학교를 가야 한다니...젠장. 다리가 아프진 않았다. 힘들 리가 없지. 그 보단 더 심각한 몇 가지 문제에 나는 봉착했다. 애들 뿐이라, 여관에서 보호자를 불러오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세상물정에 눈이 어둡다 못해서 깜깜했다. "난 애 아냐." "그래. 꼬마지." 케빈이 한숨을 쉬고 나는 녀석을 쥐잡을 듯이 노려보았다. 뭐, 한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참아야지. 녀석이랑 나이 차가 무려 백살이 넘게 나는 데 말야. 쳇. 하여간 문제란 말야. 요즘 것들은. "그래. 저기 보이는 마을에서도 묶지 못하면 우린 오늘 야숙 하는 거야. 알겠어?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세이는 머뭇거리면서 웃었다. "스승님. 제가 있잖아요. 그래도 열 여덟 살이나 먹었는데... 동생들 데리고 여행 간다고 하죠 뭐." 셋은 동시에 외쳤다. "누가 동생이라는 거야!" 세이 녀석... 울고 있군. 쯔. 마을은 한산했다. 그보다는 썰렁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마을 문들은 모두 닫혀있고,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아직 초저녁인데 이상하네. 흠. "저... 이상하네요. 아무도 없잖아요." 세이가 나에게 속닥거렸다. "글쎄.. 저기 여관으로 보이는 집이 있으니까 가서 물어 보자고." 우리는 서서히 <빛나는 달밤의 여행>이라는 표지판이 쓰여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그 곳은 마을의 약간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덜렁거리는 표지판이나, 아주 더러워 보이는 나무판은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우린 쉬고 싶었으므로 그 곳으로 갔다. "왠지 겁나네요... 아무 소리도 안 나는 데다가.. 왠지 음침한 여관인데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구만. 문을 열고 서서히 안으로 들어가자, 순간 서너 명의 사람들이 우릴 돌아보았다. 그들은 왠지 겁에 질려 있었다. 설마, 내가 노크 안 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여관 문을 노크한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저.. 뭐..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요?" 케빈의 겁먹은 목소리가 울러 퍼지자, 흰색의 치마를 입은 더러운 소녀가 울부짖었다. "꺄악! 살려 줘요! 제발...! 제발...! 제 피는 맛없어요!" 잠시 우리 일행들은 혼란에 쌓였다. 뭐, 피는 누가 달라고 했니? 왠 피 타령? 여긴 예의 없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나? "여기 여관 맞나요?" 아님 말고. 잠시 멈칫거리던 남자 하나가 일어나면서 그 소녀의 어깨를 투닥 거렸다. "엔젤... 걱정마. 저 사람들은 애인데다가 아무리 봐도 외지인 같아. 너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라고." 소녀는 잠시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에는 공포가 역력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케빈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 사람... 너무 무섭다고요..." 신관기사야. 견습이긴 해도. "저.. 전 신관입니다. 이쪽은 같은 신전 소속의 전투 신관이고요. 앞으로 신전 기사가 될 분입니다. 제 이름은 살린, 이쪽은 케빈입니다." 그 소녀는 아주 똥그란 눈을 하고선 케빈을 바라보았다. "그럼 악의 신전?" 허헐... "자. 애. 의. 여신의 신전입니다." 왠지 김나는 소리가 잠시 들린 듯 했지만, 과연 신관 교육을 받은 케빈은 참을성이 대단했다. 허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여기는 아주 평화로운 곳으로 보이는 데요. 사람들도 다니지 않고 말입니다. 이상하군요." 케빈이 꾹꾹 눌러 참으면서 이야기하자, 세이는 그저 냄새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배고픈가 보군. "그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일없었습니다. 그런데..." 흠? 세이야! 거기 가면 어떡해! "얌.. 얌.. 맛있다.. 음 냐냐.." 모두의 시선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으면서 우물거리는 세이에게로 향했다. 괴물이 있건, 귀신이 있건, 세이는 역시 어떤 의미에선 무적이다... "이 녀석!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느냐!" 나는 냉큼 녀석의 귀를 잡아당기려고 녀석의 옆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녀석의 귀를 잡아 당겼는데... 팔 아팠다. "스승님.. 하지만 배가 너무 고프다고요! 여기까지 오면서 따뜻한 건 하나도 안 주셨잖아요!" 그야, 마법 쓰기 귀찮으니까.. 젠장. 애 하나 잡는 군. 그러나.. 케빈과 살린은 나와 세이가 굿하던 말던 잘 들 놀고 있군. "잘 들 노는 구나..." 결국,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케빈이나 살린에게 듣기로 하고, 포기하고 잠들었다. 젠장. 늙으면 역시 다리가 쑤신다... "그래. 무슨 이야기야? 뭐, 괴물이라도 있다니?" 살린은 자신의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한숨 쉬면서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흡혈귀가 있다는 거래요. 사실 흡혈귀는 없는데.. 아마 흡혈하는 괴물이겠죠." 어라라? "그럼 우린 모두 마늘과 십자가를 준비해야 하는 거야!" 세이야. 넌 그냥 잠이나 자라. "글쎼.. 정말 흡혈괴물이 그런 게 필요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소 같이 큰 동물을 쓰러트리고 죽였을 정도면.. 아무리 흡혈 괴물이라도 작은 건 불가능해." 그렇게 되네. 음. 의외로 살린이 똑 똑 한데? "그래서, 뭐.. 우린 상관없으니까 다행이네." 나는 냉큼 이불 덥고 누웠다. 젠장, 방이 없다고 이런 딱딱한 데다가 잠자리를 주다니.. 아니지. 눈밭에서 안 자는 것만 해도 다행이니까. 우이구.. 추워. "스승님.. 옛날이야기 해주시면 안 되요?" 녀석의 머리를 이불 속에 쳐 박고 나는 그날 아주 산뜻한 저녁을 맞이했다. 훗. 역시 운동 후에는 달콤한 잠이 최고지. "음 냐냐.. 스승님.. 연어 죽이 제일 맛있다고요... 음 냐냐.." 모두와 함께 한 방에서 자게 되었다. 어린애들 넷이서 여행하는 것은 일반적인 여행 기준에서 볼 때 상당히 맘에 안 드는 듯 했다. 그래서, 나와 케빈은 이렇게 방바닥을 구르면서 자고 있고, 살린은 뭔가를 계속 읽고 있었다. 그리고 내 멍청한 제자 녀석은 지금 구석에서 잠꼬대를 하면서 자고 있었다. "저... 프라오니스. 물어볼 께 있는데..." 그래. 살린. 네가 나한테 반말도 하고. 세상 많이 좋아졌구나. "뭐?" "흡혈귀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어?" 내가 그런 거 알면, 괴수 대 백과라도 냈겠지. 안 그래? 아까부터 영 찝찝한 게.. 정말 흡혈귀일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닌지.. "없어. 잠이나 잘래." 살린은 완전히 책에서 눈을 떼고 나에게 말했다. "참 이상해. 프라오니스는 마법사잖아? 하지만, 너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생각 단 한번도 한적 없었지만.. 저번엔 성에서 거대 마법진을 만들어 줬다면서? 절대 아무나 만들 수 없는, 흡사 대 마도사 라플과 같았다고... 뭐, 너가 스승에게서 밤새서 교육받은 결과로 그렇게 강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 어떻게 주문을 외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거지?" 밤중에 이렇쿵저렇쿵 하는 군. "글쎄... 언젠가 부터는 이렇게 되버렸네. 뭐. 중요한 건 아니잖아? 내가 여기 있고, 나쁜 놈도 아니고, 안 그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책의 어느 부분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었다. "고대 오테일의 성전에 있던 몇몇 신관들은 위대한 마법사가 궁극에는 마왕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래서 현재도 그러한 전통이 지켜져 오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갑자기 뜬금 없는 말을 내가 알 리가 없잖소. "몰라." "조심하라고. 신전은 널 좋게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너가 여기 오게 된 것도 신전에서 꾸민 일일 수 있어." 흠... 그래도 지들이 날 어쩌지는 못하지 않아? "근데 왜 날 이렇게 도와주는 거지? 하등의 이유 같은 건 없잖아?" 살린은 잠시 아주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줬다. "넌, 꼭 내 동생 같아서 말야." 엉? 훗. 그 동생 꽤나 미남이겠군... 이 아니지! 이런 나쁜 놈! 감히 너의 할아버지의 아버지뻘 되는 나에게 그런 망발을! 용서 못 해! "나, 진짜...!" 살린에게 항의하려는 순간 거리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살린은 나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내가 바깥을 손으로 가리키자, 살린은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있었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집의 옆의 길에선 흙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와 살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물체가 솟아서 우리 창문 바로 앞에 섰다. "저.. 저..." 살린, 겁먹다. 나? 훗. 더한 것도 많이 본 사람이다. 새삼스럽게 뭘. "인형이야." 내가 한 마디 하면서 일어서자, 살린은 나를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인형이라니? 저렇게 움직이는데!" 조용히 주문을 암송하고 그것의 몸에 아주 작은 충격을 주었다. "어라라?" 그리고 공중 부양 마법으로 사람은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방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케빈과 세이는 깨지 않았다. "이건.. 누구지?" 내가 알 리가 있냐! 오늘 온 마을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둥둥 떠다니는 녀석 따위 내가 알 리가 없잖아! "그보다, 흡혈귀라는 거 진짜 있나 본데?" 갈색 옷을 젖히자, 하얀 목에는 검은 자국 두개가 나 있었다. "아웅, 잘 잤다. 어라라? 살린과, 스승님 눈이 왜 그래요? 퀭하네?" 그래. 퀭하지. 한 밤도 못 자고 이 정체를 밝혀 볼려고 했으니까. 문제는 이건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니고 말야. 젠장. "왠 시체죠? 설마, 순진한 살린을 꼬셔서!" 케빈을 흠씬 패준 뒤에 나는 그 시체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세이에게 업도록 시키고 여관의 아래로 내려갔다. "실례합니다. 주인 아저씨.... 왜 그러세요?" 아래에는 몇 몇의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소녀가 비명 질렀다. "꺄약! 저건...! 흡혈귀!" 이봐, 무슨 소리야... "자네들... 어려서... 설마, 어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 같지? "어서 떨어져라! 얘들아! 난 여기 신관이란다!" 먼지와 때로 더렵혀진 옷을 입은 갈색 머리 총각이 방망이를 들고 나왔다. 요즘은 괴물을 기도가 아닌 방망이로 잡냐? "저도 신관인데요?" 잠시 혼란, 그러나 한 사나이의 말로 이내 우리를 째려보았다. "신관도 홀려버린 게 틀림없어!" 아주 잘들 노는 구나. "제가 흡혈귀라는 증거가 어디 있죠?" 한 아주머니가 앞으로 나왔다. "그야, 은발을 가지고, 하얀 피부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 흡혈귀지!" 은발은 원래 그렇고... 이봐, 그럼 세상에 은발 가진 사람은 다 죽으리? 그리고 하얀 피부는 훗. 원래 그렇다. 그리고 붉은 눈은 밤샜단 말이다! 더 말이 필요하냐! "에휴휴.. 전 고위 신관이에요. 여기 케빈은 성 기사 견습 후보생이고요. 여기 증표도 있어요. 마기에 홀린 자는 이걸 잡지도 못 한다고요." 어라라.. 그럼 나 못 잡겠네? 아니지. 난 마왕 그 자체니까 잡을 수 있을 지도. 흐흐흐.. "진짜잖아.. 그럼 그 사람은 뭐지?" 뒤에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차차, 모르는 부유 시체가 있었지! "크악!" 갑자기 난동을 시작했다. 먼저 강력한 녀석의 어퍼컷에 내 귀여운 제자가 계단에서 떨어지고, 케빈은 녀석의 허리를 검으로 쳤다. "젠장. 신성주문 부탁해. 살린." 살린은 조용히 신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름다운 흰빛이 그의 몸을 떠나 그 모르는 부유 시체의 가슴에 흡입되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체는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이래서 죽이기 싫었는데. 죽으면서 갑자기 부패해 버리잖아. 안 그래?" 마을 주민이 오바이트를 하건 말건, 난 그 시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점에 착안했다. 이건 흡혈귀라기 보단 좀비 같은데? 마을 대책회의가 열렸다. 아무래도 우리 일행 중에 신관이 있다는 게 큰 힘이 되는 모양이다. 아, 살린은 고위 신관인데 그 중에서도 에네브 급이라고 한다... 그거 난 잘 모르지만, 무지 높은 계급 중에 하나라고 한다.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럼 에네브님. 부탁이니 제발 흡혈귀를 잡아주십시오!" 모두의 희망인 에네브! 그는 잔뜩 얼어 있었다. "물론 제가 여러분을 도와야겠죠. 하지만, 녀석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라... 뭐 아는 게 있다면 아무 거나 말해 주십시오. 사소한 것도 괜찮습니다." 흠. 국가 사정위원회에 끌려 간 분위기가 드는 군. 사람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있고 말야. "그러니까... 한달 되었군요. 옆집 린의 가족들이 행방 불명된 게 말입니다. 그리고 몇 일뒤... 전 보고 말았지요. 저녁에, 그 집사람들은 분명 다 사라진 게 틀림없는 데... 검은 그림자를 보았지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나 밤일하는 분일 수도 있는 데 말야. "아, 전 봤어요. 분명 3일전에 죽은 사스 할아버지네 막내 아들을요. 무서워서 열심히 뛰었지요." 흠... 어딜 봐도 흡혈귀 같지는 않은데? "사람을 물고 그랬다는 걸 본 사람이나 겪은 사람은 없나요?" 조용해졌다. 없네. "살린, 난 이들이 본 건 절대 흡혈귀가 아니라는 데 돈을 걸 수도 있어." 살린은 나를 째려보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너무 어려서 도박은 안 된다." 갑자기 화난다. 그리고 한 작은 소녀가 머뭇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5일전쯤... 밤중에 목욕을 하려고 하는데... 여러 사람들이 작은 길을 따라서 숲으로 가는 걸 봤어요." 흡혈귀가 단체 행동 한다는 소린 들어본 적 없다. 그렇다. 그럼... 역시. 좀비군. 좀비의 생활에 대해서 어느 마법사가 내 놓은 의견을 본 적이 있다. 그 내용이라는 것이 아마, 좀비는 뭘 먹고살까 하는 내용이었는데... 사람이라든가, 마물이라든가, 뭔가 몸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영양소가 필요하다는 거였는데. 뭐, 지금 와서 그걸 조사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역시 내가 유능하고, 위대한 마법사이기 때문이지. 훗. "스승님. 왜 침흘려요?" 헉, 이미지 망가지는 군. 소녀는 나를 측은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꼬마가 졸렸구나." 그래. 나 꼬마고! 어려서 졸리다 그래! 젠장. 젠장. 결국 나는 떠밀리다 시피 해서 방으로 갔다. 되는 일이 없구만. 음.. 분명히 좀비라면 그 중심에 마법을 쓴 사람이 있겠지? 그럼 쉽군. "마법의 흐름이여... 나타나라." 조용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검은 언덕이 비춰졌다. 그리고 싸늘한 시선도 느껴졌다. 에엑? "날, 찾는 건가? 수준급이군. 넌... 마족인가?" 에에에~ 아냐! 대화도 할 수 있나? "당신은 누구지?" 싸늘한 시선을 가진 눈동자가 점점 작아지면서 그 사람의 얼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색의 머리와,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손에는 떡갈나무로 만든 듯한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사람...? "나? 먼저 물어본 사람은 나야. 아무래도 넌 마족의 파장을 가지고 있군. 나를 동족으로 착각했나 보지? 후후후.. 이름정도는 알려주마. 난 제호라이스다.. 후후후! 어둠을 뒤덮는 빛! 신성한 빛의 힘이여! 나의 적을 멸하라!" 순간 눈을 뒤덮는 빛이 나타나고, 내 앞에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거대한 원과, 그 사이에 있는 새와 같은... 무엇이지? "스승님! 스승님!"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를 이런 식으로 불렀던 어떤 사람이 있었다. 세이? 세이구나.. 다행이다. 나는 눈을 떴다. "호들갑떨긴..." "스승님. 이런 데서 어퍼져서 자면 큰일나요. 감기 걸린다고요." 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침대에서 다섯 걸음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서 침대로 가고 싶었다. "이거... 젠장." 확실하게도, 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녀석이 나를 놀란 듯이 바라보았다. "스승님...? 여기 뭔가 얼룩이 져 있는 데요?" 허... 헐... 그렇지? 나는 손을 내 등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손을 펴자, 끈쩍 거리는 어떤 것이 느껴졌다. "회복마법... 기억 나냐?" 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회복마법은 내가 내성이 사라진다고 왠만 하면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스승님. 그거 혹시 피... 아니에요?" 세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방긋이 웃어주었다. "가서 살린 불러와." 곧 세이의 비명 가까운 짖음이 들려오고, 나는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정신을 유지했다. 기억을 잃으면 끝장이었다. 살린과 케빈, 그리고 몇 몇의 마을 사람들이 들어왔다. 살린은 회복마법을 써서 날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려지는 정신 가운데, 녀석과 케빈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살린?" "글쎄... 내 힘 만으론 무리야. 너무 크게 다쳤어. 거의 등이 날아간 거나 다름없다고. 어떻게 살아있는지도... 모를 정도야." 헤... 그랬구나. -스승님... 저 오늘 떠날 겁니다.- -좀 더 배우는 게 낫지 않느냐?- -전... 전.. 이런 산 속에 쳐 박혀서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전 야망도 있고요. 스승님.- -마음대로 하려무나.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데로. 너가 원하는 데로, 가거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전.. 정말 스승님을 존경합니다.- -넌 내게 아들이나 다름없단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청년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끝까지,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내... 제자였나 보다. 으.. 그저 늙으면.. 젠장. "스승님. 훌쩍... 훌쩍..." 세이가 옆에서 질질 짜고 있었다. 뭔가 꿈을 꾼 거 같았다. 세이는 아니었는데... 대체 누구람. "세이야." 세이는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이제 괜찮으신 거죠? 그렇죠?" 그럴 리가 있냐.. 너 같으면 겨우 18시간만에 다시 멀쩡해져서 돌아다닐 인간이 있겠냐? "살린에게 말해서 좀비를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봐. 저녁에 움직이지 않아도 녀석들은 낮에도 다닐 수 있으니까.. 그점 유의하고." 세이는 다시 활기찬 표정을 하고 뛰쳐나갔다. 하여간. 녀석. "자.. 그럼 녀석이 오늘 외워야 할 마법이나 정리해 둘까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위대한 스승이 어디 있겠어? 우후후후. "아, 뭐 하는 거야? 프라오니스." 라플이라고 불러 줘... 너무 길잖아. "살린. 좀비는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 지 너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러니까 준비 좀 해둬." 살린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래. 하지만, 그 중심을 없애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어. 그리고 누군지 알게 뭐야? 마족일 수도 있고, 마법사일 수도 있어." 이런 작은 마을에... 왜 마족이 오겠니? 그리고 그 회색머리 녀석은 틀림없이 인간이었다고. "인간이야. 틀림없어. 그리고, 중심을 없애려면 너와 케빈이 가는 게 좋겠지. 아, 세이도 데려가." 살린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면서 물었다. "어리석구나. 세이가 없으면 넌 너무 위험해져." 세이가 있으면 더 위험하다고. "살린. 나보다 마을 하나 살리는 게 더 중요해. 그리고 그 녀석이라면 적어도 보조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알았어?" 살린은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살린. 빨리 결정해.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죽을 수 있어." 살린은 그제서야 못 마땅하다는 어조로 대답하면서 준비하러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등이 너무 아팠다. 살린의 마법으로 겨우 겉만 치료되었을 뿐, 안은 아직도 엉망이었다. "자.. 그럼 난 좀 쉬어야겠다." 세이와, 살린, 케빈이 몇 명의 청년과 함께 준비하고 마을의 서쪽에 있는 언덕을 향해 떠났다. 그 사람이 있던 곳이었다. 난 여관이 조용해지자, 이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가끔 소녀가 왔다 갔다 하기는 했지만, 정말 고요한 저녁이었다. "헤에. 꼬마, 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면서 소녀를 보았다. "난 꼬마 아냐. 이름이 있다고. 프라오니스라고 불러." 그녀는 방그레 웃었다. "꼭 용사의 이름과 같잖아? 신기하네." 그 용사가 바로 나다! 자, 이제 네 죄를 알렸다? 꼬마 따위가 아니란 말여! 그러나... 애들 데리고 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뭘. 그보다, 오늘 저녁은 뭐야?"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손을 들어 볼을 꼬집었다. "너 말야! 애가 너무 건방지잖아? 귀엽게 생긴 게 말이지.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이렇게 건방지게 된 거 아냐?" 흑... 무슨 소리야! 난 원래 이래! "누... 나." 그녀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다. 젠장. 다 늙어서 애들 비위나 맞춰야 하고. 에이. "그래? 동생아. 무슨 일이야?" 좋아. 정보나 알아보자. "그럼 이 동네에 특이한 점은 뭐야?" 착한 동생 버전이라고 불러다오. 늙어서 별 짓을 다 하는 구나. 흐허허.. "응? 글쎄.. 별 거 없지. 아, 한 며칠 뒤에 대단한 사람이 지나간다고 하더라고." 응? "어떻게 대단한 사람인데?"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하더니 이내 술 술 털어놓았다. "응. 피스트레이카 공작." 내 이야기잖아! "그 삶이 언제 지나가는데?" 땀 흘리는 거 보이지? "몰라. 뭐, 화려하겠지. 공작은 이 나라에 단 두 가문 뿐 이니까. 사람들도 많이 있을 꺼고... 아, 그 공작이 어리다고 하더라고. 그럼 혹시, 나, 공작의 눈에 띄어서 공작 부인이 되면 어쩌지? 호호호.." 그게 니가 지금 꼬집고, 협박한 아이다. "참수형.." "뭐라고?" 나는 얼른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누나. 뭘 잘 모르나 본데. 그 공작도 사람을 선택할 권리정도는 있다고." 물론, 이 소리하고 내 볼은 다시 팅팅 부었다. 흥. 그리고 나는 끔찍한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꺄약! 괴물이다!" 소녀는 즉시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괴물이야.. 그것도 무지 많아!" 총... 공격인가? "많기는 하네. 음... 저 정도의 숫자라면..." 소녀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어서 도망가야해. 응?" 나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으면서 방그레 웃어 주었다. "걱정마.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지금 비록 다쳐 있지만 저 정도도 어떻게 못할 정도는 아냐." 역장에 의해 그 녀석에게 당하긴 했지만, 케빈의 검술과 살린의 신성술이 있다면 뭐, 그리 무리도 아니겠지. 녀석들.. 잘 하고 있을 테니, 난 저 떨거지들을 해치워야겠지? "으악!" 마을 입구에 검게 몰려든 괴물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 몇몇은 무기를 대신할만한 물건들을 들고 좀비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부축해 주겠어?" "응? 응..."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몸에 무게 중심을 싣고 천천히 창문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밖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느끼면서 천천히 주문을 외웠다. 아마도... 생각대로라면, 성공할 것이다. "어둠을 지배하는 자, 그 이름을 이은 자, 암흑의 재래와 더불어 다시 세상에 현신 하노니. 내 명에 의해 나에 반하는 자들이여... 사라지라. 어둠의 인형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라!" 창문의 앞에는 작은 검은 구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구는 천천히 마을의 위에 거대하게 구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정화되지 않은 어둠의 존재들은 한줌의 어둠의 흙으로 사라져갔다. "저... 건..!!!" 소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밖을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던 것들도 완전히 소멸했다. 진정한 의미의 어떤 간섭도 없는 소멸이 시작된 것이다. 검은 구체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다시 점으로 변하여서 사라졌다. 저것이... 내 의지인가... "다시 침대로 옮겨줄래? 찬바람 쐬었더니 몸에서 열이 나는 거 같아." 그 작은아이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이, 나 지금 무지 아프다고. 환자야 환자. "너... 마법사야? 그런 거야?" 음. 그렇지. 그보다 피곤하니 빨리 자리로 갔으면 좋겠는데... "빨리 말하란 말야!" 잡아먹을 분위기... 내 팔을 지탱하고 있던 그녀가 떨어져 나가자, 난 순식간에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데 왜? 아프단 말야." 소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드리워졌고, 날 노려보았다. 뭐, 마법사에게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나 보지? "그래? 하지만... 내 일을 방해하다니.. 용서 못해! 율지스 저 녀석을 제거해!" 내가 야간 벙 쪄 있는 상태에서 그녀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허공에는 푸른 원이 생성되면서 한 명의 사람이 등장했다. 분명히... 그 남자다. "내 이름은 율지스다. 꼬마야. 아직 살아있다니, 놀랍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차가운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손이 천천히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율지스... 들어본 이름이다. 설마... "라플이라고 알아?" 이거 꼭 지나가는 사람한테 스카웃제의 하는 기분이 드네....푸른 눈동자의 사나이는 잠시 움찔하더니 나에게 다시 살기를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꼬마야. 이젠 그만 죽어라. 그게 너한테도 좋은 일이다." 어쩐 다냐... "내가 그 라플하고 관계 있는 사람이거든." 본인이라고. 혹시 아시나? 소녀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관계? 무슨 관계지?" 휴... 어느 정도 살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어쩐다. 이 녀석은 정말... 설마가 맞을까나? "나랑 동행이 라플의 제자거든." 그리고 참고로 나는 라플이고. 허허허허.. "그랬던가? 네 쪽이 더 라플의 제자 같았는데 말야. 좋아.... 하지만 내가 그거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그래서 널 살려줄 이유 같은 건..." 윽... 아닌가봐. "프라오니스!" 그 때 문이 열리고, 케빈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마도사는 눈을 찡그리면서 그를 바라보고 나에게 물었다. "이 녀석이 라플의 제자?" 농담 하냐... 이런 녀석을 데리고 뭘 가르친다면, 그 생각을 한 사람에겐 표창장이라도 줘야 한다고. "아냐." 이어서 살린과 세이가 기어 들어왔다. 세이의 목에는 날카로운 검이 들이대져 있었다. 그 소녀가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흠... 그럼 이 둘 중 하나인가? 그보다, 너의 이름이 프라오니스?" 라플이라고도 하지.. "뭐, 그렇게 되는군... 제자는 저쪽 갈색머리야." 푸른 눈의 사나이는 눈을 빛내면서 세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실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터무니없이 약하잖아? 어디가 위대한 대 마도사의 제자라는 거지!" 그야... 이 녀석은 취식 담당이니까...특별히 재능이 있어서 제자로 삼은 것도 아니고... "음... 요리는 잘하는데." 세이는 나를 보고 울부짖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또 벌어졌잖아요! 어떻게 된 거에요! 그 사람은 누구에요! 어서 도망가요!" 이봐... 그렇게 말해도. "으... 살린. 어떻게 된 거야?" 케빈이 검을 들고 잔뜩 긴장하면서 말하자, 살린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음. 확실한 건 여기서 싸울 수는 없지. 이 좁아터진 방에 지금 몇 명이나 있는지 잊은 건 아니지?" 아항. 그렇구나... "뭐, 이렇게 된 이상, 모두 죽여야겠군. 율지스. 해치워라." 율지스는 나를 바라보고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해를 어떻게 치우라는 거야?" 썰렁.... 순간 방에 있던 A, B, C 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그리고 마도사는 주문을 외웠다. 뭐, 내가 정말 그랑 싸우기를 마음먹는다면.... 꼭 못 싸울 것도 없지만. "다음 부턴 율지스, 썰렁한 농담은 하지마." 율지스는 씨익 웃으면서 마법을 준비했다. 어쩌지... [심. 연. 의. 불. 꽃.] 그의 손에서 붉은 구가 생성 되서 그건 정확히 소녀가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소녀는 세이를 놓아버리고 황급히 옆으로 뛰었고, 문은 아작이 났다. "율지스! 무슨 짓이야!" 그는 잠시 비웃듯이 웃더니, 이내 다시 스펠을 준비했다. "그야, 원래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그녀는 품에서 작은칼을 꺼냈다. 유 백색이 빛나는 매우 날카로워 보이는 검이었다. 그리고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가... 원래의 목적은 라플의 행방을 아는 것? 하지만... 그는... 죽었잖아?" 엥? "그래. 그런데, 라플과 관계 있는 사람을 만났거든." 소녀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냐. 피스트레이카 공작 일행은 아직 안 왔잖아? 그리고... 그들만이 라플에 대해 알고 있다고!" 율지스는 손에서 다시 불을 구를 만들어냈다. "이제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리고 소녀는 순식간에 하나의 구를 품에서 꺼내서 던졌다. 잠시 방안은 빛에 휩싸이고, 다시 빛이 사그라들었을 무렵, 그 소녀의 모습은 이미 방에 없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는 생명을 건진 거로군. 저 여자.. 대체 뭐지?" 살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일행은 동시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율지스라고 하셨죠? 그녀는 누구죠?" 왜 좀비를 불러내고, 것도 모자라 죄 없는 나까지 죽이려고 하다니. "아,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프라오니스. 넌 피스트레이카 공작가 사람인가?" 살벌해 형님. "맞아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했다. "라플은.. 정말 죽었나? 너가 가짜이건 아니건, 나와는 상관없어." 흠.... 율지스는 정말.. 그 녀석이구나. 나는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 을 려고 했는데, 키가 나보다 커서 그냥 끌어안는 걸로 만족했다. "내 사랑하는 제자.. 율. 건강했구나.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행이다. 무사해서. 그래... 돌아 온 거구나." 이 닭살 만점의 대사를 내 뱉고 있는 사이, 세이는 말했다. "제자가 또 있었어요?" 넌... 내가 대체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너 전의 제자는 바로 이 사람... 아니지. 엘프... 야. 물론, 지금 율지스의 얼굴에는 엄청난 충격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난 스승님 손자라고 생각했는데?" 뭐,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흠. 세이는 똥그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냐? 내가 드디어 과대한 피로와, 상처가 터져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쓰러진 거지. 뭐. "스승님!" 잠시 뒤, 혼란 속에서도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도, 살린 녀석이 회복 마법을 사용하는 거 같았다. 음... 이러면 내성이 약해져서 혼자 힘으로 나을려면 고생하는 데 말야. "세이...?" 세이는 냉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좀 더 뒤였다. 저녁 어스름한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음.. 그 말은, 나중에 너가 마법 역작용에 된통 당한 뒤에 쉴 시간도 없이 실시간으로 마법을 잔뜩 쓴 뒤에 녹초가 되어서 며칠쯤 누운 다음에 물어봐 주지... "아니. 전혀. 살린과 케빈은?" 세이는 방긋 웃었다. 스승이 곤죽이 되어서 누워 있어서 행복한 게냐! 넌! "헤... 남은 좀비를 해 치우러 갔어요. 글쎄.. 그, 스승님의 제자라는 율지스말 이에요. 굉장히 건방져요. 그 정도 해결할 수 있잖아? 그러면서 혼자 폼은 있는 데로 잡더라고요." 그야.. 그 녀석이 좀...그치만... 나보다 약간 어린 정도니까.. 일단 엘프 잖아? "그래서 어디 있는데?" "여기." 문을 열고 회색 머리를 풀풀 날리면서 그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아, 율지스. 내가 너의 스승이자, 위대하고, 천재이신 대 마도사님이신 라플이시다." 잠시 내 소개에 벙쪄 있던 그는 나에게 물었다. "정말 내 스승이긴 한 건가? 하지만 스승은 인간이야. 그리고... 인간은 기껏해야 백살도 살지 못한다고." 그야... 난 위대하신 대 마도사이잖아. 녀석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스승님은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세상을 위해서 항상 생각하고 희생하시는 위대한 분이셨지." 그랬던가.. 음. 젊었을 때 이야기잖아? "한때는. 이제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기로 했다고." 세이가 한마디 덧붙였다. "나사가 하나 빠진 거겠지..." 그 이야기하고 세이는 흠씬 얻어 터졌다. 뭐, 내 제자라면, 이 정도 일에는 익숙해 져야 한단다. 후후훗. "정말 스승님?" 험악한 분위기가 흘렀다. 왠지 그렇다고 하면 맞을 분위기다. "응." 그는 잠시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얼싸안았다. "귀여워~~~ 스승님~ 왜 이렇게 귀여워 진 거야~" 세이와 나는 그날 합동으로 제자 율지스를 두들겨 팼다... 뭐, 이 녀석에게도 내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마법학원으로 간다고 하자, 그는 동행을 요청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런 귀여운 스승을 혼자가게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나? 뭐냣! 이 위대하신 대 마도사님을 뭘로 보는 거냐.. "필요 없어. 내 몸 정도는 내가 챙길 수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마법의 역작용 따위를 쓰는 녀석을 데리고 다니긴 싫다 이거야." 마법의 역작용은, 이 녀석만의 장기다. 그것도 상대가 완전히 나처럼 방심하고 있을 때만 먹히는 건데.. 일종의 주술이랄까나? 상대가 마법 탐색에 나서면 그걸 역추적해서 반사시켜서 상대편에게 타격을 주는 거지.. 뭐, 내 경우에는 내가 강해서 더 문제가 컸던 거고.. 그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간략했다. "아, 하루 백 메장에 고용되었거든." 이런 녀석이 내 제자다.. 내 곁을 떠날 때의 그 불타는 야망 어쩌고는 저기 난롯가에서 타고 있나 보지? "좋아... 그런 너라도 데리고 다니면 쓸만 할지도 모르지. 좋아. 가지. 아, 케빈과 살린에게 내 정체에 대해선 이야기하지마. 뭐, 말해도 안 믿지만... 그 녀석들 날 정의의 주인공 정도로 생각하고 있거든." 그리고 나는 둥실 웃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 아무리 너보다 어려졌어도, 너의 스승이니, 함부로 끌어 않지마." 율지스는 스승 너무해를 연발했지만... 뭐, 케빈은 나중에 그를 보곤, 이런 놈이었던가 하고... 말했다. 뭐, 세월이 흐르니 사람의 성격이 변하는 건 마찬가지지... 음. 제자는 완전히 회수했다.. "자.. 그럼 이 마을을 떠나 볼까나?" 우린 마을 주민 여러분의 환송 속에서 기분 좋게 출발할 수 있었다. 살린의 한 마디가 귓전을 때렸지만. "완전히... 그렇지? 케빈?" "흠.. 그렇네. 뭐, 나나 넌 상관없지만." 엉? 무슨 소리래? 난 재빨리 율지스를 바라보았다. 그도 어깨를 들썩였다. "아, 마법학원이 시작되었을 테니.. 아마도 스승님.. 편입시험 같은 거라도 보고 가야 겠네요?" 으잉? "나도 가는 거죠? 헤헷. 기대된다." 세이야.. 기대할 께 따로 있어서 그런 거나 기대하냐? 으이구....우린 곧 그 학원에 도착하게 될 테지만.. 난 별로 그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내가 설립한 학교를 다녀야 한다니.. 이거 꼭 졸부가 학교 세워서 학교에 졸업장 받는 격이잖아? "스승님. 음.. 저도 다닐까요?" 이봐. 율지스. 네 나이가 몇이냐. 아, 노망날 때가 된 거냐? "왜? 너가 어떻게 다니냐. 네 이모에 그 정도 얼굴이라면 뻔하잖아. 젊은 엘프면 적어도 50은 넘긴 건데." 율지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럼 교사로 가죠. 뭐. 저도 한 번쯤은 스승님을 가르쳐 보고 싶었다고요." 뭐야? 교사는 아무나 하나... 것도 모르나? "좋아. 교사 지망생과 학생 지망생 둘이서 설거지하면 되겠네. 어서 가!" 세이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율지스는 옆에서 세이를 들볶고 있었다. 내용도 더럽게 유치했다. 네 실력으론 스승님의 발톱의 때만큼 못해.. 라든지. 사실 발톱의 때정도라도 되면 다행이겠다. 녀석아. "아.... 저기가... 마법학원?" 그렇지. 세이는 여기 온 적이 없겠구나. 처음에 계획은 아주 단촐했다. 오두막을 하나 져서 거기서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살자.. 였는데... 그 썩을 친구 때문이었지. 내가 세우는 거면 좀더 커야 한다나 뭐라나!!! "그럼 수속을 받으러 가죠. 뭐, 마을 구경을 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피스트레이카 공작 저택에서 묵으면 되니까... 아, 율지스씨는 어쩌실 겁니까? 듣기론 피스트레이카가의 먼... 방계 친척 이라면서요?" 케빈. 속았구나... 이 사람은 말야. 엘프다. 엘프랑 결혼한 공작이 있을 꺼 같냐? 종족간의 결혼이 평민도 힘든데. "아... 전, 당연히 공작과 함께 있어야지요." 그건... 이렇게 율지스가 뻥을 친 이유는 이렇게 해야 나한테 존대를 해도 이상하지 않느냐 하는 거였다. 스승에 대한 예의는 꼬박꼬박 챙기는 녀석이지.. 대신, 성격 파탄이지만. "와! 스승님! 이게 수도란 거군요? 너무 크고.. 너무 멋져요~" 여기 촌놈 하나 더 있었군. 어서 학원이나 가서 수속이나 해야지. "씻고 갔으면 하는데..." 그러나, 살린의 외침은 묻여 버렸다. 신난 막강 사제, 율지스와 세이의 끌림에 의해.. 무참히 꼬질한 모습으로 우린 마법학원에 가야 했다... 젠장! 첫 시작부터 꿀꿀하군. 마법학원은 총 다섯 개의 관과, 여섯 개의 탑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엄청 크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작은 호수가 하나 있고, 그 속엔 다시 작은 섬이 있다. 그 섬엔 작은 오두막집이 있고.. 이게 원래 내가 지을 려고 했던 마법학원이다... 그 사이에 이어져 있는 다리는 없다. 나만 그 주문을 알고 있다. 뭐, 비행마법을 써도 결계가 쳐져서 갈 수 없지만.. 그리고 여기 마법학원은 원래 내 취지와는 상당히 다르게 귀족자제들이 운집해 있는 곳이다. 나바스와는 달리, 이곳은 마법사가 많고, 귀족간의 정쟁에 있어서 마법을 모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도인데... 저 둘은 아주 신났군. "저도 본 건 처음입니다. 과연.. 크군요. 숲에 있는 저택 같은 분위깁니다. 사람들도 꽤 적은 편이군요." 신났어... "스승님~ 저거 봐요! 멋진 건물이에요!" 다 멋져.. 여긴. 자, 그럼 나도 푸른 꿈나무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학원 물을 시작해 볼까나? 후후훗. 13. 마법 학원 나는 절대로 놀라지 않았다. 그 사람이 그런 곳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든지 하는 것도. 내겐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곳에선 그가 없는 그곳에선... 단지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었다. 그 모양은, 그가 평생을 걸쳐 사랑했던 그 소녀의 모습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 조각상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깨트렸다. 이렇게... 만들어주마. -율지스- "공작 가의 자제 분답지 않게 정말 늦게 오셨군요. 정말이지... 요즘에는... 아, 일단 수속은 모두 마쳐져 있으니 염려하실 건 없습니다. 그보다... 이분들은?" 교장이라는 사람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마치 절대 교장이 될 수 없듯이 보이는 삐쩍 마른 체구에 붉은 머리를 하고 있고, 더군다나 안경 따위는 끼고 있지 않았다. 아주 신경질적인 인상에다가, 매우 평범한 인상이었다. 보통 교장은 흰 수염에다가 뚱뚱한 몸을 가지고 있고.. 뭐, 그래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 전 살린. 에네브입니다. 신의 종으로서, 이곳에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역시 같은 종단 소속의 케빈입니다. 현재 신성 기사단의 부름을 받고 활동 중입니다." 그리고 살린은 내 옆에, 옆에 있는 율지스를 바라보았다. 뭐야, 소개는 나보고 하라, 이건가? "아, 전 율지스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엘프이고, 마도사입니다. 직장을 구하러 여기 왔습니다." 이봐.. 아무리 내 제자지만, 그 정도 가지고 오.. 그럼 채용하지.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교장이 벌떡 일어났다... 음. 쫓아내려는 거로군. "오, 그 삭풍(削風)의 마도사! 대단합니다. 실물로 보게 될 줄은.. 영광입니다. 저희 학원에서 일해주시겠다니.. 왕성으로 가시는 쪽이 낫지 않으실런지요?" 어이.. 어이. 그럼 나는? 대마도사 라플인데? 내 이름은 세 살 먹은 얘들도 알아. "하하하.. 교장선생님. 과찬이십니다. 전 그저 평범한데 남들이 저를 추켜 세워주는 것 뿐이죠. 이번엔 후학 양성을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아, 이 소년은 제 사제입니다. 세이. 인사해라." 어이. 어이. 그 전에 내 제자야. "아..안녕하세요? 세이키르입니다." 허허헐... 살린은 깜짝 놀란 듯 했다. "살린 알아?" 귓속말로 살린에게 즉시 속삭이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신전에만 있어서.. 그러고 보니, 삭풍 어쩌고는 들은 적이 있어." 음. 세이와는 다르게 유능한 녀석이었군. "아, 그럼 여기 이 공작님은 이분께 맡기면 되겠군요. 명분도 서고. 하하하. 잘 되었습니다. 근데, 사제 분도 선생으로 오시는 겁니까?" 무리다... "아, 그게 좋겠군요. 하하하." 으잉? 이봐, 누가 누굴 가르치라는 거야! "아, 그럼. 아피르!" 왠 소년 하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넌 항시 대기냐? "부르셨습니까?" "아, 그래. 여기 새로운 신입생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여기 프라오니스군은 피스트레이카의 공작의 신분으로 계시지. 특별 실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고. 아, 이곳 구경도 해 드리렴." 소년은 나를 보고 깍듯이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님. 전 아피르 켄들입니다." 나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뭐야! 그럼 여긴 나만 학생이고, 다른 넘들은 다 선생이잖아! 그래... 율지스는 그렇다치지만, 세이 녀석이 뭘 가르치냐!!! "깜깜하네... 휴." "응? 지금은 다 저녁때니까. 아, 앞으론 말 놓아도 돼나? 내가 일단은 선배니까.. 뭐, 공작님이라도.. 이해해 주시겠죠?" 그야.... 나이는 물론 백살쯤 차이나지만, 그런 정도의 소소한 거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니까.. 흠. "아, 그래요. 선배님." "그래." 그는 아주 상큼하게 웃었다. 에휴휴... 내가 이 학교 설립자다. 에잉. 방은 아주 호사스럽다 못해서 무슨 왕성 복사판 같았다. 어이. 아무리 내가 공작이라지만... 너무 하는 거 아냐? "이거야 원... 너무 화려한데요?" "응? 하지만, 프라오니스는 공작이니까 더 화려한 곳에 살지 않아?" 대대로.. 우리 가문은 싸움만 했다. 칼만 있는 살벌한 그곳에 금박 은박이 왠 말이냐... 흐흐흑.. "하하하.. 아냐. 우리집. 가난하거든." 그는 더더욱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요 근래 들어 더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 있잖아? 그게 새 공작의 정책 덕이라고 하던데? 너무 겸손한 건 좋지 않아. 아, 내일 시간표 없지? 넌 늦게 와서 수업을 좀 놓쳤잖아. 그러니까, 내가 설명해 줄께." 알아서 하쇼... 아.. 율지스의 말이 떠오르는군. 녀석 왈, 스승님은 절대 본신의 능력을 드러내셔선 안됩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어린애는 완력에서 어른을 이기지 못하니까요. 라고 건방진 소리를 지껄였겠다. "일단, 내일 수업의 첫 번 째는 마법학 개론이야. 이 시간에는 그냥 책하고 노트만 있으면 돼. 그리고 다음시간이 프라운 관에서 하는 실습시간인데.. 뭐, 아마 지금은 아주 간단한 마법 이론만 하고 있을 꺼야. 그러니 특별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음. 수학. 수학의 마법의 기본이야. 알고 있지?" 그야... 나 정도 대마도사가 되면... 다 잘하지. 후훗. "음... 마법은 잘 못해서." "그래? 그럼 걱정이겠다. 음. 이 시간에는 프라운 관 옆의 라플의 관에서 해. 아, 여기 관들이 용사들의 이름을 땄다는 건 알고 있어?" 내가 지은 거라니까... "응. 우리 선조가 라플 이잖아." "아. 그랬지. 이거야... 그럼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해. 라플을 선조로 둔 거잖아. 음. 이렇게 세시간 뿐이야. 그리고 쉬는 시간은 한 시간 씩이고. 그리고... 동아리라는 게 있어. 알아?" 그런 건 내가 안 만들었는데.. 내가 고개를 젖자, 그는 아주 신나 하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 그랬구나, 우리 학교 동아리는 유명해. 그리고 역사도 오래되었고. 아무거나 적성에 맞는 걸 고르도록 해. 참고로 나는 검술 부에 들어있어."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편한 거 없나. 우이.. "응... 난 별로, 그런 건 좋아하지 않아서. 몸이 약하거든." 그는 나를 바라보고 이내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훗... 연기도 잘하는 군. 역시 난 천재 대마도사 님이시지. "그랬구나. 저런. 하긴, 넌 얼굴이 너무 하얘." 그거야... 원래 우리 가문 사람 대대로 색소가 좀 부족하거든. "아, 여기선 탑이 보이네?" 창문 밖에 펼쳐진 학원 풍경은 높은 나무들과 어울러져 아름답게 빛나게 있었다. 역시 빛나는 모래알들.. 그리고 아름다운 탑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코끝이 시려왔다. "저건... 키히의 탑이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고, 아피르는 조용히 내 곁에 다가와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랬었지. 지금은 반역자로 몰려서... 지금 당장은 이름을 안 바꾸겠지만.. 아마.. 조만간 바꿀 꺼야." 에? 그렇게되나. "아, 가봐야겠다. 그럼 잘 지내고. 내일 첫 수업엔 지각하지마." "예. 선배." 그가 방을 나가고, 나는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세이는 율지스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뭐. 응? 어디서 목소리가 들리는데? 아래인가? "엥... 너무해요. 이걸 어떻게 오늘 다 외워요!" 이거야 원... 녀석이네. 세이. "세이야~" 이내 아래 베란다에는 멍청한 녀석의 뒷통수가 나타났다. 두리번거리는 모습도 귀엽구만. "스승님?" "여기야. 위에. 바로 아래 방이네? 잘됬네. 그나저나, 그건 뭐냐?" 녀석은 손에 스펠이 잔뜩 쓰여진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게, 율지스 형이 이걸 다 외우라잖아요! 어떻게 오늘만에. 잉... 스승님. 뭐라고 말 좀 해 주세요." 하하하... 율지스 녀석도 고개를 내밀었다. "아, 스승님. 이 녀석은 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맡겨 주시죠!" 불타오르는데... 잘해보라는 손짓을 하고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리고 이불 펴고 일찍 잠에 들었다. 왠지 오늘은... 잠이 올 것 같지 않긴 했지만.. 왜냐? 세이 녀석이 밤새 스펠을 베란다에서 중얼거렸기 때문에... "웅..." 이곳의 아침은 매우 기괴하게 시작한다. 어떻게? 일일이, 하녀가 깨우러 오는 것이다. 세상에... 귀족 학교는 역시 다른 건가? 나도 원래는 귀족인데 말야. 흠.. "어서 일어나세요. 아침 식사시간입니다." 여기 아침은 정확히 7시에 시작한다. 뭐, 특실의 경우엔 갖다 준다... 크흑. 나는 사실 저혈압이 있어서... "스승님~" 밥숟가락 뜨기도 전에, 녀석이 들어 왔다... "뭐냐. 세이야." "어라라? 같이 밥 먹자고 왔는데... 여긴 갖다 주나 봐요? 우와~ 요리도 굉장한데요? 어.. 스승님.. 저도 먹고 싶어요." 글썽거리는 제자의 눈을 보라. 어느 스승이 밥 넘어가나. 단, 난 넘어 간다. "가서 율지스랑 먹고 오려므나." 세이는 울면서 뛰쳐나갔다... 뭐냐.. 뭐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냐.. "스승님 미워~~~" 잠시 율지스 혀차는 소리와 함께 그가 회색 머리를 풀풀 날리면서 나타났다. 어이, 머리 좀 묶어라. 문에 걸리겠다... "앗, 머리가 문에.. 이런. 아, 흠.. 아, 스승님. 기침하셨습니까?" 아... 세이와 이 녀석의 차이가.. 이거야. 크흑. 이제야. 제다 다운 제자를 만나는 구나. "그래. 이제 막 아침 먹는 참이다. 가서 세이랑 밥 먹고 와라." "예. 그럼. 이만." 율지스가 나가고 나는 따뜻한 이불 위에서 밥을 먹었다. 훗. 꼭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간 듯 하군. 밥 먹고 수련하고, 밥 먹고 수련하고, 자기 전에 또 수련하고 공부하고... 음.. .그리 즐거운 유년은 아니었군. "자, 이제 수업에 가야지.. 음... 책이 어딨더라." 나는 어제 오자마자 잠시 노닥거리다 바로 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내가 짐 정리도 하나도 안하고 잤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곧.... 아침에 어수선하게 책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흐... "젠장!!!" 좀 일찍 일어났다면.. 그래도 좀 나았겠지만, 나는 거의 교복도 거의 쑤셔 넣다 시피 하고 달리고 있었다. 한 손엔 아까 막 찾은 마법 기본서를 끼고 있었다. 이곳은 교복이 참도 귀여웠다. 그러나... 내가 귀여운 걸 좋아할 나이냐! 대체 왜 남자애 교복에 프릴이 달려 있는 거냐!!! "죄송합니다.. .헉... 헉." 잠시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왜 보냐! 늦는 놈 첨 보냐? 가만.. 뭔가, 옷이 다르다.. 흐헉헉!!! 왜 내가 여자애 옷을 입고 있는 거냐!!! "여자 전학생이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은 없는데.. 자넨 누구지?" 안경 낀 선생님이 아주 다정스레 물었다. 흠.. 저런 고가의 물건을 끼고 있다니. 신기타. 그보다... 왜 여자 교복을 내가 입고 있냐. 윽. 완전히.. "죄송합니다. 선생님." 나이를 먹으면 부끄러운 것이 없다... 할아버지 벗은 옷보고 흥분하는 놈 봤냐? 즉... 이런 데서 쪽팔릴 내가 아니라는 거지. "아니. 앉거라. 아, 마침 저 자리가 비었구나." 나는 조용히 자리에 가서 앉고, 책을 펼쳤다. 옆에 앉은 여학생이 소근거렸다. "잘 부탁해. 나는 릴뤼아야. 너는?" 어이. 나처럼 늙은이랑 친하게 지내서 뭐하냐? "프라오니스." "응? 특이하네. 좀 더 귀여운 이름을 가지고 있을 꺼 같았는데 말야." 귀여운!!! 여기서 불의 화살 한 방 맞고 싶은 가보지? 윽... 뛰었더니 상처가 쑤신다... "자, 그럼 오늘 새로운 학생. 자기 소개 해 보도록." 선생은 방글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젠장. 나는 앞으로 저벅거리면서 걸어갔다. 주변의 아주 듣기 싫은 어떤 속삭임들이 들려 왔다. "정말 이쁘다. 선배들이 환장하겠네?" 늙은이한테 왜 환장 하냐? "여자친구 하고 싶다. 그치?" 여자친구? 누구랑? 나는 당당히 단상에 섰다. 그리고 조용히 내 인생 역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 원래 입학하기로 했으나, 불행히도 좀비를 만나서 크게 다쳤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아이들은 정말이지 가련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 이렇게 까지 남자애들의 동정을 받다니. 흠.. 그리고 오늘 아침 옷을 잘 못 입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자, 아이들은 서서히 침묵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뭐랄까? 폭풍전의 고요? 옆에서 안경 교사가 한마디했다. "남자애니?" "예. 프라오니스 피스트레이카입니다. 직분은 공작. 하지만, 여기서는 모두와 공부하러 왔으니 그냥 친구로 생각해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그 날, 나는 이곳에 여자 옷이 더 잘 어울리는 남학생으로 찍혔고, 동시에 여자 애들에게는 친근함을, 남자애들에게는 조금 색다른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럼 프라오니스군. 아직 아무 것도 모를테니, 오늘은 수업을 열심히 들어주세요." 그러지. 훗. 내 지식을 따라오려면 넌 아직 멀고멀었다. 후후훗. "그래서, 마법의 기본 원리를 발견해 낸 사람은 바로 올테이가 마법사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융합하고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정리한 사람은 마왕을 없앤 용사이자, 대 마도사이신 라플님 이시다. 그의 제 일 원칙은 마법 공중의 원칙이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는 그야말로 내가 예전에 책으로 넘겼던 그런 이야기를 듣는 따분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모든 학생이 그렇듯이, 학기초엔 조용한 법이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졸립겠는가.. 흐.. "...물론 이런 진리는... 다음의 이론들은... " 졸고 있었다. "거기, 프라오니스군!" 벌떡 일어난 나에게 옆의 여학생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예." "자, 그럼 다음 제 3기현상이란 뭔가?" 잠시 여기서 고민했다. 뭐, 그게 뭔지 모를 내가 아니다. 그러나.. 너무 아는척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율지스가 그랬지 않은가?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야... "예. 그건... 아.. 맞다. 마법이 이윽고 에너지에서 실물의 단계로 연소...? 되는 현상이던가.. 뭐더라.. 음.." 선생은 손짓해서 나를 앉혔다. "그래도 대충 듣기는 했구나. 앞으로 졸지 말아라." "예." 이렇게 그럭저럭 수업은 끝났다. 때론,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더럽게 힘든 일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내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여자 옷 빨리 갈아입고 싶은데... "우와, 너무 어울린다. 그치? 엘류드라고 해. 내 이름은. 앞으로 잘 지내자." "내 이름은 피렐리야. 훗... 너처럼 예쁜 남자애는 처음이야." 어련 하셔... "고마워. 근데 나 지금 가서 옷 갈아입고 싶거든." "계속 입고 있어도 어울릴 거 같은데." 모두의 아쉬운 얼굴들을 뿌리치고 나는 재빨리 달렸다. 그리고.. 제일 만나기 싫은 인간이랑 만났다. "음? 스승님?" 율지스와 나 사이에는 한동안 격동의 바다가 몰아쳤다. 나는 즉시 순간이동 마법을 써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도망갔다... 율지스의 웃음이 복도를 울렸지만.. .젠장. "휴.. 이번엔 프라운 관이로군.. 저것이... 키히의 탑." 한 구석에 아름답게 서 있는 키히의 탑은 호수에 그 모습을 정확히 반사시키고 있었다. 저 탑에는 사실 마법이 걸려 있다. 내가 건 마법의 이름은 가장 아름다운 그 모습 그대로, 항상 변함없기를 기원이 든 보존 마법이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저렇게 아무 변함이 없는 것이다. "보고 싶다.. 키히." 호수의 물결이 잔잔히 퍼지면서 나는 그 가장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어차피 쉬는 시간은 좀 남았고 여기서 추억에 잠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색 칼라가 달려 있고, 금색 배지가 있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에 푸른 눈이라.. 음. "그냥... 잠시 있던 건데요?" 왜 다짜고짜 반말이냐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걸 참았다. "그래? 볼 것도 없는 데 말야. 여긴." 아니, 이런 무감한 놈! 이 반짝이는 호수와, 아름다운 탑, 호수 중앙에 있는 오두막!!!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냔 말이냐! "전 계속 볼 테니까, 가보세요." 소년은 잠시 그의 푸른 눈을 흘렸다. "너가 피스트레이카 공작이지?" 내 정체를 알고 있다니. 자객은 아닐텐데... "놀랄 것 없어. 저번 대한민국 침공 사건 때 너가 있는 걸 봤으니까.. 그 거대한 베리어도. 기억하고 있거든." 에엑? 괜히 약한 척 할 필요 없잖아? 아는 놈은 다 안다는 거잖아. 젠장. "그래요? 근데 왜 다짜고짜 반말이시죠?" 초면에 실례야 라는 눈빛 광선을 강하게 표출하자 그는 잠시 비웃음 같은 걸 흘리더니 자신의 신분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야, 이 학원에선 어쨋든 넌 내 후배니까. 안 그래? 후배? 난 라플의 학기에 다니고 있거든. 후후후... 그럼." 그는 조용히 사라져 갔다... 가 아니라. 그냥 걸어서 갔다. 뭐? 라플의 학기? 젠장. 내가 여기 학원 설립자다 임마! 아무리 너가 나이가 많아도 30 이상까지도 안 갈텐데. 으... "군자의 복수는 백년도 이르다.. 참자. .참자.." 한가로운 점심... 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린 모두 프라운 학기에 다니고 있는 거야. 우리 바로 위의 선배들이 베젤 학기에 다니는 거고... 그 다음이 키히의 학기. 그 다음이 위제스 학기. 그 다음이 최 상급생이 라플의 학기지. 몰랐지?" 두 번째 시간은 프라운 관에서 시작되었다. 소위 마법 이론을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 되기 때문에 이런 걸 하나 보다. 마법 실무 응용이라는 이상한 책을 펼치자, 첫 장엔 주변에 불 밝히기라는 내용이 있었다. "에휴휴.." 친구임을 자처하는 우리 반 어떤 사내녀석이 중얼댔는데... 내가 이 학교 설립자고, 마왕을 격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내가.. 왜, 불 밝히기 따위를 해야 하냐고! "왜 한숨을 쉬고 그래? 참, 너 아직 동아리 정하지 않았지? 여기 동아리는 장차 너의 정치 생활에도 영향을 끼칠 대단한 곳들 뿐이야." 난, 그런 거 다 필요 없다고. "야. 트릴. 설마 프라오니스 피스트레이카 공작 전하가 우리랑 같냐? 오히려 다른 동아리에서 끌어들이려고 환장할 껄?" 동아리라.. 유동식 만들기 동아리.. 이런 건 없나? "야, 오나봐!" 한 학생의 말에 따라 나는 조용히 석판으로 된 책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누가 오던지 적당히 졸다 가면 되겠지. "오늘부터, 여러분에게 쉬운 마법을 설명해 줄... 어라라? 스승님?" 잠시 학생은 침묵과 함께 한 곳을 응시했다. 나도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한 듯 했고, 더군다나 말한 놈이 내 제자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아.. 아니. 잘 못 봤네. 너무 닮아서.. 하하하... 자, 책을 펴세요." 세이와 학생의 나이차이는 대략 다섯 살... 즉, 무척이나 만만하게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자, 그럼 빛의 구슬을..." "화염 구~" "꺄 하하하~" "야, 저기서 바로 던져!" "너무 한다. 아주 선생을 개 무시하잖아?" "에... 저렇게 어린데 무슨 선생이야?" 세이의 눈에는 눈물이 방울 거리기 시작했다. 뭐야...세이 녀석. 설마 여기서 울건 아니지??? "조용히 해..." 교실은 무척이나 벅적대고, 세이의 목소리는 모기가 윙윙거리듯 조용히 여운만 남겼다. 나 열 받았다. "조용히 못 해! 너희들!" 시선 집중!!! 젠장, 왜 내가 왜 이렇게 화내고 있냐... 세이야. 뭘 보냐! "뭐냐..." 어떤 애 하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으휴. 이걸로 밝고 명랑한 청춘물은 물 건너갔구나. "수업시간에 떠들다니, 이러고도 너희들이 명문가의 자제야? 모두 적당히 해두라고!" 거기까지 말하고 내가 자리에 앉자, 세이가 나에게 두두두 달려 왔다. 그리고 갑자기 나를 꼭 껴않았다. "엥... 엥... 엥... 스승님... 무서워요... 이런 데 너무 싫어요. 저 안 하면 안 되요? 싫단 말이에요... 영지로 돌아 갈래요. 잉..." 우는 제자를 띠어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아이들의 모호한 시선과 함께, 나는 녀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갈 수밖엔 없었다. "세이야. 고만 울어. 뚝." 너 열 여덟 살 맞냐고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손자 같은 녀석을 차마 그리 팰 수는 없었다. 역시 난 제자에겐 너무 약해. "흑.. .흑.. .스승님. 너무 슬퍼요. 사형은 너무 무섭고... 엥..." 할 수 없군. 에휴휴.. 역시 얘에게는 선생은 무리야. 아직 어리기도 하고. "그래. 하지 마라. 내가 얘기해 두마. 그래. 그래. 우리 세이 착하지~" 녀석이 울면서 안기는 걸 보니.. .쪼금은 기분이 좋았다. 이 녀석 사실 이렇게 나에게 어리광 부리는 게 거의 5년도 넘었으니까... "거기 누구?" 잠시 미인의 기준을 알아보면, 빛나는 긴 머릿결을 가졌던 말았던, 미인이란 보통 당대의 가장 평균적인 미모인 것이다. 개성이라곤 없는... 그런데 난 이렇게 무 개성한 인간을 본 적 없었다. "딸꼭?" 세이의 반응... "사람인데요?" 나의 반응. "응?" 그녀의 반응... 잠시 썰렁한 반응들이 오가고, 그녀는 서서히 그 아름다운 긴 금발을 풀풀 날리면서 나타났다. 그녀가 보기엔 아마도 이상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15살 정도의 아이에게 안겨서 울고 있다니.. 대체. "볼 일 없으면 가보세요. 바쁘거든요." 그녀의 표정은 잠시 상쾌하게 나빠졌다. "난 키히의 학기에 다니는 엘메라인이야. 너흰 뭐지? 만약 후배라면 용서하지 않겠어." 어이, 뭘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야! "훌쩍... 난 일단은 교사인데?" 잠시 정적... 그녀는 잠시 침묵을 일관했다. "정말이야. 믿지 못해도 상관없지. 뭐."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뛰어 갔다. 자, 여기서 퀴즈. 벌써 난 학원에 몇 명의 적을 만들었을 까요? 젠장. 적 만드는 재주는 뛰어나구만. "그래서, 3교시는 아예 듣지도 않으시고, 세이 녀석만 달래고 있었다... 이 소리 신가요?" 율지스는 뭔가 잔뜩 열 받은 듯... 했지만, 감히 스승에게 큰소리도 못하고 불쌍한 놈. 역시 만제자의 본보기야. "음. 그렇게 된 거지. 아... 동아리 결정했어." 잠시 불타는 듯한 착각이 스쳤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 녀석 하는 일에 일일이 신경 쓰면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말씀하시죠." "꽃꽂이 동호회. 어때? 아까 보니까 그런 이름의 동아리도 있더라고. 꽤 맘에 들지 않아?" 율지스의 발광이 잠시 이어지고, 잔 소리성 항의와 함께 그는 몇 마디 했다. "스승님... 그 동아리는 귀족계급이 아닌 평민용 동아리입니다. 가서 뭐하시게요! 그리고 꽃꽂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걸 하실 생각하신 겁니까!" 이봐, 넌 그런 걸 계획 짜서 하냐? "뭘? 원래는 조리 부에 들려고 했는데... 유동식은 별로 안 할 꺼 같더라고. 뭐. 상관 없지. 아, 세이는 오늘부터 우리 방에 재울께." 녀석은 손에 있던 뭔가의 공지사항인 듯한 종이를 북 찢었다. "왜요?" "아, 녀석이 많이 상심했잖아. 너랑 있으면 밤새 피곤해 하는 거 같아서." "사자는 절벽에서 떨어진 놈만 키웁니다!" 율지스, 오늘 너의 광기 타임이냐? "그래?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어. 보통은. 그리고 세이는 그렇게 강하게 키워야 할 필요가 없잖아? 너 때하고 상황이 다르다고. 평화롭고.. 뭐, 뭣하면 내가 해결하면 되잖아?" 율지스... 잠시 주변의 물건에 분노를 표출하고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하고선 나가버렸다. 음... 그럼 나는 남는 오후 시간을 자유롭게 꽃꽂이 동호회에 가야겠군. 이 학원은 평민과 귀족으로 나뉘어져 있다. 원래는 귀족만 있었지만... 내 취지는 그런 게 아니었다. 능력 있는 사람을 키워 보자는 거였지. 뭐. 어쨌든, 동아리 실은 놀랍게도 키히의 탑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키히의 탑이 한때는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들이 차지하고 했었지만... 지금은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라서 가장 천대 받는 동아리 차지가 되어 버렸다. 나야 뭐... 상관없지만. "안녕하세요? 여기 동아리에 가입하고 싶어서 왔는데요?" 수업도 빠지고, 율지스와 밥 실컷 퍼먹고 기껏 한다는 짓이 동아리 탐색. 음. 조금 한심하긴 하네. "어, 정말?"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소녀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대략 다섯 명 정도가 있었고, 그들은 남자 둘에 여자 셋이었다. "우와! 드디어 귀여운 남학생이 들어오는 일이 있구나! 야, 너 친구도 데려와라." 상아빛 머리를 가진 남학생이 엄청 친근한 척 하면서 말을 걸었다. 뭐, 좋은 사람 같네. "친구 없어요. 온지 얼마 안 되어서...우와!~ 이거 데렐레 몰키즈란 꽃이잖아요!" 석 장의 잎과, 석 장의 꽃잎, 한 개의 꿀 집을 가지고 있는 그 꽃은 아주 희귀한데다가 마법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고작 이런 곳에 있다니. "너 대단하다. 이런 것도 알고. 훌륭한 후배가 들어 온 거 같은데? 실리아. 참, 넌 그럼 프라운 학기구나?" 나는 꽃들을 살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는 별로 대단한 꽃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실력이었다. "좋아. 이름은 뭐지?" "예. 프라오니스 피스트레이카에요." 그래? 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실리아라는 소녀가 내 이름을 장부에 적었다. 그리고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 이름은 실리아야. 너보다 두 학기 선배야. 키히의 학기에 다니고 있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하면 도와 줄께." 옆에 어두운 금발머리를 가진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실리아와 같은 학기야. 내 이름은 리무르야. 앞으로 잘 부탁해." 리무르라.. 인상이 굉장히 조용해 보이는 군. "난 알트야. 이녀석은 쿠릴츠. 앞으로 잘 부탁해. 이 녀석은 낯을 많이 가려서. 앞으로 얼마 지나야 너랑 이야기 할 꺼야." 상아빛 머리가 굉장히 인상적인데? 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 쿠릴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긋 웃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응. 라플." 단아한 호수 같은 푸른 눈을 가진 그 소년의 입에서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었다. 옆의 알트가 질책했다. "바보, 쿠릴츠. 이 녀석은 우리보다 한참 아래라고. 후배란 말야. 라플의 학기가 아니라, 프라운 학기란 말야." 뭐냐...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이 녀석 왠지 낯도 익고... "예. 하하.. 선배가 착각하셨나봐요." 쿠릴츠는 잠시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이내 눈을 감고 침묵에 빠져들었다. 괴상한 놈... 이게 그를 본 첫 인상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 외에도 회원이 한 명 더 있어. 선배인데... 오른이라는 선배인데...뭐, 가끔 나오긴 해. 자, 그럼 오늘 환영식을 해주자!"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여기 신입생이 온건 이년 만이란다. 왜 이런 좋은 동아리를 싫어하나. 흠... "앞으로 그냥 일주일에 한 번 나와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음... 아, 가끔 들러서 꽃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꺼야. 특이하고 희귀한 꽃이 있으면 꼭 이야기하고. 알았지?" 회장인 실리아 누나는 무척이나 활달한 사람이었다. 공부도 꽤 하는 거 같고. 뭐. "네. 앞으로 열심히 할께요." "크흑. 나도 드디어 선배 소리를 듣는 날이 왔구나!" 알트는 감격에 떨었다. "네. 선배.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알트는 아주 좋아하는 듯 했다... 같이 떠들석하게 과자랑 음료수를 마시고 정신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먼저 실리아가 일어났다. "자, 이제 밤이 다 되 거 같은데? 통금 시간에 늦을 수도 있으니까, 이만 일어나자. 아무르는 나랑 같이 가야... 어라, 그래. 너 혼자 프라운관 기숙사네?" 알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면서 생긋 웃었다. "내가 바래다주지. 후후후. 사랑하는 후! 배! 를 위해서 이 정도도 못해? 음." 하하하... 왠지 땀나는 성격이군. "싫어. 알트. 내가 바래다 줄 꺼야." 동아리 방이 침묵에 휩싸였다. 아까 웃고 떠들 땐 아무 소리도 하지 않던 쿠릴츠가 갑자기 말을 꺼낸 것이었다. 알트는 쿠릴츠를 바라보았다. "꽤나... 맘에 들었나 보네?" "당연하잖아." 그리곤 내 손을 잡더니 벌떡 일으켜 세우곤 질질 끌었다. 이봐! "라플인데 말야." 녀석의 목소리가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다. 키히의 관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린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왠지 나도 무서워졌고.... 음... 귀신이랄까, 그런 것 때문은 아니다. 나를 아는데,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뿐이니까. "음... 선배. 왜 절 라플이라고 생각해요?" 잠시 풀숲을 걷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라플이니까. 아냐?" 그야...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지만... 너 정체가 뭐냐.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당연해. 프라운이니까." 그리고 그는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가만, 가만, 말도 안 된다고! 너가 어떻게 프라운이냐! 그는 날 배반한 데다가..! "가만! 너가 프라운 일리가 없잖아!"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투명한 푸른 눈... 그를 확실히 닮아 있었다. "라플. 왜 믿지 않는 거지? 너 설마 내가 정말 평민이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시 마왕을 해치우러 갈 때... 베젤은 귀족이었고, 위제스는 왕자였어. 그리고... 오직 나만 평민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이 학교의 가장 낮은 학년은 바로 내 이름을 땄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프라운은..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한 동료였다. 항상 묵묵히 남들을 위해서 일해주고, 싫은 내색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베젤과 위제스와 결탁해서 셋만 도망을 가버렸다. 나 혼자 마왕과 대적했지. 키히는 내가 보내 버렸고... 뭐, 그들을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키히는 그들을 저주해서 그 자손을 없애는 계획을 세운 거 같던데... 아닌가? 물론, 키히도 진실의 일부분 밖에는 모르지만... "그래서. 프라운이라는 증거가 뭐지?" "그런 게 아냐. 라플. 너가 이렇듯 젊어졌지만, 역시 넌 인간이었지." 과거형인 게 맘에 걸리는 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난, 원래 스파이었어. 베젤을 부추겨서 도망가도록 한 것도 나였지. 그러나... 너가 그토록 강해서 정말 마왕을 봉인할 줄을 몰랐지만." 잠시 내 머리는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저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스파이? 하지만 누구의? 왜? "무슨... 소리야. 마왕을 봉인한 건 내가 강해서는 아니었어." "그래? 상관없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너가 마왕이니까. 그리고 나도 마족인 이상... 너를 따라야 하니까. 너의 존재가 나의 생명과 존재의 의무가 아닌가? 모든 마족이 그러하듯이." 내 발 밑의 모든 모래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 날, 우린 마왕과의 마지막 일전을 치르러 가는 중이었었다. 베젤은 여전히 검을 손질하고 있었고, 위제스는 마을에 음식을 가지러 갔다. 프라운은 척후 활동을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었다. 그러다가 베젤이 땔감을 가지러 마침 자리를 비웠다. 키히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난 걱정입니다. 라플. 저들이...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것보다.. 아주 불길해요." 나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면서 스펠 북을 외우기 시작했다. "걱정마요. 키히. 우리에겐 동료가 있기에 강한 겁니다." 그녀는 무척이나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우리 일행 중에서 프라운이 돌아왔다. "아무도 안 왔다고? 설마.. 녀석들 도망간 거 아냐?"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프라운. 그럴 리가 없지. 아마...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이러면 원래 계획대로 마왕 성으로 가자. 프라운은 뒤에 우리를 쫓아 올 수 있도록 표식을 남겨 줘. 나와 키히는 먼저 가고 있을 테니까." 프라운은 잠시 항의했지만, 나와 키히는 예정대로의 마왕성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왕성에 무수히 많은 괴물들을 뚫고 성이 무너져 내리자, 나는 키히를 공간 전이 마법으로 성에서 멀리 날려 버렸다. 그리고 성의 중앙의 지하로 가자, 마왕을 만나게 되었다. 나와 똑같은 허무를 안고, 묵묵히 살아가는 그를... 그래서 나는 그를 소원대로 봉인해 주었다.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 없이. 그리고 그곳에 사원을 마법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너무나 좌절했기에 그 곳에서 나와 은거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마왕의 영향이 컸지. 그리고 그가 죽여 달라고 했었을 때, 난 마왕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그를 봉인만 했던 것이었다... 그런 그를 내가 얼마 전에 죽였지. "이제 생각났나? 라플." 그래. 그런데, 친구들은 배신 때리고, 키히는 마녀가 되었고, 그나마 하나 믿었던 놈은 마족이었다... 이건가? 그것도 고위 마족이군. "그래. 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잖아."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마족은 물론 마왕이 소멸하면 같이 소멸한다. 힘이 넘어 갔을 때에는, 우린 엄청난 고통을 느껴야 하지. 그러니까... 죽지 마라." 그를 비웃으면서 나는 묵묵히 걸어갔다. 그는 머뭇거리면서 다시 말했다. "그리고... 네 제자.. 세이. 녀석은 너에게 위험해. 없애는 게 좋겠지만.. 넌 그렇게 하지 않겠지?" 나는 그저, 묵묵히 걸었고, 더 이상 프라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내 침대에선 세이 녀석이 뒹글 거리면서 잠들어 있었다. "잘 자라. 내 제자." 모든 슬픔 따윈... 없게 하겠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와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있다면 어제 내리 두 시간 제낀 거 정도랄까? 그리고 세이는 교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결국, 다른 사람이 하게 된 것이다. 역시나, 내 제자의 신분이었다. 율지스... "잘 부탁합니다. 전 율지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성 같은 건 없으니 묻지 말도록. 그리고 다른 질문 있나?" 반 아이들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쳐가고 있었다. 뭐, 인간이 아니라는 건 척 보면 알 수 ... 없군. 겉보기엔 다른 게 없잖아? 녀석은 더군다나 마법으로 귀를 가리고 있으니까.. 뭐. "선생님은 그럼, 엘프인가요?" 율지스가 그렇다고 말하자, 더더욱 큰 충격이 지나쳐 갔다. 마왕의 재림으로 인해 많은 엘프 종족들은 힘없이 죽었기에, 거의 적은 수의 엘프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마법사 엘프라는 존재는 상당히 희귀할 수밖엔 없었을 것이다. 뭐, 나야 하도 많이 봐서 뭐가 신기하냐? "들었니? 정말 엘프라니! 그럼 몇 살일 까나?" "우와, 어쩐지 미남 이라더라니." "대단해. 그럼 마왕을 만났을 수도 있잖아?" 이봐... 율지스를 쳐다보자 그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내가 한가지 잊은 게 있었다. 녀석은 성격이 무지 더럽다. "조용히! 난 현재 나이 93세이다. 그리고 마왕은 당연히 본적이 없다. 내 스승은 대 마도사이신 라플이시다. 다른 질문 없을 거 같으니 마법 실습에 들어가겠다. 먼저 앞의 너! 너! 는 앞으로 나와서 라이트닝 시범을 보이도록! 자신 있으니까 떠든 거겠지!" 두 명이 나와서 율지스에게 쪼이고 있을 때, 나는 세이 생각이 났다. 저 녀석의 반 만 되도, 별 문제 없을 텐데 말야. "참, 프라오니스는 어느 동아리에 들었어?" 옆의 여학생이 쉬는 시간 지체 없이 일어서려는 나에게 물었다. 이름? 모르지. "아, 꽃꽂이 동호회. 선배들도 좋은 분들뿐이라고. 뭐..." 잠시 소녀는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키히의 탑에 있는 사람들 말야? 거기에 들은 거야? 거기는 아주 수상한 동아리라고! 선배들 말을 들어보니까, 작년만 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꽃이나, 식충 식물을 들여왔다고 하더라고!" 별로, 식충 식물은 보이지 않던데...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틀림없이 거긴 마족이 섞여 있는 게 틀림없데. 뭐, 아무리 마족도 요즘은 나바스의 영향으로 다들 살기 좋아졌지만... 그래도, 마족은 마족이잖아? 언제 사람을 뜯어먹을 지 모른다고." 뭔가... 그건 마물이고, 보통 마족은 사람을 잡아먹거나 하진 않는다고. 에너지를 흡입 한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나야 뭐.. 젠장. 이젠 인정 할 수밖에 없군. 그래. 이젠 대마도사도 모자라서 마왕 한다. "응. 난 마왕이거든. 그럼 잘 있어." 잠시 뜨악한 표정의 소녀를 내버려두고 나는 짐을 챙겨 다음 수업이 있는 곳을 향했다. 대체, 왜 마법을 배우는 이곳에서 왜 수학을 해야 하는 거냐.. 아, 어제 빠졌던 수업이지. 윽.. "자네군. 이 학교 창립자의 후손이자, 역사상 내 수업에 불참한 간뎅이 부은 학생이. 그래, 뭔가 할 말 있나?" 눈앞에는 낡은 옷을 입고, 배가 좀 나온 데다가 안경을 착용한 약간 마른 형상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꽤 능력 있나 보다. "..." "선생이 말하는 데 아무 대답도 없나?" "저... 할 말이 없는데요?" 잠시 격동의 10초가 흐르고 그는 거품을 물었다. 젠장, 내가 이제 이런 어린것들에게도 멸시받는 구나.. "자넨 자네 가문의 의미를 아나? 세상을 구한 마도사께서 보면 개탄할 노릇이구나!" 그게 나야... "본다고 해도 개탄까지는 안 하실 꺼에요. 그분은 적어도 어쩌다 빠진 거 가지고 뭐라 하실 만큼 속 좁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내가 날 보는 건 사실 불가능 한 일이고.. 뭐, 지금은 인생을 낙천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리라 결심했으니까. 훗. "자네.. 자네... 다음부터 내 수업을 들을 필요 없네! 나가!" 음... 돌려 말할 건데 꽤 빨리 눈치 챘군. "예. 안녕히 계시구요. 건강하세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러면 확실히 능력을 들어낼 필요는 없지. 수학을 모른다고 어떻게 모르게 풀란 말이냐? 그게 무슨 사회도 아니고, 애초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이나 주러 갈까나? 음...? 누가 있잖아?" 프라운 관의 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선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뭔가 의식을 행하려는 듯 했다. 헤... 저건, 그거 아냐? "저.. 마왕을 깨우는 의식을 뭐 하러 하는 거야?" 그 사람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것도 프라운 관 앞에서... 아, 그러고 보니 꽤 낯이 익었다. 생각이 났다. 라플의 학기에 다닌다는 그 재수 없는 놈. "음...? 너는...? 상관하지마. 난 저 빌어먹을 평민 관을 없앨 테니까." 글쎄... 정말 프라운의 정체는 마족이니.. 사실 없는 게 날지도 모르겠군. 저 관 자체가 프라운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프라운이 하나 하나 지은 건 아니지만, 마왕 토벌 전에 분명히 그가 마법을 이곳에 부여하긴 했지. "아, 그래? 그럼 상관 안 할께. 잘 해보라고." 나는 그리고 좋은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즉시 옆자리에 책을 바닥에 펼쳐서 눕히고 그 위에 앉았다. "너... 뭐하는 거야?" "아, 엉덩이 안 아프게 책을 돗자리로 쓰려고. 기발하지?" "기발하고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너, 하급생 주제에 수업시간에 뭐 하는 거야! 공부 안 해?" 응? 공부? 훗... 내게 더 이상의 공부는 머리를 더 아프게 할 뿐이야.. 천지 창조 마법이라도 연구하리? "공부? 구경이 더 재미있어. 어서 해봐. 또 누가 알아? 죽은 마왕이라도 잠시 볼 수 있을지." 내가 그리고 유유히 준비해 두었던 간식을 오물거리면서 씹기 시작하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법을 가동시켰다. 음... 꽤 잘 만든 마법진이다. 상당한 마력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물론 율지스보단 약하지만... "자, 심연에 잠든 마왕이여, 피와 붉은 화염의 지배자여, 너의 그 위대한 존재를 현신 하라!" 마법진에는 따스한 푸른빛이 퍼져 나갔다. 뭐랄까, 마왕의 재래 치곤 엄청 안 어울리는 색이었다. 뭐, 회색이나 검은 색, 붉은 색 정도는 되야겠지만... 음? 푸른색? "어서 너의 그 모습을 보여라 마왕!!!" 황급히 나는 반 마법 주문을 몰래 외어서 내 몸에 걸어야 하는 불운한 사태가 있었다. 마왕이 말하길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부문의 마법이 파괴와 반 마법이라고 한 이유를 알듯하네.. "젠장.. 실패인가." 푸른빛은 급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마법진은 소멸되기 시작했다. 아, 마왕을 효과적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절대 절명의 마법이 생각났다. 그건 바로, 마왕을 소환하면 마왕은 소환에 불응하기 위해 반 마법을 펼치지 않겠는가? 그러면 바로 용사가 개 패 듯이 패면... 되지만,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하며, 그 시간을 어떻게 맞춘단 말인가... "좌절하지마. 뭐, 마왕이 봉인되었다는 게 진실이잖아?" 라플의 학기에 다니는 선배-이름도 모른다, 성도 모른다-는 정확히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요즘 것들은... 허허허.. "위로할 필요 없어. 그리고, 너. 꽃꽂이 동호회에 들었다며?" 너 스토커냐? "그런데... 왜?" "반말하지마. 난 네 선배야. 그리고 동호회 선배기도 하다고. 젠장, 프라운 녀석이 말했다 길래 어떤 자식인가 했더니.. 쳇." 그 다음 말이 궁금하다... 난 궁금한 건 못 참는다. 고로, 물어본다. "어떤데요? 선배님?" 생글생글. 참고로, 난 아주 귀염성 얼굴을 한 15세다. 일단은 겉모습만... 그러나 사람들은, 겉모습에 현혹되어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종종 잊곤 하는 것이다. 방금 까지 싸가지 없고, 반말을 해대던 녀석이라는 것을.. .훗. "음... 귀엽다고. 뭐. 야, 너 수업은 안가냐?" "저야 뭐... 나가라고 하시던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역시 천재는.. 이라고 했다. 뭐, 상당히 오해하고 있는 듯 한데 말야. 내 진면목을 아는... 아주 부분 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나를 좋은 후배로 생각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생글거리면서 그를 졸졸 따라갔다. 14. 키히의 탑 ...그리하여 내가 그 탑을 진다는 왕의 말을 들었을 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비록 키히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했으나, 대 마도사로 칭송되고 있는 내가 짓는 학원이라는 것 때문에 그 것을 허락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한가지의 조건을 걸었다. 그건, 내가 살게 될... 만약 마왕을 없애고 살아남으면 살게될 학원 한 가운데 있는 오두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곳에서 키히의 탑을 항상 바라보고 잠이 들고 싶다... -오두막의 종이조각에 적힌 내용- "근데 왜 마왕을 불러내려고 한 거에요? 불러내면 프라운 관이 날아가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잠시 엄청 고민한 듯한 고뇌의 흔적을 보였다... 손으로 땀을 훔치는 흉내를 냈다. "그건 말이지. 후배야. 그런 사소한 일들은 그 때가서 생각하는 거야. 후후훗. 가능성도 없잖아. 안 그래?" 뭐야... "음.. 선배. 마왕은 제물이 없으면 분노해서 선배부터 먼저 죽이고 세계를 파멸 비슷하게 갈 때까지 놀다 갈지도 모르는데요?" 그런 걸 폭주라고 하지. 뭐, 내가 그럴 필요는 없지만. "뭐야! 그럼 왜 안 말린 거야?" 그야... 내가 마왕인데다가..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잖아? 내가 세계 멸망시킬 뚜렷한 이유도 없고.. 한이 깊어서 누굴 절실히 죽이고 싶으면 가서 죽이지. 당장 이 재미있는 세계를 부술 만큼 무슨 이상 신념에 불타는 것도 아니잖아? "그야, 선배 왠지 마왕을 통제할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제 눈엔 아주 대단해 보였어요!"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거지. 아... 나이가 많은 내가 어린것들의 마음도 보살펴야 한다니... 후후훗. "아, 그래? 흠... 아, 다 왔구나. 귀여운 후배야. 내가 예쁜 우리 꽃들 가꾸는 법과 꽃꽂이 필살기를 전수하마." 꽃꽂이가 무슨 칼싸움이냐...? 필살기가 난무하게... "필살기 맞군.." 사실 프라운 녀석이 있다는 거 자체가 정상은 아니었다. 음.. 여기 마왕을 쓰러트렸던 용사 둘이 있군... 하나는 마왕이 되었고, 한 놈은 마족이지만... "어때? 후후후! 알츠, 이번엔 너도 승복해야 할 것이여!" 뭐냐... "아직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선배!~ 간다, 식충 식물 그라마!" 그라마는 뿌리를 이용하여 동식물을 잡아먹는다.. 정말 식충 식물이 있기는 하구나. 세상에. 무서운 일이다. 이들이 하고 있는 꽃꽂이는 식물을 이용하여 얼마나 누가 더 상대방을 공격 하느냐다.. 이게 무슨 꽃꽂이냐! 이건 부 이름을 바꿔야된다. 식물을 이용한 공격법 연구부가 알맞군. "내 낭만.. 내 청춘..꽃꽂이를 하면서 더 우아한 삶을 영위하고자 했건만... 노인네의 기쁨을 빼앗다니.. 흑..." 벽에 기대서 읖조리는 내게 프라운 녀석, 여기서는 쿠릴츠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녀석이 다가왔다. "괜찮아?" 그야... 이 좌절한 노인네의 모습이 안보이냐? 그리고, 이 나이 대에는 정신적인 충격이 감당하기 힘든 법이다.. 몰랐지? "안 괜찮아. 대체 뭣 하는 짓이야. 다 수업은 어쩌고?" "응. 원래 라플의 학기는 자유 수업이야. 몰랐지? 그냥 과제만 하면 된다고. 저렇게 보여도 오른은 장학생이야. 그리고, 평민반 수업은 저녁에 몰려 있어. 선생수가 많지 않으니까, 이부제를 하는 거야." 뭐야, 애들도 갈라져서 한다는 게 맞긴 맞구나. 흠.. 이래서야 만나기도 힘들고 그렇겠군. "아, 이 녀석.. 너 수업은 어쨌냐? 지금은 귀족 반 수업하고 있을 텐데?" 알트여.. 사소한 건 묻지마.. 음. 또 수업하나 더 제낀 듯한 시간이 되었군. "저 녀석... 아무리 설립자가 자기 선조라고 해도, 너무 하는 구나." 뭐냐... 그럼 너도 이 나이 되어서 자기가 쓴 책을 듣는 입장이 되어 봐라!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 알트, 멋대로 머리 쓰다듬지 마! "에이. 괜찮아. 저 녀석은 아주 강하다고. 그치? 쿠릴츠. 너도 그렇다고 했잖아?" 오른이 알트를 제지했다. 쿠릴츠 녀석은 간만에 아주 살짝 미소지었다. "역사상, 어느 윗대보다 강력하지." 좋아해야 하나... 왠지 우리 집안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아, 이번에 우리 동아리에서 할 세미나 주제가 정해졌어." 느닷없이.. 그런 걸 발표 하냐 보통은... 회의로 결정하는 거 아냐? "응? 오른 선배의 생각이라면 난 찬성이야. 여자부원들이 좀 싫어하는 일들이긴 해도.. 뭐, 재미는 있잖아? 이번엔 뭐야?" 왠지.. .듣기 싫어진다. "아, 별거 아냐. 이번엔 바로... 호수 중앙에 있는 오두막에 가는 거야!" 정말 별 거 아니긴 하군. 그런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하는 거야? 그리고 그게 꽃꽂이 부에서 할 일이냐... "무리야. 오른 선배. 거긴 결계가 쳐져 있고, 함부로 갔다가 들키면 정말 이번에야말로 퇴학일지도.." 알트가 걱정스런 어조로 말하자 오른은 갑자기 나를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어이, 이봐.. "괜찮아. 여긴, 바로 설립자의 후손이시자, 피스트레이카 공작이 있잖아! 기껏해야 정학이라고! 음 하하하!" 뭐냐.. 결국 나를 제물 삼아서 지들은 재미를 보겄다, 이건 것인가? 쿠릴츠가 나섰다. "정학도 안 당할지도..." 이봐... 너, 엄밀히 따지면 내 부하잖아! 하기사, 이 동아리에 왠지 내 의견 따위는 가벼히 무시되고 있었다... 역시 늙으니 설움을 톡톡히 당하는 구나. 오늘은 간만에 세이랑 놀려고 했건만. "음... 재미있겠네? 이번엔 귀신이랑 상대할 일도 없고. 좋다. 하자." 좀 더 뒤에 온 실리아의 말이었다. 리무르는 그저... 조용히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 절대 다수라, 이건가.. "거사일은 언제가 좋을까?" 알트는 뭔가 지가 레지스탕스나, 테러단쯤 되는 분위기로 조명도 어둡게 하고 말했다. "글쎄, 준비할 것도 있지. 좋아. 회장. 역할은 어떻게 나눌까?" 이내 이무르가 일어서서 불 켰다. "음... 먼저 언제나처럼 결계 해제는 선배가 맡아 줘. 그리고, 주변의 경계는 쿠릴츠가하고, 알트는 그 곳에 대한 역사를 조사해 줘. 나와 리무르는 장비를 구해보지." 회장이자 실리아는 이것저것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뭔가, 나름대로 조직의 냄새가 물씬 물씬 풍겨졌다. 장비씩이나. .가만, 난 뭐하지? "저, 선배. 전 뭐하나요?" "음? 아, 이번엔 한 사람이 더 있네. 그럼.. 넌, 그래! 그게 좋겠다! 음식 준비해! 음료수도 잊으면 안 된다고! 아.. 이번엔 허기에 떨면서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치?" 이봐.... 지금 소풍 가냐! 그리고, 난 밥 준비나 하라니! 뭐... 근데 왠지 이것도 재미있을 거 같군. 그렇게 역할 분담을 하고, 평민반 수업시간이 되어서 우린 헤어질 수 있었다. 음.. 오늘도 1교시만 들어갔군. "아, 여기 계셨군요. 스승님.." 율지스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내 방 의자에 떡 하니 앉아 있었다. 뭐가 여기 계셨 냐냐! 너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잖아! "뭔데 그러냐?" "예. 다름이 아니고... 조심하셔야 할 듯 합니다. 수업은.. 제 수업 외에는 되도록이면 빠지시고요. 지금 아주 잘 하고 계십니다. 제가 오늘들은 이야기인데 최근 성에서 불온한 움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음? 누가 불을 난로에 올려놓기라도 했냐? 불온이라니? "무슨?" "예. 왕이 미쳤다는 소문이 비밀리에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후, 반 왕파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 세 사람이 살해당했습니다." 오옹? 난 이제 음모론은 질색이라고. 사실 그런 거 잘 알지도 못해. "음...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상관이 있습니다. 살해당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이 학교 이사장으로 있는 쉬코프 백작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도 이 학원 내에 발원권이 강한 이사입니다." 그야, 이사장이 관련이 있긴 하지만, 나완 아무 상관없잖아? "이해를... 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그 다음 후임자가 최근 미쳤다는 소문이 도는 왕이 직접 임명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곧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고.. 그래서 역시 반 왕파도 왕의 측근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곳에 자객을 파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 그래도 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스승님... 단 하나 남은 공작을 내버려 둘 리가 없잖습니까? 병력 역시, 아젠 기사단 다음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쓸데없는 분쟁에 절대 휘말리지 마십시오." 라고 말해도... 음.. 음.. "참, 세이는?" "네. 기특하게도, 도서관에서 공부중이랍니다." 별로 안 기특한데.. 녀석은 담력시험이라도 해야 한다고.. 오.. 담력시험! 그렇지! "좋은 생각이 났어. 허허허... 역시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야." 즉시 두다다다 세이가 있는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도서관은 프라운관과 베젤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부하고자 하는 녀석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내가 볼 땐, 친구들과 놀러 온 거 같긴 하지만. "아, 세이야." 세이는 어퍼져 자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율지스, 너의 하나뿐인 동생뻘인 이 녀석은 이렇게 퍼 자고 있단다. "아, 스승님? 음 냐냐..." 나는 녀석을 그냥 끌고 나왔다. 녀석은 그래도 잠이 덜 깬 듯 했다. "음. 너가 불면증으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쁘긴 한데 말이다, 공부는 좀 해라." 자뭇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세이는 단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그러게 목욕은 자주 하라니까.. 쯔. "근데, 스승님. 그 이야기하러 오신 거에요? 아니면, 사랑스러운 제자를 만나러 오신 거에요?" 양쪽 다 아니지. "헛소리 집어치우고.. 다름이 아니라 며칠 뒤에 모종의 계획을 짜서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데, 너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 같아서 말야." 세이의 얼굴을 일그러졌다. "스승님 계획치고 여지껏 제가 혼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요?" 후후후. "그야, 너는 이번에 사람들을 놀래 키면 되는 역이니까 괜찮아." 나의 이 원대한 계획과 포부를 간추려서 녀석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자, 녀석은 단지 한 마디만 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할래요!" 어련 하실까... 뭐, 그걸 위해서 난 따로 할 일은 별로 있지도 않으니까... 세이 녀석은 신나서 흰 천을 구하러 갔고, 뭐 녀석에게는 그건 쉬운 일일 것이었다. 일단, 아무리 때려 치웠어도, 라플의 제자가 아닌가? 그것도 교사 신분이고... "이런데서 왜 그렇게 음침하게 웃고 있는 거야? 프라오니스?" 으잉? 뒷 쪽에 서 있는 놈은 나도 익히 잘 알며, 또한 미워하는 놈이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살린과 케빈. "살린, 왠 일이야? 원래 예배소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야.. 생각하기도 싫은 거냐? "그게... 곤란한 일이 좀 생겼어. 근처에서 환자들이 몰려든다고. 뭐, 보통 환자들 몇을 치료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근래 여기서 괴상한 병이 돌고 있거든." 괴상한 병? "그래. 그 환자 하나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신성력을 다 쓸 수 있다니까, 그래서 살린과 나는 이렇게 하루 한 명 치료하고 도망 나온 길이지. 그래서 혹시 넌 아는 게 많으니까 알지 않을까 하고." 음.. .신성력으로 병을 고치는데 하루 한 명밖엔 못 해준다... 무슨 마술 램프 같군. 하루에 한가지 소원.. 앗, 이게 아니지. "음.. 증세를 설명해 봐." 살린은 한숨을 푹 쉬면서 설명했다. 증세는 일단, 발병하면 열이 오르고, 몸에 거무튀튀한 반점이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간다... 어디서들은 적이 있는 병인데... "그리고, 이건 극비인데... 수도에 이런 병이 만연해 있어. 아마 예상이지만, 한 달만 지나도 수도에서만 몇 천 정도가 죽어 나갈 꺼야." 전염은 안되나? "전염성은 아닌가 보지? 아니면 잠복기가 길던지. 아니면 병 걸리고 나서 한참 뒤에 죽는 거 아냐?" 살린은 역시로 한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게... 사람들이 동시에 걸리는 걸로 봐서는 전염병이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는 건 아닌 거 같아." 흠... 그렇군. "그래. 그럼 학원에도 환자가 있어?" "응? 그러고 보니, 여기도 수도나 다름없는데... 없네? 정말, 환자는 하나도 없었어." 케빈이 뜻밖의 사실에 놀란 듯 했다. 하지만, 뭐가 달라지리... 이상한 일이다. 뭐에 감염 된 거지? 그것도 일단 문제고. 누가...? 아... 알 것도 같군. "음... 병명은 대충 알았어. 하지만, 여기서 치료하려고 해도... 재료를 쉽게 구할 수가 없어." 일단, 우리 영지에만 서생 하는 것들이 필요한 데 말야... "뭐야, 그럼 너 병명을 아는 거야! 어서 말해! 그럼 내가 재료는 다 구해 줄께!" 케빈은 마치 목숨을 건 듯한 태도를 취했다. 원래 사소한 데 목숨거나 보지? 한달 동안 몇 천씩 죽는다면 너가 자릴 비우면 안되잖아. "내 생각 대로라면, 아마 키히의 탑에서 구할 수 있을 꺼야. 거기 예전에 쓰던 약재 창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 예전에 키히가 쓰곤 하던 연구실을 생각하면서 말했더니, 살린과 케빈은 의아한 얼굴을 지었다. "약재창? 그런 게 있어? 아니, 그런 거 보다...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살린, 의외로 날카롭군. "아, 내가 피스트레이카 사람이잖아. 당연히 여기 설계 정도는 외우고 있다고. 자, 그럼 어떡할까? 지금 당장 갈래? 비록 지금 해가 져가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살린과 케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세 명은 즉시 키히의 탑으로 향했다. "바로 이곳이 키히의 탑이군. 뭐랄까? 밤이 되니까 더 아름답구나." 이 지하에 꽃꽂이 동호회가 있지. 뭐, 기괴한 식충 식물도... 자라고 있겠군. "그래. 살린. 하지만 일은 빨리 끝내는 게 좋다고. 일단 해독에 필요한 프르트레세라는 잎을 얻어야 한다고. 최고층이니까, 빨리 올라가자." 나야 마법으로 단번에 올라가면 하나도 문제가 없지만, 케빈은 마법은커녕 아무 것도 못한다는 문제가 있지. "헉.. 헉... 되게.. 되게... 멀다." 케빈은 그래도 신관 기사라서 그런지, 꽤나 괜찮아 보였다. 그래도 개중에서 가장 무거울 텐데... 검까지 힘겹게 들고 있으니까. 뭐, 여기 괴물이 살 리도... 없는데 말야.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살린이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고." 진작에 지친 거 같은데... "쉿. 무슨 소리가 들렸어." 우린 즉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앞 쪽 작은 복도에서 나는 소리었다. 쉿 쉿 거리는 소리가 낮게 울러 퍼지고 있었다. 분명히, 무슨 생물인 듯 했다. 하지만 이곳에 생명체가 있다는 거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식충 식물이라면 몰라도, 발 달린 괴물이라는 건 좀 웃기는 일 아닌가? "누가 왔던 걸까?" 살린의 나지막한 의문 속에서 뭔가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병든 사람들, 그들의 증세는 확실히 예전 영지의 주민들이 보이던 증세와 흡사했다. 이른바 마력 중독현상. 그리고 그 범인이 아마 키히였다. 그렇다면, 키히의 탑은 키히 자신이 종종 이용했을 터이니, 아마도 실험을 한다면 더 좋은 곳이 여기지 않겠는가? "살린, 케빈. 마법을 준비해 두는 게 좋겠어. 남은 힘은 있어?" 살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약한 치료술 두 번 정도면 끝이야." 케빈이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앞에..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사람인가?" 아마 아니라는 데 얼마를 걸어도 좋다고. 서서히 쉿쉿거리는 소리는 다가오고 있었다. "케빈... 아마 그 괴물 같은 게 아닐까? 예전에 지하도에서 흑을 구할 때 본 그런 거 말야." "그렇군." 응? 괴물이라면 그 마물 같은 걸 말하나? 그렇다면 내 전공이구만. 때리고, 부시고, 다시 패고, 엎어치기 하고, 리본을 매달아서 휙 하고 던지는 그런 거... 할 수 있잖아? "좋아. 일단 녀석이 우리 위치를 찾고 오는 거 같으니까, 숨도 차고 하니 잠시 쉬자고." 케빈에게 말하고 앞을 보았다. 잠시 쉿 소리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더니 계속적인 마찰음이 났다. 복도를 통해서 오는 건 분명 아니었다. 그럼 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 "살린, 뒤를 조심하고, 케빈은 주위를 살펴." 계단 옆의 복도에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하고, 주변의 어둠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신성한 학교 한 가운데서 괴물과의 놀이가 시작되는 건가.. 젠장. 그러고 보니, 정말 위치도 한 가운데로군. 젠....장. "온다! 계단이야!" 케빈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는 순간, 검은 물체 하나가 살린에게 달려들었고, 나와 케빈은 즉시 살린을 구하기 위해 뛰었다. "살린! 젠장!" 케빈이 정신없이 그 녀석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나는 가벼운 빛 마법을 사용하여 주변을 밝게 했다. "쿠 워워워!" 나와 케빈은 그 녀석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머리와, 무릎까지 오는 거대한 팔과, 끈적거리는 듯한 피부를 가진, 사람 같지만, 사람이 아닌 그것을... "젠장..저게 뭐야!" 살린을 덥친 녀석은 소리를 크게 내더니 이내 다시 복도의 윗 쪽으로 달려서 사라졌다. 나는 즉시 살린에게 다가가고 케빈은 주위를 경계했다. "살린, 어때? 살 만한 거야?" 살린은 다행히 상처는 팔이 약간 찢겨져 있었다. 나는 정화 마법을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녀석이 좀 이상한 걸 눈치챈다고 해도, 별 수 없는 일이다. "으..." 녀석이 괴롭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마족이나 마물에게 상처를 입어서 다친 상처로 죽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건 녀석들에게 먹이 표시를 해 놓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정화를 하지 않는다면 지상 끝까지 쫓길 수도 있는 것이다. [흙. 은. 흙. 으. 로. 물. 은. 물. 로. 돌. 아. 가. 라] 내 고유 마법 색이 푸른빛이 그의 몸을 서서히 감싸고, 주변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잠시 케빈이 우릴 바라보았다. "신기하군..." 뭘. 너도 나처럼 늙어보면 알아. 이 정도는 별 거 아니고, 오히려... 앞으로가 문제군. "내려가자. 아무래도 안되겠어. 사람들을 데려 오는 게 좋겠어." 잠시 기절한 살린을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면서 케빈이 중얼거렸다. "글쎄... 하지만 내려가다 잡힐 공산이 더 크다고 보는데? 아까 까지는 밤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냐. 차라리 이 곳의 안전한 곳을 찾아 밤을 맞고, 내일 살린이 회복되면 살린의 신성술로 녀석들을 처리하는 게 나아." 케빈은 잠시 살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는 계단도 내려가는 건 무리다. "하지만 안전한 곳은 어디 있지? 이런 곳에 그런 데가 있을 리가 만무하잖아?" 내가 설계했다니까... "여차하면 마법 결계라도 치면 되니까, 걱정마. 그리고 여긴 방문이 모두 돌로 되어 있어. 키히의 탑은 돌의 탑이기도 하다고." 모두가 돌로 이루어졌지. 뭐, 얼마간 버티는 건 가능할 것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도.. "좋아. 가자." 케빈이 녀석을 들쳐업고, 우리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꽤 안쪽은 한 방문 앞에 섰다. "복도 한 번 더럽게 음산하군." "여기선 얼마간 수업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괜찮으십니까?" 케빈의 말에 뒤에서 목소리가 답했다. 케빈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고, 나 역시 그를 바라 보았다. "쿠릴츠..." 프라운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그러면 정말 이상한 놈이 될 판국이지. "그래. 그런데 여기선 뭘 하시나요?" 그건 내가 묻고 싶다고. "어서 들어가는 게 좋겠어. 놈의 소리가 나." 확실히 쉿쉿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벽을 끌리는 듯한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 어서 들어가자. 일단 들어가면 안전할 꺼야." 문을 열고 방의 의자를 네 개정도 붙여서 간이 침대를 만들고 녀석을 눕혔다. 살린은 정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뭐, 치료해도 공포를 치료할 수는 없으니까... "뭐 하시냐고요? 밖에 뭐가 있다고... 제가 나가보죠. 아까부터 시끄러운데." 케빈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녀석은 문을 열고 그 괴물이 쿠릴츠를 덥쳤다. "바보자식!" 검을 집어드는 그를 나는 제지했다. 케빈은 인상을 찡그리고 쿠릴츠의 모습을 주시했다. 쿠릴츠는 잠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가볍게 녀석을 뜯어냈다. 천천히 다리부터 바닥으로 던졌다. 그의 팔을 물고 있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뜯어내었을 때, 케빈은 얼굴이 파래지고 구석으로 달려갔다. "저건... 뭐죠?" 온 몸에 피를 철철 흘리는 프라운의 말을 듣고 잠시 나는 뭐라고 해 줘야 할 지 고민했다. "설명해 줄 테니까, 어서 문이나 닫아. 확실히 잠그고." "그러지." 케빈은 아직도 한 구석에서 욱욱거리고 있었고, 나와 프라운은 마치 아주 오래 전처럼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회장이 시킨 일을 하러 왔지. 여기서 가장 잘 보이니까.. 뭐, 나도 저녁에 와본 적은 없지만, 낮 동안에는 너와 동아리 방에 있어야 하니까... 뭐, 수업 끝나고 바로 왔더니 미미한 피 냄새가 나더군. 뭐, 너려니 했지." 그려...너 잘났어. "그래. 우리는 일종의 약을 찾으러 온 거야. 그리고... 저 녀석의 대한 정체는 나중에 정리가 되면 말해 줄께. 아직은 심증밖엔 없으니까." 프라운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넌 항상 그랬지. 라플. 그 때도, 항상.... 넌 오직 키히 밖에 믿지 않았어. 아니. 그녀도 믿지 않았어. 왜 그녀가 미쳤는지 알아? 그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안 그래?" 단지... 그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해서지.. 그리고 왜 지금 그 이야기를 하냐? 넌 마족이잖아. "그만둬. 그리고 좀 닦는 게 좋겠어. 너무 꼬지지 하잖아. 상처 대. 내가 치료하는 건 괜찮을 꺼야." 내버려두면 낫기야 하겠지만, 케빈이나 살린은 이상하게 생각 할테니까. 내가 조용히 주문을 외우자 역시 푸른빛이 그의 팔에 일렁이면서 상처가 싹 사라졌다.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마족인 그의 정신 체계 자체는 마족에 속해 있는데, 만약 내가 그를 치유하고자 마음먹는 다면, 역시 죽이는 것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마워... 라플.. 그리고.. 그래도 우린 항상 널 좋아했었다. 베젤과, 위제스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지만, 항상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그들은 너를 지상 최고의 마도사로 올린 거야." 뭐... 워낙 난 인기가 좋으니까. 훗. 훗... 할께 아니군. 희미하게 돌에 무슨 물체가 끌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케빈. 오바이트 고만 하고 이리와. 녀석들이야." 이곳은 교실이라서 문이 앞뒤로 두 군데가 있었다. 창문도 있었지만, 아래는 무려 7층이나 되기 때문에 이곳으로 올리는 없었다. "문이 어느 정도나 버틸 수 있지?" "글쎄.. 한 오 분 정도 버티면 다행이겠지." 프라운은 조용히 자신 옷에 뭍은 괴물의 피를 털어 내고 있었다. 프라운은 특이하게도, 마족 치고는 깔끔한 편이었다. "온다." 문에 뭔가 큰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대체 몇 놈이나 굴러다니는 거야? "내가 다 처리할까?" 프라운의 나지막한 소리에 케빈이 기겁했다. "그러면 난 오늘 확실히 위궤양에 걸리겠지. 그리고 넌 아직 학생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앞을 막을께. 둘은 보조해 줘. 그리고 학생이니까,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을 꺼 아냐?" 글쎄... 널 보조해주는 사람은 한 사람은 전 현직 마족, 한 사람은 현직 마왕이자, 전직 세계를 구한 용사... 인데 말야. "멋대로 하시죠. 제 이름은 쿠릴츠 입니다. 뭐, 이름을 불러도 무관합니다만, 되도록이면 부르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케빈의 얼굴에는 너 정말 재수 없는 놈이랑 사귀고 있구나 하는 문자가 두르륵 쓰여지고 있었다. 어이, 어이. 마족이랑 그 정도 인사를 주고받고 살아 있다는 데 의의를 두라고. "금가네." 문에는 거대한 금이 하나 둘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케빈은 검을 고쳐 들고 심호흡 한 번했다. 나는 즉시 스펠을 준비했고, 프라운은 조용히 살린의 앞으로 나아갔다. "부서진다." 프라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약간의 먼지와 함께 검은 물체가 서 있었다. 괴물 브라더스였다. 그들은 우리를 마치 쥐잡듯이 노려보고 있었으며, 눈은 붉게 치켜 뜨고 있었다. 오, 유혹하는 거라면 사양이라고. "간다!" 케빈이 먼저 적들에게 선공을 시작했고, 나는 즉시 녀석들의 발 밑을 끈적거리는 곳으로 변환시켰다. 동시에 한 쪽 문이 부서졌다. "젠장! 저긴 누가 맡냐!" 프라운이 그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리고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목을 꺽어 분지르기 시작했다. 한 세 놈쯤 죽이고, 케빈도 서서히 녀석들을 처리해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프라운이 소름끼치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해. 죽이는 감각이 인간 같아. 골격도 그렇고... 하지만, 이성 따윈 없고... 내가 착각 할 리가 없는데..." 케빈은 거의 땀으로 물 말아서 의자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프라운이 중얼거리자, 케빈은 의아한 듯이 반문했다. "설마, 인간이라면 저런 속도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그리고, 어딜 봐서 골격이 인간이냐? 팔이 저렇게 긴 인간이... 가만, 팔, 다리. 얼굴... 직립보행... 어라라?" 케빈은 즉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저 팔을 으쓱해 주었다. "수상해도 그냥 넘어가. 일단은 정당방위니까." 프라운의 어깨를 툭 치고 밖의 창문을 보았다. 어느새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앞으로 한 세층 정도만 올라가면 연구실이 있는 복도가 나온다. 내 생각인데... 아마 이 이상한 놈들도 그곳에서 나오고 있을 확률이 높다. "살린이 잠시 뒤면 깨어날 테니까, 그 때 물어보면 더 잘 알 수 있겠지. 그리고.. 그러면 바로 올라가자." 일단은 프라운도 있고 말이지, 든든하잖아. 프라운을 바라보자 그는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늘 수업 또 빠지게 되는 거냐?" 허허허.. 노인이 되면 기억력이 가물가물 해지는 법이라... 헐헐헐.. "그냥 넘어가!" "음... 음.. 아, 케빈?" 살린이 드디어 눈을 베시시 뜨고 피칠을 잔뜩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짓이 그를 보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신관기사가 사람을 죽이다니! 제정신이야!" 이 반응으로 나와 프라운은 즉시 공론에 들어갔고, 케빈은 죽은 사체... 인가? 뭐 하여튼, 괴물을 놓고 살린에게 요모조모 설명을 해 주었고, 역시나 한층 더 무서운 살린은 그 상냥한 얼굴을 하고선 그 괴물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해?" "글쎄... 라플. 단지 저것만 가지고는... 일련의 마력 중독 사태라.. 아마도 그거겠지. 마족의 피를 짜내서... 그럼 마족보다 강한 인간이어야 하는데..." 나는 한숨을 쉬었고, 그도 어느 정도는 내 뜻을 이해한 듯 했다. "너... 조심해라. 피 빨리기 싫으면." "그렇게 되나? 그런데, 왜 널 믿지 않는 거지? 네 제자인 율지스 녀석은 쉽게 믿었잖아?" 그야.. 그렇지. "녀석이야, 원래 귀가 얇은 편이라고. 그리고 제자와 연인은 달라. 너도 알잖아?" 프라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난 연인보다 제자와 있던 시간이 훨씬 길었고,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그보다 지금 문제는 어떻게 하느 냐야. 어쩌면 키히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갑자기 내 눈앞에는 내장이 출렁였다. "무슨 짓이야!" 살린이 내장을 흔들고 있었다. 너... 신관 맞냐? "아, 이거 봐. 거의 인간의 내장과 흡사하지? 느끼는 거 없어?" 그야, 있지. 너가 신관이 아닌지 의심스럽기 시작했다는 거. "모르겠어. 살린. 제발, 이것 좀 치워!" 케빈은 역시나 구석에서 오바이트 하고 있었다... "흠... 모른다니.. 안타까운데? 거의 인간의 위장과 흡사한데 여기 봐, 뇌는 새까맣게 되어 있어. 일종의 바이러스 발생과 비슷해. 그런데 뇌만 망가진 거지. 오히려 다른 신체는 아주 싸우기 좋게 발전했어. 그것도 여기 살이 튼 게 보이지? 아주 갑작스러운 팽창이 있었다는 거야." 아무래도 좋은데.. 어이! 프라운! 그런데서 유심히 바라보지 말라고! "역시, 감각이 비슷하다 했지." 으.. 저놈은 대체 몇 사람이나 죽였 길래 감각까지 기억 하냐! "뭐, 처음에 피를 보고 짐작했지만... 피가 붉잖아. 보통 괴물이나 마족과 같게 푸른빛을 띄지 않잖아. 산성액도 아니고." 이봐.. 그건 잘못된 상식이야. 네 앞에 있는 프라운과 라플이라는 사람들은 마족인데도 불구하고 피가 붉지.. "다... 좋아. 그럼 올라가자. 살린. 적의 음모를 분쇄해야지. 이런 곳에 더 있다간 앞으로 평생 고기는 못 먹을 꺼 같아." 살린은 비장하게 내장을 집어들고 외쳤다. "맞아. 인간을 이렇게 하는 놈들은 용서할 수 없어!" 어이, 다들 무슨 정의에 불타는 사람들이 된 거라도 된 거냐? 젠장.. 어라라? 프라운 너까지 왜 그래? "자, 갑시다! 가서 세계를 구원하는 겁니다!" 어이... 말릴 사이도 없군. 다들 위험이라던가, 공포라는 건 아예 없는 게냐? 어두 침침하던 복도에는 어느새 비린내와 함께 밝은 햇살이 내비치고 있었다. 괴물은 보통 야행성이다. 뭐, 안 그런 괴물이 있다면 그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지. "계단은 오늘은 조금 올라가서 기분 좋다." 살린은 이상한 데서 감동하고 있었다. "어서 가기나 하자고." 앞장은 프라운이 서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이 사악한 마족이 아주 착한데다가 힘도 강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음... 뭐, 나보곤 툭하면 정의의 용사 라잖아. 하긴, 마왕이 뭐 별건가? 마법 잘 쓰는 놈이지 뭐. 훗. 그거 완전히 내 얘기잖아? 허허허. 이 노인네 앞날이 보이는 군... "자, 이제 복도야. 어디로 가야 약재창이 있지?" 셋은 모두 약간은 들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칙칙함, 어두움, 증오, 배신, 사랑, 괴로움, 외로움.... 인간의 감정이 녹아들어서 거무튀튀한 감정의 막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괜찮아?" 프라운이 어느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젖고 손을 들어서 한 방을 가리켰다. "저 방이야. 아마도 기억이 맞다면, 저곳에서 약재를 취급하고 있어. 단, 녀석들이 여기 깔려 있을 가능성도 있어. 조심하는 게 좋아." 살린은 조심스럽게 케빈에게 축복 주문을 걸었고,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 아주 어두우니까, 조심해." 분명히 해는 아주 잘 들고 있었지만 말이지. "자, 앞으로 가 볼까나?" 문을 서서히 열고 우리는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 약재들은 작은 병에 담겨서 큰 방안에 빼곡하게 넣어져 있었다. 괴물들이 돌아다녔을 테데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깨지거나 하지 않았다. "여기야. 이거랑 이거야. 그리고. .아, 여기도 있군." 나는 즉시 빠른 속도로 약재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창문을 보았을 때,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저게.. 대체!" 밖 창문에는 한 사람이 대롱대롱 매달려서 붉은 눈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케빈은 칼을 들고 서서히 다가갔다. 그는 다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죽은 사람이야. 모두 안심해. 그리고... 대체 누구지?" 프라운이 이미 부패되어 가고 있는 그 시체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학교 교사군. 얼마 전에 그만뒀다고 들었는데.. 왜 이런데서 죽어있는 거지? 이상해.. 그리고, 왜 여지껏 들키지 않았던 걸까?" 그거...참 이상하군.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내 귀에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이었다. "옆방이야!" 난 즉시 문을 열어 젖히고 옆 방 문을 열었다. 그곳엔 괴물 한 마리의 목에 칼을 꽂아 넣는 사람이 있었다. 온통 검은 색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흑?" "어이... 프라오니스 아냐?" 왜... 왜 저 녀석이 여기 있는 거야! 녀석은 무척 반가워했다. 난 녀석을 안 반가워했다. 우리 모두는 그를 아주아주 싫어했다... 가 내가 생각한 녀석에 대한 나와, 살린, 케빈의 반응이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할 소리. "흑이야말로 뭐 하는 거야. 나랑 여기 둘은 여기 취직했잖아. 잊었어?"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이젠 아주 신출귀몰한 역만 다 맡아서 하는 구나. 너도 혹시 나중에 사실은 내가 궁극의 마신이야.. 뭐야 그랬단 죽여 버리겠어. "음.. 그랬지. 진작 너희를 만나서 도움을 요청했다면 이렇게 죽도록 고생하지 않고 내려도 되었을 텐데.. 나 사실은 계단 올라가는 걸 되게 싫어하잖아. 그래서 기구를 만들어서 이곳에 몰래 내렸지. 힘들었다고. 옥상에 내리는 순간 괴물 셋과 혈전을 치루어야 했고, 거기서 내려오자마자, 정체불명의 괴인이 나를 죽이려 들고... 젠장, 완전히 스릴러 였다고." 넌 좀 더 당해야 한다고. "그래서, 뭐 알아낸 건 있고?"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음.. 전혀. 사실 여기 온건 얼마 뒤에 올 왕의 측근들을 감시하러 온 거야. 그래서 여기가 가장 다른 곳들이 잘 보여서 잠복 근무를 하면서 수상한 자를 감시하러 온건 데.. 아, 옆방에서 왔으면 그 엄청 수상한 녀석을 봤겠네? 저녁만 되면 살아난다고... 으.. 장난 아냐." 에엑? "그럼 좀비나 뭐 그런 건가?" "아, 그건 아닐 꺼야. 일단, 그런 좀비가 있다면 상을 주겠다고. 그래서 아예 살아나도 이상한 짓을 못하도록 벽에 매달았어." 너답다... "무슨 짓을 했지?" "음.. 별건 아니고... 사람들을 데려다가 인체 실험을 하는 거 같았어. 뭔가를 몸에 넣더군. 그리고 나서는 얼마 뒤 사람이 죽으면 아까 그게 된다고. 나도 처음엔 그걸 모르고 죽을 뻔 했다고." 대체 뭘 넣길래 그런 일이 생기는 건지... "좋아. 흑. 하지만 여긴 위험하니까, 차라리 우리 신전으로 와. 예배소는 차라리 안전하다고." 글쎄... 나는 그들을 제지했다. "과연 그럴까? 돌연한 전염병. 하지만, 사람으로 옮기는 건 아니지. 그리고 뭔가를 넣었다... 뭔가 떠오르지 않아?" 흑이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나, 벌써 3끼나 굶었어." 어련해.. "마족화로군. 기본적으로 마족과 인간은 다른 게 없으니까... 하지만 기가 막히군. 마족의 피를 이용해서... 대단해. 말 잘 듣는 애완견을 만들어 내는 셈이니까." 프라운의 정리였습니다... 살린은 그제서야 안색이 파래졌다. "그럼... 그럼... 마족의 피를 푼 거야? 그래서 마력 중독현상이 나타난 거고.. 그리고... 뭔가의 계기가 있으면 그게 마족이 된다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일행은 조용해 졌다. "그래도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마족처럼 마법을 사용하진 않아. 멍청하잖아." 모두는 결국, 소름끼치는 결과를 알아내었다. 살린은 빨리 약을 풀어서 왕국의 안녕을 빌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자, 그럼 다시 탑을 내려가자. 여기 정화는 서서히 해 두는 게 좋겠지. 더 이상의 마물을 찾아보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야." 그리고 여기 녀석들을 만드는 곳이 없다는 게 가장 문제였다. 연구실에는 단지 3개의 침대가 있을 뿐이었다. 약을 풀어 시험을 한 곳은 다른 곳이 틀림없었다. "키히인가..." 내 입에서 허망한 탄식과 함께, 절망의 말이 나왔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놈들은 다른 놈들대로의 걱정스러운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흑은 살린과 케빈 일행과 함께 신전으로 갔다. 만약, 정말 유행하는 이 병과 그 괴물이 관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 괴물이 흑이 전에도 만났던 그거라면 아마도 문제는... 좀 더 심각해지기에,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헤어져야 했다. "어쩔 셈이지? 만약 키히라면 어떻게 할 꺼야?" 프라운이 둘만 남자 나지막하게 물었다. "글쎄... 닥쳐야 알지. 일단은 동아리 일부터 해결하자고. 우리가 걱정한다고 해서 뭐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프라운은 잠시 한숨을 쉬면서 마왕이잖아... 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나도 음식거리를 준비하러 갔다. 호수는 여전히 아름답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율지스?" 그가 조용히 아침의 따사로운 햇살을 밭으면서 서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자 곧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스승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게다가 이 모습은, 어디서 싸움이라도 하셨습니까?"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우스워 졌다. 마왕이건 아니건, 나는 나고. 이 녀석은 내 제자일 따름이다. 갑자기 내가 마왕이라고 해서 세계 정복 같은 걸 꿈꿀 이유도 없고. 그냥 엄청 황당한 번들 제품 하나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뭐. 하하하.. "녀석. 바람이 차다. 가자." 난 그날, 왠지 제자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꼈다. 역시, 늙어서는 자식보고 산다더니 그 말이 맞다. 날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래서.. 왜 수업을 내리 빠지신 겁니까? 공작? 설마 소문처럼 너무 유능해서 들을 필요가 없다든지, 이런 겁니까?"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수업을 제끼고도 내가 무사할 리는 없었다. 나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내가 여기 들어온 것도 꽤나 늦은 거였고, 바로 시험도 본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난 까마득히 몰랐다. "교장 선생님. 공작께서는 많이 아프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전 일도 거드시고요. 그러니 수업들을 시간은 없으시지 않았겠습니까? 부디 선처 바랍니다." 교장 옆에는 내 신변에 대한 보증인 뻘 되는 율지스와, 살린이 있었다. 제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쳇. "제가 공작을 나무래고 혼내자고 이렇게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전 이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만에 하나, 공작께서 나중에 크셔서 아주 불성실한 태도와, 비 양식적인 행동들을 보이면 어떻겠습니까? 누구도 당신을 우러러보지 않을 것입니다." 에.. 그렇게 말해도...죄송합니다. 앞으로 시정하겠습니다. 하고 끝내면 되는 문제였지만... 난 갑자기 근래 들어 연기 수업을 못했다는 게 떠올랐고,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전... 전...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교장 선생님! 전.. 전 나쁜 놈입니다! 제발 퇴학시켜주세요! 이런 놈이 학교 다닌다는 거 자체가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어떻게.. 제발!" 그리고 눈에서 초롱초롱 광선을 남발했다... 율지스는 가볍게 눈썹을 찡그렸고, 살린은 거의 웃을 지경인 듯 했다. "음... 반성하면 된 겁니다. 가보세요. 그리고 다음주에 아마도 고위 인사가 이 학원을 시찰할텐데... 조심하세요." 그야... 조심하지 말래도.. "그럼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따끔하게 혼을 내도록 하죠." "그러세요. 그럼." 둔탁한 문을 열고 나오자, 살린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대체 우리 용사께선 얼마나 수업을 많이 빠진 거야?" 나간 거라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제대로 들은 수업이 두 시간이었지... "뭐, 여차 저차... 사실 잘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옆에서 율지스가 나에게 종이를 건넸다. "이건 과제입니다. 뭐, 다 해놓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전 세이에게 과제를 확인하러 가봐야겠군요." 녀석이 사라지고 나서 종이를 펼치자, 세이의 지렁이 글씨로 답안들이 적혀져 있었다... 녀석에게 내 숙제를 시킬 줄은... 고 단수다. "저 사람이 율지스지? 엘프이고, 대마도사 라플의 제자라는... 너의 선조의 제자라서 너를 보살펴 주는 거야?" 글쎄...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고... 뭐, 사정이 좀 있지. 하하하..." "그래도.. 좋은 사람이구나. 예전의 정 때문에 도와주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말야. 아, 사람이 아니라 엘프지? 난 예전에 엘프는 다 몬스터인줄 알았다니까?" 그건 그렇군. 엘프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게 거의 키히 때였으니까... 뭐. 아, 바로 며칠 뒤를 대비한 음식 준비하러 가야겠다! 으라라라차찻! 음식이다! 가만, 내가 할 줄 아는 음식이라곤 유동식밖엔 없는데? 15. 호수 위의 오두막집 ...당신과 그 시간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곳은 아무래도 아름다운 호수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해가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다만 당신이 있는 것도 좋지만, 당신이 그 호수에 비칠 때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난 노력할 것입니다. 당신의 미소가 매일 매일 아름다울 수 있도록... 사랑합니다. 그래서, 난 그 집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와 주신다면, 무척이나 영광이군요. -음유시인의 노래- 그 날도 여전히 나는 키히의 탑에 갔다. 비록 상층부엔 갖가지 이상스런 일이 있고, 괴물이 있더라도, 아래는 일단은 내려오지 않았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프라운이 가서 철저하게 괴물을 없애고 왔다. 그리고 꽃으로 장식했다. 이건 어찌 보면 좀 더 위험해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꽃이란 식충 식물이 다이기 때문이다. 알트야 좋아했지만... "선배. 전 음식 만들 줄 아는 게 하나 밖엔 없어요." 선배라는 소리에 반응하는 오직 한사람이 있다. 바로... 오른이었다... "후후후! 사랑스러운 후배야! 모든 걱정을 털어버리렴! 이 선배는 말이지, 너가 만든 그 모든 음식을 먹어줄 수 있단다!" 음... 그럼 유동식으로 밀고 나가야겠군. "오른선배. 그러지 말고, 제가 구해온 장비 좀 보세요. 어때요?" 실리아와 루미르가 사온 것들은 모두 어디서 구해온 건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들 뿐 이었다. 일단, 작은 조각배의 부품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에도 줄이나, 횃불, 등, 천? 하여튼, 이런 것들이 있었다. "이건 뭐에요?" 나는 작은 종을 들었다. 겨우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였고, 아주 깜찍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음... "응, 이건 만에 하나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거야. 일단 괴물이 나타나면 우리 중에 하나가 미끼가 되는 거지." 어이.. 그런 걸 누가 하냐! "아, 귀여운 후배를 희생시키려는 거야? 너무하잖아. 어, 놀라지마. 꼭 괴물이 있으란 법도 없잖아." 하하하.. 그래도 다행이군. 내 계획에 더 도움이 되겠어. "그런데 거기로 비행 마법을 사용하면 안되나요? 들킬 거 같지는 않은데." 갑자기 알트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몇 가지 조사해 보았는데... 그건 무리야. 내가 거기에 대해 조사해 보았는데, 거긴 직접 라플이 만든 유일한 곳이라고. 그리고 다른 곳은 그저 설계만 했을 뿐이야. 내 생각인데, 아마도 그곳은 라플이 살려고 지은 곳일 가능성이 커."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래서 라플에 대해 알아보려고 가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나에게 묻지. 녀석들도 참. 훗. "응? 그런 거라면 너에게 묻지. 그게 아냐. 그렇다면 라플은 그래도 최고의 대마도사. 당연히 거기엔 희귀한 재료나, 물건이 있지 않겠어? 어쩌면 전설에서 듣던 마법 생물을 볼 수 도 있고." 이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음... 그래도 저희 선조의 기록에 보면 그런 건 없다고 하던데요?" 알츠는 나에게 강렬한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냐. 그건 당연히 기록으로 안 남는 다고. 당연히! 본인만 알고 있는 것들이지! 그리고 엄청난 비밀이 있을 거 같지 않아? 그것들을 공개하면 이번 동아리 경진 대회는 우리가 1등이라고! 음 하하하!" 목적은 이것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뭔가 위험한 물건을 만들던 기억이 있기도 해... 뭐였더라.. "좋아요. 가요. 에휴... 그렇게 말을 안 듣다니." 소귀에 경 읽기 열심히 하고 세이에겐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거사 일은 그 때이니...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율지스는 계획에 끼우기엔 너무 신중하니 빼고, 역시.. 만만 한 건 살린과 케빈이군. 흐흐흐... 나에게 신세진 것도 있고 하니. "누구십니까?" 신전에 실제로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여전히 수업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일단, 빠져도 날 퇴학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뭐. "예. 살린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신관이 거만한 얼굴로 내 품을 한 번 싸악 훝었다. "환자는 지금 받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날 오세요. 에네브님은 무척 바쁜 분이십니다. 손님." 에... 당황하는 나를 보라. 이 나이에 문전 박대 당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뭐하는 거야? 어, 프라오니스? 여긴 왠 일이야?" 케빈이 이른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려왔다. 당연히 그 신관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워 했다. "아시는 분이십니까? 에네브님을 뵈러 왔다고 하더군요." 케빈은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가리키면서 웅변을 하기 시작했다. "보라! 이 얼마나 영웅다운 얼굴인가! 영웅의 기본이자, 필수 조건의 하나는 바로 이 아름다운 얼굴이 아닌가? 영웅이 아름답지 않으면, 수많은 기사소설들은 다 망했을 것이며, 단지 무서운 호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소년의 가문은 단지 이 나라에 하나 남은 공작가이며, 개국 공신의 가문이며, 대 마도사의 가문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바로 영웅의 조건이 아닌가? 게다가 불운한 어린 시절까지! 오! 완벽 하도다!" 이봐.. 숨은 쉬는 거냐? 그리고 숨 넘어가겠다. "그러셨습니까? 몰라 뵈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하하하... 역시 세상은 능력 중심이 아니라, 백그라운드 중심이다. 고로, 등짝이 넓어야 한다. 후후후... "아, 어서 와. 무슨 일이야?" 살린은 여전히 친근한 이웃집 형님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 저 부탁이 있어서요. 별건 아니고... 그냥 일종의 이벤트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리고 요 근래 재미있는 일도 없었잖아요." 둘에게 내 깜짝 공연 이벤트를 이야기하자, 둘은 아주 나를 불쌍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불쌍해라...하긴, 넌 아직 놀 나이인데 말야. 고생이 너무 많았지? 걱정마. 우리랑 세이형이랑 특급으로 준비할 께!" 왠지 케빈과 살린이 불타오르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이.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뭐, 흥분해도 내가 어쩔 문제는 아니지... 다시 그곳을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먼저, 유동식을 위한 기초 상식... 음식은 아무거나 다 된다. 다 잘게 부실수만 있으면 된다. "어라라? 너 여기서 뭐하니?" 고개를 들자, 그야말로 퍼펙트한 미모를 가진 그 소녀가 서 있었다. 하기사, 이 밤중에 유동식을 만드는 모습이란... 거기다 양까지 많아서 엄청난 솥을 쓰고 있으니 무슨 마녀가 약 만드는 광경과도 흡사할 터였다. "안녕하세요? 분명히.. 무슨... 음.." 몇 학기였더라.. 음.. 음.. "키히의 학기에 다니는 엘메라인이야. 내 이름 기억 못하는 애는 너가 처음이다." 너도 나이 먹어봐! "에. 안녕하세요? 보다시피 음식을 만드는 중이에요." 그녀는 잠시 지긋한 시선으로 내 솥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솥은 마치 야채 수프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거...? 이렇게 많이 만들어서 뭐해?" "예. 내일 선배들께 드리게요." 잠시 정적이 오갔다. 그녀는 그 유동식을 살짝 손으로 찍어서 핱아 먹었다. 그리고 웃었다. "맛있긴 한데, 다 이것만 먹니? 이건 꼭... 그래. 유동식 같아." 아닌게 아니라 그거야. "만들 줄 아는 게 이거 밖에 없어서요." 세이와 살린, 케빈은 다 보내 버렸거든... "그러니? 흠.. 재료도 엉망이네? 다 어디서 남은 것만 모아 왔잖아? 에... 그래. 내가 도와줄까?" 으잉? "정말요?" "그래. 음식 만들어 줄께. 몇 인분이나 준비 해야되는데?" 에... 프라운, 실리아, 루미르, 오른, 알트.. 지? 아, 세이 일행 것도 준비해야지. "총 8개 정도면 되거든요." "모두 피크닉 가기로 했나 보구나? 자, 도와 줄께. 시간은 좀 오래 걸려도 괜찮지? 아, 그리고... 옆에서 좀 도와줘." 그야 이를 말이신가? 후후후..난 옆에서 그녀를 열심히 도와주었다. 뭐랄까,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의 웃음소리도 듣기 좋았다... 가만, 좋았다? "저... 누나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늙어서 노망이 났나?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다. "응. 있어. 평생을 두고 사랑하는 사람." 그렇구나.. 뭐, 할 수 없지. "그렇군요... 하긴." "너랑 닮았어. 아, 다 된 거 같은데?" 그녀는 서서히 끓는 솥을 내려놓았다. 문득, 나도 키히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왜, 그런 음모를 꾸미는지는 알았지만... 난 이렇게 멀쩡한데 말야. "자, 다 되었지? 어때? 맛 좋지?" 엘메.. 뭐 시기는 하여튼 나를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웃었다. 맛있고 자시고 내가 이런 걸 먹었어야지... 그녀가 그걸 만드는 동안, 그 동안 익히 특선 사과 죽을 만들어서 냠냠 먹었다. 밤새 음식을 만들려니까, 여간 피곤한 게 아니라서 후후.. "좋아요. 맛있어요. 누나, 안 가셔도 되나요?" 그녀는 그제서야 생각난 듯이 화들짝 놀랐다. "그래. 아침수업에 지각하겠다. 너도 어서 가렴! 피크닉 잘 보내고!"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내 눈앞에는 거대한 걱정이 아닌, 거대한 설겆이가 쌓여 있었다. 젠장... "일단, 음식은 보존 마법을 걸어서 치워놓아야겠네. 살린과 케빈 녀석, 굶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아, 여분을 좀 남겨서 가져가자." 음식을 쌓아서 다 가방에 넣고, 난 나답지 않게 수업에 들어가 보았다. 하루 완전히 제끼고, 그 전날엔 듣다 간... 그래서 인지 모두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오! 지각과, 결석의 초 절정 문제아! 학원 개국이래 너 같은 녀석은 처음이라고 다들 그러더라. 하필 시험 날은 알고 왔냐?" 어떤 학생의 말이었다. 뭐? 시험! "오늘 시험 봐?" 아이들은 그제서야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위로했다.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다나? 야.. 내 앞에서 나이를 논하지 마라. "너 엘메라인이라고 알아? 키히의 학기에 다니는데." 한 학생이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너한테 안 물었어.. "그야, 모르면 간첩이지. 전학년 성적 톱에다가, 얼굴 예쁘지, 트류바 남작 가의 아가씨지... 뭐, 완벽하지 않아?" 뭐가... "이쁘더라. 그래서 물어봤어." "아... 그러나 그녀는 특정한 친구는 안 만드는 걸로 유명해 누구에게도 친절하지만, 글쎄... 절대로 남에게 그 이상의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아냐. 친구도 만들지 않고... 뭐, 그래서 더 예쁘지. 고고하잖아?" 고고학이나 해라. "야, 온다. 와." 시험 감독관이 시험지를 내려놓고 주위를 쫘악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게로 시선이 닿았다. "오, 오늘은 그래도 나왔구나. 뭐, 좋겠지. 자, 컨닝(Cheating) 하지마." 시험지를 받아들고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쓸 것인가? 나의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이성에 기 귀 기울일 것인가? 일단 읽어보고 결정하기로 생각하고 문제지를 살폈다. 먼저,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게 난이도가 높은지 알 수 없다는 것... 아는 게 너무 많아도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다. 허허헐... "어쩐다.." "모르겠니? 하긴, 수업도 별로 듣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수업도 그나마 잘 들어오지 않았으니.. 뭐, 괜찮다. 정상참작은 되니까." 짜르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그런 걸로 고민할 꺼 같냐? 좋아. 단 한 문제만 풀고 나가자. 음... 아, 이게 좋겠군. 이게 어려운 문제일리가 없잖아? 어둠 마법의 기본 원리에 대해 쓰라. 후후훗... "좋았어!" 그걸 쓰고 나는 확실히 이번이 꼴찌일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먼저 나왔다. 아직 애들은 죽자 사자 쓰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들.. 시험지 오래 쳐다보면 답 나오나? 응? 율지스!" 저 멀리 걸어가는 율지스를 불러 세우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시험은 잘 보셨습니까?" 후후후... "한 문제만 쓰고 나왔어. 뭐를 쓰고 나와야 할지 몰라서 그냥 1번 문제 썼어. 원래 1번 문제가 제일 쉬운 거잖아. 안 그래?" 방글거리면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프라운 학기의 1번 문제라면.. 혹시 어둠 마법의 기본원리에 대한 것입니까?" 그렇지. 이름도 기본이잖아? "응. 쉽잖아. 그거." 잠시 뒤, 그는 머리를 지긋이 손으로 눌렀다. "다음시간... 확실히 망쳐 주십시오. 실기지요?" 응... 그렇지. 왜 그러지? "그럼 나 갈께~~~" 녀석을 확실히 따돌리고, 나는 열심히 방으로 돌아갔다. 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고. 좀 자다가도 되겠군... 푸른 호수 위에 그녀가 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 잡으러 달려갔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주변의 호수에 내 발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은.... 엘메라인? "헉!"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구석이 시원했다. 어찌된 일인가... 대체. 엘메라인이라니... 젠장. 나도 알고 보니 둥이었구나.. 쯔.. 아니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 가만, 내가 나온 목적이 토끼 같은 새끼들과 같이 여우같은 마누라 얻어서 사는 거잖아? 음... 거기다 내 밥통이 제자들을 싫어하질 않을 사람이라면 더 좋겠는데.. 흠.. 흠.. "에잉.. 으악! 벌써 시작했겠다!" 시간은 이미 시험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즉시 나는 그야말로 발바닥에서 땀이 나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으으으악!" "지각이군." 선생의 말... 이 아니라, 율지스였다. 다행이군. "죄송.. 그만 깜박하고 잠드는 바람에.. 하핫. 늙으면 이 모양이지. 금방 깜빡거리면서 잊고 만다니까. 하하하.." 은행나무라도 씹어야 할라나.. "좋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다른 애들에게 물으니, 오늘의 시험은 그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펼치는 것이라고 한다. 뭐, 각양 각색이었다. 프라운 관은 신입생이니 무슨 대단한 마법을 쓸 수 있겠나... 결국.. 그들은 단순한 화염마법 같은 걸 사용하고 있었다. 내게 자신 있는 마법은 세 가지이다. 먼저, 암흑마법 중에서도 대 소멸 마법이다... 뭐, 쉽고 자시고 말만 하면 되거든. 그리고 공격마법 중에서 죽음의 공간 하강 같은 것도 잘 한다. 그러나... 사실 빈도수로 보면 내가 가장 잘 사용하는 마법은 빛의 구 마법이다. 얼마나 실용적인가? "전 빛의 구를 실현하겠습니다." 애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주문을 외었다. [빛. 의. 구] 세 글자다.. 얼마나 간편한가? 응...? 어라라, 왜 그런 도끼 찍을 얼굴로 나를 보는 겨? 내가 뭐 잘못했나? 확실히... 아, 얼른 취소해야겠군. 깜박했는데.. 마법 주문은, 그 시전자의 능력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줄어든다.. 즉, 세 글자 짜리 마법은... 근대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죄송합니다. 못하겠어요. 다른 거할래요." 결국, 지금 막 창안해낸 마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름은 무조건 길게! [아. 름. 다. 운. 별. 빛. 처. 럼. 지. 상. 의. 낙. 원. 에. 서. 소. 환. 되. 어. 푸. 른. 달. 빛. 을. 반. 사. 시. 키. 면. 서. 그. 리. 고. 다. 시. 그. 아. 름. 다. 운. 빛. 을. 지. 상. 에. 내. 비. 추. 어. 지. 상. 의. 광. 명. 처. 럼. 빛. 나. 다] 이 마법은.. 이른바, 빛나라 마법이다.. 특정 부위를 그냥 빛나게 만든다.. 뭐에 쓸모가 있냐고? 묻지마.. "정말, 이보다 쓸모 없는 마법은 본 적이 없구나. 씨 마이너!" 이봐. 그래도 좀 심한 거 아니냐? 이렇게 애들에게 위로까지 받을 줄은 몰랐단 말야! 으... 다음시간은 수학시간인데.. 가만, 가야 되나 모르겠군. "그래도 시험은 볼 수 있어. 감독을 그 선생이 하는 게 아니니까. 무슨 실습이라면 몰라도. 안 그래?" 흠.. 그런 건가? "자 풀도록 하세요. 컨닝은 하지 마세요!" 수학은 컨닝이 불가능하다. 그 말을 해주고 싶군. 식까지 어떻게 다 베끼냐.. 이번엔 뭘 푼 다냐.. 우... 젠장. 음. 이게 좋겠어. 이번에는 그래도 앞의 성적이 무슨 디 마이너 정도는 되었을 테니, 이번엔 비 정도는 받아야지 않겠어? 좋았다.. "마지막문제다!" 그 문제는 아주 쉬었다... 마법사는 모두 수학의 귀재다. 모르긴 몰라도 수학 싫어하는 애들에게는 나는 공적 일호일 것이리라... 내가 가장 많은 수학 정리를 해 내었으니까. 마법은 수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의 왕족에게서 보이던 그 특수한 절대마법 무위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던데... 흠. 특이하군. 그 능력이 좋은 이유는 내가 볼 땐, 단지 수학이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마법은 선천적으로 익힐 수 없는 경우도 있다구. 그들은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천재가 아닌가? "자.. 이제야 가방 들고 갈 수 있군." 동아리 방으로 가자, 여전히 알트와 오른은 시덥지 않은 식충 식물 시합을 하고 있었다... "선배들은 시험 안 봐요?" 실리아 선배가 베시시 웃었다. "시험은 같은 시간에 본다. 아, 밥은 싸왔지? 여기서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해가 떨어지면 호수로 가는 거야. 내가 조용한 장소를 봐 놨어. 우리 귀여운 후배는 그냥 조용히만 있으면 된다. 그 때까지 내가 꽃 꽂는 법 가르쳐 줄께." 그래. 내가 원하던 생활이 바로 이런 거였다고. "..." 쿠릴츠는 여전히 무게만 잔뜩 잡고 있었다. 하긴, 녀석은 원래 프라운 시절에도 저랬다. "자 봐. 모든 건 균형과 조화를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시나요...? 오옷! "제목은 잠자는 늑대의 하루!" 쿠릴츠가 한마디했다. "먹을 수 없는 걸 가지고 왜 그렇게 정성인지... 그냥 식충식물 콜렉션이나 돌보라고. 우리가 없는 동안 다른 사람이 보면 좀 곤란하잖아?" 그제서야 실리아가 일어났다. "맞다. 어서 가자. 에잉. 리무르. 너도 가자. 너만큼 식충 식물을 잘 다루는 인간도 없잖아." "응." 리무르도 싱긋 웃으면서 일어났다. 에휴휴. 왜 나만 이러고 있어야 하나. 왠지 내 인생이 처절하고, 불쌍함을 느끼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식충 식물에게 물을 주어야 하나! "자, 파리야. 어서 먹고 무럭무럭 크렴." 리무르는 그렇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상당히. 특이하군. "자, 우리 막내도 그렇게 있지 말고 다른 것도 살펴보라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 뽑아서 버리고 싶은 것만 있었다... 응? 설마 저건 가와세리크? 하긴.. 마족이 여기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이건 잡초야. 그냥 잎이 특이해서 내버려두었어. 신기하지?" 별로.. 이건 그럼 프라운이 가져온 게 아닌가? "선배님. 이건... 사연이 많은 풀인데... 이곳에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닌데 말야." 뭐, 지하에 이런 식충 식물이 있다는 거 자체가 더 놀랍긴 하지. 뭐,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이 위에는 괴물이 살고 있었으니... 뭐, 당연할 수도 있겠군. "사연? 우와... 멋진데? 뭐, 그 이야긴 다음에 듣도록 하고.. 파리를 들여보내고 문 잠궈야 하니까 어서 나와." 식충 식물의 먹이는 파리였다.. 하긴, 식인 식물은 없어. "아, 조각배가 다 만들어졌어. 지금 그 곳에 숨겨 뒀어." 쿠릴츠가 어느새 나갔다 왔는지 조용히 말했다. 왠지 머리가 젖어 있었다. "머리는 왜 그래? 비와?" "응? 아... 약간. 하지만 계획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야. 그리고 선배가 결계 해제 준비를 다 해놓으셨으니까, 걱정마." 흠... 결계는 사실 살린 일행에게 건드리지 않고 통과하는 백 한가지 방법을 일러주었다. 키키키. "그래. 어서 가자. 해가 질 시간이야. 그리고 이런 일은 비오는 날 하는 게 좋지. 왜냐? 발자국이 남지 않거든." 하늘은 한 마디로 음울, 그 자체였다. 딱 프라운 분위기로군. "마음에 드는 날씨야. 우리들의 거사가 성공 할 것이다.!" "그래. 어서 가자. 후후후..." 나는 제일 뒤에서 방수 마법을 걸고 있었다. 젖으면 곤란하잖아... 게다가 죽도 싸왔는데.. 웅... "저거야." 작은 조각배 하나가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아주.. 깜찍하다고 할까나? "어떻게 여기 이 사람들이 다 타요?" "응? 하나 더 있어." 숲에 숨겨놓은 작은 조각배 하나를 더 꺼냈다. 이게 조각배라고 한다면 말이지. "땟목이군요." "어허, 퓨르네티스 1호라고 불러 줘." 어련 하실까.. 오른은 그러고는 조용히 끈을 연결했다. "이렇게 하면, 두 배가 흩어지지 않을 꺼야. 자, 그럼 나누자." 으... 난 노 젖는 취미 따윈 없는데. "음. 그럼 셋씩 나누면 되겠네. 나와 오른 선배, 알트가 조각배를 탈 테니까, 리무르와 쿠릴츠, 프라오니스는 뒤에 퓨르네티스호에 타 줘. 그럼. 어서 움직여.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고." 남는 게 시간 아니었수? 무슨 폭탄테러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으. 게다가 왜 이런 배 같지 않은 배에 내가 타야 하는 것이여! "좋아.. 타자.. 휴.." 순간 어깨에 쿠릴츠의 손이 있었다. "걱정마. 나 수영 잘해." 더 불안하다 임마... 서서히 노 젖기를 시작했다. 한 배에 세 명이고, 남자는 나와 쿠릴츠... 그러나 쿠릴츠는 내가 힘들까봐 특별히 마법으로 배가 서서히 나가게 하고 있었다. 물론, 앞에는 그럴 재주가 있을 리가 없으므로 똥 빠지게 젖고 있지. "한 중간쯤 온 거 같은데? 여기 굉장히 넓다." 그래봐야 폭이 한 눈에 다 들어와. 리무르는 왠지 감동한 듯 했다. "누나, 넋 놓고 있지 말고 주변을 좀 살펴 주세요.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이젠 물에 손까지 담구고 놀기 시작했다. 우리 지금 놀러 왔냐! "이거 봐.. 물이 굉장히 차가워. 정말... 이곳은 라플의 눈물이 내려서 되었다고 하는데... 너무 멋있지?" 그럼 물이 짜야지.. 응? "... 나타나셨군." 쿠릴츠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앞에는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물론, 리무르도 노느라.. 아, 물! "누나, 당장 손 빼." "응?" 그녀는 손을 뺐다. 그리고 그녀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쿠릴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건.. 대체!" 호수의 한 가운데 하나의 작은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거와는 별개로 우리 바로 뒤에 물에는 그림자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얼굴이었다. "뭐지..? 대체...? 실리아! 뭔가 이상해." 그리고 툭 소리가 났다 싶었고, 갑자기 어디선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쿠릴츠는 잠시 인상을 썼고, 내 옆에 다가왔다. "리무르도 이리 와요." 리무르는 몸이 살짝 떨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군. 나는 잠시 쿠릴츠를 응시했다. "할 수 없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리무르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이봐. .잘못하면 죽겠다. "안 죽었지?" "난 프로야." 어련하실 까나... 나는 끈을 살짝 잡아 당겼다. 끈은 설설 끌려 왔다. 완전히 헤어졌군. "어떻게 찾지?" "글쎄.. 내가 찾아볼 테니, 일단 오두막에 내려서 기다리도록 해." 그야.. 그래야 겠군. 응? 찾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그대로 아무 주문 없이 공중에 부양했다. 아, 저 녀석 고위 마족이지? 젠장.. 나도 할 수 있나?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나의 의지로 만들어진 호수여,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어라." 잠시 배...라 부를 수 없는 땟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이 움직이고 우리는 바로 흙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리무르를 흔들었다. "음..." "선배, 정신 차리세요. 다 왔어요." "어떻게 된 거야? 나.. 정신을 잃었었어." 그렇게 머리를 맞고 안 기절하면 사람이 아니지... 게다가 그 녀석 정말 프로라고. 프라운일 때, 용병으로 있었거든.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갔어요. 끈이 끊어졌거든요. 일단, 누나를 지키려고요. 정말 무엇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리무르는 그제서야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지껏 즐거운 놀이가 한순간에 담력 체험 비슷하게 변하는구만. 녀석은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안개... 겉히지 않네." 글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결계는 분명히 오른 선배가 깼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응?" 앞의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는 가운데서 뭔가 움직였다. 희멀건한 무언가가.. "꺄악!" 엄청난 비명이 대지를 갈랐다. 그리고 나도 긴장하고 그것을 주시했다. 리무르는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엄습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으악!" 희멀건한 것은 같이 소리를 질렀다. 난 그 소리를 듣고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세이!" "으앗.. 놀랐잖아요. 전 유령인 줄 알았다고요. 누구에요?" 리무르는 아직도 안정되지 않은 얼굴을 하고 나를 응시했다. 누구냐고 말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팍팍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이라고.. 이번에 새로 온 선생이에요. 세이. 다른 사람들은?" "응? 그야, 놀래키러 갔지. 여기 스승님이 있는 줄 알았으면.. 어라라, 기절했네?" 기절할 만해서 기절한 거다. 네 뒤를 봐라. "음... 세이. 엎드려!" 세이가 잽싸게 엎드렸다. 역시 훈련받은 제자 하나 열 어벙한 제자 부럽지 않다. "어둠이여 사라지리라!" 암흑 마법이 내 손에서 뻗어 나가자, 허공을 배회하던 그것은 즉시 소멸했다. 세이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뭐에요? 뭔가 있었어요?" "귀신이라고... 아마도 오랜만에 왔더니 별 게 다 살기 시작했나 보다. 아무래도 빨리 일행을 찾아 봐야겠어. 어느 쪽인지 알아?" 세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직이 한숨을 쉬고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킨 뒤, 우리 세 명은 물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마, 이 근처에 있지 않을까나.." 프라운 녀석, 마족 주제에 뭐 하는 거야! "저기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요?" 호수 쪽이었다. 뭔가 터지는 소리도 나고,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이는 섬광 마법을 사용했다... 말릴 사이도 없었다. "이 밥통아!" 나는 녀석을 한대 쳤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어둠가운데서,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괴상한 괴물과 세 사람이 대치하고 있었다. 흑, 살린, 케빈이었다. 흑은 언제 온 거냐.. "살린! 저에요!" 살린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보다 나는 물에서 나는 소리가 신경 쓰이는데... 리무르는 어쩌나. "세이. 여기서 리무르를 지키고 있어. 흑 일행과 절대 헤어지지 말고!" 살린이 신성력을 쓰니, 별 문제는 없겠지. 나는 즉시 공중 부양을 시작했다. 뭔가..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뭔가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리아! 알트! 오른!" 한 쪽에서 소리가 답했다. 분명히 알트 목소리었다. "알트! 지금 갈 께요!" 즉시 안개를 뚫고 아래로 내려가자, 물위의 조각배 위의 세 사람은 애처롭게 한 사람.. 아니, 한 마족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쿠릴츠는 놀랍게도, 고전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선배!" 오른은 왠지 겁에 질려 있었고, 그의 팔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괴물이야...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지..." 쿠릴츠, 아니 프라운은 그야 말로 마법과 검술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소리를 질렀다. "전 상대가 안되요! 라플! 도와줘요!" 쿠릴츠가 상대가 안 되는 마족이라니.. 젠장. 즉시 비행마법으로 그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적을 만날 수 있었다. "이건 뭐냐...?" "모르지만, 강합니다. 라플. 부디 신중하세요." 그는 작은 소도를 들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건 마족도 아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물은 당연히 아니겠지. "그럼 갈까?" 나는 급히 화염마법 계열의 마법 주문을 외운 후 다섯 개 정도를 난사했다. 괴물은 아주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았다... 가만.. 아무 타격도? 반면... 그 화염은 다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바보 쿠릴츠... 저건.. 괴물이 아니야." 나는 베리어를 친 뒤, 즉시 빛의 마법을 사용했다. 거대한 빛의 구가 떠올랐다. 나의 예전 마력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엄청난 크기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서 그 빛의 구는 호수 위에 떠올랐다. "대단하군..." 쿠릴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빛의 구가 완전히 떠올라서 호수를 완전히 밝히고, 밤의 장막을 완전히 가리우자, 우리 앞의 괴물은 깨져 내렸다. "그림자였군." "그렇지. 뭐, 대단한 건 아니잖아? 그보다.. 문제가 있군. 다른 사람이 다 알게 되겠어." 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쿠릴츠는 나를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그래도, 당신을 방해할 자는 아무도 없지. 안 그래? 자.. 어서 친구들에게 가자고. 놀랐겠어." 당연히 놀랐지. 나는 그들을 마법으로 끌어서 육지에 댔다. 어느새 괴물도 케빈과 흑의 검에 죽어 있었다. 그건 그의 주장이고, 살린이 해결한 거 같았다. "다행이네. 다친 사람이 ... 있군. 내가 치료하면 되지 뭐." 살린이 웃으면서 치유마법으로 알트와 오른을 치료했다. 둘은 신관을 처음으로 봤댄다... "우린 평민이잖아. 그나저나, 프라오니스가 원래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넌 어떻게 된 거야?" 쿠릴츠에 대한 집중 공청회가 시작되었다. 쿠릴츠는 오랜만에 웃었다. "글쎄.. 왤 까나...?" 대체... 저 미적지근한 대답은 뭔지.. 하긴, 나 마족이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러지 말고.. 저게 없어지기 전에 가자." 이제 아홉으로 늘은 대부대는 우글거리면서 가운데 있는 낡은 오두막집 앞에 섰다. 그곳은 나의 추억이 어려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꼭 도굴꾼이 된 심정이군. "조심하는 게 좋겠어." 흑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군. 여기도 뭐가 있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나는 서서히 문을 열었다. 문은 아주 손쉽게 열렸다. 그리고 따뜻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법의 장작인가..." 절대로 연기가 나지 않고, 영원히 탈 수 있는 꿈의 신소재??? 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데.. 내가 가져다 논 기억이 나기도 하는군. "누가.. 있었던 거 같은데요? 여기 보면 노트도 있고.." 세이가 조용히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 시선은 오직 한 군데에 멈추었다. "왔었구나.. 그녀가." 희미한 결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가운데서도, 여긴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향기가 아주 희미하게 나고 있었다. 푸른 나무 향기. 그리고 이 불을 피운 것도 그녀일 것이었다. 안개 마법을 사용하면서, 혹시 이곳의 책들이 습 질까봐, 이런 행동을 한 것이리라.. "사랑만은 대단하군요." 쿠릴츠가 비웃고 있었다. 알트와 오른은 무척이나 신난 듯이 이것저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낙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꺄악...!" "겨우 번개 한 번 친 거 가지고 놀라냐?" 알트가 방그레 웃거나 말거나, 살린, 케빈, 흑, 쿠릴츠는 경계 태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의 약간 떨어진 곳에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왜 그러시는 거에요?" 세이는 책을 챙기다 말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리고 리무르는 다시 기절했고, 아마도 그것이 궁극의 귀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알트나 오른은 마법의 장작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실리아는 단지 밖의 그 정체 모를 그림자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채고 알트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음.. 알트. 미안한데, 문제가 생겼어." 쿠릴츠나, 살린이 느낄 수 있는 강대함이었다. 쿠릴츠.. 너 진짜 고위 마족인 건 맞냐? 심히 의심스럽다. 아무래도 아닌가봐. 말단 아냐? 하위 마족 말야. 어찌되었던, 위기임에는 틀림없었다. 과연 귀신인가 사람인가! 우리가 그렇게 한참 고민하고 있는 데, 그것은 아주 약간 움직였다. 그저 손이 약간 움직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이곳의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왠일이신가요?" 청아한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그러나, 빗속에서 서 있는 그녀는 전혀 신비감을 줄 수는 없었다. 점점 빗줄기가 거세지는 와중에 드디어 목소리를 들은 일행은 모두 그녀를 주시했다. "누구...죠?" 실리아는 리무르의 몸을 살며시 잡아 세웠다. 그래봐야 곧 기절할 꺼 같은데. 하하하..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답 할 리가 있나. "난 키히 크리시아 휘젠. 이곳 주인과는 각별한 사이이다." 즉시, 세이와 쿠릴츠의 시선이 자동으로 나를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저완 구면이시군요. 이렇게 있기도 그런데 식사라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휘젠님." 그렇게 말하자, 빗소리에 섞여서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후후후... 어리석은 건가요? 그대는 정말 재미있군요. 그의.. 혈연이라 해도, 전 용서하지 않습니다." 에.. 혈연 아니에요. 어쩌다가 내가 나를 위한 복수를 막는 입장이 된 거냐... "키히 크리시아 휘젠. 목적이 뭐지? 이런 식으로 라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인가? 인간을 개조하고, 실험을 하고 말야." 살린의 입에서 신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살린. 넌 한방이면 죽어. 조심하라고. "실험? 아.. 그 하찮은 것들을 이용한 것 말이군. 인간은 말이지.. 라플 외엔 아무도 의미가 없어. 되었나?"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붉은 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 없애주지." 그녀의 일갈과 함께 나는 황급히 사인을 보냈다. "그래도 배고프다고!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몰라? 키히." 방그레 웃는 나를 보고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스승님.. 농담이시죠?" 당연히 농담이지, 임마! "키히씨. 라플은 당신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배신으로 죽은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은빛이 번득였다. "흑!" 흑의 표창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비껴나갔다. 실체가 아니었군. "젠장!" "후후후... 그래요? 이거 보세요. 한때는 제 제자였어요. 그런데 이 모양이군요. 그에 비하면, 적은 얌전히 죽어주었으니 얼마나 좋지? 흑... 곤란해요. 호호호... 그래.. 내 복수는 라플에 대한 것이 아니야. 뭔가 오해하고 있군.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 무슨 소리지? 그녀의 손이 움직이자,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흑의 몸이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흑을 완벽하게 바닥에 내 던졌다. "세상을 다 파멸하길... 그렇게 되어, 나도 라플의 곁에서 쉬길 바란다. 그게 내 소망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사라졌다. 내 눈에선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쿠릴츠가 조용히 수건을 건넸다. "... 더럽잖아." "싫음 관두라고." 그날의 비는 지독하게도 3일 내내 내렸다. 그러나, 내 마음의 비는 그치지 않았다. 마왕은... 어떤 것도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마왕의 정의를 세상을 파멸하려는 자라고 둔다면, 키히가.. 지금 마왕인 것이다. 강하고, 증오에 가득 찼으며, 세상을 없애려고 하는 존재... "스승님.. 괜찮아요? 원래 옛 애인은 물에 씻어 보내고 지금은 다시 시작해야 할 때에요."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하고는 ... 날 염려하려는 건가? 우습군. "자.. 그럼 다시 돌아가자. 지금쯤 학원은 발칵 뒤집혔을 테니까." "이미 들켰는데요?" 살린이 황급히 마법구를 생성했다. "미안, 나와 케빈이랑, 흑, 세이는 돌아갈께." 이봐.. 니들만 튀냐? "우린 남는 게 좋아. 키히의 등장과 그녀의 음모를 이야기해야지." 이봐.. 언제부터 그렇게 용사 의식에 젖었어? 난 사양이라고! 율지스가 알면 반죽음이야! 뭐, 스승을 어쩌기야 하겠냐만.. 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알트. 좋은 생각이다. 역시 넌 훌륭한 꽃꽂이 동호회원이야." 으... 무슨 검술부 같은 거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야. 으.. "선배! 실리아는요?" 어이.. 지금 그게 애교냐! "우리 부원 모두는 훌륭해. 그보다, 저기 오는 거 회장일행이군. 한쪽은 선생일행이군." 그렇지.. 선생들 배에 탄 사람 중에는 당연히 율지스가 당당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서 있었다. "인사해야 하나? 밤이니까.. 음.. 통금도 어겼고.. 아, 금지에 가지 말라는 것도 어겼다. 어쩌나.." 나는 조금 색다른 문제로 고민했다. "이 가방의 먹을 것도 하나도 못 먹었잖아요." 모두의 시선이 가방에 쏠렸다. "그러고 보니, 배고프지 않아? 우리 밥이나 먹자. 젠장, 어차피 신전에 가면 밥도 굶길 거 아냐?" 이봐... 신전이라고? "그래도 괜찮아. 퇴학은 안 당할 테니까." 어이. 어이. "선배들은 무슨 빽 있어요?" 모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쿠릴츠를 제외한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이. 어이. "그야, 너가 있으니까. 주모자, 너에. 실행자 너. 어때? 선배를 위해 한번 참어라. 응?" 못살아... 으. 괜히 나만 나쁜 놈 되는 군. "제가 뒤집어쓸까요?" 쿠릴츠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오른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넌, 같은 평민이고, 당장 퇴학이라고. 자. 그럼 우리 밥이나 먹자." 태평한 인간들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한심한 인간들이라고 해야 하나. "프라오니스님!" 당연지사, 율지스는 거의 맨발...은 아니고, 여하튼 허겁지겁 내렸다. 그리고 곧장 나에게 달려왔다. "아, 율지스? 잠 못 자면 피부가 많이 상해." 그는 나에게 달려와서 나를 꼭 안았다. 어이. 제자가 스승을 안다니.. "잘 못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의 마력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 생긴 거라는 걸 알았을 땐..." 이 녀석도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이봐. 내가 위험에 처할 정도면, 마신하고 붙는 다고 생각해도 원만하다고. 뭐, 하긴 너야 반 마법이 특기니까... "괜찮으신겁니까? 공작." 선생들도 모두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사과 죽을 꺼냈다. "이거 드실 래요? 할 이야기도 많고. 맛있어요. 소화도 잘 되고." 이야기는 꽤나 길게 이어져서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율지스는 다른 선생과 함께 괴물의 시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율지스 역시 나의 수제자답게 나와 비슷한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키히가.. 말씀입니까?" 율지스는 인상을 찌푸렸고, 선생 한 명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키히가 여기까지 온다는 것은, 차후에 있을 시찰단에 대해서 더욱 엄중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거로군요." 에.. 또... "좋습니다. 어찌되었든,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려보냅시다. 그리고... 모두 처벌을 기다리고 방에서 근신하도록." 우리는 그렇게 율지스에게 인솔되어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청춘의 로망이여, 밝은 학원이여! 다 어디로 가고 칙칙한 괴물에, 어두운 생체 실험에다가.. 으.. 싫다! 나에게 밝은 학원을 돌려줘! "스승님. 부디, 자중하시고 계시길. 그럼." 문을 닫고 녀석이 나가자 나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아직 몸이 젖어 있었다. 별 생 쇼(Live Show)를 다했구나. "나도 참.. 늙어서는 이런 일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는데.. 이래서 용사를 적으로 돌리면 더 힘들다는 거군." 갑자기 혼잣말을 하다가 실소가 나왔다. 영지 생각도 절실하게 났다. 이게 무슨 일인지 백의 아가씨라면 잘 알 수 있었을테지. 휴... 16. 축제 마지막 그 순간에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대가 누구이던 간에, 내가 누구이던 간에, 나의 안식을 위해주십시오. 엘레메로스의 리본을 묶고 아름다운 처녀들의 환송이 들릴 듯 합니다. 오늘은 진정 아름다운 날입니다. 나를 위한 날이기도 하고요. 부디 신이시여, 나를 오늘 가장 아름답게 비춰지게 해주십시오. -기도문- 별 일 다 있는 시끄러운 시험기간이 지나고 드디어 발표일이 되었다. 뭐, 나도 약간 기대가 되었다. 얼마나 나쁜 점수가 나올지 왠지 궁금하기도 했다. "발표가 났대! 어서 가서 보자!" 나는 잠시 내 성적 앞에서 멈칫했다. 나쁜 점수가 아니었다. 뭐가 이상하냐하면, 모든 게 다 이상했다. 내 성적을 보니, 확실히 율지스의 성적은 씨 마이너다. 그러나... 수학과 이론은 비가 아닌가? "헤... 대단하네. 그렇게 수업을 빠지고도 그렇게 점수를 잘 받다니." 옆의 한 학생이 경이 적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이. 눈 나와. "참, 그러고 보니, 이론 수업 선생님이 너 좀 오랬어. 가봐." 이상해... 라는 얼굴을 하고 교무실로 갔다. 그곳에선 선생님들이 잔뜩 있었다. 당연하지만. "아, 프라오니스군. 여기 앉게." 의자를 빼주는 그에게 잠시 인사하고 역시 앉았다. "음.. 오늘 부른 건 말이네.. 다름이 아니라, 자네 이번 시험에 대한 것이네." 1번만 쓰고 백지로 냈다고 뭐라고 할려는 건가? "예." "음.. 그런데, 평소 마법이론에 관심이 많은가?" 응? 그야... 집필서로 몇 개정도 내고.. 그것도 다 젊은 시절 일이지만.. 요즘엔 조용히 산다. 뭐. "아니요.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음.. 그래?" 한참을 그렇게 우리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시간 보내기도 뭣해서 나는 양해를 구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손을 얼굴에서 떼고 심각하게 말했다. "어둠마법에 대해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더군. 사실, 근래 어둠 마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글쎄... 아직 알려진 건 별로 없지. 그런데.. 자네.." 윽... 실수했군. 왜 율지스가 얼굴을 찡그렸는지 알겠어. "예. 집에 책이 많은 데 예전에 너무 심심해서 읽은 적이 있어요." "그래도 대단해... 어쨋든, 어떤가, 내 밑에서 계속 공부해 볼 생각이 있나?" 없지. 내가 왜 너의 밑에서 하니? 너가 사정해도 안 해줄 판이다. 노인을 놀리면 못쓴다! "아뇨. 마법엔 흥미가 없어서요. 대대로 피스트레이카가는 무를 중심으로 여기거든요." 그제서야 선생은 납득하고 나를 보내주었다. 젠장.. 땀뺐다. "아, 자네. 잠깐." 으... 이번엔 또.. 수학이냐! "음... 대단한 성적이네.. 뭐.. 그 문제.. 사실 굉장히 어려운 거거든. 자네 앞날이 촉망되는 인재가 그런 식으로 수업을 빠지고 하면 못쓰니.. 다음부터는 꼭 나오도록 하게. 알았나?" 이런 식이었다. 결국, 순한 양처럼 나는 대답하고 교무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미로 보다 더 무섭구만." 난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방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달려갔다. 당분간 동아리엔 갈 수 없었다. 근신이잖아.. 이 기숙사와 교실 외에는 갈 수 없었다. 처분은 내일쯤 결정된다고 한다. 에이.. "스승님. 여기 계셨군요. 특보입니다." 율지스의 목소리는 뭔가 흥분된 사건이 있는 듯 했다. "무슨 일인데?" 그는 아주 싱긋 웃으면서 종이 한 장을 네게 주었다. "왕의 측근이자, 이 학교 이사장과 이사들이 축제에 맞추어 온다고 하는군요. 기회입니다. 왕이 과연 정상인지 아닌지 알아볼 기회죠. 그리고 키히와의 연계라든지, 이런 것도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워낙에, 저번 이사장이 죽은 계기가 좀 묘했거든요." 흠... 그랬던가? 너 탐정 하면 잘 하겠다. "그런데 이번에 그걸 알아본다, 이건가?" 율지스는 아주 그 답지 않은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흠... 녀석이 가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체 뭐가 문제지? 저번에 마지막으로 만난 왕은 분명 사지 육신이 멀쩡했잖아? 그런데 왜 그랬을까나... 갑자기 미쳤나? 이유를 도통 모르겠단 말야. "아, 프라오니스. 선생님한테 꾸중 많이 들었어?" 같은 반 학생이 방그레 웃으면서 다가왔다. 뭐야... 내가 이런 곳에서 왜 혼나야 하는 건데? 그럴 이유도 없다고. 나는 그 녀석을 가볍게 비웃어주고 몸을 으쓱거렸다. "아니. 별로. 그보다 우리 학교 축제가 언제야?" "우와! 축제! 얼마 안 남았지. 앞으로 겨우 일주일인걸? 맞다. 너 그 유명한 꽃꽂이 동호회잖아? 대체 뭘 할 꺼래? 평민 귀족을 통틀어서 가장 이상한 동아리잖아. 너가 들어감으로써 더 이상해지긴 했지." 그 정도였나? 하긴, 전직 용사파티가 둘이나 있고, 나머지 인간들도 그리 정상이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놈들이니까. "하하하... 그렇게 이상하지 않아. 한 번 구경와." "물론이지! 제일 재미있다고 그러던데? 작년에는 더 굉장했데." 식인식물 대전쇼라도 한 건 아니겠지... 친구와 이런 저런 신변잡기적인 내용을 주고받으면서 복도의 따사로운 햇살을 느꼈다. 아직 동아리 방에 가봐야 사람들이 있을 거 같진 않았다. "프라오니스?" 금발이 보인다 싶은 순간, 아름다운 그녀가 조용히 웃으면서 나타났다. 내 옆의 같은 반 아이는 순간 엄청 당황했다. "우와.. 엘메라인 선배 아니세요?" "그래. 프라오니스, 도시락은 잘 먹었니? 그간 보이지 않던데." 예. 근신 중이죠. 처벌은 아마도 축제가 끝나면 받게 될 듯 합니다요. 헐... "맛있었어요. 별로 먹을 시간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아, 선배는 무슨 동아리세요?" 그녀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면서 꺼냈다. 팜플렛이었다. "난 음악부에 들어있어. 이번엔 교향곡 연주를 하게 되었어. 쑥스럽지만, 난 독주도 해." 오..! 팜플렛엔 엘메라인 바이올린 독주라고 쓰여져 있었다. 멋져! "전 악기는 영... 모르는 데요." "그럴 거 같았어. 아. 친구들도 데려와. 여기 세 장 줄께." 근데 돈은 안 받나? 꽁짜 일리는 없는데 말야. 그녀가 계단으로 내려가고 옆의 친구는 갑자기 초롱초롱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오! 프라오니스! 제발 나도 한 장 줘!" 어이. 어이. "응. 그래." 뭐, 친구래 봐야. 음... 율리지스랑 세이 데려가면 딱 알맞네. 아까 한 장 주셨고. 뭐, 세 장이면 되겠지. "아, 나도 이젠 가봐야겠다. 우리 동호회 표가 있어. 자. 특별히 줄께. 공짜로 주는 거야." 녀석은 나에게 괴상한 표를 건넸다. 무료 시식권? 음식 조리부인가보지? "우와... 스승님!" 세이가 도서관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는 모르지만, 녀석은 최근 열심히 공부하는 듯 하다. "놀랬지. 크크크. 그래. 그 날 배고팠겠다." 그야, 그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튀었잖아. "예. 그래서 신전에서 간단히 요기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전 신전이 그렇게 소박한... 음식만 먹는지는 미처 몰랐어요. 세상에. 장난이 아니에요! 일단, 양념이 거의 없더군요. 음식 자체도 그냥 빵... 치즈, 스프.. 이 스프가 또 장난이 아니에요. 벌게 가지고 싱거운.. 그래! 붉은 물감 탄 맛없는 국? 여하튼, 다신 안 먹어요." 불타오르네... "그래. 그래. 자, 이거 줄께. 구경 가자." 세이는 당연히 이 표가 뭐 하는 건지 잘 몰라서 내가 친절하게 그 유명한 축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녀석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세이는... 모르겠어요." 으.. 귀여운 녀석. 음. 이번엔 율지스에게 표를 주러 가야겠다. 세이는 다시 책에 코 박고 공부를 시작했고, 나는 뭐.. 놀기 시작했다. 띵까띵까.. "뒹글기도 힘들다..." 그렇다. 동아리 방에는 당분간 출입 금지. 밖에도 돌아다니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럼 뭘 하라고! "프라오니스! 프라오니스! 여기야. 여기라고." 어두워지는 가운데 왠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보니, 세 사람이 방글거리면서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선배?" 쿠릴츠, 알트, 오른이었다. 이상하다.. 이들도 근신중인데. "어서 열어주기나 해. 들키면 정말 정학감이야." 여기서 죄가 더 추가 되도 뭐 큰 일이 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야. 창문을 조용히 열어 주자 셋은 조용히 들어왔다. "우와... 방 진짜 크다. 이게 이른바 특실이구나." 음... 크긴 크지. 원래 살던 오두막의 몇 배냐. "그래도 너가 살던 그 곳 보단 적잖아. 안 그래? 야.. 언제 우리 성으로 초대해라." 알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기 저기 쑤셔대다가 침대에서 뒹글거리기 시작했다. "아, 쿠릴츠. 새로운 사실이야. 이사회가 축제 기간에 도착한데." 쿠릴츠는 살짝 눈을 찌푸리고 오른은 큰 관심을 보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재미있는데? 근래 왕이 미쳤다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나도 미쳤다고 생각하고 말야." 정말 미치긴 미쳤나보군. 오른은 갑자기 의자에 앉더니 나를 응시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정상이었죠. 그런 소문이 돈게... 정확히는 대한민국과의 교전이 끝나고 나바스 황제가 떠난 뒤잖아요?" 알트가 갑자기 끼어 들었다. "그래! 넌 나바스의 그 황제도 봤겠구나! 무신이라고 불리 우는 그는 어떤 사람이야?" 에... 검은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꼬마? "그냥.. 선배들 정도의 나이에 어린 애에요. 뭐.. 그렇게 대단한 건 모르겠던데." 쿠릴츠는 조용히 침묵을 일관했고, 알트는 아주 왕족 계보를 묻기로 결심한 듯 했다. "프라오니스. 이사회가 노리는 게 뭐라고 생각해?" 오른 선배... 그렇게 흔들의자에 일어서서 말하면 하나도 안 멋있다고요. "노리는 거요? 그런 게 있다면 제가 더 놀라운데요?" 오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이번에 이사장에 취임한 사람과 이사가 된 사람들은 정말 왕의 실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야. 아, 엘메라인이라고 알지? 그 초 절정 미녀 말야. 실리아와 같은 학기잖아." 응? "엘메라인과 상관이 있나요?" "있지. 이번 이사장이 바로 트류바 남작. 바로 엘메라인의 아버지잖아." 그랬구나.. 호.. 뭔가 관련이 있다 이거군. "뭔가를 그녀도 찾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 내 생각엔 그 약재 창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프라오니스. 그곳은 지금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게다가 지하에는 우리 동아리 방이 있지. 그러니, 우리 부원 외에 다른 사람은 들어오기도 힘들잖아. 수업은 하지 않은 지 오래고." 확실히, 이야기만 들어보면 이보다 더 수상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군.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즉시 오른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깨달은 거지만, 오른은 의외로 날카로운 분석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확실히 그것을 정리하고 결론을 도출할지도 알고 있었다. "모르지. 뭐, 나하고는 상관없지만, 최근 일련의 사태가 아마도 두 파로.. 응?" 쿠릴츠가 즉시 침대 아래로 들어가고, 두 사람도 즉시 몸을 굴려서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어이.. 장정 셋이 들어가기엔 좀... 좁지 않나? "아, 아직 안 자나?" 율지스였다. 뭐, 이 녀석은 깐깐하니 들켜서 좋을 일은 없겠지. "무슨 일이야?" "아니요. 뭐, 별 건 아니고... 음.. 음..." 그게 아니라 무슨 고민이 있는 거 같은데. "말해 보라고. 나중에 닥친 다음에 알아도 별 소용없어." "예... 사실 저와 세이가 이번 이사장 일행을 호위하게 되었습니다. 걱정입니다. 전 사실 문제가 없지만, 세이 녀석은..." 세이는 마법력 자체는 결코 약한 게 아니다. 문제는 실전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지. "그렇군... 뭐, 대책을 세워 보자고. 가봐. 나 좀 자자." "예..." 율지스의 돌발 방문이 끝나고 나는 다시 세 명을 불렀다. 알트가 고개를 내밀었다. "갔어?" "그래. 나와요." 오직 알트만 꾸물럭거리면서 기어 나왔다. 어라라, 다른 사람들은? "선배들, 장난치지 말고 나오라고요." 알트가 살짝 웃더니 침대 아래로 가보라고 했다. 밑바닥에는 놀랍게도 작은 공간이 있었다. "이건...?" "아래로 이어져 있어. 신기하지? 쿠릴츠가 여길 열어 줬거든. 녀석, 정말 눈치 밥이 장난이 아니라니까? 우리 탐험이다! 탐험!" 하하하... 난 지금 그럴 정신이 없는데... 자고 싶다고. "어두운데요?" "그야. 아, 저기 있다." 쿠릴츠와 오른이 여기 저기를 살펴보면서 어두운 지하도에 서 있었다. "어서 와. 놀라운데? 특실이라 이런 곳도 있는 건가? 그런데.. 이상하지? 쿠릴츠?" 쿠릴츠는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이상하다고... "거미줄이 하나도 없잖아. 바보 후배야." 응? 거미를 사랑하나? 가만, 거미줄은 오래된... 어라라? 여긴 당연히 오래 되었을 것이 틀림없는데 아무 것도 없잖아?!? "누군가가 끊임없이 여기를 들락 거렸다는 결론이 나오지. 너가 여기 오기 전부터.. 음..." 기분이 더럽군. 스토킹 당한 거 아냐? "일단 조사해보자. 그러나 조심해야겠어. 일련의 괴물이 더 있을지도 모르잖아. 역시.. 그 때 없앴어야 했어." 오른이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약간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마왕이 바로 나잖아. "저기. 불에 그을린 걸 봐서는 오래 되지 않았어. 뜨거운 기운도 남아있고... 저쪽은 우릴 눈치챈 거 같은데?" 쿠릴츠의 목소리가 어느새 냉막하게 변해 있었다. 오른은 조용히 단검을 집어들었다. 검 같은 걸 가져올 시간이 없었지. "쿠릴츠. 너의 기술을 기대하마. 나오면 한방에 날려야 한다고." 괴물이라면 쿠릴츠가 날릴 수 있지. 그러나... "사람 인 거 같은데요? 괴물이 불킬 이유가 없잖아요." 알트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10분 정도 걸어가자 드디어 불이 켜져 있는 횃불에 도달했다. "조용히... 이제부터는 정말 조심해야겠어." 우리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왠 문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길은 그 문에서 끝인 거 같았다. "여기인가..? 누가 열지?" 쿠릴츠는 조용히 다가갔다. 그리고 문 옆에 서서 문을 서서히 돌렸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잖아?" 방은 고요했다. 아니, 침묵의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듯, 부딪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책이 놓여 있었고, 펜대의 잉크는 마르지도 않았다. 얼마 전까지 여기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밀폐된 방... 아무도 없는 방... 누군가 정체 모를 사람의 존재... 가만...? "당장 나가!" 내가 오른을 떠밀고 문을 향해 뛰었다. 기괴한 울림이 들리고 나무로 만든 문이 즉시 닫혀버렸다. "젠장! 함정이야!" 쿠릴츠가 인상을 쓰면서 문을 열자 그 뒤로 오직 돌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글쎄... 천장을 올려다보고 대충 짐작이 갔다. 이 작은 방에 이 방의 주인이 우릴 가둬 버린 것이다. "젠장.. 어떻게 나갈 방법이 없나?" "소용없어. 반 마법 주문이 발동되기 시작했어." 쿠릴츠가 건조한 음성으로 낮게 말했다. "그럼 우린 이렇게 갇혀야 하는 거야?" 잠시 혼란이 지나가고, 책상 위에 있는 책들을 살펴보았다. 갈색 표지의 책이 왠지 눈에 익었다. "이건...?" 책을 펼치자, 마법의 종류에 여러 가지 배합들이 쓰여 있었다. 고급 마법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기도 하는 책이다. 이상해.. 왜 이게 여기 있지? "이 글씨... 되게 잘 썼군." 깨알같은 글씨로 여러 가지 해설들이 쓰여 있었다. "이건... 키히의 학기 교재잖아?" 오른이 아는 척하자 알트가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본 적 있는데?" 알트는 베젤의 학기라서... 그 책을 봤을 리가 없는데? "맞아. 살리아가 제일 어려운 교재라고 투덜거렸잖아. 숙제도 많고." 쿠릴츠가 냉막하게 중얼거리고는 손은 여전히 여러 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와 쿠릴츠만 있다면 물론 아주 손쉽게 움직일 수 있지만... "저런 덤들이 있어서야..." 쿠릴츠는 잠시 나를 보고 살짝 미소지었다. "한가지 알 수 있군. 이걸 만약 어쩌지 못하면, 우린 굶으면서 여기 이렇게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 하하하... 젠장. "축제도 못 보고 말이지." 알트는 한층 더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녀석, 그게 꼭 하고 싶었나 보구나. "그보다는 여기를 조사해 보자,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쿠릴츠가 그리고선 벽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나는 책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방은 구조 자체도 간단한 편이었다. 침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잠을 여기서 잔다는 건 아니다. 식기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밥도 안 먹었다는 말이지. "쿠릴츠. 좋은 생각이 났다. 너가 저 돌을 부시는 거야!" 어이. 어이... 그런 짓을 하면 당장 우린 정말 정학 당해. "이곳의 원래 주인이 사라졌던 방법을 사용하면 나갈 수 있을 거에요." 나도 그 생각했어. 그러고 보니 이 책장이 수상해... "이거야. 여기 바람이 통하고 있어." 책꽂이를 움직이자, 거기엔 작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쿠릴츠가 제일 먼저 그 곳을 통해 기어 나갔다. "다음은 알트, 나, 프라오니스.. 이러면 되겠다. 아, 뭔가 증거물을 챙겨가." 갈색표지의 책을 품에 넣고 즉시 출발했다. 구멍을 따라 한참 기어가다 보니 어느새 어떤 방에 다다렀다. "여긴... 이사장실?" 쿠릴츠는 먼저 온 사람답게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방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뭐, 청소는 매일 했을 테니까... "누가 와." 쿠릴츠가 문에서 귀를 떼면서 말했다. 어이.. 그런데 어디로 숨으라는 거야. "젠장. 어쩌지? 여긴 숨을 데도 없다고." 쿠릴츠는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조심해. 이 마법은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으니까. 게다가 제한시간이 있어." 어둠의 마법의 영창이 끝나고 우리의 모습은 사라졌다. 각자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행여 움직였다가는 서로가 보이지 않기에 부딪히게 될 위험도 있었다. "그렇지... 좋아. 들어가게나." 이 보이지 않게 하는 마법은 다 좋은데 엄청 불안하군. 제발 시간제한까지 나가 줬으면 좋겠지만.. 역시 무리가 아닐까나? 그럼 들키면 연기를 뿌리고 사라질까나? 음... 무리군. 그런데 대체 누구야? 어라라? "교장 선생님.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교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를 뒤적거려서 꺼냈다. 여긴 분명 이사장 실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 그래서 나도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 키히의 탑에 접근할 만한 어떤 대책도 없고. 안 그런가? 엘메라인?" 그녀는 바로 엘메라인이었다. "여전히.. 식물 때문에 접근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그곳의 학생들이 전체가 다 근신 중이라서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아예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도 가능할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대충 감은 잡을 수 있겠군. 우리가 엄청 방해가 되는 모양이지? 그야.. 쿠릴츠표 식충 식물은 상당히 껄끄럽겠지만.. 가만, 마법사가 어쩌지 못할 수준은 아니잖아? "베데일은 아직도 거기 매달려 있고... 난처하군." 매달린 사람은 그 밤마다 살아난다는 그 사람? 한패였어? "전 그 사람이 싫어요. 너무 수상한 점이 많습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낫겠어요. 율지스는 우리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겠죠?" 이젠 내 제자에게도 마수를 뻗친다, 이건가? "무리야. 율지스는 뭔가 더 수상해. 뭔가를 알아보러 다니는 거 같더군. 분명 그의 마력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뭐, 할 수 없지." 수상한 분위기 물씬이군. "베데일을 구해서 그 비밀을 푸는 수밖엔 없습니다. 이사장 일행이 오기 전에 해결해야 합니다." 엘메라인은 그리고 그녀의 화려한 금발을 살짝 쓸어 올렸다. "그래. 죽을 줄도 모르고... 후후후.. 아, 그래. 여기 이 서류가 있군. 그리고 쥐새끼는 처리했나?" "일단은 가둬 놓았습니다. 하지만... 빠져 나왔을지도 모르겠군요. 워낙에 유능한 자 아닙니까?" 나 말이지? 음... 나의 진면목을 알아주다니. "그렇지. 그 때도 우리의 포위망을 가볍게 뚫지 않았던가? 흑... 대단한 놈이야." 어이. 난 흑이 아닌데? "일단 나갑시다. 아직 준비할 것이 많으니까요." 둘은 다시 방을 나가고 잠시 주문 영창 소리가 들리더니 투명 마법이 사라졌다. 오르는 갑자기 흥분했다. "들었어! 역시, 우린 음모의 중심에 서 있는 거야!" 휴.. 정학과 표창장 사이를 오간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그럴 시간이 없어요. 어서 갑시다. 일단 동아리 방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정말 그곳을 노린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죽지도 않는 인간을 완전히 없애야 하는 거 아닙니까?" 쿠릴츠는 사뭇 긴장했다. "그래. 어서 가자." 이사장 실을 빠져 나와서 설설 걸어서 우린 이윽고 호수로 갈 수 있었다. 일단, 모든 건물은 호수의 주위를 뺑 둘러져 있으므로 호수를 따라 걸어도 바로 갈 수 있다. "대체... 녀석들의 목적이 뭐지?" 모르지.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있겠어? 그리고 동방에 다 왔군. "어서 들어가자. 어? 누가 있나 본데?" 방문을 열자, 실리아와 리무르가 있었다. 둘은 차를 마시면서 담소했다. 어이, 지금 근신 중 아니었어? "실리아, 누가 오지 않았어?" "응? 아니. 전혀. 그보다 며칠 파리를 안 줬더니 난리도 아니더라고. 하필이면 다 시들 뻔했잖아." 그렇지.. 우린 식물을 키우는 동아리었지.. 그게 비록 끔찍하고, 희귀하더라도. "전 가서 살펴볼께요." 나는 쿠릴츠와 함께 지하의 식물이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방안에는 역시 약간 시들어서 노릇노릇한 잎들이 생긴 것들이 가득했다. "쿠릴츠. 저거 봐. 가와세리크야." "그렇군요. 놀라운데요? 마족도 드나들 수 있겠어요." 흠.. 마족이라. "그럼 동쪽 숲에서도 올 수 있나?" "아마도. 그런데.. 설마, 그들에게 수호를 부탁하실 생각입니까?" 안 될 것도 없지.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어? "그럼.. 그건 너가 알아서 해. 내 모습 보여서 좋을 건 없잖아. 안 그래?" "예. 그럼." 쿠릴츠 혼자 방에 떼어놓고 나는 다시 동방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린, 축제에 할 일들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음.. 연극 같은 건 식상하고, 이번에도 식충 식물 박람회를 할 수는 없잖아?" 실리아가 인상을 찡그리고 말하자, 오른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내게 기발한 생각이 있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적들에게 틈을 주는 거야. 이거 어때? 식충 식물 뚫고 최고층까지 가기. 상품은 뭐가 좋을까?" 어이. .어이. "재미있겠는데? 그럼 확실히 놈들도 올 거 아냐? 여기 정말 뭔가가 있다면." 씨익 웃는 그들을 보고 나는 잠시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이게 대체 뭣 하는 짓이람... "좋아. 이벤트 준비는 쿠릴츠가 도맡아서 하는 게 좋겠어. 우리도 올라가기 힘들잖아. 그리고... 프라오니스는 그래. 표를 판매하고 나랑 리무르는 장소 설정 허가를 받아 볼께. 음.. 아, 맞다. 오른 선배는 알트와 막간 여흥, 상대방의 식충 식물 물리치는 법을 약간만 보여주세요." 쿠릴츠는 어둡게 웃고 있었다... 어이. 마족에게 그런 걸 맡기다니 니들이 제정신이냐! 그리고 저 녀석.. 틀림없이 무슨 식인 식물이라도 만들어 놨을 꺼라고. "자... 그럼 흩어지자!" 우리 무슨 테러단 같아... 흩어져서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 왔다. 상당히 미심 적은 곳이었지만,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곳으로 다시 올리는 만무했다. 그보다.. "설마, 엘메라인이 적이 될 줄은..." 뜻밖이었다.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준비라... 잠이나 자야겠다." 내가 할 일은 하나도 없잖아? 실리아가 제작한 표를 나는 그야말로 가서 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가. 대 마도사이며, 이 학교의 설립자인 내가 이런 데서... 표를 팔아야 한다니.. 그것도 애들의 장난감이 되 가면서 말이지... "너무 귀엽다. 나도 한 장 줘. 꼭 올라가 봐야겠다!" 신났군. 그래. 좋겠다. 나는 이런데서 표나 팔란다. 흑.. 흑. "내일이지? 우와. 너무 멋있을 거 같아. 상품이 회원중 한사람과 데이트라니! 꺄악!" 끄악이다... 지금 지명도 순위를 보면... 내가 일 위, 오른이 이 위, 삼위가 실리아이다... 쿠릴츠가 꼴지... 어두워서 싫다나? 어둡고 자시고, 제발 나를 이 악몽에서 구해 줘! "나도 한 장 줄래?" 눈앞이 잠시 조용해진다 싶더니 엘메라인이 그 아름다운 자태로 돈을 내밀고 있었다. 걸려들었다고 생각해야 하나? "네. 저.. 누굴 지명 하실래요? 일단 먼저 지명하고 나중에 상품을 받는 거거든요." 그녀는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짓더니 내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무슨 짓이야! "너로 할래. 후훗. 그럼. 잘 있어. 아, 내 공연 꼭 보러와."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건데.. 크흑. 알트가 다가와서 웃었다. "음.. 좋아해야 되는 건가? 어때? 학원 최고 미녀에게 고백 받은 기분은?" 이 나이에 고백 받아서 기쁠 이유가 없잖아... "나도 널 지명하고 싶은데. 안 될까?" 갑작스런 라이벌 등장이라는 표어가 어디선가 흘러 다니고 있었다... 알트, 뭐 하는 거냐. 지금. "아, 아피르 선배님. 안녕하세요? 오랜 만이시네요." 간만에 등장한 그 선배는 방글거리는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알트는 역시 연적 등장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표어를 내 걸고 있었지만... "네. 게임 룰에 대해서 설명해 드릴께요. 먼저, 탑의 각 부분에는 저희 회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명 받은 사람이 많을 수록 더 높은 곳에 있겠죠? 그리고 저희 회원들을 만날 실 수 있으면 데이트 가능입니다. 호호호.. 그런데, 한가지 유의하세요. 아주, 위험하고, 위험합니다. 만에 하나 저희 회원의 도움을 받으면 취소입니다. 그럼 권투를 빌어요!" 사악한 거 같은데...왠지 우리 회원들 만으로도 살아남기 힘든 곳 아니었어? 지금이야 뭐, 다 식충 식물.... 가만, 지명 많이 받은 사람이 위에? 그럼 나는 당연히 꼭대기 층 아냐? 이런 젠장! "그럼 쿠릴츠는 모두를 인솔하는 역할을 해줘. 보이지 않게. 가능하잖아. 안 그래?" "그러지. 회장. 그럼... 아, 프라오니스. 조심해." 그는 그 말만 하고서는 바로 사라져 버렸다. 이 탑은 총 10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위 에서부터 회원이 배치되니까... 10층은 나, 9층은 오른, 8층은 실리아, 7층은 리무르로 되어 있다. 뭐, 사실 7층까진 위험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배들이 괴상한 장치를 해 놓지 않았다면 말이지. "자, 그럼 우리 회원 여러분은 어서 올라갑니다. 그리고 참가자 여러분은 쿠릴츠군이 나와서 가도 된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리고 알트. 알지?" 알트는 동아리 방을 지키는 역사적 사명을 띄게 되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자는 거지. 늙으면 계단 올라가는 게 싫어진다. 그렇다고 뭐 별 수 있나? 우리 일행 끼리 올라가는 데 갑자기 오른이 말했다. "아, 맞다. 잊지 말고 너 그 녀석은 꼭 처리하도록 해." 그 녀석? "누구요?" "아, 왜. 죽여도죽여도 살아나는 녀석. 그러고 보니, 지금쯤 그 좀비와 한 패거리인 녀석들 꽤나 당황하고 있을 꺼야." 그건 그렇군. 그들이 만들어 놓은 괴물들이 버티고 있는 곳에 학생들을 동원한 이벤트라... "음.. 그나저나, 이 식충 식물들은 대체 다 뭐 에요?" "아, 그건 식충 식물이 아냐. 그냥 사람을 잡아서 올려놓는 거야. 식물인데... 이렇게 후추를 뿌려주면 가만히 있어." 별... 시런 걸 다 보게 되는구만. 그리고... 가와세리크가 많이 있는 건 또... 쿠릴츠 녀석의 취향인가? "자, 벌써 7층이다. 리무르. 무서우면 언제든지... 알지?" 오른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네. 선배. 걱정하지 마세요. 괴물이라면 몰라도... 얘들은 제 아이들 인걸요?" 누가 누구의 아이들이냐... "다음은 실리아로군. 자, 그럼 기다려." 나와 오른 선배 둘만 남았을 때, 어느새 9층이 되었다. 올라갈 수록 점점 어두워 지고 있었다. 보통은 환해져야 하는 거 아냐? "음... 일단 너가 있을 곳까지 다녀오자." "에?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오른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 녀석 묶어 놓은 줄을 아예 끊던지 해서 없애버려야지. 뭐, 그게 최선인 거 같다만... 그래도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 않겠어? 찝찝해서 원..." 최상층은 우리가 떠났던 그대로 고요에 잠들어 있었다. 복도에는 간간히 식충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몇 개는 아주 위험한 독을 품고 있다고 한다는데... 이런 위험한 이벤트를 열어도 되는 거야? "음.. 이방이군." 바로 약재창의 문을 열자, 창문은 열려 있고, 끊어진 줄이 흔들리고 있었다. 몸이 굳어 왔다. "도망갔나 본데요?" "그걸 어떻게 혼자 푸르냐? 아마... 다른 사람이 풀어줬다든지. 응?" 우린 동시에 기척을 느끼고 뒤로 돌아섰다. 쿠릴츠가 서 있었다. 젠장.. 이래서 마족들은.. "쿠릴츠? 여긴 왠 일이냐? 그리고 제발 소리좀 내면서 다녀." 쿠릴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거... 제가 처리했습니다. 얘기한다는 걸 깜박 했군요. 절대로 다시 그를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충 짐작이 가기는 했다. 무슨 마계나, 차원을 아예 분리해서 보냈다든지.... 아주 분자까지 소멸시켰다든지.. 그렇겠지? "음... 그래? 어떻게?" "예. 신전에 보냈습니다. 뭐, 지금쯤 가루가 되어 있겠죠." 하하하.. .너, 마족은 맞냐? 쿠릴츠와 오른이 계단으로 사라지자, 나는 방의 한 구석에서 오도카니 앉아서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단찮을 건 없는 곳이지만... "키히라..." 그 때 오두막에서 키히의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어딘지 아니었다. 그건 키히가 아니라고 확신 할 수 있다. 어두운 가운데서 모습을 보지도 못했고... "누구지? 에휴.. 고민한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으.. 세이나 데려 올 것을." 요즘 녀석이 도서관에서 사는 바람에 재미없단 말야. 에잉. 에잉. "그럼 다른 방이나 살펴볼까?" 서서히 어둠이 키히의 탑에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두워.. 어두워.." 점점 심심해 지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법 학교라서 그러지는 몰라도 아래서는 끊임없는 폭파음이 들리고 있었다. 이거... 이벤트 후엔 정말 정학 당하는 거 아닌가 좀 의심스럽군. 어쨋든 아직 처분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말야. 키히의 집무실로 사용되던 방의 문을 열자, 책과 종이 냄새가 물씬 풍겼다. 공기 청정 마법도 걸려져 있지 않았다. 음... 키히는 내가 모르는 얼마의 시간을 여기서 보냈을지를 생각하면... 그래. 슬퍼졌다. "응? 이건...?" 붉은 색 표지를 가진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이건... 예전에 어떤 저주받은 마법사가 쓴 책으로, 마법을 이용한 생체실험 같은 것들이 아닌가? "설마... 아니겠지." 그 책을 덮고 서류로 눈이 갔다. 아마도, 그녀는 그녀가 축출 당하기 얼마 전까지 이곳에서 일을 했던 거 같다. 아마도... 그 땐 이곳에서도 수업을 하고 있었겠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학생들을 이 탑에서 수업하지 않게 되었지? 단지 반란자의 이름을 딴 곳이라서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베델의 가문 역시, 한 때는 공작가였지만, 반란자로서 축출 당하지 않았는가? "뭔가.. 이유가 있었겠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누구지?" 죽은 이사장도 알 가능성은 있었지만, 희미했다. 마치 무슨 퍼즐의 조각이 들어맞는 생각이 들었다. "?" 그 때, 내가 있는 곳까지 들릴 정도의 강력한 폭음이 들려왔다. 적어도 중급 이상의 사용자의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냄새는...? "젠장!" 황급히 문을 열고 나는 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눈앞에는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이 서 있었다. "아, 학생. 여기 있었군." 반쯤 녹아 내린 듯한 모습으로 분명히 쿠릴츠가 보냈다던 그 마법사가 서 있었다. "별로 위생적인 모습은 아니시군요." 그는 약간 남은 입으로 웃어 보였다. "설사, 나를 다 녹여도 죽일 수 없는 데 말야. 어리석은 것들. 지금쯤 나를 찾느라 난리가 낫겠지. 뭐. 넌... 대체 누구지?" 손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래층이 걱정인데 이 녀석과 농담 따먹기 할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이놈은 그것이 틀림없었다. "라플이라고들 하더군." 잠시 정적이 지나가고, 점점 폭음이 거세게 들려 왔다. 놈은 피식거리더니 점점 큭큭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 정말 재미있군. 여기서 라플을 지칭하는 자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몰랐어. 뭐, 좋아. 여길 본 자는 죽어야 한다. 알지?" 그의 손에는 검은 마력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암흑 마법을 사용하는 것인가? "넌... 마족의 피를 섞어서 만든 괴물이군." "그래. 성공체 중 하나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죽어다오." 나는 그저 그를 주시하기만 했다. 그의 검은 구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서히 나에게 부딪힌다고 생각되는 순간 바로 소멸해 버렸다. 그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어떻게...! 어떻게...! 반 마법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야... 너에게 아주 조금의 마족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해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거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한가지 묻겠다. 키히가 그랬나?" 그는 뒤로 세 걸음쯤 물러났다. 그리고 대답했다. "키히? 누구냐? 그건. 난 더 위대한 분에게 명령을 받았지. 후후후... 좋아. 좋아. 마법이 안 통한다면 이게 있지!" 그의 손에서는 작고 날카로운 비수 하나가 나왔다. 나는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마법의 족속이여, 암흑의 자식이여. 이제는 다 흙으로 돌아가라!" 마법은 아니군. 정확히는 의지의 실현이니까.. 뭐, 이게 제일 빠르잖아? "뭐냐.. 뭐냐.. 이건.. 으아아악!" 그의 비명이 탑에 울렸다. 잔인한 모습이었다. 피가 그의 몸에서 하나 하나 빠져나가 탑에 스며들었다. 그는 그 잔혹한 모습을 유지한 채 완전히 다시 인간이 된 것이다. "다음부터는 이 방법은 쓰지 않는 게 좋겠군. 하하하.." 검은색의 오로라가 펼쳐지는 듯 했다. 어두웠다. 잠기고 싶다. 아니다.. 아니다.. 단지 이건... 으.. .괴롭다. 어두운 함성들.. "스승님!" 정신이 들었다. 계단을 열심히 뛰어서 율지스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왜 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율지스구나." 나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꼭 감싸않았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키히의 침실이었다.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옆에는 내 바보 제자 둘이 먹을 것 가지고 치사하게 싸우고 있었다. "넌 아직 어리잖아. 그러니까, 이거 먹고 떨어져!" "웃....기지 말아요! 그리고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 엘프는 그 나이에는 애나 다름 없더라고요! 이 먹보! 이건 사형이 아냐. 그리고 전 이게 더 좋단 말이에요! 연어 찜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세이 녀석아.. .목젖 보여. "나도 연어찜 좋아하는데. 뭐, 제자들이 먹고 싶어한다면 어쩔 수 없지. 에이.. 늙으면 그저 죽어야지." 그리고 밖으로 몸을 돌리자, 율지스가 삐질 거리면서 접시를 내밀었다. "이거요. 드세요. 스승님, 몸은 좀 어떠세요? 완전히 기절 하셨잖아요?" 나는 연어를 냉큼 오물거리면서 말했다. "응, 그건 니들이 아래서 하도 탑을 흔들리게 하길래 울렁거려서 그랬어. 뭐, 몸은 말짱 하다고." "살린이 걱정하더라고요. 과로에 걸린 건 아니냐고." 아.. 그렇구나. 과로도 있었구나. 그 동안 혹사당한 걸 생각하면... 음? 그러고 보니, 뭔가 중요한 생각이 났었는데? "아,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완전히 까먹었네? 그나저나, 키히의 탑에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있어도 되는 거야? 그리고, 어떻게 된 거야?" 율지스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하더니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올라가고 율지스는 바로 세이와 함께 듀엣으로 나를 지명하고 접수했단다. 그리고 나서 일행들이 우르르 몰려가는데 문제가 터진 것이다. 7층에 갔는데, 리무르는 보이지 않고 괴물만 우글거려서 놀라서 녀석들과 교전하다 폭음이 났다고 한다. "그런데, 녀석들이 죽여도, 죽여도 더 나타나더군요. 그래서 열 받은 김에 더 팍팍 써 댔죠. 그 때 안 건데... 세이 녀석, 의외로 강하던데요?" 내가 강하댔잖아. "그래서, 어떻게 올라 온 거냐?" "갑자기 녀석들이 쓰러졌어요. 그리곤 사라졌죠. 어떻게 된 건지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살린이 조사하는 중일 거에요. 그리고 스승님이 있는 곳에 올라왔더니, 왠 처참한 시체 옆에 스승이 아주 어두운 모습을 하고 서 있잖아요? 그래서 무서워서 스승님을 불렀더니, 갑자기 뛰어 오시더군요. 그리곤 기절." 손짓으로까지 보여줄 내용이었냐? 그리고 그... 황홀한 표정은 뭐냐? "그래서... 내가 이 상태라 이거지?" "예. 역시, 스승님은 나이만 어른이지 겉모습은 애인 것처럼, 아직 보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요. 그러니, 조심하세요. 세이가 졸졸 붙어 다니게 할 테니까." 이봐... "알았다. 다 나가봐라. 살린이나 도와주라고." 둘이 나가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 스승의 은혜를 개떡 같이 아는 녀석들을 봤나!!! 감히 어디서 나를 보호하려 들어? 니들 똥 지저귀는 아니더라도 업어서 키웠다 임마! "두고보자..." 왠지 살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지만.. 공기가 미약하게 좀 떠는 것 같았지만.. 무시한다. 그리고 나중에 좀 일이 수습되자, 다시 키히의 탑을 학습용으로 사용하기로 결정이 났다. 당연히 키히의 학기의 사람들은 기겁했고, 동아리 회원이 괴물을 처치했다는 단 한가지 사실로 선생들을 위협해서 맨 윗 층과, 지하는 동아리 차지가 되었다. 과연 기뻐해야 하는 건가... 그 동안의 일은 나중에 묻기로 하고, 지금은 푹 자고 싶었다. 키히의 방인가? 헤헤... 좋다. 보고 싶다. 키히... 17. 시찰단 사람들 마법 학원의 처음 시작은, 라플이 지었다고 한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트라이너의 마법 역사가 있었다. 그걸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대 마도사 라플인 것이다. 그 전에 라플이 지은 학원은 원래 무슨 용도의 건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아마도 신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무슨 신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금은 공공연히 믿어지는 신이 아니라, 고대의 다른 신이었다고 한다. 이름은 현재 당근정도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후 다른 이름들로 바뀌어 졌다. 그래서 근대에 믿어지는 신 이름이 되었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 신전의 아주 기본적인 결계 구조를 땄기 때문에 마법학원은 그야말로 튼튼한 건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결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엘 베가의 사서(史書)에서- "누구라고?" 맑고 상쾌한 아침, 나의 인상은 극도록 찌그러지고 있었다. 율지스의 말에 따르면, 만나서 별 해는 없겠다고 한다고 하지만, 그게 해충이 아니고 사람인데 해가 없을 거라는 거 자체가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게 아닌가? "이 학교 현 이사장입니다. 공작님을 뵈러 왔다고 하더군요." 음... 그 엘메라인의 아버지 말인가? "율지스... 그가 왜 나를 만난다는 거지?" 율지스는 내 이불을 끌어 덮혀 주면서 계속 조잘거렸다. "그야, 피스트레이카 공작을 만나서 손해 볼 껀 없으니까 그렇겠지요. 아니면, 그도 라플의 유산이라는 거에 눈독을 드리는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 제 스승님이 그런 걸 할 정도로 위대한 사람은 아닌데 말야... 예전에 한 그 시덥지 않은 예언이 전부 아니었나요?" 예언? 나는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나를 책망했다. "역시, 치매군요? 자기가 한 예언도 잊고. 구원기사에 대한 예언이요. 예전에 한 적 있잖아요." 구원기사? 아.. 항. 알았다. 그거 말이군. 그거야.. 나도 일종의 마왕에게서 신탁을 받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가만, 지금은 내가 마왕이잖아?!? "아. 맞아. 생각났어. 하지만,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전해. 별로 기분이 내키지도 않고. 알았지?" 율지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고, 이번엔 세이가 구수한 냄새가 나는 그릇을 들고 왔다. 누워있으니 좋군.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스승님, 이제 일어나실 때도 되었잖아요. 설마.. 율지스 형 말처럼 지금 어리광부리시는 거에요?" 나는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다. 놀랍게도 녀석이 연어 죽을 해 주었다. 오옷! "맛있다..." "역시 멀쩡하잖아? 율지스 형이 호들갑 떨길래 얼마나 아픈가 했더니... 그리고, 우.. 스승님은 저보고 좀 더 성실 하라고 하시면서 대체 학원에는 입학해서 며칠이나 나간 거에요? 율지스 형이나, 스승님이나, 세이의 사고 회로로는 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요." 후후후. 그야, 너와 나의 인식의 차이가 아니겠느냐? 나나 율지스는 아무래도 오래 살아서 아는 게 많은 거지. 후후후! 거의 너의 인생의 다섯 배를 살지 않았냐? "그만 종알거리고... 그래. 살린은 뭐 좀 알았대?" "네. 그 밤만 되면 살아나는 게 숙주였다나 봐요. 일종의 마왕 시스템이라고 하던데요? 만에 하나 마왕이 죽으면 그 몸에서 나온 모든 마족은 소멸하잖아요. 그리고 마왕의 힘이 다른 마족에게 넘어가는 의식이 치뤄진다고 해도 거의 죽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낀대요. 아셨어요? 후후후... 그리고 그 숙주가 죽자, 구심점을 잃은 괴물들이 사라졌다는 거래요. 놀랍죠?" 그야... 놀라긴 했지만... 음... 모르진 않았다고. 내가 마왕인데.. 아, 마왕에 대해선 아는 게 없지. 대 마도사 라플께선 말이지.. 너 보단 적어도 마족에 대해 잘 안다. "그래? 흠... 그랬군. 살린 좀 불러줄래?" 얼마 뒤에 살린이 들어왔다. 살린은 여지껏 살펴본 내 경험에 따르면 한번도 농담을 한 적이 없는 거 같다. "어서 와 살린. 오늘 부른 이유...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 살린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럼. 당연하지. 드디어 네 정체를 알았어." 역시.. 인가? 입에서 작게 씁쓸한 미소가 나왔다. "그래... 그랬구나..." 왠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린은 내가 마왕이라는 걸 알아차렸나 보다... "넌.. 역시.." 살린의 몸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삽질을 시작했다... "네 처분에 모든 걸 맞길께." 나는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 녀석이라면 안심할 수 있지. 그래... 설사, 나를 죽이고, 혹은 봉인해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넌 역시!" "그래.." "용사였던 거야!" "그래.. 나는 용사.. 응?" 살린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충격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무섭게 나를 몰아 붙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넌.. 그래. 넌 신이 내린.. 그 라플의 예언에 있던 구원기사야!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라플의 후예인데다가 네 녀석은.. 그래. 그 엄청난 마법, 뛰어난 검술.. 역시.. 역시 그랬던 거야!" 어이.. 어이... 이 녀석... 대체.. "아... 정말 탄식이 우러나와. 내가 용사 파티에 있다니! 오! 왜 진작 이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난 정말 어리석었어!" 이봐.. "저기.. 살린.." "아무 말도 필요 없어. 어서 정신이나 차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다시 건강해지라고! 자...! 가자! 마왕이 우릴 부른다." 그리고 휙 나가 버렸다... 이봐.. 마왕은 난데...? 그리고 라플도 나야. 설마 내가 나를 예언하니? 으... 대체. "응? 살린 어디 갔어?" 케빈이 잠시 뒤에 들어왔다. "몰라..." 왠지 힘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래? 흠.. 녀석, 널 용사라고 하던데? 난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응? 케빈..! 너가 왠 일이냐!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초롱초롱 광선을 뿜어내자, 녀석은 나를 보고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응. 라플의 재래." 나는 이불을 썼다. 왠지... 더 피곤해 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 소리가 울러 퍼졌다. 나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왠지... 왠지는 모르지만, 잠이 잘 온다. "쉿... 깨지 않게 해." 당연한 말이지만, 노인이 되면, 잠이 얕게 드는 데다가 잠귀가 밝아진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120세라는 건 잊지 않았지? 후후후.. 왠 놈들이냐? "여기 없는 거 같아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작게 속삭이는 거라고 당사자들은 그러는 거겠지만, 내 귀에는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흠... 여기 없고.. 혹시 침대 아래에 있나?" "설마." "혹시라도 모르는 가능성을 포기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서 뒤져보자." "그러다 깨면요." "... 없애 버려야지." 이 소리를 아주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오... 날 죽인데! 하고 도망갔겠지만.. 난 그럴 이유가 없다. 일단, 이들이 날 죽일 수 있을 가능성도 없고,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두운 구석에 이들보다 몇 갑절은 더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또 실현할 수 있는 녀석이 그림자 마법을 사용해서 음산하게 서 있었다. "여자.. 하나... 남자.. 넷..." 음산한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아마, 아까의 없애 버려야지에 감동을 받은 듯... "무슨 소리 들렸지?" 남자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괴물들은 모두 죽었어." "맞아요. 이럴 때가 아니에요. 헛걸 들은 거에요." 음... 저 사람이 마법에 대한 방어 작용이 제일 강하군. 하지만... 말이지. 주변을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림자가 여섯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말야. 쯧... "여긴 무슨 일이시죠? 이사장님." 이번엔 마법을 실은 것이 아니라, 확실한 목소리였다. 단, 허공에서 들리긴 했지만. "으악! 뭐야?" 한 남자가 엎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겁도 많다.. "다 깨겠어요. 조용히 하세요."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다섯 명은 조용히 둘레를 살펴보기 시작하다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깬 걸까?" "깨워 보면 되지." 한 남자가 내 어깨를 막 잡으려고 하는 찰라, 갑자기 손에서 피가 솓구치기 시작했다.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마." 이번에 아주 옆에서 들렸을 것이다. 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수준이었지만.. 그치만... 내 이불에 피 튀기는 건 안 보이냐? "왠 놈이냐! 귀신이면 당장 모습을 드러내!" "귀신이면 사라지라는 거에요." 여자의 친절한 설명이 곁들어졌다. 나는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났다. "이 밤중에 절 만나러 오셨나요? 이사장님.. 그리고 이사님. 그리고 교장선생님. 엘메라인 선배님도 계시군요." 잠시 모두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았다. 참고로, 난 누가 이사인지 모른다. 목소리를 듣고 대충 짐작 한데로 찍은 것뿐이다. "날... 아는군." 엘메라인 선배처럼 금발을 가진 사람이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저 둘이 이사군. 음.... 한 명은 손에서 피가 나오는 걸 간신히 지혈하고 있었다. "이불이 엉망이 되었네요. 무슨 일 이신지..." "그야... 자네도 알겠지만, 라플의 유산을 찾으러 왔네." 잠시 나는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유산에 사람들이 정말 목숨을 거는 구나... 일단, 그 사람이 죽어야 유산 아냐? 완전히 이거 날강도로군. 내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유산 내놓으라는 건 내 재산을 내 놓으라는 거 아냐? 음... 괜히 열 받는 군. "음... 라플이 죽었다고 누가 그래요?" 잠시 다섯 명의 밤손님은 침묵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비린내 제거 마법을 이불에 걸고 라이트 마법을 사용했다. "자, 다들 앉아요. 쿠릴츠... 너도 그만 나와. 괜히 귀신 흉내 내지 말고." 귀신처럼 한 놈이 스르륵 나타났다. 쿠릴츠는 여전히 사람 심장 얼어붙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게 저 녀석 본 모습이지. 좀.. 열 받은 거 같군. "난 이 놈들의 뼈를 갈아먹고 싶어." 이봐... 친구. "그러지마. 그래도 맛 하나도 없어. 요즘 골다공증(뼈에 있는 칼슘이 빠져나가는 병이다... 음.. 우유나 멸치를 잘 씹어 먹으면 예방 가능한 병이다.) 문제가 심각하다던데.. 너도 그거야?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어." 녀석을 이내 입을 삐죽거리면서 아주 딱딱해 보이는 의자 몇 개를 소환했다. "자. 그럼 앉아." 거만하다... "음... 그럼 한 사람씩 자기 소개를 하는 게 어때요? 요즘 계속 내리 며칠을 잤더니 잠도 안 오고 하니... 심야 토론이나 하죠." 그렇게... 그날의 심야 토론이 막을 열었다. 토론자는 나, 쿠릴츠, 이사장, 이사둘, 교장, 엘메라인이었다. 먼저 쿠릴츠가 입을 열었다. "난 쿠릴츠. 이 학교 평민 반 학생이다. 그리고... 너희들을 죽이고 싶어." 그리고 왠지 아주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강타했다. "제대로 해." 녀석은 다시 입을 비죽이면서 말했다. "젠...장. 나는 쿠릴츠. 원래는 프라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특정한 이름은 없고, 본명은 아마도 프라오니스 밖에는 몰라. 아는 놈들이 여럿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프라오니스가 다 죽였어." 왠지.. 엄청난 토론회가 될 거 같군. "그리고.. 뭐, 여기서 너희들이 오는 걸보고 살기가 치솟았다. 뭐, 그 정도야. 가족은... 없고. 아, 여기 프라오니스가 내겐 아버지 같은 존재야. 그럼 된 건가?" 나는 얼른 끼어 들었다. "취미는 뭐야?" "취미? 핫... 농담하는 거야? 당연히 죄 없는 사람 괴롭히기지. 하하핫." 녀석이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내용은 별로 밝지 않았지만... "그럼.. 내 소개를 하지. 난 프라오니스 피스트레이카. 바르하잔의 기사단의 맹주이기도 하지만... 예전 같이 많은 기사단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대마도사 라플의 손자라는 소문이 무성하지만.. 절대 아니라는 걸 밝혀두고 싶군. 그리고... 밀접한 관련이 있기는 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뭐, 용사라는 농담을 살린이 하더군? 하하핫. 취미는 세상 구하기야. 예전 일이지만.. 지금은 유동식 만들기? 뭐.. 이 정도군." 쿠릴츠녀석이 끼어 들었다. "살린 녀석.. 농담이 아닌 거 같던데? 내가 너의 부하라고 하자..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용사에겐 원래 사람이 따르는 법이라나? 웃기는 놈이야... 뭐, 재미있긴 했어." 그랬군.. 진심이었어.. "무슨 장난을 하려는 건지 몰라도... 난 엘메라인 트류바야. 남작가의 유일한 딸이지. 여기 계신 분이 내 아버지시고. 취미는 없어." 삭막한 인생이군. "난 트류바 남작이다. 그리고 이 학교 이사장이기도 하지. 그리고... 취미는... 없다." 부녀가 똑같이 재미없는 사람들이군. "난 교장으로 있는 로미너스다. 트류바 남작님과는 오랜 친구이지." 흠... 그렇군. 다른 이사의 이름은 구트, 포레스라고 했다... 뭐, 다들 별로 자신에 대해 구구절절 밝히기를 꺼렸다. 뭐, 당연한가? "좋아요. 이렇게 정다운 소개를 하니 얼마나 좋아요? 자. 그럼 여기 오신 목적이란 게 라플의 유산이라고 하셨는데... 라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요?" 내가 방글거리자, 트류바 남작은 인상을 썼다.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120세겠지. 그게 사람이냐?" 사람 맞아.. 아, 마왕이라고 해도 원래는 사람이잖아? "음... 죽었다고 누가 그래요?" 내 이 순진한 얼굴을 보자, 엘메라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확실히... 임종을 본 사람은 없었지.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거야, 댁들 생각이고... 쿠릴츠가 한마디했다. "라플은 살아있어.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라플은 단지 대 마도사이기만 한 건 아냐. 그는 이미 예전에 인간의 기준을 초월했어. 안 그러면 마왕을 봉인할 수 없었지." 어머머... 쿠릴츠. 나를 그렇게나 높이 평가하고 있다니! 놀라워.. "하지만, 우리에겐 그의 유산이 필요해요. 그가 살아 있다면, 그를 만나서라도 받아야 해요!" 엘메라인 선배...무슨 생각인 거야? "그래서, 저를 죽이려고 했나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쿠릴츠가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거봐. 살려둘 필요가 없어. 너가 왜 엘메라인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지는... 아.. 그렇군. 닮았어." 눈치 챘군. "아니에요! 잠깐 기다려요! 좋아요. 좋아. 사실대로 말하죠. 우린 당신을 의심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 의심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무슨 의심? "무엇을 말하려는 거지? 내가 여럿 죽이기라도 한 거 같나?" 나도 왠지 미소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깍지 끼고 초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련의 괴물이... 나타난 것. 우리는 그게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듣고 있었죠. 사람 같지 않은 엄청난 마력을 소유하고, 그 거대한 방어막을 혼자 쳤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죠. 나바스의 황제가 마법 황제라면, 그대는 절대마법 무위 능력도 없으니.. 틀림없이, 인간이 아닐 것이라고.." 이봐.. 내가 왜? "동기가 없잖아요? 제가 무슨 이유로 괴물을 풀겠어요." 사람을 죽이는 그런 귀찮고 제자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을 내가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군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 사악한 마법사라고." 잠시 나는 웃을 수밖엔 없었다. 쿠릴츠 녀석은 아주 구르고 있었다. "푸헤헤헤!~ 너가.. 너가 세계를 정복해? 우 하하하.. 이거야말로 특급 농담이다! 우 하하하... 그 자식 누구냐? 정말 나를 천년만에 웃기는 군! 우 하하하..." 쿠릴츠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웃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웃고 있었지. "사악하데! 허허허.. 이거 참... 재미있군. 누가 사악? 우 하하..." 간만에 웃었다. "웃지 말아요! 그럼 아니라는 거에요?" 나는 간신히 웃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쿠릴츠는 구르고 있었다... "당연히 선배.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는 당신 쪽을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뭐, 그리고 제가 세계 정복을 꿈꿨다면 진작에 했죠. 그리고.. 일단은 그런 귀찮은 일은 할 생각이 없어요. 우 하하하.. 사악..? 그래요. 사악. 좋아요. 하지만, 전... 제자 키우는 입장에서 그런 건 안 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쿠릴츠와 함께 웃었다. 다른 다섯 인은 황당해 했다. "아니, 그럼 대체 그 강대한 마력은 뭐지? 아직 나이도 어린데..." 간신히 웃음을 진정하고 한 명의 이사의 의문을 풀어주어야 했다. "음.. 그건 말이죠. 이런 명언이 있죠. 보이는 것만 믿지 말고 속을 보라는. 그게 딱 적당하군요." 쿠릴츠도 한마디 거들었다. "차라리 나보고 세계 정복을 꿈꾼다고 하면 진지하게 고민했을 꺼야." "웃기지마. 쿠릴츠. 넌 평생을 종이학 접기 하는 게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잖아? 그리고 세계 정복하면 음모를 꾸밀 거리가 없어지니 싫어하잖아?" 쿠릴츠는 역시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다른 의문은 없나 모르겠군. "좋아요. 다른 의문은 뭐죠?" 이번엔 교장이 물었다. "그럼.. 전대 공작과는 아무 관련이 없나?" 잠시 여기서 나는 기분이 극도록 나빠졌다. 그야... 녀석이 키히와 한편이 되었으니까.. "있죠. 당연하게도. 녀석의 원래 선조가 피스트레이카 집안의 집사였는데... 라플이 집을 비우면서 그 집사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했습니다. 대신 공작 행세를 하게 된 거죠. 그리고 나서 제가 나타났고, 녀석을 저를 양자로 맞이하더군요... 뭐, 지금은 키히와 손잡고 있지만..." 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트류바 남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왜, 자네와 함께 연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거지?" 그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그건 개인의 프라이버시... 알려드릴 수 없죠. 단, 힌트는 드리죠.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사하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미소-쿠릴츠는 이게 제일 싫다고 했지만..-를 지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아니군요. 우리의 목적은... 구원기사를 만드는 거에요." 잠시 나와 쿠릴츠는 벙쪄 있었고, 쿠릴츠는 뒤집어지게 웃기 시작했다... 아..하. 녀석, 오랜만에 정말 배꼽이 뒤집어지게 웃는구나... 아에 구르는 구나. "크 하하하! 정말 세상은 재미 있구만! 구원기사! 라플이 헛소리한 농담을 믿는 놈이 정말 있기는 있구나! 음 하하하!" 당연히 엘메라인은 인상을 썼다. "대 마도사님을 욕하지 말아요. 당신들은 그의 발톱의 때만도 못하니까!" 라고 했지만... 쿠릴츠는 더욱 구를 뿐이었다. 라플이.. 나잖아. "음.. 그건 넘어가고. 왜 구원기사를 만든다는 겁니까? 이해할 수 없군요. 찾으면 되지. 뭐 하러 만듭니까? 그리고 만들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아주 불쾌한 얼굴을 했다. 대답은 이사장이 해 주었다. "음... 그건 국가 기밀이긴 하네. 자네도 물론 국가 최고의 위치에 있는 공작의 입장이네만. .아직 나이가 어리고, 많은 사람과 친하지 않아서 잘 모르고 있겠지." 그야... 왕도에 와서 매일 같이 전투에 시달렸으니까. 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그래. 징조가 나타났지." 징조? "설마, 붉은 달과, 피가 강을 이루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실 셈이라면 집어치우시지. 우헤헤... 아.. 웃기다." 나는 가볍게 녀석을 패고, 다시 집중했다. "그런 일이.. 일어 났나요?" 이사장은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나는 다시 반문했다. "어떻게 그렇게 일어났죠? 그런 일이 가능 할 리가 없잖습니까? 일단, 붉은 달은... 사실 달이 붉게 되는 건 먼지 때문이죠. 가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붉은 강은 불가능해요. 피가 어떻게 강을 이룹니까?" 이사장은 침묵을 유지했고, 엘메라인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우린 이 예언을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붉은 달은 요즘 들어 일정 주기를 보이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주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죠. 하지만, 왕성 내에서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랬나? 이상한 일이긴 하군. "피가 강을 이룬다는 건요?" 그녀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사실, 달이 붉어지는 게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당장... 무서운 일은, 바로 피가 강이 되는 일이죠.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거니까." 나는 잠시 옆에 있던 냉수를 들이 켰다. 시원한 느낌이 온몸을 감돌았다. "그럼.. 누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네. 수천의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죠. 그리고... 아직 원인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강물인 거 같아요." 그제서야, 살린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수도에 정체 불명의 그 병이 돌고 있고... 그래서 탑에서 약재를 가져다가 치료법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병을 치료하려면 아무래도 약재의 조합 법을 알아야 하고, 그걸 아는 사람이 현재는 살린 뿐이지 않은가? "흠.. 그거라면 이미 치료법이 있습니다. 살린이라고... 신관의 에네브인 그는 알고 있죠. 이쪽 학원의 신관으로 와 있습니다." 이사장이 갑자기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 넌, 그 병명을 안다는 것인가? 그것도 치료법을 알고 있단 말이야?" 그야.. 아저씨.. 흔들지마. 어지럽단 말야. "예. 물론이죠. 그 병명은... 마력 중독 현상이에요. 그리고... 잘 못 되면 좀 안 좋은 결과가 생기기도 하죠. 만약 제때 치료하지 못하고, 무슨 계기가 발생하면, 괴물이 나타나죠. 음... 아마도, 엘메라인 선배는 보셨죠?" 엘메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동시에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흠... 역시, 문제가 심각하긴 하군. 나야 뭐.. 별 상관없는 일이지만." 쿠릴츠는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이내 사과를 깍기 시작했다. 어이.. "그럼 그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건가? 일반 시민들이?"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그런... 그렇게 심각하단 말인가? 그런 게 한 마리만 수도에 나타나도 당장 혼란이야!" 음... 죽이는 법은 알고 있지만. "숙주를 찾아서 없애야 해요. 문제는, 그 숙주는 그냥 검으로 찔러 죽였어도, 다시 밤이 되면 살아나죠. 제가 그거 없애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그리고.. 음.. 맞다. 말도 해요. 아마 사람이랑 똑같을 겁니다." 한 이사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면서 탄식 섞인 소리를 했다. "그럼..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이 사람이 오히려 우리편이고, 설마... 데롤 장관이 숙주인 거 아냐? 그 때... 맞아! 거의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멀쩡히 다음 날 나왔잖아! 자객을 없앴을 때.. 모두... 알지?" 데롤 장관? 그게 누구야? "에... 전 그런 건 잘 모르지만. 일단 살린에게 가서 약 만드는 법을 알아보세요. 그리고.. 아마도 상류에서 마족의 피를 방류하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그것도 알아 봐야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메라인 선배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그야.. 라플이니까, 하면 미친놈 소리 듣겠지? "저희 영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입을 꼭 다물자, 일행은 한밤의 토론을 마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정말 데롤 장관인지 뭔지가 그러한 존재라면, 저들로는 좀... 째지 않을 까나? "쿠릴츠는 어떻게 생각해?" 쿠릴츠는 방그레 웃었다. "키히라면, 좋은 게임이 되겠지. 그녀는 원래 머리가 비상했으니까. 아마도 쉽게 이기긴 어려울 꺼야." 그렇겠지... 사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고. 일단 사람들을 치료해도, 강물을 먹지 않을 방법은 없다. 예전의 사례인 우리 영지만 해도, 우물을 정화해서야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정화라는 게 말은 쉽지. 물 전체를 소독한다는 건 사실 일반 신관들도 힘이 든다. 살린의 말처럼 사람 하나 정화하면 하루 힘이 땡... 이라고 했지 않은가? "어쩐 다냐..." 쿠릴츠가 예의 마족 같은 미소를 지었다. 마족 맞군. "걱정마. 너는 그거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녀석을 흠씬 패 주었다. 내일은 축제나 구경해야겠군. "그런데 한가지... 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엘메라인이 아침 일찍 나에게 다시 찾아왔다. 이 처자는... 잠도 없나 보다. "아훔... 왜요?" 내가 무슨 뭐든지 척척척 말해주는 사람이냐? 젠장. "정말.. 라플의 예언에 따르면 구원기사가 나타나야 하는데... 정말 나타날까? 그리고 유산은 없는 거야?" 이봐. 정말..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지? "라플의.. 그 예언 자체는 원래가 사람들의 경각심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어요. 다시는 마왕에게 자신의 정신과, 모든 것을 팔지 않도록. 그래야만 세상에는 평화가 오지 않을 까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리고 구원기사는 장차 마왕 후보생에게 한 말이었죠. 나타나면 너는 죽어.. 라는.. 그리고, 유산은 없어요. 있다면, 저도 좀 보고 싶군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근래의 상황이 안 좋아지는 걸 보면, 정말 구원기사가 있었으면 해." 하하하... 그런 일은 없다고... 그리고 예언은.. 사실 진실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 주체가 키히가 될 줄은 난 몰랐지. 뭐. "자, 선배. 구경 안 해요? 날씨도 좋고. 아직 선배네 구경을 하지 못했어요. 바이올린 독주.. 기대되는 데요?" 그녀는 그제서야 안색을 폈다. "그래. 오늘이야. 꼭 구경와." 뭐랄까?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저 얼굴을 한 사람에겐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정말... 닮았다니까... 나도 참... 너무 하는군. 자.. 그럼 일어나 볼까나?" 근 삼일만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아리 실로 갔다. 이번 괴물 사건으로 인해 우리 동아리의 인기 상한선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어떤 식이냐 면... "다음에 신입생은 기대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무슨 영웅 양성소로 생각되어 지더라고. 젠장." "들어와도 사이코겠지." 오른과 알트가 중얼거렸다. 하긴, 나래도 무지막지한 괴물과도 아무렇지도 않게 싸우는 부에는 그리 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른, 알트 선배는 구경 안 다녀요?" 둘은... 나를 바라보고 글썽거렸다. "맛있는 거 사줄께! 자, 우리도 이 칙칙한 동네에서 나가자!" 어이.. 신났어? 그러고 보니, 실리아와 리무르는 보이지 않았다. 바쁜가 보네. "그럼 그 ... 뭐냐, 실리아와 리무르 선배는 어디 계세요?" 내가 묻자, 잠시 두 사람은 멈칫 했다. "아.. 그게... 너도 알잖아? 원래 우리가 이벤트 상품으로 데이트 걸었잖아... 7층이나, 8층까지 같이 간 사람 중엔 리무르와 실리아 지명한 사람도 있었거든... 그런데. .그런데.. 9층엔 아예 두 사람밖엔 없었고.. 그나마 두 사람 다 내 지명도 아니었거니와, 여자도 아니었지." 오른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트는 원래 카운터였고.. 뭐, 우리 남자들은 이렇게 쓸쓸해 진 거지." 가만, 내 지명? 율지스잖아??? 그럼 난 내 제자랑 데이트하라고? "전... 남자인데요?" "응? 뭐.. 율지스 선생은 별로 상품엔 관심이 없던데? 너로선 다행이지 뭐. 그럼 우리끼리 놀러나 가자. 젠장! 누구는 지금쯤 재미 나겠는데 말야? 에후휴." 별로, 그럴 거 같지는 않지만... 뭐, 그러려니 해야 하겠지? 축제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색색의 풍선에, 학교답지 않게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다. 이곳의 축제는.. 난장판을 생각나게 했다. "우와! 선배! 저기 봐요! 호수에서 분수도 쏘나 봐요?" 가운데 호수에서 물기둥이 솟구쳤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몇몇 사람들은 박수도 쳤다. 갑자기 오른이 박수치다 말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런 계획은 없었는데.. 깜짝 공연인가?" 곧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싶은 바로 그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고, 그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는 수밖엔 없었다. 호수에서 거대한 기둥이 솟아올랐고, 그 위에는 어제 본 그 이사 둘이 매달려 있었다. "젠장!" 순식간에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누가 호수 한가운데 떠오른 그들을 구하러 가겠는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 이사장이 보였다. 그와 교장은 사색이 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내가 묻자, 이사장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지... 찾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앗! 물이!" 호수는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예언 대로인가..." 교장의 입에서는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흔들고 나는 부양 마법을 사용했다. 사람은 많았고, 이런 걸 사용하면 안 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프라오니스!" 알트 선배가 외쳤다. 그 외침을 무시하고 두 사람이 매달린 곳으로 떠오르자, 얇은 막 같은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었다. "물... 인가? 젠장!" 즉시 그 막을 마법을 이용해서 터뜨렸다. 오렌지색이었다. 이 마법의 특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키히..." 두 사람은 켁켁 거리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물이 튀기고, 내 입에도 약간 들어갔는데... 비릿한 냄새가 났다. "켁...켁... 으..." 둘을 부양 마법으로 띄워서 호수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괜찮은 건가?" 이사장이 심각한 어조로 뛰어와서 말하고, 교장은 즉시 두 사람의 배를 눌렀다. 물을 많이 먹은 듯 싶었다. "괜찮아요. 아직은.. .하지만, 곧 안 좋아 질 테니 준비하시는 게 좋아요. 계기 이야기... 했었죠?" 이사장이 약간 띠벙한 표정을 짓자, 나는 이내 한 사람의 윗옷을 벗겼다. 그의 옷이 젖혀지자, 거무튀튀한 살점이 드러났다. "이게.. 뭐지?" "곧 정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그 괴물처럼 되요. 그럼 물러서세요." 주변에선 사람들의 소음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이젠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정. 화. 의. 빛. 이. 어. 둠. 을. 정. 화. 한. 다] 그들의 주위로 탁한 공기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호흡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점점 검은 색의 살점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정화가 끝나고 나는 조용히 옷으로 이마를 닦았다. "생쥐가 된 꼴이군." 씁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율지스가 알면 동동 뛰겠군... 뭐,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지만. "이보게! 괜찮나?" "그래.. 쿨럭.. 젠장. .죽는 줄 알았네. 그.. 그래. 누가 날 뒤에서 쳤어. 분명히 어떤... 여자 같았는데? 목소리도 들었던 거 같아." 이사들은 이내 정신을 되찾았지만, 매우 힘든 듯 했다. 저 멀리, 나의 수호천사임을 자처하는 닭탱이 제자1호, 율지스가 분노의 사신으로 화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이.... 이... 멍청이!" 녀석의 분노의 쫑알거림을 밥 먹는 내내 들어야 했다... 아.. 너도 늙어봐라 임마.. 젠장. "미안.. 미안하다고. 으... 오늘 저녁에 혹시 시간 있어?" 화내던 녀석이 갑자기 귀가 쫑긋 거렸다. 마법으로 작게 해도, 움직일 수는 있나보지??? "있지요. 근데 왜?" "아.. 별건 아니고... 오늘 무슨 연주회가 있는데 마침 표가 있어서.. 너랑, 세이, 나. 이렇게 삼 인이 가면 되거든. 세이 한테는 너가 전해 줘. 알았지?" 녀석은 어느새 방글거리고 있었다... 역시 애맞군. "예~ 전.. 연주회는 가본 적 없거든요. 하하하.. 그럼." 어느새 휙 나가버렸다. 아이구... 다시 교장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아, 여기 있었군." 교장이 웃으면서 반겼다. 어이. 댁들이 우릴 죽이려고 했던 건 잊은 거 아니지? "무슨 일로...?" "아, 자네 동호회원의 처분을 결정했네. 신전에서 이주일간 봉사하라는 거지. 이거에 물론 깊은 뜻이 있네. 자네나 쿠릴츠 군이었던가? 두 사람은 신전에서 더 이상의 이 저주받은 병의 근원을 찾아보라는 거지. 물론, 그러면 우리가 처리하지." 음... 말은 쉬워도.. "하긴, 어차피 수업도 빠지는 판국이니. 하하핫... 그런데.. 신전 측은 절 좋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자네 뒤에는 전하가 계시는 셈이 되니까. 아, 설마, 자네 전하가 미쳤다든지.. 하는 걸 믿는 건 아니지?" 못 믿을 이유도 없는데.. 뭐, 일단은. "전에 봤을 땐 멀쩡 하셨어요." "그래. 그래. 그럼. 이만.." 교장과 헤어지고 바로 율지스와 약속한 호수 앞의 프라운 관 앞에 갔다. 베젤의 관에서 연주회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베젤 관까지는 금방이니까.. 그리고, 호수 앞에는 절대 물 마시지 말 것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뭐.. 그렇게 말 안 해도 아무도 안 마신다... 참고로, 여기 식수는 예전에 내가 만들어 놓은 정화의 샘의 물을 사용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곳의 양이 딱 학원 사용량 밖에는 안 된다는 점이다...다시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러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뿐더러, 마력의 고갈도 엄청나다... 하지만, 마력은 문제가 아니지만, 시간이 문제다. "녀석들.. 감히 간뎅이가 부었군. 스승을 기다리게 하다니.." 서서히 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설마, 녀석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요즘 세상이 뒤숭숭하니.. 설마, 괴물에게 공격이라도 당해서 고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냐.. 아냐. 녀석들 실력이 왠 만한 마족 보다 낫다고. 내 제자잖아.. 아냐.. 아냐. 어쩌면.. 그래, 물에 빠졌을지도 몰라! 아.. 내가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만에 하나 잠자다 늦었다든지.. 라고 하면 다 ... 끝이다. "스승님!" 세이와 율지스가 뛰어오고 있었다... 겨우 내 마음에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야? 왜 이리 늦었어?" 으르렁거리는 나를 보자, 율지스는 이내 식은땀을 흘렸다. "에..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서요." "응? 뭔데?" 율지스는 그저 묵묵히 웃기만 하고, 세이가 대신 대답했다. "별 건 아니고요, 스승님이 엘메라인에게 반한 거 같다는 게 율지스의 말이에요. 얼토 당토 않지 않아요? 스승님과 나이차이가 얼마인데. 안 그래요?" 응? 반해? 야.. 너는 죽일 뻔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냐? ... 뭐, 그렇지는 않구... 단지..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일 뿐이야! "스승님? 설마, 진짜에요?" 세이는 토끼 눈이 되었다. "아냐. 임마. 어서 가자. 늦겠다." 율지스의 수상해 눈초리를 받으면서 생각했다.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나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녀가 좋은 이유를 알면 그녀는 나를 틀림없이 싫어할 것이다. 그녀는.. 놀랍도록 키히와 닮아 있었다. 외모가 닮은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키히의 성격과 닮았다. "시작하려나 봐요." 감미로운 선율이 베젤의 관 강당에 울러 퍼졌다. 나는 과연 키히를 잊을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 할 것이다. 그녀를 알게 되는데는 겨우 3년이 걸렸지만, 잊게 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애써 잊으려 했는데... "우와. 엘메라인 선배, 이쁘기는 무지 이쁘군요.. 흠... 하지만 그래도 스승님이 아까워요." 세이야.. 웃어야 하냐? "그건 그렇지." 율지스도 동조했다. "설마, 율지스는 엘메라인이 싫은 거야? 보통 정상적인 남자라면 미인을 좋아하는 게 정상이야." 그는 인상을 썼다. "그녀의 분위기가, 키히와 닮아서.. 별로 좋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키히와 만난 적이 있죠. 그녀는 물론, 제가 스승님의 제자라는 걸 모르지만요... 일종의, 동질감이 느껴지긴 했습니다." 왠 동질감? "무슨 소리냐?" "음... 한 사람의 인간을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제가 알고 있고요. 스승님은 어떠십니까?" 갑자기 왠 사랑타령? 이 녀석이 돌았나? "글쎄... 난 지금까지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는 한다." "... 그래서 전 스승님을 존경합니다." 헛소리를 시작하더니, 헛소리로 끝나는구나. "그래서, 동질감이 뭔데? 이 스승을 궁금증에 파묻어 버릴 셈이냐?" 그는 작게 웃고 있었다. 뭐랄까? 초탈했다. "동질감이란, 일종의 한 인물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는 거죠. 물론 제 경우엔 사랑이 아니라, 존경 이지만요." 세이가 끼어 들었다. "이런 스승이지만, 존경하고 계시는군요! 오.. 전 사형을 존경합니다. 윽.. 왜 때려요!" 당연히 날 존경하지 않는 인물은 너 정도밖엔 없을 꺼다. "흠... 그런데, 키히와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오늘 날, 그녀가 이렇게 될 것을 눈치 챘느냐?"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는 그저 조용하고 아름다운 여성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죠. 아마.. 그녀가 이상하게 된 건.. 베젤 가문을 쳤을 때부터 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때, 모두가 배반했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르죠." 흠... 그런 숨은 사연이 있다니.. 평생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위제스도.. 배반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 하지만, 그걸 누가 알려 주었지? 이상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그래.. 그렇군. 아, 이번에 나는 신전으로 가게 되었다. 아마 한 1주에서 2주정도 있어야 할 거 같아." 세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율지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신전은.. 피스트레이카가를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신전의 권위와 힘을 무너뜨린 게 라플이니까요." 그런가? 흠... 아, 그렇구나. 우리 파티에도 신관을 하나 늘 것을.. 쯔.. "별 수 없지. 아... 음악은 하나도 못 들었잖아?" 내가 투덜거리자, 율지스와 세이는 입만 쭉 내밀었다. 원체 이 녀석들은 음악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니까.. "이제 인사하네요." 우렁찬 박수소리가 들리고, 앵콜이 외쳐졌다. 엘메라인과 눈이 마주친 것은 그 때였다. 그녀는 놀랄 만큼 아름답게 미소짓고 있었다. 키히와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키히와 같은 광기의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리고, 그녀의 손이 바이올린에 다시 닿고, 그 기묘한 소리가 울러 퍼졌다. 엄청난 굉음이 객석을 맴돌았다. 그리고.... 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키히다.. 젠장!" 서둘러서 베리어를 발생시켰다. 율지스와 세이에게는 무리였다. 일종의 거대한 방어막을 일시에 생성시키고, 율지스에게 정화 주문을 준비하라고 했다. "서둘러서 정화를 시작한다! 세이는 율지스를 도와!" 여긴 당연히 신관이 없다. 기껏 있는 신관 에네브이자, 살린은 현재 교장 일행과 함께 신전에 있을 터였다.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줄이 하나 둘 튕겨져 나갔다. 사람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것마저도 아름다울 정도였다. "넌.. 항상 나를 방해하는군. 너가 설사, 그의 손자라 하더라도, 너를 다음에 만나면 살려 두지 않는다고 했는데.. 잊었나?" 나도 이번엔 할 말 있다. "전.. 피해 온 건데요?" 그녀는 잠시 아주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그녀 옆에서 연주하던 사람들은 괴물로 변신해 갔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괴물은 뛰어 올라 베리어에 몸을 박았지만, 뚤릴 리가 없었다. "강하군... 넌." "예. 키히님." 율지스가 내 얼굴을 놀라 바라보았다. 왜, 그녀가 좋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우는 거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중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괴물들은 점점 더 날뛰기 시작했다. 숙주는... 이곳에 있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눈이 매워서 그렇습니다. 키히." "그렇구나.."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라플이 죽었다는 확신도 없는데요." 그녀는 놀라울 만큼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그가 나를 막으러 왔겠지.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꼬마야." 나는 절규하고 있었다. 내가.. 라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나의 본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이나, 율지스나, 심지어는 마왕에, 마족까지 나를 알아보았는데.. 오직 그녀는 날, 알아보지 못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넌 날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끝까지.. 당신을 막을 것입니다." "그것도 재미있군." 그녀는 미소짓고, 사라져 갔다. 율지스가 정화를 시작하자, 괴물들은 다시 사람이 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이미 시체였다. 죽은 자들을 이용해서 괴물을 만든 것이다... 아니, 괴물을 만드는 동안 죽었던 것이다. 어느새 옆에 세이가 다가와 있었다. 녀석은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인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그래도 스승님을 알아봐 주는 저희가 있잖아요. 그러니... 실망하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힘이 되어 드릴께요. 저흰 결코, 스승님을 배반하지 않아요.. 잉..." 그 다음 말을 하고 나한테 얻어 터졌지만.. 뭐, 그래도 왠지.. 그리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스승님이 불쌍해..." "감히 스승을 능멸하다니.. 너 좀 맞아라." 그래서, 그 날의 아름다운 연주회는 나와 키히의 비극을 그리듯이... 슬프게 마쳐졌다. 이미 죽은 단원을 위해 친구들은 눈물을 흘렸다. 나도.. 울고 싶었다. 젠장. 하나 있는 연인이라는 게... 지 애인도 못 알아보냐! 게다가... 왠 원수 갚겠다고 난리야! 그리고.. 막으러 왔잖아! 젠장.. 괜히 열 받네... 좋아.. 좋아. .나!! "삐뚤어 질꼬야.." 왠지... 화가 더 났다. 18. 신전, 사회 봉사 명령. 태초에, 빛을 가리우는 아름다운 밤의 여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찌기 그녀를 사모한 빛의 신이 그녀를 차지하기 그가 잠들던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서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빛에 의해 밤의 여신은 가리워져 버리고, 영원히 떠오를 수 없게 되었다. 이를 한탄한 빛의 신은 그녀를 위해 그녀의 어둠과 닮은 것을, 매일 자신의 시간의 반을 포기하여 보냈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구전으로서, 고대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던 두 부족이 화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고 고대 첫 왕국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이런 설화를 통해, 당시 사회가 모계 중심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넘어 갔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 두부족의 상징이 태양과 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합 후에도 달을 존재시킨 것은 달의 부족이 태양에 부족에 평화적으로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엘 베가의 고대신화 분석-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가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도 전에, 벼락 맞듯이 일어나야 했다. 노인이 되면, 잠이 많아지는 데... 이 놈의 신전은 잠을 안락하게 자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라고 여기는 듯 하다... "으... 젠장!" "그런 소리하다 들키면 더 혼날 껄? 아마 밥을 안 줄지도 몰라." 나는 쿠릴츠를 노려보았다. "그러는 넌... 마족이라는 게 알려지면 아마 박물관 행일 꺼다. 어떻게 신전에 있는 데 멀쩡하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 네 덕이지. 친구. 마왕이 있는데 마족이라고 못 있을 껀 뭐냐?" 녀석을 개패 듯이 패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아.. 역시 난 고매한 인격을 가진 대 마도사였던가? 후훗. "여기 온지 하루인데... 정말 어제는 굉장했어." 쿠릴츠의 말엔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어제.. 그렇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마치 칠십 먹은 노인이 손자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로맨스를 들려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제 오전, 우리는 교장에게 우리 처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살린과 케빈이 있는 신전으로 갔다. 신전은 학원 내에 있지는 않았지만, 학원 관할이었다. 바로 문 옆에 있기도 했고... 흑도 있기는 한데.. 맨날 싸돌아 다녀서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는 케빈의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여기 온건 좋은데... 여기서 일행과 우리는 찢어져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나 쿠릴츠는 강한데다가, 그 괴상한 병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 정말 썰렁한 이유는 우릴 바로 이곳, 대신전이라는 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처음 온날, 우리는 그야 말로 신입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유는... 우릴 처음 온 신관 견습생으로 본 것이다... 우리는 미처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기회도 잃고,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현장이 뭐냐면... "자, 어서 일하러 가야지?" 쿠릴츠는 왠지 신난 듯... 했다. 아니. 착각이 아니라, 마족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바로.. 시체 해부. 그렇다. 처음 하게 된 일은 바로 저거 였다. 신전이니, 당연지사 환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게 된다. 죽는 일도 많고... 최근 원인 모를 사상자의 수가 급증해서 우린 바로 초보 신관복을 입고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젠장. "언제 말하지?" "글쎄.. 별로 상관없잖아? 어차피 지금쯤이면 약의 조합법도 알려 졌을 테고. 문제는 원인을 해결해야 잖아. 여기서 반짝이는 내장을 만지다 보면, 언젠가 대책이 나오지 않겠어?" 녀석의 뇌를 해부해 보고 싶다... 마족은 다 이러냐? "자.. 거기 신입! 이리 와라!" 우리 둘은 겨우 이십대의 청년에게 갔다. 지도 보아하니... 말단 이구만.. "음. 너흰 아직 이곳에 익숙하지 않겠구나. 어제 왔지?" 우리 둘은 당연히 공손히 대답했고, 그는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우리 교단에 들어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인데 너흰 운이 좋아." 그렇지. 마왕이랑 마족이 나란히 세트로 신관이 되는 일도 전대 미문이지. "물론, 바빠서 자세히는 설명 못하겠지만, 잘 들어라. 이곳은 철저한 신분제로 되어있지. 단, 세습은 아니다. 능력제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신전이야." 그야... "이곳의 계급과 특징을 설명해 주지. 잘 들어라. 먼저, 제일 말단은 너네와 같은 아무 장식도 없는 흰색 법의를 입는단다. 모두 수련 신관의 명칭을 가지게 되지. 그러니까, 너흰 수련 신관이야. 너희가 뭐라고?" 이거.. 대답해야지? 나와 쿠릴츠는 동시에 이야기했다. 물론, 사전에 암묵적인 눈빛이 오고 갔다. "수련 신관이요!" 왠지 유치원생이 된 거 같다. "그래. 그래. 귀여운 것들... 좋아. 그리고 너희 위로는 바로 나 같은 이런 녹색 줄이 있는 법복을 입은 신관이 있지. 나의 계급은 주로 새로운 신관들을 교육시키고, 일을 하거나, 그외의 높은 분들의 시중을 들곤 한단다." 흠... "그리고 내 위로는 엘차브, 가네브, 에네브, 대집관, 대사제님이 계시지. 너흰 엘차브님도 뵙지 못했을 꺼다." 에네브가 나랑 절친한 사이라우.. "예... 엘차브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응. 주로 수련을 하신단다. 이곳엔 거의 없지. 대개의 여행하는 신관들은 엘차브 계급이라고 봐도 무관하다. 이들은 그래서 정해진 법복이 없지. 그 위로 가네브는... 음.. 이 계급은 상당히 묘하지." 묘해? 무슨 소리냐? 나나, 쿠릴츠는 사실 신관 계급에 대해서 들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어떤 점이요?" "그게... 글쎄.. 그들이 신성력은 높지만, 뭐랄까, 에네브가 되기엔 많이 부족하지. 아직 교리도 잘 모르는... 일종의 전투 신관이라고 봐도 무관하다. 복장은... 특이한 검은색이니... 못 알아 볼리는 없을 꺼야. 뭐, 많이 볼 수 있는 계급은 아니지." 전투신관??? 살린은 싸움 잘 못하는데??? 이거.. 수직 상승이 아닌가? "그럼 에네브는 뭐 하는 직책입니까?" 냉막한 쿠릴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네브님들은.. 오... 위대하신 분들이지. 대개의 에네브님들은 신앙심이 높고, 신성력도 높으신 분들이야. 주로, 기적을 행하시기도 한단다. 에네브님들은 보기 매우 힘들지. 이들은 대개가, 대집관이나, 혹은 대사제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고 한 사람으로도 놀라운 기적을 행하지." 흠. 녀석은 항상 꼬질 꼬질한 옷만 입고 다녔는데? "그럼 그들은 자유복을 입나요?" "하하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들의 옷은 평범한 흰색이지만, 거기엔 신관의 표식이 있다고. 아, 너희도 그건 알지? 그리고... 대부분의 에네브들은 대신전에 있지. 바로 이곳에 말이다. 하지만, 볼 수는 없을 꺼야. 단 네 명뿐이 있을 뿐이니까.. 아, 한 사람 더 있군. 살린이라는 분인데... 아마 최연소 에네브일 꺼야." 저랑 아주 절친한 사이이죠.. 약간 성격에 문제가 있지만. "그는 송구스럽게도... 모든 이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고, 현재는 마법학원에 소속되어 학생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지. 내 생각인데... 차기 대사제님은 아마... 살린님이 될 꺼야." 알고 보니, 빵빵한 놈이었다는...? "망했군." 작게 쿠릴츠가 중얼거렸다. 하긴, 나보고는 용사라는 놈이니.. 쯔... "그럼 대집관은 몇 명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응? 아... 9명 정도야. 일단은. 하지만, 그건 잘 모르는 일이지." 그런가..? 그에게 설명을 주루륵 듣고 나서 우린 다시 일터에 투입되었다. 이거, 별 보기 운동이라도 하자는 건가... 무슨 신관이 기도는 안하고 시체 해부만 하냐.. 더군다나 이 녀석 옆에 있으면.. 무섭다고. "으히히히.. 재미있는데?" 어련하셔... 그나저나, 재미있는 것들을 알았군. 그 얼빵한 녀석이 신전의 기대주라니.. 흠.. 말세야... 마왕보고 용사라는 놈이.. 쯧. 신전의 앞날이 걱정이군. "뭐 좀 알아냈어?" 잠시 녀석이 쉬자, 쿠릴츠에게 물어보았다. "글쎄... 뭐, 평범해. 이 시체들은 아직 변이를 일으키지 않았어. 하지만... 시간 문제야. 정화 결계가 이곳에 쳐져 있으니 다행이지.. 만에 하나, 시체가 그냥 버려져 있다면 오늘 밤에 일어나도 난 놀라지 않겠어." 이 나라의 매장 풍습에 대해 고마워해야 하나? 이들은 결정적으로 신전에 시체를 갖다 준다. 그럼 신전을 그걸 가지고... 죽은 안 끓여 먹겠지만, 이것저것 실험도 하고.. 뭐, 그런다. "좋아. 그럼 우리 오늘 저녁엔 뭐하지?" "흠.. 글쎄. 아직 할 일은 없지만, 조만간 일어 날 꺼야. 내가 키히라면, 이곳의 결계를 깨겠지." 역시.. 나와 의견이 통하는 군. "여기가, 그녀의 비밀 장소라는 거야?" "물론이야. 그녀는 마족이 아냐.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고." 그럼.. 넌 뭐냐? 마족 주제에.. 아, 내일은 예배가 있다고 하는 거 같았는데.. 이 녀석 어쩔 셈이지? 다시 잠 실컷 퍼 자고 - 잠시 이런 생각이 머릴 스치긴 했다. 난 이런 곳에서 이렇게 느긋하게 지내도 되는 건가..-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자, 그럼 홀로 가자. 쿠릴츠. 괜찮겠어?" 일단,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녀석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마족이다. 아무리 최근 마족과 사람들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고는 해도, 그건 거의 전투력이 별로 없는 마족들 이야기다. 대 귀족에 속하는 마족들은 전혀... 융합되지 않았잖아? 그리고 전의 마도 공작이 비록, 나바스에 체류하고 있다고 해도... 그는 예전에 인간 여자를 아내로 맞았던 사람이니까.. 크게 문제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괜찮아."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래도, 너에게 행여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쿠릴츠는 살짝 웃었다. "이거야 원... 주인에게 걱정 받는 마족이 될 날이 있을 지는 몰랐다. 뭐, 괜찮아. 게다가, 예배만 하는 거라면 아무 상관없어. 그리고 사실, 신관 정도가 날 어쩌지는 못해. 또.. 모르겠다. 그 대사제라는 사람이라면 내게 어쩔 수 있을지도.. 뭐, 하지만, 그래도 별 문제는 없을 꺼야. 난 이렇게 보여도 너와 지내면서 완벽하게 마기를 숨겼잖아? 심지어는 사람에게 추앙 받는 용사 파티였다고." 그랬지...그래도 걱정은 되는 데 말야. "자. 그럼 가자.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야." 우린 그렇게 얼토당토않게 홀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수의 신관들이 죽... 들어차 있었다. 살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케빈의 존재에 대해 묻는 걸 잊었다. "이곳에... 일반 신도는 없군." 나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예배라면, 신관 뿐 아니라, 일반 신도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저기... 익숙한 얼굴이 나오는 군." 잠시 맑은 종소리가 세 번 울리고, 검은 색 옷을 입은 사람 뒤로 나도 잘 아는 얼굴이 나왔다. 살린은 여느 때와는 달리-무척 놀라운 모습이다- 깔끔하게 머리도 감고, 언제나 피가 튀고, 음식이 묻어있고, 때가 꼬지지 했던 옷은 하얗게 되어 있었다. 단지 신장의 문장이 여기 하얗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내 옷이랑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갑옷만 입은 사람 몇이 걸어 나왔는데, 이 중에도 아는 얼굴이 끼어 있었다. 평소의 케빈 답지 않게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인줄 잠시 착각했지만... "케빈.. 맞지?" "맞군." 옆에서 한 신관이 조용 하라고 주의를 주었고, 우리는 입다물고 바라보았다. 뭔가... 문제가 있나? "대사제님 나오십니다." 역시, 같은 에네브로 보이는 사람이 청아한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들 기립했다. 뭐, 대사제는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당연한 건가? 그럼, 난 살아있는 마법사? 농담.. "음... 다들 앉게나. 그래.. 좋아. 좋아. 모두들 좋아 보이는 구나. 그래.. 오늘 특별한 일들이 있지? 무엇이냐?" 의외로 그는 똥배 잔뜩 나온 할아버지 였다. 왠지.. 거룩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그래도 나와 쿠릴츠는 노력했다. 저 할아버지는 사실 거룩하다.. 거룩.. 에잇. 거북하다. "예. 새로운 신관지망생이 있습니다. 견습신관들은 앞으로 나오라." 옆에 있던 몇 명의 소년들이 앞으로 걸었다. 나와 쿠릴츠는 최대한 살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뒷 쪽에 섰다... 물론, 잠시 뒤에 헛수고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 이번 주에 새로 신청한 아이들이군. 그래.. 아이들아. 신께서는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신의 뜻을 따를 아이들을 선발하신 단다. 물론 우리는 지금 사람 수가 많이 모자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뽑지는 않는단다...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야." 그 말에 하마터면 쿠릴츠를 보고 웃을 뻔했다. 녀석.. 지금쯤, 고문 받는 심정이겠군. 얼마나 웃기겠어? 마족에게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라니.. 쯔... 살린과 케빈은 모두 다른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럼... 좋다. 한 사람 씩 앞으로 나오거라." 으에게게!!!! 나와 쿠릴츠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큰일났다.. 아무리 저 대사제가 사이코에 멍청이에 엉터리라고는 해도, 설마하니 마족을 구분해 내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살린과 케빈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뭐, 말할 시간이 없었다고 둘러대면... 안되겠지? 그리고 밝혀지면 바로 수자원 공사 일을 하러 가야 한다... 독 찾으러.. 문제는 그 것 뿐이 아니다. 만에 하나 키히가 여기 와서 깽판을 놔도 막을 놈이 없는 것이다.. 어느 누가 전설의 용사에게 이길 수 있냐? "그래.. 넌.. 음... 안되겠구나." 대사제는 단지 소년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저런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완전히 사이비는 아닌가 보다. "다음 사람." 옆의 에네브인 듯 한 자가 냉막하게 중얼거렸고, 다시 소녀 한 명이 올라갔다. "어쩐다..." 내 입에서는 작게 한숨이 쉬어지고, 쿠릴츠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평소와 똑같이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그래.. 그래.. 태연하자.. 설마, 죽이기는 하겠나? 아, 물론, 쿠릴츠가 사람들을 죽이지 않겠지... "다음! 뭐하나?"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이런 시선 집중이라니... 게다가 살린과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혔다. 당연히... 녀석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망했다.. "예..." 나는 거의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단상에 올라갔다. 가까이서 보니, 역시나, 그는 노인네였고, 뭐랄까, 성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아주 귀여운 아이구나.. 아직 어린데 왜 너는 신관이 되려고 하느냐?" 왜.. 왜.. 앞의 열명 정도에게는 하나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하는 거야! 고개를 들자, 당연히 살린과 케빈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놀랍게도 이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잠시, 장내가 술렁거렸다... 내가 마왕인 걸 알았을 리도 없는데... 이상하다. "여지껏, 신관만은 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입에서는 이런 웃기지도 않는 말이 나왔다. 잠시, 더욱 더 술렁거렸지만, 대사제는 다시 말했다. "넌,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런데... 그녀와 결혼하지 않아도 좋으냐? 신관은 결혼 할 수 없다. 평생, 신을 위해 헌신하는 직업이니까." 이번엔 아주 긴 질문이 나왔다.... 역시 마왕인 걸 안걸 꺼야.. 그래도 일파의 종사 아냐? 으... 잘 못 걸렸다. "그녀를... 결혼 할 수 있다면 진작에 했겠지요. 그녀는 저를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저와 결혼하고 싶어한다면, 언제든지 이 일은 집어치울 것입니다." 이 쯤 되면... 그냥 알아서 쫓아 줘!!! "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재미있는 답변이다. 그래... 아직 어린데도. 흠... 그래. 다들 보아라." 그의 입에서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닌 아주 우렁찬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이제 난 공적 1호가 되는 거구나.. "이 소년이 바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못한다. 무슨 뜻인 줄 아느냐? 여기 모인 대부분의 신관들은 부끄럽게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 어떠냐, 아이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으... 뭔가.. 잘못되었다... "전.. 프라...오니스입니다." 잠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너의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부르는 이름을 말해 다오. 신의 앞에서 넌,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뭐냐.. 지금 교리 문답시간이냐!!! 하는 수 없군...믿지도 않을 테니. 잠시의 기간을 두고 나는 천천히 누구나 들을 수 있게 똑똑히 말했다. "라플, 라플 헤제로이스 다플리제 카므디은 세론. 세상의 대 마법사라고 불리 우는 사람입니다." 잠시 나는 당연한 충격에 대비했다. 이 지겹도록 외우기도 힘든 이름을 말하자, 잠시 신전에는 고요가 감돌았다. "음.. 그래? 좋다. 널 신관으로 정하고, 에네브의 하나로 임명하겠다. 그리고, 너가 말했던 것처럼, 다시 그녀가 너를 믿게 된다면, 언제든지 너는 그 일을 그만두어도 좋다." 쿠엑!!!! 잠시 옆의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씹혔다. "시끄럽다! 감히 그대들이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인가? 이는 신의 뜻이며, 진실이다! 그대들은... 조용히 하라!" 앞으로의 나의 일과가 잠시 보였다...살린과 케빈은 여전히 약간 당황한 듯 했다. 그리고 다시 소란이 멈추고, 다음 차례 쿠릴츠가 나왔다. 그는 왠지 웃고 있었다... "좋아. 좋아. 자넨... 그래. 이 소년과는 어떤 관계인가?" 아.... 쿠릴츠도 추적 조사, 심문에 걸려들었구나.. 저 노인네, 사람인지 마족인지는 구분 못해도, 분명히 능력을 알아보는 눈은 탁월한가봐. 쿠릴츠는 역시나 그답게 아주 공손히, 진실만을 말했다. "주군이십니다." 잠시... 충격이 지나가고, 오늘.. 생명 단축된 사람 여럿일 것이 분명했다. 그 중에서도 내 생명은... 엄청 달았으리라... "주군이라... 그래. 넌 그가 죽으면 너도 죽을 것이냐?" 쿠릴츠는 갑자기 아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참고로.. 마족은 당연히 인간보다 아름답다... 그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 그게 가려지는 이유는 웃지 않아서이지. "당연합니다. 예전에는 친구였으나, 지금은 주군이 되었고, 그가 죽으면 저의 일생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저는 이것으로 운명과 피의 맹세를 했습니다. 그의 피가 마르는 날, 저를 죽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대사제." 묘하게... 사랑 고백 비슷했지만, 사실 내가 죽으면 그가 살아 있을 수가 없었다. 특별히 내가 힘을 계승하지 않은 이상... 하지만, 그것도 누가 죽이느냐...인데.. 날 죽일 만한 인간이 없는 건 당연지사고... "흠... 좋다. 넌 그 선택을 믿어야 한다. 너의 주군은 평생 너를 한 번 배신할 것이다. 그리고, 넌 그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 한번의 배신은 너의 마음을 아주 아프게 하겠지만, 그는 널 위해서 그리하는 것이기에.. 넌.. 절대로 그를 원망해선 안 된다." 이 노인네의 전직 직업이 의심스러워진다.. "..... 과연.. 대사제. 감사합니다." "그래. 넌 어차피 네 주인이 떠나면 이곳을 떠나겠지. 그러니.. 너에게도 같은 직위를 부여하겠다. 쿠릴츠여. 앞으로, 너의 주인을 도와라. 그는 아직 할 일이 많으니..." 다시 사람들이 경악했지만... 난 저 노인네가 더 의심스러워졌다. 분명히 저 놈.. 마족 아냐? 이렇게.. 전대 미문의 마족과 마왕이 신관이 되는.. 그것도 고위의 신관이 되는 엽기적인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쯔... "어떻게 된 거지?" 새로 지급 받은 에네브 의상을 입으면서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당연히 쿠릴츠는 그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돌팔이가 분명해." 글쎄.. 꼭 그런 거 같지는 않잖아? "음.. 내 생각인데, 혹시, 그 대사제는 힘이 강한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너무 강한 나머지, 나나 너가 마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게 아닐까?" 쿠릴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다. 아무래도 그쪽이 좀 더 합당한 의견이야." 역시... 밖으로 옷을 입고 나오자, 살린과 케빈이 서 있었다. 녀석들이 뭐라고 할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우와, 역시 대단해.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한번에 에네브가 된 건 좀 의외야. 뭐, 프라오니스 실력이면 당연하지만. 그리고... 라플 어쩌고 할 땐, 얼마나 살 떨렸다고. 너의 그 애칭을 대사제께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서 다행이었어. 근데.. 그 여자가 누구야?" 이 녀석 말 중에 별 쓰잘 데기 없는 말로 이렇게 많이 이야기 한 건 처음이다. 케빈도 방글거리고 있었다. "살린. 그런 건 개인 프라이버시야. 묻지 마라. 그래도 너희 둘이 다 에네브가 되다니.. 우와. 하지만, 당분간 학원에는 알리지마." 으잉? 왜? "왜? 참, 신전에선 날 나쁘게 생각한다면서?" "아, 그거? 그야... 너가 피스트레이카 공작인지는 지금도 모르지. 뭐... 입 다물고 있어. 말해봐야 좋을 건 없잖아? 그리고.. 음... 아, 에네브는 원래 비밀이 잘 보장되는 직책이야. 이제 여섯 명으로 늘긴 했어도." 흐음... 나는 케빈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넌 그럼 직책이 뭐냐?" 녀석은 머리를 긁적였다. "보다시피, 신전에 있는 기사. 그런 거야. 일종의... 신전의 방위용이지." 호호...응. "아, 그럼. 에네브로서의 일은 담당하시는 대집관이 따로 계시니까, 가서 물어봐. 헤헤헤.. 아마 리브렐님과 호사이오님이실꺼야." 흠.... "그래. 고마워." 나와 쿠릴츠는 그가 말한 지하의 대집관 실을 찾아갔다. 내가 리브렐이고, 이 녀석이 호사이오? 제발.. 대집관도 엉터리이길... "들어오세요." 나는 쿠릴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꽤 넓은 편이였다. 음... 그러고 보니, 대집관은 아까의 예배엔 나오지 않았다... 신기하군. "네 이름이 프라오니스냐?" 깡마른 체구에 머리는 거의 벗겨져 가는 늙은 사람이었다. 음.. 왠지 동족의식이 느껴지는군. 다 같은 늙다리끼리 잘해보자고. "예." "음.. 그래. 내 이름은 리브렐이다. 그런데.. 어디서 우리 본 적이 있느냐?" 응? 전혀... 모르겠는데??? 아.. 가만, 분명히 예전에.. 율지스가 막 떠나고 나서 우연히 도시에서 청년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맞아. 맞아. 그 사람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이름 이거든.. "아뇨. 전 최근에 이곳에 와서..." "음... 그래. 하긴. 눈빛이 매우 낯 익는다 했는데.. 뭐. 그래. 대사제께서 격찬을 하시길래, 어떤 사람인가 했다. 너와 네 친구? 하여튼, 재미있다고 그러시더구나." 재미... 어느 세상에 대사제가 마왕보고 재미있다고 하나. 뭐, 재미있기는 하네. "예..." "하하하.. 그래. 아직 에네브가 하는 일을 정확히 모르고 있지?" 그렇지.. 그 뿐 만이 아니라, 이 곳 계율이고 뭐고 하나도 모른다.. 신 이름이 뭐더라...? "예." 모른다고 하면 죽겠지.. "에네브는... 지금 총 여섯 명이 되었구나. 세 명은 이곳에 상주하면서 신전의 일을 하고 있단다. 음... 주로 사무 관리지. 상당히 지겹기도 하고. 성력이 좀 모자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지." 뭐냐... "그리고.. 살린. 그는 좀 알겠지? 학원 부속의 신전에서 병자를 돌보고 있다. 개중 제일 나은 녀석이지. 사실 그 녀석 때문에 다른 녀석들이 더 빛 바래 보이기도 하지...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쿠릴츠가 들었다면, 얼간이라 그렇지.. 라고 했겠지. "예. 저완.. 아는 사이입니다." 그제서야 리브렐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의외로 날카로왔다. "그래? 흠.. 그렇군. 뭐, 아는 사이라는 걸 책망하는 건 아니다. 다만... 사이가 좋으면.. 더 괴로울 수도 있다." 으잉? "저.. 하지만, 저는 곧 그만 둘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그러자, 리브렐은 웃었다.. 왜 웃냐! 재수 없단 말이야! "하하하.. 글쎄.. 그건 두고 보아야 하는 일이지." 불안해.. 뭔가.. 아냐. "아, 그건 그렇고 너가 할 일을 알려 주어야지. 내 참.. 그래.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질병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 그야... 약 제조 방법을 알려 준 게 나라고. "음. 너와 쿠릴츠가 친구라고 하니, 둘이 가서 조사해서 원인을 규명하고 되는 데까지 해 보도록 해라. 단, 생명의 위험이 있으면 즉시 철수하고.. 필요한 인원은 언제든지 요청하도록." 그게... 다였다. "어땠어?" 우린 거의 동시에 문을 열고 나왔다. 여긴 문여는 시간도 정해진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상상이 휩쓸었지만, 그래도 그냥 참았다. "뭐... 가서 상수도를 조사하라고 하던데?" 우린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신전의 복도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우린 그날 배꼽이 뒤집어지도록 웃었다... "원래 목적을 달성했으니... 기뻐해야지." "흠.. 그래. 참, 쿠릴츠. 어떻게 너가 마족인 게 들키지 않은 거지?" 나는 녀석을 기이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녀석은 아직도 큭큭 대면서 대답해 주었다. "너 때문이야. 원인은." 으잉? "나? 내가 뭘?" "바보야. 마왕이 있는데, 당연히 내 힘은 더 강력해지지. 안 그래? 그런 식으로 내 힘이 강력해지자, 난 더욱 확실히 내 마기를 감출 수 있었지. 그리고 넌... 원래 인간이고, 마왕이라는 건 단지 하나의 번들 제품이니까... 사실 너에게는 마왕이라는 게, 그리 인간들 눈에 마왕처럼 비치지 않는다는 거야. 아.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원래 인간에게 마왕 노릇을 시키는 거와는 전혀 달라. 넌 원래 인간이고, 거기에 강대한 마력이 더 늘은 것일 뿐이니까.." 여전히.. 모르겠다. 녀석은 그리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뭐하냐?" "뭐하긴? 어쨋든 우린 주어진 기간 동안 일을 해결하고 다시 학원에 돌아가야지.. 그래도 여전히 너는 수업을 제끼겠지만.. 난 재미있단 말야." 으잉? 이건 또... "뭐가? 마족인 네게 재미있는 게 있어?" 그 녀석은 아주.. 아주, 쑥쓰러운 듯이 말을 이었다. "음... 그건... 그러니까, 교재가 너가 쓴 거잖아." 이 이유를 들은 순간, 역시나 나는 뒤집어지게 웃었지만.. 뭐, 괜찮겠지. 카카칵.. "그럼... 조심해." 약간 쌀쌀한 아침이었다. 여름 날씨치고는.. 확실히 좀 더운 편이지. 살린과 케빈이 근무지로 돌아가기 전에 우릴 배웅하러 나왔다. 갑자기 돌발 의문.. 왜 나랑 살린이 친해지면 안 좋지? 모르겠군. "그래. 너네들이나... 참, 세이나 율지스한테 우리 소식도 알려줘. 아마 걱정하고 있을 꺼야." 케빈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웃었고, 쿠릴츠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주야.. 재주. "그보다.. 아마 흑을 만날 수 있을 꺼야. 요즘 계속 돌아다닌 데.. 아마 상수원 근처인 거 같았어." 아항.. 녀석.. 무대포 정신의 극치를 보여주지.. 스파이 맞는지 좀 많이 의심스럽기도 하고. "그래. 만나면 패주지. 뭐. 그럼 잘 있어!" 나와 쿠릴츠는 둘이 사탕을 빨아먹으면서 길을 나섰다. 늙으면 오히려 사탕이 먹고 싶다... 조용한 새벽의 공기를 맞으면서 쿠릴츠가 속삭였다. "젠장.. 왜 이리 일찍 나온 거야... 가게가 문 연대가 하나도 없잖아?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먹으려고 했건만.. 빌어먹을 살린 녀석이 깨우는 바람에.. 젠장.." 쿠릴츠가 특정인에게 화를 내는 일은 극히 드문데.. 흠.... 놀랍다. 마족도 밥 때문에 열 받을 수 있구나. 놀라운 사실이다. 라플 일기장.... 모월 모일.. 모시. 그날 마족이 밥 때문에 열받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이 시간부터 난 상수도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말야." "나도 그렇다고." 둘이 썰렁한 새벽 공기를 맞으면서 그렇게 떨고 있는데, 왠 남자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호외요~ 호외~ 트류바 남작가의 딸이 피살되어 발견 됬다고 합니다!" 역시.. 진짜는 죽었던 거군. "젠장. 어이. 호외소년!" 특이한... 말이다. 호외소년? "아, 예? 오.. 신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놀라운 일이었다.. 마족이 이런 대접을 다 받고. 어쨋든, 호외소년을 붙잡은 쿠릴츠는 아주 살벌한 어조로 물었다. "이 시간에 문 연 식당 있으면 혹시 말해봐라." "예? 신관들이시면 신전에 가서 먹으면..." "가끔은 민중이 먹는 식사도 맛봐야 민중의 고통을 알 수 있는 거야." "그... 렇군요. 아, 맞다. 저기 모퉁이를 돌아가시면 바로 보여요. 돼지가 닭된 날이라는 가게가 보일 꺼에요. 아까 오다 봤어요.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기 쉬웠죠." 황당한 문답이었다. 무슨, 민중의 고통? 원래 마족은 민중의 고통을 즐기는 경향이 있지 않았어? "정말 있기는 하군." 허름한 구석에 위치한 그곳은 확실히 돼지가 닭된 날이라는 표지판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들어가자." 어두운 곳이었다. 주인도 왠지 수상했고, 일단, 저렇게 기사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데.. 어떻게 식당 주인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그야말로 이런 곳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문하십시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메뉴판... 호.. 이런 것도 있네? 그 남자는 입가가 왠지 실룩이고 있었다. 왜 열 받아 보이지? 뭐, 나 때문은 아니니.. 참자. "음... 모르겠는데?" 쿠릴츠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메뉴판을 나에게 넘겨서 나도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메뉴 이름이 하나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음... 나도 모르겠는데?" 우린 동시에 메뉴 보이라고 부리기엔 너무 거대한 웨이터를 응시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어떤 음식이죠? 이것들은?" "먹을 수 있는 겁니다. 맛도 좋아요." 험악한 인상...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손에 굳은 근육은 검을 아주 오랫동안 만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그럼 여기 추천 음식은 뭐죠?" 약간 미심쩍어 하면서 그래도 물었다. 굶을 수는 없으니까. "아, 저희 추천 음식이라면... 음... 야! 우리 추천 음식이 뭐냐?" 오잇.! 웨이터가 몰라서 카운터에 물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수상해.. 수상해.. 알 수 없어... "네. 그건 닭이 쫓기면서 부른 세레나데입니다." 엄청 웃기는 이름이다... "아, 그래? 들었소?" 듣긴 들었지... 이번에는 쿠릴츠가 나섰다. 왠지 오늘 밥 먹기 힘들겠다. "그럼 뭘로 요리한 거죠?" 이번에도 근육맨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그리고 더욱 거세게 화냈다. "젠장! 그냥 그냥 먹으면 되지! 뭐가 그렇게 궁금하오! 그럴려면 굶어!" 이럴 줄... 알았다. 조용히 그에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흰 신관인데, 신의 신도이시라면,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겠습니까?" 해석 - 밥 줘... 안 그러면 교단에 찌른다. 그는 여전히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하는 말이란 게 더 가관이었다. "뭐야, 구걸하러 온 거냐?" 이쯤 되니... 쿠릴츠는 히터 틀기 시작했고, 드디어 쿠릴츠가 일어나서 한 방에 때려 눕혔다. 절대 절명의 펀치 랄까나... "우억... 쿨럭..!" 피까지 쏟는 걸 보니, 내장도 만져 주었나 보다.. 젠장. 밥 한 번 먹기 힘들군. 게다가... 쿠릴츠는 아까부터 밥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었거든... "쳇. 나가자. 여기서 밥 먹기는 글렀어. 차라리 아침까지 광장 분수나 바라보고 있자고." 그가 일어서자, 나는 조용히, 그리고 나지막하게 그에게 말했다. "쿠릴츠. 이 시간엔 분수도 안 나와. 그리고 ... 쉽게 나갈 수 없을 거 같은데?" 어느새 주위에는 여기 직원으로는 절대 안 보이는 사람들이 각자의 번쩍이는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너희들이로구나. 후후후... 이건 너희들을 노리는 함정이었다. 깜찍한 것들... 이게 함정인지도 모르고.. 후후후..." 함정? 난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키히와 아는 사이?" 잠시 정적이 흘렀다. "키히가 누구냐?" 역시. 그럼 난 모르는 놈들이다. 그럼, 이번에는 쿠릴츠가 물어 볼 차례지? "너희들.. 혹시 동쪽 마의 숲을 아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건 또 뭐냐?" 역시... 나나 쿠릴츠는 잠시 당황했다. 왠지 헛다리 엄청 짚은 거 같은데? 흠.. 그래도 일단 덤비는 사람들을 어떻게 달래지? "헛소리하지 말고! 잡아라!" "예!" 쓰러진 남자가 아무래도 두목쯤 되는 모양이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온 동료가 준 검을 잡았다. 아직도 피를 흘리는 걸 보면, 계속 누워 있는 쪽이 날 꺼 같은데... "잠깐, 우리가 누군지 알고 덤비는 건데?" 아까 카운터에 있던 남자가 무서운 얼굴을 하면서 대답했다. "후후후...왕파 녀석들이 아니냐? 오늘로 너흰 끝이다. 감히 신관복을 입고 오다니... 우리도 아닌 줄 알았지." 저들의 헛다리에 심히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오늘 너희들은 쿠릴츠에게 죽도록 얻어터지겠구나. 쿠릴츠에게 말해 주었다. "죽이지는 마. 사람을 좀 잘 못 봤을 뿐이잖아." "음. 그렇군." 녀석은 그리고 바야흐로 싸울 태세를 갖추고 앞으로 나섰다. 호리호리한 몸답지 않게, 그는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녀석들의 시야를 압도하고 있었다. "덤벼라." 건방지기까지... "이 놈!!!" 그리고 싸움이 나기 시작했다. 나? 유유히 앉아서 새벽의 식당을 감상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여기는 급조한 티가 많이도 난다. 저런 조잡한 세트로 적을 꼬실 수 있을 줄 알았나? 흐흠... "응?" 대 여섯 명 정도가 뻗을 무렵- 정말 쿠릴츠는 봐 줘가면서 싸우고 있었다. 마족이 고통을 좋아하는 건 정말 천성이야. 천성.- 문이 열리고, 일련의 사람들이 죽 들어왔다. 뭐, 그쪽도 꽤나 당황한 듯 했다. "무슨 일이지?" 셋은 모두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셋 다 남자였고, 나이는 모두 중반 이후였다. 노인은 없었다. 나는 그들을 흥미롭게 주시했다. 그들도 약간 놀란 눈치였다. 아마도, 정말 이 쌈질하는 놈들이 기다리고 있던 상대일 것이 틀림없었다. "젠장, 안되겠다! 한꺼번에 덤벼!" 음.. 이쯤해서 우린 빠져야겠군. "쿠릴츠. 그만해." 쿠릴츠는 지가 언제 싸웠냐는 듯이 다시 피도 안 묻은 흰 옷 그대로 내 옆에 섰다. 당연히, 녀석들은 당황했다. "댁들이 기다리는 진짜 싸울 상대가 온 거 아닌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두목은 나를 가리키면서 윽박질렀다. "너가! 너네가 꾸민 음모냐! 이런...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다니!" 얼레? 이건 좀.. 오해야. 세 사람은 키킥 거리면서 웃었다. 경박스럽게... 음..? "기분 나쁘군." 쿠릴츠의 말처럼, 기분 더러웠다. 결정은 쉽게 내려줬다. 이 싸움꾼들은 애초애 우릴 속일 수가 없다. 왜냐? 이렇게 빤히 얼굴에 성격이 드러나잖아... "후후후.. 다 죽여주마. 가라. O-1,2호." 응? 뭔 호? 옆의 두 사람이 갑자기 망토를 젖혔다. 그리고 변이를 시작했다. 여지껏과는 상당히 다르게도, 그 둘은 놀랍게도 괴물로 변신했다. "변신 동물인가? 인간이 언제부터 그 정도로 진화했지? 난 몰랐는데." 쿠릴츠.. 나도 몰랐다. 저게 괴물이라면.. 흠. "좋아. 네가 신관이란 걸 잊은 건 아니지? 난 아주 공평한 인사라서 말야. 놀라움이 스쳐 지나기도 전에 내 몸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화가 시작되자, 괴물은 푸른빛을 맞고 서서히 녹아 내렸다. 아예 원래 인간이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가운데 사람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 정화의 푸른빛은 이 안 식당의 곳곳까지 퍼져나갔다. "확실히... 대단하군." 쿠릴츠에게는 피해가 없었다. 당연했다. 내 힘쓰는데, 나에 소속되어 있는 녀석에게 무슨 피해가 있겠느냐... "뭘.. 간단하지. 세이 패는 것 보다 더 쉽다고." "그런가?" 그런 걸 가지고 더 심각하게 고민하는 녀석이 더 무섭다.. 어러러? 이젠 아주 종이까지 꺼내서 계산하고 있잖아? 무서운 놈... "다 치료 된 거 같군. 어이. 거기. 가운데. 어때?" 마법사는 아닌 듯 했다. 뭐랄까, 아까 왕당파, 어쩌고 했으니까.. 이 녀석들은 왕실 소속이라 이건가? 흐흠.. 이건 또... "왠 놈이냐! 신관 중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없다!" 흠... 그야 그렇지. 어제 임명되었거든. "응. 아마 그럴 꺼야. 그냥 가면 용서해 주지. 난 괴물만 미워하지만, 이 친구들은 아마 당신도 두들겨 팰 꺼야." 그는 부들부들 떨더니 몸을 돌려 나갔다. 나는 다시 진지하게 두목에게 물었다. "정말, 밥 안 되요?" 결국,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작은 식당으로 가게 되었다. 그 때는 이미 아침이 된 후라, 여러군 데가 열은 뒤였다. "설마, 진짜 밥 먹으러 온 지는 몰랐습니다. 신관이시라고요?" 그렇지. "흠.. 뭐, 그렇죠. 어제 임명되긴 했지만." 내가 뚱하게 대답하자 그는 멎적은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너무 열 받아서... 사실 제 동료의 가족들이 얽힌 문제라... 이성을 잃었습니다." 헤에? 가족? "무슨 소리인지.. 그리고, 왜 왕당파, 반 왕당파 어쩌고 하셨죠?" "그건.. 아, 식사가 나왔군요." 스프는 맛있는 편이었다. 쿠릴츠는 마족 주제에 맛까지 음미하고 먹느라 대화에는 끼지도 않았다.. 단순한 놈... "음.. 당신은 반 왕당파이시라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사실 전 아젠 기사단 소속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해고되었지요." 해고? 아젠? "왠 해고요? 그리고 원래 아젠 기사단은 용병... 같은 건데..? 그의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 덩치에... 저런 대사에, 안 어울려... "아젠 기사단 자체가 해산되었으니까요. 이건 아직 수뇌부 몇 밖에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대신 전하의 옆에는 이상한 놈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죠..." 헤? "이상하다니.. 설마, 그 괴물을 말하시는 겁니까?" 키히가.. 연관되어 있는 건가? "예? 괴물이요? 아뇨. 그건 오늘 처음 봤습니다. 간혹 뒷골목의 하층민들 이야기가.. 그런 괴물을 본 적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군요. 아, 그보다.. 전하께선 미치셨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음... 그거야, 많이도 들었지.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일년도 되지 않아서 미치나? "별로 믿지는 않습니다." "예. 그러십시오. 전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묘한 여운이 맴돌았다. "완전히 돌았습니다. 예. 그렇게 말 할 수 있군요. 전하는 그야말로 돌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전하의 아내이자, 왕비는 이미 실종되셨습니다." 이거야 원.. 별 일 다 있었잖아? 가만.. 난 이 나라 왕 빼면 최고 공작인데. 왠지 불공평하군. "흠... 그럼 트류바 남작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전하가 미치지 않았다고 확신하시던데." 그는 잠시 웃음을 짓는 거 같았다. "그런 남작의 말을 믿으십니까? 그는 자신의 딸까지 죽여가면서 음모를 꾸미는 자 입니다. 믿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는.. 그렇군요. 어쩌면 왕을 만난 적도 없을 테니까요." 점점 수수께끼만 늘어가는 군... 요즘 추리 탐정이 되도 모자람이 없겠어. "이 빵 안 먹어? 안 그러면 내가 먹을래." 쿠릴츠가 한 한마디.. 마족은 주인이 귀여워해 주면 띠벙해지나??? "쿠릴츠. 내 친애하는 친구. 먹고 싶으면 더 시켜 먹어. 내 꺼 탐내지 말고." "응." 그리고 대화는 계속되었다. 19. 아젠 기사단 ...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활동하던 유목민의 일부가 힘을 합쳐져서 만들어진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설이 가장 유력하다. 초대 기사단장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젠은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을 창조해 내는 집단이었다. 초대 기사단장 하르베이너의 이름 아래, 꾸준히 발전을 거듭했고, 그들은 최대 강국인 나바스와 트라이너의 균형자(정치학문에서 일컬어지는 일종의 파워간의 조정자를 뜻한다. 다른 쪽 편을 들었을 때, 그 세력 판도가 달라지는 역할을 한다.) 역할을 하여 대륙에 전쟁을 조절한 일도 있었다... -엘 베가의 사서(史書)- "그러니까... 이건, 우리 기사단 내에 일어난 일이다." 그의 육성 고백.. 그 눈물의.. 아니지. 이건 아냐. 어찌되었던, 그의 이야기는 대충 종합하면, 어느 날, 정확히는 나바스의 그 황제가 떠나고부터 시작된 일이다. 왕은 아주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그는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로, 여자를 무척이나 끔찍이 여기던 그가.. 아주 놀랍게도, 여자 없이는 하루도 잠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나의 나이를 어리게 봤는지, 밤에 노는 걸 왕이 좋아해서야.. 라고 했다. 바보 녀석.. 너의 갑절은 살았다. 그리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아주 즐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노예를 데려다가 고문했다고 한다. 왕비는 이일로 매우 격노했고, 왕은 그녀를 탑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 후, 왕비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얼마 뒤, 노예를 살육하는 것에 지쳤는지, 그는 점점 더 강도를 세게 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기가 심지어 놀던(아마도 자던.. 이었을..) 여자들을 아주 잔혹하게 - 그는 이 부분에서의 자세한 묘사를 하지 않았다... 역시, 내가 어리게 보이긴 하나 보군.- 살해했다. 그 후에도 간언 하는 대신들을 참수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점점... 왕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계속되고, 전혀 모를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개중에는 트류바 같은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왕에 대해 맹신적인 인물로, 다른 두 명의 이사와 함께, 그리 강한 귀족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들이 중앙에서 뛰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왕을 알현하는 적은 없었다. 그리고... 아젠 기사단이 평소처럼 훈련하고 있던 어느 날, 왕이 손수 몸을 이끌고 나왔다. 평소의 그의 옆에 있던 여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분께선.. 우릴 해산하신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직 아젠의 기사단원 중 한 명인 그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쿠릴츠의 결정타가 들어갔다. "그럼.. 실업자가 되어서 우는 거야?" 윽... 그건 아냐. "에.. 쿠릴츠. 아젠 기사단은 명예로운 기사단이야. 그러니, 충격도 컸겠지. 믿던 주군에게 배신 당하는 격이니." 쿠릴츠는 이내 토라져서 애꿎은 빵을 아작 내고 있었다. 쯧...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 아, 가정이 없지? "그럼, 왜 반 왕파가 되신 겁니까? 왕을 위한다면서... 그런 일을 하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그는 나의 물음을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아주 슬픈 미소를 띄었다. "그건... 조금이나마, 전하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비는 것이죠." 흠... 하긴. 난 아젠 기사단장에게 왕위를 떠넘기고 도망갔었지. 음.. 약간의 책임이 엿보이는 군. "뭐, 저도 왕이 그렇게 되는 데 약간의 책임이 있으니.. 도와 드리죠. 하지만, 지금은 곤란해요. 하수도를 조사해야 하거든요." 그는 고개를 들고 다시 웃었다. "요즘은 그런 곳에도 축복을 내리러 가시는 겁니까?" 하하하... 이 미친놈아.. 그런데 왜 축복을 내려! "그 괴물이 나온걸 조사하는 겁니다... 신전에서 왔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에게 그런데 무슨 책임이 있냐고 물었다. 사실대로 내가 공작인데요, 라고 하면... 음...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저... 기도해 주지 못 해서입니다 라고 했더니, 그는 나를 무슨 신 취급했다. 어이. "그럼. 여기서 헤어지죠. 아지트를 다시 만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엔 음식점은 피해 주세요." "그러죠. 아, 그러고 보니... 하수도라면 저희도 같이 가 드릴까요? 물론, 신관님의 실력은 잘 알지만, 그래도 경험이 없으실 거 같아서 걱정되는 군요." 농담이지...? 경험? 난 마왕을 쓰러트린 절대 무이의 경험이 있지... "같이 가자." 쿠릴츠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헤... 쿠릴츠가 왠 일이실까나?" "음... 아젠의 기사단은 그래도 강하다고. 적어도 거치적거리진 않잖아." 그렇긴 하지만.. 흠... 그래. 뭐. 우리끼리 가서 노가리 까는 것도 좀 그렇지. "자, 그럼 같이 가요. 근데 몇 명이나 가시는 건가요?" 너무 많이 가면... "아, 한 다섯 정도만 가죠. 나머지는 아지트 만들기도 해야 되니까.. 그 대신, 꼭 도와주시는 겁니다. 신관님." 이게 목적이군. 뭐, 안 그래도 도와 줄려고 했다고. "그래요. 가요." 카운터, 접시닦이, 웨이터, 도우미, 옷걸이라는 특이한 별명을 붙이고 우리는 상하수도 관리를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기로 결심... 했을 리가 없잖아! "이 애칭... 재미있기는 한데.. 괜찮을까 모르겠군." 쿠릴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녀석.. 비상하군. "그만하죠. 웨이터. 당신들 신분도 숨겨야 하잖아요. 그리고. 절대 물을 먹으면 안되니까 그렇게 알아요. 지금은 한번 정화되었으니까, 그렇게 쉽게 걸려들지는 않겠지만. 뭐...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했으니..." 오.. 문자 쓰는 군. "그럼 갑시다. 어디로 가야지? 음..." 지도를 펼치자, 강의 진로가 뚜렷이 들어왔다. 일단 가봐야 할 곳이 두군데 정도가 나왔다. 한 곳은 성의 북쪽, 상하수도 관리를 위한 저수지... 이고, 한 곳은 그 물이 지나가는 성 지하다. "흠... 이곳은 그렇다쳐도, 성의 지하에 접근하는 건 좀 힘들텐데." 웨이터가 말하자, 도우미가 웃었다. "에이. 대장. 우리가 못할 께 뭐요?" 이봐.. 꼭 거기 가야만 할 껀 아니라고. "자, 그러고들 있지만 말고 빨리 가자." 이번엔 옷걸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탁월한 별명... 마족의 네이밍 센스는 정말 독특하군. 우리가 걸어간 그곳은.. 그러니까, 불길한 숫자 일곱명은 드디어 별 어려움 없이 사람 붐비는 성 북쪽에 있는 저수지에 다다렀다. "관광객이 많군요." "관광객? 하긴.. 요즘이 이런 물놀이 시즌이지. 아, 저기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말이 보이는데?" 그럼 들어가려고 했단 말이냐.. 이봐. 놀러왔냐? "그런데.. 어떻게 확인하실 건가요?" 카운터가 물었다. 어떻게? 먹어보면 알긴 하지. 하지만, 이상한 표정을 지을 것 같고... 최근이라면 몰라도 전에 섞었었다면, 지금까지 그 물이 남아 있을 리도 없었다. 물은 흐르는 것이여!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이쪽 북쪽에 전염병이 얼마나 돌았는지 물으면 알 수 있지. 남쪽은 확실히 오염되어 있지만... 여긴 모르니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각자 사람들에게 탐문하고, 정확히 두 시간 뒤에 모여서 의견을 교환하기로 하였다. 나는 카운터와 동행했다. "흠... 아무래도 여긴 남쪽과는 상당히 분위기가 다른데요?" 카운터의 말에 따라.. 진짜 달랐다. 겨우, 성의 북쪽인데도 불구하고, 일단, 지나가는 병자는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와 나는 상당히 많은 사람을 탐문했는데, 기이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 중에 병에 걸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병에 안 걸릴 확률이 얼마나 희미한가? 게다가, 애들도 있는데. 놀라운 점은 애들도 안 보이는 것이다... "남쪽과는 더 다른 문제가 있군요. 오히려, 더 심각할 수 도..." 근래에 있던 별의별 심각한 문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밝고, 명랑하고.. 이상하다. "일단, 모두 모여 봐야 알... 문제로군." 몇 사람에게 혹시 아픈 사람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는 대답만 듣고 다시 저수지 앞으로 모였다. 시간이 되자, 일행은 다 모였다. "이상해." 이게 모두의 결론이었다. 도우미는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쿠릴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별로 이상할 건 없어. 여긴 죽은 자의 도시니까." 더 섬뜩 하잖냐...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물어도 되겠어? 쿠릴츠?" "별로, 대단한 건 아냐. 여기 물은 오염되었던 적이 없어.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여기 물을 마시지 않았지." 무슨 소리래? "쿠릴츠, 알아듣게 설명해봐." 쿠릴츠는 잠시 주변을 가리켰다. "잘 봐. 포위 됬지? 이렇게 된 거야." 선문답인가... 주위에는 어느새,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있었다. 모두, 정상의 눈빛은 아니었다. 그래. 미쳤다. 혹은 돌았다로 표현되는 이상 정신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쿠릴츠. 그건 잘 알겠는데... 설마 나보고 이 많은 인원을 정화하라는 건 아니지?" "글쎄.. 그러면 너라도 쓰러지겠지. 내가 있으니까, 안심하고 쓰러져도 된다." 하하하.. 젠장. 잠시 카운터와 웨이터는 나를 응시했다. 이해 못하냐? 나보고 기절할 정도까지 힘을 쓰라는 거다. "별 수 없군." 저들은 아직 의식이 있는 상태다. 그러니까.. 개중엔 죽은 사람도 있고. 문제는.. 이것뿐이 아니다. 만에 하나, 마법이 풀어짐과 동시, 저들이 어떻게 될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다.. 욱.. "모두... 기뻐하라고. 나 같은 대마도사와 함께 있다는 걸. 젠장." 나중에 일기에 크게 쓰지 않으면 마왕의 저주를 내릴 테다. 우... "잔소리 말고 하기나 해." 으... 나는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순간, 내 주변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푸른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날려갈 정도는 아니지. 그리고 저수지 물이 바람에 흔들려 파도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힘의 기운이 온 몸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힘쓸 일이 있으면, 라플, 에프터 서비스를 이용해 주세요. 흑. 흑.. [정. 화. 의. 빛.] 마왕의 마력까지 사용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빛의 방출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빛의 홍수는 사람들을 휩쓸고, 그 빛은 순식간에 수도를 비추었다. 단, 북쪽만. 만에 하나 남쪽까지 쓰면... 흠.. 생각하지 말자. 빛이 점점 거대해지고, 검은색 기류가 뿜어져서 내 몸 주위를 감돌았다. 검은 색 피가 되어 그것은 점점 점액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리더니, 점점이 흩어져서 사라졌다.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피의... 환수인가..." 쿠릴츠 녀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의식은 서서히 끝나가기 시작했다. 빛이 점점 줄어들며, 다시 내 몸 안으로 흡수되듯이, 그렇게 사라졌다. "겨우.. 끝났군.... 젠장." 아래 초점이 맞지 않는 다고 생각한 순간, 아래로 추락했다. 순식간에 강한 팔이 나를 잡았다. 쿠릴츠였다. "뭐야, 기절은 안 하잖아? 그럼 내가 꼬옥 껴않고 데려가려고 했는데 말야." 넌.. 말야... 다 좋은데, 주인을 놀리냐! "좀 있으면 괜찮아. 사람들은?" 어느새 방출했던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마왕은 다르다, 이건가? 마왕의 본래 목적과 정 반대의 힘을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멀쩡했다. 다시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주위의 빛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옆에서 쿠릴츠가 말했다. "확실히... 저주하거나, 죽이는 거라면 역대 사상 최고의 마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귀찮은 일은 안 해."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일어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이미 죽은 시체도 있었으며, 병든 사람들도 있었다. 수습하는 게 더 문제군. "정화는 한 번하면, 다시 걸리는 데에 대해 내성을 가지게 되니까.. 앞으로 이쪽은 별 문제가 없을 꺼야." 옆에서 멍한 눈을 하면서 주위를 바라보는 웨이터에게 말하자, 그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 사람 맞냐? 정화는 하루에 한 사람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하던데..." 아.. 그야.. 난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음... 일기에 쓰랬잖아. 그래서."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그간의 기억이 없는 듯 했다. 그리고 알아낸 사실은, 이곳 사람들의 식수는 저 저수원이 아니라, 저 저수원이 남쪽을 돌아서 온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이곳의 오염이 더 심각했다는 말이지." 쿠릴츠도 내 생각에 동조했다. 우리는 주변을 대충 수습하고, 사람들에게 일터의 소중함이라는 신관다운 아주 쓰잘 데기 없는 교훈용 연설을 해주고 흩어지게 했다. "난... 연설이 싫어." "아, 웨이터. 그럼 정말 성으로 잠입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그는 엄지를 들어 보이면서 웃었다. 문제없다 이건가? "이 만큼 어렵기는 하지만, 준비만 이틀 하면 된다고. 일단, 남쪽으로 가자." 그렇게 다시 상수원의 멀쩡함을 눈에 새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멋진 하루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처럼 안 어울리는 건 없었다. 마왕이 된 내가 마족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을 정화하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음. 여기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오도커니 서서 일행을 기다렸다. 두명의 신관과, 다섯 명의 장정들의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모임... 어찌 보면, 상당히 이상한 무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라라, 스승님?" 손에는 뭔가를 잔뜩 든 녀석이 종알거리고, 뺨은 상기되어 나에게 달려왔다. 오옷! 강아지! "아, 쿠릴츠도 있네?" 시쿤둥한 어조.. "세이야. 여긴 왠 일이냐?" 세이는 이내 방글거리기 시작했다. "그게요! 율지스하고 단둘이 있는 학원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차라리 살린 일행이랑 노는 게 낫잖아요. 그래서 요즘 케빈과 노는 중이에요." 엄한 표정 모드 온(ON)! "그래? 공부도 안하고 땡땡이하고 있단 말이지?" "아니에요! 음.. 그러니까, 마법사도 치료술을 배워야 하잖아요. 비교적 살린은 잘 가르쳐 주니까... 그래서요. 하하하... 공부 열심히 해요."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봐야 나보다 키 크다. "그래. 열심히 하거라. 그건 뭐냐?" 녀석은 즉시 보따리를 내려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 정화용 시약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약재들이에요. 사실, 아는 사람이 저랑 율지스 밖에 없잖아요. 스승님은 안 계시고. 근데요.. 아까, 그거 보셨어요? 거의 성의 북쪽이 다 폭파된 줄 알았어요! 근데, 폭음은 안 들리고.. 무슨 정화 마법 같았는데.. 그럴 리가 없죠? 사람이 그 정도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스승님이라면 모를까." 방긋거리는 녀석을 향해 나는 그저 웃으면서 역시 개패 듯이 패주었다. "이 머저리 녀석! 이제는 사부 마법 색 정도는 알 때가 되었잖아! 이 띠벙한 녀석아! 공부 좀 해! 각자에게는 특색 있는 마법 색이 있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그리고 또 뭐라고 했어!" 세이는 잉잉거리기 시작했다... "잉... 잉.. 사부님... 그리고 오렌지색을 쓰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그래. 키히니까... 특히 조심해야지. 만에 하나 내 제자라는 걸 아는 날엔 죽도록 얻어 터질 수 있으니까. 알겠냐?!" 세이는 펑..펑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녀석 마법색은 뭐냐?" 잠시, 여기서 왠지 세이가 열 받은 듯 했다. 녀석은 원래 말하는 도중엔 잘 삐지지 않는데...? "응. 글쎄.. 아마도 적색이 될 확률이 높은데. 그거야... 유전에 따라 많이 좌우되니까." 쿠릴츠의 질문에 친절히 대답 해주는 데, 어디선가 무시무시한 살기가 느껴졌다. 다행인 건 날 향한 건 아니라는 거지. "쿠릴츠. 넌 나이도 어리면서 나한테 왜 반말하는 거지?" 쿠릴츠는 당연히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야, 나랑 프라오니스가 친구고, 너는 그에게 존대를 하니, 난 너에게 존대 할 이유가 없지." 뭔가.. 이야기가 많이 틀린 거 같다. "그래도 존대말 해!" 쿠릴츠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쯧..쯧.. 어리석어.. 이봐. 내가 너에게 존대말을 쓰면 프라오니스가 얼마나 난처하겠어? 그리고.. 넌 잘 모를테지만.. 나랑 프라오니스는 나이대가 비슷해." 잠시... 충격의 여파가 세이의 눈동자에 스쳤다. 그리고 아주 순진한 얼굴로 쿠릴츠에게 말했다. "아, 그럼 스승님 친구 분 이시군요?" 푸...학.. 어떡해... 나와 쿠릴츠는 동시에 품을 뻔했다. 그가 살짝 속삭였다. "네.. 제자. 더럽게 귀엽다." 그렇지. 응? 더럽게? 이 자식이... "아 맞아. 오래 된 친구야. 그러니까, 세이야. 이분께는 존대하렴." "네~! 아, 가봐야겠다. 스승님. 그럼 다음에 꼭 놀러 오세요!" "그럼. 가 보렴." 잠시 세이가 사라지고, 한동안 우린 킥킥댔다. 옆에서 웨이터가 말했다. "저건 범죄야.. 쟤 나이가 몇이냐?" "열 여덟이지. 올해로 열 여덟이 되었어." 그렇게 유쾌해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밝은 햇살이 가려지고, 어두컴컴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나기가 오려나 본데? 으.. 어쩌지? 이 녀석들 대체 왜 이리 늦는 거야?" 도우미가 투덜대고 있는 데, 옷걸이가 한 쪽 모퉁이를 가리켰다. "저기 온다. 야." 우리는 그렇게 해서 간신히 비에 맞은 생쥐가 되는 일은 모면할 수 있었다. "근데.. 좀.. 음.. 음.."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웨이터가 버벅대기 시작했다. 왜냐? 이곳의 장소가 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나보다 더 당황한 것은.. 장소를 선정한 사람들과, 나를 데려온 사람이었다. 어째 따라가는 도중 애들은.. 좀.. 이라는 말을 수시로 하더니. 쯔.. 장난 좀 쳐 볼까? 크크크... "아, 여기는...! 붉은 색 조명, 그리고 여자들이 많이 다니고... 옷을 거의 안 입을 걸 봐서는... 역시!" 시퍼런 남자들은 모두 곤혹스러워 했다. 저쪽에선 소리없이 구타가 계속되고 있었다. 좀 불쌍하긴 하군. "미안해." 먼저 도우미가 꺽고 들어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전 정육점 좋아해요." "그래. 정육점... 응?" 모두 나를 응시했다. 옆의 쿠릴츠는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있었다. 저건 녀석이 웃겨 죽기 30초를 말하는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쿠릴츠. 비밀 아지트가 정육점이니까, 우리 고기 많이많이 먹을 수 있겠다. 그치?" 생글생글... 그러자, 땀 빼면서 카운터가 말을 받았다. "그래.. 그래! 여긴 정육점이야! 냄새가 나도 용서해!" 흐흐흐.. 정말 재미있다. 저 곤혹스러운 얼굴을 보니.. 훗.. 쿠릴츠가 나중에 한마디했다. "넌 말야... 고통을 보고 즐기는 게 아니라, 곤혹스러움을 좋아 하나봐. 역대 사상 사이코 마왕의 한 획을 긋겠군." 어이.. 어이. "그보다, 이틀 정도는 기다려야 하는 건가? 흠... 뭐하고 지내나.. 뭐, 그렇지 않아도 녀석들이 알아서 찾아오겠지만 말야." 쿠릴츠도 동조의 뜻을 표시했다. 그날, 힘을 엄청 많이 썼기 때문에 피곤에 쩔어 일찍 잠들었다. 물론, 쿠릴츠는 잠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차이는 명확하다. 왜 내가 옛날 눈치 채지 못했는지 의아하다. 그 때도 거의 사람이라면 절대 살 수 없는 정도로 잠을 자지 않았는데. .흠. "슬슬.. 시작인가?" 쿠릴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일어날 힘이 요만큼도, 아니 힘은 있지만, 의지가 요만큼도 없었다. "걱정마. 내가 다 해결하고 너한테 오지도 못하게 해주지." 그리고 쿠릴츠의 기척이 주변에서 한 순간에 사라졌다. 마족 특기, 감쪽같이 사라지기를 사용한 것이다. 예전에 그거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마족의 뼈를 깍는 노력이라나? 일종의 테크닉 차원의 문제라고 한다... 세상에. "쿠아아악!" 잠시 뒤.. 이런 소리도 들렸다. "이 놈!" 이런 소리도 오고 갔다. 뭐, 하지만, 정말 내 방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때까지는. 그 소리는 정말 기분이 더럽게 하는 소리였다. 뭔가 스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즉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물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의 정체는 바로 뱀이 아닌, 일종의 변이 괴물 같았다. 허리에서 다리부분은 꼬리로 연결되어 있고, 몸통은 사람처럼 얼굴이 있었다. 그래도 괴물처럼 생긴 것엔 변함이 없지만. "크르르르..." 그 놈의 노란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 놈이 없다면 난 다시 잘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갑자기 녀석의 머리가 날아간 것도, 그리고 소멸해 버린 것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난 다시 잠들었다. "프라오니스.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쿠릴츠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음? 또 힘썼나...? 으.. 기억도 안나요. 역시 치매인가? 나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 이놈에게 묻는 수밖엔 없군. "저기.. 쿠릴츠. 물어 볼 것이 있어. 마왕의 능력에 대한 거야." "응? 뭔데?"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단, 주변에 검은 얼룩이 져 있는 걸로 봐서는 역시 어제 한 바탕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이 녀석 혼자만의 쇼였던 게 틀림없다. 사람들이 슬슬 피하니까. "음.. 마왕이 원하면 바로 아무런 주문 없이 죽일 수도 있어? 마족이 아닌 경우에도." 녀석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손바닥을 쳤다. "아!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 하지만, 흔치 않아. 그렇게 강한 마왕은 별로 없었으니까. 왜?" 그렇게 강한 마왕이라는 사실이 걸리는 군. "어제.. 내가 그렇게 한 거 같아서 말야."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쿠릴츠의 눈빛에는 아무런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았다. "역시.. 그렇군. 네 능력이 원래 대단한데다가, 마왕의 힘까지 있으니.. 이런 건 예상 했어야 하는 건데... 뭐, 모두에게 통용이 되는 건 아냐. 오직 마법과 관련이 있을 때만 그럴 꺼야. 어제 그 상대가 아마도 마법사, 혹은 마물.. 아니었어?" 그 괴물에 대해 설명해 주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뭐, 걱정하지마. 그래도 넌 너니까. 그리고, 라플이 갑자기 마왕이 될 리도 없고. 너의 그 고고한... 마음이 용서하지 않겠지." 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의 고고한 도덕심이?"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그 게으름으로 마왕이라는 엄청 스트레스 쌓이는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난...이런 놈이었던가.. 왠지 눈물이 앞을 가려. "좋아. 밥이나 먹자." 이를 갈면서 밥을 먹었다. 어찌나 밥이 맛있던지 나는 이빨이 으스러질 지경이었다. 빵 먹으면서 돌 골라내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밀가루가 제대로 안 갈렸데. 이해하고 먹어." 그럼 어쩌겠나. 옆에 도우미와 카운터가 나란히 앉았다. 무슨 용병 집합소 같군. "어때, 잘 잤어? 어제 네 친구 활약이 대단했다고. 우린 신관이 아니라, 투신이 나온지 알았다니까?" 어제의 참상이 눈에 그려지는군. "어떻게 알았을까요?" "응? 글쎄.. 모르지." 이렇게 대책 없는 인간들은 처음이다. 보통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혹시 우리에 첩보원이 있는 건가? 하는데... 한 번 물어나 보자. "혹시 스파이가 있는 건 아니에요?" 우직.. 또 돌 씹었다. "응?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를 스파이 해봤자, 얻을 건 없다고." "맞아. 스파이는 없어. 그리고.. 어제 그렇게 우물에 죽치고 있었던 거 잊었어? 보통은 다 알겠다." 아... 그렇지. 이런. 그럼 이건 완전히 비밀 단체고 뭐고, 아무 것도 아니잖아! 좋아. 확인 사살. "혹시, 보통의 임무 수행시에 만나는 장소가 어디야?" 그러나, 나의 기대를 무참히 기대하고 들려온 대답은 한가지었다. 분수대.. 너무 한다. 광장 한복판.. 누가 모르냐.. 그럼. 그리고 심심풀이 삼아, 사탕을 사러 갔다가 어떤 꼬마애가 말했다. "아, 어제 아젠 기사단과 같이 있던 신관님이시다." 이거야.. 울고 싶어진다. 어떻게.. 빨리 이 일을 해결해야지. 으... 그렇게 괴로운 날도 잠시, 둘째 날 저녁, 드디어 성내 정보를 조사하러 간 스파이가 돌아왔다. 용케 스파이 짓은 하는 군.. "그래서.. 갈 수는 있겠어?" 웨이터가 물 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원래라면 술을 내놓고 싶었겠지만, 나 때문에 간신히 참는 듯 했다. 쯧... "예. 여기 수로를 통해서 가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기 쇠를 끊어야 하죠. 그리고, 이쪽의 경비병을 쓰러뜨려야 하니, 두 쪽으로 나뉘어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흠... 외곽 성을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 이건가? 뭐, 우리야 수로만 조사하면 되니까. "전하를 만날 방법은 없나?" 도우미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조사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들어갈 수 있는 곳도 겨우 내성 바로 안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사람의 접근이 없었습니다." 대단하긴 하군. "좋아. 그럼 팀을 네 팀으로 나눈다. 1조는 먼저 경비를 처리하고 대신 가짜 경비 역을 해야해. 그리고, 나머지 세 팀은 일단, 잠입한다." 웨이터가 조 편성을 시작했다. "나는 너희와 함께 2조로 간다. 먼저 밝혀두지만, 이 일은 참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빠져라. 권유할 필요는 없는 일이야." 그러나 아무도 빠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런 어린애가 가는데.. 어이. 어이. 난 댁들의 조상이라고... "훗.. 좋다. 그럼 이제부터 귀를 씻고 잘 들어라." 본격적인 계획안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이럴 때 보면, 웨이터는 역시 전 아젠 기사 부단장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럼 이 위에가 기사단장인가 보지? 바로 왕. 음.. 확실히 배신감이 크긴 했겠어. 계획은 참으로 단순했다. 일단, 수영을 잘해야 계획에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수영 못하는 도우미와 옷걸이는 경비 처리조로 투입되었다. 나와 쿠릴츠는 웨이터와 2조로 편성되어 그 외 두 사람과 함께 전진 조로 배치되었다. 3조는 카운터가 있었다. 카운터는 만약에 있을 혼전에 대비해서 일종의 버팀목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4조는 후방을 교란시키는 역과, 퇴로 확보라는 중요한 역을 맡게 되었다. 여기에는 특별히 설겆이가 있었다. 말에 따르면, 그가 검은 기동차게 잘 다룬다고 한다. 뭐, 쿠릴츠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긴 하겠지. "좋아. 그럼 다 알겠지? 가장 명심할 것은 살아 남는 것이다." "예! 부단장!" 웨이터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뭐... 조금 멋있는 놈이군. 이거.. 죽지 않도록 확실히 해야겠어. "가자!" 그 날 저녁은 마침, 달이 없었다. 그러니까, 도둑과 음모자, 반란자에게 좋은 날인 것이다. 그림자조차 완전히 가려지자, 우리는 모두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고 나섰다. 왜 하필 검은색이냐는... 음... 천이 제일 싸다나? "1조, 권투를 빈다." "예." 1조가 먼저 탑으로 갔다. 외성은 그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벽에 붙어 있었다. 정확히 백을 셀 동안,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이보다 더 시간을 끌게 되면, 오늘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가 되는 것이다. "아젠의 기사단은 원래 이런 일도 많이 했었다. 무패의 신화라는 건... 싸움만 가지고 되는 건 아냐. 어떠냐? 너도 우리 기사단에 들어올래?" 난 이미... 바르하잔의 기사단장이다.. 물론 이름만이지만. "사양할래요. 그러지 않아도 제겐 엄청난 직책이 쌓여 있거든요." "흠.. 그렇긴 하겠다. 나라고 해도, 너 같은 녀석을 스카웃하지." 글쎄... 원래 태어나거나, 혹은 우연히 취득한 게 대부분이라... 뭐라고 해 줄 말이 없군. "가자." 나지막하게 쿠릴츠가 중얼거렸다. 역시. 녀석은 희미하게 진동하는 피냄새를 감지했다. 우리는 즉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을 위해 난 특별히 수중에서 숨 쉴 수 있는 마법을 개발했다. 이건 일종의 구를 몸에 형성해서, 공기가 무사히 저장되는 데다가, 몸도 젖지 않는다는 엄청난 효능을 가지고 있다... "대단하군." 구는 조별로 정확히 세 개가 형성되어 있었다. 단, 겉에서 보기엔 그저, 평범한 물에, 아주 안 평범한 사람들이 둥둥 떠 있는 걸로 보일 뿐이었다... "진입한다." 웨이터가 이야기하자, 재빨리 4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횃불을 꺼내고 기름을 묻힌 천을 둘러서 우리에게 주었다. 가방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꺼내어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3조는 먼저 앞으로 갔다. 2조인 우리도 뒤를 따라갔다. 작은 실패가 하나 건네졌는데, 육안으로 식별이 매우 어려운 가는 줄이었다. "이건...?" "아, 이건 길을 잃지 않기 위함과, 위험을 알리려는 거지. 어느 쪽이던 위험하면 즉시 세 번 당기라고 했거든. 적이 나타났다거나.. 그나저나.. 굉장히 음산하군. 빨리 끝내고 나가는 게 좋겠어." 확실히 그건 나도 느끼고 있었고, 쿠릴츠도 경계를 잔뜩 하고 있었다. 나나 쿠릴츠에겐 별 위험이 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은 아니었다. "좋아요. 그럼 어서 갑시다." 수로 안은 뭐랄까, 음.. 좋은 단어가 뭐 없을까... 그렇다. 생쥐와 곤충의 발라드? 그래. 그런 느낌이다. "앞 조에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 하나 본데.." 쿠릴츠의 음산성 발언이 나오자, 웨이터가 그를 다그쳤다. "설마.. 뭐가 있는 겁니까?" 확실히.. 뭔가 있다. 그게 뭐냐고 물어도 뭐라고 뚜렷하게 이야기 해 줄 수는 없다. 단, 한가지... 더럽게 기분 나쁜 뭔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거다. "글쎄... 그나저나, 이 수로는 언제 중앙에 다다르지?" "아마.. 다음 통로에서 꺽어지면 중앙에 이르는 대관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꽤 걸어야지요. 여긴.. 역시 오염되어 있나요?" 그건 물어 볼 문제도 아닌데... 이렇게 피가 타는 냄새가 나는 데도 모르나? 뭐, 보통 사람은 알기 힘든 미묘한 문제니까. "예. 하지만, 마시지 않는 이상, 별 문제 없어요. 그리고... 전, 그보다, 이 성을 완전히 가로질러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1조가 거기 있는 데도 한계가 있잖아요." 그 말에 웨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역시. 확실히 중앙까지만 가야 된다면 모르지만.. "만에 하나, 중앙까지 가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여러분은 돌아가세요. 저흰 둘만 있어도 문제없으니까." 그리고 뒷말은 듣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앞에서 비명이 울러 퍼졌다. 그 공허한 울음은, 수로를 꽉 메울 정도로 구슬펐다. "꺄아아악!" 잠시 여기서 퀴즈. 아젠 기사단은 전원 남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여자 비명이 들린 걸까? 여자가 한 명 변장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게이가 있는 걸까?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야!" "그게..." 앞에 가던 남자, 이른바, 카운터가 당혹해 했다. 앞에는 놀랍게도 헝겁에 막 입이 틀어 막힌 여자 한 명이 있었다. "누구래?" 태연하게 쿠릴츠가 물었다. 이 놈의 뇌를 언젠가는 해부해 보리라.. "척 보면 모르냐? 사람이잖아." 그녀는 미친 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비틀어 틀고 있었다. 그녀의 팔은 위의 쇠로 묶여 있었다. 음... 미쳐도 할 말 없는 일이군. "비켜 보세요. 쿠릴츠는 누가 안 오나 확인해봐. 아마.. 한 둘.. 오고 있을 꺼야." "그러지." 녀석은 이내 마족 특기이자, 비기인 깜쪽 같이 사라지기를 이용해서 잠적했다. 잠시 모두 당혹스러워 했지만, 워낙 그의 신위를 자주 본 그들은 이내 잠잠해졌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이거 놓아 드릴테니까, 부디 소리만 지르지 마세요." 그리고 바로 헝겊을 잎에서 꺼내자, 그녀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도망가요. 놈들이 올 꺼에요. 제발.. 더 이상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요. 제발.. 흑..." 그녀는 매우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을 씻을 수도 없고, 핼쓱한 얼굴을 봐선, 며칠 굶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오염되어 있진 않았다. 녹슨 검 1호를 꺼냈다. 나의 애검... 이지. 이거에 맞으면, 상처보다, 파상풍 위험을 더 생각해야 한다. "자, 그럼 우리 레이디를 구할까요?" 생긋 웃고, 가볍게 힘을 넣어서 족쇄를 잘랐다. 그녀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마,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듯 해서 걸을 힘도 없는 거 같다. "카운터, 누구한테 업게 해라." 이 상태에서 더 사람이 분열되면 곤란하다는 거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전투 인력 하나 감소보다, 둘 감소가 더 크니까.. 별 수 없지. "고..마.. 워..요.. 흑.." 그녀는 계속 울었다.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눈에 띄게 긴장하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아. 모두 나를 이렇게 열열하게 반겨주니 기분 좋군." 쿠릴츠는 웃지도 않고 옆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진짜 마물 이잖아?" "그래. 새끼 마물이지. 아마... 이 근처에 어미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게 독소를 뿜을 리는 없으니.. 아마 이걸 죽여서 필를 흘려 보내고 있는 거겠지." 웨이터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질문했다. "그럼, 마물이 성 지하에 살고 있다는 겁니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흑이 예전에 무슨 귀족의 성에 잠입했다가 동료와 함께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때도... 마물.. 아니, 그건 인간이 변한 거였지만, 그 때부터면 꽤나 뿌리가 깊다는 건데... "힘들겠어." 내가 한숨을 쉬자, 쿠릴츠는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마. 너는 이 물 마셔도 안 죽는다니까. 차라리 다 마셔서 정화해 보는 건 어때? 배는 재미있겠다." 너나.. 해라. 다시 우린 걸음을 재촉했다. 마물이 나타난 이상, 사람을 앞에 세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얜, 마족이라 한 수위야.. 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그냥 원래 신관이 마물의 존재를 빨리 감지한다고 순전히 이들의 무지를 이용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럼 뭐, 다른 방법이 없잖아? "마물도.. 이젠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그저 기묘한 어두움만 깊어져 가는 군요." 쿠릴츠가 어둡게 말했다. 웨이터가 투덜거렸다. "너가 그러면 더 어두워지는 거 같다구." 물론, 그는 뒤에 있어서 쿠릴츠가 웃는 것까지는 못 봤을 것이다. 이 녀석, 기뻐하고 있었다. 당연히, 마족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나도 우스울 정도로 편안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나쁘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다. "드디어 나오는군요. 앞에 다섯 정도가 있는데.. 마물은 아닙니다. 그리고 대 홀에.. 아마 어미가 있는 거 같군요." 우리는 드디어, 원인을 찾은 거 같군. 긴 여정이었다..아, 이 노년의 즐거움이란. 훗... 윽. 내가 뭐 하는 거냐. "좋아. 내가 작전을 하달해 주지! 자, 가라!" 모두들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쿠릴츠에게만 외쳤다. "쿠릴츠, 어서 가서 해치워! 플레이, 플레이, 쿠릴츠~! 이기는 팀이 우리편!" 잠시 달려가려던 전원이 휘청거렸다. 영양실조로군. "저기... 에... 뭐 하는 거냐." 음? 내가 뭘? "좋아. 좋아. 나 혼자 가지! 대신, 너도 뒤따라 와!" 그야, 이르실 말인가? 나는 조용히 웨이터에게 주문했다. "여기 강한 술로 한잔... 이 아니라, 녀석들 다 없애 줄 테니, 보고만 있어요." 나는 생글거리면서 바로 대원 주변에 절대 방어막을 쳤다. 그리고 어느새 들려오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따라 달렸다. "우와, 쿠릴츠! 대단해!" 역시, 마족은 마족이군... 라는 표어가 떠올랐다. 녀석은 놀랍게도 괴물의 목을 정확히 꺽어서 없애고 있었다. 대 홀은 일종의 물이 지나는 저수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거대한 괴물이 괴로운 음성을 토하면서 피를 뱉어내고 있었다. "역시.. 죽이지도 않고, 살리지도 않는 전법인가? 놀랍군." 나는 씁쓰레함을 뱉어내면서 주문을 외웠다. 거대한 화염구나 내 손에서 타올랐다. 쿠릴츠에게 소리쳤다. "왠만 하면 뒤로 물러서, 타고 싶지 않다면 말야." 쿠릴츠가 내 뒤에서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내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화염구는 물의 한가운데, 괴물에게 가서 꽂혔다. 그리고 거대한 불꽃이 치솟았다. "좋아. 이젠... 응?" 완전히 연소한 괴물이 사라지자, 반대편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나와 같은 흑색 옷을 걸친 사람과,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이 있었고, 흑색의 사람의 목숨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의 손에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흑!" 재빨리 나는 공중 부양 마법을 사용하여 물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내 존재를 느꼈는지, 흑을 바닥에 구르게 했다. 그러니까, 내버렸다고.. 녀석이 켁켁 대는 걸 보니, 아직 살아 있기는 한 모양인데... "크크크... 놈. 나의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하다니... 어리석도다." 그는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랑 얘기도 한 적 있다. "너, 나 알아?" 조용히 두건을 벗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면서 웃었다. "아, 물론. 넌 피스트레이카 공작이로군. 후후후.. 그래. 거대한 마력의 소유자... 그러나, 날 어쩌진 못할 것이다."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마검...인가?" 어느새 쿠릴츠가 다가와 있었다. 으잉? "마검이라니?" "허리에 있는 저거 말야. 마검이야. 비록 모양이 단검이고, 디자인은 옛날 구닥다리 인데다가, 모든 마왕이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검 임에는 틀림없지. 게다가 수다가 굉장하다고 하더군. 세계에 단 두개 존재하는 명검인데, 왜 나바스의 황제가 가지게 되는 검과는 저리도 차이가 날까.. 쯧..." 잠시.. 분석을 마치고 저 녀석이 그럼 저렇게 된 게 검 때문이라, 이건가? 헤.. 난 진짜 녀석의 정신으로 그런 줄 알고 걱정했네. "뭐, 그럼 저것만 뺏으면 되는 건가?" "그렇지. 이봐 마검." "흐흐흐.. 내 정체를 알아보다니, 대단하군." "응? 대단? 아... 넌 모르는 구나. 난 널 잘 아는데 말야. 내 정체를 여기서 밝히지 못하는 게 안타깝군. 뭐, 여기서 이렇게 내버려둬도 상관은 없는데... 요즘 마검은 마의 주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정말 안타까워." 왕은 인상을 썼다. "헛소리하지마! 내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마왕은 봉인 당했다! 그리고 줏대 없는 마도 공작은 나바스와 손잡았지! 그리고 나바스 황제는 지검이 더 좋다는 이유로 날 여기 주고 가더군!" 음.. 결정적으로 마지막 사건 때문에 검이 잔뜩 삐진 건가? "그래? 마왕은 여기 있는데 헛소리 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가?" 나는 방그레 웃었다. "아, 나야. 나." 역시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왕은 검을 공손히 들더니 나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마도, 저 뒤에서 보호막에 갖인 사람들 표정이 어떨지.. 걱정이군. "받어. 그리고 물에 던지던지 어쩌던지는 네 맘이지. 개인적으로는 봉인하기를 원해." 흠. 그렇군. 내가 그 검을 집으려는 순간, 갑자기 물이 솟구쳤다. 오렌지...색? 키히다! "그 검은.. 내가 받아 가지!" 순간, 왕의 몸이 한 번 거의 들렸다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검이 물로 날아가고 있었고, 난 할 수 없이 왕의 몸을 마법을 써서 받았다. 젠장! "마왕의 검.. 그런 말로 현혹하다니.. 제법이군. 다음에 또 보자. 후후후.." 그녀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으... 젠장! "음.. 뭐, 키히 정도의 마법사가 정신을 점령당할 염려는 없으니, 별 문제는 없겠군." 쿠릴츠.. 그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고. 쓰러진 왕이 그제서야 빌빌거리면서 정신을 차렸다. 흑은... 아직도 쓰러져 있었다. 뭐, 간신히 아까 일어났는데, 물에 의해서 한바탕 또 머리 박었지. 뭐. "넌...? 프라오니스 피스트레이카 공작?" 음.. 확실히 정상으로 돌아온 듯 했다. 문제는... 그간의 기억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뭐, 숙주가 죽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여럿 쓰러지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겠군. "전하!" 한 때 해고당했던 남자가 두두두 달려 고 있었다. 뭐, 위험이 없어서 마법은 해제했다. "아, 그대는 부단장이 아닌가? 대체 이 곳에서 뭘 하는 건가? 그래.. 적군과의 화평은 이루어졌나? 그리고 반란은?" "전하! 절... 자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봐.. 웨이터. 소리는 지르지 마. "아니, 내가 자네를 왜 자르나.. 그보다.. 응? 왕비! 그곳에서 뭐하시오! 그 몰골은... 대체 누가 이랬단 말이오! 왕비... 대체.. 내 끝까지 복수하겠오!" 댁이오... 하지만, 그런 말 할 상황은 아니었다. 왕비는 아주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비록 때 국물에다가 꼬지지한 모습이었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다시 정상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오.. 그 복수는 이미 끝났답니다. 저의 사랑하는 전하." 닭살이다... 잠시.. 고개를 흔든 나는 이 쓸데없이 강직한 단장을 보고 심히 안도했다. 부하들 앞에서 아내를 안고 엉엉 울어댔거든.. 이제.. 트라이너의 아주 작은 문제 하나가 해결되는 참이었다. 나중에, 아주 햇살이 따뜻한 날, 왕비와 차를 마실 일이 있었다. 그녀는 아주 아름답고, 수줍은 미소를 띄면서 말했다. "모두, 제가 갇혔다고 생각 하셨겠지만, 전하는 그 때, 우시면서... 분명히 마검에 의해 정신이 나갔을 텐데... 말이죠. 전하는 저를 다치게 하기 싫으셔서 탑에 가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장소를 옮겼지요. 그러나, 저에겐 그 오염된 물을 주지 않고, 깨끗한 물과, 음식을 갖다 주셨습니다." 역시 닭살이야..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역시 계속 미소 띈 채로 말했다. "우리 부부가 비록 여지까지의 죄를 갚아야 하겠지만.. 전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 받고 있으니까요." 끝까지 닭살 떠는 부부였다.. 쿠릴츠는 한 술 더 떴다. "흠... 나는 그 보다, 더 널 좋아한다고." 녀석을 개 패듯이 패주고 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내 진정 사랑하는 키히는... 뭐 하고 있을까.. 하고 별을 세었다. 그러나,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영원히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20. 생명의 서 ... 무릇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래서 그 끝을 알 수 없다. 이 어리석은 인간도 포함하여, 세상에는 단 두가지만이 존재한다. 점(点)과 무(無)가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점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루는 존재가 되고 모든 사물들은 여기서 생성된다. 인간도 여기서 파생된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이 점이라면 무는 무엇인가?... 중략(中略)... -생명의 서 서문(序文)- 다시 해는 떠오른다.. 라는 말이 필요한 것은 바로 오늘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하 수로의 일을 해결하고도 조금도 쉴 수 없었다. 거리는 아직도 병자들이 그득했고, 왕궁에서는 그간의 왕의 미친 행위에 대한 책임 소재를 놓고 왕을 쪼아대고 있었다. 확실히 참새와 닭은 같은 조류니까, 뭐 당연한 일이지. 아무리 정신 없는 상황에서라곤 해도... 책임은 져야 하는 문제이니까... 뭐, 덕에 살린도 해독제를 만드느라 바빠졌다. 그러나 아젠 기사단원들은 더더욱 바빠졌다. 불쌍한 놈들... "라플. 뭐하는 거야?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아까부터 같은 곳만 꼬매고 있잖아?" 쿠릴츠의 말에 드디어 나는 현실에 돌아왔다. 사실은 현실도피를 하고 싶었지만, 내가 무슨 힘있냐? 나와 쿠릴츠는 바로 신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수도는 다시 겉보기엔 평화를 되찾았지만, 나나 쿠릴츠가 에네브가 되었다고 알리자, 학원측은 우리에게 1년간의 연수를 명령했다. 어이... 이거 무슨 직업사회냐? 난 직장인이 아니라고. "쿠릴츠. 나 같은 사람은 한 둘 정도는 못하는 게 있어도 괜찮다고. 그나저나, 넌 거기에 무슨 수를 놓는 거냐?" 화염무늬 장식을 예쁜 붉은 실을 사용해서 매우 섬세한 손놀림으로 수를 놓고 있었다. "아, 내 취미가 원래 수 놓기야. 아까부터 너는 계속 같은 것만 하니까, 속도를 맞출려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왜, 너도 놔줄까?" "필요 없어..." 마족 주제에, 이상한 걸 취미로 가지고 있고... 아웅.. 세이 녀석 보고 싶다. 녀석은 지금쯤 살린과 함께 죽도록 약재를 조합하고 있겠군... 공부는 제대로 하곤 있긴 하겠군. "아, 에네브님. 여기 계셨군요." 우리 보다 한 계급 아래.. 뭐더라? 아, 그렇지. 가네브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이지? 음...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설마, 빨랫감을 더 내놓는 건 아니지? 대사제가 날 에네브로 만든 건 혹시 바느질할 일꾼이 모자라서가 아닐까나... "예. 대사제께서 도서관에서 2시간 정도는 매일 매일 교리를 공부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담당하시는 대집관께서 봐 주실 겁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교리다... 왜냐? 두리뭉실, 허무맹랑, 얼토당토... 게다가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이단이 된다. 또, 무조건 믿기만 해야 한다. 과학적이 마법사와 신관들의 사이가 나쁜 것도 다 이 때문이지. 나바스는 좋겠어... 신관이건 마법사건 별로 없으니까.. "인생은 이래서 아이러니한 건가봐. 예전에 난 신관들의 목을 따면서 살았는데 말야.. 그들의 교리를 연구해야 하는 입장이 되다니.. 주인 잘 못 만나서 고생이지 뭐..." 이봐!!! "쿠릴츠. 너 참 험난한 인생을 살았구나. 어서 가자. 노인네가 되면 원래 오래 기다리는 걸 싫어한다고." 뭔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긴 하지만... 흠. 가만, 그러고 보니, 누가 가르치는 거지??? "다음의 경전을 읽고, 모두 외우도록 하세요. 겨우 세권밖에 안되니까.. 그럼 잘들 보고 은혜를 마음껏 느끼도록 하세요. 그럼 이만 전 가보도록 하죠." 저기... 소개는 안하세요? 처음 뵙는 분인데... 그는 문 까지 걸어간 뒤, 갑자기 우리쪽을 보았다. "참, 깜빡했네요. 오늘할 신성한 노동은 바느질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또.. 또 바느질이냐! "흠... 경전이나 읽어야겠군. 라플. 절규하지말고, 이거나 보라고. 의외로 도움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뭐가... 에잇. 경전은 내게 안 맞는다고.. 여기 그래도 명색이 도서관인데, 설마 경전만 있는 건 아니겠지? 후후후... 소설이나 읽어야지. "라플. 나중에 후회할 거다." 내 인생에 후회란 없다. "너가 열심히 읽고, 나중에 텔레파시로 알려주면 되잖아. 후후. 그럼." "역시... 마왕은 선거로 결정해야..." 쿠릴츠의 잡담은 멀리 넘기고, 책장을 살펴보았다. 특이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책이 원형으로 쌓여있는데.. 골뱅이 모양.. 소용돌이 모양.. 뭐, 이런 거다. 문제는... 책이 참 많다는 건데. "정말, 대 신전은 맞군." 소설책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구나.. 젠장. 세 칸 위에 저 책은 붉은색의 표지... 뭐냐?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하기도 하고 말이지. "생명의...서... 이럴수가.." 내가 애가 된 것도, 나의 그 멋진 수염이 사라진 원인을 제공한 것도 다 이 책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생명의 서가 두 권일리가 없잖아? "가만... 1장..." 책을 황급히 넘기는 내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뭔 상관인가?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모두 현대의 어법과는 상당히 다른, 그러나, 원류는 같은 문체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연대에 제작된 모양인데? 흠... 작은 메모가 있군. '생명의 서 필사본으로 원본의 유실시 그 대행을 하기 위한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은, 이른바, 생명의 비밀을 밝히는 것으로, 갖은 연도에 제작된 죽음의 서와 그 내용이 대립된다. 이 책의 용도는 현재 밝혀지지 않았다......' "찢겨져서 안 보이는 군... 내용을 봐도, 확실히 내가 가지고 있던 요리책과 다르지 않아. 하지만.. 뭔가.. 다르다..." "뭐가?" 뒤를 돌아보자, 쿠릴츠 녀석이 기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누군가 했잖아. 경전은 다 읽었어?" "그야... 난 인간이 아니라고, 그런 것 쯤이야... 그나저나, 이 빨간책은 뭐야? 혼자만 보면 안된다고... 후훗... 어이!" 책을 잽싸게 덮어서 품에 집어 넣었다. "나만 볼꺼야." "야! 나도 인간 여자들의 그런 모습에는 꽤나 관심이 지대하다고! 너 말이지... 혼자만 그런 거 볼려고 그러지! 미성년자 관람 불가도 몰라?"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보냐... 그리고, 너가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고. "헛소리 그만 하고, 어서 다른 책이나 찾아보자. 아무래도.. 여기, 무지 수상해." 쿠릴츠도 그제서야 안색을 굳혔다. 아까부터 이곳에는 바람도 없는데 묘하게 공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마법인가?" "그렇지." 쿠릴츠는 잠시 자신의 손가락을 두개 펼쳐서 붉은 실을 자아내었다... 붉은 것은 되게 좋아도 하는군. "뭐하는거야?" "난, 원래 엿보는 놈들이 제일 싫어." 녀석의 입에서 나지막한 마법 주문이 흘러 나왔다. 동시에, 바닥에 붙어 있던 작은 장식이 부서졌다. 유리 눈인가? "이런 곳에 이런 장치를 설치하다니... 내부 소행인가?" "그렇겠지.. 쿠릴츠. 너가 없앤 덕에 우리는 아주 확실하게 미움 받겠어." 쿠릴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녀석의 눈이 반짝거렸다. "원래, 나랑 여긴 철천지 원수야. 잊은 건 아니지? 그리고... 여긴 너가 모르는 아주 추악한 일들도 저지른 적이 있다고. 후후..." 이봐... 더 추악한 마족은 뭐냐.. 녀석과 나는 그렇게 도청하던 놈이 쓰던 도구를 멋지게 날리고, 두 시간 동안, 경전 옆에서 나는 자고, 녀석은 역시 잤다... "이봐.. 라플. 일어나야지." 어느새 깜빡 잠들었나 보군. "옆에 그건 뭐야?" 바느질 거리인가? 우.. 여긴 에네브 계급도 노동을 하나 보구만... 설마, 살린은 이게 싫어서 나간 거 아냐? "음. 내가 다 해놨으니까.. 더 자. 하지만, 밥은 먹어야지. 그리고... 아주 불길한 소식 전해 줄까? 아니면, 기쁜 소식을 전해줄까?" 왜... 저런 말을? "둘 다." 녀석은 빙글거리고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얼마나 재수 없는 지를. "훗. 별 거 아냐. 나쁜 소식은, 우리가 아까 없앤 그 도청 마법의 시전자를 알았다는 거지." 그게 뭐가 나쁘지???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아까 우리에게 경전 공부를 시킨 장본인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도청 마법은 도서관 책의 유출이나, 도둑을 방지하기 위하 것이라고 하더군. 그러니까, 난 사고 친 셈이지." 으으으잉? 그럼 내가 책을 몰래 숨킨 것도 아는 거 아냐? "그럼.. 기쁜 소식은?" 녀석의 시선은 공허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약간, 한숨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해 주었다. "드디어, 난 여기 경전을 안 외워도 된다는 거지. 오늘 부터 아래 참회실에 가서 반성하고 오래. 덕에... 이 곳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거지." 하긴.. 녀석은 마족이니까. 녀석은 이내 말을 마치고,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측은하기도 하고. "괜찮을 꺼야. 뭐, 네 실력에 죽을일도 없고. 안그래?" "그래. 그렇지. 하지만, 나... 구해 줄꺼지? 만약에.. 내가 정체가 탄로나면 말이지." 그야... 녀석이 왠지 병아리 같군. "그래. 당연하잖아. 내 친구잖아. 넌. 동료이고." "....응." 녀석은 바로 일어서더니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흠... 흠.. 쓸쓸하군. 한가지 잊은게 있었지만, 그 날은 무척이나, 흡족했다. 녀석이 바느질도 다 했으니까.. 문제는... 내 앞에 있는 이 아저씨 때문에.. "그래서, 경전은 하나도 외우지 않고, 잠만 쿨 쿨 잤다는 겁니까?" 허거덕... "에... 에.. 그것이.. 저도 참회실로 갈까요?"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음... 뭐, 비굴해 보일 수도 있겠군. 그러나, 인생이란, 비굴해도 잘만 넘기면.. 헉... 내가 이런 안일한 사고를... "아니. 그러진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일주일동안, 신성한 노동을 하셔야 합니다! 외출 금지도 함께 입니다!" 어이. 그나저나, 쿠릴츠녀석. 잘 하고 있나? 구경가도 되나? 뭐, 외출이란 밖으로 나가는 거니까.. 상관 없겠지. 가서 구경 좀 해도.. 뭐. 밤은 금새 찾아왔다. 신전의 군데 군데는 어느새 횟불이 하나씩 타오르기 시작했고, 내가 묵고 있는 방도 어둠이 잦아 들었다. 내가 있는 방은 신전 북쪽에 위치해 있고, 가구는 침대 밖에는 없당. 이 열악한 노동 환경!!! 오.... 신전의 신관이여, 봉기하라!!! 웃. "자, 그럼 구경이나 가 볼까나~" 복도는 매우 가파른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습기가 차서 굉장히 불쾌했고, 더군다나 벽면은 뭐를 발랐는지 모를 약간 축축한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대신전이냐? 사기다. 벽의 횃불이 내가 지나가자 마자 휙휙 켜지는 걸 보니, 만에 하나 간수라도 있으면 큰일이다.. 뭐, 쿠릴츠랑 감옥에서 날밤 까는 건 취미에 안 맞는다고. 조금 더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려가자, 정확히 100개 하고도 열계단을 더 내려가니 참회실이라고 쓰여진 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음... 쿠릴츠가 참회할 내용이 뭐가 있을까? 반성 1 : 마족 주제에 신관이 되서 미안합니다~ 반성 2 : 마왕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반성 3 : 다들 속는 거 같아서 미안합니다~ 정도인데.. 음... 신관 다운 건 하나도 없군. 마족 예찬가라도 부르고 있으면 미안한 데 말야... 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고 말야. "어이... 쿠릴츠." 나지막한 목소리로 녀석을 부르자, 참회실에 나 있는 작은 창들로, 여러 사람의 모습이 동시에 나타났다. 이봐! 이런 건 대본에 없잖아! "라플. 왜 왔냐?" 어느새 구석 방의 창문 사이로 녀석의 얼굴이 내밀어 졌다. 녀석의 얼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의 거만함과 오만함으로 미뤄볼 때, 틀림 없다. "아, 쿠릴츠. 잘 지내나 해서." "여기 오면 율법을 어기는 거야." 마족 주제에 율법 운운 하다니 우습군. 그리고, 너.. 어라랏? 얼굴이 왜 그렇게 터졌냐? "쿠릴츠, 얼굴은 왜 그런 거야?" "별 거 아냐." 그렇게 보긴 좀 무리가 있다고... 그리고.. 어라라, 여기 사람들은 다 왜 이모양이냐? 망가진 모습들이잖아? "여기 사람들은 너 빼면 다 평범한 사람들 인 거 같은데.. 아냐?" "맞을 껄? 뭐, 나완 상관없지." 어련 하슈... 근데 날 보고 다들 입에서 소리를 내긴 시작했는데.. 꾸에에...라는.. 정체를 모를 말들이었다. "무슨 소리야?" "마족어는 아냐." 건 나도 안다. 밥팅이 같으니라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글쎄." 이걸 비협조적인 놈이라고 하는 거지...? 으.. 팰 수도 없고. 설마, 이 녀석도 맞은 거 아냐? "아무래도... 너 이렇게 맞는 걸 즐기는 건가보지? 보통이라면, 당장 나왔을 텐데. 아냐?" "...." 녀석의 입이 아주 작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흠... "어서 나와." "....못 나가." 으이잉? 갑자기 마족 주제에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든지...? 그런 건 아니지? "갑자기 신앙심이 생겼어?" "안나가는게 아니고.. 못 나간다고. 힘이 봉인 당했어. 녀석들.. 아마 내가 마족인지 알고 있었나봐. 아니면, 너가 피스트레이카 공작이라서 견제하는 건지도 모르고." 으이이잉? 그게 또 뭔소리야? 요즘은 하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서 정신이 없다고! 녀석은 한동안 그렇게 시무룩하게 멍하니 서 있었다. 나름대로, 마족을 이길만한 인간이 여기 있던가? 아니면... 모르겠는데? "그래... 뭐, 같이 도망치면 그만이지." 녀석의 감옥 옆에서 재빨리 주문을 외우자, 내 몸에서 유백색과 푸른색의 기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감옥의 문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 때 였다. "거기까지... 피스트레이카 공작." "넌...!" "젠장... 저 녀석이야. 날 여기 봉인한 녀석이." 쿠릴츠의 몸에서 거무 튀튀한 불길이 쇍 올랐다. 열 받았군. 그러나, 얼마 전에 본, 가네브 계급의 녀석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리석군. 너희 둘 정도 처치 못할 내가 아냐." 하나도 안 무서운데.. 어디 물어 봐야지. "음.. 이름이 뭐에요? 일단, 이렇게 된 바에 이름이나 압시다." 오고가는 인삿말에 싹트는 투쟁심... "흐흐흐.. 시간을 벌어서 신관 놈들이 오길 바라냐? 어리석군... 공작. 너가 강해봐야 어린애인 것처럼, 신관들 역시 우물안 개구리다. 흐흐흐... 순순히 말할 때, 생명의 서를 내 놓아라." 이봐... 강한 건 맞지만... 난 어린애는 아니라고. "음.. 음... 댁은 누군데? 나에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지?" "우린 이미 만난적이 있지 않았던가?" 난 못생긴 놈은 다 잊는 편리한 사고 체계를 소유하고 있다네.. 친구. "모르겠는데?" "그래? 후후후... 좋아. 대마도사 라플을 찾던 사람이지... 기억나나?" 아, 그 어설픈 검사 둘을 데리고서 우리 세이를 사려고 했던 사람? 음침하고, 사라질 땐 무지 폼 잡고 사라지던 사람...이지? "에.. 생각 났어. 그런데, 신관이 우물안 개구리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녀석의 얼굴은 잠시 분노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흐흐흐... 그래... 그래. 너 같은 녀석을 에네브로 임명한 녀석.. 그 어리석은 대사제... 정말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지. 그 녀석들이라면, 지금쯤 곤히 잠들어 있을껄? 그리고.. 충고하나 해주지. 대사제 외에.. 과연 널 에네브로 인정한 사람이 있으리라 보는가?" 대사제가 날 에네브라고 임명한 것도 놀랍다면.. 믿으실라고? "음... 이름은 끝까지 이야기 안하네.. 좋아. 뭐. 아, 맞다. 딜로이쳐... 그런 이상 야리꾸리한 이름... 기억났어!" 칭찬을 바라는 건 좀 무리가 있군. "흐흐흐.. 어찌되었던... 사라져라. 공작. 넌, 이 세상의 어둠을 불러오는 사악한 존재.... 없어져라!" 녀석의 손에서 금빛 광선이 순식간에 방출되었다. 보통은 마법 주문을 외는 시간이라도 있는데.. 놀랍군. "라플! 피해!" 그야...... "... 어린애랑 싸워보신 일 없군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내 뒤에는 거대한 방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녀석은 키 조절에 실패한 거지 뭐. 내 머리를 바로 지나서 그 힘 덩이가 날아갔지만, 내가 터지게 놔둘 만큼 안일한 인간도 아니고 해서... "....실수군. 젠장, 이번엔 제대로다!" 음...상당히 집요한 양반이군. "멈춰라!" 순간, 지하도 안에는 묵직한 압력 비스므레 한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식빵을 든, 대사제가 나타났다... 보통은, 식빵말고, 다른 걸 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대사제...." 딜로이쳐의 얼굴은 점차 어두워졌다. 하긴, 일대 삼은 좀 무리 아닌가.. "어서 사라져라! 이곳은 신성한 신전이다!" 자애인지, 뭔지를 섬기는...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교리 공부를 좀 해둘 껄 그랬지? 그나저나, 왜 안 싸우고 쫓는거지? "젠장.... 좋아. 다음에 보자!" 놀랍게도, 이곳이 결계가 쳐져있는 신전 내부이고, 여기 대사제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녀석은 잘도 공간 전이를 했다. 놀라운 일이다. "괜찮은 겐가?" 대사제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잠시 혀를 찼다. "쯧... 어리석은... 여기 사람들은 다 풀어줘야겠군. 그래. 자네는 괜찮은 겐가? 난 참회실엔 처음인데... 신기하군." 20-3. 그러고도 대사제냐... "자.. 모두 올라가자고, 난 졸려 죽겠어." "음. 그러지." 대사제가 먼저 올라가고, 내가 제일 뒤에 섰다. 계단이 정말... 멀고도 멀고, 위험하기까지.. 으잉? "어이쿠~!" 위에서 데굴거리면서 무지 넓은 옷자락을 날리는 할아버지가 구르면서 정확하게 쿠릴츠에게 박았다... 그럼? 나? 허헛... "으으아악!" 마법은 주문을 외울 시간이 없으면, 말짱 도로묵이다. 한참을 구르면서 문득, 아득하게 나마, 율지스와 다투었던 기억이 났다. -스승님! 잘 못 생각하신 겁니다! 인간들은 어리석어요! -...넌.. 아직 세상을 모르는 거다. -닥쳐요! 제가 세상을 바꿔보겠습니다! -세상에 물들지나 말거라... -그 책을 주세요. 그럼 바꿀 수 있어요! -넌... 안된다. 아.. 그렇구나. 율지스가.. 책을 원하고 있었던 거야.. 왜, 이제야 기억이 났지? 역시, 치매는 부지 불식간에 찾아온다더니.. 쯧. 머리가.. 아프다. 괴로워... 정신 없는 꿈들의 한 가운데서 누군가 예쁘게 미소짓고 있었다. 엘프...귀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내게 방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너무나.. 사랑하는... "라플! 정신차려!" 그 얼굴이 사라진다 싶은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내 눈앞에 들어왔다. 피가 철철 흐르는... 매우 엽기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팠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진듯하다.. "라플... 라플.. 괜찮은거야?" 라플... 익숙한 이름이다... 누구였더라.. 설마, 내 이름? 가만.. 내 이름? 나? 내가 누구..? 이상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이 사람은 누구지? 여긴...? 주변이 어둡고, 횃불이...켜져있는 걸 봐선 지하인데.. 옆에 누워있는 흰옷입은 아저씨는 누구지? "저사람... 다쳤어..."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은 우울해 보였다. "떨어지면서 돌부리에 머리가 찍혔어. 아마... 살아남기 힘들꺼야. 그보다, 넌 괜찮은 거야?" 죽어? 그래... 죽음... 죽음... 아주 익숙하면서 먼... 단어. "난... 난... 죽기 싫어.. 흐...윽.. 흑..."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쏟아내렸다. 녀석은 내 편이다. 난... 그 소년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으. 음... 아.. 괜찮은 건가?" 역시나 피가 흐르고 있는 할아버지가 우릴 돌아다 보았다. 그의 상세가 매우 위중해 보였다. 그는 날 보고 깜짝 놀라는 얼굴을 지었다. "자네...! 피가 많이 나잖아? 어서 치료해야 겠네. 당장, 사람을 불러서..!" 나지막하게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자신의 옷으로 닦아주었다. "마스터... 우는 건 처음이야. 이런 일 가지고. 너 답지 않아." 마스터? 어이. 마스터 보고 너라니! 이인칭, 평어를 사용해도 되는 거냐? 뭐.. 누군지 모르지만 넘어가지. "....배고파. 머리도 아프고." "응? 응... 알았어. 빨리 위로 올라가자. 대사제님.. 다음부턴 이 위험한 계단, 제발.. 없애주세요." 대사제는 상처 부위를 대충 헝겊으로 싸면서 웃었다. "아. 당연하지. 하마터면, 내일 아침 신전에서 금족령을 내려야 할 판이었거든. 하하하... 아, 프라오니스. 자넨 괜찮나?" 아까는 라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프라오니스라고 하고.. 어떤 게 내 이름이지? "...누구세요?" 두 사람의 표정이 기괴하게 보였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대사제란다. 내가 기억 나지 않니?" 왠지 다정한 할아버지 같은데? 흠... "안녕하세요? 저, 아무래도... 아무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충격이 휩쓴 파도를 본 표정이 지나가고 있었다. 대사제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불쌍하게도.. 다 내 탓이구나.. 이거 참.. 자네.. 당분간 이 아이를 돌봐주게. 기억상실증이라니... 꽤나, 잊고 싶은 것들이 많았나 보구나." 잊고 싶은 거라... 누구한테 돈이라도 꾸었었나? "....그러죠. 그럼... 대사제님. 이곳은 위험하니, 제가 아는 안전한 장소로 데려갈까 하는 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대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게나. 하지만, 이번 가을 절기까진 돌아와야하네. 에네브의 모든 출석이 요구되는 일이니까. 알았나?" 왠지 소년의 얼굴에 사악 비스므레한 미소가 나타난 듯 했지만, 역시...착각이지? "그럼.. 우린 이만 실례하죠.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으니.. 그럼." 그는 내 옆에 서서 일종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인가? 아버진 마법을 싫어하셨었지... 응? 나도 아버지가 있나 본데? "당신이 원래 있어야 할 그자리로..." 그리고,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대사제의 걱정스런 얼굴이 떠오르긴 했지만, 왠지... 이 녀석은 믿을 수 있을 듯 했다. "시끄러워! 내 멋대로 무슨 일을 한 건지 알기나 해! 이곳의 위치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고!" "..." 시끄러운 소리는 지들이 냈으면서... 음... 이 침대 푹신하다. 옆으로 데굴거리면서 굴러서 눈을 살며시 뜨자, 아주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이 눈에 띄었다. 우와, 분위기 좋다. "프라운. 네 멋대로 일을 진행시키는 건 좋지 않아! 아무리 네가 고위 마족의 한 사람으로, 고대부터 우리의 왕을 모시는 자였지만, 그래도 안된다고! 현재 마도공작도 우릴 배신한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어!" "..."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진 여자네.. 흠.. 방도 무지 크구나... 예쁜 장식도 되어있고.. 그림도 있잖아? 미묘하게.... 이상하긴 하네. "저 꼬마애가 뭔지는 몰라도, 당장 죽이던지 없애던지 해!" "...그건 곤란해." 음? 프라운이라는 사람의 목소리.. 들은 적 있는데? 아, 맞다. 녀석이다. 날 데리고 공간이동을 했지? 맞아.. 여기에 온 건가? 안전한 곳? 창문 밖의 풍경도... 음? "마을이.. 보이는데?" 거대한 마을이 성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왠지 전에 본 적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그리고 여지껏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질 않나, 학원에서의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잘. 깨어나셨으니, 난 이만 들어가 보지." 곧이어 발소리가 들리고, 녀석이 들어왔다. 그 피는 다 닦은 모양인지 매우 깔끔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옷은 청색의 주로 하여 장식은 황금색의 수가 놓아져 있었다. 꽤나.. 비싸 보이는군.. 옆의 여인은 놀랍게도 매우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연상으로 보이는데? 한... 25세 정도? "쳇. 인간 꼬마따윈... 한 끼니 밖엔 되지 않는데 말야." 허허헉! 지금 날 먹을 셈이냐! "괜찮으신지요... 나의 주인이시여. 어둠을 지배하는 자, 그 정점에 서서 모든걸 내려다 보시고, 세상의 반을 소유하신자여... " 어둠? 난 그런 거 먹은 적 없는데... 배 고프니 별 생각이 다 나는군. 그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잖아? "...설마... 이 소년이... 하지만, 마지막에 힘을 전수 받은 건 ... 설마, 이런 꼬마가 죽였을리가 없잖아?" "...확인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지. 죽여달라고 부탁이라도 해 보지 그래?" 녀석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그녀를 비웃듯이 바라 보았다. "음... 음.. 프라운이라고 해?" 잠시, 혼란을 느끼고 있을 그녀를 대신해 녀석에게 질문했다. 녀석은 아주,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예. 주인님. 뭐든지 명령하시죠. 세계 멸망이든지, 파멸이든지 뭐든지." 왜 패고 싶냐.. "밥 좀 주셔도 될까요? 저, 지금 배가 많이 고파서요." 초롱 거리는 광선을 녀석에게 쏘아대자, 그는 이내 피시식 웃더니,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분부대로." 흠...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내가 기억을 잃은 왕자라든지.. 오옷! 그럼 저 마을은 내 주민이란??? 하지만... 내 어디에 왕의 기품이 스며있냐? 농담이 심해. 아, 그렇군. 조직의 장이었다든지...!!! "저기... 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주인님. 전, 이푸드입니다." 뭐? 무슨 음식? "예... 잘 부탁해요." "뭐든지 하명하십시오." 그래...! 정보를 알아내자! 이제 세상은 정보화 사회가 아니던가! "여기가 어딘가요?" "예. 트라이너 수도에서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동쪽 숲과도 가까운 도시입니다. 꽤나 큰 도시로, 이름은 세이버입니다. 이곳의 영주는 대대로 우리 가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도시의 영주이자, 주인님을 모시는 고위 마족 중에 하나입니다." 마족? 마족이라고 했니? 잠시 생각해 보자. 마족의 주인은 마왕 밖에 더 있냐? 그들은 자존심이 더럽게 세서 마왕 이외의 자에겐 그런 칭호조차 붙이지 않는데.. 그럼, 내가 마왕이냐!!! 20-4. "내가 마왕이에요?" 확인 사살을 하자, 그녀는 갑가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까 의심한 점, 사죄합니다! 주인님 옆에 서니, 확실히 그 강대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말해...도. 내가 뭘 어쩌라고? "나... 마왕은 싫은데... 으.." 왠지 난 마족은 무지 싫어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만... 마족이 뭔지 기억은 한단 말야. 어린아이 심장을 파먹는다는 아주 잘못된 소문이 돌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더 무서워. "여기 식사 대령했습니다." 나보다 한 두살 많아 보이는 애가 식사를 나르는 것도 좀 안쓰럽잖아.. "저... 프라운. 고마워." 그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얼굴이 붉어지면서 말했다. "주인님. 고마워라는 단어는 아끼십시오. 어둠의 지배자 답지 않으십니다." 응? 어둠의 지배자라.. "괜찮아. 그런 귀찮은 거.. 별로. 하고싶지도 않은 걸?" 왠지 프라운의 한숨 소리가 들린 듯 했다. 그날 밤. 밥 배터지게 먹고 잠시 잠에 들었다가, 문득 화장실을 가고 싶어졌다. 성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야행성인지 뭔지.. 여하튼, 복도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음... 음.. 역시. 설사야." 종이를 들고 조심스렟 걷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때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억을 잃었다니!" "그래. 완전히. 나도 기억 못하니까.. 뭐. 그래도 다행이지. 만에 하나 정상이라면 절대 마왕은 하지 않으려 들었을 꺼야." 프라운과 이푸드인 거 같은데...자, 내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자료에 따르면, 분명히 마족들은 마왕의 기척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숨기자고 맘만 먹는 다면 말이지. 그렇다면...! "프라운. 그렇다면 원래는 대 마도사인 라플이... 마왕이 된다는 건데... 난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다른 놈들이 찬성할 꺼 같아? 그리고 동쪽 숲의 주인은 어떻게 할꺼야? 그는 라플과 친구라고." 잠시 프라운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핫... 그게 친구냐? 한 때는 그 저주덕에 키히가 죽을 뻔 했다고." 키히는 또 누구냣! "프라운.. 과연 음모가 답군. 하지만, 왠지 끝이 불안한 게임이라고 이건." "난 상관 없어." "어련 하실까." 흠...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정리가 되는 군. 그러니까, 내 이름은 라플인가 보다. 프라오니스는 애칭인가? 뭐, 여하튼, 이름이 중요한게 아니지. 그보다, 내가 제 정신이라면 절대로 마왕 따위는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게 중요해. 기억을 되찾으면 무지 막지 하게 후회하는 거 따윈 싫다고. 그리고.. 마왕도 왕은 왕이야. 일이 많지 않겠어? "좋아. 그럼 난 일하러 가지. 넌 뭐할꺼야?" "교섭. 동쪽 숲의 주인의 입을 막아둬야지. 그리고... 귀찮은 마족 한 놈이 더 있잖아." 프라운은 왠지 이를 가는 듯 했다.. 착각이겠지? "아... 그녀석." 음.. 나만 모르는군. 다들 S+V를 잘 지켜 달라고...기왕이면 사형식(주어, 동사, 목적어, 보어.) 문장으로 만들어 줘... "그럼..." 잠시 마력의 파동으로 인해 방의 공기가 진동했다. 프라운과 이푸드 음식점이 떠난듯... 음... "원 투 쓰리 포... 랄랄라 랄랄라... 내 세상이다~~" 난...이런 놈이었다. 불만 있으면 항의해. 그러나.. 적당히 항의 할만한 곳은 없군. "큰 성이네..." 이곳은 도시의 북쪽에 을씨년 스럽게 서 있었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가자, 약간의 음산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 복도는 같은 벽지를 사용하고 있고, 그림도 걸려있지 않은 데다가, 가끔 있는 문 모양 마저, 동일했다. 이는 내가 길 잃기 딱 쉬운 상태를 의미하며, 여기서 나는 확실히 미아가 되었다...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으... 여긴 대체...응?" 복도 맞은편에서 두 사람이 소리를 죽이고 걸어오고 있는데, 어찌 반갑지 않으리라! 이건 바로 내가 이 빌어먹을 복도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오옷! "저기요!~"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은 남자였는데,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어디 장례식에 가나? 그리고 가슴에 작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뭐더라? 음.. 왠지 나와 많은 관련이 있는 듯한 문장이군. 머리는 갈색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여자와 매우 대조적으로 보였는데, 여자는 금발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옷은 회색? 검은색 같기도 하고.. 음.. "!" "젠장, 들킨 건가? 예상했던 일이지만, 어쩔 수 없군." 응? 나한테 들킬 걸 예상했다 이건가? 댁들의 직업이 무당인가? 것도 아니면 어떻게 알아? 자, 가만 생각을 해보자. 저 두사람은 이푸드와 프라운이 떠난 성에 나타났다. 그리고 날 만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들을 만날 줄 몰랐다. 그들이 먼 들판에서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릴 하던 말던, 나완 상관 없는 일이다. "어라라?" 이제 그들은 칼까지 꺼내고 있다... "마렐. 저 사람은 마족 같지는 않아요." 마족? 음... 어둠의 지배자는 마족은 아니지. 아마, 마족이 아니라 마왕이라고 하지. "그렇군... 그럼 이 곳에.. 저런 어린아이가 왜 있는 거지?" 흠.. 흠.. 그거야... 마왕이래두. "안녕하세요? 저..출구를 혹시 아시나요?" 잠시 침묵. 갑자기 금발 소녀가 내 손을 덥석 잡고 글썽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불쌍해라.. 여기 같혔던 거구나." 갇혀? 그럴리가... 난 프라운이 왠지 친하다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는데? 그리고 꼬박 꼬박 나한테 잘 해주고.. 훗.. "그건 아닌데요?" 잠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지?" 이번엔 남자 쪽에서 이야기했다. "...음... 음... 아, 모르겠다." 그래. 모른다. 생각해보니까, 여기 오게 된 건, 기억을 잃어서랬잖아? 그리고 나서 프라운이 가을까지 돌아온다는 조건으로 가라고 했고... 가만, 그럼 왜 가을까지... 어딜 가는 거지? "마족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는 거 아닐까? 이... 놈들... 이런 어린아이를 데리고 뭘 하려고 했던 거야!" 분노하는 사람이군... 응? "저기요... 누가 온 거 같은데.." 갈색머리 남자는 재빨리 검을 들었다. 이 파장은 분명 이푸드의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데? 가만, 난 어떻게 저들의 파장을 다 알고 있는 거지? "여긴 무슨 일이지? 난 여기 영주인 이푸드이다." 이푸드의 얼굴을 일그러져 있었다... 화 많이 났나 본데? 그녀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는 걸로 봐선... 대장간에 가려고 하나보다! 아.. 이게 아니지. "나왔구나! 이 사악한 마족! 너가 마족이라는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제 나, 사랑과 정의와 자애의 엘차브 마렐이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어디서 들은 듯한 멘트인데...? 뭐, 이런 사소한 거까지 신경쓰면 오래 못 살지. "후후후... 이제보니, 신관 나부랭이었군. 이봐. 여기 이 분은 바로 에네브님이시다!" 잠시 침묵의 공기가 돌았다. 에네브가 뭐고, 엘차브가 뭐지? 누구 아는 사람 없나? 알려줘! "설...마! 에네브는 대륙에 몇 명 존재하지 않는다. 그 중 세명은 대신전에 있고, 한 사람은 수도에 있으며, 두명의 새로운 에네브는 아직 공부중이라고 들었다!" 응. 그렇구나... 신관이란 힘든 직업이었어. 누가 어디 있는지 다 알아야 하잖아? "후후후... 이름 정도는 알겠지? 이분이 프라오니스. 그리고 쿠릴츠도 여기 머무르고 있단 말이다!" 여인이 신관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마렐. 하지만 저 여자는 마족이 맞아요. 아마도... 귀화한 마족인가 봐요." 마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수도 있군... 미안하게 되었오. 아, 에네브님.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프라오니스... 라플. 어떤게 내 이름이지? 웅... "응.... 저.. 지금 난 기억을 잃어서 말야. 아무 기억이 없어. 그러니, 편하게 대해." 잠시... 이푸드의 눈빛 공격이 이어졌다. "아, 그러셨군요... 저런.. 설마, 저 놈의 꾀임에 넘어가신건...?" 그야.. "응? 아니야. 아, 이푸드... 나 방까지 바래다줄 수 있어? 길을 잃었거든." 그녀는 왠지 슬퍼하면서 한탄했다. "으. .사기다... 이런 사람이 마왕이라니... 으..." 때로, 인생은 종종 이렇게 되는 법이다. 두 사람의 이름은, 남자가 마렐, 여자가 위트렐이라고 했다... 남매 출신으로, 마렐은 엘차브 신관이고, 여자는 마법사라고 했다... 마법사라. 왠지 정이 가는 단어야. 20-5.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소개를 마치고, 우린 적당히 친해졌다.의외로 마렐이 귀여웠다. 음? 내가 나이가 어린데 왜 귀여워 보이는 지는 ... 솔직히 모르겠다. 프라운은 여전히 오지 않았고... "나, 이렇게 보여도 의외로 장기는 잘 둔다고." "흠...마렐. 나한테 내리 여섯판이나 지고선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에요?" 마렐은 머릴 싸맸다. "그게... 왜 너한테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느냐 말야!" 옆에서 위트렐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의외로, 어린데도 불구하고 영리하네. 아무래도 여기선 오빠가 진 거야." "으... 그럼 이제 일곱번째 지는 거라고!" 음... 난 장기의 천재인가? 알고보면 머리가 많이 좋았다든가... "저... 프라오니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요." 이푸드가 음료수를 내려 놓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복도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그게... 이상해요. 쿠릴츠.. 벌써 올 시간이 다 된 거 같은데.. 아직도 오지 않아요." 무슨 일이 있나? 하지만 간지 아직 하루도 안 된 거 같은데... "좀 더 기다려 보고.. 내일 까지 기다려 보지." 동쪽 숲이라는 데가 그리 가까운데도 아닌 거 같은데. 설마, 일일 생활권 시대 어쩌고 하지는 않겠지. "프라오니스~ 이번엔 내 동생과 상대해 보라고. 원래 신관보다 마법사가 머리가 좋으니까." 갑자기 녀석이 나를 불렀다. 헤헤... 의외인데? 보통의 신관은 그걸 인정하지 않잖아? "신관은 마법사와 사이가 나쁘잖아? 그런데,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인데?" 마렐은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그야, 원래 내 동생이 영리했거든. 나야... 무늬만 신관이지, 엘챠브 계급 중에는 신성력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다고." 내 경우엔, 신성력이 아닌 게 확실한데? 마왕이 신성력이 있다면 이것도 웃기는 일이지. 가만, 그럼 내 정체가 뭐야? 마왕 겸, 사제 겸... 또 뭐가 더 있는 건 아니지! "후훗... 마법사인 저를 이기면, 천재라고요. 오빠. 자, 어디 해 볼까요?" 생긋 웃는 그녀와 붙었다... "...대단해..." "...천재 맞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이푸드는 한마디 보탰다. "이제 그만하고, 씻어요! 마렐하고 위트렐씨 둘다, 지저분하잖아요!" 어라라, 두 사람 은근 슬쩍 식객이 된 거 같다.. 어째. 이런 부당한 처사를 눈 뜨고 계속 지켜보아야 하는가? 여기서 나는 명언이 떠오른다. -친구들아 다 함께 모여서.. 쎄쎄쎄... 관두자. 쓸데 없는 생각만 난다.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면, 분명히 떠오르는 일들도 있다. 사람들도 생각나고, 그 중에 가장 기억에 강렬하게 생각나는 것은... "연어..." 으악! 난 대체 왜 이런 거만 생각나는 것인가? 나는 혹시.. 아, 그래. 나는 정말, 그것일런지도 모른다. 좋아. 이푸드.. 그녀와 이야기해 보자. "이푸드. 나.. 뭔가 과거와 관련이 있을 듯한 것이 생각났어." 이푸드는 고개를 들고 나를 주시했다. 역시... 역시. "...뭡니까?"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역시. 틀림 없다. 난... 난. "내 정체는 사실...연어 어부잡이지!" 이푸드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닌가? "에.. 그럼, 요리사? 연어 전문점의.. 그러다가 신관에게 발탁이 되었다든가... 그런 거 아냐?" 그녀는 잠시 큭큭 대기 시작했다. 사람은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데... 음... 용서할 수 없어. "큭..큭.. 아.. 죄송해요. 좋아요. 키히. 이런 이름을 듣고 생각나는 거 없습니까? 가령, 모습이나, 심경의 변화 같은 거 말입니다." 심경의 변화? 그런 게... 음... 음.! "알았어. 이젠. 다... 다 알아버렸어." "역시.. 그건 잊지 않으셨나 보죠?"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연한 자세로 외쳤다. "어부가 맞아! 어부가 키없이 살리가 없잖아!" 잠시 정적이 감돌고, 그날은 이푸드가 미친 듯이 웃는 하루가 되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다 나만 미워해. 미워. 한동안, 그렇게 이푸드의 말에 따르면 촌극을 한참 하고 마렐과 위트렐은 이만 떠나 봐야 한다고 했다. "식객 하려던거 아니었어?" "하하하... 농담도. 신관은 식객이란 없습니다. 이젠 밤이 되었으니 떠나야죠." "보통은, 마렐. 낮이 되면 떠나지 않아? 흡혈귀도 아니고." 마렐은 잠시 주저하는 듯 했다. 그러자, 위트렐이 나섰다. "우린, 아직 이푸드에 대한 의심을 푼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녀가 마족인게 사실이라면, 아마 이 마을에 불온한 기운이 있을 거에요. 그걸 찾아야죠. 그리고, 당신 친구이자, 에네브이신 그 분의 신상도 걱정되고요. 떠난지 한참 되었다면 서요. 마족의 위협으로 인해 그리 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가 마족이라는 이야기는 모르는 군. "뭐, 아무래도 좋겠지. 나와 위트렐은 이만 떠나지. 하지만, 이 근처에 계속 있을 꺼야. 아, 저기 이푸드 영주가 오시는군." 이푸드는 검은색 드레스 비스므레한 옷을 입고 있었다. 뭐랄까, 드레스라고 부르기는 좀 딱딱한 분위기가 강했다. "이푸드. 이분들 배웅해 드려." "그러지요. 가실까요?" 두 사람과 아쉬운 이별을 했다. 다시 두시간정도가 지났을 때, 이푸드가 돌아왔다. 무슨 배웅을 이렇게 오래 하냐... "이푸드, 너무 늦게 왔어." 그녀는 흠칫 놀라면서 조용히 손을 뒤로 돌렸다. 응? 뭐, 먹을 거라도 챙겼나? "연어찜?" 이거 보라. 입만 열면 연어가 나오지 않나? "아니에요. 가서 주무시죠. 밤도 꽤 깊은데다가... 그리고 피곤하실 텐데." 별로 피곤하진 않은데.. 수상해... 응? 그녀의 옷자락 한쪽이 찟겨져 있었고, 군데 군데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이푸드. 그건 뭐야? 핏자국 같은데?"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항변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이만..." 수상해... 성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다시 아침이 될 때까지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악덕영주! 사라져라!" 왠 꼬마의 목소리가 나의 아침 잠을 완벽하게 방해해 주었다. "웅... 뭐야.. 아침 부터.. 어제 저녁 설쳤는데.. 우씨." 침대에서 일어나서 거의 기듯이 창문으로 걸어가자, 창문 밖에서 나는 소리들이 더욱 확실하게 들려왔다. "이 꼬마녀석이!" 몇 몇 사람과 꼬마가 싸우고 있었다.. 정확히는 구타와 폭행이라고 하는 편이 더 알맞지만... 뭐, 안구해주냐고? 내 나이 먹어봐라... 얼마나.. 응? 내 나이가 이제 기껏해야 십대일 텐데 내가 왠 헛소리를? 혹시 차밍하게 늙은 20대? "이푸르영주, 죽어라.. 켁!" 이번 껀 직통으로 들어간 듯 했다. 꼬마녀석은 완전히 바닥에 굴렀고, 1만 2천 노동자를 봉기시키려고 했던듯한 꼬마는 처절하게 맞기 시작했다. "이 건방진 녀석이!" "야.. 애잖아. 너무 패지 말라고." 가만히 녀석이 맞는 걸 바라보자, 누군가의 영상이 아른 거렸다. 누구였더라? 누구길래 이렇게 보고 싶은 걸까? 음... 음... "젠장. 모르겠다." 창문에서 휙 뛰어 내렸다. 다음일? 당연히 중력에 의해 나는 멋지게 아래로 떨어져갔다. "으엥!~!" 다행히, 비행 마법이 생각나서 다행이었지... "한심하게 아침 댓바람부터 죽을 뻔 했다.. 헉..헉." "넌 뭐냐!" "마법사다!" 병사들이 갑자기 나를 포위하고 짖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이 영지는 그리 큰 편도 아닌데, 왠 병사들이 이렇게 많은 거지? 흐...음. "으..." 꼬마는 아직도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쯔... "어린애를 괴롭히는 것은 이,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 이 어리석은 병사들이아, 그 소년을 놔 주어라!" 대뜸 나오는 말이, 이렇게나 고색창연하면, 말하는 내 입장이 뭐가 되나? "...뭐냐.." "글쎄. 약간 미친 꼬마가 아닐까?" 절대, 아니다. 난 꼬마도 아니다! 응? "괜찮나?" 순간, 약간의 바람이 불고, 해가 나를 살짝 비춰주는 바람에 내 모습은 정말 빛나보였을 것이다. 가만...내가 왜 이런 신경까지 쓰고 있는 거야!!! "으..응." 그 소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몸이 멋대로... "이놈들! 용서하지 않겠다!" 21-1. 영웅의 조건 고금을 통털어 가장 영웅은 누구였을까? 그건 바로, 대마도사 라플을 들 수 있다. 그에 대한 조사는 아직도 이뤄지고 있는데, 그의 과거를 찾을 수록 당혹함을 감출 수 없다. 그는 놀랍게도 대륙 최고의 명문가문 중에 하나이 피스트레이카 공작가의 한 사람이고, 그의 검술은 이미 어린나이에 그 또래에 적을 찾을 수 없는 검에 관한한 천재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러나, 자신의 가문을 내세우지 않았다... -마법 언록- 내 몸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주변이 어둠에 잠들고, 태양을 구름이 가리기 시작했다. 가만.. 꼭 무슨 마왕 재래 하는 거 같군. 하하하.. "으악!" 검은색의 공들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데로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마법구를 소환해서 녀석들을 놀래키자, 그러면 알아서 기지 않을까나.. 하는 아주 얄팍한 생각이었다. 설마, 내가 애들을 데리고 무슨 짓을.. 후훗. 당돌하군. "흐흐흐... 다 죽어라!!!" 이렇게 임팩트한 대사를 집어 넣으면, 더 놀라겠지. 흠. 난 역시 소질 있다니까? 뭐에...? 갑자기 두려워 지는 이유는? 사람들의 눈이 내 뒤를 정확히 향하고, 마법구가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으잉? "라플. 여전히 잘 놀고 있군. 친구." 뒤에서 아주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가렵다. "귀에다 대고 이야기 하지마! 이 바보!" 그리고 정확히 엎어치기로 녀석을 날렸다.... "꾸엑!~~~ 마족 살려~~" 이번엔 병사들의 패닉이 가중되었다. "역시 마족이 맞아! 튀자!!!" 어이.. 니들 고용주도 마족이라고. 그나저나, 이 녀석은 뭐냐? 검은색 날개에 깃털까지 풀풀 날려 가면서, 가련함을 표현하고자 용쓴 건 알겠다. 하지만... 그 거대한 몸짓에 어울릴리가 없잖아! 한 190cm은 되겠다. "넌 누구야!" 그 마족은 갑자기 땅바닥을 측은하게 주시했다. "너무해. 이젠 나도 잊어버린거야?"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아, 괜찮니? 어서 일어나. 힘들었지?" 현실도피... "아, 네..." 이 소년도 만만치는 않군. 녀석은 내 손을 잡고 재빨리 일어나서 옷에 묻은 흙을 재빨리 털어주었다. 그리고 마족을 바라보면서 웃어주었다. "그 가면... 되게 무겁겠다." 어이.. 가면이 아니라 진짜라고. 마족...당황했군. "가면! 넌 나의 이 퍽펙트한 아름다운 얼굴이 가면으로 보이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주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가면. 하지만, 마족은 사람과 어린아이를 보면 심장을 빼버린다고 했는걸?" 누가 그런 살벌한 소리를... "웃기지마! 난 여지껏 애들은 죽인 기억이 없어!" 그렇지. 애들은. 아이와, 아기는 틀리지? "응. 그래도 가면이야. 아주 좋은 사람 같은데? 날 저 나쁜 경비에게서 구해 주었잖아." 하하핫... "하하하하. 들었냐. 라플.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건 인정이 아니고 오해라고 해. "아, 들어봐. 여기 영주는 말이지... 마족이야." 잠시... 녀석은 당혹스러워 했다. "몰랐어?" 녀석의 말이다. 이번에는 꼬마 녀석이 놀랄차례다. "뭐! 알았단 말야? 그럼 어서 심장에 말뚝을 박으러 가자!" 그건 흡혈귀 퇴치법이야... "그리고, 이 부적을 무서워 할꺼야. 음.. 좋아. 어서 가자!" 누가. 누굴? 내가? 왜? "야, 넌 못 본 사이에 취향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쭉 쭉 빵빵한 미녀 외에는 상대도 안하는 줄 알았는데. 이젠 주근깨에다가 빨간 머리 여자애를 챙기기도 하고." 응? 누가? "그런애가 어디있다고 그래?"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꼬마를 향했다. "얘." 나의 돌머리도 그녀석을 향했다. 확인 사살. "너, 여자애야?" "응. 왜?" 꽤액! 아무리, 이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하잖아! 여자애 치곤 너무 남자답게 생겼다고! "넌.. 어떻게 안거냐?" "응? 나야, 마족이니까... 왜?" 이 녀석은 대체 누구길래, 이런 친근감 넘치는 태도를 나에게 보이는 거냐... 모르겠어. 모르겠어. 어차피 인생은 알 수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절절하게 와 닿는군. "네 이름... 몰라." 갑자기 그가 나를 멍한 눈동자를 하고선 나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아주 기쁜 듯이 웃었다. "내... 이름을 알고 싶은 거야?" 그의 몸에서 검은색 빛이 나온다 싶자, 이내 그의 거대한 날개는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점점 변화했다. 그의 머리는 검은색에서 천천히 사람과 유사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검은 팔은 사람의 하얀 손으로 변했다. "너.. 변태(變兌)였냐?" 녀석은 방그레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공손히 꿇고 나의 옷자락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뭐랄까, 근접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의 주인. 나의 이름은 하브라이드.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과 생과 사를 같이 하는 자입니다." 잠시 얼었다. 그리고 꼬마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이름이네요." "맞아." 그는 조용히 일어나서 꼬마에게 꿀밤을 한대 먹여 주고서는 우와한 동작으로 다시 일어났다. "쳇... 기억을 잃었을 줄이야... 젠장. 프라운 녀석. 쓸데없는 일을 했군. 뭐, 사고긴 했지만... 라플이라고 부를께. 라플." 확실한 건, 내가 마왕이라고 부르는 존재라면, 이녀석이 마족이라면 당연히 나는 이 녀석의 주인 격이 아닌가? "무슨 조직이지?" "글쎄... 세상을 어둡게 하자 파?" 이상한 이름이다... "저기.. 오빠, 오빠. 정말 멋있다." 반짝 거리는 소녀의 눈은 그를 향하고 있었다. 뭐가 멋있지? 마족이니까, 마력으로 몸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거잖아? "훗. 내가 원래 센스가.." "그게 아니라! 신기해! 오빠! 나도 알려줘!" 이 꼬마는 보통 꼬마가 아니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울보에 떼쟁이 였으니... "으아아앙~~ 오빠~~ 알려줘~ 알려 달란 말야~" 휴... 녀석의 반응이 가관이다. "음... 오빠~ 하고 불러도 안된다. 그런건 말이야... 나같은." 마족만 쓸 수 있다는 거지. "초 절정 울트라 슈퍼 미라클 센스맨만 할 수 있어. 나처럼 하고 싶다면, 먼저 콩나물을 잘 골라야해!" 어이.. 거기서 왜 콩나물이 나오는 거야! 이푸드가 고개를 내밀어서 우리를 한 번 일견하곤 다시 쉭 사라졌다. "콩...콩나물 말이지!" "그래!" 둘은 죽이 척척 맞았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왜 콩나물을 잘 다듬어야 센스맨이 되냐고 그 하브라이드인지 오버라이드인지 하는 녀석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주인님. 기억을 잃더니 바보가 되셨군요. 당연히 아무 상관도 없죠. 제가 왜 꼬마애게 그런 걸 가르쳐 줍니까?" 이런 식이다.. 결국, 이푸드는 기뻐했다. 왜? 그녀의 저녁식사 준비를 그 꼬마가 다 알아서 했기 때문에.... "이푸드. 프라운은... 이제 슬슬 찾으러 가야지 않아?" "흠.. 그렇군요." 그러나, 어느 문헌에서 읽은 바와 같이, 이들은 게으름뱅이에 무관심의 초절정 그랑프리를 구가하고 있었다. 덕에, 모두에게서 그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나만 빼고. 21-2. "이젠 작작 놀고, 서서히 가봐야 하지 않겠어? 내 기억을 잃기 전의 일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게 그녀석이기도 하고 말야. 거기 하브라이드! 밀키! 그만 글자 맞추고 여기 좀 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내 또래인 주제에 굉장히 폼 잡네." 어디선가 내 인내가 바닥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난 너보다 100살 더 많아!" 응? 말해 놓고 보니,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이상하다... 내가 어떻게 백살이나 더 많을 수가 있단 말인가? 상식이나, 이론으로 설명이 아니되지 않은가? "호.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나 본데?" "흠..." 하브라이드와 이푸드는 조용히 작당하고 있었다. 결국,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이 믿을 수 없는 마족 새끼(결코 새끼라고 말하기엔 너무 큰..)들을 무시하고 나 혼자 녀석을 보러 가야 겠다. 결코, 구하러 가는 게 아냐. 그리고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오.. 내가 누구냐? 기억 잃은 무식한 마왕이 아닌가? 예전에 이런 고사성어도 있다. 자고로 무식한 놈이 아름답다고... "좋아. 간다." 결행일은, 녀석들이 잠시 주춤하는 대낮 정오, 그리고 갖출 물건은 여러가지. 훗. 네 글자로 그 수많은 물건들이 다 축약되다니, 역시 난 뭐가 달라도 다르게 무식하군... 으... "오빠, 어디가? 왜, 짐싸고 있어?" 나의 발악과, 주위의 권유에 의하여, 이 작은 꼬마는 내게 존대를 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급할 때와 먹을 땐, 막나간다... "음.. 소년은 길을 떠나는 법이야." 그녀는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중얼거렸다. "소년은 여행을 떠난다라... 아까는 노인이라며?" 허허헉... "음. 그건 ... 그건 내 경우에도 포함되는 단어야. 그러니까, 노인은 여행을 떠난다는 거지." "그건 죽는 거 아냐?" 어린 놈의 학식이 세상을 찌르는 구나.. "그냥 그렇구나 하고 인정해!" "음...알았어." 훗. 역시, 애들은 소리를 질러야 말을 듣는단 말야. 후후후후... 그녀는 내 짐을 이것저것 건드리면서 이내 빠진 물건을 체크해 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서운 일 이었다. 아니지, 정확히는 날카로운 소녀니까,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하겠군. "근데...나도 갈까?"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도 여기가 좋다면서? 알고보니 마족도 그리 나쁘지 않고. 이푸드에게선 요즘 요리하는 법도 배운다면서?" 그 작은 소녀는 천진한 눈을 빛내면서 갑자기 결연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소녀로 태어나, 이 한몸, 낭군을 위해 바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앗싸!" 거기서 앗싸는 왜 나와... 그리고 낭군? 누가? "호..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왠지 어린게.. 귀엽군. "응. 비밀이야. 물어보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 나, 아무 것도 못하지만, 요리랑 불 피우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흠... 그래? 하지만, 이 앨 데리고 동쪽 마의 숲을 간다는 건 좀... 무리 아냐? "관둬. 애들은 다친다고." "너도 애잖아!" 급한가 보다. 막나가는 걸 보면... 뭐, 나야 어쩌겠냐만은... "음... 그럼 내가 충고 한마디 해 줄께. 넌 아직 어리고, 괴물이나 위험을 만났을 때, 도망치기도 힘들어. 무슨 소리인지 알아?" 그녀는 잠시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부탁해. 난... 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문제는 그 일이라는 게 하도 바뀌잖냐. 언제는 변신술이 하고 싶다더니 또 언제는 이거, 저거, 나도 질렸다. 정말이지... 뭐, 저렇게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걸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음... 음... "알았어. 좋아. 같이가." "응! 나도 가서 준비할께!"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당연히 마족 녀석들은 모두 쿨쿨 잠을 자러 들어가 버리고, 아마 저녁 다 되어서야 깨어날 참이었다. 나는 짐을 들고 조용히 성문을 나섰다. 옆에는 꼬마가 조용히 작은 하트모양의 가방을 메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런 걸 파는 거지? 사는 놈은 또 뭐고? "보통은 밤에 출발하지 않나? 새벽이나." "이봐. 밀키. 그건 무리야. 녀석들은 밤엔 잠을 안잔다고. 그리고.. 뭐, 이러긴 싫었지만, 수면 마법까지 써야 했다고." 왠지, 이 여행이 내 머릿속에 있는 이 안개를 걷게 해 줄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어이, 밀키 아니니? 그래, 성에서 쫓겨나는 거니? 어딜가는 거니?" 어이... 그렇다. 밝은 대낮도 좋다. 문제는 사람들은 다 일어나 있다는 건데, 이건 사실 심각한 문제다. 여기에 내가 와서 이들을 본 적이 있나? 전혀. 그렇다면 이들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오는 것도 못 봤는데 성을 빠져나간다니... "그래, 그 아이는 누구냐?" "제 오빠에요. 우린 유랑하면서 돈을 벌어보려고요." 의외로, 밀키는 세상 물정에 밝았다. 놀라운 일이다. "....?" 저 앞에 구석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아는 얼굴이었다. 마렐과 위틀렐 남매였다. 즉시 나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마렐! 위틀렐!" "어라, 이게 누구야! 에네브님 아니신가?" 음. 쑥쓰럽군. "헤헤헤. 그보다, 증거나, 물증은 찾으셨나요?" 마렐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 그런 건 못 찾았고... 최근 이 근처의 영지 중에 로만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영주가 장난이 아니더라고. 포악 그 자체라나? 뭐, 대충 그래." 흠... 그곳은 분명 우리가 지나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로만 영지 바로 건너에 그 숲이 있다고. "그래요? 뭐, 포악해도 여행자에게 어쩌지는 않겠죠." "흠... 그래. 게다가 넌 신관이잖아. 이 귀여운 아가씨는 누구야?" 그녀는 벼락같이 달려 들었다. "후후후! 사람 잘 보시는 군요! 전 밀키라고 해요. 호호호..." 어이. "조심하는 게 좋아. 어딜 가는 건지는 몰라도. 요즘 트라이너는 수도 사건 이후 아주 민감해 졌다고. 왕실이 혼잡스러우니... 지방이 시끄러울 수 밖에. 그럼." 둘은 다시 골목으로 사라져 갔다. 뭐, 나야 상관 할 바는 아니지만... "가자. 라플." "응..." 우리 둘은 얼핏보면 애들 둘이 겁 없이 여행하는 것으로 보일 만 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도 별로 변호하고 싶은 맘은 없지만, 그래도 무시하지는 말아줘. 이 여자앤 내가 봐 온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여자애니까.. "이거 봐. 이건 푸를르라는 꽃이야. 헤헤. 아직도 있었구나. 이제 철이 바뀌어서 안피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아주 귀엽게 웃었다. 뭐... 이런 여행도 나쁘지 않지. 밥만 맛있다면 말이지. "그래. 다 좋은데. 이건 대체 뭐냐?" 그녀는 자신이 끓이 수프와 비슷한 물체를 나에게 내밀었다. "응. 내가 먹었는데, 그럭저럭 먹을 만해." 난 재료가 분명 정상임을 확인했는데,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거냐! "이것도 능력이지..." 그래도 굶을 순 없지. 오늘은 로만에 가기 전에 바로 야숙이로군. "그럼 내가 마법진으로 보호할 테니까... 그럼 잘 자라고." "응. 근데, 기억이 많이 돌아왔나보지?" 아.. 그거야... 사람이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마법들은 거의 기억이 난단 말야... "그래. 그러니까, 바보 취급은 이제 그만." "헤헤. 알았어." 그녀가 눕고 우리 주위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나왔다. 이른 바, 보호 마법이다. 적의를 가진 생명체는 절대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뭐, 아침에 이걸 해제할 때, 적이 떼거지로 몰려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않으면, 뭐, 완벽하지.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달이 대지에 흰빛을 뿌리고, 달 주위를 별들이 아름 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꼭 스프에 떨어진 밀가루 덩어리 같군. 음. "아름 답다... 잘 지내는 거니... 내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이여..." 그 날, 난 아주 사소한 꿈을 꾸었다. 밀키가 국솥을 들고 내게 먹지 않으면 뭔가를 없애겠다고 협박하는 꿈이었다.. 소름 끼친다. 아마 오전이 지나고 정오즈음엔 로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 끔찍한 국 솥을 보지 않아도 되겠지. 21-3. "여긴 로만이라는 도시인가 보지? 대대로 노예 밀매와, 도둑 길드가 횡행하는 데다가 용병까지 합세해서 엄청나게 북적대기도 하지만 무서운 곳이래." 밀키는 모르는 게 없나보다. "어떻게 알았어?" "여기, 관광 가이드에 다 나와있잖아. 바보." 그래... 관광 가이드.. 한 50년 전만해도 이런 거 없었단 말야! 젠장! 오, 이건 좋은 징조이군. 내가 슬슬 하나 하나 기억나기 시작한 거 아냐? 오... "그래.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맛있는 가게가 있다든지 하는 것도 나와 있겠지?" 그녀는 방그레 웃고 대답했다. "근데, 돈은 있어, 오빠?"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돈을 챙기지 않았군." "바보..." 그래. 나이 먹으면 이렇게 된다! 우씨. 그래. 유식하게는 알츠하이머... 한자어로는 치매라고 하지! 젠장. 그리고 그냥 막 말하면 노망이라고도 해! "그럼... 이제 어쩌지? 나 배고픈데." "여기서 야숙하고 밥 해서 먹으면 되잖아. 안그래?" 그래... 그렇긴 하겠지. 문제는 여긴 마을 안 이라고! "마을 안에선 야숙 못해. 다른 방법을 구해봐." "돈을 벌면 되지 뭐. 오빠, 마법도 쓰잖아?" 그야, 그렇지만. 뭐, 간단히 일하고 벌 수 있는 그런 거라면, 암살, 도둑질, 등 등... "관두자. 그냥 야숙으로 밀고 나가자." 나의 이 결연한 의견을 말하고 그녀가 막 반박하려는 찰라, 작은 소동이 구석에서 일어났다. "왜, 이제 겁나기 시작하는 거구나! 헤헤... 하기 너같은 놈이 이런 사람을 감싸고 돈다는 게 말이 안되는 일이었지. 후후." 작은 골목 바로 앞에서 세사람이 두 사람 앞에 둘러 서서 모종의 다구리를 하고 있었다. 저런 나쁜 짓을 하다니. "으.... 으... 도망쳐요. 레이디. 제가.. 제가.." 아름다운 소녀가 거기 있었다. 아무래도... 신파극 찍냐는 생각이 들 정도. "오빠. 정의 용사는 도와줘야 하는 거야." 왠지 내 입에서는 쓴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정의의 용사라... 그래서, 과연 남는 게 뭐가 있었을까? 이름을 딴 학교? 세상 사람들의 존경? 진정한 용사는 기회를 노릴 줄 알고, 앞 뒤를 잴 줄 알아야 하는 거다. 난, 그러지 못했지만. 음.. 음... 무슨 생각이 난 듯했다. 뭐, 지금은 내 힘이 월등하게 강하고, 여기서 설령 소동을 일으켜도 날 어쩌겠어? "거기 멈추십시오.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동시의 사람들의 시선이 남루 그 자체인 우리 일행에게 꽂혔다. "뭐야 이건?" 사람을 지칭 대명사로 지칭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행위이다. "이건 제 짐입니다." 잠시 밀키가 나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오빠. 제대로 해." 뭘 하란 말인가? 나가서 쇼라도 하고 정의의 용사 어쩌고 하란 말인가? 난 그런 게 싫다구. "거기 앉아 계신 아가씨. 이런 상황을 즐기는 게 취미인가 보죠? 왠만하면 그냥 그 청년을 보내주시지요. 당신 같은 사람이 당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 힘드니까." 순간 아까까지 순수하고 꾸밈 없이 슬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넌... 누구냐!" 누구긴. 라플이지. "그야, 상관없지. 어이, 겁없는 데다가 실력도 안되는 애송이는 이제 퇴장하라고. 저 여자랑 이 건달들은 한패인 거 같다." 겁 없고, 실력도 안되는 애송이는 당연히 분노했다. "그대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근거? 많지. 일단, 저 여자는 저 최고의 미모로 아무에게도 옷이 찢겨진 흔적이 없고, 다친 상처 하나도 없어. 게다가 머리는 약간 헝클어진 정도인 반면, 애송이는 죽도록 얻어맞은 거 같은데 뭘. 같은 편이 아니라면 봐 줬을 리가 없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법사 인거 같거든. "나도 마법사니까. 아가씨는 알텐데.. 어라! 위험해!" 순간 내 몸에서 푸른 빛이 애송이를 감쌌다. 그리고 강력한 타격음이 울러퍼졌다. 그리고 건달들 중에 한 사람이 소리쳤다. "아가씨! 그러니까, 이젠 그만 패자고요! 언제까지 아가씨의 취미를 위해서 사람들을 팰 수는 없잖아요! 어서 가요!" 잠시 애송이는 벙쪄 있었다. 어떻게 된거냐면... 여자가 뒤에서 갈긴 거지 뭐. 내 베리어가 잘 막은 거고. 뭐... "호, 오빠, 꽤 하는 데?" 꽤 못하면 나서지도 않아 임마. "후후후... 마법사였군." 정확히는 신관 겸 마도사겸 마왕이지. 훗. 댁은 사람의 한가지 일면만 보는군. "뭐, 틀린 건 아니지만. 글쎄. 이젠 됬으니까 가 보라고." 싸우고 싶지도 않고 말이지. 밀키가 소리질렀다. "어, 그건 안된다고! 당연히 사람을 우롱한 죄는 치뤄야지!" 나는 냉소해주었다. "애송이가 멍청해서 당한 거야. 그런 걸 구해주었으면 되었지, 뭘 어쩌라고." 그 소녀는 결국 일어서고 말았다. "후후후.. 아주 건방짐의 극치를 달리는 구나. 너가 내 이름을 듣고도 그렇게 당당하게 있을 수 있다면... 어디. 난, 로만 영주의 딸이다." 주위 사람의 헉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난 좀 다른 걸로 고민하고 있었다. 악역은 역시 예쁜 게 어울려. "그래서?" 난 마왕이야. 왕은 왕이잖아? 긍지를 갖고 행동해야지. 비록 빈곤하긴 해도 말이지. "...넌... 넌 놀라지도 않냐!" "내가 왜? 너의 부모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한 적 없다고. 그리고 너가 부잣집 딸인 건 다 알 수 있어. 이정도 쇼를 계획하려면 돈이 많아야 하잖아?" 어느새 애송이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었다. 음... 벨도 없는 놈. 난 뻐꾸기 벨을 애용하고 있지. "네 이놈.. 감히 내가 영주의 딸인 걸 알고도 무서워하지 않다니! 너 만은 내 용서하지 않겠다!" 옆에 옷자락에 작은 무게가 전해졌다. 밀키가 내 옷을 꼭 잡고 있었다. 약간 떨기도 하는 거 같고. "오빠.. 영주는 귀족이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흠... 그게 뭔 상관이야? 난 공작이야...응? 나 공작이었다? "아, 이제 막 생각난 건데, 나 사실은 공작이야." 그녀의 입에선 경악의 한 마디가 올라왔다. "미친놈." 크헐... 나보고 미친 놈이라고 했겠지? 좋아. 내 분노 파워를 보여주지! 손에서 빔! "좋아! 헝그리 정신을 보여주지!" 단지 돈을 안 가져오는 미련한 내 머리 덕이지만. 내 손에서는 어쨌든 헝그리 광선이 뿜어져 나갔다. 당연히 주문 없이 나간 눈 속임이다. 이런 거에 속을 놈은 별로 없겠지만... "꺄악~!" 있긴 있군. 빔은 당연히 스사삭 사라졌다. 뭐, 전혀 말로 힘을 넣지 않았으니 당연하지만. 아, 이런 건 그나마 나 같은 대 마도사나 가능한 일이라고. 후훗. "오빠.. 멋지다." 훗. 내가 원래 한 멋짐 하지. 시내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사람들은 절규하면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만 영주의 병사들이 뛰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랏!" 재빨리 밀키의 손을 잡아채곤 골목으로 뛰어 달렸다. 뭐, 껌이지. 그리고 적당한 골목에서 난 둘에게 보이지 않게 하는 마법을 걸었다. 쉬운 일이다.. 후훗. "젠장. 어디로 간 거야?" "할 수 없지. 돌아가자." "그래."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는 마법을 재빨리 풀었다. 그나저나, 음침한 골목이군. 확실히 도심가라는 말이 실감이 가는데? 뭐... 나완 상관 없지. 그나저나... "밀키야, 괜찮아?" "으...응. 그 사람들... 안오지? 저기... 난 그런 귀족들이 제일 무섭단 말야." 그래서 넌 영주 관사 앞에서 마족 꺼져라.. 했냐? "하하.. 그래? 걱정마. 그나저나, 여기서 뭘 해야 하나.." 그리고 바로 앞에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 둘은 스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쭉이와 뚱띵이었는데... "왠일이세요?" "우리와 일하자." 에엥?? 21-4. "좋아요!" 밀키가 날 앞질렀다. 결국,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지. 뭐. "좋아. 그럼 우리와 함께 가자. 앞으로 너희는 우리가 대신 보호해 주겠다. 걱정마라. 로만이건, 마왕이건 우리 아지트는 결코 알아낼 수 없으니까." 내가 마왕인데?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 데요?" 그는 회심에 젖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쾌활한 얼굴을 하고 말해 주었다. "라이와 사기단이다! 아, 도둑도 겸한다." 이런 젠장... "우와! 대단해요!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밀키는 꿈이 여 도둑이었냐? "다 좋아. 좋아. 하지만, 나는 끌어들이지마." "라플, 하지만 돈이 없잖아요. 뭐, 좀 뒤가 구리긴 해도, 이건 확실하다고요. 그리고 가장 좋은 점은 도둑은 길드 소속의 길드원의 주머니는 절대 털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돈도 벌고, 훔쳐질 기회도 없애자는 거냐? 어린애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살았길래 그런 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가냐.. 흑... 난 슬프다. "자, 그럼 우리 아지트로 가자." 아지트는 뭐, 단순했다. 여긴 등불이 적당히 아무데나 켜져 있었고, 우리에겐 작은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물건 훔치기... 이봐. 난 부시는 건 잘해도 자물쇠 여는 기술 같은 건 없다고! "우와, 저 자물쇠 여는 데 천재에요. 그럼 이번 임무는 뭐죠?" 두근 거리는 소녀의 얼굴... 하지만, 보통 저 나이때는 예쁜 드레스 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응. 네 파트너가 마법사라서 하는 거야. 로만 성에 있는 마법의 거울을 훔쳐오는 거야. 듣기로는 굉장하다고 하더라고." 마법의 거울? "그게 뭐에요? 진실만을 말한 다든지 그런 건가요?" 그는 껄껄 웃었다. "하핫... 아냐. 내가 알기론 그 거울은 그냥 이름이 그거라나 보더라고. 듣기론, 녀석들도 훔친 모양인데 우리 의뢰주가 훔쳐 달라고 부탁했지." 흠... 그래? 뭐, 내 성에도 그런 비슷한 게.. 가만, 이제 도둑 초짜인 애들에게 너무 심한 거 아냐! "저... 너무 일이 어렵네요. 보수는 얼마죠?" 내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그들은 조용히 웃었다. "입단 테스트야. 뭐, 우리는 좀 엄격해서 말이지. 거울을 훔쳐오면 보수로 의뢰인이 지급한 금액의 80%를 주지. 30,000메장이라고. 그럼... 알겠지?" 밀키는 갑자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오! 좋아! 가자!" 어련 하셔... "하지만.. 나한테 기대하진 말라고. 계획은 너가 짜. 밀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응. 나. 너한테 줄 곧 미안했거든. 되도록이면 빨리 맛있는 걸 먹도록 해줄께. 그러니까. 기다려." 응? 그녀가 조용히 방으로 종이를 들고 사라졌다. 왠지.. 왠지...그리워? "별... 일이군." 거사의 결행일은 바로 오늘 저녁이 되었다. 이건 단지, 밀키의 얼렁 뚱땅 계획의 하나가 아니라, 원래 생각하면 빨리 움직이는 게 최고라나.. 뭐라나. 나야, 무슨 힘 있나? 그냥 하자는 데로 할 수 밖에.. "자, 봐. 라플. 여기가 바로 로만 성의 보물 창고로 생각되는 곳이야. 그리고 여기. 보이지? 이건 영주의 방. 여긴 영주 딸의 방. 보물 창고로 가는 길은 오직 영주의 방을 들어가서만 갈 수 있게 되어 있어. 그리고 지하로 꽤 내려가야 하는 거라고. 그래서 난 생각해 보았는데, 먼저 너가 저택 밖에 소란스러운 마법을 미리 걸어놔야 해. 그리고 소란해진 틈을 타서 너와 내가 저택으로 들어가는 거지." 이봐.. 보통 마법사는 마법을 걸어 놓지는 못한다고. 뭐, 난 천재니까. 후훗. "그리고, 이거봐. 여기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 수로야. 수로 따라 올라가면 바로 저택 마굿간 근처에 있는 분수대 앞으로 나갈 수 있어. 바로 여기서 잠입하는 거지." 어렵다.. 어려워. 밀키는 왠지 불타오르는 듯 했고, 나는 점점 불이 꺼져 가고 있었고. "좋아. 좋아. 그럼.... 된거지?" "그래. 계획은 완벽해." 아주 허술 한 거 같은데... 저택에 들어가서 어떻게 돌아 다닐 셈이냐? 앙? 대책 없는 인간. "자, 어서 가자." 결국, 나는 그녀를 위해 최고의 화려한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마왕 소환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법이다. 화려할 수록 좋은 거 아냐? 밤의 거리는 어느새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달 마저도 구름에 드문 드문 가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이런 날은 부침개 부쳐 먹으면 맛있는데...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어쨌든 털어야 하지 않겠어? "저기, 라플. 마법은 언제 시작되는 거야?" 후후훗... 그걸 알고 싶나? "곧. 아, 이제 시작되네. 저기 하늘 쪽." 허공에 공허한 바람소리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름만 가득한 하늘에 그 어두움을 뚫고 붉은색의 마법진이 이중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가짜 마왕 소환술이라고도 하지. 음 하하하. "으엑... 저건 대체...?" 마을에 불이 하나 둘 켜지고, 사람들은 확실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성에서도 횃불이 타오르고, 사람들과 경비병들이 서둘러 뛰쳐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진 주위로는 구름이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자, 성공이지?" 나는 밀키를 보고 상큼하게 웃어주었다. "으... 넌 정말 위험한 놈이야." 하하하.. 과찬이군. 내가 좀 사악하긴 하지. 그나저나, 큰일인걸? 저거 사실 소환은 소환이지. 어둠의 전사 소환. 뭐, 확실히 적들의 이목을 속이긴 했는데, 일을 빨리 해결 안하면 이 도시 멸망할 수도 있겠어. "자, 어서 들어가기나 하자." 잠시 뒤, 마을의 위에서의 기괴한 괴물의 음향이 다채롭게 들리고, 경비병들은 밖으로 내달렸다. 나와 밀키는 그틈을 타서 무사히 수로로 잠입할 수 있었다. 수로라... 그러고 보니, 언제 와본 듯 해. 어디서였을까나? 밀키는 그저 묵묵히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한두가지 수상한게 아니야. 왜 저런 여자애가 저렇게 있는 건지도 이상하고. 특별히 그녀가 하는 행동에 정당성은 눈꼽만치도 없는 데다가, 사는 게 왠지 힘든 거 같지도 않고. 한 마디로, 수상해. "여기서 죽 올라가면 물을 타고 마구간 옆으로 갈 수 있어. 어서 가자." "그러지." 수로를 죽 따라서 가다 보니, 드디어 마구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뭐가 어찌되었던 간에, 그녀의 생각이 맞았는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헤... 그럼 들어가자고." 왠지 신난거 같기도 하고 말야. 뭐 애들이 좋다는 데..그녀는 계속 앞장서서 줄곧 따라 올라갔다. 예의 의심스러움도 잠시 접어두는 게 좋겠지 뭐. 그나저나.. 여기 미로 같은데? "미로... 맞지?"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지도가 틀렸잖아? 너, 대체 그거 이리 내봐." 그녀가 내민 지도는 완벽한 평면 지도로, 방의 위치가 아주 잘 나와 있는 방면, 방 위치외에 다른 것은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이걸... 보고 온거냐..." "응..." 오, 신이셔. 절 진정 시험에 들게 할 셈입니까? 너무해요. "좋아. 할 수 없지. 그럼 보이지 않는 마법을 우리 둘에게 사용하고, 벽을 부수면서 지나간다. 실시!" 그리고 나는 열심히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당연히 달려 나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꺄악! 여긴 저주 받은 거야!" "젠장! 그분을 불러!" 한참을 부시고, 사람들이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잠시 아연했다. 이렇게 부셨는데도 찾을 수가 없다니... 대체 여긴 진정 미로란 말인가? "무슨 일이냐?" "그게.. 아까부터 벽이 멋대로 부서지고 있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밝아질대로 밝아진 가운데 그는 마치 블랙홀처럼 어둡게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우리 쪽을 흩어 지나가는데... 이상하다. 구면인가? 21-5. "마법인가? 좋아. 너희 모두, 움직이지 마라." 그리고 그는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정확히 아래를 보면서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속이 타기 시작했다. 저녀석, 마법임을 알아챈대다가 골치아프게도 이 마법의 맹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 다는 거다... "거기.. 있었나?" 이렇게 된 이상 강행 돌파!!!! 어라라? 갑자기 그는 우리 뒤의 한참 뒤를 손으로 가르키면서 외쳤다. "가랏! 도둑들은 저쪽으로 갔다!" "예!" 얼레? 사람들이 순식간에 뛰어나가고, 그는 정확히 내 옆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작게 나에게만 들릴정도로 말했다. "조심하라고." 으이잉? 저 사람 우리 편이야? 하지만, 그럴리가 없잖아? 아무리 봐도 기억나지는 않고... 음.. 혹시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알았던 사람이 아닐까? "뭐해? 빨리 가자고." "으..응." 보물 창고는 제일 끝에 있는 법이라는 격연을 떠올려서, 우리 둘은 즉시 지하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걸 봐선, 확실히 마을에 큰일이 나긴 난 모양이지? "저기 문이 보인다." 밀키가 작게 중얼거리면서 문을 살짝 돌렸다. 문은 별 소음 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앞에 거대한 방 하나가 있고, 그 안에는 몇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괴물... "흐엑! 읍..." 재빨리 밀키의 입을 막고 벽에 붙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벽의 차가운 감촉이 전해져 왔다. 이건 실험실이다. 그것도 괴물을 만드는...그녀의 손을 잡고 그대로 문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복도에서 나에게 물었다. "그럼.. 저건 뭐지?" "글쎄..." 그녀나 나나,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뭔가 아주 많이 수상한 듯 하지만. "여기가... 로만영주의 방인데? 제대로 찾긴 했군. 여길 통해서만 갈 수 있다고 하던데..." "응..." 로만 영주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화려하게 장식된 방을 이리 저리 둘러보면서 어떻게 연결된 곳이 없나 살펴보았다. "여기 봐." 그녀는 벽 난로 주변을 응시했다. 가까이 가보니, 벽날로에는 불을 핀 흔적이 없었다. "수상하군. 여길 통해서 가나 본데?" "아마, 밀면 될 꺼야." 벽 난로를 밀자, 벽은 천천히 뒤로 빠지고, 그 앞에는 작은 통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문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놓쳤어?" "예..." "흠... 정부에서 보낸 첩자일 테지. 신경쓰지 말라고. 어차피, 여긴 더 이상 알아낼 수도 없을 테니. 후후후... 그래. 자넨 이만 가보게나." 재빨리 벽난로를 원상으로 복귀시키고, 좁은 통로를 재빨리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거울을 훔친 다음은 어쩐다? 역시 모조리 부시면서 나가야 하나? 젠장... 그런 건 싫은데. "여기야. 보물 창고인가봐." 그건 안 봐도 알어. 저렇듯 번쩍거리는 게 많은데 말야. 음... 저 거울은? "정말 이상하게 생겼다. 그치? 이건 거 같아. 어서 들어." 나는 거울에 다가갔다. 그리고 웃었다. "안녕, 진실의 거울?" 거울에서 손이 나온 건 그 때 였다. 눈코입도 생기고, 그리고 즉시 밀키를 째려 보았다. "흥, 너보다 이상하게 생긴 인간은 없을 거 같은데? 잘 있었어? 라플. 난 너가 구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역시, 아는 거울인가? 밀키는 좀 당황하는 거 같군. "꺄악! 말하는 거울이잖아!" "조용히 해. 다 들렸겠다." 거울은 잠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으로 뒤를 가리켰다. "거기까지. 이미 너흰 들켰어." 왠 남자와 여럿의 사내들이 모여서 웅얼대고 있었다. 젠장... 정말 어쩐다냐? 여긴 꼭대기 층이니까.. 흠.. 흠.. "쳇. 로만 영주! 이 악독한 인간! 넌 좀 당해야 한다고!" 밀키, 넌 전에 어디 사회 조직에 몸 담고 있었던 거니? 아니면, 그 전에 무슨 정보 조작을 통한 사람들을 선동한다든지 하는 거... 여하튼 범상치 않았던 재단에 있었던 게 틀림 없다고. "후후후... 꼬마들 뿐이라니 심심하지만, 벽난로는 원래 누가 들어간 뒤엔 내게 자동으로 알리게 되어 있거든? 그래서 심지어 나와 친한 인간도 모르지. 어리석은 것들." 이럴 땐 역시 마법을 사용해서 도망 가야 하나? 거울도 있고. 어쩐다나. 밀키는 왠지 분노 게이지 만땅인 거 같고 말야. "어리석지 않아! 널 내가 오늘 용서하지 않겠어! 라플, 어서 처치해!" 여기서 잠깐. 왜 내가? 왜 내가 처치해야 하는 건데? "잠..깐. 거기서 왜 내 이름이 나오는 거야? 그리고, 너 말야.. 너무 한 거 아냐?" 그녀는 나를 휙 돌아 보았다. 그녀의 붉은 머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시끄러. 한다면 하는 거야! 그게 바로 사나이 정신이라고!" 사나이 정신... 난 노인이라고. 그리고 이제 슬슬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고.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 그건.... 그게... 제자를 족쳐서 연어찜을 얻어 먹는 거야. "....니들 지금 뭐하냐? 얘들아, 어서 쳐라!" 왜 악당의 대사는 항상 이렇게 같은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추측해 보건데, 악당은 원래 멍청한가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멍청한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 악당이 멍청하다면 용사는 훨씬 더 멍청하다. 용사가 똑똑하다면 당연히 악당 같은 건 조기에 제거 되지 않았겠는가? 어찌되었던, 상투 적인 대사를 내뱉고( 왜 저 대사는 100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가?) 당연히 우리 쪽으로 돌진했다. 밀키는 냉큼 내 뒤에 숨었다. 빠르기도 하지. 나는 거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상황을 좀 어떻게 바꿔봐." 거울은 씨익 웃는 듯한 일렁임을 보이고 바로 거기선 끔찍하게도 검은 손이 쑤욱 뻗어 나왔다. 그 손은 그대로 병사 둘을 한 손에 들었다. 동시에 방 분위기는 마왕 라플과 대적하는 용사 구도로 바뀐 듯... "이, 사악한...!!! 마귀였구나!" 정확히는 마왕이야. 그리고.. 뒤에 있는 저 청년. 어디서 본 듯한데 말야. "할 수 없다! 다크 블레인! 가서 녀석을 해치워!" 흑은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척척 걸어서 곧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공작, 잘 지냈나 보지? 근데 어느새 여기까지 온거야? 분명히 수도에 있는지 알았는데." 그렇다. 이 녀석 누군지 기억났다. 음침하고, 종을 잡을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 게다가 날 조금 싫어하기도 하는 듯한 작자. 그 이름도 유명한 흑.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어. 너야말로 여긴 왠 일이야? 그리고 저 거울에 대해서라면 좀 묻고 싶은 게 많은데?" 그는 씩 웃어 보였다. 웃을 줄도 아는군. 그녀석은 거울을 한 번 보고, 곧 벙쪄 있는 영주 일당을 바라보면서 말해주었다. "백에게서 빌린 거야. 아무래도 이런 굉장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신임받기 쉬울 테니까. 뭐. 생각대로 잘 된 거지. 이젠 돌려줘야지." 어이.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빌린게 아니라, 훔친 거 아냐?" "뭐, 꼭 그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뜻은 통하잖아?" 역시. 그래서 의뢰인이 그렇게 돈을 많이 걸었던 거구나. 내가 맡기고 간 걸 잃어 버렸으니... 쯧. "날 배신한거냐!" "웃기지마. 영주. 난 폐하의 명령으로 수상한 널 감시하러 온 것 뿐이야. 뭐, 증거는 다 챙겼으니 다행이지." 흑도 의외로 사악하기도 하다. 녀석은 손을 잠시 풀고 그의 단검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전투 모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밀키 손이나 꽉 잡고 있어야지 뭐. "이... 이.... 죽어라!" 자, 여기부터 우리는 한가지 가정을 해야한다. 이들은 싸움에 미친 환자들이다. 그래서 뻑하면 싸우는 것이다.. 결국, 싸움은 피를 튀기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나야 실제 연령이 높지만, 이 아그야는 그렇지 않다는 것. "밀키는 저기 보물이랑 놀렴." "싫어." 말 안 듣는 꼬마는 위대하신 사부로서(난 내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란 게 생각나 버렸다. 후훗.), 때려 주진 못하지만, 설교를 퍼 부어 주기로 결심했다. "잘 들으렴 밀키. 사람은 말이지 한 번 태어나면 곧 죽어가는 게 인지상정, 인과 응보야.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집고 넘어가야 하는 거야. 왜 사람의 나이는 왜 차이가 날까, 하는 거지. 그리고 너는 어리고, 사람들과 살기 위해서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거란다. 그러니까, 너도 내 말 듣는 게 좋아." 그 때, 거울이 한 마디 했다. "횡설 수설에, 어린 것이 못하는 소리가 없군." 하하핫.. 저 거울. 깬다. 깨고야 만다. "죽고 싶나 보지? 감히 이 초절정 위대한 대 마도사님에게 개기다니." "농담이야." 한 없이 비굴한 자, 그 이름이 거울이라 했는가? 여하간, 시커멓고 세련되지 못한 옛날 스타일로 우리에게 뭘 보여주려는 건지는 몰라도.... 비굴해... 비굴해. "그래? 다음부턴 사사로운 농담하다 죽는 일이 없길 바래." 병사는 여전히 거울에 잡혀 있었고, 어느새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은 흑은(대체 항상 저 옷을 싸가지고 다니는 걸까?) 로만과 그의 유쾌하지 못한 친구들과 싸우고 있었다. 밀키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녀석. 그래도 동료로 생각되는 사람이 걱정되기는 하는 모양이군. 나는 덩달아,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음... 이런 우리 모습으로 생각되어지는 게 하나 있기는 하군. 집 없는 남매... "가라!" 흑은 가지도 않을 상대에게 가라는 말을 퍼부으면서 격전의 소용돌이에 파 묻히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다른 사람이 또 나타났다. 로만 영주의 딸이라나? 뭐, 나완 그리 유쾌하지 못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대체 무슨일이지?" 무슨 일이긴. 큰 일이지. 그녀는 나를 보고 소리쳤다. 그런데.. 약간 비명이 아니라, 일종의 그래. 경악 같은 분위기가 풍겨졌다. "아까의 그 건방진 꼬마녀석 아냐! 너 이놈!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말해도, 날 어쩌겠어? 흑은 잘 싸우고 있고.... 밀키는 잘 구경하고 있고. 나? 상황 설명 하고 있지. "후후후. 용서할 것도 아니었잖아. 어차피. 그나저나, 당신 아버지 굉장히 수상한 짓들을 많이 하던데? 지하에 있던 그 괴물은 대체 뭐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하는 짓인가?"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뒤에 있던 병사 둘에게 지시했다. 설마, 날 죽이라고? 흑은 저기서 싸우고 있고. 음... "죽여." 간단해서 좋긴하군. 22-1. 정말 마왕인가? 피곤하다... 하지만, 잠들 순 없다. 여기선 끝낼 수 없다. 그의 복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난, 다시 그를 위해 그의 죽음과 맞 바꾼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리라. 그는... 웃고 있을 것이다. 아마, 아직도 그는 날 사랑하리라.... -키히 크리시아 휘젠- 간단하건 말건, 그녀가 날 싫어하는 건 다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어? 저렇게 검은 오라를 내 뿜고 있잖어. 게다가, 그녀는 내가 인류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흠. 곤란해. 인류의 적까지는 안가더라도 나쁜 건 얼마든지 있다고. 밥 늦게 주는 아저씨라든지... 뭐, 그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어? "저기. 아저씨들... 대화로 해결해도 좋잖아? 아, 거울... 음. 두 팔 다 쓰는 중이군. 너도 왠만하면 팔 여러개는 안되는 거냐?" 거울은 입을 비죽였다. 녀석은 화가 났는지 사람을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먹지도 못하게 할 꺼면서... 너가 알아서 해. 뭐, 먹어도 된다면.. 후훗." 관두지... "어서 처리해. 라플." 밀키도 이런 인간이라니.. 젠장. 되는 일이 없다고. 난. 도통. 병사 둘이 나에게 달려 들었다. 뭐, 곧 그런 시도는 좌절되고 그들은 베리어에 머리를 박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내가 위대한 대마도사라는 건... 계속 말해야 하나? "라플. 좀 제대로 해. 막기만 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구. 그리고, 저 사람들은 악당이잖아?" 그럼 막지 않으면 어쩌리... 싸워서 냅다 팰까? 하지만, 너도 지켜야 하고... 일단, 흑이 알아서 잘 하겠지 뭐. 난 이럴 때만 흑을 믿어. 크크크... "흑! 파이팅! 파이팅! 나이스 플레이!" 녀석은 잠시 휘청이는 듯 했다. 다시 접전이 시작되어 녀석은 자신의 그 빠름을 특성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뭐, 조금만 도와줄까? [화.염.의.불.꽃] 내 손에서 정확히 붉은색의 불이 쏘아져 나갔다. 앞에 달려오던 병사 둘은 확실히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었다. 옷에는 불이 붙고, 바닥에 구르기 시작했다. 뭐, 저정도로는 죽지도 않는다구. 그보다, 아까부터 들리는 이 기괴한 소음들은 대체... "큰일 났습니다! 영주님!" 왠 흰 옷을 입은 사나이가 뛰쳐 들어왔다. 그 사람은 숨은 헐떡이고 있었고, 옷에는 피가 무지 많이 튀어 있었다. "응? 자네.. 옷차림이...?" 한 병사 하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순간, 그의 옷에 피가 쫘악 튀기고, 두 사람의 옷은 형편없이 피로 물들었다. 문제는 나중에 들어온 흰 옷 입은 사람의 몸이 검은 팔과, 번뜩이는 눈으로 변해가고, 천천히 괴수로 변해간다는 게 문제긴했지. 이대로라면, 영주의 딸의 목숨이 위험하다! "흑! 엎드려!" 괴물의 팔이 휙 소리를 내면서 일행의 머리위를 순식간에 지나갔다. 영주 딸은 재빨리 바닥으로 굴렀고, 병사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저건.. 괴물이잖아... 싫어...!" 밀키가 소리지르면서 주저 앉는 바람에 내 일은 더욱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젠장. 되는 일이 없으려니까. 아가야, 엥기지 말거래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감을 못 잡겠는데.. .설마, 내가 풀어 놓은 마법진 때문인가? "저런게 어디서 나온거야!" 미안. 미안. "아버지! 조심해요! 그 쪽으로 가요!" 괴물이 낮게.. 정확히는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괴물이 내 앞에 그 더러운 입을 벌리고 쉭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음침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끔찍하리 만큼 더러운 침을 뚝 뚝.. 으에..엑. "젠장! 꼬마는 먹을 것도 없어!" 아까 마법을 쏘느라 베리어를 걷었다는 사실을 깜빡했군 그래. 뭐, 만에 하나, 네놈이 정말 마족이라면... 사라지겠지? "사라져라. 내게 거역하는 자, 내게 생명을 받은자여. 어두운 암흑으로 가라. 그리고 너의 존재를 평생을 원망하면서 지내라. 어둡고 차가운 밑바닥으로 떨어져라." 그녀석의 몸 주위에 검은 오라가 감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거울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녀석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난.. 난.. 단지! 당신을 보러 왔을 뿐인데...! 잔인한...! 왕이시여!" 뭐, 그래도 주위에 혐오감을 주잖니. 그리고... "사라졌어...!" 영주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뭐, 사라지게 되겠지. 괴물이 맞군. 아마 오랫동안 여기서 일했나보군. 아마도, 마족이 기색을 숨키고 잠입한 거겠지만. 뭐. "밀키야. 괜찮아?" 녀석의 붉은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잘 보면 갈색 같기도 하고.. 귀여운 녀석. 꼭 세이녀석 어릴때랑 똑같네. 음? 세이? 그게 누구지? 내 손자인가??? "이봐. 라플. 괜찮은거야? 젠장. 백한테 뼈도 못추릴 정도로 얻어 터질 뻔 했네. 뭐, 무사하니 다행이야. 아, 로만 영주. 거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이렇게 멍해 보여도, 일단 이쪽은 피스트레이카 대공나으리 이시고, 이쪽은... 내 예상이 맞다면, 분명히 나바스의 황녀아니신가?" 황녀. 황녀. 황녀. 농담이지? "어떻게 알았나요? 아무도 모를거라고 생각했는데?" 흑은 잠시 혀를 찼다. "네 가출 사건 때문에 너의 정혼자인지 뭔지 하는 재수 없는 녀석이 와 있다고. 세인 푸르체트인가 뭔가... 세인은 푸르다..인가?" 하핫... 정말 황녀잖아! 말도 안된다! 황녀란 무릇 건방짐의 화신이 아니던가!!! 어떻게 이런 뭐 같은 일이... 내게. 이런 꼬마가. 그럼 이름이 뭐더라? 꽤나 길겠군. "뭐엇! 나바스의 황녀! 그리고 피스트레이카 대공!" 어이, 그렇게까지 효과를 아니 줘도 난 원래 대단한... 아, 나 공작 이었구나. 가만.. 그럼 내게 딸린 타이틀이 몇개야? 혹시 다 번들제품이냐? "아.. 그건 접어두고. 밖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가봐야하지 않을까? 이대로 있다간 생매장 당할 수도 있다고. 안그래? 어서 나가자. 참,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냐? 꼬마야." 밀키는 즉각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뭐, 아무리 잘 봐줘도 그 나바스의 황제 애송이와 닮은 거 같지는 않은데... 배다른 형제쯤 되나보군. 뭐, 나완 상관 없지만... 그보다, 아까부터 이 울림이 들리지 않는 거냐? "메데이레나. 뭐, 그냥 그런 줄 알아." 길다... 역시 왕족 이름은 기본 석자를 넘어야 한다, 이건가? 그냥 잭이나, 벤, 룩. 이런 이름도 좋잖아? 여자애라면 .... .... ... 없군. 한자 이름이 있던가? 알? 이것도 남자 이름이구.. "라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이들을 붙잡아서 가둬 둘 테니까, 어서 나가봐. 뭔가... 밖에 느껴지는 공기가 심상치 않다고." 글쎄.. 나도 그건 느끼고 있다고. 좋아. 메데이레나는 두고 가야지. "메데이레나는 여기 있어. 아무래도 밖보단 여기가 안전할 꺼야. 일단, 출구도 기어서 들어와야 하고...알겠지? 곧 올테니까."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확실히 얘들이 귀엽기는 하지. 그 나이에 정혼자가 있다는 게 더 엽기지만. 뭐. "저도 같이 가요. 여긴 제가 더 지리를 잘 알아요. 그리고 마법도 쓸 수 있으니까, 걸리적 거리진 않을 꺼에요." 영주의 딸이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러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법은 이제 겨우 내가 열 몇 살에 쓰던 수준이고... 음. "맘대로 해. 대신 걸리적거리지나 말라고. 아, 그 거울을 내가 나가면 입구에 세워두도록 해. 그럼 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거울은 기뻐했다. 괴물이 오면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밖으로 간신히 기어 나오자, 이미 묵사발이 난 성을 볼 수 있었다. 이건 그래도 나은 편인가? 정말, 괴물이 나오긴 했나 보군. 내가 소환한 것들은... 그냥 위협 용이고. 사람은 죽이지 않을 텐데.... "이건.. 대체..." 일단, 지하로 가보면 알겠군. "지하로 가보자. 거기서 무슨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그녀를 날카롭게 추궁하자, 그녀는 안색을 흐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별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모두 비밀이에요. 그리고... 아, 그래. 닥터 모르겐이라면 알지도 모르죠." 닥터 모르겐? 뭘... 모르는 건데? 이상한 이름이라는 건 확실하군. "언제쯤 나타난 사람이지?" "음... 글쎄 한 반년 전에 돌연히 나타나서... 그래요. 그 사람, 매번 어딘가에 편지를 쓰고 있었어요. 구원의 조직이라는 이상한 클럽에 들었다는 걸 들은 적도 있고... 아버지는 그가 돈을 벌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서 신뢰한 거지만..." 구원의 조직? 정말 이름도 간단해서 좋긴 하군. 몇배는 수상한 조직이라는 것도 확실하고 말이지. 하지만, 일단은 지하실이 급선무라고. 내 생각에 이상한 놈들은 거기서 나왔을 테니... "가자, 지하실로." 그녀는 첫인상이 뭐 같았던 데 반해, 성격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게다가 누구처럼 어거지 피우지도 않고. 흠. 하지만 인간의 성격이란 모르는 일이니까. "여기가 실험실이에요." 아까 나와 밀키가 잘 못 왔던 바로 그 곳이다. 괴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에는 피칠이 되어 있었고, 군데 군데 사람의 시체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아래로 내려 갈 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자, 그럼 괴물이랑 데이트를 즐겨볼까?" 조용히 미소짓자, 그녀는 나를 보고 경악의 말을 내뱉었다. "당신... 그런 취미?" 여기서 그냥 죽이면 시체도 안 남고, 둘러 댈 수도 있는데... 젠장. 무시하고 문이나 열자. "이건가...?" 안에는 갖가지 관들이 눈에 띄고, 배양을 위한 침대들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곳곳에 죽어 있고, 방 안에는 단지 하나의 괴물 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도. "닥터 모르겐!" 닥터 모르겐이 고개를 돌리고, 그와 난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는 놈이었다. 바로, 교장 선생. 실종 되었던건가? 응? 우와! 다 기억난다! 세이는 내 제자였던 거야! "아! 행복하다!"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하지 말아야 할 대사를 하고 말았다... 하핫. 음. 적어도 난 마왕은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 그나저나.. 악연이야. "날 만나 행복하다는 건가? 우습군. 넌... 너만은 꼭 죽여야겠다. 그분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우리 왕은 너를 죽이길 원해. 알겠나? 흐흐흐... 가라!" 왜, 적이 등장할 땐 가라는 말이 제일 많은 건지... 젠장. 그나저나, 귀찮게 됬군. 22-2. "그분의 행복이라니? 난 원래 남한테 미움받고 살 짓은 안한 거 같은데?" 교장은 음침하게 웃었다. "넌 그 분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자라서... 방해가 되거든. 뭐, 오늘 죽을 테니까.. 후후후.. 가라." 괴물이 순시간에 바로 앞에 당도했다. 녀석. 더럽게 빠르긴 하군. 옆의 영주의 딸은 재빨리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메데이레나처럼 엎드려서 울거나 하진 않으니 다행이긴 해. "좋아. 죽일 수 있다면 죽여봐라." 녀석에게 웃어보이고 난 뒤, 즉시 옆의 플라스크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당연하지. "뭐하는 거야! 어서 처치해야 한다고!" 그건 나도 알지만... 뭐. 저 녀석의 본심도 듣고 싶고. 괴물은 순식간에 영주의 딸이 쏜 마법의 화살을 매우 가볍게 지나쳤다. 빠르고 신속하게 그리고 탁자 위로 점프하더니, 이내 뛰어 올랐다. 그리고...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괴물의 두뇌는 어떻게 할 수 없나 보군." 교장은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 괴물의 두뇌를 정상적으로 운용할 방법은 전혀 없을까?"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기라? "음.. 글쎄. 아마 디트로인이라는 매개체가 있으면 괜찮을 꺼야. 단, 이런 상황하에서는 어떻게 콘트롤 하느냐가 문제가 되겠지. 그러니까, 생체병기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일종의 신종의 사고하는 생명체가 생겨나는 거라고. 자신의 인권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질 가능성도 있고 말이지." 녀석은 잽싸게 팬을 꺼내 들었다. "그래? 하지만, 디트로인 보다 다른 개체를 이용할 방법도 있지 않을까?" 괴물은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머리가 많이 아픈 모양이야. "당연히 존재하지. 그건, 저런 무자아 상태에서 죽도록 패서 확실하게 교육을 시키면 되지. 하지만... 주인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 될 수도 있으니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네." 결국, 영주의 딸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봐요! 지금 그런 이야기나 늘어 놓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당신들 제정신이에요? 지금은 싸우는 중이잖아요!" 교장과 나는 동시에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연구는 소중한 것이여!" 그러나, 연구는 지속되지 못했다. 괴물이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영주의 딸에게 뛰어 들었기 때문이다. "꺄악!" 녀석은 빠르게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뒤로 엎어져 버리고, 나는 즉시 캐스트를 시작했다. 동시에 붉은 색의 화염 여러개가 생성되어서 괴물의 몸에 박았다.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되려 녀석은 나를 바라보고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아, 소용없어. 저건 강화해서 만든 괴물이라고. 마족 여럿을 잡아야 했다니까? 하하하하.. 뭐, 마족들의 근성은 형편 없잖아? 그래...서, 이렇게 훌륭한 녀석이 나온거지만." 교장은 꽤나 자신 있는 어투, 그리고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 했지만, 내겐 다 헛소리 그 이상은 가질 못했다. 녀석이 마족피가 진하다면.. 뭐, 일은 쉬워지겠군. 가만, 그냥 없애는 건 재미없으니까, 한번.. 다르게 해 볼까? "내 존재를 따르는 자... 여. 내 말을 들으라. 그리고 응답하라." 내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뭐, 그냥 해도 되지만, 분위기를 좀 맞춰야 무서울 것이 아닌가? 예상대로, 괴물은 내 앞에서 그대로 정지했다. 그리고 아주 떠듬거리는 어조로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훗. 껌이야. "가서 나를 괴롭히는 저 녀석을 없애라!" "..에...예..." 그리고 모두 놀란 속에서 그 괴물은 말을 할 때와는 달리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무지 당황한 교장은 황급히 녀석에게 말했다. "이봐! 진정해! 내 명령을 듣지 못하나? 당장 저놈을 쳐!" 흠... 괴물은 아주 붉은 눈을 빛내면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소름끼치는 어조로 말했다. "주인...은... 오직... 하나..." 그리고 그의 날카로운 발이 교장이 구르면서 피했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어깨를 찢어 버렸다. 교장은 매우 괴로운 신음을 내고, 이내 뭔가 캡슐같은 것을 허공에 던졌다. "두고보자!" 훗. 싱거운 놈. 뭐, 저래? 내게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 준 게 실수 였다고. 바보. 마족은 피로서 마왕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후후후. 영주의 딸은 어리버리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 보았다. "뭘 그리 놀래? 자, 그럼 이만 마을 밖에 풀어놓은 귀여운 놈들을 회수하러 가야지. 지금쯤 꽤나 소동이 벌어졌을 테니." 괴물은 이내 허물어지듯이 무너지고, 그의 발 밑에는 마족의 피가 천천히 증발해 갔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훗. 구멍 뚫리겠어. "너... 정체가 뭐야?" "보다시피. 자, 어서 나가자."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뭐랄까? 공포가 지배하고 있는 듯 했다. 음. 맞다. 그래. "저건... 마족의 하수잖아요! 그것도 고위 마족의 하수! 어떻게 저런 게 소화되어 있는 거지? 그리고 저 원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잖아!" 하핫... 눈치 챘냐? 눈치도 빠르군. 후훗. 뭐, 다 이 나의 뛰어난 능력 덕택이란 말씀. 모르나? 후후후... 난 역시 대단해. "별 거 아냐. 사람도 안 죽었잖아? 그럼 된 거지. 뭐." "하지만.. 저런 괴물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주술자가 특별한 주문을 더 넣은 게 틀림없는데.. 어떻게 저런 게 가능 한 거죠?" 그런 건... 몰라도 된다고. 후훗. "자, 그렇게 너무 고민하면 대머리 된다고. 자, 없애 볼까?" 성의 문 바로 앞에서 그 거대한 허공의 마법진을 보고 역시 반 자장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내 마법의 위력에 반응한 변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그리고 점차 빛이 엷어 지더니, 하늘에 있던 마법진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주변에 뛰어 놀던 괴물들도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다. "...없.. 어지고... 있잖아!" 그럼 나타나게 하니? 이상한 아이군. 역시 어린 것들은. 허허허. "자, 그럼 대충 정리도 되었군. 그럼 들어가 볼까?"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을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몇가지 무수한 소문이 돌았지만, 사소한 거 신경쓰면 오래 못산다. 밀키..아니, 나바스의 대 황녀 전하는 당분간 로안 영주의 성에 묵고 있었으며, 나는 그래도 동쪽 숲으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찍 가 줄 생각은 없다. 같은 마족인데 뭔 일이 있기야 하겠냐? 그리고 그 정도에 당하면 마족이 아니라고. 뭐. 후훗. 다, 인과 응보야. 감히 내게 그 귀찮은 마왕 자리를 하게 하려 했겠다? 죽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렇게 떨어진 나도 좀 멍했지만... 뭐. "거울은 내가 도둑 길드에 가져다 줄께. 흑이 한 걸 알면 나중에 백을 보기 좀 그렇지 않아?" 흑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녀석은 이제 왕에게 보고 하는 일만 남은 거 같다. 그리고 영주는 아마도 짤리고, 대신 그의 딸이 이어 받게 될 거 란다. 뭐, 내눈에는 그 놈이 그놈이다만.... 그리고 메데이레나는... 어쩔 셈이냐? "그러지. 역시 라플은 똑똑하군. 뭐, 네 놈 하는 일이야 항상 종을 잡을 수가 있어야지. 뭐, 그래도 이번엔 괜찮아. 아, 너 앞으로 어디 간다고?" 메데이레나는 저기서 삽질을 시작했다. 이유? 죽어간 사람들을 묻어 줘야 한다나 뭐라나? 불쌍한 것. 그게 다 내 책임이라고 가끔 노려보지만 않아도 꽤나 귀여운 데 말야. 내가 뭘 잘 못했다고. 후후후. "동쪽 숲이요. 거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흑은 역시나 검은 옷을 입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어두운 놈... "그래? 하지만, 거긴 꽤나 위험하다고. 오죽하면 마의 숲이라고 까지 하겠어? 너 혼자 간다면 그건 더더욱 안 될 말이야." 혼자 가는 게 더 편한데. 뭐, 여기서 계속 하녀들이 가져다 주는 차 마시고 노는 것도 좋지만, 결정적으로 저 여자가 꽤나 불편하거든. "어머, 여기 있었던 건가요?" 그래. 바로, 영주의 딸. 대위의 딸도 아닌, 영주의 딸인 저 여자는 사사건건 나를 노리고 있다. 날 좋아하냐고? 천만에. 약점 잡을 날만 시시각각 노리고 있다고. 일단은 아버지의 원수에 준하는 사람이잖아. 영주야 지금은 지하에 갇혀있지만... 곧 사람들이 와서 데려갈테고. 중앙에 가면 죽지 않을테지만, 엄청 문책당하겠지. "아, 네. 흑. 난 떠날 차비를 할 테니까. 뒤를 부탁해. 그럼. 이만." 그리고 휘리릭... 미안 흑. 하지만, 나도 귀찮은 건 질색이라고. 게다가 저 여자는 왠지 싫단 말야. 차라리 귀여운 강아지랑 놀겠어. 메데이레나~~~ "메데이레나, 넌 성에서 사람들이 오면 같이 따라가. 괜시리 트라이너와 나바스 싸우게 만들지 말고." 약간 엄하게 말하자, 그녀는 이내 입을 내밀었다. "흥. 그건 내가 알 바 아냐." 하핫.. 역시 애는 애. "참, 너희 나라 황제... 어떤 사람이야? 마검을 주고 가버려서 꽤나 고생했다고. 알아?" 그렇지. 수로에서 헤메고... 뭐, 잘 생각해 보면, 그 검이 삐진 게 원인이 컸다고 할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상태에서의 다른 사람의 말이란, 솔깃하기 쉽지. 그래도 일단은 마왕의 검이라고. 즉, 내검. 하지만... 그렇게 가지고 싶을 만큼 검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괜히 있으면 시끄러울 것 같기도 해. "응? 우리 오빠가? 몰랐는데... 우리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착해. 일단, 천사같은 사람이야. 뭘 해도 다 착하고... 정말 좋은 사람이지. 문제가 있다면... 너무 착해서 검말에는 꼼짝 못하고, 사린이랑, 그런 수하한테도 싫은 소리 잘 안해." 흠.. 사린? 살린이랑 이름이 비슷하군. 설마, 친척은 아니겠지? "그래? 평판도 좋은 편이지. 나바스는 그런 위대한 황제가 나와서 척척 발전하고 있는데..트라이너는 계속 싸움 판이니... 걱정이다." 그녀는 갑자기 빙긋이 웃었다. "괜찮아. 라플도 대단한 거 같던데? 우리 오빠는 피스트레이카 공작이 어린애라고했지만... 내가 볼 때는 더 대단해 보여. 그래. 소년." 나이도 나보다 한참 떨어지는 애송이들에게 이런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한다니. 내 신세야. "그래... 아, 깜빡 할 뻔 했는데. 앞으로 조심 조심 다녀. 난 이제 못 지켜 준다고. 동쪽 숲으로 난 계속 갈 생각이니까. 뭐, 다른 사람 데리고 다니는 취미도 없고. 일단, 사람들 오는 건 보고 가야지." 그녀는 똘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긋 웃었다. 그녀의 손은 비록 흙에 더러워져 있었고, 얼굴은 해에 약간 탔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여웠다. "응. 그래도 꼭 다시 만날 꺼야." 하하하.. 그래. 그럼 난 열심히 도망가 주마. "그래. 꼬마야." 햇볕이 잘 드는 오후의 일이었다. 22-3. 그리고 날짜는 정확히 삼일 쯤 지나, 내가 슬슬 지겹다는 생각이 들 즈음해서 그들이 도착했다. 트라이너 중심에서 온 사람들 이었는데, 개중에는 메데이레나의 정혼자라는 세인 푸르다...인가? 뭐, 그런 놈도 끼어 있었다. 무지 닭살스런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런 사람. 그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황녀 전하. 저 무수히 퍼져 나가는 아침 햇살 보다 더욱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분이신 당신, 고귀한 메데이레나 아르페서 위데인 나바스여. 당신의 충실한 종이자, 영원한 노예인 저, 세인 푸르체트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저, 내 나쁜 옛날 버릇이 안 나오길 바랄 뿐이지. 그거 고치는 데 1세기가 걸렸다고. "푸르체트경. 일어나세요. 그리고. 돌아갈 준비는 해 두시고, 내일 아침 떠나는 걸로 해요. 아, 피스트레이카 대공?" ...뭐라고 해야 하나? 이 닭살에 같이 발 맞춰 걸어야 하는 건가? 닭도.. 날 수 있다. 하마터면 나도 대기를 이탈할 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대지에 두발 붙이고 있었다. 날 달로 보내지 말아줘... 부디. "부르셨습니까, 존귀하신 황녀 마마." 닭살 좌르륵.. "응. 다름이 아니고, 오늘 떠나야지." 생글 생글. 좋은 생각이다. 나도 더 이상 여기 있다간, 망부석 내지는 조류에 하나로 끼게 될 테니까. 훗. 살았다. 그래, 미운정 고운정 다든 프라운 녀석 구하러 가야지... 그러고 보면 프라운 녀석. 이름이 꼭 개구리 비슷하단 말야. 그 날 오전에 도착한 일행들의 닭살 스러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뭐, 다 잘 될 거야. 별 일이야 있겠어? 그리고... 사실 저 메데이레나가 좀 무섭기도 하고. 내가 약한 게 원래 떼젱이와 울보라고. 그럼... 나는 간다~ 잘 있거라. "왜, 몰래 나가는 거냐?" 어스름한 새벽에, 흑 녀석이 혼자 밖에 서 있었다.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조용히 나에게 빵봉지를 내밀었다. "뭐냐 이건?" "빵이잖아. 가면서 먹어. 듣자하니, 마의 숲엔 여관도 빵집도 없다고 하던데?" 이봐... 마의 숲에 그런 게 당연히 있을리가 만무 하잖아!!! 이런 바보를 봤나. 정말이지. 한심해서 어쩔 수 없는 놈이로군. "고마워. 하여튼, 잘 가라. 그리고.. 거울은 너가 대신 길드에 전해줘. 나중에 들린다고 전해 달라고." "그래." 걸음을 옮김에 따라, 점점 녀석이 멀어져 갔다. 그리고 녀석이 뭐라고 하는 듯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 대체 얼마나 걸어야 숲이 나오는 거야. 보기엔 무척이나 가까워 보이는 데 말야. 사기다.. 에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돌아가자. 그리고 발걸음을 당장 돌리는데, 바로 앞쪽에서 엄청난 비명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어디서도 듣는 다는 게 가능 하다는 이른 바, 여자의 비명 소리가 아닌가? "젠장. 대체 왜 여자가 이런 데 있는 거야?" 라고 투덜거려도 이 용사 정신이 투철한 나는 이미 그곳으로 뛰고 있었다. 뭐, 꼭 그런 것보다, 왠지 들은 듣한 목소리... 거든. "이봐! 거기 누구야! 대답해!" 저 멀리, 소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찢겨져 나간 옷자락과 그걸 들고 무식하게 서 있는 거대한 마물.... 저게.. 이름이 뭐더라? 아브켈?? 모르겠다. 이젠 괴수 이름도 너무 어렵단 말야. 후훗. "이 놈!" 여자는 쓰러져서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나마, 피들이 점점히 흩어진 걸로 봐선, 아무래도 상처를 입고 있다고 봐야겠지. 녀석의 목을 노리고 순간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나의 특수한 가문의 비검!!! 녹슨 검1호! 주제가도 있다. -나가라, 녹슨검... 하늘이 부른다. 땅이 부른다. 세상의 평화는 네 손으로 지켜라. 평화는 네 손에 있다. 나가라, 녹슨 검. 녹슨 검. 저 푸른 하늘이 네게 준 그것을 잘 지켜라. 그리고 너의 아름다운 검집의 평화를 위해...! 크흑. 눈물이 날 것처럼 아름다운 대사로군. 후훗. 정확히 검은 녀석의 둔탁한 목에 꽂....혔는데, 부러졌다. -잘가라, 녹슨검... 우린 항상 행복했었어. 그래도 뭔가가 부족했던 거야. 진작에 대장간에 갈 것을... 잘 못했어. 용서해죠.( 싫어! 싫어!) 이제 저리가... 나보다 더 멋진 주인은 당연히 만날 수 없겠지. 그럼.. 미안해. 날 용서해. 잘가, 떠나가... "꾸에에엑!" 괴물에게 노래를 들려 주고 싶었지만, 녀석의 방해로 더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지. 검이 없다면, 검의 사촌인... 마법으로 해결해 주지. "죽어라!!!" 진작에 이렇게 할 것을.. 녀석은 나의 붉은 화염 화살에 맞고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성급하게 나한테 개긴 벌이다. 뭐. 소녀는... 무사한가? "으..." 별로 그렇진 않군. 여기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사람이 누구냐면.. 메데이레나. 이름도 더럽게 어렵기도 하지. 발음은 더 어렵고... 젠장. 세인 푸르다 경이 불쌍하군. "좋아. 어쩔 수 없지. 살려 준 셈 치고 떠나야지. 후훗."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아직 안 죽었어. 라플. 냉큼 와서 치료하지 못해!" 하핫... 무슨 애가 이렇게 무섭냐. "하하하.. 그래? 뭐, 난 단지 주위를 둘러 보려고 했단 말야.. 이렇게 마법 결계를 치고, 그러면 녀석들이 들어 오지 못하거든." 그녀는 나를 째려 보았다. 다친 주제에 어떻게 저런 입심을 발휘 할 수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넌 왜 여기있는 거냐! 내 철저한 계획에 따르면 넌 오늘 점심을 지금쯤 근처 성에서 해결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이젠 괜찮아... 그 옷. 벗어줘." 이봐.. 이젠 옷까지 벗기려 드냐? "난 단벌 신사라고. 이거 마저 없어지면 어쩌라고 그래?" "그럼 숙녀가 찢어지고 피 묻은 옷을 입고 있으란 말야!" 하하하.. 아, 옷.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가방을 뒤적여서 흰색 옷에 푸른색 문장이 새겨진 옷을 건네었다. 이건 바로, 그 대신관 나으리에게 하사받은 것이지. 뭐, 에네브 증표의 옷이라나? "우와. 이거 신관복 아냐? 너 왜 이런 걸 들고 다녀?" 그야, 신관 에네브.. 어라라, 그 징표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대신, 검은 해골이 나타났다. "끄에엑! 이게 뭐야! 너.. 나한테 이상한 주술을 건거지?" 그럴리가 없잖아! "아냐. 그럼 다시 벗어봐." 그 옷은 다시 말끔한 흰색에 푸른 문장이 빛나는 옷으로 변했다. 역시... 마법이군. 아니, 신력이라고 해야 옳겠지. 여하간, 노인네 그렇게 안 봤는데, 꽤나 대단한 걸? "그럼... 내가 신관 복을 입고, 넌 내 옷을 입어.. 좀 땀냄새가 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갑자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헤... 라플도 땀흘려? 전혀~ 아닐 꺼 같은데?" 이봐, 사람이라면 당연히 땀을 흘려야 하는 거잖아. 뭐, 나 같이 훈련을 많이 하면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이지. 나도 보통 인간이라고. 인간. "그만 하고. 입기나 해. 참, 밥은 먹었어?" 그녀는 방그레 웃으면서 역시나 뻔한 대답을 했다. "아니? 밥 줘." 이렇게 제 멋대로일 수가. 그래도 세이는 좀 노력은 하잖아? 젠장. 젠장. 젠장! 차라리 수도로 가서 세이 녀석 데려오는 게 낫겠어. 녀석은 귀여운 맛이라도 있지. "응~ 오빠. 응?" 음.. 좀 귀엽기는 하군. "그래. 자, 이건 흑이 준 빵이야. 고맙게 먹으라고." "응." 말은 잘하지. 나바스의 모든 인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젠장. 가만... 이젠 돌려 보내기도 좀 늦은 거 같고. 어떻게 한다. 좋은 생각이 나는 군. "너, 거기 가만히 있어봐." "응? 왜?" 그녀의 하얗고 작은 이마에 즉시 내 입을 갖다 대었다. 반해서? 웃기지 마라. 내겐 이 꼬마보다 백배는 예쁜 키히가 있고, 더군다나 이건 일종의 의식이다. 이건 내 먹이다.. 라는 마족의 습성 중에 하나인데. 그럼 절대 하위의 마족은 건드릴 수 없다. 뭐, 마족 중에서는 내가 대빵이니, 그녀를 건드릴 간뎅이 내 놓은 놈은 없겠지. 후훗. "에에엣! 설마! 오빠 날 좋아하는 거야!"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뭐라고 설명할 방법도 없고. 아, 그래. 우연히 획득한 타이틀, 신관이라는 좋은 명분이 있지 않은가? 후후후후. "음. 신관의 축복이야. 난 사실 신관이거든. 우연한 기회에 에네브라는 신관이 되었지. 왜그래? 놀랐어?" 그녀는 잠시 당혹한 얼굴을 하고 두 손에 얼굴을 파 묻고 울기 시작했다. "흐흐흐엉... 오빠가 불쌍해. 거긴 남색 집단이라고 아는 사람이 그랬단 말야." 누가.. 그런 잘못된 사상을. .분명 남자가 대부분인 건 사실이지만.. "절대 아냐. 누가 그래?" "응. 이지리스라고, 드래곤 나이트가." 드래곤 나이트? 헤.. 그거 굉장하군. 최근에 된 모양이지? 하여간, 나바스는 좋겠다니까. 뭐, 트라이너엔 나같은 녀석이 있으니. 후훗. 균형은 소중한 것이여. "좋아. 좋아. 그럼 이만하고. 저기 저 숲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넌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 지금 쯤이면 널 찾으러 달려 오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꺼야. 그래. 내가 널 바래다 주고..." 그녀는 귀엽게 머리를 찰랑이면서 고개를 막 흔들어 댔다. "아냐. 아냐. 오빠 친구는 지금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을지 모르는 데, 어떻게 그런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어! 절대 안된다고!" 어이... 마족 주제에 무슨 생사의 기로를.. 뭐, 죽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존재의 소멸은 느끼지 못했는데... "하하하하.. 녀석은 그래도 더 버틸 수 있어. 하지만, 넌 저기가면 위험한 일 투성이라고. 그래도 괜찮아?" 메레이데나는 이제 입까지 오리처럼 내밀고 있었다. 음.. 녀석. 오리 인형을 좋아했나봐. "오빠의 친구는 곧 나의 친구야!" 이런 얼토당토없는.. 녀석을 넌 본 적도 없잖어. 뭐, 할 수 없지. 동쪽 숲의 왕과 그리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왕이 되었으니, 조금은 내 편의를 봐주긴 하겠지. 뭐. "가자. 가." 난 몰러. 이제 어떻게 되도 말이지. 그나저나, 저 숲... 더럽게 멀군. 정말, 프라운 녀석. 꼭 일 낸데니까! 차원 이동으로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사실 여기부터는 걸어가는 게 좋지. 왜냐? 길 잃기 딱 알맞아서.. 숲 내에서의 좌표는 항상 변하거든... 22-4. 역시 내 예상은 항상 맞아 떨어져서 무서울 때가 있어. 이번에도 역시 그렇잖아? "역시. 길 잃은 거지? 라플. 하여간, 이런 인간이 대공작이라니... 트라이너도 알만해." 어이. 너같은 인간이 황녀인 나라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래도 난 적어도 예전엔 세상을 구하기라도 했다고. 그 일에 자존심을 걸어도 좋지. "꼭 그런 건 아냐. 그리고 숲이 저기 보이긴 하잖아." "보이는 데도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난 더 놀라워. 그리고 아까부터 괴물은 더더욱 늘어만 가고. 그리고 검한테 왠 묘지? 그 시간만 해도 저 앞까지는 갔겠다." 하핫. 너무 하는군. 건방진 녀석.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참. 그리고.. 정말 길을 잃은 거 같아. 이젠 어쩐다냐. "차라리, 지름길 찾지 말고 앞으로 쭉 가는 게 어때? 그 편이라면, 길 잃을 염려도 없고 말야. 안그래?" 응? 그럴까나... 흐흠. 그럴 수 도 있군. 아니지. 그게 정석 아닌가? 보통은. "자. 가자." 왠지, 청춘이 사그라 드는 느낌이 조금 들긴 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얄팍한 생각을 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주 조금 뒤에 우리는 숲의 입구에 도달 할 수 있었다. "3일 걸렸지? 배고파." 하하하.. 그래. 나도 배고파. 이러다, 몬스터 구이라도 먹을 지경이라고. 게다가, 빵이랑, 식량은 거짐 떨어져 가고. 이거야 원. 완전히 거지 아냐? 근처에 물도 없고... 흑 흑... 거지의 조건이 완전히 부합하잖아. 이건 비극이야. 대마도사 라플의 말로(末路)...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젠 두려워져... 어, 여기 표지판도 있네. 근데... 무슨 글이야? 난... 이런 맞춤법 안 맞는 글을 몰라." 그녀가 손으로 만지고 있는 저 돌의 기원은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으로 올라간다. 정확히 300년 전, 인간들과 그리 교류 하지 않던 동쪽 숲의 주인은 한가지 결단을 내린다. 쓸데 없이 인간들이 들어오는 게 무지 귀찮았던 지라, 그들의 언어로 친절하게 여기 오지 말라고 써 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이 숲의 주인인 마왕이 언제 인간들이랑 이야기는 해 봤어도, 글을 주고 받은 일이 있었겠는가? 거의 문맹에 가까웠던 것이다. 게다가, 마족이란 원래 긍지가 높디 높은 종족이라, 인간의 글을 익힌다는 건 정말 머저리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으니... 결론, 놈들은 자신들이 인간과 필담(筆談 ; 예전에 고대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대화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자를 종이에 써서 뜻을 전했다고 한다.)이라도 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그들은 맞춤법이 엉망이 글씨, 게다가 사투리가 무지 진한 그 글씨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대충, 해석하면. 들어오지 말 것. 개조심.- 얼마나, 간단명료한지... 여기서 개가 왜 나오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냥.. 별 거 아냐. 어서 들어가자. 녀석.. 무사하겠지?" 그래도 주제에 마족이잖아. 하핫. 그것도 고위의.... "우와, 저기 맑은 샘이 있네~ 저기봐! 라플, 저런 곳에 예쁜 꽃밭이 있어!" 여긴, 오랫동안 사람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자연은 죽이는 군. 하긴, 마의 숲에 누가 들어가. "오길 잘했어. 역시. 이런 데라면 진작 와볼껄. 세상에. 좋다. 좋아." 이봐. 그걸 마족들에게 쌓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널 존경해 주지. "잔소리 말고... 물에서 좀 놀다 갈까?" 역시. 사람은 노는 데는 약하다. 뭐, 늙었다고 맘까지 늙으면 내가 좀 불쌍한 놈이잖아. 하핫... 이런 식으로 위기를 넘기자. "응!" 결국, 나와 메데이레나는 즐겁고 환상적이고.. 무지 피곤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물놀이 해서 얼굴은 벌겋게 타고, 손 발은 쑤시고... 그렇다. 난 아무래도 늙은이 심정이 깊이 베어 있어서... 무지 힘들었다. "괜찮아?" 물보라를 계속 튕기려 하던 그녀는 결국, 다음날, 근육통으로 일어나질 못하고 있다... 바보. 나? 덩달아, 나도 누워 있다. "으... 전혀. 으. 온 몸이 다 아파. 라플... 몸도 좀 으쓱한게.. .감기인가봐." 하핫... 그럼 뭐냐. 나보고 불 피우라 이거군. 마법으로 불은 피워도 장작이 있어야지... 젠장. 할 수 없군. 근처 나무를 동가리 치는 수밖에. "잠깐만 기다려. 불 피워 줄께." 잠시 뒤, 근처가 온화한 기운이 들고 몸이 점 점 훈훈해 졌다. 다시 마법진으로 우리 장소 주위에 방어막을 치고, 나도 좀 누웠다. 음... 역시 늙으면, 이게 딱이야. "근데.. 오이는 없어? 어마마마가, 얼굴 탄데는 오이가 짱이라던데." 짱아치나 박아라... "그런 게 어디있어? 좀 쉬라고. 열도 있는 거 같은데." 감기나 걸리고 말야. 허약하긴. 세이 녀석은 튼튼 한데 말야. 뭐, 세이하고 비교 한다는 거 자체가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말야. 후후. "오이 있는데?" 꾸엑! 어디서 난 소리야! "거기.. 사람인가 본데? 라플 오빠." 그러냐? 어디 보자... 사람... 넌... 열이 많구나. 이게 사람으로 보이고. 보통 뿔나고, 팔이 여섯개인 사람이 있어? "하하...오이만 놓고 가면 안될까?" "그건 곤란해. 여기 나무들을 내가 지키는 데, 너희들이 와서 망쳐 놨잖아. 나, 왕께 혼난단 말야." 하하하하.. 그렇게 말해도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나저나, 상당히 띠벙한 놈이네... 메데이레나는 이제 색색 잠들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자는 놈이나... 아니지, 대낮에 멀쩡하게 나타난 마족이 이상한 거야. "마족은 전부 야행성 아냐?" "뭐야... 너 다른 마족이야? 왜 야밤에 돌아다녀? 할 일 없이. 여긴 눈치 볼 인간도 없는데... 너, 마족 맞지?" 그렇다고 해야, 동료를 안 불러 오겠지? 이 녀석은 좀 띠벙해 보이니까.. 하핫. "암, 그렇고 말고. 자, 어서 가보라고. 나중에 내가 왕께 찾아갈께." "응. 그래. 꼭 그래야 한다." 녀석은 어슬렁 거리면서 사라져갔다. 오이도 두고. 하하핫... 대체. 대체. 저런 맹한 마족도 있단 말야? 신기하단 말야. 역시 신비한 세계야. "응...." 녀석. 잘도 자는 군. 이러다, 밤에 안자면.. 아, 그래. 보초를 세우면 되겠군. 흐흐흐. 그럼 싫은 소린 못하겠지? 당연히 못해야지. 암. 이렇게 낮에 내가 보초를 세워주고 있는데 말야. 후훗. "아... 날씨도 좋고. ... 왠지 나도 좀 졸리잖아? 오이는 잘 붙여 주었으니.. 난, 원체 살이 안타는 내 피부에 감사하고.. 자.. 한 번 자 볼까나?" 그리고 조용히, 꿈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는 계속 마왕이 나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나....랑, 항상 놀고 싶었다나? 이젠 별 꿈 다 꾸는 군. "오빠! 어서 일어나란 말야!" 순간... 키히인 줄 알았다. 그녀와 닮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한참 어리기까지 한 메데이레나가 키히로 보이다니. 나도 열있나? 뭐, 얼굴은 발게 가지고.. 대체 뭔 일이야? "뭐야. 너도 좀 자 두는 게 낫지 않아? 응?" 곧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어막 바로 옆에 수많은 마족들이 운집해 있었다. 어이, 뭐 여기서 동창회라도.. 할리가 없지. "하핫... 언제부터 저래?" "몰라. 아까부터 계속 지켜보기만해. 어쩌지?" 어쩌긴, 방어막 때문에 못 오는 거 같은데. 뭐. 이야기나 해 봐야 겠군. "에... 저, 이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놈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녀석은 낮게 으르렁 대면서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듯. "인간이 이 곳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에에? 인간이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마족 같은걸?" 하하하... 이빨 큰 놈이 처음 우리에게 오이 준 놈에게 눈쌀을 찌푸렸다. 저놈, 이곳에서도 따 인 모양이군. 하하하... "시끄러. 어딜 봐서 마족이란 거야? 네.. .놈. 여긴 무슨 일이냐? 그리고.. 이건 걷으라고. 그럼 내가 널 갈갈이 찢어주마." 어이. 그런 직설적인 표현을 듣고 누가 없애냐? "아, 친구를 찾아 왔어.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마족 프라운이라고." 잠시 정적이 잠겼다. 한 놈이 나를 바라보고 비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놈들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에 나온 마족이 나에게 비웃으면서 말해주었다. "이봐. 인간과 마족이 친구라니, 그런 걸 믿으란 말야? 그리고. 프라운이란 놈은 들어보지도 못했어. 너가 찾아온 건 역시 같은 인간 아냐?" 마족 맞어. 이름이... 본명이 프라운이 아닌가? 흠... "용사 프라운. 그럼 알지?" 이건 또 모르지. 하지만, 녀석들은 이제 아주 깔깔 거리기 시작했다. "꼬마... 마법을 너무 많이 연구해서, 미친 게로구나. 훗. 이 마족 어르신이 잘 요리해 주마. 어쩔 땐, 사는 게 더 힘든 법이다." 그런가... 흠. 흠. 그럼 뭐지? 역시... 재수 없는 데다가 기분 나쁘고, 무식한 놈이지만, 동쪽 숲의 마왕을 불러야하나? "당신은! 라플이 아닌가요?" 갑자기 무리 뒤에서 왠 마족 하나가 기어 나왔다. 오옷? 저 녀석은 틀림 없이, 예전에 내가 성에 있을 때, 가와세리크 잎 사건으로 본 적이 있지. 어휴. 다행이군. 그래도 알아보는 놈이 있어서. "아, 안녕? 왕에게 안부 전해줘." 그녀는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안부를 전할 정도로 친하지는 않잖아요? 뭐... 당신 정도라면, 그냥 뚫고 나올 수도 있는데.. 하지만, 여긴 당신이 찾는 프라운이라는 사람은 없어요. 대체 누굴 찾아 온 거에요?" 하하하.. 어쩐다나. 에라이. 모르겠다. "음... 그럼 일단, 왕을 만날 수 있을까? 그라면, 사정을 들으면 보내 줄거야. 어때?" "그야... 좋아요. 여러분, 저 사람은 대마도사 라플입니다. 길을 비켜 주세요. 그리고 당신들은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고요. 왠만한 마족들보다 더 무서운 존재니까요. 그럼... 가실까요?" 하하하... 소개 한 번 거창하군. 나는 즉시 메데이레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역시, 예전에 한 번 만난 게 행운이었어. 우.. 역시 인생이란, 모르는 거 아냐. "음... 라플. 너, 나이도 날아 비슷한 데, 어린 나이에 대단히 유명하구나?" 하하하.. 그래. 어린나이. 120세 조금 넘어. 나이는 이미 내 관심 밖이라고. "그래... 뭐, 부담 갖지는 말라고. 대부분은 뻥이니까." "응. 그럼. 당연하지." 그렇게 너무 당연한 건 아닌데 말야. 뭐, 너가 날 이해하려면 내 산 거에 반은 더 살아야 할 거야. "저기에요. 왕이 계시는 곳. 들어가세요." 뭐, 그래야지. 나와 그녀는 동시에 그 움막으로 들어갔다. 메데이레나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음.. 이상해. 왕이 이렇게 허술한 데 살아?" "마족은 인간처럼, 집에 연연하지 않거든. 뭐,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음..." 그리고 드디어, 움막 안에 거대한 화염이 타오르는 방이 있고, 그 제일 끝에는 위대한 동쪽 숲의 지도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프라운이 있었고. 젠장, 녀석 역시 여기 있었군. 하나도 안 위험한 모습이잖아! 난 널 찾느라, 근육통까지 걸렸는데!(수영때문에) "위대한 숲의 왕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22-5. 마의 숲을 다스리는 주인과는 예전에 아주 거지 같은 추억과 함께 만난 기억이 있다. 그건 바로, 녀석이 키히와 나를 가지고 장난을 쳤던 아주 거지 같은 추억. 하지만, 뭐, 그래도 나쁜 놈은 아니었다. 음흉하고, 치사할 뿐이지. "그대는... 분명, 라플?"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비아냥 거릴려는 찰라, 그는 다시 말을 덧붙였다. "과 많이 닮은 손자로군." 본인이야. 임마. 그리고. 프라운 녀석. 왜 저렇게 싱글거리는 거야! 아까부터 재수 없게스리. "아, 왕이시여. 저는 이만 돌아가야 겠습니다. 제 주인이 무척 화가 난 듯 하군요." 알긴 아나 보군. 그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지. "음? 그대의 주인이라면.. 분명.. 마왕이 아닌가? 우리 모두의 주인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분은 봉인되지 않았던가?" "예. 사실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건데... 여러가지 일 때문에 깜박했군요. 마왕의 힘이 계승되었습니다." 그는 인상을 서서히 찡그렸다. "그럼, 그때의 그 통증이 그거였었군. 난 또, 왜그런가 했지. 뭐... 알아서 하게. 대신, 마왕 즉위식은 할꺼지? 이번에도 안하면 안된다고. 그런 식으로 하니까, 하잘 것 없는 것들이 계속 우리 마족을 얕보는 거야." 내가 본인이야. "오빠..." 갑자기 메데이레나가 내 옷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왜? 겁내지마. 여기서 널 헤치지 못하게 할 꺼야." "응? 난 배가 고파서." 하핫... 이 애한테 진지함을 기대하는 게 무리였어. 무리. "그...래? 저. 프라운. 먹을 게 좀 있을까?" 그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여긴 마의 숲입니다. 인간이 먹을 만한게 없어요. 그리고.. 그 아가씨는 누굽니까? 설마, 애인?" 하핫..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소릴 했다간, 지금 저 분노와 광기의 화신으로 돌변한 키히가 나중에라도 알면, 넌 그냥 잿더미야. "알 거 없잖아. 내 손님이야." "예... 어라, 그 인은...? 아, 알겠습니다. 전, 기쁩니다." 오해하지 말라고.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이니까. 젠장. 저 녀석 분명히 헛다리 짚고 있을 꺼야... 젠장. 하여간, 최근엔 되는 일이 없다니까. 이런 멀쩡한 놈을 데리러 오다니, 내가 돌았어. 돌았지. "기뻐할 거 없어. 어서 나가기나 하자고." 프라운은 싱글거리면서 내쪽으로 걸어왔다. 그 때, 그 숲지기가 우릴 제지했다. "아, 잠깐. 그대... 라플의 손자라면 내 마땅히 음식을 대접해야 하지 않겠나? 어떤가, 잠시 여흥을 즐기고 가는 것은? 그대의 할아버지와 나는 아주 절친한 사이었다네." 누구랑 누가 절친했어? 묻고 싶구만. "에... 내가 알기론, 댁 때문에 누구 누구는 백년간 저주를 받았지? 그리고 최근에는 덕에 죽을 뻔도 하고. 그 뿐만이 아니라, 아주 유치한 장난은 더했지? 신발에 지렁이를 넣는다든지, 갑자기 하늘에서 지네비가 온다든지 말야." 갑자기 메데이레나가 끼어들었다. "음.. .그건 꼭 어린애가 환심사려고 하는 거 같네?" 그럴리가 없잖아. 뭐가 아쉬워서. 그리고 저 놈은 어린애가 아냐. 잘 보라고. 느끼한 아저씨! 잖아. 훗. 갑자기 그 위대한 숲지기 나으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게냐! 그는 너완 비교도 되지 않는 위대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리고 난 절대로 어린애가 아니다! 그런 사사로운 일에 내 힘을 쓰겠는가?" 누가 위대해? 하핫. 그리고 사사로운 일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프라운이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헤. 정말, 그런 유치한 짓을 한 거에요? 의외인데?" 의외 정도가 아니라고. 나는 정말 죽을 뻔 했는 데. 뭐. 네겐 사소한 일들 뿐이었는지 몰라도 말이지. "나쁜 넘." 나는 그를 보고 딱 한마디 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안색이 파래져서는 쩔쩔 매기 시작했다. 어이, 친구. 너, 그런 말에 그렇게 동하다니 이상해. "그... 그대는... 그런 말을 해선 안되네. 자, 우리 다 함께, 연회를 즐기러 가세. 아, 그리고 그 인간 아가씨는... 배가 고프지 않나? 좀 입맛에 안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같이 가게. 굶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프라운은 아까부터 왠지 웃고 있었고, 기분이 점점 묘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에게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음... 숲의 왕이여. 단순한 장난치고.... 그 가와세리크 잎은 좀 심한 게 아닌가요? 음. 그래서 상당히 고통 받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녀석은 잠시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음. 예전에도 한동안 나를 저렇게 노려보곤 했었다. 이 녀석이 나에게 도움을 준 건 무시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싫다고. 난. 무엇보다, 키히를 죽게 할 뻔 했잖아? 덕에 독에는 도사급이 됬지만...뭐. "음... 그 땐...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래도 너같이 예쁜 아이를 가지게 되다니, 라플은 복이 많구나. 그런데... 네게선 엘프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그건 어찌된 거냐?" 그야.. 엘프랑 결혼한 일이 없어. 우리 까마득한 선조나으리 중에 귀족 아니었던 인간이 없는데, 어떤 인간이 유사 인종이랑 결혼을 하냐? "에... 내가 라플이거든." 잠시, 프라운의 웃음이 지나가고, 녀석이 비아냥 거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숲의 왕전하. 안되었지만, 이분은 정말 라플, 그 분이 맞습니다. 후훗. 그래. 어떻습니까? 이렇게 젊어진 이분을 보니." 너, 어딘지 음모의 냄새가 난다. 혹시 먹을 걸 혼자 다 먹으려는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냐? 수상해. "하지만, 인간이라면 이렇게 오래 살리가 없다. 어찌 된 게냐?" "훗. 아까도 말씀 드렸잖습니까? 새로운 마왕의 즉위식을 위해 왔다고." 잠깐, 프라운. 즉위식 이야기는 대체 뭐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애초에 날 인정하게 하려고... 이 녀석이! 내가 기억을 잃은 동안, 날 마왕에 앉히려는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프라운. 그건 못 들은 이야기인데? 그리고... 나 기억 다 돌아왔어." 왠지 녀석의 얼굴엔 아깝다는 표정이 지나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대한 불의 봉을 들고 있던 숲의 왕은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거 참. "그대... 정말, 라플인가? 라플이군.. 맞아. 이런 눈은 아무리 세월이 지난다 해도 변할 수 없는거지." 녀석은 그리고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 지금 누굴 쓰다듬어! "이 손 놓으라고. 예전처럼 사람 좋던 라플이 아냐. 지금은 단지... 그래. 여기 버릇 없는 마족 친구 버릇 좀 가르치러 온 사람이라고." 프라운 각오하라고. "하하.. 라플. 왜... 그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자넨 여전히 너무나도 순수하고 아름답군. 좋아. 좋아. 자넨 마왕이 되어도 좋아. 자네 즉위식에는 꼭 가겠네." 어이! 왜... 얘기가 그렇게 되냐. 어이, 메데이레나.. 나 좀 살려 달라고. 같은 인간으로서...웃. 저건... 대체. 녀석. 메데이레나는 저 멀리서 과일을 씹어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먹는 모습이 워낙에 전투적이어서, 주변의 마족은 혀를 내 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무서운 놈. 오히려 더 마족 같잖아. "저.. 며칠 굶으셨나요?" 드디어 상황 파악을 한 프라운이 내게 물었다. 당연하잖아! "그래. 굶었다. 왜?" "하하하... 그냥 마법으로 만들면 되는데. 왜 그러셨어요?" 늙으면 두뇌도 멍청해 지는 법이라는 격언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나는 조용히 과일을 집었다. 하핫. "묻지마." 녀석은 역시 대단한 고위 마족. 마왕의 심기를 깊이 헤아려서 내 의견을 존중하듯, 입을 다물었다. 단지, 녀석이 좀 겁에 떠는 확률이 컸지만. "우와, 이거 되게 맛있어!" 얜 먹는 걸 보면 황족은 아냐. 나바스의 황제도 저럴까? 확실히 말하는 걸 보면 귀족과는 담 쌓은 거 같긴 하더군. 그런 걸 보면 확실히 형제는 형제...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우린 이만 해두고, 바로 성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계승식은 원래 마도에서 해야 합니다. 거기까지 가는 것만 해도, 최소 두달 가까이 걸리는데.." 여기서 일침을 놔 준다. "그냥 공간 이동해서 가면 되잖아. 뭘 고민하고 그래. 너 답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말이지. 난 마왕 계승식이건, 뭐건 할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알라고!" 메데이레나가 갑자기 끼어 들었다. "음. 난 좋을 거 같은데? 마왕도 왕 아냐? 그리고, 우리 고모 딸 중에 바키라고 있는데 마도 공작의 딸이야. 부르면 오지 않을까?" 하핫. 그게 뭔 상관이냐? 그리고, 희한한 일이네. 마도 공작이 황제의 딸과 결혼하다니, 무슨 영화같잖아? "흠. 그래? 난 별로 초대하고 싶은 생각 없어." 프라운이 눈을 빛냈다. "오, 그렇다면 역시 알아서 오길 바라시는 겁니까? 역시 마왕 다우십니다!" 친구야, 거기 오이는 내려 놓고 말해. 굉장히 안 멋있어. 폼도 하나도 안나는 걸? 하하... 불쌍한 놈. 원래 나 같은 친구를 두면 죽도록 고생하는 거야. "하하하.. 그래. 좋아. 좋아. 예전에는 자네가 뛰어난 인간이라서 어쩔 수 없이 자네를 경계해야 했는데, 이젠 자네가 마왕이라니, 뭐... 세상사 다 이렇게 돌아가는 군. 그나저나, 자넨 이제 너무 강한 거 아닌가?" 숲지기 양반. 숲이나 잘지켜. 남 일이나 신경쓰지 말고. 에잇. 하여간, 저 인간 때문에 예전에 여행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다. 퍽 퍽... 하고. "뭐, 그래도 귀찮게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키히... 는. 이렇게 제가 된 줄 몰라요. 알면, 경멸할까요? 우연이었는데.. 날, 싫어할까봐 걱정이에요."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왜 니가 쉬는 거야! 내가 한숨 쉬고 싶단 말이야! "흠... 그래? 글쎄. 난 밖의 일은 잘 모르지만, 근래 이 곳 사람들을 납치해간 자가 있었지. 그게 바로 키히 크리시아 휘젠이라는 자라더군. 자네도 당연히 알고 있지?" 뭐, 그렇긴 하지. 가만, 이 사람이 몰랐다는 건, 그 마족 여인이 안가르쳐 줬다는 건가? 하하하... 땀나는 곳이군. "예. 몇 번 싸우기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저를 못 알아 보더군요.." "그래..." 그는 다시 조용한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많이 쉬는 걸 보면, 이 놈도 요즘의 인생이 편치는 않았나 보지? 우리 모두 불쌍한 노년이로군. 아, 뻐근한 게 갱년기 현상인가? 하하하... 인생 무상. "자, 자. 이렇게 음침하게 한숨쉬지 말고, 모두 즐겁게 노세요." "그러지."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의 평균 나이는 과연 몇 살인가? 제일 어린건 당연히 메데이레나. 그리고 그 다음이 나.... 허허허... 무서운 일이군. 여긴 양로원이란 말인가? 마의 숲이 아니라, 양로원을 지키는 외로운 사람들이군. 하하. "오빠, 여기 이것 도 먹어봐. 맛있어." 그녀는 깜찍한 과일을 하나 들어 보였다. 그게 엄청 시고, 맵고, 쏘는 그런 맛을 가졌다는 건 예전에 알았다고... 아. 그거 키히가 한 장난이었지. 젠장.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갑자기 숲지기 나으리가 그의 귀를 쫑긋 세웠다. 엘프보다 약간 작은 그의 귀가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마족들이 갑자기 살기를 띄기 시작했다. 허허허.. 무슨 일이 있는 건가? 23-1. 희대의 느끼한 놈.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에게서 참을 수 없는 닭살을 느꼈다면, 그 다음 느낀 건 바로 혼자 쇼를 잘 한다는 것이다. 정말 기이하다 못해서 신기한 놈이다. 어떻게 저런 이상한 놈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놀라워. 저 놈이 죽으면, 꼭 뇌는 해부해 보고 싶다. -세인에 대한 평- "인간이 침입했습니다! 갖은 병장기를 가지고 있고, 병사들 수도 상당합니다! 왕이시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라고 말해도... 병사라. 뭔가 좀 걸리는게... 재빨리 메데이레나를 바라 보았다. "뭐, 걸리는 거 없니? 세인 푸르다.. 인가 뭔가, 있잖아." "음... 아마도 맞을 거에요." 젠장. 그럼 가서 해결하면 되겠군. "에, 왕이시여. 그들은 저와 구면입니다. 그만, 당신의 부하를 물리시지요. 제가 가면 해결 되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왕을 바라보고 말하자, 왕은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화난 건 아니지? "나도 같이 가겠다. 그대는 나의 친구이며, 나의 맹약자가 아닌가?" 하핫... 농담하냐? 누가 친구냐? 요즘은 원수도 친구로 하는 새로운 법이 등장했냐? 젠장. 그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은 저 꼬마의 정혼자라고. "맘대로 해. 자. 메데이레나 가자." "응...." 가기 싫은 얼굴이다만, 너가 안가면 피 보게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얌전히 가라고. 하여간, 문제는 다 잃으키는 꼬마야. 문제는 조금 심각했다. 뭐, 나나 숲지기 아저씨에게는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저기 구르고 있는 놈들에게는 좀 문제가 있는 거겠지. 아저씨는 조용히 손을 내 저었다. 그리고 거대한 소리로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마족에게 말했다. "물러나라, 나의 백성들아." 백성? 흠. 이런 숲의 백성도 백성은 백성. 그런 설정도 가능하군. 유감스럽게도 저런 아저씨 밑에서 일하다니. 쯔읏. "사부님!" 갑자기 이 소리는? 여기 날 사부라고 부를 인간이.. 어라라? 세이? "사부님! 우와, 아직 안 돌아가셨군요! 전 사부님이 돌아가신 줄 알고, 제사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다행이에요. 무사해서. 하하.. 글쎄, 우연히 성에 온 이분들과 동행하게 되었는데, 중간에 사부님 소식을 듣게 되었지 뭐에요? 그래서 당연히 따라 나왔죠. 우와, 사부님은 여전하세요. 하핫. 하긴 누가 우리 사부님을 헤치겠어요. 안그래요? 그래도 조심하셔야 한다고요. 율지스 형 말처럼, 사부님은 그래도 근육이 전혀 없으니까, 힘으로 하면 당할 수도 있다고.... 우와, 사부님. 그러고 보니 신관복을 입고 계시는 군요! 너무 멋져요! 이참에 저도 사부님 따라서 신관이나 되어 버리고 싶어요!.... 중략(중략 ; 너무 긴.. 너무 기나긴 수다였다.)" 잠시 거기 있던 모든 종족이 귀를 막아야 함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녀석은 주절댔었으니.. 난 녀석에게 제일 잘 통하는 약발을 시전할 수 밖에 없었다. "세이. 오늘 저녁은 굶어라. 계속 떠들 참이라면 말이지." "뚝." 흠. 역시 약 발은 죽이는군. 냐하하하. "아, 이 녀석이 자네 제자인가? 정말이지... 자네 취향도 많이 변했군. 이제 보니, 취향만 변한건가? 예전에 그 깔끔한 녀석...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 맞다. 율브리너.. 아닌가?" 이 녀석은.. 마의 숲 주인 주제에 기억력은 바닥을 치는군. 누가 마족은 세상을 오래 살면서 고통 까지 함께 하는 종족이라고 그랬어? 이 녀석은... 치매야. "그런 이상한 이름이 아니야. 율지스라고 해." "그게 그거구만." "맞아." 마지막은 메데이레나 였다. 그런데... 저기 세인 푸르자씨는 아까부터 비장한 눈을 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고, 어디서 많이 해본 듯한 포즈를 당당히 하고, 그리고 머리띠 질끈 매고(꼭 붉은 색이어야 비장감이 돈다) 그는 외쳤다. "거기, 마족은 즉시, 인질을 보내다오!" 이봐... 누가 인질이라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숲지기는 벙찐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인질인가봐!" 하하하.. 이젠 살려 두지 않는다. 아니지. 참을 인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며. 젠장. 참자. 참어. 나도 많이 사람 되었다. 예전에... 아, 예전엔 화도 안냈어? 하하하.. 회춘(回春 ; 젊어짐)한거야. 암. 그렇고 말고. "세인경.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포로도 인질도 아니니까." 그러자, 그는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 외치기 시작했다. "오! 황제 전하! 당신의 누이와 그의 친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부디 절 용서하지 말아주십시오! 하오나, 전하, 간악한 마족의 꾀임에 넘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저들을, 제가 꼭 구원해 내고야 말겠습니다!" 누가 누굴? 젠장. 미치겠군. 결국, 끝장을 본 건 메데이레나 였다. 그녀는 당당히 그리고 우와하게 주먹을 날려서 녀석을 쳤다. 그리고 외쳤다. "자, 이제 실컷 놀았으면 가요!" 결국, 이렇게 우리는 비웃는 숲지기 일당을 뒤로 하고, 다시 숲을 떠나게 되었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어떻게 이들은 내가 한참 헤맨 숲을 그렇게 금방 왔을까? "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오신 겁니까?" "예? 저기 세이라는 분이 마법을 써서 공중으로 길을 보고 이동했습니다. 편하더군요." 청출어람. 청춘은 나가고, 어이없음이 람바디 춤을 춘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녀석이 나보다 춤을.. 아니지. 훨씬 응용성이 좋았던 것이다. 이는 내가 단지 띨해서가 아니라, 단지.. 단지, 녀석이 운이 좋았을 뿐! 그래. 그런 거야. "스승님. 저... 저녁 먹어도 되요?" 똘망거리는 녀석을 보자, 불쾌한 감정은 싸악 사라졌다. 그리고 녀석을 보고 작게 웃어주었다. "그래. 녀석아. 아까는 그냥 장난이야. 그래. 오늘 식사는 내껀 꼭 너가 해. 소화 잘 되는 걸로. 알았지? 통 입맛이 없어서." "예~" 녀석, 하여튼, 하는 짓은 정말 귀엽단 말야. 헤헤. 그러니 내 애제자 아니겠어? 그리고 저녁은, 로만 영지로 가기 직전에 얕은 야산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다. 뭐, 나야 무슨 일이 있겠는가? 적당히 마법진 그리고... 그리고 쿨 쿨 자면 되는 거지. 그리고 여긴 사실, 여기 있는 사람 다 모아놓아도 버티기 힘든 고위마족 프라운이 신관복을 입고 떡하니 버티고 있고... 녀석이 드디어 저 옷의 효용을 알았다. 저걸 입고 있으면, 누구도 마족으로 안 보잖나.. "음...졸려." 보초가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메데이레나가 다가왔다. 이 시간에, 이렇게 소릴 죽여서 온다면 뻔하지. 화장실 갈 셈이군 그래. "쉬잇. 라플, 잠깐만." 이봐..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제일 만만하냐? 하긴, 세이 녀석은 쿨쿨 잠들었을 테고, 네 맘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보고 망보라고 하는 건 좀 심한 거 아냐? 우씨. 그녀는 나를 조용히 끌고 갔다. 겨우 근처 숲에 가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고. "라플. 뭐해?" 너가 데려 왔잖냐. 그래서 이렇게 삐져 있고. "흠... 라플. 저기. 우리 도망가자. 나, 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싫어. 나이가 얼마나 차이나는 줄 알아?" 많이 차이 난다는 건 익히 봐서 알지. 좀 사이코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넌 귀족이잖냐? 그럼 마땅히 조용히 있어야지. 후훗. "그럴 수는 없어. 그리고 프라운이나, 세이녀석을 두고 갈 수도 없고." 인상을 팍 쓰자, 그녀는 고개를 팍 숙이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이! 난 얘를 울리지 않는다고! 젠장. "음. 내가 데려오면 되겠군. 걱정하지 말라고. 나야 좋지." 허허헉! 당신은 프라운? 너 언제 우리 뒤에 따라 붙은 거냐? 동작도 되게 빠르군. 누가 마족 나으리 아니랄까봐. 하여간, 이렇게 숲도 어둠에 잠겨서 여기서 몇몇 사람이 작당을 하는 것도 모르겠구나. 통재야. 통재. 슬픈 일이기도 하지. "음...그렇지만, 너가 도망간 다음은 하나도 생각 안 해놓았지? 일단, 너가 도망가면 사람들이 트라이너의 공작이 너를 납치한 줄 알꺼야. 그리고... 아마 전쟁이 다시 일어나겠지. 너, 전쟁 본 일은 없지?"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훗. 애들은 애들이야.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 "그래. 그럼 정신 차리고 납치해 가자!" 잠깐... 무슨 헛소리야! 프라운 녀석, 왜 저렇게 의기양양 한 건데! "쿠릴츠. 너 돌았냐?" 그는 얼굴을 휘휘 저으면서 이젠 손가락까지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달이 어슴프레 빛나기 시작해서, 그의 얼굴은 한 층 더, 음산해 보이기 시작했다. "오? 그럴리가. 하지만, 전쟁이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마족들이 좋아하는 거라고. 넌 마왕이고, 난 그 보좌관이니까, 당연히 널 위해 전쟁이라도 일으켜야지." 이봐.. 지금 애앞에서 뭔 소리를 못하는 거야! "응... 그럼 좋겠네? 하핫. 좋겠다. 그렇게 해요. 프라운씨!" 야. 나보곤 라플. 라플. 그러더니, 이젠 나보고 프라운이씨까지 붙여서 이야기해 주냐? 프라운에게 열열하게 싫어 광선 어택!!! "뭐, 납치는 내가 한 걸로 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 정말 그래야 전쟁이 확실하게 일어날 수 있겠다. 음 하하하. 가자. 가자." 안된다고 절대로 그렇게 못한다고 말하려는 찰라, 갑자기 메데이레나가 측은하게 나를 올려다 보면서 울먹 거렸다. "정말.. 정말, 내가 그런 사이코에게 시집가도 좋은거야?" 가건 말건... 윽. 젠장. 난 애들하고 여자한테는 약해. 정말 너무 약하다고. 흑...흑...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거야. 그래서, 결국, 프라운 녀석이 나의 애제자를 들처 매고 왔다. "안 일어나?" "응. 어떤 의미에선 대단한 놈이야. 나중에 어떤 의미에서 큰 인물이 될 꺼야." 하핫... 참아 줘. 세이 녀석, 분명 동네 거대한 음식점 사장 까지는 괜찮을지는 모르지. 하지만, 그 이상은 좀 무리가 아닐까나? 그리고, 프라운, 네 녀석도 만만치 않다고. 그런 걸 알기는 하는 거냐? "자, 그럼 일단 어디로 갈 생각이야? 저들은 어쩌고." 나의 이 째림광선을 본 프라운 녀석은 이내 방글거리더니 자신의 소신을 있는 힘껏 밝히기 시작했다. 녀석... "일단 로만 성에는 갈 수 없잖아? 그러니까, 일다, 우리가 있었던 그 마을의 이푸드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그 곳이라면 안심할 수 있어. 그리고.. 적당히 마왕 제전을 치룬 후에는 즉시 움직여서 신전으로 돌아가야 간신히 가을까지 시간을 맞출 수 있다고." 여기서 잠깐만. 언제 마왕 제전을 내가 한다고 했냐! "프라운, 난 마왕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절대로!" 녀석은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다시 씨익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뭐, 그럴 거 같았어. 하지만, 걱정마. 진정한 마왕 제전이란, 몇 몇 밖에 들어 올 수 없고, 대부분의 마족들은 볼 수 없다고. 게다가 마족들은 내성적이라, 아무리 주인의 제전이라고 해도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가지 않는다고. 더군다나, 넌 굳이 마왕 할 필요 없어." 으엥?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녀석, 점점 나를 궁금함의 무덤에 갖다 바칠 셈이냐? "무슨 소리야? 언제는 내가 마왕이라면서?" 인상을 박박 긁자, 녀석은 방글 방글 웃음의 빈도가 더 심해져갔다. 틀림 없이 즐거워 하고 있는 거지? 젠장. 죽음의 공간 하강을 네 녀석에게만 집중해서 쓰면 무슨 효과가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군. "아, 당연하지. 그건 절대 바꿀 수 없어. 네가 죽어서 그 힘이 다른 자에게 넘어가기 전에는. 하지만,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마왕은 다른 사람이 한다 이거지. 사실, 넌 하기엔 무리가 많아. 신관인데다가, 공작이기도 한 너를 어떻게 밖에 세우겠어?" 글쎄. 그건 그렇지. 흠. 맞는 소리야. 23-2. "좋아. 그럼 누가 내 대신이 되는 건데?" "후후후후. 적당한 사람이 있지. 바로, 그건 세이야." 에엣~! 말도 안된다고! 넌 그 귀여운 내 제자가 마의 마자라도 할 수 있을 거 같니? 그 강아지는 사악하고는 담 쌓은 데다가, 내 말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라고! 근데 어떻게 그런 흉악한 생각을 할 수 있어! "절대 안된다!" "왜, 좋은 생각인데? 원래 이 녀석, 많이 수상한 놈이잖아. 설마, 아직도 정체를 모른다든지, 그런 거야?" 당연하지... "무슨 정체? 난,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어." 녀석은 잠시 웃는 걸 멈추고 무슨 생각을 골똘하게 하기 시작했다. 메데이레나 녀석은 시기하다는 듯이 흥미 진진하게 바라 보고 있었고.. 뭐. 이런 것들이 다있나. 젠장. "흠.. 그래? 그래서 마왕이 이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건데... 뭐, 모른다면 그냥 넘어가라고. 내가 볼 땐, 그리 위험하지 않아. 나중에 위험해도, 그건 그 때 일이고." 이런 무책임한 발언을... 게다가 아무리 봐도 이 녀석,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고. 뭐가 위험해? 암. 내 제자인걸. "아, 우리 여기서 놀 일이 아니라, 가봐야 하지 않아요?" 간만에 뉘집 자식인지 똑똑한 메데이레나가 나와서 말했다. 그렇다. 여기서 한 밤의 토론이라니... 세인 푸르다...라인가? 하여튼, 그 사람이 보면 기절할 일이지. "좋아. 가자." 원래, 결심하고 나면 걸음도 빨라진다. 그리고 녀석은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기 때문에, 프라운이 계속 힘들게 업어가야 했다. 나나 메데이레나는 녀석보다 몸무게도 덜 나가는 데 어떻게 업어? 그나마, 프라운 녀석이 좀 낫지. 게다가 주제에 마족이잖아. 일행은 손에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앞 뒤로 서서 아주 느리고 거북이 같은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공간 이동을 하자는 의견은 당연히 묵살되었고, 아침이 되자 깬 세이는 모두의 식사를 책임지고 유동식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는데, 이걸 사실 좋아하는 인간은 나 뿐이고, 메데이레나는 이걸 가리켜 이유식이라고 칭했고, 프라운 녀석은 눈쌀을 찌푸리고 퍼 먹었다. "맛 없어." 이봐, 성의를 봐줘. "하지만, 스승님의 친구분 씨, 여기는 요리 재료가 없다고요. 그나마, 과일로 이런 죽이라도 만들어서 대접해 드린 게 다행이니, 빨리 마을에 가기나 기도하시죠." 라고 세이는 역시 맞 받아쳤고, 둘 사이에는 은연중에 피가 튀고 있었다. 하핫. 뼈와 살이 타는 밥이군. 그리고 마을에는 갈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일단, 행선지가 비슷한 길을 따라서 나 있으니, 어떻게 가겠는가? "난 그래도 괜찮은 거 같은데? 어릴때 기억이 나서 말야. 헤헤. 세이 오빠. 괜찮아. 맛있어." 세이, 입이 찢어져라 좋아한다. 생각 없는 놈. "흥. 좋아. 다 좋다고. 이런 이유식만 안 먹을 수 있다면 좋겠어. 젠장." 어이. 참으라고. 그리고, 날씨도 그렇지 않은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어. 일단, 로만 영주의 성을 거치지 않고 가려면 앞에 있는 습지대를 통과해서 가야 하는데, 사실 여기 전력의 두명은 전직 용사가 아닌가? 당연히 겁을 상실했지. 뭐, 이건 딱히 내가 납치하는 게 아니라, 마족이 황녀의 꾀임에 넘어갔다는 거지만... 전쟁 나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후... "참, 그건 그렇고 율지스랑 살린, 케빈은 다 잘지내?" 세이 녀석은 마침 설거지를 하는 참이었다. 아주 주부가 다 되었군. 뭐, 이렇게 키운 나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니다만... 그래도. 그렇군. "예. 뭐, 율지스형은 요즘도 무슨 음모를 밝혀 내겠다고 항상 불타오르고 계시고요, 수도에는 그 괴질이 싹 사라졌어요. 대신 다른 병이 돌긴 하지만.... 병도 이상해요. 돌이 되는 병이라니. 이번에도 학원은 아무런 피해가 없더군요." 흠... 그게 내가 이해 못한 점이야. 키히가 저지르는 일인 건 확실한데, 왜 학원은 그냥 두는 거지? 거기엔 그녀가 미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딴 곳들도 많잖아? "괴질이라.. 신전에 가면 그거 부터 해결을 봐야겠군." 세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신기하냐? "왜 그렇게 쳐다보는 게냐?" "음.. 아뇨. 스승님은 의외로 이젠 세상 따윈 모른다고 하셨으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세계를 걱정하시는 군요?" 뭐야. 쓸데 없는 소리. 걱정이 아니라.. 그냥 좀.. 신경이 쓰일 뿐이라고. 녀석은 뭔가 쓸데 없는 오해를 하는 듯 했지만, 괜히 이야기 하면 머리 아프니까 내버려 두었다. 젠장. "습지는 싫은데." 그건 나도 동감이야. 메데이레나. 일단, 습지는 공기가 축축해서 숨 쉴 때마다 물 마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다고. 그리고 이곳에서 괴물이 얼마나 많다고. 뭐, 프라운이 다 처리하겠지만.... "스승님. 이곳만 지나면 스승님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나요?" "뭐, 그렇지."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푸드는 잘 있겠지? 뭐, 마족치고는 꽤 정치를 잘하는 녀석이란 말야. 신기하게도. 그나저나, 이곳은 왜 이리 음침해? 어둡고. 에잇. "응? 저건 뭐죠?" 작은 불 하나가 저 멀리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뭐, 워낙에 한가한 생각만 하는 인간들이니까. "사람... 들인데?" 그래. 프라운의 말따라, 정말 사람들이 맞았다. 그런데, 문제는 살벌하게 습지 한 가운데서 칼을 시퍼렇게 들고 있다는 거. 우릴, 설마 기다린 사람들인가? 세인은 아니고. "누구죠?" 메데이레나가 작게 내게 속삭였다. 그녀의 눈이 그 쪽으로 거의 고정되다 시피 하고 있었다. 뭐, 반한 건 아니지? 곤란하다고. "모르는 사람이야." 프라운이 앞으로 나서면서 우리에게 손짓했다. 어쩌라고? 나오라고, 말라고? 우린 그런 거 정하지도 않았다는 걸 명심하라고. "댁들은 뉘시길래 이런 곳에서 멈춰 계십니까? 여긴 아주 위험한 숲이거든요?" 어이. 이 숲에서 너보다 위험한 놈은 없다. 지상 최대의 생물이 바로 마족 아냐? 그리고 저 말투는 뭐냐? 그런 위험한 숲에 얘들만 우루루(어디까지나 겉보기에) 몰려다닌 게 좋아 보일리 없잖아! "후후. 기다리고 있었다. 살린. 그 옆이 케빈인가? 뭐, 아무래도 좋겠지. 하지만, 여기까지가 너희들의 인생이라면, 다음은 지옥이다! 가랏!" 우리 이름을 착각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다음은 더 황당하군. 왜냐? 하필 아는 사람들 이름이 튀어나오다니... "아닌데..." 라고 희미하게 프라운이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이내 묵살되었다. 하핫. 우린 억세게 재수도 없는 놈 들이야. "싸우는 거네." 세이야. 그렇게 능청 떨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젠장. 프라운이 다 알아서 하겠지만... 응? 응? 저 녀석, 아주 개패듯이 맞고 있잖아? 저 위험한 인간이 다 맞고... 별 일이네? "헉.. 헉..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달라고요!" 결국, 프라운이 절규를 할 즈음,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겨우 눈치챘다. 저 녀석을 지금 패고 있는 놈들 기사 세명은, 아주 강했다. 프라운 녀석은 가뜩이나, 신관복을 입고 있고, 그래서 어둠의 마법을 쓴다는 건 조금 안어울리니까, 그냥 몸을 열심히 움직이고 싸우고 있는데.... 저 녀석들, 대단한데? "저, 누구신지는 몰라도. 제 친구는 그만 패시는 게 어때요?"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여지껏 뒤에서 폼만 잡던 놈인데. 구렛나루를 기르고 있는 재수 없게 생긴 인간이었다. "하하핫. 자네 농담하나? 그리고, 여기 성전의 기사단이 잔뜩 몰려 왔으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요즘은 네명이 온 것도 잔뜩이냐? "에, 근데, 왜 그러세요? 우린 살린 일행이 아닌데요? 굳이 이야기 하자면..." 갑자기 메데이레나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유괴범이요~" 이런 식이 될 줄은... 너 나중에 개패듯이 때려주마. 뭐, 애를 팰 수는 없으니, 대신 프라운 녀석을 패주지. "프라운! 내가 흔적을 아주 말소해 줄테니까, 사정 보지 말고 싸워!" "프라운? 건방진 놈들, 감히 위대한 용사의 이름을 따라 쓰다니!" 하핫. 본인인데? "음... 그래? 좋았어. 이 자식들, 죽었다!" 저기,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 갑자기 프라운의 눈에서는 빔이 쏟아져 나왔다. 저게... 사람이냐? 역시나, 세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갑자기 나를 보았다. "나중에, 꼭 가르쳐 달래야지~" 어떤 면에선 너랑 메데이레나랑 닮은 데가 있구나. 쓸데 없는 일을 배우고 싶어하고 말이지. 하여간, 인생에 도움은 하나도 안되는 것이야... 프라운은 이제 한층 더 떠서 입에서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어이, 신관복을 입은 사제가 그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내가 맘대로 하라고 했지만. 녀석의 몸에서는 검은 오라가 마구 마구 발산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녀석들은 겁에 질리기 시작했고,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사상자 0명, 부상자 없음. "두목!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녀석들은 결국, 프라운의 그 엄청난 엽기 모습에 겁을 질려서 결국, 튀기 시작했다. 멀리 멀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놈! 인간치곤 이상한 기술들을 익혔잖아!" 하하하... 그게 인간이 아니라니까. 주위를 둘러 보니, 그들이 놓고간 물건 몇개가 보였다. 프라운이 입을 쓰윽 닦고 한 마디 했다. "먹어도 돼냐?" "....안된다." "쳇." 역시 마족은 마족. 이라기 보단, 밥 족 같다는 생각이 근래 들어선 더 드는 거 같지만... 하여간, 이상한 놈이라니까. 젠장. "아, 그러고보니, 저거봐. 무지 아름답지 않아? 석양이 지면서 숲이 빛을 습지에 투과하면서 생기는 무리 효과야." 세이는 작게 그런게 어딨냐고 중얼거렸다가 내게 개패듯이 맞았다. 후훗. 어찌되었던, 이들의 행적에 관해 우리는 의논을 시작했다. 일단, 수상한 점이 하나 둘도 아니고, 게다가 신전과 관련이 있다면 당연히 나랑도 만날 일이 있을 거 아냐? 그리고 왜 살린을 노리는 지도 알 수 없고. 살린이 설마하니, 숨겨논 왕의 자식이라든지... 그런 일이 있을리가 없잖아. "역시... 모르겠는데?"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애초에, 고민따위 하지 않는 편이 마음이 놓인다고. 어떻게 할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래? 뭐, 근처에는 마물도 없고. 설사, 있어도 내가 적당히 처리 할 테니까, 여기서 자자." 프라운 녀석, 아주 신났군. 메데이레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습지를 신기하다는 듯이 둘러 보고 있었고, 세이 녀석은 방학 숙제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율지스가 숙제로 내 준 거란다. 쯔... 불쌍한 놈. "그럼. 힘내고. 먹자." 결국, 그날은 겨우 1km도 가지 않아서 야영했다. 세상에... 이런 속도로 가다간 평생이 걸려도 영지에 다다르지 못할 꺼야. 젠장. 23-3. 살린 같은 녀석을 노리는 녀석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우리는 계속 느릿 느릿 여행을 계속했다. "음. 사부님. 여기는 말이죠, 굉장히 조용해요. 마족이나, 마물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 데다가, 심지어는 나쁜 괴물도 안 나오는게.. 묘하게 좋은 거 같아요." 그러냐? 그건 다 프라운 녀석이 옷에 피칠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결과지. 너야 몰랐겠지만. 뭐, 마족 정도라면 프라운을 보고 절대 간뎅이 부어서 달려오지는 않을 것이며, 하급 마족 정도야 녀석이 다 해결 할 수 있으니.. 하지만, 좋은 건 아니라고. 저기 피냄새 나는 녀석 옆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올지 모르겠다. "그래? 난 잘 모르겠구나." "우와, 세이 오빠. 그럼 우리 나중에 이리로 놀러 오자. 얼마나 멋있어? 습지를 항해하는 위대한 용사들!" 위대한 사고뭉치들이겠지. 나야 이제 신경쓰고 싶지도 않을 지경이라고. 녀석들 하고는. 정말 손 쓸 수가 없다니까. "그래? 그럼 그 여행에 나도 꼭 데려가 달라고." 농담이지? 프라운, 너 그렇게 상큼하게 웃으면서 말하다니.. 확실히 제 정신은 아닌 모양이구나. 허허허. 녀석 하고는. 역시 세월엔 장수하는 놈이 없다더니. 너도 역시 그런 모양이지? 뭐, 지금 우리 일행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존재가 너이니까.. 그래도 너무 심하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세이가 리더...가 아니라, 맏형. 프라운이 둘째. 내가 셋째. 메데이레나가 막내. 이렇게 보이겠군. 외모는 다 각자 극과 극을 달리지만. "참, 스승님. 그 녀석들, 설마하니 다시 다타나지는 않겠죠? 아까 그렇게 사라졌는데." 글쎄. 왜 살린을 노리는 지 모르겠지만,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뭐, 아무래도 상관 없어. "흠... 바보가 아닌 이상 다시 오겠지. 내 괴력을 보고도 온다면 멍청한 거 아냐?" 하핫. 생각 보다 멍청하면 어쩔려고 그래? 넌, 너무 사람들을 과대 해석하는 버릇이 있는데.. 사실 인간은 생각보다 무지 많이 어리석은 동물이라고. 알아? 하여간, 뭔 말을 못하지. "헤헤... 생각보다 많이 멍청한 놈들이군." 내게서 이런 소리가 나오자, 프라운은 정말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쌍한 놈. 인생이 저렇게 처절할 수가... 정확히 저들은 십분 전쯤, 우리 건너편에 나타났다. 사이에는 슾지를 두고 있는 걸 봐선, 아마도 이리로 오긴 좀 무서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살린, 케빈!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아앗, 조심해! 빠지잖아!" 한 사내가 목이 터져라 외치자, 메데이레나가 싸늘하게 웃어 주었다. "왠지, 바보틱하네요." 이봐... 너무 하잖아. 그건. 에, 그럼 대화로 사태를 해결해 볼까? "저흰 살린과 케빈이 아닌데요? 우린 왜 둘이나 에네브 옷을 입고 있을까요?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케빈은 에네브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여기 여자애는 뭘까요? 상관 없는 사람이에요. 아저씨들. 사람 잘 못 봤다구요. 지금 가면 모른척 해 줄 테니까, 어서 가요." 그들은 약간 멈칫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 이건 세이와도 약간 관계가 있는 내용이었다. 그들 바보 4인은 동시에 세이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녀석은 분명 살린과 친한 놈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세이의 답이 걸작이었다. "친해요? 그저 옆에서 떠드니까 상대하는 것 뿐인데. 일일히 저리가라 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 알고보니, 세이는 이런 성격이었던 것이다. 하하하. 내가 제자 하나는 잘 키웠다니까? 흐흐흐흑... 이런 놈이었다니. 사기다. 나 같이 위대한 놈에게서 어떻게 이런 놈이. "무섭군.. 그래? 그렇다면 좋다. 좋아. 여기서 빠져 나가는 데로 여기서 떠나주지. 자, 끌어 올려봐! 더 빠져 들잖아!" 저 녀석들, 늪에 빠졌군. 할 수 없군. 뭐, 이건 안쓸려고 했는데. "그럼, 이제 신전으로 가시는 건가요?" "응? 그렇지. 이봐, 너희들, 할 일 없으면 이것 좀 도와달라고!" 헤. 누가. 아까는 죽이려고 했잖아.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우린 살린과 친구들이라고. "할 수 없이. 공간이동!" 잠시 그들의 몸이 빛에 감싸지면서 조용히 사라져갔다. 후훗... 이렇게 신전으로 보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좌표는 오직 하나, 대신전 중앙 꺼 밖에는 몰라서 말이지. 지금쯤 대예배 시간일텐데. 뭐, 쉽게 갔다고 기뻐하라고 들. "자, 이제 우리는 다시 상쾌하게 떠나자." 그리고 정확히 삼일이나 지난 뒤에야, 숲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우린 점점 깨끗해 졌고, 상대적으로 프라운 녀석은 점점 피칠에 떡이 되었다. 불쌍한 놈. 그러거나, 말거나 여행을 떠나는 우리들도 우리들이지만. 뭐, 세이 녀석이 물었다. "스승님. 그런데, 왜 우리는 공간이동을 해서 가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가면 편하잖아요." 그야 그렇지. "설마, 넌 그냥 재미로 그런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정말은 그런 건 아냐. 녀석은 말이지, 사실 우리가 갈 곳의 좌표를 몰라." 그렇다. 내가 언제 그런 걸 다 조사해 두고 다닐 거 같냐? 기억을 잃은 상태인데. 에잇. "너, 날 수 있잖아?" "내가 못하는 게 어디있냐? 음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닌데 형씨. "그래? 그럼 희생 정신을 발동 시켜서 좀 우리 모두 싣고 가는 건 어때? 내가 가서 온탕에 쳐 넣어 줄테니." 지옥탕이라고 혹시 들어는 보셨나 모르겠군. 후후후. "응? 하하핫. 무리야. 무리. 너 정도면 몰라도, 애들 죽 데리고 내가 무슨 날으는 침대도 아니고. 관두라고." 그래? 나중에 둘 만 있을 때 보자. 흠씬 패주지. 제자 앞에서 망신 아닌 망신을 줬겠다. 두고봐! 내가 한을 품으면, 어느때라도 벼락을 내려 줄 수 있으니까. 흐흐흐. "저, 고만 좀 떠드시고, 제발 지도 좀 봐 주세요." 세이는 이제 울고 있었다. "맞아. 맞아.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해 줘야 하는 거라고요." 메데이레나. 여기서 제일 나이든 사람은 프라운이야. 그런데, 이런 마족을 존경하라고? 농담이지? 나 같으면, 절대 아니라고.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지도를 보면, 자, 봐. 얼마나 아름다워! 아아아하핫. 나 지도 볼 줄 몰라. "아, 그러고보니, 너. 지도 볼 줄 모르지? 그래서 항상 길을 잃고 헤매곤 했었지." 메데이레나와, 세이는 갑자기 의욕 게이지가 최고를 때렸다. "우와왓! 그게 사실이에요? 스승님이 그런 어벙한 행동을 다 하시고! 절대로, 절대로 믿을 수 없어요!" 그래. 나 어벙해. 그래서 니들, 보태 준 거 있냐? 어라, 아주 이젠 과거 이야기 편을 찍는 구나. 그래. 맘대로 해라. 젠장. 젠장. 다음 마을이 톰슨 마을인가? 뭐, 아주 작은 편이군. 뒤에는 큰 동굴이 하나 있고... 뭐, 이정도는 읽는데 뭘 못 읽냐하면, 정확히는 방위를 못 본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이런 결점 한가지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후후훗. 인생은 그런 거야.(이렇게 인생에 위안을 찾는 거라고.) "자, 톰슨 마을에 다 온거 같은데?" 톰슨 마을은 그냥 평범해 보였다. 멀리서 보기엔. 문제는 굴뚝마다 불이 하나도 올라오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이건 좀 확실히 수상하기는 하군. 이상해. 수상해. 궁금해. "아무래도 이상하지? 폐촌이 아닐까? 이 지도, 상당히 오래 된 거잖아." 프라운 녀석 시큰둥하게 말했다. 뭐, 너도 화는 나겠다. 계속 세이 녀석의 유동식, 이유식을 먹어 대고 있으니. 쯧. 이러다 영양 실조 걸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고 말하자, 세이는 이렇게 말했지. 이건 완전 유동식이라고. 하하하. "그래도 이게 낫다고. 밤에 내 옷깔고 덮고 자는 건 사실 기분이 더럽단 말야. 적어도 여긴 침대는 있을 꺼 아냐. 일단, 적당히 시체는 치우고 자면 되겠지. 백골도 있을 수도." 메데이레나가 나의 옷자락을 꼭 잡고 글썽 거리는 눈을 했다. "꼬..옥. 보고 싶다. 나, 그런 거 한 번도 못 봤거든. 우와. 신기해라." 하핫... 역시 나바스의 교육 방침에는 문제가 있는 거 같군. 세이 녀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마디 했다. "역시. 나도 그걸 보고 싶어야 하나 보다." 꼭... 그럴 필요는 없어! 하여간, 애들은 정말 통제 불능이라니까. 으...오, 혹시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존재했다든지 그런 건 아니지? "고만들 하고.. 음. 저거 무슨 말 같은데? 저렇게 화려한 장식을 잔뜩 단 건... 그래. 알겠다. 저거 예전에 그 뭐시기.. 아, 쉐이 프르다? 그런 이름의 녀석이 타고 있던 말 아냐? 왜 저런데 굴러다니지?" 마을 한 가운데 싸늘하게 바람만 불고 있는 데, 마을 우물 바로 옆에는 백마가 룰루 거리고 있다? 그것도 우리와 헤어진(정확히는 도망간)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쫓아 왔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 그리고 미리 여기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지. 이미 습지대에서 보통의 시간을 훨씬 뛰어넘어서 왔잖아? "스승님. 그 사람 이름이라면.. 혹시 세인 푸르체트경 아닙니까?" 세이 녀석, 근래에 못 보던 면이 많이 보이는 군. 신기해라. 하핫.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왜 저 놈 이름만 오래 걸리면서 외워야 하는 거람. 혹시 첫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러나? 뭐, 두번째 인상도 강렬했지. 그 놈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우 하하하 하고 나타나서 일단 닭살 쫘악 돋는 소리들을 할 께 뻔하니까. "일단, 내려가 봐요." 수상해라는 생각을 하면서 프라운의 얼굴을 보니, 아무런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족의 기운은 확실히 느껴지지 않고. 할 수 없군. "프라운. 너가 대타로 가서 말에게 말해봐. 왜 여기 있냐고." 프라운의 얼굴에는 내가 말이냐라는 메세지가 흘렀다. 하핫. 녀석 하고는. "그래요. 프라운 오빠는 굉장히 유능하잖아요?" 이봐, 이런 때만 유능 운운하냐? "뭐, 내가 꼭 가야 할 이유는 없잖아?" 역시 이 놈의 얼굴은 가장 세상에서 강하다는 금광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언제 네놈의 뇌를 해부하고 말리라. "너,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을 잃은 사이에 살짝 나를 마왕에 앉힐 생각을 했지? 그럼 안되지. 그리고, 동쪽 숲에서 딩가 딩가 놀던 기억 나냐?" 그는 잠시 얼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다시 돌아보고 씨익 웃었다. "우린, 사선을 같이 건넌 전우잖아? 같이 여행도 했잖아? 이러지 말라고. 하하핫." 그래? 그렇다고 네 놈을 봐 줄줄 알고? "그래. 같이 여행했지. 마왕 쓰러트리러. 나중에 너가 배반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아주 행복했을 꺼야. 안그래?" 씨익. "하하... 알았어. 갈께. 가면 되잖아." 녀석은 마을 입구에서 주위를 싸악 둘러보더니, 이내 굉장한 점프를 하기 시작했다. 어라라, 왠일이람? 저 놈. 의외로 잘 뛰는 데? 대단해. 그리고... 뭐랄까? 왜 뛰는 거지? 그냥 걸어가도 되잖아. 괜히 폼 잡으려고 저러는 건 아닐텐데 말이야. 이상한 놈. 녀석은 순간, 말 등 위에 멋지게 앉았다. 뭐, 멋있긴 했다. 그 다음에 날아온 동아줄 들과 귀여운 꼬마들을 보고 얼빵한 얼굴을 한 거 보면... "마족이다! 잡아라!" 하핫... 정말 대단한 꼬마군. 어떻게 저 놈이 마족인 걸 알았지? 그리고, 마족인데, 그 줄은 특수 줄이냐? 어떻게 그런 얇은 줄로 잡을 생각을 했냐? "이봐, 난 마족이 아냐! 너희들이 바로 이 주위에 함정을 팠구나! 난 신관 에네브 쿠릴츠 님이시다!" 신관이 보통은 자기 이름에 님자는 안 붙인다는 거, 혹시 알고는 있었니? 뭐,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지만 말야. 역시.. 같이 늙어가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걱정이다. 너도 나중에 고생꽤나 하겠어. "어... 정말? 그러고 보니까, 정말 신관 옷을 입고 있어!" "정말, 신기하다." 하긴, 이정도 신관을 본 적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갑자기 울면 어떡하냐! "으아아앙~!" 얘들 울음 소리는 거의 독약과 같다는 걸 확실히 실감하는 하루군. 자, 이제 자초지정을 물어 볼까나? 23-4. 아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세인 푸르체트경인가 뭔가는(다 외웠다!) 바로 여길 왔었다고 한다. 그것도 며칠 전에. 물론, 그의 머리가 엄청 뛰어나서 황녀가 이리로 올 것을 짐작한 건 절대로 아니고... 우리를 찾으러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고 여기 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본연의 목적을 잃고 여기 사람들을 구하러 그 동굴로 가서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정말... 다른 나라지만, 나바스의 미래가 걱정된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나타난 괴물이 사람들을 납치해 간다. 이거야?" "응." 역시, 얘들 상대는 세이가 짱이지. "형은, 신관이야?" 한 꼬마 하나가 똥그란 눈을 올려다 보면서 프라운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당연히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응. 상급 신관이지. 하핫. 근데, 뭘 도와줄까?" 녀석이 웃고 있다. 게다가 애들까지 안아서.. 오옷. 세기말이다... "마마를 구해줘. 부탁이야. 저 동굴에는 마족이 사는 데, 그를 없애려면 신관이 있어야 하는 거랬어." 에? 약간 어감이 이상한데. 왜 신관을 직접 지명했지? 굳이 신관이 아니래도 용사쯤 되면 상관없잖아? "흠... 그래? 누가?" 방긋 거리는 프라운을 보면서 메데이레나는 잠시 한숨을 쉬다 못해서 이젠 구석에서 키득대고 있었다. 나도 껴줘라. "응. 잡혀간 우리 아빠가. 그 전에 그랬는걸? 신관이 있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끌려가지 않아도 될텐데 하고." 헤. 잘못된 상식이군. 프라운은 잠시 생각에 잠긴듯 했고, 세이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용은, 언제나 어디서나 위험할 때 안전할 때, 유동식 만들기. 갖가지 재료로도 사용 가능 합니다. "대체... 녀석. 그럼 할 수 없지. 이 위에 동굴이라면... 좋아. 프라운. 너도 가자." 프라운 녀석이 나를 순간 팍하고 표정이 바뀌어서 바라 보았다. 전환은 무척이나 빠르군. "싫어. 내가 갈 이유는 없어. 그리고 여기서 애들하고 노는 게 훨씬 재미있단 말야. 너 모르는 구나? 애들은 말이지. 금방 자기한테 무섭게 한 사람을 잊는다고. 헤헤헤." 누가 마족 아니랄 까봐. 그리고, 너, 나한테 반항할 위치가 아니실터인데. 후후. "난, 네가 지난 마왕 정벌 때 한 일을 알고 있다." 갑자기 내 주위에서 검은 오라가 무럭 무럭 나오기 시작했다. 메데이레나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했다. "죽이지는 말고, 가루로 한 세번 만들어서 버무려서 먹어 보는 건 어떨까요?" 죽이는 거 보다 더 심하잖아. 형씨. 하지만, 적절한 대사였어. 저 녀석 부들 부들 떨기 시작하잖아. 하핫. 불쌍한 놈. "소년은 여행을 떠나는 법이지. 라플. 어서 가자!" 이 녀석, 마족 주제에 겁은 많아 가지고. 꼭 이상한데서 묘하게 겁 먹는 단 말야. 신기한 놈. 뭐, 나야 좋지. "그래. 그럼 혹시 괴물에 대해서 아는 건 있니?" 꼬마 하나에게 사전 정보 수집을 위해서 질문을 던지자, 녀석은 이내 조잘거리면서 떠들기 시작했다. "음... 맞다. 그래요. 녀석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거대한 이빨을 가진 괴물을 조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마물을 조정하는 건 오직 마족 뿐이잖아요? 하지만, 마족을 본 일은 없어요." 간략해서 좋긴 한데 그래가지곤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다고. 이봐, 프라운은 혹시... 음. 역시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이렇게 되면 강행 돌파! "흠.. 그럼 나와 프라운이 가서 조사해보고, 메데이레나와 세이는 여기 애들을 지켜. 혹시 괴물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일단, 세인 푸르체트경을 찾게 되면 그들과 합세해서 적당히 처리하지. 그리고... 음.. 애들을 잘 먹이라고. 유동식도 좋지만.. 뭐. 나쁘지 않겠지." 일단, 팀의 리더다운 면을 약간 내비치면서 나와 녀석은 동굴로 향하기로 결정되었다. 녀석에게 한 마디 해 주었다. "자, 나정도라면 데리고 날 수 있지?" "설마, 아직까지 그걸 하고 싶었다는?" "당연하지. 비행마법은 귀찮단 말야." 마법을 유지하는데 정신력이 얼마나 든다고. 뭐, 너같이 단순한 마족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이지. 뭐, 이렇게 녀석이 순순히 등을 벌려 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이내 그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본 마을은 그야말로 작았다. "저.. 동굴인가? 어이, 바로 내려간다." 바로 산 위에 있는 거였는데... 아주 가깝기도 하군. 아무도 서 있지 않고. 흠. 그냥 단순한 동굴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말야. "단순한 동굴이겠지?" "아니야. 저 앞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터가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어. 오, 넌 안들리냐 라플? 저건 말이지.. 아, 그래. 그들이 속삭여. 배고프다고. 우씨. 우리 왜 밥도 안 먹도 나온 거냐?" 나한테 그런 쓰잘데기 없는 말을 묻다니.. 뭐, 지금 내 조그만 가방에는 사실 세이가 준 먹을 게 약간 들어있지만, 네 놈은 틀림없이 피크닉 기분을 낼려고 할테니까.. 절대 혼자 먹어야지. 마족은 생명력이 강하다면서? "잔말말고 내려. 주위에 아무도 없지? 헤... 아무도 없긴 없군. 사람은. 하지만, 괴물 서넛이 돌아 다니고.... 정찰 같은 건가? 분명히, 시가지에 나타났던 그 이상한 놈들이 틀림 없어. 그럼.. 혹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싹 지우고 다시 시작했다. 일단, 괴물을 조정하는 놈을 봐야 하는 게 급선무야. 그게 우선이라고. "자, 그럼 강행 돌파 해 볼까나?" 녀석이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분히 나를 놀려 보려는 의도인 거 같은데.. 하여간, 정신 연령이 어리다니까. 바보놈. "이봐. 저기.. 어라라? 사람이 있잖아? 싸우고 있는데? 가보자!" 기사 몇명이 한 꺼번에 괴물 하나와 싸우고 있었다. 분명히 저번 여행 출발전에 만난적 있는 녀석이었다. 세인 푸르체트경. 호. 근데.. 떠난지 이틀 됬다는 인간이 여태 여기서 뭐하냐? 왠지 나바스의 앞날이 더더욱 걱정되는 군. "세인 푸르체트경! 으으엑!" 풀 네임 다 부르기 전에 죽을 뻔한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귀족의 이름은 즉시 짧게 지어야 한다고. 이름 부르다가 볼 일 못봐. "아니, 당신은 대공?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뭔 일이긴. 잘 놀고 있지. "하하하... 보면 모르냐." "아, 싸우고 계시군요." 왠지 메데이레나, 다시 결혼을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저런 얼빠진 놈하고 무슨 결혼이냐. 왠지 심각해. 하긴 귀족의 전형답긴 하다만... "라플. 딴 생각 할 때가 아냐. 저 녀석, 원래는 사람이고, 지금도 살아 있어!" 프라운이 음산하게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세인 일행은 당연히 경악했다. 왜냐? 그럼 자신들은 인간 하나 어찌지 못한 셈이니까. 그럼 정화가 먹힐 지 모르겠군. "정화가 먹힐라나?" "글쎄. 해 보기나 해." 할 수 없군. 목소리 조절 하고. 하나, 둘, 셋! [정화의 빛] 빛이 내 몸에서 그 괴물의 몸으로 전이 되면서 그 녀석의 몸이 산산 조각 나기 시작했다. 역시, 그 때와 반응이 틀려. 진화하게 만든 건가? "놈들도 조금은 똑똑해 졌나본데? 흠.. 할 수 없잖아? 그럼 내가 먹어도 돼?" 이런 썩을. 다른 사람이 있어도 거절이야! "절대로 안된다." 프라운은 입을 비죽이고, 산산 조각난 괴물의 몸에서 이상한 벌레 하나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 벌레가 내게 달려 들었다. 으엑! "라플!" "젠장! 정화!" 다시 빛이 화려하게 나를 감싸고, 작은 벌레는 이내 소멸해 버렸다. 이게 뭐야? 그리고... 산산 조각난 그 속에는 왠 작은 여자가 있었다. 다가가서 맥을 짚어보니, 살아 있기는 하다. "다행이다. 세인경. 아무래도 여긴 너무 위험하니 이 여인과 함께 이곳을 지키시겠습니까? 물론 마법진을 쳐 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생글거리는 나를 향해 녀석이 당연히 반대했다. 어린 것들은 제 분수도 모르고 까분다니까. "안됩니다! 당신은 트라이너 최고의 공작이 아니십니까? 이런 데서 무슨 일이라도 있다면 아마 전쟁입니다!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재고는 창고에 많아. "나 먼저 간다?" 프라운이 어느새 싱글거리고 있었다. 젠장. 그래. 벼룩도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지. "좋아요. 이 여인과 기사 둘을 여기 남겨 두십시오. 마법진으로 보호할 수 있으니. 뭐, 아예 혼자 둬도 되겠어요. 얼마 동안은 깨어나지 않을 거 같으니..." 세인은 그제서야 기뻐했다. 뭐, 내 제자 이름이랑 비슷하니까 봐준다. 에잇. "그래, 어때? 프라운. 너는 뭐가 느껴지냐? 난 그저 약한 마력 정도 밖에는..." 프라운이 나에게 귓속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너, 마왕은 마왕이구나. 나는 아주 압사할 지경이야. 그런데 하나에서 나오는 힘은 아냐. 틀림 없어." 흠.. 그럼 저런 괴물이 아주 많다는 이야기겠지? 사람을 납치해가는 이유가 이것인가? 시체보다 효율이 좋다든지... 알 수 없군. 대체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저기.. 저기.. 메데이레나 황녀님은 무사하신가?" 이제 생각난 세인 푸르체트경. 정말, 멍청한 거 아니냐. 너 혹시 돌? "예. 무사하십니다. 지금 마을에서 묶고 계시죠. 걱정하지 마시죠. 그보다, 여기가 아주 수상하니, 빨리 놈들을 처리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하긴 그렇지. 뭐, 서둘러서 나쁠 건 없으니까. 프라운 녀석의 이 표리부동한 성격은 정말이지,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니까. 예전에 이런 놈을 믿고 싸운 거, 정말 후회된다니까? "아, 라플. 새야 새." "응." "라플. 저기봐. 꽃이야. 꽃." "그래서?" "...그렇다고." 이런 이상한 녀석을 봤나! 아까부터 계속 실 없는 소리 좀 안한다 했더니, 왜 또 발작이야! 정말 죽고 싶나!! "넌, 말이지. 저게 새로 보이냐? 박쥐가 언제부터 조류가 됬냐? 그리고, 버섯이 꽃이 어떻게 되지? 어디,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소리가 없냐!" 이건 또 듣다 듣다 이상한 소리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세인 녀석은 그냥 묵묵히 앞 길을 살펴보고 있었고, 뒤의 기사 세명은 그냥 묵묵히 따라올 뿐이었다. 짜식들, 주인 잘 못 만나서 니들도 고생이 심각하구나. "...미안해. 안 미워 할 꺼지?" 지금 나한테 시방 애교를 부린 거냐? 젠장. 젠장! 이런 썩을 녀석을 냅다 패줄수도 없고. 23-5. 동굴은 계속 계속 깊어지기만 했고, 중간에 별 괴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인간형 괴물 7마리 정도랑 피 터지게 싸운 일 정도?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뭐, 나름대로. "오오... 바로 그거야." 갑자기 프라운,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기발한 생각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데. "뭐가?" "드디어, 아이들 데리고 효과적인 대청소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어!" 참아줘. 그리고 녀석은 계속 떠들기 시작했다. 프라운, 너 마족은 맞은 거냐? 어떻게 갑자기 애들 데리고 대청소 하는 방법이나 생각하고 그래? "쉿.. 드디어, 또 몇 마리 나오나 본데?" 세인이 날카롭게 말함과 동시에 위에서 뭔가 싸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리고 위의 천장에서 깜찍하지도 않고, 귀엽지도 않은 녀석들이 떨어져 내렸다. 검은 놈, 아주 검은 놈, 칠흑같이 검은 놈이 떨어져 내렸다. 젠장, 다 시커멓게 되어 있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군. "야, 프라운 적당히 때려 눕히라고! 안 보여서 정화를 쓸 수 있냐? 그러니까, 아래로 눕히고 내가 쓰고. 어때?" 라고 말하는 사이, 세인이 데려온 병사 하나가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젠장. 하마터면 장례식 갈 뻔 했군. 프라운은 재빨리 그 어두운 곳에서 살짝 옆으로 몸을 비틀어서 검은놈의 공격을 피하고, 이내 손으로 얼굴을 바닥에 박게 했다. "자, 라플!" "응!" 곧 손에서 빛이 환하게 빛나고 검은 조각이 부서져갔다. 그리고 괴물이 산산 조각 나면서 예의 그 작은 벌레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벌레는 정확히 프라운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프라운!" 녀석은 정확히 인상을 썼을 뿐, 변형을 일으킨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녀석은 단지 툴툴대면서 투정하기 시작했다. "맛없어. 우... 젠장. 하지만, 먹을 게 없으니, 이거라도 먹어야 하나? 아, 라플은 이게 뭔지 모르지? 예전부터 마족이 인간을 조정할 때 쓰는 식충의 종류야. 뭐, 마족들은 아무래도 잡기 힘드니까, 이런 식으로 한 게 아닐까 생각 되는데?" 헤.. 갑자기 마족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싹 싹 지웠다. 왜 마족은 그 엄청난 힘을 가지고도 인간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이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들을 필요도 없다. 내가 그 이유를 잘 알지. 그건, 바로 마왕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즉, 인간계를 마족이 점령한다 쳐도, 마왕이 필요 없으면 말짱 꽝이라는 거지. 대대로 마왕의 성격이 게으름 그 자체 인 걸 보면... 이 점이 이해가 가는 바다. 뭐, 나도 다를 바는 없지. "그래? 그래도 마족의 피는 섞였을 꺼 아냐? 역시 동쪽 숲의 마족들을 잡아다가 피를 뽑은 게 틀림 없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세인은 이내 안색을 굳히고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갈 길도 멀고, 그런데 여기서 밥이나 먹고 가면 안될까요?" 나바스의 미래. 정말 진심으로 걱정이야. 농담이 아니라고. "그러지... 프라운. 너도 앉아. 여기 도시락." 프라운은 개가 되었다.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밥을 정말 맛있게 먹는 게 아닌가? 하하하.. 정말 짜증이 뻗쳐. "냠.. 냠.." 잘도 먹는 군. 햐... 세이 일행은 아무 일도 없겠지? 그리고 이 동굴 대체 얼마나 가야 하는 거야? 응? "야, 이게 뭐야? 꼭 무슨 문 같은데." 내 바로 뒤로 장식이 좀 있는 돌로 된 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역시, 등잔불 아래가 어두운 법이지. 여하튼, 이걸 열면 적이 있는 거겠지? 보통의 패턴으로 보면, 우린 적 문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거군. 하핫. "우... 밥 다먹고 열어라 라플. 어차피 그 사이에 열리지도 않을 꺼 아냐." 그래. 어차피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럼... 먹고 하자." 왠지 걱정되는 일행이었지만, 기사들은 왠지 심려하면서 쭈볏거리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음. 저렇게 먹으면 나중에 체할 수도 있는데 말야. 긴장을 풀어줄 방법이 없을까나? 내가 이렇게 착하고 기특한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줄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아주 무시무시한 긁히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는 왠 소년이 떡하니 서 있었다. "...." "...." 모두 잠시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주시했다. 소년은 왠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와 프라운은 얼굴에 묻은 빵가루를 털고 있었다. 세인은 다시 도시락을 쌓아 놓고 있었고, 기사 둘은 돗자리를 정리했다. 나머지 기사들은 주변의 쓰레기를 정리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직력이란 말인가? "저, 우리 청소 다 했는데요?" 생글거리면서 그 소년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보이는 얼굴을 하고 말하자, 그 소년은 약간 어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선 나를 유심히 바라 보았다. 뭐, 눈싸움이라면 내가 안 진다고. 그리고, 이 녀석도 머리가 은발이네? "너로군." 응? 나? 왠지 지금 날 보고 하는 이야기 같어. 어째. "에, 무슨 이야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사람들을 납치해 간 사람이 너야?" 그 소년은 이제 겨우 세이 또래 쯤 되었을까? 왠지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녀석은 서서히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훗. 그 쓰레기들 말인가?" 여기서 우리의 세인 푸르체트경이 분노했다. "넌, 사람들이 쓰레기로 보이나!" "하하하... 재미있군. 그들은 그래도 좋은 용도로 쓰이게 되었잖아? 그러니, 그들도 기뻐할 텐데? 여기서 계속 너희들이랑 놀아 주고 싶지만, 이번 실험도 성공으로 끝났고, 너흴 상대할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 뭐, 마을은 지금쯤 초토화되었겠지만.. 하하하! 왜, 놀랐나?" 프라운은 조용히 있었고, 세인 경은 드디어 분노하고 검을 빼어 들었다. "이 놈! 아무리 겉보기에 어려보여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 검과, 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네놈을 꼭 저 세상으로 보내주마! 나, 정의의 사신이 너를 지옥으로 보내주마!" 왠지.. 분노한 나머지 좀 돈 거 같은데. 그리고 저 소년은 어려. 보이기만 그런 게 아니라고. 일단, 풍겨 나오는 세월의 연륜이 없잖아? 유유 상종. 몰라? "하하하... 난, 너희들을 상대할 이유도, 그럴 시간도 없다. 할 수 있다면, 날 잡아 봐. 그럼 잘 있으라고. 아, 그리고. 너, 프라오니스 피스트레이카라고 했지?" 응? 나랑 아는 놈인가? 초면인데? "에, 그런데?" "네 놈... 다음엔 내가 너의 사신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잘 있어라. 후후후..." 그리고, 키히나, 고등 마법사의 전매 특허, 이른바 삭 사라지기 전술을 사용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럼... 혹시 마을로 놈들을 푼 건가? 젠장, 한 두마리도 힘든데... "으..응. 친구들, 안녕~" 잠시 프라운은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야, 뒷북 치지 말고, 앞에 방에 있는 놈들 정화나 해." 젠장. 이거 해야 마을에 갈 수 있겠지? 죽었군. 갈 때 사람들 어떻게 하나. 휴. 이번엔 괴물들이 잔뜩 우글 우글 모여 있어서 아주 쉬었다. 한 꺼번에 정화해 버리고, 덕에 녹초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세이 녀석이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절대로 가지 않을 수없었다. 그래서 프라운 녀석을 나의 전용 말로 삼고 우리는 세인 일행에게 뒤를 맡기고 재빨리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에서 본 마을에는 불이 곳곳에 타오르고 있었고, 군데 군데 괴물도 있었다. "젠장, 늦은 건가?" "아직이야. 저 쪽에 녀석들이 보이잖아?" 프라운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그래도 꽤 큼지막한 집 바로 앞에서 세이 녀석이 불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덕에 괴물은 더 이상 접근 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 "내려가자!" "좋아." 즉시 나와 프라운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즉시 손에서 정화의 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사방이 하얀색 빛에 물들고, 아까까지 날뛰던 괴물들 모두가 아래 쓰러졌다. 개중에는 시체가 된 사람도 있었는데, 이건 생기를 빨어 먹혀서라고, 부탁하지도 않은 설명을 프라운이 해 주었다. "세이!" "스승님!" 녀석의 손에서는 빨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얼굴은 불에 그을려서 검게 타 있었다. 이건... "너, 불화살 쏠 때는 손과 얼굴 사이를 많이 띄워야 한다고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너 바보냐! 왜 것도 하나도 못해!" "엥...스승님은 나만 미워해." 하하하.... 패주고 싶다. 정신차려 이놈아! 창문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우르르 뛰쳐 나왔다. 아무래도 여기서 몰려 있었던 모양이군. "잘 되서 다행이다. 근데, 어떻게 다 여기 있었던 거야?" "예. 아까까지 여기서 유동식 만드는 법 강의 하고 있었거든요." 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군. 어느새,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찾기 시작했고, 마을은 울음 바다가 되었다. 이제 하나의 사건 종결이군. 쯧.. 그리고, 메데이레나... 넌 안됬지만. "메데이레나, 우린 어서 출발하자. 저기 세인이 오고 있어!" "에엑! 어서 가요! 라플!" 왜... 왜.. 이 애한테서 이젠 벗어나고 싶다고... 왜 해결 한 건 난데 이렇게 도망치듯이 달려야 하는 거냐. 엥? 이젠 싫어! "잠깐... 여기 사람들도 좀 도와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녀석들에게 도망치는 건 쉬운 일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좀 더 있다 가자! 나도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쓰러질 거 같다고!" 프라운은 나의 이마에 손을 잠시 짚더니 한 마디 했다. "세이야. 늙으신 스승을 업어라." 결국, 난 세이 등에 업혀서 가게 되었다. 메데이레나는 이제 마왕 제전을 볼 수 있다고 기뻐했고, 초대장 문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게 취미래... "스승님. 괜찮아요?" "그래. 너.. 오늘 말이야." "네?" 세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무척 안심이 된다. 여기 업혀서 가는 것도 그렇고 말이지. 헤헤... 좋다. 역시 늙을 말년에는 이런 재미로 사는 게 아닌가? "잘했어. 믿음직스러운 나의 제자야." 그리고 나는 곧바로 기절아닌 기절을 했다. 역시, 하룻 동안에 너무 많은 정화를 했다. 게다가, 순수 마법만이 아니라, 어둠의 마법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몸에 무리가 간 거지. 프라운 녀석, 그래도 뭐라고 계속 재잘 거리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 귀엔 들려 오지 않았다. "스승님!" 화들짝 놀래서 죽을 수도 있다. 눈을 뜨자, 녀석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 보고 있었다. 녀석이 돌았나? 왜들 저렇게.. 어라, 메데이레나도 있네? 그리고 날은 왜이리 컴컴해? 벌써 밤 됬나? "소리지르지마. 머리울리니까. 근데, 무슨 일이냐?" "기절해서 삼일 만에 깨어나셨다고요!" 하핫. 그랬나? "그래서 제가 이리로 공간 이동 했죠. 제 실수 입니다. 진작에 이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프라운 녀석. 할 줄 알면서 안했다는 말이렷다? 넌 정말, 너무해. "그래. 여긴 어디냐?" "아, 이푸드씨의 성이래요. 스승님 꼬봉이라면서요?" 어디서 그런 나쁜 말을 배운 거냐...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그날 밤 중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계속 업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프라운이 결국 좌표치를 계산하고 나를 이동시키고, 세이는 메데이레나를 이동시켰다고 한다. 뭐야. 그럼 진작에 이랬다면 아무 문제 없잖아? 뭐, 그래서 우린 이렇게 다시 무사히 이푸드의 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마왕 제전이 열리게 되었다. 24-1. 마왕 제전 무릇, 검은 마왕이 재래함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를 마왕 제전이라 한다. 이 행사는 극비리에 치뤄지며, 마족 중에서도 고위급 마족 몇만 참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과거 문헌을 살펴 보면 이 제전에서 살해된 인간이나, 유사인종의 수가 몇천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왕의 재래라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놓고 보면, 그다지 많은 수의 사람이 살해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마족은 누가 마왕인지 알기 어렵다고 전해진다. -마왕 제전에 관한 논문- "으아아아! 이게 다 뭐야!" 바닥을 긁는 건 그리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하다. 문제는 내 앞에 있는 저 수많은 옷과 장신구는 다 무엇인가? 이에 나는 심각한 상상을 하기에 이르른다. 설마, 내가 다 입어야 하는 것인가? "뭐기는? 옷이잖아? 이 중에서 맘에 드는 걸 고르라고." 프라운은 햇볕 잘드는 창가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속을 긁어주면서. "우와. 저도 입어 봐도 되요? 이런 귀한 옷을 다 어디서 구했어요?" 세이야.. 그런 건 하나도 안 부러워도 된다고! "아, 그건 동쪽 숲의 주인에게서 온 특별 선물이야. 뭐,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하는데... 내가 볼땐, 너가 그래도 오래된 친구 중에 하나잖아. 그러니 이런 걸 준 거겠지." 하하하... 아무 의미도 필요 없다고. "설마, 이걸 그 분 혼자 다 보내신건가요?" 메데이레나는 눈이 똥그래져서 옷들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사실 내가 열 받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이거야. 왜 이렇게 치렁 치렁 하고 여자 옷들 같은 거만 쫘악 늘어 놓은 거야! 용서가 안된다고! "응? 아니지. 뭐, 개중의 보석 중에는 나랑 좀 연락이 되었던 녀석들이 보낸 것도 섞여 있어. 아직 하브라이드 녀석은 보내지 않았는데... 녀석이 마족 중에선 꽤나 부자에 속하니까, 아마 기대하셔도 될 꺼에요." 됐어. 필요 없다고! 왜 가만히 있는 날 괴롭히는 거냐고. 으이잉. "아, 이거 나 가져도 되는 거야? 너무 이쁘다~" 약간 소라색 빛 나는 머리끈을 메데이레나가 들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 가져도 된다고. "그래. 가져. 가져. 에휴휴... 꼭 그걸 해야 하는 거냐? 안 해도 상관 없잖아?" 프라운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은, 전통이니까요." 어딜가나 그 전통이 제일 문제야. 맞아. 맞아. 내 대에서 타파애야 한다고! "우와... 멋있겠다. 스승님. 꼭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해도... 이봐. 원래 이 행사가 어떤 건지 알기나 해? 보통 사람 몇 천이 죽어나가는 그런 대단한 행사라고! 그런 걸 왜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고위급 마족 몇몇이라고 해도 그 수만 백명이 더 넘는 데다가 조금 낌새를 차린 마족들은 다 모려 온다고! 인간하고는 조금 틀려서 마족이 잘 보여야 하는 상대는 오직 하나, 마왕 뿐이거든. 평소엔 볼 수도 없지만, 이 제전 때만은 꽤나 많이 볼 확률이 놓아. 알아! "맞아. 나도 그래. 아, 라플. 그럼 음식은 누가해?" 잠시 프라운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다. 음식. 원래라면, 내가 마족이라면 사람을 잡아서 먹었겠지만, 난 마족도 아니고, 지극히 인간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먹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날 굶길 수도없는 노릇. "잠시 다녀올 데가 생각 났습니다. 그럼."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편리하군. 프라운아, 이제야 너는 그 중대한 사실을 깨닭은 거냐? "스승님. 그거, 무슨 축제인지 전 잘 모르지만... 이벤트도 있죠?" 있지. 사람을 우리에 가두고 하급 마물로 하여금 죽게 하는 거. "음... 있긴 있지. 근데 왜? 이번엔 별로 할 생각이 없어." 세이의 눈이 갑자기 확대되었다. "절대! 해야 해요! 그래, 내가 준비할 께요!" 그리고 사라졌다. 메데이레나 역시, 손에는 상아빛 리본을 들고 쭐래쭐래 사라져갔다. 결국, 이 넓디 넓은 옷의 홍수에 나는 혼자 버려지게 된 것이지. 이게 문제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족들이 이곳에 왔을 때, 어떻게 그 사실을 무마시키냐 인데... 지금이야 평화 공존론으로 다들 왠만해서는 싸우진 않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동안 대립한 만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 아냐? "헤... 응? 거기, 들어와. 세이야?" 문이 열리고, 하브라이드가 들어왔다. 녀석은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좀 의식한 모양인지, 옷을 입은 인간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손에는 가득 가득 상자가 들려 있었다. 뒤에 몇몇 하급 마족이 눈에 띄었는데, 그들 역시 손에는 가득한 상자가 들려 있다. "아, 라플. 이거 선물입니다. 마왕 제전 때 쓰시라고요." 방긋 거리는 녀석을 흠씬 패주고 싶은 충동은 좀 자제시키고 녀석이 가져온 선물을 풀어보기로 했다. 하나 하나 상자를 풀자, 먼저 나온 것들은 역시 여자 옷이 다분해 보이는 옷들.. 이런 건 키히도 안 입는다고. 가만, 사이즈도 안 맞잖아! "저, 하브라이드. 잘 못 가져온 거 아냐? 이거 사이즈도 내 사이즈가 아닌데?" "예? 아, 이건 메데이레나님 사이즈입니다. 마왕비가 되실 분이라면서요?" 꽤액! 절대 아냐! 그런 무서운 오해를 남기게 되다니 싫어! ".... 하브라이드. 때론, 헛소문에 죽은 사람도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하브라이드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다른 상자에는 보석이며, 장시구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돈이 많다는 건 사실이군. 이걸 다 내가 뭐 하겠어? 밥을 하리, 죽을 끓이리. "자, 자. 다 좋은데, 이건 대체 뭐하는 거야? 마법 기운이 느껴지는 걸 봐선 마법 도구 같은데? 비싼 거 아냐?" 내가 들어 올린 것은 금광석으로 된 칼이었다. 일단, 일반 기술로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굉장히 강한 것이기도 한데.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다니? "하하하... 이건 급할 때 팔아 먹으면 그만이죠. 단, 검으로의 효용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장식용." 이런 쓰잘데기 없는.. 가만, 그럼 마법은? "마법은 뭐야? 걸려 있잖아?" "아, 그거요? 그 검을 휘두르면 반짝 반짝 꽃가루가 날립니다." 하하... 재빨리 팔아서 성으로 보내야지 안되겠어. 하브라이드의 황당한 선물 이 후로도 계속 마족들의 선물이 당도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하급, 중급 마족들은 아예 이런 제전에서 왕에게 보낼 선물을 하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다고 하니... 뭐, 철저한 계급사회이기도 하다. 일단, 선물을 보내는 측이 상급 마족 쯤 되고 보니, 선물도 굉장한 것들이 오고 나는 다 싫어하는... 심지어 개중에는 독도 있었다. 젠장. "메데이레나, 여기 있었구나." 성의 위쪽,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그녀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심심해서 걸어나온 거였는데, 의외로 만나게 되는 군. 그녀는 두 발을 얌전히 모으고, 왠지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게 왠 고민? 안 어울리는 데. "아, 라플이구나..." 왠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여긴 좀 쌀쌀하니까, 안으로 들어가. 감기 거리면 어쩔려고 그래?" 그녀는 왠지 우수에 젖은 듯... 한데, 말야. 설마, 옷을 안 줘서 그랬다든지 그런 거라면, 내가 좀 곤란하다고. "응...라플. 나 말이지. 돌아가기 싫어." 엥? 내가 알기론 나바스의 황족들은 사이가 무지 좋다고 하던데?? "왜...? 누가 널 구박하니?" "아니. 모두 잘 대해주지. 그치만.... 저번에 말야. 우리 성에 괴한이 들었었어. 날.. 죽이려고 했어. 그런데.. 그 멍청한 바보 같은 오빠가.. 말이지... 거의 죽을 뻔 했단 말야. 나 같은 거 때문에." 에... 지금 자랑하냐? 누가 자기 대신 죽을 뻔 했다고 자랑하다니. 쯔. "에... 그래도 돌아가. 그렇게 너를 생각해 주는 오빠가 걱정하지 않겠어?" 그녀는이제 울고 있었다. "그래... 그렇지. 나도 그럴려고 했어. 근데! 그 머저리 푸르체트경은 왜 꼭 필요할 땐 없는거야!" 하하... 많이 쌓였나보군. 뭐, 내가 볼 땐, 강직한 기사 그 이상은 아닌 거 같다만. "에휴휴...뭐, 선택은 너가 하는 거잖아. 그 사람이 싫으면 안한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리고... 너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좋지. 뭐, 넌 아직 어리기도..." 어리고 선택할 시간은 아직 구만리라,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하려는 데 갑자기 그녀가 나를 꼬옥 안는게 아닌가! 야, 키히가 보면 난 반 죽음이야! "응. 그래. 라플 말이 맞아. 그럼. 그렇고 말고. 그러니까....음... 그 사람도 날 좋아하겠지?" 그거야... 내가 어떻게 아냐? 이 나이 먹어서 내 나이에서 백살을 빼도 모자라는 애한테 이런 인생상담이나 하고 말야. 내 신세도 참 딱해. "그래. 어느 누가 널 거절하겠어? 자, 이제 그만 울고 내려가자. 세이가 요리는 기가막히게 잘하거든." 유동식 류로만. 메데이레나는 기분 나쁠 정도로 환하게 웃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 트라이너의 공작, 내 손을 잡아 일으키라." 하핫. "예. 황공하옵니다. 황녀마마 전하." 구색을 맞춰주면서, 난 정말 다정하고 훌륭한 놈이야. 아, 키히는 왜 나의 이런 좋은 점을 모르는 걸까? 뭐, 알고 자시고 날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뭐. "아, 스승님! 빨리 오세요! 제가 정말 이번 저녁은 특별한 걸로 만들었어요!" 오, 기대되는 군. "뭔데?" "연어로 만든 죽!" 나야 기뻐서 팔짝 뛰고 잘 퍼먹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해다. 일단, 프라운(넌 언제 돌아온 거냐?)은 또 죽이냐면서 투덜댔고, 이푸드는 비싼 재료 다 망가진다고 울쌍이었으며, 하브라이드는 그저 묵묵히 아주 인상 긁으면서 먹었다. 메데이레나는 맛있다고 먹었지만. "그럼, 행사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죠. 아마, 라플님도 어느정도는 알고 계시겠지만, 사실 이 행사라는 건 대단히 많은 마족과 노력이 투입되는 겁니다." 그런가...? 뭐, 이푸드는 설명을 시작했고, 프라운은 제대로 된 씹을 수 있는 걸 먹고 싶다면서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하브라이드도 은근슬쩍 빠져 나간 걸 보면.. .같이 가서 먹나 보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형식적인 행사인데도?" "예. 그렇지만, 이건 역대 단 2번 정도 밖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2000년 사이에 한 번 정도 하면 많이 한 거니까요. 저번에 제전이 있던게 그러니까, 제가 태어나기 전 2400년 전의 일입니다." 의외로 이푸드는 할머니었다. 세이는 그저 설거지 하러 갔고, 메데이레나는 자신의 옷인 하브라이드가 가져온 옷들을 입으러 사라졌다. 결국, 이런 무시무시한 여자와 함께 나는 이런 어두운 이야기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으. "음... 그럼 대체 무슨 행사를 한다는 거야? 힘 같은 거야, 다 예전에 전해진 거고. 그럼 더 이상 뭐 할 것도 없는 거 아냐?"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려고 저러는 거야! "물론, 그렇습니다. 이 제전은 마왕을 위한 행사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마족을 위해서지요." 으잉? 그러면서 고위마족 밖에는 들어오지 못한다며? "모르겠는데? 난 수수께끼엔 소질이 없다고." "예. 설명해 드리죠. 프라운에게 말을 들어보니, 꽤나 많은 마물을 죽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들이 덤벼서랬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뭐, 하지만 덤비는 걸 어떡하라고." "예. 바로 그겁니다. 고위 마족의 경우에도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마왕에게 덤비면 어차피 배타적 성격의 마왕이 살려 둘턱이 없습니다. 결국, 그들의 목숨을 위해서 마왕을 알현하게 한다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지요." 이봐, 그럼 불쌍한 하급 마족들은 어쩌라고? "에.. 그럼 고위 마족 만을 위한 행사가 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각자 많은 마족을 이끌고 있습니다. 마왕은 오직 단신으로 행동하지만, 다른 마족들은 그렇지 않죠. 그래서 그들이 보면 다른 자신의 부하에게 입력을 시킬 수 있고, 마물들도 덤비지 않게 됩니다." 모르겠어.... 마족의 세계는 정말 깊고도 심오해. 공부가 필요하네. 24-2. "헤... 그런거였군. 좋아. 좋아. 그럼 행사 절차라고 해봐야 별 건 없겠군. 나보고 잘 새겨두고 돌아가면 그만, 아냐?" 그녀는 역시 기분나쁜 미소를 흘렸다. "그렇긴 합니다만, 과거의 문헌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몇개의 행사도 겸했죠. 듣자하니, 이번엔 그런 걸 하지 않을 계획이지만.. 하긴 저도 그건 좀 곤란합니다. 일단은 영주 신분으로 있고요." 음. 그렇지. 이푸드도 영주 신분을 포기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지. 여기에서의 거점을 확보해 놓은 셈이지. "그래... 그럼 절차는?" "가면 아시게 될 겁니다. 별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많이 걱정된단 말이다. 이봐. 사람을 잡거나 하면 어째? 난 정말 그런 건 사양이라고! 절대 싫어! 그런 거 하면 도망쳐 버릴꺼야! "걱정된다." "그러시지 마시고. 가서 선물 정리나 하세요. 할 일이 산더미니까요." 그러겠지. 마왕이란, 안 해도 상관 없지만, 뭐, 서류 정리를 한다든지, 그런 거는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자 맘 먹으면 세계 정복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거지만,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하겠어? 이대로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말이지. 며칠 뒤, 드디어 결전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오늘이 분명히 제전날이라고 했는데 별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지 않았다. 그저, 프라운이 데려온 자칭 요리사라는 사람이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을 뿐, 그 외에 다른 마족은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수가. "스승님! 여기 이것 좀 잡아 주세요!" 문제는 바로 이 녀석, 세이인데... 이 녀석은 제전에 대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 없다. 이게 무슨 페스티발~(패스하고 튀어서 발을 내미는.) 인 줄 아는 거 아냐! 왜 꽃은 달고, 리본 달고, 그러는 거냐! 너 제발, 나이 값좀 해라. "으...그래. 어딘데?" 그리고 잡아 주는 나도 이상한 놈이지. 뭐, 하지만, 제자의 부탁을 어찌 거절하리요! 그건 사람도 아니다! 음 하하핫. 이렇게 자상한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너도 참 복 많이 받은거야. "어, 두 분, 여기서 뭐해요?" "응, 메데이레나. 축제 준비하고 있었어. 너 그 옷 이쁘다." 세이가 메데이레나의 옷을 보면서 칭찬해 주자, 그녀는 얼굴이 빨개졌다. 오? 설마, 녀석을 좋아하는 거야? 잘 됬다. 엮어 주자. 엮어... 굴비 엮듯이 엮어. "하브라이드씨가 준 거야. 아, 라플. 아까 프라운이 너 찾던데?" 응? 녀석이 나 왜 찾나? 훗. 이거 놓고 가야지. 그리고 사다리를 놓고 당연히 걸음을 옮기는 순간, 제자가 퍽 떨어졌다. 뭐, 양심의 가책이 조금 들기는 하는군. 하핫. "자, 그럼!" 상쾌한 하루의 시작은 역시 제자를 골탕먹이는 겁니다. - 라플 놀기 대작전- "스승님! 미워요!" 녀석. 아침의 햇살을 본 자는 굴러 떨어져도 행복하다라는 격언을 모르느냐? 뭔 소리냐. "아, 어서 오라고. 할 일이 있어. 아마 저녁부터 마족들이 들어닥칠 테니까, 그 때 다 같이 뭘 할까?" 설마... 여지껏,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거냐! "라플. 여기 있으셨군요. 이 옷으로 갈아입어요!" 이푸드는 아주 여자옷 비슷한 옷을 건네 주었다. 젠장. 학원에서 여자옷을 입은 것도 싫었는데... 이건 대체 뭐냐. "젠장! 니들 지금 즐기고 있지! 왜 아까부터 웃는 거야!" 프라운과 이푸드는 평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큭큭대고 웃고 있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여자 옷을 입고 있다는 데서.. "음. 너무 잘 어울려요. 사실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는데. 프라운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응." 너무 간단해.... 으..으.. 두고보자. 앞으로도 식사는 계속 유동식으로 깔라고 세이에게 시켜야겠군. 으... "니들 싫어!" 파파팍... 뛰어 나갔다. 뭐, 쪽팔려서 그런 건 아니고, 단지 녀석들이 원래 한심하지 않아? 그러니, 더 상대했다간 내 머리가 돌지 않겠어? 흠. 응? 이건, 마력의 기운? 아직 저녁도 아닌데? "어? 당신은...!" 숲지기 아저씨였다. 빨리도 왔네. 이걸 보고 더 이상 쥐궁멍을 찾는 건 불가능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 젠장. 되는 일이 없어. 왜 이 아저씨는 왜 이리 빨리 나타난 거야? 그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뭘 봐! "음? 넌 못보던 아이인데... 누구지? 정말 귀여운 아이구나." 죽여버리고 싶어...패게 해줘! "라플." "응?" "라플이야. 이 아저씨야! 정말이지! 넌 어떻게 된게 마력으로 사람을 구분 할 줄도 모르냐! 너 사실 가짜 아냐!" 녀석은 그제서야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래도 라플이 여자옷을 입고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뭐, 새로운 취미야? 잘 어울리긴 해." 그리고 살의가 하늘을 찔렀다. "이 자식들!!!" 그 날, 저녁 식사 시간에 나는 가볍게 손을 풀었다. 내가 누구냐,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광폭한 대 마도사 나으리... 라고 말하고 싶지만, 조금 찔리는군. 녀석들 얼굴이 팅팅 부어있는 걸 보는 내 맘이 그리 편치 만은 않고. "오늘.. 제전이라 친구들도 많이 오는데." "웅..." 그렇게 너구리가 된 얼굴 정도는 쉽게 고칠 수 있잖아! 젠장. 동정심을 유도하는 건가? 이 때, 세이가 나섰다. "에... 마법으로 고쳐 드릴까요?" 역시, 내 제자. 내 마음을 읽고 있어. 그러자, 두 사람은 격렬하게 손을 내저었다. 미치나? "절대로! 아니 됩니다. 이건 마왕께 죽지 않을 정도로 맞은 상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감히! 노우!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저, 나를 괴롭히고 싶었을 뿐이라는 건 절대 말 하지 않는군. 그 때, 하녀 한 사람이 들어왔다. 오, 이집엔 하녀가 있기는 했군. 몰랐어. 난 우리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자,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이푸드가 말해주었다. "오늘만 사람들을 특별히 고용했어요. 뭐, 할 수 없잖아요. 손이 모자라는 판에." 그런데.. .저 하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위트렐양이라고.. 에? "위트렐?" "어머! 라플아냐? 아, 여기서 잠시 일하게 되었어. 그 일도 알아볼겸. 겸사 겸사." 하하하.. 그럼 오늘 날짜 잘 잡았군. 하핫. "그래...? 잘해 봐." 뭘 알아냈다면 좋겠다. 야. 그녀는 갑자기 손을 탁치고 황급히 말했다. 다른 손님이 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음... 이제 속속들어 하나 둘 오기 시작하는데? "안녕하세요? 바키 베르네 입니다. 제 아버지를 대신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어라라? 메데이레나?" 잠시 나는 저 둘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었다. 분명 아는 사이. 그리고, 저 이름은 틀림 없이 마도 공작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럼 저 소녀가 바로 황제 동생이 난 마족의 아이군. 흠. "여기 오다니. 간이 부어도 한참 부었군." 뒤에서 음산한 녀석 하나가 중얼거렸다. 메데이레나야, 뭐 그런 상황에 끄떡이나 하나? 그저 두다다다 달려가서 꼬옥 안기면서 언니 언니 하지. "그래. 그래. 근데, 세인 푸르체트 경은? 너랑 같이 가지 않았어?" "응. 근데 중간에 도망쳤어. 그 아저씨... 맘에 안든다고." 둘은 어느새 그러고 저러고 이야기까지 하면서 세인을 철저하게 깍아 내리고 있었다. 여기 조각상 하나 나오겠군. 기대하시라. "자. 자. 다 여기 앉아요.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을 터이니. 위트렐양. 가서 먹을 것을 좀 더 가져와 주세요." "예." 이푸드는 그래도 저쪽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했는데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여기 있는 마족들은 다 고위 마족이니..뭐. "아, 라플. 나 그거 먹고 싶어. 이리 줘." 생글거리는 하브라이드를 가볍게 발로 차주고, 다시금 하늘을 보면서 탄식했다. "정신차려. 바보야. 이건 세이 줄꺼야. 세이야. 아~" 세이가 귀엽게 입을 벌려서 먹자, 주위에 있던 곳에서 잠시 피분수가 솟았다. 내 제자가 좀 많이 귀여워. 어린 나이도 아닌데 말야. 훗. 사람은 우리가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정말 백명정도가 되어 있었다. 개중엔 유행에 첨단을 달리는 놈들 부터 시작해서, 고전파, 낭만파 등의 다양한 마족들이 꾸역거리고 몰려들었다. 이푸드는 식사가 종결되자, 이내 일어서서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다. "그럼, 자정에 정확히 제전을 실행합니다!" 자정! 즉시 세이를 돌아보고 한 마디 했다. "애들은 잘 시간이야. 너도, 메데이레나도. 거기 바키는 어쩔 수 없다 쳐도, 너흰 안된다!" 엄한 연장자의 모습을 보여야 하지! "예. 알았어요. 쳇. 스승님 혼자 케잌 다 먹으려고 그러는지 모를꺼 같아요! 전 다 알고 있어요!" 하하하... "그래. 그래. 이따가 케잌 가져다 주마. 그럼 됬지?" 한 마족이 어리버리 다가오더니 갑자기 하이브라이드에게 인사했다. "새 마왕이시지요?" "아닌데요?" 잠시 정적이 감돌고, 마족들은 감도 못 잡은 듯, 혼란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서서히 이푸드의 지시에 따라 대전으로 몰려가지 시작했다. 이들은 군집활동을 좋아하나 보군. 뭐, 별난 취미라는 데 일메장을 걸어도 좋아. "자, 그럼 모두 제전 장소로 갑시다. 애들은 가. 애들은 가라. 야, 거기 너, 부모님 모셔와!" 뭐하는 거냐... 역시 그녀의 멀쩡한 눈을 때려서 이번엔 균형을 맞춘뒤에 나도 홀로 갔다. 홀은 상당히 음울하고, 어두웠다. 뭐, 당장 피가 뚝뚝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지경이야. 언제 이런 걸 만들었는지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중앙의 식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즉 유동식이 가득했다. 마족들은 아주 그것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 보고 있었고, 오늘 저걸 먹는 건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그럼 모두 앉아 주십시오. 그리고, 마왕님. 이리로 오세요." 쳇. 이푸드를 따라서 정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가서 앉자 잠시 홀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나오는 한 마디. "어린애가 유동식을 가장 좋아하다니, 이번 마왕은 이빨이 없나? 어린 것이 불쌍하게도. 잘못했어. 선물로는 틀이가 가장 좋을 뻔 했는데 말야." "맞네. 맞아." 누가 틀이를 껴야 한다는 거야! 이 자식들, 험담은 안 듣게 해야 할 거 아냐!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뭐, 무시해도 상관 없지만. "자, 그럼 제가 이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모두 경청해 주십시오." 하브라이드가 폼잡고 나섰다. 왠지 불길한데... 24-3. "여기 계시는 이 분은 고금 유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과 마족이 최고라고 꼽아 마지 않는 대마도사의 칭호를 가진 저 유명한 라플인 것입니다~!" 근데, 말투가 어째 약장수같다. "오오..." 사람들, 아니지. 마족들은 모두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젠장. 되는 일이 없으려니까 이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마족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거냐! 내가 왜! 나처럼 착한 마도사를 괴롭히려는 사람들의 수작이 너무 안타까운 일이야. "그리고, 선대 마왕을 아주 별 일 아닌 일로 쳐 죽인 놀라운 성깔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어이, 하브라이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오!" 니들도 그래! 별 일 아닌 거 가지고 괜히 놀라지 말아 줘! 으... "소개합니다! 마왕이십니다!" "와와!" 그러나, 내겐 별 다른 감흥을 주진 못했다. 왜냐? 지금 느껴지는 마력의 수치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인데, 왜 딴 놈들은 눈치도 못 챘는지. "그럼 한 말씀." 하브라이드가 내게 살짝 웃으면서 말하고 벌떡 일어나서 대중을 향해 외쳤다. "모두 업드려!" 그리고 손에서 거대한 베리어가 나가고, 동시에 성을 관통 할 뻔 한 거대한 마력은 다행히 비껴 나가서 옆 산을 날렸다. 굉음 죽이고...! "무슨 일이야!" "모르겠습니다!" 젠장. 되는 일이 없으려니까. 그런데, 이 정도의 마력이라니.. 응? 야, 니들 어디가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저희는 이만... 마력 패턴은 알았으니 별 문제 없군요." 난 문제 많아. 이봐! 보통은 다 같이 싸워야 하는 거 아냐! 역시.. 이 놈들 마족이군. 도움이 안된다고. 으... "이거.. 공간이 흔들리는 걸 보니 등장하실 생각인가 본데요?" 프라운이 인상을 작게 쓰면서 말하자, 이푸드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밥을 다 못 먹었으니 어쩐다냐 하면서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지만. 확실히 공간이 점차 파동을 치고 있었다. 그것도 한 둘은 아닌 모양이고... 이거 큰일이군. 괴물을 들여 보내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텐데 말야. 음. 지금 남아 있는 마족은 엔트리 멤버 정도군. 젠장. "마족의 우정이라는 게 알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예? 설마요. 다 믿으니까 그랬겠죠.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느끼지 못했는데 라플님은 아셨잖아요? 그러니까, 믿고 도망친 거에요. 발목을 잡으면 안되니까." 설마, 그렇게까지 마족이 섬세한가? 하긴, 이정도도 어떻게 못하면 마왕이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지. 에잇. 되는 일이 없군. "왔다!" 정면 허공에 두둥실 구름 사탕 흉내를 내면서 서 있는 사람은 총 다섯. 그 중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세명 이었다. 키히와 그 동굴의 꼬마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대체... "안녕?" 프라운이 빙그레 웃자, 키히의 눈에는 놀람과 경악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당연하지. 옛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배신자이니까. "넌... 설마, 프라운?" "응." 방글 거리면서 웃다니. 이 녀석아. 너는 전력을 다해서도 질 확률이 높은 상대라고. 그리고.. 저 꼬마. 왠지 세보이고. 움... 뒤에 있는 녀석들은 다 뭐하는 놈들이야! "이런 데 있으니.. 널 찾을 수가 없지. 너의 후손을 추적하는 데 아무래도 나오지 않더군. 그래서 어디서 혼자 죽은 줄 알았다. 그래.. 네놈. 사람이 아니었군." 이거 또... 분위기 살벌해 지는 군. 마법으로 옷자락 날리는 효과 하기는 되게 힘든데 말야.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왔다. "넌...피스트레이카 공작?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여긴 마왕 제전이야." 내가 마왕이라고. "너완 상관 없다. 키히 크리시아 휘젠. 너가 무슨 생각으로 계속 우리 마족들을 잡아서 피를 뽑고 괴물을 만들어 내는 지는 모르겠다만, 용서할 수 없다!!" 어이. 이푸드. 상대를 봐 가면서 개겨... 그리고 왜 내 뒤에 숨는 거냐. 키도 나보다 크면서 말이지. "그게 어때서? 어차피 너희 마족들은 벌레와 같은 하등동물이야. 이용할 수 있는 건 동물이래도 이용해야지않나? 하하하하! 오늘은 내가 여기 왜 온 건지 아나? 바로 네 놈들의 피를 뽑아 더 강한 괴물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지!" 그 옛날, 다정했던 키히의 눈동자는 광기에 젖어 있었다. "재미있군. 그래. 그래서 인간들을 잡아서 괴물을 만드는 건가? 넌, 인간도 소모품이라고 생각하나? 한 때 너가 지키려 했던 그 모든 것인데?" 프라운이 싸늘하게 굳은 눈동자를 하면서 그녀를 질책하자, 그녀는 다시 사악하게 웃기 시작했다. "어리석어... 내가 잘 보이고 싶었던 존재는 오직 하나, 바로 라플이었다. 인간?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젠 그는 없는데. 바로 네놈 때문에!" 무서워... 잉. 응? "스승님... 케잌은 어디 있어요?" 세이가 잠옷을 입고 휘적거리면서 들어왔고, 가장 놀란 건 나였다. 저 바보 자식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단 말인가! "이 멍청한 놈! 이푸드. 이 녀석을 메데이레나가 있는 곳에 같이 있어!" "예." 그녀가 세이를 한 대 팬 뒤에 업고 사라지자, 키히가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군. 마족이 인간의 말을 따르다니." 그래. 내가 마왕이니까 그러지. 하지만,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내 기분을 헤아려 주는 건가? 예전에는.. 그래. 얼마전에 키히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마왕이라는 건 아니었지만, 설령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 해도 그녀가 증오하는 마족임에는 틀림 없는 것이다. "돈으로 고용했지. 뭐. 돈이면 안되는 게 없잖아. 키히씨. 그리고... 당신의 이런 모습. 라플은 좋아하지 않을 꺼에요. 아마도.. .깊이 당신을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한숨 나오지. 에휴... 그녀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너..... 너... 건방져! 그리고 그 말투도 맘에 안 들어! 죽어.. 죽어!" 그녀의 손이 날카롭게 내 몸에 파고 들었다. 뭐, 다른 놈들은 다 기절할듯이 놀랐지만, 정작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가 있으니까..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날 죽인다면, 그것도 괜찮을 테니까. "키히.... 사...랑... 하... 고..." 숨이 점점 차올랐다. 키히의 얼굴이 무척이나 하얗게 되어 있어서 왠지 안쓰러웠다. 내가 있다면 같이 여행다니면서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항상.. 항상. 네가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이렇게... 헤어지게 되나? "꼼짝마! 내 친구를 죽이면 용서하지 않겠어!" 갑자기 앙증맞은 소녀의 목소리가 대홀에 퍼져 나갔다. 메데이레나가 떨리는 손으로 금광석 검을 잡고 서 있었다. 검 따윈... 처음 잡은 걸텐데. ".... 너도 죽인다!" 그녀의 신형이 떠올랐다. 내 가슴 언저리에는 피가 솼맣“ 있었지만, 메데이레나가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녀도... 착한 아이니까. "안돼!" 그녀의 손은 정확히 메데이레나의 앞에서 멈춰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내 배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왠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왜지? 왜... 우는 거지? 그녀는 울 이유가 없는데. 그녀를 울리는 사람은 내가 용서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키히. 우린.. 어긋나기 시작한거야. 그걸... 알아? "왜... 왜.. 방해하는 거지?" 글쎄.. 왜 일까?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내장이 섞인 듯 했다. 그리고 천천히 메데이레나의 울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오빠랑... 같잖아... 왜... 나같은 거 때문에 ... 싫어. 싫단 말야. 죽지마!" 키히의 손이 빠져 나갔다. 나는 그녀에게 짐을 지울 순 없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아마, 내 힘은 그녀에게 가겠지. 그건... 안된다. "내 의지로 명한다. 회복." 몸에서 검은색의 오라가 펼쳐지면서 내 몸에는 피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이 커졌고, 경악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모두 진동할 정도의 엄청나고 강대한 마왕의 마력이, 그 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메데이레나. 난, 절대 죽지 않아. 난 불사신이거든." "응! 괜찮은 거지!"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키히에게, 내 사랑하는 연인에게 말해주었다. "키히. 너는 날... 겉모습만 보고 믿지 않는구나. 어째서 너만은 날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 넌, 나만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내 모습만, 그리고 내 성격만. 다른 존재와 연관되지 않은 나를 말이지. 어리석은 키히여. 난 죽지 않았다. 그리고 배신조차도... 난 염두에 두지 않았어. 그리고 넌... 그 배신중에 가장 큰 배신을 했어. 알고 있나? 그래서... 넌 내가 소중히 여기던, 그 모든 것들을 파괴한 거냐? 배신이라는 것 때문에? 하지만, 그거야 말로 내게 가장 큰 배신이었다!" 프라운과 하브라이드는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키히는 나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 은발의 소년이 키히에게 다가갔다. "키히. 신경쓰지 마세요. 저 꼬마... 당신을 흔들리게 해서 죽일 셈이에요. 인간의 수명은, 무척 짧아요." 꼬마의 입에서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프라운은 인상을 찡그렸고, 난 그저 쉬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손을 쳐 들었다. "그래... 라플이라면, 내게 그런 말을 하진 않아. 넌, 단지 그의 손자일 뿐... 아니면, 단지 닮은 사람... 죽인다. 후환을 없애야지!" 마음 속 깊이, 이제 이런 건 싫다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래. 이런 건 싫어. 그녀의 손에서 차가운 얼음 화살이 내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 백여개 정도. 마치 무수히 반짝이는 별 같았다. "...후환이라니..." 내 손에서 붉은 기운이 나가고, 얼음 화살들이 다시 녹아 내렸다. 그리고 그 붉은 기운은 정확히 키히의 몸을 꽤뚫었다. "크아아악!" "키히!" 눈이 무표정하게 식고 있었다. 이게 차가운 감정이라는 건가? 아니면... 힘에 사로잡히진 않는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감정 같은 건.. 예전에도 있지 않았다. 키히를 사랑했던건? 그건.. 그래... 어긋나버렸다. 그녀는.. .더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르지. "젠장. 오늘은 여기까지다! 두고 보자! 공작!" 은발 소년의 주문과 함께, 키히와 녀석, 그 뒤에 있던 삼인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메데이레나가 내게 다가왔다. "라플..." "왜?" 그녀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주자,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옷자락을 꼬옥 손으로 붙잡고 말했다. "제발... 울지마. 너무.. 안타까워. 울지마. 응?" 내 눈에서는 100년 만에 실연한 슬픔의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23-4. 다음날 아침, 기분은 더럽고 거울을 보니, 띵띵 울어서 부운 내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좌절해야 했다. 그래.. 뭐, 이렇게 살 수 도 있지. 세이 녀석은 내 얼굴 보고, 일의 전모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날 놀리다가 메데이레나의 어퍼컷에 처절하게 뒹글어야 했으며, 프라운에게는 구박을, 하브라이드에게선 째려 봄을 당해야 했다. 불쌍한 놈. "으... 왜들 이 아침 부터 다들 이상한 거죠? 스승님?" 음. 뭐라고 해 줘야 하나? 하긴, 다들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건 사실이고 말이지. "글쎄. 드디어 인류 생성의 비밀이라도 알아낸 게 아닐까 모르겠구나? 자, 여기 케잌. 에이. 흘렸잖아?" 세이가 넙죽 넙죽 받아 먹는 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배시시 웃고 있는데, 메데이레나가 무척이나 놀랐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세이의 보호자가 라플이잖아요! 난 몰랐는데!" 하핫. 이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소리나 하고 말이지. 원래 녀석이 내 제자란 건 다 알아요. 키히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미워할 수도 없지. 그러나... 그녀를 알게 된게 겨우 1년 이었으니까, 잊을 땐.. 그 배의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백년이 지나도 못 잊은 걸 보면... 아마도. 이 마음이 너무나 아프지만... 언젠가는 그냥 무덤덤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될 꺼야. 그래. 난... 그럴 수 있을 꺼야. 그러다 죽은 후에 그녀를 만나면, 그년 그 땐 날 용서해 줄까? "라플. 수프 다 식어. 어서 먹어. 그리고... 어제 완전히 제전 답지 않게 엉망이 되었어? 그리고 너 그 힘을 잘 사용하던데?" 프라운이 과자를 담아주면서 말하자, 하브라이드도 맞장구 쳤다. "응. 그래. 라플. 역시 보통이 아냐. 앞으로도 특별히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알겠지? 저번처럼 너 죽을려고 마음 먹으면 정말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이제는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라고." 그런가? 하긴. 내가 죽으면 이들의 고통이 장난이 아니라니까... 뭐, 할 수 없지. "그래요. 라플. 나도... 라플처럼 강해지고 싶어. 아, 라플은 여기서 이젠 계속 있을 꺼에요?" 메데이레나가 한 손에는 식빵을 들고 말하자, 프라운이 대답해 주었다. "아니. 우린 다시 수도의 대신전으로 돌아가야한다고. 가을이 오잖아. 뭐, 나바스엔 그런 행사는 별로 없지?" 그렇지. 그 위대한 대신관 나으리가 오라고 했으니.. 그리고 살린을 노리는 녀석들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어? 역시 인기인은 바쁘단말야. "예. 전혀 없어요. 에... 봐도 될까요? 겸사 겸사 들려서. 어차피 푸르체트경도 수도로 올 텐데요. 안그래요?" "음. 그렇겠군." 프라운이 긍정하고 있을 때, 세이가 내게 아주 살며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무슨 고민 있어요?" 눈치는 칼이군. "그래. 왜?" "음... 스승님 답지 않아요. 그리고. 아, 그래. 그거 혹시 키히라는 분? 꼭 다시 착한 사람이 되도록 구제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녀석 하고는... "임마. 그냥 밥이나 먹어. 나 걱정해 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말이지. 난, 영원히 그녀를 사랑한단다." 세이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세이는 키히를 사랑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말해 주었다. 정말이지... 착한 녀석이라니까. 하여간. "자, 그럼 수도로 가요!" 이푸드는 빨리도 우릴 내쫓았다. 너무 하는 군. 난 마족에 대해 환상이 있었는데. 적어도 마왕한테는 잘 하는 줄 알았지. 그랬더니 이건 그냥 너 죽고 나 살어라 아냐! 젠장. 젠장. 갈테면 가라지.. 누가누가 나를 말리리... 어느 노래가 떠오르는 군. 대마도사는 아무나 하나. 후훗. 우리가 벌써 여행을 떠난지 십여초, 드디어 아주 아주 원치 않던 대문을 나설 수 있었다. 이푸드는 저기서 손을 흔들어 주고, 하브라이드 녀석은 무슨 볼 일이 있대나 하면서 나가버렸다. 쳇. 맘대로 하라지. 우리는 역시나, 애들 모임으로 가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은 솔직히 없으니 어쩔 수 있나? 손에 손잡고 유치원 부대가 간다 간다. "아, 이번에도 그냥 초고속으로 가면 안되요? 그리고 시간에 맞춰 간뒤, 시험을 보고 살린이 있는 곳에 들렸다가 다시 신전으로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잠시 나와 프라운은 동시에 세이 녀석을 바라 보았다. 시험? "시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들은 적도 없는 데?" 녀석은 계속 생글거리기 시작했고, 난 점점 저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이 불길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다. "아, 몰랐어요? 마법 학원 학생이잖아요? 아무리 신전에서 공부 중이라고 해도 할 건 해야죠." 뭘, 할 건 해야죠야!!! 기분도 드러운 판에! "음.. 그렇군. 좋아. 라플. 그럼 너랑 메데이레나 세이가 한팀. 내가 한팀. 자, 여기서 너가 A조 조장이고 내가 B팀을 맡지. 우리는 서로 상부 상조 하는 거야! 자, 가자! 마법학원으로!" 왠지 상당히 불리한 거 같은데? "프라운. 나는 말이지. 네 놈이 한 일을 다 잊은 뒤에도 알고 있어." "자, 내가 다 이동시킬 테니까, 준비해!" 비굴한 놈. 다시 일행은 녀석의 초고속 이동에 휩쓸려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문제는, 녀석의 마법에 있는 치명 적인 단점. 학원에 갈 때는 우리 몸이 뒤집혀서 내려오게 된다는 거다. 젠장. 되는 일이 없어. "좋아. 이젠 다친 곳만 낫기를 바라면 되는 군." 프라운 녀석은 어느새 삽을 들고 땅을 파 들어가고 있었다. 짜식. 계속 삽질해서 무덤에서 땅을 뚫고 저 편으로 사라져라. 앞으로 널 삽돌이라 불러주지. "그나저나, 정말 편하군요. 스승님. 율지스 형은 뭘 하고 계실라나? 궁금하네." 뭘 하긴. 녀석의 패턴을 보면 아마.. 지금쯤 우리 마력의 이상을 탐지하고 달려 오고 있지 않겠어? 그렇지. 저기 오는 구나. "어라라? 사부님! 왜 여기 오신 거에요? 신전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 녀석은 활짝 웃으면서 나를 반겨줬다. 세이는 한대 치고. 도망쳤다고 구박당하는 걸 보니, 조금은 녀석이 불쌍해 지기도 하네. "아, 시험 보러 왔지. 세이 녀석이 봐야 한다고 하길래... 뭐, 별 일은 없었지? 여기 새로운 질병이 떠도네 어쩌네라는 소문도 들은 거 같은데 말야." 율지스의 안색은 한순간에 먹구름이 되었다. "꼭... 병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어쨌든 여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여기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인데... 아닙니다. 이건 나중에 알려 드리죠. 참, 그리고 시험은 지금 안 보셔도 되는데요?" 세이 녀석을 프라운과 나는 옛날 마왕을 용사들이 다구리 할 때처럼 두들겨 팼다. 역시 말 안듣고 띠벙한 아이는 패야 한다니까? 그래야 정신을 차리지. 쯧 쯧. "그건 그렇고, 메데이레나, 너는 왕성으로 일단 가는 게 좋겠다. 율지스, 그녀를 데려다 주고, 세인 푸르체트 경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율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녀석도 소문 정도는 들었겠지. 뭐. 갑자기 내 옷을 잡는 이 손은? "옷 놔. 찢어지면 사줄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나.. 나.. 여기가 재미있는 걸?" 나바스는 꽤나 자유롭지 않아? 듣기론 괴물도 없다고 하던데. 그런데 말야, 이렇게 옷 잡고 있으면 맘이 약해지잖아! "에, 괜찮겠지. 세인경의 그 엄청난 방향감각으론 한 100년쯤 걸려야 수도에 올 수 있을껄? 찾아 내기 전까지는 실컷 놀고 가는 것도 좋잖아?" 갑자기 칼들고 싶은 마음을 꼬옥 누르고, 녀석을 노려봐 주었다. "위험하면 너가 지키는 거냐? 난 세이 녀석 지키기도 벅차." "스승님. 저도 제자인데요?" 생글 거리는 율지스를 한 대 차주고, 다시 프라운을 노려 보았다. 뒤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율지스의 개탄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사소한 것은 다 잊자. 잊어. "그럼 내가 세이를 돌보지. 아무래도 이 여자앤 내 취미엔 안 맞는 다고.. 어이! 왜 도망가는 거야?" 나는 얼른 세이를 끌어 당겼다. 무서운 아저씨다.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사실 속은 썩었어! "세이야. 세이야. 앞으론 제 곁에는 가지마. 알았지?" "예. 뭐, 스승님이 하시는 말이라면.... 근데, 스승님. 저 가볼데가 있어서 그러는데.. 좀 놔주시겠어요?" 엥? 어. 그러지. 뭐. 손을 풀어주자 마자, 표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율지스는 그저 개탄만 하고 있었고, 프라운은 입맛 다시다가 나한테 걸려서 개패듯이 맞았는가 하면, 그 외에 메데이레나는 그저 우리 눈치만 보고 있었다. "좋아. 그럼. 시험 안 봐도 되니까... 바로 신전으로 가야 하는데,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메데이레나를 남장시켜서 견습 신관으로 분장시켜서 데려가는 거야!" 오래 살면 다 저렇게 되나? 아주 재미있는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하이에나, 흣~ 난 저러지 말아야지... 근데, 메데이레나 같은 여자애도 남장하면 어울릴라나? 뭐, 해봐서 손해 볼 일도 없고... 왠지 재미도 있을 거 같은데? "할꺼지?" "그럼요!" 번쩍거려, 지금. 반짝이 아니라... 왠지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기분이 다분히 드는데, 혹시 나는 마왕이 된게 장난치려고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무럭 무럭 새록 새록 드는데? 설마, 그럴리야 있겠지만... "우와!" "목소리는 좀 까는 게 좋겠는데? 아직 변성기 전이라고 해도,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마법을 걸 수 없으니까, 알아서 조심하라고." 프라운은 아까부터 계속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며 사탕을 물고 있었다. 진정, 마족이 멸망해 가는 징조다. 징조. "응? 에네브님 이십니까? 이런.. 빨리 오시죠." 앞에 있던 견습 신관이 재빨리 일어서서 우릴 반겨 주었다. 옷에 마크가 떡하니 찍혀 있으니 오죽하겠어? 그나저나, 신관은 옷도 못 빌려 주는 불쌍한 족속이라는 사실... "환자가 많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걸까?" 귀에다 속삭이지 말아줘. 프라운 동지. 상당히 기분이 더러워 진다고. "글쎄... 있다 보면 알겠지." "아, 에네브 님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라오니스, 쿠릴츠. 맞죠?" "예." 메데이레나는 아까 아까 새로 견습으로 집어 넣었다. 에네브의 사촌 동생이라니까, 우리 옆에 배치한다고 하더군. 역시 인생은 빽과 줄의 사회. 왠지 기분이 더러워지는군.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랫동안 다녀 오셨습니다." 뭐야, 저 대신관 할아버지! 아직도 얼굴에 멍이 져 있잖아? 아직도 안 나은 건가, 아니면 또 그새 다친건가? 따지고 보면 내가 이푸드의 성에 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한 상대이기도 하니.. 뭐. "하하하. 드디어 왔군! 그래, 어땠나? 기억은 다 찾은 건가?"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아, 내가 생각해도 너무 공손하지 않냐? 크크크. 다 본 받으라고. "헌데, 왜 가을 까지 돌아오라고 하셨는지요?" 프라운이 아주 공손한 어투로 묻자, 할아버지는 이내 안색을 굳혔다. 어차피 주름이 많아서 심각해 보이는 얼굴인데, 계속 그러니 더 무서워 보이는 군. 그래. "아, 그건 말이지... 그 때에 바로 신이 재래하는 데, 그 분께 고쳐달라고 그럴려고 그랬지. 하지만, 이제 다 나았다니. 안심이네." 신? 신? 하늘에서 산다고 정해지는 그런 신 말이야! 농담이지! "하하하... 얼굴들 좀 펴게. 자네들은 잘 모르겠군. 에네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과 관련이 있지." 이젠 모르겄다! 알아서 해! 23-5. "그러니까.. 그래. 마왕 제전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 그것과 맥락은 사실 비슷하다네. 물론, 여기선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런 건 사악한 마왕이 나올 때나 하는 거지. 그리고 식행사가 같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거지, 다른 의미는 없어요." 갑자기 왠 마왕 제전까지 나오는 거야? 그리고 내가 겪은 마왕 제전은 최고였지. 유동식 테이블이 가득하고, 키히가 나와서 내 가슴에 손을 꽂아 넣을 정도였으니까 말야. "근데... 설마, 진짜 신이 내려 옵니까?" 프라운, 얼굴에 나 미심쩍어라고 쓰여 있어. 표정 관리도 좀 하라고. 그래서야 자랑스러운 사기단이라고 할 수 있겠나? "글쎄... 뭐라고 말하기 곤란하네. 난, 이나이가 되도록 신에 대한 경외심과 의심을 함께 가지고 있거든." 무슨 얘기가 나올지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야. 제발... 누가 좀 말려라. "마왕 제전에 관해서 저희가 알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프라운의 이어지는 이차 어택! "하하하. 그야, 자네들은 마법학원의 학생이고, 거기 프라오니스 군이 사실은 피스트레이카 공작이라면서? 그렇다면 마왕에 대한 자료가 많을 것이고, 거기서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마왕 제전이라는 거, 그렇게 은폐된 자료도 아니고.. 역대 몇 번 있었던 거 같긴 하지만." 어제까지 3번이야. "흠. 좋습니다. 그럼 에네브가 과연 무슨 역할을 하는 겁니까?" 프라운이 이야기의 주도권을 뺏은 셈이 되었지만, 할아버지 노친네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뭐, 당연하기도 하지. 나이 먹으면 그런 데 쓸 신경이 있으면 따뜻한 양지에 가서 눕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다고. "음.... 그래. 에네브의 역할. 사실 난 이미 늙었네." 할아버지. 그게 여기서 무슨 상관이야! 누구 미치는 꼴을 정말 보겠다는 거야, 뭐야! "그래서요?" 싸가지 없는 프라운의 답변. "슬슬...내 후사를 준비해야지." 꽤액! 그럼 신관이 결혼을! 농담하니! 내가 알기론 대신관은 종신제에다가 평생 독신이라고! 뭐, 다른 신관에겐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 독신이 많고... "아, 그럼 이번 에네브들 중에서 한명을 뽑으시려는 겁니까?" 엥? 그런 거야? 에이. 난 또. 늙으면 쓸데 없는 생각만 늘어나서 하핫. "바로 그거야. 문제는... 과연, 이번에는 몇명이나 살아 남을 것인가가 문제지만. 걱정이군." 살아남기 힘들다면 다들 모여서 대스매치라도 하는 건가? 재미는 있겠지만, 이런 신성한 곳에서 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군. "그렇군요. 그럼 대체 그 역할이 뭡니까?" "힘의... 방출을 견뎌내기만 하면 되네. 문제는... 그 힘이 강해서 그렇지. 자네 둘은 그걸 아직 보지 못했겠지만, 신의 성력에 닿으면, 마족은 그대로 녹아 버리지. 그러나, 문제는 약간이라도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인간도 녹아버려. 그야말로 순수한 힘의 결정체니까." 에엑! 그럼 나랑 프라운은 어떻게 하라고! 그냥 우린 직빵이야! "...그렇군요. 그래서 당신이 남았다는 건 믿기 힘들지만." 녀석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역시 한숨을 깊이 내쉬고 다시 말했다. "그래. 난 조금도 신에 대한 충성이랄까? 그런 것이 별로 없지. 문제는... 우리 땐 후보가 나 하나였어. 그 때 다른 사람들 중에 에네브는 셋이 있었는데... 그 때 도망갔었지. 그 의식을 치르기 싫다면서 말이지. 덕에 예식 절차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내가 낙찰된 거야. 우스운 일이지. 결국, 아무라도 하나는 내세웠어야 하니까.. 결국 내가 시험도 치르지 않고 된거지. 그런데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하더군.. 내 선대에서 거의 전부는 그 시험이라는 것을 치르지 않았어." 그럼 이번 것 역시 몇 백년 만에 처음 실행되는 특이한 것이 되는 거군. 하지만, 나 같아도 도망 가겠다. 프라운이나, 나나, 아주 죽을 게 확실한데 버티리? "그러하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몇 명이나 남을 거 같습니까?" 프라운은 그럼에도 별로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무섭지 않나 보네.. 뭐, 그 만큼 나이 먹으면 신의 성력이란 게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하겠구 말야. "장담은 못하지만, 살린 녀석은 워낙에 미련한 놈이니 남겠지. 그리고 야망에 불타는 크리온도 남겠고... 듣자하니, 녀석들이 너희를 습격했다면서? 하여간, 그렇게까지 안해도 되는데.. 어리석은 놈들. 이젠 조심해야 하네. 앞으로 일주일 뒤, 정확히 에네브들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맡은 자들에게 이런 비사를 이야기 해 줄테니까." 서로 죽이거나, 회유해서 떠나보낼 수 있겠군. 그럼 목숨을 조심해라, 이건가? "그런데 왜 저희에겐 이렇게 빨리 알려 주시는 거죠? 이유를 알 수 없군요." "그건...자네 둘의 담당관이 모두 행방 불명 되었네. 왜인지는 모르지만, 사라진 시간은 바로 4일전으로... 아직까지 이유조차 알아내지 못하고 있지." 사연이 깊기도 하군. 하지만, 정말 큰일인데? 일단, 나와 우리는 빠진다 쳐도, 살린은 어쩌니? 잘못하면 죽기 쉽상이잖아? "흠... 그렇군요. 그런 일이. 좋습니다. 그럼 우리 둘은 앞으로 있을 가을제에 대비해서 준비 좀 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좋겠네. 그럼 조심하게. 이만 나가보고." "예." 간신히 문을 닫고 나오자, 재빨리 프라운을 족치기 시작했다. "야, 너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어떻게 된거야?" "뭐가?" "우리 어차피 그거 안 되잖아?" 그 빔을 맞는 순간 우리는 바로 가루가 되지 않겠어? 아니지... 계란 노른자가 될지도 모르지. "바보. 신과 악마는 같은 존재야. 나야 좀 문제가 있지만, 너라면 상관 없어. 그게 정말 신의 성력이라면 말이지." 응? 무슨 소리야! 그 수수께끼 같은 미소는 뭐고! 니가 무슨 탐정이냐! 아니면 공작을 꾸미는 악덕 귀족이라도 되는 거냐고!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알려고 하지마. 묻지도 마. 단지, 단지, 마족은 아무나 하나~~" 왜 이상한 노래는 부르는 건지.. 일단, 나와 녀석의 방으로 오자, 메데이레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에서 코까지 골고... "황녀 맞냐? 보통의 황녀라면 우아하고, 아름답고 상냥하다 못해서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야지, 그렇지는 못할 망정 보통의 아가씨도 하지 않는 코를 골고 자다니! 난 이래서 이런 애들이 싫다고!"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닐까 싶다. 너는. "프라운. 그러지 말라고. 그럼 난 여기서 애랑 잘 테니까, 넌 저기 네 침대에서 자." 아.. 빨리 발 씻고 자야.. 어라라, 왜 그렇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냐? "절! 대! 안되는 일이야! 차라리, 내가 이 꼬마랑 자겠어! 이 꼬마가 너 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래!" 이봐. 코까지 골고 자는 애한테 무슨.. 그리고 너같이 사상이 불순한 놈에게 뭘 맡겨? 농담이 심하군. 학생. 안되지. 안돼. "아무일 없을 테니까.. 뭐, 그렇게 못 미더우면 셋이 같이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잘래?" "그게 좋겠다!" 반짝거리는 눈은 대체... 설마, 네 놈.. 늙은이 주제에 로리콤(로리타 콤플렉스 :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변태..)아냐? 으.. 싫다. 싫어. 앞으로 경계 해야 하겠어. 저 놈, 나랑 동료가 되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뭐야? 요즘이야 대륙에 사악한 기운이 사라져서 마족이 순해진 편이지만, 이놈은 고위 마족이고.. 그렇다는 건.. 음. 역시 애들은 내 손으로 보호해야해! "라플. 자?" 한 시간 째, 라플 자냐고 물어 보는 미친 놈은 너 밖에 없어. "못자고 있잖아. 네 녀석이 자꾸 불러 대는 바람에." 프라운 녀석을 어떻게 멍석에 말아서 기절 시킬까 고민이군. "저, 라플. 절대 다치지마. 너무 아팠단 말야. 그리고... 다른 마족들도 아파했을 꺼라고. 알겠어?" 모르겠다 임마. 내가 다치는 거지. 어떻게 그걸 막아보냐? "알았어. 이젠 제발 자라. 응?" "너... 우리 마족을 버리지마. 알았지?" 버려져야 버리지! 젠장, 생각 같아선 다 버려버리고 싶다고! 하지만, 마족도 착한 놈, 나쁜 놈도 있고, 이푸드처럼 의외로 마을 주민을 생각해 주는 영주도 있는 데다가, 숲지기 아저씨처럼 자연 환경을 금쪽같이 사랑하는 놈도... 뭐, 별 놈이 다 있지. 개중엔 인간과 거의 유사한 놈도 있다고 하던데... 그러니.. 죽일 수가 없잖아. "그래. 약속할테니, 제발 이젠 자자. 응?" "응." 그 날, 저녁. 간만에 편하게 침대에서 자나 보다 했던 기대를 완전히 개박살내고, 메데이레나와 프라운, 나는 바닥에서 추운 돌의 한기를 마음껏 느껴가면서 잠들었다. 덕에, 다음날 아침, 감기와 함께 시작했다. "으엣취!" "젠장.... 엣취." 상태는 비교적 내가 제일 양호했고, 아예 우리 황녀 나으리는 자리에 들어 누웠다. 결국 내가 침대 하나를 더 들여 놓았고, 프라운 녀석은 제일 가상에서 콜록 대면서 쓰러져서 빌빌 댔다. 묘하게 인간틱하단 말야. 마족도 감기에 걸리나? "너.. 왜 감기 걸렸냐?" "그야... 추운데서 자면 다 감기 걸려. 이 내가, 마법 거는 것도 잊다니. 쯔." 그렇다. 최근에 깨달은 것인데, 마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만능은 아니라는 것. 음... 이 담에 마족 탐구기 같은 걸 써 내면 재미있겠어. "자, 그럼 나는... 또 바느질이냐.. 젠장." 그렇다. 다시 이곳에 돌아온 이상, 신성한 노동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젠장. 젠장. 게다가 나는 저번에 도서관에서 쓸데 없는 책만 찾아 다녀서 신전에 대한 아무런 상식이 없었다. 가만, 그래! 책! 이제야 기억해 내다니, 나도 어지간한 건망증이군. 혹시.. 이게.. 치매? "음.. 여기 있군." 생명의 서는 이쪽이 아마도 번역본? 내지는 필사본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일단, 내용은 별 거 없었다. 태초의 생명의 신비라는 명목 하에서의 성교육(姓교육 ; 대체 왜 이런 게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성씨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는가라니.. 쯔.) 과 그 외에도 문명의 이음과 충돌 같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이건 모 박사가 주장한 논리와도 부합되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 다른 문명을 가진 민족이 충돌하게 된다.. 이런 거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과 나바간에는 대판 싸웠잖아? "흠... 어디보자. 어? 마왕 제전?" 이런 것도 있군. 마왕 제전은... 유쾌하고 재미있는 쇼. 라니, 이 필자는 대체 뭐하는 놈이야! 아... 절차는 별 거.. 어라라! 3대 대마왕, 마법과 코믹의 대마왕 라플! 왜 내 이름이 여기 있는 거야! 아니지.. 그보다.. 여기 이 백지 들은.. 설마, 설마.. "새겨지고 있는 거다... 이런 대단한 일이." 어떤 마법사도 이런 책은 만들지 못한다. 과거의 일을 기록하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미래의 일이 그대로 기록될 수 있냔 말이다. 그리고 종이도... 여분이 한장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보면 볼 수록 늘어 있으니.. 그래. 이 책은 이상한 책이라고 치부하고, 일단, 신전의 가을제에 대해 조사해 봐야지. 뭐, 없는 게 없을 거 아닌가? "있다!" [신전의 가을제, 즉 신의 은총을 받을 자를 뽑는 의식은 과거 단 두 번 행해졌을 뿐이다. 이는 마왕 제전과 때를 비슷하게 하며, 마왕 제전이 여름 늦게 행해지고, 바로 이 행사가 가을에 시작된다. 처음의 신전의 가을제에서는 총 8인의 에네브 계급이 참석했으며, 이 중 오직 한 명만이 살아 남았다. 그리고 그는 대신관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고, 떠도는 방랑자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되지 못한 데에는 그 때 죽은 7명의 에네브들의 가문 힘이 막강해서 였으며, 이는 그로부터 200년 뒤에 시행된 가을제에도 비슷하게 재현된다. 역시 이때는 4인의 에네브 계급 중, 단지 1명 만이 살아 남았으며, 그는 무사히 대신관의 자리에 오르지만, 때마침 나바스와 전면전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되고 대신관은 처형 당했다.] 헤.... 할 말 없을 정도로 어이 없잖아! 그럼 된다고 해도 좋은 게 아니잖아? 비록 샘플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리고 그 다음 기록은 없군. 가을제에 대해 어떻게 치룬 다든지 하는 건 없잖아? 다 온천에 들어가듯이 머리에 수건이랑, 얇은 신관 복만 입고 들어가서 광합성 하고 나오는 건 아닐꺼 아냐! "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괜시리 머리도 아픈데 더 혹사 시켰군. 앞으론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야 겠어. 일단, 내일 아침이 되면 프라운 녀석도 좀 좋아질테니 물어 봐야지.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녀석 말이 묘하게 여운이 남어. 정말 신의 성력이라면이라니. 그럼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아냐? 아무래도 나보단 오래 산 놈이니.. 쯔. 율지스랑 세이 녀석도.. 조심해야 할텐데. 그래. 살린과도 의논해 봐야겠어. "웅.. 웅. 아플리야... 이리와. 응..." 프라운 녀석! 무슨 생각을 하고 자는 거야! 정말이지... 애들 정서에 안 좋게 시리. 응? "메데이레나, 일어난 거야? 안 아파?" "아파... 근데... 프라운 오빠, 좀 상태가 이상한 거 같은데? 저 튼튼한 오빠도 아플 수 있나 봐?" 하하하. 나도 어제 알았다. "그래. 다 나으면 내가 잘 아는 어벙한 콤비 소개 시켜 줄께. 살린과 케빈이라고... 하여간 재미있어. 뭐, 흑도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녀석은 바쁘니까. 그래도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곤 하지." "응. 라플이랑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아. 나 잘래." 자라 자. 젠장. 요즘 내가 유머감각이 넘치는 군. 싫다. 이젠 나도 점잖은 노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명의 서에 따르면, 내 이야기도 나와 있는데.. .그럴 걱정은 하지 말래. 젠장. 나이 먹는 약은 아무도 개발한 적이 없으니까.. 헤유. 여하튼. 내 신세도 딱하디 딱해. 24-1. 가을제 그건 일종의 놀라운 빛이 내리는 마치.. 그래요. 신이 내려온 거 같았습니다. 그 환한 빛은 나의 폐부를 시원하게 해주고,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했는데, 맞다. 그건 천사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역시 대신전에서는 신이 사나 봅니다. 맞아요. 틀림 없어요. 그러니까, 전 신을 계속 믿습니다. 설령 보이지는 않아도, 그의 증거가 세상에 나타나 있으니까요. -노인의 증언- 바보 둘이 다 나아서 그들을 데리고 살린이 있는 수도 분점 신전에 가게 되었다. 여긴 마법 학원 소속이기도 하지만, 대로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용하곤 했다. 살린을 본다는 것 외에도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그 확률 1명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걸 연구하러 간 것이다. "메데이레나가 못 온게 서운하네. 안 그래? 그렇게 놀고 싶어 하던데.. 쯔. 역시 애들은." 프라운. 네가 기절시키고 온 거잖아! 녀석이 병이 아직 낳지 않아서 못간다고 했더니 울어 젖히는 메데이레나를 무식하게 힘으로 패고 묶은 뒤에나온 거 아니었어? 입에는 실어증 마법 까지 걸어주고 말야. "... 난 가끔, 네가 존경스러워." "훗. 원래 친구 사이엔 존경이 있어야 우정이 싹뜨는 법이지." 씨를 뿌려야 싹이 트지. 이 바보야. "어서 오십시오. 치료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저희 신전 특제 약을 원하시는 겁니까? 뭐든지 말씀만 하시죠." 생글거리고 웃는 카운터의 아저씨를 보면서, 여기도 묘하게 상점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지울 수는 없었다. "저흰 대신전의 에네브인 프라오니스. 이쪽은 같은 에네브로 쿠릴츠라고 합니다. 여기 에네브이신 살린님을 뵈러 왔는데요?" 나의 스마일 어택이 유효하다면, 저 사람은 우릴 안내해 줄 것이다. "아, 이리로 오시죠." 그 사람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뭐랄까, 녀석이 열심히 일하는 삶의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살린은 속속 들이 들어닥치는 병자들을 보고 있었고, 케빈은 사람들을 나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 살린!" 내가 쪼르르 달려가자, 녀석은 이내 나를 바라보고 생긋 웃었다. 저 녀석은 무지 착하니까 통과할지도 모르지. "아, 프라오니스! 무사했구나. 걱정했어. 듣기론, 너가 무슨 병을 앓아서 휴양하러 갔다면서?" 케빈이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그게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든지, 암이라든지 하는 건 다 거짓말이지?" 당연하잖아! "당연해. 설사 게릭슨(몸의 근육이 마비되어 어느날 갑자기 죽는 병)병에 걸려도 아무 말도 안해 주지. 자,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어? 바쁘지 않다면." 살린은 이내 약간 쓸쓸한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길 봐서 알겠지만, 보다시피 미치도록 바쁘지. 사람들은 계속 밀려들고.. 이젠 각종 병들이 판을 쳐. 저번엔 홍역에, 수두에, 페스트까지. 각양 각색의 병들이 돌고 있다고. 다행인 건.. 아직 전염병은 그리 많지 않아." 너가 예로 든 게 다 전염병이잖아? 무섭구나. "역시, 무슨 이유가 있나?" "그럴꺼야. 정상적으로 이렇게 동시 다발적으로 질병이 발생할 일이 없으니까.. 사실 여기 환자는 작은 편이야. 내가 알기론, 성의 북쪽에 이상한 신전이 생겼는데, 거기서도 환자를 받는데. 효과가 아주 좋아서 사람이 늘고 있다는데...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냐." 에... 그거보단, 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넌 정말 좋은 놈이야. "에. 그거보다, 사실 오늘은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너, 가을제에 대해 알고 있어?" 녀석은 계속 환자에게 시선을 둔 채 미소지었다. "그럼.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걸?" 뭔가 단단히 잘 못 알고 있는 녀석아냐? 케빈이 갑자기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열변을 시작했다. "그래! 맛난거! 신전 생활 3년만 하면 미각이 굳어버린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선택받은 거 아니겠어? 좋아. 좋아. 우린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는 걸 증명해 보이는 거야!" 그게... 그렇게 되냐? "음. 케빈. 정말 살린은 죽을 수도 있다고." 둘은 동시에 나를 바라 보았다. 프라운이 싱긋 웃으면서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가을제란 것이 이렇게 저렇게 된 이야기라고 설명하였다. "어때? 맛있는 걸 먹고 죽으면 좋긴 하겠지만, 밥이 넘어가겠어?" 살린은 생긋 웃었다. 어라라, 웃어? "아, 그거라면. 기권할 생각이야. 몰랐어? 그거 기권해도 된다고. 기권하면 다음대에 장로 비슷한 지위를 받고.. 그러니까, 다음대의 에네브 관리를 맡게 되는 거야. 사실 이렇게 환자가 많은 데, 그런데 신경 쓸 여유도 없고 말야." 살린! 넌 역시 좋은 놈이구나! 그리고, 왜, 왜! 나와 프라운은 그런 걸 몰랐던 거지? 그 노인네 마치 우리에게만 말해주는 거 같더니, 이 놈은 알고 있잖아! "글쎄... 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다른 에네브가 그렇게 생각할지는 미지수지."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흠.. 그래? 난 여기 있을 꺼니까.. 그리고 케빈도 있잖아? 나보단 너희가 더 걱정이라고. 너희는 대사제님이 결정해서 된 거 아냐? 그런 경우는 흔치도 않고.. 경력도 없는데. 다들 수군거리더라, 너희 중에 하나가 다음 차기 후보자라고." 설마, 그럴리가... 살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주었다. 그의 설명을 듣다 보니, 그가 알게 된 경위는 그의 사촌이 예전에 여기서 신관을 하시던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이것 저것을 들었다나? 하긴, 나처럼 생판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난 살린이 되는 편이 좋을거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놈들보단 너가 제일 희생감이 높고, 훌륭한 사람이잖아?" 살린은 조용히 웃었다. 역시, 대단한 놈이다. "틀려. 넌, 용사잖아. 난 너가 진정한 구원기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라플의 예언처럼 말이지." 바보야... 넌 라플이 나라는 걸 모르잖아. 그리고 그건 ... 그건... 그래. 그렇지. 구원기사. "...난 아냐. 누군지는 알고 있지만, 이제는 왜 그런지도 모르겠어. 살린. 그리고. 난 절대로 구원기사가 될 수 없어. 그 점은 명심해. 일단, 이 질병에 대해서 수상하다고 전해진 곳이 그... 병원이라면서?" 살린은 이제 하얗던 신관복이 피로 물든채로 간단하게 빵을 씹기 시작했다. 나와 프라운에게도 권했지만, 우린 싫다고. "응... 하지만,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지. 그리고.. 각처에서 사람들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수상하고... 어쨌든 조심하고." "그래. 알았어. 가자." "그러지." 프라운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웃기는 일이지. 이른바, 어둠의 종족인 마족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뛰어 다니고 말야. 쯧. "여기 인가? 별로 별 다를건 없군." 프라운은 평범한 갈색 벽돌로 지어진 집 앞에 섰다. 그래, 확실히 평범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숫자는 좀 많고, 그 외에는 거의 이상한 점이란 걸 찾을 수 없었다. 뭐가 문제지? 자, 벽돌의 색은 정상이야. 음... 돈 많군. 이 벽돌 비싼 건데. "너, 지금 벽돌하고 사랑하냐? 왜 거기서 인상쓰고 있어? 일단, 좋은 생각이 났는데, 어때?" 좋은 생각이 나? "프라운. 그게 뭔데?" "우리도 환자를 데리고 와 보면 되잖아? 그럼 의심받지 않고.. 뭐, 신관복은 벗어야 겠지만. 메데이레나... 그녀를 데리고 오는 거지." 흠. 그런 방법이 있군. 하지만 말이지. 과연 애를 데리고 그런 짓을 생각해 내다니, 너가 무지 나쁜놈이고 사악한 놈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차라리 내가 할께." "그래. 그러지." 너무 쉽게 허락하는 걸 보면.. 이런 상황을 유도했다는 건가? 이런 사악한 마족 쉐이를 봤나! 하여간, 이런 놈들은 다... 동쪽으로 여행을 보내야 한다고.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나요?" 일단, 카운터 아가씨는 합격이군. 아무데도 수상한 데가 없고, 예쁘기까지 하잖아? 후훗. 좋아. 좋아. 뭐, 카운터 아가씨가 음모와 관련이 있을리가 없지만 말야. "아 예. 몸이 막 쑤시고 아파요. 그리고 머리도 좀 울리는 데다가.. 아, 그래.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어요." 이건 최근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인데, 살린을 조져서 알아냈다. 흐흐흐. "오, 저런. 그거 요즘 많이 도는 가벼운 감기 증상이에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여기 이쪽으로 쭉 들어가시면 줄 선 사람이 보일 거에요. 여긴 처음이신가요?" 있다는 것도 오늘 알았다. "예. 이쪽은 제 친구라서요. 같이 가야 해요." "예. 그러세요." 휴. 일단, 상관은 없다는 건가? 특이하네... 설마, 여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곳 아냐? 그럴 수도 있고... 갔더니 꾀병입니다. 그러면 곤란한 점이 한 둘이 아니라고. 젠장... 살린이 힘들게 일하는 게 불쌍해서 원인을 찾으려고 했더니... 그리고 만에 하나 키히가 개입되어 있다면 내 책임이 크잖아? "사람이 많은 편이네? 모두 너랑 비슷한 증상인 걸로 보인다 야." 그건 그래. 그리고 여자들 숫자가 더 많고... 음. "그래... 그런 거 같군. 여긴... 아무래도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이는데 말야." 프라운은 인상을 쓰고 있는데, 마력을 탐사하고 있는 중인 듯 했다. 정말 여기 적이나 괴물과 관계가 있는 곳이라면 마력이 느껴지긴 하겠지. "흠... 깨끗하군. 잘 못 짚었나?" 나도 깨끗하다는 걸 느끼고 있긴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더 미친놈 취급을 받을 테고.. 어쩐다냐. 앗, 그러고 보니 살린에게 생명을 노리는 놈이 있다는 걸 이야기 해주는 걸 깜빡했다. 으... 정신을 대체 어디다 놓고 다니는 거냐. "예. 라프님. 들어오세요." 내가 쓴 가명이다. 흐흐. 그냥 글씨 하나만 빼도 저런 발음이 나오니까... 프라운은 내 뒤를 쫄래 쫄래 따라와다. 방문을 열자, 작은 사무실 같은 곳에 아주 아주 잘생긴 아저씨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본 적 있는 놈이었다. "!" "예. 어디가 아프신 건가요?" 못 알아봤나? 그럴리가 없어... 창졸지간에 스쳐가듯이 봤다곤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분명 키히 뒤에 있던 사람 중 하나야! "....어디서 뵌 적이 있는 거 같은데요?" 아주 떠듬거리면서 말하자, 그는 살짝 웃었다. "물론이죠. 설마, 당신같은 은발이 흔할리는 없으니까. 여기까지 걸어오시다니.. 대체 목숨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는 되나 보죠? 이렇게나 수상한 곳에 단신으로 오다니..." 프라운이 피식 웃으면서 일어섰다. 바야흐로 한 판 붙을 분위기군. "어리석군. 넌 마력도 느껴지지않는 걸 보면 내 공격을 일초라도 막을 수 있을 거 같나?" 그래! 바로 내가 그 말을 하고 싶었다고! "공격? 하하핫. 이봐, 형씨. 자네가 여기서 마법을 쓰면 나 혼자만 피해를 입을 꺼 같나? 그리고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 게 좋아. 내게는 많은 숫자의 인질이 있으니까. 그리고... 너 말인데... 어리석군. 내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을 꺼 같아?" 그것도 그렇지만.. 설마, 마왕과 마족이 앉아서 당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텐데. 앗, 이 사람은 내가 마족인 걸 모르는 구나! 24-2. "그럼, 무슨 방비를 해 두셨는지 보여줘 보시지." 프라운, 입에서 불은 뿜지 말아줘. 의사로 분장한 키히의 꼬봉은 방그레 웃었다. "그러지. 그럼... 잘 있으라고!" 갑자기 의사가 앉아 있던 의자가 휭 돌아가면서 아래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방에서는 기괴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뭔가 긁고, 맞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뒤에 멎었다. "뭐지?" 프라운이 인상 긁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문을 열고자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사뿐하게 열렸다. 그리고 있는 건 돌... "같혔군." "그리고 무너 뜨리면 끝나는 거 아냐?" "천만에. 그렇게 녹녹한 상대가 아냐. 아마도... 우릴 실험 대상으로 삼을 모양인 듯 하군. 잔머리는 잘 굴러 가는 놈인가 본데? 마력을 쓸 줄 모르는 대신.. 아마도.. 학자인가봐. 인간과 마족을 이용한 괴물 만들기를 주도한 사람일런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보다, 지금은 우리 도망가는 게 문제 아냐? 여기 있다간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고. "다른 사람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주로 환자들 말야." "글쎄. 만에 하나 여긴 그냥 인간에 대한 연구만 하는 곳이라면, 아마 수상하긴 해도 마법을 쓰진 않을 꺼야. 뭐, 지하 깊은데서 반장력을 펼치고 실험하면 몰라도. 자, 어쩔래? 뚫고 나갈래? 부시고 나갈래?" 둘다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거 같은데... 어쩐다. 공간 이동으로 쉭하고 사라지는 방법이 있긴 한데... 아직 여기에 대해 많은 걸 알아내지도 못했단 말야? 그리고 오... 오... 알고 보니 이놈 완전히 바보구나! "자, 이리로 가면 녀석이 있는 데로 갈 수 있을 꺼 같지 않아? 여기 의자가 지나간 자리에 친절하게 구멍이 나 있는 걸?" "그렇군.... 함정이면 어쩌지?" 프라운. 걱정도 팔자군. 그럴리가 없잖아. 좁다란 구멍에는 온통 흙이 투성이라, 빌린 옷은 이미 형편 없이 망가지고 있었고, 나의 이 아름다운 은발엔 흙이 묻고 얼굴도 지저분 해져 가고 있었다. 프라운 녀석이 뒤에서 투덜대기 시작했다는 건 녀석도 꽤나 기분이 더럽다는 건데... "어라, 왜 갑자기 입을 다무는 거야?" "...입에 흙 들어갔어." 알만하군. 결국, 우리는 그렇게 엉금 엉금 기어서 마침내 빛이 보이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프라운이 감격에 찬 듯 했다. "드디어 도착!" 뭐가 말이냐... 여긴 그리고.. 성의 외곽에 있는 곳이잖아? 더군다나 여긴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인데... 왜 이리로 나오게 되지? "찾았다. 아지트." 바로 정면쯤에, 오두막으로 지은 건물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틀림 없이 녀석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곳이다. 왜냐? 마력이 느껴지는 게 장난이 아니거든. 근데.. 왜 이런 한적한 곳에 있는 거냐? "이런 데서 살다니, 악의 조직도 꽤나 빈곤한 모양이지?" 프라운. 모든 걸 네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말이 말이지, 그냥 악의 조직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데... "글쎄...어떻게 할래? 골라봐. 정면 돌파, 우회 공격, 잠입 수사. 어떤게 좋겠어?" 프라운은 잠시 고민했다. "정면 돌파. 가서 꽃이라도 줘야지. 자, 가볼까나?" 녀석은 길에 핀 민들레 하나를 꺽고 내 손을 잡고 씩씩하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안에서는 사람 소리가 계속 나고 있는 걸 봐선, 아무래도.. "나중에 오면 역시 안되겠지?" "당연하잖아? 겁 먹은 거야? 그 때 네 녀석이 죽을 뻔 한 걸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고." 그러냐... 난 잘 모르겠는데. "너희들은!" 문을 때려서 알아차리기 전에 녀석이 먼처 알아차렸다. 바로 옆쪽엔 뭔가 종이를 든 녀석이 서 있었고, 녀석의 머리는 은발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 때 키히 옆에서 이죽대던 바보가 아닌가? 저녀석... 때문에 난 더더욱 맞을 뻔 했다고. 알기나 하는 거냐! 이놈...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 잘 만났다. 이런 데 있다고 모를 줄 알고!" "어떻게... 알았지? 아니. 뭐, 상관은 없겠지. 그래. 여긴 왠 일이지? 차라도 한 잔 하러 왔나? 여긴 내 처소야. 보다시피. 원래는 이곳이 내 집이 아니지." 흠.. 그런가? "들어오라고. 적어도 차정도는 줄 수 있으니까." 근데.. 이런 화기 애애하진 않지만, 차를 얻어 먹을 정도로 우리가 사이 좋을 일이 없잖아? 문을 열자, 안에는 그 때 본 그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있고, 아까 도망친 그 의사도 있었다. 당연히 놀라는 눈치였다. 병신. 그것도 도망이라고 치냐... "앉아." 방은 아주 검소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키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랄까? "당신들.. 왜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지? 뚜렷하게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키히의 목적은 좀 황당하잖아? 그러니.. 당신들이 그녀를 따르는 이유를 모르겠어." 소년은 프라운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작게 한숨쉬면서 말했다. "난... 그분의 제자야. 원래 어렸을 적부터 거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래도.. 그래도 그 분이 나에게 잘 대해주시고.. 그래서.. 아주 많이 좋아하는 분이야. 그래서 따르는 것 뿐. 다른 이유는 없어." 제자? 제자가 또 있었나? 키히 녀석... 제자는 많이도 거둬 들였군. 재주도 좋지. 내 제자는 율지스와 세이 둘 뿐인 데다가 녀석의 그 멍청함과 바보 스러움은 정말이지.. 대책이 없는데. "좋아. 그럼 다음 질문.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이 복수라면, 이제다 된거 아닌가?" 갑자기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어이, 내가 못할 소리 한 건 아니잖아? "그 녀석도 그 대상중에 하나니까, 끝난 게 아냐. 그리고 거기 프라운이라는 사람도라면서? 뭐, 자신을 죽이기 위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셈이니..." 의사가 비아냥 거리자, 소년은 점점 더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죽을 수 있어. 그래. 그 분이 없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거야. 그러니까, 난 후회하지 않아." 뭐냐.. 이거 뭔가 숨은 사연이 엄청 많은 듯 하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그래.. 뭐. 알아서 해라. 아, 근데, 왜 이번에는 우릴 공격하지 않는 거야?" "아, 키히님이 계시지도 않은데.. 그리고 넌 애꿎게 휘말린 셈이니까. 사실 그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널 죽이게 되면 그 분은.. 정말 미칠지도 모른다고." 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태도가 달라도 되는 거야? 그 땐 거의 죽일려고 하지 않았어? 정말, 사람일이란, 모를일이지. 뭐, 이젠 별 상관 없지만. 가만... "그럼 키히는 지금 어디 간거야?" "아, 알아볼 게 있으시다고 마도로 가셨어... 뭔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만. 아, 넌.. 이름이 뭐야? 프라오니스라면서?" 알면 됬지. "음.... 이런 말 하면 믿을 지 모르지만.. 내가 사실 그 대마도사 라플이야." "나팔?" "라플." "나풀?" "라플! 젠장?! 귀가 먹었어! 내가 키히의 연인이자, 마왕을 봉인했던(지금은 죽였고, 내가 마왕이 되었으니.. 쩝.) 그 위대하신 라플 나으리란 말야! 알아 듣겠어!" 그제서야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이해하긴 한 건가? "농담하지마. 그럴리가 없잖아. 사람의 평균 수명이 몇 살이라고. 하여튼." 내 경우는 좀 질기게 오래 사는 경우다. 왜? 떫냐? 젠장... 프라운....도 오래 살고 있잖아? "아, 맞아. 라플이 맞다고. 엄청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이꼴이 되긴 했지만, 라플이 맞아." 그럼... 프라운이 아주 평범하게 말하자, 그제서야 녀석들은 얼굴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사 녀석이 심각하게 나에게 말했다. "어떻게....! 해부해 봐도 되냐?" 날려 드리지. 의사를 이단 콤보에 박치기 더블 스트레이트로 날린 뒤에 벽에 매다 꽂았다. "휴... 자, 믿어." "...믿을께. 사실 그 나이에 그런 마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니까... 음.. 나는 너가 마왕 인 줄 알았어. 그래서 협조를 구하려고 했던 거고. 그래." 협조? "무슨 협조 말인가?" 그리고 녀석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아주 울먹이는 말로 내게 천천히 말했다. "어으으으엉 흑... 꺽.." 무슨 소리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하지만, 녀석은 계속 울어 버리고 말았다. 젠장. 대마도사 라플, 애들은 패서 말 듣게 하는 게 최고라는 신념을 가진 놈.. 이지. 내가. "제대로 눈물 뚝! 어서 불지 못해!" "어이. 너무 심하잖아? 의사나, 여기 있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될 텐데." 음... 그렇군. 의사를 째려 보자, 녀석은 부운 눈을 슬슬 문지르면서 순순히 말했다. "봉인해달라는 거야. 죽일 수도 없지. 우리 스승이니까.. 너라면, 아마 너 같이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당연히 그 분을 봉인해 버리는 것도 가능할 꺼 아냐?" 그야... 불가능한 일도 있지만... "주문이 너무 황당한데? 그리고 무엇보다, 왜 봉인하려고 하는 거지?" 의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이미 많이 미쳤어요 .예전의 그 상냥한 키히님으론.. 돌아오지 않을런지도 모르죠. 오죽하면 그런 마검을 가지고 별의 별 실험을 다 하겠어요? 그리고.. 그리고.. 예... 라플이 정말 당신이라고 해도..." 해도 뭐? 내가 라플이라는 데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말이지. 쳇. 하여간, 모두들... 정신을 개조해야 한다는 거야.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론 사람들을 가지고 실험하지나 말아줘." 갑자기 의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우린 그런 적 없어요. 시체나, 사람을 이용 하더래도 죽게 하지는 않는다고요. 그리고... 요 근래 돌고 있는 질병. 우리 탓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라고요." 으잉? 그럼 그 가지가지의 질병들은 대체 뭐야? "흠.. 재미있는데? 내 생각이 점점 맞아 떨어져. 좋아. 라플. 가자. 할 일이 있잖아. 아, 그리고 그 키히 봉인 건은...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리고 너희나 조심해. 미치면 적이고 아군이고 없으니까." 그리고 우린 다시 그 곳을 빠져 나와서 살린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프라운은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고, 내 머리는 키히에 대한 생각으로 꽉찼다. 젠장. 이런 때, 맛있는 거라도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만. "라플. 들어볼래? 요근래 일어났던 모든 일들의 원흉은 최소한 세가지가 존재해." 으잉? 원흉이 셋이라니? 이렇게 대단한 일들을 벌이는 사람들이 무려 3그룹이나 있다는 거냐? 믿기 어려운데... "무슨 소리야? 키히 일당 말고 어떤 그룹이 그런 짓을 했단 말야?" "아마... 키히가 하는 일이 하나, 키히를 닮은 쪽에서 하는 일 하나, 그리고... 나머지. 이게 중요하지. 아마, 신전일꺼야." 24-3. 처음하고 마지막은 그래도 명칭은 알아듣겠는데, 대체 키히를 닮다니? 누가? 난 아니고... 가만있어봐. 처음 이 학원에서 본 그 선배... 그래. 키히라고 했던 그 여자, 왠지 아니었어. 지금 자세히 뜯어서 생각해보면, 왠지 얼굴형은 닮았지만, 눈매가 아니야. "좋아. 신전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야?" "흠.. 그건, 그 정도의 병균을 보유하고 있는덴 그 정도 밖에는 없다는 이야기지. 슬프게도 말야. 왕성의 학자나, 의사들도 그 정도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아. 예로부터 갖은 질병을 고쳐온 신전에서는 많은 연구를 위해서라도 그런게 많이 있다고." 하지만, 신전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신전이 뭔가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프라운, 너 뭔가 아는 거 있으면 다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 해 보라고. 나 궁금해 죽겠어." 프라운 녀석은 길에서 파는 사탕은 하나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생긋 웃었다. "그 다음은 나도 잘 몰라. 왜 그러는지, 그리고 키히를 닮은 사람이 왜 그러는지도...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무슨 학교라도 하나 세우지 않겠어? 범죄 분석 연구원이라든지 말야." 녀석의 말을 종합한 결과, 아주 뜻밖의 결과가 도출 되었다. 그건 놀랍게도, 그냥 있다 보면 알지 않겠어? 였다. 역시 늙으면 모름지기,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게 중요한 일 중 하나니까. "응? 라플, 왔어?" 메데이레나는 얼굴이 발개서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몸이 아직도 많이 안 좋은 모양인데 누워서 쉬지. 저 바느질 더미를 보니 대충 짐작은 간다만. "그래. 몸은 좀 어때? 쓰리고, 아프고 그렇지는 않아? 만약 그렇다면 병에 걸린 거니까, 가까운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고." 그녀는 발그레한 볼을 하고선 살짝 웃었다. "응.. 아냐. 많이 좋아졌는걸? 아, 그리고 아까 사람들이 와서 세 사람 분의 신성한 노동이 어쩌고 하면서 놓고 갔어. 해야 된다는데? 왠 바느질이야? 그것도 신전에선 바느질만해?" 그게 바로 이 신전에 웃기는 점이지. 옛날, 고대 신관 중에 테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분업에 의한 효과 창출이라나 뭐라나 하는 헛소리로 많은 신관에게 각자 같은 일을 배정했다. 결국, 그 결과가 우리는 줄창 바느질이지. 뭐. "자, 그럼 밤 새서 하고... 그렇다면 여기 지하실에는 별 게 없다는 걸 다 알고 있잖아. 윽... 찔렸다." 프라운이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 보고, 메데이레나는 조용히 작은 연고를 건네 주었다. 으잉? "이건.. 뭐야?" "응, 나바스 황가에 전해져 오는 신비의 비약. 바르면 낫는데." 야, 바늘 찔린 건 피도 쥐알(참고로, 쥐는 알을 낳지 않는다. 엄연한 포유 동물이다.)만한 피밖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그리고 이런 건 침 안 발라도 나아! "괜찮아. 그런 건 나중에 급할 때 사용하자고. 그래. 메데이레나는 여기 있으면서 이상한 일 없었어?"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없었다는 거군. "응. 별 일은 없었어. 대신... 아, 맞다. 왠 편지가 와 있었지? 편지라기 보단 쪽지 같았지만." 책상 서랍을 열고 거기서 네번 접은 종이 하나를 꺼냈다. 거기 쓰여 있는 것은... 뭐야? "포기해라. 너흰 대사제 따위완 걸맞지 않아라니.. 뭐냐? 그리고 이 칼그림 봐, 왠지 코믹하지 않아? 상대방은 상당히 유머 감각이 넘치는 사람인가 보다." 프라운은 재미있어 하고 있다. 사이코자식. 미친 마족 쉐이. "오, 그렇네요. 여기다가 빛 효과로 다이아 몬드를 찌익 그려 넣으면! 우와! 너무 너무 귀여운 칼이에요!" 그냥 바느질이나 하는 게 왠지 덕을 보는 거 같아. "어이, 라플. 넌 어떻게 생각해? 너무 귀여운 협박장인 거 같지 않아? 저 죽을지도 모르고 이런 걸 보내다니.. 아니면 자기가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건지도 모르고." 음? "너도 뇌라는 게 있기는 있구나. 생각은 하고 있었던 걸 보면? 그래. 프라운. 네 녀석은 어차피 기권이지?" "당연하지. 내가 대사제가 된다고 해봐. 얼마나 웃기는 일이겠어?" 확실히 웃기기는 하다. 마족 녀석이 앉아서.. 아니지. 네 놈은 약간 맛이 돌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어. "좋아. 좋아. 그럼 나도 빠지자. 마왕이 대사제가 된다는 것도 웃기잖아?" "틀려! 그건! 넌 뭔가 잘 못 생각하고 있어!" 갑자기 왠 불길이 타오르냐? 너 지금 뜨거워! "뭐가...?" 메데이레나가 벌떡 일어나서 갑자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왜 너가? "라플! 바보에요! 어차피 마왕이나 대사제의 역할이 뭐겠어요! 그건 바로 신의 음성을 우둔한 인간들에게 전하는 게 아니겠어요? 마신도 신(神)! 대사제도 신의 음성을 듣는 거니, 어차피 하는 일은 같잖아요!" 전혀 다른 거 같은데.. "음. 메데이레나. 그럼 네 말대로라면 귀신도 신이네?" 잠시 그녀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면서 구석에서 삽질을 시도했으나, 벽이 너무 단단해서 그저 긁고만 있다... "왜, 애를 기를 죽이고 그래? 한창 땐데." 허허허...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법이야! 그리고 너가 쓸데 없는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이런 이상한 마족아... "귀신은 신이 아닌줄... 몰랐는데. 뭐, 할 수 없지. 어쨌든 비슷해." 뭐가? 갑자기 뜬금 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랑 이야기 하다보면 내 뇌의 한계를 느낀다고... "뭔지 제대로 말이 정리되면 말해줘... 난 이거나 꼬맬테니까." 녀석은 털썩 주저앉아 검은 오라를 마음껏 뿜어대면서 방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결국 아무 말도 준비해 놓지 않았군... 바보녀석. 3시간 뒤. "자, 이제 그만 일어나자. 눈이다 아프네. 프라운?" 녀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빛나는 눈으로 나를 째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마른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내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기억이 안나! 왜 나에겐 변신술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도망갈려고 했냐.. 상당히 너 답게 쓸모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군. 정말이지. 이젠 나도 몰라... "밥이나 먹으러 가자. 간만에 여기서 밥을 먹는 건데, 왠지 좀 기대도 되고. 자, 메데이레나, 일어나. 저녁 먹으러 가자." 이 녀석은 구석에 잠들어 있었다. "아? 응." 먹는 건 역시 고금을 막론하고 대마왕이나, 대사제보다 힘이 좋군. 뭐, 나름대로 어쨌던, 나완 상관 없지만. 밥이 먹기 영 불편해서 좋진 않지만, 뭐 어쩌겠어? 내가 무슨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에잇. 식당은 북적대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거에 비하면 절대로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아무리 속세와 인연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축제하면 신나고 즐거운 거니까. 뭐, 케빈 같이 평소에 못 먹던 맛있는 걸 먹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가을제라는 거, 굉장한 행사인가 본데?" 에네브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는 사람들에겐 확실히 즐거울 수 있겠어. "프라운, 그렇지만, 꼭 굉장한 행사라고만 생각할 건 아닌 거 같아. 일단 사람들이 이렇게 들뜬다는 건, 사실 매년 했던 행사일 수도 있으니까. 매년 대사제를 뽑지는 않았을 꺼 아냐." 옆에서 갑자기 왠 신관 하나가 눈을 반짝이면서 앉았는데, 그의 옷에 있는 황금 마 "아, 자네들, 새 에네브라지? 난 에네브 중, 피르카엘이라는 사람이야. 모두 피르라고 하지. 하핫. 자네들은 가을제가 어떤 행사인지 모르나 본데?" 당연히 모르지. 이 놈이 그 몇 안되는 에네브 중에 하나로군. "전혀요. 아는 게 별로 없죠. 아직도 교리의 반도 못 외웠는걸요?" 갑자기 피르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하핫. 미안. 그래.. 그렇구나. 훗. 열심히 외우렴. 난 말이지.. 그래. 아기였을 때 이리로 와서 교리 같은 건 하나도 몰라. 그냥 법 없이도 사는 경지에 이르른 거지." "그게 아니라, 사고를 너처럼 많이 친 에네브도 없을꺼다." 또 다른 새로운 얼굴을 한 녀석이 옆에 앉았다. 그는 우리를 보고 싱긋 웃어 주었다. "아, 처음 보는 거지? 난 페레야. 이쪽은 피르. 에네브 계급에 새로 들어왔다는 꽃돌이들이 누군지 보고 싶기는 했는데, 매번 나가서 말야. 저번엔 몸이 아파서 휴양하고 왔다면서? 참 힘들었겠다. 야." 하하하... 기억 상실증도 중증의 병이긴 하지. 일단, 약은 없으니까. "가을제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저흰 아무 것도 몰라서... 살린이 그러기를 맛있는 걸 많이 먹을 수 있다는 말만 해서요. 잘 알려 주는 선배님들도 없고... 그래서." 글썽거리는 눈물까지.. 연기는 정말 잘 한단 말야? 그 실력으로 연극을 해 보는 건 어때? "아! 그랬구나! 저런. 그래. 내가 다~ 알려 주지. 사실, 가을제는 여지껏 두 번 밖에는 열리지 않았다는 거야. 기록에 따르면 그 두 번 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지." 기적? 그런 건 신이 있고, 더 나아가 인간의 강한 의지가 있어야 구현되는 확률 거의 0퍼센트에 가까운 그런 일 아냐? 사실, 이게 일어나는 건 거의 없다고. "기적이라뇨?" 프라운이 똥글똥글한 얼굴로 피르에게 묻자, 그 녀석은 술술 잘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기적. 놀랍게도 첫 번째 가을제에선 그 때 단 하루동안 수많은 사람의 질병이 치유되었지. 두 번째는 전란 중이었는데, 그 때 하루 동안 아무도 다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고 하더군! 단, 신을 믿는 우리 나라만. 그래서 나바스는 수도까지 뺏었다가 다시 후퇴해야 했다고 해... 뭐, 하루 동안 이었지만, 불사신 이잖아?" 흠.. 그런 기록은 나와있지 않은데.. 에.. 역시, 프라운 녀석 웃고 있군. 첫번째 가을제라면 몰라도, 두번째 가을제가 열릴 때는 녀석도 아직 어린 마족이긴 해도 살아 있었을 거라고. "후후후.. 그랬군요. 그럼 이번엔 무슨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 저리들 웅성거리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뭐, 내생각에는 지금 병이 창궐하고 있으니, 싹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뭐, 페레도 그렇게 생각하지?" 피르의 질문에 페르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군요. 저도 그렇게 될 거 같습니다. 아, 전 다먹었는데... 프라오니스. 그만 올라가자. 메디도." 메데이레나의 가칭이 메디... 라고 편하게 부르기로 했지만, 역시 누군지 잠시 생각 좀 해 봐야 하는 군. "이제 알았어. 조각이 다 맞춰졌어." 으잉? 방에 돌아오자 마자, 녀석은 침대를 정리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 "뭐가? 설마, 나 몰래 글자 맞추기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 "메데이레나도 그건 좋아하는 걸?" 음. 취미가 같으니, 꼭 그걸 가져와서 해봐야겠는데? "...그런 거 아냐. 내 말은 신전이 왜 병균을 풀었는지 알겠다는 거야." 헤...? "왜?" "생각 좀 해봐. 늙더니 머리도 굳었냐? 첫번과 두번째는 우연, 그리고 세번째는 필연. 그런거야." 난... 수수께끼엔 역시 소질이 없나 보다. 결국, 녀석에게선 별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다. 젠장! 날 놀리는 게 재미있다 이거지! "어서 일어나라. 바보야. 오늘은 가을제용 옷을 짓기로 했잖아?" 아침 일찍, 햇살을 느끼면서 하루를 상쾌하게 만들기로 결심하기도 전에, 이 썩을 녀석에게 배를 발로 밟히는 수모를 겪고(보통 마족과 마왕의 관계가 이런가? 통탄할 일이다. 노조를 결성해야 해...) 일어나서 옷을 짓는 곳으로 끌려가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상쾌한 아침, 세수도 못하고, 대마도사 라플, 옷 지으러 가다. 꼬지지하게스리. "기다렸어요?" "그럼요! 에네브님은 처음 뵙는데요 뭘. 에네브님들은 자기가 입을 옷을 자기가 지어야 한다는 재미있는 제도가 있거든요." 이상한 제도다. 구제도는 철폐되어야 해. "악법도 법이지. 아, 라플 뭐해?" 너.... 내 생각을 읽은 거냐! 왜 그렇게 싱글 거리는 거야! 재수 없게스리! 젠장. 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용사야. 24-4. "오, 멋지다. 이건 금박이 여러군데 들어가네?" 프라운은 의외로 바느질에 취미가 맞는 듯 했다. 정말 의외지... "그런 거 볼 시간 있으면 수나 놓으라고." 이걸 다한 다음에는 듣기로는 무슨 마법을 적용시켜야 한다고 한다. 오직 자신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여야 한다는데.. 무슨 마법을 걸까? 다른 사람이 입으면 알러지에 걸려서 간지럽게 된다든지, 머리에서 뿔이 난다든지.. 음. 재미 있겠어! "넌 무슨 마법을 넣을 생각이냐? 프라운?" 그 녀석은 갑자기 으 흐흐흐 웃음을 남발하더니 갑자기 바늘과 함께 혼연 일체로 빛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옷을 입는 녀석을..어떻게 그냥 놔두니? 후후후후... " 왠지 묻기 싫어지는데? 약간 싫어진다. "그래서... 무슨 마법을 걸껀데?" 프라운은 몇가지 후보 마법 리스트를 꺼냈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1. 운석 소환 2. 주변에 드래곤 소환 3. 지옥으로 공간이동 4. 3대손까지 얼굴 부스럼 5. 영구적인 임포텐츠 ....등등... 대체... 이게 다 뭐냐. 녀석의 머릿 속에는 뭐가 들은 거야! 얼레레? 누구야! 왜 종이를? 응? "이야.. 이거 대단한데? 너희도 옷에 널 마법을 연구 중이구나? 하하하. 일단, 1번은 곤란하다. 이걸 쓰면 주변에 피해가 가잖아. 아, 국지적 소환이라면.. 상관없겠지. 그리고 2번? 재미는 있겠다만.. 뭐, 드래곤이 그렇게 한가하냐? 그리고 목적이 뭔지를 모르면 곤란하다고. 그리고 3번.. 이건 제일 문제 있어. 옷을 찾을 방법이 없잖아?" 거기에 조언까지 해 주는 당신의 이름은, 아마 같은 에네브의 피르가 아니신가? 옆에 페르님도 등장하셨군.... "아, 프라오니스는 뭘 할 생각이야?" 그냥 소박한 걸로 할래... 저런 거 걸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고. "아니요. 전 별로... 선배님은 뭘 거실 생각이에요?" "아? 나는 말이지! 후후후훗! 옷이 투명해지는 마법을 걸었어! 그럼 간단하잖아? 문제 해결." 그렇군.. 그럼 누가 입든지 말던지 상관 없지. 저 옷은 일종의 표식이지, 뭐, 딴 건 없으니까... 하하.. 그런 방법이 존재했구나? 가만, 그럼 페르는? "피르다운 일이지. 난 영구 보전 마법만 걸꺼야. 옷에 때도 타지 않고..뭐, 다른 사람에게 뺏기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걸... 그리고 얼마나 이 옷을 입겠다고... 무슨 전통이네 하면서.. 뭐, 결국 그래서 가벼운 제재 마법 정도는 걸꺼야. 축소화 마법이라든지.. 그런거." 하나도 가볍지 않아! "프라오니스도 재미있는 걸 많이 생각해 두라고. 우리에겐 이번 축제는 각별하잖아?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모두 들뜨고 말이지. 후훗. 아, 그 얘긴 들었니? 이번에 차기 대사제 후보를 뽑는다면서? 뭐, 그렇게 위험한 일이라면 빠지는 게 현명하지. 너희는?" 당연하잖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차라, 프라운이 먼저 나를 앞질렀다. "전 안나가는 데 이 녀석은 나가요.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거든요. 지금 포기하면 쪼짠하고 더럽고 치사한데다가 제자들에게도 본이 되지 않는다면서.. 후훗." 그런말 하면 그만 둘 수 없잖아! 젠장... 어쩌라고. 피르와 페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살린도 포기한다고 했으니, 너하고 그 녀석만 남겠군. 조심해. 그 놈.. 의외로 집요해. 원래는 지가 무슨 살린의 라이벌이라고 우기고 다녔는데... 큰일인 걸?" 혹시, 그 때 우리에게 검 휘두르는 멍청한 녀석들을 말하는 건가? 뭐, 꽤... 웃기는 놈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살아 있었네? 사실 거기서 살아난 것도 대단하다고. 아무리 숲의 괴수들을 프라운 녀석이 적당히 처리했지만... "걱정마세요. 프라오니스는... 무적이니까요. 사실 그의 여인이 더 대단한지만." "에엑!"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단하군." 프라운 녀석, 쓰잘데기 없는 소릴 하고 있어! 곤란하잖아! "아, 그렇구나. 공작이니까.. 애인이 없을리도 없지. 걱정마. 대사제는 평생 결혼을 할 수는 없지만, 첩이나, 외도는 상관 없다고. 그러니...." "시끄러! 나 갈꺼야!" 뒤에서 프라운이 중얼거렸다. "지금은 애인이랑 교전중이거든." "안됬네..." 우씨. 저 도움도 하나도 안되는 마족 녀석. 으... "라플, 라플. 이것봐~ 또 쪽지가 왔어! 꼭 친구들이랑 장난치는 거 같아~" 이번엔 해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포기해라, 그러면 살려주마라는 아주 식상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봐... 누가 이런 걸 하냐. "프라운이 오면, 여기다 같이 그림 그려야겠다." 참아줘... 너 왜 안가냐! 성으로 돌아가라.. 으흐흑. "아, 라플. 벌써 여기서... 왜 울고 있냐? 뭐, 괴로운 일이 있다면 내게 상담하라고. 언제든지 약점을 잡아서 놀려 줄테니." 절대로 그런 괴로운 일을 너에게 상담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겠다. 난 적어도 아직 이성을 잃지는 않았어. "이거, 또 왔어." "흠.. 별 거 아니네. 그보다, 오늘 저녁엔 드디어 빅 이벤트가 있어. 에네브 전원과 대사제와의 만찬이야." 왠지... 불길한 예감이 새록새록 드는 걸 어쩌란 말야! 으... 가기 싫다. 왠지 싫어. 싫다고 싫어! "어서 오게." 거대한 식탁에는 총 6인의 에네브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제일 앞의 자리에는 정 중앙에 대사제 할아버지가 또아리를(뱀은 아니지만, 기분이 더러우니까...) 틀고 앉아 있었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것이 먼저 앉아 있다니.. 건방지군. "하늘을 수호하는 자, 빛의 광명을 비추우는 자, 그리고 영원하신 자애로 우리를 돌보시는 그 위대한 자의 이름을 받드는 영원한 첫번째 종이시여, 영원한 축복을 받으시옵소서." "뻐끔... 뻐끔.." 모른다.. 난, 저런 인사말 따위는 전혀 모른단 말야! "신의 종의 하나로, 그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에 비추우는 자들이여, 이리 와서 앉으라." "예. 대사제님." "뻐끔.." 헌데 놀라운 것은 프라운은 그 인사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나만 모르는 거지? 언제 가르쳐 준 기억도 없는데? 자리에 앉자 마자, 녀석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너, 어떻게 아냐?" "응? 예전에 한 번 본 일이 있거든..." 언제인지 물어보기 겁나서 관둔다. 이 녀석이 예전이라고 하면, 정확한 연대를 모른다는 거고, 그럼 나보다 더럽게 오래 산 이 녀석이 모를리가 있겠는가? "그래. 다들 인사는 했나? 저기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이번에 새로 에네브가 된 사람이지.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 되었지만, 그래도 잘들 대해주게." 너가 그랬잖아! 안 그랬으면, 지금쯤 학원의 특실에서 푹 쉬고 있을 꺼라고! 나보다 나이가 한 30세 정도 어려 보이는 그는 천천히 손짓을 하자, 음식이 실려 나왔다. 뭐, 화려 했다. 케빈 녀석이 있었으면 무지 좋아했겠군. "음.. 오늘 내가 자네들을 부른 것은, 이번 가을제에 있을 에네브 행사때문이네. 이번에.. 그래. 이번 행사에 자네들 전원이 참석하게! 이건 명령이네!" 갑자기 수저 뜨기도 전에 본론으로 직격? 그리고.. 동생씨! 그건 너무하잖아? 여기 프라운 녀석은 그 빛인가 뭔가를 맞기만 하면 돌이 될 꺼라고! 그럼 재를 모아서 처녀의 피를... 아, 이건 흡혈귀 용이지? 그럼.. 마족은 어떻게 살려야냐... "저.. 하지만, 환자들을 그렇게 오랜동안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대사제님! 부디!" 살린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뭐, 그럴 수도 있군. 이 녀석은 그럴 수 있지. 워낙에 환자들 돌보기를 뭐 같이 아니까.. .근데, 그렇게 오래라니? "저... 하루만 같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잠시 대중은 조용해 졌다. 대중이래봐야 겨우 7명이지만. "흠.. 흠..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군. 행사는 말이네... 삼일 내내 치뤄지지. 자네들 모두는 대홀 옆에 있는 신의 방에 들어가서 삼일간을 금식기도하는 거네." 아, 알았다. 생존자가 적은 이유. 굶어 죽었군. "저.. 포기 할래요." 너무 손쉽게 나는 포기했다. 늙어 봐! 굶는 건 싫다고! 게다가 늙으면 밥이 얼마나 그리운지 너희는 모를꺼야. 너무해. "안되네. 전원 출석이야! 그리고 여지껏 죽은 이유는 공포에 질려서 였지, 절대 무슨 일이 있어서 죽은 건 아니야!" 결국, 할아버지가 소리를 지르자, 모두는 갑자기 일제히 소리 질렀다. "공포라니, 그런 건 듣지 못했습니다!(피르)" "역시 환자를 두고 갈 순...(살린)" "약속에 차질이 생기는 데...(페르)" "전 갈겁니다!(아마도 쪽지 보낸 놈이군.)" "공포라... 재미는 있겠지만, 삼일씩이나, 저 놈의 히스테리를 어떻게 견디라고!(프라운)" "밥 줘!(나다.)" 할아버지는 결국 큰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시끄럽다! 그러고도 위대한 에네브란 말인가! 먼저, 피르군! 공포란 자신과 싸우는 거네! 자넨 자신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나!" "예. 이런 퍼펙트한 저와 싸워 이길 상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이놈도 싸이코였어. "흠... 그래도. 아, 그리고 살린군. 환자는 다른 신관들을 더 파견할꺼니, 걱정말게." "할 수 없군요... " 살린 녀석...약하군. 끝까지 밀어 부치지 말야. "그리고, 페르. 약속이라니?" "아? 아? 아? 하하핫.. 뭔가 착각이시죠? 하하하." 옆에서 프라운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여자 문제라고.. 하하하. 너, 신관 맞냐? "그리고, 엘베르스군의 자세를 본 받게! 그리고, 쿠릴츠군은... 가게. 어차피 따로 방을 쓰니, 상관 없잖은가?" "가죠." 너.. 너무 간단하게 결정하잖아! "마지막은.. 흠.. 밥이라.. 밥.. 음.. 음... 이건.. 곤란하네. 할 수 없군. 아주 조금씩이지만, 자네가 원하는 걸 보내 주도록 하지. 뭘 원하나?" "유동식, 미음, 죽... 그 세가지 중에 하나면 됩니다. 아, 과일즙도 되는 데요?" 대사제는 잠시 조용하더니 손을 탁 쳤다. "그렇군! 자네들 밥 문제가 해결되었어! 원래 과일은 금식 항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네. 뭐, 그럼 들어갈 때 삼일간 썩지 않을 걸로 가져가면 되는 거지. 그럼 다 해결된 거군." 아무것도 사실은 해결되지 않은 거 같다만... 뭐 어찌되었던, 엘베르스라는 녀석이 우릴 노리던 놈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런 유치한 쪽지를 쓰고 사람을 잘 못 보는 녀석이 무슨 일을 저지른다는 게 더 우습잖아? 그러니... "이제 과일만 고르는 일만 남았네." 나와 프라운 살린은 인상 팍팍 긁고 과일을 사러 나와야 했다. 남들은 지금 배터지게 고기 먹고 있을 때, 우린 이 꼴이라니... 케빈은 단지 한 마디만 했다. "면회 되냐?" 죽일 놈.. 우리가 감옥가는 것도 아니란 말야! 그리고 당연히 될 리가 없잖아? "프라운, 그런데 말야. 나 궁금 한 게 하나 있어." "응? 뭔데?" 녀석이 귤 하나를 유심하게 째려 보고 있었다. 무섭구만. 야, 과일 가게 아저씨, 떨고 있잖어? "그러니까... 그 신의 빛을 받았다는 걸 어떻게 알아? 예전이야 한 사람 살아 남았으니, 이렇다 할 필요가 없지만.. 만에 하나 둘 이상이 살아 남으면 어떻게 할려고?" 프라운은 상큼하게 말했다. "모르지." 역시, 마족은 인간의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뼈가 시리도록 알게 되었다. 뭐, 빨리 알아서 다행이지. 24-5. "우와! 정말 먹을 건 많잖아!" 신관들은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다른 계급들은 먹고, 마시고.. 뭐, 그래도 술은 없지만, 그래도 정말 거의 1년 만에 단 한번, 신의 은총을 되새기면서 노는 사람들이었다. 신이 있음으로 신전이 있는 거고, 신전이 있음으로 이 많은 사람들이 실직자에서 신관으로 어엿하게 탈바꿈 한게 아닌가? "어이, 살린 먹어 두라고. 오, 이거 맛있는 거야! 너 금식한다면서? 자자. 어서 먹어. 먹으리, 살리, 이런 노래도 모르지?" 알 리가 없는 일이다. "살린 녀석... 케빈 말에는 정말 꼼짝도 못한다니까..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지만, 저래서야.. 녀석, 설사로 죽는 게 아닐까 싶다." 프라운, 그렇게 정색하고 말하니까.. 정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너도 먹어 두라고. 이젠 과일 쪼가리밖에는 먹지 못하는 날이 드디어 오게 되었으니까. 바로 내일 부터라고." 나도 안다. 그리고 삼일간 더 퍼질나게 논 뒤에, 바로 감옥에서 우릴 끄집어 내면 차기 후보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뭐야... "뭐라고 해도, 감옥 비슷하다는 건 사실인가 봐." "그렇지." 피르와 페르는 처참한 얼굴로 주절대고 있었다. 쯔... 안 먹으면 후회 할 텐데. 뭐, 중간에 심심하면 공간이동을 해서 뭐라도 먹어야지. 굶어 죽는 건 내 취미에 맞지 않는단 말야. 이런 노래가 있다. 감옥에 갇힌 자는 오직 콩나물을 먹으면서 인생을 곱씹어야 했다는.. 그리고 나서 다시 인생을 한탄하면서 숙주나물을 먹게 해달라는... "아... 저기는 너무.. 하잖아!" 왜 다 죽었는지 알만하다. 다음날, 메데이레나의 눈물 나는 환송을 받고(그녀가 내 옆구리를 가격했다는 것 때문은 절대 아니다) 여섯명의 죽음을 앞둔 용사가 마법 걸린 옷을 입고 간 곳은 바로 물이 반쯤 찬 괴상한 방이었다. "자애의 신이 아니라, 물의 신 아냐?" 프라운에게 인상쓰고 말하자, 녀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꽉 차 있어야지. 물의 신이 되려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반쯤 되다만 신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런 신성모독의 발언을 하면서 나와 녀석은 배정된 방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일단, 아래는 보이지도 않았고, 물 에 돌을 떨어뜨리자, 물은 소리도 나지 않는 거 같았다. 이런 방이 대체 여긴 몇개나 되는 거냐! "깊이가 얼마나 되나요?" "음.. 글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기 최 지하층의 깊이보단 더 깊을 꺼다. 여긴 꼭대기에 속하니까..." 그래. 우리 강당의 위로 올라왔지? 하하하... 대체 여긴 우물이 아냐? "페르... 어쩌지? 너가 소개팅시켜준다는 것도 펑크내겠다." "맞아. 이 장사는 신용이 장기인데." 대체...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오, 엘베르스. 그냥 너가 해라. 왠지 나는 싫다. 녀석은 기차게 물 위로 뛰어 내렸다. 그래봐야 한 뼘도 되지 않는 차이지만.. 그래도 용기가 어디야? "앗! 엘베스르! 넌, 그 방이 아냐! 거긴 빈 방이다!" 녀석은 다시 나와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녀석은, 맥주병이었다. 꼬르륵 잠겨가는 그를 피르가 끄집어 냈다. 벌써 하나 탈락이군. "부럽다.. 나도 이렇게 할까?" 초롱 초롱. "자, 그만들 이야기 하고, 엘베스르군은 저쪽 방에 집어 넣어라." 에엣! 아직 깨어 나지도 않았는데? "저... 지금 넣으면 살 수 없을 텐데요?" "물론이지. 하지만, 시간이 다 되었다. 살고 못 살고는 신의 뜻. 다, 자기가 알아서 신에게 기도하는 거야! 과일은 바구니로 다 들고 있나?" 할 수 없군. 녀석에게 재빨리 정신차리는 마법을 사용했고, 녀석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영 못하잖아? "그럼, 라플. 잘 해 보라고. 난, 여기서 유유히 놀다 갈 테니. 어쩌면... 저 물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지." 무슨 뜻이람? 사람이 죽는 건 질색이라고. 혹시.. 여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찾는 다는 게 불가능 할테니.. 저 아래는 해골이 데굴거리면서 굴러 다니는 거 아냐? "우.... 난 그냥 마법으로 떠 있어야 겠군." 혼자 중얼거리자, 피르가 놀라는 눈치였다. 뭐,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한시간만 해도 탈진이지... 뭐, 나도 안다고. 하지만.. 내가 어디 보통 놈이냐? "좋아. 그럼 들어가라!" 역시나, 나도 방에 들어가야 했다. 바구니는 재빨리 방수 마법을 걸고, 물 위에 띄워 버렸다. 뭐가 자신과의 싸움이냐? 음? "낙서? 이런 곳에?" 이런 때, 낙서의 내용보다, 어떻게 펜을 들고 왔는지 생각하는 내가 좀 무섭기는 하지만, 그런 소소한 것들은 그냥 넘어가야지. 내용은 뭐 별 건 아니었다. 엄마, 미안해.. 이런 이야기부터.... 음. 아주 오래 된 건 글씨가 바래서 읽을 수도 없고. 밑바닥이 울렁 거리는 걸 보니,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그래, 매일 여기서 수영하면서 몸을 단련하는 거야! 옷이 젖는 건 싫으니까, 벗어 놓고! 아죠! 매일 매일 인생의 재미를 찾지 못하면 그건 죽은 인생이다. 맞어. 그 말이 맞어. 그래서 난 이렇게 인생의 재미를 찾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삼일 뿐이지만, 뭐, 그 이상한 빛만 아니라면 사는 데 하나도 지장 없다는 걸 아니까. 물 속에 빠져들자, 아주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물이 아마도 되게 찬 걸 보면... 꽤 깊다는 말이 되는데... 들어가 볼까? 물 속으로 점점 들어갈 수록 뭐, 호흡의 곤란은 느끼지 않았지만, 그래도 점점 사방이 어두워져 갔다. 그래서 라이트 마법까지... 으... 귀찮어. 그래도 어쨌든, 점차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얼레? "어부부부...(구멍이잖아? 옆과 연결된 건가?)" 벽면에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수상해... 가만, 내 옆이 아마도 그... 뭐냐, 엘베...뭐더라? 요즘 치매 증상이 심각하긴 하군. 그래. 어찌되었던 그 유치 찬란 쪽지를 보낸 놈이지? 확실히 물을 점점 헤치고 올라가는 데 왠 시체 비슷한 것이 점점 아래로 내려 오고 있었다. 녀석이었다. 틀림 없군. 재빨리 녀석의 주위에 산소막의 마법을 걸고 위로 헤엄쳐서 올라왔다. 좀 빨리 알아차렸다면... "어이, 살아 있냐?" "케...켁... 켁.." 그렇다. 인간은 그리 손 쉽게 죽지는 않는다. 녀석은 똥그란 눈으로 날 멍하니 바라 보았다. "저기.. 어떻게 된 거야?" "뭐긴. 내가 옆에서 너를 구하러 왔지. 수영 못하는 놈을 여기 어거지로 집어 넣다니.. 대체, 이 행사가 뭐라고. 어찌되었던, 넌 이제 살아 났어. 내가 살려 주기로 결심했으니. 뭐, 과일도 다 빠졌나 보지? 걱정하지마. 내가 여차하면 나가서 사오면 되니까... 음, 분명 옆은 프라운 녀석이 있는 곳이지? 가볼래?"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정오가 되는 군. 아무래도 난 저 위에 있는 창문이 계속 신경쓰인단 말야. 물을 다시 헤치고, 이번에 그 엘베르스녀석을 끌고 나아갔다. 뭐, 산소막이 쳐져 있으니 물을 먹을 염려도 없으니, 수영하긴 쉬웠다. 그리고 이곳에도 역시나, 그 구멍이 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프라운?" "네 탐구정신에 놀라움을 표할 뿐이야. 뭔가 물에 비밀이 있을 꺼라는 생각만 했지, 정작 물에 젖는 게 싫어서 들어가진 않았는데..." "프라운이라니? 이 사람 이름은 쿠릴츠 아냐?" "애칭이야." "아항." 정말 쉽게 납득하는 군. 이 녀석... 이제 보니 약간 바보 같기도 하고 말이지. 천장의 창문을 보니, 아직 정오가 되려면 시간이 좀 남은 거 같았다. "어이, 살린에게 가보자. 그리고 녀석들과 모두 모여서 토의하는 편이 좋다고. 어차피 여긴 삼일간 봉쇄잖아?" "그렇군." 프라운도 함께 물 속에서 동굴에서 동굴로 이동하여, 모두 살린의 방에 모였다. 무슨 회의장 같군. "음... 이렇게 통로가 있다니, 몰랐어." 살린 녀석도 꽤나 놀란 거 같군. "하지만, 너희들은 이동하는 게 거의 무리야. 이 정도 마법을 계속 유지해야 하고..." 프라운이 싸늘하게 말하자, 동시에 엘베르스와 피르와 페르는 고개를 숙였다. 녀석들의 마력으로는 이동조차 거의 불가능 했다. 뭐, 살린도 고작 왕복 한번 하면 힘이 고갈 될 테고.. 개중 살린이 나은 정도니 원. "모두 들어봐. 곧 정오가 될 텐데... 내 생각인데 아무도 살아 남지 못했던 비밀이 곧 밝혀질꺼야. 우리 모두 거기 통로에 있어야 안전할 꺼야." 프라운이 의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오늘은 첫날이야. 설마, 오늘부터 그럴 리가 있겠어?" 아무렴. 정말 신이 아니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신의 정체는 곧 밝혀질 꺼라고. "프라운. 신이 정말이라면 삼일째 되어도.. 아니, 정말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을꺼야. 신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명목으로 죽일 꺼 같아? 비밀을 저 창문에 있어. 저 창문을 잘 보면 굴절되어 있는데, 해가 저 위에 뜨게 되면 바로 빛이 아래로 직격타야. 그럼 아래 있는 인간은 종이가 불에 타듯, 타버리지."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러니... 물 속, 그것도 빛이 잘 안드는 그곳에 있어야 살 수 있어. 내가 모두에게 산소 마법을 걸어 줄테니, 끝난 뒤에 만나자고. 통로는 좁아서 겨우 두 명 밖에는 있지 못한다고." "하지만, 통로가 아니어도 살아남은 사람은 대체 뭐지?" 갑자기 입에서 쓴 웃음이 걸렸다. "이동 마법. 여긴 마법이 금지 되어 있지 않아. 그걸 사용해서 나갈 수 있어." 모두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서둘러서 뿔뿔이 자신이 있어야 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내가 있는 동굴 통로 사이에 엘베르스 녀석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물이 따뜻해 지기 시작했다. 그래... 시작이군. "어 부부부..." 엘베르스가 뭐라고 했다. 눈이 똥그래져가지구는... 놀라긴 아직 이르다고. "부부부부!(자, 봐라! 저것이 신의 빛의 정체다!)" 음... 심각한 일인데 말야. 물이 살짝 데워지나 싶더니 이내 뜨거운 빛이 작열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곳에서 제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 뿐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정말로 신앙심이 높은 사람들은 정말 타 죽었겠지. 이건... "무무무..." 엘베르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정오의 빛은 대략 십분 정도가 되자,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싸우나 온 거 같군. "..."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빛의 정체가 단지 자연의 농간이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자... 그 사람이 이 모든 걸 주도했다는 거니까. "라플. 여기.. 파괴해 버릴까?" "관 둬. 나가서 정식으로 여기의 비밀을 밝히면 그만이야. 삼일간 있다가 나오는 쪽이 더 드라마틱하고. 그리고... 대사제가 이렇게 복수의 후보가 있을 때 어떻게 결정하는 지도 알고 싶고." 왠지 사악하긴 하군. 하지만, 날 화나게 했겠다? 그 점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용서 뿐이냐? 죽도록 패고 싶다. "환자나 볼껄. 실수했어." "어쩔 수 없지. 그 노망난 노인네.. 아, 좋은 생각이 났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래. 이 얼빠진 인간들을 모두 한꺼번에 징벌할 좋은 생각이 났단 말이지. 후후후...기대하시라...대사제. 날 이 물속에 쳐박은 걸 후회하게 될꺼라고. 25-1. 신의 소환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떨어져 내리고 인류의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대를 보살피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삶을 살아라. 난 그저 지켜볼 뿐인 존재이니, 그대들이 만에 하나, 내 힘이 필요하다면, 나의 자식과도 같은 그대들을 위하여 나는 얼마든지 힘을 빌려 줄 것이다. 나는 악마요, 천사요, 위대한 신이요. 하지만, 나의 존재 여부는 오직 그대들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자애의 성전- 우린 그렇게 물 속에서 가끔 술래잡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뭐, 가장 근본적인 이유중의 하나는 모두 경건한 마음이 사라졌다는 거이기도 하고.. 원래 독실한 집안 소생으로 태어났다는 엘베르스 녀석도 아주 이교도 반쯤 되어서 이젠 완전히 프라운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피르와 페르는 서로 나가면 무슨 여자를 꼬셔야 할지를 고민했고, 덩달아 나는 그들에게 좋은 여자 고르는 법을 조언해 주었다. 나이를 많이 산 자의 충고였다. "어이, 라플. 이제 슬슬 나갈 때가 되어 가는데... 대체 너가 생각하는 그 음흉한 생각이라는 게 뭐냐? 궁금해 죽겠어." 프라운 녀석... 기다리면 다 알게 된단다. "알 거 없어. 그리고 이런 건 기업 비밀이라고. 뭐, 너는 협조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너는 이번엔 정말 신의 빛을 받기 싫다면 말이지. 그리고... 아직 관문은 더 남았어. 나가는 건 정확히 내일 아침이지. 하지만, 아마.. 기록에 보면 정말 기적 아닌 기적들이 있었다고.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거 같냐?" 프라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공중에서 발꼬고 앉아서 사과로 저글링 하는 것도 힘들군. 사과는 괜히 가져왔어. 난, 사과 껍질 못 먹는데, 여긴 칼이 없잖어. "글쎄.. 마지막 날엔 정말 신 비슷한 거라도 나왔다는 거야?" "땡." 프라운은 절규했다. 이번엔 너가 당할 차례야. "아직까지 안 나온 신이 지금와서 나올리가 없지. 그건 바로, 신전의 광고 효과야. 요 근래,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 지금 바로 윗대의 신관대에는 나라는 대단한 놈이 있어서 신전의 권위는 땅 아래를 쳤어." 자, 이쯤해서 못 알아 들으면 죽어야지? "모르겠는데." 죽어라. "자, 잘 들어봐. 너가 추론한 거에 따르면 신전이 병을 퍼트렸다면서? 그렇다면 그건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야. 그럼 왜 굳이 그래야 했을까? 약을 빨리 퍼트리지도 않고. 심지어는 잘 치료하고 있는 녀석까지 불러 들였어? 여기서 뭔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어?" 녀석은 손바닥을 때렸다. 그리고 감동 받았다는 듯한 어조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오! 알았어! 그러니까, 그들은 이벤트가 필요하다 이거였군! 우리 같은 마왕 제전에 열 받은 거야!" 땀난다.. "야, 대사제가 마왕 제전이 있었다는 걸 알긴 해도, 그게 정확히 어떻게 치뤄졌는지도 모르고, 이번엔 사상자가 없었단 건 아냐?" 녀석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해. 우리 내부에 적이 있을 줄...! 왜 때려!" 넌 다 좋은데, 너무 앞서 가는 구나. 휴... 나 마왕 안할래. 적어도 하브라이드라면 이렇게까지는 띠벙하진 않을꺼 아냐! 왠지 용서가 안된다고. 이 녀석은. "좋아. 내가 확실하게 다, 이야기 해 주지. 녀석들에겐 이벤트가 필요했지. 떨어지고 있는 신전의 명예를 일거에 올릴 수 있는, 그리고 더불어서 사람들의 관심도 증폭 시키고, 거기에 덤으로 방해자와 함께 걸림돌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거야. 거기엔 당연히 에네브들이 껴 있었던 거지." 녀석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렇지만, 너 정도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은 왜? 더군다나 살린처럼 촉망 받는 인재도 있잖아? 설마, 살아나리라 생각 되서 그런 건 아니겠지?" 아직도 모르나? 유능한 인재는 시기당하기 마련이지. "아마, 그는 살린이 당연히 죽을 거라고 알았을꺼야. 그리고 이곳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아. 여길 보고도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어. 그러나.. 너나 나는 거기엔 포함되지 않았어." 그의 눈은 점점 동그라지고 있었다. 어이, 프라운, 네 눈이 무슨 아름다운 술잔이냐? 달이 다 비친다 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나, 나도 죽을 수 있잖아?" "그럴 리가. 나도 얼마 전에 떠오른 건데... 네 녀석이 날 데리고 공간 이동 했었어. 기억나? 그런 걸... 보통 인간이 할 수 있나?" 녀석은 점점 더 충격을 먹어 가고 있었다. 아직 결정타가 한 방 남아 있는데. "그럼... 너와 내가 둘이 살아 난다면... 대체, 둘 중 누굴 하려고 했던 거야?" "당연히 나지. 너는 예전에 그의 앞에서 나의 부하라고 했고, 더군다나 내가 되는 편이 신전에는 이익이야. 여기 대사제는 평생 독신. 그리고 설사, 첩을 둔다 쳐도 정식으로 유산을 상속 받을 순 없어. 그러하다면, 당연히 어떻겠어? 내 재산은 다 이리로 오는 거지. 광대한 영지와, 수 많은 돈까지 덤으로." 그제서야, 모든 전말을 알게된 녀석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좀 충격이 크겠군. 살린을 살려 두지 않으려는 이유는 알만 했다. 살린 녀석, 정말 사람이 좋지만, 대사제의 입장에선 그걸 알리가 없다. 그리고, 그에게는 결정적으로 뒷받침되는 세력이란 게 없다. 다음에 엘베르스는 의욕과 배경은 되지만, 결정적으로 무능하다는 게 문제였지. 그리고, 피르와 페레은... 아마도 그들의 문란한(?) 사생활이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놈들을 다 배척한다 쳐도.. 널 선택한 건 정말 최악 아냐? 넌 마왕인데 말이지." "그렇지." 의외로 녀석도 이제야 이 일의 엄청난 함정을 알아차렸군. 그렇다. 난 마왕의 신분이라는 덤태기를 쓰고 있는데 말야. 뭐... 그게 뭐, 별건 아니지만. "헤... 정말 너가 대사제가 되는 것도 엽기겠다. 그냥 하지 그래?" 나는 적어도 늙어서까지 서류에 파 묻히고 싶은 생각 없다. 그건 젊은 시절에 잠시 하던 마왕 때려 잡기 하나로도 족하다고. 사실 그 이전에도 서류에 거의 쌓여서 지냈단 말이다! 알기나 하는 게냐... "싫어. 그보다, 차기는 누가 하는 게 좋겠냐? 난 살린이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당근이지." 이렇게 둘이 얼렁 뚱땅 결정한 것도 모르고, 다음날 아침, 드디어 문이 열려졌다. 뭐, 놀라지 않을까나? "여기..! 살린군이 살아 있습니다!" "오오! 살린군이 차기 대사제인가?" 속단은 금물이라는 말이 있지. 살린은 사과를 먹고 있다 발견되었다. 땀나는군. 물에서 얼굴만 빼끔 내밀고 사과를 아작 아작 씹어 먹는 모습이 압권이었다고 한다. "여기...! 엘베르스군도 살아 있습니다!" "이럴수가... 이번에는 후보가 둘이라니!" 이쯤 되면 밖의 소리가 상당히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뭐, 댁들이 놀라는 것도 이해가 가니는 해. 하지만 어쩌겠어. 이게 다 운명이라고. 이쯤되면 그냥 인정해. 좀 놀라는 거 같긴 하지만, 아직 이르다고. "아니, 피르군도 살아 있습니다!" "페레군도!" 하핫. "쿠릴츠군도.. 살아 있습니다! 여기, 프라오니스군도 살아 있군요! 신의 축복입니다! 전원 살아 남다니!" 신관들은 속도 모르고 기뻐하고 있었다. 특히 케빈은 눈물까지 흘리고 감동하는 찰라였다. 문제는 대사제의 얼굴이 궁금하네. 지금쯤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겠지? "하늘을 수호하는 자, 빛의 광명을 비추우는 자, 그리고 영원하신 자애로 우리를 돌보시는 그 위대한 자의 이름을 받드는 영원한 첫번째 종이시여, 영원한 축복을 받으시옵소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왠지 사악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프라운 녀석이 좀 우습기도 했지만, 막판에 가서 엘베르스 녀석은 울고 있었다. 지도 지가 죽다 살아난 건지는 아는군. 뭐, 죽을 때까지 비밀이라고 입을 잘 막아 뒀으니, 별 일은 없겠지만. 켈켈켈. 아직 메인 이벤트가 남아 있다고. "모두... 무사하다니.. 신의 기적이로구나... 다름 아니라, 정말 기적이 일어났단다. 그게.. 거대한 빛과 함께, 사람들의 질병이 모두 완쾌 되었다는 구나. 놀라운 일이지. 아, 춥겠구나. 어서 가자." 왠지 석연찮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늙은 생강 답게 얼굴을 온화하게 바꾸었다. 뭐... 이놈이고 저놈이고, 모두 나쁜 일 정도는 하나씩 하지만,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병들게 하는 건 좀 심했다고 형씨. 그 응답은 확실히 내가 잘 해주지. "기대하라고.. 후훗..." 살린은 케빈의 귀에다 뭐라고 속삭였다. 뭐, 녀석은 믿을만 하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그 썩을 수영장에서 다시 살아나오게 된 것이다. 그 하루 내내, 모두는 즐겁게 마시고 떠들 수 있었다.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경쓰지는 않았다.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 것이지만, 대사제를 비롯한 이른바, 늙은축으로 구성된(그래봐야 나보다 나이 많은 놈은 없다.) 사람들의 긴급 대책회의가 소집 되었다... 후후.. 이제 본편은 아직 시작도 안되었는데, 벌써 부터 떠나? "너... 뭘 꾸미고 있지?" 메데이레나가 기뻐서 데롱 데롱 매달려 있는 걸 어떻게 떼어낼까 꾸미고 있다. "아니. 살린. 내 호수같은 맑은 눈을 봐.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어?" "....엄청 수상한데? 내가 아는 너는 굉장히 주도 면밀한 놈이라고." 잘도 아는 군. "훗... 곧 쇼타임이야. 기대하라고." 녀석의 얼굴에는 점점 모른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고, 케빈은 왠지 얼굴이 붉어지는 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긴, 하마터면 가짜 신 한테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까. "신 정도는... 부를 수 있다고. 좀 무리긴 해도..." 옆에서 프라운이 놀란 얼굴을 하고 날 바라 보았다. 이제 슬슬 경험담을 들려 줘야 할 때군. "아, 프라오니스군. 어땠나? 신의 은총은...? 모두 살아 났지만, 어떻게 된 건지 잘 기억이 안나고, 피곤했다고 하더군. 자넨... 어떤 기억이라도 나나?" 흐흐흐. 곧 댁이 볼 거에 비하면 내 기억은 별 게 아니지. "전... 봤어요." "뭘 말인가?" 댁이 구린 짓을 했다는 걸 뚫어 보았지.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 하면 하나도 재미 없다고. 댁이 신을 팔아서 우릴 죽일 뻔 했으니까, 그 죄 값을 치룰 준비도 되었겠지? "신이요." 주변이 싸늘하게 경직되기 시작했고, 살린은 컵을 떨어뜨렸다. 쯔.. 칠칠 맞긴. 프라운은 날 놀란 얼굴로 바라 보았고, 다른 녀석들도 유심히 나를 바라 보았다. 뭐, 놀랄 일도 아닌데 말야. "신... 이라고 했나?" "예. 분명히, 신을 뵈었습니다."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뭐, 제대로 들었다면 다 놀랄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아직 멀었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나?" 별 일이야 있었나? 정말은 만나지도 않았는데 말야. 하지만 댁을 만나게는 해 드릴 수 있다고. 뭐, 신이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만나게 해 드리죠." 마침 넓어서 다행이군. 내 주위에 거대한 물결파가 일어나듯 바람이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서서히 잦아드는 바람은 일종의 내 주위에 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프라운은 일치감치 뒤로 튀었고, 모두는 바람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 마족은 고대... 원래는 인간과 같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사실, 마족은 그 특수한 상황, 마왕이 죽으면 같이 고통을 겪게 되거나, 심하게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만 아니라면 훨씬 월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종족이었다. 원래는 온화한 종족이었다고 알려진다. 그런 마족을 배척한 자는 바로 인간이었다. 그래서 마도로 몰려가서 살게 되었는데, 월등한 힘을 가졌던 그들에게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마왕을 비롯해서 조금씩 미쳐가게 되었던 것이다. 뭐, 2000년씩 살면 돌기도 한참 돌겠지만 말야. 25-2. 돌건 말건, 어쨌든 그렇게 되었지만, 원래의 마왕의 역할이란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 힘이나, 무엇을 보던지 말이지. 지금의 믿는 신은 사실 진짜 신이 아니다. 과거 사람들이 믿었던 두 명의 신이 존재 했는데, 한명의 이름은 당, 하나의 이름은 근이라 하였다. 둘은 각기 힘과 지혜를 상징하며 둘은 어느새 대립하게 되었다. 태초에 그들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잊고 대립하고, 급기야는 당이 근을 봉인하기에 이르렀다. 뭐, 지금은 풀려났지만. 하여간, 미친 놈들이라니까... 어찌되었던, 이건 다 나바스 기록에서 알 수 있었다. 거기 신들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인간들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트라이너의 종교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도 미친 짓이다. 왜냐? 그야... 나바스도 꽤 오래 전부터 신을 믿고 있고, 그게 물론 진짜 신은 아니지만,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까, 종교도 문화로 흡수된 거다. 여기서 내가 소환한 신은.. 당근, 진짜 신이지. 마왕은 최고의 제사장인 동시의 신의 힘의 구현자다. 대사제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검은 빛이 서서히 주위에 흩어지고, 하늘에서는 그야말로 거대한 빛 줄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진은 푸른색을 띄면서 빛나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은 확장을 거듭했고, 드디어, 그 사람이 나왔다. "날 불렀나? 그대, 파멸과 함께 창조의 의지를 가진 자여. 프라오니스." 거의 빛에 쌓여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내 눈에는 똑똑하게 보여지고 있었다. 그래.. 이 녀석이 신이군. "그렇습니다. 전 당신을 이 자리에 불렀습니다. 신이셔, 우매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진정, 저 밖의 병이 나은 것이 당신이 행하신 일입니까?" 신은 잠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도 웃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아니. 내가 왜 인간이 부탁하지도 않은 일에 간섭하나?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군. 왜, 자네는 모든 답을 알고도 나에게 묻고 싶어하나? 저 어리석은 사람의 탐욕을 밝히려는 거라면, 날 굳이 부르지 않고 허수아비를 세워도 되었을 텐데... 왕이여." 젠장...끝의 말은 반응이 좀 안 좋았다. 왕... 그래. 왕이라. 말은 좋지. 하지만, 이 세상에 왕이라는 소릴 들을 이유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 트라이너 왕은 전직 아젠 기사단장이라는 건 다 아는 거고, 그리고.. 다른 왕이 어디있어? "...흠.. 신이셔. 그렇다면, 가장 대사제에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라고 보십니까?" 아무도 필요 없다고 하면 내 처지가 곤란해 지는 데 말야. 신은 서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엘베르스에게서 시선이 멎었다. 하하하.. 재미있는데? "그대, 그대가 하는 것이 좋겠구나..." 나 제발 웃지 않게 해다오. "저.. 신이셔. 왜, 하필 그를..." 신은 무게 잡고 한마디 했다. "왠지... 정이 가는 아이야." 뭐라고 하리. 대충 전말은 이렇다. 당연히 저들이야, 지들이 섬기는 신인지 알게 뭐람? 그러나 정말 신이라는 거 정도는 풍기는 분위기와 힘의 거대함으로 대충 알 수 있을 테고... 뭐, 신이 엘베르스를 지명한 이유는 오직 하나. 이 신전의 망함을 바라기 때문이다. 하핫... "저, 그럼 이만 가봐야죠?" "....그러지." 신은 당연히 소환자인 내가 가라고 하자, 냉큼 사라졌다.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자네! 왜 그렇게 신을 빨리 보내드렸나! 조금은 더 있게 해도 괜찮지 않겠나?" 천만에. 쓸데 없는 소릴 하면 곤란하다고. 뭐, 그 녀석이 대지에 정식으로 왕림한 덕에 이 근방에 질병 같은 건 다 사라졌겠지만 말야... 뭐, 보통 놈이 아니잖아. 일단, 현존하는 유일 신이라고. 그러니, 효과 만점 아니겠어? 다른 건 뭐, 번들제품이라고 치고. "예.. 마력이. .흐헙!"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프라운 녀석이 재빨리 굴러 나와서 나를 업고 방으로 갔다. 시종 일관 메데이레나는 걱정되는 표정을 지었다. "라플.. 괜찮은 거야?" 잠시는 아픈 척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프라운도 무지 오버하는군. "흐...윽. 왜 그런 짓을! 아직 네겐 무리라고 했잖아! 안되겠어! 이런 일 따윈 집어 치워! 난... 나는... 내 주인이 다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녀석.. 이젠 눈물까지.. "갔어. 고만해. 아무도 없어." "야, 그러냐? 엥... 재미있었는데... 아깝다. 어, 메데이레나야, 왜 우냐? 누구 다쳤어?" 메데이레나의 분노의 일격에 나와 프라운은 정말 아파서 방을 나갈 수 없었다. 눈에 너구리 표식을 하고 어딜 나가냐? "프라운... 이제 여길 나가서.. 다시 마법 학원으로 가자. 여기 의외로 그만 두는 건 쉽던데?" "그래.. 이제 이곳은 저들에게 맡겨두자." 그래. 신전의 평화는 저들 손에 달렸...는데.. 가만, 저 위에서 날 노려보는 당신은 누구? "신이다." 아, 신발? 그야, 잘 알지만... 댁하곤 생긴 게 많이 틀려요. "누구라고요?" "신. 마왕이 날 소환해서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고생도 많이 한 모양이군. 그러니 특별히 봐주지." 댁이 안 봐줘도 될 듯 한데... 뭐, 관망만 하다 지쳤나? "근데... 소환도 안했는데 무슨 일이세요?" "응? 그냥. 날 소환한 마왕이 어떤 놈인지 볼려고 했지. 마왕을 만나는 건 워낙에 오래간만이라... 좀 당황하기도 했어. 뭐, 어때? 마왕은 할 만 한가?" 할만 안하면, 댁이 바꿔줄 수도 없는 일 아니요? 그럼 조용히 하라고. 게다가 이 일이 생각보다 쉬워. 마족과 힘들여 싸울 필요도 없는 데다가, 덤비는 놈도 앞으로 없고, 마족의 기미만 좀 있는 놈이다 싶으면 말 한마디면 끝나고.. 무적이지 뭐. "그럭저럭이요. 그런데... 왜 다시 오신거냐고요?" "아니.. 자넬 보아하니, 충고를 하나 해 주려고." 왠 충고? "무슨 말씀이시죠?" 그는 한참동안 뜸을 들였다. 아마, 무슨 신의 권위를 좀 보여보려는 것인데... 좀, 무리 아닌가 싶다. 게다가 신과 마왕의 사이가 좋다는 말은 별로 들어 본 일이 없다고. "자넨... 너무 사람을 쉽게 믿어. 그리고.. 자네 제자를 조심하게." 제자? 뜻모를 말을 남기고, 신보다는 무슨 신비의 괴인 Q같은 느낌을 뿌리고 사라졌다. 게다가 연기는 대체... "상당히 재미있는 신이긴 하군." 재미? 너나해라. 난 저 녀석 싫다. 왠지 은근히 재수가 없어. 그리고 제자라... 흠.. 신이 하는 말이니 틀림 없긴 하겠군. 아마도.. 율지스를 말하는 거겠지만. 일단, 세이 녀석이 뭘 할리가 없잖아? 녀석은 실력 뿐 아니라, 능력도 안된다고. "내일은... 사퇴서 쓰고 나가야겠다. 메데이레나는 언제 바래다 주냐? 세인 소식 못 들었어?" "아, 들었어." 오옷. 드디어 여기 오긴 온 모양이지? "어디있데? 데려가라고 해야지." "응. 글쎄.. 소식은 알았는데.. 마도에 있다던데?" 녀석은.. 바보인가? 다음날 아침, 나와 프라운의 사퇴서, 덤태기로 메데이레나것도 있었지만 뭐, 이건 좀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게다가 엘베레스 녀석은 거의 눈물까지 흘려데면서 슬퍼했다. 뭐, 자신은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고 하면서 매달렸는데.. 아마도 서류에 파 묻히다 보니, 어떤 일인지 눈치를 좀 챈 거겠지. 둔하긴. 왜 다 싫어하는지 몰랐다니..쯧. "고생 좀 하고..." 녀석에겐 이 말만 해 주었다. 덕담이라면 덕담이지. 후훗. 그리고 피르와 페레는 웃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도 곧 그만 둘 꺼란다. 뭐, 당연한가? 나래도 그만 둔다...쯔. "....그대가 대사제가 되기를 바랬건만... 이렇게 떠나지 않아도 되는데..." 천만에 여기서 무슨 일을 더 겪으리. 게다가 난 댁들의 최고 증오의 대상, 라플이란 말야. 모르니까 나 한테 잘 해주는 거지. 쯔. "잘 있으라고!" 그리고 바로 학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메데이레나는 살린이 있는 곳에 떠넘겼다. 세이랑 잘 지내기도 하겠고, 일단, 애니까... 뭐라도 배워둬야지! 그래도 명색이 황녀인데 말야. 뭐, 세이는 살린이 있는 곳에서 일을 도우면서 회복 마법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다 뻥일 확률이 높았다. 당연하지. "녀석들.. 다 잘 있겠지? 친구들 말야. 같은 꽃꽃이 동호회 녀석들도.. 지금쯤 벌 다치르고 고생 좀 하고 있겠지. 너가 잔뜩 뿌려 논 것들 때문에. 안그래?" 프라운은 간만에 비실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다들 기분은 좋은 거 같군. "다녀왔습니다!" 학원 교장, 새로온 이 아저씨는 아마... 나도 잘 아는 인간이었다. 바로, 율지스. "아, 스승님." 이런 구도가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참을 껄 그랬다. 뭐, 신도 보고 구경은 잘 했지만 말야. 하지만... 이런 건 싫다고. "너, 언제 교장 된거야?" "후임자로 적당한 사람을 찾던 그들에게 있어서, 라플의 제자란 저의 이 직함은 대단한 거였겠죠. 뭐. 다행히도, 신전은 스승님을 아주 더럽게 나쁘게 보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 젊은 층은 좋아하지만, 원로 대부분은 스승님을 척살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거 같던데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신 겁니까?" 마왕 제전에다가, 가을제, 에네브.. 하핫. 그렇군. 많은 일을 하고 돌아온 거라고. "스승 하는 일에 간섭하면 혼난다. 너. 머리에 피도 안마른게." "...제가 교장이니.. 뭐, 당분간 어떤 행동을 하셔도 대부분 보호받으실 순 있지만, 너무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은 제발 부탁하니, 하지 말아 주세요." 하핫. "뭘, 괜찮아. 괜찮아. 그럼 까짓 학원 그만 두지? 내가 언제 뭘 무서워하고 살았나? 음 하하핫!" "스승님.. 나갔다 오시더니.. 한층 더 나사가 빠지신 듯 하군요." 율지스를 스승 모독죄로 개패듯이 패고 그날 상쾌하게 나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된거야! 이 널려 있는 옷들으 뭐고!!! 알트와 오른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여자들이 이렇게 옷을 널어 놓을리는 없고. 실리아나 이무르가 그런 나쁜 짓을 하겠어? "이 녀석...!!!" 죽음의 응징 까진 아니어도, 각오하라고.. 오, 이런 데 아주 책까지 있잖아? 이름도 쓰여있군. 알트.. 감히 특실 비었다고 이렇게 놀았겠다?!? "그래.. 그래.." 복수의 시간은 아주 빨리 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럼 그렇게 되냐? 말도 안되지." "그렇네요..." 오른선배와 알트 선배의 목소리가 방을 울리고 있었다. 밤이 되자 마자, 오는군. 그래? 내가 온지 겨우 한시간이 지나서 말이지. "어서 오세요~" 일단은 웃고 보자. 두 사람은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자, 이제 죽을... 어? "살아 있었구나! 난, 네 녀석이 죽은 줄 알았어! 장래가 촉망되는 우리 부의 막내인데 말야! 절대로! 절대로! 죽으면 안된다고! 살아있었어!" 이봐... "다행이다. 알트가 네 걱정이랑, 쿠릴츠 걱정을 많이 했지. 너희둘이 아주 신전에 말뚝 박는 거 아닌가 하고.. 설마, 그건 아니지!" 뭐야.. 오른 선배? 애 잡어? "아니에요. 선배. 오늘 사퇴서 쓰고 나왔는 걸요? 그리고 교장도 바뀌었으니까.. 다행이죠." "그래. 그래. 어쨌든 잘 되었다. 이거, 파티라도 해야 겠다. 내일 당장 오전에 하자. 너, 수업 빠져도 되잖아? 넌 모르는 게 없다면서? 가서 있던 일도 좀 과장을 곁들여서 얘기해 다오. 요즘 너무 지루했거든?" 그냥 이야기 해도 놀랄텐데.. 과장까지? 좀.. 무리 같은데? 뭐, 나야 상관 없지. 좋아. 사실 대로 말해 주마! 25-3. "우와... 그럼, 넌 이제 마왕이야? 신기한데? 후후.. 재미있다." 리무르는 순수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지. 프라운은 가서 식물 손보고 있고... 실리아는 그걸 도우러 갔다. 뭐냐... "오른 선배. 믿어요? 그 때, 정말 신을 봤다니까요?" 그는 아주 과장된 행동을 해 보였다. "당연히 믿지. 안 믿으면 누굴 믿니? 너무 멋있었겠다. 다음엔 나도 보여다오." 보면 기절할꺼 아냐? 젠장... 뭐, 안 믿는 쪽이 정신 건강에 이롭긴 하지. 맘대로 해라. 맘대로. 나도 이젠 모른다. "예. 그런데, 여긴 별 일은 없었나요? 뭐, 갑자기 하늘이 붉어진다든지.. 뭐, 그런 일이 있다든지..." "전혀." 그랬다. 이곳은 평화로웠던 것이다. "예..." 간만에 돌아온 학원을 역시나 수업 제끼고(어차피 1년 휴가였잖아? 그럼 뭐, 더 빠져도 상관 없지.) 호수에서 아름다운 오두막을 바라 보았다. 아, 가볼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잘 되었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닭살 만점의 대사군. 하지만.. 이건 키히를 위해 한 거였다. 뭐, 지금이야 그녀는 잘 모르겠지만... 봉인 건도 생각은 하겠지만, 난 아마도 못 할께 뻔하고... 길이 열렸다. 이건 오직 단어를 말한 사람 만이 건널 수 있는 유리로 된 다리이다. 그리고 천천히 그 다리를 건너자, 아름다운 오두막이 나왔다. 이건 정상적인 방법으로 간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건물이 보여지게 되어있다. "아름답구나..." "그... 암호... 알고 있었나?" 뒤에서 사람이 움직였다 싶은 순간,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래... 이건 누구? 분명히 키히와 닮은 사람 이었다. 그리고 아주 똑같은 얼굴을 한...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달랐다. 어디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야말로, 누구지? 키히는 아니고... 하지만 닮은 걸 보면... 무언가 관련이 있나 보군?"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바람에 나뭇잎이 호수에 날려서 떨어졌다.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아주 쓸쓸하게 호수를 바라 보았다. "저번엔...당신, 날 키히로 착각했어. 그래서.. 그래서.. 아주 약간 기뻤단 말야." 에? "역시 그렇군. 그런데 왜 이런 음모를 꾸미는 거지? 괴물을 만들어서 죽이거나, 게다가 넌 그게 키히의 짓으로 보이도록 하고 있는데.... 그녀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녀는 손을 살짝 쥐었다 폈다. 그리고 다시 핀 손에는 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글쎄... 왜 그럴까? 난, 너가 라플이라는 걸 믿어. 아니, 믿지 않을 수가 없지. 나도.. 키히니까." 에엑? 무슨 소리야! 난 모르는 일이야! "...알기 쉽게 설명한건 아닌거지?" 아니면 그 동안 내 뇌가 퇴화했다거나... "키히가 미워. 이토록 오랫동안 한 사람에게 사랑 받으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잖아? 난... 난 말이지. 또 하나의 키히야." 계속 수수께끼 같은 소리하면 난 뇌가 터져 죽을지도 모르겠다. 앗, 혹시 이런 식으로 날 죽이려는 건가? 그렇다면 제발 참아 달라고. "알아 듣기 쉽게 해 달라고. 쌍둥이는 아니고, 그녀의 의식이 분리 되었다는 건 더 믿기 어렵고..." 고민하게 만들지 말라고! 계속 뇌세포가 운석 속에 죽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란 말야. "응... 난, 그녀의 분신. 그녀의 아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 알지! 아. 이해...했는데 말이지. 아이라니? "에...에...아이라니?" 그녀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화내듯이 한 마디했다. "당신 아이라고." 헉! 유부남으로 돌변! 이거 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런 딸이 있다니...! 에.. 또.. 그럴수야 있지만... 너무하는 거 아냐? "그....런...가? 이런 예쁜 딸이 있다니.. 기쁘다.. 하핫.." 거짓인 게 곧 들통날 정도로 난 연기를 못하는군. 아무래도.. 이건... 일생 일대의.. 결혼도 안했는데! 오...! 신이셔, 용서해.. 아, 그 신은 도움이 안되니까.. 그럼. 뭐라고해! "딸아냐. 아들이야." 이젠 저세상으로 탈출하는 나의 영혼이 보이냐? 정말 너무하는 구나. 이젠 난 변태의 부모가 되는 셈이잖아! "에... 아들?" "그래. 아들. 그리고.. 나, 당신 싫어. 아버지라면서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어." 에.. 또.. 누가 알기나 했냐! 너도 백년 가까이 입산 수도 해봐! 세상에 자기 자식이 문제가 아냐! "에.. 그럼... 하핫.. 나이가 좀 많겠구나?" 땀난다.. "응? 아.. 나이? 응.. 좀 많지. 아빠보다 이십살쯤 어리니까..." 엘프 사이에선 그건 거의 친구로 통한다며!!! 이전에 키히가 해 준 이야기가 있단 말야! 세상에, 갑자기 유부남이 된 걸로 모자라서 백살된 딸이라니!!! "아, 그래.. 하핫." 땀 난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되었던.. 가만, 근데, 내 딸이 지금 올바르지 못한 길로 가고 있는거 아냐? 아, 아들이랬지... "나, 엄마 싫어." 어쩌라고!!! "아.. 그러니?" 이렇게 밖에 이야기 못하는 내가 저주 스럽다. 하지만, 어쩌겠냐고? 애는 세이나, 율지스 켜본 게 다라고! 게다가 이렇게 많이 성장한 애는 어떻게 다루는 지 몰라! "....그래서 투정 부렸어. 근데.. 하마터면 아빠도 다치게 할 뻔 했어... 아빠.. 나 미워?" 으... 이건 거의 세이 수준이잖아? 게다가 내가 약한 키히의 얼구을 한 아들이라니.. 운다.. 사나이는 운다.. "아니. 왜 미워하겠니? 자, 우리 밝고 건강하게 사는 거야!" "응. 그럴께. 게다가 그 전 교장이라는 사람도 싫었던 참이거든." 이봐... 그렇게 멋대로 동료를 배반하냐? 하긴 인간도 거의 15세 이전에는 세상이 자길 중심으로 도는 줄 알고 있으니.. 뭐, 이 놈도 비슷한 거군. "그래... 뭐,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이름이 뭐냐?" "응. 엘메인이야." 아, 예전에 여자 흉내 낼 때 이름이 엘메라인이었지? 흠... "그래.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거야. 그 점을 명심해." "괴롭히는 건 되지?" 될 리가 없잖아! 으... 대체 키히. 애들 양육까지 내게 던지고.. 너무 하잖어? 내가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졌다고... "괴롭히는 것도 안된다. 휴.. 그럼 남자옷이라도 좀 입고. 그래... 일단 내 방에 가자." 한숨을 쉬면서 사나이는 또 한 번 성장을 거듭한다. 방으로 녀석을 데려가서, 일단, 율지스를 불렀다. 믿을 놈은 그 놈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옷을 빌려야 할 게 아닌가? "부르셨습니까?" "아, 들어와." 아직 알트와 오른의 잔재가 가시지 않은 방이었지만, 그런데로 청소는 해 두었는데... 너, 너무 노골적으로 놀란 얼굴을 한다. 방이 그렇게 지저분하냐? "아, 방이 좀 지저분해. 거기 앉아 봐. 그리고 좀 벗어라." 갑자기 백보 후퇴... 야, 내가 설마 널 덥치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아... 여기 이 아리따운 소년..에게 옷 좀 줘. 여자옷을 입고 있는 건, 사실 부모된 도리로 속이 뒤틀리니까..." 여기서, 율지스도 보통 사람이었다. 범인의 범주에 속하는 그는 역시 나와 같은 정신적 공황상태 즉 쇼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한번 혼이 뛰쳐 나가면 돌아오는 데 좀 시간이 걸리지. "내가 싫은 가보죠?" "그럴리가. 하핫..." 땀난다. 이 녀석, 아주 키히랑 빼 닮았잖아! 나랑 닮은 건.. 하나도 없잖아... 정말 내 자식이냐? "스..스...스승..." 말도 못하는 실어증 증세는 쇼크가 너무 격렬하면 수반되는 질병이다. 뭐, 회복할려면 멀었군. 불쌍한 놈. 뭐 몸을 좀 아껴야지. 쯧. "아, 그래. 옷 얼른 벗어라." 그날, 난 단시 팔은 안으로 굽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면서 첫째 제자를 무참히 옷을 벗겨서 쫓아냈다. "맞다. 다른 옷도 나중에 더 부쳐라. 너랑 얘랑 체형이 똑같잖아?" 녀석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떠났다. 정신적 충격이 많이 컸군. "아빠!" 눈 앞에 있는 귀여운 눈동자를 살살 굴리는 녀석을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귀엽다!" "에엑! 이러지 말아요! 아프단 말이에요!" 녀석 키가 더 커서 좀 비참 하군... "프라오니스! 너... 너.. 돌았냐!" 갑자기 창문에서 사람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눈이 개구리보다 더 커진 인간이 하나 날 바라보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떨어진 건 알트로군...오른이 멍하게 중얼거리고, 옆에 있던 프라운은 역시 눈이 똥그래졌다. "에... 뭐가요?" 생글거리는 나를 보자, 프라운은 유심코 엘메인을 뜯어 보았다.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야. 근데.. 정말 닮긴 했는데?" 그렇지. "응. 그럴꺼야. 내 새끼거든. 이리온, 내 강아지." 엘메인은 금새 방글거리면서 내 얼굴에 지 얼굴을 가져다 대고 부볐다. 우아.. 귀엽다. 이래서 다 애를 낳으려고 환장하는 거구나. "...마법을 쓴 녀석을 어떻게 믿냐? 그것도 모습 변형 마법인데?" 으잉?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 이거요? 엄마 머리 색이랑 틀려서 그랬어요. 풀어야지." 귀여운 목소리(이건 어디까지나 내 관점이다.)로 주문을 외우자, 녀석의 머리는 금색에서 나와 똑같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우와.... "피스트레이카가의... 은색의 휘장인가?" 멍하니 오른 선배가 중얼거리고, 어느새 올라온 알트는 내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떨어졌다. 다음에는 올라온 다음에 이야기 하는 게 좋겠어. 쯔... "...너, 유부남이구나." "그래.. 미안하다." "아니야. 뭘. 괜찮아. 하하하.. 하하하.. 너만 결혼하다니! 나도 결혼해 버릴까 보다! 우이.." 마족도 결혼을 하긴 하지. "아...아..니. 근데 어떻게 이렇게 큰... 딸이지?" 오른은 버벅댔다. 뭐, 당연하지, 이들은 내 실제 연령을 모르잖아. 할 수 없지. "아들이야. 예쁘지? 내가 자식 농사는 참 잘 진거 같아." "아빠.. 나 졸려." "에이구. 그럼 자야지. 자장.. 자장. " 엘메인은 이내 침대에 눕더니 푹 잠들어 버렸다. "너.. 어떻게 할 셈이야? 여기 내버려 두면 들킨다고. 게다가 여긴 하녀도 왔다 갔다 하잖아?" 알트는 완전히 뭔가 오해한 듯.. 그리고 사정을 잘 아는 프라운은 거의 수긍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키히의 탑으로 옮겨야지. 거기 맨 꼭데기는 우리 동호회가 사용하기로 되어 있잖아." "아, 그렇지." 오른과 알트도 도와 준다고 동의했다. 뭐,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이 모양 이꼴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들이니까... 25-4. "아빠, 나 이제 여기 있는 거야?" 녀석은 너무나 귀여워서 순식간에 여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우와! 너무 귀엽다! 어디서 유괴한 거야? 은발 봐.. 찰랑 거리는 게. 어머, 혹시 네 형이야?" 아들이유. 실리아 누님. "아니야.. 그냥 그건 넘어가. 왜 이 애가 있다든지..이건, 다 남자들의 비밀. 알았지?" 프라운이 왠지 인생 다 산듯한 말로 중얼거리고 녀석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응... 엘프는 100살정도면 아주 애라고 들었는데.. 정말이네?" 그래. 같은 엘프인 율지스는 아주 어른스러운데 말야. 뭐, 그거야 이 나의 훌륭한 교육 덕이지. 너, 감사해야 한다. 음 하하핫. "옷가방...입니다." 이렇게 율지스는 옷가방만 던지고 다시 교장실로 도망갔다. 녀석, 숫기도 없군. 엘메인은 계속 생글거렸고, 아주 실리아와 이무르는 녀석 옆에 붙어 버렸다. 뭐, 내 아들이니까, 내가 좀 큰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좀 그렇군. 하핫. "너.. 말야. 언제 애까지 낳을 짓을 한거냐? 난, 기억에 없는데." 아, 나도없지. 에엑! "프라운. 나도 없는데?"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이럴 수가. "너! 누구애야!" 동시에 우리 둘은 살기..까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살벌한 얼굴로 달려 갔다. 수상해... "아빠?" 귀.. 여...아니. 여기서 꺽이면 다 끝이야! "라플. 힘내." 좋았어! 네 녀석이 누군지는 몰라도! 난 아직도.... 윽. 이 말 까지 해야 하냐! 난 총각이란 말야! 어떻게 아이가 나오냐! "난 너라는 앨 만든 기억이 없는데 대체 넌 누구냐?" "난.. 난.. 아빠 아이인데?" 이젠 눈물 까지 글썽거리는 것이다.. 이럴 수가. 이렇게 귀엽다니! 젠장, 얼굴은 키히랑 똑같아서 감히 치지도 못하고.. 엉? "프라오니스! 왜 애를 울리고 난리야! 너가 낳은 애면 잘 해 줘야지!" 이봐! 백살이 애냐? "맞아요. 프라오니스. 그건 나쁜 행동이에요." 이무르까지... 너무해. 다들 내 맘은 모르고... 이봐. 난 키히랑 깨끗한 사이었다기 보단, 그런 애날 시간이 없었다고...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있을 거 같긴 하냐? 동료는 버글거리고, 특히 프라운 자식이 항상 내 옆에 죽치고 앉아 있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된 것도 거의 용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 프라오니스. 가보자. 일단은 대책을 세워야지. 율지스랑 의논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고." 그거 좋은 생각이다. 일단 정말 대책이라는 걸 세워 둬야지 안되겠어. 이대론... 이대론, 그래. 자멸은 아니더라도.. 문제가 심각해. "그래서.. 자신의 아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거군요? 휴... 나는 또...그럼 아니라고 하면 되잖습니까?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다면 제 옷을 받으러 가면 되는 거고요." 문제는 심각한데 말이지, 넌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구나. "그게 좀 곤란해. 얼굴이 키히랑 똑같아서 어쩌질 못하겠어. 더군다나 그건 마법을 해제한 모습이란 말야." 율지스는 내가 얼마나 키히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녀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그냥 아들이려니 데리고 살면 되지 않을까요?" 죽여버리겠어! 그런 아무런 대책이 없는 대안을 내 놓다니! "지금 내가 그럴 거 같으면 너한테 왔겠냐? 무지 막지 하게 수상한 녀석이라고! 원래는 교장과 결탁해서 여럿 죽이기도 했고! 아, 사상자는 없었군. 다 내가 막아서 그렇게 된 거란 말야! 날 몇번이나 죽일려고 했기도 했고! 그런 놈을 어떻게 데리고 살어!" 프라운이 박수를 쳐 주었다. 열변이라면서.. 그래서 놈의 팔목을 가벼이 꺽었다. "흠.. 곤란하군요. 키히와 정말 아무 관련이 없다면.. 다행인데... 관련이 있으면 어쩌죠?" 나보고 물으면 어쩌라고! 나 이제 울겠다! "어떻게 대책이나 구상해 놓으라고! 난 살린이 있는 신전에 다녀올테니. 그리 알어." 되는 일도 없고. 인생이 처절함을 느낀다. 아, 이게 한계인가? 왜, 난 팔자에도 없는 유부남 신세를 져야 하는 거냐고. 꺼이. 꺼이. "라플. 힘내. 애 키우는 거, 돈이 많이 드는데, 내가 옆에서 도와 줄께." 이 놈.. .언제 재기했냐? 살린의 일터는 역시나, 항상 전쟁터를 방불케하고 있었다. 일단, 가을이 오면 많은 사람이 건강할 것 같지만, 천만에. 낮밤의 기온차가 극심해져서 녀석은 계속 감기환자를 상대해야 한다고 한다. 신관이 아니라 의사가 아닐까나? "아, 왔어?" "그래. 왔다." 살린과 케빈이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너, 뭔가 기분이 더럽고 마치. .아, 그래. 졸지에 애를 떠맣게 된 미혼남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케빈. 너... 대단해. 앞으로 존경한다. "스승님~~" 귀엽고 깜찍한 내 제자를 봐도, 저 하늘에 멀리 멀리 펴진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구나. 근심, 걱정.. 등 등. 정말 애 키우는데 돈 많이 드나? 백이 죽일려고 할텐데... 내 자식도 아니고 남의 자식을 키운다고 하면. 그녀가 지금 살림 챙기니까.. 하.. 어쩌지? "그래. 세이야. 공부는 잘하고?" "예. 힘쓰는 일이라면 맡겨 주세요!" 회복 마법이 아니라, 힘 쓰는 일? 에구구.. 되는 일이 없구나. "너도 그냥 마법 학원으로 와라. 가서 같이 마법이나 배우자." "예? 저야 좋죠. 그럴께요. 참, 율지스 형이 교장이라면서요? 대체 정부는 뭘 하는 거야! 형이 앉은 날로 모든 전국에 공부하는 마법사는 죽은 거라고요. 얼마나 빡센데. 쯔...삼대 악원(惡院)에 하나로 선정될꺼야. 쯔." 글쎄.. 비슷하긴 하군. 녀석이 하는 일이라는 게 요즘 학생들 죽이는 일 밖에 더 있나? "그래. 세이야. 앞으로는 늙어서 이 스승을 잘 모시고 살아야 한다." "예? 하지만 스승님이 저보다 어린데요?" 아, 그렇구나.. 젠장! 되는 일이 없어. 이제라도 나보다 어린... 애를 데려다 뭐하겠어? 하여간, 나도 참 한심하군. "그래. 살린. 요즘엔 별 일 없지? 엘베르스는 잘 해?" "응. 잘하지. 뭐, 덕분에 우리 교단의 발전이 한 백년은 늦어진거 같지만.. 그래도 느긋해서 좋아. 대신 너는 좀 조심해라. 너무 우리 교단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잖아?" 뭐, 그래도 내가 라플인데 뭐. "괜찮아. 그럼 세이는 데려가지. 메데이레나는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않아?" "그렇지..." 메데이레나는 아마... 다음주 쯤에 보내야겠지. 소문에 따르면 다시 수도를 향해 중간에 공간이동까지 해서 오고 있다고 하니까... 곧 올게 틀림 없었다. "난... 가기 싫어." 그리고 조용히 그녀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뭐, 고생하는 건 알지만, 어쩌겠어? 생긴대로 사람은 사는... 거지만, 그건 지금 아무 관련도 없군. 다시 마법 학원으로 돌아오는 도중, 세이에게도 간략한 사정을 설명했다. 근데.. 이 놈은 의외로 분노하면서 그런 놈은 죽여야 한다나 뭐라나? 하면서 분노했다. 녀석을 진정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뭐, 어쩌겠어? "율지스 형!" 둘은 의외로 친했다. 사실 저 둘의 관계는 아무리 잘 봐줘도 율지스가 세이를 들들 괴롭히는 거 같긴 하지만, 의외로 한쪽이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지속되는 관계이겠지. "그래. 세이 왔구나? 앞으로는 스승님 방에 묵을 거라면서? 조심해. 밤마다 이상한 놈들이 들어온다고." 프라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거기. 나도 포함 되어 있는데." 프라운이 내 친구라는 거는 아직 녀석은 모르니까, 당연히 기분 나빠했다! 당연하지. "자네. 아무리 내 스승의 친구라고는 해도, 내가 연상이고 이 학교의 교장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너가 연상이 아니라고. 이쪽은 나이를 나도 몰러. "자네라? 난 아직 그 정도 나이가 된 거 같지 않은데?" 둘 사이에선 갑자기 전류가 흘렀다. 세이가 나섰다. "아, 율지스 형. 이쪽 분은 원래 스승님과 오래 된 친구래요. 그리고 율지스 형이 항상 존경해 마지 않던 용사 중에 한 분이신 프라운 님이래요." 율지스는 세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질문했다. "너, 인간이 저렇게 오래 사는 게 그리 흔한 일인 줄 아니?" "예? 하지만, 스승님도 오래 사셨잖아요?" 세이 답기는 하군. 과연, 율지스의 형다운 사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는데? "특수 상황. 그리고, 프라운은 원래 검사야. 검사가 그렇게 오래 이렇게 어린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긴 들어 보지 못했어." 당연하지. "아, 그럴꺼야. 난 사실 마족이거든?" 잠시 공기가 얼어 붙었다. 아마도 충격이 휩쓴 거지. 이건 마치 예전 과거 49년전에 일어났던 그 대폭풍 보다 더 큰 파장을 율지스에게 몰고 온 거 같았다. 무너지는 우상, 무너지는 신념? "거짓말이야!!!" 녀석은 그야말로 두다다다 사라졌다. 한손에는 눈물을 훔치고 달려가는 게 뒤에는 오직 꽃이 아니라, 흙먼지가 날릴 뿐이었다. 불쌍한 놈. 아주 여러모로 공격 당하는구나. "충격이 컸나 본데요?" 세이야. 너가 비정상이야. 본래, 영웅심리에 크게 젖었던 사람이라면 저게 정상이라고. 하핫. 하긴, 프라운을 존경한 놈들이 더 멍청한 거지만. 뭐, 누굴 원망하리? "괜찮아. 소년은 계속 충격을 받으면서 덤덤해 지는 거라고. 그러니, 많은 충격을 줘야 한단다? 알았지?" 생글거리는 프라운을 보고 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아주 신났어. 괜히 마족이 아니라니까? 세이야. 저런 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넌 뭐냐? "그럼 스승님의 아이를 자처하는 그 정신나간 녀석은 아직도 저 탑에 있다, 이거죠?" "그렇지." 세이, 불타오르다! "귀엽다!" 불, 완전히 연소되다. 역시, 도움이 안되는군. 율지스는 적어도 이런 거에 흔들리는 녀석은 아니니까, 좀 정신을 차려주면 좋겠는데. 아까보니 완전히 폐인 수준이더군. 나의 우상이 마족이었어라는 둥 헛소리처럼 계속 중얼거리고. 하지만, 스승은 마왕이란다. 음. 이거 내일 이야기해야겠군. 계속 충격주면 아예 갈지도 모르지. "가자." 세이를 끌고 다시 우린 나와야 했다. 그래. 녀석이 귀엽다 못해서 이쁘다는 건 인정한다.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수 있나? 하지만 말이지. 나는 말이야! 유부남이 아니라고. "힘내." 프라운 녀석만 아니라면 힘이 좀 날꺼 같은데 말야. 홧김에 세이에게 과제를 내 주고는 율지스의 교장실로 걸어갔다. 녀석은 여전히 맹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 스승님?" 이젠 좀 정신을 차린 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 프라운 말마따나 더 충격을 줄까? "율지스. 나 사실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나, 전에 마왕을 봉인한 거 알고 있지?" "예. 스승님. 무슨.. 일이라도?" 있지. 녀석은 그래도 고개를 내밀었다. 이즈음에서 멈춰야 했나? 에라, 모르겠다! 25-5. "그리고 나서 한참뒤에 세이 녀석과 여행을 하고 있다가 마왕이 세이를 죽이려고 하잖아, 그래서 죽였다." "아, 그랬군요."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족의 관습이나, 힘의 계승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군. 에휴휴. 이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지. "마왕 계승식. 저번에 있었잖아. 기억나냐?" "아, 예. 별 일 없이 끝나서 다행입니다. 마족도 이번에 새로 태어났다는 걸 보여 줬고요.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그래도.. 스승님의 친구분에게 큰 결례를 했으니까요." 하하하. 미안해. 이 말을 해야만 하는 걸 용서하라고. "그게. 넌 잘 모르겠지만, 원래 마왕을 죽이면 그 힘은 그 죽인 사람에게 넘어가지. 원래 인간이 마왕을 죽이는 확율은 없다고 봐야 하거든? 그래서 대부분 마족 사이에서 계승되어 왔지." 녀석은 생긋 웃었다. "스승님은 아시는 것도 많으시네요. 그런 건 거의 극비 아닌가요?" 그렇지. 극비는 극비지. 나도 겪기 전에는 몰랐으니까. "아, 그거? 내가 마왕이 된 마당에 극비고 뭐고 없더라고. 하하하!" 녀석은 그렇게 나와 함께 한 5분 정도를 같이 웃었다. 그리고 기절했다. 녀석은 한 3일 정도를 혼수 상태에서 해메었다. 나도 약간의 양심은 있으니까, 그래도 옆에서 녀석을 간호했다. 그래도 내가 예전에 똥지저기 갈면서 데리고 산 놈이잖아. "스스...승님?" "오, 그래." 녀석은 삼일만에 정신차리고, 날보고 아주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스승님이 마왕이라는.. 하하하." 현실 도피군. "꿈 아닌데?" "...." 녀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날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다시 쓰러집니다." 그리고 녀석은 다시 하룻동안을 계속 잠만 잤다. 쯧. 프라운도 병문안겸 잠깐 들렀다. "애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서 크는 법이라니까? 내 말이 맞지?" 덕에 애꿎은 애만 잡았지. 하휴휴... 이런 제자 하나 만드는데 얼마나 돈이랑 시간이 드는데. 쯔. "그래서, 이렇게 되었잖아. 됬냐? 뭐.. 그 내 아들임을 자청하는 엘메인 녀석은 어때?" "뭘? 그냥 잘 지내지. 여전히 여자 선배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지. 녀석은 정말 키히랑 닮았던데.. 혹시 키히 애 아냐?" 그걸 몰라서 이렇게 고민 때리고 있잖냐. 내가 알면 진작에 수소문해서 애 엄마에게 보내줬을 꺼라고. 젠장 되는 일이 없으니까, 제자는 충격먹고 쓰러지고. 제...엔 장. "그래. 괜찮아. 이젠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되다면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용의 주도 하고 주도면밀의 대명사라고 불리우는 마족이라는 놈이 이렇게나 무사 안일하다니. 쯔. 마족도 이렇게 멸망해 가는 것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좋아. 좋아. 좋은 자세다." 이렇게 칭찬해서 띄워준다. 그럼 좀 안심하지 않겠어? "자, 프라운. 너는 이제 네 수업들으러 가야지? 뭐, 나야 어찌되었든 상관 없지만.. 넌 여기 졸업하고 뭐할래?" 녀석은 갑자기 분위기 잡기 시작하면서 어디서 등장했는지 바람까지 불어대고, 머리가 표표히 날리기 시작했다. 무서운놈. "나, 취직할꺼야." 에? 마족도 요즘 취직하나? "뭐...뭘로?" 녀석의 주변은 어느새 붉게 황혼으로 물들었다. 아주 이젠 특수효과까지 하면서... 마법을 이런 데 쓰는 게 아닌데 말야. 넌, 아주 이상한 놈이다. "네 놈의 집사로. 그럼 심심하진 않을 꺼 아냐?" 이런 쳐 죽일 놈을 봤나! 네 놈이 우리집 집사로 들어 와 봐라! 하브라이드 녀석은 가만히 있겠냐! 녀석도 틀림 없이 무슨 한자리 하겠다고 설칠지도 몰라. 음. 그건 싫다고. "하하하... 절대 안 된다." 순간 하늘에서는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녀석은 갑자기 살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집사는 원래 해 보고 싶었단 말야! 신비의 집사! 얼마나 멋있냐!" 뭐가 멋있냐. 여하간, 요즘 소설이 애들 많이 망쳤어. 쯧.... "차라리 세계 정복 조직 같은 데 들어가라. 보수는 무보수지만, 그래도 명예직이잖아?" "마족도 밥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한다고. 너가 마왕이 된 이상 인간을 침략하는 건 안되잖아? 그러니까, 나 좀 구제해." 그런 식으로 말하면, 거절도 못한다. 으이, 정말. "할 수 없지. 그렇게 해라. 뭐, 너라면 나도 안심이고말이지. 참, 저기 뛰어오는 인간, 어디서 많이 본 인간 아냐?" 케빈이 그 답지 않은 어설픈 품새로 허겁지겁 달려 오고 있었다. 녀석은 왠지 급한 일이 있는 듯 했고. 난 원인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어이, 케빈. 왜 뛰어 오는 거야?" "큰일 났어. 헥.. 헥..." 너를 보니 큰일이 난 것도 하다. 뭐, 그래봐야 누가 수도를 날린다든지 그런 거겠지. 아닌가? 왠지 이 녀석 할떡거리는 게, 왠지 무지 불길해. "무슨 일 있어?" "있지... 메데이레나가 납치되었어. 살린도 같이." 어디서 갑자기 돌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놈! 왜 하필 메데이레나와 살린을 납치해 가냐? 녀석들은 아주.. 아주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놈들이란 말야! "나바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은 있어?" "글쎄... 몰라. 하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는게, 돈이 목적은 아닌 거 같아." "언제 납치 되었어?" 프라운도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아는 놈이 당했다는 데, 기분이 더럽겠지. "아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야, 그럼 돈을 요구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잖아! 이 바보놈!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너가 와버리면 연락 받을 놈이 없잖아! "어서 가자!" 젠장. 흠씬 패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추스리면서 우리는 정말 죽자 사자 그곳으로 갔다. 일단, 납치된 경위와 그런 걸 물어 볼까 했는데, 그럴 것도 없었다. 가보니 신전이 난장판이었다. "어떻게.. 된거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실수였어. 메데이레나 줄 과자를 사러 갔었거든. 그 사이에 우연히 세인 푸르체트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고. 내일 쯤 여기 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소식을 알리려고 여기 온 순간, 살린과 메데이레나가 납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녀석이 다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정도가 다였고, 그 때 상황은 거기 있던 환자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녀석들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잘생긴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은발에, 그래. 나 같은 은발을 하고 몇몇 사람을 대동한 사람이라고 한다. "젠장. 그 녀석, 역시 수상하다 했더니! 제길!" "진정해. 이미 터진 일은 어쩌겠어? 단서를 잡았잖아? 아예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것보단 나은 거라고. 자, 우리 인생은 황금빛, 길거리는 F빛. 언제 언제 까지나... 언제 언제 까지나.. 슬프게 살아가는..." 프라운 녀석이 괴상한 노래를 부르자 창문으로 가벼이 던져서 입을 막았다. 녀석은 마족이라 튼튼하거든. 어찌되었던, 녀석을 그렇게 처리한 뒤에 다시 단서를 모았다. 무슨 편지가 남아 있지도 않고... 역시 키히 탑에 가 봐야겠군. 응? "저거, 알트아냐?" 알트가 허겁지겁 여기로 달려 오고 있었다. 이 구도는 설마...! "알트! 설마, 너도 여자 선배가 납치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는 아니지? 그리고 그 범인이 사실 그 자청해서 엘메인이라는 녀석이라든지, 그런 건 아니지!" 프라운이 윽박지르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 "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오른 선배는 얻어 터지고.. 나도 많이 맞았어." 녀석의 얼굴은 확실히 맞은티가 팍팍 났다. 젠장. "그럼 두 곳 동시에 털린 셈인데? 역시.. 우습게 봤어." 아빠, 아빠 하더니. 이럴 속셈인가? 두고 보자. 뭐 일단은 모두와 함께 의논을 해야 겠지만, 세이 녀석은.. 이럴 때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납치된 흔적도 없어서 일단 제껴 두었다. 율지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유감의 의사를 표명했다. "학교장으로서, 학교 내에서 납치 사건이 방생해서 유감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 놈들을 잡고 말겠습니다!" 까지는 학교장 의견이고, 내 제자로서 내 친구들과 나바스 황녀가 섞여 있다는 말을 듣자, 분개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건 국제 분쟁 감입니다!" "아, 그건 걱정마. 그 쪽에선 아마 우리랑 있는지도 모르거든." "지금 그렇게 변명할 땝니까!!!" 그럼 어쩌라고. 나도 별 방법이 없단 말야. 뭐, 놈이 노리는 게 나라면 뭔가 소식이 오겠지. 예로, 너 나와라든지. 이런 거 있지 않겠어? "율지스. 너.. 반마법 사용하는 데는 거의 천재잖아?" "그렇죠." 좋아. 이걸 이용해서 어떻게 해 봐야겠군. "그 납치범. 그걸 쓸 줄 알아. 그러니까, 그걸 찾아내는 것도 너는 할 수 있을 꺼야. 마력 패턴 정도는 내가 알려 줄테니까, 수색하는 데는 마력이 엄청나게 소모되겠지만, 지금은 별 방법이 없어." "알겠습니다!" 왠지 녀석도 세이랑 비슷한 데가 있단 말야. 흠. 닮은 건가? 환경에 의해서 말이지. 가만, 그럼 나도 저렇다는 거잖아! 으! 싫어! "라플. 왜, 혼자 땅파고 그래? 우린 일단, 키히 쪽으로 가자.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는 거니까." 프라운. 오늘 해 떨어지는 거 안보이지? 쯔. "오늘은 해 안떴어. 날씨 계속 흐렸잖아." "오오! 이건 불길한 징조야!" 신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그 녀석은 참견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고. 우... "라플? 넌 저게 누구인거 같냐?" 그 녀석이었다. 엘메인이라는 녀석. 아, 그게 본명인지도 모르겠군. 확실한 건 내 약점이 키히라는 걸 너무 잘 아는 녀석이라는 거지. 문제야. "아, 아빠?" 제길, 뭐가 아빠냐! "나와 키히 사이엔 애가 없어. 모른다면 나중에 키히에게 확인해 봐도 된다." 목소리가 차갑게 나오고 있었다. 녀석은 계속 빙글거리고 웃기만 했다. 재...수 없군. "응, 그건 상관 없어. 어차피, 그런 것쯤 나완 상관 없는걸? 아, 내 아빠가 정말 당신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난 대 마도사의 아들이잖아? 후후후... 그래. 하지만, 당신, 이번엔 실수 한거야?" 뭘! 내가 뭘 했다고! 제발.. 날 가만히 내 버려두라고. 가마니 쓰고 있을께. "너, 이자식.. 죽여 버리겠어!" 내 손에서 차가운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차가운 얼음의 화살이 날아가려는 찰라, 녀석이 방긋 웃으면서 붉은 갈색 머리카락을 내밀었다. "젠장..." "이거, 주인. 아직은 안전해. 하지만 말야.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지. 후후후.. 왜, 화나? 계속 화내. 나, 그런 거 좋아하거든? 맹세컨데, 댁이 어떤 결정을 내려 준다면, 난 아무 짓도 안 할 꺼야." 녀석은 계속 재수 없게 웃고 있었다. 정말 재수 없는 일이군. 왜 저런 사이코한테 걸려가지고. "귀엽잖아. 참아." 프라운 녀석을 지긋이 밟아 주고 녀석을 노려 보았다. 녀석은 왠지 웃고 있는걸 잠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머리. 정말 맘에 들어. 당신.. 그거 알아? 내 제안은 당신한테 더 좋을 수 있다고." 듣지 않을 수 없는 위치가 아니라고. 젠장. 빨리 알아내라. 율지스. 평화는 네 손에 달렸어! "무슨 제안이지?" "당신이 깨끗하게 키히를 죽이면 되는 거야. 그 저주 받은 마녀를 말이지." 그건... 불가능해. 프라운이 어느새 회복하고 일어섰다. "별로,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 어떤 인간이 희생되던, 우리완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안그런가? 난 마족이야. 그 정도 정보는 가지고 있나?" 프라운의 얼굴이 살짝 웃고 있었다. 확실히 엘메인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뭐, 녀석이 정말 마족이라는 건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지. "그래? 그 썩을 마족과 손 잡다니, 마왕을 처단했던 당신 답지 않군." 내가 그 썩을 마족의 왕이 되었다네. 마족도 알고 보면 착해. 지도자가 좋으면 아무 문제 없는 게 그 종족이라고. 뭐, 일인 독재라 좀 그렇지만.. 철저하게 능력 중심으로 이뤄져 있어서 별로 불평도 없고. 근본부터가 인간과는 다르니까. "...상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난 키히를 죽일 수 없어. 그 어떤 무수한 인간들 보다, 그녀를 구하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녀 앞에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녀를 죽이나?" 엘메인은 점자 웃기 시작했다. 녀석의 눈이 갑자기 붉은 빛을 띄었다. 마력은... 전혀 없었는데? "그래? 그럼 넌, 죽어." 그리고 녀석은 순식간에 점프하여 내 가슴에 팔을 쑤셔 박고 있었다. 생명의 서 4 차례 27. 죽음과 생명의 무게 28. 제자와 스승의 길 29. 그 황녀와 그 공작의 사연 30. 종이 울리고 전투가 시작 31. 검은 종이, 하얀 종이 32. 영광의 검 27. 죽음과 생명의 무게 내게 단지 작은 시간이 주어졌었다면, 난 아마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외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주어진 시간이 길면 길수록 후회하고 슬퍼하게 된다. 그래도 시간은 가지 않는다. 이젠 무엇을 고민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괴로운 것들이 다 지나는 그 순간에도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처럼 생각되어지는 그 많은 미래를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말렝의 글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 손이 매우 차다는 걸 느끼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는 놈인가 보다. 잠시 후, 그의 뒤에 쓰러지는 프라운이 보였다. 음, 가슴이 좀 아프긴 하지만 아직 나는 죽지 않았다는 데 더 큰 의의를 두어야 한다. "아직도 그녀를 봉인할 마음이 들지 않나? 좀 더 찔러 줄까?" 얘 사디스트인가 봐. "아니, 더 찔러도 소용없어. 못하는 거지 안 하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너의 정체가 많이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지. 너, 정체가 뭐야?" 엘메인은 엘프다운 그 얼굴에 전혀 안 어울리게도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 봐야 키히보단 덜 사악해 보이는군.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냐? "엘메인이지. 그리고 댁들에게 보낸 암살자들을 기억하나? 딜로이쳐라는 사람과 그 외의 인물들도 모두 다 내가 보냈지. 후후후, 너가 라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너가 라플이 될 수 없는 이유야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우연히 마왕을 죽이게 된 덕분이지, 너가 라플이라서가 아니라. 안 그런가?" 안 그런데…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젊은 사람이 참 안 된 것 같아. 뭐,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댁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구제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만둬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프라운이 갑자기 앞에 나섰다. 엘메인의 손이 내 가슴에서 뽑혀 나가자 동시에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이 흐릿한 내 눈에도 들어와 잡혔다. 몸이 아픈 건 사실 많이 면역이 되었지만, 그래도 피를 볼 때마다 비린내 나는 건 정말 질색이군. "프라운, 그만둬. 너가 이길 만한 상대가 아냐." 상처는 어느새 아물기 시작했다. 엘메인은 역시 보통 인간답게 놀라고 있었다. 아, 인간이 아니라 엘프지. 근데 요즘 엘프 덕에 내가 아주 수난이군. 키히부터 율지스, 엘메인까지. 이거야 원. "역시 마왕답군. 좋아, 그래야지 후후후. 내 한 가지 알려줄까? 키히에게 그 사람들이 라플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려준 건 바로 나야. 그 전까지 그녀는 아무 것도 몰랐었지. 후후후, 아주 약간의 효과만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알려줬는데 왕국을 멸망시키고 사람들을 모두 다 없애 버릴 생각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해. 하하핫." 순간 혹시 이놈이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약간 들었다. 하지만 찾아보기로 작정하면 이런 놈은 의외로 많지. 뭐, 다 위대한 내가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정말 난 이해심이 넘쳐. "대체 왜 나에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게다가 키히를 미치도록 만든 장본인이라면서 이제 와서 왜 나보고 봉인하라는 거야? 너가 해." 이 얼마나 이치에 합당한 말인가? 녀석은 그러나 내 말을 완전히 씹고 헛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놈이 그간 지껄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걸 완벽하게 뒷받침해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뭐, 그렇거나 말거나 난 아무래도 좋다. 이 녀석만 어떻게 처리해 봐라. 상 준다, 상 줘. "라플, 괜찮은 거야?" 프라운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뭐, 그런 얼굴이어도 난 죽거나 하진 않는다고요. 이렇게 보여도 난 아주 아픔이 많은 사람이거든. 게다가 저 정신 나간 키히의 닮은꼴을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해질까 지금 고민중이라고. "아무렇지도 않아. 대신 속이 좀 아프다고. 이렇게 마법으로 계속 상처를 치유하다가는 나중에 내성이 사라질 텐데 큰일이야. 저 녀석, 대체 왜 저렇게 개 폼을 잡고 싸우는 거야?" 프라운은 약하게 고개를 흔들며 다시 앞을 응시했다. 녀석은 점점 더 헛소리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젠 자신의 꿈은 원래 마차를 모는 마부가 되는 것이었다는 둥, 혹은 자신이 이렇게 사는 건 모두 키히 탓이라는 둥 도대체 이야기의 요점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거기서 왜 키히가 나오는 거냐고. "하하하, 그런 것이다!" 뭐가… 여태까지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두서없고 정신없는 말을 들어준 것만 해도 대단한 것 같은데. "프라오니스, 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래, 후후훗. 난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나타난 그러한 마왕 따위와는 차원이 틀려! 내가 구원기사가 되어서 세상에 악을 떨치는 너와 키히라는 여자를 없애 주마!" 여태 한 소리는 뭐고 또 이 소리는 뭐야? 프라운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뭐, 얘나 나나 머리 돌아가는 건 비슷하겠지. 주변 공기는 어느덧 차가워지고 있었다. 밤이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스산한 바람 한줄기가 녀석 근처로 불어오면서 즉시 주변의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모래가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격렬해졌고, 어느새 그 가운데에는 엘메인이 서 있었다. "사악한 마왕아, 여자들을 구하고 싶거든 내 성으로 와라. 음 하하하!" 어이, 생긴 건 미소년인데 대사는 완전히 아저씨네. 음… 흐리다 흐려. 아까 맞은 곳이 치유가 별로 잘 안 된 모양이군. 뭐, 단박에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프라운, 나 쓰러지면… 알지?" "…바보 녀석." 왠지 녀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고 생각했다. 키히도 그렇고 엘메인 녀석도 그렇고, 요즘 엘프들 세계에 광견병이라도 도는 모양이지? 헤… 키히야,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간다. 내가 기절하고 나서… 뭐, 기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기절이 아니라 출혈 과다에 의한 쇼크 증세였으니까. 침대는 무척이나 포근했지만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건방진 엘프 녀석이 키히를 사칭하고 돌아다닌 것도 모자라서 내 자식 흉내까지 내서 아주 잠시지만 귀여움을 떨면서도 사람을 납치해 가다니. 용서 못하지 암. "메데이레나는 황녀니까 그렇다 치자. 그런데 살린은 왜 납치해 갔을까? 그리고 지 목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무슨 출생의 비밀 같은 건 눈곱만치도 없을 듯한 녀석들까지 왜 데려간 거지?" 프라운! 녀석들이라니, 나한테는 그래도 선배야. 그리고 내 침대 위에서 당장 내려가라고. "프라운, 너 지금 내 다리 깔고 앉아 있는 거 알고 있니?" "어, 몰랐는데. 지금은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사람들을 찾을 생각이 없는 거야? 난 우리 마족이 총 동원되어서 녀석을 갈가리 찢어놓아야 속이 시원하겠다고." 내 다리가 찢어지는구나. "아, 여기 계셨군요 스승님." 그때 율지스가 인상을 박박 긁으며 들어왔다. 야, 어디 스승 앞에서 그런 불온한 표정을 지으라고 하더냐. 이것도 용서할 수 없지. 암 그렇고 말고. "그래, 아파서 스승이 낑낑대고, 괴한에 의해 가슴팍이 쑤셔지고 납치 사건이 일어난 이때, 넌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녀석은 다시 깊고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어이, 땅 꺼져. 여전히 저렇게 한숨을 쉬는 걸 보면 아직도 폼 잡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군. "전 그간 한 가지 일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별건 아닙니다만, 아직은 정리가 된 상태가 아니니 나중에 다 정리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세이와 관련된 일입니다." 세이와? 그 애가 뭘 어쨌는데? 사실 알고 보면 녀석은 그야말로 한심할 정도로 할 일 없는 인간이 아니었어? "세이와 관계가 되는 일이 있어?" 윽, 또 괜히 말했다. 말만 하면 쑤신다 쑤셔. 이제 늙으면 더더욱 쑤시겠지? 그럼 나는 점점 늙어 가는 게 아닐까. 에잇! "예, 녀석의 과거와 관련된 일입니다. 뭐, 아직까지 그리 특별한 사항은 없지만 아주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살린에게 제가 뭔가를 부탁했었는데 아마 그것도 연관이 있는 문제일 겁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 녀석이 관련이 있다면……." 대화를 할 때 주어와 목적어를 빼면 듣는 사람은 뭐가 뭔 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지. 결국 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뭔가 뭐와 관련이 있다는 뜻인데… 젠장, 나 화나려고 해. "스승님이 이렇게 누워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야?" 스승의 초로롱 공격이라는 것이지. 이런 거에 넘어가는 놈이 더 이상한 놈이겠지만, 그래도 일단 율지스는 아직 정신 연령이 애니까. 후후후. "스승,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농담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너무 허황된 이야기잖아. 나 궁금하게 해서 죽이려는 속셈도 아니면서 말이지. 음. "율지스,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하면 안 되나?" "…구원기사에 대한 겁니다." 구원기사? 젊은 시절에 거의 반 미친 상태로 말한 그거? "내가 이야기한 거잖아. 그걸 또 왜 이야기하는 거야?" 율지스는 다시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그러다 너 습관된다. 늙어 가는 거라고. 뭐, 니 인생 네가 알아서 하는 거다만. "스승님,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구원기사 운운한 건 다 엉터리입니까? 심심해서 한 말이냔 말입니다." 심심해서 그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건 예전에 내가 마왕과 싸우다가 알게 된 이야기야. 그건 내가 한 이야기도 아니었다고. 뭐, 고문서를 마왕이 못 읽었다는 것도 문제가 있는 일이지만. 녀석, 문맹이었거든." 일만 이천 마족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그 녀석 정말 문맹이었지. "하지만 그게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대 마도사가 이야기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겁니다." 문제라… 내가 말한 게 그런 파장을 일으키다니 역시 난 대단한 마도사야. 훗, 하지만 율지스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군. "무슨 문제?" "그걸 실현시키고자 하는 거죠. 그래서 전 그간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해 가장 적합한 인물을 산출해 내었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말이지? "그래서 뭘 어쩌려는 건데? 마왕을 무찌르게? 하지만 마왕은 나야. 그리고 마족들도 특별히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안 하고 있잖아." 프라운은 말똥거리는 눈을 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면서 입에선 뭔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 몰래 또 뭘 먹는 거냐. "예, 하지만 그 외에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있죠. 엘메인이라든지 키히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자꾸만 등장하게 되니 구원기사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뿐 아니라 근래 들어 이상한 전조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고요. 신전도 수상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터지고 있어요. 사람들은 구원기사가 나오면 이러한 문제들이 한 번에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거죠." 그게 그런 식으로 해결될 리가 없잖아. 게다가 그건 마왕이 예언한 거라고. 나? 나도 마왕이지만 아직 그런 예언을 할 만한 계시는 받지 않았다고. 그 바보 같은 신이랑 단 한 번 이야기한 게 다란 말야. 왜 그렇게 목숨 걸고 구원기사가 생겼으면 하는 건지 이제 난 정말 모르겠다. 사람들의 군중 심리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구원기사 혼자서 그 모든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구원기사를 입 밖에 낸 의도는 당시 혼란했던 상황이 종료되고 내가 완전히 은거하면서 일종의 대비책을 깔아놓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악한이 나오더라도 구원기사라는 쪽 팔리는 이름을 가진 놈이 나와서 처리해 줄 터이니 다 안심하고 살아라 하는 뜻이었지. 덕에 내 전설에 따라 트라이너 같은 경우는 굉장히 준비를 많이 했었다. 그래 봐야 쫄딱 망했지만. 그런데 그게 왜 여기서 다시 거론되는 것인가? "흠, 난 모르겠군. 어찌 되었든 자넨 그 구원기사에 대해 무얼 알아냈나?" 율지스는 한동안 폼을 잡았다. 이 녀석, 이제 건방진 데다가 거만하기까지. "제가 알아낸 것은 다름 아니라 구원기사가 되기 위한 과정과 그와 관련된 소문입니다. 듣기론 오직 인간 중에서 위대한 라플의 유물을 얻는 자가 구원기사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인데……."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바라본들 내가 내 유물을 알 리가 없잖아! 게다가 그 유물이라는 게 만약 {생명의 서}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고. 필사본의 역할이 그렇듯 모든 일을 적어놓는 역할만 한다면 만의 하나 내가 홀라당 태워 버린 그 진본… 가만, 그건 그런 이상한 기능 같은 건 없었잖아. "그 유물이 뭔지는 너도 모르지? 그러고도 라플의 제자라 할 수 있냐?" 프라운이 율지스를 보면서 이죽거렸다. 미안하지만 정작 라플 본인도 모르는 유물을 제자가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만둬, 이렇게 고민한다고 구원기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세이는? 그리고 서둘러 엘메인을 찾아야만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프라운이 내 의견에 동조하고 곧바로 추적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녀석 의외로 쓸데가 많은 마족이란 말이다. "라플, 여기야 여기." 순간 속삭이는 귓가로 엄청나게 찐득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닭살이 주르륵 돋는 것이 기분이 엄청 드러워진다.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나 본데, 옆의 귓가에서 작은 마족 하나가 큭큭대기 시작했다. "라플, 내가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모습으로 등장하니까 어때? 널 좀 더 보려고 빨리 오려 했는데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계속 뜻대로 되지 않아도 난 상관없는데. 녀석은 하브라이드였다. 프라운이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서 내 귓가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너, 하브라이드잖아. 왜 그렇게 파리 같은 폼으로 손바닥을 비비고 있는 거야? 인생이 구차해 보여, 때려 치워라." 파리……. "난 파리가 아냐!" 곧 커다란 굉음이 울리면서 갑자기 하브라이드의 본모습이 나타났다. 동시에 율지스는 아주아주 기분 더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그리고 한마디했다. "젠장, 이젠 별 잡종 같은 마족들도 다 끼어드는구만." 하핫! "응, 너 말야 율지스지! 아무리 네 스승님이 내 주군이라고 해도 그렇게 건방지게 굴면 용서하지 않아요! 나쁜 어린이는… 아얏! 라플, 왜 때리는 거야 응?" 아무리 눈망울을 크게 굴려도 너가 뭐 귀여운 줄 아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소리! 내가 널 귀엽게 보다니… 아직 백 년은 일러! "자, 어서 제 집무실로 가죠." 우는 아이 더 패주고 우리는 모두 집무실에 가요. 하이~브라이드는 내 원수, 내 원수 하브라이드…라는 뜻 모를 노래가 떠오르는군. 아마도 율지스가 흥얼거리는 멜로디에 맞춰 부른다면 딱 이겠어. "그럼 스승님께선 그들에게서 키히 님을 봉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셨다는 겁니까?" "응. 뭐,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모두들 각자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집무실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정적과 생각의 감정이 휘몰아쳤고… 뭔가 분위기 타개를 위해서 한마디하려고 폼을 잡았을 때, 하브라이드가 갑자기 끼어 들었다. "음, 그보다 아주 중요한 일을 까먹고 있었네. 이봐, 라플. 내가 말이지 여기로 한참 오는 도중이었는데 그때 어떤 사람을 발견했지. 그가 말하기를… 아무 소리도 안하고 갔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오늘 굶고 왔다는 사실이 떠오른 거야. 라플, 배고파." 제발… 이젠 헛소리는 그만. "하브라이드, 그만 하고 어서 알아온 자료나 뱉어내." 프라운이 인상을 쓰면서 한마디하자 녀석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배고픈데…'라는 말을 연발했다. 그러고 나서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알아낸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어요. 까만 악마와 하얀 악마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무서움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불러가면서 숲을 걸어가고 있었죠. 그런데 저 앞에 작은 보석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둘은 생사를 걸고 싸움을 한 끝에 까만 악마가 이겨서 그 보석을 쥐게 되었죠. 아, 그런데 그건 보석이 아니었어요. 그건 모조 다이아몬드였어요." 이쯤 되면 하브라이드에게 존재의 소멸을 명령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왜 갑자기 동화 타령이야! "그래서?" 참을성이 넘치다 못해 뻗치는 우리의 위대한 프라운은 조용히 반문했다. "예, 그래서 화가 난 까만 악마는 그걸 흘린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기 위해 흔적을 쫓아갔지요." 겨우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열 받은 걸 보면… 가만, 이거 하브라이드 이야기 아냐? 역시 수상해. "그럼 그 사람을 찾았나?" 싸늘하게 프라운이 질문하고 율지스는 종이를 뒤적이면서 뭔가를 받아 적고 있었다. 혹시 나중에 '까만 악마 하얀 악마'라는 제목으로 동화라도 쓸 생각은 아니겠지? "예, 까만 악마는 서서히 길을 접어들던 도중 아주 강력한 힘이 내뿜어져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신전을 하나 보았답니다." 신전? 이건 또 의외의 사건이군. 갑자기 신전이라니? 버려진 성이나 그런 거라면 몰라도. 그리고 신전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신전이라… 그럼 그건 누굴 모시는 거지? 뭔가 모시는 대상이 있을 게 아닌가?" 그 말에 하브라이드는 손을 입에 올리고 쉿 소리를 냈다. 조용히 하라는 거군. "그러고 나서 그 까만 악마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 안으로 덥석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안에는 까만 악마보다 훨씬 무서운 엘프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엘프는 자신을 엘메인이라 소개했고, 어두운 곳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어요. 아, 까만 악마는 그 사람이 모조 보석을 흘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달리 도망갈 방법이 없었지요."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리고 율지스와 나를 한 번 둘러보고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때 한 소년이 등장했지요. 그 소년은 겨우 얼음화살 주문을 외워 사람들을 혼란시켰답니다. 하지만 이내 잡혔지요. 그 틈에 까만 악마는 겨우 도망갈 수 있었는데, 그 소년이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언뜻 들을 수 있었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세이였어요." 순간 잡고 있었던 컵이 깨지면서 손이 피로 물들어갔다. 그러나 아픔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다. 율지스는 순식간에 하브라이드의 멱살을 움켜쥐고 협박했다. "젠장, 그 세이를 어떻게 한 거야! 그 앤 준 바보급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녀석이 들으면 꽤나 낙담할 거야. 그리고 세이 팬이 얼마나 많은데. 신전 사람들은 일단 다 세이 팬클럽 회원이라는 걸 모르고 있구나. 죽은 다음에 한탄하면 이미 때는 늦으리. "잠깐,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아직 더 남은 게 있는가?" 녀석은 벙실거리면서 다시 웃음을 지었다. 웃, 재수 없다. "까만 악마는 혼이 저 하늘 너머로 다 날아갈 때까지 당황했지요. 그때 그 소년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하얀빛에 휩싸이면서요. 그러자 엘프는 무척 당황했고, 까만 악마는 간신히 도망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점점 이야기가 알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점점 더 당황했다. 프라운은 계속 똥 폼을 잡고 있었으며, 율지스는 이제 엎어 치기 한판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서 말해, 녀석은 무사한 거야 아냐!" "에… 율지스, 그만 앉아라. 네가 그렇게 하브라이드를 팬다고 뭐가 어떻게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보다 단서를 찾았다는 게 중요하지. 보아하니 그 까만 악마는 하브라이드의 부하 내지는 친구일 가능성이 높아. 안 그런가?" 하브라이드가 갑자기 내 옆에 다가오더니 나를 꼬옥 안으면서 말했다. "역시 라플은 내 맘을 잘 알아듣는구나.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닮는다더니, 우리가 딱 그거야." 누가! 이 자식을 어떻게 죽여야 속이 시원할까? 알려다오. "그럼, 지체할 시간이 없군요. 어서 안내해, 하브라이드." "에? 아직 수도의 명물인 물시계랑, 붕어 탑도 구경하지 못했는데. 싫어, 난 구경하고 갈래. 좀 늦게 가도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 아냐?" 역시 마족은 마족이군. "응, 그래 하브라이드만 놓고 우린 먼저 출발하자. 넌 앞으로 따야, 따." 왠지 내 입에서는 상당히 자기 중심적인 발언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신경 쓰면 오래 못 산다. 지가 무슨 힘있나? 하브라이드는 당연히 쫓아 나와야 했다. 일행은 케빈과 율지스, 하브라이드, 프라운, 나로 구성되었으며, 오른 선배 등은 와봤자 상대가 안 되므로 일행에서 제외시켰다. 이건 아주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그 신전에 가기 위해서는 트라이너의 남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중간에 마을은 없지만 큼지막한 성이 몇 개 있다. 그리고 그쪽에서 아래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내 영지가 나오지. "세이는 무사하겠죠? 그런 어벙한 녀석을 인질로 잡아도 별 소용도 없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그거야 맞는 말이지. 하지만 세상은 넓고 변태도 많다. "여긴 숲이군요." 우리가 걷기 시작한 지 정확히 19시간만에 케빈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아주 자연스럽게 앞에서 계속 머리를 긁고 있는 하브라이드에게 향했다. "그…러네. 라플,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재미없으면 알지?"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하브라이드는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소 중에서 최고의 미소를 지으면서 아주 발랄하게 말했다. "길을… 잃은 것 같아." 순간, 우리 모두는 그에게 살의를 느꼈다. 그렇다, 마족에게 살의를 느끼다니.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놀라운 일도 종종 느끼게 되는 거다. "그럼 아까 들어올 때 이야기하지 그랬어. 이제 와서 이야기하면 찾을 방도가 없잖아. 영지를 거치지 않고 숲을 통하면 손쉽게 빨리 갈 수 있다면서?" 율지스는 왠지 이를 갈고 있는 듯했다. "멍게, 해삼, 말미잘, 참새, 갈매기, 지네, 파리, 모기…의 정신 연령을 가진 녀석." 이렇게 자신의 심사가 꼬였다는 것을 잘 표현하는 케빈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심사가 꼬인 놈이 있건 말건, 문제는 바로 여기서 어떻게 나갈 것인가 하는 건데… 이 몸이 아무리 대 마도사 나으리라 해도 좌표 없는 곳에서 텔레포트 할 수는 없는 일이요, 갑자기 길 안내할 사람을 만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영지가 근처에 있다고 했죠?" 갑자기 프라운이 나지막한 어조로 숲의 위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얀 성채가 눈부신 자태를 뽐내면서 서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마치… 아, 그래 안개가 끼어 있어서 무슨 훈제구이를 하는 집으로 보였는데, 내 배가 많이 고프긴 한 모양이지. "백색의 성이라… 짐작 가는 것이 계십니까?" 프라운이 다시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왠지 그래도 대 공작인 내가 알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인 듯한데… 그러나 천만에. 내가 그런 걸 다 외우고 다닐 만큼 한가해 보이냐? 내가 집히는 데가 없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엘프답지 않게 이것저것 잘 알고 있는 율지스 녀석이 아는 체를 했다. "오, 저긴 그 유명한 전대 공작 가문의 하나로 알려진 이하르트 위드스 가문입니다. 틀림없어요. 거의 별 활동도 하지 않는 가문이었는데, 키히 님이 등장하기 전까지 재상을 지낸 적도 있는 가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별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문이 있었나? 내 기억에는… 응? 그런데 이제 공작가는 피스트레이카 가문 하나만 남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떻게 저 가문이 남아 있는 거지? "지금은 공작가가 아냐?" 율지스는 방그레 웃어 주었다. 아무래도 지 아는 내용이 나와서 기쁜 모양이군. 좀팽이 같으니라구. "예. 안타깝게도 이 가문은 원래 라플 님 이전에도 있었던 매우매우 유서 깊고, 왕실과도 연관이 있는 집안이었지요. 하지만 저번에 혼란기를 틈타서 왕관을 어중이에게 빼앗겼으니 한탄할 노릇이죠. 게다가 원래 공작이란, 왕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가문이 누리는 최대의 영예 아니겠습니까? 제가 듣기론 스승님이 이러고저러고 해도 꽤나 왕실에 은혜를 입혔던가 본데, 그런 것 때문에 스승님 가문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문제는 이런 가문들은……." 대충 이해는 가는군. 겉보기와는 달리 왕도 상당히 무서운 놈이라 이거지? 나도 다 이해했다고. 뭐, 어느 왕이나 왕위를 위해서는 싸우기 마련이지. "그럼 지금은 후작이야?" "그렇죠. 하지만 관직에서는 완전히 물러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론 이젠 후사도 없다고 하더군요. 워낙 폐쇄적인 집안이라 친척도 없고……." 흠… 뭐, 그래도 밥 한 끼 정도야 안 주겠어? 마족 두 마리, 어중이 신관 하나, 공작 하나, 그의 제자 하나… 뭐, 어때 쌈박하잖아? "들어오시죠." 정원은 그래도 매우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치고는 매우 의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깔끔하네." "밥은 주겠지?" 마족들 하는 말들이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군. 뭐, 이것도 다 내 업보라 생각하고 거둬들여야지 어쩌겠어, 젠장. 앞에 걸어가는 저 집사 비슷한 사람 외에도 이 집에는 사람이 무지 많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도 없어 보이더니만 이 저택에는 몰래 숨어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더냐.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주인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절도 있는 동작, 화려한 흰머리… 음, 집사의 표본이다. 스카우트 제의를 해야겠어. 오, 그래 얼마면 되겠니? 얼마면 되냐고? "스승님, 어떻습니까? 매우 수상한 곳입니다." 참고로 율지스는 마법사 수련밖에 받지 않아서 누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당연하지. "그래. 율지스, 수상하긴 하다만 특별히 아직 내 비위를 거스르지는 않으니 내비둬라." 마족 두 마리가 마주 보면서 싱긋 웃었다. 하브라이드 녀석이 다시 상큼한 미소를 흘렸다. "먹어도 돼?" "절대 안 돼." 다시 고개를 숙이는 놈. 역시 생각 없는 놈… 그렇게 개 폼을 잡고 앉아서 얼마간 노닥거리고 있자 이곳의 주인이라는 전직 공작, 현직 후작이 나타났다. 후작은 그저 평범한 인상의 이웃집 아저씨 같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여행자들이시라고요?" 그는 엷게 미소지으면서 우리 중의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율지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당연히 율지스는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이중의 가장 연장자이자 실질 나이로 치면 가장 늙다리인 녀석을 바라보았다. "하브라이드, 인사해야지." 그는 벌떡 일어나서 아주 우아한 동작으로 율지스를 발로 걷어찼다. 그런 뒤에 후작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브라이드입니다. 지금 저희는 모험중이며 일행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처에서 마을을 찾지도 못하고, 그리고 계속되는 숲 덕에 완전히 헤매고 있는 중이죠." 음, 연기 잘하는군. 헤매는 건 다 네 덕이지 아마. "아, 그렇군요. 그럼 쉬었다 가도록 하세요. 언제까지든……." 그 사람은 피곤하다면서 곧바로 나가 버렸고, 우린 그저 길을 가던 어중이떠중이 주제로 후작을 만났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그건 사실 케빈의 의상 덕이 컸다는 걸 저 마족 녀석들이 알 리가 없었다. 케빈이 신관이니, 아마도 저 사람은 신전에 그렇게 잘못 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그나저나 이곳에 살다니 악취미군. 저택도 무지 오래된 곳인 데다 하인도 몇 명 없고, 대부분 있는 놈들은 자객처럼 숨어 있는 자들뿐이고… 음. "수상해." 그렇게 이야기 안 해도 엄청나게 수상하다고, 프라운. "난 좀 쉴 테니까 내일 아침에 좀 깨워 줘. 바로 나가야지."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놈 한 놈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요즘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군. 책을 품에 넣고도 완전히 까먹고… 어라라? "저기… 하브라이드, 내 품속에 있던 책이 어디로 갔을까?" 프라운은 창가에 기대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브라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디서 흘린 거 아냐?" 그래, 설마 내가 그 {생명의 서} 필사본을 흘렸다는 건가! 진품을 태워 버린 데 이어 필사본까지 잊어버리다니, 나 혹시 무서운 놈 아냐? "끄아가가각!" 내가 책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순간 갑자기 엄청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상당히 독특한 비명이었다. 보통 여자라면 꺄악, 남자면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나? 끄아가가각? 이거 비명계에 새로운 충격의 바람이 이는군. 잠시 뒤, 비명 일보를 주목해야겠어. "너 왜 바람맞고 있냐, 빨리 가보지 않고?" 프라운은 내가 노는 꼴을 못 본다. 결국 나는 녀석에게 질질 끌려서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신기한 건, 하인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 이상타, 한둘은 지나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수상해라는 단어가 머리를 헤매는군. "프라운, 이상하지 않아? 아무도 없다니, 이거 마치 짜여진 함정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 하브라이드는 케빈의 뒤를 졸졸 쫓아서 앞서 가고 있었다. 비명은 계속 들려오고 있어서 길을 잃고 헤맬 염려는 없었다. 문제는 비명의 강도가 점점 세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젠 아주 돼지 멱을 따는군." 하브라이드는 왠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고, 케빈은 역시 신전 기사답게 개 폼을 잡고 있었다. 무서운 놈. "저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인 것 같습니다." 케빈의 정색과 함께 하브라이드는 하품을 했으며, 프라운은 기침을 했다. "내려가도 될까?" 모두는 약간 떨떠름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아래로 설설 내려갔다. 둔탁한 나무문을 쉽게 열고(프라운이 한 방에 날렸다) 모두는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상황 1: 웬 대머리 남자가 웬 소녀에게 팔을 물어뜯기고 있다. 상황 2: 대머리 남자의 비명이 틀림없다. 상황 3: 결정적으로 소녀는 아는 사람이었다. 상황 4: 대머리가 나쁜 놈이다. 일단 상황이 정리되자 당연히 우린 즉시 대머리에게 달려들었다. 하마터면 대머리의 직사광선을 받아 눈부심을 당할 뻔한 우리는 즉시 눈을 낮게 깔고 옆으로 달려가서 녀석을 단번에 때려 눕혔다. "아, 넌!" 프라운이 질겁했다. 음, 둔하군. 난 아까 알아챘는데. 저런 머리색이 흔할 리가 없다. 갈색인데 약간 붉은 빛이 진하게 돌고, 게다가 빨간색 옷을 입고 있는 저 공주 나으리… 아니, 황녀지. "꺄악, 오빠야~" 얜 필요할 때만 오빠야. 이봐, 난 네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 그러니 앞으로는 나를 깍듯이 모셔야 하느니라. 어이! "나 구해 주러 온 거야?" 갑자기 초롱초롱 버전이… 어이, 귀엽지도 않은 얼굴 어디다 갖다 대냐. 뭐, 잘 보면 쪼끔 귀엽기도 하지만. "우연이지." 프라운의 손이 갑자기 날 확 끌어가 버렸다. 신장 차이, 극복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보라. "우연? 하지만 여기까지 올 수가 없잖아. 근데 여긴 어디야?" "그보다 살린은 어디 있지?" 케빈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뭐, 그렇게 물어 봐도 모르지 않을까 싶은데. 대개의 여자들은 눈이 가려져서 이런 곳에 온다고. "아, 알지." 앞의 말 취소하지. "살아 있어? 무사한 거지? 다친 데도 없어?" 그럼 누가 죽이니? 케빈의 그 오버를 맘껏 지켜보던 프라운과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기는 했지만. 메데이레나는 내 팔을 얼른 움켜잡고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나보고 싶었지?" 누가 이런 어린애를 보고 싶어하겠어? 그리고 나에겐 이미 키히라는 여자가 있단 말이다. 그녀가 알면 너희들은 당장 십자가형은 물론이고 다 무덤으로 가야 할 것이여! "그…래 그래, 살린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 그녀는 작게 고개를 떨구었다. 아까는 안다고 했으면서 이런 행동을 하면… 우리의 뇌는 그녀의 행동을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헷갈려하게 된다. "모르…는 거야, 아니면……." "응, 살린은 말이지 저 뒤에 있어." 모두의 고개는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 손을 따라 멈춘 곳에는 거대한 석벽(石壁)에 아주 두꺼운 철창이 두 개나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살린이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사…알…린!" 케빈은 철창으로 달려가서 철창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게 빠지면 감옥이 아니다. "으…으." 살린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주변의 핏자국이나 그의 하얀 사제복이 피로 더럽혀져 있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심하게 얻어터진 듯했다. 최악의 경우, 그는 살았을지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해보지." 하브라이드는 케빈 옆으로 다가가 벽 앞에 섰다. 미소를 지었다 싶은 순간, 곧바로 벽을 손으로 부셔 버렸다. 프라운은 여전히 싸늘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고, 모두의 시선은 하브라이드 녀석에게 집중됐다. "알고 보니 벽 부수는 소년이었다는!" 케빈의 경악을 조용히 주먹으로 다스린 뒤에 살린에게 다가갔다. 그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다 못해 굳어 있었고, 그의 코는 심하게 부러졌으며 얼굴에는 온갖 상처가 가득했다. "살린, 정신 차려! 넌 양지 바른 곳에 묻히게 될 꺼야!" "죽지는 않았다."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한 사람이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우리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후작이라고 한 놈이었다. 젠장, 이런 곳에 숨어서 권력을 꿈꿨을 리는 없는데. "그럼 기절해 있는 건가?" "아니, 어떤 실험을 하기 위해 약을 투여했는데… 과연 에네브는 다르더군. 보통 인간보다 마족의 피에 대한 적응력이 더 뛰어나." 그 말을 듣자마자 난 살린 녀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게 그거 같았다. 마족이며 대 마도사인 내가 뭘 알 수 있겠나. 기껏해야 좀 불순한 기가 섞였다는 정도만 눈치채도 대단하구만. "실험이라면, 예의 그 마족의 피를 뽑아서 인간에게 주입시키면 충실한 종이 된다는 그건가?" 프라운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왔다. 녀석, 알고 보면 꽤나 무서운 놈이 아닐까나? "그렇지, 여기 좋은 실험체가 또 가득 들어왔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이걸로 내가 다시 왕이 될 수 있어!" 헤, 완전히 하늘로 날아가는구만. 그런데 왕이 된다고 하는 건 좋아. 그건 문제 될 게 없지만, 다시라니? "당신, 언제 왕이었던 적이 있었어?" 내가 말을 건네자 그는 코웃음을 쳤다. "훗, 어린애가 눈치도 빠르군. 제법 쓸 만해." 어린애…라니, 난 이미 너의 할아버지뻘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말야. 하브라이드는 못마땅한 듯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족의 피를 먹여서 마물이 되게 한다는 댁의 착상은 좋은데, 정말 마족의 피를 사용해 본 적은 없었지? 기껏해야 마물 정도 아니었나?" 그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이면서 손바닥을 한 번 탁 쳤다. 그와 동시에 다섯 명의 사람이 내려왔다. "저건……."(하브라이드) "그렇군."(프라운) "……."(케빈) "뭔데?"(메데이레나) 일행은 잠시 메데이레나를 일초간 동시에 바라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돌렸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말, 건드리는 놈이 미친놈이다. "단골이 되겠어. 계속 저런 놈들만 보게 되다니. 어이, 정화하면 끝나는 저런 놈들을 내보내다니 무슨 생각이지?" 케빈의 입에는 한줄기 비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나를 믿고 저러나 본데, 한 가지 말을 건네서 그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야겠군. "후후후후, 그래? 내가 너희들에 대해 조사도 안 했을 것 같나? 당연히 소란스러운 놈들에 대해선 다 알아보고 있었지. 당연히 여기선 신성력을 쓸 수 없지. 이유는 안 알려줄 거지만." 그 말을 들은 일동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는 검을 빼어 들 준비를 했다. "비겁해!" 갑자기 메데이레나가 나섰다. 그녀의 걸음은 의연했으며, 그녀의 눈동자는 뭔가 확신을 가진 것처럼 반짝거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조금 두려운데, 어디 바람 들어오는 데라도 있나? "뭐가 말이지? 아직 어린 데다가 여자라서 살려두었더니 못하는 말이 없군." "그거야 당신은 악역이니까 당연히 여기 정의의 용사에게 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 마땅히 당신은 당해 주어야 하고 마치 그들의 기술을 알았어도 모르는 척,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야 맡은 바 악역에 충실한 거 아닌가요?" 어이, 왠지… 그리고 내가 바라본 그 후작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나지막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리석군, 어디서 그런 확신을 얻었는가 어리석은 아이야." "이쪽이 더 미남이잖아." 참으로 애다운 발상이었다. 그리고 이 이론의 원조는 원래 케빈이었는데 녀석은 이제 아주 고개를 끄덕이다 못해 옆에다 칼로 낙서까지 하고 있었다. '불법 악당 물러가라.' 대체 너희들의 뇌 구조는 어떻게 생긴 거니. 죽은 후에 나에게 뇌를 넘겨라. "알고 보면 이들도 악당일지 모르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곳에서 과연 너희들이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지. 안 그런가? 명심해라, 여긴 곧 마력이 듣지 않게 될 터이니." 그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옆에 있던 놈들의 재빠르고 날카로운 동작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물의 피를 받고 마물이 된 인간들. "으, 이 나쁜 놈!" 케빈은 검을 휘두르자마자 헛손질의 지대함으로 인해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로 그 위로 괴물의 손이 스쳐 지나갔는데, 나뒹군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쳇… 프라운, 넌 안 싸우냐?" 하브라이드는 꽤나 못마땅한 듯……. "아, 싸울 필요가 없지. 저놈만 건져서 튀면 그만 아냐?" 그의 손에서 검이 빠르게 움직이자 살린은 바닥에 코를 박았다. 그는 케빈과 살린을 낚아채서 재빨리 외벽으로 뛰어 올랐다. "그렇군, 그런 방법이! 어이, 가자!" 하브라이드도 즉시 손을 들어서 메데이레나를 거꾸로 달고선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는… 잡혔다. "먼저 가." 괴물을 바라보는 하브라이드는 잠시 놀라는 눈치인 듯했다. 뭐, 내가 남기로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세 명은 이 방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벽을 부수고 달아났다. "…넌 왜 남았지?" 후작의 얼굴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끈적끈적함은 둘째 치고라도……. "너, 무엇과 계약했길래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거냐?" 아까부터 뭔가가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기분 탓이려니 했는데, 그건 저 후작이 들어오는 순간을 기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순간 방안은 싸늘한 공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섬유 같은 것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누구와 계약을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아무하고도 계약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진실로 보여졌다. 아마, 저 얼굴로 거짓을 고하는 거라면 그는 후작일 리가 없지. "나와 계약했지요." 웬 놈이 방긋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어느새 내 뒤에? 뒤로 고개를 돌리자 그 싸늘한 시선과 아름다운 미소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누구냐!" 후작은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으니, 그건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미처 다 돌리기도 전해 나는 어느새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얼굴을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순간 생각이 겹쳐졌다. 일행을 보내기를 잘했다. 메데이레나는 아마 울지도 모르겠지만… 세이 녀석, 잡혔다는데 잘 지내고 있는지. "정신이 드나?" 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내 정면에는 아까 살린이 걸려 있던 포즈 그대로 후작이 걸려 있었고, 나 또한 그 자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만 아직 배후가 누군지도 모르니. "예." "저놈, 그래그래 분명히 그 자야." 여잔 아닌 모양이니 한숨 돌리겠군. 자,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누구일까? 살린을 납치한 자, 그는 엘메인이니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여자 선배들은 어디로 갔다는 건가? "당신,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했소?" 궁시렁대던 그가 날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한쪽이 없어져 있었다. 피가 흐르는 것을 보니 아마 얼마 전에 뽑힌 것이 틀림없었다. "나머지라니? 네 일행이라면 아까 도망치지 않았느냐?" 모르는 거군. "우릴 이곳에 가둔 사람은 뭐 하는 자입니까?" "나지. 우리 오랜만이지?" 난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올라오는 공포 아닌 공포의 감정이 내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마…왕." 내게 봉인 당했다가 마침내는 정신체가 소멸되어 버린 그 자가 왜 여기에… 죽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내게 힘이 전해질 턱이 없지 않은가? "그래 알아보는군." 그는 작은 의자를 끌어다 앉고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예전과 비슷한 그 퇴폐적인 분위기에서부터 그 달관한 듯한 모습까지 뭐 하나. "어떻게……." 그는 철창을 한 손으로 서서히 쓰다듬었다. "글쎄, 어떻게였을까? 난 소멸 당했는데. 아, 물론 정신체는 아직 남아 있었지. 힘은 다 잃었지만… 힘은 애초부터 너에게 간 거였으니 내게 의미가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힘을 얻으려고 이러고 있는 건 아냐." 원래도 세상 다 산 놈 같았지만 지금은 그 증세가 더 심해졌구만. "그럼 왜 이러지?" "맞춰봐, 나의 사랑하는 라플." 흐걱! "엇, 너흰 그런 사이었단 말인가?" 이봐 아저씨, 그런 망발을! 그의 옆에 순식간에 번개가 날아가 박혔다. 그리고 마왕이 싸늘하게 말했다. "한 번 더 실없는 소릴 지껄이면 이번에는 다른 눈에 박히게 해주지." "넌 여전히 무서운 놈이구나." 그는 단지 살살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 그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마왕이었던 그와 용사의 신분으로 찾아간 나. 나는 동료의 배신으로 혼자 단신으로 마왕의 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많은 괴물을 처치하고 난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거기에 서 있었다. '날… 찾아온 건가? 이 무료함을 끝낼 수 있나?' 답하지 못했다. 그의 무료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 그땐 그래도 꽤나 멋있었는데. 이놈을 보고 마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인간도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아, 그저… 근데 너 아직 대답하지 않았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애꿎은 사람들을 납치하고." 그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인간의 몸에 침입해서 저런 일을 하다니 참 할 일도 없는 놈이야. "무료해서…라고 말하면 화내겠지? 그건 아냐. 다 이유가 있어. 하지만 지금 말하면 안 되겠지. 라플, 내 친구여. 날 위해 단지 얼마간만 이곳에 있어 줄 수 있겠나?" 부탁하는 자세는 좋은데, 댁은 지금 앉아 있고 난 지금 매달려 있다고. "싫어, 제자를 구하러 가야 해." "…그럼 힘으로 가둬 둘 수밖에. 엘메인!" 그의 입에서 아주 익숙한 이름이 터져 나왔다. 내 눈앞에는 순식간에 아름다운 엘프 한 놈이 서 있었다. 28. 제자와 스승의 길 처음 그 아이를 기르기로 마음먹었던 건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내게 그 아이는 제자를 넘어 자식과 마찬가지의 존재였다. 율지스와는 달랐다. 율지스는 처음부터 아이가 아니었지만 녀석은 아주 어린아이였다. 그건 그가 죽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생각해 보면 모두 짜여진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무서운 생각.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속에서 꼬이는 인간의 운명의 실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내 깊은 마력이 비록 인간 최고라 하지만 장담할 수 없음을 한탄하리라. 나 또한 그 아이의 운명을 알 길이 없으니. 라플 눈앞에 서 있는 녀석을 보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혹시 지지리 복도 없는 대 마도사 나으리가 아닐까? 왜냐면, 이제까지의 경과를 두고 볼 때 저 자가 나를 좋아할 이유는 혹시라도 없었으니 분명히 내 가슴에 칼이나 안 꽂으면 다행이 아니겠는가? "엘메인이로군." 녀석이 비굴하게 웃는 걸 보니 문득 굴비가 먹고 싶어진다. "예, 안녕하세요? 아… 마왕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대로 두고 저흰 어서 가봐야 하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방해하는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엥? 그럼 이 위대한 마도사를 버려 두고 가겠다는 거냐? 적어도 가기 전에 악당답게 비밀이라도 속 시원히 이야기해 주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좋아. 라플, 나중에 보자. 그리고 내가 한 말 명심해라." 너가 뭐라고 했는지 내가 어떻게 기억 하냐! 젠장젠장, 기억나는 거 하나도 없는데 왜 날 괴롭히는 거야! 둘은 그렇게 후작과 나를 버려 두고 사라졌다. 둘이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은 귀족 중의 귀족들이 마주 보고 있는 셈이니까……. "근데 후작, 왜 이런 일을 한 거지? 엘메인의 꼬임에 넘어간 이유도 있을 텐데." 그는 나를 잠시 응시했다. "…네놈은 모를 것이다." 대뜸 한다는 소리가 네놈? 어이, 댁보다 내 나이가 더 많다고. 그리고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는군. 내 입장에서 보면 엘메인과 전직 마왕 녀석은 완전히 변태라고. "뭘? 너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잖아." 자, 후작은 이제 열이 받다 못해 하늘로 승천할 지경일 것이 틀림없었다. 묶인 상태에서도 그의 어깨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의 머리는 곤두서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것이 건방지구나." 후작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뭘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무서운 놈임에는 틀림없지. "주인님, 여기 계십니까?" 곧 문이 열리면서 우릴 집안으로 안내했던 집사가 들어왔다. 덕에 우리는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일어났다. 이젠 그 마족 녀석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이렇게 차를 내주시니 조금 고맙기는 하네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고마워하라고." 따뜻한 차는 어느새 내 입으로 꼴까닥 넘어갔다. 곰곰 생각해 보니까 마왕과 엘메인, 그것도 엘프가 손을 잡았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뭔가 거대한 목적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며, 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진행중이라는 이야기도 되는 거잖아. 방해자는 누굴 까나.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여기 과자도 들게." 이 후작, 처음에는 나보고 거방진 놈 어쩌고 하더니 이제는 잘해 주잖아. 내가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모를 텐데. 공작이라는 걸 알아 버렸나? 그럴 리도 없는데… 내가 이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이 사람도 날 본 적은 없지 않겠어? 은발이 흔한 건 아니지만. "자, 이제 말해 보시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리고 왜 사람들을 이용해서 괴물로 만들었는지, 대체 왜 살린을 납치한 건지 말해 보시지요. 메데이레나도 그렇고요. 그리고 납치된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 있는 겁니까?" 그는 잠시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마도 무슨 중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자네……." 말씀하시죠! "예." "과자 더 먹고 싶으면 갖다 주지. 이보게 가서 더 가져 오게나." "예." 이게 아냐! 하지만 과자는 맛있다. "저, 정말 대답해 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그의 손은 무척이나 말라 있었다. 확실히 검을 휘두르는 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엘메인이라는 자가 내 아들의 행방을 안다고 했네. 어렸을 적에 가출한 우리 아이를 말야. 하하하… 어이없지 않나? 그런 사람이 안다고 하다니." 그야 내 알 바 아니고. "괴물을 만든 건, 그래 그가 시켜서였지. 내 자의로 한 건 아니었어. 엘메인이라는 엘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던데 그걸 아직도 모르겠군." "나중에 천천히 알아봐도 됩니다 그런 건. 그보다 당신이 납치한 것도 엘메인이 시켜서였겠군요." "그렇지." 한숨과 함께 차에서 올라오는 김이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자식을 위해서 영혼까지 팔 수 있는 듯한 아버지의 모습이란 말인가? 부럽구나, 우리 아버지… 그래 전 공작은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렇듯 자식을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었지. 쳇, 이 나이가 돼서 백 년도 훨씬 전에 죽은 사람을 생각하다니. "그렇다면 그들의 계획에 대해 아는 바는 없으시겠군요." "그렇지. 아, 그들의 비밀 기지에 대해서는 약간 들은 바가 있네. 여기서 좀 더 동쪽으로 쭉 가다 보면 버려진 성채? 뭐 여하튼 구조물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있다고 하는 것 같더군." 이건 좀 도움이 되는군. 바로 떠나야겠다. 그는 내가 일어서자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약간 침중한 어조로 나에게, 같이 가주겠노라고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해, 댁이 가면 더 귀찮아질 뿐. 그래서 그를 슥 버리고 혼자 씩씩하게 걸어가게 되었다. "대체 이놈들은 어디 있는 거야!" 설마 잡힌 건 아니겠지만 아직까지도 아무 기척이 없는 걸로 봐선 무척이나 수상했다. 어느새 밤이 되어서 숲은 아주 적막하고 어두워서 한 치 앞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고파……. "으, 젠장." 대 마도사로서 뱀을 잡아먹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내가 낙심하면서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어두운 가운데서 웬 녹색 옷을 걸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 그 사람은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이 보일 때쯤 되어서야 나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이?" "스승님." 녀석이었다. 젠장, 걱정했는데 이놈은… 응, 끈적끈적? 이거 검은색은 뭐……? "너 다쳤냐?" "…겨우 만났네요." 세이는 작게 미소지으면서 곧 앞으로 쓰러졌다. 녀석의 등에는 거대한 도끼 하나가 박혀 있었다. 젠장! 회복 마법은 많이 쓰면 건강에나 몸에나 양쪽 다 좋지 않다. 게다가 신체에의 내성이 사라짐은 물론, 과도한 마법사용은 인간의 몸을 버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손에서 빛이 흐르면서 녀석의 몸에 대자 간신히 도끼 주위에 있던 피들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도끼다. 저게 빠지면서 대량의 피가 유출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녀석의 몸에 아예 마비 마법을 걸어 버리고 도끼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래도 피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아래로 검붉은 피와 살이 다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녀석의 몸에 재빨리 고급 치료 주문을 걸자 상처는 아물어가기 시작했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괜…찮을 거야." 키히가 다쳤을 때, 그 말을 중얼거렸지 아마. 카와세리크 독에 당했을 때도 이렇게 울지도 않고 괜찮을 거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었다… 그랬었다. "이 아인… 죽지 않을 거야." 사실 알고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그래,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어쩌면… 그래, 사람은 너무나 허망하게 죽어 버린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라플, 여기 있었냐?" 프라운이었다. 어느새 숲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해서 세이를 한 번 바라보았다. "세이냐? 근데 왜 그렇게 쓰러져 있냐?" "……." 세이의 숨결이 점차 흩어져 가고 있었다. 프라운도 세이의 옆에 다가가서 그의 상처를 살펴보다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바스락거리는 풀잎 소리와 함께 프라운은 다시 숲으로 사라져 갔다. 프라운이 사라지고 숲은 적막에 휩싸였다. 마치 꿈처럼 작은 시간들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모든 건 꿈이 아닐까? 이 아이는 약해서, 그래서 꿈에서 오래 견딜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맞지? 그리고 키히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숲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고, 아무 것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아이, 내 제자, 나의 사랑하는 세이가 점점 이 세상에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세이야, 스승님께 마법을 배운다고 했잖니. 어서 일어나렴." 세이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흩어져 지나갔다. 그리고 세이의 숨은 어느새 멈춰져 있었다. "세이야!" 녀석의 몸에서 서서히 온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마도 아까 숨을 거둔 것이리라.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 녀석은 나의 제자이고 그렇게 쉽게 숨을 거둘 리가 없는데. "스승님." 그래, 이렇게 나를 부르곤 했었지. "스승님!"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사실 난 사람들과 살면서 느끼는 그 많은 기쁨보다 이 녀석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그래……. "이런 데서 주무시면 감기 걸려요." 내 손에 있던 세이가 사라져 갔다. 그 대신 눈앞에 세이가 다시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세이…냐?" "예, 세상에 남은 수많은 고초를 겪어가면서 여기까지 무사히 도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스승님은 이런 데서 이렇게 땅만 파고 계시는 거예요? 누구 죽었어요?" 녀석을 꼭 끌어안자 녀석의 가슴께에 내 머리가 닿았다. 이 녀석의 심장소리는 힘차게 들려오고 있었다. 가만, 그런데 상처투성이잖아! "너 왜 이렇게 상처투성이냐?" 세이는 나중에 말했다. 그땐 순간적으로 내가 악귀로 보였다고 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나 마왕 맞아. "예, 탈출하려다가 다친 거죠 뭐. 간신히 저만 포위망을 뚫었어요. 한 번 잡혔을 때 고문당한 걸 생각하면… 근데 왜 울고 계셨어요? 설마 길을 잃어버리신 거예요?" 말 안 듣는 녀석은 흠씬 패면 그만이다. 그러고도 더 안 들으면 더 흠씬 패면 그만이고. 크크크. "자, 그럼 네 녀석은 아직도 수련이 필요하구나. 게다가 내가 누차 얘기했잖아!" "예. 강한 놈에게는 빨리 튀는 게 최고요, 약하다 싶으면 죽여놔라. 그래서 꼬봉을 만들어 두면 인생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고." 만족, 대 만족. "좋아. 잘 알았으면 앞으로는 잘 도망 다니거라. 너보다 강한 놈이 아직 많으니까, 알았지?" "예." 세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날 안내했다. 다행히 길을 아는지 어쩌는지 우린 그가 의도한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곳은 나도 잘 아는 곳으로 그 유명한 악당의 성채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성채를 만들었는지는 의심만 가득. "이거 표지판이죠?" 요즘은 마왕의 성 표지판도 있냐? 그러나 거기엔 번듯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다. 옆에는 정말 표지판이 서 있었는데, 것도 고대어와 대륙어, 마법어로 쓰여 있었다. 즉, 문맹도 알 수 있다는 거다. 마법어는 특별히 마법이 걸려 있어서 글을 못 읽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특유의 목소리로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프라운도 여기로 갔을까나." 세이는 옆에서 뭔가를 쓰고 있었는데 옆에 가서 보니 가관이었다. 그래서 녀석을 한 대 패주었다. "왜 때려요!" "그야, 네놈이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이놈아, 너 바보냐? 여기 보다시피 개가 어디 있다고 개 조심이냐!" 녀석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내가 다시 한 대 더 패자 이내 잠잠해졌다. 건방진 놈, 음 그래도 죽다 살아나서 기쁘긴 하군. 근데 그거 꿈이었냐? 너무 사실적이라고. 피도 그렇고 마법도 수상해. "개가 많긴 하군." 먼저 간 인생 선배의 말은 한 마디도 놓쳐서는 아니 되는 거였다. 그리고 난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세이는 개조심을 그냥 심심해서 적은 게 아니었다. 나와 녀석이 해자(垓字; 성밖을 둘러 판 못)를 건너자마자 외성의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개들의 행렬은 가히 가관이었다. 그뿐 아니라 적들이 왜들 저렇게 많은 건지는 주지할 사실이었다. "개판이네." "근처에 양계장이라도 있나 보죠 뭐." 우는 아이 더 패주고 우리 우리는 즐겁게… 개는 특별히 처리할 방법이 없었지만, 나름대로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건 바로. "우리도 개로 둔갑하는 거야!" 개 같은 인생사 어차피 개로 변해도 뭐 어때? 그러나 그 계획은 개로 인해서 좌절되고 말았다. 개 한 마리가 내가 마법 시동어를 외우려는 찰나 달려들었던 것이다. 덕에 주문은 깨지고 하마터면 개에 물려 돌아가실 뻔했다. "스승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개 같은 일을 당하는 거라고요. 바로 저 문이에요. 저걸 열면 아래로 갈 수 있어요." 세이가 재빨리 문을 열고, 나는 달려오는 귀여운 강아지들에게 폭염 마법을 사용한 뒤 재빨리 튀었다. 말이 개지 저건 개가 아닌가 보다. "저것도 마물화 된 걸까요?" "모르지, 정상이 아니란 건 확실하지만. 야, 넌 어디 가냐?" 녀석은 날 떠밀더니 조용히 웃고 있었다. 이상해, 뭔가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잠시 들를 곳이 있어요. 스승님, 그럼." 어느새 문은 완전히 닫히고 폭염의 영향으로 인해서 내가 있는 곳까지 열기가 느껴졌다. 세이 녀석, 대체 제정신인가? 문을 아무리 밀려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열리지가 않았다. "세이… 이놈." 세이는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저건 환상이 아닐까? 할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가자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난 통로 위로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설마 위로 통하는 비밀 통로인가?" 통로는 그냥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사다리조차 없었으며, 어두운 통로 덕에 위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난 대 마도사 나으리가 아니더냐. "비행 마법을 쓰면 되겠군." 서서히 작은 통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자 위는 정확히 막혀 있었다. 하지만 벽이 얇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무슨 함정 종류가 아닐까 싶었는데……. "결국 이곳까지 오고 말았군요." "어쩔 수 없지." 엘메인과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아닐 텐데. "그래도 스승에게 너의 그러한 모습은 보일 수 없다는 건가?" 엘메인의 말을 판단해 보면 그건 내 얘기는 아니었다. 내 스승이라면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니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세이, 아니면 율지스. "그렇지요 엘메인. 당신과 당신의 동반자를 없애드리죠." 싸늘한 목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지만,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내 제자 중엔 저런 놈이 없는데. 가만, 꼭 내 제자라는 법은 없잖아. "너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아도 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 오늘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자, 엘메인 너는 도망가라. 네 실력으로 상대될 자가 아니다." 마왕의 목소리는 왠지 서늘한 가운데서도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이미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하하하, 내게서 도망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때 갑자기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몇 사람이 그 방안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엘메인, 여자들은 어디 있느냐!" 저건 프라운의 목소리였다. 엘메인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프라운, 하브라이드, 어서 인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 너흰 이곳에 있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그리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여기로 오는 건가? "어, 세이 오빠?" 메데이레나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내가 있던 곳의 천장이 열리면서 벽이 사라지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안녕?" 이 말 외에 더 무엇을 말하랴. "라…플!" 엘메인의 놀란 눈동자가 내 눈에도 들어왔다. 놀라기는… 대 마도사의 조건 중에 이런 게 있지, 신출귀몰이라고. 내가 비행 마법으로 서서히 홀에 등장하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단연 엘메인이었다. 아마도 탈출 루트인 듯한데 거기서 역으로 내가 기어 나왔으니… 아, 그럼 세이는 나를 탈출 루트로 던진 거잖아. "모두 안녕, 잘 지냈나 보지?" 세이가 제일 가운데 서 있었고, 그리고 그 뒤로는 하브라이드, 프라운, 살린, 메데이레나가 차례로 있었다. 내 뒤로는 마왕이 제일 끝에 앉아 있었다. 마왕 폼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마왕이 바로 맞아. "스승님." 세이가 약간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지 녀석이 아주 슬퍼 보인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래 라플이로군. 하하하핫, 좋아 넌 이제 어쩔 셈이지?" 그는 정확히 세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이는 둔탁한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나에게 걸어왔다. "스승님, 왜 이리로 오신 거예요?" "아, 저기 오다 보니까 위로 통하는 구멍이 있길래. 하하핫." 그 작은아이는 이젠 많이 컸다. 뭐, 여전히 귀여운 놈이라는 데는 틀림이 없지만. "스승님, 만약에 스승님이 오지 않으면……."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세이를 보고 난 잠시 당황했다. 오지 않다니? "무슨 소리냐? 난 지금 너랑 같이 있잖아?" "하지만 그러면 키히가 스승님이 세우신 학원을 날려 버리겠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오시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마법학원은 스승님이 세우신 곳이잖아요. 그래서 전……." 설마, 이 녀석 키히 말을 믿는 거냐? "내가 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어. 마법학원을 내가 세운 건 맞지만, 키히가 그곳을 모두 폭파할 정도로 미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마왕, 이제 슬슬 음모란 것에 대해 말해 주시지. 왜 납치극을 벌였지? 아니, 실리아 양." 모두 조용함에 젖어들었다. 특히 케빈과 살린은 눈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는데, 뭐 당연한 일이었다. 실리아가 마족, 것도 전직 마왕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보유한 자가 아니던가? "어떻게 알았지?" "그야 뻔하지. 카와세리크 잎이 결정적이었어. 처음에 널 보고 별로 인간 냄새가 나지 않는 특이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카와세리크는 보기보다 구하기 힘들다고. 그런 게 학교 내의 일개 동호회실에 버젓하게 심어져 있다니 놀라운 일이지." 그래, 그리고 마족인 프라운도 그건 원래 심어져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상급생도 중 하나가 납치했다는 이야기인데, 남자 선배 둘은 마족이라고 보기엔 확실히 덜떨어진 모양새였다. 그 다음은 여러 가지 정황을 들 수 있는데, 처음 오두막집에 가서 일어난 사건을 봐도 다른 여자 선배들은 나서서 싸움조차 하지 않았다. 적어도 마법 주문은 프라운보다 많이 알고 있어야 하는 건데. "그래 항상 느끼는 거지만 라플, 넌 탐정 해도 되겠어. 그럼 엘메인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군." 그건 모르는데. "알 리가 없잖아. 워낙에 헷갈리는 놈이고 내가 아는 엘프도 그리 없다고." 율지스가 아닌 건 확실하지. 재수 없게 웃지 마. 마왕, 정 떨어져. "그래, 하긴 엘메인을 자네가 만난 적이 있을 리가 없지. 엘메인은 키히의 동생이네." 흐거덕! "처음 뵙겠습니다. 평소 깊이 존경하고 싶었습니다." 요즘 존경의 인사는 가슴에 팔을 쑤셔 박거나, 아는 사람을 납치하거나, 성으로 유인해서 개밥이 되도록 하는 건가 보다. 참, 세상 많이 발전했다. "나도 평소에 엘메인을 많이 보고 싶었지. 아, 정식으로 우리 소개하지. 나는 라플, 이쪽은 나의 제자 세이와 그의 사형 율지스. 그리고 이쪽은 에네브인 살린, 그 옆은 기사 케빈. 그리고 이쪽은 아름다운 공주님 메데이레나, 아니 황녀님. 그리고 하브라이드와 프라운은 마왕을 알지?" 마왕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가만, 우리 한 사람을 잊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실리아 선배와 함께 있던 리무르 선배는? "그래 알지." "마왕, 리무르는 어디로 갔지? 설마 잡아먹거나 한 건 아니지?" "응? 우린 그녀는 납치한 적이 없는데." 잠시 패닉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그녀는 어디로? 모두는 화기 애애한 분위기에서 악수하고 있었다. 율지스는 인상을 박박 긁고 있었으며, 세이는 그쪽에서 싫어했고, 메데이레나는 내 소매를 잡고 떨어지지도 않는 데다가 그나마 살린과 케빈은 주제에 신관이라서 대놓고 싫은 척했다. 그나마 제대로 인사를 한 건 하브라이드나 프라운이 아닐까나. 그리고 내 심증은 더더욱 굳어갔으니, 이건 이 시대의 진정한 명탐정의 탄생이 아니겠는가? 음 하하하. "프라운, 너랑 하브라이드랑 마왕의 스파이 노릇했지?" 둘은 동시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프라운이나 하브라이드가 아니었다면 난 아마도 납치 당한 인간이랑 계속 옆에 있지 않았겠는가? "아, 그게……." 하브라이드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주먹은 멀고 마법은 순식간이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대지를 날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떡이 되었다. 뭐, 비행 마법 중간에 끊는 내 이 기술은 마법의 길에 어느 정도 한참 들어서야 할 수 있는 것인데… 킬킬킬. "너무해요." 아무리 눈물을 글썽이고, 오버를 많이 해도 내가 보기엔 하나도 안 귀여워.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는 착한 어린이가 되도록 하거라. 크크크. "자, 그럼 프라운은 뭐가 좋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를 배신한 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 뭐가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그는 역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여기 온도가 많이 더운 모양이니 이번엔 얼음 마법으로 날려드려야 하겠다. 으흐흐흐. 그는 땅에 박히는 기이한 현상을 연출했는데, 온몸이 얼음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뭐, 보통 인간이라면 저렇게 한 번 당하는 것만으로도 당연히 죽을 게 틀림없지만, 저놈들은 마족이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 이제 마왕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해 보실까? 심심해서 그런 거라면 죽여놓고, 이유가 합당치 않다면 반쯤 죽여주지." 메데이레나가 초롱한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도 죽는 건 마찬가지네." 상당히 정확한 의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아이들의 눈은 순수한 법. "…라플, 또 손님이 온 것 같습니다." 엘메인의 목소리가 좌악 가라앉은 가운데 웬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 도끼가 네 도끼냐?" 마왕은 이 말 한 마디를 잘못한 죄로 거의 죽도록 우리에게 째림을 당해야 했다. 불쌍한 놈, 농담 한 마디에 저렇게… 쯔. "오랜만이군, 프라오니스 피스트레이카 공작." 키히가 나타남과 동시에 많은 익숙한 얼굴들이 나왔다. 개중 몇은 나나 내 일행들이 보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자세를 하고 있었다. 연기가 나오는 마법의 약병을 손에 들고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꽃은 안 뿌리냐? 뭐, 하기사 악의 조직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지.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키히가 언제 돈을 훔친 적이 있었냐? 스폰서들도 완전히 잠적해서 살아야 할 정도였는데… 쯥. 키히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전등을 달았는지 눈은 번쩍거리고 있었고, 그녀의 옷은 여전히 같은 옷이었다. 음, 돈 모아서 옷 좀 사줘야 할 판이군. "아, 오랜만이긴 한데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여기 라플의 유적이 있다고 들었다." 이래서 풍문을 믿고 움직이면 얼마나 피 보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럴 리가, 내가 여기 온 건 이게 처음인데요." "넌 라플이 아닌데 네가 처음 오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뒤에서 의사 역할을 하던 놈이 눈이 벌게 가지고 소리쳤다. 그건 그가 밤중까지 무면허 진료를 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놈이 왜 눈이 벌겋겠는가? "상관? 후후후, 있지. 키히, 혹시 내가 예전에 이야기해 준 고사성어를 기억하는지 모르겠군. 예전에 내가 말했지. 라플 왈, 무릇 밤샘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할 일 없이 돈 없는 놈들이 하는 것이다. 이건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밤을 새서라도 일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키히가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는 뜻을 표했다. "그래요, 그런데 당신과 할아버지는 매우 친했나 보군요. 그런 이야기도 다 아는 걸 보면." 내가 왜 우리 할아버지랑 친하냐! 난 그 분 얼굴도 기억 안 나. 돌아가신 지 몇 년이나 되었더라. "어쨌든, 여기 라플의 유적은 없으니 돌아가십시오." 그녀의 시선은 천천히 마족 중에서 얼어 뒹굴어 다니다가 이제 간신히 발과 입 부분이 녹아 가는 프라운에게로 향했다. 설마 알아보진 못하겠지? 저렇게 괴상한 폼으로 있잖아. "저… 연기 그만 뿌리면 안 되나요? 힘들어서……." 그도 힘들었나 보다. 저런 걸 보면 너무 효율이 떨어진다. 너무 힘들어 보여. "넌 프라운이로군. 마왕의 앞잡이."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이번엔 엘메인에게 향했다. "누님!" 남자 맞군. 정말 여잔 줄 알았는데 말야. 하긴 형제는 닮는 법, 남매라고 닮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누님? 후후후, 넌 더러운 엘프일 뿐이다." 그녀의 손에서 섬광과도 같은 얇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건 엘메인에게 향했지만 역시 엘메인,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동작으로 뛰어올라 그 광선을 피했다. "주문도 없이 어떻게……." 은발의 소년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아마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뭐, 저녁 메뉴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프라운, 내 오늘 널 가루로 만들어 주마. 너만 없었어도, 그는 그래… 그는 죽지 않았을 거야. 그래 아니지, 마왕 네놈만 없었어도 말이지! 하잘 것 없는 인간은 백 놈도 필요 없다!" 나 멋대로 죽이지 말아 줘 으힉! "젠장!" <절대 마법 봉쇄.> 재빨리 주문 영창이 나오고 즉시 프라운의 몸을 감싸자 그 막 옆으로 엄청난 화염이 작렬했다. 이젠 주문 없이 마법을 부리는 것이 가능해졌나 본데. 이거 젠장. 그나마 나나 엘메인은 피해서라도 갈 수 있지만 나머지, 특히 프라운은 아직 얼음에 싸여 있는 상태가 아닌가. 순간의 장난이 한 사람의, 아니 한 마족의 생명을 뺏을 수도 있습니다! "하브라이드, 애들 데리고 튀어! 내가 나온 데로 뛰어가면 살 수 있을 거야. 아, 비행 주문 잊지 마. 늦었네." 엄청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는 한 손에 메데이레나와 케빈을 끼고 내려갔다. 살린은 그래도 신관이므로 마법을 쓸 줄 알까 싶어 그냥 내버려두었다. "프라운, 너도 어서 장난칠 시간 없으니 튀어!" 프라운은 즉시 얼음인 채로 아래로 떨어져 갔다. 남은 건 율지스와 살린 뿐이었다. 키히의 눈동자는 여전히 마왕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 마력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불길하다 못해서 불안할 지경이었다. "으하하하, 재미있구나. 내 목숨을 빼앗은 자는 되려 날 살리려 애쓰고, 오히려 예전에 날 도운 이는 날 이렇게 죽이려 하다니. 키히야, 잊었느냐?" 마왕은 뜻 모를 소리하는 게 취미인 모양인데, 저건 원래 노인의 특징 중의 하나다. 노인의 특징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가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뭐 그런 거라 할 수 있지. 그리고 옛일을 회상한다든지… 치매는 뭐 병이니 그냥 넘어가자. "무슨 소리지?" 재빨리 율지스에게 손짓을 하자 녀석은 살린을 밀면서 잽싸게 구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러나 키히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래서 엄청난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신관의 마법 중에는 비행 마법이 없다. 뭐, 율지스가 같이 갔으니 알아서 잘했겠지. "꽤액~" 이번엔 율지스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제 장내에는 나와 엘메인, 마왕, 키히 일행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저……." 모든 이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이거 나가서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지?" 마왕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자식은 개뿔 힘도 없으면서 폼은 다 잡는군. 네놈의 힘은 내가 다 가지고 있다! "이렇게 주요 엔트리 멤버가 다 모였으니 마땅히 할 일도 없으면 심야 토론이나 하는 게 어떨까 해서." 모두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어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살벌한 거냐?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오옷, 설마 믿지는 않겠지만 말이지. 크크크. "라플, 나풀거리지 말고 거기 엎어져 있어." 마왕은 날 애 취급하는데 이봐, 지금 마왕은 나라고! 가만, 나도 궁금한 게 많아. 왜 엘메인이 마왕 편에 붙었는지 라든가, 혹은 왜 그런 개 쇼를 벌였는지. 쟤 성격에 그냥 심심해서 그랬을 확률도 높지만, 알고 보면 사람이란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물론, 저놈은 사람이 아니라 마왕이지만. "내가 널 도운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지?" 키히의 눈은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뭔가 마왕이 믿는 구석이 있나 본데. 안심 부적이라도 잔뜩 사놓은 모양이야. 세상에 믿을 거 하나도 없다고 혹시 들어나 봤는지 모르겠어. "도와? 천만에, 넌 나에게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지. 처음 프라운을 너에게 소개시켜 주었던 길드 장이 나였던 건 알았나? 저놈은 나중에 알았더군. 그래도 별로 상관없어했지만, 미련하긴 곰 같은 놈이야."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몸이 떠는 걸로 봐선… 추운 모양이다. "마왕,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내 의문이나 풀어달라고. 왜 그러냐?" "그건 나중에 말해 주어야지. 또 죽고 싶진 않다고." 혹시 마왕의 정체는 불가사리가 아닐까? "내 질문에나 대답해! 너 정말 그 길드 장이었나! 난, 난… 네게 들은 이야기를 거의 라플에게 다 해주었단 말이야!" "그래, 마왕의 성이 있는 곳도 말이지?" 그의 입에는 아주 비웃음이 명백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성질 더러운 놈인지는 알았지만 저 정도인 줄은 몰랐군. "설마… 설마 그럼 내가 알려준 라플의 약점도……." "그래 잘 알고 있었지." 에, 그래서 하마터면 내가 죽을 뻔했던 거로군. 그곳으로 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건 속은 거지 배신은 아니지. 지금 키히처럼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는 그걸 알 리도 만무하지만. "…너, 너만 없었다면!" 그녀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화염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화염도 저렇게 뜨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메인은 재빨리 옆으로 피했고, 마왕은 그걸 따뜻하게 뒤집어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얼음의 화살.> 얼음의 화살 하나가 그 거대한 화염의 벽에 가서 박히자 순식간에 그 화염은 일렁임을 끝으로 사라져 갔다. 뭐, 아직 마력은 내가 우선인 모양인데, 정식으로 싸운다면 내가 질 수도 있겠다. "으으… 아, 나 때문에 그가! 이 빌어먹을 세상 따위는 모두 사라져라! 저 멀리, 멀리!" 순식간에 온 주위에 화염이 난사되었고, 엘메인은 마왕을 옆구리에 끼고 그 구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키히……." 내 한쪽 눈에서 뭔가 미지근한 것이 흐르고 있었고 코가 멍멍해졌다. "종이 좀 줘. 코 나오려고 해." 그러나 그녀는 묵묵 부답으로 그저 마법만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 웃겨서 멈추게 해보려는 계획도 실패다. "어서 도망가시죠. 이대로는……." 의사로서 여기 일행들의 악의 발전 자금을 모으는 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그 맘 이해한다니까. "그래 여긴 너희에게 맡길게. 아직 그리 많이 미친 건 아냐. 너가 보기 보단 사실 양호한 편이라고. 정상일 때도 저 정도는 별거 아니었다고. 그거 아냐? 예전에 우리 음식이 없어서 옥수수 말린 것만 씹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런 생활이 자기 탓이라고 자학하다가 결국 성 하나를 날렸지. 그러니 이 정도야 뭐, 하하." 나를 째려보는 듯하군. 이건 성 하나가 아니라 대륙이 날아갈 지경이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걱정 마.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릴 거야. 그러니 봉인하지 않아도 될 거야." 여전히 의사는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키히!"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고, 그 아름다운 금발은 푸석거리는 것만 같았다. 머리 감고 기름 좀 발라 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그래도 왠지 그녀가 귀여워 보였다. 왜, 난 세상이 망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아마, 나도 미쳐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아니까. "키히, 내가 라플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만 좀 크면 다시 너랑 놀 수 있어." 헉,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좀 더 멋있게 이야기하는 건데 그랬나? 아니지. 그녀의 눈에는 이제 눈물 두 방울이 천천히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라플, 전… 전 나쁜 여자예요. 그러니 절 제발 용서하지 말아요. 그리고… 저도 곧 당신의 옆으로 갈 테니까… 흑흑." 황당. 그녀의 증세는 보기보다 심각했다. 그리고 내가 원령 내지는 혼령으로 보이나 보다. 이런… 그 순간에 하필 내 옆에 있던 의사가 나를 구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오, 세상은 불공평하다. 난 떨어져 내리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대 마도사라 해도 멀쩡한 정신에서 이렇게 떨어져 버리면 마법 외울 정신이 안 된다고. "사람 살려~!" 날 받은 건 바로 프라운이었다. 그는 여전히 싸늘한 미소를 띄우고 예의 재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여긴 비행 마법을 쓸 만한 시간이 충분해서 좋더군. 뭐, 어중간했다면 아마 다 죽었을 거야. 자, 어서 아래로 가자고." 아래에는 대 부대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일행이 이렇게 증식했네. "어이, 불가사리." 마왕에게 던진 한 마디는 그에게 비수가 되어 3단 콤보를 기록했다. "내가 왜 불가사리라는 거냐!" "죽여도 죽여도 안 죽으니까. 뭐, 마왕이 쉽게 죽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의외라니까." 마왕은 계속 옆으로는 뭐라고 씹었지만, 배가 고프니까 저렇게 되새김질을 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스승님, 표정이 어두워요." 역시 내 옆에서 몇 년 넘게 같이 산 놈이 달라도 한참 다르구나. 그래 내 속이 지금 타고 있지. 겉으로 아무리 즐겁고 즐겁게 표현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날 배신한 친구와 수상한 제자, 그리고 날 기억 못하는 애인.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지. "음?" 프라운이 문득 천장을 바라보았다. 미세하지만 분명히 진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왕은 다급하게 우리를 재촉했다. 만약 키히가 여길 부수면 우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기에. "제가 앞장을 설 테니 모두들 황급히 따라오십시오." 하지만 여전히 엘메인을 믿을 수는 없었다. 마왕은 더더욱 못 믿지. 한때 내 제자를 죽이려고 한 놈이었잖아. "근데 세이, 언제 키히를 만난 거냐?" "그게 아무래도 키히 님이 아니었나 봐요. 마력 파장이 조금 달라요. 그걸… 저 사람을 보니까 알겠어요." 엘메인은 혓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 엘프를 효과적으로 고문하는 백 가지 방법 중의 하나가 떠올랐다. 엘프는 지적 생명체이다. 그러니 어려운 이야기를 잔뜩 해대면, 모르는 이야기일 경우 그들은 이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흐흐흐. "엘메인, 너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가면서 들어." "예." 아무리 지금 존대를 해도 이미 배는 떠났다. 흐흐흐. "요즘 내가 인류에 대한 과학서적을 하나 읽었는데 말이지 거기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더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초의 인류라 하면 으레 북경원인(Sinanthropus pekinensis) 또는 자바원인(Pithecanthropus erectus) 등이 거론되어 왔었지. 이들은 대개 지금부터 50만 년 전에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더군. 이들은 직립은 물론 불과 도구를 사용했음이 분명하고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는 훨씬 키도 크고 두뇌의 용적도 컸다네. 이들 역시 종전에는 호모(Homo)라는 속명으로 불리지 않고 시난트로푸스(Sinanthropus, 북경원인) 또는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hropus, wkqkdnjsdls)라는 속명으로 불려왔는데, 이들을 요즘은 모두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1) 호모 에렉투스를 지칭한다(Homo erectus, 직립인). }}" 자, 이쯤 되면 녀석이 뻗을 차례다. 흐흐흐, 앞에 가던 녀석은 잠시 푸트… 뭐라고 하더니 이내 주저앉아 버렸다. 역시 아무래도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오갔지. 인류에 관한 이런 문제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아는 놈도 소수였지만 거의 10년 동안 할 일 없던 내가 뭘 했겠는가? 크크크.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알 때까지 고민 좀 해." 으 하하하, 세이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놈은 원래 이런 건 아예 관심 밖.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놈인 것이다. 흐흐흐. "앗, 여기는……!" 마왕이 갑자기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곳은 거대한 광장이었는데, 통로 중간에서 길을 잘못 들어선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이런 데로 왔겠냐. "여긴 어디냐?" 하브라이드가 인상을 쓰면서 엘메인에게 묻자 녀석은 더욱 난처해했다. "아까 제가 그만 딴 생각을 하는 바람에 길을 잘못 든 모양입니다. 다시 돌아서 나가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 가지 교훈, 모르는 길을 갈 땐 길 안내하는 놈이 왕이다. 절대 놀리거나 하지 말자. "스승님, 여긴 어디서 많이 본 구조입니다." 그렇다, 많이 본 구조. 여기를 언제 와봤지? "맞아, 율지스 형도 여기 와보셨나요?" "물론이지. 예전에 어렸을 적에 마법 연습하긴 여기가 딱 이라며 항상 데려오곤 하셨지." 마법이 하나도 안 통하기 때문에 이 녀석들이 발광하기엔 딱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특수한 아이템이 하나 묻혀 있어서 여기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 그래 봐야 애들에게 만이지만. "흠, 흥미롭군. 하지만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나? 이대로 있다가는 성이 무너짐과 동시에 사라질 수 있는데." 이미 마왕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가만, 이게 여기 있다는 건… 여긴 내가 아는 곳이었다. 처음 본 거라고 생각했던 건 워낙 오래 전에 왔던 때문이었다. "마왕, 여긴 내 별장이네?" 모두 나를 응시하고, 케빈은 특유의 재미있는 어투로 한마디 해 주었다. "역시 귀족 중의 귀족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부자잖아?" 하지만 이미 내 별장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니… 키히에게 이건 꼭 따지고 넘어가야겠군. 왠지 살린이 힘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일 있나? "살린은 어디 아픈 거야? 아까부터 한 마디도 안 하는데." "약을 먹어서 그러는 건가?" 엘메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살린은 이마를 가리켰다. 그의 머리를 약간 젖혀 보자 거대하게 피멍이 져 있었다. 설마 아까 후작의 성에서 탈출시킬 때 땅바닥에 약간 구른 것 때문에? 하브라이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살아야 해! "자, 모두 저쪽으로 가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어서 가자!" 재빨리 주위 환기를 위해 이들이 미세하게도 못 알아차리는, 이른바 공기 청정 마법의 최고 단계인 재빨리 화제 돌리기를 시전해서 모두의 시선을 돌리게 하였다. "자, 여기야." 거기엔 작은 이동 지점이 그려져 있었다. 음, 하나씩 하는 게 좋겠군. "자, 여기에 서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그리…면 안 되겠네. 장소 지정이 되어 있어. 별수없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애들부터 움직이지." 메데이레나는 겉으로 보나 속으로 보나 절대 애이고 여자이기에 제일 먼저 보내졌고, 그 다음으로는 케빈과 살린을 보냈다. 마왕은 웬일인지 싱글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자 엘메인, 어서 가. 내가 제일 나중에 가지." "…당신을 위해서였습니다." 엥? 설마 이런 시점에서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겠지? 이런 때 고백하다가는 돌 맞아 죽기 십상이라고. 거대한 기둥이 어느새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주 아작을 내나 보다. 키히야, 좀 작작 부숴라.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서 가라." "이것도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응? 순간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너무도 재빠른 그의 동작은 공간 이동 장치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엘메인은 유유히 엘프 특유의 공간 이동술을 이용해서 완전히 사라져 갔다. 옆쪽에서 서서히 돌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날 위해서? 날 사랑한다는 사람들은 다 날 죽이려드니 어찌하겠냐?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빨리 마법을 펼쳐서 내 주위에 방어막을 쳤다. 주위에서는 진동과 함께 서서히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 것도 운명이라면 내 운명은 꽤나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인류의 적인가? 왜 날 위해서, 날 죽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엘메인… 밉다. "이거야 원, 살아 있잖아?" 어이없다는 누군가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쳐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내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왜 날 위해서인지, 그게 어째서 날 위해서인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난 헛 산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다." 그는 날 조용히 안아 들었다. 상당히 키가 큰 모양이었다. 돌 냄새가 났지만 그러려니 했다. 피 냄새가 나도 그러려니 했다. "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살아야 할 이유를 품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는 자체가 큰 의미일 뿐." 눈물이 흘러 내렸다. 흐려져 가는 정신 속에서 난 키히가 성을 부수고 사람들에게 낙뢰를 꽂는 것을 보았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그녀는 사람의 목숨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예전에는 꽃도 꺾지 않던 그녀였는데. 다시 다른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이였다. 세이는 어느새 커다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녀석, 검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왜 들고 있는 걸까? 세이는 많은 사람의 환호 속에서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살린이나 케빈의 얼굴도 잠시 보여졌다. 저 멀리 어두운 골목에서 조용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율지스의 모습이 잠시 스쳤지만 난 세이를 더 보고 싶었다. 그는 서서히 검을 올리고 다시 아래로 내렸다. 동시에 한 사람이 쓰러지고 있었다. 키히가 쓰러지고 있었다. 나의 연인이고 나의 사랑이며, 날 항상 사랑한다는 그녀가 내 제자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마왕이 엘메인과 함께 작은 저택에 앉아 있었다. 둘은 웃고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내가 보고 싶을 것이라고 엘메인은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신이 드나?"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예전에 세이가 죽는 꿈도 그랬지만, 이번 건 더 싫었다. 왜 세이가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당근이지."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찌 당근이야? "누구시냐고요……." "내 얼굴을 벌써 잊은 건가? 난 바로 그 당근이라는 신이 아니던가? 자네가 날 여기 소환했던 적도 있잖아." 그러고 보니 저런 상판을 본 적이 있기도 한 것 같다. 몸을 일으키려 하니 왠지 모르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 일어날 만한 상태가 아니네. 자넨 극도록 허약해져 있어. 그렇다고 마력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하더군." 신이 날 치료하다니 정말 웃다가 죽을 일이다. 아니,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몸의 고통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여긴 어딥니까?" "응? 아, 여긴 자네가 살던 오두막에서 아주 아주 멀리 떨어진 나바스 북쪽의 얼음성이지." 잠시 귀를 의심해야 했다. 북쪽이라니? "제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건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제 보니 신답지 않게 아주 우락부락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싫은데, 입 아프거든." 신도 아플 수 있다니. 신전에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겠군. "……." "농담이야. 내가 자네를 발견하고 이곳으로 옮겼지. 뭐, 악몽을 꾸나 보더군. 사내답지 못하게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말야. 자네 나이가 백 이십 세면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지 않은가?" 다 꿈이었다니 천만 다행이다. "예, 끔찍한 꿈을 꿨습니다. 글쎄 키히가 마녀가 되어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고 세이가, 제 제자가 그녀를 죽이는 그런 아주 무서운 꿈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등에서는 땀이 만져지고 있었다. "그거 아주 거짓말은 아니군. 자네, 거기서 그렇게 헤어지고 몇 년이 흘렀는지 아나? 무려 삼 년이 넘게 흘렀지." 잠시 나는 이것이 꿈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사람이 3년 동안이나 잘 수 있단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놀라지 말게. 자네는 키도 크고, 머리는 내가 긴 걸 못 참아서 항상 단발을 유지하도록 계속 잘라 주었지. 얼마나 힘들었다고. 젠장, 긴 머리를 유지하는 건 무지 힘든 일이야. 비누도 많이 들지, 게다가 물은 장난이 아니라고." 이 사람, '안티(anti; 反) 긴 머리 연합'에라도 들어놨나? "그래서 뭡니까, 지금 제가 삼 년이나 끙끙 앓았다 이겁니까?" "그래. 것도 나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라고. 뭐, 나도 자네를 꼭 살려 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사실 나도 일말의 책임은 느낀다고. 예전에 나바스 황제가 내게 말했었지. 왜 나는 신이면서 인간을 하나도 돕지 않는 거냐고." 그래서 그걸 실천하려는 건가? 뭐, 그는 그런 이야기는 자세하게 하지 않고 대충대충 넘어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들은 내용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뿐이었다. 먼저 그 뒤로 키히는 완전히 미쳤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법을 펼칠 때 주문도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고, 동쪽은 피스트레이카 영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세이는 살린과 케빈의 도움을 받아서 키히에게 복수하기 위한 일을 하나씩 착착 진행했다. 지금은 트라이너 왕의 협조를 통해서 세이가 트라이너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녀석 많이 출세했다. 율지스는 어떻게 된 건지 그는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으며, 피스트레이카 영지는 뛰어난 집사인 엘류시아와 흑 등이 방어하고 있다고 전했다. "뭐, 한 마디로 개판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자네라면 그 여자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네만… 어찌 생각하나?" 이길 수 있을까? 전혀, 난 그녀 앞에서 그대로 서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또 있었다. "혹시 마왕과 엘메인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응? 하하하, 그들은 자네를 죽인 진정한 흉수지? 힘의 계승 의식이 일어나지 않으니 자네가 죽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걸 알고는 완전히 잠적중이네. 어디서 자네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들을 믿었는데 말야. "그리고… 아, 그래 자네의 그 마족 친구들 말 이네만 모두 피스트레이카 영지에 있네." 아주 마족 소굴이 되었군. 거기 말야, 가서 무슨 마족 파티라도 열면 곤란해. "그렇다면 신께서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자넬 살려놨으니 난 이만 가봐야지. 가서 나바스 황제가 해주는 맛있는 밥도 좀 먹고. 왜 그런 얼굴로 보나?" 이 신 역시 나와 동류의 인간이었다. 뭐, 인간은 아니지만 진지함은 눈곱만치도 없는… 아마도 원래부터 이런 성격은 아니었겠지. "…아닙니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야겠지요. 저는 저의 제자를 잘못 가르쳤고 애인이 미쳐 가는 것도 막지 못했으며, 또한 마왕을 제 친구라 믿었던 과오 때문이죠." 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 손에는 조용히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제 서서히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내일 정신을 차리고… 그리고 난 그들에게 뭐라고 말해 주어야 할 것인가? "자넨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야. 위선자라는 말, 많이 듣겠군."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신은 그 말을 끝으로 이 황량한 얼음의 성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이 성도 서서히 신기루처럼 흩어져서 사라졌다. 이제는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알아서 움직여라 이거군. 그러나 왜 내가 삼 년이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자식, 신이면 다냐! 삼 년이나 안 움직였는데 몸이 정상일 리가 없잖아!" 난 한 일주일간은 눈밭에서 이끼를 파먹고 눈을 먹으면서 살아야 했다. 움직일 수가 없어서 끔찍한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신은 때론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한동안 이끼 먹고 눈 파먹고 살다가 어느 정도 살 만해져서 서서히 남으로 남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여긴 처음 오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유심히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평화롭구나." 나바스는 이리도 평화로운데, 어째서 트라이너는 항상 그렇게 시끄러운 것인지. 그러고 보니 메데이레나도 많이 컸겠다. 하하하, 이젠 모두들 아이가 아니겠어. 나만 그저 세월을 헛살았을 뿐. "그래 나도 차라리 예전에 그랬듯이 다시 산 속에 묻혀 살까?" 왠지 산들바람조차 서늘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허망하게만 느껴지고. 하늘에서는 어느새 가느다란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면서 내 얄팍한 옷도 같이 젖어갔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그렇게 얼마쯤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데 웬 사람 하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나바스에서 물건을 사다 트라이너에 파는 상인이었다. 주로 취급하는 상품은 양털과 곡식이었다. "비를 맞으면서 걷고 있습니다." "운치 있군. 하지만 그보다 자넨 좀 쉬는 게 어떻겠나? 피곤해 보이는데." 피곤했다, 그리고 괴로웠다. 상인단의 그 친절한 사내가 권유하는 대로 나는 그곳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주로 잡일이 다였다. "아, 그 소식 들었나? 트라이너에서는 세이키르 재상이 무위를 떨치면서 악마들을 제압하고 있다는군." "물론 들었지. 그가 바로 구원기사라고 하던걸." 제자가 위대해졌음을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걸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괴로움도. "그보다 더 특집 소식을 이야기해 주지. 또 나바스 황궁이 뒤집혔더군." "왜? 설마……." "그 설마가 설마지. 또 황녀께서 가출하셨다고 하더군. 쯔, 아무리 세인 푸르체트 경과 결혼하기 싫어서 그런다지만 그래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지 않나." 가출도 직업병인가 싶다. 왕족이면 누구나 가리지 않고 다 하는 걸 보면. 인생은 역시 놀라운 것이여. "저, 그 황녀란 메데이레나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렇네. 자네도 소문은 들었나 보군, 하핫." 내 모습은 꽤나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신발도 살 수 없었기에 이들이 빌려준 가죽신을 신어야 했고 옷은 그저 내가 처음에 입은, 그러니까 삼 년 전에 입었던 그 옷 그대로 입고 있었으니 길이도 짧아져서 꽤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젠 마법은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 인생에 오점을 낳은 건 마법이었다. 마왕의 이야기가 이제는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구원기사니 뭐니 하는 것들도 어쩌면… 정말 난 마왕일런지도 모르지. "자, 어서 움직이자고!" 나바스는 트라이너와 다른 점이 꽤 많았다. 여긴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타 대륙에 비해 꽤나 높은 편이었고, 또한 안정되어 있었다. 일단 황권이 흔들리는 일이 없었으며 황제 주위에는 유능한 인재가 많았다. 군주의 자질이란, 스스로 유능한 것보다 주변을 훨씬 유능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트라이너는 그렇지 못했단 말인가… 허허허." 노인네 웃음이 다시 살아났군. 하, 이제 인생을 다시 바꾸자. 처음 내가 그 오두막에서 내려왔을 때 다짐한 것처럼 인생을 다시 재미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그리고 상인단은 점점 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동 중, 우리가 작은 마을에 들러서 물건을 보급하고 있을 때였다. 시장에서 물건을 힘들게 움직이고 있는데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자식들, 감히 내가 누군지 알아! 당장 저리 비켜!"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가 빛을 받아서 더욱 반짝거렸다. 순간 눈에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흥, 우리 손에 걸렸으니 가진 돈을 얌전히 내놓는 게 좋을 것이다!" 아마도 녀석은 강도나 깡패 비슷한 놈인 듯했다. 나바스가 치안이 잘돼 있다지만 이런 산골까지 퍼져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웃기지 마!" 메데이레나의 손에서 장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의외인데, 저 꼬마가 검을 다 익히다니. 하지만 실력은 정말 웃기는 정도……. "흥! 별 볼일 없군!" 그 말이 내 말이다. 짐을 내려놓고 동료에게 한마디해 주었다. "음, 나 잠깐 일 좀 보고 올게." "에, 그래." 그리고 골목을 따라 그녀 뒤편에 서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나의 1호 검, 녹슨 검은 아니었다. 오, 그 검도 그리워질 때가 있군. "자 얼간이 여러분, 집에 갈 시간이에요." 잠시 세 명의 악당이 나를 응시했다. 왜, 악당은 항상 3인조이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좁은 골목에서는 세 명도 버겁다. "넌 웬 놈이냐!" 놈이라니, 저런 심한 말을. 난 너희들보다 몇 배는 더 나이 먹은 놈이다! 에라이, 늙은이 파워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뭐, 아직 몸이 삐그덕거리기는 하지만 네놈들은 처리할 수 있다고. "덤벼!" 한 놈이 화가 나서 나에게 검을 날렸다. 오, 좋은 검. 하지만 그의 검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내 검은 녀석의 검을 날려 버렸다. 난 곧바로 그 녀석의 목에 검을 들이밀며 외쳤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면 죽인다!" 누가 악당인지, 이 상황만 보면 모르겠지? 난 말야 항상 궁금했다. 왜 정의의 사도가 이 방법을 쓰지 않는지 말야. 아주 간단하고 빠르잖아. "저기… 당신 뭐 하는 놈이야요?" 이제 말이 슬슬 경어체로 바뀌어가는군. "그냥." 메데이레나는 아주 많이 커 있었다. 더 이상 손 아래로 보이는 꼬마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출이라니, 아주 재미있는 습관이 생겼네. "그럼 그냥 우릴 보내 주실래요?"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래 야, 가." "잠깐요! 구해 줬으면 이 나쁜 놈들을 응징해야지요!" 메데이레나는 날 알아보지 못했다. 뭐, 그때에 비해 머리도 많이 짧고(빌어먹을 신 덕분에. 그거 잘라서 가발로 판 건 아닌가 싶어) 얼굴도 지저분했기에 그렇다. 뭐, 보통 사람도 3년 동안 안 보면 얼굴 알아보기 힘들잖아? "응징? 난 원래 나쁜 놈이라 이런 녀석을 보면 측은해서 말야. 실력도 없이 괜히 그러면 안타까워. 자, 좀 더 실력을 쌓고 와." 그들은 잽싸게 튀었고 메데이레나는 그녀의 눈썹을 역십자로 꺾으면서 화를 냈다. "으… 당신, 나쁜 사람이면 난 왜 구해 줬어!" "그야……." 그녀의 눈이 초롱거렸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같군. "그냥." 이젠 좀 열 받을 거다. 재미있군, 여전히 꼬마로군. 뭐, 어쩜 이렇게 성장하지 않았는지… 쯧, 뭐 니 성격 어디로 가진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신 말이지, 반성해! 실력이 있으면 마땅히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 나쁜 사람을 응징해야지!" 애 놀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어멋, 나 혹시 사디스트? "아, 그야 난 그리 좋은 놈이 아니니까. 아, 가봐야겠군. 일을 안 하면 밥도 없으니까." 그대로 몸을 돌리자, 그녀는 내 옆으로 다가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군자의 도에 대해서 종알대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만, 이젠 조용히 해. 나 일해야 하니까." 작은 포대를 들고 앞으로 걸어가자 그녀는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저기, 일꾼이야? 난 틀림없이 신분을 감춘 기사나 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나쁜 사람이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건 나쁜 사람밖에 없어. 안 그래?" 그녀는 잠시 멈춰 서는 듯했다. 그러더니 다시 내 뒤를 졸랑졸랑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가, 뭐 하려고 날 따라와?" "…그냥." 그렇게 그녀는 말하곤 고개를 숙였다. 왠지 불쌍해 보였다. "나 따라올래? 음, 그러니까 난 아주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살 생각이거든. 여기서 돈 좀 벌고, 그리고 신선처럼……." 메데이레나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깜박였다. 젠장, 내가 애를 데리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어디에라도 숨고 싶은 거야? 무슨 조직에서 쫓아온다든지, 그런 거야?" 얜 역시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어. "아냐, 그냥." 이거 버릇되겠군. 그냥그냥그냥. "음, 좋아." 그녀는 방긋 웃었다. 에? 정말 찬성할 줄은 몰랐는데, 이거 어쩌지? 29. 그 황녀와 그 공작의 사연 나는 말이지요, 정말정말 그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젠 죽어 버렸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슬펐지만 지금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무덤덤해 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를 알게 된 건 겨우 몇 달. 그럼 잊는 데는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나야 잊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래도 잊어지지 않는다면, 그럼 아마도 무뎌지게 되겠죠. 메데이레나의 비밀 일기 황녀가 온다고 하면 내게 말릴 능력이 있겠는가? 원래도 끌려 다녔는데. 한 가지 희망이라면 내가 라플이라는 사실은 모른다는 것. 게다가 얘길 들어보니 황녀가 더 자라나면서 아주 고잉 마의 페이스(Going my face)로 철저하게 살고 있다는데… 그러니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 "저 아가씨는 자네 여동생이라면서? 저런… 벌써… 하긴, 이쁜 여자 애인이 있어서 좋겠군. 하하핫." 일꾼 대장은 그렇게 나와 메데이레나를 엮어 버렸다. 젠장! "왜 그래?" 메데이레나는 여기서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지만 뭐, 그래도 잡일은 많이 하는 편이었다. 사실 황녀라고 안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녀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가 일행이 된 지 겨우 이틀 된 날이었다. "아앗, 이럴 수가!" 갑자기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갑자기 내리는 비 덕분에 대부분은 쫄딱 젖어 있었고, 원래 비 맞은 사람들은 정신이 약간 혼란한 법. "무슨 일이지?" 메데이레나는 일행에게 자신의 이름을 메디라고 밝혔다. 웃기는 작명 센스다. "큰일이네, 저기 앞에 있던 수레가 그만 진창에 빠지고 말았네. 그래서 지금 일꾼들이 빼고 있지만 쉽게 빠지지 않는군." 한 일꾼이 친절하게 현재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뭐, 그러느니 저러느니 한다고 해도 역시 직접 보는 게 최고. "그럼 지금 상황은 어떤가?" 나도 그쪽으로 비를 맞으면서 가보았다. 메데이레나도 쫄쫄거리면서 쫓아왔다. 뭐, 그냥저냥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수레가 진창에 빠지기만 했으면 다행인데 뺀답시고 움직여서 옆에 있던 나무뿌리에 걸려 버리고 만 것이다. "헤, 큰일이네." 메데이레나, 속이나 긁지 말고 가라. 저거 빼려면 비오는 날 땀 빼야겠군. "자, 그럼 다시 해보세!" 메데이레나는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잔머리가 좀 굴러가는 모양……? "좋은 생각이 있어요. 어차피 끼었으니 바퀴를 아예 빼고 나서 수레를 건지는 게 어때요? 그 다음에 수레바퀴만 빼면 더 쉽잖아요."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왜 아무도 생각 못한 거냐? "오, 그렇군. 자, 가세!" 뭐, 이 일 말고도 효과적으로 말안장 놓는 법이나 의외로 먹을 수 있는 풀 같은 걸 많이 알고 있어서 꽤 도움이 되기 시작했다. "메디, 수련은 안 해? 여기사가 되는 게 꿈이라면서?" 메데이레나는 환하게 웃었다. "응, 하지만 아무도 지켜줄 사람이 없는걸." 이거 참, 세인 푸르체트 경은 완전히 차인 거군. "예전엔 있었나 보지?" 그 말에 메디의 입가에 왠지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메데이레나도 변했지만,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해 있어서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응 있었어. 그러나 그 사람, 나보다 강했거든. 하지만 난 지켜주지도, 아니 그 사람이 나를 지켜준 적이 더 많았지." 헤,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놈이군. "그래 있었다고 말하는 건 지금은 그 사람한테 차였다는 뜻인가 보지?" "아냐 죽었어." 갑자기 주위에 있던 몇몇 동료에게서 엄청나게 살벌한 눈초리 공격을 받아야 했다. 내가 뭔 죄가 있다고. "그래… 하지만 메디는 예쁘니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응 그래야지.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뭔데?"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저기요~ 밥 먹을 시간이에요. 쉬었다 가요!"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 "아닛!" 밥 먹다 체하겠다. 한 일꾼이 갑자기 숲 가운데를 보고 비명을 질러댔다. "무슨 일이야!" 모두들 일어나서 앞을 바라보았다. "저건……." "앙크루 사슴이다, 잡자!" 나바스와 트라이너 사이에서만 잡을 수 있다는 사슴으로, 이때가 아니면 절대로 잡을 수 없다. 하지만 넘 한다. 밥이나 먹고 가지. "메디…도 갔군." 일행은 모두 가버리고 중역과 상인 일당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슴이 그렇게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따라 죽도 더럽게 맛없군."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은 아니겠지. 내가 누구인가? 이젠 어느 정도 원기를 찾은 이 지상 최고의 마도사가 아닌가. 웬 놈인지는 몰라도 잘못 걸렸다. "숨어 있지 말고 썩 나와라!" 수풀에서 한 사내가 검을 들고 나타났다. 이런 게 혹시 산적이라는 것? 살기 좋은 나바스에 이게 웬 말이더냐. "흐흐흐… 얘들아, 들켰다." 얘들? 자, 잠깐… 이건 얘기가 틀리잖아. 산적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이거 몇 백은 되겠군." "천만에, 칠백 명이다. 우린 이 시대의 마지막 타오르는 불꽃!" 에? "마지막 신념의 결정체!" "우리는 운명의!" "도적단, 카구스리!" 뭘 쓰리 맞았다고? 그들은 우리 상인단을 삥 둘러서 질척거리는 땅에 주욱 서 있었다. 그렇다, 산적도 비오는 날에 영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 프로 정신을 보여 주었다. "이런 큰일……." 상인을 포함해 나머지 용병들은 15명.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사슴 잡으러 갔음. 죽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 엥? 상인 중 한 명이 갑자기 눈물을 죽죽 흘리고 있었다. 저 녀석은 또 왜 저러냐? "세상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간다!" 어이… 그들은 두두두두 달려갔다. 두 형제인가? 이름은 나중에 들어야겠다.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겠군. "미친놈, 넘어져 죽다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었나?" 예전에도 세계 평화를 부르짖다가 넘어져 죽은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놀라운 일이군. 하지만 오늘은 세계 평화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아남는 게 문제가 되겠어. 까딱하면 죽기 십상이지. "자, 다 내놔. 우린 의적이다! 반항하지도 않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 대신 반죽음을 만들어서 우리의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할 뿐. 그렇지 않냐 아그들아." 저놈은 틀림없이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는데 한 놈이 뛰어 나왔다. "두목,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런 놈들은 십 초면 됩니다!" "오, 좋아 가자!" 이들에 대한 소문이 돌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증거 인멸이 치밀했기 때문이었나 보다. 십 초라……. "오늘 내 여기 뼈를 묻겠다!" 한 용병이 비장감이 흘러 넘치는 말을 하곤 검을 들었다. 그리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자, 여기서 산적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예시 1: 원래 저런 놈이려니 하고 무시하고 지나간다. 예시 2: 건드리는 놈이 미친놈이다. 예시 3: 아니다, 이건 놈의 함정이다. 그 녀석은 검으로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저건 다 헛소리다. "…이상한 놈들이다, 모두 죽여라!" 그렇다. 이래야 막 나가는 산적다운 것이지. 나는 스스로 그의 행동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개떼처럼 내려오는 녀석들을 바라보고 지긋이 미소지었다. "일꾼이 돌았나 봅니다. 음 하하핫." 조용히 그놈을 바라보고 더욱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즉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검은색 불빛이 일렁이더니 어느새 비는 검게 변해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어둠과 동화되어 비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죽음의 공간 하강.> 이 마법은 예전에 세계 각지에 파란을 일으켰던 검은머리의 마녀가 자주 써먹어서 꽤나 유명해졌다. 마법 도구까지 사용해서 거의 완벽에 가까웠지 뭐. "저게… 뭐야!" 마법사는 예로부터 사이코가 많다. 그리고 나도 그 중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기는 한다. 그래서 이렇게 죽음의 공간 하강도 특별히 연출만으로 이루어진 환상 공격이라는 걸… 아는 놈이 몇이나 될까? "으아아악!" 엄청난 비명이 곧 대지를 울리기 시작했다. 뭐, 깨어나기 전에 우리 일행이 오면 같이 짐 싸들고 튀면 그만 아닌가? "왜, 저 사람들 미쳐서 저러지?" 그렇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저건 극도의 공포를 이용하는 마법이라 정신력이라도 약한 놈이 걸리는 날에는 인생 종치거나 식물인간으로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음 하하하. "별거 아닙니다. 한동안 저러고 있다가 잠잠해지면 아마 혼절한 겁니다. 지속 시간은 꽤 오래니까요. 아, 저 마법사 아닙니다." 15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빨리 불어라 하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에… 그게, 미리 병에다 마법을 담아둔 겁니다. 여행갈 땐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이렇게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났더니 여기 주인은 내게 돈도 두둑이 더 주었다. 뭐, 그 병을 싸게 살 수 있었다는 말은 모두 믿지 않았는데, 당연하지. 사실 근래에 이르러서 다시 마법 정체기를 맞고 있는데, 이건 트라이너로서는 치명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위의 나바스는 학교를 설립한다 뭐다 해서 잘 되고 있는데… 쯥. "저기 사냥 갔던 일행이 돌아오는군." 산너머로 사라졌던 일행들이 어느새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메데이레나도 왔겠군. "어이!" 일행 중 한 사람이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내려오다가 곧바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사슴을 잡느라 지쳐 버린 건 아닐 텐데… 대체. "빨리 구급약!" 사슴이 무슨 몬스터였냐? 돌연변이라도 됐나? 나도 황급히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다리에는 뭔가 길쭉한 나무가 꽂혀 있어서 괜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꼬치구이를 생각하게 했다. "이보게, 혹시 내 여동생 못 봤나?" "아, 그게 헤어져서 모르지. 그나마 여기 온 것도 다행인 판에. 제길, 그런 엄청난 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한 사람의 옷에는 산성액이 묻어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하고 혹은 잊고 싶었던 듯하고. "제기랄, 메데이레나!" 내 외침이 공허하게 허공을 그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켁켁, 사래 걸렸다." 난 진정 바보였단 말이다. 여하튼, 그날 저녁이 되어도, 그 다음 날이 되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찾으러 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행방 불명되었으니 그 사람도 겸사 해서 찾도록 하죠. 그리고 먼저 가서 다음 마을에서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도착해서 삼 일이 지나도 안 오면 그냥 출발하십시오." 다른 짐꾼들은 날보고 바보라 했다. 왜 용병도 아니면서 사람을 찾으러 가느냐는 것이었는데, 나라고 좋아서 그러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메데이레나를 잃게 되는 것은 싫었다. "혹시 세인이라는 사람이 있으면… 아닙니다. 그만 두죠." 이미 결혼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길로 나는 짐 싸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 사람들 그림 솜씨는 정말 형편 없구만. 알아볼 수가 없잖아. 그나저나 괴물이라, 아마도… 그것들인가?" 과거 3년 전의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거의 완성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금쯤이면 더하지 않겠어? 산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심지어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리한 길이었다. 여러모로 수상했다. 어두운 분위기와 함께 곳곳에 카와세리크 잎이 간혹 보인다는 것도 뭔가 불길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이 근처에 무슨 동식물 기념 단체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고. 생각을 정리하는 찰나, 뭔가 검은 물체 하나가 옆으로 쉭 지나갔다. 찾았다! 검은 물체는 한 곳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단검 하나를 빼어 들었다. 단검의 경우, 아주 빠르고 사용하기 간편해서 나는 곧잘 사용하곤 했는데 이런 데서 또 사용하게 될 줄은… 하지만 괴물이라면 정화시켜 버리면 그만이다. "오빠야?" 갑자기 일어나면 사람 놀란단다…라는 격언을 마음에 꼭 담고 메데이레나의 얼굴을 살폈다. 흙에 넘어졌던 모양인지 온통 지저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손에 있던 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검 자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검은 어쩌고?" 그녀는 더러운 가운데서도 밝게 웃었다. "녹았지 뭐. 이럴 때가 아냐, 어서 내려가. 무서워 죽겠어." 네가 더 무서워 보인다. 아까부터 옆에서 맴돌고 있는 다섯 마리만 어떻게 되면 좋겠지만 말이지. "이 원 안에서 나오지 마." "에?" 그녀 주위에는 순식간에 마법진 하나가 생성되었다. 이건 마력과 동시에 물리력도 방어할 수 있는 아주 성능 좋은 마법진이다. "자, 그럼 와라!" 풀숲에서 검은 물체가 잠시 정지하는 듯싶더니 뒤편의 두 마리가 동시에 뛰어 올랐다. 쯧, 시간차도 모르냐? 그리고 그들이 박은 곳은 바로 메데이레나의 방어막. 쯔쯧. "꽤애애액!" 어디서 돼지 잡는 소리가… 아, 메데이레나는 놀랐겠군. "꺄아아악!" 완벽한 불협화음이다. 빨리 끝내야겠군. 괴물 하나는 좀 모양이 남달랐다. 이제껏 있던 놈들은 3년 전에 보았던 것과 모양이 비슷했는데 나머지 한 놈은 그렇지 않았다. 평범하게 생긴 두 마리를 옆으로 날리자 갑자기 나머지 세 마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하고 술래잡기를 하자는 심보는 아닐 텐데. "인간, 강하군." 자, 나의 놀라움을 뭘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지나가던 강아지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신했다 해도 내 놀라움을 뛰어 넘을 순 없을 것이다.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분명히 불가능할 텐데!" 저런 괴물의 표정까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입 꼬리가 올라가는 듯했다. 기분 나빴다. "난 인간이니까. 단지 위대한 분의 도움으로 이렇듯 놀라운 신체를 손에 넣은 것뿐이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정상이라면 저런 걸 저리도 자랑스럽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인간이라면 정화를 한 뒤에 다시 어떻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괴물 세 마리가 동시에 뛰어 올랐다. 이젠 주춤거릴 시간이 없다! "정화의 빛!" 빛이 점점 넓게 퍼져 나가서 괴물 다섯 마리 모두 그 빛에 휩싸여졌다. 그리고 잠시 빛에 사방이 잠겼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 너… 넌 어떻게 그렇게 짧게 주문을… 으, 두고 보자!" 얼굴이 반쯤 녹아 내린 괴물이 산 저편으로 가로질러 뛰어 올라갔다. 주변에는 다른 네 구의 시체가 땅바닥에 구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더 이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 방어막이 사라지자 그녀는 재빨리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울먹거렸다. "왜 우는 거냐? 다 없어졌어, 이젠 걱정 마." "아무도, 아무도 지킬 수 없어… 또, 또……." 메데이레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꼭 이 아이가 지켜 줘야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자, 내려가자 메디. 사람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응." 그녀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주고 우린 그대로 산을 내려왔다. 사람이 계약에 의해 마물이 되었다면 정화도 잘 먹히지 않게 된다. 나 정도나 되어야 그 정도 타격을 입히지. 다른 신관들은 엄청 고전하고 있겠군. "저 마을이야? 그런데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면 다들 밥 하나 보지?" 밥? 그럴 리가, 지금은 아직 밥 때가 아닌데. 요즘 계속 수상한 일들이 뿌려지는 판이니. "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요." 메데이레나는 그러면서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마을 주위에는 무슨 시체가 널려 있다든지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뭔가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일단 빨리 가보도록 하자." 마을 앞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나도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분명히 짐꾼 일행이 아닌가? "언제 직종을 바꾸셨나요?" "그게 아니지. 그보다 무사하니 다행이군. 여기 마을은 장난이 아니더군. 우리도 여길 빨리 떠야 할 판이야." 응? 트라이너로 들어서자마자 이게 웬일이냐? "수도가 가까운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쯧, 모르는군. 여기에 키히의 편지가 도착했다는 거야. 글쎄 이 마을을 날려 버리겠다는 거지." 그녀는 아직도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완전히 미쳤다는 사람이 어떻게 편지를 보내는, 그런 일을 하지? "어서 들어가요. 다리가 아파요." 메데이레나는 인상을 쓰면서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도 일의 정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데… 물어 봐야겠다. "아니, 이게 누군가!" 한 사람이 메데이레나를 보면서 반색했다. 이봐, 아무리 여자가 귀하고 이 아가씨가 황녀라고 하지만 나는 안 보이냐!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어요." "무사한 게 어딘가? 그래 여긴 보다시피 전염병이 심하게 한 번 돌았다는군. 지금은 나아졌지만." 그 사람은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저 연기는 시체를 태우는 거라는 이야기다. 왜? 원래 이곳의 장례 관습은 매장이 아니었나? "매장하지 않습니까?" "그게, 여기 전염된 물을 마시게 되면 열병 비슷한 증세가 돌다가 그만 죽어 버리지. 그런데 죽고 나서 사람을 묻었더니 괴물이 된 게야." 그렇구나. 예전에 키히가 풀었던 마족의 피, 그건 역시 이런 데 사용하려 했던 것인가? 가만, 뭔가 생각이 날 듯한데… 에라 모르겠다. 늙어서 대머리로 사느니 젊어서 돌 머리로 사는 게… 나을 리가 없는데, 잉. "자, 그럼 우린 일행이 왔으니 출발하도록 하자!" 상인단의 대장이 크게 외치자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촌장은 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으리, 제발 부탁입니다. 금방 전염병이 돈 마을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 마녀가 와서 여길 죽음의 마을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아이고, 제발 며칠만, 며칠만이라도 여기 남아서……." 촌장의 가련한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저 약간의 죄책감과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들이라고 그 키히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린 갈 길이 바쁘오. 그대 마을일은 안 됐지만 딱히 비결이 없는 것도 아니오. 기다리다 보면 중앙에서 재상이 오지 않겠소?" 재상이 세이지? 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은 재상에 많이도 오르는군. 전 재상은 키히, 다음 재상은 세이, 그 다음은 누가 하려나. "아이고, 나으리!" 그러나 상인단은 출발을 결행하고 우리는 그 마을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메데이레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난… 남을래요." 그녀는 그리고 더 이상 걷지 않았다. 나도 따라 멈추었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그래, 그것도 좋겠지." 그녀의 눈에서는 작은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나에게 말했다. "있잖아요, 전… 전 그 키히를 알아요." 이미 상인단은 우리에게서 꽤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내 입가에는 단지 미소만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놀랍지 않아요? 대륙 최고의 마녀인데… 그리고 그녀가 너무 부러워요. 그녀는 어쨌든 한 사람에게 계속 사랑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건데 그녀는 그걸 모르더군요. 너무 미워요." 죽음을 결심한 사람 같았다. 왠지 착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메데이레나, 내가 네 옆에 있는 이상 넌 죽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고개가 들려졌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도 눈물기가 많이 남아 있는 목소리를 뒤로 남기며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웃기지 말아요. 전 이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요. 남들에게 지킴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긴 싫다고요! 애가 아닌 걸요." 너보다 백 살쯤 많은 사람이 보기에 넌 아직 애야, 임마. 마을 사람들은 우릴 그다지 반겨 주지 않았다. 그들이 믿은 건 40여 명에 이르는 용병이었지 허약해 보이는 나와 메데이레나 같은 아가씨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편지 언제 도착했습니까? 그리고 볼 수 있을까요?" 촌장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마을은 이제 나로 인해 어둠으로 물들 것이며, 모두들 나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위대한 나의 이름을 듣고 따르라. 키히 잠시 난 고민해야 했다. 갈등도 때렸다. 이건 키히 글씨가 아니었다. 뭐, 미치면 인격도 변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인격 이야기지, 습관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거다. 게다가 키히는 이미 백 년을 넘게 엘프로 살아왔지 않은가. 그런 그녀의 필기 습관이 이렇게 빨리 변했을 리가 없다. "…우물에 가보고 싶군요." 촌장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곳은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끊겨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도 이 물을 사용하지 않는 듯했다. "뭐 해요?" 메데이레나는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면서 날 응시했다. 우물에서 물을 한 바가지 건져내 떠올리자 깨끗해 보이는 물이 나타났다. "겉보기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만, 일단 먹기만 하면 그 병에 걸립니다." 촌장의 말을 시험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내가 먹어 보면 되는 것이다. "으엑! 오빠, 그 물에는 병균이 득시글댄다고!" 내 입에서 청량한 물이 목으로 넘어갔다. 일단 한 바가지를 꿀꺽 삼키고 한 바가지 더 먹었다. 이건……. "아, 시원하다." 촌장의 눈은 마치 '젊은 사람이 참 안 되었군' 하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고. 여기 시골 사람들을 이렇게 농락하다니. "오빠, 괜찮아?" "이 물은 아무 이상이 없어. 그보다 혹시 병자가 있다면 봐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보기보다 배운 재주가 많습니다.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죠. 재주가 메주다……." 예문은 좀 비 적절했지만, 촌장은 환자를 보여 주었다. 환자들은 모두 마을 외곽의 한 곳에 격리되어 있었는데 일단 우리도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까지입니다. 뭐, 이곳에서 곧 생활하셔야 하겠습니다만." 키히가 푼 약은 적어도 전염병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떤 병들도 사실 괴물이 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마력 중독 현상에 의한 것이었기에 이렇듯 격리해 놓는다고 해서 낳을 리가 없는 병이었다. "음…음." 병자들의 신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이 병이 수도를 한 번 휩쓸었을 때는 정화 한 방으로 해결했지만, 그 3년간 업그레이드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오빠, 이 사람들 너무 불쌍해요." 메데이레나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흠, 치료약을 준비해야겠다. 메디, 아… 넌 마법약에 대해 모르지? 뭐, 별수 없군. 좋아, 이건 마력 중독 현상이라는 건데, 아주 평범한 인간이 마족, 혹은 마물의 피를 먹게 되었을 때 이런 반응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힘을 견디지 못하면 죽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 피를 먹인 자가 아주 약간만 수고하면 이들은 마물이 되어 그의 충실한 개가 되는 거지." "그런 잔인한!" 그래 잔인하지.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건 마족이 아니라 마물을 이용한 점에 있었다. 처음 영지에서 일어났던 그 마력 중독 현상은 키히가 한 짓이었는데 그건 마족을 직접 잡아서 죽였었다. 그래서 그 파급 효과도 엄청났지. 하지만 내가 근처에 있었기에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트라이너 왕성에서 있었던 그 괴물 사건은 마족이 아닌 마물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키히가 한 건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숲의 왕이 말했던 걸 생각해 보면, 사라진 마족 수가 그 정도 인간을 중독 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키히가 그 방법을 알아냈을까? 천만에, 키히는 마족을 잡는 게 전혀 어려울 이유가 없다. 게다가 효과도 더 좋은데 굳이 그 더러운 마물의 피를 써야 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렇다면 역시……." 수상한 놈이 하나 더 있다는 거다. "무슨 생각해?" "아니. 메디, 부탁이 있어. 내가 정화 주문을 사용할 텐데, 아마 그러고 나서 곧 쓰러질 수도 있어. 그 다음에는 네가 날 지켜 주어야 한다, 알았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밝게 웃었다. "그래 좋아." <정화의 힘이여 이들을 정화하라!> 메데이레나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정화의 한계는 두 사람이 고작이다. 그것도 신전의 에네브 정도? 그 정도만 하면 마력이 고갈되어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뭐, 나야 대 마도사님이지. 빛이 다시 내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때, 빛에 유의해야 한다. 마족은 잘못 쐬면 병신 되기 십상이다. 빛은 사람들 몸 속으로 그대로 흡수되어졌다. 뭐, 함께 있어서 다행이군. "아름…다워." 메데이레나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반하는 건 곤란하다고. 아무리 사랑엔 국경이 없다지만 세대 차이는 엄청나단 말이다. "곤란하다고… 하하하."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뭐, 그렇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서서히 기운을 차려 가는 듯했다. 완전히 정화되었으니 이제 원인만 찾으면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괜찮아?" 정신이 들었을 때, 나를 제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건 메데이레나였다. 문득, 가끔 그녀와 키히가 겹쳐 보이곤 한다. 나를 이렇게 그녀도 걱정스럽게 바라보곤 했었지. "그래, 그 편지의 주인은 아직 안 왔지?" "응, 근데 병사들이 오고 있다나 봐." 키히는 오지 않았는데 병사는 온다? 언제부터 이렇게 트라이너의 병사 체계가 잽싸고 확실했지? "이상하군." "뭐가?" 그녀는 여전히 약간 어리숙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참으로, 황족답지 않은 면모야. "걱정할 건 없어. 자, 이제 촌장을 좀 불러 주겠어?" "응!" 그녀는 후다닥 뛰어 나갔다. 요즘 황녀는 저렇게 성질이 급하고, 약간 맹한 데다가 뭐든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의 황제란 말인가? 참, 세상 많이 망가졌어. "은인, 부르셨습니까? 뭐든 물어 보시지요." 촌장은 더 이상 그때의 그 비굴한 면모를 가진 양반이 아니었다. 이젠 때깔도 좋아 보여… 아저씨, 대단한데. "예,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이곳 사람들이 단체로 뭔가 먹은 적이 없었습니까?" "예? 단체로… 아, 그거라면 있죠. 이 마을에는 원래 보석을 채굴하는 산이 있습니다. 모두들 보석을 채굴하며 살아가죠. 그래서 이번엔 성에서 상으로 저희에게 곡물을 내렸었는데… 그것밖에는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가 없군요." 곡물? "그거 좀 볼 수 있습니까? 한 번 보고 싶군요." 촌장은 이내 작은 바가지에 곡물을 가득 담아왔다. 뭐, 꼭 이렇게 많이 가져오지 않아도 괜찮은데. 한 줌만 있어도 알아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거든. 한 알을 입에 넣고 작게 오물거리면서 씹어 먹어 보았다. 그건 새로운 충격이었다. "섞였군. 촌장님, 원흉은 이겁니다. 이걸 당장 금지시켜요. 아직 안 먹은 집들에게는 모두 환수하도록 하세요." 성에서 내린 곡물에 이런 것들이 섞여 있다는 건……. "성에서 내린 곡물인데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도중에 마족의 피라도 뿌린 걸까?" 메데이레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에서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3년,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래, 곡식이 자라도 몇 번은 자랄 수 있는 시간이지. "젠장, 설마… 이젠…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트라이너의 왕은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조종당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아내를 구해내려 애쓰지 않았던가. 굉장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세이! "왜 그래?" 메데이레나는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내 얼굴을 계속 살폈다. 내가 걱정을 끼친 모양인데. "괜찮아, 일단 여기 더 머무르도록 하자. 아직 환자가 더 나올 수도 있고, 그리고 그 병사들이라는 것도 한 번 봐야 할 필요성이 있어." 그리고 그의 목적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메데이레나와 나는 그 마을에 좀 더 머무르게 되었다. 굳이 이곳을 노리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사용한 것들로 봐서도 알 수 있지만, 이건 마물을 이용한 거다. 그러니까 트라이너 사건 때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그때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엘메인. "밥 먹어. 고민하면 대머리 된대." "젊어서 돌 머리보다는 낫잖아?" 메데이레나는 씩 웃으면서 조용히 빵을 씹어 먹었다. …아무래도 역시 황녀는 황녀였다. 먹는 폼이 우아 그 자체였으니까. "돌아가." "응?" 그녀의 입에서는 빵 부스러기가 조용히 흩어지고 있었다. 이 얼마나 드러운가. "너희 집으로, 나바스로 돌아가라고." 메데이레나의 얼굴은 조용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라라, 화낼 이유가 없잖아? "물론 결혼하려면 양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있지. 에, 그래도 말이야 아직 서로에 대해선 잘 모르고… 음, 그리고 나도 좀 헷갈리는 면도 있고 말야." 대체, 이 애 머리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야. 나까지 덩달아 빨개지잖아! "어, 식사 다 하셨으면 내려오라고 했는데, 그냥 그대로 계세요. 헤헤헤." 촌장 손자가 비웃음을 날리면서 문을 닫고 그냥 내려갔다. 으으, 쓸데없이 오해를 받고 있다! "저기… 메디, 나 말이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응?" 그녀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알아. 에이 참, 우리 오빠 허락만 받으면 되는데 뭐. 우리 오빠는 물렁이니까 괜찮아. 호호호~" 그게 아니라우. 하지만 말할 기회를 놓치면… 아니 되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가 아냐!" 메데이레나는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수프에 빵을 찍기 시작했다. 저럼 맛있나? "응 그럴 것 같았어. 예전에 내가 좋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래서 죽었어." 자, 이 소녀의 말에는 원인이 없고 결과만 있다. 내가 왜 키히 때문에 죽냐? "그래?" "응. 그녀가… 죽였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왠지 오빠랑 그 사람이 닮았거든. 하는 행동이나 괜히 노인처럼 햇볕에서 뒹구는 거라든지." 어이, 너도 나이 먹어봐! 딱 50만 넘으면 그게 인간의 행복이라니까. "그래서?" "설마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난 평생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를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건 너무 가슴 아파." 꼬마답지 않았다. 그래, 이 앤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 "…메디." "응? 그거 내 빵이잖아!" 역시 애들에게는 아직 연인보다 빵이 우선이었다. "아까 분위기 좋던데, 어떻게 된 거야 응?" 헉, 이 꼬마는 대체… 어쩐지 촌장 외 기타 등등 가족들도 왠지 입가에 뜻모를 미소를 가득히 띄우고 있었는데……. "아무 일도. 그보다 병사들은 언제 도착한대요?" "글쎄, 아까 마을 아래쪽에 들어섰으니 지금쯤 거의 다 왔을 거야." 이봐, 근데 안 나가 봐도 되는 거야? "안 가봐도 되나요?" 촌장의 입은 밥그릇 뒤집은 형상을 했다. "우리에게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것만 풀어놓은 걸 보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니 나갈 필요 없네." 이 촌장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무지막지하게 실리적인 이익 추구였다. 음, 이 아저씨를 외교관으로 캐스팅하는 게 좋을런지도 모르겠군. "촌장님, 마을 입구에 기사와 병사들이 도착했습니다!" 잠깐, 기사와 병사? "가봐야겠군, 쳇." 그는 왠지 띠껍다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나와 메데이레나도 그를 따라 나섰다. 일단, 기사가 아는 놈이라면 이야기가 빨리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메데이레나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인가?" 제일 앞에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뭐,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어서 놀란 거겠지. 그럼 넌 이게 괴물로 보이냐? 생생하게 그들을 째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확실히 곱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포상으로 받은 곡물 덕에 전염병이 쫘악 돌았고, 죽은 사람도 꽤나 많지 않은가. 갑자기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에이 퉤! 재수 없으려니, 그 더러운 개자식이 지나가는구만. 에이 퉤!" 보석을 채굴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보석의 아름다움을 본받으리란 법은 없다. 어쨌든 광부 아닌가? "이곳에 잘 오셨소, 따질 것도 있으니… 그리고 마을 규칙에 따라 병사들은 마을 밖의 저 아래에 머물도록 하시오." 보통 마을의 촌장이라면 이렇게 싸가지 없는 말투를 사용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곳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많은 보석 업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마녀가 나타나면 방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나서서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촌장은 이미 삐쳐 있었다. "방어? 그것도 마녀가 나타난다면이겠지. 난 마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굳게 믿고 있소. 자, 당신이나 오시오. 얘기 좀 해봅시다, 따질 것도 있으니." 아무래도 여긴 한 차례 광부들의 발광이 이어질 듯 하구만. 사람들의 시선도 띠꺼운 걸 보는 듯한 얼굴이고. 기사가 바보에 천치가 아니라면 이미 눈치챘을 텐데 말야. "따지다뇨? 이유를 모르겠군요. 여기에 온 건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험악한 분위기가 서서히 조성되기 시작하는군. 뭐, 말릴 생각은 없다고. "뭐라고, 그럼 네놈들이 거기 독을 섞은 게 아니란 말인가!" 병사들은 여전히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아무 것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내 보기엔, 나의 그 숙련된 경험에 의해서 저 기사만은 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독…이라뇨, 누가 독을 섞었단 말입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지는 것도 수상하고 말야. 메데이레나도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고는 기사를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할 수 없군요. 이렇게 된 이상 모두 죽여 버릴 수밖에, 후후훗." 기사의 목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게 무슨……!" 촌장은 무지 당황했다. 순간 그 기사의 몸이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병사들? 그들의 놀라움은 더했다. 뭐, 일단 주저앉는 놈도 있었고 저마다 당황의 극을 달리는 모습이었다. 메데이레나는 짧은 신음을 토했다. "그 괴물이군." 딩동댕∼이지. 이거였나? 그때 그 도망친 놈과 같이 자신의 의식을 유지한 채 괴물이 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로군. "으아아악!" 병사들이 점차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아직 별 움직임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써 어떤 사실 하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병사들은 저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는 거. "크크크, 내가 여기 오기 전에 그저 죽어 있었다면 다 위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안 됐군. 자, 모두 내 손에 죽어라!" 퉤퉤거리며 침을 뱉던 사람은 재빨리 촌장을 부축했다. 나는 그 괴물 앞으로 나섰다. "잠깐, 한 가지 물을 게 있다." 괴물의 노란색 눈이 나를 응시했다. "이 마을 주민치곤 더럽군. 뭐지?" 으씨, 넌 내 필히 죽여주마. "이걸 지시한 건 누구지?" "크크크, 알 거 없지. 크크크, 꺼져 버려라! 영원히 지옥의 화염에서 발버둥쳐라!" 이때의 내 경악은 그야말로 경악 자체였다. 괴물이 된 기사가 마법도 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겐 소용없었다. 있으면 그게 엽기지. 마왕에게 마법이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라플, 안 돼! 죽으면 안 돼!" 내 앞에 순간 갈색 머리가 나풀거렸다. 거대한 검은 마력은 내 앞에서 메데이레나에 의해 멈춰졌다. 그녀의 주위로 피가 산산이 흩어져 갔다. "메…디?"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검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바보 같은! "너… 정말 그와 닮았어. 그래서 좋아했어… 미안해… 미안해." 그녀의 몸에 정화와 회복을 동시에 걸었다. 괴물은 나를 향해 히죽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신관이었나? 크크크, 소용없어. 내게 죽는 순서가 조금 달라지는 것뿐이지. 내겐 어둠의 권능이 있으니까, 크크크." 그 괴물은 나를 바라보며 비웃고 있었다. 메데이레나의 숨소리는 약해졌지만 확실히 뛰고 있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너……." "왜, 크크크." 이 녀석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앗, 저기 머쉬멜로우 인형이 지나가!" 괴물의 고개가 갑자기 돌아갔다. 그 순간 나는 그 녀석의 머리에 정확히 단검을 꽂았다. 검은 뇌수가 뿜어져 나오면서 녀석은 뒹굴어댔다. "끄아아악, 이놈!" 누가 속으래? 그런 유치한 장난에 속는 네가 나빠. "왜, 정화가 듣지 않는다면 더 좋은 게 있지. 기대하라고, 아주 처절하게 죽여주지. 흐흐흐." 잠시 내 주위에는 검은색 기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런 짓을 해도 나와 연결된 마족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놓고…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명심했지만 이놈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뭐, 뭐…냐!" 뭐긴, 힘의 응집이라고 하지. "차갑고 어두운 심연, 그 핏빛의 어두움을 가진 바람, 감정의 회오리 그 중심에 서서 어두운 암흑을 만들어내는 자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의 피 한 방울까지 모두 증발하고 사라져서 영원히 구천을 헤매게 될지라!" 거대한 회오리가 그 괴물의 몸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는 검은색 피가 튀겼다. 마왕에게 거역한 마족이나 마물은 살 수 없다. "메디… 괜찮을 거야." 이젠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 더 이상 누구도… 하지만 그러기엔 모든 것이 늦었고 나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몰라. "오오, 그대는 신관이었던 것입니까!" 한때는 대사제 후보로 거론된 사람이기도 했지만… 뭐, 하하핫. 지금은 때려 치운지 오래라고. "아니에요. 한때 해본 적이 있을 뿐이고… 그나저나 제가 낫기가 무섭게 얘가 들어가 있어야겠네요."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뭐, 엄청났지. 보통 사람이라면 정화 받을 시간도 없이 썩었겠지만 다행히도 내가 옆에 있었으니 뭐. "우와, 눈물나는 로맨스가 아닌가요?" 그 꼬마 아닌가? "무슨 소리야?"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아름다운 소녀와 그 소녀를 지키기 위해 괴물과 싸운 소년… 오옷!" 참아 줘. 이젠 여기 음유 시인 하나 나올 분위기로군. "응… 으…음." 그녀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뭐, 기절 상태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지. 내가 다친 게 차라리 더 편했겠다는 생각이 드네. 나도 참. '좋아해… 라플, 그러니까… 죽지 마.' 기절하기 전,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눈에서 왠지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이렇게 밤새서 간호하려니 약간 심심하기도 하네. 겸해서 {생명의 서} 필사본이나 읽어볼까. 해서 난 오랜만에 {생명의 서}를 들춰보았다. 내용을 살펴봤지만 별로 특이한 상황이나 궁금한 점 등은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3년간의 상황이 대충 어떻게 흘렀는지는 알 수 있었다. "개판이군."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었다. 책에는 괴물이 환자로 표현되어 있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럼, 그 기사는 자청해서 광견병에 걸린 경우에 해당되는 건가? 흠, 알 수 없군. 특이한 사항은… 그래, 이거였다. 세이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건 또 의외의 신분이었는데, 내가 잠시 신세진 적 있는 그 후작 가문의 아이라는 것이었다. 이거 참, 세상은 알쏭달쏭하다더니. 그리고 율지스 이야기는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여전히 마법학원 교장직을 맡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아, 맞다. 우리 선배 하나가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녀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지 전혀 쓰여 있지 않았다. 그 외에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없었고, 전대 마왕의 행적에 대해선 아예 나온 바가 없었다. 대신 내 이야기는 무지막지하게 자세하게 나와 있었는데……. …그렇게 기사 중 하나가 괴물로 돌변하여 사람들을 위협하자 마왕인 라플은 그의 놀라운 힘을 떨쳐서 모두를 구하고 나바스의 황녀의 목숨을 구했다……. 기분 나쁜 구절이다. "우리가 항상 지켜줄 거야~ 멍멍 멍멍멍." 이상한 노래가 들려왔지만, 그냥 무시하고 잔다. 괜히 신경을 많이 쓰면 대머리가 된다. 헐……. 다음 날 아침, 메데이레나는 아직 별 차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대로 숨도 고르고 점차 나아지고는 있었다. 마왕인 나와는 달리 그녀의 회복은 더딜 수밖엔 없었다. 뭐, 불공평하면 마왕을 하도록. "그 기사, 누가 보낸 걸까요? 혹시 사제님은 아십니까?" 촌장은 아침 식탁에서 재빨리 소화 안 되는 주제를 끄집어냈다. "왕일까요? 병사들은 오늘 하루 묵고, 내일 돌아간다고 했습니다만." 촌장의 아들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운을 띄웠다. 아무래도 궁금해할 것 같았나 보지? 하지만……. "저도 물어 보았는데 한두 가지 수상한 게 아닙니다. 아마도 병사들이 가도 무사할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군요." 촌장은 묵묵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빵에 버터를 발랐다. 버터 바르면 난 느끼하기만 하던데… 음음, 유동식 먹고 싶다. "아마도 병사들이 안 온다면 다른 사람을 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까지 한번 기다려 보는 게 어떻습니까?" "하지만 병사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하긴, 그것도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에는 항상 해결 방법도 존재하는 법. "밥값 대신 일을 시키면 되잖습니까? 광산에서 여차여차해서 일을 열심히 하면 언젠가 보상도 받을 테고." 촌장은 그 말대로 병사들에게 그들의 취업 사실을 알렸다. 뭐, 촌장은 내 말을 꽤나 믿어 주고 있었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신관으로 떠받들었다. 신관이 마을마다 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지만 나 같은 신관도 사실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나저나 메데이레나를 빨리 보내야 할 텐데… 여기 더 있으면 아마 대륙 정벌이라도 하겠다고 나설지 모르겠어. "아, 오빠구나. 한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보였어."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약간 젖어 있었다. 에, 뭐라고 위로를 하나? "이번에 날 지켜줘서 고마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약간의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미소가 되어 퍼져 나갔다. "응 아냐, 나야말로 고마워." 3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진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메데이레나에게는 슬픔을, 키히에게는 마녀라는 칭호를, 세이에게는 재상이라는 영광을…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나으면 바로 나바스로 가."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뭐, 이번엔 착각하지 않겠지. "너무 일러." 엥? "뭐…가?" "그야, 내가 지금 가면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그리고 너에게 말 안 한 게 하나 있어. 너도 꼭 내게 이야기해 주어야 해. 네 이름… 뭐야?" 응? 아, 그렇구나. 여태껏 내 이름은 가르쳐 준 적이 없었지. 뭐, 그렇지. "음, 글쎄……." "좋아, 내가 먼저 이야기할게. 내 이름은 메데이레나야. 그리고 나바스의 황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어. 세인 푸르체트라는 영족과 혼담이 오고 가지만, 난 아주아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도망쳤어." 에, 자꾸 불길한 한기가 어디서 엄습하는데. "그래…서? 그 사람이 나와 닮은 라플이라는 사람이야?" 그녀는 내가 알아온 그 시간 동안 절대로 짓지 않았던 아주 아름답지만 슬픈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래, 이미 죽은……." 아직 난 안 죽었어, 멋대로 죽이지 말아 달라고. "그랬구나." "나, 그의 복수를 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만두었어. 오빠가 그러더라. 그렇게나 사랑했던, 그래서 죽기까지 한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않다고." 이번엔 내가 울 뻔했다. 그렇지, 어찌 보면 이젠 그녀를 막아야 하는 건 나밖엔 없는지도 모르지. "그랬구나." 그녀의 머리는 어느새 약간 부수수해져 있었다. 손으로 그걸 좀 정리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이름이 뭐야? 그와 닮아서 좋아하지만 넌 그와는 좀 틀려. 아주 틀리지." 에이, 동명 동인인데. "무엇이?"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내게 다정하지 않거든. 그 사람… 헤헤헤, 그러니까 내 짝사랑이었다는 거지. 에, 큰일났잖아! 어머니가 그러시길 남잔 여자의 과거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처음으로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나보다 100살 정도 어린애에게 귀엽다는 생각을 했으니, 난 지극히 정상! "날 라플이라고 불러." 메데이레나는 날 한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웃었다. "응, 좋아." 그날, 나와 그녀는 밤새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주로 그녀가 떠드는 쪽이었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프라운이나 하브라이드의 기이한 재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꽤나 웃기는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난 어쩌면 라플이 살아 돌아온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날 위해서 말야." "그것도 괜찮겠지." 잠시 키히와 모두에 대해 잊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데이레나를 만나서 이렇게 웃고 떠드는 것도 잠시라면… 괜찮겠지. 응, 키히? "우에에엑!" 이게 몇 번째더라? 하여간 검에 소질 없는 것들은 다 마법으로 전향해야 한다구. 뭐, 메데이레나가 그다지 소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제 와서 검을 배운다는 건 좀……. "무리야, 집어치우라고." "싫어, 내가 왜? 원래 파티라 함은 마법사와 기사가 제일 완벽하다고!" 너 같은 기사는 있으나마나야. 괜히 나서서 싸우다가 너 다칠까봐 내가 더 조마조마하겠다. 으……. "자, 이제 차라리 다른 걸 해보는 게 어때. 그냥 마법이나 배워라. 그거면 적들과 굳이 붙어서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의 입은 서서히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건… 불길해. "웃기지 마, 감히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이럴 때만 황녀지. 에휴휴, 내 신세야. 차라리 제자로 들여놓는 쪽이 낫겠어. 그럼 이렇게 개기지는 않을 거 아냐. "아, 자네 잠깐 와보겠나?" 촌장이 구부정한 걸음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날 불렀다. 메데이레나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기회였기에 당연히 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촌장의 얼굴에는 뭐랄까, 수심이 어려 있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종이 하나가 꼬옥 쥐어져 있었고, 그 손은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그걸로 봐서 혹시……? "중풍이십니까?" 맞을 뻔했다. 뭐 그렇다고 맞을 내가 아니지 않은가, 음 하하하! "노인을 놀리면 못 쓰네!" 전 댁보다 나이가 많아유. 어쩌자고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서 이 꼴 저 꼴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노인이 되면 아이와 같아진다더니 요즘 그걸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음 하하하. "무슨 일은 없는 것 같고… 아, 그러고 보니 그 종이는 뭡니까? 오늘 저녁 식단은 아니겠고." 그는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어이, 비듬 떨어져. "그게 아니네. 이 종이는 중앙에서 나에게 온 게야. 내용이 무시무시하네. 글쎄, 여기 있는 자들이 모두 마왕과 결탁했고 사악한 마녀의 한 패거리라잖아. 이게 말이 되나!" 된다… 난 마왕 맞지. 그리고 키히가 내 애인이고, 나 땜시로 저렇듯 삽질을 무지하게 해대니 어찌… 어찌 아니겠나. "에… 그것이, 그것이 아니어요." 째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는 아주 무서워질 때가 많다. 음……. "당연히 아니지! 난 마왕은커녕 마족도 못 봤다!" 그렇지, 이 노인은 내가 마왕인 건 모르니까. 뭐,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지. "음, 중앙에서 아무래도 대대적인 토벌군을 보낼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걸 빌미로 아마 사람들을 죽여서 입을 막거나, 혹은 여기 있는 광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아마도 제 생각에는 그게 틀림없을 것 같은데요." 그의 눈에는 이채가 떠올랐다. 뭐, 그거야 개나 소나 양이나 말이나 다 생각할 수 있다고. 이 마을에 돈 되고 쓸모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런… 좋아, 알겠네. 하지만 무슨 수가 없겠나?" 무슨 수라니, 나보고 설마 트라이너의 일등 병사들과 싸우란 건 아니겠지? 뭐,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음, 수는 있지만 그리 권장할 방법은 아니네요. 몇 가지 예가 있기는 합니다. 전 항상 선택을 중시 여기거든요. 들어 보실래요?" "그야 이를 말인가." 왜 아저씨들은 꼭 그냥 말해…라고 하면 될 걸 저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는 거람. 쳇! "예, 좋아요. 그러니까 먼저 적들이 쳐들어오면 같이 싸우는 거죠. 이게 가장 정공법이고요."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라도 찌푸리지. "미쳤나, 정규군과 싸우게?" 그렇지? "음, 그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정규군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지형적인 이점도 갖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광산으로 가서 싸운다면 별 피해 없이 끝날 수도 있어요." 어느 정도 그는 수긍하는 듯했다. "그럼, 다른 방법은 뭔가?" "예, 다른 하나는 항복하는 거죠. 금광을 바치든지, 아니면 목숨을 바치든지. 그러려면 적어도 몇 사람은 살 수 있겠죠." "차라리 싸우겠네." 의외로 이 촌장 기개가 있는 인간이었다. 살다 보니 별일 다 보는군.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방법! 아주 비열하지만 아마 사망자는 하나도 없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는 고개를 들고 번쩍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촌장으로서 비열하건 치사하건 해야 할 건 해야 하네. 그건 바로 마을을 지키는 일이야!" 애국심에 앞서는 이 애향심을 보니 우리 나라도 아직 멀었어. "좋습니다. 인질은 메데이레나가 하고 나머지 분들은 모래로 탑을 쌓으면 그만입니다. 마왕과 결탁했다고 하니 마왕이 나와 줘야겠죠?" 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 중엔 마족은 커녕 마법사도 없네." "제가 있습니다. 신관이잖아요, 헤헤헤. 그럼 실력 발휘를 위해서 작전을 세워야겠군요. 기마 부대가 온다면 아마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올 텐데요." 기왕 올 바에 아젠 기사단이 온다면 그냥 얘기로도 끝낼 수 있을 텐데, 나에게 위험부담은 더 늘겠지만.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선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아, 느는 것은 역시 잔머리뿐이구나!" 메데이레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검을 제대로 안 가르쳐 준다고 내게 투덜댔다. 뭐, 그녀에게도 내일 전투를 위해서 한 가지 알려주긴 했지. 예전에 세이에게 가르쳐 주었던 그 필살의 삼 검식! "우잉, 너무 어려운데." 재질의 차이다, 쯧. 역시 마법사가 머리는 더 좋아. "할 수 없지. 넌 연기만 잘하면 돼. 아, 맞다. 여기 혹시 드레스 있어요?"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빌어먹을! 꼬마 녀석이 한 마디 거들었다. "혹시 형이 입으려고요?" 말 안 듣는 아이는 패서 가르친다! 내 신조다. "이걸 저보고 입으라고요?" "응, 아무래도 인질로 보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고." 그녀는 옷을 들고 잠시 기뻐하는 것 같았다. 빨간 드레스였는데, 원래는 뭐 약간 지저분한 회색이었지. 내가 거기에다가 빨간 물을 먹였거든. 역시 시선 집중은 빨간색이 최고라니까. "왠지 돼지가 된 기분이야." 헉,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핫. "하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리자! "근데 라플은 왜 아무런 장식도 안 해? 그런 옷을 입고 있다가는 거지가 인질극 벌이는 줄 알걸? 제대로 좀 씻고 검은색 망토를 휘날리는 건 어때?" 소설 너무 많이 봤군. 하기사 내가 마왕을 만났을 때도 그는 더욱 웃기는 차림을 하고 있었지. 혹시 마왕이 되려면 웃기는 옷을 잘 입어야 한다는 관례라도 있나? "후후후,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 우리 마을에 예전에 축제할 때 남겨둔 악당용 옷이 있어. 이걸 입으면 다 속아넘어갈 거야." 꼬마가 어느새 회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놀라운 치유력이다. 얘나 잡아가서 실험하지 그러냐. 그럼 의학계가 한 10년은 진보할 거다. 그보다 내일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는데도 왜 마을 분위기가 아무런 근심이 없어 보이지? "응, 마을 사람들이 왜 태평하냐고? 그야 자네를 믿기 때문이지. 우리도 들은 건 있다네. 보통의 신관은 한둘만 정화하는 게 고작이라면서? 그런데 자네는 우리 마을 전체를 정화했으니… 당연하지." 하하핫, 게다가 괴물도 화려하게 죽여주었고. 괜히 폼 잡았다, 덜미 잡혔어. "그런가요, 하핫." "그래, 내일 기대하지. 뭐, 우리 애들도 쫘악 풀어놨으니 고민하지 말게. 아래쯤 도착하면 다 전해 줄 걸세." 하나도 걱정 안 해. 다만, 다만 이 옷이 잘 어울릴까 그게 걱정이란 말이다. 으, 이런 옷은 처음이다. 내가 처음 검을 잡고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비록 공작가의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낯부끄러운 옷은 입은 적이 없다고! "우와, 기대된다. 틀림없이 멋질 거야!" 메데이레나는 이제 목걸이도 준비해서 목에 걸어대고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모두 흥미진진하게 음식 장만을 하고 있었는데, 이건 난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오는 사람들은 아주 무섭고, 어쩌면 전투가 날 수 있는 상황인데 이렇게 느긋할 수 있는 걸까? 도대체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애들과 여자들은 내 마법 방어막이 쳐진 마을 회관에 있었다. 여기 분위기가 또 장난이 아니었다. "오, 거기 재료 좀 줘." "응, 여기. 예끼, 벌써 먹으면 어떡하니!" 곧 아이의 소리가 나고 다시 시끄럽게 음식을 하는 소리가 났다. 내일 전승 기념회라도 있어서 음식 준비를 하는 건가봐. "지면 곧 죽음이다!" "왜 달보고 그래? 늑대인간이야?" 이 꼬마는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내 속을 긁고 있다. 대장간에서는 무기 만드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왜 무기는 안 만들고 있냐고. 그러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게… 부엌칼 주문이 밀려서요." 내일 마왕이 이 마을에 강림해도 이들은 왠지 무사 태평이지 않을까? 에휴휴, 괜히 나만 더 긴장되잖아! 메데이레나는 히히덕거리고 있지,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지. 결국 난 식탁에서 한마디했다. "내일 축제라도 하나 보죠?" 촌장이 손바닥을 쳤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 결국, 얼렁뚱땅 무슨 기념인지 모를 축제가 열리게 되었다. 내 입이 웬수지. 그 덕에 밤새도록 마을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당하는 입장에서 이건 꽤나 괴기스러웠다. 혹시 이곳이 마족 마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늘 별이 참 이쁘다 그치?" 메데이레나는 예쁜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목에는 예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뭐, 보석 산지니 저런 게 많이 있기는 하겠군. "음, 그러네." 메데이레나는 잠시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감탄조로 말했다. "달도 참 이쁘네." "아, 그래." 어디서 문득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난 안 이뻐?" 여기 역시 긴장감을 상실한 인간이 하나 더 있었구나. 어떻게 교화시켜야 할지 이제는 정말 모를 지경이라구. "예뻐, 그래. 하지만 내일은 싸움이 있다고. 조금은 긴장해 달라고." "으, 그렇지 않아! 그거 알아? 인류에 대한 과학서적을 하나 읽었는데 말이지, 거기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더라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초의 인류라 하면 으레 북경원인(Sinanthropus pekinensis), 또는 자바원인(Pithecanthropus erectus) 등이 거론되어 왔었지. 이들은 대개 지금부터 50만 년 전에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더라고. 이들은 직립은 물론 불과 도구를 사용했음이 분명하고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는 훨씬 키도 크고 두뇌의 용적도 컸는데, 이들 역시 종전에는 호모(Homo)라는 속명으로 불리지 않고 시난트로푸스(Sinanthropus, 북경원인), 또는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hropus, wkqkdnjsdls)라는 속명으로 불려왔는데, 이들을 요즘은 모두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모를 거야. 그러니까 내게 아름답다고 해야 한다고." 그걸 다 외운 너에게 심심한 존경을 표한다. 하지만 내가 낸 문제야. 내가 답을 모를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 얘기랑 아름답다고 말해야 되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알아, 그건 호모 에렉투스야. 너야말로 몰랐지?" 그녀의 얼굴은 금세 홍당무가 되었다. "웃기지 마! 나도 알고 있었단 말야. 난 바보가 아냐!" 누가 뭐랬나? 음, 이젠 세이를 놀릴 수 없으니 정신 연령이 비슷한 애를 데리고 노는 건가? 나도 참 짓궂어. "바보라곤 안 했어. 그거 아니? 저 별들은 사실 별이 아니라 구멍이라고,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어둠의 꽃이 아주 예쁘게 하늘에 수놓아져 있으니까 별이 많으면 많을수록 꽃은 덜 피어 있는 거지. 낭만적이지?" 내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미처 그걸 보지 못했다. 황홀하다는 듯이 손을 꼬옥 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 예쁘다, 검은 꽃이라니." "뻥이야." 그리고 나는 땅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역시 인간 관계는 힘으로 결정되는 게 아닌가봐, 흑흑. "라플, 나빠! 나한테 뻥이나 치고 말이지." "헤헤헤… 뭐, 그것도 잠시라고. 이번 일만 끝나면 즉시 나바스로 돌아가. 바래다주리? 여긴 너무 위험해서 너에겐 안 좋아." 그녀는 갑자기 내 앞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또박또박 목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했다. "내 인생이야, 참견 마!" "요즘 소녀들에게 인기 있는 특별 수제 인형세트를 줄게." 순간 그녀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래도 난 애가 아니라고." 할 수 없네. "알았어. 그럼 네가 가고 싶어질 때 돌아가. 대신 강해져야 해." "응, 그럼 그 인형세트 줘." 에? "없는데." "무에라고! 감히 날 데리고 장난을 쳤어?" 장난감치고 반응이 다양하잖아. 그래서… 에에, 역시 애는 애구나. 그녀는 이제 불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들이 서서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자, 장난은 여기까지. 연극 준비에 들어가 보실까." 내 입가에는 어느덧 미소가 걸려 있었다. 뭐, 사람들이 긴장을 안 하는데 나라고 긴장할 리가 없잖아. 30. 종이 울리고 전투가 시작 아무리 화려한 왕관이나 어떠한 면류관을 쓰더라도 진정한 왕이 아닌 자는 왕이 아닌 것을 드러내게 된다. 왕은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라도 갑자기 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왕은 그런 면에서의 모든 법칙을 뛰어 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마왕이 될 수 없고, 어떠한 특정한 목적을 달성해야만 마왕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마왕은 과거엔 신의 사자로 생각되어졌는데 그런 이유로 신에 대해 인정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금의 마왕은 인간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요, 어둠의 지배자로 인식될 뿐이다. 말렝의 글 사람들은 모두 조금의 긴장 정도는 하고 있는 듯했다. 문제는 그 긴장의 이유인데, 어떤 자는 자신이 내일 춤 신청할 여자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내일 뭘 입을 까에 대해 긴장하고 있었다. "조금쯤은 긴장해도 상관없는데." "라플, 발 밟으면 죽어." 메데이레나야, 내가 네 발 밟을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물며 내가 그리도 한가해 보이더냐? 에구구. "저기 기사단입니다. 놀랍군요, 여기까지 기사단이 오다니. 말도 꽤나 지쳤을 터인데." 말을 담당하는 이 동네 유일의 말 장사 아저씨는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뭐, 여기 한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러나 문제는, 네가 지금 말 걱정할 때냐! "근데 언제 시작할 거야?" "곧."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부유 마법을 써서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특수 효과로 빛 마법을 주위에 살살 뿌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웬 빛나리람'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와~!" 환성은 계획에 없었던 거다. 사람들은 무슨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기뻐했다. 어이……. "오빠, 마왕이 이렇게 멋지게 등장해? 이건 꼭 신의 사자 같잖아." 그렇군, 나도 의도한 바와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너도 비련의 여주인공 역을 잘해내. 그럼, 박쥐 몇 마리를 띄워 볼까?" 하늘에 환영 마법으로 박쥐를 소환한다는 것이 그만 착각해서 날개 달린 마족 몇 마리가 날아다니게 되었다. 말들은 그 공포감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고. "이쯤 하면 되겠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눈이 빠져라 구경하고 있었고, 달려오던 기사들도 꽤나 당황한 듯했다. "네놈은 웬 놈이냐!" 한 사내가 아예 말에서 내려서 씩씩하게 물었다. 목소리 큰 건 맘에 드는군. "난 너희가 찾는 자다. 어둠을 지배하고 그 어둠을 먹으며, 어둠을 토해내는 자!" 왜 악당의 대사는 대사집이 규정되어 있는 거지? 꼭 무슨 약관을 적어놓은 것 같단 말야. 재미없게시리… 다들 창조력이 부족하다고. "뭐, 마왕이라니!"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는 착각이 들었다. 에… 그것이, 그것이 응? 저 아래 또 흙먼지가 일고 있잖아. "사령관님, 아래 트라이너의 기사단이 오고 있습니다." 잘못 짚었다. "어이, 계획에 전면 수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들은 대체 누구여! 오, 아는 얼굴이 드디어 나타났군. 그럼 효과 만점이겠는데. "음 하하하!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감히 내가 사는 이 마을에 피해를 입히려 하다니. 마왕은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이쯤 폼을 잡을 무렵, 트라이너의 기사들도 몰려왔다. 다행히도 아는 놈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아젠 기사단이 아니라는 거지. 휴! "넌 누구냐! 왕께 반역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는다." "음 하하하! 어리석은 인간, 여기 이 소녀는 나바스의 황녀다. 그녀가 죽어도 좋으냐?" "꺄악~ 살려 줘요, 푸르체트 경!" 역시 그녀도 자신이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내가 아는 한 제일 느끼한 자식이 거기서 기름병을 들고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메데이레나, 내 귀 아프다. "아니 황녀님을 인질로 삼다니, 비열한 놈!" "후후후, 원래 마왕이 좀 비열해." 좀 찔리는군. 트라이너의 기사 하나가 코웃음을 치면서 앞에 나섰다. 저자식도 실은 무지 놀랐을 것이다. 모략하려고 그냥 꾸며낸 말이었는데 정말 마왕이 나타나 있으니. "좋아, 네놈들은 정말 마왕과 작당을 했던 게로구나. 오늘 내 여기서 너의 뼈를 보겠다!" 음… 다 좋은데, 어떻게 내 뼈를 보냐? 너 해부학 공부를 많이 했나 보지? 생선뼈도 못 바르게 생겼구만. "어리석은 인간들,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주마. 음 하하하!" 메데이레나가 작게 속삭였다. "오빠, 입 안 닦았지?" 젠장, 지금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음… 그 분을 놔줘라! 그 분은 한 떨기 꽃보다 더 소중하고, 나바스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시다. 감히 너같이 더러운 놈이 그 분을 인질로 삼다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하하하, 왠지 할 말 없어지는군. "우매한 인간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나의 역할이다! 감히 정부에서 사람들에게 독을 푼 곡물을 먹이고 광산을 집어먹을 계획이나 세우다니,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나? 다 알고 있다!" 세인은 즉시 고개를 돌려 트라이너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당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음, 세인이 좀 똑똑한 놈이면 좋겠는데 말야. "그게 무슨 소리냐! 감히 이젠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느냐, 이 음모의 마왕!" 음모의 마왕? 것 두 꽤 멋진데. 음, 생각해 봐야겠어. 어차피 마왕도 하나의 직업이라고 가벼이 생각한다면 직함도 좀 멋져야지. "틀려요, 저 사람이 우리에게 독이 든 곡물을 주었어요. 천사님!" 웬 꼬마 하나가 나오는 바람에 우리 일행은 더더욱 당황하게 되었다. 뭐, 나만 당황하고 끝나면 괜찮은데, 세인이나 트라이너의 기사단도 어이없어했다. "천사라니? 헛소리하지 마라. 이미 인간들도 모두 잡아먹혀서 마족이 되었나 보다!" 내가 잡아먹으면 마족이 되냐? 그거 참, 한번 실험해 봐야겠군. "음 하하하, 내가 먹으면 어떻게 마족이 되냐? 그거 참 재미있겠구나. 너부터 먹어 줄까?" 그리고 살벌한 검은색 마기를 살짝 흩어 뿌리면 보통의 인간은 겁먹게 되어 있다. "으……!" 이거 참, 세인이 멍청해서 문제군. "거기 나바스의 인간아, 만약 네 황녀를 살리고 싶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저 자를 죽여라!" 자, 이제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실 때가 아니신가? "이 마왕, 에잇!" 에? 그는 검을 집어들고 내 바로 아래에서 열심히 휘둘렀다. 정말 열심히… 그러나 나는 떠 있다. "비겁하게 떠 있지 말고 내려와라, 에잇!" 뭐야, 이건. 그래도 또 모르지. 어둠의 피를 불러내는 수밖에 없나? "흠, 좋아. 그럼 내 응징을 시작하겠다! 차갑고 어두운 심연, 그 핏빛의 어두움을 가진 바람, 감정의 회오리 그 중심에 서서 어두운 암흑을 만들어내는 자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의 피 한 방울까지 모두 증발하고 사라져서 영원히 구천을 헤매게 될지라! 사라져라!" 그런데 이번엔 또 의외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일단, 검은색 기류를 그 단장에게 흘려서 마족의 피를 없애는 주문을 외웠는데……. "으아아악!" 트라이너의 대장 기사를 제외하고 모두가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서서히 마족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약간이라도 검은색 공기를 들이마시면 놈들은 정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어떻게……. "이게 뭐냐, 너 설마 우리 일행에게 저주를……." "피해!" 방어막으로 그와 세인 일행을 보호했다. 괴물 하나가 스산한 미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제법이군. 신관이라니, 후후후… 모두 죽여라!" 대장도 있나 보다. 그나저나 정화도 안 되니 그 땀나게 긴 주문을 다시 외워야 하는 건가. 아, 좋은 방법이 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세인은 그저 당황하고 있었고, 검을 든 마물은 방어막 앞에서 정확히 기껏 쳐져 있는 방어막을 두 동강내었다. "트라이너의 발전이 들리지 않나? 크크크." 마물화된 사람의 전용 대사가 '크크크' 아닐까? 모를 일이다. "흙은 흙으로 어둠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라!" 이번엔 그리 번잡스럽지 않게, 확실히 피가 땅에 스며드는 그런 부작용만 제외하면 마물 처치로는 그만이었다. 마족들은 끔찍하게도 피가 터지면서 땅에 거무죽죽하게 스며들어갔다. "이게 대체……." 멍하니 서 있는 기사 옆으로 내려섰으나 그는 날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젠 시체가 되어 버린 일행을 멍하니 바라볼 뿐. "마물의 피로 인한 거예요. 아마 이 마을에 전해진 곡식과 똑같은 걸 먹고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 기사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난 아무 이상도 없지 않은가?" "뭐, 이유가 있겠지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세인은 어느새 메데이레나 앞으로 쪼르륵 달려가 앉았다. "황녀 전하, 그 동안 무사하셨습니까! 찾다찾다 트라이너에 도움을 구하고자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무사하신 모습을 뵈니 다행입니다. 신, 신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메데이레나는 인상을 박박 긁고 있었다. 그녀의 가출이 이제 종말을 향해가고 있는 거지 뭐. "웃기지 마. 여기서까지 그 생 쇼를 할 생각이야? 그리고 당신 트라이너의 신관 기사지?" "예, 그렇습니다만……." 에, 신관 기사? 그런 것도 있었나? 아, 맞어. 케빈도 그런 거였지. 나보다 잠시 누워만 있던 메데이레나가 더 잘 아냐. 난 반성해야 해. "당신 말야, 척 보면 몰라? 동료가 뭔가 크크크 웃음을 흘리고, 내가 이 사람 편을 들고… 응? 당신 바보가 아니면 알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해했나 보군. "제 이름은 사비르입니다. 성은 버렸습니다. 그리고 종족을 초월한 사랑이라니 아름답군요." 이 사람도 메데이레나 못지않은 넘겨짚기 선수였단 말이다. 메데이레나는 얼굴까지 빨개져서 그를 살살 치면서 말했다. "어머머, 아냐 얘는. 아이 참, 그죠?" 마을 사람 모두의 야릇한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젠장, 키히가 알면 어쩌려고 그래? 그녀가 알게 되면 아마도 세계에 모두 쑥을 심을지도 몰라! 그리고 세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 "참 메데이레나 님, 저와 황녀님의 약혼은 정식으로 취소되었습니다. 저도 이제는 결혼을 해야지요. 그리고 앞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은 황녀님이 막으셔야 합니다. 제가 기사역을 해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저기 더 괜찮은 기사님도 계시고요." 어이… 사실 세인은 매우 좋은 놈에다가 사려 깊고,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고 했다. 선대에 맺은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었지만 사실은… 좋아하는 여자도 있었다고? "우와, 정말 잘 된 거네. 그럼 그녀랑 결혼하는 거야?" 세인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뭐, 불쌍한 인생이지 다들. "아니오, 아직 좀 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사실 트라이너에 온 것은 명목은 황녀님을 찾으러 온 것이었지만 사실 이곳 트라이너의 왕께서 저희 폐하에게 편지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잉? "무슨 편지를 보냈다고?" 메데이레나도 모르는 걸 보면 그녀가 가출한 뒤에 벌어진 일이라는 말이겠지. "그게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거였지요. 왕비께서도 지금 유폐되어 계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하는 거의 갇혀 지내는 거와 다를 바 없다고 하더군요." 그 왕비 정말 고난의 연속이로군. "그러면, 배후는 재상인가?" 하마터면 세이라는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올 뻔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내 옆에 있던 신관 기사는 더더욱 눈을 황망히 뜨고 있었다. "글쎄요, 그건 아직 모릅니다. 배후도 드러나지 않은 걸 보면 얼마나 치밀한지 알 수 있죠. 그래서 아직 황녀께선 행적이 드러나셔선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신관 기사인지라 아마도 여기서 죽이려는 속셈이었나 봅니다.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세인이 이런 성격이었다니… 쇼크다. "말씀하시죠, 푸르체트 경." "예, 앞으로 황녀님을 당분간이라도 지켜 주시고 함께 행동하십시오. 그럼 저들도 함부로 어쩌진 못할 겁니다." "그러리다! 내 자애의 신의 이름을 걸고라도!" 김 나네요. 저 사람의 단순 무식은 정말이지 누가 생각나게 하는군. 당근 신… 매번 볼 때마다 얼굴이 변하긴 하지만 성격은 정말 비슷해. "잘 부탁드립니다, 황녀 전하!" 앞으로도 인사할 때마다 이렇게 큰소리로 말하면 정말 곤란하군. 음, 이 일을 우짜면 좋노? 뭐 뾰족한 방법도 없고. "그만해, 다 쳐다보잖아!" 메데이레나는 그 황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히스테리를 부렸다. 세인은 당연히 쩔쩔맸고 촌장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내게 말을 건넸다. "정말 황녀라면 당신은 신분을 초월한 가슴 아픈 사랑을 하고 계시는군요!" 농담 하냐? 내가 왜 그런 걸 해야 하는데? "자,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전 어서 트라이너로 가봐야 하는데, 황녀님은 어디 계시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 확실히 생각해 놓은 것도 없었을 테고, 여기 온 것도 순전히 날 따라오다 이 모양이 된 게 아닌가. "응, 그냥… 아, 그래 그곳에 가볼까 해. 피스트레이카 영지." 여기서 정확히 세 사람이 당황했다. 나야 뭐 놀라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지. "아니, 그곳은 지금 위험합니다! 키히와 대치중인데 어쩌자고!" "됐어, 간다면 가는 거야!" 흠, 전장에 황녀가 간다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메데이레나, 그건 좋지 않아. 우린 당분간 수도에 있는 게 좋겠어. 여러 가지 알아볼 것도 있고, 어때?" "웅, 난 싫은데." 싫어도 할 수 없느니라. 후후후, 네가 발악을 해도 내가 안 가면 너가 갈 수 있겠어? 그나저나 나도 피스트레이카 영지가 보고 싶기는 하군. 그리운 얼굴도 보고 싶고 말야. 흑도 거기 있는 것 같던데. "자, 메데이레나 잘 들어봐. 분명히 수도에는 무시무시한 괴물도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거기 가면 모험이 줄 창 일어날 것이야. 어때, 재미있고도 멋있겠지?" 괴물 소리에 세인의 안색이 파래져 가고 있었지만, 뭐 어때. "응, 그래 가자." 결국 이렇게 결정되었다. 제일 먼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아직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럼 일단 오늘 하루는 이곳에 머물렀다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겠군요." 세인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뭔가 명령을 하달하고 그대로 마을 앞 어귀에 텐트를 치고 쉴 준비를 했다. 나야 뭐, 촌장 집에 있으니까. "저, 전……?" 사비르라는 신관 기사가 여전히 띠벙한 표정을 하고서 사람들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 그에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는데, 바로 잘 데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었다. 일행들이 다 죽어 버렸으니까. "그냥 우리 집에서 자게." 사비르는 기뻐하면서 우리와 함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새벽녘 동이 터올 무렵, 아니나 다를까 이 마을에서는 시끌벅적하게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나야 밤새 생쇼를 했으니 피곤해서라도 잠들어 있었고, 메데이레나는 한 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어제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났는가 보다. 바보… 그렇게 축제가 한창일 무렵에도 난 새근거리면서 잘 잠들어 있었다. 그 소리가 나기 전까지. "끄에에엑!" 어디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고, 내 방문이 노크 없이 열려지는 기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들어온 메데이레나의 얼굴에는 당혹함이 흐르고 있었다. "큰일… 났어요!" 눈에 눈곱이 낄 시간도 내게는 없다는 건데… 내 인생도 참으로 안 된 인생이다. "무슨 일이야?" "그게… 나와 보세요!" 잠옷 바람으로 끌려나가야 하다니, 일생 일대의 수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마구 뛰어가고 있었고, 마을 어귀에서는 기사들이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신관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사비르, 무슨 일이죠? 뭔가 쳐들어오기라도 했나요?" 이젠 안 올 줄 알았는데. "광산 쪽에서 아까 폭음이 울렸는데, 동시에 괴물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즉시 손에 쥐고 있던 검에 신성 저항 마법을 걸고 서둘러 뛰어갔다. 광산에서 괴물들이? '거기 무슨 묘지라도 있었나?' 난 즉시 마을 사람들을 마을 회관에 넣고 그곳에 방어막을 쳤다. 메데이레나도 그 안에 넣고 신관 기사와 나는 나란히 서서 그 괴물이 오고 있다는 쪽을 향해 달렸다. "저게 그 괴물?" "젠장." 사비르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럭저럭 기사들이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고, 괴물들은 밀려 내려오다가 잠시 멈추었다. "여기 있었군, 이 빌어먹을 신관 녀석." 나 아직 거지 아니다. 그리고 저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오, 그렇군. 국경을 넘자마자 바로 들이닥쳤던 그 괴물이로군. 내게 얼굴이 한 반쯤 녹지 않았었던가? 다시 원래대로 되어 있네. "나를 해하려는 놈이었구나. 용서할 수 없다!" 사비르, 너가 아니라 날보고 이야기하는 건데, 너 흥분했구나. "케케케케,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얘들은 마물이 아니니 너의 그 신성력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럼 좀 곤란한데. 한 방에 확실히 끝낼 수 있는 걸 질질 끌어야 한다고. 게다가 여긴 딸린 식구도 많고. 세인의 검술은 본 적도 없고, 그 부하들 검술은 뭐 평균 이상은 하겠지만. "세인, 내가 중앙에 있는 저놈을 죽이면 주변을 정리하라고. 알았지?" "그러죠." 나이가 어려 보이는 나에게 존대까지 하고 말이지. 대단히 예의바른 놈이군, 아주 좋아. "간다!" 그래 가야지. 어라라, 왜 네놈이 먼저 움직이는 거야! 신관은 이미 두두두두 달려가고 있었다. 윽! 야, 쟤들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왜냐면 이곳은 오르막이라 쟤들이 더 유리하단 말야. "할 수 없군." 난 손에 마법탄을 생성시켜서 즉시 오른쪽에 날리면서 뛰어 올라갔다. 바로 녀석이 넘어져서 더 당황했지만. "어이쿠!" 아주 쇼란 쇼는 다 하는구나. 사비르가 쓰러지자 다른 괴물들이 기괴한 음향 효과를 연출하면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사비르는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고. "사비르!" 녀석의 주변에 즉시 방어막을 펼쳤다. 그러자마자 한 놈이 거기에 부딪혔다. 젠장, 내가 왜 저 녀석 보호까지 책임져야 하는 거야! "나바스의 용맹한 기사들이여, 가랏!" 세인의 기사들의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행동은 꽤 민첩했다. 맘에 드는군. 나중에 스카웃 제의나 해볼까? 아니지, 나에겐 바르하잔 기사단이라는 훌륭한 단체가 있잖아. 괜히 이상한 놈들 탐내서 벌받지 말고 조용히 살자. "이놈!" 말하는 괴물은 보기에 상당히 재미있다. 나름대로 지루하지도 않고, 전쟁중에 졸 염려도 없기 때문이다. "녀석, 참 귀엽기도 하지!" 내 입에서 이런 엽기적인 대사가 나올 일이 생길 줄이야. 여하튼, 녀석의 날카로운 발이 내 머리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날카로운 단검… 앗, 아직 안 뽑았잖아! "이야야야얍!" 검을 허둥지둥 꺼내서 녀석의 한쪽 발에 갖다 대었지만 녀석의 피부는 무척이나 두꺼워서 감히 내 검을 통과시킬 수가 없었다. "헤, 강하잖아!" 세인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는 나와는 달리 근력 좋지, 힘 좋지, 나이도 많지… 한 마디로 정말 오랫동안 수련한 검사의 표본적인 모습이었다. "크크크크…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다!" 이봐, 그렇게 섣불리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하하하, 까불지 마라!"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해. 마력탄 하나를 그 녀석의 입 속에 깔끔하게 넣어 주자 괴물은 나에게 미처 고맙다는 표현도 하지 못한 채 한 줌의 먼지가 되었다. "잘 가."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이놈!" 이 멋진 함성은 누구의 것인가? 오오옷, 사비르는 내가 쳐준 방어막 안에서 검을 휘두르면서 주위의 적들을 교란시키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놈아, 왜 그렇게 인생을 헛되이 소비 하냐. 그리고……. "아, 사비르 방어막이 없어지고 있어!" 시간이 다 됐다는 표정을 놈에게 흘리자, 순간 냉동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더니 녀석은 급히 품에서 뭔가 담겨 있는 병 하나를 꺼냈다. "이얏, 이거나 먹어라!" 방어막이 사라짐과 동시에 녀석의 그 화려한 물병들이 허공에서 마치 유리알처럼 빛나면서 괴물에게 내리꽂혔다. "끄에에엑!" 괴물들이 괴로워하는 걸로 봐선 그냥 맹물은 아닌가 보다. 고춧가루가 아닐까? "사비르~ 그거 나도 나중에 하나 만들어 줘." 녀석이 비장하게 주문을 외우자 어느새 그들에게 하얀 화살이 하나씩 날아가기 시작했다. 오, 빛의 화살인가? 그런데 말이지……. "너무 작어. 나 살려!" 결국, 녀석은 열심히 뛰어야 했다. 불쌍한 놈. "괜찮아?" 녀석에게 손을 내밀면서 아주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녀석은 당연히 감지덕지. 뭐, 그 방어막이 며칠 가도 끄떡없는 거라는 걸 모르니 내가 천사로 보이긴 하겠지. 크크크. "자, 그럼 어디 다 쓸어 볼까. 모두 물러서요!" 이젠 거리낄 것도 전혀 없으니 마음놓고 마법을 사용해도 되겠군. 한 가지 결심을 했거든. 후회할 때 하더라도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하겠다는. "간다!" 사람들은 어느새 뒤로 많이 물러서 있었다. 나의 마력탄은 한꺼번에 지상을 휩쓸었다. 거대한 섬광이 대지를 빛내고 그리고 소멸해 갔다. "대단해… 이건 신성력이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힘을." 사비르는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고, 세인은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뭐, 약간 쑥스럽긴 하군.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자, 우리 모두 움직이자고요. 저 위에 아직 잔당이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몇 명은 마을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세인은 동조하는 의사를 표명하고 곧 부하 5명을 마을로 내려보냈다. 뭐, 현재 위쪽에 위치해 있어서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긴 해. 별일 없는 것도 알 수 있고. 하지만 그래도 혹시 살아남은 괴물이 하나라도 마을에 들어가면 안 될 말이잖아. 마을로 기사들을 보내고 나서 우린 광산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누가 선두에 설 것인지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럼 세인, 제가 앞장서죠." "아닙니다, 장차 부마가 되실 분에게 그런 일을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앞장서죠." 넌 영족이라면서? 다른 나라 귀족이 트라이너의 일을 해주는 것도 미안하단 말이다. 나중에 그 빚을 어떻게 다 갚으리?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제가 자애의 신의 권능으로 이 모든 일들을 헤쳐나갈 테니 맡겨만 주십시오!" 나와 세인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사비르가 좋겠네." 일행은 사비르가 제일 앞, 그 다음이 세인과 그의 유쾌한 친구들, 그리고 내가 제일 뒤, 이런 순으로 대충 배치되었다. "광산에 들어가 있던 걸까? 하지만 하루만에 그런다는 건 너무 무리한 생각 같은데. 어제 저녁에 우리가 싸우고 있을 때 들어갔다면, 차라리 그때 마을을 치는 게 더 유리했을 텐데." 세인도 내 말에 의아함을 표명했다. "맞습니다, 뭔가 앞뒤가 안 맞아요. 이들이 여기 있다든지 하는 건… 아, 여기 오기 전에 이들을 만났다고 하셨죠?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혹시 이들이 트라이너에서 국경을 넘어 혹시 나바스로 가는 도중이었다면?" 음, 하지만 나바스엔 뭐 하러 가냐? "그럴 이유가 있을까?" 세인은 그 말에 곧 입을 다물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뭐, 단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떠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여기가 광산 입구인데 별달리 수상한 점은 없군요. 광부들은 안 보이지만." 그야 광부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회관에서 쑥덕공론중이잖아. 이 광산에서 보석이 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마을을 이렇게 힘들여 점령하려는 걸 보면 이곳에 뭔가 중요한 게 있다든지 뭐, 그런 건 아닐까? "제가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마을로 돌아가셔서 지켜보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말입니까?" 세인의 얼굴은 의아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혼자 내려간다고 하니 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음, 글쎄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죠. 신관으로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하하하, 이거 땀나는군. 뭐, 말릴 생각은 없지만 이 아저씨가 따라오면 도망칠 때 힘들어지는데. 뭐, 방어막 쳐놓고 기다리라고 하면 되겠지. "할 수 없군요. 그럼 사비르와 전 이 안으로 들어갈 터이니, 여기서 당장 마을로 내려가서 혹시 다른 군사가 더 오는지 감시를 좀 부탁드립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트라이너의 수도로 가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리니까요." "그러죠." 그래, 그렇게 가깝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걸지도 모르지. 일단, 여기는 보석이 나는 데다가 지리적인 이점도 존재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곡물을 내려 괴물이 되도록 꾀했으나 실패. 그렇다면 기를 쓰고 달려올 만하지. 입을 막아야 할 테니까. "음침하군. 이런 데 뭐가 있겠나?" 인상을 쓰는 사비르를 바라보면서 왠지 쓴웃음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이놈은 역시 아무 생각이 없군. 음침하기는 뭐가 음침하냐, 예쁘기만 하구만. 아무 것도 모르면서 말이지. 이런 건 운치라고 하는 거야, 운치. "모르면 가만있으라고. 그나저나 보석이 나는 광산이라고 해도 석탄 캐는 광산이랑 별다를 건 없군." "아무래도 보석은 정제한 후에야 아름다움을 발하는 법 아닙니까?" 음, 그렇지. 모든 보석은 연마한 다음에 가치가 있는 법이지. 그나저나 이곳의 길을 모르니 문제로군. 예전에 아마 키히가 이런 곳에다 비밀 기지를 만들어 놓은 일도 있었지? "음?" 순간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사비르는 아마도 눈치를 못 챈 듯했지만 틀림없이 이건 소리였다. 아니, 작은 물소리도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물소리라? 사비르,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도망치든지 싸우든지 나 혼자 있으면 편하지만 아무래도 네가 있으면 내가 더 불편하다고." 기척 외에 예감도 매우 불길하니까 말이지. "그래?" 어둠 속에서 사비르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묻혀 버리는 것 같았다. 난 녀석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어둠의 한가운데서 눈동자만 번뜩이고 있었다. 왠지 이건 좀 무섭군. "어서 나가라고." "그럴 수는 없지,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라플의 유적을 찾아낼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고 말이지. 이곳은 예전에 라플이 뭔가를 숨겨놓은 장소라고 하던데… 곤란해." 에? 제가 라플이고, 전 이런 데 온 일도 없는 걸요. 하여간 난 너무 유명해서 탈이라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 왜 이리 개 폼을 잡고 그래? "사비르, 너 어디 아파?" "아파? 하하핫,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했나? 뭐, 그 편이 네놈에게는 좋을지도 모르지." 이거 이놈도 알고 보니 적이었다는 건가? 젠장, 뭔가 수상하다 했더니. "너도 그 괴물과 한패야?" "하하핫, 농담이지? 난 그런 더러운 것들과 한패가 아냐. 난 신전에서 온 에네브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대사제의 명령으로 이곳에 와 있는 거고." 에네브가 그새 또 증식이라도 했나? 모를 일이야. 그보다 나 혹시 지금 생명의 위기라든지 뭐 그런 순간인 건 아냐? 그렇다면 이거 곤란한데. "에, 그럼 날 어쩔 셈이지?" "글쎄, 이대로 사라져 준다면 어떻게 하지는 않겠어. 난 단지 신전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 너를 죽이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으니까." 헤,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만약 내가 정말 대 마왕인 데다가 나쁜 놈이라는 걸 알면… 그나저나 이녀석 신전이라면 혹시 살린이나 케빈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혹시 살린이나 케빈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약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린? 전 에네브이자 지금은 배신자가 된 자를 말하는 거로군. 그 두 녀석은 신전을 배신하고 피스트레이카 영지로 가버렸지. 뭐, 내가 볼 땐 너무 정의감이 넘쳐서 그래. 사실 그 영지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말야." 헤, 그렇게나 나를 위해서 신전 지위까지 집어던지다니… 이거 기뻐해야 하나? 아니지, 나 때문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속단은 금물이겠어. "흠, 그랬군. 좋아, 어서 찾으러 가봐. 난 다른 데로 갈 테니까." "좋아, 내가 길을 선택해서 가지. 틀림없이 라플의 유적은 지하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여태껏 저 녀석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나도 저 녀석을 많이 속이고 있었잖아, 후후후. "자, 그럼 나도 슬슬 움직여 볼까. 있지도 않은 라플의 유적이라니, 흥미가 동해서 말이지." 옆에서 타오르고 있는 횃불을 옆으로 약간 돌리자 작은 구멍이 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사람을 숨기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그냥 내려가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예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겠어? 길고 긴 구덩이는 점점 아래가 아닌 위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동굴의 끝이 밝아져 올 무렵 난 내 옷이 세탁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대 마도사 신분으로 이게 웬 꼴이람." 어느새 빛은 밖이라는 것을 알려줄 만큼 내 눈을 환하게 덮었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구덩이에서 나와 어떤 작은 분지 같은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놀랍게도 주위로는 돌로 된 절벽이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고 주변에는 꽃들이 철을 잊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름답긴 한데……." 이런 분지를 누가, 왜 만들어 놨을까? 게다가 이런 대 공사를 할 일 없이 왜 했을까? 그렇다고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고,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풀과 꽃들뿐. 그 순간 저 멀리 놓여 있는 웬 제단 비슷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건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분명히 예전에 신을 모실 때 사용하던 그 제단이었다. 하지만 이게 이런 곳에 왜 있는 걸까? 절벽은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게 서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이런 곳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 걸로 봐선… 응? "하늘에 벽이?" 하늘에는 분명 구름이 흐르고 있어야 했는데, 구름은커녕 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빛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도중 절벽 가운데에 박혀 있는 어떤 곳에서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것 덕에 이곳이 밝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천장은 아마도 그 위가 산 위일 것이니 대충 설명도 되고. 자연의 신비라는 건 절대 아닐 터. 이곳은 절대로 사람이 만든 곳일 텐데 왜 이런 곳이 있는… 음, 저건 틀림없이 비석이지? 주변의 풀 덩굴들을 젖히고 흙을 대충 떨어내자 모퉁이만 보이던 비석 하나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꽃과 아름다운 향기가 영원히 머무르는 대지에서 너와 만나고 싶었다.' 뭔지 모르지만 더럽게 멋있군. 낭만적이기도 하고 말이지. 주위에는 특별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내가 느꼈던 그 이상한 괴리감은 저 뿜어져 나오는 빛에 그 이유가 있을 듯했다. 이곳의 유적이란 이 자체, 꽃과 풀들 그리고 아름다운 향기들. 이 비석을 쓴 사람에 대해 1초간 묵념을 마치고 나는 조용히 꽃밭에 대해 생각했다. 비밀이라면 비밀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이런 걸 왜 만들었으며, 왜…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자, 가볼까." 메데이레나와 함께 수도로 가서, 과연 내 속에 있는 의심들을 밝혀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한번 시도해 보는 건 나쁘지 않겠지. 나는 마을에 녀석보다 먼저 도착했고, 사비르는 아주 지저분해진 모습으로 나보다 훨씬 뒤늦게 돌아왔다. 이 녀석은 인생도 불쌍하게 계속 아래로 내려가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자 이곳저곳을 헤맨 듯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웬 곡괭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건 또 뭐지?" 사비르의 득의양양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라플의 유적이다. 음 하하하! 남은 게 이것밖에 없는 걸로 봐서 이건 틀림없어!" 한 광부가 조용히 그 곡괭이를 살피다가 어이없어하면서 말했다. "이건 예전에 제가 날이 안 들어서 버려 둔 건데요." "……." 위로를 해줘야 하는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군. "왔어? 그래서 라플의 유적은 찾았어?" 메데이레나의 얼굴은 거의 초롱 광선의 집광체 역할을 하면서 빛나고 있었다. "라플의 행동 반경에 있지도 않다고 여긴. 그러지 말고 언능 가기나 하자. 세인도 여기서 더 놀 시간이 없을 거 아냐. 그 사이 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곤란하잖아. 아, 세인 혹시 돌아가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그러죠." 끝까지 내게 존대하는군. 훗, 정말 괜찮은 젊은이로구만. "자, 그럼 서서히 가자고." 메데이레나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여기저기를 내내 뛰어 다니면서 촐랑촐랑 마을을 내려갔다. 사비르는 아까 그 곡괭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인과 그의 유쾌한 친구들은 꽤나 유능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주변에 괴물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니 성공이라 할 수 있지. "그럼 앞으로 한두 시간만 가면 되나요?" 메데이레나는 드디어 힘이 빠졌다. 당연하지, 그렇게 뛰어 다니고 힘이 남아 있기를 기대한다는 게 더 웃기지 않은가. "예, 황녀님 그곳에 가셔서는 더욱 조심하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명심하시고요. 물론, 저기 부마되실 분의 실력이 출중해서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에는 황녀께서 가장 조심하셔야 합니다." 거기… 실력이 좋다는 건 다 이해해, 사실이니까. 하지만 부마되실 분이라니? 멋대로 날 부마로 만들지 말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그럼 여기서 슬슬 헤어져야겠네요." 메데이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라플, 나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 만약 또 마을로 사람들이 오면 어떻게 해? 이젠 지켜줄 사람도 없잖아." 음, 아직 어린애는 어린애군. 세인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황녀님, 그들은 갖고 있는 병력을 모두 보냈던 겁니다. 그들의 병력 규모가 그 정도였거든요. 제가 입성하게 되면 당분간 병력을 차출하기가 힘들어지겠죠. 그곳은 국경과 가까운 곳이니 만약 제가 트집을 걸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많은 숫자가 죽었는데 신중을 기하지 않겠어? 뭐, 안 그런다면 바보고. "흠, 그렇구나. 그럼 세인 먼저 가! 우린 걸어서 천천히 갈 테니까." "예. 부디 다시 뵙는 그날까지 무사하시길, 나의 사랑하는 전하." 황녀도 그의 인사에 미소로 답하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이제 나와 사비르, 메데이레나 셋이서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사비르는 아마도 신전으로 가면 곧바로 일을 보고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해야 되는 모양이었다. 왠지 천천히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거든. "그 세인이라는 사람, 알고 보면 꽤나 실력 있고 좋은 사람 같던데 왜 그를 남편감으로 정하지 않았는지 이상하군.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걸까?" 사비르, 궁금한 게 많으면 다치는 법이란다. 뭐, 네놈이 알 리가 없지만. "신분이 좀 낮은 아가씨와 사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죠. 내가 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그냥 꾸며낸 말일지도 모르고." 왠지 후자가 맞을지도 모르겠어. 아까 보기에도 상당히 예의바르면서도 우아하고 멋있었는걸. "그냥 그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을 텐데, 안 그래?" "응? 설마 질투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갑자기 말투까지 바꿔서 무지하게 닭살 돋는 어조로 물었다. 순간 난 갑자기 인생이 어두워옴을 실감했다. 대체 메데이레나의 얼굴은 몇 개? "우리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고 쉬었다 가지." 사비르는 재빨리 아주 숙련된 솜씨로 장작을 옮겨오는 등 부지런히 아영 준비를 했다. 마침내 서서히 불이 피워 오르자 우리는 마을 사람들이 싸준 도시락을 꺼내서 오물오물 먹어댔다. 그런데 왠지 궁금함이 치밀어 올라왔다. "음… 혹시 사비르, 살린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있어?" 그는 고기를 씹어 먹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속 씹어 먹으면서 말했다. 야, 파편 튄다. "살린에 대해서라면 저보다는 장로나 에네브들이 더 환장했지요. 훌륭한 인품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차기 대사제라고 불렸을 정도니까. 하지만 어이없게도 신이 나와서 차기 후보를 찍었잖아요. 그래서 결국 그는 그저 위대한 성인 정도로 끝날 것 같은데……." 말을 흐리는 걸 보니 흑막이 있는 거군. 그때 메데이레나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알아. 라플은 모르나 보지? 하긴 나바스에서 계속 짐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니까." 그래, 니들 잘났다. 다 해먹어라, 잉. "내가 알 리가 없잖아. 예전에 신전에서 봤을 때 굉장히 좋은 사람 같았는데 배신자라고 하니 어이가 없어서 그런다 왜." 내 말에 사비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은 분이시지.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 분이 떠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애통해했다고 해. 어쩌면 지금이라도 나타나면 대사제를 시켜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살린, 알고 보니 네놈도 대단한 놈이었구나. 역시 그때 억지를 써서라도 신에게 졸라 보는 건데 그랬어. 후회 막심이야. 메데이레나가 이쯤 되자 고백조의 대사를 읊었다. "그 전에… 사실 나, 그 살린이라는 신관과 잘 아는 사이야. 그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케빈은 피스트레이카 영지가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을 버리고 가버렸지." 넌 멋진 놈이다 살린. 죽지 말고 기다려다오. 내, 내 곧 가서 감동적인 눈물의 재회를 맛보는 거야!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대 마도사 라플이 나타났었다는……." 사비르는 떨떠름하다는 어투로 이렇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이내 이불을 펴고 잠자리에 들었다. 풀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는 매우 음산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친구들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난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그 귀여운 놈들을 놀려먹을 생각을 하면, 헤헤헤. 역시 인덕은 쌓으면 쌓을수록 좋은 것이여, 흐흐흐. "벌써 자는 거야?" 메데이레나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설마, 밤새서 이야기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건 곤란해, 밤새서 이야기하면 눈이 벌겋게 된단 말이다. "아니, 아직." "응, 그랬구나."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봐,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말을. "왜, 할 말 있어?" "응? 아니 그냥." 내 제자 내지는 부하였으면 반쯤 얻어터졌을 위험한 대사로군. 하지만 여자고, 또 애니까 참는다. "메데이레나는 내가 라플이라면 어떻게 할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사비르가 한마디했다. 그리고 두 손은 꼭 잡고 불타오르는 중이군. "당연히 우리 신전의 최대 숙적이니 결투라도 신청해야지." 그거 기대되는군. 하지만 내가 물어본 건 너가 아니고 메데이레나야 임마. 그러니 조용히 하라고. "난……." 그녀의 목소리가 어느새 흘러나왔다. "난 아마도 울어 버릴 거야." 간단해서 좋긴 하군. 좀 더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걱정한 너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 실은 살아 있었어. 죽었을 리가 없잖아. 내가 그 라플 맞아. 너보다 나이는 한 백 살은 많고 못난이 제자에 어벙한 부하들을 거느린." 그녀의 이불 안에서 잠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아마도 믿지 않는 것 같군. "장난치지 마, 그럼 혼나. 난 이만 잘래." 에, 진실을 말해도 믿지를 않으니 이 어찌 통재라 하지 않을꼬! 다음날 아침이 되자 우리는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원하던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트라이너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은 사람이 한 명 정도 간신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빠끔히 열려 있을 뿐이었다. "출입증을 꺼내야 되겠군." 사비르의 자신 있는 말투가 흐르자 나와 메데이레나는 당황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 예전엔 그런 거 없이 통과하지 않았나? 3년 전만 하더라도 그런 건 없었는데 말야. "사비르, 출입증이라니?" "설마 너희들 그것도 없는 거야? 하긴 나바스에서 왔으니. 하지만 그게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어쩌지?" 어쩌긴, 할 수 없이 길을 돌려서 외로운 갈매기가 되어 정처 없이 구천을 방황하는 거지. 그 방법밖에는 없겠어. "다른 방법은 없어? 예를 들면, 네 일행이라고 하면 들여보내 준다든지." "예전엔 그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냐. 수상한 자들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거든. 그래서 수도 사람들과 군인들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와." 그랬구나, 세인이야 나바스 기사단이니 들어갈 수 있었겠지. "그럼 내가 저 문지기에게 물어 보지." 난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 무시하지 못할 만큼 무섭게 날이 선 창을 들고 있는 병사 앞으로 다가갔다. 사비르와 메데이레나도 주루룩 쫓아왔다. "무슨 일이냐? 통과하는 게 목적이라면 저쪽으로 가면 된다." 그게… 나도 통과할 수만 있다면 아저씨한테 오지도 않았수다. 젠장, 트라이너의 피스트레이카 공작께서 이런 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니. "저, 사실 제가 그 출입증을 발급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 경비병은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날 째려보았다. 욱! "뭐, 출입증이 없어?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군대에 입대해서 병사가 되면 그걸 면제받을 수 있지. 출입증도 나오고. 나라면 그 방법을 택하겠네, 어떤가?" 메데이레나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난 여자잖아." "가족이라면 한 명만 지원해도 같이 발급된다. 그리고 이쪽 분은 혹시 신관이 아니신가?" 사비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출입증을 보여 주었다. 그곳엔 에네브라고 꾹 눌러져 있는 마크가 찍혀 있었다. 당연히 경비병은 당황했다. "아니, 에네브님이 아니십니까. 놀랍군요. 일행이신가 보죠?" "그렇지. 임무를 마치고 귀환 중이네만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그나저나 꼭 입대하는 방법밖에는 없나?" 그는 아주 굽신거리는 태도로 일관했다. 음, 개똥도 약에 쓸 수 있구나. "없습니다. 게다가 근래에는 경비가 더욱 엄해졌거든요. 요 근래 들어 주변이 뒤숭숭하잖습니까? 뭐, 그냥 편의상 입대하시고 바로 한 달 뒤에 그만두시면 될 겁니다. 그 정도면 아무래도 신관님과 아는 분이시니 어떻게 손 쓸 수 있겠죠." 병사 주제에 병역을 띵기는 방법까지 알려주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나. "그게 좋겠군. 그럼, 나는 이대로 신전에 보고를 드리러 갈 터이니 자네는 바로 군에 입대를 하게. 내가 바로 손을 써주지." 나한테는 반말이구나. 그래, 나중에 보자. 나도 한때는 에네브였단 말이다. 흥, 그리고 너 국왕의 사신으로 온 거였는데, 보고는 안 드려도 되나 보지? 하긴, 나중에 보고서 형식으로 올리는 것일 테니까. "그럼 그 동안 우리는 어디서 묵어? 집도 뭐도 아무 것도 없는데." 집? 아, 천만에 있지 왜 없어? 좀 장소가 후미져서 그렇지. 예전에 내가 만들어 놓은 호수 위의 오두막집이라는 아주 운치 좋은 집이 있잖아. 하지만 그걸 어떻게 쓰냐? 언제 뭔 놈이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일단 이 근처에서 집을 구해 봐야겠군. 참, 난 돈도 별로 없는데. "메데이레나, 돈 있어?" "응, 어느 정도." 가출할 때 싸 가지고 나온 모양이지? 하지만 그 돈은 내 예상을 웃도는 양이었다. 일단 마을에서 나올 때 촌장이 보석을 바리바리 싸준 모양이었고, 그녀 자신도 황궁에서 나올 때 무식하게 돈을 많이 들고 온 것이었다. 공금 횡령이다! "이 정도면 집 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어. 일단 구하고 나서 내 신고하러 가면 되겠네." 일단 돈으로 바꾸는 게 우선이겠군. 야, 나 갑부 됐다! 아,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알릴 만한 놈이 하나도 없군. 통재라 통재. 그녀와 나는 보석을 현금화시키고 바로 집을 알아보러 나갔다. 뭐, 그래 봐야 임시 처소이긴 했지만 그녀는 왠지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 듯했다. "야, 이 집 어때? 아늑해 보여!" 음침해 보인다 야. 그리고 너 지금 뭐 하냐, 왜 그렇게 들뜬 거야? "그럼 이 집으로 하지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응? 아냐, 갑자기 맘에 안 드는데." 어이어이… 그리고는 다음 집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래서 결국 우리는 북쪽 저수지 근처에 있는 깔끔한 집을 찾아냈다. 화단도 있고 작지만 연못도 있었다. 내가 볼 땐 비가 고인 게 아닐까 싶은데. "이 집으로 하자!" 신났군. 나는 그 길로 궁성 앞에 있는 신병 등록소로 갔고, 그녀는 가구를 사러 횅하니 사라져 버렸다. 여하튼, 여자애들은 그런 건 무지 좋아해. "이름은?" 아, 나이도 한참 어린놈이 내게 바로 반말이라니, 쯔. 세상이 많이 탁해졌어. "라플 헤제로이스입니다."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덧붙여서 상당히 안되었다는 말을 했다. "부모님을 잘못 만나 그런 이상한 이름을 얻었구만 자네." 멋대로 생각해라. 이젠 나도 귀찮을 뿐이니까. 그는 내게 신병이 되기 위한 몇 가지 규칙이 쓰여진 지침서라는 걸 건네주었다. 그리고 난 곧바로 병장기를 제외한 제복도 지급받았다. "월급도 주나요?" "하루에 일 메장 정도네. 한 달이면 삼십 메장이니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거야." 웃기지 마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겠다. 훈련은 내일부터니까 오늘은 가야겠군.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병사를 모은다면 많이 모으기는 하겠어. 그리 권장할 바는 아니지만. "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이리로 오면 되나요?" "그러게나." 북쪽 저수지 근처에 위치한 새로운 집에 갔을 때, 나는 정말정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메데이레나는 황녀였다. 뭐, 그 사실을 내가 잊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그녀는 왜, 이렇게나 호화롭게 집을 꾸몄단 말인가! "어머, 이제 오는 거야? 빨리 왔네~" 우릴 보고 무슨 다정한 신혼부부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내 월급은 하루 30메장인데, 여기 장식품은 하나만 해도 백 메장은 넘어가겠구나. 물어나 봐야지. "저, 이 소파 얼마야?" "응? 이거 싸. 시장에서 삼 백 팔십 메장 주고 샀어." 순간 나는 닭이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아, 닭은 못 날지. 이렇게 슬픈 일이 있을 수가… 인생은 이래서 힘들어. "저기… 메데이레나, 웬만하면 정체가 탄로 나지 않는 편이 살기 쉽지 않을까?" 그녀는 방그레 웃어 주었다. "당연히 탄로가 안 나지. 평범하잖아." 어디가 어떻게 평범한지 묻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난 밥 잘 먹고 잔 다음 다음날이 되어 훈련장으로 나가야 했다. "제군들! 자네들은 용감 무쌍한 사람들이라 확신한다. 자네들의 목표는 저 악마 왕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궁극적인 우리의 적은 바로 마녀 키히라 할 수 있다!" 한때는 재상까지 시켜 주고 용사랍시고 잘해 준 주제에 이제 와서 못하는 말이 없군. 뭐, 이래서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지만. "잠시 뒤, 재상님의 기조 연설이 있을 터이니 모두 부복하도록!" 이건 좀 흥미가 갔다. 재상이라면 세이 아냐? 내가 고개를 들려는 찰나 잘 훈련된 조교가 내 머리를 땅에 박았다. "감히 재상님을 똑바로 쳐다보려는 건가? 당장 머리 박아!" 욱, 너무하는구려. 저놈이 내 제자라우. 젠장, 늙어서 별꼴을 다 보는군. 역시 나이 들면 일찍 죽었어야 하는 건데, 쳇. "재상 전하께서 하교하실 터이니 모두 귀를 씻고 잘 들어라!" 여기 물 없어, 젠장. 세이가 맞는지 목소리로 확인하는 수밖엔 없겠군. "친애하는 신병 여러분, 앞으로도 여러분은 우리 트라이너의 긍지 높은 병사로서 나라와 국민,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훌륭한 병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전하에게 그 영광을 돌리십시오." 박수 소리가 나고 모두 있는 힘껏 박수를 쳐댔다. 세이는 예전처럼 애 같은 말투를 쓰지 않고 있었다. 칭얼거리는 그 모습도 없어졌으며, 결정적으로 나에게 울면서 매달리지도 않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함부로 팰 수는 없어. "그럼 난 이만 가보지." 곧이어, 교관은 우리에게 약간의 가벼운 훈련을 시켰다. 일단 이곳 홍보처에서 발행한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초보 신병 여러분'이라는 아무 쓰잘데기 없는 책자를 우리에게 나눠줬다. 그걸 받은 우리는 매우 재미있게 읽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이걸 재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말이지. 재정 낭비야, 낭비. 그리고 가만 생각해 보니, 공을 세우면 세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하지만 일개 병사의 신분으로 무슨 공을 세울 수 있겠어. "야, 너 어디서 왔냐?" 웬 놈 하나가 내게 아는 척을 하면서 친근하게 굴었다. 나이는 나보다 좀 많고, 나보다 더욱 꾀죄죄했다. "국경 근처 출신입니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쪽 마을로 파견되었다고 그러더라고. 뭐, 그러고 나서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뭔가 수상해. 넌 그런 생각 안 해봤냐?" 난 오늘 입대했수. "전 오늘 들어와서 잘 모르는데요." 그러자 그는 털이 숭숭 난 손바닥을 내 어깨에 턱 올려놓으면서 껄껄거렸다. 저렇게 웃다가 기절하면 약도 없는데. "오, 후배였군. 내 옆에 잘 따라다니면 죽을 염려는 없을 거야. 아, 이건 비밀인데 요즘 우리 왕궁에서 괴물을 키우고 있다는 거야. 그걸 관리하다가 여럿이 죽었다는 거지." 그건 좀 흥미 있는 이야기로군. "괴물이라니요?" 내가 흥미를 좀 보이자 그는 더더욱 신이 나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괴물은 지하에 살고 있는데 가끔 나와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유치찬란한 3류 괴기 소설 같은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게 다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은 아니라는 거지. 실제로 난 보기도 했잖아, 그런 괴물 말야. "그러니 너도 앞으로 조심하라고. 언제 괴물이 나와서 사람들을 잡아먹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일부러 신병을 먹이로 준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말야." 그건 좀 많이 끔찍하군. "거기 뭐 하나. 엎드려!" 제식 훈련은 정말 재미없다. 기사들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저 성안에서 훈련을 하는 모양이지. 차라리 아젠 기사단과 이야기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면 세인이라든지. "자, 오전 훈련은 여기까지. 그리고 자원자 없나? 오늘도 기사들을 상대로 반사력 훈련을 해야 하는데, 누가 가겠나?" 반사력 훈련? 그건 또 뭐야? "저, 전 신병이라……." '…몰라서 그러는데, 그게 뭡니까' 하고 물으려는 찰나 갑자기 교관이 소리쳤다. "좋다, 너로 결정한다! 다른 사람은 없나?" 뭐냐… 아까 내 어깨를 두드리던 그 사람도 손을 들어서 우린 둘이 나란히 가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바보 녀석, 왜 손은 들고 그래? 죽으면 어쩌려고." 유감스럽게도 나도 손을 들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에, 그러는 형은 왜 그러셨어요? 저야 실수라고 해도 어차피 결정된 거지만 형은 상관없었잖아요." "나? 임마, 너처럼 후들거리는 꼬마 녀석이 자원해서 가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야 쓰냐. 조심하라고, 내 친구들 중에 여기 가서 못 돌아온 놈들도 있으니까." 그건…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군. 신병들은 금세 다른 곳으로 차출되어서 보내지곤 하니까 비밀을 덮어 버리기엔 딱이야. "흠, 형이야말로 조심하시라고요." 쭉 이어진 복도를 따라 서서히 가자 이른바 기사 연무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기사들은 한 서너 명 정도가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긴장감이라고는 눈을 뜨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기 보조원들을 데려왔습니다. 부디 훈련 잘하십시오." 훈련된 조교가 밖으로 나가고, 우리 둘은 내심 속으로 바들거리면서 서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들은 우리에게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참, 얘들아 우리도 훈련이란 걸 해야지." "쳇, 오늘은 안 하면 안 되냐? 굳이 할 필요 없잖아. 그리고 얘들은 너무 약해서 상대도 안 된다고." 그래, 어디 붙고 나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면 안 잡아먹지. 옆의 형도 조심스러운 듯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정말 하지 말까? 차라리 우리끼리 대련하자. 뭐, 대장이 알면 혼나겠지만 마침 대장도 없고. 안 그래?" 그런 식으로 지들끼리 뚝딱거리더니 이내 편먹고 대련 준비에 들어갔다. 거기서 내기는 필수인 듯. "아, 너희들은 그냥 여기 편하게 앉아서 구경해. 좀 멀리 떨어지라고. 그래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친절하기까지 한 기사의 안내대로 우리는 편하게 앉아서 마음은 약간 떨면서 구경하게 되었다. 먼저 흑과 청의 싸움이 벌어졌다. 흑팀과 청팀은 모두 세 명씩 구성되어 있었는데 저마다 기사라는 데 크나큰 자긍심을 지니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흑에서 제일 먼저 나온 기사는 가벼워 보이는 금발을 한 청년이었는데, 나이와 맞지 않게 실력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멋져." 나와 같이 온 형이 옆에서 조용히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뭐, 기사가 되는 건 상당한 영예이긴 하지. "하하하, 멋지지 않나? 저 둘의 싸움을 보고 여태껏 기사의 종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도 꽤나 많았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나이에 종자가 되어서야 언제 기사가 되겠나. 어떤가?" 아무래도 내 옆에서 이죽거리는 이 아저씬 이제까지 있었던 실종 사건의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잘못 짚었는데… 하지만 어쩌면 기사가 된다면 세이와 만나서 이야기해 볼 가능성도 생기고, 일단 국왕도 만날 수 있지 않겠어? "그거 참, 흥미롭군요. 저도 거기에 관심이 가는군요. 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옆의 아저씨는 이내 껄껄거리고 웃었고, 나와 같이 온 형은 약간의 비웃음을 담은 시선을 나에게 보냈다. 뭐, 그렇게 바라본다고 해도 나도 아직 감각은 남아 있다고!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하하하, 하긴 자넨 잘생겼으니 또 모르겠군. 어이~ 여기 기사가 되고 싶다는 풋내기가 하나 더 들어왔네!" 내 옆에 있던 형이 내 손을 즉시 꼬집으면서 속삭였다. "제정신이야? 기사는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그야… 난 한때 기사를 때려치우기도 했지만 실력은 평균 이상이라고. 물론 마법에 있어선 세상에 내 적수가 없지. 음 하하하! "괜찮아요." 잠시 기사들이 큭큭대고 웃더니 나보고 가운데로 나오라고 했다. 그곳은 훈련할 수 있도록 말도 매어져 있었다. "음, 말은 탈 줄 아는지 모르겠군. 그냥 검술 실력만 보도록 하지. 이 녀석 알고 보면 숨은 실력자일지도 모르지, 안 그래? 하하하핫… 자, 검은 뭐가 좋을까. 이 소 검은 어때?" 분명히 이건 날 놀리고 있는 분위기 같다. 뭐, 나중에 죽여주마. 흠, 오랫동안 마법을 익힌 데다가 3년 동안 누워 있었기 때문에 사실 저 소 검도 그냥 잡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냥 단검은 없습니까? 창 정도의 무게를 지닌 걸로." 일반 병사의 창은 나무를 깎아 만든 대에 끝 부분에만 칼날이 달려 있으니까 그리 무겁지 않았지만, 이 소 검은 그래도 무거웠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더 웃어댔다. "우헤헤헤, 요즘 기사는 소 검보다 더 가벼운 검을 쓰나 보지?" 젠장! 웃던 아저씨는 즉시 뒤적거리다가 과일을 깎을 때 쓰는 과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근엄하게 외쳤다. "나의 칼을 받아라!" 나보다도 더더욱 형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게다가 눈은 튀어나와 있었고. 당장 나서서 검을 꺼내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것도 설마 무겁다고 하진 않겠지?" 젠장, 나이 먹은 노인을 놀리면 벌받는다는 걸 내 확실히 보여 주지.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검을 든 손이 살짝 떨려왔다. 아마 너무 오랜만에 검을 잡아서인 듯했다. 앞에는 날 배려해서 제일 나이도 어리고 실력도 별로인 막내 기사가 위치해 있었다. "자, 내 이름은 파스텔 야즈다." 금발의 청년은 날 보고 싱긋 웃었다. 뭐, 내 이름은 아깝지만 알려주지. "제 이름은 라플 헤제로이스입니다." 몇몇 사람은 더욱 웃어댔다. "이름이 대 마도사 라플하고 같잖아. 분과를 잘못 온 거 아냐? 음 하하하!" 젠장, 오늘 아주 네 덕에 잘 웃는구나. "그럼 간다!" 그리고 그 사람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내 보기엔 자세도 별로였고 결정적으로 잘난 척이 몸에 배어 있었다. 확실히 아젠 기사단은 아니군. "…장난칠 시간이 없을 겁니다." '과도(果刀)를 들고 달려나간다'의 주제가, 과도 예찬가. 내 이름은 과도 과도. 세상의 모든 딱딱한 과일은 내 손에 맡겨라. 그러나 호두는 못 깐다. 왜 나로 견과(堅果)류를 까려는 것이냐. 안 된다, 안 된다. 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위대한 과도, 과도. 세상의 평화는 내가 지킨다. 어느새 청년의 검이 금세 내 가슴 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싸움 중에 잡생각은 역시 몸에 해롭다.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과도는 그야말로 과도. 사람과 싸우라고 만들어진 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걸로 검을 쳐낸다는 건 말도 안 되고, 더군다나 상처를 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바르하잔의 기사단의 수장이자 어렸을 적 한때는 잘 나갔던 나. 훗, 기사의 몸이 내 사정권 안에 들어올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즉시 높게 뛰어올라 그 기사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상대방 검을 가볍게 밟아서 도약한 것이지만… 뭐, 기사의 힘이 나빴으면 것도 못했겠지. "오오!" 모두의 눈이 날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단검은 정확히 청년의 목 바로 아래에 멈춰져 있었다. 딱 강도가 인질 잡은 형국이군. "항복하시죠." "…항복이다." 모두가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한 기사가 멍하니 있다가 손뼉을 쳤다. "자네, 힘없는 것만 빼면 기사가 되어도 좋겠군. 어떤가, 이번 기사 시험에 나가는 것이? 이번 대회에는 상금도 두둑하고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입상도 할 수 있을지 모르네. 일단 십 위안에만 들면 기사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네." 나한테 져서 모두들 기분이 더러울 텐데 의외로 화기 애애한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의외인데? 하지만 그 이유는 돌아오는 길에 형에게서 들어 알 수 있었다. "미친놈들, 자기들도 나갈 수 없는 곳에 널 내보내려 하다니. 거절해. 거긴 매년 사상자가 속출한다고. 삼 년 전에 재상이 바뀐 뒤로 계속 열리고 있고. 무엇보다 널 추천하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라고, 썩은 귀족 놈들." 난 귀족 중의 귀족이라는 공작인데. 원래 왕의 형제들은 제후로 불리고, 그 다음 그들의 아들은 대부분 공작이 되지. 그러니까 공작은 일등 공신도 하기 힘든 직위라고. "흠……." "흠이 아냐, 이 바보야. 그래 네 집은 어디냐? 신입 기념도 할 겸 너네 집에 가서 뭐 좀 얻어먹었으면 하는데. 우리 친구들도 다 부르지." 이 형의 이름은 카오라고 했는데… 괴이한 이름이다. 이거 메데이레나가 알면 날 죽이려고 들 텐데. 하지만 난 원래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성격인지라. "누구세요?" 메데이레나의 첫 마디였다. 당연히 카오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카오인데요, 그러는 댁이야말로 뉘시죠?" 왠지 불꽃이 튀기고 있다. "전 메데이레나, 이 집주인인데요." 살벌해. 이거 내가 나서서 중재를 해야겠군. "제……." "아내 될 사람이죠. 당신은 제 남편의 친구 분이신가 보죠?" 그때부터 갑자기 화기 애애한 분위기로 돌변해서는 나만 쏙 빼고 안에 들어가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왜 인생은 나에게 이렇듯 시련을 주는 것인가, 음. 한참을 정원에서 땅을 파고 있을 때, 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해 내었다. 작은 무덤이 하나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여자만 사랑한 병신 같은 마법사.' 이거 왠지 누구 이야기 같은데. 이렇게 묘지까지 있고. 아무리 약식이어도 그렇지 산 사람의 무덤을! 어느새 뒤에 누군가 다가와 서 있었다. "저기, 이거 웬 무덤이야?" "응, 내가 저번에 이야기한 사람. 왜?" 땀난다. "저, 나 누구랑 닮지 않았어? 아무리 삼 년이 지났다고 해도 누구랑 많이 닮았잖아. 은발이 흔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안 그래?" 그녀의 눈이 나를 한참 응시했다. "아, 맞다. 우리 집 강아지를 닮긴 했어." 인생 무상. 허무하기 그지없다. 난 나이 120이 넘어서 겨우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메데이레나야, 그게 아니야! "내가 라플이야. 그리고 그때 난 죽지 않았어. 우연히 구해져서 간신히 살아날 수는 있었지만, 삼 년 동안 의식을 잃었었지. 메데이레나?" 그녀는 어느새 나를 꽉 안고 울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는 이제 동료들이 집을 때려부수는 모양이었다. "야, 메데이레나……." 왠지 그녀를 떨쳐낼 수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아앗, 실례!" 카오는 정색을 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리 뒤편으로 갔다. 그리곤 즉시 술병을 들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메데이레나는 전혀 상관없이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들어간 지 10분도 안 돼서 더 많은 일행들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그만 떨어져. 이제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제발 저런 기분 나쁜 묘지는 좀 없애달라고." "내 취미가 말이지 무덤 만들기야. 어렸을 때 아주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일찍 없어졌거든. 헤헤헤, 내 눈 빨갛지?" 그야 당연히 빨갛지만 그럭저럭 귀엽다고. "그만 들어가자.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메데이레나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나에게 한 마디하고는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돌아온 걸 환영해!" 인생에는 이런저런 돌발적인 재미도 있구나. 문득, 키히의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잠시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키히만이 나의 영원한 연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어이, 저런 예쁜 애인을 어디서 어떻게 꼬신 거야? 비결 좀 알려줘." 음, 메데이레나를 만난 게 아마… 앗,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혹시 난 바보? 뭐, 그러기엔 너무나도 많은 시간들이 지난 게 사실이니까. "에에, 여러 가지 모험을 겪어야 해." "엥?" "약간 띠벙한 모습도 좋아." 그녀가 나를 뭘 보고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긴 걸로 치자면 다른 마족들이 원래 훨씬 더 이쁘잖아. "난 라플의, 그토록 한 사람만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다는 점에 반했어. 내가 사랑하는 점은 또……." 메데이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뒤에서 방그레 웃었다. "에…에." "또, 라플은 어떤 사람이라도 살리려고 노력하니까 그 점이 우리 오빠랑 닮아서 좋아. 예전에 할터 아저씨가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뺏으라고 했거든. 헤헤." 이건 바보 모드다. 할터, 그건 또 누구야? 알게 뭐람. 그날의 신입 환영회는 완전히 흐느적대는 파티가 되어 버렸다. 그날 우리 집에 온 인간들은 다음날 모두 지각했다. 나만 제외하고. "썰렁하군." "예!" 늙은이는 잠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이를 먹으면 원래 술도 잘 마시기 싫다. "흠, 다들 오면 빠떼루를 줘야겠군. 자넨 가서 쉬게!" "옙!" 크크크, 죽어 봐라. 나를 놀린 대가는 아주 후하게 치러야 할 것이여! "참, 자네가 그 라플인가? 내가 듣기로 은발의 미 청년이 과도를 들고 기사들을 꺾었다던데." 그 쪽팔리는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구나. "예……." 그는 고개를 잠시 끄덕이더니 한 손으로 무슨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리곤 종이 한 장을 뽑아서 내게 주었다. "이건 이번 무투회 참가서인데… 어떤가, 한 번 나가 보는 것이. 자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안 해주는군. "예? 하지만 신원 보증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전 그런 것도 없는 걸요."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곳은 왕족들도 계시니까 말야. 아, 자네 여기 들어온 추천인이 사비르 아니었던가? 사제라고 쓰여 있던데, 사제 정도라면 추천인이 될 수 있지. 가서 허락을 받아 오게나." 윽, 이거 완전히 강압 아냐? 할 수 없군. 그 전에 룰이나 좀 물어 봐야지. "저, 전 평민인데 참가해도 좋습니까?" "여긴 그런 제약은 없네. 그리고 여기 종이를 잘 읽어보면 알겠지만 참가자 전원에게는 사기 도자기 세트를 준다는군." 잠시 혼란이 느껴졌다. 도자기 세트? 왜, 아니 어째서? 기사 싸움이라면 무슨 보호구를 서비스로 지급한다든지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저, 이건 요리 대회 안내문인데요." 요즘 요리 대회는 추천인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다시 무투회 공지서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무기의 종류는 아무거나 상관없고, 예선 이후부터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법을 쓰면 들킬 염려가 더 많아지니 그건 곤란하겠군. "여길 보게. 여기 참가자 전원에게는 도자기 찻잔 세트를 준다는군. 이게 뭐야, 차라리 요리 대회에 나가는 게 낫겠군." 그렇다, 상품이 너무 빈약하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곧바로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장은 확실히 뒤숭숭했다. 곧 개최될 각종 대회에 대한 어떤 기대 심리가 많이 작용하는 듯했다. 주변에는 환자의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 문제가 없다면 좋겠는데 말이지." 신전을 바라보면서 난 저 안에 들어가 에네브라는 사비르를 만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암담해져 왔다. 이곳에서 한동안 생활했으니 어쩌면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결정적으로 대사제를 보는 날에는 끝장이다. "자, 가볼까." 31. 검은 종이, 하얀 종이 모든 고대 신전이 한 번 몰락하고 새로운 종교가 생겨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대륙 중부를 중심으로 트라이너에 특히 자애의 신의 신전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애의 신은 전혀 있지 않은 신이었지만, 사람이 믿게 되면 능력이 발현된다는 점에서 이 신전은 점점 광신적인 교리로 발전되어갔다. 그 중, 에네브라는 계급은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역시 높은 정신력을 소유한 인간이었다. 마력과는 약간 다른 극도의 인간 정신력에 따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의 서} 필사본 신전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으나 내가 떠났던 그때와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 마법학원은 중퇴인 건가? 신전 옆의 학원에서 쭉 나오는 거리엔 아직도 그 작은 신전이 있을까? 살린과 케빈이 있던 그곳.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기로 불러내서 도장만 찍거나 사인해달라고 하면 되겠군. "죄송합니다만, 혹시 에네브이신 사비르 님이 계십니까? 라플이라는 사람이 보러 왔다고 하면 아실 겁니다." 그 사람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더 어린 견습 사제인 게 뻔해 보이는 사람에게 뭐라뭐라 말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이곳은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계된 곳인데 특별히 마음이 안정되는 그런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이런 조잡한 마법이 먹혀들 리가 없지 않은가. "아, 라플이로군. 잘 지냈나? 그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어서 잘 정착한 건지 꽤나 걱정했네. 그래 자네의 그 어여쁜 아가씨는?" 사비르는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 어벙한 얼굴도 변한 게 없군. "아주 잘 지내고 있지. 집도 꽤 맘에 들고 병사 일도 꽤 재미있다고." 그가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안에서는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니까. "그래 무슨 일로 왔나? 마침 나도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네." 사비르의 얼굴에는 왠지 비장감이 넘쳐흘렀으나, 난 그보다 도장을 받는 게 우선이었다. "여기 도장부터 찍어. 이게 제일 급하다고." "뭔데? 에, 무투회? 자네 돌았나? 이건 아젠 기사단의 등용문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회잖아. 현역 기사들이 빡세게 공부해서 들어가 시험 보는 곳이 아닌가?" 그랬던가. 난 그저 막연히 기사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하거든." 사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도장을 찍어 주고선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밝은 얼굴을 지었다. "자네 혹시, 황녀의 부마로서 부끄럽지 않은 신분이 되고자 기사가 되려는 건 아닌가? 음 하하하… 에, 농담이네 화내지 말라고." 화 많이 난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서러움! "닥쳐라, 그리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그는 금세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었는데, 이런 얼굴 표정 변화 술에는 아마 이놈을 따라갈 자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거나 말거나 사비르는 그 동안 자신이 겪은 이상한 일들을 술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자네와 내가 처음 이곳으로 다시 온 날부터 이상한 일들이 속출하기 시작했지. 그건 바로 처음,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거였어. 뭐, 신전에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것도 우습고 해서 그냥 무시했는데,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지금은 폐지된 장로의 방에 가게 되었지. 그곳을 정리하면서 웬 종이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그건 고대 문서였어." 고대 문서라, 연구하기 위해서 놓아둔 거겠지. "그렇게 수상하지 않은데? 장로의 방이니 그럴 수도 있잖아." "그렇지 않네. 그 장로는 실종된 지 이미 삼 년도 넘은 오래된 일이야. 그런데 그 방에는 아주 새것 같은 종이에 흘려 쓴 고대어 종이가 있으니 얼마나 수상한가? 그리고 말이 고대어지 그리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나? 자네라면 좀 알고 있겠지?" 그야 내가 가장 권위 있는 도서관이니까. 그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종이 조각을 꺼내 내게 넘겼다. "이건 내가 베낀 걸세. 원본은 그곳에 그대로 두었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하지만 난 이걸 해석할 방법도 능력도 안 되니, 자네가 부디 해주게나." 어려울 건 없었다. 뭐, 하루면 해석 가능하니까. 뭐, 다시 정리하려면 3일은 걸리겠지만 대충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있겠어. "그거면 되는 건가? 그런데 그게 귀신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에, 그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괴물로 변하는 게 곡물에 의한 거랬지?" "응." 그는 아주 오랫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으며, 거기에 더해 더더욱 우울한 얼굴을 하고 침중한 어조로 간신히 말했다. "나, 그 곡물이 어디서 재배되고 있는지 알아냈네. 바로 신전에서 재배되고 있었어. 그런데 신전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없더군. 신의 은총을 입은 곡물 정도로만 알고 있어서 아무도 그걸 먹는 사람은 없었어. 물론, 나도 그게 평범한 건 줄 알았네만 내 아는 놈 하나가 그걸 몰래 먹고선 어느 날 열병을 앓더군." 나는 신중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식중독이 아닐까?" "하하하,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그러고 나서 그는 삼 일 뒤에 없어졌고 그 재배지도 사라졌네. 아마 장소를 옮긴 걸 거야. 물론,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지. 그래서 그 곡물이 심어져 있던 땅의 성분을 조사했네. 나도 이름만 에네브는 아니니까." 그랬구나, 난 돈으로 에네브를 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뭔가를 알아냈군?" "그렇지. 확신하건대 마물의 피가 들어 있었어." 이거 참, 곤란하게 되었는데. "사비르, 그건 자네만 알고 있게.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게 좋아. 또한, 그런 재배지는 한 군데가 아닐 거야. 신전처럼 좁은 장소에서 재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그러니까 입 다무는 게 자네 건강에도 좋고. 또 뭔가 아는 게 있나?" 그는 잠시 품속을 뒤적이다 또 하나의 종이를 건넸다. "이건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편지 조각인데, 윗 부분이 찢겨져 있어서 누구에게 보낸 건지 알 수는 없네. 하지만 아래에 쓴 사람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아래 서명에는 위르트르바라고 쓰여 있었다. 편지 내용은 대충 아직 증거를 잡지 못했다면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누가 이런 걸……. "흠,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잘 알아보지. 수상한 사람은 신전에 있는 사람들뿐이 아니니까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게나. 자네도 조심하고." 그날 그와 헤어지고 나서 난 도장을 들고 가 무투회 신청서를 냈다. 접수원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제에 아젠 기사단이 유명한 건 아는 모양이구나.' 안다 알어. 한때 난 기사들이랑 식당놀이도 하고 그랬는걸. 웨이터 녀석, 설거지 녀석, 모두들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어이, 여기로 패스!"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공 하나가 내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와서 재빨리 집어 아이에게 던져 주었다. "감사합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참, 착한 녀석이군. 음…? 골목에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누군가 있다. "웬 놈이냐!" 재빨리 몸을 날려서 그곳으로 뛰어갔다. 어느새 난 한 사람을 잡을 수 있었다. "젠장!" 그 사람은 검은색 상의에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이었다. 항상 이 녀석을 잊어먹곤 했지만 이번엔 그래도 헤어진 시간이 5년 안팎이잖아? "율지스?" 그 녀석은 더더욱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었다. 게다가 '넌 누구야'라는 광선까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더욱 의아한 건, 왜 녀석이 마법을 쓰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넌 누구냐? 설마 날 죽이려고 온 놈들이냐?" 내가 왜 율지스를 죽여야 하나? "너, 뭔가 죽을 일을 한 거냐? 지금쯤 마법학원 안에 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사하니 나야 좋다만… 어라라, 너 마력은 어디서 엿 사먹었냐?" 율지스의 몸에는 그 거대했던 마력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인보다 마력이 적은 정도였으니… 쯔. 이놈도 뭔 일이 있었나 보군. "처음 보는데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너야말로 누구냐! 기분 나쁘게 나의 빌어먹을 스승과 닮았구나!" 누구긴. "네놈의 빌어먹을 스승이다! 이 멍충한 녀석, 지 스승도 못 알아봐? 그래, 왜 이러고 있냐?"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있었다. 뭐, 귀엽긴 하지만 나하고 나이 차이가 제일 적게 나는 놈 중의 하나니까. 프라운과 하브라이드는 당연히 마족이니까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지. "스승님? 말도 안 돼, 죽었다고 그랬단 말입니다!" "엘메인이? 어떻게 너희들은 그렇게 똑같이 밥퉁이 같냐? 엘메인이 나를 기절시키고 부서지는 성에 혼자 두고 튀더라. 뭐, 될대로 되어라였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미친개가 날 살려 주더구나." 갑자기 신이 미친개가 되는 처절한 순간이었다. "설마 엘메인이……." 왜 저리 놀란다냐? "그나저나 세이는 어떻게 재상이 된 거냐? 신기하구나, 그 바보 놈이 해서 제대로 되는 게 없을 텐데. 너는 사형이라는 놈이 도와주지는 않고 변태처럼 애들 노는 거나 보고 있냐!" 그는 이내 울먹거리면서 스승은 역시 예전에 어릴 때가 더 나았다고 중얼거렸다. 당연히 나에게 그야말로 곤죽이 되도록 맞아서 결국 내가 업어서 들고 가야 했다. "이거는 또 뭐야?" "병신 제자." 메데이레나는 그저 눈을 찌푸리면서 한 번 거들떠보고는 녀석에게 소금을 살살 뿌렸다. 어이, 그래도 그 앤 내 제자야! "으에에엑!" 상처에 소금 뿌려본 사람은 안다, 그 고통이 어떤 건지. "왜, 맞은 데는 이게 최고야. 소독도 잘 되고, 한 번 사용해 보라고. 효과는 곧 알 수 있으니까." 대신 명은 많이 줄어들 것 같아. 율지스는 정말 많이도 맞은 듯했다. 얼굴은 너구리 친구(얼굴 양쪽이 멍들었고)가 되어 있었고, 나중에 치료 마법을 써보니 뼈 하나도 나가 있었다. 좀 찔리긴 한다, 음 하하하. "제자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 팬 거 아냐?" "아, 괜찮아. 이 위대한 마도사이신 라플의 제자라면 이 정도 시련은 탁탁 털고 일어나야 한다고." 메데이레나의 눈에는 불신이 숨어 있었다. 어이, 난 평화주의자라고. "스…승……." 왜 또 스스거리냐? 니가 뱀이냐? "뭔가 말을 하고 싶은가 봐요." 메데이레나가 그렇게 말하자 율지스는 왠지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서도 기뻐했다. 하지만 때려서 사람 만드는데,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라." 녀석은 입을 움직여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오…으……." 뭐라고 그러는지 짜증이 뻗치기 시작할 무렵, 카오가 들어왔다. "어이, 내가 왔네. 엉?" 카오는 당연히 방바닥에 엎어져 있는 율지스를 보고 무척이나 당황해했다. 저런저런… 시체가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다가 옆의 소금 그릇을 발견하고는 불길하다면서 마구 뿌려댔다. 저런… 율지스, 당분간은 짠 음식은 못 먹겠군. "살려줘!" 이 율지스의 한 마디는 처절하게 수도를 울렸다. 다행히 우리 집은 저수지 근처였고,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 아니었기에 녀석의 그 처절한 고난은 은폐되고 말았다. 불쌍한 놈. "아, 그러니까 자네의 조카뻘이 된단 말이지? 하지만 엘프잖아." 오옷, 몇 남지도 않은 엘프에 대해 아직 알고 있는 놈이 있다니. 놀라운 놈, 카오 녀석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다니! "하하하… 카오, 나도 엘프랑 혼혈이야. 그러나 이 녀석은 혼혈이 아니거든. 그리고 난 부모님께서 좀 늘그막에 얻은 자식이라… 엘프는 원래 나이가 먹어도 아름답잖아." 카오는 수긍하는 듯했다. "너 이제 보니 고귀한 태생이었구나."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난 그냥 원래도 고귀한 태생이야. 우리 집은 말이지 공작 가문에다가 트라이너 개국 공신이 나왔으며 현재 유일한 공작가! "하하하……." 그냥 웃음으로 때우고 있을 때, 마침 식사시간이 되었다. 음식을 보던 카오가 잠시 머뭇거렸다. "음, 그땐 몰랐는데 네 음식은 좀 특이하네. 이제 보니 완전히 유동식 아냐? 희멀건 데다가 건더기도 안 보이고." 건더기를 보면 왠지 소화가 안 되거든. 늙으면 다 이래, 마. "원래 어렸을 적부터 위가 안 좋았거든." 갑자기 카오가 내 손을 부여잡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럴 수가, 자네 그런 약한 몸을 하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구만. 그러니 과도밖엔 못 잡지!" 이 대목에서 메데이레나는 즉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오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 활약사가 아닌 활약상를 유창하게 떠들어댔다. 내가 우연찮게 기사를 쓰러뜨린 것부터 시작해서 우연히 무투회에 가게 된 것까지. 그만해 이놈아! "그랬군, 그랬었던 거야. 그래서 무투회에 나간다고?" 싸늘한 메데이레나를 애써 외면하고 카오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녀석은 아주 유쾌해 보였다. "그렇게 되었어." "음, 그래.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우린 하층석이긴 하지만 표를 모두 구입했지. 네놈을 응원해 줘야 할 거 아냐, 음 하하하!" 응원이 아니라 저주가 아닐까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탁할게." "하하핫, 예선에서 떨어져도 파티 해야 하는 거 알지? 예선에선 죽지 않는다니까 너무 걱정은 말라고!" 네가 먹어치우는 그 식비가 더 걱정이라면 넌 아마도 안 믿겠지? 으이구, 내 신세야. 왜 저런 놈들에게 걸려서 난 맨날 걱정이지? 카오가 가고 나서야 나는 어느새 바닥에서 소파로 진급한 율지스를 보러 갈 수 있었다. 이제 열도 좀 내린 듯했다. "죽었다고 해서 너무나 슬퍼했는데… 살아나신 스승님이 절 죽일 뻔할 줄은 몰랐어요." 입 나왔어 임마. "적어도 나와 있었으면 죽을 염려는 없잖아.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나의 다정한 말투에 녀석은 이내 경계를 풀고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술술 이야기했다. 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서 세인과 율지스, 살린, 케빈, 메데이레나는 수도로 다시 돌아갔는데 거기서 메데이레나는 다시 나바스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한 2년쯤, 마법학원에서 밥 빌어서 죽을 쓰는 위대한 마법들을 개발하면서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던 중, 키히가 피스트레이카 영지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걸 피스트레이카 영지의 멍청한 마족들이 용사가 되어 막고 있다는 완전히 와전된 이야기도 듣게 되었단다. 그후에 용사 둘이 나타나 싸우게 되자 그 마족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단다. 가끔 달려드는 키히의 군대, 대체 그게 뭔지 여기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걸 막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저번의 그 외진 마을에 키히가 나타난다고 했던 사건은 완전히 뻥이라는 거지. 세이와 연락도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우연히 왕궁으로 불려갔다가 어느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서부터 마법의 기억이 완전히 잘렸다고 했다. 간신히 흑을 만나 도망치기는 했지만, 피스트레이카 영지로 갈 만한 힘도 없고 왕궁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뜰 수가 없어서 이렇게 남아서 살피고 있었다고 했다. "그럼 마법학원에는 당연히 가보지 않았겠네?" 율지스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제자 하나는 재상이 되어서 설치고 있는데 이놈은 이 모양이라니… 쯧. 나이와 능력에 상관없이 빽만 좋으면 등용되는 세상이니 원. "세이와 연락한 마지막 내용은 뭐였냐?" "예? 그게 스승님의 원수를 갚을 방법을 알아냈다는 거였습니다. 그걸 보고 저도 궁으로 갔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키히가 아니라 엘메인이 흉수라니 할 말이 없군요. 하긴 그를 의심했어야 하는 거였습니다." 너희들이 바보라는 사실을 이제라도 깨달아서 이 스승님은 기쁘단다. "그래 됐다. 어쨌든 넌 마법 봉쇄 주문에 걸린 건데, 이걸 당장 풀 수도 있지만… 너 어느 정도 검술도 하잖아?" "예. 뭐, 자랑은 아닙니다만… 후훗." 또 패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이 녀석을 위해서 고문을 시작했다. "네놈이 한 일은 내가 낱낱이 알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라. 이 로리콘 변태 자식." 녀석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직 많이 모자란 검술이지요." "그럼그럼." 후후후, 니 놈이 스승을 따라 잡으려면 백만 광년도 모자라다는 걸 알게 해주지. 흐흐흐, 그나저나 세이와 연락도 안 되고… 설마, 세이도 내 복수를 위해 불타오르고 있는 거 아냐? "스승님은 그럼 엘메인이 나쁜 놈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계시는군요." 당연하지, 날 죽이려고 했잖아. 사실 그런 와중에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니? 날 살려 준 신이 아니었다면 난 완전히 콩가루가 될 뻔했다고. "다 날 위해서라는데… 모르겠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엘메인은 바로 마왕과 함께 어디론가 갔다면서?" "예, 메데이레나 님께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그 이후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역시 그랬었군. 그렇게 행동하면 적어도 날 죽였다는 사실은 완벽하게 은폐되지. 한 가지 궁금한 건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과연 그들이 알고 있을까 하는 점인데, 일단 마족이라면 내가 죽었는지 어쨌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엘메인은 마족이 아니고, 마왕 역시 정신만 마왕일 뿐 몸은 인간이 아닌가? "좋아, 이렇게 공론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 너라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보다 난 앞으로 있을 무투회에 참가한다. 목적은 세이를 만나고 그녀석이 뭔가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바로잡자는 데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왕에 관련된 일이다." 가장 불안한 것은, 아직 메데이레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세인 푸르체트에 관한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는 점이었다. 분명히 사신이 당도했다면 알 수밖에 없을 텐데, 엄청 수상해. 지금 한두 가지가 수상한 게 아니라고. "조심하십시오. 전 그럼 스승님이 안 계실 동안 뭐 하죠?" "당연히 검술 수련을 하면서 메데이레나를 지켜야지! 아직도 그런 안이한 사고로 이 진보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려고 하나. 그래선 더 이상 호빵을 굴 수 없어!" "예에?" 말이 헛 나왔지만 헛기침을 흘리고 사라져 갔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은 때론 잘못을 덮어 줄 필요도 있는 거야. 다음날 아침, 아직도 신병 훈련을 하기 위해 나는 집합 장소로 나갔다. 준비된 조교는 우리를 향해 싱긋이 실없는 미소를 흘렸다. "자, 모두들 잘 들어라. 이번에 너희들 중 단 한 사람이 무투회에 도전장을 냈다. 알고 있나? 그래서 다들 응원하러 가기로 했다지? 그래서 이번엔 라플 군을 제외하고 모두들 응원 준비에 힘쓰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도 기사를 한 번 꺾어 보는 거야. 자, 모두 불타오르나!" "옛!" 사이코들의 모임이로군. 하지만 대답과 동시에 모두의 얼굴은 잿빛을 띄고 있었다. 조교 뒤에 투구를 쓰고 은색의 갑옷을 입은 웬 살벌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무려 내 애 검(=과도)의 16배쯤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크기였고, 그 검 집에는 화려한 잎새 무늬가 양각되어 있었다. 번쩍이는 갑옷은 그가 절대 낮은 지위의 기사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응, 모두 겁먹었나? 빨리도 겁을 집어먹는군. 아젠의 기사도 알고 보면 별거 아니다. 모두 힘내도록!"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움직이냐? 그 기사는 마침내 무게감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아주 천천히 조교 앞으로 나왔다. 조교가 놀란 건 당연했다. "으앗… 기사님!" 즉시 얼굴이 퍼렇다 못해서 하얗게 탈색된 그를 보자, 이 도시의 귀족 아가씨들에게 문득 저런 효과가 최고로 인기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란 아가씨를 본 기사들은 이렇게 생각할 게 아닌가? 참으로 눈처럼 흰 피부다…라고. "웬만하면 넘어가려 했다." 그 말은 안 넘어가겠다는 뜻인가? 역시 조교는 바보가 아닌지라 손바닥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기사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실수로 한 소리입니다!" 넌 지금 떨다 못해서 진동으로 모든 걸 세탁해낼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아젠 기사단원으로서 아젠 기사를 모욕한 건 참을 수 없다! 검을 들어라. 명예롭게 죽여주겠다!" 죽는 마당에 명예가 웬 소용이니? 아저씨 오버하는구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내가 조용히 나서자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애는 꺼져라." 네놈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내 두고 보마. "아젠의 기사이시라면 마땅히 그 강력함이 대륙 제일이실 터인데 어찌 힘없는 자의 사소한 말실수를 타박하십니까? 그리고 이 분은 보다시피 기사도 아닙니다. 일반 병사에게 기사의 위엄을 보여서 무엇하겠습니까?" 내가 원래 말은 청산유수다. "후후후, 건방진 놈. 그러나 아젠 기사단을 모욕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비켜라!" 이 꽉 막힌 인사를 봤나. 할 수 없군. "아젠 기사단장은 팔불출에 공처가고, 그 부단장은 요리도 못하는 놈이고, 그 이하는 검술로도 허섭스레기에 불과하다." 잠시 왕궁 앞에는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기사는 싸늘한 살기를 방출하며 떠는 듯했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검을 빼어 들고는 달려오고 있었다. 성질도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네. "죽어라 이놈!" 네놈보다는 나이도 많고 직위도 높다. 너가 트라이너 왕이라고 해야 나보다 높은 건데 말야. "난 아직 젊어서 말이지, 나와라 검!" 마치 손에서 검이 나오는 착각이 들만큼 폼은 있는 대로 잡고… 가슴에 있던 검을 꺼낸 후에 감싸두었던 나뭇잎을 풀어낸다. 이 동작은 적의 공격을 재빨리 피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놈, 쥐새끼같이 피하는구나!" 나 아직 쥐를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곤궁하지 않은데, 넌 그게 아닌가봐. "이렇게 이쁜 쥐 봤어요? 아젠 기사단은 쥐도 모르는구나. 통재라……." 이젠 어디선가 스팀 하나를 돌리고 있어서 그 열기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감상하기에 충분했다. 난 드디어 주문을 외웠다. 주문 이름은 너 열 받아서 열반해라. "깜찍한 과도가 나와서 세상을 흔든다. 이제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 된다! 나가랏, 내 검의 맛을 봐라!" 이 자는 당연히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내 허약한 근력으로는 갑옷을 뚫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러니 갑옷이 없는 부분을 노려야 하는데, 손에는 쇠로 된 장갑을 끼고 있고, 얼굴에는 쇠 투구를 쓰고 있으니 어디가 없는 부분인가? 그렇다고 눈을? 난 호러는 싫다. "이… 이 꼬마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내 검과 저 사람의 검을 바꾸는 거다. 혹시 자기 검에 실증이 났을지도 모르잖아. "후후후." 내가 희미한 미소를 날리면서 녀석의 검 손잡이 부분을 깊게 내리쳤다. 아플 리는 없다. 단지 그는 검을 놓치고 말았을 뿐. 쯧, 아직 수련이 부족해. 검사가 검을 놓치다니. "아앗, 이놈!" 노인을 화나게 하면 노인 파워를 맛보게 하는 수밖에 없다. 후후후. "이건 내가 가지지. 멋진데! 슬슬 끝을 내볼까?" 내 검이 된 그 기사의 검이 잠시 허공을 가르고 검을 잃은 기사의 투구 아랫부분에 가서 멈췄다. 그러자 그는 서서히 투구를 벗었다. "젠장, 내가졌다." 모두 그 얼굴을 보고 경악했지만 나보다 더 경악한 인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놈은 그 웨이터? "웨이터잖아? 야, 이거 오랜만인데!" 내가 씨익 웃자 그는 웬 미친놈이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즉시 조교는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장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검을 거두고 침을 묻힌 다음 검을 돌려주었다. 그 녀석은 좀 의구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검을 받아 자신의 검 집에 집어넣었다. "넌 누구길래 날 아는 척하는 거지?" 그의 귀에 대고 살짝 속삭였다. "피스트레이카 공작. 비밀이야." 그는 깜짝 놀랐다. 우리의 인연은 하수도가 끝이 아니었나 보다. 그놈은 갑자기 날 안고는 울음소리를 삼키며 울어댔다. 그러다가 서서히 떨어지던 눈물은 어느새 펑펑 쏟아지며 대성통곡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으허허헝엉… 너로구나, 으어어엉……." "아는 사이었나?" 조교는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 꽤 오랜만이긴 하지만 변한 게 없네요. 그때도 그렇게 싸워 놓고선… 하하하, 하여간 아저씨 고만 울어요." 그는 어느새 눈물을 쓱쓱 닦고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며 자신의 집무실로 가자고 했다. 그야, 나도 바라던 바지. 그의 집무실로 가는 동안 웬일인지 기사는 한 명도 볼 수가 없고, 하나둘쯤 하인만 지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보이는 하인들도 모두들 바쁜 듯 총총걸음으로 사라져 갔는데, 모두들 둘 셋씩 짝을 이루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분위기가 이상하네요. 예전에 폐하가 미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의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은 창문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커서 벽면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가구들은 화려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사용한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책상 정도? "그게… 삼 년 전에야 전하께서는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만 죽이셨으니까 이번과는 경우가 틀리지." 잉? "설마 또 전하가 미치신 건 아니죠?"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미친 거라도 살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하지만 이번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 이건 또 뭔 일이래? 뭐가 또 잘못되어서 그런 거지? 분명히 나바스에 편지 보낼 정도는 되지 않았어? "무슨 소리지요? 나바스에서 세인 푸르체트 경이 도착하지 않았나요?" "아, 그들… 너도 그들을 만났구나. 그들도 현재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전하를 알현한다고 들어와서 최근 이곳에 생긴 기사단과 싸움이 붙었지. 그런데 결과는 잡혀가는 거였어. 이걸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을 뿐더러 게다가 기사단장인 나조차도 최근 전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그랬군. 그럼 그 가상의 적들은 세인 일행을 잡아 가둬서라도 국왕과 만나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건데, 그럼 차라리 다행 아닌가? 적어도 살아 있다는 말이 되잖아. 아예 죽었다면 이미 가상의 왕이 등장했을 터이니 말야.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이번의 경우란 대체 뭐죠?" 그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며 무척 괴로워 보였다. "그건 괴물이 나타나는 거야. 최근 칠 일 전에 웬 괴물 하나가 뛰쳐나와서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잡혔는데, 잡고 보니 일반 기사더군. 그는 이내 곧 자결했지만." 흠, 그 변종이로군. 이로서 뭔가 가닥이 잡혀가는군. "또 그 마물이로군요." "그렇지, 그래서 자네를 본 순간 무척 기뻤네. 저번엔 자네가 전하를 구하지 않았나. 그리고 대공작이니 이번에도 자네가 도와줘서 전하를 구해냈으면 하네." 그야 그런 목적으로 이곳에 왔지만, 나바스의 귀족까지 잡았다면 아마도 이들은 전쟁도 불사할지 모르겠군. 세인이 알고 보면 조금 어벙하잖아. "좋습니다. 전 이번 무투회에 나갈 것이 아니라 여기 하인으로 취직이라도 해야 할 판이군요." "아니네. 그 무투회에는 꼭 나가게. 자네가 접수 안 했다면 나라도 시켰을 거야. 사실 이번에 뽑는 건 아젠 기사단원을 뽑는 게 아니라 사실, 그 자살한 기사를 보충하기 위한 거란 이야기가 돌고 있네." 흠, 그렇다면 정말 가봐야겠군. 내가 마족 피를 아무리 양동이째 먹는다 해도 별 탈이 있겠어? 아, 있군. 그렇게 많이 먹으면 체하거나 피가 굳어서 죽을지도… 음. "그런데 다른 아젠 기사단원들은 어디 있죠?" 그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모두 피스트레이카 영지에 가 있다네. 가서 키히를 막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우리 아젠 기사단이 눈치챈 걸 알고 배후에서 내쫓은 것이 틀림없네. 전하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음, 고민 좀 되겠군. 하지만 전하는 멀쩡할 거라고. 의외로 강하니까. 문제는 누가 그걸 조종하고 있냐 하는 문제인데. 내가 고민을 한 바가지쯤 얻어서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을 즈음 이미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율지스 녀석은 그새 살아나서 푸드득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카오 녀석은 무슨 제집처럼 퍼질러서 자고 있었으며, 메데이레나는 뭔가를 쓰고 있었다. "메데이레나, 뭐 하는 거야? 어디 보자. '초 절정 미공자 라플의 정체를 알려주마…' 이게 뭐지?" 이럴 때 살기를 쓰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열받으면 이거고 저거고 볼 것 없다는 사실을 니가 아느뇨? "에, 그게… 아, 벌써 왔어? 하하하, 오늘 기사랑 맞장 뜨고 사라졌다길래 조금 걱정하는 참이었는데 말야. 하하핫." 네 행동을 나는 다 꿰고 있다. 음 하하하. 수상한 종이, 이 음침한 시각, 아는 사람도 없는 종이. "너, 나 팔아먹고 있냐!" "미안……." 으, 하지만 늙은이를 팔아먹어서 어쩐다는 건지 알 수 없군. 대체 요즘 여자들은 왜 늙은이를 좋아하는 거지? 에잉. "좋아, 나는 무투회 준비를 위해서 명상할 거니까 방해하지 마." 그녀는 풀이 죽어 중얼거리면서 다시 일을 계속했다. 그녀의 일이란 한심하게도 내 초상화를 여기저기 팔아먹는 것이었으니… 돈도 많은데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물었더니, 취미 생활이란다. 그리고 그녀의 저서는 꽤 유명해졌다고 한다. '라플, 그 실과 허'라나? "세상엔 역시 믿을 놈이 하나도 없구나. 클클클… 그래 율지스야, 뭔가 깨달은 게 있느냐?" "예." 그는 검을 한 손에 들고 비장미 넘치게 외쳤다. 아니, 검으로 연습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새 깨달음을 얻다니, 내 제자가 혹시 천재? "뭔데?" 시덥잖으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라. "검이 무겁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참 패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내가 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제자 녀석도 마법만 죽도록 팠으니 근성이 부족할 것이 아닌가? "좋다, 오늘부터 특훈이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동네 한 바퀴씩 돈다!" 녀석의 얼굴은 기뻐서 파래지는 것 같았다. 참, 감정 표현이 특이하군. 다 이 스승님이 너를 잘 되라 그러는 것이야, 헐헐헐. "더 가야 합니까! 헥…헥." "아직 고지는 멀다! 힘내라, 헥…헥." 성은 정말 컸다. 트라이너의 수도이며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답게 엄청나게 넓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훈련을 위해 깡패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절대 외롭지 않았다. 나는 과도로 상대했고 나보다 조금 상황이 나은 율지스는 소 검을 들고 다녔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게 그거였다. "헥…헥, 정말 멀군요." "헥…헥, 그냥 내일부터는 반 바퀴만 돌까?" "그래요… 헥…헥." 그러나 스승이 제자에게 밉보일 순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기지 마라. 우린 훈련을 거듭해야 해, 으허헉!" 말했더니 숨차서 죽겄다. 너무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으면 정신이 드는 마법을 사용하곤 했는데 이게 더 장난이 아니었다. 정신력 고갈이라고 들어 봤나? 그 날, 밤중에 땀으로 범벅하고 들어온 우릴 보고 메데이레나가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기분 더러운 그 말들. "어머, 어디서 비가 왔어? 이상하다 하늘이 저렇게 맑은데." 그리고 더더욱 어이없는 이야기는 그로부터 3일 뒤의 식탁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 들었어?" 메데이레나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율지스는 이걸 먹고 나가서 또 뛸 생각을 하니 암담해지는 모양이다. 식사 내내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아직까지 둘에게는 체력이 더 보강된 듯한 느낌은 없었다. "무슨 이야기?" "응, 요즘 밤이면 밤마다 두 명의 천사님이 다니면서 악당을 없애고 성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사라진다는 거야. 얼마나 멋져!" 그거 혹시… 율지스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짓도 많이 하면 안 되겠군. 뭐, 이것도 다 이번 무투회까지다. 그 다음은 절대로 안 해! 빌어바쳐도 안 해! 뭐, 예선이 내일 모레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것이여! 그렇게 3일쯤 뛰었을 땐 이미 성내에는 성스러운 용사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요즘같이 뒤숭숭할 때는 이런 류의 소문은 정말 빨리도 퍼져 나간다. 오늘은 드디어 예선 날. 뭐, 예선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일단 특별히 다른 사람들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감독관 몇 명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 라플 어쩌면 너라면 우승할지도 몰라." 이 내가 아니면 누가 우승하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만 싸움은 기술 가지고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더군다나 내 체력이 좋니? 싸움이 장기화되면 아마 맨손으로 싸우던가 마법을 써야 할 판이라고. "그야 해봐야 아는 거지. 상금도 높은 편이라면서?" "아마 역대 최고일걸. 하긴 상금은 매년 올라가니까. 그럼 잘해 보라고." 좋아, 난 할 수 있다! 드디어 종이 울리고 나에게는 전투를 위해서 종이 한 장이 쥐어졌다. 이 검은 종이를 보니 문득 신관 녀석이 맡겨 놓은 그 해석해야 할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난 바보인가 보다. "자, 그럼 검은 종이를 받은 사람들은 저 검은 테두리로 가시고, 흰 종이를 받은 사람은 흰 테두리 안으로 가십시오." 그 안으로 가서 무지막지하게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워서 남은 사람 8명씩이 이번 대회의 메인이 되는 거였다. 다구리의 현장이 아닌가. "음 하하하, 네 너희들을 쓸어 주마. 억!" 멍청하기는 눈에 띄면 죽는다는 걸 모르나 보지? 예선전은 살인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쓰러지면 즉시 밖으로 옮겨 버리고 만다. 그럼 본선에서는 죽으면 땡이라는 건가? 여하튼 여긴 쓰러지면 탈락. 어라라, 아무도 내겐 안 덤비잖아.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상한 건, 내가 있는 벽 쪽으로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는 건데… 음, 운이 좋군. 뭐, 그런 사람이 많이 있으니 나에게만 뭐라고 하지는 않겠군. 저 중에서도 대략 가장 빠르게 많은 사람을 쓰러뜨리고 있는 이는 바로 검은색 옷을 걸치고 무거워 보이는 중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일단 그의 검에 한 번 얻어맞기만 해도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뭐, 날카로워 보이진 않아서 사람이 다치진 않는 듯했다. "어디 보자, 흰색도… 비슷하군." 흰색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검은색 줄 안에 들어간 사람이나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눈이 착각을 일으킨 건지는 몰라도, 흰색 안에는 유별나게 귀족 자제들이 많이 들어간 듯했다. 음, 그렇단 말이지. "한눈 파나, 꼬마." 갑작스럽게 중 검이 내 옆을 관통하면서 정확히 벽에 부딪혔다.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검은색 벽이 파괴되었고, 그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에 또… 하하하." 왜 이리로 왔냐? 한동안 구경 잘하고 있었는데 다 망했잖아. 게다가 되는 일이 없네. 이런 중 검이야말로 내가 상대하기 제일 싫은 스타일이라고! 난 빠르기에 중점을 두니 어디 이 사람과 검이나 한 번 부딪칠 수 있겠어? "까불지 마라!" 그의 검이 내 머리 바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등줄기로 식은땀 한 방울이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대는 정말 싫다고. 게다가 눈은 엄청난 빛을 뿌리고 강하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땀 냄새는 또 왜 이렇게 지독한 것인지… 대체. "전 안 까불어요!" 살려 주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요? 저기 아저씨들이랑 싸우지 그래요? 잉잉, 늙은이를 핍박하면 못써요. "잘도 피하는구나!"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놀라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오옷, 나에게 약간 감탄하긴 한 모양이다. 할 수 없군. 유능한 사람 같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마지막이다!" 그의 검은 그의 옆구리 방면에서 재빨리 오른쪽으로 돌아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 검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의 옆구리에 내 과도를 재빨리 집어넣는 순간, 빵빠레가 울렸다. "검은색은 여덟 명이 되었습니다! 싸움을 중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얼른 검을 다시 품에 집어넣으면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잘못해서 머리라도 맞으면 골로 간다. "헤, 제법이구나.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가 그런 곳에 가만히 있길래 별 볼일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누가 예쁘장하냐! 100살 넘은 노인에게 그런 말은 곧 욕이다! 헐헐,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어 버릇이. "아, 예선전 통과했군." 웨이터 아저씨가 방그레 웃고 있었다. 그의 등장으로 장내는 충격에 휩싸였다. "어, 아저씨!" "하하하… 아, 뭐 하나? 어서 일이나 하게." 아젠 기사단장이 나타났으니 모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갑자기 중 검을 쓰는 검은 옷의 사내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내가 존경하는 분이야. 대단하군!"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나는 그에게 쫄랑거리면서 달려갔다. 다행이다, 이 땀 냄새의 천국을 탈출할 수 있게 되었어. 앗, 이놈도 기사였지? 제길, 좀 씻고 살아라. "그래 잘 되었군. 이젠 뭘 할 건가? 앞으로 결승전까지는 시간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종단의 부름을 받아서 그 고문을 해석해야지 뭘 해? 아마 늦게 했다가는 최소한 죽을지도 몰라. 근데, 내 분명히 그 쪽에 내 집을 알려줬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는 게 수상하군. 이거 해석 끝내고 빨리 가봐야겠어. 요즘은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겠다니까. "여, 역시 우리의 호프! 그 녀석을 상대로 죽여주던데!" 신병 일동의 감탄사가 금세 내 주위를 감싸고돌았다. 내가 이런 얼라들의 대회에 나간다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하여간. "자, 그럼 너네 집에 가서 죽도록 먹어 보자!" 이러다가 한 게임 이길 때마다 계속 먹는 건 아니겠지? 으, 아무리 메데이레나가 부자라 해도 이렇게 먹어대다간 파산하겠다. 걱정이야, 그리고 난 이것도 해석해야 한다고. "이 떨거지들은 대체……." 메데이레나의 한 마디에 나는 급속도로 얼어붙었지만, 그녀는 그래도 모두에게 당연하다는 듯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다 꺼내와 대접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나는 몰래 내 방으로 들어가 고대 문자가 적힌 그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걸 해석해야 한다… 이거지." 종이에는 뜻 모를 문자들이 많이 적혀 있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이니, 내 어찌 이게 뭔 말인지 알겠는가? "스승님, 왜 올라오셨습니까?" 율지스가 약간 취한 상태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 많이도 먹었구만. "아, 좀 할 일이 있어서. 너라도 내려가 봐라." "예이." 문서에 있는 글들은 모두 그리 흥미롭지 않은 내용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일이다, 일. 이것도 당금의 사태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니 열심히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이 글은 세 가지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안에는 정확히 몇 가지 단어를 제외하고는 그리 어려운 말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먼저 첫 번째 단락에는 바로 마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해 적혀 있었다. 놀라운 일이야… 이게 실종된 장로의 방에서 나오다니.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그 마족을 조종하는 법. 결정적인 건 3번째 단락인데, 그에 따른 부작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단락은 어려운 글자와 유실된 글자가 많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읽기를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후후… 그래 이거야. 이걸 이용하면 손쉽게 일을 해결할 수 있겠어." 왠지 내가 좀 사악한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음흉하고 치사하기까지 하니.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이런 가정이 사실 제일 쉽다. 모두 적일 경우, 이건 좀 심하다 싶긴 하지만 이대로 보면 막힘이 없을 거야. 과연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음……. "그럼 내일은 꼭 신전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려줘야겠군."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역시나 잠들어 있는 놈들 사이로 우아한 한 마리의 백조처럼 샤샤샥 지나갔다. 율지스가 한마디했던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했다. "스승님, 꼭 무슨 벌레 같은데요." 저 자식, 초치고 있어. 너 때문에 부정 타겠다. 부정 타기만 해봐라. 다 네 탓으로 돌려주마! "아니 이럴 수가!" 마을로 나온 나는 감동에 몸을 떨었다. 곳곳에는 저마다 예쁘게 장식된 등이 달려 있었고, 본격적인 축제 분위기로 돌입해 있는 게 아닌가. 저수지도 화려한 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전으로 가면 갈수록 그러한 축제 분위기는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유독 신전만은 별다른 장식을 하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성 모독이 될 가능성이 있잖아. "저, 실례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때의 그녀석이 아닌가? 여기도 매일 얼굴 바꾸기를 시도해서 참신한 얼굴 살리길 해보는 게 어떨까? "예, 여기 에네브로 계시는 사비르 님을 뵈러 왔습니다. 라플이 왔다고 하시면 아실 겁니다." "예, 잠시만 기다리시죠." 그 사람이 다시 견습사제를 시켜서 사라지고 나는 잠시 대기실에 앉았다. 뭔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상하다… 왜 오늘은 그 맘이 편해지는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 거지? "끄아아악!" 엄청난 비명소리가 신전을 꿰뚫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체 뭔 소리지? "비명소리 아닌가요? 아, 저기 신관이 오네요." 한 부인이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복도를 바라보니 웬 신관 하나가 붉은 머리에 파란 얼굴을 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갈색 아니었나? "사, 살려 주세요!" 견습 사제인 듯한 그 소년의 얼굴은 이제 혈관이 보일 정도로 투명해졌다. 그의 눈은 공포가 무엇인지를 봤다는 듯이 겁에 질려 있었고, 또 그 노부인도 더 이상 우아하지 않았다. 엄청난 비명을 질러댔던 것이다. "꺄아아악! 괴물!" 그건 나도 볼 수 있었다.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소년이 겁에 질린 얼굴이나 그 뒤를 쫓아오는 얼빠진 괴물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재미없게 되었군." 괴물은 뒤에서 쫓아오다가 갑자기 놀라운 높이로 점프를 시도했다. 그리고 소년 사제와 노부인 사이에 정확하게 내려앉았다. 이제까지 보아온 괴물과는 좀 틀렸다. 전의 괴물은 꼬리가 보이지 않았는데, 이 괴물에겐 꼬리가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이빨이나 발톱도 상당히 깜찍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크크." 소년은 아예 주저앉았고 노부인은 뒷걸음질치다가 엉덩이가 땅에 닿아 버렸다. 겁을 먹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저런……!" 모두는 소년이 문제가 아니라는 듯 신전 문을 향해 앞으로 달려갔다. 노부인과 소년을 사이에 두고 괴물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안녕?" 괴물에게 말을 건네면 대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단지 괴물의 시선이 좀 더 질긴 고기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 쏠리길 기대하자. "크크크." 이 아이의 어휘 체계는 매우 단순했다. 부모가 좀 많이 부실한 모양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내가 재교육을 시켜야겠지? "사라져라, 괴물!" 자, 어느 변신보다 이건 훨씬 어려운 기술이다. 일단 귀물의 팔과 날카로운 이빨을 피해서 재빨리 품속에 들어 있는, 나뭇잎과 천에 둘러싸인 과도를 꺼내야 하는 것이다. 어디선가 과도 주제가가 울려 퍼졌고 괴물은 잠시 당황했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걸로 나를 찌를 수나 있나?' 뭐, 하지만 괴물의 생각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재빨리 녀석의 정수리 부분으로 달려가서 검을 정확하게 찍어 넣었다. 그러나 괴물은 계속 요동을 쳤는데, 이젠 무기도 없으니 난 어쩌나. "이놈, 죽어라!" 갑자기 신전 소파가 놀라운 속도로 괴물에게 떨어졌다. 노부인이었다. 역시 우먼 파워는 무섭고 노인 파워도 역시 장난이 아니다. "아, 죽었다!"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바라보니 거기 늘어져 있는 괴물은 정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난 여기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는데, 이 괴물은 사람하고는 관련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람과 관련이 있다면 적어도 노부인의 소파가 작렬하기 전에 이미 주변을 정리하거나 제일 약한 놈을 해치우지 않았겠나? 그리고……. "이건 틀림없이 제가 키우던 강아지 목걸이인데… 이런 데 걸려 있네요." 소년이 울먹거리면서 괴물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견습 사제는 일을 도우러 이곳으로 오던 중이었는데 문득 자기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만 들어가다 미끄러져서 넘어졌단다. 순간 머리에 뭔가 끈적끈적한 게 묻어서 머리를 만지면서 앞을 보니 웬 괴물이 자신의 룸메이트를 씹어먹고 있었다는 거다. 개가 괴물이 되는 건 당연히 가능하다. 안 될 것도 없지. 하지만 개 사료를 따로 개발했나?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군. 그게 아니라 아마 그 곡물을 먹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 일단 강아지 주인을 위로해 줘야겠지. "아마 강아지도 먹혔던 게야.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알았지?" 소년은 계속 울먹였다. 그러고 있는 사이 일련의 사제들이 늦장 출동했다. "아니, 이런 괴물이……!" "이봐요, 왜 신전에 이런 게 있는 거죠? 죽을 뻔했다고요!"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 사과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의 시선이 내게 닿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에 옷은 에네브 옷을 입고 있었다. 아는 놈이었다. 아마 '내가 어디서 본 얼굴인데'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로 봐선… 쯧. 그의 기억력에 개탄을 금치 못하겠군. "죄송합니다, 저희도 몰랐던 일이라……." "저,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피르의 얼굴은 천천히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둔팅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여긴 위험하고, 나와 관련되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뇨. 제가 어찌 이런 대단한 분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한 번 씨익 웃어서 상대방의 의심을 없애 준다. 캬캬캬!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다시 괴물을 살펴보았다. "저, 아까 사비르 님을 뵙고 싶다고 하신 분 어디 계십니까?" 한 신관이 나오면서 말했다. 어째서 사비르가 나오지 않고 이 사람이 나온 것일까, 묘하군. 나는 좀 의아한 생각을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제가 뵙고자 했습니다만… 어디 가셨습니까?" 그는 방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하지만 좀 아프셔서… 바쁜 일이 없으시다면 이대로 돌아가셨다가 며칠 뒤에 오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파, 그 빈대가? 의외로군. 가만, 이런 신전에서 아프다니? "아, 그렇다면 병 문안 겸 들러보고 가야겠군요. 안내해 주시지요." 그 신관이 좀 당황하면서 피르에게 뭐라고 속닥이자, 피르가 다가왔다. "친하신 분이십니까? 어쩌면 그 병은 전염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친하다고 보기는 좀 어려운 사이지. 하지만 오늘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가봐야겠군요. 부탁이니 보내 주십시오. 전 예전에 물 속에서 같이 과일을 먹고 굴속에 함께 들어가 놀기도 했던 사이입니다. 이름은 라플이고요." 그는 나를 한참 응시하더니 마침내 그의 눈동자에 작은 놀라움이 번져가고 있었다. 하긴 놀라는 게 당연하지. 빠져 죽거나 타죽을 뻔한 걸 내가 이렇게 살려놨으니… 쯧. "그러시다면 들어가시죠. 제가 안내하죠. 너희들은 이 괴물을 속히 검시반에 보내라!" "예!" 피르는 조용히 복도를 걸었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과연, 에네브라 이건가? "이 방입니다. 저도 들어가도 됩니까?"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같이 가시죠." 방안에는 불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어서 흡사 냉장고에 들어온 듯했다. 작은 창문은 완전히 가려져 있었고, 침대 위는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프라오니스… 맞지?" 피르가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넸고, 나는 그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방에 떨어진 종이에 얼른 글씨를 썼다. '여기 도청 마법이 걸려 있다.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 그의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퍼졌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누워 있는 사비르의 손목을 잡았다. 딱딱했다. 이미 진행중인 것 같은데. "…라……." 다행히 내 얼굴을 알아보는 듯했다. 뭐, 아직 늦지는 않았지만. 피르는 정화 마법을 쓸 줄 아는지 모르겠다. '정화 마법 쓸 줄 알아? 알면 이 녀석에게 쓰라고. 난 들킬 염려가 있어.' '해보지.' 정화 마법 하나 하면서 그는 심호흡을 하는 둥 폼을 있는 대로 잡았다. 그가 정화 마법을 시작했으나 잠시 빛이 날 뿐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저 사비르의 살이 좀 연해진 정도? 제길, 내가 하기엔 좀 위험이 많은데. '나중에 네가 했다고 잡아떼, 알았지?' '응.' 내 몸에서 화려한 정화의 빛이 소용돌이치면서 누워 있는 사비르의 몸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그의 몸은 점점 사람의 형상을 다시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대단한 정신력이다. 이 정도로 변화되었는데도 괴물 같은 행동을 전혀 안 보이다니. 아마도 입을 막으려 한 게 아닌가 싶은데. "…라…플…이구나." 그의 눈에서는 작은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이거, 괜히 나까지 감동 받게 만드는군. "그래 나야. 괜찮아?" "아하하… 응, 이젠 괜찮겠지?" 그야 이를 말인가? 하지만 이곳에 있다가 언제 또 이렇게 될지 모르겠군. '이런 환자가 얼마나 더 있어? 혹은 열병을 앓는 사람들이라든지.' '족히 백은 넘을 거야. 모두 자기 방에서 근신하고 있지.' 귀찮게 되었네. 일일이 찾아가서 다 정화해야 한다는 말인데. 으, 할 수 없군. "괜찮다면 우리 집에 있게 하고 싶은데,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고. 그리고 내 의형제라 보고 싶기도 했거든. 어때 괜찮겠지?" 피르를 바라보면서 무언의 압력을 넣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같은 에네브로서 이렇게 약하다니. 쯧……." 그리고 피르는 즉시 종이에 뭐라고 휘갈겨 썼다. '환자 중에 페르도 있어. 구해 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상 최대의 이벤트를 구상해 보았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음음, 모두에게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정화할 방법은? 아니, 설사 정화한다 해도 그 다음은 어쩐단 말인가? 흉수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 근본적으로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게 아닌가.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후후후, 잘 되었군. 날 본 홀로 데려다 줄 수 있어?" 일련의 계획을 간추려 설명해 주자 피르는 놀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봐,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는 조용히 수도사의 두건을 하나 집어서 썼다. "괜찮아." 내 웃음을 보고 그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사비르와 함께 대 홀을 향해서 걸어갔다. 대 홀은 역시 내가 떠났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안에서 청소를 하던 사제들은 놀란 눈을 하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고문서의 내용이 틀림없다면, 아무리 재발해도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이었다. "음 하하하!" 갑자기 내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단상으로 달려가자, 사제들은 엄청 당황한 모양이었다. 뭐, 이것도 다 계산에 들어 있다고. "에네브님, 저놈이 누굽니까!" "에, 그게 갑자기 돌아서……." 땀을 흘리면서 피르는 내가 준 모범 답안을 줄줄 읽기 시작했다. 사제들은 사람들을 부르러 즉시 뛰어갔다. "예엣, 돌은 놈을 데려오시다니요!" "그게 돌아서 그런지 어때서 그런지 몰라도 갑자기 저놈의 몸에 신이 강림하신 것이야." 이쯤 되면 사제들은 혼란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음 하하하. "저놈은 웬 놈이냐!" 드디어 노 마물 등장이시군. 저 자가 아무리 관련이 없다고 해도 이번 쇼의 배우로 행동해 주어야 한다고. 헤헷. "아 하하하, 감히 나 자애의 신을 무시하느뇨? 너희들은 어리석기 그지 없도다! 한 번 내 모습을 보고도 나를 못 알아보다니!" 사람들이 당황한 건 지극히 당연했다. 아직 몸이 덜 회복된 사비르 역시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고, 아마도 한 켠으론 이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저놈이 미쳤나 부다' 하고. "무…슨 증거가 있나!" "증거?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 이곳에 병이 돌고 있던데 내 그 병을 없애 주겠다!"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꽤 알려진 듯 동요하는 모습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한 번은 너희를 모두 치료해 주겠지만 그 다음에는 내가 알려주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이 괴질을 고칠 수 있으리라. 이 병은 어느 사악한 자가 퍼뜨린 것이다! 내 그를 용서치 않으리라! 그를 끓는 불에 세 번 구워, 다시 꼬치산적을 만든 뒤에 지옥의 마귀들에게 던지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보통의 신도들은 무서워서 떨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아무에게도 그리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앗, 저건 엘베르스 군이 아닌가? 가장 무능해 보여서 당첨된, 행운의 사내. 아직 건재하군.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자 그는 계속 열을 냈다. 저런 놈을 믿느냐는 둥 어쨌다는 둥… 잉. "내 권능을 보여 주겠다!" 마족이라고 해서 치료 마법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단지, 마력이 몇 배로 더 소비되기 때문에 대부분 간단한 회복 하나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 무제한에 가까운 마왕의 마력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 염려 없다. 내 몸에서 엄청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어차피 신의 사자라는 마왕의 힘이 인간을 훨씬 상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번 일로 잘못하면 내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모르지만, 뭐 이젠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자. 내 눈앞에 있는 사람부터 구하고 보는 거지. 빛은 마치 이 신전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더 퍼져 나가서 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치 기적같이 아름다웠다. 오색의 빛이 도시를 감싸고, 다시 그 빛 사이에 퍼지는 맑은 기운은 마치 이 도시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았다는 걸 모두 잊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걸치고 있던 두건이 아래로 흘러 내렸지만, 힘의 조절에 실패해서 거의 무제한의 마력이 방출되고 있는 내 상황으로는 그걸 챙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신…이다!" 한 사제가 소리를 질렀다. 확실히 저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었지. "신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신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로서는 이 힘을 다시 거둬들이는 게 더 힘든 작업이었다. 서서히 힘이 잦아들면서 도시에 쌓인 기적의 힘도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기적이다!" "와아!" 사람들의 환성이 울려 퍼졌지만, 빨리 할 말을 마쳐야 했다.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나는 말을 이어야만 했다. "모두 듣거라, 이 병이 다시 재발할 때는 당근을 잔뜩 먹이면 살아난다." 이건 좀 황당하지만 어쨌든 당근이면 된다. 주스도 되고 당근찜도 된다. 튀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아, 만세!" 왜 사람들은 좋으면 만세를 하는 건지 난 절대 모르지. "아……." "라플!" 지상이 빙글빙글 도는 걸 느끼면서 마력 고갈의 증세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기절해서 편하긴 했다, 젠장. "괜찮나?" 불빛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불이라고 해서 잘 보이는 건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사비르와 피르, 페르, 대사제 영감이었다. "이거 참, 다 여기 계시는 건가요? 지금 시간이……." "아, 저녁이지. 내일이 바로 무투회가 있는 날이고. 꼬박 하루를 자더군." 영감은, 인간으로서 신을 접했으니 아마도 매우 힘든 일이었을 거라고 역설했다. 문제는 사비르와 피르는 내가 완전히 뻥친 거라는 사실을 안다는 건데 말야. "범인은 잡혔나?"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의외로 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장로 중 세 명이 결탁해서 한 일이었는데 모두 진실을 밝히고 바로 자살해 버렸어. 그래서 배후라든지 하는 건 전혀 알아낼 수가 없었어." 젠장, 그게 궁금했는데. 아니지, 만약 정말 배후가 존재한다면 그가 누구였든지 내 앞에 다시 나타나겠지. 과연 그게 누구일까나? 검은 악의 재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확실한 경험으로 내 알고 있고, 인류의 숙적인 마왕이 나니까 나는 아니지. "그래서 결국 당근이 꼭 식사에 끼게 되었고, 열병 환자에게는 당근이 좋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건가요?" 한숨이 나왔다. 난 당근이 제일 싫던데 왜 나까지 당근 찜을 씹어먹고 있어야 하는 거냐. 여기서 밥 먹고 가자고… 잉. "여기서 하루 잤으니 메데이레나가 날 죽이려 들 거야… 으." 선물로 준 당근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있는 힘껏 문을 열었다. 그러나 집안은 불도 켜져 있지 않고 침묵에 싸여 있었다. 어찌 된 거지? 뭐, 나 빼고 다 놀러 간 모양이군. 음, 율지스 이놈 스승을 팽개치고 나가다니. 그래도 기다려 주지. 외박을 한 데다가 내일은 무투회 본선이 있으니까 참자. "음, 당근이나 쪄놔야겠군." 한 시간이 흘러도 메데이레나와 율지스는 안 오고 밤은 계속 깊어만 갔다. 그들을 기다리던 난 피곤한 나머지 그만 식탁에서 곤히 잠들고 말았다. 앞에는 당근 찜이 가득하고. 꿈에서 나는 키히의 환영을 발견했다. 쫓아가고 쫓아가도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키히가 내게 물벼락을 씌웠다. "으에에엑, 웬 물이야!" 갑자기 어디선가 살기가 흐르고 나를 바라보는 몇 개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메데이레나가 바가지를 들고 있는 걸로 봐선 아마도 쟤가 물벼락을 씌운 모양이네. 옆에는 율지스와 카오도 있고. "……." 갑자기 메데이레나가 문을 열고 나가더니 바가지를 던지고 위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바가지는 멋지게 중력의 법칙을 실현하면서 카오에게 박혔다. "으엑!" "스승님, 대체 어디 가셨던 겁니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율지스는 다른 날과 다르게 무척 엄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카오는 바가지의 타격에서 금세 회복되어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말게. 총각 시절의 기쁨을 마음껏 맛봐야지 않겠나? 하하핫." 그런 너는 결혼도 못했잖아. "그만두세요! 그 동안 엄청난 일이 있었단 말입니다! 갑자기 걸어가던 사람이 어마어마한 빛에 휩싸이더니 갑자기 시체가 되어 쓰러지지를 않나……!" 에구구. "그거 내가 했는데……." 이번엔 율지스가 거세게 김을 뿜었다. 너 새로운 직종을 선택해도 되겠다. 연기사……. "제정신입니까! 누가 흉수인지 제대로 모르고, 더군다나 언제 어디서 또 엘메인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쫄아 있던 내 앞에 불쑥 카오가 나섰다. "엘메인이 내연의 애인이야?" 참아 줘, 그 엘프 변태랑 애인이라니. 아는 것도 싫더라. 키히의 동생이라는데 하는 짓은 그 마왕 자식이랑 완전히 닮은꼴이라고. "그는 라플을 죽이려고 한 자입니다." 카오는 완벽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성안에 있는 괴물 문제는 완전히 비껴갔잖아. 하하하, 그걸로 된 거지 안 그래?" 율지스는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전 시장에 있었는데 확실히 봤습니다. 성에는 검은 방어막이 쳐지고 그 빛에 휩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건 암흑의 방어막이라는 거죠." …내지는 결계겠지. 방어막일 수는 없다고. 그걸 하려면 최소한 마왕과 계약하거나 마왕이 하거나, 아니면 키히 정도? 그 외에는 없다고. "아마도 결계겠지. 그걸 만든 놈도 대단한 놈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아마도 잘 해결될 거야. 내일 무투회가 열리면 내가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잖아. 모두에게 당근주스를 퍼부어 주면 그만이라고." 먹이면 확실하겠지만. "그럼 지금부터 주스를 만들어야겠군요. 당근은 다행히도 지금 많이 나오는 철이니 참 잘 되었네요. 카오 님, 우리 당근을 사러 갑시다." 이 밤에? 내가 의아해했지만 그들은 서둘러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당근을 풍족히 구했다며 떠들어댔다. 그들 말에 의하면 잠시 빌려온 것뿐이라고 했다. 민족의 건강 위생을 위해서 당근 밭에서 뽑아 왔다나. 정작 정신 구조에 개선이 필요한 건 이들이 아닐까 싶군.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겠어. 떡잎부터 확실히 교육을 시켜야지. 음 하하하. "메데이레나, 자?" 그녀의 방은 여전히 작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문간에 서서 나는 생쇼를 하기 시작했다. "나 아무래도 너에게 제일 미안해." 말하고 나서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용서해 줘.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키히가 저렇게 된 것도 다 내 탓일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난 또 그런 일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부탁이야.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밤의 정적만이 감싸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말했다. "대신 나도 널 지켜 줄게. 다시는 다치지 않도록 혹은 너에게 슬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날 용서해 줘. 내일 아침이 되면 아마도 힘든 하루가 시작되겠지만 힘들다고 해서 날 버리지는 말아 줘. 이젠 배신당하는 건 너무 싫어." 이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 "차라리 예전에 마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프라운이나 다른 동료들이 배반했다는 것도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은 키히가 저렇게 되는 모습을 보지 않게 되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그리고 아무 것도 느끼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지. "하지만 난 이제 알겠어. 신이 나를 살린 이유는 내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들을 이기고 다시 살아 보라는 의미라고. 그리고 나, 널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메데이레나의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서서히 말했다. "그러니 날 위해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겠니? 너무나 이기적이고, 나이 많이 먹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야. 하지만 그래 준다면 좋겠어." 밤의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계단을 지나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여기서 뭐해?" 메데이레나는 방에 없었다. 우웃, 일장 연설을 토해 내놓는 동안 그녀는 여기 없었던 것이다. 제기랄! "아…니 그냥, 아직도 화났어?" "아니야. 뭐, 라플은 워낙에 바쁘잖아.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 그리고 다시 그런 몰지각한 행동을 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그랬다간 나도 키히처럼 귀신이 되어 대륙을 멸망시켜 줄 테니까!" 이거 참, 키히야 이 애는 너랑 닮은 구석이 참 많이 있구나. "하하하, 그거 참 무서운데? 내일 응원할 표는 사놨어?" "응, 기대하라고!" 당근 비가 내리는 하루가 되겠군. 근데 하필 당근인 까닭은 뭐지? 당근은… 그러니까 최근에 생긴 채소의 하나이다. 듣기로는 나바스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발칙하게도 신 이름이랑 똑같잖아. 하지만 신의 본래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지. 뭐, 신의 입장에서야 좀 못마땅하겠지만. 근데 그 종이에는 왜 고대어로 굳이 그렇게 적어놓은 걸까? 새로 생긴 채소를 누군가 알고 있다는 얘긴데……. "이렇게 졸린데 아침이라니……." 씨는 뿌린 만큼 거두는 법이다. 그걸 확실히 오늘 실감하게 될 줄이야. 어제 늦게 온 데다가 온갖 생쇼를 해서 결국 오늘은 이렇게 모두들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응?" 어디서 단내가 집을 진동하고 있었다. 나의 어벙한 제자 율지스와 그의 유쾌한 패거리인 카오가 열심히 당근즙을 만들고 있었다. "율지스, 시방 뭐해?"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 조직원들에게 모두 배달시키고 있습니다. 음 하하핫, 이 정도면 궁전을 정화하기엔 부족함이 없겠죠? 자, 모두 맡기세요!" 하나도 믿음직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불안하기까지. 과연 오늘 일은 잘 될까? 잠시 뒤, 신병 소속원들은 통 하나씩을 들고 줄줄이 찾아와 당근주스를 가득가득 담아서 가져갔다. 대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더란 말인가. "주스 장사해도 되겠네." 율지스가 고개를 들어 방그레 웃으면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미 시작하고 있죠. 매표소 근처에서 팔고 있는걸요." 땀 나는군. "자, 그럼 가보라고. 자넨 먼저 가서 준비도 하고 그래야 하지 않나?" 난 지금 매스게임 준비하러 가는 게 아니라고. "그래요. 이따 관중석에서 봬요!" 메데이레나는 왠지 방글거리고 웃고 있었다. 우, 내 인생이 왜 이리 처절해 보이는 거냐. 성 근처에 가자 입구 바로 앞에서는 익숙한 얼굴이 당근주스를 아주 싼값에 팔고 있었다. "어, 라플 아냐. 이거 한 잔 먹어. 너한테는 공짜라고." 뭐라고 하리. "예, 감사합니다만 사양하죠. 하핫." 그는 갑자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가 세상을 구하는 거네! 명심해!" 대체 카오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한 건지 몰라도, 여하튼 대단하군. 이렇게 빨리 세계 방위대 조직을 구성하다니. 그럼 난 행동대장쯤 되겠군. 성을 바라보자 한숨이 앞을 가렸다. 일단, 확실히 율지스의 말대로 못 보던 결계 하나가 쳐져 있었는데, 매우 똑똑한 놈이 친 듯했다. 할 수 없군. "음, 저기 제가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요." 당근주스 장사는 갑자기 기뻐했다. "내 뭐든지 하지!" "음, 나중에 율지스가 오면 이 성벽을 쭉 따라가다 보면 작은 돌무더기가 있는데, 거기에 당근주스를 쫘악 부으면 된다고 그에게 전해 주세요. 하지만 대회전에 부으면 절대 안 되니까 그 점도 전해 주시고요." 그는 불타올랐다. "물론이지!" 그가 너무 큰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주변의 위병들이 모두들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우습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스 장사 아저씨에게 말을 마치고 바로 성내에 마련된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엔 커다란 천이 걸려 있었는데, 열 여섯 명의 용사가 싸우는 대회라고 써 있었다. 기사들은 곳곳에서 오늘의 행사를 위해 바쁘게 뛰어 다니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기사 몇몇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장면도 보였고, 하인들은 의자를 설치하고, 칸막이를 세우는 등 대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시합 참가자가 벌써 와서 뭘 어쩌겠는가? 나의 훌륭한 검을 닦아서 윤이나 낼까… 헉. "맞다, 검은 신전에서 괴물을 잡을 때 사용했었지." 그리고 안 빠져서 그냥 헌납하고 왔는데, 그러고 나선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으, 검도 없이 기사대회에 오는 인간은 나밖에 없을 거야! "앗, 검을 안 가져왔군. 다시 갔다 와야지." 한 기사가 중얼거리면서 나갔다. 오, 그래 저자는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아, 그래! "저, 여기 아젠 기사단장님을 뵙고 싶은데요. 급한 일입니다." 병사 하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성안으로 안내했다. 이 병사는 말이 좀 많았다. "아, 음산하죠? 최근에 성내에서 실종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요. 뭐, 이 복도는 그래도 기사단장님이 계셔서 좀 낫지만요. 벌써 한 세 마리는 잡았을걸요." 그의 검술이라면 하나씩 상대하는 한 질 이유가 없지. "자, 이 방입니다. 기사단장님, 뵙고 싶다는 분이 계십니다." 곧 방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는 다시 돌아가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날 반갑게 맞았다. "아, 어서 오게나. 자네 활약은 내 여기서도 들어 알고 있었지. 성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네. 적의 상당 부분도 많이 처리되었을 거야. 그리고 기쁜 소식이 또 있네. 왕비님이 갇히신 곳을 알아냈고 말이지." 그의 눈에는 뿌듯함과 충성심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응, 뭔가? 얼마든지 말하게나." 계속 방글거리는 걸로 봐서 그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 검 하나만 주실 수 없습니까? 최대한 얇은 걸로." "에? 하지만 난 중 검이나 장검밖에는 쓰지 않네. 음… 아, 그래 자네 마법을 쓰지 않나? 그럼 그걸로 가볍게 만들면 되지 않나. 내 이 검을 줄 터이니 그렇게 해서 사용하게." 그러고는 보기에도 엄청 무거워 보이는 검 집을 가지고 있는 검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 검에는 나팔꽃이 문양으로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웬 나팔꽃? 보통은 독수리나 용 같은 걸 조각하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싸 보이긴 하네. 그러고 보니 마법 쓸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었지? 나 혹시 바보? "이건 무슨 검입니까?" "원래 피스트레이카에 가야 할 물건이지. 전하께서 하사하는 검이지만, 지금은 하사할 상황이 아니지 않나. 혹여 적의 손에 들어갈까 봐 내가 맡아놓고 있었지. 맘에 드나?" 검은 푸른 청광을 띄고 있어서 아주 비싼 거라는 사실을 몸소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내 영지에 있는 보검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은 검이었다. 내 영지에 있는 검은 그야말로 아주 오랜 세월을 제련해서 우리 가문에서만 내려오는 검이니 아무래도 상대가 되지 않지. "꼭 전하를 구해내겠습니다." 그 푸른 청광은 모든 것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투명하게 보여지고 있었다. 오늘은 세이에게 모든 것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밝혀내리라. 누가 이런 사악한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32. 영광의 검 한줄기의 빛을 발하는 그 검의 이름은 '영광의 검'이라 하였다. 그건 과거 트라이너의 왕이 만들게 했으며, 그 검의 최초 소유자는 피스트레이카 공작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후 그 검은 세인 푸르체트 경에게 넘어가서 대대로 푸르체트 가의 가보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 검을 본 사람들은 그 검 집과 검 표면에 새겨진 나팔꽃 무늬를 잊지 못하는데, 그것의 아름다움은 가히 어떤 꽃보다 더욱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그 검은 영광과 희망을 안겨주는, 마치 새벽에 처음 피는 꽃을 생각나게 한다고 전해진다. 검 수집가의 평 나는 그와 적당히 작당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어차피 그의 도움 없이는 이번 일은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원래 내부의 적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법이니까. 그에게 당근 찜을 한 바가지 안겨 주면서 난 제의했다.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이걸 먹이면서 인원을 규합해서 적에게 맞서 싸우자고. "좋습니다. 그럼 그 동안 저흰 왕비님을 구해낼 터이니 부디 전하를……."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의 이 전하 구하기 계획의 실현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거사일은 오늘! 서서히 시간이 흐른 듯,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다. 왕궁의 정원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의아하지만 이건 전통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이 나오는 것도 전통이다. 왕비는 전통적으로 나오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대신들도 대부분 참석하는 게 관례이며, 시작 테이프는 재상이 끊게 되어 있다. "기대되는구만. 아무래도 오늘의 일은 상당한 이벤트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전하도 나오시고 말이지. 하하핫." 기사들도 모두 기쁜 듯이 깔깔대고 있었다. 단지 내 맘만 두근거릴 뿐. 일련의 계획은 일단 대회가 끝나서 시상식이 거행되고 첫 번째 축포가 울리면 그와 동시에 당근주스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괴물이 된 사람들이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시민들이야 어차피 궁에 있었을 리가 없지만 일반 귀족들은 대부분 성에 있었을 테니 괴물이 된 자도 있을 것이 아닌가? "자, 모두들 착석해 주십시오!" 궁전의 정원은 그야말로 사람의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근래 들어 트라이너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모두 썩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기에 이런 행사를 벌인 것이었다. 몇 년만에 벌어지는 축제이니 사람들이야 오죽 기쁘겠는가. 게다가 스포츠는 본래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특징이 있지 않은가. "자, 선수들은 이제 자신의 대기실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내 대기실은 모두 두 명이 함께 쓰는 곳이었다. 뭐, 흰색 종이를 뽑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기에 별로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가 나를 보자 처음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쳇, 평민이라니 기분 더럽군." 갑자기 당근을 이놈의 입에 집어넣어 주고 싶은 욕망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놈에게선 마기는 커녕 땀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럼, 오늘 트라이너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축제가 시작됨을 알립니다!" "와아아!" 시합의 개회식을 알리는 축포가 쏘아지고 어느새 사람들의 환성이 들려왔다. "먼저, 무투회가 이곳에서 열리게 됩니다. 무투회는 모두 예선전을 거친 열 여덟 명의 용사가 서로 일 대 일 형식으로 싸우게 됩니다. 한 번 지면 무조건 탈락입니다. 승자에게는 영광이! 패자에게는 위로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함성이 다시 미여터지도록 울려왔다. 그렇거나 말거나 내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먼저, 규칙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 점이 이상했고 재상의 기조 연설 또한 아직 없다는 점이 내 머리 속에서 체크되었다. 뭐, 테이프를 끊기야 하겠지만. "여기 국왕 폐하께서 나오셨습니다. 모두 열렬하게 환호해 주십시오!" "와와, 국왕 폐하 만세!" 음, 나오긴 했군. 국왕은 잠시 일어나서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의 뒤에는 정확히 기사 세 명이 서 있었는데… 뭐,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아보겠군. 시체를 세워놨네. "그럼 재상께서 테이프를 끊어주시겠습니다!" 재상인 내 제자 세이가 나와서 오색 빛의 테이프를 끊자 사방에서 색색의 종이가 뿌려졌다. 모두들 열렬하게 환호하는 가운데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이, 빨리 시작이나 할 것이지. 평민 녀석 냄새가 나서 더러워 죽겠다고." 내가 대 공작이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해지는군. 뭐, 그렇다고 해서 널 어쩌려는 건 아니지만 말야. "곤란하네요, 전 평민이 아닌데요." 그가 날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라플 헤제로이스!" 환호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나를 멍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이였다. 그는 멍하니 나를 응시했고 허공 중에서 마주친 나와 그의 시선은 한참 동안 공중을 맴돌았다. "뭐 하나, 어서 나가지 않고?" 한 병사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세이는… 결백하다. "예." 검에는 경량화 마법을 걸어놓아 사용하기에 좋았다. 거의 과도 수준이었는데 역시 검은 비싼 값을 한다. "후후후, 날 보고 겁을 먹은 게로군. 물론 그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잘못 짚었다! 난 겁먹었다고 용서하지 않는 위대한 프로로리우스 가문의……." 이런 놈하고 싸워야 하는 내 신세가 갑자기 무지막지하게 쓸쓸해졌다. 나도 그에게 인사 비슷한 걸 하고 싶었지만, 온통 혼자 떠드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쳤다. 감독도 조금은 열받았는지 그에게 주의까지 주고 말았다. "그만 소개하고 공격하시오. 시작!" 우리 일행이 보이지 않는 걸 봐선 아무래도 잘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특별히 마련된 귀빈석 근처에는 유별나게 주황색 풍선이 많이 위치하고 있었다. 음 흐흐흐, 착착 잘 진행되는군. "나의 검을……." 아마도 나머지 말은 받아라가 아니었을까나? 그도 나의 검을 보았는지 재빨리 말하다 말고 옆으로 비켜섰다. 내 검은 검집째 그의 옆구리를 공격해 들어갔다. "오오오오!" 경기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감탄사가 울려왔다. 사실, 시합 내용 면에서 보면 나의 실력은 워낙 출중하고 상대방은 실력이 너무 형편없는 나머지 경기 자체가 시들시들했다. 내가 좀 경기 효과를 가미해서 그렇지 내용은 전혀 없는 싸움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단, 어떻게 통과했는지도 우스울 지경. 설마, 그의 필살기는 기선 제압이었던 걸까? "라플 헤제로이스 승!" 사람들 중 평민 계급의 확실한 환호가 이어졌다. 나 평민은 아니라우. 뭐, 그 비슷한 생활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럼 다음 나오십시오!" 정작 내 다음에 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일단, 귀족 팀에 있던 사람은 검을 뽑다가 손이 베어서 길길이 날뛰었으며, 평민 팀으로 나간 사람은 검을 들고 설치다가 우연히 옆에 있던 날카로운 못에 손을 찔렸다. 싸움은 엄청 시시했는데, 그야말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난 다음이다." 끝까지 고자세라니. 응? 다음이라면 나랑 맞붙었어도 일말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그 중 검의 사나이와? "노발스 테레에 경의 승리입니다!" 아, 귀족 친구가 어떻게 우연하게라도 이긴 모양이지? 뭐, 다 유쾌하게 이겨서 기분은 좋군. "그럼 평민, 잘 있어라. 나의 승리를 지켜 봐다오." 착각이 지나치면 병이 된다고 그런데……. "자, 그럼 시작!"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무시무시한 눈길로 서로를 응시했는데, 그게 또 걸작이었다. 눈싸움이 참으로 멋졌으니까. 아울러 검 싸움도 괜히 기대되는 인간들이었다. 먼저 움직인 놈은 중 검의 사나이였다. 하기사, 그의 검이 무거우니 먼저 움직여야 할 듯도 했다. 아무래도 속도가 딸리지 않겠는가? 그러자 귀족 풋내기의 날카로운 공격이 허리와 어깨를 중심으로 연달아 일어났다. 딴 건 몰라도 약점을 찾고자 하는 동작이 분명했는데, 아무래도 중 검의 친구는 이미 약점을 찾은 것 같았다. "훗, 꺼져라!" 굳이 꺼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형씨. 하지만 검 솜씨는 괜찮으니 봐주지. 아무래도 순번으로 봐선 준결승에서 나랑 붙게 생겼구만. 가만, 16명 중에서 10명이 기사가 되면… 어이없구만. 이런 어중이떠중이들도 모두 기사가 되는 건가? 참으로 어이없어. 귀족의 솜씨도 괜찮았지만 저 중검의 사내는 나에 필적하는 수준이니 당연지사 이길 턱이 없었다. 쯧. "예, 그럼 승자는 무트 렉입니다!" 헤, 그는 나에게 살짝 웃어 보이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결국 붙기는 하겠는데. 여기선 저렇게 대단한 놈이 없으니까. "나 졌어." 귀족 청년이 갑자기 나보다 더 호리호리해져서 나타났다. 아무래도 심적 충격이 상당했던 듯. "아하하, 상대방 실력이 너무 뛰어났어. 하지만 너도 괜찮은 실력이었다고." 위로성 발언 백퍼센트다. 뭐, 괜찮기는 했지. 앞에서 이겼던 어중이떠중이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으니까. "그렇구나, 나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거야?" 엇……. "그래그래. 어서 가서 열심히 수련을 쌓으면 다음에는 꼭 이길 수 있을 거야?" 말이 왠지 의문조로 종결되고 있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희망에 들떠서 사라져 갔다. 저런. 그 다음의 싸움은 그야말로 눈 버리기 십상이었다. 그 뒤로 다섯 번 벌어진 싸움 중에서 오직 쓸 만한 기사는 내 눈에는 2명 정도만 보였다. 그나마 둘은 제비뽑기 운이 없었던 듯 같이 붙게 되어서 그만 한 놈만 올라가게 되었다. 이 사람은 좀 많이 수상해 보였다. "자, 이제 준비해 볼까?" 중간에 잠시 식사시간이 있고 나서 시합은 다시 이어졌다. 이제부터 그야말로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4강 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랑 붙는 놈은 운이 없게도 아까 우연히 통과한 그 귀족 청년. "자, 선수 앞으로!" 미적거리면서 앞으로 나갔다. 재상은 저 멀리 왕 근처에 앉아 있었는데, 주변에는 귀족들이 상당히 많이 앉아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살짝 미소를 흘리면서 말하는 순간 어느 한쪽에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난 처음엔 뭔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와, '라플의 비밀 일기'의 주인공이다!" "역시 멋져요!" 대체 메데이레나는 무슨 짓을 한 거냐… 으. "자네 인기 최고군." 이젠 아주 감독관까지 날 보고 비웃었다. 뭐, 좋게 말하면 부러움의 눈길을 보낸 거겠지만 난 하나도 기쁘지 않다고. "시작!" 자, 이 허약한 상대를 어떻게 해야 팬 서비스 차원에서 멋지게 끝내줄 수 있을까? 잠시 궁리한 나는 이번에는 놀라운 도약을 보여 주었다. 절대 마법사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높게 점프해서 순식간에 상대의 등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의 내 전매특허를 말했다. "항복?" "…항…복." 이렇게 쉽게 우승을?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한 법이다. 지금도 이렇게 했으니 이따 결승전에서는 더욱더 화려하게 해야 할 텐데 어쩌나. "승자는 라플 헤제로이스!" 심판관이 나의 승리를 선포했다. "꺄아아아아악!" 때론, 괴물에 의한 비명보다 이런 여자들의 함성이 더 두렵게 느껴진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꺼이꺼이. 아직까지는 별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으면서 경기는 계속되었다. 다음 경기에서는 중 검을 쓰는 무트가 멋지게 승리해서 결국 나와 만나게 되었다. 뭐, 그래 봐야 허술한 상대였지만. 이제 준결승 장은 서서히 흥미진진한 감동의 도가니로 들끓고 있었다. 별로 변동된 사항은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들끓고 있었고, 귀족석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4강에 올라오기까지 귀족은 겨우 한 명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 이제 고대하시던 준결승입니다!"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나와 무트라는 기사는 바로 마주 보게 되어 있었다. 뭐, 나는 절대 기사 서훈식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나? 난 바르하잔의 기사인 데다가 검술도 많이 알고 있는데. "아, 이제 곧 준결승이네. 이길 자신 있어? 그 기사 대단해 보이더라." 어느새 메데이레나가 방글거리면서 내 대기실에 와 앉았다. "하하하, 현역 기사가 지면 곤란하지. 그보다 넌 여기에 있어라. 그럼 적어도 잠시 뒤에 일어날 그 당근주스 비는 피할 수 있잖아." 그녀는 이내 생글거렸다. "헤헤, 그러네. 이거 걱정해 주는 거지? 아무리 사소한 거라고 해도 난 너무너무 기분 좋아!" 여기 어딘가에 세인이 갇혀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렇지. 에구구, 난 아주 늙어서 고생을 사서하는 타입이란 말인가. "자, 그럼 양 팀 선수는 이제 앞으로 나오십시오!" "와!" 심판관의 목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은 다시 큰소리로 환호했다. 목도 안 아픈가? 무슨 목소리 내는 마법 도구라도 사용했나. 아, 그런 걸 개발하면 적어도 떼돈 벌겠어. "꼭 이겨." 백 마디 말보다 한 마디 말이 더 기분 좋게 들릴 때란 바로 이런 때인가 보다. 뭐, 할 수 없지. 이겨 드리지요, 하하하. "너와 싸우고 싶었다. 좋아, 겨루자! 못 다한 승부를 내자!" 날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땐 말이지 과도를 들고 싸웠었다고. 지금하곤 상황이 틀리지. "좋아, 널 위해 검을 뽑아 주마." 그래도 내가 인정한 검사이니 만큼 예우를 다 해야 하겠지. 난 천천히 검 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번쩍거렸다. "좋은 검이군. 하지만 내가 이긴다! 간다, 봐주지 않는다!" 언제는 봐줬냐? 왠지 의구심이 풀풀 날리는 대사를 하면서 그는 바로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검이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전혀 무게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마법도 안 걸려 있으니 뭐, 대단하지. "후후후." 그의 검을 정면으로 받는 건 사실 미친 짓이다. 하지만 왠지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했다. 그의 검과 내 검은 맞부딪치면서 엄청난 소리를 주위로 흘려 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겨우 손가락 하나 정도의 사이를 둔 채 눈을 빛내고 있는 우리를 응시했다. 고놈의 손가락 길기도 하지. "제법이군." 난 힘들어 죽겄다! 재빨리 다시 검을 떼고 옆으로 빠르게 돌자, 그도 놀라운 속도로 나를 따라 움직였다. 힘으로 승부가 되지도 않는데 스피드도 엇비슷했다. 과연 대단한 놈이다. 이번에는 그의 검이 빠르게 선제 공격을 펼쳤다. 게다가 검은 주위의 모든 바람을 집어삼키듯이 번쩍이고 나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다행히, 난 그 검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다음 공격에 대해서는 미처 방어할 수 없었다. "저…런!" 사람들의 소리가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헤, 너도 제법이지만 난 대 마도사이자 바르하잔의 빛이라 불리는 존재다! "이야아압!" 검이 허공을 맴돌면서 그의 주변을 압박해 들어갔다. 어느새 그 스피드에 딸려 올라간 중 검은 놀랍게도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다. "이런, 내가졌잖아! 너 이제 보니 대단하잖아!" 내가 한 필살기였는데 당연히 대단하지! "너도 참 대단한 놈이다." "고맙군, 꼭 우승해라. 날 이기고도 진다면 용서하지 않겠어." 이거 땀나는군. 멋진 녀석인데. 이 나이가 먹어서 봐도 괜찮은 상대였어. 왕년의 나라도 한 번쯤 고민하게 할 만한 상대야. 여하간, 이 잡다한 절차를 거치고 경기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 말은 우리의 화려한 당근주스 파티가 시작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지. 다른 준결승에서는 그 꽤 하는 평민 출신 기사가 귀족을 꺾고 승리했다. 결국, 결승전은 평민 파티가 되었다는 거다. "자, 그럼 대망의 결승전입니다! 양 선수 앞으로!" 저 멀리 객석 앞쪽에서 무트가 앉아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좋은 광경이지. 아까워. 내가 한 100년 정도만 젊었다면 야자 트고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친구가 되는 데는 나이가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아? "잘 부탁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꽤나 깨끗한 눈을 가진 녀석이었다. 난 이런 눈을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시작!"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그 사내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검을 짧게 휘둘렀는데, 그때 나는 검을 미처 뽑지도 못했다고! "이런!" 그녀석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차가운 갈색 머리가 시리도록 눈에 박히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 정도입니까? 실망이군요. 난 좀 더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오늘 당신을 죽여드리죠. 계획에 방해되는 자는 살려둘 수 없습니다." 그의 검이 화려하게 번득였다. 몸 주위에 재빨리 방어막이 쳐졌고, 그의 검이 퉁겨나갔다. "젠장, 검도 안 뽑았는데 너무 하는군!"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오르며 배시시 웃었다. "하하하, 마법이라면 제가 더 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그의 한 손에 마력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 구는 정확히 나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너 대체……!" 난 순간적으로 방어막에서 뛰어 올라 마력탄을 피해야 했다. 맞대응하기 위해서 마법 화살을 녀석에게 날렸으나 놈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 이름은 아까 소개했습니다." 날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하구만. 그렇다고 마력에 있어서 마왕과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만 내겐 크나큰 핸디캡이 있었다. 바로 이 주변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싸울 수는 없다는 점. "이번에 또 갑니다!" 그의 입에서는 아주 빠른 주문이 흘러 나왔고, 주문에 따라 마법의 화살이 여러 개 생성되었다. 그 화살들은 정확하게 나에게 날아들었다. 문제는 화력이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나도 할 수 없다!" 순간적으로 싸우는 장소 바깥쪽으로 전체를 두르는 거대한 방어막을 생성시켰다. 그런 다음 난 즉시 녀석을 향해서 거대한 피의 주문을 부르기 시작했다. 상대가 날 죽이려 한다면, 나도 맞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화염이여 어둠이여, 나의 명을 받아 오라!> 거대한 지옥의 불길이 지상에서 소용돌이치며 거세게 올라왔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는 당혹해하는 표정이 어렸다. 그리고 경악에 넘치는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당신… 라플인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방어막 덕에 사람들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지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서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군. 넌 바로 그 엘메인이로군." 화려한 불길이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저 놀라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거 모습을 감춰 봤자겠군요." 그의 모습이 흔들림과 동시에 키히와 비슷한 얼굴을 한 모습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경악에 떨었고, 엘메인을 아는 율지스나 세이의 놀라움은 대단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 엘메인. 너의 음모가 무엇이든지 더 이상 사람을 해치는 것은 용서 못한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여도 좋습니다. 당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살아서 뭐 좋은 일이 있죠? 애인이 배신하고 제자도 배신하고… 왜, 더 살고 싶으셨나요?" 엘메인의 표정과 목소리는 매우 슬픈 빛을 띄고 있었으나, 나에겐 그저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저놈은 날 위해서 내 몸에 손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날 위해 나를 무너지는 성에 가두려 했지. "엘메인, 아직 넌 사람을 모르는구나. 어리석도다!" "할 수 없군요. 오늘은 세이를 죽이러 왔건만… 나의 어둠의 자식들이여, 어서 일어나 닥치는 대로 죽여라."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엘메인, 넌 정말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군. 나의 방어막은 절대적이라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가지 못한다. 물론 마법도. 마왕에게 마법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당신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붉은 강은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수수께끼 내지 마! 용서가 안 된다! 왜 엘프랑 마족은 저렇듯이 수수께끼를 밥보다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다 막아 주지!" 거대한 불길이 그를 감싸 돌았다. 엘메인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되려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다. "엘메인!" 그는 키히의 동생이고, 몇 안 남은 엘프였다. 그보다 하나의 생명이라는 점이 내겐 더더욱 깊게 느껴지고 있었다. 살려야 한다! "젠장!" 그를 끌어올리자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웃었다, 아주 조용히. "당신을 정말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붉은 달과 붉은 강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방어막이 점점 깨지고 있었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의해서. "넌!" 허공에 한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나도 잘 아는 놈이었다. "전대 마왕이라고 불러 주겠나? 나의 사랑하는 라플." 닭살이 주르륵 돋았다. 내 앞에 있던 엘메인은 그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허공에 둘의 모습이 두둥실 떠 있었다. "그 사랑 어쩌고는 집어치우시지.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이게 지루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나?"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신음성이 들린다 싶더니 그의 앞에 있던 엘메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내 선물이네. 이제 이 인형은 쓸모가 없어졌거든. 다시 만날 땐, 좀 더 성장한 모습으로 보길 바라네. 자네 모습, 아주 보기 좋지만 말야. 하하핫!" 그의 광소가 울려 퍼지거나 말거나 나는 엘메인을 잡아챘다. 그의 등에서는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엘…메인!" 그는 나의 그녀와 닮아서 더더욱 괴로움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 바로 처남이 되는 몸인데 말야. "…라플 님, 전 이미 죽은 몸입니다. 저도 다를 게 없는 인형. 그러나… 그러나 누나를… 누나를 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군요… 부탁이 있어요, 들어주시겠어요?" 나의 눈물이 서서히 흘러서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좋아, 뭐든지 들어주겠다." "제… 누나를 부디 깨끗이 죽여주세요. 그렇게 하지 못하신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살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더 이상 당신의 맘을 아프지 않도록……." 그는 완전히 잠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이 완전히 감기고 나자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운 축포가 울리고 붉은 색의 꽃비가 내려왔다. "죽…었군." 마왕은 사라지고 엘메인은 죽었지만 아직 나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순간 주스가 쏟아지자 곳곳에서 사람들의 기형적인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왕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은 모두 쓰러지면서 시체로 변했다. 사람들은 이유를 몰라 당황해했고, 순간적으로 장내는 혼란한 상황이 되었다. "스승님." 누군가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세이는 3년 동안 이제 의젓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역대 최연소 재상이라지? "난 무능한가 보다." "아니에요. 살아 계셔서 고마워요." 세이의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제자를 울게 만드는 나쁜 놈이지. "그래 무사했구나." "그거 나중에 꼭 알려 주세요. 불꽃이 너무 멋졌거든요." 세이는 어느새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녀석이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승님, 나이 값 좀 하세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그 나이 먹어서 무투회라니, 노인정에서 운다고요. 그리고 저 주스 연출은 정말 형편없어요. 어떻게… 하지만 전 감동했으니까 괜찮아요." 이녀석을 패줘야 할지 쓰다듬어 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엘메인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자." "예." 이제 와서 생각이 난 건데, 예전에 키히가 모험을 하던 당시, 나에게 어렸을 적의 동생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자신을 많이 닮은 그 동생은 미처 성인이 되기도 전에 마족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시체마저 도난 당해서 매우 가슴이 아팠다고 항상 말하곤 했었지. 엘메인은 어느새 산산이 먼지가 되어서 사라져 갔다. 이 아이는 시체조차 남지 않는 가련한 존재였다. "세이 이놈!" 율지스가 게거품을 물고 뛰어오고 있었다. 저 녀석은 계속 할 일없이 저러고 있군. "어라, 형 아니세요?" "넌 어떻게 된 놈이 날 한 번도 찾아오지 않냐!" 세이는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감금되어 있었어요. 제 아버지, 보셨어요? 그 분이 제가 말을 안 듣자 그렇게 했죠. 아까 도망가시는 것 같던데… 못 보셨어요?" 당연히 못 봤지. 하지만 대충 누가 배후 인물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군. 내 애인은 희대의 살인마고, 네 아버지는 마왕 뺨치는 놈이었구나. "마왕과 아버지가 모종의 협약을 맺었던 것 같아요. 종종 만나시는 걸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죠." 율지스는 세이를 패 죽일 분위기로 서 있었다. "왜?" 세이는 아주 아프게 웃었다. 여전히 귀여운 건 변치 않았군. "저를 마왕이 죽이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말을 따를 테니 살려달라고 하셨죠. 그래서… 이렇게 된 거예요." 나는 세이를 꼭 안아 주었다. 세이는 이렇듯 제자를 아끼는 위대한 스승에게 한마디 해 주었다. "스승님, 흙 먹었어요." 죽일 놈……. "하지만 아직 해결된 건 하나도 없다. 일단 왕을 풀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왕비를 구하러 간 대장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세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어서 움직이자." 율지스는 당근주스에 당한 괴물의 시체를 꼼꼼히 조사하고, 신관들도 협조해서 성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자네 이제 보니 대단하잖아!" 무트라는 검사가 나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단하기는 뭐. "음, 아마 무투회는 다시 열릴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게." "흠, 하지만 검술이 아니라 마법이라면 내가 이겼을 텐데. 쳇." 뭔 소리래? "무슨 마법을 쓰는데?" "아, 뭔지 궁금해? 항복하는 마법!" 할 말 없음. 재미있는 청년이었다. 나와 세이는 그를 향해 한숨을 지어 보인 뒤 성 지하로 내려가 조사하기로 했다. 율지스는 아무래도 유능함으로 점철된 인물이었다. 아까 엘메인이 죽는 동시에 자신에게 마법이 되돌아왔다고 했다. "아마 이 아래 있을 거예요." 지하는 더럽지 않았고, 오히려 가끔 횃불도 켜져 있었다. 세이는 여전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주변의 방에서는 괴이쩍은 소리가 들리곤 했다. "무슨 소리지?" 작은 신음이 들리기 시작한 곳은 매우 깊은 지하였다. 나와 세이, 사비르가 이렇게 깊숙이 들어오기까지 도중에서는 괴물이 한두 마리쯤 나타났다. 하지만 어디 내가 보통 마법사도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의외로 사비르도 강하지 않던가. 살린보다는 좀 약하지만. "신음소리입니다. 감옥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요." 세이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세인이 무사하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 에휴휴, 이 지겨운 길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내 마음을 누가 알꼬? "저기 감옥이 있군요." 분명히 지금쯤 세인 일행은 끙끙대면서 누워 있지 않을까? 아니지, 그보다 더한 꼴을 당했을 확률이 높지. 실험 대상이 되어서 다리가 하나 잘려 있다든지. "어, 자넨 차기 부마가 되실 라플이라는 분이 아니신가?" 한 사람이 나를 반겼다. 반겨? 지금쯤 죽도록 노동을 한다던가 죽살나게 고생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저, 신음 소리가 들렸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한 기사가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아, 푸르체트 경께선 꼭 잠만 자면 머쉬멜로우 인형이 나온다고 저러지 뭐야? 제일 무서운 게 그거라나. 쯧, 하여간 할 말 없지. 구하러 온 건가? 너무 늦게 왔군. 우리가 축제에 늦은 건 아니지?" 긴장감 결여 군단을 또 발견하게 될 줄은… 뭐, 내가 나중에 듣게 된 바에 의하면 나바스 황제의 기조가 그거란다. 긴장감을 없애자…라나. 뭐, 인생의 허망함을 깨달았건 말건, 그 사람들은 감옥 안이다 뿐이지 오히려 밖에 있는 우리보다 맛있게 밥도 잘 먹고, 호강하고 잘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율지스를 분노케 했는데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는 사실 엄청 힘든 일은 도맡아서 다 하고 한때는 마력까지 잃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밖에. "결국 난 모조리 뛰어 다니면서 해결한 셈이군." 어느새 트라이너에는 문제가 정말 깡그리 해결되어 빛이 나는 듯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스승님. 아직 피스트레이카 쪽은 하나 손도 못 댔잖아요." 그게 더 문제라는 거야, 이놈아. "그리고 네 아버지는 어떻게 할까? 그래 더 무서운 짓을 벌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더냐?" 녀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도망치실 때 이젠 괜찮을 거라고 하셨는걸요. 아마도 스승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때문에 안심하신 거겠죠. 이젠 아마 어딘가에 은둔해서 사실 거예요." 세이는 시종일관 밝은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마음은 밝을 리가 없었다. 기껏 자신의 부모를 찾았는데 다시 버려진 거나 다름없으니… 이 녀석, 원래 부모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대로 바로 피스트레이카 영지로 갈 생각이다. 율지스, 넌 여기 남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세인 푸르체트 경은 메데이레나를 데리고 나바스로 돌아가십시오. 이젠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왜 날 보내는 거야?" "이젠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안 돼. 키히에게 가는 내 마음을 좀 헤아려달라고."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응, 돌아갈게. 하지만… 꼭 와야 해." 윽! 세이가 날 바라보며 의외의 한 마디를 던졌다. "스승님 인생이 왠지 달라 보이시는군요. 자수해서 광명 찾아요." 내가 간첩이냐! 이런 제자를 다 키워놨더니 이런 헛소리나 하고 말이지. 잠깐! "혹시 이 편지를 두고 간 게 누군지 아냐?" 고대어로 쓰여진 종이를 내밀자 세이가 낮게 웃었다. "이건 제가 쓴 거예요. 스승님만 아시도록. 그리고 이건 흑이 가져다 놓은 거예요. 지금은 피스트레이카로 돌아갔겠지만 종종 연락을 하고 지냈거든요." 에엣, 다 컸구나 세이야! 잔머리도 굴릴 줄 알고. 아니지, 애들이 잔머리 굴리는 것이 어찌 성장의 척도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암 그렇고 말고. 아젠 기사단장이 그녀를 무사히 구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에 내가 물었다. "그래그래, 그나저나 왕과 왕비는 만났다냐?" 아마 왜 자신이 왕이 되었는지 늘 한탄하면서 더욱 좋은 왕이 되기 위해 힘쓰고 있겠지 뭐. "또 끈적거리고 있죠." 율지스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녀석아, 너나 결혼해. 나이도 많은 놈이 말이지. 앗, 그러고 보니 나와 율지스, 카오 이렇게 셋이 뭉치면 노총각 클럽! "스승님, 얼굴이 파래졌어요." 허헉, 이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야지. 무서운 일이야. 이게 알려지는 날에는 아마 맞선 선다는 사람들이 줄서지 않겠어? 그것만은 참아 주어야지. 암 그렇고 말고. "그냥 한기가 좀 들었을 뿐이니 너무 심려치 말아라." 이렇게 무슨 위대한 사람 마냥 한 마디를 흘리고 무지막지한 동작으로 의자를 떨치고 일어나 걸어서 튀었다. 왕과 왕비도 나를 반갑게 반겨 주었다. 그리고 나의 생환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살아나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지. "자네가 죽었으면 어쩌나 했네. 그리고 자네 혹시 꿈꾸는 야망 없나?" 야망?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냐. 내 어릴 적 꿈이 세계평화를 위해 세계의 악을 구하는 거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지. "아뇨, 그런 건 전혀 없는걸요. 게다가 전 원래 야심은 물 말아서 잘 먹어서요." 나에게 원래 주어진 직위도 내가 처리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고. 오죽했으면 다 때려치우고 마왕 잡으러 갔겠냐? "그래? 아쉽군. 야망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하게. 내 언제든지 이 자리 넘겨 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네." 하기사 왕은 그런 말하는 게 당연하다. 왜냐면 왕이 되어서 어디 편한 적이 있었겠냐? 맨날 납치에 독약에 감금에… 하여간 그새 늙어가는 게 보이는구만. 불쌍한 중생. "난 아직도 믿지 못하겠네. 그 후작이 그런 음모를 꾸몄다니. 안 그렇소, 왕비?" 왕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아줌마 검 휘두르는 걸 못 본 인간은 그저 우아한 왕비로만 여기겠지. 늑대 날려 버리는 걸 봤어야 한다고. "이젠 좀 조용해지겠죠. 피스트레이카 공작이 이렇게 장성했으니 더구나 걱정도 없을 것 같군요." 갑자기 왕이 웬 서류뭉치 비슷한 걸 기습적으로 꺼내 들었다. "참, 자네도 결혼해야 하지 않나? 이렇게 참한 아가씨들이 많은데, 어떤가?" 입에는 시키지도 않은 빙그레 미소까지 흘리고. 이봐 형님, 난 싫어! 키히라는 애인이 있다고!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고, 다시 괴로움을 곱씹으면서도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내 가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집에는 메데이레나가 없고, 대신 율지스와 세이가 들어오게 되었다. 아직 수도는 여전히 어수선하고 성은 괴물이 더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이곳을 뜰 수가 없었다. 사실, 마왕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자식은 봉인된 다음에야 정신 차리고 바르고 맑게 살지. 괜히 문제만 가득 일으키는군. "스승님, 오셨어요? 오늘은 당근 찜이네요." 그래, 딴 건 다 참을 수 있다. 이곳의 왕이 나만 보면 선보라고 이야기하는 거나, 푸르체트 경이 나만 보면 빨리 날짜(무슨 날짜를 잡으라는 거야!)를 잡으라는 거라든지, 혹은 길가다 심심찮게 무트를 보면 꼭 한판 싸워야 한다든지 하는 건 다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난 당근이 싫다." "에이, 그러면서 당근주스를 뿌려대요? 아마 이번 해는 당근 상품이 히트일 거예요. 이 해의 우수상품에 대상으로 선정되었을 텐데요?" 그 아저씨 돈 많이 벌겠군. 하유유. "딴 건 없냐?" 세이는 입을 내밀면서 그냥 붉은 죽을 내밀었다. "그냥 당근 죽을 먹으시는 것이 신상에 이로우실 거예요." 이젠 협박까지… 그렇다, 이 녀석의 협박의 근원은 아주 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이 녀석의 아버지가 아무리 반역을 했다고 해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녀석은 재상의 위치가 아닌가? 비록 지금은 나에게 죽이나 끓여 주는 녀석이 되었지만. 그러니 그 재상의 권한으로 우리 영지 세금을 올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걸 아는 것 같지는 않지만. "좋아좋아, 먹어 주지!" 당근의 그 요상한 맛이 입에 퍼졌다. 그나마 죽이 좀 낫다. 그걸 씹어먹는 건 내 일생의 괴로움이요, 나바스의 황제까지 미워지는 판이었다. 왜 이런 걸 개발해 가지구서리… 쯔. "신의 권능이 들어간 음식을 싫어하면 곤란하지." 세이가 국자를 가지고 부엌으로 간 사이, 내 앞에 웬 사내가 떡 하니 나타났다. 당근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 내가 당근을 왜 싫어하는지 알았다. "이 자식아, 네 덕분에 나는 일주일 동안 눈만 파먹고 살았으며, 그 이후로도 근육이 살아나지 않아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니가 알기나 하냐!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그래도 되는 거냐!" 그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짧은 황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볼 땐 노인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재미있을 것 같군. "진정하라고. 그래도 잘 해결되었잖아. 널 살리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게다가 바로 깨어나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삼 년이나 재웠는데, 칭찬해 줘." 날 삼 년이나 재운 게… 단지 재미 때문이라고라! "너 마왕이랑 싸우는 신이 되고 싶은 거냐!" "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소리 지르지 마. 제자 눈이 똥그래졌잖니." 어느새 부엌에서 나왔는지 세이가 국솥 가득 당근 죽을 들고 나타났다. 참으로 지옥의 사신보다 무서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음 하하하, 자네 이제 보니 나 때문에 저 유익한 걸 싫어하는군." 그게 아니라… 에잇, 네놈! "그래 궁금한 게 있었네. 갑자기 나타난 저런 작물에 어째서 성력이 가득히 들어 있는 건지 말해 줄 수 있나?" 당근은 조용히 죽을 퍼먹으면서 대답했다. "뭐, 별거 아니네. 사실 저건 좀 사연 있는 물건이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힘을 미약하게나마 받게 된 거야. 그러니 괴물들이 저걸 보면 맥을 못 추지." 앞으로 몬스터를 대비하기 위해선 밭에 당근을 잔뜩 심어놓는 게 좋겠다. 가끔은 어떤 썩을 자식을 생각하면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지근지근 밟아 주고 말이지. "하하하, 그렇군요. 앞으로 당근을 장려 해야겠는걸요." "물론이지. 그러니 당근을 소홀히 여기는 자, 당근에 망하리!" 젠장, 신 치고 이렇게 미친놈도 드물어. "에휴, 좋아요. 키히를 정상으로 돌릴 방법은 없나요?" 신은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역시 이건 신이 아니라 마귀야. 도움이 된다면 신님이라고 부르려 했건만. "당신은 신이니 혹시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군요. 역시 어쩔 수 없이 발로 뛰어야 하나 보죠?" 그는 희미한 미소를 건네면서 그릇을 세이에게 내밀었다. 뭐, 더 먹겠다고? 돼지……. "흠, 자신의 틀에 갇혀 사는 건 이미 인간의 의미를 잃는 것이지. 뭐, 그녀는 엘프라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래, 자네에게 내 이건 확신할 수 있네. 자네가 변한 만큼 그녀도 변했네." 신의 특징 중에 가장 절대적인 것이 있다면 아마 애매 모호한 대사를 시도 때도 없이 던져댄다는 것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글쎄, 그 답은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않을까? 좋아, 국을 준 대가로 꼬마에게 좋은 것을 알려주지. 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질 것이다." 세이는 멍했다. 설마, 신이랑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을 테지. "그럼 전 어떻게 되나요?" 그는 방그레 웃었다. "너같이 강한 인간이 아니지, 마왕에게 내 무슨 예언을 하겠는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며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기사의 스승이 아닌가?" 에엑, 구원기사가 내 제자 중의 한 놈이라는 말인가? "구원기사라면 스승님의 그 시답잖은 예언에 나오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래. 하지만 그 예언은 내가 한 이야기란다. 그걸 전 마왕에게 내가 이야기해 주었고. 그 구원기사는 바로… 안 가르쳐 주지∼ 하지만 비밀을 풀 수는 있네. 자네가 그 {생명의 서}의 비밀을 풀어낸다면… 아, 그리고 필사본이나 원본이나 별 차이는 없네." 별 차이가 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대신 필사본에는 쓰여지는 대신, 원본에는 다 쓰여 있다는 정도의 차이지. "정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이야기만 잔뜩 하시는군요." "왜, 힌트는 많이 줬잖아. 그럼 난 이만 가보지." 그는 씨익 웃으면서 사라졌다. 뭐, 더 물어 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신에게 너무 많이 묻는 것도 사실 좋지 않다. 신이 곧 마신이기에,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 무슨 이야기중이셨습니까? 오옷, 죽이로군요!" 율지스가 죽을 보고 반색을 표명했다. 이런 걸 좋아하는 네놈이 참으로 무섭구나. "우리는 그러고 보니 유동식 가족이로군요!" 놀라운 발견이겠다, 이놈아. 으이구, 그런 건 죽을 때까지 조용히 입다무는 거라고! 그나저나 우리 언제부터 이렇게 불쌍한 존재가 된 거냐… 쯔. "스승님, 그럼 신이 다녀갔다는 겁니까?" 그놈도 신이라면 말이지. "뭐, 그냥 그렇게 생각해. 세이야, 흘렸잖아. 좀 조심해서 먹으라고." "으잉, 스승님은 나만 미워해!" 그리고 두다다다… 어라, 빨리 끝났네? "스승님, 세이는 왜 저렇게 어리광만 피우죠? 에휴휴, 이젠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이건 아주 길 잃은 개가 주인을 만난 지경이라 할 수 있군요." 율지스는 잠시 세이에 대한 짤막한 의견을 토로했다. 내가 볼 때는 별 문제 없다. 그리고 원래 저런 놈이었잖아. "뭐, 한동안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었잖냐. 당연한 일이야. 점차 좋아지겠지. 그리고 너도 엘프 치고는 어리광 많이 피운다고, 알고나 있느냐?" 율지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직 엘프다운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기는 한 모양이군. "그랬군요. 하지만 유독 스승님만 보면 그렇게 되는 걸 어쩝니까? 이건 다 저나 세이가 스승님을 부모로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어렸을 적부터 주욱 키워 주셨는데, 더군다나 세이는 더 어렸으니까요." 음, 그렇기는 하겠네. "넌 여기 남아라. 그래서 더 이상 전하 곁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라. 상대가 마왕이라면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율지스는 역시 그렇게 한다고 대답하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일어났다. 내 제자들은 장가가면 사랑 받겠군. 요리 잘하지(매우 국한된 메뉴에 한하지만) 설거지도 잘하니까. "…응?"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소녀 한 명이 나타났다. 메데이레나는 그렇게 한낮의 해를 쐬면서 얼른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라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그녀는 왠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모자와 함께 뭔가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들어와. 죽 먹을래?" "음, 아냐. 금방 끝나." 그녀의 갈색 머리가 해에 노출되자 더욱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는 드디어 뒤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나중에 풀어봐. 나 이제 떠날 거야. 그렇지만 라플을 꼭 한 번 보고 싶었어. 만약에 갈등이 생긴다면, 설사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해. 알았지?" 이거 참…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멀리 세인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갈 때는 그래도 황녀랍시고 마차에 태워서 가는 모양이었다. 손을 흔들어 주자, 그녀도 같이 흔들어 주었다.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고 있는데 문득 세이가 나왔다. "스승님, 드디어 중풍에 걸리신… 왜 때려요!" 넌 항상 매를 버는구나 벌어. 그로부터 얼마 후, 성의 일은 확실히 정리가 되어서 우리는 드디어 피스트레이카 영지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지었다. 뭐, 그러려면 대륙을 횡단해야 한다든지 그런 무리한 일들이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가지 않겠는가? "꼭 떠나야 하나? 병사를 보내서……." 왕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싶어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건 제 영지고 제가 해결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키히의 문제는 내 손으로 꼭 마무리지어야 하는 거고. "그래, 율지스 경이 남아 준다니 안심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자네도 있어 주었으면 하네만… 무리겠지?" 무리야. "스승님과 함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재상직은 정식으로 그만두겠습니다. 차라리 저보다는 제 형이 더 낫죠. 율지스 형에게 맡기십시오." "그러지." 우리 일행은 신관도 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사비르가 끼게 되었다. 덕분에 나와 세이는 둘만의 외로운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놈이나 요놈이나 내게는 다 쓸모 없다는 걸 여행을 시작하고 단 며칠도 되지 않아서 깨달았지만 말이다. "스승님,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우리의 폐부를 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내 아무리 늙었다지만 내 영지로 가는 길에 이런 습지가 나올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부터 완전히 남쪽으로 주욱 온 것이 틀림없었다. 즉, 완전히 길을 잘못 들었다. "너에게도 양심이 있다면 당금의 상황을 보고 느끼는 바가 크겠지. 그렇지 않느냐? 게다가 이곳이 어딘지도 모른다면 이 스승님은 심히 널 혼내야 한단다." 옆에서 사비르가 말렸다. "모두 초행길이니 어쩌겠나? 그리고 이곳에서 길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니 여기서 그냥 하루 숙박하고 가세." 말은 쉽다만, 여기 어디 여관 같은 개 코가 보이더냐! "야숙이로군." 씁쓸한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세이는 그럼에도 한 10분 뒤에 다시 생생해져서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당근 죽. "영양 만점이에요. 투정하지 마시고 다 드셔야 한다고요!" 이번에 화가 난 사람은 사비르였다. 신관은 대개 육식을 잘 먹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사비르는 육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대신 산나물이나 신선한 채소로 식탁을 항상 풍성하게 채우곤 했다. 입맛도 꽤나 까다로운 미식가에 속해서 그의 식단은 항상 호화로웠다나. 그런 놈에게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이제까지 세 끼 식사를 모두 당근 죽만 줬으니 어떻겠는가? 괴롭겠지… 괴로울 거야. "난 이거 싫은데, 딴 건 없나?" "마른 옥수수가 마침 남아 있네요. 불려 먹으면 맛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비르는 모험가의 야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요리사라도 데려올 걸 그랬군. "그거라도 다오." 사비르의 신세에 조금의 동정을 표하면서 우리는 그날 아주 맛있는 당근 죽을 들이켰다…는 건 세이 생각이다. 이 당근 죽의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모든 죽이 그러하듯이 배가 금방 꺼진다는 점이다. 나나 세이는 이미 숙련된지라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아마도 사비르는 죽을 맛일 거다. "죽겠다… 헉, 배고파서 잠을 못 자겠어." 잠결에 그 소리를 듣고 좀 불쌍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일어나서 뭘 잡아다 줄만큼 내가 부지런한 인간은 아니었다. "응? 왜 보초가 없나 했더니 방어막이 쳐져 있었구나, 이런." 사비르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이 방어막을 뚫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땅을 긁으면서 배고픔을 달래야 했다. "자네 눈이 빨간데?" "아니, 됐네. 그보다 아직 아침은 준비하지 않았지? 내가 하지." 세이는 자신이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매우 기뻐하면서 그에게 재료를 떠넘겼다. 곧, 애처로운 비명이 숲을 울렸다. "왜 당근밖에 없는 거야!" 우리는 묵묵히 당근찜을 퍼먹고 있었다. 애당초 그는 당근을 좋아했을 터지만, 지금은 명백하게 아니었다. 누가 좋아해? 이젠 저주하는 게 아닐까. "어때?" 그는 씁쓰레한 미소를 흘리면서 옥수수를 박아 넣은 당근을 힘겹게 먹고 있었다. 저 옥수수가 아마 말린 딱딱한 거였지? 쯔……. 그때 갑자기 새가 날아오르면서 한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뭔 소리지?" 귀찮으니 웬만하면 관심을 끊으려 했지만, 그 말소리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세이는 즉시 자신이 가진 최대의 능력으로 밥솥을 사수했고, 나나 사비르는 밥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서라!" 어디선가 멀리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즉시 달려오는 사람 하나와 뒤에서 달려오는 말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네?" "천사님, 살려 주세요!" 작은 소년은 엉엉 울고 있었는데, 그 소년은 꼬질함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왜 우리가 천사로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승님,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 옵니다." 세이가 어느새 나하고 있을 때와는 달리 매우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곧이어 말 탄 세 사람이 들이닥쳤다. 덕에 먼지가 가득 일었지만, 내가 누구냐? "이런, 다른 놈들이 있었군." 꼬마는 사비르의 품속에서 파들거리면서 떨고 있었다. 겉보기엔 제일 강해 보이니까 아마 그를 선택한 듯하지? "누구인데 이런 어린아이를 괴롭히시는 겁니까?" 세이가 역시 한때 재상을 지냈던 그 위엄으로 밀고 나갔지만, 세 사람의 얼굴에서는 비릿한 웃음이 맴돌 뿐이었다. 역시 맞아야 불 놈들이군. "걱정 마라, 너희도 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오호라! 대장, 저렇게 우리가 찾던 놈이 있잖습니까? 은발의 귀공자 타입이요. 당장 가져다 팔아 버립시다!" 누굴 판다는 거냐? "지금 뭐라고 하셨소? 시방 나를 판다는 거요? 누구 맘대로!" 왠지 악당 같은 녀석이 배시시 웃으면서 기름을 쏟아냈다. "오, 우리는 아주 유명한 노예 사냥꾼이야. 이런 데서 이렇게 비싸게 넘어갈 노예를 발견해서 기쁘기 한량없군. 헤헤헤… 야, 다 잡아." 세 명은 검을 꺼내 들었고 세이는 매우 분노했다. "분명히 노예 사냥은 금지되어 있을 텐데?" "원래 법이란 어기라고 있는 거라고. 으 헤헤헤." 한 놈이 검을 들이대었으나, 우리 셋은 누구도 겁먹지 않았다. 한 놈은 전직 재상이요, 하나는 신전의 에네브 신관이요, 하나는 마왕이 아닌가. 음, 환상의 트리오로군. "그렇다면 살인은 하라고 있나 보군. 마법을 좀 보여 줘야겠어." 먼저 세이 손에서 주문이 영창되고 녀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세이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솜씨를 발휘했다. 녀석들의 발을 묶고 재빨리 검을 빼어 들어 세 놈 중 대장인 듯한 놈의 목에 겨누었다. "대단하네!" 사비르는 살짝 감탄의 뜻을 내비쳤다. 난 하마터면 울 뻔했다. 제자를 가르친 보람이라는 건 이런 때를 말하는 거겠지. "어리석은 놈들, 우린 중앙 정부 소속이다. 스승님, 이놈들을 어떻게 할까요?" "마법…사…라니." 트라이너가 나바스에 비해 마법사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연하지, 어느 마법사가 할 일 없이 돌아다니겠냐? 대부분은 조용히 있는 거라고. "음, 내 생각에는 이들을 그냥 매달아 놓고 가는 게 가장 좋을 듯싶구나. 그렇게 한다면 지나가는 늑대들이 좋아하지 않겠느냐? 이런 인신 매매 범들은 자신이 좀 먹히는 것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뭐, 아직 가망 있어 보이는 인간들이라면 신이 풀어 주겠지." 왠지 내 입은 나와 있었다. 기분이 좀 나쁜 모양이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라플, 우린 마저 밥 먹고 출발하죠. 이 아이는 마을에 데려다 주어야겠습니다." 왠지 화기 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매달린 녀석들 한 번 쳐다보고 밥 한술 먹고, 꼬마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또 밥 한술 먹고, 그렇게 밥을 잘 먹었다. 음 하하하. "그래, 너가 사는 마을이 어디냐?" "예, 요 아래 있는 율이라는 마을이에요. 아주 작은 곳이지만 무척 아름다워요." 율?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을인데. 길을 어지간히 잘못 들었던지, 아니면 내가 이 마을을 단지 모르는 것이겠지. "그래도 자네는 신관이니 알겠지. 율이란 마을이 어딘지 아나?" 그의 얼굴에는 몰라 묻지 마 광선이 방출되었다. 음, 할 수 없군. "혹시 트라이너 아니?" "아, 여기서 저 산을 넘어 주욱 가면 바로인데요." 한 가지 알 수 있다. 여긴 트라이너가 아니다. "혹시 여기가 어디니? 대한 민국이냐?" 사비르도 사태의 심각성을 드디어 눈치챈 듯했다. 저런! "그렇죠. 참 당연한 걸 물으시… 아, 혹시 길을 잃으신 거예요?" 그 혹시나가 역시나였으니. 며칠만에 대한민국으로 왔으니 빨리 왔다고 좋아해야 하나? "그런 것 같다. 제대로 된 길로 가야 하는 거였는데, 괜스레 지름길로 간다고… 으." 세이를 노려보았다. 세이는 필살 얼버무리기 미소를 띄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관두자. 애 패서 뭐가 나오겠나. 어차피 약도 내가 발라 줘야 하는 판에, 에잇. "좋다, 저 마을에 들러서 제대로 된 재료를 준비해서 제대로 된 여행을 하라는 신의 계시다. 가자!" 너가 믿는 신은 가짜라니까… 쯧. 마을은 정말 소년의 말대로 자그마했다. 지도에도 없을 정도였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아주 잊혀져 가는 세월을 사는 사람들 같았다. "요즘 그런 놈들이 이곳까지 와서 극성이지요. 대륙의 어떤 나라든지 모두 인신 매매를 금지했더니 병사가 별로 없고 혼란한 국경에 와서 이런 엽기적인 일을 벌이는 게 아닌가요? 그런 놈들은 용서할 수 없죠." 그 소년의 엄마는 무척이나 우리에게 고마워했다. 그리고 사비르가 그렇게 목 메이게 부르짖은 제대로 된 요리 재료를 많이 주었다. 이곳은 산골이라 고기보다는 아무래도 나물이나 푸성귀 같은 것이 더 많은 편이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은발이로군요. 신기해라." 엥, 뭔 소리람? 한 청년이 내 머리를 보고 재미있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여기서 좀 더 가면 트라이너 영지에 어떤 버려진 성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이 공고문을 냈단다. 그 내용인즉, 은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을 데려다 주면 돈을 두둑히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액수가 무려 2000메장, 놀라운 액수다. "부자인가 보네요, 그 정도 돈을 걸다니. 하지만 꼭 특정한 누구를 지칭한 것도 아니고, 수상하기는 하네요." 난 많이 수상해. 은발이 그렇게 흔한 줄 아냐? 그리 흔하지도 않고 더구나 이 나라엔 또 몇 명이나 있겠어? 그 중에 나, 백의 아가씨 엘류시아를 포함하면… 뭐, 더 생각나지도 않는군. "음, 그렇게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도 별로 은발의 사람은 보지 못했잖아요." 이제야 눈치채다니, 이 둔팅한 제자야. "흠, 재미있군요. 그럼 우리 라플을 데리고 가서 돈만 챙기고 튈까요?" 것도 상당히 재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차피 영지의 싸움도 정체기고, 휴전 상태라는 소문도 들었으니 내가 그리 빨리 가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가다 나쁜 놈들이 눈에 띄었으니 네 운명을 의심하라고. "좋은 생각입니다, 음 흐흐흐." 우리의 목적이 상당 부분 변질되었다는 걸 느끼면서 돈 보따리를 위해 우리는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세이는 물론 단순히 재미있으니까 해보고 싶은 것뿐일 테고, 사비르는 신관이 무슨 돈 욕심이 있겠냐? 이상한 놈이면 속셈을 알아보고 응징하려는 거지 뭐. "근데 우리가 무사히 그곳을 찾을 수 있을까?" 잠시 일행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 생각을 못했다. "할 수 있을 거야, 우린." "그래 해내야 해!" 무슨 죽음의 토너먼트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얼굴은 분연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신세계의 두려움을 모두 잊고 있었다. 자, 나가라 새로운 우리의 빈대 용사여! "지도에 따르면 이곳을 벗어나면 바로 마을이다." 등고선을 제외한 것 모두를 볼 수 있는 내가 그 중 그나마 방향 감각이 좀 나았기에 이렇게 지도를 보고 있었다. "절벽을 어떻게 올라가요?" 세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무리도 아니지. "음, 그건 마법으로 올라가지 뭐. 자, 준비해라." 결국 부상 마법을 써서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문제는 올라가자마자 정체 모를 개들이 나타났고, 그 앞에는 거대한 저택이 서 있었다는 거였다. "개는 어떻게 하죠?" "으르르렁!" 쓰다듬어 주면 싫어할 것 같다. 아, 맞다! "내 부름에 응답하라, 지옥의 개여!" 마왕은 정말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 개들은 지옥의 개를 보자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기 시작했고,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그 거대한 저택을 빙 돌아서 앞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서 길을 물어 보는 거예요." 세이의 눈은 비장한 각오로 빛나고 있었다. 그 집 문에는 웬 쪽지 하나가 붙여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은발의 사람을 찾아다 주면 후사하겠음. 2000메장의 포상이 있음. 절벽 위의 트리엘이. 그 메시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절벽 위에다 짓는 집이 어디 두 채일 리가 있겠냐? 고로, 이 집이 바로 그 집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자, 어서 문을 두드리자." 길고 긴 방황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사비르가 박력 넘치는 태도로 문을 두드렸다. 웬 사람 하나가 걸어 나왔는데, 그는 틀림없이 집사인 듯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눈도 잘 안 보이는 듯했다. 사비르는 방긋 웃으면서 웬 책자 하나를 내밀었다. 대체 그건 어디 있었던 거야? "이거 받으시고 자애의 신의 은혜를 느끼십시오." 여기 그거 이야기하러 온 거 아닌데. "사비르……." "헉, 나도 모르게……!" 그게 아니라 습관이 아닐까 싶은데 말야. "여기 은발을 찾으신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단발 정도가 되긴 했지만, 틀림없이 은발입니다." 그 사람은 게슴츠레한 눈동자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설설 손짓을 했다. "맞군요. 이리로 오세요. 주인님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부디 주인님의 신경을 건드리지 마세요." 그리고 곧장, 그는 앞으로 걸어가 우리를 이층의 어떤 방 앞에 데려다 놓았다. 집은 상당히 격조 높은 저택으로 보였다. 상당 부분 아름다운 세공이 들어가서 왠지 비싸 보였다. 하긴 포상금으로 이천 메장을 지불할 정도가 아닌가. "들어오시오." 언뜻 들으면 차가운 목소리였다. 방안은 창문에 커튼이 두텁게 쳐져 있어 어두웠다.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의자가 돌려져 있어서 사람의 형상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주인님, 이들이 은발의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제야 의자가 앞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문이 쾅 닫혀 버렸다. "이런!" 사비르가 문을 열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그는 바로 전대의 마왕이며, 내가 봉인시키고 죽였다고 생각한 존재였다. "이렇게 만날 줄 알고 있었지. 자네는 너무 신체가 특이해서 조금만 미끼를 던져도 달려오거든. 그래서 재미있단 말야." 젠장, 난 하나도 재미없다. "그래서 왜 날 보고 싶었던 거지?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가령 나를 죽이고 싶어졌다든지, 혹은 이젠 마왕 자리가 도로 탐이 났다든지 말야."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과연, 멋있기는 하군. "내가 이제 원하는 게 뭐가 있겠나? 자네도 한번 보게. 내 몸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고, 이렇듯이 정신체만 남아 있는데 말야." 하지만 내가 보기엔 끝없이 간사한 놈 같아서 말이지. "넌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 왔어. 아닌가? 그리고 그건 내가 키히와 만나기 전부터였고, 그렇지?" 그는 잠시 손에 쥐고 있던 종이에 뭔가 낙서를 했다. "음… 그렇지, 자네 짐작대로야. 난 그 즈음부터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 당시에 자네는 어차피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였어. 난 단지 키히라는 존재가 커서 나를 재미있게 해주리라는 걸 눈치채고, 그녀의 동생을 내 부하로 만들었지. 그건 몰랐지?" 녀석을 증오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녀석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키히와 엘메인이나 나를 조종하려 했던 거지.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 그리고 자네가 무얼 꾸미는지도. 하지만 키히 이야기는 뜻밖이군." "물론이야. 그녀의 정신은 당시에 보기에도 약간 불안했지. 엘프답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녀가 용사가 된 후에는 필히 악마가 되리라 믿었지. 하지만 자네라는 변수가 등장했지.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마도사가 나왔지 뭔가." 이거야 원, 다리 아파 죽겠네. "앉아서 이야기하지. 다리도 아프군." "이를 말인가, 어서 앉게. 그리고 자네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난 마왕이 되기 전에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었어. 그것도 상위 마족의 하나였지. 뭐, 그리 지지 받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모두들 갑자기 미쳐서 날뛰는 마왕이라고 그러던데,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군. 확실히 모든 걸 계산하고 있었다는 거야. "이제 와서 갑자기 회개하는 마음이라도 든 건가? 네놈이 그럴 리가 없지. 뭔가 또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당연하지 않나? 하하하……."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악인도 흔치 않다. 세이는 그를 부글거리는 심정으로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도 저자의 농간에 놀아난 셈이니까. "그래, 네 목적이 대체 뭐지? 대륙의 혼란이라면 목표는 달성된 거 아닌가?" "음, 처음엔 그랬는데 이젠 아니네. 엘메인 녀석이 자넬 죽이려 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나? 그야말로 경악이었지. 하지만 자넨 살아 있더군. 그래서 생각했지. 자네는 원래 조연이었는데… 이젠 자네가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지더군." 변태인 게 점점 확실해져 가는군. "넌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야." "당연하지 않나, 난 마왕인데?" 그는 아주 어깨까지 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내 인생은 왜 이리 되는 게 없냐? "그래서 내가 망가지는 모습은 봤나?" 그는 아주 매력적인 포즈로 손가락을 살짝 퉁겼다. "아니, 아직. 그런 일이 있어도 자네는 안 망가지더군. 그래서 그런 환영까지 보냈는데 말야. 힘들었다고, 신에게 안 들키고… 으휴."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래서 세이와 사비르의 놀라는 시선을 한꺼번에 받으면서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자, 어때 내 망가진 모습이." "하하하하, 정말 자네는 재미있다니까!" 죽일 놈. 난 간장이 다 타들어 가고 있다! 내가 네놈을 씹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으이구, 두고 보자. 나중에 네놈에게는 필살 복수를 할 테니까. "관둬, 이제 와서 날 찾은 이유가 이런 쇼를 해보자는 건 아닐 텐데 무슨 일이지? 뭔가 내게 알리고 싶은 일이라도 있나?" 저 자식의 뼈까지 갈아먹어도 시원찮겠어. 하긴 그러기엔 내 입은 유동식에 길들여져 있거든. "별거 아니네. 그저 몇 가지 자네에게 이야기해 줄 게 있네." 그럴 줄 알았어. "첫 번째, 과연 구원기사는 누구일까?" 나는 인상을 쓰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좋아. 두 번째, 자넨 과연 키히를 사랑했던 걸까? 이건 어쩌면 내 뜻대로 된 건지도 모르지." "당신 정말 아무리 전대 마왕이라고 해도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끝내 얼굴이 벌게진 세이가 일어나서 마왕을 향해 외쳤다. "그야 꼬마야, 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지." 마왕은 요지부동이군. "좋아좋아, 자네의 그 지고한 뜻은 잘 알겠네. 세 번째는 뭔가?" "흠, 이건 사실 극비인데 자네의 제자 중의 하나는 자넬 아주 크게 배신했다네. 그게 누굴까?" 그의 미소는 아주 싱그러웠다. 만약 그의 표정만 보고 판단한다면 무슨 오늘 저녁 메뉴를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나나 세이, 사비르의 얼굴은 지옥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부터 대답해 주지." 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설마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먼저 구원기사는 세이키르, 내 옆에 앉은 내 제자이지. 질문 있나?" "그 근거는 무언가?" 녀석은 아주 흥미롭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뭐긴, 신이 둘 중 하나라고 힌트를 던지고 갔는데, 율지스는 기사가 되고 싶어도 근력이 없기 때문에 못해. 반면 이 녀석은 검술을 조금이나마 익히기는 했지. 하지만 신이 말한 구원기사는 꼭 지금의 일을 해결하라는 뜻이 아니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마왕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마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의 답도 아나?" "얼마 전에 알았지. 그건 자네에 의해 사랑하게 되었다는 게 맞네." 세이는 놀라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비르는 대화의 요지나 내용을 일체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졸고 있었다. 이놈도 대단하다, 마왕과의 대담 중에 잠을 잘 수 있다니. "거짓…말." "아니, 맞다. 키히와 처음 만나게 된 경위를 생각해도 그래. 어떻게 처음 만난 엘프라는 사람이 내 이상형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지. 어린 시절 책을 읽으면서 항상 이런 여자가 내 아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나는 다시 마왕을 응시했다. 이 이야기는 가슴에 묻기로 하자.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마왕은 이제 아주 재미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사랑한다. 그건 조작이 아니다. 설령 완벽한 내 이상형의 여자라도 사랑에 빠질 수는 없어. 그리고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아는 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해." 마왕은 두 손을 들었다. "항복, 다음으로 넘어가게. 너를 배반한 제자는 누군지 아나?" "물론, 그 답도 세이다." 세이가 나를 더욱더 놀란 토끼 눈이 되어서 바라보았다. "스승님, 전……!" 녀석을 가벼이 앉히고 마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말이지, 안 그런가?" 마왕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 세월을 산 자만이 할 수 있는 간교하고, 사악한 짓을 난 알 수 있었다. 이놈은 원래 이런 놈이었나? 그렇다 해도 지금은 크게 상관은 없지만, 왠지 분한 마음이 드는 건 참을 수 없군.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래 좋아. 다 맞아, 대단해. 어떻게 넌 이런 걸 다 알고 있었던 거지? 아무리 신이 힌트를 주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럼 내 마지막 시련을 견뎌낼 자격이 되는군."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이번엔 정말 널 용서하지 않겠다. "정신체는 미리 다른 곳에 봉인했던 거로군, 마왕." "물론이야. 힘이 너에게만 넘어가는 걸로 족했어." 갑자기 의문 하나가 넘실거리면서 내 뇌리에 떠올랐다. 어째서 마왕은 나에게 힘이 넘어오도록 했지? 더 재미있다면 키히에게 가야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단지 재미있어서라고 하기엔 설명이 되지 않아. "마왕, 세이의 아버지는 무사한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이야, 걱정하지 말라고.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모든 인간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능력과 소질이 다분하니까 말야. 하긴 자네 같은 인간도 흔치 않았어." 그리고 이 말을 꼭 해야 하는 거겠지? "너, 오늘 저녁은 연어 찜이지?"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주위를 휩쓸었고, 제일 휘청거린 건 세이였다. "스승님,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니잖아요!" "괜찮아. 시련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설마 밥에 독을 타진 않을 게 아니냐? 재미를 위해서 인생의 전부를 보낸 놈이다. 그렇게 시시하게 우릴 죽일 리가 없어." 그는 다시 껄껄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는데 사비르가 졸다가 일어나 말했다. "젠장, 잠자고 있는데 좀 조용히 하라고!" 그리고 그는 용감하게도 다시 잠들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보통 인간이 마족을, 그것도 마왕을 상대로 이렇게 당당하다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이다. "저도 연어찜이 먹고 싶네요. 그러니까 단지 배가 좀 고파서… 에이, 보지 마세요! 얼굴 빨개진단 말예요!" 세이가 황급히 변명하자, 마왕은 웃으면서 가볍게 작은 종을 흔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엽기적으로 생긴 놈이 나타나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집사지 아마? "아, 오늘 식사는 여기서 하겠네. 내가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 말야. 그럼 기다리지." "예." 다시 그 사내가 문을 닫고 나갔다. 우리들은 식사 전 행사로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얼굴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식사가 준비되어 들어왔고, 우린 비교적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식사하는 중에 나는 그에게 살벌한 어조로 약간의 협박을 붙여서 말했다. "아마도 다시 인간들을 가지고 장난친다면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널 처단하겠다, 마왕." "이거 참, 무섭구만. 연어 찜은 맛있나?" 무지 맛있다, 제기랄! "그래, 내 말 명심해!" 그는 계속 실실거리면서 웃었다. 이윽고 일행 모두 밥을 잘 먹고 나자 그는 커튼을 바라보면서 조용하고 아련한 어조로 말했다. "나의 시련을 잘 받다 보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걸세." "네놈의 시련이 없다면 더 잘 살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녀석은 내 가시 돋친 말을 듣고도 더욱 웃을 뿐이었다. "음, 난 편애주의자라서 말야. 그럼 난 이만 가보지. 잘 있게, 다음에 보지."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역시 정신체라 사라지는 것도 빠른 모양이었다. 아, 맞다. 이 집도 놈이 만든 거겠지? "여기 이층이지?" "응." 사비르가 냉큼 대답해 주었다. "이 빌어먹을 마왕!" 우리는 사라지는 집의 이층에서 멋지게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뜻밖의 재앙을 겪고 우리의 엉덩이는 더더욱 튼튼해졌겠지만, 나는 그 녀석에게 고마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네놈을 죽여 놓으마!" 어느새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으, 밤이 되면 길 찾기 더 힘들어지는데. "스승님, 우리 과연 영지까지 갈 수 있기는 할까요?" 난 근엄함과 스승의 파워를 뿌리면서 대답해 주었다. "신이 돌보시는 한, 우린 계속 갈 수 있을 것이야!" 세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군요…라고. 발칙한 놈! 아마… 갈 수 있겠지? 이 위대하신 대 마도사님은 말이지, 발음을 잘 못해서 대 맛 도사님이 될 가능성도 많지만, 어떻든 위대하신 나으리란 말야! 생명의 서 5권 33. 숲의 기억 조용히 가노라면, 아름다운 새들이 지저귀면서 나의 앞길을 밝혀준다. 그 앞에 작은 새 깃털이 살짝 털어지고, 숲 속의 나뭇잎이 부딪혀간다. 그 앞의 세상에는 또 하나의 나와, 또 하나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현실은 모두 미래를 향해 가는 하나의 숲 가운데. 나는 맹세한다. 기억이 닿는한, 그 숲의 미래를 향해 기억을 잃지 않겠다고. -음유시인- "으아아아!" 세이의 비명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이때다 싶은지 새들이 후루룩 날아 올랐다. 뭐, 녀석의 비명이 장래 절규하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약이 되리라고 보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으니까. "왜 그러냐?" 사비르는 제일 앞에서 걷다가 나를 휙 돌아보면서 정다운 눈길을 건넸다. "그야, 당신 덕에 이렇게 헤메고 있으니 그러지!" 사비르. 나이 많은 내겐 그건 실례 란다. "제자는 수련해야 하는 법이다. 그치?" 세이는 묵묵히 나무 수풀을 조용히 걷어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흠. 길 잃은 건 어찌보면 네 탓도 있다고. 그러니 너무 그러지 말라고. 사실 내가 가자고 한 길로만 계속 갔다면 완전히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게.. 제가 지도를 얻어 오자고 그랬잖아요! 예전에 어떻게 영지까지 갔던 거에요! 제가 다 신기할 지경이라구요!" 그 땐 그 때고.. 요즘 들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기억이 가물 가물 하단 말이야. 안 그래? 흐흐흐. "그땐 이렇게 울창하기까지 한 숲은 없었던 거 같은데..." 막 의문을 제기하려는 찰라, 뭔가 숲에서 살짝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하군. 일단, 여기가 아무리 대한민국과 트라이너의 경계 구역이라고 해도 이렇게 울창할 리도 없고... 게다가 이런 숲지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단 말이지. "조금만이 몇시간이냐.. 대체. 에잇." 세이는 아무래도 화가 무척 많이 난 듯 했다. 뭐, 녀석이야 말로 마법사의 표본처럼 허약하니까.. 한 때 검술 배운다고 하더니 이젠 다 포기했나봐. "자, 이제 힘내서 걷자!" 우리 일행이 처음 오게 된 것은 아주 단순한 일의 결과였다. 마왕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몰랐다는 게 정답이다. 우리 세명은 동서 남북 방위에 무척 약했다는 거다. 무슨 성자에, 현자에, 마법사가 이렇게 얼빵 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어쩌겠나? "저기.. 불빛이 보이는 거 같지 않아요?" 세이의 눈이 불을 보고선 아주 반짝이는 얼굴로 돌변했다. 그의 얼굴엔 먹을 거라는 단어가 엄청나게 새겨지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의심되어도 연어찜을 좀 많이 먹어 둘 걸 그랬어... "흠.. 정말 그렇군. 무슨 상인 일행이 아닐까 싶은데?" 사비르가 손으로 그 쪽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나도 눈을 돌렸다. 그 곳에는 뭐랄까, 상인인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왜냐? 난 사비르처럼 시력이 좋지 않다. 이 녀석 시력은 거의 인간 수준이 아니군. "사부님. 이건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어서 가서 밥을 좀 달라고 해 봐요." 글쎄.. 나라면 너처럼 하지는 않을꺼다. 생판 모르는 놈들일텐데 뭐. 하기사, 적어도 밥은 주겠지. 우리 셋은 천천히 걸어서 불빛의 발생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뭐, 연어찜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따뜻한 수프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헤. "누구냐!" 누구긴. 사람이지. 우리가 생각한데로(뭐, 주로 사비르가 생각했던 거지만. 사소한 거 신경쓰면 대머리된다. 음 하하.) 그들의 정체는 상인 행렬이었다. 하지만, 보통 상인 행렬은 아닌 듯 했다. 일단, 우리 세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싶자, 이내 대여섯명의 칼 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으며, 마른 체구에 어두운 복장을 한 사내 주위에 역시 세 사람 정도가 막아 섰다. "안녕하세요? 저흰 여행자들입니다. 사실 길을 잃어서요. 죄송합니다만, 자애의 신의 사도인 저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마르고 대략 30대 정도 되는 사람의 눈매에는 이내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트라이너 분들이시군요. 전 또 누구라고. 후후훗. 거기 앉으세요. 저런..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드셨나 보군요." 세이는 그야말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이. 전직 재상이라는 놈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쯧.. 아직도 수행이 부족해. 부족.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 쪽은 저희 신전의 견습입니다. 보다시피, 아직 어린데도 총명하지요." 누가, 견습? 쳇. 하긴 얜 재상이고, 이 녀석은 공작이에요. 누가 믿냐.. 이런 걸. "잘 부탁합니다. 그런데.. 사람 수에 비해 마차가 많군요. 대체 무슨 상품을 나르고 계십니까?" 스프는 아주 적절하게 뎁혀져 있어서 무지 맛있다. 아이 좋아. "얌.. 얌.." 상인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뭐, 만난 기념으로 하나씩 주려는 건가? 응? "우와.. 배가 따뜻하고 차니까 졸려요. 저 좀 자도 되죠?" 언제는 허락 맞고 잤어? 세이는 이내 색 색 소리를 내면서 바로 국그릇 옆에서 쓰러지듯이 누워서 잠들어 버렸다. 어라라, 얘가 이렇게 일찍 자는 녀석이 아닌데? 아직 국도 많이 남았잖아? "이런... 왜 이렇게 졸리지..? 설마.. 제길.. 너희..!" 사비르는 숫가락을 들고 그게 마치 검인양 부르르 떨다가 쓰러져서 잠들어 버렸다. 상인의 얼굴을 즉시 바라 보았다. "당신.. 설마, 여기에 약을 탄 거요?" 상인 녀석의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곧... 알게 된다고 했는데.. 넌 약이 안 통하나 보군. 뭐, 개중에 꼭 이런 놈들이 있기 마련이지." 엥? 갑작스럽게 뒤에서 수박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음.. 굳이 이야기하자면 맞았다는 거지. 아주 멋지게... "그러게... 알게 된다고 했잖나. 후후후." 아주 재수 없는 웃음이 내 귓가에 멍하니 울러 퍼졌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뇌에 너무 자주 충격을 주면, 나중에 뇌세포 감소로 인해서 돌머리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응... 사부님.. 밥 줘요.. 밥.." 어이없이 제자의 편하게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주 당당하게 내 발을 지 배개 삼고 아주 새근거리면서 가끔 잠꼬대로 사람을 패가면서 자고 있었다. 사비르는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으... 무지 아프군... 꼭 술 퍼마신 다음 날 같잖아." 잠시 이 말에 의문을 느꼈다. "너, 신관이 술 먹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의 얼굴에는 두통보다 더한 고통이 흘러 나왔다. "교단엔 비밀이다." 내가 일러야 할 이유도 없다. 임마. 하여간, 대체 되는 게 없다니까. 내 어릴적엔 안 그랬어요! 그나저나.. 세이 녀석은 어떻게 하나. "사비르. 그건 그렇고, 우리 여기 감옥인 거 같지 않냐? 거의 일반 감옥에서 보여지는 그 특별한 향기가 여기서도 느껴지는데?" 내 말을 듣던 사비르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문질러 댔다. "좀 있다가 생각하자. 그래도 밥은 먹었으니 좀 낫기는 한데..." 역시. 이놈이나 저 놈이나 먹을 게 더 중요하군. 가만, 난 별로 먹지도 못하고 쓰러졌잖아! 이런 제길. "여긴 어디야. 대체." 입가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빨리 피스트레이카 영지로 가야 하는데..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세이는 나와 사비르가 머리를 혹사시키고 있을 때, 간신히 깨어났다. "우와, 여긴 무척 시원한데요?" 당신이 살인 충동을 느낀다면,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참지마.. 가볍게 세이를 두들겨 주고 우리 셋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의논에 들어갔다. "일단, 상황정리를 좀 해 보자. 여긴 감옥이지?" 세이와 사비르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선 사비르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여긴 감옥이 아닐 수도 있어. 하급 호텔일 수도 있지." 역시 신관의 사고는 남들과 다른 게 특징인가 모양이다. 문 닫힌 호텔 봤니? 뭐, 웃자고 하자는 일이었지만, 상당히 쇼킹해서 별로 분위기 쇄신에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음... 혹시 숨겨논 왕자이거나, 그런 거 아닐까요?" 세이의 상상력은 또.. 엄청나군. "누가 누굴 숨겨놨다구? 헛소리 그만하고, 아까 그 상인들의 직업은 뭘까? 보기 1번, 그들은 상인이 아니라 사실 특수 무장 강도단이다. 둘째, 그들은 상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기 밀매 거래, 혹은 용병을 이끄는 상인단이다. 셋째, 그들의 정체는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가 꾼 꿈이다. 자, 셋 중 하나. 뭐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세이는 나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스승님. 확률 33.3퍼센트의 확률이네요?" 답이나 말해 이놈아. "흠... 라플. 내 생각인데, 저들의 정체는 우리가 바로 전에 만났던 놈들과 한패이거나 한 게 아닐까?" 나와 세이는 동시에 사비르를 바라보면서 외쳤다. "마왕의?" 사비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냐. 그 전에 인간을 잡아서 매매하는 조직을 만났었잖아? 기억 안나? 비록 특수한 상황이긴 했지만. 요즘엔 트라이너 변방의 치안이 안 좋아서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해. 대한민국도 정권이 바뀐지 얼마 안되어서 더 하잖아." 하긴... 그럼 그 마차안에는 모두 사람이었다는 결론?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밖에를 보면 알 수 있지. 사람들 소리가 희미하지만 나고 있거든." 흠... 하지만, 마법사(세이), 현자(나!), 성자(사비르)를 가두다니 간뎅이가 부어도 단단이 부었구만. "좋아. 그럼 빠져나갈려면 어떻게 하지?" 사비르와 세이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이런, 자칭 현자인 나를 이렇게 박대하다니.. 설마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이렇게 두꺼운 벽을 뚫고 가겠니? 아예 이 건물 자체를 부시면 또 몰라도. "스승님이 하세요. 그럼 확실하게 나갈 수 있잖아요?" 확실히 나갈 수는 있어도.. 내가 화력 조절이 잘 안되거든. 그러니까 왠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가라구. 결국, 우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옥은 사람을 가두기 위한 곳이지, 도망가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당연히 비밀 통로가 있을 리가 없잖아! "쉬잇.. 발자국 소리가 들려." 사비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간간히 들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 들었다. 그리고 발소리는 뚜벅 뚜벅 거리면서 점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여섯인가..." 사비르의 귀는 거의 동물 수준이다. "이 문을 열어라." "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우리 세 명의 귀는 쫑긋이 섰다. 그게 우리 방 앞이였기 때문이다. 문이 서서히 열리고 둔탁한 소리가 가실 무렵, 방 앞에는 세명 정도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이름은, 검둥이, 흰둥이, 보라둥이. "안녕하세요? 전 세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세이의 인사성은 이런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밝았다. "어.. 그래. 안녕? 가만! 이게 아니잖아!" 그렇다. 내 교육 지침에 보면, 세이에게 항상 이르기를, 손 위 어른에게는 무조건 공손하게 인사하라고 되어 있다. 허허허. "제자야. 훌륭하다." 세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지만, 앞에 있는 검둥이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한 거 같았다. "제길, 어서 팔아 버리자." 팔아? 누굴? 성자, 현자, 마법사중에 누굴 판단 말이지? "저.. 죄송합니다. 당신들 혹시 인신매매범?" "유식하게 노예 상인이라고 하지. 뭐, 예전에 베이카 시에서 노예 매매가 합법이었을 땐 더욱 살기 좋았지만.. 요즘은 경기가 많이 안 좋아졌어. 뭐해? 어서 이들을 끌어 내라." 아, 노예매매도 경기 조류와 상관이 있구나...베이카는 예전에 세이가 팔릴 뻔한 곳이지? "저기.. 우린 왠 만하면 팔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그러나, 사비르의 말은 무참히 씹혔다. 쯧. 기나긴 복도를 따라서 그들을 따라가다 보니, 우리 세명 외에도 소년들 두 명이 합류했다. 이 두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고, 옷은 꼬지지한 걸로 봐선, 귀족 소년은 절대 아니었다. 하기사, 우리 행색도 길에서 하도 헤맨 덕에 남루 그 자체니까. 뭐. "저기... 살려 주세요.." 한 소년이 이 말하고 늠씬 얻어 터졌지만, 얼굴을 때리진 않았다. 얼굴을 때리면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나 뭐라나? "이게 벌써 두번째네요. 감개 무량하다고나 할까..." 세이야. 이런 걸로 감동하지 말란 말이다! 뭐, 좋은 추억이었지. 그나저나 우리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되냐? 뭐, 세명이서 마왕과 싸울 정도이니 이런 거야 별로 감흥이 없다고 해도... "사비르.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거야?" "있지. 여기서 피스트레이카 영지쪽으로 편하게 갈려면 마차를 탈취해야 잖아? 그러니까... 귀족에게 팔린 뒤, 마차를 뺏어서 도망가는 거야." 뭔가 즉석에서 생각난 듯한 작전인데 말야. "그럼 마부도 납치해야 하는데요?" 사비르는 세이의 말에 무척 당황하는 듯 했다. 당연하지. "그래. 마부는 어쩔 꺼야? 참고로 난 승마는 해도 마차는 몰지 모른다고. 세이도 당연히 못하고. 넌 어때?" 에네브 계급의 신관 나리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좋아. 신관의 명예를 걸고! 마부도 덤으로 납치한다!" 왠지 엄청나게 무계획성이 엿보인다만... 나로선 할 말이 없구나. "저기... 시끄러운 거 같은데요?" 얼마간이나 걸었을런지는 몰라도 문 몇개와, 계단 몇개를 지나자, 사람들의 북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화려한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허헐.. "야. 너희들은 먼지 좀 털어라. 그 옷 벗고 이걸로 갈아 입고." 그리고 이상 야리꾸리한 망사같은 옷을 우리에게 던졌다. 문제는 사비르. 에네브 신관은 절대로 왠만한 일이 아니고선 옷을 함부로 갈아입으면 안된다. 게다가, 지금이야 신관마크가 거의 안보이는 상태지만, 먼지만 털어도 신관복이 아닌가? "그냥 이러고 나가죠. 뭐." "안돼. 가격이 떨어진단 말이다. 어서 갈아 입어!" 세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엥... 전 이거 싫어요.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네?" 날 보고 울어 봐야 소용 없단다... 할 수 없군. "세이야. 네 그 청결함의 마법을 사용하면 되잖아? 그거라면 우리 옷 안 갈아입어도 괜찮지 않아?" 세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 셋에게 청결함의 마법을 사용했다. 물론, 우릴 데려온 사람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덕에, 처음 우리가 트라이너 수도를 나설때와 마찬가지로, 사비르의 옷은 번쩍이는 에네브의 문장이, 그리고 세이는 재상복이, 나는? 아.. 나만 후질근하다. 당연히 우릴 데려온 그 인신매매범 중 검둥이는 의아함을 표시했지만, 너무나 바빠서 그건 무시했다. "흠.. 이런 옷이 있었나? 뭐, 재미있기는 하겠군. 어서 나가라. 너부터 가라." 먼저 사비르가 끌려 나갔다. 뭐, 정확하게는 끌려 나간거겠지만. 곧 이어 사람들의 환오와 함께,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울러 퍼졌다. 과연 신관이 사비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부님.. 어떻게 안 하세요? 충분히 도망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아무 것도 안 하고 계시는 거죠? 사비르형, 저러다가 팔려요." 내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음... 세이. 난 이번 여행이 무척이나 어렵고, 또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단다. 게다가 고금에 다시 없을 만큼 강하고 영리한 마왕과도 대결해야 하지. 비록 그의 힘은 내가 가지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강력하단다. 그러나.. 과연 저 신관이 우리와의 여행에서 살아 남을 수 만큼 강할까? 난 잘 모르겠구나." 일종의 시험이라는 거지. 사람을 시험하는 건 나쁘지만, 별 수 없으니까, 나도 이런 잔머리를 굴리는 거라고. "사부님... 그럼 저도 방해가 되나요? 저도 저 형보다 약한데요?" "녀석. 넌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비르까지 지킬 수는 없다고. 알겠냐?" 세이의 입에서는 이내 삐죽이는 뭔가가 튀쳐 나왔지만, 녀석이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애로 보인다고. "신의 영광이 이곳에 깃들라!" 한 목소리가 대지를 가르듯이 울러 퍼졌다. 그리고 사비르의 모습이 우리 앞에 드러났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선 우리에게 손짓했다. "뭐해? 어서 도망가자고." 뭔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성력이 느껴지는데.. "너 뭔 짓 했냐?" "새카맣게 어린 너에게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그보다.. 저들이 정신이 나간 동안에 빨리 도망가자고." 세이는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그에게 질문했다. "저... 사비르. 이곳에 잡힌 노예는 안 풀어 주시나요? 그들도 풀어 주셔야지요." 사비르는 재빨리 우리 곁으로 다가오면서 속삭였다. "저들에겐 신의 고행이 같이 하는 것 뿐이야. 우린 우리 길을 가야 하는 거고. 알았지?" 너.. 신관 맞냐? 살린이나 케빈이라면 끝까지 살릴려고 애쓸 텐데 말야. 쯧.. 하는 짓하고는. 할 수 없군. 본보기를 좀 보여야지. "사비르. 저기 저 울고 있는 사람들은 어쩔 셈이지? 그들을 구출할 생각은 안 하는 거냐?" 사비르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군. 뭐, 세이도 엉거주춤 어물 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이들을 모두 탈출 시키냐 인데.. "차라리 모두 다 폭파 시키는 건 어때요?" 세이 다운 말이다. 그나저나, 왜 사람들은 아무 반응이 없는거야? "저기 있다! 잡아라! 이 놈! 감히 깜짝 폭탄을 던지고 도망가다니! 정말 신관인 줄 알고 긴장했잖아!" 신성력이 느껴지길래 신력을 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단 말이냐? 너도 참으로 웃기는 놈이로구나.. 쯧. "할 수 없군." 사비르가 인상을 쓰면서 앞으로 다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녀석의 옷에 있는 에네브 망토는 마치 아름다운 황금빛에 휩싸여서 정말 대단한 신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음 하하하!" 뭔가 신관이 할 대사는 아니다. "저 놈 잡아라!" 사비르는 다시 크게 한 번 웃고 말했다. 손은 허리 위에 올리고, 아주 의기 양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두를 압도하는 자세를 취해 주었다. "자, 여러분! 여긴 정말 마왕이 있습니다! 모두 박수! 뭐해? 안나오고?" 죽일놈. "안녕하세요? 오늘도 즐거운 시간,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저흰 정부에서 감사 나온 사람들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만, 언젠가 있을 만남을 위해.. 그럼..." 세이가 커튼 뒤에서 한숨을 지어 보였지만, 그건 싸악 무시하고 마력탄을 천장에 날리고, 동시에 하급 마법들을 난사했다. 즉, 죽지 않을 정도로만.. "우와. 대단하네요. 아주 쑥대밭이 되었네?" 가벼운 마법 몇개 날렸는데, 일대가 아주 평지가 되었군. 헐헐헐.. 내가 참, 요즘은 나이를 먹어서인지는 몰라도 힘 조절이 잘 안된단 말이지. 하핫. "조심하세요!" 어느새 빈 공터가 되어 버린 황량한 대지에 숲의 나무들만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세이의 말마따라 조심해야 할 듯한 은색의 화살이 날아 오고 있었다. "뭐야!" 서넛의 금발이 흔들거리면서 엘프 몇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아는 엘프들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리고 환영의 뜻에서 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말야.. "으... 이 놈들.. 으.."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그래도 뭐, 죽은 사람은 없네. "누구냐!" 사비르, 여지까지 비겁의 화신처럼 행동하다 갑자기 정의로운 행동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 정의를 지키는 정의의 화신 장의사이다!" 잠시 장내가 조용해졌다. 장의사. 그래. 장의사란, 시체를 장사지내는 사람을 말한다. 갑자기 저 엘프가 왠 헛소리를.. 엘프의 유머감각이 내가 없는 사이에 더 뛰어나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야. 시끄러." 다른 엘프 하나가 그 녀석을 핀잔주는 걸로 봐선, 별로 시대가 변하진 않은 모양이다... "흠..! 여하튼, 너가 우리 엘프들의 적! 인신매매단이겠지? 사람만 매매하는 것도 모자라서 숭고한 엘프까지 매매하다니! 용서못한다!" 뭐야? 그럼 우리 편이잖아? "아, 우리도 여기 잡혀와서 이제 막 탈출하려고 하는 거야. 자네 뭘 몰랐군." 화려한 금발의 엘프들은 즉시 사람들을 도와 잡아서 혼내야 할 놈들은 때려주고 나머지는 다 알아서 가도록 조처했다. 사비르? 이 비열의 화신은 돈을 챙기고 있었다... 말세야. "에네브는 가난하다고..!" 누가 뭐랬냐. "스승님. 역시 종교의 몰락이라는 건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었군요. 살린처럼 좋은 사람도 있고, 사비르처럼 썩은 신관도 있고." 암. 그렇고 말고. 그나저나, 숲의 엘프라면 혹시 길을 알지도 모르겠는걸? "아, 혹시 여기 나가는 길을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엘프 하나가 우리를 살짝 바라 보았다. 그의 눈은 엘프 답지 않은 붉은색이었다. 옷도 좀 옛날 스타일이고..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엘프들이 원래 옛날 걸 좋아하니까... 유행에 뒤떨어져도 참아야지. "길이요? 글쎄.. 우린 한참 동안 숲을 나간적이 없어서요." 으잉? 그럼 이 사람들에게... 어라라? "스승님.. 사람들이... 모두.. 없어 졌어요. 사비르형도!" 방금까지 돈을 챙기던 사비르가 갑자기 사라지고, 서서히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난 재빨리 세이의 손을 잡았다. 뭔가.. 이상하다. 숲에서 이런 노예 매매가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게다가 길도 모르는 엘프에.. 뭔가.. "흐흐흐흐..." "얼마만의 사람이지?" "글쎄.. 이번엔 실컷 놀려주고 보내야지. 헤헤헤..." "재미있겠다." 난 하나도 재미없어! 그래도 다행이군. 세이라도 건졌어. "스승님.. 무서워요.. 뭐죠?" 낸들 아냐? "자.. 어떻든 빠져나가야겠다. 다 부셔볼까? 불로 화악... 그럼 나오지 않을까? 네 생각은 어떠냐?" "몰라요. 그런 어려운 것, 제가 알리가 없잖아요... 스... 승... 님.. 어디 계세요? 안 보여요." 순식간에 세이의 손을 잡고 있었던 쪽에 짙은 안개가 어리는 듯 하나 싶더니 어느새 내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세이의 목소리는 금새 어둠 속으로 뭍혀 버렸다. 이런... "이게.. 대체 무슨 장난이지..?" 안개는 여전히 가득했다. 이런 경우엔.. 차라리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낫지. 설사 결계니 뭐니 해도.. 아.. 그렇구나. 그 화살이 바로 이거였어. 엘프가 은을 사용해서 활을 만들리가 없는데 말이지. 어리 석었어... "라플? 거기 있는 거에요?" 그리고... 저건.. 또.. 뭐지? 왜 키히가 이런 곳에서 내게 살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있는거지? 그의 모습은 마치 예전에 나와 그녀가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처럼, 머리에는 흙이 군데 군데 떨어져 있었고, 옷에는 거미줄이 엉켜 있었다. "...넌..." "저에요..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라플. 전.. 당신이 사라진 줄만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절 혼자 두시지 않으시겠죠? 네? 약속해 주세요." 그녀의 얼굴에는 슬프리만치 아름다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옷에는 군데 군데 피도 묻어 있었고,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곧 괴로움으로 다가 왔다. "어서요..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시면.. 전.. 전.." 키히가 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날 부르고 있다. 이럴수가..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고, 환상이라면 꿈결같은 꿈. "라플. 왜 거기 서 있죠? 그녀는 나쁜 사람이에요. 제가 더 좋지 않나요?" 뒤에서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메데이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수도로 돌아갔을 텐데.. 아.. 알고는 있다. 이게 모두 실제가 아니고, 뭔가 이곳이 수상하다는 것도. "..." 세이가.. 무사해야할텐데.. 걱정이다. 아, 난 역시 연인보다 제자가 더 소중하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부님! 위험해요!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하. 이번엔 세이인가? 세이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라플... 날 버리는 거야?" "저와 함께 나바스로 가요!" 목소리들이 귓가에 울리고, 허공에는 어둠이 깊게 깔려 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환상, 꿈이라면 악몽, 실제라면 꿈.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난 키히에게 돌아섰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눈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날... 사랑한다면, 이대로 사라져 주렴. 나의 작은 엘프여." 참고로 키히는 키가 크다. "라플. 왜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거지요?" 키히는 절규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에 날리고 옷에 묻어 있는 피들은 점점 농도를 더해갔다. "그건... 넌 내 사랑하는 엘프가 아니기 때문이지. 그녀라면, 날 죽여버렸을 꺼야. 왜냐면.. 그녀는.. 지금 미쳐 있거든? 들어 봤어? 미친 애인에, 살인자 제자에... 그리고 당사자는 어리석은 광대라고.." 이건 예전에 마왕이 내게 한 이야기들이다. 그는 나에게 저주나 비슷한 예언을 했었지. 그 놈의 예언에 모든 게 맞춰져서 돌아가는... 가만, 맞춰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다시 나타난다는 예언 비스므레한 것도 하지 않았어! 그래.. 그리고 마왕은 내가 소멸 시켰고.. 그러고 보니 웃기는 일이지. 마왕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있다니? 그래. 붉은 달, 구원기사.. 그게 다 마왕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어. 마왕이 나타나서 뭘 하지? 그는 세상을 원래도 멸망시킬 생각따윈 없었는데. 지금의 마왕은 내가 아는 그 옛날의 마왕이 아니란 거지. 그걸 아는 어떤 다른 자... "너의 정체를 알겠다. 넌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냐. 아, 당연하군. 넌 사람이니.. 그녀는 말이지. 엘프야. 엘프. 엘프는 멸종된 거나 다름 없지. 안 그래? 모든 게 숲의 환상이군. 그렇지?" 숲의 환상처럼, 정말 꿈결처럼 키히의 모습은 천천히 어둠속으로 흩어져 갔다. 동시에 메데이레나와 세이의 모습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내 주위에 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동시에 난 볼 수 있었다. 숲 가운데 늪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는 세이의 모습을. "세이!" 녀석은 왠지 눈도 뜨고 있었고, 동시에 눈에선 눈물이 흘러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떤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눈에는 그것이상의 진실이 없으리라. "세이!" 녀석의 손을 힘겹게 잡는 순간, 동시에 주변에 안개가 다시 밀려 들었다. 내가 끼어들었기 때문에 녀석의 환상 속으로 가게 된 거 같았다. 젠장... 어떻게 이 녀석을 끄집어 내냐. "...흑.. 흑.. 잘 못했어요. 전. .전.. 잘 할 수 있어요. 아버지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전.. 전 훌륭한 기사가 될께요. 제발.. 제발 때리지 말아요." 녀석은 괴롭다는 듯이 몸을 뒤틀었고,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떤 형체가 그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숲이 보여주는 환상이지만... 계속 겪게 되면 좋을리가 없지. "세이야. 나다. 내 목소리 들리니? 나, 너의 스승인 라플이란다. 세이야. 집에 가야지." 세이는 갑자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서서히 안개가 걷혀갔다. "스승님.. 나쁜 꿈을 꿨어요. 스승님을 제가.. 제가.. 죽이는 그런 나쁜 꿈을.." 세이의 머리카락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난 녀석을 꼭 끌어않고 슬픔을 되삼켰다. 녀석을 위해서.. 난 아무 것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 "응?" 녀석의 팔과 다리에는 아까 맞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거.. 보통 환상이 아니군. "세이야. 이렇게 우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이 늪지에서 빠져 나가고, 그리고 나서 빨리 사비르를 구해야겠다. 녀석이라면 어떻게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 놈 성격이라면 성력을 마구 남발할 가능성도 높은데 말야. 사비르의 모습은 그 때 그 이후로 잘 보이지 않았다. 세이는 나와 함께 있었으니, 안개에 휩싸였어도 근처에 있다손 치더라도, 사비르는 그 곳에 없었다. 이미 화살 날아올 때 근처에 없지 않았나? 그럼.. 어디 있는 거지? "추적 마법을 사용해야 겠어요. 아니면 비행 마법으로 찾아보던지요." 세이는 어느새 씩씩하게도 눈물을 닦고 의젓한 척 하고 있었다. 귀여운 것. 후후. 내가 제자 하나는 잘 키웠다니까? "좋아. 일단 근방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근처에 다른 기척이 별로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주변에는 고작해야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변의 숲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부터 드는 생각인데요... 설마, 우리가 잡힌 것도 다 엉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러고보니 스승님만 수면제가 듣지 않은 것도 그렇고.. 또, 아까 있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잖아요?" 이제야 눈치챘냐? 이런 둔탱이. "그 정도가 아냐. 이들은 아마도.. 살아 있는 게 아닐꺼야. 그런 면에선 아마도 사비르가 좀 날지도 모르지. 그는 죽은 자들의 반대니까." 어디 성력 안 날아가냐? 그럼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사부님. 추워요. 밤이 되가나 봐요." 아예 이공간일 가능성도 찾아 봐야겠군. 일단, 이렇게 일교차가 심할리도 없으니까. 흠... "다 가짜는 아닌 모양이야. 차라리 잘 된거야. 사비르가 제 정신이 아니라면 아마 귀신이 되어서 우릴 찾고 있을 테니까." 세이의 얼굴에는 세로 주름이 깊게 파였다. 야, 입 찢는 표정은 언제 봐도 엽기라고. "거기... 사람입니까?" 갑자기 풀 숲이 움직이면서 왠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아무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이젠 별 수를 다 쓰는군. "보다시피. 근데 댁은 누구십니까? 이곳은 여러모로 수상한 곳인데 말이죠." 인영은 천천히 우리 앞에 다가왔다. 그는 사비르였다. "에엑? 사비르? 어디 있었던 거에요?" 젠장! "세이! 이름을 부르면 안돼!" 인영이 미소를 짓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급속도로 세이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젠, 너만 남았군." 그 말은 사비르도 당했다는 건가? 하긴, 세이가 사라짐과 동시에 완전히 기척이 없어졌으니까.. 수상하다 했지. 키히, 메데이레나, 세이의 환영은 자신의 이름을 절대로 말하지 않았지... 뭔가 이름을 불르면 그걸로 의미를 갖게 되는 게 틀림 없어. "그렇게 되었지만, 내가 모두를 구출해서 가도록 하지." 그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너가? 농담이지? 나는 사비르야. 날 이길 순 없어. 그 소년이 나에게 이름을 주었지. 잊었나?" 사비르에게 이름을 주었다? 제길. 제발 사비르가 부른 이름이 내가 아니길 바래야 겠군. 나라도 내가 상대라면 버겁다고. 다행히도, 여기의 환상이란 자신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 같으니.. "아, 그랬지? 좋아. 좋아. 그보다 목적이 뭐지?" "목적? 아, 그거? 시험이지. 자네와, 자네 동료의 시험. 언젠가 구원기사가 나타나길 난 기다려왔거든. 이젠 우리 모두는 이름을 잊었지만... 당신이 정말 구원기사라면 우리에게 이름을 줄 수 있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힌트나, 컨닝은 안되냐? "그걸 어떻게...?" "모르면 평생 여기서 이러고 있던지. 그 동안 너의 제자는 죽겠지만. 후후후. 잘 있어. 잘 해 보라고~" 녀석의 모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래. 한가지 안 것이 있잖은가? 난 구원기사가 절대로 아니라는 거. 마왕이 세상을 구원해? 것두 웃기는 코메디라고. 그렇다면 누가 있을까? 구원기사가 될 소질이 있는 놈들은.. 음.. 음.. 없군. "젠장. 할 수 없군." 다음날 아침이 되기 전까지 난 그야말로 곤히 잠들었다. 사실, 여긴 위험은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 그게 사실 정말 문제인데, 괴물이나 맹수가 있다면 적어도 나갈 수라도 있다는 거겠지만, 아예 그런 게 하나도 없다는 건 가끔 미친듯이 나타나는 놈들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예 이젠 어제 그 이름을 가지게 된 놈을 제외하곤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게 문제지. "그럼... 응?" 세이가 작은 나무 묘목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가짜이겠지만. "여기서 뭐하나?" 세이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녀석의 옷은 꽤나 화려한 복장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아마 재상복 정장이지? 흠. "세이는 보다시피 이곳에 심어진 나무를 보고 있었지요." 이름을 말한다는 건.. 이 녀석이 사비르가 말한 놈이라는 거군. 제발 더 이상 증식은 안 했으면 하는데 말야. "좋아. 너희들.. 내가 어쩌길 바라는 거지?" "아무 것도. 그저 당신이 이곳에 있으면 하는 거에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바깥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당신을 아프게 해요. 하지만, 우린 그렇게 하지 않아요." 충분히 골머리가 아프다고. "모르면 가만있어. 젠장. 원래 본체가 그 모양이니 너도 이 모양인 게로구나." 가짜 세이는 생긋 웃었다. "아니요. 전 그 본체와 상관 없어요. 전 사비르가 불러서 나온 이름인 걸요? 그의 눈에 비친 세이의 모습이지요." 흠.. 이건 또 흥미롭군. "그럼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지?" "아이요. 그 외엔 아무 것도.. 당신을 마왕으로 보는 자는 없어요." 흠. 그것 참 다행이군. 아이라. 그렇다면 나와 똑같은 아이 정도 밖에는 안 나온다는 거지? 휴. "좋아. 한가지. 나와 약속해 주겠지? 너가 세이라면." "예. 스승님. 말씀하세요." 진짜 세이가 이거의 반만큼만 말을 잘 들어도 황홀하겠군. "좋아. 사라져라. 그리고 원래 본체를 내 놓으렴." "예. 전 스승님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요." 너무 착해도 문제군. 녀석은 서서히 사라지고 그 앞에 있던 묘목에는 이제까진 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래.. 이거였구나. "어서 나와라. 녀석. 멍청하긴." 세이는 흙속에 나무의 뿌리에 엉켜서 묻혀 있었다. 이거.. 이제 슬슬 감이 잡히는군. 논리 게임은 정말 질색인데 말야. "자, 이제 바보 신관 녀석을 찾는 건 너가 해야 한다. 사비르를 크게 불러라." 입에 있던 흙을 뱉던 세이는 툴툴 거리기 시작했다. 녀석을.. 다시 가둘까 보다. 쳇. "그리고 한가지 명심할 건... 너가 평소 그에게 하던 행동으로 해야 한다는 거다. 나에게 보이는 이런 모습이 아니라." 그 말을 들은 세이는 잠시 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저 입가에 손을 모으고 허공을 향해 불렀다. "사비르!" 어쩌면 세이는 내가 생각하는 녀석처럼 어리숙한 놈이 아닐지도 모르지. "부르셨습니까? 재상님." 녀석은 즉시 세이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아마도 평소의 세이는 강압적이고, 무서운 놈일지도 모른다. "그래. 사비르. 너에게 지시할 것이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번 일은 취소하시는 겁니까?" 이번 일? "그래. 가서 너의 본체를 데려와라. 그리고 넌 소멸하라." "알겠습니다. 재상님. 분부 명심하겠습니다." 세이는 알고보니 무척 관료적인 놈이었구나. 흐음. 할 수 없지만.. 추궁하고 싶어도 참아야겠지? 세이는 명령을 내리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이 흐르자, 저 풀숲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한 청년이 오고 있었다. 사비르는 그야말로 흙 검데이가 되어서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무사했군. 이거, 나만 이꼴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해. 젠장. 내가 왜 눈치 채지 못했지?" 너가 둔탱이거나, 혹은 너무 돈에 눈을 뺏기고 있어서겠지. 그 외엔 없다. "자, 이제는 나가야겠군." 허공에 빛나는 아름다운 별들이 화사하게 어느새 밤을 알리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진심을 담아서 작게 속삭였다. "내 보내주지 않겠니? 난 너희들을 헤치지 않아. 그리고,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겠다. 약속하지. 마왕의 약속이다." 숲은 서서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 많던 나무들도 모두 하나의 잡초로 변해가고 있었다. 잡초는 바람에 흩날리고 나는 그 가운데 하나의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느티나무?" 세이는 깜짝 놀라서 그 나무에 다가갔다. 적어도 나보단 오래 된 나무 같은데? "그래. 느티나무지." 사비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무에 가서 내게 물었다. "라플. 이해할 수 없어. 그 많던 숲들이 다 어딜 간거지?" 단체 동문회갔다. 왜? "그들은... 모두 미래와 과거의 숲들이야. 아마도 나에게 어떤 메세지를 건네려 한 것이겠지. 내가 어리석어서 그걸 실현시킬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지만." "흠... 그런 썰렁한 이유를 우릴 그토록 고생하다니. 젠장. 정신이 드니까 내가 흙을 파고 있었던 거 알아? 무서웠다고." 사비르는 지금도 치가 떨리는 듯 했다.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세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아래만을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가.. 있군." 동시에 사비르는 이번엔 아예 자신의 입을 닫고 내가 지시한 방향을 바라 보았다. "넌...엘프로군." "예. 그렇습니다. 마도사." 엘프는 젊어 보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반말을 찍찍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버릇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엘프 대다수는 민족 우월주의와 공주병을 앓고 있다. "당신이 벌인 일인가? 넌, 죽은 엘프일텐데?" 이젠 귀신도 설치는 구나. "그렇죠. 조심하세요. 전 키히의 친구였습니다. 당신에게 충고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당신은 한가지 모르는 게 있어요. 키히는 정말 미친 걸까요?" 세이와 사비르는 아예 멀리 떨어져서 떨고 있었다. 하긴, 엘프건 괴물이건 죽어서 귀신이 되어 있다면 무섭기 마련이지. "걱정마. 난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하기로. 그리고 그건 변하지 않아." "전.. 당신이 최악의 선택을 할까봐 두려운 거에요." 최악은 때론 최선이 되곤 하지. 그리고 난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엘프가 보여주는 환상이 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숲의 기억, 그녀와, 그녀의 종족들의 기억들이 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키히는 단지 평범한 엘프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생인 엘메인보다 훨씬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는 장래 엘프의 장이 될 것이라고 했고, 혹은 세상을 구할 용사가 될 것이라 하였다.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던 그 시대, 마왕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그 시대 이전에 태어난 키히는 장래 있을 어둠에 대비하여 마법을 익히고 자라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그래. 엘메인과의 사소한 다툼이었다. "누나!" 엘메인은 키히와 거의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엘메인, 무슨 일이지?" "그게 사실이야? 인간 세상으로 간다는 거 말야? 웅... 난 나도 같이 갔으면 하는데?" 키히는 정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곤란해. 넌 아직 어리니까. 알았지? 다음에 다시 올 땐 선물을 잔뜩 사올 테니까. 알았지?" "응... 싫은데." 그 날, 엘메인은 납치 되었고, 동시에 많은 인간들이 들이 닥쳤다. 인간 마도사의 힘은 엄청났다. 그들은 엘프들을 잡아서 노예로 넘기기 위해서 마을을 습격했고, 그의 그러한 시도로 인해 키히는 가족을 동시에 잃게 되었다. 그리고... 키히는 괴로움 속에서 홀로 탈출하여 마을을 벗어나 인간의 무대로 나가게 되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에 천천히 검은색 물방울이 번져나가고, 그녀에게 인간은 적이고, 어둠의 존재였다. "엘프 아가씨. 이런 곳에서 잠들면 감기 듭니다." 은발의 20대 청년 한 사람이 그녀 앞에 서서 조용히 손을 내 밀었다. 키히와, 내가 처음 만난 그 날이었다. 그녀는 그 때 강한 거부감으로 나를 밀쳐냈고, 배고픔과 지침에 허덕이던 그녀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인간 마도사인 내가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인간 마도사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사랑하면서 천천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뭔가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가족을 죽였는데.. 그 때 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점차 세월이 흘러서 한 왕의 영혼에 마왕이 씌어서 세상은 그야말로 어둠의 한 가운데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마도사의 곁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중, 프라운이라는 자는 마족의 냄새가 났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다. 키히의 마음에서는 순간 어떤 것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 마도사는 강해. 그러나 마왕 보다는 약하겠지. 이런 그를 없앨려면 그래서, 모두의 복수를 해 주려면 아마 이 마족을 이용하면 괜찮을꺼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 사실을 잊기로 했다. 마도사가 행여나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마음에 그를 사랑하는 마음도 괴로움을 참지 못했고. "자... 당신이 여기에 있다면 위험합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키히. 나의 사랑하는 엘프여." 그는 정말 따사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그는 내 마을을 불태운 그 마도사가 아니고, 사실은 한 없이 착하기만 한 사람인데... 그를 인정하면 내가 부서져 버릴까 두려웠던 걸까? 응? 그는 배신으로 인해서 죽었다. 그리고 다시 키히는 인간 세상으로 나갔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인간들에게 있어서 약하고, 어리석은 엘프가 아니었다. 그녀는 영웅이고, 라플이라는 대 마도사, 인간을 구한 사람의 애인이라는 명칭이 있었다. 그녀는 트라이너라는 라플이 있던 그 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자, 그를 배신한 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키히는 맹세했다. 자신이 가장 큰 배신자이고, 또한 너희들이 그를 죽였다고. 그러니 너희들을 없애리라... 인간들, 어리석은 인간들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죽였으니, 내 그를 위해 복수한다고. 그녀는 그리고 정확히 그 때부터 모든 사람을 죽이기 위한 일들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라플과 닮은, 아니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밝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괴로워하고 있는 건가?" "너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라플. 이젠 그녀를 구제할 방법이 없어요. 하늘과 대지가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숲의 아이. 숲으로 돌아가 처참하게 영혼조차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엘프의 말이 들림과 동시에 서서히 안개들처럼 보여지던 환영은 사라져갔다. 이걸 보고 난 나의 감상? 난 따였다... 왜 나만 몰랐지? 쳇. 너무하네 진짜. "스승님? 왜 멍하니 계세요?" 이들에겐 내가 한 사람의 일생을 보는 것이 아주 한 순간의 일처럼 보이나보다. 뭐, 그럴 수 있지. "아니. 그런 건 아냐. 단지... 단지... 그래. 가자."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도 이겨낼 수 없다면 내가 아니지. 하핫. 스스로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거지. 안 그래? "사비르. 넌 혹시 세이 녀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나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있어? 뭐, 말은 안해도 괜찮지만, 혹시 또... " 사비르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서 앞서서 수풀을 신나게 헤치면서 가는 꼬마 녀석을 바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내 생각을 말하는 건가?" 그럼 너한테 묻지 신에게 물으리? 멍멍. "그래. 세이가 내 눈에는 그저 작고 귀여운 녀석으로 밖에는 안 보이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잖아." 녀석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간은 낮은, 약간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왜 이리 폼은 잡는거냐. "글쎄.. 내 눈에 비친 세이라. 녀석을 처음 봤을 땐 단지 재상으로 비치진 않았어. 귀여운? 글쎄.. 난 절대 그렇게 안 보여. 그 당시 반역자 세명을 단칼에 없애 버렸거든. 트라이너의 지금 왕이야 녀석을 절대 신임하긴 하지." 그럼 무서운 사람이라는 얘기인가? "그래서?" "그래서... 글쎄. 사실 내 눈에는 너가 더 귀엽게 보일 뿐이니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말야. 라플. 이건 잊지마. 녀석은 재상이었어. 그러니까 어린애는 아냐. 어린아이는 재상을 할 수 없어. 그 자리란, 이른 바 가장 힘든 자리야. 사람들의 음모와, 험담의 가운데에 있는 곳이라고. 그러나, 녀석은 짧은 기간동안 모두를 물리쳤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연히 알지! 암. 그렇고 말고. "내 제자가 천재라는...?" 사비르는 잠시 한숨을 내 쉬었다. "만만하지 않다는 거야. 너가 보는 건 그야말로 어린애라는 관점이니까." 음.. 하지만, 내 눈에 너도 어려 보인다고. 그건 아는 거냐. 세이에 대한 입장을 막 정리 할 무렵 우리는 그야말로 그 지겹고 짜증나는 숲을 간신히 벗어 날 수 있었다. 다행하게도 그 엘프 귀신이 어느정도는 우릴 도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영지에 가기 전에 마왕을 만나느니 어쩌느니 해서 시간도 소비하고 길도 꽤나 돌아간 셈인데, 이렇듯 숲을 빠져 나가자 마자 영지의 입구로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으로 왔다는 건 아니지만. "숲이.. 사라졌어요." 세이의 눈은 똥그랗게 되어서 아까 우리가 걸어온 길을 바라 보았다. 그 곳은 단지 넓게 펼쳐진 길이 뻗어 있을 뿐이었다. 귀신이 곡을 한다더니 정말이군. "여기 표지판도 있는데요?" 아름답고 광할한 대지의 한 가운데 길로 보이는 곳 바로 옆에는 돌로 깊게 파여진 글씨가 쓰여 있었다. [피스트레이카 영지] 이건 아마도 예전에 내 선조의 선조쯤 되는 사람이 만든 게 틀림 없었다. 예전에도 한 번 본 일이 있지. 자,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곳을 잘 따라가서 성공적으로 성에 도달하느냐인데... "성에는 아마 지금쯤 교전 중일 확률이 높겠죠? 키히의 해골군단이나 좀비들의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거나 포위하고 있을 테니까요. 이 정도인데도 중앙에서는 군사를 보내지 않다니 너무 하는 군요." 사비르의 이마에는 살짝 골이 생겼다. 뭐, 그렇긴 하지만, 바로 위에 강국 나바스가 아주 멀쩡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은 중앙에선 커다란 부담이 될 터였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스승님.. 좀 쉬었다 가면 안되요?" "응?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세이의 입에서는 투덜거리는 불평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스승으로서 그런 거 일일이 다 챙겨주면 애 버릇 나빠져요. "참, 세이. 너 연어찜말야, 연어가 없으면 할 수 없겠지?" 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날 미친놈 보듯이 바라 보았다. 썩을.. 스승보고 그런 불순한 얼굴이라니! "물론이죠. 재료도 없이 어떻게 만들어요? 게다가 저희가 일정을 오버하는 바람에 식량이 훨씬 모자른단 말에요." 그렇지. 역시 그렇군. 사비르는 내 말에 눈치를 조금 챈 듯 황급히 나를 바라 보았다. "설마.." "그 설마가 맞지. 앞으로 우린 키히의 군대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은 강하고 숫자가 많으니 우린 도망만 쳐야 할 입장이란 말야. 게다가 식량을 뺏을 수는 당연히 없을 테고, 그러니... 우린 가는 동안 잘못하면 꼼짝없이 굶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그렇다. 앞에는 격전이 기다리고 있고, 심지어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텐데 먹을 기회나 있을까 싶지 않군. "마을이 있잖아요? 그 곳에서 먹을 걸 좀 챙기면 되지 않을까요?" 세이는 아직도 별로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군. "일단 마을은 상황 파악을 위해 돌아다니긴 했지만, 먹이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꺼다. 일단, 놈들이 주변의 마을을 그냥 내버려두는 인도적인 일을 했을리도 없고, 더군다나 사람이 안 지 꽤 되었을 마을에 있는 게 멀쩡하겠어?" 세이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이내 눈물이 그렁한 얼굴을 하고선 나를 바라 보았다. "사부님.. 전 굶는 게 싫어요." 누군 좋냐! 세이를 흠씬 두들겨 패고는 질질 끌고 우린 근처에 가장 가까운 소규묘 촌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길따라 가다가는 적군의 한 반은 만날 수 있을 테니 돌아서 뒤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얇팍한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 얊팍한 생각이 뜻대로 안 될지도 모른다는 거고. "마을인가..." 이 마을은 아마 총 집이 7채 정도의 작은 마을인 거 같았다. 뭐, 그래봐야 괴물들이 들이 닥친 바로 그 순간에 멸망했을 확률이 높았다. 주변에는 시체의 흔적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죽은지 얼마 안되서 다시 좀비가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 생존자를 찾아 보지요. 모두 흩어져서 찾는 건 위험하니까, 같이 다닙시다." 사비르가 의견을 제시하고, 우리는 7채를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 된 듯 했다. 집마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곡식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죽은 거 같았다. 혹은, 피난했거나. 군데 군데 있는 핏자국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웠는가를 알게 해 주었을 뿐이었다. "키히는.. 정말 용서받을 수 없겠습니다." 그녀는 이제 그나마 이젠에는 하지 않던 살인도 꺼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미치게 하였는지, 이제는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내 영지에 있는 건지도. 그녀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여기서 더 이상 있어 봐야 좋을 건 없겠습니다. 어서 갑시다. 자, 세이. 어서 가자꾸나. 뭐가 있니?" 세이의 시선은 한 곳에 멈춰지고 있었다. 그 곳에는 작은 괴물이 있었다. 작았다. 집의 헛간만한 크기에 말 하나를 꾸역 꾸역 삼키고 있었으니까. "용보다는 작잖아요. 그렇죠?" 세이가 땀을 닦으면서 말하곤 사비르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저 놈이 배가 부르기를 기대하는 건 역시 무리겠지?" "무리지. 말을 집어 던졌잖아? 저 놈은 아마 사람이 더 맛있다는 걸 아나 본데?" 사비르가 문득 나를 바라 보았다. "정말 사람이 더 맛있어?" 정말 실 없는 놈이구만. 미칠 노릇이야. "자, 저 놈을 봐. 우릴 향해서 다가오지? 우리랑 세세세 하자는 건 아닌거 같고 말야. 좋은 의견 있어? 신관, 어서 말해보라고." 사비르는 싱긋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우아하게 한 마디했다. "도망가는 거지 뭐." 이런 놈이 신관이라고. 제길 뭐든 되는 게 없다니까? 왜 신이 이런 놈을 에네브.. 가만, 신이 앉힌 건 아니었지? 그럼 할 말 없어. "그래서 돌팔이라고!" 옆에서 세이의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얼음의 화살이 쏘아져 올라갔다. 괴물은 그걸 아주 가벼운 동작으로 잡았다. 잠깐! 잡다니! 그게 말이 되냐! "안녕? 여러분?" 말까지! 오, 날 진정 시험에 들게 하는 거라면, 이건 너무 합니다 그려! 그 괴물의 입에선 아까까지 씹던 말의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는데! 그 입에서 사람의 말이 나오다니! "하하핫.. 말도 하시네요?" "아, 그럼. 말을 못해서야 요즘의 관광 특수에 대응할 수 없지. 안 그래? 참, 자네들은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모양이지?" 이젠 모르겠어...옆을 보니 세이와 사비르 역시 벙찐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하지만 말이지 너무 하지 않아? 괴물이 말을 다 하다니! 기껏해야 아주 낮은 어휘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 "진화한거가..." 사비르의 입에서는 낮은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이는 신기한 모양인지 그 녀석의 앞에 가서 이것 저것 살펴보고 있었다. "우와! 그럼 말은 어떻게 하는 거에요? 얼마 전부터 하게 된 거죠? 주론 좋아하는 건?" 아주 신 났어. 신 났어. "하하하. 걱정말렴. 아, 오늘 저녁 공성전이 있는데... 가만, 너희들은 그걸 구경만 할꺼지? 끼어들면 나도 너희랑 싸워야 한단 말이다. 그건 사실 괴로운 일이지. 서로간의 죽이고 죽이는 일은 정말 가슴아파." 거의 인간수준이지 않냐? 사비르를 응시하자 그는 나에게 낮게 속삭였다. "드디어 인간에게 완벽하게 괴물의 입자를 이식하는 데 성공한 게 아닐까요? 수도의 기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의 같지 않았습니까? 아마 이 괴물도 원래는 사람일런지도 몰라요." 하긴 그럴 가능성도 있군. "일단은 성에 가봐야하겠군." "오우! 우리 성을 구경하러 오시는 군요! 당연히 제가 안내하죠. 자, 안내비는 말 한마리입니다. 어떻게 지불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지불하긴 그 성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별로 우린 생각이 없군요. 그보다는.. 당신과 좀 차를 마시면서 우아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괴물은 이상하게도 뛸 듯이 기뻐했다. 차 마신지도 오래 되었다나 뭐라나 하면서... 정말이지. 한심할 정도야. 어떻게 된게 괴물이 더욱 더 사람같은 거지? "정화가 안 먹어요." 어느새 창백해진 얼굴을 한 사비르가 나에게 살짝 속삭였다. 가만, 정화가 안 먹는다는 건 마족의 피로 만든 게 아니란 말인가? 문제가 심각해 지는군. "그럼 사람이셨다는 거에요?" "예. 전 원래 이 근방에서 전전하는 농민이었지요. 그러던 중 문득, 계시를 들은 겁니다. 이렇게 살아선 영원히 나와 나의 자식들은 농사꾼이 되어서 살겠지? 그리고 발전이란 없을 거라고요. 그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키히님이 이끄시는 군단에 들어가면 우린 모두 배불리 먹고 살 수 있고, 모두 평등하다는.." 무슨 평등이론이야? 그러나.. 사람일 때나 그게 좋을지 몰라도.. 이건 좀. "우와. 그래서 모두 평등하게 된 거군요!" "그렇지. 왜, 너도 생각있니? 그럼 하렴. 하지만, 한가지 명심하려므나,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다는 구나." 하긴, 정화가 안 먹힐 정도면 뭔가 단단히 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제게도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지금 전세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괴물은 아마도 생각하는 포즈를 잠시 취하고는 그 엄청난 손톱이 달려있는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예! 우리가 아마도 몇일 내로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적들 마법사는 무척 피로하고, 적의 신관마법은 우리에게 듣지도 않으니까요. 적들 기사단은 많은 수가 잡히거나 죽었거든요. 하하하. 이젠 저 고대 성은 우리 것이 되는 겁니다." 성주가.. 나였다고. "그래요? 하지만... 우린 그들을 도우러 왔는데 어쩌시렵니까?" 갑자기 괴물이 내 말을 듣자마자 크게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괴물의 거대한 어깨가 웃을 때마다 약간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 정도야 알고 있었죠. 전 단지.. 음. 그래요. 마음을 혹시나 바꾸시지 않을까 해서요. 기회는 줘야죠. 우린 야만인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 또한 인간의 새로운 변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린 사고하고, 울 수도, 웃을 수도 있죠. 인간이 하는 모든 걸 하고 또 거기에 아주 엄청난 힘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사비르는 동시에 탁자를 손으로 치면서 일어났다. "닥쳐라!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괴물을 택한 너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아무리 너희가 사고해도 괴물은 괴물 아니더냐!" "사비르. 이 자의 말이 맞아. 어쩌면 아주 오랜 세월 뒤에 인간이 저렇게 될 수도 있는거야. 자넨 성직자로서 그들을 모두 자애롭게 바라보지 못하나?" 사비르는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세이는 하지만 여전히 초롱 초롱한 눈으로 괴물에게 뭔가를 묻고 싶어했고,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사비르와 함께 옆 방에 가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우릴 쉽게 보내줄까? 그리고 왠지 저 사람을 죽이는 건 기분이 나빠." "나도 그렇죠. 뭐, 나라고 저 자가 완전한 인간이라는 부정할 수는 없죠. 하지만.. 하지만.." 겉모습이 문제지. 아주 심각한 문제. 게다가... "하지만 뭔가? 자애의 신이라면 겉모습에 현혹되선 안되네. 저 자는 괴물이 아냐. 사람이지.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나?"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닭았으니까, 사비르가 몰라도 당연한 것이다. "좋아. 알려주지. 저 괴물의 혼은 이곳에 없어. 저건 정말 사람이지. 괴물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사비르의 얼굴은 크게 놀람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뭔 소리인지 알긴 하는 건가? "그게 무슨...! 말이 되질 않잖아?" "아마도.. 육체는 따로 있는 게 틀림 없네. 이상하다 했지. 아무리 이렇듯 마을이 황폐화 되었는데 시체는 커녕 뼈도 안보이다니? 이건 시체가 어디론가 옮겨졌다는 이야기지. 아마도.. 내 생각이 맞다면 시체는 모두 그 성이란 곳에 있을 확률이 높아. 그것도 아주 극비리에. 사람들은 아마도 대다수가 자신의 육체가 어디있는지 모를꺼야." 사비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는 납득할만핝 자료가 없으니.. 뭐, 따에도 묻을 수 있겠지만, 왠지 그건 아닌 거 같고..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저 멀리 괴물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아까의 그 말을 들고 서서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대체.. "세이! 그를 그냥 보내주면 우리에게 단체 공격을 가할지도 모릅니다!" 사비르는 당황하여 그를 붙잡으려 하자 이번엔 세이가 그를 말렸다. "그만 두세요. 사비르. 그는 그다지 전쟁을 찬성하는 쪽이 아니에요." 호, 그럼 괴물 중에서도 전쟁을 찬성하고 안하는 파가 갈렸다는 이야기인데 이건 정말 흥미로운 정보로군. "좋아요. 좋아. 그럼 그 괴물이 왜 우리와 인사를 하고 싸악 사라진 거죠?" 사비르는 약간 숨을 헐떡이는 것도 같았다. "그야.. 우리가 여기 몇일 묵고 싶다고 해서 그렇죠. 일단 주변에 괴물이 깔려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곳에서 잠시 상황을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밤이 되면 공성전이 있다고 하니 우리도 그 곳으로 살며시 스며들어야죠." 괴물 사이에 사람이 있어도 눈에 띈다는 생각은 안 하니? 그리고 가선 어쩔 건데? 설사 분장이 완벽했어도 괴물간의 신호 같은건? 역시 아무 생각이 없는게로구나. "어떻게 스며들 생각인데?" 잠시 세이는 숨을 삼키고 나를 바라보고 굳센 주먹을 쥐고 외쳤다. "바톤 터치! 다음은 스승님이..." 생긋 웃고 있구나. 난 이럴 때 제자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엉망이야. "좋아. 일단 밤에는 움직이지만, 몸을 숨기려 해 봤자, 아마 괴물에 의해 가기전만 해도 아마 한 가벼운 싸움만 백번 정도는 해야 할껄? 그러니 아예 편법을 쓰자고." 사비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 보았다. "어떻게?" "우린 정말 관광객이 되는 거지 뭐. 다른 생각 있으면 어서 말해 보라고. 목에 꽃도 달고 정말 관광객인양 흉내내지. 다행히도 적들은 우리가 누군지 잘 모르는 거 같으니까 말야." 결국 세이는 꽃을 꼬아서 예쁜 화한 세개를 만들어내고, 사비르는 그 꽃다발에 작은 축복을 불어 넣었다. 얼마나 갈진 아무도 모르지. "자, 그나저나 세이군은 어떻게 하실려나?" 세이는 작게 웃고, 그가 들고 있던 아름다운 빵을 들었다. "괴물에게 제 특제 빵을 던지면서 도망가게요. 어차피 개랑 같잖아요?" 가만.. 먹는거라.. 좋은 생각이 났군. "먹는 거에 수면제 타자. 왜 그걸 생각 못했지? 그럼 우리를 쫓는 잠정적인 적들도 처리하는 셈이 되는 거잖아! 사비르! 약 준비해! 세이! 넌 고기를 준비해. 아마 근처에서 말이나 토끼를 구할 수 있을꺼야. 그리고.. 난! 놀아야지. 요즘 피곤해서. 허허헐. 나이 먹어봐." 그리하여 나는 잘 자고, 나머지 둘은 뼈빠지게 일한 덕에 우리는 약탄 고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나는 거기에 마법을 걸어 주었다. 맛있다고 착각하는 마법, 혹은 맛있어 보이는 마법... 자루로 세 자루를 만들어서 그걸 각자 자신의 옆에 들었다. "이걸로 잘 될까요?" "안 되면 되게 하라." 세이는 아무래도 불길한 모양인데, 어쩌겠나? 하늘에는 아름다운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어서 을씨년 스러움을 더불게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 없지만. 후훗. "달도 참 밝지. 헉.. 헉.." 그렇다. 곧 나타날 줄 알았던 괴물들은 의외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등에 짊어진 고기의 무게는 점점 우리를 짖눌러 오기 시작했다. "괴물이 나타나길 이렇게 바란 적도 없는 거 같아요." 세이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고, 사비르는 가장 개중 근력이 딸리는 관계로 거의 기듯이 오고 있었다. 기거나 말거나 난 큰 상관은 하지 않았지만, 녀석은 아주 아주 불안한 얼굴을 하고선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오르막이 펼쳐져 있었다. "개 썰매 같은 걸 만들 걸 그랬죠?" 여기가 나바스 북부냐! "세이. 그러지 말고 수련의 하나라고 생각해라." "하지만 스승님. 수련은 밥 줘가면서 하잖아요." 그렇다. 우리는 아까 그 괴물이 준 차가 전부고, 그 외에는 땡땡 굶고 있었던 것이다. 뭐 곧 가면 마을 하나가 더 나오긴 하겠지만, 그건 그 때 일이고 당장은 어쩌라고.. 아, 그 마을도 다 괴물화 되거나 하면 곤란한데 말야. "이거 하나만 가져가면 안될까요?" "시끄러. 언제 어디서 적들이 나타날지도 몰라. 어서 가자." 그러나 그 날 저녁, 정말 공성전이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신음소리를 끝으로 아침이 밝아 오르기 시작했다. 제길... 한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발도 서서히 한계에 부딪혀갈 무렵, 우리 눈앞에는 아주 아름답고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지형적으로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있었고, 마을 입구는 거대한 모래 장벽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는 매우 작았고, 그 앞에는 두 사람이 망을 보고 있었다. "스승님.. 제가 꿈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저거 사람 맞죠? 저 하얀 연기는 사람들이 밥을 한다는 거죠!?" 세이를 조금만 더 굶기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겠군. "어서 가요. 저도 막 어깨가 무거워지기 시작했거든요." 사비르도 왠지 많이 힘든 듯 했다. 하긴 힘들지 않으면 사람이 아냐. "누구냐! 마녀의 수하냐!" 마녀는 아마도 키히를 말하는 걸 테니까 우리가 제대로 오기는 온 거로군. 다행이라고 해야겠어. "죄송합니다. 우린 성으로 가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밥 좀 주실 수 있습니까? 기왕이면 잠 잘 곳도 있으면 좋겠는데. 여기까지 굶고 잠도 못자고 왔거든요." 간신히 우리는 그 작은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긴 아무리 잘 봐도 애 하나에(나겠지..?) 신관 하나, 청년 하나가 뭘 하겠느냐 말야. "우와! 침대다 침대!" 하긴 나도 하얀 시트를 언제 봤는지 가물 거린다. 야. "이 마을은 어째서 아직까지 멀쩡한 걸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사비르는 신관주제에 의심 만빵이다. "뭐, 여기 검성이라도 살고 있나 보지. 그건 그냥 그러려니 해라. 응?" 세이는 어느새 새록 새록 잠들고 있었다. 뭐, 인간의 활동 중에서 잠을 빼면 남는 게 없다니까.. 하여간. 나도 역시 머리를 배개에 묻고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는 아주 힘들어질지도 모르지만, 뭔가 강하게 이곳에서 나를 그녀가 부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키히는 뭔가를 끝내려 하고 있었고, 그건 나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마왕을 사칭하는 그 녀석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잠이나 자지. 뭐. 쳇." 그 날 밤, 난 아주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꿈을 하나 꾸게 되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에 꾸었던 꿈의 연장 같이 생각될 정도로 아주 몽환적이었다. 하지만, 너무 슬퍼서 그 꿈을 꾸는 동안 내내 울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 났을 때도 눈물이 내 눈에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씻기나 해야겠군." 조용히 일어나서 침대 세개가 나란히 있는 방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방은 그저 흙에 석회석을 발라 만든 듯 하얀 색을 띄고 있었고, 장식으로는 작은 서랍장 하나가 다였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그래도 간만에 쉬었다는 데 기쁨을 느끼면서 앞으로 걸어가자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배가 무척 고파.. 굶어 죽겄어. "야.. 세이야. 배 안 고프냐? 난 굶어 죽겠다 마. 어서 일어나라. 우리 맘마 먹자. 응?" 세이는 생긋 웃으면서 날 보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우웅.. 스승님, 세이는 말이죠. 스승님이 제일 제일 좋아요. 헤헤헤." 그래. 다 좋아. 그런데 말이지.. 야...! 곧 내 머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갔고, 곧 이어 엄청난 소리가 들려 왔다. 돌 떨어지는 소리... 덕분에 잘 자던 사비르는 일어났고, 세이는 정확히 내 머리를 지나 데구르르 굴러가기 시작했으며, 마침 놀란 사비르는 일어서다가 휘청이는 바람에 내 위로 떨어졌고, 마침 뭔가해서 문 열던 사람덕분에 문짝에 세이의 머리가 박는 재미있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으아아악!" 결국, 그날 나는 뒷머리를 잡으면서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야 했고, 세이는 이마에 난 혹을 뭘로 감춰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포기했으며, 사비르는 개중 그래도 나은 편으로 온 몸 타박상에 고생해야 했다. 그 자루가 꽤 무겁긴 한 모양이었다. "많이들 드시죠. 크크큭.. 하핫.. 죄송합니다. 웃지 않고 싶어도 얼굴... 하하하하.. 아닙니다. 어서 드세요." 웃고 있잖어 너! 눈 앞에 앉은 이 아저씨는 이 마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인데 이 마을이 아직까지 점령 안된 게 다 이아저씨 덕분이란다. 뭐, 그렇게 강해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지. "이곳은 그래도 안전한 모양입니다? 다른 곳은 괴물이 판치던데..." 그 사람은 크게 웃으면서 자신의 수염을 쓸었다. 수염도 별로 없으면서.. "하하핫.. 그게.. 의외로 괴물들이 이 마을을 잘 발견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요. 게다가, 이 곳 청년들이 모두 훌륭해서 적들을 잘 막아내고 있으니까요." 그의 팔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는데, 아마도 괴물에 의해 난 듯 했다. 뭐, 대단한 사람인 건 알겠다고. "그래요? 저흰 성으로 가려 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는 깜짝 놀라면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성이라니.. 대체.. 마녀의 성에 가서 뭘 할 생각이신 겁니까?" 이봐. 나도 거기 갈 생각 없다고. "아니요. 그곳이 아니라 피스트레이카 공작의 저택 말입니다. 그 성에 갈 생각이거든요. 몇가지 알아야 할 것도 있고... 해서." 세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젠장, 누가 보면 며칠 굶긴 줄 알겠다! 아, 굶은 거 맞구나. "흠... 그랬군요. 거긴 가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사실 괴물들도 가만히 있으면 그리 우리를 공격하진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대항하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거겠지요." 무사 안일주의로군. 하지만, 촌장의 입장에선 마을이 먼저니까.. 이해해야지. "예. 그래서 저흰 오늘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에, 라플. 난 그게.. 좀 쉬었다가 갔으면 하는데? 아직도 근육통이 장난이 아니거든." 사비르는 울상을 지어서 나에게 어필하고자 하는 듯 했지만.. 쯧. 내가 그런 걸 봐주는 놈 같냐? "치유 마법을 쓰라고. 넌 신관이잖아." 사비르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다음은 세이가 물었다. 멍멍. "저기..전 밥을 더 먹고 싶은데요? 그리고 아직도 피로가 가시지도 않았고.. 네?" "어차피 적들이 보통 사람을 치지 않는다면 이러고 자시고 할 필요 없어. 그냥 부딪히면 그만이라고. 게다가 우리가 성까지 가서 녀석들이 너 성가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잡아 떼면 그만이잖아?" 사비르가 머리를 싸매면서 중얼거렸다. "안일해... 너무 안일해.." 음.. 맘에 안들면 다른 방법도 있지. 난 집에 간다고 그러면 그만 아냐? "자자.. 그럼 우린 바로 밥 먹고 일어 나자." 세이나 사비르는 할 수 없이 나에게 이끌려서 가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흐. 그러나, 그들의 불행은 이게 다가 아니었으니... 뭐? 후후후.. "배 불러..." 세이는 볼록 나온 배를 부여잡고 끙끙 대면서 짐을 들고 가고 있었고, 보존 마법이 걸려서 그나마 물도 떨어지지 않는 고기들을 들고 힘쓰고 있었다. "안일해.. 헉..." 사비르는 근육통이 한층 더 심해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우린 마치 길을 헤매는 부랑아 내지는 괴로운 청년들로 보이겠다. 이것이 바로 시대의 아픔이 아닌가? "자, 힘내자! 예전의 우리 선대들은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해 냈다고!" 잠시 주변에는 풀들이 얼어 붙는 이상 기후 현상을 보이면서 우리는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난 속으로 이상함을 금치 못했다. 왜, 세이나 사비르는 나처럼 경량화의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단 말이다. 이해 못하겠다고. "저기가 성이죠? 헥.. 헥... 근데 아주 새까맣네요.. 헥.. 헥.. 좀 쉬었다 가요..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네?" 불쌍하긴 하지. 하지만, 음.. 좀 문제가 있군. 이 고기를 어떻게 던지지? 그보다 수요와 공급이 전혀 맞지 않잖아? 그리고 안 먹으려고 하면 어쩌지? 흠.. "우리 쇼가 필요하지 않을까?" 세이는 이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왠 쇼요!!! 이젠 더 이상 이상한 짓은 하기 싫다구요! 또 무슨 이상한 제의 하시면 전 그냥 걸어갈 거에요!" 뭐야, 여지까지의 모든 내 정책들은 단지 오늘을 위한 가벼운 숨쉬기 였다고! 후훗. 기대하라고. "자,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둘의 인상은 이제 구겨질대로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비르는 어차피 내 제자는 아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다. "싫어요! 왜 제가 그런 쪽 팔리는 짓을 해야 하나요!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흠.. 물론 나도 안하고 지나가면 좋겠지만. "우린 해야만 해. 너의 그 정화가 먹지도 않고, 게다가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어디 일이 하나 둘입니까? 먼저 그런 일을 안하고 저기 까지 이 짐들을 들고 갈 수 있겠어요? 게다가 우리 얼굴을 아는 적들도 있을 수 있는 데 이 정도의 일은 감수해야 한다고요! 어쨌든 저 안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이는 그제서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스승님. 대신 귀여운 걸로 해 주세요." 흐흐흐. 그러다 마다. 키키키.. 기대하시라고. 바람부는 평원, 습도? 정당함. 날씨? 약간 흐리지만, 이게 딱 좋음. 바람? 우리가 원하는 데로 불면 그게 바람이냐? 어쨌든 준비는 완벽함. 후후후. "난 정말.. 이게 싫어. 싫어... 이젠 괴물이고 세상의 종말이건 간에 상관하기도 싫다고." 왠지는 몰라도 녀석은 절규하고 있었다. 쯧. "절규하지 말라고. 그런데로 살만한 세상이야. 아직은 말이지. 크크크. 자, 세이야. 에구 귀여워라~" 세이의 옷은 무지막지 하게 깜찍하다 못해서 끔찍하기 까지한 귀여운 새끼 드래곤 옷이었다. 이건 적당히 주변의 풀들을 이어서 마법을 살짝 곁들어 만든 이른바 완벽한 눈속임 옷이다. 녹색의 작은 공룡을 모토로 작성해 보았다. 크크크. "..." 세이는 눈이 팅팅 불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아까 때린 게 좀 아팠나? 하핫. "자, 사비르. 자넨 준비가 다 되었는가? 우린 앞으로 역사에 남을 일을 하러 가는 거야!" 사비르는 황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골드 드래곤.. 말이 쉽지. 지금 이 황야 한 가운데서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그래서 난 진흙을 구우면 누렇게 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진흙으로 만든 무거운 완벽한 눈속임 용 옷을 발명해 낸 것이다. 크크크. "왜 너만 안 무거워 보인다는 착각이 들지?" 날 째려보는 걸 보면 어제 저녁 밥을 많이 못 먹어서 영양이 달리는 모양이다. 쯧. 안되었어. "착각이야. 사람은 말이지. 종종 자신의 사고에 맞춰서 남들을 일반화 시키곤 해. 그래서 내 옷이나 니옷이나 같은데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야. 후후후. 자, 어서 갈까? 짐 들어 짐." 무게 순으로 치자면 단연 사비르의 옷이 가장 무거웠다. 왜냐? 흙이 굳어서 마치 돌벽 몇개 지고 가는 거와 맘먹는 수준이다. 게다가 햇볕마저 따사로와서 그는 숨쉬기도 힘들 참이다. 해 덕분에 흙 옷 아래는 뜻뜻하게 달궈질 터이니.. 쯧. 그 다음은 풀로 만들어서 눈속임을 만든 세이인데.. 사실 풀이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겁냐? 그게 그거지 뭐.. 녀석은 가장 힘든게 아마도 풀 냄새 일 것이다. 그 다음, 내 옷은 후후후! 무게가 없다! 왜냐? 난 환상마법을 써서 완벽하게 감추었기 때문에 이게 옷인지 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괜히 마왕(魔王)인가? 얼마나 마력이 남아돌면 이런 짓을 하겠냔 말이지. 근데 왜 딴 놈들은 안 해주느냐 하면...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면서? 그걸 충실히 실현하고자 하는 것 일뿐... "음? 드래곤? 으에에엑!!!" 한 괴물이 우리를 보고 경악성을 지르면서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 외 기타들도 천천히 튀기 시작했다. 사실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그냥 괴물이라면 괜찮았겠지만, 한가지 실수를 했다. 인간의 감정이 지배한다면 그 두려움이라는 것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걸 적절히 이용하면 그만인 것이다. 설령, 우리가 이렇게 작은 용모양을 하고 있어도 말이지. "용 쓰는군..."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누군가 우리 앞에 솟아 올랐다. 벌써 저 앞에 있던 사람들에게 소식이 퍼졌는지 괴물들은 거의 퇴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래. 불만이냐?" 잠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그리고 그 마왕을 가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녀석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와서 비웃음을 날리기 시작했다. "안 힘드나? 자네들 정도라면 비행마법을 써서 날아가도 상관 없었을 텐데? 후후후.. 어리석어.." 헉..! 아니야. 나도 그건 생각했다고. 단지.. 그, 고생을 좀 해봐야 하니까.. 하하핫... "그렇구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사비르와 세이는 두 손을 부여잡고(용들이 손이 어디있냐.. 그냥 마주보고 있는 거지 뭐.) 서로의 고통 분담을 하고 있었다. "바보들.. 그래. 잘 들 지냈나? 보아하니 여러가지 일이 있었나 본데... 난 항상 자네를 염려하고 있다고. 후후훗." 그게 뻥이라는 거 다 안다고. "미안하지만, 이렇게라도 너를 만났으니 끝장을 봐야겠는데? 기대하라고. 그 동안 난 놀고 먹은 것도 아니고.. 자네 역시 그러하겠지만 말야." 사실 놀고 먹었지. 마왕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손을 살짝 들어올렸는데, 작은 반지 하나가 그의 손가락 두번째에서 빛나고 있었다. "짜식.. 돈도 많군. 그거 비싼 거 같은데." "감정평가서도 있어. 보여줄까?" 당연히 봐야지. "그래.. 아니닛! 여기 캐럿 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잖아! 이거 가짜야! 이 바보야. 이런 기본 적인 것도 몰랐냐? 날짜도 표시되어 있지 않잖아!" 마왕은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나에게 소름끼치는 어조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그 주위에는 거므스름한 안개가 점점 잦아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늘까지 어두워 지는 걸 보니, 꽤나 마력이 강한 모양이다. "흐흐흐... 날 속이다니.. 좋아. 그런데..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미안하지만, 이거 나에게 판 놈을 없애고 나서 다시 오지. 하지만, 그 동안 심심하면 안되니.. 내 충실한 부하 하나를 버려 두고 가지... 잘 해보라고. 어쩌면 살아 남을 수도 있으니까. 아, 그 고기들은 치워. 그거 먹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고." 그 주위에 거대한 마법진 하나가 순식간에 빛을 내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잡한 기의 파동이 점차로 강해지는 순간, 대략 성 하나 만한 괴물 하나가 거대한 낫을 들고 나타났다. 머리의 가운데 코 위에는 거대한 붉은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젠장... 저거, 어둠의 농사꾼이로군요." 어둠의 농사꾼...? 정말 이름 한 번 죽여 주는군. "상당히 작명 센스가 엉망인데? 쎄냐?" 사비르는 돌로 열심히 자신의 용갑옷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부서지지도 않았다. "헥... 그야.. 당연히 강하죠. 여지껏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을 껄요?" 이봐... "그런데 넌 왜 이렇게 능청하냐?" 사비르는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짧은 팔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도망갈려구요. 어쩌면 포기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노닥거리는 사이, 괴물은 드디어 마법진에서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지가 다 울릴 정도의 목소리로.. "쿠워워워워!" 뭐, 뜻 해석 안 해도 알 수 있어서 좋기는 하군. 34. 피스트레이카 성의 깜찍한 살인 사건 세 가지. 하나, 마음을 비우고 달리라. 둘,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 셋, 안전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너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다. 넷,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 다섯, 절대로 문 앞의 일을 내다봐선 안된다. 여섯, 첫번째 아이는 노래하고 있다. 일곱, 두번째 아이는 잉크병을 던질 것이다. 여덟, 도망가던 세번째 아이는 죽을 것이다. 아홉, 시체 옆에 가지 말아야 한다. 열, 모든 것들은 종말 가까이 갈 것이다. -트라이너의 구전(口傳)민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나에게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보다 큰 괴물을 만나는 거야 뭐 상관 없지만, 여지껏 이 괴물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 "세이야. 절대로.. 저 녀석 근처에 가선 안된다." "예." 세이의 목소리는 어느새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대지를 감싸기 시작했고, 괴물의 모습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하여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냥 검정색 괴물은 아닌 모양이다. 가죽 벗겨서 팔면 비싸긴 하겠다... "사비르! 어서 뛰어!" "젠장! 하지만, 이게.. 이게..!" 녀석의 갑옷 겸 옷이 너무나 무거웠으므로 녀석은 뛸 수도 없고, 더군다나 절대로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사비르!" 괴물은 거대한 낫을 들어 한 번 주변을 휘두르자, 그 전방에는 거대한 낫 자국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는 사비르가 낑낑대면서 뒤뚱거리면서 뛰고 있었다. "젠장... 세이! 여기서 얼음의 방어막을 만들어 둬라! 내가 오면 즉시 치는 거야. 알았지!" "예!" 황급히 녀석이 뒤뚱거리는 곳으로 달려 갔다. 거대한 괴물의 입에서는 하얀 안개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낫이 위로 올라갔다. "사비르!" "라플!" 그의 몸 주위에 즉시 베리어를 치고 고개를 숙이자 마자, 엄청난 압력이 강타했다. 그리고 쩌적 소리와 함께 녀석의 옷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비르, 괜찮나?" "아직은... 어서 가자고...!" 재빨리 그 옷을 던져 버리고 나와 그는 세이가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그 무시무시한 괴물의 콧김이 느껴지는 거 같았다. 사비르의 옷을 잡는 순간, 뭔가 질척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일직선으로 그의 몸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치.유.의.빛] 따뜻한 유백색 빛이 녀석을 살살 감싸면서 출혈은 멈춰졌지만, 그 녀석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해져 있었다. "넌... 헉.. 헉.. 괴물이야.. 달리면서 4글자 마법을 사용하다니.." "글쎄.. 누구 하나 잡는 것 보단 낫겠지.. 세이! 지금이야!" 세이는 동시에 우리 위에 거대한 얼음의 방어막을 세웠다. 난 즉시 사비르를 눕히고 세이에게 주문했다. "넌 어서 업드려!" "예...!" 세이가 업드리자 마자 거대한 압력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위의 베리어를 때렸고, 얼음 방어막은 그야말로 허무할 정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 세이는 떨어진 얼음 조각들을 피하느라 바빴고, 사비르는 아주 편안하게 출혈 과다로 인한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면서 아예 기절했다. 거기엔 물론, 나의 무적 주먹도 한 일조 했다. "쿠 워워워!" 젠장, 난 원래 괴물이 싫다고. 그것도 아주 아주 싫단 말이다! 가만,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맨날 스승님이 생각해 낸 게 이렇지.. 꼭 쓸 기회도 없이 끝난다니까.. 이래서 문제야. 문제." 윽.. 세이 녀석의 머리를 아주 지긋이 밟아 주고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괴물은 여전히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었고, 내가 만들어낸 급조 방어막은 제 구실을 잘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저 괴물을 어떻게 사라지게 하느냐인데... "어떤 마법이던 써 보세요!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구요!" 그야 그렇지. 문제는 무슨 마법을 쓰느냐가 아니겠냐고. "좋아. 아무 거나 써보지!" [불. 멸. 의. 바. 람. 이. 여. 그. 를. 덮. 어. 라] 거대한 바람의 소용돌이가 괴물의 몸을 갈갈이 찢기 시작했고, 의외로 쉽게 끝나는 괴물을 보고선 세이는 방그레 미소지었다. "헤... 공격력만 세지, 방어력은 별 거 없네요?" "글쎄... 그건 아닌 거 같다.." 괴물의 찢겨진 몸은 다시 살아나서 꿈틀거리면서 다시 괴물의 신체가 되어서 표호했다. 그리고 나와 세이는 입만 벌릴 뿐이었다. "적어도 소득은 있네요. 한 번 부셔도 다시 잘 살아난다는... 아닌가요?" "그렇군.. 하핫.." 괴물은 다시 우리를 향해 엄청나리만큼 큰 낫을 휘둘렀고, 이번에는 미처 방어막을 전개할 시간도 없었다. "으에에엑!" 세이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나는 나의 멍청함을 탓하면서 달려갔다. "괴물! 죽어라!" 어느새, 우리 앞에는 희미하리만큼 약하게 빛나고 있는 작은 베리어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건... 성력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살...린...?" 살린과 케빈외에도 몇몇의 궁병과 기사들이 윗쪽에서 활을 쏴대고 있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금새 입에서는 욕이 뛰쳐 나오기 시작했다. "이 바보들! 빨리 도망가! 상대가 누군지 알고나 달려 오는 거야? 저 놈을 어떻게 상대할 셈이야!" 괴물은 화살을 한 두어개 맞은 즉시 뒤를 돌아서 성 쪽에서 나온 사람들을 바라다 보았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낫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쿠워워워!" 우릴 죽이고 싶어서 환장하긴 했군. 마왕 녀석, 우리에게 이런 거나 던져 주고 말야. 사비르가 정신이 들었는지 나를 불렀다. "라플.. 저거... 고위 마물중에 하나야. 도망가라고... 당해 낼 수 없어. 나를.. 버려.. 제발.." 그의 말이 울리고, 무슨 신파극 찍는 것처럼 세이가 그에게 매달렸다. "아니에요! 우린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힘내요!" 이봐.. 방금 좋은 생각이 났다고. "고맙다고, 사비르. 너도 가끔은 도움이 되는데?" 괴물의 낫은 위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고 있었고, 그게 휘둘러지면 앞의 성은 끝장이었다. "어이!" 괴물의 고개가 정확히 백팔십도 꺾여져서 나를 바라 보았다. 하핫.. 대단하구만. "어둠의 지배자인 내 이름으로 명하노니, 어둠의 괴물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라!" 괴물은 목이 꺾여진 채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거대한 마법진은 다시 풀밭의 흙으로 흩어졌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한숨을 쉬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엄청났다. 괴물의 낫이 지나간 자리는 모두 곤죽이 되어 날아가고 있고, 게다가 검은 흙이 파여져서 풀들이 자리를 잃고 흩어져 갔다. 저 괴물, 의외로 시시하게 끝났다. "땅 갈아 엎기는 안해도 되겠군요." 사비르가 배시시 웃음을 지으면서 세이의 부축으로 일어섰다. "바보. 여긴 대대로 농업이 주가 아니라 목축업이 주라고. 알기나 하는 거야? 이렇게 풀을 파헤쳐 놓았으니.. 뭐, 다시 농업으로 바꿔도 괜찮긴 하겠군. 안 그래?"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벌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군. 허허허.. "프라오니스!" 멀리 살린과 케빈이 쪼로록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 그러니 저러니 해도 저 녀석들만큼 재미있는 놈들도 없단 말야. 그리고... 몇몇의 익숙한 얼굴들이 스쳐서 오고 있었다. "어서 가자고요!" 세이는 그제서야 신난듯이 얼굴을 활짝 펴고서 모두를 향해서 미소 지었다. 우린 돌아왔다. 그것도 예전에 우리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일동 경례!" 오랜만에 본 자이츠의 얼굴이 제일 앞렬에 서서 지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다들 전시라서 정신이 없을 텐데.. 헤. 약간은 감동 받는군. 예전엔 이런 걸 볼 일이 없었으니까.. 공작 되자마자 떠나서 안 돌아 왔었잖아. 무수한 기사들의 칼이 들려 올려지면서 마치 은색 다리의 길을 만들어 놓는 듯 했다. 물론, 저 다리를 건너면 칼침 받겠지만. 세이나 사비르는 무척이나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고, 사비르가 살짝 속삭였다. "정말 공작 맞구나. 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썩을 놈. 그런 걸로 뻥쳐서 뭐하냐? "그 외에도 여러가지 비밀이 있지. 어라라? 엘류시아!" 백색의 옷을 걸친 그녀가 마치 원래 있던 사람처럼 서 있고, 옆에는 그녀의 언니가 서 있었다. "공작 각하의 성의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엘류시아가 방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옷을 바라보면서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공작 각하. 일단 샤워부터 하셔야 하겠습니다. 옆의 세이키르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요? 손님이십니까?" 엘류시아가 집사 역할을 하니까 이런 저런 걸 알아 노려고 하는 모양이군. "아, 이 사람은 자애의 신 종단의 에네브 고위 신관이지. 이번에 우리 일행의 일에 지대한.." 사비르의 얼굴이 의기 양양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해가 되었지. 하지만, 그래도 종단 얼굴을 봐서 식사라도 주고 그러게. 그럼... 음..? 자네.. 자이츠의 아내는 무사했던가?" 자이츠는 그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 더듬 거리기 시작했다. "에.. 그게. .또. .음.. 그러니까.." 옆에서 그의 아내가 웃으면서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자이츠가 절 구하러 단신으로 왔었어요. 그 때 마침 저희는 탈출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다행이었지요. 뭐. 호호호... 그 때 대사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제 일행이 다 들었는데, 글쎄, 사랑의 당신의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라나? 너무 너무 멋졌어요!" 모두들 얼굴이 빨개진 자이츠를 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 살린과 케빈은 손으로 나를 불렀다. 녀석들, 꼭 흥깨는 데는 뭐 있군. "살린. 반가워." 갑자기 강력한 주먹이 내 복부를 강타했다. "야 이자식아! 내가 너 죽은 줄 알고! 종단과 결별하고, 갖은 수작을 떨면서 널 위해 복수한답시고 이런 촌구석에다가 위험도 백프로의 곳에 와 있잖아! 뭐, 느끼는 거 없냐! 살아 있으면 살아 있다고 전해 달라고!" 허거덕... 신관도 욕하네. "신.. 관은 욕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때려 치웠다. 왜? 내 참, 더러워스리.." 이게 그 밝고 맑고 명랑한데다가 사람들의 위험을 보면 안절부절 못하던 그 살린이 맞아요? "하긴. 살린이 마음 고생이 컸어. 널 마지막에 둔 것도 그렇고 말이지. 수상했어. 여러가지 상황들이. 게다가.. 너가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열 받더라고." 날 위해서 목숨을 걸어 주었다는 거다. 여긴 위험한 곳이 되어 버렸는데.. 살린도, 케빈도, 안지 얼마 안되는 날 위해서. "고마워.. 다들." 내 전의 일행들은 어땠지? 배신하고, 도망가 버렸지. 그러나 이들은... 이들은.. 세이도 그렇지.. 모두 날 위해 주는 구나. "짜식. 살아 있으면 된거지 뭐. 하핫. 이것도 나중엔 다 추억이라는 거 아니겠어? 하하핫. 자, 가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살린의 탈을 쓴 마족 같아... 아, 내 마족 친구들은? "그들은 어디있어? 프라운이랑..." 살린이 빙긋 웃으면서 성의 북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저기서 뜰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 거긴 키히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보통 사람이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지. 그나마 마족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마족이건 뭐건, 이럴 땐 다 다같은 인류같다니까? 하하핫.. 우습지?" 우스운게 아니라.. 황당하다. 마족과 인간의 공동 전선이라니. 키히가 무섭긴 하군. 좋아.. 응? 어느새 문 앞에는 서류를 든 엘류시아가 서 있었다. "놀고 먹는 것도 좋고, 마족과 공동 전선을 하건 말건, 이건 들으셔야죠. 지금 이곳의 상황과 보급 문제입니다. 보다시피, 아시다시피 이곳은 상당히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식량이 떨어져서 거의 유지하기 힘든 지경입니다. 지금도 두끼만으로 식사를 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것도 거의 며칠내에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거야 원.. 바닥씩이나. 하긴, 밖으로 나가서 사냥이라는 건 아예 불가능하니.. 할 수 없군. 그렇다면 아, 맞다. 아까 그 포대가 있잖아? 어쨌든 그것도 고기는 고기잖아. "음.. 아까 우리가 들고온 포대 기억하나? 거기엔 수면제가 들어있는 고기가 있는데, 비전투 요원에겐 그걸 먹이는 게 좋겠어. 아이들 같은 경우에 말야." 참고로 실제 나이로 하자고. 즉, 나는 빼 달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주로 아이와 임산부를 중심으로 배포해야 겠군요. 하지만, 그것도 아마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지금 이 성에는 수 많은 비 전투 요원이 있습니다. 게다가... 전투 요원은 첫날의 기습에 많은 수가 삼아하거나 전투 불능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적의 대규모적인 공습이 다시 남쪽에서 시작된다면, 우리는 이길 가망이 없습니다." 흠.. 문제가 많이 심각하군. 오기만 하면 될 리가 없지. 당연한 거였어. "좋아. 일단은 중역급 이상의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해 보도록 하자. 오늘은 적들도 완전히 물러간 것으로 보이니.. 그리고 몇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물어볼 것이란 당연히 마왕에 대한 거지. 그의 신체 사이즈나 좋아하는 음식, 등 등... 이 아니라!! "그렇다면 일단 회의실로 가죠. 자이츠군도 불러야겠군요. 하지만 세이키르군은 곤란해요. 전혀 도움이 안되요. 차라리 사비르씨를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엘류시아는 이것 저것 자기가 알아서 척척 해서 참 좋단 말야. 뭐, 이른 바, 편한 타입이지. "그래. 좋아." 회의실은 뭐, 이곳엔 특별히 회의실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워낙에 공작의 일인 독주 체제인데다가 공작이 멍청한 경우에는 섭정하는 사람들이 대강 결정하는 게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도 없었고. "먼저, 식량 조달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전쟁이 이대로 장기화 될 경우, 기아자가 속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엘류시아의 말이 끝나자, 자이츠가 손을 들었다. "식량에 관해서 질문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엘류시아에게 모아졌다. 그녀는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아마, 길어야 일주일입니다." 길어야 일주일... 대단하군. 그 정도밖에는 없다는 건가? 하긴.. 원래 적들과 싸우면서 얻는 부수적 수입도 무시 할 수 없는데 적들의 주 주종이 대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취급하질 않으니까.. "그렇다면 대책은 일주일 내에 해결하는 거로군요." 케빈이 인상을 쓰면서 말하자 모두의 시선은 다시 그 쪽으로 쏠렸다. "우리에게 이번에 합류한 프라오니스는 마족의 세력을 모두 무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는 적들은 아마도... 키히 본인이겠지요." 이봐.. 나도 적어도 마법 주문 외울 시간은 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뭘 하든지 말든지 하지!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입니다. 적들을 없애는 걸 한다면, 그 이후 키히가 만든 그 성을 공격해야 합니다. 그것도 거의 단숨에, 그녀가 다시 좀비나 해골을 만들어낼 시간을 주어선 안됩니다." 모두의 얼굴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보다 더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괴물들에게는 신력이 듣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그들의 경우 물리력만이 주효할 것이다. 게다가 만에 하나 괴물이 죽을 경우 그 충격으로 원래 사람의 혼도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 아니. 혼이 빠져나간 뒤에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어차피 키히를 건드리기라도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몇몇 있는 마족들과 여기 있는 프라오니스 정도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두명으로 늘은 신관이 언데드(Undead)계열의 괴물들을 처리하고 방어하는 동안, 몇몇의 선정된 사람들이 성으로 잠입하여 키히와 싸우는 겁니다." 말을 꺼낸 사람은 자이츠였다. 살린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자이츠. 그건 무립니다. 먼저... 그렇게 하려면 저희 신관들 두명이선 몇 명도 없애지 못합니다." 어떤 결정을 이 곳에선 요구하고 있었다. 모두 다 내겐 말하지 않았지만.. 난 해야 하는 거다. "좋습니다. 제가 언데드들을 날려 버리고 성으로 가겠습니다. 그 동안 남은 기사들은 성을 방위하십시오. 만약에 저나 제 일행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 말이 끝나자, 케빈이 벌떡 일어났다. "농담하지마! 그 정도로 마력을 쓰고 멀쩡할리가 없잖아! 차라리 여기서 버티면서 천천히 하나씩 상대하다 보면 언젠가는 키히도 지치거나 하지 않겠어? 그 때를 기다리자고!" 보급은 어쩌고? 할 수 없다. 희생 어쩌고 하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풀린 실들을 다시 엮어서 정상으로 돌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긴급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북쪽의 재기습이 강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전투 요원 중에 현재 담당 구역이 없으신 분들은 북쪽 성채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엘류시아의 목소리가 울리고 우리는 조용히 회의를 끝내야 했다. 어떠한 결말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공작 각하. 잠시 드릴 말이 있습니다." 엘류시아는 그 하얀 손을 꼬옥 잡고선 불안한 얼굴을 하고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잠시 고개를 떨구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성에 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전,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적을 죽였던 스승님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갇혀 있는 게 틀림없는 흑을 구해야 하니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필경 괴로울 것이다. 아, 그렇다. 그녀와 나의 처지가 상당히 비슷했다. 배신과 죽음의 가운데라는 것. "좋아. 엘류시아. 하지만, 한가지 명심해라. 넌 절대... 친구들의 복수를 위해 살지 말아야 한다. 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맡긴 사람이다. 그러니 함부로 널 죽게 할 수 없으니까. 알겠느냐?"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그녀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작님.. 참, 그 신관에 대해서인데요.." 응? 신관? 신관이라면 사비르? "그 신관이 뭘? 사비르 말이지?" "예. 주의하십시오. 그는 아까 싸울 때 본신의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제가 오랫동안 첩자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지혜입니다." 흠.. 그래? 하긴 에네브가 그렇게 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너무 허약한 척을 했지..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긴 하지만. 난 그보다 마왕에 관한 게 더 궁금하다고. "좋아. 그럼... 아, 세이는?" 그녀는 갑자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세이는 이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짓게 만드는 특이한 능력이 있는 모양이지? "아까 방에 가보니 주무시고 계셔습니다. 피곤하신 모양이에요." 뭐, 남들은 보기도 힘든 엘프를, 것도 귀신을 봤으니 오죽하겠냐? 게다가 소환된 적도 없다는 낫 든 이상한 괴물에다가, 공사 다난했지... "그럼... 거기 서류들 좀 가져다 줘요. 검토해보고, 작전을 짜야 하니까. 전선은 문제 없지?" 위에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으면서 말했다. "예. 그럼 오늘은 푹 주무십시오. 좋은 꿈 꾸십시오." 그야 이를 말인가? 하하하.. 키히야. 난 행복하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도 많고 하니까 말야.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넌 왜 날 사랑해 버렸니? 응? 깊은 밤이 되고, 자정 전에 가벼운 기습이 끝나고 성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말이 침묵이지 경계는 오전보다 훨씬 삼엄해져 있었다. 나는 침대에 몸을 파묻고 약간이라도 잠을 청했다. 키히가 바로 저 앞에 있지만.. 그래도 잠은 자야지. 에잇. "꺄아아악!" 그래. 내가 쉽게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적어도 아까까지 과로하면서 일했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나에게도 쉴 시간을 달라고. 젠장.. "공작 각하! 큰일 났습니다!" 자이츠가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이 아저씨는 할 일 없나? 아까 낮에도 가서 싸우지 않았었어? 그리고 큰일 났다고 말 안해도 알 수 있다고. 이게 아주 늙은이로 아나? 나 아직 정정해! "무슨 일이지?" 그는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삼층 복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체는 심하게 손상되어 있는데, 그걸로 봐선 아마도 괴물 중 하나가 여기 잠입한 모양입니다." 즉시 옷을 걸치고 대충 일어서서 황급히 뛰기 시작했다. 3층이라면 세이가 있는 곳이 아닌가? 녀석.. 무사하긴 한 건가? 괜히 걱정되잖아! "죽은 사람은 누구지?" "근방의 경비원입니다. 가뜩이나 인력이 모자란 상황에서..."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확실히 삼층에 도달하자 뭔가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일단, 사람의 피 냄새가 강하게 퍼져 있었다. 이거 한번에 동맥이 잡혔다는 걸 말하고, 시체는 심하게 찢겨 있었다. 사람은 아니다. "엘류시아. 어서 오시게." 자이츠가 인상을 쓰면서 황급히 뒤로 물러 났다. 엘류시아는 과연 전직 첩보원답게 냉정한 표정을 일관하면서 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뭐에 당한 거 같나?" 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세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마법입니다. 각하." 이 말을 들은 순간 나의 얼굴도 크게 찌푸려졌다. 마법?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가능할 리가 없다고.. 헌데 마법? "좋아. 마법이란 말이지..." 마법사는 몇 명 되지도 않는다. 나, 엘류시아, 세이. 거기에 신관까지 포함해봐야 둘이 더 포함될 뿐이었다. "일단 시체를 수습하고 모두 해산하도록. 조사는.. 엘류시아. 자네가 알아서 진행하게. 어려운 일이나 도움은 자이츠를 통해서 하고. 알았나?" 엘류시아는 뭔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다시 의견을 내었다. "곤란합니다. 각하. 자이츠 기사단장은 계속 전쟁을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각하께서 직접 나서 주십시오. 성 내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할 수 없다. "좋아. 엘류시아. 그렇다면 나도 알아보도록 하지." 시체를 살짝 살펴보니 별로 특이한 점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한 점은 한 둘이 아니었다. 먼저 작은 자상(칼로 벤 상처)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 상처는 직접적으로 이 사람의 죽음에는 별 원인 제공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마법을 사용하는데 자상이 들어가야 했을까? 그리고 그 다음에 들어온 상처들을 바라보니 작은 한숨이 감돌았다. 그래. 이건 확실히 풍계열의 마법이었다. "세이는.. 아니군." 세이가 아는 마법 주문 중에 이렇게 엄청난 위력을 내는 풍계열 마법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것은 나도 처음 보는 류였고. "웅... 무슨 일이에요?" 세이가 눈을 비비면서 겨우 문에서 기어 나오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녀석의 손에 철퍽하고 피가 묻고 말았다. 세이는 그걸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피와, 사람들을 번갈아서 바라 보았다. 그리고 녀석은 시체를 보고야 말았다. 녀석다운 합리적인 선택을 녀석은 했다. 바로 기절하는 거였다. "에에에에..." 기절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쓰러지는군. 특이한 놈이야. 덕에 녀석은 피에 푹 절여졌다. 가만, 녀석 방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렇다는건... "세이를 노린 것이로군. 아니면 사비르거나." 세이와 사비르는 한 방에 있으니 둘 중 하나를 노린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재수 없게 있던 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며, 흉수가 잡히지 않았다는 건 아직도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야? 아까부터 사람들 소리가 나길... 우와. 여기서 뭐 했어? 세이는 왜 저러고 있어?" 살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불쌍한 놈. "보다시피, 헌혈하는 게 싫다고 해서 이렇게 피를 보여주는 거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내가 말을 건네자, 살린도 그 시체를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뭔가.. 아는 게 있는거야?" 케빈이 뒤에 다가가서 살린에게 물었다. 살린은 방긋이 웃으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살아 있어!" [정.화.의. 빛.] 녀석보다 내 주문이 먼저 발동되어서 녀석에게 날아갔다. 왜 예전처럼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자꾸 판단이 흐려지는 거 같기도 하고..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막 좀비화 되었다고 봐야해. 프라오니스가 볼때만 해도 좀비가 아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좀비화 된 거지. 일단은 정화했으니 그냥 시체가 된 거야.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태우는 게 좋겠어." 모두들 인상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결국 그 시체를 차분하게 치우기 시작했고, 세이는 목욕을 다시 해야 했으며, 특별히 살린의 정화 마법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한참 뒤 성은 다시 정적에 감싸였지만, 내 마음은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내 신세가 이렇게 불쌍해 질 줄은 몰랐지 뭐. 잠도 못자는 내 신세... 응? 희미하지만,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울리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곳에는 이렇듯 발소리를 안내고 돌아다닐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성의 제일 윗쪽에 있는 편이고, 엘류시아는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편이다. 사람들이 놀라면 곤란하니까. 그러나 지금 걷고 있는 사람은 내 방문 앞에 정확히 정지했다. 잠시 정적이 이 성을 완전히 감싸는 듯 했다. 가끔 들리는 바람 소리만 창문 밖을 맴돌고, 발소리의 주인은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의 파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묵직한 뭔가를 떨구는 소리. 이제는 밖으로 나가보아야 했다. 발자국 소리는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왠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 곳에는 하나의 사람이 널부러져 있었다. 엘류시아의 언니었다. "이봐요! 부인! 정신차시리십시오!" 그녀는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 보았다. "...누구...? 아.. 공작.. 아.. 아..! 그 괴물은! 그 괴물은 어디있어요! 살려 줘요..." 그녀는 다시 실신해 버렸다. 괴물? 그래. 그녀는 괴물을 본 것이다. 그런데 왜 죽이지 않고 들고 가다 버리고 간 거지? 나도 참으로 어리석군. 뭘 두려워 한거지? 왜 나가보지 않았던 걸까.. 젠장. 다음날 아침, 시체는 한 구 더 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엘류시아 언니의 바로 옆에 있던 방에 머물던 기사 한명이었는데, 그는 심하게 반항한 듯이 온통 가구가 어지러져 있었다. 옆방에 있던 그녀가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마법으로 결계를 쳤을 확률도 존재했다. "빨리 범인을 잡지 않으면 안되겠어요. 하룻밤에 두사람이라니!" 엘류시아는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자신의 언니가 당할 뻔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뭔가 있다... "이런 상태라면 키히의 성을 치는 것도 문제가 생깁니다. 주력이 빠져나간사이 여기가 점령당하면 큰일이니까요." 자이츠가 침음성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아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범인을 잡을 필요가 있을까요? 만에 하나 키히의 부하라면, 키히가 사라짐과 동시에 없어질 것이고, 키히의 부하가 아닌 단독의 행동이라면.. 예. 프라오니스님께서 없앨 수 있어요. 말 하나만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마족들에게 물으니 마족의 기척을 느끼진 못했다고 하더군요." 나도 못 만나본 마족까지 만나고 다녔군.. 뭐, 당연한가? "그렇다면... 계속 희생자가 생기도록 내버려 두자는 말입니까?" 기사단원 중 하나가 불만섞인 어조로 반론을 제기했고, 다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주시했다. "아뇨. 범인은 잡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우리 모두의 시선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변해서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 방법이 뭐지요? 난 아무리 해도 모르겠는데?"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면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피입니다. 그 정도로 피가 날 정도라면 아마도 자신도 피가 묻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해지지요. 마족들 중에는 피만으로도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말에 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피가 묻은 사람도 있잖습니까? 세이의 경우는 확실히 피에 박았으니 당연할 테고..." 그녀는 살린의 말에 고개를 흔들면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이군은 첫번 살인에서만 피가 묻었을 뿐 입니다. 하지만, 다른 두번째 살인은 아는 사람도 적고, 피가 묻은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멀리서 보기만 했고, 기껏해야 살린님이 정화를 사용한 게 고작이잖습니까?" 그럼.. 할 수 없군. 결국, 그 마족만이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프라운이 급히 이곳 남성채로 오게 되었다. 그는 못 본 사이에 무척이나 핼쓱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프라운!" 프라운은 나를 보고 두다다다 달려 오더니 눈물까지 글썽이기 시작했다. "너 다신 다치지마! 거의 한 삼년 정도는 만년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고! 알기나 하는 거냐!" 두통이 내 탓이냐? 음.. 뭐, 마왕에 의해 마족이 영향을 받는 건 사실이니 내 탓일 수도 있겠군. 하지만, 절대 난 책임질 생각 없다고. "체질 개선해. 좋은 곳 알아봐 줄까?" "관둬라.. 젠장. 그보다 왠 살인 사건이람. 쳇.. 피 냄새 맡는 거라니.. 뭐, 맨날 시체 썩은 냄새 맡는 것보단 낫지만 말이지." 시체 썩은 내도 잘 맡으면 누가 알아? 왠만한 악취에도 내성이 길러지는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좋아. 좋아. 그럼 찾아 보지. 음.... 음..." 나의 시선이 뜨겁게 녀석의 이마에 꽂이는 찰라, 녀석은 계속해서 땀을 흘려가면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묻기도 싫다. "이런 게 정말 효과가 있기는 할까 싶지 않군." 갑자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세번째 살인이다!" 우린 동시에 녀석이 뛰쳐나간 쪽으로 따라서 힘겹게 달렸다. 그래봐야 나와 엘류시아 뿐이지만. 프라운은 거의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인간 아니다. 마족이다.)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나와 내 일행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그 진기한 행동을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그리고 나와 엘류시아가 도착했을 때, 과연 살인이 벌어지려는 찰라를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다다른 곳은 성의 남쪽에 있는 전망대 안이었다. 그리고, 어둠의 가운데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건...!" 엘류시아의 입에서는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을 가진 사비르 군이 거기 엄청 큰칼을 들고 사이한 미소를 짓고 프라운과 대치 상태에 있었다. "사비르...!" "젠장.. 신관이라니!" 프라운의 입에서는 짧은 욕들이 뛰쳐 나왔고, 그와 무관하게 그의 팔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사비르의 칼을 뺏으려고 움직였지만, 그건 헛수고였다. 사비르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그를 피해 아까까지 그의 옆에 매달려 있던 목표자에게 칼을 꽂기 위해 움직였다. "죽어라!" 그리고 순간 반짝이는 칼날 아래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소년, 아니 청년은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세이였다. "세이!" 그리고 잠시 시간이 정지한 듯 했다. 무수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한 순간에 사라져갔다. 칼은 세이의 목 바로 위에서 멈춰진 듯 했다. 아니, 멈춰져 있었다. 칼은 더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프라운의 거대한 손톱이 어느새 그 칼에 꽂혀 있었다. 프라운의 소름끼치는 비명이 잠시 대지를 갈랐다. "젠장! 세이! 어서 도망가!" 세이는 황급히 몸을 굴려서 내 쪽으로 도망왔다. 세이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고, 아마도 팔이 떨리고 있는 걸 봐선 겁을 먹은 듯 했다. "프라운!" 프라운의 손에는 아직도 그 거대한 칼이 박혀 있었고, 곧 이어 스윽소리와 함께 살이 완전히 갈라지고 프라운의 손을 정확히 수직으로 자르고 말았다. "프라운...! 젠장! 사비르! 멈춰! 왜 그러는 거야!" 사비르는 잠시 괴로워 하는 프라운을 발로 차버리고는 조용히 나를 바라 보았다. 싸늘하고, 감정이 하나도 없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그렇게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점의 움직임도 일으키지 않았고, 엘류시아가 칼을 꺼내는 것도 개의하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그를... 내게 넘겨. 그만 죽이면 된다. 모든게.. 잘 된다고." 약에 취한 듯, 그는 몽롱하기 까지 할만큼 편안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뭐가 잘된다는 거야! 말을 해보라고!" 그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왜, 모르는 걸까? 그 아이는 필요악인데.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거지? 그가 말했잖아. 기억나지 않는 거야? 그는 너에게 필요 없어. 널 죽일지도 몰라. 알겠어?" 젠장. 그는 숨결하나도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까의 그 프라운과의 격전에서도 한줌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놀랍게도, 그는 마족보다 놀라운 운동신경을 보이고 있었다. "너... 사비르가 아니지?" 그거 외엔 달리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니. 난 사비르야. 왜, 잊었어?" 젠장.. 그럼 어떻게 된거지? 갑자기 나 몰래 특훈이라도 받고 왔다는 건가? 아니면.. 정녕 모르겠단 말이다! "네가 점점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좋아. 예전에 마왕도 그런 소릴 했었지. 어째서 세이가 죽어야 하지?" 그는 잠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싸늘한 얼굴로 세이를 노려 보았다. "으... 라플. 이 녀석의 이야기엔 귀 기울이지마. 이게 사람일리가 없잖아. 마족보다 빠른 인간따윈.. 들은 적 없어." 프라운이 고통스럽게 중얼거리자, 사비르는 그를 발로 누르기 시작했다. "헤.. 마족 주제에. 인간이 다 어리석고 약한 줄 아나? 때론 강한 인간도 있지. 나처럼 말이야. 약한 놈이 아니라고 나는." 사비르의 얼굴에는 아주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놀랍게도 이 녀석은 이걸 즐기고 있었다. 즐기다니.. 세상에. "좋아. 사비르. 어서 말해 보라고. 왜, 세이가 죽어야 하는지." 물론, 그 이유가 합당해도 네 의견을 따르지는 않겠지만 말이지. "그건... 네 등에 칼을 들이대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모든 건, 그래.. 너가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졌다고... 마왕이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건 마왕이 아냐. 난 그리고 그에 대해 확증도 있어." 그의 입에는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그건 마왕이 아니지. 실제 마왕은 너니까. 하지만, 그가 마왕이 아니라, 신이라면 어쩔래?" 엘류시아는 조용히 있었고, 잠시 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가 신?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왜 신이 날 놀리겠는가? 그리고 하다못해 왜 사람들을 죽이고, 벌레처럼 이용하지? "신은 아니야. 날 현혹하지마. 사비르." "하하하핫.. 이거 참. 너무 냉정하잖아? 그래. 좋아. 이걸 준비한 사람은.. 아니지. 그건 사람이 아냐. 사실 넌 이상하다는 생각하지 않았니? 왜 마왕이면서도 아무런 능력이 느껴지지 않았던가를... 그건 당연해. 실제 마왕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아주 오래 전, 한 사람에 의해 계획되고 세사람이 공동으로 만든 이 계획에.. 세이라는 사람은 아주 필요악이지." 모를 소리만 지껄이는 그를 향해서 엘류시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넌, 사람을 죽이고 벌레처럼 이용했다는 거잖아? 내겐 그 이상의 악은 없다고. 그러니..." "시끄럽군. 내가 말할 땐 듣는 게 예의야. 자, 여기서 질문하나. 내 나이가 몇인 거 같지? 열 여덟? 아니면 그 이상? 아무리 잘 봐줘도 20을 넘을 수 없겠지? 그래. 그럴 꺼야. 하지만 사실 내 나이는 올해로 300이 넘어간다고. 하하핫? 놀랐지?" 놀라긴, 야. 끔찍하다 마. "나이를 속이다니.. 이런 나쁜!" "맞아요! 사기 결혼이야!" 엘류시아의 말에 프라운이나 나는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뭔 헛소리래? 갑자기 왠 결혼? "무슨 소리야? 엘류시아?" 그녀는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고는 한마디했다. "그게.. 청혼 받았거든요. 이번 일이 끝나면 자신도 신관을 그만 둘테니 같이 결혼해서 잘 살면 어떻겠냐고.. 그 말.. 믿었는데.. 어떻게...!!!" 땡... 땡... "저기.. 그럼 저랑 사비르랑 한집안 식구가 된다는 건가요?" 어이. 세이야. 왜 또 얘기가 그 쪽으로 발전하는 건데! "내가 왜 너랑 한집안이 되어야 하냐! 난 절대로 싫어! 싫어!" 엘류시아 조차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 보았다. "전... 전.. 아이. 부끄러워라. 전.. 엘류시아님의 언니를 사랑하거든요. 헤헤헤.." 지금 이렇게 활발하게 웃으면서 놀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데.. 그거 나만의 착각이냐? 아니면 모두의 착각이냐? 프라운이야 마족이니 회복 속도가 빠르다손 쳐도 말이지. "라플. 당신의 오해를 풀고 싶군. 내가 죽인 두 사람은, 계획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신전측의 첩자였소. 당신이 신전에 안 좋게 비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우리 세사람의 그 계획에 가장 방해가 되는 건 바로 세이요. 이 자가 없어져야해." 왠지 화가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왜 하필, 세이가 방해가 된다는 건가? 이 녀석이 뭘 똑똑해서 방해하고 돌아다닐 가망도 없는데 말야. "납득 못하겠오. 그렇다면, 당신은 300살 먹었는데도 나이는 겉보기엔 젊어 보이는 데다가, 또 뭐가 있소? 당신의 멤버는 누구누구지?" 그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뭐, 어차피 아래는 절벽이니 도망갈 수도 없는 터였다. 밖에는 게다가 좀비나 해골이 득시글 하지 않은가? "하하하... 이름이란, 우리에겐 너무나도 가치 없지. 한가지 명심하시오. 라플. 당신 제자를... 조심해요." 그는 높이 하늘로 뛰쳐 올랐다. 동시에 그의 모습은 구름에 빨려 들듯이 사라지고, 하늘에서는 오렌지 색을 한 거대한 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그 곳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조만간, 또 보게 될걸세. 라플."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나, 그런 건 둘째 치고서라도... 마왕의 한패가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스승님.. 전.. 절대 스승님을 배반하지 않을 거에요!" 녀석을 나는 잠시 응시했다. 머리에 손이 닿지 않아서 발돋움을 해야 했다. "앞으로.. 난 키가 더 커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너보다 오래 살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지. 하지만, 세이야. 이건 명심해라. 너가 날 배반하건 그러지 않던간에, 난 널 사랑할 것이다. 내 제자이고, 나에겐 넌 마치 자식과 같아서 내겐 어떤 행동도 사랑스럽단다. 내가 널 배신하는 것보다, 너가 날 배신하는 게 차라리 내겐 행복하겠지." 엘류시아는 프라운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결혼 사기 어쩌고를 떠들고 있었다. 과연, 포기를 모르는 아가씨로군. 하핫. "자, 어디 볼까? 프라운 녀석 얼마나 다쳤나 보자고." 프라운은 입을 비죽였지만, 그래도 순순히 상처를 보여 주었다. 칼.. 이라. 여러가지 의미를 안겨주는 군. 그래도 한가지 알았어.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 흉내내고 있다는 것을.. 그럼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구? 그것도 가까이 있을 확률이 있는데... 대체.. 누구지? 한 사람에 의해 계획되어지고, 세 사람에 의해 추진되어진... 계획이란, 대체 뭐지? 무슨 먹고 자는 계 같은 건 아닌 게 틀림없는데 말야. 흠.. 대체 나이 먹은 늙은이들의 생각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고. 젠장. "그런 일이 있었군." 살린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세 사람에게 조언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그 조언이란, 졸리면 안 자면 더 졸려서 결국에는 안 잘 수 없게된다는 데..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리라 이거냐? "그럼 사비르가 300살이었다는 이야기네? 참,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니까." 이봐. 300살이나 사는 사람이 있냐! "케빈. 인간의 평균 수명이 몇살이지?" 케빈은 잠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모르겠다. 아.. 그럼 사람이 아니네?" 당연하잖아. 임마. 설사 사람이라고 해도 어딘가 사람 같지 않은 구석이 있는 게 틀림 없다고! "그럼 이제 대책을 강구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나머지 두 사람의 정체도 궁금하긴 하지만, 이건 제 생각인데 조만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아요." 그건 그렇군. 세 명의 사악한 마법사 집단 정도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는데 말이지. 음. 하지만 몇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왜 나에게는 저렇듯 정의 스러운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거지? "아마도 스승님으로 인해서 이익을 누리는 사람이 틀림없어요. 그러니까... 뭔가 스승님이 이익 될 만한 일이 있을 꺼에요. 그리고 제가 방해된다면... 그게 대체 뭐죠?" 이렇듯, 당사자들도 모르는 일들을 그들은 알고 있다니, 미래 예측이 거의 점장이를 벗어나, 신에 가까운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살린이나 케빈도 역시 짚히는 데가 없는 거로구나?" "그렇지 뭐. 난 그 보다 왜 미망인을 그런데 내려놓은 게 아닐까 싶은데?" 그건 좀 알겠다. 원조교제보다 더 심각한 교제를 신청한 아저씨가 좋아하는 여자의 언니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뭐. "그건 알아요. 그건 대충 넘어가요. 그보다 제가 더 궁금한 건 그들이 과연 언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냐 하는 거죠." 프라운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나타났다. "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그 세사람이 우리 앞에 드러난 거 같아." 모두의 시선은 프라운에게 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성 가운데 정원을 바라 보았다. 거긴 정확히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사비르, 하나는 마왕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가짜일 게 틀림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놀랍군." 케빈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확실히 저기 저 삼인은 일반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떤 마족보다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우리.. 가봐야겠죠? 마치... 우릴 부르려고 있는 거 같은데." 세이가 똥그란 눈을 나에게 뜨고 물었다. 확실히.. 그러기 위해서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세이가 가면... 안된다.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이들의 여지까지의 패턴으로 보건데 날 죽이려 하진 않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아무런 감정없이 죽여버렸지. "넌 여기 프라운과 있어라. 프라운. 잘 지켜라." 프라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 가지. 모두 여기서 지켜보라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내내 생각해다.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인지 이제는 아예 알 수 가 없었다. 도통 알 수 없는 일들뿐이었고, 이제 하나의 매듭이 풀려가고 있었다. 정원은 마침 이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전투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화려한 녹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푸른 색도 여러가지가 있었다. 야간 벌레 먹은 색깔, 혹은 아주 연한 연두빛... 등 등.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지. "어서 오게나." 사비르,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 "사비르. 아니.. 사비르가 본명이긴 하나?" 사비르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이런 특이한 이름을 다시 짓기도 힘들 걸세. 이 두사람은 부득히하게 얼굴을 숨겨야 하네. 이해해 주게나. 자네라면, 우리의 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얻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네. 어때, 들어 보겠나?" 듣기만 하는 거라면 아무 상관 없겠지. "좋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을 따른 다는 보장은 하지 않겠습니다." 사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자네가 그리 쉽게 우릴 따르지 않겠다고 생각하네. 뭐, 끝까지 우릴 반대할 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관없네. 우린 자네에게 알리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아도 되거든. 자, 이곳 지하로 가야하네. 이보게들..." 사비르는 두사람을 번갈아 바라 보았다. 그 셋은 삼각형 모양으로 서더니 각각 정원 가운데 있는 기둥을 잡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주문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그러한 주문이었다. "다... 모였군요." 잠시 뒤, 우린 지하에 있었다. 지하로 내려온 순간 화악하고 불이 순식간에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런 곳이 있는 지도 몰랐는데.. 놀랍군. 벽에는 별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일렁이는 불꽃을 빛내고 있는 저 불이야말로, 마법의 결집체였다. 이상하다. 원래 우리 피스트레이카 공작가는 대대로 검 중심이었는데... 이상해. "그래. 이제 걸어가는 일만 남았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마왕의 얼굴에서 새어 나왔는데, 생전 처음 듣는 기분좋은 저음이었다. 아니야.. 처음 들은 게 아니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히. "저 곳이지?" 한참을 동일하게 주욱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앞에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문은 사람 백명이 밀어도 열리지 않을 것처럼 거대하고 또한 돌에 일일이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조각은 보기에도 무척 오래된 듯 했다. "다왔군. 모두 비키게. 내가 열테니." 설마, 엄청난 마법이라도 사용하겠다는 건가? 그러나 그런 나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가고 대신 그의 손은 문의 한구석에 대어졌다. 그 곳에는 마치 원래 그런 홈이 있었던 것처럼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자. 다왔군. 저기 있군. 그 책이." 한 중앙에는 빛이 새어 나오듯이 그 곳만 빛나고 있었고, 황금색 표지에, 붉은색 종이로 만들어진 책 한 권이 놓여져 있었다. "그렇군... 저 책이지." 모두들 나지막한 한숨을 내 쉬었을 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건.. 그래. 저건... 바로 생명의 서 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저건 원본이 틀림 없다. 빛의 한가운데서 찬연히 빛나는 그 책 앞에 나는 조용히 섰다. 마치 누가 시킨 것처럼, 그 책은 천천히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 맞다. 이 책과 난 아주 오래전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무척이나 심심해하고 있었던 거 같다. "오랜.. 만이구나." 책은 단지 빛을 뿜어낼 뿐이었다. 항상 대화하고 떠들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난 나이를 먹어 버렸지? 그 때.. 그래. 그 일이 있었다. 널 만나고, 그 때 난 결심했다. 마왕을 없애리라고... "이젠.. 인사도 할 수 없는 거니?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겐 말을 건네줄 줄 알았는데 말야. 내가 널 잊게 된 건 모두 너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잖아. 안 그래? 유효기간 백년의 마법.. 넌 정말.. 대단한 책이야." 책표지가 펼쳐져서 넘어가기 시작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그 조용한 홀에 울리고, 메아리쳐서 돌아오는 듯 했다. 얼마나 넘어갔을까? 마침 빈 공간을 찾은 듯 종이는 즉시 멈춰졌다. 그리고 몇가지 단어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빈 공간에 예전에 내가 그와 대화할 때처럼 그렇게 몇가지 단어가 쓰여졌다. 기적처럼 글씨가 쓰여졌지만,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밖엔 없었다. -널 죽이려고 하는 자가 이 방에 있다.- 순식간에 난 재빨리 몸을 앞으로 굴려서 동그랗게 굴러갔다. 그리고 칼 꽂히는 소리가 홀을 맴돌았다. 검이 바로 발 옆에 꽂혀 있었다. 사비르는 평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피했군." 저자는 날 원래 죽이지 않을려던 사람이 아니었나? 어째서.. 왜? "사비르. 그만둬. 그 아이를 죽여봐야 아무 이득도 없어." "그렇지. 그만 칼을 거두게." 처음으로 가면의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확실히 나이가 많은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사비르는 천천히 칼을 거두면서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두사람과 달리 난 널 죽이려고 했었지. 아주 오래 전부터... 기회가 없어서 할 수 없었지만.. 세이의 환영이라면 널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재수가 없었어. 뭐, 할 수 없지. 이렇게 된이상. 다른 방법을 찾아 보는 수밖에." 사비르는 여전히 그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건 다 가식이었다. 마스크의 사내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 책...알고 있지? 어렸을 적에 보았을 테니까 말이네. 그리고 자네가 이렇게 젊어진 게.. 설마, 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일단 나이가 많아 보이니 저 자세로 나가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저 책은 어찌 된 게 자네를 상당히 맘에 들어 했어. 자아가 있는 책이야. 신의 책이니 만큼... 그리고... 신 또한 자네를 맘에 들어하니까 말이네. 뭐,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자넨 여러가지 운명의 선택을 받게 된 만큼, 시련과 고통을 겪는 운명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 하지만.. 그건 별 거 아니지."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지? "당신들이 뭘 말하는 지도 모르겠고... 대체 뭘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마왕의 얼굴을 한 자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키히.. 의 기억을 봤지? 그래. 그 숲에서 봤을 걸세. 키히는 원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물이야. 무슨 말인지 아나? 뭐, 이렇게 이야기하면 황당할테니... 죽음의 서와 생명의 서에 대해선 알고 있지?" 그야 모르면 마법사가 아니니까.. "물론이죠." "좋네. 하지만, 그 책들의 효용에 대해선 모를 걸세. 당연해. 원래 두 책의 목적은 바로 한가지.. 사람을 돕자고 만들어진 걸세. 모든 책이 그러하듯..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지. 책이긴 책이되, 신의 힘이 깃들어서 그만 생겨서 안될 장점이 생겨버린 거야. 그리고.. 저 책도 그러하듯이.. 죽음의 서 역시.... 자넨 젊은 시절 죽음의 서를 본 적이 있을 걸세." 그야.. 아주 젊은 시절에.. 그리고 지금은 그 책이 나바스에 있다고.. 들었는데? 뭐, 소멸했다고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죠?" "죽음의 서는 그래도 괜찮았지. 하지만.. 문제는 바로 생명의 서. 바로 저 앞에 있는 저걸세.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있어야만 했지. 홀로 오랫동안 아무 일 없이 조용히... 그런데 어느날, 한 소년이 이곳에 들어가게 된 거야. 그건 바로 자네이고. 맞지?" 그야.. 여부가 있나. "그게 어쨌다는 건데요? 그리고 왜 당신들이 그걸 알고 있습니까? 제 부모들도 모르던 일인데..." 이번엔 마왕의 얼굴을 한 사내가 대답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든, 자네가 이곳에 들어 와서 저 책과 함께 놀기 시작했네... 뭐, 그러다가 소년은 마법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오지 않게 되었어. 책 또한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소년의 기억을 흐리게 해 놓았지." 그거야... 음...? 저 이야기는 마치 책에 자아가 있다는 것처럼 들려? "책에게 자아가 있다는 겁니까?" "자아? 하하하.. 그 정도로 쉬운 문제가 아니네. 저 책의 본체는 이곳에 없어.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누굴 꺼 같나?" 설마... "세이입니까? 그래서 당신들이 죽이려고...!" 마왕의 얼굴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랄까, 상당히 기품있는 듯한 행동이 베어 있었다. "세이는.. 아니네. 자네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생명의 서의 혼은 이곳을 빠져나가서 자네를 만나기 위해 몸을 가지게 되었네. 그게 바로... 키히 크리시아 휘젠. 엘프족 아가씨의 몸을 빌어 나온 것이지. 뭐, 그 다음의 상황이 문제였지만, 아마도 그녀는 근본적으로 자네를 절대 잊을 수 없을 걸세... 그래서 미치게 된 거지. 원래는 엘프란 종족은 복수를 끝까지 하는 종족이네. 그게 무엇이든..." 그럼... 키히가.. 사람이 아니라.. "키히가 책일리가 없잖습니까!" 잠시 사비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뭐,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그녀는 엘프지. 게다가 생명의 서의 혼이 그녀를 잡고 있을 뿐... 별로 그녀의 원래 영혼이 없다거나 하지는 않아. 즉, 한 몸에 두개의 영혼이 있는 거지. 그래서 더 빨리 미친 거고." 키히가... 책이라니... 내가 일생을 걸어서 사랑했던 여자가 책...? 어이 없군. 하핫.. 이렇게 허탈할 때가. "전.. 속았군요. 좋아요. 그럼 왜 세이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사비르가 조용히 앉으면서 말했다. "또 하나의 책. 죽음의 서의 영혼이니까. 뭐, 그 영혼은 특별히 자네에게 반해서 나온 건 아니네. 하지만... 이건 좀 문제가 있지. 이건 책들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생명의 서는 말 그대로 생명에 관한책이네. 그래서 사실 키히의 영혼 자체가 사람들의 수명에 미치는 영향 자체가 미미하네. 그리고 실제로 그녀가 뭐 어떻게 한 거 봤나? 심지어 그녀는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지... 최근에야, 그녀가 미쳐서 생명의 서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지만..." 그럼.. 세이의 영혼이 죽음의 서라고.. 그런.. 하지만, 세이는 살인 따윈 하지 않았잖아? 역시 이 세사람이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건가? "거짓말... 그렇다면.. 세이가 누굴 죽일 거라는 이야기인가?" 마스크를 쓴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나도 그럴지도 몰라서 그의 곁에서 조사해보았지만, 그런 흔적따위는 보이지 않았지. 그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알 수 있었네. 자네가 죽었다고 판명된 순간.. 그는 재상이 되어서 그야말로 피의 정치를 펼쳤지." 그러나.. 그건 직업상의.. 어떤 인간도 그 정도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이군. 좋아. 죽음의 서 영혼은 생명의 서 영혼이 하는 것의 반대 상황을 일으키네. 사람을 죽이고.. 없애. 서로 죽이게 하고... 마침내는 파멸에 이르게 하지. 아직까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빨리 영혼을 빠져나가게 해서 다시 책으로 돌아가게 해야 하네." 책으로 돌아가란다고 가는 영혼이 어디있냐! "그는.. .제 제자입니다. 그렇게 착한 아이가.. 그럴리가 없잖습니까!" 세 사람 중 한 명이 조용히 자신의 마스크를 벗었다. "접니다. 율지스." 어렸을 적 점을 보니 내 인생에는 배반과, 사랑과, 충격이 항상 교차하는 삶이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게..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과, 나의 추억들이 모두 산산히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모든 것들... "어째서 네가.. 왜..." 그의 단정한 금발은 아주 잘 말려서 올라가 있었다. 그가 두건을 벗자, 그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출렁거리는 옷을 바라보면서 문득, 저 녀석을 거두게 되었을 때가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엘프는 당시 처음 보는 거였다. -그래.. 넌 누구지?- -율지스라고 해요. 스승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당시, 엘프였던 키히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 등이 복합되어서 난 율지스를 제자로 맞았던 거였다. 그랬는데.. 어째서 이 사람이 그 세사람 중 하나란 것인가? 그리고 세이를 죽이려 하는 것인가? "가끔 당신과 함께 하면서 진실로 제 처지를 잊은 적이 많았습니다. 현명한 인간이여. 당신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투에는 조금의 스승에 대한 마음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 확실히. 율지스. 그게 네 본명이었구나.. "그럼.. 마지막 당신은 누구지? 날 그냥 놀래키지 말고 확실히 알려 달라고."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내게 묻는 것보단 책을 봐도 나올 걸세. 하지만... 자네에겐 확실히 보여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이 계획을 세우고, 결정한 사람이네." 그의 얼굴에서 마법이 풀리면서 낯 선 할아버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난... 피스트레이카 전 공작이자, 이 트라이너의 개국공신이기도 하네. 또한, 자네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잠시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 아버지? 하지만 내 아버지는 날 볼 시간 따위는 항상 없었다. 일 하느라 바빴고, 철이 들기도 전에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거짓말.. 아닌가요? 제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그렇지. 그 사람은 자넬 맡아 기르고 있었던 것 뿐이니까... 사실, 트라이너에는 단 두명의 공작이 있을 뿐이네. 자네와, 나." 그럼 친부모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고 볶았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리고 사람의 평균 수명이 대체 얼마라고 생각하는 거지? "잠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당신이 정말 제 아버지라면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당신이 이 계획을 준비했는데.. 전 그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아니면..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단지 재미있고자 그런 건가요?" 그는 서서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씩 대답해 주겠네.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건... 아마도 저주 때문이겠지. 생명의 서를 이곳에 논 데 대한 저주. 자네도 이제는 슬슬 눈치를 챘겠지만, 생명의 서는 사람의 생명을 늘여주는 효과가 있네. 언제까지라도 자신이 원한다면... 그래. 그럼 자네의 경우는 어떤 걸까? 난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되었지만.. 자넨.. 다르지. 그래. 책이 자네가 늙어 죽는 걸 못 견딘거야. 사실 자네의 찬장에는 그런 요리책 비슷한, 혹은 생명의 서 따윈 있지 않았네. 자네가 단지 세뇌당한 것 뿐이지..." 그럼.. 내 인생은 단지 꾸민 길을 걸었다는 건가... "좋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의 대답은 뭡니까?" "그건... 그래. 사실 자넨 내 계획에 들어 있지는 않았다네. 한가지.. 난 내 인생을 끝내고 싶었네만... 그 때 죽음의 서의 영혼이 뛰쳐나와 버렸지. 실수였어... 자네가 보는 것처럼 세이의 나이는 어리지 않네. 자신도 모를 정도로 나이가 많아.. 몰랐지? 자넨 계획에 아예 들어있지 않아서. 그런데.. 자네가 태어나서 생명의 서와 교감하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음의 서 영혼을 제자로 들였네.. 당연히 내 계획에는 전면적인 수정이 일어났네..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영혼이.. 자네 옆에 있었으니..." 언젠가.. 날 키워주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다. 자신의 신념이 무너졌을 땐 어떻게 하겠냐고.. 아, 그래. 그 때 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난 내 신념을 지키겠다고... "그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한 거라, 이 말입니까?" 세 명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원하는 건 단지 하나, 세이의 목숨이 대기중에 흩어지고 죽음의 서가 영원히 닫혀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다. 절대로 그렇게 둘 수 없다. 서서히 난 생명의 서 앞으로 걸어갔다. 생명의 서는 여전히 찬연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죽음의 서 원본은 사라졌다고 그랬지? 그럼 차라리 잘 된 거다. 세이는 그렇게 사는 게 좋아. 그 아이.. 마음이 약하고 언제나 착한 아이이니까. "모두 비키십시오. 전 이책을 가지고 나가야 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일에는 협조하지 않겠습니다." 사비르가 조용히 말하는 것이 등 뒤에 들렸다. "후회할 걸세..." 후회는 항상 했고, 만에 하나 그 후회가 단지 나를 위해서라면 보람이 없지만, 그게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그건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난 그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항상 움직이겠습니다. "후회는 항상 합니다. 항상... 그 후회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나은 거죠. 그리고... 당신들을 보면, 그 후회라는 짐을 항상 안고 사는 거 같군요." 문을 나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오자, 지하의 횃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황홀한 빛들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세이와 일행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달려 오고 있었다. "스승님!" 세이는 조로록 달려와서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요?" 햇볕 안쐬고 어둡고 침침한데서 별 이상한 소릴 다 들어라. 너도 10분이면 이렇게 될 껄? "안색이야, 해를 못 봐서 그렇지. 세이야. 그리고.. 넌 항상 내가 지켜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예!" 세이는 방긋 웃었다. 죽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하늘에, 푸른 구슬이 반짝이면서 터져 나갔다. 그리고 하늘에는 푸른 빛으로 서서히 물이 들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런 하늘처럼 푸르기만 한 건 아니었나 보다. 날 배신했던 자들, 날 배신할 자들, 세상은 이 두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배신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영원히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배신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있을 후회를 걱정하느니, 차라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나 알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오랜 뒤에 내가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단지 한마디... 나는 사랑했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의 세상, 내가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내가 그 사람들 곁에 있음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세상이기에, 내가 사랑했다면 얼마든지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자이츠가 회의실에서 나에게 물었다. 회의의 중점은 앞으로 있을 키히가 있는 성을 치는 작전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 회의실에는 세이도 앉아 있었다. 일단은 사비르에게서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안전을 도모하는 편이 좋았다. "아무 것도.. 그나저나 오늘 하루동안 키히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지?" 엘류시아가 일어나서 말했다. "예. 별다른 행동이 관측된 바 없습니다. 다만, 몇 시간 전부터 좀비단의 해체가 눈에 띌 정도로 늘고 있다고 합니다." 좀비는 시체로 만들어지는데, 설령 좀비가 되었다고 해도 영원히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일단은 시체이므로 썩어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 썩어서 사라지면 다시 해골병사가 된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골이 늘었겠군요. 아닌가?" 케빈이 끼어들었다. "그게...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적들은 마치, 마법 조력이 끊긴 것처럼 서서히 동작을 멈추고 있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키히가 행동을 중지하고 있다는 건데... "그럼 그 자아가 있는 괴물은 어떻게 되었나?" "그들은 아직도 행동을 계속하고는 있지만.. 그 쪽은 원래 반전파가 많은 편이라서 그리 걱정할만한 숫자는 아닙니다." 설마, 키히에게 무슨 일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안되는데. 갑자기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다 느끼고 말이지, 오래 살기는 살았어. 이게 다 키히 덕분이라는 거군. 하하하. "그렇다면 우린 들어갈 궁리나 하는 게 좋겠군요. 어떻습니까?" 모두의 시선은 자이츠에게 향했다. 자이츠는 여러가지 안건들을 내 놓았고, 나는 그걸 그저 경청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차피 소수에 의한 침투 작전이라는 게 의례히 그렇듯이 달라질래야 달라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부님.. 저, 괜찮으세요? 그곳에 다녀온 뒤로 계속 안색이 안 좋으세요. 뭔가 생각에 잠기는 날도 많고..." 세이의 눈동자는 걱정 그 자체 였다. 만에 하나, 그들 말마따라 세이가 사신이라면, 날 이렇듯 염려해 줄까? "세이가 연어찜을 안해주니까.. 뭐, 여긴 재료도 구하기 힘들고. 안 그러냐?" 세이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긴 하다못해 작은 냇가도 없으니까요... 해자가 있어도.. 그렇게 물고기가 사는 데도 아니고요." 아서라. 물고기가 아니라 악어가 산다. 세이는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녀석, 설마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날의 회의도 마치고, 그날 역시 공습은 없었다. "헉.. 헉.. 큰일났습니다!" 최근에 느끼는 건데, 아침 일찍 자이츠의 얼굴을 보면 뭐 되는 일이 없더군? 자이츠는 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무슨 일인가? 또 살인 사건인가?" 그는 황급히 고개를 휘저었다. "아닙니다. 막 세이의 방에 갔는데... 글쎄, 낚시 도구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뭐, 짚이는 데 없으십니까?" 짚이는 데? 있지. 녀석이 이런 시기에 지금 낚시를 하러 갔구나.. 제길..! 지금 녀석을 노리는 사람이 몇인데...! "프라운을 불러! 같이 나갔다 와야겠다." "알겠습니다!" 프라운은 어느새 완벽하게 나은 손을 하고선 완전히 준비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긴장이 떠올라 있었다. 한 때는 나보고 위험하다고 하더니.. "하브라이드가 같이 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만 두라고 했어. 덕에 전선에 구멍이 뚫리면 곤란하잖아." 그렇지... 세이는 아마도 이 근처에 하나 있는 냇가에 갔을 확률이 높았다. 비록 연어는 아니더라도, 생선들이 많이 있는 냇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곳의 위치가 작은 마을 사이에 있다는 건데, 그 건 괴물들도 그 사이를 지나다닐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사비르가... 세이를 노리고 있어. 그 뿐 아니라, 아주 강한 두 사람이 더." 프라운은 눈쌀을 찌푸렸다. 그와 나는 거의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비행 마법을 써서(비행 마법을 쓰는 데 왜 땀이 나냐고 한다면.. 그냥 그런 줄 알어라..) 냇가 쪽으로 황급히 날아갔다. 서서히 냇가의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냇가는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처럼 갖가지 풍경을 빨아드리고 있었다. 프라운은 침을 삼켰다. "난.. 무리입니다. 갔다간 바로 빨려 들어갈 겁니다." 확실히.. 프라운 정도의 힘도 빨아드리게 될 께 틀림 없었다. 축이 세개라는 것은 그 세사람이 다 나왔다는 거이 틀림 없었다. 아마도 혼자가 될 때까지를 기다린 것이겠지? "세이!" 세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즉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엄청난 힘의 압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안은 별 변화가 없고 단지 서늘한 미풍만이 불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냇가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선 세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녀석은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이 고기 잡아서 폭폭 삶아서 우리 스승님 밥해 드리자. 맛있는 고기, 하얀 고기 이리로 와라. 내가 다 잡아 줄께." 세이는 저 세사람의 소용돌이를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확실히 책의 영혼이 맞긴 맞나보다. "세이야. 여기서 고기 잡고 있느냐?" 세이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에는 이내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헤헤.. 스승님. 보세요. 벌써 세마리나 잡았는 걸요? 아마 조금 있으면 며칠 먹을 걸 장만 할 수 있을 꺼에요. 갈 때 얼음 마법에 얼리면 말이죠. 네? 여긴 고기도 참 잘 잡히고 참 좋은 거 같아요." 글쎄..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녀석의 눈에도 이제서야 주변이 회색의 바람으로 쌓여 있다는 걸 겨우 눈치 챈 모양이다. 둔하기는. "이건 또... 뭐죠?" 뭐, 봐서도 모르겠지. 이게 그 유명한 마법의 소용돌이라든지 하는 걸 너가 어떻게 알겠냐? 죽음의 서의 영혼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영혼이 단지 씌운 것 뿐이니까... "이건 말이다. 마법의 소용돌이다. 중심축이 셋인 걸 봐선 세사람이 쓰는 거란다. 우린 아직 이게 불완전할 때 빨리 튀는거다." 세이는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손바닥을 쳤다. "좋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어떻게 도망가요? 굴을 팔 수도 없잖아요." 물론이지. "공간이동 마법은 괜히 배운 게 아니잖니. 어서 마법진을 그리려무나. 난 고기를 챙기마." 그 세사람이 봤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지만, 내겐 별 거 아니었다. 왜? 떫냐? 그럼 너도 마왕하라고. 흐흐흐. "거기서 끝까지 힘쓰고 있으라지 뭐. 헤." 율지스의 모습이 잠시 보인 듯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젠 아무래도 괜찮았다. 율지스가 어떻게 했든, 서서히 문제가 풀려가고 있는 걸 난 알 수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괜찮나?" 프라운이 세이를 바라보면서 묻자, 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녀석은 즉시 고기 바구니를 들고 주방으로 쪼로록 걸어갔다. 프라운이 날 바라보면서 물었다. "왜, 저런 작은 아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모르지. 자넨 저 아이가 위험하지 않다고 보나?" 프라운은 잠시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내 뒤를 지나쳐서 북쪽 성채를 향해 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서 나를 돌아 보았다. "내일 부터는 아무래도 좀 힘든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힘드셔도... 투정하지 마십시오." 결국, 전쟁은 나를 위시한 전쟁으로 재편되었나 보다. 뭐, 어차피 적들의 숫자가 상당히 감소했으니 별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래. 프라운. 너나 조심해라." "예." 프라운의 미소가 환하게 머릿속에 박혔다. 간만에 하브라이드 녀석도 보고 싶어졌다. 마족 주제에 의리는 죽여 준단 말이지? 아, 의리가 아니라 충성심인가? 이들은 내가 지금 마왕이라 충성을 바치는 거잖아? 흠.. 그렇군. 그래. "여기 계셨습니까? 그래. 세이는 찾으셨습니까?" 자이츠가 입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양반.. .뭐 좋은 일이 있나? "자네, 무슨 일 있나?" "예. 제 아내가.. 글쎄.. 임신을 했지 뭡니까? 하하하. 사실 거의 기대도 안하고 있었는데.. 이젠 안심하고 싸울 수 있습니다. 대대로 저희 가문은 피스트레이카 가문을 위해 싸워 왔거든요.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가문 열성 신봉자도 있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이지. 이것 참 놀랍군. 하핫. 신기해. "그래. 하지만 죽는다는 말은 말게. 자네가 빨리 죽으면 자네 아내 등쌀에 내가 먼저 죽을 테니 말이네. 나도 내 후손을 남길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나?" 자이츠는 방긋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하의 분부에 따라. 그럼 좀 쉬십시오."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이츠가 사라지고 이번에는 살린과 케빈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상당히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비실 거리는 미소를 머금고 나타나는 거야? 무슨 일 있어?" 내가 묻자, 살린은 방긋 웃으면서 소매를 잡아서 이끌었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장난감들이 가득한 방이었다. "처음 봤지? 난 이런 게 있는 지도 몰랐는데, 케빈이 찾아냈어. 멋지지 않아? 내가 어린애였다면 이런 방에 환장했을지도 몰라. 굉장히 오래된 거 같기는 해도... 무척이나 비싼 물건들 이었을 꺼야. 안 그래?" 그 물건들을 보면서 나는 회상에 잠겼다. 이 방, 그래. 이젠 잘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난 항상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상하고 신기했다. 왜 마차는 굴러가는 걸까. 왜 내 머리 위에 잇는 저 조각들은 부딪혀야 예쁜 소리가 날까 하는 것들. 그러나 개 중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존재였다. 내겐 어머니가 없었다. 아예 어렸을 적에도 없었다. 유모라는 존재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내게 항상 도련님이라고 불러주었고, 절대로 나를 혼내지 않았다. 한 책에선가는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난 그걸 보고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는 늘상 서류에 갇혀서 지내는 사람이었고, 항상 우울해 보였다. 나도 그러한 어머니가 가지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하자, 아버지는 그야말로 슬픈 얼굴을 하면서 나를 안아주었다. 그는 다시는 이런 어머니란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녀 옆으로 가고 싶다고.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가 10살이 되기 전에 저 하늘로 가버리고 말았다. 혼자라는 것, 홀로 된다는 것을 그 때 부터 나는 느껴야 했다. 과거 자신이 했던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단지 태어난 것 하나로 홀로 되어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그건 싫은 일이 었다. 그리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일이었고, 가장 화가나는 대상은 아버지란 존재였다. 왜 나에게 이 많은 일을 맡기고 가셨던 걸까하는 생각을 하면 잠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책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책은 화려한 마법을 할 줄도 알았고, 말도 할 줄 알았다. 사람이나 다름 없었다. 그 책과 난 친구가 되었고, 덕분에 마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그 책을 잊고 난 나 자신을 구하지도 못했으면서, 세상을 구하러 갔다. 이 놀이방은 내가 떠나던 그 날까지 없애지 못했다. 그 전에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은 다 사라졌는데, 백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이 곳의 시간은 여전히 정지해 있는 상태였다. 정지한 시간속에 여전히 작은 라플이 놀고 있는 것이다. "프라오니스? 이건 뭐에 쓰는 거야?" "아, 이건 그냥 아이들에게 흔들어 주는 거야. 잘 봐. 그럼 자르륵 소리가 나지?" 케빈은 그걸 무척이나 신기하다는 듯이 응시했다. "케빈이나 나는, 장난감을 별로 본 일이 없어." 살린이 그렇게 말하면서 약간 우수에 젖는 듯한 표정을 짓자 어이가 없어졌다. "이건 더하지. 이건 백년이나 된 거라고. 알아? 예전에 이 곳에 살던 아이를 위해서 산 것들이지. 문제는 그 아이는 이걸 가지고 놀 줄 몰랐다는 게 문제지만. 하하.. 오랜 만이네. 이곳.. 아, 맞다." 그 도장이 아마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드래곤 모형의 입안으로 손을 넣으니 뭔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세상에. 백년이 지나도록 있네? "있다. 이거 봐. 이게 뭔지 알아?" 수정을 깍아서 만든 것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도장 하나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거기에 향했다. "우와. 이거 수정이야?" 바보. 수정은 이렇게 오래 두면 색이 변했을껄? "케빈. 이거 다이아몬드야." 잠시 케빈은 멍하니 그걸 바라 보았다. 그리고 손으로 살짝 만졌다가 황급히 손을 떼었다. "엑? 차가워?"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었다. "당연해. 이건 원래 얼음의 심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트라이너 황가의 옥쇄였어." "에엑!" 놀라는 게 당연하긴 하지. "좀 사연 많은 도장이야. 아마도... 내일 이게 필요 할지도 모르겠어." 살린은 의의를 제기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키히와 만나는 데 그게 필요하지?" 케빈이 손을 치면서 자신의 추리를 선보였다. "혹시, 그걸로 꼬셔보려는 수작.. 에이! 왜 때려? 아니면 말지!" 넌 맞을만 하니까 맞는거야. 하여간. "자자.. 아마도.. 어떤 행사에 이게 필요하게 될꺼야. 그러니.. 기대하라고.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너희들 모두 가도 그리 위험하지 않을 꺼야." 케빈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원래 그 녀석 이해하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뭐. 상관 없지. "그럼 세이는 여전히 위험한 거네? 살린은 대충 일의 경과에 대해 듣더니 자신의 의견을 내 놓았다. "넌 그가 책의 영혼이라고 해서 어쩌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보지?" "그야... 이미 내 친구라는 생각이 드니까. 게다가 그렇게 어벙한 녀석이 책이라니 사실 믿기지도 않고. 안그래?" 케빈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먹을 걸 자신의 입에 쑤셔 넣었다. "난 단지 배가 고플 뿐... 살린도 먹어. 내일에 대비해야지." 내가 걱정하는 건.. 아마도.. 그녀가.. "대비도 좋고 다 좋은데 한가지 나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게 있어. 라플. 넌, 정말 그 대 마도사 라플이라면 정말 키히와 연인이야?" 케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조용히 연어죽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후회할 일을 하지 마. 그녀를 평생 사랑했으니까, 잊는 것도 평생, 혹은 그 이상이 걸릴테니까. 알았지?" 케빈의 따뜻한 말에 왠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가 비웃는다고 더 맞았지만. 쳇. 멋을 모르는 놈이야. 쳇 쳇. "고마워, 케빈. 하지만 난 그렇게 어리석은 놈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난 내가 후회하지 않는 최고의 방법으로 해결할 테니까. 이거나 먹어. 알았지?" 역시나 세이의 연어죽은 일품이었고, 세이의 무단외출 낚시 사건은 더욱 크게 붉어져서 죽도록 엘류시아에게 맞게 되었다. 쯧.. 거의 애 잡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혼났다. 이거지?" 세이의 얼굴에는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낼 모래면 성인이잖아. 하여간. 믿음직스럽지 못하기는... "그래서 무슨 장가를 간다고 그래? 정신 차려. 임마. 근데. 한가지 묻자. 그 여자의 어떤 점이 맘에 드냐?" 세이는 갑자기 입을 꼬옥 다물고 나를 묵묵히 바라 보았다. "말해 봐. 안하면 때려 줄테다." "그런게 어디있어요? 절대로 말 안해 줄꺼야." 그런 사소한 걸 가지고 삐지는 놈은 네 놈이 처음이라구. 여하튼, 안 알려 줄 생각인데 본데.. 뜻 밖에도 그걸 다른 사람 덕에 알게 되었다. 그것도 지나가던 엘류시아 덕이었다. "어머머. 고민하지 마세요. 그게 아마 세이가 제 언니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스승님을 닮아서래는데, 원 웃겨서." 순간 물 먹던 케빈은 물 뿜고, 옆에서 연어죽을 먹던 살린은 입을 틀어 막고 괴로워 하기 시작했으며, 세이의 얼굴은 거의 적색당을 보는 듯 했다. "헤.. 그거 정말이냐? 너가 정말 날아 닮아서 좋아하는 거냐? 그럴 필요 없이 스승님이랑 평생 같이 살면 되잖아?" 내가 일부러 놀리느라 그러자, 옆에서 살린도 거들었다. "그래. 괜히 닮은 사람 찾지 말고 스승님이랑 재미있게 살면 그만이지. 안 그래?" 살린의 저 이죽거리는 표정을 보면 괴리감에 잠시 당혹한다.. 헉. "...정말요? 하지만.. 스승님이 맨날 밥만 축낸다고.. 나가서 살라고 그래서... 괜찮아요, 스승님?" 겨우 사례를 진정시킨 케빈은 다시 사례들렸으며, 지나가다 우연히 합류한 엘류시아는 거의 웃지 못해 죽은 사람 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쯧... "저기.. 세이야. 스승님이 좋아?" "예." 너무 망설임 없는 대답이라 더 두렵다 마. "나도 세이가 좋아. 하지만, 세이야. 세이는 나 말고 나보다 더 좋은 여자랑 결혼해야 하는 거야. 알겠어?" 세이의 얼굴에는 이제 눈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예.. 사부님은 제가 싫은 거로군요." 나도 네가 여자였으면 이러진 않았다 임마... 하여간, 언제까지나 부모랑 같이 살고 싶어하는 자식의 마음을 알긴 하겠지만.. 뭐, 귀엽긴 하지. "세이야.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래. 결혼해서 우리집에서 같이 살면 되지. 안 그러냐?" "응! 그럴 께요." 그제서야 맘이 풀렸는지 종알대면서 떠들기 시작했다. 무서운 놈.. 하여간 별 짓을 다 저지른단 말야? "아깝네요. 여자 제자였으면 어떻게 해 보는 건데. 키키킥.." 이 말은 정확히 살린의 입에서 나온 거였다. 세상에.. 중이 돌면 고깃집만 찾는다더니.. 이게 완전히 그 꼴이잖아? "케빈. 물 다 먹었어?" "아.. 예. 하하핫.. 오늘 저녁은 샤워 안해도 되겠네요. 그렇죠? 하하핫." 제발 해라. 해. 더러워서 냄새날라. "자 자. 그만들 하고 이젠 가서 좀 쉬어야죠. 그래야 내일 작전도 성공으로 마쳐지지 않겠습니까?" 그제서야 어렵사리 엘류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흘깃 살린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같은 신관이니.. 이쪽을 꼬셔볼까?" 순간 살린은 오한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나? 재미를 느꼈지. 크크크. 세이를 데려다 주고 천장에 있는 아름다운 벽화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나 오늘처럼 놀고, 떠들고 편하게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당신이 있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당신이시여, 부디 날,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서 날 위해 기도해 주고, 나도 당신을 잊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먼 훗날 다시 만나도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 내일을 위해서 잠을 청해야겠군.. 아, 자네인가?" 희미할 정도로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듯 했다. 사비르가 내 침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날 죽이러 온 건 아니군. "자네... 다시 생각해도 협조하기 싫은가?" "후회하지 않으니까. 내일이 지나면.. 아마도, 모든 게 끝나겠지. 어떤 식으로든. 그렇지 않은가?" 그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쉬고 사라져 버렸다. 35. 막간극 때론, 진실이란 알지 못할 때가 좋을 때도 있다. 나는 항상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우습게도 진실은 절대로 드러나곤 한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숨겨도 밝혀질 것은 다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묘미라 할 수 있다. -명언록- 우린 다음날 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괴물의 침입도 거의 보여지지 않고 적들의 침공같은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좋은 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는 성에 비치되어 있는 식량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이건 중요한 문제이긴 했다. 식량이 없이 어찌 살 수 있단 말인가? "배가 무지 고프니.. 제가 다시 연어를 잡아.. 왜 때려요!" "맞을 짓을 하니까 때린다. 너 그 때 그 죽을 뻔한 생각은 정말 조금도 하지 않는구나! 제 정신이냐! 넌 정말 가끔 보면 미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놈아!" 옆에서 살린과 케빈은 자신의 무기-그래봐야 살린 무기와 케빈의 무기는 오랜 전쟁으로 이가 다 빠져 있었지만.-를 손질하고 있었다. 살린이 갑자기 미소지으면서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참,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우리 이곳에 축제가 있다면서?" 이봐.. 아무리 내가 노는 걸 좋아해도 축제는 무리라고. 밥도 없는데 무슨 축제? 일단 축제하면 술과 고기가 푸짐해야 하는 거 아냐? "축제라, 그거 좋기는 한데..문제는 먹을 게 없잖아? 그러니 무슨 축제를 하니? 원래 카와세리크 잎의 연인이 어쩌고 하는 축제가 있긴 하지만.." 케빈이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헤, 그럼 먹을 게 있으면 축제를 한다는 거지?" 잉? 무슨 소리야? 당장 먹을 게 없어서 엘류시아의 걱정소리를 못들은 거냐? "먹을 게 있다면야 별 문제 아니지. 하지만, 그런 게 없잖아. 왜 소세지 하나 올려 놓고 축제 하자고?" 케빈은 고개를 저었고, 살린은 매우 기쁜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전의 그 너가 사비르와 사라진 그 곳말야. 성의 구조를 연구해서 우리도 거길 들어가 봤거든. 뭐, 거긴 사실 별 게 없었는데, 아주 흥미로운 걸 발견했어. 뭔 줄 알아?" 케빈이 술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건 이 근방에서만 나는 보리를 이용한 증류주였다. 세상에... 저게 지하에 있었단 말야? "그게.. 지하에 있어?" "응! 아마 성 비축 용이나 뭐 그런 거였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비축용 증류주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는 거 아니겠어? 즉, 마시는 게 해결되었다는 거지." 하지만, 마시기만 해선 뭐가 되는 게 아니잖아? 일단 중요한 먹을 게 없잖아? 안주 없이 술 마실 수도 없고 말이지. 그 술, 그래보여도 꽤나 독하단 말이다. "먹을 거는? 없이 하게?" 이번에도 살린과 케빈은 마주 보고 씨익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 상당히 웃는 걸 좋아한단 말이지. "하하하! 그것도 해결 되었어. 약간 찝찝하긴 하지만, 그래도 화려한 식탁이 준비되어 있지. 지하에 역시 비축용으로 보이는 듯한 저장고를 발견했거든, 아, 물론 엘류시아에게 말하면 안된다고. 그녀가 알면 당장에 식량으로 될껄? 일단 술 이야기만 하고 축제 준비 하자고. 요즘 사기들도 떨어져 있는데, 이런 일로 사기를 돋구면 좋잖아?" 그야 그렇지만, 신관의 머리에서 술 먹고 마시자는 이야기가 나올지는 몰랐다, 이거지. "그럼... 어떻게 축제를 준비할 생각이지?" "그야, 우리 맘대로지. 좋지? 그럼 가자, 오에에에~~!!!" 살린과 케빈은 아주 신이 잔뜩 나 있었다.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단 말야. 생각하는 게 항상 이상해서 말이지. 으휴. 너무 한다니까. 그리고 축제는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준비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천만에 그 두사람은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했다. 그건 아무래도 다분히 엘류시아나 자이츠 등의 강경 보수파를 의식한 행동으로 보여졌다. 하긴, 좀 무섭긴 하지? "케빈, 잘 되가나?" 문득, 지나가다 만난 케빈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 쉿. 몰라도 된다고. 어차피 넌 꼭 부를 테니까. 알았지? 헤헤헤." 그래도 왠지 걱정된다. 축제라니.. 참나. "그 소문 들으셨어요?" 세이가 그날 바로 점심때 쯤에 나를 붙잡고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바라 보았다. "무슨 소문?" "연어 소문이요." 갑자기 머리에선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연어가 뛰쳐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황당하게 왜? "왠 연어 소문?" "그게... 사실 저 위대하신 몇몇 분이 드디어 축제 준비에 착수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준비 물품 중엔 글쎄, 연어도 있다고 그러는 거잖아요? 사실, 연어를 잡기가 지금은 무지 어렵잖아요. 그쵸?" 그렇지. 연어를 잡으려면 성을 나가야 하니까..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스승님도 참 둔하시군요." 내가 왜 나보다 백살 더 어린애에게 둔하다는 소릴 들어야지? 아직 벽이 시커멓진 않다고! "둔..하다니? 난 잘 모르겠으니 똑똑한 네가 이야기해봐라." "예. 그럼... 글쎄. 살린일행이 멋지게도 고기를 준비했다는 거죠. 그것도 엘류시아 모르게 말이죠. 출처에 대해선 별 소문이 다 돌고 있을 정도라고요." 알만하군. 그 저장고에 연어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 알았다. 이 사부는 바빠서 일해야 하니까, 넌 가서 돕던지 그러렴." 그제서야 세이는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끼얏! 꼭 가고 싶었거든요. 감사합니다. 헤헤헷~" 아직 애야. 애. 쯧.. 쯧. 공부가 조금 더 부족한 감이 있다니까? 역시 앉혀서 끼고 패면서 가르치는 게 최고인데 말야. 에휴휴. 난 왜 여기까지 와서 서류랑 씨름해야 하냐고.. "공작님. 계십니까?" 문이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바로 엘류시아가 예의 흰색 옷을 입고 들어왔다. 아, 오늘은 꼭 물어 봐야겠다. "아, 어서 들어와. 물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그녀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스쳤다. "대체 무엇을 알고 싶으신 겁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별 거 아니라고. "아, 그저.. 이젠 백의 아가씨도 아닌데 왜 맨날 흰색 옷만 입는 거지? 생각해보면 흰색옷이 때도 잘 타고 그래서 상당히 비 실용적이잖아? 검은색 같은 게 낫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주 커다란 문제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응? 뭔가 흰 옷을 입어야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가? "뭔데?" 그녀는 약간 쑥쓰러워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하도 흰옷만 몇년을 입어더니 다른 옷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하하하.. 게다가 여기 온 뒤로 계속 싸움만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좀 정신 차릴만 하니까 거울 도난 사건도 있었고.. 아, 그 거울은 전망대에서 잘 쓰고 있습니다." 불쌍한 거울이라고 불러주지. "그랬군.. 어쩐지 안 보인다 했지. 하하핫. 그래 참. 자네 무슨 일 있나? 왜 여기 그렇게 급하게 들어오고 그러나?" 그제서야 그녀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을 가볍게 치고는 넌지시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축제 준비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왜 저는 모르고 있었던 걸까요?" 놀랍군.. 며쳧 사람 밖에는 모를 일인데 그녀가 알고 있다니. 일단은 살린에게 협조해 주어야겠지? "그거라면 잘 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알기론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준비하는 사람들이 소수이거나 뭐 개개인의 축하 파티겠지. 생일 파티 같은 거 말야. 안 그래?" 이렇게 말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면 거의 대부분이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시기가 좀 묘하잖습니까? 원래 축제 시즌에 맞춘 거 같습니다." 그녀는 역시 보통 사람처럼 대부분에 들진 않았다. "그거야... 우연이겠지. 축제가 생일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안 그래? 너무 고민하지 말라고. 예쁜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서 원형 탈모증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그래?" 이렇게 진지하게 일침을 놓는다. 흐흐흐. "흠.. 그래요? 할 수 없군요. 각하도 모르신다니.. 다른 사람에게 물어 봐야겠네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횡하니 사라지는 그녀를 보면서 약간의 불안감이 덮쳐 왔다. 우리 적이 코앞에 있는 데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뭐, 대책이 있다고 별로 변하는 건 없지만 서도. 으 헤헤헤. "저기... 케빈. 아무래도 엘류시아가 냄새를 맡은 거 같아." 케빈은 지나가다가 하마터면 칼을 떨어트릴뻔 할 정도로 놀랐다. "어떻게...!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설마, 너가 이야기 한 건 아니지?" 내가 그 이야기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냐? 연어찜은 나도 먹고 싶다고. "내가 멋하러.. 그 보다, 행사가 잘 되어가니 다행이네. 일단은 밤에 해야 하겠지? 모두에게 들키지 않고 재미있게 하려면." 케빈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건 왜?" "당연히 아침 부터 굶고 가려고 그러지. 당연한 걸 묻고 그래. 허허허. 노인네의 맘을 이해할 수 있겠지?" 케빈은 누가 노인네냐라는 아주 발칙한 말들을 쫑알거리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세이는 확실히 거기 도우런 간 모양인지 거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불쌍한 놈. "스승님." 역시 생각하기가 무섭구만. 아주 몇시간 사이에 눈이 푹 꺼져 있었다. 대체 뭘 하느라 저렇게 된 거지? "왜?" 역시 소곤 소곤 대답해 보았다. 세이 녀석은 내 귓가에 말하기 시작했다. "일손이 부족해요. 좀 도와 주세요." 스켈톤 병사 잔뜩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녀석에게 질질 끌려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지트는 정확히 남성채의 지하 2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여기만 푹 꺼진 쪽에 있어서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거나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가만, 내가 여기 있으면 찾는 놈들도 많을 텐데.. 흠. 지나가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축제에 대한 의견들을 주고 받고 있었다. "아니, 그럼 이번 축제 주제가 마왕 버라이어티 쇼란 말인가?" 어이.. 어이.. "아니라니까. 결투와 무투의 적당한 만남이 될 게 틀림 없어." "그건 아닐세. 요리 대회라는 이야기도 있어." 세이가 어리벙벙한 나에게 살짝 귓말을 해 주었다. "일부러 살린이 이런 저런 거짓 소문을 풀어 놓은 거에요. 엘류시아는 지금쯤 무슨 파티에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껄요?" 그건 아니라고 봐. 이미 대충은 눈치를 챈 거 같던데. 흠.. "그게 잘 통한지는 좀 의문이다만.. 음? 여긴 지하가 아니냐?" "예. 여기서 작업하고 있어요. 그런데 잘 하는 사람이 없어서 일이 더뎌요." 알만 하군.. 방 가득 널어진 푸른 색의 천들을 보니 대충은 알것도 같았다. 이들은 그야말로 천으로 뭔가를 만들려는 것이 었나 본데.. 아무리 잘 봐줘도 이건... "걸레로군. 맞지?" "아니야.. 가서 앉아서 꼬매는 표시 된 데 꼬매라고. 아, 세이는 가서 좀 쉬다오라고." 세이가 괴이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사라지는 걸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믿을 놈 하나도 없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등... 등... "이건 뭐에 쓸 셈으로 만든 거야?" 케빈은 한 손에는 바늘을 들고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어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휘장이지!" 원래는 우리 가문의 문장을 그려 보려고 했던 가 본데.. 원래의 용맹스러워 보이는 유니콘은 간데 없고 어디서 말 비슷하게 생긴 노루 하나가.. 어이... "어디 휘장?" 생글 생글 미소로 끝까지 내 얼굴을 숨겨야 하겠다. "응. 당연히 여기 휘장이지. 유니콘이지 아마?" 난 동시에 책을 집어 던졌다. "이 멍청아! 유니콘은 뿔이 하나야! 이건 사슴뿔이잖아!! 녹용해서 약해먹을 일 있어!" 그러나... 휘장을 고칠 시간이 당연히 없었다. 거의 급조 축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살린은 그래도 위로랍시고 한 마디 했다. "멀리서 보면 잘 몰라." 그래. 모르겠지. 동물인지 뭔지도 알아 보기 힘든걸? 난 이게 우리 가문 문장인지도 몰랐을 정도니.. 이걸로 이벤트 걸어서 무슨 동물인지 알아 보라고 하는 것도 꽤나 재미있겠다. 하하하하. "라플. 재미있는 이벤트가 생각났어. 너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말야." 살린은 방긋 웃으면서 다시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불꽃 놀이었는데, 사실 그거 자체는 어려울 게 없었다. 내가 대마도사잖아?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앞에서 같이 싸우고 정들고 있는 놈들에게도 특별 서비스를 하란 말인가? "뭐 못할 건 없지만, 적들에게도 버라이어티 쇼를 선사하는 게 되겠네? 그리고 그런 짓 하면 전쟁이 나도 크게 난 줄 알지 않겠어?" 살린은 걱정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 그러거나 말거나 결판 날 싸움을 더 질질 끄는 거에 불과하잖아? 안 그래? 그렇다면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야." 어이.. 거기서 결판 난다는 건 누가 이기는 건데? 불길하잖아! "낭만적인 축제가 되겠지?" 케빈은 아예 저만의 세상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자신의 옷과 함께 휘장도 뜨고 있는 걸 모르는 거 같았다. 말해줘? 싫어. 내가 왜? 세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듣기로는 몇 몇 사람들과 정원 근처에 마법 등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엘류시아는 특별히 서류에 치이고 있었고, 자이츠는 워낙에 둔팅이라 그런 건 잘 모르는 거 같았다. 쯧... 불쌍한 놈. 문득, 이런 축제를 하고 있는 동안, 역시 절실히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 기사단원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일단 이번의 괴물가의 전쟁 덕에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허허허. 그럼 이제 정말 대륙 제일이 될 날도 멀지 않았는가? 하... 멋지다. "저, 라플님. 뭐 하십니까?" 허거덕.. 자이츠가 마침 내가 휘장을 들고 가는 찰나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녀석 지금쯤 관찰 숙제(적 감찰 보고서)를 쓰고 있어야 한느 거 아닌가? 제길.. "아.. 그냥 마법 공부나 해 볼까 하고. 요즘 느끼는 거지만, 마법은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지 않아? 하하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자이츠는 마법을 할줄은 몰라도공부는 오래 했잖아. 안 그래?" 생글 거리면서 위기를 극복해 본다. "예? 그 걸레는 뭡니까? 설마 걸레를 옷으로 만드는 그런 마법을 연구하고 계신 겁니까?" 절대 아니라고.. 이봐. 너무 하잖아. "당연히 아니지. 하하하. 어서 가 보라고. 그래." "예... 알겠습니다." 뭔가 덜 납득한 표정으로 그는 즉시 내 시야에서 휘리릭 사라져 갔다. 가만, 저 쪽이 무슨 방향이더라? 하하하.. 젠장! "어이! 자이츠! 자이츠!" 자이츠는 내 부름에 즉시 고개를 돌렸다. 곤란하다고. 거긴 바로 우리 작업장이 있는 지하가 아니냐? 들켰다가는 이 놈은 엘류시아에게 말할테고, 우린 현행범으로 쪼르륵 들어가게 된단 말이지. 허허헐. "부르셨습니까?" 역시나 찜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날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지금 한가해?" 젠장, 여자에게도 잘 안 하는 데이트 신청이다. 으.. 싫어. 기분이 더더욱 나빠지는 것이 앞으로 일진도 안 좋을 듯 한 예감이야. 으.. 왜 처음부터 엘류시아에게 이르지 않았을꼬? 고생을 사서하는구만. "멍청하면 평생 고생이라지?" 왠지 혼잣말이 나오는 나였다. "자, 이것 좀 잡고 있어봐." "알겠습니다!" 소리지르지 않아도 충분히 잘 들린다고. 그리고... 내가 지금 왜 이렇듯 정체를 알 수 없는 휘장에다가 일일이 빛마법을 걸고 있는지.. 참 내가 봐도 어이 없다고. "자이츠 부인은 뭐하고 있어?" 자이츠는 부인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살짝 붉히곤 한다. 꽤 귀엽지. 후. "예. 오전부터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녀를 찾고 있었습니다. 뭐, 본 사람들은 많던데.. 대체 뭘 하는 건지." 하하핫.. 그녀도 행사 준비위원회였지? 알 만 하군. 지금쯤 막판 준비작업으로 음식 세팅에 들어갔을 테니까. "하하하.. 그래? 뭐, 뭐든 하고 있으니까 보이지 않았던 거겠지. 너무 신경쓰지말라고. 알겠지? 괜히 머리에 좋지 않아. 하하하..." 어색하다. 어색해.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도 다 된 거 같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응?" 그가 막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찰라, 갑작스럽게 기사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린 그가 혹시 간질병 증세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큰일났습니다!" 요즘은 일이 터져도 모두 큰일이니 그것도 문제다. "하, 그래? 하지만, 내가 볼 땐 큰일도 문제긴 하지만, 자네의 그 예의 없음도 문제네 그려. 이곳은 공작 각하가 계시는 곳이네!" 자이츠, 알고 보니 꽤나 예의를 잘 지키는 놈이었다? 하지만 그의 여태 한 행동들을 종합해보면 전혀... "죄송합니다. 하지만, 현재 밖에 중앙에서 온 사신이 와 있습니다!" 이건 좀 의외의 사건이었다. 중앙에서 사람이 와 있다니? 그게 어디 흔한 일인가? 이곳에 사신이 오는 경우도 거의 없고, 이번 전쟁이 일어난 것도 거의 모르는 척 하고 있지 않은가? 아, 맞다. 율지스가 중앙에 있었을테니까 뭔가 음모를 꾸몄을 수도 있고... "그래? 에휴휴. 자이츠. 어서 가봐라. 나는 좀 천천히 내려가보지. 뭐." "알겠습니다." 자이츠가 황급히 사라지고 난 다시 마법을 거는 일에 몰두했다. 요즘은 이렇듯 뭔가를 하지 않으면 계속 생각이 나서 괴롭곤 했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하나씩 올라.. 헥? 잘못했다. "공작각하!" 소리를 지르면서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자이츠가 갑작스럽게 들어왔다. 어이, 너말야. 아까는 막 들어오지 말라면서? "왜? 사신이 곰이라도 되냐?" 자이츠는 순식간에 어버 거리고 있었고, 뒤에 왠 소녀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이쁜 곰이 어디있어? 오빠를 아주 졸라서 얻은 결과라 할 수 있지. 헤헤헤. 반갑지?" 메데이레나였다. 맙소사! 그 황제, 이제보니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이곳이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보낼 수가 있나? "반갑긴 하지만, 제 정신이야? 이곳은 하루에도 기습이 몇번이나 있는 곳이라고!" 그녀는 그저 입술을 죽 내밀 뿐 별다르게 항변하진 않았다. "각하.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뭘 어째? 빨리 온 그대로 돌려 보내는 게 좋은 거지. 가만, 그렇다. "그래. 메데이레나, 온 건 온거니까 뭐 좋은 것들 좀 보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럴래?" 그녀는 그제서야 환하게 미소지었다. "응!" 그녀는 이곳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거 같았고, 더욱이 사람들 대다수가 그녀를 매우 좋아하는 거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장래 공작 부인에게 잘해주어야 한다는 헛소리를 해서 나를 매우 당혹하게 했다. 저번에도 밝혔지만, 키히 알면 반 죽음이다.. "우와와! 전망 정말 좋다!" 탑의 꼭대기에서 병사들 둘 정도가 다니고 있는 그런 위치에서 한 나라의 황녀가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흩날리고 있다면? 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어이.. 추우니까 내려가자. 응?" 정말이지. 나이를 먹으면 더욱 몸이 허해지는 거 같애. 그리고 원래 여자가 남자보다 덜 추운 법이라고. 난 추우면 춥다고 말해! "뭐야? 재미없게. 그리고 여기가 위험하다 어쩌다 하더니 내가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지껏 시시한 습격 한 번 없잖아?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그야 우리도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갑자기 적들이 사라지다니... 혹시 그건 키히 주변에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말하는 거기도 하잖아? "다들 축제를 보러 가나 보지. 축제 시즌이잖아?" 주머니에 결국 나는 손을 집어 넣고 말았다.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나 차가웠다. 역시 어린게 좋다니까. 청춘이야. 청춘. "그래? 농담이라도 그런 이야긴 하지 말라고. 괴물들과 함께 축제를 본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그 자세가 더 문제라고 보는데? 난 말야. "저기... 메데이레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면서 아주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 보았다. "으응? 왜?" 이 말을 하지 말까 할까 몇 번 망설였지만, 그간의 경과로 생각해 본다면 기왕이면 말하고 후회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에 있는 축제가 끝나거든, 돌아가." 그녀는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어떠한 감정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천천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확실히 아무리 못생긴 체 해도 미녀였고, 작지만, 훌륭한 아가씨였다. 잠시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러나, 이내 활짝 웃음지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뭐야, 라플. 당연하잖아? 난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어 이렇게 놀고 있지만, 그래도 나바스의 제2 왕이 계승 권자에다가 황녀님이시란 말야. 당연하지. 안 그래? 어디의 한가 한가한 누구와는 분명히 다르단 말이지." 미안하구만, 한가해서.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걱정했거든. 그리고 한가지 더, 메데이레나. 나중에 꼭 만날 수 있을 꺼야. 약속할께. 난 여지껏 계속 한가지 방황만을 거듭하고 있었지. 하지만 이젠 아냐. 이젠 나도 결정을 내렸고, 후회하지 않게 될 꺼야. 날 믿을 수 있지?"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 듯 그녀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어. 넌.. 나보다도 훨씬 생각이 깊은 걸?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어쩐지 모르겠어. 하지만.. 결정이 어떤 것인지는 묻지 않을께. 하지만, 너의 그 미래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진 않겠지?" 순간 고개가 무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그녀의 젖은 눈동자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 미래에는... 그녀가 있지 않았다. "그래... 미안. 메데이레나. 그래. 내가 잘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아." 메데이레나는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 알고 있었어. 난... 난 어린아이인걸.. 하지만 라플. 나, 말이야. 나이를 더 먹으면 먹을 수록 널 더 좋아하게 되면 어쩌지? 넌 날 좋아하지도 않을 텐데.. 그러면.. 너무 너무 괴로와서 울어 버릴지도 몰라." 그녀의 눈에는 마침내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키히를 사랑했던 거 만큼, 메데이레나는 옆에서 계속 울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동경의 대상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 모르지. 내가 전혀 다른 아줌마와 눈 맞아서 이 나라를 뜰지도. 하지만, 메데이레나, 이건 말할 수 있어. 널 정말 좋아해. 문제는 내가 널 좋아하는 거 이상으로 키히를 사랑했다는 거야."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 해도 그녀를 미워하게 될 수는 없을 꺼라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이지. "알고 있어. 그래서.. 더욱 더 슬퍼져." 잠시 바람들이 우리 사이를 물처럼 빠져 나갔다. 그리고 그 때 아름다운 불꽃이 멋지게 하늘을 수 놓기 시작했다. 빨강, 파랑, 노랑의 색들이 하늘에서 어울어져서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내고, 다시 사그라 드는 것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 아름다움이 영원하길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항상 행복할 수 있도록, 작은 소녀가 나 때문에 울지 않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이번 만큼은 왠지 키히에 대한 것들을 빌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 대해 사랑하면 할 수록 왜 옆에 있는 사람들은 불행해 지는 것인지... 끝까지 알 수 없으리라. "내려가서 맛있는 거 먹어야지? 응?" 그녀는 이내 활기찬 얼굴을 하고선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붉은 드레스가 불꽃 보다 더욱 더 아름답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래서 왠지 눈물이 날 정도로 슬펐다. 하지만, 내가 메데이레나랑 사귀면 키히는 둘째 치고 완전히 원조 교제 아냐? 100년 넘게 차이 난단 말이다! 죽욱 나선형으로 연결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아래는 벌써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서 엘류시아가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에도 술 한잔이 들려 있었다. 선조들이 예비해 놓은 먹을 것들이 이렇게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어찌보면 우습기도 했지만, 어차피 사람이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행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찬 얼굴을 하고선 맘껏 마시고 퍼먹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오랜 기간동안의 전쟁의 흔적이라든지 하는 게 없었다. 마치 승전 축하 파티처럼 사람들의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부님!" 세이가 쪼르르 달려 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연어 찜이 연기를 피어 오르면서 얹어져 있었다. 아마도 날 위해 들고 오는 모양이었다. "이야. 세이야. 이거, 나 먹으라고 들고 오는 거냐?" "예. 당연하잖아요. 그리고 제가 일부러 따뜻하게 데워봤어요. 맛있어요?" 생글 거리는 녀석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 앉아서 약간 고기를 떼서 먹어 보았다. 이거야 말로 진정 연어의 맛이었다. 오랫동안 저장고에 있었던 것 치고는 그야말로 정말 신선했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보존 마법 때문이었겠지만.... "그래. 이거 완전히 꿀맛이다. 너도 뭐 좀 먹으렴? 요즘 계속 힘들었잖니?" 세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뭐가 힘들어요? 사실 요즘 들어서 별의 별 일들이 다 일어나긴 했지만, 아직은 끄덕없어요. 헤헤헤. 사부님만 건강하시다면 그만인 걸요?" 이 아이가 영혼이 인간이 아니라는 거다. 웃기는 일이지. 죽음의 서의 영혼? 하하하. 말도 안된다. "그래? 난 워낙에 팔팔해서 말이다. 연어찜 같이 먹자꾸나." 세이는 그제서야 방글거리면서 연어찜을 서서히 자신의 입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그 녀석의 입으로 커다란 조각이 쏘옥 들어가 버렸고, 난 갑자기 배가 쓰려왔다. 자식, 좀 작은 조각을 먹을 수도 있었잖아? "후와, 정말 맛있네요?" 그래. 너가 먹은 부분이 제일 맛있는 등살이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지. 흐흑.. 너무 한다. 너무 해. 세이는 정신 없이 그걸 먹기 시작했고, 나도 질세라 무섭도록 먹어대기 시작했다. 과연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게 본업이란 말인가? "하하핫... 무지 맛있잖아?"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그렇게 먹고 있으면 어떻하냐?" 살린이 어느새 나타났는지 한 손에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씨익 웃고 있었다. 세상에. 과일도 있었던 거야? "과일도 있었냐?" "응.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오늘 사람들이 먹고 다 없앨 수 있을 정도는 있더라고. 그 저장고 덕에 네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너가 오자마자 이렇게 먹고 놀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기뻐하잖아? 하여간, 사람들은 먹는 걸 너무들 좋아한단 말이지. 너를 포함해서 말이지." 세이는 빙글거리고 있을 뿐 별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하기사, 지가 양심이 있다면 반박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 당연해. 살린의 커다란 입에 과일 하나가 사라락 사라져 버리자, 케빈은 질세라 큰 과일을 베어 물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흥청 망청 웃고 있었고, 각각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이쁜 옷을 챙겨서 입고 있었다. "나름대로 준비 많이 한 거네? 참, 내가 만든 휘장도 다 거려 있구나? 저거 밤이 되면 무척 아름 다울껄?" 세이는 고개를 갸웃 거렸고, 이미 눈치챈 살린은 그저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왜 아름다운 건데?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거야?" 케빈이 묻자, 메데이레나도 신기하다는 듯이 매달렸다. "정말 마법이야? 우와!" 나바스에선 마법을 그리 볼 수 없는 편이니까 신기하긴 하겠군. 뭐... 당연한가?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기초중에 기초라고." "가르쳐 줘!!!" 아직 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가르쳐 달라고 그러냐.. 배움의 충동이 큰 거냐, 아니면 원래 그러냐? "대단한 건 아니래도. 그보다 케빈. 적들의 동향은 없어?" 나도 일단은 성주인 이상, 밖의 상황이 좀 신경쓰이고 있었다. "당연히 있지. 저 위대하신 사람들 께서 말이야. 아무래도 괴물들이 부러운 모양이더라고. 아까 불꽃이 터질 때 꽤나 우릴 주시하고 있던데?" 가만.. 가만. 그럼 괴물들이 우리 성 주위에 죽 둘러서 있다는 거야! "그럼 포위된 거잖아." 살린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어? 정말,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볼 수 도있겠다. 너무 신경쓰진 말라고. 그래도 그들은 아주 합리적이라 쳐들어오지는 않을꺼야." 이봐.. 지금 당신은 포위 된 거나 다름없다는 데 웃음이 나와? "저 괴물의 전투력은 거의 일당 백, 아니었어?" 세이는 내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스승님이 잘 모르나 본데 저 사람들은 말이죠. 사실은 아주 대단한 그룹들이라고요. 일단 싸움도 잘 걸지 않는 데다가, 자신들은 진화한 아주 유식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요? 제가 볼땐 그냥 괴물 같이 생긴 사람들인데..." 그게 엽기라는 점이지. "그래. 그래. 여하튼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살린은 빙긋 웃고 그저 그러하듯이 조용히 입다물고 있었다. 전직 신관이 뭘 얼마나 더 알겠는가? "어떻게는요. 괴물들이 우릴 쳐들어 오지만 않는다면 상관이 없다는 거죠. 그리고 저 괴물들의 숫자가 확실히 얼마 전에 비해서 격감하고 있어요. 더 이상 늘지 않는 것은 물론, 하루에 반씩 줄어드는 정도랍니다." 케빈이 유식한 체 하면서 이야기 했고, 메데이레나는 일말의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저들의 가운데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로군요?" 모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렇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문제가 뭔지 모르는 게 우리에겐 더욱 안 좋다고 할 수 있지. 만에 하나 우리에게 아주 불리하게 적용되는 일이라면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당할 수 있다고." 확실히 그건 그렇지. 뭐, 비전투 요원이 많은 우리 성 내에서 괴물이 하나만 나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때만큼 성벽의 견고함을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 문제야. 문제. 막 다시 생각에 잠기려는 찰라, 다시 아름다운 불꽃이 하늘에 쏘아져 올라갔다. 그리고 그건 아주 멋진 장식을 하듯이 빛나기 시작했다. "멋진데요?" 메데이레나가 아주 감동 받은 듯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예쁘긴 하지. 억수로 비싸다는 것만 제외하면 멋지기도 해. 하지만, 역시 돈 문제가 장난이 아니라고. 뭐, 이번에 쏘는 것들은 다 내 마법을 써서 쏘아 올리는 것이니 괜찮긴 하지만.. 말야. "꼭 꽃들의 개화를 보는 거 같아요." 세이도 답지 않게 멋진 말을 내뱉었다. 신기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축제의 하일라이트인 사람들의 춤과 노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빵빠레가 울리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옷을 챙겨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분장을 하고선 나와 키히의 역을 맡고 있었다. 뭐, 아무리 키히가 돌아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곤 해도 전설이란 원래 누가 누군지 모르고, 사람에 관련해선 잘 기억 나지 않는 법이니까.. 원래 놀자고 하는 일들이 아니냔 말이다. 뭐, 당연하지. "우와! 저건 바로 그 유명한 카와세리크 잎에 관련된 전설을 재구성한 게 아닌가요? 멋지다. 언제 저런 의상을 다 만들었지? 저 저것들이 너무 너무 좋아질 거 같아요. 하긴, 원래 저런 놀이를 좋아하긴 하거든요. 스승님은 저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세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당신이 잠든 사이에 만들었을 지도 모르지요. 살린군." 엘류시아가 어느새 다가와서 웃고 있었다. 엘류시아는 뭐랄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긴장이 풀려 있었다. 허허헉! 그렇다.. 그녀는 엄청나게 마셔댄 모양이었다. "저기.. 엘류시아, 많이 취했나 본데...?" 황급히 내가 일어서서 그녀를 부축하자 그녀는 다시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요상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팔자도 아닌 것이, 십자도 아닌 것이 일자도 아니었다. 이상했다. 취한 사람은 자신이 취했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경우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평소의 냉정하고 싸늘한 그녀의 입에서 나오리라고 믿기 어려운 대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에야... 살린이잖아? 헤헤헤. 이 나쁜 사비르녀석...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죽었어. 쳇. 신관들은 다 똑같아. 안 그래요? 전 말이죠. 정말..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그쵸? 에..엥... 응? 이건 뭐지? 하하하. 밥이다. 우와, 맛 있겠다. 저 그동안 계속 굶었거든요. 배가 아파서 죽을 거 같아요. 아니지, 굶어서 배가 아픈 거래요. 어쩌죠? 난 너무 불쌍하다니까. 하하하... 너무하죠? 난?"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살린은 졸지에 얼굴까지 빨개져서 쩔쩔매기 시작했다. 원래 살린이 속한 자애의 신관은 독신이 원칙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모양이란 말인지. 참으로 어이 없다. "그건 말이야.. 하하하. 살린. 너가 해결해라. 난 모르겠다." 배째란 말이다.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너무 내겐 어려운 거 같다. 하하하. "사부님. 비겁해요." 왜 너가 해봐라. 너도 하면 죽을 껄? 남의 연애 문제에 끼지 말라고. 그랬단 피보는 수가 있다. 이건.. 음.. 너에게 해주는 고마운 말들이라고 경청해! "자 자... 진정하라고." 살린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말을 건넸다. 문제는 그녀의 눈초리가 아까보다 더 험악해 졌다는 게 문제일까나? "하하하! 신관이 나보고 진정하래. 웃긴다. 그치? 이봐요. 신관 나으리. 댁이 날 책임 질 것도 아니면 신경 쓰지 말라고!" 아, 이제 엘류시아 이미지 완전히 다 무너지고 있잖아. 하하하. 말조야. 말조. "그럼... 됩니까?"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엘류시아를 제외한 모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어감이 뭔가 묘했다. 여기 있는 아주 눈치 없는 사람(뻔하지. 세이가 아니겠는가?)을 제외하고는 모두의 시선이 살린에게 꽂히고 있었다. 엘류시아는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듯, 커다랗게 웃었다. "하하하! 전 목적어와 주어가 없으면 못 알아 듣는다구요!" 자랑입니다. 그려. 평소에 그렇게 자세하게 나에게 보고하는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셨구만. 아주 대단해. 그려. "못 알아 들었다면 다시 말해 주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책임 진다면, 당신에게 신경써도 되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너무나 신경이 쓰여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오, 이럴 수가! 이번에는 엘류시아도 의미를 확실하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못 채면 바보지.. 하지만 그녀는 취했을 뿐 여전히 총명하지 않은가? 당연히 일의 심각성으로 인해서 술이 다 깨는 듯 했다. "살린! 당신은 신관이잖아요!" 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끝까지 절도있는 행동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정중하게 그녀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우면서 부축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은, 특히 케빈의 눈은 거의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신관? 그건 예전에 때려 치웠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라면 신께서도 용서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제가 싫으십니까?" 말투가 어째 좀 심각해 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그제서야 나는 세이가 뭔가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까까지 살린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체리 주스처럼 보이자만, 그 실상은 아주 독한 술이 떡하니 잔에 따라져 있었고, 옆의 병에는 거의 한 방울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에.. 그러니까.." 엘류시아의 당황하는 모습도 보는 날이 올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사람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결혼합시다!" 정말 많이도 취했군. 하지만, 이내 결혼 어쩌고 하니까 사람들이 우글 우글 몰려들기 시작했고, 특히 살린은 꽤나 유명인사라서 금방 소문이 쫘악 퍼지게 되었다. 저런.. 불쌍한 지고. 이젠 술김에 한 약속 덕분에 빼도 박도 못하게 되겠구나. 쯧 쯧... 저런 저런. 그리곤 모두가 지켜 보는 앞에서 갑자기 살린의 돌발행동이 이어졌다. 그가 갑자기 그녀에게 아주 찐한 키스를 한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장내를 뒤덮었고,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놀라움이 깃들게 되었다. 다행히도 혐오감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하하하.. "멋지다.." 메데이레나는 상당히 위험 수위가 짙은 농담을 했다. "글쎄.. 계속 지켜보면 그리 멋진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텐데.." 그녀의 눈동자가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변했는데, 곧 바로 내 말을 증명이나 하듯이 술을 너무 많이 먹은 살린은 그대로 바닥에 널부러졌고, 역시나 많이 먹은 엘류시아는 그대로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벽에 기대고 섰다. "스승님. 술은 많이 먹으면 추한 꼴을 보게 되는 군요." 하하핫.. 그렇지. "그래. 그러니까 너도 왠만하면 술을 먹지 말려무나. 지금이야 어차피 먹어서도 안되지만." "나바스 북부에선 어린애들도 술을 마셔요. 거긴 너무 추워서 마시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썩거든요." 썩어...? 하하하. 그건 아니겠지. 몸이 얼겠지. 썩지는 않는다고. "너무 추워서 썩기나 하나?" 케빈은 살린의 시체 아닌 시체를 조용히 끌어다가 어깨에 들쳐 맸다. "아, 그거 버리고 와." 어느새 나타났는지 자이츠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가만. 가만.. 그럼 성은 누가 지키고 있는 거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아냐? 일단, 내가 아는 놈들은 태반이 여기서 죽치고 있고, 나머지는 없잖아? 럴수 럴수 이럴 수가... "꽤액!" 갑자기 별 소리가 다 들리기 시작했고, 난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이번엔 게임을 시작했던 것이다. 세상에.. 무서운 일이다. "괜찮은 걸까요? 저런 험악한 게임을 해도..." 그야, 전통이니까. 어쩔 수 없지. 말린다고 듣기나 하겠어? 결정적으로 저 사람들은 원래 저 모양인데... "스승님. 거기 그것 좀 집어 주세요." 세이는 여전히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참을 놀다 보니 어느새 내 주위에는 모르는 사람만 가득이 들어 있고, 세이나 메데이레나는 이미 어린애는 골아떨어질 시간을 확실히 지키듯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바닥에서 잠들면 감기 걸릴 텐데.. 에휴휴." 어떻게 하나 하나 옮긴담. 가만, 세이 녀석 좀 봐라? 니가 애냐! 나보다 키가 더 크잖아! 한숨을 쉬면서 녀석을 마법으로 옮겨야 할지를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한 검은 속이 그의 몸을 들처 맸다. "아, 라플. 이 녀석은 내가 옮겨 줄께.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충분히 걱정되고 있다. 임마. "프라운. 성 방어 안해? 아무리 놀고 먹자 분위기지만, 적들이 쳐들어 오면 큰일나잖아." 프라운은 그야말로 한 순간에 세이를 들처 매버리고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지 실력도 좋지. "그거야, 이젠 어느정도 진실에 접근해서 괜찮습니다." 진실? 왠 뜬금 없는 소리람? 나에게 뭔가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도 좀 해주고 그러라고!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는 세이를 들처매었고, 나는 메데이레나를 업고 그를 따라 성 내부로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적들은 마왕님, 즉 라플 너가 온 다음 부터는 아예 이곳을 습격할 생각이 없다는 거지. 뭐, 당연하지. 마왕의 피로 인해서 저들이 반역할 경우 모두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릴테니까.. 그걸설령 모르고 있다고 해도, 키히마저 모를 리는 없잖아. 너도 알지? 그녀는... 영리하잖아?" 글쎄.. 난 그 영리함이 사실은 더욱 무서운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고 있는 중이지. 책인데 똑똑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모든 것들이 다 새겨지는 그런 책인데... "영리하고 자시고, 그게 진실이라는 건 좀 웃기는데? 다른 뜻에서 하는 말 아냐?" 프라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나를 바라 보았다. "그래.. 사실. 알고 있었어. 이 곳 지하에 뭐가 있는지.. 오는 순간 알 수 있었지. 왜 그녀가 굳이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지도..." 그는... 그녀가 책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그래...?" "응. 그녀는 사실 이 지하에 있는 검이 탐나는 게 틀림 없어! 그거 무지 비싸잖아! 일단, 피스트레이카가의 하나 뿐인 보검이고, 더군다나 너가 죽은 줄 알았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예전의 추억을 되살리는 추억의 물건이니까 말야.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걸 뺏을려고 했던 게 틀림 없어." 하.. 난 또 그녀의 정체를 알았다고? 그리고 그녀는 그 검을 모른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지? "넌 말야.. 이론에 정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알아?" "응?" 역시 아무 것도 모르고 있군. 너보다 한자라도 더 아는 내가 설명해 주어, 너의 눈을 띄어 주어야겠어. "그 검은, 원래 우리 가문의 것이야. 그리고 그건 우리 가문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아예 잡을 수 조차 없어. 그건 몰랐지? 그러니 키히가 가져가봐야 무용지물이라는 거지. 결정적으로 그걸 뽑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가져가." 그제서야 그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항... 어쩐지 날 거부하길래 그냥 심심해서 그러는 지 알았지.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라고 본다구. "그래...? 심심해서.. 하하핫. 그게 아니라고! 이 멍청아." 심심해서 검이 그럴리가 없잖아. "뭐, 살다 보면 착각할 수 있는 거지. 그래도 그녀는 뭔가 그 검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지도 모르잖아?" "아니. 절대로 몰라. 그 검을 알지도 못해. 그녀는. 본 적도 없지. 내가 여행을 떠나고 나서 한참뒤에 그녀를 만났는데... 기억해? 원래 난 마법사로 활동했다고." 그녀는 정말 좋은 파트너였지. 지금 생각해 보면.. 하하.. 좋은 추억들이지. 안 그래? "그래서.. 그녀는 아예 그 검을 본 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 프라운. 이제 제발 사람 가슴 철렁이게 하지 좀 말어."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걸음을 멈춘 걸로 봐선 뭔각 짚히거나, 미심쩍은 게 있는 모양이다. "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굳이 이 성을 치려고 했을까?" 낸들 아냐? 그걸 알면 나한테 상을 달라고. 하하하. "모르지. 그거야 그녀의 심오한 뜻이니 나에게 묻지는 말라고. 아, 세이가 정신 차리고 있는데?" 세이가 밍기적 거리면서 꿈틀 거렸다. 그리고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사부님.. 이젠 잘할테니까 굶기지 마세요. 흠 냐냐..." 프라운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동 보호법 위반이야. 너." "그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공부를 시키는 것도 힘들었다고. 알기나 해?" 프라운은 어느덧 작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세이의 방이었다. 이 방은 물론 아주 올랫동안 쓰여 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세이는 항상 그 모양의 침대에서 자지 않았던가? 한 몇 십년 전에 버려진 침대랄지, 아예 바닥에서 야숙을 하던지 하는 식이었으니까, 이 정도의 공작가의 하인 침대도 틀림 없이 낫지 않을까? "방... 바꿔줘라. 그래도 명색이 네 제자인데 방이 이게 뭐냐? 가구도 침대 하나 밖에 없고. 너무 불쌍하잖아." 사실 불쌍하진 않지. 다만 처절할 뿐이지. "헤. 집 없는 마족보다는 훨씬 낫다 뭘. 그래. 이 녀석 눕히고 메데이레나 눕히러 가자." "좋아. 여자 방은 어떤지 한 번 보자." 글쎄... 당연히 세이보다 좋은 거 아니겠냐? 일단, 부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황녀잖아? 황족이 당연히 좋지 않겠어? 게다가 여긴 사신으로 온 것이니 가장 좋은 방을 내 주었을 확률이 상당히 강했다. 메데이레나가 이런 사실을 알 리는 없지만... 복도는 간간히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제외하고는 별로 별 다를 게 없었다. 그저 밤이 깊어서 점점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만제외하면 정말 적막하다 못해서 조용하기 까지 했다. 세이의 방 문을 닫으면서 일어서는 데, 문득 붉은 색 눈을 보는 듯 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확실히. 남들이 돈 주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 "나중에 라플 경험록 같은 걸 하나 써서 낼까? 그럼 아마 크게 히트 할텐데 말야. 안 그래?" 생긋 웃자, 프라운 녀석은 그저 비웃기만 했다. "자, 프라운. 그럼 이 메데이레나를 내려 놓자 꾸나. 그럼 잘 자겠지?" 베란다에 내려 놓으면 보통 사람의 경우, 시원하다는 것보다는 춥다는 걸 먼저 느끼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는데...?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 뭐, 너가 어떻게 생각하던 큰 상관이야 없다만.. "시원하긴 하겠다. 하지만, 메데이레나는 침대에 눕고 싶을 꺼야. 자, 그럼 내려 놓아야 겠다." 여자를 얼마만에 부축해 보더라? 허거걱.. 거의 백년만이잖아? 놀랍구만. 나도 대단해. 이젠 여자가 어떤 걸 제일 좋아하는 지도 잘 모를 지경이라구. 이야, 여자는 사실 이렇게... 무거웠구나. 대체 어느 누가 여자를 가볍다고 했는가? 그렇다... 여자는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자고 있을 땐 무지 막지 하게 무겁다는 거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럼 내려 놓고 우리 그 칼한테 가볼래?" 프라운, 넌 내가 하는 게 힘겨워 보이지도 않냐? 난 지금 무거워서 사망일보 직전이라고! 대체.. 으... 힘들어 죽겠구만. "사망하건 자시건.. 응? 저건 뭐야?" 하얀 그림자 하나가 우리 앞을 휙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열려 있는 방문 너머로 지나간 그 그림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마족이라면 시력이 무지 뛰어나니까 알고 있겠지? "사람이었어?" "모르지. 그냥 희끄므레한 뭔가였는데.. 알았다. 밀가루 덩어리가 날아다니고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니라고봐. 왜 멀쩡한 밀가루가 날아다니니? "모르겠다면 따라가보는 수밖에." 그와 나는 눈으로 교신하고(나야 절실하게 그냥 이대로 손 떼자였지만, 그는 그걸 가고 싶다는 뜻으로 오인한 거 같다) 우린 그 밀가루로 추정되는 것이 사라진 쪽으로 쭈욱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데이레나.. 너 좋아하지?" 갑자기 왠 뜬금 없이! 황당하게 무슨 소리야! "귀신이나 찾으라고. 무슨 헛소리야?" "흠.. 내 생각엔 그녀랑 결혼하면 좋을 거 같은데? 황제의 부마가 되는 거잖아. 그리고 거기에 더더군다나 멋진 돈들도 따라서 들어오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냐. 내가 황제 부마가 되서 뭐하냐? 왕하는 것도 싫은 사람인데. 게다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내가 뭐하러 더 돈이 필요하겠어? 안 그래?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서로 마음이 맞아야지. 그리고 내겐 키히가 있잖아?" 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뭐, 보나마나 왜 그런 여자랑 결혼하려고 하는 지 알 수 없다라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겠지. 하여간, 먹고 싶은 게 많으니 궁금한 것도 많구나. 하하하. "그 일에 관해서라면 나조차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프라운마저 끼어서 골치 아프게 만들지 말아 달라구. 너도 알잖아?" "뭘?"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기왕이면 진심을 알아차리면 좋겠어. "그녀와 나는 서로 100년간을 사랑했다는 걸." 그는 계속 툴툴 거렸고, 그가 잠시 주변의 벽들을 살피고 있을 무렵, 저 앞의 복도에 정말 이상하게도 하얀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데... "손짓하고 있어...! 가 봐야해!" "이봐!" 프라운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 확실히 저 하얀 물체는 나를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알고 있었다. 그게 왜 나를 아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알고 있는 건 틀림없다. 나도.. 저걸 알고 있는 건 지도 모른다. 요즘 별 일이 다 일어났으니 지나가던 빨래터 귀신이 뭘 알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이봐! 당장 거기서라고! 뭔지도 모르면서 왜 따라가는 거야!" 글쎄... 프라운의 걸음은 순식간에 나를 따라잡고 나와 같이 달리고 있었다. 불공평하군. 난 전력질주로 달리고 있는데 프라운은.. 거의 숨도 안차고 있잖아? 젠장, 나도 마족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저런 고생 안하고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런데 그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프라운이 아주 힘겹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걸어도 계속 그와 나의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서야 비로소 이상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이상해. 그 때, 눈 앞에 가던 하얀 밀가루 추정 덩어리가 깜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살짝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뭔가 사람과 관련된 물체로 보이지 않았다. "넌.. 대체 뭐지? 무엇이길래.. 나와 프라운은 떼어 놓고 있는 거지?" 그 하얀 물체는 대답했다. 그는 마족이고, 나는 인간이라서 그랬다고. 세상에! 난 그 밀가루의 말을 알아 듣고 있었던 거다! 이런 믿기지 못할 일이 벌어지다니..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날 따라오라고 했지?" 다시 그 하얀 물체는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누굴.. 없애기 위해서? 프라운이나 하브라이드? 오 맙소사! 내가 속았어! 황급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느새 내 뒤에는 하얀 물체들이 버글거리면서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축제 덕에 다른 사람들은 별로 돌아다니지도 않는 이곳에 내가 완전히 고립되었다니... 어리석었어. 후회는 계속 밀려 들었지만, 그 하얀 물체들도 내게 밀려 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빨리 여길 빠져나가서 내 마족 친구를 구해야만 했다. 그는 아마도 큰 위험에 처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좋아. 덤비라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하하하..." 녀석들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시에 달려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컹한 몸을 내게 부딪혔는데, 그 때마다 황당하게도 내 옷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내 옷을 벗겨서 그걸로 나에게 창피를 주려는 건지도... "이런..! 그만 두지 못해!" 그렇다고 그만 둘 거라면 진작에 그만 뒀겠지만... 여하튼, 그들은 계속 적으로 내 앞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머리에도 간만에 괜찮은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좋아...! 그거라면 좀 쪽 팔리긴 해도.." 즉시 나는 내 거대한 겉옷을 벗었다. 벌써 여러군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는 했지만,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쪽이 나을 듯 했다. 옷을 재빨리 벗어서 적들이 우글거리는 쪽 저쪽에 던져버렸다. 옷은 아주 빠르게 훨훨 날아갔고, 귀신들의 목(으로 추정되는...)이 그 쪽을 향해서 돌아갔다. 그리고 모두들 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옷을 먹는 거 같았다. 포위망이 뚫리자, 그 다음은 쉬웠다. 일단,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 유령을 잡는 게 급선무였지만, 이곳엔 없으므로 프라운이 있을 법한 장소로 황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프라운! 어디야! 대답하라고!" 그럼 사탕 줄께! "으아아악! 이게 뭐야!" 비명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건 프라운만이 할 수 있는 장기였군. 하핫. 하핫. 역시 녀석은 대단한 놈이라니까? 확실하게 내가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잖아. 하여간... "프라운! 지금 갈께!" 즉시 고속화의 마법을 내 몸에 사용하고 재빨리 달려 갔다. 왠지 뒤는 돌아보기 싫었다. 뭐가 있을지 알게 뭐람? "프라운!" 개구리를 닮은 내 친구는 거의 떨어져 가는 옷을 입은체 괴물 여럿에 둘러쌓여 있었다. 유령같이 생긴 그 젤리들은 프라운의 옷을 무슨 간식이라도 되는 듯이 먹어 치우고 있었다. 한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이들이 옷을 먹어도 프라운을 죽일 순 없을 텐데? "빨리 안 구해주시고 뭐하는 거에요?" 이젠 재촉까지 하는군. 당당하기도 하지. 뻔뻔한데다가.. 쯧.. 좀 더 곤란을 겪도록 할까? "쳇.. 도와주지." [빛.나.는.화.염.의.화.살] 마법이 발동되자, 유령들 사이에 불이 붙었다. 유령들은 참으로 어이 없이 깡총깡총 뛰면서 마법을 피하고자 하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피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개중 몇몇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상한 동작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다. "이건 뭐죠...? 유령이 아닌 거 같은데.." "아, 이건 내 생각으론 슬라임의 일종이야. 젤리 같은 거나.. 밀가루가 아니라고. 알았지? 어쩔 땐 꽤나 위험하게 될 수 도 있어. 그나저나, 이런 걸로 널 해치는 건 상당히 무리일 텐데.. 어찌된 걸까?" 당연히 프라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넌 대체 아는 게 뭐니? 뭐, 마족한테 그런 사소한 것들을 기대하는 것도 어른 마법사 답지 않은 짓이지. 녀석을 쪼는 건 의외로 재미있으니, 이대로 실수를 하게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겠다. 간만에 안심의 미소가 퍼져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북쪽 성채 근방에서의 출처로 들리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우리의 정신을 붙들어 주었다. 그건, 하브라이드의 끔찍한 비명이었다. "젠장!" 입에서 작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 말하던 녀석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프라운의 얼굴도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어떤 놈이 세상의 최강 종족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마족을 다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빨리 가 봐야겠다. 어서 뛰어!" 프라운은 즉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걸음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지나 하브라이드가 머물고 있는 북쪽 성채로 갔을 무렵 우린 몇몇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자이츠! 엘류시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달려가자, 엘류시아는 꽤나 분노한 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뭘요. 단지 어떤 멍청한 마족 녀석이 벌레를 보고 소리르 질렀다는 거죠. 세상에. 전 벌레를 보고 소리지르는 마족은 본 적이 없어요. 아니, 이번에 봤으니 좋은 경험을 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하하.. 상당히 직설적으로 나가는군. "그럴 수도 있겠네.. 음.. 그래. 아, 그럼 하브라이드에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하브라이드는 저 쪽에서 세이에게 쪼임을 당하고 있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어쩌면 다 큰 어른이라는 작자가 이렇듯 소리를 질러서 우릴 놀라게 하느냐 였다. "하브라이드. 괜찮아?" 하브라이드는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어떤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기분 나쁜 그런 느낌이 몸을 꽤뚫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라플." 하브라이드가 생긋 웃었다. 옆에는 세이가 잡은 듯 보이는 작은 지네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아, 죽은 놈에게는 누워 있다는 표현이 좀 어울리지 않는군. 하핫. "그래. 걱정했거든. 다행이네." 그는 생긋 웃었고, 옆으로 프라운이 다가서서 혀를 끌끌 찼다. "뭐야, 너 때문에 여기까지 전력 질주 했어. 알기나 하냐? 대체 하는 짓이라고는 이렇 듯 얼렁뚱땅한 짓만 하니.. 쯧.. 쯧." 하브라이드의 손이 천천히 프라운 쪽으로 움직여 갔다. 그리고 정확히 목을 부여 잡았다. "에? 놀린 것만으로 목을 조르진 말아.. 컥... 무.. 슨..!" 즉시 자이츠가 달려들어 그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마족은 힘이 많이 셌다. "하브라이드!" 하브라이드의 손이 처절하리만큼 강하게 프라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하얀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마족도 귀신에 씌일 수 있구나. 나는 황급히 하브라이드에게 다가서서 그 허연 물체를 손으로 때린다는 느낌으로 퍽 쳤다. "꽤액! 왜 때려!" 잠시 때린 내가 더욱 더 당황했다. 당황 뿐인가? 머릿속에서는 내 먼 옛날 마법 입학 입문을 읽었던 시절의 유령에 대한 서적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보통 유령이란, 물리력 공격은 당연히 받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유령들은 매우 포악하며, 말도 잘 알아 듣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저 유령은 어떻게 된게 무척이나 또렷한 말투로 말하는 것인가! "너, 지금 말했냐?" 유령은 어느새 자신의 손을 하브라이드에게서 떼어내 얻어맞은 뒷통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이 떨어지자 마자 하브라이드는 맨땅에 그대로 박아서 커다란 혹이 생긴 거 같았다. 음... 부상자 탄생이군. "그럼 누가 말했다는 거지? 난 아주 고상하고 우아한 영혼이란 말야." 허걱..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영혼 주제에 왠 고상? 우아? "좋아. 다 좋은데 말야. 왜 하브라이드에 씌어서 내 친구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던 거지?" 유령은 아주 리얼할 정도로 입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잠시 튀어 나왔다. "에.. 그건 그게 마족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라플. 넌 몰랐지?" 참아줘.. 마족이라는 걸 왜 모르냐? 내가 마왕인데. "저기.. 알았는데?" 이번엔 그 영혼이 호들갑스럽게 이곳 저곳을 날아 다니기 시작했다. 프라운은 하브라이드를 부축해서 침대로 옮기고 있었고, 엘류시아나 자이츠의 눈은 매우 커지기 시작했다. "뭐? 그럴리가? 마족인 걸 알았는데 어떻게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어? 말도 안된다고! 그건 내 주인의 명을 거역하는 행동이야!" 네 주인이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다 야. "좋아. 좋아. 다 좋은데... 왜 마족을 없애려고 했지? 아까 속삭이기도 했잖아." 유령은 이제 내 앞으로 다가와서 생글거리기 시작했다. "헤.. 그건 말이지, 내 사랑하는 주인의 기가 강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지. 난 대대로 이곳을 지켜오고 있었는데 뭐. 이곳 주인의 기가 강해진 걸 느끼고 깨어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생겼어. 거대한 마기가 느껴진 거야. 믿을 수 있어? 이 피스트레이카에 마기라니!" 그야.. 내가 마왕이잖어. "음.. 믿을 수 있어. 그래서 어쩌고 싶었던 건데?" 녀석은 점점 고개를 높이 처들기 시작했다. 아마, 자아 도취 증세가 심각한 마족으로 보인다. "어쩌긴. 당연히 주인의 해충인 마족을 없애야지!" 바로 이 말을 듣고 프라운의 얼굴은 처절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주 비슷한 거 같았다. "하하하...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 마족들은 모두 내 말을 잘 들어 주거든. 내 친구들이야." 그 친구 중에 하나인 나를 한 때 배신 했으며, 지금은 충실히 나를 잘 따라주는 녀석이 나를 바라 보았다. "에? 그건 속는 거야! 아무리 인간을 좋아하는 마족이라 해도, 마왕의 명령이 가장 절대적이라고!" 그.. 뭣이냐.. 진실을 공개해 주어야겠군. "그게.. 내가 그 마왕이거든." 잠시 영혼 주위에는 번개가 치고 바람에 낙옆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서 엘류시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봐! 충격 받는 것도 좋지만, 당장 그 허접 쓰레기 같은 짓은 그만두라고! 방 청소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노고를 너가 알기나 하냐! 자꾸 그러면 난 널 유령 토스트로 만들어 버릴 테다!" 어이, 어이. 엘류시아씨.. 아가씨가 더 무섭구만. 젊은 처자 하는 짓이 장난이 아니라구.. "헤엑! 저 여자는 마왕의 오른팔인가요?" 결국 유령은 맞고 구석에 처박혀서 울기 시작했다. 이봐. 유령군. 나도 황당하다구. 갑자기 왠 헛소리를 늘어놓고 말이지. 그나저나 너 번들 제품 많이 좋아하겠다. 저번에 아는 마족이 그러던데, 열받으면 폭죽이 나가는 지팡이가 만들어 졌다고 하던데.. 하나 구입할래? "그런말을 하니까 맞는거야. 그래. 네 주인은 누구야?" 그는 글썽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요. 라플. 그런데.. 당신이 마왕이면 당신의 적은 인간들이 되는 건가요? 아.. 전 마족 전문이라 인간을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는 지 모른다구요." 알고 싶지도 않다고. 하여간 이상한 유령이구만. "에... 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가지 충고 할께 있어. 여긴 마족이 인간을 도와 싸우고 있다고. 그러니까 넌 이 사람들을 혹은 마족을 헤쳐선 안된다고. 그리고 널 부하로 둔 적도 없는데 어떻게 내 주인이 되는거야?" 녀석은 툴툴대고 있었다. 쯧... 뭐, 하는 짓이 그렇고 그렇지 뭐. 유령에 대한 학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이 불어 닥치겠군. 아무래도 나 학자로 전향할까봐. 그럼 이 나이에도 걸맞고. 오! 현자! 멋진데? "그건... 내가 이 성의 수호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래. 수호자라. 그럼 유령인 건 아니겠군. 단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죽을 뻔 했던 그 수많은 순간들에는 그는 어디서 잘 자고 있다가 이제 와서 눈 시퍼렇게 뜨고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게다가, 더욱 더 열받는 건 왜 이제와서 나타나서 애매한 사람의 목을 조르냔 말이냐? 그는 아주 멋지게 내 친구 하나를 골로 보낼 뻔 하지 않았는가? 이 어디 용서가 되는 행동인가? 게다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아주 인간도 다 죽이려 하는 엽기적인 놈이 아닌가? "정신감정이 필요하겠군. 수호자면 수호자답게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이 성에서 많은 사람이 싸우고 있을 땐 뭐했어? 가만, 그러고 보니.. 너 혹시 내 아버지 알고 있겠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류시아는 하품을 작게 했고, 자이츠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시간이라는 이상하기도 한 노래를 부르면서 사라져갔다. 하여간, 이 성엔 제 정신 박힌 놈은 없다니까.. 이래서 과연 키히를 구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말야. "자, 그럼 저희 일은 대충 해결 된 거 같군요. 그럼 다시 저 이상한 유령 나부랑이가 다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그럼 전 이만 가죠. 자, 자. 모두 가보세요!" 엘류시아가 사람들을 쫓아냈고, 우리의 프라운은 하브라이드를 패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족이 유령에 조정당하다니 그거에 열 받은 거다. 하지만, 깨어 난 뒤에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무슨 아버지 말이죠? 제가 아는 사람이라면, 불행하게도 태어난지 3일 이내에 죽은 어린 아기들이라면 잘 아는데요." 유령의 말투는 너무나 끔찍할 정도로 리얼한 정도가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었다. "아기들? 그게 또 무슨 소리야? 분명히 자식들이... 그래. 내가 이번에 공작이 되었는데 전대 공작이 누군지는 알고 있지? 전대 공작은 몇 명이었어?" 수호자인지 골칫거리인지 모르지만, 뭔가를 알고 있지 않겠는가? "아, 그건.. 단 한명이었어요. 그가 계속 바꾸어지는 모습으로 백년에 거의 한 번 정도 사람이 달라지는 흉내를 내었어요. 그 때마다 아내는 바뀌었고 아이들도 바뀌었지요." 흠.. 그러니까, 그게 내 아버지가 맞긴 한 건가? "그래서, 그게 내 아버지가 맞아?" 내가 라플이라는 걸 안다면 누가 내 아버지 인지도 알지 않겠어? 뭐, 지금 와선 그가 아버지 인지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너도 이 나이 먹어봐! "음... 당신이 그의 여섯번째 아이군요. 불길한 강의 아이라고 항상 부르곤 했었죠.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어릴 적에도 늘상 전대 공작이 못 마땅한 얼굴을 하고 말하곤 했지요." 헤. 그럼 결국 그가 날 좋아한 건 아니었다는 소리잖아? 그나마 있던 정들이 저 멀리 산책을 떠나고 있군. "그래. 그럼 날 좋아하지는 않았던 거지?" 그 유령 비슷한 물체(밀가루 덩어리가 더 확실하겠다.)는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한참 묵묵히 있다가 이내 아주 느릿 느릿 말을 이었다. "전 인간의 감정을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는 위의 다섯명의 아이를 잃었을 때 끔찍하게 슬퍼하곤 했어요. 게다가... 그가 원한 것들은 다 얻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모두 빨리 죽어 버렸죠. 처음 아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죠. 두번재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지나가던 개가 아이를 물어 죽여버렸어요. 세번째는 더 잔인했지요. 마족이 목을 비틀어 버렸으니까. 네번째 아이는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 였는데, 이 아이는 그래도 꽤 오래 산 편이었죠. 한 여섯살 쯤 되었을까? 그 소녀는 그대로 작은 호수에 머리를 박고 죽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줄초상이라는 건가? "그래서.. 어떻게 된 거지? 아직 다섯째가 있잖아?" "예. 다섯째.. 이 아이도 무척이나 불행했어요. 태어나고 나서 전쟁이 터졌었으니까요. 주변의 소국들을 점령하기 위해서 공작이 사라졌을 때, 마침 아이가 태어났죠. 그리고.. 네. 공작 부인이 미쳐서 아이를 탑에서 떨어트렸어요." 헤.. 이건 완전히 줄초상 경력사란 거군. 연도 차이는 엄청 나지만, 내 위의 형제가 모두 죽었다는 거군. "그렇지만, 트라이너의 역사는 꽤 오래 되었는데... 그 동안 아이를 전혀 갖지 않았나?" 그 유령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도 감정이 조금은 있는 모양이지? "예... 마지막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작은 출정해서 수많은 사람들로 피의 산을 만들어 버렸어요. 그가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미친 아내를 벤 일이었어요. 모두... 공포에 떨었죠. 그리고 아주 오랜 기간동안, 그는 아내도 없고, 아이도 낳지 않는 생활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하게 살아났다는 건가? 이거 참.. "그렇다면 난 어떻게 태어나게 된거지? 뭐, 이 나이 먹어서 그런 걸 궁금하게 여기는 것도 좀 우습긴 해도, 난 전혀 그런 이야기.. 듣지 못했거든." 유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은 포프리 화분 옆에 가서 앉았다.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아서 흔들렸다. 음.. 유령은 다리가 많이 짧았다. "그건... 글쎄요. 그 때 부터 서서히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딱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주인님은 무척이나 불행한 사람이었죠. 아..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에요." 하긴, 좀 많이 오래 사는 거 같긴 하더군. "그건 모른다면 넘어가고.. 내가 어떻게 태어나게 된 거냐니까?" 왠지 조급해 져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건.. 아.. 당신의 어머니는 정말 착한 아가씨였죠. 당시 왕의 딸이었고, 밝고 명랑했답니다. 그런 그녀가 우리 주인님을 좋아하게 된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어요." 운명의 장난 씩이나 운운할 이야기냐? 공작가에 시집가게 되는 공주의 운명이 뭐 그렇게 꼭 불행한 건 아니잖아? 뭐, 상대가 노인이라는 게 좀 불쌍하긴 해도.. "그녀가.. 내 어머니란 말이지?" "예. 성의 모두는 그녀를 좋아했어요. 문제는... 그녀는 공작님을 너무 맘에 들어한 나머지 왕에게 부탁해서 그와 억지로 맺어지게 되었지요. 공작님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분은 공주를 혼자 버려두기 일쑤였는데, 여기서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던 거죠. 그래요. 그게 당신이에요. 공주는 여지껏 이 가문의 아이들이 죽었던 사연을 알지 못했죠.." 그게.. 무슨 문제가 되었다는 건가? 난 어머니 얼굴 자체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셨다고 말할 뿐이었으니까. "그게.. 비밀이 될 이유는 없지 안나?" "아뇨. 그런 걸 알게 되면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거죠. 어쨌든 당신은 성공적으로 태어났고, 공작님은 역시 빨리 죽어버릴 꺼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보러 오지도 않았죠. 여기서 불행이 시작되었어요. 그분.. 공주님은..." 아, 그러고 보니 난 로열 패밀리었어.. 어쩌면... 왕족의 후예잖아? 하핫. "공주님은.. 어떻게 되었지?" "우연히 서가에서 이곳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분이 마법사였다는 게 더 문제였어요. 공주님은, 저주를 풀 방도를 찾기 시작했죠. 아... 그래요. 그분은..." 잠시 여기서 유령은 말을 멈추었다. 뭔가.. 꽤나 공주를 맘에 들어하는 거 같다. 그녀는 유부녀야 임마. "그분은 자신의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죠. 그건, 공작을 죽이는 거였어요. 소름끼치는 일이었죠. 하지만, 그걸 그녀는 할 수 없었어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일 순 없었겠죠." 잠시 난 그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어릴때도 본 적 없었던 사람.. 그녀는 날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방법을 택한 거지?" "그건.. 네. 그녀는 아이를 포기했어요. 공작 옆에 있다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그렇게 결심했지만, 그녀는 마침내 아무도 죽지 않고...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낸 거에요. 그건, 바로... 하늘에 아이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었어요. 절차는 간단했지만, 한 사람의 피의 제물이 필요했어요. 진정 소원을 이루고 싶을 땐, 인간의 목숨이 필요하죠." 그녀는..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죽었던 거구나. "날.. 위해서였군." 잠시 알지도 못하는 어머니라는 인물의 영상이 내 머리를 메우는 듯 했다. "예. 그리고... 그 밀폐된 공간에선 당신과 공주님의 시체가 일주일 동안 있었지만, 아이는 숨지지 않았어요. 공작이 발견했을 당시, 당신은 잘 울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목숨 하나에, 목숨 하나를 지켜준다는 거였구나. 그래서 내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세상을 뜨신 거구나. "당신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슬프게 우셨어요. 비록 당신의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지만, 정이 없었을리가 없죠. 그리고 당신을 아주 깊이 깊이 사랑하고 있었어요. 아주 가끔씩 당신을 멍하니 지켜보고 천둥이 치는 날은 당신의 방에 가곤 했죠." 아버진.. 근데 날 죽이려고 하는데? 그간 많은 일이 있었나 보군. "그런데.. 그 때도 아버진 하얀 머리를 한 노인이었나?" "아뇨. 젊으셨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그 뒤는 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여행을 떠난 공작을 대신해서 어린 내가 주변의 모든 기대를 받고선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는 거지 뭐. 이제 보니 왕족과 난 친척이 맞구나. "아니야... 그저, 몇가지 궁금한 게 있었지만, 뭐, 상관 없겠군. 알지 않아도 큰 상관이 없어. 가만, 그럼 너 정체가 뭐야?" 그는 생긋 웃었다. "그야, 수호자이지요." 그건 알겠다고. 수호자라기 보다는 스토커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막 들기 시작했는데.. 혹시 수호자가 아니라 사고뭉치자같은 거 아닐까? "한가지 알겠어. 너, 전대 공작이 별로 안 좋아했지?" 유령의 뻥 뚫린 공간이 서서히 확대 되었다. 특이한 기분이군. "어떻게 아셨어요?" 그건 말이지. 굳이 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마악 들기 시작했다고. 하 참. 바보도 아니고 말이지. "음... 난 말이지 귓 속에서 누군가가 소근 소근 알려 준단다. 흐흐흐." "으엑! 싫어! 무섭단 말이에요!" 밀가루 비슷한 놈은 그렇게 두다다다 도망가 버렸다. 세상에 말조는 틀림 없다. 왜냐면, 일단 귀신 주제에 저런 약간의 농담을 무서워 하다니 말야. 하여간.. 다음날 아침, 프라운은 나에게 조르르 달려 왔다. 어제의 유령 소동으로 엘류시아가 기분이 무척 나빠져 있었고, 메데이레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잘 잤다는 점이 더욱 무서웠다. 음... 잘 자는 어린애는 순하다는데.. 그게 여기도 적용되는지는 좀 의심스러워. "프라운은 왠 일이야? 아침 부터.. 밥은 먹었어?" 축제 음식이 정말 많이 남고 꽤나 창고가 큰 편이어서 엘류시아의 근심을 적게 나마 덜 수 있었다. 문제는 엘류시아의 다음 대사였다. 그녀는 우리가 그렇게 축제에서 먹어 버려서 예의 식량 수급 사정이 더 좋아질 수 도 있었던 기회를 날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족은 굶긴다는 방침은 여전하다고. 젠장... 민족 결의 대회 같은 건 없나?" 아서라.. 그런 특이한 게 있다는 것도 꽤나 웃기는 일이다. 녀석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면서 모른다고 대답했고,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생수로 목을 축이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산뜻하게 주스나 이런 거면 좋겠는데 말야. 역시.. 무리겠지?" 프라운은 당연히 인상을 찡그렸다. "당연하지. 그런 짓을 했다간 엘류시아 양에게 통구이가 될 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다는 걸 깜박했군. 당연히 그 보다 더욱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런 일이 있다면 정말 끔찍할 거야. "잠시만.. 들어가도 될까?" 산뜻한 노크소리가 방문을 울리고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메데이레나였다. 곧 이어 문이 열리고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들어왔다. "아, 어서와. 메데이레나. 이 아침 부터 무슨 일이야? 어제 유령 소동 들었어? 글쎄, 그 하브라이드가..." "라플. 할 이야기가 있어. 프라운은 좀 나가줬으면 하는데 말야." 분위기 급속 냉각과 동시에 실내 체감온도는 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내가 그녀를 알아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이었으며, 왠지 모르게 두려움을 물씬 느끼게 하고 있었다. "내가 들으면 안되는 이야기야? 왠만하면 그냥 하라고. 난 인간들에 관해서는 별 생각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편이라고." 프라운은 그러면서 조용히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메데이레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가주세요. 프라운. 저는 피스트레이카 공자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척이나 딱딱한 말투라서 난 잠시 그녀의 등뒤에 귀신이 서 있지 않은가 의심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 듯 했다. 다행이지 뭐. 프라운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나간 뒤, 그녀는 그야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닥을 바라 볼 뿐이었다. 괜히 이야기 꺼내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묵묵히 같이 바닥의 양탄자 재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왠지 이 양탄자, 싸구려가 아닐까 싶다. 어디선가 창문에서 바람에 뭔가 부딪히면서 탁소리가 들려 와서 우리의 정적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침묵에 의한 걸로 바뀌고 말았다. "나 말이지..." 드디어 장장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가 꺼낸 말이었다. 왠지 힘 없고, 자신 없는 듯한 말투였는데 나로서는 상당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하나 하나 말을 듣지 못하니까 이것 저것 생각만 하게되었다. 예로, 저 옷은 대체 몇 번이나 입는 걸까라든지, 혹은 머리띠가 일년 농사꾼의 몇배의 수입에 맘먹는 것일까 라든지 하는 것들이 수상하게 궁금해 지고 있었다. "나 말이지..." 다시 똑같은 대사를 하고 침묵 시위를 시작하기 시작했고, 난 마왕을 물리치는 것보다 여자와 대화하는 게 백배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실히 확인하면서 용기내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메데이레나, 무슨 일이야?"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바로 내가 이런 반응이 무서 웠던 건데 말이지. 에휴휴. 차라리 살린, 케빈, 세이와 함께 땅따먹기 놀이라도 할 걸 그랬지? "예..." 그리고 나도 입을 다물었다. 대체 다시 입을 열면 어떤 무서운 소리를 듣게 될지 그게 더 무서웠다! "라플. 만약에 만약에 말야..." 난 만약에라는 단어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내가 워낙에 사람들을 갈구긴 해도 특별히 어쩌진 않는다구. 오죽하면 한 때 배반 때린 녀석들도 붙잡고 살고 있을까... "뭐?" 최대한 친절 스마일 미소를 띄우면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걱정, 고민, 두려움, 절망등이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어 내는 듯 했다. "이런 말 하면, 날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할꺼야. 라플." 대체... 무슨 소리길래 저렇게 뜸들이고, 겁먹고, 겁주고 한단 말인가? 이거 궁금해서라도 듣게 되잖아? "글쎄, 난 메데이레나를 아주 좋아하니까, 그럴 염려는 없어." 그녀는 한동안 나를 묵묵히 응시하다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만약에 말야... 너가 이대로 키히라는 사람을 완전히 잊고, 혹은 그녀가 죽는다면... 우리 나라에 와 줄 수 있어?" 분노, 절망, 슬픔, 사랑은 모두 하나에 원칙을 지키고 있다. 뭔가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들이다.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틀리지만, 언제나 위험해질 요소를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외교적인 교섭이야, 아니면 개인적인 교섭이야?" 메데이레나는 어느새 나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봐. 나이를 이정도 먹으면 별로 기분 상하거나 하진 않는다고. 내가 20대 청년이 아닌 것처럼 너에게 화낼 이유도 별로 없다.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이건 말하면 화낼 테니까 말야. 그리고 확실히 거절했잖아. 나바스에서 재상 역할을 해 주었으면해. 지금 정확히 재상을 하고 계시는 분은 전대 황제셨던 분으로 우리에겐 할아버지 뻘에 해당하는 분이셔. 이 분은 그만 은퇴하고 편하게 지내고 싶어하거든. 그래서.. 그 후임으로 너의 이름이 나왔어." 이거.. 영광보다도, 그 할아버지 선대 황제랑 같이 바둑이라도 두라는 건지 원. "거절하겠어." 메데이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다시 떨구었다. 그렇게 우린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고, 메데이레나 역시 다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단지.. 왠지 모를 슬픔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럼 라플... 난 오늘 떠날 꺼야. 난 말이지. 너무 분해. 너와 같은 시간대에 태어 났더라면, 너가 키히를 만나기 전에 나를 먼저 만났다면, 틀림없이 키히를 지금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했을 텐데 말야... 너무.. 너무.. 분해..." 메데이레나는 머리를 어깨에 파 묻고 울기 시작했고, 그 조용한 울음은 계속 되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살린과 케빈이 들어왔다. "야, 어제 귀신 소동 말인데.. .어라라, 아. 실례." 젠장, 위기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였는데 말야. 완전히 놓쳤지 뭐. 쳇.. 쳇. "메데이레나. 나의 메디. 아마 그랬다면 정말 널 사랑했을 꺼야. 넌 아주 사랑스럽고, 모두를 행복하게 할 만하거든. 그래.. 널 만났다면 아주 행복했을 꺼야. 좋은 사이가 되었겠지. 누구나 부러워하는... 메디. 하지만, 너는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을 만나게 될 꺼야. 내가 키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언젠가는 너만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 그녀의 울음은 더더욱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아, 난.. 아마도 이 소녀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키히보다 더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키히에 대한 감정이 사랑과, 증오라면.. 이 소녀에게는 증오라는 건 없으니까. 그리고 키히에게는 책임감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데이레나는 그런 게 없으니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랑이 영원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가 산속에 있고자 했던 것도 어쩌면 그녀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게 되길 바랬던 것이겠지. 그래.. 그래서 이름도 잊어 버릴 정도로 말이지. 그런데 세상에 나오자 마자, 그녀에 대한 걸 무너트릴 정도의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이 나이에 말이지. 어리석다. 나는. 사랑이란 게 영원 할리 없는데, 이 아이에겐 그런 게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위선. "그래.. 그리고 그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꺼야. 아이도 여럿 낳고, 나바스 최고 귀족 가문의 하나로 멋지고 우아한 삶을 살 수도 있을꺼야. 안 그러니? 그러니... 나 같이 괴상하고, 특이한 녀석을 좋아할 필요는 없는 거야. 알겠니...?" 그녀가 우는 걸 보면서 쓰다듬고 울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메데이레나에겐 그렇게 해선 안된다. 내가 내린 결정처럼, 그녀에게 짐을 지워주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 잊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문을 열고 얼굴에는 퉁퉁 불은 눈을 하고 그녀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살린과 케빈이 들어왔다. 이런 발칙한 것들... "이야, 이야! 너 너무 하잖아! 대 나바스의 황녀를 차다니!" 케빈이 호들갑을 떨면서 그야말로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무서운 놈. "그래. 그녀를 굳이 찰 필요는 없잖아? 사람을 많이 죽이고 나쁜 마녀 키히보다는, 메데이레나 쪽이 낫다고 생각해. 일단, 어리잖아." 그러니까.. 그게 신관의 입에서 나올 소리냐? 앙? 어려? 에라이. 내가 무슨 도둑이냐! 나이차가 몇인데 그런 헛소리를 해! "닥쳐." 나지막한 내 한마디에 적어도 케빈의 입을 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살린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아무리 너가 그녀를 사랑하고 변호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우리의 많은 친구들이 그녀 손에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잃었어. 넌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죄가 없다고 주장할 셈은 아니겠지?" 살린의 말이 백번 옳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난 그렇게 수긍하기만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일단은 이들은 잘 모르는, 그녀의 영혼이 원래는 책이라던가 하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게다가 음모의 주범이 내 친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알고 있어. 그런 것 쯤은.. 하지만.. 하지만 말야. 나도 그녀를 버리면 그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거야. 그런 건 싫어. 난, 그런 걸 원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밀가루 덩어리가 내 앞에서 작은 검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으잉? "이건 또.. 그 유령의 실체야?" 케빈은 역시나 심각한 이야기를 쥐약을 보듯 싫어하고 있었다. 저런. "그래. 근데.. 대체 뭘 하는 거지?" "뭘 하긴요. 제가 주인을 위해서 좋은 정보를 알려 드리려고 하는 거죠. 이런 게 있어요. 아시죠?" 물론, 알긴 해. 하지만, 그걸 왜...? 마족 이상으로 유령의 정신체제는 이해하기 어렵다. 좋은 공부 많이 하는군. "좋은 정보라... 뭔데, 이거?" "예. 아셨으면 전 가볼께요. 그리고.. 당신을 무척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의 유품이 이 성 지하 3층에 가면 있어요. 꼭, 가보세요." 그리고 그는 지 할말만 다 하고 스르륵 벽으로 사라져갔다. 이봐... "흠... 내가 별 말 하고는 싶지 않지만, 이건 명심해. 넌, 절대로 키히의 편을 들 되, 그녀의 죄를 용서하지마. 그녀의 손에 묻은 피를 항상 기억하라고." 그야...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난... 아. "자 자.. 어두운 이야기 하지 말라고. 어련히 녀석이 알아서 하지 않을까? 그보다... 우리 가보지 않겠어?" 가다니 어딜? 케빈 녀석도 참..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지... "어딜?" "살린. 당연히 귀신이 이야기 한 지하 3층이지!" 살린과 나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천천히 살린이 설명해 주었다. "그 귀신이 가짜로 알려준 거야. 이 성에는 지하 3층이라는 게 없어. 여긴 2층까지 밖엔 없다고." "어라? 그럴리가 없어. 그 귀신이 거짓말을 해야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만에 하나 3층이 숨겨져 있을 확률도 찾아 봐야지!" 케빈의 이러한 강력한 주장 덕분에 우리는 세이를 하나 더 껴서 지하를 헤메게 되었다. 제일 기뻐하는 인간들은 세이와 케빈이었다. "체력이 남아 도나봐." "모를일이지." 살린과 나는 감옥 앞에 설치 되어 있는 아름다운 의자에 조심스럽게 걸터 앉았다. 이곳은 꽤나 오랫동안 입주자를 받지 않은 덕택에 매우 군데 군데가 썩어가고 있었고, 녹과, 이끼가 가득했다. "우린 이제 새로운 개념의 감옥을 도입해야해." 살린이 아마도 신관일을 때려 치우면서 완전히 돌았다는데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그래.. 그래.. 음?" 두 사람은 바닥을 여전히 기어다니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난 개중에 감옥 들 중 이상하게 깨끗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방 안에는 가구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어떤 감옥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작은 깔개가 깔려 있었다. 물론, 거의 바닥과 티도 잘 나지 않을 만큼 낡은 것이었다. 그걸 들어 올리자, 왠 문 하나가 나타났다. 찾았다. "어이! 찾았어!" 살린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너가 투입되자 마자 십초면 찾는 걸 저 녀석들은 하루 왠 종일 찾을 뻔 했다고." 그렇게 되나... 네 명이 모이고 하이파이브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 이내 아래 문을 열었다. 문은 꽤나 굳게 닫혀 있어서 기름을 좀 쳐야 간신히 엄청난 마찰음을 내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계단이라. 우웃! 이곳에 바로 그 유뮬이 있다는 거지!" 이봐.. 속았다는 생각이나 그런 건 전혀 들지 않는 거냐? 정말 속도 편하지. "그래. 그럼 가서 살펴보자고." 아래 계단을 따라서 내가 제일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세이, 살린, 케빈이 뒤 따라 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내려 서자, 놀랍게도 어두웠던 곳에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마법의 등인가 본데? 꽤나 돈 좀 쳐발랐겠군." 윽.. 꼭 그런 말을 써야 하냐? 너도 참.. 대단한 놈이다. "돈만 발랐냐? 아무 마법사나 하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언제 만들어진 줄 알고? 지속기간에 비례해서 마법이 힘들어지는 거야. 이건 거의... 어라라? 여기 봐! 거의 먼지가 없잖아?" 살린의 발견에서 처럼, 확실히 이 곳에는 오랫동안 방치된 문과는 다르게 바닥에 먼지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도 희미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이곳에도 역시 마법이 걸려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말이지, 돈은 엄청나게 들었겠군. 심지어 신관도 이렇게 안 만드는데 말야.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우와, 저 문 좀 봐!" 거대한 잎사귀 두개가 그려진 그 것에는 정확히 여러가지 문자가 도합 48개 정도가 쓰여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 절대로 알 수 없었다. 내가 어찌 알겠나? 그걸 원래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이건..아마도 그 유물이라는 거겠지? 라플의 유산이라는 게 없었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어떤 유산을 보긴 하는구나.." 케빈은 왠지 감개 무량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하긴... 다들 내 유산을 찾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으니까.. "들어가봐 라플. 아마도 여긴 너만 들어갈 수 있을꺼야." 살린이 말했고, 세이는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금새 우울한 얼굴을 했다. 하여간... "그래. 그럼." 문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뿐인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은 자동으로 앞으로 밀려 나갔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주 아름다운 사람 하나가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누구...?" 순간 사람이 있는 줄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게 아닌 동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세심하게 만든 것이었다. 방은 따사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리고 한 구석에는 왠 요람 같은 게 있었다. 설마... 그래. 그렇다. 저안에서 나는 컸다.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요람을 흔들고, 나는 그걸 보면서 꺄르르 웃곤 했었다. 여긴, 내가 태어난 방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방이기도 했지만... "어머니.. 이건 당신이시군요." 아름다운 빛 가운데 그것은 동상이 아니었다. 죽은 그대로 굳어져 버린 어머니 자신이었다. 어머니의 무덤이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 그랬구나. "이젠.. 편안하십니까?" 나에게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그 얼굴은 너무나 편안해 보였고, 평생을 행복하게 산 듯 빛나고 있었다. 날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사랑해 준 사람 이었다. "사랑해요. 어머님...당신을 이렇게 뵙는군요. 무려.. 백이십년이 걸렸어요. 이거야 원. 그래도 여전히 당신은 아름다운 데요? 그래요. 당신을 주욱 만나고 싶었습니다.." 눈에서는 왠지 한 줄기 눈물이 서서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날 오후 우리 성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메데이레나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쯤 짐을 준비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녀를 호위해 온 사람들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자,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라플...!" 한 소녀가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저 날 잠시 바라 보았다. "이제 가야지?" "나, 그거 들었어." 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뭘... 말이지?" "내일, 날이 밝는데로 그.. 키히가 있는 곳으로 간다면서? 그리고 무척이나 위험할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야?" 정보는 정말 빠르다니까? 제 사의 물결이 일면서 해수욕장을 개발해서 돈을 좀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언젠가 누군가는 매듭을 지어야 하는 문제니까. 단지.. 내가 현명한 결단을 내렸을 거라고.. 나중에 생각할 수 있으면 그만이야." 메디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죽지.. 않을꺼지? 다신.. 못 보진 않겠지? 날 사랑하진 않지만, 그래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언젠가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녀의 눈에선 물 한방울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옛날 글에 보면 여자 눈에서 눈물 뽑으면 그 남자는 그 배를 흘려야 한다고 그러던데.. 참 나.. 나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그럼. 당연하잖아? 내가 네 무덤에 성묘도 해 줄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는 그제서야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오래 살진 말라고. 라플." "그래." 천천히 우리는 밖으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햇볕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상의 참으로 기쁜 기억처럼,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메디, 가서 꼭 잘 살고 편지해라." 세이가 건방지게 한 마디 했고, 메데이레나는 그를 지긋이 밟아주는 우아함을 보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마다 인사를 했고, 그녀는 마차에 탔다. "저기.. 저기.. 나 그래도... 말이지...!" 메데이레나는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황녀답지 않게 나를 보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떨구었는데, 역시 충혈된 눈에서 다시 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더 울면, 저 먼 나라에 수출해야겠다. 소금물이 부족한 나라 어디 없나?" "장...난치지마." 메데이레나는 그제서야 눈물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탄 마차가 서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린 손을 흔들었고, 그녀의 얼굴은 꽤나 오랫동안 보였다. 마차가 한 점이 될 때까지 우리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아마도 이젠 만나기 힘들 것이다. 어쨌거나 황녀 님이시고, 나바스 사람이니까... 원래 국가간의 관계란 게 친해지고, 틀어지는 것도 모두 아주 찰라간의 일이니까.. 그녀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할 무렵 내 눈에도 눈물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그녀를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듯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인지도 모르지. "난 어쩌면... 바보일런지도 모르겠다." 옆의 사린도 혀를 살며시 차 주었다. "넌 바보 맞아." 역시 그렇군. 따가운 햇살이 내겐 어울리지 않을 정도야. "그래. 내일.. 바로 출발하자. 괴물의 움직임도 거의 없어졌고 하니까 이젠 아무 문제가 없지. 안 그래?" "뭐, 그렇겠군. 좋아. 좋아. 가자고. 가서 우리의 실력을 한 번 보이지 뭐." "그럼 겁나서 갈까?" 살린의 얼굴에는 왠지 희망의 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별로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 같은데 말야. "글쎄.. 모든 건 부딪혀 봐야 아는 거래잖아? 우리도 한 번 부딪혀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과연 우리의 행동이 옳았는지. 그런 거 말야. 이기면 우리 위주의 역사가 쓰여질 테니까. 안 그래?" 살린은 낮게 웃었고, 그날의 아픔도 서서히 풀잎의 향기를 타고 공중으로 흩어져 갔다. 난, 아주 슬펐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내 내면의 썩은 것들을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36. 영원히 잠자는 공주 내가 왕자라면 당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전 당신의 왕자가 아닌 모양입니다. 당신의 몸은 이미 이렇듯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공주입니다. 그러니.. 절 깨워주세요. 당신이 나에게 키스하는 순간, 전 당신의 왕자가 될 수 있답니다. 그러니 부디 당신이 절 위해 일어나 주십시오. 왕자 혼자서 찾는 길은 너무나 오래 걸리고 힘듭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덜 힘들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어서 오세요. 이곳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답니다. 다만, 당신을 막는 사악한 마왕이 보낸 괴물들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절대 당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에요. 왜냐면 당신은 전설의 용사이기 때문이죠. 내 말, 듣고 있나요? 나의 사랑하는 당신이여. -시의 찬미 . 루퍼스 젠드-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모두 비장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어떤이는 칼을 갈고 있었으며- 부엌칼을 가는 그는 요리사 였다.- 어떤 이는 나름대로 성벽의 견고함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어린 것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정의를 위해서 다음날 있어야 할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우린 모두 여기까지 왔고, 키히와의 결말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이길 것이다. "준비.. 되셨습니까? 이젠 거의 괴물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지능화 되어 있던 괴물들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하네요." 확실히 그건 그랬다. 그 삼인방이 우릴 위해서 없앴다고 보기도 이상한데 말야. 아무래도 모두를 모아놓고 끔찍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게 틀림 없다. 예로 무슨 땅따먹기 놀이라던지... 음.. 그건 안 끔찍하나? 여하튼. "저건.. 뭐죠?" 거대한 빛 한줄기가 키히의 그 부실공사 성에서 뿜어져 나왔다. 부실공사하면 저런 부작용이 있나 보지? 모를 일이야... "글쎄요. 일단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살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자이츠가 고개를 흔들었다. "곤란합니다. 식량이 바닥을 향하고 있어요. 빨리 일을 마쳐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식량의 조달이 가능할 수도 있고요.어서 움직입시다. 이미 남아 있는 괴물은 거의 없으니까요. 쉽게 성까지 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확실히 내가 도착할 때만해도 엄청 많던 사람들 숫자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경기의 곡선으로 보자면 이제 하강에서 거의 더이상 떨어질 때가 없다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좋았어. 가자!" 세이는 내 옆에서 쫄랑 거리고 따라 붙었고, 하브라이드, 프라운도 내 옆에, 살린과 케빈은 후방의 우리의 지원을 맡기로 했다. 자이츠와 엘류시아는 성을 방어하고,기사들 몇몇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성을 떠나 우리와 반대쪽으로 가게 되었다. 성으로 가는 길은 피크닉 가는 거 같았다. "도시락이 없는 게 아쉽네요." 세이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자, 프라운이 입을 잠시 내밀었다. "쳇. 우리 마족은 안 먹어도 안 굶어 죽는다고 밥도 안 주더라. 에이.. 이번 일이 끝나거든 어느 식당 하나를 다 거덜낼 텐다." 맘대로 하라고. 하핫. "참, 하브라이드. 마족들은 여전히 다 잘지내고 있지?" "물론이죠. 로드. 못 지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마족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모두다 좋은 미래, 밝은 미래, 희망찬 미래를 만들려고 고심하고 있으니까요." 어련 밝기만 하군. 좋아. 좋아. 세이는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역시 피크닉의 정점은 도시락인데 말야." 어이. 우리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고. 쯧.. 정신을 못차려. 하여간, 너무들 한다니까. 얼마 가지 않아 아름다운 성 하나가 우리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실공사 치고는 그런 티 안내고 꽤 잘 만들어진 편에 속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 뒤로는 아름다운 숲들이 조화롭게 어울어져서 그야말로 엘프의 장소로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역시 부실공사.."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면서 우리는 성문 바로 앞에 섰다. 거기서 먼저 첫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먼저, 이 문을 어떻게 열 것인가? 이건 해자는 아니지만, 꽤나 두터운 현관문이었다. "이걸 어떻게 열까요? 부실까요? 아니면..." 프라운이 조잘 조잘 떠들 거나 말거나 나는 그 문 앞에 서서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완전히 열리고 말았다. 세이는 한 마디 거들었다. "두들어라 열릴것이다?" 프라운과 하브라이드는 힘쓸 기회를 잃어서 꽤 안타까운 듯 했고, 뒤따라오던 살린이나 케빈은 상당히 황당하다는 감정 표현을 전하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의외로 악당의 집 같이 음산하거나 한 그런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뭐, 믿거나 말거나 한 일이지만, 곳곳에는 작은 화분들도 놓여져 있었다. "이건 포프리 같은데요? 이런 게 있는 마녀의 성이라니 생각도 못했다고요." 세이가 신나서 중얼거리고 프라운은 꽤나 못 마땅한 듯했다. "쳇. 마왕 성도 이것보다 더 음침한데 말입니다." 마왕이 마녀보다 계급이 높잖어. 그리고 원래 키히의 직업을 잊으면 곤란해. 전직 용사라고 용사. "그래. 어디로 올라가지?" 거대한 계단이 눈앞에 윗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문제는 오른쪽과 왼쪽 두 군데 중에 어디로 올라가느냐인데.. 이 건물 꽤 얼렁뚱땅 지은 거 치고는 잘 지어놨단 말야? 신기해... "팀을 나누는 건 미련한 짓입니다. 그렇다면 안내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떻습니까?" 케빈의 절도있는 농담을 들은 우리는 모두 그를 밟아 주고 오른 쪽 계단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아, 제가 늦었군요. 어서 오십시오." 우리와 그는 구면이었다. "그 돌팔이 의사?" "사기꾼 의사!" 뭐 대충 말은 달라도 뜻은 통하는 모양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한 대사에 별 충격을 먹지 않은 듯 다음 말을 계속 이었다. 미소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구두까지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자, 제 심사평은 여기까지입니다. 절 따라서 올라가면 됩니다. 방해가 없다면 말이죠." 모두들 그의 시선이 움직이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 곳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사비르가 살짝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원래 나쁜 마녀 마법사들이 있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우린 그리 나쁜 놈들은 아니네. 세이를 넘기면 그냥 돌아갈 수도 있어." 그리고 세이를 죽이겠지? "그럼 키히는 포기한다는 뜻인가?" 사비르는 조용히 큭큭대기 시작했고, 대신 마스크의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포기..라.. 그건 아니네. 그녀보단 세이가 몇배나 더 위험하니까." 율지스 이, 가증스러운 녀석. 뭐? 때론 자신의 신세를 잊은 적도 있다고? 얼마나 우스웠을까.. 젠장. 젠장! 괜히 화나잖아! "세이를 넘기진 않을 테니.. 우린 싸움 밖엔 할 수 없겠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얼굴 가리는 것도 웃기지 않나? 어서 벗어 주시지." 율지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마스크를 벗었고, 역시나 가장 놀란 사람은 세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도 꽤 많았지 않나? 살린과 케자로도 그를 알고 지냈으니.. 감개 무량하겠어. "율지스... 어떻게 된 건가?" 살린의 얼굴에서는 어이없음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분노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증스럽군. 우릴 기만하다니!" 케빈은 그렇다 치고 살린의 분노는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 내 제자이면서도 꽤나 믿음직스러운 면이 많아서 모두들 꽤나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신이라는 건 그냥 이런 게 아니겠는가? "다 어쩔 수 없었지. 할 수 없었어. 나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지. 그리고 이건.. 아주 오랫동안 계획된 일이니.. 당연하지." 그런 게 배신이 아니면 뭐냐? "좋아. 좋아. 다 좋네. 우린 세이를 넘겨 줄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으니 이만 포기하게나." 예언이 하나 들어 맞었다. 당신의 제자 중 하나가 나를 기만할 것이라고.. 그게 율지스였어... 쳇. "할 수 없군. 좋아! 간다!" 마법 주문이 빠르게 캐스팅 되면서 우리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목표는 세이에게 맞춰져 있었다. 힘은 현재 율지스 혼자 마법을 쓰고 있었지만, 한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율지스 혼자라도 그가 전력으로 싸운다면 여기 있는 사람 중 나를 제외한 모두는 전멸이다. "젠장! 방어막!" 방어막이 쳐지고 나는 동시에 묶기 마법을 사용해서 하늘에 떠있는 율지스를 공격했는데, 순식간에 눈앞에 흰빛이 번뜩였다. "나도 끼어야겠군. 자네가 상대라면 꽤나 즐거울 테니 기대되는군." 난 하나도 기대 안된다. 뭐. "간다!" 그의 검의 속도를 다 막아내려면, 아마도 방어막을 거의 반쯤 치고 있어야 하는 게 문제이다. 그를 제대로 공격할 시간이 모자라... 아, 맞다. 마족! "프라운, 하브라이드, 엄호 할 수 있겠어?" 둘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시도만 해 보라고. 얼마든지 마법을 난사해 줄 테니까. 알았지?" 두 사람의 마법이 교차되면서 사비르에게 날아가고 동시에 나는 앞으로 달려가서 재빨리 율지스의 앞면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녀석은 재빨리 자리를 옮겨 버리고, 대신 눈 앞에는 사비르가 대검을 들고 하얗게 웃고 있었다. "스승님! 위험해요!" 말 안해도 나도 안다. 나 아직 벽을 시커멓게하지 않는단 말이다. 노인 파워를 무시하면 큰일 난다고. 알았나? "젠장! 안개다!" 안개?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나의 자칭 아버지라는 사람이 안개를 풀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안개가 아니었다. 나나 세이는 겪은 일이 있었다. 그래. 그 안개다. 설마, 그 때의 그 안개도...저 인간의 솜씨란 말야? "그 때... 그 엘프 귀신도 당신 작품이었나?"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왠만하면 아버지라고 불러다오. 그리고, 이번에는 어떻게 빠져 나오는지 볼까?" 역시 우리 나라도 서서히 고령화 사회로 가는 거야. 아버지 나이가.. 몇인지 엄두도 안나고 내 나이 120세가 좀 넘고.. 헐... 헐.. 하지만 생각은 오래 이어갈 수 없었다. 안개가 내 몸을 완전히 덮었고, 거기에 사람들 조차 순식간에 잠겨 버렸으니 말이다. 한가지 다행인 건, 이번에는 떨어질 데가 없다는 거 정도겠지. 가만... 저번엔 나무였는데 이번엔 뭐지? "이봐! 들리나!" 혹시나 싶어서 확인 사살하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건가? 이번 환상은 좀 독특했다. 저번처럼 숲이나 그런 게 아니라, 마을의 한 가운데였고, 거기서 나는 부랑아 차림을 하고 서 있었다. 세상에. 이젠 별 걸 다 보게 되는 군. 사람들 사이에서 헐거운 망토에다가 그 위에 다시 낡은 지팡이를 지고 있었다. 사람들 누구도 내게 관심을 두는 거 같지는 않았다. 사비르와 율지스 만이라면 당연히 내가 이기겠지만, 자칭 피스트레이카 공작이라는 분은 그야말로 상대하기에 큰 어려움이 있다. 일단, 알지도 못할 마법을 사용하고 툭하면 결계를 팍팍 처버리는 데다가 그 발동 자체도 무척이나 순식간이라는 데 있다. "역시.. 모르겠단 말이지. 음?" 닫힌 세계 한 가운데서 한 사람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내 괴로움의 증거이자, 슬픔의 증거. 키히였다. 그녀는 회색빛이 강한 드레스를 입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결계 가운데서라도 그녀는 빛나고 있었다. 물론, 저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라플... 날 구하러 오신 건가요?" 그녀는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벽 사이에 금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벽이 금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그녀의 정신체가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내가... 라플이라는 걸 믿을 수 있소?" "예. 하지만, 제 정신이 납득을 해도 눈으론 믿을 수 없겠죠. 전 지금 깊이 잠들고 있답니다. 당신이 나를 깨우러 오지 않으니까요." 그녀의 하얀 얼굴 아래로 천천히 아름다운 보석같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 눈물은 그녀의 옷을 적셔서 회색을 검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건 환상이다. 그러나, 환상은 깨어지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면서 그녀의 옷은 어느새 완전한 검은색으로 물들어버리고 주변의 풍경은 황혼녘의 장례식 장으로 바뀌었다. 당나귀 네마리가 천천히 수레를 지고선 마을의 길 한가운데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길에 서 있던 키히를 완전히 통과해서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은... 결계이지만, 당신의 또 다른 기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당신의 고뇌가 그대로 여과없이 드러나죠. 그래서 사람들을 현혹하게 되는 거에요." 그녀의 옷은 아직도 검은 색이었다. "어째서 당신은 사람들을 죽여버린 거지?" 가장 묻고 싶었던 그 말을 그녀에게 물었다. "글쎄요... 인간이 증오스러워서 그랬겠죠. 하지만, 그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서 그 것 때문에 괴로워요." 키히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누군가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프라오니스. 저건 환상이야." 뒤를 돌자, 붉은색이 감도는 갈색머리 소녀가 서 있었다. 화려하고, 강렬한 붉은 드레서를 입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고통에 젖어 있었고, 뭔가를 조급해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알고 있지. 하지만, 너도 환상이야. 그래... 당신이 진정 내 아버지라면, 알고 계시겠군요. 전 환상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이걸 당장 걷어 주세요." 천천히 금이 가던 환상이 완전히 사라져가고, 단지 키히의 잔상만이 맴돌다가 서서히 사라졌을 뿐이었다. 내게 뭔가를 속삭이고. "대단하군. 자네는 두 번이나 내 환상을 깨었군. 과연 마왕이라 이건가? 다른 사람들은 저렇듯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아주 기쁘거나 괴로왔던 기억들 사이에서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을 걸세." 손뼉을 치면서 자칭 아버지가 서 있었다. 이런 걸 고부간의 갈등이라고.. 하지는 못하겠군. 반항기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가 되나? 음.. 이것도 뭔가 이상해. "다, 헛수고입니다. 저들이 빠져 나오지 못해도 전 당신들을 이기고 키히에게 가겠습니다." 율지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라플. 이걸 명심해 주십시오. 그녀는 원래 인간도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단지 하나의 책일 뿐입니다. 이 점을 아시겠습니까?" "그래. 알지. 그녀와 손잡고 세계 최고의 대백과 사전을 편찬해 볼려고. 내 꿈을 짓밟지 말아 달라고. 알았죠? 유명해 진 뒤에는 사인 해 드리죠." 율지스는 단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고, 옆에 있던 사비르는 싸늘하게 웄었으며, 옆의 자칭 내 아버지란 사람은 그저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그거 참 재미있겠구나. 하지만, 한가지 더 명심하렴. 난 바보가 아니라는 점이지. 넌 정말 사람이 아닌 것들을 위해서 사람들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느냐? 우리.. 즐거운 내기를 하자꾸나." 그의 입에서는 잔혹하리 만큼 차가운 미소가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주위의 안개들 사이에서는 다른 일행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개 중에는 별 이상한 행동을 하는 놈도 있었다. 특히 프라운이나 하브라이드의 경우에는 오랜 세월을 산 만큼, 고뇌할 것도 많았을 것이다. "무슨 소리지?" 수수께끼 장난이라면 곤란한데 말야. "별 거 아니지. 그저, 너가 여기 있는 사람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이 위에 있는 키히를 구할 것인가이지." 순간 등 뒤로는 싸늘한 공기가 타고 흐르는 착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이지?" 사비르는 그저 묵묵히 검을 집어서 자신의 뒤로 넣었다. "별 거 아니지. 그저.. 여기 있는 사람들과 위의 키히와 누굴 택하겠느냐 이지. 너가 손쓸 사이도 없이 우리가 해치우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여기라고. 후후후."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강하고, 사실 마왕인 나에게 대항한다면 용사와 마왕의 싸움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지.. 게다가 모두들 환상 속에 있는 게 아닌가? "세이도.. 그렇게 죽일 수 있다는 건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율지스가 나서서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건 아니네. 저건 인간이 아냐. 단지 사람의 영혼과 비슷한 지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책일 뿐이지. 그저 신이 만든 장난감이야. 그러니 죽는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뭘 선택하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 보다 더욱 더, 세이를 그렇게 귀여워 했던 것도 모두 다 가식이라는 건가? "가식.. 이었나? 세이를 좋은 동생으로 여긴 것들도 말이지." 율지스의 눈동자는 한순간 흔들림을 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한숨을 작게 내쉰 그의 모습은 약간의 괴로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율지스는 우리일에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어. 그리고 괴물의 개발을 알아낸 것도 그였지. 몰랐지? 넌 항상 속고 있었던 거야. 후후후.." 사비르, 너에게도 말이지. 책의 영혼이라면서 세이를 무시하더니 이제는 사람들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네 놈들... 너흰 사람도 아니다. "한가지 물어 볼께 있어. 사람을 이용해서 괴물로 만들고도 너희가 진정 무엇을 노리고 있었던 거지? 세계 정복? 아니면 마왕을 죽이는 것?" 사비르는 사악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저 율지스는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이었고, 여전히 주변에는 안개의 차가운 느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인간? 우릴 보게. 그런 하찮은 것들은 모두 사라져도 괜찮아. 더 큰 희생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중요하지. 넌 이해하지 못해."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사람의 목숨에 무게는 없어. 그리고... 너희들이 추구하는 바를 아직도 모르겠어. 단지 책의 영혼이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혼란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더더욱 너희들에 의해 혼란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나?" 율지스는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엘프인 그로서는 인간을 괴물로 만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나도.. 알고 있지. 엘프의 맥이 끊긴 그 시점에서도... 인간들 하나 하나의 무게는 같다는 걸.. 하지만, 라플. 자넨 우리 입장을 이해해 주어야 하네. 우린, 그저 무차별 살인을 하고 있는 게 아니네. 단지 사리 사욕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생명의 서와 죽음의 서의 영혼이 만나는 그 순간, 세상에는 파멸이 깃들게 되어있네. 구원기사에 대한 예언을 기억하나?" 붉은 달이 이지러지니 어쩌니 하는 그 헛소리 말이군. "파멸에 관한 것이 어쨌다는 건가? 자네가, 그 파멸을 막을 수 있다는 건가? 어느 누구도 그걸 하지 못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게. 율지스. 인간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그래.. 인간은 약하지 않지. 그건 내가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느끼게 된 것이었다. 노예이건, 혹은 비천한 몸을 파는 여자들도 자신의 할 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남기 위해 강해지곤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엘프들은 그렇지 않았다. 키히만 해도, 그녀는 자신을 받치던 모든 게 붕괴되자, 정신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라플.. 이해해 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 제자는 이미 각성을 시작하고 있네. 그건 아나?" 율지스는 고통스러운 듯 했다. 고개를 돌려서 세이가 있는 쪽을 바라 보니, 그 녀석은 안개 한 가운데서도 우리 쪽을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그 녀석의 눈은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 법은 아니군. 왜 눈동자의 색이 붉어지는 거지?" 사비르가 비꼬듯이 킬킬거렸다. "그야... 각성하고 있다는 거지.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책을 기억하게나. 그건, 황금색은 생명을, 붉은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걸세. 무슨 소리인지 아나? 저 녀석은 서서히 온 몸이 붉어지게 될 거야." 그리고.. 파멸이 시작될 것이란 건가? 하지만, 난 그걸 믿지 않는다. 세이는 나의 제자고, 나의 귀여운 아이일 뿐이다. "나의 아버지라는 분이시여, 한가지 더 묻겠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나나, 인간의 목숨의 무게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는 잠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글쎄... 당장 대답하긴 곤란하군. 그거 아나?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네. 노력하게 하는 것도 재능이야. 그건 정말 축복받은 재능이지. 하지만, 그 재능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게 있네.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거야. 어떤 한 분야에 있어서 일반인은 절대로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러한 재능 말이네. 라플. 넌 그런 걸 가지고 있지. 어떤 인간들 중에도 없던 그러한 재능말이지. 내 아이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자네의 목숨의 무게라는 것은 일반인의 수천배보다 더 무거운 것이지. 하잘 것없는 도둑 같은 녀석들은 모두 사라져도 괜찮은 게 아니겠나?" 잠시 난 거기서 하나의 선을 그었다. 이 세사람은 상당히 비뚤어진 생각을 매우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여기서 시간을 조금 더 끌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면, 기대 이상으로 살린의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지스. 잘 못 생각하고 있는거야. 인간이 멸망당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설마 당신이 나서야 할 정도로 인간이 어리석다고 보는 건가? 어서 때려 치우고 현상 유지나 하라고!" 사비르의 입에서는 작은 욕이 튀어나왔고, 순간 살린의 안개가 금이 가면서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과연, 신전 개시이래 최고의 수재라더니.. 정말 대단하군. "이 놈! 없애 버리겠다!" 사비르와 살린은 사실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솥밥 먹는 사이 아니었나? 하여간. "위험해!" 살린은 막 나와서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몸이 뒤로 쏠리면서 그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스치고 있었다. 내 몸이 멋대로 그 살린의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칼이 박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난, 아니었다. "율...지...스?" 어이 없게도, 아까까지 저기서 폼잡고 있던 율지스가 내 앞에서 칼에 몸이 완전히 관통 당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살린은 머리를 부여 잡고 있었고, 율지스는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엘프... 이래서 엘프는 안된다고 그랬잖습니까?" 사비르의 입에서는 아까까지 동료라고는 믿기 어려운 대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의 선택에 갈채를 보내지. 끝나기 전에 죽는 것도 괜찮을 거 같으니까. 우리가 저 라플의 꾀임에 넘어가서 시간을 너무 끌었어. 죽음의 서가 사라졌네." 그 말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한 때 내 제자 였고, 첫번째로 나를 스승이라고 불러주던 녀석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말이었다. "율지스.. 왜...? 난 찔려도 잘 안 죽는단 말야! 하지만, 넌.. 넌.. 아니잖아!" 그의 입에서는 피가 쿨럭 거리면서 넘어오고 있었다. "사비르의.. 큭.. 검은 보통 검이 아닙니다.. 그리고, 회복 마법을 사용하지 마세요. 이미 전 죽은 생명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요.. 키히의 마을을 불살랐을 때부터 말이죠.. 그래요. .전 어째서 그리 행동했을까요? 모두를 죽이는 그런 길을...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는데.. 당신과 함께 하던 그 몇년이 가장 행복했다는 걸.. 전 진작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율지스의 눈동자는 아주 살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피투성이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거기 있는 건가요? 라플.. 나의 스승이여.." "그래. 여기 있다. 율지스. 어서 정신차려라!" 아무리 회복 마법을 사용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하나의 돌 조각이 굴러 나왔다. 그건 종이를 뭉쳐 놓은 것으로 보여졌다. "쿨럭.. 이제 끝입니다. 억지로 책의 생명으로 제 목숨을 연장시키는 일 따윈.. 이제 끝이에요... 하긴, 한눈에 당신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의 계획이 실패할 거라는 거.. 알 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피가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복부에서는 더 이상의 피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율지스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봐.. 율지스. 정신 차려.. 응? 난 말이지.. 너가 이렇게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야! 이 바보야!" 뒤에서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살린이었다. 그는 아주 슬픈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 보았다. "라플.. 세이가 없어. 그리고 그 두사람은 위로 올라간 거 같아. 내가.. 일행들을 도와서 깨울 테니까. 넌 어서 올라가봐.. 더 늦기 전에. 나도.. 곧 갈테니까. 응?" 살린의 미소는 참으로 안타까운 미소로 되어 있었다.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그저 갈색으로 보여지는 평범한 계단일 뿐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구할 거라는 생각따윈 하지 않겠어. 살린. 하지만, 우리.. 꼭 우리가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도록 하자. 응?" 율지스의 손을 내려 놓자,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어서 매우 을씨년 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 무슨 옷 잘입는 사람 베스트를 선정하는 것도 아니므로, 난 그저 앞으로 걸어서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었다.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면서, 서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총 몇개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셀 수도 없었으며, 피냄새 때문에 후각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제자를.. 둘 다 잃을 수는 없지... 안 그래? 율지스. 세이는 내가 꼭 구해낼께." 율지스가 어디선가 미소 짓는 거 같았다. 언제이던가, 율지스가 나에게 처음 마법을 배울때, 녀석이 정말 실수를 많이 했던 게 떠올랐다. 아마도 그 때 녀석은 이미 나보다 나이도 많았을 것이며, 마법도 더 많이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숨기느라 무지 고생도 했었겠지. 늘상 과제가 힘겹다 싶으면 녀석은 그래도 허겁지겁 끝내곤 했다. 그래도 난 항상 녀석의 재주가 비상해서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래... 하지만, 세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한가지 의구심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나와 보낸 몇년들이 행복했다면, 평생 시간이 멈춰졌다면 그를 잃고 슬퍼하지는 않아도 되었으리라. 나의 사랑하는 제자여. 부디 고이 잠들어, 너를 생각하는 날 위해 항상 위에서 지켜봐 다오. 아주 먼 훗날, 그와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내가 널 아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말이지. 아주 가끔... 보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율지스. 아니, 아주 아주 가끔 생각날 것이다. 너무 자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릴지도 모르니까. "이층이군.." 앞에는 괴물의 시체가 한 대 여섯구정도가 널부러져 있었다. 그들의 짓이 분명했다. 아직 키히의 부하들로 전 트라이너 왕의 아들이 남아 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지.. 모를일이다. "으아아악! 널 끝장 내고 말겠다!" 곧이어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울러퍼졌다. 바로 이 근처의 방이었다. 방은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문의 경첩이 떨어져 나가면서 문 자체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쳇.. 꼬마가지고 뭐 하시는 겁니까? 어서 헤치우세요." 사비르의 차가운 목소리도 울리고 있었다. 난 즉시 그 앞으로 뛰쳐 나갔다. "어? 벌써 왔군. 제자와 감동의 재회라도 약속하고 오지 그랬어?" 사비르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저 앞에는 화려한 침대와 그 앞에 소년 하나가 검을 들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직은.. 무사한 건가?" 하지만 곧 무사하게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쳇... 할 수 없지. 이건 이대로 좋은 거니까. 꼬마는 이만 죽여야겠구나. 데리고 노는 것도 좋지만, 더 이상 놀리면 여기 무서운 형아가 날 때리려 할 테니까. 하하하하..." 그의 면상을 크게 갈기고 싶은 욕망을 참으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먼저, 침대 외의 집기들은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다. 침대에는 휘장이 둘러져 있어서 안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기 있는 건 키히일 확률이 컸다. 문제는 왜 이 소동이 났는데도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거지. "키히는...! 무사한가?" 내가 달려가자, 소년은 날 보고 반색했다. "아직은요. 하지만 곧 무사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이 키히님의 왕자님이시니까.. 그러니까.." 사비르가 코웃음을 쳤다. "이상하군. 너 트라이너의 왕자지? 근데 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보호하려고 용쓰는 거냐?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구나. 미쳤니?" 정말 다정한 말투로 인사해주는군.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럼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나요?" 왕자는 비장한 각오로 외치고 다시 칼을 부여 잡았다. 사비르의 손에서는 어느새 그 장검이 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불효 막심한 것.. 그런 놈은 나의 검으로 징벌해 주어야 하겠지? 헤헤헤. 기대하라고." 검이 화려하게 번득이는 그 순간 소년의 몸은 힘업이 쓰러지고 말았다. 사비르는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입으로 살짝 맛보면서 중얼 거렸다. "신기하네. 무지 허약하잖아? 아무래도 너 같지는 않... 헉...!" 사비르의 몸에서 하나의 팔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비르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궁금하나? 자넨...너무나 잔혹하군. 내 일과 맞지 않아." "배..신.... 하는.. 거냐...?" 자칭 아버지는 고개를 살짝 저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배신? 계획을 세울 당시부터 너희 두 사람은 내 계획에 들어 있지도 않았지. 우연히 이용할 사람이 필요 했을 뿐이니까.. 율지스가 차라리 괜찮았지. 그는 해선 될 일과 해선 안 될일을 알고 있었으니까... 자네완 많이 다르지." 그의 입에서는 잠시 욕이 뻗어 나오고 있었지만,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바닥에 나 뒹글었다. 이제 방에는 나와, 그가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같은 편을 죽이다니.. 정말 내 아버지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군요." "모르는 소리. 원래 같은 편이 아니었네. 음.. 그 두사람은 정말 멸망을 막아보려고 했던 거 같은데.. 난 틀리지. 멸망을 굳이 막자는 쪽이 아니라고." 내 눈이 커졌다. 그 때문이 아니라,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소년이 핏자국을 길게 남기면서 자신의 몸을 질질 끌어서 침대 옆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시려는 겁니까?" 아직 눈치 채진 못한 모양이다. "별 거 아니네. 그저 이 지겨운 세상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거지. 난, 너무 오래 살았거든." 요즘 이곳의 평균 연령을 조사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이런 사람이 한 열명만 되어도 평균이 엄청나게 올라가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냥 자살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굳이 이런 저런 문제로 원수를 늘이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그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얀 백발은 그의 오랜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윤기까지 흐르고 있었다. 머리로 옷감을 지을 수는 없나? 그럼 돈 많이 벌을 텐데. "그렇게 보였나? 하하하.. 그렇다면 난 지금쯤 무덤에 있어야 하겠지. 음.. 글쎄.. 널 낳기도 까마득히 전에 나에게는 무려 다섯명의 아이들이 있었지. 그것도 다른 아내에게서 나온 것이었고, 더 황당한 건 그 아이들의 나이차가 백년 정도였어. 즉, 형제이되 절대로 본 적이 없었을 테지... 아, 이해하겠나?" 즉, 나에게는 까마득히 오래전에 죽은 형들이 다섯이나 된다는 거지? 내 가정 비화란 거의 이 트라이너의 역사와도 같은 거였군... 세상에나.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건가요? 아니.. 정확히는 나이(연세가라고 물었어야 하겠지만, 사실 아버지란 실감이 별로 나지 않는다.)가 어떻게 되는 거죠?" 전 피스트레이카 공작이자, 나의 아버지란 사람은 내가 묻건 말건 신경쓰지도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처음엔 나도 이 엄청나게 긴 생명을 알아채지 못했지. 마족처럼 하고 싶은데로 다 하고 살수도 없고, 인간은 다른 일에 열정을 쏟아야만 하지. 그게 내 경우에는 트라이너 건국이었다는 점이 특이했을 뿐이었어." 즉, 초대 공작이라는 아주 쉬운 결론이 등장하는 군. 그럼 우리 나라 역사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었다는 거군.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죠?" "뭐, 흔한 이야기처럼 나에게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더디게 흘러가기 시작했지. 그게 내 저택 아래 있던 그 생명의 서라는 것 때문에라는 것도 몰랐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게만 그 이상한 영향이 끼쳐진 것도 몰랐고.. 왜 그런지도.. 아직도 모르겠네. 하지만, 어쨌든 그리고 나서 난 아이나, 아내가 먼저 죽는 걸 봐야만 했네. 처음 얼마간은 좋았어. 나이를 먹어도 오래 살아있고.. 사실 나쁠 게 없지 않은가? 내가 부족한 것도 없었고, 열정을 쏟을 만한 일은 많았으니까..." 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게 더 웃기다.. 야. 몇 백년 넘게 사는 인간이 어디있냐. "그 뒤에... 자신의 나이에 대한 걸 알아 차린 건가요?" "아니. 사실 나도 내가 젊은 모습이라면 계속 살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자네를 낳고.. 프라오니스라는 아이를 낳고는 변했지. 모든게.. 그 뒤로 난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이를 먹게 되었지. 사실 그런 점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 나도, 아이는 사랑하니까. 그런데.. 책의 영혼이 나오는 일이 생긴 거지. 그래서 난 여행을 떠나야 했지..." 아이를 버려두고 말이지? 하긴.. 먼저 간 다섯명의 아이를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을테지. "사비르와 율지스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군요?" "그건 아니네. 훨씬 전에 내가 불사라는 걸 알았을 적부터 사비르와 율지스는 접촉하고 있었네. 그 땐 생명의 서가 아닌 죽음의 서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지만... 율지스는 엘프지만, 일종의... 그래. 그는 엘프의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만 엘프를 멸종시키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고 있었지. 그러던 말던, 난 어느새 알게 되었던 거야. 난 영원히 죽을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당치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로군. "그렇다면 당신 자신이 죽기 위해서 고작해야 그런 이유 하나때문에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겁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뭔가 제가 이해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싫은데?" 지금 나랑 농담하자는 거요? "왜요...?" 살기 느껴지지? "그야, 원래 나 같은 인물은 신비로와야 하는 법이니까.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 그래도 말이다 너. 내가 너 아빠야. 야." 그의 눈은 아직도 날카로왔다. 그런 헛소리를 즐겨 하는 것치고는 꽤나 험한 눈매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내 나이의 적어도 몇배를 살았을 터이니. "뭐, 그런 눈으로 노려보지 말라고. 나도 간만에 아이를 만나서 이렇듯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 정도는 있어야 살지. 안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니? 넌 안 그러니? 뭐,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니 어쩌느니 한 이야기는 잊어. 정확히는 인간이 멸망하는 게 아냐. 인간은 당분간은 멸망하지 않겠지. 오히려.. 난... 다른 걸 의도하고 있는 거네. 이 책은 영원히 봉인되어서 모두가 자신의 수명을 뛰어넘어 신처럼 살 수 있다고. 영원한 삶이라는 거지. 신의 권위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그럴려면 이 두 권의 책 모두가 봉인되어야 하는 선결 조건이 남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원래 피스트레이카 핏줄 자체가 황당한 생각을 잘하는 건가? 아니면 저 아저씨만 오래 살아서 약간 맛이 간거야? 대체 알 수 가 없군. 나도 저렇듯 오래 살면 그렇게 될려는지.. 어이구. "오래 살아서 뭐합니까? 게다가 신이 가만 있을리도 만무하지 않습니까? 저도 신을 몇 번 봤습니다만, 그는 그렇게 널널하게 일을 처리할 거 같지는 않더군요." 사실 널널하게 처리하려는 듯 했지만, 그건 이야기 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하? 신이 왜 움직이나? 원래 인간의 수명이 신과 같았는데. 게다가 그는 재미있는 거라면 사죽을 못쓴다고. 이상한 놈이라고. 저번 나바스에 개입한 것도 그렇고. 그 전에는 종이 호랑이었는 데 뭘. 그가 어떻게 했던지 간에 어떤 계기로 인하여 신의 영원한 수명이 인간에게선 사라지고 말았지. 그리고..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인간은 고작 잘해야 백살도 안되는 삶을 살게 된 걸세. 이해 못하면 나중에 따로 레포트로 제출하라고. 질문할테니까." 제발 헛소리는 이제 그만. 어쨌든, 저 아저씨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래서 수명을 늘이고 싶어하는 건가? 하지만.. 말이 안 맞잖아! 자신은 지쳤다면서 왜 수명을 늘여? "전 반대에요. 그대로 놓아두는 쪽이 좋아요. 인간의 생명이 줄었다면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예로, 평생을 남의 노예로 지낸다든지 하는 건 너무나 불행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중병에 걸려서도 평생을 산다는 건 괴로움의 산실이겠죠. 설마, 그런 걸 노리는 겁니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생각이시냐구요."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난... 글쎄. 그런건 곧 해결 되겠지. 원래는 시간이 다 해결해 주는 거야. 이것도 틀리지 않는다고." 그야말로 무책임의 황제로군. 그리고 당신은 시간을 거슬러 보려는 거 아니었어? 에휴휴.. 마침 트라이너 전 왕자가 힘겹게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느끼게 했으면 좋겠지만.. 흠. "저 소년을 바라 보십시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왕자의 목숨은 그야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힘겹게 피를 쏟아 가면서 천천히키히가 누워있는 침대에 다가갔다. 그리고 힘겨운 목소리로 천천히 짜내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키히님.. 어서 일어나세요. 저기 당신의 왕자가 와 있습니다. 전 비록.. 당신의 왕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을 바라보는 건 괜찮지요? 이제 곧 전 이세상을 떠나야 하지만.. 키히님.. 한가지 약속할께요. 전 그래도 당신을 기억할 꺼에요. 그러니.. 그것을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부탁이니까요. 당신의 왕자가 되고 싶었는데, 언제나 당신은 이렇듯 잠들어 있기만 하군요." 소년은 입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스윽 닦고선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키히님을.. 구해 주세요." 그의 몸은 천천히 아래로 무너졌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아마도 생명도 없다는 것이리라. "이젠 아시겠습니까? 죽음과 생명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걸요." 그는 날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무슨 반론의 여지를 찾고 있는 거 같았다. 나는 천천히 그녀가 있는 자리에 다가갔다. 그 곳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하는 그녀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옷은 실크로 만들어진듯 차가운 촉감이 전해졌다. 난 그녀의 그 옷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을 잡았다. 실크는 검은 색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하얀 얼굴과 금발이 더욱 두드러져 보여졌다. "키히. 내가 왔답니다. 당신의 라플이 이렇게 당신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눈이 떠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그녀의 눈은 서서히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 보고 있는 거 같았다. 그녀의 손이 서서히 나의 팔을 타고 올라가 내 얼굴을 만졌다. 그녀는 서서히 미소지었다. "라플.. 나 나쁜 꿈을 꾸었답니다. 당신을 제가 무척이나 괴롭히는 그런 꿈이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저.. 괴롭게 있었어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쓸어 주었다. "괜찮아요. 키히. 당신의 라플이 항상 곂에 있습니다. 이젠 그 누구도 당신을 어쩌지 못해요. 알겠죠? 항상 제가 옆에 있으니까요... 키히? 키히?" 그녀의 눈동자는 서서히 감겨지기 시작했고,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책으로 돌아갈 때가 된 거네. 자신도 대충 알고 있었던 게지. 자신의 한계가 다가왔다는 걸 말이네." 한계라.. 키히의 몸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건가? 설마..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혼이 책인 걸까? 그럼 같이 살면서 그녀의 옷에 묻은 먼지도 털어주고 그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으엑. 그런 건 싫다고. "하지만.. 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뭐, 하건 말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서서이 깨닭아 가고 있지만 말이지. "세이...로군." 한쪽에서 엄청난 마력의 파동이 감지될 정도로 한 순간에 벽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저거 수리 비용은 설마 내가 내야하는 건 아니겠지? 일단은 보호자니까.. 으. 싫다. "세이키르군. 오랜 만이로군. 아니, 죽음의 서의 의지인가?" 세이는 별로 다른 게 없었다. 그저 온 몸이 붉게 빛나고 있고, 살만이 유일하게 하얗다 못해서 창백할 지경이었다. 못 먹어서 그런 거라고 오해하겠군. "전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울리면서 자칭 아버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원래 둘의 사이는 좋지 않은 듯 했다. 그 이유라면 아마도 돈 떼먹은 사이가 아닐까나? "난 줄곧 자네를 쫓고 있었지. 이런 데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네." 세이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붉은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뭔가가 일렁였지만, 이내 사라져 버렸다. 내 눈앞에 있는 세이는 세이이되, 세이가 아닌 거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누워있는 키히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조사해 볼 가치가 있었지만, 이제와서 탐구심을 불태운 들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세이의 저 모습은 왠지 애처로와서 그저 안고서 등을 투닥거리고 싶을 뿐이었다. "당신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라플의 아버지여. 전 제 스승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제가 각성하게 되었지만, 제 강한 의지는 그를 여전히 스승이라고 부르길 원합니다. 가엽게도 제 영혼 안에 있던 세이라는 소년은 아주 강하게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문득 미소가 흘러나왔다. "너 역시 세이다." 잠시 아무 말도 흐르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표류하는 작은 배를 탄 듯 약간 울렁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색의 잔상이 나를 덥치기 시작하고 모든 세상이 새카맣게 사라져 버렸다. "이제부터 제가 보여드리는 것은 저의 탄생에 관한 겁니다. 전, 당신이 이걸 꼭 알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답을 내려 주십시오. 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신은 알 것입니다." 세이의 무뚝뚝하지만 친절한 목소리가 어느덧 완전히 사라지고 여운조차 남지 않았을 무렵, 새카맣게 펼쳐진 우주에 두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별들을 만지작 거리던 한 신이 어느덧 입을 열었다. "난 말이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내고 싶군. 이제 너무나 같은 놀이를 하는 건 질렸거든. 자네 생각은 어떤가?" 또 다른 사람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나 힘들고, 오랜 관리를 요하는 것이네. 나라면 자네가 하지 않길 바라네." 다른 신의 입이 비죽 삐져나왔다.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삶을 살았나? 우리와 닮은 것들을 창조해 낸다면,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 행동하지 않겠는가?" 변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직 나와 별 상관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두사람은 결국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내었다. 전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인류라는 것들이 살고 있는 작은 별을 만들어낸 것이다. 별빛의 세상이 열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펼쳐지는 융단인가? 하하하.. 인간들이 죽어서 별이 되게 한 건 정말 탁월했어. 이렇듯 아름답게 빛나지 않나?" 신 하나가 미소를 머금으면서 별들을 바라 보았고, 다른 한 신이 뭔가 책을 만들고 있었다. "흥.. 그거야 원래 아름답지. 아, 이거 보게. 난 이렇게 책을 만들어서 인간들의 생활을 도울 생각이네. 이게 내려가면 인간들은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네. 멋진 선물이지?" "하하하.. 원래는 그렇게 반대하더니. 자네도 참... 재미있다니까?" 그래서 생명의 서가 탄생했다. 인간들은 그 이후로 영원에 가까운 삶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그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자 마자, 의욕을 잃고 서서히 인구가 감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어서도 별이 되는 숫자보다 돌이 되는 숫자가 늘기 시작했다.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고, 모두들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할 수 없군.. 인간들의 생명을 다시 뺏았아야겠네. 그럼.. 이걸 내려보내면 되겠군." 역시나 그 책은 영혼을 간직하고선 지상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생명의 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죽음의 서는 그 목숨을 다시 빼앗기 시작해서 다시 인간들의 무한의 가까운 삶은 사라지고, 그 빛을 덜 받은 종족들은 보통 평균 이상의 생명을 가지게 되었으나, 예저의 인간들 전체가 그러하듯이, 이들도 서서히 멸종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죽음과 생명의 평행이 그 때부터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두책은 오랜 세월동안 있으면서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책은 서로의 공감에 의해서 하나의 소년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라플.. 나 자신이었다. "세이. 하지만, 이건 명심해라. 사람들을 위해서 항상 힘을 써야 한단다." 내가 세이를 보고 또박 또박 말해 주고 있었다. 세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스승님. 전 사람을 위해서 힘을 쓰는 게 너무나 힘들고 할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전 원래 생명을 앗아 가는 걸요?" 세이의 표정은 비장했다. "세이야... 너무 고민하지 말아라. 그건 책이 그렇게 하는 거지, 너가 생명을 빼앗는 게 아니다. 그러니 넌 여전히 내 귀여운 제자일 따름이란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은 소름끼치도록 붉은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어떤 일면에선 날 증오했었을지도 모르겠군. "예. 스승님. 그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잘 지키지 못했네요. 하지만, 용서해 주실꺼죠?" "물론이야." 세이의 귀여운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전신을 물들이고 있던 붉은 색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대단해." 누가 댁 같은 늙은이의 아들 한데? 증거를 좀 대보라고. "증거는 어디있지?" "하하하.. 재미있다니까. 죽음의 서는 아예 본체인 책 자체가 사라졌어. 그래서 이 혼 자체는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지.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려 하지 않았고. 그래.. 자네 품에는 생명의 서가 있지?" 그렇지. 그럼 이걸 태우면 혹시 키히가 살아나는 게 아닐까? 혹시 또 모르잖아? 세이도 그렇게 되었는데 키히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 아니겠어? 키히가 깨어나면 우리 셋이서 놀수도 있잖아? 저 아저씨는 끼워주지 말아야지. "그럼 이걸 태우거나 제거하면 키히의 영혼도 안전해 집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쉽다면 내가 예전에 없앴겠지. 생명의 서는 봉인해야 하네. 그게 거의 죽음의 서를 태우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네. 알겠나?" 모르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태우는 것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없애죠?" "없앨 수 없네. 그 책이 사라지길 원해도 사라지지 않아. 그러니 그걸 없애면 즉시 키히 자체가 사라지네." 무시 무시 하구만.. 예전의 불꽃 놀이를 봤을 때처럼 한 순간에 팍 사라져 버리는 건가? 그런 건 싫은데 말이지. "그럼 그녀를 깨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속으로 들어가면 되네." 이 아저씨가 농담하냐! 어떻게 사람 몸 속으로 들어가란 말야? "전 그런 재주는 없는데요?" "하하하.. 사람 몸에 들어가라는 게 아니네. 생각해 보게나. 그녀는 어찌되었던 책에 적을 두고 있는 신분이야. 따라서 죽거나 말거나 책에서 결정되는 걸세. 그러니 자네가 책 속에 들어가서 내용을 고치면 그만이야." 그게 아주 쉽게 들리긴 하는데 하면 아닐 거 같다. 어째. "수상해요." "검증서 보여주리?"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 역시나 인상을 긁어 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이 속에 들어가 봐야 할 거 같다. "좋아요. 가 보겠습니다. 기다리시죠." 책을 보고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 바보냐? 쳐다보기만 하면 들어가지면 그게 대체 뭐냐!" 특이한 방법을 쓰던 말던 들어간다는 자체도 엽기라고 생각하는데? 하기사 알리가 없지. 나이가 저렇게 많고 애를 600년에 걸쳐서 낳으면 저렇게 되는 거라고. 하여간, 이상해. "아무 걱정하지 말게. 내가 방법을 다 일러줄 터이니." 그게 제일 불안하다고 말하면 당신 믿겠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먼저, 저 생명의 서를 펼친뒤 들어가게 되는 사람 외에는 모두 간절하게 바래야만 한다. 그리고 들어가서 그녀의 영혼을 찾아서 끄집어 내오면 되는 거라고." 간단하긴 무지 간단하군. "성공 확률은?" 그는 잠시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라면 안하지." 역시나 이 사람에게는 뭘 물어도 도움이 안된다는 값진 교훈을 하고선 그 즉시 세이를 보았다. 그래도 같은 책이니 혹시 뭘 알지 모른다는 기대감이었다. "에.. 전 그런 거 잘 모르잖아요. 원래 조사하는 데도 소질도 없고.. 게다가 그 쪽 분들이 무섭잖아요." 그건 동감이야. 어떻게 그들이 저렇듯 무계획적으로 살 수 있는지 궁금하다. 신이 만들고 아무리 수석이나 하면 뭐하냐.. 급할 땐 모른다는데. 에잇. "자, 그럼 어쨌든 걱정이 되긴 하지만 들어가 보지요. 아, 그리고 나와야 할 시간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사실 그게 제일 걱정이었거든. 뭐, 아무나 알아서 나오거나 하는 건 아닐꺼 아냐? "뭐, 그 점은 걱정말게. 그렇게 오래 끌진 않을 테니까. 봐서 그녀의 영혼을 꼭 끌고 나와야 하지만 만에 하나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빠져 나오게. 자네 목숨이 더 중요하니 말이네." 그렇다는 말은, 그 속에 날 위험하게 할 만한 것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자나. ㅐ체 되는 게 없구만. "알겠습니다. 줄을 두 번 당겨보지요. 하하핫." 사실 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약간의 긴장 완화를 위해서 한 마디 하고 나니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그럼... 이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황금빛이 순식간에 나를 감싸 돌았다. 그리고 의식을 잃게 되었다. 까마득한 어둠이 내 전신을 감싸고 그리고 바로 그 가운데에서 가득한 물 속에 첨벙 빠져드는 느낌이 속속들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그 빌어먹을 아버지란 사람이 내게 뻥을 친 게 아니라면 아마도 이 곳은 그 책 속, 키히의 정신체가 있는 곳일 확률이 지대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다 믿은 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일단은, 밑져야 본전이다. 사람도 아니라 책의 의식이라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험을 하는 모양이다. 이토록이나 어지러운 생각들의 흐름을 보니.. 할 말도 없었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건 아닐 테지. 나처럼 아주 아주 특이한 경험을 가진 사람만 애인이 책이고, 사랑하는 제자 중 하나는 날 배신 때리고, 하나는 역시 책이고.. 잠깐. 나 혹시 굉장히 불행한 거였어? 으! 그걸 몰랐다니! 세계 불행한 인류 대상, 뭐 이런 것도 받을 수 있었던 걸 텐데.. 아깝다. 책의 의식 구조라는 것은 별로 특이할 점은 없었다. 키히의 의식이 깊이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걸 찾겠다고 떠나다니... 세상에. 먼저 그 안쪽 세계라는 곳은 붉은색과 회색이 묘하게 교차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 확실히 묘한 곳임에는 틀림 없었다. 주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고, 군데 군데 잉크병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이.. 키히가 있는 곳인가? 하지만, 어디서 찾냐..." 찾는다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확실히. 일단, 난 벌써 길을 잃기 시작했거든. 길이 어디더라? "저기요. 저기요." 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서 즉시 고개를 돌리자, 왠 책 한 권이 내 뒤에서 깜찍한 미소를 흘리면서 둥실 떠 있었다. "뭐야 이건!" 얼마나 놀라겠는가? 떠다니는 거하고 내게 말을 거는 건 분명히 다르단 말이다! "어머머머, 실례에요. 이곳에 인간이 들어온 건 처음이니까 봐줄께요." 계속 봐도 내 얼굴이 미남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보는데. "근데.. 넌 책이냐?" "당신 눈 나쁘죠. 봐서 몰라요?" 이젠 아주 돌겄다. 어쩌다 이런 이상한 놈하고 만나서리! "아니.. 알지. 그냥 확인해 본 것 뿐이야." 그 책은 이번엔 부르르 떨었는데, 낡은 갈색 표지에선 먼지가 ㄸㄹ어진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어쩜. 믿음성이 부족하네요." 이젠 아무 이야기도 안한다! 절대로! 그 책을 일견하고선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가자(물론, 길 따위 알리가 없다.) 그 책은 나를 졸졸졸 쫓아오기 시작했다. "왜.. 쫓아 오는 거야!" 갑자기 뒤돌아서 소리 지르자, 그 책은 한참 동안 가만있다가 내 주변을 펄럭이면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응.. 그건 말이지... 왠지 좋아서." 으아.. 이젠 책에게도 사랑 받고.. 기뻐해야겠다. 그나저나, 왠지 익숙한 느낌이야. 정겹기도 하고 말이지. "너, 이름이 뭐야? 책이라면 이름이 있을 꺼 아냐?" 왠지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운 책은 잠시 둥둥 떠있다가 꽤나 쾌활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헤헤헤.. 내이름 말이지? 좋으면 좋다고 하지. 참. 한 번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두라고! 내 이름은 생명의 서야!" 에? 앞의 그 닭살 땡기는 소설들은 다 그렇다 치고, 그 이름이 문제였다. 생명의 서라고? "너, 저자가 신이라면서?" "어? 어떻게 알아? 그건 극비야!" 극비고 자시고...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야. 그리고 모르면 여기 들어와서 이런 생쇼를 하고 있겠냐? 무리야. 무리. "아.. 그래?" 극비치고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얜 왠지 그걸 극비라고.. 가만, 얘가 혹시 생명의 서라면 키히 아냐! "너, 혹시 키히라는 사람 알아?" 잠시 그 책은 펄럭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내 눈 바로 앞에 섰다. 어이, 바로 앞에 있으면 안 보인다고. "아, 당연히 알지. 그리고 그건 사람이 아닌걸? 그건 나야. 내가 그렇게 한 거지. 음... 왜?" 왜긴... "아니.. 책 치곤 참, 성격이... 재미있네." 마지막 말을 하면서는 땀이 조금 흘렀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 거 같았다. 책이 저렇듯 이상한 성격이라니. "그치? 난 내 이런 성격이 장점이라고 생각해. 아, 그럼 혹시 여긴 키히 만나러 왔어?" 눈치도 빠르고 말이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내 말은, 그러니까 키히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거야." 책은 잠시 붉은 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갑자기 앞에 희끄옇게 되어 있는 한 영혼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 키히야. 너랑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네? 여기 까기 온 공을 봐서라도 잘 이야기 해봐." 상당히 시원스런 성격의 책이군.. 키히는 아주 하얗게 된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마지막 보았던 그 쟂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금발은 아무렇게나 늘어저 있었지만, 여전히 너무 아름 다웠다. "라플...!" "키히. 무사했군요." 그렇다.. 고질병 다시 등장! 키히만 보면 말투가 완전 경어체로 돌변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 왜 여기 오신 거죠? 전 이제 잠시 뒤면 의식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요. 그러니까.. 육체만 남게 되는 거죠. 라플. 어서 나가세요. 당신의 모습을 보는 건 너무나 괴로워요." 키히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선 가련한 여인 이백프로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런 게 모두 쓸모 없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래... 그래.. 이게 네 마음이야? 날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 시선은 키히를 꿰뚫고 그 뒤에 있는 책으로 가서 멈췄다. 내가 기억하는 키히는 친절한 성격이 절대로 아니었다. 참으로 어이 없게도 내 앞에 이건 키히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슨 소리지 라플? 내가 키히가 아니라면 누가 키히란 거야? 그리고 왜 널 보고 싶지 않겠어? 응?" 키히는 팔을 뻗어서 나를 안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녀를 뿌리쳤다. 그리고 책을 바라 보았다. "이봐. 난 현혹 따위는 당하지 않으니까 어서 집어치우라고." "쳇. 너, 너무 그러면 사랑 받지 못한다고." 어이. 책에게 사랑 받지 못해서 무엇하지? 정말이지 책의 이론이란, 웃기는 거라고. "사랑 받고 받지 않고의 문제가 아냐. 이것 보라고, 왜 이런 장난깜으로 날 붙들어 두려고 하는 거지? 이유가 뭐야?" 책 주위에 갑자기 어디선가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동시에 많은 구석에서 동시에 꽃잎과 나뭇잎이 날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럴수가! 너무해!" 황당한 성격의 책이었다. 갑자기 온천지가 뒤흔들리고 세상이 갑자기 아래 위가 바뀐 듯 했다. 이상하네. 여긴 물질계가 아니라 정신계잖아? "무슨.. 일이야?" 주변은 아직 미세한 진동을 하고 있어서 아까까지 심각한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뭐긴... 너 키히를 찾으러 왔다고 했지?" 이 바보 책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을 셈이냐! "당연하지!" "그건 나고.. 곧 키히이기도 해. 하지만... 난 말야. 너가 날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건 아주 달콤한 생각이었지." 아무리 성격좋고 돈 많아도 책이랑 결혼할 순 없다고... 이봐. "그래서..?" "돌아가세요. 그리고 그 곳에서 나와 만날 수 있겠죠. 하지만, 서두르는 게 좋아요. 그는 나를 완전히 없애려 하고 있으니까, 부디 절 구해 주세요." 책이 완벽한 키히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이 목소리였지. 처음 지하에서 책을 보았었던 때 들었던 소리었지 아마. "키히... 좋아." "예." 그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가 내 지금 마음을 읽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궁금했다. 다시 세상이 흔들리고 난 즉시 정신을 비우고 정신 세계를 천천히 탈출하기 시작했다. 책들이 무수히 뒤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내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거대한 검은 구멍이 입을 벌리고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줄곧 키히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어지럽게 널어져 있었다. 밖으로 서서히 빠져나와 내 정신은 빠르게 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떠졌을 땐,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이!" 세이가 눈 앞에서 침대 기둥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있었고, 그의 머리는 혹이 나서 무슨 선인장을 보는 듯 했다. 올록 볼록.. 그리고 난 황급히 일어서려 했지만, 오히려 바닥에 더 뒹글 뿐이었다. 팔과 다리가 동시에 묶여져 있었다. "젠장!" "욕을 하는게 아니란다. 넌 착한 아이니까. 알겠지?" 갑자기 방 한가운데서 뭔가 불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음.. 뜻밖의 만남은 아니라는 게 다행이었다. "반갑네요?" "아까 보고 또 보는데 뭐가 반갑니?" 흥.. 그럼 반갑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잖아? 세이 녀석은 내가 이걸 하는게 무의미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좋아.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면서? 좋아. 좋아.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손의 횃불은 정확히 어떤 책 앞에서 있었다. 가슴팍에 항상 있던 그 책의 중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세이를 쓰러트리고 이걸 꺼내간 게 틀림 없었다. "으..." 세이의 입에서는 단지 괴로운 신음이 나왔을 뿐이었다. "왜.. 냐고 묻고 싶은 게냐?" 내 아버지라는 사람 이었다. 살기로는 천년정도 산 괴물이나 다름 없는 인간. 게다가 날 사랑하긴 했다지만, 그건 진실을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당신.. 정말 제 아버지가 맞습니까? 어떻게 제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없애시려고 할 수 있죠?" "그건.. 아마도 널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야망 때문이었지. 난 천년을 살고, 그 동안 트라이너를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그래. 네 어머니... 그 사건으로 난 왕에게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지. 너가 내 아이가 맞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기다 다음에 나에게 어울릴만한 여자랍 시고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 녀석은 자신의 딸이 죽은 것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지... 그 전까지는 정말 이 두권을 그냥 봉인만 할 생각이었다. 그건 쉬운 일이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고 내가 왕위에 오르도록 해 본 거구나.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자리를 거부했으니.. 그로서는 상당히 못 마땅했을 수 있다.. 게다가 애인이랍시고 목메고 있는 여자가 책이라니? 하여간 나도 불량 아이군. "절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대신... 그녀를 살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는 날 순간적으로 노려 보는 거 같았다. "어리석은 놈! 이 여자는 비록 내 조작에 의해서라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해치고 앞으로 더 많은 생명을 빨아드릴 놈이다! 이게 없어져야 나도 비로소 안식을 취할 수 있단 말이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따위.. 내가 알 리가 없잖아요. 난 몸을 조금 더 비틀었지만, 여전히 움직여지지 않았고, 괜히 손이 붉게 달아 오르기만 했다. 아파왔다. 하지만, 키히는 이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당신도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당신은.. 그건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분명 죄값을 치루겠지만, 굳이 우리가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치루게 되어있습니다!" 순간 공작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언젠가.. 그게 오늘이지. 자, 타올라라!" 붉은 불이 책에 닿는 순간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눈에서 눈물이 비집고 흘러 나왔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내 평생의 애인은 이제 눈을 영원히 뜨지 못할 테니까.. "으.. 이거 놔라!" 눈을 뜨자, 장면은 다시 바뀌어져 있었다. 책은 아래 떨어져 있었고, 아버지의 목에는 소름끼치도록 하얀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키히...!" 키히의 무표정한 얼굴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했고, 그 목을 조르던 손은 매우 섬약해 보였다. "이것 놔라!"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그녀는 바닥에 구르고 있었고, 그녀는 어느새 세이의 앞쪽까지 굴러가 버렸다. "그녀를 살려 주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이제 품에서 작은 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널 위해서라도.. 이 여자는 여기서 끝나야 해!" 세이가 눈을 뜬 것은 그 때였다. "아함.. 응? 사부님, 우리 술래 잡기 하고 있었나요?" 순식간에 긴장이 확 풀려 버리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무서운 놈이다. 내 제자지만.. 가끔 황당을 넘어서서 이상할 때가 있어. "아니. 세이! 어서 날 풀어다오!" 라고 했지만, 세이는 나보다 더 잘 묶여져 있었다 세상에. 어려울 땐 뭘 의지해야 하냐. "스승님. 저도 묶여 있는 걸요? 그보다 차라리 키히씨에게 풀어달라고 하시는 건 어때요?"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저거.. 영혼은 아무리 봐도 없는 거 같은데 어떻게 일어나서 걸을 수 있지? 좀비인가? "그것도 괜찮겠지만.. 응?" 키히는 서서히 일어섰다. 그리고 거의 알아듣기 힘든 어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라플...넌. 날. 알아. 그리고. 나도." 무슨 소리야? 풀어 주기나 해다오. "나. 살고 싶.. 다?" "젠장! 당연하지! 살려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곧 나가서 구해 줄 테니까! 이 내가 말이지!" 그러나 손목의 조임 벨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천천히 그 성성한 백발과 함께 횃부을 들고 다시 책으로 가셔서 불을 붙이기를 시도하셨다. 그 때마다 키히의 입에서는 끔찍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꺄아아악!" 젠장.. 이럴 수가. 이럴 때 내가 아무 것도 못한다니. "스승님. 그 특유의 마법을 사용해 보세요." 그렇다. 마법. 그걸 잊고 있었다. 나, 마법사 맞냐? 마법으로 인해 손과 발의 족쇄가 사라지고 동시에 내 몸은 번개처럼 달려가서 책을 빼앗았다. 그 여파로 횃불이 바닥에 떨어지고 오랫동안 잘 말려진 이곳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세이!" 세이는 순식간에 마법으로 나오려다 버둥거리고 있었다. 저놈도 책의 화신이라면서.. 왜 저모양이냐. "너... 너.. 이게 무슨 짓이냐!" "보다시피. 이걸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겠어요." 그는 결연하게 문에서 딱 버티고 섰다. "날 죽이기 전에 통과할 수 없다." 잠시 그걸 보고 세이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고, 나는 그저 묵묵히 바라 보았으며, 나머지 키히는 어이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 보았다. "자, 일로 나가자. 아버지도 빨리 오세요. 여기 불 끄고 오신다면 아무 말 안하겠지만." 그리고선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비교적 2층이라서 아무런 상처 없이 쌈박하게 내려 올 수 있었다. 주변에선 내 포즈에 대해 왈가 불가 하고 있었고, 세이는 머리를 박았으며(그렇게 짦은 거리도 못 내려온다니. 어휴.), 키히는 그야말로 나는 새처럼 우아하게 내려 앉았다. 그리고 일일이 계단을 통해서 한 사람이 달려 왔다. 그리곤 외쳤다. "불 다껐으니 다시 가서 제대로 한 번 붙어 보자!" 이봐요.. 그리고 나서 왜 날 질질 끌고 들어가는 거야! 난 싫다고! 그리고.. "그만두세요! 사실은 알 고 계시는 거죠!" 그는 현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입구에서 서서 돌아보지 않았다. "뭘... 말이지?" "세상을 망하게 하는 건 바로 아버지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 구원기사란 거... 우리 일행을 말하는 거였어요. 맞죠!" "맞아. 그래. 난.. 너무 너무.." 너무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정신 상태는 꽤나 불안정해 보이고 있었다. 키히가 앞으로 나섰다. "괴로워 하실 것 없습니다. 저만 봉인되면 끝나는 거니까요. 그래요. 그게 끝이죠. 더 이상,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요. 죽음의 서도 같이 하실 생각인가요? 하지만, 여기 세이는 거의 잔념이나 마찬가지에요. 부디.. 죽이지 말아 주세요. 우리도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런 잔혹한 짓을 할 수는 없죠?" 왠지 우리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래... 그래... 봉인..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는 키히를 바라 보았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나?" "무엇을 말입니까?" 키히는 엄숙하게 그에게 물었다. "내게 주었던 생명들을 지금 당장 가져가게. 그래서 내가 영원히 이곳에 남아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걸 보지 않게 해줘. 그러니까.. 지금 당장." 키히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순간 푸른빛이 그의 몸에서 빠져 나왔다. 서서히 키히의 손이 푸르다는 걸 알게 되기도 전에, 내 아버지는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지!" "오.. 라플. 내 사랑스런 아기. 걱정하지 마렴. 넌 이제 어른이잖니? 혼자서도 잘 해쳐 나갈 수 있을 거란다. 그리고, 내 부탁을 들어주렴." 그는 귓가에 천천히 자신의 소원 아닌 소원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공작이 되면 제발 저 생명의 방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꺼져가는 생명은 왠지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서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슬퍼서 눈물이 나와야 하는데... 코만 찡할 뿐 그다지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난 키히를 바라 보았다. 그 곳에 있는 키히는 키히가 아니었다. "스승님?" 세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이젠 마지막 선택을 하러 가야 하는 것이다. "둘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구나." 세이와 키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원래 내가 목표하던 목적지인 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살린 일행은 우리 보다 약간 더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난 차라리 그들이 이걸 못 보길 바랄 뿐이었다. 사랑하는 세이에게... 사랑하는 키히에게 해 줄 일이 있었다. 키히는 가는 도중 한번도 내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건 그녀의 실수에 관한 일일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한마디 물었다. "키히. 당신은 사람들을 괴롭힌 것을 어떻게 보상할 생각이죠?" 그녀는 아주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글쎄요. 라플. 전.. 전..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없지만 그래도 그녀의 얼굴을 보니 왠지 평화로웠다. 그녀가 평화로워 보인다는 게 아니라 내가 평화로왔다. 왠지 안심이 되고, 걱정 같은 것이 되지 않았다. "자, 그럼 이리로 들어가면 된다. 따라오라고. 세이. 키히." 두 사람은 나를 따라 지하로 주욱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던 그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키히는 그 곳을 알고 있지 않았다. "여긴...!" 세이와 키히는 잠시 그 방을 바라보면서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키히와 세이는 여기 처음 보지? 여긴 내가 태어난 곳이야. 나도 꽤 오래전의 일이라 거의 잊고 있었는데 말이지... 아, 그래. 바로 저 동상이지." 동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내 어머니의 동상이며, 이제는 자신의 죄값을 위해 그리고 영원한 평안을 위해 재가 되어 버린 내 아버지... 한 며칠 전만해도 몰랐던 존재인데 이제는 아예 재가 되어 버렸다. "스승님.. 우시는 거에요?" 세이 녀석이 나를 동정하는 건가? 짜식. 많이도 컸군. 아서라, 아직 백년은 이르다. 이제 드는 생각인데, 이건 정신 연령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별로... 기분 나쁜 생각 따윈 하지 않고 있으니까 안심해." 동상의 뒤쪽에는 아주 평범한 시계 하나랑, 꽃 병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시계는 이미 오래전에 멈춰진듯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라플.. 지금 이런 이야기하면 싫어하실 지도 모르지만.. 꼭 말해야 하겠어요. 전... 당신을 아주 사랑해요. 하지만, 전... 인간이 아니죠. 그래요. 전 책이죠. 그래서.. 그래서 당신과는 결코 행복해 질 수없다고 생각해요." 난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손은 여전히 시계에 가 있었다. "키히.. 당신이 사람이건, 괴물이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심지어 전 마왕이 되어 버렸지 않습니까?" 세이는 왠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스승님... 그렇게 말해 준 건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그야, 너희가 책이라는 걸 몰랐으니까 그렇겠지. "세이도, 키히도. 사람들에게 용서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찾아냈어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키히." 키히는 고개를 들어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시계의 시간을 정확히 빼 버렸다. 항상 어렸을 적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시간이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정말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그리고 그건 내가 그 너머로 전진하기 위한 키워드(Key Word)였다는 걸. 문은 전혀 의의의 장소였다. 이 방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고, 서서히 내려가길 어느정도 멈추었을 때, 한 번 온 적 있는 거대한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방법은 내가 아주 오래 전에 이곳에 살 때 사용한 것이다. "사부님... 저건..." 이제는 책이 없어서 빛을 잃은 어두컴컴한 복도와 실내 한 가운데 바로 책을 올려 놓는 받침대가 비어서 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명의 서가 원래 있던 곳이지. 죽음의 서는 소각되었지만, 저 책은 안전했던 거야. 사실은 생명의 서가 훨씬 위험한 것이였는데, 대부분은 오래 사는 것보단 죽음을 두려워 했으니까...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 집결된 것이었지." 키히는 갑자기 내 팔을 붙잡았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던지.. 전 꼭 당신에게 말해야만 하는 게 있어요." 그녀의 얼굴은 한참을 고심한 듯,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생각을 말하려는 거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녀에게 꼭 해주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키히.. 시간은 많아요. 그러니 천천히 말해 보세요. 자, 우리 모두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까?" 손을 젓자, 세개의 편안한 솜털 의자가 나타났다. 우리는 그 위에 앉았고 다리를 쭈욱 뻗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오랜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녀에 관한 이야기면서, 또 슬픔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의 고통과 슬픔을 나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라플... 전 고백해야만 합니다. 아마도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 인간을 없애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겠죠? 그건.. 모두다..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그래요. 사실 그러했죠. 모두가 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 믿고 있었어요. 당신은 절대로 날 버리지 않으리라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난 즉시 그녀를 제지했다. "키히.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나중에 합시다." 그녀는 이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꼭 해야만 해요. 사람의 마음이란 변하는 거에요. 라플. 당신이 그러하듯이... 전.. 전.. 그래요. 책이었죠. 그래서인지 기억이란 게 절대로 변할 수가 없거든요. 이제 되었어요. 저는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영원히 어두운 봉인아래 살도록 할께요. 그러니까.. 그녀와 행복하게 되세요." 그녀라면.. 메데이레나를 말하는 것이리라. "스승님! 대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어느새 어떤 여자랑 눈이 맞았... 으! 왜 때려요!" 아무리 너가 죽음의 서이고, 인간의 죽음을 내릴 수 있다는 그런 특수 능력이 있어도, 넌 내 제자니 맞아야 한다. "키히. 그건... 그래. 그래. 난 당신이 내게서 맘을 돌렸다고 생각했어. 날 주욱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알아봤던 거지?" 그리고, 내 가슴팍에 손을 쑤셔 넣기도 했고. "설마요. 알아보면서 스승님을 괴롭혔을리가 없잖아요?" "천만에." 키히의 얼굴은 이제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확실히 난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책이라는 걸 몰랐지만, 어떻게 평범한 사람의 사랑이 100년이나 지속될 수 있겠는가? 아니.. 나는 그랬다. 실제로 여자를 만날 일이 없었으니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죽은 줄 알았는데 내가 다시 나타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마법의 기운이라는 것은 절대로 유전되지도 않고, 어떤 사람이라도 같은 빛을 띄진 않는다. 명도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그녀 정도의 마법사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도 없지 않은가? "키히님? 얼굴이 하야신데요?" 그녀의 거짓말은 거기 부터였다. 날 사랑한다고 한데서 부터.. 그녀는 단지 날 가지고 싶었던 거였다. 날 영원히 책 속에 넣어두고.. 그렇게.. 그리고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날 죄책감에 자신을 벌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참이겠지. "당신은 내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어. 항상 이상했지. 끊임 없이 달려드는 괴물들, 그리고 항상 결정적으로 날 죽이려고 했을 때마다.. 내가 마왕의 계승식을 하지 못했다면 이미 죽었어야 했겠지. 아닌가?" 그녀는 갑자기 큰 소리를 치면서 일어났다. "아냐! 난 당신을 사랑해!" 그렇겠지. 소유욕도 사랑이라면 사랑이니까. 세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 보았다. "아버지를 좋아했던 거야. 아닌가?" 거의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진 그녀의 얼굴은 이젠 확실히 그녀의 입으로 전해 듣지 않고는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라플.. 난!" "알 수 있었지. 그의 그 오랜 생명, 태어나는 아이들마다 죽고, 그 어머니들의 불행이나 사망들도.. 아마도 당신은 그들을 저주하거나, 생명의 기운을 조금씩 뺏었겠지. 그리고 힘을 축적하고... 그걸 알지 못한 아버지는 그렇게 살았고. 내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생명력을 너에게 완전히 주어서 날 지킨 대신 널 저 밖으로 내보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냐? 아니냐구! 키히! 넌 날 속였어!" 100년이나 사랑했던 연인에게 배반당하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장소에서 아무에게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그걸 듣고 싶었다.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했다는.. 그런 흔한 삼류 연애소설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라플.. 오해에요. 그건.. 그건.. 그가 너무 늙어 버려서 이지. 바보 같은 인간. 내 옆에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순간 주변이 싸늘하게 바뀌는 듯 했다. 세이는 놀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고, 내 가슴 한 구석은 그야말로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난 네 주위에 없었는데 어떻게 힘을 얻게 되었던 거지?" 눈물이 하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던 걸까? 응? "그건.. 내가 아니야. 내가 왜 그의 아이에게 그런 일을 해야 하나? 단지... 저 빌어 먹을 죽음이 너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지. 완벽한 죽음의 방해라고 할 수 있다고. 하! 그래서 난 널 죽이기는 커녕, 손도 데지 못했지.. 그래.. 그래. 그래도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번엔 신이 방해했지." 가슴이 괜시리 아려 왔다. 메데이레나. 미안하다. 난, 이곳을 벗어나기 힘들 거 같다. "그래... 그랬구나. 키히. 솔직해서 좋긴 하군." "그렇다곤 해도 이제야 널 죽일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어. 세이가 아주 힘 없는 놈이라는 걸 알았고, 그는 이제 인간이나 같다는 사실도. 후후후... 책을 잃은 영혼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 게다가 너에게 자신의 힘을 넣어 준 어리석은 녀석 말이야. 하하하... 좋아. 좋아!" 세이의 얼굴은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세이가 살짝 내게 말했다. "스승님. 저 기억이 안나는데요... 저도 모르는 일을 어쩌라고. 웅..." 세이는 살려야 했다. 이곳에 있다가는 녀석도 괴롭게 될 지도 몰랐다. 아마도 필히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 어두운 벽들의 차가운 감촉이 내게 전해져 왔다. 그들이 속삭였다. 저 책은 여기서 많은 힘을 비축했고, 그 힘으로 정말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너의 어머니도, 너의 아버지도 죽여 버렸다고. 복수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죽어간 사람들을 봐서라도 그냥 보내선 안된다고 끊임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난 어머니의 환상을 보는 거 같았다. 그녀는 내게 미소짓고 있었고, 항상 그랬듯이 아름다운 자장가를 들려주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 곁에서 아주 멋진 담배 파이프를 물고 계셨다. 모든 게 여름날의 꿈들처럼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환상이고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난 이미 100살을 더 먹은 노인이었고, 저기 서 있는 한 때 내가 사랑하는, 아니 지금도 사랑하는 저 사람은 날 죽이고, 내 가족을 죽인 사람이었다. "스승님을 헤치면 용서하지 않겠어!" 세이가 용감하게 내게 소리쳤다. 난 세이를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동시에 그를 저 멀리 벽 쪽으로 밀어 버리자, 그 뒤의 벽이 스르륵 움직이면서 세이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이제 세이는 정신을 차려 보면 자신이 성 내 분수대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승님! 제발.. 제발 이것 열어 주세요!!"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물살에 의해 싫어도 밀려나가게 되어 있었다. 키히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 보다 나를 다시 응시했다. 저 눈동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행복한 추억을 같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랑한 사람은 그게 아니었다. 날,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시 사랑을 애원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긴 했지만, 그건 용서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내 부모의 원수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키히. 이제... 널 봉인하겠다." 그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지만, 난 그걸 무시하기로 했다. "어리석은...! 신의 마력을 받은 나에게 대항하다니! 그저 가만히 있었다면 너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정한 연인 역할을 해 줄까 했었는데 말이다. 하하하핫." 이젠... 그 그리웠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겠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훗.. 물을 잔뜩 뒤집어 쓰시고 하는 인사말 치고는 우아한데요?- -죄송합니다.. 제가... 예. 마법을 쓰다 실수로..- -후후후. 그거 제가 그런거에요. 일부러 놀려 드릴려고. 헤헤. 화나셨어요?- -아뇨. 괜찮아요. 요정이 장난을 치는 거 정도는 이해한답니다.- -전 요정이 아니라 엘프지만, 당분간 쫓아다니면서 요정같이 하는 것도 재미있겠어요? 프라운은 항상 그녀를 싫어하곤 했다. 이것도 그런 이유에선지 모르겠다. 내가 마왕과 싸우러들어갈때, 어쩌면 그녀는 잘 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왕이 죽음과 동시에 나도 죽을 수 있으니까. "자, 이제 슬슬 끝을 내도록 합시다! 라플!" 그녀의 손에서는 마법으로 만들어낸 화려한 창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장 나를 향해 찔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녀는 마법사 답지 않게 그걸 정말 잘 휘두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도 검공부를 많이 한 덕에 그걸 제법 피할 수 있었다. 한 구석에서는 줄곧 들리는 한마디가 내 귀를 울리고 있었다. "나도.. 바라던 바야." 그녀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는 어느 한 순간 교차하면서 서로 많은 걸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아직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약점 삼지 않았다. "멈춰라!"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살린과 케빈의 모습이 장내에 드러났다. 이 네사람은 모두 밖에서 들어온 듯 했다. "우리도 도우겠습니다!" 나는 즉시 옆에 선 살린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되었길래 여기 다 모인 것인가 하고. "흑 때문이었다고. 흑이 자신을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스승인 키히였다고 이야기하고 여러가지 정황 설명을 하던 중에 깨닭게 된 것이지. 뭐. 그녀는 바로 아무도 자신의 이용가치가 없다면 믿지 않고, 필요 없다고 여기는 그런 성향이 있었던 걸 알아낸 거야. 그리고 우린 곧바로 함께 사라진 라플, 너가 걱정되어서 왔던 거야. 역시나 예상대로 심각하군." 차라리 모두가 오지 않는 편이 쉽겠다는 생각이 싸운지 1분도 안되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싸우에 즉각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싸우자 마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살린은 즉시 뒤로 빠져서 신성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지만, 키히는 영악해서 뒤로 재빨리 돌아가 그 녀석을 기절시키곤 내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의 칼이 하나둘 바닥으로 내쳤다. 그런데 그녀는 그들을 굳이 죽이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매우 놀랍게도 그녀는 우리 모두를 일견하고 내게물었다. "하하하하.. 모두들 많이도 모아놨군. 하지만 라플. 잘 알고 있겠지만, 저런 사람들 백명이 와도 매 한가지야. 알지?" 그녀의 날카로운 창이 정확히 나를 겨누고 있었다. 난 그창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이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정확히 나의 사랑하는 키히에게... 그걸 보고 난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걸 가지고 있었다. 왜? 날 사랑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날 죽일려고?" 마력따위론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고 있었다. 신의 마력과 가장 근접한 마력을 소지한 그녀가 아닌가. "그래." 그녀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엘프답게 감정 조절이 완벽했다. 대단한 여자야. "그럼 어서 찌르라고." 그녀의 손이 멀리서 부터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때, 흑이 달려와 그녀의 창을 밀쳐내고, 순식간에 엘류시아가 무슨 재같은 걸 뿌려서 그녀의 눈을 감게 했다. "라플! 어서 그녀를 책에 봉인해! 어서!" 케빈이 재빨리 소리를 질르는 순간 난 손에서 하나의 결계를 완성 시켜서 책을 그녀에게 들이밀고 그녀의 눈동자가 확대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책을 펼쳐 버렸다. [흙은 흙으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라!] 책은 놀라웠다. 생명의 서 원본에서는 아주 강한 바람이 불러 오듯이 키히를 완전히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빨아드리다 결국 창 하나만을 남기고 완전히 잠잠해졌다. "창...인가?" 책을 바라보고 한숨 쉬고 다시 일행을 바라 보았다. 이제 끝난것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임시방편적인 주문이었다. 나는 서서히 그 책을 책 받침대에 올려 놓았다. 책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 난, 원래 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살린, 하나 꼭 전해줘." "뭘... 말이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살린은 다리에 큰 상처를 입은 듯,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흑과 엘류시아는 왠지 동료의 원수를 갚았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슬퍼서 울고 있었고, 케빈은 살린을 부축하고 있었다. "마왕을 봉인한 건.. 세이가 했다고 해 둬. 그럼... 녀석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은 안해도 괜찮을꺼야. 원래는.. 원래는 목수을 바쳐야 할 수 있는 거지만, 이거.. 생각보다 난 괜찮을꺼야." 살린이 미처 내 곁에 오기도 전에, 나는 온 생명을 쏟아서 그 책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왕으로서의 내 힘과 원래의 마력들이 방출되어 힘의 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책의 뚜껑에 거대한 문자를 남기고 있었다. 봉인의 주문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세이가 나중에 이거 가르쳐 달라고 해도... 영원히 가르쳐 줄 수 없겠구나. 참.. 나도. 이젠 걱정따윈 하지 않아도 되는 건데 말야. 내 손이 올려져 있는채로 봉인의 의식이 거행되기 시작했다. 책은 더더욱 심하게 들썩 거렸지만, 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책에서 어떤 영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오래전 내가 아이었을 때 그녀가 있던 곳에 온 기억이었다. 그녀는 겨우 날 알아보고 반가워 했었다. 그리고 슬퍼했다. 다시는 사람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창으로 날 찌를 때 그녀는 멈췄었다. 어쩌면 그녀도 나를, 아주 싫어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종말이다. 그녀는 영원히 이곳을 나올 수 없을 것이고, 나 역시 이곳에서 점점 사라질 테니까..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타났을 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다시 착한 소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봉인은 영구적인 게 아니니까.. 언젠가 그녀가 뚫고 나오더라 하더라도, 날 아주 미워하지만 않는다면 좋겠다. 진심으로.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라플, 우리 함께 날씨 맑은 날 같이 피크닉을 가는 거에요. 그러면, 아주 좋을 텐데요. 그리고 같이 낚시도 해요. 그러면 아마도 당신은 저에게 낚시를 가르쳐야 할꺼에요. 나, 좋은 학생이 될 테니까, 꼭 그렇게 해요. 참, 제가 어제 꿈을 꿨는데 말이죠? 아주 무서운 꿈이었어요. 내가 나쁜 여자가 되서 당신에게 거짓말하고, 사람을 죽이고.. 세상에. 너무나 무서웠어요. 그래도, 그 여자는 당신을 사실은 아주 많이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그래서... 겨우 안심하고 잠이 들었어요. 당신이 제가 잠든 사이에 아주 오랫동안 곁에 있어 준다고 해서요. 그래서,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았어요. 라플, 듣고 있는 거에요? 자꾸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니까 모두들 당신을 물렁하게 보는 거라고요! 듣고 있냐고요!"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그 수풀 밖에서 미소지으면서 그녀 이마에 키스했다. "나의 엘프 키히. 진정해요. 전 항상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나 다름 없으니까요. 알고 있었어요? 저도 그 꿈을 꾼 거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당신이 절 죽이려 했어요. 하지만, 제가 죽게 된다는 것보다도 당신이 절 사랑하지 않는 거 같아서 아주 두려웠답니다. 다시는 제가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 꺼라고 맹세 했던가요?" 키히는 입을 삐죽히 내밀었다. "그런 맹세 한 적 없어요. 지금 하세요!"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왠지 우린 이 손을 계속 잡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요. 내 사랑. 전 앞으로도 키히. 당신 옆에서 절대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 거랍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을 계속 계속 사랑할테니까요." "응! 그럼 되요!" 나무들 사이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꽃향기가 짙게 퍼져갔다. 그녀가 멀리서 내게 미소짓고, 난 그녀를 위해 화환도 만들어 보았다. 너무나.. 행복했다. 언제까지나 그녀는 그렇게 내 옆에 있을 것이었다. 계속 손을 꼭 잡은 채로 옆에서 날 위해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슬픔도 없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와 나의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 카와세리크 잎의 전설처럼 그렇게 주욱 같이 있을 것이다. 그게 나와 그녀의 사랑이다. -우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입니다.- 에필로그 어쩌면 세상을 지내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있다. 요 근래 나바스와 트라이너가 다시 전쟁을 시작한 것도 사실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역시 전쟁 때문에 막사는 시끌 벅적했다. 물론, 내 막사에 올 만큼 간덩이가 부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나 있다면 엘류시아 총사령관 정도일까... 그녀는 정말이지 수완도 좋고, 일단 능력 자체도 출중한 편이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땐 그녀 남편의 역할이 톡톡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궁정에 모든 일을 맡아하는 재상이라는 위치가... 대단하지 않았던가 싶다. 난 낙하산 인사라고 그를 놀려댔지만, 그는 그야말로 진지한 어조로 우린 원래 대단한 사람들이야라고 말해서 나를 다시 웃게 만들었다. 나중에 케빈형도 들으면 얼마나 웃을까? 아, 그러고 보니 케빈형은 전쟁이 터지자 정말 이곳 저곳 불려가면서 죽도록 고생을 하고 있었다. 친구가 재상인 건 정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거다. 케빈형은 평소에 그렇게 반 신도적 생활을 하더니 피스트레이카 영지에서의 사건이 터지고 나서 한참 뒤 연락해 보니 글쎄, 신관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얼마 뒤엔 대사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아는 분들이 귀뜸해 주었다. 대 자애의 신전도 이젠 몰락이구나. 후후. 흑형은.. 아, 그 형은 아직도 본명을 모른다. 아마 평생 그 형의 두건뒤의 얼굴을 보게 되는 사람은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두건뒤의 얼굴이라니... 왠만한 괴물들은 다 꼬리를 감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할 일 없이 이곳 저곳 기웃 거리는 게 아닌가 싶지만, 내일은 나바스 북방에 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이츠는 바르하잔의 기사단장으로서 이젠 중앙에 와서 일하고 있다. 아, 참. 나는 피스트레이카 영지를 받고 내가 주제에 공작이 되었다. 뭐, 그래 봐야 그 영지에 있는 건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다. 이곳 저곳 불려 다니면서 여러가지 일 하기도 버겁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반대는 전혀 없었다. 뭐, 당연했다. 마족도 공포에 떨게 하던 위대한 키히님을 봉인한 사람의 제자이고, 사람들이 알기론 내가 봉인한 걸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원래 내 위의 형인 율지스는 배신 때리고 어쩌다 보니 죽어 있었고, 스승님의 아버지는 죽어서 가루가 되었으니.. 공로로 내가 일등 공신이 되어서 어쩌다 보니 귀족이 된 것이다. 책 주제에 귀족이라니, 좀 우습다. 나를 일화로 써진 서사시 같은 걸 보고는 거의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그 유명한 라플이 예언을 하고 그 제자가 사건을 해결했다는.. 그런 웃기는 일이었다. 뭐, 반론의 여지는 없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다. 분명히 말해서 난 스승님을 아직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승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다. 정확히는 활동을 정지하고 계시다고 해야 한다. 봉인 상태에서 완벽하게 정지. 그 주위에는 점차 마력이 새어 나와 이제는 그 주위에 수정 같은 걸로 가득 차게 되었다. 거기 갈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기껏해야 나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뭐, 스승님의 절친한 친구이자, 배신자이기도 했었던 프라운과, 그와 같은 마족 하브라이드 군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뭐, 마왕이 봉인된 덕에 마족들의 힘이 격감되긴 했지만, 이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인간과 마족이 서로 융합하게 된 것이다. 내 부하 노릇을 하고 있는 제자 하나도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다. 신기하기도 하지. "스승님. 차 드셔야지요." 이 녀석은 말하기가 무섭게 차를 가지고 오는구만. 하핫. 마침 차가 먹고 싶기도 했지. 이제 겨우 일곱살 남짓한 녀석은, 내게 마법을 잘만 배우면 크게 대성할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다. 뭐, 일단은 기대를 걸고 있지. "오. 그래. 거기다 두고 가렴." "예." 얜 나의 어렸을 적과는 완전히 틀리다. 난 그야마로 어리광 부리면서 유년기를 다 보냈는데, 이 녀석은 그야말로 탁월한 성실함을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다. 뭐, 내가 지금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만에 하나 제자가 나 같은 놈이었다면 진작에 때려 치웠을 것이다. 어쨌든, 하브라이드와 프라운은.. 뭐, 스승님의 그런 돌발 행동에 꽤나 충격을 먹은 게 사실이다. 특히나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 때문에도 더 충격을 받았던 것이었다. 내가 제일 슬펐던 것은 나중에 스승님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프라운이 우는 것이었는데, 난 그 마족이 우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내 제자 녀석이 그러는데, 전통 마족, 그것도 귀족쯤 되면 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관하다고 한다. 프라운은 울면서 그 앞에서 예전에 자신이 그를 배신했던 것까지 말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하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하브라이드가 그를 끌고 돌아갔다. 아, 그래서 프라운과 하브라이드는 그 성에 계속 남게 되었다. 어차피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그들에게 그들의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책상에는 지금 한통의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이건, 발신자가 나바스의 황공하옵게도(이 말투는 케빈이 즐겨 쓰곤 한다. 꽤 재미있다니까.) 황녀께서 보내신 서문이다. 그녀는 나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 <지금쯤 무척 바쁠 세이키르에게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들어 날씨가 좀 쌀쌀해지는데, 전선에 있을 세이군은 무척 추우시겠군요. 전 이렇듯 울적해지는 하늘을 보면 피스트레이카 영지와 그 아름다운 성, 그리고 그가 생각납니다. 제가 이런 편지를 드려서 무척 놀라셨겠지요? 하지만 꼭 한 번, 이렇게 그와 가장 친한 당신에게 이 편지를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양국간의 전쟁이 심해지니 이젠 언제 그곳에 가 볼 수 있을지도 아득하군요. 이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그냥 물 흐르듯 흘러 버리니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당신은 그 분의 제자로서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전 그래도 제 가슴이 제일 아픈 거 같습니다. 모두들 그래도 언젠가 그가 다시 일어나면 행복해 지겠지요. 하다못해 그 마족 친구들 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세이군. 전 행복해 질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했더군요. 그는 혼자 남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면서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실천했더군요. 전... 그가 깨어난다고 해도 혼자이기에, 슬퍼지기만 합니다. 세이군,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가 마지막에 하던 말이 떠오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어쩌면 절 아주 조금 정도는 좋아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겠죠. 그럼.. 이런 편지를 쓰고 있지 않을 텐데요. 저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뒤에 전 대한민국의 왕족과 함께 결혼하게 됩니다. 이름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모두 중요한 게 아니군요.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는 트라이너에 갈 수 없는 이 때에 무척이나 그 곳이 그리워 진답니다. 세이군. 우리 모두 행복해지는 그런 약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럼 더 이상 고민 따윈 하지 않을 테고요. 저희 오빠는 그러시더군요. 제가 비록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하지 않았느냐고요. 오빠에겐 아주 소중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에 비하면 전 행복한 편이지요. 비록 그런 식이라도... 아직 살아있고, 적어도 자신은 행복한 모양이니까요. 이거, 약간은 괘씸해지는데요? 이런 멋진 여자를 차버리고 말입니다. 나중에 깨어나면 따귀를 때려 줄 껍니다. 세이군. 언젠가는 우리 모두 행복해 질 때가 오겠죠. 그리고, 저도... 행복해 지고 싶답니다. 그럼 건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당신의 절친한 친구 메데이레나로부터> 난 그 편지를 읽으면서 조용히 슬픔이 밀려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어른이 된 그녀에게서 편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들은 바 있었다. 나바스의 황제가 독신을 고집하는 바람에 그녀가 결혼하여 낳는 아이가 왕위를 이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결혼이 정략 결혼이라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난, 일종의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녀를...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실천에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스승님. 아까 차 다 드셨으면.. 뭐하세요?" 나는 귀여운 제자에게 찻잔을 건넸다. 그리고 빙그레 미소지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이건 말이지. 마법진이라는 거야. 난 지금 어디 다녀 올껀데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아, 엘류시아가 또 히스테리 부리면 적당히 네가 탄 차를 넘겨주면 괜찮을 꺼야." 꼬마는 입을 비죽거리기 시작했다. "스승님. 엘류시아님의 히스테리는 정말 가관이라구요!" "어릴 땐, 그런 걸 배워나가는 데서 시작하는 거야. 그럼. 다녀온다." 마법진이 붉게 빛나고 순간적으로 난 나바스 왕궁 지하에 도착해 있었다. 어떻게 했냐고? 예전에 사부님이 어느 왕성이든 이런 비밀 출입구가 있다고 했지. 이런 게 도움이 될줄은.. 응? "세이키르군?" 눈 앞에서는 짐을 잔뜩 들고 있는 왠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한가지 그녀에게 예전과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아마 그 무시 무시한 성격 정도일까? "데리러 왔습니다. 황녀님. 부디... 제게 그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비록 제 스승님처럼 잘생기지고, 멋지지도, 마왕도 아니고, 특이한 마법을 아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녀의 얼굴은 금새 흐려졌다. "난... 이젠 다 잊었어요. 세이. 하지만. 글쎄.. 역시 만나면 때려 주고 싶어서 일려나?"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즉시 마법진으로 들어갔다. 문이 콰당탕 소리를 내면서 열리고 왠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황녀 마마! 어디 가십니까!" 그녀는 방긋 웃으면서 내 팔을 꼬옥 잡았다. "보면 몰라? 야반 도주!" 실소를 머금으면서 피스트레이카 영지로 이동했다. 아마 좀 많이 벙쪘겠지. 사실, 아무리 근래 마법사가 늘은 나바스라도, 나 같이 엄청나게 많은 마력을 소지한 인간은 없을 테니까. 음... 피스트레이카 영지의 성의 지하는 여전히 조용했고 고요했다. 나와 그녀는 손을 잡고 어둠을 의지하며 걸어갔다. 프라운과 하브라이드는 보이지 않았다. 자는 모양이지? "여기야. 이 시계 초침과 분침을 빼면 된다고." "응..." 어릴 적 장난치던 때로 돌아간 거 같았다. 그리고 서서히 방이 내려가고 우리는 지하와 연결된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썰렁하던 방은 이제 아름다운 수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마력에 의해.. 이렇게 된 건가봐." 메데이레나는 그걸 멍하니 바라 보았다. 뭐, 당연한가? 그녀의 시선은 중앙에 있는 책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있는 어떤 수정 속에 있는 한 사람에 가 꽂혔다. "스승님..." "응. 그러네. 뭐야. 정말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잖아, 너무해."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은 정말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건가? 부럽구만. "나중에 깨어나면 개패듯이 한 번 때려봐. 그게 네 전공이잖아." "우.. 아냐. 이렇게 보여도 나바스의 우아한 황녀 마마라고." 어련 하실까? "잘 봐둬. 또 언제 볼 줄 알겠어." "응.. 그러네." 스승님은 어릴적 나를 패실 때와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웃고 계셨다. 혹시... 꿈 속에서 계속 책을 패고 있다든지 그런 건 아니겠지? 오.. 자세히 보니 저 포즈! 책을 패고 있는 거 같기도 해! "스승님. 안녕. 행복해야해요. 스승님이 눈을 떴을 때 설령 제가 없다고 해도.. 행복하실 꺼에요. 알았죠?" 그리고.. 프라운이나 하브라이드는 곁에 있을 거잖아? 그리고.. 절대로 메데이레나가 죽기 전에 깨어나면 안되요. 개 패듯이 맞을 지도 모른다고요. "그럼.. 안녕." 문이 닫히고, 다시 그 곳은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되었다. 언제 까지나.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