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노멀 마스터 Name : Cigarette男 Date : 28-05-2002 21:28 Line : 143 Read : 9629 [1] - 1장 가면의 마법사 (1) -------------------------------------------------------------------------- ------ 서재의 좁은 창문에는 하얗게 성에가 끼어 있었다. 카라는 손바닥으로 창유리를 문질러 뿌 옇게 흐린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바깥 풍경도 별다를 게 없었다. 온종일 내린 눈으로 하얗게만 보일 뿐. 유리에 이마를 붙이고 위쪽을 열심히 살폈지만 어두운 하늘은 맑아질 기 미가 없었다. 다음 날도 눈이 더 내릴 모양이다. 카라는 유리에서 몸을 떼고 손을 비비며 조 용한 서재 한가운데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편이 좋았다. 어린 시절, 혼자 놀고 있노라면 종종 들려오는 말들이 있었다. 주방에서, 식당에서, 창문을 닦거나 음식재료를 다듬으며 모여 소근거리는 소리들. “카라 아가씨 좀 이상하지 않니? 무슨 어린애가 그렇게 눈을 빤히 쳐다본담. 무서워하는 법도 없고.” “게다가 제 나이로 보이지도 않아. 돌아가신 마님하고도 하나도 안 닮았잖아? 도련님들하 고도 딴판이고. 다른 데서 데려온 아이 아닐까?” "음침해." "기분나빠." 뭐, 그런 정도는 약과였다. 심한 소문도 많았다. 요정이 바꿔치기한 아이가 아니겠냐거나, 심 지어는 요물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카라가 고개를 들고 가만히 그들을 쳐다보면 기분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돌리던 사람들. 사람들이란 종종 다른 사 람이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다행히도 카라는 그런 말들 대부분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추측 중에는 진실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 집의 친 딸이 아니었고, 어떻 게인지는 몰라도 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친부모의 친구가 아니었을까 싶은 양아버지는 친절했다. 그는 자그마한 성의 성주였다. 정말 작은 영지였다. 왕의 이름이 뭔지는커녕 수도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변방의 작은 마을. 겨울은 길고 혹독했으며, 마을을 외부와 차단시키고 있는 깊은 숲과 계곡이 마을 사람 들을 먹여 살렸다. 대부분의 곡물은 목재나 모피와 맞바꾸어 들여와야 했는데 그건 즉,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히기라도 하면 식량난에 부딪친다는 의미였다. 카라의 양아버지와 그 뒤를 이은 큰아들 카트니는 꽤 유능한 편이었고, 영주로서는 상당히 관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다지 굶주리지 않았다. 숲이 울창하다 보니 사냥이나 고기잡 이, 나무열매 채취 등으로 빵을 대신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실종자나 늑대에 물려죽은 사람이 해마다 나오기는 했지만. 카트니 역시 양아버지 못지 않게 친절했다. 아니, 친절 이상이었다. 그만이 가족 중에 유일 하게 카라를 진짜 동생처럼 생각하고 책임감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런 애정과 책임감 은 과히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나타났다. 큰오빠로서의 책임감에 불타는 카트니의 눈에 어 린 여동생은 아무리 좋게 봐줄래도 문제가 넘치는 아이였고, 그는 그 문제를 고치겠다는 일 념으로 지치지도 않고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작은 오빠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카라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몇 년 전에 수도로 떠난 후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외에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는 없었다. 카라에게 정말 가까운 사람은 유모 하나뿐이었다. 남쪽 섬나라 어디쯤에서 왔다는 얼굴이 검은 유모. 그녀는 카라가 음침하다거나 기분나쁘다고 수군대는 이들에게 버럭 화를 내곤 했다. 그녀는 카라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성이 늘 춥기 때문 이다, 햇빛을 많이 받지 않아서다, 구석에 틀어박혀서 책만 읽으니까 그런 거다, 또래 친구 가 없어서 그렇다 등의 핑계거리를 무수히도 생각해내며, 약하게 태어난 강아지 주위를 맴 도는 어미개처럼 카라를 감싸고 돌았다. 그런 핑계가 통할 거라면 두 사내아이는 어째서 멀 쩡하단 말인가? 어쨌든, 카라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절대적인 자기편은 하나만 있으면 족 한 법이다. 뭔가에 화를 내며 울부짖고 발버둥치던 자신을 달래던 유모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말을 잘 듣지 않으심 안돼요, 카라 아가씨. 안그러면 커다란 늑대들이 와서 물어간답니다. 무섭지요?” 어린 카라는 울음을 뚝 그쳤지만,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작은 아이는 눈을 동그 랗게 뜨고 유모를 쳐다보며 웃었다. “커다란 늑대? 왜 늑대야? 커다란 여우라든가 고양이는 없어? 기왕 커다란 놈이라면 호랑 이가 좋은데.” “아가씨!” 유모는 사색이 되어 소리를 빽 질렀다. 카라에게 사랑을 듬뿍 쏟아주던 그 유모도 육년 전, 카라가 열 살 되던 해 병으로 죽었다. 카라는 손떼묻은 나무 사다리를 옆으로 밀어 오늘 정리할 책장 앞에 세웠다. 두 발바닥만 겨우 붙일 정도의 좁다란 사다리 위에 올라서서 손을 뻗어 먼지쌓인 책을 꺼내는 일에는 나 름의 스릴이 있었다. 사실 그녀의 작은 키로는 한껏 몸을 뻗어도 맨 위에 있는 책을 꺼낼 수가 없었으므로, 모험을 감행하다가 떨어지는 일도 곧잘 있었다. 용케 그다지 다친 적이 없 어서 코히마 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유모가 죽고나서 몇 년 후에는 아버지가 병석에 누웠다. 유모만큼은 아니었어도 나름의 애 정을 보여주던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된 후, 카라는 성의 서재에 틀어박혀 지냈다. 오빠나 다 른 사람들을 피해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곳은 그곳 뿐이었다. 아무리 변경이라도 예의는 예의, '성의 아가씨'는 험한 일을 해서도 안되고, 함부로 돌아다녀도 안된다. 그나마 드레스 를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도피처는 책뿐이었고, 말벗은 서재관리인 코히 마 노인 뿐이었다. - 색깔로 나타낸다면 내 삶은 지루하고 칙칙한 회색일 거야. 눈이 내린 위에 또 눈이 내려 단단히 얼어붙고 떼묻어서 원래 바닥 색깔도 알아볼 수 없는 회색. 열 여섯의 겨울 저녁, 카라는 조심스레 책을 뽑아들며 생각했다. 재미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언제나 같은 얼굴들, 레퍼토리를 바꿀 줄도 모르는 듯한 수근거림, 이젠 식사마저 맛이 없어 졌다. 그나마 최근에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들 정도가 흥미로운 일일 뿐이었다. 마침 코히마 가 뭔가 또 일어났다는 얼굴을 하고 한쪽 발을 질질 끌며 서재에 들어서자 카라는 책을 쥔 채 사다리 중간참에 주저앉아 물었다. “이번엔 또 뭐야? 쥐? 고양이? 돼지?” 최근의 이상한 사건이란 괴물의 출몰이었다. 괴물이라고는 해도 다른 몬스터가 아니라 비정 상적으로 커다란 동물들이다. 처음에는 고양이만한 쥐부터 시작이었지만 나중에는 늑대만한 시궁창쥐를 본 사람도 나왔다. 쥐만이 아니다. 실제 크기보다 두배에서 다섯 배까지 큰 고양 이며 늑대, 집채만한 돼지도 있었다. 동물들은 갑자기 나타나서 대개 집을 부수고 식량을 훔쳤으며, 때로는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런 게 아니고 말입니다...” 코히마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엔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사슴이었는데 말씀이죠. 집채만한 곰만한 사슴이-” “집채만한 사슴이면 사슴이지 집채만한 곰만한 사슴은 또 뭐야.” “아, 하여튼 말입니다. 그런 사슴이 나타나서는 글쎄, 사람이 죽었다지 뭡니까.” “사람이? 어쩌다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코히마는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반쯤은 두렵다는 듯, 반쯤은 신이 난다는 듯 입술을 축이며 목소리를 깔았다. “예에. 무서운 일이지요. 아직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대장장이네 집 둘째아들이 사슴에 깔려 죽었다는군요. 여하튼 그 놈들은 뒤쫓아 가다 보면 없어져 버리는 게, 땅으로 꺼졌는가 싶을 정도로 싹 사라져 버린다구요. 악마의 장난이 아니고선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죠, 암요. 벌써 몇 군데 신전에 신탁을 구했는데 도통 알 수가 없답니다. 지난 번에 신관도 한 분 다녀가셨잖습니까. 그분도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 나는 건지......저주에요. 무서운 저주가 아니고선......” 주저리 주저리, 말이 길어지자 카라는 혀를 살짝 내밀고는 다시 책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확실히 큰일이긴 했다. 사람이 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해도, 숲에서 언제 이상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벌채도 사냥도 하기 힘들었고 그건 즉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다는 뜻이 다. 그러나 카라에게 그런 문제까지 와닿을 리는 없었다. 신기하기만 할 뿐. 혼자 한참 떠들던 코히마의 마지막 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도련님께서 마법사를 초빙하기로 하셨답니다.” “마법사라구!” 카라는 깜짝 놀라서 몸을 돌리며 외쳤다. 아까의 외침이 놀라움이었다면 이번에는 환희의 함성이었다. 코히마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지만 더이상 그는 안중에 없었다. 마법사! 마법사는 흔히 볼 수 있는 인종이 아니다. 이런 구석진 곳에서야 마법사든 신관이든 보기 드문 것은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신관들은 신전에 찾아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지 않은가. 마 법사는 말로만 들었을 뿐 주위 아무도 실제로 만나본 사람이 없는 존재였다. 카라는 들떠서 서재 맨 위쪽에 꽂힌 낡은 책들을 꺼내러 사다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낡은 책들은 어렸을 때에는 다락방에 있던 것들로, 글자를 배운 다음 가장 먼저 읽기 시작 한 책들이었다. 먼 나라의 괴물들, 옛날 옛적에 있었던 영웅과 모험 이야기들이 가득찬 그 책들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카라는 사다리 끝에 조심스레 한쪽 발을 붙이고 손을 한껏 뻗었 다. 그런데 아래쪽에서 코히마의 당황스러운 고함소리가 들렸다. “조, 조심하세요 아가씨! 그쪽은...!” “뭐라고?”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발이 사다리 끄트머리로 미끄러졌다. 미처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 었다. 몸이 확 아래로 잡아당겨지는 느낌. “카라!” 아래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카라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다 음 순간에 느껴진 것은 바닥에 부딪치는 충격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그제서야 천천히 바닥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부드러운 착지. “얼레?” 바닥에 주저앉아 얼빠진 소리를 내는 순간 거친 손이 팔을 잡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귀가 터져나갈 듯한 고함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무슨 짓이냐 카라! 위험한 일을 시키라고 코히마가 있는 거 아니야!” 큰 오빠 카트니였다. “미안......” 카라는 약간 움츠러들어서 중얼거렸다. 조금 미안한 감이 들긴 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 도 늘 걱정거리에 깔려사는 카트니 오빠니까.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 일은 꽤 여러 번 있 었고, 별로 다친 적도 없다고 말할까 하다가 좋을 게 없을 듯 싶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코히마는 다리를 저는 데다가 늙었다구. 떨어지더라도 내 쪽이 낫지- 라고 속으로만 중얼거 리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귀여운 동생분이군요.” 그제서야 카트니 옆에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철없는 아이라 폐를 끼쳤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나이에 비해 왜소한 동생을 노려보던 카트니는 겨우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려 정중한 인사를 던졌다. 왠일로 잔소리가 별로 없다 했더니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카라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 이방인을 살펴보았다. 뒤이어 카트니의 입에서 약간은 어색한 칭찬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보니 과연, 대단하시오! 주문도 들리지 않았는데.” 카트니가 ‘초빙해’ 왔다는 마법사가 이 사람인 모양이다. 확실히 그 짧은 순간에 주문도 없이 몸을 띄우다니 대단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그 마법사의 모습은 상상과는 많이 틀 렸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라든가 지팡이를 든 근엄한 아저씨, 아니면 화려한 여자를 기대했는데. 카라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고 있자 카트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엄한 목소리로 소개했다. “카라. 마법사 이자드 루이님이다.” - 이름도 이상하군. 게다가 가면을 쓴 마법사라니! 카라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볍게 고개 를 까딱했다. 뭘로 만들었는지 모를 얇은 흰 가면이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나마 뚫린 구멍으로 엿보이는 눈동자조차도 그늘 속에 숨어 색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얼굴을 가린 둥그런 가면 도 가면이지만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늘어지는 커다란 포댓자루 같은 로브도 가관이었 다. 옷자락 끝으로 살짝 드러난 두 손을 제외하면 드러난 데라곤 하나도 없다. 성격이 정말 이상한 사람인 모양이다. 아니면 마법의 부작용이라도 있는 걸까? 인사 후에도 카라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마법사는 서늘한 눈매를 옆으로 돌리며 희미하게 어 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기사, 그는 훨씬 더 심한 호기심의 시선을 잔뜩 받으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 아무리 마법사들이 괴상한 사람들이 많다지만 심하잖아. 정말...... 그때는 아직, 그를 만난 것이 삶에 얼마나 큰 전환점이 될지 알지 못했다. 막연히 재미있겠 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 ------ Back : 2 : - 1장 가면의 마법사 (2) (written by Cigarette男) 기묘한 마법사가 호기심을 자극한 덕분에 아침 일찍 눈이 반짝 떠졌다. 카라는 벌떡 일어나 면서 오래간만에 무기력한 기분이 날아간 것을 느꼈다. 열 여섯이면 어린아이라고 할 나이도 아니지만 카라는 발육이 늦은 편인지 원래 그런 건지 몸집이 작고 깡말라서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랬다. 늘 나이보다 서너살쯤 어리고 작아보였다. 그다지 밖에 나가지 않아 창백해진 안색에, 놀랄만큼 날카로와질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흐리멍덩한 커다란 검은 눈. 그렇게 못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오래 전에 죽은 양어머니나 다른 이 집 식구들과는 전혀 닮지 않은 얼굴. 카라는 뚫어져라 거울을 노려보다가 얼굴을 돌렸다. “그 마법사 말이야. 왜 그런 이상한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걸까?” 늘 그렇듯 혼자 방에서 아침을 먹고 나서 그릇을 정리하는 하녀에게 묻자 그녀는 화들짝 놀 라서 쟁반을 떨어뜨릴 뻔 했다. 이제까지 몇 년 동안 말을 걸어본 적이 없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성에 들어온 지 몇 년 안된 젊은 하녀는 곧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입 을 열었다. 그동안 입 꾹 다물고 시중드느라 힘들었겠구나 싶을 정도로 수다스러웠다. “아가씨도 보셨어요? 안그래도 온통 난리에요. 성안 사람들은 물론이고 벌써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걸요.아무래도 마법사님이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죠. 뭔가 무서운 저주에 걸 렸다든가, 실험을 하다가 얼굴이 엉망이 됐다든가.” “흐음...” 신이 나서 뭐라고 계속 떠들어대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카라는 탁자 밑으로 발가락을 꼼지 락거렸다. 생각에 잠겼을 때의 버릇이다. 그래도 마지막 말은 귀에 들어왔다. 이것도 이상하 다면 이상한 습관이겠지만, 아무리 딴청을 부리더라도 마지막 말만큼은 확실히 귀에 들어온 다. “오늘은 눈이 그쳤으니까 낮에 계곡에 가보실 거라나봐요.” 계곡이라고? 뻥튀기 동물이 주로 나타난다는 곳이다. 카라는 언뜻 스쳐지나간 생각에 눈을 굴리며 무심한 척 다시 물었다. “어디에 묵고 있는데? 카트니 오빠 옆?” “아뇨. 북쪽 탑 어디라나봐요. 일체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는 뭔가 하시는 것 같던 데요.” “알았어.” 카라는 그 말로 더이상 그 여자가 말을 계속하지 못하게 막아버리고는, 하녀가 나가기를 기 다려 잽싸게 북쪽 탑으로 향했다. 북쪽 탑은 원래 그녀의 주무대였다. 일단 서재와 다락방이 그쪽에 있으니까. 원래도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곳인데 그 마법사 때문인지 더 조용했 다. 서둘러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다가, 위에서 내려오던 그림자와 정통으로 맞닿뜨렸다. “우앗!”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푸댓자루 같은 치렁한 옷에 가면. 바로 그 마 법사였다. 어제 본 기억으로는 성격이 보통 괴팍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카라는 긴장해서 최 대한 붙임성 있게 인사했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법사님?” “아아, 카라 아가씨랬었나. 잘 잤어?” 카라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가면에 가려진 얼굴은 표정을 알 수 없다. 똑 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가면.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날씨가 좋은데. 말을 타고 한 바퀴 돌기 딱...”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는 뭔가에 막힌 듯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 뭐라고 입안으로 중얼거리더니 헛기침을 한 두 번 하고 말을 돌린다. “그나저나 카트니 공자가 안내인을 보내준다더니, 그게 아가씨였나?” “아가씨 말고 카라라고 부르셔도 돼요, 마법사님.” 카라는 기회가 온 것을 직감하자마자 냉큼 대답하며 생긋 웃어보였다. 이 성안에서 내가 웃 는 걸 본 사람은 얼마 안되는데, 운좋은 줄 알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말은 탈 줄 알아?” “그럼요.”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말타기쯤은 배웠다. 뭐 기본적인 ‘귀족의 교양’이라고 하니까. 과연 귀족일까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말타기를 배우지 않으려고 그런 핑계를 댈 수 야 없지 않은가. 아버지가 병석에 눕기 전에는 호신용 단검 쓰는 법도 배웠다. 성에 있는 말은 다섯 마리도 채 되지 않았다.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는 말보다 사슴 쪽이 짐을 나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개썰매라든가. 말은 이 고장에서 상당히 사치스러 운 동물이었다. 성주밖에 가질 수 없는. 다행히도 마굿간에는 시종 한 사람밖에 없었다. 눈에 익지 않은 검은 색 말이 있었다. 조금 이상한 일이었지만, 마법사는 마구를 전혀 달지 않은 채 가볍게 말에 올랐다. 푸댓자루 같은 치렁한 로브를 입고서도 용케 사뿐히 말에 오 른다. 등자도 없이, 가벼운 몸놀림이다. 어제 직접 겪지 않았다면 마법사라기보다는 기사라 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냥 타요?” “아아.” 왠지 기뻤다. 카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런데도 말을 잘 타지 않는 것은 마구를 다는 것이 싫 어서였다. 아무도 그녀가 마구 없이 말을 타게 놔두지 않았다. 마법사의 새까만 말은 야생마 처럼 자유로와 보였다. 카라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려 시종을 불렀다. “이것 좀 벗겨줘.” “예?” 안장을 올리려고 다가오던 시종은 등자를 벗겨내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자 어리둥절한 얼굴 로 눈만 깜박였다. “그냥 탈 수 있겠어?” 말을 타고 먼저 마굿간을 나섰던 이자드 루이는 되돌아와 그들이 마구를 벗기는 것을 보며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카라는 씩 웃어보이고는 마구를 모두 벗은 말의 머리를 가볍 게 끌어안았다. “착하지, 크레드.” 말은 얌전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등자없이 그 높은 말등에 오를 만큼 날렵하지 못하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가 말등에 오르기 위해 낑낑거리고 있자 이자드 루이 가 가볍게 손을 뻗어 허리를 안아올렸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그의 팔은 가뿐하게 카라를 들어 말 위에 올려주었다. 어젯밤에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쾌활하고, 격식을 차리는 법이 없고, 무 엇보다도 말을 사랑하는 것 같으니까. 목소리도 맑아서, 가면 안쪽에 있을 얼굴이 궁금해졌 다. 왜 저런 가면에 푸댓자루 같은 옷을 걸치고 다니는 걸까? 카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허 리를 쭉 펴고 앉았다. 이자드 루이는 가면 안쪽으로 푸른 눈을 가볍게 찡긋하며 천천히 말 을 몰았다. 엉덩이가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카트니와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성을 빠져나가면서 기분은 더 좋아졌다. 이자드 루이는 카라와 보조를 맞춰 천천히 말을 몰면서 툭 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커다란 동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들었는데, 짐작가는 건 없어?” 좋게 말해 친숙하고 나쁘게 보면 무례한 사람이다. 카라는 일부러 정중한 말투로 대꾸했다. “음. 나도 직접 보질 못해서 잘 몰라요, 마법사님.” “마법사님이라는 칭호는 마음에 안드는데. 그냥 이름을 부르라구. ” “이자드님?” “아니, 님자도 빼고...” 그는 약간 망설이듯 껄끄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루이라고만 부르면 돼.” “흐음. 이자드가 성?”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화제를 돌렸다. “저기가 그 계곡인가?” 어느 새 눈앞에 눈이 쌓인 위로 겨울안개가 내린 계곡이 보였다. 카라는 기대어린 눈으로 루이를 쳐다보았다. 괴물이 나오는 계곡에 도착했으니 뭔가 탐색마 법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난처한 듯 입 언저리에 손을 올릴 뿐이었다.가 면이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입 언저리에 손을 얹으려다가 흠칫 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평소에 가면을 늘 쓰고 다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오늘은 안나오려나?” 그는 기대가 깨졌다는 듯 계곡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모르죠 뭐. 여기서 잠깐 기다려 볼까요?” 카라가 먼저 말에서 내리자 그도 동의한 듯 내려섰다. 때로 날카로와지는 그녀의 눈은 그 순간 푸댓자루 안쪽으로 칼집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루이는 그냥 마법 사는 아닌 듯 싶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검사인 사람도 있다고 들 었는데, 그런 부류일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그는 마법사가 흔히 들고 다닌다는 지팡이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실제 마법사란 책과는 다른 걸까? 그러고보니 카트니는 어떻게 이 사 람을 고용한 걸까. 곁눈질해 보니 루이는 장갑을 낀 손으로 말머리를 어루만지며 주변을 두 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몇 발자국 들어서다가 문득 카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춥지 않아?” 카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추위 같은 건 별로 안타요.” 말하며 어깨를 펴는데 멀리 뭔가 까만 것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카라는 펄쩍 뛰 어올랐다. “루이! 저기, 저기!” “잠깐만, 서두르지 말고...” 카라가 흥분해서 뛰기 시작하자 루이는 당황한 듯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와앗!” 발밑이 허전해지더니, 자주 느끼던 감각 아래로 몸이 당겨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빠른 속도 로 떨어져내린다. 카라는 역시나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몸이 닿기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긴 추락이었다. 그래도 눈이 많이 쌓여있으니 많이는 다치지 않으리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떨어지면서 느낀 것은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뭉클한 감촉이었다. 눈을 떴으나 잠시 앞이 캄캄했다. “제기랄......” 루이의 목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렸다. 아니, 바로 밑이다. 아무래도 루이의 몸 위로 떨 어진 모양이다. 서둘러 머리를 드는데 후두둑 눈이 떨어져 내렸다. 카라는 머리 위에 떨어진 눈을 털며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킬 수 있 었다. 카라는 그렇게 몸을 일으키다가 멈칫했다. 바로 코앞에, 찌푸린 표정이라도 상당히 잘 생긴 얼굴이 있었다. 단정한 선과 도톰한 입술, 하얀 얼굴이 여자라도 미인축에 들겠다. 깜 박이고 있는 푸른 눈만이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루이?" 카라는 확인의 의미에서 이름을 불러보았다. 루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그제 서야 가면이 떨어진 것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가면을 등 밑에서 찾 아냈을 때에는 이미 손쓸 도리가 없이 망가진 후였다. "이런......큰일났다." 루이가 낭패의 신음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카라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가면 조각을 주웠다. 가면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저렇게 낭패스러운 얼굴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래요? 괜찮은 얼굴인데. 그냥 다녀도......" "그런 문제가...아니야......" 그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난감한 표정인가 싶더니, 순식간에 다시 밝아진 얼굴로 몸에 묻은 눈과 흙을 털어내며 위를 올려다본다. “뭐, 할 수 없지. 뭔가 수가 생기겠지. 그나저나 저길 다시 어떻게 올라간다?”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절벽이다. 눈이 비스듬히 걸쳐져 있어서 눈치를 못챘던 것 이다. 루이는 혀를 차며 팔짱을 끼고 뭔가 생각에 잠겼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법을 써서 올라가면 되잖아요?” 그 말에 루이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에 쓴 두건까지 벗어던졌다. 길고 구불거리는 금발이 흩어져내렸다. 그 순간 카라의 귀에 기묘한 목소리가 들렸다. - 멍청이. 쓸데없이 돌아다니니까 이런 꼴이 됐잖아. “어? 뭐라구요?” 낮고 차가운 목소리. 이건 조금 전까지 들려온 루이의 목소리와는 딴판이었다. 카라는 어리 둥절해서 루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난처한 듯 입을 약간 벌리더니, 어색한 몸짓과 함께 웃어 보였다. “들었어?” - 놀랍군. 내 목소리가 들리나, 너? 카라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루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술은 조금도 움직 이지 않았다. “복화술이라도 하는 거예요, 지금?” “그게 아니라...” - 넌 가만 있어. 내가 설명할테니. “뭘 그렇게 화내고 그래? 정찰 정도는 좋다고 한 건 너잖아, 이자드.” - 누가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오래? 옥신각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입씨름이 계속되는 가운데 카라는 문득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기, 잠깐만요.” 카라는 당황해서 이자드-루이의 옷자락을 잡았다. “지금 싸울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뭐?” - 이런. "크르르르르르..." 어느 새 몰려들었는지 주변에 동물들이 원을 그리고 서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커다란 늑대 가 몇 마리...늑대만한 시궁창쥐가 몇 마리. 늑대보다 큰 고양이가 한마리. 크기도 크기지만 충혈된 눈이나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뭔가 비정상적이었다. 루이는 짧게 욕설을 던지며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카라는 당황해서 외쳤다. “검으로 저 많은 걸 다 어떻게 해요? 마법은?” “못써.” “에에?” “난 못쓴다구. 마법사는 내가 아니라 이자드란 말이야. ” 루이는 알 수 없는 말로 대꾸하더니 카라를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 “걱정마. 내 옆에 꼭 붙어있기만 하면 다치지 않을 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들었다. 뭔가 더 물어볼 틈도 없이 시궁창쥐들이 달려들었다. "캬악!" "핫!” 기합소리 한번에, 허공을 긋는 칼질 한번. 쥐는 깨끗하게 두 조각이 나서 털썩 땅에 떨어졌 다. 퍼억- 질퍽한 소리와 함께 내장이 떨어져 눈을 붉게 물들였다. 카라는 그의 옆구리에 붙은 채 눈을 크게 떴다.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대단한 칼솜씨다. 루이는 왼손으로 자신을 붙잡은 채 한 손만으로 순식간에 몇 마리를 해치우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다행히도 뒤쪽은 절벽이라 다가오는 동물이 없었다. 루이가 싸우는 모습은 경쾌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여유로왔다. 서서히 카라도 안정을 되 찾았다. 그녀는 장검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루이는 그 무거운 장검을 너무 나 가뿐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는 많았고, 싸움은 길어졌다. “아!” 한참만에 소리를 지른 것은 루이가 아니라 카라였다. 늑대 한 마리를 베는 사이에 위쪽에서 고양이가 뛰어내린 것이다. 카라는 몸을 웅크리며 외쳤다. “루이!” 순간 루이가 몸을 돌리며 카라를 밀어내는가 싶더니 거대한 고양이의 몸 아래에 깔렸다. 카 라는 어찌할 바를 몰라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잠시 후, 떨어져 있는 거대한 고양이의 몸이 움찔거린다 싶더니 그 밑에서 루이가 빠져나왔다. 피를 많이 뒤집어써서 엉망이 된 모습이 었다. “괜, 괜찮아요?” “괜찮아. 팔을 좀 다치긴 했지만.” 그는 숨을 몰아쉬며 검을 왼손에 바꿔 쥐었다. 아까 몰려온 놈들은 거의 다 죽인 것 같은데, 새로 또 몰려온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루이는 앞에 있는 짐승들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누구에겐가 투덜거렸다. "지쳤어. 재미도 없고." - 잠시만 버텨.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낮은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카라는 흠칫 놀라며 생각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뭐가 된다는 거지?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루이를 쳐다보며 가슴졸이면서도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 다. 카라는 절벽에 바싹 붙어서서 숨을 죽인 채, 루이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하게 구름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지만 곧 해가 질 시간이다. 해가 진다? 해가 지면 무 슨 도움이 온다는 거지? 그 답은 곧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루이! 뒤! 뒤!” 후드득, 사람 크기만한 까마귀들이 발톱을 세우고 떼를 지어 루이의 등으로 덮쳐드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차고 냉정한 음성이 주변을 흔들었다. “아카사 Akasa 판차탄마트라스 Panca-tanmatras!” 다음 순간 카라는 눈을 의심해야 했다. 칭- 칭- 하는 희미한 쇳소리 같은 것이 난다 싶더니 새파란 빛의 원이 일어나 주변에서 날뛰던 동물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루이?” 엉거주춤 일어난 카라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루이의 이름이었지만, 거기 서 있는 것은 루 이가 아니었다. 입은 옷도, 피를 뒤집어쓴 것까지도 그대로인데,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긴 금발에 푸른 눈의 쾌활한 청년이 아니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카라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 것은 상아빛 피부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남자였 다. 카라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주 카라를 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본 적이 있는 눈이다. 전날 밤, 가면 속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던 것과 같은 눈동자였다. 카 라는 눈을 깜박이며 다시 한 번 자신없이 그를 불러보았다. “루이?” “이자드다.”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3] - 1장 가면의 마법사 (3) “그러니까 당신이 이자드고, 아까 그 사람이 루이?” “그래.” - 그래. 동시에 두 개의 목소리가 대답한다.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였다. 희미하게 깔리는 소리가 루 이의 쾌활한 음성이었고,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낮고 서늘한 이자드의 목소리. 카라는 아직 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심정으로 두 사람을 ? 아니 눈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이자드의 모습 뿐인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둘이다. 루이의 음성이 말을 이 었다. - 우린 그러니까...같은 공간을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거든. 낮에는 내가, 밤에는 이자드가 나오지. "하아-" 뭐랄까. 납득한다고 하기에도 뭣 하지만 일단 상황은 접수했다. 카라는 대체 어떻게 이런 일 이 가능한 건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며 코를 비볐다. 루이가 다시 말했 다. - 그나저나 너도 참 신기한 애다. 이때까지 평범한 환경에서 자란 애치고는 너무 적응이 빠 른데 그래? 계속 이어지려는 루이의 말을 이자드의 목소리가 딱 잘랐다. “넌 잠이나 자지 그래. 상처도 있는데.” 이자드는 루이만큼 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냉정하고 침착하며 무뚝뚝했다.카라 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저주?” 이자드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해가 떨어졌으니 성에서 걱정하고 있을 거다. 돌아가자.” “에......” 아직도 절벽 밑에 있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말하려 입을 여는데, 이자드가 아까와 비슷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손목을 한 번 흔들었다. 눈 앞에 푸른 섬광 같은 것이 번쩍였다. 카라는 잠시 고개를 기울이며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이자드가 앞장서서 움직일 뿐이다. “어어어?” 이자드는 수직으로 절벽을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뭔진 모르지만 주문을 건 모양이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성큼성큼 가버렸다. 우두커니 서있어 봐야 기다려줄 성 싶지가 않 다. 카라는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발이 공중을 딛는 느낌이 기묘했다. 말은 둘 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물들’ 은 이쪽으로는 한 마리도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자드가 검은 말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그러네요. 우리한테는 그렇게 많이 몰려왔었는데, 여긴 멀쩡하다니.” 이자드는 카라의 말을 듣지 못한 듯이 두건을 깊이 눌러썼다. 그는 말에 오르지 않았다. 카 라가 낑낑대며 말등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지도 않았다. 카라가 말에 탈 때까지 기다려준 것 만도 놀라울 정도였다. “루이는 괜찮아요?” 카라는 혼자서 겨우 말등에 오른 다음 한 숨 돌리고 물었다. 이자드는 걸음을 옮기며 냉랭 하게 말했다. “괜찮아. 상처 때문에 열이 좀 있긴 하지만. 밤새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거다.” - 괜찮아, 괜찮아. 난 치유마법 같은 건 안듣는 체질이지만 회복은 빠르거든. 루이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치유마법이 안 듣는다. 치유마법이라는 게 어떤 건지 들은 적은 있어도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 실감이 가지 않는 이야기다. 게다가, 설령 치료 마법이 듣는 다 해도 이자드가 루이에게 마법을 거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자기 몸 안에…아니, 같은 공 간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이자드는 저만치 가 있었다. 카 라는 급한 마음에 크레드의 배를 가볍게 찼다가 갑작스레 중심을 잃어 허둥거렸다. 이자드는 눈 위를 성큼성큼 나아갔다. 검은 말은 아무 지시 없이도 이자드 바로 뒤를 따라 걷고 있다. 카라는 그에게 질문을 던질 용기가 나지 않아 혼자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아까 들은 얘기 를 얼추 짜맞춰 보면, 아무래도 이자드 루이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것 같다. 해 가 떠 있는 동안에는 루이가, 해가 지면 이자드가 나타난다. 성격도, 목소리도, 외모도 전혀 다른 두 사람. 그렇다면 대체 지금 루이는 어디 있는 걸까? 어째서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카라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루이가 투명해져서 이자드의 머리참에 달라붙어 있을지도 모 른다는 상상을 하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재미있는 상상이었다. 카라는 이자드에게 들리지 않게 혼자 웃었다. 어쨌든 그가 가면을 쓰고 있었던 이유는 이제 밝혀진 셈이었다. 낮과 밤에 전혀 다른 사람 이 된다면 얼굴을 숨길 수밖에 없겠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카라는 찔끔했다. 성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그녀를 찾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성 안에 들어서자마자 카트니의 벼락 같은 호 통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카라!” 수색대를 내보낼 채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 안 마당에 횃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 선 카트니의 얼굴은 장난이 아니게 굳어져 있었다. “...저기......” 구원을 청하듯 이자드를 쳐다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계곡에서 몇 십마리를 해치웠으니 당분간은 피해가 없을 겁니다. 다만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내지 않으면 또 나타날지도 모르니 연구를 좀 해 보지요.” 그는 카라의 구원요청을 본척만척하고, 카트니에게 그 말만 하고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버 렸다. 루이였다면 그러진 않았을 텐데. 너무하다 이자드. 카라는 속으로 원망의 말을 중얼거 렸다. 카트니는 입술을 깨물며 엄한 얼굴로 카라를 내려다보았다. 잔소리도 잔소리지만 이번엔 한 대 맞을지도......카라는 각오를 단단히 굳혔다. 그러나 카트니는 잠시 카라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됐다. 들어가봐라.” 카라는 안도의 한숨을 참으며 조심조심 그의 곁을 지나 방으로 올라갔다. 긴장히 확 풀리면 서 피로가 몰려왔다. 카트니가 어째서 그렇게 쉽게 용서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쉬 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옷이며 얼굴이 지저분했다. 눈 과 흙은 물론이고 아까의 싸움으로 피도 튀었으리라. 아래에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이 자신 에 대해 또 뭐라고 수근거릴까 생각하니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이자드가 무슨 연구를 해본다는 것인지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기묘한 사람이었다…루이도……혹시 자고 일어나면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는 게 아닐까? 카라는 북쪽 탑으로 갈라지는 계단참에 서서 어두운 탑 위 쪽을 올려다보았다. 피곤에 싸인 머리는 오늘 일어난 일이 다 진짜인가 의심하고 있었다. 카 라는 머뭇거리며 북쪽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가, 머리를 흔들며 물러섰다. 한 숨을 내쉬던 카트니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무수한 생각들 속에 방으로 돌아가, 시녀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몸을 씻고 침대에 엎어져 잠들었다. 계곡에서의 사건 후 일주일은 아무 소동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일주일이 지나, 너무 잠잠 해서 따분하다 싶어질 만 하자 다시 이상한 크기의 동물들이 여기저기 출몰하기 시작했다. 전만큼의 피해는 없었지만 여전히 문제거리였다. 마을에는 마물은 아니다, 조심해서 도망치 기만 하면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이자드의 말이 전달되었지만, 집이 부서지고 저장해둔 식량이 없어지는 데 사람들이 가만히만 있을 리 없었다.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고, 당연 히 다치는 사람들도 나왔다. 밤에 일이 벌어지면 이자드가 서둘러 나가서 깔끔하게 처리했 지만 낮에는 카트니와 근위병들이 달려가야 했다. 대체 낮에는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걸 어 떻게 카트니에게 납득시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물론이고 그 후에도 루이의 처지는 카라와 비슷했다. 계곡 사건 바로 다음날 오후에 만났을 때 풀죽은 목소리로 늘어놓은 말에 의하면 그 일로 이자드에게 단단히 주의 를 들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낮 동안에는 성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고 가면도 늘 쓰고 있어야 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카라라는 말상대라도 없었으면 버텨내지 못하고 무슨 사고를 쳐도 크게 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덕분에 카라는 루이와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루이는 쾌활하고,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낙천적이었으며, 남에게 허물없이 대하는 사람이었다. 제멋대로이면서도 의외의 배려심을 보였고, 행동패턴은 단순했지만 종종 직감적으로, 즉흥적 으로 움직여서 행동반경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좋고 싫은 것은 분명하지만 누군가를 길게 증오하거나 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강했다. 호기심. 바로 그것이 왜 그'들'이 이 일을 떠맡았는가 하는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었다. 부근을 지나다가 루이 쪽이 먼저 소문 을 들었던 것이다. 언제나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눈을 빛내는 그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었으리라...카라는 며칠만에 루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자드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저녁 때가 되면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 거나 밖으로 나다녀서 카라와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 데다가,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요즘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루이에게 물어봐도 소득이 없었다. "글쎄, 이자드 녀석 나한테도 별 말 없었는데. 밤마다 뭘 그렇게 하는지 요즘은 낮에 늘 자 고 있는 것 같아. 하긴 녀석은 자고 있지 않아도 말을 별로 안하니까.” 카라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당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루이는 많이, 잘 먹고 잠도 많이 자 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 같은 성격이다. 겉모습으로는 카라보다 열 살쯤 위였고 실제 나이상으로도 대여섯 살은 차이가 나는 어른이었지만 또래 친구나 별다를 게 없는 느 낌이 들었다. 루이와 수다를 떠는 것은 즐거웠다. 그러나 아무리 쉽게 적응했다고 해도 이자드와 루이의 교대 시스템은 여전히 이해불능이었 다. 루이와 이자드는, 루이의 설명으로는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하는 두 사람’이라고 했 다.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루이는 낮에만 나올 수 있고 이자드는 밤 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또 하나, 나오지 못하는 시간에도 목소리는 들린다는 것. ? 어째서인 지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카라는 들을 수 있었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한해서. 육체는 교대로 나오지만 영혼은 항상 거기에 있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인가? 생김 새도 성격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 다. 머리속이 더 복잡해진 것은, 카트니가 들이닥칠까봐 코히마에게 망을 보게 하고 서재에 앉 아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전혀 대단한 마법사답지 않은 모습으로 가면을 벗고 차를 마시던 루이는 이자드 이야기를 꺼내면서 초콜렛 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고 우물거리면서 한 숨을 내쉬었다. 카라는 그런 두 동작을 그렇게 어울리게 하는 사람이 루이 말고 또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녀석이 잔소리하는 것도 이해는 가. 이번 일도 사실은 내가 떠맡은 거거든. 내가 호기심이 좀 많은 편이라서, 하하. 언제나 별 생각없이 일을 맡고 나선 다음에 아차 하지. 휴우. 가면 을 쓰게 되는 바람에 이자드에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이자드도 루이한테는 말이 많은 편인가봐? 나한테는 말을 별로 안하던데.” “좀 달라붙어서 귀찮게 굴면 많이 해. 그 녀석은 뭐랄까...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나에게도 말하지 않는 게 많지. 하지만 말은 냉정하게 해도 사실은 잘해준다구. 걱정 덩어리야, 걱정 덩어리. 나만해도 늘 걱정시키는 편이지. 음.” 루이는 팔짱을 끼며 잘난 척 흠흠거렸다. “나도 꽤 강하지만 이자드만은 못하니까 말이야. 녀석은 정말 대단한 마법사거든.” “헤에.” 마법사라고는 처음 봤으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나. 루이가 그렇다니 그렇겠지 하 고 고개를 끄덕인 카라는 문득 ‘오랫동안’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오랫동안? 얼마나 오래 같이 있었는데?” “글쎄? 잘 기억이 안나. 기억하고 있는 한에서는 항상 이런 상태였는데......한 백년...백 오십 년 정도 됐을까?” “백 오십? 그렇게 나이가 많았어?” 카라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코히마가 빠꼼히 문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둘이 마주앉아 있을 뿐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보고 다시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카라는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있다가 겨우 혀를 내두르며 중얼 거렸다. “나보다 조금 많은 정돈 줄 알았는데.” 루이는 태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이다. “보이는 것처럼 젊진 않아.” “으음...사람이 아닌 거야?” 두 사람이 밤낮을 교대로 해서 나오는 것만도 이상한데 150년이나 살도록 늙지도 않다니.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카라는 왠지 그건 그것대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 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루이는 그 무심한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 말 이자드에게는 절대 하지 마라. 굉장히 싫어하니까.” 그 말에 카라는 물끄러미 루이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루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나? 나도 뭐 기분좋진 않지. 음... 그야 좀 이상한 데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뭐 괴물은 아니라구. 회복이 빠르긴 하지만 다치면 피도 흘리고 말이야. 아마 죽기도 할 걸... 이정도면 충분히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으응...” 카라는 루이의 간단한 정리에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복잡한 기분으로 다 식어버린 차를 들이마시다가, 달다 못해 떫은 맛에 얼굴을 찌푸렸다. 루이는 행복한 얼굴로 설탕 덩어리 쉐 이크를 마시고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음침하다느니 애같지 않다느니 하 는 소리를 들었어도, 자신이 인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꽤 상처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보통 인간이라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사람인데도 자신의 상황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꼬마 계집애에게. 어디서 저런 태연한 태도가 나오는 걸까? 이자드의 생각은 다를까? 정말로 백 오십년이 넘 게 살아온 건가? 이자드는 조금 어려웠다. 무뚝뚝하고 냉정해서만이 아니라…그래도 카라의 호기심은 이내 그런 거북한 마음을 누르고 승리를 따냈다. 1장 가면의 마법사 (4)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라는 잠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귀도 밝았다. 덕분에 어렸을 때 부터 하인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다 들어버린 셈이지만. 카라는 저녁식사 후에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가 한밤중에 벌떡 일어났다. 자그마한 성이다. 그래도 영주고 귀족이라고 하인들이 있긴 했지만 한 가지 일만 전담하기 에는 손이 부족했다. 유모가 죽은 이후에는 그녀에게 늘 붙어있는 하인이 없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카라의 행동을 제지할 사람도 없었다. 물론 카트니에게 들키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듣겠지만. 카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치고 북쪽 탑으로 올라갔다. 길을 헤맬 염려는 전혀 없었다. 워낙 익숙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밤눈이 밝다는 것도 그녀의 얼마 안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나선형 계단을 쉼없이 오르다 보니 숨이 차 올랐다. 잠시 멈춰서서 위쪽을 올 려다보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카라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거의 꼭 대기에 있는 방이었다. 문틈으로 빛이 새어나왔다. 카라는 손을 들어올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빼꼼히 방안을 들여다보자 손에 펜을 든 이자드가 눈썹을 가볍게 치 켜올리고 문쪽을 향해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카라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문을 마저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자드와 만나는 것은 계곡에서 이후 처음이었고, 생김새를 제대로 보게 된 것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불빛 아래에서 보니 이자드는 루이보다 훨씬 어른스러 웠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 후 바로 백 오십년이라는 시간을 떠올 려야 했지만. 루이의 단아한 선과는 전혀 달랐다. 선이 굵은 얼굴은 아니지만 짙은 눈썹 때 문인지 강한 느낌이다. 꽉 다문 날카로운 턱선과 얇은 입술이 접근하기 힘든 차가운 인상을 주지만, 신경질적인 학자풍이라기보다는 엄격한 군인 같았다. 검은 구멍같은 새까만 눈동자 가 그녀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돼가...요?” 눈치를 보자 이자드는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그래도 자리는 내주었다. 냉큼 자 리에 앉자 탁자 위에 펼쳐진 커다란 책들이 보인다. 카라는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책을 건너다보았다. “이걸 다 들고 다녀요? 엄청 무거울 텐데.” 대답 대신 그는 책 한권을 집어들고 가볍게 모서리에 십자를 그었다. 그러자 책은 엄지손톱 만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카라가 속으로 찬바람이 쌩쌩 돈다며 투덜거리는 사이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책을 차례 차례 줄여서 주머니에 집어넣고 마지막의 가장 큰 책을 펼쳤다. 그림 하나없이 글자만 빽빽 한데 알아볼 수 없는 기묘한 생김새였다. 전혀 눈에 익은 데가 없다. 마법사가 나오는 얘기 엔 꼭 나오던 ‘룬 문자’라는 글자도 아니었다. 카라는 몸을 더 내밀고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 괴상한 글자만으로 쓰인 것은 아닌 듯, 군데 군데 알아볼 수 있는 글자도 눈에 들어왔다. “파...파라노말 마스터?” 카라가 눈을 책에 바짝 붙인 채 더듬 더듬 읽어보는 순간 이자드는 책을 쾅 닫아버렸다. 이 자드에게 너무하다는 눈길을 던지자 그는 상당히 귀찮다는 얼굴로, 그러나 할 수 없다는 듯 이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지?” 카라는 냉큼 방금 본 책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다. “이건 무슨 글자에요? 룬문자도 아닌 것 같은데. 주문?” “......동방문자다. 그리고 이건 주문서가 아니야. 굳이 설명하자면 백과사전 같은 거지.” 루이의 말대로, 퉁명스럽기는 하지만 물어보는 말에는 대답을 해준다는 것을 확인한 카라는 용기백배하여 다시 물었다. “저번에 쓰던 주문 같은 것도 다 동방문자였어요?” “그런 셈이지. 네가 아는 룬문자는...주로 이쪽 지방에서 많이들 사용하지만, 내 마법은 종 류가 좀 달라.” 카라가 최대한 눈을 빛내며 쳐다보자 그는 말을 멈췄다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마법에 대해 관심이 많은가보군. 어느 정도나 알지?” 카라는 잽싸게 기억을 더듬었다. “책에서는 일단 마법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읽었어요. 매개체 없이도 원하는 대로 자연 력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타고난 마력이라고 하는데, 이건 보통은 없는 재능이고 연마한다 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죠.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구사하는 마법은 주문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한 것이고, 이것도 어느 정도 타고난 재능 없이는 배울 수 없지만, 연마하기에 따라서 강력해질 수 있는 것이 마력과 다른 점이구요. ” 카라는 이자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힘을 얻어 말을 이었다. “주문이란 그러니까, 간접적으로 자연력을 움직이는 매개체죠.” “어떻게?” 그는 재미있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카라는 침을 삼키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녀가 마법에 대해 아는 바라고는 책에서 읽은 지식을 짜집기한 게 전부였다. 카라는 솔직하게 모 른다고 대답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조심스러운 추측을 내놓았다. “사물에는 모두 ‘진짜 이름’이 있어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지배력을 얻을 수 있다 는 이론도 있던데요.” “그건 잘못된 설명이다.” 이자드는 고개를 흔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생김새야 어쨌든 그는 학자 타입이었다. 항상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할 기회가 온 것이 반가왔는지도 모른다. 카라가 루이보다 훨씬 훌륭한 학생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 지가 없었다. 그는 강의하는 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름이 기본적으로 구속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그러니까 사람의 이름은 이미 하나의 주문이 되지. 그러나 이름이란 스스로가 자신이라고 믿고 투영해놓은 상(相)이다. 사 람이 아닌 다른 것...예를 들어 이 책을 우리가 ‘책’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책이 스스로를 그렇게 믿고 있을까? 아니면 말을 ‘말’이라고 부른다 해서 그렇게 알고 있을까?” “아뇨. 어…그러니까 내가 내 이름이라고 믿는 것만이 구속력을 가진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주문에 필요한 것은 구속력이다. 즉, 원래부터 진짜 이름이라는 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마법사가 그 ‘주문’과 ‘대상’사이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거야. 그러니까 반대 로 그 사람이 이미 그런 관계를 안다면…” 이자드는 카라가 인상을 심하게 찌푸리는 것을 보고서야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했음을 깨달 았는지 실소했다. “쓸데없는 얘길 했군.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하나의 약속체계- 여 러사람이 공유하는 ‘구속’의 이름을 사용하는 데 동의하고 있는 거야. 고대어나, 엘프어, 혹은 룬 문자 같은 것이 주로 쓰이지. 그것을 사람들은…심지어는 마법사들 스스로까지도 주문 자체에 힘이 있고, 원래 주문이란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들 착각을 하는 거다.” “아하. 그러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굳이 다른 사람이 쓰는 주문을 따라갈 이유가 없다는 건가요? 그럼 혼자 쓰는 주문이 따로 있다는…?” “그렇지.” 그래도 끄트머리나마 알아들어 다행이었다. 이자드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싱긋 웃으며 손바닥을 펴보였다. “예를 들어, 다른 자들은 불을 부를 때 살라만타라는 이름을 자주 쓰지. 불의 정령의 이름 으로 유명하기 때문이야. 그러나 나는 다른 이름을 쓴다...아날라 Anala!"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에 파란 불꽃이 확 일어났다. “와아! 아날라 Anala?" 손뼉을 치며 따라서 말해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내 손바닥을 오므렸 다. 불꽃은 사라졌다...그는 보기좋은 미소를 지우고 다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말 투는 한결 부드러웠다. “아가씨가 밤늦게,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녀도 뭐라고들 안하시나?” “괜찮아요. 사실은 이집 아가씨도 아닌걸요 뭐.” 카라는 가볍게 대꾸했다. 굳이 숨길 것도, 그렇다고 대단한 일로 포장할 생각도 없었다. 이 자드는 가볍게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카라의 눈을 직시하며 의자 등에 턱을 고였다. 계속 말해보라는 것 같아서 카라는 얼떨결에 말을 이었다. “그냥, 지금 아버지가 친부모님의 친구분이라는 것밖에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요정이 바꿔 치기한 애라는 둥,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둥 하는 헛소문이 돌았지만 그렇지는 않겠죠. 유별난 능력이 없는 걸 보면.” “흠.” 이자드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카라는 그를 쳐다보았다. 이 자드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굳이 찾아본다면, 지루하지는 않다는 정 도의 감정일까. 그는 호기심도, 흥미도,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카라는 반쯤은 실망하고, 반 쯤은 안도하면서 탁자에 턱을 고였다. 왠지 마음이 편했다. 루이만큼 마음편한 이야기 상대 는 아니었지만 무엇이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카라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특별히 재촉하거나 돌아서지 않았고, 카라가 더듬 더듬 이야기를 한다 해 서 끼어들지도 않았으며 빠른 속도로 재잘거린다고 가로막거나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어느 샌가 카라는 탁자위에 엎드려 반쯤 잠에 취한 채 아무에게도, 심지어는 스스로에게도 명확 히 하지 않던 속내를 말하고 있었다. “나,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성을 뜰 거예요. 물론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을만큼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 전에 대책을 생각해 둬야겠지만. 어쨌든 이 성에 계속 살 생각은 없어요. 친 부모님을 찾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마 돌아가셨겠죠…살아계시다면 날 찾을 생각이 없 는 걸테고. 어쨌든 떠날 거예요.” 그래. 성을 벗어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이 작고 조용한 영지에서도 벗어나, 멀리 멀리 날 아가고 싶다. 이곳은 너무 추웠고, 나가고 싶다는 말조차 할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서 나가고 싶어요……” 그 말을 소리내어 말했는지, 꿈 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득 눈을 떠보니 방 침대에 누워 있었고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반쯤 잠에 취해서 계속 말을 했던 기 억만 남아 있었다. 방에 데려다 준 건 이자드였을까? 한밤중에 있었던 일이 왠지 비현실적 으로 느껴졌다. 카라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아날라 Anala!" 역시 소용없었다. 그 말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은 매개체일 뿐이다. 그녀는 그렇 게 이해했다. 머리가 개운했다. 하녀가 왔다갔는지 탁자 위에 쟁반이 놓여 있었다. 아침식사 는 아직 차갑게 식지 않았다. 카라는 대충 옷을 꿰어입고 배를 채웠다. 창밖에서 말 울음소 리가 들렸다. 카라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앞마당에 검은 말이 나와 있었다. 그 옆에 치렁한 로 브를 차려입은 루이가 서 있었다. 마구간지기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막 말 위에 오르려는 참이었다. 카라는 창문 밖으로 반쯤 몸을 내밀고 소리를 치려다가 카트니의 얼굴을 떠올리 고 잽싸게 방문으로 달려나갔다. 2층에서 앞마당까지는 한달음이었다. 카라가 숨가쁘게 달려 나오는 것을 본 루이가 워-워 가볍게 말을 달래 멈춰세웠다. 카라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나가는 거야?” “아아.” 루이는 흘끔 저만치 떨어져 있는 마구간지기를 쳐다보고 속삭였다. “계곡에 마법덫을 좀 설치해 두려고. 같이 갈래?” 당연히, 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정문으로 카트니가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카라는 냉큼 말 가까이에서 떨어져, 어설픈 웃음을 떠올리며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네. 지난번의 계곡이요. 길은 아시죠?” 왜 그러냐는 듯 카라를 바라보던 루이는 뒤늦게 다가오는 카트니를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 다. 카트니는 잠시 카라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진 다음, 귀족적이라고 생각해서 쓰는 건지, 실제보다 나이들어보이려고 쓰는 건지 모를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성과가 좀 있소?” “예......” 루이는 이상하게 들릴까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천천히 말했다. “원인을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계곡에 덫을 놓으러 가는 길입니다.” “덫이라구요?” 카트니는 이상하다는 듯 루이가 등에 걸머진 둥그런 실꾸러미를 쳐다보았다. 카라의 눈도 그쪽에 쏠렸다. 아무리 봐도 실꾸머리 외에 다른 물건은 없어 보이는데, 대체 무슨 덫인지 궁금했지만 루이는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카트니는 실꾸러미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루이 의 눈치를 살피고 헛기침을 했다. “알겠소. 누구 한 사람 데려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루이는 재빨리 대답하고 카라에게 스치듯 시선을 던진 다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가 성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뒤로 하고 카라는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카라!” 윽. 카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뛰어나오는 걸 보고 따라나온 게 틀림없 었다. 카트니는 날카롭게 그녀를 불러세우더니 눈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고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카라는 잠자코 따라갔다. 빠른 걸음으로 홀을 지나 안쪽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카트니는 몇 번이나 노성을 참는 듯 턱을 움찔거렸다. 마침내 하인이 없는 방에 들어 서자 그는 몸을 홱 돌리며 잔소리를 쏟아냈다. “대체 언제까지 애처럼 굴 작정이냐? 너도 벌써 열 여섯이야. 얼마 안 있으면 결혼도 해야 할 나이인데, 숙녀처럼 좀 굴 수 없겠니?” 카라는 아랫입술을 물며 한숨을 깨물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있을 수도 없는 얘기 였다. 친동생도 아닌 그녀를 나무랄 데 없는 귀족 가문에 시집보내려 하는 마음씀씀이는 감 동적이었지만, 카트니의 가치관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 게다가 시집을 간들 내가 잘도 살겠다. 쳇. 카라는 버릇대로 꼼지락꼼지락 발가락을 움직이며 건성으로 잔소리를 들어넘겼다. 카트니의 잔소리는 여느 때 이상으로 길게 이어졌다. “아버지도 편찮으신데......효도는 못할 망정 속을 썩이며......체신머리가......하인들에게 무슨 꼴이며......마법사와는......” “도련님!” 지겹디 지겨운 설교는 도중에 끝나 버렸다. 시종장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 어젖혔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시종장이 이토록 예의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다급한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카트니는 당황해 서 목을 뺐다. 순간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엄격한 얼굴을 스쳤 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시종장은 입에 거품을 물고 허덕이다가 말을 쏟아 냈다. “불, 불입니다! 불이 났어요!!” “뭐? 불? 어디에?” “서, 서잽니다. 서재에......” 카트니는 더 이상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고 황급히 뛰쳐나갔다. 카라 역시 서둘러 뒤따랐다. 서재에 불이라니. 아무리 건조한 겨울이라지만 서재에 불이 날 이유가 없었다. 서재까지 한 달음에 달려 올라가자, 물통을 손에 든 채 멀거니 서 있는 하인들이 보였다. “어찌된 일이야? 왜들 불을 끄지 않는 거냐?” 카트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물통을 빼앗아 와락 서재 문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앞에 펼쳐진 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화재상황이 아니었다. 끼얹은 물은 불꽃에 아 무 영향도 주지 못하고 카페트로 떨어져 내렸다. 푸르스름한 불꽃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서재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벽에 꽂힌 책들과 책 장, 탁자 위를 건너뛰어 천장까지 기어올라간다. 그러나 바닥의 카페트와 창문에서 펄럭이는 커튼은 말짱했다. 열기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이...이게 어찌된 건가, 코히마!” 카트니는 멍청한 얼굴로 코히마를 불렀다. 코히마 노인은 발을 절름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노인은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제가 서재에 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없었던 데에서 불꽃 이 일어났답니다. 얼른 물을 퍼왔지만 보시다시피......” 맙소사. 앞을 가린 카트니와 코히마의 모습 사이로 서재 안을 들여다본 카라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 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그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공포였다. 이자드가 불러냈던 것과 똑같은 색깔의 푸른 불꽃...... Anala! 카라는 다급히 카트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마법사님을...…“ “그렇지! 어서 계곡으로 사람을 보내라! 마법사님을 모셔와!” 카트니도 그게 제일 낫겠다 싶었던지 하인을 제일 좋은 말에 태워 계곡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던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책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 다. 다른 곳으로 불길이 번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므로 큰 피해가 나지는 않았다. 모두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간혹 희미하게 기도문 같은 것을 외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누군가가 저주…라고 속삭이는 것을 들은 듯도 했다. 카라는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동물들이 실제보 다 커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재미있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맞닿뜨렸을 때에도, 겁 은 났지만 흥미진진한 모험물 같았다. - 하지만 이건 달라...! 눈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성안에서! 게다가 나는...... 카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책이 타버리고 있다는 사실, 성 안에서 책의 손실을 슬퍼할 사 람은 코히마와 자신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슬픔조차 희미했다. 두려움이 슬픔을 앞섰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루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푸른 불꽃은 사그러들고 서재 안 은 고운 잿더미에 뒤덮혀 있었다. 멀쩡하게 남은 커튼만 가볍게 흔들렸다. 루이는 묵묵히 서 재 안을 둘러보다가 무릎을 꿇고 고운 재를 만져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자연발화로군요.” 괴괴한 침묵이 감돌았다. 카트니는 물론이고 사람들 모두가 그를 쳐다보며 어떤 설명을 기 다리고 있었다. 카라는 문득, 루이가 그럴싸한 말을 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이자드가 지금 깨어 있다면 목소리만으로 루이에게 말 을 해줄 수도 있겠지. 가까이 있으면 카라 자신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한 발짝 안으로 다가들자 그제서야 어린 여동생의 존재를 알아차린 카트니가 엄한 목소리로 말 했다. “카라, 넌 나가 있어라.” 항의하는 시선을 보내봤자 카트니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다. 카라는 포기하고 서재 앞에서 물러나왔다. 밤을 기다려 이자드에게 물어보든가, 아니면 내일 루이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하 면서. 그러나 그날 밤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서워서, 두려움 때문에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 다. 기껏 잠이 드는가 싶으면 악몽이 덮쳐왔다. 유모와 이자드, 아버지와 카트니, 커다란 동 물들과 푸른 불꽃,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붉은 원...... 겨우 잠에서 깨었을 때는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에 드물게 내리는 비였다. 1장 가면의 마법사 (5) 새벽에 깨어났을 때는 바로 북탑에 가서 이자드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려 고 방문 앞까지 걸어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이유로 걸음을 돌리기를 몇 번, 어느 새 아침식사 시간이 다 되었다. 카라는 단념하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아침만 먹고 물 어보러 가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겨우 방문을 열고 나선 것은 점심 때도 지나서였다. 발은 늘 가던 대로 서재 쪽으로 향했다. 카라는 생각에 잠겨 서재 문 앞까지 갔다가 서재 안이 다 타버린 것을 기억하고 멈칫했다. 갑자기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발밑이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카라는 백지가 되어버린 머리로 중 얼거렸다. 그렇게 멍한 상태가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몰랐다. 문득 그녀는 뒤쪽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카라! 여기 있었구나. 찾고 있었는데…” 카라는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가면에 헐렁한 로브. 루이였 다. 그는 쾌활하게 카라의 어깨를 두드리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카라는 정신없이 고개만 저었다. 루이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서재를 쳐다보았다. “아아…서재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는 게 좋겠는걸. 차 마실래?” 서재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말고 카라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주방에 들렀 다가 북탑으로 올라갔다. 시간과 공간이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는 느낌은 여전했지만,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조금씩 마 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카라는 창틀 언저리에 앉아, 둥그런 컵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 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살짝 몸을 젖혀 구름낀 낮은 하늘을 보았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바람이 강해지고 있었다. 루이는 단풍나무 시럽으로 졸인 밤과자를 베어물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거북스러운 듯 옷자락을 털며 말을 꺼냈다. “카라......이자드가 한 가지 실험을 해봤으면 한다는데. 도와줄 수 있겠니?” 카라는 마지막 한모금의 식은 차를 꿀꺽 삼키고 다리를 흔들었다. 실험. 별로 좋게 들리는 말은 아니다. “무슨 실험을? 왜?” - 별로 위험하거나 하지는 않아. 확인해 볼 게 있을 뿐이니까. 간단한 거다. 하고 나서 설명 해 주지. 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유령 같은 목소리로가 아니라, 이자드와 직접 마주보고 말하 고 싶다. 확인해 볼 것......카라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걸터앉았던 창문에서 뛰 어내렸다. 해가 졌다. 다음 순간 눈 앞에 있던 루이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이자드가 서 있었다. 눈 앞에서 그 ‘교대’를 본 것은 이것으로 두번째다. 교대는 순식간에 이루어졌 다. 눈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자드는 소매를 걷으며 나직이 말했다. “간단해. 지금부터 내가 네게, 내 마법을 일부 부여할 거다.” 카라는 흠칫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자드는 딴에는 최대한인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무서워하고 있는줄은 알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즉시 내가 막을 테니까.” 무서워하고 있다고? ‘이번에는’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카라는 숨죽여 생각하며 이자드의 눈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겨우 용기를 짜내어 말할 때까지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손을 내 밀어 카라의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탓 트밤 아시. Tat -tvam - asi." 특별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순간적으로 눈 앞이 푸르게 빛나기는 했지만 그것 뿐이었다. 카 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자드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한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불꽃을 일으켜 봐라. 기억하지? 아날라Anala.” 카라는 움찔하며 서재에 타오르던 그 푸른 불꽃을 생각했지만, 이자드가 손을 내밀며 그 위 에다 만들어 보라는 시늉을 하자 천천히 침을 삼키고 손바닥을 피며 중얼거렸다. “아날라. Anala." 훅! 하고 불꽃이 타올랐다. 바로 손바닥 위에서. 카라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다가 넘어질 뻔했다. “이걸 어떻게 없애죠?” 카라가 어쩔 줄 몰라 불꽃을 바라보며 말하자 이자드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 지그시 손바닥 위를 눌렀다. 불꽃은 사라졌다. 그는 아무 설명 없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바람을......다라Dhara라고 말해봐." “...다라. Dhara." 바람이 훅 일어났다. 신기하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카라는 즐거워진 기분으로 주변을 도는 바람을 쫓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됐다. 이제 됐어.” 이자드는 그렇게 말하고 묵묵히 카라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자드가 말없이 바라보는 동안 카라는 불안한 느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자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앉아서 얘기하자.” 이자드는 카라를 앉히고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나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카라..” 이자드가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카라는 또 한번 흠칫했다. 이번의 놀람은 불 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이자드는 천천히 손가락을 깍지끼며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말해야겠지. 조금 전 내가 말한 마법은 가짜다.” “에에?” “그래. 처음에 건 마법, 그건 내 마법력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본성을 드러낼 때 쓰 는 말이었을 뿐이다. 마법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본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다라, 그건 바람이 아니라 땅에 관계된 말이고.” 카라는 뚫어져라 이자드를 노려보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즉, 네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거라는 말이지. 원래 존재하는 마법이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아니, 비슷한 방식으로 서재에 불이 난 거야. 어쩌면 저 큰 동물들도 너 때문에 나타난 건지도 모르겠다.” 카라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한참 시간을 들인 다음......결국 속삭였다. “하지만 어떻게요?” “글쎄다.” 이자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글쎄, 이건 추측일 뿐 사실 여부는 몰라. 계곡에 갔을 때, 너와 루이가 있는 곳에만 짐승 들이 몰려들었던 것 기억하겠지? 그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혹시 네게 마력이 잠재해 있지 않나 하고 해본 실험은 실패인 것 같았다.“ “그...주문?” 카라는 아날라, 라고 말하려다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입을 다물며 말했다. 이자드는 고 개를 끄덕이고 말을 계속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내 주문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다르다. 설령 다른 마법사가, 혹은 마 법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내 주문을 외운다 해도 나와 같은 효과를 볼 수는 없다는 얘기지. 그런데 네가 외운 주문은 다음 날 불을 일으켰다. 게다가 그 불꽃의 색깔은 오직 나에게서 만 나타나는 빛깔이야. 설령 다른 마법사가 같은 마법을 사용한다 해도, 마법색이 다르기 때 문에 서로 다른 빛깔이 나타나게 되어있지. 그 불은 내가 일으킨 게 아니었고, 그런데도 나 와 같은 색을 띠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곳에서 그 주문을 알고, 흉내낼 가능성이 있는 것은 너 뿐인데..." 이자드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니 네게 어떤 기묘한 힘이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아. 그렇다면 이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사건도 너 때문일 수 있지 않을까? ‘동물들’ 역시 너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 은 아닌가?“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카라를 관찰하듯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가정해놓고 문제를 풀어보려 생각하니 서재는 너와 확실히 연관이 있었지. 하지만 거대한 짐승들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뭔가 생각나는 게 없나?" 거대한 동물들. 카라는 등골을 스치는 한기에 몸서리를 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유모......” 이자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카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등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카라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패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디서부터라구요?” “유모.” “음......지난 번에 말한 것 같은데 유모는 이 지방 사람이 아니라 남쪽 섬에서 온 사람이었 고, 얼굴이 검었고, 날 친딸처럼 사랑해 줬고, 열 살 때 병으로 죽었어요. 카트니는 유모가 죽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고, 장례식도 못가게 했죠. 아마도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은 기억을 떠올리고 나름대로 염려해서 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을 하는 행동은 평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자드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카라는 조금씩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일까. 이자드 앞에서는 솔 직하게 말할 수 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아마도 유모는...내가 살아오면서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진짜 내편이었을 거예요. 절대적으 로 나를 믿어주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 주는 사람. 그냥 아무래도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라...혼을 내기도 했지만 정말로 용서해주는..." "엄마같은?" 이자드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너무나 생소해서 카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마 그런 거겠죠. 잘은 모르지만." 이자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른 데 주의를 돌렸다.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게 뭐라고?”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나요?” 이자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 어렸을 때 내가 말을 잘 안들으면 유모는 늘 늑대가… 커다란 늑대가 와서 잡아간다 는 말로 위협하곤 했죠. 이 고장 사람들이 다 그러듯이.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내가 이렇게 대꾸한 기억이 나요 - ‘ 어째서 늑대야? 다른 동물은 없어? 커다란 쥐라든가......’” 별로 내키지 않는 얘기였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말을 끝내는 동안 이자드는 침묵하고 있었 다. 카라가 이야기를 끝내자 그는 자세를 약간 고치면서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유모가 죽은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물어도 될까?” 몇 초간, 아니면 몇 분 간, 카라는 빤히 이자드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글쎄요......” “슬프지 않았나?” 잠시 망설이다가, 카라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슬프지 않았던 것 같다고. 그런데 말을 꺼내기 전에 루이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 슬프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순간 카라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슬픔을 느낀 기억이 없다. 운 기억도...... 카라가 본 것은 죽기 며칠 전, 푸르스름한 얼굴로 누워있던 유모의 모습과 장례식이 다 끝난 다음 남 은 물건을 태우던 조의식 뿐이었다. 병이 든 이후로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옆에서 사라 져 버렸다는 허전한 느낌은 이미 죽음 이전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다시 만날 가능성이 완전 히 상실되었다고 해서 그 허전함이 갑자기 커지지는 않았다. 문득 카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툭툭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았다. “하지만 별로, 기억이 없어.” 이자드는 그 말만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는 카라에게 다시 물었다. “다른 걸 생각해보자. 서재는 어때? 그곳에서 주로 생활했다고 들었는데.” “그랬죠. 거기말곤 자유로운 공간이 없으니까.” - 라는 것은 좀 답답하기도 했다는 뜻? 루이가 한 마디 거들자 이자드는 실마리를 찾았다는 듯 가볍게 손을 마주치더니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아무래도 내 추측이 맞는 것 같군. 알겠어. ‘대상’에 대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억압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건가.” - 이자드! “이자드!” 루이와 카라는 거의 동시에 항의의 소리를 울렸다. - 좀 알아듣게 말해줄 수 없냐, 너? “그러니까......” 집게 손가락을 세우고 뭔가 말하려던 이자드는 난처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친절하고 알 기 쉽게 설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네가 어떤 일을 골똘히 생각하는데, 아니 이런 표현은 좀 안 맞는군. 그러니까......어떤 일에 대해서 네가 느끼는 감정이 좋은 쪽과 나쁜 쪽 양쪽 모두이고, 나쁜 감정을 느껴선 안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단 말이야. 거기에 어떤 계기가 부여되면 사건 이 일어나는 거지.” 카라는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려보다가 물었다. “으음......그러면 서재에 불은? 왜 일어난 거죠?” “추측하자면-” - 또 그놈의 추측. 이자드는 루이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 쪽은 상당히 분명하지. 내 주문을 봤기 때문에 ‘불’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서재는 네가 좋아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무의식 적으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투영된 거지.” “...말이 어렵긴 하지만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 을 경우 그 쪽을 따라간다는 거예 요?” “그건 아니고......” 이자드는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흔들다가 마 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모르겠다.” 카라는 항의의 소리를 웅얼거렸지만, 이자드라고 모든 걸 알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카라는 손을 쳐들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그러니까......그 동물들이 나타나는 건 내가 유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 때문 이라는 건가요?” “내 추측으로는.” “하지만, 난 감정을 잘 통제하는 편인데요.” 이자드는 아무 말 없이 기묘한 표정으로 카라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몸을 일 으켰다. “너무 늦었군. 좀 자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궁리를 좀 해보지......” 카라는 입술을 내밀며 무책임해- 라는 항의의 말을 삼켰다. 대신 그녀는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이자드, 정작 중요한 걸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이자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무슨 감정을 가졌든 간에, 왜 그렇다고 해서 불이 일어나고 커다란 동물이 나타나야 한다는 거죠? 보통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가졌다는 힘이라는 게 어떤 거예요? 마법?” 이자드는 잠깐 카라를 내려다보다가 칭찬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지적이다. 그래. 아무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지. 네가 지닌 소질은…아, 그 설명 은 내일 해주마.” “하지만…!” 카라의 항의는 묵살되었다. 이자드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로 그녀를 쫓아냈다. 잠자리에 들어 멀뚱멀뚱 천장을 쳐다보다 보니 이자드의 설명은 모두 말도 안되는 소리로 여겨졌다. 서재에 불을 일으키고, 집채만한 늑대를 만들었다고? 말도 안된다. 그녀에게는 그 런 힘이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그게 그녀가 저지른 짓이라면, 어째서 동물들이 그녀를 공격 했단 말인가? 그래. 이자드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손 안에 피어올랐던 선명한 불꽃과, 주위를 감싸고 돌던 작은 바람의 기억은 선명했 다. 겨우 든 잠 속에서는, 거대한 비석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건 유모의 무덤이었다. 어렴 풋한 의식 속에서 카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난 유모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걸. 흐르는 시간에 가속이 붙은 것 같았다. 계곡에서의 일 이후 조용했던 일주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그건 폭풍 전야의 침묵이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 어두운 꿈에서 깨어나 자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께서?” 요 며칠은 의외의 일 투성이었다. 아버지를 만난 지 1년은 된 것 같았다. 존재감 없이 살아 오던 아버지가 갑자기 부르다니, 왠지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아버지의 병실이 있는 남쪽 탑으로 걸어가면서 카라는 혹시 친부모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 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카라는 언제나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는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죽기 전에 이야기를 해두자 고 생각하신 걸까? 아버지가 죽는다......생각해 본 적은 있었지만 어쩐지 실감은 가지 않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모가 죽었을 때도 실감은 하지 못했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카라는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커튼을 내린 방 안은 어두웠다. 희미하게 약품 냄 새가, 그리고 약품 냄새에 섞여 병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등을 기댔다. 원래 날카로운 편이었던 얼굴이 살이 빠지면서 뼈만 앙상하게 두드러져 마주보기 무서울 정 도였다. 카라는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부르셨어요.” “......이리 가까이 오너라, 카라.” 옆에 다가가 가만히 앉는 동안 그는 뚫어져라 카라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혀 를 차며 앙상한 미소를 띄운다. “많이 컸구나. 카트니에게 얘기는 듣고 있었다. 여전히 책만 붙들고 있다고?” “아, 아녜요. 요즘은 종종 밖에도 나가요.” “그 마법사와는 마음이 잘 맞느냐?” 카트니가 늘 루이와 함께 있는 것도 이야기했나보다. “음, 네. 그런 편이에요.” 카라는 망설이면서 대답한 다음 주저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편찮으세요?” “아니, 아니다. 괜찮아.” 아버지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황급히 그녀의 말을 부인했다. 그러고는 또 한참 가만히 쌕 쌕 숨만 들이쉬었다. 카라는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병색이 완연 한 뾰족한 얼굴에 그의 본질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원래 왕의 행정관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정관리 능력을 가진, 성실하고 근면한 관리...그리고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고지 식한 사람. “최근에 계속 안좋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젯밤에 겨우 들었다.” 카라는 순간 긴장했다. 병자는 앙상한 손을 카라에게 뻗었다. “카트니는 끝까지 내게 말을 하지 않으려 했던 모양이다만…네 문제가 걸렸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해결을 하려면 네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한 박자 쉬고, 침묵. 아버지는 기침을 몇 번 하며 고개를 숙이더니 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너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오늘밤에 계곡에 나가서 일을 마무리했으면 한다더구나.” 듣지 못했다. 카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망설이는 듯,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라 를 살피더니 돌연 화제를 바꾸어 나직이 말했다. “네 친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지?” 카라는 손이 희미하게 떨리자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는 언제나 그가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장면이 펼쳐질 가능성을 생각했으면서도 당혹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엇갈린 감정과, 친부모 에 대한 호기심이 뒤얽혔다. 아직까지 친부모에 대해 그렇게 궁금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 다. 그러나 지금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감정이 뒤엉켰다. 그녀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부스럭거리며 몸을 약간 일으켰다. “저 그림을 본 적이 있느냐?”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커튼에 반쯤 가려진 그림이 보였다. 카라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서 커튼을 마저 걷었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원형 궁전이 있다. 그 벽 끄트머리에 거대한 은빛 날개를 반쯤 펼치고 선 은발의 아름다운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손에는 긴 창을 들고 있다. 카라는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다지 묘사가 세밀한 그림은 아니었다. 부분 부분 햇빛을 반사하여 투명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웠지만, 그 머리카락이 얼굴 을 가리고 있었다. 분명치 않은 얼굴인데도 그 사람은 어딘가 지치고 슬퍼 보였다. 카라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저건 누구죠?” “긴나라 족의 마지막 왕, 파류나 왕이라고 하더구나.” 긴나라족? 카라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제까지 읽은 책에서는 그런 이름을 보지 못했다. “어떤 전설에 나오는 종족이죠?” “실재했던 종족이다. 바로 20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뭔가 껄끄러웠다. 카라는 한참동안 그림을 쳐다보다가 눈을 비볐다. 잠깐, 그림 전체를 가르면서 붉은 원이 그려지는 것 같은 환상이 보였던 것이다. 그 사이에도 아버지는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진 섬에서 살던 종족이지. 수명이 길고, 아름다우며 음악적인 사람들이었다.” “엘프들처럼요?” “그래. 엘프들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몰락해온 종족이었다고 들었다.” 카라는 그의 곁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들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죠?” 아버지는 말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 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나는 오래 전에 모험을 한 적이 있었다. 모험가였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날카로운 행정관 타입의 아버지가 모험가였다니. 그는 어깨를 보일락 말락 으쓱이며 손을 흔들었다. “별로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니란다. 어린 나이의 치기였지. 단 한 번의 모험이었고,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났다. 그 때 한 사람에게 목숨빚을 졌지. 그는......” 또 한번 아버지는 껄끄럽다는 듯 손을 펼쳤다. “자세한 사정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너를 맡길 때. 저 그림을 건네주며 그림에 얽힌 사연을 설명해주고는, 너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잘 부탁한다는 말만 하고 떠나버 렸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카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네가 긴나라 족은 아닐까.” 그 말에는 이미 부정의 뜻이 담겨 있었다. “네게는 날개가 없었지. 게다가...그...” 아버지는 거북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들 긴나라 족은 남성도 여성도 없다고 했는데, 너는 분명 여자아이였다. 그러니 나로서 도 네 친부모가 누군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해 줄 수 있 는 말은 이게 다로구나.” 카라는 숨죽인 채 가만히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더 말하지 않은 것이 남아 있다는 느 낌이 드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버지는, 그는 언제나 친절했다. 카라에게 그렇게 가깝게 다가든 적은 없었어도 늘 친절했다. 그는 이제 머뭇거리며 부드럽게 카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앙상한 손이 카라의 손을 쥐었다. “카라......너는 좋은 아이다. 유별나기는 하지만 착한 아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우리를 가족 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어려서부터 속을 잘 알 수가 없었지. 언제나 그 유 모의 말만 잘 들었으니까 말이야......” 그다지 잘 들었다고는 할 수 없어요. 카라는 기계적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주저하며, 어색 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겠지? 네가 내 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그다지 좋 은 아버지는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노력해 왔단다......” 다음에 나올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친딸은 아니지만 이날까지 키우며 친자식처럼 정이 들 었다는 것, 평범하게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이야기. 그러나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만 강해질 뿐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믿고 싶어할 뿐. 혹은,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고 축축한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카라는 조용히 손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 이름, 카라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으신 건가요?” 병자는 가만히 눈을 떨어뜨렸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아니야…그건 네 어머니가…죽은 아내가 지은 이름이란다.” 꽤 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메꿨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침내 정말로 하고 싶었을 말을 꺼냈다. “마법학교나 신전에 들어가고 싶다면 네 뜻대로 해주마.” 카라는 그때까지 아버지에게 잡혀 있던 오른손을 살며시 빼내며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요.” 바깥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비가 온 후 바람이 세차게 분다 싶더니 제법 매운 추위가 밀려들었다. 카라는 희미하게 몸을 떨며 망토깃을 여몄다. 말을 끌어내고 이자드를 기다렸지 만 그는 현관에서 카트니와 짧은 대화를 나누더니 나오자마자 말했다. “말은 타지 않을 거다. 가까이 와봐라.” 이자드는 카라의 손을 잡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프라브리띠.Pravriti. 아닐라. Anila." 몸이 가벼워지더니 발끝이 약간 떠올랐다. 살그머니 한쪽 발을 내딛자 미끄러지듯 몸이 앞 으로 나가면서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균형이 쉽게 잡히지 않아 허둥대는데, 이자드 가 손을 잡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카라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이자드가 대체 무슨 말로 카트니를 설득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완전히 넘어간 것만은 분명했다. 보통 때의 카 트니라면 이런 일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자기라도 따라가겠다고 나섰겠지. 그러 나 지금 그는 문 앞에 선 채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카라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뒤로 성의 하인들이 주욱 늘어서서 음울하게 지켜보고 있다. 카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침묵은 언 제나 듣던 수근거림보다 더 나빴다. 이자드와 루이는 엄청난 속도로 성문을 벗어나 마을을 빠져나갔다. 과연 마법이란 편리하다. 이자드는 문득 입을 열었다. “유모 말인데......어제 했던 얘기, 좀 자세히 해볼래?” 카라는 망설였다. 또 유모인가. 속이 조여드는 것 같은 불안감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저도 모르게 이자드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이자드는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말해 봐라.” 별로 위안이 되는 말투는 아니지만 아무 말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카라는 긴장을 약간 풀 고 곰곰이 생각했다. “별로 자세히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어제 말한 대로, 어렸을 때 유모가 나를 혼냈던 일. 흔히들 그러죠. 무서운 늑대가 잡아간다고. 그 때 난 어째서 커다란 늑대일까......늑대만 한 고양이라면 더 무서울 텐데. 아니면 곰만한 쥐라든가...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그런 얘길 했더니 유모는 굉장히...” “화를 냈었나?” “아뇨...화를 냈다기보다는 어쩔 줄 몰라했던 것 같아요.” 소리를 빽 질렀었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리고 나서 유모 는 눈물을 글썽이며 카라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 소리 하면 안돼요…잠깐 동안이었지만, 그 때는 유모도 다른 사람들처럼 기분나쁜 아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 니었다. 유모는 더 힘주어 카라를 끌어안아 토닥거리며 속삭였다. 유모는 알죠. 아가씬 나이 에 비해 너무 똑똑한 거예요. 그럼요. 사람들 하는 소린 하나도 신경쓸 것 없어요. 그래도 그런 소린 하는 게 아니야. 알았죠? 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동안 이자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걸음을 멈추 면서였다. “다 왔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카라는 멈춰서서 이자드의 손을 놓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눈덮힌 계곡은 더 스산한 느낌이었다. 날이 따뜻해지고 비가 내렸지만 이곳의 눈은 별로 녹 지 않았다. 뒤이은 추위에 더 단단히 얼어붙은 것 같다. “앉아.” 언제 다 준비해왔는지, 이자드는 바위 위에 모피를 깔고 앉아서는 책을 펼치고 있었다. 주변 을 둘러보니 보일락말락 가느다란 선 같은 것이 보였다. 카라는 몸을 굽혀 그 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몸을 굽히는 통에 그림자가 져서 더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어쩐지 지난번에 루이가 들고 나가던 실꾸러미가 떠올랐다. 덫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한 한 가닥의 실이 지 금 이자드가 앉아있는 바위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카라는 잠시 더 서성이다가 별 수 없이 바위에 앉았다. “어둡지 않아요?” “바스 Vas."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짤막한 한마디만으로 푸르스름한 불꽃을 일으킨다. 불꽃이라기보다 는 등불 같은 빛이었다. 그 푸른빛을 보자 반사적으로 소름이 끼쳤다. ......바보같이. “이자드......” 이자드는 왜 부르느냐는 듯 눈만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얘기 상대가 되 어줄 것 같지 않은 눈치였다. “루이는 자요?” - 아냐. 깨어 있어. 심심하니? 다행히도 루이가 깨어 있었다. 하품이 섞인 듯한 목소리이긴 했지만. 카라와 루이가 잡담을 나누는 동안 이자드는 묵묵히 책만 보고 있었다. 카라는 루이에게 바깥 세상에 대해 물었다. 남쪽은 어떤 곳인지, 수도나 바다 건너 남쪽 섬, 들은 적도 없는 동쪽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 는지, 눈이 전혀 오지 않는 곳도 있다던데 정말인지…루이는 대부분의 질문에 답해 주었지 만 그리 멋진 묘사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의 여행담은 대개 극도로 한쪽에만 치우쳐 있 었다. 자신이 관심두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해서 무슨 이야기에나 한 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 셈이었다. 밤이 깊어가며 카라는 점점 심해지는 추위에 망토를 여미며 물었다. “혹시 긴나라족이라는 사람들도 만나봤어?” 무심코 던진 질문이었건만, 루이의 반응에 카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루이는 날카롭게 숨 을 들이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라는 눈을 깜박였다. 그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루이 는 이제까지 긴장하거나 심각한 표정 한 번 지은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난 날 팔에 상처를 입고서도 별로 걱정스러워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 다. 루이는 짧은 숨을 몇 번인가 몰아쉬더니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 긴나라……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그냥…들었어. 잘 알아?” - 그냥 듣다니, 누구에게? 긴나라족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 어. 누가 무슨 말을 하는 걸 들었지? 루이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날카롭게 추궁하고 들었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난…” 그 때 갑자기 이자드가 책을 덮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왔다.” 카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있었다. 짐승들이 주변에 몰려들어 있다. 지난 번 못지 않은 숫자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습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기다리던 입장이었다. “흠. 내 생각이 맞은 것 같군.” 이자드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손을 펼쳐 허공에 복잡한 문양을 그렸다. 주문은 한마디도 없었는데, 땅바닥에 지난번과 비슷한 푸른 빛이 일어났다. 빛은 바닥에 놓아둔 실 을 따라 원을 그렸다. 곧 파앗! 하는 선명한 소리가 울리더니 주변이 환해졌다가 어두워졌 다. 그러나 짐승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자드가 쳐놓은 ‘덫’은 일종의 방어막 같은 것을 형성하고 있었다. 짐승들은 흉포하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가 푸르스름한 막에 부 딪쳐 튕겨나갔다. “뭐, 뭐하는 거예요 이건?” 카라는 첫번째 짐승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모습에 기겁을 하며 외쳤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침을 흘리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방어막 때 문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구역질이 났다. 안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기분이 나빴다. “무서워하지 마. 더 흉폭해진다.” 이자드는 말을 하면서 카라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카라는 힘겹게 침을 삼키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몇 번 호흡을 가다듬자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등 뒤, 앞에 서 있는 이 자드의 등 뒤로도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끊이지 않았다. 짐승들은 여전히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카라는 고개를 떨구고 발만 내려다보았다. 그 때였다. 기억에 선명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카라 아가씨, 우리 카라 아가씨.” 흥얼거리듯, 분명치 않은 느릿한 발음. 카라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믿을 수가 없었 다. 어렸을 때 보았던 그대로 커다란 유모였다. “유모?” 확인하듯 입을 열자 자신의 목소리가 어리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카라는 열 살로, 그 이전, 일곱 살… 여섯 살로 돌아가 있었다. 유모가 어르듯 말했다. “말을 잘 듣지 않으심 안돼요, 카라 아가씨. 안그러면 커다란 늑대들이 와서 물어간답니다. 무섭지요?” 아, 그 날이다......예전에 있었던 일이야. 이건 꿈인가? 아까부터 일어난 일이 모두 꿈인가? 꿈이라 해도 좋아. 카라는 뭔가 더 생각하기 전에, 얼빠진 듯 유모를 올려다보며 분명치 않 은 발음으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응, 무서워. 무섭다구. 그러니까 그런 얘긴 하지 마.” 무서우니까, 죽지 말아줘. 부탁이야. “우리 카라 아가씨......” 목이 메었다. 투두둑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카라는 크고 풍만한 유모의 몸에 이마를 기대 어, 눈물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떨림, 뒤이어 흐느낌이 섞여들더 니, 마침내는 무엇 때문에 우는지도 모를 정도로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유모는 어쩐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카라를 안고 등을 다독였다. 따뜻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포기해 버린 따스함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카라는 지금 자신을 안고 달래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크지도 않 고, 풍만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한 울음 뒤라 딸꾹질에 몸이 흔들렸 지만 눈물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유모가 아니었다. 이자드였다. 그는 엉거주춤한 정도가 아 니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카라를 안고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루이가 콧방귀를 끼 며 작은 소리로 킥킥거리는 것이 들렸다. - 잘난 척 할 땐 언제고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구나, 너. 좀 제대로 달래 줄 수 없냐? 이자드는 노려볼 대상이 없다는 사실에 한탄하는 듯 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괜찮아. 오래 쌓여서 그런 거니까 계속 울게 놔두자구.” “윽...흑......끅. 이제...됐어요. 괜찮아.” 카라는 연신 끅끅거리면서도 이자드를 밀어내고 눈물을 훔쳤다. 이자드의 로브가 엉망이 되 어 있었다. 창피한 생각에 피부 아래가 화끈거렸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다니…유모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눈물도 보인 적이 없는데. 게다가 이자드가 일부러 유모의 모습으로 자신 을 속였다고 생각하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기도 했다. 자신의 허락도 맡지 않고 마법을 쓰다 니. 그러나 어정쩡하니 곤란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자드를 보니 노성이 아니 라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자드는 카라가 엉엉 울다 말고 피식피식 웃자 어처구니가 없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보니 또 웃음이 나왔다.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에, 울음을 제 대로 그치지 못해 딸꾹질을 하면서 웃음을 깨무는 모양새라니,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정말 가 관이었을 것이다. 이자드는 무슨 말인가 할 듯 하다가 그만두고 어디선가 큼지막한 손수건 을 꺼내 내밀었다. 카라는 이자드가 내민 손수건을 말아 쥐면서 문득 중얼거렸다. “하지만 잊지 않으려고 했는데.” - 무슨 말이야? “나, 유모가 죽어도 별로 슬퍼지지가 않아서, 굉장히 미안했거든. 그래서 울지도 않고 잊지 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어.” 실컷 울고 나서인지 코맹맹이 소리가 귀에 설다. 카라가 코를 훌쩍이며 그렇게 말하자 이자 드는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는 엄격했다. “바보같은 생각을 했구나.” 카라는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하지만 눈물이라는 건 자기 연민에서 흘리는 거잖아요? 그렇게 대단한 일이 있는 것도 아 닌데 자기 서러운 것만 생각하고 실컷 울고 난 다음에, 정작 마음에 걸리는 일은 잊어버리 는 거잖아요!” 항의에 대해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자기 연민이 뭐 어때서? 스스로를 동정하지도 않고 살아갈 만큼 강한 인간은 없어. ...그리 고 울어버린다고 해서 모든 게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카라는 손수건으로 코를 팽 풀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동물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카라는 아연해져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끔 쥐나 새 같 은 것들이 움찔거리며 뒹굴고 있기는 했는데, 원래 크기 그대로였다. 카라는 멍하니 서 있다 가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한 거예요?” “내가 한 게 아니다. 아마 네가 울었기 때문일 거다." “에에?” - 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냐 너? 루이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자드는 그 말을 무시하고 차분히 말했다. “기본적으로 열쇠는 ‘압박감’이야. 압박감을 느끼고 응어리가 지면 그게 어떤 식으로든 왜곡되어 형상을 띠게 되는 거지. 즉, 네가 한 생각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야. 그건 ‘형 태’만을 이루지. 중요한 건 네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와 압박의 정도고, 그게 강하면 강할 수록 나타나는 형태도 위험한 게 되는 거다....이해하겠니?” 카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얼굴에 뚜렷이 드러낸 채 올려다보자 이자드는 다시 말했 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유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척 하고 억눌러 놓은 감정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이죠? 그리고 실컷 울어서 감정을 풀었기 때문에 동물들이 원래로 돌아갔고?” “그렇지.” - 야, 카라가 너보다 훨씬 설명을 잘하는데? “흠.” 이자드는 조금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했다. 카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 디 있냐고 항의하려 했지만 이자드는 카라의 말을 막으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이걸로 더 이상 그런 동물들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거다." 아까의 푸르스름한 빛은 사그러들고 없었지만, 사방에 쌓인 눈 때문에 그리 어둡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카라는 다시 한 번 코를 팽 풀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자드는 눈썹을 약간 치 켜올리며 그 손수건을 받아들더니, 카라의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로브 앞자락과 함께 내려 다보며 짧은 한숨을 지었다. “마법사란 언제나 냉정을 유지할 줄 알고 감정을 잘 통제하는 사람들이지. 그러지 않으면 곤란하거든.”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냉정하지 않다면 큰일이 나겠지. 이자드는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감정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것도 평온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억 지로 있는 감정을 마음 속 깊이 밀어넣고 억누른다면 문제는 오히려 더 커져 버리지. 네게 일어난 것도 그와 같은 일일 거다.” - 무슨 소리야. 알아듣기 힘들게 말하는 거 하나는... 루이가 투덜거렸지만 카라는 알 것도 같았다. 너무 울어서 눈이 아팠다. 왠지 나른하다. 하 지만 어째서? 소질에 대해서… 말해 준다고 하지 않았었나…카라는 애써 그 생각을 붙잡고 있었지만 서서히 졸음의 파도가 밀려들어 생각을 쓸어내 버렸다. 머리가 약간 떨어졌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올라갔다. 자고 싶기만 했다. 꿈속에서처럼 이자드의 목소리가 흔들려 들 렸다. “그나저나 -네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눈을 비비는 카라를 보며 품 속에서 가면을 꺼냈다. 가면. 카라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나야말로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닌가. 강하다고 생 각했었는데, 그저 강한 척 하는 어린애에 불과했던 건가. 감정은…… 카트니는 그 시간까지 잠들지 않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자드는 반쯤 잠들어 있는 카 라를 그에게 건네주며 뭔가를 말했다. 그리고 카라 쪽으로 고개를 숙여 들릴락말락하게 말 했다. “푹 자라.” ** 이자드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카라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래. 네가 지난번에 파라노말이라고 읽었었지. 원래는 패러노말이라고 읽고, 논리를 벗어 난 존재라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카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렴풋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자드의 말은 계속 이어졌고, 그것은 잔소리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마법, 특히 주문마법에는 분명한 논리가 있다. 그런데 그런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능력 의 소유자, 주문 마법을 연마하지도 않고, 연마할 필요도 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어. 그런 힘을 지닌 사람을 패러노말 마스터라고 부르지. 주문 마법 없이 자연력을 다룬다면 마력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지도 모르겠는 데, 마력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받은 천부적인 능력이고,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종족은 그 힘을 의식도 하지 않고 쉽게 사용할 수 있어. 기록된 바가 많지 않아서 확실히는 알 수 없 지만 마력과도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해. 몇 백년에 한 번…아니, 어쩌면 몇 천년에 한 번 정 도 나올까 말까한 능력이다. 인간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바는 거의 없고, 나로서도 추측밖 에 할 수 없는 힘이야.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나타나는지, 어느 정도의 힘인지…어느 것 하 나 알지 못한다.” 카라는 왠지 질려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서 내가 그거라구요?” 이자드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몰라.” “그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맞는 말이지. 하지만 네 힘인데도 스스로 의식하고 통제하지 못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구나.” 이자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커튼처럼 드리운 햇빛 아래에서 그의 모습이나 표정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제시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만, 지금으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성을 떠나라는 것 뿐이다. 아니, 마법학교나 신전은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네게 해가 될 수도 있다. 사원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장소와 추천장을 두고 갈 테니 까…” 잠깐, 이자드의 모습이 흔들렸다. 카라는 눈을 비볐다. 그는 햇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햇 빛? 순간 그녀는 뭐가 이상했었는지 깨달았다. 해가 떠 있는데 이자드가 나와 있다니? 카라 가 입을 벙긋거리며 창문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자, 이자드는 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슬쩍 웃 음을 흘렸다. “그래. 실제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지. 이런 식으로 설명해서 미안하다만, 네가 잠든 사이 에 떠날 작정이라서…” “뭐라구요?” 카라는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것도 생각만이었을까? 그녀는 이미 일어 서 있었다.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떫은 미소를 지었다. “나 책임져야죠.” “뭐?” 이자드의 큰 몸이 순간 휘청하는 것 같았다. “내가 집을 떠나게 된 건 당신 때문이니까 책임져요. 최소한 그 사원이라는 곳까지는 가는 길에 데려다 줘도 되잖아요. 내가 자는 사이에 슬그머니 도망쳐 버리다니 너무해!” “아니, 집을 떠나고 싶어했었잖아?” 이자드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카라는 모른척 주장을 밀어붙였다.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줘야 할 거 아녜요. 비겁해요. 나 같은 어린애가 졸지에 집에서 쫓 겨나서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게 됐는데…” “그만, 그만!” 카라는 입을 다물고 이자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지만 입가에 보일락말락한 웃음 같은 것이 걸쳐져 있었다. 카라는 소근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약속해요. 그 사원에 있으면 꼭 오는 거죠?” 그는 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십년 후에 온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설마.” “반년 안에.” 카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자드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현실에서보다 부드러웠다. 나 중에 만나면 꼭 말해주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카라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걱정 말아라. 너처럼 흥미로운 연구 대상을 잊어버릴 리는 없으니.” 그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농으로 들리지 않았다. 카라는 항의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이자드는 세번째로 뒤를 돌아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제 가야겠군. 다음에 볼 때까지, 그럼.” “잠…!” 카라는 이자드의 소매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손은 허공만 움켜쥐고 말았다. 공기가 서 늘했다. 문득 카라는 자신이 침대에 누운 채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음을 깨달았다. 꿈에 서 깨어난 것이다. 잠시 어리둥절해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꿈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햇살. 머리는 맑았지만 눈이 아팠다. 한참이나 눈을 비비고 깜박거린 다음에서야 기억이 났다. 너무 울어서 눈이 부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넋을 잃고 눈두덩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문간으로 튀어나갔다. 카라는 잠옷바람으로 씩씩하게 나선 계단을 뛰어올라가다가 그 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를 수 는 없다는 교훈을 얻으며 벽을 잡고 주저앉았다. 결국 거기서 한참이나 숨을 고른 후에 터 벅터벅 걸어서 마저 올라갈 수 있었다. 노크는 하지 않았다. 방문을 기세좋게 열어젖혔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이자드는 밤 사이에 이미 떠났다. 떠나 버렸다. 빈 방의 싸느란 한기가 감겨든 팔에 소름이 돋았다. 카라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막막하다. 꿈 속에서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사실은 이자드 루이가 귀찮아하더라도 그들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함께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긴가민가했지만, 아니 믿고 싶지 않았지만 지난 밤, 이자드의 말이 들어맞는 것 같았 다. 정말로 자신에게 어떤 힘인가가 있고, 그래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문득 거대한 동 물과 싸우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속이 느글거렸다. 그녀는 눈을 떠 마른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양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눈 앞에 들어올렸다. 힘? 이건 힘이 아니라 저주였다. 방향모를 분노가 꿈틀거렸다. 카라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아버지가 있을 남쪽 탑으로 향했다. 육년동안이나 실감하지 못했다. 그녀는 유모를 잃어버리고 마땅히 다가올 슬픔을 기다리는 대신 분노로 그 자리를 메꾸어 버렸다. 슬픔이 나설 자리를 봉해 버렸다. 육년이나…카라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복도를 지났다. 전에도 그랬지만, 아무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다들 카라를 먼발치에서부터 보고 허둥지둥 못본 척 몸을 피하는 것이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 다. 아침부터 몸 속을 헤집고 다니는, 제멋대로 풀려나온 감정을 다잡을 마음은 없었다. 전 과 같은 둔중한 고통이 아니라 날카로운 분노가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분노인 가? 누구에 대한? 병실 문을 밀면서 그 분노는 나타났을 때처럼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 대 신 떨리는 목소리와 담담한 의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카라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갈게요.” 난다의 이야기, 첫번째 내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공식적인 이름,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름은 난다라고 한다. 나를 키웠으며 내가 죽인 사람에게서 받은 이름이다. 이 이름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외부요소를 가리킨다. 이 이 름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또한 내 이름이라는 사실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두번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른 사람도 몇 명 없었고, 몇 안 되는 그들도 이미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그래도 그 이름은 내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내게 영혼이 있다면, 알이라는 이름은 그 영혼의 몫일 것이다. 내가 진짜 나라고 믿고 싶어하는 이름 또한 두번째 이름이다. 나는 가장 맑고 깨끗한 기억만을 골라서 알이라는 이 름의 병 속에 간직해 두었다. 소중한 기억, 하지만 지금은 아픈 기억들을. 난다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외부 요소는 태어난 지 300년 정도 된 용족이다. 은발에 보라색 눈, 모습은 태어났을 때나 다름없이 10여세 소년. 전에도 자라지 않았고 앞으로도 성장하거 나 변할 가능성은 없다. 용족 중에서도 돌연변이, 불구이기 때문이다. 외모에서 용족의 본질 을 드러내는 것은 눈동자 뿐이지만, 그것도 평상시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돌연변이, 불구의 존재다. 성체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용족 에게 주어지는 강대한 힘도 없으며, 선천적인 결함인지 후천적인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용 족과는 사고방식도 감정도 전혀 다르다. 사고방식도 인간에 더 가깝지 않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간 속에 섞여서 자랐으니 그렇게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간 이 된 것은 아니다. 힘이 없다 해도 나는 여전히 긴 수명과 놀라울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내 기억은 인간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자서전을 쓰려는 게 아니다. 일기 한 번 써본 적이 없어서 어색한 자기 소개만 늘어놓고 말았지만, 내 이야기는 간단히 해두자. 나는 마력없는 용족이라는 저주스러운 돌연변이로 태어나 버려졌고, 여차저차해서 살아남아 주문 마법을 익혔다. 용족들은 주문 마법을 저질이요 하급의 기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주문마 법을 주로 익히는 인간들이 수명이 짧은 탓에 본격적인 수준에 올라서기 힘든 것 뿐, 오랜 시간 연마하기만 하면 타고난 마력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타고난 마력은 연마를 필요로 하 지 않는다. 아니, 그들 스스로가 연마하려 들지 않는다. 그에 비해 주문 마법은 부단한 노력 이 필요한 것...지금에 와서도 나는 간혹 내가 얻지 못한 천혜의 능력을 생각하지만, 더 이상 그 힘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들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 물론, 용족 의회는 그런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나는 마법학교의 이사장 겸 교장으로 여기 잔다바티 성에 머무르고 있다. 용족 들과도 아득히 멀고, 내 과거와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 용족들은 아마 내가 살아 있다는 사 실 자체가 못마땅하겠지만 어찌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저 내 존재를 무시하고,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나를 그토록 꺼리면서도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아마도 카 라의 덕이겠지만... 카라. 내게는 카라일 뿐이지만 여러 개의 이름을 가졌던 그녀. 태어나서부터의 모든 기억을 세세한 부분까지 선명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나에게 있어서 도 그 이름과, 그에 관련된 기억은 특별한 무게를 지닌다. 과거를 낱낱이 기억하므로 일기를 쓸 필요가 없는 내가 이런 기록을 시작한 것도 카라 때문이었다. 발단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 날 일몰 무렵, 객이 찾아들어 학교 문을 두드렸다. "스승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잔다바티 성은 낮에 도저히 밖에 나돌아다닐 수 없을 만큼 무덥다. 물론 나에게까지 해당되 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서 여름에는 대부분의 일이 밤에 이루어진다. 마법학교 역시 밤 이 되어서야 문을 열었다. 저녁 무렵에 객이 찾아든다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공손한 태도로 들어와 그 말을 전한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체 이 때에 나를 찾아올 손님이 누굴까 생각했다. 예정된 약속은 없다. 예정없이 찾아올 사람은 더더욱 없다. 카라를 마지막으로 인간 친구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났다. 완전한 인간은 아니지만 파이 역시 오래 전에 죽었다. 나는 참을성있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울퉁불퉁한 푸른 피부의 노인을 의식하고 생각을 멈췄다. "누구라고 하던가요?" "이름이...이자드 루이 씨라고 합니다." 이자드 루이! 순간 등골을 타고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이자드 루이라고! 당장! 당장 안내해 오세요!" 이자드 루이! 그들이 아직 살아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가움에 들떴던 내 마음은 기다리는 사이 천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들이 잠든 것은 아 직 카라가 죽기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그는 아직...... "스승님, 이 분입니다." 나보다 훨씬 나이든 모습의 내 제자가 다시 한 번 나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자드였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의 그였다. 큰 키에 냉정함을 유지한 상아빛 얼 굴, 인간계 최고의 현자라 불리우는 나를 능가하는 지력이 깃든 검은 눈동자와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도.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당신이 난다인가?" 나는 잠시 동안 말문이 막혀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루이였다 면 좀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으리라. 그의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맞지 않는 옷 을 입은 듯 어색해하고 있다. 찬찬히 관찰하는 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앉으세요. 얘기가 길어질 것 같군요." 그는 내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으며 내내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 대해 무 엇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나 됐습니까?" "두 달 정도밖에." "두 달......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나는 평온해진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적어도 나를 찾아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 억하고 있는 것이 남아있다는 의미겠지. "아니. 아무 것도......깨어났을 때, 내 옆에 이곳을 찾아가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그의 말투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 이 떠오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 아아, 그 모두가 오래 전 일이다...쓰라린 설레임. 내가 인간 이었다면 눈물이 흘러내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군요. 알이라고 썼다면 찾아오기 힘들었을테니까." 그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는 조금도 감정적인 구석이라고는 없다. "무엇부터 얘기하면 좋을지...잘 모르겠군요." 그는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루이도 깨어 있습니까?" - 여기 있어. "그래요." 나는 말문을 열기 전 잠시 눈을 감았다. 이자드-루이는 인간이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 그 자신도 모를 만큼 긴 세월을 살아왔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인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지만 당연한 얘기다. 인간이 그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그렇게 오래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왜 생각지 못했을까. 잠을 자면서 그는 나와- 우리와 - 카라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렇게 잊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피의 차크라, 앞 그, 아니 그들이 그 섬을 찾은 것은 피의 차크라가 나타나기 이레 전의 일이었다. < 서쪽, 은의 바다를 건너 멀리 떨어진 한 섬에 전설 속에 나오는 반인 반조, 사람의 머리 에 새의 몸을 가진 인비인(人非人)이라고도 하는 이들이 있어, 전승에서는 그들을 일컬어 긴 나라(緊那羅)라고 불렀다. 이들이 사는 섬은 대륙에서 꽤 멀리 떨어진 바다에 있는데 용감한 항해자들이라 해도 찾아 가기 힘들고, 굳이 찾아갈 이유도 없는 곳이다. 모험자나 마법사들이 찾아가는 일이 있어 간 혹 그 이름이 언급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긴나라족이라는 이름을 몰라 날개달린 사람들, 새 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들, 혹은 천인(天人)이라고도 칭한다. 전승에 의하면 본래 그들은 대륙 안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래 전에 있었던 대전쟁 이후 바다로 밀려나 그 섬에만 틀어박혀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믿을 만한 보고에 의하면 그 섬의 바깥쪽 절반은 바다에, 중심 절반은 하늘에 떠 있었다고 한다. 그들 스스로는 그 섬을 '라노라크 에루타'라고 부르고, 성은 '아딜 테파'라고 불렀다고 하는 데, 대륙인들은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푸른 성을 멀리서 보고 '창성(創成)'이라고 이름붙였 다. 동쪽이나 남쪽 땅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엘프와 비슷한 면이 많다. 용모는 아름답고, 수명은 인간의 다섯 배 정도이며, 더할 수 없이 우아하다.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 같으며 자손이 적 다. 또 이 아름다운 '사람 아닌 사람'들은 성별의 구분이 없고, 어린아이가 아니라 알을 낳 는다고 한다......(후략)...> 길거리에는 어린아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가 쓸쓸하지 않소?" 왕은 온화하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담담한 말투였다. 창성 아딜 테파- 이 하늘의 성채는 바깥쪽은 반듯한 정사각형, 안쪽은 원형으로 만들어졌 다. 일곱 겹의 정방형 외성벽은 계단처럼 층층이 높아지면서 원형의 궁전을 감싸고, 궁전 벽 을 따라 다시 원형의 내성벽이 이어진다. 궁전 정중앙에는 하늘을 떠받친 기둥처럼 거대한 탑이 솟아올라 있었다. 성벽은 층마다 10하스타(1하스타는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 거리 의 두배. 즉 두 뼘 정도 길이다) 정도 높이 차이가 나는데, 아무리 둘러 보더라도 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없다. 성벽 자체가, 거인이 아니고서는 걸어서 오를 수 없는 거대한 계단인 셈이었다. 이 성의 주민들은 날개를 펴고 자유로이 그 높이를 넘나들었지만 - 그것은 기괴 할 정도로 균형잡힌 신전이었다. 이자드 루이와 파류나 왕이 마주앉은 곳은 중앙탑 바로 아래층에 있는 테라스였다. 하나의 거대한 도시나 다름없는 이 성의 저녁 풍경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이자드는 말없 이 바깥을 내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성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 겁니까?" "바깥 벽에는 이미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남은 사람은 거의 이 탑 안에 있지요. 아래쪽 섬 에 남아 있던 이들도 얼마 전 모두 불러올렸소." 왕의 음성은 부드럽고 음악적이었지만 씁쓸했다. 긴나라족의 왕, 파류나는 온몸의 털과 날개 가 은빛이었고 은은한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은빛 눈썹 아래로 부드럽게 빛나는 눈동자 역시 새파란 하늘빛이다. 긴나라족의 눈동자답게 흰자위는 거의 없었다. 은색과 푸른색의 조 화, 그것은 푸른 하늘을 등지고 떠있는 창성의 모습 그대로의 빛깔이었다. 파류나 왕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몰락해가고 있는 중이오......최근 20년간 태어난 아이는 단 둘 뿐이었지. 그나마도 정상이 아니었고."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이자드는 그를 쳐다보았다. - 루이는 이자 드의 눈을 통해 그를 쳐다보았다. 타인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란 다소 뒤틀린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도 루이는 그 눈 을 통해서 파류나 왕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여행을 하 다 보면 가끔 만날 수 있는 얼굴이다. 지치고, 지쳐서 끝을 내고 싶어하는 얼굴. 파멸이 깃 든… 이자드는 문득 눈 안쪽이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혀를 찼다.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두 사람이라도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면 어느 정도 공명하는 데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서로 다른 인격과 육체를 지니고 있다 해도. 하물며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입장에 서 공명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어느 한 쪽의 문제는 양쪽 모두의 문제가 되기 마련이고, 그럴 경우 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이자드 쪽이었다. 루이는 호기심이 강한 데다가 충동적이어서 성가신 일에 뛰어드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그렇게 상관없는 일에 관여하게 되는 것보다 더 피하고 싶은 것은 '감 정적 공유'였다. 그것만은 제발, 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루이는 격한 성미이기 때문에 그 파 동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격하고 참견하기 좋아하고 호기심 가득한 루이지만 때로는 이자드 이 상으로 냉정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일단 자기가 손쓸 수 없는 일에 대한 포기가 빨랐다. 최 선을 다했으니 그걸로 됐다는 건가. 유감스럽게도 이자드 쪽은 일단 동요하기 시작하면 그 렇게 쉽게 발을 빼지 못한다. 그런 성격 탓에 늘 뒤치닥꺼리 전담이 되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루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자드는 말을 하면서 파류나 왕에게서 눈을 피했다. "돕고 싶어합니다." "알고 있소." 파류나 왕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은빛 속눈썹이 깜박였다. 위엄있는 말 투에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우아한 몸짓. "말했듯이 지금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루이가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 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는 것은 알아요. 그는 이렇게 말하겠지 - 일단 해본 다음에나 포 기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파류나는 그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미소지었다. 이자드는 떫게 웃었다. 언젠가, 이자드가 심각한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낮이 되면 루이가 비교적 멀쩡한 몸으로 활동할 수 있었지만, 이자드 쪽은 한 달 이상 의식이 없었으니 밤이 되면 속수무책이었다. 한마디로 위험천만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 그가 모르는 사이에 루이는 지금 눈앞에 있 는 이 아름다운 긴나라족의 왕을 만났다. 이 대목에서 이자드는 하늘을 잠깐 우러르며 탄식 했다. 통촉하소서, 제발. 루이는 파류나 왕이 인간이 아니고 성별이 없다는 점을 깨끗이 무 시하고 그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결국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루이의 고집 때문에. 이자드는 속으로 이를 갈고 푸 념하면서도 새로 연결한 주문을 되새겼다. 언제나 혼자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 하는 루이지만, 보나마나 "어떻게 좀 해봐, 이자드."라고 말할 테니까. ** "제발 좀들 죽어라, 제발! 우와아아아아앗!!!" 소리도 요란하게 지르며 끝이 둔중한 카트바르겔을 수평으로 반바퀴 돌린다. 칼날이 뼈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루이가 내지르는 고함소리는 그 소리에 묻히지 않을만큼 컸다. 한쪽 손으로만 반바퀴나 검을 돌린 탓에 균형을 잠깐 잃은 사이, 다시 표정없는 인형들이 꾸역꾸역, 시체 아닌 시체들 위로 올라서며 자리를 메웠다. 루이는 넌더리를 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온몸에 튄 검은 피를 털어내는 것도 이미 포기했다. 사실 '죽어라'보다는 '좀 줄 어들어라' 라고 말하는 쪽이 적절하겠지만, 그런 걸 생각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고 그럴 필 요도 느낄 수 없었다. 루이는 꾸역꾸역 앞으로 다시 몰려드는 인형들을 노려보았다. 벌써 여섯 시간째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북쪽 면을 혼자 지키겠다고 자청했을 때에는 나름 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리 그라도 체력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헉, 헉......야아앗!" 다시 한 번, 카트바르겔이 와작 와작 과자 씹는 듯한 소리를 내며 인형 몇을 갈랐지만, 아까 만큼의 기세는 없었다. 좀비와 비슷한 검은피의 인형들은 그의 상태가 좋든 나쁘든 상관하 지 않고 무표정하게 앞으로만 밀려들 뿐이다. "제기랄!" 루이는 또 한발짝 물러서면서, 원래 둔한 날이긴 하지만 이제는 상할 대로 상해버린 카트바 르겔을 미련없이 던져버렸다. 그 대신 왼손에 쥐고 있던 화염도(火焰刀)를 고쳐 쥐었다. 5일 째, 해가 지면 멈췄다가 해만 뜨면 꾸역꾸역 다시 밀려 올라오는 이 끝도 없는 좀비들의 행 렬. 이자드의 분석으로는 좀비가 아니라 시체의 일부분을 가지고 만든 '인형'이라지만, 베고 썰고 자르고 있는 루이 입장에서는 인형이든 좀비든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화염도는 카트바르겔보다 훨씬 길이가 짧았다. 1하스타 정도밖에 안되니, 그만큼 사정거리도 짧다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화염도를 양손에 고쳐쥔 루이의 표정은 전보다 더 여유로와져 있었다. "좋~ 아! 하아아아아압!!!" 루이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기합을 내지르며 정신을 집중하자, 손가락 세 개 정도 너비의 울퉁불퉁한 검날이 하얗게 달아오르더니 끄트머리가 길어지면서 날카로와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화염도'라는 이름은 겉치레만이 아니다. 검 끝에서 1 하스타만큼 더 뻗어나온 날카로운 불꽃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히는 강력한 칼날이었 다. 때문에 평상시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칼이다. 그러나 그 화염도를 뽑아들고 기세를 올렸어도,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었다. 검은 피의 인형 들은 꾸역꾸역 앞으로 전진할 뿐이었고, 루이가 한번에 열을 베든 스물을 베든 꼭 그만큼씩 앞으로 나섰다. 전진은 불가능했다. 해질 무렵쯤 루이의 위치는 아침보다 한참 뒤쪽으로 밀 려나 있었다. 루이는 기계적으로 지친 팔을 움직였다. 화염도로 상대해봐야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달은 뒤 칼날의 길이는 줄였다. 그는 꼭 맨 앞줄만 휘저을 정도 반경으로 칼을 휘둘렀다. 해가 지면 교대해서 쉴 수 있다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그는 해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뒤이어 다른 삼면에서 싸우고 있을 긴나라족들은 워낙 사람이 적어서 거의 쉴 수 없음을 떠올렸다. 닷새째 싸운 이들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루이는 지친 심신을 집어삼키려 달려드 는 무력감과 패배감, 잡다한 상념을 털어내려 애쓰며 지친 팔을 다시 움직였다. 곧 해가 질 것이고, 그러면 어쨌든 이들을 조금은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무 생각없이 똑같은 반경으로 휘두른 칼이 공중을 헛친 감각에 어리둥절해서 앞을 쳐다보 니, 기계처럼 정확하게 앞으로 나서던 좀비들이 일제히 멈춰서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서쪽으로 돌아간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 물론, 자신이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어떻게 된 거야?" 루이는 팔을 늘어뜨리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멈춰선 인형들을 응시했다. 창성 아딜 테파의 외성벽을 빽빽하게 한 치 틈도 없이 둘러싸고 있는 서 있는 인형들. 어디 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긴나라족의 도움을 받아 밤중에 살펴본 이자드의 말로는 아래 섬으로부터 이 창성까지 인형들이 허공에 기둥을 이루고 있다 고 했다. 루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칼을 휘둘렀다. 칼날에 닿은 인형들 이 푸스슥 무기력하게 쓰러져 버린다. 그리고 칼에 베인 '인형'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시체를 남기지 않고,. 공기 중에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뭐야, 이거?" 혼란스럽다. 둘러보자 서 있던 인형들이 천천히 신기루처럼 스러져가고 있었다. "뭐야, 이거! 누구 놀리냐?" 확 핏대가 올라 소리를 지르며 칼질을 해댔지만 그의 칼은 거의 허공만 쳤다. 인형들은 나 타났을 때만큼이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루이는 곤혹스러운 표정 을 지우지 못한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가 다시 물러섰다. "이자드!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불쑥 외쳤지만 금방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 대신 뭔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외형상 으로는 인간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북면 끄트머리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자드가 때맞춰 중얼거렸다. - 아무래도 이게 본편 같은데. "...그런 것쯤은 말 안해줘도 알아." 루이는 녹초가 된 근육에 힘을 불어넣으려 애쓰며 양손으로 화염도를 움켜쥐었다. 정면에 편안한 자세로 서 있는 자는 아무리 봐도 인형이 아니었다. 표정 같은 것은 없다. 살기도 느 낄 수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칼을 쥐고 살아온 루이의 감각이 날카롭게 위험신호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흘끗 다시 한 번 태양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자드의 음성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 기다려......교대한 다음에, "내가 상대할 수 있어!" 루이는 이자드의 말을 자르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어느 정도 비축해둔 힘은 있었다. 전신이 긴장감으로 팽팽해진다. 상대방은 그의 살기를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 여전히 묵묵히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팽팽한 대치 상태 속에 루이는 천천히 칼끝으로 상대방을 겨누었다. 그 때 문득 이자드가 중얼거렸다. - 널 보고 있는 게 아니야. "뭐?" - 중앙탑이다. 이자드는 루이의 눈동자를 통해 그자를 볼 수 있다. 그 흰자위 없는 새카만 눈동자는 루이 를 지나쳐 창성의 중앙탑을 향해 있었다. 툭,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루이는 잠시 갈등했다. 해가 지고 이자드가 상대하 기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마법이 칼보다 나을까? 눈앞에 있는 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 었다. 사람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디에도 흰 부분이 없는 새까만 존재. 검은 얼굴과 검은 눈. 어둠을 뭉쳐서 만든 존재,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자는 갑자기 시선을 루이 쪽으로 돌리 더니 양손을 펼쳤다. 그리고 그 손 안에서 뭔가가 생성되는 것이 보였다. 어둠이다. - 물러서, 루이! 이자드가 경고성을 발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루이는 반사적으로 물러서며 화염도에 힘을 가 했다. 간발의 차로 엄청난 힘이 밀려들었다. "와앗!" 파창창창! 수백개의 유리잔이 한꺼번에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귀를 울린다. 루이는 한참이나 뒤로 밀 려난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발이 얼얼했지만 발의 상처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파 도 모양으로 솟아오른 화염도 불꽃은 창처럼 보이는 새카만 기운과 십자로 마주쳐 있었다. "윽......" 밀린다. 루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아직까지 머리가 쾅쾅 울 리는 것 같았다. 이를 너무 세게 물어서 턱이 얼얼했다. 그러나 턱에서 힘을 빼면 다른 부분 에서까지 힘이 빠져나갈까 두려웠다. 용을 쓰며 버텨도 팔은 천천히 접히고 있었다. 식은땀 을 흘리며 팔에 힘을 주려 애쓴 그 짧은 시간이 마치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 창이 보이는 것처럼 어둠을 뭉쳐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화염도에 잘리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오히려 화염도의 불꽃이 천천히 어둠에 먹혀들어가고 있다. 눈으로 땀이 흘러들어갔지만 닦아낼 여력이 없다. 루이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면서 시 선을 약간 올렸다. 새까만 '무한' 그 자체인 검은 눈과 마주쳤다......그리고 그것으로. "!"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팔에서 썰물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화염도의 날이 수그러든다. 75분 의 일초, 검은 창이 뒤로 빠지더니 허리를 베어 왔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파고 들었다. 그 순간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졌다. 위이잉- 강렬한 이명(耳鳴)이 덮쳐들었다. "괜찮소?" 귓가에 울리던 이명이 잦아들자 그제서야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자드는 잠시 눈을 깜박이 며 루이에게서 공명되는 통증을 완화시키려 애썼다. "괜찮아요, 이자드? 베인 거요?" 재차 묻는 소리. 이자드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실어 몸을 세우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베인 건 루이입니다." 얼얼한 한기와 열기가 뒤섞여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이자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몇 번 이고 머리를 흔들어 털었다. "다행히도 이 이상 앞으로 전진하지는 않는군." 고요한 가운데 긴박감이 묻어나는 목소리. 파류나 왕이었다. 검은 창이 루이를 베어나가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파류나가 그를 낚아채어 날아올랐던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자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몇 번인가 고개를 흔들고 뺨을 때렸다. 겨우 어느 정 도 몸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나서 둘러보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아까의 위치에서 두 층이나 올라온 성벽 위였다. 파류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루이는 괜찮겠소?" "죽지는 않을 겁니다……지금 아예 정신을...잃은 것 같군요." 루이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자 이자드는 떨리는 손을 멈추려 애쓰며 대답했다. 온통 뒤 흔들리던 시야가 회복되고 초점이 맞자 아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그 자'가 보였다. 주변에는 이미 빠른 속도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지만, 그 주변은 더욱 어두웠다. 맞붙어 있 을 때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지금 보니 그 자가 손에 든 검은 창은 4하스타 정도의 길 이였다. 저렇게 가볍게 들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긴 창이다. 어쩌면 무게가 없는 것일 까. 이자드는 가볍게 몸서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저건 대체...?" "위대한 죽음 - " 파류나 왕의 속삭임이 어둠속에 스며들었다. 섬뜩한 느낌이었다. 이자드는 파류나 왕의 옆얼 굴을 쳐다보았다. 단정한 얼굴에 초연한 표정이 깃들어 있다. 인간 이상 - 혹은 인간 이하 의 어떤 것을 반영한, 신상과도 같은 얼굴. 거기엔 어딘가 저 검은 죽음과 유사한 무엇인가 가 있었다. "저게 뭔지 알고 계십니까?" 이자드는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루이가 입은 상처의 통증이 둔중하게 느껴진다. - 녀석은 정신을 잃었으니 느끼지 못하고 있겠군...... "온다!" 대답 대신 파류나 왕의 입에서 나온 것은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한 마디였다. 검은 죽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둠이 육박해오는 것을 보고 이자드는 피하는 대신 손을 모았다. 입과 손이 빠른 속도로 마법을 엮어나갔다. "제길! 파라 마르가, 바가 야기아나우파비타, 바루나! Para marga, Bhaga Yajnopavita! Varuna!( 절대적인 길, 신성한 실의 제공자의 이름으로, 경계를!)" 언어는 빨랐지만 수인이 약간 느렸다. 이자드는 엄청난 힘에 떠밀리듯 숨이 콱 막혀오는 것 을 감지하며 아슬아슬하게 주문을 완성했다. 돌진해오던 검은 창이 푸르스름한 결계막에 부 딪쳤다. "컥!" 눈앞이 캄캄해지며 이자드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분명 창은 방어막에 부딪쳐 멈췄건만, 바늘 끝처럼 미세한 충격이 그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번에도 75분의 일초나 될까말까한 짧 은 순간이었다. 너무 빨라서 오히려 정지된 듯이 보이는 순간. 그자의 검은 눈동자가 눈앞으 로 확 다가든 것 같은 느낌. 무한한 허공.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엿본 듯한 현기증이 밀려들 었다. 이자드는 허공에 손을 뻗은 채 비틀거렸다. 지상까지 거꾸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 나 그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손이 있었다. "...사라졌소." 이자드를 거의 안듯이 부축한 채 파류나는 나지막히 말했다. "사라졌어요. 이제 갔소. 괜찮아요." 파류나는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계속 그 말을 반복했다. 그것이 이자드를 향한 것인지, 스스로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왕의 음악적인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지며 눈 앞이 다시 어두워졌다. 이자드는 탈진과 공명된 통증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자드가 눈 언저리에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팔다리가 묶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묶인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자드는 아무 것도 걸려 있지 않은 발목을 보고 속박주문에 걸린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것과는 종류가 다른 주문이다. 엉덩이 밑에 단단한 돌바닥이 느껴졌 다. 그는 어처구니 없는 심정과 분노를 더해서 팔을 흔들어 보았다. 주문으로 묶였다면 주문 으로 풀면 된다. 입만 자유로이 쓸 수 있다면…그는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의 발에 막 떼려 면 입을 다시 다물었다. 그는 멍하니 시선을 올려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찬연히 빛나 는 은빛 머리카락, 맑은 하늘색 눈빛. 파류나 왕이었다. 이자드는 잠시 할 말을 잊고 그를 쳐다보았다. 파류나 왕은 애석함과 갈망이 뒤섞인 눈매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뒤를 돌 아보며 말했다. "잠시 나가 있어라, 아도." 아도는 이자드와 루이도 알고 있는 긴나라족 젊은이였다. 아직 50세가 되지 않은 나이에, 화 려한 청록색의 자그마한 날개를 달고 있었다. 그는 쭈뼛거리며 이자드의 눈치를 조금 살피 다가, 왕의 명령을 받들었다. 이자드는 냉정을 되찾고 천천히 힘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대체 뭐가 어찌되어 가는 건지 모르겠군요." "미안하오.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를 틈타 속박 주문을 건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라고 생각하는데요." 목소리에 날이 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파류나 왕은 씁쓸하게 웃더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음악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상 우리 일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소." 끼어들었다는 표현이 거슬렸지만 이자드는 일단 호흡을 가다듬고 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루이의 부상이 심각해 그 여파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 주문도 풀지 못할만큼은 아니 다. 파류나는 이자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듯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목소리는 아름답다 못해 슬플 정도였다. "이건 우리의 싸움입니다. 외부인인 그대들이 여기 휘말려서 목숨을 잃을 이유가 없어요. 오 늘밤 안으로 떠나 줬으면 해서 부득이하게 이런 방법을 썼습니다. 말로 해서는 듣지 않을 테니까…" "허, 이렇게 속박해놓고 떠나라구요? 성에서 집어던지기라도 하시겠습니까?" 파류나는 그의 가시돋힌 말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오. 나도 약간이지만 마법은 쓸 줄 압니다. 지상으로 옮겨 드리겠소." "필요 없습니다! 떠나려면 내 힘으로 직접 할 수 있어요. 그 남은 힘으로 '당신의' 싸움이나 계속하시죠." 안 그래도 마지못해 참가한 일이다. 이자드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파류나는 난처한 얼 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커다란 은빛 날개가 감정표현을 하듯 건들건들 움직였다. 그러나 파 류나는 끝까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우리 때문에 - 이제까지 고생하셨습니다. 루이가 깨어나거든 정말로 고마웠다고 전해주시 오." "그 녀석은 그런 말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그 말만을 끝으로 파류나는 몸을 일으켰다. 종류가 다른 주문이라 속박 주문을 즉각 해제하 기는 힘들었다. 긴나라족은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종족이었으므로 이런 종류의 주문마법 을 익히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하려고 든다면 못할 일은 아니었지만 이자드는 망설였다. 그는 긴나라족의 왕이 긴 주문을 펼치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는 것을 바라보다가 차분하게 물었다. "아까 그자- 위대한 죽음이라고 했었죠. 그게 누굽니까?" 파류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면 어떤 존재냐고 물어야 할까요?” "마하칼리 MahaKali - 위대한 죽음. 피할 수 없는 파괴의 수레바퀴, 피의 차크라cakra - 우 리가 불러낸 파멸의 여신이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자드는 순간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리 는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공명일 뿐이다. 루이의 감정에 대한 반향일 뿐이 야.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루이는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파류나 왕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알고 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겠지 - 왜 멸망을 피하려 하지 않는가, 왜 백성들을 살리려 하지 않는가, 왜 얼마의 사람들 만이라도 피신시키지 않는가, 왜 희망없이 싸우려 하는가 - 라고." "그러겠지요." "말했었지요......이대로 가면 우리 종족은 몇 백년안에 절멸하오. 어쩌면 조금 더 갈지도 모 르지요. 하지만 우리에 대한 기억은 그 사이에도 천천히 엷어져 갈테고 우리 자신도 그럴 겁니다. 점점, 조금씩 엷어져 가다가 사라져 버리겠지요......그러느니." 파류나 왕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주문을 펼치기 위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나는 패배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난 이 싸움에 서 이기는 거요 - 반드시." 그 말을 하는 파류나 왕의 얼굴은 엄숙했다. 조금은 슬퍼 보이기도 했다. 이긴다고? 무엇에 대해? 무엇을 위해? 그러나 그런 질문을 던질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이자드가 들 은 마지막 말이었고 마지막 모습이었다. 곧 왕을 포함한 주변이 흐려지며 어둠과 몸의 경계 가 희미해졌다. 주위가 다시 뚜렷해지고 실체감을 되찾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맨 먼저 느껴진 것은 바 닥이 울퉁불퉁하고 차갑다는 점이었다. 곧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닷물의 짠내가 코속으로 밀려들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은 검푸른 하늘 위에 떠 있는 창성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깔린 라노라크 에루타 역시. 그가 앉아 있는 곳은 두어 사람이 가까스로 서 있을 만한 자그마한 섬이었다. 섬이라기보다 는 바다 위에 삐죽 튀어나온 바윗덩어리 정도였지만. 더 먼 곳까지 보내지 못한 것을 보면, 이 정도가 파류나 왕의 한계인 것일까? 아니면 무슨 이유로? 이자드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마시며 생각했다. 어차피 달갑지 않았던 일이니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가버리자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이가 깨어나면 -. 문득 그는 루이가 중상을 입은 상태임을 새삼 떠올리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루이가 아무 리 자기치유력이 강하다고 해도 하루밤 정도로 나을 상처는 아니었다. 루이는 정신이 들자 마자 창성으로 돌아가려고 난리를 칠 것이다. 이자드 루이에게 이런 종류의 주문은 교대와 함께 효력을 잃는다는 사실을 파류나가 알고 있었을지 궁금했다. 만일 알고 있다면, 해가 뜨 자마자 루이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그들을 떨구어 놓은 것인가?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 빛깔로 보아 이제 해가 뜨려면 두어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잠시 수평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천천히 마음을 정했다. 그는 속박 주문을 풀 역 주문을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 이자드가 눈 앞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파류나는 꽤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늘한 공기가 조금씩 움직이다가, 왕의 몸에 부딪쳐 얌전히 고개를 숙인다. 파류나 주변의 공기는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왕은 침묵 속에서 몸을 돌려, 생애 마지막 아침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문 앞에 아도가 서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서서 기다린 듯, 날개가 추위에 오그라들어 있다. 아도는 공손히 눈을 내려뜨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곧 해가 뜹니다, 폐하. 이자드 루이님은 무사하신가요?" 흰자위 없는 청록색 눈동자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파류나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며 부드럽 게 말했다. "괜찮을 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야. 주문도 아침 쯤이면 풀릴 것이고." 그러나 아도의 눈에서 흔들리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파류나 왕은 가만히 젊은이의 청 록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무서운 거냐?" 그래, 무섭겠지......나도 무섭다. 그러나 파류나는 그 말 대신 잔잔하게 말했다. "무서울 것 없다. 아도, 오늘 우린 싸움에서 이길 것이고, 긴나라 족은 역사에 남을 거다. 무 서워할 필요 없어." 아도는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왕의 말에 안심한 듯 떨면서도 미소지어 보였다. 파류나는 미 소지었다. 왕은 어떤 순간에도 두려움을 내비쳐서는 안된다. 지금 성에 남아있는 가장 어린 백성을 다독이며 파류나는 가만히 죽음을 응시하며 내면으로 속삭였다. 내가 무서운 것은 죽음이 아니야. 패배, 망각이지. 파류나는 의식을 치루듯 단정히 옷차림을 갖췄다. 10년마다 한 번 돌아오는 큰 제사 때처럼, 길게 늘어뜨린 은발을 묶고 한끝을 잘라 '허공의 불'에 바친다. 은청색 갑옷을 입고, 손에는 늘 사용하는 칼이 아니라 은창을 들었다. 300년이라는 세월동안 왕은 백성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만을 보아왔다. 그것이 타고난 예기를 꺾고, 무기력과 체념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나 오늘, 파류나 왕은 마치 처음 왕 위에 올랐을 때처럼 생생하게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맥박이 뛴다. 피가 온 몸을 돈다. 다가오는 새벽의 냄새는 달콤했다. 왕은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푸른 눈을 들어 텅 빈 제단 위를 쓸어보았다. 결코, 가만히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지는 않으리라. 그것이 필연이라면, 차 라리 죽음을 향해 돌진하리라. 위대한 죽음, 영원을 꿰뚫으리라. 왕은 창을 쥐고 떨쳐 일어 났다. 전투는 해 뜨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긴나라족은 왕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전진했다. 파류나 왕은 중앙탑 위에 선 채 그의 백성들이 하나씩 하나씩 피를 뿌리며 죽음의 영토로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미칠 듯한 고통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고통이 힘을 북돋운다. 마치 그들의 목숨을 삼키며 강해져가는 것 처 럼, 정신은 바늘끝처럼 날카롭게 한 점에 모였다. 마침내 해가 떴다. 파류나는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한 태양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루 이가 나왔겠구나. 상처가 심했는데,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디 그가 깨어있기를, 깨어나 이 광경을 보고 있기를 바랬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기를 바란 것은 자신의 욕 심. 이 마지막을 보고 있기를 바랬다…마침내 해가 수평선 위로 올라왔다. 며칠간 볼 수 없 었던 청명한 하늘이었다. 파류나 왕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미소지으며 은빛 날개를 펼 쳤다. 하늘과 같은 빛의 눈에 그 자의 모습이 비친다. 눈빛과 똑 같은 하늘을 뒤로 하고 그 자가 서있다 - 마하칼리, 위대한 죽음 ? 왕이 직접 불러낸 파멸의 여신이. 마하칼리 - 위대한 죽음 유일하고 무한한 파괴의 여신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 거역할 수 없는 순리 피의 차크라 cakra. 파류나는 창을 들고 돌진했다. 창끝은 정확히 마하칼리의 명치를 꿰뚫었다. 어둠으로 뭉쳐진 듯한 존재로부터 붉은 피가 뿜어나왔다. ** -루이...... 해가 뜬 직후 이자드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시야가 캄캄했다. 루이가 의식을 잃고 있는 한 에는 그의 시야도 열리지 않는다. 해가 뜨기 직전에 본 광경, 중앙탑 위에 서 있던 은빛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초조했다. 그의 시력은 루이만큼 뛰어나지 못했으므로, 정확 히 본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이 맞았다면 그것은 날개를 펼친 파류나 왕이었 는데… - 루이! "윽......아야야." 이자드가 전심전력으로 불러댄 덕분인지 루이가 신음을 뱉으며 몸을 구부렸다. 아직 3분의 1도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부상을 입자마자 교대한 덕에 제대로 손쓸 겨를이 없었던 탓이었다. 루이는 상처를 감싸 안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악......더럽게 아프네, 젠장. 이자드 뭐한 거...으아아악!" 눈을 뜬 루이는 몸을 일으키다가 비명을 지르며 이를 악물었다. - 정신차리고 하늘을 봐! 지금 그럴 때가... "뭐? 뭐야, 이거. 여긴 어디......" 어리둥절한 채 하늘로 돌린 루이의 눈에 비친 것은, 그 순간, 파류나 왕의 창이 마하칼리를 꿰뚫은 순간 뿜어나온 피가 새벽 하늘을 가르는 모습이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듯한 마하 칼리의 심장에서 터져나온 한 줄기 붉은 피는 곧 생명을 얻은 듯 용틀임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창성 주위를 감싸는 거대한 핏빛 원이 그려졌다. 루이는 그 압도적인 광경에 넋을 잃었다. 잠시 동안 숨을 멈추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그 피의 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루이만이 아니라 이자드 역시 그랬다. 완벽한 핏빛 호선은 마침내 한숨을 내쉬는 듯한 짧은 망설임과 함께 시작점으로 돌아갔다. 시작이 끝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핏빛 원은 한 순간 창성을 감싸안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그 거대한 원이 맞물린 순간, 천만의 생명이 일제히 내지르는 비명소리 같은 붕괴음이 터져 나왔다. 온 세상이 일제히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소름끼치는 순간이었다. 루이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충격파에 떠밀려 아득히 날려가는 것 같았다. 피의 차크라, 피의 차크라…이자드는 파류나 왕의 미소를 떠올렸다. 루이는 귀를 틀어막은 채 바위 위에 엎드려서도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의 차크라는 서서히 움직임을 개시했다. 생명과 의지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겠다는 듯 탐욕스러 운 회전. 폭풍 한 가운데 떨어진 느낌이었지만 파도소리는 전과 다름없이 잔잔했으며, 바람 도 불지 않았다. 루이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회전은 처음에는 천천히, 점점 가속을 더하며 안으로 안으로 조여들었고, 마침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껴질 만큼 무시무시한 파공음 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루이는 눈을 깜박였다. 하늘은 푸른 색이었다. 피의 차크라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던 아 딜 테파도 사라졌다. 폐허도 없었다.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그곳에, 창성 아딜 테파 가 있었다는, 긴나라족이 살았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루이가 눈을 비비며 몇 번이나 쳐 다본 것은 텅 빈 하늘 뿐이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 ...(계속)... 몇몇 전승은 하늘에 피의 차크라가 수놓인 날 긴나라족은 위대한 파멸을 맞이 했다고 적고 있다. 긴나라족의 마지막 왕은 파류나로 알려져 있으며, 파류나 왕이 위대한 죽 음에게서 피의 차크라를 불러낸 장본인이라고도 하나 사실 여부를 알 수는 없다. 이제는 사실을 확인할 만한 어떤 자취도 남아있지 않으며...다른 많은 전설의 변용으로 나타 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2장 피의 차크라, 덧붙임 루이는 깨알 같은 글씨에서 고개를 들며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뭔가 잊어버렸다 했어!” -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이자드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루이는 넋나간 사람처럼 대답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짐을 챙겨 들기 시작했다. 그/그들은 황야 한복판에 있었다. 점심을 먹던 중, 갑자기 루이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이자 드의 주머니 속을 뒤적여 검은색 책을 꺼내들었던 것이다. 이자드 본인이 아니면 본래 크기 로 되돌릴 수 없었으므로 그는 깨알 같은 글씨를 힘들여 읽어야 했다. 루이의 시력이 거의 매와 같은 정도였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 ? - 야, 야, 어디로 가는 거야? 짐을 챙겨든 루이가 성큼성큼 이제까지 오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자 이자드는 당혹감 을 느끼며 물었다. 루이는 걸으면서 대답했다. “뭔가 빠뜨리고 온 것 같다 했지. 그날 밤에 카라가 한 말 말이야. 긴나라족에 대해서 물었 던 말…” - 그런 말이 있었어? “그 때 넌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었지. 젠장, 그걸 잊어버리다니…카라에게 제대로 물어보 려는 참에 네 덫이 발동해서 깜빡했었어.” 이자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말했다. - 긴나라족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신경쓸 일이 되진 않아. 루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난 20년간 여러 군데 돌아다녔지만 긴나라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어? 그 나마 흩어진 전승이 있는 곳이라도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잖아. 그렇게 멀리 떨어진 북쪽에 이름을 제대로 아는 자가 있다는 건 아무리 봐도…정말 오랜만에 실마리를 찾았는지도 모른다구.” 이자드는 어둠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말릴 길은 별로 없 다. 게다가 긴나라족에 관한 일인 다음에야. 사실 이자드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심 을 간직하고 있었다. 긴나라족이 멸망하던 순간에 느낀 충격은 그 역시 작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검은 존재와 마주쳤던 순간에 느낀 전율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그 눈동자를 떠올리고 서늘한 긴장감을 느꼈다. 루이가 기대하는 것만큼 대단한 소득이 있으리라고는 생 각지 않지만 다시 가본다고 나쁠 것도 없다. 이자드는 결정을 내리고 루이에게 야유를 날렸 다. - 그런데 너, 설마 북영지까지 걸어갈 작정은 아니겠지? [13] - 3장 마녀와 케이크 (1) 키시 반도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마름모꼴의 북변에 자리잡은 초승달 모양의 도시가 보 일 것이다. 지금은 예전 그대로의 초승달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품 안에 신시가지를 끌어 안아 반달꼴로 변했지만, 백색과 금색의 화려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구시가지와 소박한 잿빛 신시가지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것이 북쪽의 수도라고 불리우는 아칸 서스, 일명 신전의 도시였다. “으- 아아아아아아아......지겨워라.” 헤델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분수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늦은 아침이다. 아침 시간, 아칸서 스 대광장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가려는 사람들도 이곳을 지나치게 마련이고, 외부에서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많은 경우 이 쪽을 통과하게 되어있다. 대광장은 말 그대로 아칸서스의 중심지였다. 반듯한 길은 모두 이 곳에서 교차했다. 호객 행위란 대개 사람이 많은 곳을 주무대로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헤델이 새벽부터 광 장에 나와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대고 있는 것은 그 중에서도 새로 도시에 들어서는 여행자 들 때문이었다. 늦은 아침, 여행자도 많지 않은 시간이었고, 새벽부터 입아프게 떠들어 댄 결과 쉬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이렇게 분수대에 걸터앉아 하품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하급신관이 보기라 도 하면 한바탕 호된 잔소리가 쏟아겠지만 헤델은 신경쓰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 를 한다면 자신만만하게 대꾸하지 않을까. - 나처럼 노련한 사람이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아하아아아아아암...” 헤델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쳐다보며 또 한 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반짝이는 호박 색 눈동자가 박힌 희고 통통한 얼굴은 기본적으로 웃는 상이라 친절하고 상냥한 느낌을 준 다. 지금처럼 지겨운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할 때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쭉 곧은 갈색머리카락은 단정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지독한 곱슬이었다. 그 것을, 신전 봉사활동을 위해서는 단정하고 청순한 외모를 갖춰야 한다는 이유로 손떨리는 거액을 지불하고 편 것이다. 큰 투자였지만 그 후 이 일을 하면서 본전은 뽑고도 남았다. “아?” 분수대에 퍼질러 앉아 있던 헤델은 광장 입구로 들어서는 먼지투성이 남자를 발견하자 먹이 를 발견한 매처럼 눈을 빛냈다. 잽싸게도 일어난다 싶더니 벌써 그 남자 앞까지 달려가 있 다. “여행자이신가 보죠?” 상냥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생긋 웃으면서. “예에......그런데요?” 상대는 갑작스러운 여자의 출현에 당황한 듯 애매하게 대답한다. 재빨리 훑어보니 남자는 모험가 내지 용병이 틀림없었다. 허리에 찬 손떼묻은 가죽칼집이며 드러난 팔의 상처자국,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헤델은 신발이 낡을 대로 낡은 것도 놓치지 않았다. 분명 도시 에 와서 며칠 편안히 쉬어갈 작정으로 밤을 새워 걸음을 재촉했으리라. 게다가 자신을 대하 는 반응으로 보아 이 도시가 처음 왔거나 연고자가 없는 사람이다. 짧은 시간에 분석을 끝낸 헤델은 상냥한 웃음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아칸서스시에 처음 오셨나요? 우리 신전에서는 용감한 모험자들을 위해 숙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관에서 흔히 일어나는 말썽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 기 위해서죠. 여행자들의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구요.” 여행자는 쏟아지는 안내말에 어벙벙한 얼굴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헤델은 고상한 이미지를 유지하며 상냥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어디까지나 강요가 아님을 강조하며 매끄럽게 말을 이 었다. “물론 좀 더 세속적인 분위기를 원하신다면 시중 여관에 묵으시는 것도 좋겠지요. 하지만 어차피 길을 다시 떠나시기 전에 신전 참배를 하는 게 순서 아니겠어요? 저희는 무거운 성 소 분위기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신전 내관과 손님들이 묵으시는 건물을 분리해 두고 있으 니 지나치게 규율에 신경쓰실 필요도 없구요. 편의를 위한 온천도 딸려 있답니다.” 생긋 생긋 웃으며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말에 귀를 기울이던 여행자는 차츰 그렇습니까, 하 는 얼굴이 되더니, 그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어...그런데 숙박비는?” “어머나, 물론 무료죠.” “예에? 무료란 말입니까?” “참배료와 온천 사용료, 식비만 내시면 됩니다. 시중 여관에 묵으시다가 온천 목욕을 하고 신전 참배를 하시는 값의 반밖에 안되는 비용이죠. 어디까지나 신전에서 여행자들을 위해 제공하는 봉사활동이니까요......호호호.” 헤델은 그쯤에서 탄복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승리에 찬 미소를 억눌렀다. - 넘어갔다! 역시 난 수완이 좋다니까. 헤델은 마무리로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고상한 태도로 여행자에게 신전 위치와 이름을 알 려주었다. 일단 그녀에게 걸려든 이상, 가다가 다른 호객꾼을 만나더라도 탐탁치 않다고 여 길 것이다. “후후훗. 역시 내 연기력은 훌륭해.” 헤델은 걸어가는 여행자 뒤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한 번 던져준 다음, 다시 조금 전의 늘어 진 태도로 돌아가 분수대에 주저앉았다. 아직도 조금은 어색한 느낌이 드는 곧은 머리카락 을 만지작거리며 뻐근한 목을 돌리자 뚝뚝 소리가 난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건너 편에 앉아있는 사람 그림자에 눈을 멈췄다. “어라?” 분수대 맞은편에는 종이쪽지를 손에 든 검은 머리 소녀가 하나 앉아 있었다. 헤델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깜박였다. 비스듬히 앉아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 처 음 보는 사람이다. 아침마다 어슬렁 어슬렁 광장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꿰 고 있는데 말이다. 호기심이 동했다. 헤델은 벌떡 일어나서 슬금슬금 그 소녀 쪽으로 다가갔 다. 멍하니 사람들을 쳐다보는 목적없는 모습으로 봐서 동업자는 아니다. 얼굴의 반을 차지 한 것 같은 커다란 검은 눈을 깜박이면서 뭔가를 열심히도 쳐다보고 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나 시선을 따라가 보자 광장 한 구석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가 보였 다. 젊은 어머니는 짐보퉁이를 끌어안고 장에 나갈 모양으로 서두르는데 아직 어린 아들이 징징거리며 다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지쳐 보이는 창백한 얼굴이 난처함을 넘어서 짜증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특별히 시선을 끌만한 광경은 아니었 다. 잠시의 소동일 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 번쯤 혀를 쯧쯧 차거나 젊은 어머니에 대 해, 혹은 어린 아들에 대해 몇 마디 논평을 던지고 제 갈길을 재촉할 뿐. 그러나 소녀는 계 속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결국 한참의 실랑이 끝에 아이는 쫓아나온 할아버지 손으로 넘어갔다. 친할아버지일까? 아 니면 여자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노인의 손에 안겨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내내 발버둥치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도망치듯 걸음을 옮기는 사이 내내 울음 소리가 그 뒤를 따라간다. 할아버지는 힘겹게 아이를 안고 뭐라고 달래더니 별 수 없이 멈춰서서 길 저쪽을 손가락질했다. “사탕 하나로 해결이 될까 몰라.” 헤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눈치챈 듯, 소녀 가 고개를 들고 쳐다본다. “어떻게 알아요?” “응?” 헤델은 천연덕스레 그 옆에 걸터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탕을 사줄 거라는 거.” “아아. 그거 말야? 뻔하잖아. 일단 저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쪽에는 늘 사탕파는 행상이 나 와있고, 우는 애 달래는 방법이야 몇 가지 안되는 거니까.” “정말 그걸로 달래져요?” 헤델은 잠시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어린애를 본 적도 없나? 의문이 일었지만 상대의 얼굴 은 진지했다. 결국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장은 되겠지. 나중에 엄마를 찾다가 또 울기 시작할 지도 모르지만, 며칠 지나면 체념하 고 받아들이게 될 거야. 저 행색을 보아 하니 아버지도 없는 것 같고 저 여자가 일하러 나 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데, 달리 어쩌겠어?” “흠……” 검은 눈의 소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코끝을 비볐다. 헤델은 신기한 눈으로 소녀를 살폈 다. 이런 사소한 일에 그렇게 관심을 보이다니. 어딘가 이상한 애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악의 없는 호기심이 고개를 든다. “난 헤델. 여기 터줏대감인데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인걸. 여행자?” “아, 아니. 사원에 있어요.” 소녀는 대답하고 나서 뒤늦게 덧붙였다. “이름은 카라.” “사원이라구? 그럼 수도승이란 말이야?” “그건 아니고…수행중이라고나 할까요.” 헤델은 이상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신전이 많기로 유명한 아칸서스시라도 사원이 없지는 않다. 특히 아칸서스시 외곽 아키 산에 자리잡은 사원은 규모는 작지만 유명한 무니가 둘이 나 있는 데다가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멀리서부터 찾아오는 사람도 꽤 있었다. 주변의 화려하고 세속적인 신전에 넌더리가 난 사람들이 사원 쪽으로 방향을 틀기도 했다. 하지만 10대 소녀가 사원이라니? 그다지 어울리는 일은 아니었다. 헤델은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수행 중이라면 왜 이런 곳에 나와있는 건데?” 카라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달 동안은 사원 안에만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새로운 과제가 떨어져서요. 사람들을 관 찰해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헤에? 그 사람 사이비 아냐? 그런 걸 수행이라고 시켜?” 카라는 쓴웃음을 물고 어깨만 으쓱했다. 사실 카라로서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주문이었으 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 말 대신 헤델에게 질문을 던졌다. “헤델…은 여기서 뭐하는데요?” “아, 난 신전 봉사활동 중이야.” 헤델은 생긋 웃으면서 아직 손에 남아있는 전단지를 흔들어 보였다. 카라는 이해하지 못하 고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모르니? 하긴 광장에 나오는 게 처음이랬지. 어떤 거냐 하면 말이야......글 읽을 줄 알 아?” 헤델은 카라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카라는 종이를 받아들고 소 리내어 읽어 내려갔다. “긴 여행으로 피로한 몸과 영혼에 자양분을! 태모신의 은총이 함께 하는 성스러운 신전으 로 오십시오....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휴식의 장소가 딸려 있는......뭐야, 이거 여관 선전 같잖아요?” “하하, 좀 그렇지? 여긴 원래 좀 이래. 내가 봐도 유치한 문구지만 이런 게 선전효과는 좋 단다.” 카라가 종이에서 고개를 들고는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자 헤델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래보여도 내 밥벌이라구. 뭐 내가 보기에도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만 어쩌겠어. 여긴 통 행량이 많은 대도시인데다가 안그래도 신전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신전이 많으니 까, 서로 경쟁이 치열하단 말이야. ” “그래도 이해가 잘 안가네요.” 카라는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글자는 조금 전에 읽은 것이 다였고, 종이의 나머지 부분은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나마도 성소와 신상은 자그마하게 한귀퉁 이만 차지하고 있을 뿐, 눈에 확 띄는 것은 선명한 색을 써서 그려낸 온천과 푸짐한 상과 여자들의 모습이다. 카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신전이 원래 이런 데에요? 내가 생각한 이미지가 아닌데.” “뭐 어디나 다 이런 건 아니야. 하지만 신전도 신전 나름이지. 수도에는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신전이 있고, 시골마을에는 자유롭고 소박한 신전이 있고. 모시는 신마다 틀리고 책임 신관의 성향에 따라 다르고…여기 아칸서스는 자유도시라서 갖가지 종류의 신전이 다 있는 데다가, 여행자가 많잖니. 여행자들이야 지나가다가 그저 편안하게 쉬고 축복이나 받으 면 장땡이지 복잡하게 머리 굴리겠어? 엄숙하고 경건한 것보다 화려하고 편안한 쪽에 쏠리 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헤델은 시니컬하게 웃어보였다. “아, 그래도 여자까지 제공하진 않아. 그냥 그림만 그렇게 그린 거지. 여자를 원하는 사람 들이 갈 곳이야 따로 있지…뭐 거기서 거기지만. ” 카라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헤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칸 서스의 신전 사정을 설명했다. 원래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신전은 부유해지고, 부유해지면 신전을 크게 지을 수 있는 법이다. 또 크고 부유한 신전은 사람이 많이 찾는 법. 악순환의 반복. 특별한 신앙이 따로 없는 여행 자들은 대개 눈길을 끄는 커다란 신전에 가기 마련이었다. 처음에 크고 화려한 치장과 호객 행위를 시작한 신전이 어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렵에는 저속하다고 비난하던 엄숙한 신전, 소박함이야말로 진정한 신전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던 신관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전통을 고집하던 신전이 하나 둘씩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남은 신전 쪽에서도 발벗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신앙이 우선이 요 호객행위는 어쩔 수 없는 방편이라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취지는 잊혀지고 지금은 호객행위 자체에만 열을 올릴 뿐이다. 헤델은 설명 끝에 멀리서 반짝이는 금빛 지붕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봐. 보이지? 번쩍거리는 황금지붕. 저런 데는 사람들이 매일 장난 아니게 몰려간다 구. 크고 화려하니까.” 그리고 헤델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고 싫고를 떠나서 워낙 신전이 많다 보니 여기 밥줄이 달린 사람도 꽤 된다구.” “흐음......그런 것 치고는, 왜 이 넓은 광장엔 헤델밖에 없는 거죠?” “오호호홋. 그야 뭐 다 내 수완 덕이지. 여긴 내 구역이란 말씀이야. 그러므로 이 몸의 봉 사활동 단가는 다른 사람보다 좀 높지.” 헤델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흘렸다. 그 때 신시가지 쪽에서 광장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 오는 금발머리 여자가 보였다. 차림새, 머리 모양 모두 헤델과 비슷했다. 그 여자는 광장 입 구에 멈춰서서 잠시 두리번거리는 듯 하더니 분수대 쪽으로 곧장 뛰어왔다. 그녀는 헤델 앞 에 멈춰서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야, 헤델! 벌써 쉬고 있는 거야? 내가 맡긴 것까지 다 했어?” “아직 몇 장 남았는데. 이건 네가 직접 하라구. 오늘 껀 7할이다.” 헤델은 바닥에 깔아놓았던 다른 신전 전단지를 건네주며 손가락을 세웠다. “7할? 와, 너무하는 거 아냐 너. 돈독 올랐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젯밤 일 때문에 늦게 나온 건 네 잘못이라구. 그 정도면 싸게 해 준 거지.” 헤델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투덜거리는 금발여자를 떠나보냈다. 그리고서는 어깨를 움츠리며 카라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거짓말이 벌써 탄로나 버렸네, 헤헤. 원래 신전마다 매일같이 호객꾼을 쓰진 못하거든. 난 두 세 군데에서 일하기 때문에 매일 여기 나오는 것 뿐이야. 저렇게 무슨 사정이 있다는 애 들 것도 맡아서 해주고.” “하아? 두 세 군데...다른 신전인데 같은 사람이 해도 돼요?” “에이, 여행자들은 그런 거 신경 안써. 그리고 이 일을 하는 여자들은 모두 비슷한 머리모 양에 비슷한 차림새니까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걸.” 카라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흐음......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어서 뭐할건데요?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녜요?” 헤델은 그 질문에 어깨를 움츠렸다. 만나자마자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대답 의 결과가 두려웠다. 하지만 진지하게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를 보자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웃으면 안돼?” 헤델은 카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곁눈질하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음, 내 꿈은 말야. 황당할지도 모르지만, 마녀가 되는 거야.” 카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아키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사원으로 가는 길은 언덕을 다 오르기 전에 옆으로 빠졌다. 길 양쪽으로 풀숲이 우거져, 가끔씩 걸음을 늦추고 늘어진 가지 를 걷어올려야 했다. 정신을 놓고 걷다가는 나뭇가지에 한대씩 머리를 맞기 십상이었다. 카 라는 나뭇가지 하나를 걷어올리며 자그마한 연초록 잎사귀를 쓰다듬었다. 키시 반도 북변에 있다고는 해도 이곳은 북영지보다 훨씬 남쪽이라, 겨울이 꼬리를 감춘 지 오래였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타박타박, 흙길에 닿는 카라의 발소리만 나는 고요한 저녁 이었다. 카라는 새삼스레 고개를 들고 소나무 냄새를 맡았다. 사원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나 다름없는 진한 송진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곧 허술한 사원 문이 눈에 들어왔다. “어이- 돌아왔구나 카라.” 시원스러운 메조 소프라노 음성에 카라는 사원 문으로 들어서던 걸음을 멈추고 소나무 뿌리 에 걸터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티나밋다 무니였다. 대개 처음 티나밋다 무니를 본 사람들은 두 번 고개를 갸웃거리기 마련이었다. 일단 젊은 사람인지 나이많은 노인인지 긴가민가해서 한 번, 아무리 아래 위를 훑어봐도 성별을 잘 알 수가 없어서 또 한 번. 카라도 처음 만났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한 번에 그쳤지만 말이다. 카라는 티나밋다 무니가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티나밋다는 흙묻은 얼굴로 종아리를 걷어올린 채 느긋하게 앉아서 씩 웃어보였다. “그래 오늘 뭘 봤냐?” “친구를 한 사람 사귄 것 같아요.” “그래? 그거 잘 됐구나. 그 사람은 꿈이 뭐라든?” “마녀가 되는 거래요.” “그래? 그거 잘 됐구나. 그래서 또?” “내일 또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 그거 잘 됐구나.” 카라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티나밋다를 쳐다보았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둥근 얼굴에 은 은한 웃음이 감돌고 있다.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도통 진의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 었다. 또 한 사람의 무니, 비치킷차만큼 어렵지는 않지만 어딘가 가까워지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아니, 카라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티나밋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벽이 없 었다. 그저 먼저 다가가기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마도 문제는 카라 자신에게 있 을 것이다. 티나밋다는 수행자 두 사람이 낑낑거리며 커다란 독을 짊어지고 오는 모습을 보고 벌떡 일 어나서 외쳤다. “어이, 어이! 조심해라 너희들! 그 술 한 방울이라도 쏟으면 안돼!” 소나무 밑에 구멍을 파놓고 그 안에 조심스레 술독을 집어넣는 티나밋다의 모습은 기묘한 것이었지만, 사원 안에서는 티나밋다 무니가 하는 일은 끝나기 전에는 모른다고들 말한다. 카라도 이 한달간 티나밋다의 행각에 익숙해진 터라, 술독에 대해 아무 질문도 던지지 않았 다. 그녀는 술독을 조심조심 구덩이에 옮겨넣느라 정신이 없는 티나밋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방으로 걸어들어가면서 아까의 대화를 곰씹었다. “마녀가 되려면 뭘 해야 하는데요?” 카라가 진지한 얼굴로 묻자 헤델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이봐. 아무리 내가 웃지 말라고 했다지만 그런 식으로 맞장구쳐 주려고 애쓸 필요까 진 없어. 안다구.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소원이라는 건 알아.” “이해가 안가는데요. 마녀라는 거 되기 힘든 거에요?” 헤델은 웃음을 거두고 어이없는 얼굴로 카라를 보았다. “정말로 모르는 거니?” “주변에 신전도 사원도 없고 마법사나 마녀는 이야기책에서나 볼 수 있는 마을에서 자랐거 든요. 북영지라고…마녀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요.” “하아-” 헤델은 뭐 이런 시골뜨기가 다 있나, 하는 얼굴로 카라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더 북쪽이라면 교통이 안좋을 텐데. 어떻게 온 거야? 설마 그 엄청나게 비싼 비행 선은 아닐 테고…” “바로 그 비행선인데요.” “헤에? 너 보기보다 부잣집 애구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카라는 헤어지는 마당에 카트니가 무리를 해서 비행선 값을 낸 거라고 설명하려다가, 그렇 게 구구한 설명을 덧붙이기 싫어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하여튼, 그래서요. 마녀라는 게 어떤 건데 그렇게 힘들어요?” 헤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그리운 기억을 떠올린 듯 엷은 웃음이 배어나왔다. “마녀라는 건 말야......여러 종류가 있지만, 일단 마법사와는 틀린 족속이라는 것부터 알아 야 해. 사람들은 마법사나 마녀나 비슷한 줄 알지만 말이지. 마법사는 머리아픈 이론과 논리 를 늘어놓지만, 마녀는 그렇지 않아. 다른 존재와의 ‘계약’을 통해 힘을 쓰지.” “계약? ” “귀령이라고 하는 존재와 계약이 성립될 때라야 진정한 마녀라고 할 수 있거든. 마녀 중에 도 하급 귀령과 계약하는 모자란 마녀들은 기껏해야 사랑점이나 치고 저주를 거는 정도밖에 못하지만, 내가 말하는 진짜 족보있는 마녀는 왠만한 마법사쯤은 상대도 안돼. 소용돌이를 지배하는 라쉬 같은 마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지. 폭풍의 마녀 헤웬도…” 헤델은 신이 나서 말하다가 갑자기 풀이 죽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아, 어쨌거나 어려운 거야.” “그럼 어떻게 해서 마녀가 되는 건데요?” 헤델은 잠시 침묵했다. 활달한 얼굴에 잠시 그늘이 스쳤다. “마녀는…일단 마녀로 태어나야 해. 혈통이 우선이지. 가끔 엉뚱한 집안에서 마녀의 피를 타고나는 경우도 있다지만 그건 예외 중에 예외고, 그렇게 타고났다고 해도 마녀 집안에 받 아들여지지 못하면 계약을 맺기 힘들다더라. 마녀들 사이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요령 같은 게 있는 건지.” “그럼 타고나지 못해서는 마녀가 될 수 없다는 얘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헤델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햇빛 아래에 깍지낀 손을 쭉 폈다. 일부러 밝게 웃었는지는 몰 라도 그 웃음에 그늘이 걷히는 것 같았다. “으으음......이건 정말 아무에게도 한 적 없는 얘긴데...헤헷. 좀 웃기는 생각이거든. 수도 에…키시에 말이야. 기적을 이뤄준다는 신전이 있대. 소문만 듣고 무턱대고 믿는 건 아니지 만 실제로 기적을 목격했다는 사람을 만났단 말이야. 글쎄 명색이 기적인데 쉽게 일어나지 야 않겠지. 게다가 그 신전에 있는 신관들은 거액의 기부금을 내지 않으면 소원을 빌게 해 주지도 않는다고 하고. 그래도,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서. 기부금으로 낼 만한 돈을 모으면 수도로 떠날 작정이야.” 헤델의 얼굴은 너무나 진지했고 조금은 힘들어 보였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마녀가 되고 싶 어하는지 차마 물어볼 수 없을 정도였다. 카라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소원…” 카라는 방문을 닫으며 되뇌어 보았다. 햇살이 내려앉아 있던 헤델의 얼굴이 온화하고 맑은 비치킷차 무니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그 날 아침, 한달만에 사원 밖으로 내보내면서 비치킷 차 무니는 카라를 불러놓고 대뜸 물었다. “꿈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카라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비치킷차 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한 달 동안 내처 그랬지만 이번에도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비치킷차는 다시 물었다.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힘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노력......아닌가요?” 비치킷차는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 손을 들어 바깥을 가리켰다. “사람들을 보거라.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네 안에서 답을 찾아오너라.” 다시 생각해도 피식 웃음만 나온다. 카라는 딱딱한 침대 위에 던지듯 몸을 누이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비치킷차 무니의 간결한 말들은 때로 사기처럼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말을 툭 툭 던지니까 사람들이 뭔가 신기하고 대단하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티나밋다 무니의 기괴 한 행동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문득 문득, 그들의 눈빛이나 얼굴에 서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자드 루이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두 무니는 이자드의 편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 었다. 수행자들의 말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무니들이 놀란 표정을 드러내다 니. 그러나 그들은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편지를 접어넣고 바로 카라에게 방을 정해주더니 다른 수행자들의 생활을 본받으라 했다. 속시원한 설명을 들을 수 없는 것이 답답하다는 점 만 빼면 수행생활은 괜찮았다. 단순하고 간결한 생활. 그런데 겨우 익숙해졌다 싶었더니 시 내에 나가게 된 것이다. 다른 수행자들은 계속 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녀만. 그저 다 무슨 뜻이 있겠거니 믿을 수밖에 없는 건가? 카라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사각형으로 배치된 수행자들의 방은 모두 안쪽 마당을 향해 열려 있었다. 조금 미묘한 위치인 카라의 방은 모서리에 있어서 안쪽, 바깥쪽 마당으로 모두 통해 있다. 이쪽에서는 바깥 하늘이 보였다. 카라는 두 손을 깍지껴 머리 뒤에 댄 채 물끄러미 서쪽 하늘이 진한 남빛으로 침전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행선 위에서 16년간 살아온 자그마한 성을 내려다보았을 때에는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 만, 일단 떠나고 나자 다른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득문득 이전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그 모든 기억이 실체감 없이 뿌옇게만 느껴져서, 새삼 사람이란 정말 간사하구나 하 는 생각을 했다. - 사람이 다 그런 게 아니라 나만 간사한 건지도 모르지. 쓴웃음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던 서재보다도 오히려 눈이 내린 마을과 계곡 풍경이 더 그립고, 큰 일보다는 사소한 일들이 더 또렷이 기억난다는 것이었다. “꿈이라......” 카라는 코끝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 내렸다. 카라는 창문을 닫고 뒤돌아서면서, 밤에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이자드와 루이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반년이라고 했지만, 정말로 오기는 하는 걸까? 그 런 생각을 하면 막막해졌다. 한달 동안 나아진 게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 힘이라는 것이 어차피 통제가 안되니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다. 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때가 나았다. 다른 생각을 할 짬이 없었으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하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엄청난 무게로 사람을 눌러댄다. - 이자드는 약속을 지킬 거야.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티나밋다 무니는 또 소나무 뿌리에 앉아 있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구덩이 속에 묻은 술독 을 들여다보며,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변에 회벽을 바르고 있다. 카라는 나가다 말고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술독 안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처음 부었을 때에는 투명한 술이었는 데 지금은 연한 호박빛으로 변해 있다. 쌉싸름한 송진 냄새가 섞인 달큰한 술향기. 카라는 코 안쪽이 찡해오는 현기증에 고개를 빼며 물었다. “아직도 다 안됐어요?” “그럼, 그럼. 겨우 일주일 지났는데 뭘. 이제 일주일만 더 기다려라. 환상적인 술맛을 보여 주마.” “어린애한테 술을 권하셔도 되는 거예요?” “스스로도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빈소리 마라.” 티나밋다님은 한쪽 눈을 꿈벅하면서 말했다. “걱정 말아. 비치킷차님 모르게 맛보여 줄테니” 카라는 웃으면서 시내로 걸어나갔다. 언덕 위쪽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 모양의 구시가지 곳곳에 번쩍이는 신전 지붕들이 눈에 부 시다. 신전의 도시 아칸서스, 한 때는 성스러운 도시로 불리웠던 구도시의 잔재인 셈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신전수는 늘어나고 신전 지붕은 더욱 화려해졌지만 성스러움이라 할 만 한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카라는 길가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 검푸른 향 초들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햇빛이 제법 강해졌다. 이미 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날씨다. 북영지에는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았을 것이다. 얼음이 깨어져 나가면서 계곡에 물이 흐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카라는 곧장 대광장 분수대로 향했다. 일주일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마친 다음 사원 문을 나서서 시내에 내려가는 것은 카라의 일과가 되었다. 부탁받은 물건이 있을 때는 시장이나 상점가에 들렀고, 다른 일이 없 으면 바로 광장으로 향해 죽치고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할 수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물론 그 재미라는 것이 늘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카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 말, 행동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십육년 동안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경이 로울 정도였다. 광장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지나쳐갔다. 큰 길을 달려가는 여섯 마리 말이 끄 는 마차와, 좁은 길에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소달구지. 노인들은 나무그늘에 앉아 더러는 꾸 벅꾸벅 졸고 더러는 입을 우물거리며 멍하니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떼의 아이들이 꺅꺅거리며 뛰어 지나간다.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후아. 끝났다!!” 멍하니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귓가에 활기찬 목소리가 울리더니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 다. 카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헤델이었다. 오늘은 또 다른 옷차림이다. 약간 비치는 긴 연녹색 옷에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흰 장갑 을 꼈다. “이번엔 어느 신전?” “여기야, 여기. 나무와 물의 여신......풍요의 신전이지. 역사가 길지 않은 데다가 교외라서 종종 봉사활동을 시키거든.” 헤델이 내미는 전단지에는 자그마하게 담쟁이덩굴이 빽빽이 덮인 벽돌 건물이 그려져 있었 다. “흠. 지난번보단 나아 보이네.” 카라는 그림을 들여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헤델은 카라 옆에 털퍼덕 주저앉으며 기지개를 켰다. “우아아아......졸리고 배고프고 발아프다!” “일은 다 끝난 거야?” “으으음. 아냐. 오전 일만 끝이지. 낮에 좀 쉬고 저녁 때 또 해야 돼. 낮에 도착하는 여행자 는 별로 없거든.” 카라는 축 늘어져서 손으로 부채를 부치는 헤델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가방 속에서 샌드위치 를 꺼냈다. “고마워.” 카라가 샌드위치를 내밀자 헤델은 사양않고 덥석 물었다. 허겁지겁 씹는 모습이 정말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녀는 샌드위치를 절반쯤 삼킨 다음 손가락을 빨며 불평하는 것 을 잊지 않았다. “계란이 간이 제대로 안됐어. 토마토는 설익었고.” 몇 번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곧 깨달은 사실이지만 헤델은 입맛이 상당히 까다로왔다. 무엇 을 먹든 품평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렇다고 까다로운 만큼 입이 짧은 것은 아니어서 불평하 면서도 먹기는 잘 먹었다. 헤델은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마저 삼키고 겨우 살겠다는 듯 포만 감이 느껴지는 한숨을 뱉았다. 그리고는 부스럭거리며 작은 주머니를 꺼내들어 펼쳤다. “짠! 오늘은 딸기 쿠키다!” “와아!” 카라는 박수를 치며 분홍색의 동그란 쿠키를 집어들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아무리 음식을 가지고 불평을 해도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사흘 전부터 점심식사를 함께하면서 처음 먹어본 헤델의 쵸콜렛 쿠키는 정말 흔한 표현으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었다. 지나치게 달콤하지도 않고 부드러우면서 바삭바삭한 것이, 미각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는 카라로서도 흔히 파는 과자보다 낫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배어나오는 딸기향을 들이키며 한입 깨물자마자 카라는 탄성을 질렀다. “어떻게 한 거야? 이 딸기향! 지금 딸기철도 아니잖아?” “누가 쿠키에 진짜 딸기를 넣겠어? 당연히 다른 비법이 있지.” 카라가 쿠키를 씹으며 눈을 빛내고 바라보자 헤델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며 눈을 찡긋했 다. “그거야 기업비밀이지. 안가르쳐줘.” “에이~ 어차피 난 배워봐야 못만들텐데 너무하다. 진짜 맛있어. 나 칭찬에 그리 후한 사람 아니니까 사양말고 받아둬.” “칭찬 좋아하기로 이름난 헤델에게 사양은 무슨.” 헤델은 기분좋게 웃더니 쿠키는 몇 개만 집어먹고 손을 내렸다. 그녀는 카라가 세번째 과자 를 깨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런 거라도 맛있게 먹는 걸 보니 기쁘다. 넌 도통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처럼 맛없게 먹 으니까 옆에서 보는 사람이 답답하다구.” “헤에. 그래? 그런 말 별로 못들었는데.” 하긴 생각해보니 누군가와 같이 뭘 먹은 적이 별로 없었다. 카라는 연신 쿠키에 손을 내밀 며 문득 설탕 덩어리나 다름없는 쉐이크를 맛있게 먹던 루이를 떠올렸다. “루이가 있으면 정말 좋아할 텐데. 단 걸 좋아하...” 말하던 카라는 헤델의 눈빛이 변하자 말을 딱 멈췄다. 헤델은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로 카라를 쿡쿡 찔렀다. “그래~ 이 언니도 아직 없는데 네가 사모하는 님이 계시다 이거지? 햐아, 부럽다 부러워.”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저번에도 한 번 그런 얘길 들은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니? 응?” 카라는 난처함을 모면하지 못해 허둥거리며 화제를 돌리려 진땀을 뺐다. “저기, 요리 말이야. 난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노력하면 나아질까?” 그 말에 헤델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뭐 모든 재능이 다 타고 나는 거겠어? 노력하면 느는 거지.” “하지만 정말 가끔은 노력만으론 안되는 일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예를 들어 이런 쿠키는 아무나 만들지 못할걸. 나같으면 절대 못해.” 카라는 헤델이 약간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헤델은 조금 웃더니 중얼거 리듯 대답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하기는 타고나는 재능보다는, 뭐든 간절히 바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 르지. 그래도......헤델?” 카라는 옆을 흘끗 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헤델이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떨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붉그스름했다. “헤...” 헤델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노력?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웃기지 말아. 세상에 노력만 해가지곤 안되는 일이 얼마 나 많은데! 네가 뭘 알아?” 카라는 당혹감에 눈만 깜박였다. 헤델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난 노력하지 않은 줄 알아? 간절히 바라지 않은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얼마나......” 헤델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카라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일어났 다 앉았다 하며 헤델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헤델의 화가 풀릴지, 아니 그보다 는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 - 집중. 집중해! 중년 여자는 아직 가녀린 아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윽박질렀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지지않게 큰 소리를 질렀다. - 안돼요! 안된다구요! 아무리 해봐도 보이는 게 없단 말예요. - 그게 안될리가 없다. 조금만 더 노력해 봐. 노력해서 안될리가 없잖니. 네 언니들을 봐라! 너도 똑같은 내 딸이잖아! - 나도 노력했어요! 노력했다구요!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건 엄마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녜 요! 아이의 목소리는 비명소리처럼 높아졌다. 여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더니 손이 높이 올라 갔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매를 피하려고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쿵! “아야야......” 헤델은 바닥에서 아픈 머리를 싸쥐고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원망스럽게 침대를 올려다보았 다. “하아, 이딴 꿈이나 꾸고......일진 나쁘네.” 헤델은 일어날 생각은 안하고 바닥에 드러누운 채 꿈 속의 일을 생각했다.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점을 치기 위해 눈썹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크리스탈 거울을 들여다보며 뭐라도 나타나 보이 기를 간절히 바랬던 기억이 난다. 하다못해 먼지가 내려앉은 얼룩만 보여도 부산을 떨며 어 머니를 찾던 기억도. 언니들의 귀령을 보고 싶어서 몇 번이나 귀찮게 굴던 일도, 초보적인 향초 채집조차 못해서 밤새도록 산속을 헤매다녔던 기억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미친 듯이 책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도. “빌어먹을...” 바닥에 누운 채, 헤델은 손을 들어 눈에 비치는 햇빛을 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감은 눈 사 이로 또 눈물이 언뜻 비쳤다. 그러나 헤델은 그 물을 쓱쓱 훔쳐내며 애써 기운차게 일어났 다. 지나간 일은 빨리 잊어버리자. 그게 안된다면, 생각이라도 하지 말자. 헤델은 정신이 번 쩍 나게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며 눈물과 기억을 같이 털어냈다. 애써 기운을 북돋아 일어나는데 전날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 말 때문에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버렸다... 헤델은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해하며 서 투르게 위로하려던 카라의 모습을 떠올리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미안해서 어떡하지.” 헤델이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은 작고 보잘것 없었지만 부엌 하나는 쓸만했다. 사실 이렇게 구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1층집을 고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헤델은 창문틈으로 새어들 어오는 햇빛으로 시간을 가늠해 보고 팔을 걷어붙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찜찜한 채로 있을 수는 없다.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괜찮겠지. 같은 시간에 카라는 사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오늘은 왠일로 아직까지 여기 있는 거냐?” 휘적휘적 맨발로 걸어나오던 티나밋다 무니는 소나무 앞에 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카라를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일주일간 해만 뜨면 시내로 나가던 카라다. 벌써 아침시 간도 훨씬 지난 데다가 사원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문간에 앉아 있다니. 이상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티나밋다는 더 물어보기 전에 일단 소나무 앞 구덩이부터 들여다보았다. “어디보자. 술이 잘 익어가는구만.” 술은 전날보다 더 걸쭉한 호박색으로 변해 있다. 티나밋다는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밤 사이 기어들어가 빠져 죽은 벌레들을 건져내며 무심히 말했다. “그 친구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카라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티나밋다 손에 잡혀 땅에 던져진 벌레들을 바라보았다. 저를 위해 마련된 것도 아닌 함정에 빠져드는 벌레들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상에 그녀가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그 외에도 너무 많았다. 카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티나밋다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을 때, 카라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졌다. “티나밋다님, 저, 역시 이상한가요?” 티나밋다가 대답하기 전에 카라는 빠른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어딘가 모자란 걸까요? 빠진 부분이 있는 걸까요?” “모자라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다 모자라지. 빠진 부분이 없는 사람도 없고.” 티나밋다는 깊게 울리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카라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카라는 고개를 약간 들었다. “새로 사귄 친구가 화를 냈는데, 친구 같은 거…있어본 적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 르겠어요. 하지만 더 알 수 없었던 건…왜 화를 내는지.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아니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헤델이 이상하게 군 건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그냥, 당황스럽고,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 떻게 달래야 할 지도 알 수가 없었어요.” 티나밋다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카라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나 미간에 약간 주름이 패인 것을 제외하면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처음에는 몰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아무 리 관찰을 해도, 상황을 정리하고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어요. 열심히 맞춰놓은 퍼즐에 한 부 분이 뭉텅 빠져 있는 것처럼…그런데도 빠진 부분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는 것처럼…사람들이 화를 낼 때, 왜 화를 내는지 잘 모르겠고, 슬픔을 느낄 때, 왜 우는지도 잘 모르겠을 때가 너무 많아요. 역시 제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카라는 고개를 들어 티나밋다를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티나밋다는 가 만히 바닥에 주저앉아 카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무니라고 해서 답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야. 무니는 사실 답을 해주기보다는 질문을 던 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란다. 답은 항상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는 거야. 네게 문제가 있냐고?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네게 이상한 부분이 있냐고? 나도 잘은 모른 다, 카라. 정말로 네게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는 건지, 아니면 세상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 듯, 그저 배워나가고 있는 도중인지….” 티나밋다는 부드럽고도 엄하게 말했다. 카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어떤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알 수는 있었지만, 카라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카라 는 티나밋다의 얼굴에 비치킷차 무니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서로 너무나 다르고, 그녀에게 해준 말도 너무나 다른데, 어렴풋이 뭔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티나밋다는 곧 편한 얼굴로 돌아가서 일어서며 활기차게 말했다. “젊은 녀석이 궁상맞게 쭈그리고 있지 말고 당장 발딱 일어나지 못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원래 복잡하게 생각하고 살지 않던 녀석이 생각이 많아지면 되는 일이 없어. 자, 자, 일어나라. 후딱 달려가봐! 사람 일이란 한 번 꼬이면 바로 풀어야지, 무섭다고 피해버리면 안되는 게야.” 카라는 뭔가 더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티나밋다는 본격적인 몰이꾼 자세로 넘어가 있었다. 정신없이 손사레를 치며 내모는 통에 카라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길 쪽으로 밀려났 다. 얼결에 내려서서 돌아보자 극성스럽게 팔을 내저으며 쫓는다. 완전히 무슨 도둑고양이나 들개가 된 느낌이었다. 카라는 그 극성에 밀려 얼떨떨한 상태로 걸음을 빨리했다. 걸음걸이 는 아칸서스 시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가서야 느려졌다. 다시 헤델의 일이 생각났던 것이 다. 어떤 얼굴로 헤델을 대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후우-” 카라는 한숨을 내쉬고, 무거운 걸음걸이로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광장에는 헤델이 나와 있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가 지난번에 지나치며 본 적이 있는, 헤델과 같은 신전 호객 꾼 일을 하는 여자를 잡고 물어보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예? 오늘 쉰다구요?” 카라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겨우 용기를 내어 나왔더니. 게다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모으겠 다고 매일같이 봉사활동 일에 나서던 억척스러운 헤델이 쉰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머뭇 거리고 있으려니 그 여자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뭐 중요한 일이라도 있니?” “그게...” “집으로 가보렴. 어디 다른 데 가려고 쉬는 것 같지는 않던데. 하긴, 그 억척스러운 기집애 가 나한테 일을 맡기고 쉴 정도면 무슨 일이 있는 지 모르지.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어 디 아픈 데가 있는 건지.” “집이 어디인지 가르쳐 줄래요?” “어머나, 아직 몰랐니? 난 둘이 하도 친하게 굴길래 집에도 가본 줄 알았는데. 헤델이 사는 곳은 말이지......” 카라는 대충 설명을 듣고 더딘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신시가지로 향했다. 헤델은 초승달 모양 시내의 동쪽 끄트머리 가까이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중앙 광장과는 꽤 떨어진 곳이다. 광장에서 멀어질수록, 익숙한 아칸서스시와는 전혀 다른 도시 같은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신전과 부유한 저택들부터가 서쪽에 더 많고, 원래 똑같이 생긴 회 색 집이 다닥다닥 붙어서 있는 인구 밀집지역인 신시가지 중에서도 동쪽이 서쪽에 기울었 다. 꼬불꼬불한 길을 몇 번이나 잘못 들었다가 겨우 고만고만한 셋집들이 죽 늘어서 있는 골목 에 들어선 것은 한참만의 일이었다. - 그 새 어디 나갔으면 어쩌지? 카라는 지은 지 오래된 것도 아닌데 낡아보이는 허술한 집들을 기웃거리며 헤델의 집을 찾 아보았다.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집들이었지만, 문마다 다른 문장이 그 려져 있어서 구분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카라는 금발 여자가 가르쳐준 대로 보름달 그림 이 있는 집에서부터 왼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까......반달 그림...반달......” 꽤 걸었는데도 반달 그림이 그려진 집이 눈에 띄질 않는다. 혹시 잘못 가르쳐준 것은 아닌 지, 아니면 길을 잘못 든 게 아닌지 의심이 꼬이기 시작했다. 카라는 길에 멈춰서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 때였다. 쨍하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길까지 울려나온 것은. “시끄러워요! 이제 그만 좀 하라구요!” 카라는 흠칫 놀라서 몸을 돌렸다. 귀에 쨍하게 울리는 이 목소리는, 카라의 귀가 맞다면 분 명 헤델의 음성이었다. 이미 지나친 방향이었다. 따라가보니 멀지 않은 골목길에 반쯤 열린 문이 있었다. 문 앞까지 다가가서야 비스듬히 열린 문 뒤쪽으로 그려진 반달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열려 있는 데다 골목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놓친 모양이었다. 이제야 찾았다, 하고 안도했던 것도 잠시. 안에서는 더 시끄러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와장창 소리와 뒤이어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높아진 헤델의 목소리. “이제 됐어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게 내버려둬요, 좀! 어머니 딸인 거 아무한테도 말 안했으니 집안 망신 안시켰잖아요?” 카라는 얼어붙은 듯 멈춰서 버렸다. 어머니라고? “말이 심하구나, 헤델! 난 네 어미다. 네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이럴 수가 있 니?” “걱정요? 왜요, 제가 돌팔이 마녀 흉내라도 내서 집안 망신이라도 시킬까봐서요? 아니면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으로 어머니가 누군지 알릴까봐서요? 그런 걱정 안하셔도 되니까 찾아 오실 필요 없어요. 저 자알 살고 있어요. 신경 끊으시라구요!” 뒤이어 다시 와장창 소리. 둘 다 흥분할 대로 해서 문이 열려있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카라 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선 채로 계속되는 말다툼을 엿듣는 꼴이 되어 버렸 다. “잘 살아? 지금 이게 잘 사는 거냐? 마녀가 감히 더러운 신전 의 개 노릇을 해?” “하! 누가 저보고 마녀래요? 제가 마녀 자격이나 있어요? 언제 어머니 자식 자격이나 있었 냐구요!” 짝!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카라는 숨을 들이키며 한 발짝 물러나다가 세찬 바람을 일으 키며 걸어나오는 갈색 머리 여자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그 여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뛰듯이 걸어가 버렸다. 카라는 푸른 색 망토를 펄럭이며 멀어 져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한 번 난 쿠당탕 소리에 흠칫 놀라 문 안 을 들여다보았다. “저기...헤, 헤델?” 주저앉아서 고개를 파묻고 있던 헤델이 고개를 들고 카라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눈물 콧물 로 엉망이었고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헤델은 그런 얼굴로 코를 훌쩍이며 힘 없이 웃었다. “헤헤...한심한 꼴을 보여줘 버렸네.” 카라는 잠자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헤델이 주저앉아 있는 곳은 부엌이었다. 화덕에서 아직 온기가 오르는데, 주방도구가 여기저기 떨어져 부엌바닥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카라 는 할 말이 없어 조용히 흩어진 그릇과 칼을 줍다가 바닥에 떨어져 형체를 알 수 없이 뭉개 진 덩어리를 보고 멈칫했다. 헤델이 또 피식 웃는다. “그거......그 케익, 어제 일 미안해서…너 줄려고 만들었는데 말야. 그 모양이 돼버렸어.” 카라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케익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주워들고는 한조각 떼어서 입에 넣어보았다. “맛있는데.” “킥......바보야, 주워서 먹어볼 필욘 없어. 괜히 나 위로해 주려고 안해도 돼.” 헤델은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쿡쿡거리며 코를 훌쩍였다.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이 더 참담 해 보였다. “꿈자리가 안좋더라니......우리 엄마 봤지? 어때? 나랑 안닮았지?” “어, 응. 별로 안닮았던데.” 카라는 언뜻 스쳐 지나간 여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에, 매서워 보이는 날카로운 얼굴선과 매부리코 아래로 두른 짙푸른 망토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헤델이 다시 허탈하게 뇌까렸다. “그치? 난 외모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엄말 안닮았어. 마녀의 자질도 없고… 어렸을 때 부터 생각했지. 어쩌면 주워온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뭐 이모나 외할머니하고는 꼭 닮았으니까 그건 아닐 거고, 꼼짝없이 난, 우리집안의 돌연변인 거야.” 카라는 망가진 케익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한 옆에 올려놓고 넘어진 의자를 바로세워 앉았 다. 헤델은 웅크리고 앉은 채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라는 차마 헤델에게 손을 내밀 지 못했다. 헤델의 목소리가 잠겨들었다. “나도 마녀가 되고 싶었어. 이모처럼, 외할머니처럼 대단한 마녀까지는 아니라도 엄마같은, 언니들 같은...... 처음엔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실패할 때마다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면서.....그리고 안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너무나 억울했어...너무 나, 너무나 분했어.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지. 오죽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신전이라는 그런 허황된 소리를 믿고 갈 생각까지 했을까.” 중얼거리던 헤델은 입술을 깨물며 또 피식피식 웃었다. “다 바보짓거리였어.” 둥그스름한 턱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한참 후에야 속삭이듯 마지 막 말이 따라나왔다. “안되는 일은 안되는 거야.”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려 헤델의 옷자락을 적시기 시작했다. 카라는 멍하니 헤델을 바라보았 다. 머뭇거리며 뻗어보던 손은 헤델이 고개를 묻고 흐느끼기 시작하면서 멈춰버렸다. 카라는 손을 거둬들이며 어째서인지 마음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이자드가 말해준 것 같은 그런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자유로이 쓸 수 있었으면 좋겠 다고. 자유로이 헤델을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실제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돌같이 굳어진 채 그 자리에 앉아, 저물어가 는 주홍빛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들어와 헤델의 어깨에 내려앉도록 지켜볼 수밖에. 헤델이 우는 모습을 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헤델은 그 날 꿈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다른 일을 계획했다. 쿠키와 케이 크를 구워파는 가게였다. 광장 한켠에 작은 가게를 내는 날, 헤델은 행복해 보였다. 카라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비치킷차 무니는 고요히 웃으며 말했다. -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이란다. 카라가 그 말이 반대로도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18] - 4장 교차점 #1. 이름없는 신의 그림자 찬바람이 기세를 잃고 봄이 무르익어가던 어느 날인가 카라는 시내 한가운데에서 돌담을 발 견했다. 헤어진 누더기처럼 잡초를 두른 고색창연한 돌담의 존재는 마주친 곳이 마주친 곳 이었으니만큼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벽돌이 아닌 돌로 담을 쌓는 것은 시간, 돈, 노동력 모 두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런 돌벽이 이렇게 신시가지 가까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카라는 담을 돌아 안쪽 정원으로 들어갈 길을 찾아보았다. 담 안쪽은 고적한 폐허였다. 시내 한복판에 숨어있을 만한 자그마한 정원과 본래는 아담한 신전이었을 몇 개의 벽.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황금지붕과 신 전 첨탑들만 아니라면 아칸서스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정적. 카라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 눈덮힌 계곡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도 좋았지만 그 점 때문에 끌린 것만은 아 니었다. 신전은 이미 오래 전에 허물어졌지만, 그곳에는 옛 유산이 하나 남아있었다. 낡은 신상이었 다. 군데군데 깨어지고, 갈라진 틈에 흙먼지가 쌓여 그 위로 돋아난 잡초가 노란 점 같은 꽃 잎을 빼꼼이 내밀고 있었어도, 그 신상을 처음 봤을 때 카라의 눈에는 푸른 왕관을 쓰고 있 는 위대한 왕의 모습이 비쳤다. 그만큼 그 낡은 석상에는 여전히 고요하고 엄숙한 기품이 감돌고 있었다. 닦이지 않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부분부분 깨어져나갔다 해도 신상은 여전히 도도했다. 두 날개는 반쯤 펼쳐 막 날아오르려는 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눈은 먼 곳을 바라 고 있다. 그것은 마치, 화를 당하고도 고결함을 잃지 않은 왕의 모습 같았다. 진흙탕 속에서 날아오르 려는 상처입은 새 같았다. 지저분해진 신상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날개 다친 독수리가 진 흙탕 속에서 날개를 퍼득이며 아이들의 짖궂은 장난을 견디는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안타까 운 느낌이 들었다. 그 신상 때문에 카라는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그 상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잡초를 뽑아내지도, 먼지를 닦아버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우두 커니 몇 시간이나 바라보기만 했다. 그 상을 보고 있을 때 느껴지는 안타까움이 대체 어떤 기분인지 의아해 하면서. 네 번째인가 다시 그 곳을 찾았을 때, 카라는 그제서야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 하나를 깨달 았다. - 그 그림이다.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그림 속의, 슬픈 눈을 하고 있던 왕의 모습. 이 신상에는 어딘가 그 왕 을 닮은 데가 있었다. 아니, 닮지 않았다. 날개달린 사람의 모습이라는 점만 빼면 비슷지도 않았다. 하지만…카라는 고개를 젖혀 신상의 얼굴 부분을 쳐다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 때 뒤에서 낯선 음성이 날아왔다. "아름다운 신상이죠?" 카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떤 느낌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던 시간이 깨어 져 버렸다. 게다가 이곳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올 줄은 몰랐다. 목소리의 주인은 무성하게 자란 풀밭 사이를 조심스레 디디며 신상 앞까지 걸어오더니, 흙 먼지를 뒤집어쓴 단을 대충 쓸어내고 들고온 꽃과 과일을 올려놓았다. 고개를 숙일 때 금빛 머리채 사이로 드문드문 섞인 은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제법 기품있는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찬 공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멋으로 두른 듯한 커다란 숄을 여미며 나직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런 모습이 되어 버렸지만 이분은 이 도시에 남아있는 가장 고귀한 신 이랍니다. 요즘 사람들은 신이 깃들 만한 상을 만들지 않지요." 카라는 말없이 신상으로 눈을 돌렸다. 이 신상을 보고 있을 때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 러나 그런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부인은 아련한 눈으로 석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말고도 이곳을 찾는 분이 또 있다니 정말 기쁘군요. 예전에는 늘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 대던 곳인데…내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이런 폐허가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죠. 예전 에는 참으로 엄숙하고 경건한 장소였는데…그때는 사람들도 정신이 똑바로 박혀서, 성스러 운 아칸서스시의 이름에 걸맞는 신전에 참배할 줄을 알았더랬어요. 신관들도 지금처럼 탐욕 스럽지 않았고, 저런 광대짓거리는……하여튼 요즘 사람들이란, 신전의 도시라는 이름에 부 끄럽지도 않은지." 노부인은 번쩍이는 황금지붕을 향해 비난의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카라는 시큰둥하 게 그 말을 흘려들으며 정리하지 않아 제멋대로 우거진 풀숲에 눈을 돌렸다. 신전이 호객꾼 까지 쓰면서 여행자들을 끌어들이려 경쟁하는 모습이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노부 인의 고상한 말투에는 뭔가 거슬리는 데가 있었다. 그녀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손수건을 꺼 내어 마른 입가를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요즘 모험가입네 하는 저 거렁뱅이 같은 작자들은 신전에서조차 예의를 차릴 줄 모 르더군요! 아아, 한심한 일이예요.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한 번 혹시나 하고 찾아가 봤지 만 신전이란 신전은 다 온통 기도와 간구의 장소가 아니라 환락가처럼 보이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여기까지 와서 기도를 드리는 거랍니다. 내 손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기 를......" 기도와 간구…카라는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거창하게 늘어놓아봐야 결국은 그런 거였다. 경 건함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지만, 분명 손자가 아프기 전에는 신전 쪽으로는 발도 들이지 않았겠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한다. 그렇다면 신전에 돈을 내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러나 전에 카라가 신전과 신전을 찾는 사람들에 대해 그런 말을 하자 티나밋다는 지나가 는 말처럼, 그러나 꽤 단호하게 카라의 생각을 부인했었다. “네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거다." "별로,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예요. 단지 괜히 그런 바램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신앙심인 양 할 필요는 없지 않겠냐는 거죠." 티나밋다는 카라를 쳐다보지도 않고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나도 너만할 때에는 많은 일에 불만이 있었지." "나이가 든다고 불만이 없어졌나요?" "어느 정도는......또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됐지." "그건 이해가 아니라 타협일 수도 있지 않아요?" 조금 심한 말이었지만 티나밋다 무니는 웃기만 했다. 그리고 비치킷차 무니에게 훨씬 더 공손한 어조로 비슷한 말을 했을 때에는...그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카라를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은 약한 존재란다." 아직도 카라는 납득할 수 없었다. 노부인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젠 손자의 병이 어떤 것인지, 그 손자가 어떻게 얻은 아 이인데 병이 걸렸는지 하는 얘기로 넘어가 있다. 누구든 하소연할 상대가 있다는 것만 기쁜 모양인지, 카라가 듣고 있는지 아닌지도 신경쓰지 않고 말을 잇는다. 말의 내용은 시장 사람 들과 진배없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은 격이 다르다는 말을 끼워넣고 고상을 떠는 데에는 어처 구니가 없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카라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다시 신상을 올려다보았다. - 전에 비해서 짜증이 늘었나봐. 이러면 안되는데… 하지만 억제하려고 할 수록 뭔가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색깔을 알아볼 수 없는 감정의 거품이 한 방울 두 방울씩 표면으로 솟아오른다. 카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신상 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그 신상마저도 평온해 보이지 않는다. 많이 긁힌 얼굴에서는 뚜렷한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눈은 어쩌면 날지 못하게 땅에 붙들어매어 둔 인간을 증오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신상이 고개를 숙여 카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나를 날려보내다오! 이 사슬을 끊어다오!! ...환청이었을까? 환상이었나? 카라는 흠칫 뒷걸음질치며 눈을 깜박였다. 다시 쳐다보니 신상 은 여전히 고개를 약간 위로 든 채 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지. 움직였을 리가 없다. 카라는 갑자기 스치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구름이 해를 가렸다. 기분 탓인지 바람이 차가워진 것 같다. 신상은 금방이라도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카라는 갑자 기 마음을 꿰뚫는 섬뜩한 느낌에 몸서리를 치며 신상에게서 마음을 떼어내려 애썼다. 이미 늦었다. 끼이이이이이익 - . 길게, 녹슨 문을 미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카라는 숨을 들이켰다. "어머나, 이게 무슨 소리죠?" 노부인은 하던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 깨 위로 투둑 투둑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도. 카라는 겨우 목소리를 짜내며 노부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물러나요! 어서요!!" "대체 무슨..." 그 순간 큰 종이 떨어져 깨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돌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져내렸다. "꺄아아아아악!!" 노부인은 혼비백산, 기품없는 비명소리를 울리며 주저앉아 바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카라는 점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검은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접은 날개를 펼쳐 땅을 박차려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자세로. 커다란 금색 구슬 같은 금색의 눈. 군데 군데 긁히고 흉이 졌어도 여전히 신상의 얼굴과 모습은 아름다왔지만 그 눈은...... "아냐. 난 이런 걸 바라지 않았어!" 카라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신상은 그 말을 비웃듯 키리릭거리며 땅을 박차고 날개를 펼쳤다. 카라가 얼빠진 채 쳐다보는 사이 신상은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북동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냐. 아니야!!" 카라는 납빛이 된 안색으로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피가 식었다.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몰 려들었다. 뭔가 잘못됐다. 뭔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해버렸다. 뭐라 형언할 수는 없지만, 어 떻게 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저것은 그녀가 저지른 짓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카라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 느낌을 부인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 앞에 금빛 눈동자가, 서재를 태우던 푸르스름한 불꽃이, 미쳐버린 동 물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겨우 잊고 지내던 악몽이 되돌아왔다… "오오, 기적이다! 기적이야!!" 옆에서는 노부인이 언제 비명을 질렀냐는 듯 환희에 차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바탕 소동에 놀란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카라는 눈을 감아 버렸다. [19] - 4장 교차점 #2. 모래의 바다, 돌의 강 (앞) 버려진 신전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발빠르게 퍼져나갔다. 기적을 직접 목격했다는 노 부인은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고, 신이 강림한 흔적, 그러니까 신상이 사라진 주위로 흩어 져 있던 돌 부스러기는 영험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흙부스 러기라도 건진 사람들은 운이 좋았던 축이고, 한 발 늦은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주변의 풀까지 뜯어갔다. 잡초가 무성했던 신전 마당은 하루만에 민둥산으로 변해 버렸다. 예전에 그곳 신전을 버렸던 신관들은 숨넘어가는 소리로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 고 나섰고, 그 자리에 으리으리한 새 신전을 짓자는 공론이 줄을 이었다. 온 시내가 흥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에 무신경한 사람은 있는 법이다. 헤델은 케이크를 화덕에 밀어넣고 불을 살핀 다음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기적 좋아하시네. 땅주인이 한몫 잡아볼 작심을 하고 돈을 쳐들였겠지. 다른 신전에선 지 금쯤 땅을 치고 있을걸. 왜 내가 더 빨리 생각하지 못했나 하고 말야.” 가게 뒷문에 기대 서 있던 카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하지만 본 사람이 많은데.” “얘 좀 봐, 그걸 다 믿니? 요새 사기꾼이 얼마나 무서운데, 봤다고 해봤자지. 직접 본 건 할머니 뿐이잖아. 누가 알아?” “그럼 못믿는다는 거야?” 카라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헤델은 찬장에서 재료를 꺼내느라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물론이지! 못믿는 게 아니라 안믿어!” “그럼…” “여기요!” 카라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가게 쪽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날아왔다. 헤델은 잠깐만, 이라 는 말로 카라의 입을 막고 잽싸게 밖으로 튀어나갔다. 헤델의 가게는 작았다. 사람이 앉을 탁자는 세 개뿐이다. 날이 따뜻해지니 바깥에 두어 개 탁자를 놓을 계획을 세우고는 있지만, 당장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날 밤에 재료 준비를 끝내놓고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미리 구워놓는 것도 벌써 한계에 달했다. 늘 있 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 이 사람 같은 손님이 있을 때는. “하나 더 줘요.” 헤델은 빈 접시를 받아들며 잠시 동안 접시를 내민 손님을 내려다보다가, 확인차 말했다. “벌써 여덟개나 드셨는데요.” “아, 벌써 그렇게 먹었나. 맛있어서.” 아까부터 헤델을 연신 종종걸음치게 만들었던 손님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되받았 다. 헤델은 침을 삼켰다. 뒤따라 나온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저어......그러면 다른 케이크를 드셔보시죠? 다른 것도 맛있는데요.” 그 말에 금발 청년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포크를 물고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치즈초코케익이 너무 맛있군요.” 헤델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잠시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쵸코, 치즈케익이랍니다, 손님.” “아, 미안해요.” 미안하다고는 하지만 양보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얼굴이다. 헤델은 잠시 쟁반을 쥔 손 을 부르르 떨다가, 들릴락말락하게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말한 다음 주방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맛있다고 말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미리 준비해둔 케이크를 다 먹어치우고 그것도 모자라서 또 먹겠다니, 경쟁자만 있었어도 장사를 방해하러 온 고용인이 아닌가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 헤델이 궁시렁거리며 주방으로 돌아오자 초조하게 밖을 내다보고 있던 카라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바쁜가 보네.” “별 황당한 여행자가 다 있잖아. 생긴 건 멀쩡한 남자가 나도 느끼해서 다 못먹는 초코치 즈케이크를 여덟 개나 먹어치…” 헤델은 문득 카라가 작은 가방을 짊어진 것을 알아보고 말을 멈췄다. 동그란 얼굴에 살피는 기색이 떠올랐다. “어디 가니?”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인사하러 온 거야.”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니면 사원에서 쫓겨난 거야?” “그런 건 아냐. 그냥, 좀 할 일이 있어서. 걱정마. 별 일 아니야.” “어디로 가는데?” “일단 북동쪽으로.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아마도.” 헤델은 이마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떡한다. 하필이면 구워놓았던 쿠키도 딱 떨어졌는데. 케이크라도 좀 싸갈래?” 카라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헤델은 허리에 손을 얹더니 줄줄이 잔소리를 읊기 시작했 다. “무리하지 말고, 길 조심하고, 산적도 조심하고, 위험하니까 아무나 믿지 말고, 좀도둑도 조 심해야지. 야생동물도 조심하고, 그리고...” “헤델.” 카라가 웃으면서 가로막으려 했지만 헤델은 손가락을 꼽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괜히 호기심에서 말썽에 말려들지 말고, 사람들 너무 믿지 말고, 사기꾼도 조심하고, 넌 좀 둔하니까 눈치 잘 살펴서 다니고......” “헤델!” 헤델의 말이 끊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돌아올 거지?” “그럼. ”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잘 되길 바랄게.” “응. 갈게.” 카라는 손위의 친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걸어나갔다. 헤델은 잠시 뒷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실 나이차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역시 헤델에게 는 카라가 어리게만 느껴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가 혼자 어딜 간다고…역시 붙잡고 무슨 일인지 알아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그래도 사원의 무니들이 무리한 일에 보냈을 리야... 생각하는데 가게 쪽에서 다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케이크 안줘요?” “우왓!” 헤델은 화들짝 놀라 달려들어 화덕 문을 열었다. 철컹 소리와 함께 철판이 밀려 나왔다. 주 방에 연기가 자욱하게 깔리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헤델은 연기에 눈물을 글썽이며 케이크빵이 새까맣게 타버린 것을 확인했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그녀는 입술을 축이고 각오를 다진 다음 가게로 나갔다. 손님에게 허 리를 숙이며 말하는 목소리는 엄숙하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더 이상 안되겠네요.” 이제까지의 고집을 생각하면 가게 안이 뒤집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금발 청년은 의외로 머리를 한 번 긁적이더니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뭐. 얼마죠?” “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산을 하려던 헤델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붉은 빛 금발, 의외로 단아한 얼굴. 시선을 내리자 허리에 찬 칼이 보인다. - 응? 외모는 카라가 말했던 사람과 비슷한데...? 눈은 좀 흐리멍텅하지만. 단 음식을 엄청 잘먹는다고도 했었지. 카라가 무심코 흘린 말을 다그쳐서 알아냈던 정보를 종합하며 유심히 살펴보고 있으려니 상 대방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뭐가 잘못됐나요?” “아, 아니예요. 혼자 여행오신 건가요?” 금발 청년은 고개만 끄덕였다. 헤델은 안도하며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 설마. 늘 같이 다닌다던 검은 머리 마법사도 안 보이잖아.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절대 다시는 오지 말아라. 헤델은 돌아서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방을 정리하고 저녁 장 사를 위해 새로 케이크를 구울 생각을 하니 피곤이 몰려들었다. 역시 혼자 꾸려나가는 것은 한계였다. 케이크 가게에서 나온 금발 남자는 기분좋게 기지개를 펴며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여기 케이크 진짜 맛있었다. 부럽지? 부럽지? 내가 네몫까지 먹었다고 생각해라 야.” 그에게만 들리는 또 한 사람의 음성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 그래. 내 몫까지 먹느라 온종일 죽치고 앉아 있었단 말이지? “반나절 정도 가지고 온종일로 과장할 것까지야. 뭐 어때서 그래? 사원이 어디로 날아갈 것도 아닌데.” - 네 변덕 때문에 헤맨 시간은 두 달로 충분해. 루이는 어깨만 으쓱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맞지 않을 때면 종종 있는 일이, 낮에는 루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열심 히 가고, 밤이 되면 이자드가 화를 내며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번 에는 그것이 완전히 반대 방향이어서 같은 길을 죽어라 왕복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자드 쪽이 움직이는 반경은 넓었지만 루이의 고집은 이기기 힘들었다. 홧김에 마법을 써서 한참 떨어진 장소까지 가버려도 루이가 포기하지 않아서야 제자리 걸음일 뿐이다. 결국 이번에도 줄다리기 끝에 이자드가 포기하고 루이가 원하는 대로 북영지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뭐,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잖아. 안 그래?” 지나간 일은 재빨리 잊어버리는 루이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자드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확실히, 카라의 양아버지가 말해준 이야기나 그 그림은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으로 해결된 것은 별로 없었다. 긴나라족과 카라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지, 혹은 없는지. 누가 카라를 맡겼는지. 그 자는 어떻게 긴나라족의 멸망에 대해 알고 있었 는지. 그 그림은 누가 그렸는지…이자드는 20년 전에 본 파류나 왕의 마지막을, 긴나라족의 멸망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 아니, 육체가 있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루이는 긴나라족이 왜, 어떻게 멸망했는가를 알고 싶어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파류나 왕이 그 멸망을 일부러 불러들였다는 이자드의 의견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을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자드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그는 자신이 마하칼리를 불러들였다고 했던 파류나왕의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마하칼리가 어떤 존재인지가 궁금했다. 그는 아직도 한 순간 맞부딪쳤던 암흑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한기를 느꼈다. “꼬맹이는 잘 있으려나.” 루이는 어슬렁 어슬렁 시내를 벗어나 아키 언덕으로 향했다. [20] - 4장 교차점 #2. 모래의 바다, 돌의 강 (뒤) 쏴아아아아- 파도가 강하게 일었다. 카라는 따갑게 밀어닥치는 모래바람에 눈을 가리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래 파도는 아무런 규칙도 없이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눈을 감은 채 들으면 여느 바다와 구별할 수 없는 파도소리였다. 아직 바다에 가본 적이 없는 카 라로서는 모래의 바다가 얼마나 일반적인 바다와 같은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파도 소리 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바람이 잦아든 후 손을 내리자 눈 앞에 일렁이는 모래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까지 끝없이 이어진 은빛 모래가 쉴새없이 약동하며 밀려오고 밀려간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얕 은 파도는 쉼없이 들락거린다. 이것이 아칸서스시 북동쪽에 자리한 모래의 바다, 키시 반도 를 북쪽 대륙에서 고립시키고 있는 움직이는 사막이었다. 이 거대한 모래 바다 사이에 섬처 럼 자리한 땅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 하나가 카라의 고향인 북영지였고 또 하나는 소국 카 르트였다. "하아-" 카라는 한참동안이나 넋을 놓고 약동하는 모래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비 행선을 타고 남쪽으로 오면서 이곳을 내려다본 기억이 있었다. 비행선으로도 지나는 데 며 칠이나 걸리는 광대한 모래바다. 육로로 이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길은 동쪽 산맥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돌의 강 뿐이었다. 그리고 카라가 가야할 길은 그 쪽이었다. 전날 아칸서스시 에서 날아오른 신상은 곧장 북동쪽으로 향했다. - 괜히 큰소리치고 나왔나. 카라는 문득 후회스러운 마음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끝에 전날 온 시내를 떠 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적이 자기 탓인 것 같다는 말을 꺼냈더니 대뜸 벼락 같은 불호령부터 떨어뜨린 티나밋다 무니가 조금 야속하기도 했다. 일단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그 신상을 쫓 아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하면 막막했다. -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카라는 은빛 모래보라를 망연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최소한 그 신상의 눈에서 그렇게 불 안한 느낌을 받지만 않았더라도… 카라는 우울한 기분으로 조금 더 걸어가다가 다시 멈춰서서 모래고기를 잡고 있는 낚시꾼들 에게 주의를 돌렸다. 아칸서스시에 와서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납작 하고 못생긴 데다가 낚시대에 걸리면 모래를 가르며 요동을 치는 모래고기는 어지간한 물고 기보다 맛있다고들 했다. 게다가 이곳에서밖에 나지 않는 특산품이었으므로 상당한 값에 팔 려나갔다. 원래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은 이미 새벽에 그물을 거둬들였고, 지금 낚 시질을 하고 있는 것은 대개 심심풀이삼아 나온 아칸서스 시민이거나 여행자였다. 카라는 한참동안 낚시를 구경하며 생각했다. 역시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 그 눈이 마음에 걸려. 사람들에게 해나 끼치지 않는지 확인하지 않으면…어쨌든 내 책임 이니까.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 다. “얘!” 카라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 곳에 얘라는 말로 불리울 만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호칭은 애매하지만 분명히 카라를 향해 날아온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저만치에서 낚시도구 를 챙겨들던 나이 지긋한 부부가 가까이 와 보라며 손짓을 했다. “저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춤 주춤 다가가 보니 여자 쪽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까부터 구경하고 있던데. 낚시가 하고 싶은 거니?” “아, 아뇨. 그런 건…” “그럼 좀 먹어볼래?” “예?”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는데 남자 쪽이 모래고기가 퍼덕이는 망태를 들어올리며 걸찍한 목소리 로 말했다. “이 부근 어디서 구워먹을까 하는데 우리끼리 먹기엔 좀 많고, 다시 풀어주기도 아깝구나. 괜찮다면 너도 좀 먹고 가렴.” 그 부부는 친절해 보였다. 모래고기를 먹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카라는 조금 망설이다 가 고개를 끄덕였다. ** 사원에는 수행자들이 놀라서 하던 일을 떨어뜨릴 정도의 고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뭐, 뭐라고? 카라가 혼자 어딜 떠나?" 루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방금 말한 티나밋다 무니를 노려보았다. 티나밋다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말한 대로야. 혼자 떠났어. " "왜? 어째서? 뭣 때문에?" 루이는 티나밋다가 대답하려고 입을 벌리기도 전에 노성부터 질렀다. 그러나 티나밋다는 흔 들리지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가 한 일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지. 네 녀석 입버릇 아냐?" "걔가 어디가 어린애가 아니냐, 티나!"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지!" 티나밋다의 이마에 주름이 쫙 가는가 싶더니 루이의 목청에 지지않게 큰 소리가 터져나왔 다. 메조소프라노의 음성이 단숨에 두 옥타브를 건너뛰어 귀에 쨍 하니 울렸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을 루이가 아니었다. 그는 티나밋다와 얼굴을 맞대고 소리를 쳤다. "내가 뭣 때문에 걜 이리로 보냈는데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저, 루이님......" "어디로 갔다고?" 보다못한 비치킷차가 입을 떼자마자 루이는 그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제대로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금방 떠났다며! 어느 쪽이야?" "그러니까......북동쪽입니다." "북동쪽?" 비치킷차는 완전히 밀린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모래의 바다를 건너야 하니 돌의 강으로 갔겠지요." "알았어!" 루이는 계속되려는 비치킷차의 말꼬리를 끊어버리고 문을 박차고 나섰다. 비치킷차 무니가 정신을 가다듬고 뭔가 더 말하려 했을 때는 이미 저만치 사라진 후였다. 멀리서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울려왔다. "티나밋다!! 너 돌아와서 보자아!!" "흥, 두고 보자는 놈 무서워한 적 없다." 티나밋다는 코웃음치며 비치킷차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루이 녀석에게 약하시군요. 저녀석 소리 질러대는 건 겁낼 거 하나 없다니까요." "전 도저히 티나밋다님만큼 태연할 수가 없군요. 정말 괜찮을까요? 카르트는…" 티나밋다는 고개를 외로 꼬고 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저 바보자식,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그래. 한 번에 한가지밖에 생각 못하는 단순왕 같으니 라고. 카라가 왜 떠났는지 이유도 제대로 듣지 않았잖아." "하아-" 카라에게 불호령을 내려 뛰쳐나가게 만든 장본인이면서도 티나밋다는 믿을 수 없을만큼 태 평했다. 비치킷차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말이 열 여섯 살이지 카라는 사실 어린아이가 아닌가? 카르트가 평화롭고 안전한 땅이라 할 수도 없는데…비치킷차의 표 정에서 그 마음을 읽었는지 티나밋다는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 말아요. 뛰쳐나가게 놔두기는 했지만 돌의 강 경비원들이 아무나 건네준답니까. 어린 아이가 혼자 건너겠다고 하는 걸 그냥 보내줄 리가 없으니까 제발로 돌아올 거예요. 아니, 이번에는 루이가 달려갔으니 만나서 같이 갈 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기는 하지만… 또 엇갈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에이, 그런 걱정까지 사서 할 거 뭐 있어요. 만날 사람은 다 만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엿 차- 그럼 난 나무껍질 벗기는 일이나 마저 하러 나가야겠네요.” 티나밋다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털레 털레 바깥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이는 아키 언덕을 내려가 맹렬한 기세로 시내를 주파해서 모래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검정색과 녹색이 교차하던 땅이 갑자기 은빛으로 변화하는 경계선, 모래의 바닷가에 드문드 문 앉아 낚시질하던 사람들이 대낮의 햇빛을 피해 들어갈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루이는 이 곳까지 달려와서야 겨우 걸음을 늦추고 막 낚싯대를 접는 젊은이를 붙잡았다. "이봐, 혹시 검은 머리 여자애 못봤어?" "예?" 일단 멱살부터 잡고 볼 듯한 루이의 기세에 놀란 젊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루이는 어깨 위로 손을 가져가며 다급하게 설명했다. "이 정도...길이의 검은 머리에 열 네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앤데." 겨우 루이가 누군가 사람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 젊은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요...잘 모르겠는데요." 그 젊은이를 놓고 다시 몇 명에게 물어봤지만 아무도 그런 아이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루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에 빠졌다. "설마 내가 너무 빨라서 지나친 건가? 이상한데......" "검은 머리 아이라면 아까 강쪽으로 간 것을 본 것 같소만." "예?" 루이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이 유유자적 낚시대에 모래 고기 미끼를 꿰고 있었다. "글쎄 찾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의 강 쪽으로 올라가는 검은 머리 여자애가 있긴 있었 다구." "고마워요!!" 루이는 재빨리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모래바닷가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뒤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낚시줄을 던졌다. "허어, 참. 뭐가 저리 급한고? 한낮이 되어 가는데 여기서 달리기라니, 쓰러지지나 말아야 할 텐데…" 온화한 평야지대 앞에 갑자기 출현한 모래의 바다는 제대로 된 사막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낮에 은빛 모래파도에 반사하는 햇빛과 열기는 견디기 힘들었다. 낮에 이 부근에 서 격한 운동을 하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루이는 단숨에 돌의 강까지 달리고도 그다지 힘이 빠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돌이 얌전히 늘어선 강가까지 달려가도록 카라의 모 습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초조할 뿐이다. 그는 돌의 강 입구에 도달해서 주위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쳇...설마 벌써 건너갔나?" 돌의 강을 건너 북쪽은 카르트라는 나라였다. 돌의 강과 모래의 바다로 둘러싸여 외부로부 터 고립된 산악지대로, 사람들은 친절하다고 하지만 워낙 척박하고 위험한 곳이다. 산 속에 는 사람을 습격하는 이름 모를 맹수들이 득시글거린다는 것이 여행자들의 상식이었다. 카르 트에 가본 적은 없지만 루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강 옆에 지키고 선 경비원이 황색 깃발을 흔들며 외치기 시작했다. "곧 강이 움직입니다! 건너실 분은 서두르십시오!!" 루이는 걸음을 빨리했다.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은 그라도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돌의 강을 건널 재주는 없다. 폭이 지금의 절반 정도만 되어도 어떻게 뛰어넘어 보겠지만 일주일에 나흘씩, 산맥에서부터 맹렬하게 굴러내려와 모래의 바다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이 강은 바람이 불지 않는 모래바다가 끊임없이 요동한다는 사실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 끼였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발원지를 찾아 산을 오르내렸지만 어디에서부터 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지 밝혀낸 사람은 없었다. 꽤 굵은 돌들인데도 일단 바다에 도착하면 흔 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도 기괴한 점이었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산사태가 일어나는 듯한 굉음을 일으키며 모래의 바다까지 흘러내 려가는 이 돌의 강에 휩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나마 멈추기 얼마 전이 라면 시체 조각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바다까지 떠내려가고 나면 유품 한 조각도 기대할 수 없다. 다행히도 강의 움직임은 그럴 수 없이 규칙적이었다. 4일 동안 맹렬하게 떨어져 내린 다음 3일간은 잠잠히 멈춰서 있다. 사람들은 그 3일을 이용해서 강을 건너야 했다. 혹시라도 돌의 강이 어떤 곳인지 몰라 섣불리 발을 디디거나, 시간을 잘못 맞춰 건너다가 휩쓸려 가는 사 람이 없도록 늘 경비원이 양쪽에 지키고 서서 시간을 알렸다. 그는 저쪽 산 위에서 오르는 신호를 보더니 붉은 깃발을 흔들기 시작했다. "곧 강이 움직입니다!! 이제 그만 건너세요!" "잠깐만!" "이, 이봐욧!" 경비원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제지했지만 루이는 마음이 급했다. 경비원을 가볍게 제치고 서둘러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이 울퉁불퉁한데다가 둥글어서 생각만큼 빨리 뛸 수가 없었다. 쿠르르르르르릉- 멀리서부터 우레 소리같은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루이는 다급한 마음에 보폭을 넓혀 껑충 뛰다가 아차 하는 순간 발이 꼬여서 넘어졌다. 강 기슭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올렸다. 루이는 잽싸게 일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젠장.....꼴이 말이 아니군." 루이는 일어나면서 흘끗 상류 쪽을 쳐다보았다. 돌의 강이 육중한 소리와 먼지 구름을 동반 하여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물의 폭포라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텐데, 이건 물도 아니고 돌무더기다. 루이는 입술을 핥으며 거리를 쟀다. 그는 강 한중간쯤에 서 있었다. 기 슭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쪽으로 오라고 손을 휘저으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좋아...이 정도 거리라면." 루이는 냉정하게 거리를 가늠해 보고는 한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돌아와! 돌아와요!" "어서 뛰어!" "아이고, 발이 굳었나 봐요! 저를 어째!!" 강 기슭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는 강이 움직이는 굉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다. 루이는 아랫입술을 빨며 씩 웃고는 몸을 팽팽히 굽혔다가 힘껏 발을 굴렀다. "꺄아아아악!!" 굉음소리를 찢는 비명소리들과 함께, 루이는 공중에 뛰어올라 아슬아슬하게 강 끄트머리에 발을 붙였다. 겨우 살았다 싶은 순간 발밑에서 움직거리는 자그마한 돌이 균형을 무너뜨렸 다. "어, 어, 어?" 휘청거리며 다급하게 팔을 휘저어 균형을 잡는데 그 바로 등 뒤로 우르르르 굉음을 울리며 돌의 강이 흘러내려갔다. 또 한 번 사람들이 아찔해서 눈을 감는 순간 루이는 균형을 찾아 몸을 앞으로 숙이고 한 발짝 내디뎌 사지에서 벗어났다. "엿차- ." "와아아!!!!" 강 양쪽에서 일제히 박수갈채가 올랐다. 루이는 멋적게 웃으며 양쪽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 다. 혼이 빠진 듯 서 있던 이쪽 경비원이 그제서야 길길이 날뛰며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제정신입니까 지금!! 까딱 했으면 죽었다구요!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도 돌줄기의 굉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다. 루이는 연신 웃음을 흘리 며 상황을 무마하고 슬금슬금 소란을 피해 강에서 멀어져갔다. "휴우 - " 루이가 겨우 좀 조용한 곳으로 들어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냉정한 음성이 울렸다. - 축하한다. 정말 꼴사나왔어. "윽...이자드...조용하길래 다른 생각 중인 줄 알았는데." - 그랬었지. 네가 돌줄기 한중간에서 비틀거리기 전까지만 해도. 루이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서두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핫핫핫." - 그래서 카라는? "아, 아무래도 벌써 건너온 것 같아. 얼른 찾아내야지." 루이는 허둥거리며 산 기슭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의 소란을 봤는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들과 마주쳐 진땀을 빼 가면서. ** "우앗......" 몇 분 후, 카라는 굉음을 울리며 떨어져 내려가는 돌의 강을 보며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덜그럭 덜그럭 부딪쳐 가며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중인 돌덩이들을 보고도 강을 건널 생각을 한다면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카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전에 비행선에서 봤을 땐 분명 이렇지 않았는데?" 오기로 뛰쳐 나왔으니 여행 준비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 돌의 강이 움직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누구 하나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강이 움 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슭에 있던 사람들은 다 떠난 후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경비원 들도 철수한 뒤였다. 다행히도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올라오다가 카라를 보고 의외롭다는 듯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냐 꼬마야?" 여행장비를 단단히 차리고 짐꾸러미를 짊어진 모습이 떠돌이 상인이었다. 카라는 반색을 하 며 그에게 물었다. "저어, 이 강 어떻게 건너가죠?" “뭐라고?” 돌 굴러가는 굉음이 워낙 커서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카라는 목청을 돋구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물었다. “이 강 어떻게 건너가냐구요!” "응? 너 이 강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거냐?" "예에......" 상인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소리소리 지르기가 뭐하다는 듯 손짓을 하고 강어귀에 떨어져 있던 작은 꾸러미를 줍더니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니, 강소리가 어지간히 숙어들 정도로 한참 내려간 후에야 멈춰선 상인은 돌아보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말 했다. "대체 너같은 꼬마가 무슨 일로 강을 건넌다는 거냐? 카르트가 어떤 나라인지는 알아? 여행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카라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뭇거리자 상인은 마음 속으로 뭔가 단정을 내린 듯, 카라를 쳐다보며 일장 훈계할 태세를 가다듬었다. "모험심이야 다 좋다만 무모한 건 자랑이 아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렇게 무작정 뛰쳐나와서야 ......" 카라는 계속되는 잔소리에 네, 네 하고 듣고 있어야 했다. 마침내 일장 훈시가 끝나고 질문 이 떨어졌다. "그래서 대체 강은 왜 건너가려는 거냐?" 그제서야 카라는 조금 전에 생각난 말을 내뱉았다. "사원의 심부름이예요." "사원? 어느 분의?" "티나밋다님인데요. 아세요?" "알지. 그런데......심부름을 시키시면서 강 얘기도 안해주셨단 말이냐?" 상인은 의외의 변명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의심스러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티나밋다님이 원래 그러시잖아요." 카라는 억지로 웃으며 상황을 무마해보려 했다. 상인은 과연 티나밋다 무니를 아는지 그렇 긴 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말했다. "하여튼 강 건너긴 이제 며칠간 틀렸다. 급한 용무라면 안됐구나." "예?" "돌의 강은 멈춰 서 있을 때에만 건널 수 있단다. 사흘간 멈춰 있다가 조금 전에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나흘간은 건널 수가 없어. 사원에 돌아가서 잘 말씀드리려무나." 순간 눈앞에 노랗게 변했다. 기세등등하게 사원을 박차고 나왔는데 어떻게 그 날 안으로 다 시 기어들어간단 말인가.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원망을 담아 중얼거렸다. "저 놈의 모래고기만 아니었어도......" "뭐라고?" "아니, 아니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가보세요." 서둘러 상인을 보내고 나서 카라는 모래바닷가에서 가끔 고개를 내미는 모래고기를 밉살스 럽게 노려보았다. 괜히 모래고기를 먹어보느라고 늦장을 부린 덕분에 이렇게 진퇴양난의 상 황에 놓여버린 것이다. "할 수 없지. 나흘 정도 늦는다고 신상이 그렇게 멀리 도망가기야......할려고......"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카라는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고 몸을 돌려 다시 아칸서스시로 향했다. 사원에 다시 기어들어가기는 역시 자존심 상하고, 헤델에게라도 가서 며칠 묵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 "이상한데? 아직까지도 본 사람이 없다잖아." 루이는 초조함을 넘어서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해가 질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이제까지 주위 를 뒤졌지만 카라는커녕 카라처럼 생긴 아이를 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멀리 은빛의 모래 바 다가 넘어가는 저녁 햇살을 받아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지금 루이 눈에 그게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정말. 여기까지는 그다지 사고가 일어날 일도 없는데. 그녀석 걸음이 그 렇게 빠를 리도 없고…" - 엇갈렸거나 지나쳐온 걸지도 모르지. 루이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고 칼집으로 애꿎은 바위만 두들기며 성질을 부렸다. "제기랄......뭐야, 대체? 완전 바보됐잖아!!!" - 그거야 네 잘못이지. 누가 그렇게 성질 급하게 굴래? “야. 내가 멍청하게 구는 것 같았으면 네가 말렸어야지.” - 잘도 내 말을 들었겠다. 해지기 전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나 움직여. 교대한 다 음에 내가 다시 찾아보고 안되면 강을 다시 건너가면 되는 일이니까. "끄응......" 루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가 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 았다. 그런데 가라앉아가는 태양빛 사이로 기묘한 검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루이는 손 을 들어 햇빛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저건?" 가라앉아가는 태양빛 때문에 잘은 보이지 않지만, 뭔가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고 있었다. "새......?" 새라고 보기엔 좀 이상하다. 그림자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루이의 몸이 머리보다 먼 저 긴장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날개가 달리기는 했어도 그 그림자는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설마!!!" 루이는 외마디 소리를 뱉더니 하늘의 그림자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 루이! 멍청한 짓 하지마!! 이자드가 소리쳤지만, 루이의 머리 속은 긴나라족처럼 생긴 그림자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모래의 바다와 돌의 강을 뒤로 하고 정신없이 카르트 깊숙이 달려올라갔다. [21] - 4장 교차점 #3. 그림자 계곡 (1) 카르트는 모래의 바다와 돌의 강에 둘러싸인데다가, 북영지 쪽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는 하지만 험준하기 짝이 없어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땅이었다. 그나마 돌의 강 쪽 입구가 열리는 사흘간은 아칸서스시 쪽에서 교역하는 상인들이 들어오지만, 나머지 나흘 동안에는 이쪽 산길을 다니는 사람의 숫자가 극히 적었다. 루이가 정신없이 큰길을 벗어나 인적없는 험로로 달려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쪽으로 가지 말라며 말리는 사 람도 없었다. 그렇게 험준하지도, 평탄하지도 않은 지루한 능선의 반복. 날아가는 그림자를 쫓아 정신없이 달리던 루이는 갑작스레 횡하니 뚫린 절벽에 맞닿뜨려 급하게 걸음을 멈추고서야 아까 있던 곳이 어느 방향인지, 돌의 강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렸음을 깨 달았다. 길을 잃은 것이다. “젠장……” 루이는 몇 걸음 물러서서 목을 빼고 절벽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눈에 꽤 힘을 주고서야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에 유유히 호선을 그리며 날아 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앞에 가로놓인 절벽의 깊이와 거리를 가늠하며 이 를 갈았다. “야, 이자드!”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자드, 듣고 있냐? 교대한 다음에도 저거 쫓아가야 해!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고!” - 카라는? 이자드의 짧은 대꾸에 루이는 눈을 껌벅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카라를 찾으러 달려온 것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잠깐 멍했다가 뒤이어 무슨 말인가를 하기 전에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루이의 늦은 대꾸는 현실의 소리로 울리지 않았다. - 카라는…아직 건너오지 않았다면 괜찮잖아? 앞으로 나흘간은 이쪽으로 건너올 수 없는 거잖아. "...바보 자식." 이자드는 내뱉듯 말했다. “학습능력이라는 것도 없냐? 눈앞에 새로운 미끼만 던져주면 직전에 하던 일도 까먹고 날 뛰니 늘 일이 꼬이는 거야.” - 그래서 지금 안 쫓아가겠다는 거야? 긴나라족 문제는 너도 궁금해하는 거잖아!! 루이가 펄쩍 펄쩍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이자드는 시끄러운 루이의 소리를 무시하고 먼 하늘을 살폈다. 루이의 눈은 초원의 사냥꾼과 맞먹지만, 그렇지 못한 이자드의 눈에는 멀 리 날아가는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루이가 건너뛸 수 없는 이 절벽을 그가 넘어갈 수 있 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흠……” 이자드는 절벽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문제는 지금 그가 카라를 먼저 찾아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날개달린 그림자부터 찾아 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카라의 일은, 애초에 카라가 혼자 위험한 곳에 들어설까 걱정되어 쫓아온 것이니만큼 루이 말마따나 돌의 강을 건너지만 않았다면 나중에 만나도 안될 것이 없다. 하지만 카라가 건너왔다면? 카라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하려면, 왜 건너왔는가 하는 이 유를 알아야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루이의 성급함을 개탄하며 중얼거렸다. “티나가 어떤 앤데 아무 대비도 없이 보냈을까. 게다가 네녀석, 카라가 무슨 일을 벌여서 무슨 책임을 지러 나갔다는 건지도 듣지 않았지.” 루이의 말문이 막히기에 충분한 일침이었다. 이자드는 겨우 조용해진 머리로 나머지 생각을 정리했다. 날개달린 인간이라는 문제는 간단치가 않았다. 날개달린 인간은 긴나라족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긴나라족은 멸망했으니, 저 날개달린 그림자는 루이의 섣부른 기대대로 긴 나라족의 생존자이거나…그렇지 않으면 더 골치아픈 존재라는 뜻이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자드는 문득 시선을 올리다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입술 끝이 보일락말락하게 올라 갔다 내려오더니 입이 열렸다. "프라브리띠.Pravriti. 아닐라. Anila!" 발 아래로 얇은 공기층이 생기면서 발끝이 떠오른다. 이자드는 연이어 한 가지 주문을 더했 다. "판차 * 탄-마-트라스 Panca-tanmatras" 원래는 공격용 주문이지만 적절히 말의 높낮이와 리듬을 바꾸면 추진력으로 사용할 수도 있 다. 두 가지 주문이 섞여들면서 이자드는 빠른 속도로 갈라진 절벽 위 허공을 딛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하늘의 그림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커다란 새 같은 그 그림자는 유유자적 고도를 낮췄다가 날개를 몇 번 퍼덕여 창공으로 날아오르며 몇 번이나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더니 하늘 위에서 날개를 접으며 이자드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져내 려왔다. 이자드는 순간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날개가 허공을 치며 밀린 공기가 아프게 귀를 때렸다. “키리리리리릭-“ 날개달린 그림자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이자드의 몸을 치받으며 다시 위로 날아올랐 다. 허공이라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날개에 정통으로 맞지 않은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이자 드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루이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 으다다닷! 이자드는 정신을 집중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도 루이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호들갑 떨지 마. ” 이자드는 절벽 반대편 땅에 발을 딛고 겨우 균형을 잡으며 고개를 홱 돌려 공격자를 노려보 았다. 날개달린 그림자는 한 번 더 곡예비행을 선보이더니 다시 바람을 타고 어두워지는 북 동쪽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자드의 검은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잡아보라 이거지. 좋다.” 그는 맹렬한 기세로 추격을 재개했다. 한 번 더 주문을 외우자 발밑에 응어리져 있던 공기 층이 한층 두꺼워지며 발 위로 기어올랐다. 속도가 빨라졌다. 날카로운 바람이 아프게 귀를 때렸고 풍성한 로브는 바람을 먹어 팽팽이 부풀었다. 강풍이 돛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속도에서 지지 않는다 해도 하늘 위의 상대를 쫓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같은 비행이 라도 땅 위에서는 직선으로 움직이기 어렵다. 게다가 하늘은 빠른 속도로 어두워져가고 있 었다. 어둠속에 녹아들어가는 흰 날개를 찾기 위해 신경쓰다 보면 주의가 흐트러져 움직이 는 속도가 줄어드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마침내 사위가 다 어두워지자 이자드는 속 도를 늦춰 천천히 멈춰서고 말았다. - 잘 좀 찾아봐. 그것도 안 보이냐! 이자드는 잠시 하늘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이미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차가 운 밤공기가 서늘했다. “무리야. 어떤 바보처럼 머리보다 눈이 앞서지 않는 한은.” - 뭐야? 이자드는 문득 코를 막더니 한 손을 들어올리며 낮게 주문을 뇌었다. “바스Vas.” 푸르스름한 빛이 타올라 어둑한 주위를 비추었다. 부러진 판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며 역한 피냄새가 강하게 실려왔다. 이자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빛을 조 금 더 키우자 피를 흘린 장본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체였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 체 조각들이었다. 그는 피웅덩이와 살점을 밟지 않으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시체들을 살펴보았다. 날카로운 발톱에 찢기고 살가죽이 통째로 뜯겨나간 사람들. 노인과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두 세 가족이 전멸당한 듯 싶었다. - 이건 대체… 루이가 혀를 찼다. 이자드는 곧 이 살육의 원흉을 찾아내고 허리를 숙였다. 두 쪽이 나기는 했지만 워낙 깔끔하게 이등분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늑대와 원숭이를 섞어 반으로 나눈 것처럼 생긴 짐승, 거브와였다. “이렇게 큰 놈은 처음 보는데.” 이자드는 일반적인 거브와의 두 배는 될성 싶은 시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틈에 낀 살점이며 피부조각을 살폈다. 거브와는 주로 썩은 시체를 뜯어먹고 사 는 놈이다. 게다가 아무리 몸집이 크다 해도 야생의 짐승이 무리지은 상대를, 그것도 사람을 습격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 하지만 이 흔적으로 봐서는 이놈이 살육의 원흉임에 분명했다. 이 짐승을 반듯하게 두조각으로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카르트 사람 중에 이 정도 로 뛰어난 칼솜씨를 지닌 자가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칼놀림의 정 확함이나 속도, 모두 루이와 비등한 정도였다. 이자드는 시체에 손을 얹어보았다. 아직 따뜻 했다. 그렇다면 이 살육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뜻인데…이 놈을 벤 자는 어디 로 갔을까? 그가 꼼꼼이 사체를 뜯어보는 사이 루이는 연신 하품을 했다. - 우이씨, 졸려. 잠도 못자고…넌 뭐 그런 걸 가까이에서 뜯어보 고 그러냐. 악취미라니까. “취미 따위가 아니라고 몇 번 말해야 알아듣지.” 이자드는 몸을 일으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드는군.” - 응? 졸음에 겨운 목소리였다. 이자드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일단 여길 뜨는 게 좋겠어.” 그러나 그의 말은 바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거기 누구냐?”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오더니 횃불을 든 사람 십여명이 우르르 이자드 쪽으로 달려들었다. [22] - 4장 교차점 #3. 그림자 계곡 (2) 이자드는 한 발짝 물러섰지만 그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새파란 창날이 코앞에 다가들어 있었다. 그는 부르르 떨리는 창끝을 주시하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창을 쥔 청년은 긴장 탓 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몸을 떨고 있었다. 뒤이어 이자드에게 창을 들이댄 중년 사내가 못내 불안한 듯 바로 옆에 선 청년을 흘긋거렸다. 이자드는 어느 새 주위를 빙 둘러싼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단단해 보이는 갈색 얼굴에 노여움과 긴장으로 타오르고 있는 수십 개의 눈동자. 이자드가 처음 쳐다보았던 젊은이는 살육장면을 본 경험이 없는지 피비 린내를 참지 못하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 뭐야, 이건. 루이는 귀찮다는 듯 웅얼거렸다. 이자드는 저렇게 당황하고 분노한 상태에서도 다짜고짜 달 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지휘관이 괜찮은 놈일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손끝에서 타오르 던 푸른 빛이 사그러들고, 그가 조용히 서 있자 사람들은 긴장이 풀리는지 조금씩 웅성이기 시작했다. 반쯤은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었고, 가끔은 이자드를 향한 것인 듯한 욕설이 날아 왔다. 루이가 다시 웅얼거렸다. - 야, 적당히 혼내주고 가자. 이자드는 루이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이 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잠시 후 험악한 얼굴들 너머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해. 흥분하지들 말아라." "하지만 이걸 좀 보십시오...!" “대장님, 저놈이 사악한 술수로…” “이 광경을 좀 보세요!!” 항의의 소리는 한꺼번에 뒤섞여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다들 금새 입을 다물었다. 이자드는 흥미로운 눈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뜯어보았다. 그다지 풍족해보이지 않는 마른 얼굴과 평이 한 옷차림은 다른 사람과 별다를 게 없었지만 눈동자가 영민했고 걸음걸이에 절도가 있었 다. 그는 찢긴 시체와 거브와의 사체를 가리키며 꾸짖듯 말했다. "시체를 잘 봐. 거브와들의 짓이다." 다시 웅성임이 일었다. 십여명의 사내들 가운데 눈에 띄게 어깨가 넓은 중년 남자가 머리를 곧추세우며 큰 소리로 항의햇다. "거브와는 산 사람에게 덤비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하켄?" 하켄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이자드를 손가락질하며 거칠게 외쳤다. "보셨잖습니까! 이자는 푸른 불꽃을 손 위에 불러내고 있었습니다! 사악한 마법사임에 틀림 없지요. 거브와들을 부려서 사람을 죽인 게 이자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이자드는 속으로 호오, 탄성을 던졌다. 꽤 그럴싸한 추리가 아닌가. 과연 주위 사람들이 일 제히 동조해 다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마구잡이였다. 이자드는 결론이 어떻게 나는가 궁금해하며 팔짱을 꼈다. 자신이 문제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구경꾼 같은 자세였다. 루이가 또다시 투덜거렸다. - 젠장. 이런 바보들은 어디에나 있다니까. 가만히 서서 계속 들을 마음이 나냐? 얼른 우리 갈 길이나 가자니까. 이자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기대대로 대장은 다시 부하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발끝으로 거브와 사체의 단면을 건드렸다. “바보같은 소리들 말고 누가 다녀갔는지 좀 봐라.” 이 말에는 이자드도 몸을 앞으로 내미는 관심을 보였다. 하켄을 비롯한 사내들도 일제히 그 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거울처럼 매끈하게 잘려나가 내장조차 단정하게 갈무리된 거브와의 모습을 보자 다들 안색이 변했다. 그런 칼솜씨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모양이었 다. 그러나 이자드의 바람과는 달리 그게 누구인지 입밖에 내어 말하는 자는 없었다. 아까의 마음약한 젊은이가 탄성을 지르며 입을 떼다가 동료들의 눈총을 한몸에 받았을 뿐이었다. “알았으면 그만 창들 치워.” 대장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반론의 여지 없이 단호했다. 다들 흘긋흘긋 이자드에 게 못마땅한 눈초리를 던지며 겨누고 있던 창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야 대장은 이자드 쪽으 로 몇 발자국 다가들어 정중하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경황 중이라 실례를 범했군요. 카르트 수비대의 시진입니다. ” 이자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말했다. “별로…그런데 무슨 근거로 내가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호의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그의 대응에 시진의 눈이 날카로와졌지만 평정을 잃지는 않았 다. 그는 목소리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답했다. “우선 저희보다 조금 전에 이 곳에 도착한 게 분명하고, 제 부하들을 공격하지 않았으니까 요.” 시진의 말투나 태도는 부드러웠지만 이자드는 그 눈에 어린 경계심을 놓치지 않았다. 이자 드는 그가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으며, 방금의 행동은 수상한 이방인에 대한 친절 이 아니라 자기 부하들을 감싸려고 취한 행동이었을 거라고 해석했다. 시진은 잠깐 사이를 두고 사교적인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불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고 생각되는군요. 이 나라는 마법사들에 대해 그 리 관대하지 못합니다." “그건 미처 몰랐군요. 여행 준비가 소홀해놔서.” "실례지만 카르트에 오신 목적을 알 수 있을까요?" “아, 사람을 찾으러 왔소. 설마하니 무조건 나가라고 하지는 않 겠지요?” - ......미치겠군. 계속되는 두 사람의 완곡어법에 루이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자드는 쓴웃음을 머 금었지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진은 여전히 경계심 어린 부드러운 태도로 이자드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뜸을 들인 다음에 말했다. “글쎄요…마법사라면 무조건 악마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으니 걱정이 되는군요.” “걱정마시오. 함부로 마법을 쓸 생각은 없으니.” 루이가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 ......속이 답답하다, 야. 그만 좀 해. 사진은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를 거두고 곤란한 표정을 보였다. “…곤란하군요. 이런 흉흉한 때에, 잘못하면 봉변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자드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잽싸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다고 찾아온 손님을 억지로 쫓아보낼 수야 없고, 저희와 함께 행동하시는 게 어떻겠 습니까?” 시진 뒤편에서 헉 소리가 터져나왔다. 시진은 반쯤 고개를 돌려 불만에 가득찬 부하들에게 엄한 눈길을 던졌다. 이자드는 무심결에 턱을 쓸었다. 저들과 같이 다니다니, 그럴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떼거지로 다니는 것은 질색인데다, 이번에는 워낙 다급하 게 움직여서 가면도 준비하지 못했다. 이대로 같이 있다가 아침이 되어 루이와 교대를 한다 면, 그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악마 취급을 받을 것이다. 성가신 일이었다. 루이가 이제 졸음을 참기가 힘든지 웅얼거리는 소리로 채근했다. - 그것 보라니까. 저런 놈들 상대하지 말고 가자고. "그럴까......" "예?" 시진은 그 말을 자신의 제안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 정도로 여겼는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안전은 제 명예를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이자드는 그 진지한 얼굴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진의 제의는 정중했지만 신경에 거 슬렸고, 그렇다고 루이처럼 행동해서 박살을 내고 자리를 뜰 마음은 없었다. 아직은. 그는 조금 더 알아낼 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이렇게 흉흉한 때…라니,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시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자드는 그 질문 을 바로 포기하고 방향을 바꿔 다시 물었다. “수비대라면 목적이 있어서 나왔을 텐데요.” “예? 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시진은 주저하며 아직까지 내밀고 있던 손을 어색하게 얼굴로 올렸다. 이자드는 재빨리 말 꼬리를 잡아챘다. “목적이 엄연히 따로 있는데 무조건 동행하자는 것은 지나친 간섭같군요. 나도 그쪽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 동행건은 없는 일로 합시다.” 시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자드는 태연히 덧붙였다. “걱정마시오. 억울하게 돌세례를 받는다 해도 주민들을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이 만.” 이자드는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수비대원 들이 불만스럽게 웅성이는 것이 들렸다. 이자드는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시진은 금방 이라도 적의를 폭발시킬 듯한 부하들을 의식하고 재빨리 표정을 풀었다. “정 그러시다면…무사히 일 마치시길 바라지요. 자, 이 사람들을 매장해야지!” 돌아서는 말끝에 가시가 돋혔다. 이자드는 차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 흐으응…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일을 꽤나 성가시게 처리한다니까. "이 편이 덜 성가신 거다. 너는 싸우는 편이 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 그나저나 쫓아가는 거지? 이자드는 걸음을 재촉해 언덕을 넘어선 다음에야 대답했다. “거브와가 원래 산 사람에게 덤비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 그것도 하필이면 그놈이 지나간 자리에, 시간적으로도 비슷하게 일어난 일이야. 게다가 나를 약올리는 듯 하던 그 몸놀림… 대체 뭘까.” 그는 루이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긴나라족의 생존자이길 바라는 건 알아. 하지만 긴나라족치고는 너무 짐승같지 않던가?” 루이는 마지못해 그 말을 수긍했다. - 그건 그렇지만… 돌연변이일 수도 있잖아? 왜, 그 때 파류나 왕이…그랬었잖아. 제대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흠…” 이자드는 천천히 어둠 속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지금 마음이 이쪽 일에 쏠리는 것은 분명했 지만, 카라 일을 해결하지 않고 무작정 그 날개달린 놈을 쫓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지금 아칸서스까지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에는 시간이 넉넉치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 놈 을 좇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고…문득 루이가 목을 울리며(목은 없었지만) 중얼거렸다. - 으으음…느낌이 안좋은걸. 너 설마 그 소악귀를 불러내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긴.” - 우에에에엑! 나 그녀석 싫어! 루이가 비명을 꽥 지르자 머리속이 쾅 울리는 것 같았다. 이자드는 저도 모르게 두통을 참 는 사람처럼 머리를 감싸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소리지르지 않아도 네가 하리잔을 싫어하는 건 알아! 지금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다른 방법이 있으면 말해봐라.” - 하지만…하지만… “시끄러. 방법이 없으면 입다물고 잠이나 자라.” 루이는 할 말이 없어지자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지만 이건 마치 귓속 에 파리가 들어가서 앵앵거리는 것 같아서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이자드는 몇 번이나 마법을 시전하려다가 실패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어쩌자는 거야 그럼?” 징징대던 소리가 뚝 끊기더니 금새 밝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 잘게. 자는 건 좋은데…내가 잠든 다음에 불러내면 안될까? “네 녀석은…” 이자드는 화를 내려다가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그는 말없이 주위 땅을 살피기 시작했 다. 루이는 그가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입을 봉했다. 그는 주의깊게 땅을 골랐다. 마법진을 그리려면 피가 묻어 있는 곳이나 죽음의 냄새가 남아 있는 곳은 안된다. 지하에 뭔가 마법을 방해할 만한 물질이 없는지 투시해 보고, 마침내 아 무 문제가 없는 땅을 골라 평평하게 다지는 데에만도 꽤 시간이 들었다. 물건이나 사람을, 그것도 친숙하지 않은 상대를 찾는 마법은 어렵다. 아마 공격마법의 배가 넘는 힘이 소모될 것이다. 마법진을 그리는 것만 해도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이자드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작업을 마치고 허리를 펴며 인상을 썼다. "젠장......" 이런 식의 마법체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도 많이 든다. 마법사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서도 칼을 든 적에게 쉽사리 목을 빼앗기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자드 는 잠시 한쪽 옆에 있는 바위에 앉아서 쉬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마법사의 약점을 보강하고, 위력이 강한 주문을 사용할 때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마법체계를 고안해낸 것이 벌써 언제 일인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으로 짧은 주문 안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내는 작업은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이자드는 판차 탄마트라스라는 주문을 완성 하는 데에만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걸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새로운 체계로 소화 해낸 주문이 많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급하게 쓸 수 있는 공격과 방어 주문, 자주 사용하는 몇 개 주문 뿐이다. 지금처럼 누군가를 찾는 주문을 쓰려고 할 경우에는 고스란히 낡은 방 법 그대로를 이용해야 했다. 이자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성공으로도 다른 마법사들보다 현저히 빠르게, 한 꺼번에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을 얻었지만, 어차피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공격주문에 힘을 쏟느니 원래 장시간이 걸리는 주문부터 바꿀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 것이 다. 언제나 결론은 똑같지만. 그는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가늠하며 일어섰다. [23] - 4장 교차점 #3. 그림자 계곡 (3) 마법진은 완성과 함께 희미한 푸른 빛을 발했다. 그 빛은 곧 꺼져들었다. 이자드가 걸음을 옮겨 진 밖으로 벗어나자마자 마법진의 선 하나 하나가 흔적없이 흩어져갔다. 그 대신 희미 한 푸른 빛의 궤적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지난 이틀 사이 이 부근을 지 나간 생물의 흔적이었다. 이자드는 땅 위에 나타난 궤적을 무시하고 하늘에 나타난 몇 개의 궤적을 살폈다. 그가 찾고 있는 생물은 새 치고는 덩치가 너무 컸다. 어느 쪽으로 갔는지 금새 알아볼 수 없었다. 이자드는 손을 털고 한숨을 내쉬며 하늘에 그려진 궤적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곧 다른 흔적은 공기중에 잠겨들어 사라졌다. 이자드는 다시 주문을 외워 빠른 속도로 궤적을 따라가며 두 손을 모았다. "내가 부른다, 사다카여! 파라 사르바 탄트라 스바탄트라! para Sarva- tantra- avatantra!" 주문을 발하고도 잠시 동안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반응은 꽤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나타났 다. 이자드의 손 안쪽에 희미한 응어리같은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자드는 그 응어리 에 정신을 집중하고 조심스레 손바닥을 펼치면서 발밑으로 미끄러져가는 공기층이 저항하는 느낌을 무시했다. 그가 불러내려 하는 존재는, 자연을 어머니에 비유하자면 반항아 자식 같 은 것이어서 자연력과 마찰을 일으키곤 했다. 이자드는 손 안에서 점점 강해지는 푸르스름한 응어리가 연꽃의 형태를 갖추자 마지막 결정 어, 그 이름을 던졌다. "하리잔!" 그 이름이 이자드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자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니 응결된 것은 공기가 아니라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반투명한 청색 연꽃이 입을 벌리고 작은 새만 한 사람 형상을 뱉아내기까지, 시간은 흐르면서 동시에 정지해 있는 듯 했다. 반투명하고 흐 릿하던 사람 윤곽이 분명해진 다음에서야 겨우 얼어붙었던 시간이 한숨을 토해냈다. 주위 공기도 제 흐름을 회복했다. "......콜록!" 형상이 선명해지자마자 그 작은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는 기침소리였다. 루이가 소악귀라 는 이름으로 혐오감을 보였던 존재, 하리잔은 작은 몸을 구부리며 세차게 기침부터 뱉고는 간신히 말했다. "콜록콜록콜록...오랜만...콜록...이네 이자드!" 이자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 안에 앉은 듯 떠 있는 형상을 일별했다. "또 감기인가?" "콜록..." 하리잔은 이자드의 손바닥에 주저앉아, 자그마한 손수건처럼 보이는 하얀 것으로 입을 막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자드는 뻐근한 목을 젖히며 피곤한 듯 말했다. "명색이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소악마라는 네가 감기를 달고 살다니, 아무도 믿지 않을 거 다.” "콜록콜록...감기는...콜록콜록콜록콜록...최악의 병이라구! 게다가 여긴 공기가 너무 나빠!" 하리잔은 계속되는 기침에 한참이나 허리를 구부렸다가 겨우 펴면서 단숨에 할 말을 뱉어냈 다. 기침은 잠시 더 계속되었고 그 사이 이자드는 궤적을 따라 계속 나아가며, 기다렸다. 겨 우 기침소리가 멎고, 하리잔은 비틀비틀 날아올라 코맹맹이소리로 말했다. "왠일이야? 날 다 불러내고. 네 반쪽이 싫어하지 않던가?" "반쪽이라는 말은 마음에 안드는군." "반쪽 맞잖아.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알 바르카 일?" "알 바르카?" 그 이름을 듣자 이자드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정지해서 눈앞에 떠있는 하 리잔을 노려보았다. "알 바르카?" "어, 몰랐어?” 사이에 세차게 코를 푸는 패앵! 소리. “얼마 전에 봉인이 풀렸을걸." 하리잔은 어디선가 끄집어낸 작은 종이로 코를 풀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은 이자드의 반응을 살피며 즐거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다카라는 부류가 아무리 지식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기묘한 존재라 해도, 소악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특성 때문에 보통 상호간에 지식을 주고받는다는 조건으로 계약이 성립하기는 하지만, 상대가 틈만 보이면 곯려먹을 궁리에 골몰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놈들의 본성이었다. 이 자드는 하리잔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문제를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는 다시 앞 으로 미끄러져 가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니- 다른 일이다." “흠흠, 뭔데?” “우선 카르트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봐.” 하리잔은 기침과 코풀기를 병행하며, 시시한 일을 시킨다는 듯 입을 삐죽이며 빠른 속도로 정보를 쏟아냈다. “흠. 카르트의 권력체계는 간단하다면 아주 간단해. 종교와 정치는 하나. 최고 권력자인 왕 은 신의 아들이고 두번째 권력자는 무조건 대승정이지. 왕은 신에게 바쳐진 몸이므로 결혼 은 하지 않아. 왕의 후계자는 대승정이 예언한 날에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 뽑히지. 그 날 태 어난 아이가 하나 뿐일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여러 명일 때는 시험을 거치게 되어있고. 아, 무슨 시험인지까지는 잘 몰라. 카르트의 승정원은 내가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서. 여하튼 왕 위 후보가 결정되고 나이가 찰 때까지는 대승정이 대리로 통치한다든가…뭐, 해먹을 것도 별로 없는 나라라서 별로 엇나갈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여하튼 천년이나 이런 방식에 만족해 왔더군. 흠, 현재 왕은 공석이고, 대를 이을 왕을 정해야 할 대승정은 병석에 누워 있음. 후계자는 원래 후보가 다섯명이었던 것이 현재는 두명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사고로 죽은 건가?" 이자드는 냉소적인 감상을 뱉고 다음 내용을 재촉했다. 하리잔은 요란하게 코를 푼 다음 계 속해서 말했다. "후계자 둘 중 하나는 아마 계속 대승정 옆에 붙어있을 거야. 정치력이 뛰어난 놈이지. 이 나라의 종교에는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마음을 적절히 숨기고 있고. 이 녀석이 왕이 된다면 카르트도 조금은 변하겠지. 그리고 또 하나가 그놈이야." “그놈?” 하리잔은 귀찮다는 듯 짜증스럽게 말했다. “칼솜씨가 뛰어난 녀석.” "그렇군......" 이자드는 앞길을 인도하던 푸른 빛의 괘선이 바로 앞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 고 다시 발을 멈췄다. 그는 하리잔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칸서스에 갔다와라." "아칸서스…에?" 하리잔은 달갑지 않다는 듯 연달아 코를 풀면서 볼멘 소리로 되물었다. 이자드는 그의 불만 표현을 무시하고 말했다. "전과 달라서 지금의 아칸서스시는 들어갈 만 할거다. 가서 아이 하나를 찾아봐." "헤에......?" “카라라는 아이야. 생김새는…” 하리잔은 이자드의 설명에 고개를 삐뚜름하니 꺾었다. "못 본 사이에 자식이라도 낳았어?" "하리잔." "알았어, 알았어. 농담 좀 하면 시간낭비라고 화내는 멍청이." 하리잔은 히죽히죽 웃으며 이자드의 손바닥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변 어디선가 핑- 소리 와 더불어 코푸는 소리가 들렸다. 이자드는 그쪽을 돌아보지 않고 한 마디 덧붙였다. "찾아서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면 되는 거다. 쓸데없는 장난은 하지마." "아아, 알았다구!" 이자드는 즐거운 듯한 하리잔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흠." 하리잔은 골치아픈 소악마지만, 대개의 사다카가 그렇듯 계약은 확실하게 지킨다. 게다가 그 와 하리잔의 계약관계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고 하리잔은 보통의 사다카가 아니었다. 배신 의 위험은 없었다- 골탕먹을 위험이 있을 뿐. 이자드는 고개를 저으며 궤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참! 그 앞에 있는 계곡 이름은 그림자 계곡이야!” 갑작스레 튀어나온 목소리가 이자드의 귓가를 맴돌더니 다시 날아가 버렸다. 그는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 하리잔이 요구받지 않은 정보를 내어줄 때는 대개 골탕먹이거나 놀릴 때 뿐이다…하지만 그림자 계곡이 어쨌다는 거지? 그는 석연찮은 기분으로 급경사 앞까지 걸어갔다. 궤적이 아래로 떨어져내려간 자리에 깊은 계곡이 시꺼멓게 입을 벌리고 있다. 밤의 어둠에 익숙한 그의 눈에도 윤곽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만큼 굴곡이 심한 계곡이었다. 날개달린 존재를 따라간 궤적의 끄트머리는 계곡 중심으 로 떨어져내려갔다. 이자드는 잠시 계곡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 했다. 이제까지 궤적을 따라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실어온 공기층은 이제 계단처럼 험한 경사면을 채워 내려가기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의 몸이 순간 휘청거린 것은 발밑이 불안해서는 아니었다. "……?” 이자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멈춰섰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지?" 일부러 소리를 내어본 질문은 공허하게 밤공기에 먹혀버렸다. 이자드는 우두커니 비탈길에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불길한 예감이나 살기가 느껴지는 것 도 아닌데. ** 이자드 옆을 떠난 하리잔은 언제 그렇게 기침을 해댔냐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아칸서스시의 초승달 가장자리에 들어섰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이자드가 강제로 끌어냈을 때에만 반투명한 푸른색으로 나타날 뿐, 실제 생김새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것 도 이쪽 세계에서 돌아다니는 하리잔의 형태는 본체가 아니었다. 어쨌든 하리잔은 아칸서스 시 가장자리에서 약간 겁을 먹은 듯 망설이다가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서더니, 곧 마음놓고 날기 시작했다. “헤. 진짜다. 아칸서스시도 이젠 편한걸. 여기도 한물 갔구나.” 성스러운 도시, 신전의 도시라고 불리울 시절의 아칸서스는 많은 것을 차단하는 도시였다. 하리잔은 함부로 들어설 수 없던 지역 하나가 뚫린 것이 기쁜 듯 이리저리 날며 도시 내부 를 구경하다가 이자드의 말을 기억해냈다. "어디보자 - 카라라고? 마음에 안드는 이름인데." 하리잔은 아칸서스시를 헤매다녔다. 헤맸다고는 해도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하리잔 은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 멈춰서 궁시렁거렸다. 본체가 아닌 만큼 제약도 많을 수밖에 없어서 그의 투시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본체가 잠들어있는 시기인 지금에는 더더욱. 하리잔은 시 외곽 아키 언덕 쪽으로 몸을 틀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원? 에엑… 이건 또, 골치아픈 녀석이 있네. 흥...이건 또 뭐야......뭐야?" 하리잔은 공중에서 갑자기 확 뒤로 물러서다가 뭔가에 튕겨나가듯이 멈춰섰다. 뒤이어 날카 로운 신음소리 비슷한 것이 새어나왔다. "왜 이녀석이 여기 있는 거야?" [24] - 4장 교차점 #3. 그림자 계곡 (4) 그 순간 카라는 따스하고 편안한 잠 속에서 갑자기 끌려나왔다. "...어라..." 카라는 눈을 뜬 채 멀뚱멀뚱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놀라서 깨어 날 만한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잠시 동안 깨어났다는 감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만큼 갑 작스러운 일이었다. 카라는 몸을 틀어 옆에 누운 사람을 확인했다. 피곤한 듯 약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여자, 헤델이다. 방안은 어두웠고, 모든 것이 잠자리에 들 때와 같았다. 카라 는 다시 잠을 청해 보았지만 눈이 너무 말똥말똥했다. 헤델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에서 빠져나오자 새벽 한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커튼을 젖혀보았다. 골목길은 어둡고 조용하기만 했다.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고양이 한 마리 가 달려가다가 멈춰서서 카라 쪽을 돌아보았다. 카라는 한 손으로 커튼을 잡은 채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 나를 쳐다보는 건가? 윤곽선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어쩐지 그런 것 같아서, 카라는 의심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왠 지 고양이의 눈동자가 반짝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더니 고양이는 재빨리 몸을 돌려 가던 길을 달려갔다.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면서.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창가에 서 있다가, 발이 약간 시려워지자 침대 안으로 다시 기 어들어갔다. 잠은 오지 않았다. 카라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피할 수 없는 생각에 빠 져들었다. 강을 건너가려면 나흘…아니, 이제 하루가 지났으니 사흘이나 더 있어야 한다. 어 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괜찮을까. 오히려 죄책감이 드 는 것은, 사흘 뒤 강을 건너보면 이미 신상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더 이상 책임을 질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마법을 쓸 줄 안다면 건너갈 수 있을텐데… 카라는 이자드의 마법을 떠올리며 입술을 빨았다. ** 이자드는 자신이 얼마 동안이나 꼼짝하지 않고 발치 너머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는지 의식하 지 못했다. 주변 윤곽만 겨우 드러난 희미한 새벽 어둠 속에서 그의 날카로운 얼굴선은 꽉 조여져 있었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턱선이 흔들렸다. 그는 왜 이렇게 기묘한 기분이 드는 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모든 사고는 일종의 문제풀이였다. 상황을 정리하 고, 더하기 빼기를 통해 결론에 접근해가는… 일순 검은 눈에 섬광 같은 것이 지나갔다. "이자드!" "뭐야?" 이자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보다는 분개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시선을 올렸 다. 그의 눈높이에는 예상밖의 응대에 놀란 하리잔이 있었다. 이자드는 곤두선 눈썹을 내려 뜨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접었다. 하리잔의 목소리가 겨우 떠오르려던 답을 방해해 버렸다고 해도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찾아본 건가?" "...그야, 얼마 걸릴 일도 아니니까. 아칸서스에 있던데. 그런데!" 하리잔은 포르르 날아오르며 흥분한 듯 손발을 휘저었다. “그런데 말야…그 녀석이…” "그 녀석?” 이자드의 주의는 완전히 하리잔에게 쏠렸다. 덕분에 조금 전 스쳐지나갔던 작은 깨달음은 실마리마저 잃고 다시 망각의 둥지에 돌아가고 말았다. 하리잔은 굉장히 흥분한 듯 뭔가 더 말하려다가 갑자기 이크! 소리를 내며 몸을 피해 버렸다. 그 뒤를 듣기 즐겁지 않은 울음소 리가 대체했다. "가르르르르르르-" "귀엽지 않은 고양이들이군." 이자드는 발치께의 어둠, 그 속에 도사린 맹수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보다는 루이가 했음직한 말이었다. "여기, 몬스터 계곡쯤 되나?" "아니. 그림자 계곡이라니까. 푸에취!! 잘해봐! 난 들어갈 거야!" 하리잔은 재빨리 귓가에 속삭이더니 대꾸할 틈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이자드는 인상을 약 간 찌푸렸다. 사다카라는 족속은 대개 이렇다. 어차피 본체는 따로 있으니 크게 다칠 일이 없는데도 위험하거나 귀찮은 일은 질색하며 꽁무니를 빼버리는 것이다. 체면을 가리지 않고 몸을 사리는 그 모습을 보면 ‘완성한 자’라는 의미의 사다카라는 종족명이 무색할 정도였 다. 이자드는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고, 다시 불러내면 된다. 카 라가 아칸서스시에 있다는 것은 확인했으니 다음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그는 시간을 더 허비하지 않았다. 고양이과의 동물들은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법이 없다.이 자드는 아직 튀어오르지 않은 맹수들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재빨리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양손을 세웠다가 뒤집으며 외쳤다. "칸 Khan!" 단순한 주문일수록 효과는 확실한 법. 쿠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발 앞의 흙이 꿈틀거리는 가 싶더니 반경 십 하스타 정도의 땅이 한꺼번에 함몰했다. 노란 눈을 빛내며 몸을 날리던 고양이 몇 마리가 흙과 함께 아래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가르르르르르-" 그러나 몇 마리 뿐이었다. 이자드는 곧바로 양손을 교차했다. "두루바, 타트하! dhruva, Tatha!" 그를 중심으로 반경 이십 하스타 안에 있던 놈들은 모두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이자드 는 뒷줄에 있던 놈들이 달려들기 전에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나머지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 나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몸을 날려 계곡 바깥에 착지한 순간 그를 쫓아오 던 놈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커다란 고양이들은 계곡 경계선이라 할 만한 능선에 멈춰서서 이빨만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이자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잠시 그들을 관찰했다. 세련된 몸의 곡선과 우아하다 할 만한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생김새는 표범과 비슷하지만, 크다. 표범으로 보기에는 비정상적으로 컸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비죽이 튀어나온 날 카로운 이빨을 감당하지 못해 턱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능선 부근을 왔다갔다 하며 초조한 듯 이자드에게 눈을 빛내는 놈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경계선?" 하지만 마법적인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저 야수들이 경계선을 뚫고 달려들지 못하는 이유 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의문에 싸여 대치해 있는 사이 계곡 능선은 조금씩 어둠에서 빠져나 와 또렷한 형태를 찾았다. 가장 짙은 어둠이 물러갈 시간이 온 것이다. 곧 해가 뜬다는 사실 을 감지했는지 루이가 소리내어 긴 하품을 하며 끼어들었다. - 으아아아아아아암- 뭐야, 뭐? 육체가 있었다면 거창하게 기지개를 켰으리라. 목소리만으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루이는 입맛을 다시며 잠이 덜깬 목소리로 궁시렁거렸다. - 뭐야. 기분나쁜 냄새가 나는걸...화산에서 나는 유황냄새 비스무레한 게, 하리잔 녀석 아직 안들어갔냐? "실체도 아닌데 냄새 같은 게 날 리가." - 쳇. 구덩이에나 처박혀 사는 그 얍쌉하고 교활하며 믿을 수 없는 녀석. 반쯤은 농담조지만 나머지 반은 진심이다. 이자드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가 깨어나 고, 아침이 다가오는 이상 이제 하리잔을 다시 불러내어 아까 하다 만 말을 추궁하기란 무 리가 아닌가. 그는 다시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맹수들에게 주의를 돌렸다. 어느 새 몰려 들었는지 아까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계속 걸리는 일 투성이군." - 뭐라고? 우와! 저 살쾡이들은 또 언제 나타난 거야? "살쾡이?" - 아닌가? 하긴 살쾡이치고는 너무 크구나. 이 순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루이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선물을 푸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연 상하지 않았을까. 이자드에게는 루이가 준비운동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계곡 안 에서 초조하게 어슬렁거리며 부드러운 인간의 살점을 잡아뜯을 궁리를 하고 있는 저 맹수들 이 루이에게는 근사한 아침운동감으로 보이는 게 분명했다. 지난 몇 달간 변변한 싸움을 하 지 못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이자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루이가 뛰어다니고 칼질하는 일 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에는 반대할 마음이 없었지만... 루이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 그 날개 녀석은 어디로 간 건데? 이자드는 그래도 루이가 얼마 전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짧게 대답했다. "저 계곡 밑으로 내려간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공기를 흔들던 목소리는 해가 지평선에 빼꼼이 얼굴을 내밀면서 어둠 속, 그림자 속으로 후 퇴했다. 말의 후반부는 루이의 머리속으로 울렸다. - 저 고양이들을 만나서. “그렇단 말이지.” 루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햇살을 쳐다보며 기지개를 한껏 펴더니 바로 뛰기 시작했다. “계곡 밑이란 말이지?” - 잠깐만. 루... "이-야아아아아아아압!!" 루이는 장난이 섞여들어간 요란스러운 고함소리로 이자드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며 칼을 빼들 고 계곡 경계선 안쪽으로 뛰어올랐다. 사용하는 손을 오른손. 당연히 빼어든 칼은 오른쪽에 꽂힌 화염도가 아니라 왼편의 보통 장 검이었다. 루이는 계곡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그에게 덤벼드는 맹수 한 마리를 베고 나머지 한 마리를 발로 걷어차 날려버린 다음 안착, 흙비탈에 발을 반쯤 묻은 채 먼지를 일으키며 좌악 미끄러져 내려갔다. 말 그대로 신이 나서 놀이터에 뛰쳐나가는 어 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에헤- 생각보다 골치아픈 녀석들이네.” 루이는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경사면 아래쪽에서 사뿐하게 뛰어올라 몇 하스타 떨어 진 바위에 착지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평상 시의 흐리멍덩한 눈이 아니었다. 이자드가 잔소리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이 없었다. 루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캬앗- 소리를 내며 거칠게 덤벼드는 고양이의 턱을 슬쩍 피하고 뒤이어 내리쳐오는 앞발을 잡아채 어 집어던졌다. 무식한 힘으로 땅에 패대기쳐진 맹수는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대신 날렵하게 몸을 뒤집 어 내려앉았다. 노여움에 온몸의 털이 빳빳이 곤두서 있다. 그 뒤로 계곡 경계선 부근에 있 던 무리가 짓쳐들었다. 루이는 장난스럽게 혀를 빼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일일이 상대해줄 시간은 없는데. 바쁜 몸이라구- 이크!” 그는 날쌔게 허리를 틀어 막 날아든 발톱을 피하고 다시 뛰어올랐다. 이제 발톱과 이빨은 쉴 틈 없이 날아들었다. 루이는 껑충껑충 가뿐한 몸놀림으로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다니며 덤벼드는 맹수들을 차고 때리고 베어넘겼다. 이런 상황에서 신이 난 그의 얼굴을 보면 누구 라도 감탄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 반응이 경탄이든, 무모함에 대한 질책이든. 생각해 보면 몇 달간 제대로 싸움을 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 몇 달 전의 싸움도 만족 스럽지가 못했다. 북영지에서, 진면목을 들켜버린 당황에 더해서 카라를 지키느라 마음껏 싸 우지 못했던 일을 생각하면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고양이떼를 몰살시킬 생각은 아니 었다. 가속도가 붙은 루이는 점점 멀리 있는 바위 위로 건너뛰며 계곡 깊숙이 들어갔다. 한 번 건너뛸 때마다 공격해오는 발톱의 수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아홉번째 도약의 결과로 경계선에서 한참 밑에 자리한 바위에 발을 디뎠을 때, 저쪽 편에서 새로운 울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키리리리릭-" "얼레. 여긴 대체 뭐야? 몬스터 계곡?" 루이는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는 적의어린 짐승들의 모습에 흥미롭다는 듯 뇌까렸다. 퉁퉁하 고 굵은 다리에 몸체의 중간까지 찢어져 있는 거대한 입. 아메마이트였다. 루이는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이쪽을 탐색해오는 아메마이트 떼거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력 면에서는 아직 별로 지치지 않았지만… 이건 이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 다. 몬스터라고 부르든 야수라고 부르든, 사람을 공격할 만한 동물은 모두 육식동물이다. 아 까의 고양이과 동물들만 사냥에 나선다고 해도 숲 하나의 동물 씨가 마를 정도인데, 나무 한 그루 변변히 자라지 않는 이 바위산에 이렇게 광포한 맹수만 드글거리다니? 그는 고양이 들이 더 이상 그를 쫓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앞쪽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상대를 기다리 며 이자드에게 말을 걸었다. "야, 여기 대체 뭐냐? 사냥광들이 보면 미치겠는걸. 아무리 험한 나라라지만 이런 건 처음 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얘네들 뭘 먹고 살지? 그 긴, 아니 날개달린 사람은 왜 여기로 내려온 거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루이는 한가롭게 말을 이었다. "이자드! 꽁해 있지 말고 대답 좀 해봐. 아참, 아까 뭐 말하다가 관두지 않았었냐?" 여전히 묵묵부답. 문득 루이는 멀리서 그를 탐색하고 있는 맹수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소리 를 질렀다. "야!" 고요. 확실하고 차가운 침묵 뿐이었다. 루이는 눈을 깜박였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좀 끼긴 했지만 확실한 한낮이다. 루이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러보 았다. "...이자드?" "...자냐?" "야, 이자드!" 루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대에 차서 기 다리던 맹수들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이자드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 그것 자체로는 별 일이 아니었다. 자거나, 말을 하기 싫어서 의식 속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자리, 같은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고 해서 특별 히 연결감각이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에는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손이 그 자리에 있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이자드와 루이는 늘 서로의 자리에 있었고 그 래서 그 당연한 존재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가 없어졌다. 루이는 칼을 쥔 손을 늘어뜨리고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야…야, 이자드! 너 거기 있는 거지? 대답 좀 해봐. 야!” 몇십년 전인가, 이자드가 한 달간 의식불명이었던 때에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이자드!” 점점 낮아지는 루이의 음성이 계곡 그늘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는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러나 아메마이트들은 그의 사정 같은 것은 봐주지 않았다. 루 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25] - 4장 교차점 #3. 그림자 계곡 (5) 카라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고양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새벽에 지나가던 고양이가 이 녀 석이었을까? 깊게 가라앉은 보라색 눈에 부드럽고 따스해 보이는 새까만 몸뚱이를 보고 있 자니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고양이는 카라에게 다가오 지 않았다. 아침에 갑자기 나타났을 때부터 주욱 헤델 곁에 붙어서 아양을 떨고 있을 뿐. 고양이가 다리에 몸을 비비며 냐앙거리자 헤델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던 케이크 장식에서 잠시 손을 떼고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잠시만 기다리렴. 이 언니가 또 우유 줄게.” 헤델은 갑자기 나타난 검은 고양이를 오래 전부터 기르던 동물처럼 대하고 있었다. 카라는 그 신기한 생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떠돌아다니는 도둑 고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나 깔끔하고 예쁘장한 데다가 애교가 넘치는 고양이였다. 게다가 카라만의 생각일지도 모르 지만,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원래 고양이는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전에는 그 동물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카라가 의자턱에 머리를 기대고 고양이를 쳐다보는 사이 헤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은 그릇에 우유를 부었다. 날씨는 좋았고, 시내는 여전히 최근에 일어난 기적의 여파로 활기에 넘쳤으며, 헤델은 시장 에게 주문받은 축하 케이크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야심작을 위해 하루 가게 문을 닫았을 정도였다. 새벽에 갑자기 카라의 마음을 스쳤던 이상한 느낌도 지금은 꿈인지 현실 인지 긴가민가했다. 마음 속에 커다란 시계추 같은 것이 달려있는 것 같았다. 왼쪽 오른쪽으 로 움직이는 대신 불안함과 태평함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 지금 추는 태평한 마음 쪽으로 높이 치솟아 있었고 카라는 빨간 혀를 내밀어 우유를 할짝이는 고양이를 보며 허기를 느꼈 다. 때마침 헤델이 주방 쪽으로 걸어가면서 소리쳤다. “뭐 좀 먹을래?” “응. 초코치즈케이크 있어?” “아, 그건 하나도 남은 게 없다.” 헤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치즈와 과일 케이크를 담은 접시를 들고 돌아오며 궁시렁거렸 다. “말했잖아. 어제 자그마치 여덟 개나 먹어치운 인간이 있었다니까. 넌더리가 나서 다시 구 울 생각도 안든다. 내 참, 그 단 걸 그렇게 잘 먹는 남자는 처음 봤어.” “여덟 개나? 조각으로도 아니고?” “그렇다니까. 덕분에 어제 화덕을 구워먹은 걸 생각하면…” 헤델은 엉망이 되었던 주방을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말이야…” 카라는 치즈 조각을 입에 넣으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물었다. “잘생긴 사람이었나 보네.” “음…꽤 잘생기긴 했었는데, 아참 그러고보니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비슷하더라.” 카라의 목으로 넘어가던 치즈 조각이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라는 사레가 들려 심 하게 기침을 해대며 몸을 숙였다. “콜록콜록…누, 누구? 내가 누굴 좋아해?” 카라는 기침을 멈추지 못하면서 물었다. 헤델은 대답 대신 부랴부랴 물을 떠왔다. 카라는 물 을 마시고 겨우 기침을 가라앉혔다. 기침이 얼마나 심했는지 가슴이 다 뻐근했다. 숨을 제대 로 쉬지 못해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카라는 눈을 비비며 다시 물었다. "누구 말이야?" 헤델은 시치미 떼지 말라는 듯 눈을 흘기며 카라의 이마에 손가락을 퉁겼다. "루이라든가 하는 사람 말이야. 붉은 빛 도는 금발에 푸른 눈이라며.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 한다는 것까지 비슷하잖아?" 카라는 아픈 이마에 손을 올리며 멍청한 얼굴로 헤델을 올려다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부분에 대한 항변도 잊어버린 채로. “곱슬 머리? 아무렇게나 동여맨?” “응.” “예쁘장한 얼굴에…” “칼을 차고 있었고.” “혹시 옷차림은…” “헐렁한 푸댓자루 같은…” 잠시 헤델과 카라는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헤델이 왠지 모르게 방어적이 되어, 변명하 듯이 말했다. "네 설명과 하도 비슷해서 혹시 싶었지. 그런 사람이 흔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주위를 살펴 보니까 혼자더라구. 네가 그랬잖아. 이자드라는 마법사와 늘 같이 다닌다며… 어머, 혹시 진 짜 그 사람이니?" 카라는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사원에 가봐야겠어." 벌떡 일어나는 서슬에 의자가 기우뚱 넘어질 뻔 했지만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라는 허 둥지둥 정신없이 문을 나섰다. 당황한 헤델은 넘어지려는 의자를 붙잡은 채, 이해할 수 없다 는 표정으로 카라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헤델은 소리내어 불만을 표현하다가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 눈에 바닥에 놓아두었 던 우유 접시가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우유를 할짝이던 고양이는 어느 새 사라지고 없었다. ** "...쳇." 루이는 발 아래 질펀하게 깔린 시체들을 밟지 않으려 몸을 가누며 중얼거렸다. 평소의 중얼 거림은 대화였지만, 이번에는 진짜 혼잣말이었다. 이자드가 없었으니까. 대답하지도 핀잔을 던지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는 평소처럼, 이자드에게 하듯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냐? 응? 쳇. 지금 내 꼴을 보면 또 '내가 없으면 안되는 녀석이라니까.' 등등 어쩌구 하며 잰체하겠지. 하앗!" 그는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면서도 달려드는 아메마이트를 포착해 칼을 휘둘렀다. 커다란 주 둥이가 세로로 잘려 허공에 핏방울을 뿌렸다. 루이는 번갈아 양쪽 손에 검을 바꿔 쥐며 자 리를 지켰다. "너라면 일단 생각부터 하겠지...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라든가. 하지만 난 생각 같은 건 잘 못해. 네가 대신 생각해 주니까 그럴 필요도 없고." 끝도 없을 것 같은 살육에 진저리를 내며, 미친 사람처럼 계속. "듣고 있는 거야? 야, 혹시 너 약올리려고 입다물고 있는 거 아니야?"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이자드를 찾을 수 없어 당황한 상태로, 달려드는 야수들을 맞이해서, 돌파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서 싸웠다. 태양이 하늘 중천에서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루이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뻐근한 어깨를 휘둘렀다. 기합소리도 신나게 울리지 않 는다. 마침내 입을 다물어버린 루이는 바위벽에 등을 붙인 채 끝도 없을 것 같은 칼부림을 계속했다. “키리리리” “크와악!” 베어내도 베어내도 앞으로 밀려드는 아메마이트의 행렬은 언젠가의 지루하고 목적없던 방어 전을 상기시켰다. 그놈들은 소리도 지르지 않았고, 피를 흘리지도 않았었지만... 문득 루이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이런 건 나답지 않아." 루이는 칼을 쥔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이렇게 무기력하게 눌러서서 오는 놈들이나 베고 있다니…” 그는 혼자 주거니 받거니 중얼거리며, 왼손으로 화염도를 뽑아들었다. 어느새 오른손을 떠나 허공을 가른 장검은 다음 차례의 아메마이트에게 날아가, 벌린 입천장을 뚫고 부르르 떨리 며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루이는 화염도를 양손으로 쥐고 날카로운 기합을 발했다. "하아아아아압!!" 오래간만에 손에 쥔 애도에서 변함없이 눈부신 불꽃의 칼날이 솟아올랐다. 바로 루이의 왼 발이 흐르듯이 움직여 내딛고, 허리가 회전하고, 팔이 크게 반원을 그린다 ? 쿠드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공기를 흔들더니 깨끗하게 잘려나간 시체 몇 구가 털썩 소리를 내며 바닥 에 팽개쳐졌다. "좋아, 좋아! 골치아프게 고민하느니 돌파한다!!" 루이는 기세좋게 외치며 뛰어올랐다. 공중에 뜬 그의 눈에 땅이 비쳤다. 검은 흙 위로 태양 이 작열하고 있는... "어?" 잠깐 땅을 향했던 그의 눈이 멍해지는가 싶더니 내딛는 발끝이 어긋났다. 루이는 바위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으와앗!! 휴우. 큰일날 뻔했네."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바람에 미끄러졌던 루이는 겨우 균형을 잡고 바위에 주저앉아, 아래쪽 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태양은 남서쪽에 있다. 그러니까 그림자 는 북동쪽에 생겨야 한다. 그런데 그림자가 없었다. 바위에도, 그의 화염도에도, 아메마이트 들에도. 그리고 바로 뒤이어서 깨달은 것은, 다른 그림자가 전혀 없는 땅 위에, 그 자신의 그림자만 은 뚜렷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그 무렵, 카라는 우르르 굉음 소리와 함께 힘차게 달려내려가는 돌의 강 기슭에 서 있었다. 사원까지 가서 전날 이자드 루이가 아칸서스 시에 왔다는 사실과, 카라를 쫓아서 바로 달려 가 버렸다는 것,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건너간 게 분명하다는 말까지 듣고서, 바로 뛰어 온 참이다. 그러나 다시 와서 본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카라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무시무시한 강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루이, 바보." 카라는 저 멀리에 보이는 건너편 기슭에 눈을 흘기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앞뒤 재지도 않고 달려와서 건너가 버리다니. 하지만 왜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루이는 다시 건너올 수 없었다고 해도 이자드는 가 능했을 텐데…거의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 각과, 카라가 그쪽에 있는 줄 알고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카라는 발을 세게 구르며 다시 한 번 외쳤다. "멍청이!" 고함소리는 시끄러운 굉음소리에 먹혀 강을 건너지 못했다. 카라는 입을 다물고 다시 한 번 강 건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쳐다봐야 건너갈 방법은 없다. 강이 멈출 때까지 기 다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배고픔과 비슷한 묘한 느낌이 마음을 채웠다. 카라는 한숨을 깨 물며 몸을 돌렸다. 설마, 또 엇갈리지는 않겠지. “건너게 해 줄까?” 카라는 갑작스레 귀에 스며든 목소리에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이 움직이는 동안 에는 할 일이 없는 경비원만 멀리서 왔다갔다 하고 있을 뿐. 지금은 강을 건너기 위해 기다 리는 사람도 없다. 다시 한 번, 같은 목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건너게 해 줄 수도 있어." 부드럽고 허스키한…가르릉거리는 듯한 목소리. 카라는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60도 정도 아래로 깔았다. 검은 고양이가 느긋하게 앉아 발을 핥고 있었다. "지금 네가 말한 거니?" 누가 보면 미쳤다고 했겠지만, 카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검은 고양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들었다. "그래." 카라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법에 걸린 동물일까? 아니면 변신한 마법사일까? 아니면 또 알 수 없는 부작용인가? 아니면...... 그러나 정작 잠시 후에 입에서 나온 질문은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마법사야?" "흐으으으으응- 그 비슷한 거라고 해두자." 고양이는 마법사라는 말에 대해 비웃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카라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검 은 고양이가 우아하게 발등을 핥는 모양을 내려다보았다. 묘하게 비현실적이면서도 자연스 럽게 느껴지는 광경. 문득 카라는 그 목소리가 고양이 쪽에서 나오는 것은 맞지만, 고양이의 입과 성대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자드와 루이가 교대했을 때 안쪽에 들어간 사람의 목소리처럼. 역시 이 고양이는 누군가의 심부름꾼일까? 카라가 망 설이며 가만히 있자 고양이는 목을 약간 틀더니 말했다. "너, 이자드를 알고 있지?" 순간 카라의 몸이 약간 움츠러들었다. 카라는 긴장해서 고양이의 눈치를 살폈다. "뭐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난 이자드의, 옛 친구거든." 고양이가 씨익 웃자 보랏빛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건 아니야. 이자드를 만나거든 내가 도와줬다는 말을 해줬으면 할 뿐." "음...친구라고?" "흐으으으으으응- 의심이 많은 아이구나." 기분이 상한 듯, 묘하게 신경을 긁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카라는 의심이 짙어지는 것을 느끼 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 거지? 꼬마야..." 고양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잽싸게 카라의 팔 위로 뛰어오르더니 나직이 목을 울렸 다. "널 죽이거나 할 거였으면 벌써 했단다."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카라는 가까이에서 그 눈을 마주하며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는 것 을 느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햇빛을 받으며 보니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던 몸뚱이에도 약간 자색 빛이 도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털빛을 가진 고양이는 없다. 카라 는 천천히 말했다. "좋아. 그건 좋지만 잠시만 기다려줘. 짐도 제대로 챙겨와야 하고 헤델에게도 다시 가서 인 사를 해야 해." "흐으으으응- 그런 건 걱정말라구. 내가 전해줄테니." "네가?" 카라는 미심쩍은 얼굴로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마녀 출신인 헤델이라지만 고양이와 대화가 될까. 고양이는 카라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어슬렁 어슬렁 카라의 어깨로 기 어올랐다. "눈빛이 마음에 드는걸. 새까만 눈. 내 눈하고 바꾸면 좋을 텐데. 아, 농담이야- 흐으으으으 응- 이자드가 화낼 테니까. 어쨌든 겁이 없는 게 마음에 들어서 해주는 서비스라고 생각하 렴." 언뜻 들으면 다정한 말투였지만 은근히 위협적인 느낌이 들었다. 카라는 말없이 고양이의 보라색 눈을 마주보았다. 고양이로 변하거나, 고양이처럼 생긴 특별한 생물을 부릴 수 있는 상대에게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그나마 이자드에게 신경을 쓰는 모습이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아칸서스는 신전과 사원이 많고 결계가 강력해서, 사술을 쓰는 요마는 들어오지 못한다고 들었다. 심지어는 마녀들이 계약한 귀령들조차 들어오지 못한다고. 그래서 헤델의 어머니도 혼자 왔었던 것이 아닌가…카라는 찜찜한 기분으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자드에게는 누가 도와줬다고 말하면 되는 거야?" 고양이는 훌쩍 카라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몸을 틀며 보라색 눈을 빛냈다. "휘안- 옛친구 휘안이라고만 하면 알 거야. 꼭 전해주렴." 고양이는 싱긋 웃으며 카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보나 완전한 인간의 웃음이었다. 다음 순간 카라는 얼떨떨한 눈으로 강 기슭을 바라보았다. 아까와 똑 같은 광경이지만, 방향 은 반대였다.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건너온 게 맞다. 바위산 사이로 한 갈래 길이 뻗어나가 고 있었다. 건너편을 다시 바라보았지만, 검은 고양이의 모습을 보기에는 너무 멀었다. "이상한 걸 역시."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문외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다니...그렇게 강력 한 마법사란 말인가? 여전히 기분은 찜찜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는 일이 무슨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겠는가. 카라는 결국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등을 돌려 산길 쪽으로 걸어갔다. 헤델의 집에 놓아두었 던 짐까지 고이 어깨에 걸려 있음을 확인하면서. 카라가 가끔 뒤를 돌아보며 산길로 들어가고 있을 때, 강 건너편에서 보랏빛 눈의 고양이는 서서히 몸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검은 몸이 부풀어오르더니 서서히 높아지며 인간의 형체를 갖추어 나갔다. 변환은 빠른 시간에 이루어졌다. 손가락이 완성되어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 카락을 쓸었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카라와 똑같았다. 키와 옷차림, 얼굴 생김새까지. 다른 것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의 빛깔 뿐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보면 검은 빛으로 보일 지도 모르 는 짙은 보라색…휘안은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듯 돌아보고 머리카락을 당겨보며 중얼거렸 다. "색이 너무 짙은가..." 목소리까지 카라와 비슷했다. 여성이라기에는 낮고, 남성이라기에는 높은, 어린 소년 같은 음성. 카라와 똑같은 모습을 한 휘안은 강 건너 멀리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카라가 보이지 않았을 법한 쾌활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오자마자 재미있는 걸 만났는걸. 흐흠…” 휘안은 키득키득 웃은 다음 눈앞에 대화 상대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이자드. 당장은 따로 놀 거리가 있으니까…” ** 루이는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한 일이라면 꽤 많이 당해왔고 오히려 이상한 일을 찾아다니기까지 해왔다. 그러나 오늘만큼 당황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 것은 이제까지 늘 이유를 설명해 주었던 이자드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 그 이유를 제대 로 이해한 적은 별로 없었다고 해도. 그러나 루이는 오랫동안 마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무지가 곧 공포로 연결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사고 구조의 소유자였다. 이자드의 입을 빌자면, 단순 무식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의 결론을 내려 발목을 잡고 있는 고민거리를 치워버렸다. "이상한 계곡이군." 그 이상 뭔가 생각하거나 말하기 전에 또 한 마리의 아메마이트가 달려들었다. 루이는 무엇 이든 먹어치우는 몬스터, 아메마이트의 90도로 벌어진 입을 깨끗하게 두동강내면서 다시 몸 을 띄웠다. 이번에는 시원스러운 도약이었다. 루이는 아메마이트 한 마리의 머리를 사뿐히 밟고 아래로 건너뛰며 중얼거렸다. "웃챠- 그나저나 배고프군...이걸 구워먹을 수도 없고." 내딛고, 다시 도약. 딛고, 다시 도약. "여긴 몬스터밖에 안사나. 쳇..." 그는 순식간에 몇십 하스타를 내려간 다음 잠시 고개를 돌려, 아까의 고양이 무리들과 마찬 가지로 일정 경계선 이상 쫓아오지 않는 아메마이트의 무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생 각하는 문제는 더 이상 그림자에 대한 것도, 야수들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고개를 기울였다. "의외로 먹을 만할지도...?” 아메마이트를 먹을 생각을 하다니. 이자드가 있었다면 화려한 비야냥을 던져 주었을 만한 발상이었다. 루이는 이자드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을 움츠렸다. "아냐. 역시 관두자. 아메마이트의 이빨에는 독이 있다던데, 또 무슨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 르잖아." 혼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미친놈의 그것이었 다. "후아 - 더워." 카라는 다시 한 번 물통을 꺼내 입술을 축였다. 아칸서스시의 한낮도 견디기 어려웠는데 지 금 머리 위로 내리쪼이는 햇빛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그늘로 찾아 걷고는 있었지만 그늘을 드리울 만한 물체가 워낙 없었다. 변화없이 이어진 바위벽 발 아래 찔끔찔 끔 고인 그림자를 따라 걷는 것이 최선이었다. 발 아래로는 햇볕에 바싹 말라 밟을 때마다 먼지가 일어나는 길바닥이 이어지고, 눈에 띄는 녹색이라고는 바위 틈을 비집고 나온 잡초 정도가 전부였다. 뜨겁고 건조한 공기와 지루한 풍경 때문인지, 걷기 시작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온종일 걸은 것 같았다. 카라는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물통을 흔들어 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렇게 나무 한 그루 없을 수가 있담!!" 해가 지려면 얼마쯤 남았을까? 손으로 눈을 가리며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은 머리 위 비스듬히 떠있었다. 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정체도 알 수 없는 고양이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을지도. 두 시간여 동안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하나 뿐이었는데, 운좋게도 루이가 돌의 강을 건너면서 일으킨 소동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돌의 강 가장자리에 서서 날개짓하듯 팔을 휘 저었을 루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참을 수 없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내 날개짓이라는 말에서 연상된 존재의 그림자에 가리웠다. 그 사람은 며칠 전 남쪽에서 날개 달린 악마가 날아와 나라 안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말도 해주었다. 아칸서스에서는 신의 기 적이었던 것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흉조로 돌변한 것이다. 카라는 설레 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문제는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어쨌든 이자드 루이가 이곳 어딘가에 있고, 신상 역시 이곳 어딘가에 있으니 잘된 일이 아닌가. 우선 이자 드를 찾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카르트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동서남북의 네 개 성과 왕성, 다섯 곳밖에 없다고 들 었다. 카라는 이 길을 곧바로 따라가면 나온다는 왕성으로 먼저 가보기로 했다. 루이와 이자 드는 워낙 눈에 띄는 사람들이니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카라는 다시 한 번 물통을 찾으며 언덕배기를 넘어섰다. 그 때였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날린 모래와 돌조각이 정면을 때렸다. 카라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비틀거렸다. 발끝에 와닿는 바닥의 느낌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아니나다를까.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내려갔다. "어......우왓!" 일단 모래흙으로 덮힌 비탈길을 미끄러지기 시작한 발은 쉽사리 멈추지 않는다. 다행히 몸 이 뒤로 넘어간 덕에 구르지 않아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발과 등이 화끈거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워낙 정신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통에, 엉덩이가 바닥에 닿은 후에도 한참 동안 어 질어질하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늦었다. 카라는 머리를 세차 게 흔들고 눈을 깜박이며 쓰라린 등에 손을 가져갔다. "으…아파." 그 때 머리 바로 위쪽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려오자 카라는 얼어붙은 듯 손을 멈췄다. "키리리리릭......" 등줄기를 타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머리속에 금빛 눈동자의 신상이 내던 울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카라는 잠시 동안 머리를 들지 못했다. 머리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가로질 러간다. 그 신상일까? 아니면 다른 맹수나 괴물일까? 소름끼치던 금색 눈을 떠올리자 차라 리 다른 야수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카라는 뒤이어 마음 속으로나마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멍청아. 그럼 지금 죽는 거잖아.’ 카라는 고개를 들지 않고 웅크린 채 앞쪽을 내려다보았다. 머리 위에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 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눈 앞에 보이는 그림자에는 발과 다리, 팔이 있었다. 카라는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올라가다가 날개가 없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그림자는 어떤 맹수의 것도 아니었다. 사람의 것이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키리리르르르…" "어, 얼레?" 카라는 괴이한 울음소리가 다시 울리자 움찔하며 조심스레 뒤 쪽을 돌아보았다. 그림자대로였다. 역광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카라 위쪽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괴이한 울음소리는 그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숙여!!" 카라는 사람 그림자 뒤편으로 뭔가 두리뭉실한 것이 서 있음을 확인한 순간 날아온 날카로 운 명령에 복종했다. 머리를 확 숙이자 묵직한 발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돌부스러기가 떨 어져 내렸다. 바위 위에 서있던 사람이 카라의 머리 위로 뛰어넘어간 것이다. "이봐요!" 처음 울음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돌조각에 머리를 맞아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기까지는 상당 히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몇 초 사이에 눈앞에는 살벌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정면에는 사람의 두 배는 족히 되어보이는 덩치큰 짐승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있었 다. 구부정한 자세에 긴 팔, 사람과 똑같지만 좀 더 길쭉한 네 개의 손가락 끝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반짝거렸다.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건장한 남자가 카라 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재빨리 칼을 움직이고 있었다. 카라가 잠시 눈을 깜박이며 앞에서 벌 어지는 싸움을 보고 있자니 뒤쪽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야, 괜찮냐?" 억센 팔이 카라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카라는 주르륵 뒤로 끌려가며 십여명의 남자들 이 활을 매기는 모습을 보았다. 방금 그녀를 잡아당긴 남자가 손을 놓으며 석궁을 들었다. 카라는 멍청히 물었다. “저건 뭐예요?” 사내는 석궁을 겨누며 재빨리 대답했다. "거브와다. 원래는 저렇게 커다랗지 않지만." "거브와?" 카라는 한참만에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름을 들어봐야 아는 것이 없으니, 이 나라에 잘 알려진 맹수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다. 카라를 보호하듯 옆에 붙어선 사내는 각진 갈색 얼굴에 긴장을 떠올리며 입술을 핥았다. 아까 카라의 머리 위를 건너 뛰어 정면에서 대치하 고 있는 남자가 거브와와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 화살을 날리기가 힘겨운 탓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한 끝에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이 날린 화 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았다. 핑- 핑 ?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귀에 설었다. 거브와 몇 마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만 끝을 내기에는 아직 멀었다. 곧 활을 들고 있던 사내들은 칼을 뽑아들고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루이는 이름 외우기를 싫어했다. 특히 사람들이 이런 저런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붙여놓는 복잡한 이름들은 질색이었다. 맹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름을 잘 모르는 맹수들을 날개 달린 것, 발없는 놈, 머리 둘 달린 녀석, 꼬리에 비늘돋힌 놈 정도로만 기억했다. 그런데 지 금 주위에서 바글거리고 있는 것들은 그런 식의 구분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많고 다양했다. 발이 없는 놈만 해도 서너 종류나 되지 않는가. 루이는 아까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대체, 계곡 아래로 내려갈수록 육식동물만 많아진다면 이 많은 녀석들이 다 뭘 먹고 사는 걸까? 서로 잡아먹고 사는 건가? 루이는 어느샌가 음치 수준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할 때면 늘 뒤따라나 오던 이자드의 불평이 들리지 않아 허전했다. 이리저리 뛸 때마다 느슨하게 몸에 감겨오는 로브는 사실 갑옷 이상의 방어구였다. 이자드 가 직접 만든 옷이다. 갑옷처럼 행동에 제약을 주지 않으면서도 가죽 이상의 보호대 역할을 해냈다. 익숙치 않은 사람이라면 옷자락에 걸려 넘어지거나 넓은 소매에 걸려 허둥대겠지만, 루이는 짧은 칼을 뒤집어 내리치고 칼자루로 뒤를 찌르고 연이어 웅 소리나게 한바퀴 휘둘 러가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계곡 입구에서부터 몇 번이나 되풀이된 일을 미루어보면 저 맹수들도 일정한 테두리만 벗어 나면 따라붙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사이 사이 쉴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계곡 밑바닥이 가까워질수록 맹수의 수가 늘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길을 되짚어 갈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도 생각하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 그는 지금도 해가 진 뒤의 일은 알 바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키리리리리리리릭-" 여러 가지 울음소리를 꿰뚫듯 멀리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루이는 반사적으로 그 쪽으 로 향했다. 시선이 멀리 고정되었다. 그는 보통 사람의 몇 배에 달하는 시력의 소유자였다. 멀리, 말라버린 이 검은 계곡의 바닥 즈음이다. "아하!" 루이의 눈이 빛났다. 거대한 비둘기빛의 날개와, 대리석 빛깔의 긴 머리카락, 둥그런 금색 눈의 소유자가 그곳에 있었다. ** 카라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으아아아아!’ 에서부터 ‘퀘에에에 엑!’까지,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짐승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한데섞인 비명의 합창. 공중으로 피가 튀었다. 손톱이 어깨에 박혀 비명을 지르는 사람의 모습과 양쪽에서 칼 을 맞고 공중에 튀어오르는 거브와의 손이 겹쳐졌다. "욱..." 멍해있다가 어느 순간엔가 그것이 살육임을 느끼는 순간 카라는 황급히 입을 막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쓴물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다행스럽게도 싸움은 그렇게 오래지 않아 끝났다. "빌어먹을! 거브와 따위에게 이렇게 애를 먹다니!" 사체를 걷어차며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은 아까 카라의 어깨를 잡았던 남자였다. 맨 처음 칼 을 들었던 침착한 얼굴의 남자가 얼굴에 튄 피를 적당히 닦아내며 말했다. "분통 터뜨리기 전에 상처부터 묶어라, 하켄." "이거...이렇게 큰 놈 본 적 있습니까, 대장?" "감탄하지 말고 다른 거나 좀 찾아봐. 놈들이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잖나." "이거, 독은 없을까요?" "루아, 정화수 남아있나?" "예에 - 이제 얼마 없습니다." "조금씩이라도 상처에 뿌려줘라."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던 대장이라는 남자는 뒤늦게 멍하니 서있는 카라에게 주의를 돌렸다. "괜찮나?" 잠시 동안 카라는 그 질문이 자신에게 날아왔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이 나라의 땅과 같 은 모래빛깔 머리카락에 돌과 같은 색깔의 눈동자를 가진 30대 남자였다. 피곤해 보이지만 단단한 얼굴이다. 카라가 눈만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는데 아까 그녀를 잡았던 억센 중년 사 내 하켄이 저쪽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다쳤냐, 꼬마야? 아님 놀라서 굳은 거냐?" "대체 왜 너같은 어린애가 이런 곳에..." 대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들자 카라는 그 커다란 남자를 올려다보 기 위해 고개를 뒤로 꺾어야 했다. 카라는 약간 망설이다가 인사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대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카라는 그가 묻지 않은 것 을 확인해 주었다. “다른 사람은 없어요.” “너 혼자란 말이냐? 강은 언제 건넜는데 이런 곳을 헤매고 있지? 혼자 이런 곳에서 뭘 하 는 거냐?” 카라는 대장이 비치는 의혹을 모르는 척 하고 마지막 질문에만 대답했다. "음- 저어,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대장은 다시 한 번 얼굴을 찡그렸다. 카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혹시 붉은 빛 도는 금발머리를 길게 길러서 묶은 남자 못보셨어요? 키는 아저씨만하고,얼 굴을 좀 어려보이고 눈은 파란 사람인데." "금발이라고? 그런 남자는 못봤다. 금발이라면 눈에 띄었을 텐데." "그러면 혹시 짧은 검은 머리에 푸댓자루같이 생긴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요?" 마법사, 라는 말이 입밖에 나간 순간 카라는 주위 공기가 싸늘해진 것을 감지했다. 대장은 그래도 적당히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하켄을 비롯한 나머지 우락부락한 사내들은 험상 궂은 얼굴이었고 가뭄에 콩나듯 섞여있는 어린 축의 남자들도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카라는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생각하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 다. 카라는 기다렸다. “검은 머리의 마법사라면…” 마침내 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 것 같구나." 카라는 대장 뒤편에 서서 이쪽에 삼엄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사 람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대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하켄이 칼을 쥔 채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거칠게 외쳤다. "사악한 마법사와 관계가 있다면 아무리 어린..." "하켄!" "대장님!" "입 다물어라.” 젊은 대장과 노련한 부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은 모두 불안한 얼굴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하켄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물러섰 다. 대장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카라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꼬마야, 그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 카라는 슬슬 기분이 나빠져 분명한 어조로 따져 물었다. "내가 왜 이런 추궁을 당해야 하는지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 대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만, 어쩔 수가 없구나. 마법사는 이 나라에서 별로 환영받는 존재 가 아니지. 더더구나 지금처럼 …흉흉한 때에는." 그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제까지 숨가쁘게 뒤쫓아온 상대였지만 제대로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멀리서 빛나는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루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머리속으로 긴나라족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몸을 감쌀 정도로 커다란 날개에, 투명한 피부, 흰자위 없이 동그란 눈동자. 금색 눈동자의 긴나라족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날개, 그런 날개를 지닌 종족은 하나 뿐이지 않은가. "비...비켜! 비켜라!!" 루이는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날뛰며 야수들의 벽을 돌파해 나갔다. 앞 을 막아서는 것은 모두 걷어낼 기세였고, 실제로 그랬다. 2하스타 길이로 뻗어나간 화염도의 날이 스칠 때마다 찌직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살타는 냄새가 허공을 채웠다. 하얗게 달아오 른 화염도날에 잘린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루이는 무서운 기세로 육박해 들어갔 다. 발아래에서 흙먼지가 일어난다. 루이는 ‘그 자’에게 접근해서 손을 뻗었다. “키리리리릭-“ 놈은 기분나쁜 소리를 내지르며 루이의 손을 피해 뒤쪽으로 날아오르더니 바로 긴 손톱을 내뻗었다. “이봐! 널 해치려는 게 아냐!” 챙강! 루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반사적으로 손톱을 받아냈다. 다급한 중에도 칼을 뒤로 돌려 받아냈기에 망정이지, 화염도날로 받아냈다면 이미 상대의 손은 날아가고 없을 것이다. 그러 나 날개달린 인간은 루이가 사정을 봐주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달아 날카로운 공격만 가해왔다. “해치려는 게 아니라니까!” 루이는 초조하게 외쳤지만 그의 말은 허공에 부딪혀 떨어져내릴 뿐이었다. 그는 계속 방어 에만 급급한 채 뒤로 밀리며 생각했다. 이 아이는 어딘가 이상하다. 그 생각 외에는 모든 것 이 머리 속에서 뒤엉켜 버렸다. 그는 막막함 속에서 갑자기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지평선에 시선을 꽂았다. 그의 입에서 절망적인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런...안돼......지금은!"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해가 뜨고 질 때, 이자드가 루이와, 루이가 이자드와 교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짧았 다. 아주 짧은 시간. 그러나 짧다고는 해도 분명한 간극은 존재했다. 공백기라고 할 만한 순 간이…평소에 그 간극은 충분히 메울 수 있는 것이었다. 낮이라고 해도 이자드가 깨어 있고, 지금 루이가 처한 상황을 명확히 알고, 교대하자마자 손쓸 준비를 해둔다면. 그러나 지금 은… 루이의 눈앞이 캄캄해진 순간에도 기분나쁜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귀를 때렸다. "키리리리릭-" 그리고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밀려나와, 앞이 제대로 보이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 정도였을까? 기껏해 야 몇 초? 그러나 그 몇 초가 지났을 때 이자드는 긴 손톱이 천천히 옆구리를 파고드는 것 부터 느껴야 했다. 뜨거운 통증이 밀려들었다. 숨이 막혔다. 이자드는 눈앞에 불똥이 튀는 것을 무시하며 악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제길 ? 달dal!” 짧지만 효과가 확실한 주문. 짧고 명확한 퍽! 소리와 함께 금빛 눈의 조인은 2하스타쯤 공 중에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연이어 공격을 퍼부어 끝장을 봐야했지만 앞이 캄캄해져 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투두둑, 핏방울이 떨어져내렸다. 놈이 날아갈 때 갈비뼈가 손톱에 잡힌 채 딸려나가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제기랄..." 오래된 상처까지 되살아나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이자드는 최대한 숨을 짜내어 정신을 가 다듬고 후들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안타깝게도 상대편 역시 일어나 있었다. 이자드는 살기넘 치는 금빛 눈동자를 쳐다보며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방금 경황중에 펼친 주문에 는 거대한 바위 하나정도를 간단히 부수는 파괴력이 실려 있었다. 주문을 무효화한다면 모 를까,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고 살아날 수 있는 생물은 용족 정도밖에 없다. 그는 바로 판 단을 수정했다. ‘정상이 아닌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군.’ 그래도 타격이 없지는 않았는지, 놈은 날개를 접고 도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금빛 눈으로 이자드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자드는 숨을 고르려 애쓰며 마주 놈을 노려 보았다. 옆구리를 쥔 손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으로 보아 피가 꽤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지 만, 눈앞에 긴장한 야수를 두고 치료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그는 상대가 완전히 야수라 고 단정하고 있었다. 루이가 그 외양에서 무엇을 떠올렸든, 이것은 긴나라족과 전혀 다른 존 재였다. 그는 문득 금빛 눈이 자신의 입술께에 고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안단 말인가?’ 그리고 마법사의 공격은 입에서 나온다는 것도? 그렇다면 야수일지는 몰라도, 지능은 있다는 뜻이었다. 이자드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손가 락을 구부리기 시작했다. 놈은 분명 틈을 노리고 있었다. 공격주문을 외우면 방어에는 손을 쓸 수가 없게 된다. 상대가 어중간한 스피드라면 모르지만 공격 속도가 루이 정도가 된다 면… ‘그리고 아마 그렇겠지.’ 루이는 그렇지 않다고 펄펄 뛸지도 모르지만. 이자드가 눈을 떼지 않고 재빨리 입술을 움직인 순간 놈이 날아올랐다. “키리리리릭!” “파사 pasa!” 날카로운 일갈에 새파란 칼날같은 바람이 공기를 찢었다. 그러나 상대는 거대한 날개가 폼 으로 달린 게 아님을 증명하듯 공중 높이 떠오르며 그것을 피해버리더니 틈을 주지 않고 그 에게 내리꽂혔다. 그러나 이자드는 이미 시작한 수인을 매듭짓고 있었다. 이자드는 얇은 입술 끝에 차가운 웃음을 매달고 외쳤다. "판차 탄마트라스, 아카사! Panca Tanmatras, Akasa!" 키이이이익! 귀청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푸르스름한 빛의 화살이 존재하지 않 는 시위를 떠났다. 이자드는 피에 젖은 손으로 다시 상처를 감싸안으며 헐떡였다. "...그 스피드로는 피할 수 없을 거다......" "키리리릭!" 아래로 내리꽂히던 새는 방향을 바꾸기 어려운 법이다. 아카사의 화살은 공중에서 그 새-인 간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니, 잠시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떨어져내리는 듯 보이던 다음 순간에 놈은 분노의 비명을 지르면서 이자드의 어깨에 발톱을 박았다. "아파라지타..." 이자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외우던 방어 주문을 멈추고 말았다. 머리 바로 위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투두둑 떨어져내렸다. 놈의 손과 어깨 사이는 거의 분리되어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자드의 공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화살은 심장이 아니라 어깨를 꿰 뚫었고, 다친 짐승이 으례 그렇듯 놈도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이자드는 어깨를 파고드 는 통증에 휘청였다. 찰나간에 십여 가지의 주문이 떠올랐지만 그 중에 무언가를 고를 겨를 이 없었다. 그가 대응하기 전에 뒤편에서 쌔액!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귀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놈이 놀라서 몸을 뒤로 젖히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뒤이어 같은 방향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날아왔다. "거기......!" 연이어 날아온 공격이 멋지게 놈의 어깨참에 적중하는 것을 보고서야 이자드는 아까 곁을 스친 물건이 칼이었음을 깨달았다. 칼에 맞은 놈은 분노의 소리를 질렀지만 미련없이 이자 드의 어깨에서 발톱을 빼내고 날개를 펼쳤다. 커다란 날개가 공기를 때리자 인간의 형체를 한 새는 단숨에 공중에 떠올랐다.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이자드 의 어깨를 세게 짚었다. 어깨에 실린 힘에 이자드는 넘어질 뻔했다. 그 누군가는 그의 어깨를 짚고 공중에 뛰어오르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고 위를 쳐다본 이자드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공중에 뛰어오른 남자는 10하스 타 정도 높이에서, 발을 디딜 곳도 없이 완벽한 칼솜씨를 선보였다. 칼끝이 시작한 순간부터 반원을 그리며 갈무리되기까지, 주위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얼어붙은 듯한 수평치기. 한없이 정적이면서도 날카롭기 그지없는 선(線). 그것이 날아가는 상대를 한끝 차이로 벗어났음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듯 착지한 그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하늘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도망치는 놈은 상처 때문인지 약간씩 비틀거리며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놓쳐버렸군." 그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팔 하나가 공중에서 떨어져내렸다. 대리석 빛깔의 팔. 아까 이자드의 공격을 받고 덜렁거리던 놈의 한쪽 팔이다. 이자드는 주저앉으려는 몸을 바로 세우며, 막 돌아서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지만 대충 자른 듯한 갈색머리에, 군더더기 없이 균형잡힌 장신의 청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는 멀뚱하니 이자드를 쳐다보다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상처는 괜찮은가?" 이자드는 똑같이 멀뚱한 눈으로 그를 쳐다봐 주었다. 잘못 들은 걸까 귀를 의심했지만 청년 은 계속해서 똑같은 말투로 물었다. "괜찮은가 물었잖나. " 이자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똑같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상처가 심해 보이는데." 이자드는 대답 대신 옆구리를 쥐고 중얼거렸다. "사리라 사나타나. Sarira Sanatana." 손 안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오며 피가 멎었다. 어깨에서도 피가 나고 있었지만 곧 멎 을 것이다. 사실 치유주문은 그의 장기가 아니어서, 지금의 치료는 응급조치일 뿐 회복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빤히 쳐다보던 청년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떨어져있는 팔을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자드는 여전히 결리는 옆구리를 의식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자는 팔을 내밀며 말했다. "뭔가 특이한 데가 있나?" "글쎄......" 이자드는 찬찬히 그 팔을 살폈다. 손톱이 유달리 단단하고 길다는 점만 빼면 보통의 사람 팔처럼 생긴 팔이었다. 대리석처럼 매끈한…지나치게 매끈했다. 잘려나간 단면도 거의 온전 하게 남아있지 않은가. 문제는 그거였다. 팔이 떨어져나간 것을 보면 공격이 맞은 것은 분명 하다. 그 주문은,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장 위험한 공격주문 중의 하나였다. 팔을 스치기라도 했다면 그 부근의 살이 완전히 부서졌어야 정상이다. 이 팔은 너무나 단단하고 매끈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팔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이자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군." 청년은 손을 털며 어깨만 으쓱했다. 카르트 사람임에는 분명했지만, 지난번의 수비대와는 달 리 마법사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는 듯 했다. 문득 이자드는 아까의 인상적인 수평치기를 떠올리며, 새삼스럽게 거브와를 죽인 칼솜씨가 이 자의 것임을 알았다. 청년은 조인(鳥人)이 날아간 방향을 턱짓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것은 뭔가?”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 청년이 막연히 계곡 이쪽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계곡에 들어왔다가, 시체들을 따라왔지. 그쪽이 한 일이 아닌가?” “아아.” 이자드는 애매하게 답을 얼버무리며 허리를 굽혀 떨어져 있는 화염도를 주워들었다. 화염도 가 나와 있다니. 차단되어 있던 지난 몇 시간 사이에 루이가 꽤 요란스럽게 벌여놓은 모양 이었다. 그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무시하고 화염도를 칼집에 갈무리해 넣었다. 그 사소한 동작으로 약간이나마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는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저것을 보고 쫓아왔지. 오래 전에 멸망한 종족과 비슷해서.” 진실의 일부만을. 갈색 머리 청년은 약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한 바퀴 휘둘렀다. “좋지 않군.” “무엇이?” “남쪽에서 저것이 날아들어온 이후 줄곧 좋지 않아. 맹수들이 지나치게 날뛴다.” 이자드는 거브와가 습격한 가족의 시체를 떠올리며 계곡 저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각양각색 의 맹수들이 시체가 되어 포개져 있었다. 지나치게 많다. 그는 낮에 루이가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이 계곡도 그래서인가?” 청년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맹수가 지나치게 많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아아. 그건 원래 그래. 맹수가 많지. 사람들은 오지 않아. ” 그는 멀리서 번쩍이는 불빛에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더 오기 전에 뜨는 게 좋겠군.” 이자드는 여전히 루이와 차단되어 있는 감각에 갈증 비슷한 공허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왜 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저 시체더미나 화염도, 싸우고 있던 상황을 종합해 보 아도 교대해 나오기 직전까지 루이가 날뛰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존재를 느낄 수 없음은 어째서인가. 그는 낮 동안 갇혀 있어야 했던 온전한 어둠, 온전한 고독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둘 사이의 연결이 끊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것은, 언젠가 그 들이 분리되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자드 자신이 태양 아래 서고 루이가 밤의 공기를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도 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실 제로 이곳에서 그들의 연결은 차단되었다. 문득 이자드는 ‘그림자 계곡’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고 물었다. “이곳이 왜 그림자 계곡이지?” 앞서 걸어가던 갈색머리 청년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니까. 누구에게도, 어느 순간에도.” 그림자…! 하마터면 큰 소리를 지를 뻔 하던 이자드는 옆구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숨을 멈췄 다. ‘그림자! 그거였군……’ 하지만 어떻게? 이자드는 계곡 가장자리에 발을 디디며, 잠들어있기는 하지만 루이의 존재감이 확실히 되돌 아오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루이와 그의 관계가 물체와 그 그림자 사이의 관계와 같단 말인가? "으......추워." 바람이 차다. 해가 지자 빠른 속도로 기온이 떨어졌다. 낮의 더위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북영지의 추위와는 딴판인,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 카라는 얇은 옷을 다시 한 번 여미며 으 슬으슬 몸을 떨었다. 갈색머리의 청년, 수비대장이 돌아보더니 정중히 물었다. “많이 추운가요?” 카라는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만 참으십시오. 곧 쉬어갈 자리가 나옵니다.” 딴에는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겠지만, 카라는 그 말에 더 암담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쉬어간 다니, 밤새 걸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들, 카라와 카르트 수비대는 함께 카르트 왕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비대는 보고와 휴식 을 위해 귀환해야 했고 카라는 어차피 그쪽으로 가볼 생각이었으니,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 어져서 함께 가기로 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실은 ‘혼자 여행하고 있는 데다가 마법사 에 대해 묻는 수상한 아이’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번뜩이는 자들과의 반강제 동행이었다. 카라는 한 무리의 호위병을 얻은 셈 치며 마음을 달랬다. 사실 그녀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호위병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카라가 여자, 정확히 말하자면 열 세 살이 넘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카라 는 대장의 정중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적의 가득한 사내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것도 불편한 일이었지만, 냉랭한 정중함이 낫다고 할 수도 없었다. 말이 없으니 걸어야 하고, 다들 한겹의 가죽옷 뿐이니 추위에 떨 수밖에 없다. 실질적인 이익이 없는데 정중한 예의가 다 무슨 소용인가. 카라는 추위와 답답함을 잊기 위해 계속 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참을성있게 대답해 주었다. 그래서 카라는 카르트에 여자가 귀하다는 것과, 그래서 황야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두세 명의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르트 인구를 다 합쳐봐야 아칸서스시에 사는 사람수에 한참 못미친다는 것, 관료나 군인의 수가 아주 적다 는 것도 알았다. 그 적은 수의 군인은 태반이 맹수 사냥에 시간을 보낸다는 것, 외부 상인들 과 주로 거래하는 품목이 그 사냥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도. 졸면서 걷고 있었을까. 카라는 넓은 등에 이마를 부딪치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쉬어간다.” 수비대장이 말했다. 황야가 단련시킨 사내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분주히 패를 갈라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더니 가죽부대에 든 가루를 덜어내어 따스한 수프를 끓여 낸다. 그 동안 카라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엉덩이 아래 바위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서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불쑥 코앞에 컵이 다가왔다. 김이 오르고 있었다. "에...고마워요." 카라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컵을 받아 손안에 쥐었다. 따뜻하다. 대장이 나직이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카라는 문득 그가 상당히 젊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카트니와 비슷한 또래일지도 모른 다. 실제보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은 성격 탓일까, 아니면 지쳐 보이는 표정 탓일까. 카라 는 손을 데워주던 따스한 액체가 식기 전에 컵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별다른 맛은 없었 지만 온기가 스며드니 한결 나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검은 허공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카라는 눈을 비볐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녹색 불꽃 같은 것이 벽처럼 허공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니, 벽이 아니다. 벽이라기보다는 탑이나 기둥 같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벽이었다가 그것이 기둥 모양으로 변하고 있는 것일 까? 지켜보는 동안 녹색빛의 기둥은 빠른 속도로 아래위로 뻗어나가더니 허공을 완전히 반 으로 갈라버렸다. 주변에 아무런 그림자를 던지지 않는 빛, 실재한다기보다는 밤의 하늘 사 이에 전혀 다른 공간이 끼어든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아름답지만 기괴했다. “기둥이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경외감 어린 속삭임. 하켄이었다. ** 인가가 없는 황야에 피운 모닥불은 멀리에서도 잘 보였다. 이자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 을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마주쳤던 그 자들인가. 통곡하는 듯한 황야의 바람이 휘돌아칠 때 마다 모닥불에서 튀어오른 불똥이 허공을 수놓았다. 같은 바람이 이자드에게도 불어닥쳤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데다가 여기저기 찢긴 로브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는 아침이 오기 전에 로브를 벗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옆으로 눈을 돌렸다. 그림자 계곡에서부터 동행해온 무뚝뚝한 청년 역시 모닥불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자 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쪽으로 갈 마음은 없는 듯 했다. 이자드는 거브와를 죽인 칼솜씨의 주인공에 대해 언급을 꺼리던 수비대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흥미를 느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자네가 두 사람의 후보자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이자드의 말에 돌아온 반응은 무서운 살기였다. 청년은 녹색 불꽃 같은 눈동자로 이자드를 노려보며 칼자루를 그러쥐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자드는 살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이 나라의 왕위가 어찌되든 나는 상관없어. 자네의 이름이 궁금할 뿐이다.” “내 이름이 그대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대개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갖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있겠지.” 녹색 불꽃이 한바퀴 휘돌더니 꺼졌다. 청년은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속이 빈 통속으로 전 해지는 듯한 목소리. “내겐 이름이 없어.” 이자드는 잠시 침묵했다. “이름이 없다면 사람들이 자네를 어떻게 부르나?” “대개는 부르지 않지.” “어째서? 후보자에게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인가?” 청년은 눈살을 찌푸리고 이자드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옳은 말이었지만, 어쩐지 어린아이가 항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자드는 엷은 웃음을 돌려주었다. “나에게는 호기심이라는 게 있거든.” 청년은 무거운 숨을 뱉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로 제 갈길을 가자는 신호 였다. 이자드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야생동물 같은 청년의 조용한 움직임을 눈만으로 쫓았 다. 어차피 잠시의 동행, 저쪽이 잡는다 해도 새벽이 오기 전에 헤어져야 했다. 하지만 여전 히 그는 청년에게 흥미를 느꼈다. 게다가 그는 이곳의 지리를 몰랐다. 그는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 다른 후보자는?” 앞서가던 청년의 유연한 움직임이 굳어졌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듯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이 자드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다른 후보자가 있지. 그와 자네는 서로를 부르지 않나?” 그 말에 다시, 청년의 주변에 흉폭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까의 살기와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아까의 살기가 바깥으로 향한 것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안으로 움츠러드는 분노였다. 어느 쪽이나 주위에 있는 생물을 일제히 긴장시킬 만한 기운이었지만 이자드는 태연할 뿐더러 확 실한 반응에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의 느슨한 자세가 살기를 누그러뜨렸는지, 청년은 바싹 굳어있던 어깨를 풀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녀석과 나는…” 그는 말을 뚝 끊더니 외면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길.”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말할 게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더니 걸음을 빨리했다. 이자드는 청년 이 더 빠른 속도로 걷는 모습을 보며 길을 따라 몇 발자국을 옮겼다. 그때였다. 길이 돌연 멈춰서더니 속삭이듯 절규했다. “기둥이다.” 그것은 분명 속삭이는 소리였지만, 절규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울림이 배어 있었다. 이자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길의 눈이 붙박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기둥이라니? 길이 다급한 얼굴로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나는…사자(死者)의 기둥은…” “기둥?”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길은 초조한 얼굴로 뭔가 입안으로 웅얼거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인사였음을 깨달은 것은 저만치까지 달려간 길의 뒷모습을 보면서였다. 이자드는 길 이 보고 있던 쪽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카라는 몸을 부르르 떨며 갈라진 소리로 물었다. "...저 기둥, 뭐죠?" 카라의 눈은 크게 벌어진 채 빛의 기둥에 고정되어 있었다. 왠지 소름이 끼쳤다. 기둥은 고 요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서 있었지만 카라의 눈에는 무엇인가가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처 럼 보였다. 주위의 소리가 다 먹혀들어간 것처럼 조용했지만 카라의 귀에는 소리없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꿈틀꿈틀, 기분나쁜 오한이 등을 타고 올라온다. 카라는 입을 막 았다. 대장을 비롯한 수비대 사람들은 일제히 카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안색이 역력했다. 하켄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게 보입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카라는 당황해서 그의 투박한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켄의 커다란 손이 카라의 어깨를 잡았다. “정말 보인단 말입니까?” 카라가 무슨 말인가 하기 전에 날카로운 질타가 날아왔다. "무슨 짓이냐, 하켄! 무례하게." "아...! 죄, 죄송합니다. 대장..." "나에게 사과할 일이 아닐텐데." 두 사람은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주위에 둘러선 수비대원들이 불안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대장이 고개를 돌려 부하들 하나하나에게 흔들림없는 시선을 보냈다. “괜찮아. 너희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서두르지 말고 몸을 데운 다음 출발한다.” 십여명의 사내들은 아직 불안이 채 걷히지 않은 얼굴로 흩어졌다. 서두르지 말라고는 했지 만 다들 이미 휴식을 취할 생각은 사라진 듯, 서둘러 수프를 들이키고 불을 끄고 짐을 챙기 는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그제서야 대장과 하켄은 카라에게 주의를 돌렸다. 카라는 아직도 그 기둥을 보고 있었다. 추웠다. “저 기둥은 뭐죠?” “…정말로 보이는 거군요.” 대장은 카라의 시선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죠. 보고 있잖아요. 보이지 않아요?” 그 말에 대장과 하켄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켄이 입을 벌리다가 대장의 눈짓에 말을 삼켰다. 대장은 카라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하켄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제게는 보입니다만." 그는 외경어린 얼굴로 기둥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자(死者)의 기둥이라고 하지요. 이 나라의 수호영혼들이 모습을 비추신 겁니다." 수호 영혼이라고? 카라는 빛의 기둥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분명 그 기둥에는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인간 이상의 것이 내재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좋은 의미란 말인가? 그렇다면 왜들 그렇게 불안해 하는 거지? 그런 질문이 속에서 쏟아져 나왔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카라는 그 기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 면서 동시에 눈을 뗄 수도 없을 만큼 매혹되어 있었다. "아......!" 카라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소리를 질렀다. 바람에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갑자기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환상을 보았거나 꿈을 꾼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대장이 그 방향에 절을 하고 있었다. 하켄과 다른 수비대원들이 대장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 이자드는 멀리 보이던 모닥불이 꺼지는 모양에 다시 한 번 턱을 매만졌다. 서둘러 뛰어가버 린 길의 행동과, 불을 피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서두르는 저들의 행적이 겹쳐보였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되살아난 옆구리의 통증이 묵직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들었다. 그는 루이가, 잠들어있을지는 몰라도 분명 존재해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고 나직이 하리잔을 불렀 다. “하리잔!" 침묵. 이자드는 천천히 바위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돌아간 척하지말고 나와." "푸에취!" 하리잔은 재미없다고 종알거리며 푸른 몸을 드러냈다. 들어간다고는 했지만 한 번 불러낸 하리잔의 의식은 이자드의 허락 없이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자드는 투덜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물었다. "사자의 기둥이라는 게 뭐지?" "에...사자의 기둥 말이지. 네 뒤에 있는?" 하리잔의 얼굴에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자드는 뒤를 돌아보려는 충동을 눌렀다. "네게는 보이나?" "물론이지... 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 "기침 그만하고 설명해봐." “이 나라의 수호영혼이 모인 덩어리 같은 거라고 봐야 하나.” “수호영혼?” “뭐,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어. 흠흠.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나라를 지켜 주다가 저렇게 모습을 드러낼 때면 큰일이 일어날 전조라 이거지.” 이자드는 차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도 흥미는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실제로 그게 뭐냐는 거다.” 하리잔은 소리내어 코를 풀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글쎄 뭐 왕과 대승정은 저것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니까…혼이 모인 덩어리인 것 도 사실이고.” “그런 일이 가능한가.” 하리잔은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곳은 말이지…저 기둥이 오른 곳은 왕성 중심부야. 그곳을 중심으로 이 나라 전체에 하 나의 장(場)이 펼쳐져 있다는 거 못알아보겠어?” 이자드는 하리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머리속에 여러 가지 사실이 책장 넘기듯 화라락 스쳐 지나갔다. 자연의 법칙에 위배된 것들- 모래의 바다 와 돌의 강, 그림자 계곡, 지나치게 많은 야수들, 환생하는 왕과 대승정의 존재. 그리고 이제 사자의 기둥까지…그는 조용히 말했다. “터무니없는 나라에 들어와버렸군.” 그말에 하리잔은 상당히 재미있어하는 얼굴로 기침을 터뜨렸다. 이자드는 그것을 못본척했 다. 하리잔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공중을 맴돌았다. “에…그럼 나 이만 들어가도 되겠지?” “하리잔." 이자드는 신뢰할 수 없는 사다카에게 얼음장 같은 시선을 던졌다. 녀석은 그림자 계곡에 대 해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리잔도 그 문제로 이자드가 화를 낼 것이 불안한 눈치였다. 하지만 지금 추궁하려는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그는 가라앉은 소리로 물었다. “어젯밤에 말을 하다 말았지. 그 녀석이라는 건 누굴 말하는 거지?” 그 말에 하리잔의 얼굴에 다시금 교활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 그녀석 말이지…콜록콜록콜록콜록!” 하리잔은 짐짓 부산을 떨며 기침을 하고 재채기를 한 다음에 코까지 풀었다. 이자드는 놈의 태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석’이라는 게 누굴 말하는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손 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하리잔, 지금 나를 놀리려는 건가?” 순간 하리잔의 몸이 얼어붙었다. 작은 사다카는 도망치려는 듯 날개를 파닥이며 방어적으로 양손을 들었다. “말할게, 말할게! 저기, 알 바르카가 있었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자드의 눈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에?” “아, 아칸서스시에…” 이자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칸서스에? 아직도 그쪽에 있나?” “몰라. 몰라. 알잖아. 난 알 바르카 가까이 갈 수가 없단 말이야. 완전히 튕겨나와 버렸다 구. 얼마나 놀랐는데!” 이자드는 아직 손을 내리지 않았다. 하리잔은 이제 새된 소리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그건 내 소관이 아니잖아. 난 카라라는 애에 대해서만…그렇 지!” “또, 뭐냐.” 하리잔은 다시 자신감을 회복한 듯 거드름피우는 말투로 말했다. “네게 알려주려는 게 또 있었는데 말이야. 어젯밤에 찾아보라던 그 애, 지금 이 나라에 있 어.” “염소……” 긴 다리를 바위 위에 올리고 방만한 자세로 기대있던 루이는 작고 다리가 긴 염소를 향해 눈을 빛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입맛 다시는 모양을 보았는지, 염 소를 몰고 가던 소년이 걸음을 서둘렀다. 루이는 소년의 경계심어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염소고기도 꽤 맛있지…통째 불에 그을려도 좋고 썰어서 구워도 좋고. 새끼염소고기라면 더 좋겠지만 나이든 염소라도 괜찮을 텐데. 아아- 배고파!” 그는 입술을 핥다가 다리를 내리며 푸념을 던졌다. “이자드. 넌 배고픔 같은 것을 잘 느끼지 않으니 내 고통을 모르겠지.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아냐. 이틀째 굶은 거나 다름없단 말이야. 그러게 밤 사이에 인가나 찾든가 사냥이 라도 했으면 좋았잖냐.” - 지금 날 탓하는 거냐? 길을 잃고 헤맨 건 누군데? 이자드의 음성에는 날이 서 있었지만 루이는 댓발이나 나온 입을 집어넣을 줄 몰랐다. “네가 길을 제대로 안가르쳐줬잖아. 왕성가는 길이 이쪽이 분명하다며.” - 누가… 이자드는 대꾸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단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 루이에게 진지하게 대응해 봐야 나올 게 없는 데다가,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하리잔이라고 말한다 는 것은 루이의 기만 살려주는 일이었다. 보나마나 루이는 하리잔이 한 말은 무조건 부인하 고 볼 터였다. 카라가 왕성에 있다는 사실도 포함해서. 이자드가 입을 다물고 갈등하는 사이 루이는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할 거리가 그렇게 많다고 입 꽉 다물고 있냐. 심심하잖아.” - 네 심심함이 당면한 문제보다 중요할까. “아, 심심함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배가 고프다는 것은 중요해.” 이자드는 잠깐이나마 이 녀석의 존재감에 안도했다는 사실을 통탄하며 화를 눌렀다. - 정 그러면 저 꼬마한테 물어보지 그래. "뭘? 염소 팔지 않겠냐고?" - ...아니. 왕성에 가는 길 말이다. "아하! 그거 좋은 생각이다!" 루이는 손뼉을 탁 치며 손을 번쩍 쳐들었다. "꼬마야! 잠깐 나좀 보자!!" 순간 염소를 몰고 가던 소년이 바싹 긴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칼을 찬 이방인이 염소에게 눈길을 던지는 모양을 보며 곤두서 있던 참이다. 루이의 행동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소년은 달아나지도 못하고 다가오지도 못하면서 흘끔흘끔 루이의 행색을 살폈다. 피묻은 로브를 벗 어 옷차림은 평이해 보일지 모르지만 대신 허리에 찬 칼이 고스란히 드러나보이는 모습이, 누가 봐도 영락없는 떠돌이 용병 꼴이었다. 소년이 쳐다만 보고 다가오지 않자 루이는 가벼 운 몸놀림으로 바위에서 뛰어내리며 물었다. "왕성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 "와, 왕성요?" "이 나라의 수도 말이야. 그러니까, 중심 도시." 더듬거리며 눈치를 보던 소년은 그 말에 긴장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 끝으로 하늘 저편을 가리켰다. 루이의 고개가 실에 꿰인 듯 지팡이 끝을 따라갔다. 그쪽에, 멀리 햇 살을 받아 반짝이는 탑 끄트머리가 분지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카라는 목을 한껏 뒤로 젖히고 열린 성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깥쪽으로 한껏 열어젖힌 채, 그 상태로 얼마를 서 있었을까. 커다란 돌쩌귀에 붉은 녹이 잔뜩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몇 십년은 훌쩍 넘어설 듯한 문. 다시는 닫히지 않을 듯한 육중한 돌문은 키 큰 어른 세 사람 이 올라서도 닿지 않을 만큼 높았다. 카라는 첫 햇살이 막 내려앉은 돌문 꼭대기를 어림해 보다가 예기치 않은 뭔가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 쓰여있는 거죠?" 수비대장이 돌아보고 카라의 시선을 좇았다. "저 글자 말씀인가요." 그는 목을 뒤로 젖히고 침묵에 빠져들었다. 카라는 아픈 목을 두드리며 대장을 곁눈질해 보 았다. 금새 대답해 줄 것 같이 사이를 둔 침묵은 생각외로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대장은 심 각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고 성문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는 빤히 그 옆모습을 쳐다보다 가 대장이 대답을 찾지 못해 궁색해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러나 이제와서 ‘아 대장도 모 르나 보죠’라든가 ‘대답 안해주셔도 되는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카라 역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일행 선두에 선 두 사람이 그런 상태였으니, 뒤에 선 수비대원들은 전원 멈춰선 채 몸을 비 틀며 왜 안들어가는가 의아해할 따름이었다. 바싹 마른 염소며 야크를 몰고 성문을 들어서 던 아이들이 옆을 지나치며 눈을 굴렸다. 겨우 상황을 타개한 것은 하켄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연이어서 성문으로 들 어가는 것을 보더니 괄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얘들아! 왜 다들 몰고 들어오는 거냐?” 대장과 카라는 살았다는 심정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메에에- 소년이 걸음을 멈추자 앞서 가던 염소가 왜 안 따라오냐는 듯 소리를 냈다. 소년은 하켄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까 탑에서 신호가 오르던데요.” “신호가? 푸른 봉화가 올랐단 말이냐?” “네에- 제대로 먹이지도 못했는데. 차암-“ 아이들은 주거니 받거니 하켄의 말에 대답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하켄은 고개를 끄덕 이며 대장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알아차린 눈빛이 오갔다. 야크를 처음 보는 데다가, 염소는커녕 소를 방목한 모습도 본 적이 없는 카라는 시끌벅적하 게 몰려드는 짐승들의 대열에 신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 으니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팔꿈치로 쳐가며 키득키득 웃었다. 카라가 그쪽에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그들은 소리내어 웃더니 얼굴을 붉히 며 걸음을 재촉했다. “들어갑시다.” 나직한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압적이고 어딘가 아련한 고대의 상흔을 남긴 듯 하던 성문과 달리 왕성은 소박하고 조용 한 도시였다. 사방을 둘러싼 높은 성벽이 어울리지 않는다. 명색이 왕성이건만, 아칸서스시 만큼의 활기도 화려함도 없다. 하긴 머릿수를 따져도 아칸서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도 시였다. 그래도 이곳이 중요한 장소임을 드러내는 조형물이 있기는 했다. 멀리서부터 반짝이 던 높은 탑이 도시 한 중앙에 솟아올라 있었다. 카라의 눈은 저절로 그리 쏠렸다. 단순하지만 깔끔하게 뻗어올라간 높은 탑과 그에 딸린 건물들은 그 당당함을 보나 위치를 보나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이 왕성이라고 불리우는 이상에는 그곳이 왕궁일 것이다. 그러나 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왕궁을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 탑은 전혀 왕궁처 럼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아칸서스시의 신전에 더 가까운 분위기였다. 아칸서스의 신전들보다는 좀 더 고요하고, 엄숙하고, 경의어린 분위기. 그 분위기에서 어떤 곳을 연상한 카라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신상이 날아가버렸던, 바로 그 정원. 폐허가 된 신전. 카라는 침을 삼켰다. 이 탑은 어딘가 그곳과 비슷했다. “중앙의 탑이 대승정원입니다.” 갑자기 대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쾅 하고 울렸다. 그는 부드럽게 카라의 어깨를 건드려 방향 을 잡아주었다. 그들은 그 탑이 아니라 옆에 있는 건물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간결하 게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승원안에 머물 곳을 마련하지요.” “예? 잠깐, 잠깐만요.” 카라는 놀라서 몰려가던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만 같이 오자던 거 아니었어요? 왜 승원에 머물러야 하죠?” 대장은 고뇌의 표정을 보여주더니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 나라에서 이방인은 본래 환영받지 못하는 데다가 때가 좋지 않아요. 게다가…” “그 말은 어제도 했잖아요.” 대장의 눈빛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상황이 또 달라졌습니다. 사자의 기둥이 오른 데다가…그걸 볼 수 있다는 사실도 그렇고, 아니, 갇혀있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승원 내에서는 자유로이 돌아다니실 수 있습니 다. 대승정님을 뵐 수 있다면 바로 해결될 겁니다.” 카라는 분통을 참느라 길게 숨을 내쉰 다음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또 실수를 저 지른 모양이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자드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가지 행 동이 추가될 때마다 대장의 태도는 더 정중하고 그만큼 더 단호해졌다. 그녀에게 무기라곤 작은 단검 하나 뿐이었고, 요행히 이곳에서 도망친다 해도 맹수가 돌아다니는 바깥 황야를 혼자 돌아다닐 능력이 없었다. 카라는 돌아서서 입술을 꽉 물고 최대한 성큼성큼 걸음을 옮 겼다. 건물 안은 승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크고 넓었다. 천장이 높아 서늘한 느낌이 몰려 들었고 그나마 화려해보이던 외관과 달리 내부에는 장식이라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승원 내부는 썰렁하고, 음습했다. 드문드문 창을 통해 기어들어온 햇빛이 뒤집힌 그림자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대장은 카라의 거처를 정해줄 사람을 찾아 반대쪽 문으로 걸어갔지만 카라는 입구 근처에 있는 계단참에 섰다. 그녀는 갑자기 몰려드는 피곤과 허기를 느끼며 멍하니 서 있다가, 뭔가 물컹하고 부드러운 것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펄쩍 뛰어올랐다. "냐아-" 고양이였다. 카라를 무시하고 우아하게 난간위에 뛰어오른 통통한 고양이가 녹색 눈을 이쪽 으로 돌리자 그 동작에 맞춘 듯 음악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미안해요 꼬마 아가씨. 그녀석이 워낙 제멋대로라서." 순간적으로 휘안을 떠올리고 고양이를 쳐다보던 카라는 한박자 늦게 그 목소리가 뒤쪽에서 날아온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상대방은 그녀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 짐작도 못하겠지 만, 당황스러운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카라는 대꾸할 타이밍을 놓치고 옅은 금발 청년이 옆을 지나 난간에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르트에 들어와서 본 사람들 중에 가 장 화려한 사람이었다. 카르트에서 본 사람들은 모두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피부, 갈색 눈동자에 거친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서서 고양이에게 팔을 내밀고 있 는 이 청년은 모든 면에서 색채가 엷었다. 백금색의 머리카락, 상아빛의 피부, 백색 일색의 옷차림. 색채만이 아니라 그에게는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정말 이질적이면서도 또 묘하게 이 승원에 녹아들어간 듯한 분위기. 금발 청년이 손을 내밀자, 오만한 표정으로 난간에 걸터앉았던 통통한 고양이는 순순히 점 령지를 포기하고 청년의 품에 뛰어들었다. 모양새로 봐서는 제법 무거울텐데 청년이 고양이 를 안아올리는 동작은 가벼웠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카라는 짧은 백금색 머리카락 아 래로 재미있다는 듯한 빛의 녹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카라가 뭔가 말하기 전에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입을 막았다. "곤란합니다. 이런 동물을 승원 안에 데리고 들어오시다니요." 대장이었다. 카라에게서 시선을 뗀 청년의 표정이 일변했다. 반짝이던 녹색 우물이 순식간에 음울한 늪지로 탈바꿈하더니 단정한 입매가 비틀렸다. 오른쪽만 치켜올린 차가운 미소는 전 체적인 인상을 바꿔놓았다. 카라에게 사과를 하고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던 명랑한 청년은 간곳없이 사라졌다. 카라는 눈만 깜박거리며 그와, 딱딱하게 굳어진 대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은 카라의 존재를 잊은 듯 서로에게 냉랭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청년이 비야냥어린 목소리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이게 누구야, 어젯밤까지 돌아온다던 우리 수비 대장 시진이 아닌가?” 대장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푸른 봉화를 올리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뭐가 잘못되기라도?” 여전히 음악적인 말투였지만 카라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청년의 눈은 냉혹했다. 한치의 도 전도 용납치 않겠다는 오만함과, 덤벼보라, 네가 먼저 공격해오면 끝장을 내주마, 라고 말하 는 듯한 섬뜩한 적의가 함께 실린 칼날같았다. 그는 비웃듯 말을 이었다. “대승정께선 누워계시고, 길도 들어오지 않아. 그런데 내가 결정을 내리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청년의 입매가 다시 한 번 비틀렸다. “왜 늦었는지는 보고하지 않는 건가?” 대장은 칼날 같은 청년의 시선을 꿋꿋이 받아넘겼다. “…돌아오시면 함께 계신 곳에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청년은 푸후, 소리내어 웃었다. “다행히 길은 조금 전에 돌아왔다. 봉화를 올리자마자였어.” 순간 카라는 곁에 서 있던 대장의 몸에서 긴장감이 약간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안도감을 숨기지 않고 확인했다. “돌아와 계십니까?” “그래. 그러니 나에게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겠지. 가도 좋아.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 세히 보고하도록.” 청년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적의가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조롱어린 눈빛으로 변했다. 그는 분 노를 냉담으로 가장한 채 고개를 숙이는 대장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 수비대장이 멜카르트에게 충성하는 것은 더할나위없이 바람직한 일이지. 하지만 왕 은 하나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대장의 동작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외면하며 억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말도 가까스로 내뱉은 듯, 대장은 도망치듯 걸음을 재게 놀려 멀어져버렸다. 서로 비수를 던지는 듯한 대화에 정신이 번쩍 들어버린 카라는 아연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있을 곳을 정해준다고 하더니?’ 그 뒤를 쫓아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쾌활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이런. 저 융통성 없는 친구가 꼬마 아가씨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사라져 버렸는 걸. 어떻게 생각해요? 난 지금 식사하러 갈 참인데.” 언제 살기를 주고받았냐는 듯, 금발 청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대장이 허둥지 둥 사라지도록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었다. 카라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배에서 꼬 르륵 소리가 들렸다. "나 말이다..." 루이는 심각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손질이라고는 한 흔적이 없는, 손질 같은 것이 불가능 했을 성 싶은 성벽 한켠, 이끼에 덮힌 돌 위에 한쪽 발이 올라가 있고 다른 쪽 발은 유유히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가 앉아있는 곳을 올려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려다본다 해도 새가 앉아 있는가보다 하고 지나치지 않을까. 보통 사람의 눈에 형체가 제대로 잡힐 만한 높이가 아니었다.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일 만한 곳은 도시 정중앙에 솟아오른 탑 위 정도밖에 없었다. 루이는 허공을 걷어차며 말을 마쳤다. "여기가 마음에 안들어. 정말 마음에 안든다고.” 그는 비스듬히 내리깐 눈으로 멀리 탑 중간에서 이쪽을 향해 열려있는 창문을 쳐다보고 있 었다. 이자드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 뭐가 그렇게. 루이는 한쪽 다리를 공중에 던진 채 두 팔을 들어 휘젓는다는 위험천만한 묘기를 시연하며 볼을 부풀렸다. “대체 뭐야, 이 도시. 이 분위기 말이야. 공기가 다 정지해 있는 것 같아. 살아 있다는 느낌 이 도통 들지 않잖아." - 보통은 이런 걸 두고 경건하다고 하지. "경건? 쳇. 경건은 무슨, 죽어있는 거겠지." 불평을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가느다란 푸른 눈은 탑의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지간 히 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창문이 있다는 정도나 알아볼까 말까한 거리였지만 루이의 시력은 어지간한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반쯤 열린 창문 안쪽에 놓인 침대와 그 위에 누 운 노인의 모습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분위기, 저 노친네 때문일까?” 루이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웅얼거렸다. 이자드는 한 박자 늦게 주의를 돌려 루이의 눈을 통 해 보이는 광경을 보았다. 탑 안에 침대를 차지하고 누울 만한 노인이라면 대승정밖에 없을 것이다. 그늘이 드리운 얼굴빛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침대 모서리에 걸쳐진 손에는 생 기가 없었다. 루이가 심상하게 중얼거렸다. “죽어가고 있군. 뭐 그다지 성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데.” 확 다가든 바람의 손가락이 루이의 머리카락을 엉성하게 묶어두었던 끈을 슬금 슬금 풀어내 렸다. 그는 귀찮다는 듯 끈을 잡아당겨 손에 쥐었다. 붉은 빛 도는 화려한 금발이 바람에 날 린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없이, 벌 써 몇 십년이나 되풀이했음에도 여전히 서투른 손놀림으로 끈을 돌리고 매듭을 지었다. 이 자드는 시야를 가리는 루이의 손이 짜증스러웠다. 낮 시간에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시야를 가리는 그림자에 짜증이 나도 직접 손을 움직여 치울 수도 없다. 보고 싶 은 것이 있어도, 말을 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루이가 머리카락을 묶고 손을 내 리도록 기다리면서 내뱉은 대꾸에는 짜증이 배어들어 있었다. - 대승정이 성스러워보일 이유라도 있나? 루이는 이자드의 짜증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승정이라…대승정이 왕보다 위에 있는 거냐?” - 비슷한 위치겠지. 둘이 교대로 다스린다고 들었으니. “왕과 대승정이 교대로…뭐야, 명칭은 상관없는 거냐? 여긴 대체 무슨 신을 섬기는 거야?" 루이는 마침내 엉성하게 머리를 묶고 다시 탑 쪽을 쳐다보며 뇌까렸다. - 글쎄. 자비의 신이라던가. “흠…그럼 노친네 옆에 있는 저놈이 왕?” 이자드는 루이의 시력에 편승하여, 방금 노인의 병상에 다가든 갈색 머리 청년을 보았다. 알 고 있는 얼굴이었다. - 아니. 내가 빚진 녀석이다. 왕위 후보자. “아, 저게 그녀석이야?” 루이는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며 그 젊은이를 관찰했다. 그는 칼을 사랑했고 괜찮은 칼잡이 에게는 언제나 관심이 있었다. “칼솜씨가 제법이던, 그 녀석 말이지? 이름이 뭐라고?” - 길. 길이 상처많은 거친 손으로 노인의 베개를 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의 머리 가까이 고개 를 숙이고 입술을 움직이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유감스럽게도, 루이의 청력은 시력만큼 좋 지 못했다. 그는 잠시 입술모양으로 말의 내용을 알아내 보려고 눈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싫증을 내고 관심을 다른 곳에 돌렸다. 애초에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는 저 탑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었다. “카라가 어디 있으려나…” 루이의 시선은 시내로 옮겨갔다. 어디에나 탑을 향해 절을 하는 사람들과 경건하게 촛불을 켜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대승정의 회복이라도 비는 것일까. 서로 마주치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는 소박하고 금욕적인 사람들. 루이는 시내를 살펴보며 계속 눈썹을 꿈 틀거렸고 가끔은 심술궂은 미소를 떠올리기도 했다. “아아, 마음에 안들어, 마음에 안들어. 노인들만 모아놓은 마을 같아. 염소치던 애들은 밖에 서는 보통 애들 같더니 이 안에서는 왜 저래? 아참, 그런데 대체 카라가 어떻게 이리 건너 왔대? 돌의 강이 움직이고 있었잖아? 혹시…” - 입 닫고 찾기나 해. 이자드는 싸늘하게 루이의 질문은 무질러 버렸다. 루이는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찾으라고 해봐야, 어딜 찾으라는 거야?” - 저쪽. “저쪽 어디?” - 탑 옆. 루이는 성벽 위에 걸치고 있던 한쪽 다리를 내리고 탑 주위를 둘러싼 건물군에 눈을 돌렸 다. 아무리 눈이 좋다 해도 건물 안까지 투시할 재간은 없다. 언뜻 언뜻 드러나 보이는 복도 와 회랑 사이를 헤엄치듯 훑고 지나가던 그의 시선은 유난히 눈에 띄는 색채에 부딪쳐 멈춰 섰다. 갈색, 회색, 검정색으로 도배된 듯한 이 도시에서 백색과 금색의 조합은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헤. 이 나라에도 금발이 다 있었네.” 루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백금색 머리카락의 주인공을 쫓았다. 회랑을 따라 걸어가는 우 아하고 느긋한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신경이 거슬렸다. 루이는 보나 마나 얄쌍하게 생긴 놈일 거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자드 가 코웃음을 쳤다. 루이의 시선은 미끄러지듯 떨어져 나왔다. 건물 안에서 미끄러져 나오면 서 그 옆, 안쪽에 있던 검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지만, 루이는 더 이상 그쪽을 보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음을 흘렸다. “지겨워, 재미없어!” 루이는 아예 좁은 성벽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이자드는 루이가 조바심치는 기색을 감지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아무리 잔소리를 해봐야 이 위에 붙잡아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는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도 않은 채 갑자기 오른손으로 성벽 옆 을 짚더니 팔로 벽을 밀면서 공중에 몸을 던졌다. 물론, 이런 높이에서 무작정 뛰어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올라올 때 확인해둔 돌출부를 밟으며 춤이라도 추듯 경쾌하게 떨어져 내렸다. 동작은 경쾌하지만 발이 벽을 디딜 때마다 쿵 하는 충격과 함께 버석버석 돌부서지 는 소리가 났다. 루이는 유쾌하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쿵 소리나게 바닥을 딛었다. 흙바닥인 데도 충격이 찌르르 심장을 찔렀다. “완벽한 착지~” 그는 발목을 몇 번 털고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아이 하나가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아이 는 놀라서 가슴을 벌렁거리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온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이는 아 이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 탑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높은 곳은 좋아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관찰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그에게는 언제나 몸으로 뛰어서 하는 일이 제격이었다. 건물 안은 어디나 예외없이 서늘하고 어두웠다. 카라는 긴 회랑을 따라 걸어가면서 손을 내 밀어 떨어지는 햇살을 받았다. 날은 화창했건만, 손바닥을 채운 햇빛에서는 아무런 따스함을 느낄 수 없었다. 카라는 비스듬히 앞서 걸어가는 청년의 등을 보았다. 그는 한 번도 뒤돌아 보는 법 없이 유유자적 걸었다. 품에 안긴 통통한 고양이가 흘긋 카라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빨간 입속을 드러내며 하품을 했다. 갑자기 청년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라도 걸음을 늦추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계 단도 문도 보이지 않았고 회랑이 끝나려면 아직 더 걸어야 했다. 무엇 때문에 멈춰섰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청년의 얇은 입술에 불쾌한 기색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는 어정쩡하게 선 카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아직 좀 더 가야 하는데.” 그는 다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카라는 별 수 없이 그 뒤를 따 랐다. 회랑이 끝나고 다시 천장 높은 방이 나왔다. 계단을 올라갔다. 또 한 층의 계단을. 그 늘진 복도를 지나고, 문이 하나, 둘, 셋. 청년은 멈춰서서 고양이를 내려놓더니 세번째 문을 열고 허리를 굽혔다. “다 왔습니다.” 카라는 갑자기 쏘아들어오는 햇빛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커다란 창문이 동쪽을 향해 열 려 있어 방 안이 환했다. 창틀은 아무 장식없이 깔끔했고 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라는 겨 우 빛에 익숙해진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가구라고는 커다란 나무 탁자 하나와 그에 딸린 의자, 그리고 칠도 하지 않은 나무 침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벽에는 그 소박한 방에 어 울리지도 않고 실용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잡동사니가 즐비했다. 큼지막한 모형배 위에는 이 지역에서 쓸 일이 없어보이는 털모자가 놓여 있었고 벽에 기댄 누런 두루마기에는 얇디 얇 은 천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또 그 옆에는 허브를 넣은 것이 분명한 아기자기한 천주머니 가 무더기로 쌓였다. 카라는 잡동사니 무더기를 쓸어보며 솔직한 감상을 피력했다. “재미있는 방이네요.” “그거 다행이군요.” 청년은 다른 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쾌활하게 대꾸했다. 카라가 신기한 잡동사니들 위로 몸을 굽히고 있는 동안 그는 소박한 식사를 차렸다. 카라는 시위가 없는 작은 활을 건드려 보며 물었다. “대체 이 물건들은 다 어디서 온 거죠?” “대개는 아칸서스쪽에서 온 상인들에게서 사거나 받은 것들이죠.” “이런 것두요?” 카라는 잡동사니 안쪽에 있던 마구와 부러진 칼을 가리키며 그를 돌아보았다. 밝은 햇빛 아 래에서 한층 더 연못물같아 보이는 녹색 눈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니. 그건 내가 버린 물건이고...” 이런 곳에 쌓아두고서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묘한 일이었지만 카라는 그 이상 질문을 던지 지 않고 탁자 앞에 앉았다. 배가 고팠고, 예의차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음식은 소박했다. 단 순한 빵과, 흰 소스를 끼얹은 고기 요리, 옆에 보일락말락하게 곁들여 나온 푸성귀 약간. 이 가 나간 커다란 잔을 건드리자 뽀얀 액체가 찰랑거렸다. “식사 전에 이름 정도는 알 수 있겠죠?” 단정한 얼굴에 다시 한 번 뒤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진. 진이라고 불러요. 꼬마 아가씨는?” “카라…” 카라는 아주 잠깐, 그 뒤에 뭔가 덧붙일 듯 말끝을 흐리다가 말았다. 진은 등을 뒤로 붙이며 우아한 손놀림으로 사기잔을 들었다. “먹어요, 카라.” 카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던 흰 액체를 기울였다. “켁. 이거 뭐예요?” 당연히 우유겠거니 했던 액체에서 시큼한 맛이 나자 카라는 거진 반을 뱉어내고 말았다. 진 은 사기잔 너머로 재미있다는 눈길을 던졌다. “염소젖이 입에 맞지 않는가 보군요. 하긴,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고양이가 맞장구라도 치는 것처럼 목을 울렸다. 카라는 잔을 밀어놓고 입맛을 다시며 물을 찾았다. 진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희 미하게 한쪽으로만 치켜올라간 옅은 입술이 전체적인 인상을 악의적인 것으로 해석하게 만 들었다. 반짝이는 눈은 사람을 깔보는 듯 했고 반듯한 콧날은 오만해 보였다. 카라는 그의 얼굴을 찬찬이 살피며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이 사람을 순순이 따라온 것이 실수가 아니었 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호의만으로 식사 초대를 한 것일까? 카라는 물컵을 내리고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저, 왜…” “이 나라에 대한 인상은 어때요?” “예?” 진은 손을 들어 사방을 가리키는 듯 흔들었다. “이 땅, 이 탑, 이 건물 안, 여기 사람들…어떻게 보이냐고요.” “……이상해요.” 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카라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은 어 깨를 흔들며 웃어대다가 겨우 말했다. “아니, 딱 맞는 말이라서 그만.” 카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중에서도 댁이 제일 이상해요.” “그런가요?” 그제서야 진은 웃음을 멈추고 카라를 마주 쳐다보았다. 장난스럽게 빛나는 녹색 눈이 비틀 린 입매와 합쳐져서 심술궂은 표정을 낳았다. 그는 잠깐 탐색하는 눈으로 카라를 쳐다보다 가, 의자에서 약간 엉덩이를 들고 팔을 뻗어 접시를 밀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이야기하죠, 카라.” 카라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며 고기접시를 끌어당겼다. “귀는 열려 있어요.” 진은 다시 한 번 입매를 비틀더니 의자에 등을 기댔다. 햇살이 조금씩 물러나면서 빛으로 가득찼던 방 안에도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라는 그 침묵을 천천히 씹고 삼키는 데 썼다. 많이 먹지는 못했다. 허기를 조금 면하자마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 다. 진의 목소리가 약간 멀게 들렸다. “그래, 뭐가 궁금해요?” 카라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수비대장보다 높아 보이던데 뭐하는 사람이예요?”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일단 이 나라의 교역과 행정업무를 책임지고 있고, 전체 결정권도 절반은 담당하죠. 직책 은 아무것도 없지만.” “직책이 없다니…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설명을 하자면 좀 복잡해질 텐데요.” 진은 오른쪽 입끝을 한층 비틀고 이죽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잘나고 훌륭하신 이 나라 시조 멜카르트왕께서 나라를 세울 때 말입니다, 자기가 영원히 이 나라를 보호하겠노라, 결코 사악함에 침범받지 않도록 지키겠노라 말했다더군요. 몇 번을 죽더라도 바로 바로 되돌아오겠다고 말이죠. 그래서 시조님께서 후사없이 뒈진 이후 대승정 은 사람들을 풀더니 나라 안에서 그 날 태어난 아이들을 모아들였답니다. 그리고는 그 중에 하나만 남을 때까지 이런 저런 시험을 해본 다음, 왕이 돌아오셨다, 그리고는 역시 꼴까닥. 대승정도 멜카르트 왕과 같은 신세라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더랬죠. 그래서… 천년이 지나도록 이 나라는 왕도 한 사람, 대승정도 한 사람 뿐이라는 겁니다.” 카라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모두들 굳게 믿으니 그렇게 돌아가는 거죠. 덕분에 천년 동안 이 나라 가 거의 변하지 않고 경건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던 거고.” ‘경건한’이라는 말에서 진의 목소리가 한층 뛰어올랐다. 카라는 그 순간 그 한 마디에 담 긴 악의와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저기…그래서…” “그래서, 내겐 직책이 없죠. 이름도 없고.” “에?” “멜카르트라는 이름의 주인이 누군지 정해지기 전까지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아요. …후보 자끼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부르지 않고.” 진은 비식 웃었다. 카라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겨우 이해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후보자라는……” 진은 고개만 살짝 움직여 긍정했다. 카라는 지금 진이 꺼낸 이야기가 외부에서 들어온 어린아이에게 할 만한 것이 아님을 서서 히 깨달았고, 당황했다. 잠도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진의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는 더 이상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몸 을 조금 앞으로 내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도와줘요. 아니,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합당한 거래가 가능할 거예요.” 카라는 멍청히 그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진은 카라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거절이라는 뜻인가요?” 턱, 하고 숨막히는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우아하고 냉소적인 청년의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어 려운 살기였다. 카라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항의의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순간 진의 기세가 주춤했다. “거래라니, 도와 달라느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나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진은 탁자 위에 손을 짚은 채 카라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카라는 빳빳이 굳어서 숨도 제 대로 쉴 수가 없었다. 진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조금씩 당혹감이 배어나왔다. 아주 잠깐이었 지만, 매끄러운 가면 틈으로 진짜 곤혹스러운 감정이 드러났다. “그럴 리가…아무 힘도 없다고?” 카라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반신반의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빛깔은…그것과 같았는데…당신이 그 날개달린 인간의 주인이 아니라고?” 카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때, 밖에서 귀를 찢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 루이는 곧장 탑 옆 건물로 향해서 수비대 숙소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30분쯤 그와 대치해 서 입씨름으로 어떻게 밀어내 보려던 30대 사내가 결국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하켄! 좀 나와봐!” 그러자 비슷한 연배의 단단한 사내가 하품을 하며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왔다. “뭐야?” 먼저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각진 얼굴의 남자는 문 앞에 버티고 선 청년을 가리켰다. 하켄 은 아무렇게나 동여맨 금갈색 머리카락이 유달리 눈에 띄는 흰 얼굴을 보더니 하켄은 턱짓 을 하며 물었다. “뭔데?” “용병이래.” “용병?” 귀찮다는 표정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하켄은 루이를 아래 위로 살폈다. 대충 보았을 때는 곱상한 얼굴과 화려한 머리카락만 눈에 띄었지만, 자세히 보니 긴장을 느슨하 게 유지한 자세가 멋으로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호리호리해서 힘쓰 는 데는 별 도움이 안되겠다. ? 얼굴에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하켄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데.” 대꾸하는 목소리에는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켄도 당황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 다. 루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했다. “당신이 대장?” “대장님은 안계슈.” 하켄은 어떤 말투를 써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태도로 어름어름 말끝을 흐리더니 개운치 않은 얼굴로 턱을 쓱 문질렀다. “여긴 용병을 고용할 만한 일이 없는데. 전쟁도 없고.” 루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면서 보니까 맹수가 많던데.” “돈주고 이방인을 고용할 정도로 궁하진 않아. 우리 사람들은 우리가 보호해. 어쩌다 이리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돈벌이는 다른 데 가서 찾아보슈.” 하켄의 말투는 퉁명스러웠고, 눈빛에는 경멸이 어렸다. 루이는 언짢은 기색을 띠며 푸른 눈 을 가늘게 좁혔다. 그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쓸만한 사람도 없는 수비대에서 허세부리기는.” “뭐?” 하켄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성큼 한 걸음을 딛는데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루이는 짧은 휘파람을 불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피하려는 게 아니라 맞붙기에 좋은 거리를 가늠하는 자세였다. 그의 눈은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마냥 반짝였다. 머리 속에서 이자드가 나직이 탄식했다. - 수비대에 가서 알아본다고 할 때 이럴 줄 알았다. 루이는 싱글 싱글 웃는 얼굴로 비야냥거렸다. “왜, 내 말이 수긍이 안가냐? 몸만이 아니라 머리도 둔한가보군?”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다!” 하켄은 칼자루를 움켜쥐었지만 뽑지는 않았다. 먼저 앞으로 썩 나선 것은 오히려 성미가 유 해 보이던 각진 얼굴 쪽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소란을 피우는 거냐!” 루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롱조로 말했다. “뭐야, 둘이 합쳐야 일인분몫을 하나보지?” 쉿- 소리와 함께 하켄이 결국 칼을 뽑았다. 루이는 환한 얼굴로 손을 마주쳤다. “오, 좋아 좋아! 어디 솜씨 좀 보자고!” 평소에 쓰던 장검은 그림자 계곡에 버려져 있었으니 차고 있는 칼이라곤 화염도밖에 없었 다. 루이는 화염도를 뽑아들었다. 물론 불꽃의 칼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염칼날을 세우지 않은 화염도는 1하스타 정도의 짧고 뭉툭한 칼이었고, 그 모양을 본 하켄은 더욱 발 끈한 기색이었다. 그는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큰 몸놀림으로 칼을 쳐올려갔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휘두르는 힘이 좋아 웅 소리가 났다. 루이는 그 칼을 무시하고 하켄의 허리를 베어갔다. 방 어도 하지 않고 작은 칼로 마주 공격해 오는 동작을 확인한 하켄의 입가에 확신어린 비웃음 이 떠올랐다. 찰나간에, 기본기도 없는 놈이 까부는 거였구만, 죽이지는 말자는 표정이 스쳐 지나가다가 곧 그대로 얼어붙었다. 루이는 씩 웃으며 허리로 들어가던 칼의 방향을 90도 꺾 어 곧장 위로 쳐올렸다. 하켄은 기겁을 하며 아슬아슬하게 몸을 뒤로 젖혀 칼을 피했다. “아구구구국…” 용케 피하기는 했지만 무리하게 젖힌 허리 덕에 죽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켄은 그래도 오 기로 버텨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지는 꼴만은 수습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 귀에 곧바로 속 뒤 집는 루이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생각보다는 괜찮은 솜씨로군. 나쁘지 않아! 날 상대하기에는 아직 10년쯤 이르지만.” “뭐, 뭐, 뭐라고?! 이, 이, 이 XX한 XX가!” “어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나.” 루이가 짐짓 점잖은 척까지 하자 하켄의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푸르뎅뎅해졌다. 소란은 이 미 커질 대로 커졌다. 안쪽에서 쉬던 수비대원들이 어느 새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있었다. 루 이는 칼끝을 땅에 꽂고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안되겠어. 내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대장이라도 불러와.” - 그쯤 해두지 그래.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고? “뭐 어때서 그래. 죽은 공기 좀 휘저어서 살려놓겠다는 좋은 취지에서 하는 일인데.” - 오랜만에 호적수가 될만한 인물과 싸우고 싶어 좀이 쑤시는 게 아니고? 원래 목적이 뭔 지 기억은 하고 있는 거냐? “아…그야 물론이지.” 루이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다가 멈칫 소리를 죽였다. 험악하게 모여든 수비대원들 이 혼자 중얼거리는 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모르는 척, 칼에게 말을 거 는 양 고개를 숙였다. “그녀석이 왕위 후보자라며. 실력자니까 그놈을 설득하면 카라를 찾기가 쉬울 거 아냐?” - 설득? 이자드는 그렇게 한 마디만 반문하고 말문을 닫았다. 잠을 자려는 것인지, 생각에 몰두할 작 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루이가 몇 번인가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차마 앉아있는 상대를 치지 못해 씩씩대는 수비대원들에게 순진무구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곧, 그가 기다리던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대체 무슨 소란인가!!” 몰려선 수비대원들이 갈라지더니 20대 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갈색 머리 청년이 성큼성큼 걸 어왔다. 루이의 눈이 기대감에 부풀어 새로 나타난 자에게 쏠렸다가, 실망의 빛으로 바뀌었 다. 아까 성벽 위에서 본, 탑 안에 있던 남자가 아니었다. 맨 앞에서 칼을 쥔 손을 부르르 떨고 있던 하켄이 뒤미처 그를 돌아보고 외쳤다. “대장님!” 루이는 그가 더 말하기 전에 잽싸게 끼어들었다. “흐음 ? 대장이신가?”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수비대장 시진은 아우성치려는 부하들을 몸짓 한 번으로 잠재우고 정중하게 물었다. 루이는 데구르르 눈을 굴리다가, 그 바로 뒤편에 조용히 서 있는 또 한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 다. 그는 대장이 아니라 그쪽에 눈을 고정시키고 말했다. “여기서 일해보고 싶어 찾아왔는데 댁의 부하들이 막무가내로 안된다고만 해서 말요.” “그런…” “소란부리기를 좋아하나보군.” 대장은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하던 말을 끊고 뒤를 돌아보았다. 루이가 빤히 쳐다보고 있던 젊은이였다. 특별히 어떤 감정도 덧입히지 않은 억양없는 목소리였지만 루이는 낚시줄 에 걸린 고기를 보는 듯 흐뭇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른 카르트 인과 다를 게 없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얼굴은 우물 같은 녹색 눈동자 탓에 평범한 인상을 잃었다. 루이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의 칼을 찾았다. 오른손잡이인 듯, 왼쪽에 찬 칼은 날이 휜 곡도였다. 칼의 길이나 모양에는 특별할 것이 없 었는데, 특이하게도 손목 보호를 위한 칼코등이(영어로는 가드Guard라고 하는데, 손잡이와 칼날 사이에 있는 손목보호용 칼방패를 지칭한다)가 거의 없었다. 루이는 시선을 올려 흐릿 한 녹색 눈을 향해 웃었다. “칼은 그럴싸해 보이는데, 칼주인은 어떤가 모르겠군.” 길은 흘긋, 루이 앞에 박혀 있는 깡똥한 화염도를 쳐다보고 되받아쳤다. “칼은 이상한데, 칼주인은 어떨지 모르겠군.” 그는 루이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있음에 분명했다.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여긴 솜씨자랑을 하러 오는 궁정도 아니고, 명예의 간판을 내건 학원도 아니다. 더구나 난 칼싸움 따위에 목숨거는 인간들이 밥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쪽처럼 혈기왕성하지도 못해. 이 정도로 알아듣고 사라져주면 고맙겠군." 그는 억양없이 그 말만 던지고 무심하게 몸을 돌렸다. 당황한 것은 루이 쪽이었다. “어어엇! 이봐, 잠깐만!!” 길은 아예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다급해진 루이는 몸 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그림자 계곡에서 보았던 날개달린 사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이 말은 효과가 있었다. 아니,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효과가 있었다. 길이 걸음을 멈추고 돌 아본 것은 물론이고 대장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고 수비대원들이 일제히 입 속으로 무슨 말 인가를 중얼거렸다. 대장 이하 모두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지만 길 때문에 하지 못하는 듯 했다. 길은 몸을 반쯤 돌리고 조용히 되물었다. “날개달린 악마 말인가?” “그래. 그림자 계곡에서 그 놈의 팔 한쪽을 잘랐었지?” 녹색 눈이 이채를 발했다. “너, 그 검은 머리 마법사와는 어떤 관계지?” “에? 어, 그…” “사악한 마법사와 한패거리라고!!” 노성이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하켄이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격한 몸짓을 하며 보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 마법사가 악마를 불러낸 게 틀림없다니까요! 제 말이 맞잖습니까! 이렇게 난동을 부리 는 것도 사악한 속셈이 있어서 그런 게 분명해요!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 거브와의 일을 생 각해 보십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루이는 하켄의 말에 우 동조하는 분위기에 당황해서 항변했지만 이미 그의 말이 귀에 들어 갈 상황이 아니었다. 다들 몇 번의 논리적 비약을 거쳐서, 날개달린 악마가 최근 흉흉한 일 들의 원인이며 그 악마는 사악한 마법사와 관계가 있고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이방인은 그 마법사와 한패거리라고 단정짓는 분위기였다. 일단 눈이 뒤집힌 군중이 얼마나 상대하기 어 려운지 알고 있는 루이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나둘씩 노성이 높아졌다. 루이를 난처 한 상황에서 구한 것은 다름아닌 길의 고요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시끄럽다.” 아우성치던 수비대원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 마법사는 나와 함께 그놈과 싸웠어.”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격앙된 공기가 일시에 가라앉았다. 그 때, 거리 저쪽에서 찢 어지는 비명소리가 올랐다. 사방 몇백 하스타에 이르는 텅 빈 황무지를 내려다보고 선 카르트 왕성에는 망루가 없었다. 사실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은 이곳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고, 아무리 교활한 짐승 이 배를 곯더라도 이렇게 단단한 성벽을 침범할 엄두는 내지 않았다. 수비대가 지키는 것은 뿔뿔이 소규모로 흩어져 사는 양민들, 황야를 건너는 상인들, 짐승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염 소나 야크 떼를 몰고 오가는 목동들이었지 이 왕성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켜야 하고 지키고 자 하는 것은 왕성의 신성함이었지, 물리적인 경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날 오전, 갑작스 레 공기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몰려왔을 때 그것을 경계하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키리리리리리릭-!”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공중을 찢자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떨 어진 그림자들이 그 머리 위로 덮쳐들었다. 평온하던 거리는 한 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 다. “아악!” 짧은 비명소리를 지른 아낙은 다리에 힘이 풀려 도망도 못가고 주저앉아 버렸다. 공포에 질 린 그 눈 앞에서, 머리 둘 달린 거대한 도마뱀이 쓰러진 사내의 등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 녀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고, 도움의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비명소리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주저앉은 채 로 발버둥을 쳤다. 자신은 발버둥을 쳤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떨리는 주먹으로 땅을 짚고 안간힘을 썼다. 겨우 몸이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하는데, 곁눈으로 원 숭이처럼 생긴 커다란 짐승이 긴 팔로 어린아이를 들어올려 찢어발기는 모양이 보였다. 숨 이 콱 막혔다. 핏덩이를 내던지고 다른 놀잇감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거브와의 모습에 그녀 는 도망칠 생각을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끝난 것이다. 그녀는 거브와가 자 신을 발견하고 다리를 굽히자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파앗- 눈앞이 선뜻하더니 뜨겁고 축축한 것이 얼굴에 튀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강한 손이 어깨를 잡더니 거센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눈을 뜨자 그녀도 알고 있는, ‘이름을 말해서는 안되는 분’이 있었다. 그는 그녀를 승원 쪽으로 밀며 외쳤다. “어서 저쪽으로!” 길은 자신이 두어 마리를 해치운 다음에서야 급히 쫓아나오는 수비대원들을 보며 외쳤다. “뭣들 하나! 사람들을 보호해!” 앞을 가리는 피안개에 아연해있던 수비대원들이 황망히 무기를 꼬나들고 합류했다. 그들은 눈에 들어오는 짐승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며 중얼거리기도 하고 절규하기도 했다. 입밖 으로 나오는 말의 내용은 어슷비슷했다. “이게 다 어디서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그런 소리들과 끊이지 않는 비명소리 위로 시진이 목청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었다. “냉정을 잃지 마! 사람들을 보면서 공격해! 하켄, 혼자 파고들지 마라! 다들 두사람씩 조를 짜라!” 시진은 한편으로 부하들을 살피면서 달려드는 아메마이트의 독이빨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탓-!” 짧은 경호성과 함께 칼날이 아메마이트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거대한 입을 가진 괴물은 고 통에 못이겨 몸부림치며 꼬리를 휘둘러 시진을 후려쳐왔다. 그는 전력을 실어 칼날을 박아 넣었다. 그 뒤로 도마뱀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부하들을 지휘할 여유가 없 었다. 루이는 그 즈음까지 승원 앞에 서 있었다. 뛰쳐나오기는 다른 수비대원들보다 먼저였지만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자 계곡에서 보았던 온갖 종류의 야수들이 다 모여들어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기는 하지만 명백한 일이었다. 문제는 곳 곳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거나 엎드 려 있기만 했다. 곁에 있던 사람을 찢어발기고 피칠갑을 한 맹수가 자신들에게 주의를 돌려 도, 피하거나 방어할 태세는 보이지 않고 눈만 감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탑을 향해 고개 를 조아리고 기도를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루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연신 고개만 흔들다가 칼을 들어올리고 곧장 가장 안쪽 싸움터로 파고들었다. 길이 소리없이, 그러나 악귀처럼 날 뛰고 있는 곳이었다. 길은 무릎을 꿇고 있던 여자의 팔을 나꿔채 옆에 있는 문 안으로 밀어넣으며 칼을 휘둘렀 다. 칼날이 한순간 공중에서 정지했다가, 다음 순간 반대 방향에 나타나더니 피보라를 뿌렸 다. 그의 칼 사이에 있던 야수는 깨끗이 두동강이 나 무너져 내렸다. “훌륭해!!”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루이는 손뼉을 두들기며 찬사를 던졌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칼이 정지했다가 순간이동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의 눈은 칼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칼날 사이에서 공간이 얼어붙은 듯, 완벽한 수평치기였다. 그의 갈채를 들었는지 길이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더니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얼굴로 바로 다음 상대에 게 달려들었다. 루이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쉿쉿거리며 머리를 드는 뱀의 머리를 걷어차고 옆구리 로 덤벼드는 아메마이트를 향해 화염도를 꺾어쳤다. 화염날을 세우지 않았어도 아메마이트 의 질긴 가죽이 갈라져 나갈 정도로 맹렬한 공격이었다. 팔근육이 버텨주는 것이 신기할 정 도였다. 그러나 그런 공격으로도, 조금 전 길이 보여준 것처럼 깔끔하게 상대를 양단하지는 못했다. 아메마이트는 갈라져 뭉그러진 피부와 근육 사이로 꾸역꾸역 내장을 토해내며 널부 러졌다. “쳇…” 혀를 세게 찬 루이는 왼쪽 발에 힘을 실어 동작을 한 박자 늦추면서 한쪽에 던져진 긴 칼을 집어들었다. 지금 누가 더 깔끔하게 베어죽이나 따위의 문제로 경쟁할 때가 아니었다. 짐승 들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고, 여기저기 수비대원은 물론이고 보통 시민들이 섞여 있어 마구 잡이로 싸울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여전히 소리없이, 폭풍처럼 움직이며 주위에 길을 만들고 있는 길을 흘긋 돌아보고는 양손을 다 써서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피비린내와 비명소리는 고요한 승원 안까지 흘러들어갔다. 카라는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 이 다급하게 뛰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야를 가린 건물 너머를 보려고 몸을 반쯤 밖으로 빼자 창틀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멀리서 튀어오르는 피보라와 번쩍이는 칼날만 일별 하는 것이 한계였다. 카라는 몸을 안으로 당기며 고개를 돌렸다. 진은 팔짱을 낀 채 벽에 몸 을 기대고 서 있었다. “당신은 안나가요?” “내가? 왜?” 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덤덤히 되물었다. 카라는 잠시 할말을 잊었다. 정말로 자신이 왜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진의 태도는 너무나 태연자약했다. 카라는 궁색하게 답을 찾 았다. “책임자라면서요.” “뭐, 싸움의 책임자는 저기 나가 있는걸. 내 일은 나가서 싸우는 게 아니라, 저 녀석이 자 기 일을 끝내고 난 다음 남아있는 난장판을 수습하는 거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끝을 비틀었다. “게다가 왕도 없고 대승정도 쓰러진 판에 후보자까지 위험에 뛰어든다는 것은 무모하고 어 리석은 짓이지 않을까.” 카라는 잠시 눈을 굴렸다. “저 녀석이라는 건 누구?” 진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멀리 어딘가를 가리켰다. 카라는 까치발을 하고 그 손끝을 따 라 눈살을 모았다. 하지만 그녀의 키로는 무리였다. 카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발을 내 렸다. “모르겠는데요.” 진은 아예 창가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물을 따르며 말했다. “나말고 아직 한 명 남아있는 후보자죠. 수비 쪽을 전담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 이라죠 아마. 흠, 못마땅해 하는 건 알겠는데, 원래 책임자가 하나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랍 니다, 레이디 카라. 싸움터에 있는 사람은 넓게 보지 못하는 법, 만일의 문제를 생각할 사람 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나저나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진의 말투는 어느샌가 다시 변해 있었다. 카라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다시 창밖으로 눈 을 돌렸다. 소란은 여전했지만 비명소리는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 상황이 수습된 것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에 허둥대던 수비대원들이 냉정을 찾 고 그 위에 길과 루이가 몇 사람 몫을 해내면서 극심한 혼란은 가라앉았다. 맹수들의 숫자 는 이제 착실히 줄어들었다. 연거푸 몇 마리를 상대하다가 겨우 한숨돌린 시진은 근심어린 얼굴로 탑 쪽을 돌아보았다.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지? 결계가 깨진 건가!” 그러나 염려한 것과 달리 승원 벽 안쪽은 다른 세상이었다. 길이 밀어넣은 사람들 몇이 망 연히 주저앉아 이쪽을 내다보고 있었고 아직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기는 했 지만, 탑을 중심으로 한 승원 공간 자체는 평온하기만 했다. 시진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 는 고개를 쭉 빼고 ‘이름을 말해서는 안되는 분’-길의 모습을 찾았다. 마침내 시진이 찾아냈을 때, 길은 고개를 젖혀 위쪽 어딘가를 보고 있고 있었다. 그의 입술 이 달싹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시진이 있는 곳까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길의 시선을 좇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은 하늘을 향해 눈을 번뜩였다. “복수하러 온 건가.” “엉? 뭐라고?” 루이는 양손치기로 거브와 두 마리를 동시에 내리찍으며 고개를 돌렸다. 길의 목소리를 언 뜻 들은 것 같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루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문득, 머리 속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 하늘이다. “하늘?” 루이의 시선은 높이 뻗어올라간 중앙 탑을 따라서 하늘로 기어올라갔다. 땅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과 무관하게 깨끗해야 할 하늘은 검은 그림자로 가득차 있었다. 새들이었다. 보통의 새가 아니라, 거브와 한 마리 정도는 가뿐하게 실어나를 법한 거대한 맹금류들. 루이는 나지 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것들이었군.” 이 많은 맹수들이 소리소문없이 습격해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짐 승들이 연합해서 그런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지만… 루이와 비슷한 시점에 같은 결론을 얻은 듯, 시진은 동분서주, 겨우 한숨 돌리기 시작한 사 람들을 모으며 고함을 질렀다. “활! 활을 준비해! 궁수들을 모아라!!” 다행히 카르트인들이 가장 익숙하게 사용하는 무기가 활이었다. 줄어든 공격자의 숫자만큼 늘어난 방어자들은 잽싸게 행동을 개시했다. 곧 여기저기에서 하늘을 향해 화살이 날았다. 몇 마리 새가 날개를 꺾었고 몇 마리는 추락했다. 그리고 나머지 새들은 고도를 낮추어 공 격에 가담했다. 휘익- ! 귀가 멍멍할 정도의 바람을 일으키며 거대한 날개가 머리를 때린다. 루이는 머리를 숙여 피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게!” 거대한 매- 혹은 매 비슷하게 생긴 날짐승은 그를 비웃듯, 칼끝이 닿을랑 말랑한 높이에서 곡예비행을 펼쳤다. 루이는 그 짐승이 다시 한 번 날랜 자태를 뽐내며 모험을 시도할 때를 노려 짧은 기합을 질렀다. 단숨에 화염도의 무딘 날을 타고 진짜 화염의 칼날이 타올랐다.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난 칼날은 맹렬한 속도로 날던 날짐승을 두토막내기에 족했다. 루이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경쾌한 몸놀림으로 쏟아지는 피와 내장을 피하고 길의 모습을 찾았다. “이녀석은 어디 간 거야?” - 탑 쪽을 봐. “탑?” 루이는 눈을 깜박이면서도 순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미친 듯 탑쪽을 향해 질주해가는 길의 뒷모습과 그 위로 낮게 드리운 사람 크기만한 그림자가 보였다. 탑 위로 비스듬히 떨어져내리며 비둘기색 날개를 활짝 편 그 그림자에는 한쪽 팔이 없었다. 루이의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했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저건…!” - 이미 늦었어. 이자드의 목소리는 냉정함을 지나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목소리에 제지당해서인지, 혹은 추락하던 그림자가 아슬아슬하게 길의 공격을 피해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아직 끝나지 않은 주위 상황을 의식해서인지, 루이는 튀어나가려던 몸을 억지 로 가라앉히고 파르르 눈썹을 떨었다. 험악해진 푸른 눈에 목표물을 놓치고 하릴없이 돌아 서는 길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자드가 중얼거렸다. - 놀랍군. 설마 저 놈이 주동했단 말인가? 루이는 멀리 기우뚱하게 날고 있는 그림자만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그림자에게 서 눈을 뗄 수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후퇴할 길을 잃은 야수들은 아직 날뛰고 있었고, 루 이에게는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같은 순간, 진은 창문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카라의 몸을 간발의 차로 붙들어 안았다. “카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커다랗게 증폭되었다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죽어들었다. 카라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에 입을 막으며 몸을 한껏 웅크렸다. 몸이 허공에 붕 뜬 것 같았 다. 발딛고 있는 바닥은 물론이고 몸을 잡고 있는 진의 손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라?” 이제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도, 물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하지도 않았지만 구역질은 쉽 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렇게 멀리 있었는데, 하늘을 날 고 있었는데 어떻게 눈이 마주칠 수가.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그 신상, 그녀가 날려보낸 그 신상이 금빛 눈에 악의를 가득 담은 채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아니 눈 을 감으면 더 생생하게 그 시선이 마음을 찔러 들어왔다. 카라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지?’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자 카라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고 한바탕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카라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들었다. 진은 그 제서야 카라의 몸에서 손을 떼며 미소를 지었다. 녹색 눈이 춤추듯 흔들렸지만, 뒤틀린 미소 는 그 눈에 담긴 일말의 다정함을 앗아갔다. 그는 카라와 눈높이를 맞춘 채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틀린 건 아니었군요. 저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까지는 맞췄어. 그렇지?” 카라는 대답하지 않았고, 진도 굳이 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탐색하는 눈길로 카라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목소리는 더할 나위없이 달콤했다. “좋아, 좋아. 그럼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갈 수 있겠군. 두 가지 길을 제시하지. 첫번째, 네 가 나를 돕는다. 어때?” “난…내가 무슨 수로 뭘 도와요?” 어처구니가 없어 항의하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진은 부드럽게 물컵을 건넸다. 그러나 카라는 그 물을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물컵을 내민 손에 따라붙은 쾌활한 음성이 카라를 얼어붙게 만들었으므로. “아, 어쩐지 그런 대답이 나올 것 같았어. 그러면 별 수 없지... 내가 너를 이용하는 수밖 에.” 루이는 손목을 무겁게 흔들어 칼을 털었다. 핏방울이 후드득, 더 이상 얼룩질 자리도 없는 땅 위로 떨어져내렸다. 뻣뻣한 다리를 쉬고 싶었지만 이 더러운 땅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칼집 속에 화염도를 갈무리하고 허리를 폈다. 싸움에 뛰어든 수비대원 중에는 온전한 사람이 몇 없었다. 설 수 있고 손을 놀릴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부상자를 옮기고 주변을 정리하는 데 동원되었다. 몇 안되는 의료진이 종종걸 음 치는 모양이 안쓰러웠다. 정리라고는 해도 시신을 수습하는 게 한계여서, 겨우 한 옆에 모아놓은 짐승들의 사체가 역한 냄새를 풍겼다. 피는 계속해서 흘러 왕성의 돌과 흙을 붉게 물들였다. 저 시체를 다 불사르고, 길에 새로운 흙을 가져다 덮더라도 그 피는 그 자리에 남 아 있으리라. - 엉망이군. 이자드가 담담한 목소리로 소감을 피력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옮겼다. “내가 뭐 도울 일은?” 그의 말에 혼자서 제 상처를 싸매고 있던 30대 사내가 찌푸린 눈을 들었다. 처음 루이와 시 비가 붙었던 사내, 하켄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팔의 붕대를 마무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저쪽 일이나 같이 돕지.” 하켄은 발을 질질 끌며 임시 치료소로 향했고 루이는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하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치료소에 도착해서야 흘긋 돌아보고 툭 던지듯 말했다. “잘 싸우더군” 루이는 어깨만 으쓱였다. 빽빽이 눕혀둔 환자들의 열 너머에서 길이 시진과 마주보고 서 있었다. 부상을 입었는지 시 진의 가슴팍으로 흰 붕대자락이 엿보였고, 길은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피곤에 절은 모습 이었다. 두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몇 마디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길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안나온다고? 왜?” 루이와 하켄을 비롯한 몇 사람의 시선이 그쪽에 쏠렸다. 곧 길의 음성은 잦아들었고 사람들 의 주의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루이 혼자 멀뚱멀뚱 그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진이 당황한 낯빛으로 머리를 숙이며 뭔가 길을 만류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길은 고개를 흔들 더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승원 문쪽으로 걸어갔다. 시진이 급히 그 뒤를 좇았다. 루이는 그 제서야 잊고 있던 문제를 떠올리고 뛰면서 외쳤다. “어이, 잠깐만! 길!”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던 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주위 공기가 일시에 냉각되었 다. 루이는 자신에게 따가운 시선이 집중되자 무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기겁을 한 하켄이 한 박자 늦게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그런 불경한…!” “뭐야. 이름도 부르면 안되나? 이름이란 부르라고 있는 거잖아.” 이번에는 하켄과 시진이 이구동성으로 핏대를 올렸다. “저 분에겐…!” “됐어. 그만해라.” 길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그만해. 그는 외부인이니까.” 하켄과 시진은 화가 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부루퉁한 루이는 길이 손짓하는 대로 다가섰 다. 길은 하켄과 시진 정도에게만 들릴까 말까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세해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목적을 모르겠군. 아까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그 마 법사와는 어떤 관계지?” “어?” 루이는 앗차 했지만 이미 길이라는 이름까지 내뱉은 이상 발뺌할 여지가 없었다. 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법사라고 무조건 배척할 마음은 없지만 계속해서 부딪치게 되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 군. 날개달린 악마와는 무슨 관계며,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그 놈은 뭐지?” “난 그놈과 아무 상관도 없어! 내가 아는 종족과 닮았길래 쫓아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뿐이라고.” 루이는 잠깐 사이를 두고 덧붙였다. “찾을 사람이 있기도 하고.” “그거 이상하군요. 이틀 사이에 사람을 찾는다는 외부인을 셋이나 만나다니.”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시진이 썩 끼어들었다. 길과 루이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린가?” “그제 밤에 말씀하신 그 마법사와 마주쳤었습니다. 사람을 찾는다고 했었죠. 그리고 어제 낮에는 거브와에게 당할 뻔한 꼬마 아가씨와 마주쳤지요. 역시 사람을 찾는다면서…” 시진의 뒷말은 루이와 동시에 나왔다. “그러고보니 그때 두 사람의 인상착의를 말했었어요. 검은 머리 마법사와 금발의 청년.” “아, 그애야! 내가 찾는…” - 루이! 이자드의 경고성은 때가 늦었다. 이미 길과 시진은 물론이고 하켄까지 날카로운 긴장감 속 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진이 다시 말했다. “이상한 시기에 강을 건넌 점도 그렇고, 사자(死者)의 기둥을 알아보는 것도 이상해서 승원 까지 함께 왔습니다만.” 길은 루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찬찬히 설명을 들어봐야겠는데.” 루이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승원 건물 윗자락으로 어느새 엷어진 하늘빛이 보였 다. 이자드가 속삭였다. - 곧 해가 떨어진다. 루이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아하하하. 설명, 그렇지. 설명을 해야겠지. 나도 그 점에는 찬성인데 말이야…카라도 무사한지 챙겨봐야겠고… 그런데 내일하면 안될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이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횡설수설하자 하켄이 도끼눈을 뜨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게 말이지…난 지금 좀 자야겠거든?” “뭐?” “난 해가 지면 바로 자야 한단 말이야. 이야기는 내일 하자고!” 루이는 그 말만 던지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뒤의 세 사람을 빼면 그를 막을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순간 벙벙해있던 하켄과 시진이 악을 쓰며 그 뒤를 쫓았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잠이야 여기서 자도 되잖아!” “안돼, 안돼! 내가 자는 모습은 절대 보여줄 수가 없다고!!” “그게 말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길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고개를 흔들며 웃지못할 추격전을 지켜보았다. 루이의 속도는 몇 시간이나 칼을 들고 날뛴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빨랐다. 각각 작지 않은 상처를 입은 하켄과 시진이 아무리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따라잡기 어려웠다. 이상한 낌새를 챈 몇 사람이 성문 쪽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루이는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가까운 성 벽을 향해 돌진했고, 엇 하는 사이에 몸을 쑥 뽑아올려 성벽을 밟아올라갔다. 한 순간의 망 설임도 없이 울퉁불퉁한 석벽을 밟아오르는 것을 보니 이미 같은 방식으로 올라가거나 내려 가본 적이 있는 몸놀림이었다.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사이 루이는 전속력으로 달 려올라가 성벽위로 올라서더니 쉴 틈도 없이 건너편으로 몸을 넘겼다. 시진이 씩씩거리며 성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 밖으로!” “그만둬!” 길은 보다못해 소리를 질러 수비대장을 막았다. 이득이 없는 일이었다. 루이는 지극히 의심 스러운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들을 도와주었고, 그들에게는 여력이 없었다. 또 있을지도 모르 는 습격에 대비할 인원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정말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형편 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너무나 피곤했다. 그 모든 생각을 담아내어, 길은 숨을 들이키며 한 마디 말만을 덧붙였다. “그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불만스러운 얼굴들이 일시에 수긍하는 것을 보자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 나 그에게 매달린 얼굴들 앞에서 피곤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시진이 돌아오는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의심스러운 구석은 많지만 우리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아. 게다가 찾는다던 사람이 여기 있으니 돌아오겠지. 아까 말한 꼬마 아가씨는 그래서 어디에 있나?” “아, 그게…” 길은 시진이 표현할 말을 찾아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해했다. 녹색 눈이 흐려졌다. “…또 진인가?” “예. 같이 계실 겁니다.” 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피곤해 보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진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다가섰다. “괜찮으십니까?” “음. 들어가서…진과 대승정님을 보고 올 테니, 뒤를 부탁하네.” “예.” 길은 시진의 대답을 뒤로 들으며 루이 때문에 지체된 길을 재촉했다. 승원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그의 녹색 눈에서 인광(燐光)이 흘렀다. 보는 눈이 없어지자 감췄던 감정이 눈으로 치 솟는 것 같았다. 그는 피곤과 분노 속에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저물어가는 주홍빛 구체가 창틈으로 그 모습을 엿보았다. 같은 시간, 루이는 저무는 햇살을 등에 받으며 힘겹게 몸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급하게 성벽 을 뛰쳐올라간 가속도로 몸을 넘겨놓고서 두 팔만으로 몸을 지탱하려니 보통 힘든 게 아니 었다. 겨우 성벽 위에 발을 올리며 팔이 부르르 떨렸다. 한쪽 발을 걸치고 다른 쪽 발까지 끌어올려 성벽의 평평한 돌 위에 널부러지는 찰나 그의 몸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몸의 윤곽이 전체적으로 흐려지며 어두운 신기루 같은 것이 겹쳐졌다. 짧은 순간이었다. 눈 을 한 번 비빌 정도의 시간. 지평선 아래로 해가 떨어졌고, 루이의 모습은 완전히 지워졌다. 그 자리에는 상아빛 피부에 검은 눈이 날카로운 남자의 형상이 자리했다. - 헥, 헥… 머리 속에서 들리는 루이의 목소리에 이자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몸이 없는데 숨이 찰 리가.” - 어…그렇군. 뭐 그런 것까지 핀잔주고 그래. 갑자기 바뀌면 몸이 받아들이질 못한다고. 이자드는 찜찜한 얼굴로 먼지와 피로 얼룩진 검은 옷을 털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 해가 지면 바로 자야해? 아무도 자는 모습을 보면 안된다고?” - 어, 그건…나름대로 틀린 말은 아니잖아! 루이는 더듬거리며 항의했지만 이자드는 짐을 챙기느라 바빴다. 그는 책과 그 외 물건을 넣 어둔 작은 주머니를 찾아 속에서 여분의 로브를 꺼냈다. 인형옷처럼 보이던 옷은 이자드의 역주문에 금새 푸댓자루 같은 풍성한 제모양을 회복했다. 루이가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 뭐야, 또 그 푸댓자루를 입는 거야? 이자드는 대꾸없이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의 시력으로는 아무리 눈을 찌푸려 보아도 승원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단 주문을 발했다. “티로 - 브하바. Tiro- bh va” 그러자 루이가 미심쩍게 물었다. - 뭐야, 설마 옷 갈아입겠다고 은폐 주문을 쓰는 건 아니겠지? 이자드는 로브를 걸치다 말고 목에 걸린 숨을 토하더니, 다른 주문을 외워 성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피하며 승원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제서야 생각난 듯 루이가 말했다. - 아, 맞다! 카라를 찾아야지 참? “그래. 이제 알았으면 입 좀 다물어라.” 이자드는 입 속으로 질책의 말을 던지며 건물 안으로 미끄러져들어갔다. 우선 알 만한 사람 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이자드는 건물 안 그늘 속에서 속삭였다. “아까 그 친구 어느 쪽으로 갔지?” - 입 다물라며? “어린애처럼 굴지 좀 마.” 루이는 툴툴대면서 방향을 일러주었다. - 저쪽으로 올라가서 저쪽. 그 다음은 나도 몰라. 있으나 마나한 그런 정보를 가지고서 이자드는 용케 길을 찾아냈다. 이 크고 어두운 건물 안에 불이 밝혀진 방이 몇 군데 없는 덕이었다. 그가 처음 찾아낸 방은 비어 있었지만, 그 방과 연결된 조금 큰 방에는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었다. 한쪽은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에 띄는 청년이었다. 감각이 날카로운 칼잡이에게는 은폐주문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자 드는 들키지 않도록 주의깊게 안을 살폈다. 길은 탁자 앞에 앉은 후 한참동안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진은 창옆에 기대서서 팔짱 을 낀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가닥을 잡기 힘든 묘한 기류가 흘렀다. 마침내 침묵을 깨뜨린 것은 진이었다. 그는 입술 끝을 약간 비틀며 길을 돌아보았다. “피곤해 보이는군.” 형제처럼 닮은 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왜 나오지 않았지?” “네가 있는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까지 있었을까.” “싸울 때를 말하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싸우기 싫다면, 그건 좋아. 하지만 치료사가 몇 명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이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가 있어?” 진의 눈에 조롱기가 떠올랐다. “뭐야, 고작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거냐?” “고작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지금 나라 꼴이 어떤지 알기는 하는 건가?” “알지. 너보다 잘 알걸 아마.” “믿고 싶지 않은 말이로군. 넌 우리를 믿고 있는 백성들을 외면하고 있어. 책임을 등한시하 고 있어.” “하! 백성들? 책임? 어렸을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소리 비슷한걸.” “진!” 잠깐 진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벽에서 등을 떼고 탁자에 손을 짚었다. “…길, 네게서 피냄새가 나.”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확실한 일격이었다. 길의 눈이 흔들렸다. 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 피를 보았을 때는 맨정신으로 있지도 못했었는데…언제부턴가 피냄새가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해져버렸지. 나는 살아있는 생명의 불꽃을 보는데, 너는 죽어가는 생명의 불꽃을 봐. 어렸을 때 너는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곤 했었는데… 그런데 왜 죽이는 일을 맡았 지? 이젠 괜찮아진 건가? 응? 말해봐, 대체 뭘 위해서 그런 고통을 감수하지? 말해봐, 대체 왜 그 애들이 죽어야 했지?” “내 칼은…내 칼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거야!” 길은 쥐어짜내듯 대답했다. 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지킨다고? 그 지킨다는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희생되었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해? 사자(死者)의 기둥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길은 어깨를 떨면서 격하게 탁자를 내리쳤다. “알기 때문에 더더욱! 헛되이 할 수 없어. 내가 마지막까지 남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게 의지하는 이들을 버릴 수는 없어. 그럴 수는 없어! 네가 변화를 꿈꾸는 건 알아, 진. 하지만 그 변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고통스러워할지 생 각해 봐. 그 모든 고통을 눈감아 버리겠다고? 지금처럼, 피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앞에 있 는데도 네가 할 수 있는 치료도 해주지 않고 버려두겠다고? 정말로 네 길이 그거라면…” “그거라면?” 진은 조용히 되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네 적이 되겠어!” 길은 한 마디 한 마디를 고통스럽게, 갈갈이 찢기는 것 같은 비탄 속에서 뱉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간 것은 공허한 웃음소리였다. “맙소사, 길…우린, 이미, 적이야.” 무거운, 그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길은 탁자 모서리를 노려 보며, 진은 그를 쳐다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삐뚜름하게 비웃음을 띄운 입매 위로 쓰디쓴 고통의 흔적이 배어나왔다. 녹색 눈이 암담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진은 눈을 감 았다 뜨는 것으로 냉정을 회복했다. 진의 통통한 고양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목을 울렸다. 마침내 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는 일어서서 문까지 걸어 가는 동안 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진은 이야기를 시작할 때의 심상한 어조로 돌아가서 물 었다. “나한테 뭔가 다른 할 말이 있어서 왔던 게 아닌가?” 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시진이 데리고 왔다던 소녀는?” “탑에. 수상한 점이 많아서.” “약재가 모자라.” “곧 보내지.” 평정을 되찾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간결하고 딱딱하기만 했다. 길은 고개를 끄덕 이고, 지친 다리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진은 닫힌 문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얄미울 정 도로 침착하게 옆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나오시죠 그만.” 그의 눈은 정확히 이자드의 눈어림께에 향해 있었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됐을까. 카라는 좁은 방 안을 뱅뱅 돌았다. 휑덩그렁한 방에 하나 뚫린 창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잠시 멈춰서서 소름돋은 팔을 문질렀다. 침대는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잘 시간도 아니었고 잘 마음도 없었다. 카라는 그 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래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몇 시간 전, 진이 예의 얄미운 미소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갔을 때는 감옥에 갇히다니 어처구 니없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보니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원하면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대체 진은 무엇을 어 떻게 해서 그녀를 이용하겠다는 것인지, 실수로 문을 열어둔 것인지, 아니면 나가기를 바래 서 일부러 열어놓은 것인지, 또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머리 속이 복잡해져서 벌 써 몇 번이나 문을 열고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가 다시 들어왔는지 모른다. “한심해.” 카라는 침대 위에 드러누우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것 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도대로 질질 끌려가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심지어 스스로 저지른 일의 의미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제대로 쓸 수 없는 힘이라면, 없는 편이 낫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알 수 없는 표정에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진에게 화가 났으며, 어 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루이와 이자드에게까지 화가 났다. 카라는 결국 분을 못이기고 벌떡 일어났다. 되든 안되든 나가고 보자. 진이 데려다 놓은 방은 탑 안에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선계단을 한참이나 올라와서 나온 방이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지금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다보니 꽤 높았다. 올려다보니 똑같은 계단이 위쪽으로도 계속 이어진다. 카라는 등으로 문을 밀어 닫으며 계 단에 발을 디뎠다. 휘이이- 탑 한가운데를 꿰뚫는 기둥 사이 빈 공간으로 바람이 휘몰아쳐 기분나쁜 소리가 울렸다. 카라는 잠시 멈춰서서 눈을 굴렸다. 어두웠지만, 중간중간 희미한 불빛이 비쳐 그럭저럭 발밑은 볼 수 있었다. 계단폭을 가늠하느라 빨리 걸을 수 없다는 정 도가 불편할 뿐, 어둠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공기에는 어둠이나 한기 이상으로 기분나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어 고심하며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타박타박타박. 얼마 동안 계단을 딛는 발소리만 일정하게 울렸다. 지루한 여정 끝에 도달한 것은 하나의 문이었다. 평범하고 아무 장식 없는 문. 카라는 곤혹 스러운 얼굴로 그 문을 쳐다보았다. 올라올 때에도 이런 게 있었던가? “무슨 미궁같네.” 어쨌든 길이 하나뿐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라는 살그머니 문고리를 돌렸다. 다행히 소리없이 열린다. 문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안은 어두웠다. 코에 닿는 냄새가 기억 속에 있는 다른 방을 연상시켰다. “에……” 카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약과 죽음의 냄새였다. 오랜 환자가 누운 방에서 나는 - 아버지의 방에서 나던 것과 비슷한 냄새. 상당히 넓고 둥근 방이었다. 그 중간쯤에 휘장을 반쯤 걷어올린 커다란 침대가 놓였다. 침대 위에는 안색이 창백한 노인이 숨소리도 없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빼고 살 폈지만 간호인도, 치료사도 없었다. 게다가 반쯤 닫다 만 창으로 환자에게 좋을 리 없는 찬 바람이 새어들어왔다. 카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 옆을 멀찍이 돌아서 창가로 다가갔다. 당연히 돌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발을 딛은 자리가 푹신해서 내려다보니, 묘한 무늬 가 아로새겨진 갈색 카펫이 방바닥 전체를 덮고 있었다. 아니, 이게 카펫이 맞나? 카라는 무 릎을 굽히고 손으로 바닥을 쓸어 보았다. 감촉이 묘했다. 살아있는 동물의 살 같기도 하고 동시에 차가운 금속 같기도 했다. 카라의 눈은 바닥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갔다. 무엇을 나타 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림이 나선을 그리며 이어져, 방 가운데에 놓인 침대로 모여들고 있다. 덜그덕, 카라는 바람에 흔들린 나무 덧창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섰다. 갑자기 바람 이 거세게 부는지 덜컥덜컥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카라는 다가가서 손을 뻗어 나무 덧창을 잡았다. 파앗- ! 갑작스러운 돌개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카라는 눈을 감은 채 덧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딸 려오지가 않았다. 한 번 더 잡아당겨 봤지만 어딘가에 걸린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나 허공에 걸릴 곳이 있을까. 카라는 갑자기 깨달았다. 바깥에 누군가가 있다. 그녀는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 천천히 덧창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재빨리 몸을 뒤로 뺐 다. 그러나 카라의 팔은 이미 억센 손에 붙들려 있었다. 카라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몸을 잡아당겼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카라는 결사적으로 몸을 당기며 자신이 알고있는 유일한 무기를 내밀었다. “아날라 Anala!” 다행히 엉겁결에 뱉은 주문이 통했다. 확 하고 푸른 불꽃이 일더니 기분나쁜 비명소리가 들 렸다. “키르르르르- “ 쿠당탕, 카라는 바닥에 나동그라져서 팔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밖에서 거친 날개짓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린 창틈으로 들어오다 만 몸뚱이가 팔에 기어오른 푸른 불꽃을 털어 내려 몸부림을 쳤다. 놈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서도 계속 금색 눈동자를 카라에게 붙박고 있었다. 그 시선에 못박힌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놈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벽에 제 팔을 내리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불꽃이 사그러들 때까지. 돌로 만들어진 듯 했던 팔에서 붉 은 피가 흘러, 바닥으로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그제서야 카라는 퉁기듯 몸을 일 으켰다. 이제 놈은 날개를 접고 창문 안으로 몸을 비틀어 넣고 있었다. 덜컹거리던 덧창이 비틀려 떨어져나가고 한쪽 발이 안으로 들어왔다. 카라는 돌아서서 뛰었다. 반대쪽 문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무작정 아까의 문으로 뛰 쳐나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소동을 알아챈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지만 그 소리는 멀기만 했다. ** “차라도 한 잔?” 이자드가 가타부타 말이 없자 진은 투박한 잔에 검은 차를 따라 앞으로 밀었다. 이자드는 손끝으로 잔을 받으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선 왕이 되어 득볼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군.” “왕관 대신 산더미 같은 책임감을 덮어쓰고 화려한 옥좌 대신 희생정신이라는 영웅심리 위 에 걸터앉죠. 수족 같은 하인들 대신에 왕을 신처럼 여기는 백성들이 있고.” 진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화려한 독설을 담아 던지며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는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는 듯이 행동했고 오랜 친구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자드는 계속해 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불편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상황 때문이 아니라, 뭔가 더 말초적인 불쾌감이다. 그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진을 건너다보았다. “이 나라를 좋아하지 않나 보군.”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할 뿐이죠. 싫어한다기보다는.” “변한다…그게 가능할까, 이곳에서?” 이자드가 ‘이곳’이라는 말에 강세를 두자 진은 잠깐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을 알아본 모양이군요.” “이렇게 부자연스러운데 못알아본다면 마법사가 아니지.” 두 사람은 탁자 너머로 미소를 교환했다. 겉보기에는 더없이 우호적이었지만 저변에 흐르는 기류는 그렇지 않았다. 이자드는 잔을 들어 입술만 축였다. 워낙 규모가 커서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이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특히 그림자 계곡에서 이 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마법진을 제대로 알아본 것은 탑 가까이에 와서였다. 탑은 모래의 바다와 그림자 계곡 사이 한 중간에 위치했고, 그 양쪽에서 자연에 역행하는 거대한 힘이 탑으로 흘러들어갔다. 아마 사자(死者)의 기둥이라는 것도 그 힘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리라.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그는 전율하고 있었다. 일찍이 어떤 인간도, 어떤 종족도 모래의 바다 나 그림자 계곡 같은 장소를 창조해내지 못했다. 그것을 정말로 멜카르트라는 한 인물이 해 냈단 말인가? 뒤이은 진의 말이 의문 하나는 해결해 주었다. “천년 전이죠. 멜카르트가 모래의 바다, 돌의 강이라는 천혜의 방벽을 찾아내고 이 땅에 정 착한 것이…천년이 지나도록 깨어지지 않는 마법진이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이죠?” 그렇다면 모래의 바다는 그의 작품이 아니로군. 이자드는 안도했지만, 그림자 계곡만 해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의혹에 차서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어떻게? 그리고, “대체 무슨 목적으로?” 진은 음울한 눈으로 입끝만 당겨 웃었다. “변하지 않는 평화, 영원한 희생… 그 속을 알게 뭡니까. 덕분에 죽어도 이곳을 떠날 수 없 게 됐는데.” 그는 이자드에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시간을 주지 않고 덧붙였다. “당신이 그 마법진을 깨줬으면 합니다.” 이자드가 앉은 의자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내가 왜?” “당신 자신과 꼬마 아가씨의 안전이 대가라면요?”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천만에요. 어디까지나 부탁이죠. 부탁.” 진은 비틀린 입매로 생글생글 웃었다. 이자드는 그 얼굴을 보고 왜 계속 불편한 느낌이 사 라지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진의 말투나 표정은 그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자를 닮아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휘안을 닮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 상황이 더욱 짜증스러워졌다.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거절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면 강요할 수야 없겠죠.” 이자드는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짐승들이 도시 한가운데까지 쳐들어올 정도라면 마법진은 이미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닌 가.” “그러니까 더더욱, 지금 해야죠. 틈이 났을 때. 다시 복구되기 전에.” “…지금 나에게 뭘 요구하고 있는지 아는 건가?” “목숨을 걸라는 요구를 하고 있죠.” “잘 아는군. 그럼 다시 말해볼까, 대체 내가 왜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 그런 위험을 무릅 써야 하지?” 진이 씩 웃었다.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자 불길한 느낌이 강해졌다. 아니나다를까, 진은 창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면서 한가로이 말했다. “당신 도움을 얻을 수 없다면 하는 수 없죠. 별로 하고 싶지는 않았던 일이지만…꼬마 아 가씨를 쓰는 수밖에.” “…뭐?” “이제와서 상관없는 사람이라고는 못하시겠죠.” “너무 너절하게 구는 거 아닌가? 대체 카라가 뭘 할 수 있다고?” 진은 이자드의 차가운 항의에 차분하게 대꾸했다. “협박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법진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며칠 전, 날개달린 악마가 들어오면서부터였죠. 놈에게 진을 깨뜨리는 힘이 있다면 당연히 꼬마 아가씨에게도 있겠죠? 그걸 직접 시험해 봐야 할까요?” 이자드는 몸을 일으키고 비스듬히 진을 내려다보았다. 턱선이 굳어져 있었다. “둘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그걸 어떻게 단언하지?” “빛깔이 같으니까요.” “빛깔?” 이자드는 멍하니 그 말을 되풀이하다가 깨달았다. 진이 은폐 주문을 꿰뚫고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능력의 발로였다. 그는 생물의 본질, 그 내적인 불꽃의 색을 알아볼 수 있 었다. 그러니까 카라의 색이 날개달린 짐승과 같았다는 것은… “맙소사. 카라가 한 짓이었나.” 그는 질려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밖이 술렁이는가 싶더니 조금씩 웅 성이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진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그나마 남아있던 적막을 찢었다. “키르르르르-“ 진은 튀어나갈 듯 창문으로 몸을 내밀었다. 탑 위에서 푸른 불꽃이 춤을 추었다. 진은 의혹 어린 눈을 이자드에게 돌렸다. 어느 새 창가에 다가와 있었는지, 그의 석탄 같은 눈에 푸른 불꽃이 비쳤다. 얇은 입술이 움직이더니 들릴까 말까한 소리를 뱉어냈다. “카라.” 진처럼 사람들 고유의 빛깔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마법사들에게는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색채가 있었다. 마법색은 결코 두 사람에게 겹치지 않는다. 이자드의 마법색이 다른 사람에 게서 되풀이된 예는 몇백년 통틀어 단 한 번뿐이었다. 이자드는 망설임없이 창밖으로 뛰어 내렸다. ‘프라브리띠!’ 주문이 제 때 살아나 떨어지는 몸을 받쳐주었다. 진이 위에서 뭔가 외치고 있었다. 이미 은폐주문이 깨어진 터라, 탑을 향해 달려가는 그를 알아본 사람들 사이에 소란 이 한층 커졌다. 하지만 당장은 그런 문제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푸른 불꽃, 창문을 뜯 어내고 날개를 접어 몸을 우겨넣던 놈의 뒷모습, 사악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던 그 금빛 눈 동자가 머리 속에서 엉켜 돌아갔다. 그는 누구보다 빨리 탑에 도달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 했다. 사람들은 그가 벽을 딛으며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침입자다! 마법사야!” 일단 한 사람이 그렇게 외치자 모두들 정신을 차렸다. 곧 화살이 분분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진이 도착했고, 선잠에서 깨어 뛰쳐나온 길이 그 뒤를 이었다. 길은 궁사들 뒤에 선 진을 보 자마자 다짜고짜 외쳤다. “대승정님은? 누가 있어?” 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길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탑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이자드가, 안에서는 길이 맹렬한 속도로 위로 올라갔다. 카르트인들의 화살이 이 자드를 방해한 덕분에, 두 사람이 대승정의 방에 도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자드는 창문에 손을 걸치고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침대 휘장 저편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올라온 길이었다. 그는 창문에 선 그림자를 보자 핏발선 눈으로 칼부터 휘둘렀다. 이자드가 공중에 몸을 띄우는 순간 날아온 칼이 관자놀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길이 호흡 을 제대로 고르지 않고 던진 공격이라 가까스로 피하기는 했지만 몸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 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짚으며 재빨리 중얼거렸다. “프라브리띠, 판차 탄마트라스 아닐라 암사! Pravritti, Panca tanmatras Anila Amsa!" 바람이 불어와 떨어져 내려가는 이자드의 몸을 감싸안았다. 그는 바람으로 만든 양탄자 위 에 무릎을 세우고 창문 쪽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는 길이 다시 공격하기 전에 재빨리 양손 을 펼쳐보였다. “적이 아니야! 올라가는 길은 어디로 통하지?” 길은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에 멈칫했지만, 칼을 거두지는 않았다. 이자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검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하자 몸을 떠받친 바람기둥이 상승했 다. 계단을 통하지 않고 탑 꼭대기로 올라갈 작정이었다. 길은 머뭇거리며 침대 쪽을 돌아보 았다. 그가 걱정하던 대승정은 여전히 죽은 듯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다가가서 노인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무사했다. 그는 잠시 안도하며 땀에 젖 은 머리카락을 쓸고 다시 올라가는 쪽 문으로 뛰었다. ** “하아- 하아- “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지친 발이 자꾸 꺾여 몸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에 잠깐 붙들 렸던 기억이 계속 카라를 뛰게 만들었다. 길고 매끈한 비둘기빛 손가락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와 목을 잡던 기억. 그 손가락 끝에 있던 눈, 이름없는 신상의, 돌처럼 단단한 황금빛 눈 동자, 강철 같은 손가락이 목을 파고들던 아픔. 다행히 카라는 그 때 몸을 뺄 수 있었다. 신 상의 자세가 불안정했고 손이 하나뿐이었기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곁을 스쳐 지나가던 잘려나간 팔의 단면이 눈에 선했다. 카라는 벽에 매달리듯이 해서 계속 올라갔다. 다행히 계단 폭이 좁아서 신상은 날개를 펴지 못했다. ‘……왜?’ 발을 질질 끌어 몸을 움직이면서도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나는 저 신상에게 서 도망쳐야 하는 거지? 왜 저것은 나를 그토록 증오하지? 목을 파고들던 손가락보다 더 두 려운 것은 텅빈 금색 눈이었다. 증오, 증오, 증오, 분노밖에 깃들지 않은 눈. ‘날 죽이려고 하는 걸까?’ 그 생각을 하자 정말로 오싹하는 한기가 발밑에서부터 밀려올라왔다. 카라는 숨을 크게 들 이마시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불빛 아래로 빛나고 있는 황금빛 눈동자 를. 끝나지 않는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카라는 아까 들어갔던 방의 문을 지나쳐,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그 때 위쪽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 카라- 카- 카- 카강- 소리가 텅빈 벽을 타고 날카롭게 메아리쳐 금방 알아들을 수가 없었 다. 카라는 막 고꾸라지려던 몸을 세우며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것만 같 던 나선형 계단 어디쯤엔가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 혹시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하는데 다시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카라?” - 카라, 아래에 있니? “루이!!” 카라는 루이의 음성을 알아듣고 환성을 올렸다. 이자드의 목소리가 너무 울려서 잘 알아들 을 수 없었던 것과 달리 실제 소리로 울리지 않는 루이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눈물이 핑 돌 았다. 하지만 갑자기 안심해버린 탓이었을까. 무릎이 꺾였다. 당황해서 발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일 단 힘이 빠진 다리는 더 이상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반가움과 안도와 당황과 초조감이 교차했다. 숨을 몰아쉬었다. “키리리리…” 그 때 강한 손가락이 발목을 움켜쥐었다. ** 푸른 불꽃이 일고, 날개달린 악마가 나타나고, 이자드가 화살을 피해가며 올라가고, 길이 미 친 듯 탑위로 달려올라가며 대승정원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 몇 십분간, 가장 냉정하게 할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진이었다. 그는 일단 마구잡이로 화살을 쏘던 이 들을 제지했다. 곧 이자드의 회색 로브 자락이 탑 꼭대기로 사라졌다. “아니, 저, 저-!”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활을 멈추라 하시다니!” 진은 차가운 눈으로 펄펄 뛰는 승정들을 돌아보았다. 어둠이 그의 눈에 떠오른 경멸을 감춰 주었다. 제일 늦게 달려온 고위 승정은 삿대질도 서슴지 않았다. “제정신이시오! 대승정님의 안위가 달려있는 판국에-“ “더할나위없이 제정신이오. 대승정을 구할 마음이 있거든 지금 당장 정화의식을 준비하세 요. 당장!” “지금 무슨 소리를-“ “내 말대로 하십시오!!” 진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승정은 찔끔 기세가 꺾이는 것 같았지만 아직 완전히 승복한 눈은 아니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적당히 구슬러주지 않으면 말귀를 알아먹 지 못하니. 그는 속으로만 그렇게 비야냥거리며 강한 어세로 밀어붙혔다. “본래 탑 안에서는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시겠지요? 오늘 낮에 있었던 살육, 그 더러운 피를 아직 정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오염을 씻어내면 저 안에 든 악마나 마법사나 힘을 잃어버릴 겁니다.” 그제서야 그를 둘러싼 일단의 무리들에게서 아, 하는 납득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는 냉정 하게 승정들을 돌려세웠다. “하지만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요? 혹여나 대승정님께…” 누가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하는가 보니 시진의 단정하고 성실한 얼굴이 보였다. 진은 내색 하지 않고 속으로만 코웃음을 쳤다. 미련한 것들. 이미 반 이상 죽어있는 대승정을 해치려고 침범하는 자가 있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눈이 멀다니. 그는 가능한 한 담백하게 대답했다. “길이 올라갔으니까 괜찮겠지.” 곧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함께 고위 승정 네 사람과 마흔 명의 승원들이 탑을 둘러싸고 방진 을 짰다. 뛰어나오는 속도는 느렸을지 몰라도 진을 짜는 속도는 나쁘지 않았다. 진은 그림자 진 녹색 눈으로 탑 위를 올려다보았다. 임시변통의 정화제가 시작되었다. ** “카라!” 다시 한 번 불러보았지만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자드는 몸을 굽혀 아래를 내 려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나선계단 한가운데로 기둥이 지나가고, 기둥과 계단 사이의 공간 은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제서야 아래에서 약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발이…안움직여요…와악! 이거 놔!” 질겁을 한 목소리였다. 루이가 당황해서 말했다. -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미친 건가…왜 카라를 쫓고 있는 거지? 야, 빨리 내려가봐! “기둥과 계단 사이가 너무 좁아.” 그는 다시 한 번 아래쪽을 들여다보고 외쳤다. “카라! 옆으로 뛰어내려라!” “에에엑!” 카라는 발목을 잡은 비둘기빛의 손가락을 떼어내려 애쓰다 말고 괴성을 질러 항의를 대신했 다. 분명 좁은 공간이라고 해도 카라 정도면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하지만 이자드는 다시 외쳤다. “내가 받을 테니까 안심하고!” 그는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아래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카라가 떨어지는 것을 주문으로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카라가 뛰어내리는 순간, 그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카라는 아직도 끙끙거리면서 발목을 파고드는 손가락을 떼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신상의 힘 은 그녀가 대응하기에 너무 강했다. 게다가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차올랐다. 분명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눈이었지만, 카라를 보는 눈은…… 갑자기 발목의 손아귀힘이 약해졌다. 신상은 아래쪽을 돌아보았고, 카라는 발버둥치던 그대 로 밀려나가 기둥 옆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언뜻 보니 신상은 갈색 머리 남자 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자드는 기둥 옆 공간으로 무엇인가가 떨어진다 싶자 바로 준비해둔 주문을 폈다. “프라브리띠, 판차 탄마트라스 아닐라 암사! Pravritti, Panca tanmatras Anila Amsa!" 그 순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달렸다. 탑 안 공기가 정지했다. 이자드는 딱딱하 게 굳어졌다. 안색이 급변했다. 1초도 되지 않은 시간차였다. 바람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았 다. 주문이 먹히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이 탑 안의 모든 힘을 봉쇄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라 는 받아주는 손 없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탑 아래에서는 승정들이 임시 변통의 정화제를 마무리짓고 있었다. 이자드는 찰나간에 결정을 내렸다. 탑 안의 힘을 봉쇄한 결계가 있다면 깨뜨리고 카라를 받 는 수밖에 없다. 그는 위험을 각오하고 더 강하게 주문을 밀어붙였다. 카라는 떨어지고 있었다. 길의 칼이 신상의 가슴을 꿰뚫었다. 단말마의 고통이 신상에게서부터 시작되어 카라를 관통하고, 기둥을 따라 아래 위로 뻗어나 갔다. 길은 팔에 저릿한 아픔을 느끼고 칼을 떨구었다. 이자드는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주문을 멈추고 말았다. 카라는 귀가 아니라 온몸을 통해 울리는 거대한 합창을 들었다. 풀. 어. 줘. 일시에 사방이 투명해졌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날아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고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빛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부셨다. 주위 풍경이 잘 들어오지 않았 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서서히 카라는 주위의 폐허를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폐허였다. 말 그대로 폐허라고밖에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자세히 보니 반쯤 무너 지다 만 신전 같기도 했다. 카라는 잠시 멍청해졌다가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얏!" 아프다. 등 뒤의 돌기둥을 쿵쿵 두들겨 보았다. 촉감도 소리도 진짜같았다. 영문 모를 노릇이었다. 탑에서 떨어져내리던 것까지 기억에 남아있는데…이곳에는 탑도 계단도 신상도, 이자드 루 이도 없었다. 여기에는,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끝없이 이어진 회색 지평선과 돌기둥들 뿐이 다. 반쯤은 무너지고, 반쯤은 바람에 깎인 돌기둥들 뿐. 너무나 적막하고, 살아있는 것은 아 무것도 없는 공간. 희미한 그림자는 이미 태양이 하늘 중앙을 넘어서서 서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을 알려주 었지만, 올려다본 하늘에 해 같은 것은 없었다. 너무나 조용하다.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움 직이는 것은 카라 자신밖에 없었다. 발끝으로 흙을 비비며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 이 아주 많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별로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피곤했다. 속이 울렁 거렸다. 자신이 통째로 뒤집혀서, 안이 밖으로 나오고 바깥이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 다. 혹시 내가 죽은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대답 같은 것은 없었다. 혹시 이건 꿈이 아닐까. 문득 카라는 돌기둥을 돌아보았다. “신상…” 그 단단하고 서늘한 팔과 같은 감촉이었다. 카라는 조심스레 그 돌기둥을 어루만지며 시선 을 위로 올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까 돌아보았을 때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는데, 지금 둥 그렇게 늘어선 돌기둥 위에 각각 상이 하나씩 서 있었다. 검은 색 그림자, 푸른 색의 물고 기, 붉은 빛깔의 새. 그리고 그 옆에는… 문득 카라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목을 움켜쥐던, 발목을 붙잡 던 신상의 금색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길의 칼이 심장을 뚫을 때 내지르던 단말 마의 괴성도…내면에서, 혹은 허공 어딘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만들고 내가 부숴버렸다. 내가 태어나게 하고는 내가 죽여버렸다.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고, 내가… “그만!” 카라는 고통스럽게 몸을 구부린 채 속삭였다. “그만! 그만! 그만해!” 높아진 비명소리에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이 쭈볏 곤두설 듯한 귀곡성, 처절한 통곡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가 들려오자 심장을 짓부수 는 것 같던 통증은 사라졌다. 카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몸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듯한, 혹은 다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엄습했다. 네 개의 상이 서 있던 기둥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낯익은 빛의 기둥이 보였다. 카라는 기억을 더듬으며 눈을 깜박였다. 옅은 녹색빛으로 이루어진 기둥…울음소리는 그 안에서 들렸다.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아이들, 아주 어린 아이에서부터 소년티가 나는 아이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이 기 둥 속에 갇혀 있었다. 더 들어갈 틈도 없이 꼭꼭 포개어져서 기둥 뿌리에서부터 저 위까지 차곡 차곡, 아이들이 겹쳐져 있었다. 서로를 밀쳐 가며 얼굴이 짓눌려가며, 투명한 빛의 벽 을 두들기면서 바깥을 향해 아우성치고 있었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에 들었던 그 합창 소리가 생생했다. 풀. 어. 줘. 카라는 당황했다. 어떻게든 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벽 안에서 벙긋거리는 작은 입들이 처참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돌조각이 잔뜩 널려 있던 폐허였건만 찾으려 하니 마땅한 돌맹이가 없었다. 카라는 눈에 띄는 대로 돌맹이를 주워 집 어던졌다. 팅- 튕겨나온다. 다시 던졌다. 튕겨나온다. 더 큰 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길쭉하 고 날카로와보이는 돌이 있었다. 집어던졌다. 그리고 던지는 순간에 깨달았다. 그 돌에서 피 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핏방울이 떨어졌다. 돌로 된 팔뚝이 기둥에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발했다. 그 소리는 아래로 위로 일파만파 퍼져나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커져나갔다. 녹색 빛이 깨어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눈부신 빛이 굉음을 대신했 다. 그리고 부서진 돌조각들이 비처럼 떨어져내렸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돌 조각들.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살아 있었던 돌의 파편들… 카라는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워졌다. ** 루이는 카라의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 절레 내저었다. “열이 내리질 않아. 벌써 사흘째 잠에서 깨질 않으니 원. 뭔가 되게 잘못된 거 아냐? 야, 그냥 너 회복되는 거 기다리지 말고 카라 데리고 튈까?”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서 카라의 잠든 얼굴은 창백하게만 보였다. 목덜미의 멍은 흉한 자주 색으로 변해가고 발목은 붓기가 빠질 줄 몰랐다. 루이는 상처를 살피며 다시 한 번 투덜거 렸다. “쳇. 이런 어린애를 지하감옥에 처넣다니 인정머리 없는 놈들.” - 사악한 마법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한 처사겠지. 이자드는 조금 지친 듯한 목소리였다. 루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 회복되려면 멀었냐? 꽤 크게 다친 모양이네.” 이자드는 쓰게 웃기만 했다. 주문이 도중에 멈춰버리면 갈 곳을 잃은 힘은 고스란히 마법사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흘 전 ? 정확히는 두 번의 낮이 있기 전의 밤, 위험을 무릅쓰고 밀어붙이던 주문이 깨지면서 돌아 온 반탄력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카라가 떨어져 내리고 길이 신상을 찌르고 주문이 정지 해 버렸던 그 순간에 일어난 충격파가 문제였다. 루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역시 안돼? 간단한 주문도?” - 흠…장소만 좀 달라도 수월할 텐데. 이자드는 벌써 몇 번이나 되풀이한 탄식을 다시 한 번 내뱉았다. 이 탑은 외부의 자연력과 차단되어 있었다. 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속을 다친 상태로는 이용할 수가 없 었다. 물론 이자드가 일시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해도 루이가 힘으로 밀어붙여 빠 져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카라를 데리고 감행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데다 지난한 길일 터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제까지 지하감옥에 갇힌 신세를 참아내며 카라가 깨어나기를 기다린 것인데, 계속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며 짜증을 부리는 것을 보니 이제 루이의 인내심도 바닥이 난 듯 했다. 그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방 안을 서성이며 또 중얼거렸다. “아, 역시 안되겠어. 카라도 밖에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걸지도 몰라. 나가자.” - 치료 문제가 아니라니까. 이자드는 우울하게 대꾸했다. 루이는 벌컥 짜증을 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다행히 이자드는 그 말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 순간 두터운 문이 덜컹 하고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섰고, 루이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어라?” - 흠? 루이와 이자드는 등을 떠밀려 고꾸라질 듯 감옥 안에 들어온 인물을 알아보자 감탄사를 뱉 고 말았다. 쓰러질 듯 벽에 몸을 기대며 루이를 쳐다보는 청년은 다름아닌 길이었다. 루이는 어리둥절해서 엄지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이녀석이 여길 들어왔지?” - 바깥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인데. 이자드는 시침 딱 떼고 태연한 얼굴로 그를 감옥에 밀어넣던 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 이 나라에서 쿠데타가 가능할 리는 없겠고, 무슨 누명이라도 씌운 건가… “헤에. 누명? 어떤?” 길이 이상한 눈으로 루이를 쳐다보았다. “혼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마법사? 미치기라도 했나? 아니…잠깐만. 머리카락이…” 그는 이제서야 루이를 제대로 알아봤는지 몸을 세우며 입을 벌렸다. 루이는 아차 했지만 얼 굴을 가릴 방법도 없었다. 한껏 당긴 활줄처럼 긴장한 길이 다그쳐 물었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 대체 그 마법사는 어디있지?” 루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에에, 그게 말이지……곧 보게 되긴 할 텐데 말이야. 여기 있긴 있거든?”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길은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라고 해도……그나저나 그쪽은 어떻게 된 거야? 정말로 누명을 쓴 거야?” 길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악마의 패거리라는 노친네들의 말을 곧이듣고 싶어지는군.” 방안을 휘돌아보던 길의 시선이 누워있는 카라에게 꽂혔다. 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루이가 기다렸다는 듯 뇌까렸다. “악마 좋아하시네. 이런 꼬마애를, 그것도 다친 아이를 감옥에 처넣고 할만한 소리다.” “내가 한 일은 아니다.” 길은 화가 난 듯 단호하게 말하고서, 찔리는 데가 있는 듯 우물우물 변명을 덧붙였다. “말리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할 말이 없지만. …그래서 그 애는 괜찮나?” “안 괜찮아.”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이자드였다. 물론 한쪽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 혹시 진이 우리 문제를 이용한 건 아닌가? “음? 흠…진이 우리 문제를 이용한 게 아니냐는데.” 길은 얼굴을 굳히며 허리께에 손을 가져갔다가, 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납게 얼굴을 찌 푸렸다. “너희가 정말 사악한 존재라면 난 진에게 맞선 내 결정을 후회해야 할 거다. 말해봐라. 대 체 누구와 말하고 있는 거지?” “이자드- 네놈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사악한 마법사와 얘기 중이시다. 그런데 무슨 결 정? 정말 그녀석이 우리를 이용한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는데. 마법의 일종인가?” 루이는 흘긋 눈을 들어 허공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는…” “않아.” 말을 시작한 것은 루이였지만, 맺은 것은 이자드였다. 길은 다시 한 번 반사적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가 빈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는 불가사의한 것을 보는 눈으로 이자드를 쳐 다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대체……” 이자드는 카라의 상태를 살피며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엇갈리기만 하는 답답한 대화는 그만두지. 내가 악마든 저주를 썼든 지금 중요한 건 우리 가 같은 신세라는 점 아닌가?” 길은 아직도 판단이 안 서는지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이자드는 카라의 몸을 안아올리며 말 했다. “그 망토좀 주겠나?” “뭐?” “망토 말이야. 피가 묻어있는 건 아니겠지?” 길은 머뭇거리며 입고 있던 망토를 끌러 넘겨주었다. 이자드는 망토를 받아 살폈다. “먼지투성이로군.” 길이 멍청한 얼굴로 보는 사이 그는 망토를 탁탁 털어 바닥에 깔더니 그 위에 카라를 눕혔 다. 카라가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이자드는 곁에 앉아서 다시 카라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내리지 않았지만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좋은 징조였다. 땀을 닦아줄 깨끗한 수 건 하나 없다는 것은 문제였지만. 마법만 다시 쓸 수 있다면…그는 길을 돌아보고 빠른 속 도로 말했다.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군. 나와 루이는 원래 같은 시공간을 공유해. 낮에는 그가, 밤에는 내가 나오지. 저주에 걸렸냐느니 하는 시시껄렁한 질문은 그만두고, 진이 무슨 말을 했지?” 길은 입을 약간 벌렸다가 다물며 도전적으로 이자드를 쏘아보았다. “내가 왜 그걸 말해야 하나?”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건가?” 의외로 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나 어조는 담담했지만 의연하고 강했다. “우리의 존재가치는 이 나라를…백성들을 지키는 데 있어. 진과 나의 생각이 다른 것은 사 실이지만 결국 목적은 같아. 나는 이 나라가 변화하고 외부에 개방되어야 한다는 진의 생각 에 반대하지만,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기꺼이 그 대가를 치룰 용의가 있네.” “허. 비장하고 멋진 말이긴 한데 저쪽 생각은 다를 성 싶군.” 이자드는 들릴락말락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똑바로 길의 눈을 마주보고 물었다. “그 친구가 바라는 게 정말 지키는 것이라고 확신하나?” 길의 눈이 흔들렸다. ** 진은 오랫 동안 대승정 곁에 앉아 있었다. 죽음과 삶 사이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노인 곁에 서, 미동도 없이, 깎아놓은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늘 그랬듯이 방 안에는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승정이든 승원이든, 죽을 때가 오면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막으려 하지도 않 는다. 아무리 절박하게 살아 돌아오기를 바란다 해도……또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어 차피 이 나라에 봉헌한 생명은 모두 이 곳으로 돌아온다고 믿었으므로. 진은 문득 손을 내밀어 대승정의 코끝에 갔다대었다. 시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지만 희미하 게 숨이 느껴진다. 진의 단정한 입매가 보기 흉하게 비틀렸다. “모질게도……” 그의 속삭임은 방 안의 침묵 사이로 빨려들어갔다. 침묵은 그의 속말을 빨아들였다가 긴 탄 식을 토해냈다. 진의 눈동자가 열에 들뜬 사람의 그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여유있는 미소 나 조롱기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뒤틀린 입술 끝으로 악다문 턱이 떨렸다. 그의 눈은 환영을 쫓는 것처럼 방 이쪽 저쪽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고통에 쥐어뜯기는 듯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약간 느슨해진 입술 사이로 역시 침묵에 삼키울 소리들이 새어나왔다. 이름들, 수십개, 수백개의 이름들…그는 점점 빠른 속도로 이름을 부르다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아하하하하하……” 진은 벌떡 일어나서 어릿광대처럼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대승정의 침대를 향해 허리를 굽혔 다. 조금 전까지의 고뇌에 짜부라질 듯한 인물은 간 데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예의 여유로운, 밉살스러운 미소를 띠우며 대승정의 몸을 안아들었다. 이미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노인의 몸은 몹시도 가벼웠다. 그는 노인을 짐짝처럼 들고 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귓가로 침묵이 뱉어내는 무거운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사자(死者)의 기둥은 깨어졌다. ** 뜨거운 열탕 속에 빠진 것 같았다. 카라는 땀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툭, 하고 뭔가가 이 마에 떨어졌다. 시원하다. 이마에 와닿은 것은 크고 차가운 손이었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 리가 계속되다가 조금씩 조금씩 의미를 담은 말소리로 변해갔다. 목소리는 둘이었다. 굴곡없 는 낮은 목소리와 또 하나. 가까이에서 들리는 낮은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카라는 안도했다. 머리가 무거웠고 무 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연결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고 이자드와 함께 있었다. 카라는 긴 숨을 뱉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잠이, 이번에는 제대로 된 편안한 잠 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목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비몽사몽의 상태로 있 는데 문득 이자드의 손이 떨어져나갔다. 허전한 느낌이었다. 이자드와 또 한 사람의 대화가 조금씩 잘 들리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진은 지금과 많이 달랐어. 모두 같은 나이였지만 그만은 형 같았지.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 것도, 하나씩 아이들이 줄어들 때마다 남은 아이들 을 달래준 것도 진이었다. 나도…” 말소리가 잠깐 끊겼다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째서 진이…어째서 진이 그런 생각을?” “짐작가는 게 없나? 정말로?” 텅 빈 침묵. 이자드가 다시 말했다. “하나씩 줄어든 아이들은 어디로 가지? 죽는 건가?” 여전히 침묵. 이자드는 할 수 없지, 라고 말하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어디 내가 맞춰볼까. 후보자에서 떨어져나갈 때마다 그 아이들 모두 탑에서 죽었겠지? 이 곳의 결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 혼을 모두 가둬서 그 힘으로 모래의 바다를 강화 하고 그림자 계곡을 유지했겠지. 이 땅이 고립되도록, 영원히 성스러운, 척박하고 경건한 땅 이 될 수 있도록! 틀린가? 아이들을 이용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쨍 하고 울려서 카라도 흠칫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혼곤하게 몸을 잡아당기던 졸음이 멀어져갔다. 이자드는 아직 카라가 깬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 갑자기 그 위에 소리없는 목소리가 겹쳐졌다. 루이였다. - 나는 어째 그 녀석 마음이 이해가 가는걸. 상대방은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절박하게 속삭였다. “나도 그렇고 다른 아이들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어. 그건 불평할 일이 아니었어.” “그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군.” 이자드는 냉랭하게 대꾸하고 이어서 말했다. “목적이야 어쨌든 녀석에게 이용당해줄 마음은 없어. 게다가 카라를 죽이라고 했다는 부분 은…” “내가 반대하리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아직도 그를 옹호하고 싶나?” 상대방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음울한 신음소리만 냈다. 소리가 들리는 지점이 낮아진 것을 보니 앉은 것도 같았다. 마침내 그가 다시 물었다. “결계는, 정말로 깰 수 있긴 한 건가?” “이미 반쯤은 깨진 상태야…아니, 잠깐만.” 이자드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풀렸다, 지금…” - 응? 뭐야. 회복된 거야? “아니. 구속력이 돌아왔어. 탑의 결계는 아직 그대로지만… 좀 더 근본적인 뭔가가 사라졌 어……사자(死者)의 기둥이 무너진 건가?” 이자드의 목소리가 올라간 만큼이나 소스라치게 놀란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뭐라고?!” 카라도 저도 모르게 움찔 하다가 신음소리를 뱉고 말았다. “카라?” “엑…” 카라는 대답대신 앓는 소리를 냈다. 혼곤한 기운이 사라졌다 했더니 온몸이 아팠다. 덕분에 조금 전 사자의 기둥에 대해 들었을 때 떠오른 무엇인가가 머리 속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자드가 카라를 안아 일으켰다. “나…” 목소리가 잔뜩 쉬어서 이상하게 나온다. 카라는 마른 기침을 하며 목으로 손을 올렸다. 이자 드가 물을 내밀었다. 꿀꺽꿀꺽 쉼없이 마시고 나자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목이 아 팠다. 이자드가 물그릇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 말아라. 다친 데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카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쾅! 쾅! 문 두들기는 소리에 맞춰 물그릇이 흔들렸다. 이자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쪽을 돌 아보았다. 길이 초조한 얼굴로 문을 두들기다 못해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지금 대체 뭐하는 건가?” “확인해 봐야지. 정말로 사자(死者)의 기둥이 무너졌다면…정말로…” “무너졌다면?” 길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육중한 문을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움푹 패였지만 부 서지지는 않았다. 이자드는 허공을 사이에 두고 문을 가리키며 입 안으로 무슨 말인가를 중 얼거렸다. 딸깍,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문이 열렸다. 길은 문에 부딪치려던 몸을 겨우 바로 세우며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카라를 안아들고 있었다. “나가려는 건가?” “물론.” 이제 카라도 깨어났고 그의 힘도 회복되었으니 감옥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자드는 문 앞에 멍청히 선 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넨 나가지 않을 건가?” “나는……” 길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자드의 앞을 가로막은 꼴이었다. 이자드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나는…………” “여기 있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 길이 속삭였다. 건장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카라는 경이로운 눈으로 젊은 얼굴에 깊은 고 통의 주름이 패이는 것을 보았다. 이자드가 나직이 말했다. “되고 싶지 않다면 도망쳐 버려.” 길의 입에서 끔찍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대들은 이해 못해. 이해를 못해……” 이자드는 잠자코 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앞을 막고 서있던 길은 의외로 힘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이자드는 문 밖으로 나섰고, 카라는 고개를 빼고 길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어깨를 늘어뜨린 채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카라는 의문어린 눈으로 이자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루이가 먼저 했다. - 저대로 놔둬?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스스로 결정하겠지.” 그는 은폐 주문을 걸고 천천히 탑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조용하던 승원 안이 사흘 전만큼이 나 시끄러웠다. 게다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분주하기만 했지 질서가 잡혀있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허둥거리며 뛰어다닐 뿐이었다. 처음에는 탈출이 들 킨 건가 싶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인 듯 했다. 고위 승원들이 모조리 나와서 갈팡질팡하 고 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보고 있노라니 이자드가 아는 얼굴이 저쪽에서 뛰어들었다. 시진이었다. “길 님을…” 그는 불러서는 안되는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격하게 외쳤다. “이렇게 되어서까지 망설이십니까! 지금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그 분 뿐이잖아요!” 고위 승원이 얼빠진 얼굴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더니, 쓰러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시진은 더 기다리지 않고 다시 뛰쳐나갔다. 방향은 보나마나 탑의 지하 감옥이었다. 이자드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느라 지체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연이어 일어난 이변의 책임을 뒤집어쓰기 쉬운 위치였고 완전히 속수무책이 되었던 며칠간은 되살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고 그들은 곧 성문을 나섰다. 그런데 성문 바로 앞에 시체가 있었다. 아직 숨은 가늘게 붙어 있었으니 시체는 아니겠지만 이미 절반 넘게 저승으로 넘어간 사람. 그리고 그 곁에는 아마도 그 반 시체를 여기까지 데 려다 놓았을 인물이 앉아 있었다. 카라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다가 꺽꺽거리는 쉰 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진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더니 히죽 웃었다. “아하, 꼬마 아가씨로군. 덕분에 사자(死者)의 기둥을 깼는데, 보답할 처지가 못되어 유감이 군요.” 이자드는 진이 단정히 뉘어놓은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난리가 났더군. 곧 쫓아나올 거야. 그걸 기다리는 건가?” 진은 어깨만 으쓱였다. 이자드는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곁을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 잠깐 멈춰서 서 진을 돌아보았다. “자네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는 건가?” 진은 어둠 속에서 그를 돌아보았다.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잘 보 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쾌활했다. “내가 말인가요?” “아니면 더 이상 돌아오기가 지겨워서 그 짐을 길에게 떠넘기려는 건가, 멜카르트?” 카라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눈만 굴렸다.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니 루이도 마 찬가지인 듯 했다. 진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길이 그러더군. 자네가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성 안쪽이 한층 소란스러워지더니 우왕좌왕하던 횃불이 질서를 찾았다. 진은 고개를 잠깐 옆으로 돌려 그 모습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니 내가 매듭지어야겠지요. …멜카르트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이자드는 고개만 끄덕였다. 카라의 불만스러운 얼굴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그 뜻을 말하는 대신 조용히 그렇게만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나도 그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빛을 등진 그림자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진은 삐뚤어진 미소를 흘 리며 손을 들었다. “난 파렴치한 놈이니까, 나중에 또 보게 될지도 몰라요.” 이자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게 빚이 있는 거 잊지 말게.” 그는 진이 의아한 표정을 짓기 전에 마법을 전개했고, 그들은 진과 길이 다시 맞닿뜨리기 전에 그곳을 벗어났다. 뒤쪽 어디에선가 비통한 노성이 들려왔지만 이자드도 카라도 돌아보 지 않았다. 그들은 덜커덕거리는 돌의 강의 굉음이 가까워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자드는 강이 가까워져서야 속도를 늦추더니 대뜸 말했다. “아무래도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겠다.” 카라는 버둥버둥 내려서서 걷겠다는 신호를 하며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자드는 카라를 내려주면서 말했다. “너 말이다. 예전에도 위험했지만 이번에 보니 한결 더하지 않나.” - 그건 그래. 그 신상이 네 작품이라니 실망이긴 하지만… “실망?” 카라는 목에 손을 갖다대며 속삭이듯이 되묻고 얼굴을 찌푸렸다가 폈다. 그리고는 한 발자 국 물러서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자드, 루이…오랜만이예요. 잘 지냈어요?” 난데없는 점잖은 인사에 이자드도 잠시 얼빠진 얼굴을 보였다. 카라는 뒤이어 이제 인사도 했으니, 라는 얼굴로 따져 물었다. 목은 여전히 아팠지만 궁금증이 더 우선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게 다 무슨 소리예요? 멜카르트는 무슨 뜻? 그 할아버지는 왜 데리고 나온 거예요?” - 게다가 카라가 사자(死者)의 기둥을 깨는 걸 도와줬다는 건 무슨 소리야? 루이까지 질문 공세에 합세하자 이자드는 질렸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나씩, 하나씩.” 카라와 루이가 입을 다물자 그는 짧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멜카르트는 원래 ‘왕’이라는 뜻이다.” “왕?” - 왕? “왕.” 그들에게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진은 입 안으로 속삭였다. 그는 차분하게 앉아서 길을 기다 리고 있었다. 그는 조소를 띠며 누워있는 대승정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녀석, 언젠가는 네가 비밀을 밝혀줄 거라 믿었으니까 몸이 달았겠지. 너나 나나 정말 죄 많은 목숨이야. …내가 지친 이상으로 너도 지쳤겠지. 이걸로 끝내자. 이걸로.” 다급한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로 길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진은 씩 웃으며 대승정의 가느 다란 목에 손을 얹고, 힘을 주었다. 손에 힘줄이 불거지며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정 적을 꿰뚫었다. “안돼!!!” 길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진은 마지막으로 확실히 목을 꺾으며 속삭였다. “안녕히, 친구여. 다시는 만나지 말길.” 콰직. 노인의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진은 천천히 그 머리를 떨구며 고개를 들었다.길 은 물론이고 그 뒤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비현실적인 풍 경처럼 눈에 들어왔다. 길이 칼을 꺼내들고, 손에 움켜쥐는 모양도 그럴 수 없이 비현실적이 었다. 그에게 검 다루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자신이었는데. 그 순간에 어째서인지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가장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야심과 사명감에 불타 오르던 젊은이와, 깊은 신앙심과 더불어 자신을 박해하는 무지한 이들에 대한 증오심이 골 수에 박혀 있던 어느 신관이 사람들을 모으던 일이. 영원히 이 땅을 수호하리라 맹세하며 어리석은 굴레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그 일들이. 진은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비틀린 웃 음을 지으며 동시에 길에게 가책을 느꼈다. 네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게 되어 미안하군. 지금 말고 다시는 미안해할 일도 없겠지만… 이제 겨우, 자유다. 그는 그제서야 겨우 마음 속에 있던 결계까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길의 칼날을 보면서 가 만히 앉아 있었다. “냐-“ 고양이가. 진은 순간 마비상태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분명 데리고 나오지 않았 는데, 회색 털실뭉치 같은 통통한 고양이가 다리 위로 기어오르며 목을 울리고 있었다. ** - 이해할 수 없어. 루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이자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파류나도… 루이는 그 이름을 꺼내다가 말을 멈췄고, 이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는 겨우 졸음을 이 겨내며 이자드의 설명을 듣다가 잠들어 버렸다. 돌의 강이 내리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커졌 다. 이자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전혀 다른 일이다. 전혀 다르지만 그 일을 연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단지 왕이라는 이름만으로 다른 많은 사람의 운명과 생명을 짊어지고 가야 할 이유 를 이해할 수 없었다. 파류나가 스스로 멸망을 택해야 했던 이유 역시도. 이자드는 잠든 카라를 내려다보았고, 루이는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난 인정 못해. 파류나가 부른 게 아닐 거야. 분명 뭔가가 있어. 뭔가가. 이자드는 대꾸하지 않았다. 벌써 20년째 되풀이해온 논쟁을 또 반복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그는 당장 카라의 힘을 제어할 만한 물건이 뭔가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타났던 거대한 짐승들도 카라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번처럼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그녀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우연찮게도 사자(死者)의 기둥과 부딪치면서 소멸해 버린 것 같지 만,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 아아함. 참, 빚이란 건 뭐야? 그 결계는 결국 네가 깬 것도 아니잖아? 루이가 하품을 하다 말고 물었다. 이자드는 그제서야 한 가지를 생각해내고 웃는 듯 마는 듯 입술끝을 당겼다. “고양이.” - 응? 고양이? 이자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물보라처럼 가느다란 은빛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38] - 난다의 이야기, 두번째 이자드 루이와 재회한...혹은 처음으로 만난 다음 날, 아침 일과를 끝내고 나서 손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보니 청색의 방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그림을 보고 있었다. 청색의 방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한 곳이다. 세부적인 면까지 모두 기억해내 는 용족이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조금은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루이의 모습에 문간에서 멈춰섰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붉은 기 도는 금빛의 곱슬머리가 보인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한장의 그림을 하염없이 쳐다보 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내가 본 광경도 아니었다. 오래 전에 분실되어버린 그림, 이야기만 듣고 그린 그림이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채우고 있는 은빛의 성, 층계처럼 겹겹이 올라가는 성벽 꼭대기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커다란 은색 의 날개를 펴고, 손에는 길다란 은빛 창을 든 사람...아마 본래 존재했던 그림보다 크게 그려 졌을 것이다. 나는 한참동안 넋을 잃고 그림을 바라보던 루이가 천천히 그림 속의 사람에게 손을 뻗는 모습을 보고 입을 떼었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루이는 그제서야 나를 돌아보았다. "이 그림들......네가 그린 건가?" "예. 취미생활이거든요." 나는 유심히 그를 살폈다. 긴나라족에 대한 것은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직접 봤던 장면도 있지만 듣기만 하고 상상해서 그린 것도 많습니다." 그는 내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그림에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기억은 모조리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일부만, 잊고 싶었던 것들만 지워버린 것 일까? 혹시 이렇게 긴 잠에 들 때마다 죽음을 경험하듯 그 전의 과거는 모두 잊는 걸까. 내 가 아는 것은 너무 적었다. 루이는 한참 동안 파류나 왕의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그 뿐이었다. 실망스럽게도 그는 미련없이 고개를 돌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자드에게 대충 듣긴 했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쓴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내가 하려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나는 이자드 루이 가 카라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기를 바랬고, 그래서 혹 카라가 왜 죽음을 택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이자드 루이에 대해 알아낸다면 그것은 부수적인 정보에 지나 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글쎄요. 이곳 도서관에서 찾아낸 자료가 있긴 한데..." 루이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도서관이라고? 이런 더운 나라에?" "네. 여기엔 정말 오래된 도서관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 정착한 이유중 하나죠." "하지만, 이런 나라에서 종이가 보존이 잘 돼?" 그는 '이런' 이라고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밤낮의 기온차가 심한 데다가 습기가 많은 기후를 뭉뚱그려 가리킨 것이리라. 이런 환경에서는 종이를 오래 보관할 수 없다. "종이가 아닙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신호를 보냈다. 제자들이 돌판을 한아름씩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내 지 시에 따라 돌판을 바닥에 늘어놓고, 정중한 인사와 함께 나갔다. 나는 돌판 앞을 왔다갔다 하며 설명했다. "제가 여기 처음 도착했을 때 이나라에서 마법이란, 돌에 정밀하게 조각을 새기고 그것을 보존하는 힘일 뿐이었죠. 지금은 제가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지만......왜 그러시죠?" 루이는 도무지 설명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듯한 얼굴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신기한 듯한 눈길이 과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새삼 네가 정말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표정도 그렇고...용족과는 전혀 다른걸." 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찌푸리거나, 화를 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속에 그가 용족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장해 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 눈동자는, 내 냉정한 마음과는 다르게 반응했던 것일까. 루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말했다. "눈을 보면 확실히 용족이네." "그렇겠지요. 이 눈이 제 것인 이상 저는 용족입니다. 불구이든 아니든...결코 인간이 될 수 는 없어요. 하지만 확실히 인간의 특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끝없 는 갈망이고, 그런 면에서 저는 분명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루이는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내 눈은 벽 어딘가에 걸려 있었던 얼굴을 찾아헤맸다. 나와 꼭 닮은 얼굴, 내 어머니의 얼 굴. "몇 백년이라는 시간동안 용족과 대등한 힘을 가지기 위해 해왔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 고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가질 수 없는 것의 대체물이었을 뿐,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것 - 그 치명적인 결여만큼은 보상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글쎄, 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걸." 벽을 헤매던 내 눈은 카라가 죽었을 때 그 초상화도 태워버린 것을 기억해 내고 루이에게 돌아왔다. 그의 성격에는 변화가 없다. 언제나 솔직한 말투. 아무래도 좋다. 그가 이해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용족으로 태어났다면 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원하는 것이 곧 의지이며, 의지가 곧 현실인 삶을 살았을 것이며, 불가능을 원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흠." 이번에는 루이도 긍정하는 것 같았다. 그가 그리웠다 - 지금 눈앞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 가 그리웠다. 이자드도, 처음 만났을 때 한바탕 싸웠던 일도 그리웠다. 그 모든 생생한 기억 들이 그리웠다.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을 하면서도 그것이 현재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 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가. 나는 또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말을 잇는다. "덕분에,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덕에 전 누구보다도 카라를 가까이 이해할 수 있어요. 불가능을 모르는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힘을 갖지 못한 저와, 불가능을 구현하는 힘을 가 지고서도 그 힘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없었던 카라 - 닮은 것 같지 않지 않습니까." "카라 - 또 카라인가. 난 기억나지 않아." 루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마치 '난 더위가 싫어'라고 말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내 시선은 둥그런 천장모서리를 따라 한 바퀴 돌았다. 푸른 돌을 얇게 잘라서, 이음새도 보 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짜넣어 만들어낸 천장. 가끔 잔다바티 성이야말로 인간이 마법 이라는 편법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겠지.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으며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루이는 불편한 듯 몸을 꿈지럭거리며 다시 말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지 말해줘. 초상화는 없나?" 나는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카라를 그린 적은 없습니다." "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치에 놓인 돌판들로 주의를 돌렸다. "이 돌판들에 쓰인 말들은 이자드가 가지고 있던 '백과사전'과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카라 는 처음에 그 백과사전이 원래 존재하는 책인 줄 알았다고 했었죠. 후에 이자드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때마다 새로운 글이 더해지는 것을 알고서야 그 책이 이자드가 마법으로 만 든 책임을 알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돌판에 적힌 글과 백과사전의 어귀가 일치한다는 것은, 이자드가 이 문서를 읽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뜻하지요." "혹은 그 반대이거나?" "...무슨 뜻이죠? 이 돌판을 이자드가 새겼다는 겁니까?" 내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와졌다. 루이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알 게 뭐야. 그런 얘기는 이자드하고 해." "백과사전은 여전히 가지고 있나요?" 루이는 고개만 살레살레 저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그에게...나라카 족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습니까?" "나라카? 그런 거 몰라." 루이의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푸른 천장의 빛을 반사하여 더 깊은 색 조를 띄우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의 관심은 완전히 돌판에서 멀어진 것 같았다. 그는 그림을 건성으로 살피며 방안을 한 바퀴 돌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건 이자드에게 확인하고, 얘기좀 해봐." 나는 잠시 어두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잠시 후에 다시 손짓을 했고, 나는 할 수 없이 다가가서 앉았다. "이야기라니, 뭘 말인가요?" "뭐 여러 가지 있잖아...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카라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같은 거." 내 시선은 다시 천장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게 언제였지. 카라는 검은 눈에 찬탄의 빛을 띄 운 채 내게 고래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 거대함과, 그 아름다움, 그 세월로 깊이 주름진 눈동자에 대해서. 그러나 너는 몰랐어...고래가 왜 자살하는지를. "어이, 이봐? 너 괜찮냐?" 내 정신은 다시 현재로 되돌아온다. 경련을 일으키듯 당겨올라간 입끝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는 잠시 침묵 속에서 루이를 쳐다보았다. "고래 좋아하세요?" 루이는 외모 중에 유일하게 칼잡이 같아 보이는 날카로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 았다. "고래? 좋아하지. 사실은, 전에 한 번 해변가에 밀려올라온 고래를 본 적이 있었어...물이 말 라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지. 그 눈을..." 그는 머뭇거리며,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광경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눈을 다시 가늘게 떴다. "...결국 난 그 고래가 죽어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지. 그 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 아......어이, 왜 그래? 내 얘기가 그렇게 감동적이냐?" 나는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내가 카라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언젠가 루이가 카라에게 해주었고, 카라가 다시 내 게 해준 이야기였다. 기억을 모두 잃어도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 있는 것일까. 함께 했던 과거가 사라져 버려 도 그 사람이 같은 의미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것 에 맞닿뜨릴 때면 늘 그랬듯, 내게 설명을 해줄, 그렇지 않으면 알게 뭐야라고 말해줄 카라 를 생각했다. 수십 수백번을 생각해도 그녀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끊 임없이 되새기지 않으면 안되는 나에 대해, 나, 어리석은 인간에 대해. [39] - 5장 샤미르의 유산 (1) <샤미르(schamir)가 만들었다고 하는 지하동굴은 그의 사후 몇백년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 었다. 샤미르는 강대한 나라를 건설한 위대한 마법사 군주였다고 전해진다. 후계자를 세우지 않아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나라도 붕괴했으므로 그것이 정확히 어느 시대의 일인지는 알 수 없 다.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것은 그의 나라만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재산과 보물이 함께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샤미르는 서부 드워프들을 고용하여 20여년에 걸쳐 이 동굴을 만들었으며, 동굴이 완성된 날 드워프들에게 크게 사례하고...흥겹게 술에 취해 있는 드워프들을 함정에 빠뜨려...(중략)... 동굴 내부에 대해 아는 이가 없게끔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몇백년 동안 이 지방의 전설로만 치부되었었다. 한 소년이 우연히 동굴 속에 들어갔다가 기관장치를 피해 가까스로 몇 개의 보석을 들고 나오기 이전까지는. 아마도 그 전에 발견자가 있었더라도 모두 욕심을 내어 동굴 깊숙히 들어가다가 죽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발견 이후 수많은 모험자들이 샤미르의 유산에 도전했으나, 살아 돌아온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온 자들은 모두 얼마간의 보물을 가지고 왔으므로 모험가들의 발길은 여전히 끊기지 않고 있다...(중략)...> “혼자 들어갑니까?” 이름을 적던 서기는 놀라서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상인의 도시 레투스에 어울리는 훌륭한 상술이라고나 할까. 샤미르의 동굴을 일종의 관광상 품으로 개발하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찾아오는 모험자들에게 숙박과 식사, 잡화를 파는 데 만족하지 않고 시 행정부와 연계하여 동굴 입장료를 받기로 한 것이다. 물론 계약은 대신 동굴에서 들고 나오는 보물에는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졌다. 도전자들은 자신들이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가능성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에 돈 을 거는 법. 덕분에 레투스 시의 행정부(그리고 아마도 그 뒤에 진을 치고 있는 레투스 상 인 연합)는 한동안 세금을 걷을 필요가 없을 정도의 풍요로운 재정을 자랑했다. 눈에 띄게 도전자가 줄어든 지금에서도 이 수입은 짭짤한 것이다. 그런 내막이야 아무래도 좋다. 레투스 시의 행정부는 아칸서스 시만큼이나 자유롭기로 유명 했고, 누구도 이런 방식에 불평을 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나 그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명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설마 고양이도 참가비를 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서기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가 안고 있는 잿빛 고양이를 쳐다본 다음,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저어, 만약의 경우에 연락해야 할 친척이나 친구분의 주소라도...” 그 말에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는 흐음, 하고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가 손을 흔들며 그냥 동 굴로 걸어들어갔다. 서기는 뒤에 남아 머리를 긁적이며 명단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혼자서 샤미르의 동굴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쟁쟁한 팀을 이루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 구하고 살아 돌아온 자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들어간 사람은...겨우 고양이 한 마리만 달랑 들고 혼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쳇...알게 뭐야. 죽고 싶다는데 말릴 수 있나.” 그는 다가오는 한 무리의 모험자들을 바라보며 펜을 잉크에 적셨다. 요 며칠간 도전자가 없 었는데 오늘은 연이어 두 팀이다. 그는 다섯 명의 이름을 받아적으며 질문을 던졌다. “카르멧, 여성. 가우바르와, 남성. 비트, 드워프 남성. 비델, 신관 여성. 실비오, 남성......만약 의 경우에 연락할 곳은 없습니까?” “우린 살아 돌아올 테니 그런 건 필요없어. 카르멧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이야?”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다섯명치의 돈을 탁자 위에 떨어뜨린 것은 리더로 보이는 여자 카르 멧이었다. 서기는 고개를 들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카르멧은 짧은 갈색머리에 근육질의 여자였으며, 등에 석궁을 지고 허리에는 채찍을 감고 있었다. 그 바로 뒤에 선 가우바르와라는 남자는 육중한 거구에 빡빡머리의 무표정한 얼굴 로 긴 핼버드를 들고 있었다. 손에 낀 검은 장갑에서 쇠붙이가 반짝거린다. 서기의 시선은 조금 흥미롭다는 듯 다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호리호리한 금발 청년은 분 명 도둑질에 능할 것이었다. 신관인 비델은 흰 앨브 위로 덮어쓴 두건 달린 망토 탓에 얼굴 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긴 석장을 쥐고 있었으며, 석장 끝에는 복잡한 고리가 흔들리 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인물, 드워프. 짙은 회색 눈썹 아래로 불타는 석탄 같은 눈동자. 그들은 강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명단을 덮으며 인사를 던졌다. “멋진 모험이 되길 빕니다.” 그의 목소리는 일행이 사라진 동굴의 어둠 너머로 메아리쳤다. ** 천연동굴에 손질을 가한 곳이었다. 입구 부근은 축축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대략 한 시 간 정도 걸어내려가자 냄새가 옅어지고 공기가 건조해졌다. 여기서부터다. 진은 고양이를 앞 세워 유유자적 걸어가고 있었지만, 분명 피부 아래 근육은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흠-” 이자드는 이곳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예의 비틀린 미소를 떠올렸다. 문제의 발단은 그의 새로운 취미 생활이었다. 오랜 고향인 카르트를 떠나 아칸서스시에 간 것이 이 주 전이니까, 대략 그때쯤 부터였던 것 같다. “글세, 칼이나 활은 모르겠지만 약초배합에 별 재능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검은 머리의 마법사는 그를 반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적대시하지도 않았다. 루이 는 더더구나 별 상관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카라는... 그는 살짝 중심을 이동시켰다. 슈욱! 머리위로 화살이 스쳐지나갔다. 진은 그의 오른편 벽에 박혀 있는 백골을 지각하면서도 집중상태를 깨뜨리지 않고 걸어나갔 다. 흠. 카라에 대해서는 유보해 둘 필요가 있겠다. 어쨌거나 그는 적당히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아칸서스시에 잠시 머물렀다. 오래간만에 아낌없는 교제를 나누면서. 그 교제상대 중에 케익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이 있었다는 게 불운이었다면 불운. 그녀의 부 탁대로 만들어본 묘약이 문제거리가 된 것이다. “내가 그런 특이체질인지 알게 뭐람.” 그는 새삼 루이의 상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루이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로, 어떤 종류 의 약이나 독약에도 보통 사람과 다른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사랑의 묘약을 먹고 심한 비 염과 이명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덤으로 심각한 두드러기까지. 덕분에. “루이가 꼼짝할 수 없게 된 건 자네 탓이니까 말이야.” 루이가 해야했던 일을 진 자신이 떠맡게 된 것이다. 물론 항의는 했다. “이봐요 - 난 검사도, 마법사도, 전사도, 사제도 아니고 모험가는 더더욱 아니라구요. 샤미 르의 동굴은 -” 그러나 씨도 먹히지 않았다. 카라가 옆에서 거든 덕분에. “어, 하지만 길에게 검술을 가르친 건 당신이잖아요?” “맞아. 게다가 샤미르가 아무리 성격이 나쁜 놈이었다 해도 자네만큼 교활하진 않았을 테 니 염려말라구. 게다가 자네 나에게 빚이 있었지?" ...그렇게 해서, 이자드는 평소답지 않게 즐거운 듯 그를 놀리며 이곳으로 보냈던 것이다. 아 마도 그건 그가 매우 지독히 끔찍하게 싫어하는 자와 자신이 닮았다는 데에 부분적인 이유 가 있는 것 같지만. 냄새.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체다. 창에 꿰여있었다. 진은 잠시 멈춰서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눈앞의 바닥을 짚어서는 안된다. 그는 거리를 가늠해보고 뛰어올라 한 발로 벽을 짚 고 건너편에 착지했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그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모처럼 자유로와진 김에 좀 더 고상하고 품위있게 살고 싶었단 말이다! 진은 투덜거리며 전 진했다. 아직까지는 어렵지 않다. 길은 외길이었고 생명체는 없었다. 함정도 연달아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두어 개의 방을 지나치고 나서, 배를 채울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왔다. 그는 그의 감각 현을 건드리는 것이 없는 곳에서 멈춰섰고, 그제서야 약간의 피로를 느꼈다. 대략 세 시간 정도 걸어온 것 같다. 앉아서 투덜거리며 천천히 말린 고기를 씹고 있을 때 멀리서 기관장치가 발동하는 쉭 소리 가 났다. 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나쳐온 방들 중 하나다. 잠시 후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질그릇 깨지는 것 같은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 다. “뭐야, 별 것 아니잖아?” “목소리가 커, 비트. 아직까지는 입구에 가까우니까 그런 거라구. 방심하면 안돼.” “헤헷, 카르멧 말이 맞아요. 아까 그 방에서는 당할 뻔 했잖아요?” “뭐야? 그건 실비오 네놈이 버릇을 못고치고 보석을...엉?” 왁자지껄 떠들던 그들은 혼자 단정히 앉아있는 진을 발견하고는 일제히 긴장했다. “뭐야......우리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인가?” “잠깐만! 이상하잖아. 우리가 지나쳐온 방들에는 보석이 남아있었다구.” 진에게 다가오려는 비트를 붙잡은 것은 카르멧이었다. “그러고 보니...기관장치들도 작동한 흔적이 없었잖아?” “게다가 혼자서 여길 들어오는 사람이 어딨겠어? 게다가 고양이까지 같이 있잖아!” 그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영락없이 눈앞에 있는 것이 사람 처럼 생긴 몬스터라고 생각하는 눈초리였다. “아, 하지만 이상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요?” “비델...” 앞장서서 석궁을 겨누던 카르멧은 신관의 말에 머뭇거리며 길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주저하 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진은 그들을 유유히 관망하며 먹던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일 어서서 옷소매를 탁탁 털자 카르멧은 다시 한번 긴장하며 그를 쏘아보았다. “이봐! 왜 변명이 없지? 몬스터냐 인간이냐?” “몬스터?” “그래, 몬스터 말이야! 몬스터를 몰라? 이거 진짜 수상하네!” 카르멧은 초조하게 몬스터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뒤에 서 있던 비델이 다시 끼어들었다. “말투로 봐선 아무래도 북부 사람 같은데요. 그렇다면 말이 좀 다를지도 몰라요.” 진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들의 대화 때문에 주변의 공기 파동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아까같 은 방법을 고수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두 여자간의 언쟁을 마무리지었다. “대체 이렇게 잘생긴 몬스터가 어디있다고 그런 언쟁을 벌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미안 하지만 할 말 다 했으면, 나 먼저 가도 될까요?” 언쟁이 뚝 그치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마주보았다. “와하하핫! 이거 진짜 배짱좋은 친구잖아? 혼자서 샤미르의 동굴에 도전하다니! 마음에 들 었어!” 너털웃음을 터뜨린 것은 역시 드워프, 비트였다. 카르멧은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흔들었 다. “할 수 없지. 여기까지 무사히 온 걸 보면 상당히 실력있는 건 알겠는데 말이야, 여긴 그리 호락호락한 데가 아니라구? 선심쓰지. 우리 파티에 끼워줄게. 우린 경험도 많고 실력있는 모 험가들이라구.” 진은 자신만만한 카르멧을 잠시 쳐다보았다. 끼워줘? 이 여자는 그럭저럭 마음에 들지만, 누 구와 함께 행동하는 건 체질상 안맞는다. “고맙지만, 사양하겠...” “쿠워어어어어어어-” 그의 대답은 갑자기 울려온 요란한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진은 오른발을 축으로 반바 퀴 몸을 돌려 앞쪽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그의 고양이가 캬악!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이 울음소리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입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메마이트다.” “뭐엇? 아메마이트? 그런 몬스터가 이렇게 빨리 나온단 말이야?” “어째서 이렇게 큰소리로 울부짖는 거야? 기습공격을 하지 않고...” 다른 세 사람도 뭔가 말했지만, 비트와 카르멧의 목소리만이 아메마이트의 울음소리를 뚫고 제대로 전달됐다. 진은 포효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대답해 주었다. “무리지어 공격할 때에는 소리를 지르죠. 기습할 필요가 없으니까.” “무리라고?” “아메마이트 한떼거리?” 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몸을 굽혔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아메마이트는 입을 벌린 채 두조각이 났다. 다만 역시 거리가 모자랐는 지 깨끗하게 마무리가 되질 않았다.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뱃속에서 튀어나온 내장이 이쪽 으로 날아온다. 진은 자동적으로 그것을 피하고 나서, 아차했다. “꺄아악!” 역시나. 뒤에 있던 누군가가 맞은 모양이다. ‘역시나. 너무 오랜만이라 동작이 깨끗하지가 않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진의 몸은 슬그머니 벽쪽으로 붙고 있었다. 혼자정면을 막고 서서 싸움을 도맡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다른 자들이 싸움에 뛰어드는 모 습을 곁눈질했다. 그 때 바로 눈 앞에서 딱! 소리를 내며 세차게 입이 닫혔다. “침이 흠뻑 튀잖아. 가정 교육도 제대로 안받았나?” 진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얼굴에 튄 침을 닦기 위해 소매를 올렸다. 물론 아메마이트는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악어와 하마를 합친 것처럼 생긴 몬스 터는 다음순간 고깃덩이가 되어 자기 동족의 몸에 부딪쳐가고 있었다. “으랏챠챠챠!!” 질그릇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드워프가 기세좋게 도끼를 내리찍는 모습 이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그 바로 옆에서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칼이 날아가 또 한마리 의 눈에 박힌다. 카르멧이었다. 진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앞으로 뛰쳐나간 것은 비트와 가우바르와였고, 카르멧은 옆에서 싸우고 있다. 뒤에서는 실비오와 비델이 긴장된 얼굴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팀이라는 거군.’ 진은 한숨 돌리고 허리를 펴며 생각했다. 비트와 가우바르와는 각각 두어번씩의 도끼놀림으 로 아메마이트를 처리했고, 카르멧의 공격도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뭐, 굳이 나서서 열심히 날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쉬엄쉬엄 눈치를 봐가며 몇 마리에게 칼집을 넣어 주었다. “어때, 역시 협력하는 게 도움이 되지?” 겨우 아메마이트의 시체를 한쪽에 쌓고 나서, 카르멧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왁자하니 떠들어댔다. “마음에 들었어! 과연, 거드름 피울 만한 실력이더군?” “잘하던데.” “야...대단하던데. 칼놀림이 말이야. 공기가 정지하는 것 같더니 그냥 슈왁! 그거 뭐라고 하 는 검법이야?” 흠. 이들과 같이 다니면 확실히 힘은 덜 들일 수도 있겠군. 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매한 미 소를 띄웠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들을 뒤에 떨어뜨리든 앞으로 내세우든 이미 공 기의 흐름에 의지하여 움직이기는 틀렸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이용해 보는 것이 좋겠지. “이름 같은 건 붙인 적 없는데요.” “헤엣. 터프가이로군, 이 사람. 생긴 거랑 안어울리게.” 실비오가 헤실헤실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카르멧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이 파티의 리더, 카르멧이야. 잘 부탁한다.” 진은 싱긋 웃으며 그 손에 입을 맞췄다. 카르멧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뭐야 대체. 기사 출신인가?” 카르멧은 당황을 얼버무리려는 듯, 어처구니 없다는 듯 그를 훑어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드 워프가 옆에서 거들었다. “와하핫. 정말 이상한 친구로군. 뭐, 모험가 중에는 괴벽을 가진 사람도 많이 있으니...” “뭐얏! 비트, 당신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지금?” “음허허허허. 괴벽이라니까, 괴벽.”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사이 말수적은 사내, 거우바르와가 손을 내밀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뭐라고 부르면 되지?” “진.” “거우바르와다. 저 드워프는 비트, 이녀석은 도적 출신의 실비오. 그리고 저분은...” “비델입니다. 성직자죠.” 웃으며 손을 내민 여자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인이었지만, 진은 이번에는 악수조차 하 지 않았다. 그는 항의하기 힘든 미소와 함께 정중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성직자와는 상종하지 않기로 하고 있어서 말이죠.” [40] - 5장 샤미르의 유산 (2) “여긴 나와 같은 산악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걸작이지. 꼭 우리 취향에 맞는 건 아니지만- 특히 함정의 위치 같은 것은 - 그야 뭐 주문한 작자의 말대로 지었을 테니까 할 수 없는 노릇이었을 거야.” 드워프는 수염을 휘날리며 앞장서 걸어가고 있었다. 앞에 선 것은 그와 실비오였다. 카르멧 의 설명에 따르면 그 두 사람이 함정에 능숙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그들은 매번 미끼 인 보석류를 챙기면서도 함정을 해체하는 일에 거의 실패하지 않았다. 이 다섯 사람의 목적은 조금씩 달랐다. 카르멧과 가우바르와는 모험가로서의 명성과 성공을 원했다. 실비오는 철저히 돈이 목적이었다. 비트는 탐험을 원했고, 비델은 신관으로서의 수 련 때문에 그들과 동행했다고 했다. “치유력이 있을 정도의 신관이란 흔치 않은데 말이지, 우린 운이 좋았어.” 카르멧은 그렇게 덧붙였고, 비델은 그녀의 칭찬에 얼굴을 붉혔다. 진은 카르멧과 비트, 실비 오의 거의 끊이지 않는 수다를 모두 들은 다음 말했다. “그러고보니까, 아메마이트가 지하에 살던가?”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카르멧의 걸음이 멈췄다. 비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시체들의 악취도 여기까지 풍기지 않아요. 어딘가 다른 데로 통하는 입구가 또 있는 걸까요?” “아까 그 갈림길? 하지만 다른 한쪽은 막혀 있었잖아?” 카르멧은 재빨리 말하고 나서 앞에 있는 실비오에게 물었다. “실비오! 지도는 제대로 작성하고 있는 거야?” “그럼, 그럼. 걱정 말라구.” 건성처럼 대답하지만 실비오의 손은 빈틈없이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굳이 종이에 옮기 지 않더라도 머리속에 거의 다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분명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쉴새없이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미로에서 움직이는 데 능숙했다. “좋아. 나중에 체크해 보면 되겠지. 탈출로가 될지도 모르겠군.” 카르멧은 그 사실을 머리에 넣은 다음, 다시 진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목적에 대해선 실컷 떠들었는데 말이야. 그쪽은 어때?” “......글쎄...” “뭐야, 비밀주의인가?” 진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런 자들과 구구하니 참새처럼 떠들어댈 생각 은 없다. “심부름이라서 말이죠. 내키진 않지만.” 카르멧은 진에게 말시키기를 포기했는지 비트에게 말을 돌렸다. “어때? 그 샤미르의 유산이라는 게 뭔지 감이 잡혀?” “전혀.” 드워프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목을 돌리며 대답했다. 오히려 신이 난 것은 실비오 쪽이었다. “이렇게 함정으로 가득한 지하동굴이 뭘 지키려고 만든 건지 기대된단 말이야, 정말. 악랄 한 군주였다고 하니 드래곤의 보금자리처럼 보석이 가득한 거 아닐까?” “그건 너무 진부하잖아.” “희대의 마법사였다고 하니까 말이지. 뭔가 대단한 마법도구라든가 그런 거 아닐까? 비델, 어떻게 생각해?” “네? 글쎄요......” 비델은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들이 이렇게 열심히 떠들어대는 것은 지루함 때문이기도 했다. 아메마이트 떼를 해치우고 나서 두어개의 석실이 있은 이후로 몇 시간째 통로만이 계속되고 있다. 방심하지 말라는 듯 중간 중간에 함정이 있기는 했지만 얻은 것도 없고, 새로운 사실도 없다. 결국 카르멧은 짜 증스럽게 말했다. “대체 이 통로는...” “쉿!” 타이밍 좋게도 비트가 손을 올렸다. 새로운 석실이었다. 카르멧은 눈을 빛내며 몸을 긴장시 켰다. 석실 문은 열려 있었고, 맞은 편 벽에는 문이 아니라 석상 같은 것이 서 있었다. 일단 실비오는 자그마한 돌조각을 하나 안으로 던졌다. 아무 반응도 없다. 하지만 사람 정도 의 하중이 실려야 작동하는 함정도 있으므로 이걸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가우바르와 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는 핼버드의 자루 끄트머리를 잡고 칼등을 아래쪽으로 향했다. 쿵! 제법 육중한 소리를 내며 도끼머리가 문 안쪽에 내리쳐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기대하 던 반응이 있었다. 쉭 소리를 내며 한웅큼의 칼날이 그들 앞을 스쳐지나갔던 것이다. “오케이. 이걸로 됐겠지?” 실비오는 히죽 웃으며 한 발 안으로 내딛었다...그 순간 고양이가 캭 소리를 냈고, 가우바르 와가 재빨리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무슨 짓이야?” 쉐엑! 실비오가 거칠게 내팽개쳐지면서 항의의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아까보다 큰 파공성을 남기며 서슬퍼런 칼날이 다시 한 번 날았다. 실비오는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며 외쳤다. “말도 안돼! 연속으로 발사된단 말이야?” 이번에는 아까보다 폭넓은 지역이었다. 어지간한 속도로는 피하기 힘들다. 카르멧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우바르와의 어깨를 두들겼다. “슬슬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그래. 실비오, 조심해. 함정이 또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고마 워, 진. 고양이를 데려온 이유가 뭔가 했더니만, 위험을 빨리 감지하는 건가?” 진은 모호하게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그나저나 앞으로 함정이 다 이런 식이라면 어떻게 하지?” 한참만에 가우바르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칼날이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고양이의 판단에 의존해 봐야겠군.” 그는 다시 한 번 핼버드를 내리치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진은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 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때까지 덕분에 편하게 왔지만, 이들에게만 맡겨서는 통과하기가 어려 울 것 같다. “내가 하죠.” “네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던 가우바르와는 그의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말 문을 닫았다. 그가 물러서자 카르멧은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고, 진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는 느슨하게 오른손에 소매에 반쯤 가린 칼을 쥔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예고없이 바로 뛰어들었다. “꺄악!” 비델의 비명소리가 오르는 순간 파공성이 울렸다. 그러나 석실 안은 그가 칼을 제대로 움직 이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카르멧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에서 시간이 응축된 것 같았다. 진의 동 작은 그다지 빨라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한동작 한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도 그의 앞 에서만 시간이 느려지는 듯, 칼날은 모두 그의 칼에 맞아 튕겨나갔다! 그리고 다음 한 발짝을 디디는 순간 이번에는 위에서 날카로운 창이 내리꽂혔고, 진은 아슬 아슬하게 한 바퀴 굴러서 그 창을 피했고, 숨돌릴 틈도 없이 그 아래에서 바닥이 꺼졌다. “조심해!!” 바닥이 꺼져내려가는 순간 카르멧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내달았지만, 가우바 르와에게 가로막혔다. “왜 그래?” “괜찮아.” 가우바르와의 눈이 더 날카로왔던 것이다. 진은 발밑이 허전해지는 순간 칼을 옆으로 내리 꽂았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니 역시나 반짝반짝하게 갈린 창날이 무수히 박혀 있다. 일행은 진이 간신히 기어오르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오는 어이없는 얼굴로 고 개를 가로저었다. “맙소사, 이렇게 무식한 트랩은 처음 본다, 정말.” “아직도 남아있을까?” 비트가 먼저 조심스럽게 문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담대하기로 이름난 드워프라지만 등줄기 에 땀이 흐르고 있다. 진은 흘끗 그를 쳐다보고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관장치는 분명 양쪽 벽과 천장, 바닥까지 나 있었다. 아직 더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무식함에는 무식하게 대응하는 것이 제일...이런 말은 루이가 외칠 법한 말이지만, 진은 바로 그대로 행동했다. 양쪽 벽에 있는 기관장치를 날려버린 것이다. “우와아......” 실비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에게 다가갔다. 이제 겨우 방의 절반만큼 움직였을 뿐이다. 도둑의 자존심 문제였다. 실비오는 신중하게 사 방을 살피기 시작했고, 곧 비트가 그에 가담했다. 가우바르와가 먼저 칭찬을 던졌다. “수고했어. 대단한 솜씨야.” “정말이지, 사과해야겠는데. 도움받는 건 우리쪽이군 그래.” 카르멧은 약간은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지만 시원스럽게 인사했다. 진은 얄미울 정도로 침 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칼날을 살폈다. 원래도 별로 좋은 칼도 아닌데, 돌벽에 대고 여러번 그은 덕에 상당히 이가 나갔다. 가우바르와의 투박한 손이 칼날을 만졌다. “내가 갈아주지.”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그의 칼날의 날카로움과 상관없는 칼놀림이라고는 해도, 석실이 아니라 통로에서는 사용하기 힘든 기술이었다. 진은 순순히 그에게 칼을 넘겨주고 땀에 젖은 이마를 쓸었다. 가우바르와가 솜씨좋게 썩썩 칼을 가는 사이 실비오는 있는대로 인상을 구긴 채 말하고 있 었다. “아무래도 그 다음 문제는 저 석상일 것 같지?” “그럼 저걸 안 건드리면 되잖아요?” “비델......여긴 다른 문이 없어요. 저 석상 외에는 어딘가로 통할 만한 구석이 없다구요.” 실비오는 그렇게 말하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함정이겠지?” “할 수 없어. 앞으로 나가려면 위험을 감수해야지.” 카르멧은 잠시 뒤쪽을 돌아보았다. 진은 유유히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가우바르와 에게서 칼을 받아들고 있었다. 이제껏 소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칼은 자루 부분 이 좀 이상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그녀는 진에게 부탁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냉정 하게 지시했다. 비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프를 꺼냈다. 질긴 로프다. 그는 그것을 가우바 르와에게 던지고는 허리에 맸다. 가우바르와는 로프를 팔에 감았다. 실비오는 그가 조심조심 디디는 길을 눈으로 쫓으며 기억속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꺼지는 함정은 없었다. 비트는 무사히 석상 앞에 도달해서, 꼼꼼이 조각상을 살펴보기 시작 했다. 이렇다할 이상한 구석이 없다. 비트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각상에 손을 댔다. 쿠구구구구구궁... 일행은 긴장해서 숨을 들이켰지만, 소리는 조각상이 돌아가면서 난 소리였다. 바로 뒤에 문 이 있었다. 카르멧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뭐야, 별 것 아니잖아?” 그들은 차례차례 문을 통과했다. “쳇. 여긴 함정만 가득하고 어째 보석 한 알 없냐.” 실비오는 마지막으로 움직인 좌표와 거리를 지도에 적어넣은 다음 궁시렁거리며 나가다가, 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래? 또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살기가...” “에?” 실비오는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제 더이상 함정은 없다. 진 역시 그것을 알고 있 었다. 트랩은 모두 처리했다. 어째서 아직도 살기가 느껴지는 걸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젓고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소리지?”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실비오였다. 그의 얼굴은 바짝 굳어져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은 점점 확실해졌고, 곧 실체를 드러냈다. “빌어먹을!! 맙소사! 뛰어! 어서 뛰어!!” 실비오는 입안 가득 욕설을 퍼부으며 문 안으로 달려들어 정신없이 외치기 시작했다. 신중 하게 걸어가던 일행은 엎어질듯 구르며 달려오는 실비오를 보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 다. “뛰라구! 바보들아!!!” 그의 목소리를 삼킬 듯 굉음이 커져가고 있었다. 진은 넘어질 뻔한 실비오의 팔을 잡아 일 으키며 등뒤로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제기랄!” 카르멧 역시 그 살아있는 불을 보자마자 욕부터 내뱉았다. 그들은 일제히 뒤돌아 뛰기 시작 했다. 그렇다. 그들 등뒤로 혀를 날름거리며 쫓아오고 있는 불은 살아있었고, 굶주려 있었으며, 광 폭하기 그지없었다. 진은 놈의 탐욕스러운 생명을 느낄 수 있었고, 가끔 뛰면서 뒤를 돌아보 았다. 검붉은, 죽은 핏빛의 오오라. ‘이것도 나름대로 아름답기는 하군.’ 살아있는 불의 물은 용암처럼 주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흘러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 라면 실제 물이 쏟아질 때만큼 빠르지는 않다는 정도였다. “아아악!” “빌어먹을, 이번엔 또 뭐야?” 실비오는 흩어진 머리카락에 가린 눈을 깜박이며 또한번 욕을 내뱉았다. 정신없이 뛰느라 앞쪽 통로에 있는 함정을 체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곧 잠시 뒤쳐진 비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실비오를 흘끗 쳐다보고는 다리에 박힌 화살을 부러뜨렸다. 앞서 뛰어가고 있는 카르멧과 가우바르와 역시 화살이 스쳤는지 피를 약간 흘리고 있었지 만, 치료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다행히도 비델은 다치지 않았는지 석장을 흔들며 열심히 뛰 고 있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오른쪽 코너를 돌았을 때, 실비오는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 같 은 느낌으로 멈춰서야 했다. 앞이 막혀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런데서 죽으려고 온게 아니라구!!” 불길은 그들보다 조금 뒤처지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모두들 얼굴이 딱딱하 게 굳어졌다. 절망감. 카르멧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가우바르와의 팔을 붙잡았다. 아까의 화 살을 거의 다 막아낸 덕분에 가우바르와는 피투성이였다. 비델은 두려움에 찬 얼굴이었지만 신관답게도 떨고 있지는 않았다. 실비오는 연신 욕을 퍼 부었고, 비트는 수염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쿵쿵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진은, 그들 앞을 지 나쳐서 벽으로 다가갔다. 칼자루로 벽을 쿵쿵 두드리는 그를 보고 먼저 물어본 것은 카르멧이었다. “...뭐하는 거야?” “건너편은 비어있는 것 같아요.” “뭐?” 순간 카르멧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돌았지만, 곧 다시 사라졌다. “우린 마법사가 아니야. 벽을 뚫을 순 없다구.” 이미 뜨거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진은 대답없이 불길을 돌아보았다. 시간이 없다. 일단 시간 을 조금이라도 벌어야 했다. 그는 비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브를.” “예?”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비델은 급히 흰색 로브를 벗어서 그에게 건넸다. 진은 손끝으로 천 을 붙잡고 통로 반경만큼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붕- 붕- 붕...파아앗! “으와앗!”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은 실비오였다. 진은 천을 세차게 몇 바퀴 돌려 팽팽하게 만든 다음 마치 나무에 마지막 도끼질을 하듯 발로 내리찍었던 것이다. 공기를 응축한 로브는 불 과 맞부딪치면서 폭발하듯 함께 날아갔고, 잠시나마 불길의 흐름은 늦춰졌다. 진은 연이어 외쳤다. “준비해! 내가 신호하면 바로 벽을 가격하는 거다!” 반사적으로 가우바르와는 핼버드를, 비트는 도끼를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이 를 악물고 자세를 잡았다. 상황이 이해는 안가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진은 눈으로 불길이 다시 로브를 집어삼키고 달려오는 것을 지켜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고, 공기가 거의 사라지기까지. “지금이야!” “하아아아앗!” “으랏차차차차찻!” 각기 나름의 기합을 내지르며 그들은 일제히 벽을 향해 각자의 무기를 내리쳤고, 진은 정확 히 타이밍을 맞춰서 수평으로 벽을 베어갔다. 콰과광! 폭발소리 비슷한 폭음과 함께 벽은 반쯤 무너져 내렸다. 일행은 환성을 지르며 서둘러 그 구멍을 빠져나갔다. 불길이 뒤에서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진, 서둘러!” 카르멧은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는 진의 손을 붙잡으며 재촉했다. 발뒤꿈치가 불길에 물려 뜨 끔했다. 일단은 죽음을 면했지만 불길은 구멍을 통과해서 다시 그들을 쫓고 있었다. 맨 앞에서는 실 비오가 악을 쓰며 달려가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통로는 아까보다 축축해져 있었고, 그 때문에 불길의 힘은 약간이나마 약해지고 있었다. “어서, 어서 이리로!!” 진과 카르멧이 간신히 불길 바로 앞을 달리고 있을 때 실비오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구르듯 그가 부르고 있는 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실비오는 쾅! 소리가 나게 돌문을 닫고 뒤로 물러나며 땀을 씻었다. “휴우우. 겨우 살았네...” “아직 안심하긴 이른 것 같은데.” “엉?” 실비오는 흩어진 금발머리를 묶으며 무심히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카르멧 이 굳어진 얼굴로 석궁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산너머 산이라더니...” 그들 앞에는 거대한 드래곤이 황금더미 위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41] - 5장 샤미르의 유산 (3) “제, 제, 제기랄...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구.” 실비오는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중언부언 중얼거렸다. 비트는 상처입은 상태로도 대차게 무 릎을 세우고 도끼를 들어올렸다. “드래곤이라! 좋지. 싸우다 죽을 상대로는 영광이잖아!” “칫. 괜한 오기 부리지 말아요. 쓸데없는 생각은 관두고, 저놈을 깨우지 않고 지나가는 방 향으로 하자구요, 제발.” 카르멧은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 드래곤을 노려보며 작은 소리로 비델을 불렀다. 부상자가 많으니 뭘 하든 치료가 우선이었다. 멍해 있던 비델은 카르멧의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가장 상처가 심한 가우바르와에게 다가갔다. 치료를 받는 가우바르와도 신음소리 를 죽였다. 다들 바짝 곤두선 상태로 잠든 드래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와중에 진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로브 밑에 그런 갑옷이라니, 어울리지 않는군요, 그거.” 다들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비델이 아래에 받쳐입은 갑옷은 보통 물건이 아 니었다. 촘촘하게 사슬로 엮은 갑옷인데다가, 세공이 보통 섬세한 게 아니다. 전투에 참여하 지도 않는 여리여리한 신관이 갑옷을 입고 있다는 정도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정도 갑옷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비델은 멈칫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그래도 명색이 모험가니까요. 싸울 줄 모르니 방어라도 해야죠.” “비델이 무사한 게 우리에게도 중요한 일이야.” 카르멧이 나직이 끼어들었다. 그녀 자신도 의혹어린 눈길을 던지고 있었지만, 비델은 그녀의 동료였고 진은 외부인이었다. “흠.” 진은 어깨만 으쓱하더니 비델을 외면하고 벽에 기대서서 타서 눌어붙은 신발을 떼어내기 시 작했다. 카르멧은 태연자약한 진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음속의 말을 입밖에 냈다. “대담하다고 해야할지, 둔하다고 해야할지.” “뭐어. 아까는 정말 굉장했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지만 말이야......그러고보 니 혹시 드래곤도 죽일 자신이 있는 거 아냐? 그렇게 태연한 걸 보면.” 실비오는 진의 태도에 약간 마음이 놓이는지 계속 드래곤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진은 그제 서야 눈을 들어 잠들어 있는 드래곤을 쳐다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한쪽 입끝만 살짝 올라가 비웃는 듯 비틀린 미소를 이루었다. 그리고 진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주저하는 기 색도 없이 곧장 드래곤의 앞발까지 걸어갔다. 실비오는 불안한 눈으로 그의 모습을 쳐다보 다가, 진이 드래곤에게 접근해서 칼을 들어올리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봐 이봐. 농담이었다구......농담이었다니까!” 실비오가 거의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순간, 진은 가볍게 칼을 내리쳤다. “와악!!” 열받은 드래곤이 고개를 들리라 생각하고 동시에 비명을 올린 실비오와 카르멧은, 땅! 소리 가 나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비델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환영이었군요.” “뭐엇?” “드래곤처럼 보이는 돌 위에 환영을 덧입혀놓은 거예요.” 속은 느낌이다. 카르멧은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애꿎은 진을 쏘아보았다. “내 참, 환영이라고 말해주면 될 걸 사람 놀래키고 그래?” 진은 피식 웃고 살아있는 드래곤의 앞발처럼 보이는 돌 위에 앉았다. 한쪽 발이 너덜너덜해 져 있어서 타는 것같은 아픔이 느껴졌지만, 비델에게 치료를 부탁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천 천히 상처 위에 천을 감기 시작했다. 옷 속에 넣어둔 고양이가 숨막히다는 듯 고개를 내밀 며 야옹거리더니, 곧 상처를 할짝 할짝 핥기 시작했다. 카르멧은 무의식중에 말했다. “치료를 해야지.” “아, 난 됐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별로 저 사람에게 치료받고 싶지도 않은 데다가, 그쪽만 해도 힘이 모자랄 텐데.” 카르멧은 그 말에 머쓱해져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형편없이 그을린 데다가, 가우바르 와의 상태는 심각했고, 비트도 웃고는 있었지만 화살이 깊이 박혀 있었다. 자신도 화살에 다 친 상태다. 비델이 모두를 치료하기는 무리였다, 어차피. 카르멧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네, 아무리 자네 덕에 살았다고는 하지만 정말 무례하구만. 비델은 우리 모두의 은인이 라구!” 비트는 고통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당당하게 외쳤다. 카르멧은 고개를 저었다. 진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동료로 삼기에 너무 제멋대로였다. “미안하게 됐어. 비델. ” “아녜요. 저 때문에 괜히…” 비델이 오히려 펄쩍 뛰어오르며 손을 내저었다. 카르멧은 비델과의 실랑이를 짧게 끝내고 상황을 확인했다. “그런데 실비오, 당연히 지도는 못그렸겠지?” 일말의 기대는 실비오의 어두운 얼굴에 무너졌다. “무리야. 방향이 기억나질 않아.” “네 잘못이 아니야.” 카르멧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늘진 얼굴을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근심어린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여 화살이 스친 자리를 살피며, 그나마 독이 묻은 화살이 아니었음에 감사했 다. 이 동굴은 무덤치고도 지나친 감이 있었다. 숨돌릴 틈없이 빽빽하게 함정을 깔아놓다 니...정말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할 작정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때마침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가우바르와가 중얼거렸다. “샤미르의 유산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가? 아무래도 금은보화 정도가 아닌 것 같 지?” 그는 비델의 치료를 받고 일단 통증을 누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 던 실비오가 농담이랍시고 한 마디 던졌다. “혹시 또 모르지. 샤미르라는 놈이 그저 악취미였던 걸지도...”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실비오는 한 박자 늦게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움찔했다. 그는 재빨리 바보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냥 해본 소리야. 농담이라고, 헤헤…” ** 다들 몸이 말이 아니었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지만, 움직여야 했다. 혹시나 하고 귀를 갖다댄 돌문은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고, 건너편에서 불길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 다. 그쪽으로 돌아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로는 점점 더 축축해졌고, 공기에선 곰팡이 냄새가 났다. 비델은 가우바르와의 부상에 진 력을 쏟아야 했으므로 진만이 아니라 비트도 제대로 회복이 안된 상태로 걸어야 했다. 다행 히도 여기까지 들어오자 자잘한 함정은 거의 없었다. 실비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까 거길 빠져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안심시켜 놓고 갑자기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 늦추지 말라구.” 카르멧이 허리를 펴며 모두에게 다짐을 두었다. 다들 지치고 신경도 날카로와져 있었다. 통 로는 좁아져서 모두 일렬로 늘어서야 했고, 가우바르와 같은 경우에는 허리를 굽혀야 했다. 함정은 없다지만 내리막길은 미끄러워 움직이는 데 힘이 들었다. 모두 한참동안 말없이 걸 음만 옮겼다. 앞장서서 가던 실비오가 문득 멈춰서서 말하기 전까지는. “빛이 보이는데?” “방이야?” “그런 것 같아.” 실비오는 천천히 조심해서 발을 디디며 뒤를 향해 대답했다. 그는 다음 순간 얼굴을 찡그리 며 귀에 손을 가져갔다. “왜 그래?” “무슨 소리 안들려?” “소리?” 막 되묻자마자 카르멧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재 잘거리는 것 같기도 한 속삭임...갑자기 비델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모두 귀를 막아요!” 다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그러나 실비오에게는 이미 늦은 경고였다. 그는 뭔 가 중얼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정신차려!” 서둘러 옷을 찢어 귀를 막은 가우바르와가 그를 붙잡았지만, 실비오는 평소의 배는 되는 것 같은 힘으로 거칠게 그 팔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실비오!” 일행은 다급하게 실비오를 뒤쫓아 달려내려갔다. 활짝 열린 문으로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꽤 커다란 원형의 방이었다. 사방에 꺼지지 않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눈앞에 있 는 바닥에서는... “사, 살려줘!!” 실비오가 울부짖으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의 한쪽 다리에는 쇠사슬처럼 보이는 뭔가가 얽 혀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지만, 바닥에 깔린 모래만 헛되이 거머쥘 뿐이었다. 또 하나의 사슬이 날아와 그의 다른쪽 발목을 꿰뚫었고, 실비오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귀는 꼭꼭 틀어막았어도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일그러진 실비오의 얼굴은 잘 보였다. “잠시만 버텨! 곧 구해줄게!!” 카르멧은 당황한 상태로도 애써 실비오를 북돋아주려 했지만, 이미 그는 거의 실신 상태였 다. 사슬처럼 보인 무엇인가는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 사슬은 한쪽 벽에 있는 창살문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너머의 어둠 속에는 무엇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카르멧은 초조한 마음으로 앞으로 나서며 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을 가리키며 큰 소리 로 외쳤다. “저걸 끊어내야겠어. 도와줘!” 그러나 하필이면 카르멧의 발이 짚은 돌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내려앉더니, 자동적으로 굉 음을 울리며 천장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카르멧은 절망으로 하얗게 질려 천장을 올 려다보고는 실비오에게 달려들어 그의 발을 꿰뚫고 있는 촉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천장은 사정없이 아래로 내려왔고, 촉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젠장! 좀 도와달란 말이야!!” 카르멧은 미친듯이 칼을 내리치며 외쳤다. 비트가 합세해서 도끼질을 시작했고, 가우바르와 는 어떻게든 내려앉는 천장을 막아보려고 버티고 섰다. 비델은 문 앞에 선 채 석장만 꼭 부 여잡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으로 말하자면, 그의 눈은 냉담하기만 했다. 스스로 재난을 자초한 데다가 구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인물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마음은 없었다. 도끼질과 칼질세례를 받은 촉수는 오히려 점점 더 강하게 실비오를 죄어 끌어당기고 있었 다. 카르멧은 칼이 부러져 나가자 절망적으로 진을 쳐다보며 외쳤다. “진! 어떻게 좀 해봐!” 카르멧은 그에게 신뢰와 절망이 뒤엉킨 시선을 던졌다. 이미 천장은 가우바르와의 키에 닿 을 정도로 내려앉고 있었다. 진은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으으윽...” 가우바르와는 이를 물고는 양팔에 힘을 주었다. 힘줄이 불거지는 것이 보였지만, 천장이 내 려오는 속도는 여전했다. 카르멧은 부러져 나간 검으로 바닥에 초승달 모양의 홈이 패이도록 휘두르고 있었다. 손이 얼얼했다. 너덜너덜해진 촉수는 여전히 실비오의 발을 휘감고 있었다. 드드득, 드드득 가차 없이 천장이 내려오며 사방에 돌조각이 떨어져내렸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검을 고쳐잡고 내 리쳤다. 땅! 소리를 내며 검이 다시 부러져나갔다. 상처입은 촉수는 더 죄어들었고, 기절했 던 실비오는 다시 깨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사, 살려줘!” “다 죽겠어! 포기하고 나와!” 비트의 질그릇 깨지는 것같은 목소리가 굉음을 뚫고 솟아올랐고, 가우바르와의 어깨에서 뚜 둑 하는 소리가 났다.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지켜보던 진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칼 을 들었다. “악!” 피가 튀면서 잘려나간 것은 촉수가 아니라 실비오의 발목이었다. “무슨 짓이야!” 카르멧은 대경실색해서 진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이미 기절해서 축 늘어진 실비오를 잡아일 으켜 몸을 숙이고 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르멧은 정신없이 그 뒤를 쫓았다. “가우바르와! 나와! 나오라구!!” 카르멧은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고, 가우바르와가 지르는 소리가 얽혀들었다. 그는 남아있던 작은 틈새로 몸을 날려 빠져나갔고, 그 뒤에서 메마른 쿠궁 소리가 울렸다. 모두 음울한 기분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우바르와가 한참만에 귓가에 손을 가져가 막고 있던 천조각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비트와 카르멧도 귀마개를 뺐다. 카르멧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진을 쳐다보다가 깡 소리나게 부러진 칼을 집어던지며 외쳤다. “왜 아까 나서지 않았어?” “그만둬, 카르...” “넘어갈 수 없어! 좀 더 일찍 도왔다면 실비오를 끌어낼 수 있었다구! 고양이 따위나 끌어 안고서, 뭘하고 있는 거야 대체?” 진의 눈에 언짢은 빛이 떠올랐다. “고양이 따위?” “그래! 지금 그런 고양이가 사람 목숨보다 소중해? 어린애도 아니고.” 카르멧은 순간 움찔했다. 그녀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녹색 눈동자는 어떤 빛이라도 반 사해 낼 것같이 반들거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런 진부한 표현밖에 생각할 수 없는 눈. 진 은 한쪽 입끝을 당겨올리며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서 말했다. “대체, 내가, 뭣 때문에 내 고양이보다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이봐. 말이 심하잖나!” 보다못해 끼어든 비트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진은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당신들 동료가 아니야. 서로 필요에 의해 같이 행동하고 있을 뿐 이지. 내 나름대로는 리더로서의 당신을 충분히 존중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느린 판단에는 따를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나?” 카르멧은 차갑게 빈정거리는 진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아 까 그 상황에서 실비오의 발을 포기해야 했던 건 자신이었다.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팀을 끌고 내려온 것도 자신이었다. 실비오의 몸을 살피던 비델이 지친 얼굴 로 돌아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카르멧은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실비오는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몇시간만에 죽었다. 까맣게 퉁퉁 부은 채로. 그리고 좋든 싫든 그들은 함께 종착역까지 가야했다. [42] - 5장 샤미르의 유산 (4)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방이 나왔다. 또 어떤 함정이 있을까, 조심하느라 한참을 지체하고 검토한 끝에 들어간 일행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벽에 박힌 수정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다 는 점을 제외하면, 작고 네모진 보통의 석실일 뿐이었다. 그것도 텅 빈.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카르멧은 저도 모르게 항의섞인 말을 뱉으며 가우바르와를 부축한 팔에 힘을 주었다. 방안 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역시 특별한 물건은 없어보인다. 눈에 띄는 것이라곤 방 한가운데 꽂 혀있는 지팡이가 다였다. 비트가 망연자실 수염을 뜯으며 말했다. “샤미르의 무덤은 어디있는 거지? 유산은?” “젠장!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골탕먹이다니...진짜 무덤은 사람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둔 게 틀림없어! 이런 것 때문에 실비오를 잃다니......” 카르멧은 울분을 터뜨렸다. 비델이 애써 그녀의 기운을 북돋으려 애쓰며 말했다. “저 지팡이에 뭔가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비밀은 무슨 비밀. 마지막 함정일 거야.” 카르멧은 음울하게 말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마지막 남아있던 힘이 다 빠지는 것 같 은 느낌이었다. 가우바르와가 끙 하고 신음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말했다. “너답지 않아, 카르멧.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네 장점이잖아.” 카르멧이 가우바르와를 쳐다보는 동안 비델은 석장을 쥐고 선 채 카르멧과 지팡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제가 한 번 뽑아볼게요. 다들 나가 있으면...” “나갔다가 여기까지 무너져 버리면 앞으로도 뒤로도 못가! 다 죽는 거지.” 카르멧은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나서 뒤이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비델. 네 잘못이 아닌데.” 비델은 무표정한 얼굴을 숙였다. “좋아.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보자...어?” 그러나 카르멧이 몸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방 한가운데 드리운 그림자가 있었다. 진이었다. 그는 잠깐 사이에 방 한 가운데로 걸어가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카르멧은 다급하게 외쳤다. “너 무기도 없이 어쩌려고...왓!” 진은 서슴없이 지팡이를 잡아뽑았다. 오랫동안 밀봉되어 있던 코르크 마개를 잡아 뽑을 때 같은 펑 소리가 났다. 나머지 일행은 모두 숨을 멈추고 뻣뻣하게 긴장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진은 구멍 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 뭔가 있군.” “휴우우...” 네 사람의 입에서 일제히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지도, 벽에서 창이 튀어나오지도 않았고 꿈틀거리는 괴물의 등장도 없었다. 이 방에 함정은 없었다. 진은 몸을 굽히더니 지팡이가 박혀있던 구멍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카르멧은 엉거주춤 앞으로 나서 다 만 자세로 물었다. “뭐야? 뭐가 있어?” “푸른 보석하고...이건?” 진은 의아한 얼굴로 허리를 펴더니 손에 든 물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순간, 번개가 쳤 다. 카르멧은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진이 한쪽 벽으로 날아가 쳐박히는 것을 보았다. 멍하니 눈 을 깜박이는데, 구겨박힌 진의 옆구리에서 흐른 피가 천천히 바닥을 따라 움직였다. 함정? 뭐가 날아왔지? 그러나 쓰러져있는 진의 몸이나 그 주위에나 다른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뭔지 알 수 없는 공격을 받은 그 짧은 순간에 칼을 뽑아들었던 걸까, 부러져 나간 칼이 저 만치에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척추를 따라 올라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저항감을 누르고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 선 비델이 보였다. 언제 움직였 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르멧은 눈을 깜박이며 입을 벌렸다. “비델?” 비델은 못내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굽혀, 진이 떨어뜨린 물건을 주 워들었다. 카르멧의 얼굴에 잔물결이 일었다. “하, 이거 뭐야? 무슨 농담?”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걸 다른 분에게 빼앗길 수는 없거든요.” 비델은 차분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손에 든 물건을 이리저리 돌리며 불빛에 비추어보았 다. 손가락 세 개 만한 크기의 유리병이었다. 비델은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려는 듯 병을 흔 들었고, 투명한 액체는 흔들리면서 희미하게 검은 빛을 띠었다. 카르멧은 얼이 빠진 채 그녀 를 쳐다보며, 이제까지 비델이 보인 지친 모습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떨려나왔 다. “너...너...치유력을 쓸 힘이 떨어졌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비델은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품 안에 갈무리하며 대꾸했다. “실비오씨 일은 안됐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컸어요. 시도해 봤더라도 죽었을 걸요.” “이 배신자!!” 카르멧은 상처입은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비델에게 달려들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 았다고는 하지만 허술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먹힐 공격이었다.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그러나 비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혀를 차며 석장을 가볍게 흔들었을 뿐 이다. 머리 부분에 복잡하게 달려있던 고리들이 부딪치며 아까와 같은 번쩍 하는 광채, 폭 음. 카르멧은 문쪽으로 날아갔고, 모서리에 부딪치는 것을 가우바르와가 몸으로 막았다. 어 느샌가, 쓰러져 있는 진의 곁에 달려간 고양이가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로 울고 있다. 카르 멧은 타는 듯한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큭...” 비델은 냉엄하지만 차분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여러분을 해칠 생각은 없었어요. 제 치유력은 도움이 되지 않았었나요?” “우리를 좀 더 잘 이용하기 위해서였겠지.” 비트가 도끼날을 세우며 서슬 퍼렇게 눈을 치떴다. 카르멧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왼쪽 팔 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비델은 그들의 적의에 아랑곳하지 않 고 허공을 바라보며 무슨 말인가를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흰 얼굴에 잠깐 안타까운 표정이 스쳤다. 비트와 카르멧, 가우바르와가 협공할 태세를 갖췄을 때 정확히 그들에게 돌아선 비 델은 여전히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명령받은 물건을 손에 넣은 이상 그냥 사라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군요. 이것도 명령이 니. 여기 남아서 천천히 괴롭게 죽어가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을 거라는 점으로 위안을 삼아 야겠네요.” “명령? 누구의?” 비델은 살며시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가 누굴 섬기는지...어느 신전에 속해 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으셨 죠, 카르멧?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예요. 저 사람이 끼어들지 만 않았어도 무난하게 해결했을 텐데.” “익…!” 성질급한 카르멧과 비트가 먼저 달려들었고, 가우바르와가 남은 힘을 짜내어 그 뒤를 받쳤 다. 그러나 그들의 맹공도, 비델에게 약간의 상처만 입혔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비델은 석장만 흔들어서 그들을 벽에 처박았다. 카르멧의 입에서 꿀럭꿀럭 피가 솟아나왔다. 비델은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카르멧에게 다가섰다. “안타깝군요. 제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 아까 한번에 다 죽여드렸을 텐데 여러분께 이런 고 통을 안겨 드리다니. 이번엔 두 분 다 확실하게 쉬게 해드릴게요.” 카르멧은 피를 훔치며 저도 모르게 가우바르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절망적으로 그의 눈을 찾았다. 마음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내 잘못으로 동료들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는 자책감, 분노, 무력감...이렇게 죽어야 하는 건가? 번개불이 다시 떨어졌고 카르멧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다시 떠야 했다. “저런......” 비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올랐다. 거의 움직이지 못하던 가우바르와가 마지막 힘을 짜낸 걸까. 어느새 달려들었는지, 단단히 카르멧을 감싼 그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 었다. 비델은 혀를 끌끌 찼다. “이기적인 분이군요, 정말. 당신을 살렸다는 만족감을 안고 죽겠다니...감동적이긴 하지 만......” 카르멧은 타는 듯한 무언가로 목이 막히는 것을 느꼈고, 으르렁거리듯 잇새로 욕설을 내뱉 았다. 비델은 문득 다시 허공을 쳐다보더니 약간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너무 오래 지체했군요.” 카르멧은 입안에 고인 피맛을 느끼면서 가우바르와의 시체를 꽉 끌어안았다. 오히려 절망보 다 분노가 더 컸다. 그녀의 눈은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비트는 저기에 있다, 아직 기세는 죽지 않았지만 무릎이 나갔다……배회하던 카르멧의 눈이 갑자기 이채를 발했다. 그 녀는 비델 뒤편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네?” 비델은 멈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싸늘한 한기와 함께 칼날이 날아들었고, 석 장 윗부분이 철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델은 휘청이다가 균형을 잡고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진이었다. 아직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고, 입가에는 거의 경련에 가까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안그래도 기분나쁜 빛깔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할 말 없이 당해 버렸군 그래.” 비델은 바짝 긴장해서 석장을 끌어당기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이 재빨리 진의 손에 들린 칼을 훑었다. “역시 미숙했군요. 생사를 확인하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그 지팡이를 잊고 있었으니...” 진은 비꼬듯 검을 살짝 들어올리는 동작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믿을 수 없이 빠른 동작으로 칼을 뽑아 비델의 공격을 흘려낸 공은 그의 몫이었지만, 다른 손에 지팡이를 든 채 나가떨 어진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팡이를 들고 있 던 손에 이 칼이 쥐어져 있는 게 아닌가. 어찌된 노릇인지는 모르지만, 부러진 칼이 나뒹굴 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칼은 조금 전까지 지팡이였던 그 물건이 맞는 듯 싶었다. 진은 아 직 흐릿한 머리를 몇 번 흔들고 잠깐 고양이에게 눈길을 준 다음에 험악한 눈으로 비델을 쏘아보았다. 그의 입에서 의외의 비난이 튀어나왔다. “내 고양이의 발톱을 부러뜨리다니!” 그는 비델의 멍청한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 바로 다음동작으로 들어갔다. 시간과 공간을 한 순간에 응축한 일검이었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칼끝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모 습이 비델의 눈에 선명했다. 그러나 몸은 그에 맞춰서 피해지질 않았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눈을 감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정확히 진의 칼에 비델의 몸이 동강나기 직전, 허공에 검은 구멍이 나더니 손이 하나 툭 튀어나와 비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카르멧이 상반신을 내밀며 외마디 소리를 질 렀다. “안돼!!” 진의 칼은 헛되이 허공을 쪼갰다. [43] - 5장 샤미르의 유산 (5)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이 깔렸다. 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칼을 바닥에 박아넣더니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비델을 놓친 것은 분명했지만, 그의 얼굴에 분하다거나 안타깝다는 표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진은 기괴하다 할 만한 미소를 짓더니 옆구리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 다. “빌어먹을...”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비트였다. 그는 대자로 드러눕더니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참이나 중얼 중얼 욕을 퍼붓고 나서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린 멍텅구리 천치로군, 그렇지?” 대답은 어디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카르멧은 침묵의 안개 속에서 가우바르와의 시체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무게 때문에 자꾸만 피에 젖은 손이 미끌어질 때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다시 시체를 안아 일으켰다. 진은 비트와 카르멧을 흘긋 돌아보는가 싶더니, 일어나서 지팡이가 꽂혀있던 구멍 쪽으로 다시 다가갔다. 푸른 돌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비델은 유리병 하나만을 들고 갔던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푸른 돌을 집어들었다. 처음부터 그가 목표한 물건은 그것이었다. 한참이나 누워서 웃던 비트가 문득 부서지지 않은 쪽 무릎을 대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수 염을 떨며 결연히 말했다. “난 이대로 누워서는 못죽어! 죽더라도 나가다 죽겠어.” “약한 소리 하지마, 비트. 우린 살아나간다.” 카르멧은 날카롭게 말을 자르며 겨우 가우바르와의 시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녀의 비통함은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낮고 살벌한 맹세로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나가. 비델, 그년을 죽여버리겠어.” 비트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울고 싶으면 울라구.” 카르멧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는 건 나중에 할래. 진, 아직 칼을 쓸 수 있지? 우리가 나가는 걸 도와줘. 그대신 그 물건들은 네가 가져가도 좋아.” 푸른 돌을 갈무리해 넣고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진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선심이라도 쓰는 것 같군.” “그걸 가지고 있으면 위험부담도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우리에게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잖아? 내 말이 틀려?” 진은 카르멧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쇠를 자르듯 날카롭게 울렸다. “선택해. 어차피 넌 나가야 할 테지. 우리와 함께 나가겠어, 아니면 싸워서 죽이고 가겠 어?” 진은 끼고 있던 팔을 풀고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 그런데 그가 대답을 하기 전에 다른 목 소리가 끼어들었다. 허공에서. “계산이 분명해서 좋군.” 서늘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진이 눈살을 찌푸렸는가 싶더니 아래 위 공간이 거꾸로 뒤집히 는 것 같은 느낌이 엄습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시원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진은 메슥한 속을 털어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이다. 다시 주위를 돌아보자, 바닥에 주저앉은 카르멧과 비트가 보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듯 당황한 표정이었다. 진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희미한 어둠 속 에 보이는 또렷한 윤곽이 손을 들어올렸다. “지상으로 돌아온 걸 환영하네, 진.” 이자드였다. 진은 지친 눈을 비비고 이자드를 훑어보았다. 눈에 익은 헐렁한 회색옷이 아니라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건 뭐죠,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애초부터 생고생 안시켜도 되는 거였잖아요?” 이자드는 바위벽에 걸터앉은 채 돌을 두들겼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지금 같은 경우는 만약을 생각해서 이걸 받아뒀고 자네가 안에 있었으니까 가능했지…그 역은 불가능해.” 이자드는 진의 머리카락을 들어보이며 덧붙였다. “그나마도 운이 좋았던 거다. 사방이 밀폐된 공간이었다면 역시 불가능했어.” “흐음…역시, 다른 입구가 있었던 건가요? 어쩐지 아메마이트가 어디서 왔나 했어.” “그래서…” 이자드가 다시 입을 여는데 카르멧이 절뚝이며 걸어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만!” 그녀는 이자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강하게 물었다. “가우바르와는, 내옆에 있던 사람은 어떻게 된 거지?” 이자드의 눈빛에는 아무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시체까지 옮길 여력은 없었다.” 카르멧은 울컥 피를 토하듯이 절규했다. “뭐가 어째고 어째? 잘도 우릴 지켜보면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내버려뒀겠다!” “카르멧! 그만둬!” 비트가 말리지 않았어도 카르멧은 달려들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자 드를 노려보고 있을 뿐.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갈고 나직이 말했다. “당신도 비델과 다를 바 없어. 우릴 이용했을 뿐이지.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원하는 걸 손 에 넣으셨단 말이지, 잘난 마법사 양반.” “누군가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내겐 그런 어리광을 받아줄 이유가 없어.” “당신이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도울 마음이 있었다면 우릴 밖으로 옮길 게 아니라 당신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 거 아냐. 내 말이 틀려?” “...내가 왜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수고를 해야 하지?” 카르멧은 이자드의 차디찬 대꾸에 부르르 떨며 입술을 꽉 다물었다. 꽉 쥐어진 주먹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변했다. “그렇군. 하하, 마법사란 부류에게 인간미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샤미르의 유산이나 잘 챙기시지. 그게 원하던 거겠지?” “카르멧! 말이 심하잖아...” “시끄러워, 비트! 지금 누구 편을 들려는 거야?”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돌아서서 레투스 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트도 잠시 망 설이듯 길을 쳐다보다가 그녀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고맙다는 인사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자드는 시큰둥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진은 그가 희미하게 휘청이는 것을 놓치지 않 았다. 여력이 없다는 말은 엄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흔적만을 가지고 세 사람을 지상까 지 이동시킨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고, 사실 구해줄 이유가 없는 두 사람까지 끄집어낸 데 대해서는 감사를 받아도 시원치 않을 터였다. 진은 빙글빙글 입매를 돌렸다. “당신도 어지간히 변명을 싫어하는군요.” 이자드는 그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째서 고전한 거지? 함정이 그렇게 복잡했나?” 진은 반쯤 분개한 듯한 코웃음을 쳤다. “이거 사실은 나한테 복수할 마음으로 시킨 일 아닌가 의심스럽던데요. 이 꼴사나운 모습 이라니. 게다가…처음부터 샤미르의 유산이 뭔지 알고 있었던 거죠?” “아, 솔직히 두 가지는 알고 있었어. 자네가 가져온 그 무기- 샤미르의 지팡이는 누구든 그 주인이 가장 편안하게 여기는 무기로 모습을 바꾼다고 알려져 있지. 무엇이든 자를 수 있고 부러지는 법도 깨지는 법도 없어. 생물에 가깝다는 말까지 있는 물건이지...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하네만?” “이 돌은 당신이 원하던 거고.” 진은 가볍게 푸른 돌을 집어던졌다. 돌은 정확히 이자드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래. 이게 내가 원하던 거야. 샤미르가 직접 손질한 라피스 라줄리 Lapis Lazuli ? 청금 석.” 이자드는 감상하듯 그 돌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진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버린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단순한 모양에, 그다지 특별날 것이 없어보이는 지팡이였다. 머리 부분에 뭔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빼면 아무 것도 없다. 조각은 아무래도 손의 감촉으로 보아서는 글자 종류인 것 같았다. 이름인가? 이자드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 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넨 화나지 않나?” “뭐가요?” 진은 시큰둥하게 말하면서 상처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난 보기보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거든요. 뭐, 카라를 위한 일이라면 나름대로 진 빚도 있으 니까…그래도 날 이용했다고 생각한다면 상처나 치료해주는 게 어때요.” “아아, 그걸 잊고 있었군. 치유 주문에는 약한 편이지만...사리라..." “아니. 나말고 내 고양이.” 이자드는 잠시 방심한 얼굴로 진을 쳐다보았다. 진은 품속에서 고개를 내민 고양이를 끄집 어내더니 이자드 앞에 내밀었다. “발톱이 부러져서 피가 나잖아요!” 이자드는 잠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진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도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이자드는 신음하며 고양이 발에 손을 댔다. “사리라 사나타나. SArira sanatana.” 그리고나서 이자드는 다시 주저앉았다. 레투스 시에서 아칸서스까지 보통 방법대로 가면 빨 라도 사흘이 걸린다. 조금이라도 쉰 다음 마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쉴 겸해서 진 에게 전후 사정을 듣기로 했다. 카르멧이 뭐라고 말했든, 그는 진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극히 일부밖에 알지 못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진은 여유롭게 대폭 생략되고 일부분은 과장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자드는 들으면서 이마 를 찌푸렸다. 진을 겨우 찾아냈을 때 느꼈던 낯설지 않은 기운, 그게 비델이라는 여자였던 모양이다. 그는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사실은 자네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쫓아나온 거였는데 과연…” “흐음. 그게 혹시 알 바르카?” 이자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이름을 알고 있나?” “아까 비델이라는 여자가 중얼거리는 걸 들었어요....나랑 닮았다던 작자 맞죠?” “흠.” 이자드는 그 화제는 피하고 싶다는 듯, 카르멧과 비트가 사라져간 어둠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사람들은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화낼 상대를 찾는다. 그도 그런 경우에 걸려들었 을 뿐이었다. 기분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관없었다. 도와줄 이유가 없는 만큼이나 굳 이 막을 이유도 없다. 어차피 그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니까. 진이 헤엄이라도 치 듯 한가로운 걸음으로 주위를 서성이다가 물었다. “루이는 어때요?” “뭐, 꼼짝못하고 비치킷차와 카라 사이에서 도덕성과 자기 희생에 대한 토론을 듣고 있었 지.” 이자드는 새삼 루이의 절규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사실은 그 절규 때문에 머리가 다 지 끈거릴 지경이었다. 도덕성과 자기희생이라니. 카라답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 역시 신경쓰이는 건 알 바르카 놈이 대체 뭘 찾고 있었냐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복잡해지는군...” 그는 소리없이 중얼거리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서쪽, 아칸서스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44] - 6장 그리 나쁘진 않아 (1) 키시 반도의 네 중심지- 키시, 시더, 레투스, 아칸서스가 보이는 밤은 각기 다른 빛을 띤다 고들 한다. 캄캄한 시내에 밤새도록 밝혀져 있는 왕궁의 불빛만이 눈에 띄게 솟아오른 왕도 키시의 모습이 황야를 헤매는 사람들에게 외로운 등대가 서 있는 듯 보인다고 하면, 항구도 시이자 마법사의 도시라 일컫는 시더는 낮보다 더 휘황하고 화려한 불빛의 잔치가 벌어진 다. 레투스의 경우에는 십자형의 도시 끄트머리 쪽에 자리한 부호들의 저택불빛과, 교차로를 중심으로 밤새 영업을 하는 흐릿한 유흥가 불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신전의 도시 아칸서스는, 신전마다 켜두는 유록색 등불빛이 산 위에서 보면 점점이 흩어진 반딧불 처럼 보인다 해서 운치로는 최고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야경을 감상하고 품평하는 것이야 음유시인들이나 할 만한 일이고, 아칸서스 외곽 아키 언덕 위에 있는 사원 객실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에게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이자드는 진이 가지고 나온 청금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가공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탁자 위에는 청금석을 중심으로 하여 빽빽하게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마법적 선이 그어져 있었다. 순수하게 자연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돌 중에 가장 푸른 빛깔을 띠는 라피스 라줄리- 청금석은 천계와 관련된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어 신전에 서 많이 찾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때문에, 그리고 이 돌이 힘을 밖으로 분출하기보다는 안 으로 모으거나 흐름을 막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이 돌보다 다른 보석을 더 많이 찾았다. 그러니 샤미르의 유산 중에 다름아닌 청금석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놀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자드는 샤미르의 유산 중에 라피스 라줄리가 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다. 우선 라피스 라줄리가 마법력을 끌어내는 목적보다 오히려 막는 목적으로 쓰이는 돌이라는 점도 그렇고, 이자드 자신의 마법색과 유사하기 때문에 비교적 가공하기 쉽다는 점이 지금 이용 하려는 목적에 딱 맞아떨어졌다. “바스Vas” 이자드는 마지막 주문으로 죽어있던 돌이 시리도록 푸른 광휘를 내뿜는 것을 보며 뻐근한 목을 뒤로 젖혔다. 이제 겨우 샤미르가 해두었던 가공을 무효화한 것이다. 진과 함께 레투스 시에서 돌아온 것이 이틀 전인 것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자드는 잠시 기지개를 켜고 목을 풀며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태세를 갖췄다. 그때였다. 환영이 나타난 것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언제나 비야냥대는 듯한 느낌의 나른한 허스키 음성이 먼저 도착했 다. “오랜만이야, 이자드. 건강해 보여 기쁜데?”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이자드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모습까지 확인하는 데에는 몇 초 정도 시간이 걸렸다. 속이 뒤 틀리고, 목이 뻣뻣하게 굳으며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곤두선 것 같은 느낌을 가라앉히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는 마침내 겨우 고개를 돌려 알 바르카의 얼굴을 마주했다. 환영이라는 것은 보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실물이라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모르 고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그는 전체적으로 흐릿한 윤곽 속에서 또렷이 빛나고 있는, 죽은 핏빛 같은 자주색 눈동자부터 확인했다. 알 바르카는 언제나 원하는 모습, 원하는 형태를 취 할 수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자드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며 나직이 대꾸했다. “멋진 인사로군. 휘안.” “네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쁨이 가중되는걸.” 알 바르카는 가시돋힌 대답을 기대했다는 듯 기름진 웃음을 보였다. 이자드는 한층 더 속이 뒤틀림을 느끼며 응수했다. “허. 그 뻔뻔스러움이 조금도 변하지 않다니 정말 유감이야. 지난번에 봉인되고 나서 뭐 좀 배운 게 없었나보지?” “천만에. 많은 걸 배웠지. 이를테면 네게 극히 부족한 미덕…인내심이라든가.” 알 바르카는 불길한 그림자처럼 드리운 긴 흑자색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방 안을 어슬렁거 렸다. 혹은,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투명한 검은 그림자 너머로 나무 침대며 문 손잡 이가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도 환영치고는 대단한 생생함이었다. 알 바르카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긴 대체 뭐지? 형편없는 방이로구만. 이런 데서 지내나?” 이자드는 제법 침착하게 탁자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내가 어디서 지내건 상관할 바 아냐.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지 그래?” “아, 몇십년만에 만난 친구에게 이러기야?” “친구? 누가? 누구의?” 이자드의 목소리가 약간 커지자 알 바르카는 훌쩍 형상의 키를 늘리며 양손을 펼쳐보였다. “저런 저런, 이자드. 여전히 융통성이 없군. 늘 말하지만 넌 너무 음울하단 말이야. 좀 세상 을 즐겁게 살라구! 스트레스 해소엔 뭐니뭐니해도 피와 전쟁이 즉효약이라니까.” 알 바르카의 자줏빛 눈동자가 다시 이자드를 직시했다. “그렇지. 저번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을 때처럼 그렇게 살라고…그 날은 꽤 하던데 그래. 날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갔을 때 말이야.” 이자드는 자신을 억제하려 애쓰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죽을 뻔 했을 때 말이겠지?” 알 바르카는, 아니 알 바르카의 환영은 어둠 속에 녹아들 듯 흐릿해졌다가 다시 모습을 뚜 렷이 했다. “뭐,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구. 너도 죽을 뻔 했고 나도 호되게 당했고…우연히 아칸서스시 에 왔다가 네 흔적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그때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직접 찾아가 보지 못했지만 말이야…아참, 그 꼬마하고는 무사히 만났나?” 이자드는 손을 다시 한 번 쥐었다 폈다. 알고 있었다. 그는 카르트에서 빠져나온 후, 카라에 게 어떻게 돌의 강을 건넜는지 묻는 것을 잊지 않았었다. 휘안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에 대한 카라의 이야기는 하리잔을 다그쳐 마저 들은 내용과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그러니까, 그는 40년 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그래서 한동안 잊고 지내던 숙적이 부활 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모를 이유로 휘안이 죽지 않았다는 것, 언제든 회복해서 돌아오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 녀석이 자신과는 다른 이유로 샤미 르의 유산을 노렸다는 것 또한, 며칠 전에 확인한 바였다. “안그래도 대체 무슨 속셈인지 궁금해하던 참이었어.” 이자드의 얼음 같은 목소리에 알 바르카는 또 쯧쯧 혀를 찼다. “아아, 여전히 내 호의를 알아주지 않는군, 이자드. 내가 언제 네 주변 사람을 해친 적이 있었던가?” 이자드는 대꾸를 하려다가 마음을 거두고,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어 버렸다. 알 바르카는 계 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참, 며칠 전 일은 의외였어. 사실 최근에는 신경쓸 일이 좀 있어서, 직접 방문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있었거든. 그런데 비델의 일을 방해한 재미있는 녀석이 네 부하였단 말이지? 레투 스 시에서 여기까지 푸른 색의 궤적이 또렷이 남아있더군. 그걸 발견하자마자 뛸듯이 기쁜 나머지 바로 날아와버렸지 뭔가. 그런데 그건 뭐야, 라피스 라줄리? 흐음- 샤미르의 무덤에 그걸 가지러 왔던 건가? 아,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구. 난 원하던 걸 손에 넣었고, 네가 뭘 하든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휘안은 싱긋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은.” “떠벌떠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이자드는 짜증을 누르지 못하고 탁자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알 바르카는 눈을 깜박이며 손 가락을 흔들어보였다. 이자드는 짜증 속에서도 굳이 눈꺼풀을 깜박이는 동작까지 흉내내는 알 바르카의 묘한 완벽주의에 감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탄은 뒤이어 나온 알 바르카의 더없이 우아한 동작과 말의 내용에 깨끗이 사그러들었다. “인내심! 정말 인내심이 부족하단 말이야……” 순간 이자드의 손가락이 드득 탁자 위를 긁었다. 알 바르카의 모습이 아주 낯익은 형태로 변했던 것이다. 몇 번이나 봤지만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 이자드 자신의 모습으로. 머리카락이 길다는 점만 빼면 거울에 비춘 듯 똑같은 얼굴이 이쪽을 쳐다보며 조롱하듯 웃 고 있다. 정말로, 알 바르카가 조금만 더 약했더라도 벌써 오래 전에 끝장을 봤을 텐데…이자드는 부 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을 삭히려 애쓰며 눈썹을 곤두세웠다. 알 바르카는 한층 더 약을 올 리려는 듯, 이자드와 똑같은 얼굴에 전혀 닮지 않은 몸짓으로 말을 이었다. “말했잖나! 옛 친구가 보고 싶어서 온 거라고. 비록 지난번에 서로 안좋은 상황에서 헤어 지기는 했지만 말이야. 알잖아? 난 개인적으로는 널 아주 좋아하거든. 어쩔 수 없이 친구와 적대시하게 되는 건 언제나 슬픈 일이지.” 이자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역겹군. 그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더더욱 역겨워.” 알 바르카의 자줏빛 눈이 이채를 발하는가 싶더니 확 눈앞에 다가들었다. 착 가라앉은 달콤 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사랑스러운 입은 여전한걸. 잡아뜯어주고 싶을 정도야.” 이자드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멈추고 눈앞에 다가든 자줏빛 눈을 마주보 았다. 그 눈에 담긴 살기는 환영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늘했다. 어쩌면 알 바르카는 환 영 상태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지금은, 나를 상대로는 아니지.’ 이자드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알 바르카는 곧 살기어린 눈빛을 거두고 다시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니까! 난 목적에 부합될 때가 아니고는 아무도 함부로 공격하거나 하지 않아. 알잖나?” “알지.” 이자드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그 ‘목적’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제멋 대로 설정하고 계획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알 바르카는 극적인 연출을 즐기는 편이었고, ‘맛있는 것은 나중에’ 먹는 습관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초라한 배경 속에서 피를 흘릴 성격은 아니다. 이자드 자신의 얼굴을 한 밉살스러운 숙적은 다시 한가로 이 뇌까렸다. “게다가 네가 방해가 될 때라도 절대 죽이고 싶진 않단 말이야. 네가 없으면 세상의 재미 가 반쯤은 줄어드는 셈이니.” 이자드는 숨을 들이마시며 40년 전, 알 바르카의 손에 가슴이 꿰뚫렸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 지 않으려 애썼다. 그 때의 상처 때문에 한 달 동안이나 의식을 차리지 못했었고, 겨우 깨어 나 보니 그 사이 루이는 은색 날개를 우아하게 접은 긴나라족에게 푹 빠져 있더라는 상황에 직면해야 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런 이후의 일은 차치하더라도,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분만 떠올려도 충분히 더러웠다. 같은 순간에 뒤늦게 먹혀든 그의 주문이 알 바르카를 무너뜨렸 다는 것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도 알 바르카는 그 이상 그의 기분을 갖고 장난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문득 어딘 가를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었던 것이다. “오늘은 이 정도로 안부인사를 마치지. 또 만나자구, 이자드! 옛친구를 만나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이거든!” 알 바르카의 환영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어둠 속에 녹아들어갔다. 이자드는 속이 통째로 뒤집히는 것 같은 느낌에 탁자 위로 고개를 숙였다. 알 바르카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 참! 입고 다는 품이 여전히 상거지꼴이라고 말해주는 걸 깜박했네. 누누이 말하지만 회색보다는 붉은 색이 더 잘 어울린다니까……” “파사! pasa!” 저도 모르게 터져나온 일갈에 소용돌이가 한바탕 휘몰아쳤다. 찢어지는 비명소리같은 바람 소리와 함께 작은 방 안에 있던 물건이 갈갈이 찢겨나갔다. “이자드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밖에서 놀란 비치킷차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자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 것도 아냐!” “예?” 이자드가 이렇게 대응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비치킷차는 약간 당황해서 문 앞에 서 있다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돌아섰다. 그는 뒤늦게 몰려나온 수행자들을 안심시키며 객실 앞에서 멀어졌다. 이자드는 그런 상황에조차 신경쓰지 못할 만큼 화가 나 있었다. “젠장!” 그는 알 바르카를 꺼렸다. 아니 증오했다. 비단 40년 전의 일만이 아니다. 언제부터, 왜 그랬 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지만 늘 그랬다. 그 문제에서만큼은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스스 로의 감정을 자제할 수 없다는 점에 한층 더 화가 났다. 이자드는 머리를 흔들다 말고 천천히 주먹을 들어 부서져라 탁자를 내리쳤다. 팍 소리를 내 며 푸른 돌이 튀어올라 바닥에 떨어져내렸다. [45] - 6장 그리 나쁘진 않아 (2) 루이는 육체가 없는 밤 시간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 밤이 이슥하도록 깨어있는 경우는 대 개 교대하기 전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뿐이었다. 남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남이 움직이는 대로만 따라간다는 것,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다. 가끔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으면 서 낮 시간에도 거의 깨어있는 이자드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 았지만. 어쨌든 새벽에 교대가 이루어진 후에도 내처 자다가, 햇빛이 눈을 찌를 때 즈음해서야 일어 나는 게 루이의 평소 습관이었다. 이자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 뭔가 연구나 공부에 몰 두해 있다가 잊은 경우만 아니라면 침대 근처에서 교대하는 편이었다. 자는 채로 교대해 나 온 루이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그리고 보통은 주변에 늘어놓은 자기 물건도 정리해 놓 고 새벽을 맞았다. 그런데 그 날 아침, 루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방 안이 장난이 아니었다. 연구하다가 미처 치우지 못해서 어수선한 정도가 아니었다. 방 안에 태풍이라도 몰아친 듯 온군데가 부 서지고 찢어지고 엉망진창이 되어있는 게 아닌가. 루이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물었다. “이자드! 야,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대뜸 음울하고 신경질적인 대꾸가 돌아왔다. - 시끄러워. “뭔데 그래?” 그 이상은 반응이 없었다. 낮 시간에 혼자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면 늘 그렇듯 ‘어둠’속 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루이는 연거푸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길게 켠 다음 방안을 훑어보 며 입술을 삐죽였다. “헹. 네 놈이 이렇게 광분하는 이유야 하나밖에 없지.” 이자드가 이름만 들어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존재, 알 바르카가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 것 은 그도 귓등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루이는 발에 채이는 물건을 쓱쓱 밀어놓고 밖으로 나 가면서 막연히, 알 바르카가 찾아오기라도 했던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좋아할 수는 없는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이자드처럼 반응할 이유도 없었다. “직접 마주친 일도 없는걸.” 루이는 혼자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알 바르카는 언제나 이자 드만 상대했다. 40년 전만 해도 그랬다. 알 바르카가 치명타를 입고, 이자드도 목숨이 간당 간당하게 다칠 때까지도 루이는 그들의 싸움과 무관한 제삼자로 남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가면을 쓰고 한 사람인 양 행세했었는데도 말이다! 문득 루이는 40년 전의 사건에서 연상되어 버린 장면에 목이 꽉 죄이는 것 같은 아픔을 느 꼈다.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사람의 형상에 몰아넣은 듯 했던 푸른 눈과 투명한 은빛 날 개…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 목을 뒤로 젖히고 잠시 동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파류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때 그는 정말이지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우선 잘 자다가 갑작스러운 통증에 깨어 나 보니 이자드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쓰러져 있지, 밤새도록 악을 쓰며 불러대도 반응이 없는 데다가, 어차피 루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이자드 뿐이니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그 와중에 산 속이라 피냄새를 맡은 짐승들은 몰려오고…그래도 겨우 아침이 와서 한 시름 놓기는 했지만 워낙 이자드의 부상이 심해서 그 공명으로 루이 쪽도 몸이 시원치 않은 상태에, 은신할 곳을 찾기도 전에 곰과 마주치질 않나, 산적 떼와 마주치지 않나…지금 생각 해도 한심스럽지만, 그 때는 꼼짝없이 붙잡혀 노예로 팔려가든가 죽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정말로, 칼까지 떨어뜨리기 직전이었으니까. 열 때문에 멍한 머리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올려다 본 하늘은 꿈을 꾸는 듯 아름다웠다. 그 순간에 본 것이다. 그 하늘이 쪼개져서 지상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이자드는 나중에 그 말을 듣고서 어지간히도 감상적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라고 비야냥거렸 지만- 루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반한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다. 동경이라고 부르건 사랑이라 부르건 아무래도 좋다. 그 때도 그 후로도, 아니 그 후에 파류나를 알아갈수록 점점 더해져서 지금까지도, 루이는 파류 나를 떠올릴 때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우리한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이 피를 데우고, 손끝 발끝까지 저릿저릿 퍼져나가 어떻게든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들 었다. 그래서 그는 20년이 지나도록 포기할 수가 없었다. 긴나라족이 멸망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 기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인정할 수 없는 것은 파류나가 그 길을 택한 거라는 이자드의 말 이었다. 납득할 수도 납득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이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들어 무겁게 벽 을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지잉- 하는 아픔이 겨우 머리에까지 전달될 즈음에서야 그는 그 생각을 떨어버릴 수 있었다. 루이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문을 열었다. 온통 푸르딩딩한 풀쪼가리 뿐이었지만 사원의 식사로 고픈 배를 채우고, 뒷마당으로 나가보 니 티나밋다가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정어정 다가가 툭 던지듯 묻자 시큰둥한 답이 돌아온다. “카라는?” “글쎄. 게을러터진 누구를 기다리다가 나갔겠지.” 티나밋다는 방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덕분에 오히려 궁금증이 생겨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니, 구덩이 속에 손가락 굵기만한 뱀이 우글거리고 있다. “엥? 이게 다 뭐야?” “어어, 건드리지 마! 다 독뱀이라구.” “에 ?“ “또 물려서 온몸에 두드러기라도 나게?” 티나밋다의 일침에 막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던 손이 멈춰 버렸다. 루이는 새삼 지난 사흘간 의 악몽을 떠올리며 점잖게 손을 거둬들였다. 사랑의 묘약인지 뭔지 모를 물건에 부작용으 로 일어난 다른 증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흘간 담요를 뒤집어쓰고 꼼짝 못한 채 비치킷차 와 카라의 토론에 귀를 기울여야 했던 것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루이는 카라나 찾아봐야겠 다고 생각하며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그 뒤로 티나밋다가 질문을 던졌다. “아참. 비치킷차님이 굉장히 걱정스러워하던데, 무슨 일 있어?” “비치킷차가? 왜?” 막 되물어보고 나서야 짐작이 갔다. 루이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드가 화내는 걸 봤나보군. 뭐, 별일 아냐. 녀석이 아주아주 싫어하던 놈이 나타났나봐. 비치킷차 녀석, 여전히 기가 약하군.” “이자드님이 화내는 걸 보고 멀쩡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이자드님이라는 호칭에 루이는 혀를 반쯤 빼물었다. “흐흥… 그녀석은 왜 그렇게 늘 무게를 잡고 다니나 몰라. 삶은 즐기라고 있는 건데 말이 지.” “이자드님은 너하고는 사람이 틀리잖아.” “……별로 그렇지도 않을걸.” 루이는 중얼거리며 사원 문을 나섰다. 그는 티나밋다가 고개를 돌려 묘한 표정으로 그 뒷모 습을 쳐다보는 것을 알지 못했다. 카라를 찾자. 어디로? 언덕 위, 아니면 시내, 아니면 모래의 바다 기슭에 있겠지. 언덕 위부 터 가볼까. 그런데 카라를 왜 찾는 거더라? 몰라. 카라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이고, 좋은 아이고, 또 긴나라족과 뭔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에이 씨!” 루이는 사람 없는 숲 속에서 버럭 성질을 터뜨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생각 따윈 머리만 아프지, 질색이다. 그는 카라를 찾겠다던 처음 목적을 잊어버리고 벌렁 소나무 그늘에 드러 누워 버렸다. 잠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건 꿈이었다. 그런데 꿈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깨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파류나는 예의 초연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운 채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게 그리 간단하진 않아, 루이.” 어째서? 간단하게 만들면 되잖아? 하지만 그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파류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깊은 숨을 들이키고, 찌르는 듯한 고통을 삭이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만 전력을 다해야 했으므로. 그와 함께 있으면 항상 흠뻑 취한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달콤한 고통…매번 반복되는. 절벽위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것 같은 위태위태한 행복감. 아차 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 져 버릴 것이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성별이 없어서인지 왕이라서인진 몰라도, 당신 정말 이기적이야. 그거 알아요?” 파류나는 빙긋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파류나의 새파란 눈은 루이를 지나쳐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긴나라족의 마지막 왕은 미소지으며 약간 고개를 기울였고, 머리카락과 똑같은 은빛 날개를 조금 까닥거렸다. “사실 난 엉뚱한 곳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거든. 왕으로서도 어버이로서도 실격이야.” 루이는 가만히 몸을 기울여 파류나의 긴 은빛 머리카락을 감아쥐었다.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해.” “아하하…루이, 루이!” 파류나는 처음으로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에게 ‘나, 커서 엄마랑 결혼할거야’ 라는 말을 들은 어머니 같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증거하듯 파류나는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루이의 이마를 쓸었다.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잦아들더니 노래 하는 듯한 말소리가 뒤를 이었고 서서히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갔다. “그거 알고 있나? 세상 어딘가에 사랑하는 존재가 하나 있다는 것은 수많은 가능성을 의미 하지. 존재하는 것, 세상, 삶…어쩌면 나 자신까지도……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 데.”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아주 잠깐, 루이의 이마를 스쳤다. 화창한 햇살이 구름에 가리운 듯, 주위에 온통 서늘한 어둠이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낭떠러지다. 나락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이 집어삼킨 건 루이가 아니었다. “아니…이기적이라 해도, 실격이라 해도 난 왕이야.” 파류나는 작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건 꿈이었다. 잠들어 있던 기억의 파편이 진짜처럼 되풀이된 것 뿐이다. “제기랄……” 루이는 팔을 들어 머리를 가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화창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 고, 새파란 하늘에 몇 조각 구름이 유유히 떠돌았다. 그리고 기억이 남아있는 한 - 고통은 몇 십년이 지나도록 바래지 않고 되풀이되었다. 지금 잠깐만. 잠깐 뿐이야. 루이는 가만히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곧 지나갈 거야. [46] - 6장 그리 나쁘진 않아 (3) 길어진 앞머리가 벌써 눈을 찌르기 시작했다. 왠지 최근 들어서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 그러나 그 순간 카라는 머리를 정돈해야겠다거나, 지금 눈을 찌르는 머리카 락을 걷어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마비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편 지를 읽었다. 흰 종이에 검은 색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는 글자였다. 아는 단어였다. 아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내용이 와닿지 않았다. 왜 내용이 이해가 안되지. 카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비치킷차 무니의 둥글고 환한 얼굴을 올려다보았 다. 보름달에 찍힌 얼룩처럼, 약간의 수심과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저어…” 비치킷차에게서 울림깊은 잔잔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답신을 보내려면 떠나기 전에 내게 말해다오.” “네에…” 카라는 편지위로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며 모호하게 대답했다. 편지의 필체는 카트니 오빠의 것이었다. 카트니의 말투가 묻어나는, 조금은 어색한 말투. 그런 주제에 끝에는 ‘어떻게 지 내는지 궁금하구나. 답장 기다리겠다, 사랑하는 오빠가’라고 적어놓았다. 집을 떠난 후 처음 받은 편지였다. 카라는 다시 눈을 들었다가, 문득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었던 양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비치킷차 무니의 부드러운 손이 어깨에 와닿았다. 온화한 눈빛에 진심어린 위로와 걱정의 빛이 어려 있었다.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야. 알고 있지? 마음껏 슬퍼하고 떠나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애도 란다.” 카라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죽음의 냄새를 떼어놓고 떠올릴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는 말도, 요 몇 달 사이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 도 하지 않았다. 이미 집을 떠나면서, 아버지의 침대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 다시는 만나 지 못할 줄 알았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울지도 않았다. 울지 않음으로써 잊지도 않겠 다던 어린 시절의 마음은 버렸을 텐데도, 여전히 눈물은 쉽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마 음 한 구석에서, 울어야 하는 걸까 의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상관없다. 눈물은 나올 때가 되면 나오겠지. 카라는 찬찬히 편지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고, 다시 한 번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 고 비치킷차 무니 앞을 떠났다. 뒷마당으로 나오자 낯익은 얼굴이 흘긋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여어- 일찍 일어났구나, 카라.” “티나밋다님.” 카라는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티나밋다 무니에게 다가갔다. 또 무슨 일을 하고 있는것 인지, 티나밋다는 마당 한 구석에 커다란 자루를 내려놓고서 허리를 펴며 눈을 찡긋했다. 가 끔보면 티나밋다의 과장된 동작이나 활달한 몸짓에는 루이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어렸을 때 루이가 키웠다더니(이건 본인의 말이니 믿을 수 없지만), 그래서인지. 카라는 자루에 손을 뻗으며 물었다. “이건 뭐예요?” “손대지 말아라. 뱀이야.” 카라가 멈칫하는 사이 티나밋다는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독사란다.” 카라는 손을 거둬들였다. 티나밋다 무니는 여기저기 긁히고 물린 상처가 드러난 손 위에 두 꺼운 장갑을 끼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카라는 티나밋다가 구덩이에 뱀을 옮겨놓는 모 양을 지켜보다가 일어섰다. 오늘은, 티나밋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카라는 시내까지 내려가서야 루이에게 어디 간다 말을 남기지 않은 것을 기억해내고 아차 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루이와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다. 헤델의 가게 문을 열자 아침인사 대신 고양이 울음소리가 카라를 반겼다. “냐옹-“ 통통한 잿빛 고양이가 금발 청년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달려왔다. 카라가 헤델의 눈을 피해 제 우유를 고양이에게 먹여온 효과였다. 헤델은 몸에 좋다는 주장을 펼치며 매번 카라에게 우유를 먹이려 했다. 고양이는 잠시 자신의 추종자에게 인사치레를 해 준 다음 돌아서서 헤델에게 다가갔다. 정 확히는 헤델이 내려놓은 우유 접시에게. 카라는 고양이 주인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맞은편에 앉았다. “며칠 안보이더니 돌아왔네?” “아아, 일이 좀 있었지.” 진은 느릿느릿 말하면서 여전히 사람 속을 긁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카라는 잠시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늘 단정하고 심하다 싶을 만큼 깔끔하기만 했던 얼굴에 상처가 있 다. 게다가 옆에 못보던, 이상하게 생긴 지팡이를 끼고 있다. 그러나 카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음 말을 이은 것은 진이었다. “아참, 그 사이 루이는 내내 담요만 뒤집어쓰고 있었다면서?” “아아.” 카라는 새삼 울상을 짓고 웅크려 앉아있던 루이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키득 웃어버렸다. 그 얼굴에 한 가득 울긋불긋 뾰루지가 돋아난 광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희극이었다. 카라는 조 금 웃다 말고 말했다. “나도 루이가 그런 체질인 줄은 처음 알았어. 그나저나 그 여자는 대체 어쩌자고 루이에게 사랑의 묘약 같은 걸 쓰려고 했...” “아악! 그 얘긴 꺼내지도 마!! 절대! 절대 듣고 싶지 않아!!” 헤델이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루이가 헤델의 케익을 먹고 그런 꼴이 된 걸로 소문이 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덕분에 며칠째 가게에 파리가 날리고 있었으니 더 더욱. 카라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며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진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 을 가늘게 떴다. “흐흠…” 카라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왜?” 진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녹색 눈은 흥미롭다는 듯 반짝이며 카라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 다.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진에게 사람의 ‘색’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보기만 할 뿐 정작 무엇을 보았는지는 말해주지 않으니. 카라는 몸을 굽혀 고양이를 안아들며 그를 외면했다. 끌어안기는 것을 질색하는 고양이는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다. 카라가 처음 진에 대해 반감을 덜어낸 것은, 그 고양이의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였다. 진은 태연하게 ‘내 고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름이 뭐냐고 다시 묻자, ‘난 내 고 양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은 진의 고양이라고 부르든 뭐든 좋을 대로 부르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소유욕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그 반대 인 것 같기도 했지만…어쨌든 그 순간부터 카라는 그를 자신과 동격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했 다. 진은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우아하게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기분이 안좋아 보이는데.” 카라는 어깨만 으쓱이고 버둥거리는 고양이를 바싹 끌어안았다. 체온이 따뜻했다. 진은 카라 의 동작을 흉내내듯 어깨를 들썩이더니 손을 내밀어 고양이를 빼앗으며 연극적인 어조로 말 했다. “별로 아름답지 못한 귀부인과 약속이 있어서 말이죠, 레이디 카라. 먼저 가보겠습니다. 충 고하건대 지나친 사고는 오히려 뇌를 둔하게 만든다는 것, 명심하시길." “…충고 고마워.” 카라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헤델의 가게를 떠난 것은 정오를 막 지난 시간이었다. 사원을 둘러싼 소나무 숲을 이리저리 헤집어 길을 찾아올라가면, 모래의 바다가 바로 내려 다보이는 나즈막한 절벽을 찾을 수 있었다. 볕에 달구어진 바위에 앉아, 가끔은 그 절벽 높 이까지 솟구쳐 머리위로 서늘하게 부서져내리는 모래 파도 위에서 발을 달랑이는 것도 꽤 기분좋은 일이었다. 사막과 바다. 폐허와 도시. 눈 덮힌 골짜기와 황야. '내가 아는 건 그것 뿐이지.' 카라는 은빛 모래바다를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진짜 바다, 물로 이루어졌다는 바다는 어떤 곳일까. 호기심을 불태우려 해봤지만, 별 느낌이 없었다. 루이 말로는 아칸서스시를 떠 나 열흘 정도면 시더시에 도착할 거라 했다. 중간에 별 말썽만 없다면. 시더시는 은의 바다 에 면해 있는 항구도시이고, 마법사 길드가 있는 곳이며, 루이의 말에 의하면 카라에게 분명 도움이 될 누군가가 있는 곳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긴나라족과 그녀가 무슨 관계인지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사람이겠지. 글쎄, 그것도 이자드는 그다지 기대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 아름다운 그림이나, 긴나라족 일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루이를 보아도 별로 마음이 상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확실한 이유가 있는 편이 안심이 되는 면도 있다. 아무래도 루 이가 기대하는 것만큼 관련이 있을 성 싶지 않아 걱정일 뿐. - 달리 단서도 없으니 마음쓰지 말아라. 오히려 이자드의 말이 떠오르자 화를 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렇게 절벽 위에 앉아 있었다. 꽤 오랫동안. 정확히 말하자면, 해가 질 때까지. ** “늦었구나.” 사원 앞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자드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라는 걸음을 멈추고 윤곽만 뚜렷한 이자드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는 뭔가 더 말할 것 같다가,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은 카라의 눈앞까지 내려왔다. 카라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그 손위에 있던 물건 을 집어들었다. “이건…?” 이자드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원래는 좀 더 단순한 형태로 만들 생각이었다만, 돌 자체가 균형잡혀 있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와아-“ 카라는 그 물건을 들어올려 살펴보고서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달빛 아래에서 투명한 푸른 빛을 발산하고 있는 두 개의 돌조각. 손바닥 위에서 기분좋을 정도로 차갑고 물기어린 감촉이었다. 단순하지만, 아름답다. 카라는 정신없이 그 돌을 들여다보았다. 찬찬히 뜯어보니 그냥 둥그런 돌이 아니라 뭔가 고리 형태같은 것이 뒤에 달려있었다. 고리라기보다는 둥그 런 집게 같은데, 잘 보니 같은 돌이었다. 이자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라피스 라줄리 Lapis Lazuli, 청금석이라는 돌이다. 마력이나 마법력의 통제에 상당히 효 과가 있는 돌이니까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구나. 음, 사실은 목걸이 형태로 만들 생각이었는데…뭐 양쪽으로 나눠놓으면 균형감이나…” “이자드!” 카라는 뭐가 그리 마음에 걸리는지 중언 부언 게속되는 설명을 막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이자드에게는 그 얼굴이 잘 보일 터였다. “고마워요.” 잠시 부드러운 침묵이 흘렀다. 카라는 돌을 한 번 더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 조심스레 귀에 달아보았다. 집게 같은 부분이 귀에 딱 들어맞았다. 조금 얼얼하기는 하지만. 카라는 몇 번 실패한 끝에 양쪽에 다 푸른 돌을 달고 어떠냐는 듯 양손을 들어보였다. 이자드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달빛과 모래파도가 하늘에서 이중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카라는 이자드를 쳐다보고 웃었 다. 사실은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 루이와 마주쳤을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마음 속 에 있는 수레바퀴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 실히 속도를 더해 가면서. 시더로 떠나기 전에, 카트니에게 편지를 쓰자. 오늘은 아버지의 죽음이 배달된 날, 그리고 16년간 카라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라고 알아 온 그 날이었다. [48] - 7장 폭풍의 길 (1) 아칸서스시에서 남서쪽으로 가는 길은 황무지를 따라 하나로 이어지다가 숲으로 접어들면서 두갈래로 갈라진다. 한쪽은 주로 상인들이 이용하는 큰길로, 짐마차가 지나가기 좋게 평탄하 게 닦여있고 안전했다. 이 큰 길에 곁다리처럼 가늘게 달려 숲 속으로 이어진 오솔길이 또 한 갈래였다.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는 딱 글씨 새기기에 좋을 성 싶은 넙적한 바위덩어리가 우뚝 섰고, 지금 그 앞에는 크고 작은 두 사람이 서서 바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큰 쪽은 금발에 삐딱한 자세, 작은 쪽은 검은 머리에 바위에 쓰인 말을 읽느라 한껏 발돋움을 했다. 아이는 고개를 쳐들고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길을 여는 사람들> 공고. 이 길의 정비와 관리 및 안전보장은 상기와 같은 요금체계하 에 공정하게 운영되며…이게 뭐야?” “뭐긴. 안전하게 장사하고 싶으면 통행세를 내라는 거지.” “안내고 가면 어떻게 되는데?” “털리지.” “그런 게 어딨어? 완전 산적이잖아!” “뭐, 그래도 목숨은 보전해 주니까 진짜 산적들보다는 낫다고나 할까. 상인들도 다 합의한 거야. 어느 정도 돈을 내더라도 안전하게 다니는 편이 좋다는 거지.” 금발 남자는 무관심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아무렴 어떠냐. 우리랑은 상관 없는 얘긴데.”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오솔길 쪽을 가리켰다. 검은 머리 소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타박 타박 걸어서 바위 반대쪽을 올려다보았다. 이쪽에도 역시 공고문이 있었다. 내용은 딴판이었 다. 위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 말을 탈 수 없음, 마차는 들어올 수 없음…소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글을 낱낱이 읽어본 다음, 문맹자를 위해 친절하게 표시된 커다란 붉은 해골 마크까지 보고 나서 시선을 돌렸다. “이리로 가도 괜찮은 거야, 루이?” 루이는 히죽 웃었다. “산적이 나오면 식전 운동인 셈 치지 뭐.” 푸른 눈이 반짝이는 모양새가 아무리 봐도 산적이 나와줬으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검은 머리 소녀, 카라는 머리를 가벼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카라는 몇 시간 걸으면서 그런 한숨을 세 번이나 더 내쉬어야 했다. “웃챠! 이제 다됐다.” 루이가 쓰러진 나무를 숲 쪽으로 밀어붙이고 흙투성이가 된 손을 탁탁 털면서 다시 길 쪽으 로 나오자 카라는 일어서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벌써 세 번째잖아. 이 길 원래 이래?” “글쎄다. 전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최근에 폭풍이라도 쳤나봐.” “폭풍?” 카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루이를 쳐다보았다. 잠시 머리 속에 폭풍에 대한 기억이 스쳐 지나 갔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며칠 동안이나 창밖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물론 이쪽에서는 눈이 별로 내리지 않으니 비가 오겠지. 카라는 책에서 본 것처럼 캄캄한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고 비는 억수같이 퍼붓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 광경을 떠올렸다. 확실히 계속 길을 가로막는 나무들은 벼락을 맞아 쓰러진 듯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아칸서스에서 별로 멀지 않다. 최근 들어 아칸서스에는 폭풍은커녕 천둥을 동반한 소나기도 찾아오지 않았다. “폭풍이라고?” 카라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지만, 루이는 그 의심스러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명랑하게 다시 앞장섰다. “저기쯤 가면 샘이 하나 있을 거야. 거기서 점심을 먹자.” “응.” 바람이 묵직한 잎새들을 소리나게 흔들며 지나갔다. 이 숲의 나무들은 대체로 카라가 기억 하는 나무들보다 잎이 넓적하고 가지도 넓었다. 카라는 잠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쏴아- 다시 한 번, 숲 전체가 파도치듯 흔들렸다. 은빛 모래파도가 일어나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나뭇가지들 위로 경쾌하게 달음박질하는 바람의 형상이 눈에 잡히는 것 같았다. 카라는 잠 시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몸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해?” 루이가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카라는 눈을 뜨고 그에게 뛰어갔다. 루이가 말한 샘은 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빽빽하게 서로를 받치고 선 나무들 사이로 갑자기 공터가 나오고, 그 한쪽 구석에 샘이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이끼 다그한 녹색 바 닥 어딘가에서 꿀럭꿀럭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모양이 보였다. 샘물은 차갑고 달콤했다. 카라 는 몇번이나 손 안 가득 물을 퍼올려 마시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는 먹고 마 시고 먹고 마시고를 몇 번을 반복한 다음 포만감과 함께 팔을 베고 드러누웠다. 카라는 차 가운 샘물에 손을 담근 채 물었다. “이 샘물 정말 맛있는데. 어떻게 알았어?” “응? 아아 - 글쎄, 뭐, 옛날에 와본 적이 있어서 말이야.” 루이는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졸음이 밀려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에는 늪이 있었지... 어둡고, 짐승들도 살지 못하는데가가 괴물이 나오는... 지금은 이 렇게 좋은 곳이지만 말이야.” “흐음.” 카라는 물통 가득 물을 퍼올린 다음 공터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인걸.” “아아, 그래… 기분좋은 날씨다.” “루이, 자버리면 안돼!” 루이는 아예 모로 누워버리며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아함 - 좀 자면 어떠냐. 천천히 가도 돼.” 카라는 냉큼 눈을 감아버린 루이의 몸을 흔들었다. “루이는 저녁이 되면 잘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이자드가 나오면…” 카라의 말을 끊어버린 것은 다름아닌 바람이었다. 갑자기 확 불어온 바람이 숲 전체를 뒤흔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불이 꺼지듯 어두워졌다.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이어 지던 새와 벌레들의 소리가 꺼져들었다. 화닥화닥 나뭇잎과 흙부스러기가 돌풍에 말려 공중 제비를 돌았다. “뭐야?” 루이가 튀어오르듯 상반신을 일으킨 순간, 두번째 바람이 덮쳐들었다. 카라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루이가 재빨리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날려갔을 정도의 바람이었다. 루이는 한쪽 손으로 카라를 잡은 채 바닥을 차고 몸을 한바퀴 팽그르르 돌렸다. 풍압을 몸 으로 받아내며 고스란히 흘려버린 훌륭한 동작이었지만, 막 그의 손이 다시 땅바닥을 짚을 때 세 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그것도 이번엔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듯한 바람이었다. 루이는 카라를 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잘 잡아! 눈 감고!” “에…” 그러나 눈을 감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카라는 눈을 크게 떴다. ‘어? 눈에 뭐가 들어갔나?’ 카라는 잠시 미간에 주름을 잡고, 앞을 유심히 살펴본 다음 루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는 보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다시 그 쪽을 돌아보았다. 바람은 형체를 갖고 있었다. 카라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입을 열어 그 사실을 말해주기 전에 루이는 카라를 땅에 내려놓으면서 칼을 뽑아들었다. 이럴 때만은 무섭게 빠르다. 바람의 진로는 이제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히 위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루이는 눈을 빛내며 기세좋게 소리를 질렀다. “좋아좋아. 감히 나한테 덤볐다 이거지!!” 그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크게 발을 내딛고 윙 소리가 나게 칼을 휘 둘렀다. 그 순간, 갑자기 기세를 잃은 부드러운 바람은 그의 옆구리를 스쳐지나갔다. 뒤이어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냐- 옹.” 주춤. 루이의 자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하며 그 소리가 들린 쪽 을 쳐다보니, 카라가 언제 꺼냈는지 말린 모래고기를 허공에 쳐들고 있었다. 그 바로 앞에서 기쁜 듯 목을 울리는 고양이 소리가 다시. “냐 - 옹.” 카라는 루이를 건너다보며 웃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고양이였나봐. 루이, 이거봐.” 카라는 손에 들고 있던 모래고기를 약간 쳐들었다. 루이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 허공 을 쳐다보았다. 카라 앞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모래고기가 냐금냐금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카라는 신기한 듯 손을 놓았다. 반쯤 남은 모래고기는 허공에 뜬 채 조금씩 조금씩 어딘가 로 빨려들어갔다. 루이는 엉거주춤 자세를 바로하며 눈을 깜박였다. “이거 봐, 루이. 안보여? 여기 공중에 희뿌옇게 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이…” 카라는 말을 하면서 팔 안 가득 허공을 안았다. “아까는 이것보다 더 컸는데, 지금은 좀 작아졌네. 근데 이녀석 엄청나게 뚱뚱해! 이렇게 커다란 고양이는 처음 봤어. 뭉실뭉실하고, 공같이 뚱그런걸. 굴러다닐 정도야.” “…굴러 다니는 속도가 그렇게 빨랐단 말이야?” 루이는 아까의 바람에 풀려나간 머리를 고쳐 묶고는 뺨에 스친 상처를 아무렇게나 문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맥 빠지네. 배고픈 고양이였을 뿐이라니.” 루이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뭉실뭉실한 바람 고양이를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별 생각없이 다닌다고는 해도 살아온 경력이 있다. 짐작가는 바는 있었지만. 그는 고개를 갸 웃할 수밖에 없었다. “…듣던 거랑은 좀 다른데……” “듣던 거라니? 얘가 뭔지 알아?” 카라는 폭신폭신한 베개라도 끌어안은 것처럼 허공을 안은 채 눈을 크게 떴다. 루이는 석연 찮은 얼굴로 턱만 긁고 있었다. 대답한 것은 이자드 쪽이었다. - 귀령(鬼靈)이다. [49] - 7장 폭풍의 길 (2) 귀령은 이 세계, 아니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세계의 틈새를 헤매는 존재다. 정확 히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해서 그런 틈새에 빠지는지, 혹은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귀령에게 힘이 있으며, 이 세상에 발딛기를 절실히 원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이용해서 귀령과 계약을 체결하고, 이 세상에 있을 수 있 는 존재의 발판을 제공하는 대신 그 힘을 이용하는 것이 바로 마녀들이었다. 마구잡이로 건너뛰어가는 루이의 설명과, 차분하기는 하지만 알아듣기가 어려운 이자드의 설명을 종합해서 거기까지 들은 다음에서야 겨우 카라는 귀령이라는 말이 왜 어디선가 들어 본 듯 했는지 깨달았다. “귀령이라고 하는 존재와 계약이 성립될 때라야 진정한 마녀라고 할 수 있거든.” 헤델이 그렇게 말했었다. 자기는 자질이 없다고, 그래서 마녀가 될 수 없다고. 카라는 루이 와 이자드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둥글고 커다란 동물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너무나 자연 스럽게 고양이라고 생각했지만, 뜯어보니 강아지 같기도 했고, 다른 어떤 동물이든 될 수 있 을 것도 같았다. 카라의 눈에는 보인다지만 그나마도 그 몸은 반투명했다. 부드럽고 폭신해 보이는 희끄무레한 형체 너머로 나무둥치의 윤곽이 보인다. 카라는 물끄러미 녀석을 내려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그럼 혹시 나도 마녀 자질이 있는 게 아닐까?” “뭐?” 루이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반응했고 이자드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렇잖아요. 나만 귀령이 보인다는 건 재능있다는 거 아녜요?” 루이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자드가 천천히 말했다. - 그건…다르지. “마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면서요.” - 그래. 그건 인정한다. 마녀들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니까 자세하게는 모르지. 하지만 네가 마녀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어. 이자드가 말끝을 단호하게 끊자 카라는 눈을 굴리며 코끝을 긁었다. “아님 말구요. 왜 화를 내요?” - 내가 언제 화를 냈다는 거냐? 이번에는 정말로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카라는 입술을 삐죽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 다. 루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건 그렇고 이놈을 어쩌지? …아무래도 그거겠지?” - 글쎄, 조금 이상한데… “무슨 말이예요?” “귀령은 말이지, 계약한 마녀 없이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게 되어있거든. 혼자 헤매는 걸 로 봐서는 이녀석도 계약자를 …에, 잃어버린 거겠지 뭐. 어쩐다. 어차피 곧 돌아갈 테니 놔 두고 갈까?” - 아까처럼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덤빈다면 곤란해. “어, 잠깐만. 돌아간다니?” 루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했다. 카라는 루이의 얼굴과 귀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죽는 거야?” “죽는 게 아니지. 왔던 데로 돌아가는 것 뿐이야. 살아있었던 적도 없는 녀석들이라고.” 카라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루이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얌마,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귀령이 무슨 애완동물인줄 아냐?” 카라의 이마에 한 줄 더 골이 패인다 싶더니, 불쑥 이자드가 칼로 자르듯 결론을 지었다. - 데리고 가자. 따라가기만 한다면. “어잉?” 루이는 찌푸리는 듯 웃는 듯, 황당하다는 듯 반대라는 듯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표정을 지었 지만 그 이상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카라가 일어서서 손짓을 하자 귀령은 너무나 자연스럽 게 그 뒤를 쫓아왔다. 오후 내내 루이는 가끔씩 뒤를 돌아보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돌풍이 일어나는 것으로 그 귀령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뭔가 석연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해가 졌다. <길을 여는 자들>이 관리하는 큰길에는 정기적으로 직할 여관이 있다지만, 이 어두운 숲속 에는 지붕있는 숙소라고는 딱 하나 뿐이었다. 두텁던 나무의 장벽이 그나마 얇아지는 곳, 근 처에 마을이 있어 꾸려나가는 게 가능한 여관 겸 주점이었다. 빠른 속도로 주변이 어두워지 는 가운데 이자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샛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잡았다. 상대적으 로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는 카라는 뛰다시피 뒤를 쫓아야 했다. 덕분에 겨우 여관 불빛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왠지 녹초가 된 느낌이었다. “어서옵쇼~!” 여관 문이 활짝 열리면서 갑작스레 왁자한 소음과 불빛이 쏟아져나왔다. 카라는 주춤하면서 다리에 뭔가 뭉클한 것이 와닿는 것을 느꼈다. 카라는 반투명한 귀령을 내려다보았다. 다리 에 닿아있는 부분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왜 그래?” 그 소리를 듣고 먼저 저만치 들어서던 이자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아니, 얘가…” 카라가 다시 고개를 들고 뭐라 말을 하기 전에 갑자기 진동이 거세졌다. 화악- 예고없는 돌 풍이 일어나 주위를 휩쓸었다. “우왓!” 졸지에 돌풍의 중심에 서버린 카라가 발이 뜨는 느낌에 내지른 소리는 뒤이은 와장창 소리 에 묻히고 말았다. 돌풍이 안에 있던 탁자를 온통 헤집어놓은 것이다. 겨우 발이 다시 땅에 닿은 느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깐, 카라는 수십개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 것을 깨닫고 다시 당황해야 했다. 바닥에 널부러지고 깨진 술잔들 위로 불길한 침묵이 흐르고, 그 위로 십여명의 남녀가 반쯤 일어선 채 카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두려움인 것 같았 던 시선들은 곧 분노에 자리를 내주었다. 한 여자가 몸을 바로 세우며 떨리는 소리로 외쳤 다. “그 마녀가 너냐? 오늘 너 잘만났다! 내 밭을 망쳐놓고 뻔뻔하게스리 모르는 척 했겠다? 남의 밭을 망쳤으면 변상을 해야 할 거 아냐?” 갑자기 와글와글 다른 목소리가 치솟아올랐다. “맞아! 남의 집을 부숴놓고…” “우리 집 과수원은…” “채 익지도 않은 과일이…”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이 한데 뒤섞여서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카라는 멍 하니 서서 눈만 깜박였다. 발치에 반쯤 몸을 댄 귀령이 조금씩 떠는 것만 느껴졌다. “저기…” 카라가 어쩔 줄 몰라 입을 열며 한 걸음 물러서자 얼굴이 시뻘개진 사람 몇이 삿대질을 하 며 앞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너도나도 몰켜나왔다. 후끈 달아오른 열 기를 한꺼번에 베어버릴 듯한 차가운 일갈이 아니었다면 바로 카라에게 덤벼들었을지도 몰 랐다. “시끄러워!!” 이자드의 일갈에는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와글와글 몰려나오던 사람들이 주춤하며 눈을 끔벅였다. 이자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들과 카라 사이에 끼어든 다음 싸 늘한 눈으로 마을 주민에 틀림없는 면면을 쓸어보았다. 무서울 게 없을 것 같던 사람들은 흥분이 가라앉자 곧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자드는 그제서야 다시 입을 열어 나직이 말했다. “저 애는 마녀가 아니고 우린 지금 여기 처음오는 사람들이오.” 이자드의 고압적인 자세에 사람들은 한층 더 주눅이 들며 입을 열지 못했다. “이 근방에 마녀가 왔었나?” “아유, 왔었던 정도가 아니죠. 온통 휘젓고 다니는걸요.” 처음에 앞에 나섰던 아낙네가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이자드는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마녀가 휘젓고 다닌다?” 그 여자 옆에 섰던 40대 남자가 침을 탁 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에이 씨팔, 더러워서 못살겠소. 왕실의 반역잔지 뭔지를 잡으러 왔다고 관에서 허가증을 내줬다더니만 이거야 원. 온 군데 바람을 몰고 다니면서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고, 아니, 반 역자고 나발이고 우린 어떻게 살라고?” 하나씩 하나씩, 여기저기에서 불평이 터져나왔다. 이자드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채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듣고 있었다. 카라는 와락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에 문설주에 몸을 기댔다가, 귀령이 부르르 몸을 떠는 것이 느껴지자 불안한 마음에 몸을 바로세웠다. “또 왜 그러니?” 그 때 바깥의 어둠속에서 괴성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게로오오오오오옷!” 너도 나도 불평을 해대던 여관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라가 선 옆으로 뻥 뚫린 어둠 속에서, 뭔가가 폭풍처럼 날아들더니 허공을 와락 붙잡았다. “이 말썽꾸러기야! 대체 어디 갔었던 거얏!!” 어둠속에서 날아온 것은 치맛자락이었다. 아니, 치렁한 치마자락을 휘날리는 여자였다. 아니, 긴 옷자락과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마녀였다. 그녀가 카라의 눈에만 그나마 반투명하게 보이는 귀령을 끌어안고 뺨을 부비대다가는 한대씩 쥐어박으며 재회를 기뻐하는 동안 카라 와 이자드, 마을 사람들은 눈만 깜박일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침내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와 입을 연 것은 이자드였다. “그러니까…당신이 그 귀령의 몸주인가?” 마녀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카라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불빛에 정면으로 드러난 마녀의 둥그런 얼굴은 카라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똑같았다. 머리 카락이 저렇게 곱슬거리지만 않는다면 영락없이… 카라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헤델?” 그것은 영락없는 헤델의 얼굴이었다. 동그란 얼굴의 마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라를 쳐다보았다. “우리 언니를 알아?” 카라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저어…헤델은 막내라고 들었는데요. 동생이 있었나요?” 마녀는 손뼉을 딱 쳤다. “아하! 헤델 언니가 아니라 헤델 얘기였어? 그래, 그 앤 잘 지내니? 어디서 어떻게 아는 사인데? 언제 만났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연이어 쏟아지는 질문에 카라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이자드가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몰려나온 마을 사람들을 가리켰다. [50] - 7장 폭풍의 길 (3) 마녀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이자드만 쳐다보았다. 여관에서 비쳐나오는 불빛 이 그 얼굴에 떠오른 싸늘한 적의를 드러냈다. 고양이가 털을 바짝 곤두세우는 것 같은 느 낌이었다. 정작 그 시선을 받은 이자드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를 방패삼아 몰려나온 마을 사람들은 움찔 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다음 순간, 마녀는 적의 가득한 표정과는 달리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허리가 살짝 구부러 지며 늘어지는 옷자락 안으로 생각보다 가느다란 몸매가 드러났다.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라니아 혈족의 일곱째 딸의 일곱째 딸의 일곱째 딸, 폭풍의 헤웬 인사드립니다.” 이 소개말에 대한 반응은 각기 달랐다. 카라는 일곱째의 일곱째의 일곱째라는 말에 입을 벌 렸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폭풍의 헤웬’이라는 이름에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자드는 맨 앞에 나온 말에 흥미를 보였다. “라니아의 혈족인가?” “들으신 대로.” 헤웬은 여전히 정중하기는 하지만 가시돋힌 말투로 딱딱하게 말했다. “고명하신 마법사님께서 왜 하잘것없는 마녀의 일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저기…” 듣다 못해 카라가 끼어들었지만 이자드 쪽이 빨랐다. 그는 여전히 화도 내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나다 우연히 귀령을 주웠고, 그애의 보호자니까.” “귀령을…주웠다고요? 마법사가?” 헤웬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이쯤 되면 이자드도 눈썹을 치켜올릴 차례였다. 그는 내 가 주운 게 아니라고 해명하려다가 생각을 돌려 말했다. “그렇잖아도 대체 어떤 마녀가 귀령 혼자 나돌아다니게 하나 궁금하던 참인데, 이런 이야 기를 여기서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헤웬은 이해한 것이 확실했다. 동그란 얼 굴의 젊은 마녀는 여전히, 아니 아까보다 더 적의에 불타오르는 얼굴로 이자드를 노려보더 니 고개를 돌려 마을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다가서는 기세에 눌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헤웬은 사람들 앞에 딱 멈춰서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쭉 돌아보 더니 바로 한 여자를 지목해서 말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죠?” 헤웬의 눈은 정확했다. 그 여자는 아까도 앞장서서 나섰던 중년 부인이었다. 그녀는 헤웬의 지적에 움찔하는가 싶더니 떨면서도 어김없이 할 말을 다 뱉아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역시 나 그 뒤를 쫓아 왁자지껄 각자의 불평거리를 내놓았다. 헤웬은 생각보다 참을성있게 그 말 들에 귀를 기울이더니, 카라의 예상을 깨고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나도 하고 싶어서 이런 데까지 와 있는 거 아니니까, 불 평하려거든 관에다 해요.” 냉정한 대답이었지만, 그 정도로 순순히 물러설 상대는 아니었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피해도 아니지 않냐고 해도 그런 별 것 아닌 물건이나 몸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사람 들이다.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마녀보다 관에 항의하는 쪽이 더 싫고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 들은 소리를 지르다가 겁을 떨어버렸는지 한층 기세좋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카 라가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헤웬은 여전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좋아요, 알았어요. 사정들은 딱하니까, 이렇게 하죠.” 주위가 조용해졌다. “당신들 대신 내가 가서 손해를 보상해달라고 요구하겠어요. 이 일 끝낸 다음에 한꺼번에. 됐죠?”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이오?” “그럼 내가 쓸데없이 거짓말 하겠어요?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신세야 댁들이나 나나 똑 같은데, 관에 가서 항의 좀 해주는 게 뭐 어렵다고? 그래도 마음이 안놓인다면 혈족의 이름 을 걸고라도 약속하죠. 단, 내가 요구한다고 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는 장담 못해요.” 잠시 사방이 조용해졌다. 머리 굴리는 소리는 계속 들리는 것 같았지만. 함께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는 잊고 있었다고 해도, ‘폭풍의 헤웬’이라는 이름은 유명하다. 자기들이 날고 기 어봐야 이 정도 마녀를 해칠 수 없다는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그저 아무 보상도 없이 이런 피해를 입어야 하는 입장이 분하고 원통했을 뿐이다. 혹시라도 마녀가 약속을 지켜서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나마도 감지덕지다. 이런 생각들이 머리속을 오가는 게 눈에 선했다. 마침내 그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수다. 믿어보지.”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은 그렇게 해결되었다. 그리고 나서 헤웬은 이자드에게 따라오라는 몸짓만 하고 몸을 돌려 카라의 손을 잡았다. “내가 묵고 있는 곳에 가면서 얘기하자. 그래서 헤델은 어떻게 사니?” 이자드나 마을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걸어가면서 카라는 몇 번이나 헤웬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헤델과 똑같았다. 십여살의 나이차가 있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목소리가 틀리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 까. 헤델의 음성은 높고 가늘었지만 헤웬의 목소리에는 조금 더 폭넓은 울림이 있다. 그녀는 헤델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더니, 카라에게 더 들을 이야기가 없겠다 싶을 때쯤해서 겨우 만 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문질렀다. “헤에. 케익가게라! 걔가 원래 날 닮아서 손재주가 있었지. 그래. 그랬구나...어쩐지 언니가 왠일로 아칸서스시에 갔나 했더니만.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헤델을 만나러 갔었단 말이지… 후후후후후”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반보쯤 뒤쳐져서 걷던 이자드가 말했다. “내 지식이 맞다면 헤델은 당신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었을 텐데. 별로 서운해하지도 않 는 것 같군.” “어머나, 젊은 마법사님치고는 잘 알고 계시네요?” “…당신보다는 나이가 많을 텐데.” “전 보기보다 나이가 많답니다.” 헤웬은 카라에게는 스스럼없이 굴면서도 이자드에게는 가시돋힌 태도를 거두지 않았다. 이 자드에게 시선을 돌릴 때마다 표정이나 분위기에서 적의가 흘러넘쳤다. 카라로서는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자드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이상 이쪽도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라는 헤웬의 관심을 돌리려고 물었다. “왜 헤델이 이모님의 후계자죠?” “어머나, 얘는. 그냥 헤웬이라고 부르렴. 이모님이라니 갑자기 열 살은 더 먹은 것 같잖니. 원래 그래. 아랫대의 맏이는 막내의 이름을 받고, 아랫대의 막내는 맏이의 이름을 받지. 그 리고 아랫대의 막내는 윗대의 막내의 후계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헤델의 어머니인 내 큰 언니의 이름은 헤델이고, 언니의 후계자인 내 맏조카의 이름은 헤웬인 거지. 알겠지?” 아니오,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헤웬의 말은 계속되었다. “물론 그러면 이름을 부를 때 헷갈리지 않을까 싶겠지. 간단해. 모든 마녀에게는 귀령이 있 으니까, 귀령의 특성을 따서 별명을 하나씩 붙이는 거야. 이를테면 나는 ‘폭풍의 헤웬’이 고 내 큰조카…헤델의 큰언니가 되는 헤웬은 ‘비구름의 헤웬’이거든.” 헤웬은 걸으면서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안그래도 헤델은 어렸을 때부터 내 위명에 눌려서 괴로워했었지. 훗. 나 정도 되는 마녀의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중압이었을 텐데 자질까지 부족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헤 델은 그런 점까지 나랑 닮았다니까.” “어떤 점요?” “안되는 일에 매달리는 거. 사실은 나도 어렸을 때는 꿈이 있었거든. 마녀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어. 마녀로서의 넘치는 재능따윈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었어. 그 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치는 재능’ 운운하니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카라는 왠지 꿈이 뭐였는지 물어봐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물었다. “뭐가 되고 싶었었는데요?” “서커스 조련사.” “...아, 그래요.” 카라는 아까부터 헤웬의 등덜미에 원숭이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희끄무레하고 뭉실뭉실한 귀령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네에?” 헤웬은 날카롭게 반응하며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이자드는 담담하게 그녀를 마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의 귀령은 1차 계약자가 아닌 건가?” 순간, 헤웬의 동그랗고 팽팽한 얼굴에 주름이 졌다. 카라는 잠시 후에야 그것이 얼굴을 찡그 린 탓임을 깨달았다. 이자드는 유유히 말을 이었다. “나이가 보기보다 많다고 해봐여 저 귀령과 계약을 맺은 지 20년 이상 되진 않았을 텐데. 아니 설령 그 이상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해도 저 정도로 인성을 갖출 리는 없잖나.” 카라는 저건 인성이라기보다는 동물성 같은데, 라고 소근거렸지만 두 사람 다 듣지 못한 건 지 무시한 건지, 눈싸움만 계속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헤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아하니 거의 추측하고 있는 모양인데, 뭐가 더 궁금하시죠?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 으신가요? 하기사, 고명하고 똑똑하신 마법사들께서는 허구헌날 하는 일이 추측하고 확인하 는 것 뿐이니까 그럴 법도 하겠군요.” “말이 심하군.” 이자드는 가볍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헤웬 너머 어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원래 이렇게 마법사라면 다 적대시하나?” 순간 덜컹, 카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해골의 뼈 같은 길고 하얀 것이 두 개 튀어나오더니 헤웬의 어깨를 덥석 잡았던 것이다. 뒤이어 산 사람같지 않은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 참, 죄송. 헤웬은 낮의 싸움 때문에 날카로운 것.” 이자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쪽을 보며 반문했다. “낮의 싸움이라니?” “뒤쫓던 자들에게 마법사가 붙어있어서.” 멍한 얼굴의 헤웬과 카라를 사이에 두고 이어지던 대화는 헤웬의 어깨를 잡은 팔이 당겨지 면서 그 뒤에 있는 얼굴이 드러나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헤웬의 어깨에 매달려 웃는 듯 우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은, 얼굴에는 거미줄 같은 잔주름이 가득한데 이상하 게 머리카락은 새까만 노파였다. 앙상하니 해골 같은 팔을 붙이고 머리만 덩그러니 헤웬의 어깨 위로 솟아오른 것이, 무슨 유령이나 요괴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노파는 합죽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마슈님.” “잘도 아직까지 살아 있었군, 라니아.” “명이 질겨서.” 라니아는 다시 합죽한 입을 움직여 헤웬에게 말했다. “인사해라, 헤웬.” “아니…이 마법사가 이모할머니와 아는 사이란 말이예요?” 헤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이자드는 못마땅한 얼굴로 라니아를 향해 혀를 찼다. “그런데 대체 그 꼴이 뭔가? 이젠 귀령보다 더 귀령같군.” 라니아는 대답 대신 귀신같은 웃음만 또 지었다. 헤웬은 갈피가 잡히지 않는지 이자드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다시 이모할머니를 돌아보았다. [51] - 7장 폭풍의 길 (4) 네 사람은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헤웬과 라니아는 숲 속에 버려진 낡은 성채에 머물고 있다며 앞장을 섰다. 카라는 약간 뒤쳐져 걸으면서 라니아와 이자드 사 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자드는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카라가 졸면서 걷 고 있지나 않은지 살폈는데, 정작 카라는 연이은 마녀들의 출현 덕분에 눈망울이 초롱초롱 하기만 했다. 마녀들이 세대마다 같은 이름을 하나씩 이어받는 점을 감안하면 헤웬이 말한 ‘라니아의 혈 족’이라는 것이 이 라니아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장로회의 중심이며 현존 하는 마녀 가계 중 최고령자라는 말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중요 인물임에는 분명했다. 이자 드는 그런 라니아와, 차세대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유명한 마녀인 헤웬이 왜 함께 이런 곳 에 나와있는지 의아해 했고, 라니아 노파는 쓴웃음이라고 여겨지는 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다 왔으니 들어가서 얘기.” 뼈처럼 가늘고 하얀 손이 앞쪽에 보이는 돌무더기를 가리켰다. 카라와 이자드는 잠깐 걸음 을 멈추고 앞에 나타난 작은 돌탑을 쳐다보았다. 3층 정도 높이나 될까, 반쯤 허물어진 옆구 리로 숲이 스멀스멀 기어들고 있었다. 돌벽 안으로 늘어진 나뭇가지 위에 앉은 올빼미가 사 람들을 보고 목을 움츠렸다. 카라는 눈을 깜박이며 탑을 가리켰다. “이런 곳에 묵는 거예요?” 헤웬은 어깨를 으쓱하며 앞장서 들어갔다. “별 수 없어. 마녀들을 받아주는 여관은 없으니까. 저래 보여도 안은 쓸만해.” 그 쓸만하다는 내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만 봐도 지저분한 먼지더미였다. 헤웬이 램프를 켜자 지붕 모서리마다 진을 치고 있던 거미들이 잽싼 줄타기 솜씨를 선보이며 모습을 감춘 다. 원래는 고급 응접실이었던 듯, 푹신한 긴 의자가 사이를 두고 마주해 있었다. 이자드는 먼지가 날리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래, 대체 어찌된 일이지? 반역자가 나오고 도망치는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 만 키시에서 도망자 잡는 일을 마녀에게 맡기다니 금시초문이야. 리베르 문디에 무슨 일이 라도 있나?” 카라는 먼지를 털어내고 그 의자 끄트머리에 앉으며 헤웬을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 안 내내 헤웬의 어깨에 달라붙어있던 라니아가 슬그머니 기어내려와서 반대쪽 의자에 몸을 얹었다. 그제서야 카라는 어린아이만한 라니아의 작은 몸과,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작은 귀 령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작다기보다는 늘씬하고 우아했다. 멈춰있는 법이 없이 계속 주변을 뱅뱅 도는 바람에 정확한 생김새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이 귀령은 헤웬의 것보다 덜 투명했다. 카라가 귀령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이 라니아와 헤웬은 주거니 받거니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꽤 오래 리베르 문디와 연락하지 않으신 모양.” “그 쪽, 벌써 3년 전쯤부터 꽤 복잡해요. 나 같은 마녀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말이죠. 키퍼 재상의 그늘 아래서 허울만 좋던 키시의 왕실마법단에 실력자가 등장한 모양이더군요. 그렇잖아도 최근들어 부쩍 잦아진 난다의 암살을 막지 못해 위신이 추락한 리베르 문디는 -” “암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래저래 밀려드는 압박에 제대로 대응하기는커녕 파벌까지 갈라서 머리 터져라 싸우고 있고, 거기에 갑자기 왕을 암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그래서 재상이 애 꿎은 우리 쪽에 일을 떨군 거랍니다. 설명 됐나요?” 이자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도망자들은 귀족인가? 배후가 뿌리뽑히지 않은 모양이군?” 헤웬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도망자들에게 당신을 막아낼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가 붙어있다면 배후가 든든하다는 건 뻔한 사실이지.” “그야 그렇죠.” 헤웬은 마지못해 그 말을 인정하고 석연찮은 얼굴로 덧붙였다. “리베르 문디 출신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어디서 이렇게 강력한 마법사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이모할머니도 출신을 짐작하지 못해.” 이자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라니아를 돌아보았다. 노파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마법사였지? 마법색은?” “흰 색. 쳇, 얌전하게 생긴 금발 여잔데 생긴 거랑 달리 손매에는 인정사정 없어요. 하필 번개 비슷한 걸 다뤄서 정면으로 부딪치는 바람에 완전 체면 구겼다구요. 게로는 도망쳐 버 리지…아, 정말 너 귀령 맞냐? 감히 도망을 쳐?” 헤웬은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귀령을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이자드는 미묘하 게 표정을 바꾸며 그 특징을 되뇌었다. “흰 색이라. 마법색이 백색인 경우는 흔치 않아. 금발에 젊은 여자라. 게다가 폭발을 다룬 다면…” “아는 마법사?” “그 비슷한 여자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중얼거리면서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샤미르의 무덤에서 진이 마주쳤던 여 자, 비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그 여자라면 당연히 알 바르카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키시 왕실, 리베르 문디, 마녀들, 재상과 왕실 마법단- 알 바르카가 뭔 가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알 바르카는 언제나 권력의 중심부에서 장난질 치기를 좋아했다. 피해의 규모는 크면 클수록 좋고, 피는 많이 흐 를수록 좋다는 것이 놈의 지론이니까……문득 비델이 가져간 세 번째 샤미르의 유산이 떠올 랐다. 그는 그 작은 병에 담긴 것이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자드의 눈은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카라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헤웬 쪽으로 돌아갔 다. “확실히 마법사였나? 지난번에는 신관을 자처했던 모양인데.” “신관?” “신관?” 헤웬과 라니아는 동시에 말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라니아가 먼저 고개를 흔들고, 말은 헤 웬이 했다. “마법사 치고는 좀 특이하다 싶었지만, 신관일 리는 없어요. 전혀 달랐는걸요.” “신관은 마법사나 마녀하고 어떻게 다른데요?”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카라에게 쏠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라니 아의 눈이 카라의 귓가를 스치며 희미하게 떨렸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이자드 뿐이 었다. 그는 라니아에게 보일락 말락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헤웬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 했다. “마녀는 귀령과 계약해서 내부에서 힘을 끌어내는 존재니까 완전히 다르고, 마법사나 신관 이나 외부의 힘을 끌어온다는 점은 비슷해. 하지만 방식은 반대지. 마법사는 자연력을 지배 함으로써 이용하고, 신관은 자연력에 지배당함으로써 이용하는 거거든.” 카라는 커다란 검은 눈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굴렸다. 이자드가 보충설명을 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녀는 수련을 많이 해야 하고, 마법사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신 관은 수련과 공부 양쪽을 다 해야 한다는 거다. 보통은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직접 맞닿뜨 리면 헷갈릴 수가 없어.” “그런 거예요?” 카라가 눈을 깜박이는데 헤웬이 코방귀를 뀌며 끼어들었다. “흥, 마법사들이란 저렇게 늘 잘난척이라니까.” 이자드가 라니아와 잘 아는 사이라는 점도 헤웬의 적개심을 완전히 꺼뜨리지는 못한 모양이 었다. 이자드는 흘긋 그녀를 돌아보더니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마법사들! 그들은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 모든 사건, 모 든 감정에 명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기까지 한 다! 왜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들이 통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그대로 받아 들이는 일들을, 그들은 이리저리 나누고 분석하고 이름을 붙인다. 존재하는 그대로 놔두려 하지 않고 바꾸려 한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 말하지만, 그 말은 사 실이 아님을 모두 알 것이다. -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랑이 있는가? 그들에게 그런 힘이 있는가? 없다! 마법사들! 그들에게는 오만한 지배욕과 자기 과신만이 있을 뿐이다!…” 헤웬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이자드는 웃음기 도는 얼굴로 라니아를 가리켰다. “오래 전에 라니아라는 혈기 왕성한 마녀가 이런 연설을 했었지.” “에엣? 이모할머니, 그런 연설을 했었어요?” “호호호호홋, 옛날 일을.” “그래, 오래된 일이지. 라니아가 처음으로 마법사를 하나 죽이고 나서 문책회의에 불려나가 서 했던 연설이야.” 라니아는 바람불면 날아갈 듯한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였다. 순간 헤웬과 카라의 뇌리에 이 자드가 그 일에 관련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자드는 그 이상 설명해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게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마녀들은 마법사들보다 좀 더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라 는 것.” 카라는 라니아 주변을 돌고 있는 귀령을 눈으로 쫓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귀령은요?” 헤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자드는 뒤로 등을 기대며 잠시 침묵했다. 귀령은 마녀들이 민감 할 수밖에 없는 주제다.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것들, 존재하지 않는 존재, 세상의 틈새 에서 온 힘. 그는 저도 모르게 카라의 귓볼에 얌전히 매달린 푸른 돌을 확인했다. 확신할 수 없었다. 마법사들에게 있어 ‘힘’이란 외부에 존재하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다 룰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마녀들에게 있어 ‘힘’이란, 내부에 존재하되 누군가의 도움이 있 어야만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카라의 힘이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마녀들의 기준에 더 가까운 것이겠지만……그러나 마녀보다 오히려 귀령과 더 가깝다면? 이자드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또 다른 문제야. 궁금한 게 더 있으면 나중에 얘기하자. 라니아, 쫓고 있는 반역자가 어떤 놈들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부른 것은 라니아였지만, 설명한 것은 역시 헤웬이었다. 키시에 대해 무관심한 채 돌아다니다가 귀찮은 일에 붙들린 헤웬은 사건의 이면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쨌든 표면적인 사건은 흔히 있을 법한 가족 싸움이었다. 현 키시 왕에게는 4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서, 동생이 제1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들어 후궁 하나가 아들을 낳았다. 보통 이쯤에서 왕위 계승자가 바뀐다면 신하 들도 편이 갈리기 마련이건만, 이 왕제가 과히 똑똑한 인물이 아닌 데다가 온갖 방만한 행 동을 일삼아왔기 때문에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은 거의 다 왕자 쪽으로 붙었다. 해서, 당연히 제 것이라고 생각했던 왕관을 빼앗긴 왕제는 다음 수순으로 반란을 꾸밀 생각을 하게 된다. 급조된 반란은 실패했고 왕제와 그에게 가담한 자들은 도망쳤다. 언제나 이긴 자의 편에 서 는 리베르 문디가 그들을 추격하기로 했으므로, 일망타진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여 기서 문제가 생겼다. 아까 말한 것처럼, ‘누군가’가 왕을 암살하기 위해 대단히 악명이 높 은 마법사를 고용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자드는 이 부분 에서 반응을 보였다. “악명높은 마법사? 설마 난다 말인가?” “소문은 그래요.” 이자드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내가 알기로 그 녀석은 마법사들만 상대할 텐데. 권력이나 돈에 관심이 없는데 뭐하러 왕을 죽이려 하겠어?” “모르죠 뭐. 명분상 그렇게 말하는 거고 사실은 리베르 문디에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니까요.” 헤웬은 그 뒤에 “마법사들이란”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서 우리가 맡게 된 거예요.” “흠.” 이자드는 잠시 턱을 만지다가 물었다. “왕제는 멍청한 놈이라 했고, 혹시 주변에 가치있는 인물이 따로 있나?”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요.” “왕제에게 아들이 하나 있음.” 라니아의 짧은 언급만으로도 왕제의 아들이 아버지와 다르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키시 반도에는 왕제를 꼭두각시삼아 명분을 세울 만한 세력이 없다. 그렇다면 장래에 더 위협이 되는 것은 왕제의 아들 쪽이고, 당연히 재상은 이 자를 확실히 제거하려 할 것이 다. 지금 왕제 일행을 보호하고 있는 배후자도 같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겠지…이자드는 생각이 이 대목에 이르자 다시 한 번 얼굴을 찌푸렸다. 알 바르카가 이 사슬의 어디쯤에 웅크리고 있는지 알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자드는 몸을 일으키며 카라를 돌아보았다. “어딜 좀 갔다와야겠는데…카라, 하루쯤 여기 남아있을 수 있을까.” 카라는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박였다. 이자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라니아를 돌아보았다. “하루만 부탁하지.” 그는 더 말할 여지를 주지 않고 서둘러 떠나버렸다. 뒤에 남은 카라와 헤웬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52] - 7장 폭풍의 길 (5) 잠시 후 헤웬은 어디랄 것도 없이 애매하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보호자라며?” 카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서 어정쩡한 표정만 지었다. 이자드를 이해할 수 없기로 는 카라도 헤웬보다 나을 게 없었다. 보호자를 자처한 것도 의외였지만, 그런 직후에는 또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 그것도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위험하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툭 떨궈놓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다니. 그만큼 이 사람들이 믿을 만 하다는 얘기겠 지, 뭔가 급한 일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카라는 한참만에 겨우 기분을 정리하고 뭔가 말해보려 했지만, 헤웬은 이미 라니아 쪽으로 포문을 돌린 다음이었다. “근데 대체 뭐하는 마법사예요? 할머니가 존대를 다 하게.” 라니아는 앙상한 손으로 의자 등받이만 만지작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헤웬은 얼굴이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할머니가 공손하게 굴길래 가만히 있었지만, 엄청 건방지잖아 요! 쳇. 나한테는 듣고 싶은 거 다 들어놓고 말해준 건 하나도 없고. 게다가 뭐야, 설명도 없이 애를 맡기고 휙 가버리다니. 무례하잖아! 아, 너보고 뭐라는 건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 고 있어, 카라. 카라 맞지?”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난처한 상황, 난감한 기분이었다. 어색한 공기가 방 안을 채 웠다. 헤웬은 머리를 긁적이며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나 헤웬의 목소리 가 나오기 전에 라니아의 기묘한 음성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내일은 설욕해야.” 그 짧은 말에 헤웬은 퍼뜩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맞아. 내일은 멋지게 설욕해 보일 테니 염려 말아요. 아, 힘을 비축해야지. 자둬야겠어. 카 라, 아무 데나 편한 데서 자렴. 아침에 얘기하자. 게로!” 헤웬은 정신없이 후다닥 말을 끝내더니 희끄무레한 귀령을 잡아당겨 베개 털 듯 팡팡 두들 겼다. 카라는 젊은 마녀가 먼지투성이 방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누워, 귀령을 베개삼아 잠을 청하는 모양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보니, 한밤중에 깨어나 마주치기라 도 하면 비명을 지르게 생긴 노파 라니아는 자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 눈을 내리깐 채 미동 도 않는다. 우욱, 우욱, 올빼미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자 반쯤 무너진 천장에서 우 수수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화가 아니라 웃음이 나왔다. 이자드가 말한 ‘하루’라는 건 분명히 내일 밤까지겠지. 멀리까지 갔다면 루이로는 돌아올 수가 없을 테니까… 카라는 앉아있던 긴 의자를 잠자리로 정하고, 열심히 먼지를 털다가 잠들었다. 깊은 잠은 아 니었지만, 늘 그렇듯 꿈은 꾸지 않았다. ** 아침 햇살에 흠뻑 젖은 성은 어둠 속에서보다 한층 더 초라해 보였다. 카라는 내리꽂히는 빛의 화살에 찔려 잠에서 깨어났다. 몇 번인가 눈을 비비고 나서야 어디에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났다. 둘러보니 라니아는 보이 지 않고, 헤웬은 허물어져버린 망루 자리에 올라서서 돌 위에 척하니 한쪽 다리를 걸친 위 태로운 자세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카라는 헤웬 옆까지 기어올라가서, 돌 위에 두 팔을 얹고 하품을 했다. 주위는 녹색의 바다 였다. 가끔 작은 바위산이 암초처럼 머리를 내밀고 있을 뿐, 사방 어디를 보아도 녹색 물결 이 바람에 흔들린다. 카라는 시원한 녹색 물결을 바라보다가 헤웬을 올려다보았다. 자기 전 이나 자고 일어난 후나 모양 변화가 없는 억센 곱슬머리 아래로 갈색 눈이 원기왕성하게 반 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매끄러운 녹색 천에 구멍이 난 것처럼 숲이 망가진 부분이 보였다. 가운데가 부러져 나가고 꺾여 쓰러진 나무들은 처참하다기보다는 비현실적 이었다. 규모가 작다는 점만 빼면 영락없이 폭풍이 쓸고 지나간 자리였다. “저기서 싸웠어요?” “응. 저기 까맣게 그을린 그루터기들 보이지?”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이 헤웬의 작품이라면, 까맣게 타버린 자국 들은 벼락을 쓴다는 상대방의 흔적일 것이다. 뒤이어 카라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런데 말이죠, 이해가 안되는 게 있어요.” “뭐가 말이니?” “폭풍이 오면 번개도 치잖아요. 그러니까 저 쪽이 벼락으로 공격을 하면 마주 번개를 쳐버 리면 되는 거 아녜요?”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음.”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라니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폭풍을 한 점에 집중하지 못함.”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럼 마녀들에게도 규칙이 있는 거네. 마법과는 다르다지만.” “그렇기도 하지만…” 헤웬은 우거지상으로 손을 흔들었다. 라니아가 재빨리 요점을 내놓았다. “성격 탓.” “내 성격 탓이기도 해.” 한 박자 늦은 헤웬은 라니아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별로 차분한 편은 못되거든. 어머, 쪼그만 게 눈썹을 치켜올리긴. 얘, 얘, 미간에 주 름 잡지 마. 노친네 같다. 물론 나도 내 단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산만해서 탈이지 멍청하 지는 않거든. 성질이 좀 급하고, 덜렁대고, 욱 하는 것만 빼면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이때까 지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왔지.”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라니아의 코방귀 소리가 끼어들고. “아무래도 그 금발, 내 천적이지 싶어.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해다니면서 약을 올리는 게 어 찌나 얄미운지. 덕분에 이성을 잃어가지고 미친 듯이 날뛰다가 게로까지 날려버리고. 말이 야. 이번엔 냉정하게,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싸워야 할 텐데.” 카라는 귀를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헤웬의 심각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단점을 알고 있으니까 고치면 되는 거잖아요?” “그게 말처럼 쉽다면야. 성질이 어디 가니.”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또 싸울 거라면 대책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건……” 헤웬은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박이며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당겼다. 뒤쪽에서 라니아가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흘렸다. 헤웬은 애꿎은 돌벽을 내리치더니 냅다 소리쳤다. “에이 씨, 내가 대체 뭣 때문에 상관도 없는 귀족들 따위를 잡으러 쫓아다녀야 하는 거지! 게다가 왜 내가 정체도 모르는 마법사 따위랑 싸우느라 속을 끓여야 하는 거얏!” 으드득, 헤웬은 손가락을 깨물었다. 순간 파앗- 날카로운 칼날 같은 바람이 옷자락을 뚫고 지나갔다. 팟팟팟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울리며 옷자락이 베어져 나갔다. 카라는 당황해서 중심을 잃었다가 돌벽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헤웬!” “우아앗! 미안! 미안해!” 헤웬이 당황해서 손을 내젓자 겨우 바람이 가라앉았다. 카라는 너덜너덜, 통풍 잘 되는 여름 옷이 되어버린 옷자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성격 문제라는 말이 납득이 간다. “그러니까, 싸울 때도 이런 거예요?” “아하하하하하.” 헤웬은 멋적은 웃음을 떠올리며 카라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카라는 왜 졌는지 알만하다 는 말을 도로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주문이 필요없다고 다 좋은 건 아니네요. 감정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해서야 곤란한 거잖 아요.” 말을 뱉고 나서야 언젠가 이자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마법사란 언제나 냉정을 유지할 줄 알고 감정을 잘 통제하는 사람들이지. 그러지 않으면 곤란하거든. 하지만 감정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것도 평온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있는 감정을 마음 속 깊이 밀어넣고 억누른다면 문제는 오히려 더 커져 버리 지. 순간 카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 있는 헤웬이 자신과 겹쳐졌다. 피해를 입 고 아우성치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언젠가 짐승들의 습격을 받았던 사람들의 모습에 겹쳐 졌다.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막막함이 몰려들었다. 처음 자신에게 이상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무거운 느낌. 가슴께에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매달 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라는 숨을 들이키며, 방금 한 말을 후회했다.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피해에 있어서도, 자신에게는 헤웬에게 그런 말을 할 자 격이 없었다. 그러나 헤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야 하지. 고쳐야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본성을 포기할 수도 없는 거잖아? 어떻게 보면 내가 폭풍을 다루게 된 것 자체가 내 성격 탓인데 말이야……아, 마녀 중에도 나 같은 유형은 별로 없어서 여러 모로 곤란하다니까.” 카라는 햇빛에 따듯하게 달궈지고 있는 돌에 매달리듯 기대며,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에서 시선을 피했다. 헤웬의 말 중에 한 가지가 걸렸다. “마녀들이 무슨 힘을 쓰는지는 자기가 선택하는 게 아니었어요?”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종일관 쾌활하던 헤웬이 이때만큼은 주춤했다. 때맞춰 라니아 가 끼어들었다. “반쯤은, 선택이지.” 라니아에게서 들은 중에 처음으로 끝까지 맺은 말이었다. 카라는 뒤를 돌아보고, 그제서야 노파의 큰 눈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알았다. 카라와 마주친 눈동자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미끄러지듯 옆으로 흘러갔다. 라니아는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옷을.” 헤웬이 말귀를 알아듣고 ‘맞아! 옷이 망가져 버렸으니 갈아입어야지. 내 옷 중에 맞는 게 있을지 모르겠다.’고 외칠 때까지 카라는 어리둥절해 있었다. 라니아의 시선이 칼날처럼 스 쳐 지나간 것이 자신의 귀였다는 것, 그러니까 귀에 매달려 있던 푸른 돌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헤웬의 손이 팔을 잡은 후였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 허물어져가는 고성이 자리잡은 숲의 끝자락, 암초처럼 튀어나온 바위산들 사이에, 그 고성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저장고가 있었다. 자연 동굴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만들었으니 그렇게 안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은신처로는 더할나위없는 곳이다. 본래도 눈에 잘 띄지 않게 만들어진 데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자라난 나무와 덩굴이 입구를 가렸고, 식량이나 무기 저 장고로 썼던 듯 내부 온도도 일정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저장고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그 런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카랑한 목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쳤다. “대체 언제쯤에나 이 구질구질한 동굴을 떠나는 건가? 며칠이면 레투스에 갈 수 있다면 서?” 그 목소리에 호응하듯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차분하고 서늘한 음성이 그 소리들을 일 거에 내리깔며 대답했다. “비델이 알아서 할 겁니다. 염려 마세요.” 바위 동굴 위쪽으로 햇빛이 비쳐들어와, 방금 말한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자색 무지개 를 띄웠다. 반대편에 있던 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 화려한 옷차림의 노인이 못마땅한 얼굴 로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그 여자 가지고 되겠나? 어제 보니까 마녀 하나 제대로 못 다루더구만.” 50이 조금 넘었을까, 아니, 실제 나이로는 50살이 안되었을 것이다. 화려한 풍채와 달리 노 인의 눈빛은 허약하기만 했고, 불평하는 목소리에는 투정을 부리는 기색이 엿보였다. 상대방 은 여유있게 대답했다. “비델의 솜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마녀 쪽이 강한 거죠. 마녀라고 얕볼 문제가 아니예요. 아무려면 여러분에게 하찮은 추격자를 보내겠습니까.” 정중한 듯 하지만 그 목소리 저변에 비꼬는 기색이 깔려 있다. 노인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허긴 그래, 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 뒤를 둘러싸고 있던 소위 신하라는 자들도 마 찬가지였다. 창백한 얼굴의 남자는 비식 웃으며 하고자 하던 말을 계속했다. “중요한 두 분이 함께 계셔서야 곤란하지요. 우선 왕자님부터 자리를 옮겨 먼저 일을 도모 하시게 하고, 다시 돌아올 테니 걱정말고 기다리세요. 그렇게 편안치는 않겠습니다만 안전한 곳이니까 말입니다.” “큼, 그래. 불편하기는 하지만 별 수 없지. 자네가 수고하는군.” 노인은 ‘안전’을 강조한 말에 한시라도 빨리 아늑한 도시로 가고픈 마음을 접은 듯, 헛웃 음을 지으며 한참 위쪽에 있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남자 뒤쪽에 공손히 서 있던 금발 여자는 미묘하게 변한 표정을 감추고자 고개를 숙였다가, 노인과 귀족들이 우르르 안쪽 은 신처로 들어가고 나서야 하고 싶었던 말을 뱉았다.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저런 머저리들에게.” 남자는 킥킥 웃으며 몸을 돌렸다. “뭐 어때. 꼭두각시 놀이의 재미란 이런 거지. 아참, 그보다 그 마녀 말인데…”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끝장내지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예?” 여자의 안색이 확 변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제가 하지 못할 일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 마녀, 폭풍을 다룬다고 했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어. 쓸모가 있으 니 적당히 하라는 거다.” 남자는 혼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다가 덧붙였다. “뭐, 고작해야 마녀라고는 하지만 라니아까지 합세하면 시간도 많이 들 거고 말이야. 적당 히 하고 때를 봐서 저놈들은 버리고 돌아와.” 금발 여자는 다시 차분해진 얼굴로 확인했다. “이번에 버립니까.” “쓸 데라고는 그런 데밖에 없는 놈들이니까 말이야. 왕제는 아직 쓸모가 있으니 무사히 모 시고 오고.” “예.” 여자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흰 옷자락을 갈무리하며 돌아서서 동굴 벽에 기대두었던 석 장을 쥐었다. [53] - 7장 폭풍의 길 (6) “왜 그렇게 불만스러운 얼굴이야, 귀엽기만 하구만. 꼬마 마녀 같다, 얘.” 헤웬은 벌써 몇번째인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카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카라는 발에 걸리는 옷자락을 내려다보며 몇 번이나 접은 큰 소매를 펄렁펄렁 흔들었다. 헤웬은 비져나오는 웃 음을 참지 못해 얼굴을 씰룩이며 괜한 헛기침을 뱉았다. “흠흠, 그럼 난 나간다. 얌전히 있어. 위험하니까 나오지 말고.” “조심해요.” 헤웬은 걱정말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쳐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려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숲을 향해 열린 천장으로 뭔가가 번쩍 한다 싶더니 돌 부스러기가 하얗게 떨어진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은 것도 잠시, 연이어 섬광이 터지자 헤웬은 카 라의 팔을 잡고 냅다 숲쪽으로 달렸다. 카라가 끌리다시피 뛰어서 겨우 낡은 성채를 빠져나 오자 바로 뒤쪽에서 요란스러운 굉음을 울리며 돌이 무너져내렸다. 먼저 반쯤 남아있던 천 장이 허물어지고, 벽이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기우뚱 넘어가기 시작한다. 헐떡이며 바닥에 주 저앉은 카라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모양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헤웬을 배웅하려고 문 가까이 나와있었으니 망정이지, 성 한가운데에 있었다가는 빠져나오지 못할 뻔 했다. 헤웬은 카라의 팔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뭔가 고함을 질렀다. 카라는 그제서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라니 아 할머니는? “선공.” 있었다. 언제 빠져나왔는지, 라니아는 갑자기 옆에 나타나서 중얼거렸다. 헤웬이 약이 바짝 오른 얼굴을 돌렸다. 간간이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헤웬의 고함소리를 가렸다. 그래도 라니 아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웬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기세좋게 외쳤 다. “조오아, 덤볐다 이거지?” 상대는 보이지 않는데, 헤웬은 웃으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르르- 갑자기 먹구름 이 몰려들어 하늘이 어두워진다. 윙- 윙- 나뭇잎이 조금씩 튀어오르더니 미친 듯이 춤을 추 기 시작했다. 바람이 한 번씩 숲을 후려갈길 때마다 나무들 사이를 쇠로 만든 채찍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찢어지고 떨어져나온 나뭇잎이 광풍에 휩쓸려 다니며 윤무를 추더니 곧 그 춤사위에 작은 나뭇가지들이 합세했고, 마침내 꽤 굵은 가지들까지 뚝뚝 소리를 내며 부러지기 시작했다. 헤웬은 날카로운 소리를 발하며 뻗은 손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르릉 소리를 동반한 번개가 땅을 파헤쳤다.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마른 나무가 갈라지며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카라는 바로 코 앞에서 허벅지 굵기만한 나무가 뿌리채 뽑혀 나동그라지는 것을 보며 입을 막았다. 바람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러대며 불꽃을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헤웬이 선 자리를 중심으로 해서 카라와 라니아가 있는 곳까지의 작은 공간을 제외하면 주변이 온통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카라는 질려서 소리를 질렀다. “숲이 다 타버리겠어요!” 헤웬이 뒤를 돌아보며 귀에 손을 갖다댄다. “뭐- 라- 구?” “다 타버리겠다구요!” 목청껏 소리를 질렀지만 헤웬은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만 내저었다. 카라는 그 힘과 무식함 에 압도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힘을 가지고서 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 다. 하지만 이렇게 마구잡이로, 적이 튀어나오기만 기다리며 휘저어대는 모습을 보니 또 묘 하게 납득이 가기도 했다. 바람에 날린 나뭇잎과 흙이 공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번개가 바위를 강타했다. 번쩍 하는 불빛과 함께 또 한 번의 번개가 내리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늘에서 내리꽂힌 게 아니었다. 사람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흰 옷과 밝은 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상대를 발견한 헤웬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잠시 바람이 수그러들었 다. “흐, 나왔구나, 나왔어. 할머니, 카라랑 잘 피해계세요!” 라니아의 앙상한 손이 카라의 어깨를 붙잡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아니, 라니아가 아니었다. 카라와 라니아를 한꺼번에 감싸고 들어올린 것은 라니아 주위를 끊임없이 돌던 작은 귀령이 었다. 그들은 그렇게 들어올려진 채로 무너진 성 위를 지나 한참 뒤쪽에 있는 높은 바위까 지 옮겨졌다. 겨우 바위에 발이 닿자 카라는 멈췄던 숨을 내쉬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멀리, 헤웬의 중심으로 한 난장판이 보였다. 카라는 문득 눈을 비볐다. 게로의 뭉실 뭉실한 몸이 갑자기 쭉 늘어나더니 헤웬 주위를 휘감고 도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덕분에 안 그래도 잘 보이지 않던 전쟁터가 흰 벽에 싸여 버렸다. 발돋움을 해봤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 반투명하게 반짝이는 회오리바람 너머로 이따금씩 번쩍이는 빛과 부러져 날아가는 나무둥치, 날름거리는 불길이 보일 뿐이었다. 카라는 라니아를 돌아보았다. “괜찮은 거예요?” 노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앤 원래.” “원래… 저렇다구요?” “할 수 없지.” 말은 느긋하게 했지만 라니아도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급한 성질, 고쳐지지 않아.” 카라는 다시 싸움터를 돌아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광풍 사이로 게로의 하얀 몸이 번뜩 인다. 폭풍의 울부짖음 소리가 숲 전체를 뒤흔든다. 발 밑의 바위가 흔들거리는 것처럼 느껴 질 정도다. 성난 파도 같은 숲의 흔들림. 카라는 눈을 깜박였다. 귀가 먹먹하다. 바람소리에 섞여 따닥따닥거리는 소음, 하늘과 땅 양쪽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백뢰(白雷)의 포효가 정 적처럼 느껴진다. 헤웬은 굉음의 침묵 속에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발 마법사는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잘도 마구잡이로 나는 나뭇가지며 돌들을 막아내고, 가끔씩 손에 든 지팡이까지 떨쳐내곤 했다. 정작 이 폭풍을 지배하고 있는 자신은 잔가지와 흙을 맞고 있는 처지인데도. 그녀는 초조한 마음을 누르며 바람벽을 더 두텁게 만들어 날아드는 번개불을 흘렸다. 게로는 끊임 없이 으르렁대며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이대로는.” 라니아가 중얼거렸다. 카라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이마를 찌푸리며 그 말을 해석했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구요?” 헤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상태는 전날과 다를 게 없었다. 분명 주변을 휩쓸고 있는 폭풍의 힘은 대단하지만, 한 점에 집중되지 않는 한 피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정말로 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다면… “절대 져서는.” 라니아는 싸움에 끼어들 준비를 하는 듯 몸을 긴장시키며 내뱉았다. 카라도 덩달아 긴장하 며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싸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헤웬은 진다면, 그 다음의 생각을 밀어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집중하자. 집중, 놓치지 말고 천천히 그물을 조이는 거다. 그녀는 주문이라도 외우듯 중얼거리며 흰 옷의 마법사를 노려 보았다. 게로가 그녀에게 호응하여 도는 속도를 빨리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라?” 카라는 발돋움을 해서 헤웬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기분 탓인지,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광풍의 범위가 좁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자리만 도는 흰 실 같던 바람이 엉기고 있었 다. 안쪽으로, 좀 더 안쪽으로……카라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고 라니아를 돌아보았 다. 역시, 노파는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 하던 태세에서 벗어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폭풍 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라니아는 소름끼치는 표정- 즉, 미소를 지으며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고칠 필요 없다더니.” 바람벽 속에서도 헤웬은 라니아가 뭐라고 말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고칠 필요 없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이제야 정신 차렸구나, 뭐 이런 뜻이 담긴 소리를 내뱉고 있겠지. 그녀는 마침내 나뭇가지 하나가 비델의 뺨을 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떠올 렸다. “끝장을 내주지.” 말은 기세등등하게 했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폭풍을 불러낸 지 반 시간이 다 되어간다. 힘이 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상대는 한 가지 주문만 알고 있는 초보 마법사가 아니었다. 금발의 마법사는 여전히 단정한 얼굴이었고, 더 이상 번개를 쓰기를 포기한 듯 석 장 끝을 낮추며 주문을 외웠다. 날카로운 바람이 화살이 되어 날아갔다. 약해진 바람벽을 뚫고 들어간 화살은 간발의 차이 로 피한 헤웬의 머리카락을 허공에 날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바람을 쓰다니. 헤웬의 안색이 푸르죽죽해졌다. 분노한 소리는 뱉았지만 아직 그녀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바람벽은 착실히 좁혀들어가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돌고 있는 바람벽을 피해 마법사는 헤웬과의 거리를 좁힐 수밖에 없 었다. 처음으로 상대방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헤웬은 시종일관 표정이 없던 단정한 얼굴 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떠올렸다. 다음 순간, 마법사는 입을 열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주문인가 싶어 긴장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헤웬은 잠깐 의아한 표 정을 지었다가, 뒤늦게 그 말뜻을 알아듣고 바싹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뭐, 할 수 없지? 그럼 지금까지 봐줬다 이거야?’ 상대방은 삼엄하게 석장을 내뻗으며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뭐야, 라고 생각한 순간 코앞에 섬광이 날아들었다. 얇아진 바람벽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쉽게 뚫고 들어오다니! 놀라서 몸을 젖히는 순간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아니, 정면으로 날아온 번갯불을 맞아서가 아니었 다. 다리가 타는 것같이 아팠다. 저도 모르게 중심이 기울며 몸이 기두뚱했다. 양동공격이었 다. 정면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는 사이 또 하나가 다리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헤웬은 넘 어지려는 몸을 바로 세우며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저도 모르게 마음 속의 소리가 빠져나왔 다. “질 수는 없어! 특히나 마법사에게는!” 갑자기 어떤 광경이 마음을 스쳤다. 어머니가 졌을 때, 막내딸인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헤웬은 거칠게 눈을 문지르며 게로를 흘끗 쳐다보았다. 평소의 형태는 잃어버렸지만 게로는 여전히 그녀의 감정이 움직이는 데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얀 실같던 게로의 모습이 투명해 지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변했다. 광풍은 거칠게 땅을 움켜쥐는 신의 손처럼 마구잡이 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저…저런!” 라니아가 갑자기 펄쩍 뛰어오르더니 몸을 날렸다. 발돋움을 하고 몸을 앞으로 내민 채 싸움 의 추이를 지켜보던 카라는 놀라서 바위에서 미끄러질 뻔 했다. 그녀는 주저앉다시피 해서 겨우 바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라니아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예요?” 하지만 이미 저만치 멀어진 라니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카라는 헤웬이 있는 쪽으로 시 선을 돌렸다. 하얀 실처럼 엉기던 바람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뭔가 위급한 모양인데,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바위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처지니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움직일 수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겠지만- 할 줄 아는 거라곤 겨우 불꽃을 일으키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마음 먹은 대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잘못했다가는 헤웬을 다 치게 할 지도 모르니…카라는 속상한 마음에 발을 구르며 귓볼을 만지작거렸다. 이자드는 이 푸른 돌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지 않은가. 그 때 문득 회오리바람이 멎더니 튕겨나가듯 섬광 하나가 떨어져나갔다. 먹구름은 어느새 흔적없이 걷히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심히 고개를 내민 태양이 파헤 쳐진 공터를 내려다보았다. 카라는 바위에서 기어내려오다가 긁힌 팔을 문지르며 눈치를 살 폈다. 등만 보이고 주저앉아있는 헤웬의 몰골은 참담했다. 여기 저기 찢긴 상처에 머리카락 도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졌고, 특히나 치료도 하지 못한 다리의 상처는 흉하게 피딱지가 앉 은 위에 시꺼멓게 그을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카라는 다시 왼쪽발을 들 어 껍질이 까진 오른쪽 발목을 문지르며 입술을 빨았다. 다친 다리를 저렇게 아무렇게나 팽 개쳐도 될지 걱정스러웠지만, 분위기가 하도 험악해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헤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카라만이 아니었다. 구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게로가 끙끙 대며 멀찍이 주위를 돌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반쯤 타버린 나뭇잎을 이리저리 실어날 랐다. 결국 답답한 분위기를 깬 것은 라니아 노파였다. 라니아는 그 가벼운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거운 기세로 땅을 구르더니 무섭게 호통을 쳤다. “철없는 것!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추상 같은 호령소리에도 헤웬은 별 반응이 없고 오히려 카라가 움찔했다. 라니아는 목소리 를 약간 누그러뜨리더니 탄식하듯 다음 말을 토해냈다. “살아난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 “이모할머니.” 헤웬은 조용히 라니아를 불렀다. 생각외로 침착한 목소리였다. 라니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헤웬은 대답을 들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전에, 내가 마녀들 중에 가장 강하다고 했었죠. 엄마보다도 강하다고.” “사실.” “나라면 마법사도 이길 수 있다고 했었죠.” “그것도 사실.” 헤웬은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카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헤웬이 죽일 듯 노려보는 상 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헤웬과 라니아는 눈싸움이라도 하듯 한참이 나 서로를 노려보았다. 마침내 헤웬은 피라도 토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말했다. “마녀 중에 최고라고 해도 보통의 마법사밖에 이기지 못한다는 거군요.”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그래도 헤웬은 간절한 눈으로 라니아를 쳐다보았다. 라니아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 이자드는 해가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 가까이에 도착했다. 어찌나 서둘렀던지 아직 해 넘이도 끝나기 전이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루이가 질문을 퍼부었다. - 여긴 또 어디야? 카라는 어디 뒀는데? 마녀들한테 맡겼다며. 마녀들이 여관에 있진 않을 거 아냐. 이자드는 한숨을 깨물었다. “왔던 곳도 못알아보겠으면 묻지를 말든가.” - 꼬맹이를 아무 데나 떨군 매정한 놈이 누군데 큰 소리야. “내가 어쩌다 너 같은 놈에게 매정하다는 소리를 듣는지.” 루이는 이자드의 한탄을 못 들은 양 재촉을 해댔다. - 빨리 가자.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어쩔래? 그냥 떠돌이 마녀들도 아니고 위험 한 상황이었잖아!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되는 잔소리 세례에 이자드는 대꾸를 포기하고 걸음만 옮겼다. 낡은 성채는 금새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낡고 허물어진 성채의 검은 윤곽이 눈에 들어오자 이 자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자드의 시야를 공유하고 있던 루이가 중얼거렸다. - 야, 허물어진 성채라고는 했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무너진 성벽을 확인하자 이자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카 라는 남겨두고 나갈 테니 안전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성채가 무너져 내리다니, 대체 무 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순식간에 몇 가지 가능성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공격을 받은 건 가, 아니면 설마 카라가…… 그 때 돌무더기 저쪽에서 뭔가가 팔짝 뛰어내리더니 소매를 펄렁거리며 뛰어왔다. “이자드!” “무슨 일이…” 이자드가 말을 맺기도 전에 루이가 끼어들었다. - 대체 그 옷차림은 뭐야? “아, 이거? 옷이 망가져서 헤웬 옷을 빌려입었거든.” 카라는 말을 하면서 헐렁한 소매를 흔들어보였다. “옷이 망가지다니, 왜? 게다가 성은 어쩌다 무너진 거냐? 라니아는?” 카라는 팔을 내리더니 이자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둠에 밝은 이자드의 눈은 정색을 한 작 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자드.” “왜?” “나한테 미안해 해야 한다는 거 알아요?” 이자드는 잠시 멍해졌다가 되물었다. “그래야 하나?” “당연하죠. 안 미안해요, 그럼?”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드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당연한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뿐이었다. 이자드는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검은 눈동자를 보며 곤혹스러운 느낌에 사로잡혔 다. 아니,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설명도 없이 휙 떠나버린 것도 그렇 고 그 사이에 일이 터진 것도 그렇다. 단지, 이제까지 한 번도 이렇게 정면에서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당황했을 뿐. 이렇게 흔들림없는 눈을 본 적이 없을 뿐이다. 전 에 잠깐씩 데리고 있던 아이들은 대개 불안한 눈을 했었다. 그 아이들은 언제든 버림받을 것을 각오한 것처럼 굴거나 아니면 그에게 매달리곤 했다. 카라 같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나오지 않으려는 말을 억지로 목구멍에서 잡아 빼냈다. “……미안하다.” 카라는 그제서야 만족한 듯 눈을 돌리더니 소매를 흔들며 말했다. “헤웬은 말 한 마디 못붙이게 살벌하지, 라니아 할머니는 말걸기 힘들지, 얼마나 가시방석 이었는 줄 알아요.” 뒤이어 이자드는 낮에 있었던 싸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성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진 일 부터 시작해서, 무섭게 싸우다가 뭔가 번쩍 하더니 헤웬 혼자 주저앉아 있었던 것, 라니아가 불호령을 내리고 헤웬이 무섭게 받아친 일, 그리고서 상처를 대충 싸매고 다시 쫓아나갔다 가 시체를 세 구 찾아내어 돌아온 일까지. 같이 가지 않았던 카라는 헤웬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그들을 발견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헤웬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음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노인들이 찾고 있던 반역자들이라 고 말하면서 애꿎은 시체를 연거푸 걷어찼다. 자신이 찾은 게 아니라 ‘그 마법사’가 일부 러 버리고 간 거라고, 자기를 우습게 봤다면서, 용서할 수 없다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덕분 에 또 한바탕 돌풍이 일고 소란이 벌어졌다. 카라는 그 대목까지 가서 뭔가 생각하는 것 같 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별로 무섭지 않았지만.” 이자드는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는 아까 뛰어내린 돌무더기 쪽을 돌아보며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요……” “지금 상태로 봐서는 마법사와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거겠지.”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드는 팔짱을 풀고 손을 쥐었다 펴며 말했다. “그래. 알겠다.” 그리고 그는 뭔가 생각하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라니아를 불러다 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라니아 할머니를요? 응, 알았어요.” 카라는 치렁한 옷자락이 거추장스러운지 옷을 손에 쥔 채 무너진 성채 쪽으로 뛰었다. 이자 드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카라는 그 속삭임을 들은 것처럼 걸음을 늦췄다가 돌무더기 옆을 돌아 시야에서 벗어났다. 루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 사과는 이미 했잖아. “아니. 지금 것은…” 지금의 것은 카라가 괜찮을까를 걱정하기에 앞서 혹시 카라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게 아닌 가 하는 생각부터 했던 데 대한 사과였다. 카라는 돌무더기 옆을 돌자마자 희미한 별빛을 받은 두 개의 검은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헤웬은 바닥에, 라니아는 무너지다 만 돌벽 위에 앉아 있다. 헤웬에게 다가갈수록 바람은 강 해졌다. 바람이 강해질수록 카라의 걸음은 느려졌다. 헤웬을 감싸고 멀찍이 도는 바람이 뺨 이며 팔에 부딪칠 때마다, 살아 움직이는 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게로 자체가 바람일까? 하지만 귀령은 동물이 아니고, 바람은 생물이 아니다. 카라가 다가가자 헤웬은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착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카라 는 그 너머에 앉아있는 라니아를 쳐다보았다. “이자드가 할머니를 좀 불러달라는데요.” “이자드?” 라니아는 의아한 듯 말끝을 올렸다가 이내 그것이 자신이 마슈라고 부르는 마법사를 가리킨 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니아가 걷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는 것 같은 묘한 걸 음걸이로 돌무더기를 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카라는 머뭇거리다가 헤웬 옆에 앉았다. 바람이, 헤웬의 것이 아닌 진짜 바람이 잎새를 흔든다. 벌레가 운다. 올빼미가 날개를 펼친 다. 숲은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속살거리며, 살아있는 정적으로 밤을 감싸안았다. 헤웬과 카라는 한참이나 그 소리에만 귀기울였다. 라니아와 이자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 자체를 잊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헤웬이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는 막내였어. 당연히 엄마 이름도 헤델이었지.” 그 말투에서 이미 카라는 그녀가 살아있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돌아가셨어요?” “응. 그때 헤델 언니는 이미 딸이 셋이었어. 나는 열 네 살이었고, 아직 귀령과 계약도 치 르지 않은 상태였지. 딱 지금 네 나이쯤이겠구나.” 카라는 이래봬도 열 일곱살이라고 말하려다가 포기하고 물었다. “어머니도 마녀였겠네요. 무슨 헤델이었어요?” 순간 헤웬의 입가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무릎을 세우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소리 하나 하나를 혀 위에 놓고 굴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 “폭풍의 헤델.” 짧지만 여운이 긴 대답이었다. 카라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갸 웃거리다가 말했다. “우와. 그럼 어머니 이름을 이어받은 셈이네. 게로와는 언제 만난, 아니 계약한 건데요?” 헤웬은 또 아까 같은 야릇한 웃음을 달고 대답했다. “열 네 살 때였지. 그러니까 엄마가……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였어. 그래. 그 전까지는 서 커스 조련사가 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 “엄마 때문에 꿈을 포기한 거예요?” “아니야. 포기했다기보다는 바뀐 것 뿐이지. 기왕 마녀가 될 거라면 정말 강한 마녀가 되고 싶었어. 다들 나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줬고. 하지만…” 헤웬은 말끝을 흐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카라는 순간 아까 헤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최강의 마녀라 해도, 보통 이상의 마법사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 헤웬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적은 없었어, 역시.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지……알면서도, 일부러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나봐. 어린애처럼.” 헤웬은 카라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안 미안. 내가 좀 감상적이 됐었나보다. 그렇게 엄청난 일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괜찮아, 괜찮아. 힘내서 내일은 정말 끝을 봐야지!” 카라는 정말로 기운을 차렸다기보다는 억지로 주먹을 불끈 쥐는 듯한 헤웬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저기, 헤웬. 내 생각에는요.” “응?” “약해서가 아니라 역시 힘이 분산되기 때문에 밀렸던 것 같아서요. 열심히 연습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너무 안이한 생각인가?” 헤웬은 혼자 중언부언하는 카라를 보며 미소지었다. 더 이상 쓰고 무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헤웬의 머리를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네 말이 맞아. 그래. 그럴 거야.” 카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카라에게는 어머니가 없었다. 기억 의 편린조차 없다. 성 안 식구들 말로는 다정한 여자였다고 했지만, 카라에게는 따스하다거 나 차다거나 하는 어렴풋한 느낌조차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되풀이 하는 ‘엄마’의 자리는 그래서 유모가 대신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꿈도 없었다. 답답한, 뭔가 불안한 압박감이 스물스물 기어오른다. 뭔가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렇게 불안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고 나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난 적은 별로 없었다. 카라는 귓볼에 손을 올리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잠이 든 듯, 만 듯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이자드는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자마자 출발을 서둘렀다. 카라가 항의를 해볼 겨를도 없었다. 헤웬은 그렇게 서두를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더 같이 있자고 잡을 수 도 없는 눈치였다. 그녀에게는 할 일이 있었고, 카라에게는 갈 길이 있었다. 헤웬은 어스름 속에서 연신 하품을 하며 눈물 맺힌 눈을 비볐다. “시더로 간다고?” “그렇대요.” “좋겠다. 시더라면 엄청 활기차고 시끌벅적할거야. 아무래도 항구니까 신기한 사람도 많을 거고. 그래 리베르 문디에도 가보겠구나.” 헤웬은 축 늘어진 카라의 옷소매를 장난스레 잡아당겼다. “언제 또 만날 날이 있겠지. 아칸서스로 돌아가게 되면 헤델에게 안부 전해주렴. 참, 아칸 서스가 마녀들에게 상당히 거북한 도시라는 것도 말해줘. 언니가 그래도 걔 얼굴 보려고 큰 맘 먹은 거라고.”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 조심해요.” 헤웬은 씩 웃고는 활기차게 돌아섰다. “자! 나도 일해야지, 일! 가요, 할머니!” 결국 서로 등을 돌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길 때까지, 헤웬과 이자드는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해가 뜨려면 아직 시간이 있었다. 카라는 천천히 걸으면서 이자드에게 물었다. “대체 어제 어디 갔었어요?” “바다에 갔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시더가 바닷가에 있다면서요. 먼 바다에 갈 일이었어요?” 이자드는 더 설명해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출발을 무섭게 재촉했던 데 비해 그도 걸음 은 느긋했다. 어쩌면 마녀들에게 루이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카라는 하품을 한 번 크게 하고 말했다. “헤웬이 마법사를 싫어하는 거, 아무래도 어머니하고 관계있나봐요.” 순간 이자드의 턱이 움찔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그런 말은 안했지만……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마녀가 됐다고 하는 품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요. 게다가 어머니도 폭풍을 다스렸대요. 혹시 마법사 때문에 돌아가신 거라면, 마 법사만 보면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도 이해가 가잖아요. 그렇죠?” 이자드는 말없이 몇 걸음을 옮기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헤웬이 무시한다고 기분나빠하지 말아라, 뭐 그런 거냐?”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됐다. 어린애도 아니고.” 카라는 웃다가 다시 하품을 했다. 슬슬 태양이 고개를 내미는지 하늘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이자드는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이는 분명 자고 있을 테니, 선 채로 교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밤 라니아와의 대화를 생각했다. 그의 질문에 라니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녀와는 무관. 저 애는 전혀.” “그래……혹시나 했는데. 전혀 다른가?” 좀 더 설명해달라는 요구가 포함된 이자드의 확인에 라니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 다. “헤웬을 이해하시길, 마슈님. 어미가 마법사에게 당하는 것을 제 눈으로 봐서.” “알고 있다. 폭풍의 헤웬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분명 헤델이 폭풍이었을 텐데. 하지만 설마 어미의 귀령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줄은 몰랐어. 귀령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자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잔인한 짓을 했군.” “제가 한 게 아니라.” “그럼 본인 선택이었단 말인가?” 문득 지금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회상 속의 음성을 덮어버렸다. “저기, 그런데 저번에 말했던 거요. 1차 계약자가 아니니 어쩌니……그건 무슨 말이에요?” 이자드는 잠시 카라를 내려다보았다. 카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결정을 내리고, 설명했다. “귀령이라는 건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것들이다. 그들이 마녀들과 계약을 맺고 힘을 빌려주는 것도 존재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지. 지배가 아니라 존재의 힘을 원하니까. 그러니까 그들의 계약조건은 아주 간단해. 귀령은 계약한 마녀가 힘을 발휘하는 것을 돕는다. 그 마녀 가 패배하면, 귀령이 그 인성을 흡수한다. 존재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인성을 흡수한다고? 카라는 잠시 멍하니 이자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옛날 이야기에 나 오는 괴물들처럼 사람을 먹어치우는 것도 아닐 테고, 어떻게 흡수한다는 건지 잘 상상이 되 지 않았다. 이자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덧붙였다. “그걸로 그 마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지.” 그는 죽는다가 아니라 사라진다는 표현을 썼다. 카라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 았다. '흡수한다'는 것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렇다면. 카라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러면……그러면 게로는……” 이자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설마, 설마 어머니의 귀령이었던 건 아니겠죠? 설마……” 그는 천천히 나무둥치에 기대 앉아 카라를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말했다. “다른 마녀의 귀령이었다고 해서 꼭 그게 어머니였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카라는 잠시 안도하는가 싶더니 풀죽은 얼굴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서서히 솟아오르 기 시작한 햇살이 며칠 전엔가 헤웬이 휩쓸고 지나갔을 폭풍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이자 드는 다시 밤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꽤 긴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라니아의 음성은 달라져 있었다. 목소리 도 말투도, 지금 눈앞에 있는 노파가 아니라 오래 전, 처음 만났을 때의 혈기왕성한 소녀를 연상시켰다. 그때처럼 활기찬 목소리는 아니라 해도. “저 애는 어미가 죽을 때 그 옆에 있었어요. 가엾은 것. 최고라고만 생각했던 어미가 마법 사에게 지는 것을 보고, 강아지처럼 사랑스러워했던 귀령이 어미를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았 죠. 운명을 알고 있었다 해도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을 텐데도 저 애는……그 자리에서 바로 그 귀령을 계승하기로 결정하고, 막 어미를 먹어치운 귀령과 계약을 맺고, 바로 쫓아가서 그 마법사를 죽여버렸지요.” 다시 침묵. 라니아는 이자드를, 60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마슈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처 음 질문으로 돌아갔다. “뭐가 다르냐고 물으셨지요. 제가 묻고 싶은 말이로군요. 뭔가 이상하다는 것만 느낄 뿐,전 혀 알 수가 없어요. 저와는 전혀 다른데, 뭐가 어떻게 다른지 제 능력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 어요. 마법사들은 자연력을 끌어내기 위해 주문과 지팡이를 필요로 하지요. 마녀들은 주문을 쓸 필요가 없는 대신 귀령을 필요로 하고, 심지어 용족이라 해도 ‘명령’을 하기 위해서는 말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라면 저 애는…아무 것도, 어떤 매개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거죠. 정말로 저 아이에게 그런 힘이 있는 건가요?” 라니아의 목소리에는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의문이 가득했다. 그리고 갈망도. 이자드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카라는 폭풍이 걸어간 길을 쳐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힘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미 나무둥치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은 이자드가 아니라 루 이였다. [56] - 난다의 이야기, 세번째 좋은 일들만이 아니라 나쁜 일들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장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때로 생각한다. 진짜 용족들, 나같은 불구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태어나고 정상적으 로 자란 용족들도 이런 식으로 기억할까? 그들도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감정을 느낄까? 그 리고 그들의 시간도 내 시간과 같은 밀도를 갖고 있을까......그런 생각들. 내가 영원히 알아 낼 수 없을 문제들. 구원 같은 것은 없다고 몇번이나 되뇌었던 것은, 아마도 누구보다 그것을 갈망했기 때문이 리라. 그래. 생애 한 순간 한 순간에 염원했었지. 고통이란 고통은 다 사라져버리고, 오직 빛 과 환희만이 남는다는 그런 구원에 대해 들은 이후부터 줄곧. 그러나 이제 난 그런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설령 존재한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남겨진 모든 불구의 것들의 이름으로. 다시 나는 현재 내가 딛고 서있는 이곳으로 생각을 돌린다. 어김없이 밤이 찾아들고, 잔다바티 성은 살인적인 햇빛과 무더위에서 벗어나 활기를 찾았다. 서늘한 저녁바람이 불어오면서 마지막까지 낮잠을 즐기던 사람들도 깨어나고, 겨우 불 앞에 앉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탁탁, 아궁이에 새 장작이 들 어갈 때마다 튀어오르는 불똥 소리, 물이 끓는 소리,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우는 소리들. 나는 그 소리를 들이마시며 어둠을 내다보았다. 돌아보니 이자드는 침묵 속에서 점토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책상 쪽으로 걸 어가면서 설명했다. "첫번째 무더기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공 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꼼꼼이 살피면 동일한 궤적을 읽을 수 있어요. 그 이야기들에는 검은 머리카락의 마법사, 혹은 금발의 검사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푸른 색의 마법색이나 불꽃 의 날을 가진 검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입니다. 이 곳 도서관에 있는 기록은 최고 천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그 첫번째 무더기 속에 그 시간대와 맞닿 아 있는 판도 있습니다." 이자드는 흘긋 눈을 들어 나를 보더니 표정없이 눈길을 아래로 돌렸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 었다.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두번째 무더기는 각각 나라카 족, 트리탄 족, 긴나라 족의 멸망에 관해 적힌 세 장의 점토 판과 그 외에 패러노말 마스터라고 불리운 인물들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역시 최고 기록은 천년 전까지 올라가지만, 나라카 족에 대한 기록은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난 연대가 훨씬 오래 전일 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자드도 반응을 보였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들 종족의 멸망과 패러노말 마스터는 무슨 상관이지?" "제가 하고 싶은 질문입니다. 시기적으로 한 종족의 멸망과 패러노말 마스터의 출현이 겹쳐 지고 있습니다. 딱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고는 해도 비슷한 패턴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면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이해가 안가는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이자드는 보기 전에 점토판의 내용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루이에게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들의 기억이 완전히 백지 상태로 돌아간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으니까. 이자드는 여전히 마법을 쓸 수 있었고, 마법에 바탕이 되는 지 식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것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 면 지워지고 남는 기억 자체가 선택적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의심이 든다. 어쩌면 기억하고 있는데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표면적으로 만 기억하지 못할 뿐, 몸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직 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 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전에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갑자기 내 앞에 놓인 점토판을 다 깨뜨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고대의 종족들 몇이 멸 망했듯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패라노말 마스터는 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카라는 이미 가버렸고 그녀가 무엇이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인데. 나는 지금 호기심에 차 있는 것도, 회한에 가득차 있는 것도, 친구의 추억을 더듬고 있는 것 도 아니다. 시간과 기억은 물결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그러나 어쩌면 슬픔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가 그 안에 숨어 있다. 카라가 죽음을 택한 이유. 그래야 했던 이유. 나는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 더듬어 찾아볼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뜨고, 다시 어둠을 내다보았다. 멸망이라는 말은 내게 생경하기만 한 느낌을 주었 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카라는 세상에 오직 나만이 홀로 남아있다면 어떤 기분일지 떠 올려 보라고 했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런 기분이라면 언제나 느끼고 있다고. 문득 깨닫고 보니 이자드가 다시 말을 잇고 있었다. "연결이 안되는 것 투성이야. 나라카 족, 트리탄 족, 긴나라 족 사이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 어. 어둠과 바다, 하늘......게다가 패러노말 마스터는 인간이잖나?"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들떠 나왔다. "기억이 나세요?" 이자드는 얼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열중해 있다가, 긍정이라고도 부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몸짓을 취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나라카 족이 어떤 종족인지, 긴나라 족이 어떤 종족인지는 기억하시는 겁니까?" "대충은. 기억한다기보다는 알고 있다고 해야겠지. 나라카는 아득한 고대에 멸망한 종족이 고,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밤과 어둠, 그림자에 관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트리탄 족은 소위 반인반어라고 하는 종족으로 은의 바다에 살았었고, 긴나라 족은 반인반 조로 창성 아딜 테파에 살았었다는 정도. 그런데 이게 무슨 상관이 있지?" 그는 초조한 얼굴이었다. 나는 뭔지 모를 들뜬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일반적인 지식은 기억하고, 자신과 관계있는 사건이나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거군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혹시 되살릴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억해내 보십시오!" 이자드는 억지로 뭔가를 짜내려는 듯 고뇌하다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포 기하지 않고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그럼 일단 점토판의 내용부터 읽어보세요. 뭔가 떠오를 지도 모릅니다." 이자드는 뭔지 모를 쓴웃음을 지었다. "꽤나 집요하군." 나는 대답없이, 자리를 잡고 점토판을 들여다보는 데 열중하는 이자드의 얼굴을 바라본다. 루이가 바깥으로 생명력을 내뿜는 사람이라면 그는 강한 힘을 내면에 갈무리하고 있다는 느 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새삼 그가 늘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말 이 아니라 온몸으로. 누군가에게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날카롭게 반응하 곤 했었다. 내 추측이 맞다면 벌써 천년을 살고도...... 천년. 용족이라 해도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한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아마 나는 미쳐버리 겠지. 천년 동안의 기억을 모두 끌어안은 채로. 어쩌면 그가 잠에 빠져들고, 기억을 지워버 리는 것도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오로지 살기 위한 삶일 뿐.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이 세상을 헤메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대체 무엇일까. 내게는 카라 보다도 이자드 루이 쪽이 더 불가사의하게만 여겨졌다. 나는 그의 날카로운 옆얼굴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기억의 흐름을 휘젓는다. 나는 알고 있 다. 인간의 기억을 '파편'이라 규정한다면, 나의 기억은 연속적인 흐름을 형성한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자드가 점토판을 들여다보며 필사적으로 더듬어 찾고 있는 것은 어떤 파편들 이다. 나의 기억과는 다른. 새삼스럽게 나는 내가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용족과도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존재는 없다는 것을. 이질감. 어쩌면 고독이라고 부를만한 종류의 감정. 그래. 그렇다. 그 당시 나는 고독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때문에 반쯤은 미쳐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반 이상 미쳐있었는지도 모른다. 용족의회, 그 잘나빠진 수장회의에서 모욕을 당하 고, 경멸과 혐오로 얼룩진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보며 나는 이백년 동안의 노력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경험했다.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도 없었다. 어렸을 때보다 더 심해진 갈증만이 남아있었다. 갈증. 내 차가운 혈관에서 격렬히 들끓고 있었던 피...... 그 때 내 주변의 공기를 느꼈는지 이자드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때의 흐름을 돌이키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기억의 흐름을 다시 끌어내는 것만으로 내 정신과 육체가 그때 당시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떠돌아다니 던 시간 동안 억제에도, 마음을 숨기는 데에도, 인내와 교활함에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 당 시의 기억만은 언제나 나를 미치게 한다. 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시절들, 용족임을 나타내는 눈동자의 모양을 숨기기 위해 장님 행세를 하며 견뎌냈던 세월들, 그리고 나를 돌봐주거나 소유하려 했던 사람들을 죽여야 했던 순간들 모두를 견뎌나가게끔 나를 지탱해준 불꽃을 한 순간에 꺼뜨려 버렸던 내 동족. 내 어머니...... 손톱이 지그시 손바닥 안을 파고들어왔다. 이자드는 점토판에서 눈을 떼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코 외면하지 않는 눈동 자. 그래. 나는 집착이 강하다. 언젠가 내게 왜 집착하냐고 물었었지. 나는 속삭인다. 버림받은 자들은 집착이 강해, 카라. 이자드에게는 카라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것도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가 아니라 그 후의 모습에. 그들에게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가 있다. 마음이 찔리는 듯한, 동시에 바싹 말라버린 바닥에 물이 고이듯 무언가를 차오르게 하는 것. 지금까지도 가끔 나를 말라 버린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이 타는 듯한 갈증에 유예시간을 부여하는 것.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 [57] - 8. 공명 #1. 일곱개의 눈동자 지도는 누군가 하늘에 올라가서 땅을 내려다보며 그린 듯 선명하고 자세했다. 색채도 화려 하다. 특히 눈길을 빼앗는 서쪽 옆구리는 은푸른 색의 바다로, 점점이 찍힌 녹색 섬들을 따 라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바다색이 어두워져 완전히 남쪽으로 내려가면 새카매졌다가 동쪽으 로 올라가면서 단순한 푸른색을 띤다. 육지의 길은 노란 선이었고 마을은 흰 색, 언덕과 숲 은 연두색. 도시도 화려해서 수도 키시는 금색 십자가, 아칸서스는 초록색 초승달, 레투스는 루비색 사각형, 그리고 이곳 시더는 진푸른색 삼각형이었다. 지도에 나타나기로 남쪽 평원에 자리한 수도 키시는 약간 멀리 떨어진 편이고 다른 세 도시는 비교적 거리가 가까워서, 네 도시를 연결해서 선을 그으면 윗면이 좁은 다이아몬드 꼴이 나왔다. “꼬마야, 지도 처음 보냐?” 카라는 크고 무거운 지도책에서 눈만 들어올려 서점 주인을 쳐다보았다. 서점보다는 어물전 에 더 어울릴 성 싶은 매무새에 머리가 반쯤 벗겨진 주인 아저씨는 받침대 위에 올라서서 책에 쌓인 먼지를 털고 있었다. 총채가 휙휙 움직일 때마다 작은 의자는 주인의 무게를 못 이겨 삐걱거리고 독한 책먼지가 좁은 가게 안을 채운다. 카라는 선반에 책을 내리고 벅찬 무게를 버티느라 시큰해진 손목을 털었다. “이렇게 화려한 지도는 처음 봐요.” “흐흠, 그래. 그렇겠지. 그 지도라면 마법사들도 사가는 물건이니까 말이야.” 서점 주인은 총채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내려오더니 파이프를 집어들었다. 그가 파이프에 든 담배를 확인하고 불을 붙이는 동안 카라는 다시 펼쳐진 지도책에 시선을 내렸다. 아칸서스 북쪽, 은빛 모래바다와 산맥 사이에 눈에 들어올까 말까한 작은 땅이 있었다. 가늘고 꼬불꼬 불한 노란 선 하나가 간신히 모래바다를 에둘러 그 쪽으로 이어져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곳에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산다는 사실도 모르겠지. 카라는 문득 가지가 휘청일 정도로 쌓인 눈, 계곡 사이로 울리던 개썰매의 방울소리, 사슴 사냥 후에 성 안으로 몰려들 어와 잠시 몸을 녹이고 먹거리를 받아들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많이 비싸겠죠?” 서점 주인은 파이프를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런 꼬맹이가 책을 살 거라고는 기대 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카라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지도책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접고 표지를 덮었다. 제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낑낑대며 손을 뻗자 아저씨는 파이프 를 문 채 무슨 말인가 우물거리며 손을 저었다. 비린내 섞인 바람이 거리 구석구석을 헤집어다니고 있다. 항구 도시 시더. 골목 골목 가게들 이 밀집한 시장통 위쪽 언덕 위로 탑이 하나 고고하게 서 있었다. 시더의 자랑이자 오점- 마법사 협회 리베르 문디의 총본산 <침묵의 탑>이다. 탑에는 협회장이 상주했고, 시기에 따 라 두 명에서 세 명 정도 장로가 머물렀으며 아직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젊은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 누구나가 아는 일이었지만 이 젊은 마법사들은 실력을 평가받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나라일 처리에 동원되곤 했다. 반역자나 소위 불온한 무리 제 압, 호위, 산적 소탕, 심지어 공사일이나 수송에 이르기까지…그리고 리베르 문디에는 이런 사람들 외에, 정보가 있었다. 이자드는 그 정보를 얻기 위해 탑에 올라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자드는 아니 다. 시간이 낮이었기 때문에 루이가 이자드의 대리로 가면을 쓰고 로브를 휘감아야 했다. 카라는 서점을 나와 목을 빼고 언덕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늦네…” 몇 시간쯤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하긴 했었다. 어째서인지, 이자드는 카라가 마법사들의 눈에 띄는 일을 꺼리는 눈치였다. 아예 시더 외곽 에 잡은 여관에서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 결국은 루이의 지원에 힘입어 시장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도 처음 한 두 시간이지, 벌써 네 시간째 다. 이제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카라는 저 탑위에서 이자드/루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사탕과자를 늘어 놓은 진열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반짝이는 흰 설탕으로 덮인 모양이 예뻐서 몇 개 집어 들었다. 그러나 값을 치르면서 입에 넣어보니 너무 달았다. 루이라면 잘 먹을지도 모른다. 카라는 볼품없는 과자봉지를 말아쥐고 돌아서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사탕과자를 팔던 아 주머니에게 던졌다. “간단한 식사 같은 걸 하려면 뭐가 좋아요?” 눈두덩이에 졸음을 얹고 있던 아주머니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되물었다. “시더에 처음 와보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귀찮은 티를 내며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더니 카라 주위 를 살폈다. “보아하니 여기 애도 아니고, 너 혼자 다니기엔 험할 텐데……” 카라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깜박이다가 대답했다. “혼자 온 건 아니고 기다리는 동안 구경하는 건데요.” “그래? 그래도 그렇지, 요새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돌아다니는데……조심해라. 정작 뱃사람 들이야 생긴 게 험악해서 그렇지 겁낼 것 없다만. 아참, 그래서 먹을 거리에 대해 물었지? 항구 쪽으로 더 내려가면 음식점이 쭉 늘어선 골목이 나올 거다. 생선요리나 물 건너온 과 일 같은 건 값도 싸고 먹을 만 할거야. 그런데…” 카라는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고 계속되려는 사설을 끊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다닥다닥 붙어있던 시장 골목을 벗어나자 바다 냄새는 한층 강해졌다. 쉼없이 불어오는 바 람에 여기저기에서 네모낳고 세모난 천이 펄럭인다. 어느 샌가 카라는 시장이나 보고 있으 라던 이자드의 다짐을 잊고 부두로 내려가고 있었다. 짐을 부리고 있는 커다란 화물선과 아 침일을 끝내고 매어둔 고기잡이배, 시장보다 더 요란하고 떠들썩하다. 사람이 많기로야 아칸 서스도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시더는 그 안에 섞여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들뜰 만큼 생동감 넘치는 도시였다. 사람들의 모습도 갖가지여서 사람 구경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지경이었다. 두리번거리던 카라는 문득 눈이 돌아갈 정도로 가지각색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 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낮은 기둥처럼 튀어나온 돌 위에 오도카니 앉아 바다를 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주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배경 그림처럼 보 일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그 아이는 카라보다도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새카만 옷차림 이었다. 소매 밖으로 나온 도자기처럼 하얀 손목은 까만 옷에 대비되어 더 하얘 보였고, 무 엇보다도 눈을 사로잡는 것은 그 검은 옷 위로 떨어져내리는 투명한 은빛 머리카락이었다. 저렇게 예쁜 아이가 있다니. 카라는 잠시 넋을 잃고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카라 말고는 그 아이를 열심히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기만 했다. 마침내 카라는 용기를 내어 돌기둥 쪽으로 다가갔다. “너, 여기서 뭐하니?” 아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 눈을 보고 카라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아 이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제비꽃 색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그 눈동자는 어떤 꽃 에도, 어떤 새에도 존재하지 않을 투명한 자색빛이었다. 투명하지만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포도주빛 물 위로 금빛 햇살이 흔들리는 듯한…그런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 눈 깊은 곳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이 감돌았다. 단정한 입술에서 미성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낮은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까지 카라 는 그 눈동자에 매혹되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일입니까.” 자색의 구슬에 당혹감이 드러날 즈음해서야 카라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이의 눈동 자는 보통 사람과 달랐다.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원이 중첩되며 겹쳐져서 하나의 원을 구성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게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억양없는 목소리가 귀를 때리고서야 카라는 겨우 그 눈동자에서 눈을 떼어 소 년을 쳐다볼 수 있었다. “미안해. 너무 뚫어져라 쳐다봤지.” 어색한 웃음을 떠올려 봤지만 소년은 여전히 쌀쌀맞은 무표정이었다. “무슨 용건이죠?” “저……그냥, 왠 어린애가 혼자 이런 데 앉아있나 하고. 누구 기다리니?” 난처하게도 소년은 카라의 말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는 뭔지 모를 표정으로 카라를 노려 보더니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평소같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쳐 갔을 지도 모른다. 카라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어정 쩡하게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새카만 옷차림이 바닷바람에 펄 럭이자 로브 자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호기심이 동했다. “너 마법사니? 아니, 아직 어리니까 공부하고 있는 건가?” 소년은 귀찮다는 듯 몸을 움직거렸다.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아 몸을 완전히 틀지는 못했지 만,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은 충분히 전달될 정도였다. 카라는 잠시 고민에 빠졌 다.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뭘 어떻게 생각했는지 소년은 다시 한 번, 자르듯 말했다. “제게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매몰차게 거절당해서야 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카라는 볼을 긁적이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가, 역시 마음에 걸려서 다시 발을 멈추고 말했다. “저, 내가 너무 뚫어져라 쳐다봐서 기분이 나빠졌다면 미안해. 네 눈이 너무 예뻐서 그 만.” 완강하게 바다만 바라보던 소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카라는 다시 한 번 그 눈에 매혹되 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희미한 조소와 함께 반문했다. “……내 눈이, 예쁘다고 생각합니까?” 카라는 잠시 당황했다. 어린아이가 너무 예쁘다 보니 시달린 건가. 저 불신감 가득한 눈은 뭐란 말인가. “안 믿겨?” 소년은 대답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음. 난 아름답다는 말을 잘 안쓰는데 있지, 지금까지 딱 세 번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 거든. 네 눈동자가 세 번째야.” 소년은 잠시 카라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약간이지만 표정을 풀고 물었다. “첫번째, 두번째는 뭐죠?” “으음. 첫번째는……옛날에 살던 집 뒤편에 계곡이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얼음이 꽝꽝 얼 었거든. 그 얼음이 깨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봤을 때였어. 언제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은 확실히 기억해. 흐르던 물살이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결이 진 얼음 위로 잔설이 남아있었 고, 그 위로 드문드문 시리도록 파란 하늘빛이 비춰서 꼭 구름낀 하늘 같이 보였어. 그걸 내 려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게 울리더니 얼음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는 거 야. 세상이 부서지는 것 같은 물소리가 나고……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소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카라는 진지한 얼굴로 손 가락을 꼽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됐어요.”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돌기둥에서 뛰어내렸다. “믿어줄 테니까, 그만해도 돼요. 전 할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그는 그 말만으로 더 이상의 인사도 없이 카라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 럼 소리없이. [58] - 8. 공명 #2. 리베르 문디 “여전히 멋대가리 없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구먼.” 구루하는 마법사의 로브라기보다는 귀족의 연회복 같은 화려한 옷소매를 들어, 멋들어지게 다듬은 콧수염을 쓸어올리며 우아한 동작으로 파이프에 담배를 재웠다. 이자드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 네놈은 여전히 쓸데없는 멋내기를 좋아하고. 물론 그의 목소리가 구루하에게 들릴 리는 없었다. 지금은 낮, 루이와 카라 외에는 아무도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루이가 방금 나온 말을 옮겨야 하는가 생각하는 사 이 구루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동안 뭘 하고 다녔나? 여전히 긴나라족인지 뭔지를 쫓아다니나?” “그야…” - 입, 다물어. 내 말만 전하라고 했다. 루이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이자드의 날카로운 경고에 찔끔했다. 저렇게 뽐내고 멋내는 데만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아 보여도 구루하는 리베르 문디의 협회장이다. 그것도 10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즉, 구루하가 번쩍이는 능라를 휘감은 뚱뚱한 너구리 영감이라는 뜻 이다. 그가 마법사로서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해마다 나왔지만, 그런 사람들도 그만큼 뛰어난 행정가이자 노련한 협상가가 달리 있느냐는 반론에는 언제나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자드는 루이에게 이 자리에 오기 직전까지, 아니 자리 에 앉은 후에도 계속해서 아차 실수했다가는 구루하에게 무슨 꼬투리를 잡힐 지 모른다고 신신당부한 터였다. 그래서 루이는 입을 다물고 어깨만 으쓱거렸다. 구루하는 알아들었다는 듯 씩 웃었다. 루이 로서는 그가 뭘 알아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멋들어진 콧수염 을 쓰다듬고 파이프를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 “그 놈의 로브도 여전하고 말이야. 생각같아서는 내 전용 재단사를 소개해 주고 싶네만 보 나마나 거절하겠지? 자네는 실력은 좋을지 몰라도 너무 멋이 없어요. 조금만 신경을 쓰면 힘들게 돌아다닐 것 없이 편하게 일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긴, 자네가 찾는 물건…아니 사람이랬나, 종족이랬나, 그건 편히 앉아서 사람을 풀어 찾기가 힘들다고 했지?” - 너구리같은 놈. 이자드가 중얼거렸다. 그래, 넌 하고 싶은 말 다 내뱉으니 시원하고 좋겠다. 루이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그는 잘난척 하는 마법사들 한 무더기가 모여서 만들어놓 은 리베르 문디라는 모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모를 구루하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이 방도 불편했다. 가면을 쓰고 외모를 감추고 이 자드 행세를 해야 하는 것도 답답한 일이었다. 하지만 들어오기는 이미 들어왔고, 여기에서 빨리 빠져나가려면 이자드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야 했다. 그는 이자드의 말에 귀를 기울 이며 대화를 끌어나갔다. “리베르 문디는 괜찮은 건가? 이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소문이라니? 어떤 소문 말인가?” 구루하는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반문했다. “꼭 소문이라고만도 할 수 없지. 오는 길에 반역자를 쫓고 있는 마녀를 만났어.” “아하, 그거 말인가. 그래서 리베르 문디가 그만한 일을 맡길 사람이 없어서 마녀에게 의존 할 만큼 궁지에 몰린 거냐고 생각한 모양이군. 맞나?” “대충은.” 구루하는 고개를 흔들며 육중한 몸을 움직여 술병을 찾았다. “마시겠나? 그렇게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루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속으로는 입맛을 다셔야 했지만. 구루하는 진한 초콜렛색 액체를 잔에 따르고 술병을 닫으며 말했다. “내부적으로 그렇게 대단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야.” 그 말은 사실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자드는 파벌 싸움이 있다 는 헤웬의 말을 떠올리며 침묵했다. 루이는 보일락 말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루하는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문제 하나는 최근 10년간 키시의 왕실마법단이 조금씩이나마 강해져 왔다는 것과, 그들이 사사건건 우리를 견제하려고 든다는 사실이라네. 뭐, 겉보기에는 재상과도 반목하고 있는 것 같지만 누가 알겠나, 우리를 늘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재상인데. 어쩌면 이제까지 강력한 키 퍼인 재상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해왔던 마법 대책을 반성하고 직접 손을 쓴 건지도 몰 라.” 구루하는 잠시 말을 끓고 술을 핥았다. 대개의 마법사들이 그렇듯, 그 역시 재상에 대해 말 할 때 어찌할 수 없는 불편함을 드러냈다. 현 재상은 마법사의 상극인 키퍼 중에서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강력한 키퍼였다. 수도인 키시 안에서는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거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사실 그가 정말 위협적인 것은 그가 강할 뿐 아니라 영 리하다는 데 있었다. 키퍼의 능력을 타고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고, 그 중에서도 비교적 강 하다 싶은 키퍼는 대개 백치이거나 어딘가 불구였다. 그만큼 재상의 존재는 특별했다. 그러 나 지난 40년간 키시에 성역을 구축해온 재상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 그가 죽었을 경우, 몇십년간이나 마법사에 대해 무관심했던 수도나 왕실이 어떻게 될 것인가. 능력에 걸맞지 않게 왕실에 충성하고 있는 재상으로서는 그 점이 어지간히 걱정스러울 것이다. 구루하는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반역자가 왕제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그를 잡는 일에도 무게가 실린다. 구루하의 말은 또 왕실 마법단이 그런 중요한 일을 리베르 문디에 맡기는 데 반대하고 나섰고, 재상은 그 의 견을 받아들이되 왕실 마법단에 맡기는 대신 아예 마녀라는 엉뚱한 쪽에 던져버렸다는 상황 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에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재상이 그 의견을 받아들 이려면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구루하는 술을 마시며 한 박자 쉬고 그 부분을 말했다. “문제 둘은 최근 들어서 용족이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온다는 점이야.” “용족?” 루이는 순간 용족이라니, 설마 진짜 용족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말을 내뱉을 뻔 했다. 물론 아니었다. “그래. 별 관심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알고 있겠지. 용족의 마법사 놈 말이야.” “난다 말인가.” “그래. 역시 자네도 알고 있군.” 모를 수가 없었다. 용족이 인간 사회에 나와 돌아다닌다는 것도 희귀한 일인데다가, 불구라 서 용족에게 버려진 아이가 마법을 배웠다는 것은 한층 더 신기한 일. 보통 사람들은 몰라 도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름이었다. 아마 정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자신, 마슈 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이자드보다 훨씬 유명할 것이다. 그다지 좋은 쪽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알 수가 없는 일이야. 알다시피 놈은 이제까지 마법사를 여러 명 죽인 걸로 유명하지. 하 지만 마법사가 같은 마법사를 죽이는 일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가 끔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 이 말에는 루이마저도 가면 속에서 웃고 말았다. 구루하는 마치 리베르 문디가 무관심해서, 선심을 써서 난다를 내버려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처음에 난다가 등장했을 때 리베르 문디는 그를 없애려고 했었다. 그러나 난다는 리베르 문디의 장로 전부 가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을만큼 강했다. 다행히도 그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자들만 쓸어버 렸을 뿐 그 외의 일에는 무관심했고, 그래서 리베르 문디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들은 난다의 존재를 묵인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보통 마법사 같으면 멋적은 티라도 냈을 대목이지만 구루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당 당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놈의 용족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최근 들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단 말이야. 도저히 두고 봐 줄 수가 없을 지경이야.” “흐음?” “최근 5개월간 놈은 다섯 명의 마법사를 죽였어.” 이자드는 침묵했다. 자연히 루이도 침묵했다. 구루하는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책상을 두들기 며 말했다. “그것도 다섯 명 모두 우리 장로급이었다네.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애매한 정보긴 하지만, 저 놈이 북쪽에 갔다온 후부터 돌변했다는 설이 유력하다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 에, 왜 마법사들을 암살하고 다니는 건가? 골치아픈 일이 아닐 수 없어.” 이자드는 북쪽이라는 말에서 모래의 바다 너머 북쪽 어딘가에 있다는 용족의 나라를 떠올렸 다. 루이는 속으로 암살이라니, 요새는 정면에서 대놓고 죽이는 것도 암살이라고 부르나 하 고 생각했다. - 그래서? “그래서?” “두 달 전, 그 일에 대해 조사하는 사이 국왕 암살 기도가 발견됐지. 그래서 난다에게 대처 하려고 동원했던 마법사들을 그 일에 투입해야 했다네. 그리고 뒤이어 반역자들이 밝혀지고, 유감스럽게도 바로 체포되지 않고 도망쳤지. 왕실 마법단은 우리를 비난하고 나섰고… 그렇 게 된 거야.” 구루하는 이 시점에서 교활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루이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루이, 말투 조심해라. 그는 이자드의 지적에 찔끔했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계속해서 말했다. “듣고 있자니 설명이 구구하잖나. 무슨 일이지?” 구루하는 술잔을 비우고 입맛을 다시며 콧수염을 쓸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해서, 실은 우리 쪽에서 자네를 찾던 참이었어. 물론 나머지 우리들이야 자네를 찾을 실마리도 모르지만 하시피에가 있으니까 말이지. 그런데 운좋게도 먼저 찾아와 줬으니……” 그는 슬그머니 이쪽의 눈치를 살피더니 덧붙였다. “사실은, 최근 들어서 왕에 대한 암살 기도가 또 있을 것이고, 이번에는 난다가 나설 거라 는 정보까지 들어왔다네. 확률은 반반이지만 최근 행동으로 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얘기지. 솔직히 인정하지만 사실 난다를 상대할 만한 마법사가 달리 누가 있겠나? 자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지.” - 웃기고 있군. “웃기…” “물론, 공짜로 도와달라고 매달릴 만큼 염치없지는 않아요. 자네가 리베르 문디에 이름을 걸어놓기는 했지만 그거야 구색일 뿐이고……구미에 당길 만한 거래조건을 제시하지.” “돈 따위에는 흥미없어.” “돈 얘기가 아니라네. 그렇게 찾아헤매던 긴나라족에 대한 정보…라면 어떤가?” 구루하는 잠시 가면 아래에서 일고 있는 루이의 동요를 재며 파이프를 빨았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금박으로 돋을새김을 한 천장 벽화까지 기어올라갔다. 마침내 루이는 입을 열었다. “긴나라족이라고?” 목소리에서 이미 동요를 읽을 수 있었을까. 구루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자드는 낮게 신음했다. - 내가 처리할 테니까, 일단은 생각해 본다고만 해. 루이,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루이는 이미 이자드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게 그만큼 가치있는 정보라는 걸 어떻게 알지?” “긴나라족에 대한 정보 자체가 워낙 없다는 거 알잖아, 마슈.” 구루하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익살스럽게 양팔을 펼쳐보였다. 이자드는 다급하게 말했다. - 그게 어떤 정보든, 지금 몸이 달아있는 건 저쪽이야. 미끼에 덥석 달려드는 바보짓 하지 마! 일단 마슈의 이름으로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게 아무리 이자드가 아니라 루이였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 한다. 지켜야 할 약속, 깨뜨려서는 안될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 러나 루이는 이미 긴나라족이라는 이름이 나온 후부터 통제 불능이었다. 이자드는 차라리 밤에 직접 오는 건데 실수했다는 후회를 되씹어야 했다. 아직 루이는 망설이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힌트를 주지.” 구루하는 느긋하게 파이프를 빼고 낚시줄을 당겼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말이지…살아있는 긴나라족에 대한 거라네.” 순간 루이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그는 탁자에 손을 대고 몸을 일으키며 시 원스럽게 대답해 버렸다. “좋아, 받아들이지!” 그와 동시에 이자드의 엄한 목소리가 루이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네가 한 말에는 네가 책임져라. 잠시 공기의 흐름이 멈췄다. 구루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뼉을 딱 치며 입을 열었다. 루이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 았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정보인지도 모르는 이상 아무 요구나 다 들어줄 수는 없어.” “무슨 뜻인가?” “난다가 국왕 암살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 그 이상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야.” 구루하의 손이 파이프를 쥔 채 허공을 휘저었다. 잘 다듬은 콧수염 끝이 꿈틀거린다. 루이는 완전히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머리 하나는 낮은 데 있는 구루하의 눈을 들여다보며 단호하 게 못을 박았다. “이 정도만 해도 내가 치를 대가가 충분히 크지 않나?” 구루하는 파이프를 다시 물며 슬그머니 웃었다. “우리도 이 정보를 얻느라 꽤 희생을 치뤄야 했다고. 알겠지만, 워낙 구하기 힘든 정보고… 내 마법사 생명을 걸고 장담하는데 정말 가치있는 정보거든.” 루이는 애써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다른 걸 찾다가 우연히 손에 넣었을 게 뻔한데 그런 허풍을 치나.” 구루하는 너구리 같은 미소로 그 말을 수긍하고 왼손을 내밀었다. “어쨌거나 그럼 거래 성립이야.” 이자드는 불길한 예감에 한숨을 깨물었고, 루이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구루하의 손을 잡았 다. [59] - 8. 공명 #3. 용족의 마법사 (1) 카라는 잠시 멍해 있다가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살폈다. 보이지 않았다. 키가 작아서 사람들 사이에 파묻혔다 치더라도 그 은발만큼은 눈에 확 띌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왠지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햇살을 받아 녹아내린 환영이었다 해도 믿길 만큼 비현 실적인 아름다움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두커니 서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 보니 볼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 다. 카라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속으로 절규했다. ‘내가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한 거지!’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예쁜 아이를 보고 얼이 빠져 헛소리를 해대다니! 평소에라도 예쁜 것에 사족을 못 쓰는 편이었다면 또 모르겠다.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넋이 나갔던 걸까? 아니, 하지만 그 아이라면 누구라도 보고 멍해졌을 거야. 한참 괴로워하며 속으로 주거니 받거니 변명을 하고 있는데, 문득 친숙한 목소리가 끼어들 었다. “카라!” 루이였다. “겨우 찾았다 싶었더니 이런 데서 뭐하냐?” 그는 이미 헝클어진 카라의 머리카락을 더 흐뜨러트리며 물었다. 카라는 눈을 굴리며 그의 행색을 살폈다. 가면과 로브는 어디다 밀어넣어 놓았는지, 지금은 평소와 다름없는 루이의 모습이다. 무언의 질문에 루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볼일 끝나고 나오자마자 벗었지. 으,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 점심은?” 카라는 고개를 저으며 들고 있던 과자봉지를 내밀었다. 루이는 기뻐하며 사탕과자를 입 안 에 밀어넣었다. “그렇게 막 벗어버려도 괜찮은 거야?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괜찮아, 괜찮아. 일단 로브와 가면만 벗으면 마법색도 없는 내가 마법사들 눈에 띌 리가 없지.” 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갔던 일이 잘 됐나봐? 무지 기분좋아 보이네.” 순간 루이는 딱 소리나게 사탕과자를 깨물었다. 이자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저 놈이야 좋겠지. “……무슨 일 있어요?” - 저 바보가 아무 생각없이 엄청난 일을 해주겠다고 승낙해 버렸다. 루이는 이에 붙은 사탕과자를 겨우 떼어내고 말했다. “뭐 엄청난 일이라고 할 것까진 없잖아. 게다가 이번 일은 그냥 내 기분만으로 승낙한 것 도 아니고 말이야. 게다가 어쨌든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날 일은 아니잖아.” - 아니라고? 그럼 맡은 일에서 손을 떼라고 말로 설득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 정도 마법 사가 네,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쩌면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어. 이자드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진다. 루이는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에이, 네 실력으로 그 정도쯤이야.” 이자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무서우리만큼 냉정하게 대답했다. - 날 추켜세워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텐데. 루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카라는 두 사람 의 말다툼을 들으며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굴릴 뿐이었다. 이자드의 잔소리나 루이의 어 거지야 익숙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험악했다. 지금 이자드는 귀찮아 서 잔소리를 하거나 타박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화가 나 있는 것이다. 대체 루이 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루이는 마침내 조심스럽게, 이자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그렇게 힘든 상대냐?” 이자드는 대답 대신 차분히 반문했다. - 카라는 어떻게 하고? 루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카라는 마침 자신의 이름이 나온 김에 끼어들기로 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자드, 무슨 일이에요?” 루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항복했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래. 내가 성급했다.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하다고!” 이자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카라가 눈썹을 찡그릴 차례였다. “무슨 일이냐니까?” “그게 말이지……” -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설명해라. 이자드는 더 이상 화난 음성이 아니라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루이는 턱을 긁적이며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카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점심 먹고 얘기해 줄게. 일단 밥부터 먹자.” 아무래도 석연찮은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야기해 주겠다는데 또 독촉을 할 수도 없었다. 카라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루이와 함께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이는 남은 사탕과자를 한꺼번에 입 안에 털어넣으며 우물거렸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러고 있었어?” “아참! 나 아까 굉장히 묘한 애를 봤어. 굉장히 예쁜 데다가, 눈이 무지 신기하게 생겼더라 고. 그런 눈 본 적 있어? 눈동자 가운데에 여기…이 동그란 부분이 말이지, 하나가 아니고… 아, 굉장히 묘하고 아름다웠는데, 설명하기가 힘드네. 원이 여러 개 겹쳐진 것처럼…” 무심히 들으며 과자봉지를 털던 루이의 동작이 딱 굳어졌다. “눈동자가 어쨌다고?” 카라의 대답은 그 순간 일어난 폭발음에 묻혀 버렸다. 놀라서 폭발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본 순간 뒤이어 연쇄적인 폭발이 땅을 뒤흔들었다. 땅울림소리와 더불어 발밑이 흔들렸다. 카라는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 하다가 루이에게 의 지해서 겨우 균형을 잡았다. 부두 쪽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이쪽으로 도망쳐오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를 비우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카라는 어리 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그들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부두 쪽을 돌아 보니 먼지가 자욱했다. 뿌연 먼지 구름 속에서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가지 색깔의 빛이 움직이는 모양만 보였다. 루이는 카라를 감싸안으며 혀를 찼다. “이런, 이런. 시더에서 마법사들끼리 싸움이라니 믿을 수가 없는데.” 혀를 찼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루이는 재미있어 하는 얼굴이었다. 카라도 무서움보다는 호기심을 먼저 느꼈다. 아직까지 다른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빼고 바라보려니 서 서히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며 움직이는 빛깔이 선명해졌다. 하나는 옅은 주색, 또 하나는 검 붉은 자색. 현란한 빛의 윤무였다.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카라는 저도 모르게 감 탄사를 뱉았다. 루이가 유유자적 설명을 덧붙였다. “저게 마법색이라는 거야. 별로 본 적이 없지?” “응. 이자드 말고는…저건 마법사들에게만 있는 거지?” “아냐. 그렇지는 않을걸.” “어? 마녀들은…헤웬은 빛깔 같은 거 없던데.” “마녀야 그렇지. 대신 귀령이 있잖아. 긴나라족이나 용족 같은 고대종족도 힘을 사용할 때 는 고유의 색깔이 드러나더라. 뭐, 내가 보기에는 마법색과 별 구분이 안가던걸. 진 같은 녀 석은 보통 사람에게서도 고유색을 보니까 또…” 갑자기 주변 공기가 떨리며 웅웅거리는 소리가 루이의 음성을 집어삼켰다. 카라는 공기가 떨리기 시작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약간 위쪽이었다. 공중에 천조각 같은 것이 펄럭이 고 있었다. 잠시 보고 있으니 그것이 천조각이 아니라 마법사들의 옷자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먼지가 걷히기 시작했다. 루이는 다시 혀를 찼다. “싸움 구경 좀 하나 했더니 벌써 소방수들이 나와버렸네. 시시한걸.” “소방수?” “자기네 앞마당에서 마법 싸움이 일어나다니 리베르 문디의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 루이가 소방수라고 부른 치안담당 마법사들이 공중에서 주문을 외 우기 시작했다. 빛의 실이 한 줄기, 두 줄이 공중을 가로지른다 싶더니 빠른 속도로 빛이 교 차하며 그물을 짜나간다. 오각의 거미집 모양을 갖춘 그물은 주문을 외운 사람에 따라 다섯 가지 다른 빛깔로 반짝이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위에서 자신들을 잡으려는 그물이 내려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지, 아래 먼지구름 속에서는 여전히 주색과 자색의 빛이 부딪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 자, 이제 슬슬 물러나자.” 루이는 서운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카라의 어깨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포박용의 마법 그물은 싸우고 있는 두 마법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 때였다. 옅어진 먼 지 구름 속에서 울림있는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디스인티그레잇 Disintegrate.- 파쇄.” 슈우칵. 기분나쁜 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카라는 뭔지 모를 기분나쁜 한기가 등골을 타고 달리는 것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루이도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며 중얼거렸 다. “뭐야?”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았다. 오색의 마법 그물은 변함없이 아래로 내려가며 조금 씩 입구를 조이고 있었다. 카라는 눈을 비볐다. 아니다. 그물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카라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 지만 루이는 알아볼 수 있었다. 허공에 작은 구멍이 입을 벌리고 빛의 그물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물은 점점 이지러지더니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그 구멍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져 버 렸다. 그물끝을 놓쳐버린 다섯 명의 마법사가 아연히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정신을 수습하기 전에 아까의 목소리는 억양없이 다음 주문을 뱉으며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울렸다. “파이어 볼.” 한꺼번에 다섯 개의 불덩어리가 솟구쳐 올랐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치솟아올라, 불덩어리라 기보다는 불줄기 같았다. 일단 허공에 몸을 띄운 자색 불덩이는 곧장 다섯 사람에게 부딪쳐 들어갔다. 카라의 눈에는 다섯 방향으로 덮쳐들어가는 자색 불꽃의 잔상만 보일 뿐이었지만, 루이는 공격이 들이닥치기 전에 손을 들어올리고 방어의 몸짓을, 혹은 방어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의 모습과 그 결과가 무엇이건 주저없이 뚫고 들어가는 파이어볼을 확인할 수 있었 다. 그는 공중에서 불길이 치솟기 전에 카라의 눈을 가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단말마의 비명소리는 들렸다. - 루이, 물러나. 이자드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루이의 몸은 팽팽이 긴장해 있었다. 이렇게 빠르고 전투적인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전의와 전율을 동시에 느끼며 오른손으로 카라의 눈을 가린 채 왼손만 돌려 화염도의 칼자루를 쥐었다. 그는 칼을 뽑지 않고 그 자세를 유지한 채 몇 걸음을 더 물러나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했다. 카라는 루이가 긴장을 약간 푸는 것을 느끼 고 양손으로 루이의 손을 떼어냈다. 먼지 구름은 완전히 걷혀 있었다. 거리는 꽤 떨어졌지만 상황은 눈에 잘 들어왔다. 의외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주색 빛의 주인공은 중년의 여자였다. 쓰러지기 일보직 전처럼 보였지만 그 여자는 아직 헛되이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목숨을 건 공격을 잔인할 정도로 철저히 짓부수며 그녀를 압박해 들어가고 있는 상대는 체구가 작았다. 자색빛의 주 인공,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마법사의 새까만 로브 위로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 이 흩어져 내렸다. 카라는 아무 소리도 못내고 눈만 크게 떴다. 이자드인지 루이인지가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 때 주색의 마법사가 마지막 힘을 다 그러모은 듯, 온 힘을 쏟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태초에, 혼돈으로부터 언어가 나와 언어로부터 더 가벼운 혼돈, 더 밝은 혼돈, 더 안정된 혼돈이 나왔으니 그로부터 어둠과 빛이 갈라지고 세계가 질서를 부여받았으니……” 꽤 긴 주문이었는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상대방은 그녀를 막으려 들지 않았다. 곧 주색의 마 법사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긴 주문을 끝내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 틈에 남아있는 언어의 힘으로, 틈을 찢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에보케이션 Evocation!” 뒤이은 굉음에 떨어져 있던 카라까지도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모습 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손이었다. 손은 무서운 속도로 허공에 뜬 은발의 아이를 덮쳐들어갔 다. 카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이는 냉정하게 손가락을 퉁기며, 아까처럼 억양없 는 목소리로 말했다. “디스인티그레잇.”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주문의 진행이 빨랐다. 루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거대한 손은 소리없이 붕괴하여 날아가버렸고, 초혼 주문을 외웠던 마법사의 몸은 기역자로 꺾이며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땅에 떨어지기 전 이미 그 몸은 갈기갈기 찢겨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고깃덩이로 변해 있었다. 카라는 귀에 아픔을 느끼며 멍하니 은발의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조용히 시체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멀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카라는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라가 불렀을 때 돌아보던 얼굴과 마찬가지로 귀찮 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일 것이다. 카라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이 놀라움인지, 분노인 지, 슬픔인지, 혹은 아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먹먹하던 귀가 나아지면서 누군가의 비명소리 가 들렸다. 누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걸까. 카라는 문득 루이의 손이 자신을 거칠게 흔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카라, 괜찮아? 카라!” 카라는 멍하니 루이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디 다쳤냐? 응?” “……다친 데 없어.” 멍하니 대답하면서 그제서야 카라는 조금 전의 비명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왔음을 깨 달았다. 주위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언제부턴가 구경꾼이 모여들어 있었고 리베르 문디에서 도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그러나 이미 사건의 주인공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루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카라를 안아들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왔다. “아직도 그대로야. 내 참,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루이는 카라를 살피려 고개를 숙였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도 아니건만 카라는 함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을 뜨고는 있 지만 초점이 맞지 않는다. 드문드문, 잠꼬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기도 했다. 숨결 은 얕고 맥박은 느리다. 할 수 없이 루이는 카라를 가까운 해안에 뉘여놓고 몇 시간째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주변을 서성이며 손톱을 깨물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도무지 이해가 안가. 좀 잔인하긴 했지만, 그렇게 비명지르고 쓰러질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지?” 이자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은커녕 얼굴도 없으니, 루이로써는 이자드가 무슨 생각을 하 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루이는 행여라도 카라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입 안으로 중얼 거리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카라 말이야,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묘한 데가 있지 않냐?” - 어떤? 루이는 적절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외로 꼬았다. 드물게 보이는 찌푸린 표정이었다.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 예를 들어 넘어져서 무릎을 다친다고 치면, 울먹이거나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거나 다 그럴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바로 옆에서 집이 무너진다면? 그러면 보 통 반응이 어떨까?” - 그러니까 사소한 일에는 그럭저럭 보통 애들처럼 반응하는데, 큰 일에는 이상하다? “그 비슷한 느낌이긴 한데……” 루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의 실을 더듬었다. “둔하다고 하기도 그렇고, 담대하다는 거랑도 다른가……. 여하튼 분명히 충격은 받는 것 같은데,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와버린단 말이야. 무뎌지는 것도 아니고, 나처럼 금새 털어 버리고 잊어버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뭐라고 딱 집어 말은 못하겠지만 어딘가 이상해. 도 무지 외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고나 할까. 벽이 둘러처진 것처럼? 아니, 벽하고는 또 다른데…뭔가 모호한……안개벽 같은 것?” 이자드는 시큰둥하게 말을 잘랐다. -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에라, 나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때.” 루이는 머리를 마구 흔들더니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더 생각하기 싫다는 신호였다. 잠 시동안 파도소리만 이어졌다. 반응은 시큰둥했어도 이자드는 루이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늘 퉁명스럽게 반응하기는 했지만 그는 루이의 감을 존중했다. 잘 정리해서 표현하지 못할 뿐, 지나고 보면 루이의 느낌이 정확했을 경우도 꽤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말은 잘 와닿지 않았다. 분명 이자드에게도 카라는 풀지 않으면 안될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루이가 말한 것 같은 문제는 느끼지 못했다. 어린아이라면 전에도 몇 번 주워서 데리고 다녔고, 아이들이란 언제나 이해 할 수 없는 상대였다. 어린 시절의 티나-티나밋다만 해도 카라보다 훨씬 불가사의한 아이였 지 않은가. 카라 같은 이상한 힘은 없었어도……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번쩍 떠오르는 생각 이 있었다. 몸이 있었다면 무릎이라도 쳤을지 모른다. - 그래, 파쇄 주문! “응? 뭐라고?” 갑자기 튀어나온 이자드의 탄성에 루이는 어리둥절해서 눈만 껌벅거렸다. 이자드는 어쩌면……이라고 중얼거렸다. 디스인티그레잇- 파쇄 주문. 본래는 마력이 깃든 물건이나 마법을 무효화시키고,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상대, 예를 들면 초혼법으로 불러들인 존재를 상대하는 주문이다. 통제하기가 워낙 어렵고, 마녀의 귀령이나 초혼 마법사와 싸울 때에나 쓸모있는 정도여서 이 주문을 익 히는 마법사는 상당히 드물었다. 그런데 아까 난다는 그 주문을 손바닥 뒤집기만큼이나 간 단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그것도 위력적으로. 초혼으로 불러들인 존재를 박살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초혼을 행한 마법사까지 죽였다. 그 주문 하나에 어지간한 시간을 투자하지 않 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난다에게는 그 주문에 매달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파쇄 주문은 ‘물질’에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의 마법사나 일반인에게는 별 위력을 발 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몸 자체가 힘의 매개체일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즉, 자신 의 명령만으로 힘을 발휘하는 종족- 예컨대 용족 같은 경우에 말이다. 난다가 용족을 염두 에 두고 그 주문을 익혔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루이는 거기까지 설명을 듣고 심각한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가만. 그러니까 카라가 그 주문의 영향을 받아서 이상한 반응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직접 영향받는 건 귀령이나 용족 뿐이라며!” - 예를 들자면 용족 같은 존재라고 했지, 용족뿐이라고는 안했다. 순간 루이의 얼굴이 불이 켜진 듯 환해졌다. “그럼……?” - 속단하기는 일러. “긴나라족도 용족과 비슷한 고대종족이잖아! 강하지는 않지만 그런 류의 힘을 가지고 있었 잖아?” 이자드는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가능성으로 치자면 귀고리에 걸어둔 주 문과 샤미르의 힘 때문에 반응이 일어났을 수도 있어. “작작 좀 해라.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20년간 실마리 하나 못찾다가 카라를 만난 후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게 우연이라고? 그 정확한 그림이며, 카라를 맡겼다는 자의 인상착의, 긴나라족과 놀랄 만큼 비슷했던 조각상의 생김새가 다? 게다가 드디어는 생존자 까지 나왔잖아!” - 그래서 결론이 뭐냐? 카라가 긴나라족의 아이일 거라고? 루이가 주춤하자 이자드는 문제점을 상기시켰다. - 나이가 맞지 않아. “카라가 열 여섯 살이라는 건 누가 증명하는데? 봐봐, 지금 열 여섯이라고는 하지만 열 세 살 정도로밖에 안보이잖아. 진짜 나이는 스무 살이 넘을지 어떻게 알아?” - 날개도 없고, 게다가 성별이 있어. “파류나가 그랬었잖아. 최근 들어서 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완전히 인간 같 은 아이가 태어났던 건지도 몰라.” 이자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몇 번이나 같은 대화의 반복일 뿐이다. 카 라의 양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그림을 확인한 이후 되풀이해서 나온 이야기. 루이는 지난 20 년간 줄곧 긴나라족이 멸망하던 순간, 그 바닷가에서 본 광경을 부인해왔다. 그는 파류나 왕 스스로가 멸망을 원한 것 같다는 이자드의 말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긴나라족이 멸망하고 창성이 사라진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긴 나라족의 생존자를 찾고 싶어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정말로 생존자를 만나면 진상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루이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 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상을 알아낸다고 납득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루이는 그저 파 류나와의 끈을 이어두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파류나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 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루이는 카라가 긴나라족의 아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대할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이 이상 문제삼지 말고 루 이의 생각에 맞장구를 쳐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이자드를 괴롭혔다. 문제는…… 문제는, 자신이다. 루이의 고집 탓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이자드 자신도 계속 그 때의 일에 매달려 왔다. 루 이와는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그 역시 잊을 수가 없었다. 새까만 눈동자, ‘무한’ 그 자체 였던 그 눈과 마주쳤을 때의 차가운 전율을. 그 눈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세 상, 이 자리에 서 있는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괴상한 형태로 반쪽 인생을 살게 되었는가,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보다 더 강하고 깊은 초조감을 느꼈다. 호기심이라든가 수 수께끼를 보면 풀고 싶은 기분 같은 차원을 넘어선 막막한 갈증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소리없이 속삭였다. 하지만 그것과 카라는 별개야. 마치 그 소리를 들었다는 듯, 카라는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제정신을 차렸다. 벌써 해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 바다로 잠겨들어가는 태양의 모습에는 다른 어떤 곳의 일몰과도 다른 독특함이 있었다. 붉 은 불덩이가 몸을 던지자 은의 바다가 한꺼번에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한때 이 바다는 어둠 속에서도 은빛으로 반짝였다고 하는데, 눈부시게 타오르는 물빛을 보면 정말로 물 속 한가 득 반짝이는 은빛 가루가 떠다니는 것 같다. 그러나 카라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바다의 일몰을 차분히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비 명을 지르며 쓰러졌다는 것도,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도 남의 일처럼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사실은 낮에 있었던 일이 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날 일처럼 흐릿했다. 고 작해야 몇 시간 전의 일이건만. 그래서 카라는 앙금처럼 불편한 마음이 고인 채로 해가 지 고 루이와 교대해서 이자드가 나타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루이는 시더의 떠들썩한 활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이자드는 달랐다. 그는 이 도시도, 이 바다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평소보다 한층 굳어진 얼굴로 옷자락을 털었다. 그는 카라 에게 고개만 까딱해 보이고 몸을 돌렸다. 카라는 습관처럼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어디로 가요?” “오늘 묵을 곳.” 이자드는 앞서 걷기 시작했고 카라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터벅터벅 그 뒤를 따라 걸음 을 옮겼다. 모래사장이라고는 하지만 발밑은 단단했다. 자갈이 많아서 자꾸만 발바닥을 찔렀 다. 파도는 꾸준히 밀려왔다가 밀려나갔다. 카라는 점점 뒤처졌다. 평소와 달리 이자드는 뒤 를 돌아보고 카라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았다. 뭔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카라는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이자드의 이름을 불렀다. 이자드는 꿈에서 깬 사람처럼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채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을 머리 에 인 모습이 기둥같았다. 카라는 이미 잘 보이지 않는 이자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문득, 결코 환한 햇빛 아래에서 그를 보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마치 지금까지 몰랐던 것처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카라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이자드는 몇 걸음 되돌아왔다. “왜?” 카라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이자드 옆으로 뛰어갔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 에는 나란히. 카라는 걸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용족이라는 건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용족은 왜?” “아까 그애가 용족의 마법사라면서요. 전에는 용족이나 긴나라족 같은 고대 종족은 주문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긴나라족 같은 경우에는 주문을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 원래는 필요없는 일이다. 특 히나 용족처럼 강력한 종족에게는. 난다는 희귀한 경우지.” 이자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천천히 걸으면서 용족에 대해 설명했다. “용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워낙 숫자가 적고, 바깥 세상에 좀처럼 나오지 않 기 때문이지. 가끔 나오는 경우도 대부분 뭔가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있을 때 뿐이니 요행 히 용족을 직접 보더라도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기는 힘들지. 그 제잘난 멋에 사는 놈들은 제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일단 쓸어버리고 보거든. 자신들이 이 세상에 사는 다른 생물들과 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이자드의 목소리에는 비야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용족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에 대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하려고 하면 못 하 는 일이 없는 데 익숙해져 있고, 체력이나 근력, 지력, 외모까지 뛰어나기 때문에 자신들이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곱 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동공 부분이야말로 자신들의 완전성을 증명한다고 말하지.” 카라는 눈을 뗄 수 없었던 보랏빛 눈동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 눈동자도 그랬어요.” “분명 난다는 그 때 은폐주문을 걸고 있었을 거야. 너는 종종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 니까. 네 눈에 띄어서 꽤 놀랐을 텐데 용케 공격하지 않았구나 싶다.” 뭐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부딪치면 종소리가 울릴 것 같은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 과, 사람의 몸이 반으로 접혀 찢겨나가는 광경을 미동도 않고 지켜보던 제비꽃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서도 여전히 카라는 그 아이가 위험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길은 해변을 벗어나 언덕위로 이어졌다. 이자드의 서늘한 음성은 짙어가는 어둠을 뚫고 이 어졌다. “난다는 마법사들 사이에 꽤 유명한 존재지. 눈동자만큼은 용족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지만, 강력한 힘도 없고, 성장하지도 않아. 말하자면 불구라고 할까. 원래 용족은 돌연변이나 힘이 없는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버리는 것으로 안다만, 난다를 낳은 여자는 죽이는 대신 황무지 에 버렸던 모양이야. 그 아이는 희귀종 취급을 받으며 몇 십년을 인간들 틈에서 보냈다. 그 러다가 어떤 계기에선가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용족이라는 사실을 감 추려고 장님 행세를 했던 것 같아. 그는 은둔해 있는 마법사들의 집에 들어가 어깨 너머로 마법을 배우다가, 더 이상 배울 게 없어지면 그 마법사를 죽이고 다음 마법사를 찾았다.” “죽이……” “같은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될 때까지 아무도 그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었지. 단기간에 일어 난 일도 아니었고, 죽은 세 사람은 그렇게 유명한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네 번째로 죽은 자는 제법 강한 마법사였고, 리베르 문디 소속이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해서 말썽이 좀 있었지……리베르 문디는 난다를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이미 난다는 그 때 리베르 문디 에 상대할 자가 없을만큼 강해져 있었어. 리베르 문디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난다는 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그 후 50년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 다.” “50년? 그 애가 그렇게 오래 살았단 말이에요?” “최소한 200살은 넘었을 거다.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그 용모를 유지하는 것 뿐이 야.” 카라는 입만 뻐끔거렸다.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들은 언덕을 다 올라와서 다시 바다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카라는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무지 힘들었겠네요.” “그랬겠지.”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다니 이해가 안가……. 그럼 난다가 강해지려고 하는 건…용 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 거겠지. 어떤 형태로든.” 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고 싶어했던 거네요.” “아니. 그렇지 않아.” 이자드는 경멸어린 냉소를 떠올리며 단호히 말했다. “차라리 법대로 아이를 죽이는 편이 옳았을 거다. 황야에 갓 태어난 아이를 버렸을 때, 그 아이가 살아남을 거라고 기대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곧 죽을 줄 알았겠지. 형편없는 책임 회피야. 선택을 해야 했다면 직접 죽여주든가, 괴로울 줄 알고서도 직접 키우든가 둘 중 하 나여야 했어. 나라면 그런 어머니는 죽여버리고 싶을 거다.” 이자드의 어세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카라는 입술을 깨물고 한참만에 다시 말했다. “그 아이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모르지. 알고 싶지도 않고. 어줍잖은 동정심을 발휘할 마음은 없다.” “그야 그렇지만……”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이자드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단호한 말투에는 뭔가 석연찮 은 구석이 있었다. 뭔가. 문득 아까 이자드와 루이가 하던 이야기에 생각이 미쳤다. 카라는 확인하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물었다. “이자드…혹시 그 아이가 아까 말했던 골치아픈 일과 관계있어요?” 이제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불빛이 보였다. 이자드는 희미하게 떫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 난다와 싸워야 하게 생겼다.” [61] -8. 공명 #4. 습격 폐업 직전의 작고 허름한 여관. 손님이라고는 이자드 루이와 카라 뿐이었다. 남편을 바다에 빼앗기고 20년 세월을 기다림에 버틴 파리한 얼굴의 여관주인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이 시간쯤이면 카라도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이자드는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것 같이 위태 한 목조 발코니에 서서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바다, 어두운 하늘, 어두운…… 이자드의 얼굴에 언뜻 피곤한 표정이 스치는가 싶더니, 곧 절벽 같은 냉랭함으로 변했다. 그 는 빙글 몸을 돌려 지붕위를 향해 말했다. “뭘 기다리고 있지?” 부스럭 소리도 없었다. 이자드가 말한 상대는 박쥐처럼 어둠 속에서 떨어져나왔다. 나른하고 끈적한 목소리. “당신을 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이자드.” 이자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색깔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녀는 녹색 눈동 자와 녹색 로브를 빼면 검은 색 일색이었다. 늘씬하게 큰 키에 목부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로 몸을 감싸고 있는데도 묘하게 고혹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너는 조금 변했구나, 하시피에.” “그런가요? 지난 번에 만나고 10년이 지났으니 변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죠. 루이는 좀 어때요?” “여전하지.” “그럼 여전히 날 미워하고 있겠군요.” “미워한 적은 없어. 화를 내더라도 곧 풀어지는 녀석이라는 것, 알잖나.” “하긴, 화도 내지 않는 당신보다야 루이 쪽이 훨씬 낫죠. 생각해보면 그래도 티나 쪽이 나 보다는 눈이 제대로 박혔던 것 같아요.” 하시피에는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에 엷은 웃음을 떠올렸다. 이자드는 팔짱을 끼고 난간에 기대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 “아니, 됐어요. 그저 한 번 긁어보고 싶었던 거니까.” 하시피에는 흑단조각에 박힌 에메랄드 같은 눈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애는 뭐죠? 나나 티나처럼, 또 루이가 주워온 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제자라도 두기로 한 건가요? 그새 가치관이 변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자드는 대답 대신 한숨을 깨물었다. 그가 한동안 리베르 문디를 피한 것은 바로 눈 앞에 있는 하시피에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티나-티나밋다의 태연한 태도를 보고 혹시나 하는 기 대를 품었건만. “그런 걸 물어보려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하시피에는 반쯤 입을 벌려 흰 이를 드러냈다.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웃음이었다. “설마 저 앨 달고 난다와 싸울 작정은 아니겠죠?” “글쎄.” 하시피에는 어깨를 약간 젖히며 말했다. “저 애한테도 위험하고 당신들에게도 방해에요. 뭣하면 탑에서 맡아드릴 수도 있는데요.” “사양하겠다.” 이자드는 일언지하에 자르고 하시피에를 건너다보았다. 어서 찾아온 용건이나 말하라는 무 언의 압력이었다. 하시피에는 양손을 깍지끼더니 다시 웃었다. “날 마주하기도 싫은가 보군요. 좋아요. 얼른 말하고 꺼져드리죠. 왕이 시더로 온다는 정보 가 있어요.” 이자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시피에는 한들 한들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새로 태어난 왕자의 이름을 내린 배가 진수식을 갖는다나요. 글쎄 무슨 변덕인지. 머리에 는 비계만 들어찬 놈이 고집은 세서 재상도 못 말렸다고 하더군요.” 하시피에는 서슴없이 왕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냈고 이자드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 역시 왕에 대해 손톱만큼의 존경심도 없다. 왕이 뚱뚱한 밥버러지든 뭐든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 이기도 했다. 그런 자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고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겠지 만, 이자드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보를 얻기 위해서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을 다 하 고 돌아서려는 하시피에를 불렀다. “하시피에, 그 정보는 확실한 건가?” 하시피에는 녹색 눈을 요염하게 치뜨며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이죽이는 것 같은 미소가 떠 오르며 다시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긴나라족에 대한 것 말인가요? 물론이죠. 정보는 확실히 진짜예요.” 순간 이자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되물었다. “정보는-이라고?” “안녕히, 이자드.” 하시피에는 소리없이 웃으며 마지막 인사말을 던졌다. 그녀는 처음 배울 때부터 이동 마법 에 소질이 있었다. 지금도 이동속도만큼은 이자드보다 빨랐다. 이자드는 돌아서서 밤바다 위 로 비스듬히 미끄러지는 하시피에의 동선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몇 년 전이었더라? 루이가 난파선에서 통통하고 새하얀 아이와 새까맣고 단단한 얼굴에 녹색 눈동자만 반짝이던 아이 를 주웠던 것이. 이자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들이란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다. 유난히도 잘 따르던 아이가 갑자기 죽이려 덤벼든다면,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안녕히……라.” 이자드는 불길한 느낌에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아직도 그를 미워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 렇다 하더라도 설마……. 그는 복잡한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희미하게 동이 터오고, 태양이 수평선 위로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더할 나위없 이 맑은 날이었고 수평선 부근에도 거의 구름이 끼지 않았다. 해는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 떠오를 듯 물을 건드리며 기다리는 사람의 애를 태우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물 위로 뛰어오 르며 첫번째 햇살을 던졌다. 허름한 여관의 이층방, 한 가운데에 서 있던 검은 머리 남자는 그가 볼 수 있는 유일한 햇 빛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요란한 소리와 함 께 탁자 가장자리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우욱! 뭐, 뭐야!” 아픈 머리를 싸쥐고 소리를 지른 것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검은 머리 남자와는 전혀 인상 이 다른 금발 청년이었다. 그는 한참만에 겨우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짓이야!” - 아침이다. 남은 눈물까지 흘릴만큼 아픈데, 머릿속에서 울리는 대답은 태연하기만 했다. 루이는 비틀비 틀 침대를 찾아 앉으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부터 했다. “우이 씨, 누군 아침인 줄 모르냐. 어쩌자고 방 한가운데 서 있었던 거야? 난 더 자야 하는 거 알잖아!” - 12시간이나 잤으면 됐지. “난데없이 왠 심술이야. 늘 그렇게 자는 거 알면서.” 루이는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표정이나 동작은 영락없이 막 잠에서 깬 사람이지만, 실제 로 잠자리에 든 적이 없으니 곱슬곱슬한 적금색 머리카락은 눌린 흔적없이 단정하기만 했 다. 루이는 그 머리를 제대로 눌러줄 태세를 갖추고 침대에 엎어졌다. 그 머릿속에서 이자드 는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 일어나! “으……대체 왜 그러는 건데?” 루이는 결국 짜증을 부리며 일어나 앉았다. - 카라가 일어나기 전에 결정할 게 있었을 텐데. “응? 뭐?” 루이는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자드는 왕이 갑자기 시더 로 온다는 정보, 난다가 정말로 왕을 암살할 작정이라면 이 기회를 노릴 게 분명하다는 점, 그러므로 생각보다 빨리 난다와 부딪치게 생겼고 그러니 카라를 어딘가 맡겨야 한다는 이야 기를 했다. 루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물었다. “그 정보는 어디서 들은 건데? 밤 사이에 또 어디 갔다왔냐?” - 아니. 저쪽에서 찾아왔었다. “저쪽? 리베르 문디에서? 누가?” 거기까지 묻다가 루이는 뭔가 눈치를 챈 듯 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일단 수평선 위로 뛰어오른 태양은 열심히 하늘을 헤엄쳐 올라가고, 방 안도 점점 밝아졌다. 마침내 이자드는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 그래서? “으음……카라가 위험할 테니 어딘가 맡기잔 말이지. 하지만 이 부근에 어디 맡길 만한 데 가 있냐. 아칸서스야 도시 자체도 안전한 편이고 티나도 있었지만 말이야. 아, 설마하니 그 바다뱀한테 맡기자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안돼! 그 바다뱀한테 맡기느니 차라리 하시피에 손 에 맡기는 게 낫겠…아, 미안. 하시피에 얘기하는 거 싫어하지.” 루이는 히죽 웃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뭐, 괜찮잖아. 내 생각에는 말이지, 카라를 그냥 데리고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아. 혼자 놔 두는 게 더 위험하지 않겠어? 아, 하지만 역시 싸움에 휘말리는 건 곤란하니까, 우리 쪽에서 먼저 녀석을 찾아내서 결판을 내 버리자고. 그러면 되잖아.” 자신만만하다고 해야 할지, 대책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를 루이의 태도에 이자드도 말문이 막혔다. 루이는 내친 김에 말을 이으며 방문을 열었다. “네 녀석은 늘 미리부터 걱정을 해서 탈이야. 싸울 때만 한나절쯤 떨어뜨려 놓으면 되지 않겠냐. 어차피 싸움은 밤에 있을 테니까, 어디 재워놓고 나가면 될 거 아냐. 힉, 여긴 여전 하네. 낡아도 어째 이렇게 낡았냐. 걷다가 바닥 부서지겠다.” 루이는 혼자 잘도 지껄이며 큼지막한 거미를 집어 옆으로 치우고 삐걱이는 바닥을 디뎌나갔 다. 옆방 문을 열었지만 카라는 없었다. “어라. 벌써 일어났나 본데?” 루이는 갸웃거리며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자드는 루이의 오른쪽 발이 맨 윗 계단을 밟고서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 - 너…… 그러나 이어진 말은 뒤이은 폭음에 묻혀 버렸다. 폭발소리가 세 번 정도 이어지더니 뒤이어 우지직 소리와 함께 나무계단이 무너져내렸다. 뒤이어 건물이 통째로 무너질 것처럼 바닥과 천장이 온통 삐걱거리며 먼지와 나무진이 자욱하게 깔렸다. 겨우 삐걱이는 소리가 좀 가라앉자 여관 문쪽으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스며들어왔다. 그들 은 계단참을 에워싼 먼지구름을 쳐다보며 섰다. 쇳소리 같은 음성이 먼저 말했다. “끝났나?” “이렇게 쉽게 끝났을 리는 없어.” “하지만 불꽃이……” “경계를 단단히 해. 바리어 치고.” 세 사람이 수런거리고 있는데 위쪽에서 네번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어, 수고스럽게 해서 미안하지만 기습은 내 취향이 아냐.” 세 사람의 목이 일제히 같은 곳으로 돌아갔다. 루이는 서까래 위에 앉은 채 히죽 웃으며 손 을 흔들었다. “기습하는 것도, 기습당하는 것도 재미없다고. 너흰 뭐야?” “말할 이유가 없다.” 쇳소리가 대꾸하자 루이는 턱을 긁적였다. “뭐, 대답해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야. 그런데 말이지, 이건 대답해주지 않으면 곤란하거 든. 위층에 있던 여자애 어딨어?” 세 사람의 암살자는 대답없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루이는 다리를 공중에 뻗으며 세 사람 을 훑어보았다. 셋 다 얼굴은 가렸다. 쇳소리 같은 거슬리는 소리의 주인공은 땅딸막한 녀 석, 바리어를 치고 있는 놈은 성별을 알 수 없는 호리호리한 그림자, 세번째는 아마도 리더. 루이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몸을 기울이며 선언했다. “좋아. 그럼 힘으로 알아내지.” “어딜! 메스몰프Messmorph!” 겁을 먹었는지 다소 급하게 주문을 뱉은 것은 쇳소리 쪽이었다. 루이의 눈앞이 흔들 하더니 검은 그림자가 공중에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는 코웃음쳤다. “뭐야. 환영술사였냐? 너, 진짜 초보자구나.” 야유를 던지면서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다. 루이는 몸을 날리며 덧붙여 말했다. “이런 건 도망갈 때나 쓰는 거야.” “Hallucina…” 쇳소리는 두번째 주문을 끝맺기 전에 뚝 끊겨버렸다. 숫자를 셋까지 셀 정도 시간이었다. 루 이가 뛰어내려, 리더가 마법을 쓰려고 뻗어올린 팔을 밟고 그 반동을 이용해서 땅딸막한 남 자의 목을 걷어차 버릴 때까지 걸린 시간은. 루이가 바닥을 밟을 때쯤에서야 뒤늦게 우지직, 둔탁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비명은 오 르지 않았다. 땅딸막한 놈은 서서히 쓰러지고 리더 쪽은 고통을 참으며 남은 한쪽 팔을 다 시 들어올렸다. “라이트닝 체인 Lightning Chain!” 주문은 성공했고 번개불이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공격이 나갔을 때 이미 루이는 그의 코앞 까지 육박해 들어가 팔꿈치로 리더의 얼굴을 세게 올려치고 있었다. 리더는 피를 뿌리며 뒤 로 넘어갔고, 뒤늦게 루이의 등으로 덮쳐든 사슬모양의 번개불은 화염도를 뽑아들어 후려치 는 단 두 동작만에 소멸되어 버렸다. “뭐야 이거. 너무 싱겁잖아!” 루이는 칼끝을 내려뜨리며 중얼거리다가 문득 옆에 날카로운 살기를 감지하고 몸을 돌렸다. 이번 공격은 그에 못지않게 빨랐다. 칼을 세웠을 때는 이미 날카로운 뭔가가 왼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선뜻한 통증. 이자드의 목소리. - 방심은 네 장기지. “말을 해도 꼭…!” 루이가 화를 내기 전에 상대방, 바리어를 치고 있던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칼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나는 안중에도 없었나보군! 미안하지만 넌 이미 중독됐어. 날 죽인다고 해도 살아남기는 힘들 거다.” “중독?” 루이는 코에 주름을 잡으며 팔을 들어올렸다. 워낙 예리한 날에 베여서 그런지 상처에는 피 가 별로 흐르지 않았다. 다만 상처 자국에 묘한 녹색빛이 감도는 것이 특이했다. “어라라. 정말이네.” “그래. 말해두지만 해독약 따윈 없다.” “그래? 확실히 죽는 독이란 말이지?” 루이는 남의 일처럼 중얼거리더니 한 걸음 다가섰다. “좋아. 나는 죽는다 치고, 누군지 좀 알려주면 안될까?” 검은 옷에 감싸인 호리호리한 그림자는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방심은 금물. 아무리 네가 곧 죽는다고 해도 발설할 수는 없지.” “헤, 생각보다는 치밀하잖아. 하도 엉터리 같은 놈들이라 혹시나 했더니만.” “뭐라고?” “아니, 네가 저 둘보다 낫다는 건 인정해주지. 그나저나 그 여자애는 어디있어? 그건 말해 줘도 되잖아?” “알고 있다 해도 후환은 남겨두지 않는 게 최선이지. 안됐지만……” 루이의 눈이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검은 옷은 파랗게 날선 창끝 같은 살기가 다가들자 움찔하더니 양손으로 짧은 칼을 움켜쥐며 말했다. “나까지 죽이겠다는 건가. 할 수 없겠지. 당신 솜씨에는 경의를 표하겠어. 벌써 죽어넘어졌 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인데, 대단해. 하지만…” 암살자는 갑자기 루이의 적금색 머리카락이 이상하게 물결치기 시작하자 말을 끊었다. 루이 는 머리카락에 푸르스름한 빛이 왔다갔다 하며 불꽃을 탁탁 튀기자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나쁜 소식인데 말이지. 아무래도 내가 죽을 것 같지는 않거든?” “어떻게……말도 안돼!” “말이 되든 안되든…” 루이는 순식간에 상대방의 품까지 파고들어 팔을 잡아 비틀었다. 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루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평소같으면 이런 식으로는 안하겠는데 말이야. 마지막으로 묻겠어. 그 여자애, 어딨는지 진짜 모르냐?” “모…모…몰라! 아아악!” 암살자는 억지로 몸을 뒤틀어 단도를 던지려다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루이는 넘어 진 상대의 등에 발을 올리며 쥐고 있던 팔을 놓았다. 이상하게 뒤틀린 팔이 바닥에 떨어지 자 암살자는 다시 자지러지는 비명을 올렸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며 다른 쪽 팔을 잡았다. - 그만. “응?” - 이미 기절했어. “아, 진짜네. 내 참, 어디서 이런 어설픈 놈들을 보낸 거야? 에이, 찝찝해.” 루이는 투덜거리며 손을 놓고 옷을 툭툭 털었다. 그 사이 먼지구름은 왠만큼 가라앉아 있었 다. 머리카락에서 탁탁 녹색 불꽃이 튀어올랐다. 독극물에 대한 이상 반응이었다. 주위를 둘 러보던 그의 눈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깨끗하게 죽어있는 여관주인에게 멎었다. 그는 뭔가 알아듣기 힘든 욕을 퍼붓고 다시 돌아섰다. 쇳소리는 목이 부러져 즉사했지만 리더와 방금의 독극물은 기절 상태였다. 그는 대충 시체부터 수습하고 기절한 놈들을 묶었다. 루이 는 일단 놈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궁시렁거리며 일어섰다. “아, 씨. 이런 거 진짜 별론데.” 루이가 기절한 놈들을 깨우려고 물그릇을 찾는 사이 이자드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 전부 마법사군. 마법사가 와서 카라를 데리고 나갔다면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돼. “저놈들 있는 것도 몰랐잖아.” - 그거야 내가 아니라 네 책임이고. “말은 잘한다. 그럼 뭐야?” -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놈은 거의 없어. 하지만 만약…… “만약?” 이자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묵하다가 말했다. - 저놈들을 보낸 게 누군지부터 알아내야겠다. “결국 나오는 게 그거냐. 난 두들겨패는 것밖에 못하는 거 알잖아. 뭐 좋은 생각 없어?” 몸도 없는 이자드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루이는 잠시 답을 기다리다가 찬장 밑 에서 물동이를 찾아 바가지와 함께 들어올렸다. 거의 가득차 있었는지, 물동이를 반시체들 앞에 내려놓자 찰랑거리며 물이 넘쳐흘렀다. 루이는 먼지가 내려앉은 바가지를 쥐고 물 속 에 담갔다. 물이 다시 넘쳐 먼지가 뽀얗게 덮힌 바닥에 거무스름한 자국을 내며 흐른다. 루이는 잠시 바가지를 담그고 있다가 물을 퍼올리며 중얼거렸다. “일단 깨우고 보자고.” 그 순간 여관문이 확 열리며 새로운 그림자가 들어섰다. 루이는 바가지를 떨구고 칼을 쥐며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나 새로운 등장인물은 암살자가 아니었다. 나이보다 작고 마른, 익숙 한 윤곽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 왠일이야? 벌써 일어났…루이!” “카라! 너 대체 어디갔다가……아, 이건 말이지…” 루이는 놀라서 소리부터 질렀다가 뒤늦게 주위에 널린 시체와 반시체들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러나 카라가 눈을 크게 뜨고 가리키고 있는 것은 주변에 널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머리가 왜 그래?” “머리?” 탁탁, 불꽃 튀는 소리. 루이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녹색, 청색, 금색, 보라색 불꽃을 날리며 살아있는 듯 공중을 날고 있었다. 독극물의 부작용은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두건을 쓴 위에 다시 모자를 눌러쓰고 손으로 꾹꾹 눌러도 머리카락은 자꾸만 들고 일어나 며 허공에 불꽃을 튀겼다. 루이는 몇 번이나 시도해 보다가 결국 성질을 내며 모자를 던져 버렸다. “아무래도 눈에 안띄게 돌아다니는 건 무리겠는걸.” 카라는 피냄새를 피해 문 밖 멀찌감치 서서 루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루이는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자드의 목소리가 경고하듯 말했다. - 그렇다 해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는 없어. “최대한 사람이 없을 만한 길로 가는 수밖에.” 루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카라 쪽으로 염려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사람이 없는 길이라면 아 무래도 다니기 편한 길은 아닐 것이다. 걷는 속도 면에서나 지구력 면에서나, 카라가 루이와 보조를 맞추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아칸서스에서 시더로 올 때야 서두를 것 없이 느긋 하게 걸었으니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다. 루이는 널부러져 있는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시체 한 구를 돌아보았다. 아직 누가 이자들 을 보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난다는 막아야 하고 왕이 시더로 오고 있다면 시간은 이틀 정도밖에 없다. 도저히 빙 둘러서 카라를 어딘가에 맡겨놓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곳에 놓아둘 수도 없고. 밤이 되어 이자드가 힘을 쓸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데리고 있어 야 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뭔가 굉장히 황당한 상황이 되어버렸네.” 이자드는 침묵으로 비난을 대신했다.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모자를 눌러 썼다. “할 수 없지. 가자!” 걱정한 대로, 카라와 함께 다니는 문제점은 곧 드러났다. 루이는 몇 번이나 뒤처진 카라 때 문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왕은 큰길로 오겠지만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큰길 옆으로 움직 여야 했다. 대부분 산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제법 씩씩하게 따라오던 카라도 반나 절이 지나자 정신을 못차릴 지경으로 힘들어했다. 결국 오후가 저녁을 향해 내리달려갈 쯤 이 되자 카라는 무릎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루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잠시 쉬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 옆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카라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루이는 힐끗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너무 닦아세웠나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제 해가 질 때까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업고 가는 편이 좋을 지도…… 그는 모자를 다시 눌러 쓰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야, 이자드…” 아침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자드는 이번에도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듣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루이는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우리가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말이야.” 이자드는 신음소리 비슷하게 대답했다. - 그래. “역시 그렇지? 하시피에밖에 없지? 그녀석이 왜 또 그런 걸까. 아직도 널 미워한대? 어젯 밤에 뭐라고 했냐?” - 하지만 하시피에라면, 그런 녀석들로 너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텐데. “하긴…그것도 그래.” 루이는 모처럼 해낸 생각이 다시 벽에 부딪치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려고 손을 올렸 다가 부질없이 모자만 건드렸다. “…이렇게 되면, 그 정보도 틀린 거 아냐?” - 글쎄. 이자드 역시 대답에 자신이 없었다. 잠시 누워 있다가 정신을 차렸는지, 카라가 일어나 앉으며 물을 찾았다. 루이는 입을 다물고 다리를 뻗었다. “더 걸을 수 있겠냐?” 카라는 물통 너머로 루이를 노려보았다. “……조금만 더 쉬고.” 루이는 킬킬거리더니 일어나서 카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됐다. 이제 몇 시간만 더 가면 저녁이니까 내가 업어줄게.” 카라는 됐다고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어 버렸다. 어린애처럼 업혀가기도 그 렇고, 고집을 부려 걸어가기에는 너무 힘들고.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결국 힘든 몸이 자존심을 꺾었다. 루이는 카라를 업고서도 속도가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카라가 조금 마음이 편해져 서 이자드와 이야기를 나누자 사이 사이 끼어들기까지 했다. 속으로 진작 업어주지 싶은 생 각이 들 정도였다. 카라는 이제야 겨우 이자드에게서 상황을 들었다. 왕이 시더로 온다는 소식이 있다는 것,그 렇다면 당연히 안전한 수도보다 길거리에서 왕을 습격하려고 할 거라는 것. 알지도 못하는 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수도가 안전한 이유가 재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은 흥미로웠 다. “재상이 대단한 마법사쯤 돼요?” - 아니. 그는 키퍼다. 본인이 마법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 태 어나기 때문에 그의 주변으로 일정 반경 안에서는 마법이 거의 듣지 않아.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과 비교해서 100분의 1이나 있을까 말까한 희귀한 능력자지. 특히나 재상은…거 의 도시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키퍼라서. 이자드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 재상의 곁이 안전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지. 재상을 위험에 몰아넣어서는 곤란하기 때문 에, 당연히 그 옆에서 폭탄을 터뜨리거나 칼을 휘두르는 것도 곤란한 일이 되거든. “왜요?” - 재상이 갑자기 죽으면 온 나라가 파멸이니까. 왕 자리에 앉은 작자가 전왕을 죽이고 찬탈 했건 어쨌건 상관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만, 재상을 죽였다면 무사히 왕위에 앉기는 틀린 일 이거든. 그랬다. 지난 40년간 재상 카이닌 엘 그레드의 이름은 평화와 안정의 상징이었고, 현재 왕이 무능함 그 자체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좋은 인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 역시 재상을 전폭적 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헤에…” 카라는 루이의 목에 매달려 감탄의 소리를 뱉다가 탁 튀어오른 녹색 불꽃에 코를 맞고 몸을 뒤로 젖혔다. 그때였다. “쉿!” 루이가 갑자기 말을 끊더니 걸음을 멈췄다. 눈이 먼 곳을 내다보듯 가늘어졌다. 뭔가를 유심 히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카라의 시력으로는 도저히 뭘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루이의 입끝이 가볍게 휘어졌다. “이거 이거, 생각지도 못한 일인걸.” “왜 그래?” 카라가 팔을 바싹 당기며 묻자 루이는 흘끔 카라를 돌아보더니 잠시 눈을 굴렸다. 그 표정 을 보니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루이는 몸을 굽혀 카라를 내려놓더니 말했 다. “너 잠시만 여기서 쉬고 있을래? 잠깐 다녀올 테니까. 여기 있어!” 루이는 카라가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루이의 말을 무시하고 그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루이가 본 것은 멀리서 깜박인 흑자색 빛이었다. 진한 자줏빛 마법색…항구에서 본 적이 있 는 색깔이다. 보통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의 눈에는 흑자색 빛과 더 불어 주변을 날파리처럼 날아다니는 몇 가지 다른 불빛까지 잡혔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자연스레 난다가 왕의 경호마법사들 아니면 리베르 문디의 마법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그쪽으로 달려가는 사이 상황이 변했다. 루이는 이제 흑자색 불빛과 은록 색 불빛이 충돌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 어부지리라고 해야 하는 건지……” 이자드는 코웃음을 쳤다. “뭐가 또 그렇게 못마땅하냐?” - 너무 가까이 가지나 말아. 루이는 속도를 늦추며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이제 상황은 분명했다. 마법사들이 난다와 싸운 것은 확실했지만, 그것은 과거형이었다. 리 베르 문디가 아니라 왕실 쪽 사람들로 보이는 네 사람의 마법사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 다. 지금 난다를 상대하고 있는 은록색 빛의 주인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루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큰길을 가로막고 솟아오른 거무튀튀한 언덕이었다. 잠시 눈을 깜박이고 보니 언덕 위에는 날카로운 창이 빽빽이 돋아 있었으며 머리와 꼬리가 있었다. 숨을 깊이 들이쉴 때마다 언덕이 부르르 떨리며 거무튀튀한 비늘이 벌어져 연약한 녹색 살이 드러났다. 박쥐와 비슷하게 생긴 거대한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이 뒤늦게 눈에 띄 었으나, 지금은 날개를 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날개깃 사이 사이로 끈끈하고 하얀 것이 엉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끝부터 꼬리끝까지 촘촘이 돋아난 창 같은 비늘도 사이사이 문드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영락없이 상상의 동물이었다. 정상적으로 태어나 땅 위 를 활보하는 동물이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 저 도마뱀 위에 서 있는 남자와 무슨 연관이 있 지 싶었다. 그 남자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은록색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늘어져 바람이 흔들리 고 있었다. 루이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겨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미 그 자의 눈동자가 어떤 모양일지 알고 있었다. 일곱 개의 원이 겹쳐져 이루어진 하나의 원. 지금 분노해 있다면 그 원이 꽃잎처럼 벌어져 있으리라. 그와 대치하고 있는 아이의 자줏빛 눈동자가 그런 것처럼. “엔스피어Enspere 둠Doom!” 가늘지만 묵직한 소년의 음성이 끝을 맺자 공기 중에 불꽃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지직거리 는 소리가 나며 그 남자 주위로 반투명한 구형 막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 구 체 안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일었다. 그러나 소리없는 폭발이 걷히고 막이 사라지자 은록색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모습 을 다시 드러냈다. 그는 냉소적으로 입술을 뒤틀며 손을 들어올렸다. “겨우 이정돈가? 괜찮은 마법사라길래 제법 상대가 될 줄 알았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 허공을 날았다. “디스인티그레잇 Disintegrate!” - 파쇄(破碎) 주문이다. 이자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루이는 침을 삼켰다. 파쇄 주문은 힘이 깃든 곳에만 작용 한다. 그러니까 마법이 걸린 물건이나, 마력의 소유자 그 자체에게. 주문이 발동하자마자 슈 우칵! 하는 기분나쁜 소리가 울리더니 보이지 않는 파동이 공간의 틈을 찢고 ‘힘’이 본래 뿌리내렸던 혼돈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난다의 보랏빛 눈동자 속에서 꽃잎처럼 벌어졌 던 일곱 개의 원이 오므라들며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계속되기 전까지는. “...보라색은 우리 일족 중에서도 높은 능력을 자랑하는 핏줄인데 말이야. 정말 애석해. 그 피가...” 카각 카각 하는 소리가 먼저 나고, 은록색 남자가 한 손을 가볍게 들어올리자 날카로운 파 동이 공중을 찢으며 채찍처럼 난다를 내리찍었다. 난다는 공중에 몸을 띄운 채 몸을 뒤로 젖혔지만, 은록색 빛의 채찍 끄트머리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몇 개로 갈라져 더 빠른 속도로 그를 덮쳐들었다. 난다는 숨 한 번 들이마실 틈을 놓치지 않고 실드를 쳤다. 그러나 그 채찍 은 방어막을 화려하게 찢어발기며 끝내 난다를 후려쳤다. 은록색 용족은 느긋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말끝을 맺었다. “…이런 식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다니.” 난다는 한쪽 팔로 빛의 채찍을 받아냈다. 어린아이의 팔처럼 연약해 보였지만, 그 채찍을 받 아내고도 잘려 나가지는 않았다. 투두둑 붉은 피가 덩어리째 떨어져내릴 뿐. “흠. 근성은 나쁘지 않군. 불구라더니 그래도 몸은 단단한 모양이야.” “싸울 때 말이 많은 건 존귀하신 놈들의 버릇입니까?” 난다는 차갑게 비야냥거렸다. 은록색 용족은 꿈틀 이를 드러냈다. 동시에 그를 태우고 있던 거무튀튀한 도마뱀도 이빨을 드러냈다. “잘도 지껄이는구나. 물론 손쉬운 상대를 가지고 놀 때는 말이 많지. 심심하지 않나.” “심심하게 해드렸다니 송구하기 짝이 없군요.” 난다의 음성은 싸늘하게 깔려들어갔다. 얼어붙은 듯 정지해 있던 보라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은록색 용족이 타고 있던 거대한 도마뱀이 둔중하게 꼬리를 휘저었다. 용족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난다가 빨랐다. “컨틴젼시 contingency!” 순간 이자드가 감탄사를 발했다. 크기가 서로 다른 불확정 공간의 구체 십여개가 은록색 용 족 주변으로 떠오르고, 난다는 피가 흐르고 있는 팔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디스인터그레잇. Disintegrate.”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선명한 슈우칵 소리. 아직 불확정의 구는 활동을 개시하지 않았다. 은록색 머리의 용족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았다. 얼어붙은 듯한 정적. 난다와 은록색 용족은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대치하고 있었다. 루이는 참다 못해 속 삭였다. “어떻게 된 거야?” - 흐흠. 머리가 좋군… “뭐가?” - 파쇄 주문은 마력을 빨아들이는 거야. 제대로 발동했다면 피하지도 않고서 무사했을 리가 없지. 아예 주문이 발동하기 전에 막은 거였어. 이번에도 그렇고. “어떻게?” - 소리를 통제해서. 이자드는 간결하게 답하고 이어 날카롭게 말했다. - 이제 입 좀 다물어라. “하지만…” - 자신과 난다 사이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는 거야. 주문 마법은 주문이라는 소리를 매개로 해야 움직이지. 그러니까 저자는 주문이 통과해야 하는 지점을 진공으로 만들어 소리가 통 과하지 못하게 한 거야……그러니까 마법의 효과가 자신에게까지 미치지 못하게. 하지만 난 다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얼굴이로군. 확실히, 마법이 발동하지 않는데도 난다는 태연했다. 반면 잠시 당황했던 은록색 용족은 곧 자신을 되찾은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이건 또 뭐야. 하나로 안되니까 주문을 열배로 증폭시키겠다? 그런다고 소용이 있을 것 같나?” 겨우 주문의 발동만 막았을 뿐, 소멸시키지는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만만했다. 난다는 입술에 배어나온 피를 천천히 닦으며 한 음절 한 음절을 똑똑 끊어서 말했다. “어디, 보죠.” 주위 공기가 일시에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떠 있던 불확정 구, 난다 의 눈빛과 같은 빛깔을 머금은 십여개의 구체가 핑 핑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 작했다. 난다의 팔에서 다시 한 번 핏덩이가 떨어졌다. 그는 피가 얼마나 흐르든 상관없다는 듯 조용히 말했다. “잘 막고는 있지만 움직이거나 절 공격할 여력은 없는 모양이군요. 마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용족은 미친듯이 돌기 시작한 구체가 신경이 쓰이는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난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라고 할 만한 것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어린아이에게 말하 듯 자분자분 설명했다. “주문 마법은 생각보다 다양하거든요. 예컨대 컨틴젼시contingensy라는 주문은 처음부터 그 안에 명령어를 포함하고 있지요. 필요하다면, 발동하는 순간까지 정해둘 수 있답니다 ……” 그 순간, 열 개의 마력구가 일제히 폭발했다. 귀가 멀 것 같은 지독한 소음. 루이는 잠시 눈 을 감았다가 허공에 마법진과 비슷한 모양의 틈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열개의 마법구에 들어있는 주문은 모두 파쇄 주문이었던 것이다. 허공에 벌어진 틈은 거대한 괴물이 입을 벌 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입은 지금 은록색의 무언가를 집어삼키려 하는 중이었다. 무언 가, ‘힘’이 깃든 존재를. 용족을. 전에도 파쇄 주문이 마법을 빨아들이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이것처럼 화려 하지는 않았다. 은록색의 빛이 소용돌이치며 공중을 메웠다. 배수구로 빠져나가는 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 힘의 주인이자 그 자체인 용족은 믿을 수 없이 빨리 부서져내리기 시작했다. 단말마의 비명이 나오는가 싶더니 토막토막 끊겨, 사라졌다. 용족은 순수한 힘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육체까지도 갈갈이 찢겨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난다는 지혈을 할 생각도, 몸 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연마한 파쇄 주문이 용족을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광경을. 그 눈에는 승리의 기쁨도 비참함에 대한 동정심도 깃 들지 않았다. 용족들이 아무리 완벽한 존재라고 자부한다 해도 핏빛은 다른 모든 동물과 똑 같은 붉은 색이었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피가 흘렀다. 은록색의 마법색 위로 핏빛 안개가 깔 리기 시작했고, 허공에 벌어진 입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육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망가 져갔다. 이제 울고 있는 것은 용족이 아니라 그가 타고 있던 육중한 짐승이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동물이 아니었던 걸까. 그 짐승은 딸려들어가지 않았다. “처참하군……” 루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자드가 침중하게 대꾸했다. - 용족은 나면서부터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길들어 있지. 그래 서 예상외의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난다의 마법은 정말로 용족에게 치명적이군. “흐흠.” 루이는 팔짱을 끼며 겨우 굳어있던 얼굴을 풀었다. “너도 저거 배워보면 어때? 알 바르카 녀석을 상대할 때 쓸모있지 않을까?”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루이의 푸른 눈은 날카로와져 있었다. 이자드는 경고의 뜻 을 담아 말했다. - 루이, 설마 저 녀석과 싸워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아니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왜. 내가 상대하면 너도 편하고 좋잖아?” 루이는 화염도를 뽑아들며 미소지었다. 푸른 눈 안에서 불꽃이 춤을 춘다. 일단 루이가 누군 가와, 무엇인가와 싸워보고 싶다고 느꼈다면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피가 끓어오르고, 다 른 일은 다 잊어버린다. 이런 순간의 루이는 막을 수 없었다. 이자드는 몸만 있다면 이녀석 을 때려눕혀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루이는 놀이터로 뛰어드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칼을 들고 발을 굴렀다. “타핫-!” 굉장한 바람소리와 함께 눈부신 칼날이 공중을 내리쳤다. 난다는 고개를 돌렸다. 3하스타까 지 뻗어나간, 눈부시게 흰 불꽃의 검날이 너울거리더니 일도양단, 깨끗하게 거대한 도마뱀의 몸을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루이가 사뿐히 옆에 착지한 다음에서야 그 몸은 쩍 갈라지며 핏물을 콸콸 쏟아냈다. 삽시간에 사방이 역한 피비린내로 가득찼다. 루이는 흘러내리는 핏줄 기를 보며 혀를 찼다. “이런, <길을 여는 사람들>인가 하는 녀석들이 화내겠는걸. 이 피는 잘 닦이지 않을텐 데.” 난다는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 고 있었다. 루이는 싱글거리며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항구에서 본 기억이 있군요.” “아, 기억하고 있다니 영광인걸.” 난다는 몸을 약간 움직여 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당신도 제 적입니까?” 루이는 길게 뻗은 칼날을 약간 줄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나저나 그렇게 정중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데.” 난다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원래 말투입니다. 사양말고 공격하시죠.” 루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머뭇거렸다. “음…보다보니 싸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달려들긴 했는데, 역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 는걸. 넌 벌써 마법사들에다가 용족까지 상대한 후고 상처도 입었고 말이야.” “전, 사양하실 것 없다고 말했습니다.” 난다의 눈이 루이와 마주쳤다. 심장이 두어 번 고동칠 정도의 시간. 꽃잎처럼 벌어졌던 모습 은 간데 없이 다시 하나의 원으로 겹쳐진 일곱 개의 보랏빛 원에는 한 치 흔들림도 없었다. 푸른 눈은 서서히 시야를 좁히며 가늘게 빛났다. 루이는 칼날을 앞으로 세우고 양손으로 칼 자루를 쥐었다. 난다의 팔에서 톡,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디……” 루이의 무릎이 천천히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눈은 둘 사이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시험해 볼까나.” 루이는 선 자리에서 그대로 돌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힘을 주어 도약했다. 난다는 그 자세 그대로 몸을 날려 뒤로 피하며 파이어볼을 퉁겼다. 루이는 칼날을 세워 막았다. 보랏빛 불덩 이는 펑! 소리와 함께 화염도의 칼날에 맞아 쪼개지며 소멸했다. 동시에 난다의 팔에서 떨 어지던 핏방울이 화염도에 맞아 치지직 소리를 내며 증발했다. 타닥. 거의 동시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땅에 발을 딛었다. 루이는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빨 았고 난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루이는 자세를 낮추며 칼날을 수평으로 젖혔다. “그럼……진짜 사양않고 간다.” 긴장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바싹 조여든 몸을 다시 움직이기 전, 엉뚱한 소리가 끼어들어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깨뜨렸다. “아야야야얏…아우, 귀가…” 카라였다. 긴장이 깨진 순간 루이는 한 걸음 크게 뛰어 뒤로 물러서면서 카라를 돌아보았고 난다는 냉 소섞인 말을 뱉았다. “이 이상 상대할 여유가 없군요. 그럼 이만.” “어, 어엇? 야, 잠깐만!” 그러나 이미 난다는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멀찍이 달아난 후였다. 루이는 발을 구르며 분통 을 터뜨리다가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고 있는 카라에게 달려갔다. 푸른 색 귀고리가 파고 들어 그 주변이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왼쪽은 멀쩡했지만 오른쪽 귓볼은 붉은 색으로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부어오른 살 속에 푸 른 색 돌이 박혀 있다. 물로 축여주자 통증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귀고리를 떼어내 보 려고 손을 댈 때마다 카라가 자지러지는 통에 실패했다. 루이는 결국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 고 말았다. “어쩌다 이렇게 파고들었냐. 안되겠다. 부숴버리는 수밖에 없겠어.” 이자드나 카라가 뭐라고 반박할 틈도 없었다. 루이는 화염도를 꺼내들더니 한 순간의 망설 임도 없이 휘둘렀다. 차가운 흰 불꽃이 머리 바로 옆으로 다가드는 모양을 보고도 카라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몇 올 허공에 흩어졌다. 루이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땅에 떨어진 푸른 돌조각을 주워들었다. 깨끗하게 쪼개져 있었다. 그제서야 카라는 겨우 멈췄던 숨을 토하듯 내뱉으며 외쳤다. “위험하잖아!” 이자드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반쯤은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 그걸 그렇게 잘라버리다니. “그거야 네가 다시 고치면 되잖아. 이제 좀 덜하지?” 카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심스레 귓볼을 만졌다. 부어올라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만지지만 않으면 이럭저럭 견딜만 할 것 같았다. “모르겠어. 덜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놀라서 아픈 걸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루이는 뒷말은 싹 무시하고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사그러드는 햇빛이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흙길에 무거운 시선을 던졌다. 구름이 해를 가리자 가느다랗게 흘러가는 핏줄기가 검은 뱀 처럼 보였다. 끼루루루룩- 기분나쁜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자 새떼가 낮게 날아 서녁으로 향 하고 있었다.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의 짧은 순간동안 괴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것은 한순간이었다. 루이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왜 아팠던 걸까.” - 글쎄…… 이자드는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루이가 쓴입맛을 다셨다. “쳇. 괜찮은 상대랑 붙어볼 기회였는데.” 카라는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러나 카라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이자드가 먼저 말했 다. - 잘난척 하지마. 내가 그놈이었다면 네 녀석이 한눈을 판 순간 끝장내 버렸을 거다. 솔직 히 그냥 가버린 게 이상할 정도야. 팔만 빼면 부상이 그렇게 심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에는 루이도 영 찜찜한 표정이었다. 이자드는 짧은 한숨에 이어 조용히 말했다. - 어쨌든 당장 문제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보다도 난다와 마주칠 때마다 카라가 심상치 않 은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야. 매번 이래서는…… 질책이 아닌 담담한 말투. 카라는 겸연쩍게 코를 문질렀고 루이는 괜히 해가 넘어가려면 얼 마나 남았나 살피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카라는 앞으로는 쫓아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미간에 주름을 잡아 조그만 얼굴이 고집스러워 보였다. 문득, 루이가 고 개를 돌려 길 반대편을 쳐다보았다. 아직 카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웅성이는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잽싸게 카라를 안아들었다. “왜 그래?” “일단 여길 벗어나야겠어.” 루이는 재빨리 길을 벗어나 경사면을 따라 올라갔다. 지금 오고 있는 것이 왕의 행차일행인 지 확인해보고픈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어딜 보나 왕실 마법단 소속의 시체가 네 구나 뒹 굴고 있는 데다가 괴상한 동물까지 죽어 넘어져 있는 옆에 얌전히 서 있다가는 무슨 곤욕을 치를 지 모른다. 루이는 어지간히 길에서 멀어졌다 싶자 카라를 내려놓고 멈춰서서 귀를 기 울였다. 사람 수가 많은 데다 말이 여러 필 있는 것은 확실했다. 말발굽 소리로 미루어보아 짐말이 아니다. 게다가 바퀴가 구르는 소리, 뭔가 금속성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 곧이어 호 각소리까지 들렸다. 이제 시체가 있는 곳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뭔가 거창한 행렬이 오는 건 확실한데. 왕이 진짜 오는 건지 미끼를 내보낸 건지는 모르 겠지만.” 루이는 들릴락 말락하게 ? 그러므로 이자드에게는 확실하게 들리게 중얼거리고 다시 한 번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일몰이 이제 곧이다. - 그럼 오늘 야영에서는 경계 태세를 높이겠군. 시더에 도착하기 전을 노린다면 오늘 밤이 적기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에도 아마 행렬은 시더 시에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그 정도로 가까워지면 리베르 문디가 대 거 지원해 나올 테니까. 루이가 귀를 기울이는 사이 멈춰서 있던 행렬은 다시 떠들썩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 했다. 금속성이 많아진 것을 보니 호위대가 다 칼을 빼든 모양이다. 곧 천천히 바퀴가 구르 기 시작했다. 루이는 카라에게 손짓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독 요란한 말발굽소리 가 하나. 시더시를 향해 달려가는 전령일 것이다. 루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 다. 루이가 긴장해 있는 탓에 입을 꼭 다물고 따라가던 카라가 빤히 올려다보았다. 루이는 야영지까지 쫓아가기를 포기하고 멈춰서서 말했다. “뭔가 찜찜한걸.” “뭐가?” “글쎄, 뭔지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든데……” 루이는 뭔가가 생각날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을 때 흔히 짓는 표 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침묵의 탑에서 구루하와 계약을 해버린 이후 계속 벌어지는 일마다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 었다. “이자드, 만일 하시피에가……그 애가 우릴 배신했다면 말이야.” - 했다면? “리베르 문디를 믿을 수 있을까?” 이자드는 놀라우리만큼 담담하게 대꾸했다. - 믿은 적도 없어. “하지만 그러면……” - 계약은 계약이야. 저쪽에서 확실하게 뭔가를 보여주지 않는 한 이쪽에서 깰 수는 없다. 게다가 넌 긴나라족에 대한 정보를 원하잖아. “그야 그렇지만.” 이자드는 엄하게 말했다. - 이랬다 저랬다 하지마. 네가 저지른 일이고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 루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그 녀석, 꽤 마음에 드는걸.” 그 말에 이자드도 카라도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루이……난다랑 무지 싸우고 싶어했잖아.” “아, 그거야 이거랑은 별개지. 싸우고 싶은 건 그녀석이 강하고 이기기 힘든 상대니까 고……” “그럼 마음에 드는 건?” 루이는 정신이 딴 데 팔린 듯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아까 뛰어들다가 두건이 벗겨졌었잖아. 그런데 그 녀석, 내 머리를 보고도 아무 소리 안하 더라고. 웃지도 않고.” 탁, 탁, 루이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꽤 사그러든 불꽃이 몇 개 튀어올라 분홍빛으로 물들 어가는 하늘을 맴돌았다. 이자드는 해가 지자 일단 카라의 귀부터 살폈다. 붓기는 별로 빠지지 않았지만 통증은 덜해 져 있었다. 치유 주문도 걸어 보았지만, 특별히 더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카라는 나무 그루터기에 동그마니 앉아, 이자드가 루이의 전투복 위로 로브를 걸치고 장갑 을 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이는 감각이 둔해진다는 이유로 장갑을 싫어했지만 이자드는 손바닥에 상처를 입으면 수인(手印)을 함께 맺어야 하는 마법을 쓰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장 갑을 꼈다. 다시 말해 그가 장갑을 끼는 것은 일종의 출전 준비였다. 그는 양손을 깍지껴 장 갑이 꼭 맞물리게 만든 다음 조용히 앉아있던 카라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따라오지 말아라.” 카라는 네, 라고 대답하는 대신 이자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자드는 더 말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카라가 앉은 자리 주위에 원을 그렸다. 어느 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카라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땅바닥의 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자드, 뭘 하는 거예요?” “네 주위에 실드를 쳐두는 거다.” 그는 공들여 원을 완성한 다음 양손을 펴서 땅에 갖다대며 간결하게 말했다. “안전하게.” 카라는 조금 당혹해 하며 이자드가 주문을 시작하려는 것을 막았다. “잠깐만요. 여기다 가둬두려는 거예요?” 이자드는 대답 없이 입 안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비하면 상당히 긴 주문 이었다. 그는 한참을 입 속으로만 말하다가 마지막에 목소리를 키웠다. “아파라지타스토트라Aparajitastotra 찰라cala- 자파japa 다라Dhara. 자파japa 아날라 Anala. 자파japa 시디히siddhis, 타트하 Tatha!” 카라는 눈을 깜박였다. 아무 변화도 없다 싶더니 땅바닥에 그려져 있던 원이 푸르스름한 빛 을 발하며 몸을 일으켰다. 푸른 선이 양쪽에서 일어나 구형을 그리며 카라의 머리 위를 돌 더니 교차해서 다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혹시 주변에 뭔가 있는 건 가 싶어서 손을 뻗어봤지만 아무것도 잡히거나 부딪치지 않았다. 이자드는 피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카라는 약간 걱정스러워져서 물었다. “괜찮아요? 이런 데다 힘을 써도 되는 거예요?” 이자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약간 퉁명스럽다 싶은 대꾸. 이자드는 잠시 후에 퉁명스러운 기운을 덜어내고 말했다. “격한 싸움을 치르고 상처까지 입은 상대와 붙어서 질 정도라면……” 카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자드가 심각한 것도 불안했 고, 또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다치게 되는 것도 싫었다. 이자드가 난다와 싸우게 됐다고 말 했을 때는, 당황하기는 했어도 상황이 그렇게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 별 일 없이 해결될 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피, 자체가 두렵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조여 들었다. 이자드는 카라의 굳어진 얼굴을 보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는 방어막에 대해 설명했다. “공격을 받을 때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을 거다. 마법의 공격에 한해서 막아줄 거야. 사 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을 거고.” “그럼 이자드 주위에도 쳐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강력한 공격이 정통으로 날아들거나 집중적으로 쏟아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서. 게다가 이런 방어진을 치고 있으면 내 쪽에서도 공격을 할 수가 없어.” “아.” “하지만 이번에도 쓰러지거나 통증을 느낀다면, 그건 이런 방어막으로 막을 수 없겠지.” 이번에는 카라가 눈썹을 치켜올릴 차례였다. 그녀는 잠시 이자드와 눈을 마주쳤다가 그 말 의 의미를 이해했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카라 때문에 이자드에게까 지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마음이 조여든다. 바닥이 허해지는 듯한 불안감도 함께. 이자드는 불현듯 카라의 머리를 두드리더니 놀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있어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어. 알겠지?” 부인할 수가 없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폐만 끼칠 게 뻔하다. 하지만…… 카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드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손을 거둬들이고 왕의 야 영지를 찾아 움직였다. 이자드는 여분의 로브와 망토까지 두고 갔지만 카라는 옷을 겹겹이 뒤집어쓰고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왕의 일행, 혹은 왕이 있는 척 가장한 일행은 마법사들의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두 시간 정 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큰길 양쪽을 따라 계속되던 경사면이 이쯤에서 한쪽 날개를 낮추어 황야지대로 몸을 뻗었던 것이다. 그들은 큰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그 둘레로 삼엄한 경비태 세를 갖추었다. 말만 해도 스무 마리가 넘어, 기수와 보병, 말을 돌볼 시중꾼들과 말먹이수 레만 해도 대부대였지만, 중앙의 큰 천막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다른 귀빈이 보이지 않는다 는 것이 역시 이 일행이 암살자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뒷받침했다. 너무 차분한 분위기라는 점도 이상했다. 그날 밤의 몇 시간 동안, 그 커다란 천막을 둘러싸 고 몇 개의 크고 작은 세력이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야영지는 고요하기만 했다. 이자드 는 그렇다 해도 난다는 일을 확실히 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자드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함정이라 해도 충분히 빠져나갈 만한 자신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준비를 하고 난다를 기다렸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난다는 공격해 왔다. 자정을 넘어 몇 시간 후, 가장 캄캄한 시간이었다. 그는 천막 안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평온히 잠겨있던 야영지는 키기깃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보초병들 이 이상한 소리가 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자마자 자줏빛 공이 곧장 야영지 한가운데로 떨 어져 내리며 맑은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딜러테이션 Dilatation 폴지 palsy!” 호위병들이 뭔가 다른 행동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자색 구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 다. 그 사람들의 반응이 드러나기도 전, 허공에서는 어린아이만한 자그마한 몸집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직활강해 내려오고 있었다. 마비 주문을 증폭시켜 터뜨렸으니 반경 500하스타 안 에 있는 사람은 모두 감각이 마비되거나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어있다. 난다는 바닥에 나뒹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큰 천막 위에 멈춰섰다. 역시 망설임 없는 공격. “엔스피어 Ensphere 둠 Doom!” 주문을 발하는 순간에서부터 시행되는 순간까지 시차가 거의 없다. 난다의 앙증맞은 입술에 서 주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막 주위에 반투명한 막이 둘러쳐 지더니 그 안에서 요란한 폭발이 일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눈이 멀었을 법한 섬광. 그리고 섬광이 잦아들고 나니 그 자리에는 반구형으로 움푹 패인 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 다.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난다는 공중에 몸을 띄운 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너 무 쉬웠다. 이렇게 무방비상태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나뒹굴고 있는 병사들을 둘 러보았다. 왕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면 이들까지 다 죽이는 수밖에 없다. 목적은 분명했다. 난다는 미리 만들어둔 컨틴젼시-불확정 마법구를 또 하나 던지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 때 비명소리 사이로 들릴락말락한 쉿! 소리가 나더니 서늘하고 명료한 음성이 허공을 갈 랐다. “다르파나 Darpana!” 난다는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무엇인가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번 개불에 맞은 듯한 마비감이 다리를 스쳤다. 폴지palsy 주문이다. 난다는 고개를 돌려, 자신 을 스쳐 지나간 공격이 허공에 흩어지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 빛깔은 어두운 자주빛,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마법색이었다. “반사마법……” 난다는 놀란 티도 없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시야에 나타난 자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헐렁한 회색 로브,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날카로운 얼굴. 처음 보는 자였다. 어린아이의 몸 안에 갇힌 용족의 마법사는 더 이상의 행동 없이 멈춰서 있는 상대를 쳐다보았다. 마음 속 에 흐릿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왜 바로 공격해 오지 않는 걸까. 이자드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바로 공격을 계속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 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기습을 위해 공을 들여 환영진까지 치고 기다렸건만, 정작 반사마법 으로 하나 되받아친 다음에 입을 다물어 버리다니. 이렇게 되면 공들인 환영도 화려한 환영 인사에 그칠 뿐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그는 짧은 한숨을 안으로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루이 녀석에게 물들기라도 했나.’ 그가 어째서인지 모르게 맥이 풀려버린 마음을 다잡는 사이 난다의 제비꽃빛 눈동자는 가볍 게 움직여 주변에서 나뒹구는 사람들의 모습을 훑었다. 비슷한 동작, 비슷한 신음소리. 조금 만 주의를 기울이면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난다 도 이제 방금 공격한 대상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자드는 장갑낀 손을 들어올려 수인을 맺었다. “파사pasa!”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나며 새파란 빛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난다는 가볍게 몸을 뒤로 날 렸지만 그 채찍은 한 번 목표를 놓치고도 재빨리 선회하여, 난다의 몸을 휘감은 올가미 모 양으로 공중을 돌기 시작했다. 난다의 몸이 약간 아래로 떨어진다 싶더니 바로 대응 주문이 튀어나왔다. “엔스네어먼트 Ensnarement!” 막 난다의 몸에 휘감기려던 빛의 채찍이 느슨해 지더니 엉뚱한 곳을 후려치고 소멸해 버렸 다. 난다는 바로 반격에 나섰다. “엔스피어 둠 Ensphere Doom- 리버스Reverse!” 파앗- 이자드의 몸을 감싸고 반투명한 구가 형성되어 그 속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니, 바로 그 폭발이 역류하며 이자드의 몸을 다시 한 번 두들겼다. 이자드는 첫번째 공격에만 대비하 고 있었기에 두번째 타격은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그래도 그는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 주문 을 던졌다. “테야스 탄다바Tejas Tandava” 역류해온 열기가 이자드의 몸에 부딪침과 동시에 푸르스름한 불꽃이 소용돌이치며 난다가 있는 지점을 휩쓸었다. 난다도 순간적으로 프로텍션을 외웠지만 한 발 늦어 공격의 일부를 몸으로 감당해 내야 했다. 이자드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로브와 장갑 사이, 손목에 타는 듯 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외쳤다. “달dal!” 질세라, 난다도 아직 푸른 불꽃이 달라붙어 너울거리는 검은 로브를 거칠게 털며 외쳤다. “매직 미사일 Magic Missile!” 절묘하게도 같은 성질에 비슷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두 개의 공격 주문은 공중에서 부딪혀 소멸해 버렸다. 이자드는 겨우 숨을 돌리며, 발이 땅에 닿는 감촉을 느꼈다. 정신없이 서로에게 주문을 던져 대는 사이 몸은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공격을 가하려고 손 을 들었지만,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 주문을 외울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난다 역시 마찬가지 였다. 땅에 발을 딛고 선 모습을 보니 몸집이 얼마나 작은지 실감이 난다. 난다는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이자드를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들이키고 있었다. 빨리 주문외우기 시합이라도 한 것처럼 숨돌릴 틈없이 공격을 퍼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통상적인 마법 싸움은 이렇게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 이 정도 속도를 감당할 수 있는 마법사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속도를 획득한다는 것은 주문의 위력과는 별개의 문제다. 통상적인 주문마 법과 전혀 다른 방식, 자신만의 공격 방식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이렇게 빨리 연이어 공격 주문을 던질 수 없다. 우선 공격 위주로 마법을 익혀야 하고, 독창적이며, 독창적인 방식을 실행에 옮길만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실험이 결실을 거둘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춘 마법사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여기에 성공한 사례가 둘이나 있는 것이다. 난다는 마법을 미리 불확정 구에 저장해 두는 컨틴젼시 라는 방식으로, 이자드는 수인(手印)과 연결된 전혀 다른 언어의 사용으로.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거칠게 숨만 몰아쉴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서로에 게 경이를 느꼈다. 숨이 차서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양쪽 다 별로 심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아직 양쪽 다 진 짜 장기로 하는 공격은 나오지 않았다. 이자드는 서서히 숨이 가라앉아 가면서 신경이 칼날 처럼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컨틴젼시가 올 것이다. 이자드의 마법 시현 속도가 아 무리 빠르다 해도, 두 가지 이상의 마법을 동시에 구사할 수는 없었다. 컨틴젼시는 여러 가 지 공격을 한꺼번에 할 수 있다. 그나마 난다가 이자드에 대해서나 그의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 유리한 점일까…하지만 그는 이미 난다가 거의 자신에 비등한 마법사임 을 인정하고 있었고, 자신이라면 상대가 어떤 마법을 쓰는지 알든 모르든 별로 동요하지 않 는다. 그는 에두를 것 없이 힘을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난다 역시 숨을 고르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자는 정말로 강하다. 지난번에 싸웠던 용족보 다도 더. 이 세상에 용족보다 강한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경이로왔다. 자신 은 그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헤매야 했는데…게다가 그가 구사하는 주문은 어느 것 하나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마법을 훔쳐 배우면서 어지간히 알려지지 않은 주문까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주문을 들어도 어떤 공격이 날아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는 빨리 냉정을 되 찾았다. 어차피 상대의 공격을 알아내는 데 의지해서 싸우지는 않았다. 용족을 상대로 할 때 는 어차피 주문이 없으니까. 차츰 호흡이 고르게 잦아들며 그는 다음 공격이 양쪽 다에게 가장 자신있고 가장 위력적인 주문이리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양쪽 다 숨은 골랐다. 난다와 이자드는 상대가 공격을 준비하는 데 따라 긴장도를 높 이며, 상대방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위로 다른 움직임이 다가드는 것 을 감지하지 못했다. 양쪽 다.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서 주위를 서성이다가 다시 주저앉기를 몇 번이었을까. 깜박 선잠이 들었나 보다. 현실과 꿈 사이의 어두운 틈에 빠졌다가 퍼뜩 놀라 눈을 떠보니 하늘이 밝았 다. 순간적으로 벌써 새벽인가 생각했지만, 눈을 비비고 보니 그 빛은 태양빛이 아니었다. 눈에 너무나 익은 서늘한 푸른빛, 그리고 최근에 본 적이 있는 제비꽃 색깔의 불꽃이 하늘 을 수놓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정도로 외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카라는 다시 나무 그루터기 위에 쭈그리고 앉아 턱을 고였다. 차라리 잠이나 계속 잘 것을. 결론이 날 때까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젠장!” 카라는 아무래도 어색한 욕설을 뱉으며 되는 대로 바닥을 걷어찼다. 작은 돌 하나가 튀어올 라 툭, 툭 몇 번 튀기면서 멀어져갔다. 그 때 갑자기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오는 스르릉 소리 가 났다. 카라는 순간 얼어붙었다. 답답한 침묵. 카라는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눈을 굴렸다. 어둠 저편에 누가 있는 걸까?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그렇게 오랫동안은 아니었겠지만, 카라가 느끼기에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 다시 칼이 칼집에 들어가는 소리가 나며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람쥐였나 보군.” 말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또 한 번 심장이 내려앉았다. 카라는 당황해서 주위 를 두리번거리다가,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나자 별 수 없이 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몸을 한껏 움츠리고,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면서 앉아 있으려니 그 남자의 시선은 카라가 있는 곳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그제서야 이자드가 걸어놓은 마법이 생각났다. 움직이지만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었 지. 카라는 겨우 한시름 놓았다. 그래도 계속 숨을 죽이느라 호흡은 차올랐고, 제발 한시라 도 빨리 저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겨우 그 사람을 살펴볼 마음이 든 것은 그 뒤로 다른 사람 둘이 나타날 무렵이었다. 아까 칼을 뽑았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약간은 힐난이 섞인 어조였다. “설마 그 일 때문에 의심을 품은 것은 아니겠지. 뭐,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을 보니 일단은 무사통과한 것 같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카라는 숨을 죽인 채 눈을 굴려 세 사람을 살펴보았다. 맨 앞에 선 칼찬 인물은 키가 크고 건장한 몸에 언뜻 보아도 무구를 단 단히 차리고 있었다. 그 뒤로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마법사로 보이는 백발 노인 과 어두운 녹색 옷을 발목까지 늘어뜨린 여자. 이 여자는 특히 고양이 같이 부드러운 걸음 걸이가 인상적이었다.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입을 연 것은 이 여자였다. 속삭이듯 나른 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구루하가 어리석은 짓을 했어요. 그를 마슈와 착각한 것까지는 좋은데, 함부로 자객을 보 내다니- 자칫하면 계획이 다 어그러질 뻔 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목소리에도 힐난조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뭔가 언쟁 같은 것 이 오갔지만, 카라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을 보니’라는 말과 ‘마 슈’, ‘자객’, ‘구루하’라는 말이 한데 모여들자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저 사람들은 누군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좀 더 들어보려고 하자 또 한 마디 가슴 철렁한 말이 귀에 들어왔다. “…병사들 배치는 조금 전에 끝났습니다.” 병사들이라니? 순간 카라는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세 사람이 일제히 그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 아니다. 그 순간 요행히도 카라의 뒤편으로 귀를 찢는 천둥소리가 울렸고 그들의 주의를 끈 것은 그 소리였다. 카라도 그쪽을 돌아보았다. 핏빛 자주색과 시린 푸른색 이 파도처럼 부딪치며 뒤엉켜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다. 어쩌면 시더까지 보일지도 모른다 싶을만큼. 카라가 멍해 있는 사이 백 발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관이로군요. 이만한 마법 전투를 보게 되다니……” 칼을 든 남자가 날카롭게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때요? 나는 소름이 끼치는군. 저 돌연변이 용족 새끼와 대적할 만한 마법사가 또 있었다니. 저런 힘을 가진 자가 둘이나 횡행한다니! 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요? 폭군 샤미르의 시대는 벌써 먼 옛날의 일이 되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일이에요, 카데인 경.” 고양이 같은 여자가 반쯤은 비웃는 얼굴로 손사레를 쳤다. “게다가 그런 이유 때문에 저 둘이 싸우게 만들지 않았나요. 일은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으 니 이제 감정적인 반응은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유연하게 허리를 틀어 푸른색과 자색 빛의 향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희 일은 여기까지고, 그 다음은 경의 일. 아무리 지쳐 있다 해도 강력한 마법사라는 점 을 잊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소.” 카데인 경이라고 불린 남자는 퉁명스레 대꾸하면서 어깨에 매고 있던 장궁을 추슬렀다. “한쪽을 끝장내고 다른 쪽이 완전히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때를 노리는 거지. 성급하게 행 동할 마음은 없소.” 순간 카라는 다시 한 번 새어나오려는 목소리를 막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카라 쪽을 향해 있던 여자의 눈에 푸른 불꽃이 어른거렸다. 카데인 경은 보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카라 는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달렸다. 카라는 한층 더 숨을 죽였 다. 고양이 같은 여자. 왠지 그 여자만은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 같았다. 그러 나 그녀는 카라 쪽을 천천히 쓸어보더니 말했다. “성공을 바랍니다.” 희미하게 땅이 흔들렸다. 카데인 경은 장궁을 다시 한 번 추스르고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 갔다. 백발 노인도 그 뒤를 따랐다. 카라는 무릎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한껏 몸을 옹송그리 고 기다렸다. 천천히, 나른한 걸음걸이로 서성이고 있는 그 여자가 떠나기를. ** 먼저 움직인 것은 이번에도 이자드였다. 그는 오른쪽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수인을 맺었다. 하나는 공격을 위해. 다음 것은 방어를 위해. “판차 탄마트라스, 아카사! PanCa Tanmatras, Akasa!” “둠라로차나! Dhumralocana!" 연거퍼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며. “비바스바트, 아리야만! Vivasvat, aryaman!" 다섯 가닥의 푸른 빛 화살이 공중을 수놓으며 난다가 선 쪽으로 날았고, 뒤이어 이자드의 몸 주위로 옅은 푸른 빛 안개가 뭉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난다도 주문을 외웠다. “컨틴젼시contingency” 난다의 눈빛과 똑같은 색깔의 마력구 일곱 개가 이자드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는 푸른 화살 이 반쯤 거리를 좁혔을 때 마력구에 명령을 내렸다. “디스인티그레잇Disintegrate- 리버스 Reverse.” 그는 곧바로 방어 주문으로 전환했다. 이자드의 몸짓에서부터 난다의 방어 전환까지가 눈을 몇 번 깜박일 정도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양쪽 공격이, 거의 동시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멀리서 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눈에는 양쪽에서 거대한 빛의 파도가 일어난 듯 보 였을 것이다. 자주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빛의 윤무. 먼저 공중에 솟아올랐던 판차 탄마트라스- 다섯 가닥의 빛 화살은 난다의 앞까지 다가들어 견고한 방어막에 부딪쳤다. 그러나 멈칫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뒤이어 푸른 빛의 에너지 파 도가 사납게 부딪쳐 오자 방어막은 밀리기 시작했고 그 뒤로, 다시 그 뒤로 연달아 해일처 럼 밀려드는 푸른 빛의 전광은 방어막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멈칫했던 빛의 화살이 곧장 내리꽂혔다. 그렇게 난다 주변으로 푸른 번개가 떨어지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는 일곱 개의 마력구가 진 형을 이루어 이자드 주위를 감싼 방어용 안개막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디스인티그레잇- 파 쇄 주문으로는 마법을 무효화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람의 육체를 공격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마력구에서 발동한 파쇄 주문이 둠라로차나의 안개를 다 먹어치우자마자 난다의 두 번째 주문이 활동을 개시했다. 리버스, 역전이었다. 빨아들였던 이자드의 마법이 통째로 역 류하여 이자드의 몸으로 부딪쳐온 것이다. 다급하게 펼친 두번째 방어막으로는 일곱 개 마 법구를 다 막을 수 없었다. 세번째 구가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시야가 검붉게 물들었다. 이자드는 귓속에서 울리던 날카로운 소리가 가라앉고 시야가 맑아지고 나서야 마력구가 역 류시킨 것이 빨아들인 둠라로차나 주문만이 아니라 파쇄주문 그 자체였음을 깨달았다. 사람 에게는 쓸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주문 자체를 역전시켜 버리면 육체에 통할 수 있다는 것 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자드는 시야를 완전히 회 복하려고 눈을 깜박이며 등을 세우다가 끔찍한 격통에 숨을 멈춰야 했다. 그는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며 부상을 헤아렸다. 처음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왼쪽 어깨에다가, 갈비뼈가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오른쪽 정강 이도 어긋난 것 같다. 그는 잠시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방어 주문으로 친 둠라로차나를 깨 끗이 뚫고 이 정도 상처를 입히다니. 게다가 정신을 추스리고 보니 양쪽 손바닥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막았던 걸까. 손바닥을 보호하려고 끼고 있던 장 갑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그는 멍하니 발치에 떨어지는 핏방울을 내려다보다가 한 발 늦게 그 피가 손에서만이 아니라 입에서도 흘러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 희미하게 미소까지 띤 채 앞을 바라보았다. 통증이 둔하게 몸을 찔렀지만 난다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에는 섣불리 치유주문을 쓸 수 없었다. 물론, 난다도 무사하지 않았다. 이자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겨우 쓰 러지지는 않고 서 있었지만 안색이 산 사람같지 않게 창백했다. 로브가 검은 색이라서 피가 흘렀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주변으로 땅은 검게 타버리고 바위는 녹아내린 것을 보니 공격은 정통으로 먹혔다. 아마 서있는 것만도 가까스로일 것이다. 판차탄마트라스 주문은 이 자드에게 있어 가장 손에 익은 공격마법이었고, 위력 면에서나 속도 면에서나 막아낼 수 있 는 자가 없었다. 이자드 자신이라 해도 완전히는 막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 뒤에 비바스 바트 주문을 걸었다. 파도처럼 완만히 짓쳐들어가는 그 공격은 그렇게 빠르지도 않고 위력 면에서도 앞의 공격보다 떨어지지만, 그렇다 해도 일단 판차탄마트라스를 맞은 사람에게는 결정타를 먹일 수 있었다. 문득 이자드는 희미한 냉소를 머금었다. 한심하다. 마법사들끼리 속력에 의존한 직격타를 주 고받고 있다니. 서로에게 있어 최악의 싸움 방식이 아닌가. 결코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는 소모전이었다. 어쨌든 이제 서로 상처도 입을 만큼 입었다. 이자드는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치유 주문을 외웠다. 양손과 정강이께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며 통증이 감소했다. 어깨와 갈비뼈는 나중 일이다. 우선은 움직이고, 공격할 수 있게 해두는 것이 중요했다. 난다도 힐링을 시도한 듯, 엷은 자줏빛 광채가 작은 몸 주위를 맴돌았다. 세간의 믿음과 달리 치유주문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특히나 이자드나 난다처럼 공격에 능한 마법사들의 경우, 치유주문은 구색이나 갖춘 마법이기 쉬웠다. 당장 피를 멈추고 고통을 줄일 수는 있지만 상처를 아예 아물게 하지도 못하고, 없는 체력을 끌어올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자드는 뛰어오르면 한 번에 닿을 거리에 있는 난다의 눈동자를 보았다. 시선의 높이는 다 르지만, 꽃잎처럼 활짝 벌어진 일곱개의 원이 뚜렷이 눈에 들어온다. 이자드는 냉정하게 난 다의 여력을 가늠해 보았다. 어린아이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난다의 근골은 용족의 것이다. 체력 면에서는 인간의 어른보다 낫다. 길게 끌어봐야 유리할 게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길게 끌고 싶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지 않은가. 이자드는 난다의 눈동자가 수축하는 것을 감지하고 호흡을 짧게 끊었다. 팔을 움직여 보니 찢겨나간 소매자락이 걸리적거렸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천천히 옷자락을 찢어냈다. 서로에게 득이 될 게 없다 해도, 이제 와서 싸움 방식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걸로 끝내자.” 이자드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양손을 모았다. 그리고 시작했다. “타트하 - 프라브리띠 다라 판차 탄마트라스 다르파나 Tatha - Pravritti Dhara panca tanmatras Darpana, 타트하 타 - 프라브리띠 바스 셋사 아디파티 Tatha ta - Pravritti vas sesa adipati...” 그의 주문은 노랫가락처럼 느릿느릿, 리드미컬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느낌만큼 느 리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아니면 미혹되어 있었던 것 일까. 난다는 땅울림이 시작되고서야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땅이 움직이고 있었다. 꿈 틀거리며, 파도처럼 위아래로…… 이자드는 모은 손끝으로 난다를 가리키며 또렷이 결어(結語)를 맺었다. “칸KHAN!” 콰직! 난다의 발 아래 땅이 뱀처럼 머리를 들더니 흐르듯 솟구쳐 올라 그를 덮쳤다. 난다의 몸은 간발차로 그 입에서 벗어나 공중에 날아올랐다. 바위의 몸을 한 거대한 뱀이 몸을 일 으키며 난다를 뒤쫓음과 동시에 뱀을 뱉어낸 땅은 아래로 꺼져들어갔다. 이자드는 움직임 없이 서서 눈으로만 난다를 쫓았다. 함몰의 여파로 주변의 땅이 빠른 속도로 갈라지기 시작 했다. 난다는 뱀의 이빨을 피해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몸을 거꾸로 세운 채 그대로 주문을 외웠다. “디스인티그레잇 Disinregrate!” 이자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뱀에게는 파쇄 주문이 통하지 않는다. 다른 차원에서 불 러낸 초혼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 뱀의 이름은 셋사Sesa였고, 셋사가 온 곳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 지금 흔들리고 갈라지고 있는 대지였다. 주문은 무위로 돌아갔고 난다도 무엇이 문 제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난다가 셋사의 거대한 머리를 밟고 뛰어오르자 어둠 속에서 은빛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빛을 발했다. 아이의 몸을 한 용족은 셋사의 몸통 위에 서서 앙증맞은 양 손을 겹쳤다가 벌리며 외쳤다. “딜러테이션 라이트닝 체인, 둠!” 난다의 손 안에 자줏빛 구체가 형성되더니 셋사가 몸을 뒤틀어 난다에게 머리를 뻗는 사이 에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다. 곧 반경이 1하스타가 넘는 자줏빛 달이 떠오르고 그 주변으로 덩굴처럼 감겨든 라이트닝 체인이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다. 이자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 다. 그가 셋사를 조종하느라 묶여있다는 것을 난다가 벌써 알아차렸을까? 어쨌든 그 구체는 컸고 셋사는 아슬아슬하게 난다의 뒤로 따라붙고 있었다. 난다는 거대한 구체를 들어올려 자신에게 덮쳐드는 셋사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그리고 동시에 입으로는 다른 주문을 외쳤 다. “컨틴젼시contingency, 둠Doom” 순간 이자드는 아차 했다. 설마 했는데 마력구가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주먹만한 자줏빛 공이 갑자기 그의 옆에서 튀어나오더니 맹렬히 회전하며 달려들었다. 피할 수 없다. 그는 순 간 오른손을 움직여 오른쪽 허리에 매달려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셋사의 머리가 난다를 덮친 것과, 난다의 손에서 날아간 빛의 구체가 셋사에게 부딪친 것, 컨틴젼시 마력구가 이자드를 친 것 중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늘 천장이 통 째로 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이자드는 손목에 저릿저릿한 아픔을 느끼며 쥐고 있던 칼을 놓쳤다. 화염도는 푸른 빛 칼날을 잃고 나무막대기처럼 툭 떨어졌다. 그러나 잠시 동안의 푸른 화염도도 제 임무는 다한 셈이었다. 난다의 컨틴젼시를 쳐내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그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자줏빛 구체가 언덕을 뚫고 들어가 폭발을 일으키는 것을 지켜보며 아픈 손목을 만졌다. “이건 반칙인가.” 아마도 간발의 차이였을 것이다. 이자드가 컨틴젼시 구를 막아내느라 집중을 흐트러뜨린 것 이 조금만 빨랐어도 셋사는 공중에 멈췄을 것이고, 난다의 공격은 그 머리를 박살냈을 것이 다. 반면에 이자드가 그 공격을 막는 것이 조금만 더 느렸어도 난다는 셋사에게 죽었을 것 이고, 물론 이자드 역시 그에 버금가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마법과 아무 상관없는 방어수 단이- 화염도가 없었다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 이야기는 루이에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눈 닿는 곳은 완전히 폐허였다. 여기저기 갈라진 틈 사이로 곳곳이 날아가 박힌 바위덩어리 들과, 무너져 내리며 지축을 뒤흔든 세사의 몸뚱이. 날아가 버린 언덕과 언덕만큼을 통째로 파낸 듯 패여있는 거대한 구덩이. 구덩이 쪽으로 다가가려 발을 움직이자 몸이 비틀 기울어 진다. 이자드는 어질한 머리를 잡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힘의 소모가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 다. 하지만 난다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발밑이 흔들렸다.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는 빛의 윤무. 카라는 잠 시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떠난 기척은 없었는데, 어디쯤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둘레둘레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흔적 이 없었다. 발소리도 없이 걷던 여자니까 어쩌면 떠났을 지도 모른다 싶어 반쯤 안도해서 몸을 조금 더 내밀었다. 그 때, 나른하고 축축한 손이 목덜미를 건드렸다. “여기 숨어있었구나.”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싸늘한 한기에 몸이 떨렸다. 카라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탁 치 면서 몸을 돌려 뒤로 뺐다. 아먼드형의 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나고 있다. 그 여자였다. 눈을 좁혀 카라를 내려다보며, 방금 카라가 친 손등을 쓰다듬고 있다. 카라는 감 히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눈을 마주 쳐다보았다. 이상한 눈이었다. 보석 같 기도 하고,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를 고양이의 눈동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그 녹색 눈동자가 카라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뭔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 머리 속에서는 그런 명제가 떠올랐지만 카라는 아직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는. “이자드가 이 부근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지. 어디 다른 데 맡길 시간은 없었 을 테니까. 그런데 하필 딱 여기서 마주치다니……” 카라는 눈을 깜박였다. 이자드와 아는 사이인가? 잠깐이지만 마음이 놓일 뻔 했다가 화들짝 놀라 튀어오를 뻔 했다. 이자드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 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카라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물었다. “날 알아요?” 그 여자는 대답 대신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카라는 계속 해서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망쳐야 해. 그리고 이자드에게 말 해줘야지. 이자드에게…하지만 파랗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동자 는 고동치듯 수축했다가 확장되며 카라의 눈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녹색 눈동자 한가 운데에서 검은 구멍이 입을 벌리더니 카라를 끌어당긴다. 머리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빨 려들어간다. 그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매몰되어 버린다… 카라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놀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리버리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보니 그 여자가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 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카라는 다시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인 다음, 정신을 차리고 뛰기 시작했다. 이자드에게 가야 해. 다리가 무거워서 그렇게 빨리 뛸 순 없었지만 카라는 열심히 달렸다. 무엇 때문에 물러섰는 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도 곧 정신을 차린 듯, 뒤쪽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뭔가가 맹렬히 날아와서 등을 때렸다. 몸이 확 앞으로 밀려나가며 바람에 머리카락이 앞으 로 날렸다. 하지만 아픔은 없었다. 카라는 잠시 휘청하며 중심을 잡은 다음, 뒤를 돌아보았 다. 주위에 푸르스름한 기류가 휘감긴다 싶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마법이었을까? 카라도 놀 랐지만 그 여자도 놀란 듯 아연한 표정이었다. 그제서야 카라는 이자드가 걸어둔 주문을 기 억해냈다. 그렇다면 아까 그 이상한 눈동자도 마법이었나. 잠깐이라도 멈춰선 것은 치명적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녹색 눈의 여자는 충격을 받았는지 그 동안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카라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돌, 경사면, 길, 언덕, 그리 고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마지막 힘을 다해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자 앞에 폐허가 펼쳐져 있었다. 땅이 갈라지고, 여기저기 바윗덩어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오고 새 까맣게 불에 그을려, 녹색이라고는 한 치도 남아있지 않다. 카라는 아연해져서 잠시 멈춰섰 다가, 방금 올라온 언덕 사면 저쪽에서 움직이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단숨에 아래로 내달렸다. 이쪽 폐허에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하나 뿐이었다. 눈에 익은 훤칠한 윤 곽. “이자드! 이자드!” 처음에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지만 재차 부르는 동안 고함소리가 커졌다. 동시에 뒤편에서 느껴지던 인기척도 더 강해졌다. 뭔가 쇳소리 같은 것도 나는 것 같았다. 머리에 구름이 낀 듯 몽롱한 상태에서 갑자기 들려온 카라의 목소리는 잠깐이지만 이자드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숨이 차서 얼굴이 새빨갛게 된 카라를 보며 입을 벌렸다. “대체…” 하지만 목소리가 듣기 싫을 정도로 갈라져 나왔다. 그는 잠시 목을 막고 몇 번인가 기침을 한 다음, 그 사이에 코앞까지 달려와 이자드의 옷자락을 잡은 카라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 다. “대체 왜 그렇게 말을 안듣는 거냐? 위험하다고 했을 텐데. 지금은……” 카라는 그게 아니라는 뜻으로 맹렬히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지만 아직 숨이 차서 말을 제 대로 하지 못했다. 카라가 입을 열고 헛바람을 들이키자 이자드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고개 를 흔들었다. “어쨌든 끝내고 얘기하자.” 그리고 다시 카라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이자드가 몸을 돌리려 했을 때 그들 앞에 가로놓 여 있던 깊은 구덩이 속에서 희미하게 갈라진 음성이 빠져나왔다. “래비테이션!” 주문을 외우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다의 작은 몸은 천천히, 너 무 천천히 떠올라 구덩이 속에서 빠져나왔다. 구덩이가 얼마나 깊었는지는 모르지만, 난다에 게 기력이 거의 남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정신없이 싸우던 와중에도 아름답게 빛나던 은빛 머리카락이 지금은 피가 엉겨붙은 채 헝클어져 있다. 겨우 맨땅에 발을 디딘 게 고작이었다. 난다는 바로 몸을 떨어뜨리며 비틀거렸다. 그래도 어린아이 모습을 한 용족은 꼿꼿이 등을 세우고 이자드를 쳐다보았다. 이자드 역시 말은 끝을 내겠다고 했지만 조용히 난다를 건너 다보기만 했다. 꽃잎처럼 벌어져 있던 난다의 일곱 개 동공이 천천히 오므라들고 있었다. 문 득, 난다의 눈이 옆으로 움직여 카라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카라는 서둘러 달려왔던 용건도 잠시 잊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숨을 돌리고 나니 난다만이 아니라 이자드도 엉망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하니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계속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자드였다. 그는 고저없이 말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의 암살을 막는 것 뿐이야. 내가 그쪽을 죽여야 할까?” 카라는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정전 제의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난다의 답변에 그녀는 안도했던 신경은 다시 곤두서야 했다. 난다는 무겁게 말했다. “계약은 계약입니다.” “……그 말은, 내가 여기서 죽이지 않는다면 또 왕을 노릴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정확합니다.” 난다는 아무 동요도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속에 적의는 없었다. 그는 단지 사실 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난다는 잠시 뭔가 더 생각하는 것 같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 었다. 전 중단 못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자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 었다. “……할 수 없지. 그럼…” 카라는 그제서야 다급히 이자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잠깐만요. 또 싸우려는 거예요? 지금? 빨리 도망쳐야 되는데!” 이자드는 물론이고 난다까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카라는 답답한 마음에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외쳤다. “숲속에서 들었어. 함정이에요! 주위에 온통 병사들이…” 난다와 이자드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난다는 바싹 경계하며 주위를 살폈고 이자드는 재차 물었다. “함정? 병사들이라니, 누구의?” “그렇다니까! 누구 병사들인지야 내가 어떻게 알아요. 카데인 경이라는 남자랑 고양이 같은 여자가 있었는데…” 순간 이자드의 표정이 벌레 씹은 듯 일그러지더니,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고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고양이 같은 여자라고? 어두운 녹색 눈동자에…머리카락이 새까만?” 그 말에 대답을 할 겨를은 없었다. 카라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리더니 불화살 여섯 대가 공중을 밝혔다. 이자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카라를 잡아 끌어 당기며 미끄러지듯 난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다 역시 자연스레 이자드와 등을 마주하 며 물러서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싸우던 사람들 치고는 놀라우리만큼 호흡이 잘 맞는다. 말을 주고받지 않고도 양쪽 다, 이게 함정이라면 일단 협력해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데 일치를 보고 있었다. 서로가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이었으므로. 카라는 문득 이자드의 다리가 휘청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들릴락 말락하게 속삭였다. “곤란하군.” 휘파람과 불화살을 신호로, 일단의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와 그들 주위를 포위해 들어오 고 있었다. 다들 활을 손에 들고 있어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포위망 선두에는 유난히 큰 활을 걸머진 사내와, 물이 흐르듯 우아하게 걸음을 옮기는 녹색 눈의 여자가 있었다. 이 자드의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하시피에.” 그의 음성은 낮다 못해 땅속으로 기어들어갈 듯 음산했다.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지금 이자드는 속으로 땅을 파고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의심할 여지 가 많았는데도 하시피에를 믿었다니. 이 주위에 이렇게 많은 군사가 매복해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어리석었다니…그래도 그는 겉보기에 냉정함을 유지하며 차갑게 말했다. “이걸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건가, 아니면…” 하시피에는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는 팔꿈치까지 감싸고 있 던 긴 장갑을 벗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유감이군요. 기왕이면 당신이 난다를 끝장낸 다음에 공격하고 싶었는데……참, 대단해요. 저 꼬마에게 방어진까지 걸어주고도 이만큼 해내다니. 하지만 당신이 지나치게 대단한 게 문제가 될 줄 몰랐나요, 설마? 전보다 머리가 둔해진 게 아닌가요? 하긴, 요새는 전보다 정 도 많아진 것 같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변화의 대가는 이런 법이에요, 마슈.” 마슈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자드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반신반의하며 하시피에를 쳐다보았다. 마슈라고? 왕의 병사들에게 들려주 기 위해 그렇게 부르는 건가? 그렇다면…… 하지만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상대방의 전력을 계산하며 허리를 폈다. “어쨌든 타이밍은 맞지 않은 것 같군. 나나 저쪽에게나 아직 힘은 남아있어.” 하시피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계산착오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연 어느 정도나 남아있을까요? 나도 마법사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이 난리를 치고도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동귀어진이라는 말에 하시피에 옆에 있던 칼잡이는 얼굴을 찌푸렸고 병사들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말은 오히려 병사들에게 겁을 주는 효과를 낳았다. 이상한 일이다. 하시피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자드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주변을 계속 살폈다. 지 금 그에게나 난다에게나 아예 공중으로 날아올라서 도망칠 여력이 없는 것은 확실했고, 남 은 힘을 다 그러모아 그렇게 한다 해도 화살이나 하시피에의 공격을 막기는 어려웠다. 그러 면 어쩐다? 그의 신경은 몇 필 안되는 군마에 쏠렸다. 한 필만 손에 넣는다면…그는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이젠 마법사끼리의 계약도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나? 난 계약을 이행했어. 난다가 왕 을 암살하지 못하게 막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 쪽의 계약은 어떻게 된 거 지?” 하시피에는 입끝을 당겨올리며 비야냥거렸다. “당신이 이런 상투적인 시간끌기까지 동원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군요. 당신이 계약한 건 구루하지 내가 아니에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이자드는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건 구루하가 더 이상 리베르 문디의 대표가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면 네가 더 이상 리 베르 문디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하시피에는 고개만 흔들었다. 옆에 선 대장이 큰 활을 내려 활시위를 매기는 모습이 더 이 상 시간을 낭비하기 싫다는 무언의 압력 같았다. 그래도 이자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만 말해봐. 긴나라족의 생존자는 정말 있나?” “그놈의 긴나라, 긴나라. 정말 끈질기군요. 그 문제는…” “하나같이 말이 많군.” 서늘한 바람이 모두의 얼굴을 때린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초조하게 활을 당기던 대장이 아니라, 심하게 다친 어린아이 모습을 한 마법사의 것이었다. 그의 애띤 목소리에 병사들이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난다에게는 확실히 이자드 못지 않은 존재감이 있었다. 그는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 로 주변의 기선을 제압하고 있었다. 이자드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지켜보다가, 난다가 흘 끗 그를 돌아보더니 병사들을 도발하려는 듯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카라를 끌어당겼다. “쏴라!” 시기 적절하게도, 대장은 큰 활을 팽팽이 당기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팍! 상관의 말에 자동 적으로 반응한 첫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뒤이어 우수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러나 난다는 첫번째 화살이 난 직후에 생긴 순간의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한달음에 주문을 외웠다. 팍 쉬어버린 목소리에 엄청나게 빠른 발음 때문에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 한 마디만으로도 이자드는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정상 속도로 옮기면 이렇게 되리라. “불을 낳은 것은 물 빛을 낳은 것은 어둠 만물을 낳은 것은 허공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무(無)로부터 오라." 하지만 귀에 정확히 들린 것은 마지막에 외친 '에보케이션!' 뿐이었다. 에보케이션이라는 말이 끝을 맺은 순간, 막 그들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화살이 공중에서 뭔가에 잡아채여 부르르 몸을 떨었다. 투명하고, 덩치가 큰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환 마법이었다. 반사적으로 하시피에가 대응에 나섰다.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자드는 잽싸게 카라를 들어올리며 화염도를 뽑아 몇 걸음에 포위망 쪽으로 들이닥친다는 일을 감행 해냈다. 마법사가 칼을 쓰리라는 점을 예상치 못했던 병사들은 순간 당황했고, 그가 워낙 빨 리 들이닥쳤기 때문에 활은 소용이 없었다. 그는 혼란을 이용해서 재빨리 군마 한 필의 고 삐를 나꿔채어 말등에 올라탔다. 카라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잽싸게 자세를 바꾸어 그의 등에 달라붙었다. 난다가 사용한 소환 마법은 사실 사기나 다름없었다. 완전한 소환을 해낼 힘이 남아있었을 리가 없다. 하시피에는 단 두 번의 공격으로 투명한 소환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번의 공격이 이자드에게 말을 나꿔챌 틈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이자드는 돌아서서 그 광경을 보고 카라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으며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군마는 주인 이 아닌 손을 거부한다지만, 이 말은 이자드의 명대로 쏜살같이 달렸다.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 하시피에의 손에서 불화살이 나는 순간 이자드는 간신히 난다의 허리를 나꿔챌 수 있었다. 안장위 무게가 옆으로 심하게 기우는 통에 말이 비틀거렸다. 여기서 말이 고꾸라지기라도 하면 모두가 끝장이다. “파이어 볼Fire Ball!” 그 때를 놓칠세라, 하시피에의 다음 공격이 정통으로 날아왔다. 카라는 아무 생각없이 몸을 내밀었다. 모험이었지만, 먹혀들었다. 파이어볼이 이자드가 쳐둔 방어진에 부딪쳐 사라지며 한순간 주변에 푸르스름한 기류가 흘렀다. 이자드는 카라를 돌아보고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말없이 바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는 병사들이 가장 많이 뭉쳐있는 쪽으로 말을 달리면서 몸을 낮췄다. 아직 한쪽 손에 화염도가 쥐어져 있어 손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포위망에 돌진하면서 왼손에 쥐고 있던 고삐를 놓고 외쳤다. “타파스tapas!” 지금으로서는 뜨거운 열기 정도밖에 나가지 않겠지만, 병사들에게는 그 정도로도 효과가 있 었다. 그는 병사들이 떼지어 도망치는 것을 보며 한 편으로는 안도감을, 또 한편으로는 비침 함을 느꼈다. 그는 다시 고삐를 잡았다. 설상가상이라고, 겨우 잡아채어 품 속에 꾸겨박아둔 난다가 낑낑거리며 고개를 내밀더니 외쳤다. “도와줄 필요 없었습니다!” “시끄러워!” 카라가 등을 꽉 잡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말을 최대한 다그치면서 외쳤다. “움직여서 앞쪽으로 올 수 있겠니?” 카라는 거의 이자드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제법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 난 괜찮아요! 방어진도 나한테 있잖아요. 공격이 뒤에서 날아올 텐데.” 어차피 이 상태에서 서로의 자세를 바꾸기란 무리였다. 하지만 하시피에의 공격을 카라가 다 받아내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화살이……이자드가 뭔가 더 생각하기 전에 퓨웃- 하는 이질적인 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자드를 잡고 있던 카라의 손이 느슨해 졌다. 이자드는 순간 고삐를 놓고 굴러떨어지는 카라의 몸을 받았다. “카라!” 다행히 말은 계속 제 스피드를 유지했다. 이자드가 손을 놓는 순간 난다가 잽싸게 고삐를 이어받은 것이다. 두 사람 무게를 싣고 달리는 것치고는 대단한 말이었다. 이자드는 몸을 틀 어 뒤쪽에서 쫓아오는 병사들을 확인하며 다급히 카라의 상처를 살폈다. 오른쪽 어깨를 관 통해 나간 것은 다행이었지만 날아온 기세가 너무 강했다. 빗장뼈가 부서진 것 같다. 피가 솟구쳐 이자드의 손을 흠뻑 적셨다. 카라의 검은 눈은 크게 열려 있었다. 새까만, 어둠. 순간 이자드는 머릿속에서 거대한 망치가 천공을 두들기는 것 같은 거대한 텅! 소리를 듣고 숨을 멈췄다. 아니, 소리가 아니라 그저 느낌이었을까. 머리속이 진탕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 은 것 같은 느낌. 이 자리에서부터 하늘 꼭대기까지를 한 줄의 현에 꿰어 세게 퉁긴 것 같 은 느낌. 모든 것이 흔들렸고, 사실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같은 것을 느꼈는지 난다 의 몸이 흔들리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들을 태운 말은 잠깐 주 춤하는 것 같더니 약간 느려진 속도로나마 계속 달렸다. 이자드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 신을 차리려 애쓰며 카라를 힘주어 붙잡았다. “……카라.” 그는 속삭이듯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샌가 크게 열려 있던 눈은 감기고 뻣뻣이 굳었던 몸은 생기없이 축 늘어져 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뒤쪽을 확인했다. 추 격자들이 조금 멀어져 있었다. 문득, 뭔가 흰 것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땅으로 내리꽂히는 백색의 창. 이자드는 최면에 걸린 듯 칼을 든 손을 내밀어 그 창을 받았다. 차갑다. “눈……?” 눈이 내리는 지방이 아니다. 눈이 내릴 철도 아니다. 하늘에는 비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러나 이자드가 찢어진 검은 장갑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눈송이를 들여다보는 동안 눈발은 점점 강해져 하늘을 하얗게 덮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눈에 바람이 가세해 거친 눈보라로 바꾸어 놓는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라의 상처를 어떻게든 해야 했다.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나?” 난다도 눈 때문에 넋을 잃고 있었을까. 그 말이 자신에게 날아온 질문임을 뒤늦게 깨달은 용족은 천천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눈발이 점점 강해진다. 추격자를 따돌리기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결국은 고꾸라져 버린 말을 버리고 눈보라 속을 걸으며 내내, 이자드의 마음 속에는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8. 공명 #5. 파문 츠즈즈즈즈즈…챙! 하프현은 끊기고, 노랫소리는 예기치 않게 멎었다. 연이어 끊어져 나가는 하프줄 소리는 높 은 천장과 기둥에 부딪쳐 공명을 일으키며 점점 커져 간다. 소리가 소리를 잡아먹고 다른 소리를 먹여 너른 궁전 안을, 바닷속 전체를 채울 듯 퍼져나가다가……한순간, 뚝 그쳐버린 다. 리아로는 그제서야 하프 앞에서 몸을 일으키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홀 위로 까 마득히 높은 곳에 뻗은 천장에서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기묘한 빛을 투과시키며 바닷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희미한 빛을 발하는 심해의 물고기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둠 속을 유 영하고 있다. 축제날에 거리를 밝힌 화려한 등불 같은 해파리가 둥실 몸을 일으킨다. 그 풍 경은 여느 때의 바닷속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닷물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리아로의 변화무쌍한 눈동자는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다. 그곳에서부터 진짜 하늘까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바닷물을 꿰뚫어 보려는 듯…… 궁전 안 여기저기에 놓여있던 정교한 얼음조각들이 예고도 없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소년 모습을 하고 있던 정교한 조각이 쩍 갈라지더니 목과 어깨부분까지가 뚝 떨 어져 나와 바닥에 부딪치며 와장창 부서져 버렸다. 물론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지만, 일그러진 채 남아있는 조각의 얼굴은 비참한 시체처럼 참담하다.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종소리 같은 진동소리가 궁전 안을 가득 채우며 퍼져나갔다. 마침내 리아로는 겁먹은 얼굴로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권속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내리고 있다.” 시녀들은 잠시 멍한 얼굴로 여왕을 마주 쳐다보았다. 리아로는 되풀이해서, 이번에는 힘을 주어 말했다. “눈이 내리고 있어!” 어린 시녀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우며, 얼음조각들이 내지른 비명소리를 덮어버렸 다. 리아로는 공포에 질린 시녀들에게 호통을 치지 않았다. 어린 시녀들로서는 당연한 반응 이었다. 눈이 내린다는 것은 겨울이 온다는 것, 겨울이 온다는 것은 아버지 뮤로아가 깨어난 다는 뜻이다. 그리고 뮤로아가 깨어나면,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는 어린 시녀들은 반 이상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 뻔했다. “소란 떨지 말아라! 어서 준비를 시작해!” 리아로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나마 침착을 유지하던 시녀장이 호통을 쳐가며 시녀들을 진 정시켰다. 시녀장은 평소에 대비했던 대로 빨리 움직일 것을 명하고 리아로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도 긴장과 의혹이 가득했다. “아직 뮤로아님이 깨어나실 시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지역에 눈이라뇨?” 리아로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래 수룡 뮤로아가 깨어나, 딸 리아로와 교대해서 바다를 다스리는 것은 일년 중에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시간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바다가 차가워질 때. 그리고 지금은 그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눈이라니. 이쪽에서는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거늘……리아로는 다시 눈을 들어 천장 위, 까마득한 바닷물 너머 하늘에서 쏟아 지는 눈보라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방에서 얼음조각이 깨어지며 높고 낮은 음색의 종소리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 “말도 안돼.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마법사에 대해선 이야기책에서도 본 적이 없어!” 카데인은 날뛰는 말을 힘겹게 잡아당기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갑작스레 온도가 내려가는 바 람에 바다에서부터 안개가 밀려와, 주위가 온통 뿌연 운무로 뒤덮이고 있었다. 아니, 운무만 이 아니라 그 위에 가느다란 눈보라까지 겹쳐 있다. 이미 앞쪽은커녕 왔던 길도 되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북쪽 지역에서나, 그것도 한겨울에나 내릴 법한 폭풍우였다. 더 이상 추적을 계속하기는 무리였다. 하시피에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앞쪽을 가로막은 흰 색 방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법이 아니야.” “뭐라고?” “당신 말마따나, 어떤 마법도 이런 일은 하지 못해요.” “마법이 아니라? 그럼 이게 무슨 천재지변이오?” 천재지변이라는 표현은 더 나빴다. 겪어보지도 못한 눈보라에 질려있던 병사들 사이로 파도 처럼 웅성임이 퍼져나간다. 카데인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혀를 깨물 뻔 했다. 하시피 에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이 고개를 돌려 카데인을 향해 눈을 번득였다. “지금 그를 해치우지 못하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눈보라를 멈춰 보시오, 마법사.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이 이런 눈보라 속에서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만들어 주든지.” 카데인은 차갑게 쏘아붙이고 다시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덧붙였다. “나는 이런 눈보라를 잘 알아. 이런 날씨 속에서 만용을 부리다간 오도가도 못하고 얼어죽 기 십상이오. 도망치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요. 다친 어린아이까지 있으니까…” 카데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하시피에는 고개를 돌려 다시 흰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과 눈에 언뜻 차가운 비웃음 같은 것이 스쳤다. 카데인은 병사들을 독려하여 방 향을 잡으며 다시 말했다. “눈만 그치면 사방에 군사를 풀어 이잡듯이 뒤지지. 그 상처가 그리 쉽게 낫진 않을 거 아 뇨.” 하시피에는 그를 흘긋 돌아보며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더니, 입을 다물고 말머리를 돌렸다. ** 눈은 순식간에 발목까지 쌓였다. 이자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언제까지 내릴 작정일까. 온 밤 내내? 이건 거의 겨울 폭풍우 수준이지 않은가. 머리를 범종처럼 내리치던 이상한 통증은 그럭저럭 가셨지만, 피곤 때문에 머리속에 구름만 잔뜩 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카라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행히 숨은 규칙적으로 쉬고 있지만, 호흡 간격이 너무 멀다. 언제 였더라? 전에도 이런 식으로 정신을 잃고 있었지……흐릿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그의 머리속을 꽉 채우는 생각은 어딘가 피할 곳을, 추적이 아니라 눈보라를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자꾸만 흐려지는 눈 앞을 문지르며 주위를 살폈다. 주위라고 해봐야 아직 옆에 버티고 있는 난다를 제외하면 온통 새하얀 세상 뿐이다. 난다는 그럭저럭 버틸만 해 보였다. 무기력 한 어린아이처럼 보여도 뼈대와 근육은 용족의 것이니까. 카라를 안고 있는 이자드 쪽이 상 태가 훨씬 안좋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눈을 비볐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침이 오기를 이렇게 간절히 바란 적이 또 있었던가? 이 난리통에도 아랑곳없이 잘도 자고 있을 루이를 생각하니 피곤만 더 쌓이는 것 같기도 하 다. 품에 안고 있는 카라의 몸은 너무나 작고 무기력하게만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 무게를 떠안기가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 위로 내리쌓인 눈을 털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그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할 수밖에…… ** “왜 그러십니까?” 비델은 명령을 내리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돌린 주인을 향해 물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주인은 무엇인가, 그녀가 들을 수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녀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휘안 알 바르카는 흑자색 눈동자에 이채를 발하며 중얼거렸다. “눈이라……? 어처구니없군.”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비델은 조용히 알 바르카를 지켜보기만 했다. 어린아이 모습을 취하고 있던 그녀의 신은 문득 눈부신 미소를 머금으며 손바닥으로 검은 돌 의자를 내리쳤 다. “이제야 알겠다.” 그는 비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알 바르카의 모습은 완전히 변하 고 있었다. 둥글던 눈매는 가늘게 찢어지고 목덜미까지 오던 짧은 머리카락은 짙은 물감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처럼 길어져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부풀어오 르고 어깨는 성큼 넓어진다. 창백한 안색은 그대로였지만 얼굴 윤곽이 날카롭게 다듬어지고 눈썹이 짙어졌다. 멀리서 보면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확실히 균형이 잡힌 어른 남자의 몸. 휘안 알 바르카는 팔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켜며 고양이처럼 몸을 휘어뜨리더니 완전히 달라진 형태로 몸을 일으켰다.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비델에게 명을 내렸다. “시더 쪽에서 들어오는 소식은 모두 내게 직접 가져와라. 그리고 마법사와 마녀들이 그쪽 에서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알아오도록.” 비델은 가만히 허리를 굽혀 복종을 표했다. 신에게는 이유 같은 것이 필요치 않다. 그녀는 알 바르카가 왜 그 자의 모습을, 이자드라는 이름의 마법사와 똑같은 모습을 취했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정작 그녀에게 의문을 불러 일으킨 것은, 왜 평소처럼 누군가와 완전히 똑 같 은 모습을 취하지 않았는지 하는 점이었다. 지금 알 바르카의 모습은 이자드와 거의 같은 것이었지만, 머리카락만은 그보다 훨씬 길었으므로. ** 어둠. 언제나 그 안에 그대로 있었던, 그대로의 어둠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조차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 편안했다. 추락하고 있었다. 천천히……그러나 어디로? 위에서 아래로인가? 혹은 아래에서 위로인가?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고, 밝으면서도 어두운 곳. 문득 눈앞이 밝아졌다. 탑이다. 하늘 끝까지 닿은 듯 뻗어올라간 ? 혹은 땅끝까지 뻗어내려간 탑 바깥으로 이어진 나선의 계단을 누군가가 힘겹게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늘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실재할 수도 없을 듯 새파란 하늘. 날개가 퍼득인다. 은빛의. 깃털인가? 눈인가? 떨어지고 있다. 하늘 가득히. 누군가가 속삭였다. <눈이 내리는 것을 봤지. 그게 너였구나. >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것은, 거울에 비춘 듯 똑같은 얼굴. 그러나 마주보고 있는 핏빛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춰져 있지 않았다. 장갑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발이 칼날에 닿았다. 눈앞이 새빨갛게 변한다. 그리고 다 시 어둠. 카라는 오한에 몸을 떨며 깨어났다. 9. 부러진 날개 (1) 목덜미로 서늘한 한기가 기어든다. 카라는 몽롱한 정신에도 몸을 부르르 떨며 담요를 더듬 어 찾았다. 그러나 담요 같은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뭔가 묵직한 것이 가슴을 누르는 느 낌이 남아 허공에 손을 휘저어 봤지만 역시 아무 것도 없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신이 돌 아오면서 바닥이 딱딱하다는 깨닫는다. 주위가 차갑다.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은 한 겹의 천 뿐이었다. 눈꺼풀을 들어올렸지만, 처음 눈을 뜬 순간에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 눈 안에 이물질이 가득 낀 것 같다. 비비려고 손을 들려는데 어깨가 찌르는 것 같이 아파온다. 온몸이 비명을 지른 다.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비명을 삼키고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고 나자 그제서야 주위가 온통 바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도, 아래도, 옆도 바위. 빛을 찾아 시선을 더듬다 보니 저쪽에 겨우 살아있는 존재가 하나 보인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 옆모습만 보이지만, 아름다운, 투명하게 빛나는 은발이 검 은 옷 위로 몇 가닥 흔들리고 있다. 그 옆으로 터진 좁은 구멍에서 빛이 새어들어와 은빛 머리카락을 눈부시게 비춰주고 있다. 카라는 멍하니 그 머리카락 위로 떨어지고 있는 햇빛을 쳐다본다. 해가 났는데...왜 이렇게 춥지? 그러나 바싹 마른 입술에서 새어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루이는?” 순간 은발의 아이는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카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깨어났느냐, 몸 은 어떠냐 같은 질문은 일체 없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람 말입니까?” 카라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난다는 찌푸린 표정 그대로, 이렇다할 설명도 없 이 벌떡 일어나서는 동굴 입구를 거의 막고 있는 눈을 헤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구멍이 커지면서 슬금슬금 기어들어온 햇살이 카라의 얼굴 앞까지 손을 뻗었다. 카라는 비스듬히 누워서 그 햇살을 쳐다보았다. 아니, 쳐다본다기보다는 그저 하릴없이 눈만 고정시킨 채 천 천히 머리속을 씻어냈다. 여러 가지 생각과 이미지가 조각 조각 떠돌다가 하나씩 맞춰져 들 어가는 것 같다. 우선 루이가 없다는 것부터 확인. 어처구니없는 사람이라니, 루이가 또 무 슨 짓을 한 걸까? 그 다음으로 깨달은 것은 덮고 있던 얇은 천이 다름아닌 이자드의 로브라 는 것. 찢어진 데다가 군데 군데 핏자국까지 남아있다. 서서히 기억이 되살아난다. 맞아. 화살에 맞았지. 이제야 팔에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카라는 다 시 머리를 움직여서 햇살이 새어들어오는 입구를 쳐다본다. 눈……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북쪽까지 올라왔을까? 이자드의 마법인가? 아니면 하룻밤이 아니라 여러 날이 지난 건가. 카라는 문득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에 얼굴을 찌푸린다. 뭔 가, 검붉은 색으로 가득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머리속을 맴돌기만 할 뿐 생각이 나지 않는다. 카라는 멍하니 누워서 생각을 더듬어 보다가 결국 성한 쪽 팔만으로 몸을 지탱해서 비틀다 시피 일어난다. 이제서야 조금 짜증이 난다. 루이는 대체 어딜 간 걸까.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아이도 가버린 건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입구가 어두워진다. 난다가 나뭇가지를 한아름 안고 들어오고 있다. 그는 나뭇가지를 바닥에 쏟아놓고, 옷깃에 묻은 눈이나 흙은 털 생각도 하지 않고 털 썩 주저앉아 화톳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카라는 눈만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불을 꺼 뜨린 지 한참 지났는지 남은 불씨가 없다. 할 수 없다는 듯 난다는 나뭇가지를 모아 비비기 시작했다. 동작에는 어색한 데가 없지만 왠지 어울리지가 않는다. “불이 잘 안붙네.” “눈이 녹기 시작해서 바짝 마른 가지가 없습니다.” 카라는 잠시 난다가 묵묵히 나뭇가지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코를 문질렀다. 연 기만 날 뿐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다. “저, 너 마법사잖아. 왜 손으로 하는 건데?” “지금은 마법을 쓸 수 없습니다.” “아직 덜 나은 거야?” “하룻밤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하룻밤?” 카라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사이를 두고 묻는다. “어떻게 이렇게 멀리까지 도망친 거야? 이자드도 마법을 쓸 수가 없었을 텐데.” 그 때까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하던 난다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카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난다의 깎아만든 인형 같은 얼굴이 살짝 구겨지는가 싶더니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어젯밤에 내린 겁니다. ” 카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크게 뜬다. “여긴 눈이 내리는 지역이 아니잖아!” 다시 대꾸할 필요도 없는 일. 난다는 아예 불붙일 생각을 단념한 듯, 카라를 찬찬히 뜯어보 고 있다. 그의 눈은 역시 카라의 귀에 매달린 푸른 돌에 쏠린다. 라피스 라줄리. 난다가 알 기로 라피스 라줄리의 용도는 두 가지밖에 없다. 마력을 제어하거나, 매개물로 쓰이거나. 그 래서 그는 처음부터 카라를 어느 마법사의 개인 제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라피스 라줄리는 그 마법사가 준 겁니까?” “응. 나한테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고.” 난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고개만 천천히 끄덕인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 앉는다. 난다는 다시 불피우기 작업으로 돌아간다. 질리지도 않는 듯 같은 동작만 반복. 슬 슬 따뜻한 불이 그리워졌다. 게다가 배도 고프다. 카라는 기다리다 못해서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아날라anala.” 순간 난다는 고개를 번쩍 들어 카라를 쏘아봄과 동시에 동굴 안에 푸른 불꽃이 휘몰아쳤다. 카라는 불꽃을 피해 고개를 숙이면서 소리쳤다. “나뭇가지에 붙으라고, 나뭇가지에!” 다행히 불꽃은 순식간에 사그러들었다. 카라는 성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변명 겸해서 투 덜거렸다. “귀고리도 별 도움이 안되네. 미안해. 불을 피워보려던 건데.” 말하면서 건너다보니 난다는 침착한 얼굴로 모닥불을 지피고 있다. 타닥, 타닥, 꾸준히 나뭇 가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나면서 푸른 불꽃이 따듯한 주홍색으로 변해간다. 불꽃이 공중에 휘몰아치는 순간 들고 있던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는 것쯤이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 다. 카라는 감탄한 듯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지만. 난다는 삭정이와 나뭇가지를 더 쌓아올 리고 나서 조용히 말한다. “마법사가 아니군요.” “응? 응.” “그렇다고 용족도 아니고.” 묘하게 신경을 긁는 침묵이 흘렀다. 카라는 난다의 눈치를 살피며 불가로 조금 다가갔다. “물론 아니지.” 난다는 잠시 동안 불꽃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확인차 물어보기는 했지만, 용족의 힘 이 아니라는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용족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 여자아이는 뭔가. 마법과 비슷한 힘을 구사하는,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종족? 그가 알기로는 마족 정도밖에 없지만, 마족이라고 해서 타인과 같은 마법색을 낼 수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주문을 외워야 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고. 그 검은 머리 마법사가 사용하는 주문체계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아직 그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 뭐, 어차피 용족이나 마법사가 아니라면 상관없다. 난다는 나뭇 가지를 딱 소리나게 부러뜨리며 혼잣말 하듯 말을 이었다. “조절은 잘 못하나 보군요.” 카라는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다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 이기도 하고 더 불안하기도 하다. 이자드는 카라의 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 을 상당히 꺼렸다. 그 영향인지 카라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난다는 나뭇가지를 또 하나 꺾 으며 말한다. “상관은 없지만, 조절할 수 없는 힘이라면 쓰지 않는 게 좋겠군요.” 따끔한 일침. 게다가 카라의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의 난다의 말투는 상당히 껄끄러웠다. 희미한 혐오감, 경멸 같은 것이 깔려 있다는 느낌. 난다가 이제까지 거 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만큼 그 정도의 희미한 차이도 크게 느껴진다. 카라는 왠지 울 적해진 기분으로 모닥불을 응시했다. 따듯한 주홍색 불꽃. 금새 열이 오르는 것 같다. 게다 가 배가 더 고파온다. 게다가 깨어난 순간부터 말라있던 입술이 말을 하느라 한층 말라붙었 다. 카라는 입술을 핥고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날리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와 모닥불을 흩어놓는다. 녹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밖은 여전히 새하얀 눈밭이 었다. 가서 눈을 한주먹만 집어오면 일단 목은 축일 수 있겠는데, 일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 다. 카라는 다시 한 번 입술을 핥고 어쩔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난다가 고개를 들더니 카라 옆에 시선을 던졌다. 그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통증에 잠시 멈칫, 반대쪽으로 몸을 빙 돌려 보니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카라는 앉은 자리에서 엉금엉금 손을 뻗어 그릇을 잡고 끌어당 긴 다음, 담겨 있던 물을 한달음에 다 마셔버렸다. 물을 다 마시고 나니 한결 괜찮아진 기분이다. 카라는 조심조심 아픈 어깨를 만져보았다. 난 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만 위쪽을 맞았으면 팔을 쓰지 못하게 됐을 겁니다. 조금만 아래쪽을 맞았으면 심장 을 꿰뚫었을 겁니다. 아슬아슬하게 잘 관통했더군요.” 이게 좋은 얘기라고 해주는 건가. 카라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어색하게 말했다. “...어, 운이 좋았단 얘기네.”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사실은 카라가 불편해하는 것 이상으로 난다 쪽이 더 난처해하 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것이 너무 오래 전이다. 특히나 어린아이는 거 의 대해본 적이 없다. 그는 잠시 침묵에 잠겨, 기억을 돌이켜 보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결 코 무뎌지지 않는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과거의 흐름을 끊어버 리고 어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늦는군요.” 나름의 생각에 빠져있었는지, 아니면 졸고 있었는지 카라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다. “응?” “무슨 사정인지는 알 바 아닙니다만……” 그가 말끝을 흐리자 카라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알겠다는 듯 비식 웃는다. “아아, 루이 말이야?” 9. 부러진 날개 (2) "하아아아아아아앗-!!" 루이는 요란한 기합소리와 함께 양손으로 쥔 화염도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내리 찍었다. 본래 화염도는 길이 1하스타에 세 손가락 정도 너비밖에 안되는 작은 칼이지만, 지 금은 새하얀 불꽃이 2하스타에 가깝게 길게 뻗어나가 있는 데다가 칼날 위로도 불길이 넘실 거리고 있었다. 본래의 화염도가 몽당자루로 보일 정도로 큰 칼이다. 그리고 그 칼이 지나간 부분의 기둥은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무게를 받칠 힘을 잃어버리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요란한 소리가 루이의 기합소리는 물론이고 마법사들의 비명소리까지 삼켜버렸다. 루이는 자욱하게 깔린 먼지구름 속을 몇 걸음 전진했다. 갑자기 양옆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불덩이와 얼음화살이 동시에 날아왔다. 루이는 왼쪽 손목만을 돌려 깨끗하게 마법 공격을 쳐내 버렸다. 방향을 잃은 공격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터져버렸다. 어느새 그의 앞에 포진해 있던 마법사들이 숨을 들이키며 허둥 지둥 몸을 피했다. 대열이 엉망이다. 루이는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이를 드러내고 웃었 다. “이거 이거, 정말 도움이 안되는 가드들이로군 그래. 그런 구닥다리 주문밖에 못쓰냐, 응?” 그리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화염도의 칼날을 뒤집어 수평으로 베어쳤다. 화르 륵 백색의 불꽃이 오른다. 마법사들은 순간 움찔 하며 뒤로 물러섰다. 루이는 앞으로 중심을 실으며 외쳤다. “바보 자식들. 기싸움에서부터 지는 것들이 감히 내 앞을 막아? 비켜 비켜 비켜엇-!!” 지금은 싸움을 할 때마다 당연한 듯 머리속에서 울리던 그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거의 잠을 자지 않는 이자드도 어제의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그것이 루이 를 더 난폭하게 만들었다. 한 번의 위협만으로도, 마법사들이 방어진을 치기 전에 앞으로 이 동하기는 쉬웠다. 설령 방어진을 친다 해도 화염도에 뚫리겠지만. 루이는 흘끗 화염도를 내 려다보고 칼날을 약간 줄였다. -이자드가 깨어있었으면 보나마나 미련하다고 잔소리를 퍼붓겠지. 흥…나도 안다. 이렇게 휘 둘러선 오래 못간다는 정도는. 쌔애애액! 이번에는 천 찢는 소리같은 파공성과 함께 지팡이 머리부분이 몇 개 공중에 날았 다. 루이는 파죽지세로 방어진을 뚫고 달려들어가, 정면 문을 쾅 소리나게 걷어차 열며 외쳤 다. “하지만 이래도...열이 식질 않는 걸 어쩌냐!!” 마법 주문이 걸려있던 문은 산산조각이 나며 온 방안에 파편을 날렸다. 의외로 그 때 막 책 상에서 일어난 인물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구루하는 파이프를 탁자 위에 톡톡 두들 기며 말했다. “허허, 이것 참 성질 더러운 자로군. 뭘 하자는 건가? 실력 과시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거라면 장소를 잘못 찾았...” “엉뚱한 소리 하지마!! 하시피에는 어디 있지?” “하시피에......? 뭔가, 개인적인 문제였나?” 구루하는 진심으로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루이의 눈에 그의 표정 같은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한달음에 책상 위로 뛰어올라 구루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자꾸 시간 끌어봐야 소용없어. 지금 너희 떼거리 머릿수를 믿나 본데, 다 몰려와 봐야 네 목숨을 구하기에도 역부족일걸. 하시피에가 나온다면 또 모르지만.” 칼날같은 살기가 눈을 찌르고 들어가자 구루하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러나 아직 미소는 잃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꼴을 당했어도 그는 명실공히 리베르 문디의 수장이었다. “글쎄. 날 죽인다고 뭐가 나올지 모르겠군.” “뭐?” “하시피에는 여기 없어. 그리고 난 자네가 왜 이러는지 이유는 물론이고, 자네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하! 헛소리 하지 마. 한 번 거짓말을 치더니 이젠 버릇이 됐나? 그러고도 마법사야? 말해 봐. 왜 배신을 때렸는지, 그리고 긴나라족은 어디 있는지. 설마 내 코앞에서 또 거짓말을 하 진 않겠지.” “천만에. 난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아!” 구루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이제까지 유지하고 있던 얄미운 태도를 완전히 깨는 것이어서, 루이조차도 멱살을 쥔 손에 힘을 뺄 정도였다. 구루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배신이라고?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게다가 자네는 탑 앞에 나타나서부터 자신이 마슈라고 주장하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자넨 지금 칼을 들 고 있잖나, 마법사가 아니라. 마슈라면 어째서 마법을 쓰지 않지? 마슈가 늘 가면을 쓰고 다 닌다는 걸 이용해서 리베르 문디를 공격하는 건가, 지금?” 순간 루이는 말문이 막혀 멈칫하다가, 쥐고 있는 멱살만 바싹 잡아당겼다. “...내가 마슈야.” “그 말만으로는 증명되지 않네.” 루이는 무서운 눈으로 구루하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구루하는 쉽게 밀리지 않고 말을 계속 이었다. “좋아. 힘으로 자네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건 인정하지.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탑을 무 너뜨리고 싶은가? 리베르 문디를 쓸어내고 싶은 건가? 혹 무슨 원한이 있다면 원한있는 당 사자에게 풀 일이고, 오해가 있다면 차근 차근 설명부터 해야 할 일. 막무가내로 드잡이질을 하면 단가?” 루이는 잠시 침묵했다. 지금 구루하의 말에는 하나 틀린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그렇습니까 하고 얌전히 물러날 상황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다. 오히려 구루하의 말에 제 대로 대꾸를 할 수가 없으니 울화통만 더 커진다. 그는 조용히 구루하의 멱살을 풀며 화염 도를 그 옆에 꽂았다. 불꽃을 죽이기는 했다지만 시퍼렇게 이글거리고 있는 화염 칼날이 구 루하의 얼굴 옆을 스치면서 턱수염을 몇 가닥 태워버렸다. 구루하는 얼굴 바로 옆에서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루이는 맹수가 숨을 죽일 때처럼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좋아. 나는 마법사가 아니다. 하지만 너와 거래한 것은 나다. 난다는 왕을 죽이지 못했어. 하시피에는 어디 있지? 그리고 긴나라족은?” 구루하가 무슨 명령을 내려놓았던 것일까. 허둥거리면서도 루이를 막으려 애쓰던 마법사들 도 정작 이 방으로는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 구루하가 자신의 추태를 드러내기 싫 어서 막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법으로 방어진을 쳐놓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루이는, 화 염도를 쥐고 있을 때의 그는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 잠시 동안 방 안에는 구루하의 숨소리와, 화염도 날이 책상을 태우며 나는 지직거리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구루하가 입을 열었다. “그 두 가지를 다 답하라는 건가, 지금?” 루이의 눈이 흔들리며 입꼬리가 도저히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느낌으로 말려올라갔다. “지금 나하고 흥정하자는 거야?” “어차피 걸려있는 건 내 목숨이고, 내 목숨은 하나 뿐이지.” 루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시피에냐, 긴나라족의 생존자냐. 선택은 순식간이었다. “……긴나라족의 생존자에 대한 정보는?” 구루하의 눈에 언뜻 의외라는 듯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동료를 배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좀 더 값어치가 있을지도 모르 는 귀한 정보를 뱉어내야 한다는 점을 억울하게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알고 있는 사람을 알지.” “뜸들이지 마. 누굴 기다리는 지는 몰라도 소용없을 테니까.” 구루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내가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있겠나. 리베르 문디의 장인 내가 속수무책인 상대에게 누가 뭘 어쩔 수 있겠어?” 루이는 퍽 소리를 내며 화염도를 뽑아쥐었다. “알았네, 알았어. 다만 부탁인데 대체 이 모든 소동이 왜 일어난 건지 정도는 알려주지 않 겠나?” “그런 건 하시피에에게 물어봐.” 구루하는 이마를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마지못해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뭐라고?” “신임 왕실 마법단장. 공교롭게도 놈의 이름도 마슈로군.” 순간 루이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구루하는 그의 표정을 훔쳐보며 수염을 약간 떨었다. 회심의 미소인지, 그저 자신의 체면을 엉망으로 구겨놓은 놈이 당황한 데 대해 고소해하는 웃음인지 알 수가 없다. 루이는 호흡을 몇 번 조정한 다음, 자세를 바로세웠다. 그는 소리없 이 그 이름을 되뇌이다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다시 구루하를 쳐다보았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순간 구루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목소리가 버럭 올라갔다. “난 마법사다! 진실의 일부만 말할 수는 있어도, 거짓말은 못하는 게 마법사라는 것도 모르 나? 애초에 내 말을 안 믿을 거라면 무엇 때문에 칼을 겨누고 사람을 다그친 거지?” “아, 알았어, 알았어. 뭐 그렇게 펄펄 뛸 것까진 없잖아.” 루이는 이제 완전히 화가 가라앉아버린 심상한 목소리로, 짜증내는 어린아이처럼 손사레를 치며 말하더니 돌아서 버렸다. 구루하로서는 한층 더 복장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구루하의 얼굴이 막 터질 듯이 자줏빛으로 부풀어오르는데, 몇 발자국 걸어나가던 루이가 다시 몸을 돌리며 불쑥 말했다. “하시피에를 만나거든, 필히 전해줘. 이자드가 용서했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용서 못한다 고. 다음에 나랑 마주치면 당장 죽은 목숨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는 구루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 그를 기다려서 쳐놓은 마법 그물을 한 칼에 찢어버리고, 함정 몇 개를 망가뜨리는 김에 바닥에 방 하나만한 구멍을 뚫 고, 정문 현관마저 무너뜨린 다음, 거리로 나섰다. 전날의 난데없는 눈보라에 이어, 아침부터 벌어진 대소동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불똥이라도 튈까 무서워서 납작 엎드린 채, 거리에 나 오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몇 사람이 호기심을 못이겨 문틈이나 구멍 사이로 엿보고 있기는 했지만, 그거야 루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는 생각에 빠진 채 텅빈 거리를 걸어가서 큰 길로 빠져, 황야 쪽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이 한참 멀어진 다음에서야 사람들이 거리 로 쏟아져나와서 엉망이 된 ‘탑’을 보며 입방아들을 찧기 시작했다. 방향도 없이 마구잡이로 걷고 있는 루이의 머리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쾅 소리나게 동굴 천장에 머리를 박고, 우두둑소 리나게 관절을 돌리며 투덜거리다가 주위를 보니 카라는 언젠가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잠들 어 있고, 이자드와 박터지게 싸웠을 난다라는 녀석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며 자신을 쳐 다보고 있는 데다가, 추웠다. 밖을 내다보니 발목까지 쌓인 눈이 막 떠오른 햇빛을 받아 눈 부시게 빛나고 있다. 루이는 잠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가, 난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자드에게 물었다. 그리고 지칠 대로 지친 이자드가 최대한 조리있게 설명해준 상황을 듣자 마자 그대로 뛰쳐나와버린 것이다. 상황이라고는 해도 제대로 들은 거라곤 카라가 다쳤다는 것과, 하시피에가 함정을 놓았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가 난다에게 보여준 모습이라고는 천장에 주먹질을 해서 돌가루를 날리며 버럭 버럭, 말 리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동굴 입구에서 홱 몸을 돌려 난다에게 “어이, 좀 부탁한다.” 고 말한 것밖에 없었다. 그러고서 한달음에 시더까지 달려와 버렸으니 난다가 그를 ‘어처 구니없는 사람’으로 기억해버린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되고 보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루이는 시내를 벗어 나서 어정쩡하게 멈춰서서 화염도를 갈무리해 허리춤에 꽂았다. 눈이 녹으면서 길이 질척한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눈덩이를 걷어차면서 중얼거렸다. “마슈라니……” 원래 이자드가 쓰던 이름이다. 물론 같은 이름의 마법사가 또 있을 수도 있겠지. 있을 수야 있겠지…하지만. “알 바르카 녀석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그놈이 또 뭔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루이는 툴툴거리며 다시 한 번 눈덩이를 걷어차 날렸다. 하기는, 20년 동안 찾아헤매고서도 몰랐던 소식이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알 바르 카라니. 그렇다면 놈이 정말로 긴나라족의 생존자를 아는 건지, 아니면 사기를 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또 무슨 함정을 치는 건지 알 수가 없잖은가. 구루하에게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되는 짓이다. “알 바르카라니……” 루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녀석이 사기를 친 거라면, 오히려 실망은 되겠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진짜라면? 그 놈이 정말로 긴나라족의 생존자에 대해 알고 있거나 더 나쁜 경우 손에 쥐고 있고, 그걸 미끼로 쓸 작정이라면? 눈앞이 아찔하다. 하지만 그녀석은 루이와 이자드가 파류나 왕을 만나기 전에 상처를 입고 물러났었다. 최근에 다시 깨어난 거라면, 대체 어떻게 긴나라족 문제를, 그리고 그들이 그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 실을 알아낼 수 있었던 걸까. “아아아악! 머리 복잡해!!” 루이는 생각을 하다 하다 못해서 나무둥치에 머리를 부딪치며 괴성을 질러댔다. 머리를 쿵 쿵 부딪칠 때마다 우수수 눈가루가 떨어져, 먼지에 덮힌 몸 위에 다시 한 번 껍질을 씌운다. 한참 나무둥치에 머리를 박고 머리를 식힌 다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푸른색과 은색의 하늘이다. 파류나의 색깔과 같은 하늘. 루이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다가 털레털레 머리를 흔들어, 돌가루와 눈가루와 잡생각을 한 꺼번에 털어버렸다. 생각 같은 건, 이자드가 깨어나면 녀석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설쳐대느라 속이 빈 것도 잊고 있었다. 이제서야 배가 고파온다 싶더 니 순식간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비명을 올려댔다. 게다가, 이제서야 깨달은 것은 주린 배만 이 아니었다.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도 못한 카라를, 위험천만한 꼬마녀석만 옆에 붙여놓은 채 남겨두고 왔다는 것. 그리고 더 치명적인 것은, 흥분해서 뛰쳐나오느라 그 동굴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길을 기억할 수가 없다는 것. 난다는 그 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모닥불만 바라보며 나뭇가지를 꺾어넣더 니, 어디선가 그릇과 말린 고기를 꺼내어 눈을 끓이고 고기를 불려서 그릇째 카라에게 내밀 었을 뿐. 카라가 눈짓으로 “너는?”이라고 묻자 무표정한 얼굴로 손만 몇 번 흔들 뿐이다. 카라는 망설이다가 그릇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뜨거운 그릇을 한쪽 손으로만 받치려니 손이 부르르 떨린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는데, 정작 한 모금 삼키고 나자 공복감이 밀 려들었다. 카라는 꿀꺽꿀꺽 물만 마시고 그릇을 도로 내려놓았다. 고기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변변한 재료는 없어도 따듯한 게 속에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카라는 “고 마워”라고 말했고 난다는 여전히 대답없이 그릇만 받아서 다시 눈을 한웅큼 집어넣고 끓여 허기를 때웠다. 그 다음에는 다시 침묵. 해는 서서히 중천으로 기어올라가고, 눈이 움푹움푹 녹아들어가면서 동굴 입구도 질척해졌 다. 카라는 루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하다가 다시 잠들어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잠이 들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비몽사몽, 꿈속을 오락가락할 뿐이다. 카라는 뜨거운 눈을 문지르며 몸을 뒤척였다. 팔은 완전히 마비된 것 같아서 특별한 통증은 없었다. 그러나 머리는 지끈거리고, 들이쉬는 숨은 뜨겁게 느껴졌다. 난다는 슬슬 떨어져가는 나뭇가지를 하나씩 불속에 밀어넣으며 동굴 안쪽으로 눈길을 던졌 다. 아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계속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열이 오르는 모양이다. 막 깨어났 을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그런 류의 고통은 잘 모른다. 발로 채이거나 칼에 맞는 류의 통증 이라면 알고 있다. 불구덩이에 떨어지거나 마법공격에 당하는 통증도.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그가 느끼는 통증은 인간의 육체가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으응...” 강아지같은 신음소리. 난다는 무릎 위에 턱을 고이고 그 소녀를 쳐다보았다. 딱, 소리를 내 며 손에 쥔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통제할 수 없는 힘 따위, 질색이야.”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말소리가 유령의 그것처럼 공허하게 울렸다. 순간 카라는 깜짝 놀란 듯 움찔하며 깨어났다. “응? 뭐라고 했어?” “......아니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라는 오한을 느끼며 이자드의 로브를 끌어당겼다. 여전히 난다 뿐이다. 머리가 아프다. 깜 빡 잠이 든 사이 또 기분나쁜 꿈을 꾼 것 같이 기분이 나빴다. 속도 메스껍기만 하다. 카라 는 더듬더듬 물그릇을 찾아 손을 뻗었다. 난다가 소리없이 일어나더니 물그릇을 카라 쪽으 로 밀어주었다. 카라는 한참동안 물을 마신 다음, 그릇을 내려놓았다. 눈은 감은 채였다. 난다는 한층 가까워진 위치에서 카라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특별난 데 없는, 그냥 인 간이다. 병든 인간이 다 그렇듯 약하고 짜증스러운. 카라는 계속 춥기만 한지 몸을 웅크리며 얇은 옷자락을 감아쥐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아픈 건 싫어. 무기력해지잖아 굉장히. 게다가 어린애처럼 징징거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가 비참해져 버리지. 그런 건...화가 나.” 난다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카라가 특별히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헛소리라기 에는 너무 조리가 있지만. 열이 오르지 않았다면 분명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다는 그것을 몰랐다기보다는, 아이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고 나서 나으면 그런 느낌이 들잖아. 한참 동안 어두운 곳에 있다가 커튼을 젖히고 햇빛을 받는 것 같은. 세상이 처음 보는 것처럼 밝고...깨끗하게. 그럴 때는 내가 여 기 살아있는 거구나라는 느낌이 드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좋은 점이 있다고, 그렇 게 생각하지 않으면...그렇지? 그러니까 아픈 것도……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어.” 카라의 목소리와 같이 모닥불이 희미해지고 있다. 난다는 가만히 앉아서 동굴 안쪽의 어둠 을 응시했다. 갑자기 목이 말라왔다. 그는 카라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따뜻하다. 그의 차가 운 손이 기분 좋은지 카라의 숨소리가 차츰 편안해졌다.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 앞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것 같았다. 난 다는 몸이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만 둬.’ 머리 한쪽에서 제동을 걸었다. ‘생각하지 마. 기억해내지 마.’ 그는 공허하게 속삭였다. 무엇을 하려고 했었지? 무엇을 하고 있었지? 그가 쌓아올린 삶은 가느다란 기둥 위에 서있는 성 같은 것이었다. 언제든 와르르 무너져내릴 수 있는. 하지만 난다는 고요히 어둠을 응시한 채, 숨을 가라앉혔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 용히. 그러나 그의 숨소리가 희미해진 다음에도 거기엔 다른 사람의 숨소리가 있었다. 어둠 속에 서 규칙적으로 들리는 숨소리. 사람의 체온. 살아있는 것. 무기력한 생명. 난다는 모닥불이 꺼질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카라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서. 갑자기 찾아왔던 몸의 떨림이 멎으면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반나절만 있으면 몸이 회복될 것이다. 그러면 이 아이 곁에 붙어있을 이유가 없다. 루이라는 자가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는 천천히 카라의 이마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렸다. 9. 부러진 날개 (3) - 대책없는 녀석. 예고도 없이, 차가운 한 마디. 루이는 움씰하며 들고 있던 빵을 떨어뜨렸다가 아슬아슬하게 다시 낚아채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땅에 떨어졌다고 먹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루이는 빵 을 쥐고 비슬비슬 웃으며 입 안으로 중얼거린다. “깨자마자 하는 인사가 뭐 그래?” - 길을 잃은 거냐? “천만에! 배가 고파서 우선 시장기부터 채우고 가려고 멈춘 것 뿐이라고.” 변명을 해가며 증거로 손에 든 빵을 입에 밀어넣어 보았지만, 이자드가 그런 어설픈 거짓말 에 속을 리 없다. 해는 중천을 넘어가고 있다. 루이는 몇 시간 동안 황무지를 뱅뱅 돌다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가게 앞에 앉은 참이었다. 레투스에서 시더로 이어지는 대로 변이다. 평소에는 레투스에서 시더로 가는 상인들의 마차와 달구지가 줄을 잇는 곳이지만, 간밤의 눈보라 때문인지 오늘은 아직까지 지나는 손이 많지 않다. 지나는 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파는 것이 업인 가게 주인은 녹아내려 질척이는 눈길에 나 있는 몇 줄의 바퀴자 국을 보며 투덜거린다. 눈을 치우고 길을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유지비는 더 뜯어갈 텐데 손 님은 줄었으니 투덜거릴 만도 하다. 루이는 잠시 동안 앞에 놓인 음식을 입 안에 쓸어넣는 데 몰두하고, 이자드는 또 말이 없다. 루이는 물을 쭉 마시고 컵을 내려놓으며 눈치를 살폈다. “야, 또 자는 건 아니지?” - 생각을 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이자드의 목소리는 약간 잠긴 데다가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른 사람처럼 쉬어 있었다. 루이 는 코끝을 문지르며 적당히 가감을 섞어서 아침의 일을 이야기했다. 이자드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이야기가 신임 왕실마법단장이 마슈라고 자칭한다는 데 이르러서는 희미하게 코웃음 을 쳤다. - 마슈라고? 그래서, 그 놈에게 달려가보지 않고?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야!” 이자드는 대답 대신 뜻이 전해질 만큼 긴 정적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 돌아가자. “물론 돌아가야지. 에…길 기억하지?” - 길 잃은 게 아니라면서. “아니, 뭐 그거야……” 루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일어나다 말고 엉거주춤, 동작을 멈췄다. 어느 새 주위에 험상궂은 사내들이 다가들고 있었다. 그것도 무기를 꼬나쥔 놈들이다. 기세등등한 것을 보니 그다지 몰래 다가온 것 같지는 않은데, 이자드와 이야기하느라 눈치를 채지 못했다. 루이는 일어서 던 동작을 마무리하고, 탁자를 짚은 채 한 바퀴 휘돌아보았다. 다섯 명. 가게 주인은 벌써 어딘가 숨어들어간 모양이다. 루이는 빙긋 웃으며 양손을 탁자에서 떼고, 칼을 뽑았다. 오른 쪽에 찬 화염도가 아니라 왼쪽에 차고 있던 보통 장검. 싸움은, 변변히 싸움이랄 것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루이는 쓰러진 녀석들을 툭툭 차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적은 아닐 것이고…마법사도 아니고…대체 뭐지, 이놈들?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네. 여관 에도 날 죽이러 찾아온 놈들이 있었지. 관계가 있는 건가?” - 네게 원한있는 사람이 있나보지. 이자드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쳇, 알아내 봐야 하나……” 그는 보기좋은 눈썹을 찡그리며 머리를 긁었다. 추리하는 것도 고문하는 것도 취향은 아니 다. 하지만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는 것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쓰러진 자들을 내려다보며 눈을 굴렸다. “……귀찮아.”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놈의 허리를 걷어찼다. “야, 일어나!”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놈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 순간, 어디선가 엄청난 고음의 비명소리가 귀를 찔렀다. “꺄아아아악-! 강도야! 도둑이야! 산적이야-- 어떡해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잡았던 멱살까지 놓쳐 버렸다. 루이는 인상을 벅벅 쓰며 고개를 돌렸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해져 버렸다. 귀에 상당히 거슬리는 비명 을 지른 젊은 여자는 왠 남자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루이의 시선은 여자보다 남자 쪽으로 쏠렸다. 그 남자는 흰 옷 일색의 옷차림에, 진흙이 옷에 튀지 않게 미끄러지듯 걸었고, 루이 보다는 약간 큰 키에, 햇빛을 받으면 은색에 가까워지는 옅은 금발, 맑은 녹색 눈동자, 이죽 이는 듯한 입매의 소유자였다. 그는 루이의 시선에 엷은 미소를 돌려주며 옆에 붙은 여자를 다독였다. “안심하세요. 여긴 시 입구라서 산적같은 건 나오지 않아요, 아가씨.” 이제 또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날 차례였다. 이 남녀 뒤에서 덜커덕 덜커덕 소리를 내며 굴러오던 마차가 멈춰서면서 또 한 여자가 머리를 내밀었다. 마차 바퀴가 한 바퀴를 더 돌 면서 눈 녹은 진흙이 한웅큼 남자 쪽으로 튀는가 싶더니, 어느 샌가 남자는 너무나 자연스 럽게 위치를 바꾸면서 마차 쪽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흙탕물은 대부분 허공을 가르고 떨어 졌고 일부는 젊은 여자의 치마에 튀었다. 여자는 남자가 얄밉게 몸을 피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 마차에서 내려오는 여자 쪽에만 입술을 비죽이고 있다. 루이는 입을 헤 벌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여자는 젊은 여자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마차에서 발을 다 내리기도 전에 눈이 째지게 첫번째 여자를 흘겨보며 남자의 반대쪽 팔을 홱 낚아챘다. “세상에. 왠 호들갑이 그렇게 심하니? 너 이 틈을 타서...” 금발 청년은 역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여자의 어깨를 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 조심해서 내리세요, 부인.” “어머, 고마워요.” 순간 루이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로 나타난 여자는 쓰 러져 있는 남자들을 죽 훑어보며 손사레를 쳤다. “어머나- 정말이네? 하지만 설마, 저렇게 잘생긴 분이. 쓰러져 있는 다섯 놈 쪽이 훨씬 산 적같아 보이는걸?” 금발 청년은 한쪽 손으로는 젊은 여자의 허리를 안고, 한쪽 손은 나이든 여자의 귓볼을 간 지르면서 씩 웃는다.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오른쪽 입끝만 살짝 올라가는 뒤틀린 웃 음. “맞아요. 아마 그럴 겁니다. 저 친구는 저도 아는 사람이거든요.” 루이는 얼굴을 있는대로 구긴 채 말했다. “진, 네가 여기 왜 있는 거냐?” 진은 싱글싱글 웃으며 옆에 선 마차를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여기 숙녀분들께서 내 호위를 부탁하셔서 말이야.” “호위?” “그래. 이번에 시더에서 큰 행사가 있잖아? 그 구경도 할 겸, 시더시에 있는 친척들도 만나 볼 겸하는데 여자들끼리 그 먼거리를 올 순 없다잖아.” “통행료 내고 대로로 온 거 아냐?” “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게다가 난 의사도 겸하는 셈이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야? 카 라는?” 루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진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다음엔 시선을 옮겨서, 양 옆 에 붙어있는 여자들을. “됐다. 신경쓰지 말고 너 가던 길이나 가라.” 루이는 진을 싹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바닥에서 허부적대고 있는 놈의 목덜미를 다시 잡아챘 다. 루이의 얼굴을 다시 마주대하자 놈은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진의 양옆에 붙어있던 두 여자는 보기싫다는 듯 얼굴을 돌리며 재잘거렸지만 루이는 물론이고 진 조차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시끄러워! 손도 대기 전에 소리부터 지르냐? 내 참, 나한테 원한 진 게 누군진 몰라도 너 희 같은 놈들이나 골라 보내는 걸 보면 신통찮은 인간인가 보다.” 루이의 손에 번쩍 들렸던 사내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 전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입 좀 다물어 보라구! 야, 안들려? 에잇- 하필이면 이런 놈을 골랐담.” 루이는 성질을 버럭 내며 놈을 내던져 버렸다. 진이 쯧쯧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얼마나 무식하게 팼으면 저럴까. 괜히 화풀이한 거 아냐? 그런 식으로는 할 말도 못하겠 는데.” “가던 길이나 가라니까. 쓸데없이 참견 말고.” 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여자들을 데리고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루이는 고개도 들지 않고 손만 올려서 흔들었다. 그랬다가 이자드의 핀잔과 더불어 카라가 다쳤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다시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진은 눈앞에 서서 회색 고양이를 어깨 위 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역시 이게 더 재미있어 보이는걸.” “...그 여자들은 어쩌고?” “뭐, 나나 저쪽이나 어차피 놀자고 만난 상대일 뿐이니까. 자네처럼 순정파가 아니라서 미 안하지만, 소년.” 진은 예의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뜸 엎어져 있는 한 놈의 허리띠에 발 끝을 넣어 위로 쳐들었다. “내가 보기엔 이 놈이 두목 같은데. 뭘 알아내야 하는 거지?” “잘도 끼어드는군, 노친네. 특기는 영혼 보기, 취미는 검술과 활쏘기, 부업은 약사, 여가활 동은 여자꼬시기, 이번엔 또 뭐야?” “호오, 루이 너도 꽤 말솜씨가 늘었는걸. 뭐 오래 살다보면 이것저것 관심이 많아지는 법이 거든. 만능이 된 것도 당연하지 않나.” “호오, 그러셔? 그럼 난 뭐냐? 나도 제법 오래 살았지만 한우물을 파고 있잖아.” “그거야 네가 특이한 거지. 자, 어디보자. 일단 이놈을 어떻게 하기 전에 말해 보라구. 뭘 어쨌길래 눈이 내린 거지?” 루이는 움찔했다. 진은 예의, 음습한 느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보는 사람을 기분나쁘게 만 드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허리띠를 받치고 있던 사내를 다시 땅에 떨구며 말했다. “네 반응을 보니, 내 생각이 맞은 것 같은데.” “독심술 같은 것도 키우냐?”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주위에 나타난 색 변화를 보면 대략의 감정변화 정도는 읽 을 수 있거든. 어차피 넌 얼굴에 다 드러나지만.” 루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기다렸지만, 이자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 다. 어차피 루이도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왜 눈이 내린 건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해 줄 말이 많지는 않았다. 진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 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발 밑에 있는 남자를 지근지근 밟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놈들이 왜 널 습격했는지, 누가 시킨 일인지 알아내고 싶다 이거지?” 그는 루이도 불안해질 만큼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한 시간 후, 결국 누가 시킨 일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 그들도 몰랐으니까 ? 한 가지만 은 확실해졌다. 진이 루이가 뜯어말릴 만큼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 그들이 겨우 길을 더듬어 카라가 있는 동굴까지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기 직전이었 다. 온종일 내리쬐인 햇살에 눈은 거의 다 녹아 사라졌다. 루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안을 들여다보니, 동굴 속에는 카라 혼자 누워 있었다. 모닥불이 아직 타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니 떠난 지 오래 지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루이는 주위를 한 바퀴 휘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가버렸네, 그 녀석. 부탁 좀 한다고 했더니만.” 곧 해가 졌다. 이자드는 잠들어 있는 카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은 어깨의 상처에 약초를 대고 붕대를 감은 다음, 맥을 짚어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두 번짼가...” “뭐가 말이지?” “지난 번에도 며칠 동안 의식이 없었죠?” 이자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진이 말하는 것이 언제 일인지 기억해낸 것이다. 카르트 에서, 카라와 닿은 신상이 ‘사라져 버렸던’ 때. 그 직후 카라는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열 에 시달렸었다. “그러니까 상처 때문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 하는 거죠. 흐음, 보통 사람들이 병이 들거나 상처를 입으면 몸 주위의 빛 깔은 엷어지거나, 반대로 진해지면서 짧아지죠. 생명력이 약한가 강한가에 따라서. 그런데 카라의 경우는 어느 쪽도 아니란 말입니다. 몸 주위의 빛이 더 진하고 강해져 있어요.” 진은 카라의 몸 위로 대충 선을 그려 보이고 말을 이었다. “요컨대 급격한 성장 때문에 겪는 통증이나 신열 비슷한 거죠. 하지만 지난번에나 이번에 나 신체적으로 뭔가 변하는 것 같진 않고...” 진은 거기에서 말을 끊었지만 이자드는 침묵을 고수했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 고 한편으로는 그저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했다. 진은 굽혔던 무릎을 일 으키며 예의 비틀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내가 끼어들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가끔 보면 당신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궁금해진다는 얘기죠, 뭐.” 이자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원래 이쪽에 온 건 만날 사람이 있어서였다. 루이 녀석이 어리석은 도발에 넘어가는 바람 에 일이 꼬였지. 리베르 문디나 왕 따위와 얽혀들고 싶진 않았는데.” “뭐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고.…리베르 문디와 왕실 경호대이 쫓고 있는 데다가, 루 이에게도 알 수 없는 녀석들이 덤벼들고, 그 외에 뭐 더 있나요? 루이가 그렇게 설쳤는데도 용케 아직은 별 일이 없었지만......” 진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기대가 어린 표정으로 이자드를 쳐다보았다. 이자드는 그 눈빛에 냉소를 던지며 카라를 안아들었다. 이자드의 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아직 체력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이었지만, 그렇 다고 진에게 도움을 구하지는 않았다. 진도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품에는 고 양이가 안겨 있었고. 황야를 지나 며칠 전에 묵었던 여관까지 걸어가는 데 몇 시간이 걸렸 는지 모른다. 여관 뒤편의 절벽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별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자드 는 망설임없이 절벽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그러나 진은 발 아래에서 시커멓게 빛나고 있는 바닷물을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아, 그렇군. 물을 안좋아하던가?” 이자드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진은 대답없이 바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오 랫동안 머무른 카르트는 대부분이 사막에 둘러싸인 바위산. 물이라고는 스며나오는 지하수 와 졸졸 흐르는 개울물 정도인 곳에서 살아왔으니, 이렇게 많은 물을 보고 질리는 것도 당 연하다. 이자드는 짐짓 유쾌하게 말했다.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수영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면 자넨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진은 약간 얼굴을 잠시 씰룩이다가 발치에 붙어있던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고양이도 버둥버둥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진은 고양이를 적당히 다독이고, 적당히 힘으로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제 마법은 쓸 수 있는 겁니까?” 이자드는 카라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양손을 펼쳤다. 루이와 교대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회복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쓰려는 주문에 실수가 없으려면, 그리고 혹시라도 그를 뒤 쫓는 자가 있을 경우에 대비해서라도 마법을 쓰지 않고 걸어와야 했다. “드루바 물라비그라하 파라 이샤 Dhruva mulavigraha para isa 바루나 varuna - 아파스 apas, 바루나 varuna." 순간 진은 귀가 찡하게 울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 변화도 없었다. 이자 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카라를 다시 안아올리더니 말했다. “날 놓치면 바로 물 속에 떨어지게 된다. 잘 따라와.” 이자드는 그 말을 하자마자 절벽 끝에서 곧장 앞으로 걸어나갔다. 진은 그 뒤를 따랐다. 물 론 그들의 몸은 아래로 떨어졌지만, 직활강은 아니었다. 이자드는 계속 걷고 있었고, 한 걸 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갈 때마다 그들의 몸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해 갔다. 물을 향해. 그리 고 물 속에서도. 긴 포물선이었다. 어둡고 소리도 없는 물 속에, 길고 투명한 계단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아 래로 내려갈수록 수면 위로 비치던 달빛과 별빛이 희미해지며 해초와 해파리들의 빛에 뒤섞 여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더 내려가자 제 스스로 불빛을 뿜어 내는 물고기들이 주위를 휘젓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조금 더 아래로. 그 궤도의 끝에는 물의 궁전이 있었다. 처음에 그 궁전은 위쪽이 평평한 장방형의 수정 속에 갇힌 환영처럼 보였다. 거대한 수정 바위였다. 그 주변의 물빛은 어둠 속에서 짙은 남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해 뜨기 전 새벽 의 미명 속에서 검은 윤곽선을 드러내는 산마루 선 같았다. 그들은 천천히 그 거대한 수정 위로 내려가, 빨려들듯이 아래로 끌려내려갔다. 젤라틴 막을 통과하는 듯한 괴이한 감각이었 다. 그러나 곧 그 감각은 사라지고 그들의 발은 단단하고 차가운 돌 바닥을 디뎠다. 진은 발 을 굴러 바닥의 단단함을 확인해 본 다음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짙고 어두운,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가끔 빛이 보였지만 그것은 물 속을 유영하는 발광체 의 것일 뿐, 별빛은 여기까지 와닿지 않는 듯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이자드의 뒤를 따라 걸어들어갔다. 궁전이라기보다는 신전 같은 곳이었다. 사람 키의 세 배는 될 듯한 높은 천장을 받치고 선 거대한 열주들은 아무런 장식도 없다. 진은 옆을 지나치면서 기둥을 만져 보았다. 돌인지 뭔 지는 모르겠지만 닿는 순간 손끝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듯한 기묘한 감촉이었다. 견고해 보이는 기둥 사이사이에 수정으로 깎아 만든 듯한 섬세한 조각상들이 서 있었다. 모두 인간 의 모습이었다. 어린아이도 있고 노인도 있었지만 다만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대개 깨어지거나 부서져 있었다. 진은 걸음을 늦추고 넘어진 조각상의 섬세한 얼굴을 주시하며 말했다. “폐허같은데요, 여기. 지진이라도 났었나?” “지진 같은 것에 영향을 받는 곳이 아니야.” 이자드는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의구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듯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 를 둘러보았다. 진은 고개를 한 바퀴 돌려 웅장한 기둥숲을 둘러보고 물었다. “흐음.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리아로의 궁전.” “리아로?” 이자드는 계속되는 질문이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간단하게 대답했다. “바다의 지배자라고 해두지.” 순간 진은 손가락을 딱 울리며 말했다. “아, 리아로! 이제 기억났어요. 뮤로아의 딸 이름이죠 아마.” 이자드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진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엄청나게 낡은 기억이지만 아직 쓸만하죠? 내가 기억하기로는 바다의 왕은 수룡(水龍) 뮤 로아였는데. 요즘은 아닌가.” “그런 셈이지. 이럴 때는 자네가 환생자라는 걸 새삼 떠올리게 되는군. 정확히 말하자면 아 직 한 해의 10분의 1은 뮤로아가 관장하는 걸로 알고 있어. 바다가 추워질 때에 한해서. 아 마도 지진이 지나간 듯한 이 상태는 뮤로아가 깨어났기 때문일 테지.” “추워질 때에 한해서라면서요? 아직...아.” 진은 문득 깨달았는지 말을 멈췄다. “설마하니 며칠 전의 눈 때문에?” “달갑잖은 생각이지만.” 이자드는 카라를 고쳐 안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이미 기둥이 없는 넓은 홀에 들어와 있었다. 다행히도 궁이 비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막 피난갔다가 돌아온 마을처럼 어수선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리아로의 시종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안을 청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드는 빠른 걸음으로 그들 곁을 지나쳐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유리종을 두들기는 것 같은 맑은 음파가 울려퍼진다. 이자드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진은 그의 등에 부딪칠 뻔하다가 몸을 바로잡고 앞을 쳐다 보았다. 허공에 거대한 눈동자 같은 것이 언뜻 보였는가 싶더니 분수처럼 물방울이 흩어져 내렸다. 물방울이라고는 하지만 색조는 짙은 청남색에서부터 햇빛을 받아 빛나는 투명한 물 색깔까지 다채로왔다. 낮으면서도 높고, 깊고 풍부하면서도 재잘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 다. “이자드인가?” 물방울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가, 모여들어 엉기며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은 흥미 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자드의 키 높이 정도로 솟아오른 물기둥은 서서히 사람 과 같은 형체를 띠기 시작했고, 뒤이어 검푸른 빛깔의 긴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흩어져내렸 다. 그리고 아까의 목소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눈 때문에- 대비할 겨를도 없이 아버님이 깨어나셨지. 덕분에 궁전은 엉망이 되고 아끼던 조각품은 다 깨어져 버렸어. 그런데, 몰골이 말이 아니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지, 저 위에서?” 마침내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리아로는 심해의 바닷물같은 빛깔의 눈동자로 주의깊게 이자 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얘기할 만한 거리도 못돼. 한심한 일이 있었지.” 그 때 진의 품에서 빠져나온 잿빛 고양이가 뛰어가더니 냐아 소리를 내며 리아로의 발치에 목을 비볐다. 리아로는 놀란 얼굴로 그 동물을 내려다보고는 뒤미처 진의 존재를 알아차렸 다. 리아로는 순간순간 명도와 채도가 변하는 짙은 남빛 눈동자를 굴리며 아래위로 진을 훑 어보며 유쾌하게 말했다. “이게 왠일이지? 내 취향의 선물을 다 가져오고.” 진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양손을 들어올리며 이자드를 건너다보았다. “어쩐지, 난 뇌물용이었습니까?” “자네도 그리 기분나쁘진 않아 보이는데.” “그야 물론이죠.…..결례를 범했습니다, 바다의 지배자이신 여왕님.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라 면 물론 선물로 바쳐진다 해도 영광이죠.” “이자드의 친구치고는 혀도 꽤 매끄러운걸.” “누가 누구 친구라고?” 이자드는 커다란 쿠션 위에 카라를 올려놓고 돌아서면서 혀를 찼다. 리아로는 긴 머리카락 을 손가락으로 빗어내려 흔들며 나지막이 웃었다. 머리카락이 흐르는 물소리를 내며 출렁여, 웃음소리와 절묘한 화음을 이루었다. 리아로의 몸이 한층 더 커지며 진보다 머리 하나 위로 솟아올랐다. “이자드는 여전히 매정하군.” 진이 싱긋 웃으며 리아로의 손을 잡아 가볍게 입을 맞췄다. “꼭 매정한 성격 탓만은 아니죠. 저를 싫어한답니다.” “호오, 그래? 왜지?” “루이 말로는 제가 이자드가 아주 싫어하는 누군가를 닮았다더군요.” 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오른쪽 입끝을 살짝 올렸다. 뒤틀린 미소와는 달리 녹색 눈은 즐거운 듯 투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리아로는 길고 가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물기가 느껴지는 차가운 손가락이 진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쓸었다가 녹색 눈동자 가까이 다 가갔다. 감미로우면서도 왠지 섬뜩한 느낌이었다. “확실히그렇군. 생김새는 딱 내 취향이지만 누굴 닮았다는 얘긴지는 알만 해.” “여왕님께서도 아십니까?” “누구, 알 바르카 말인가?”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말이 나오니까 생각나는군. 그가 얼마 전에 들러서 네 안부를 묻던데.” 순간 이자드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얼마 전? 정확히 언제쯤을 말하는 거지?” “오...글쎄. 언제쯤이었더라...” 리아로는 뜸을 들이며 머리를 기울였다. “지난 번 물이 차가워지기 전이었나. 아버님께서 깨어나실 때가 다가와 교대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이자드는 재빨리 속으로 계산했다. 뮤로아가 바다를 장악하는 것은 1년 중에 두 달 뿐이다. ‘물이 차가워지는 시기’란 그 두 달, 1월과 2월을 말한다. 그렇다면 리아로가 말하는 시기 는 10월에서 12월 사이일 것이다. 그 때쯤 그는 북쪽에 있었다. 카라를 만난 것이 그 무렵이 었으니까. 그렇다면 휘안이 깨어난 후 이자드에게 ‘인사’를 하러 오기까지 몇 달의 공백 이 있다. 그 동안 뭘 꾸미고 있었던 거지?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 그런데...” 리아로의 음성이 그를 상념에서 다시 불러들였다. “저건 뭐지?” 기분 탓일까, 한층 길어진 듯한 손가락 끝이 카라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건...이라니, 좀 심하군. 어린아이라면 전에도 데려온 적이 있잖아.” “아, 그랬었던가? 하지만 이런 건 아니었어 - 왜 <라피스 라줄리>가 여기에 있는 거지?” 성가시게 됐군, 이자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리아로의 바다빛 눈동자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변하는 눈동자 색깔이 한 순간 새파란 색깔로 고정되면서 가장자리에 금 띠를 두른 듯 반짝였다. 청금석 라피스 라줄리는 천공의 힘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리아로는 그것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에게 뭔가 설명할 게 있을 것 같은데, 이자드?” 이자드는 잠시 피곤을 느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리아로는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시 간조차 기다려 주지 않고 재차 물었다. “공교롭게도 딱 이런 때에 나타나다니- 라고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이 ‘사고’, 네가 관계 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눈이 내린 것이 너 때문이냐는 뜻이지.” “아니.” 이자드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진실이었다. 그가 일으킨 사건도 아니고, 그가 일어나길 바랬던 사건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이상 리아로가 계 속 캐묻는다면...그는 천천히 덧붙였다. “확실히, 내가 도망치고 있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내가 한 일은 아니다.” “도망? 도망이라구? 네가?” 리아로는 예상대로 반응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양팔을 벌려 보이고는, 대체 누구에게 그런 동작을 배웠는지, 꽤나 자연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대체 누가? 오오, 이런. 알 바르카가 알면 기분나빠하겠는걸. 자신 아닌 누가 널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 “글쎄. 그놈과 무관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자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리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라지만 눈보 라 속에서 도망치던 상황을 돌이켜 보는 것은 전날 밤에 느낀 모멸감도 함께 돌이키는 일이 었던 것이다. 리아로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긴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갔다. “뭔가 꽤나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것 같군. 그럼 그 눈보라는 알 바르카 짓이라는 말인 가?” 이자드는 쓰게 웃기만 했다. 그의 떨떠름한 얼굴을 보고 리아로는 한층 더 구미가 돋는 것 같았다. 그가 영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곧 고개를 돌려 진을 쳐다본다. “말하기 싫다면 이쪽에 물어보도록 하지. 그대는 알고 있겠지?” “아, 제가 아는 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말씀드리지요, 여왕님. 루이에게 들 은 설명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것이어서 크게 도움이 못될까 걱정입니다만.” 진은 냉기를 뿜어내는 듯한 이자드의 시선을 못본 척 하며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건 그가 함정에 빠져서 난다라는 마법사와 싸웠다는 것 뿐입니다.” “호오, 마법사라? 1대 1로 싸워서 이자드를 곤경에 빠뜨릴 만한 마법사가 있단 말인가?” “저도 믿어지지 않습니다만, 듣자하니 그 난다는 용족이라더군요.” “용족이라니- 용족은 마법사가 아니다. 그대가 잘못 들었나보군. 뭐 용족이라면 가능은 한 일이겠지만-- 그를 궁지에 몰 정도라면 애송이도 아니었을 텐데 내가 감지하지 못했을 리 가 없어.” “그런가요?” 이자드는 그의 복장을 긁어대는 대화를 듣다 못해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는 마법사가 맞아.” 리아로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돌아섰다. 머리카락이 큰 파도처럼 출렁이며 다시 한 번 물 소리를 빚어냈다. 이자드는 그 소리의 파장 안에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태어나기는 용족으로 태어났지만, 돌연변이었는지 황야에 버려졌다더군. 그 후에 인간들 틈에서 자라다가 마법사가 됐고.” “호오? 그거 재미있는걸. 그래서 마법을 연마한 끝에 너를 곤경에 빠뜨렸단 말인가?” 이자드는 리아로의 즐거운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 한심한 모습이라면 처음 만났을 때 실컷 봤 을 텐데.” “아아, 그야 그렇지만, 확실히 이럴 땐 알 바르카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아. 네가 곤란에 빠진 모습을 보는 건 꽤 즐겁거든.” 그 말에 이자드가 이마를 찌푸린 순간, 우르르 궁이 흔들렸다. 발밑이 흔들리며 얼음 갈라지 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주위를 정돈하던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이자드와 진 도 균형을 잡느라 자세를 낮추었다. 오연히 서서 흔들림에 꿈쩍도 않는 것은 리아로 뿐이었 지만, 그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이자드는 진동이 가라앉은 다음에 물었다. “무슨 일이지?” “- 아버지가 - 아직 불안정하군.” 진동이 가라앉은 다음에도 궁은 희미하게,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리아로는 긴장한 얼굴로 천장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즐거움은 나중으로 미뤄야겠군. 그대들도 우선 쉬어야겠지. 루코!” 리아로의 부름에 허둥지둥 달려온 시종은 궁전 안을 메우고 있는 다른 시종들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머리에는 양처럼 굽어 휘어진 뿔이 달려있고 하체 가득 비늘이 반짝인다. 두 개의 발이 있기는 하지만 발가락은 없고, 발 뒤쪽으로 길다란 물갈퀴가 달려서 걷는 데 방해가 되었다. 당연히 걸음이 빠를 수가 없었다. 루코가 저만치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리아로는 명 령을 내렸다. “이들을 자주색 방으로 안내해라.” “네에?” 루코가 뭔가 항의를 하려는 듯 입을 빠끔거렸지만 리아로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지체없이 움 직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은 일순간에 다시 물방울로 흩어져 버렸다. 진이 혀를 차며 손을 벌렸다. “이런! 제대로 인사도 못드렸는데.” “지금이라도 하든지. 리아로는 이 궁 안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그래요?” 진은 어디랄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멋들어지게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자드 는 눈보라에 대한 추궁을 일단 피한 데 안도하며 카라를 다시 안아들었다. 그 동안 루코는 열심히 발을 놀려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인사를 마친 진과 카라를 안아들고 자세를 고친 이자드가 루코라는 이름의 시종을 쳐다보 니, 성별을 모를 바다의 시종은 비늘이 반짝이는 하체를 움직이며 입을 비죽이고 있다. 불만 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자드는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 “뭔가 불만이라도 있나?” “무, 물론이죠. 그럼요. 저, 전 리아로님의 시종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니라고? 이 궁 안에 있는 건 다 리아로의 시종인 줄 알았는데.” “처, 천만에요. 저, 전 뮤로아님의 시중을 드는 명예로운 임무를 맡고 있단 말입니다. 이런 시기에 깨어나는 바람에, 뮤로아님은 다시 잠드셨지만 전 그렇게 쉽게 들어갈 수가 없거든 요. 이번 사, 사고로 일손도 모자라고, 뭐 리아로님의 명령에 따르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요. 자, 이쪽이에요. 잘 따라오세요.” 귀에 거슬리는 끽끽거리는 목소리, 혀짤배기처럼 뭉개지는 발음에 더듬거리기까지 한다. 진 은 비늘이 반짝이는 루코의 발에 달려들려는 고양이를 잡아채며 물었다. “인어인가?” “그, 그건 허황된 전, 전설이에요!” 루코는 요란하게 두 팔을 들어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 다. “보, 보세요. 인어(人魚)란 건 그러니까 인간처럼 생긴 물고기라는 뜻이죠? 전 인간도 물고 기도 아니니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반인반어족 정도로 해줘야죠. 무, 물론, 원래는 트리탄 족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지만 뭐 그, 그거야 요새 사람들이 기억할 리 없는 이름이고. 어, 얼마 전까지 저쪽 바다위에 살던 긴나라족도 일단은 반인반조족이라고 이름붙여져 있었단 말이지요. 구, 굳이 다른 종족을 비교하는 건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라고? 이자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한 해에 10분의 1만을 깨어나서 활동하 는 입장이라면 물론 20년이라는 시간도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이자드는 곧 다른 생각에 빠져 들었다. 어떻게 하면 리아로에게서 쓸만한 정보를 끌어낼 수 있을까. 리아로는 많은 것을 알 고 있었지만 그것을 다 말해주는 일은 절대 없었다. 게다가 리아로는 이자드만이 아니라 휘 안 알 바르카와도 무던하게 지내는 사이다. 아니, 어쩌면 이자드보다 알 바르카 쪽을 더 가 깝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으로 다다다다 지껄여대는 루코의 상대역은 진이 맡고 있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루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한두번씩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루코가 느리지 만 열심히 놀리던 발을 딱 멈추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자드는 퍼뜩 백일몽에 서 깨어난 것처럼 그 쪽에 초점을 맞추었다. 루코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흐느끼는 통에 한 층 더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외쳤다. “그, 그, 그래요! 아무도. 나 빼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어요. 다 사라져 버렸어요…… 기억하 는 자들도 없을 만큼 오래 전에. 나만 남기고 모두, 모두 없어져 버렸어요.” 이자드는 진을 쳐다보았다. 진은 내가 알 게 뭐냐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가, 이자드가 얼굴을 찌푸리자 시큰둥하게 말했다. “트리탄 족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고 했더니 대뜸 저러는데요.” “트리탄?” 이자드는 그 이름을 입 속으로 뇌어 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 이 름이다. 그가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어보는 사이, 진은 꺼이꺼이 울고 있는 루코에게 다 시 물었다. “멸망이라니, 어쩌다가 그랬는데?” “나, 난 몰라요. 직접 보진 못했는 걸요. 뮤로아님이 보여주셨어요. 갑자기 섬 주위에 새까 만 기둥같은 게 생겼었어요. 뮤로아님께선, 그들이 죽음의 나라에서 온 자들이라고 하셨죠. 그리고는, 그리고는 며칠 못가서 섬이 새빨간 고리 같은 것에 휩싸이더니...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는, 사라져버렸어요.” 진은 그 말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재차 확인했다. “사라졌다고?” “사, 사라져버렸어요! 붉은 빛의 고리가, 성을 감싸더니 엄청난 속도로 돌면서, 점점 크기가 줄어들었어요. 그리고는 사라져버렸어요. 고리도, 섬도, 성도, 내 친구들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나...나만 여기 남겨두고.” 루코는 다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 무슨 소린지.” 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혀를 차며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자드의 얼굴에 는 짜증과는 전혀 거리가 먼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자 드는 팽팽이 줄이 당겨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넌 살아남은 거지?” 루코는 훌쩍이기만 했다. 혀만 짧은 게 아니라 머리도 좀 모자라는 모양이다. 이자드는 거칠 게 루코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서 넌 살아남은 거냐고 물었다! 어째서지? 뮤로아의 시종이었기 때문인가?” 루코는 겁에 질린 듯 울먹이며 말했다. 당황해서인지 눈물 때문인지 말을 한층 심하게 더듬 는다. “그.…..그래요, 맞아요. 난 쓸모없는 아이라서, 무, 물 속에서 살 수가 어, 없게 태어났다구 요. ...그, 그래서 뮤로아님이 거, 거둬주신 건데, 흑...나만 살아남았어요. 나, 난, 난 돌아갈 수가 없어서.” 순간 이자드는 손을 떼며 넋나간 듯 속삭였다. “불구여서 살아남았다는 건가.” 그렇다면 별 도움이 되지 않겠다. 그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묵묵히 울고 있는 루코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혐오감에 더하여 연민이 조금씩 차올랐다. 동족이 모두 사라지고 혼자만 남아있다는 것 - 어디에도 자신이 속한 곳이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디에도 속해본 적이 없으 므로. 그러나 짐작은 할 수 있다. 무중력의 공포 - 발 디딜 곳이 없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 할 수 없다는 그 공포감이라면. 9. 부러진 날개 (4) 카라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 음악소리는 천장 전체 에서 울려나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천장의 모습은 뭔가 이상했다. 보통 천장 이라는 곳에 기대할 수 있는 것- 나뭇결이 남아있는 목재라든가 대들보, 혹은 회색이나 흰 색으로 덧바른 벽돌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머리 위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며 색색의 물고기 들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고기들이었다. 마치 머리 위 에 엄청난 양의 물이 담긴 거대한 상자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꿈을 꾸고 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다가 카라는 어깨의 아픔에 얼굴을 찡그렸다. 덮혀있던 얇은 이불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건 아픔의 눈물이 아니라, 이미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었 다. 그러나 어째서? 카라는 이마를 찌푸렸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제비꽃 같은 눈동자로 가만히 쳐다보던 그 아이, 난다. 그게 꿈이었나? 고개를 내저으며 조심스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단단 하다. 카라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여하튼 천당이 아닌 것은 분명하네.” “그렇게 생각하세요?”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본 카라의 눈이 둥그래졌다. 안쪽으로 구부러진 두 개의 뿔. 그리고 발을 놀릴 때마다 각도가 달라지며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하체의 비늘...카라는 벌떡 일어나 면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인어다!!” “저런, 꼬마 아가씨도 그런 허황된 전설을 들었나 보군요!” 인어는 요란하게 두 팔을 들어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 다. “보세요. 인어(人魚)란 건 그러니까 인간처럼 생긴 물고기라는 뜻이 아닌가요? 전 인간도 물고기도 아니니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반인반어족 정도로 해줬으면 좋겠다구요. 물론, 원래는 트리탄족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지만 뭐 그거야 요새 사람들이 기억할 리 없는 이름 이고 하니.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도 날 인어라고 불러서 불쾌하게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말 예요. 난 물고기가 아니라구요. 명심해 줬음 좋겠어요.” “저어, 조금...” 말이 너무 빨라서 정신이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인어는 이미 자기 말에 도취할 대로 도취한 듯, 온갖 몸짓과 함께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장광설을 멈춘 것은 또다 른 인물이었다. “네놈은 여전히 시끄럽구나, 루코.” 인어- 아니 트리탄족은 그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자 움찔하며 입을 다물고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쟁반에 담긴 물건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카라는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말 그대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겉모습만은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처럼 보였다. 새하얗다 못해 은빛의 머리카락과 수염, 아직 허리가 굽지 않은 중키 에 힘은 안으로 갈무리한 듯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 몸. 그렇게 특이하달 것도 없었다. 피 부빛이 아름다운 푸른빛이고 눈이 은빛이라는 것만 빼면. 노인은 가만히 카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관찰해 보니 어떤가?” “...잘 모르겠는데요.” 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서늘한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뒤에서 루코가 뭐가 좋은지 그저 따라웃는다. 카라는 참을성있게 그가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려서, 최대한 예의바르게 물었다. “저어, 실례지만 제가 어떻게 여기에 온 거죠?” “글쎄다. 짐도 잘 모르겠구나.” “에엣? 저기....." “널 데리고 온 건 검은 눈의 마법사였다.” 노인은 노래하듯 말하며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외양과 달리 앉으면 서 드러난 맨다리는 탄력있고 매끄러웠다. 살아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만큼 완벽하 다. 뛰어나게 잘 만들어진 조각상 같은 느낌이랄까. 카라는 눈을 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이자드는 어디...?” “너희 시간으로는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는 카라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는 특이한 인간이지. 리아로는 조금 놀라고, 즐거워했다. 검은 머리의 마법사가 곤경에 처한 경우는 본 적이 있어도, 난처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거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말투를 쫓아가기도 쉽지가 않고. 카라는 얼굴을 찌푸리 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 여기는 그럼 물 속이고, 당신이 여기 주인이신가요, 리아로?” “리아로라고?”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라를 돌아보았다. “리아로는 내 딸의 이름이다. 짐은 뮤로아라고 한다.” “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뮤로아는 녹색과 푸른색이 섞인 듯한 기묘한 빛의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 애가 바다의 주인이다. 짐은 한 해의 십분의 일, 바다가 차가워질 때에만 깨어 난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갑자기 때아닌 눈이 내린 덕분에 잘못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어버 렸지. 리아로와 내가 동시에 깨어나 있어서는 안되거든...” “눈이라구요? 언제 그렇게……” “쯧쯧. 지금 말하지 않았나. 때아닌 눈이 내렸다고. 본래 내려서는 안될 눈이 내린 거란 말 이다. 그러니까 말썽이 된 게지. 이제 알겠나?” “아, 네.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사과부터 하고, 난다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다음에서야 카 라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저어, 그런데,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닌가요?” “뭐가 말이냐.” “다시 잠들어버렸다...고 하신 것 같은데요, 지금.” “그랬지.” 뮤로아는 뭐가 잘못됐느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는 잠시 기다렸 다. 그러나 뮤로아는 말을 고칠 기색이 없었다. 식은땀이 한 방울 흐르기 시작했다. “잠들어 계시다면서요? 지금 저랑 대화를 하고 계시잖아요?” 뮤로아는 이상한 것을 본다는 듯 카라를 쳐다보았다. “그것 참. 모르고 있었던 건가?” “뭐...뭘요?” “흠. 그렇다면 우연히 틈새로 떨어진 건가?”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노인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짐은 지금 자고 있다. 너 역시 자고 있고.” 하나, 둘, 셋. 카라는 숫자를 세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물었다. “그럼 이건 꿈인가요?”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짐은 한 해의 십분의 구라는 시간 동안 잠을 잔단다. 그러나 잠을 자는 것은 짐의 육체이고, 실제로 짐은 계속 이 궁 안의 다른 층위에서 유유자 적 살고 있는 거다. 루코 하나만을 시종으로 삼아서.” 카라는 저도 모르게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건 꿈이야. 틀림없어. 그래, 저 할아버지도 긍정했잖아? 꿈을 꾸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나, 꿈 같은 거 별로 꾼 적이 없는데. 이것도 깨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건가?’ 그사이 뮤로아는 느릿느릿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루코는 짐이 오래 전부터 시종으로 택한 아이라 이 공간에 함께 들어온다만, 네가 자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상당히 놀랐도다. 짐이 허락하지 않는데 여기로 들어올 수 있는 존 재는 아직까지 없었거든. 그래서 꽤 흥미를 가지고 네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는데 말이다. 아 무것도 모른다니 유감이로구나. 흠.” 뮤로아는 그렇게 말하고, 뭔가 탐색을 하는 듯한 눈으로 카라를 쳐다보았다. 은빛 거울같은, 그러나 아무 것도 반사해 내지 않는 눈동자. 카라는 멀뚱멀뚱 노인을 마주 쳐다보았다. 곧 노인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는,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모든 언어는 반대 의미를 노래하지. 처음 어둠이 언어를 낳았을 때에는, 언어는 한쪽 방향 으로만 달릴 줄을 모르는 존재였다. 느리다는 것은 빠르다는 것과 같은 언어였고, 거짓은 진 실과 어둠은 빛과 동일어였지. 지금은 모두 잊혀져 버린 이야 기...” 이건 또 무슨 동문서답이람.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가 없군. 카라는 새삼스럽게, 이제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선 그래도 이자드가 설명을 제일 잘한다는 것을 통감하며 속으로 다짐했 다. ‘이자드, 다음번엔 절대로 못알아듣게 말한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여기서 나가서 다 시 만나면 말이지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니 왠지 암담해진다. 이 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쩌지? 카라는 신음하며 다시 한 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때 햇빛이 물 속을 통과하여, 물속을 통 과하여 커튼을 드리우듯 빛을 떨구었다. 카라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아름답죠?” 눈을 돌려보니 아까의 반인반어, 아니 트리탄 족 루코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자, 이거 좀 마셔요.” “어, 고마워요.” 카라는 엉겁결에 그 병을 받아 마시려다가, 병을 다시 내려놓으며 배배꼬인 뿔을 단 반인반 어족에게 물었다. “저기, 그러니까 댁도 지금 자고 있는 건가요?” “네- 에. 사실은 뮤로아님이 깨어나셨을 때 같이 깨어났다가, 다시 잠이 들어버리셨는데 금 방 쫓아오질 못해서요. 리아로님의 다른 시종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했답니다. 어제 겨우 돌 아왔어요.” “그럼...저, 이자드나 루이는 그쪽에 있는 건가요?” “아- 이름은 모르겠는데요. 리아로님의 친구분이신 듯한 검은 머리의 건방진 인간과 또 한 사람, 리아로님의 비위를 잘 맞추는 금발이라면 봤지만요. 참, 그 금발 인간은 꼬마 아가씨 랑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구요 - 날 보자마자 인어다! 라니.” “하아.” 카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루이라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비위를 잘 맞춘다니? 그 건 좀 루이답지 않은데. 카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병을 입에 댔다.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었 다. 게다가 꿀꺽꿀꺽 마시고 나니 배고픔도 가시는 것 같다. 카라는 반쯤 마신 병을 내려놓 으며 입술을 핥았다. 에라, 모르겠다. 꿈이라면 언젠가 깨겠지. 카라는 루코를 보면서 물었다. “사실 난, 다른 종족은 처음 봐요. 얼마 전에 용족이라는 아이를 보긴 했지만 사람하고 별 다를 게 없었고. 트리탄족은 어디 살죠?” 그렇게 물어보면서 루코를 쳐다본 순간, 카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루코의 얼굴은 순 식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보는 사람이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트리탄족은...우리 동족은...하나도 없어요.” 카라는 당황했다. “아, 저,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봤네요.” 루코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에는 이쪽 바다는 다 우리들의 것이었죠 - 이 바 다가 은빛으로 빛나던 시절에는.” 루코가 띄엄띄엄 그렇게 말하고 다시 푹 고개를 숙여 버리자 뮤로아가 말을 받았다. “그랬지. 빌로드르 나르의 족속. 이제 은(銀)의 바다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은빛 비늘 은 가라앉았다. 창성(創成)은 떨어지고 깃털조차 남지 않았다. 누가 그들을 멸했는가? 누가 그들을 시간 속에서 지워 버렸는가? 마하칼리. 파멸의 여신이었지. 누가 그녀를 불렀는가? 그들 자신.” 불가사의한 공기의 흐름과 함께 느릿느릿 이어지던 노래는 그 대목에서 뚝 끊겨버렸다. 카 라는 병을 손에 든 채 멍하니 뮤로아를 쳐다보았다. 노인은 이제 비애에 찬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긴 손가락으로 눈 앞에 있는 공기를 - 적어도 카라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무엇인가를 건드렸다. 하프의 현을 건드린 것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울렸다. 툭, 툭 하는 희미한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루코가 울고 있었다. 하트 모양의 뿔 을 세운 채로 흐느끼고 있다. ‘아, 그래. 그의 종족이 멸망했다는 얘기였지.’ 마침내 뮤로아는 긴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펴고, 다시 온화하게 말을 이었다. “루코는 물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지. 날 때부터 불구였어. 본래는 그 때 같이 죽었을 운명 이었다. 하지만 내 시중을 들게 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살아있지. 수명을 훨씬 넘어서...1년 의 대부분 시간동안 잠들어, 옛 동족들의 꿈을 꾸면서. -- 맛은 어떤가?” “네? 아아......” 카라는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맛있었어요.” “그거 다행이군. 쉬게나.” ...종잡을 수 없는 할아버지. 카라는 눈을 비비며 다시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아름답다. 햇빛 의 흐름이 다시 한 번 궁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종족의 멸망. 그건 어떤 의미일까...? 만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사라지고 나만 남는다 면... 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악몽이다. 차라리 함께 사라져 버린다면 모르지만. 루코는 잔인한 인생을 살고 있군. 그리고 문득,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긴나라족의 생존자라고...?’ 왠지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게, 꽉 메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깨의 아픔보다 더 싫은 것. 뮤로아가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하프의 현을 건드린 듯한, 혹은 은종을 치는 것 같은 아름 다운 음파가 퍼져나갔다. 한 번, 또 한 번, 음이 퍼져 나갈 때마다 온몸이 그 소리에 공명해 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그 음에 실려서 어디까지라도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 다. 심장이 울린다. 머리가 울린다. 온몸을 도는 피가 진동하며, 흩어져 나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라는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그래. 생각해 보았나?” 리아로는 진주빛 쿠션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은 폭포수처럼 물보라 를 일으키며 쏟아져내리고 있는 그녀의 검푸른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유혹적인 제안이라 생각하고는 있습니다만...” “호오. 과연 유혹적이라고 느끼고 있긴 한 건가? 건방지군. 내가 인간에게 이런 제의를 한 것은 그대가 고작해야 두 번째야.” 지금 그들은 사흘 전, 이자드를 따라 이곳에 도착한 다음 날 다시 만났을 때 리아로가 한 제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원히 물의 궁전 안에, 리아로 곁에 머무르지 않겠느냐고 하는. 그 때 리아로는 부서져버린 수정조각을 가리키며 말했었다. 대개의 인간은 이 궁에 발 을 들여놓지도 못하지만, 마음에 드는 자가 있을 때는 끌어들여 조각으로 만들어 왔노라고. 말하자면 진에게는 대단한 예외를 베풀어주겠다는 얘기였다. 지금 리아로의 말에 위협의 기미가 별로 없기도 했지만, 진은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말씀이라고 하시나이까. 더할나위없이 유혹적이죠. 이렇게 아름다운 여왕님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야. 하지만 제 성정은 모래바람이라, 너무 많은 물은 맞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매끄러운 혀로군.” 리아로는 낮게 웃으며 팔꿈치를 세우고 돌아누웠다. 그녀의 - 과연 그녀일까 하는 것은 아 직까지도 의문이었지만 - 손가락이 얼굴에 와닿자 진은 시원한 물이 얼굴에 와닿는 것 같은 감촉을 느꼈다. 리아로는 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네 눈동자 색깔이 마음에 든다.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바닷물같은 초록빛이야.” 코앞에 심원한 바닷빛이 펼쳐져 있었다. 진은 잠시 동안 그 눈동자를 마주 쳐다보았지만, 오 래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끝없는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 숨이 막혔던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고 그 정도나마 버틸 수 있는 것도 네가 처음이 지.” 진은 그 말에 긍정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리아로의 존재의 깊이는 이미 실감하고 있다. 처 음 왔을 때는 뮤로아의 일로 불안정한 상황이어서 덜 그랬던 모양이지만,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궁 안 전체가 리아로의 빛으로 가득찼다. 이제는 모두 그녀의 빛에 삼켜져 버려서, 그의 눈으로도 다른 생명의 빛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리아로는 말처럼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은 듯, 가벼운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쓸며 몸을 일 으켜 앉았다. 진도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매무새를 갖췄다. 리아로가 인간의 여성 모습을 즐 겨 취한다고 해서 정말로 인간과 같은 성정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집착하지도 않았 고, 망설이거나, 갈팡질팡하거나,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지니지 않았다. 가지고 싶으면 손에 넣는다. 그러니까 조각상으로 만들었을 때는 이미 살아있는 것을 소유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면 살아있는 채로, 모습만이 마음에 들었다면 조각품으로. 진은 문득 리아로에게 물었다. “루이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곳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루이는 이자드의 예상대로 한바탕 소동을 부렸다. 카라의 안전 을 위해서라면 참겠지만, 그것도 카라만 여기에 놔두면 될 일이다, 나 혼자서라도 나가겠다 면서 난리를 친 것이다. 그는 궁의 결계를 깨고 나가겠다면서 화염도까지 꺼내들었다. 이자 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곧 얌전해지기는 했지만, 그 이후 사흘이 지나도록 카라 옆에 붙어 앉아서 끊임없이 투덜거리고 있어서 진으로서도 그 옆에 붙어있기가 괴로운 참이었다. 리아 로는 고개를 약간 들더니 말했다. “얌전하군.” 그것 뿐이었다. 리아로는 루이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육체를 갖춘 모습으로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루이가 있는 곳에 시선을 두는 것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순히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유가 있어서 꺼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은 그것을 일 찌감치 눈치채고 있었지만 감히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진은 어깨만 으쓱하고 리아로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차피 이 궁 안에 있는 이상에는 리아로를 떠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격 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가 걸음을 떼려 했을 때, 리아로가 그를 불렀다. 소리를 내어 부른 것은 아니었지 만 진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리아로는 어딘가 먼 곳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들과 가까이하지 말아라.” 진은 움직임없이 리아로의 옆얼굴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자드와 루이요? 아니면……” “양쪽 다.” 리아로의 눈이 캄캄한 심연의 빛으로 변해서 진에게 꽂혔다. “내가 진정 모를 거라 생각했던가? 그 아이가 내 영역 안에 들어와 누워있는데 모를 수가 있었을까? 명심해라. 이곳을 나가는 즉시 그들과 떨어지지 않으면 넌 네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을 잃게 될 것이야.” 진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지만, 침을 삼키고, 천천히 말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에게 헛된 충고를 해주시는군요.” 순간 리아로는 가슴 서늘하게 웃었다.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겠지.” 목소리는 조금도 높아지지 않았지만, 왠지 진에게는 그 목소리가 얼음의 창이 되어 바닥에 꽂히고, 그 소리가 궁전의 천장과 기둥에 부딪쳐 메아리치며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 같은 착 각이 들었다. 한순간이었지만, 시야가 흔들리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한순간이었다. 진은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된 몸을 천천히 움직여서, 리아로에게서 멀어졌다. 적어도 그녀의 중심으로부터는. 딱딱하게 잿빛으로 굳어진 얼굴만큼은 한참동안이나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자신감은 되돌아왔다. 자줏빛 방에 도착할 무렵에는 오른쪽 입매를 애매하게 올리고 있을 정도였다. 루이는 자주빛 융단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고, 그의 등 위에 잿빛 고양이가 몸을 말고 누워 있다. 진은 방으로 들어가서 잠시 그 모양을 내려다보다가 발끝으로 툭 쳤 다. 귀찮다는 듯한 웅얼거림이 돌아온다. “뭐하고 있는 거야?” “심심해......” 루이는 땅 속으로 기어들어갈 듯 음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몸을 뒤집었다. 고양이는 잽싸게 다시 루이의 배 위에 올라앉았다. 루이는 허공을 쳐다보며 손을 휘저었다. “우우우...심심해...” 그러더니 그의 눈이 진에게 꽂히면서 반짝 생기를 띠었다. “진, 나랑 대련 안할래?” “싫은데.” “그러지 말고, 한판만 하자, 응?” “싫어.” 진은 고개를 저으며 루이의 배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루이는 어린애같이 입 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 물뱀같은 여자랑 맨날 있는 게 좋냐?” “물뱀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알 게 뭐야. 사람을 끌어들여서 수정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여자 따위.” 뭐라고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루이는 큰 소리로 기지개를 켜며 몸을 뒤집었다. “으아아아아- 대체 카라는 왜 아직도 깨어나질 않는 거야? 몸은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글쎄. 상처도 덧나지 않았고 열도 어느 정도 내렸는데, 왜 아직까지 자고 있는 건지……그 나저나 너, 뛰어다니지 않으면 늘 그렇게 뒹굴거리는 거냐? 칼잡이 맞아?” 진은 다시 한 번 바닥을 구르고 있는 루이를 발로 꾹꾹 누르면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카라 쪽을 쳐다보았다. 리아로의 푸른 빛이 이렇게 강해졌어도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서 작은 몸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검은 빛. 그 때 카라의 가슴께가 약간 올라가는가 싶더니,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눈꺼풀이 들리고 새까만 눈동자가 열렸다. 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외 쳤다. “카라!” “뭐, 뭣?” 루이가 벌떡 일어났다. 검은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더니 진에게 초점을 맞추고, 가늘어졌다 가, 다시 움직여서 루이를 쳐다보았다. “루이?” “진짜 깨어났구나! 사흘 동안이나 깨어날 줄을 몰라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루이가 대뜸 달려드는 사이 진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체 왜 그렇게 가슴이 철 렁했을까. 그럴 이유가 없는데…리아로의 말 때문에 겁을 먹었던가? 다시 카라를 보아도 더 이상 그런 느낌은 없었다. 그는 왠지 모를 답답함을 누르고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이런. 섭섭하네요. 내가 벌써 잊어버릴 만큼 무의미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 “진? 진짜 진이네. 진이 왜 여기 있어?” “우연히 만났거든.” 루이가 간결하게 한 마디로 설명을 대신하고 카라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야, 정말 다행이다. 이제 너도 깨어났고 하니 여기도 뜰 수 있 겠고……아, 배고프지?” 카라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얼굴로 궁전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9. 부러진 날개 (5) 난다는 어둠 속에 앉아서 가만히 숨을 죽였다. 천천히, 천천히……숨소리가 잦아들고,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다음에는 심장 고동 소리도 잦아들고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한다. 우선은 바로 가까운 곳부터.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들리는 것은 잿빛 그늘이 묻어있는 여자 목소리. “알 바르카...” 바로 며칠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은 음색, 그러나 어딘가 미묘하게 다른 목소리가 대꾸 한다. “마슈라고 불러.” 뭔가 물이 찰랑이는 소리. “그 이름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셈인가요?”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또각또각, 일부러 힘을 주어 걷는 발자국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여자가 움직이고 있다. 발소리가 멈춘다.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 남자가 웃는다. “그래, 빛 아래에서 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좋은가?”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한 음성. 여자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 얼굴을 봐서 좋을 이유가 있나요 내게?” “저런 저런, 사랑이 증오로 바뀐 전형적인 케이스로구나, 넌. 하긴 이자드도 무정하지. 이런 괜찮은 여자를...” 잠시 침묵. 여자는 경멸의 감정이 뚜렷하게 스며든 목소리로, 냉랭하게 말한다. “나쁜 취미로군요.” “내가 성격이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뭔가 다르다. 이번에 대꾸한 것은 아까까지의 남자 목소리가 아니라 여자와 똑같은 목소리 다. 그래도 난다는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목소리가 몇 번을 바뀌어도 이 자에게는 뭔가 감춰지지 않는 느낌이 있다. 어떤 모습을 취하더라도 그 눈동자와 머리카락에 미세하게 스 며들어 있는 흑자색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자신을 죽이고 목소 리를 듣고 있으면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난다는 구분해낼 수 있었다. 곧 알 바르카는 다시 아까의 목소리로 돌아가서 말했다. “이 얼굴이 보기 싫다고?”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이자드와 전혀 달라.” “흐, 섭섭한 소릴 하는군.” 이자드. 이제서야 기억이 난다. 이자드라고 했었다. 그 마법사.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 뼈가 시릴 것 같은 푸른 빛의 소유자. 난다는 잠시 눈을 떴다. 그 눈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잠시 겹쳐져 있던 일곱개의 동공이 꽃잎처럼 벌어졌다가 다시 오므라 들었다. 이제서야 기억이 났다. 알 바르카는 목소리만이 아니라 모습도 이자드와 똑같은 형 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모습, 다른 사람들을 흉내낼 때처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 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같지 않았다. 이자드는 머리카락이 짧았는데……어째서일까? 의문은 짧았다. 난다는 호기심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청각을 확장했다. 잠시 생각을 놓은 사이 무슨 대화가 오갔던 걸까. 다시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나더니, 알 바르카가 속삭였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심해도 좋아. 대체로 나는 약속은 잘 지키거든...” 잠시 침묵. 몸을 돌릴 때 나는 옷깃 스치는 소리. 발자국 소리.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 리. 난다는 청계(聽界)를 넓혔다. 순식간에 여러 가지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건물 안에 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무거운 천이 끌리는 소리?왕실 마법단의 정식 복장은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책이 여닫히는 소리, 접시와 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숨죽인 밀어, 여자들의 웃음소리,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좀 더 확장해보자. 동물들의 소리가 들리 고, 더 멀리…더 멀리. 다른 건물로 뻗어간다. 남쪽, 재상의 관저. 올라간다. 초점을 고정한 다. 온갖 소리가 뒤섞여 웅얼거리며 끓는 속에서 갑자기 젊은 목소리 하나가 확 커진다. "시더의 피해가 예상외로 커서 진수식은 일주일 후로 미뤄졌습니다." "그럼 전하께선 모레쯤이나 출발하시겠군." 창노한 목소리. 재상 카이닌 엘 그레드다. 뭔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펜촉이 서류 위를 긁 고 지나가는 소리가 배경처럼 계속 깔리고 있었다. 종이를 건네주고, 정리하고 또 건네주는 소리들이 어수선하게 뒤섞여 있다. 이제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비서관이 하나, 둘, 셋, 넷, 지금 말한 녀석까지 다섯 명이다. 하나는 재상 왼쪽에서 서류철을 내밀고, 그 뒤에 또 한 명 이 서류를 정리, 분류하고, 재상의 앞쪽에서 한 명이 서류를 거둬들여 정리하고, 오른쪽에 서있는 녀석이 보고를 하고, 그 뒤에 선 다섯번째가 보고하는 놈을 보조한다. 과연, 소문대 로 엄청난 양의 일을 소화해내고 있다. 재상이 하루만 쉬어도 모든 업무가 마비될 것이다. 다시, 보고하는 비서관의 목소리. “근위대의 카티스 대장에게서 항의 서한이 왔습니다.” “비행선 운항 중지건인가? 카티스의 고향이 북쪽 영지였지?” 재상은 잠시 펜을 멈추고 펜촉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기다가 말했다. “나중에 만나지. 며칠 후로 만날 날짜를 잡아둬.” "그리고 리베르 문디의 마법사가 왕실마법단과 자꾸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잠시 사이를 두고.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노인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산더미 같은 일거리가 힘에 부치는 것일까. 달칵. 코 앞에 있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난다의 감각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 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뜨고 가만히 알 바르카, 이곳에서는 마슈라고 행세하 고 있는 자를 마주보았다. 그는 이자드와 같은 얼굴에,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 다. “수련이라도 하는 건가?” 난다는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답답합니다. 이야기를 빨리 마무리짓고 싶습니다만.” “아아, 그래. 그렇겠지. 마법사로서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일 테 니까. 아무리 용족에게 받은 육체가 강하다 해도 200년간 애써 쌓아올린 탑이 무너진 것 같 은 느낌은 참기 어렵겠지.” 알 바르카는 친절하게도 난다의 기분을 대신 풀어서 설명해 주고는 느물느물한 얼굴로 웃었 다. 난다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알 바르카는 손을 들어올려 흔들었 다. “알았다. 빨리 용건을 이야기하지. 의뢰 대상을 바꾸고 싶은데, 어떤가?” 난다는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지만, 눈동자는 확 벌어졌다. “이미 계약을 한 일입니다. 그 외에 다른 계약을 또 한다면 모르지만, 변경은 없습니다.” “아, 그렇지 참. 그럼 또 한 건 해볼 생각은?” “보수가 있습니까?” 알 바르카는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군. 네 구미를 당길만한 정보는 하나 뿐이다, 이거로군. 그럼 의뢰대상이 누군지 들어볼 생각도 없겠지? 좋아.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 그 정도로 넘어가지. 그럼 두번째 용건으로 넘어갈까.” 난다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알 바르카는 놀리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일처리를 빨리 좀 해줬으면 좋겠어. 내 사정이 좀 급해져서 말이야.”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난다는 며칠 후 왕이 다시 시더시로 향한다던 재상의 말을 다시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위아래로 두어 번 끄덕였다. 좋다. 마음이 급한 것은 오히려 난다가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알 바르카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그를 가지고 놀 거나 놀리려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하지만 재상은 분명 왕을 그냥 보내지 않 을 것이다. 방비를 철저히 하겠지. 마법이 아닌 다른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그는 곧 그 일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알 바르카가 왜 이자드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 해 가졌던 일말의 관심조차 깨끗이 지워버렸다. 그리고 손끝에 닿았던 희미한 온기도. 9. 부러진 날개 (6) 물의 궁전을 떠나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카라는 내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물의 궁전이 있는 곳, 보통 사람이라면 죽어가는 순간에만 보일 그 수정(水精)의 궁은 반딧붙이나 해파리 같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카라의 눈에 그 빛은 어느 순간에는 바위로 보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거대한 뱀처럼 보였다. 뱀? 아니, 아니다. 궁전이 있는 자리에 또아리를 틀고 누운 그 거대한 생물이 머리를 들어 카라를 쳐다보았을 때, 그 은빛의 거울같은 눈을 보았을 때 바로 알 수 있었다. - 저것이 수 룡 뮤로아라고. 그 은빛의 눈에는 사람의 모습이 지녔을 때 같은 표정은 없었지만, 카라는 그 순간 뮤로아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마음 속 아주 깊은 심층의 현을 건드리는 듯한 - 결코 그 의미를 번역해낼 수 없는 말을. 그녀는 뮤로아의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들 을 수 없었고, 그것이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 “...그래서?” 취한 듯 카라의 머리와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광경이 떨어져나간 것은 여기, 현실 속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였다. 카라는 꿈에서 깬 듯 앞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아, 그렇지. 바다를 빠져나와서...걷기 시작했지, 참.’ 이자드와 진이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라는 그들의 나지막한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 며 뒤따라 걸었다. 밤공기가 왠지 달콤하게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세상이 조금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꿈결속을 걷는 듯, 발이 구름을 밟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진이 말하고 있었다. “흐음, 왕제 말이죠. 사실 그게 왕제란 작자는 확실히 그다지 볼 게 없는 녀석이예요. 추종 자들이 불타는 충성심을 바치고 있는 건 그 노친네가 아니라 아들이라더군요. 왕제의 아들 이니까 왕의 조카가 되나…… 여하튼 그 아들은 재상과 사이가 좋지 않아요. 나이도 어린 녀석이 재상의 권한이 너무 크고 왕권이 유명무실한 데 불만이 크다든가, 뭐라든가. 덕분에 재상의 그늘에 서식하는 지저분한 기생식물들이 다 왕제 쪽이 쏠린 거죠.” “늘 그런 이야기군.” 이자드는 냉소를 치며 중얼거렸다. 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정말로 들리는 것만큼 명석한 아이라면 그런 신하들은 단물만 빨아먹고 버리겠지만, 그렇다고 재상만한 능력이 있을지 어떨지.” “재상에 대해 반감을 지닌 사람들이 다 그쪽에 붙었다면, 왕실마법단도 당연히 그쪽이겠 지?” “말하나 마나죠.” “그 왕실마법단의 신임단장에 대해서는 아는 거 없나?” 진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신임 단장이 취임했다는 얘기까지는 들었지만, 그 무렵에 나와버렸으니까요.” 진은 카르트를 떠난 시기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말머리를 돌려 호기심어린 얼 굴로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문제에는 왜 관심을?” 그는 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로 왕실마법단장, 혹은 마법단장 행세를 하고 있는 게 휘안이라면, 자동적으로 왕제와 그 아들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 아들 이 똑똑하고 고집이 있다면 확률은 더 높아질 것이다. 휘안은 영리한 상대를 휘둘러 농락하 기를 즐기니까. 이자드의 미간에 저절로 골이 패였다. 왕이 죽거나 말거나, 나라가 쑥대밭이 되거나 말거나 그건 알 바 아니다. 아니, 알 바 아닌 걸로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상대가 휘안이 니……오래된 상처가 쑤셔온다. 벌써 30년이 지났는데도, 휘안을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아 파오는 상처. 그의 심장 언저리까지 파고들었던 차가운 손의 감촉. 이자드는 그 느낌을 털어 버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워낙 조용해서 혹시 졸고 있는 게 아닌가 했지만, 카라는 멀쩡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뭔가 주위가 낯선 것처럼 멍한 눈이기는 하지만 졸린 기색은 아니 었다. 사흘이나 잤으니 잠이 더 오지 않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이자드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카라는 왜 그러냐는 듯 그를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혀 진의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진이 돌아보고 손가락을 흔들었다. “내 고양이 괴롭히면 안돼.” “누가 괴롭힌다고 그래?” 카라는 씩 웃으며 고양이를 꼭 끌어안았다. 잿빛 고양이는 답답한지 품에서 도망치려고 발 버둥치기 시작했다. 이자드와 진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대화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진이 먼저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왕제의 세력 기반은 시더가 아니라 레투스 시인 걸로 아는데, 어 째서 왕은 시더를 더 견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이 나라, 남서쪽으로는 바다를 면하고, 북으로는 모래의 바다와 카르트에 접해 있으며 그 너 머에도 약간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키시 반도는 실질적으로 통일국가가 아니라 도시 연합국 이었다. 4대 도시 아칸서스, 레투스, 시더, 그리고 키시는 본래 각기 독립된 도시국가였고, 지금도 키시의 왕은 다른 세 도시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키시의 왕 - 정확히 말하면 키시 왕조는 일종의 명맥상 대표자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더불 어 다른 세 도시와는 달리 성도 키시가 다른 도시와의 교역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소비도시 라는 점도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분명 왕은 키시의 왕조에서 나온다. 그러나 다음 왕이 누가 되느냐는 세 도시의 중심 세력 이 누구와 결탁하고 누구를 미느냐에도 크게 좌지우지되었다. 예를 들자면 지금의 왕은 전 왕의 둘째 아들이었고, 아칸서스에서 지지하던 왕위 계승자였다. 물론 그러므로 현 왕조에서 아칸서스는 많은 혜택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진이 말한대로 레투스 시는 공공연히 몇 년 전부터 왕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세간에서 아는 바로 시더는 아직까지 왕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이자드가 말했다. “왕실 마법단은 리베르 문디와 사이가 나쁘지.” “그렇죠. 그러니까 마법단이 재상 반대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크다면……” “시더의 원래 의사와 관계없이 밀어낼 수도 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레투스 하나만으로 키시, 레투스, 아칸서스 세 도시를 상대하게 됩니다. 승산이 없어지죠.” “흠……” 이자드는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다. 진이 생각보다 키시 반도의 사정에 밝은 데 대한 놀라움 의 표현이었다. 진은 입매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뭐라고 해도 인접 국가니까요. 신경을 안쓸 수가 없었죠.” 대화는 그쯤에서 끊기고 이자드와 진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어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더 쪽으로 가볼 생각이었 지만, 다가갈수록 병사들의 수가 부쩍 늘어서 피하다 못해 단념해야 했다. 당장 경계선을 뚫 고 들어가는 거야 별 일 아닐지 모르지만, 그 다음, 또 그 다음에 성가신 일이 계속된다. 게 다가 리베르 문디가 이자드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면 도저히 시더 시는 좋은 생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자드는 시더 항구의 불빛이 보이는 곳에 서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혀를 찼 다. “루이가 성급하게 굴어서……” “자아, 어쩌시겠습니까?” 진은 어디까지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재미있다는 투로 묻고 다시 말했다. “그러고보니 리아로에게 알아낸다던 건 알아냈어요?” 이자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진은 답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몸 주위로 뻗어나오는 푸 른 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오 른쪽 입끝을 끌어올렸다. 결국 그들은 시더를 포기하고 밤을 새워 시더와 레투스 시 중간쯤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향 했다. 도중에 카라가 졸기 시작해서 노숙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어슴푸레 별빛이 사라질 무 렵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장대비에 그 생각은 포기해야 했다. 그들은 흠뻑 젖어서 마을 어귀 에 도착, 자고 있던 여관 주인을 두들겨 깨워서 방을 잡았다.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남은 시간을 이용해서 사다카 하리잔을 불러냈었다. 그러나 하리잔은 키시 주변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아니, 키시만이 아니었다. 시더도 공백 지대가 되어버렸 다. 이렇게 넓은 지역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휘안의 존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불길한 징후는 계속되어, 비는 녹초가 된 그들이 다음 날 느직이 일어날 때까지도 그칠 생 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점점 더 심해졌다. 폭우에 바람까지 동반해 서 나무 덧창을 덜컹덜컹 흔드는 것이 영락없이 폭풍의 신호였다. 계절에 맞지 않는 폭풍이 었다. 마을 사람들은 며칠 전의 눈보라에 이어 또 엉뚱한 날씨라고 수근거리며 불안에 떨었 다. 번개가 떨어지고 나서 한참 뒤에야 우르르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걸 보면 이 마을을 정 통으로 때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우레소리가 드물게 고약스러웠다. 카라는 천장을 뚫을 것처럼 쏟아지는 빗소리와 한번씩 하늘을 찢어놓을 것처럼 울리는 우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 순간 헤웬을 떠올렸지만, 그 생각은 곧 지워버렸다. 이 비바람은 헤웬이 일으킨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강력했다. 지나치게 강력했다. 9. 부러진 날개 (7) 카라는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맙소사……” 진도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였다.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폭풍의 손톱에 갈가리 찢긴 폐허로 변해 있었다. 마을에서는 제 일 피해가 심한 집이라도 지붕이 뜯겨 날아간 정도였고, 죽은 사람도 없었다. 이 숲의 상황 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니, 숲속에 들어와서도 이제까지는 이렇지 않았다. 대개는 비바람 이 휩쓸고 지나간 여느 숲과 비슷한 상태였다. 번개에 맞아 아직까지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아름드리 나무도 종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그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맞닿뜨린 곳은 처참했다. 하늘에서 불구덩이가 떨어져내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살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온통 부러지고 쪼개지고 갈라져, 숯덩이로 변해서 연기를 올리는 나무들 뿐이었다. 짐승들도 미처 도망치지 못했는지 새까맣게 그을은 시체가 여기 저기 널려 있다. 루이는 목을 뚝뚝 소리나게 꺾더니 허리를 낮췄다. 카라는 루이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서 땅에 발을 디뎠다. 지쳐서라기보다는 워낙 진과 루이의 보폭을 따라잡지 못해서 업혔던 거 였으니까 별 무리는 없다. 나무와 흙, 고기와 가죽이 탄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찔렀다. 카라 는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만에 중얼거렸다. “원형이야.” 말 그대로였다. 폐허가 되어 생명이라고는 벌레까지 모두 씨가 말라버린 땅은 둥그런 모양 의 공터를 이루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비바람에 좀 시달렸다 싶은 정도의 나무들이 멀쩡히 서 있었다. 진이 중얼거렸다. “백색………” 두 사람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 루이를 쳐다보았다. 뭔가 있는 걸 까? 진의 감각이 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늑대나 독수리를 뛰어넘는 루이의 감각에는 미치 지 못한다. 그들은 잠시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루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이는 그들의 기 대에 화답이라도 하듯, 뭔가를 손에 들고 허리를 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기대 밖이었다. “야, 이거 먹어도 될 것 같은데!” “뭐?” 루이는 손에 든 덩어리를 툭툭 털어내며 희희낙락 외쳤다. “토낀가봐! 요리도 안해도 되겠다. 잘 구워졌네.” 카라는 발끈해서 지금 그럴 때냐고 외쳤고, 진은 그러면 그렇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 를 흔들었다. 루이는 무안한 얼굴로 변명했다. “그래도 먹을 건 먹을 거잖아. 폭풍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얻어먹고 나왔는걸. 배가 고파서 힘이 없다고!” 카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이건 자연적인 태풍의 흔적이 아니야.” “그럼 마법?” 진의 말투는 회의적이었다. 카라는 손톱을 깨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루이가 토끼 시 체를 손에 든 채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왜 그래, 루이?” “으음…무슨 소리 안들려?” “소리?” 루이는 자세를 바꾸어 아예 땅에 귀를 댔다. “이상한걸. 무슨 폭음소리 같기도 하고...” “폭음? 우레소리 아냐?” 루이는 땅에서 고개를 떼며 미심쩍은 듯 말했다. “글쎄, 그건가……좀 다른 것 같은데.” 순간 마른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카라와 진도 똑똑히 들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세 사람이 고개를 들자 바람이 휘몰아쳐 재와 숯가루를 공중에 가득 띄웠다. 눈에 가루가 조금 들어갔는지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카라는 눈을 감고 앞을 가린 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멀리서 세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겨 우 바람이 멎고 눈물을 좀 흘린 다음 앞을 보니 루이가 언제 올라갔는지 위태위태하게 불탄 나무 위에 서서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뭐가 보여?” “맞았어!” 루이가 쾅 소리를 내며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카라는 눈을 가물가물 뜬 채로 물었다. “뭐가 보였는데?” “번개!” “자연적인 거 아니고?” 루이는 대답도 하지 않고 빙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간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해서 다른 것은 잊어버린 것이다. 루이는 숯검댕으로 엉망이 된 옷과 머리카락을 털 생 각도 하지않고 순식간에 저만치까지 내달렸다. "이런 이런." 루이의 성급함에 혀를 차며 바로 뒤따라가려던 진은 멈칫 걸음을 멈추고 카라를 돌아보았 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면 두고 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이 숲에서 카라만 놔두 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루이가 정신이 나가버린 이상 그라도 카라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물론 카라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나빴다. 아무리 카라가 제법 굵은 신경의 소유자라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 쩔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카라는 탕 하고 바닥을 차서 불만을 날려버린 다음 말했다. “저 바보, 배가 고파서 힘도 못쓴다더니.” 카라는 전력을 다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전력질주라봐야 오래 달릴 수는 없었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벽력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까 이 갈수록 바람이 거세어져서, 밀려가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기만도 힘에 겨웠다. 진의 도움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키가 높은 나무들은 모두 돌풍에 휘말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예 전에 경험해본 양상이었다. 헤웬이 분노했을 때 휘두르던 폭풍의 힘과 비슷했다. 하지만 전 보다 강하다. 돌풍에 작은 나무는 뿌리뽑혀 날아가고 떨어지는 번개로 불이 붙는다. 땅에 발 붙이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모두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채 공중에서 광무를 추고 있을 뿐. 헤웬이 강해진 걸까, 아니면 헤웬과 이렇게도 흡사한 힘을 쓸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걸 까. 번쩍! 낙뢰가 어두워진 숲 속을 밝게 비췄다. 떨어진 곳은 루이에게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 이었다. 루이는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나무둥치를 쳐다보며 딱딱하게 내뱉았다. “젠장.” 생각보다 어렵다. 카라보다 한참 앞서있기는 했지만, 루이도 그렇게 쉽게 전진할 수가 없었 다. 칼끝을 땅에 찔러넣고 지탱해 가면서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칼날이 부러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다행히도 칼날은 아직까지 잘 지탱해주고 있었고, 루이는 어찌됐든 착 실하게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그는 돌과 나뭇가지가 언제 들어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입을 벌려 투덜거렸다. “제기랄~~ 그 토끼를 잽싸게 먹어치우고 오는 건데!” 그는 잽싸게 발을 땅속에 파묻으면서 검집째로 칼을 올려쳐 앞으로 날아든 돌덩이를 밀어냈 다. - 네가 이 정도면 진은 오기 힘들겠군. 이자드가 침착하게 머리 속에서 중얼거렸다. “에? 왜? 그 녀석 솜씨 꽤 좋잖아.” - 고양이에다가 카라까지 데리고서는 무리지. “어? 그런가?” 이자드와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도 몸은 앞으로 숙인 채 전진하고 있다. - 여하간 네놈은…… 루이는 이자드의 잔소리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다른 데 주의를 돌렸다. 불규칙적으로 하 늘 위, 이 좁은 지역 위만 덮은 먹구름에서 떨어지고 있는 번개와는 다른 백색의 섬광이 앞 쪽 나무들 위에서 연속적으로 터지고 있었다. 루이는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을 쳐다 보았다. 백뢰(白雷)다. 하지만 번개가 떨어지는 곳은 하늘이 아니었다. 루이보다 한참 뒤쳐진 곳에서 천천히 전진하고 있던 진과 카라도 그 번개를 보았다. 카라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외쳤다. “지난번이랑 똑같아!” 저 새하얀 번개는 지난번에 헤웬과 싸우던 상대였다. 그러면 지금 싸우고 있는 건? 역시 헤 웬일까. 정말로 원하던 대로 강해진 걸까.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사람에게서 떨어져나온 번개가 연속적으로 숲을 수놓으면서 오히려 이쪽의 상태는 나아지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하지만 방향이 조금 달라진 느낌이었다. 진은 잠깐 발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원래 루이만큼 체력이 좋은 타입이 아니라 축적해두었던 힘 을 한 번에 방출하는 형이어서, 이런 식으로 전진하는 것은 제법 힘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은 품 속에는 고양이를 넣고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카라의 팔을 잡고 있는 상태였 다. 그는 숨을 고르다가 문득 손을 들어올렸다. “어딜!” 진은 마치 상대에게 의지라도 있다는 듯이 외치면서 덮쳐들어오는 나뭇가지를 지팡이로 깨 끗하게 베어넘겼다. 화려하게 숲을 수놓고 있는 백뢰(白雷)를 바라보는 진의 입매가 뱅글뱅 글 돌았다. 살벌한 미소였다. “역시 같은 색이군.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녀석이 있나본데.” 바람이 한층 강해졌다. “우와아악! 뭐야 갑자기! 이런 건 반칙이라구!” 루이는 갑자기 강해진 바람에 주르륵 뒤로 밀리며 소리쳤다. 이자드가 비야냥거렸다. - 그 정도 소리지를 힘이 있으면 중심부터 잡겠다. “젠장. 너 지금 여기 없다고 잘도 그런 소릴! 너같으면 이런 바람 맞고 설 수 있을 것 같 아?” - 나라면 그런 바람을 맞을 필요도 없지. “칫- 좋아, 나라고 못할 줄 알고?!” 이자드의 비웃음에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루이는 손을 뻗어 오른쪽 칼집에 들어있는 짧은 검을 뽑아들었다. “우아아아아아앗-!” 보통 막대기 같아 보였던 화염도의 뿌리 부분에 화르륵 백색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루이는 공중에 대고 화염도를 수평으로 그었다. 순간 공중에 미친 듯이 날아다니던 나뭇가지며 돌 들이 얼어붙은 듯 정지하더니 아래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검을 휘두른 주위 반경 10여미터 내에 바람이 잘려나간 것이다. 루이는 혀를 날름 내밀며 웃었다. “헷헷헷. 어떠냐! 폭풍이라도 나를 막지는 못하지!” - 잘났다. 그건 멜카르트의 도법이잖아? “어허. 모름지기 진정한 무사라면 실용적인 기술은 다 받아들이는 법!” - 다 좋은데 기껏 바람을 잘라냈으면 앞으로 좀 가지 그래? “아아앗!” 루이는 당황하며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미 검의 영향력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연속 해서 화염도를 휘둘러 바람을 자르면서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루이가 생각해낸 것은 물론 진도 생각할 수 있었다. “타핫!” 옆으로 뉘인 칼날이 깨끗한 반원을 그리며 바람을 잘라낸다. 그는 샤미르의 지팡이를 손에 익은 장도로 바꾸어 쓰고 있었다. 몇 백년이나 손에 익은 도법이니 정확함은 루이 이상이지 만 아무래도 만들 수 있는 공간은 훨씬 작았다. 우선 루이만큼의 힘이 없는 데다가, 그의 칼 이 아무리 샤미르의 유산이라고 해도 루이의 화염도만한 파괴력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기를 쓰고 나아가도 진과 카라의 위치는 루이로부터 몇 천 하스타는 족히 떨 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진의 도법은 불필요한 힘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서 체력 소모가 적었다. 카라는 진의 뒤에 바싹 붙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주문이라도 써서 진을 도울 생각은 굴뚝 같지만 이제까지 매번 그랬듯, 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이 폭풍을 멈출 힘만 있다면…… 진이 손에서 칼자루를 미끄러뜨리는가 싶더니, 다시 고쳐잡고 들어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순간,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벼락이 온 숲을 밝게 물들였다. 하늘이라는 천을 둘로 잡아찢는 듯한 굉장한 소음과 함께. 엄청난 우레소리가 메아리를 남기며 사그라들자 돌풍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순간적으로 카 라는 어리둥절해서 걸음을 멈췄다가, 뭔가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던 싸움이 결정적인 국면으 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시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물론 진은 그녀보다도 앞서서 뛰어가고 있었다. 같은 순간, 돌풍이 갑작스럽게 멎자 루이는 직관적으로 방향을 잡아 뛰었다. 달큰한 탄내가 코를 찔렀다. 싸움의 한복판이었던 듯, 나무들의 잔해가 새까맣게 깔린 공터가 새로 만들어 져 있다.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 새까맣게 타버린 나뭇조각들이 파삭 소리를 내며 재를 날린 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그의 말이 땅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그 소리를 삼켜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악- 안돼! 안돼요, 할머니! 할머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갈색 머리에 동그란 얼굴의 여자였다. 루이는 바로 그가 이자드의 눈을 통해 본 적이 있는 그 마녀임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검댕이 온몸에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 무엇인가에 결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사람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 도 한 어떤 물체에. 루이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쓰러진 나무둥치를 훌쩍 뛰어넘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헤웬의 앞에 서있던 여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단아한 얼굴 에 가슴까지 늘어뜨린 금발 머리, 순 흰색의 로브. 그 손에는 키 높이만한 석장이 들려 있었 고 그 끄트머리는 헤웬이 부여안고 있는 물체에 박혀 있었다. 루이는 그제서야 그 ‘물체’ 가 마녀 라니아의 사체임을 알아보았다. 금발 여자는 담담한 얼굴로 석장을 비틀어 시체에서 빼냈다. 으적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 다. 끄트머리에서 피가 투둑 떨어졌지만 공기중에서 바로 안개처럼 스러져 버린다. 뒤이어 바닥에 누운 사체도 서서히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마녀는 죽어도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패 배한 순간 자신의 귀령에게 먹히는 것이 마녀의 운명이므로. 헤웬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흐느끼며 몇번이고 허공을 움켜쥐었다. 헝크러진 갈색 머리 아 래로 보이는 혈색 좋은 둥근 얼굴은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러나 금발 여자가 바로 그녀까지 해치우지 않은 것이 그 슬픔에 애도를 표하기 위함은 아 니었음은 분명했다. 루이는 그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너, 뭐야? 복장으로 봐선 신관 같은데- 응?” -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머리 속에서 이자드가 중얼거렸고, 루이는 말을 멈추고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 목 소리에 반문했다. “어디서 언제 봤다는 거야?” - 흠... 그 여자는 이자드가 기억을 돌이키기 전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뵙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만, 이자드님.” 순간 루이는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설마 이녀석 목소리가 들리냐? 와- 카라 말고 그런 녀석이 또 있을 줄은...” “들리지는 않습니다. 추론해봤을 뿐이죠. 제 주인께 들은대로.” “......?” 석장의 복잡한 고리들이 흔들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듯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여자는 석장 을 짚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알 바르카님의 신관, 비델입니다.” “신관? 알 바르카 - 휘안의? 그 개자식이 무슨 신이란 말야?” 루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내뱉았고, 그 대가로 비델의 살기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비델의 시선은 그야말로 시선에 손발이 달렸다면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죽일 만큼 험 악한 것이었으나, 루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내참, 오래 살다보니 별소릴 다듣잖아. 뭐야, 너 어렸을 때 잡혀서 세뇌라도 당한 거 아 냐? 아니 참, 그래도 그렇지 그 녀석 신을 자칭할 정도로 미친 놈은 아니었는데. 그 사이 성 격이 더 이상해졌나- 안그래도 처치 곤란이었는데 큰일이네.” 비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석장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하얗게 변했다. 알 바 르카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며 욕을 한다는 것은 그녀로선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수행해야 할 일은 마쳤다. 게다가 그녀의 신은 이자드와 상대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비델은 루이를 무시하고 돌아갈 작정으로 석장을 꽉 움켜쥐었다가, 문득 알 바르카의 명령을 돌이켜 보았다. - 분명 이자드를 상대해선 안된다고 하셨지. 지금 지껄여대는 자는 이자드가 아니다. 비델은 싸늘하게 눈을 빛내며 석장을 들어올렸다. 루이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석장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고리가 부딪친 순간 도약해 서 비델의 코앞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비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석장을 양손 으로 쥐고 들어올려 검격을 막았다. 루이가 쥔 1하스타 길이밖에 안되는 짧은 칼에는 날이 서있지 않았다. 덕분에 막아내기는 했지만 어깨까지 저려올 정도의 힘이었다. 루이는 비델이 그의 칼을 막아내자 씩 웃었다. 석장을 받치고 있는 두 팔이 덜덜 떨리고 있 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대로 화염도의 날을 세운다면 석장을 두동강내는 것쯤이야 일도 아 니었지만, 상대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자칭 알 바르카의 신관이라도...사람을 상대로 화염도 를 쓰는 것은 도에 넘치는 일이다. 그렇게 말하면 이자드는 언제나 코웃음을 치며, 보통 칼 로 죽이나 화염도로 죽이나 그게 그거지 무슨 위선이냐고 말했지만. 이제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루이의 등뒤로 뭔가가 날아들었다. 그는 재빨리 칼을 떼고 그 대신 오른손으로 석장을 움켜쥐면서 뒤돌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발톱 비슷한 것 이 등을 할퀴고 지나간 후였다. 등의 아픔과 동시에 오른손바닥에도 불에 댄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석장에도 자체 방어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루이는 엉겁결에 석장을 쥔 손을 놓았 고, 그 틈에 비델은 몸을 굴려 빠져나갔다. “무슨 짓이야!!” 루이는 완전히 뒤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기합에 감응하여 화염도에 하얀 불 꽃의 날이 치솟았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상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루이를, 아니 그의 뒤쪽에 있는 비델을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헤웬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 여잔 내 상대야. 당신은 빠져.” 헤웬은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루이는 눈을 치뜨고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빠지라 마라 명령이야?” - ...또 어린애처럼 군다. “안들리게 말했어, 안들리게.” - 참도 안들리겠다. 자신의 성량을 모르는군. 이자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헤웬에게는 확실히 루이의 말이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루이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싹 무시하고 비델에게만 정신을 집중했다. 들어올린 손 주위로 돌풍이 다시 맺히기 시작했다. 비델은 루이를 경계하면서도 일단 헤웬을 상대하 기 위해 석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루이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일 단 비켜섰다. 그러나 그가 비켜서준 보람도 없이, 헤웬과 비델이 다시 맞닿뜨리기 전 쉭 하고 공기를 찢 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화살촉 하나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두 사람의 집중력을 깨뜨 리기에는 충분히 날카로운 화살이었다. 묘하게도 아무것도 맞히지 않은 화살은 부메랑처럼 돌아서 다시 활로 되돌아갔다. “아아, 이런. 화살이 마땅치 않은 걸 생각 못했네.” 진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화살은 재빨리 덩굴처럼 활에 엉켜붙어 녹아들어갔 다. 화살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샤미르의 지팡이 하나로 활과 화살을 함께 만들었던 모양이 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활시위를 한 번 퉁기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곧 손에 쥔 활은 형 태를 바꾸어 검으로 변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헤웬과 비델은 이 남자는 누구 편일까 생각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옆에 서서 팔짱만 끼고 있던 루이가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얌마, 나도 가만 있는데 네가 왜 끼어드는 거야?” “질문이 틀렸어. 넌 그냥 끼어든 거지만 난 저 여성에게 빚이 있거든.” 헤웬은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러니 빚이 있다는 건 비델을 두고 하는 말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녀는 야멸차게 말했다. “꿈도 꾸지말아요. 무슨 빚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먼저니까.” 진은 부드럽지만 뒤틀린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죠?” “저 여자가 방금 라니아를 죽였거든.” 루이가 무신경하게 끼어들었다. 헤웬은 화난 얼굴로 루이를 쳐다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우리 할머니죠.” “아하, 할머니의 복수라. 하지만 방금이라면 시간순으론 내 빚이 먼저인 것 같은데요? 자 자, 그러니까 내가 적당히 요리해서 넘겨주면 그 다음에 복수하지 그래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진!” 네 번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양이를 안은 채 바깥쪽에 서 있던 카라였다. 열심히 뛰어온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카라의 머리카락과 고양이의 털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있었 다. 카라는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내며 진을 쏘아보았다. 문득, 논의의 중심이었던 비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더 이상 이 촌극에 동참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 말소리가 허공을 떠돈 것과 비델의 몸이 사라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루 이의 대응이 가장 빨랐다. 그는 바로 칼을 들어올려서 비델이 서있던 자리에 냅다 집어던지 고는 칼이 떨어지기 전에 도약했다. 순간이동은 마족이나 용족같이 마력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다. 고로, 비델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 이가 던진 칼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그는 몸을 날려 다시 칼을 받으면서 무슨 생각인지 진을 쳐다보았다. 보라는 듯이 진의 녹색 눈동자가 무엇인가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루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진의 시선 끝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파악했다. 몸을 돌리고, 뛰어 올라서, 접근한 다음, 공격한다. 네 가지 동작을 다 해치우는 데 말 그대로 눈 하나 꿈적할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칙 소리를 내며 칼 끝에 뭔가가 걸렸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날았 다. “아...!” 비델은 당황하여 약한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루이의 움직임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랐 다. 비델이 허둥거리는 사이 귓가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 그러니까 그 녀석은 상대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알 바르카님!” 루이는 그 이름이 귀에 들어와 대뇌에 도달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을 빼며 화염도를 왼 손에 쥐고 기합을 넣었다. “저 녀석, 왜 저래?” 루이의 동작을 지켜보던, 아마도 유일하게 제대로 알아보고 있었을 진은 그가 비델을 앞에 놓고서 몸을 뒤로 빼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칼을 세워들었다. 루이는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화염도를 쳐올려갔다. 비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나타난 누군가가 화염도의 칼날을 맨손으로 잡은 채 웃었다. 작은 손 안에서 새하얀 화염이 몸부림이라도 치는 것처럼 맹렬히 움직이고 있었 다. 이자드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 ...휘안... 휘안은 화염도를 맨손으로 쥔 채 빙긋 웃었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저 녀석이 필요하거든.” 어린아이와 어른의 중간쯤 되는 것 같은 애매한 목소리. 남자아이라기에는 낮고, 여자아이라 기에는 너무 허스키한 그 목소리를 듣고 뒤이어 눈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루이는 아 연히 입을 벌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카라 쪽으로 돌아간다. 루이는 고양이를 안고 서있는 카라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적자색의 눈 동자를 제외하고 루이의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생김새는 카라와 똑같았던 것이다. 이제는 루 이만이 아니라 헤웬도, 진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카라는 입만 딱 벌린 채 숨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는 카라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처럼 몇십년만에 만나는 건데 대뜸 욕부터 하다니 너무하잖아, 루이?” 루이는 아는 욕이 다 떨어지자 씩씩거리며 칼자루를 당겼다. 여유있는 척 하고 있지만 아무 리 알 바르카라도 화염도를 맨손으로 쥐고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바짝 힘을 기 울이자 카라의 모습을 취한 휘안도 그에 못지 않은 힘으로 칼날을 움켜쥐었다. 보기에는 아 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루이마저도 정말 괜찮은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휘안은 칼날 을 잡은 채 다시 미소를 지었다. 카라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상을 덜 차렸거든. 식사 초대는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 그때까지……” 갑자기 휘안의 힘이 확 줄어들었다. 루이는 당기던 힘을 줄이지 못하고 칼자루를 확 잡아당 겼다. 휘안은 그 힘을 역이용해서 루이의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자드가 날카롭게 외쳤 다. - 이 멍청아! 당장 피해!! 루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휘안의 작은 몸이 루이의 품 속으로 파고들더니, 젖은 듯한 검은 머리카락이 루이의 얼굴을 스쳤다. 휘안은 얼어붙을 듯한 미소를 지으며 루이의 눈속 을 들여다보고, 루이에게만 겨우 들릴락 말락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때까지 몸을 잘 보전하고 있어라, 이자드. 내……” …입술이 움직이는 것은 보였지만, 그 다음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무엇인가가 루이를 꿰뚫고 그 속을 강타했다. 루이는 강렬한 아픔을 느끼고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다. 온몸이 마 비된 것 같았다. 휘안은 엷은 웃음을 띤 채 루이에게서 얼굴을 뗐다. 목소리가 서서히 변하 며 굵어져갔다. “걱정말아, 루이. 네겐 별로 흥미가 없거든. 특히나 지금은...” 그 목소리를 끝으로 휘안은 공기속에 녹아들듯 사라져갔다. 진이 움직였지만 루이와 너무 바싹 붙어있어서 손쓸 방법이 없었다. 루이는 카라와 같은 얼굴, 소름끼치는 적자색 눈동자 가 사라져갈 때까지 마비된 듯 초점잃은 눈동자로 서 있었다. 카라가 달려들어 루이를 잡고 흔들었다. “루이! 루이? 괜찮아? 다친 거야?” 한참 흔든 후에야 루이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더니, 무릎이 확 꺾였다. 바싹 붙어있던 카라가 루이의 몸에 깔릴 뻔 했다. 진이 황급히 손을 내밀어 루이의 몸을 붙잡았다. 루이는 초점을 찾고서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 멍한 눈초리였다. 그는 바닥을, 날아다니는 재와 흙을 바라 보며 쉰 목소리로 내면을 향해 말했다. “이자드……?” 9. 부러진 날개 (8) 숲 속은 언제 태풍에 휘말렸었냐는 듯, 평화로운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부언하자면 그 평화 란, 아직까지도 타들어가며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무줄기와, 새까맣게 그을음에 덮힌 땅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탄내, 죽어 넘어지거나 제 터전으로 돌아오지 않는 동물들로 이루 어진 평화였다. 새 몇 마리만 돌아와서 제 보금자리를 찾는 듯 하늘을 빙빙 돌았다. 루이는 겨우겨우 쓰러진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맥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덕분에 얼굴이 가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때때 로 입술 끝이 팽팽이 휘어지는 모습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을 알려주었다. 카라는 옆 에 붙어앉아서 루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났네.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 루이가 슬그머니 한쪽 눈을 뜨더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카라는 그 얼굴을 보고 잠시 안 도했다가, 혹시나 하고 다시 물었다. “이자드는...?” 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쉬어터진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다. “아무 반응도 없어.” 줄이 툭 끊긴 것처럼 이자드의 의식이 느껴지지 않은 지 벌써 몇시간이 지났다. 그때부터 시작된 두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져, 이제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진의 부축을 받으며 조금 걸어본 것도 잠시, 그 다음에는 거의 업히다시피 해서 움직여야 했다. 덕분에 그들은 결국 아까의 공터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한 상태였다. 조금 쉬면 나아지지 않 을까 싶어 기다리다 보니 벌써 해거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두통은 원래 루이의 것이 아니었다. 루이가 무슨 머리 쓸 일이 있다고 두통이 일어나겠 느냐는 진의 말을 믿어서는 아니지만, 끔찍하게 머리아파하고 있는 장본인은 이자드였고, 루 이가 겪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한 공명임에 분명했다. 공명만으로 루이가 이 지경이 될 정도 로, 그 정도로 이자드가 크게 다쳤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깨어나지 않는 이자드, 아프다는 엄살조차 떨지 못할 만큼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루 이, 이미 지쳐버린 진과, 아직도 라니아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터벅 터벅 따라오고 있는 헤웬. 카라는 암담함을 느끼면서 물었다. “특별히 뭘 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알 바르카라는 녀석이 그렇게 강해?”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무서운 녀석인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야. 이자드가 좀 밀리는 정도 지.” 카라는 아까의 상황을 돌이켜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휘안이 한 말 때문에? 대체 뭐라고 했길래?” 루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카라를 쳐다보았다. “나보고 흥미없다고 했던 거 말이야?” “아니. 그거라면 나도 들었는걸. 그 전에...” 카라는 말을 멈추고 진과 루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카라는 당혹감을 느꼈다. “내가 잘못 본건가? 하지만 분명히 입술이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아무 말도 못들었 어?” 루이는 고개를 젓다 말고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괜찮아?” “도끼가 있으면 내 머리를 빠개버리고 싶을 정도야.” “빌려주리?” 말도 없이 쉬고 있던 진이 지팡이를 불쑥 내밀었다. 루이는 눈을 치뜨며 지팡이를 잡아채려 했지만 연이은 통증에 손을 떨구고 말았다. 진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일찌감치 야영할 만한 곳을 찾는 편이 나을 성 싶은데.” 카라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결국 결정권은 카라에게 떨어진 셈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다. 혼자 가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는 하지만 절대로 자기가 나서서 상황을 주도하려고 는 하지 않는 진이 좀 얄미웠다. 카라는 헤웬을 돌아보았다. 루이가 이 지경이 되는 바람에 헤웬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분명히 헤웬도 강한 사람이고, 자신에게 뭔가 해줄 만한 능력 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위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니까. 그나마 게로가 헤웬 주 위를 맴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태로 봐서는 진의 말이 옳았다. 일찌감치 야영할 자리를 잡아서 밤을 조금이라도 잘 보낸 다음 아침에 힘을 내어 레투스로 향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왠지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한 것뿐이라면 좋겠지만…카라는 단호해 보이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조금만 더 가서, 조금만 더 간 다음에 쉬자.” 진은 어깨만 으쓱하고 루이를 들쳐업었다. 물론 업으면서 한 소리 하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 다. “네가 여자였으면 좀 견딜만 했겠는데.” 카라는 헤웬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건드렸다. 헤웬은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걸을 수 있 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마음이 답답하다. 카라는 그냥 헤웬의 손을 한 번 꼭 잡았다가 놓아 준 다음, 게로에게 말했다. “옆에 꼭 붙어있어.” 카라는 마음을 다잡고 앞장서서 길을 잡았다. 낮에 루이에게 업혔던 것도 있겠지만,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어서 그런지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다. 오히려 카라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더 고생스러워질 상황이었다. 방향은 맞는 걸까,조 금 돌더라도 대로로 나가는 편이 안전하고 더 확실하지 않을까, 레투스로 가느니 마을로 되 돌아가는 편이 빠르고 더 적절하지 않을까……불안감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버릴 수는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너무 긴장했나 보다. 해가 지면서 슬슬 쉴 자리를 찾다가 문득 깨닫고 보니 이를 너무 꽉 물고 있었는지 턱이 아팠다. 카라는 입을 약간 벌려 서 턱운동을 조금 하고 나서 걸음을 멈췄다. 숲 속이 너무 어두웠다. “……아날라.” 화르륵, 카라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일어나 숲속을 비추어 주었다. ‘이런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마침내 겨우 야영할 만한 자리를 찾았다 싶었을 때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서 진의 다리가 휘 청했다. “아아, 이런…” 진은 업고 있던 루이 대신 이자드를 내려놓았다. 이자드의 얼굴을 보자 카라의 심장이 꽉 죄어들었다. 이자드의 안색은 창백했고 얇은 입술은 납빛이었다. 진은 이자드를 눕혀놓고 잠 시 살펴보다가 혀를 찼다. “숨은 쉬고 있는데, 맥박이나 호흡이 지나치게 느려.” 카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신경쓰면서 말했다. “여기서 자자. 야생동물이 별로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네. 폭풍 때문일까?” “게로 때문일 거야.” 걸음을 멈추자마자 벌써 무릎을 세우고 바닥에 앉아버린 헤웬이 불쑥 말했다. 헤웬이 입을 여는 게 워낙 오랜만이라, 카라는 반가움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카라가 무슨 말인가를 하 기 전에 헤웬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땔감을 모아올게.” 진이 옷소매를 털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나마 야생동물이 안덤빈다니 다행이군 그래.” 카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자드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멀다. 어두운 배경 때문 인지 더더욱. 이자드의 존재 자체가 손에 잡히지 않게 아득하게 멀어져 버린 것 같은 불안 감이 마음을 조였다. 차가운 손이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아팠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이 렇게 아프다는 걸 왜 아직까지 몰랐을까.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유모가 죽었을 때, 왜 그게 슬픈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아파한다는 것을 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까. 카라는 어둠 속에 앉아서 이자드의 차가운 손을 쥐었다. 어쩔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다. 힘이 있다면 분명히 그 힘을 쓸 방법도 있을 거야. 분명히. 카라는 입 속으로 가만히 속삭였다. “...잠자는 왕자님 같은 거 하나도 안어울려요, 이자드.” 그 날 밤 헤웬은 카라를 붙잡고 말없이 펑펑 울었다. 진은 그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깊 이 잠들어 있었다. 아니, 조금만 점수를 높게 주고 보자면 듣고도 모른척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러고나서 무슨 결심을 했는지 헤웬은 빠른 속도로 활기를 되찾았고, 덕분에 상황 은 훨씬 좋아졌다. 이자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루이의 상태가 점점 나아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더디게나마 회복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루이가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될 즈음해서 가까스로 그들은 레투스 성벽 가까이에 도달했다. 상업의 도시 레투스. 원형으로 만들어진 아칸서스나, 바다를 면하고 삼각형꼴을 이루고 있는 시더와 달리 레투스 는 정사각형 모양의 도시였다. 아칸서스나 시더처럼 완전히 개방된 도시는 아니다. 그 네모 진 도시는 사방을 벽으로 둘러싸고 네 군데에만 성문을 내두었다. 그런 면은 다른 두 도시 보다는 십자형의 왕성 키시와 더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레투스가 아칸서스나 시더보다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아칸서스나 시더에는 신전이나 마법사들의 결계가 있었지만 레투스 에는 그런 방어벽이 따로 없으니까, 물리적으로 막아둘 수밖에 없는 것 뿐이다. 바로 옆에 숲을 끼고 있는 만큼 늑대와 곰 같은 야생동물을 경계해야 했다. 때문에 네 개의 성문 중에 서도 숲을 향하고 있는 서문과 시더/키시로 이어지는 대로에 이어지는 남문은 밤이 되면 닫 혔지만 아칸서스로 이어지는 북문과 평야로 이어진 동문은 24시간 열려 있었다. 삼면의 문 으로는 늘 상품과 짐을 실은 달구지며 수레, 낙타와 노새가 들어가고 나왔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성문이 닫히기 직전에 도착해서 문을 통과했다. 진은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이자드를 업고 여관 안으로 들어가 2층까지 나른 다음에 그대로 침대에 뻗어 버렸다. 카라 역시 겨우 안전한 곳까지 왔다고 안도하면서 긴장이 확 풀려, 정신없이 잠들어 버렸다. 그나마 제일 상태가 나았던 헤웬은 진을 거들어준 다음 카라와 함께 쓰는 방으로 돌아와서 가만히 침대에 앉았다. 어느 정도 활기를 찾았다고는 하지만, 얼굴에 드리운 그늘까지 사라 지지는 않았다. 헤웬은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방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 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앉은 채로 잠든 것처럼 움직임이 없던 헤웬은 소리없이 품 속에 손을 넣어, 작은 약병을 하나 꺼냈다. 손끝이 떨리고 있는지 약병이 흔들리면서 안에 든 액 체가 찰랑거렸다. 헤웬은 또 한참 동안 그 병을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마개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털어넣었다. 카라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아직 주위는 어두웠다. 너무 피곤해서 온종일이라도 잘 것 같 았는데, 생각외로 빨리 일어난 셈이다. 이불의 온기를 즐기며 침대 안에 파묻혀서 옆침대를 돌아보니 헤웬은 머리카락으로 완전히 얼굴을 가린 채 게로의 몸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아마 옆방의 두 사람도 아직까지 자고 있겠지. 루이야 원래 아침잠이 많고, 진도 많이 지쳤 으니 느지막이 일어나겠지. 이자드의 주머니에서 꺼낸 여비는 아직 충분했다. 그러니까 일단 다들 일어나면 식사를 하 고...카라는 문득 침대 옆을 보고 머리카락과 옷에 아직까지 검댕이며 진흙이 묻어있음을 기 억해냈다. 어제 제대로 씻지도 않고 침대에 엎어져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기분이 한결 좋았다. 이자드도 곧 회복될 것 같았고,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다. 살금살금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다 보니 여분의 옷이 변변치 않았다. 옷이라...카라는 우선 소리없이 방을 빠져나가서 공동 욕실에서 대충 얼굴과 손을 씻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대충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맨발로 마룻바닥에 앉으니 한기가 으슬으슬 올라왔다. 숲에서 노숙하던 데 비하면야 견딜만한, 아니 오히려 기분좋은 한기다. 카라는 바 닥에 주저앉아서 끄적끄적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카라의 여비계산도 과히 훌륭하고 알뜰하 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루이나 헤웬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카라는 문득 종이를 들여다보며 신음했다. 설마하니, 이자드는 항상 여행하면서 이런 계산을 해왔단 말인가? 믿을 수 없어! 그 이자드가 숫자 계산을 붙들고 여비 문제로 끙끙댄다니 그런.…..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상상한 카라는 큭큭거리고 웃고 말았다. 이자드.…..휘안과는 대체 어떤 관계인 걸까?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돈계산을 하던 종이 위에 줄줄이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휘안. 검은 고양이. 흑자색 눈동자. 거울. 시더. 마법사들. 왕. 난다. 눈. ...패라노멀 마스터. 카라는 잠시 그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종이를 반으로, 다시 반으로, 다 시 반으로 찢었다. 찢어버린 종이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라는 다리를 끌어당기고 무릎에 턱을 얹었다. 무릎의 맨살은 차가웠다. 바닥보다 더. 때때로 무언가 뜨거운 것, 열기 같은 것이 몸을 감싸고 올라올 때가 있다. 파리한 얼굴로 누 워있는 이자드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또 가끔은, 자신은 아주 차갑고 단단한 덩어리 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고, 아무 것도 실재하는 것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순간 들이 과연 정말로 존재했던가? 정말로 그런 감정들이 존재했던가? 혹, 그것들은 내부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저 바깥 어딘가에서 다가와 나를 통과해 지나간 것은 아닐까? 그런 느낌은 ‘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앙금처럼 가라앉아있던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가슴을 조여오는 불 안감. 그러면서도 묘하게 들뜨는 것 같은 느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도 해서는 안될 것만 같은 느낌. 카라는 무릎 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아침 햇살이 창틈으로 기 어들어오고 밖에 인기척이 날 때까지. 9. 부러진 날개 (9) 결국 다른 사람들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다. 진이 가장 먼저 일어났지만, 식탁에 먼저 나타난 것은 루이와 헤웬이었다. 진은 일어나자마자 목욕탕부터 직행했다가 뒤늦게 깔끔하 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루이는 줄곧 하품을 하며, 졸면서 먹는 것처럼 천천히 음식을 씹어삼켰다. 루이가 그렇게 천 천히 음식을 먹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몸은 어때?” “음? 응...응응.” 루이는 씹던 것을 삼키고 나서 대답했다. “좀 나른하고 졸리긴 하지만 다른 건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머리도 아프지 않고...” “이자드는?” 루이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야?” 그래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카라는 다 비운 그릇을 밀어놓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1층 식당 바깥으로는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돌바닥이 하얗게 보일 정도의 햇살이다. 평화로 왔다. 또 안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카라는 “그럼 루이는 쉬어야겠네.” “잠이나 더 자야겠다. 왜, 어디 나가게?” “옷도 좀 사야겠고 해서…… 헤웬은?” “나?” 헤웬은 놀란 듯 고개를 들더니,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할머니...일을 알려야해. 최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긴 했어도 중요한 분이셨 으니까. 여러 가지로.…..우리들 사이에선.” “아.” 카라는 저도 모르게 곤란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헤웬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 아무튼 그래서 난 나갈 테니까…” 카라와 헤웬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진에게 꽂혔다. 그는 우아하게 손을 놀리며 가볍게 고개만 저었다. 카라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응, 그럼 혼자 갔다올게.” “조심해서 다녀와라.” 루이는 태평하게 손을 흔들고 카라를 보냈다. 진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괜찮겠어?” “괜찮아, 괜찮아. 휘안 녀석은 원래 이자드만 괴롭히지 주위 사람은 건드리지 않으니까. 시 간이 좀 있을 거야. 카라도 그 동안 힘들었을 테니까……” 루이는 말하다 말고 흘긋 진에게 비난의 눈길을 던졌다. “네가 해도 될 걸 꼭 어린애한테 맡겨서 힘들게 하냐.” 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눈썹과 입끝을 함께 치켜올렸다. “내가?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이유가 있나?” “치사한 자식.” 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유롭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어쨌든 이걸로 빚은 갚았어.” 시내는 적당히 지저분하고, 활기차고, 시끄러웠다. 모든 일은 도시 중앙에 있는 시장을 중심 으로 이루어지는 듯 했다. 카라는 느긋하게 시장을 기웃거리며 대로를 따라 걸었다. 카라는 몰랐지만, 큰 규모의 흥정이나 장사는 대개 아침 나절에 끝이 났다. 그러니까 지금은 제 가 게가 있는 장사꾼들은 느긋하고, 행상들이 불꽃을 튀기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대로로 들어서 자마자 말을 걸거나 붙잡는 행상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연신 거절의 말을 중얼거리며, 동시에 주머니까지 조심하면서 간신히 그 길을 빠져나오고 보니 얼결에 떠안듯이 사버린 과일이 한 꾸러미였다. 카라는 겨우 한숨 돌리고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길 양쪽으로 행상이 좌악 늘어선 것을 봤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돌아 갈 때는 다른 길로 가야겠다. 옷을 사는 데 생각외로 시간이 걸렸다. 카라는 겨우 헐렁하고 편한 외투를 하나 산 다음 과 일 보따리와 옷을 안고 아픈 다리를 쉬러 광장을 찾았다. 광장은 아칸서스와 비슷했다. 카라는 마른 분수대에 걸터앉아서 아까 얼결에 사버린 과일꾸 러미를 꺼내들었다. 아까는 잘 몰랐지만, 마늘처럼 생긴 연보랏빛 과일에서 좋은 향기가 났 다. 카라는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꾹꾹 껍질을 찔러보았다. 부드러웠다. 이걸 그냥 먹어도 되는 건가? 처음 보는 과일이라 방법을 잘 모르겠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어떤 목소 리가 날아왔다. “껍질은 벗겨먹는 거야.” “어?” 카라는 깜짝 놀라서 앉은 자리에서 떨어질 뻔 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코앞에서 금갈색 눈동 자가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얀 팔이 뻗어와서 과일을 건드렸다. “이걸 이렇게...벗겨서 먹는 거라구. 자.” 카라가 당황해있는 사이 금갈색 눈동자의 주인은 분수대 위에 쭈그리고 앉은 채 척척 손톱 으로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처음엔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몸집은 카라보다 크다. 하지만 행동이나 말하는 투는 영락없이 어린아이였다. 벙벙해있는 사이 그 여자는 손 톱을 자줏빛으로 물들이며 서투른 솜씨로 과일을 다 까더니 카라에게 내밀었다. “자, 아아- 해봐.” “저기...난,”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젓자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카라는 할 수 없이 입을 벌 렸다. 그 여자는 활짝 웃으며 카라의 입에 과일을 넣었다. “맛있지? 응?” “어...” 그 여자는 활짝 웃는 얼굴로 카라를 쳐다보며 보라빛으로 물든 손가락을 빨았다. 카라는 주 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같이 온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 여자는 또 하나 보랏빛 과일을 까며 재잘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어서 기뻐 - 이건 파이가 먹는 거야.” “파이. 네 이름이 파이니?” 그 여자는 과일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는 파이를 쳐다보며 잠시 눈을 굴렸다. 파이는 카라가 쳐다보자 천진난만하게 까르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흰자위가 거의 없는 금갈색 눈동자가 왠지 강아지 같은 인상을 준다. 짧은 반바지 아래로 긴 다리가 다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맨발. 아무리 햇살이 좋다지만 주위에 이런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카라의 눈에 문득 파이의 목에 걸린 금줄이 보였다. “이게 뭐야?”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지만 파이는 얌전했다. 목걸이였다, 일단은. 하지만 그 금줄에 가려진 상처 자국이 있었다. 새하얀 목덜미에 심하게 까지고 부대낀 듯한...카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머리카락이 닿았는지 파이가 까르르 소리를 내며 발버둥쳤다. “꺄하하핫! 간지러!” “미안. 이거...” 카라는 말을 멈추고 흠칫했다. 그 자국은 아무리 봐도 끈이나 밧줄 같은 걸로 묶여서 부대 낀 상처자국이었다. 그러고 보니 양 손목에도 팔찌를 끼고 있다. 그 아래에도 상처 자국이 있는 걸까? 설마, 노예나 뭐 그런 걸까? 북쪽 영지도 그렇고 대개 자치도시에는 노예가 별로 없어서, 노예라는 게 있다는 얘기는 책 에서나 보았다. 노예라면...도망친 걸까? 길을 잃은 걸까? 이렇게 천진난만한 아이를.…..카라 는 불안한 마음으로 파이를 쳐다보았다. 파이는 그녀가 쳐다보자 막 껍질을 벗진 과일을 내 밀었다. “응, 고마워. 근데 파이...” “응?” “혼자 나온 거야? 누구 같이 온 사람 없어?” 파이는 금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뭘 하고 있었냐구?” “으응...파이는...” 파이는 갑자기 생각난 듯 까르르 웃더니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이 아 래로 떨어진다. 카라는 당황해서 팔을 뻗었지만, 이미 파이는 아래로 내려서서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파이!” 파이는 까르륵 웃으며 몇 번인가 휙휙 공중제비를 넘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능숙하고 화 려한 솜씨였다. 불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머리카락이 하늘에서 춤을 춘다. 카라는 눈을 크게 뜬 채 파이의 묘기를 지켜보았다. 마침내 파이는 새처럼 한 번 공중 높이 떠올랐다가 한 바 퀴 돌아서 바닥에 탁 내려섰다. “우와아아- !” “멋지다!” 어느 새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파이는 에헴 하고 우아하게 인사 를 하더니 카라가 꺼낸 손수건을 빼앗아 들고 돌아다녔다. 여기저기서 짤랑짤랑 동전이 손 수건으로 떨어졌다. 카라는 어안이 벙벙해서 파이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파이는 한 바 퀴를 다 돌고는 다시 한 번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카라에게 돌아왔다. “파이는 이런 거 잘해. 예쁘지?” “곡예단 같은 데 있어?” 파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젠 안해. 난 참 좋아했는데...으응. 맞거나 하면 아프긴 했지만, 뛰어 다니는 건 재 미있는걸. 근데 이젠 하지 말래. 안해도 된대.” 누군가가 곡마단에서 사들인 모양이다. 카라는 파이가 준 손수건에 담긴 동전을 도로 내밀 었다. “이건 네가 가져.” “왜? 파이는 돈 필요없어 - 다 주는걸.” “...좋아. 그럼 뭐 먹고싶니? 사줄게.” 그 말에 파이는 눈을 빛내며 궁리하기 시작했다. 카라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귀엽고 좋은 애지만, 주인이나 가족이 있다면 찾아줘야겠지. 어쨌든 혼자 돌아다니게 놔두기엔 너무 위험해 보인다. 저런 옷차림으로도 살갗이 새하얀 걸 보면 실내에만 있었던 걸지도…….설마 도망친 걸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파이가 겨우 결정을 내렸는지 일어나서 카라의 손을 잡 아당겼다. “예쁜 얼음사탕 먹을래.” “알았어. 그래.” 카라는 순순히 파이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이의 모습이나 복장이 워 낙 눈에 띄어서 그런지 몇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뭐 어 떻게 되겠지. “저기야, 저기- 예쁜 얼음사탕~” 파이와 같이 다니는 것은 유쾌하기는 했지만, 꽤나 진을 빼는 일이었다. 어린애는커녕 제 나 이 또래 아이들과 놀아본 적도 없는 카라로선 정신없이 재잘거리고 까르륵대며 곧잘 다른 길로 빠지는 파이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행히도 파이는 산만하긴 했지만 카라의 말은 잘 들었다. “이쪽이라니까. 자꾸 다른 길로 가지마.” “으응.” 파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깨 길이까지 내려오는 숱많은 붉은 고 수머리가 붕붕 공중을 난다. 머리카락부터가 워낙 눈에 띄어서 그런지 지나던 사람들은 물 론이고 행상들도 한마디씩 걸어왔다. 카라 혼자서 다닐 때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겨우 파이가 말한 얼음사탕 파는 집에 도착하자 카라는 한숨을 내쉬며 손부채를 부쳤다. 아 이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가는 순간이었다. “뭐 먹을래?” “으응-” 파이는 얼음사탕 진열대에 코를 바싹 붙이고 응응거렸다. 푸짐하게 생긴 주인 아줌마가 웃 으며 말을 건다. “착하기도 해라. 언니 돌보는 거니?” “네?” “이거! 파이는 이게 좋아- 이이거.” 카라가 놀라서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파이가 세차게 소매를 잡아당겼다. “알았어. 알았어. 저기 저거요, 아줌마.” “그래. 착한 애니까 깎아주마. 옛다.” 카라는 영문을 모른 채 감사합니다 인사를 던지고 파이에게 사탕을 넘겨주었다. 파이는 마 냥 행복한 얼굴로 사탕을 햇빛에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거 아냐. 먹어야지...금방 녹아버려.” 그러니까 저 아줌마는, 파이가 내 언니고, 조금 모자란 애라서 내가 돌보는 거라고 생각한 건가? 어이가 없었다. 어디가 닮았다고......카라는 행복한 얼굴로 얼음사탕을 돌리고 있는 파 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과, 흰자위없이 동그란 금갈색 눈동자, 예 쁘지만 묘하게 여성적이지만은 않은 얼굴. 빛으로 물든 것 같은 밝은 얼굴... 역시, 닮은 데라곤 없는데. “이리와. 손수건 사러가자.” 카라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파이는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손을 내밀어 카라를 와락 붙잡았 다. “응? 왜 그래?” 파이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커다란 흰 손이 카라의 손을 찾아 꼭 쥐면서 더 듬더듬 말한다. “길 잃으면 안되니까...손 꼭 잡고 다니는 거야.” 카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입을 벌렸다. 그러나 파이는 키도 작은 카라의 손을 엉거주 춤하게 붙잡고는 뭐가 좋은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제까지 누구 손을 잡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파이가 놓아줄 생각을 안하니 어쩔 수 없었다. 카라는 할 수 없이 파이가 몸을 구부리지 않게 최대한 자세를 곧게 펴고 앞장을 섰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다시 파이가 카라를 확 잡아당겼다. 카라는 주르륵 끌려가서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 하다가 겨우 자세를 바로잡고 파이를 돌아보았다. “왜 또 그러니?” “저기, 파이는 돌아가기 싫어.” 화를 내려다 보니 파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파이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두 명, 세 명 정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질문을 던지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파이가 다시 소근거 렸다. “파이는 돌아가기 싫어!” “널 찾는 거야?” 묻지 않아도 벌써 그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걸음을 빨리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카 라는 약간 당황해서 그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파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손을 확 잡아당겼다. “파이는 돌아가기 싫어!” 카라는 파이가 당기는 힘에 몸이 통째로 끌려가는 것을 깨닫고 입을 벌렸지만, 카라의 목소 리는 뒤에서 터져나온 시끄러운 소리에 삼켜져 버렸다. “저기다!” “파이! 거기 서!” “베에~” 파이는 순식간에 물구나무를 서서 혀를 내밀어 보이더니, 다시 카라를 잡고 빠른 속도로 뛰 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어린애처럼 카라가 이끄는 대로만 움직이더니, 일단 끌고 뛰기 시 작하니 힘이 장난이 아니다. 카라의 발은 거의 땅에 닿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것도 그냥 평 지만 달리는 것도 아니고 장애물이 있으면 카라를 들어올려 뛰어넘기도 하고, 재주넘기를 하기도 하면서.…..머리가 핑핑 돌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쫓아오던 사람들은 도저히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카라는 멀리서 그 남자들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멈춰서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잠깐, 잠깐만! 이젠 안쫓아오잖아!” “워리얏!” 파이는 장난스럽게 입으로 소리를 내며 딱 멈춰섰다. 카라는 파이를 잡고 거의 쓰러지다시 피 주저앉았다. 아직도 눈앞이 빙빙 돌 정도의 질주였다. 그런데 파이는 맨발로 그렇게 뛰고 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카라가 주저앉아있는 것을 들여다보며 파이가 걱정스러 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아파?” 카라는 겨우 숨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너......역시 도망친 거야? 왜?” 파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쪽의 질문에 대답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심심해서.” “장난치지 말고! 그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야?” “으응? 응. 파이는 싫어.” “그럼...” “아크는 좋지만 다른 사람들은 싫어. 재미없고 파이랑 놀아주지도 않는걸.” “아크? 그건 누군데?” “아크는...아저씨가 파이를 때리지 못하게 했어. 그리고 이제 재주넘기같은 거 안해도 된다 고 했어.” “그럼 좋은 사람이잖아!” 카라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파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카라를 쳐다보았 다. 카라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리쳐서 미안해. 하지만 그러면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잖아. 걱정할 텐데 돌아 가야지.” “하지만 파이는 아이혜를 찾았는걸.” “누구?” “아이혜.” 파이는 카라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는지, 아무 설명도 없이 배시시 웃기만 했다. 카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파이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아크라는 사람이 걱정할 거 아냐. 그런 건 말을 하고 나왔어야지. 내가 데려다 줄 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 파이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는 일어서서 흙을 털어내고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같이 가자. 데려다 줄게.” 파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응......아크한테 설명해 줘야 하니까? 인사하러 가는 거야?”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카라는 건성으로 그래, 그래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파이는 어째서인지 기분좋은 얼굴로 카라에게 매달렸다. 카라는 찰싹 달라붙은 파이를 곤혹 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물었다. “아주 먼 데 있는 건 아니겠지?” “안 멀어.” “정말이야?” 파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있게 대답하기는 하는데, 뭔가 미심쩍었다. 파이가 아까 같은 속도로 달린다면 어지간한 거리는 다 ‘멀지 않은’ 정도일 테니까. 카라는 잠시 망설였다. 여관에 돌아가서 말을 하고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는데…하지만 파이는 또 신이 났는지 카라를 잡아당기며 껑충껑충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길을 기억해 두기만도 벅차다. 카라는 망설이다가, 다시 한 번 파이에게 다짐을 두었다. "난 빨리 돌아가야 해. 정말 멀지 않은 거지?" "응, 응, 응." 파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춤을 추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카라에게 찰싹 달라붙었 다. 카라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파이를 쳐다보았지만, 뿌리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카라는 루 이와 진이 있을 여관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9. 부러진 날개 (10) 꿈 없는 잠. 무(無)의 구덩이로부터 기어올라오는 길. - 오랜만이다. 이자드... 환영이 아닌, 진짜 휘안의 눈동자가 눈앞에 다가들었다. 오랜만이라고? 웃기는군. 잘도 그런 인사를.…..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로 손을 올린 순간 이자드는 멈칫 눈을 떴다. 하늘이 아니라, 나무 서 까래와 벽돌로 만든 지붕. 아직도 귓가에서 이명이 울리고 있었다. 이자드는 잠시 눈을 감았 다가, 다시 뜨고 몸을 일으켰다. 지잉- 하고 머리를 울려오는 현기증과 함께 몸이 다시 주저 앉는다. 그는 잠시동안 이마를 짚고 앉아 있다가, 시력이 돌아오자 2인용의 침실에 자신밖에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힘이 별로 없다. 그것은 곤혹스럽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분명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이자드는 가만히 벽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내가 며칠이나 잔 거지?”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루이도 잠들어 있었다는 건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휘안의 눈동자를 마주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백지였다. 루이의 눈 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한 검붉은 눈동자만 떠오를 뿐. 속이 메스꺼워지며 두통이 심해졌다. 이자드는 머리를 감싸쥐고 휘안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려 애썼다. 두통이 차츰 가라앉았다. 상황을 판단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일단, 이것은 평이한 여관방의 풍경이다. 그러니까 숲을 벗어나는 동안 내내 잠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 때 누가 있었지? 카라 혼자 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을 텐데. 이자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초저녁, 여관 안은 아직 조용했다. 계단 아래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약을 올리듯 유쾌하게 말하며 카드를 던진 것은 진이었다. 주변에 모여있던 사내들이 일제 히 투덜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승률이 나쁘다고 불평들을 해서 그쪽이 지정하는 게임에, 지정하는 규칙대로 응해 주었지 않습니까. 더 이상 트집잡을 것도 없을 텐데요. 더 할까요?” 진은 카드 한 장을 팔랑팔랑 흔들고 있었다. 이자드는 잠시 층계 벽에 기대선 채 그 뒷모습 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냥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그게 진의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 물더니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은 낌새를 차리고는 고개를 뒤로 꺾어 이자드를 쳐다보았다. “허어?” 진이 희한한 탄성을 내질렀다. 이자드는 천천히 걸어내려가며 차분히 되물었다. “그게 내가 일어난 데 대한 환영인사인가?” “아니. 조금 놀라서요.” 이자드가 자리에 앉아버리자 사람들은 투덜거리며 흩어졌다. 진은 밉살스레 웃으며 여관주 인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술 한잔씩 살테니까 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대머리 여관 주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을 닦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긴…… 레투스로군. 내가 며칠이나 잠들어 있었지?” 그 질문에 진은 카드를 뒤섞으며 애매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흘 정도 됐을까요.” “루이도 잠들어 있었나?” “대체로 깨어 있었죠. 지독한 두통 때문에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되긴 했지만.” 루이가 깨어 있었다는 말에 이자드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진은 흥미로운 것을 관 찰하듯 눈을 빛내며 그의 표정 변화를 살피고 있었다. 자신의 입장 때문에 대놓고 묻지는 않지만, 어찌된 일인지 듣고 싶어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이자드는 불쾌감을 구석으로 밀어내 며 물었다. “......카라는?” 진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둑어둑하다. 진과 이자드 주위는 텅 비어 있었지만 일찍 장 사를 끝낸 사람들이 속속 술을 찾아 여관을 찾고 있었다. 진은 고개를 돌리며 태평한 어조 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요. 옷 사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이자드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옷을 사러 갔다고? 혼자 말인가?” “혼자면 안될 이유라도 있던가요?” “자네……” “루이는 괜찮다던데요. 뭐, 보기에는 그래도 어린애도 아니고. 뭐라고 해도 어지간한 상처 는 치료도 없이 나아버리는 애니까요.” 이자드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진은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희고 가지런한 이빨이 침침한 불 빛을 받아 번득였다. 회색 고양이가 울었다. 현기증. 이자드는 가만히 탁자를 짚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거의 먹지 않지만, 지금은 속에서 뭔가 태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음 식을 시키고 한숨 돌린 다음 다시 물었다. “언제쯤 나갔지?” 진은 카드를 한장씩 퉁기며 곰곰이 생각하는 척 하더니 대답했다. “점심때쯤.” 이자드가 다시 얼굴을 찌푸리자 진은 좌르륵 소리나게 카드를 쏟아놓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불안해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과보호라는 소리 안들어요?” 이자드가 어이없는 얼굴로 입을 열려는데 진이 툭 말을 잘랐다. “왕이 어젯밤에 죽었다더군요. 시더에서 키시로 돌아가자마자.”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진의 표정에는 긴장이 깔려 있었다. 두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정적 속 으로 달가닥 소리를 내며 그릇이 내려앉았다. 이자드는 반쯤 열려 있는 문 밖의 어둠을 내 다보았다. 진이 손을 등 뒤로 돌려 길게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드신 다음에 찾으러 가죠.” 시간은 전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시의 왕 - 그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특별히 잘나지도, 그렇다고 별 나게 못나지도 않은 40대 후반의 남자였다. 개인적인 능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 반을 다져놓은 왕조에서 탈락할 만큼 어리석은 패악을 부리지도 않는 평이한 왕. 그런 남자 들이 대개 그렇듯 그 역시 여자들을 좋아했고, 최근에 늦게나마 자식을 보게 된 것을 기뻐 하고 있었다. 물론, 그 기쁨와 더불어 다른 여자를 찾고 있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그날 저녁 포도주병을 들고 들어온 소녀가 눈에 띈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니, 사실 그 소녀라면 어지간히 여 자에게 관심이 없는 자라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속물이 입을 반쯤 벌리고 잠시 동안 소녀를 내려다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느다란 손목이 오랫동안 쟁반을 들고 있는 것에도 신경 을 쓰지 못한 채 한참이나 소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이구나.” “새로 들어왔습니다.”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 “새로 들어온 시녀라...?“ 왕은 살포시 고개를 숙인 소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키가 작은 데다 고개를 수그 려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마 위로 흔들리는 투명한 은빛 머리카락이나, 희미한 불빛 을 받아 반짝이는 속눈썹은 어딘가 사람의 눈을 홀리는 데가 있었다. 그는 침을 삼키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헛기침을 몇 번 내뱉았다. 그런 동작들과 흥분된 감정 때문에, 그는 그 소녀가 가느다란 손목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흔들림없이 무거운 쟁반을 들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는 손짓으로 쟁반을 놓 게 하고 나름대로 위엄있게 말했다. “...고개를 좀 들어봐라.”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이 그가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이었다. 미처 무슨 일이 벌어지 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의 목에서 둔탁한 소음이, 뒤이어 명치께에 날카로운 통증이 밀 려들었다. 왕은 눈을 크게 뜬 채 손을 내밀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그의 손가락 끝이 소 녀의 목 부근을 스쳤다. 순간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을 가볍게 찡그리면서 다시 한 번 발을 들어 왕의 턱을 걷어찼다. 퍼억- 또 한 번, 둔탁한 소음과 함께 이번에는 그 입에서 울컥 피 가 쏟아졌다. 그, 사람들이 이름도 기억해주지 않을 한 왕이 죽음의 순간에 마주친 것은 소름끼치도록 아 름다운 제비꽃색의, 인간과 다른 눈동자였다. 난다는 표정없이 천천히 손을 올려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예상보다 재상의 능력이 걸림돌 이 되어, 결국 직접 손을 쓰게 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어떤 이유로든 인간의 손이 자 신에게 닿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왕의 손끝이 살짝 목 부근을 스친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밀려왔다. 그는 쓴입맛을 다시며 포도주잔을 들어 한 입에 들이키고 밖으로 나섰다. 조용히 문을 닫고 어두운 복도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난다는 이미 뒤에 남은 주검에 대해 서 잊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요구받은 대로 일을 끝냈다는 점이다. 그는 대가를 원했 다. 그는 소리없이 궁을 빠져나갔지만, 곧장 성 밖으로 도망치지는 않았다. 밤이라기보다는 새벽에 더 가까운 늦은 시간임에도 왕궁은 절반 이상이 휘황하게 불을 밝히 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만큼은 아니었지만 깨어 돌아 다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남 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만남은 대개 이런 밤의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만 남에는 두 종류가 있는법. 첫 번째는 연인들의 만남일 터고 두 번째는 밀담이다. 지금 왕실 마법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만남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이 미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비행선 운항을 중지한다는 말을 들었네.” “...저도 소문은 이미 들었습니다.” 누군가 문 밖에 서 있었다면 가까스로 들었을 법한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을 받은 것은 의식적으로 톤을 낮추었음에도 숨길 수 없는 카랑한 목소리. 그 주 인공은 온몸을 평범한 망토로 감싼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차림새와 달리 자세는 은연중에 자신의 패기와 힘을 자랑하는 듯, 그의 젊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흐으음. 재상께서 결정하신 일에 토를 달 수야 없겠지.” 고의적으로 정중하게 비야냥거린 것은 이 방의 주인이었다. 키시에서는 마슈라고 알려져 있 는 마법사. 그의 외모는 마법사라기보다는 무문의 귀족이라는 편이 더 잘 어울렸다. 균형잡 힌 몸에 큰 키, 상아빛 피부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날카로운 얼굴 윤곽. 그리고 본래 밝 은 햇빛 아래에서라면 붉은 기운이 감돌겠지만 좀처럼 햇빛 아래에 나서지 않아 새까맣게만 보이는 긴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언제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돌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에게서 위압감을 먼저 느낄 터였다. 마주앉아있는 인물은 찌푸린 인상을 펴지 않은 채 천천히 대답했다. “이미 결정이 내려졌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 ” 긍정하는 듯 했던 그의 답변은 곧 빠른 항변으로 이어졌다.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북쪽 영지를 아예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는 처사에요. 비행정 없이 어떻게 연락이 닿겠습니까? 게다가 재상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북영지는 척박한 땅 이란 말입니다. 세금을 감면해줬으니 먹고 사는 데야 아무 지장없지 않냐고 할 지 모르죠. 하지만 여느 평민도 아니고 귀족이 생필품만으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거기선 귀족답게 살 기 위해 필요한 물건은 전부 다 바깥에서 사들여야 하는데 - 비행정이 없다면 그걸 다 어디 서 구하죠? 또 소식은요?” “비행정이 아니더라도 여행자나 상인들은 있잖나.” 마슈는 다소 느긋하게 말했다. 그가 노린 대로 상대방은 콧방귀를 끼며 분통을 터뜨렸다. “여행자! 거긴 겨울 한 철간은 눈으로 뒤덮여서 뚫고 갈 수 없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단 말 입니다! 게다가 상인들은 - 상인들은 물론 그래도 가는 자들이 있겠죠. 위험 부담이라는 이 유를 붙여서 호되게 비싼 값을 부를 테지만요. 사람 좋은 형이 대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 하기 짝이 없군요.” 평소보다 배는 빠르고, 몇 배는 많은 양의 불평만 들어도 그가 단단히 화가 나있음은 분명 했다. 본래의 그는 다소 음울하고 입이 무거운 남자였다. 그를 불렀을 때 마슈는 물론 이 이 야기가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젊고 야심만만한 경호대장 카데인 은 북영지 출신이었고, 비록 출세를 열망하고 고향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 곳을 사랑했으므 로. “대체 이유는 뭐라고 하던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상대방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대답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재정 문제죠. 더 이상 이 나라엔 그런 변방까지 보살필 여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건 사실이지.” “저도 압니다.” 잠시 두 사람은 침묵했다. 카데인은 변방인 북쪽 영지에서 단신으로 올라와 몇 년만에 군단장 직을 따낼 만큼 유능한 남자였다. 그만큼 야심도 강했다. 그에게는 재상파와 왕제파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도 곧잘 해낼 만큼의 정치 감각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젊은 혈기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마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었다. 그를 믿고 이런 말들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어리다는 증거겠지. 그는 좀 더 다루기 힘든 자들을 좋아했다 - 저 재상이라든가, 그보다는 못하지만 하시피에 같은 정도의. 재상이 없다면 이곳 생활이 얼마나 지겨워지겠는가. 그는 문득 정말 로 지겨움을 느꼈다. 여기서 벌이고 있는 몇 가지 장난에도 싫증날 때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뭔가 터져주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마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갑자기 불이 켜진 것처럼 눈동자 속에 적자색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던 카데인 의 말을 끊었다. 기분나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리고 카데인을 내보낸 다음 그는 문을 열고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 다. “반가운 손님이 오셨군. 여기까지 직접 오다니… 무슨 일인가?” 그가 말을 건넨 상대는 복도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희 미한 불빛 아래에서 조명처럼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휘안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 소년 을, 아니면 적어도 소년의 모습을 한 존재를 뜯어보며 말했다. "지금 보니 왜 왔는지 묻지 않아도 알겠군. 시더에서 실패했기에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난다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내키지 않다는 티를 내며 조용히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 어왔다. 마슈, 아니 휘안 알 바르카는 다음 순간 책상 너머에 있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 다. 그는 손가락을 흔들어 문을 닫았다. 난다는 이 조그마한 예술에 전혀 감명받지 않은 얼 굴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다의 제비꽃잎 같은 눈동자는 차가운 의지와, 더 깊은 곳에 자리잡은 증오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휘안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 를 걸치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난다를 감상하듯,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 나 붉은 빛깔을 좋아했고, 그것이 증오와 절망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더더욱 좋아했다. 어쩌면 그가 굳이 난다에게 일을 의뢰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난다는 간명하게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계약대로 왕은 죽었습니다.” “역시 그랬군.” 휘안은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작게 키들키들 웃었다. “그 머저리왕을 죽이는 데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군 그래. 너무 오래 걸려서 지루해지려 던 참이었어. 하기는 재상은 만만찮은 골칫거리니까 말이야. 어떻게 했지? 곧 나에게도 소식 이 올 테지만 - ” 그는 잠시 바깥에 귀를 기울이고 조용함을 깨닫고 말했다. “흐음. 아직 깨닫지들 못하는 걸로 봐선 침대에 누워있는가 보군 그래. 마법을 쓰기는 쉽지 않았을 테고 쓴다 해도 아주 근거리에서나 가능했을테니 - 어떻게 접근했는지 짐작이 갈 법 도...” 난다는 참을성을 잃고 말했다. “그만! 중요한 것은 결과이지 과정이 아닐 텐데요. 나는 어서 용건을 마무리하고 떠나고 싶 습니다.” 휘안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벌려 보였다. “저런, 저런, 너무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고. 이 일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군. 그 렇다고 내 잠시의 즐거움도 충족시켜주지 못한단 말인가?” 그 순간 난다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보고 휘안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난다가 가져온 소식이 그토록 그를 즐겁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 반쪽짜리 용족을 더 가지고 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았다. 그는 결국 평소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좋아. 나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대가 그토록 찾고 싶어하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 지 말해주지.…..그런데, 그녀를 찾아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나?” 난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까보다 더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증오와 갈망을 담은 눈으 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휘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진정으로 이 만남을 즐기고 있었 다. 난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충분히 황폐화되어 굳어져 버린 것처럼 보였고, 그래 서 흥미를 끌지 못했었다. 그는 상처를 입히고, 황폐화시키고, 신경을 가닥가닥 끊어놓는 것 은 좋아했지만 더 이상 그럴 구석이 없는 자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보라......결국, 인간이란 언제까지나 상처입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언제까지 라도. “보아하니 혈육의 정을 나눌 분위기는 아닌데. 하기는, 나라면 만나자마자 죽여버리겠지 만.” 그 말을 내뱉고 나서 휘안은 무슨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물론 그는 난다가 그럴 작 정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말은 난다를 더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문득 누군가를 떠올리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까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미소, 난 다조차도 오싹함을 느낄 만한 분위기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서 핏빛 광기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휘안은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을 죽이는 게 더 늦어지면 강제로라도 의뢰대상을 바꿀 참이었는데 말이야. 하는 수 없 지.” 그는 난다의 초조한 표정을 보고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그래, 내가 누굴 죽이라고 하려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의뢰는 끝났습니다.” 자줏빛 눈동자가 활짝 벌어져 있었다. 팽팽한 긴장이 공기를 채웠다. 휘안은 오히려 그 긴장 감과 살기를 음미하듯 찬찬히 난다를 훑어보고만 있었다. 그는 난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다 싶을 때까지 뜸을 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는 난다가 그토록 원하고 갈망하던, 그를 황야에 내다버린 그 용족, 그의 어머니의 소재를 말해 주었다. 그것이 그의 의뢰 조건이었다. 난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간 뒤, 휘안은 혀를 끌끌 차며 홀로 잔을 채웠다. 의뢰 대상을 '그 아이'로 바꿨더라면 더 재미있었겠지만…… 뭐 이대로도 좋다. 그는 찰랑이는 술잔을 들 고 읊조렸다. “세상의 모든 마법사와 마녀들을 위해!” 9. 부러진 날개 (11) “아직도야?” 벌써 몇번째 묻는지 모르겠다. 카라는 약간 초조해지고 있었다. 파이는 이번에도 같은 대답 을 돌려주었다. “응. 조금만 더 가면 돼.”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다리도 아프고, 무엇보다도 여관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 니 마음이 초조하다. 파이는 길을 구불구불 돌아 돌아서 움직였는데, 일부러 그렇게 움직인 다기보다는 그렇게 가는 길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카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확히 어 디쯤인지 가늠해 보려했다. 하지만 북문 근처라는 것만 확실할 뿐, 나머지는 알아보기 힘들 었다. 오가는 사람이라도 많으면 서문이 어느 쪽인지 물어서라도 찾아갈 수 있으련만 을씨 년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돌아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포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다시 한 번, 아직도냐고 물으려 입을 열었을 때 파이가 딱 멈춰섰다. "다 온 거니?" "으응- " 파이는 대답은 않고 뭔가 입 안으로 우물우물거리며 주위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설마 길을 잃은 걸까? “으으응 - 여긴데...이상해.” 파이는 울상을 짓고 카라를 돌아보았다. 속터질 노릇이었다. 카라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찬찬히 물었다. “여기라니, 이 골목이라는 거야?” “히잉-” “울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뭔가 기억나는 게 있으면 말해봐.” “응...응...” 다시 한 번, 깊은 한숨. 진정하자, 진정해. 카라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여기까지 와서 못 찾고 돌아간대서야 너무나 한심하지 않은가? 날이 어두워지면 밝을 때와는 길이 전혀 달라 보이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나 파이는 잉잉거리며 발만 구를 뿐이었다. 골목길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카라는 주위를 둘러보고 약간 당황했다. 미처 몰 랐다. 파이가 여기라고 주장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골목은 평범한 가게골목도, 주택가 도 아니었던 것이다. 술집이 많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줄줄이 내걸린 등이 붉은색 일색 이었다거나, 거리에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묘한 것 등, 그저 호기심만으로 구경하기에는 약간 불길한 감이 있었다. 카라는 입술을 빨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파이. 여기 확실해?” “그럼. 맞아. 빨갛고 예쁜 불빛들도 봤는걸.” 흘끔흘끔, 술집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카라는 파이를 올려다 보았다. 파이의 모습은 너무나 눈에 띄었다. 카라는 아까 샀던 외투를 꺼내들었다. “자, 이거 입어.” “왜? 파이는 안 추운데.” “그래도 입어. 자, 머리 넣고.” 카라는 파이의 머리에 두건을 씌워 당긴 다음 손을 잡고 가까운 가게로 들어갔다. 그렇게 입혀 놓으니 조금 낫긴 하지만 카라보다 훨씬 키가 큰 탓에 맨 다리는 여전히 드러나 있었 다. 술집에 들어서자 안에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카라는 움츠러드는 기색을 감추고 성큼성큼 카운터로 다가가 애써 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어,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뭐야. 애비가 바람이라도 났니?” 딴에는 친절하게 응대한다고 하는 것 같지만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 거슬리는 말투. 아저씨 가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자마자 여러 탁자에서 왁자하니 시끄러운 소리가 올랐다. 뭔가 농 담들을 하는 것 같은데, 몇 개가 귀에 들어오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이어이, 시끄러워!! 어린애들한테 무슨 짓이야?” “걘 몰라도 뒤에 앤 어린애가 아닌 것 같은데?” 카운터의 아저씨는 그 말에 파이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려 침을 퉷 뱉었다. “누굴 찾는진 모르지만 밤에 이런 데 돌아 다니는 게 아니다. 얼른 집에 들어가.” “고맙지만, 꼭 찾아야 해서요. 저기 그러니까...” 이런. 바보같은. 인상착의를 알아두질 않았다. 카라는 당황해서 파이를 돌아보았다. “파이,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 “얼씨구. 뭐야, 애비가 아니라 도망간 남편 찾아왔나본대?” “도망친 놈팽이 찾아서 뭐해? 뭣하면 내가 대신해줄 수도 있는데.” “야. 너도 입 좀 열지 그래? 다리 보니까 목소리도 예쁠 것 같은데.” 아까 그 목소리다. 뒤이어 또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날아왔다. 카라가 인상을 찡그리 기 전에 다시 아저씨가 고함을 질렀다. “니미랄! 입들 좀 다물어! 너희 얼른 나가는 게 좋겠다. 다른 집에 갔다간 진짜 봉변 당할 지도 모른다.” “이것만 가르쳐주세요. 아크라는 사람 몰라요?” “아크? 몰라.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 아저씨는 생각해보는 척도 하지 않고 뚝 무질러버렸다. 카라는 한숨을 내쉬고 파이를 잡아 끌었다. 역시 안되겠다. 아무래도 여길 빨리 벗어나는 게 낫겠다. 그 와중에 그녀는, 아크라 는 이름이 나왔을 때 술집에 앉아 있던 사내들 중 몇 명이 눈을 번득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 다. 파이가 종종걸음으로 카라를 쫓아오며 물었다. “어디 가? 아크한테 인사해야 하잖아.” “내일 다시 오자. 오늘은 안되겠어.” “응. 오늘 자고 내일 다시 와.” 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두건이 조금 흘러내렸다. 카라는 잠시 멈춰서서 발돋움해 파이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파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런. 카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파이 의 눈동자에 비친 광경을 굳이 보지 않아도 이미 몇 사람이 뒤쪽에 서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파이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쪽에도 두명이 서 있었다. 카라는 뒤를 돌아보고 물었 다.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인지는 들어보면 알 거고. 좀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하자.” 카라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나직이 말하면서 팔을 붙잡았고, 그의 턱짓에 두 명이 파이를 잡았다. “파이!” 다른 말을 할 새도 없었다. 파이는 두 남자가 자기 팔을 붙잡자마자 맨발로 깨끗하게 한 놈 의 턱을 날리고는 다른 놈의 배를 걷어차버렸던 것이다. 힘이 얼마나 좋았는지 배를 얻어맞 은 남자는 날아가서 벽에 부딪쳐 떨어졌을 정도였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휘유!” “잘한다!” “야! 따끔한 맛 좀 보여줘!” 멀리서 지켜보던 여자들에게서 휘파람과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격한 동작 덕분에 두건이 벗겨져 나가, 파이의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나 있었다. 카라는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사정을 전혀 몰라도 일단 여자 편을 드는 건가. 파이는 박수갈채가 신이 나는지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아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준 다음 - 두 가지 의미에서 - 다시 한 남자를 팔꿈치로 세게 후려쳤다. 그 순간 카라를 잡고 있던 남자가 팔을 세게 비틀었다. “아욱!” 카라는 날카로운 통증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순간 파이가 주춤했다. 귓가에 나직한, 험악한 목소리가 울렸다. “머저리같은 새끼들. 여자애 상대로 뭐하는 거야?” “그러는 댁은 여자애 상대로 뭐하는 건데?” 카라는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내뱉듯 말했다. 남자는 대답 대신 카라의 팔을 더 세게 비틀었다. 이번에는 비명은 올리지 않았지만 정말 눈 앞에 별이 반짝일 정도였다. 뼈가 부러질 지도 모른다. 파이가 어쩔 줄 몰라 울상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겨우 일어선 남자들 이 천천히 파이에게 다가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카라가 자책과 자기비하를 퍼붓기에는 충분히 길었다. 그 때 구세주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파이!!” “여기 와 있었다니! 이번엔 안 놓친다, 이 말썽꾸러기!!” “꼼짝 말고 거기 서 있어!” 깜짝 놀란 파이와 더불어 주변의 남자들이 일제히 그 쪽을 쳐다보았다. 아까 따돌렸던, 파이 를 찾고 있던 남자들이었다. "저것들은 또 뭐야......아니, 킨 아냐?“ 험상궂은 표정은 당혹스러운 어물거림으로 수그러들었다. 막 달려들려던 이쪽 사내들이 당 황해서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달려온 남자들 중 한 사람도 놀란 듯 되물었다. “세이빈! 자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난 누가 도련님에 대해 캐묻길래 수상해서...” 당황한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파이에게 쏠렸다가, 다시 카라에게 날아왔다. 카라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우르르르- 천둥이 울렸다. 먹구름이 몰려들며 하늘이 삽시간에 캄캄해지고 있었다. 소나기가 올 모양이었다. 카라는 아픈 어깨를 주무르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멋쩍은 얼굴로 서로를 쳐 다보고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카라는 어느 술집 2층에 있는 작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곤란하다. 오해도 풀렸고, 파이를 데려다줬으니 그만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순순히 카 라를 보내주지 않았다. 특히나 킨이라는 남자는 예의가 깍듯해서, 자기들 때문에 팔을 다쳤 을지도 모르니 치료도 할 겸, 소나기가 지나갈 때까지만 머무르라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 다. 워낙 집요하게 설득하는 통에 난처해진 데다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일단 들어오기 는 했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불안했다. 정작 카라를 데리고 여기까지 들어온 킨은 치료사가 지금 자리를 비웠다는 핑계를 대고 사라져 버렸다. 카라는 바싹 붙어앉아 있는 파 이의 머리를 쓸어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도망이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카라는 킨이 사라진 쪽 문을 한 번 쳐다보고, 들어올 때 사용한 문을 돌아보았다. 그 때, 바로 그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사람들이 있다. 외모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감이 워낙 강력해서 대부분 사람이 무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 강렬한 생명력이라든가, 기묘한 위화감,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이질감, 예를 들 자면 이자드같은 압도감 같은 것. 카라는 꽤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리고 말았다. 이건 이제까지 봐온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정확히 뭐가 다르냐고 하면, 나이일까. 문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은, 소년이라기엔 조금 나이가 많고 청년이라기엔 아직 어려 보였다. 카라보다 두어 살 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권위있는 사람이라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 그런 존재감이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여유 로움과, 타고난 듯한 자신감. 그것도 거북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당당함과 오만함이 녹아들어 가 있는 표정. 이 소년의 분위기는 이자드와 조금 비슷했지만, 한 가지가 결정적으로 달랐 다. 그에게는 피로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관심이나 냉담함 같은 벽도 없었다. 어떤 불 가능해 보이는 일에라도 기꺼이, 포기하지 않고 매달릴 듯한 탐욕스러운 젊음만이 있을 뿐. 그러고보니, 이자드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소년을 관찰하며 그런 생각을 하던 카라는 몇 초가 지나간 다음에서야 상대방도 그녀 못지 않게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거울같은 은회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 더니 귀에 선 이름을 뱉어냈다. “휘안?” “어?” “아. 아니. 미안하다. 사람을 잘못봤군. 아는 사람 중에 닮은 얼굴이 있어서 그만.” 그는 약간의 당황함을 곧 수습하고 자연스럽게 걸어들어왔다. 카라는 잠시 동안 휘안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 생각하다가, 기억해내고 경악에 차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 런데 언제 돌아왔는지 킨이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절도있게 허리를 굽히며 소년 에게 말했다. “직접 오실 것까지는 없는 일인 것을……” “아니다. 그대들이 실수를 저질렀다면 응당 내 잘못이기도 한 법이지.” 파문 하나 일지 않는 은회색 연못 같은 눈동자가 다시 카라를 향했다. “많이 아픈가? 사과하겠다. 어이없는 오해를 한 모양이군. 파이를 데려다줘서 고맙다.” 카라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바짝 긴장한 채 소년의 기색을 살폈다. 품위있는 언동에 거짓은 없는 것 같았다. “당신이 아크?” 카악! 갑자기 귀청을 울리며 터져나온 괴성에 카라는 놀라서 킨을 돌아보았다. 그는 못마땅 한 얼굴로 카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가 화가 치솟는다. 하지만 분노가 제대로 자 리잡기 전에 소년이 혀를 차며 나무라듯 한 마디를 뱉었다. “킨!” 잘 훈련된 개처럼 킨은 순식간에 수그러들며 눈을 내리깔았다.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 며 다시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래. 파이가 내 이름을 이야기하던가?”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허름한 술집 2층에 사는 주제에, 대체 뭐하는 인물이길래 이 렇게 위세등등한 걸까. 무엇보다도 휘안을 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이름만 같은 사람이겠거 니, 생각하고 싶었지만 카라와 닮았다면 그 휘안이 맞을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카라와 똑 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났었으니까. 휘안을 생각하자 다시 여관에 누워있을 이자드에게 생각 이 미치면서 경계심이 강해졌다. “저, 어쨌든 파이도 데려다줬고, 일행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돌아가볼게.” “치료사가 곧 올텐데.” 카라는 고개를 세차게 내젓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단호하게 말했다. “가봐야해.” 아크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창밖을 내다보고 말했다. “비가 많이 오는데다가 어두운데, 길은 잘 찾을 수 있을지...” 카라는 황급히 말을 끊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괜찮아.” “흠……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킨, 안내를…” 카라는 뒷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문 쪽을 향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방해 물이 달라붙었다. 파이였다. 파이는 큰 몸을 구겨서 답삭 카라에게 안겨들며 말했다. “아이혜, 아크한테 안녕하고 가는 거야?” 카라가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아크가 먼저 표정을 바꾸며 카라를 쳐다보았다. “아이혜라고? 네가?” “내가? 아니야. 난 아이혜라는 사람 몰라. 내 이름은 카라야.” 아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파이와 카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파이는 처음부터 아이혜라는 사람 이야기를 곧잘 하곤 했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말한 적은 없었지만…네가 그 사람을 닮은 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크의 목소리에도 의심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휘안, 이번에는 아이혜. 세상에 카라처럼 생긴 사람이 깔렸으면 또 모를까. 하지만 달리 생각할 수도 없었다. 카라는 정색을 하고 파이를 돌아보았다. “저기, 파이, 난 아이혜가 아니야. 닮았는지는 모르지만 난 그 사람이 아니라고. 듣고 있 니?” “소용없을 거다. 그는 한 번 결정한 일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아.” 아크의 말대로였다. 파이는 조금도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카라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 질 줄을 몰랐다. 카라는 난처한 얼굴로 아크를 쳐다보았다. 그도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래도 아크는 결정이 빨랐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곧 단념한 듯 시원스럽게 말했다. “……파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니, 너를 따라가겠다고 고집부린다면 말릴 수는 없지.” “하아?” 아크가 소유권을 포기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뭐라고 해도 이건 고양이나 강아지를 줍는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카라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안돼!” 순간 아크의 눈썹이 살짝 찌그러졌다. 킨이 또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아크는 킨에게 한 번 엄한 시선을 던지더니 다시 카라에게 물었다. “왜 안된다는 거지? 나로서도 파이를 포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의사를 존중해줄 수밖에 없어서 네게 맡기려는 거야.” 자존심이 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카라는 어이가 없어서 멀뚱히 아크를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서 말했다. “남의 사정도 생각해야지. 난 빈대란 말이야.” “빈…뭐라고?” “빈대. 내 돈 한 푼 안내고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사실 지금 같이 다니는 사람은 내 친척도 아니고 스승도 아니고...하여튼 애매한 관계거든. 그렇게 쪼들리는 사람은 아니라서 부담은 별로 없지만. 요새 몸도 안좋은데 얹혀사는 주제에 식객을 늘리는 건 너무 하잖아.” 아크는 잠시 상당히 오묘한 표정을 연출해 보였다. “흠. 돈을 벌지 않고 의식주를 해결하면 빈대라고 하는 건가?” “꼭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니지만.” “그럼 나도 빈대로군.” “그런 무참한 말씀을! 와…” “킨!” 아크는 킨이 뭔가 더 하려는 말을 매섭게 끊어버리고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킨은 끽 소 리도 못하고 수그러들었다. 아크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킨에게 명령했다. “그녀가 돌아왔는지나 알아봐 줬으면 좋겠군.”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킨은 잽싸게 뛰쳐나갔다. 카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엄청난 귀족 자제쯤 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크의 눈동자가 똑바로 카 라에게 꽂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다고 생각했던 회색 눈동자가 얼음거울처럼 차고 투명하게 빛난다. 무엇이든 다 반사해낼 것만 같은 느낌의 단단한 청회색. 계속해서 눈 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오싹 소름이 끼쳤다.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단단한 벽을 마 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크는 침착하게 다시 제의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파이 몫의 식비를 지불하겠다. 이제 됐나?” “아......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카라는 아크의 말에 바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항의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다는 말이야. 말했듯이 내 일행은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아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명령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카라는 바싹 긴장했지만, 파이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바닥에 앉아서 카라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혼 자 흥얼거리고 있다. 다행히도 아크는 차마 자기보다 어린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 성질을 죽이고 다시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그 보호자인지 일행인지 하는 사람을 내가 만나보고 설득하도록 하지. 괜 찮겠지?” 아크는 한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연중에 파이 쪽을 훔쳐 보고 있었다. 카라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눈을 굴렸다. ‘뭐야, 사실은 파이를 보내기 싫은데 한 번 꺼낸 말이 자꾸 거절당하니까 고집으로 밀어붙 이는 거 아냐?’ 아크는 이제 얘기 끝났다는 얼굴로 파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카라는 이런 질문을 해도 괜찮 을까 어떨까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내기도 전에 뒤에서 다시 문이 왈칵 열리더니 킨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왔습니다! 비델이 돌아왔어요!” 순간 카라는 몸을 홱 돌리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 설마 했지만, 킨보다 반 발자국 정도 뒤쳐져서 걸어들어오는 것은 정말로 석장을 든 금발의 여자였다. 비델. 알 바르카의 신 관이라고 자칭하는, 헤웬의 원수. 우르르르르 ? 한동안 잠잠하던 천둥이 다시 울리며 창문을 흔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그 쪽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 번, 하늘을 찢어놓을 듯한 우레소리가 창문을, 아니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9. 부러진 날개 (12) 다시 한 번, 고막이 터질 듯 강렬한 우레소리가 지축을 뒤흔들고 나서 거짓말처럼 빗발이 딱 그쳤다. 불길한 정적이 날개를 펴고 레투스 시 위에 내려앉는 것 같다. 이자드는 눈을 가 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 마녀...헤웬은 어디에 있지?” 진은 손을 내밀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며 딴청을 부렸다. “헤웬? 글쎄요, 어디보자. 낮에 나갔는데, 어디에 간다고 했더라...” “능청부리지 말고 빨리 말해.” 이자드가 날카롭게 다그치자 진은 입끝을 살짝 들어올렸다. 장난꾸러기같은 뻔뻔하고 얄미 운,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자드는 대개의 사람들처럼 그 표정에 미소 를 짓는 대신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나다를까, 진은 웃으면서 조건을 달았다. “왜 마녀를 찾는 건지 먼저 알고 싶은데요.” “흠.” 이자드는 진을 차갑게 쏘아보고 단숨에 말을 뱉었다. “마법사와는 달라서 마녀가 원하는 대상을 찾는 데에는 독특한 방식이 있지. 그들은 귀령 을 이용해. 귀령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마력장 또한 그들에게는 영 향을 끼치지 않으니까 어떤 경우든 장애없이 상대를 찾을 수 있지.” “아하. 그래서 헤웬을 찾는 건가요? 그녀에게 길찾기를 부탁하려고?” 부탁이라는 말이 상당히 껄끄러웠지만 이자드는 간단하게만 대답했다. “아니다.” “하지만 헤웬을 찾는다면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여자가 아니라 다른 마녀를 찾으려는 거다. 이 도시에도 마녀들은 있 겠지. 헤웬은 그들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이고.” 진은 이 정도 설명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어째서 다른 마녀를? 헤웬은 실력있는 마녀일 텐데요.” “그녀는 이미 공격령과 계약을 맺었다. 귀령이라는 존재는 한 가지 이상의 일은 하지 못해. 그리고 마녀는 복수의 귀령과 계약할 수 없고.” 진이 또 질문을 던지려고 입을 벌리기 전에 이자드는 재빨리 말했다. “그 다음은 움직이면서 듣지 그래.” “아, 알았어요, 알았어. 할머니 일을 알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게 단가?” “에...원래대로라면 그렇죠. 그런데 난 언제나 마녀 집회가 어떤 건지 궁금했거든요.” 진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문밖으로 나섰다. 뜸들인 것에 비해서는 재빠른 행동이었다. 그는 걸음을 재게 놀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따라가보고 돌아왔죠. 아직까지 거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흠.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군.” 눈부신 번개가 하늘을 둘로 찢으며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의 뱃속에서부터 울려나 오는 듯한 천둥소리가 도시를 뒤흔든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무엇인가를 찾는 듯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진은 그 구름을 쳐다보며 얕게 코웃음을 쳤다. “이게 그냥 마른천둥소리일 가능성은 별로 없겠죠?” 이자드는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복수를 하러 간 건가......” “저랑 같은 생각을 하시나보군요.” “글쎄. 그것뿐이라면 좋겠지만...” 이자드는 하필이면 카라가 없을 때 일이 터지다니 공교롭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표정을 구겼 다. 게다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본 헤웬의 힘은 이렇게 무시무 시한 것이 아니었다. 점점 강해지는 이유가 단순히 분노와 복수심이 커지기 때문만일까? “비가 그쳤군.” 아크가 조용히 말했다. 비델이 창밖을 내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밖으로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천둥이 방을 뒤흔들었다. 귀청을 찢는 소리 때문에 흔들린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방은 실제로 흔들리고 있었다. 물컵이 달그락거리며 탁자 모서리로 밀려나간다. 챙 그랑!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어졌다. 곧이어 세 번째 충격이 왔다. 파이가 덥석 카라에게 매달리는 통에 균형을 잃었다. 아크는 뛰어난 균형감각을 발휘, 볼성사납지 않게 벽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비델은 석장을 짚어 버텼다. 그녀가 더 재촉하기 전에 우르르 젊은 남자들 한 무리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아크를 보더니 거의 입을 맞춰 외쳤다. “아직 여기 계셨습니까! 어서!” 그리고는 다급하게 다시 우르르 몰려나갔다. 아크를 가운데 둘러싸고서. 뒤에 남은 카라는 망설이다가 비델에게 물었다. “이건 또 뭐지?”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이 잠깐 카라를 돌아보았다. 비델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저보다 잘 아실 텐데요. 그 마녀입니다.” “누구? 헤웬? 말도 안돼!” 그 이상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우르르 ? 무서운 기세로 번개가 내리꽂히며 거인이 쥐고 흔 드는 것처럼 건물이 흔들렸다. 카라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슬하게 계단에 몸이 걸렸다.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파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라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팔이 아팠다. 그래도 겁에 질린 파이를 달래야 했다. 카라는 애써 웃어보이면서 말했다. “괜찮아. 여기서 나가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사이에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충격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카라 는 몇 번이나 파이에게 의지하여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다 싶었을 때 잡고 있던 계단 난간이 떨어져 나가면서 다리가 확 꺾였다. 카라는 주저앉은 채 숨을 들이켰다. 불쑥, 어디선가 팔이 하나 뻗어오더니 파이가 잡지 않은 반대쪽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 고마...나가지 않았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진지한 얼굴로 카라를 잡아끌고 있는 것은 아크였다. 그는 아예 카라를 가뿐하게 안아들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어린애 하나도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왕이 된다는 건 무리겠지.” 꽤나 멋지게 한 마디 뱉은 셈이지만, 가뜩이나 안기는 것에 익숙치 않은 카라는 초긴장상태 여서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와앗! 무슨 짓이야! 이러고 내려가다 넘어지면 둘 다 죽겠다!” 다행히 아크의 균형감각은 평균 이상을 넘어서 아주 뛰어났다. 그는 발밑을 신경써서 계단 을 밟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너무 나쁘게 생각지 마. 저들은 나에게 모든 걸 걸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생명과 생각 전부를 짊어지다니, 그런 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었 지만, 아크의 납덩이 같은 얼굴을 보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카라는 결국 짧게 대꾸하고 말았다. “......이해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건물을 흔들던 벼락이 잠시 멈추고, 짧은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아크는 때를 놓치 지 않고 계단을 뛰어내려 1층을 가로질렀다. 주위가 엉망이었다. 겨우 벽과 지붕 밑에서 몸 을 피하기는 했지만 바깥도 사정이 그리 낫다 할 수 없었다. 콰지직! 벼락이 떨어지면서 건물이 또 우르르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낡은 건물이다. 건물 이 통째로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이쪽 거리의 주민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 흙먼지가 또 한 무더기 떨어져 내렸다. 카라는 기침을 하며 버둥버둥 아크의 품 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아크도 기침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먼지 속에서 몇 사람의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아크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다시 들어가시다뇨!” “무모한 짓 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하늘에서는 계속 벼락이 울려대고 있었다. 땅에서는 나이든 남자들이 악을 써대고 있었다. “왕자님의 목숨값은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걸 모르십니까!” 카라는 기침하는 틈틈이 들려오는 그들의 말에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켰다. 왕자? 왕자라고? 뭔가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지만, 아크가 절대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왕족 이라는 족속이라는 데 대해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이제는 바람까지 미친 듯 강해지며 공기를 감아쥐기 시작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점점 더 날카로와지고 있었다. 바람 속에 드 문 드문, 흰 실 같은 것이 섞여들어 있다. 카라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그 바람 속 에 날리고 있는 흰 실, 게로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로 헤웬이란 말인가. 하지만 헤웬의 힘은 이렇게 강하지 않았었다. 라니아의 죽음 때문 에, 그 분노 때문에 이렇게 강해졌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카라의 눈길은 2층 구석 창문으 로 향했다. 비델은 아직 저기에 있는 걸까. 망연히 생각에 잠긴 사이, 다시 아크는 몰려든 측근들의 손에 들리다시피 피신해갔다. 아크 는 카라 쪽을 보고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도 움을 기대할 입장도 아니었다. 카라는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손등으로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닦았다. 가까스로 바람에 쓸려가지 않는 것도 파이가 잘 붙들고 있어준 덕분이었다. ‘어딜 가나 짐이라니, 비참하군.’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힘은 더 셀지 몰라도 파이는 여전히 매달리는 듯한 눈으로, 겁 에 질려서 카라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콰직. 건물 벽 하나가 벼락과 바람의 협동공세에 통째 날아가 버렸다. 카라는 발이 미끄러지 는 것을 겨우 버텨서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을 낮추며, 스스로에게 힘을 북돋 기 위해서 중얼거려 본다. “휴우. 차라리 기어가는 게 빠르겠다.” “기어가는 거야?”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파이는 납작 엎드리며 카라를 올려다보았다. 카라는 당황해서 파이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냥 해본 말이야.” 아니, 그냥 해본 말만은 아니었다. 바람이 점점 날카로와지고 있어서 잠시라도 서있으면 온 갖 물건들이 와서 부딪쳤다. 가까이에서 벽이 넘어질 태세만 보이고 있지 않다면 정말 기어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조금 화가 났다. 아니, 정말로 화가 치밀었다. 관계없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시내 한복 판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헤웬이 제정신으로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카라는 버럭 화를 내며 발을 탕 굴렀다. “힘이 있다면 뭔가 해보란 말이야! 다라Dhara!" 그 말이 입밖으로 굴러떨어지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땅이 움직였다. 사람들의 발로 단단 하게 다져진 땅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단순하 고, 손쉽게.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카라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동시에 갈라진 틈 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카라는 잠시 공중에 뜬 상태를 실감하면서, 망연히 생각했다. 제기랄. 뭔가 알고 있는 욕설을 더 찾아내기 전에 부드러운 압력이 느껴졌다. 머리부터 온몸을 감싸 는 단단한 압력. 커다랗게 퍼드득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카라는 거세게 땅에 처박히며 한 바퀴를 굴렀다. 아니, 땅에 부딪치고 구른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카라를 꼭 안은 채 땅에 처박혀 정신을 잃은 것은 붉은 머리카락의...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흔들리듯, 정신이 나갈 듯 하다가 가까스로 다시 불이 들어왔다. “파이!!” 카라는 떨리는 손으로 파이의 머리를 받쳐들었다. 상처는 크지 않은 것 같았지만 당황한 눈 으로 보기에는 피가 너무 많이 나온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 니 아까보다 더 아수라장이었다.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카라는 눈을 감고 파이의 가슴에 머리를 댔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미친 듯이 그 말만이 머리속에 메아리쳤다. 돌봐줘 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오히려 도움을 받아버렸다. 물밀듯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왜 좀 더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하나. 왜? “다쳤어?” 쏟아져 들어오던 혐오와 자괴감의 물결이 뚝 그쳤다. 카라는 얼굴을 들었다. 파이가 눈을 뜨 고 그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파이는 어쩔줄 모르는 얼굴로 카라의 볼을 매만졌다. “미안해. 파이가 잘못했어.” “바보야, 네가 잘못한 게 아냐. 이건 놀라서 그런 거라구.” 카라는 주먹으로 대충 눈물을 닦아내며 볼멘 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다.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날 이렇게 걱정해 주는 거지?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위 험을 무릅쓰면서. 눈앞에 있는 것은 이질적인, 불가해한 존재였다. 한 점 의심도 섞여 있지 않은 눈동자. 무조건적으로 따라오는...카라는 파이가 계속 불안해하는 것을 깨닫고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제서야 안심한 파이가 배시시 따라웃는 모습을 보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 분이 들었다. 기쁨과 부담감에 더해서 책임감 같은 것이 뒤범벅이 된. “일어날 수 있겠어?” “우엥...아파...” 카라가 머리를 쓸어주며 묻자 파이는 금새 울상을 지으며 칭얼거렸다. 일단은 어리광인 것 같아 안심이었다. 카라는 문득 아까 떨어지던 갈라진 틈이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 하고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날 잡고 여기까지 건너뛴 거지?’ 거기에 생각이 미친 다음에서야 겨우, 파이의 주위를, 아니 카라의 주위까지 감싸고 있는 크 고 따듯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 순간이나마 불꽃으로 착각했을 만큼 붉디 붉은 무엇. 붉 은 색을 따라 흘러흘러가보니 파이의 팔, 아니 어깨로 이어져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 던 무엇인가가 어깻죽지에서부터 뻗어나와 허공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화염으로 짠 담요 같 은 것. 아니, 깃털이다. 단단하고 촘촘하게 이어붙은 깃털들… 날개. 카라는 한참이나 걸려서 그 화려한 물건이 날개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시내 한복판에서 폭풍이라니, 원래 저렇게 화끈한 여자였던가요? 미리 알았으면 그냥 보 내지 않는 건데 그랬는걸요.” 이자드의 주문에 덤으로 실려온 진은 회오리바람에 실려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각종 집기들 을 유심히 관찰하며 명랑하게 말했다. 이자드는 폭풍이 가장 강하게 집약되어 있는 위치 가 까이에 도착하자마자 피로를 감추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주문을 쓰 는 편이 달려오는 것보다 체력 소모가 덜 된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시간만이라도 아끼자고 이쪽을 택한 것 뿐이다. 이자드는 몇 번 더 숨을 들이킨 다음 겨우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진이 바라보고 있는 광경에 눈을 돌렸다. “아니. 원래 이런 류는 아니었다. 무모한 면은 있었지만.” “그럼 뭡니까, 복수에 미쳐서 막나가는 건가요?” “제어할 힘이 모자란 거겠지.” 진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자드는 좋지 않은 얼굴로 막 일기 시작한 폭풍과, 한밤중에 깨어나 공포에 질려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힘이 모자란다니,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요. 원래 마녀란 자기 역량에 맞는 귀령과만 계약을 나눌 수 있지 않던가요.” “저렇게 설쳐대다가 무고한 사람들까지 다치겠군.” 이자드는 대답 대신 그렇게 말하며 몇걸음 나섰다. 진이 재빨리 그를 잡았다. “지금 몸으로는 저걸 막을 수 없을 걸요.” 이자드는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얼굴로 진의 손을 떨쳐냈다. “막으러 가는 게 아니야. 카라를 찾으려는 것 뿐이다.” “아하.” 진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지팡이를 고쳐쥐고 그 뒤를 쫓았다.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모래폭풍처럼 흙먼지가 점점 더 심하게 휘몰아칠 뿐이다. 바 짝 마른 번개가 가끔은 여기로, 또 가끔은 저기로 내리쳤다. 그런 곳에는 반반 확률로 불길 이 올랐다. 자연적인 폭풍이라면 진원지인 이곳에는 잔잔한 눈이 형성되겠지만, 폭풍의 마녀 가 불러낸 바람에는 안식처가 없었다. 바람은 맹렬한 기세로 창문을 깨고, 의자와 그릇을 끄 집어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벽에 메어쳤다. 바람이 뚫지 못하는 곳에는 번개가 가세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번개는 아예 땅을 가르고 건물을 모조리 무너뜨릴 기세로 날뛰었다. 바람 자체만으로도 무서운 적이건만, 사방을 날아다니는 물건들의 공세에는 버틸 장사가 없 었다. 진이 참다못해 칼을 뽑아들려는 순간, 이자드는 뜨개질을 하는 것 같은 기묘한 손놀림 으로 허공에 뭔가를 그려넣었다. 진이 지켜보는 사이 이자드의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엷은 막이 생성되었다. 그 막은 그들 주위로 물건이나 돌이 날아드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것도 마법인가요?” 이자드는 그 질문을 무시하고 물었다. “뭔가 보이나?” “흙먼지가 너무 자욱해서 알아보기 어려운데요.” 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 속을 들여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헤웬과 그 귀령이 저기 있는 건 분명히 보이는군요. 흐음. 그런데 이상한데요. 내 눈이 잘 못됐을 리는 없고...상대편에도 마녀가 있나?” 그 말에 이자드는 진이 쳐다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봐야 그로서는 아무 것 도 알아볼 수 없었다. 루이라면 모를까, 이 난장판을 뚫고 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 을 것이다. 진은 모습이 아니라 방출하는 기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이 흙먼지 속에서도 헤웬을 알아볼 수 있는 것 뿐이다. 이자드는 어림짐작으로 물었다. “귀령이 둘인가?” “그렇게 보이는군요. 하나는 전에도 본 적 있는 놈이지만.” “쯧. 역시나 어리석은 짓을 했군.” 이자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것을 놓칠 진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짓이라면?” “쓸데없는 일에 관심두지 말고 카라나 찾아봐.” “지금 시점에서 이건 꽤 중요한 문제라구요. 저 마녀 때문에 우리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아닙니까.” 이자드는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이중 계약을 건 거다.” “흐음, 또 한 마리의 귀령과 계약을 맺었다는 건가요?” “달리 무슨 계약이 또 있겠나. 아마도 저급의 귀령이겠지. 조정하는 데 큰 힘은 들지 않는. 그렇다 해도 이중 계약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대체 왜 그런...” “무슨 생각을 했는지까지야 내가 알 수 없는 일. 종류는 알 수 있지만. 점치는 마녀들이 쓰 는 귀령이지 싶군. 내가 찾으려 했던……” 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 대목에서 손가락을 딱 울렸다. “비델인가 하는 그 여자를 찾으려고?” “그러니 지금 싸우고 있겠지. 카라는?” “아아, 지금 찾고 있어요. 그 애의 색깔은 아주 독특하니까, 눈에만 들어오면 알 수 있을 텐데……” 중얼거리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멀리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진은 그 소리가 무엇이었는 지 기억해 내려고 이마를 찌푸렸다. 이번에는 이자드 쪽이 더 빨랐다. “피해!” 이자드가 진의 팔을 잡고 곧장 공중으로 뛰어오르자 아슬아슬하게 발 아래 땅이 쩍쩍 소리 를 내며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쿠구궁 소리를 내며 집이 무너져 내렸다. 흙바람 에 벼락, 화염에 더해서 사방이 지옥도였다. 이자드는 흙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키며 어디 말 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내뱉았다. 뒤미처 일어난 진이 툭툭 먼지를 털어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피해가 장난이 아니겠는데요, 이건. 좀 너무하는군요, 아무리 복수심에 불타도 그렇지.” “자넨 저 정도 벼락으로 땅도 가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미처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이자드는 뛰다시피 서둘러 갈라진 틈을 따라가기 시작했 다. 카라다. 예감 정도가 아니라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다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서두르는 중에도 이자드의 머리는 분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규모가 커졌다. 게다가 자연현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성장하고 있는 걸까? 혹 라피스 라줄 리를 단 것이 힘을 억제하기는커녕 더 확대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제까지 그는 카라가 힘을 발전시키고 다스리기보다는 억제하고 누르게끔 해왔다. 하지만 결국은 아무 소용도 없이, 오 히려 카라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좋지 않은 결과만 낳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이 바 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있었다. 처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건가. 9. 부러진 날개 (13) 카라는 파이의 커다란 붉은 색 날개를 홀린 듯 쳐다보다가, 겁을 먹은 것처럼 살짝 손을 내 밀어 깃털을 건드렸다. 파이가 헤벌쭉 웃으면서 날개를 까닥까닥 움직였다. “예쁘지?” “응. 정말 예쁘다.” “그치만 파이는 많이 못날아.” 왜, 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카라는 그제서야 눈길을 옮겨 왼쪽 날개를 보고 당혹감 에 사로잡혔다. 왼쪽 날개는 노을녁의 구름을 잡아 뜨개질해낸 것처럼 아름다운 오른쪽 날 개와는 전혀 달랐다. 같은 줄기에서 뻗어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기형의 가지. 일단 크기부 터 훨씬 작아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깃털은 곧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구부러진 데다가 빛깔도 칙칙했다. 오그라들고 뒤틀린 모습이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추했다. 카라 가 머뭇거리는 사이 파이는 잽싸게 날개를 접어넣어 버렸다. 접어넣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날개는 신기루가 사라지는 것처럼 스르륵 줄어들어 뻗어나왔던 어깻 죽지로 스며들어갔다. 콰르릉. 번개가 멀지 않은 곳을 내리찍는 소리에 카라는 정신을 차리고 파이의 상처를 살폈 다. 다행히도 대단한 부상은 아니었다. 이자드와 진이 균열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카라는 낑낑거리며 힘겹게 파이를 부축하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딴에는 아까부터 요란 하게 벼락이 떨어지고 있는 방향을 피하려는 계산이었지만, 이럴 때에 계산이라는 것은 대 개 어긋나기 마련이다. 낮부터 계속 뛰어다닌데다가 생각해보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위에 아까부터 몇 번 넘어지고 깨지고 나니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서, 한걸음 한걸음 옮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도망을 치느니 한군데 가만 앉아있는 게 낫다고 하는 것이 평소의 카라가 할 만한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파이가 다쳤으니 그럴 수가 없다. 비오듯 땀을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이상함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보니 사방이 조용했 다. 소리없이 백뢰(白雷)가 떨어지며 발밑이 흔들렸다. 카라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나가떨어져 버렸다. 오늘만 몇번째 나가떨어지는 거지. 생각은 농담처럼 했지만, 이젠 힘이 다 빠졌다.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가 싫었다. 정말 지쳤다. 카라는 눈을 감고 팔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나 귀를 뚫고 들어오는 소리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불꽃이 날름거리며 집을 먹어들어가는 소리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기울어 넘어지는 기둥과 벽의 목소리. 도망칠 사람은 다 도망친 걸까. 사람들의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점차 가라앉아간다. 파괴작업이 거의 끝나고, 아직 재건 은 시작되지 않은 사이의 폐허만이 담을 수 있는 정적. 그러다가 문득 하나의 목소리, 끝나 지 않을 것처럼 길디 길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그 정적을 찢었다. 카라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헤웬?” 설마, 설마 하면서 부인하려고 했지만 정말로 헤웬이었다. 폭풍의 새를 몸에 두른 마녀. 밤 이었지만, 불그스름한 하늘과 타오르는 대지가 사방을 밝혀주어, 공중에 떠 있는 형체가 너 무나 잘 보였다. 헤웬과 비델은 몇번이나 그랬듯 또 싸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싸움터는 카라에게 너무나 가까웠다. 사방에 벼락이 떨어지고 돌이 튕겨나오고 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헤 웬은 싸우면서, 게로의 몸을 늘리고 찢고 집어던지면서 내내 비명을 질렀다. 비현실적이었 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순식간에 납득해 버릴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발밑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땅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너무나 자연스럽던 일상이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무너져 버리는 것.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만 여겨졌다. 이젠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 지 않았다. 자고 싶었다. 귀찮았다. 혼자였다면 정말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다시 드러누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라는 곧 파이를 돌아보았다. 움직이기도 싫고 움직일 힘도 없었지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안전해 보이는 쪽으로 움직일 요량이었다. 그렇게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무엇인가,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 퍼어억!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리얼한, 둔탁한 소리. 카라는 천천히, 불가 항력에 끌리듯이 시선을 돌렸다. 둘 중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땅으로. 피를 흘리며. 떨어져내리던 사람은 겨우 몸을 뒤채며 머리부터 떨어지는 것을 면하고, 비틀거리며 바닥에 섰다. 헝클어진 긴 갈색 곱슬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헤웬!” 카라는 다시 한 번, 망연히 외쳤다. 별로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건만, 헤웬은 그 목소리를 듣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과처럼 혈색이 좋던, 낙천적이고 밝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저러는 건가. 어리둥절해있는 카라의 눈에, 천천히 내려섰다가, 냉담한 얼굴로 잠시 헤웬 을 내려다보고는 돌아서는 비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듯 헤웬에게 날아 내려오고 있는 뭉실뭉실한 형체가 보였다. 게로......그리고 뭔지 모를 작은 것도 하나. 진 건가? 이렇게 강해졌는데도 비델에게 졌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처음 생각한 말 이 다시 되돌아오며 섬뜩하게 등골을 스쳤다. 예전에 이자드에게 들었던 말이 선명하게 뇌 리를 스쳤던 것이다. 마녀는 패배하는 순간 자신의 귀령에게 먹힌다. 그것이 계약. ‘게로에게 먹혀 버린다고?’ 싫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게로가, 저 귀여운 귀령이 그럴 리가 없다. 헤웬의 어머 니를 먹어치운 게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녀석은 확실히 형체를 이루어 헤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카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며, 남은 힘을 짜내어 외쳤다. “헤웬! 피해!” 헤웬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멍하니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보면 각오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상황을 인정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헤웬은 뭔가 중얼거리고 있 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곧 음성이 커졌다. 헤웬은 텅 빈 눈으로 손을 들어올리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델을 향해. 혹은 자기 자신을 향 해. “어째서……어째서 너를 이길 수가 없는 거지? 나는 강해졌어! 나는 강하단 말이다! 왜 너 를 이길 수가 없는 거지? 마녀는 결국 이것까지밖에 안되는 건가? 말해줘. 이게 우리의 한 계야? 절대로 넘어설 수가 없는 거야?” 비델은 멀찍이 내려서서, 냉연한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사이 게로는 헤웬의 머리 위 에 도달했다. 카라는 다시 한 번 외쳤다. “헤웬!!” 헤웬은 돌아보지 않았다. 게로가 입을 벌렸다. 혹은 입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카라는 그 입 속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눈부신 어둠, 끝없는 허기에 시달리며 아무리 먹어도 먹 어도 배를 채우지 못하는 걸기들린 귀령의 내부, 그 존재, 그 무(無)를 고스란히 까발겨 보 여주는 막막한 허공. 몇 명의 마녀를 먹어도 실체를 얻지 못할 비참한 존재의 심연. 순간적 인 착각이었는지 진짜로 보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라는 그렇게 보았다. 순간 귀가 멍해 지며 종소리 같은 것이 머리를 두들겼다. 카라는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종소리 같은 소리를 울리고 있는 것이 귀고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힘을 느꼈다. 처음으로, 확실 하게. 그녀는 게로가 헤웬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며 단호하게, 절대적인 선언을 내리듯 외쳤 다. “그만둬!” 그 순간,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헤웬과 귀령들만이 아니었다. 막 그 자리에 당도한 이자드 와 진, 막 그 자리에 등을 돌리고 떠나던 비델이 모두 그 목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뒤이어 카라는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사라져라.” 헤웬이 서 있는 바로 앞에서 공기가 말려올라가며 째지는 듯한 바람소리가 올랐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소리 같았다. 그 비명소리는 점점 더 커지면서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듯 울 리다가 삽시간에 쪼그라들어,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완전한 침묵이 감돌았다. 다 른 세계에 빠졌다가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완전한 침묵. 진은 경악과 감탄 속에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고 있었다. 반투명한 에너지체가 찢 기듯이 어딘가로 빨려들어가,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광경을. 이자드는 그처럼 귀령이 부서지 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에 소리로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귀령은 제 자리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이자드는 경악했다. 난다 가 소환수를 부숴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놀라움이었다. 문제는 일어난 일 이 아니라, 일어나게 한 원인이었다. 그는, 카라가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 하는 일을 행했다는 사실에 전율하고 있었다. 카라는 심장이 급하게 뛰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됐다! 이번 에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힘이다. 내가 귀령들을, 게로를 ‘죽였다’. 게로를 살아있는 동물처럼 여겨왔기에 그 생각이 삼키기 힘든 씨처럼 목에 걸렸지만, 일단은 헤웬 이 살아났다는 사실이 기뻤다. “헤웬......” 기쁜 얼굴로 그 이름을 다시 불렀을 때, 헤델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마녀가 카라를 돌아보 았다. 그 표정에 카라는 멈칫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한번도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본 적이 없 었다. 헤웬의 눈빛은 도저히 제정신이라 생각할 수 없는 불안정하고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몇 번 깨물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뭔가 중얼거리며 불안하게 눈을 옮겼다. 그 눈은 문득 카라를 지나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이자드에게 가 닿았다. 그녀는 원인을 깨달았다는 듯 증오를 담아 이자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입술과 얼굴 근육이 뒤틀리며 독기로 가득찬 말들을 뱉어냈다. “하! 잘나신 마법사님의 행차시로군. 나흘 동안 꼼짝않고 잠만 자더니 일어나자마자 가엾고 어리석은 마녀를 구하느라 납시신 건가?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네! 그래, 잘난 마법사는 귀령도 없앨 수 있는 건가 보지? 몰라 드려 미안하군요! 살려줬다고 절이라 도 할까요?” 카라는 멍하니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아아, 이자드다. 깨어났구나. 그 순간에는 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헤웬이 하고 있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자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욕과 욕설을 침착하게 받고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성격까지 변한 건가? 이중계약만이 아니군.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상관할 바가 아냐!!” 헤웬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카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헤웬이 화를 내고 있다. 어째서? 그냥 죽게 내버려둬야 했단 말인가? 게로를 죽여버렸기 때문에 화를 내는 건가? 문득 파이 의 온기가 느껴졌다. 깨닫고 보니 어느샌가 그녀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파이가 걱 정스러운 얼굴로 매달려 있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또 뭔가 잘못한 건가? 다시 이자드의 목 소리가 들렸다. 매우 정중한 말투였다. “...이 일이 마녀로서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다는 것은 알겠다. 더불어 그 귀 령의 죽음이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자포자기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지금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야. 치료를 받아야 해.” 헤웬은 그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혀는 기름칠을 한 것처럼 잘도 돌아가는군.” 증오의 독기. 헤웬이 말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표정과 말, 목소리였다. 카라는 어느새 진이 옆에 다가온 것도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이자드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 헤웬을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희미하지만 연민의 빛이 감돌았다. 헤웬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에 망가지고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쉿쉿거리는 소리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법사 같은 것들! 마법사들 따윈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해!” 헤웬은 중얼거리는 사이 사이 흐느껴 울기도 하고 미친 듯이 웃기도 했다. 이자드는 그녀에 게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대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어리석게도. 이중계약을 걸기 위해 뭘 희생한 거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나?” “입 닥쳐!!” 헤웬이 비명을 내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이자드는 보일락말락하게 상체를 뒤로 물렸지만 발은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헤웬은 으르렁거리며 이자드에게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카라는 아무 생각없이 불쑥, 말했다. “이자드가 한 일이 아니야.” “카라.” 이자드는 카라를 부르며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카라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자드가 아니야. 내가 한 거였어. 난...난 몰랐어. 미안해. 화낼 줄은 몰랐어. 그저 헤웬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 일인데.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말 끝에 팽팽히 당겨진 침묵이 따라왔다. 카라의 커다란 검은 눈은 물끄러미 헤웬에게 고정 되어 있었다. 헤웬의 보기좋은 환한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다. 순식간에 몇십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맑은 갈색 눈동자는 흐릿하게 탁해졌고 보기좋던 입술 사이 로 침이 한 줄기 흘러내려 자국을 남겼다. 카라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사이 탁한 기운은 약 간이지만 걷치고, 헤웬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려는 사람처럼 조금씩 정신을 모았다. 그녀 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그러모으듯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문 채 허리를 폈다. 그러나 전체 적으로 남아있는 둔탁한 기운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진이 오른쪽 입끝을 치켜올리며 속삭였다. “어째서 이렇게 잠깐 사이에 기운이 완전히 다른 빛깔로 변할 수가 있지?” “헤웬.” 카라는 조그맣게 이름을 불렀다. “헤웬!” 그 이름을 계속 부름으로써 헤웬에게 일어난 변화가 다시 되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이건 뭔가 잘못된 일이다. 헤웬은 잠시 충격으로 이상해진 것이고,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카라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느꼈던, 헤델과 똑같이 밝고 붙임성있는, 그리고 자존심 강한 모습 그대로. 그러나 헤웬은 잠시 눈을 감고 무서운 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얼굴을 일 그러뜨렸다가, 눈을 뜨고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 카라는 둔중한 통증을 느꼈다. 헤웬이 누구를 향해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카라에게 한 말이었는지, 비델에게, 혹은 헤웬 자신에게 한 말이었는지도. 그 말만을 내뱉고 그녀는 휘청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다. 휘청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무너져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그 걸음은 여전히 카라가 아니라 이자드를 향하고 있었다. 원수인 비델도, 마녀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파괴해버 린 카라도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헤웬은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생명의 불꽃이 사그러들며 육체가 침몰해갔다. 천천히 무너지는 얼굴 한쪽으로 뒤틀린 입술 에서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마법사 따윈……” 그리고 헤웬은 무너져 내렸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공허한 눈으로 몸을 뒤틀고 누워서 간헐 적으로 몸을 떨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헤웬이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그저 껍데 기, 살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계속 헤웬을 지켜보고 있던 카라는 딱딱딱 두들기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무슨 소리일까 생각하자마자 답을 알 수 있었다.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카라는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힘있고 커다란 손이 카라의 어깨를 붙잡고 그 떨림을 가라앉혔다. 이자드였다. 그는 그저 카라를 잡고 진정시킬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자드가 만들어주었던 청금석 귀고 리 한 짝이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나머지 한쪽이 푸르기는 하지만 광택없이 흐린 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카라는 덜덜 떨면서 이자드의 어깨 너머로 아직 냉연히 서 있는 비델의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오그라들고 뒤틀린 헤웬의 몸뚱이를 내려다보는 비델의 얼굴에는 한 점의 연민도, 죄책감도 없었다. 비델은 석장을 내밀어 헤웬의 몸을 쿡쿡 찔러보고 입 속으로 뭔가 를 말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이것도 환영이었을까. 비델의 얼굴 위에 또 하나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카라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카라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한 것과 거의 동시 에 진이 칼을 빼들고 비스듬히 이자드의 등을 가로막고 섰다. 이자드가 고개를 돌려 비델, 혹은 비델에게 덧씌운 무엇인가를 응시했다. 카라는 이자드의 등이 긴장으로 바싹 굳어지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자드는 싸늘하게 상대방의 이름을 불렀다. “휘안……” 비델의 모습이 순식간에 녹아들더니 카라의 모습으로 변했다. 카라는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 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라의 모습을 띤 휘안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발을 들어 헤 웬의 몸뚱이를 걷어차며 쾌활하게 말했다. “이런 걸 두고 자업자득이라고 하지.” “자업자득이라고? 이제야 헤웬이 어떻게 그렇게 망가졌는지 알겠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자드의 노기띤 추궁에도 휘안은 즐거운 얼굴이었다. “말했듯이 자업자득이라니까. 아, 물론 꼬마도 한 몫 해주긴 했지.” 그는 카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미소했다. “그렇지. 네 힘은 그렇게 쓰는 거야, 패러노말 마스터.” “무……” 이자드가 튕겨오르듯 반응했지만, 이미 휘안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비델의 모습에서 카 라의 모습으로 변한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쓰레기처럼 바 닥에 널부러져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몇 번인가 숨을 헐떡이며 피거품을 흘리다가 식어가 는 헤웬의 시체 뿐이었다. 패러노말 마스터 - askalai 81 - 난다의 이야기, 네번째 난다의 이야기…네번째 “마하칼리는 누구지?” 이자드가 물었다. 점토판에 적혀있던 내용을 다 읽었는지, 얼굴에 조급해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조 용히 질문을 되풀이했다. “마하칼리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경계선 맨 끄트머리에 어떤 이들이 있었다고 하자. 무엇인가를 창조 할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이들, 누우스. 그렇다고 이들이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성별의 구분이 없었고, 의지와 실재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하나이면서도 여럿이 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완전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창조하는 것들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세상은 다른 이들에게 그렇듯 그들에게도 부 조리했다. 다만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덜 그랬던 것 뿐이다. 혹은, 더 부조리했던 걸까? 누우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많은 것이 태어났다. 새로 태어난 누우스의 자식, 혹은 누 우스 자신들은 전보다 조금 더 불완전했고 좀 더 많은 꿈을 꾸었다. 그렇게 해서 세계가 생 겼다. 첫번째 꿈에서 탄생한 이들 중에 어둠을 다스리는 족속이 있어 그 이름을 나라카라 했다. 나라카는 어느 순간부턴가 완전함을 꿈꾸었다. 아마 그들 중 하나가 불완전한 것 중에 불완 전한 것, 부조리의 극치로 변화해버린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저버렸고, 더 이상 그들이 아닌 것이 되었다. 그럴 수 있었다는 것부터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그들은 자신들이 꿈을 꿀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불완전한 존재만이 꿈을 꾸는 법이므로. 그들 에게는 꿈을 이룰 만한 힘이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존재, 어떤 부조리함도 없는 존재를 창조해냈다. 완전하고 무한한 어둠, 마하 칼라/마하 칼리. 그 존재는 탄생하자마자 그들을 무(無)로 되돌려놓았다. 완전함은 곧 무(無)이므로. 그것이 아무도 섬기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는 파멸의 여신/신에 대한 전설. “무(無)……라고?” 이자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신화로군. 그게 다인가?” “알려진 것은 오직 그것 뿐입니다.” 이자드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석상처럼 앉아있는 그의 등을 잠시 쳐다보다가 물러나왔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그러나 무의미한 짓 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니까. 내가, 나는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카라는 그렇게 말하는 이는 모두 인간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것, 내가 인간인가 아닌가를 의심하는 것, 그런 건 인간이 아니면 아 무도 하지 않는 짓이라고. 카라의 말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나는 슬픔에 목까지 잠겨서 침대에 누웠다. 지금도 가끔 한밤중에 깨어나 두려움에 몸을 웅크려 떨곤 한다. 그럴 때면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 아주 어렸을 때, 세상에서 진실로 존재하는 감정은 고통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모든 감 정은 고통이 덮어쓴 너울, 환상일 뿐이라고 믿었고 고통을 견디기 위해선 심장을 돌처럼 단 단하게 만들면 된다고 믿었다. 잘 되지 않을 때엔, 스스로에게 물었다. 용족으로 태어난 이 상 그들과 똑같이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그것조차 도 내가 불량품이기 때문인가? …하고. 조금 더 자랐을 때 그 믿음은 조금 달라졌다. 진실로 존재하는 감정은 고통만이 아니었다. 분노가 그 자리에, 더 크게 자리했다. 분노. 어머니에 대한. 동족에 대한. 세상에 대한. 나 자 신에 대한 분노. 분노는 힘이 되고, 자원이 되어 나를 키우고 단련시켰다. 실체를 가진 감정 은 고통과 분노, 둘 뿐이었다.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침대속에 파묻혀, 몸을 웅크려 떨며, 눈보라 속에서 시냇물 에 부딪쳐 반짝이는 햇살을 그리듯 카라를 생각한다. - 고통과 분노……그럴지도 모르겠네. 카라는 솟아오르는 모래 파도에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 오래 전, 어떤 감정들은 가짜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어. 사람들은 종종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웃거나 울었지. 처음에는 그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려 했었 고, 그 다음엔 그들을 흉내냈어. 흉내를 열심히 내다가 어느 순간부턴가 그 연기가 너무나 몸에 배어서, 미묘하게 잘 맞지 않는 그 감정들이 내것인 양 착각하기도 했지. 완전히 깨지 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그래, 그건 진짜 내 것이 아니었어. 흉내에 불과했지 ?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 때때로, 그 거짓 감정의 껍질 속까지도 찾아들어오는 것들이 있었어. 나는 기다렸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환하게 미소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 알, 나는 말이야. 사람들이 좋아. 너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 난 잘 모르겠는걸. - 왜 그런가 하면 너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지. 그 말에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카라는 내 표정을 보고 키득거리며 내 볼을 잡아늘렸다. - 삐지지 마. 예쁜 얼굴 망가지잖아. - 어린애 취급 좀 하지마. 그 이유가 뭔데? - …아름답고, 슬프니까.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다워. 그건 불완전한 것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지. 너도 그래, 알. 카라가 나를 부를 때면 늘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 왜 날 알이라고 부르지? 카라는 씩 웃었다. - 아무도 널 그렇게 부르지 않으니까. 그건 내가 오직 그녀에게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카라. 하지만 내가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야. 네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네가 인간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난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나도, 어설픈 흉내로 껍데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연습을 하고 있어야 되는 거지. 카라, 넌 날 두고 가지 않았어야 했어. 그녀의 손에 죽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데리고 가 주기까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떠나기 전에 나를 먼저 죽여주길 바랐다. 몇번이 나 되풀이되는 생각. 왜 나를 두고 가버린 걸까. 어쩌면 이자드의 기억을 되살리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는 기억해내지 않을 것이다. 껍질을 깨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하칼리에 대해, 이자드에게 말해주지 않은, 말해줄 수 없는 마지막 부분이 있었다. 완전하고 무한한 어둠, 마하 칼라/마하 칼리. 그 존재는 탄생하자마자 그들을 무(無)로 되돌려놓았다. 완전함은 곧 백지와 같은 것이므로.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이미 무(無)일 수 없는 법.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완전할 수 없는 법…… 10. 씨앗 (上) 키시의 왕이 시체로 발견된 다음날, 재상과 근위대장, 왕실 마법단장 세 사람의 논의는 다음 날 바로 정식 국무회의에서 확인되었다. 사실상 재상의 결정이 이의없이 통과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국무회의에 속해 있는 27명 가운데 공공연하게 재상에게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법단장 마슈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사실 전날부터 마슈가 보이고 있는 태도는 여러 사람에게 의구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이전부터 그에게 의심을 품고 있던 재상은, 의심을 하다 못해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결정사항은 간단했다. 후계자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왕자로 한다. 본래대로라면 왕자가 적령기에 이를 때 까지 왕제가 대행해야겠으나 그는 반역죄인이므로 왕후와 재상이 최고권을 대행한다. 키시 에 있는 귀족가 모두 이에 찬성하는 충성 맹세를 행하고 그 후에 다른 도시에 공표한다. 더 불어 왕제를 비롯한 반란자들을 하루 빨리 잡아 책임을 묻는다. 왕의 죽음의 배후를 쫓아야 한다는 사항은 맨 마지막에 있었다. 불상사의 책임을 물어 해임 혹은 처형된 것도 최말단의 몇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속전속결로 빨리 일을 처리했지만, 이미 왕이 죽었다는 소문은 마녀와 마법사들을 이용하여 발빠르게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아칸서스와 레투스, 시더는 방향을 정하기 위해 촉 각을 있는 한껏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그날 저녁에 재상의 사자를 맞아들였다. 가장 빨리 의사를 표한 것은 키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신전의 도시 아칸서스였다. 사자를 받아들인 다음날로 아칸서스 신전회는 키시의 결정을 승인했다. 그러나 적극적인 찬 성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미온적인 중립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왕위를 왕자가 계승하 는 것까지는 받아들였으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명했던 것이다. “왕제를 비롯한 반란자들을 하루 빨리 잡아 책임을 묻는다”는 대목이 문제였다. 아칸서스는 성지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중앙의 군대가 들어서서 사람들을 잡아가도록 할 수는 없다 - 만약 왕제를 비롯한 죄인들이 이 도시로 들어온다면 다른 행동 을 하지 못하게 연금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것이 아칸서스의 대표들이 돌려 말한 이야기 의 골자였다. 또한 충성 선언에 대해서도, 아칸서스는 키시의 왕조에 충성한다는 식의 교묘한 말장난을 벌였을 뿐 명확히 어느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미 왕자만이 아닌 왕후가 개 입되어 있었음을 이용해, 언제든 유리한 쪽으로 발을 뺄 수 있게 선언해둔 것이다. 재상은 그 답변이 이미 예상했던 대로인 듯, 아무런 난색도 표명 하지 않았다. 아칸서스가 소극적으로나마 재상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 만으로도 대세는 기 운 듯 보였으니까. 레투스와 시더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본래 사이가 좋지 않은 이 두 도시가 같은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오전, 시더의 입이 아직 열리지 않은 가운데 레투스에서 몇 가지 소문이 퍼져나갔 다. 이야기는 가지각색이었지만 누군가가 간밤에 레투스 시내에서 엄청난 소동을 벌여 시민 들이 무참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미치광이 마법사였다는 말도 있었고, 마법사 들끼리의 싸움이었다는 말, 시더에 내린 눈보라와 마찬가지의 천재지변이라는 말도 있었다. 왕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다느니, 재앙의 예고라느니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소동을 일으키 고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레투스에 숨어있던 왕자를 죽이려는 암살자였으며, 자신들은 이 런 무도한 일을 아무렇게나 저지르는 재상을 따를 수 없다는 소문 아닌 소문도 꽤 노골적으 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재상과 재상이 암살에 이용하고 있는 극악무도한 마녀들’을 비난 하며 목소리를 높혔다. 재상은 그들의 말을 전면 부인하며 말도 안되는 모함이라고 반박했 으나 한층 더 뒤숭숭해진 분위기를 어쩌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직 레투스는 공식적으로 왕 제를 지지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들도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날 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재상 카이닌 엘 그레드는 이제서야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있 었다. 그는 식어가고 있는 요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식사부터 하신 다음에 하죠.” 부드럽고 매끄러운 목소리. 카이닌은 숟가락을 들지 않고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긴 얘기가 아니라면 들은 다음에 먹겠네.” “아, 하긴.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군요. 제가 있으면 식욕이 떨어지시겠죠, 물론.” “식욕에야 문제가 없네만 소화가 제대로 될지는 의문이지.” 재상은 가시돋힌 말을 서슴치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마법사도 그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 다. 그는 불쾌해하는 대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할 수 없군요. 재상의 건강에 방해가 된대서야.” 재상은 혀 밑에 돌가루가 낀 것 같은 느낌에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식사 전에 들 어도 소화에 지장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 것이다. “시더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슈는 손톱을 들여다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재상은 딱딱하게 대답했 다. “리베르 문디가 회의 중이란 보고는 들었네. 하지만 하시피에는 이미 우리에게 호의적인 뜻을 내비쳤잖나. 지원할 방법을 모색 중이네.” “제 개인적인 정보로는...하시피에도 그다지 우세를 점하고 있지는 못하답니다. 하지만 그게 본 용건은 아니겠고...그런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무슨 생각?” “리베르 문디를 포기하는 편이 더 유리한 거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재상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계속해 보게.” “아시다시피 왕실 마법단만 해도 그들과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습니다. 리베르 문디는 너 무 오랫동안 일인자의 자리에 있어와서 타성에 젖어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쟁취하 기보다는 지켜야 할 입장입니다. 어차피 하시피에든 구루하든 누가 성공한다 해도 내부가 분열되어 있는 상태로는 우리에게 적극적인 도움은 주지 않겠죠. 이 기회에 그들을 약화시 키고 리베르 문디에 적대하는 세력을 끌어들이는 게 나을 수도 있단 얘깁니다.” 재상은 무서운 눈으로 마슈를 노려보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세력을?” “마녀들이 있지 않습니까?” “터무니없는!” “어째서요?” 마슈는 너무나 침착하게 반문했다. 재상은 갑작스럽게 양손으로 탁자를 붙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타성이라고! 쟁취!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자네의 언행은 너무나 똑같아...너무나 비슷해..." "누구와 말입니까?" 마슈는 건조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순간 재상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뚝 끊어졌다. 그의 눈은 의심과 불신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의심해왔다. 왕실마법단의 단장이라는 이름 으로 항상 그의 주변 어디쯤엔가 머물러, 미소짓고 있는 이 자를. 재상 카이닌 엘 그레드는 자신의 눈이 정확함을 믿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판단하는 데 실수를 저지른 적은 없었다. 그러나 - 이 자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혼란이 존재했다. 그는 마슈가 정식으로 왕제를 밀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하시피에 가 마슈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녀가 리베르 문디와 시더를 왕제 편으로 몰고 가리라고 예상했다. 다시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하시피에는 기존 세력을 모으 고 있다. 다시 이자는 그쪽을 버리자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마녀! 그의 행동은 때로는 왕 제를 돕는 것 같았다가 다음 순간에는 재상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종잡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가 나를 돕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난 믿을 수가 없어 - 그게 더 괴로운 일이로군. 재상은 하얗게 센 눈썹을 꿈틀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늙은 것인가? 정말로 그렇단 말인가? 그는 점 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단지 기질적으로 맞지 않을 뿐인가...? 카이닌 엘 그레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혼란을 반영하여 묘하게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며 마슈는 입술을 축였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달콤해져 있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를 잊지 마십시오.…..‘씨앗’만 있으면 더 이상 마녀와 마법사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레투스가 상인의 도시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이 도시를 계획적으로 정비하고 또 꾸려나 가는 것이 상인 연합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인들, 특히 연합의 중추를 구성하는 거상들 모두 가 이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지는 않다. 대규모 자본을 가지고 큰 돈을 벌어들이는 상인들 일수록 넓은 범위의 지역을 돌아다니게 마련이다. 거상들은 늘 바빴다. 그러나 상인 연합은 처음 세워진 순간부터 불가침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정 이 상의 자본과 고용인을 거느린 거상들은 의무적으로 돌아가며 연합과 레투스의 운영을 책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상인들로 하여금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샤미 르의 무덤과 그 왕국의 폐허 위에 이 도시의 기반을 닦고, 처음 상인학교를 세운 아케인 레 투스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이날 밤 레투스 남쪽 문 바깥에 위치한 유사의 별장에는 며칠 전 아칸서스에서 돌아온 유사 의 절친한 친구 시전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겉보기로는. 누군가 이 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해도 시전이나 유사의 고용인들 외에 다른 사람이 들어 가는 모습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별장 응접실에서는 명백히 회의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현재 상 인연합의 중추부를 구성하고 있는 일곱 명의 거상들 중 시전과 유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 은 심지어 레투스에 있지조차 않았는데 말이다. 비밀은 상인연합이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유지해온, 마녀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레투스 상인 들은 물론 마법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마녀들의, 이익보다는 혈족 모임 인 ‘포 히나’는 표면적으로 어느 정치 집단과도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 었다. 그러나 마녀들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정보전달 능력은 상인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또 마녀들에게도 자금은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유사의 별장에도 고용인을 가장하여 몇 명의 마녀가 들어와 있었고, 다른 도시에 있는 거상들이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도록 일하고 있었다. 유사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굵은 루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자들에게 오가는 열띤 논쟁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몇 달 전, 재상의 교묘한 술책에 넘어가 왕제가 반역자로 몰리기 전까지 레투스는 그의 가 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사실 왕제가 반역자로 몰려 쫓기고 있는 지금에도 레투스는 그에게 많은 자금과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절대적인 지원일 수는 없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어쩌면 그들이 왕제를 배반하는 일도 있을 수 있었다. 그 가능성은 지금에 와 서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레투스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었다. 왕이 어린 왕자를 남기고 급사하여, 왕제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는데도. 유사는 짜증스럽게 손가락에 낀 반지를 돌리며 헛기침을 몇 번 뱉았다. 다른 상인들이 그에 게 주의를 돌렸다. 유사는 일단 온화하게 말을 시작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있소. 이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회의를 유지할 수가 없다는 걸 상 기해 줬으면 좋겠군요.” 시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선에 탄 채 회의에 참석한 라스포기아를 이 자리에 연결하고 있는 마녀는 이미 몇 번이나 비틀거렸던 것이다. 상인들의 동의를 얻은 유사는 말을 이었다. “동의하시겠지만 문제가 무엇인지는 지금 새삼 토론할 여지가 없소이다. 우리 입장에는 변 화가 없소. 참으로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전원이 왕제를 지원하는 데 동의해 왔으며, 그것은 왕제의 - 정확히 말하자면 아크 왕자님의 포부가 우리와 일치하기 때문이오. ...문제는 재상이오. 재상의 강력한 지지만 없었다면 누구도 아직 젖도 못뗀 어린아이에게 왕 위를 넘기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오...“ “시간이 없다면서 오히려 더 시시콜콜히 말씀을 하시는군요.” 모가 난 뾰족한 목소리는 다름아닌 라스포기아였다. 그는 이 중에서는 조금 어린 축에 속해 서 그런지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유사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을 이었다. “그럼 바로 얘기하지. 지금 문제가 뭐요? 우리가 입장 표명을 꺼리는 이유가 뭐요? 다름아 니라 지금 우리가 왕제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공표했을 경우, 재상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오. 과연 그가 무리를 해서라도 군사력을 동원하여, 왕제의 가장 큰 지지세력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관망파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려 할 것인가...” “우리가 그리 쉽게 무너진답니까?” 다시 라스포기아. 시전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유사는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물론 그렇소. 그러나 타격은 받을 수 있지. 오히려 내전이 일어날 경우 레투스를 비롯한 여러 곳이 황폐해지는 게 문제요. 힘의 우위는 아직 저쪽에 있고, 우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 는다면 오히려 안정을 찾기가 더 힘들지.” “안정이 꼭 번영의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지나가듯 중얼거린 것이 무기상임을 확인하고 나서. “그러나 전쟁이란 언제나 무리수가 너무 많아요.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 단 말이오.” “이제까지 그 얘기들을 하고 있었잖소!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요, 유사?” 짜증스러운 반응에 유사는 미소지으며 팔을 벌렸다. “그래도 결정은 내려야 한다는 얘기요, 하도. 결정은 내려야지. 도박이란 위험부담을 안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 법이오. 그렇잖소?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기왕이면 확실히 이길 수 있는 판에 돈을 걸어야지...해서 말인데. “ 그는 잠시 망설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시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올 계획이 있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이러다간 난 듣지도 못하겠습니다.” “말을 끊지 말아주십시오, 라스포기아. 생각을 해봅시다. 만약 지금 왕제에게 무슨 일이 일 어난다면 여론이 어떻게 될까요?” 이제까지 뜸을 들이던 것에 비해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온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상인 들은 제각기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유사가 천천히 말했다. “만약 재상이, 적법한 절차도 없이 몰래 왕제를 해한다면...어떤 이들은 재상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거요. 어린 왕자를 배경으로 완전히 독재를 행하려 한다고 말이오. 더불어 재상은 명 분을 잃게 되오...아크 왕자는 반역을 일으킨 주동자가 아니니.” 순간 무서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만에 하도가 질문을 던졌다. “아크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오! 당연히 아크 왕자님은 상심하시겠지. 그러나 재상의 어리석음에 대한 증오는 한층 더 그분을 열정적으로 몰아갈 거요. 우리가 미리 귀띰을 해줄 필요도 있을지 모르지.” “뭐라고? 그랬다가 반대라도 하면...” 유사를 비롯한 몇 명이 츠츠 혀를 찼다. 하도가 이렇게 멍청한 작자일 줄은 미처 몰랐다. 이 런 일을 아크에게 설명하고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일일이 설명을 해주는 것은 안전하지 못 한 일이었다. 유사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게요? 하도, 물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막을 거요...최선을 다할 거란 말이오.” 하도를 제외한 다른 상인들은 이 대목에서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 다. 유사는 이제 나머지 이야기를 시전이 끌어가도록 내버려둔 채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다 른 상인들과 달랐다. 그가 아크에게 걸고 있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이상이었다 - 물론, 재산 도 따라온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이것도 다 왕자님을 위한 일이 아니겠나. 그래. 그자 말이 맞아...’ 그는 새삼 지난번에 접촉한, 아크의 측근이라는 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휘안은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두꺼운 나무 탁자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기분 이 유쾌해 보였다 - 그는 대개 유쾌해 보였지만. 그는 알 수 없는 멜로디까지 흥얼거리며 잔에 담긴 투명한 알콜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 때 허공이 흔들리더니 한 여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큰 키에, 검은 머리카락을 엉덩이까지 늘어뜨리고 검은 색 일색의 옷차림. 예외는 오직 눈동자와 같은 빛깔의 진한 녹색의 코트 뿐이었다. 그녀는 별로 많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모든 동작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 리고 있었다. 휘안은 놀라기는커녕 반가운 얼굴로 술병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 을 불렀다. “하시피에.” 하시피에는 대답 대신 팔짱을 끼고 서서 휘안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그의 친근한 미소 에 속지 않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죠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것 같아?” 휘안은 술병을 흔들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딴청 부리지 말아요.” 하시피에는 술병을 무시하고 냉랭하게 쏘았다. 휘안은 쿡쿡 웃었다. “처음에는 내게 아크 편을 들게 할 것 같더니, 다시 재상 편을 들어 리베르 문디를 분열시 키게 하고, 정작 당신은 뭘 하고 있는 거죠? 이젠 아크에게 흥미가 떨어진 건가요? 그래서 재상 편을 드는 건가요? 권력을 잡기엔 그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그런 식으로 기 다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뭘 생각하고 있는 거지?” 휘안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애초부터 네 관심사는 리베르 문디의 이익이나 이 나라의 왕이 누가 되고 실세가 누가 되 느냐 따위가 아닐 텐데. 왜 갑자기 그렇게 불안해 하는 건지 나야말로 궁금하군. 평소같으면 쓰지도 않을 - 마녀들이나 쓰는 술법이라며 경멸하던 투영법까지 써서 - 뭐가 문제야? 새 삼스럽게 이자드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생긴 건가?” 하시피에의 보기좋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말할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의심과 불안이 싹튼 이유가, '씨앗‘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 눈 앞에서 휘안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와 똑같은 얼굴 을 한 채 미소짓고 있었다. 미소......하시피에의 온 몸의 세포가 경고를 발했다. 이자는 위험 하다. 더할 나위없이.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공포가 하시피에를 움직였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런.” 그때 휘안이 다시 입을 열었고, 마법은 깨졌다 - 하시피에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순간적으 로 그녀를 얼어붙게 만든 공포는 사라져 버렸다. 뭔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리둥절한 느낌 만 남아있을 뿐. 그는 다시 술병을 흔들며 말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나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 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염려할 시간이 있으면 장로들이나 잘 구워삶으라구.” 하시피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휘안을 쳐다보았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의심과 불안의 흔적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 그대로, 서두르지 않으려 노력하 면서 돌아서서, 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휘안은 냉정하게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손바닥 들여 다보듯 알 수 있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웃었다. “잘 해보라구. 분열되면 분열될수록...혼란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재미있으니까.” 그는 다시 술병을 들며 키들거렸다. 술병 안에는 순도 높은 알콜이 반쯤 남아서 찰랑거리고 있었고, 잘 들여다보면 그 밑바닥에 무엇인가가 가라앉아 휘안이 술병을 움직일 때마다 흐 느적대고 있었다. 그 물체는 언뜻 보면 네 개의 다리가 달린 벌레처럼 보였다. 그리고 더 자 세히 들여다보면...돋보기를 놓고 들여다본다면, 그 벌레에 사람의 얼굴이 달려있는 것을 알 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휘안은 술병을 들어올려 눈가에 갖다대며 미소지었다. “자아, 왕제 전하. 시신을 어디에 안치해 드릴까요?” 무능한 왕의, 평이한 동생 - 반평생을 그 아들 아크의 아버지로만 알려졌던 왕제는 그렇게 죽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이틀 후였다. 시신의 모습도 발견된 장소도 참으로 미묘한 상황이 었다. 눈을 크게 뜨고 가슴에 칼을 맞은 채, 아칸서스시의 황금신전 한 구석에 구겨박힌 모 습으로, 아침기도를 나온 신관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모든 정황이 자객의 존재를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당연히, 의심의 초점은 재상이었다. 왕족에 대한 무례함과, 무엇보다도 그 일이 신전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격분하기는 했지만 아칸서스시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레투스에서 벌어진 사건이 알려지기 전까지 는. 왕제의 아들이며 현재 왕위계승권 2위인 아크 왕자가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절그덕, 절그덕, 절그덕. 톱니바퀴 어딘가에 무엇인가가 걸렸는지 시계추 소리가 신경을 자 극한다. 비델은 초연한 얼굴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앉아있는 방은 이국적으로 꾸민 유사의 접대실 중 하나였다. 그녀는 아크가 누워있는 방 바로 옆방에 안내 된지 몇시간째 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비델은 눈을 내리깔았다. 초조함은 없었다. - 지금쯤 아크의 다른 부하들은 유사가 아크와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반쯤 미쳐 있겠지만,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로서는 아크의 안위를 특별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 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아크 일행이 유사의 저택으로 옮겨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 바로 어제의 일 이다. 습격은 이동중에 있었다. 자객은 아크에게 칼을 꽂아넣자마자 바로 붙들렸고 혀를 깨 물기 전에 입을 틀어막혔다. 지금쯤 배후를 캐내기 위한 고문이 진행중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재상의 부하라는 사실 외에는. 그것은 사실 이었다. 그 사내는 재상이 레투스에 심어둔 첩자 중 한 사람이었다- 아크에게 달려들어 눈 에 띌 정도의 상처를 입히라는 명령만은 재상이 내린 것이 아니었지만. 그 명령은 이미 그 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명령을 내린 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커덕, 시계추소리를 누르고 큰소리를 내며 왼쪽 문이 열렸다. 비델은 석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거상 유사가 표정을 감춘 얼굴로 손가락에 낀 굵은 루비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 었다. “왕자님께서 보자고 하시네.” 어울리지 않는 하대에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않고 비델은 조용히 그 방으로 걸어들어갔 다. 아크는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은 채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옆에 유사의 전속 의사와 치료사들이 서 있었다. 비델이 치유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도 모른 척 한 것인지, 몰랐던 것인지. 때마침 아크가 입을 열었다. “유사는 당신의 힘을 몰랐던 모양이야. 내가 깨어나서 말하고서야 이마를 치더군.” 비델은 흘끗 유사를 돌아보고 아크의 상처에 머리를 숙였다. 긴 금발이 떨어져내렸다. 상처 는 충분히 치료할 만한 정도였다. 비델이 손을 들어 갖다대자 문득 아크가 말했다. “완전히 치료할 필요는 없어. 적당히 움직일 정도로만 해줘요.” “예?” “힘을 낭비할 필요 없잖아.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아크는 미소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말에 문쪽에 서있던 유사가 슬쩍 웃었다. 이런 유리한 증거를 말소해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분간은 상처를 과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전 면에 나설 작정이니 더더욱. 비델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크의 어깨에 손을 댔다. 은은하 게 흰 빛이 퍼졌다. 비델이 손을 떼자 아크는 가볍게 팔을 움직여보고는 통증에 인상 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색은 좋지 않았지만 눈은 기민하게 반짝였다. 아크는 유사 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를 습격한 자는 잡혔습니까?” “예. 아래에서 문초하고 있습니다.” “죽지 않도록 잘 감시하는 것, 잊지 마세요. 가능한 한 빨리 항의문을 준비해서 그자를 함 께 키시로 보냅니다. 내 부하들이 걱정하고 있을테니 불러주시구요. 호위는 그들에게 맡기면 충분해요.” “알겠습니다.” 유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으로 심부름꾼을 불렀다. 아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대들은 상당히 빠른 연락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아버지와 연락을 취해야겠습니다. 빌릴 수 있을까요?” 순간 방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유사는 난처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고는, 턱짓으로 의사들을 내보냈다. 아크는 잘생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죄송합니다. 회복하실 때까지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버님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유사는 흘끗 비델을 쳐다보았다. 아크도 비델을 돌아보았다. 비델은 짧은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돌아가셨어요. 벌써 나흘 전 일이라더군요.” “누...어떻게?” 누구에게 - 라고 물으려던 아크는 곧 질문을 바꿨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앞으로 쏠 린 몸을 지탱하고 있는 두 손끝이 새하얗게 되도록 이불을 꽉 쥐고 있었다. 그는 넋을 잃은 듯 비델과 유사를 쳐다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어...어떻게...” 뭔가 목에 걸린 듯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크는 잠시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사 납게 고개를 내저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부딪쳤다. 얼굴이 붉어졌다. 억지로 거세게 내지 르는 고함소리가 거칠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버지께서 그리 쉽게 당하셨을 리가 없어!” 분노와 슬픔, 고통을 억제하고 새어나오는, 꺽인 목소리. 평소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분노였다. 의외였다. 한동안 미친 듯 날뛰고 있는 아크의 모습과, 말릴 생각조차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델에게는 마치 한 편의 연극 장면처럼 보였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 따위를 비춘 적이 없는 소년이었다. 어쩌면 왕제는그에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그만큼 아 크가 보이는 감정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보일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심으로 가득찬 비델이 보기에도 아크의 분노는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유사는 아크가 마침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쳐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하자 그를 붙들었다. 다 른 사람들도 그것이 신호인 양 달려들었다. “그런 바보같은...” 마침내 아크는 분을 다 삭이지 못하고 부르르 떨며 고개를 쳐들었다. 은회색 눈동자에서 불 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댓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재상은 후회하게 될 거야.” 유사는 눈에 띄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크의 눈동자는 이미 거울처럼 냉혹한 빛 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 순간, 비델은 묘하게도 휘안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그 앤 바보가 아니야. 절대로 쉽게 이용당할 인물이 아니지. 오히려 이용당하는 척 하면서 남들을 이용할걸. 그래...권력을 잡고 나면 보복할 지도 모르지. 나에게도 말이야... 휘안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비델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크는 아버지의 죽음이나 자 신의 상처 모두 어떻게 해서 생긴 일인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서도 이용하고 있는지 도. 그러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다음날. 아칸서스시는 정식으로 키시에서 선왕의 유아를 방패삼아 전횡을 휘두르고 있는 재 상에 대한 반대성명을 내걸며 아크 왕자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다시 다음날, 레투스시와 상인연합은 아칸서스시의 성명을 지지하며 재상의 독재를 맹렬하 게 비난하고, 그가 왕제는 물론이요 혹 왕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 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같은 날 오후, 재상 카이닌 엘 그레드는 여느 때처럼 집무실 탁자 앞에 서류를 쌓아두고 앉 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평소와는 달리 쌓여있는 서류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미 3 대에 걸쳐 재상으로 봉사하면서 몇 년 전에 칠십세를 넘겼지만 언제나 강건하고 정정해 보 이기만 했던 그의 얼굴은 지금 생기가 남김없이 사라진 듯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침통한 분위기는 재상을 보좌하고 있는 비서관과 심부름꾼들에게까지 퍼져 있었다. 재상의 유능함과 공정함을 믿고 존경해 마지 않는 궁정 요리사는 누군가를 두들겨 패기라도 할 듯 거칠게 후라이팬을 휘두르며 불평을 토해내고 있었다. “민심이란 도무지 믿을 게 못된다니까! 어쩌면 그렇게 귀들이 얇을 수가 있어. 다들 맘편히 발뻗고 잘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인데 재상님을 비난할 수가 있느냔 말이야!!” 확실히 민심이란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인 법이다. 왕제의 죽음과 잇달아 대대적 으로 공표된 성명서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상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고 있었다. 많은 사람 들은 자신들이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는 한 언제나 재상이 재상 자리에 있었음을 상기하고는 늘 존재해온 문제들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기에 급급했다. 물론 그것은 항상 존재하기는 했 지만 터져나오지 못했던, 귀족들의 질투와 시기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재상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권력의 속성과 민심의 움직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정치가 였다. 그러나 지금, 발빠른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지금에 와서 그는 끝없는 피로 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마디진 손가락을 깍지껴 이마에 댄 채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 았다. 그는 눈을 내리감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젠 은퇴할 때가 됐어. 하지만 지금 은퇴한다면 자동으로 아크 왕자가 왕위에 오른다. 레투스의 상인들에게 둘러싸 여서. 오히려 전왕에 비하면 총명하고, 쉬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을 인재였지만, 그만큼 오히려 큰 실패를 자초할 수도 있었다. 뿐인가. 재상은 숨죽여 웃었다. 그는 지금 나라가 어 떻게 돌아갈지 걱정하면서 은퇴해서 마음편히 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권력투쟁의 패 자에게 주어질 수 있는 휴식은 영원한 안식 뿐이다. 저들은 필사적으로 그를 무너뜨리려 하 고 있었다.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왕제의 죽음, 나아가서는 왕의 죽음까지 뒤집어씌우려 하 고 있다. 그런데 아크 왕자가 즉위하도록 돕는다 해서 그를 살려 두겠는가. 너무 많은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재상은 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크...그 소년은 위 험하다.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이 일석 이조, 아니 일석 삼조의 죽음에 아크 왕자도 관여하고 있을까? 왕제가 비명횡사함으로써 그들은 일거에 불리한 입장을 뒤집었다. 더불어 다소 어리석고 우 유부단한 면이 많은 왕제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감을 일소했고, 아크 왕자의 정당성을 전면 에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재상을 비방할 거리가 생긴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설마, 아크 모르게 다른 이들이 그 일을 꾸밀 수 있었을까? 재상은 다른 생각을 마저 진행시키려 했지만 그 질문에서 오랫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 을 거듭할수록 의심은 더 굳어져갔다. 아크의 총명함, 자신의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기던 그 총명함과 야심이 노재상의 눈앞에서 확대되어가기만 했다. 그는 언제나 옛것에 대해 반대하 기만 했었다...똑똑하기는 하지만 그는 조급해...그래. 그는 위험하다. 이대로 그에게 나라를 맡길 수는 없어. 짙은 회색의 눈썹 아래로 재상의 눈동자가 다시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일단 결론을 내리자 그의 머리는 언제나처럼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펜을 들어올렸다. 아까까지 힘겹 게 쓰고 있던, 왕제의 죽음에 대한 정식 성명서 초안을 완전히 수정하고, 자신이 후퇴한 것 처럼 보이게 하려는 제스처로 왕제에게 걸려 있는 반역죄를 신왕의 이름으로 사했다. 장례 식 날짜를 결정하고, 아크 왕자를 초청하고, 단호한 어조로 왕제의 죽음을 강경하게 수사할 것이며 아칸서스와 레투스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보조를 취할 생각이 충분히 있음을 썼다. 왕제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는 공개적으로 재판을 받고 극형에 처해질 것임을 썼다. 더불 어 살짝 은퇴 의사까지 비추었다. 선왕의 유아, 아직 이름도 짓지 않은 그 어린아이의 대관 식과 더불어서. 그 모든 것을 세련된 어조로 써내려가면서 그는 내전의 준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히 어쩔 수 없다면...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말이다. 그럴 경우엔 시더를 반드시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는 마슈와, 그가 했던 제안을 떠올렸다. ‘씨앗’, 그것만 있으면 마법사들과 마녀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그는 홀로 의지를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악으로 악을 다스려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가 성명서를 끝내고 마슈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휘안은 느긋하게 재상이 자신을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끝을 마주대며 웃었다. 10. 씨앗 (下) 며칠간 계속되는 혼란의 와중에도 레투스에서는 구조와 재건 작업이 한창이었다. 기분좋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카라는 무릎을 당겨 턱을 고이며 눈 아래로 펼쳐진 시가지를 굽어보았다. 여관 지붕은 시 전체를 내려다볼 만큼 높은 전망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멀리 사방으로 열린 문 을 통해 드나드는 우차와 말, 달구지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시가는 조용했지만 여전히 활 기에 넘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왕이 죽었다 해도, 내전이 선포되었다 해도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생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것이.…..그 당연한 일에 그녀는 경이를 느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 올라앉아서...저 흐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내려다보며 그런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카라는 이제서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제대로 되짚어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의 평정을 찾은 것이다. 그녀는 창턱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며칠 동안 틀어박혀 있던 방 밖으로 나섰다. 헤웬의 시체를 그대로 남겨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급히 그 자리를 뜨자면 그 시체를 짊어 지고 나오거나, 장례를 치뤄줄 겨를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장례는 헤웬에게 어울리 지 않았다. 카라는 헤웬이 자유로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되었다. 추하고 구겨 진 육체의 껍질은 물거품처럼 스러져 바람에 실려갔다. 더 이상 이자드의 주문을 흉내낼 필요가 없다는 것, 어느 정도 의지대로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기쁘지가 않았다. 힘이 있다 해도, 그 힘으로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의 힘은 무엇하나 쓸만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 힘이라도 정말 원했던 사람, 헤웬 같은 사람이 지녔다면 좋았을 것을. 휘안의 말을 믿고 싶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을 작정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목소리와 모습이 앙금처 럼 눈과 귀에 밟혔다. 헤웬의 몸뚱이가 사라지고 난 뒤, 바닥에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이 있었다. 작은 유 리병이었다. 흔들어 보니 바닥쯤에 조금 남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그것을 보고 이자드는 미 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약물인가?” 카라는 병을 손에 든 채 이자드에게 의문어린 눈길을 던졌다. 그는 덤덤하게 설명했다. “마녀들은 가끔 자신의 능력 이상의 귀령과 계약을 하기 위해 특별한 약초나 약물을 사용 한다고 들었다. 그런 약물들 때문에 많은 마녀가 정신적으로 황폐해지지. 라니아나 헤웬 정 도의 마녀들은 그런 데 기대지 않았고 그래서 밝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흔한 일은 아니야.” “약물......그럼 이것, 때문에 저렇게……?” “아마도.” “하지만 약물이나 약초의 힘만으로 갑자기 그렇게 강해지고, 그렇게 뒤틀린다는 일이 가능 하던가요.” 아까 칼을 빼들었던 모습과 달리 또 한 걸음 물러서서 방관자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진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자드는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점이 이상한 것은 사실이야. 처음에는 이중계약 때문에 정신의 균형이 무너진 것으로 만 생각했지만……” “이중 계약, 이라면, 귀령이 둘이었던 것?” 카라는 게로 옆에 언뜻 보였던 작은 형체를 떠올리며 띄엄띄엄 물었다. “그래. 아마 비델을 찾기 위해서였겠지. 원래 계약하고 있던 귀령에게는 사람이나 물건을 찾는 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귀령이라고 해도 계약을 이중으로 건다는 것은 이미 생명을 포기하는 짓이야.” 이자드는 은연중에 여기에 카라의 잘못은 없다고, 유혹에 넘어간 헤웬의 자업자득이라고 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이나 이자드나 그 유리병 속에 든 물건이 일반적인 약물보다 훨씬 강하고 위험하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더불어 어떻게인지는 모르지만 휘안이 관여했을 거라 는 점도. 카라는 유리병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감정의 마비상태가 풀리면서 얼얼한 분노 의 열기가 몸을 감싼다. 휘안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가로막는 목적없는 분노. 카라 는 말없이 이자드에게 유리병을 넘겨주었다. 어쨌든 그렇게 어둠을 되밟아 여관으로 돌아와서 며칠 동안, 카라는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식사도 파이가 가져다주는 과일만 겨우 입에 댔을 뿐. 진과 이자드는 때가 되 면 나오겠거니 생각한 듯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루이는 종종 들여다보았는데, 그에게 들은 말로는 진과 이자드는 요새 그 약물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했다. 카라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루이가 이른 점심을 먹고 있다가 카라가 내려가자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가 여관 주인을 부르자 대머리 주인은 완전히 질렸 다는 얼굴로 루이를 쳐다보았다. “더……더 드시게?” “아니. 이번엔 저녀석이 먹을 거야.” 그 말에 주인은 약간 안심한 얼굴로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들어갔다. 카라가 탁자에 앉자 루이는 손을 뻗어 카라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좀 괜찮냐?” 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리번두리번 다른 이들을 찾았다. 루이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진은 맨날 어디 나가고 코빼기도 안보여.” “파이는?” “아, 그녀석?” 루이가 뒤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우당탕탕 소리가 나더니 파이가 한달음에 계단을 달 려내려와서 카라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이혜, 아이혜, 이제 괜찮아?” “응. 괜찮아. 상처는?” “다 나았다. 이것봐, 딱지 앉았어.” 파이는 헤헤거리며 상처를 자랑했다. 카라는 웃고 말았다. 보고 있던 루이가 아무렇지도 않 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널 아이혜라고 부르는 거래냐?” 카라는 파이에게 뻗었던 손을 멈칫하며 루이를 돌아보았다. 까만 눈에 망설이는 기색이 어 렸다. 루이는 왜 그러냐는 듯 멀뚱멀뚱 카라를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카라는 한참 망설이다 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저기 루이, 긴나라족 말인데……” ** 진은 머리맡을 더듬어 겨우 찾아낸 웃옷을 팔에 꿰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 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바닥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바지를 찾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졸린 듯 나른한 음성이 매달렸다. “벌써 가는 거야? 너무하네. 나말고 숨겨둔 연인이라도 있어?” 진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누워있던 여자는 상반신을 끌어 일 으키며 냉소적인 어투로 말했다. “보나마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라도 꼬여냈을 거야. 어리고 귀여운 데다가 나 같은 마녀하곤 전혀 다르겠지. 결국 남자들은 다 그런 애들한테 간다니까.” “비약하지 말아요 - 에린. 그런 자기 비하는 당신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아.” 진은 이제 바지를 입고 신발을 찾으면서 말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는 마침내 신발을 찾아 내고는 몸을 돌려 에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워요. 외모만이 아니라...”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에린을 응시하며 천천히 그녀의 주위로 퍼져 있는 따스한 주홍빛을 어 루만졌다 - 물론, 형태상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진 셈이었다. 사실 에린은 절세 미 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여자였다. 약간 치켜올라간 코나 도톰한 입술이 귀엽기는 하지만. 그 러나 그녀는 강력한 마녀였고, 그만큼 강렬한 생명빛을 소유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강한 빛 깔. 진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뒤틀리지 않은 미소를. 물론 그는 자 신이 그럴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효과 또한 무서울 정도로 객관적 으로 가늠하고 있었고. 그는 다시 한 번 몸을 기울여 에린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짧은 입맞춤을 덧붙인 다 음 망토를 집어들고, 문가에서 가르릉거리고 있는 닭과 용을 섞어놓은 듯한 모양의 귀령을 곁눈질하며 작별 인사를 던졌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 잠시 뒤돌아보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쓰지 말아요. 절대로.” 에린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그 말에 눈을 치켜떴 다. 그러나 진의 얼굴이 진지해 보이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문을 닫고 얼굴을 약간 찡그린 채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 정도 실마리를 잡는 데 사흘이나 걸리다니. 지난 사흘간 이자드가 보여준 - “자네 그정 도밖에 안됐었나?” 식의 태도는 꽤 튼튼한 신경줄을 지니고 있는 진에게도 상당히 껄끄러 운 것이었다. 그는 짧은 한숨과 더불어, 다소 야비해 보이는 비틀린 미소를 회복했다. 그가 추적해 올라가기 전에 더 많은 마녀들이 그 물건을 접할 것이다. 예감이 아니라 확신 이었다. 힘의 유혹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는 본래 이곳 사람이 아니었기에, 마녀들에 대한 편견은 없었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오랫동안 그림자에서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강력한 힘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소의 위험을 무시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 이 약물은 ‘다 소의 위험’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녀들은 헤웬이 극단적인 경우였다고, 특이한 케이 스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리석게도! 지금 희망은 풀려나오는 약물의 양이 대단히 적 어서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 뿐이었다. 걸어가면서 생각은 다른 곳으로 건너뛰었다. 그는 사실 현재의 불안한 정세가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왕제의 아들, 아크가 어떤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며 어떤 주장을 펼치는지도 대충은 알고 있다. 그 소년이 왕이 되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마저 있었다. 하지만 휘안 알 바르카, 놈이 그 뒤에 있는 거라면…… 그는 문득 자신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멜카르트...멜카르트...” 그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후에, 대승정을 죽이고 길을 속이면서까 지 겨우 떠나오고서도……자유를 얻었으면서도, 이제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마음 일부는 아직도 그 황야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걸까. ** 루이는 넋이 나간 얼굴로 붉은 날개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찾아헤맸던 긴나라족의 생존자인 데, 정작 눈앞에 나타나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쁘다기보다는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카라는 루이의 그런 표정을 못본척 하며 파이의 구부러진 날개를 쓰다듬었다. “날개를 보기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어. 아니, 날개를 보고 나서도 며칠 동안은……봐, 루 이. 긴나라족 맞는 거지?” 루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카라는 입술을 깨물고 파이의 얼굴을 감싸쥐어, 자신을 보게 하고 물었다. “파이, 아이혜가 누구니?” 파이는 방긋 웃더니 카라를 가리켰다. “나 말고, 아이혜가 누구냐고. 어떤 사람?” 파이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카라는 다시 물었다. “아이혜라는 사람이 나랑 똑같이 생겼어?” 파이는 자신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아이혜는 이렇게 생겼다고 했어.” “누가?” 파이는 눈만 또록또록 굴렸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파이는 카라의 질문을 거의 이해하지 못 했다. 되풀이해서 아이혜는 카라처럼 생긴 사람이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카라는 같은 질문 을 조금씩 바꿔가며 끈질기게 묻다가 결국 포기하고, 도움을 청하듯 루이를 돌아보았다. 하 지만 루이는 아직도 넋이 나간 듯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카라는 결국 그 부 분을 포기하고 물었다. “파이, 몇 살인지 기억해?” “응……” 파이가 어물어물 말을 흐리자 카라는 질문을 고쳐서 물었다. “겨울을 몇 번 봤는지 기억하니?” “응! 스무 번!” - 창성이 멸망하기 얼마 전에 태어난 아이로군. 이자드가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카라는 차분하게 문답을 계속했다. 조각 조각 정보를 모 아들이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카라가 주로 질문을 하고, 이자드가 간간히 그 내용을 해 석했다. 끈질기게 매달렸어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너무 어렸을 때라서 그런지, 아니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파이는 창성의 멸망에 대해 아 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하지만 카라와 이자드가 녹초가 되어 포기하려 했을 때, 마침내 한 가닥 실마리가 잡혔다. ‘파류나’라는 이름에 파이가 반응을 보인 것이다. 파이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손짓 발짓을 하며 말했다. “응, 응. 예쁜 알이었어.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까만 알. 깨어나면 까만 눈에 까만 날개가 돋을 거랬어.” 이자드와 카라가 말뜻을 알아들으려고 애쓰는 사이 파이는 카라에게 매달리며 말을 잇고 있 었다. “근데 아이혜는 날개가 없나봐.” 카라도 이자드도 잠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카라는 잠시 후에 당혹해 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열 일곱 살이야. 나이가 맞지 않아……”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때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루이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내가 그랬잖아. 실제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걸 수도 있어. 성장이 더디다거나 뭐 그런 거겠지. 정상적인 긴나라족과 다르게 태어났으리라는 정도는 예상했잖아. 그 집에 맡겨진 경 위도 그렇고, 긴나라족 맞다니까! 파류나 왕의 아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루이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카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이의를 제기 한 것은 이자드였다. - 다른 경우도 아니고 파류나 왕의 아이라면, 불가능한 얘기야. “아니, 왜?” - 태어난 지 2년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은 알은 가망이 없다고 했지. 잊었나? 루이는 말문이 막혔다가 더듬거리며 다시 항의했다. “하지만…다른 부분도 이례적이잖아. 시간이 지나서 깨어날 수도 있는 거 아냐?” - 태어난 지 2년이 지나서 깨어나, 다시 3년이 지나서 누군지도 모를 녀석의 손에 들려서 북영지의 영주에게 맡겨지고, 성장이 더뎌서 모습은 한참 어려 보이는 데다가, 날개도 없고, 성별도 없고, 눈동자까지 인간과 같다고? 답답하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이는 “하지만…”이라고 말하면서 카라를 돌아보고, 다시 파이를 쳐다보고, 다시 “하지만……”이라고 말한 다음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카라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져 있었다.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이자드 혼자서 뭔가 생각에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 그렇군……뭔가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그 알이 원래 파이에게 있었던 거라면, 그 알 을 가져간 자, 파이에게 아이혜가 카라처럼 생겼다고 말해준 자가 있어야 말이 되지. 그 자 가 카라를 맡긴 긴나라족과 같은 자라면…… 하지만 이자드도 그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런 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그 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 사람 다 그 점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왜? 날지 못하는 긴나라족, 물 속에서 살지 못하던 트리탄족이라는 두 가지 우연이 겹쳐지 면서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이자드에게는 루이에게조차 말해주지 않은 정보가 하나 있었다. 패러노말 마스터에 대한 것…… 이자드는 패러노말 마스터에 대해 뭔가 아는 듯 말하던 휘안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휘안이 연관되어 있을 경우에는 무 슨 일이든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알아냈던 것들, 알고 있는 것들이 어지러이 얽힌 다. 그 덤불 너머에는 뭔가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 알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끌려가게 되는 어떤 것.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카라의 까만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향보고 있었다. 루이의 눈을 통해 서 보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 사이 해가 진 것이다. 카라는 조용히 물었다. “이자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있다고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카라는 그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 았다. 그저 희미하게 웃고는, 일어서서 문 밖으로 걸어나갔을 뿐. 파이가 그 뒤를 좇아갔다. 이자드는 카라가 등을 보이고 나가서 문을 닫을 때까지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는 이전 에 구해냈던 아이들, 생명을 구해주고 어딘가에 맡기기 전까지 데리고 다니던 그 아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순간에 카라는 패러노말 마스터일 가능성이 높은 아이, 긴나라족과 관 계있는 아이, 전보다 훨씬 책임감을 느끼는 아이가 아니라 그저 수많은 아이들, 수많은 사람 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아이. 그는 카라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 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문이 열리 고 진이 들어왔을 때까지. 진은 들어오자마자 램프부터 켜더니 이자드를 보면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분위기가 침침하네요. 무슨 일인지 저도 좀 알면 안되는 겁니까?” 이자드는 대답없이 검은 우물 같은 눈으로 진을 쳐다볼 뿐이었다. 진은 손을 들어올렸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알아온 이야기나 하죠.” 그는 이자드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작은 유리병을 건드리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마녀들 사이에서는 이걸 ‘씨앗’이라고 부르더군요.” “씨앗?” “원로급 마녀에게 작은 공 모양의 유리구가 하나 있고, 다른 마녀들은 그걸 희석해서 물약 으로 만든 병을 받았답니다. 이것도 그런 식으로 만든 거겠죠. 마시는 물이나 음식에 타기도 하고, 눈이나 귀에 직접 넣기도 한다는군요. 효력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아요. 마녀들 역시 자세히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귀령을 제어하는 능력이 강해진다, 힘이 강해진다는 식 의 흐릿한 얘기가 대부분이고 가끔은 계약 없이 힘을 쓸 수 있다더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더 군요. 아무도 서로에게 권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권하지 않기 때문에?” “효능이 확실하니까, 다른 자들까지 강해지길 원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막지는 않아도 굳 이 권할 이유가 없잖아요? 다 함께 강해지는 것이 마녀들의 모토라고 해도.” 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인간의 속성이라는 게 그런 거죠. 현재 이게 엄청난 속도로 퍼지지 않는 건 순전히 처음 에 공을 받은 원로 마녀가 그리 많은 이들에게 나눠주지 않았다는 것 뿐이에요.” 진은 삐걱 소리를 내며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처음 그 마녀에게 이 공을 준 놈은 예전부터 마녀들에게 이런 저런 약을 팔고 그들의 능 력을 사던 상인들 쪽인 것 같은데, 추측하기로는 라스포기아라는 젊은 거상이 유력하답니다. 아크 왕자를 지지하는 상인들 중에서도 꽤 중요한 위치에 있죠.”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이자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자드는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사람 처럼 한참동안 가만히 있다가, 느릿느릿 말했다. “샤미르의 유산……그 세번째가 약물이었다면.” “흐음.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하지만 그게 다일까?” 이자드는 의혹어린 시선을 유리병에 던지며 중얼거렸다. 휘안은 왜 그 이름을 ‘씨앗’이라고 붙인 걸까. ** 은빛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휘젓던 바람이 딱 멈춘 것은 난다가 붉은 바위를 지나친 순간이 었다. 그는 공기의 느낌이 완연히 달라진 것을 감지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붉은 바위를 제외하면 문도, 파수꾼도 없다. 용족의 하늘 높 은 줄 모르는 오만함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어떤 침입자도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난다의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꽃잎처럼 진한 붉은빛을 띠며 벌어졌다. 이 공기만으로 이 미 느낄 수 있다. 생각만 해도 토악질이 날 것 같은 자가 여기에 있다. 공기의 정령들조차 얼씬도 못하게 쫓겨나고 없는 이 황량한 곳에. 그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눈을 감 았다. 냉정하자. 적어도 그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조용히, 냉정하게 움직이는 거다. 그는 작은 입술에 피가 맺힐 때까지 꾹 깨물고 있다가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앞을 보았다. 힘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여기서 함부로 마법을 쓸 수는 없다. 그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아 껴 둬야지. 최대한. 그러니 걷는 수밖에 없었다. 난다는 붉은 황무지 우 카흐마 - 용의 대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11. 절반의 진실 (1) 아크 왕자가 재상에게 격한 비난을 퍼부으며 전면에 나서고, 그를 지지하는 레투스 시는 재 상이 당장 왕권유린을 멈추고, 정당한 왕위 계승자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내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아칸서스는 레투스보다는 약간 미온적인 태도로 지지 의사 를 밝혔다. 키시는, 재상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더는 리베르 문디가 내분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지만 일단은 키시의 편에 설 것 같아 보였다. 이제까지 왕위 계승분쟁은 대개 네 도시가 3대 1로 대립하는 구도로 해결되곤 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돌아가지가 않았고, 진 짜 내전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었다. 그러나 가을걷이가 코앞이었다. 추수라도 끝내기 전에는 양쪽 다 군을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재상도, 아크 왕자도 그렇게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들 했다. 때문에 레투스 시에서 좀 더 안전해보이는 아칸서스를 향해 대피해 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 는 와중에도, 상인들은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재건할 사람들이 떠나자 도시 한가 운데에는 상흔이 그대로 남았다. 원래 그곳에 둥지를 틀었던 윤락가는 다른 사람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우고, 왕자의 군대를 상대로 영업을 재개했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빨리 적응하고 자리를 잡았다. 카라와 이자드, 진도 아직 레투스에 남아 있었다. 온갖 소문이 거리를 떠돌았다. 대부분 뒤숭숭한 소식, 출처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이야기들 이었다. 물론 그 중에 진실은 섞여 있었다. 진은 진실을 고를 줄 알았고, 자기 나름의 출처 를 짚어 정확하다 싶은 정보만을 날라왔다. 일주일 가량이 지나도록 카라와 이자드는 미묘 한 긴장상태에 있었다. 루이와 카라도 며칠 동안은 서로를 서먹하게 대했지만 그 쪽 문제는 오래지 않아 해결되었다. 루이의 문제는 분명한 것이었고, 그는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 고 처음 이유가 어쨌든 카라는 긴나라족과 관계없이 카라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오면 사과 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자드와 카라가 느끼는 불편함은 좀 더 설명하기 복잡한 것이었고, 그래서 냉전 아닌 냉전이 계속되었다. 진은 졸지에 중재자 같은 꼴이 되어 양쪽을 왔다갔다 하며 이야기를 전했다. 그 이야기 중에는 결국 북영지로의 비행선 운항이 중지되고, 북영지 자체를 포기한다는 선 언이 내려졌다는 것, 그에 반발한 북영지 출신의 군인이 재상 측에서 이탈하여 휘하 부대를 이끌고 왕자 쪽에 섰다는 것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데인이었다. 카라는 조금 창백해진 얼 굴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카데인, 그녀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그리고 아마 카라에 대해 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 둘째 오빠였다. 카라에게 화살을 쏘아맞혔던 그 남자였 다. 또 며칠이 지나 전해진 이야기 중에는 아칸서스에서 리베르 문디에 속하지 않는 마법사들 중에 한 두 명이 미쳐 날뛰며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고 파괴행위를 했다는 말도 드문드문 섞 여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재상의 사주를 받아서 한 짓이라느니, 오히려 재상에 대한 적대감 을 높이기 위해 아크 왕자가 한 짓이라느니 별 말이 많았고 마녀들이, 마침내는 마법사와 마녀들이 왕을 죽이고 아예 자기네들의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는 이야기까지 튀어나왔다. 이 제와서 샤미르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소문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 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투스를 떠났다. 아칸서스 쪽에서 오는 소식이 점점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카라와 이자드/루이는 그쪽에 있 는 친구들을 걱정해야 했다. 어차피 내전이 닥치기 전에 레투스를 떠날 작정이기도 했고, 그 나마 망설이던 걸음을 확실히 떨치게 한 사건도 일어났다. 레투스 서북쪽 외곽에 자리한 작은 여관을 찾아든 소년은 척 보아도 꽤 높은 신분임에 분명 했고, 호위병을 몇 명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관 주인은 소년이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 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소년 뒤에 서 있는 험상궂은 면면에 연신 눈길을 던지며 굽실굽실 허리를 조아렸다. “마법사라구요? 글쎄올습니다. 이층에 그런 사람이 묵고 있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하도 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니까요. 오늘도 점심때쯤 나가는 것 같던데 - 아뇨, 검은 머리는 아니었고, 금발이었죠. 예? 두 사람 중 누굴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한 사 람은 칼을 차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은 아니겠죠. 밝은… 은빛에 가까운 금발에, 카드를 같이 쳤는데 장난기가 심한 사람이었어요.” “금발?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른데.” 소년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찾는 사람은 키가 크고, 검은 눈에 검은 머리가 짧아.” “예에...? 아, 그 사람요? 아니, 그 사람이 마법사란 말입니까?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찮긴 했지만...” 여관주인은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혀를 몇 번 차더니 다시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몇주나 묵었는데 그 동안에도 그 사람은 자주 본 적이 없어요. 별로 뭘 먹 는 것 같지도 않고. 밤에 언제 어디로 들어오는지 보질 못했는데 새벽에 불쑥 내려오기도 했죠...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분명 창문이나 지붕으로 드나들었을 게야.” 소년은 인내심을 잃고 물었다. “그래서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주인은 흘끔 소년의 눈치를 살피더니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야 모를 일이지요." 소년은 발끈 화가 난 것 같았다가, 그가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성질을 누그러뜨 렸다. “그럼 그들과 함께 있는 소녀는?” “소-녀-요?” 여관 주인은 말을 길게 잡아늘였다. 그는 뭔가 탐색하듯 소년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에, 그 빨간 머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있을 겁니다.” 소년은 다시 한 번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그가 찾고 있는 것이 빨간 머리가 아니라는 얘기 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위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올라가 봐도 되겠지?” “그러믄요......” 반색을 하던 그는, 뒤미처 혹시 그 손님들이 돌아와서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는지 다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미 소년은 군인들을 대동한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 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위층을 노려보았다. 일단은 저 군인들을 이 자리 에서 치우는 게 우선이니까...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의 기대를 배반하고 소년이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 있도록. 카라와 이야기하는 데 이렇게 갈 필요는 없어.” 여관 주인은, 그 작자들 때문에 썰물빠지듯 도망치는 손님들을 노려보며 다시 위층을 노려 보았다. 숙박료와 식사대를 듬뿍 지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 말썽많은 손님들이다. 소년이 막 계단을 올라 이층 복도에 멈춰섰을 때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그에 게 달려들었다. “왁! 파이!!” 그는 얼떨결에 와락 달려든 붉은 머리의 아이를 받아 안으며 넘어질 뻔한 몸을 겨우 바로잡 았다. 그는 파이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전보다 버릇이 더 나빠진 것 같구나, 너.” “그거 설마 나 때문이란 얘긴 아니겠지?” 카라는 당혹감과 반가움을 반씩 섞어놓은 듯한 얼굴로 아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그 소년은 아크였다.…..놀랍게도, 이렇게 당당하게 찾아온 것이다. 지난번에 소재 파악 을 피하려고 카라를 잡아두던 그 부하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것도 다 왕이 죽었기 때문 인가? 복잡한 상념이 솟아올랐지만 일단 카라는 파이가 기뻐하는 모습에 웃음을 지을 수밖 에 없었다. 아크는 겨우 파이를 떼어내고 카라에게 미소를 던졌다. 은회색 눈동자는 예전에 만났을 때처럼 부드러웠다. 물론, 그 눈이 언제든 믿을 수 없이 차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지만. 카라는 왕자라는 사실을 못들은 걸로 치기로 작정하고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파이가 걱정돼서 온 거야?” “아니. 첫번째 용건이 빗나간 이상 이것도 나쁘지 않은 덤이지만. 파이는 건강한 것 같구 나.” “응.”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시 아크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년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씩 웃었다. “솔직히 말하지. 난 너의 보호자를 만나러 왔다. 이자드라는 마법사 말이야. 맞지?” 카라는 보호자라는 말에 잠시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다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 다. “이자드를? 왜? 그는 지금 없는데.” “알아.” 아크는 마지막 말에만 대답하고 난처한 듯 팔을 벌렸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날 쫓아낼 생각은 아니겠지?” 카라는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에게는 빚이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꽤 있 기는 했지만 그다지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들어와서 앉으라는 말을 하기 전 에 계단에서 서두르는 듯한 무거운 발소리가 울렸다. 아크는 늘상 등을 조심하는 사람처럼 잽싸게 몸을 돌려, 막 이층 바닥에 발을 디딘 키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카라는 가만히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이자드는 분명 화를 낼 거다. 아니면 코웃음을 치거 나. “당신이 이자드로군.” 아크는 이자드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감탄한 듯 말했다. 이자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카라는 그를 이렇게만 소개했다. “아크. 파이 때문에 만나게 됐던.” 다시 나무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백금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이층으로 올라 서며 투덜거렸다. “이자드, 난 당신 호위병이 아니란 말입니다……벌써 빚은 다 갚은 것 같은데요.” 진이었다. 그는 아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건 누구신가?” 카라는 다시 성의없는 소개를 되풀이했다. “아크. 파이 때문에 만났던.” “아하, 아하.” 진은 손가락을 딱 울리며 아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유쾌한 듯 말했다. “왕자님이시군. 저런...그럼 저 덩치들은 당신 경호원들이었습니까? 미안하게 됐군요. 뼈는 부러뜨리지 않았으니 정신차리면 멀쩡할 겁니다.” 아크는 순간 당혹한 얼굴로 한 걸음 난간 쪽에 다가섰다. 그가 카라와 말을 나누는 동안, 아 래층에서 싸우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반신반의하며 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칼 조차 차고 있지 않았다. 한 손에 꽤 무거워보이는 지팡이를 들고 있을 뿐. 이자드는 아크의 당혹한 표정을 보고 냉담하게 말했다. “휘안이 이 인물에 대해서는 얘기해 주지 않던가? 아니면 최근에 휘안을 만난 적이 없는 건가?” 뒤미처 그는 아크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물었다. “그런데 내게 무슨 용건이지?” 아크의 시선이 다시 이자드에게 돌아왔다. 얼음장 같은 이자드의 시선에도 소년은 아직 물 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위엄을 차리며 딱딱하게 말했다. “방으로 들어가서 얘기해도 되겠소?” 카라는 순간 이자드가 아크를 그대로 날려버리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그는 희미하게 냉소를 띄웠을 뿐, 방문을 열고 앞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카라는 방관자의 입장으로 구석에 앉은 채 방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정신을 회복하고 위층으로 따라 올라와 방안까지 들어온 무표정한 군인들 세 명은 뒷짐을 지고 아크 뒤에 부동자세로 서서, 때때로 진에게 무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크는 이자드 앞에 앉아 있었다. 이자드가 등장한 순간부터 그의 주의는 모두 그에게 쏠려 있는 것 같았다. 아크가 방안에 들어와, 긴장감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로 제의를 던진 지 십 분 이상이 지났 다. 제의는 역시나 카라가 예상한 대로의 그것이었다. 정확하게 옮기자면, “나를 도와 이 나라 를 바로 세워보지 않겠습니까?”였다. 그 말을 들은 후 이자드는 이미 십분째 한마디도 않 고 아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자드의 눈길은 더할 나위없이 차가웠다. 그는 아크를 충분히 정중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정중함이 조롱기를 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찬찬히 쳐다보고 있는 동안 아크의 얼굴은 점점 불쾌감으로 굳어졌고, 노기로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자드는 입을 열었다.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내게 이런 제의를 하자는 생각은 직접 한 건가?” “그렇소.” 이자드는 소리없이 웃었다. “후원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는 내가 같은 편이 되길 원치 않을 텐데.” “후원자는 어디까지나 후원자일 뿐이지. 결정은 내가 하는 거요. 당신은 충분히 강한 마법 사니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판단하고 결정했어요. 휘안이 당신에게 어떤 감정 을 지니고 있는지는 몰라도 더 큰 일을 위해서라면 접어둘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어색함이 느껴지는 딱딱한 말투. 힘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 이자드는 엷게 웃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은 아크가 알고 있는 마법사, 마슈, 휘안 알 바르카과 비슷해 보였다. 그는 통렬하게 내뱉았다. “자기가 어린애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애다운 행동도 없지.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 하는 것만큼 머저리같은 믿음도 없고.” 순간 아크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셨다. 카라는 그가 발끝을 곧추세우는 것을 보며 눈을 굴 렸다. 금방이라도 이자드에게 달려들 것 같은 태세였다. 아크의 뒤에 선 군인들이 일제히 칼 자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자드는 그들에게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다행히 소년은 입술 을 꽉 깨물며 분노를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의도로 나를 모욕하는지 모르겠군. 나를 시험해 보는 건가? 아니면 휘안과 당신 사 이의 원한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과 더 큰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의 인물이라면 나도 필요없어. 내가 당신을 과대평가했을지도 모르겠군.” “하.” 이자드는 아크의 창백해진 얼굴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난 원래 개인적인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이 비천한 마법사를 높이 평가하셨다니 영광이로군. 충고하겠는데...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믿음만 버리면 제법 괜찮은 군주가 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리고 그는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휘안이 이 일을 알면 꽤나 재미있어 하겠군.” 아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구제 불능의 바보는 아니었다. 적어도 이자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크가 자신의 말 속에 담긴 뭔가를 포착해내고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글쎄.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휘안은 옛날부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더 좋아했다. 결국 아크는 자존심의 일부를 굽히기로 마음먹은 듯, 물었다. “무슨 뜻이오?” “군주로서의 자질 중에 가장 중요한 건 판단력이지. 특히 사람에 대한. 섣불리 자신이 본 것 그대로를 믿지 말라 - 그게 내 충고요.” 아크는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은회색 눈동자가 냉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자드는 그 시선을 받아넘기며 어떤 반응이 나올까 생각했다. 휘안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한다고 받아 들일까? 아니면 있는 그대로? 예상 외로 아크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어른처럼 말했다. “충고, 고맙게 받겠소.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요. 아직 포기했다고는 생각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자드는 대답 대신 눈썹만 치켜올렸다. 소년과 경호원들이 나가고 나자 딴청을 부리고 있던 진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소년의 자존심을 긁는 건 그리 좋은 일이 못돼요. 평생 원수가 되는 수도 있다구요.” 반쯤 장난기가 어린 진의 말에 이자드는 어깨만 으쓱해보일 뿐이었다. 카라가 무릎 위에 머 리를 얹은 파이를 쓰다듬어주며 심상하게 말했다. “조금 놀랐는걸요.” 이자드는 잠시 카라를 쳐다보다가 반문했다. “뭐가 말이냐?” “처음엔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사실은 아크가 마음에 든 거죠?” 이자드는 재미있다는 듯 다시 되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화같은 건 아예 안하는 사람이 뭔가 가르쳐주려고 하는 걸 로 봐서는.” “내가 그래 보였나?” 전과 다름없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한 대화. 두 사람 다 은연중에 냉 전은 이정도로 끝내자는 데 동의하고 있는 듯한 대화였다. 어쨌든 그들은 아크의 방문을 계기로 레투스를 떠났다. 목적지는 아칸서스였다. 그러나 그렇 게 길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이자드는 마법을 써서 아칸서스로 바로 가자는 의견에 반대했고,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카라는 혹시나 하 고 이리 저리 생각을 해 보았지만 헤웬이 죽었을 때 같은 집중력, 그 때의 느낌을 되살려내 기가 쉽지 않았다. 아직 힘을 자유자재로 쓰기는 힘들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직선거 리로 숲을 가로질렀다. ** 레투스에서 아칸서스까지는 직선거리로 말을 달리면 사흘이지만, 도보로 갈 경우에는 기본 이 30일, 그것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는 여정이다. 여관은 말을 타고 꼬박 하 루를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걸어서 같은 길을 가려면 며칠씩 노숙을 하게 되는데, 그러자면 야생동물이나 산적의 습격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빙 돌아서 가다 보면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보통의 여행자나 행상인들의 이야기이고, 한다 하 는 모험가나 용병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직선길로 갔다. 그런 이들 중 또 절반이상은 자만심 때문에 산적 손에 목숨을 잃게 마련. 제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 몇십명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여럿이 무 리를 지어 숲을 통과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니, 지금 길 옆에 주저앉아 빵을 뜯으며 한 가로이 낮에 뜬 달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여행자라고밖에 할 수 없 었다. 손질을 하지 않아 엉망이기는 하지만 원래 빛깔은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금빛 곱슬머리를 질끈 묶은 채 멍청히 입을 반쯤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던 젊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아- 심심하다.” 이 숲길에서도 단정한 차림새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또 한명이, 햇살 아래에서 은빛에 가깝게 빛나는 짧은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쓸어올리며 대꾸했다. “이제 배가 부른 모양이지?” 그들 뒤편으로는 검은 머리카락의 자그마한 소녀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편하게 앉아있었 고, 그 무릎 위에 새빨간 털뭉치가 얹혀 있다. 아니, 그 새빨간 털뭉치에는 풀 위에 아기처 럼 웅크리고 누운 몸뚱이가 딸려 있다. 소녀는 그 몸뚱이를 몇 번 흔들어보다가 손을 떼며 말했다. “큰일났네. 파이가 잠들어버렸어.” 쏴아 ? 숲에 바람의 파도가 일었다. 떨어져내리는 나뭇잎을 손으로 잡아채며 첫번째 남자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그럼 여기서 낮잠이나 자지 뭐.” “그래도 되는 거야, 루이?” “뭐 그렇게 서두를 것까지야 있겠냐.” “내일까지 아칸서스에 도착하자며.” “에이. 정 안되면 이자드가 알아서 데려다주겠지.” - 누구 마음대로? 루이는 웃음 사이로 하품을 하며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말해놓고 보니 졸린걸. 급하면 이따 일어나서 내가 카라를 업고 뛰지 뭐…흐아암.” “누굴 업고 뛴다는 거야. 나도 그 정도는…” 대꾸하던 카라는 루이가 이미 잠들어버린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평화로운 침묵 이 감돌았다. 카라는 습관처럼 귓가로 손을 올려 차가운 푸른 돌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 다. “산적이라도 나오면 어쩔 거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덤불 속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앞장선 사내가 외 쳤다. “감히 허가도 없이 이 숲을 지나다니, 무서운 줄을 모르는 놈들이로군. 너그럽게 봐줄 테니 통행세를 바쳐라!”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루이와 파이는 깨어날 줄을 몰랐고 카라와 진은 멀뚱히 그들을 쳐다 볼 뿐이었다. “내…내 말 못들었나? 통행세를 내란 말이다!” 당황한 사내는 더듬거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진이 정중하고도 우아하게 입술끝을 올리 며 말했다. 물론 자세도 바꾸지 않은 채로. “말하는 걸 보니 이 길에 들어선 지 얼마 안된 것 같군요. 위협에 성공하려면 그렇게 정중 하게 말해서는 안되는 거랍니다.” “맞아요. 그리고 무기가 형편없네요. 당신만 칼을 들었을 뿐이지 뒤쪽은 다 농기구 아니면 도끼 뿐이잖아요?” 카라가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선 사내는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외쳤다. “건방지구나! 좋아, 어린애들도 있고 해서 봐주려 했더니만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 겠다면 할 수 없지. 쳐라!” 와아- 십여명의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카라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길게 말해선 안되는 거라니까 그러네.” 카라의 입술이 다물릴 무렵 상황은 끝나 있었다. 진은 여유작작 사람무더기 위에 걸터앉아 앞장서 있던 남자의 팔을 꺾으며 말했다. “사람이 좋은 의도로 충고를 해주면 들어먹을 줄 알아야지. 그렇게 사람볼 줄 몰라서 험난 한 산적생활을 어떻게들 하려고 하시나?” “아아아악! 그, 그 팔 좀 놓고 말해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었어요. 명, 명망높 은 분인 줄도 모르고 실례를, 아악! 팔 좀…” 진의 효율적인 비틀기에 잡힌 사내는 곧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아까까지 유지하던 손톱만한 위엄을 다 포기해 버렸다. 보다못한 카라가 먼저 말했다. “그만해, 진. 좀 심하잖아.” 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팔을 놓고 손을 털었다. 사내는 쿠당탕 소리를 내며 사람 무더기 아래로 굴러떨어져 얼굴을 땅에 처박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진은 단정히 앞에 꿇어앉은 사내에게 묻고 있었다. “댁은 검은 좀 쓸 줄 아는 것 같지만 아무리 봐도 산적류가 아닌데 어쩌다가…이 사람들을 끌고?” 그가 손짓해 보인 이 사람들이란, 들고 있던 무기란 것도 그랬지만 어디를 보나 평이한 마 을 장정들이었다. “…전쟁 때문에…마을은 불타버리고…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먹고살 길도 막막하고, 그 렇다고 군대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 그래도 사람들을 죽이진 않았습니 다.” 순간 카라가 몸을 일으키고 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진은 조 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터는 레투스 쪽인 줄 알았는데. 게다가 아직 내전이 터지지도 않았잖나. 정말 군대가 이 부근 마을을 지나갔다고?” 뒤편에 엎드려 있던 장정들 쪽에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악마였어요! 그놈들은 악마요!!” “아냐. 여럿도 아니었어.” “조용히. 내가 말하겠소. ?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마법사였어요. 미 친 놈들 같았더랬습니다. 완전 미친 놈이었어요. 닥치는 대로 부수고 저희들끼리 싸우고…실 은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촌장은 아니지만 마을의 지식인으로 그도 울분과 두려움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면 놀 라운 판단력이었다. “…실은 아칸서스까지 피신할까 하기도 했습니다. 사원이나 신전에서 구호물자도 공급해 준다고 하고…하지만 아이들까지 끌고 가기엔 너무 멀고 험한 길인 데다가 그쪽도 난리라는 소문을 들었지요.” 진의 얼굴에서 조금씩 예의 미소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들이 레투스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이야기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정보가 빠르기로 이름난 그 도시에서조차도. 그렇다 면 고작 이틀 안에 상황이 급격히 변했단 말인가? - 너무 빨라… 이자드가 속삭이듯 말했다. 카라만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진을 쳐다보았 을 때, 그는 마치 그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빨라…” 진의 얼굴에 이제까지 거의 보지 못한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다. 그 그늘은 순식간에 사 라지고 진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이죽이는 표정을 회복했지만, 카라는 언젠가 한 번 엿보 았던 진의 진짜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분노와 절망에 가득차서 자신의 과거를 깔아 뭉개던 그 때의 그를.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확실한 정보와 소문, 사람들의 분위기 양쪽 모두를. 그들은 이제까지의 직선 행로를 벗어나 여관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큰길은 아니라 해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 쪽으로 접어들자 갑자기 사람이 많아졌다. 여행자와 산적, 양 쪽 다 늘어난 것 같았다. 행길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의 그림자, 아니면 절망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직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통제가 가능했지만, 언제 무슨 사태가 일어날 지 알 수 없었다. 카라는 비참한 피난민들과 지나쳐 한참 걷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여 말했다. “전쟁이란 거 원래 이런 건가?” 이자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이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파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 본래 잔인하고 비참하지. 전쟁은.” 가라앉은 소리로 대답한 것은 진이었다. 그는 뒤이어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이상해. 마녀들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날뛰고 있다는 건 약이 흘러 나오는 범위가 넓어졌다는 뜻이겠지만, 대체 누가 이런 식으로 싸움을 하는 거지? 내전에서 파괴는 최소화하는 것이 상식이야. 게다가 재상이나 아크 왕자나 맞불을 놓아 너죽고 나죽 자고 덤빌 사람들도 아니고.” “음…이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루이가 조금 풀이 죽어서 진에게 동조했다. “난 싸움은 좋아하지만 말이야. 이건 이상해. …휘안이…” 마지막 말은 거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서 카라가 자신없이 말 했다. “그렇지만 뭐하러?” - 그 놈은 재미로 그러고도 남지.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대꾸가 날아왔다. 카라는 루이의 옆모습을 올려다보며 돌처럼 굳어진 얼굴로 앞을 쳐다보고 있는 이자드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그렇지만 뭔가 이유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 이유? 이유는 있지. 그런 걸 이유라고 할 수 있다면. 이자드는 비웃듯 내뱉았다. - 놈은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즐기거든. 녀석에겐 오락거리인 셈이지. 피와 광기, 죽음과 배 반과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하고 파멸로 내달리는 자들의 모습, 고통의 향연을 즐기기 때문 이야. 카라는 말의 내용보다 오히려 그 목소리 깊이 배어있는 증오에 놀랐다. 루이가 난처한 듯 입술을 빨았다. “그만해, 이자드. 카라에게…” “아니, 괜찮아.” 카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자드와 냉전 아닌 냉전을 깬 다음부터 서로 피하고 있는 이야기였 지만, 휘안은 카라에 대해, 혹은 패러노말 마스터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었다. 긴 침묵이 감 돌았다. 아직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지는 않았으나 숲속은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있 었다. 문득 루이가 몸을 굽혀 카라를 들쳐업었다. 그리고는 항변할 여지도 없이 굉장한 속도 로 달리며 말했다. “빨리 좀 가자.” 그들은 해가 질 무렵 첫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루이의 자리를 이자드가 대신할 무렵이 었다. 여관에 가까워지자 카라가 먼저 루이의 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 해 지겠다. 내려줘…” “그래…” 루이는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 카라를 돌아보며 몸을 굽혔다. 카라는 바닥을 가늠하여 발 을 휘휘 젓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확 놓아버렸다. “우왓!” 제대로 내리지 않아 균형이 흐트러진 순간 커다란 손 하나가 받쳐주었다. 루이보다 훨씬 낮 은 음성이 어둠속에서 날아왔다. “요새는 덜렁거리는 것까지 루이를 닮는구나.” 카라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멋적게 대꾸했다.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그런 것 뿐인데, 루이와 비교할 것까진 없잖아요.” - 어어, 뭐야 카라. 나랑 닮았단 얘기가 싫단 말야? 너무해~ 루이의 항변은 깨끗이 무시되었다. 이자드는 약간 뒤쳐진 진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여관문 을 밀어 열었다. 카라는 따라가지 않고 잠시 여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선명해진 이자드의 실루엣을 쳐다 보다가 엇비슷하게 달려온 진과 파이에게 돌아섰다. 여관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대개 다른 사람들이 한 말과 비슷했다. 좀 더 자세하거 나 좀 더 혼란스러웠을 뿐. 다만 훨씬 나쁜 소식이 하나 있었다. 진- 진 멜카르트의 나라, 카르트가 내전에 휘말려들었다는 소식이었다. 11. 절반의 진실 (2)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새벽이었다. 이자드는 어둠에 잠긴 숲속에 있었다. 멀리서 새와 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가까이에는 나무들의 파도소리 외에는 생물의 기척이 없었다. 이자드는 단단한 나무줄기에 등을 기댄 채 눈높이에서 왔다갔다하고 있는 푸른 빛의 덩어리 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럼 제대로 통제되고 있는 군대는 재상과 아크 왕자 직속의 몇 백 명 뿐이라는 얘긴 가?” “콜록…그런 셈이지. 그 약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양쪽 모두에 흘러들어간 것은 분명해. 푸에취! ? 네 도시를 제외하면 어디나 엉망진창이야. 지옥도가 따로 없어.” 고작 이틀 사이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푸른 빛의 덩어리 ? 하리잔은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키시는 재상의 능력으로 버티고 있는 거고, 레투스에는 마녀들의 중추가 합류해서 진을 치고 사태를 수습하려 들고 있고, 시더는 리베르 문디가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 아칸서스는 신관들이 그럭저럭. 그밖에는 온통 어디에나 마법사와 마녀들이 돌아다니며 지휘관을 죽이 고 있어. 군대는 모두 폭도 떼로 변하고 있고. 재상이나 아크 왕자나 통제력을 회복하고 군 대를 불러들이려고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둘 다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상태고 시더나 아 칸서스야 말할 것도 없지. 게다가…콜록콜록콜록콜록…아, 미안. 그 마법사와 마녀들 중에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마을을 날려버리거나 아예 미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공격하는 자들이 나와서 사람들이 다 피난 중이야.” “어디로?” “일부는 숲이나 산으로. 일부는 네 도시로. 전쟁에 합류할 생각이 있는 자들은 키시나 레투 스로 향하고 있고 나머지는 아칸서스와 시더로 가고 있지만…그것도 대단한 희망은 못되지. 그래서 아예 돌의 강을 건너 카르트로 들어가는 인구가 늘고 있어.” “과연. 카르트는 많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야. 식량도 치안도 문제가 되고 있겠군…그래서 전쟁에 끼어들기로 한 건가. 정확히 어느 쪽과 동맹을 맺은 거지?” “아칸서스와 손을 잡았으니 일단은 아크왕자 쪽이겠지. 푸에취!” 푸른 빛에 감싸인 작은 인간 형상은 주섬주섬 손수건처럼 보이는 작은 천을 꺼내어 맹렬히 코를 풀었다. 이자드는 어두운 눈으로 그 형상을 쳐다보았다. 단 이틀만에, 온 나라가 난장 판이 되었다. 내전은 본래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는 법이지만 이렇게 빨리, 이렇게 철저히 이 루어지지는 않는다. 본래대로라면. 식량이 부족해질 것이다. 농토를 잃은 농민이 너무 많았 다. 아마 타버린 논밭도 많을 것이다. 제 터전을 버리고 떠난 이들도 너무 많았다. 자연재해 라면 재건을 도울 마법사와 마녀들이라고 있었으련만, 지금은 그들이 오히려 살아있는 재앙 이 되고 있었다. 재상과 아크왕자가 내전을 포기하고 함께 통제에 들어간다 해도 까딱하면 폭동이다. 그는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휘안은 어디에 있나?” 하리잔은 손수건을 갈무리하고 양손을 펼치며 혀를 내밀었다. “무리한 질문은 하지 말아줘. 이만큼 알아내기도 힘들었다고. 요새 시야가 현저히 좁아들고 있단 말이야.” “허어. 네가 그걸 인정하다니 놀랍군……요새 약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이유가 뭐 지?” 대답은 없었다. “휘안 때문인가?” “아니. 그러는 너는 어째서 약해진 거지?” 이자드는 불편한 기색을 용케 감추었지만, 그가 동요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하리잔이 아니었다. 푸른 색의 사다카는 심술궂게 웃으며 반격을 가했다. “휘안 때문이야?’ 이자드는 냉정을 되찾고 차가운 방어벽 뒤에서 말했다. “내가 약해졌다고 단정짓고 있군. 그런 식으로 찔러본다고 넘어갈 내가 아니다.” 하리잔은 키득키득 웃더니, 한층 약해진 불빛을 두르고 이자드의 눈 앞으로 날아들었다. “좋아. 그러면 이건 어떨까? 그렇게 전쟁과 혼란이 걱정된다면 왜 가서 그들을 돕지 않 지?” 이자드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사태는 벌어졌고, 일단 벌어진 혼란상황은 스스로 부 딪치고 굴러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물론 있었 다. 미쳐 날뛰는 마법사와 마녀들을 때려잡고, 아크와 재상 사이를 중재하고, 리베르 문디의 힘을 강화하고…그는 공허한 시선을 숲의 어둠 속으로 돌리며 웃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숨어사는 사다카에게 들을 말은 아니로군.” “콜록콜록콜록…아하하하하. 그래. 맞는 말이야. 푸에취!” “돌아가도 좋아.” 칼로 자르듯 던져진 말에, 푸른빛은 거칠게 지워진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숲은 다시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숨을 죽이고 있던 동물들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자드는 발소리를 죽여 여관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많아진 인구로 방이 모자라, 그들은 작은 방 하나에 함께 들어야 했다. 그나마 방 하 나를 차지한 것도 운이 좋았다. 운이라기보다는 돈의 힘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자드는 카라 를 꼭 붙잡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파이의 웅크린 모습과,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 처럼 끙끙거리는 카라의 모습을 지나 싸늘하게 비어있는 자리를 쳐다보았다. 진의 자리였다. 산책을 나서기 전까지는 진도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이자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생각이 옳았다. 진은 마구간 곁에 있었다. “인사도 안하고 가는 건가?” 비난도 조롱도 아닌 담담한 말투. 진은 거금을 주고 반 어거지로 사들였을 게 분명한, 보잘 것없는 말의 고삐를 쥔 채 이자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희미한 별빛을 등진 이자드의 윤곽선 을 향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뭐 특별히 인사할 게 있어야죠.” “하긴 그렇군.” 진은 고른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평온한 미소였다. 이자드는 그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진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를 비웃지 않는군요.” “내가 왜?” 이자드는 마음 속으로 덧붙였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진은 먼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 인간이란 참 우습죠. 나를 쫓아오는 여자에게서는 도망치고 내게서 도망치는 여자는 쫓 아가고…왜 내가 찾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반대로 나를 찾기 시작하는지. 오래 전에 무엇 인가를 찾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요.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하고서는 곧, 내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던 것도. 권태로움, 초조, 갈망, 분노…그렇게 천년이나 헤매다닌 끝에 결국 또 그곳으 로 돌아갑니다. 이게 책임감일까요 아니면 만용일까요.” “그걸 내게 묻는 건가? 자네가?” 이자드는 팔짱을 끼며 피곤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진은 쿡쿡 소리내어 웃고, 다시 전처럼 한 쪽 입끝을 당겨올리며 사뿐히 말에 올랐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한 순간 백금색 머리카락이 빛을 발했다. “그동안 재미있었습니다, 덕분에. 카라에게…아니, 그만두죠.” 진은 다리를 조여 말 옆구리를 가볍게 차며 나직이 말했다. 이자드는 돌아서며 말했다. “자네 형제는 아칸서스에 들르지 않고 레투스로 내려가 아크 왕자를 만날 거다. ? 파국을 막으려면 재상과 그가 손을 잡지 않으면 안돼.” 진은 잠시 말고삐를 당기더니 서늘한 밤바람 속에 떠내려보내듯 말했다. “부디.” 그 뒤의 말은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 카라는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에 떠밀려 잠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것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깨어남이었다. 정신은 마치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또렷했다. 다시 잠을 청할까 머뭇거리며 눈을 감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파이를 떼어내느라 꽤 고생을 한 다음 몸을 일으켜, 새벽 한기에 몸을 떨며 긴 겉옷을 찾았다. 그런데 뭔가가 허전했다. 좁은 방 안에는 자신과 파이밖에 없었고 침대는 싸늘하게 식은 채 정돈되어 있었던 것이다. 잠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그들이 그녀만 놔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 불 안은 잠시였고 곧 스스로에게 그럴 리가 없다고 타일렀지만, 어쨌든 일단 일어나서 주변을 찾아보기로 했다. 맨발이 차갑고 까끌한 바닥에 닿아 머리를 비워주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움직였다. 밤눈이 전보다 어두워졌는지 문을 찾는 데 다소 시간 이 걸렸다. 계단은 카라의 가벼운 무게에조차도 삐걱 삐걱 작은 비명을 질러댔고, 주위가 너무나 조용 해서 그 소리마저도 대포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카라는 가능한 한 빨리, 소리없이 내려 가기 위해 난간을 타기로 마음먹고 아래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뭔가 꾸러미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면 그리 큰 소리는 나지 않겠지. 자주 하지는 않지만 난간을 타고 쭉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카라는 단숨에 일층까지 내려가 사뿐히 바닥을 밟았다. 물컹. “뭐야!!” 카라는 같이 비명을 지를 뻔 하다가 놀라서 제 입을 막으며 소근거렸다.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카라에게 밟힌 사람은 잠에서 덜깬 소리로 뭔가 중얼중얼거리더니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 다시 담요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보니 일층도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다. 방에 들 수 있었던 것은 왠만큼 돈이 있는 사 람들 뿐이었고, 나머지는 여기에서 밤을 새워야 했던 것이다. 카라는 사람들 사이를 조심조 심 지나가며 새삼 깨달았다. 다들 옷으로 보이는 짐보퉁이를 끌어안거나 베고 있었다. 대부 분이 얼마 안되는 재산을 짊어지고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문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조심하느라고 했다 해도 소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 다. 벽 쪽에서 누군가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모습이 보여, 카라는 멈춰섰다. 아니, 카라의 인기척 때문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작은 소리로 칭얼대는 아이를 안아들고 있 었다. 아이 때문에 깼던 모양이다. 아니면 설핏 잠이 들었거나. 유모도 그랬었다. 밤에 조그 만 바스락 소리라도 나면 얼마나 쉽게 깨는지. 그 여자는 벽에 기대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 렸다. 카라는 저도 모르게 멈춰선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 지만 눈이 마주쳤다. 그저 한없이 지친,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 물끄러미 카라를 관통했다. ……갑자기 그 시선이 견딜 수 없어져, 카라는 고개를 돌리고 조금 서둘러서 문 쪽으로 향 했다. 삐걱. 작은 소리가 나며 뒷문이 열리고 키가 큰 그림자가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금새 알 수 있다. 이자드였다. 카라는 반쯤 안도하며 그가 돌아서기를 기다렸다. “카라…?” 이자드는 바닥 여기저기를 차지한 보퉁이 보퉁이 사이에 우두커니 선 카라를 보고 작은 소 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손짓으로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계절은 아직 추울 때가 아니었지만 새벽 숲속은 싸늘했다. 카라는 찬공기에 나서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자드가 금방 알아채고 어깨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감싸 안아준 것은 아니었 다. 어떤 마법 기운인지 곧 따스한 공기가 일어났을 뿐. 카라는 이자드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표정이지만 조금 가라앉아 보 이는 것은 자신만의 착각일까. 문득 생각이 났다. “진은요?” 이자드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카라는 곧 알아차렸다. “돌아간 건가요?” “그런 셈이지…아마 전쟁터로 갔을 거다.” “흐음.” 잠시 그들은 침묵 속에서 숲속을 걸었다. 별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하늘은 남색빛으로 물들 고 있었다. 술렁이는 숲의 실루엣 너머로 밤의 야수들이 마지막 사냥을 마치는 소리가 들렸 다. 평화로움. 카라는 언제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실감이 안나요.” 문득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전쟁이 말이냐?” “음.” 카라는 애매하게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희미하게, 이자드의 발이 땅을 끄는 소리가 들렸 다. 카라는 이자드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잠시 망설이다가 다물어 버리더니 조금 후에 조용히 말했다. “전쟁이라……직접 보면 알겠지.” 그의 목소리가 너무 가라앉아 있어서 또 한번 가슴이 철렁했다. 카라는 잠시 눈을 감고 바 람을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숲은 평화롭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인지. 헤웬 같은 마녀가 지나치기만 해도 숲이 있던 자리를 타버린 공터가 대신한다. 카라, 그녀 자신도, 마녀였다. 가는 곳마다 무엇인가가 부서지고, 무엇인가가 깨어진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떠오른 것은 죽은 사람들의 모습도 아니고 부서진 건물도 아니고…아까 여관 바닥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그 여자의 무심한 시선 뿐이었다. 카라는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려오는 것을 떨쳐버리며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죠?” 그 질문에 이자드의 발이 다시 한 번 땅을 끌었다. 카라가 묻고 있는 것은 지금 목적지, 아 칸서스 이야기가 아니었다. 둘 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자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글쎄다, 라고 말했다. 카라는 앞서 걸어가는 그의 옷소매를 살짝 잡았다. 이자드가 돌아보았다. 카라 는 부러 그러는 듯 웃음기섞인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물었다. “나, 어딘가에 떼어놓고 가려는 거 아니죠?” “루이가 그러게 놔두기나 할까.” 이자드 역시 묘하게 웃음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은 생각이 다르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카라는 쓰게 웃었다. “계속 그러네요. 나랑 같이 다니기 싫은 거라면 그렇게 말해주는 편이 좋을 텐데.” “카라......” “해본 얘기예요.” 카라는 잽싸게 말을 뒤집고 나서 다시 웃었다. “지금 속으로 언제 이녀석이 이렇게 기어오르게 됐지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 말에 이자드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짧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웃음이었다. 난처하거 나, 씁쓸하거나 해서 보이는 웃음이 아니라. 이자드가 오랜만에 웃음을 보이자 카라도 제대 로 웃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 아무 생각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기분좋은 징조였다. 평온했다. 두 사람 각자가 짊어진 걱정거리가 모두 떨려나온 것 같았다. 잠시 뿐이라고 해 도. 이자드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휘안에 대해서는……미안하다. 그 녀석에 대해서는 말을 하기도, 아니 생각을 하기조차도 싫거든. 어째서인지는 명확히 말을 못하겠지만.” 이자드는 그 부분에서 말을 뚝 끊었고, 카라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더 이상 이야기는 이 어지지 않았다. 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무조건 싫은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요.” 계속 시도해 보기에는 새벽 공기가 너무 달았다. 카라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고, 그들 은 방향을 바꾸어 다시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밤이슬에 축축해진 나무향. 성 큼성큼 다가오는 태양을 예감하고 벌써부터 밝아지는 하늘 언저리. 그들 사이의 간격을 침 묵이 대신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결코 벌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 평화를 깨뜨린 것은 요란한 울음소리였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떼쓰는 어린아이같기도 하고, 야생동물이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여관 쪽이다. 이 자드와 카라는 순간 멍해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파이!!” 카라는 멍청히 눈을 깜박이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겨우 누가 울고 있는지 알아차렸던 것 이다. 파이가 깨어나 카라를 찾으며 울고 있는 모양이다. 여관 사람들이 다 깨어날 것 같은 엄청난 소리였다. 이자드는 혀를 차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런 이런. 가서 달래줘라.” “와와와와- 그럼 이따가 다시 얘기해요!!” 카라는 당황해서 여관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뛰어가는 카라의 뒷모습을 보고 돌 아서며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외면하기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피하기만 해서는 수세에 몰릴 뿐.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해도, 일단 그림 자를 한 겹 걷어내자 기분이 한결 좋았다. 어떻게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해가 뜰 것이다. 그는 이슬에 젖어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숲냄새를 즐기며 몇 걸음을 더 떼 었다. 그 때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몇 발짝 앞에 카라가 서서 웃고 있었다. 파이 의 울음소리는 아직 들리고 있었는데, 이자드는 별 생각없이 입을 열었다. “카라? 왜 다시…” 말을 꺼낸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언제나. 너무 늦게. 이자드는 깨우친 순간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몸을 뒤로 날리며 왼손을 떨쳤다. “달Dal!” 순간, 작은 발이 그의 팔을 걷어찼다. 수인을 제대로 맺지 못한 손끝에서 새파란 빛이 일어 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스러져버린다. 연이어 작은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고 다른 손이 팔을 잡아 뒤틀었다. “크윽…” 이자드는 아픔에 대해 반사적으로 터져나오려는 몸의 비명을 죽이며 끊어진 호흡을 이으려 애썼다. 눈앞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빠르고 정확한 발길질이 복부를 강타해 그의 노력을 헛 되게 만들었다. 다음 순간, 이자드는 목과 팔을 밟힌 채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낮은 웃음소리가 겨우 숨을 가다듬은 그의 귀에 꽂혔다. “이런 이런. 이거 정말 실망인걸. 이렇게 형편없이 당하다니 말이야. 그새 몸이 둔해졌구나, 이자드.” 어깨 부근에서 찰랑거리는 짧은 머리카락도, 눈만 커다란 얼굴도, 나이에 비해 작고 마른 몸 도 카라와 같은 형상이 그의 위로 머리를 약간 굽히고 어깨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어슴푸 레한 빛 속에서라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영원히 새겨진 핏빛은 보이지 않았다. 이자드는 입술을 깨물며 목을 조금 움직여보려 했지만 고통만 가중시킨 꼴이었다. 휘안이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재미없는걸. 모처럼 찾아왔는데 이런 꼴이라니…그나저나 너희 대화는 재미있게 들었어.” 휘안은 몸을 굽혀 이자드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대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나에 대해 말하기도, 생각하기도 싫다고? 나에 대해서까지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어? 그렇게는 안되지. 곤란해. 정말…곤란하다니까.” 달콤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일변해 섬뜩한 살기가 번뜩였다. 이자드는 왼쪽 팔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휘안이 팔을 움켜쥐고 아무렇지도 않게 확 잡아뜯었다. 우두 둑 소리가 나고, 뜨거운 피가 튀었다. 왼팔은 떨어져나가지는 않았지만 너덜너덜해져서 땅에 축 늘어졌다. 이자드는 제대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는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아예 반격을 못하게 할 셈인가… 멀리서, 아직 파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카라가 먼저 들어간 것이 다행이다. 휘안은 얼굴에 튄 피를 닦지 않고 혀로 입술 부근을 핥았다. 이자드는 피칠갑을 한 그 얼굴 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휘안이 손등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뭐야, 이 얼굴이 보기 싫은 거냐? 응? 그래?” 눈을 뜨자, 피가 여기저기 튄 카라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원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네가 그렇게 싫어하니 이 모습대로 해줘야겠는걸.” 휘안은 악의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복사뼈를 짓이겼다. 큰 덫에 걸린 것처럼 발 목이 부서져갔다. 절대로 한번에 까무러치지 않게 천천히, 계속해서 찌르는 듯한 고통.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문 대신 전혀, 아무 주문도 외울 틈이 없었다. 견디는 것만이 고 작이었다. ? 곧 해가 뜬다. 그는 사라질 것이다. 이 자리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휘안은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이자드의 팔다리를 엉망으로 만든 다음 경쾌하게 뛰어올라 그의 가슴께 언저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피 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자드의 입술께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그리고는 씩 웃으며 읊조리듯 이. “아, 이런. 원래는 만찬 준비가 끝났으니 정중하게 초대할 참이었는데 ? 아까의 대화를 듣 고 좀 열이 받았나봐. 이제야 좀 마음이 가라앉는군.” “큭…그거…다행이군.” 이자드는 가까스로 몇 마디 대꾸했다. 휘안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잡아 약간 들어올렸다. 휘안의 핏빛 눈동자에 비친 그의 얼굴이 보일 정도 각도로. 숨을 들이마시자 늑골 부근이 찌르는 듯 아파왔다. 지독하게 아팠다. 끔찍하게. 그래도 정신은 또렷했다. 그는 입술을 축였다. 피맛이 느껴졌다. 휘안이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쳐다보더니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곧 해가 뜨겠는걸.” *** “그만, 그만해, 파이!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울어!” 카라는 급하게 여관 안으로 뛰어들어가며 외쳤다. 파이는 방이 아니라 1층 바닥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울어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뺑 둘러싼 채 어쩌지도 못하고 있다가 카라에게 일제 히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카라는 군중 속에서 빽빽 울어대는 아이를 찾아낸 엄마의 난처한 기분을 만끽하며 사람들 사이를 뚫고 파이에게 다가갔다. 파이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카라를 덥석 안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난감한 상황이다. 카라는 일단 파이를 토닥거리며 주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몇몇은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대개는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피곤에서 덜 깬 사람들은 거의 살의에 가까운 시선을 던지고 투덜거리며 보잘것없는 잠자리로 돌아갔다. 카 라는 한숨을 내쉬며 눈물에 젖어 얼굴에 엉망으로 붙어버린 파이의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올 려 주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잠깐 옆에 없다고 이러는 일 없었잖아.” “으흑…흑흑흑…아이혜…” 파이는 울음을 멈추지 못해 끅끅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아이혜가 아니라 카라라니까.” “아이혜…카라한테 가려고 했는데, 날개는 펴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테 왜? 그냥 숲속을 산책하고 있었어. 널 버려두고 간 게 아니라구.” 어린아이처럼, 버리고 간 줄 알고 무서웠나보다. 카라는 그렇게 이해하고 한숨을 내쉬며 파 이를 달랬다. 그러나 파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거 아냐. 아냐. 걱정했어, 파이는.” 카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파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결사적으로 카라의 다리를 붙들고 있 다. 이상할 정도로 걱정스러운 얼굴. 걱정과, 겁에 질린 듯한…무서운. “왜 그래?” 카라는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달리는 한기에 파이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파이의 두려움이 전염되기라도 한 걸까. 파이는 카라에게 꼭 매달리며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고장난 자동인형처럼 반복되는 말, 반복되는 끄덕임. 어떤 예감이 등골을 타고 달렸다. 카라 는 침을 삼키며 파이를 떼어내려 했다. “잠깐만, 파이…파이! 이거 놔!” 파이를 매단 채로 여관 밖으로 나서는 데 끔찍하게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 “해가 뜨면 루이가 나오겠지. 그러면 어쨌든 당장은 모면할 수 있다 ? 그렇게 생각하고 있 었겠지, 이자드?” 휘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부드러움이 더 소름끼쳤다. 이자드는 불길함을 감지하고 머리를 돌려 추측하려 애썼다. 이자드가 일출을 기다린 것 만큼이나, 휘안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사실 이건 조금 전에 떠오른 계획이야. 이자드…내가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하지 않아?” “설마…윽.” 이자드는 문득 휘안이 보고 있는 것이 어느 쪽인지 깨닫고 무심결에 몸을 움직였다가 짧은 신음을 뱉았다. 휘안은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저런. 함부로 움직이면 좀 아플거야.” “너…이제까진 나 이외 사람은 공격하지 않았잖아!” “오호. 이제야 기억이 나시나? 그야 물론이지. 너 이외의 사람은 공격한 적이 없어. 늘 그 랬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말이야. 그렇지?” 휘안은 싱긋 웃었다. 이번 미소는 카라의 그것과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이자드는 그 미소 에 초점을 맞추며 머리 속에 몰려드는 구름을 떨쳐내려 애썼다. “카라였지, 이름이?” “왜 그 앨…”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걱정한대봐야 할 수 있는 일도 없겠지만.” 휘안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러나 잔인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았다. 해가 뜨기를 이토록 간절히 바래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자드는 끔찍한 통증을 감수하며 조금씩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안의, 카라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휘안은 여관 쪽을 바라보 며 중얼거렸다. “이제 오는군.” 곧, 해가 뜬다. 곧. 이제 곧. 카라가 달려오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휘안은 미소지으며 손을 들어올려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이자드 주위로 어둠이 몰려들었다. 카라와 똑같은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내 계획은 말이지. 일단 네가 루이 등 뒤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거거든. 어둠 속에서 잘 쉬고 있으라구.” “이자드!” 멀리서, 카라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 “이자드!” 카라는 이자드가 어둠 속에 싸여 사라진 후에도 몇 번인가 그의 이름을 되풀이해 불렀다. 그렇게 이름을 부름으로써 사라진 것이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처음에는 간절히, 다 음에는 서서히 가라앉아 기계적으로 잦아들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자드…” 아, 그래. 이자드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검은 구름 같은 것에 휩싸여 어딘가로 사라졌다. 사라졌다. 너무 차가운 것에 손을 대었을 때와 같은 얼얼함이 온몸을 관통하고는, 뭔가 지금 당장 울 음을 터뜨릴 것 같은 부분을 마비시켜 버렸다. 자기 자신이 몸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 난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획득한 냉정함으로, 그제서야 카라는 이자드 옆에 서있었던 사람 ? 혹은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자는 카라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으며 유유히 한 두 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나를 쳐다보는군.” 카라는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서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핏빛 그림자가 거기에 있다. “전에 만난 적이 있어. 더 예전에.” “그랬지. 네가 모래의 바다를 건너는 걸 도와줬잖아. 잊고 있었나?” “꿈 속에서도 본 적이 있었어. 그 때는 내 그림자를 봤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기억나나?” 시더에 눈이 내렸던 날 밤에,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보며 미소지었던 그를 본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는 탄성을 지르며 전과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얼굴과 손 여기저기에 피가 튀어 있 었다. 카라는 문득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 깨닫고 확 몰려드는 구역질을 참으며 떨리는 소 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휘안 알 바르카. - 왜 내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마음에 들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어?” 휘안은 나직이 쿡쿡거리며 덧붙였다. “녀석은 내가 널 어쩌려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을 거야. 네가 대단히 여리고 힘없는 아 이인 줄 아니까 말이지.” 죽은 것은 아니다. 틀림없이. 카라는 냉정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금방이라 도 깨져나갈 듯 흔들리는 것을 의식하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물었다. “이자드를 어떻게 했어?” 가까스로, 목에 걸려있던 그 질문을 꺼낸 순간 맹렬한 분노가 솟구쳐 냉정한 외피를 깨뜨렸 다.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분노였다. 카각, 카각, 카각. 카라의 마음 속에서 터져나온 소리에 호응이라도 하듯, 나무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휘청이고 꺾여나갔다. 칼같은 바람이 그들 주위를 한 바퀴 휘돌았다. 숲이 있 던 곳이 순식간에 붉은 빛 표토를 드러낸 공터로 변했다. 대기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을 길게 내지르자 나뭇가지들 위로 푸른 번갯불이 춤을 추었다.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져내 려 주위에 쌓였다. “오, 이제 잘 하잖아? 근사하군.” 휘안은 키들거렸다. 그는 카라를 흉내내듯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손을 뒤로 모았다. “내 생각을 말해볼까. 넌 충분히 강하면서, 이자드 뒤에 숨어있는 것을 즐겨왔을 뿐이야. 그가 돌봐주고 달려와서 구해주는 것을 즐겼겠지. 아니면 네게 그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 게 되면 더 이상 곁에 있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랬을 지도 모르겠군.” “닥쳐!!” 날카로운 공기가 휘안의 뺨을 찢었다. 그는 가느다란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가락으로 닦으며 차갑게 웃었다. “제법이야. 하지만 충분히 강하다고 해서 나와 겨룰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아직 멀었 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동안 주변 공기가 웅웅거리며 유영하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며 모 여들어, 무형의 벽이 되더니 사방에서 카라를 향해 꾸역꾸역 밀려들어온다. 무거운 돌벽에 짓이겨질 것 같은 압박감. 몇 번인가 그 벽을 깨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창이나 칼 같은 날카 로운 형상을 떠올려서는 도저히 깰 수가 없었다. 난처함보다 분노가 더 강해졌다. 카라는 보 이지 않는 벽 속에 갇힌 채 세차게 발을 굴렀다. 쿠르르르르르- 땅울림에 뒤이어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땅바닥만이 아니라 공기중 전체에. 강에서 겨우내 두껍게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으면서 일어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날카로운 신호음이 울리며 휘안이 만든 무형의 벽이 깨졌다. 동시에 카라는 몸을 낮추어 휘안에게 달려들며 오른손을 내저었다. 순간적으로 그 빈 공간에 날카로운 푸 른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은 칼처럼 휘안을 베어나갔지만 빈 공기만을 쓸었다. 휘안은 경이로 운 속도로 피하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재미있는데! 그건 루이와 비슷한 동작이군 그래.” 그가 사뿐히 나뭇가지 위에 안착하자 곧 그가 있던 자리에서 일직선으로 몇 그루의 나무가 기울어져 맥없이 쓰러져내렸다. 휘안은 그쪽을 쳐다보며 휘파람을 한 번 분 다음 조롱하듯 말했다. “온통 남 흉내만 내고 있군. 너 자신의 힘은 어디 있는 거지?” 카라는 대꾸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몸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반면 검은 눈동자는 미동 도 없이 휘안의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재미있다는 듯 마주 쳐다보던 휘안의 얼굴 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미소가 지워지고, 카라에게 붙잡힌 시선을 떼어내려다가 몇 번 실패하고 카라와 똑같이, 아니 조금 더 심하게 몸이 흔들리는 데 시간 이 얼마나 걸렸을까? 한쪽은 분노로 굳어져 있었고, 다른 쪽은 웃고 있던 두 개의 같은 얼 굴이 서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휘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제 필사적으로 카라에게서 눈을 떼려 하고 보이지 않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카라는 집중하고 있었다. 할 수 있어. 마음 속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카라는 왜 휘안과 싸우기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자신을 잃을 정도로 분 노했는지조차 잊었다. 집중. 놈을 끌어당겨, 그 힘을 흔적없이 빨아내 버리자. 심연의 구덩이 로 되돌려보내자. 여기에, 문을 열고, 완전한 소멸의 축복을 내려주자. 누군가가 마음 속에서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자, 조금만 더. 취한 듯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속삭였을 때, 카라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오한을 느꼈다. 그 목소리.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 순간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휘안을 잡고 있던 시선은 떨어져 버렸다. “-츠.” 휘안이 들릴 듯 말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떨어져내렸다. 그는 헐떡이고 있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다. 탈진한 것처럼. 그러나 카라 역시 그를 어떻게 해볼 상태가 아 니었다. 춥다.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카라는 덜덜 떨고 있는 몸을 감싸며 입 을 열었다. 낯선, 순식간에 엄청나게 쉬어버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자드는 어디…?” 휘안은 잠시 몸을 가누느라 시간을 들였고, 그 사이 그의 모습은 꺼져가는 등불처럼 몇 번 깜박이며 변해가고 있었다. 카라의 모습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었던 걸까. 키가 커지고, 긴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카라 자신의 거울상이 있던 자리에 이자드의 조금 지친 듯 피 곤한 얼굴이 자리했다. 카라는 견딜 수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얼굴을 보이지 마!” 휘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마저도 이자드의 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리고서, 이자드 가 짓지 않는 조롱하는 듯한 미소. “이게 내 본래 얼굴인데. 그럼 다시 네 모습을 띠라는 건가? 미안하지만 덕분에 그럴 여력 이 남아있질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말. “이자드를 어디로 보냈지?” 휘안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이제 기력을 다시 회복하고 있었다. “쿡쿡쿡…아하하하하하하. 정말 재미있어. 네가 벌써 이정도로 힘을 찾았는지는 몰랐는 걸.” “날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알고 있지.” “우린 세 번밖에 마주치지 않았어. 꿈 속에서까지 합치더라도” “그 전에도 만난 적이 있어.” 휘안은 이제 이자드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조금 더 풍부하고 감정적인, 그리고 조 롱하는 듯한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카라의 머리속으로 꿈 속에서 휘안이 했던 말이 스쳐지 나갔다. < 눈이 내리는 것을 봤지. 그게 너였구나. >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던 검붉은 빛 눈동자. “난 이자드가 어디 있냐고 물었어.” 목소리가 흔들렸다. 휘안은 살짝 눈을 감으며 입술을 빨았다. “글쎄. 어딜까?” “장난치지 마. 난 널 죽일 수도 있어.” 카라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차갑게 그 말을 뱉었다. 휘안은 마음 속까지 얼어붙은 듯한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네가 날 죽일 수 있다고? 글쎄. 자신의 힘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패 러노말 마스터.” “이자드는 어디 있어?” “- 어디 한 번…찾아보라구.” 그 말과 함께 그는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카라가 흠칫 놀라 반응한 것은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공터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휘안은 가버렸다. 이자드도 가버렸다. 꿈에서 깨어난 듯, 분노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굴러떨어지며, 카라는 멍청히 그 자리에 주저앉 았다. 조금 전까지 내부를 채우고 있던 힘의 흔적까지도 사라져 버렸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힘이 썰물처럼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만 해도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해 보였는데, 지금은 땅바닥까지 다 흔들리고 있다. 카라는 땅바닥에 흩어진 나뭇잎 어디쯤엔가 망연히 시선을 던지며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에 신음했다. 조금 전에 휘안과 싸운 것이 정말로 카라 자신이었을까?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그 힘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비현실적이다. 집을 떠났을 때에도, 혼자 길을 떠났을 때에도, 몇 번이나 이자드와 헤어졌을 때에도 세상은 여전히 단단했고, 아무것도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었다. 진짜 아버지가 누구고 자신 이 누구이며 자신의 힘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더라도, 세상이 전 쟁터가 되었다 해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들 하나하나의 무게가 엄청난 짐이 되어 자신을 짜부러뜨리는 것으로 다가왔다. 카라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은 채 숨조차 쉬지 않고 있었다. 따뜻한 손이 어깨 에 닿았을 때까지. “괜찮아?” 고개를 들어 보자 눈물로 지저분해진 얼굴의 파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매달려 있었다. 카라는 그 붉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들어서 낮게 나왔다. 파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카라에게 매달렸다. “미안해, 카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괜찮아. 이제 그만해.” “미안. 미안. 미안. 미안.” “그만하라니까!” 카라가 버럭 화를 내자 파이는 다시 결사적으로 매달려왔다. 휘안이 시켰니? 라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다. 카라는 한참동안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가, 결 국 파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정말이야. 괜찮아. 그냥 이것만 약속해줘.” “응! 응!” “……다시는, 절대 다시는 그 녀석의 말을 듣지 마. 알았니?” 파이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가까스로 덫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지. 카라는 거칠게 눈을 문지르고, 다시 한참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우리 어떻게 해?” 파이가 물었다. 조그마한 소리로. 카라는 파이의 불안한 시선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느샌가 여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튀어나와 그들 주위를 멀찍이서 둘러싸고 있었다. 카라 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기, 죄송합니다. 시끄러웠나요?” 걱정이 되어서 쫓아나온 걸까- 그 생각은 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의 눈에 어린 적 의와 경계심을 깨닫고서. 카라는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적의. 분노. 살의. 두려움.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카라는 사람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가 닿을 때마다 사람들은 움찔 하며 조금 물러나거나 그녀를 외면했지만, 적의와 반감은 누그러들기는커녕 더 높아지 고 있었다. “저…” “입닥쳐, 이 마녀야!” 누군가가, 뒤쪽에서 소리쳤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외친 자에게 더러 원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뒤편에 숨어서 도발 을 한 자에 대한 원망이겠지. 카라는 조그맣게 말했다. “난 마녀가 아니에요.” 아마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라는 입술을 떨며 다시,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을 해칠 마음도 없구요.” 약간 떨리는 목소리는 허무하게 사그러들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카라는 심호흡을 했다. 더 이상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고 부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마녀였으니까. 그리 고 그들은 미쳐날뛰는 마녀들에게 생활터전을 잃었다. 친척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카라는 파이의 손을 잡았다. “파이, 가자.” “어디로 가?” “이자드를 찾으러 가야지.” 이자드를 찾으러 가자. 그 말은 입밖으로 나오자 강한 실체를 띠고 일어나 카라의 마음을 점령했다. 그래. 이자드를 찾아야지. 괜찮아. 모두 괜찮아질 거야. 그들이 걸어가자 사람들은 움찔해서 조금씩 물러서 길을 만들었다.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두려움 때문에 덤비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얼마나 보았는지 는 알 수 없지만. 여관으로 돌아가, 남아있던 짐을 들고 다시 내려올 때까지 사람들은 적의어린 침묵으로 집 요하게 따라오며 지켜보고 있었다. 해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맞고 싶지도 않았다. 이 와중에 그렇게까지 몰아세우는 건 너무 비참해. 카라는 제발 아무도 덤비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며 파이를 데리고 여관을 나섰다. 해가 떴지만 숲 속은 답답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카라는 마음 속으로 자신의 호흡을 세면서, 다시금 얼얼한 무감각의 껍질이 마음을 감싸고 자라나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이자드를 찾아야지. 어디에서? 막막함을 느끼며 걸음을 잠시 멈췄을 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카라의 얼굴은 조금 밝아 졌다. 그래. 비델. 그 여자를 찾자. 11. 절반의 진실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낮,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물러나 앉아서 오로지 루이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때 그 접촉마저도 끊긴 것 같은 감각이었다. - 완전한 무감각을 감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사고 이외에는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은 상태.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그와 비슷 한 경험을 되살렸다. 그림자 계곡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하다. 그와 루이 사이에 존재하는 연 결통로가 완전히 가로막혀 버린 것 같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감각이 하나 돌아왔다. “젠장…”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욕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감각이 모조리 살아나며 제일 먼저 마비되어 있던 통증이 덮쳐들었다. 그 다음으로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욕설 소리가 들 린다. 그 다음으로는 피비린내를 맡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왼쪽 팔은 축 늘어져 감각이 없고, 양쪽 발 목에서 흐른 피가 말라붙기는 했지만 통증은 여전하다. 그럭저럭 움직여주는 것은 오른팔 뿐이었다. 그는 누운 채 오른팔을 들어올려 이리저리 움직여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체만 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까 조금 움직여보았지만 아찔한 통증에 몸이 맥없이 떨어져내린다. 갈빗대도 나간 모양이다. 열이 조금 오른 것 같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붙어 괴로왔다.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싶 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그는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내어 오른팔을 들어 가슴께에 갖 다대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리라 사나타나 Sarira Sanatana.” 잠시 반응이 없었다. 설마 마법이 듣지 않는 건가 걱정할 무렵에야 겨우 손바닥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퍼져나와 상처를 쓸었다. 힘은 약하게 흘러들어왔지만 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 다. 몇 번이나 그랬지만, 이번에도 다시 한 번, 치유 주문을 제대로 만들어두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무리 성정이 맞지 않는 편이라 해도 이것보다 도움이 될만한 것도 있었을 텐데. 그가 가진 치유 주문으로는 응급처치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상처를 조금씩 치료한 다음 그는 몸을 질질 끌어 차가운 석벽에 몸을 기댔다.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에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카라는 괜찮을까. 그는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며 생각했다. 휘안의 말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걱정한대봐야 할 수 있는 일도 없지만.> 그건 분명 일부러 한 말이다. 그리고 카라에게도 어느 정도 힘은 있으니까 ? 하지만 휘안이 작정하고 공격했다면 ?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은 그만두자. 지금은 그 말이 맞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려 고개를 몇 번 흔들고 다시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일단 자신이 나와서 감각을 느끼고 있으니 밤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마 음 속으로 루이를 불러봤지만 여전히 막막한 느낌 뿐이다. 휘안이 뭔가 장(場) 같은 것을 펴 놓은 걸까. 여기는 어디일까. 휘안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그것 역시 알 수 없었다. 문이 있기 는 했다. 그러나 어떤 구조로 만들어 놓았는지, 가느다란 홈이 문의 존재를 알려줄 뿐 손잡 이도 경첩도 없었다. 벽을 두들겨 보았지만 두께를 알 수 없는 둔탁한 소리만 돌아올 뿐이 다. 창문은커녕 빛이 새어들어올 틈도 하나 없다. 당장 벽 너머에 하늘이 있는지 땅속인지조 차 확인할 수 없었다. 결국 휘안이 직접 와서 말해주기 전에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자드는 한참이 지나 조사를 포기하고는 드러누웠다. 그는 욕설을 입밖으로 뱉어 힘을 낭비하지 않는 대신 오른 손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작스레 어둠을 가르고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배 안고프냐?” 그는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하긴 넌 원래 별로 먹는 게 없었지.” 목소리가 재차 날아오자 그제서야 그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어둠속에 녹아들듯 희미하게 녀석의, 휘안의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카라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있어 긴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어둠에 밝은 그의 눈으로도 표정은 전 혀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쭈그리고 앉은 자세나 목소리가 왠지 시무룩해서 이상했다. “카라는?” “글쎄다. 어딘가 돌아다니고 있겠지.” 퉁명스러운 대답이었지만 그는 안도했다. 적어도 카라를 해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항의했다. “왜 이러는 거지? 전에는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않았잖아.” “지놈한테 편한 건 잘도 기억한다니까. 그 꼬마가 그렇게 걱정되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안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도 참 괴상한 놈이야. 그 꼬마가 뭔지 알고 그러는 것 같지도 않은데…고아새끼들 끌고 다니는 거야 한두 해 일도 아니지만 그런 애들에게는 동정심 이상 줘본 적이 없는 거 알아. 걘 뭐가 다르든? 뭐가 다른지 알기는 알아? 그게 아니면 뭐냐. 기왕이면 하시피에 같은 미 인이 낫지 않아?”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런 류의 감정도 아니고.” “언제나처럼 꽤나 고아한 척 하는구나.” 휘안은 뭐가 재미있는지 혼자서 낄낄거리고는 손을 내저었다. “너란 놈, 옛날에는 더 재수없긴 해도 이보다는 재미있는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이자드는 아예 상대를 하지 않으려다가 마음을 돌려 대꾸했다. “옛날 ? 어떤 옛날을 말하는 거지?” “말한들 알기나 하냐. 벌써 한옛날에 지워버린 기억일 텐데. 네녀석의 가장 재수없는 능력 중 하나지. 마음에 안드는 건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 말이야. 지난 번에 내가 한 말도 벌써 까맣게 지워버렸겠지, 보나마나.” 휘안의 말투에 다시 증오와 짜증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자드는 입을 다물고 그 말에 대 해 생각해 보았다. 지난번에 한 말? 뭘 말하는 거지? 휘안은 혼자 뭔가 중얼거리더니 재미 있는 생각을 해낸 듯 다시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침 전쟁도 터지고, 더 이상 내가 손을 안대도 제멋대로들 미쳐돌아가니까 지루하던 참 인데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그 꼬마가 이리 찾아올 수 있을까?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카라가 여기까지 찾아온다? 이자드는 경악하며 휘안을 쳐다보았다. 휘안은 턱을 쓸며 말했 다. “흐음 - 역시 내가 좀 도와주는 게 좋겠지. 혼자 찾아내기는 힘들 테니 말이야.”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다음 순간, 이자드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고 몸을 웅크려야 했다. 휘안이 그대로 옆구리를 걷어찬 것이다. 신경질적이라기보다는, 심심함을 푸 는 듯한 발길질이 몇 번. “자꾸 그렇게 딴지걸지 말라구. 대화를 하잔 말이야, 대화를.” 대화 같은 소리 하시네. 이자드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휘안이 손 등으로 뺨을 후려쳤다.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세게. 다음이 날아오기 전에 그는 반사적으로 오른손바닥을 펴며 또렷하게 외쳤다. “파사Pasa!” 펑 ? 힘과 힘이 부딪치는 둔한 폭음과 더불어 푸른 빛의 회오리가 잠시 어둠을 찢었다. 반 응은 바로 나타났다. 투두둑, 이자드의 얼굴과 목 부근으로 따듯한 액체가 떨어지는가 싶더 니, 바로 휘안이 손을 뻗어 이자드의 목을 움켜쥐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죽고 싶냐?” 죽이지 그래- 이자드가 그 말을 내뱉기도 전에, 목을 누르고 있던 날카로운 손톱이 들어가 며 힘이 느슨해졌다. 휘안은 조롱하듯 다시 말했다. “못 죽인다는 걸 알고 개기니 그런 협박은 안통하겠군. 어쨌든 기다려 봐. 재미있는 걸 보 게 해 줄 테니.” 휘안은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 경쾌한 동작으로 일어섰다. 한쪽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 지만 그리 큰 상처는 아닌 모양이다. 하긴,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상처가 타격의 정도를 드러 내는 것은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휘안이 양손을 들어올리더니 씩 웃으며 멀리 벌렸 다. 벌린 손 안에서 검은 빛이 일렁이며 긴 창 같은 모양이 되는가 싶더니, 퍼억! 소리와 함 께 이자드를 바닥에 꽂아버렸다. 불에 달군 칼날이 배를 뚫고 바닥에 꽂힌 것. 그 정도에 비유하면 딱 맞을 듯한 통증이 전 신으로 퍼져나갔다. 피는 많이 흐르지 않았지만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당연히 머리도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휘안은 만족스러운 듯 손바닥을 비비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벌로 잠시 동안 이대로 놔두기로 하지. 아참, 목이 마르지? 물 정도는 마시게 해줘야지. 다음에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자구.” 휘안은 분명 그의 힘의 구현일 검은 창을 회수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이자드의 머리맡에 물그릇을 내려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져 버렸다. 이자드는 아득할 정도 시간이 지나 창 이 서서히 녹아 사라지고 겨우 통증이 조금 가라앉은 다음에서야 혀를 깨물고 싶은 정도로 후회했다. 그나마 겨우 모았던 힘을 낭비해 버리고 이런 결과라니. - 넌 휘안에 대해서는 도무지 냉정하질 못하잖아. 루이의 목소리가 머리속 어딘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이자드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루이가 그리워질 정도라니, 스스로가 한심해진다. 재미있는 일이라는 건 또 뭘 꾸미고 있는 건가. 그리고 카라는……초조해진다. 기회가 올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그는 물을 마시고 나서 기침을 몇 번 하고 피를 약간 토해낸 다음, 기억해 냈다. 잠이 많아지고 힘이 부쩍 약해진 것은 지난번에 휘안이 뭔 가 한 마디 말을 했을 때였다.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말 한마디만으로 그 를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뜨릴 수 있다면, 언제든 그럴 수 있었다면 왜 전에는 그러지 않았을까. ** 더 이상 느긋하게 여행할 여유가 없었다. 휘안을 찾으려면 비델을 찾아야 한다. 비델에 대해 서라면 아크가 알고 있을 것이다. 레투스로 어서 돌아가야 했다. 여관을 등지고 떠나 첫번째 로 마주친 사람들에게서 말을 한 마리 샀다. 값을 워낙 비싸게 부르는 바람에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털어내야 했지만, 그래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날렵한 명마는 아니었지만 ? 당연하다. 시골 마을에 그런 말이 있을 턱이 있겠 는가 ? 튼튼한 다리를 가진 얼룩백이 회색 말이었다. 카라는 말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재 갈을 풀었다. 마구를 모두 내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제 말잔등에 훌쩍 뛰어오를 만큼 날 렵하지 못했고, 이젠 안아올려 말등에 앉혀줄 사람도 없다. 골치아픈 문제는 파이였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파이는 말에 타려 하지 않았다. 말에 타느 니 차라리 옆에서 뛰겠다는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결국은 파이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출발해야 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말을 몰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파이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리는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야아아아- 호!” 카라가 말을 달리자 파이는 신이 나서 깡총거리며 숲길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보조를 맞추 려고 속도를 올리자 귀에 바람소리가 윙윙거렸다. 말발굽소리가 경쾌하게 귀를 때리고 일정 한 리듬으로 몸이 튀어오른다. 허벅지를 꽉 조이고 말등에 낮게 몸을 숙여야 했다. 머리카락 이 거칠게 날렸다. “꺄호- 달려라 달려-!” 파이는 오랜만에 마음껏 달릴 수 있게 된 것이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더 빨리 달려보라고, 응원이라도 하듯 팔을 내저으며 맨발로 흙바닥을 힘차게 내딛는다.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언제나 일행에서 가장 느리고, 가장 빨리 지치고,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카라 만 없었다면 훨씬 빨리 갔을 길을, 자신을 배려하느라 모두들 천천히 걸었던 것이다. ‘결국, 언제나 내가 짐이었던 건가.’ 파이에게조차도. 쓰라린 깨달음이었다. 그래도 땀에 젖도록 달리고 나니 한결 기분이 개운했다. “워워- 파이!” 말을 달래면서 앞서서 달려나가는 파이를 소리쳐 불렀다. 파이는 멈춰서 돌아보면서도 연신 발을 구르고 있었다.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은 마구 흔들려서 오히려 더 보 기좋게 다듬어졌다. 카라는 엉덩이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쓸어 가다듬었다. “이 말은 그렇게 오래 달리지 못한단 말이야. 이제 좀 천천히 가자. 응?” 아직 뭔가 부족한 듯 입술을 내밀면서도 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 안아파?” 파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카라는 일단 말에서 내려 짐꾸러미를 풀었다. 아침 도 먹지 않은 채 길을 떠났다. 이제서야 위장이 맹렬하게 허기를 호소해 온다. 길가 숲 속으 로 약간 들어가, 말에게는 풀을 뜯기고 파이와 함께 약간의 과일과 빵을 먹었다. 지도를 펴들고 어느 쪽 길로 돌아가야 레투스에 빨리 도착할 수 있을지 고심하다가 겨우 방 향을 결정하고 고개를 들자 파이가 보이지 않았다. “파이! 파이!!” 목청껏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파이까지. 카라는 불안한 마음에 지 도와 음식을 챙겨넣고 주변을 뒤지기로 했다. 그 때 파이의 붉은 머리가 불쑥 저쪽 덤불 위 로 솟아올랐다. “파이! 어디 갔었어? 금방 떠날 거라고 했잖아.” “저기 마을이 있어.” “마을?” 파이가 가리킨 것은 길이 아니라 숲 쪽이었다. 카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파이를 앞세워 그쪽 으로 걸어갔다. 마을은 있었다. 버려진 채, 텅 비어 적막에 싸여 있기는 했지만 버려진 지 오래되어 인기척 이 다 지워지고 곰팡내가 들어찬 집들이 아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카라는 말을 끌고 터벅터벅 걸으며 집집의 창문을 잠깐씩 들여다보았다. “떠나버린 건가? 하지만 숲 속에 있는 마을이잖아. 대개는 숲속으로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었는데.” 중얼거려 보았지만 파이는 그 말을 아예 듣지 못한 듯 반응이 없었다. 카라는 조금 더 돌아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가자. 이쪽으로는 길이 없어.”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을 때 언뜻 마을 안쪽으로 낯선 풍경이 눈에 잡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낯선 광경이라는 뜻이었고, 이제는 꽤 익숙해진 광경이다. 카라는 말 을 내버려두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벼락을 맞은 듯 불에 탄 자국이 남아있었다 ? 집 몇채 정도 넓이만큼. 까맣게 타버린 땅 위로 드문드문 나무조각과 그릇 조각 같은 것들이 떨어져 있었고, 양 끄트머리로는 반쯤 타다 만 집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허물어져내린 벽 안쪽으로 아직 그릇인 놓여 있는 식탁이 보였다. 새까맣게 그을음을 뒤집어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뭉치들이 곳곳에 있었다. 어떤 것은 사람크기만했고 어떤 것은 조금 작았다. 확인해보기는 두려웠다. 그냥 불이 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번개나 불덩어리가 떨어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카라는 잠시, 말없이 거기 서 있었다가 돌아서 나왔다. “가자.” 길을 제대로 택했기 때문인지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걷다 뛰다 하면서 오후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저녁 무렵쯤이 되어서는 셋 다 ? 카라와 파이, 그리고 말까지 ? 모두 지쳐 있었고,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난감해졌다. 카라는 일단 말에서 내려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했다. 불을 피우고 추위를 쫓 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노숙을 하기에는 망볼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쩐 다 ? 그냥 아무 생각없이 자버릴까? 그런다고 큰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은데. 물도 별로 없고, 과일이 다 떨어져가는 것도 문제였다. 파이는 거의 과일만 먹었으니까. 중간에 있던 마을에서 물이라도 채워왔어야 하는 건데. 후회 막급이다. 그리고 따뜻한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편안한 잠자리까지는 무리라고 해도. 카라는 이마를 싸쥐고 고민했다. 뭔가 이럴 때 쓸만한 능력은 없는 건가? 불을 피우는 건 몰라도 땅을 무너뜨리거나 바람을 내놓는 건 실생활에 도움이 안된다. 뭔가 방법을 생각해 보아도 막연하기만 해서 소용이 없다. 단순히 머리속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힘이 발현하지는 않는다. 하루라도 빨리,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휘안은 물론이고 당장 비델을 만날 생각만 해도 말이다. 그렇게 고심에 잠겨 있는데 하늘이 갑자기 환해졌다. 황혼빛인가 했지만 방향도 그렇고, 이렇게 밝은 오렌지색 불빛이라니 뭔가 이상하다. 엷은 주홍색의 빛은 잠시 동안 하늘을 물들이며 밝게 퍼져나가 다가 스르륵 꺼져들어가고, 사라지는가 싶다가 다시 밝게 타오른다. “예쁘다 ? “ 파이는 입을 벌리고 감탄하고 있었다. 카라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오렌지색의 빛. 저건 마법 색이다. 마법사가 있는 걸까…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걸까? 하지만 빛은 한 가지 색깔 뿐이 었다. 싸우고 있는 다른 빛은 없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마녀인가? 아니, 그렇 지는 않을 것이다. 지켜보고 있는 사이 하늘에 오렌지색 불꽃이 폭죽처럼 여러 개 피어오르 고, 곧이어 지평선에 더 가까운 쪽에서 또 하나의 주홍빛이 하늘을 태웠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빛깔이다. 불길이다. 어딘가가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순간 아까 보았던 타버린 뭉치 들이 떠올랐다.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카라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없이 말등에 올라타며 외쳤다. “파이, 여기서 기다려!” 말을 달리는 사이에도 오렌지색 빛은 하늘을 점점이 수놓으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이다. 평소와 달리 말을 거칠게 몰고 있다는 것도, 일직선으로 뚫고 나 가는 길이 본래 숲속이고 달리는 사이 나무들이 밀려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조급했다. 언덕을 넘어서자 눈 아래로 꽤 큰 마을이 펼쳐졌다. 불길이 치솟고, 곳곳에서 악다구니와 비 명소리가 터져나오며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넘어지고 끌고 떠밀며 나뒹구는 광경. 하늘에 서 우박처럼 오렌지색 불똥이 우수수 떨어져내리고 있다. 더 생각할 겨를없이 일단 양손을 뻗으며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그만!!” 거짓말처럼 불꽃의 비가 공중에서 딱 멈춰섰다. 카라는 잠시 팔을 뻗은 채 멀뚱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이런. 이제 어떻게 하지?’ 그렇게 쉽게 멈춰줄 줄은 몰랐지만, 워낙 반사적으로 벌린 일이라 다음 생각까지도 없다. 난 처하게 굳어있는데 때마침 다른 자가 그녀를 도와주었다. “누구냐?” 공중 어디쯤에서 날아온 째진 목소리는 다름아닌 오렌지빛의 주인공이었다. 카라는 옳다구 나 생각하고 손으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외쳤다. “돌아가!” 넓게 퍼져 마을 전체 위에 멈춰섰던 불꽃의 비가 일제히,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 공중에 떠있는 사람을 쳤다. 당황한 비명과 함께 그자의 주위에 오렌지빛의 벽 같은 것이 나타나 가까스로 불꽃을 막아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공중에서 그자의 몸이 뒤로 밀리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손쉽게 풀리자 카라는 마음을 놓으며 내친 김에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이제 요령을 좀 알겠다. 억지로 떠올리고 생각을 해서는 오 히려 제대로 들어먹지 않는다. 아주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명령하는 것. 카라는 비스듬히 마을 위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눈앞에 선명한 푸른빛이 번득이더니 선명한 빗소리가 내부를 채웠다. 성공이다. 제대로 먹히 고 있다! 갑작스럽게 공중에서 떨어져내리기 시작한 비에 곳곳에서 불길이 사그러들고 있었 다.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순간적이지만 기 뻤다. 그래서 잠시 그 마법사에 대해 잊고 있었다. 아차, 하고 생각을 돌이켰을 때는 이미 자신을 향해 마구잡이로 공격이 날아오고 있다. 카라는 팔을 올려 머리를 감쌌다. 퍽- 퍼퍼퍼퍼퍼퍽- 머리 위에서 주먹으로 삼베자루를 두들기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대단한 아픔은 없었지만 팔 주위가 따끔따끔하며 정전기가 일었다. 뜨거운 수증기가 일었다. 살갗이 불에 데인 듯 아팠다. 한참이나 계속 떨어져내리던 불덩어리가 멈추자 카라는 팔을 치우며 화가 나서 외쳤다. “비겁하게! 나와!” 그렇게 말하기 전에 이미 그자는 카라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카라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우물우물 말했다. “이상하군. 넌 뭐야?” 어린아이 같은 말투에, 들뜬 듯 기묘한 억양. 나이 지긋한 점잖은 노인의 얼굴을 하고서. 등 골이 오싹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뭐냐니. 지금 저 광경이 안보여?” 카라는 열받은 김에 손을 뻗어 아래쪽 마을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노인은 눈을 희번덕 거리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자각은 전혀 없어보인다. “뭐야 넌. 왜 남의 실험을 방해해? 난 마법사라구. 마법사. 알아?” “실험이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제정신이야?” “불쾌하구나. 어린아이가 존경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니.” “존경할만해야 존경을 하지. 뭘 보고?” 발끈해서 대꾸하자 노인은 못마땅한, 아주 화가 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내 힘을 존경해야해. 교훈을 받아야겠구나.” “댁이나 교훈을 받아!” 카라는 참지 못하고 사고(思考)의 심상으로 그 노인을 후려쳤다. 이자드를 흉내냈을 때와 같 은 푸른빛이 아니라 무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휘안을 때린 것과 비슷한 느낌의 파동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노인은 손을 올려 카라를 가리킨 채 열에 들뜬 것 같 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강하단 말이다…날 비웃는 놈들은 가만 안…두겠…어……” 목소리가 띄엄 띄엄 끊어진다 싶더니 천천히 늘어진다. 그러더니 노인은 스르륵 무너져내렸 다. 그를 노려보던 카라는 어리둥절한 채, 그 유리알 같은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허우적거 리며 얼굴에서 빠져나와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을…그 몸이 가운데부터 뭉개지며 핏덩이로 변해 땅으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보았다. 후두둑. 아직 내리고 있는 빗줄기에 뒤섞여, 피와 고깃덩이가 땅에 흩어져내렸다. 카라는 입을 막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욱…” 아래쪽, 마을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이겼다! 이겼어!!” “살았다!!” “우와아아아아-!” 기쁨에 가득찬 목소리. 무엇을 보고? 왜? 내가 그 마법사를 죽였기 때문에? 불덩이를 막고 비를 뿌렸을 때 느꼈던 고양감이 흔적없이 사라지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입 을 막고 수풀가로 달려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토해냈다. 반쯤 소화된 음식을 다 게워내 고도 신물이 올라왔다. 노란 액체를 토했다. 자신이 견딜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잘난 척 힘을 과시하며 나서서,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동정심이나 선의 따위는 모두 거짓. 거짓. 거짓이었다. 결국은 힘을 과시해 보이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 노인은 미쳐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과 뭐가 다르지? 루이가 있다면, 지금 곁에 루이가 있다면 이런 일쯤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을 지도 몰라. 지 금 루이가 옆에서 웃으며, 어쩔 수 없잖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준다면. 하다못해 이 자드의 어색한 위로라도 좋았다. 아니 위로가 아니라 야단을 맞는다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노란 물조차 나오지 않을 때까지 토해내고 나서 카라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눈물은 그 이상 고이지도, 아래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 사라져 버렸다. 말라붙었거나, 스며들 어 버린 것처럼. ------------------------------------------------------- 아크는 거상 시진의 저택 꼭대기 테라스에서 몸을 앞으로 내민 채 침울한 얼굴로 도시를 내 려다보았다. 레투스는 내전으로 인한 긴장감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온한 편이었다. 바깥에서 끊임없이 도착하고 있는 나쁜 소식들을 감안하면, 시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나 소란은 대단 치 않은 문제라고 해도 좋았다. 레투스 시내는 통제되고 있었다…그의 이름 아래 모인, 사실은 거상들의 돈으로 모았으나 지금은 그의 부하들이 장악하고 있는 군대에 의해, 가까스로. 그리고 마녀들 중 수장과 원로 급은 다 여기에 있다. 정확히는 아직 제정신인 마녀들이. 아크는 마녀들 문제를 생각하며 손 가락으로 난간을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재상은 노망이 났다.” 그는 씹어내뱉듯 말하며 몸을 빙글 돌렸다. “그래도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노친네였는데 말이야. 이건 미쳤다고밖에 볼 수가 없 어.”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 속수무책이기는 고만고만한 수준 아니던가. 재상이 약을 푼 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시큰둥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아크는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지만, 핀잔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 의 부하들과 상인들은 며칠 전에 도착한 이 알 수 없는 젊은이가 아크 곁에 있는 것도, 아 크에게 함부로 구는 것도 불만스러워했지만 ? 아크는 그가 긴요한 패임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녀와 마법사들이 미쳐 날뛰는 원인을 알고 있었고 그 정보를 내주었다. 해결책까지 내놓지는 못했지만. 아크는 비싼 탁자 위에 발을 올리고 느긋하게 앉아있는 진 을 일별하고 뒷짐을 진 채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말했다. “온통 나쁜 소식 뿐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쁜 게 뭔지 아나? 대체 전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거야. 여길 떠날 수도 없고, 다른 곳을 공격해 들어 갈 수도 없어. 마을이 몇 개나 불탔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또 얼마만큼의 사람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이래서는 방침을 세울 수가 없어.” “내 의견은 이미 말한 대로랍니다, 왕자님. 재상과 휴전하고 사태를 진정시키는 게 좋을 거 라고 말입니다.” 진은 종종 나오는 예의바르지만 뒤틀릴 대로 뒤틀린 어조로 대꾸했다. 아크는 흘긋 그를 노 려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테라스로 걸어나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불쑥 물었다. “마녀들은, 어떻게 하면 좋지?” 진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피난민이 많아질수록 마녀들에 대한 시선이 나빠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되겠지.” 진은 건들거리며 읽고 있던 종이 몇 장을 공중에 흩뿌리며, 조롱하듯 덧붙였다. “뭘 고민하는 거지? 배반할 시기? 그들을 버리느냐 마느냐는 이미 선택 외일텐데.” 아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녀들이 그를 어느 정도 도와주었다고 해도, 그리고 모든 마녀와 마법사들이 다 미친 것은 아니라 해도- 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을 버려야 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해독제가 없다면,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려면 엄청난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최선의 결과라봐야 마법사 없는 세 상에 사는 것 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일이었다. “아크 왕자님이든 전하든 간에, 결단을 빨리 내리는 게 좋겠습니다.” 진이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등을 바로세우며 말했다. “이 보고서들 좀 읽어봤는데, 분위기가 정말로 안좋아. 여기저기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만 하면 모두들 그걸 마법 탓으로 돌리고 있어. 실제로 마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냐 아 니냐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아. 말세라는 거지. 집을 잃고 쫓기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버틸 것 같아? 백성들이 불안에 쫓겨 터지기 시작하면 정부고 나발이고 끝장나는 거야. 희생양이 필요해. 기왕이면 말발 끝내주는 선동가도 하나 있으면 더 좋고.” 말발 끝내주는 선동가-라는 대목에서 아크는 진을 쳐다보았다. 거울 같은 은회색 눈동자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에게는 카르트의 얼마 안되는 수비대보다 나은 쓸모가 있다. 즉위하기도 전부터 이런 지저분한 일들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었지만 ? 정말 로, 진의 말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보고서들을 지 나쳤다.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서해바다 중간에 갑자기 출현한 소용돌이라든가 샤미르의 숲 한가운데를 태우고 지나간 벼락, 심지어 개가 병들어 죽거나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가 썩 어나가도 불길한 징조요 마법의 농간이었다. 더 소급해서, 몇 달 전에 시더에 갑자기 내렸던 눈까지 소문에 더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증폭되고 과장되고 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 뿐이다. 적어도 폭동보다는 전쟁 이 나은 것이다. 아크는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마녀들은 건드리지 않겠어.” “그러면?” “마법사들 쪽을 먼저 처리하지.” 서늘한 기류가 방안에 흘러들었다. 차갑지만 무거운 공기였다. 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깍지껴 머리에 올리면서 이자드들을 생각했다. ** 20년전, 창성(創城) 아딜 테파 망망대해에 뜬 섬처럼 창공에 자연스럽게 떠올라 있는, 날개가 달리지 않고서는 올라갈 방 법이 없는 천공의 아성이며, 긴나라족의 본성인 이 아름다운 성에는 어린아이가 하나도 보 이지 않았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본래는 이 성을 본성으로 하고 많은 이들이 아래쪽 바다에 있는 섬에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종족 전부를 불러모아 도 성 외벽까지 배치할 만큼의 군사도 없을 정도로 적은 수만이 남아 있었다. 이 아름다운, 그러나 몰락해가고 있는 종족의 왕 파류나는 아름다운 은색의 후광에 싸인 채,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는 몰락해가고 있는 중이오……최근 20년간 태어난 아이는 단 둘 뿐이었지. 그나마도 정상이 아니었고.” 쾅! 쾅! 쾅! 느리고 둔중한 진동이 성 전체를 뒤흔든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성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는 생명없는 인형들의 끝없는 기둥이었다. 베어내도 베어내도 아무 동요 없이 빈 자리를 메우며 다가드는 인형들의 물결. …그리고 그자가 왔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검은 심연의 눈동자를 가지고, 긴 창을 들고. “위대한 죽음…” 파류나는 경외감을 담아, 꿈꾸는 듯한 하늘색 눈으로 그 자를 그렇게 불렀었다. 그 표정 속 에서 그는 슬픔과 체념을 읽어냈었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의 종족이 직면해 있는 폐허와 절 망에 대한 분노가 밑바닥에 잘 숨겨져 있었던 것을. 이자드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천장을 노려보며 의미없는 욕설을 뱉았다. 몸을 약간 뒤척 이는 바람에 다시 통증이 달려들었다. 그 때, 고개를 돌려 먼 수평선을 내려다보던 파류나의 옆얼굴에 애잔함을 느낀 것은 그의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루이의 것이었을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때로는 루이의 감정이 그에게 스며들어오고, 때로는…아니,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본다. 파류나를 만난 것은 긴나라족이 멸망하기 10년쯤 전의 일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처음에 만난 것은 그가 아니라 루이였다. 파류나는 우연히 반쯤 죽어 가사상태에 놓여있던 이자드 를 발견하고 간호했고, 다음 날 아침 상세를 살피기 위해 찾았다가 죽어가는 검은 머리의 인간이 아니라 새근새근 잘 자고 있는 금발의 젊은이와 맞닿뜨렸다… 그가 가사상태에 머무른 한 달 동안은 루이도 함부로 길에 나설 수 없었기에 파류나왕의 성 에 머물렀으며, 그 기간동안 그에게 완전히 반해 버렸었다. 이자드가 그 지경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은 언제나 그렇듯 휘안과의 싸움 때문이었다. 그 무렵 휘안은……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기억이 확실 하지 않다. 군데군데 빈 구멍이 난 것처럼 공백이 남아 있었다. 자연스러운 망각의 작용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미해진 게 아니라, 아무 규칙도 없이 드문드문 뚫려있는 기억 의 구멍들. 그리고 그것마저도 어느 순간부턴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다. 그곳에 새하얀 공백 의 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 한참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아마도 200년 전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200년. 그 사이 처음으로 휘안을 만난 것이 언제였지? 미친 듯이 기억의 책장을 앞뒤로 넘겨 보았지만 드문드문한 조우에서 그는 언제나 휘안을 이미 알고 있었다. 4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150년 전에도. 이자드는 머리를 감싸며 옆으로 돌아누웠고, 그 움직임 때문에 살아난 통증에 신음하며 핏 기잃은 입술을 깨물었다. 육체의 고통이나 통증은 익숙하다. 그런 것은 견디면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 런 기억의 공백에 시달릴 때면 찾아들어 그의 심장 어디께엔가 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그 고 통은 어쩌면 좋을까. 그 구멍으로 차갑고 미끈한 뱀이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뭔가 좀 생각나?” 문득 이마를 짚어오는 손과 뒤따른 목소리에 그는 순간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정신 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제멋대로 흘러나가고 있은 다음이었다. “카라? 여긴 어떻게 ? “ 그리고서 그는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또 한바탕 광태를 부리리라 생각했지만 휘안은 말없이 그의 이마를 짚은 채 물그릇을 들어 그의 입에 대주고 있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시원한 물과 함께 그 손의 서늘함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휘안은 이자드가 물을 몇 모금 삼키고서 더 이상 받아넘기지 못하자 물그 릇을 떼고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휘안을 올려다보았다. “왜. 내가 시중들어주니 감격스러워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 “흠. 병주고 약주고지.” “당연한 소리를. 약을 먹이든 붕대를 감아주든 회복을 시켜놔야 또 괴롭히지.” 휘안은 태연하게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서 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치료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자드는 될 수 있는 한 편한 자세를 유지하고 누워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휘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 속에서 문득 루이를 생각했다. 이곳에 갇힌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가 종종 의식을 잃은 시간을 빼더라도 ?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 루이 가 ‘없다’는 것은. 마치 세상에 낮과 햇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듯이, 끝없이 밤만 계속된다는 듯이 ? 이자드, 그만이 그 위치, 그 육체적인 자리를 차지한 채 잠들고 깨 어날 뿐이었다. 왜? 그리고 어떻게? 휘안이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궁금했지만, 그에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있는 휘안을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아까의 상념으로 돌아가려 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뿐더러 통증으로 엉망이 된 몸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에 빠져드는 수 밖에 없었다. 달갑지 않은 생각까지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까지 생각했을 때 겨 우 휘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이 많겠지. 그러라고 일부러 루이까지 치워버린 거니까 말이야.”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간다.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하냐?” “궁금하다면 말해 줄건가?” “당연히 안해주지. 혼자 괴로워하는 편이 즐겁잖아.” ‘누가?’ 라고 물어주고는 싶지만 그럴 기운도 없다. 휘안은 혼자 키득거리다가 다시 말했 다. “난 루이가 싫어.”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말투. 이자드는 헛웃음을 삼켰다. 휘안은 말을 계속 이었 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도 네 마법력과 루이를 한꺼번에 묶을 수는 없거든. 둘 중 하나만 고 르려다보니 역시 루이와 수다떠는 네녀석이 더 보기 싫어. 그렇게 된 거니까, 다친 걸 치료 해줄 수가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해 달라구.” 휘안은 태연히 그렇게 말했지만 이자드로서는 속이 뒤집힐 일이었다. 그러니까 루이와 교대 하지 못하게 만든 대신 마법력을 묶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허튼 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계속 밟아댔다는 얘기가 아닌가. 몸이 이지경이어서는 마법이고 뭐고 소용이 없을 테니까… 빌어먹을 자식. “아참, 그거 아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왕자와 재상이 합심해서 마법사들과 전쟁을 벌일 예정이야. 재미있을 것 같지? 꽤 화려할 텐데, 너한테 못보여주는 게 유감이다.” “그게 유감이라면 여기서 내보내주면 되잖나.” “어어, 그럴 수야 없지. 기껏 여기까지 초빙해 왔는데 말이야.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을 짜 냈냐 하면 말이지, 정말 나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이 있을 때는 네게 보여줄까 해. 이런 걸 써서 ? “ 휘안은 손가락으로 어두운 허공을 둥글게 저었다. 그러자 맑은 물에 검은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밝은 부분이 소용돌이치며 어둠을 걷어내더니 수정구의 네배쯤 되는 크기의 원이 완 성되었다. 원은 완성되자마자 바로 다시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원에 무엇인가 다채로운 색 채가 비쳤지만 뚜렷한 영상은 아니었다. “어때. 근사하지?” 이자드는 실성한 것처럼 히죽히죽 웃고 있는 휘안에게 잠깐 시선을 던지고는 다른 쪽 벽으 로 눈을 돌렸다. 보통 이쯤이면 날 무시하는 거냐 운운하며 버럭 화를 낼 때가 됐는데, 그 대신 날아온 것은 차가운 조롱이었다. “뭐야. 넌 외면하는 것 외에 모면하는 방법을 모르냐?” 별 것 아닌 비야냥이었지만 폐부를 찌르는 말이어서, 이자드는 다시 휘안에게 고개를 돌리 고 말았다. 카라의 모습을 한 그의 숙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넌 어째 변할 줄을 모르냐. 매번 내가 힌트를 주지 않으면 완강히 진실을 외면하려고만 하니.” 이자드는 그저 그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불신의 빛이 가득했지만 희미하게 의문의 감정도 묻어있는 눈빛으로. 휘안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패러노말 마스터가 진짜로 뭘 말하는지 알고 싶지 않냐?” 이자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의심스럽게 되물었다. “그걸 네가 알고 있다고?” “물론 알고 있지. 너와 루이가 어쩌다가 그런 몸이 됐는지도 잘 알고 있고 말이야.”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다. 이자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휘안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휘안은 무릎을 세워 앉은 채 킬킬거리고 웃었다. “아. 그 얼굴 마음에 드는걸. 궁금한가 보구나.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겠 지만, 확신은 없지? 잘 생각해 보면 기억도 희미할 테고, 내가 널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 은 근거없는 생각도 좀 들고 말이야. 안그래? 사실은 너도 알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런 느낌 이 들겠지.” 그는 혼자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키득거리다가 손을 내저으며 일어났다. “맞아. 급한 일이 하나 있는데 노닥거리다가 깜빡했는걸. 다 네가 궁금해하는 일들을 알려 주기 위한 준비니까 나에게 감사하며 기다리라구. 생각도 많이 하고, 기억도 좀 되살려 봐. 달리 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는 천진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이자드는 끓어오르는 화 를 이기지 못하고 성한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부근에서 달그락 소리가 울렸다. 그는 멈칫 하고 힘겹게 몸을 굴려 엉거주춤하게 엎드린 자세로 주위를 더듬어 보았다. 그릇이 있었다. 손으로 잡자 따뜻한 국물이 약간 넘쳐흐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릇을 쥔 채 숨을 죽였다. 마음 속에서 광폭하게 날뛰는 분노의 고삐를 잡아, 그 그릇을 던져버리지 않고 입가로 가져 갈 즈음에는 이미 국물이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 숲 외곽이 가까워진 것은 다시 해질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카라는 속도를 늦추고 말에서 내렸다. 전력을 다해 달려온 탓에 땀을 흘리고 있는 말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걷는다. 고민은 다름아니라 여관에 묵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제 몸 지킬 정도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헛점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여관에 드는 것보다 한데서 잠을 자는 편이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사실도. 무엇보다도 사실은 사람과 맞닿뜨리고 싶지 않았다. 사흘 동안은 파이와 얼룩백이 회색말 외에 다른 존재에게 신경쓸 필요가 없었는데. 누군가와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때로는 오해를 받거나 공격당하 고…그래서 또 누군가를 죽이고. 그런 것들이 두려웠다. 결국 터벅터벅 걷던 걸음은 서서히 늦춰지다가 아예 멈추고 말았다. 카라는 파이를 돌아보 며 애써 웃음지었다. “오늘도 숲에서 자야겠는걸.” 그때였다. 숲에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나무를 뒤흔들었다. 새들만이 아니었다. 작은 동물들이 나무 위, 나무 아래에서 튀어나와 이리저리 내달리고 방향을 잃은 듯한 벌레들이 소란을 떨었다. 숲 안쪽에서 조금 더 큰 동물들이 땅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공교롭게 도, 그들이 달리고 있는 방향은 정확히 카라에게 향해 있었다. 그대로 서 있다가는 곧 선두 에 선 사슴뿔에 받힐 상황이었다. 대개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부딪치면 공포감 때문에 굳어버린다지만, 그럴 정도로 평탄한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았다. 카라는 재빨리 파이를 나꿔채어 ?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이럴 때면 파이가 더 빨리 피하곤 했지만 ? 뛰어올라 위쪽의 가지를 붙잡았다. 두두두두두- 굉음을 울리며 짐승떼는 관목림을 짓밟고 새로운 길을 만들며 지나갔다. 한동 안 귀가 멍멍할 정도의 아수라장이었다. 겨우 그들이 지나가고 나자 아래에 밟혀죽은 어린 시체가 몇 구 남아있을 정도로. 카라는 가지를 놓고 다시 땅에 발을 디디며, 대체 무엇이 저 들을 그렇게 공포에 떨게 했는가 의아해하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카라는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번쩍이는 금빛 눈동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그림자가 움직이듯 소리없이, 그러나 얼이 빠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고요히, 어쩌면 아름다움까지 느껴질 정도로 우아하게. ? 거대한 검은 표범, 혹은 표범의 모 습을 하고 있었다. 카라는 잠시 숨도 쉬지 못하고 그 표범을 쳐다보다가 깨달았다. 저것은, 귀령(鬼靈)이다. 카라는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시며 놈을 주시했다. 확실했다. 끄트머리에서 공간에 잠겨들 어간 듯한 희미한 윤곽선, 반쯤 투명하게 뒤편의 사물을 비추는 흐릿한 입체감. 그러나 귀령 이 있다면 계약자인 마녀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 표범 모습을 한 귀령은 이제 완연히 기세를 줄여 탐색하듯 어슬렁거리며 카라와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마치 악몽속의 존재가 꿈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귀령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눈동자만이 실체감을 갖고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서, 귀령으로서는 있을 리 없는 증오와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분노를 감지하고 카라는 다시 한 번 부 르르 몸을 떨었다. 저것은, 지금 막, 계약자인 마녀를 잡아먹은 놈이다. 귀령이 마녀를 삼킬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지 못한다. 적어도 헤웬의 귀령 ? 그 폭풍의 새는 이미 두 명의 마녀를 ‘먹었다’지만 이렇지 않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 까? 새로운 마녀와 계약을 하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폭주하는 걸까? 하지만 최근에 만나거 나 이야기를 들은 마녀들이 어떻게 변해 버렸는가를 생각하면 이게 정상적인 상태라고는 생 각할 수 없었다. - 왜 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카라는 마음 속으로 대상없는 항의를 던졌다. 파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그녀를 잡은 손을 통해 전해졌다. 원만하게 해결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놈은 상처입은 야수처 럼 살기를 풍기며 앞을 가로막은 자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폭풍의 새를 없애버렸을 때 어떻게 했더라? 그러나 역시 떠올리려고 하면 제대로 되지가 않 았다. 그저 되는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카라는 검은 귀령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머리를 굴려보았다. 헤웬의 경우는 폭풍의 새였 지만, 그 정도 공격력이 있는 귀령을 거느린 마녀는 많지 않다 했다. 그러니 생김새로 보아 서는 그보다 더 흉폭해보이는 놈이지만 사용하는 힘은 별 것 아닐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을 때 놈이 먼저 이를 드러내며 공격해와, 카라는 자신의 추측을 완전히 수정해야 했다. ? 검은 표범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날선 곡괭이 모양의 불꽃이 그녀를 내리찍어왔던 것이다. 놈은 불의 귀령이었다. “으왓!”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불타오르는 곡괭이는 연속해서 땅을 내리찍었다. 카라는 흙투성이 가 되어 땅을 구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또 어떤 머저리같은 마녀가 자기 귀령한테 먹혀버린거야!!” 흙이 튀면서 드러난 살 여기저기에 긁힌 상처가 늘어났다. 카라는 왼손으로 땅을 짚은 채 몸을 돌려 균형을 잡으며 외쳤다. “파사!” 이자드의 주문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푸른색 빛의 채찍이 공기를 휘감았다. 푸른 빛의 채찍 은 주홍빛 곡괭이와 맞닿뜨려 불꽃을 튀겼지만 검은 표범이 캬앙 소리를 내며 털을 곤두세 우자 강해진 불꽃에 밀려 소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사이 카라는 시간을 벌었다. 새하얀 고리모양의 빛이 세 개, 서로 겹쳐진 채 나타나 주홍빛을 얽어매었다. 이번에는 불꽃이 튀지 않고 대신 곡괭이 모양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표범은 몇 번 으르렁거리다가 소용이 없자 눈동자를 더 큰 노여움으로 불태우며 카라에게 달려들었다. 진짜 야생동물만큼이나 빠르고 군더더기없는 동작이었다. 카라는 저도 모르게 그 기세에 밀려 넘어지며 땅을 쳤다. 순간 주 먹만한 흰 구체가 일제히 허공에 솟아오르더니 귀령에게 날아갔다. 슈우칵- 기분나쁜 울림과 더불어 흰 구체는 귀령을 둘러싼 채 연결되어 하나의 고리모양으 로 죄어들기 시작했다. 그 흰 빛과 대비되는 검은 구멍이 서서히 입을 벌리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표범모습 귀령의 검은 빛과 비슷하여 그 연장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시꺼먼 빛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불길한 구멍은 조금씩 조금씩 표범의 형태를 먹어치우기 시작했 다. 표범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발톱을 내뻗어 땅에 매달렸다. 그러나 끌어당기는 힘이 그보다 강했다. 몸체는 서서히 먹혀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원한과 분노로 가득찬 금빛 눈동자 만이 남았다. 그 눈동자는 한순간 두배 정도로 크게 불타올랐다. 그리고는. “크아아아악 “ 인간의 것과 비슷한 비명소리를 남기며, 귀령은 소멸했다. 거의 동시에 공중에서 몸부림치며 묶여있던 불꽃을 단 곡괭이도 사라졌다. 카라는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문지르며 치밀어오르는 구토를 참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귀령을 없애는 것도 흔적없이 되지가 않는다. 그때는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걸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돌려 파이를 찾아보니, 나무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떨 것 없어.” 카라는 파이에게 손을 내밀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파이가 카라를 올려다본 눈은, 두려 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은 사라진 귀령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파이는 카라를 무 서워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카라는 파랗게 질려, 천천히 손을 내렸다. 가슴이 죄 어들었다. 다리가 휘청였다. 눈을 감자 깜깜한 심연이 입을 벌려, 귀령을 집어삼킨 것처럼 그녀까지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현기증…그 때 머리위에서 박수소리가 크게 울렸다. 카라는 눈을 떴다. “야- 제법 재미있었어. 전보다 훨씬 화려하니 볼만한걸.” 카라는 멍청히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아서 손뼉을 치고 있는 자신의 거울상을 쳐다보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이고 나자 사태가 이해가 갔다. 카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 애써 누르려고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떨려나오는 소리로 말했다. “네가 보낸 거였나?” “설마. 이쪽으로 몰아주기는 했지만.” “…그 귀령의 마녀는 누구에게 패배한 거지?” 귀령은 계약자인 마녀가 패배했을 때 마녀를 잡아먹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물어보면서 이 미 카라는 그것이 휘안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휘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다른 마녀지.” “뭐?” “저런저런, 내 말을 못믿는 눈치로군.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곤란해. 내가 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지?” 휘안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카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자드는…” “아, 그녀석 얘긴 다음에 하자구. 죽일 생각은 전혀 없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줘. 우선 왜 마녀가 마녀를 사냥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카라는 말을 끊어버린 휘안을 올려다보며 자제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겨우 말 한마디가 빠 져나왔다. “왜지?” “왕제가 폭주하고 있는 마법사와 마녀를 모두 왕국의 적으로 선포하고 그 제압 임무를 마 녀회의에 맡겼거든.” “그럼 마녀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다는 건가?” “그리고 마법사들끼리도. 마녀와 마법사끼리도.” 카라는 잠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미간에 주름을 잡 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 그러니까…”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 거라는 얘기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휘안은 친절하게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동안 모든 곳이 전쟁터가 될 예정이야. 숲에서나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 그리고 넌 지금 그런 걸 걱정할 입장이 아니지.” 휘안은 빙긋 웃으며 손을 마주 비볐다. “내가 널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일이 있으니까 말이야…앞으로 어느 길로 가든 마녀와 마법 사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명성이 높아지는 것도 순식간의 일일 거야. 아,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유명인이 되어 있더라고나 할까.” 카라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까지 저지른 일을 모두 만회하더라도, 이놈만은 죽여버 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지금 놈을 죽여버리면 이자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낼 수가 없다. 휘안은 혼자 신이 나서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직 모르겠어? 이건 시합 같은 거야. 목표는 성에 갇혀있는 왕자님을 구하는 거라고 해 두자. 목표에 접근할 때까지 넌 충실히 다가오는 방해물을 제거해야 하는 거야.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도 익히고 말이지. 아, 단련을 잘해서 나한테 똑같이 써먹어주길 바래.” 카라와 똑같은 모습을 한 휘안은 나무 위에서 발을 흔들며 키득키득 웃었다. 카라는 화가 나서 외쳤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 휘안은 없었다. 카라는 나무 그루터기를 세게 걷어차며 울부짖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후로 계속, 길고 끔찍한 악몽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레투스 시까지 가는 동안만도 여섯 명의 마법사와 두 명의 마녀를 해치워야 했다. 마녀 둘 중 하나는 이미 귀령에게 먹힌 후였다. 날뛰는 귀령은 소멸시키고, 공격해오는 마법사와 마 녀는 뼈와 살로 흩어버렸다. 때로는 아예 허공에서 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더 이상 달려가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는 일도 줄어들었다. 마른 구역질이 끝 이었다. 카라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먹는 것도 줄어들었다. 잠도 줄었다. 파이는 그 때 이후로 더 이상 카라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슬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종종, 자신을 안고 있는 파이의 따스한 체온에 위안을 받았지만, 카라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 다. 레투스에 도착하기만 하면 파이를 아크에게 돌려보내자고. 길을 잃고, 사람들을 피하느라 길을 돌고, 몇번씩 마법사와 마녀들에 마주쳐서 싸우느라 여 정이 길어져, 마침내 레투스 성문에 도착한 것은 숲을 떠나고 거의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카라는 성문에서 몇 하스타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쯤에서 멈춰서야 했 다. 성문은 닫히지 않았지만, 병사들이 그 앞을 가로질러 바리케이드를 치고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카라는 길 끝에 서서 잠시 동안 가만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얼룩백이 회색말은 아직까지 곁 에 있었다. 파이는 한발짝 뒤에 서서 고개를 위로 꺾고 성벽을 올려다보고 있다. 성벽 여기 저기에 부서진 흔적이 나 있고 가끔은 심하게 허물어진 것을 적당히 때워놓은 곳도 있었다. 파이는 그것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밖에서만 보아도 이게 며칠 전에 떠난 그 도시 가 맞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기는 그 도시만이 아니었다. 숲에 들 어갔다 나온 사이 온 세상이 전에 살던 것과 다른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으니까.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 병사들은 모여들어 손가락질을 하고, 웅성이며 팔꿈치로 옆에 선 동료의 옆구리를 찔러대고 있었다. ‘뭘하고 있는 걸까.’ 카라는 아주 천천히 그런 생각이 뇌리 한쪽에서 떠올랐다가 천천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낯설도록 까칠어진 목소리가 입술 밖으로 나왔다. “아크… 를 만나고 싶은데.” 순간 웅성임이 딱 멈췄다. 병사들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는 사실에 놀란 듯 움찔했지만 곧 다시 두런거렸다. 카라는 움직이지 않고 다시 좀 더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아크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아크라니, 그게 누구냐?”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저쪽에서 외쳤다. 카라는 멀뚱히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급히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너같이 작은 아이가 어떻게 혼자 대로를 지나온 거냐?” 카라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말했다. “아크라는 이름, 들어본 적 없어요? 레투스에 있을 텐데. 왕자 아크 말이에요.” “왕자님? 어이, 왕자님 이름이 아크였어?” “몰라.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왕자님은 왕자님이지” 그럭저럭 대화가 이루어지자 마음을 놓은 듯, 병사들은 목소리를 높여 시끌시끌 떠들었다. 들여보내줘야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대장은 어디갔냐, 그래도 혹시 모른 다, 저런 아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등등의 소리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카라는 잠시 뭔 가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조금 높은 사람은?” 그 질문에 “지금 없…”까지 외치던 병사들의 눈이 뒤쪽에 있는 사람에게 쏠렸다. 작은 소 란 때문에 나온 것인지 우연히도 때맞춰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병사들과 달리 말쑥한 복장 에 허리에 찬 칼이 잘 어울리는 젊은 남자였다. 그는 앞으로 약간 나서면서 카랑한 목소리 로 외쳤다. “내가 수비대장이다. 뭐지?” “실례지만, 아크에게 가서 카라가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다 한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아크 왕자님과 아는 사이란 말이냐, 네가? 어떻게? 그리고 왜 만나겠다는 건가? 중요한 정보라도 갖고 온 거냐?” “가지고 온 정보가 있는 건 아니지만.” 반대로 얻어내야 할 정보가 있는 거지. 카라는 나머지 말을 입속으로 우물거리며 그를 쳐다 보았다.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뭣 때문에 왕자님을 만나겠다는 거냐? 그건 말해줄 수 있겠지.” 그자는 카라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카라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 한 번 질문을 반복한 다음에야 겨우 대답이 나왔다.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물어볼 게 있다고? 네가, 왕자님에게 말이냐?” 카라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비대장이라는 자의 목소리에 깔린 불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자가 쳐다보는 눈초리였다. 불쌍하 다는 듯 카라들의 행색을 훑어보는 표정.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작은 소리로 속닥거리더 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디서 오는 길이냐? 그리고 설마 너희들끼리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샤미르 숲에서 오는 길이고, 보호자는…잡혀갔어요.” “잡혀가? 누구에게?” “그런 것까지 말해야 들여보내 줘요?” 슬슬 답답한 문답에 짜증이 난 카라는 신경질적으로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대장은 몸을 돌 려 병사들과 숙덕이기 시작했다. 아마 그들이 하는 말이 들렸다면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역시 아무래도 이상하죠?” “왕자님 이름을 아는 걸 보나 말하는 걸 보나 완전 무지렁이 촌뜨기는 아닌 것 같고, 말이 두서가 없는 걸 봐서 암만 해도 미쳤지 싶군. 숲에서 습격이라도 받아 부모를 잃은 게 아닐 까 싶네.” “그럼 물어보고 싶다는 것도…?” “보나마나 엉뚱한 얘기겠지. 어린애들은 상상한 것을 진짜로 믿으니까 말이야.” “불쌍한데, 들여보내주죠?” “하지만 행색이나 태도가 이상해. 혹시 마녀일지도 모르잖나. 저애들만 무사히 여기까지 왔 다는 것도 이상하고. 특히 뒤에 선 계집애 말이야…예쁘긴 한데...” 대략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짜증이 난 카라는 그냥 성벽을 넘어갈 것을 심 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냥 가야겠다고 결심을 거의 굳혔을 즈음, 드디어 수비 대장이 돌아서며 외쳤다. “잠시만 기다려라. 한가지만 확인하고 들여보내줄 테니.” 언뜻, 사람들 틈새로 어딘가로 달려가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카라는 아무 생각없이 주저 앉으며 물었다. “뭘 확인해요?” “마녀인지 확인한대.” 답이 돌아온 것은 뒤쪽에서였다. 파이였다. 성벽을 올려다보는 것이 싫증나자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파이가 눈이나 귀 모두 보통 사람보다 밝다는 사실을 카라는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마녀?” 그 말을 되풀이하면서 카라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그렇지 않 아도 참기 힘들만큼 짜증이 나고,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웠다. 생 각같아서는 싹 무시해버리고 성벽을 넘어서 가고 싶었지만 아직 그랬다가 문제가 더 복잡해 질 것을 생각할 정도의 이성은 남아있다. 카라는 속을 삭이고, 아예 그 사람들 쪽을 쳐다보 지 않으려 돌아서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다소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림자 하나 없이 햇볕을 내리받고 있는 텅빈 길 한쪽 끝에는 수 염이 덥수룩한 군인 한 무리가 서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들의 시선 끝에는 말 한마리와 아이들 둘이 서 있다. 심심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의 미소녀는 사실 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보이는 파이에게 더 많은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때로 음울한 분 위기에 싸인 검은 머리 소녀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람들은 느릿하게 걷고 있는 그녀의 모습 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카라의 발은 길이 아니라 햇빛 자체를 밟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몇 분의 시간이었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길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마녀를 부르러 갔던 소년이 뛰어오며 외쳤다. “왔어요, 왔어!” 카라는 발을 딱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소년의 뒤로 이제까지 본 중에 라니아를 제외하 고는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마녀가 푸른 옷자락을 날리며 활기차게 걸어오고 있었다. 단 정하게 틀어올린 철회색 머리카락이며 꼿꼿한 자세, 매부리코가 근접하기 힘든 인상을 주는 노파였다. 카라는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어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마녀를 쳐다보 았다. 그러나 어디에서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엄격한 표정의 마녀는 두려움에 저절로 갈라진 병사들의 길을 지나 성문 앞에 도착해서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비대장이 카라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들입니다.” 마녀의 날카로운 푸른 눈이 카라를 지나쳐 파이에게 향했다 싶더니 재빨리 돌아가며 몸을 돌렸다. 차가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니오.” “예? 아…그럼 들여보내도 되는 겁니까?” “그건 댁이 결정할 일이지. 나보고 마녀인지 아닌지만 알아봐달라고 하지 않았소?” 냉정한 답변과 함께 마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 걷고 있었다. 수비대장은 약간 당황하여 얼굴 을 붉힌 채 카라에게 손짓을 하며 필요 이상으로 크게 외쳤다. “이제 들어와도 된다. 들어와!” 카라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터벅터벅 걸어갔다. 회색 말과 파이가 그 뒤를 졸랑 졸 랑 좇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따뜻한 길을 거의 다 지나 성문 그늘 속으로 들어갈 무렵, 콰 광! 폭음이 그들을 맞이했다. 폭발음과 함께 돌조각이 우수수 떨어져내리자 카라는 바로 한쪽으로 비켜서며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하늘에서 몇 사람이 성벽을 향해 불덩이며 벼락을 날리고 있었다. 성벽의 망가진 모 습은 이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카라는 파이를 끌고 뒷걸음질쳐서 성벽 한쪽 그늘 밑에 쭈그 리고 앉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조각들은 의식하지 않고도 튕겨내고 있었다. 그러나 싸 우고 싶지 않았다. 카라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눈을 감았어도 폭음과 아우성 소리는 똑똑히 들려왔다. 첫번째 폭발이 터졌을 때의 당황은 연이어 같은 폭음이 사방에서 터져나오며 우르르 돌덩이 가 떨어져내리자 공황상태로 발전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돌을 피하려 우왕좌왕 내달리며 문 을 거의 비우고 있었다. 사태를 가장 빨리 알아차린 것은 돌아서서 가고 있던 마녀였다. 그 녀는 귀령을 불러내 무너지는 돌덩이를 받아내며 외쳤다. “습격이다! 도망가지 마! 경보를 울려!” 그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굉장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하하하하하하하- “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비스듬히 아래를 향해 떨어져내리며 병사들에게 녹색 안개를 흩뿌 렸다. 안개는 재빨리 사람에게 달라붙어 코속으로 밀려들어갔다. 삽시간에 주위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이 늘어났다. 푸른 망토의 마녀는 손을 뻗어 그자를 향해 무엇인가를 집어 던지며 노기충천하여 외쳤다. “이년, 케이치! 당장 그만두지 못해!!” 그자는 일단 멈춰서 마녀를 돌아보았다. 기껏해야 20대 정도의 여성이었다. 담갈색 머리카락 을 길게 늘어뜨린 단정한 얼굴이었지만 눈 아래 얼굴만 끊임없이 히죽히죽 웃고 있는 모습 이 소름끼쳤다. 그녀는 들뜬 것 같은 고음으로 말했다. “헤델이잖아! 아직 그러고 있었어? 땅위에서 벌벌거리는 게 지금 보니까 별것도 아니잖 아?” “정말로 미쳤구나!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에이, 이제 그 딱딱한 설교는 지긋지긋하다구? 구역질나! 이젠 내가 더 강하단 말이야. 배 울 것도 없어. 솔직히 그동안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알기나 해? 응, 헤델?” “너…너…” 마녀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왕년의 제자, 아니 조카딸을 찢어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케이 치는 히죽히죽 웃고 있을 뿐이었다. 헤델이라고 불린 노파는 푸른 옷자락을 맹렬히 걷어부 치며 눈을 번뜩였다. “오냐, 상대해주마!” “캬하하하 ? 혼자서 우릴 상대하겠다고? 오늘은 우리도 규합, 응 뭐야, 그런 걸 했단 말이 야. 마녀 회의 따윈 쓸어버리겠다구! 응? 우리처럼 강해지지도 못한 주제에 막을 수 있겠어, 헤델?” “딴 것들은 못막아도 너만은 끝장을 내겠어!” 노파는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헤델? 그 이름이 귀에 들어온 순간 카라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이름이다…헤 델…아직 저 위쪽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자들은 산발적인 폭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성 안 쪽까지 소란이 심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병사들이 문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공격자들과 다른 마법색도 보이기 시작했다. 카라는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헤델이라는 이름이 기억난 것 과 노파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카라는 벌떡 일어나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헤델의 어머니!!” 단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아칸서스에서, 헤델을 찾아왔던 그녀와 스쳐 지나가지 않았던가. 카라는 허공에서 떨어져내리는 짙은 녹색 안개에 휘감겨 뿌옇게 보이는 헤델 어머니의 모습 을 찾아내고 즉각 손을 뻗어 공간을 찢었다. 파라라락 ? 책장이 한꺼번에 넘어가는 듯한 소 리와 함께 공기 중에 균열이 나타나 단숨에 케이치에게까지 뻗어나갔다. 균열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되었지만, 워낙 빠른 속도로 뻗어갔기에 아무도 피할 수 없었다. 케이치는 비명을 올리며 핏덩이가 떨어지고 있는 발을 감싸안았다. 헤델에게 휘감겨 있던 녹색 안개는 멈칫하더니 그 주인에게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녀를 상대할 때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패배가 완전히 결정된 순 간에 이미 귀령은 마녀를 배반하고 먹어치우기 때문에, 한발만 늦어도 더 골치아픈 상대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카라는 그동안 그것을 몸으로 터득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돌아가고 있는 녹색 안개와 케이치에게 두번째 타격을 가하고, 그 결과에서 눈을 돌렸다. 후두두둑. 뜨거운 피의 소나기가 쓰러져 있던 사람들의 머리 위로 흩뿌렸다. 질겁을 한 사람 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카라는 헤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단정하게 틀어올렸던 머리카락 을 엉망으로 풀어헤친 채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카라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이었다. 아까까지의 꼿꼿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마…말도 안돼. 지, 지금 무슨…넌…” 그 눈 속에 담긴 공포에 마주쳐, 카라는 눈을 돌려버렸다. 짜증이 났다. 귓전을 괴롭히는 웅 웅거리는 소리, 치밀어오르는 구토감, 끓어오르는 혐오감…화가 난다. 어찌할 수 없는 분노 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젠 지겨워. 마녀니 마법사니 하는 것들, 다 없어져 버리라지. 카라는 분노에 몸을 맡겨버렸다. 어쩌면 광기에. 그건 아주 짧은 순간, 사람이 눈꺼풀을 닫았다가 열며 세상을 다시 만드는 그만큼의 시간이 었다.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궁사는 갑자기 목표를 잃어버리고 눈을 깜박였다. 마법사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귀령을 부르려던 마녀는 망연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떨어지던 파이어볼을 향해 방패를 치켜들었던 수비대장은 팔이 저려올 때까지 눈을 감고 죽음의 순간 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말마의 비명소리 한조각, 핏방울 하나, 불빛 한줌조차 없었다. 아무 전조도 자취도 없이 공격자들은 사라져 버렸다. 전보다 조금 더 무너져내린 성벽, 떨어진 돌조각에 깔린 사람들 과 그들의 신음소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병사들은 침묵 속에서 뭔가에 홀린 듯 눈을 비비 며 사방을 둘러보았고 서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 미친 새끼들이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야, 이거나 좀 도와줘!” 방어를 위해 흩어졌던 동료 마녀들이 다가올 때까지 헤델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헤델…?”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요?” 헤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동공이 크게 열린 채, 한기를 견딜 수 없다는 듯 몸을 감싸안고 떨 고 있을 뿐. 동료들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들의 시선은 저만치 등을 돌리고 가 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녀의 모습을 스쳐 지나갔다. 카라는 아수라장이 되어있는 성문을 지나, 파이의 모습을 찾았다. “파이…” 없다. 그 타는 듯한 붉은 머리가 눈에 띄지 않았다. “파이?” “파이!” 한번씩 다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빨라진다. 카라는 병사들을 붙잡고 물었 다. 대개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젓거나 아예 듣지도 않고 그녀를 밀어내버렸다. “파이!!” “카라!”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카라는 아무 저항도 없이 그 팔이 끄는 대로 몸을 틀었다.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카라?” 카라는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다가 겨우 그 눈동자를 알아보았다. “아크…파이가 없어…” “파이는 아까 나에게 왔어.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래……” 맥이 탁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아크가 당황해서 다른 쪽 팔까지 잡아 일으켰다. 팔 이 아프다. ‘그래. 갔단 말이지…내가 보내기 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을 뿐. 이자드를 보고 싶었다. ----------------------------------------------------------- “카라가 왔다니?” 아크에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카라 혼자서, 이자드도 루이도 없이? “그럴리가.” “글쎄, 카라는 입을 다물고 있고 파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으니 알 수가 없군.” 아크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배어나왔다. 계속되는 공격과 파손, 부상과 죽음으 로 처리해야 할 잔무가 산더미였다. 더 나쁜 것은 한동안 공격이 계속되면서 외부 상황에 캄캄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아크는 책임자였고, 병사들이 싸우는 이유이자, 상인들이 물자를 공급해야 할 존재이유였다. 아무리 권력에 미친 사람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 왕이 되고 싶지 는 않을 것이다. 진은 더이상 그를 다그치지 않고 방을 나와 파이에게 가보았다. 탐나도록 아름다운 붉은 깃 털을 가진 그 불구의 조인(鳥人)은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 사이 사이로 하는 이야기는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여기에서도 먼저 정보를 얻기를 포기하고, 카라에게 갔다. 카라는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창턱에 앉아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느슨한 자세는 평소다웠지만 뭔가 위화감을 느껴 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가늘게 좁혔다. 카라 주변만, 공기가 완전히 정지해 그녀를 단단히 휘 감고 있었다. 저게, 내가 알던 카라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라가 고개를 돌려 진을 쳐다보았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그런데도 지독하게 피곤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카라는 건조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왔어?” “그…그래.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야? 이자드와 루이는?” 카라는 피곤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창턱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 잡혀갔어. 휘안에게.” “뭐? 잠깐만 그럼…언제?” “음- 그러니까 그게…진이 떠난 바로 그날 아침이었지 아마…응. 이제 기억난다.” 카라는 띄엄띄엄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아주 짤막하게. 그저 휘안과 싸웠고, 마법사와 싸우 고, 숲에서 길을 잃고, 귀령과 싸웠던 것을 이야기했다. 진은 한번도 반문하지 않았다. 그는 카라가 입을 다물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괜찮은 거야?” 진은 고개를 숙여 카라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로서는 드물게 부드러운 목 소리였다. 카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섬찟할 정도로 힘없는 미소였다. “…카라?” “응. 괜찮아.” 정말이냐고 되물으려다가 그 말을 삼켜버린 것은 카라의 눈 때문이었다. 종종 받았던 느낌 ?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관통하여, 그 너머 어딘가에 자리한 심연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검은 눈동자. 진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말았다. 카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친절하네, 진. 원래는 이런 사람이었어?” “글쎄. 원래라는 건 어떤 거지?” “천년 전에는 말이야.” 진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부러 감춘 적은 없었지만 그다지 이자드 외의 사람과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세부적인 일보다 더 그를 당황시키는 것은 카라의 태도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잡은 손 너머에서 깊은 슬픔이…이해 같은 것이 밀려든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 었을까. 그는 황급히 손을 빼내며 말했다. “그럼 일단 내가 알아보지. 아크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사이에 좀 자둬. 잠을 별로 못잔 것 같은데.” “아니. 자고싶지 않아. 그냥 쉬고 있을게. 잠시만 쉬고 떠날 생각이니까……” 카라는 다시 지친 무표정으로 돌아가 고개를 저었다. 진은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이제야 처 음에 느낀 위화감의 정체가 분명해졌다. 언제나 카라 주위를 희미하게 감싸고 있던 투명한 검은 색의 생명빛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 안으로 흡수되어 버린 것처럼 ? 아주 얇고 흐릿한 띠 같은 형태로만 남아서,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 투명하다. 생명빛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죽은 자가 아닌 이상 생명빛이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그는 카라가 두려웠다. ** 피로에 지친 병사들이 저녁식사를 위해 꾸역꾸역 가마솥 곁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죽을 먹었다. 팔이 부러지거나 피를 흘리는 병사들에게는 조금 더 나은 음식이 주어졌 다. 가망없는 환자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이. 치료의 절반 이상을 맡고 있는 것은 마녀들이었지만, 그들은 보답으로 감사인사보다 의혹의 눈길을 더 많이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 혹은 자매, 혹은 제자와 싸우면서 동시에 사 람들과도 싸워나가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아무도 이 도시에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았다. 많 은 수의 마녀들이 도시를 떠나, 조용한 곳으로 숨어들고 싶어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감정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크는 창문에 기대어 임시 연병장과 막사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정체되어 버린 이 나라를 바꿔보고 싶었다. 평화라는 허울 속에 갇혀 움직일 줄 모르고, 천 연의 장벽에 둘러싸여 외부에는 눈도 돌리려 하지 않는 이 나라를.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니다. 이렇게 파괴적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아무 목적도 없는 파괴행위였다. 내 편, 네 편도 없는 무질서와 혼란. 그는 휘안에게 차갑게 응어리진 분노를 느꼈다. 그를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에게도 분노가 치밀었다. 휘안 알 바르카는 자신과 재상, 양쪽 모두를 농락했 을 뿐이다. 그를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모든 게 엉망이 될 줄은 몰랐다. 대체 그 자는 뭐란 말인가? 아니, 하지만 당장은 그자가 뭔가 더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당장은 분을 삭이고,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당면한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미쳐버린 마법사와 마녀들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들은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데다가 본래의 몇 배로 강해져 있었 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전쟁이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을. …우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자신의 생명도 지키기 힘든 상태가 계속되 어서는…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아크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두들겼다. ‘주변에 나를 받쳐줄 인재가 너무 없어. 나만을 위해 충성을 바칠 나의 신하, 그러면서 내 일을 나눠줄 그런 신하가 필요해.’ 진이 언제나처럼 불쑥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아크는 짜증을 반쯤 섞어 그를 흘긋 쳐다보고 내뱉듯 말했다. “어찌된 일인지 알아냈나? 이자드 루이는 왜 함께 있지 않고?” “휘안에게 당했다는군.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 말에 아크의 인상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이자드 정도의 마법사라면 그래도 싸워볼만 하 리라 생각하고 기대를 걸었건만. 진은 냉정하게 아크의 표정을 분석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카라가 지금 껍질에 싸인 듯 주위에 무관심하니 망정이지, 아크에게 호의를 기대했다면 꽤 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지금 아크는 카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같은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진은 실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인간성 운운을 따질 입장인가. 그도 다르지 않았고, 아마 지 금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이용하고 또 희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낮에 습격 때 있었던 마녀들에게서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카라의 힘이 강해진 것만 은 분명하다. 카라에게 저 마법사와 마녀들을 처리할 만한 힘이 있다면… 진은 갈등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를 밀어넣었 던 그 구덩이, 길과 그밖에 이미 죽어버린 아이들을 던져넣은 그 구덩이에 카라까지 떨어뜨 리는 결과가 된다 해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카르트였으므로. ** 밤이 찾아들었다. 카라는 담요를 몸에 감고 바닥에 앉아, 그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오랫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난 일주일새에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 어둠속에서 일어났다가 사 라져버린 환상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둘로 나뉘어, 하나는 뒤편에 앉아서 킬킬거리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 등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어둠속을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잠깐잠깐씩, 수명 이 다한 등불이 꺼지기 전에 몇번이나 짧게 밝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가끔 둘로 쪼개진 마음 이 하나로 합해지고, 그 마음의 눈으로 진실의 일부분을 엿본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단속적으로 찾아드는 빛. 그러나 그런 순간은 금새 지나가 버렸고 그녀는 계속 묵직하게 몸을 휘감아드는 짙은 안개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안개는 주위를 메우고, 몸을 휘감아 들고, 몸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잠들지 않았음에도 꿈이 시작되었다. 안개 너머로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지친 듯 벽에 머리를 기대고 긴 다 리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모습.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얼굴 윤곽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 다. 그 윤곽선만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입을 열지 않아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카 라는 휘안과 이자드를 구분할 자신이 있었다. 안개 너머로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카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이자드……” 순간 주머니 입구를 오므리듯 안개가 자리를 메우며 몸이 뒤로 쭉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 었다. 카라는 눈을 들어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역시, 있었다.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어둠 을 향해 열린 창문옆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고 있는 휘안이. 카라는 차갑게 뱉은 목소리가 짙은 안개속을 느리고 우울하게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런 놀이는 지겨워. 게다가 왜 자꾸 내 꿈에 침범하는 거지?” “누가 누구 꿈에 침범한다고? 오, 일단 지겹다는 말에는 동의해 주지.대체 뭘 하느라 그렇 게 꾸물거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몸단장하느라 꾸물거리는 부인네도 아니고 말이야.” “어디로 가야 할지나 알려주고 그런 소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사사건건 훼방까지 놓고.” “내가? 설마.” “네가 아니면 달리 누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 귀여운 척 하는 태도 좀 집어치워. 역겨 우니까.” 휘안은 배를 잡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서서히 그의 모습이 변했다. 몸집이 커지고 머리카락 이 길어지고, 카라의 얼굴 대신 이자드의 얼굴이 자리잡았다. 카라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자드 모습을 하고 있는 거, 마음에 들지 않아.” “아아, 언제나 다들 똑같은 소리만 하는군. ‘네가 그모습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 아.’, ‘당장 치워!’ 이러면서 말이야. 오해를 정정하기 위해 말해두는 데 이건 이자드의 모습이 아니야, 카라, 아니면 아이혜든 뭐든.” “누…” “아, 잠깐 잠깐. 나머지도 마저 바로잡고 나서. 넌 계속해서 오해하고 있는 게 몇 가지 있 어. 우선, 난 네 꿈에 침범한 적이 없단 말이야. 네가 ‘내’ 꿈에 침범하고 있는 거지.” “뭐?” “그리고 두번째.” 휘안은 카라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난 널 훼방놓고 있는 게 아니라 도와주고 있었다구. 남의 호의를 몰라주다니 실례야. 널 위해서 연습상대를 몰아주려고 애꿎은 피까지 흘렸단 말이지.” 얼음덩이를 삼킨 듯 온몸이 차가워졌다. 카라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면서 ‘연습상대를 몰아주려고’라는 말을 몇 번인가 되뇌었다. 그동안 휘안은, 이자드와 똑같지 만 전혀 다른 얼굴로 카라를 관찰하듯 쳐다보며 옷자락을 털고 있었다. 카라는 겨우 냉정을 찾고 물었다. “…그럼, 마법사나 마녀들이 나에게 몰려드는 게 네가 시킨 일이란 뜻인가?” “샤미르의 유산 은 원래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는 약물이지. 재미가 없 어서 내 피를 조금 섞었더니 멋진 물건이 되더군. 덤으로 내 말도 잘 듣고 말이야.” 카라는 으득 손톱을 물어뜯었다. 자기 자신에게를 포함하여 세상에게 향해야 할 분노가 통 째로 휘안에게 전이된 것 같았다. 휘안은 씩 웃으면서 넌지시 말했다. “이름을 ‘씨앗’이라고 붙였지. 왠지 알아?”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관심없어. 이자드는 어디에 있지? 나보고 찾아오라고 하려면 어딘지는 알려줘야지?” “음…글쎄. 그런데 왜 아크에게 갔는지 모르겠는걸. 비델에게 내가 있는 곳을 물어볼 생각 이었나?” “그래.” “저런. 잘못 짚었어. 그 앤 내 명령 없이는 그런 걸 알려주지 않아.” “그거야 해봐야 알 일이지.” “아니…죽는다 해도 소용없는 일일걸. 그앤 날 위해 죽는 게 소원이니까. 원한다면 시험해 보든지.” 카라는 그 친절한 목소리 바닥에 깔린 증오의 독기, 혹은 권태, 혹은 짜증스러움에 조금 놀 랐다. 그래서 잠시 문답에 틈이 벌어졌다.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한다는 거지? 그 질문을 뱉 기 전에 휘안이 손을 깍지껴 올리며 말했다. “옛날 -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휘안의 모습이 다시 변했다. 소년이었다. 아크와 비슷한 또래의 키가 크고 늘씬한 소년. 자 줏빛 눈동자가 아름다운… “옛날 일이야. 아주 오래 전, 아직 리아로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해룡 뮤로아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다의 지배자였던 시절의 이야기지. 그 때 이 땅에는 많은 종족이 살고 있었고, 그 중 에 나라카라고 하는 종족이 있었단다. 나라카Naraka라는 이름은 그들이 세상의 어둠을 지배 했기에 붙여진 거였을 거야.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강했고, 다른 종족들과 서로 영역을 침범 하지 않고 노예로 부리거나 공물을 받아가면서 그럭저럭 잘 살았다지. 그렇게 잘 살아가다가 어느 날부턴가 왕은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지. 조금씩 조금씩…아무 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태어나는 아이의 숫자가 줄고 있었던 거야. 그들은 강한 데 다가 수명도 길었으니까, 처음에 눈치챘을 때까지만 해도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고들 생각했 지. 어쨌든 아이들은 태어났으니까. 그러나 점점 일은 심각해져서 아이들은…뱃속에서 죽어 버리거나 아예 태어나지 않았고,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도 반 이상이 불구였거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카라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휘안은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천만 다행으로 희망을 주었던 건, 왕의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났다는 사실이었지. 그들에게 있어 왕은 생명의 중심. 왕이 있다면 아직 끝나지 않은 거니까. 뭔가 해결책이 있을 거라고 들 생각했어. 왕은 백방으로 노력하고 또 방법을 찾아다녔지…하지만 마침내 왕이 병석에 눕고 왕위를 계승해야 할 때가 다가왔을 때에서야 알게 된 거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왕위 계승자가 사실은 불구였음을. 왕은 절망에 빠졌지. 자신은 수명이 다해가고, 대를 이을 자식은 없고 이제 자손이 이어지 지 않고 왕통마저 끊어지고 나면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하나둘씩 죽어가고 나라카라는 이 름도 폐허속에 묻혀버릴 것이라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는 이상한 결정을 내 렸단다. 그렇게 천천히 몰락하게 놔두느니 자신과 함께 모두 데려가겠다고.” 휘안은 가만히 카라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쾅! 그게 끝이야.” 카라는 잠시 기다리다가 휘안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자 물었다. “그게 끝이라고?” “끝. 종결. 멸망. 뭐라고 부르든, 나라는 멸망하기 마련이고 종족은 멸종하기 마련이잖아. 뭐 어쩌면 소리없이 조용히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화려하게 한 방 폭죽을 날리며 끝 장나버렸지. 왕이 없는 종족이란 설탕 없는 케이크, 그러니까 더 이상 케이크가 아닌 거란 말이야. …적어도 그 왕은 그렇게 믿었지…” 그는 다시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키득거리는 웃음은 조금씩 커져서 몸을 가누지 못할 듯한 광소로 변했다. 휘안은 혼자 배를 잡고 발을 굴러가며 웃어젖혔다. 카라는 그 억지스러 운 웃음을 낯선 눈으로 지켜보았다. 휘안의 과장된 말투와 몸짓, 종잡을 수 없이 한쪽 끝에 서 반대쪽 극으로 내달리는 감정 변화 속에서 그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기란 어 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입 안으로 뭔가 중얼거렸다. 휘안은 웃음을 멈추고 잡아먹을 듯 몸을 앞으로 내밀며 큰 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했지?” “이해할 수 없다고. 어쩌면 다른 종족과 혼혈이 가능했을지도 모르잖아. 한꺼번에 죽지 않 고 흩어져서 섞여 살면 어때서? 살다 보면 뭔가 길이 생길 수도 있는 거였잖아. 게다가 아 까는 분명히 왕의 ‘아이들’이라고 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거지?” 휘안의 표정이 다시 싸늘해졌다. 그는 일어나서 발로 안개 뭉치를 걷어차기 시작했고, 그러 면서 그 모습은 어린아이가 되었다가 다시 어른으로 변했다. 다시 모습이 고정되어 카라 쪽 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카라였다. “왕의 혈통을 이은 아이가 분명 하나 더 있기는 했지. 하지만 불행히도 그 아이는 성급하 게 왕위 계승이 결정되자마자 바로 엄청난 짓을 저질렀거든. 그 일로 그 아이는 모든 자 격을 상실했지. 스스로 더 이상 그 종족이기를 포기해 버렸던 거야. 돌이킬 수 없이, 완전 히. 어때. 웃기는 이야기지?” 카라는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자신의 거울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게 가능해? 내가 나이길 포기한다고 해서 내가 아닌 건 아니잖아. 이름을 버린다고 해서 자기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기라는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지 않냐고. 말도 안돼.” 카라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휘안은 냉소하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늑대로 태어나서 개가 되는 녀석들도 있고 새로 태어나 날지 않는 놈들 도 있는 법인데.” “그렇지 않아. 그런 건, 다르다구…난 머리가 나빠서, 제대로 설명은 잘못하겠지만 말이야. 그런 게 아니잖아, 종족이라는 건…” “그러니까 넌, 모든 것이 그 근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지? 본성대로 살 게 되어 있다고?” 휘안은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보일락 말락 치켜올라간 입꼬리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미소 였다. 순간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달린다. 그 느낌 때문에 카라는 주저 했다. 그는 달콤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음?” 카라는 망설였다. 아까 잠시 그녀를 지배했던 분노, 다른 모든 감정과 감각을 덮어버렸던 분 노가 기세를 떨어뜨리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스스로도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감정이 그 자리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이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 의도적인, 상냥한 목소리. 카라는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아하하하하하핫!!” 휘안은 기다렸다는 듯 배를 쥐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지? 그보다 나는 대답을 했으니 설명을 해줘.” “쿡쿡쿡…난 네게 질문을 했지, 네 질문에 답해주겠다고는 안했는데.” 그는 키들거리며 모로 누운 채 발을 건들거렸다. “아아, 재미있는걸. 너 스스로 그렇게 대답했던 거 잊지 말라구. 곧 생각하게 될 테니까.” 그가 사라지려 하고 있다. 그것을 감지한 카라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를 붙잡으려 는 시도를 해보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사라지는 것은 휘안이 아니고, 자신이었으므 로. 그녀는 그 장소, 그 꿈에서 급속도로 확 뒤로 떠밀려 나가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음악적인, 이자드와 너무도 흡사한 목소리만이 귓가에 남아있었다. “널 위해 붉은 주단을 깔아주지. 내 성으로 초대하는 거야. 만찬에 늦지 않게 오도록.” 다음 순간 카라는 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 자신을 의식할 수 있었다. 현기증을 느끼 며, 그녀는 잠시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중얼거렸다. “휘안 알 바르카......” 그가 한 장황한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 도 없었다. 그리고 휘안, 휘안 알 바르카 그 자신도. 그의 행동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생각 해 본 적은 없었다. 지금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곧 분명해졌다. 카라가 그가 말했던 ‘붉은 주단’의 의미를 깨닫는 데에 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11. 절반의 진실 “붉은 주단……” 카라는 발 아래에서부터 지평선까지 시선을 옮기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라도 들을까 말까한 작은 목소리였다. 입 밖으로 새어나온 소리 한 줌은 바람이 재빨 리 쓸어가 버렸다.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 하나 간신히 설 정도 너비의 성벽 위에 서 있으니 어차피 곁에 있을 사람도 없었다. 카라는 주머니에 찔러넣고 있던 손 을 빼어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추위 때문은 아니다. 벌써 주변의 온도를 느끼지 못한 지 꽤 되었다. 멀리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바쁜 손으로 추수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일단은 목숨 부지가 급하기에 땅을 버려두고 성 안으로 피신해 들어간 사람들이지만, 이대로 추수를 하지 못한 채 겨울이 온다면 굶주림으로 죽게 될 것이다. 거상들이 비축해둔 식량은 대부분 군량미로 나가고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식료품 거래는 레투스보다 시더에서 더 활발했다. 그래서 그들은 불타버린 밭 사이사이로 바삐 움직이며 작물을 거두고, 병사들이 보초를 선 위로 카라가 또 지키고 있는 것이다. 카라는 무릎을 굽혀 안으며 발끝으로 섰다. 누가 보든 위태로와보일 광경이지만 몸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카라는 반쯤은 망을 보고 반쯤은 생각에 잠긴 채 지평선을 쳐다보았다. 곧 떠날 작정이었다. 진이 추수가 끝날 때까지만 망을 봐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으면 벌써 떠났을 것이다. 그 약물, 샤미르의 유산 중 하나이며 이미 마녀와 마법사들의 절 반 이상을 오염시킨 그 물에 휘안의 피가 섞여 있다. 그 사실을 알려주자 진은 그렇다면 그 들을 죽여주는 것이 자비라고 말했다. 힘은 강해지지만 정신은 붕괴하고, 몸은 제뜻대로 움 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이 남아 있을 경우 지옥 같을 것이고, 의식이 사라진 상태라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카라는 그것이 그의, 그들의, 그 리고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주장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죄책감이라고? 아니. 아니다. 사실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괴물을 죽이면서 안도와 기쁨을 느끼지 죄책감 따위를 갖지는 않는다. 진은 아마 카라를 위해서 그 렇게 말했으리라. 그렇게 받아들이는 편이 편했다. ‘하지만, 내가 괴로운 것은 죄책감 때문이 아니야.’ 카라의 입술 끝에 희미한 자조의 웃음이 맺혔다가 역시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그 눈쌓인 계곡의 일이 생각난다.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와 잔소리쟁이 오빠, 어느날 찾아온 가면을 쓴 마법사의 일이. 그리고 여행, 티나밋다와 비치킷차 두 무니의 따스한 웃음이 떠올랐다. 헤델의 활기찬 케익 가게, 눈부시게 빛나던 황금 신전의 지붕과, 허공에 은빛 휘장을 드리우 며 파도치는 모래의 바다. 진과 길을 만났던 일, 시더의 항구에서 마주쳤던 은빛 머리카락의 소년, 난다의 모습과, 이자드와 그 아이가 싸우던 모습이, 천장을 올려다보면 청록색 바닷물 이 흐르던 리아로의 궁전이 생각났다. 그 모든 기억은 빛바랜 그림 같았다. 눈부시게 펼쳐지 던 파이의 붉은 날개마저도. ‘그 때의 나와 지금 내가 같은 사람 같지 않아.’ 카라는 푸른 하늘 어디쯤엔가 시선을 던지며 귓볼에 아직 남아 있는 청금석 귀고리를 만지 작거렸다. 서늘한 감촉이 마음을 진정시킨다. ‘나는 다시 폐허 속에 떨어졌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폐허를 더 부수는 것 뿐이야.’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치료하거나 살릴 수 없었다. 그저 파괴하고 죽 이는 방법만 알 뿐. 네 힘은 그렇게 쓰는 거다, 패러노말 마스터- 휘안이 그렇게 말했었지.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자드도 패러노말 마스터에 대해 좋은 이야기는 해준 적이 없 었다. 휘안은 이자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가끔 이자드가 왜 그런 모습인지, 또 얼 마나 오랫동안 살아왔는지 궁금했었는데……하지만 왜 그가 아니라 카라와 게임을 하려는 건지. “붉은 주단, 붉은…주단이라…” 카라는 주문을 외우듯 그 말을 몇 번인가 반복했다. 며칠간 고심했지만 그 사이에 다른 징 조는 없었다. “어쨌거나 초대를 한다고 했으면 가는 길을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부러 소리내어 짜증을 내 보지만 여전히 듣는 사람은 없다. 카라는 다시 몸을 일으켜세워 저려오는 다리를 흔들었다. 그 때 흠칫 몸이 떨렸다. 살기. 살기의 무리다. 카라는 반사적으 로 살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깝다. 생각에 골몰에 있는 사이 그들이 오고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카라는 아차 하며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녀가 수직에 가까운 성벽 위를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가자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술렁이 기 시작했다. 카라는 절반 정도 높이에서 훌쩍 뛰어 밭 가장자리에 발을 내디디며 스쳐 지 나가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들어가요!” 병사들은 진에게 지시받은 대로 재빨리 소리쳐 농민과 일꾼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카라 는 그 사이 더 앞으로 나갔다. 저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밭 너머까지 오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기왕이면 아직 성한 작물들도 보호해야 한다. 뚜렷이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카라는 그것까지 신경쓰고 있었다. 일단 눈에 들어온 선두에게 선제공격을 날린다. 허공을 쪼개듯 날아가는 흰 빛덩어리가 반 격의 여지없이 그 자를 반으로 가르고 연이어 뒤쪽에 있던 자들까지 세명의 내장을 땅 위에 쏟아놓았다. 누군가가 죽기 전에 떨군 불덩이가 날아온다. 카라는 그것을 간단히 쳐내어 그 녀를 향해 발톱을 세우고 내려오던 새 모양의 귀령을 꿰뚫었다. 그 귀령의 주인이었을 마녀 의 비명소리가 귀를 찢을 듯 높았다.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익숙해지는 자신을 느낀다. 카라는 기계적으로, 떼지어 몰려가는 개미 떼를 눌러죽이듯 그들을 해치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번의 배 이상 많은 숫자였다. 양동 공격을 경계한다는 명목으로 카라에게 거의 대부분을 맡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 밭이 남아 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이미 놓쳐버린 번개가 땅을 까맣게 그을리고, 튕겨나가면서 금빛 밀밭 위로 선명하게 피를 뿌린 자도 더러 있었다. 카라는 밭쪽으로 날아가는 자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집중적으로 떨어지는 폭격에 가까운 공격을 막아냈다. 그녀는 성문 밖 500하스타 정도 거리에 방어벽을 치고 있었다. 아직 그 벽을 넘어간 자는 없었다. 덕분에 연극 관람이라도 하듯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시선들에 목덜미가 근질근질해진다. 속 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아…”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한 잠깐 사이에 잽싸게 그녀의 공격을 피한 마법사 하나가 뒤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카라는 당황해서 몸을 반쯤 옆으로 틀었지만, 그를 막다가는 다른 자들마저 놓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굳었다. 팔을 반쯤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 마법사는 허리 가 잘려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진이었다. 순간적으로 공기를 응축시켜 시간마저 멈춘 듯 보 이게 만드는 그의 깔끔한 칼솜씨는 어떤 마법사보다도 빠르다. 이자드와 난다 정도나 예외 에 속할 것이다. 진은 카라에게 가볍게 눈짓을 해보이고는, 허리까지 잘려 땅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마법 사를 다시 세로로 쪼개 끝장을 보고 차분히 다른 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카라만큼 여럿 을 상대하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하나씩 죽여나간다. 분명 그는 뛰어난 굉장히 뛰어난 검 사였다. 루이만큼이나. 카라는 마지막 하나가 산산조각나서 땅에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루이가 기쁜 듯 씩 웃으면 서 칼을 들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나 진에게는 그런 기쁨을 누릴 만한 행운은 없었다. 고 개를 숙이고 칼을 갈무리하는 진의 모습에는 특별한 감정이랄 것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지 만, 왠지 오직 책임과 의무만으로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조금은 고통스러워보이던 길의 모습 이 겹쳐져 보였다. 사람들의 수호자였던 그가. 카라는 잠깐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고 성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환 호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두려워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들의 보호자라고 믿고 있었다. 누군가 그 편이 더 좋다고 여긴 자가 아마도 진이나 아크겠지만 그렇게 조장한 덕분이다. 카라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떠나라고 외치던 여관 사람들의 차가운 눈빛만큼이나 그들의 신뢰의 눈빛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고했어, 카라.” 진이 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라는 대꾸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몇십명이 피 를 쏟았을까. 곳곳이 허공에서 쏟아져내린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역겹게 썩어들어가지 않은 싸아한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도살장이라도 이만한 피비린내를 풍기진 않을 것이다. 전 쟁터라 해도. 카라는 가슴 한켠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무 감정도 아니었지만, 다 리에 쥐가 나듯 어쩔 수 없는 저림이었다. 오늘 그녀는 한번도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 다. “…들어가자. 뒷처리는 맡기고.” 진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며 손 하나가 어깨에 얹혔을 때, 카라의 눈이 크게 열렸다. 카라 는 확 몸을 빼내어 뒤로 물러섰다. 저도 모르게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설마…” 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라를 쳐다보다가, 카라의 눈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카라에게 눈을 돌렸다. 그 자리에 이미 카라는 없었 다. 그녀는 단숨에 허공으로 몸을 띄워, 다시 아까 서 있던 성벽 위로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다. 카라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성벽 아래에서부터 그녀를 위해 깔린 붉은 주단을 보고 있었다. 휘안이 말했던 붉은 주단 그것은 피로 만들어진 길이었다. 휘안의 속삭임이 바로 귀 가까 이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네가 저들을 죽이면 길이 나타날 것이고, 네가 저들을 죽이지 않 는다면 저들이 다른 사람들을 죽여 길을 깔 거야. 카라는 석고상처럼 얼어붙은 채, 밤이 되어 핏자국이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꼼짝않고 아래 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이 오고 반쪼가리 달이 서늘한 빛을 뿌렸을 때 마침내 카라는 손 을 꽉 쥐었다 펴면서 엉겨붙은 피를 모두 잿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붉은 주단이 아 니라 재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 레투스 시에서 북서쪽으로 삼천 하스타 정도 떨어진 시먼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지도 않은 몇 안되는 마을 중 하나였다. 비교적 다른 마을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환경 탓이기도 했지만 마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애착이 유달리 강하기 때문 이었다. 그들은 이미 도망칠 만큼 도망쳐본 이들이었으며, 이 땅을 직접 개간해 논밭을 만들 고 나무를 베어 직접 집을 짓고 살아온 개척자들이었다. 그들은 떠날 수 없었다. 그들은 차 라리 싸우다 죽기를 택했다. 그날 아침까지, 시먼의 촌장 에이리는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거둘 수 있는 돈을 모두 모아 용병을 고용하려고도 해보았고 성직자를 청하러 아칸서스까지 사자를 보내보기도 했 다. 용병들은 안전하고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도시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다. 성직자들은, 미친 마법사들이 무슨 좀비나 마귀쯤이나 된다는 듯 성수와 부적만을 들려보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파수대를 설치하고, 자경대를 조직했으며, 만일을 위해 여자와 아이들을 대피시 킬 지하실을 팠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도 그날 아침, 절망으로 결실을 맺었다. 파수대에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린 것과 휘파람 비슷한 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파수대가 불길에 휩싸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역겨운 고기타는 냄새와 함께 끔찍스러 운 비명소리가 올랐다. 개중 침착하다는 에이리 촌장 같은 사람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소 란이었다. 어디서 불이 떨어지는지도 모르게 갑자기 불길이 솟구쳤고 불을 꺼보려고 허둥허 둥 물을 길어온 사람은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에 숯검댕이 되어 엎어져 있었다. 왕년에 한 가닥 했던 주먹으로 시먼의 임시 경비대장이 된 요에가 서둘러 여자들을 지하실에 밀어넣고 있었다. 그러나 귀를 찢는, 아까의 휘파람 소리보다 더 커다란 소리에 귀가 먹먹해진다 싶더 니 다음순간, 지하 대피소가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자경대? 파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짓이었다. 에이리는 비틀비틀 중심을 잃 고 무릎을 꿇으며 분통의 눈물을 흘렸다. “악마야. 저놈들은 악마다. 세상이 멸망하는 거야…” 그 아수라장을 겪고 살아남은 무수한 이들이 그랬듯, 그 역시 이것이 전설에나 회자되던 마 왕의 귀환이요 세상의 멸망이라고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마음을 잃고 땅바닥에 엎드려 버렸다. 그 때였다. 넋을 빼앗으며 공중을 뒤덮고 있던 기분나쁜 바람소리가 뚝 끊긴 것은. “이제…끝인가……” 그는 흙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비명소리마저 다 잦아들었다. 타닥타 닥 규칙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소리만 남아 있었다. 그는 멍하니 종말을 기다렸다.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슛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철썩 뜨끈한 액 체가 그에게 떨어져내렸다. 손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것은, 끈적한 검붉은 액체. 기절할 것 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에이리는 혼비백산해서 튕겨 일어났다가 바로 다시 엉덩 방아를 찧었다. “으, 으아아아아악!” 그는 귀청이 떨어져라 비명을 질러댔지만 곧 비슷한 철퍽 소리가 나자 벌벌 떨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정도 정신은 있었다.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다. 마왕이 왔나 보다. 그는 아득해 지는 정신 너머로 생각했다. 오금이 저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는 굳은 듯 그 자리에 주저 앉아 그의 주변으로 피보라가 뿌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죽음은 오지 않았다. 기절하지 않은 댓가로 그는 또 한 사람이 파리처럼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 방을 물들이고 있는 피는 마을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몇몇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질린 얼굴로 에이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수습하고 피가 흘러내리는 눈을 주먹으로 문질러 닦으며 용기를 내어 무슨 일인지 이해해 보려 애썼다. 지금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저들, 사악한 마법사들임에는 분명했다. 가슴이 두근거렸 다. 누가, 대체 누가? 그는 정신없이 주위를 찾았다. 있었다.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집 지붕 위에…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소녀였다. 아니면 적어도 소녀처럼 보이는 어떤 존재였다. 그녀는 지붕 위에 선 채 에이리 쪽을 쳐다 보았다. 한 순간이었지만 시선이 부딪쳤다. 에이리는 새카만 아찔함이 자신을 꿰뚫고 지나가 는 것을 느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불가해한 시선은 무생물처 럼 그를 통과해 저 너머로 뻗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진 그 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는, 이미 그녀는 없었다. 공포에 질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근성있는 사람 몇 명이 겨우 촌장에게 다가 와 그가 살아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피를 씻어낼 겨를도 없이 정신을 차려야 했다. “부, 불을 꺼야지. 마을 전체로 번지기 전에 불을…” 쏴아아아아. 그의 말은 그들 위로 갑자기 쏟아져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로 끊어졌다. 그는 하 늘을 우러러보았다. 강하게 쏟아지는 비에 불길은 사그러들고 그의 몸을 뒤덮었던 핏물도 씻겨나가고 있었지만, 머리위에 비구름 따위는 없었다. 빗줄기 너머로 태양이 빛나고 있다. 그들은 살아남은 것이다. 피해는 있었으나 재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감 사했다. 누구에게 해야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고개를 숙여 감사했다. 정작 그 감사의 대상은, 아마 자신이 그런 감사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면 역겨움과 자기 혐 오로 몸을 떨었을 것이다. 카라는 시먼을 지나 새로 나타난 붉은 길 끝까지 가서 또 다음, 또 다음의 상대가 나타나기 를 기다리며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꼬박 이틀동안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길을 따라 움 직였지만 겨우 여기다. 차라리 몇 백명 정도 떼거리로 나와주면 제법 긴 길이 나타날 텐데. 무감각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카라는 손톱을 잡아뜯었다. 비를 뿌린 것은 그저 충동적인 행 동일 뿐이었다. 이미 사람들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쪽이 옳은 일인가 판단을 내리 기 어려웠다. 피로 물든 길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갈수록…점점 더 카라의 세계는 하나의 길로 좁아져 갔 다. 다른 모든 것은 희미하고 불투명한 존재일 뿐이었다.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남아있는 것, 아니 점점 더 강한 존재감을 획득하며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은 이 길 끝에 있을 이자드와…휘안 뿐이다. 이자드와 휘안의 모습이 겹쳐진다. 너무나 닮은 두 얼굴. 휘안은 그것이 자신의 본래 얼굴이 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가 했던 이야기. -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갈 때마다 어떤 예감이 강 하게 자라난다. 아직 선명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휘안은 그녀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으리라는 예감이. “…하지만 상관없어. 옛날에 이자드가 무슨 일을 했든, 내가 무엇이든 상관없어.” 카라는 고개를 흔들며 억지로 소리내어 말했다. 목소리는 공허하게 허공을 치고 힘없이 떨 어져 내렸다. 카라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그 뒤로 그녀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등 뒤의 레투스에서는 마침내 아크 왕자가 성문을 열고 수도 키시로 갈 것을 결정 했다. 그는 카라에 대한 소문을 적절히 조장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며 여론을 끌 어들이면서 서서히 재상을 희생양으로 몰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시더는 리베르 문디가 반쯤 괴멸한 혼란을 틈타 나타난 강력한 해적 때문에 곤궁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카라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세상은 하나의 붉은 선 위로 응 축되어간다. 이 길 이쪽에는 내가, 저쪽에는 이자드가 있고, 선 위로 무수한 죽음이 떨어져 내린다. 카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 나무 위에서 일어섰다. ** 모래의 바다 북쪽에 있는 작은 땅덩어리.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처럼 황야에 둘러싸인 인간 의 영지. 1년의 4분의 3이 눈에 뒤덮힌, 춥고, 고요한 땅. 그곳에서, 카라가 울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에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너머, 뒤 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자리한 심연을 향한 눈동자. 새까만, 무한(無限). 이자드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사방이 고요했다. 방안은 여전히 어둡고, 메마르고, 아무것 도 없었다. 시간이 넘치게 많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덕분에 생각을 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 그러모아서 거대한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테두리도 도판도 없는 퍼즐. 조각들조차 가장자리가 뭉그러져 있다. 그래도, 잠조차 자지 않는 그에게 는 시간이 넘치게 많았다. 그는 자신이 휘안보다는 카라에게 생각을 집중하려 애쓰고 있음 을 알고 있었다. 반쯤은 막막함 때문에, 나머지 반은? 아마도, 두려움. …그동안 생각하면서 퍼즐 조각은 충분히 모았다. 이제 맞추기만 하면 된다… 마녀들의 힘은 보통 다른 세계의 존재와 체결한 계약에서 오고. 마법사의 힘은, 그게 양이든 음이든 자연력으로부터 끌어오는 힘이야. 물론 사람에 따라 끌어올 수 있는 힘의 한계가 정 해져있기는 하지만." 그 말에 카라가 대뜸 물었다. 그럼 나도 마녀에요? 아니. 그녀의 힘은 마녀와도 다르다. 자연력으로부터 끌어오는 힘도, 다른 세계의 존재로부 터 나오는 힘도 아닌, 자기 자신의 힘. 그래서 마족이나 용족과 같다. 그러나 마족도 용족도 아니야. 그래서 패러노말 마스터라고 부른 거다. …불러? 누가? 누가 처음에 그런 힘을 보고 패러노말 마스터라는 이름을 붙였지? 이자드는 순간 등골을 타고 흐르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생각해 보면 누가 또 알고 있을까. 패러노말 마스터라는 이름이 적힌 것은 그 책, 그의 책, 그가 써온 책이다. ? 그것은 그가 붙인 칭호. 오래 전, 분명 지금 기억해내지 못하는 예전에 붙인 이름이었다. 언제…언제 보았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늘 그랬듯 아무 소득도 없었다. 여전히 텅빈 벽, 막막 한 허공 뿐이다. 이자드는 마치 눈앞에 벽이 놓여 있는 것처럼 어둠을 긁었다. 그러나 소용 없는 일이다. 소용없는… “아!!”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 하는 것 같은 깨달음이 다가왔다. 이자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 어섰다. 그래! 굳이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돌이킬 필요가 없었다. 그건… 쾅! 갑작스러운 무게감과 함께 이자드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면서 아차 했다.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경계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겨우 휘안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 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건강하구나.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왔지? 심심하진 않았나?” “……덕분에. 생각할 거리는 많이 던져주고 갔잖아.” 이자드는 겨우 질식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목을 누르고 있는 팔꿈치의 힘을 의식하며 애써 여유롭게 대답했다. 휘안은 코웃음을 쳤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계획한 대로 일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카라는? 이자드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휘안이 팔꿈치를 떼며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바로 머리를 잡고 뒤로 꺾었다. “컥…”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머리가 넘어가며 입이 벌어진 순간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따 라 쏟아져내렸다. “무…” 도로 뱉어내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휘안은 가볍게 ? 평소에 비하면 가볍다는 말이지만 그 의 목을 쳤고 그 액체는 도리없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전부 다는 아니었지만. 이자드는 콜록거리며 주위를 더듬었다. 그가 뱉어낸 액체가 미끈하게 만져진다. 감촉을 느끼기 전에 코가 먼저 반응했다. 역한 피비린내. 휘안이 어둠 속에서 싱긋 웃는다. “한꺼번에 둘을 상대하기는 좀 버거워서 말이야. 뭐 공들여 뼈를 부러뜨려줄 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아무래도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겠어?” 이자드는 식도를 넘어간 액체가 점점 뜨거워지며 소화기가 아니라 온몸의 핏줄로 퍼져나가 는 것을 느꼈다. 세포 하나하나가 불타오르는 듯한 지독한 감각과 함께 강렬한 마비감이 퍼 져나갔다. 정신은 맑았다. 맑았기에 고통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는 가까스로 입을 벌려 물었다. “뭐…뭘 먹인 거지?” “내 피.” 휘안은 상냥하게 대답하며 몸을 기울여 이자드의 팔을 집어들었다가 놓았다. 팔은 아무 힘 도 없이 툭 떨어졌다. 이자드의 몸은 타오르는 듯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의식 내에서였을 뿐, 팔다리는 돌바닥의 한기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휘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양팔을 잡고 들어올렸다. “좋아, 좋아. 이제 여기서 나가도 되겠군…” 휘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주위의 풍경은 바뀌어 있었다. 어둡기는 했지만, 희미한 불 빛이 있는 어둠.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로 땅이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어둠 속이었다. 이자드는 몇 번이고 정신이 파도치듯 위로 끌려올라갔다가 패대기쳐지는 동안 휘안이 자신 의 몸을 어딘가에 눕혀 놓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휘안이 그를 들여다보고는 상냥하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널 죽일 리가 없잖니. 네게 그년이 진짜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것 뿐 이야.” 이자드는 휘안이 미친 게 아닌가 생각하며 그 눈을 마주 쳐다보았다. 아니다. 새삼스럽게 또 미쳤을 리가 없지. 원래 미친 놈인데. 휘안은 유쾌하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잘 지켜보고 있어라. 혹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즉시 알리고.” “예.” 대답한 목소리는, 잠시 후에 의문을 담아 묻고 있었다. “왜 그렇게 많은 양의 피를 빼신 겁니까?” “많은 양이라? ‘씨앗’에 넣은 피에 비교해서 말이냐? 그때야 물론 몇 방울만으로도 충분 했지. 그 정도라도 인간들에게는 버거운 양이니까 말이야…하지만 이녀석은 다르다. 전부터 말했을 텐데.” 이자드는 마비된 채 생각했다. 거기에 휘안의 피를 섞었던 건가. 그래서 그렇게 지독한 효과 를 낳았던 거로군. 하지만 왜 나에게 이런 효과가? 여자가 다시 말하고 있었다. “그럼 그의 경우에는…” “부수적인 효과도 다르냐고? 물론이다. 이녀석의 경우에는 지금 느끼고 있을 마비감과 통 증이 전부야. 내 뜻을 따르는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지. 쓸데없는 질문은 그정도로 해 둬라, 비델.” “죄송합니다.” “자, 그러면…이런. 깜박 잊을 뻔 했군. 심심할 테니…” 휘안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춘 듯한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이자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휘안은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지난 번에 보여준 것과 똑같은 거울 같은 막이 생겼다. 호수에 파문이 일듯 일렁이던 막 위로 영상이 떠올라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하자, 선명한 핏 빛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는 피보라 너머로 죽음의 낫을 휘두르고 있는 얼굴을 알아보고 감각이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라……” ------------------------------------------------- 카라는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인지 알지 못했다. 헤아려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럴 정신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싸움에서는 시체도 거의 남지 않았기에. 피의 길. 그것만이 있을뿐.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삼백명에 달하는 마법사와 마녀들이 카라의 손에 죽었다. 그 죽 음이, 카라가 아닌 휘안에 의해 준비된 것이었다 해도 생명의 불꽃을 앗아간 것은 그녀였다. 그들의 피가 레투스에서부터 여기, 아칸서스까지 길을 열었다. ‘아칸서스라니…’ 카라는 허탈한 마음으로 그 초승달 모양의 도시를 굽어보았다. ‘아칸서스라니.’ 다시 한 번, 입 안으로 중얼거리는 말 속에 지독한 금속성 비린내가 가득 찼다. 카라는 억지 로 침을 삼키며 심호흡을 했다. 레투스에서부터 닷새간 잠도 한 숨 자지 않고 죽이고 또 죽 여서 도착한 곳이 아칸서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왠지 모를 낭패감이 엄습했다. 설마 시내는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 생각하며 카라의 눈은 저도 모르게 알고 있는 지붕을 찾아 아래를 훑어가고 있었다. 역시 무리였다. 지붕과 지붕 위를 헤매던 시선은 결국 목표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아칸서스 북쪽에는 언덕보다 조금 더 큰 산이 하나 있고, 그 산에 그녀가 고향 을 떠나 반년이나 홀로 머무른 사원이 있다. 그리고 두 무니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단단한 방어막 속에 가둬두었던 무엇인가가 허물어지며, 그들을 찾아가, 기대어 쉬고, 울고, 잠을 자 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헤델의 따스함이 그리웠다. ‘하지만, 헤델. 난 네 가족 중 누군가를 죽였을 지도 몰라.’ 단 한번도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므로. 그나마 헤델의 어머니가 그들 중에 있지 않았다는 것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카라는 양 팔로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듯 팔짱을 꽉 끼며 뒤로 물러나 나무에 등을 기댔 다. “여기까지 불렀으면 다음도 가르쳐줘야지, 휘안.” 그녀는 마치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대답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구름이 깔리고 있었다. 아니, 그건 구름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한 것들, 사람과 전혀 닮지 않은 것들과 귀령들까지…하늘에 그림자를 드리울만큼 많은 것들이 아칸서스의 하늘로 날아오고 있었다. ** “죽여라.” 휘안은 입 안으로 속삭였다. 그것은 지금 그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마법사들, 마녀들, 귀령 과 그 밖에 마의 힘에 복종하는 동물들을 향한 말이자 동시에 그들을 맞아 싸우고 있는 카 라를 향해 던지는 조소였다. “죽이고, 파괴하고, 능욕하고, 부숴버려. 네 본성에 걸맞게.” 그의 소리에 호응하듯 한 무리가 아칸서스의 거리로 내려왔다. 신전의 첨탑들이 제일 먼저 부서져 나갔다. 황금 신전의 금빛 지붕이 뜯겨나가고, 십자가는 흙바닥에 구르고 기도서는 피의 세례를 받는다. 절망과 비탄의 비명소리가 땅을 가득 채웠다. 휘안은 기분좋은 음악을 듣듯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느긋하게 눈을 감고 몸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즐거 운 것처럼…그의 마음 속에는 끝없이 퍼올리고 또 퍼올려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우물 이 있었고, 그 우물 속에 담긴 것은 광기, 광기, 광기였다. 그 광기의 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휘안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눈을 떴다. 약속이라 도 한 것처럼, 그의 눈이 카라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그녀를 굽어보며 웃기 시작했다. 아 무도 듣지 못하는 웃음소리는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며 마침내는 그가 앉아있는 탑 전체를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 카라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아니, 이것은 분노가 아니라 증오였다. 생전 처음으 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증오했다. 카라는 휘안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속삭였다. “널 죽여버리고 말겠어.” 휘안은 그 말을 들은 것처럼 히죽 웃더니, 장난스럽게 탑 위에 올라서서 발을 쿵쿵 구르다 가 공중에 몸을 던졌다. 공중에 뜬 채, 사라지기 전에 그는 카라를 향해 손짓했다. 황금의 지붕이 날아가버린 한 가운데에 그의 탑이 있었다. 절반 이상이 땅속에 파묻힌 채로. 검은 탑, 알 바르카의 신전이 있었다. ** 카라는 캄캄한 계단 입구를 바라보며, 주위를 가득 메운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려 했 다. 그녀는 한동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가. 지금 여기로 들어가지 않고 싸워야 한다는 ‘정답’이 떠올랐지만, 동시에 그 생각에 거 부감을 느꼈다. 이자드가 안에 있을 것이고, 이 모든 무대장치를 준비한 휘안이 기다리고 있 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이자드를 구한다는 ? 혹은 휘안과 싸움으로써 이 모든 혼돈 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또한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다. 어느 쪽도 진실은 아니야. 그녀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설픈 눈가림이나 타협을 원치는 않았다. 카라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깥’을 내다보았 다. 거기엔 시끄러운 파괴와 비명소리, 부서지는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이 있었다. 하나 하나 를 떼어놓고 보았다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을. 그러나 이렇게 전체를 놓고 보면 현 실감이 사라지고 세계는 점점 더 멀어져간다.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같았다. 카라는 고개를 돌려,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무엇인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이자드였고, 휘안이었고, 그들이 아닌 다른 것이었 다.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외면해 버렸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것을 계 단 아래로 떨어뜨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 오지 말아라, 카라… 이자드는 마음 속으로 긴 한숨을 뱉았다. 지금 거울 너머로 계단을 오르고 있는 카라는 그 가 알고 있던 소녀로 보이지 않았다. 표정이 풍부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딱딱한, 가 면처럼 단단한 무표정의 얼굴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죽은 자의 얼굴처럼 파리한 안색 위에 가볍게 깨문 아랫입술은 보랏빛이었다. 무겁게, 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카라는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가끔 멈춰서서 위를 올려다 보려나 싶을 때면 잠깐 뒤를 돌아보고 귓가를 만지작거릴 뿐.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이자드는 망연히 그 모습을 쳐다보며 폭발할 것 같은 암담함을 감당해야 했다. 어째서 우리 가 지금 여기에서, 이런 모습으로 재회를 준비해야 하는 건가. 여기엔 아무것도 합리적이거 나 논리적인 것이 없다. 그래서 이자드 자신의 성격은 더더욱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 뭔가 열심히 생각하고 있구나. 전에도 말했었지. 넌 쓸데없이 생각이 너무 많아.” 낯익고도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자드는 돌아보지 않았다. 몸이 마비되어 그럴 수가 없기도 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휘안은 이자드 옆 계단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습은 여전히 카라와 같다. 그러나 표정은, 표정만은 전혀 달랐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인간적이고 풍부한 표정이 담긴 얼굴로 눈을 내리뜨며 가볍게 웃었다. “……재미없군.” 이자드는 차갑게 대꾸했다. “이 이상 뭘 원하는 거지? 모든 일이 네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비델!” 휘안은 대답 대신 충성스러운 신관의 이름을 불렀다. “네.” “내려가서 저 앨 막아.” 침묵. 그리고 비델은 아무 대꾸도 없이 문으로 걸어갔다. 이자드는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쫓으며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기회를 주는 것 뿐이야. 저 녀석은 언제나 내 명으로 죽기를 기대하고 살아왔으니까…이 제까지 한 봉사의 대가로 그쯤은 해줘야지.” 휘안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실컷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재미가 없어져서 짜증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배어있었고…생각지 못한 공허감도 있었다. 잠 깐 그 귀퉁이를 엿본 것만으로도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공허. 왜? 이자드는 갑작스레 세상이 빙그르르 도는 듯한 혼란을 느꼈다. 그가 싫어하던 휘안과 눈앞 에 있는 밉살스러운 꼬마가 같은 존재가 맞는 건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는 기 진한 목소리로 자그맣게 물었다. “넌 누구지?” 휘안은 그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는 듯 조용했다. 그들은 조용히 그 텅빈 방에서 함께, 비델 이 카라의 손에 죽고, 카라가 꽤 오랫동안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옛날 옛날에…” 휘안은 여전히 턱을 괴고 계단에 앉아 문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자드는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리아로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해룡 뮤로아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다의 지배자였던 시 절, 그 때 이 땅에는 많은 종족이 살고 있었고, 그 중에 나라카라고 하는 종족이 있었지.” 나라카. 이자드의 눈을 보고 휘안은 히죽 웃었다. “그래, 나라카. 들어본 적이 있나 보구나.” 나라카, 트리탄, 긴나라. 천년 동안 세 번 마하칼리가 강림했다. 휘안은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왕은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지. 조금씩 조금씩…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천천 히, 태어나는 아이의 숫자가 줄고 있었던 거야. 그들은 강한 데다가 수명도 길었으니까, 처 음에 눈치챘을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 아닌 것 같았지. 어쨌든 아이들은 아직 태어났으니까. 그러나 점점 일은 심각해져서 아이들은…뱃속에서 죽어버리거나 아예 태어나지 않았고, 태 어난 아이들 중에서도 반 이상이 불구였지.” 이상한 느낌이었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듣는 듯한. 나라카라는 이름을 긴나라로 바꾸 어 놓기만 하면 똑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도 아직 왕의 아이들은 멀쩡했어. 그래서 다들 안심하고 있었지. 왕위 계승자가 둘이 나 있으니 아직 멸망의 때는 오지 않았다고 말이야. 형제였지…아주 많이 닮은 아이들이었 어. 적어도 겉모습은 말이야.” 검은 눈동자가 이자드를 일별하고 다시 문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나라카 족에게는 아주 특수한 능력이 하나 있어서…그 능력이 있어야만 성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지. 자신의 혼을 둘로 쪼갤 수 있는 능력이야. 뭐 자세히 설명할 것까지 는 없겠지만. 여하튼 가끔 그 능력을 받지 못한 불구의 아이가 태어나기는 했지만 왕족 중 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단다. 그래…그래서 그들은 왕위계승자의 성인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의 동생은…그애는 그 때쯤 여행을 떠나고 없었지. 왕위계승 같은 일에 별 관심이 없었거든. 그래도 형의 성인식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했었지만 말이야. 오지 않았어. 오지 않았지. 1년이 더 지나도록…사람들은, 동생을 기다리고, 형의 성인식을 기다렸지. 혹시 능력이 늦게 나타나는 건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러나 아니었어. 왕은 마침내 인정해야만 했지. 자신의 맏아이가 불구라는 것을……” 휘안의 말 꼬리에 차가운 웃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자드는 강한 불안을 느꼈다. 머리가 아 팠다. “선택의 여지가 없지. 그들은 1년동안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었어, 물론. 만일을 대비하여 두번째 왕위계승자를 찾아헤매고 있었지. 그래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을 무렵 파 견대가 두번째 아이를 찾아냈어.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은 새로운 희망이 아니라 절망 이었지. 완전한 절망. …동생은, 이미 나라카의 이름을 배신해 버렸던 거야.” “배신하다니?” 이자드는 저도 모르게 묻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휘안은 예상했 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동생은 순조롭게 성인이 되어 혼을 쪼갤 수 있는 능력을 얻었지. 그런데 그 힘으로…엉뚱 한 짓을 해버렸거든. 혼의 절반을 다른 자를 살리는 데 써버렸던 거야. ‘그’는 더 이상 나 라카족이 아니었지. 이제, 왕위계승자는 없었어.” 다른 자를 살리는 데 써버리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자드는 감히 묻지 못했다. 휘안은 거울을 흘끗 쳐다보고 카라가 얼마만큼 다가왔는지 가늠해보고는 일어서며 이야기속 도를 빨리했다. “자식 하나는 불구, 하나는 배신자. 왕이 어떻게 됐겠어? 제정신이 아니었지. 꿋꿋하게 종 족의 살길을 찾아헤매던 왕도 완전히 자포자기상태에 들어서 버렸어. 왕은 어차피 멸망할 거라면 함께 가자고 생각했지. 자살하면서 제 자식들을 먼저 목매달아 죽이는 어미처럼 말 이야. 그래서 왕이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휘안은 광대처럼 기괴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하칼리를 불렀지.” 휘안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마하칼리라는 이름이 몰고 온 죽음 같은 침묵이 방 안에 깔렸다. 타닥, 타닥, 타닥. 침묵 속에서, 카라의 발자국 소리는 이제 거울 속에서 들리는 것인지 바깥 에서 들리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휘안은 갑자기 이자드에게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서 말했다. “그래서, 네가 그녀에 대해 뭘 알지?” 그녀 …카라를 말하는 건가. 이자드는 순간 카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낯선 칭호에 멈칫했다가, 휘안의 살기에 놀랐다. 그의 눈동자에서 검은 불꽃이 튀었다 싶더니 작은 손이 뱃속을 파고 들어왔다. 마비된 속에서도 이자드는 뜨거운 통증을 느꼈다. 휘안은 손을 빼내 어 묻어있는 피를 핥으며 히죽 웃었다. 겉잡을 수 없는 광기가 이자드마저도 질릴 정도로 뻗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웃는 듯, 흐느끼는 듯 중얼거렸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계속되지. 난 이야기를 해주고, 넌 항상 잊어버리고. 나는 이야기해 주고, 너는 잊어버리고…이자드, 사랑하는, 내 가장 증오스러운 동생. 배신한 것은 너였는데 어째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거지? 응? 말해봐……왜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녀를 만나는 걸까? 네가 그녀를 찾는 걸까, 그녀가 너를 따라다니는 걸까?” 뼛속까지 저려오는 한기에 이자드의 정신은 휘청였다. 뭐라고? “…봐라.” 휘안의 손이 허공에 뻗더니, 그 손 가운데쯤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어둠이 뭉쳐들기 시 작했다. 문 너머 멀리 발소리가 들렸다. 방 안은 숨막힐 듯한 침묵으로 팽팽이 부풀어오르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어둠은 조금씩 몸을 뻗어 긴 창과 같은 길이로 변했다. 이자드는 믿 을 수 없었다. 그것, 어둠의 창은 그와 루이가 긴나라족의 창성에서 보았던 바로 그 창이었 다. 휘안이 히죽 웃었다. “이건 사실 네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야. 마하칼리가 쓰는 어둠의 창과는 달리......” 그는 이자드에게서 고개를 돌려, 문을 향해 창을 조준하며 말을 이었다. “…이건 오직 하나의 존재에만 통하거든. 바로…” 거친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멎었다. 이자드는 필사적으로 손끝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소용없이 굳어있는 자신의 몸을 저주했다. 휘안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그의 눈은 차가운 살기를 뿌 렸다. 저주와 증오. …마침내, 문 밖에서 망설이던 손이 뻗어와 문을 밀었다. 카라에게는 놀랍게도 문은 잠겨있 지 않아, 미는 것만으로 소리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그녀가 통과할 수 있을만큼 열린 순간, 카라의 눈은 계단에 반쯤 기댄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이자드와 마주쳤고,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은 앞으로 크게 한발짝을 디뎠다. “안돼!!” 이자드는 울컥 목 위로 올라오는 뜨거운 것과 함께 외쳤다. 그 순간. 휘안의 손에서 어둠의 창이 벗어나 허공을 갈랐다. 카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채 다 돌리지도 못 한 상태에서 그녀의 발이 공중에 떴다. 어둠의 창은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어 카라를 꿰뚫은 채 통째로 함께 벽에 꽂히고 있었다. “카라!” 이자드는 정신없이 이름을 불렀다. 몸은 그의 눈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눈은 계속 카라와 마 주친 채였다. 그는 보고 있었다. 카라의 눈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차츰 고 통으로, 새카만, 아무것도 없는 어둠으로 꺼져들어가는 것을. 어둠의 창은 벽에 꽂힌 뒤에 부르르 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요히 카라의 명치께를 꿰뚫고 벽에 매달고 있을 뿐. 카라의 몸이 바르르 떨리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이자드의 머리속이 하얗게 비었다. “휘아아아아안!!!” 이자드는 노성을 질렀다. “화가 나?” 휘안이 어이없을 정도로 태연하게 그의 노성을 받았다. 그는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한발짝, 한발짝씩 카라 앞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이자드를 등뒤에 둔 채 카라를 올려다보았다. 이 자드에게는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벽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까지 적시기 시 작한 붉은 피가 보일 뿐이었다. 엄청난 피였다. 그렇게 작은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많은 피가 바닥에 고이고 있다. 그는 이제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입을 움직여 분노를 표현했고, 빠드득 소리가 울렸다. 휘안 이 쿡쿡 웃으며 어깨를 흔들었다. “가관이군.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패러노말 마스터 때문에 분노한단 말인가? 네가 미친 듯이 화내는 모습은 즐겁지만 말이야, 이자드……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는단다. 이 파 멸의 여신은 말이야.” “뭐……뭐라고?” 연달아 머리를 때리는 연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자드는 정신적으로 벌써 몇 번은 쓰러진 것 같았다. 뭐라고? “완전한 자를 원했어. 아버지는 말이야. 완벽해지고 싶었거든. 내가 완벽해질 수 없다면 완 벽한 것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지. 어머니는 나 대신 그런 걸 만들어내고 싶었던 거야. 이 미 오래 전에 그런 전설이 있었지. 우리가 만든 것, 우리와 같은 이름을 지닌 누군가가 만든 것. 신이 만들었다고? 신 같은 건 없어. 난, 난 말이야! 날 환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들이 모두 끔찍하게 싫었어. 다 죽어버렸으면 했지. 너, 너만 그런 바보짓을 하지 않았어도 이렇 게 되진 않았을 거야. 네가 있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알아들어? 네 잘못이었어! 내가 - 아버지가- 어머니가 우리가 마하칼리를 불러낸 건.” 휘안은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한층 차분해 진 목소리로, 똑똑하게 한 마디씩 끊어가며 말했다. “마하칼리는 불러들인 자의 원대로 그의 세계를 남김없이 파괴한다. 단순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지 ?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 거야. 모든 것이, 일순간에. 마하칼리의 명치를 꿰뚫은 창에서 피가 흘러내리면, 그 피는 파멸의 차크라를 돌리는 힘이 되지.” 이자드는 기억했다. - 그래요! 아무도. 나를 빼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어요. 다 사라져 버렸죠…이젠 기억하는 자 들도 없을 만큼 오래 전에. 나만 남기고 모두, 멸망해 버렸어요.” 루코, 그, 물 속에서는 숨을 쉬지 못하는, 불구의 트리탄 족이 말하고 있었다. 울먹이면서. - 멸망이라니,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 나…난 몰라요. 직접 보진 못했는걸요. 뮤로아님이 보여주셨어요. 갑자기 섬 주위에 새까 만 기둥 같은 게 생겼었어요. 뮤로아님께선, 그들이 죽음의 나라에서 온 자들이라고 하셨죠. 그리고는, 그리고는 며칠 못가서 섬이 새빨간 고리 같은 것에 휩싸이더니…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는, 사라져버렸어요. 사라져버렸어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나…만 여기 남겨두고.” 휘안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오직 하나뿐. 그 종족의 생존자는 단 한명만 남는다. 그리고 그자는 반 드시 불구인 거야……”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없었던 루코. 날개 절반이 불구였던 파이. 그리고…그리고? 나라카족 의 생존자는?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있지.” 휘안의 목소리는 비웃음을 띠고 울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몸……마하칼리가 스스로를 낳을 수 있게 해주는 ‘씨앗’.” 순간 파이의 목소리가 쨍 하고 귀를 울렸다. 아이혜! 그래서였던가. 그래서 카라가 아이혜일 수 있었던 건가. 그 몸을 씨앗으로 이용했기에?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거짓말…… “거짓말! 네 말은 믿지 않아.” 이자드가 속으로 내뱉은 말이 실체를 이루어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이자드의 목 소리도, 휘안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카라였다. 이자드는 숨을 들이켰다. 명치에 긴 창을 꽂은 채 카라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 수그렸던 머리부터 들어올리고, 가까이에 서 있 던 휘안을 향해 손을 뻗는다. 휘안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였다. “날 죽여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네가 나를 비난했지. 매번 그랬어. 그래, 내가 혼 돈을 불렀다. 내가 피를 불렀다. 내가 암흑의 군주이며,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가 아들 을 잡아먹게 만드는 자이며, 질서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광기로 몰아넣는 자다. 그래서 너는 뭐지? 적어도 혼돈은 살아있는 것이지. 혼돈 속에서는 다시 생명이 태어나. 혼돈이 찾아와주 지 않으면 질서 따위는 유지되지도 않는 법이다. 내가 굳이 손을 집어넣어 이런 아수라장을 만들지 않아도, 굳이 내가 부추기지 않아도 사람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고 아비규환을 만들 며 낡은 것은 소멸하고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그런데 너는 뭐지?” 휘안의 눈에서 광기가 흘렀다. 이자드는 그의 목소리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카라는 텅 빈 검 은 눈으로 그저 휘안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얼굴에는 아무 것도, 표정이라고 할 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휘안은 미친 듯이 외쳤다. “너를 봐! 꼴사납게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너를! 아무리 다른 자의 생명과 육체를 훔쳐다 입어도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무(無)다. 아무것도 낳지 않고, 아무것도 새로 만 들어내지 않아. 네게는 생명 따위는 없어. 오직 파괴할 뿐이지.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고, 모든 것을 없었던 곳으로 되돌리고, 불모지로, 황량한 사막으로, 한줌의 재로 만들 뿐이다. 너는 불모의 어미요 파멸의 여신이다. 그런 네가 나를 비난하고 증오한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아, 네가 증오라는 게 뭔지 알기나 할까?” 이자드는 새까만 그림자 같은 것이 카라의 눈을 뒤덮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카 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죽었어야 마땅할 육체가 천천히 움직여 명치께로 손을 뻗었다. 어둠의 창은 그 손이 닿자마자 힘없이 사라져버렸다. 후두두둑. 피가 터져나와 바닥 으로 흘러내렸지만 몸은 떨어져내리지 않았다. 카라의 입에서 결코 울리지 않을 외침이 터져나왔다. 소리로 전달된 것은 아니었지만 공기 가 폭발하듯 주위로 밀려났다. 그녀에게서 흘러내린 피가 일어나, 조금씩 조금씩 소용돌이치 며 원형의 고리모양을 이루기 시작했다. 피는 피 이상의 것이 되고 원은 한번 회전할 때마 다 점점 넓어진다. 회전하는, 피의 차크라… 이자드는 멍하니 눈앞에 떠오르고 있는 피의 차크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아있을 리 없는 조각상이 피를 흘리고 있다. 긴나라족을 닮은 금빛 눈동자가, 갑작스레 세 상에 내던져진 그 가엾은 존재가 카 라를 노려본다. 강철같이 단단한 손이 소녀의 목을 조였다. 어머니를 증오하는 아이들.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 무(無)로부터 왔다가, 그 암흑 속으로 되돌아가는 아이들. 파류나 왕이 말했다.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서. “마하칼리Mahakali- 위대한 죽음. 피할 수 없는 파멸의 수레바퀴…우리가 불러낸 파멸의 여신입니다.” 휘안이 어깨를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나가야 해-” 이자드는 마비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휘안은 피의 차크라 안으로 끌어당기는 인력에 저항 하여 이자드를 잡고 빠져나가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눈은 카라에게 향해 있었다. 혼란과 비 탄이 마음을 사로잡아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네가 정말로 그녀였다고? 네가 창성을 날려버린, 긴나라족을 멸한, 트리탄족을, 그리고 나라카 족을 무(無)로 돌려보낸 그 마하칼리였다고……그의 명치에도 뜨거운 창이 꿰뚫고 지나간 듯한 통증이 일고 있었다. 사실일 리가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휘안이 말한 것 전부가 진실 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막막하던 기억의 벽이 허물어진다. 먼, 먼 어느 날엔가 겪었던 일. 그가 한 짓, 휘안이 한 짓. 휘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한 말은 진실의 절반밖에 담고 있지 않았다. 절반, 혹은 한쪽 면. 나머지는 거짓이었다. 휘안 이, 반쪼가리 혼이 살아남기 위해 텅 빈 곳에서 자아낸 아름다운 거짓의 거미집. 한번만 손 을 휘두르면 날아가버릴 거미줄…….이자드는 비통함을 느꼈다. 절망을 느꼈다. 절대로 기억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잊어버릴 것 그는 이제 휘안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쌍둥이가 아니었다. 생존자는 휘안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자드 뿐이었다. 그 때의 이름은 이자드가 아니었지만. 휘안은 이자드가 버린 반쪼가리 혼이었다. 불구의 영혼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절대로 그것을 기억해내선 안되었다. 절대로. 카라의 눈동자는 크게 열린 채 이자드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 속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전과 똑같은 무한(無限)이 있을 뿐……이해할 수 없는,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눈동자. 한 순간, 번개가 명멸하듯 빛이 시야를 덮었다. 피의 차크라가 돌고 있었다. 이자드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걸로 끝을 내자. 모두. 그러나 피의 차크라는 완전히 돌기 전에 회전을 멈추어 버렸다. 이자드는 눈을 뜨고, 그의 얼굴 앞까지 흘러내린 피자국을 보았다. 사방이 고요했다. 바깥, 아칸서스시도 조용하기만 했다. 휘안은 피의 차크라에 휘말려 상처를 크게 입었는지 옷꾸러미처럼 구겨박혀 있었다. 카라는 없었다. 조금씩 마비가 풀려, 몸을 질질 끌고서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는 계단을 기어올라갔 다. 바깥은 폐허였다. 아칸서스시는 도저히 사람이 살던 도시라고 할 수 없는 처참한 몰골이었 다. 그러나,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 있었고, 살아있는 이들은 폭풍처럼 도시를 휩쓴 재앙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치를 살피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금 전에 완전히 무(無)로 돌아갈 뻔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 나,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자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쏟아진다. 망각의 잠이. 12. 패러노말 마스터 사람들은, 전설은, 신화는, 이야기는 언제나 진실을 쪼개어 간직한다. 쪼갠다는 말이 그렇다 면 여러 개의 면을 가진 물체의 한쪽 면밖에 비추지 못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진 실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 되고, 모두 사실이면서도, 모두 거짓이라는 모순이 존재할 수 있 게 된다. 존재할 수 없는 마하칼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경계선 맨 끄트머리에 어떤 이들이 있었다고 하자. 무엇인가를 창조할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이들. 누우스. 그렇다고 이들이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 다. 그들에게는 성별의 구분이 없었고, 의지와 실재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하나이면서도 여 럿이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완전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았 다. 그들이 창조하는 것들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세상은 다른 이들에게 그렇듯 그들에게도 부조리했다. 다만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덜 그랬던 것 뿐이다. 혹은, 더 부조리했던 걸까? 그들은 꿈을 꾸었다. 그 꿈을 통해 스스로를 다시 낳았다. 그렇게 해서 많은 것이 생겨났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들 모두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 마하칼리가 태어났다. 처음에 마하칼리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 존재아닌 존재로서 마하칼리는 오랜 세 월 동안 아무 곳도 아닌 곳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누군가가 마하칼리를 불렀다. 누우스가 처음 낳았던 아이들, 마하칼리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종족들 중 하나였다. 그리 정확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마하칼리는 불러낸 자, 나라카족의 왕은 미쳐버린 자식을 살리는 대가로 모든 것을 바쳐도 좋다 했다. 마하칼리는 나라카족에 맞닿뜨려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세상에 대해 알 게 되었고, 왕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어차피 마하칼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을 무 (無)로, 태어나기 전, 존재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 뿐이었으므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난 마하칼리는 세상에 호기심을 느꼈다. 누우스의 현 현(顯現)인 세상에. 그러나 마하칼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었고, 누군가가 불러내지 않 으면 원래의 무위로 돌아가야 했다. 마하칼리는 나라카족에게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 모순 덩어리인 씨앗을 건져내어 자신에게 없는 창조의 불씨를 대신하고, 그 씨앗을 통해 스스로 를 낳았다. 그렇게 해서 패러노말 마스터가 태어났다. ** 기억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떤 장면은 그녀가 본 것이었고 스스로가 겪은 것이 었지만, 어떤 것들은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본 것처럼 생경하기만 했다. 어째서 머리 속에 들어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의 파편들. 그 기억들은 감각적으로는 온전했지만,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개입되어 있지 않 았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먹으면 그 맛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느낀’ 맛을 기억한다. 먹어 보는 것만으로 조리법을 알 수 있는 미각의 소유자라 해도 사람이라면 우선 맛이 있다 없다 가 우선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들에는 그런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펼쳐 보지도 않 은 깨끗한 장서, 존재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 기억에는 시간적인 순서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카라는 꿈 속을 떠다니듯 기 억의 파편들 사이를 떠다니며 그렇게 생각했고, 그 순간 작은 안도감을 맛보았다. 적어도 그 렇게 생각할 만한 ‘나’는 남아있다는 사실에. 그 기억은 남의 것이었다. 그녀는 마하칼리 의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것을 전혀 읽어낼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 존재하며, 왜 한 종족을 지워버리고서, 불구자를 하나 남겨두는지. 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씨앗으로 삼아 세 상에 내려오는지.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이방인보다도 더 먼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연결되어 있는 존재, 어쩌면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등을 맞대고 있어, 결코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쌍둥이처럼. 휘안과 이자드, 이자 드와 루이처럼. 그리고 마하칼리가 알지 못하는 만큼이나 카라도,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카라는 몸을 떠받치고 있는 부드러운 힘을 느꼈다. 부드러운 모래가 물보라 처럼 떨어졌다. 입 안이 까끌까끌했다. 카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래를 뱉어내고 몸을 일 으켰다. 출렁이는 모래파도 속에서 균형을 잡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일어나 앉을 수는 있었다. 눈 앞에는 잔잔히 바람에 파도치는 은빛 모래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카라는 멍하 니, 의식의 절반쯤은 버려둔 채 옆을 돌아보았고, 몸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다가 넘어졌다. 어디에도 모래 뿐이었다. 카라는 몸을 떠받치는 모래파도 위에 엎드린 채 잠시 동안 멍하니 생각했다. 여기가 어디더 라?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지? 카라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 모래를 뱉어내고,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래의 바다였 다. 카라는 손가락 사이로 은빛 모래를 흘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얼빠진 듯한 웃음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작 이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였던가. 고작 이런 걸 알기 위해서였던가. 휘안이 부르는 대로 피의 길, 재의 길을 따라, 몰려드는 마법사들을 죽이며 걸어가는 동안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이자드와 루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었지만, 지금, 이제는 돌 아갈 곳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루이, 네가 사랑했던 파류나 왕을 죽인 것은 나야. 파이, 네 동족을 없애버린 것도 나다. 그리고 이자드…… 이자드. 카라는 머리를 약간 들어올리고 겨우 겨우 힘든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그녀는 아칸서스시를 존재 이전으로 되돌려놓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카라였다. 걷기 시작했다. 갈 곳도, 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얼마나 오랫동안인지 모르면서 생각하고, 걷고, 또 생각하면서 걷고…그러면서 몇 번이나 넘 어졌는지 모른다. 가끔은 발밑에서 갑자기 모래 파도가 강해져서 떠밀려 넘어졌지만, 사실 가장 자주 그녀를 넘어뜨리는 것은 모래 속에 파묻혀 있는 조개바위들이었다. “왓!” 카라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내뱉으며 나동그라졌다. 또 입에 모래가 들어갔다. 그녀 는 짜증스럽게 모래를 뱉어내며 뒤를 돌아보았고, 발에 걸린 것이 조개바위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조개바위는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부터 있었던 것들이고, 그러므로 어느 것에나 조개가 다닥다닥 붙어있게 마련이었으므로. 이 물체에는 조개가 하나도 없었다. 카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발로 툭 밀어보았다.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사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생각을 입밖에 내며, 서둘러 몸을 숙여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바다에 서 물을 걷어내기 힘든 만큼은 아니지만 이 파도속에서 모래를 걷어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파내면 파낸 만큼 모래가 밀려들어왔다. 카라는 오랜 시간 그 일에 몰두했다. 마침내 사람, 그것도 어린아이라는 게 확실해지자 카라는 손으로 파기를 그만두고 모래를 밀어내면서 그 몸을 공중에 들어올렸다. 자그마한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은빛 모래가 떨어 져내리며 드러난 것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카라는 파도 위에 떠있는 작은 몸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 아래로 은빛 모래가 다 시 모여들어 틈을 메우고 있었다. 아이의 은빛 머리카락은 그 모래와 거의 같은 빛깔이었다. “난다.” 마침내 그녀는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난다. 카라는 입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이며 아직 허공에 떠있는 작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 다. 그것은 기묘한……설명할 수 없는……경이로운 우연이었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이런 곳에서 그들의 운명이 교차하다니. 조금 전까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고통스러운 생각들 속에 이 아이의 자리는 없었다. 얼어붙었던 시간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카라는 팔을 내밀었다. 어린아이의 몸뚱이가 천천히 팔 안으로 떨어져내렸다. 크다고 할 수 없는 카라의 품에도 폭 안길 정도 로 작은 몸이었다. 코 아래 손가락을 갖다대니 가느다란 숨이 느껴졌다. 모래에 묻힌 깊이를 보면 아마 모래속에 파묻힌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듯 했다. 그렇다 해도 보통 사람의 몸이었다면 이미 질식했을 것이다.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드러난 목이며 팔에 자잘한 상처가 나 있기는 했지만 깊지 않았고 출혈의 흔적도 대단치 않 았다. 상처 탓에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죽으려고 했던 건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곤혹스러워졌다.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죽고 싶어하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그녀의 이기적인 만족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 운명대로 놓아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행동을 막았다. 다행히도,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오랫동안 번민할 필요는 없었 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척을 느끼고 들어올린 카라의 검은 눈동자는 끊임없이 일고 있는 모래바람을 뚫고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사람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이 모래바다에서 사 람은 저렇게 움직일 수 없다. 그녀는 다시 난다에게 시선을 떨어뜨리며 미간에 주름을 모았 다. 멈춰버린 듯 했던 머리는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 속도는 너무나 느렸다. 게다가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은 여전히 무가치한 일로 여겨졌다. 어쩐다? 둔중한 머리로 잠시 생각하는 사이, 몇 개의 그림자는 더 가까이 다가왔고 카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멈춰섰다. 세 명이었다. 그들은 이 모래바다에 태연히 서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놀란 빛을 숨기지 않았 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 자는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카라에게 정도 이상의 경 계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정신구조의 소유자였고, 여기까지 쫓아오게 만든 상대와 그가 저지른 일에 몹시 분노해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소녀가 누구냐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 가 그들이 쫓던 죄인을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눈치를 살피는 것은 잠깐이었다.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은 우리 것이야. 당장 내려놓고 사라진다면 놈을 도운 죄는 용서하겠다.” 카라는 그자를 직시했다. 미동도 없이, 꽤 오랫 동안 참을성 없는 그들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움찔거릴 때까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에는 희미한 짜증이 배어나왔다. “이 아이가 왜 너희 것이지?” 그 말에 앞으로 나섰던 자는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반문에 익숙치 못했고, 도전 에는 더더욱 그랬다. 아마 눈앞에 있는 소녀가 뭔가 이상하다는, 연장자다운 경계심이 없었 다면 두말없이 공격하여 둘 다 없애버리거나 소녀를 죽이고 죄인을 끌고 가려 했을 것이다. 뒤에 선 두 젊은이는 이미 그러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며 한발짝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는 눈살을 찌푸린 채 한 손을 뒤로 돌려 두 사람을 막고 말했다. “이름을 듣고 싶은데.” 그의 종족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한 태도였다…아직까지도 노예에게 은사를 베 푸는 귀족과 같은 오만함은 남아있었지만. “그쪽의 이름은?” 순간 그의 얼굴 근육이 푸들거렸다. 그는 험악한 눈으로 카라를 쏘아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인간은 아닌 것 같아 존중해줬더니 안되겠군. 우리 용족을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다는 뜻 으로 받아들이겠다.” 용족 이라는 말에 담긴 위협에 카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는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 이자드에게 들었던 말과, 마치 조금 전에 안 듯한 오래 전 지식이 뒤엉켜 머리 속 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용족은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다고 들었는데…생각만큼 심하지는 않네? 좋아. 너희가 한 번 버렸던 이 아이를 왜 너희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지, 설명을 들어보고 결정할게.” “미친 게 아닌가요?” 뒤에 서있던 젊은 용족들이 어이없다는 듯 내뱉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은 연장자는 눈 을 가늘게 떴다. 카라는 여전히 웃음기 없는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고, 모래파도는 그들 주위 로 거세게 밀려왔다가 밀려가고 있었다. 그는 용족치고 놀라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할 정 도로 나이를 먹은 자- 장로였다. 무게감있는 목소리가 답했다. “…그는 우리 일원을 살해했다. 우리 손으로 처단해야겠어.” “용족을? 마법으로?” 카라는 진심으로 놀라서 물었고, 그 모욕적인 질문에 세 사람의 용족은 얼굴에 경련을 일으 켰다. 용족 장로는 쇳소리가 섞여나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언제까지 이런 쓸데없는 문답을 계속하자는 거지? 그는 우리 일족의 살해자이며 또한 우 리 일족의 피를 이은 자. 당연히 우리가 처분해야 할 존재다.” 카라는 비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음…일족의 피라. 한 번 버렸으면 그걸로 끝이지 다시 혈통을 문제삼는 건 또 뭐지? 누굴 죽였는지까지 말해주면 정말로 결정을 내릴게.” 장로는 눈을 번뜩였다. 그 눈에는 이미 난다를 넘겨주든 않든 카라를 죽여버리겠다는 살심 이 깃들어 있었다. 카라는 그것을 못본 척 하고 다시 말했다. “누굴 죽였다는 거지?” 세 명의 용족은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인 채 무거운 시선을 던졌다. 카라는 묘하게 마음 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말투…표정, 행동거지나 생각 전체가 달라져 있었고, 그것 이 이제서야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에. 그러나 얼굴에는 아직 미소가 달라붙어 있었다. 카라 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천천히 말했다. “누구, 였냐니까.” 순간 공기가 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공기를 메우고 있던 모래파도의 흔들림이 갑자기 사라졌다. 카라와 난다, 대치하고 있는 세 명의 용족 둘레로 둥글게 빈 공간이 생겼다. 투명 한 막을 둘러친 듯, 모래파도는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막 카라를 공격하려고 하던 용족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카라는 난다를 조심스럽게 발치에 내려놓고 무릎을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막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웃음, 같은 분노가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싸아한 설 레임…<힘>이 차오르는 충만감이 동반하는 설레임에 가슴이 뛰었다. 눈 앞에 있는 세 용족 의 소멸을 떠올리고, 아직 보지 못한 용족의 세계를 피의 차크라 안에 가두고, 모든 것을 무 (無)로 되돌리는 고통의 희열을 맛보았다. 한 순간이었다. 한 순간. 그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카라는 입술을 씹으며 용족들에게 음 울한 시선을 던졌다. 용족 장로의 안색은 이제 창백함을 지나쳐 새파랗게 변해 있다. 물론 뒤에 선 젊은 축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놀랐다가 오히려 자극을 받았는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 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있는 카라의 눈동자는 어떤 불꽃도 꺼뜨릴 수 있는 검은 우물 같았다. 그녀는 등을 곧게 펴며 조용히 말했다. “무(無)에 있을 때의 나는 소환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무 대가 없이도 너희 정도는 끝장낼 수 있어. 말해보라, 네 <종족>을 대표하여. 이 <불구의 아이> 가 누구를 죽였지?” 그녀의 음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용족 장로는 숨을 들이키며 정신없이 비틀거 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더 이상 어린 인간 소녀의 모습이 아니 라, 내면을 알아볼 수 없는 검은 그림자였다. 검은 시선이 그를 꿰뚫고 지나가며 멸망의 환 영이 마음 속에서 불타올랐다. 그는 선뜻한 오한에 몸을 떨며 오래 전에 들은 이름을 기억 해 냈다. 그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하칼리!” 마하칼리가 오다니! 그의 마음 속에 절망감이 차올랐다. 아이들의 숫자가 줄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는데. 벌써 그들에게도, 위대하고 강력한 용족에게도 멸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단 말인가? 망각 속에 들어간 긴나라족의 전례를, 그 이전 언젠가 그렇게 사라졌을 고대 종족들의 선례를 따라야 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용족의 강력함을 믿고 있는 장로는 마음 속으로 거세게 도리질을 치다가, 다시 한 번 선뜻 한 오한과 함께 난다를 쳐다보았다. 불구의 아이. 피의 차크라는 한 종족을 모두 망각 속에 묻어버린다…불구로 태어난 아이 하나만을 남기고. 설마, 벌써 그 때가 왔단 말인가? 그러나 위대한 죽음의 현신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 지금은 패러노말 마스터야.” 그 말의 의미가 가닿는 데 영원의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장로는 갑작스레 절망의 구름이 걷히자 식은땀을 흘리며 휘청거리고 말았다. 두 젋은이가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뻗었다. “아니, 아니. 괜찮다. 아무 것도…아무 것도 아니야.” 장로는 두서 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더 이상 카라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카라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실력행사 없이 알아볼 만큼의 지식이 있어 다 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장로라고는 해도 일족의 왕이 아닌 이상에는 가장 중요한 것 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죽인 게 누구라고?” 장로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서 말했다. “그 아이를 낳은 여자입니다.” “아…새끼를 죽이지 않고 버린 어미인가.” 카라는 저도 모르게 이자드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난다는 용족 의 대지, 우 카흐마에 들어갈 방법, 그리고 제 어미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자 휘안과 계약했 겠지. 어머니를 증오했던 걸까? 아니면 단지 만나고 싶었던 걸까? 처음부터 죽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어쩌다보니 죽여버리고 만 걸까. 어느 쪽이든 난다가 왜 여기, 모래바다 속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게 된 셈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목적이 용족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싶었던 거라면 이제 목적은 사라졌다. 목적이 언젠가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던 거라면 그것 역시 사라졌다. 난다는 죽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다가 죽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아까의 망설임을 버릴 수 있었다. 카라는 다시 몸을 굽혀 난다를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말했다. “난 이 아일 살려야겠어.” “그건…!” 장로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항의했다. 카라는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돌아섰다. 난다의 무게로 팔이 아파왔지만, 그 무게감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카라는 팔 에서 미끄러지려는 난다를 끌어올려 안고 뺨을 대며,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 싸우겠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직접 설명할 수 없겠다면 내가 장로회에 가주어도 좋 고.” 뒤에서는 성질을 못이기고 날뛰는 젊은 용족들을 장로가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모 래파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던 힘은 카라가 터벅터벅 걸어가는 동안에도 흔들림없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카라는 자꾸만 팔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려는 난다의 몸을 추스르며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녀가 쳐놓은 막은 모래파도만 막는 것이 아니었다. 힘의 공백지대 저 안에서 용족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뭐든 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기분이 어떤 지 맛을 보라고. 카라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잠깐 멈춰서 난다를 업어들었다. 무게감. 저려오 는 팔 안에 깃든 존재감. 터벅터벅, 모래 파도 위를 걸으며 카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미 없는 아이야, 넌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손에 걸려든 거야. ** 거울 속의 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거울 속의 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 속에 그려오던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 울 속에서 늘 보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얼굴이 앞에 있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강하고, 조금 더…잔인한 얼굴. 그녀의 눈동자는 그와 똑같은 제비꽃색이었고 그 안에 깃든 감정은, 그가 거울 속에서 늘 보던 혐오감이었다. 단지 만나보고 싶었다고. 그저 한 번쯤, 왜 나를 버렸냐고 물어보고 싶었다고 말하려 했는 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를 버린 건 어쩌면 죽일 수 없어서였을지도 몰라 바보같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리석게도. 그런, 그 여자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책, 인간의 문화가 그렇게도 수없이 되뇌이던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감언이설을 믿어버린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머니라고? 그게 어쨌단 말인가? 단지 알을 낳았다는 이유로, 단지 생김새가 닮았다는 이유로…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에게는 내가 필요없었고, 그래서 버렸다. 죽이기도 귀찮아서 버렸다. 그래도 그녀를 죽인 건 증오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몇 번이고 되풀이된다. 깊은 의식의 우물 속에서 몇 번이고, 태어나고, 버려지고, 마 법을 익히고, 언젠가 인정받고 싶다는 어리석은 희망에 매달려 강해지려고, 강해지려고 발버 둥을 치고, 죽이고, 또 죽이고…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자신의 거울상 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 이제 됐어. 이제 그만둬. 악몽의 우물 속, 더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아무래도 좋 다고. 이걸로 됐다고, 이제 더 이상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좋은 건가? 난다는 한 순간, 반복되는 악몽의 틈새에서 몸부림치며 자문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건가? 왜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 는 거지? 왜 이제까지 아득바득 살아왔단 말인가? 그것밖에 없다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의식없이 걷던 몸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 앞에 은빛 모래파도가 휘 몰아치고 있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실 끊어진 연처럼 축 늘어진 몸이 바람에 휩쓸렸 다. 이걸로 됐어…난다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눈앞에 다가드는 암흑이 더 이상 악몽으로 통하 는 입구가 아닌, 무(無)로 향하는 길이기를 바라며. 그의 소망은 전과 다름없이 묵살당했다. 맨 처음 돌아온 감각은 청각이었다. 웅웅거리는 듯한 소음 ?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누군가 가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서서히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온기. 감은 눈 위로 문득 문득 주홍색 불빛이 아른거린다. 빛이 환히 들어왔다가 나가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사방에서 속삭이는 소리. 주홍색 불빛과 따스한 온기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차갑고 딱딱한 무엇인가가 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갑자기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 속에 잠겨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저 불빛을… 그는 손을 뻗었다. 손을 뻗었다. 혹은 뻗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 난다는 눈을 뜨고 한동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자신이 단단한 돌바닥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위에 허름한, 망토 비슷한 모양을 한 천이 씌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또 한참이 걸렸다. 그제서야 눈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시 선이 닿는 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몸에, 얼굴에는 모닥불의 주홍빛 음영을 드리우고, 불빛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소녀. 그녀는 문득 눈을 들어 난다가 가만히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언뜻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난다는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곁에 놓인 작은 그릇을 들고 난 다에게 다가갔다. 그릇을 앞에 놓고 쭈그리고 앉더니 간결하게 묻는다. “먹을 수 있겠어?” 난다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새까만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던 소녀. “당신이 나를…구했습니까?” 가느다란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분노해야할지, 감사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듯 했다. 그 어조 에 카라는 시선을 올리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음…구했다면 구한 건가…주웠다는 편이 맞을 것 같은데.” 난다는 입을 다물고 돌처럼 딱딱한 얼굴로 계속 그녀를 쳐다보았다. 주웠다니, 어디에서 ? 어떻게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대답없이 그릇을 들어보였다. “못먹겠어? 아니면 안 먹을 거야?” “왜?” 카라는 그릇에 숟가락을 담그다 말고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먹어두는 게 좋을 텐데. 아무리 용족이 체력이 좋다지만.” “용족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난다는 버럭 소리를 질렀고, 이번에는 그 목소리에 원망이 배어 있었다. 기력이 없는 와중에 도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카라는 물끄러미 난다를 내려다보다가 숟가락을 들어 그 입에 가져갔다. “먹어.” 순간 난다의 제비꽃색 동공이 확 벌어졌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마법사는 작은 입술을 앙 다물고 돌아누우려고 몸을 움직였다. 카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렇게 원망하면서 어머니는 뭐하러 만나러 갔어?” 어설프게 돌아누운 작은 등이 움찔 떨렸다. 카라는 한숨을 내쉬며 난다를 답싹 안아들었다. 완전히 어린애 취급이었다. 지난번에는 난다 쪽이 카라를 돌봐주었고 그 때는 카라가 더 어 린아이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난다는 분노와 모멸감에 입술을 바르르 떨었지만 반항할 힘은 없었다. 카라는 여전히 꽃잎처럼 벌어져 있는 적자색 동공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끊어서 말 했다. “네가 죽고 싶어하거나 말거나 난 상관 안해. 그래도 먹어. 거기 쓰러져 있었을 때 네 목숨 을 포기했다면 그 이후 목숨은 내가 주웠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지. 자, 먹어!” 카라는 거의 우격다짐으로 숟가락을 밀어넣었다. 난다는 발끈 화를 내며 얼굴을 피했다. 카 라는 그 얼굴을 따라가서 숟가락을 내밀었고, 그는 힘없이 얼굴을 흔들어 뿌리쳤다. 실랑이 가 계속되었다. 댕그랑. 결국 그릇은 땅에 나뒹굴었다. 둘 다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니, 씩씩거린 것은 난다 쪽이었다. 카라는 잠시 팔짱을 낀 채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좋아. 그렇게 살기 싫다면 선택의 여지를 주지.” 난다의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카라는 가차없이 말했다. “첫째, 네 삶을 위해서 산다.” 난다는 보기좋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 표정은 다음 말을 듣고 허물어졌다. “둘째, 날 위해서 산다.” “아니 그런…” “그런 뭐?”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에 카라는 정색을 하고 답했다. “앞으로의 생이 날 위해서 사는 거라고 생각하라고. 이전의 생 전부가 날 만나기 위해서였 다고 생각해버려. 너 자신만으로 살아갈 의미가 안된다면 내가 의미가 되어주겠다 이거야. 날 위해서 살아.” 난다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카라를 쳐다보았다. 모닥불이 사그러들며 주홍색 불빛이 심하 게 흔들렸다. 그 너머에 있는 검은, 검은 눈동자. 그에게는 카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카라는 난다의 멍한 얼굴을 쳐다보며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수많은 생명을 버리고 너 하나를 살렸다. 너 하나를. 너 하나와 수천을 맞바꾼 거나 다름없 어. 그러니까, 넌 살아야 해. 내가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지금 나에겐 그것밖에 의미가 없 으니까. 넌, 살아야 해. 난다의 이야기, 마지막 내게 새 이름을 붙여주고, 나를 데리고 여행을 했다. 북쪽으로, 더 북쪽으로, 그리고는 바다 를 건너.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그 힘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 그녀는 누가 욕을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처음 만났던 그 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아무 래도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턴가 카라는 홀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드문드문 찾 기 시작했다. 가끔은 나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돌아왔고, 그러니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날, 카라는 죽었다. 나는 막막한 허공에 던져졌다. 나는 어머니에게 또 한 번 버림받았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카라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카라 에 대해, 패러노말 마스터에 대해, 마하칼리에 대해. 그리고 카라가 알았던 사람들, 사랑했던 사람들,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자드 루이를 다시 만났을 때까지도 아마, 카라의 죽음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나 보 다. 이자드 루이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니, 기억해내지 않았다. 그는 기억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카라……는 왜 죽은 거지?" 마침내 이자드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몇 달 전, 이자드 루이가 나의 학교 문을 두드렸을 때 느낀 환희와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실망감. 그러나 그 실망 감엔 달콤함이 섞여 있었다. 결국, 그도 그렇게 카라에게 가깝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자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는 외면해 버렸 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 작은 승리감을 의식하자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고 해서 카라에게 이자드가 얼마나 중요 했는가 하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나는 문득 자문해 보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 검 은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눈을 지닌 이 마법사가, 오래 전 내가 마주쳤던 그가 맞는 것일까? 이자드라고 하는 인물의 외양과 그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는 틀림없었지만, 깊은 잠 속에 들었을 때 그는 이미 한 번 죽은 것은 아닐까. 그는 오래...아주 오래 살아왔지만, 그 오랜 생이 그에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쌓았을까. 나는 포기했고, 그는 떠날 작정으로 있었다. 결국 우리 둘 다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그는 카라라는 이름과, 그녀에 대한 의문을 안고 살아가겠지. 적어도 다음 번 잠들기 전까지는. 그가 다시 잠들기 전에 카라가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카라가 떠나던 순간에 나는 곁에 있었다. 나만이 곁에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새까만 눈동자 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어느 샌가 활기를 잃어버린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 나를 원망하고 있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어째서?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왜 노쇠하고 죽어가는 운 명을 택한단 말인가? 얼마든지 더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얼마든지...신처럼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무수한 질문은 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 왜... 나는 겨우 그 말만을 내뱉았을 뿐이었다. 그래도 카라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 전에 했던 말 기억나? 나는 도리질을 쳤다. - 네가 그랬었지. 난 용족이 아니야. 인간도 아니야...그 때 내가... 기억이 났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넌 인간이야. 너는, 인간이 어떤 것인지 묻고, 스스로 가 인간인가 자문하기 때문에 인간이야. 인간 아닌 것은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아. 하지만 카라, 너는 나에게는 그렇게 말했으면서, 왜 너 자신에게는 그토록 혹독하지? 그녀 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와 보였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의 표 정은 고통스러웠다. 고통과 기쁨이 교차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 살고 싶어. 더 살고 싶어. 너와 함께 있고, 여행을 하고, 맛있는 물을 마시고, 눈밭 위로 내리쬐는 햇살을 즐기며...울고...웃으면서...기다리면서. 누구를? 나는 묻지 않았다. 카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 그러니까 지금 죽어야 하는 거야. 한숨처럼,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울고 싶었다. 내 눈물은 늘 그렇듯 어디로도 나오지 못하고 몸 속 어딘가, 어쩌면 핏줄 속이나 내장 속 즈음에 머물렀다. 카라는 그렇게 죽었다. 끝까지 내게는 수수께끼만을 남겨두고. 나는 이자드를 마주본다. 앞으로 몇백년을 더 살 수 있을까... 다시는 그를 보지 않으리라. 다시는.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언젠가...나중에 카라를 만나면......" 이자드는 내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 그녀가 돌아오더라도, 그건 나의 카라가 아니야. 나는 그제서야 처음으로...정말로, 온전히 카라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눈물 한 방울이, 몸 속 어딘가에 고여있는 물 위로 떨어졌다.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카 라가 속삭였다. - 넌, 살아야 해. 13. 돌아가는 길 [종결] 그곳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정정하자. 제 의지로 살아 움직이 는 것은 없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 바스락거리며 파도소리를 연주해내는 무성한 나무 들, 무심하게 흘러가는 물…그런 것들은 있었다. 그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생명의 울림이었어 야 마땅할 소리들. 하지만 그 모두가 일정한 선을 넘지 않고, 아주 작은 공간, 몇 사람인가 가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비워두고 있었다. 그곳에 누운 것이 자연에 어긋나는 존재임을 알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그 테두리 안에 발을 들여놓으며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지. 이 고요한 장소에 홀로 들어선 것은 외형상으로는 그닥 유별날 것이 없는 여자였다. 키도 중간쯤, 호리호리하지만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한 몸에, 간편하고 선이 단순한 옷을 걸치고, 한쪽 귀에만 푸른색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직 검은 빛으로, 어깨에 흩어져 있 다. 특별하다고 할만한 것은 눈동자밖에 없었다. 유달리 크고 검은 데다가, 묘하게도 사물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동자였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동굴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허리를 굽히고 안을 들여다본 다음, 들어 섰다. 몇 발짝 걸어들어가자 갑자기 내린 어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 다려야 했다. 그리고 또 몇 발자국, 바위턱을 넘고, 꽤 커다란 돌병풍을 에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길고 깊은 숨을 들이키고 다가갔다. 키가 제법 큰 남자였다. 코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선이 날카롭고, 짧은 검은 머리카락이 강인 한 인상을 주었다. 눈은 감겨 있어, 그 눈을 뜨면 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었다. 단 정한 자세로 누워 손을 편안하게 늘어뜨린 채, 그는 거기 누워 있었다. 누워서 잠을 자고 있 었다. 죽음과 구별할 수 없는 잠을. 그녀는 익숙한 태도로 그 시체에 가까운 사람 곁에 주저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발치 어딘가에 놓여있는 주머니, 1하스타 밖에 안되는 짧은 검, 약간의 건량.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다. 칼은 녹슬 지 않고, 건량은 썩지 않고, 입고 있는 옷도 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계속 잠들어 있 었다. “…안녕, 잠자는 왕자님.” 그녀는 잠시 턱을 고이고 그 시체 아닌 시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동굴 속에서 목소 리는 메아리치기보다 오히려 잠겨 들어갔다. “여전히 깨어나지 않네. 아니…아마 내가 떠나기 전에는 깨어나지 않겠지?” 그녀는 가만히 무릎을 끌어당겨 머리를 얹었다. “…내가 그런 생각하는 거 알아? 당신을 기다리면 어떨까…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면 어떨 까…안될 것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래. 안될 것도 없지.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 만, 달라질 게 없으니까 상관없잖아. 그렇지?” 검은 눈동자가 어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나도, 내 이전의 그녀들도.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 때에 이미 나는 카라가 아닐 테고 당신도 내가 알던 그 이자드 가 아닐 거야. 하지만 내가 지금 당신을 기다린다 해도, 깨어나는 것은 어차피 내가 알던 이 자드가 아니고 당신이 만날 나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겠지. 몇 번 생각해도 똑같아. 그런데도 말이야. 요새 들어 부쩍, 그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거야. 당신을 다시 만나서, 다시 처음부터 알아가도 되지 않을까. 처음 그 눈쌓인 계곡에서 만난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해도…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고, 동굴 속은 한참 침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카라는 손을 뻗어 이자드의 얼굴을 살짝 건드렸다. 손끝에 스친 머리카락과 피부는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실재하는 생명. 그녀는 물 끄러미 이자드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 얼굴은 볼 때마다 낯설다가, 가끔 낯익은 것으로 변 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만나고 헤어졌는데도 이렇게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당신들의 한계야.” 카라는 한숨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을 거둬들였다. “그걸 알지. 멸망 없이는 재생도 없다는 것, 끝이 없이는 시작도 없다는 것을. 당신은 언제 까지고 이대로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서는 구원받을 수도 없는 거야. 난 또 생각해. 난 정말 로 인간이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인간 이상의 것이 되고픈 걸까. ‘나는’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마하칼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 왜 그녀는 ? 나는 멸망의 대가로 삶을 원했을 까. 무엇을 이루려 했던 걸까. 왜 우리는……” 카라는 피곤한 얼굴로 목을 기울였다. “당신은 비겁해. 알아? 정말 비겁해. 언제나 외면하고 도망만 치지. 나는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난 때 로는 여신이 되었다가, 무(無)로 돌아갔다가, 다시 파멸이 되고, 피의 차크라가 되고, 카라가 돼. 지금의 나로, 이전의 나로, 그 전의 나, 또 이후에 올 나로. 때로는 이 굴레가 영원히 끝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또 때로는, 그렇다 해도 나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고, 당신도 뭔가를 쌓아가고 있을 거라고 믿기도 하고.” 물론 답 같은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답이 있었던 적도 없다. 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에 막막한 절망이 언뜻 어렸다가, 슬쩍 떠나갔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뺨을 긁적이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알은 어쩌면 좋을까.” “그 아이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카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한참만에 떴다. 눈은 다시 한 번 어둠에 익숙해져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갈 거야. 그 애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 그녀는 속삭였다. 아무도 듣지 못할 곳인데도 누군가가 들을까봐 겁내는 양. 그래도 그 속삭 이는 목소리에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음은 분명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갈 거야. 영원히 이 자리에 서 있느니 차라리 부딪쳐 깨어질 거야. 그러 니까 당신도, 부디, 쌓아가기를. 그래서, 언젠가는,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도록. 그렇게 하자, 우리.” 그녀는 마치 지금 잠들어 있는 이자드가 들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몸을 굽히고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그리고 잠시 그의 몸에 기대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일어설 때는 피곤에 절 어 휘청이는 듯 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잠든 사람에게서 멀어져 갈수록 걸음걸이에 활력 이 돌아왔다. 카라는 돌병풍 곁을 지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자드는 변함없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안녕. 이자드.” 안녕.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다음에 다시 볼 때에도. 그녀는 동굴 밖으로 나가, 경계선을 넘어서서 숲으로 들어섰다. 걸어가면서 주변은 점점 시 끄러워졌다. 개미들이 움직이고, 새들이 날고, 풀벌레가 울고, 뛰고, 싹이 움트고… 자연스러 운 흐름이 넘쳐흐른다. 그녀는 자신이 속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갈 길 을 서둘렀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