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다시 시작이다.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개막전이 열리는, 3만이 넘는 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축구경기장에선 그야말로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상공의 헬기에 몸을 싣고 있던 카메라맨은 전체적인 경기장의 장관을 폭넓게 담아내고 있었다. “어디, 그라운드를 한 번 잡아볼까…” 상공에서 잡는, 그것도 원거리로 그라운드를 잡아내는 화면 따위는 방송 화면에 나가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쯤은 뻔히 알면서도 어쩐지 무언가에 이끌리듯 카메라맨은 천천히 렌즈를 줌 인해 보다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 뭐야… 뭐가 저렇게 빨라?!’ 상공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보니 모든 선수들의 움직임은 한낱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것 같기만 했는데, 오직 단 한 선수만은 믿지 못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거… 그림 제대로 나오겠는데…?” 카메라맨은 그저 잠깐 동안 경기장의 야경을 촬영하기 위해 투입되었었음에도 어느덧 전력으로 상대편 골대를 향해 드리블해가는 붉은 유니폼의 한 선수를 잡아내고 있었다. - 뒤따라오는 상대방 선수의 스피드도 만만치 않았건만, 고개를 살짝 들어 전광판의 시계를 바라보는 여유도 가질 만큼,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 선수에게는 자신감도, 또 스피드와 힘도 넘치는 것만 같았다. ‘헉헉…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가?’ 하프라인에서부터 순간적으로 공을 인터셉트해서 달려왔던 그였기에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있었지만 주력만으로 상대방 수비수들을 따돌리고 있었으니 그 정도는 기분 좋을 정도의 호흡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페널티 에어리어를 구분 지어주는 하얀 선이 그 남자의 눈에 들어오자, 그와 동시에 휘슬을 입에 문 심판의 모습이 환영처럼 지나갔다. ‘내 첫 데뷔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진 않겠어. 간닷!’ 이윽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던 남자는 그러나 각을 좁히며 튀어나오는 상대 골키퍼의 방향을 보며 신인의 데뷔 경기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게 오른발 아웃프론트로 반대편 파 포스트로 공을 차려 했는데, 바로 그 때였다. 어느 샌가 죽을 힘을 다해 뒤쫓아 온 미드필더의 둔탁한 스터드가 막 슈팅을 날리려는 남자의 축이 되는 왼 무릎 뒤를 겨누고 있던 건. 퍼버벅~! “으악~~~!” 결국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쫓던 상대수비의 거친 태클이 그의 디딤 발 무릎 뒤편에 작렬했고 남자는 그와 동시에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다는 얼굴로 녹색의 그라운드 위를 정신 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 “으… 아… 안돼!! 헉… 헉…” 악몽을 꾼 듯, 식은 땀으로 푹 젖어버린 침대 위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난 그는 다급하게 이불을 홱 젖히고는, 왼쪽 무릎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져보고 있었다. 그 떨리는 손끝에 느껴지는,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받았던 세 차례의 수술자국만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꿈이,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또…” 10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꾸었던 꿈. 강산이 한번 쯤은 바뀌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던 만큼, 그만하면 면역이 되었을 법도 했을 텐데 언제나 남자는 방금 태클을 당한 것마냥 매일 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태클만… 그때 그 태클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이내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보며 고개를 저어보았다. 전쟁터 같은 그라운드 위에선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픔을 감추고 있었던 자신에게 더 큰 잘못이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와 후회해본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도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게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침대머리맡에 놓여진 작은 탁상용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이제는 완치되어 아플 리 없을 왼쪽 다리를 조심조심 움직이며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늘 알몸으로 자던 습관 탓에, 조각이라도 한 듯한 완벽한 남자의 몸매가 창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내 시원한 샤워 물소리가 울려 퍼지는 원룸엔, 방주인의 과거를 알려주는 신문기사가 사진과 함께 벽 곳곳에 붙어있었는데, 축구를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정말 유명한 선수였구나, 싶을 정도로 찬사일색의 기사들뿐이었다. 물론, 그 기사의 작성자 이름 또한 하나같이 동일해 조금은 이상해 보이기도 했지만. - “아, 버스…” 하얀색 티셔츠와 진한 색의 청바지 차림으로 버스 정류장에 거의 도착한 남자의 눈엔 마침 타야 할 버스가 보였지만, 뛰려다가 멈칫하고는 이내 자신에게 타이르듯 애써 담담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 다음 거 타면 되지 다음 거.” 그러나 중얼거림과는 달리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매끈한 승용차 한대가 그의 앞에 서곤 ‘빵빵!’ 하고 클락션을 울렸다. “영후야!” 조수석 쪽 창문을 내리고서야 영후는 그 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 하연아? 어쩐 일이야 여긴?” “야, 뒷차들 난리 났다. 우선 타. 타서 얘기하자.” “어? 어어..” 잠깐이었지만, 벌써 뒷차들은 영후가 차문을 열기도 전에 헤드라이트를 튕겨가며 난리 부르스를 치고 있었다. 물론 하연은 영후가 조수석에 몸을 싣자 마자 그런 뒷차들에게 창문 밖으로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여주며 유유히 엑셀을 밟았고. “근데 진짜 웬일이야? 원고 마감이 코앞이라더니?” “야, 이만한 기사거리가 또 어딨다고 그래? 슈퍼스타 이영후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지도자로 새 출발 한다는데 지금 그깟 원고 마감이 문제냐?” “어, 어떻게 알았어? 나 아무한테도 얘기한적 없는데..” “오호~ ‘일레븐’의 미녀수석기자인 내 정보통을 무시하겠다는 발언이냐 지금?” “미… 미녀… 후우… 진작에 널 병원에 데리고 갔어야 했어야 했는데, 윽!”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하연이 가볍게 날린 주먹으로 옆구리를 강타당한 영후는 한동안 숨이 막혀 켁켁 거려야 했다. “으,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건데? 나 늦었단 말야.” “그러니까 이 누나가 데려다 준다잖아. 지금 한국여대 가려는 거잖아. 아냐?” “쩝… 잘 알고는 있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시트에 몸을 편안히 기대어보는 영후였다. 그러나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였을까. 이내 오랜만에 보는 하연의 모습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성격과는 달리 꽤나 기자다운 깔끔한 블랙정장과 더불어 윤기 있는 검은 생머리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가슴 큰 여자는 머리가 나쁘다는 통념을 손쉽게 깨뜨려버린 그녀의 터져나올 듯한 가슴을, 블라우스 단추가 겨우겨우 막아주고 있는 모양 하나로도 영후의 중심부엔 충분한 자극제가 되고도 남음이었고. '얘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예쁘고 섹시해져 버린 걸까.' 자신도 모르게 하연의 몸매 감상에 빠져드느라 영후는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퍽! “윽!” “너 또 가슴 훔쳐봤지? 죽을래?” “아… 안 봤어!” “침 안 닦냐?!” 또다시 날아올지도 모를 그녀의 라이트 훅 걱정에 입가에 침을 닦으며 잔뜩 몸을 움츠리는 영후였다. “그나저나 불황은 잡지사도 피해가진 않는가 보다. 기껏 한물간 나 같은 걸 취재하러 오다니” “에휴, 그러게 말이다. 그 놈의 약속이 뭔지” 하연의 말에 영후는 풉, 하고 살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너두 너다. 아직까지 그 약속 얘기냐?” “걱정하지마. 네 부고기사까지 내가 단독으로 쓸 거니까.” “하여간 아침부터 재수없는 소리는.” 툴툴거리긴 했지만, 영후는 그닥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하연이라면 지금처럼 티격태격하더라도 언제까지나 계속 옆에 있어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뭐가?” “가르치는 건 가르치는 거지만, 하필 왜 여자축구부냐고.” “오호~ 이러니저러니 해도 박하연 네가 이영후의 인기를 인정하고 있었구나. 은근 걱정되디?” “이게~!” “야야!! 운전! 운전!” 흥분하면 순간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리는 하연 덕분에 영후는 아침 일찍부터 '골’로 갈수도 있었단 사실에 오금이 저려왔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만류 덕분에 운전에만 집중하며 냉랭해져 버린 하연이 더없이 귀엽게 보이기만 했다. ‘훗, 이게 다 하연이 너 때문이잖아.’ - 초등학교 때였었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축구를 하던 9살짜리 영후에게, 여자는 왜 축구를 하면 안되냐며 바락바락 대들던 동갑내기 소녀가 나타난 건. 딱히 안 될 것도 없었지만, 체력적으로나 체격적으로 여자에게는 불합리해 보이는 운동 중에 하나가 축구였기에 영후는, 바가지 머리에 깡마른 여자애가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설득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몇 번 정도 같이 해보려 했으나 워낙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거친 남자애들에 비해 여자애들 중에서도 유독 약했던 하연이 걱정스러웠던 영후는 결국, 하연을 세워둔 채 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 마주 서서 장시간에 걸쳐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 나… 다시는 너랑 축구 못 하는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누군가 살짝 만 건드려도 툭 터져버릴 것만 같은 그런 눈망울로, 하연은 영후에게 물었기에, 영후는 마법에 걸린 듯 한참을 그 눈에 빠져들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곤 그런 하연에게 제법 어른스런 말을 건넸었다. “그대신… 나 지켜봐 줄래? 꼭 네 몫까지 뛸게.” 그 어떤 말보다도 설득력 있던 한마디를 듣고 난 소녀는 더 이상 울지도, 땡깡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으로 뛰어가는 영후의 뒷모습이 한 소녀의 가슴 속에 자리잡은 것 또한 아마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네비게이션 속의 낭랑한 아가씨의 음성이 들려 고개를 드니, 차는 어느새 한국여대의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윽고 하연은 핸들을 천천히 돌리며 주차장을 찾아 들어가려 했는데, 그와 동시에 저 멀리 초록빛 가득한 운동장이 영후의 눈에 먼저 들어오고 있었다. ‘결국, 다시 와버렸군.’ 직접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감회에 젖은 영후의 모습에 하연도 괜히 숙연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영후는 내색하지 않은 채 하연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먼저 내릴게.” “어? 왜? 같이 들어가지.” “주차하고 있어. 금방 갈게.” 영후의 생각을 읽지 못했기에 잠시 의아해하던 하연이었지만, 뒷편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는 녹색의 피치를 다시금 바라보고서야 지금의 영후는 그 누가 와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 그 누구도 그라운드를 뺐을 순 없었으니까. “그럼 총장실로 바로 와. 먼저 가 있을게.” “그래.” 차에서 내린 영후는 천천히 운동장으로 향했고, 하연은 그런 영후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 똑똑. “네, 들어와요.” 연륜이 묻어나면서도 여전히 고운 목소리가 총장실 문 밖으로 들리자 하연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총장님? 연락 드렸었던 ‘일레븐’의 박하연 기잡니다.” “아, 어서 와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잘 와주셨네요. 참, 기자님의 기사는 늘 잘보고 있답니다.” “아, 네…”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며 입을 여는 총장의 말에 꽤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선은 여성인 자신이 축구기사를 다룬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도 놀랄 지경인데, 본인 말고 또 다른 여자가, 그것도 칠순을 바라보는 여성이 자신의 축구기사를 봤다? 아니, 그것도 즐겨봤다? 아무리 인사말이라지만 하연으로선 쉽게 납득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하연의 머릿속과는 달리 총장은 평온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그리고 창밖에 펼쳐진 초록색의 운동장에 시선을 두었다. “놀랐나요?” “네? 아… 네, 조금은 요.”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정말이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이영후 선수가 저희 학교 축구부를 맡아주겠다니요.” “안 그래도 저도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 산전수전 다 겪어본 한 여인의 육감이랄까. 총장은 하연의 말에 꽤나 개인적인 애정이 깃들어 있음을 눈치챘다. “취재… 인건가요? 아님 개인적으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총장의 갑작스런 물음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하연은 이내 간단히 답을 했다. “둘 다라고 해두죠.” “흠…” 총장은 능숙하게 답변을 회피하는 하연을 부드러운 눈길로 한동안 바라봤다. 허나 그저 바라보는 것일 뿐이었음에도 하연은 그 시선을 피할 수도, 마주할 수도 없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째야 하나 하연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려는 순간, 이내 총장은 그 깊은 눈길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직접… 찾아왔어요. 이영후 선수… 아니 이젠 감독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네엣?!” 총장의 이야기에 원래도 컸던 하연의 눈은 그야말로 세배쯤 더 커지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영후가 아니 이영후 선수가 먼저 감독직에 관심을 보였단 말씀이신가요? 여기 한국여대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는 총장 덕분에 혹시나 했던 생각이 맞아 떨어지는 구나 싶어, 하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했다. ‘이놈의 자식!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여대 감독 지원이라니. 어쩐지 뭔가 이상타 했다… 으이구…’ 급속도로 일그러지기 시작한 하연의 얼굴을 그러나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총장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직접 만나보기 전까진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만나보니 느껴지더군요. 확고한 결의 같은 게.” “확고한… 결의?” “그리고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요…? 그게… 무슨?” 기자들의 습관처럼 어느새 메모수첩과 펜을 들고 대기하는 하연을 보고, 총장은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글쎄요. 조금쯤 지켜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 운동장의 한 가운데 선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영후는 마치 그때의 전율이 느껴지는 듯 했다. 동료와의 대화도 불가능할 만큼 엄청났던 관중의 응원 함성과… 죽을 힘을 다해 달려도 바로 귀 뒤편에서 들려오는 수비수들의 거친 숨소리들…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환하게 경기장을 비춰주는 조명과… 선수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해 터져 나오는 탄성과 플래쉬들… 그 모든 느낌들이 아직도 땀구멍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눈을 뜬 영후는 무척이나 황당했다. 아무리 여대라지만, 이렇게 멋진 운동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학생들을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운동장 양쪽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축구 골대가 더욱 쓸쓸해 보이고 있었다. ‘어이없구만’ 간만에 운동장에 나와 땀 흘리며 운동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의욕을 불태워보려 했던 영후는 그러나 그나마 남아있던 기운마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에휴… 아무리 요새 애들이 운동들을 안 한다지만 너무들 하네… 윽… 아우 배야. 아… 화장실…” 새로운 장소에 오면 항상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해서인지 늘 갑작스레 배앓이를 하곤 했던 영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신호를 보내는 아랫배 덕분에 엉거주춤한 걸음을 해서 건물 안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 “후아… 하마터면 큰일날뻔했네. 응? 어라? 휴지?” 겨우 생리적 현상을 해결한 영후에겐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확실히 여대는 여대인지라, 남자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진 지는 꽤나 오래 전 이었건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으… 진짜 큰일은 지금부터 구만. 어쩐다…” 텅. 덜그럭.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침 그때 옆 칸에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영후는 쾌재를 불렀다. ‘오, 신이시여!’ 고작 화장실 화장지 때문에 변기에 앉은 채 두 손을 맞잡고 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영후였다. 하지만 기도를 한다고 화장지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기에 영후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옆 칸을 향해 노크를 해보았다. 똑똑. “저기요… 죄송한데 그쪽에 휴지 있으면 좀 부탁 드립니다…” 하지만 애절한 영후의 바람과는 달리 옆 칸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기에 애간장이 탈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영후가 다짜고짜 화를 낼 입장도 아니었기에 그저 숨 죽인 채 칸막이에 귀를 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으, 뭐야 대체. 설마 그쪽도 휴지가 없는 건가? 없으면 없다고 이야기나 좀 해주던가.' 영후가 이런 저런 최악의 상황들을 시뮬레이션 하는 동안 옆 칸에서는 계속해서 고요한 적막이 흘렀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 가방을 뒤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윽고 칸막이 밑으로 휴대용 화장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영후는 방금전까지 마음 속으로 온갖 비난을 퍼부었던 것을 그대로 날려버리곤 바지를 벗은 채로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몇 번이고 화장실 벽에 대고 해보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겨우 거사를 치르고 나온 영후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는데, 마침 옆 칸에 있던 사람이 물을 내리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때문에 영후는 고마운 마음에 인사라도 할 겸 손을 씻으면서 얼굴을 들어 거울을 들여다 봤는데,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여기… 여자화장실… 이었던… 가…?’ 잠시 얼어 붙은 채로 눈동자만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니 남성용 소변기가 주르륵 줄 서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절대 영후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손을 씻고 있는 사람은 분명 여자였다. 그것도 짧은 청 미니스커트에 회색 빛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는 엄청나게 섹시한 여자. ‘그… 여대니까… 그래… 여대는 남자가 적으니까… 그러니까… 남자화장실은 공용으로 쓰는 걸 거야… 그러니까… 저 가슴은…’ 영후는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잠시 망각한 채 계속 흐르는 물에 손을 씻는 둥 마는 둥 거울을 통해 그녀의 보일 듯 말듯한 가슴 골만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그리 커 보이진 않았지만, 민소매 티셔츠가 꽤나 도전적으로 헐렁거리며 가슴부분마저 푹 파여 있었기에 손을 씻기 위해 수그리고 있는 모습 자체 만으로도 무척 흥분이 될 요소였다. ‘아, 이런 일이 내게도…’ 영후는 하늘이 연거푸 자신에게 행운을 내려주시는 거라는 생각에 정신 없이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가슴 골을 훔쳐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서 거울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아뿔싸! 그녀 또한 거울을 통해 영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영후의 당황한 시선과 다른 점이라면, 영후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 정도랄까. “보니까 좋아?” “네… 네?” “훔쳐보니까 좋냐구?”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흡!” 영후는 그런 게 아니라며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 순간 코피를 쏟을 뻔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녀가 그녀의 상의를 순식간에 목까지 끌어올려버렸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드러난 그녀의 가슴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알맞은 크기와 더불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선 분홍빛 유두는 영후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나… 지금… 떨고 있니…?' “하여간 달린 것들이란…”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곤 한껏 추켜올렸던 옷을 내리곤 화장실 밖으로 나가버렸고, 혼자 남겨진 영후는 잠시 멍한 상태를 지속했다. “꾸… 꿈이었나? 아… 아니 저 잠깐만요!!” 겨우 정신을 차린 영후는 후반에 막 교체되어 투입되는 에너지 충만한 선수마냥 엄청난 스피드로 문밖으로 따라나갔지만, 소녀는 그새 어디로 가버린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으… 늦었나…” 그러나 그나마도 횡재했다는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모아, 방금 본 가슴크기를 가늠해보고 있는 영후였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들어 화장실 푯말을 확인했는데, 그곳엔 분명 파란 색깔로 그려진 사람이 근엄하게 서 있었다. “뭐야… 맞잖아, 남자화장실…” 그러나 영후는 왠지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야말로 어릴 적 엄마 가슴을 본 이후로 처음 본 여자의 가슴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스물 여덟의 나이임에도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한창 선수생활을 할 때에는 그야말로 축구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왔고, 그래서 그만한 실력을 키울 수도 있었지만 얻은 게 있으면 잃은 것도 있는 법, 결국 영후는 창창한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자란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때문에 이제부터 시작이었지만, 벌써부터 여대에 들어왔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나는 듯한 얼굴을 하는 영후였다. “아, 진짜 세상엔 별의별 여자가 다 있구나…” - 똑똑. “들어오세요.” 영후가 총장실에 들어서자, 이미 친숙해진 듯한 총장과 하연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이감독님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됐으니까요.” “아 예…” 총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영후는 겸연쩍게 웃으며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하연을 째려봤지만, 하연은 짐짓 모르는 척 차만 홀짝였다. “자, 여기.” 총장은 영후 앞으로 계약서를 건넸다. “천천히 살펴보시고, 맘에 드시면 사인하도록 하세요.” 영후는 하연의 맞은 편에 앉은 채 계약서를 들춰봤는데, 문득 궁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오다가 운동장을 봤습니다만…” “?” “관리가 잘 되어있더군요. 지금이라도 시합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호호, 그렇던가요? 그 말씀 칭찬으로 듣죠.” “그런데…” “?” “제가 가르칠 선수들은 어디에 있죠?” 하연도 영후의 말을 듣고 보니 궁금해졌다. 새 감독이 온다는 소식을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코칭 스텝도, 선수도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감을 못 잡은 영후는 또다시 바보 같은 질문을 해대고 있었다. “선수들은 따로 숙소가 있거나… 뭐 그런 건가요?” “이감독님?” “네?” “처음에도 말씀 드렸듯이… 선수 선발에 관한 전권을 드린다고 했을텐데요?” “예? 예, 그야…” “선수는 없습니다. 즉…” 영후와 하연은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눈동자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직접 구하셔야지요.” “네? 아,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영후만큼이나 놀란 하연이 총장에게 다급하게 물으려 했지만, 순간 들리는 노크 소리가 세 사람 모두의 입을 닫히게 만들었다. 똑똑. 그러자 잠시 세 사람이 앉아있던 공간엔 적막감이 맴돌았지만, 이윽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총장이 입을 열었다. “들어와요.” 그러자 총장의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노크 후에도 한동안 열리지 않고 있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는데, 그 순간, 황당해 하는 영후의 눈에 갑자기 엄청난 미녀가 등장하고 있었다. '처…천사다…' 2부. 조우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처…천사다…’ 영후는 순간, 지구상에 이런 독보적인 미모를 가진 여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지경이었다. 취재를 다녀야 하기 때문인지 평소에 남자 양복에 버금가는 세미 정장을 즐겨 입는 하연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성성을 최대한 살려주는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매끈하게 드러난 종아리를 살짝살짝 스칠 정도로 짧지않은 에이라인 치마, 그리고 겨우 여며진 듯한 볼레로의 단추는, 소위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몸매를 구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언제나 압박을 받는 것에 익숙했던 스트라이커 영후의 매서운 시선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몸매를 날카롭게 분석해 빈틈을 찾으려 했으나, 순간 어디선가 느껴지는 낯익은 살해위협성 눈초리로 인해 짐짓 안 그런 척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슴만으로도 하연이랑 용호상박이겠는데...’ 역시나 하연이 모르게 약간의 분석을 마친 영후였다. 한편 이런 청춘 남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황총장은 간단한 손짓을 하며 영후와 하연에게 여전히 총장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인사 나누겠어요? 이쪽은 이영후 감독님, 그리고 이쪽은 박기자님.” “권남희 입니다.” 쓰고 있던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 뿔테 안경을 살짝 콧대위로 올리며, 조금은 차가운 매력을 발산하는 남희의 모습에 영후는 더욱 가슴이 뛰는 것만 같았다. 보통의 여자들이 자신의 미모를 돋보이려 렌즈를 사용하곤 하는 요즘, 투박한 안경마저도 그녀가 가진 얇지만 그윽한 쌍꺼풀의 매력을 감추기 위한 소도구로 밖에 보여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때문에 무미건조한 인사를 건네는 남희와 눈을 맞추며 영후는 황송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려 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아 예… 저는… 앗! 따거~!” 헤벌쭉한 얼굴로 일어나 인사하려는 영후를 보다 못한 하연은 보이지 않게 집게 손가락으로 꼬집어 앉히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충 인사했다. “박하연이에요. 근데…” 하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총장을 바라봤다. 물론 총장은 하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고. 때문에 하연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차, 총장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그런 문제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이감독님?” “예? 그게 무슨…” 여전히 남희라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총장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총장과 하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만 껌뻑 거리는 영후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하연은 결국 작심한 듯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꽉 쥐어보고는 곧바로, 그것도 격하게 맞받아쳤다. “선수가 갖추어 진 후에 감독이 되는 것과 감독이 먼저 선임된 후 감독의 마음에 드는 선수들을 선발하는 것… 뭐 이런 뜻인 건가요? 그렇다면 이 분은… 코치? 아님 스카우터?” 하연은 힐끗 남희를 쳐다보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영후, 아니 이영후 선수 만으론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어떻게든 총장님 쪽 사람을 하나 심어야 겠다… 뭐 그런 거군요?” 눈치가 백단인 하연이 기자의 신분을 접은 채 먼저 공격을 감행하자 총장의 쪽진 은빛 머리칼을 고정하고 있던 검은색 비녀가 조금쯤 떨리는 것도 같았지만, 살아온 연륜의 힘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였다. “역시 박기자님이시네요. 우선… 절반은 맞습니다. 인정하지요. 다만…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시면 안될까요? 이감독님께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 드리는 것만 같아, 노파심에 이 늙은이 독단으로 감독님을 보좌할 사람을 마련해봤다고 말이지요. 물론 처음부터야 손발이 잘 맞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감독님께서는 젊고 또 능력도 있으시니 차근차근 잘 가르쳐 가면서 팀을 만들어 주실 수 있을 거라 기대해보면 안 되는 걸까요?” ‘노망난 할망구, 느릿느릿 할말은 다 하는구만.’ 자애로운 미소와 상반된 총장의 완벽한 설득에 하연은 차마 비집고 들어가지도 못한 채, 어쨌든 이 상태 그대로는 절대 허락하면 안 된다는 간절한 눈빛을 해서 하연은 영후를 돌아봤으나, 이미 남희의 미모에 홀딱 빠져버린 영후는 여전히 정신줄을 놓은 상태였다. “아, 저야 뭐….” 정작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할 당사자의 너무나 간단한 반응을 본 하연은 더더욱 황당했다. ‘뭐야 대체! 지금 내가 계약하는 것도 아니구! 왜 내가 이 할망구랑 싸우고 있어야 되는 거냐구!!!!’ 속으론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영후가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물불 안 가리는 하연의 성격이 결국 또다시 발동되고 있었다. “자… 잠시만요! 총장님. 지금 그 말씀은 좀 전에 말씀하셨던 것과 정 반대되는 것 아닌가요? 감독 재량에 맡기겠다고 하셔놓고는 정작 다른 사람을…” 나이차는 엄청났지만, 총장과 하연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은 불꽃이 일다 못해 불이 날 지경이었지만, 영후는 여전히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남희의 등장이 모두 총장의 계산된 행동이었던가 싶기까지 했다. 어쨌든 영후의 정신을 되돌리기 쉽지 않아진 지금 하연은 어떻게든 총장의 의도만이라도 막아내고 싶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흠, 안타깝지만… 결국 학교도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곳으로 변모해 버린 지 오래랍니다. 학교의 수입원은 학생들의 등록금이 주가 되지요. 하지만, 요즘 같은 시국엔 학생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요. 때문에 이사회에선 학교 홍보를 위해 축구부를 신설하자는 제 뜻에 굳이 반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심할 순 없었던지 조건을 내 걸더군요.” “조건… 이요?” 순간 ‘설마?’ 하는 단어가 하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총장과 학교가 원하는 건 오로지 홍보였다. 그리고 진정 그것이 목적이라면, 영후를 감독으로 앉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K리그의 중요한 경기도 TV에선 제대로 해주지도 않는 판국에, 여자축구. 그것도 그저 그런 여자 대학에서 신생팀 하나가 생겨났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쉽게 홍보가 되어 줄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TV중계밖에 없을 거라는 판단을, 하연은 단 몇 초 만에 해내고 있었다. 하연이 알기론 전국여자 축구선수권대회의 TV중계만이 여자축구경기 중 유일하게 편성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지금까지의 관례대로라면 4강부터라는 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연은 현재 대학 팀들 중 여자 축구팀이 몇 개였던가 셈을 해보려 했는데, 그러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총장의 입에서 나오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2년 이내에 전국여자 축구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시나 자신의 쓸데없는 예측이 적중한 것에, 하연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요?” “축구부는 다시 해체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최악의 결과를 바라지 않는 저로선… 남희씨라는 보험에라도 의지할 수 밖에요.” “마… 말도 안돼… 그런 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고작… 고작 초짜 감독 한 명하고, 축구의 ‘축’자는 아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여자 한 명하고 무슨… 영후야! 무슨 말 좀 해봐!!” 하연은 말도 안 되는 조건에 기가 차 총장과 영후를 번갈아 돌아보다 여전히 입이 귀에 걸려있던 영후의 모습에 장소와 주변인들에 상관없이 그대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게 지금 여자 때문에… 정신 안 차릴랫!!!’ 결국 참다 못한 하연이 공포의 레프트 훅을 날리려는 찰나, 영후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을 알아챈 하연은 겨우 주먹을 거둘 수 있었다. 그 눈빛. 영후가 저런 눈빛을 보여줄 때만큼은 믿어줄 수 밖에 없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하연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거 가지고 성에 차시겠습니까?” 남희의 등장 이후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더니만 갑자기 입을 연 영후의 말에 하연을 비롯해 세 여자들의 눈이 동시에 세 배쯤은 커졌다. “제가 맡는 팀이라면… 우승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평소보다도 더욱 거칠게 차를 운전중인 하연을 건드렸다간 쉽게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 걸 너무나도 잘 아는 영후는 안전벨트만으로도 안심할 수 없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부여잡고 조수석에 웅크린 채 덜덜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돼… 무슨 이런 계약이 있을 수 있어!’ 하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후의 감독계약 소식만을 처음 접했을 땐 의례 영후의 선수시절의 빛나던 네임 벨류를 이용해서 그저, 학교 축구부와 학교 이름을 좀더 매스컴에 노출하는 게, 학교나 총장의 목적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투성이였다. 게다가, 간만에 쓰게 되는 영후의 기사 헤드라인을 ‘이영후 선수 감독데뷔, 목표는 우승!’ 이라고 써야 할 상황이 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끼이이이익~~~~~~~!!!!!!!!!!! 열불이 뻗친 하연은 결국 급 브레이크를 밟아 타이어와 노면의 거친 마찰음을 만들어내며 노란줄이 칠해진 안전지대에 차를 급정차 시켰다. 한편 드디어 차가 움직임을 멈춘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던 영후는 그러나 곧 하연의 화가 자신에게 도래할 것이란 걸 직감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기 시작했다. “이-영-후-” 나지막이 영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하연도 실눈을 뜨고 보니 어금니를 꽤나 꽉 깨물고 있는듯했다. ‘때릴 거면 빨리 끝내라… 기다리는 게 더 힘들다구.’ 눈을 더욱 꼭 감은 채 하연의 매서운 주먹이 날아오길 기다렸음에도 반응이 없자 영후는 용기를 내어 조금씩 실눈을 떠보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영후의 시야엔, 핸들을 양손으로 꽉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또한 떨리는 듯한 그녀의 어깨도. “하… 하연아…” 하연의 어깨는 정말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영후는 충분히 당황스러웠는데 이윽고 그녀의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발견하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헉… 울잖아…? 어, 어쩌지? 아, 이럴 땐 영화에서 남자가 슬쩍 안아 주던데… 그럼 나도…?’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만 하는 영후였다. 결국 마음을 굳히고는 조금씩 하연에게 다가가던 영후는 갑자기 숙였던 고개를 치켜드는 하연 덕분에 눈에 별이 보였다. 퍽! “으… 아… 아이구 내 머리…” 영후의 엄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연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다다다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진짜 미친 거 아냐?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고!!” “왜… 왜에?” “이런 계약으로 피해보는 건 항상 감독이라구, 알아? 사람들은 학교 내부사정엔 관심조차 없을 거야! 그저 영후 너만 보고 너만 판단 할 거구. 근데… 근데 이런 일방적인 계약으론… 결국 너만 상처 입는 단 말야 바보야! 으아~앙!” 설명에 설명을 거듭 하다 보니 더욱 황당한 상황이란 생각이 들어버린 하연은 결국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영후는 그런 하연의 모습에 예전 어릴 적 추억이 오버랩 되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약하던 게, 그렇게 조그맣던 게, 이제는 영후를 걱정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은 언제나 걱정해주고 있었는지도. 그래서였을까. 영후는 한동안 엉엉 울고 있는 하연을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채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조금쯤 시간이 흘러 하연의 통곡소리가 조금씩 잠잠해지자, 영후는 ‘아, 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윽고 뜬금없이 영후가 뭘 하는 건가 싶어 하연은 울다 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영후는 하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영후 선수! 데뷔 전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대학시절 수습기자였던 때의 자신을 영후가 흉내 내고 있음을 깨달은 하연이 곱게 눈을 흘겨 보았다. 하지만 그런 하연의 시선마저도 좋은지 여전히 영후는 씨익 웃으며 하연을 바라보다 무의미한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 다 알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는 차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영후는 혼잣말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슬럼프에 빠져 슛도 한번 제대로 날리지 못했을 때 조차 사람들은 나에 대해 칭찬 일색이었어. 내가 아무리 내 멋대로 플레이를 해서 경기를 망친 날에도, 날 뭐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구. 그건… 하연이 네가 항상 나, 이영후에 대해 좋은 기사를 써줬기 때문이었잖아. 알고 있었다 나…” 영후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하연의 울음소리는 완전히 잦아들었다. “언제나 바보 같은 나지만, 그래도 축구에 관련된 건 하나라도 소홀하지 않아. 알지? 내가 얼마나 축구를 사랑하는 지…” 잠깐이지만, ‘축구’라는 단어대신 ‘하연’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갔으면 참 좋았겠다, 는 생각을 하는 하연이었다. “축구에 관한 한, 널 믿는 것처럼, 나도… 믿어주라.” 그제야, 눈물을 닦아내고 환하게 웃는 하연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부랄(?)친구답지 않게 너무 진지한 얘기들을 늘어놓았던 때문일까? 둘이 타고 있는 차 안 공기의 느낌이 미묘하게 바뀐 것 같았다. 어색함. 그러고 보니, 영후와 하연은 20년지기 친구 사이였지만, 이상하게도 한번도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둘이었다. 그랬던 두 사람 사이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어색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으… 갑자기 안 어울리는 말을 했더니 더 어색하기만 하네… 젠장.’ 괜한 얘길 했나 싶어 후회를 하며, 슬쩍 하연을 돌아보니 어느새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어 있던 하연은 울음을 터뜨렸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지 눈을 살짝 감고 있었다. 얼굴의 반이 커다란 눈망울이었던 하연이었기에,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영후는 또 새로웠다. 볼 터치를 해놓은 것 마냥 항상 발그레한 양쪽 볼이 섹시함과 어우러져 귀여움까지 자아냈고,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새빨간 립스틱을 발라놓은 듯한 도톰한 입술은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갈만했다. 게다가 그런 귀여운 얼굴과는 전혀 매치할 수 없는 커다란 가슴은, 영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단박에 홀릴 수 있는 지상 최대의 무기였다. ‘꿀꺽!’ 정말로 영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것도 모자라 하연의 입술에 자석이 달린 듯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져갔다. 또한 오른손은 자동적으로 가슴모양처럼 둥글게 만들어 하연의 가슴 쪽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영후는 첫 키스와 함께 하연의 가슴까지 만져볼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참! 내 정신 좀 봐. 응?” 갑자기 눈을 뜬 하연의 눈엔, 웬 변태 하나가 입술을 쭈욱 내민 채 자신의 가슴 앞까지 오른손을 이동하다가 놀란 눈 그대로 정지된 모습이 포착됐다. “꺄악!!! 지금 뭐 하는 거얏!!!” 퍼버벅! 쉬익~ 퍽! 코 앞에서 갑자기 날라온 원 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레프트 어퍼컷에 최고의 운동신경을 가진 영후라 할지라도 그저 인간 샌드백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에게 이정도 맷집이 있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축구가 아닌 권투 선수를 했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 해보는 영후였다. 한편 마음껏 영후를 두들 기고 난 후 하연은 먼지를 털 듯 두 손 바닥을 탁탁 털며 룸미러로 얼굴 상태를 확인하며 도어락 버튼을 눌러 문의 잠금 상태를 해제하곤 입을 열었다. “하여간 틈을 주면 안돼요. 내려! 나 성남 홈경기 취재 가야 돼.” “여… 여기서? 여기 지금 강변북로거든요?” “아 몰라, 빨리 내려 빨리. 오늘 포항 하고 붙는 경기라 중요하단 말야~!” “야! 야, 야~!” 결국 발길질까지 당하며 차에서 쫓겨나듯 도로로 내동댕이쳐진 영후는 멀어져 가는 하연의 차를 망연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 곱게 빚어진 찻잔 위로 고즈넉한 작설차 향이 퍼져 나오는 가운데, 주름진 손으로 찻잔을 들어 조심스레 한 모금 음미하는 총장의 모습에선 여전히 인자함이 묻어나 보였다. 때문에 묻고 싶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남희였건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찻잔을 내려놓은 총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던가요? 이영후 감독을 만나본 소감이?” “솔직히, 총장님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수학 전공인 제게 이런 일을 맡기신다는 것도 쉽게 납득하긴 힘듭니다.” “그래요, 남희씨는 수학 전공이었지요… 내 나이는 좀 들었어도, 아직 기억력은 나빠지지 않았답니다.” 볼멘소리를 하는 남희의 뾰루퉁한 얼굴에도 총장은 웃음지어 보였다. 참 예쁜 나이였다. 총장이 보기에 남희는 더 이상 예뻐질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총장 자신도 저 나이 때 저렇게 고왔더라면, 지금 이렇게 지루하고 쓸쓸한 자리 따위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남희는 그렇지 않았다. 저렇게 젊음이 빛나고 있건만, 수학이라는 딱딱한 학문에 매료되어 있는 모습이 총장에게는 너무나 낯설어 보였다. 말이 시간강사지, 보따리 상으로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며 강의를 하면서도, 수학밖에 생각 안 하는 아리따운 젊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게다가, 수학을 사랑하는 여인의 이미지에 걸맞게, 무슨 일이든 정답이 보이지 않으면 답답해하며, 문제의 정답을 찾을 때까지 집중하는 모습에서, 총장은 이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세상을 좀더 넓고 멀리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졌다. 때문에, 수학과 교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신이 직접 권남희를 설득했던 것이다. 물론, 시간 강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연봉도 제시하면서. 남희도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제의에, 단순히 자신의 강의가 인기가 없어서 시간강사직을 그만 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한국여대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강의하는 여타 대학에서도 학생들은 그녀의 강의 내용보다는 외모에만 관심이 넘쳤고, 그에 반해 출석 및 시험 점수를 악랄하게 관리하는 그녀 덕분에, 학기를 마치면 학생들로부터 받는 강의 평가서에선 늘상 최악의 점수를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런 악순환에 조금씩 그녀도 지쳐갈 즈음이었기 때문이었기에 이런 이상한 제의가 하등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벼랑 끝 그녀였기에, 어떻게든 마지막 동아줄을 부여잡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운동이라고 생각하나요? 축구라는 운동.” 총장의 간단하면서도 많은 것을 내포한 질문에 늘 정답만을 좇는 그녀답게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거칠고, 지루하고… 의미 없이 달리기만 하는… 해답 없는 운동… 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호호호호~” 남희는 나름 터프한 답변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한참을 웃는 총장이었다. “맞아요, 맞아. 정답이군요. 그리고, 역시 내 눈 또한 틀리지 않았군요.”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인지 남희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선명한 답을 해주지도 않은 채 한참을 웃던 총장은 겨우 진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 밖에선 초록빛의 텅 빈 운동장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이영후 감독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도… 차범근 선수 이후로 축구선수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가슴이 설레었던 적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차범근. 분데스리가의 레전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해도 당연하리라. 그런 인물과 지금 이영후를, 총장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남자였던 건가…’ 축구, 아니 운동과는 담쌓고 지내던 게 당연했던 남희가 듣기에도 엄청난 비교였기에 잠시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의 소름이 끼쳤다. “그런 선수가 한창 나이에 부상 때문에 자신의 전부였던 축구… 버리고 말았지요. 허나 그런 남자였기 때문에,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남아있을 겁니다.” 분명, 남희가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그럴 것 같았다. 그런 남자라면… “거칠고 지루한 건, 이영후 감독에게 맡겨두세요. 남희씬…” 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 의미 없음에 의미를 부여해보세요.” ‘의미’라는 단어가 연이어 총장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남희의 눈은 조금쯤 더 커졌다. “남희씨라면, 이 늙은이에게 정답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군요.” - 한밤중이 되어서야 영후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강변북로에 홀로 남겨진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하연의 차에서 쫓겨나면서 지갑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빠졌던 모양이었기에, 그야말로 하연에게 버려진 그 지점부터 집까지 터덜터덜 걸어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놈의 박마녀… 만나기만 해봐라…” 씩씩대면서 원룸의 문 앞에 선 채로 번호 키를 눌렀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문 안쪽의 걸쇠들은 문을 열려줄 생각을 안했다. “으… 이젠 너까지 약 올리냐? 앙! 앙! 앙!” 숫자버튼들이 부서져라 몇 번을 재차 누르고 나니, 그제야 ‘스르르륵’ 하고 슬로우 비디오처럼 걸쇠가 돌아가며 열렸다. “편하기는 개뿔… 배터리 잡아먹는 귀신이구만.” 전에도 한번, 배터리가 다 되어서 꿈쩍도 안 하는 도어락 덕분에 추운 겨울 밤에 열쇠수리공이 올 때까지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 본 경험이 있던 영후는 들어서자마자 배터리를 빼버렸다. 덕분에 도어락의 기다란 쇠막대기 두 개는 마치 다시 나올 생각이 없는 달팽이의 눈 마냥, 자기들의 집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영후는 갑자기 그때 생각을 하자니 더 열이 받는 것 같았다. 기껏 한 시간 만에 도착한 수리공은 돼지코 모양의 건전지 하나를 꺼내 도어락 버튼의 윗쪽에 자리한 동그란 원 두 개에 맞춰 'ㅤㄸㅣㄱ' 대더니, 대뜸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것이다. 벙찐 영후가 비밀번호를 누르자, 그 건전지를 비상전력으로 이용한 도어락은 거짓말처럼 ‘사라락’ 하고 열렸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면 진작에 전화로 알려주면 될 것을, 굳이 사람을 밖에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게 하고는 당당하게 출장비까지 챙겨간 기사를 생각하자니 열불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젠장, 그때 대판하고 출장비를 주지 말았어야 했어…’ 배터리를 빼고는 새 것으로 교체한답시고, 열심히 쓸데없는 과거회상에 열을 올린 영후는 배터리 생각은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툴툴거리며 샤워를 하러 욕실로 가며 옷을 벗어 젖혔다. - 불 꺼진 영후의 방엔, 오늘 하루가 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조금은 거친 숨소리와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는 초침소리만이 들릴 만큼 고요했다. 따뜻한 샤워 때문이었는지, 혹은 샤워 후에 마신 따뜻한 우유 한잔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로 누운 영후의 얼굴은 꽤나 근사한 꿈을 꾸는 듯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철컥철컥! 하지만 그때였다. 고요한 영후의 방에 이상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 소리는 분명… 어느 술 취한 사람이 제 집에 들어가려 열심히 문고리를 돌리려 하지만 취기 때문에 쉽사리 문고리를 끝까지 돌리지 못해 몇 번이고 돌리는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음냐…” 그러나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영후는 전혀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끼이이이… 쾅! 결국, 그 취객은 영후가 사는 원룸의 문을 여는 데 성공하곤 보란 듯이 대문을 부서져라 닫으며 들어섰다. “나아아~쁜 노무… 시키… 딸꾹! …들……늬들이…딸꾹! 뭔데……우이씨…” 난데없이 영후의 집에 침입한 취객은 계속해서 무슨 말을 내뱉기는 하는 것 같은데, 같은 수준으로 취한 통역 없이는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더니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하이힐 하나씩을 힘겹게 벗어 던졌다. 이내 그 취객은 흡사 유령처럼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영후가 곤하게 자고 있는 침대 앞으로 걸어가며 어렵사리 외투를 벗어 던졌다. 그제야,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의 힘을 빌어 취객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얼굴이 아니라면 쉽게 소화하지 못할 쇼트 커트의 윤기 나는 머리칼은 거침없이 옷을 하나씩 벗는 통에 계속 헝클어졌다 되돌아오곤 했다. 문고리를 돌리는 것만큼이나 옷을 벗는 모습이 힘겨워 보였지만, 이 기운 넘치는(?) 취객은 어느덧 아담한 가슴을 감추고 있는 브래지어와 가슴에 비해 탄력 넘치는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팬티만을 남겨두었다.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영후가 누워있는 침대에 누우려다, 발에 걸리적 거리는 게 느껴지자 발로 몇 번 차 보던 이 용감무쌍한 취객은 갑자기 이불을 확 들춰보았다. 이불 속의 영후는 평소대로(?) 알몸으로 주무시는 중이었고, 제대로 보기나 한 것인지, 이 취객 씨익 한번 웃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남아있던 브래지어와 팬티를 마저 벗어버렸다. 이제야 옷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된 가슴은, 작지만 예쁜 사과가 반씩 나뉘어 달려있는 듯한 풋풋함이 있었고, 전체적인 몸매는, 그저 삐쩍 마르기만 한 보통의 여자들과는 달리 오랫동안 해온 운동으로 가꿔진 듯한 군더더기 없는 매력적인 육체로, 나신이 되자 어두운 방을 환하게 만들 정도로 빛이 나기 했다. 게다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둔덕 위의 음모는 그 존재만으로도 뭇 남성들에게 최고의 흥분제 역할을 할 것이 자명했다. - 영후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었다. 늘 부상의 순간을 떠올려주는 꿈만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어온 밤이었기에 영후에게 있어서 잠을 잔다는 건, 실은 언제부터인가 피하고 싶은 하루 일과 중 하나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랬었는데. 오늘 밤 만큼은 정말 근사한 꿈이 시작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꿈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법한 단발머리의 귀여운 아가씨가,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순수 자연의 몸으로, 자신의 침대로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자신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입술은 영후의 몸 구석구석을 탐하기 시작했다. 어깨에 머무는 듯 하면, 어느새 자신의 배꼽에서 그녀의 촉촉한 혀가 느껴졌고, 손가락을 입에 머금는 듯 했으나, 눈깜짝할 사이에 영후의 혀와 조우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혀는 마치 새로 만나는 친구들에게 열심히 인사를 하려는 듯, 모두에게 자상했고, 섬세했으며, 뜨겁기까지 했다. 기나긴 그녀와의 키스 때문에 숨이 차오를 무렵, 그녀의 입술이 영후의 입술에서 떨어져나갔다. 다시금 유입되는 산소는 반가웠지만, 멀어진 그녀의 입술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후의 호흡은 다시 거칠어질 수 밖에 없었다. “헉!” 멀어진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입술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작은 영후’를 단번에 머금었고 (물론 절반도 채 들어가지 못했지만) 입술 안에서 수줍게 숨어있던 혀는, 이제 작은 영후와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 진짜로…… 드… 들어가버렸잖아.’ 한 번. 두 번. 세 번. 그저, 그녀의 혀는 친숙해지려 작은 영후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인데, 눈인지 입인지 모를 그곳에선 기쁨의 눈물을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그저 간단한 인사를 건네었을 뿐인데 쉽게 감동하는 작은 영후가 귀여워 그녀의 입술은 기둥을 한없이 빨아들였다 밀어내며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되었는지, 그녀의 입술과 혀는 작은 영후에게 짧은 작별의 키스를 했고, 작은 영후는 그런 키스에 끄덕끄덕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인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영후의 몸 위에 올라타며, 작은 영후를 손으로 잡고서, 자신만이 가진 소중한 ‘작은 방’과 살짝 입맞춤을 시킨 후 미처 친숙해 질 사이도 없이, 단숨에 작은 방 깊숙이 작은 영후를 밀어 넣었다. “읏!” “아앗!” 스스로 삽입을 했음에도 의외의 크기와 느낌에 순간적으로 고통스런 교성을 지를 수 밖에 없는 그녀였지만, 첫만남이었음에도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방은 작은 영후를 충분히 기다려왔다는 듯이 이내 부드럽게 질퍽거리며 작은 영후를 어루만졌다. 작은 영후 또한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이내 입술이 해준 키스의 의미를 깨닫고 천천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찌걱… 찌걱… 찌걱… 찌걱… 작은 영후와 작은 방은 서로를 낯설어 하지 않기로 했고 이내 조금씩 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원을 그리듯 엉덩이를 돌려도, 혹은 앞뒤로 움직여도 작은 영후는 작은 방 안으로 자꾸 들어가고만 싶어했고, 작은 방은 그런 작은 영후의 마음을 아는 지 어떤지 줄다리기 하는 양, 작은 영후를 놔줬다가는 다시금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하던 작은 영후와 작은 방은 이내 더 이상 서로의 감정을 속일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누가 잡아당기는지, 또 누가 밀어내는지 모를 정도로 점점 속도를 내며 환상의 호흡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헉, 헉!’ “아!…읍…으으…헉!” 그녀는 영후의 두 손을 이끌어 자신의 가슴에 놓은 채, 말을 타듯 점차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영후는 어쩌면 이리 생생한 느낌일까 싶었다.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가슴의 감촉은, TV에서 열을 내며 광고를 해대던 메모리 폼 배게 따위는 명함조차 내밀기 힘든 수준이었다. ‘여자의 가슴이란 정말 이런 느낌일까…’ 진짜로 여자와 섹스를 하게 되면 꼭 확인해봐야겠다고 다짐하는 바보 같은(?) 영후였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만져지는 그녀의 유두는 작지만 탱글탱글 한 게, 가슴 전체의 부드러움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듯 했다. 때문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영후는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우왁스레 쥐어짜듯 움켜쥐어보기도 했고, 유두만을 살살 간지럽혀 보기도 했다. 방법을 달리 할 때마다, 그녀는 악기가 된 듯 매번 다른 음정의 소리를 내 주었다. 그 소리는 다시금 영후를 흥분케 하는 매개체가 되었고, 그에 더욱 열심히 애무하는 영후였다. 꿈이 깨기 전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끼자 했던, 학구열(?)높은 영후는 이내 그녀의 엉덩이로 손을 옮겨보았다. ‘역시…’ 영후는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지자 또 다른 감흥이 밀려왔다. 막연히 가슴과 같은 느낌일 거라 생각했으나, 엉덩이의 느낌은 또 가슴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더 탄력이 느껴지고, 확실히 가슴보다 그녀의 엉덩이는 크기가 컸다. 한편 예상치 못했던 영후의 손길이 엉덩이에서 느껴지자, 그녀는 조금 더 달아올랐고, 엉덩이 덕분에 소외된 가슴에 스스로 손을 가져가 애무하며,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여자가 낼 수 있는 속도에는 한계가 온 듯, 점차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고, 여자와 원하는 바가 같았던 영후는 잡고 있던 그녀의 엉덩이를 움직이며 스스로 허리를 튕겨가며 가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아…흑…아……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작은 영후를 아기 다루듯 했었던 그녀의 작은 방은 어느새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방의 주인은 정신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는데, 작은 영후는 그런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고 거칠게 좁은 방의 이곳 저곳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아… 아………앗! 앗!” 결국 눈동자에서 검은자위가 사라질 정도로 오르가즘을 느껴가던 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갑자기 숨이 멎는 듯한 착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영후의 몸 위로 스러졌다. 그에 작은 방은 부르르 떨며 백기를 들었고, 미안하다며 사죄의 눈물을 왈칵 흘렸지만, 그런 작은 방을, 작은 영후는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며 여전히 위용을 자랑했다. - 벨렐렐렐레……벨렐렐렐레……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선가 아스라하게 멜로디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잠결에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던 영후는 이내 그것이 휴대폰 벨소리란 걸 깨달았다. 그에 눈도 뜨지 못한 채 손만을 뻗어 소리의 근원지를 더듬더니 이내 휴대폰을 찾아 귀에 대었다. “으음… 여보세요…” 잠이 묻어나는 영후의 목소리에 반해 하연의 목소린 생기가 넘쳤다. ‘어이 잠꾸러기! 너 내 차에 지갑 두고 갔더라?’ “어? 어……누구 덕분에…” ‘알지? 지갑 분실 시 찾아주면 몇 퍼센트를 주는 거더라…법이 있던데…?’ “너 진짜… 정말 너무한 단 생각 안드냐… 내가 너 땜에 어제 얼마나 고생을” ‘됐구, 이따가 밥이나 쏴. 감독된 턱 한번 내야지? 안 그래?’ “으… 알았다 알았어… 어쨌든 이따 다시 연락할게.” 하연의 전화 덕분에 정신을 차린 영후는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한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물끄러미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분명 어제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왠지, 어제까지의 방과는 조금 달라진 것도 같았다. ‘감독이라는 직함이 주는 스트레스가 이정도 인 건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려보기도 했지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은 털어버리려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어 보는 영후였다. ‘그나저나, 간만에 푹 자본 것 같네. 꿈… 덕분인가.’ 설마, 밤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현실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영후는 여전히 ‘취객 그녀’의 것과 자신의 사정액이 범벅이 된 채로 끈적이는 작은 영후의 상태는 눈치채지도 못한 채 유유히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온몸이 퍼질 대로 푹 퍼진 아줌마들에게 평소대로 수영강습을 하던 해주던 수림은, 무심히 수영장을 둘러보다 라인 한 쪽에 시선이 멈췄다. 그곳에선 좋은 몸을 가진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수영은 않고, 풀장 끝에서 끝까지 반복해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물속임을 감안한다면 꽤나 빠른 스피드였건만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재활중인건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려던 수림의 눈은 순간 갑자기 커졌다. ‘저… 저 남자…!’ 틀림없었다. 지난 밤, 자신의 옆에 있던 남자.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알몸인 채로 마치 몇 년을 사귀어 온 양 자신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곤하게 잠들어있던 바로 그 남자였다! - 똑바로 누워있는 영후에게 너무나 편한 자세로 안긴 채로 잠이 깬 수림은 너무나 놀라,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수림은 혹여 영후가 깰까 걱정돼서, 팔베개를 베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 한치도 움직이지 못한 채 빠르게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간만에 모인 동창회에서 자신에게 집적거리는 밥맛 없던 남자애 덕분에 주량도 얼마 안 되는 자신이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이내 테이블 밑으로 취한 자신의 몸을 은근히 더듬더니, 허벅지 안쪽까지 슬금슬금 진입해오던 그 나쁜 놈의 손길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물론, 자신이 500cc 맥주잔으로 그 놈의 뒤통수를 후려 갈긴 건 절대 기억 안났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취하긴 했어도 절대적인 귀소본능을 지닌 자신이었기에, 어떻게든 자신이 사는 원룸의 건물까지 온 것도 언뜻 기억이 나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3층까지 올라… ‘응?’ 수림은 약간,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3층까지… 정말 내가 올라 갔을까…? 그럼 여긴?’ 누운 채로 수림은 천천히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 구조 그대로였다. 다만… 모든 가구와 물품들이 하나도 매치되는 게 없었을 뿐이었다. ‘으… 최악이다.’ 수림은 어떻게든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영후가 뒤척이며 수림을 뒤에서 부드럽게 안으며 수림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수림은 분명, 놀라고 화를 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도 지금 이 순간이, 지금 이 느낌이 너무 행복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의 품에서, 그것도 알몸으로 안겨있으면서도 느껴지는 이 뿌듯함에 살짝 미소를 지을 뻔도 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자책했다. ‘미쳤어 미쳤어… 오수림! 네가 궁하긴 궁했구나… 에휴…’ 결국, 다시 정신을 차린 수림은 자신의 가슴에 놓여있는 영후의 손을 조심스레 젖혀놓고 일어나 여기저기 던져놓은 자신의 옷들을 수집해 최대한 소리내지 않기 위해 숨 죽인 채 옷을 입었다. 그 모습은 들키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마치, 사랑하는 애인이 혹시라도 단잠에서 깰까 걱정하며 소리를 죽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후… 이제 된 건가?’ 어느새 옷을 다 입은 그녀는 이제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런데… 잠들어있는 영후에게서 쉽사리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수림이었다. 운동선수인지, 적절한 근육질 몸매에, 참으로 선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게다가, 자신만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꽤나 행복해하는 얼굴로 잠들어있었다. ‘나… 때문일까…?’ 괜찮다는 확신만 있다면 얼마가 걸리든, 계속해서 영후를 바라보고 싶다, 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속삭이는 수림이었다. 하지만, 이내 도리질을 하고는 대문을 열려는 순간, 도어락이 수림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수림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도어락을 열기 위해선 버튼을 눌러야 할테고 그렇다면 분명, 도어락은 신경을 긁어대는 전자음을 곁들이며 ‘나 열려요’라고 외치듯 덜그럭거리며 작동될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저 남자의 깊은 잠을 방해하게 되리라. 수림은 잠깐이지만, 창문으로 뛰어내려볼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서 문득 도어락을 자세히 보니, 걸쇠가 분명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수림은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봤다. 분명, 도어락이 열.려. 있었다. 그제야, 지난 밤, 자신이 이 곳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수림이었다. 아니, 갑자기 자신을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게 움직이지 않아준 도어락이 이뻐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 수림은 문고리만 돌리면 이곳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또다시 망설이고 있는 그녀였다. 이렇게 이곳을 나가면, 저 남자와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녀는 이렇게 쉽게 저 남자,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치만… 지금 이 상황은…’ 솔직히 작금의 이 상황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저 남자와의 사랑(?)을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육체관계가 먼저 이루어졌다고 해서, 마음까지 같으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결국 마음을 다잡은 수림은 천천히 문고리를 돌리기 시작했고, 조용히 문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문고리를 손에서 놓지는 못했다. ‘저 남자… 날 기억해 주려나…’ - 아쉬운 마음으로 혼자서 이별(?)하고, 마음정리도 하려 했던 수림이었으나, 미처 그럴 시간도 없이 덜컥! 영후가 수림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수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다시 날 찾아줘서…’ 3부 - 그 남자의 이력.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고마워요… 다시 날 찾아줘서…’ 수림의 마음 속 외침이 들렸던 걸까? 묵묵히 물속에서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영후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마냥, 우뚝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시간대가 시간대였던 만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여유시간이 생겨 수영장을 찾은 아주머니들의 수다소리만이 드넓은 수영장을 가득 메웠을 뿐, 자신을 부를 만한 사람도, 그렇다고 자신의 집중력을 방해할 만큼의 아름다운 여자도 없었다…라고 결론 지으려는 순간, 영후의 눈에 좀 이상한 여자가 포착되었다. 홀로 물밖에 나와있는 것과, 그녀의 발아래 물속에서 많은 아줌마들이 바글바글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분명 이 수영장의 강사 정도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토실토실한 아줌마들이 즐비한 가운데, 기본적으로도 출중했던 그녀의 몸매는 가히 군계일학처럼 돋보였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단순한 검은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음에도 몸매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영후에게 ‘미의 척도’가 되는 가슴라인에서 약간 함량 미달인 것 같아 보였지만, 수영모를 쓴 얼굴도 거짓말 보태서 주먹보다 작아 보였기에, 신체 밸런스상 살짝 눈감아 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엉덩이라인은 잘록한 허리와 맞물려, 또 다른 섹시함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 열심히 아줌마들을 가르칠 생각은 안하고, 영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이 활기찬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스라한 표정으로 말이다. ‘뭐…뭐지…? 혹시 아까 샤워 안하고 들어온 걸 눈치라도 챈 건가?… 으… 쪽 팔려… 그냥 오늘은 대충하고 나가야겠다…’ 영후는 바로 물 밖으로 나가려다 순간 움찔했다. 수림의 몸매를 감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불룩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물밖에 나가면, 저 아줌마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비난이든, 찬사(?)든 아줌마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영후는 할 수 없이, 수림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묵직해진 아랫도리가 가라앉기를 바라며 최대한 집중해서 열심히 또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 강습 중이었기 때문에 계속 영후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던 수림은, 어느 샌가 영후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부터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강습을 어떻게 마쳤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현재 수림의 머릿속엔 온통 영후로 가득 차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수림은 결국, 혹시나 영후가 아직 있을까 싶어, 남성용 사우나 실 입구 앞에서 서성거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러고 있어봤자 수림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후… 이젠 어쩌지…’ 순간, 수림은 자신이 수업을 마칠 때까지 수영장에 있던 남자 회원은 영후뿐 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건 다시 말하면, 사우나 안에도 영후뿐 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하던 수림은 이내 결심이 섰는지 주변에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사우나 안으로 들어가려다 마침 옆에 놓여있던 대걸레 자루 하나를 꼭 부여잡은 채 살금살금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나 미쳤나봐…’ - 총장은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몸을 묻은 채 꽤나 생기 있는 얼굴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얼굴의 생기로만 치자면, 갓 연애를 시작한 처녀들의 얼굴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목소리 만큼은 애써 반가움을 감추느라 어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서야 연락하긴가요? 유명해졌다고 너무하시네요?” ‘허허, 미안하게 됐소. 그리고 고맙고.’ “당신 좋으라고 한 일 아니니까, 공치사는 관두세요.” ‘삐친거요?’ “누가 그렇다던가요? 함부로 넘겨짚는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이번 A매치만 끝나면 시간이 좀 날거요. 그때 우리…’ 수화기로 들리는 노신사의 답변에 분명 총장의 입가는 꽤나 벌어지고 있었고, 더불어 목소리의 냉기도 조금은 가시고 있었다. “그런데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시합 준비나 더 하세요.” ‘준비야 뭐, 내가 하는 건가…선수들이 알아서 해야지. 참, 근데 말야… 어떻든가?’ “이제야 본심이 나오시네요.” ‘아니 뭐, 겸사겸사. 허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총장은 잠시 한숨을 내쉬어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한번 본 걸 가지고 다 판단할 순 없지 않겠어요? 게다가 사람이잖아요 하물며” ‘그래도 당신 눈썰미는 내 인정하지 않소?’ “뭐,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눈빛이 살아있는 것도 같고…” ‘그래? 눈빛이 살아있더란 말이지? 크하하하핫!’ “그게 그렇게도 기쁜 소식인가요?” ‘기쁘냐구? 암! 기쁘고말고!’ “흥, 나보다 이영후가 더 좋다 이거죠?” 자신도 모르게 통화상대에게 살짝 교태를 부리다, 운전석의 기사가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룸미러로 보이는 듯 해, 총장은 얼굴이 붉어지며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끊어요. 지금은 통화하기가 좀 그러네.” 총장은 전화를 끊고, 괜시리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운전기사의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에 더더욱 창피함이 느껴졌다. ‘내가 그 인간 땜에 정말 못살아.’ -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영복 차림으로, 게다가 한 손엔 마대자루를 꼬옥 쥔 채로, 수림은 카운터에 있는 후배를 찾아갔다. 긴장하며 들어갔던 남성사우나와 락커룸에서 별 소득이 없자 결국엔 그 모습 그대로 카운터에까지 나와본 수림이었다. “저기, 혹시 말야. 오늘 오전에 왔던 회원들 중에 말야…” “언니! 왜 그쪽에서 나와요 지금? 거기 남자 락커룸이잖아요… 글구, 수영복 차림으로 여기까지… 뭔 일 있어요? 뭐 잃어버리기라도 했어요?” “으응?… 아… 그럴 일이… 참, 그것보다… 혹시… 회원님들 가입신청서 좀 볼 수 있을…까? 요새, 갑자기 뜸해진 분 들도 있고 해서, 오늘 시간도 남는데 전화 좀 드려볼까 하고.“ 당황스러움이 수림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지만, 그것과는 달리, 수림의 입에선 거짓말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 언니 굳이 안 그래도 되요. 어차피 안 오면 자기들 손핸걸 뭐.” 왜 자신이 남자용 락커룸에서 나왔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던 후배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자 금새 잊어버려주는 단순함이 수림은 너무나 고마웠다. “그… 그래두, 좀 신경 써주면 서로 좋잖니…” “하여간 왕천사라니까 수림언닌.” 후배는 조금은 귀찮기도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언니의 부탁인지라 서류철에서 회원들의 가입신청서 모음 철을 찾아 수림의 손에 건넸다. 파일을 건네 받은 수림의 얼굴엔 화색이 도는 듯 했으나 이내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여성회원 가입신청서 모음’. “됐죠 언니? 글구, 돈 아까우니까 괜히 언니 핸드폰으로 걸지 말고 여기 이 전화 쓰세요. 월급도 짠데 이런 거라도 애용해 줘야죠, 안 그래요?” 친절해도 너무나 친절한 후배 덕에, 수림은 멍한 얼굴로 파일 철을 받아 들고 전화기 앞으로 다가섰다. “그나저나 언니,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다. 영후씨가 좀 전에 갔기에 망정이지…” 순간 수림의 눈에선 반짝 하며 빛이 났다. “누구라고? 방금 누구라고 그랬니? 응?” “영후씨, 이영후, 언니 몰라요? 하긴 시간대가 다르면 그럴 수도 있었겠네. 어쨌든 진짜 유명했.던. 축구선수 있어요. 다쳤다나 뭐라나 해서, 하루도 안 거르고 새벽같이 와서 있지, 수영은 안하고 맨날 물속에서 걷다가 만 간다?” 이영후. ‘그 남자의 이름이구나.’ 반말 존댓말 섞어가며 계속 재잘대는 후배의 말 따윈 이미 들리지도 않는 수림은, 혹시 잊을까, 몇 번이고 영후의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그리고 그 남자의 이름을 되 뇌이면 되 뇌일수록 수림의 입가엔 점점 미소가 번져갔다. “언니! 언니이이!!” “어…?” “무슨 생각하는데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웃고 그래? 전화한다더니 안 할거야?” “어? 어어, 해야지… 할거야…” 수림은 수화기를 들고, 아무 번호나 눌러대면서도 계속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에 반해 수림의 후배는, 여전히 물기가 흥건한 수영복과 수영모를 그대로 착용하고서, 한 손에는 마대자루를 꼭 쥔 채 남자 락커룸에서 나온 아무 이유 없이 히죽거리는 수림을 조금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언니… 좀 미쳤나봐…’ - 파주 NFC의 공기는 언제나 영후에겐 낯설었다. 대한민국 대표선수로 뽑혀서, 이곳에서 연습을 하고, 나아가 붉은색의 유니폼을 입고서 월드컵 경기장의 푸른 잔디 위를 달리며,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만원 관중 앞에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는… 꿈. 언젠간 그 꿈이 현실이 될 거라 믿었던 때가 있었음이 떠올라 영후는 씁쓸하게 미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믿고 실력을 키우면, 축구공을 처음 만지면서부터 꾸어왔던 그 꿈을,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에 갓 데뷔했을 때만 해도 영후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축구판은 정치판과 한치도 다를 게 없었다는 것을. 학연과 지연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변방의 고등학교만을 나와 프로로 직행한 자신은 언제나 아웃사이더였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대표 감독과 출신 학교가 같지도 않았을 뿐 더러, 영후를 발굴하고 길러낸 것도 그가 아니었다는 것은 약점과도 같았다. 그랬기에 영후가 매 경기 두골의 신화를 써내려 갔어도, 국가대표 감독은 언제나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영후를 외면했다. 하지만 점점 누적되어 드러나는 기록만으로는 더 이상 흠잡을 수 없어지자, 감독은 국제용으로는 쓸 수 없는 체격이라며 팬들의 요구를 일축했고, ‘AFC 챔피언스 리그’와 ‘FIFA 클럽월드컵’에서 세계적인 수비수들을 농락하며 결국 득점왕을 차지하자, 궁색해진 감독은, 이미 선수 테스트는 끝났다며, 이제는 새로운 선수를 뽑기보다는, 현 선수들로 조직력을 극대화 시키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또한, 영후를 선발하게 되면 자신이 계획한 시스템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변명도 잊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수했던 영후는, 아직도 자신이 많이 부족한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다음 기회에 국가대표에 선발되기 위해, 조명탑이 꺼진 밤늦은 시간까지, 드리블을 했고, 또 슛을 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결국 영후는 데뷔 첫해부터 5년 연속 K리그 득점왕이라는 대 위업을 이뤘고 더불어 최다 득점 신기록를 3번이나 갈아치우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결국 주머니 속의 송곳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듯, FIFA클럽월드컵에서 영후를 인상 깊게 관찰한 인테르와 아스날의 스카우터들은 그들의 감독에게 이적료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당장 이영후를 영입해야 한다고 보고했고, 각 팀의 감독들과 단장들은 스카우터들의 의견에 절대 동의했다. 당연히 이 소식은 대한민국 언론과 대표팀 감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드디어 백기를 든 국가대표 감독 덕분에, 그렇게도 원하던 대표팀 엔트리에 들게 되었지만, 꿈에 그리던 빅리그를, 그것도 선택해서 갈 수 있는 행복한 시기가 찾아왔지만, 상황이 그렇게 급변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한적한 녹색 잔디 위에선, 대한민국에서 축구를 가장 잘한다 하는 선수들이 모조리 모여있었다. 스물 세 명의 선수들이 남색 트레이닝 복 위에 각자 노란 조끼와 파란 조끼를 나눠 입은 채, 즐거운 놀이를 하듯, 그라운드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백발의 노인이, 박수를 치며 그들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영후는 먼 발치에서 그를 바라만 봐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 “열 한 명 모두가 즐겁지 않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얘야…” 영후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새롭게 부임한 노감독이, 묵묵히 영후를 지켜보다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그때의 영후는, 물론 축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다른 선후배들과 동기들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열심히 따라 줄거라 여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명목상 감독이었던 체육교사를 대신해 감독역할도 대신했던 영후가 계획한 연습량은 고등학생들에겐 너무나 과한 것이었고, 언제나 진지하다 못해, 화를 종종 낼 정도로 거칠었던 영후 덕분에 축구부원들은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줄어들기 시작한 축구부에 어느덧 존폐를 거론할 만큼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노감독은 홀연히 나타나 영후와 축구부원들에게 ‘진정한 축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 들 뿐 이었다. 영후가 보기엔 축구와 하등 관계없는 것들을 연습이랍시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샌가 축구부원들은 ‘재미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어찌됐든, 더 이상 부원들이 그만두지 않아주어서 다행이었지만, 어쨌든, 영후가 보기엔 여전히 감독은 이상해 보였다. 그럼에도 축구를 계속 할 수 있게 해준 감독이 고마워 반기 따윈 들지 않았고, 막상 참여해보면 훈련도 그리 어려운 것들도 아니었기에 그 ‘이상한 훈련’과 함께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훈련 또한 홀로 묵묵히 병행 해나갔던 영후였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 일과가 이어졌다. 팀 훈련을 마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 골대가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운동장에서 감각만으로 골대를 향해 프리킥을 찬지, 이 천 개가 넘었던가 했을 무렵, 영후의 등 뒤에서 노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폼이구나.” 영후는 탐탁지 않았지만 그래도 감독이기에 다가가 목례를 했다. 감독은 인자하게 웃으며 영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그저 몇 번 등을 어루만져 주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마음의 위안을 받는 영후였다. “그 동안 혼자 고생 많았겠구나.” 하마터면 영후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그간의 눈물겨운 노력을 이 할아버지는 모두 알아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목이 메인 영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얘야… 이제 그만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무나. 네가 걱정하는 일들은 앞으로 다… 이 늙은이가 책임질 터이니, 너는 그저 즐겁게 축구를 했으면 한단다.” - 선수들 사이에서 늙은 몸을 이끌며 같이 뛰고, 넘어지고, 함께 웃고 있는, 저기 저 늙은 할아버지가 있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가서 그의 선수가 되리라고 다짐했던 그때가 문뜩 떠올라, 영후는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후는 아무도 모르게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이내 양손으로 나팔 모양을 만들어 있는 힘껏 크게 외쳤다. “감-독-니임~!” 훈련에 열중하던 노감독은 그제야 영후 쪽을 돌아보고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영후가 아이스박스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마개를 열어 노감독에게 건네주자, 노감독은 영후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등산 후 마시는 약수마냥 맛나게도 들이켰다. “크아~, 역시 훈련하고 마시는 물이 보약이지, 암.” “이제 연세도 생각하셔야죠.”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이젠 그래야지 하다가도 원, 운동장에만 서면 치매가 와서 말이지 크크.” 노감독의 농담에 영후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 늙은이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구나.” “너무 유명해지셔서 찾아 뵙기도 쉽지 않았어요.” “훗, 세상사 참 우습지. 아무도 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초야에 있던 이런 중 늙은이가 다 대표팀 감독질을 해보고 말이다.” “언제나 잘 해오셨잖아요. 이번에도 그러실 거에요.” “그것도 네놈이 있었을 때 얘기였지~, 요샛 놈들은 더 이상 대표팀에 뽑혔다는 걸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단다.” 노감독의 말에 영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에게 돈을 지불하는 곳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소속구단이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애국심을 불태우며 죽을 힘을 다해 시합을 뛰는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그저, 다치지 않을 정도만, 자신의 몸값을 올릴 수 있을 정도만큼만 뛰는 선수들이 태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그래, 다시 돌아온 거냐?” 노감독은 마치 소중한 자식을 보듬는 듯한 얼굴로 손을 들어 영후의 허벅지 위에 아무 생각 없이 ‘툭’ 올려놓았다. 그러자 영후는 깜짝 놀라며 슬쩍 다리를 뺐지만, 노감독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아하하, 설마요… 제 몸 상태 아시면서…” 뒤늦게나마 영후는 손사래를 쳤지만, 노감독은 영후의 몸을 한동안 유심히 바라봤다. “또 뭐 하시려고 그러세요? 감독님이 그렇게 보실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구요. 맨날 사람 놀래 키기나 하시구…” “누가 놀랄지는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노감독은 ‘끄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그라운드로 걸어나가 선수들의 훈련을 멈췄다. 선수들은 감독 주위에 편히 앉은 채,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내 노감독은 영후를 돌아보며 이리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건지 덜컥 겁이 나는 영후였지만, 어쨌든 미적미적 그라운드로 걸어나갔다. - “예에~?” 그라운드의 선수들 모두 감독의 발언에 놀랐고,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영후였다. “영감님, 아무리 우리가 설렁설렁 뛰는 것처럼 보여도 저흴 핫바지로 생각하시면 안되죠!” 먼저 발끈한 건, 현 대표팀의 에이스 스트라이커였던 ‘하근명’ 선수였다. 영후와는 달리 어린이 축구교실부터 시작해서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명실공히 현 대표팀의 최고 골게터였던 그가 화를 낼 만도 하다고 영후 또한 생각했다. 대표팀의 주전과 비 주전간의 연습시합에 이도 저도 아닌 영후를 참가시키겠다고 하니, 영후 자신이 근명의 입장이라도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겁나는 가?” 순간, 선수들의 심리에 대해선 항상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던 노감독의 ‘도발’이 작렬했고, 이내 근명을 필두로 주전 선수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를 뿌드득 갈며, 전의를 불태웠다. - “하여간 못 말리십니다. 저 선수들 입장이 뭐가 되겠어요?” 축구화 끈을 몇 번이고 단단하게 되 묶으며 파란 조끼를 입은 영후가 툴툴거리자 노감독은 예의 신선 같은 표정으로 허허 거릴 뿐이었다. “허허, 이놈아 불평 하지 말고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나 풀고 나가.” 영후는 ‘졌다’는 표정으로 그제야 양 발목에서 모래주머니를 풀기 시작했고, 모래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지자 소리만으로도 꽤나 묵직함이 느껴졌다. 재활을 시작하면서 항상 발복에 착용하고 다니던 모래주머니를 벗고 나자 어쩌면 정말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해… 볼까?’ 이윽고, 파란조끼를 입은 선수들을 불러모은 노감독은 간단한 작전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 영감이 감독 자리를 고스톱으로 땄나…’ 모든 선수와 심지어 영후조차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노감독은 엉뚱한 작전 지시를 했다. - 삐-익! 노감독의 입에서 휘슬이 울리자 노란 조끼를 입은 선수들이 잠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스트라이커 출신인 영후가 네 명이 일자로 서는 포백 수비의 바로 위, 그러니까 이른바 역삼각형의 아랫 꼭지점인 수비형 미드필더의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모양새에 가장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다름아닌 근명이었다. ‘정말이지, 개나 소나 다 감독한다고 지랄이야, 지랄이!’ 근명은 영후의 위치를 보고 더더욱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어떤 위치인가? 전쟁터나 다름없는 현대축구의 허리싸움에서 상대팀의 공격진을 무력화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 아니던가. 게다가 포백 바로 위의 위치라면, 최전방 공격수를 1차로 저지하는 것 또한 주요 임무 중에 하나였으니, 이건 바로, 근명과 영후를 직접 대결시키겠다는 감독의 의중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를 모를리 없던 근명은 공을 자신에게 달라는 사인을 하며 영후 쪽으로 내달렸다. 그에 후방에서 공을 돌리던 노란 조끼의 왼쪽 풀백은 달려나가는 근명을 향해 장거리 패스를 시도했다. - ‘흐~읍’ 경기가 시작됐지만, 영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았다. 그러자 생경하면서도 기분 좋은 풀 내음이 코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색했던 이곳의 공기가 폐로 한 가득 들어차고 나서야,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고 또 지금이 현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조금쯤, 왼쪽 무릎에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음을 다잡는 시간치고는 조금 길었던 모양이었다. “어?” 겨우 마음을 다잡고 눈을 뜬 영후 앞에 황소처럼 돌진해오는 근명이 보였고, 그 뒤로 근명을 향해 날아오는 공 또한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번의 호흡은 그간 잠들어있던 영후의 모든 ‘축구 감각’을 일깨운 지 오래였다. ‘뭐야, 무턱대고...?’ 영후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근명을 살짝 피하며, 날아오는 공을 가슴으로 가볍게 트래핑해서 자신의 발 아래로 살며시 떨어뜨렸다. 등뒤로 약간 벙찐 근명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한 채, 영후는 이내 간결한 드리블로 상대 진영까지 가려다 순간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 ‘참, 나 수비였지.’ 하지만 간단한 깨달음과 동시에 전방의 공격수와 눈이 맞는 순간 발 아래 축구공의 왼편 잔디에 왼쪽 다리를 굳건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한껏 뒤로 젖혀져 있던 오른 다리가 날렵한 반원을 그리며 공을 강타했다. 파~앙! 대지를 가르는 패스. 영후의 굵은 허벅지에서 품어져 나오는 힘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공은, 엄청난 스피드로 선수들의 사이를 가로질러 날아갔는데, 그 광경은 흡사 바다 위를 살짝 떠서 날아가는 미사일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전방에 있던 공격수는 설마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그것도 갑자기 날아올 줄 몰랐는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공은 이내 궤적을 바꿔 공격수의 발 아래에 툭 떨어졌다. 오프사이드도 간단히 깨버린 엄청난 스루패스가 그 먼 거리부터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득달같이 달려든 노란 조끼의 센터백에 당황한 공격수는 이내 볼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패스 한방은 파란조끼 선수들에겐 자신감을, 그리고 노란 조끼 선수들에겐 경각심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 전반전은 확실히 주전 팀의 페이스였지만, 그렇다고 공격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번번히 근명은 영후의 노련한 수비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해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비 주전 팀 또한 득점이 없었는데, 비 주전 팀 스트라이커의 골키핑 능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지만, 주전 팀의 수비 및 골키퍼의 능력이 엄청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미드필드 라인에서 치열한 공방만을 벌이다 전반전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0 - 0 득점 없이 끝났다. 한편 간만에 소화한 45분이 조금은 힘겨웠는지, 영후는 연신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면서도 비 주전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로 대화할 시간도 없었건만, 영후의 플레이 자체가 그들에겐 다정한 인사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었다. 한편 영후는 노감독의 발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공격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건, 역시 공격수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해 적절하게 커팅해 낼 수 있었고, 더불어 전방의 공격수에게 적절한 패스를 내어 줄 수 있었다. 결국 영후는 처음으로 서보는 포지션이었음에도, 전혀 어색함 없이 아니, 마치 자신의 본 포지션이었던 듯 완벽하게 소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하여간 못 말린 다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노감독의 속을 알겠다, 라고 생각해왔던 자신의 자신감이 또다시 뒤죽박죽 되어버린 영후의 머릿속이었다. 어쨌든 겨우 한숨 돌리게 되었을 즈음, 모든 선수들의 시선이 영후 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왜들 그러는 거지? 갑자기… 내가 그렇게 못 뛰었냐? 짜식들, 그럼 내가 현역처럼 뛸 줄 알았냐? 젠장.’ 하지만 가만 보니, 그런 눈빛들이 아니었다. 저 눈빛은, 먹잇감을 앞둔 늑대들의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영후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려는 찰나, 어깨너머로 시원한 음료를 건네는 손이 보였다. 그제야 음료를 건네 받고서야 손의 주인을 바라본 영후는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도 했구만.’ 오늘은 휴무였는지, 회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하연이 있었다. 모자 뒤로 빼낸 긴 포니테일 머리스타일이 싱그러움을 더했고, 가슴과 엉덩이라인이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슬림한 트레이닝 복 덕분에 주전이건 비 주전이건 일제히 정신 줄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스토킹하는데 뭐 있어 증말. 여긴 또 어떻게 알았냐?” “영후 넌 내 손바닥 안 이라니깐. 어때, 뛸 만 해?” “에고, 말도 마라. 죽겠다.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하고 뛰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구” “말은 그렇게 해도 꽤나 즐거워 보이더라 너?” “내가? 에이 설마…” “어때?” “뭐가?” 뭐가 어떠냐는 건지 하연의 시선을 따라간 영후는 그제야 이해했다. 왼쪽 무릎에 대한 걱정. 하연은 지금 그것이 염려스러운 것이었다. 일부러 보라는 듯 왼쪽 다리를 바닥에 탕탕 굴러 보였다. “괜찮네, 일단은.” 안도와 걱정이 교차하는 하연의 표정에 영후는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걱정 마, 예전처럼 아픈 거 참아가며 뛸 만큼, 여전히 바보는 아니니까.” 문득 말을 던져놓고 나니, ‘그때는 참 바보 같았구나’ 싶은 표정이 되고 있었다. ‘아팠을 때… 솔직할 걸…’ 잠시 예전의 자신이 후회스러운 영후였다. - 한편, 주전 팀의 선수들은 초비상사태였다. 5년전까진 그저 한 가닥 했을 지 언정 지금은 그저 선수 출신’이었던’ 남자 하나 때문에 이렇다 할 공격도 못했을 뿐 더러 결정적인 역습마저 번번히 허용해버렸기에 모두들의 머릿속에 위기감이 팽배해져 있었다. 그 와중에 고등학생임에도 재능을 인정받고 대표팀 상비군에 뽑힌 한 아이의 말은, 주전선수 모두의 머릿속에, 선수시절 때 영후의 활약상이 담긴 하이라이트 모음 비디오를 재생시켰다. “도대체, 저 아저씨 현역 땐 어땠나요?” - 도서관의 한 켠에선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누군가를 보기 위해 벌떼들처럼 몰려있는 남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도 그럴 것이, ‘폭탄은 도서관에, 미녀는 클럽에서’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유행되고 있는 요사이에, 클럽에서 조차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엄청난 미녀가 도서관 책상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장을 넘기는 광경은 그 자체로도 한 편의 영화와 같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영화와 좀 다른 점이라면, 그 미녀의 주변엔 축구이론서적만이 산처럼 쌓여있었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오는 것은 남희에겐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책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관한 답이 들어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스물 여섯 해를 살아오면서 가끔씩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남희는 언제나 도서관을 가장 먼저 찾곤 했다. 도서관에라도 오면, 꼭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왠지 모를 마음의 위안을 얻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남희는 어느새 ‘현대 축구 이론’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는, 쉴 틈도 없이 다시 ‘축구사의 영웅들’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브라질이 배출한 불세출의 영웅, ‘펠레’가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92회의 헤트트릭을 기록했다는 부분을 읽으며 잠시 온몸에 소름이 돋기도 했던 남희는 연이어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지난번 총장의 말이 떠올랐다. ‘이영후 감독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남희는 읽던 책을 갑자기 ‘탁’하고 덮었다. 그러자 남희를 훔쳐보던 모든 남자들의 가슴이 동시에 ‘덜컥’ 내려앉는 듯한 모습이 여기 저기서 속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그런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던 그녀는 책들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도서관내의 컴퓨터 실로 자리를 옮겼다. - ‘이……여……엉……후……우’ 컴퓨터를 비롯해, 기계들과는 전혀, 그야말로 저~언혀 친하지 않았던 수림은, 독수리 타법으로, 영후의 이름을 ‘네이년’의 검색창에 입력했다. 이윽고, 엔터키를 치자마자 거침없이 ‘이영후’에 관한 기사와 정보가 주르륵 뜨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것도 귀찮아 했던 수림이었지만, 읽어야 할 영후의 기사가 하루 만에 다 읽을 수는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기쁜지 몰랐다. 게다가 넘쳐나는 그의 사진은 수림도 모르는 사이에 ‘인쇄’버튼을 연신 클릭하게 만들었다. 카운터에 놓인 프린터 카트리지를 몽땅 쓰고, 후배에게 한 소리를 들을지언정, 수림에겐 지금 모니터에 둥둥 떠있는 영후의 기사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했다. -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 노감독은 다시 파란조끼의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이번에 지시하는 작전 또한 전반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내용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는 선수가 없었다. 이미 그들의 얼굴엔 영후에의 신뢰가 넘쳐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노감독은 작전을 지시하고는 이내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가 스탠드에 앉아있는 하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 광경을 배 아파 한 선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노감독을 향해 소리쳤다. “감독님? 후반엔 심판 안보세요?” “이놈들아, 양심이 있으면 노인네 좀 작작 부려먹어라!” 노감독은 선수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하연을 보고 빙긋 웃어 보였다. “여전하시네요. 감독님.” “색시도 여전한데 무얼.” “근데, 오랜만에 너무 무리하게 만들진 마세요.” “얼굴은 이뻐도, 축구 보는 눈은 좀더 길러야겠구먼.” “?” “어느 쪽이 더 무리하고 있는 거 같은가?” “네?” “제 아무리 무명산의 호랑이라도, 히말라야의 토끼들이 깔봐선 안 되는 법이라네.” 호랑이. 하연에겐 흘러가듯 내뱉은 노감독의 발언이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도 하연은 영후의 무릎 걱정에 불안하기만 했다. “어떻게 되도 좋으니 더 이상 다치지만 말았으면 좋겠어요.” 노감독은 근심 어린 하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같은 여자의 마음을 얻은 영후야 말로, 진정 행복한 놈이겠구먼, 허허.’ 그런 노감독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도 모르게 기도하듯 손을 맞잡고 경기장을 응시하고 있는 하연이었다. 그런데… 전반과는 달리 센터서클에 서서 축구공 위에 발을 올려놓고 서 있는 영후가 보였다. 하나도, 그때의 영후의 모습과 단 한 개도 다르지 않았다. 저렇게 공 위에 발을 올린 채 상대방의 골대를 응시하는 저 모습. 자신도 모르게 하연의 심장소리는 점점 거칠어 지고 있었고, 이윽고 울리는 휘슬소리와 함께, 후반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4부. 이상한 남자 파주 NFC 앞에서 검은색 모범 택시 한대가 정차하자, 이내 미니스커트 아래로 미끈한 다리를 내밀며, 내리는 한 소녀가 있었다. 어깨 한쪽이 드러나 보이는 루즈한 티셔츠와 고슬고슬한 단발의 퍼머머리가 그녀의 통일감 있는 섹시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거스름돈을 뒷좌석 쪽으로 건네며, 중년의 택시기사는 본능적으로 그 소녀의 몸매를 훑어보았고, 그런 시선을 못 느낄 리 없었던 소녀는 거스름돈을 건네 받으며 살짝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택시를 타기 전부터 이미 구겨져있었고, 여러 가지 화풀이 겸,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택시의 뒷문을 세게 닫은 뒤, 이내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달린 것들이란…’ - 똑똑. “으음…들어와.” 김조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 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문을 마주한 책상의자에 조금은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앉아있었다. “교수님, 그때 말씀하신 논문이요. 카피해왔는데요.” “어? 어어. 그거…거기, 거기다 놓고 나가봐요.” 김조교는,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어렵사리 의자에 앉아있는 교수를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이내 ‘별일 아닐테지.’하며,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갔다. 김조교가 문을 닫고 나가자 마자, 교수는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오오~, 그래…그렇지. 우리 윤지, 정…말 맛있게 먹는…윽! 구나.” 겨우겨우 말을 이어나가던 교수는, 이내 책상 밑으로 손을 집어 넣어 자신의 자지를 혀로 휘감고 있는 작은 소녀의, 곱슬거리는 단발 머리를 움켜쥐었다. 소녀는 한 손으로, 교수의 자지를 위아래로 문지르며, 동시에 혀를 이용해 자지의 귀두 부분을 슬쩍슬쩍 건드려 나갔다. 물론, 동시에 늘어질 대로 늘어진 늙은 고환을 부드럽게 굴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수를 올려보는 고양이 같은 눈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이내, 자지를 천천히 위아래로 쓰다듬으며, 소녀는, 침과 약간의 사정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교수의 자지가 들락거리기엔 너무나 빨갛고, 또 너무나 도톰해 보이는 입술이었다. “교수니~임, 이번 학점…정말 잘 주시는 거 맞는 거죠?” 콧소리를 섞은, 애교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교수는 잠꼬대를 하듯 입을 열었다. “그…그럼…그럼…그러니까…학점 걱정은 말고, 어서…어서 어서~” 거의 절정을 앞두고 있던 교수는 황급히 대답을 하고선,이내 윤지의 머리를 자신의 사타구니께로 짓눌렀다. 이윽고, 다시금 윤지의 입 속으로 자신의 보잘것없는 자지가 사라지자, 실로 오랜만에 머리 뒤쪽으로 짜릿한 충격이 느껴졌고, 곧 교수는 양손으로 윤지의 머리를 부여잡고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으으……어……어흑……억!”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교수는 갑자기 단발마의 비명을 내질렀고, 그와 동시에 윤지의 입 속으로는 비릿한 정액이 왈칵 밀려들어왔다. 윤지는, 교수의 사정이 끝날 때까지 자지를 그대로 입에 머금은 채, 최대한 예쁜 눈을 만들어 교수를 올려다 보았다. “후우…아…역시 우리 윤지가 최고야…” 교수는 그야말로 대 만족한 얼굴로, 손수건을 집어 자신의 이마에 맺힌 육수 같은 땀을 닦아냈고, 이내 교수의 자지에서 입을 뗀 윤지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손바닥에 교수의 정액을 뱉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수는, 자신의 마누라에게선 절대 느낄 수 없었던 흥분이 척추를 타고 오르는 듯 했다. “에…이번 중간고사도 ‘A’ 는 윤지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그러니까 다음 번도…” 느글느글한 표정으로, 윤지의 가슴 속에 손을 집어 넣고 조물거리면서, 교수는 윤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윤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개새끼…’ 윤지는 좀 전의 상황이 떠올라 나직이 욕을 해보다가, 빨간 치마를 입은 여자의 표식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 삐~익! 후반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센터서클에서 공을 수비진영으로 패스한 뒤, 적진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던 영후는 이내 ‘아차’ 싶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갑자기 수비라인을 위로 끌어올린 노란 조끼 선수들의 반격으로 인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파란 조끼의 선수들이 급격하게 수세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단지, 영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공격수로 올라왔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영후가 전반 동안 지켰던 자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휑’ 해보였다. ‘젠장, 우선은 공수 밸런스부터 맞춰야겠다.’ 영후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재빨리 수비지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미드필더의 횡패스를 인터셉트한 노란 조끼를 입은 오른쪽 윙의 돌파는 이미 골라인 부근까지 이루어져 있었고, 파란 조끼를 입은 왼쪽 풀백은 영후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한 채 간단하게 돌파 당해버렸다. 이내 거침없이 골대로 공을 끌고 가던 오른쪽 윙은, 자신을 향해 돌진하던 센터백과 골키퍼를 힐끗 보더니 시선 페인팅을 하며,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해오던 근명에게 적절한 강도로 공을 밀어주었고, 텅 빈 골대로 근명은 간단히 득점을 해버렸다. 0-1. - “이얏~호! 고~오올! 골! 골이에요~!” 연습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파주NFC의 운동장 한 귀퉁이에선, 어느 샌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윤지가, 한 손으론 캠코더로 열심히 촬영하다가 하근명의 골이 터지자, 혼자 오버하며 모 해설가 흉내를 내가며 열광하고 있었다. ‘헤헤, 정말 운이 좋은데? 그 놈의 영감탱이 때문에 전반전 놓치고 짜증 지대로였는데, 오자마자 골이라니 크크… 역시 하근명 선수 짱이셔~’ 윤지는 하근명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보이며 팔딱팔딱 뛰었고, 하근명은 나름 멋진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답례로 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 그의 손짓만으로도 이미 윤지는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쟨 누구냐?” 원래 포지션으로 되돌아 가던, 노란 조끼를 입은 한 선수가 묻자, 근명은 지어낸 표정과는 달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몰라 나도. 누구라더라…아 맞다, 내 팬클럽 부회장인가 뭔가 라지 아마?” “오~, 꽤 삼삼한데? 먹었냐? 맛있디? 맛있는 거 있음 좀 나눠먹고 그러자 응? 응?” “새끼야, 남의 간식에 침 흘리지 말고, 패스나 좀 잘해.” 괜히 심통을 부리며, 살살거리는 동료선수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근명이었다. 이내 하프라인을 넘어가려는데, 센터서클 부근에서 복잡다단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서있는 영후가 보였다. ‘훗, 그러면 그렇지.’ 툭. 근명은 영후의 어깨를 일부러 부딪히며 지나가면서 거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 녀석…’ 영후는 근명의 느끼한 얼굴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려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후는 이내 파란조끼를 입은 선수들을 불러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선제골을 먼저 내준 뒤, 급격하게 가라앉은 팀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선수들을 불러모으는 영후의 모습을 보고, 노감독은 무릎을 탁 치며 흡족해했다. “저 놈 좀 보게… 드디어 발동이 걸렸군 그래, 허허” 웃으며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노감독과는 반대로 하연의 두 손엔 이미 진땀이 한 가득 이었다. ‘영후야…’ 하지만 선수들이 모여들자 영후는 조금 난감했다. 모이는 선수들의 얼굴이 전반전과는 달리, 하나같이 ‘혹시나’에서 ‘역시나’로 어둡게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새 애들이란…정말 어쩔 수가 없구만.’ 이제 겨우 한 골일 뿐이었는데, 벌써부터 초상 치르는 얼굴들을 하고 있는 선수들이 참 한심해 보이는 영후였다. 그래도 영후는 꾹 참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 미안. 이번엔 내 실수였다.” 순간, 치명적인 패스미스를 한 미드필더는 움찔했다. ‘미안하다니…그건 분명 내가…’ 그 선수 뿐만 아니었다. 쉽게 돌파 당한 풀백도, 섣불리 달려들다 정작 골대를 비워버린 골키퍼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빈 공간으로 침투하는 공격수의 쇄도를 멍하니 지켜봤던 미드필더들 또한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고 있었건만, 영후는 자신들의 잘못을, 본인이 직접 나서서 뒤집어 쓰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실수라도 할라치면 감독의 질책이 쏟아지는 게 싫어서, 창의적인 플레이는 커녕, 실수를 줄이는 플레이 위주로 해왔던 그들이었기에, 명백히 자신들의 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사과하고 다독여주는 이남자가, 그들은 정말 이상해 보였다. 게다가 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이 남자,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저, 자신들과 다른 처지라서, 이 시합이 주는 무게가 가볍게 느껴져서 웃는 것처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이 남자의 속내를 짐작조차 해볼 수 없었다. 이상한 남자. 정말 정말 이상한 남자임에는 분명한데…이상하리만치 선수들은 이 남자가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따뜻해져 가는 걸 느꼈다. “근데 말야, 재밌지 않냐?” 상황에 맞지 않게 히죽거리는 영후의 발언에, 파란 조끼를 입은 선수들은 또다시 어리둥절해 했다. 재미있지 않냐고? 지금 이 상황이? 지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재미? 영후는 씨익 웃으며 노란조끼를 입은 녀석들을 등뒤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저 노란 병아리 녀석들은 한 골 넣었다고 기고만장해 있을걸? 하지만 경기는 이제부터 시작일 뿐 이라구. 상상해봐, 저 녀석들의 득점이 이 한 골로 끝나버리고, 우리가 세 골을, 아니다 한 다섯 골쯤으로 할까? 그래 이왕 쓰는 거 다섯 골로 하자. 여튼, 우리가 다섯 골을 저 녀석들의 골대에 쳐 넣고 환호하는 순간을 다들 떠올려봐.” 선수들은 벙찐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내 서로의 생각이 모두 같음을 느꼈다. ‘마…말도 안돼!’ 주전 팀을 상대로 득점 자체가 쉽지 않은 이 상황에서, 역전을. 그것도 다섯 골이나 넣어버리겠다는 저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샘솟는 것인지, 선수들 모두는 그의 황당한 제안에 그만 너털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에, 영후도 따라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때? 막 불타오르는 거 같지 않아?”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영후의 발언이었지만, 다섯 골은 고사하고, 열 골을 더 실점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선수들의 얼굴엔 하나 둘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남자와 함께 후반전 종료휘슬이 울릴 때까지 부서져라 달리다 보면, 분명 ‘재미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선수들의 동요가 가라앉은 것이 확인되자, 영후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후…겨우 마음들을 다잡았군.’ 이제야 겨우, 다시 경기를 진행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후였다. “자, 그럼 슬슬 가볼까?” - 윤지는 득점과 함께 잠시 게임이 멈춘 틈을 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온, 선수 프로필이 담긴 각 소속팀의 팜플렛을 꺼내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출전선수들의 얼굴과 사진을 비교해가며, 주전과 비주전의 명단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에…하근명 선수는 당근 선발팀이고…” 또한, 하근명이 속한 노란조끼 팀만을 지켜보느라 미처 파란조끼의 선수들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한 골 이 들어가고 나서야,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윤지는, 후보선수들 중에선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을만한 선수가 또 누가 있을까 체크해보기로 했다. 축구강국들은 모두 1진,2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스쿼드를 이루고 있는 요즘, 우리나라 축구 기대주들의 성장 또한 흥미 있게 지켜볼 대목이었기에, 나름 수집해온 정보와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비교해보고 유심히 지켜보려 하는 찰나, “응?” 윤지는 선수인지 아닌지도 모를 ‘이상한 남자’한 명이 선수들과 어울려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윤지는 곧바로 자신의 정보지속에서 그 ‘이상한 남자’의 사진과 프로필을 찾아봤지만, 암만 찾아봐도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코친가…?’ 아마도 한 선수가 부상 등으로 실려나가, 인원 수가 안 맞기에 코치라도 대신 뛰고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할 즈음, 윤지의 눈이, 경기장 전체가 가득 차도 남을 만큼 커져버렸다. ‘저…저 남자! 설마… 그때 그 화장실 변태?!?!?’ 윤지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주변을 의식하며 자신의 가슴께를 괜히 가려보았다. 앞으론 ‘가슴’관리에 좀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근데 저 변태 아저씨가, 왜 저기에 섞여 있는 거야?’ - 다시 휘슬이 울리자, 이내 영후는 공을 뒤로 돌렸고, 약간 오른쪽으로 이동해 다시 받았을 즈음 양쪽 터치라인에서 파란색의 양 날개가 영후의 사인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하나하나 두드려 볼 수 밖에…’ 노란 조끼 팀의 강점, 그리고 약점을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영후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별 다른 방법이 있을리 없었다. 직접 부딪혀 보는 수 밖에. ‘우선, 왼쪽을 두드려볼까?’ 영후는 양 날개에게 슬쩍 사인을 보냈고, 순간 양쪽 터치라인으로 파란색 날개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는데, 순간 영후는 양 사이드의 공간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갑작스레 전진할 줄은 몰랐던 노란색의 양 풀백들은 바로 한 골을 넣었을 때 처럼 깊숙히 적진으로 전진하다가 오버래핑하는 자신들을 마크하기는 커녕, 그대로 지나쳐 올라가고 있는 윙들을 수비하기 위해 황급히 자기들의 진영으로 되돌아갔지만, 이미 전진해있던 노란 윙들은 미처 회귀하지 못했다. 덕분에 노란색의 양 윙과 풀백들의 공간이 벌어진 사이, 약속이라도 한 듯 파란조끼의 오른쪽 풀백이 빠른 속도로 오버래핑을 시도했다. 영후는 오른쪽 풀백에게 패스를 하면서, 동시에 리턴 사인을 보냈고, 순간적으로 공을 중심으로 노란색과 파란색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 진영으로 쏠렸을 때를 놓치지 않고, 이대 일 패스를 되돌려 받은 영후는 어느새 왼쪽터치라인을 타고 오버래핑을 나가는 왼쪽 풀백에게 대각선 장거리 패스를 날렸다. 갑작스레 공격의 방향이 선회하자, 노란색의 오른쪽 수비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센터백과 풀백이, 전진하는 파란색의 풀백을 압박하자, 파란색의 풀백은 슬쩍 스스로 스크린을 걸었다. 순간, 그 틈을 놓치지않고, 풀백의 뒤로 다시 파란색 날개가 스치듯 돌아나갔다. 풀백만을 동시에 압박하던 노란 조끼 선수들은, 파란색 날개가 풀백의 등뒤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미처 막지 못했고, 풀백은 순간, 자신의 뒷 발꿈치로 돌아나가는 윙에게 슬쩍 밀어주는 ‘굿패스’를 했다. 영후의 리드로 긴장이 해소된 선수들이 드디어 자신만의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풀백과 윙의 절묘한 공간 점유가 드디어 노란조끼 팀의 수비라인에 첫 균열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을 확인한 영후는, 지체없이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하기 시작했고,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파란조끼가 눈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왼쪽 윙은 볼 것도 없이 골키퍼와 센터백의 중간지점을 향해 왼발 크로스를 날렸다. 제법 낮고 빠르게 날아가는 공은, 그러나 영후는 물론, 영후가 헤딩하지 못하도록 경합하려고 준비하던 센터백의 키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듯 보였다. - 남희는 인터넷으로 선수 ‘이영후’에 관한 기사를 검색 한 후 미적분을 풀며 간결하게 식을 작성하던 그 버릇 그대로, 기사에 실린 시합결과 및 기록, 그리고 그의 사소한 동향들까지 시간 순으로 배열해 노트에 간추려보기 시작했다. “……이영후……19세… 동아…고등학교 졸업… 졸업 직후 K-리그 입단 및 데뷔… 데뷔 경기에서 헤…트트릭...?” 첫 줄을 적기만 했음에도 남희의 가슴은 왠지 두근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이 단순한 한 줄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었겠지만, 축구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축구의 역사를 넘어 현대축구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던 책들의 마지막 장을 바로 조금 전에 덮었던 지금의 남희는, 한 골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에, ‘데뷔 경기’와 ‘헤트트릭’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선수 ‘이영후’에 대한 경외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남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PC모니터에 떠있는, 영후의 선수시절 당시, 시합에서 슈팅을 날리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역동적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사진이 뒤집힌 건가?’ - ‘흥, 후보녀석의 크로스가 그러면 그렇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센터백이 자신의 머리위로 지나가는 공을 지켜보려 할 즈음, 공은 하늘에 떠있는 태양과 겹치며, 흡사 개기일식을 일으키는 것처럼 묘하게 보였고, 그와 동시에 슬로우 비디오처럼 어디선가 나타나 그 태양을 찌그러뜨리는 '하나의 발'이 보였다. 순간, 스탠드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노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촤~악. 우와아아아~~~~~~! 파란조끼를 입은 선수들이 엄청난 환호성을 터뜨리고, 영후에게 몰려들 때까지 센터백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가 없었다. ‘무…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가 돌아봤을 땐, 골키퍼는 반응도 못한 채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고, 자신이 지켜내야 했을 골대 안에서 스르륵, 공이 굴러 나오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순식간에 일어난 지금의 상황을 절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캠코더를 들고 있던 윤지는,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이시클 킥!’ 설마, 국내에서, 그것도 국내선수가 저렇게 아름다운 폼으로 저런 엄청난 슛을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곤, 게다가 자신의 캠코더로 저 그림 같은 장면을 직접 담을 수 있을 거라곤 더더욱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내가 왜 지금까지 하근명 따위에 목을 매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윤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슛이었다. 축구선수가 슛을 날리는 모습만으로 보는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다는 걸, 윤지는 그때 처음으로 깨닫고는, 캠코더의 초점을, 분한 얼굴로 이를 뿌득 갈고 있는 하근명에서, 환호하며 달려드는 파란 조끼의 선수들에게 둘러 쌓인 채 센터서클로 이동하고 있는 ‘너무나도 즐거워 보이는’ ‘이영후’에게로 자연스레 옮기기 시작했다. ‘집에 가자마자 유튜브에 올려야겠다. 십만 힛은 기본으로 찍겠는걸? 으힛!’ 자신이 촬영한, 그리고 촬영할 오늘의 시합 장면이, 영후의 머지않은 훗날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런지는, 그때의 윤지는, 아니 이 운동장의 모든 이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하긴 지금 이순간엔, 그런 건 어찌됐든 상관없어 보였다. 스탠드의 하연을 향해 주먹을 뻗어 보이며 환하게 웃는 영후와 그런 영후의 모습에,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하연에겐 말이다. - 노란조끼의 선수들은 동점이었을 뿐이었음에도,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센터백과 풀백간의 호흡이 원활치 않다는 약점과 더불어, 센터백의 공중볼 위치 선점 능력이 예상 밖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이, 영후의 적절한 스루 패스와 크로스 몇 번으로 완전히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축구처럼 공간싸움을 하는 운동에서의 약점 노출은 의외로 치명적이었다. 결국, 노란 조끼의 팀은 문전 경합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러 페널티킥을 헌납했고, 얼마 후 코너킥에서부터 이어진 헤딩으로 한 골 더 실점하고 말았다. 3-1.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이정도 스코어는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지만, 스코어의 주인이 뒤바뀔거라곤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기에, 주전팀이 느끼는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고, 비주전팀들은, 자신들도 주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져서,빛나는 플레이를 연속으로 보여주었다. 한편, 주전팀은 주전팀대로, 비주전팀은 비주전팀대로, 감정의 흥분도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그 남자 만은, 여전히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묘한데?’ 영후는 새삼 이상함을 느꼈다. 이렇게 흥분치 않고 경기를 치르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번외 경기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대타선수여서도 아니었다. 축구라면, 하다못해, 일요일 아침에 열리는 조기축구라도 열과 성을 다했었던, 그였기에, 이처럼 전혀 끓어오르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너무 오래 쉬었던가…’ 혹자는 지나가는 말로, ‘왜 축구를 다시 시작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영후 만큼, 축구가 하고 싶어 미칠 것 같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영후에겐 축구가 애인이었고, 축구는 그의 인생이자, 종교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랬던 영후가 왜 축구가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다시 돌아가려 마음먹었을 때마다 그는, 돌아가면 내가 또다시 뭘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 9경기 연속 2골 헤트트릭 4회. 한경기 최다 골 5골. 26라운드 연속 선발 및 풀타임 출장. 37골 기록 경기당 1.4골 CUP대회 7경기 선발 및 풀타임 출장. 13골 기록 경기당 1.9골 FA대회 8경기 선발 및 풀타임 출장. 17골 기록 경기당 2.1골 남희는 영후의 선수시절 기록 중, 단지 데뷔 첫해의 기록을 정리하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열 아홉의 나이에, 프로무대에서 선발자리를 꿰찬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을 텐데, 이영후란 남자는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던 듯, 데뷔첫해부터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우려 했던 것이었다. 첫해의 기록만으로도 이영후가 남긴 발자취는 여타 선수들과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남희는 그 엄청난 간극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조금 거슬렸다. 데뷔 첫 경기에서의 깊은 태클로 얻은 부상도 숨긴 채, 5년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려왔을 그의 앞에 남은 건 1년간의 재활과 정신적 허탈함이었으리라. 하지만, 재활이 끝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의 2년간, ‘이 남자 그라운드를 떠난 채, 그 억겁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궁금증과 함께, 축구와 멀어져 있는 영후란, 어느새 상상조차 되지 않는 남희였다. - 파란조끼의 선수들은 영후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또, 공격을…?’ 세 골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영후는 또다시 선수들에게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말자고 독려했고, 엉겁결에 다들 파이팅을 외치긴 했지만, 다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사실, 전반 동안의 무실점 수비를 펼친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피로도가 이미 상당했었고, 더군다나 후반은, 영후의 눈부신 활약에 누가 되지 않도록, 죽을 힘을 다해 뛰었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이미 체력적으로도 모두들 오버페이스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영후 또한, 이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제는 모두들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판단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만일 이 정도에서 머뭇거리며 안주하려다간, 이내 주전팀의 엄청난 반격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에 적어도 ‘긴장’만은 늦추지 말길 바라며, 반은 농담처럼 말을 꺼낸 것이었다. 물론, 나머지 반은 '진심'이기도 했지만. 센터서클에선 하근명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영후를 바라보며, 다시 경기 시작이 되길 바라고 있었고, 영후는 그를 살짝 무시하며 심판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남았나요?” 심판은 오른손과 왼손의 시계를 번갈아 보고는 이내 영후를 향해 손가락을 펴 보였다. 5분. 솔직히 이정도 시간대면, 좀더 수비적으로 진영을 가다듬고 볼을 돌리기만 해도 비주전팀의 승리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시간대였다. 하지만… ‘그러면…좀 재미없지 않나?’ 근명보다도 훨씬 더 시합재개를 바라는 표정으로 근명을 마주보며 서있는 영후의 얼굴을 보면서, 파란조끼의 선수들은 모두 ‘설마’하는 표정이 되었다. ‘저 남자, 설마 진짜로 하려는 건... 아니겠지?’ 비주전 선수들은, 이제 그만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한계점까지 이끌어 준 것만 해도 너무나 고마웠고, 또, 생각지도 못한 승리의 기쁨을 선사해 준 것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러니, 이쯤 해서 쉬어가자고 한들, 영후의 결정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데 이 남자. 자신이 선언했던 약속. ‘5-1’ 의 스코어를 만들기 위해. 벌써 저만치 공을 가로채 적진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마트에 들어서는 수림은, 두꺼운 파일철을 행여 잃어버릴까 가슴에 꼭 껴안고 있었다. 그 파일철엔, ‘프린터 카트리지’를 교체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 소모됐다며, 카트리지 판매 회사에 전화해 대판하고 있는 후배를 못 본척하고 겨우 가져 나온, 이영후에 관련된 기사들을 출력한 A4용지가 전화번호부 두께 정도로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맨 앞장엔, 이영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취재한 기사가 들어있었고, 본문 중에, ‘중국요리’를 좋아한다. 라는 영후의 답변 중, ‘중국요리’라는 단어엔 몇 번이나 그은 듯, 빨간 줄이 겹겹이 쳐져 있었다. 물론 맨 밑의 ‘박하연’이라는 취재기자의 이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룰루랄라, 카트를 밀며 되는대로 요리재료를 집어넣는 수림 자신이, 요리엔 전혀 재능과 취미가 없다는 사실도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집들이라도 준비 하는 것 마냥, 수림이 힘겹게 밀고 다니는 카트엔 각종 요리재료가 산처럼 쌓여있었고, 낑낑대는 수림의 뒤로는, 마누라 등쌀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장보러 왔다가, '갑자기 이게 웬 횡재냐'며, 마누라들은 버려두고 빈 카트만을 끌면서, 멍한 표정으로 수림을 따르는 엄청난 수의 유부남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막, 수영강습을 마치고 나온지라, 물기에 젖어있는 머리칼과 뽀얀 얼굴만으로도 남자들이 모두 반할만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카트에 매달리듯 밀고 있는 수림의 트레이닝 복 속에 감춰져 있는 엉덩이의 뒷태가, 그야말로 자신들의 똘똘이들을 마구 유혹해 대는 것처럼 보였으니, 암내를 맡은 발정 난 수컷들은, 아쉬운 대로 자신들이 밀고 있는 카트에 아랫도리를 비벼대며, 똑 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얼굴로, 경주하듯 수림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얼굴도, 몸매도 엄청난 여인이 각종 요리까지 잘 하다니…그에 비하면 내 마누라는…크윽…!’ 자신도 모르게 남자들의 심금을 울리며, 동시에 엄청난 착각 또한 유발시키고 있는 ‘엉덩이 예쁜’ 수림이었다. - 현역선수들의 체력이 고갈되었을 정도니, 영후의 경우엔 더욱 그러했을 것이었건만, 이 시합에서 마치 자신을 모두 연소시키려는 듯, 영후는 이제 막 경기를 시작한 것 마냥 거칠 것 없이 공을 몰며 달리고 있었다. 설마, 중앙으로 직접, 그것도 단독 돌파를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에, 눈 깜짝 할 사이에, 영후는 모두를 따돌리고, 전방의 센터백 두 명과 대립했다.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겠거니 했다. 명색이 국가대표 수비수인, 게다가 소속팀도 같았기에 서로의 눈만 봐도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이 두 남자가, 고작 ‘예전’ 선수 출신의 영후 한 명을 막아내지 못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쳇! 너무 날뛰는 군!’ 자신들을 무시하듯, 맹렬하게 달려오는 영후를 향해, 왼쪽에 서있던 센터백 하나가 먼저 튀어나갔다. ‘막아서기만 하면 돼. 그럼 뒤에서 잘라줄테지.’ 자신의 뒤에 남아있는 또 다른 센터백에게 볼커팅을 맡기고 자신은 사람을 막을 심산이었다. 게다가 영후는 보통의 드리블러들이 방향 전환을 하며 드리블을 하는 것과는 달리 그저 최단 거리를 재듯,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센터백에게 그보다 더 좋은 먹이감은 없는 듯했다. ‘나를 통과할 순 없을걸, 간닷!’ 흡사 럭비선수의 체격을 보는 듯한 엄청난 몸집의 센터백은,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영후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러나 순간, 이 수비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저 잠깐, 그러니까 몇 백분의 일초 정도? 자신의 눈이 흔들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뛰어가던 궤도도, 달려오던 영후의 궤도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과 부딪히기 위해 달려오는 것 같던 저 남자는, 자신을 비켜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뭐든 통과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빈틈은 절대 없었을, 모든 경로를 막고 서있는 자신의 몸을, 투명인간이 그러하듯, 홀연히 뚫고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 보았을 땐, 이미 후방에 있던, 자신과 찰떡궁합이었던 또 다른 센터백도 영후에게 돌파당한 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여전히 그 남자는 오던 길 그대로, 그저 일직선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유…유령이다!’ 순간이었지만, 그 두 수비수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감을 맛보고 있었다. 한편, 단숨에 영후와 맞서게 되어버린 골키퍼는, 감독에게 두 수비수들을 선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달려오기만(?)하는 선수조차 막지 못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는 그보다 더한 바보는 없어 보일 만큼, 최악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컨디션이 별로라 오늘 골은 많이 내줬지만, 그래도 너 정도는 내 막아주지.’ 단단히 각오한 표정의 골키퍼는, 최대한 각을 줄이기 위해 서서히 달려 나왔다. 게다가 방향을 전환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영후였기에, 손만 뻗으면, 바로 공을 가슴에 품을 수 있어 보였다. ‘지금이닷!’ 이내 페널티에어리어로 진입한 영후의 발 밑으로 골키퍼가 손을 뻗으려는 찰나. 영후는 골키퍼를 힐끗 쳐다보더니, 발목에 힘을 빼고 간결하게 공의 밑부분을 차올렸다. 툭. 그것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었기에 운동장 안팎의 모든 이들은 한결같이 숨죽이고 이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 누구도 차마 입을 열지 않았다. 고요함. 그리고 아름다움. 시간으로 따지자면 채 1초도 되지 않을 순간 동안, 영후의 발을 떠난 공은, 실로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고 골키퍼는 자신의 머리위로 유유히 지나가는 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툭…툭, 데구르르…. 삐~익! 우와와와아아아아아아~~~~~~~~~~! 이내 골인을 알리는 휘슬소리가 정적을 깼고, 그와 동시에 모든 우뢰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정작 엄청난 골을 성공시킨 영후는, 조금은 지친, 그러나 덤덤한 표정으로 공을 가지고 센터서클을 향해 다시 천천히 뛰어 가고 있었고, 그 묵묵한 모습에, 길고도 촘촘한 속눈썹에 어느덧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던, 하연은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환하게 웃으며 영후를 바라봤다. ‘영후야…너 정말……돌아…왔구나.’ 5부. 그 여자의 고백 윤지는 시합 촬영은 까맣게 잊은 채, 녹화를 중지하고 바로 전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고 테잎을 돌려보았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네 번 째 골을 성공시키고도, 여전히 목마른 호랑이처럼 공을 옆구리에 끼고서 센터서클로 유유히 달려오던 남자는, 그러나, 그 동그란 원을 몇 발자국 남겨두었을 즈음, 갑자기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천천히 그라운드 위로 쓰러졌다. 마치,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사람의 모습처럼… ‘왜…갑자기…’ 윤지는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이내 테잎을 후반전 맨 처음으로 되감아 재생시켜보기 시작했다. - 하연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그때의, 3년 전 해외이적을 앞두고 가진, 국내에서의 마지막 경기 때의 영후 모습이 하연의 머리 속에서 오버랩 됐기에, 아무도 못들을 지언 정, 영후에게만은 들렸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마음으로 울부짖으며, 하연은 달려나가고 있었다. 쓰러져가던 영후의 모습을 보면서, 3년 전. 그때 그 순간, 마음이 놓였던 자신에게, 영후를 멀리 떠나 보내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을 바랬던 자신에게, 지금 이순간, 신은 자신에게 천벌을 내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영후야! 정말 미안해…’ - 국내에서 뛰는 마지막 리그 시합을 앞두고, 영후는 드디어 꿈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경기가 벌어지기 며칠 전, 영후는 아스날과 인테르의 극동지역 인사담당자들과 연달아 미팅을 했고, 비로소, 여태까지 불확실하기만 했었던 막연한 ‘기대’는 곧 환상적인 ‘현실’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영후가 완전이적하길 희망했고, 영후는 그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단순한 ‘피지컬테스트’만 받고, 유니폼을 입은 후 감독과 함께 환히 웃으며 사진만 찍으면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여느 경기와는 다른, 이른바 국내에서의 마지막 고별전이 될 그의 마지막 경기를 위해, 락커룸 한쪽 벤치에 앉아있던 영후는 늘 하던 대로 몇 번이고, 축구화 끈을 고쳐 매려 하는 순간, ‘툭!’ ‘어?’ 영후의 손엔 끊어진 축구화 끈이 들려있었다. 순간 영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있는 일이었던 것처럼, 그저 축구화 끈이 ‘끊어졌’을 뿐이었는데도, 등쪽에서 ‘오소소’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그러하자, 왠지 그날따라 조금은 더 왼쪽 무릎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분 탓일 뿐이라고, 영후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내, 경기장에 들어선 영후는, 여느 때와 똑 같은 모습으로, 센터서클 가운데에 서서, 축구공에 발을 올린 채, 주심의 휘슬 소리를 기다리며 상대방의 골대를 응시하고 있었고, 이윽고 평소와 다름없이, 공을 등 뒤의 미드필더에게 패스하고 바람처럼 달려나갔지만, 영후를 따라잡을 수비수 따윈 아무도 없었지만, 텅 빈 그라운드 어딘가에서, 스스로 다리가 풀린 것 마냥 ‘풀썩’ 쓰러지는 영후가 있었다. 그 순간. 그의 해외진출을 축하해주기 위해 운집했던 수많은 팬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고, 숨소리조차 죽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경기장. 그렇게 참고, 숨겨오던 시한폭탄이 하필이면, 이적을 앞두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서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수비수도, 동료도 없던, 그 허허벌판의 잔디 위에서, 영후는 혼자 쓸쓸하게, 무릎을 부여잡은 채,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스물 네 살의 영후는, 축구를 잃었었다. -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마치 시공간을 초월한 어느 곳인가 즈음에, 영후는 서있는 것 같았다. ‘여기가 대체…’ 바람 한 점 없는, 시작도, 끝도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자신도 모르게 홀로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어디로…가야…’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했다고 생각되었을 즈음, 저 앞에서 하얀 인영이 영후를 향해 보내는 손짓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온통 흰색이었음에도, 그 새하얀 인영의 모습은 너무나 쉽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낯설지 않은 손짓이란… 설마, ‘어…엄마?’ 초등학교 때 떠나 보낸 후, 십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모습이었지만, 영후는 절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엄마의 형상이었고, 엄마의 손짓이었고, 그것은 그대로 ‘엄마’였다. “어…엄…마? 엄마…엄마!” 그간 참아왔던 그리움이 눈물로 바뀌며, 영후의 시야를 뿌옇게 만들어갔다. ‘가야 해…엄마에게로…’ 영후는 한시라도 빨리 엄마의 부드러운 품에 안기고 싶었기에, 아이가 첫 걸음마를 시작할 때처럼,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었다. 바스락.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영후의 발 아래로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전해졌다. 푹신함. 그리고 싱그러움. ‘그래, 이 위에서라면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전혀, 숨이 차오르지도, 더 이상 무릎이 걱정되지도 않았다. 지금만 같다면. 그 누가. 설령 무엇을 주문하든. 이 위에서라면, 자신이 바라 마지 않는, 그 누구라도 납득시킬 수 있을, 그런 ‘베스트 플레이’를 언제라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나는 지금 초록색 잔디 위에 서 있구나.’ 초록색의 잔디를 밟는 느낌이, 어쩌면 그렇게 푹신푹신 한지 잠깐 누워서 잠들어도 좋겠다, 싶었다. ‘좀… 누울까?’ 영후는 그 순간 바보처럼, 엄마도 그 무엇도 잊어버리고 그저, 잠깐만 단잠을 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태양을 맨눈으로 직접 바라보면, 결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새하얗게 눈이 부신 또 다른 어딘가에서, 흐릿하게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또 무슨 소리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려오는 그 소리가, 영후는 어쩐지 낯설지 않은 따스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어디서였더라…’ 축구 말고는 들어차있을 것이 없었을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으며, 그 따스함의 근원지를 밝혀보려 애를 써보던 영후는 이내 조금씩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소리… 이 따스함… ‘그래… 역시 너였구나.’ 이윽고, 영후는 반대편에서 자신에게 손짓하고 있는 그 형상에게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엄마… 미안해...나 아직…나 아직…해야 할 일이 남았어… 그러니까! 그러니까…난 하연이가…” - “영후야!” 영후가 겨우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처음으로 보여진 정경은, 그렇게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운 채, 연신 ‘영후야!’를 외치는 참 예쁜 여자애 하나였다. ‘아, 이 여자애…기억난다.’ 아니, 이 여자애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후였다. ‘그런데… 또 울고 있었던 거니? 다시는 널 울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는데… 나의 울보 아가씨… 결국 널 또 이렇게 울게 만들어 버렸네… 정말 최악이구나 나란 인간은… 그런데……여긴 어디지…? 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순간, 빠르게 비디오 테잎을 되감듯, 지금까지 경기했던 순간순간들이 영후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렇지, 시합 중이었지…내가 골을 넣었고…그리고… 약속했지…약속…약속…? 그래 약속! 아직 한 골이 더 남아있어!’ - 순간 누워있던 영후가 벌떡 일어났고, 옆에 있던 하연은 모자를 벗어 던진 채, 엉망이 된 머리칼과 얼굴 그대로 영후를 붙들고 그야말로 펑펑 울고 있었고, 노감독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영후는 자신이 어떤 상태였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그라운드로 시선을 옮겼다. 그라운드에선 계속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나가야 돼, 한 명이 부족한 우리가 불리해. 나가야 해.’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의 가슴으로 와락 하연이 안겼다.그녀는 가늘게 떨고 있었고, 뜨거운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려, 이미 땀으로 흥건했을 차가운 영후의 가슴께를 따뜻하게 적셔줬다. 하지만, 영후는 시합에 나가야만 했기에,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하연의 팔을 풀려 했지만, 하연은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절대로,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물론 영후에겐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만해…흑흑….이제 그만…흑흑……이제 됐으니까……그러니까……” “하…하지만 선수가…” 그제야, 거짓말처럼, 영후의 입이 바르르 떨리며 열렸다. “선수교체다. 설마 오랜만에 뛰는 경기라고 룰까지 잊어버린 건 아닐테지?” 실로 오랜만에 경기를 뛰게 된 제자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노감독은 영후가 하는 걱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었다. ‘놈…그렇게나 힘들었단 말이냐…아프단 말 한마디 않더니, 그렇게나…’ 이렇게나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영후가, 축구와 동떨어져 지내던 2년간, 참으로 아프고, 힘들었겠구나, 하고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노감독이었다. 그런 하연과 노감독의 마음과는 달리 영후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생각이 자신의 뜻과는 달리, 자신을 버려둔 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진행되고 있는, 저 ‘빌어먹을’ 그라운드를 초연히 바라보다가 눈앞이 뿌옇게 변해 더 이상 바라볼 자신이 없어졌다. ‘그랬구나…난 약속을…결국…’ 영후는 어느새 경기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의 다리엔, 언제 감아놨는지 얼음주머니가 랩에 꽁꽁 싸여져 있었지만, 차가움도, 뜨거움도,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저 시합의 의미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아. 저런 시합 따윈…’ 영후는 차디차게 식어버린 자신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려, 여전히 자신의 가슴팍에 꼭 붙어있는 하연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럼에도 너무나 예쁜 하연에게 겨우 미소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나, 화장실 좀 보내주라.” - 윤지는 2배속 재생버튼을 눌러, 후반전 동안의 영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물론, 영후의 모습만을 집중적으로 담았었기에, 다른 영상과 뒤섞이는 등의 이유로 장면을 놓칠 염려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지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조그만 LCD창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후반전 내내 폭풍처럼 플레이 하는 그의 모습은, 금방 봤던 장면이었음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아오르는 통에, 윤지는 잠깐이지만 ‘일시정지’버튼을 누른 후, 괜히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데 순간, 뭔가 이상했다. ‘설마…’ 윤지는 촬영의 마지막 부분까지 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탈수증. 윤지의 캠코더에 잡힌 영후는 시합 내내 단 한번도, 터치라인 곳곳에 놓여있는 물병을 집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윤지는 순간, 얼마 전에 읽었던 축구잡지의 한 칼럼의 내용이 생각났다. ‘축구 경기 동안 선수 당 2∼3 리터 정도의 수분이 손실된다. 극단적인 조건들에서 봤을 때 몸 안의 수분 감소가 더 높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멕시코 월드컵경기중, 한 명의 덴마크 선수는 4.5 리터의 수분을 잃었다.’ 분명 이 남자, 자신은 그저 후반전만 지켜봤을 뿐이지만, 분명, 전반전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윤지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었다. ‘극단적인.’ 이 시합에서,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치열했던 이 남자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또 없을 거라고 윤지는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았다. - 영후는 물을 틀어보려,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돌려봤지만, 쉽사리 돌아가주지 않았고, 주먹을 쥐어보려 했지만, 손은 전혀 남의 손이 된 것처럼, 영후의 말을 조금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내 포기한 영후는 물끄러미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예전의 활력은 몽땅 사라진, 푸석푸석한 얼굴의 남자가, 그저 초췌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훗,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면서… 혼자 무슨 착각을 하며 살았던 거냐, 이영후…’ 이내 영후는 쓴 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연달아 물어오는 기자들에게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었지만, 실은. 스스로도 더 이상 국내에서 뛸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이루고 싶은 건 모두 이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바보 같은 짓을 하며 2년을 허비하면서도 결코, 국내는, 자신이 뛰기엔 너무나 비좁다고 ‘착각’하며 살았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닫게 된 현실을, 지금의 영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나… 최악이다.’ 거울 속의 자신이 원망스러운 듯, 한참을 노려보던 영후는 이내 소변기 앞에 서서 바지 앞 춤을 조금 내렸다. 이내 드러난 자신의 물건을 붙잡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며 소변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요의가 느껴졌던 좀 전과는 달리, 영후의 물건에선 한 방울도 나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변보는 건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영후는 바로 옆에서 누군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들어올 때 나 혼자였을 텐데…’ 무심코 옆을 돌아본 영후는 깜짝 놀랐다. 곱슬거리는 단발머리의 예쁘장한 소녀가, 호기심 그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명 자신의 물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뭐…뭐얏!?” 너무나 놀란 영후는 미처 바지를 치켜 올릴 새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그럼에도 그 소녀는 자신의 물건에서 절대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환한 화장실에서, 영후의 하반신이 고스란히 노출된 채, 또 그것을 마치 즐기는 듯한 소녀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난감한 상황이 약 5초간 지속됐다. 영후는 자신의 물건을 쳐다보는 그 고양이 눈 같은 커다란 눈망울에서 비롯되는 그 시선이 너무나 강렬하고, 도발적이라, 섣불리 자신의 바지를 치켜 올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흐~응, 축구선수들의 거기는 그렇게 생겼구나요~?” 적막을 깨는 귀여운 목소리가 그 소녀의 입에서 나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영후는, 자신도 모르게 벌써 반쯤 커져버린 자신의 물건을 황급히 바지 속으로 집어 넣었다.그리곤 생각했다. ‘여기…또…여자화장실 이던가?’ 영후는 바지만 치켜 올렸을 뿐, 바닥에 널 부러진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연이어 줄 서있는 남성용 소변기를 봤을 때 분명 여긴 ‘남자’ 화장실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 여긴 분명 남자화장실이야. 그리고 내가 그때처럼 실수를…가만…그때?’ 분명, 이 상황 왠지 낯설지 않았던 영후는 그제야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너…너!...너!....설마 그때 그….” 아연실색하는 영후완 다르게 무척 기분이 업 되어버린 소녀는, 이내 바닥에 눕다시피 쓰러진 채, 상체를 겨우 들고 있는 영후의 얼굴로 점점 다가왔다. ‘이 녀석…도대체 뭐 하려는 거지? 그리고 또 왜 여기서…’ 영후의 머리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이 발칙한 소녀가 또 무슨 짓을 하려는지, 도통 예측할 수 없었기에, 질끈 눈을 감아버린 영후의 귀에 이내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인…해주세요.” ‘응?’ 다시 눈을 뜬 영후의 앞엔, 종이와 볼펜을 내민 채 예쁜 고양이 눈으로 바라보는, 좀 전과는 다른 분위기의 소녀가 서 있었다. ‘저…정말이지…종 잡을 수가 없는 아가씨구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종이와 볼펜을 건네 받은 영후는 이윽고, 몇 번 종이 위의 허공에 대고 연습을 해보다가 이내 ‘쓱쓱’ 사인을 했다. “돼…됐니?” 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는 영후에게 그 소녀는 종이를 받을 생각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윤지에요, 송윤지. 거기 밑에다 이름도 써주세요.” 엉겁결에 다시 이름까지 써주고는, 잠깐이지만 얼굴에 맞는 참 귀여운 이름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다시 조심스런 얼굴이 되는 영후였다. “이영후였군요, 변태아저씨 이름이.” “누…누가 변태라는 거야?” 하지만, 영후의 어설픈 반론은 채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꼬마 아가씬 볼일이 모두 끝난 듯, 영후를 내버려둔 채 나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도의 숨을 내쉴 즈음, “아 참!” ‘또, 뭐!’하고 버럭 마음속으로만 화를 내던 영후는, 그러나 마음속과는 달리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되돌아보았다. “그때 그거요. 이번 걸로 ‘퉁’ 칠께요. 그럼 됐죠?” 순간, 영후는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때…그거? . . . 아, 그때 그거? 그러지 뭐…가 아니잖앗!!!!!’ 하마터면 또 당할 뻔, 아니 또 당해버린 영후는 갑자기 힘이 샘솟아 이미 출입구 쪽으로 사라진 윤지를 뒤쫓아 달려갔다. 펑! 치이이이~익…. “와아아아아아~!” 화장실 출입문 밖으로 나온 영후는,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잽싼 윤지는 역시나 이번에도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그런 복잡다단한 자신의 머리를 식혀주듯, 파란조끼를 입은 한 선수가 자신의 머리 위에 샴페인을 부어주고 있었다. “이겼어요! 우리가 해냈다구요!” 서로 부둥켜안고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파란조끼 선수들을 보며, 영후는 즐거워해야 했지만, 애써 즐거우려하는 표정을 지어보려 노력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씁쓸해보였다. 그 때였다. 하근명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 ‘오 대 일’로 진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왜 내가 샴페인을 사야되냐구? 앙? 대표팀 소집일당이 뭐 몇 백 만원 되는 것도 아니고 말야, 쳇!” 여전히 건들거리는 말투 그대로였지만, 영후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미 선수로서, 그리고 선배로서 인정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잠깐만…뭐라고? 몇 대 몇이라고?’ 그제야 영후는, 파란조끼의, 잔디와 땀 범벅이 된 11명의 선수들이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 모두 자신의 체력을 저기 그라운드에 쏟아 부어버리고 온 듯, 다들 기진맥진한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너…너희들…’ 영후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보았고, 죽어라 함께 뛰었던 파란조끼의 선수 한명 한명이 모두 영후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동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눔들아! 대체 누구 허락 받고 술잔치냐? 술잔치가!” 순간, 모든 선수들이 바짝 얼어붙어 뒤를 돌아본 순간, 엄한 표정을 지은 채 뒷짐 지고 있는 노감독과 펑펑 우는 통에 눈이 조금은 부은 듯했지만, 여전히 한 미모 하는 하연이 서 있었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분위기가 갑자기 급랭하려던 순간, 노감독은 뒤에 숨겼던 샴페인 잔 두 개를 꺼내 들며 빙긋 웃었다. “나만 빼놓고들 말이지, 에헴!” 이내, 모든 선수들이 환호하며 서로 뒤엉켜 건배를 했다. 그 와중에 노감독은 영후에게로 와 잔 하나를 건넸다. “진작에 네놈이 나한테 묻고 싶어 했었을 말 들… 오늘 경기로 잘 알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잔을 건네 받은 영후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감히 노감독을 바라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굳이 내 따로 얘기해주지 않아도, 피치 위에서 스스로 알아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만.” ‘내가 알던 그때의 네 녀석이라면’,이라며 한마디 덧붙이려다 노감독은 영후의 눈을 보고 그만 두었다. ‘그때’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이 놈이라면 알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물론, 알아들었다. 영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떤 감독의 말인데, 영후가 그의 말을 놓치랴. “알아들었으면, 어서 가봐라. 네놈이 건배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느냐.” 은근슬쩍 옆으로 노감독이 물러서자, 저 앞쪽엔, 항상 그 이상 따뜻할 수 없을 정도로 바라봐주는 눈으로, 이번에도 여지없이, 영후만을 바라봐주는, 하연이가 환하게 웃으며 거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특히나 저녁시간에 요리를 만들 때면 어느 집에서나 풍겨져 나오는, 식욕을 북돋아주는 꽤나 맛있는 내음이 수림이 열심히 요리하는, 똑 같은 저녁시간의 주방에서도 솔솔 나오게 될…… 줄 알았으나, 현실 속의, 수림이 한창 분주한 주방은 소위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이미, 한쪽엔 만들다 실패한 음식들이 비닐봉투에 (그것도 3개나!) 그득하게 들어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 밀가루와 각종 향신료가 묻어있는 가운데 여전히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는 신념 하에 요리재료와 함께 구입한 그 무겁다는 중국식 후라이팬을 돌려가며 불쇼(?)를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지지고 볶고 있는 음식 또한 비닐 봉투 행이 확실해 보였지만, 그래도 수림은 개의치 않았다. 앞으로 몇 번은 더 해볼 수 있을 정도의 요리재료들이 저 한쪽에 그득하게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꼭 그 남자가 맛있게 먹는 모습…보고 말거야...’ - 하연이 영후가 사는 원룸 앞에 차를 세웠을 땐, 조수석의 영후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하연은 영후를 깨울까도 생각했으나, 이내 그만 두기로 했다. 지금의 깊은 잠, 오늘의 영후에게는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었으니까. 하연은, 시동을 끄고 이내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히 자신의 시트를 뒤로 넘겼다. 그제야, 이미 누울 대로 누워있는 영후 쪽의 시트와 눈높이가 맞아지는 듯 했다. 하연은 몸을 옆으로 뉘어, 물끄러미 잠든 영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순한 얼굴에, 저렇게 부드럽게 오르락거리는 가슴 어딘가에,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그만이 지닌 축구에 대한 열정이 숨어있을 것이었다. 하연은 그의 열정이 여전했음을, 아니 더더욱 커져버렸음을 오늘 시합으로 또 한번 깨달을 수 있어서 기뻤지만, 크기가 무한할 수는 없을 그의 가슴속에, 그로 인해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다시금 그만큼 줄어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영후야 말로, 하연이 바라는 모습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영후가 축구를 좋아하면 할수록, 하연은 멀어지는 것만 같았기에, 축구를 하지 않고 있던 영후의 지난 2년간이, 하연에게는 그 어떤 신혼부부보다 더 달콤했던 시간이었던 것도 같았다. ‘나는…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그윽한 눈으로 평화로운 표정의 영후를 바라보면서 하연은 이내 그 어떤 것도 걱정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저 이남자가 가는 길, 바라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 남자, 답을 알려 줄 것이기에. ‘이 남잔, 그런 남자니까.’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영후의 얼굴로 다가갔다. 자신이 방금 이런 다짐을 했음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를지라도, 그에게 자신의 표식을 남기고 싶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하연은, 아직도 조금은 푸석하기만 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레 대어보았고,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영후는 기분 좋은 꿈을 꾸는 듯, 빙긋 웃는 모습으로 잠들어있었다. 6부. 준비하는 그녀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그 옛날 종가집 마님마냥, 희끗희끗한 생머리를 뒤쪽으로 틀어 올려 꽂은 비녀가 인상적인 노부인은, 진동해대는 핸드폰을 들어, 꽤나 깐깐하게 보이는 얼굴에 일조하는, 역삼각형의 안경 아래로 눈을 가늘게 만들며,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누구인가 확인해보곤, 조금쯤 웃었던 것도 같았다. 전화오기 전까지 하반기 예산안 집행에 관한 기획안을 검토하고 있었으나 걸려온 전화의 주인을 누군지 확인하고는, 아무 미련 없다는 듯, 서류들을 저리 치우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반가우면서도 왜 그런지, 늘 부드러운 어조로 전화 받지 못하는 자신이, 아직도 철이 덜 든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총장은 잠깐 해보기도 했다. ‘나요.’ “알아요.” ‘오늘 그 녀석과 같이 있었다오.’ ‘그 녀석’이라는 말에 총장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요?” 핸드폰의 저쪽에서, 약간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시기를......조금 앞당기고 싶어졌소.’ 총장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처음 말씀 하실 때와는” 총장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노감독의 무거운 심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내... 생각이 짧았소. 나도 이럴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흐릿해지는 노감독의 목소리에, 총장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그 남자’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면 누구나... 하지만 늘, 자신이 열일 제쳐두고 경청하는 노감독의 부탁이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쉽게 허락할 수가 없었다. “설사, 내가 앞당긴다고 한들, 당신의 그 잘난 제자께서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하물며, 만에 하나 실패한다고 하면, 아니 그럴 가능성이 지금은 훨씬 높은데, 정말 실패하게 되면, 적어도 본인이 공언한 약속을 지키게 될 때까지 다른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누구를 닮은 덕분에 말이에요, 하고 덧붙이려다 총장은 그만 두었다. ‘......’ 역시, 노감독도 총장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실패. 아무리 영후가 축구선수로서의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감독의 능력은 그와는 또 별개일 것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여자’축구대회라고 해도, 2년 만에 4강안에 들어야 한다고 제시한 조건도 보통의 감독이었다면 당연히 손사래를 쳤을 터였다. 하지만, 노감독은 영후의 배짱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무지막지한 조건을 내걸어야, 승부욕에 불이 붙으리라 생각했고, 결국 노감독의 생각대로 총장이 움직여줘서 영후를 감독의 자리에 앉히게 됐지만, 그 놈에게 ‘약속’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던가를 잠시 간과했던 노감독은, 어떻게든 축구계로 끌어들여, 되도록이면 빨리, 다시 선수생활을 하게끔 만들겠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만 것이었다. 당연히 그런 위험이 있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서도 총장에게 무리한 부탁을 청한 노감독이었기에, 더더욱 지금의 총장의 말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2년이 아니라, 3년 아니 5년이라도 모자를 지 모른다구요.” 전화기 너머로 잠시 ‘끄응’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여보세요? 끊은 거에요? 여보세요?” ‘아니오. 끊지 않았소.’ 총장은 계속 몰아붙인 자신이 조금은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쯤 목소리 톤을 낮춰보았다. “나이 먹어간다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게 우리나이에요.” ‘미안하게 됐소. 늘, 알면서도 어려운 것만 부탁하는구려.’ “아시면 됐어요.” 총장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조금 내쉬다가, 이내 책상 서랍에서 계약서를 꺼내보았다. 계약서 하단엔 선수시절에 많이도 해댔을 영후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왜 이 청년은, 모든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는 건지...’ 어느샌가 자신의 삶에도 깊숙이 침범해버린 듯한 이 남자의 이름에, 총장의 시선은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똑똑. 한참을 정지된 시간 속의 사람처럼, 계약서 속의 영후 사인을 들여다보던 총장은 적막을 깨는 노크소리에, 서랍 속에 다시 계약서를 넣어두곤, 이내 평소의 냉철한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들어와요.” - “2년 이상이라...후~우.” 전화를 끊은 노감독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만큼, 후회되는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프로라 해서 믿었거늘, 프로의 세계에 있어선, 영후조차 그저 필요할 때 쓰고, 효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리고 마는, ‘도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믿거라 하고 애써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감독의 마음이 모두 자신과 같을 수는 없었다는 걸 또다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조금만이라도 신경을 써줬었다면...’ 영후의 전 소속팀 감독과, 현재의 자신 모두에게 한탄하는 노감독이었다. 게다가 2년의 시간이 흐른다면, 이미 축구선수의 나이론 환갑이 지날 터였다. 가장 창창했어야 할 순간을 어둠 속에서 지낸 후, 이제야 다시 빛을 보려 하는 영후에게만, 시간은 유독 빠르게 지나가 버린 것 같아 노감독은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된 대두...그건 그 놈의 운명일 테지만...과연 그 놈이 그 시간을 또 견뎌낼는지...” “곧 돌아올 겁니다, 그 선배” 노감독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복도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트레이닝 복 차림의 하근명이 있었다. “남의 전화를 몰래 듣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구먼.” 노감독이 그를 무시하고 앞을 지나치려는데, 하근명은 한마디를 더 던졌다. “오늘 같이 플레이 해 본 장본인이 하는 말입니다. 흘려 듣지 마세요. “남 걱정 말고, 네놈 앞가림이나 잘해라.” 퉁명스레 한마디 하는 노감독에게 하근명도 지지 않고 볼멘소리를 했다. “안 그래도 지금 나이트 트레이닝 하러 가는 중이라고요.” 이내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걸어가는 노감독의 뒤통수에 대고 하근명은 제법 소리를 질렀다. “혹시라도 안 오겠다고 하면, 제가 데려올 겁니다! 두들겨 패서라도 데리고 올거라구요!” 하근명의 외침을 뒤로 하고, 노감독은 고민에서 벗어나 그래도 조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눔이, 혼자 연습을 더 했었던 적이 있었던가...’ - 토독...톡토도독...톡...톡... 잠든 영후를 옆에 두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하연은, 신발을 벗은 채 책상다리로 앉은 다리 위에 노트북을 놓고서 기사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노감독에겐 기사화하지 않기로 약속했었지만, 기사화하느냐 않으냐는 별 문제될게 없었다. 그저, 오늘 있었던 경기에 대해서, 어떻게든 기술해 놓지 않으면, 마치 내일 아침이 되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질 것만 같아, 조심조심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왕의 귀환. X월 X일. 파주 NFC에선 특별한 의미의 경기가 열렸다. 이유인즉슨, 이날 열린 비공식 연습경기가 바로 비운의 득점기계 ‘이영후’의 비공식 복귀전을 겸한 경기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예정에도 없었던 그의 출전은, 이영후의 은사이기도 한 현 대표팀의 수장 ‘노영진’ 감독의 권유로 인해 전격적으로 성사되었는데, 이영후는 빅리그 이적을 앞두고 당한 부상으로 인한 수술과 재활로 보낸 3년의 공백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날 비주전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한 이영후는 전반엔 주전팀의 파상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노련함을 보여줬다. 또한, 후반엔 원 톱으로 보직을 바꿔 후반42분에 교체될 때까지 2골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2골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했는데, 막바지 5번째 골의 성공에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까지 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이날 주전팀에는 비록 해외파가 합류치 못했다고는 하나, 현 K리그의 득점 선두인 하근명을 비롯해, 대표팀에 완전히 자리 내렸다고 생각하는 멤버들이 고스란히 출전했었기에 이영후의 활약이 시사하는 바는 제법 컸다고 할 수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단숨에 기사를 작성해 놓고서, 영후를 주인공으로 쓸 때의 반 만큼이라도 다른 기사도 이렇게 물 흐르듯 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는 하연이었다. ‘참,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둘걸. 나도 참... 기사를 작성하다 문득, 하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수시절. 어떻게 찍더라도, 그라운드 위에 서있을 때의 영후는, 언제나 ‘그림’이 되곤 했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날 글만 읽는 것보다, 생동감있는 사진이 한장 곁들여진다면 훨씬 현장감이 살아날 것이 분명했기에, ‘비공식’을 선언한 노감독이 살짝 얄미워지기도 하는 하연이었다. 한편, 기자인 자신이 써놓고도, 다시 읽어보니 오늘 경기의 감동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하연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항상 영후의 출전경기는 글로는 모두 표현이 안 되는 건지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던 그녀였다. 역시 뭔가가 조금 빠진 듯, 아무리 읽어봐도 부족한 것 같아 좀더 작성하려는데, 영후가 뒤척이며 일어나려 했다. 하연은 재빨리 노트북 상판을 덮어 뒷좌석에 던져놓았다. “으음...응? 어디야...? 다 왔니? 다 왔네? 이런, 오래 잤나 보다.” 창 밖의 하늘이 어둑어둑해 진 것을 확인하며, 기지개를 펴는 영후였다. “깨우지...” “그러기엔 좀 곤하게 자더라고.” 왠지 모르지만, 영후가 입을 열 때마다, 자신의 키스자국이 조금은 남아있는 것 같아 영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하연의 볼이 약간은 발그레해졌던 것도 같았다. “그랬구나... 나 때문에 시간만 잡아먹었네.” “뭘, 나름 쉬고 있었어 나도.” 잠시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요샌 왠지 예전 같지 않게 둘 사이에서 이런 어색한 적막의 순간이 계속되고 있음을 둘 모두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왜 그런걸까?’하고 터놓고 얘기할만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누군가가 입을 먼저 열기만을 기다리곤 했었던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이내 영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흉한 모습 보여서 미안했어.” 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은거지?” “뭐가?” “뭐든.” 오늘의, 그리고 앞으로의 영후에 대해 물었던 하연이었지만, 영후는 하연이 물었던 질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럴 때의 하연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영후였기에,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괜찮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연은 그 커다랗고 깊은 눈동자를 영후의 눈에 맞추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재미있었어. 아직, 아니 여전히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 같아.” “다행이다.” 하연의 말은 진심이었다. 영후가, 정말로 돌아온 것 같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들어가볼게.” 하연은 미소로 인사했고, 영후는 차 문을 열고 나가 문을 닫으려다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참, 부탁 하나만 하자.” “응?” 갑자기 나쁜 장난이라도 생각해낸 어린아이의 얼굴로 영후는 흥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감독 데뷔전을 치르게 되면 말야, 기사 하나 근사하게 써주라.” “근사하게...?” “응. 이를테면...’이영후 감독데뷔! 목표는 우승!’, 뭐 이렇게 말야.“ 언뜻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던 하연의 눈이 꽤나 커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바래다줘서 고맙다. 조심히 가라~” 영후는 할 말만 하고 문을 닫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하연은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퍼뜩, 하연의 뇌리를 강하게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설마...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영후 너...’ - 총장실을 찾은 남희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자신을 맞이하는 총장의 태도가 늘 어색하기만 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신경이 쓰일 지경이었는데,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수다거리는 또 없을 것이기에 요샌 부쩍 다른 이들의 눈과 입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는 남희였다. “그래, 준비는 잘 되어가나요?” 역시나 오늘도 흡사 딸을 대하는 어머니의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총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이감독님께서 별다른 말씀이 없으셔서” 총장은 눈썹으로 ‘그리고?’하며 묻는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해 두었습니다.” 총장은, 그저 ‘준비해두었다’는 한마디 말로 끝낸 남희였지만, 그녀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꿰뚫어보고 있었기에 남희의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여자의 입에서 ‘준비해두었다’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올 정도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다는 의미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총장은 문득 장난을 좀 쳐보고 싶어진 것도 같았다. ‘조금, 기대치를 올려볼까?’ 괜시리 헛기침으로 마른 목을 가다듬어보곤, 다시 입을 여는 총장이었다. “우리 한국여대의 여자축구부팀이 만들어지고 나면, 이감독은 아마 남희씨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게 될 겁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그분의 팔이 되어줄 사람은 남희씨 뿐이니까요. 이사회의 임원들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부정적일 겁니다. 당연히 많이 힘들어질 거에요, 이감독도. 하지만, 남희씨가 의외로 분발해줘서 이감독과 호흡을 맞춰서 잘 해나갈 수만 있다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도 있을 겁니다.” 얘기를 마치며, 남희의 꼭 다문 입술에 조금쯤 더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총장은 놓치지 않았다. ‘이제, 공은 그 남자에게 돌아갔는데...’ 어느새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남희를 대견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총장은 또다시 영후를 떠올려보고 있었다. - 영후는 2층, 자신이 기거하는 원룸의 문 앞까지 와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선은 어두운 복도에서 자신의 집 문 앞까지 와서야, 천정에 달린 센서 등에 불이 들어오며 밝아져서였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렇게 밝아진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 너무나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숏커트의 조막만한 얼굴의 여자가, 바닥엔 무슨 요리 같은 게 담겨진 채 랩으로 싸여있는 접시를 놓아두고, 자신이 사는 집 대문의 문고리를 잡고서, 망부석이 된 모양으로 쭈그려 앉아있었던 것이다. 게다가...이 여자 조금...우는 것도 같았다. 영후는 또다시 재빨리 이곳이 자신이 기거하는 곳이 맞는가, 둘러보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확실했다. ‘뭐...지...? 이 아가씬...?’ 자신이 바로 몇 발자국 앞에 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푹 고개 숙인 채, 문고리만을 부여잡고 있는 그 여자가 영후는 그러나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봤더라... “저...저기요...” 머뭇거리며, 영후가 입을 열자, 그제야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스스스 고개를 들어 영후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들어올린 얼굴의 양 볼엔 이미 눈물 자국이 그득했고, 눈에는 그보다 더 많이 흐를 것 같은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저기...무슨...일이신데...” “으~와아앙~~~~~!” 순식간이었다. 수림이 울음을 터뜨리며, 영후의 품으로 달려든 것은. 영후는 달려드는 수림을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어야만 했다. “흐흑......얼마나...흑...내가...얼마나......” 조금쯤, 알코올의 향기도 나는 듯했고, 또 갓 샤워를 마친 후의 여성 특유의 향도 꽤나 은은했던 것도 같았다. 다만,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자신의 집 앞에서, 울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왠지 영후에겐 참으로 미안하게 느껴졌기에, 그저, 그 여자가 울고 있는걸, 또 자신의 품 안에 들어와 있는 걸, 그대로 둘 뿐이었다. 게다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에서 울고 있는 이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이내 천천히, 그러나 참으로 다정하게 영후는 수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수림은 우는 아이를 달래주면, 그간의 것들이 더 서러워져 더 크게 울어 버리듯, 이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까.....흐흑....깐풍기가.....훌쩍......다...식어버렸단 말이에요...으왕~!” 울음소리와 뒤섞여 언뜻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말과, 바닥에 놓여진 접시를 놓고 유추해보았을 때, 그녀가 이른바 ‘깐풍기’가 식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건가...하고 영후는 지레짐작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배달이...누가 장난전활 걸었었나...’ -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던 윤지는, 이영후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선수였는지, 검색해보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검색결과가 맞다면, 자신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을 목격해버리고 만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만을 나열해놓은 단순기사의 내용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물론 걔중엔 마치 ‘팬’이 기술해 놓은 것 같이 엄청난 미사여구가 동원된 누구(?)의 기사도 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진정한 팬들이 바라본 그의 진가가 궁금했기에, ‘하근명’을 좋아해 팬클럽을 만든 자신처럼, 이영후의 팬클럽 카페도 있을 거라 유추해내곤, 이영후의 팬클럽을 검색해 진정한 팬들이 이야기 하는 ‘이영후’에 관해 읽어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이영후를 위한 팬클럽 카페엔 예전의 경기모습들이 이영후 선수 위주로 올라와 있었고, 이영후 선수가 사라진(?)지금은 그닥 올라온 글들이 많진 않았지만, 현 대표팀의 골 결정력부재에 관한 비판 글들과, 이영후 선수가 돌아오길 염원하는 글들이 아직도 심심찮게 올라와있었다. 특히, 처음으로 국가대표 엔트리에 들고나서 부상으로 소집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져갔던 점을 모두 애석해하는 글이 많이 눈에 띄었다. ‘흥, 이것들아 놀라지들 말아라...’ 윤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그 카페에 가입하는 기념 겸 해서,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이미 올려둔 유튜브에서는 이미 30만 hit을 넘었기에, 윤지는 괜히 자신이 엄청난 것을 해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는걸...” 윤지는 앞으로 영후를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자료를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 - “크...” 차갑고도 뜨거운 느낌이 영후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참, 오랜만에 마셔보는 술이었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것이, 선수생활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혹여 컨디션에 악영향을 끼칠까 싶어 여지껏 ‘술’이란 것에 눈길도 주지 않았었던 영후였기에, 지금 이렇게 억지로 넘기고 있는 술은 그야말로, 약을 먹는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후는 마주앉아 있는 수림의 잔에도 반이 조금 넘을 정도로 채워주고는 자신은 한 가득 채우자마자, 또다시 바로 비워냈다. 영후가 이토록 빨리 술잔을 비우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자신의 집 앞에서 ‘깐풍기’가 식었다며, 언제 올지도 모를 자신을 기다리며 이 여자가 울고 있었던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무작정 대문에 세워두기도 뭣해서 우선은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긴 했으나, 그래도 남자 혼자 사는 집 임에도, 거리낌없이 들어와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그러했다. 더군다나, 그녀가 가지고 온 소주 한 병이 동이 나, 어쩔 수 없이 사러 가려는 영후에게 자신의 집에 더 있으니 가져다 달라고 한 그녀의 집이, 바로 자신의 위층이라는 것에도 이해를 넘어 놀람이 가득했고, 마지막으로, 소주를 꺼내오기 위해 그녀의 집에 들어갔을 땐, 마치 도둑이라도 들었던 것 마냥, 주방은 주방대로 초토화 되어있었고, 거실과 방은, 꺼내놓은 옷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기에, 도대체.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이해가 되는 점이 없었던 영후였다. 그래서, 이해를 해볼까 하고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취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금새 비워져 버린 수림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며, 영후는 마신 양을 가늠해보았다. ‘이게 세 병 짼데...반 남았으니까...내가 한 병 반 정도 마셨으니, 이 여자도 한병은 들어갔겠구나.’ 지금까지 마신 소주 양을 생각하면, 내일 또 엄청 운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영후는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수림의 시선이 느껴졌다. 계속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뭐, 묻었어요?” 괜히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보며 묻는 영후에게, 그제야 영후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술로 인해 한 박자 늦게 인식하면서 발그레해진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이는 수림이었다. “수림...이에요...”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흘려버리듯 말한 그녀 덕분에, 영후는 다시 한 번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내 이름이요. 수림이라구요. 오, 수, 림. 헤헤...그쪽은 영후씨죠? 이, 영, 후.” “어...어떻게 저를...” “헤헤...난 다 안다구요...영후씨가 좋아하는 것도, 난 다 알고 있다구요...딸꾹!” 어느덧, 수림의 혀는 ‘전작’이 있었겠다라는 영후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참, 이상한 아가씨네...라고 생각하며 안주를 집어드는 순간, 언젠가 하연과의 대화가 문득 생각하는 영후였다. - “야, 너 기사 좀 써야 되니까, 묻는 말에 대답해라.” 언젠가 훈련을 마치고 잠시 운동장에 널부러져 있는 영후에게 하연이 다가와 옆에 털썩 주저 앉으며 물었었다. “야, 뭔 놈의 기사를 취조하듯이 묻냐?” “됐고, 시간 없으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이나 해. 너 뭐 잘 먹냐?” 파란 하늘을 눈에 담은 채,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보던 영후는 슬쩍 하연의 눈치를 살피며 이내 입을 열었다. “글쎄...난 안 가리고 다 잘 먹는데...” “콱! 그럼 내가 기사에, 아.무.거.나. 이렇게 쓸까?” “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음...그럼 중국요리 좋아한다 그래라 앞으로.” “에에? 난 중국요리는 기름져서 별론데...?” “아아, 몰라 몰라. 난 그렇게 쓸거야. 이미 썼다. 그니까 내가 쓴 기사를 거짓으로 만들어버릴 생각 아니면, 앞으로 중국요리 즐겨먹도록 해라, 알았냐?” 막무가내식 취재방법에 괜히 화난 모양으로 벌떡 일어나 “으으...내가 언제고 신문기자협회에 널 밀고할거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고, 그와 더불어 “맘대로 하시던지.” 하며 손가락 한 개로 눈을 까뒤집으며 혀를 내미는 하연의 모습도, 같이 떠올랐다. - ‘그랬었지, 이 중국요리’ 정말이지, 맛도 없고, 볼품도 없고, 게다가, 식어버리기까지 한 깐풍기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웃기게도 영후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던가 했다. 영후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수림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꿀꺽’하고 맛있게, 게다가 웃으며 넘기는 그의 멋들어진 목선을 한없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근데요...” 나른한 기억의 조각을 더듬던 영후는 이내, 수림의 말로 정신을 차렸다. “네?” “거기...” 수림이 눈으론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론 본인의 목덜미를 가리키고 있었기에, 영후는 어렵지 않게 수림이 자신의 목덜미 쪽 흉터를 얘기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아아, 여기요?” 영후가 자신의 목덜미께를 매만지며, 되물었다. “네...거기요...거기 왜 그랬어요...?” 수림의 생뚱맞은 질문에, 별다른 생각없이, 이내 '음...'하며 시선은 천정을 보는 듯, 조금 생각에 잠기는 영후였고, 그런 영후의 모습조차 수림은 너무나 멋져보였다. “그러게요...언제더라...? 어쨌든 시합 때였을 거에요 아마. 헤딩하려고 뛰어오르는 데, 수비수가 날 짚고 먼저 뛰어오르려다가...근데 왜요? 흉한가요?” 기분 좋게 영후의 음성을 음악감상처럼 즐기고 있던 수림은 자신에게 다시 물음이 되돌아오자 깜짝 놀라며, 몇 번이고 도리질했다. “아, 아뇨! 아뇨...그런 뜻이 아니라, 실은...실은 저도 몸에 흉터가 많거든요 헤헤. 그래서 몸에 크고 작은 흉터들이 있는 사람들 만나면 막 반갑고 그러거든요...” ‘흉터가 반갑다라...’ 영후는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제야, 자신의 몸 어디어디에 어떤 흉터가 있었더라...하는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후보다는 수림이 한 발 빨랐던 것 같았다. “전, 여기요...보이세요?” 수림은 자신이 입고 있는 카키색 블라우스의 단추를 두어 개 풀더니, 오른쪽 어깨부위까지 옷을 내려 보여주었다. 덕분에, 영후의 눈엔, 그녀의 어깨 상처보다도 작은 가슴이 수줍게 숨겨져 있는 브래지어가 들어왔다. 아이보리 색의 브래지어 안에는 조금은 작은 듯도 했지만, 보통의 여자들과는 달리, 꽤나 탄력적으로 하늘을 향해있을 젖꼭지가 숨어있을 터였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혹여, 자신의 흑심을 들킬라, 영후는 다시금 열심히 그녀의 어깨부위에서 상처자국을 찾기 시작했고, 그녀 말대로, 그곳엔 정말, 자세히 봐야 보일 듯 한, 몇 바늘 꼬맨 수술 자국이 있었다. 영후의 입에선 왠지모를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처를 발견했을 때의 마음은, 그야말로, 새하얀 도화지위에 그림을 그리려 붓을 들었을 때 실수로, 원치 않은 물감이 튀었을 때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후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수림의 목소리엔 생기가 넘쳤다. “어때요? 굉장하죠? 그쵸?” 그렇게 싱글벙글 한 채로, 웃옷의 한쪽은 그렇게 드러낸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림을 위해서라도 어색해지기 전에, 영후야 말로 빨리 생각해내야 할 차례였다. “이건... 어떤가요?” 겨우 생각해낸 영후는, 자신의 상의를 들어올려, 가슴 부터 갈비뼈 부근까지 이어지는 꽤나 긴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 상처는 볼을 다투는 상황에서 서로 태클을 하다가,상대선수의 축구화 스터드에 찢어진 상처였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엔 약간의 지혈후에 다시 경기에 투입됐었던 것도 같았다. 덕분에 꽤나 많은 수의 바늘자국이 남아있게 되었지만. 수림의 눈과 입은 그 즉시 커다랗게 벌어졌다. “우와~! 정말 대단해요. 이런 건 처음 봐요 진짜!” 상처를 보고, 좋아하는, 너무나 행복해하는 수림을 보고, 분명, 이해할 수 없었어야 할 자신이었건만, 점점 기분도 좋아지고, 행복한, 그래... 영후는 정말로 행복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또한 이 여자의 상처를 왠지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들기도 했다. 이제, 한숨을 돌리고 술잔을 들이키던 영후는 순간 술이 코로 나올뻔했다. 갑작스런 수림의 도발적 포즈에 순간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수림은 다소곳이 앉아있느라 속박당하고 있었던 왼쪽 다리를 쭉 펴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고 있었기에, 정말로 꽃 같았던, 꽃무늬 플레어 스커트 아래로, 미끈한 맨다리 하나가 여과없이 영후의 앞에 드러나 있었고, 영후는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게 느껴져 어쩔 수 없이 소주 한 잔을 더 비워야 했다. “여기요, 여기...” 신나게 자신의 다리를 보여주며, 눈으로 가리키는 그녀의 기분과는 달리, 그녀가 가리키는 허벅지 바깥쪽에는 꽤나 아팠을, 조금은 어둡게 변해버린 흉터자국이 있었다. “잘 안보여요? 이렇게 해봐요. 손 줘봐요, 손.” 그녀는 무턱대고 영후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영후는 취기가 확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고, 또 갑자기 더 술이 확 깨는 것도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 하지만, 영후의 생각과는 달리, 수림의 손에 이끌려 영후의 손은 그녀의 다리를 천천히 매만지고 있었다. “어때요? 느껴지죠? 그쵸? 헤헤...” 그녀의 해맑은 웃음 때문이었을까, 영후는 순간 마음이 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에게, 저런 상처들은, 신들의 질투 때문 일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에게... 영후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그녀의 상처 입은 다리에 짧은 입맞춤을 해 주었다. “어...” 갑작스런 그의 입맞춤에 수림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저 짧고, 간결한 입맞춤이었지만, 수림의 마음은 마치 온몸의 상처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껏 영후 때문에 혼자 속앓이 했던 속마음마저, 눈 녹듯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림은 애써 눈물을 참아내고는 영후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내가 이겼죠? 그쵸?” 수림의 이 말이 바보 같은 영후에게 승부욕을 자극했던 것일까. 영후는 이내, 뒤돌아 앉아 좀 전보다 상의를 약간 더 들어올려, 자신의 등 어깻죽지 쪽의 상처를 보여주려 애썼다. “이거 보이죠? 안보여요?” 옷 덕분에 그늘이 졌기에, 게다가 꽤나 술이 올라있는 수림에게 그렇게 구석진 상처 정도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기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영후는 결국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수림의 눈앞엔, 참 아름다운 남자의 몸 하나가 나타났다. 그랬기에 수림의 눈에도, 이 남자의 아름다운 몸에 아로새겨져 있는 상처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수림은 뒤돌아 앉아있는 영후의 어깻죽지를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다가, 이내 무릎으로 기어와서는 영후에게서 받은 치유약을 다시 영후의 어깻죽지에 되돌려 주었다. 영후는 정말로, 수림이 약을 발라주는 느낌이었다. 촉촉하고, 포근한 그런 약... 그리곤 영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시 숨을 고르는 수림이었다. “어...어쨌든, 제가 이긴거죠?” 왠지 어색해진, 영후는 옷을 집어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집어 든 옷을 채 입으려 하기도 전에, 등 뒤로 수림의 치마가 ‘풀썩’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영후가 뒤돌아 봤을 땐, 수림은 이미 치마를 벗은 채, 자신의 눈 앞에 살짝 엉덩이를 들이밀고 있었다. 수림의 엉덩인,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마치 지구의 중력과는 별 상관없다는 듯, 지상과 거의 수직으로 업 되어있는 엉덩이는, 게다가 잘록한 허리라인 덕분에 더욱더 옆으로 도드라져 보였고, 엉덩이를 겨우 가리고 있는 듯한 그녀의 아이보리색 팬티라인 때문에, 마치 잘 익은 복숭아를 건드리면 톡하고 터져버릴 것 같듯이, 수림의 엉덩이 또한 손만 대어 보아도, 엉덩이의 가운데 골을 기점으로 한없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잘...안보이나요?” 조금은 수줍은 듯, 돌아보지 못한 채 물어오는 그녀에게, 영후는 그야말로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예쁜 엉덩이에, 정말로 손끝만큼의 상처라도 있다면, 정말이지, 영후는 그 상처를 낸 장본인을 우주 끝까지 라도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마...? 영후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수림의 팬티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이내 팬티를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아...” 영후의 손길로 팬티가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수림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질렀다. 이남자가 드디어 직접,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후는 그녀의 팬티가 발목까지 내려갈 때까지, 차마 그녀의 엉덩이를 바라볼 수 가 없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엉덩이는, 신비함을 숨기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비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팬티가 그녀의 발목에 당도했을 때, 비로소 그녀는 발을 들어 팬티가 그녀의 몸에서 이탈하는 마지막 과정을 도왔다. 하반신을 드러낸 채, 단추가 몇 개 정도만 끼워져 있는 블라우스만 입고 있는 수림의 뒷모습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미 영후에겐 ‘상처 찾기 놀이’는 끝난 지 오래였지만, 수림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무 말 없는 영후를 살짝 돌아보던 수림은 이내, 영후 쪽으로 돌아섰다. 순간, 영후는 또 한번 숨이 멎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론 본인만의 생각이지만) 여체의 신비로움이 바로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애초에 삼각지 곳곳에 그득했을 음모는, 직업의 특성상 최소의 양만을 남겨두고 꽤나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 음모의 아랫부분에서는, 마치 토끼가 몰래 와서 먹고 가는 옹달샘이라도 있는 양, 촉촉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후는 옹달샘을 보자 목이 말라졌는지, 목울대가 울리도록,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어머, 아픈 곳이 또....” 한참을 영후의 눈앞에 그렇게 서 있던 수림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무릎을 꿇은 채 영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영후의 자지를 옷 위로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이렇게나...아픈 곳이 있었으면서...” 수림은 이내, 영후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 울고 있던 자지를 잡고는, 꾸욱 쥐어짜듯 눌러보았다. “윽!” 영후 또한 신음을 참아낼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영후는 더 이상 신음을 토해낼 수가 없었다. 곧이어, 수림의 입술이 영후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영후의 입안에 들어와, 치아 하나하나, 입천장, 그리고 잇몸 사이사이를 여행하듯이 지나다니는, 또다시 오랜만에 재회한 기쁨을 나누고 있는 그녀의 혀가, 영후는 왠지 처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마치...마치, 며칠 전 꾸었던, 그렇게나 황홀했었던 꿈속의 그녀를 운 좋게도 현실에서 다시 만난 것만 같았다. ‘미쳤다고 할거야, 그렇게 얘기했다가는...’ 영후는 이내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과감히 그녀의 블라우스의 남은 단추를 풀어나갔다. 단추가 하나씩 풀려 날려고 할 때마다, 영후의 자지를 잡고 있는 수림의 손은 움찔움찔 거리며, 마치, 더 빨리 벗겨달라는 것처럼 신호를 보냈고, 하나가 풀리고 나면, 칭찬을 하듯, 자지를 부드럽게 훑어주었다. 어느덧 그녀의 상반신이 블라우스로부터 해방되었을 무렵, 수림은 스스로 브래지어를 풀어 던지고선,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영후의 위로 슬며시 앉았다. 아니 얹혔다, 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었다. 그녀는 앉으려 했지만, 이미 커질 대로 커져있는 영후의 자지와 충분히 마실 만큼 샘이 흐르는 수림의 보지 사이를 영후의 트레이닝 복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보지로 천천히 영후의 자지가 우뚝 서있는 부분을 비벼대며, 유혹하기 시작했고, 영후의 자지는 ‘곧 뚫고 나갈 테니 걱정 말라’며 영후에게 바지 속에서 연신 끄덕대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영후는 눈앞에 펼쳐진, 수림의 가슴에 넋을 놓고는 조심스럽게 키스를 했고, 생각보다 훨씬 더 탄력 넘치는 수림의 가슴과 유두는 어지간한 그의 애무 따위는 견뎌내겠다는 모양으로 도도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영후가 입술로 유두 하나를 살짝 물고는, 혀로 간지럽히자, 그것이 부러웠던 반대편의 가슴은 파르르 떨기 시작했고, 자신의 가슴을 차별하고 싶지 않았던 수림은 이번에도, 영후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가슴에 놓아주었다. 부드럽게, 혹은 대담하게 움켜쥐는 영후의 손 덕분에, 수림은 마치 이미, 영후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와있는 착각마저 일으키고 있었기에, 영후의 바지 앞자락은 이미, 수림의 샘물로 인해 광범위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착각은 착각일 뿐, 보지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고 싶었던 수림은, 그러나 영후의 옷을 직접 벗기려 들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그의 입에서 가슴을 멀어지게 했고, 그의 자지위에 얹혀있던 보지도 거두어들였으며, 이내 완전히 영후의 몸에서 떨어진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쳐 영후의 침대로 가서 살며시 엎드리고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엉덩이를 자극적으로 움직이며, 고개를 돌려 그윽한 눈길로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영후는 수림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수림이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그의 몸엔 ‘옷’이라는 현대문명의 이기따윈 걸쳐져있지 않았다. 그저 알몸의 모습 그대로, 영후는 또다른 알몸의 여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서로의 알몸을 확인하자 그 둘은 더 이상 거칠것이 없었다. 영후는 서둘러 그녀의 뒤로 다가서서 더 이상 커지지 못해, 폭발할 지경까지 이른 자신의 자지를 그녀의 보지 입구까지 근접시켰지만, 경험이 미천했던 영후는 입구앞에서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순간, 수림의 애타던 손길이 영후의 자지를 부드럽게 인도해, 자신의 보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헉!” “아!” 두사람은 동시에 비명과도 같은 신음소리를 내질렀고, 겨우 자신의 안식처를 찾아 들어간 영후의 자지는 이내, 거칠 것 없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수림의 보지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자지를 내 쫓을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자지가 활동하기 수월하도록, 끊임없이 애액을 내뿜어주었다. 영후와 수림은 몰랐지만, 그들의 자지와 보지는 이미 친숙한 사이였으니까. 덕분에, 꽤나 민망한 ‘질꺽질꺽~’하는 소리가 쉴새없이 이어졌고, 탄력적인 수림의 엉덩이와 단단한 영후의 허벅지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철썩철썩!’소리마저, 묘한 흥분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운 음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후는, 한 손으론 수림의 가슴을 움켜쥐기 시작했고, 다른 한손은 보지 앞쪽으로 옮겨,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어흑! 어~,어~,어~!” 그제야, 점점 음정이 높아지며, 격렬해지기 시작하는 수림이었다. 이대로 죽을때까지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 무렵, 영후는 갑자기 모든 행위를 멈추고는 이내 자지까지 보지에서 빼버렸다. ‘끝...인가...’ 방금전까지, 이 순간이 계속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으면서도, 그의 행위가 잠시 멎자, 이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도 수림은 생각했다. 하지만, 영후는 여전히 아직이었다. 이내 영후는수림의 몸을 부드럽게 안고는 똑바로 눕혀놓았다. 그러자, 그제야 수림은 조금은 창피한 기분도 들기 시작했다. 격렬한 섹스로 인해, 취기가 조금 가신 것도 그 이유중 하나였겠지만, 환한 불빛 아래에, 그것도 두 다리가 벌어진 채로, 자신의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수 밖에 없었던 수림이었기에, 겨우 두 개의 손으로 어디를 가리고, 또 어디를 방치해야 할 것인지 난감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착한 남자, 자신의 생각을 읽는 듯, 잠시 벽 쪽으로 걸어가 방의 불을 껐고, 그제야 수림의 마음도 좀더 ‘야해’졌다. 그렇게 돌아온 그가 자신의 몸 위로 누우려는 것을 피해, 옆에 눕히고는 이 남자와의 첫만남 때 그러했듯, 그 남자의 이마부터, 귓속까지 혀 하나로 대화해나가기 시작했고, 작지만 탱글한 그의 젖꼭지를 지나, 배꼽 아래까지 근접해 있을 정도로 거대하게 발기한 그의 자지를 입에 넣을 때까지, 그녀가 ‘혀’로써 행한 인사는 영후의 기억을 자극시켰다. ‘꿈이 정말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이순간, 영후는 축구 경기중 짜릿한 역전골을 뽑아냈을 때 그 이상의 환희를 맛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느낌을 혼자만 호사롭게 누리긴 싫었기에, 자신의 자지를 열심히 빨아대고 있는 수림의 외로운 엉덩이를 자신의 얼굴 쪽으로 이끌었다. 한 손엔 자지를 쥔 채, 침과 자신의 애액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입술은 약간의 궁금증을 표시했지만, 이내 영후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 남자의 얼굴에 자신의 보지를 갖다 대었다. 이내, 수림과 영호의 몸은 완전히 포개진 채, 서로가 서로의 성기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이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수림이 먼저 몸을 일으켜 자신의 보지를 영후의 자지에 맞춰 그대로 내려앉았다. 이번엔, 처음과 같은 비명은 서로 지르지 않았지만, 둘의 움직임만은 처음보다 훨씬 빨라지고 있었다. “아아~, 읍....아~” “어헉! 으, 윽!” 두사람의 신음은 맞는 듯, 맞지 않으며, 또다른 음을 내기 시작했고, 이번에야말로 절정의 끝을 두 눈으로 꼭 지켜보고 싶었던 영후는 순간, 수림을 안아들어 자신이 위로 올라오도록 체위를 바꾸고는, 기어를 변속하며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편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자신의 가슴을 조금은 가려본것도 같은 수림은, 자신의 양다리를 만세부르듯 양손으로 잡고 벌린 채, 속도를 내고 있는 영후의 이마와, 가슴과, 그의 배에까지 흘러내리는 땀이, 그렇게도 섹시해 보였다. 꼭. 이 남자가 사정을 하고 나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땀을 핥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볼무렵, 그 생각은 그저 생각자체로 이내 산산 조각이 나 버렸다. 영후의 자지가 보지 속에서 급속도로 팽창해 버리는 가 싶더니, 이내 몇번이고 쉬지 않고, 꿀떡꿀떡하며, 정액을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정말...끝난건가...” 섹스 후의 나른함이 몰려오던 수림은, 자신의 보지 밖으로 그남자의 정액이 흘러내리는 것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려 했으나, 여전히 숨을 조금은 몰아쉬던 영후의 이어지는 배려에, 섹스 후 처음으로 '왈칵'하고 기쁨의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베개에 파묻었다. 자신이 해주려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을, 지금 영후가 부드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남자의 달콤한 혀로 말이다. ‘내일 아침엔, 부디 환한 얼굴로 같이 일어 날 수 있었으면...’ 나른한 몸 여기저기를 영후의 혀와 손가락에 모두 맡겨둔 채, 벌써부터, 또다시 내일 아침이면 이남자를 놓칠까 걱정에 빠져든 수림이었다. 7부. 출현! 스트라이커! 조금은 낯선 조명아래, 돼지 같은, 게다가 늙어 축 늘어지기 까지 한,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는 한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의 등판이 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등판 위에서는 동남아 계열의 국적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여자가 속이 환히 비치는 붉은 슬립차림으로 천정에 매달린 봉을 잡은 채, 천천히 그 남자의 등 곳곳을 부드럽게 밟아대고 있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남자의 입에선, 연신 ‘으음’하는 시원함에서 비롯되는 신음이 연이어 나왔고, 그렇게 한 20분쯤 지나자,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여자는 조용히 그 남자의 등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혼자 남겨진 남자는, 자신의 직책으로부터 발생되는 중압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AFC에서는 UEFA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의 각 구단 법인화를 재촉했고, 법인화는 곧, 기업과 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로 인해 파생될 경영 투명화는 곧바로 자신들의 비자금조성에 직격탄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렇게나 인기의 비활성화를 위해 일부러 방송사가 K리그 중계방송을 등한시 할 수 있도록, 대한축구연맹에 가입된 각 구단 단장들의 암묵적 동의 하에, 광고수익배분을 최대한 낮게 제시해 공중파에서 방영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FA컵의 중요경기들을, 평일 낮 경기로, 그것도 제주도에서 개최하는 등, 팬들의 원성을 살 수 있도록, 꽤나 효율적(?)으로 노력을 했건만, 프로축구는 점점 지역에 뿌리를 내려 연고지의 주민들은 점점 사랑을 주기 시작했기에, 무조건 대표팀만을 띄워 A매치 입장권 수익 등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던, 자신의 직장이기도 한 대한축구협회는 점점 난감해하기 시작했다. 그저 한국축구는 태생부터가,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꽤 간편한 도구였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처럼 진화했고, 커져버렸고, 사랑 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요 며칠 사이엔, 한때 국내 프로축구에 반향을 일으키며, 모든 사람들을 축구에 열광토록 만들었던, 그래서 자신들에겐 언제나 눈엣가시 같았던 ‘그 놈’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기에, 이 남자의 양 어깨는 그간 받아온 스트레스로 인해 그야말로 땡땡하게 뭉쳐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 망할 놈의 노감독 짓 일테지…’ 말이 프로축구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익성을 위해, 구단을 운영하는 기업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저, 명목상, 그리고 기업 홍보의 목적을 위해 축구팀이 존재해 왔었으나, 역시 굴러들어오는 돈은 점점 욕심을 불러일으켰던 모양인지, 축구팀들은 하나 둘 씩 수익성의 극대화를 위해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축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시민, 도민구단을 필두로, 입장권 및 유니폼 판매 등과 함께 선수 육성 후 이적을 시켜 수익을 올리는 등의 방법을 통해 흑자경영을 이뤄 돈 맛을 알게 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랬기에, 더 이상 예전처럼 축구협회와 연맹에 무작정 끌려가던 예전의 축구팀들이 아니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이제는 대표팀에 소속구단의 선수가 발탁이 되는 것 조차 꺼리기 시작했다. 주급은 자신들이 주고 있음에도, 축구협회는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선수들을 빼가서 혹사시키고, 혹은 부상을 입힌 채 돌려보내기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확실히 대표팀의 위상이 예전만 못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지금 모든 감독들이, 한국 대표팀 감독자리는 ‘독이 든 성배’라며 꺼려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앉혀 둔 노감독은, 자신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자신들이 조기 유학 등을 보내 키운 선수들이나, 학교 후배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야말로 리그에서의 ‘활약도’만을 중점으로 파악해 선수 선발을 하고 있었으니, 전보다 스타플레이어가 적어진 대표팀의 인기는 점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젠장, 민주주의가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예전 80년대가 좋았다는 생각을 하며, 이 남자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내, 또 다른 여자가 속옷차림으로 들어왔지만, 남자는 별 상관없다는 듯, 그대로 누워있었고, 여자는 들어오자마자 그나마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버리곤, 남자의 하반신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치워버렸다. 수건을 치운 자리엔, 탄력은 전혀 없어 보이는 엉덩이만이 축 져진 채 자리잡고 있었다. 잠시 후, 남자의 등 위엔 차가운 액체가 듬뿍 뿌려지고 있었고, 남자는 조금 떨었던 것도 같았다. “마사지 시작하겠습니다.” 농염한 그녀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남자의 등으로 물컹한 느낌이 느껴졌다. 여자는 먼저 안마를 행했던 동남아 계열의 여자와 같이 손을 쓰지 않고 마사지를 시작했는데, 차이점이 있었다면, 이 여자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이용해서 마사지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남자등과 여자의 가슴은 마사지오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남자의 뒷몸에 오일이 묻어있지 않은 부위가 없자,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내려와, 엎드려 있는 남자의 몸을 부축해 앞으로 돌아눕도록 도왔고, 남자가 ‘끄응’하며 겨우 앞으로 돌아눕자, 여자는 다시 남자의 몸 위로 올라가, 역시 풍만하고 기름진 가슴으로 남자의 가슴부터 시작해서, 점점 아래로 마사지해가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자의 흐물흐물한 자지 즈음에 이르렀을 때 여자의 가슴은, 골 사이로 자지를 넣고 자지만을 집중적으로 마사지 하기 시작했지만, 여간 해선 그 남자의 자지는 발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짜증난다는 여자의 표정을 그 남자가 봤더래도, 계속 마사지를 받았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남자는 꽤나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마사지를 받고 있었고, 여자는 식은 땀을 흘려가며 가슴으로 애써 자지를 세워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한 여자는 조심스레 수건을 집어 들어 자지에 묻어있는 오일들을 닦아내고는 이내 입으로 자지를 머금었다. “으음.” 근엄한 척 하는 것들은, 섹스 할 때도 근엄한 신음을 내고 지랄을 떤다,는 생각과 함께 그 여자가 역겨움을 겨우 참아가며 몇 분에 걸쳐 겨우 자지를 겨우 발기시키자, 이내 그 남자의 입이 열렸다. “올라오지.” 남자의 의중을 알아들은 여자는 이내 겨우 해방이다,라는 얼굴로 남자의 몸 위로 올라가더니 보지에 자지를 맞춰보곤 그대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참으로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삽입이었다. 여자는 돈도 좋지만, 다음부턴 이런 늙다리들은 다른 애에게 양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내 열심히 엉덩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똑똑. 남자의 입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노크소리가 나자마자, 검은 양복을 입은, 게다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비서인 듯 보이는 남자가 전화를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여자는 순간, 당황해서 움직임을 멈췄고, 또 다른 남자에게 드러나버린 자신의 나신을 가릴 틈이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늙은 남자의 몸 위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쇳소리를 내는 듯 남자의 입이 열렸다. “계속 해.” 항상, 이런 식의 생활을 해왔던 이 여자는,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엉덩이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지만, 속으론 이 남자를 백 번쯤 죽였다 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비서에게 전화를 건네 받은 남자는 여자가 열심히 돌려대는 엉덩이는 별로 자극되지 않는다는 듯 묵묵히 전화를 받고만 있더니,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예, 부회장님. 그 건은…예…예…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이내 전화를 끊은 늙은 남자는 비서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한마디 던졌다. “그 놈이 뛴 경기가 인터넷인가 뭔가에 떴다는 구만………구해와.” “예, 전무님.” 전화와 함께 지시도 받은 비서는 묵묵히 목례를 하고 여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나가버렸고, 역시 여자도 그와는 상관없이 열심히 돌리던 엉덩이의 속도를 조금씩 올려가려 했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 전무인 이 남자의 입에서 탄식처럼 튀어나온 한 남자의 이름에, 이 여자, ‘윤지’는 순간 멍해지는 것 같았다. “이영후……결국, 다시… 돌아왔다는 거냐?” - 영후는 이른 아침부터, 중학교 운동장 한 켠에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축구를 시작하면서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아침운동이었기에, 오늘도 변함없이 묵묵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던 점이 있었으니, 스트레칭을 할 때엔 언제나 몸 구석구석의 근육세포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던 그 였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는 달리, 몸을 풀면서도, 정작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건 그저, 어제 치렀던 연습경기 때문에 평소와는 달리 몸이 조금 무거운 느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없진 않았다. ‘정말…내가 여자랑 잤단 말이지…’ 지난 밤 동안 수림과 함께 나눴던 섹스의 여운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영후였기에, 이른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금 들뜨고, 상기된 것도 같았다. ‘그치만, 아침엔…’ 영후는 차마, 맨 정신으로 수림을 깨울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함께 섹스를 하겠지만, 섹스를 하는 사이라고 해서 꼭 연인일 수는 없었기에, 그저 하룻밤 사이에 몇 번의 섹스를 나눴다고 해서, 그 여자를, 그리고 그 여자의 몸을 마음대로 다뤄선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몸은 어젯밤에도, 새벽녘에도, 그리고 아침까지, 그대로 눈이 부셨지만, 그래서 영후의 그것은 눈치도 없이 아침까지 계속 하늘로 치솟았지만, 그럼에도 영후는 그녀의 단잠을 깨우지 않고, 몰래 먼저 집을 나섰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간단히 트랙을 몇 바퀴 돌고 있는데, 조금씩 축구유니폼을 입은 동네 아저씨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조기축구회원들끼리 경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겸사겸사, 오늘은 그냥 몇 바퀴만 돌고 가야겠다.’ 영후는 조금씩 스피드를 내며, 운동장을 돌았고, 그러는 동안에도, 아저씨들은 꾸역꾸역 모여들어, 이내 슬슬 공을 주고 받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어느덧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몰려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영후는 스탠드로 가서, 짐을 챙기며 슬슬 갈 준비를 했다. ‘아직도…잠들어 있을라나…’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영후에게, 아저씨치고는 막내에 속할 것 같은 남자 하나가 영후에게 다가왔다. “저기, 혹시 볼 좀 찰 줄 아세요?” “네?” 딴 데 정신이 팔려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영후는 다시 물었고, 그 남자는 급한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희 선수가 한 명 적어서요, 오늘 옆 동네 팀하고 시합하기로 했었는데, 한 분이 안 나와서 그런데, 같이 좀 뛰어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아, 그렇다고 하실 게 많은 건 아니구요. 그냥, 골키퍼 앞에서 대충 수비만 서주시면 되거든요. 다행스럽게 오늘은 저쪽 팀에서도 ‘그 녀석’이 안 온 거 같으니까요.” 영후는, 어제의 시합으로 누적된 피로가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곧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저 뒤에만 서 있어주는 건데 뭐…’ 이내, 버릇처럼 축구화를 꺼내 신고는, 몇 번이고 끈을 바로 묶어보았다. - 그 무렵, 영후의 침대에서 곤하게 자고 있던 수림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핸드폰 벨소리 인줄은 모르고 침대에서 뒤척이던 수림은, 꽤나 침대의 공간이 넓게 느껴지는 통에, 벌떡 일어났다. ‘아…여긴…’ 또다시 낯선, 남자의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한 수림이었지만, 놀람보다는 이내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분명, 어젯밤의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와 똑같이, 자신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자신의 옆에 있어줄 것만 같던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벨은 꽤나 길게 이어지고 있었고. 수림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어제의 술판이 벌어졌던 자리에서 반짝이는 영후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수림은 차마, 영후의 핸드폰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걸려오는 사람의 이름은 살짝 봐도 상관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며 괜히 눈치를 살피다가, 살며시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바라봤다. ‘박마녀’ 마녀? 수림은, 단순히 ‘마녀’라는 글자를 보고 ‘쿡’하고 웃음을 터뜨리려고 했으나, 순간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녀라면…여자잖아…혹시…?’ 수림은 갈등하다가, 조심스레 핸드폰의 전화를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이내 전화벨소리가 멎어버렸다. 멎어버린 핸드폰처럼, 잠깐이지만, 수림의 마음도 먹먹하게 멎어버리는 듯 했다. 이윽고,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수림은 알몸인 채로 웅크리고 앉은 채, 영후의 핸드폰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사귀는 여자가 있는 걸까…?’ 영후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기 전에, 그런 것도 한번 생각해보지 않았던 자신이 조금은 멍청하게 느껴지는 수림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젖가슴에 남아있는 그 남자의 키스자국과 여전히 그의 성기가 가득 차있는 것만 같은 자신의 보지 속 느낌을 되살리며,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림은 혹시, 욕실에 영후가 있다면, 깜짝 놀래 켜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장난끼 넘치는 얼굴과 고양이발걸음으로 욕실 문을 확 열어젖혔지만, 어두운 욕실엔 침묵만이 맴돌았다. ‘어디…간 거지…?’ - “축구화 한번 좋네~, 어디꺼여?” 골키퍼 바로 앞에서, 멍하니 서있는 영후에게 꽤나 몸집도 있고, 나이도 있어 보이는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아, 이거요? 저도 잘…그냥 얻은 거에요.” 영후의 말은 그닥 틀린 건 아니었다. 영후의 선수시절, 협찬사에서 자신만을 위해 특수하게 제작해서 선물해준 것을 받았던 것이었으니까. “이잉, 우쩐지, 몸이 호리호리한 것이 뽈은 별로 못 찰 것치럼 보이드마, 신발은 고로코롬 삐까뻔쩍하드라고” “아 예…” 조기 축구 같지 않게, 좀처럼 서로의 골 망을 가르지 못한 채 중원싸움만 벌이고 있는 미드필드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영후에게 골키퍼는 계속 말을 붙여댔다. “아따, 너무 그렇게 긴장할거 Ÿ종?, 오늘은 저짝팀 에이스가 안 나와 부렀응께.” ‘에이스?’ 경기 시작 전부터,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상대팀의 에이스가 안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안을 받고 있는 듯 해 보였다. ‘뭐, 아마추어 선수 출신 정도 되는 사람이 있나 보네.’ 가뭄에 콩 나듯, 자신에게로 오는 공을 그냥 뻥뻥 내지르면서, 영후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접전지역에 합류해 골을 노렸을 영후였지만, 확실히 어제의 경기로 인한 데미지가 아직은 느껴졌기에, 회복훈련을 하듯, 최대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골키퍼와 계속 농담 따먹기를 즐기고 있었다. “음마. 제법 차는갑네? 멀리도 나가뿐지네, 잉?” 긴 트레이닝 복 속에 감춰진 영후의 허벅지 굵기를 알리 없을 골키퍼는, 쉽게 차내는 것 같은데, 꽤나 멀리 날아가는 공을 감상하며, 연신 감탄을 했다. 이내, 별 소득 없이 전반전이 끝났고, 언제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렸냐는 듯, 내팀 네팀 가르지 않고 옹기종기 운동장 가운데 모여, 간식거리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식을 담아온 모양이 다들 군색한 것이, 외출은 못 시켜줄 망정, 주말임에도 축구 하러 나서는 남편들 덕분에 홀로 집에 있을 마눌님들을 닥달 했다간 제명에 못 죽는 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 나이였기에, 새벽부터 마누라가 깰까 조심하며 자신들이 직접 준비했을 음식들이었다. “근데, 누구 술 가져온 사람 없어?” 참한 안주거리만 넘치자, 어느 뱃살 두둑한 아저씨 하나가 모두 들으라는 듯, 목소리 높여 물었고, 다들 얼굴만 쳐다볼 뿐, 술은 아무도 가져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꼭두새벽부터 갑자기 왠 술을 찾고 그래…그런 거 가져오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구석에 앉아 물을 조금씩 들이키며 영후가 그런 생각을 할 즈음, 갑자기 정문 쪽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내 그곳으로 쏠렸고, 순간 영후의 상대팀 아저씨들이 만세를 부르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청년을 맞았다. “아니 왜 이제야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어?” “죄송해요, 아빠가 가게에 좀 늦게 나오셔서… 그대신 아빠 몰래 가게에서 이거 가져왔으니까, 좀 봐주세요.” ‘헉!’ 영후는 그 청년이 들어 보인 비닐 봉투 속의 물건을 보고 기겁했다. 그 청년이 들어 보인 건 다름아닌 막걸리 몇 통이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가져오는 인간이 있긴 있었구만…’ “그럼 그렇지! 하여간 삼거리 슈퍼 장씨가 자식 하난 잘 뒀단 말야.” 다들 칭찬이 자자했지만, 그럼에도 영후가 속해 뛰는 팀의 아저씨들은 왠지 얼굴이 밝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돌아온 ‘에이스’인 저 청년 때문일 것이었다. 비니를 눈썹 위까지 눌러쓴 자그만 얼굴 아래로, 위아래 검은 트레이닝 복을 입은 몸은 그닥, 탄탄해 보이지도 않았고, 키도 별로 크지 않았기에, 언뜻 어떤 강점이 있는 건지 영후는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뭐, 선수는 경기력으로 말하는 거니까…’ 슬슬 술잔이 돌기 시작하자 설마 자신에게 술잔이 돌아올까 덜컥 겁이 난 영후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전반전에 섰던 반대쪽 골대로 슬슬 걸어갔다. “근데, 저 아저씬 누구래요? 처음 보는데?” 왠지, 아저씨라고 부르기엔 좀 젊은 것도 같고, 꽤나 준수한 용모를 가진, 게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의 영후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 청년은 골키퍼 아저씨에게 물었다. “이잉, 놀라 덜 말어. 니가 하도 잘 찬께, 우리도 이 참에 비밀병기 하나 영입했다는 거 아녀~” 너스레를 떠는 골키퍼아저씨의 말씀에 다같이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그 청년은 왠지 영후가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 남희는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새벽까지 축구경기비디오 녹화본을 보며 포메이션과 공간배분, 시간에 따른 체력 저하 등을 나름대로 메모하며 연구하는 동안에 쌓인 피로감을 닦아내고 있었다. 만일 그녀의 샤워장면을 본 남자들이라면, 이성의 끈은 마치 썩은 동앗줄 마냥 툭 끊어졌을 만큼, D컵에 가까운 완벽한 가슴부터, 36인치에 육박하는 엉덩이까지 흐르고 있는 물줄기가 부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샤워하는 동안에도, 밤새 본 축구경기들을 통해, 여자경기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작전을 이행토록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내고는, 스스로 풀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여자는 남자보다 순발력, 지구력 등 모든 면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남희는 결국, ‘패싱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답을 찾았다. 하지만 그 해답에도 약간의 문제점은 있었다. 첫째로, 모든 선수들의 첫 번 째 볼 터치가 안정적이어야 하고, 둘째로, 볼을 가지고 있는 선수 이외의 선수들은 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편한 공간을 찾아 쉬지 않고 뛰며, 빈 공간을 창출해 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이어진 패스들을 살리며, 한 두 명쯤은 이겨낼 수 있는, 골 결정력이 있는 스트라이커가 있어야 한다… 는 세가지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지만, 그나마 다른 플레이에 비해 문제점이 가장 적은 방법이었으니, 남희는 어쨌든, 영후에게 이러한 분석에 대해 보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첫째, 둘째 문제점은 훈련으로 어찌 될 테지만, 마지막 세 번 째는 글쎄…’ 언제나 현실은 수학적 방법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믿어왔던 남희에게, 이번에 주어진 문제만큼은, 너무나 어려운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윽고 시작된 후반전엔 전반전과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을 영후는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저, 막걸리 한 두잔 때문에 취해버린 아저씨들의 알딸딸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그 ‘청년’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본능은 영후에게로 후반전 시작하기 전부터 경고를 보내고 있었고, 영후는 그 경고를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고는 이내 현실로 나타났다. ‘호오?’ 영후는 꽤나 감탄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단지 멤버 하나가 바뀌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상대팀의 아저씨들의 움직임마저 기민해지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공격의 선봉으로 나서고 있는 그 ‘청년’의 드리블 및 패스는 무척 간결하고, 또 부드러웠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오른쪽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왼 발등으로 트래핑해서 자신의 앞에 적절하게 떨궈놓은 그 ‘청년’은 이내 영후와 맞서게 되었다. ‘한번 실력 좀 구경해 볼까?’ 영후는 전반과는 달리 무게 중심을 최대한 뒤로 이동한 뒤, 자세를 낮췄다. 순간, 무덤덤한 표정의 그 ‘청년’은 자세를 낮추는 대신 벌어지는 영후의 다리 사이로 ‘툭’하고 공을 차 넣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후의 어깨 쪽으로 스치듯 달려나갔다. ‘아차차!’ 순간적인 반응이 미세하게 늦었던 영후는, 순간 자신의 발목에 모래주머니가 그대로 채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의 순간돌파능력은 꽤 놀라웠다. ‘그래도, 이렇게 쉽게 가면 재미없지…’ 영후는 재빨리 뒤돌아 달려나가며, 가까스로 공을 향한 태클을 해서, 그 ‘청년’의 다리 사이에 있던 공을 빼내었다. “휴~ 큰일 날 뻔 했네.” 영후는, 설마 공을 빼앗길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그만큼 놀라움이 커 보였던 ‘청년’에게 ‘찡긋’ 윙크를 보내고는 이내, 전방의 놀고 있는 아저씨들에게 장거리 패스를 날렸다. “아따 이 양반~, 지대로 태클할 줄 아는구마~잉~” 간담이 서늘했을 골키퍼 아저씨의 뒤늦은 농담을 뒤로한 채, 영후는 그 ‘청년’에게 점점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을 느꼈다. 또한 이 ‘청년’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음도 알 수 있었다. “쳇!” 조금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센터라인 쪽으로 돌아가는 이 ‘청년’은 그러나 또다시 돌아와 자신을 돌파하려 할 것이란 걸, 영후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엔 그러지 않았을 텐데, 벌써부터 공을 자신에게로 패스해 달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영후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재밌지 않겠나.’ 어느새, 다시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온 청년은, 자신에게 올라올 크로스를 기다리며, 영후와 몸싸움을 시도했지만, 영후는 조금 의아했다. ‘그러기엔…좀 몸이 약한 감이 있군.’ 곧이어 왼쪽 사이드 라인 쪽에서 올라온 크로스의 방향을 보고 헤딩을 시도하기 위해 뛰어가려는 ‘청년’은 이미 길목을 막고 서있던 영후 덕분에 낙하지점에도 가보지 못하고 되돌아 가야 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계속 도전해 올 것을 알기에, 영후는 마음속으로나마 응원을 보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부딪히러 와라.’ 하지만 단지 몇 번의 공격을 실패했을 뿐이었는데, 이 ‘청년’보다 아저씨들의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저녀석 왜 저래? 평소 같지 않구” “쟤가 못하는 거야, 저 남자가 잘하는 거야?” 어느새, 자신들의 할 일은 잊어버린 채, 아저씨들의 관심사는 그 ‘청년’이 영후를 돌파해내고 골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영후는 자신을 등지고 공을 키핑 하고 있는 ‘청년’에게서 왠지 공을 바로 뺏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언제라도 뺏을 수 있을 만큼 빈틈투성이였지만, 공을 뺏기보다는 또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돌파하려는지 한 번 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 정도라면, 이런 곳에서 우두머리 노릇하기는 쉬울테지… 하지만, 왠지 이 정도에서 멈출 것 같진 않은데...’ 이런 동네 조기축구 같은 곳에서 썩히기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영후는 자신을 등지고 있는 청년을 돌아서지 못하게 하려 최대한 밀착했고, 순간 턴을 하려는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청년의 가슴을 밀어냈다. ‘어?’ 순간 영후는 자신의 손끝에 느껴진 이상한 감각에 움찔했다. 그때였다. 영후가 막아선 반대쪽으로 턴을 한 그 ‘청년’은 이내 오른쪽으로 공을 차려 했고, 다시 정신차린 영후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그 ‘청년’을 마음속으로 나마 칭찬하며, ‘이번엔 공을 막아볼까’, 하며 그쪽으로 약간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순간, 이 ‘청년’의 발목은 유연하게 움직이며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오른쪽으로 공을 차던 것을, 영후의 몸이 움직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체없이 다시 오른발 인사이드로 왼쪽으로 ‘툭’ 차놓고 자신의 오른쪽 어깨 쪽으로 스치듯 돌파해 달려나갔다. ‘설마…!’ 틀림없는 ‘플립플랩’이었다. 어릴 적부터 모래밭에서 공을 차던 브라질 선수들 중에서도 발목이 유연하면서도 강한 선수들만이 구사할 수 있다는 기술을, 지금 영후는 국내에서, 그것도 조기축구시합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겠지만, 영후에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발 하나로…그것도 아웃사이드, 인사이드를 순간적으로 동시에 구사할 수 있다니…저녀석…?’ 영후 자신도 실전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을 기술을,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목격했기에 감탄하고 있는 영후를 뒤로하고 결국 골을 성공시킨 그 청년은, 그제야 속박에서 벗어난 듯, 천천히 뛰어가며 머리에 쓰고 있던 비니를 벗어 들고 빙빙 돌리며, 아저씨들의 환호를 즐겼다. “역시 장씨네 딸내미여~!” “그러면 그렇지, 사람 놀래 켜 주는 방법도 여러가지구먼~.” 많이들 즐거워했고, 또 놀랐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놀란 건 영후였다. 청년이 벗은 비니 덕분에, 숨어있던 긴 생머리가 흡사 초원을 거니는 명마의 빛나는 꼬리처럼 나풀거렸기 때문이었다. ‘여…여자였어?’ - 일요일임에도, 편집부장의 전화 한 통에, 하연은 부리나케 ‘일레븐’의 사무실로 올 수 밖에 없었다. 하연이 도착했을 땐, 편집부장은 자리에 앉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있었다. “부장님…” “이거…어떻게 된 건 지 설명 좀 해주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하연에게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연 부장의 눈길을 따라, 하연도 모니터를 응시했는데, 그곳엔 어제의 연습경기가 고스란히 녹화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고, 이내 부장이 멈춘 화면 상단에는, 노감독과 나란히 앉아있는 하연의 모습이 있었다. ‘이런…’ 현재 대한민국엔 소위 ‘FC코리아’라는 팀이 가장 유명했기에, 프로팀의 경기결과보다, 대표팀의 연습경기결과가 아직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훨씬 약발이 먹히는 뉴스거리였다. 때문에, 부장은 지금 그런 좋은 기사거리를, 그것도 현장에 직접 있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던 하연을 질책하려는 것이었다. “아, 그게요…실은 저도…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노감독님께서 ‘비공식’이라고 못을 박으셔서…” “그럼 이건 도대체 누가 찍은 건데? 박기자 이 생활 처음 하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약속이 지켜진 게 얼마나 된다고 그래? 먼저 터뜨리면 장땡 아냐? 엉? 이거 어쩔거야?” 부장의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반박도 할 수 없었던 하연은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기사는 어제 작성해 놓은 게 있긴 한데요…그래도 본인한테 허락을 좀…” “허락? 누구? 이영후?”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부장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못 말리겠구만…어이 이영후 전담 기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부장을 바라본 하연은 간만에 보는 부장의 웃음이 조금 어색했다. “이 선수, 확실히 돌아온 거 맞어?” “아직은요…하지만 곧” “됐어 그럼. 앞으로 이 녀석 기사는 그때처럼 자네한테 일임할 테니까, 우선은 슬슬 특집기사 준비해 놓으라고,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하연에게 부장은 다시금 못을 박았다. “이번 건은 자네도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테니 이해하겠지만, 어쨌든 영상이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는데, 기사한 줄 없다는 건 말이 안돼. 그러니까…” 끝맺지 못한 부장의 말이었지만, 하연은 충분히 알아들었기에, 결국, 하연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몇 번이고 영후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여간 인간아…전화 좀 받아라…’ - 한 골을 넣고서는 왠지 이 ‘청년’ 아니 이’아가씨’께서 조금은 잠잠해 진 것 같아, 영후는 슬쩍 약을 올려보고 싶어졌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영후는 골키퍼아저씨에게 잠깐 인사를 하고, 위로 올라가 ‘아가씨’의 주변을 배회했다. “이봐요.” 여자는 자신에게 말을 붙여오는 남자에게 조금은 어색한 대꾸를 했다. “왜요?” “축구, 배워본 적 있는 겁니까?” 영후의 질문은 꽤나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한 것이었다. 축구를 전혀 배워보지 않았던 사람 이라기엔, 너무나 잔기술이 좋았지만, 또 배웠다고 하기에는 기본기도 부족했고, 게다가 빈틈투성이였기에, 과연 어느 쪽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그냥…뭐…혼자…앗!” 순간, 영후와의 대화 때문에 자신에게로 공이 오는 것을 몰랐던 ‘아가씨’는 미처 잡아내지 못했고, 흘러나가는 공은 이내 영후 차지가 되었다. 영후는 그녀 앞에서 공을 멈춰놓은 채 한마디를 더 건넸다. “진짜 축구, 해보지 않을래요?” 빙긋 웃으며, 처음 본 자신에게 이상한 말을 던진 채, 자신의 머리칼이 흩날릴 만큼의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나간 이 남자는 이내, 한 40미터 정도가 넘는 거리쯤에서 강력한 중거리 슛을 날렸고, 그의 발을 떠난 공은, 마치 포물선이라는 걸 모른다는 양, 직선으로 날아가 골 포스트와 크로스바가 만나는 왼쪽 상단 모서리에 정확히 꽂혔다. 군더더기 없는. 언제나 이 아가씨, ‘장혜미’가 꿈꾸던 그런 슛이었다. 이 남자의 슛을 본 순간, 혜미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축구…’ 한 골을 허용한 아저씨들은, 수비수가 갑자기 올라와 슛을 쏘는 게 어딨냐며, 반칙 운운하며 떠들어댔고, 영후 팀의 아저씨들은, 그럼 여자랑 뛰는 통에, 정신이 산란해지는 건 어쩔거냐며 맞대응을 해댔지만, 그들과는 상관없이, 피치의 어느 중간 즈음에 마주 서 있던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흥분 상태가 되었다. “누구죠, 아저씬?” “나요? 글쎄요…” 영후는 잠시 생각하듯 손으로 턱을 괴고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생각난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일단은 쌩초보 여자축구팀 감독이라고 해두죠.” -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수림은, 조금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지저분한 주방과,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들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었는데, 오늘 다시 찾은 자신의 집은 어쩐지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만 같이 있어줬다면, 적어도 이렇게 쓸쓸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사랑이란 건 이런 걸까?’ 아직까지 진정한 사랑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수림은, 난생 처음 맛보는 어색한 감정과 심정에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아왔던 그런 식이 아닌,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은 그저 술 덕분에 그 남자와 두 번의-물론 횟수로만 따지면 그 이상이지만-섹스를 나눴지만, 자신과 같이, 그 남자도 그것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적어도 자신만큼은, 그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맞는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남자는. 자신의 마음만 가지고는 그 어떤 것도 설득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먼저 일어나 나간걸까…?’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수림 자신이 어색할까 걱정되어서 배려차원에서 먼저 잠시 밖으로 나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꽤 시간이 지났어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그’였고, 그렇게 긴 시간을 혼자 ‘그 남자’의 집에 버려져 있다 보니, 정말로, 자신이 버려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혼자만의 상상으로 받은 충격으로 인해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있던 수림이었다. ‘이럴 때 그냥 임신이라도 덜컥 돼버리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녀의 바람대로 되어버리기엔, 확률이 너무나 낮았다. 그녀의 직업특성상, 생리를 하는 날은 수영장에서 강습을 할 수가 없기에, 정기적으로 피임약을 복용해왔던 그녀의 몸은, 설령, 아무리 그 남자의 정자가 활동성이 뛰어나다 할 지라도, 아기를 만들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바보! 멍충이!” 자신을 향한 질책인지, 영후를 향한 원망인지, 욕설 같지도 않은 욕설을 그 예쁜 입으로 쉼 없이 내뱉고 있는 수림이었다. - “아, 따라오지 말라니까요?” 투덜대며, 앞장서 걷고 있는 혜미를, 영후는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뒤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난 그냥, 요 앞에 슈퍼에 좀 들러볼까 하고 가는 길이니까 신경 쓰지마요. 요새 삼거리 슈퍼가 대세더라고…” 되지도 않는 유치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따라오는 영후가 혜미는 싫지 않았지만, 문제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자신이 또 축구를 하고 온 것을 알게 되면, 불같이 화를 낼 테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혜미는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아빠한테 물벼락 맞게 되더라도 누구 원망하기 없기에요.” “뭐, 땀도 났겠다. 물벼락,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주시는 김에 비누도 좀…응?” “풉!” 계속 영후의 어이없는 농담이 이어지자, 애써 냉랭한 얼굴로 대화하던 혜미는 결국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거봐요, 웃으니까 훨씬 예쁘구만.” 남새스럽게, 그런 말은 참 잘도 해댄다고 생각한 혜미였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저희 아빤 축구 무진장 싫어하세요. 어쩌면, 그건 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가끔씩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영후를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혜미는 자신의 마음을 터놓을 만큼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제가 딸이 아니고, 아들이었으면요. 아마도 아빠는 축구를 좋아하셨을 지도 모르니까요.” 영후는 딱히 뭐라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왜 하필 아들이라고 축구가 좋아지고, 딸이라고 싫어진단 말인가? 생각에 잠긴 채 걸어가던 영후에게 자신의 팔을 당기는 혜미의 손이 느껴졌다. “저기에요.” 혜미의 시선을 따라 영후의 시선도 옮겨졌는데, 그곳엔 작지만 깔끔한 슈퍼마켓이 있었고, 가게 앞의 먼지를 비질하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보였다. “아빠~” 언제 축구를 하던 멋진 플레이어였냐 싶을 정도로, 나긋나긋한 딸의 모습으로 돌아간 혜미는 그 남자에게서 빗자루를 뺏어 들고는 이내 자신이 남은 곳을 쓸기 시작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나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 시선의 근원지로 눈을 돌렸다. “어?” “어라, 자네가 여긴 어떻게…?” 영후는 정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혜미의 아버지는 이른 바 프로축구 원년 멤버 중 한 명으로, 영후 자신이 입단했던 팀에서는 이른바 ‘레전드’로 각인되어 있는 전설의 센터백 ‘장규식’ 선배였던 것이다. 물론, 직접 같이 플레이 해본 적도 없었고, 만나본 적도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그의 경기들을 보고 자랐던 영후는 그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경기장에서 바라본, 절대로 뚫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자리는 언제나 ‘벽’ 자체였었다. 그제야, 영후는 혜미가 어떻게 그렇게 축구를 잘했는지, 또 혜미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축구를 싫어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선배 시절의 축구는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축구판 이었었다. 구장시설도 형편없었고, 선수를 관리해주는 시스템도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만은 지금의 선수들을 능가했기에, 각 팀에 소속된 선수들은 팀에 대한 충성도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구단 수뇌부의 생각은 선수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10여 년간을, 이적도 없이 한 팀에서, 그것도 부동의 센터백으로 활약했던 장선배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그에게 구단은, 그간의 활약여부에 상관없이, ‘레전드’에의 대접도 해주지 않고서, 그저 은퇴를 종용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그저 남의 일 같지 않았던 영후는, 이제는 아저씨가 되어버린, 이남자의 모습에 연민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기에는, 서로의 마음이 너무나 아플 것만 같았기에, 영후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갑작스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영후와 왠지 이 남자를 아는 것 같은 아빠의 모습에 혜미는 빗자루를 든 채로 눈만 깜빡 거리고 있었다. 8부. 그 남자에게…축구란? - 남희는 약속도, 전화통화도 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업무를 핑계 삼아 영후에게로 가려고 준비하는 동안, 어쩌면 조금 기분이 가라앉을 뻔했다. 게다가 샤워를 마치고, 브래지어를 입을 때는 더욱 자신이 싫어지는 기분이었다. 괜히 크기만 큰 그녀의 가슴에 남들의 시선이 모이는 게 싫어, 오늘도 변함없이 자신의 가슴크기보다 한참이나 작은 브래지어를 겨우겨우 채우고는 답답한 가슴만큼이나, 마음도 답답해졌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들은 어느새 그 남자를 떠올리자, 언제 그랬었냐는 듯, 자신도 모르게 한결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왜인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감정에 ‘왜’인지를 따지는 것은 조금 우스운 것도 같았다. ‘왜냐고…?’ 남희는 스스로에게 반문을 하고는, 어이가 없어서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도 문제를 내고, 또 답을 찾으려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웃긴 그녀였다. 요새 들어 부쩍, 세상엔 답이 없는 문제들이 훨씬 더 많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놀라듯, 가끔씩 콧노래도 흥얼거리고 있을 만큼, 즐거워진 요즘이었다. 그럼에도, 남희는 화장대 앞에 앉아,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조금은 한숨을 내 쉰 것도 같았다. 남희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그녀의 화장대위에는, 한창 꾸미기 좋아하는 요즘 여자들의 화장대와는 달리, 고작 스킨 한 병, 수분크림 한 병, 그리고 샘플로 받은 에센스 몇 개가 전부였다. 원체 깔끔한 그녀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여태껏 자신을 꾸미는 것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던 남희였기에, 이런 순간에 자신을 꾸밀 수 있는 화장품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만일 좋은 화장품이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다고 해도, 미처 자신을 꾸미는 방법에 대해 어디서건 배워두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화가 났을 거라며, 괜히 이래저래 ‘여자’로 살아오지 못했던 자신이 후회가 되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어떤 화장품이 필요 없을 정도의 자체발광미인이었던 남희였지만, 그런지 어떤지, 본인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게다가 지금껏 공부를 업으로 하며 살아오는 통에 이성에 관해선 관심 조차 가질 시간도 없었다. 연애할 시간은 고사하고, 꾸미는 시간조차 자신에게는 사치라고 여겼던 그녀에게, 지금의 화장대 정경은 너무나 당연스러웠고, 평소에도 그런 자신의 생활환경에 불만을 가지지도, 그럴 이유도 없었건만, 왠지 오늘의 그녀 마음은 좀 ‘많이’ 달랐다. “제가 맡는 팀이라면….우승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굵직한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듯, 말해보던 남희는, 또다시 입을 가리고 한참을 웃어댔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의 진심일 것만 같은 단 한마디가, 남희의 귓가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어느덧, 남희의 마음 어딘가에 안착해버렸고, 그 목소리는 결국, 남자라고는, 사랑이라고는 모를 것만 같은, 이 차가운 여자의 가슴을 이렇게도 설레게 만들었다. ‘일요일이긴 하지만…어쨌든, 오늘이 감독님과 첫 업무 시작인 셈인가…?’ 꽤나 얌전한 청남색 원피스를 골라 입은 차림으로, 그간 정리한 축구팀 창단에 필요한 자료들과, 앞으로의 진행 방향에 대한 기획안 등, 이른바 축구팀 수석코치로서 준비한 것들을, 가방에 챙겨 넣고 있는 남희였다. - 규식은 지금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저 남자가, 정말 이영후 선수가 맞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축구선수를 그만 두면서, 다시는 자신이 몸담았던 팀의 경기는 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지만, 그래서 지금도 축구라면 열불이 뻗칠 지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5년 동안은, 자신이 몸담았던 팀의 경기를 TV로라도 빼놓지 않고 지켜봤었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직접 보고 싶어질 때면, 최대한 본인이 아닌 척 꾸며서라도 경기장을 찾곤 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서… 규식은 영후의 플레이를 볼 때마다, 만일 자신과 동시대에, 그것도 상대팀이 선수였다면, 과연 막아낼 수 있었을까, 늘 궁금했었기에, 그는 언제나 골문 앞으로 돌진해오는 영후를 막는 꿈만을 꾸어왔었다. 물론, 결과는 늘 참혹했지만. 그렇듯, 꿈에서 만났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막상 눈으로 직접, 그것도 단 둘이 마주 앉아 있다 보니, 자신도 예전의 선수였으면서도, 마치, 연예인을 대하고 있는 듯한 설레임이 느껴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에 젖어있던 규식은 이내 영후의 조심스런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기, 선배님?” “아, 네…” “말씀 낮추십시오, 제가 한참 후밴데…” “아, 그…그러지 뭐.” 그저 말 한마디를 나눴을 뿐임에도, 이런 훌륭한 선수에게서 거만함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규식은 또 놀라웠다. “저, 다름이 아니라…실은 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규식은 자신에게 무슨 부탁 할 거리가 있는지, 자신에게, 이 남자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만큼의 무엇이 아직도 남았는지 조금 의아했다. 규식은 잠시 물 한 모금을 들이키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했지만, 이내 이어지는 영후의 발언에 한동안 정신이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님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풉!” 규식은 영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기에, 미처 삼키지 못했던 물을 그대로 영후의 얼굴에 내뿜었고, 날벼락을 맞은 영후의 얼굴은 닦아줄 생각도 못한 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내 딸을 달라고…?’ 규식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영후의 말 중 ‘맡겨’를 놓치고 말았기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으…혜미가 말했던 물벼락이 이거였나…’ 갑작스런 물벼락을 맞아 난감했던 영후였지만, 이내 얼굴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휴지를 집어 들어 얼굴을 닦아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부천이라는 팀에 입단했던 이유, 혹시 뭔지 아십니까?” 영후의 질문을 받은 규식은 순간 자신의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부천. 실로 오랜만에 떠올려보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하나에 자신의 모든 청춘을 불살랐을 만큼, 규식에겐 너무나 가치 있고, 소중했던 이름. 하지만, 기업의 노리개 감이나 다름없었던 그들의 부천은, 어이없게도 어느 축구팀보다도 가장 관중동원력이 뛰어났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수의 감소를 이유 삼아, 제주도로 연고 이전을 해버렸고, 부천이란 곳에서 축구를 보며, 부천축구에 죽고 살던, 부천의 시민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규식과 영후가 속했던 ‘부천’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열정적인 팬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부천을 선택했었던 또 다른 이유는…바로 선배님이 계셨던 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규식은 연이어 쏟아지는 영후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님의 플레이를 보고 자란 운 좋았던 저에게, 다시 은혜를 돌려드릴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 삼거리 슈퍼마켓의 카운터에는,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잘생기고, 남자라 하기엔 너무나 예쁘장한, 여자애 하나가 가게를 지키고 있는 건지, 가게 안쪽의 골방을 보는 건지 모를 정도로 목을 최대한 길게 뺀 채로, 혹시나 들릴까, 골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빠와 영후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인거야, 두 사람은…’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잠시 했었지만, 내내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던 방에서 갑자기 드르륵, 문이 열리며 아빠가 나오고 있었고, 난감한 표정의 영후가 그 뒤를 따랐다. 그새 친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혜미는 영후에게 눈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라고 물어봤지만, 영후는 그런 혜미에게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그러게 말이다. 나도 잘 모르겠는걸.’이라며 몸으로 답해주었다. 이내 규식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혜미를 지나쳐, 규식은 가게 구석 어딘가에서 먼지가 함박 쌓여있는 큼지막한 가방을 하나 꺼내며 먼저 혜미에게 말했다. “애비 잠깐 나갔다 올 동안 가게 좀 보고 있으려무나.” 당당하게 가게를 나서는 규식의 뒤로, 나직하게 한숨쉬며 조용히 따라가는 영후의 모습에서, 혜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뒷모습을 보는 것 마냥 괜히 마음이 안좋았다. '도대체 뭘 하려고 아빤 저렇게 무게를 잡고 나가는 거야?'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던 혜미는, 순간 자기가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으...맞다...레포트...' - 자식과 손주들 모두 미국으로 가버린 이후로, 홀로 지내기에는 너무나 커져버린 침실에서, 그간 읽고 싶었던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던 총장은, 갑작스런 핸드폰 벨소리 덕분에 책을 읽던 흐름이 깨져버려 조금 기분이 상해버렸다. ‘깜빡 했었네.’ 진정한 휴식을 취해야 할 땐, 언제나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리는 것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이었음에도, 역시나 나이 탓이었는지 그만 깜빡 해버린 것이었다. 결국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총장의 일요일 오후를 방해한 것은 이번에도 전화벨소리였다. 나이가 들면 잠은 사라지지만, 그에 반해서 기력이 떨어졌기에, 적어도 일요일 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저 조용히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며 보내고 싶었던 그녀의 시간을 핸드폰은 심심찮게 방해하곤 했었다. 물론, 잠깐 스쳐가는 생각에, 혹시라도 ‘노감독’일까 싶어, 총장은 또 조금은 미소도 지었던 것도 같았지만, 이내 눈으로 확인한 핸드폰 액정 속 번호는 처음보는 생경한 번호임을 확인하자, 다시금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그녀였다. “네.” ‘혹시 한국여대 총장님 되십니까? 기계적인 목소리를 내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왠지 불길한 기분마저 드는 총장이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정작, 젊은 남자는 총장에게 직접적인 볼 일이 없었는지, 사라져버렸고, 이내, 컬컬한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거 참, 모처럼 쉬시는 데 전화 드려서 송구스럽습니다.’ 꽤나 목소리에서 기름이 흐르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지만, 그 정도 가지고 속을 쉽게 드러내 보일 그녀는 아니었다. “누구신지…?” ‘아이고, 이거 참 소개가 늦었습니다. 에, 저는 대한축구협회에 몸 담고 있는 ‘조학중’이라는 사람이올습니다. “네…그런데 저에게 무슨 일로…” ‘아, 예. 거두절미하고, 들리는 풍문에 총장님께서 계신 대학에서 이번에 여자 축구팀을 새로 창단한다는 얘길 들어서 말입니다.’ 축구팀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총장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지는 것도 같았다. 아마도, 이 사리사욕에 가득 찬 축협에게 ‘노감독’이 당했었던 치욕들이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듣고 계십니까?’ “예, 계속 말씀하시죠.” ‘어쨌든, 우리 축구계에 좋은 영향을 줄만한 참 좋은 결정 내려주셔서 감사 드린단 말씀도 전할 겸,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전화 드렸습니다.’ “네…그런데…그 말씀이 전부는 아닌 것 같군요…?” 잠시 흐르는 적막의 순간,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이 늙은 할망구가 결코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는 게, 총장의 눈에 선한 듯 했다. ‘아 예, 그래서 저희가 총장님께 도움도 드릴 겸, 이번 년도 졸업예정인 고등학교 선수들의 선발권을 우선 배정해 드리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갑작스런 호의는...솔직히 조금 부담스럽군요. 아직까지 그런 규정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니요, 뭐. 그렇게 느끼실 것 까진 없습니다. 규정이야, 새로 만들면 그만인 거구요. 이건 그저,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총장님에 대한 작은 배려일 뿐이니까요. 그 점은 그리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만, 그…혹시 감독은 구하셨습니까?’ 드디어 남자의 입에서 본론이 나오자, 총장은 핸드폰을 받고 있던 손을, 오른손으로 바꿔 받았다. “네, 감독 선임은 이미 끝냈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대답을 마친 총장에게,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남자의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여자분이시라 축구에 대해 잘 모르실 것 같아서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아,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구요, 흠흠. 어쨌든, 다시 말씀 드리자면, 축구라는 운동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총장님께서 상상하실 수 없을 만큼 엄청납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희 협회에서 나온 말이, 신생팀일 수록 좋은 감독이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총장의 얼굴엔 조금씩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언제 다물지 모를 그 남자의 입을 뭐라도 이용해서 틀어막고 싶은 마음이 다분했기에, 결국, 말꼬리를 자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진 알겠지만 저희는 이미 계약을 마친 상태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정도의 대답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바로 총장의 말을 맞받아쳤다. ‘하지만, 저희 협회에서 인정하는 감독이 아니라면, 문제가 생기실수도 있습니다.’ 총장은 노감독이 말했었던, ‘기득권층의 움직임’이 이제야 시작되는 구나, 하는 생각에 미간에 조금 주름이 잡혀갔다 “협박…인 겁니까?” 대한축구협회의 안하무인은 이 정도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이게 시작일 것이었다. 먼 예를 들것도 없이 얼마 전 프로팀과 갓 계약해 시즌 개막을 앞두고 있던 감독을, 계약서에 사인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올림픽대표팀의 감독으로 재차 선임해버려서 그 팀의 선수들과 팬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던 ‘그들’ 아니었던가. 순간 의표를 찔린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조금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그럴리가요…하지만 축구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걱정되는 마음에…’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혹시 선임하셨다는 감독이…’ 총장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이내 단숨에 말을 내뱉었다. “네, 그쪽에서 생각하고 계시는 그 분 맞습니다. 이영후 감독님.” ‘그…렇군요…잘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전화를 끊는 모습이 보이는 듯, 총장은 잠깐 피식거리기도 했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축구가 인생의 전부인 사람들과, 도구인 사람들의 싸움인겐가…’ 이런 마음으로 편히 쉬긴 글렀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시려다 이미 비어있는 컵을 보고는, 총장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이내 컵을 든 채 주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좀 전의 활기찼던 아저씨들은 없어진 학교 운동장에선, 몇몇의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지만, 확실히 예전의 아이들로 넘쳐났던 운동장은 아니었다. 그런 운동장을 바라보는 규식의 시선도 영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게 요즘의 현실이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요새 아이들에게 체육시간이란 게 얼마나 보잘 것 없어졌는지…” 규식의 말에 영후는 어떤 말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었다. 한때는, 공 하나만 있어도 십 몇 명쯤은 순식간에 친구가 됐고, 땀을 흘렸고, 행복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포기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없으면? 자네 혼자 뭔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그런건가? 설마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게. 이런 건, 자네가 혼자 다 해먹던 그 축구판 하고는 달라!” 규식은 자신이 화를 내야 할 상대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영후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축구를 버리도록 만든, 저 높으신 자리에 있는 양반들일 것이기에, 애꿎은 남자에게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마음속에만 품어왔던 불만과 슬픔들을, 왠지 이 남자 앞에서는 숨기지 말고 얘기해야만 할 것 같았고 이미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요!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그저 작은 것부터 바꿔나가면… 그렇게 해 나가면…그러면 언젠가는…” 말로는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을, 한참 어린 후배의 눈을 바라보던 규식은, ‘이 남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남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전부였던 축구를 떠나면서라도, 이처럼 부조리한 현실에서부터 지켜내고 싶었던 자신의 딸 혜미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쉽게는 혜미를 허락할 수는 없었던 규식은 이를 악물었다. “좋아. 그럼, 이걸 끼고, 저기 골문 앞에 서게.” 규식은 가지고 온 가방에서 골키퍼 장갑을 꺼내 영후에게 던졌다. 장갑을 받아 든 영후는 갑작스런 규식의 행동에 뭘 하자는 건지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난, 자네를 막을 수도, 제칠 수도 없지만, 이거라면. 결과는 나도, 자네도 확신할 순 없을걸세. 어때, 해보겠나?” 그제야, 영후는 지금, 규식이 자신에게 승부차기를 제안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혜미를 원하는 것과, 현재의 세태, 그리고 지금의 승부차기가 서로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승부를 제안해 오는 규식의 말에, 영후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기면 되는 겁니까? 제가?” “져 달라고는 하지 않았네.” 골대 앞으로 장갑을 끼며 걸어가는 영후를 바라보며, 규식은 자신이 이제껏 영후에게 품어왔던 한가지 의문이 이제야 풀릴 것이라 기대하며, 페널티 스폿 위에 공을 놓았다. - 쾅쾅쾅!!! “야! 이영후! 안 일어날래!!” 전화도 안받고, 두문불출하는 영후에게, 기사에 대해 설명도 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어제의 경기로 말미암아, 꽤나 걱정이 되는 하연이었기에, 사무실에서 기사를 마무리 지어놓은 후에, 바로 차를 몰고 영후의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와있었다. 하지만, 영후의 집 대문은 당분간은 전혀 열려 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대문을 두드리다 지친 하연은 다시 영후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내 문의 건너편에서 멜로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핸드폰 소리도 나는 데…뭐야, 정말 못 일어날 정도로 아픈 거 아냐?” 하연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어…어쩌지? 이럴 땐? 아 맞다, 우선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테니까…열쇠수리공을… 아냐, 긴급한 상황일지도 모르니까 119를 불러야…’ 문에서 돌아서며, 어디로든 전화 번호를 누르려는 하연의 앞엔 빛이 나는 외모의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하연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코스모스 같은 남희가 서 있었다. “박…기자님?” 잠깐이었지만, 하연과 남희의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은 파르르 떨렸다. 하연은 남희를 본 순간, 영후가 남희를 처음 봤을 때의 그 정신 못 차리던 순간이 떠올라 씁쓸했고, 남희 또한, 그저, 기자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이런 휴일에, 게다가 집 앞까지 와있는 모습에, ‘설마?’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여긴 어떻게…?” 꽤나 도전적으로 입을 연 하연에게, 담담함을 억지로 유지하며 남희도 입을 열었다. “축구단 창단 작업 때문에요…” 서류가 가득 들어있는 비닐백을 들어 보이는 남희를 보며, 조금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하연에게 남희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기자님은 왜 여길…? “아, 저는 저…아, 맞다. 기사! 기사때문에요. 뭣 좀 물어봐야 하는데 이 자식이, 영 전화를 받아야 말이죠.” 하연은 갑작스레 반격을 해오는 남희 덕에 당황하며, 괜히 대문을 발로 한번 ‘쾅!’ 차 보았다. “제 전화도 안 받으시던데…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 아닐테죠?” 꼭 어제 일을 코앞에서 봤다는 투로 말하는 남희 앞에서 하연은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서…설마요! 그럴리가…” 하지만 하연은 결코 괜찮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바로 어제, 그렇게 쓰러지는 영후의 모습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결국, 하연은 남희에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남희에게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괜히 어제 있었던 일을 복기 하다 보니 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울컥하기도 했지만, 하연의 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남희는 물끄러미 대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핸드백을 열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참으로 천상 여자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하연이었다. 하지만, 지금 영후에게 전화는 소용없는 짓이었으므로 하연은 괜히 투정스럽게 말을 했다. “아무리 걸어봐도 안받는 다니까요?” 답답하다는 듯 괜히 남희에게 화를 내며 말을 하는 하연을 뒤로하고, 남희는 전화를 걸었고, 이내 연결되자, 담담한 목소리로, 그러나 전혀 담담하지 않은 상황을 말하기 시작했다. “네, 거기 119죠? 여기 응급환자가 생겼습니다.” - 어느새 진지한 대결을 앞두고 있는 영후와 규식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구경을 하고 있었고, 페널티 스폿 위에 놓여진 축구공을 바라보며, 규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규식이 지켜본 선수시절의 영후는, 언제나 골에 목말라 하는 최고의 골게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중 페널티 킥 찬스가 생길 때면 언제나 다른 선수들에게 양보하곤 했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겸손한 선수’ 혹은, ‘필드골의 사나이’라고 평가했지만, 규식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분명, 킥을 차는 선수가 성공할 확률이 100퍼센트일 수밖에 없는, 골키퍼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룰인 페널티 킥은, 그러나 킥을 하는 선수에게 있어선, 확률을 넘어서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을 안겨줄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각 팀마다 페널티 킥 전담 킥커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가장 심리적 동요가 적은 선수를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즉, 규식이 생각하는, 영후가 페널티 킥을 차지 않았던 이유는, 모든 선수들과 관중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그 순간만큼은, 평소의 ‘그’가 되지 못한 채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했기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약점을 가지고서는 진정한 감독이 될 수 없을 거라는, 꽤나 시니컬한 생각을 규식은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지금의 난, 이 남자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 건지…’ 하지만 규식은 잡생각을 떨쳐 버리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보고는 골대 앞에 장갑을 낀 채로, 어색하게 서있는 영후를 바라보며 공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리곤, 오른발 인사이드로 오른쪽을 바라보며 슛을 날리는 듯 했으나, 같은 방향으로 몸을 쓰러뜨리는 영후의 모습이 보이자, 바로 발목을 꺾어 왼쪽 모서리로 슛을 날렸다. 확실히 발목의 유연성과 힘은 부전여전이었다. 촤~악! 공이 들어간 지점과 반대쪽으로 쓰러져있던 영후는, 그물에서 튕겨 나오는 공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규식은 그런 영후에게 다가와 장갑을 벗겨주며, 말을 걸었다. “어때, 이제 페널티 킥을 차 볼 마음이 생겼나?” 영후는 공을 집어 들고, 규식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제가 이기면, 혜미 꼭 허락해 주시깁니다.” 그런 영후를 조금은 의아한 듯이 바라보던 규식은, 이내 장갑을 끼고선 페널티 스폿에 공을 놓고 서 있는 영후에게 장갑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쳐대며 외쳤다. “주저하지 말고, 차 보라고!” 규식의 말이 끝나자, 영후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더니, 공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멍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는 한 여인에게 고정됐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홀려있는 모든 남자들은, 도대체 어떤 놈이 저렇게 귀엽고, 아름다운 여인의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만든 건지, 자신들의 옆에 있는 여자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잡히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다짐들을 하며, 어쩔 수 없이 멀어져 가는 예쁜 엉덩이를 가진 여인의 뒷모습만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던 수림은, 그저 집에만 앉아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기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마음이 이렇게 아팠던 건 학창시절, 높이뛰기선수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아픔은, 재활을 이유로 시작했던 수영에 빠져들면서 서서히 잊혀져 갔지만, 사람에게서 생겨난 아픔은 또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수림은 막막하기만 했다. ‘어, 여긴…’ 결국, 수림은 어느덧, 자신의 직장인 수영장이 있는 문화회관 앞까지 당도해있었다. ‘그런가…’ 어쩌면, 그때처럼. 수림은 물속에 자신의 몸을 맡기면, 어쩌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나아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ㅤ?! 규식의 오른쪽 옆으로, 손도 대지 못할 만큼의 스피드로, 공이 날아와 골네트를 흔들었다. 선수생활을 접은 지 오래된 규식이었지만, 이 정도의 스피드는 실로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이런 스피드로, 게다가 엄청나게 힘이 실려 날아오는 공을 방향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골키퍼는 단 일 퍼센트의 확률도 기대하지 않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기가 막힌 건, 말은 안 했지만, 영후는 규식에게 핸디캡을 주듯,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찰 것인지 일부러 디딤발로 찰 방향으로 고정해놓은 채 알려주고 찼음에도, 자신은 손을 내밀어보기는커녕 한 발짝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 : 2 입니다~” 즐거운 표정으로 교대하려는 영후의 모습에 규식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장갑을 건네며 영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예?” 공을 차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규식은 영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자네는 선수 시절 동안 페널티 킥을 차지 않았던 건가? 난…난 그게…” “그건…아 맞다~, 혜미, 허락해 주신다면 저도 그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선배님 차롑니다.” 영후는 여전히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페널티 스폿에 다시 공을 갖다 놓으며, 골대로 돌아왔다. “아 참, 이제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선배님의 슛 폼, 이젠 알 것 같거든요.” 순간 웃으며 말하는 영후 덕분에, 규식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뭐? 내 폼을 알 것 같다고? 겨우 두 번 봤을 뿐인데…?’ 어느덧, 구름처럼 모여든, 아이들의 함성을 유도하며 영후는 팔을 벌리고 규식의 슛을 막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착한 119 구급대원들은, 정작 자신들이 구급차에 실려가야 할 정도로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생전,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미인을, 그것도 동시에 2명이나 직접 만나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후 집 앞을 가득 메운 구급대원들은, 일요일임에도 근무를 하는 자신들에게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마터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작업에 몰두한 대원들은, 언제나 이러한 상황이 일상이 되어버린 듯, 신속하고 빠른 조치로, 영후가 사는 집의 대문을 간단하게 해체해버렸고, 이내 그 안에 쓰러져 있어야 할 사람을 구조하러 뛰어들어갔지만, 집이 텅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하연과 남희를 바라봤다. “아, 그게…” 구급대원들보다 더 당황한 하연은 버벅 거리며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으나, 이내 남희의 차분하고도 확실한 답변이 이어졌다. “분명, 핸드폰도 집에 남겨져 있었고, 어제 쓰러졌던 사람 집이라서, 지금도 그렇다고 밖에는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괜히 수고스럽게 만들어드려 죄송합니다.” 천사 같은 여자들의 입에서 죄송하단 말씀까지 듣고 나니, 구급대원들은 힘이 넘쳐나서, 시키지도 않았건만, 다시금 해체했던 대문을 원래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는 기념사진을 미처 찍을 사이도 없이 호출을 한 본부를 원망하며, 서둘러 돌아갔다. “그나저나 이인간은 도대체 어딜 싸돌아 다니는 거야 진짜!” 괜히 짜증을 내며, 바닥에 털썩 앉아버리는 하연과는 달리, 남희는 홀로 사는 남자의 집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수림의 청소덕분에) 깨끗한 영후의 집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또다시 영후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더해졌다. ‘이사람, 나처럼 깔끔한 걸 좋아하는 구나…’ - 2 : 3 규식은 벌써 자신의 기회가 두 번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지만, 몇 번이 남았든, 그건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스스로 공언한 대로, 영후는 규식이 찰 방향을 이미 알아버린 것처럼, 세 번째 규식의 슛을 쉽사리 막아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은 영후의 슛에는 여전히 손도 대지 못했고 말이다. ‘어떻게 된 거지? 내 폼에 버릇이 있던가?’ 영후에게서 정신적 결함을 찾아내려 했던 규식은, 이젠 거꾸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규식은 결국, 공을 크로스바 위로 날려버리는 어이없는 실축을 하고 말았다. 이내 네 번째 슛을 간단히 성공한 영후에게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달려들어,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축하해줬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영후는 늘 그렇듯 언제나 즐거운 모습 그대로였다. “어때 얘들아? 다같이 축구 한 게임 해보지 않을래?” 어느새 모든 아이들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어버린 영후는, 축구공을 멀찌감치 내 차줬고, 아이들은 우르르 공을 향해 뛰어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이내, 영후는 깍듯하게 규식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그제야 자신이 졌다는 걸 실감한 규식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구먼.” 영후도 규식의 옆에 앉으며, 즐겁게 공을 차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즐거워 보이네요, 저 아이들…”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보던 영후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저 같은 불쌍한 운동 선수는 또다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선배님.” “그게 무슨 뜻인가? 자네가 불쌍하다니.” 규식은 언뜻 영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훌륭한 선수가 스스로를 불쌍한 선수라 여기다니… “어쩌면, 저 뿐만이 아니라, 선배님도 마찬가지 일지도 모릅니다.” 불쌍한 운동선수라… 그제야 규식은 영후의 말을 알 것도 같았다. “할 줄 아는 게 운동뿐인 사람들은, 우리들로 족하단 얘긴가?” 이내 영후가 규식을 돌아보며,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지긋이 웃음지었다. 영후가 하고 싶은 말을, 규식도 선수생활 내내, 그리고 그 이후에도 생각하고 있었다. 생활체육이란 없는, 그저 운동을 선택했다면, 공부는 할 수 없는, 그런 이 사회의 시스템이 언제나 불만이었지만, 이미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버린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팀에서든 선택 받지 못한다면, 그 이후의 상황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마는 현실을, 운동을 하는 학생들은 언제나 불안해하곤 했다. 축구선수가 되기를 희망하며, 축구만을 해오는 중,고교 학생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모두 프로선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팀의 수도 부족 했을 뿐 더러, 설령 어떤 팀에 입단한다고 한들, 최고의 연봉을 받을 수 없다면, 길어야 십여 년 남짓한 선수 생활 이후가 더 문제가 되었다. 일반인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생을 지탱할 수 있는 또 다른 진로를 모색해 보기에는, 할 줄 아는 게 축구뿐이었던 이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혜미에게도 축구를 못하게 하신 거 아닌가요?” “하지만, 혜미는 이미 꿈을 찾았고, 그래서 대학에도 다니고 있다고!” 순간 그간의 영후 답지 않게 규식의 발언에 조금 언성이 높아졌다. “꿈이요? 선배님, 누가 그러던가요? 꿈이 아닌 사람은 축구선수를 할 수 없다고요!” 순간 규식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즐거워하면서 축구를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취미로 선수생활을 하면 안 되는 거냐 구요!” 규식은 영후의 외침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즐거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절대 이루어 낼 것만 같은 이남자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으니, 규식도 왠지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이제야 규식이 지금껏 이 남자에게 가졌던 모든 의문이 풀린 것만 같았다. 아, 아직 하나가 남았던가… “그런데, 늘 궁금했었던 건데, 자넨 왜 선수시절에 페널티 킥을 차지 않았던 건가?” “그건…” 심각했던 얼굴에서 갑지가 웃음이 터지려 하는 것을 억지로 참는 듯한 얼굴로 바뀐 영후는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젠가 페널티 킥을 차려고 섰다가 골키퍼의 얼굴을 봤는데요, 세상에. 그땐 마치,꼭 사형을 집행 하는 집행관이 된 기분이더라구요 제가. 그래서, 전혀 즐거울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 뿐입니다.” 영후의 말을 듣고 있던 규식은 벙 쪄있다가, 이내 영후의 머리를 헤드락하며, 꿀밤을 연신 날려댔다. “그렇게 골키퍼가 불쌍하다는 놈이 필드골은 그렇게 무참하게 많이 넣어버렸단 말이냐!!!” “아야야야~!” 꿀밤을 맞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선배를 만나서 그동안 쌓여있던 속내를 털어버린 영후는 정말로, 정말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 언제부턴가, 자필로 쓰는 레포트가 다시 대세가 되어버린 대학교의 과제 때문에, 혜미는 고등학교 때보다도 과제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정신 없이 슈퍼마켓 카운터에 앉아 레포트를 써대고 있었다. 드르륵. “어서오세요~” 레포트를 쓰다가 문소리에 고개를 들어 인사를 하던 혜미 앞으로, 규식과 영후가 마치 오래된 친구였던 것처럼, 나란히 골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규식은 골방 문을 닫기 전에 혜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딸! 가게 문 닫고 좀 들어와라.”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혜미는 잠시 레포트 생각도 잊은 채 튀어 들어가듯, 골방으로 들어갔다. “거기 좀 앉어봐라.” 들어오긴 했으나, 왠지 가볍지 않은 분위기에 머뭇거리며, 규식과 영후 사이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분은 아빠 후배인 이영후 선수, 아니 이제 감독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어쨌든, 이 분께서 너와 함께 축구를 해보고 싶다 하시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혜미는 아빠의 입에서 직접 축구를 해보지 않겠냐는 말이 나온 것도 신기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매료시킨 이 멋진 남자가 자신을 원한다니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할게요! 아빠. 나 할래요!” 마치 어릴 적, 처음으로 원하던 인형을 품에 안고서 즐거워하는 딸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규식은, 왠지 가슴이 짠 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드러내 보일 규식이 절대 아니었다. 이럴수록 호탕해지는 그 였으니까. “좋아, 오늘은 경사스런 날이니까, 당장 삼겹살 파티닷! 딸, 어서 가서 냉동실에서 꺼내와!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걸로!” “네!” 영후는, 다시 가게로 뛰쳐나가는 혜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참 행복해 보인다, 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한 여자가 떠올랐다. 행복해 하는… ‘아차, 수림씨!’ 축구만 보면 환장하는 덕분에,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잠시 머리나 식힐 겸 나왔던 자신의 외출이, 그 여자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후는 규식에게 갑자기 중요한 볼 일이 생각났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이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순간 바보가 되어버린, 부녀는 열려있는 가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로 마주보며, 의아해했다. “야, 딸. 근데 저 녀석, 어느 대학 감독이래냐?” “몰라, 아빠 안 물어봤어?” “그러게…깜빡 했네. 뭐 어떠냐, 대학이 다르면 전학가면 되지.” “전학은, 고등학교 때나 가능한 거거든요, 이 무식한 아버님아!” 그렇게 규식을 몰아붙이면서도 혜미는, 어쩌면 편입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재학중인 ‘한국여대’에는 분명 축구팀이란 게 없었으니까. 9부. 왜, 이제야. 이렇게 빨리 달려본 적이 또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영후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그렇게 달리면서도 자신에 대한 자책 또한 잊지 않고 있었다. ‘바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어떻게!’ 수림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지금의 영후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그렇게 잊어버리고 있던 자신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길 바랬지만, 만일 영후의 바램 그대로 그 자리에서 수림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 또한 몹쓸 짓이었고, 그녀가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 버렸다고 생각하면 또 그것대로 마음이 아팠다. 그랬다. 영후는 지금 마음이 너무나 아파왔다. ‘도대체, 난…도대체…’ 이윽고, 영후는 자신이 사는 원룸에 당도했고, 이내 호흡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건물로 들어가려다, 일층에 주차되어있는 낯익은 자가용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하연…이?’ 점점 상황이 복잡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영후는 한걸음에 2층까지 올라가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영후의 눈엔 꽃 같은 하연과 남희가 앉아있다가 엉거주춤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그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영후야, 너 대체…’ “감독님…” 하연과 남희는 동시에 무슨 말이라도 영후에게 하려 했지만, 곧바로 자신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문 앞에 우뚝 선 채로 집안을 살피는 듯한 그의 행동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랬다. 지금만큼은 영후의 눈엔 그 여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그녀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이내 신을 벗지도 않은 채 뛰어들어와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던 영후는 다시 바람처럼, 뛰쳐나갔다. 이내 영후는, 부디, 그녀가 그저, 조금 삐친 채로, 그녀의 집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지껏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은 3층으로 올라섰다. 자신의 집과 동일한 구조로 된 복도의 끝으로 마지막 대문이 바로 눈에 들어왔고, 영후는 다짜고짜 문으로 다가가 부서져라 두드려댔다. 쾅쾅쾅쾅! “이봐요! 문 좀 열어봐요! 이봐요!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이 문 좀 열어 보라구요!” 하지만 그녀의 마음 같았을 문은 좀처럼 열려주지 않았고, 수림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 영후에겐 이 곳 말고는 그녀를 찾아낼 수 있는 그 어떠한 방도도 없었다. ‘하다못해, 하다못해 전화번호라도 알아뒀어야지 이 바보야…’ 이제 와서 때늦은 후회를 하면서, 영후는 쉬지 않고 소리지르며, 문을 두드려 댔다. 얼마나 두드려댔을까, 이윽고 문이 열렸지만, 수림이 사는 집의 문이 아니라, 옆집의 문이 열렸다. “뉘슈? 누군데 이렇게 다 저녁 때 소란을” 그제야 구원의 빛을 발견한 듯, 영후는 아주머니에게 바짝 다가선 채로 다급히 물었다. “아주머니! 혹시 여기 살고 있는 아가씨 어디 갔는지 아세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너무나도 간절해 보이는 영후의 흐릿한 눈망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주머니는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잘… 근데 아까 전에 나가는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영후는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아주머니에게 고맙단 말도 못한 채 달려나갔고, 요란한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와본 하연과 남희는, 또다시 영후에게 제대로 말도 붙여보지 못한 채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영후를 보며 멍하니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저렇게 정신 없는 영후의 모습도 처음이거니와, 바로 위층에 사는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기에, 계단에 선 채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후는 여전히 달리며 생각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디쯤에 있는 걸까?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 걸까? 괜찮기는 한 걸까? 날 원망 많이 할까…’ 하지만… 하지만, 영후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와 잤던 여자에 대해…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내가…나는 그렇게 무책임한 남자였었나…’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던 영후의 주변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영후는 조금씩 지쳐갔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점점 영후의 걸음의 속도는 현저하게 줄어갔고, 어느덧 ‘뚝’ 멈춰버렸다. 역시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처음 만난 여자를 지금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처음…?’ 이상했다. 수림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다. 영후는 수림을 처음 본 게 아니었다. 어디서 였을까, 그 여자를 만났던 것은… ‘아! 그때 그…’ 그제야, 영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가는 영상이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가 그곳에 지금 있을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영후는 가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가야만 했다. 이미 영후의 머리가 생각을 마무리 하기도 전에, 영후의 발은 다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겨우 자신이 생각해낸 장소에 도착한 영후는, 달려오는 동안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일거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역시 잘못 판단한 것이라 생각했다. 수림을 처음 본 곳은, 바로 이 수영장이 있는 문화회관이 맞긴 했지만, 너무 늦어버린 지금은 모든 불이 꺼져있었고, 문은 닫혀있었다. 허망한 발걸음으로 다시 되돌아 가려던 영후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문화회관의 굳게 닫혀있는 통유리로 된 정문을 매만지듯 밀어보았고, 그와 동시에 영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 열려있었다. 영후가 그저 살짝 밀어보았을 뿐인데 그 문은 마치 영후가 밀어주기를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양 스르륵 열리고 있었다. 영후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모든 조명이 꺼져있는 회관의 어두운 통로를 별 무리 없이 걸어나갔다. 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무릎재활을 위해 오갔던 길이었기에, 어둡건 밝건 그건 영후에게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후의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수림이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에, 갑자기 또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건 싫었기에, 한걸음 한걸음 진정 집중한 채 걸어나갔다. 역시나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당연히 남성용 라커룸을 지나 수영장 출입구까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영후는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걸어나갔다. 그렇게 수영장에 당도했을 때, 영후의 눈에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과는 달리 영후의 입은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행이다…정말로…정말로 다행이다…’ 영후의 시선이 머문 그곳엔, 천정의 유리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유유히 물살을 가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곳에, 수림이 있었다. - 딩동. 토스트를 구우며, 이것으로 간단히 저녁을 때운 후, 반신욕이나 하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초인종이 울리자 총장은, 또 이상한 교회를 믿으라는 등의 팔자 좋은 사람들이 찾아 왔겠거니 하고는 얼굴만 확인하고 없는 척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인터폰이 있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확실히 오늘 같은 일요일에는 차라리 학교에 나가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도 하며, 인터폰 화면을 들여다 본 순간, 총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저 양반이 기별도 없이…” 하루 종일 집에서만 뒹굴 거릴 요량으로, 제대로 씻지도 않았을 뿐더러, 머리도 산발이었고, 잠옷차림이었기에, 총장은 그야말로,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또다시 초인종이 울려댔다. 총장은 통화버튼을 눌러 냅다 소리질렀다. “보채지 말고 기다려봐요 쫌!” 침실로 가려다, 다시 욕실로 뛰다가, 총장은 이내 다시 옷장이 있는 작은 방으로 내달렸다.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여전히 전원이 들어와 있는 인터폰 속 화면엔, 겸연쩍은 모습의 노감독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서 있었다. - 속도 단축을 위해 하는 수영이 아닌, 물과 혼연일체가 된 것만 같은, 게다가 수영복마저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신으로, 그저 이곳 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인어’가 달빛을 받아 더욱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헤엄치는 모습은, 몸 뿐만 아니라, 마음을 치유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물론, 치유하려는 상처의 근원은 다름아닌 영후 자신 때문일 것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렇게나 아름답게 물속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졌다. “수림씨…” 혼잣말하듯, 나직하게 수림의 이름을 불러본 영후였지만, 수림 말고는 아무도 없던 공허한 수영장의 모든 곳으로 영후의 목소리는 퍼져나갔고, 이내 천천히 스트로크를 하던 수림은 조용히 귓가를 울리는 영후의 목소리에, 아직도 그 남자의 허상에 빠져있었나 싶어, 물 속 깊숙이 잠수를 했다. 덧없는 망상일지라도, 지금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조금쯤,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던 참이었는데, 참으로 애꿎은 자신의 집착만 탓하며, 수림은 이내 수영장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하지만 수림이 점점 가라앉을수록 그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맨 밑바닥까지 다다른 수림은 마치 엄마의 자궁 속에 있었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눈을 감았고, 귀를 막았다. 오늘이, 이 순간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그 남자 때문에 괴로운 것은. 그때였다. ‘풍덩!’하는 굉음과 함께, 수림에게로 엄청난 물의 파동이 전해진 것은. 그리고, 작은 공마냥 웅크리고 있던 수림은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수면위로 끌어올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수림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이 남자의 체온이 차가운 물속에서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아니, 물속이었기에 너무나 따뜻하고, 더욱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물속에서도 눈물은 흐를 수 있다는 걸 수림은 처음 깨달았다. “읍파!” 거짓말처럼, 그 남자가 수림의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수림씨 미쳤어요!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에요!” 트레이닝복 차림 그대로, 물에 들어와 자신의 어깨가 아프도록 흔들어대며, 이 공허한 수영장 구석구석에도 스며들 만큼 큼지막한 소리를 질러대는 이 남자 때문에, 수림의 눈에선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왜… “왜…이제야 온 건데요…왜…왜…” 물속에서 때려대는 수림의 손은 약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고 있는 영후의 가슴은 그렇게도 아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림이 두들겨 댄다면, 이 밤이 다 할 때 까지 맞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영후가 수림을 서서히 품에 안은 건 결코 아파서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마음이 아파서 안았을지도… “영영…안 오는 줄로…나한텐 영영 안 오는 줄 알았잖아요…흐흑…” 영후의 품에 꼭 안긴 채, 수림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듯, 말을 하고 있었고, 그런 수림의 안쓰러운 입술을 영후는 이내 자신의 입술로 보듬어주었다. 이윽고 영후의 혀가 수림의 입안으로 들어가, 미처 보듬어주지 못했던 그녀의 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뛰쳐나간 영후를 붙잡지도 못한 채, 두 여자는 은근히 서로를 견제하며 ‘그래도 저 여자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저렇게 영후가 다급하리만치 찾아 다니는 사람이 ‘여자’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금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후…” “에휴…” 조용하던 공간에서 갑자기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오자, 하연과 남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식은 늘 이런 식이라니까요. 뇌 구조가 단순해서 그런지, 축구 빼면, 그 밖에 다른 건 하나 생각하기도 바쁜 놈이에요.” 남희는 하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 여자는 영후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는 걸까? 단순히 기자이기 때문에? “그런데…박기자님은 감독님하고는 어떻게…?” “에? 아, 모르셨구나. 영후랑 저는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어릴 적부터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자란 사이라서요. 제가 이렇게 막 말하는 게 남희씨가 듣기에는 좀 이상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왠지 무척 친숙해 보이셔서…” 하연의 설명에, 왜 그랬는지 남희는 잠깐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이내 하연이 부러워졌다. 그 남자의 어린 시절은, 지금 마주앉아있는 저 여자만의 것이 되어버린 거니까. 그건 지금의 자신이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완벽한 패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남희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지금의 하연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늘 보아오던 사이였기에, 가끔씩 남자가 여자에게 거는 장난질을 치며 개구지게 구는 적은 있었지만,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자신을 여자로 봐준 적은 절대 없었던 영후였기에,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나, ‘여자란 이런 것이다’, 라며 영후의 혼을 쏙 빼버린 남희가 하연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 같아선, 영후에게 보인 자신의 유년기 시절의 모습을 삭제할 수만 있다면, 과감히 'del'키를 누르 듯 삭제하고픈 하연의 심정이었다. “어땠나요? 어릴 때의 감독님은?” 또다시 한숨을 내쉴 뻔 했던 하연을 살린 건 남희의 조심스런 질문이었다. 하필이면, 영후의 어린 시절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게 바로 자신의 최대의 적(?)인 남희였기에 조금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질문으로 인해 영후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던 하연의 얼굴엔 언제 그랬냐는 듯 살포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지금도 잘생기긴 했지만, 그때는 정말 귀여웠어요. 아마 남희씨도 봤다면 너무 예뻐서 꽉 깨물어주고 싶어졌을걸요? 아쉽네요. 그때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어서…” 약 올리듯 이야기 하는 하연 덕분에, 괜히 또 남희는 하연이 더 부러워질 뻔했다. “아 맞다. 어딘가 찾아보면 있을지도 몰라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응?’ 책장을 뒤지기 시작하기도 전에, 축구관련 서적들 사이로, 그것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묘한’ 책들이 하연의 눈에 들어왔다. 영어회화교본과 이탈리아어회화교본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전에 영후가 이적을 준비하며 책을 구입했던 것도, 또 개인 교습까지 받아가며 공부했었던 것도 하연은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하연의 눈에 들어온 책은 그때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오래되어 보이는 다른 회화 책들 사이에 꽂혀있는 그 책들을,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에 하연은 조심스럽게 그 책을 꺼내 살펴보았다. 짐작대로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고, 발행일자도 겨우 작년 말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영후 너…’ 괜한 것을 찾아내버린 것 같아, 하연의 머릿속은 갑자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거…일거 같은데요?” 잠시 멈춰있는 하연의 옆으로 어느 샌가 책장 뒤지기에 동참하고 있던 남희가 하연보다 먼저 ‘보물’을 찾아낸 것 같았다. 하연은 자신의 묘한 기분을 남희가 눈치챌까 싶어 다시금 회화 책들을 재빨리 제자리에 꽂아두고는 남희가 뽑아 든, 먼지가 폴폴 쌓여있는 두꺼운 책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남희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빙고.” - 물 밖으로 목만 내 놓은 채, 영후와 수림은 나란히 앉아있었다. 같은 물속이었지만, 좀 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꽤나 찬 물속에 오래 있었던 수림을 위해 영후가 마련한, 큰 수영장보다는 한참이나 작은 남자 사우나 실의 온탕 속이라는 것이었고, 좀 전과 같은 점이라면, 수림은 여전히 알몸이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옷이 몽땅 젖어버렸던 영후도 수림과 같은 알몸이었고.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한, 한결 몸이 따뜻해진 두 사람의 표정은, 천국 어딘가 즈음에 도착해 있는, 이른바 '완벽히 나른한' 모습을 연상시켰다. “바보 같았죠? 나…” 넌지시 입을 여는 수림덕분에, 영후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는걸요?” “그치만…나빴어요, 영후씨도…” 어두웠지만, 수림의 눈이 가볍게 영후를 흘기는 모습이 눈에 선한 듯 했다.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근데 오늘 뿐만 아니라 가끔씩 이러니 더 문제죠.” 수림은 왠지 알 것 같다는 얼굴로 영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둠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영후였다. “왜…요?” “축구 하러 간 거죠?” “어떻게…알았어요, 그걸?” “왠지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혼자 영후씨 방에서 있는 동안, 가만히 있기엔 너무 억울한 것 같아서… 주인한텐 미안하지만, 막 뒤져봤거든요.” 그 뒷 이야기는 굳이 수림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축구와 관련된 것 이외에 또 자신의 방에서 또 무엇이 나오겠는가. “그래도, 여자 때문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 해버린 거 있죠?” 수림의 엉뚱함 덕분에 영후는 또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순간, 잠깐 동안이었지만 자신의 방 곳곳에 붙어있는 신문기사 하단마다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어느 여기자의 이름을 떠올려보며,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역시…친구…일 뿐인 건가…’ 조명하나 들어오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음에도, 행여 자신의 알몸이 보일까,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겨 안은 채 앉아있던 수림은, 어느새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을 풀어, 영후의 팔에 팔짱을 끼며, 머리를 기대어왔다. 이윽고, 수림의 팔 너머로, 뭉클한 부드러움이 영후의 팔뚝에 전해졌다. 주책스럽게도, 그와 동시에 영후의 그것은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영후는 빨리 다른 얘기를 꺼내며 자신의 그것이 다시 줄어들길 바랬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을 어둠 속에서, 괜히 수림처럼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기며 영후가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알았나요?” 영후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언젠간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수림이었지만, 막상 받고 나니 괜히 도둑질하다 들킨 가슴처럼, 심장박동수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건…” 차마, 술김에 당신의 집에 잘못 들어가, 섹스를 했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야 반해버렸다,라고 하기엔 수림의 성격은 그리 대범하지 못했다. 물론 이 남자에게 거짓말을 하기란 너무나 싫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이야기 하기에는, 영후가, 아니 자신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수림은 거짓말을 택해야 했다. “패…팬이요…처음부터 팬이었어요.” 겨우 ‘팬’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면서도 더듬거렸을 만큼, 수림은 긴장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영후는 수림의 대답이 그럴 듯 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팬하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도.” “이렇…게요?” 이 남자가 말하는 ‘이렇게’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 수림은 왠지 궁금해해선 안될 것도 같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입 밖으로 ‘궁금증’은 튀어나와버렸다. “아, 그건…” 가끔씩 천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만이 들리는, 어두운 남성 사우나의 온탕 안에서, 수림은 영후의 입에서 그 다음 말이 나오길 기다리며, 팔짱을 끼고 있던 영후의 팔뚝에 조금쯤 더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 막 세 번 째 손님을 보내놓고, 윤지는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입고 있던 위에 붉은색의 나이트가운만을 걸친 채, 잠시 휴게실 침대에 누워 그간 모아놓은 돈이 입금된 통장의 잔액을 뿌듯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 손에 들고 있는 수표 한 장과 지폐 몇 장을 보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언제 엄마 아빠를 찾지……?' 어제는 늙은이들만 득실대더니, 그나마 오늘은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지명을 해준 덕분에, 몸은 즐거웠지만, 그 대신에 부수입은 생각만큼 짭짤하지 못했다. 확실히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세상살이였다. ‘이 생활, 그만둘 수 있을라나…’ 윤지는 돈을 통장 사이에 넣은 후 다시 작은 파우치 안에 넣어두며, 벌러덩 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돈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갑작스런 부도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엄마, 아빠를 찾아나서기는커녕, 우선은,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윤지의 어린 생각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윤지가 할 수 있는 직업군은 고작, 커피ㅤㅅㅛㅍ이나 편의점에서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게다가 시급은 국가공인 최저 임금이거나 그보다 더 적게 제시하는 곳 투성이였다. 고작 한 시간에 삼 천원 남짓 벌고자, 그것에 투자 해야 하는 시간이 윤지에게는 너무나 아까웠다. 그만큼, 윤지는 절박했고, 또 너무 철없는 나이였던 것이다. 결국, 인터넷을 통해, 처음으로 접한 고액의 아르바이트가 바로, 화상채팅 사이트였지만, 쉽게 들어오는 돈은 쉽게 빠져나가기 마련이듯, 결국 점점 씀씀이가 헤퍼진 윤지는 점점 강도가 높은 아르바이트자리를 구하게 되었고, 흘러흘러 결국은 지금의 안마 방에서 2차 영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나마, 이곳은 일반손님 대상이 아닌, 고위층이나 재력가들의 휴식처로 유명한 곳이어서, 윤지가 불합리한 대우를 받을 곳은 절대 아니었지만 이 일을 계속 하면 할수록,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퀭한 게, 허탈감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목적이었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부모님을 찾는 것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지 오래였고, 게다가, 날이 갈수록 윤지 나이또래의 여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남자들을 향한 냉소’가 윤지도 모르게 서서히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아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돈, 그게 없다면… 난 아무것도 아닌 걸…' 하지만, 사막 같은 윤지의 가슴을 단번에 오아시스로 바꾸어버린 한 남자가 윤지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기에, 이제와서야 윤지는 지금의 이 생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그 늙은 돼지 입에서 왜 그 남자의 이름이 나왔을까…? 부탁은 또 뭐고…?’ 고민을 하던 와중에 갑작스레, 윤지의 머리에서 어제의 그 충격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런 인간 말종들의 입으로 함부로 불러대서는 안될 것 같은 남자의 이름을, 그것도 모자라 이를 갈면서 내뱉다니… 아무래도 윤지는, 자신이 짐작조차 하지 못할 엄청난 일들이 곧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학교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까나?’ 우연이든 뭐든, 영후를 다시 만나게 되면 필히 이야기 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윤지였다. 우우우우우웅~.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윤지는 영후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다가 깨어났다. ‘어? 얘가 왜 이 시간에…’ 윤지는 핸드폰을 든 채로, 자신이 들어와있는 휴게실의 문이 잘 잠겨있는지 확인하고, 혹시나 밖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지나 않는지 귀를 기울여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으응.” ‘기집애. 뭐 하느라 이렇게 전화 늦게 받니?’ “어, 뭐. 그냥 이것 저것 하느라…근데 왜?” ‘에고, 목소리가 한가한 거 보니까, 넌 벌써 레포트 다 끝냈나보구나? 난 아직도 반이나 남아서 오늘 잠이나 잘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야.’ 윤지는 그제야, 내일 제출할 레포트에 대한 생각이 났다. 하지만 이내 담담해지는 얼굴로 ‘한번 대주면 그만이지 뭐.’하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뭐라고 그랬니?’ “아니야 암것두. 근데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했어?” ‘에? 우리가 뭐, 시간 정해놓고 전화 해야 하는 그런 사이니? 이거 어째 듣기 좀 거시기하다?’ “그런 말이 아니라…” 윤지는 조금 난감했다. 어느덧 남자불감증이 자리잡은 자신에게 생겨버린, 여자 같지도, 그렇다고 남자 같지도 않은 중성적 매력을 지닌 이 아이 때문에, 그나마 학교 생활이 즐거웠던 윤지였었다. 친구 이면서도, 애인 같았고, 그래서 더욱더 단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베스트프렌드’의 전화를 공들여 받을 수 없는 지금의 이 장소와 상황이 너무 불안했기에, 그리 길게 통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윤지의 친구는 무슨 할말이 그리도 많은 지 쉽사리 전화를 끊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너 알지? 우리 아빠가 왕년에 한 축구 했던 거? 근데 오늘 오전에 아빠 후배라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말야…’ 똑똑똑. 그저 작은 노크소리였지만, 윤지에게는 마치 천둥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렸던 것 같았다. 윤지는 간이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며,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혜미야, 미안. 나 지금 급한 볼일이 있어서…나중에,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알았지? 미안!” 전화를 끊고, 겨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윤지는 이내 문을 열었다. 그곳엔 웨이터 복장을 한 남자가 정중한 표정으로 윤지에게 말을 건넸다. “11번 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알았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 남자를 돌려보내고 윤지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미안. 미안 혜미야.’ - 갑작스레 끊긴 전화를 들여다 보다가 혜미는 조금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며, 한참 작성하던 레포트를 계속 써내려 가려다가 문득,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늘 아빠 몰래 나가서 일요일마다 뛰곤 했던 조기 축구시합에서, 꽤나 이상한 아저씨를 만난 일부터 해서, 그 남자가 보여준 멋진 중거리 슛과, 그 남자를 본 아빠의 요상한 행동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스카우트 하고 싶다더니만 이내 허둥대며 뛰쳐나간 것 까지… 어느 것 하나 쉽게 이해될 만한 것들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아빠는 내가 축구 하는 걸 싫어하신 게 아니었어!’ 언제나, 아빠가 바라는 얌전한 딸이 되어드리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리곤 했었는데, 이제야, 아빠의 진심을 알 수 있었기에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아빠의 후배라는 남자, 바로 ‘이영후’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혜미가 걱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 윤지 때문이었다. 입학 당시부터 선머슴 같던 자신을 멀리하는 다른 여자애들과는 달리, 서슴없이 대해주는 윤지가 혜미도 참 좋았다. 물론 아직까지 경험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마치 애인처럼 자신에게 선물을 사주기도 했고, 같이 밥을 먹어주고, 또 언제나 강의실에서 옆자리를 미리 맡아두는, 그런 윤지에게, 자신이 다른 대학으로 편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 해야 한다는 사실이, 혜미는 걱정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회를 혜미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축구…계속 하고 싶은 걸…’ - 언제 그랬냐는 듯, 총장은 평소의 옷차림을 한 채,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노감독에게 차를 내어왔다. 찻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마치 남의 집에 와있는 듯 불편하게 앉아있는 그의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는 것도 같았다. “갑자기 웬일이에요, 이 시간에” 그럼에도 늘 반갑고 좋은 기분을 숨긴 채 이렇게 쌀쌀맞게 대하고 있는 자신이 싫어지는 총장이었다. “걱정이 돼서… 한 번 들러봤소.” 총장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걱정이요? 당신이 날? 40여 년 전에도 안 해보던 걸, 왜 지금에 와서야 하려고 하는 거죠?” 총장의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노감독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것도 같았다. 그런 노감독을 좀더 다그치려다 총장은 그만 두었다. 어차피, 이 남잔 그런 남자였으니까. ‘그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조금도…’ 그 때. 총장은 50년 가까이 지난 자신의 유학시절을 돌이켜보았다. 그때의 총장은 지금보다 한참이나 어렸던, 실로 아름답기만 한, 꽃 같은 나이였었다. 하지만, 배움에의 열정이 너무나 컸던 탓에, 그녀는 남들은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할만큼 어려웠던 시기에, 그나마 부모를 잘 만난덕에, 그렇게 유학이란 것도 해 볼 수가 있었다. 당연히 그런 그녀였기에 어지간한 남성따위는 그녀의 안중에도 들지 못했었었다. 하지만, 어느 날이었던가, 강의시간이 조금 늦어 열심히 뛰어가던 자신의 눈에 꽤나 당차 보이는 한 남자가 들어왔었다. 영국의 한 대학 운동장에서, 백인들과 뒤섞여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던 작은 키의 황인종이 그녀의 가슴에 들어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때만해도, 인종차별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황인종인 자신들은 늘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야 했었는데, 처음 본 그 남자는, 축구종가인 영국의 땅에서, 그들만의 운동인 축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과 어울려 같이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때의 총장은 마치 무엇엔가에 이끌리듯, 그 남자에게 다가갔고, 만났고, 사귀었었다. 어쩌면, 고국에 대한 향수로 그 남자를 자꾸 만나게 되었는지도 몰랐지만,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그 남자에 매료되어서 총장은 결국 그 남자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됐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야 총장은 깨닫게 되었다. 그 남자에게 자신은 언제나 두 번째밖에 될 수 없었음을. 노감독이 내려놓는 찻잔의 울림 소리 덕에 총장은 옛 생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 바닥은 그리 넓지가 못하다오.” “뜬금 없이…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에요?” 노감독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다시금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학교로는…졸업하는 고교선수들을 입학시킬 수 없을 거란 얘기를 들었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총장은 이내 별것도 아니라는 투로 맞받아쳤다. “어차피, 그런 건 내년이 되어야” “내년도, 내 후년도, 불가능할거란 얘기요.” 침통하게 고개를 숙이는 노감독을 바라보며, 총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그런…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가능하오. 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토록 할테지.” 분하지만, 총장은 노감독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생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노감독이 아니던가. 한국의 축구발전을 위해, 영국과 독일 등에서 청춘을 보내며, 선진 시스템과 축구 이론 등을 섭렵해 진정한 감독의 소양을 다져왔던 그를, 협회와 연맹은 외면했고, 무시했고, 핍박했었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었으니 총장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낮에 걸려온 ‘협회’에서의 전화를 이제야 실감할 수 밖에 없는 총장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후…나라도, 이럴 땐 방법이 없다오.” 잠시 말이 없던 두 사람은 이내 한 사람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영후. 노감독은 협회와의 악연에 치가 떨렸지만, 그럼에도 지금 자신이 그녀석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더욱 미안해졌다. 게다가, 다시 이 ‘더러운’ 판에 그 녀석을 끌어드린 것도 자신이 아니었던가. 무책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그녀석’을 믿어보는 수 밖에는. '그 녀석이라면, 과연 어찌 할런지…' - “훗, 정말 귀엽네요.” 영후의 어릴 적 사진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들여다보며, 남희는 비록 오늘은 감독님과 함께 있을 순 없었지만, 기대하지도 않았던 수확이 있었음에 감사했다. 한 남자의 어릴 적 모습이 이렇게도 귀여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밤잠은 설칠 것도 같았다. 그런데, 앨범 몇 장을 넘긴 뒤로는, 부쩍 사진 장수도 줄어들었고,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단체사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이도 들쑥날쑥해 보이는 게 그저 같은 또래와 찍은 사진은 아닌것 같아 보였다. “근데…” 조금 의아해하는 남희의 시선을 따라가본 하연은 이내, 남희의 궁금증에 어렵지 않게 답을 해 주었다. “초등학교 어느 때더라, 영후 홀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딱히 다른 친척도 없었나 봐요. 바로 고아원으로 간 걸 보면…” "그럼, 아버님은…?" "글쎄요, 그건 저도… 언젠가 물어본 적이 있긴 했었는데, 얘기 안해주더라구요." 별 일 아니라는 듯, 꽤나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하던 하연이었지만, 남희는 왠지 하연이 안쓰러워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구나…’ 하연의 설명을 듣고 나니, 영후의 웃고 있는 사진들 모두가 어쩐지, ‘나는 괜찮다’라고 영후 스스로에게 지어 보이는 미소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슬픈 미소였다. 이제야 비로소 그 남자의 미소를 읽을 수 있어지자, 남희는 더 이상 사진을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조심스레 앨범을 덮는 남희를, 하연은 조금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그 보다는, 다시 뛰쳐나간 영후가 언제쯤이나 되어야 돌아올지 궁금했다. 자신 혼자 왔더라면, 이렇게까지 기다릴 이유도 없었을 텐데, 남희가 돌아갈 생각도 없이 이렇게 계속 눌러 앉아 있다 보니, 하연 혼자서 선뜻 먼저 가보겠노라며 나설 수가 없었다. 말만한 남녀 둘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한 방에 있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으이구, 영후 이 자식 때문에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여전히 얌전하게 앉아있는 남희 모르게, 영후가 돌아오면 우선 몇 대 패주고 봐야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는 하연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림은 여전히 따뜻한 물 속 어딘가에서,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버린 정지된 시간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쯤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지구의 중력도 방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물 속에서, 영후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것 말고는 그 무엇도 중요치 않았다. ‘이 남자만 있어준다면…’ 수림은 행여 떨어질까, 다시금 영후의 팔을 꼬옥 붙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영후의 팔은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는 손에서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수림의 반대편 어깨에 안착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영후의 팔도 좋았던 수림이었지만, 이 남자의 넓은 가슴에 기대는 것은 더 좋았다. 그 남자의 가슴에 귀를 기울인 채, 남자의 심장소리에, 자신의 심장소리를 맞춰보는 것도 정말 정말 좋았다. 한참을 말없이 영후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수림에게, 여전히 어깨에 두른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 선을 쓰다듬으며 영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어떻게 해야 하는지…솔직히 잘은 모르겠지만…” 말을 잠시 멈춘 영후는, 부드럽게만 안고 있던 팔에 조금은 힘을 주어, 수림을 안았다. 그와 동시에 그렇게 따뜻했던 물속이었건만 수림은 조금쯤 떨었던 것도 같았다. “게다가, 보통의 연애 순서하고는 다르게… 너무 뒤죽박죽이 돼버리긴 했지만…” 그녀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건지, 영후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의 심장은 서로가 경쟁하듯 점점 빨리 뛰고 있었고, 영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수림은 심장소리 때문에 영후의 말을 놓치게 될까 싶어, 조금쯤 얼굴을 들어올렸다. “수림씨만 괜찮다면, 우리…한 번 사귀” 영후의 입에서 ‘사귀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림은 보이지도 않았을 영후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며 와락 달려들었다. 순간 두 사람은 깊지도 않은 물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갔고, 겨우 물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혹여 떨어질까 꼭 달라붙은 채,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과 함께 영후의 입 속으로 건너온 수림의 혀는 이내, 영후의 혀에 매달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노라며, 연신 안겨왔고, 그런 수림의 혀를 영후의 혀는 다정스럽게 보듬어 주었다. 죽을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 같던 키스가 잠시 멈추자, 영후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아직, 아직 허락도…” “예스에요! 예스! 내 대답은 언제나 예스라구요!” 대답을 하는 동안 떨어진 것도 아쉽다는 듯, 수림의 입은 다시 격렬하게 영후의 입을 찾았고, 어느덧 이런 수림에게 적응이 된 영후는, 그녀의 여린 듯, 부드러운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덧 수림은, 그의 손길에 자극을 받았는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영후의 이마와, 코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더니, 이내 영후의 귓속으로 혀를 넣어주었다. ‘읍!’ 갑작스런 수림의 행동에 잠깐이나마 놀라던 영후였지만, 어느새 수림의 혀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귓속 이곳 저곳을 다니며, 연신 ‘사랑한다’는 말을 남겨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린, 그 어떤 말보다 더 확실하고, 자세하게 들려왔다. 이에 작은 보답을 해주고 싶었던 영후는, 솜털보다 가벼운 그녀를 살짝 들어올려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그리곤 자신의 입과 나란한 높이에서 촉촉한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가슴을 살며시 베어 물었다. “아…” 사랑하는 남자의 입 안에, 지금 수림의 가슴이 물려져 있었다. 그 남자의 입안에서, 그녀의 유두는 연신 흡입되었다가, 깨물렸다가, 혀로 인해 마사지되었다. 멈추지 않는 짜릿한 느낌 때문에, 수림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두 잊어버린 채, 자신의 가슴에 묻혀있는 남자의 얼굴을 한없이 끌어안으려고만 했고, 천정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는 그 작은 입으로 쉬지 않고 신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이미 남자의 마음을 알아버린 수림은 너무나 좋아 죽을 지경이었지만, 영후는 달랐다. 한동안 수림의 가슴이 잘 익은 복숭아마냥 새빨갛게 변해버릴 정도로 애무하던 영후는, 이내 그것에는 흥미가 다 했는지, 수림을 살짝 들어올려, 탕의 테두리에 앉혔다. 그러자, 여전히 물속에 있는 영후와는 달리 수림의 몸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런 수림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듯, 영후는 짧은 입맞춤을 선사해 주었고, 수림의 입술에서 미처 그 느낌이 사라지기도 전에, 수림의 감춰진 또 다른 ‘입술’에 그 남자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었다. “흑…” 물속에 있었기 때문인지, 영후의 정성스런 애무 덕분인지는 몰라도, 수림의 보지는 이미 촉촉하다 못해 흥건할 정도로 젖어있었고, 그랬기에 더욱 예민해져 있던 보지의 속살은, 영후의 혀가 침입하자, 더더욱 애액을 분출하며 젖어들어갔다. 하지만 영후의 혀는 젖어있는 모든 것들을 닦아내 줄 것처럼, 보지의 곳곳마다 혹시 놓칠까 걱정하듯 열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너무나 격정적인 느낌에 수림은 이 남자의 머리를 조금쯤 떼어놓고 싶기도 했지만, 그녀의 본능은 무서우리만치 남자의 머리를 더욱더 끌어안으라고 재촉했고, 결국 본능에 지고 만 수림은 또다시 영후의 머리를 숨도 못 쉴 만큼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로 잡아당겼다. 이미 ‘창피’란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다리는 영문자 M의 모양을 한 채 한껏 벌어져 있었고, 그런 수림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마치 목이 마른 사슴이 그러하듯, 영후는 열심히 혀를 놀렸다. “아흑!...아…이…이제…으윽…와요…어서…어서!” 언제까지라도 계속 해줄 수 있었던 영후였지만,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물속에서 일어나 눈가에서 기쁨의 눈물이 촉촉하게 빛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섰다. 또한 어둠 속에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 윤곽만으로도 엄청난 크기의 자지가, 수림의 보지를 바라보며 ‘꺼떡’거리고 있었다. 경외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영후의 자지를 바라보던 수림은 손을 뻗어, 자신의 보지로 인도하려 했으나, 눈이 달린 것도 아니었을 진데, 영후의 자지는 아무런 인도자의 도움도 필요 없이, 수림의 보지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앗!” “흡!”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이 끊길 것 같은 신음을 지르며 바로 하나가 되었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서 몸이 떨어져, 영후에게 매달려 있는 수림이었다. 보통의 남자였으면 쉽사리 할 수 없었을 자세였지만, 영후는 그녀의 동그랗고 예쁜 엉덩이를 부드럽게 손으로 받친 채, 자신의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읍…” 조금씩 빨라지는 영후의 삽입속도에, 겨우 영후의 몸에 매달려 있던 수림이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키스 뿐이었지만, 이 남자는 수림의 키스를 결코 등한시하지 않았다. 열심히 자신의 보짓속을 들락거리는 자지와는 달리, 영후의 혀또한 부드럽게 수림의 혀를 감싸안았고, 수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려 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흥분의 고점에 다다라, 그저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고, 영후의 혀는 그런 수림의 입술을 지나 가슴에까지 다다라, 그야말로 알수없는 열락의 길로 안내해주었다. 어느덧 점점 수림의 보지 속은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영후의 자지 또한 달아오르면 달아오를수록 점점 팽창하고 있었다. “앗! 아앗!” 순간 단발마의 비명이 수림의 입에서 터져나왔고, 영후의 자지는 수림의 보지 속에 들어가 있었던 죄로 흠뻑 애액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그제야 영후는 여전히 발기해있는 자신의 자지에게 잠시만 멈출 것을 명했다. 그리곤 자지를 빼지 않은 채 수림을 안아 든 채 서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한 번의 절정을 맞이했던 수림의 보지는, 그러나, 여전히 영후의 죽지 않은 자지가 너무나 대단해 보였고, 게다가 스스로 조금은 식어버렸다고 생각했으나, 영후의 배려(?)로 다시 따뜻한 물 속으로 들어온 지금, 새롭게 후반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천천히 그러나 야무지게, 영후의 자지를 꼭 물어주었다. 그러자, 영후의 자지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멈췄던 움직임에 다시 발동을 걸기 시작했고, 이에 나는 ‘철썩’소리가 물이 살에 부딪혀서 나는 소리인지, 살이 물에 부딪혀서 나는 소리인지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하게 사우나 실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물이 그들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는지, 그들의 열기가 물을 더 뜨겁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원체 덥고 습했을 그곳이, 처음보다도 훨씬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10부. 새벽녘 몇몇 연구실에만 간혹 불이 켜져 있는 한국여대의 건물들 사이로, 창마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야 할 총장실엔, 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몇몇 블라인드가 조금 올려진 틈으로, 자리에 앉아있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는 그림자 하나가 언뜻 보였다. 학교에 나와 있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총장은 해가 뜨기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새벽 내내 뜬 눈으로 지새운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학교로 나와 영후를 호출하고만 싶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바라본 벽시계는 아직 새벽 5시가 되기 전이었다. 총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의 덮개를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 하지만 아직은, 그에게 전화를 걸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기만 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지금까지의 모든 걸…?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도…?’ 자꾸만 노감독의 침통한 얼굴이 떠올라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는 총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얼굴을 영후로 하여금 또다시 짓게 만들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마음과는 달리 뿌연 새벽안개가 낮게 깔려있는, 푸르른 잔디가 그득한 운동장의 모습에 총장의 마음은 먹먹해져만 갔다. - 같은 시각. 영후 또한 총장과는 다른 이유로 이미 잠에서 깨어있었다. 어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그저 꿈만 같았지만 혹시라도 또 자신이 사라질까, 자면서도 다리까지 이용해 꼭 끌어안고 있는 수림 덕분에 영후는 그나마 현실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있었다. 자는 데 불편해 보일 정도로 영후를 꼭 끌어안고 있는 수림은, 그러나 꽤 깊이 잠들어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간의 고민들로 인해서 잠들지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작게 코까지 골아가며 꿈나라를 여행 중이었다. 행복한 얼굴이란 이런 얼굴이구나 싶은 영후였지만 왠지, 지금 자신의 마음은 어떤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행복한건가…’ 같은 무늬가 계속되고 있는 천정의 벽지들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보던 영후는, 이내 조심스럽게 수림의 팔과 다리를 편안하게끔 옮겨주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는 수림의 옷들을 한편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도 수림이 잠에서 쉽게 깨어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이자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채 욕실 쪽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영후였다. -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윤지는, 옷도 벗기 전에 늘 하던 대로 가방에 들어있는 캠코더에서 메모리를 꺼내고는 PC의 하드디스크로 옮겨놓기 시작했다. 단 하루 치였음에도 꽤 많은 용량의 파일이 복사되고 있었다. 캠코더를 구입하고부터 윤지는 늘 소소한 것들조차 영상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었는데, 처음엔 그저, 오랜시간동안 자신을 보지 못한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그래서 행복했었던 예전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게 되는 날이 오면, 거실 소파에 앉아 엄마가 깎아준 과일을 집어 먹으며, 옆에 앉은 아빠에게 어리광도 부려보고, 커다란 티비를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엄마와 아빠의 딸이 이렇게 지냈노라고, 추억처럼 웃으며 볼 날이 올 거란 기대감으로 한 컷, 한 컷 담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이런 상상도 못했던 생활을 해나가다보니, 왠지 스스로를 위한 보험을 준비해 둬야 할 것 같은 본능에 언제부터인가 윤지는 자신이 받는 손님들의 모습들도 빼놓지 않고, 항상 가방에 숨겨둔 핀 홀 렌즈를 이용해 찍어두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아왔던 것이고. 이윽고 년도와 월, 그리고 날짜로 폴더를 구분 지어 놓은 폴더로의 복사가 끝나고 나서야, 윤지는 쇼핑백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고는, 그 안에서 반짝거리는 ‘아이팟’을 꺼내 얼마 전 촬영했던 ‘영후의 복귀전’ 시합을 하드디스크에서 찾아 아이팟으로 복사하기 시작했다. 이미 인터넷에는 꽤나 유명한 동영상이 되어버렸지만, 분명 기계치인 혜미는 절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이 동영상을 보여주고 싶은 윤지였다. ‘이거 받으면 좋아하겠지? 크크.’ 졸리긴 했지만 선물을 받고 좋아할 혜미의 모습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지는 윤지였다. - “우리, 한 번 사귀어볼래?......아이씨! 이게 아니잖아! 좋아, 좀 더 눈을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영후야, 우리…한 번 사귀어볼…으으…안돼! 못하겠어!” 기사를 작성하다 말고, 그 새벽에 갑자기 하연은, 책상 한 켠에 놓여진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이른바 ‘고백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후보다 더 선머슴 같기만 한 하연에게 그런 연습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애써 조신한 여자의 그것처럼 변해보려고 하는 자신의 낯선 표정을 거울로 들여다보고는 하마터면 구토가 나올 뻔도 했다. ‘젠장, 왜 하필 그런 걸 봐 가지고 는…’ 하연은, 영후의 책장에서 발견한 회화 책들이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연이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영후는 어느덧 또다시 축구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열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명, 이대로라면 영후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짓을! 닭살 돋게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거울을 집어 든 채, 던져 버리고 싶은 욕망과 싸우며 팔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하연이었다. - “으그그그~ 아오, 겨우 끝냈네.” 혜미가 겨우 레포트를 끝내고 기지개를 펴며 탁상시계를 보니 아침 6시에서 약 10분이 모자랐다. 제법 피곤했을 법도 했을 텐데 역시 청춘 같은 때 인지라 밤을 새고도 혜미는 여전히 쌩쌩했다. 물론, 조금 눈을 붙였다가 학교에 갈까, 하고도 생각해보긴 했지만, 침대에 몸을 뉘어도 왠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그림 같았었는데…’ 혜미는 자신도 모르게 어제 조기 축구에서 영후가 보여준 멋진 중거리 슛을 떠올리고 있었다. 동작도 크지 않았고, 빨랐으며, 게다가 부드럽기까지 했던 그 슛 폼은, 그대로 교본과도 같았기에 절대로 혜미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였었나…?” 어느덧, 책상의자에서 내려와 공도 없는 방에서, 영후의 폼을 떠올려보며 천천히 공을 차는 동작을 해보던 혜미는 아무래도 여기선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옷장에서 주섬주섬 트레이닝 복을 꺼내 갈아입고는, 학교에서 갈아입을 옷과 책가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늘 아빠에게 혼날까 감춰두기만 했었던 축구공을 꺼내 들었다. ‘조금 일찍 등교하는 것 뿐 이잖아?’ 스스로를 설득하며, 아빠가 깰까 조심스레 집을 나서는 혜미였다. - 수림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하루 종일 깊기만 했었다. 깊은 슬픔과 깊은 물속, 그리고 이어진 그와의 깊은 관계… 정말이지, 늘 새로울 것도 없는 똑같은 하루가 지루하리만치 천천히 흘러가기만 했던 자신의 일상이었기에, 어제는 그야말로 희로애락을 모두 느낄 수 있을 만큼 엄청났던 하루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대단했던 건 역시 ‘그’였다. 수림을 물 속에서 건져 준 손은 얼마나 따스했으며, 안아준 그의 팔뚝과 가슴은 또 얼마나 듬직했던가. 게다가 밤새껏 자신의 안으로 들어왔었던 그의 물건은… 자면서도 수림은 수줍은 마음에 양 볼이 조금쯤 붉게 물들어갔다. ‘그런데…이 남자 오늘도 날 기다리게 하려나…’ 잠결에도 좀더 이 남자를 붙들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불 속 어딘가로 손을 뻗은 수림은 그러나 어제와 같은 공허함만이 느껴지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또다시 혼자만의 꿈이었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 부은 눈을 비비며 눈의 초점을 맞췄을 땐, 그 남자의 부드러운 눈 또한 수림의 눈에 초점을 맞춰주고 있었다. “잘…잤어요?” 있었다. 침대 옆에서 무릎을 모은 모양으로 웅크린 채 앉아서, 빙긋 웃어주는 그가 있었다. 수림은 그가 있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어나자마자 괜히 눈시울이 붉어질뻔했다. 이렇게 좋은데, 이 남자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짐작이나 할까, 조금 걱정도 되던 수림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기에, 그에게서 절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웅크리고 있던 영후의 손이 천천히 수림의 얼굴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눈가에 남아있는 잠의 잔재들을 부드럽게 닦아내 주었다. “앗!” 그제야 수림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자신은 한참 잠들어있었고, 그랬으니 지금 자신의 모습은 머리며 얼굴이며, 그야말로 엉망일 것이었다. 방금 만 해도, 이 남자가 자신의 눈곱을 떼어 주지 않았던가! 수림은 영후의 손에서 떨어져 황급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갑작스런 수림의 행동에 영후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내 언제나 예쁘고만 싶은 여자들의 마음을 그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잠깐…나가 있을까요?” 혹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닌지 싶어 조심스레 입을 연 영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영후와는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침대의 스프링보다도 더욱 탄력 있게 벌떡 일어나는 수림이었다. “아니요! 안돼요! 절대로!” “아…그…저기…” 단호한 표정으로 이불을 젖힌 채 앉아있는 수림을 깜짝 놀라 바라보던 영후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며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영후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수림은, 그제야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고서야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쓴 채, 동굴에 들어가 있는 곰이 그러하듯, 눈만 내놓은 채로 숨어버렸다. “가지…말아요…” 정말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불 속에서 반쯤은 웅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영후는 그녀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영후는 이내 자신의 양손으로 눈을 가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이러면…괜찮겠어요?” 장난꾸러기마냥 눈을 가린 채 웃고 있는 이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림은, 이 남자…참으로 다정한 남자구나,라는 생각을 또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리 많은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었었고, 섹스 또한 그리 많은 경험을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같이 수림과 섹스를 나눈 다음날의 남자들은, 수림의 몸이 이제는 완전히 자신들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들의 몸을 가릴 생각도, 그렇다고 수림의 몸을 아껴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첫 섹스를 나누고 나면 그 이후엔 모든 남자들은 거리낌없이 수림의 몸을 만졌으며, 탐했으며, 범했었다. 언제나 섹스를 나눈 후 맞이하는 아침이 수림은 그래서 싫었었다. 하지만 이 남자, 영후는 달랐다. 자신을 섹스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같이 오늘도 하나의 소중한 ‘여자’로서 봐주고 있었다. 이런 남자라면, 그야말로 이남자의 섹스 도구로라도 옆에 남고 싶어지는 수림이었다. 영후는 자신의 양손을 잡고, 부드럽게 열어젖히는 수림의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차마 눈을 뜰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커튼을 쳐놓았을지라도 점점 날이 밝아오는 지금, 그녀의 빛나는 몸을 두 눈으로 맞닥뜨리게 된다면 도저히 참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떠봐요.” 조심스럽게 들리는 수림의 목소리에 영후는 가만히, 그것도 한눈만을 살짝 떠 보다가 숨이 멎을 뻔했다. 무릎을 꿇은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벽한 알몸의 수림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후는 갑작스런 수림의 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댔지만, 수림은 천천히 영후의 다리 위에 포개듯 앉더니 이내 양손으로 영후의 볼을 감싸고는 자신의 가슴으로 품듯이 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수림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영후는 점점 긴장이 고조되며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그런 영후의 입김으로 인해 수림의 가슴도 조금씩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영후씨 꺼 할래요…그니까…” 어쩔 줄 모르는 영후의 얼굴을 가슴에서 떼어내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수림은 수줍게 말했다. “키스…해줘요…” 본의 아니게 이른 새벽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남녀의 혀가 아침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만나려 할 무렵, 어디선가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거의 닿을 뻔 했던 그들의 입은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멈춰 섰다. “저…전화가…” 참으로 어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완벽하게 섹시한 알몸의 여인이 키스를 요청하고 있는 가운데, 전화벨이 울린다,라… 정말이지 이런 종합적인 상황은 영후에게는 그야말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난감한 상황 그 자체였다. “그거 알아요?” 영후를 위에서 바라보던 수림의 입은 어느덧 비켜나 영후의 귀에 대고 소근거리고 있었다. “네?” “나도 무지 걸고 싶었다구요…영후씨에게…” 그제야 전화번호 조차 몰라 답답했었던 어제 하루가 떠올라 영후는 또 미안해졌다. “미처…생각 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럼…알려 줄 거에요? 영후씨 전화번호?” 그제야 다시 영후를 마주보며, 수림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예쁜 눈을 마주보고 있노라면, 제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내라도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을 테니, 그보다 마음 약한 영후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받아도 줄 거구요?” 역시나 영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영후가 너무 고마워 수림은 그의 이마에 ‘쪽’하며 짧은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물었다. “언제라도?” “언제라도.” 이번엔 그의 맑은 눈에. “맹세할거죠?” “맹세할게요.” 이번엔 그의 입술에 수림의 입술이 닿았고, 아쉽지만 이내 떨어졌다. 아쉬운 마음은 영후가 더 했을까, 수림이 더 했을까. 아마도 영후가 조금 더했던 듯, 다시금 수림의 입술을 찾았지만, 수림은 손바닥으로 영후의 입술을 부드럽게 막으며 말을 했다. “됐어요, 그럼 이제 전화 받아도 좋아요.” 그제야 거짓말처럼 영후의 몸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와 다시금 침대 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수림이었다. 좀 전과는 달리, 이불로 가슴께까지만 가리고 있는 수림의 아름다운 자태에 영후는 차라리 그녀가 전화를 받지 못하게 했었어도 좋았을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여전히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이영ㅤㅎㅜㅂ니다.” ‘저 총장이에요. 이른 시간에 미안합니다.’ 갑작스런 시간에, 갑작스런 인물로부터의 전화인지라 영후는 꽤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괜히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 마냥, 왠지 모르게 수림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마치 전화를 받는 상대방도 수림의 알몸을 보고는, 지금 뭘 하고 있느냐며 자신에게 호통이라도 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영후는 조금 말을 더듬어버렸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총장님께서 무슨…?” ‘아무래도 이감독님도 아셔야 할 일 같아서... 일단, 학교에서 뵙고 말씀 나눴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무거운 총장의 어조에 영후는 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예…그러겠습니다.” ‘그럼, 미안하지만 지금 바로 와주셨으면 하네요.’ “네? 지금이요? 하지만 시간이 아직…” 영후는, 동그란 눈이 조금쯤 더 커진 채 통화의 내용을 궁금해 하는 수림을 겨우 바라보며 난감하다는 듯이 조금 에둘러 말해보았지만 이른 아침의 총장은 더욱 단호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전 이미 학교에 나와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영후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수림을 응시했다. 그러자 수림 또한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영후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오물거리며 열었다. “무슨…안 좋은 일인 거에요?” 영후는 그런 수림이 너무나 귀여워 괜히 놀려 주고픈 생각에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되도 않는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네…무척이나요.” “왜…왜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수림의 당황스러워 하는 얼굴을 보며, 그제야 영후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내며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수림씨 곁에 있어주고 싶었는데,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정말 큰일이네요.” 영후의 말을 듣고 난 후에야 장난인 줄 알게 된 수림은 옆에 있는 베개를 영후에게 집어 던지며 ‘꽥’ 소리질렀다. “뭐에요~! 난 또 정말 안 좋은 일인 줄 알고 가슴 철렁했잖아요! 나빴어요 진짜!” “에, 전 진짜로 진지하게 말한 건데…쿡쿡…”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건만, 영후는 겁나게 날아오는 베개를 머리로 받은 후 그래도 즐거운 양 밝게 웃고 있었고, 그런 영후를 수림은 곱게 흘겨보고 있었다. - 그 무렵 남희는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좀 와주었으면 해요.’ 전화 속이었지만, 언제나 담담하고 냉정했던 총장으로부터 처음 들어보는 떨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좋지 않은 상황이 도래했음을 남희는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그녀의 직감은, 어쩌면 모든 일이 날개를 펴 보기도 전에 좌초될 수도 있다,라고 말해주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에 대한 걱정이 무엇보다도 가장 앞서기 시작했다. 여자 축구팀을 만드는 일 자체가 무산된다면 가장 실망할 사람은 다름아닌 ‘영후’였기에, 지독한 불운을 이겨내고는 다시금 일어서려는 ‘그’에게 유독 신은 엄격한 것만 같아 수림은 마음이 아팠다. 블랙 정장을 위아래로 입고서, 거울을 보며 차림새를 살펴보던 남희는 자신의 책장에 문득 시선이 머물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학교재 및 서적만으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책장엔 어느덧 축구에 관련된 서적들이 놓여지기 시작했고, 수학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것들이 어느덧 수학과도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음을 깨닫고 난 후엔, 어쩐지 수학만큼 아니 수학보다 더 재미가 느껴졌기에 지금 느껴지는 그녀의 ‘직감’을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었던 남희였다. 게다가 만에 하나 그녀의 직감이 맞아버리게 된다면, 다시는 ‘그 남자’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그녀에겐 없을 것이었기에, 남자처럼 바지 정장을 차려 입었음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숨만이 방안에 넘쳐나고 있었다. - 사계절용 양잔디가 깔려있는 한국여대의 운동장엔, 운동할 때 만큼은 긴 머리가 거북했기에 틀어 올린 긴 머리를 고정하느라 비니를 쓴 채, 슛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혜미가 있었다. 하지만 겨우 공 하나를 가지고 슛을 하고 있었기에, 30미터가 넘는 거리를 계속 왔다 갔다 하며, 공을 주워오는 수고를 무릅쓰며 연신 ‘누군가’의 슛 폼을 따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였나?’ 계속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영후의 영상을 되짚어보며, 공을 차보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나 힘든 폼이었다. 그렇게 먼 거리로 공을 보내려면, 모션 자체가 커질 수 밖에 없었고 그러자면 준비동작도 커져버려 결국은 간결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그저 그런 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긴 바지 속에 감춰져 있던 영후의 굵은 허벅지를 알리 없었던 혜미는 고작 영후의 폼만을 떠올려보며 생각만으로는 절대로 쉽게 될 리 없을 영후의 폼을 따라 하다가 결국 제 풀에 지쳐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아 젠장, 볼 때는 엄청 쉬워 보였었는데…’ 잠시 앉아 쉬는 동안, 갑자기 혜미는 윤지 생각이 났다. ‘다른 학교로 편입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면, 그 아이 많이 놀라겠지…?’ 축구공과 함께 있을 땐 아무런 고민도, 상념도 없었지만 언제나 그 이외의 것들은 혜미에겐 모두 고민거리가 되어주었다. 하물며 윤지에 관한 일이라면 그 어떤 것들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포기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과연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질런지 어린 혜미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지금 이 순간은 분명히 ‘기회’였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에도 ‘등가교환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인지, 이런 중요한 순간엔 꼭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만들어버리는 ‘신의 장난질’에 혜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아, 몰라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고민하고 있는 척 해 봤자, 자신의 머리로는 그 어떤 결론도 나오지 않을 거란걸 알고 있던 혜미는 골대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을 주우러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 버스에 내려 한국여대에 들어서던 영후는, 마치 집에 두근거리는 선물을 두고 온 것 마냥 들뜬 얼굴로 산책을 하듯이 총장실이 있는 학생본부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 누구지?’ 총장실로 향하던 영후의 눈에, 운동장에서 홀로 공을 차고 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온 동네 주민인지, 학생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좋은 폼으로 공을 차고 있었기에 영후는 순간 운동장 안으로 달려가볼 뻔 했지만, 총장과의 약속이 떠오르자 마음을 억누르며 결국 발걸음을 재촉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영후가 총장실로 들어서자 일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총장과 그 옆에 앉아있던 남희가 동시에 일어서서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아 네, 남희씨도 와 있었네요?” 영후의 살가운 인사에도 이미 총장에게 설명을 들어버린 남희는 굳어있는 얼굴을 펴지 못한 채 그저 가볍게 목례만을 했다. 어쩌면 저 친절한 남자에게 더 이상 정이 들었다가는 남희 자신이 더욱 힘들어 질 까봐 그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다 보자고 하시고…” 엉거주춤 남희의 맞은 편에 앉으며 영후는 총장의 미안한 눈빛을 읽을 수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척 하며 웃어 보였다. “노감독님께서 전화를 주신 덕에, 저도 어제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네? 무슨…?” 총장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자, 남희가 총장을 거들었다. “협회와 연맹이 저희 한국여대 축구팀 창단을 막으려 한다고…” 처음엔 쉽게 입을 열었지만, 남희도 쉽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영후는 굳은 얼굴의 두 사람 덕분에 아침부터 초상집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적어도 누가 죽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영후는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저…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당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제야 총장이 무겁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올해 졸업하는 고교 선수들의 배정에서 우리 학교를 제외하게 될 거라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당연히 각 대학들도 연맹의 보복이 두려울테니, 타 대학선수들을 스카우트 해 올 수는 더더욱 없을 거구요.” 총장과 남희의 말을 듣고만 있던 영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때문이군요, 그렇죠?” 총장은 동의를 구하는 영후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혹여 그랬다간 자신의 나이도 잊은 채 미안한 마음에 영후에게 매달리며 엉엉 울어버리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총장님은 어떠신가요? 역시, 저와 작성한 계약서를 찢어버리실 생각이신가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영후의 말에 총장은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영후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선수도 가질 수 없는 감독이란,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터,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이 남자는 왜 자신의 뜻을 묻고 있는 것인지 총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 됐습니다. 하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처음 계약 당시에 말씀하셨던, 선수 선발에 관한 전권을 제게 주신다던 말씀, 아직 유효한 겁니까?” 총장은 영후의 질문에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총장의 대답을 듣자 영후는 바로 남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남희씨, 여기 한국여대 총 정원이 어떻게 되죠?” “네? 그건…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만 오 천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후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해 놓고서도 남희는 그제야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영후의 생각을 알아 챈 건 총장도 마찬가지였던지 소파 팔걸이를 꼭 잡고 있던 오른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한국여대는, 제가 듣기로 전국의 수재들이 들어오고 싶어하는, 그런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정확히 알고 있는 건가요?” 총장과 남희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영후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대로만 따지자면 분명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학교임에는 분명했고, 남녀공학으로 합산해 본다 해도 뭇 남자들보다 높아진 학구열로 인해 적어도 10위권 안에는 드는 명문대학이었다. 하지만 이 대학엔 ‘체육’과 관련된 학과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공부만을 위한 학교였지 운동선수들을 위한 학교는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분명 이 학교의 재학생 수를 묻고 있었다. “하…하지만 이 학교엔 체육대학 같은 건 없습니다 감독님.”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보다 확실한 답을 원하는 ‘수학과 강사’ 남희는 다시금 영후의 입으로 답을 듣고 싶었다. “아,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근 10년을 공부만 해 온 아이들에게 어쩌면, 운동은 아이들이 모르던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줄지도 모르죠. 누가 알겠어요?” 남희는 영후의 말을 듣고, 비로소 요새 아이들의 고교생활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빡빡한 시간표에는 주 1회, 그것도 고작 한 시간 정도로 명기되어 있지만, 그나마 그 아이들에게 체육이란 그저 자율학습시간이나 혹은 보충수업시간으로 대체되는 그야말로 ‘이름만’ 체육이었던 것이다. 뛰어 놀기는커녕, 의자와 더 친해질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은, 잃어버린 그들의 시간 덕분에 진정한 체육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키만 커져갔고, 살만 쪄갔고, 허약해져만 갔다. 그랬던 아이들의 시간을, 이 남자는 지금 되돌려주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내년에 선수들을 모아서 팀을 만들겠다는 말씀은, 전 드린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총장과 남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 여기 학생들과 즐거운 동아리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아마 공부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아이들 이라면, 분명 제대로 놀 줄도 알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을 모아 우승을 일구어 낸다면, 다음 해에는 이런 걱정쯤은 할 필요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하구요.”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고서 오랜 시간 동안 해왔던 생각을 담담이 털어놓고 있는 영후의 모습에 남희와 총장은 그야말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끝은 도대체…’ - 괜한 ‘고백 연습’ 덕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하연은, 러시아워 시간에 물려 빡빡한 차량 행렬 속에서 괜히 영후 탓을 하며 움직일 리 없을 앞 차들에 연신 클락션을 울려댔다. 하지만 동시에 하연의 핸드폰도 울려댔다. 하연은 손도 움직이기 귀찮은 듯, 핸들에 있는 핸드폰 연결버튼을 눌러 차량 스피커로 연결을 시켰다. “누구십니까~” 막히는 차 속에서 기분이나 풀어볼 겸 장난스레 전화를 받은 하연과는 달리 상대방은 짜증이 잔뜩 서려있는 목소리로 응대했다. ‘아 진짜 이럴 겁니까?’ 그제야 조금 긴장하며 조심스레 입을 여는 하연이었다. “네? 누구…?” ‘저 하근명인데요, 진짜 이러시기에요?’ 도대체 지가 하근명이면 하근명이지 아침부터 다짜고짜 뭘 어쩌란 말인지, 하연도 덩달아 조금씩 짜증이 치밀어 오를 뻔 했지만, 선수와 기자는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일 수 밖에 없었기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근데, 내가 뭘요?” ‘아 진짜, 오늘 자 스포츠 신문이요! 박기자님 덕분에 쪽 팔려 죽겠단 말입니다!’ “아…” 그제야 하연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있었던 영후의 복귀전에 관해 작성해 두었었던 간략한 평이 결국은 그대로 신문에 실렸던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실은 그게 저도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누군가 그 시합을 녹화해서” ‘몰라요! 내일 있을 A매치에서 부진하면 다 박기자님 탓입니다.’ ‘어라? 이 녀석 좀 보게?’ 하연은 근명이 단지 화가 나서 전화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뭐랄까…일종의 추파 같은 뉘앙스랄까…? 이럴 땐 이쪽도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맞춰 줄 필요가 있는 법이었다. “예에? 그래도 그건 좀…그러지 말고, 나중에 술 한번 마시면서 풉시다. 예?” ‘흥! 사시는 거 봐서 그때 결정할 테니까, 지갑이나 두둑하게 준비해 두십시오!’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근명이, 하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 이런 나이도 어린 노무 시키가…” 다음 번에 만날 땐 반쯤 죽여 놓을 까 하다가, 하연은 다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내일이 A매치였지? 좋은 기사 한 줄 보고 싶으면 양말이 벗겨져라 뛰어야 할거다. 안 그랬다간 진짜 무서운 기사가 어떤 건지 모레 아침에 알게 될걸? 갑자기 기분 좋아진 하연처럼, 막혔던 길도 거짓말처럼 뚫리기 시작했고 자칭 베스트 드라이버였던 하연은 거침없이 엑셀을 밟아대기 시작했다. - “하지만 감독님, 지금 하시는 생각은 너무 무모합니다.” 총장실을 나서면서부터, 남희는 영후를 뒤따르며 영후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영후는 남희의 말을 듣는 건지 어떤 건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어나갔다. 그런 영후의 뒤에서 남희는 연신 영후를 불러 세워 봤지만 영후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나갔다. 이윽고 그의 눈앞에 푸른 잔디의 운동장이 보이자, 겨우 걸음을 멈추고 운동장 이곳 저곳을 바라보는 영후였다. ‘없잖아…좀 늦었나…?’ 보다 못한 남희는 영후의 팔을 잡으며 영후의 앞에 서서 전에 없었을 큰 소리를 질렀다. “지금 제 얘기 듣고 계신 거냐구요!?” 그제야 자신의 앞에 선 채 고개 숙이고 있는 남희를 바라보게 된 영후는, 그저 영후의 팔을 꼭 잡은 채로 조금씩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바라봤다. ‘울…어?’ 갑작스런 남희의 반응에 영후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왜…이렇게 뻔히 눈에 보이는 어려운 일에…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실 수가 있는 거냐구요 왜!!” 영후는 그런 남희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영후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걱정을 끼쳐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영후의 앞에 서 있는 이 여자의 눈에서 아니나 다를까 눈물이 ‘또르륵’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만인의 걱정거리가 된 건지 참…’ 하지만 이런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니까…이런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건 바로 ‘영후의 몫’이였다. “남희씬,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람이었잖아요.” 길고 그윽한 속눈썹 사이마다 눈물이 맺힌 채로, 남희는 영후를 바라봤다. “수학 가르쳤다면서요, 그럼… 학생들에게 언제나 쉬운 문제만 내줬었나요?” 순간, 남희는 한 대 맞은 듯한 통증을 가슴으로 느꼈다. “아이들에게 한계의 선을 긋는 건, 어쩌면 우리 어른들인지도 모르잖아요.” 남희를 바라보는 영후의 눈빛 속에서, 남희는 푸른 잔디보다도 훨씬 더 푸르른 그의 마음을 잠시나마 읽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미소를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남희의 표정을 보고는 그제야 영후의 마음도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남희씨, 아 이제 권코치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어쨌든 오늘부터 우리 바빠질 것 같은데 각오는 되어 있는 거겠죠?” 남희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 주고는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영후를 돌아보며, 남희는 안경을 가볍게 추켜올리며 뒤늦게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 보았다. “네…감독님.” - 윤지는 강의가 시작되기 전임에도 강의실 한쪽에 미리 와서 앉은 채, 신형 아이팟을 꺼내 들고는, 자신이 촬영한 영후의 경기장면이 제대로 인코딩 되었는지 확인해보고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공통의 취미를 가진 혜미에게 이보다 좋은 선물은 또 없을 거라고 혼자 흐뭇해하고 있는 윤지의 등을 툭 치며, 혜미가 바로 옆자리에 와 앉았다. “역시 오늘도 내자리 맡아놨구나? 이쁜 자식~” “응, 왔어?” 서로 살가운 인사를 나누고는, 혜미는 곧바로 윤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윤지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에 대한 궁금증을 나타냈다. “근데 그건 뭐야? 손거울 새로 샀어?” “아니, 자 봐봐.” 윤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보여준 자그마한 거울에서 이윽고,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기에 혜미의 입은 조금 벌어졌는데, 그 화면엔 혜미도 아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벌어졌던 혜미의 입은 조금쯤 더 벌어졌다. “어…이거…?” “어때? 맘에 들어? 니가 좋아할 거 같아서…자 받아 선물이야.” 그냥 속 편하게 만나자 마자 편입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혜미는, 그러나 대뜸 선물부터 내놓는 윤지 앞에서 입을 다물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지…진짜? 하지만…” 늘 윤지가 주는 선물을 받고는 있지만, 혜미는 언제나 부담스럽기만 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윤지와는 이미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데, 이 아이는 어쩐지 진정한 친구간의 애정 표현에 대해 너무나 서툴러 보였다. 하긴, 윤지의 어색한 표현은 어쩌면 보통 여자애들과는 좀 많이(?) 다른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돈이 어디서 생겨서 이러는 건지 혜미는 늘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윤지는 이런 혜미의 생각을 아는지 어떤지 혜미가 좋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보다 훨씬 더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때? 이 남자 정말 멋지지 않니? 이래봬도, 내가 파주까지 가서 직접 촬영한 거라구.” “어...?” 의기양양한 얼굴로 혜미에게 말하고 있던 윤지는 그러나 혜미의 어정쩡한 반응에 조금 마음이 상할 뻔도 했다. “못 믿는 거니? 진짜 내가 이 남자를 직접 내 두 눈으로 봤다니까? 게다가 직접 사인도 받았다구! 물론 절대 넌 믿을 수 없겠지.” 이미 어디론가 정신이 팔려있는 혜미는 듣고 있지도 않았는데, 윤지는 여전히 재잘대고 있었다. “유…윤지야…” 본인도 정신 못 차리는 와중에, 혜미는 윤지의 어깨를 흔들며 불러댔다. “응? 왜?” “저기…” 곧 이어지는 멋진 남자가 출현할때나 들릴법한 여학생들의 엄청난 환호소리와 함께, 멍한 표정으로 칠판 쪽을 가리키는 혜미의 손가락을 따라가 본 고양이 같은 윤지의 눈은 금새 왕방울만 해졌다. “안녕? 여러분!” 그곳엔 아이팟 화면에서 축구공와 함께 열심히 뛰고 있는 남자가 그대로 튀어나와 서 있었다. 윤지와 혜미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저 남자가 왜 여기에…?’ 11부. Football? No! It's a diet! 영후의 등장으로 강의실은 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물론 학교 밖으로 나가면 언제든 남자들을 만날 수 있는 학생들이었지만, 여자들만 드글거리는 학교 내에서, 그것도 저렇게 준수한 용모를 지닌 남자를 코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여학생들은 모두 한결같이 숨쉬는 것도 멈춘 채 영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윤지와 혜미도 이유는 달랐지만 다른 아이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음…우선 제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이영후죠! 맞죠?” 영후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던 찰나, 어느 학생의 입에서 먼저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축구에는 관심 없었어도, 인터넷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는 그의 영상을 접해 본 학생들의 수가 꽤 되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내막을 알리 없는 영후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내 온화한 얼굴로 돌아가며 말을 이었다. “알아봐줘서 고맙네요. 다들 들으셨다시피 전 이영후란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구요.” 영후는 계속 말을 이어가려다 학생들의 눈빛을 보고는 조금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모든 여학생들의 눈은, 필요하면 옷이라도 벗겠다는 듯 투지를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이런 얼굴들 앞에서 그냥 말해버리면…괜찮을까…?’ 자신만만하게 첫 강의실에 들어온 영후였지만, 이 정도로 긴장될 줄은 몰랐기에 괜히 진땀을 흘리고 있었고, 그런 영후를 혜미와 윤지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찻잔을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총장의 가슴은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걱정하고 고민했던 숱한 문제들이 그 남자에겐 한낱 기우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게 너무나 놀라웠다. 믿기는 어려웠지만, 왠지 그 남자라면 어떻게든 해 줄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총장의 자리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사소한 일에 조차도 완벽에 또 완벽을 기해야 하는 법이었다. 총장은 찻잔을 내려놓고서 핸드폰을 집어 들어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눌러보았다. 이내 길지 않은 신호음을 뒤로하고 노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찌 되었소?’ 전화를 받자마자 영후의 일을 묻는 모양이 노감독도 꽤나 속을 태우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의 일을 언제나 자신에게 미루고 있는 노감독이 총장은 살짝 미워지기도 했지만, 이제 그런 앙탈을 부리기에는, 또 받아주기에는 서로가 꽤나 나이를 들어버린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내 총장은 자신이 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무얼 말이오?’ “당신이 말한 그대로 말해줬더니 그 남자가 그러더군요. 그러면 우리 학교 학생들을 모아서 팀을 만들겠다고요.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요?” 노감독의 입에선 역시나 의아하다는 반응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 학교에는 체육에 관련된 학과는 없질 않소?’ “그래서 지금 묻고 있는 거잖아요 당신한테. 그런 게…정말 가능하겠어요?” 혹여, 총장 스스로가 예상하고 있던 답변이 나올까 싶어, 조심스레 다시 물었고 그제야 노감독도 영후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몇 초였을 뿐이었지만, 총장에겐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핸드폰 너머로 ‘흐음’하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노감독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 국가대표로 뽑히는 여자축구선수들의 수준을 남자고등학생과 중학생의 중간쯤으로 보고 있소만, 대학 팀이라면 분명 그보다는 좀 더 낮을 테지…’ 그래서, 가능하다는 얘기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총장은 쉽게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노감독 때문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 녀석이라면 말들을 물가로 데려가는 일쯤은 어렵지 않게 해낼 거라고 믿소만, 그 물을 마실 건지 어쩔 건지는 결국, 말들에게 달린 것 아니겠소?’ 결국, 노감독도 총장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는 못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 총장 앞에 노감독은 항상 또 다른 짐을 안겨주었을 뿐,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못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장은 그런 노감독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이들의 아빠여서가 아니었다. 손주들의 할아버지라서도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축구에 온 정열을 불사르고 있는, 그 모습에 반해버린 총장의 유일무이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저, 우리는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거군요. 그렇죠?” 총장과 노감독은 ‘그 남자’에게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스스로를 한탄하며, 전화기로 서로의 한숨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 남희는 덩그러니 운동장 밖 트랙에 놓인 책상 몇 개와 의자 몇 개들 사이에 앉은 채, 책상 한 켠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입부지원서 양식지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남자들이 넘쳐나는 학교에서 였다면 이런 절세 미녀가 운동장 한 구석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런 광경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공허하게 앉아서 한숨짓고 있는 남희의 모습은 그대로 하나의 풍경과 같기도 했다. ‘후…감독님 말씀을 믿을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남희에게 입부 지원서를 두둑하게 준비해 두란 말만 남긴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린 영후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물론 감독이 시킨 일이었으니 당연히 남희는 약 200부 정도 되는 양을 복사해 두었지만 그렇게 준비해 둔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록 더욱 한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태껏 지켜본 그 남자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 데, 분명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을 것이 안봐도 비디오였으니까. ‘저와 함께 즐거운 축구를 해보지 않으렵니까?’ 솔직히 말이 되는가? 꾸미는 것에도 시간을 쏟기가 빠듯할 한창의 나이인 아이들 앞에서, ‘축구’를 하자고 하다니. 남희도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군대얘기, 축구얘기,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라는 우스개 소리를 알고 있을 만큼, 축구는 여자들에게 지루함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아이들이 과연 축구화를 신고, 이런 땡볕에서 몇 시간 동안 땀을 흘리려 할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잠깐이나마 그 남자에게 희망을 걸며 행복해했던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는 남희였다. 그때였다. “저…여기가 입부 하는 곳이 맞나요?” “네?” 너무나 놀란 반응을 보이는 남희에게, 눈 앞에 있는 조금 토실토실한 여학생은 손가락으로 입부지원서를 가리켰다. “아, 네, 네.” 그제야, 남희는 정신을 차리고 입부 지원서 한장을 여학생에게 건넸고, 그런 남희를 여학생은 말똥말똥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아, 맞다 볼펜.” 완벽을 추구하던 평소의 남희 답지 않게 행동 하나하나가 완전 ‘덤벙’ 그 자체였기에, 그녀를 바라보던 여학생은 ‘풉’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여학생의 미소를 보고는 남희도 긴장에서 풀어지며 밝게 웃었다. “환영해요.” 환히 웃어주며 건네는 남희의 인사에 여학생은 입부지원서를 작성하면서 한마디를 했다. “네, 근데 정말로 축구 다이어트란 게 효과가 있을까요?” ‘응? 무슨 다이어트라고?’ 하마터면 비명 같이 되물을 뻔 한 자신의 말을 곱씹어 삼키며, 놀란 눈으로 남희는 그 여학생을 바라봤다. 살집이 조금 있긴 했지만, 솔직히 다이어트가 필요한 몸은 아니었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여자들이 그러하듯, 이 아이도 본인이 살이 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망할 놈의 우리 감독님은 그런 여자들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 들었음이 분명해졌다. ‘그 남자한테 이런 면이 있었던가…?’ 대견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만큼 지금은 비상사태나 다름없었으니 이 정도의 잔꾀는 , 물론 그 남자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지만, 충분히 용인해 줄만 했다. 나름 스스로에게 적절한 답을 내고는 고개를 들던 남희의 눈은 더없이 커져갔다. 엄청난 크기로 확대된 남희의 동공 안에는, 저 멀리서부터,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모두 남희에게로 마치 경주하듯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들어있었다. - 뭐가 그리 즐거운 지 깔깔거리며 걷고 있는 혜미와 윤지를 앞세운 채, 영후는 또 다른 강의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휴…이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좀 전의 상황을 되돌아보며, 영후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 “축구 해보지 않겠습니까?” 다짜고짜 여학생들 앞에 서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것이었다. 축구를 해 보자는… 갑작스런 영후의 발언에, 방금 전까지 영후를 맞이하며 환호하던 여학생들은 온데간데 없고, 멍하게 정지한 여학생들의 모습 사이로 그저 휑한 바람만이 불어대고 있었다. 혜미는 설마 했던 일이 벌어져, ‘졌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나마 편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젖은 채 아무 생각 없이 영후의 말을 듣고 있었건만, 미처 말리기도 전에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대형사고를. ‘아이구야…여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 우리 감독님.’ 물론 그런 순수함이 그대로 살아있는 저 남자가 그래서 좋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런 저 남자의 속내를 알아줄 아이들 따위는 이곳에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어쩐다…’ 뭔가 저 남자를 구할만한 방도를 생각해보려 했지만, 혜미는 딱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순간, 옆에 앉아있던 윤지가 벌떡 일어섰다. “아, 축구 다이어트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죠?” 윤지는 영후에게 찡긋 윙크를 보내며, 얼른 동의하라는 사인을 보냈고, 윤지를 알아본 영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제법 윤지의 사인을 빨리 알아채고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렇죠! 그거인 거죠. 축…구… 다이어트…” 그저, ‘축구’란 말 뒤에 ‘다이어트’가 붙었을 따름인데, 갑자기 ‘오오~!’하는 환호성과 함께 강의실의 공기는 또다시 급변하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공짜인가요?”란 질문을 필두로 엄청난 관심을 표명하는 여학생들의 쏟아지는 질문덕분에, 영후는 간만에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질 뻔 했었다. - ‘어쨌든 얘네들 덕분에 살았다.’ 혜미와 팔짱을 낀 채 앞서가는 윤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영후였다. 물론 혜미의 얼굴을 보게 된 영후는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혜미의 옆에 부적처럼 꼭 붙어있는 윤지는 슬쩍슬쩍 뒤를 돌아보며, 묘한 미소를 영후에게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영후는 고마움은 사라지고, ‘그 때’의 당황스러움만 남아버리는 듯 했다. ‘쟤는 도대체 정체가 뭔지…’ 그 때 영후의 눈엔 이 학교에서 그렇게 찾기 힘들다는 ‘남자화장실’의 푯말이 들어왔다. 어느 정도 긴장이 해소된 영후의 방광은 그제야 영후에게 ‘나 이제 나가요!’라며 신호를 보내왔다. “아, 얘들아 잠시만.” 그제야 뒤를 돌아본 혜미와 윤지는, 영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푯말을 바라보고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후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화장실로 들어가려다 문득, 윤지의 눈빛이 기억났다. ‘설마…또 그러려구.’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며 자신을 질책하며, 서둘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지만 화장실 밖의 상황은 영후가 우려하는 그대로 흘러가려 하고 있었다. “혜미야, 먼저 운동장에 가 있을래? 나도 화장실에 들렀다 갈게.” “기다릴게, 같이 가자.” 기다린다는 혜미의 말에, 엄청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윤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코치라는 분 혼자서 지금쯤 엄청 바쁠 것 같아서 말야. 다이어트라면 기집애들 환장하잖어.” 윤지의 말에, 혜미는 쉽게 수긍을 했다. 이제는 혜미 본인이 몸담게 될 곳이었고, 함께 지낼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히 자신이 도와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우리 혜미, 참 단순하기도 하지… “빨리 와 그럼, 나 먼저 거기 가 있을게.” “그래 알았어. 빨리 갈게.” 혜미가 총총 뛰어가며 멀어지자 윤지는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가능하면.” 이윽고, 주변을 살펴보던 윤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 화장실 안으로 슬며시 들어서고 있었다. - 영후는 소변기 앞에 서서 끊길 줄 모르는 소변줄기를 연신 뿌려대며, 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린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축구. 그리고 다이어트.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축구라는 운동 자체가 기본적으로 유산소 운동을 포함하고 있는 운동이었고, 다이어트에는 유산소운동만큼 지방을 쉽게 연소시킬 수 있는 방법은 또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산소 운동만큼, 즐겁지 않은 운동도 또 없었다. 그러니 영후는 적어도 포기하지 않고 모든 아이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즐거운’ 운동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진정 운동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을 찾아서, 축구를 가르쳐줘야 할 것이었다. ‘갈 길이 멀구나 후…’ 어느덧 소변줄기가 끊기고 영후는 자신의 물건을 잡고, 남은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는데, 자신의 손 말고도 또 하나의 손이 자신의 물건을 잡고 같이 흔들어 주고 있었다. 덕분에 자신의 손은 그닥 힘들이지 않아도 되어서 편할 수 있었다… ‘응?’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본 영후는 그대로 ‘얼음’이 돼버리고 말았다. 설마 했던 일이 또다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놀라 영후는 비명을 지를 수 조차 없었건만, 영후의 물건을 잡은 채 쪼그려 앉아있는 단발의 곱슬머리를 한 윤지는 남은 한 손을 본인의 입에 가져다 대며,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세웠다. “쉿! 알죠? 바로 옆엔 지금 강의가 한창이라구요.” 영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윤지의 손에 잡혀있는 물건은 순식간에 무럭무럭 자라났고, 어느새 늠름한 ‘자지’가 되어버렸다. 조그만 윤지의 손으로는 감싸 쥐기조차 쉽지 않아 보였지만, 윤지는 어느새 영후의 자지를 맛있게 먹겠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이…이러지마…너, 넌 도대체 왜…” 어느새 자신의 자지를 반쯤 입에 머금어버린 윤지는 다시금 자지를 뱉어냈고, 윤지의 입안에 그저 잠시 들어갔다 나온 영후의 자지는, 들어갔던 부위까지만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고마움의 표시에요. 일단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다시 영후의 자지를 목젖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머금는 윤지를, 영후는 그저 엉거주춤 선 채로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개방된 화장실에서, 게다가 바로 옆 강의실에선 조용하게 강의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소리도 내어선 안 되는 극도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영후는 너무나 생소한 말초적 느낌을 지금 윤지 덕분에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윤지는 단순히 자신의 자지를 입에 머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윤지의 혀는 영후의 자지가 밀려나올 땐, 귀두부분부터 시작해 자지를 휘감아 다시금 끌어들였고, 그렇게 이끌려 다시 입 속 깊숙이 들어간 자지는 마치 여자의 보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흡사할 정도의 느낌이 들 정도로, 식도부분에 까지 흡입되었다. “으…그만, 그만…” 갑작스런 느낌 때문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고 귀여운 윤지의 입에 정액을 쏟아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영후는 겨우 입을 떼고는 사정하듯 윤지에게 말을 했다. 그제야 느린 듯 빠르게 영후의 자지를 빨아들이고 있던 윤지의 입은 떨어졌고, 영후를 귀여운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 어쨌든 다행이었다. 이정도 선에서 끝내는 것이 서로에게도 좋을 것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그만둬주어서 윤지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라고 생각할 무렵, 윤지는 여전히 손으로 잡고 있던 영후의 자지를 잡아당기며, 양변기가 놓여있는 화장실 문 하나를 열며 들어갔다. 당연히 자지를 잡힌 채로 영후는 엉거주춤 끌려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이내 양변기에 털썩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너…너 지금 뭘 하려…읍!” 너무나 놀라 정신 못 차리는 영후의 입을 윤지는 가볍게 자신의 입으로 막으며, 영후의 자지를 휘감았던 혀로 다시 영후의 혀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녀의 혀는 도발적이었고, 당당했으며, 역동적이었다. 그저 영후의 혀는 가만히 있어도 될 정도로, 그녀의 혀는 영후의 혀를 장난감 가지고 놀듯, 어르고 달래주었다. 그 무렵, 윤지는 영후의 혀를 가지고 놀면서도 조금 의아했다. ‘이 남자…좀 경험이 없는 건가?’ 보통의 남자들을 미루어 봤을 때, 이 정도로 일이 진척되고 나면, 허락할 사이도 없이 윤지의 가슴과 엉덩이를 더듬어야 했고, 더불어 그녀의 팬티를 어떻게든 벗기려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손은 양손을 살짝 들어올린 채 그야말로 ‘꼼짝 마’ 포즈였다. 아무리 더 진한 스킨쉽을 해도 이 남잔, 변함없이 이 포즈일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 남자를 이런 자세로 있게 만들만한, 사랑하는 여자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윤지였다. 그러자 윤지는 괜히 심통을 부리고 싶어졌다. 이윽고 윤지는 영후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깊은 키스를 시도했고, 그저 키스만으로도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 영후는 자신의 아랫도리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윤지는 영후의 다리 위에 포개 앉은 자세에서 조금쯤 엉덩이를 들어올리는 가 싶더니, 손도 대지 않은 채 자신의 보지 속으로 영후의 자지를 삼켜버렸다! “읍!” “어흑!” 윤지가 노팬티였다는 걸 알리 없었기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삽입으로 영후는 영후대로 놀라버렸고, 윤지는 입으로 머금었을 때보다 더욱더 확장되어버린 영후의 자지 크기를 미처 예측하지 못한 통증에, 교성을 내 지르고 말았다. 순간 윤지의 교성에 당황한 영후는 어쩔 수 없이 윤지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고, 왠지 그것만으로도 감동받아버린 윤지는 약간의 통증을 애써 참은 채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으…읍…으…윽…” “아앙…아…아…앙…” 양변기의 시트가 평소 낼 리 없었을 ‘삐걱’거리는 소리는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고, 남자를 너무 잘 안다고, 그래서 늘 남자라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윤지는,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생경한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었다. “읍…너…너무…가…강해요…흑…흑” 어느덧 영후도 하반신의 움직임에 동참을 하기 시작하자, 윤지는 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영후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저, 윤지의 보지가 영후의 자지를 당겨주었고, 쓰다듬어 주었고, 다시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놀라운 흡입력에 그저 영후의 하반신은 연신 끌려 다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영후도 정신을 못 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치 윤지의 입 속에 들어가 있을 때처럼, 자신의 자지를 윤지의 보지는 뜨겁디 뜨거운 질 벽으로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느낌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아…하…좋아…흡…너무…좋아…요…흑…” 언제나 빠른 사정을 이끌어내는데 익숙했던 윤지의 보지는, 이제야 진정한 섹스의 의미를 깨닫고는 처음으로 ‘일’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지금의 섹스는 오래 지속되길 바라 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흥분도는 점점 높아져만 갔고, 이내 윤지의 보지는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아앗! 앗!”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부르르 떨고 있는 윤지가 그제야 느껴져 영후는 조심스럽게 윤지를 안아주었다. 불안정한 자세 덕에, 자칫하면 바닥에 떨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나름 걱정하는 영후의 자그마한 배려였다. 한편 윤지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흥분상태에 이르러 있으면서도 자신을 조심스럽게 안아주는 영후의 따스한 손길에 위로 받았고, 여전히 자신의 보지 안에서 생동감 넘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영후의 자지에 감동받았다. ‘진짜 남자란, 이런 거구나…’ 하지만 이 남자는 여전히 사정하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윤지는 조금 속이 상하기도 했다. ‘이 남자에게 난, 여자로 보이지 않는 걸까?’ 열락의 순간이 폭풍처럼 지나가자, 남은 건 어색한 두 사람의 자세 뿐이었다. 영후는 윤지를 자신의 다리 위에서 내려놓자니, 아직도 커져있는 자신의 자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 뻔했기에, 그러지도 못했지만, 마냥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이 아이에게 말을 건넬 수 밖에 없었다. “저…기” “왜 안했어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영후와는 달리, 윤지는 새초롬한 눈을 해가지고는 닥달하듯 영후에게 물었다. “으응? 뭐…를?” “이거요.” 윤지는 이제는 거의 힘이 빠졌을 자신의 보지를 겨우 조여보며, 영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을 기다렸다. “윽, 그거야…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아니 근데 왜 넌 나를…” 아저씨를 좋아하게 됐으니까요, 라고 말하려다 윤지는 왠지 이 남자 앞에서만큼은 수줍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자신에게 그런 감정이 남아있던가 싶었던 윤지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명 그것은 ‘수줍음’이었다. “친구…혜미에 대한 감사 인사에요. 딴 뜻은… 없어요. 절대로.” 왜, 진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지 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걸 말할 상황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좀, 내려 줄래요?” “어? 어어.” 영후는 윤지의 말에 어렵지 않게 윤지의 허리를 안고 들어올려 자신의 앞에 내려주었다. “아!” 여전히 발기해있는 영후의 자지가 자신의 보지를 긁어대며 빠져 나오자, 꽤나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윤지는 통증보다 영후의 자지가 더 신경 쓰였다. 사정시키지도 못했을 뿐더러, 어지간한 보통의 자지들로는 느껴지지도 않는 자신의 보지를 이렇게도 아프게, 또 흥분시키다니… 적어도 다음 번엔 꼭 먼저 울리고 말겠다는 다짐을, 자신의 애액이 그득하게 묻어 번들거리고 있는 영후의 자지를 바라보며 해 보았다. “조…좀, 나가 있어 줄래?” 윤지는 수습하고 나오려는 영후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다, 역시나 비어있는 휴지걸이를 바라보더니 한마디 하고는 다시 영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휴지가 오늘도 없네요…” 영후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금 영후의 자지를 입에 머금은 윤지는, 처음과는 달리 정돈의 느낌으로 영후의 자지를 빨아주었고, 어느새 윤지의 입 밖으로 나온 영후의 자지는 언제 촉촉하게 젖어있었냐는 듯, 말끔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됐죠? 운동장에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오세요.” 마치, 미처 사정하지 못한 자지를 손으로라도 풀고 오라는 것처럼, 입맛을 다시며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윤지를 바라보며, 영후는 이마에 손을 얹고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대체…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지원서 더 없어요?”, “설마 선착순으로 뽑는 건가요?”, “강의도 빼먹고 왔는데 빨리 지원서 주세요!” , “잘생긴 그 아저씬 어디간거에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하지만 혼자 어쩌지 못한 채, 난폭한 다이어트 광신도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남희를 구해낸 건 바로 혜미였다. “저기…” “응? 아, 미안한데, 지금 지원서가 다 떨어져서…” 그야말로 정신 없어 보이는 남희에게 혜미는 땅에 떨어져 있는, 지원서 한 장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거, 몇 장이나 더 필요한 거죠?” “글쎄, 나도 그건. 아, 그래. 좀 도와주겠니?” 또다시 한 무더기로 몰려오는 저쪽의 여학생무리들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듯 남희는 혜미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하지만 혜미는 이 중에 과연 어떤 친구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과 함께 진짜 축구를 하게 될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에, 즐거운 표정으로 지원서를 들고 복사실이 있는 건물로 내달렸다. “어? 어디가?” 운동장으로 걸어가던 윤지는 달려오던 혜미를 발견하고, 붙들어 세우려 했지만, 혜미는 종이 한 장을 팔랑거리며 한마디를 던진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복사!” 그제야, 윤지는 운동장 한 켠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어쩔 줄 모르는 남희를 볼 수 있었다. ‘저 여자인가?’ 윤지가 보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진정 아름다웠다. 여성스러운 모습과 동시에 뇌쇄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는, 여자가 보기에도 완벽히 아름다운 여자가 홀로 있었어도 빛났을 텐데, 보통은 커녕, 다이어트에 목을 매고 있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그럴만하네…’ 영후의 난처해하는 얼굴이 그제서야 이해가 가는 윤지였다. 저런 미녀와 함께 있는 남자였으니 어쩌면 그런 영후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왠지 윤지의 직감은 남희보다 자신이 한 발 앞서 있다고 얘기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나~ 내가 먼저 아저씨랑 그걸 해버렸으니?’ 마치 아무도 공략할 수 없는 미지의 성을 먼저 차지해버린 것 같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윤지였다. - “이런 씨발!!” 후방에서 부터 자신에게로 향해 날아온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 하려다 놓친 근명은, 다시 공을 쫓아가려다 스텝을 헛딛어 혼자 나뒹굴고는, 이내 분을 삭히지 못하고 포효하듯,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벌써 몇 번 째인지 몰랐다. 수비수 하나를 돌파해 내기는커녕, 이제는 볼을 간수하는 것 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물론, 영후와 경기를 하고 난 이후에, 좀더 축구에 관해서 눈을 떠버린 비주전팀의 성장도 한 몫을 하긴 했지만, 문제는 근명의 심리상태였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겐가 놈…” 벤치에 앉아 경기와는 상관없이 전방에 홀로 앉아있는 근명을 바라보며, 노감독은 중얼거렸다. 사실 ‘그때’의 노감독의 의도는 그저, 영후를 축구경기장에 다시 서게 하려는 것, ‘그것 뿐’ 이었지만 경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선발팀의 선수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고, 결국 무리수가 되는 줄 알면서도 영후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 경기를 속행시켰던 것이었다. 물론, 영후의 녹슬지 않은 솜씨를 확인하는 수확은 있었지만, 그에 반해 영후를 상대한 선발 선수들은 결국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노감독도 그 정도까지 영후가 몰아붙여줄 줄은 상상도 못했었기에, 지금의 근명을 비롯해 모든 선발팀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는 노감독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잠시 후에 발표할 선발 오더를 보면, 기자들이 놀래 자빠지것구먼.’ 어느덧 마음속으로 내일 출전시킬 선수들을 어느 정도 결정지어 놓은 노감독의 답답한 속내였다. - “그게…아닌 거 같은데…” 몇 번이고 영후 앞에서 중거리 슛을 날리며, 뭐가 잘못된 건지 봐달라는 혜미의 부탁 때문에, 입부 지원서를 정리하고 있는 남희와 윤지를 내버려둔 채 영후는, 혜미의 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어땠어요?” 그나마 이번 슛은 좀 본인의 마음에 들었는지, 밝은 얼굴로 달려와 영후 앞에 선 혜미였다. “아, 음…글쎄…” 하지만 영후는 쉽사리 설명해내지 못했다. 그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면, 영후 본인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영후를 바라보던 혜미는 더욱 답답해 했다. “쳇, 알았다구요. 아직 멀었다는 거잖아요.” 영후의 반응에 실망한 혜미는 그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골대 안에 들어가 있는 공을 주우러 달려나갔고, 이어 윤지가 영후에게 소리쳤다. “여기 다 끝났어요!” 윤지의 조금은 볼멘 소리에 영후가 돌아보자, 산처럼 쌓여있던 입부 지원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다. 남희 혼자였다면 꽤나 고생했을 일 이었을 텐데, 그나마 윤지와 혜미가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마우면서도 영후는 윤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좀 전만 해도 그랬던 애가, 어떻게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리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지만, 영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아름다운 남희 옆에 윤지가 붙어있는 지금은 그야말로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심정이었다. 그런 영후의 심정도 모른 채 남희는 겨우 할 일을 마쳤다는 뿌듯함에 영후를 바라봤고, 그런 두 사람의 시선에 질투가 발동한 윤지는 대뜸 큰소리로 말을 꺼냈다. “점심도 못 먹고 이렇게 고생했는데, 뭐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제야, 영후는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고는 ‘아차’싶었다. ‘수림씨!’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던 게 이제야 생각이 나는 영후였다. ‘어쩐다…’ 수림씨와의 약속을 깨버리기에는 영후의 마음이 불편했고, 수림과의 약속을 지키기에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고생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순간, 고민하고 있는 영후의 바지 속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영후는 다급히 꺼내 받고는 반가운 목소리를 담아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수림씨!” 순간, 남희와 윤지의 얼굴은 금새 굳어지고 있었다. ‘역시…애인이 있었구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던 듯, 남희의 얼굴은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뭐야? 이 여자가 아니었던 거야?’ 반면에, 남희만을 견제하고 있던 윤지는 또다른 인물의 등장으로 또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여자들의 마음을 알고는 있는지, 영후는 왠지 자신을 매섭게 바라보고 있는 듯한 두 여자 덕분에 잔뜩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아, 네…그럼요. 잊지 않고 있었어요. 생각보다 일이 좀 늦어져서요…” 순간, 윤지가 달려들어 영후의 핸드폰을 강탈해갔다. “저희도 배고파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배고프다니…영후는 ‘최악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떨궜고, 윤지는 의기양양하게 영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누구…에요 지금 그 목소린?’ 깜짝 놀란 수림이 영후에게 물어왔고, 영후는 힘없이 대답했다. “아 예. 오늘, 절 도와준 사람들이에요.” ‘아, 그럼 잘됐네요. 어차피 저녁 먹는 거 많은 사람들하고 함께 먹는 게 더 즐겁지 않겠어요?’ “괜…찮겠어요? 그래도?” ‘그럼요, 영후씰 도운 사람들이면, 저에게도 고마운 사람인걸요.’ 참, 착한 여자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통화를 끝낸 영후는 이윽고, 남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고생도 많았는데 괜찮으면, 같이 저녁식사 하지 않을래요?” “아니요, 저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는 남희의 팔짱을 끼며, 윤지가 끼어들었다. “물론 가야죠! 오늘 우리가 일한 게 얼만데! 혜미야 밥 먹으러 가자! 감독님이 쏜 대애~!” 영후는 전혀 다른 이 세 여자와 수림까지 한데 모여 밥을 먹게 되면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미리 상상조차 싶지도 않았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저녁식사를 마칠 수 있기를 바라는 수 밖에… - 하연은 내일 저녁에 벌어지는 A매치의 예상 선발 라인업과 함께 경기 예상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던 중, 요란한 신호음과 함께 도착한 팩스 한 통을 받아 들고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없잖아…’ 없었다. 선발에도 물론, 서브에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연은 근명의 이름을 팩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연은 물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발 라인업이었다. 현재의 한국 축구대표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선발라인업은 분명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근명 뿐만 아니었다. 골키퍼를 비롯해, 양 윙 백과 오른쪽 윙, 그리고 중앙수비수도 모조리 새로운 이름들뿐이었다. 그제야, 하연은 깨달을 수 있었다. ‘영후 때문이야…’ 영후의 복귀전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넘어, 본인들의 실력에 관한 의구심을 갖도록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감독의 입장에서도 이미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군사 따윈 필요 없었을 것이었다. ‘그럼 아침의 그 전화는…설마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본인의 컨디션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터. 아마도 근명은 선발되더라도 평소의 컨디션으로 시합에 임할 수는 없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후보명단에도 들지 못하는 수모를 겪고도, 이 남자 견뎌낼 수 있을지는 하연도 의문이었다. ‘진짜 술 한 잔 사야 겠구만…’ 괜히 미안해지는 하연이었다. -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수림이 먼저 도착해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온 영후 일행은,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은은한 조명으로 장식되어 있는 테이블들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섰다. “영후씨!” 그곳에는, 영후에게 자신을 선물한다는 의미인 양, 큰 리본이 달려있는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은 수림이 그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을 흔들어댔다. 단발머리가 찰랑거릴 만큼 손을 흔들어대는 귀여운 모습에, 순간 남희를 비롯한 윤지와 혜미마저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았지만,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영후는 그 여자의 자리 옆에 가서 서버렸기 때문에 남희 일행은 영후와는 떨어진 빈 자리에 서서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모두들은, 영후가 왜 수림과 사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교가 저렇게 철철 넘치는데, 어떤 남자든 구워 삶겠구만…’ 애교라면 지지 않는 윤지도, 저런 애교 따윈 흉내도 낼 수 없었을 남희와 혜미도 머리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왠지, 기분 좋은 식사 시간이 시작 되어야 할 이 순간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영후 뿐이었다. ‘하하…잠깐 나가서 소화제를 좀 사먹고 와야 하나…’ 하지만 지금 이 공간의 긴장을 해소시킨 건, 그들 중의 누구가 아니라 레스토랑의 점원이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영후 일행이 자리한 테이블 아래에 공손히 무릎 꿇고 앉은 채 주문서를 들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오전 화장실에서의 윤지 모습이 오버랩 되어버려, 영후는 괜히 마른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그런 영후의 마음을 아는 지 어떤 지 수림은 영후의 어깨에 가볍게 기대어오며 물었다. “영후씬 뭐 드실래요?” “아, 저는 뭐…그냥 수림씨가 먹는 거 먹을게요.” 수림의 사소한 스킨쉽 하나에도, 윤지와 남희는 괜히 얼굴이 벌개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수림은 그 둘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그럼, 다른 분들은…?” 수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뉴도 보지 않은 열 받은 윤지의 입에서 그야말로 ‘줄줄줄’ 주문이 쏟아져 나왔다. “아, 우선 에피타이저로 오지 치즈 후라이하고요, 골드 코스트 코코넛 쉬림프 주시구요, 스테이크는 에스프레소 립아이 스테이크 하나랑, 빅토리아 휠렛 주세요. 미디움 웰던으로요. 그리고 샐러드는 씨푸드 샐러드에 싸우전 아일랜드로 드래싱 해주시구요…” 그러기를 몇 분, 겨우 윤지의 주문을 받아 적은 점원은 메뉴를 다시 확인해 주고 가려 했으나, 윤지의 한마디에 점원을 포함한 모두는 또다시 나자빠질뻔했다. “난 두 사람 것만 주문한 건데요? 다른 분들은 주문 안 하세요?” 윤지가 말 한 ‘두 사람의 범주’에 들어간 혜미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지만, 영후를 포함한 수림과 남희는 메뉴판에 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만 했다. “아…으응…그러니까…” 순간, 영후의 바지 속에서 또다시 핸드폰이 울려댔고,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과 함께 영후가 벌떡 일어났다. “내거는 그냥 아무거나 부탁해요.” 순간 당했다는 표정의 남희와 수림은 다시 열심히 메뉴판을 들여다 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 조금 조용한 공간으로 빠져 나온 영후는 그제야 전화를 확인했다. ‘누구 번호더라…?’ 요새 들어, 참으로 많은 전화를, 그것도 모르는 번호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많이도 받게 된다고 생각하며 영후는 전화를 받았다. “네, 이영ㅤㅎㅜㅂ니다.” '선배, 접니다. 그새 저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건 아니죠?' 조금쯤 기운이 빠진 것도 같은 하근명의 전화를 받은 영후는 조금 의아해할 수 밖에 없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물어보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갑작스런 하근명의 전화에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지금의 영후에게 그가 무슨 볼일이 남아있을까. 영후는 전혀 짐작해볼 수도 없었다. ‘선배가 보기에 제게 부족한 건 뭡니까?’ 그의 간단명료한 질문에 영후는 쉽게 답해 줄 수가 없었다. 분명 간단하고도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정말 무수한 의미들이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후 역시 막혀있다고 해서 돌아갈 정도의 남자는 아니었다. 잠시 쉼호흡을 해보던 영후는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얘기하는 건 그냥 단순히 내 생각일 뿐이니까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말았으면 해요. 음…예를 들어보자면, 하선수와 내가 어지간한 고교 수비수 하나를 놓고서 일대 일을 해 본다면, 당연히 지금의 나보다는 하선수가 훨씬 잘할 거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말을 이어가려던 영후는 이 남자에게 이 정도의 말을, 그것도 시합 전날 해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고민을 잠시 해 보았지만, 이내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정도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저 이남자의 그릇의 크기가 그 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해외의 유명 수비수를 놓고 같은 조건에서 일대 일을 해 본다면, 글쎄요…지금의 하선수가 과연 다른 상황에서와 같은 똑 같은 자신감으로 똑같이 플레이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예상대로, 근명이 아무 반응이 없는 게 영후는 씁쓸했다. 하지만, 진짜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선 스스로 일어서야만 했다. 영후도 그러했었고, 그러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전, 내일 경기에서 제외됐습니다.' ‘이런…!’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제야 너무 심한 말을 해버렸구나 싶은 영후였다. '축구선수 해먹기 참 힘듭니다 선배…' 근명은 지금, 전에는 몰랐을 새로운 벽에 가로막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벽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부숴버리든, 뛰어넘어버리든 해야 한다는 걸 영후는 알고 있었고, 이제 막 ‘근명’도 알아가는 것 같았다. “힘내요. 감독님께서도 무슨 생각이 있으셨겠죠.” '그 놈의 영감탱이 때문에 죽겄습니다아~' 겨우, 장난기가 묻어 나오는 근명의 말투에 영후도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어볼 수 있었다. '근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선배?' 순간, 장난 같지는 않은 근명의 진지한 물음이 이어졌다. “네, 물론이죠.” '박기자님 있잖습니까, 박하연기자님.' 근명의 입에서 하연의 이름을 듣고 있자니 영후의 가슴이 괜히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 “네…근데 왜…” 순간, 꽤나 통화가 길어지는 것이 걱정되던 수림이 영후를 찾아 달려 나왔다. “영후씨, 아직이에요? 음식 막 나오기 시작했는데…” 수림의 말과 동시에 근명도 입을 열었다. '두 분… 사귀고 계신 겁니까?' “아…” 그 순간… 눈 앞에 서있는 수림을 바라보며, 영후는 그 어떤 말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12부. 과연, 사랑…일까?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수림을 바라보며, 영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기, 저 앞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저 여자는…그럼 저 여자는…’ 영후의 머리는 어서 빨리, 전화기에 대고 ‘하연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할 것을 재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영후…씨…?” 망설이고 있는 영후의 얼굴을 웃음지으며 바라보던 수림은 그 순간, 여자만의 육감으로, 어서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칫하면, 자칫하면 자신이 들어서는 안될,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바로 뒤돌아 뛰어들어 가 버렸다. 수림이 돌아가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여전히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수림이 서 있던 빈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영후의 입은 천천히 그러나 겨우 열리고 있었다. -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온 수림은, 주문하자 마자 점원이 가장 먼저 가져다 준 '오지 치즈 후라이'의 그 뜨거운 치즈로 범벅이 되어있는 감자 튀김들을 몇 번이고 집어 들어 채 삼키지도 못하면서도 연신 입안 가득 넣고 있었다. “어…언니…” “수림씨…” 남희 일행은 미처 말리지도 못한 채, 수림이 접시의 삼분의 일 정도를 비워낼 동안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무슨…일인 거지? 혹시 싸운 건가…? 모두들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전화통화를 끝낸 영후가 자리로 돌아왔지만, 앉지도 못한 채 수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너무 많은 입안의 음식 때문에 끅끅 대는 모습에 테이블에 놓여있는 물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다 체해요…” 하지만 영후가 내미는 물잔을 무시하며 입안의 음식들을 애써 넘기려 하던 수림은 결국, 몇 번이고 켁켁 대더니 음식이 넘어오는 지, 입을 막고는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제가 가볼게요.” 따라 나가려는 혜미를 영후는 손으로 제지했다. “내가…갈게. 먼저 먹고들 있어.” 영후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수림의 뒤를 쫓았다. - 조심스레 여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영후는, 비어있는 첫 칸을 지나서야, 양변기 옆에 힘없이 쪼그려 앉아있는 수림을 발견했다. “수림씨…” 영후의 부름에도 아무런 미동도 않는 수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영후는 그 칸으로 들어가 수림의 건너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변기를 사이에 두고 여자 화장실의 한 칸에서,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이 곳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었을 영후가 결국은 먼저 입을 열어야 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 한 거에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영후의 입이 열렸고, 그제야 진정된 수림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저도 왜 그런 건지…” 차마 그 순간에 느껴졌던 알 수 없는 느낌에 대해서, 수림은 결코 말 할 수가 없었다. 괜히 입 밖으로 내보냈다가는 그것이 그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영후를 바라보았다. 차마 수림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그 남자의 옆모습은 이런 상황에서도 참으로 그윽해 보였다. ‘지금 이 남자는 이렇게 내 옆에 있는데…언제라도 이렇게 있어 줄 텐데… 그런데도 난 지금 무슨 걱정을 하는 거지…?’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수림의 머리 속에선 수림을 재촉했지만, 먼저 사과를 한 것은 이번에도 영후였다. “그렇게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역시나 그렇게 따뜻한 영후의 말 한마디에 수림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바보…” 그제야 마주본 두 사람은 어색한 장소만큼이나 어색한 미소를 주고 받았다. 흐르는 눈물은 내버려둔 채 웃고 있던 수림은 억지 애교를 부리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 혼자 있게 하지 마요.” 어느덧 양변기위로 건너온 영후의 손은 수림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수림은 그 어떤 대답보다도 마음이 놓였다. “아 맞다, 영후씨 배고프죠? 저 땜에…” “괜찮겠어요?” 그래도 조금은 걱정스러운 영후의 눈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수림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춰주었다. “실은… 내가 더 배고파서 그래요.” 빙긋 웃는 수림의 손을 잡고 일어선 영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며, 여 화장실의 문을 나섰고 마침 화장실을 가려고 들어서던 한 여자는 멈칫한 채, 잘못 들어 온 건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영후를 뒤따라 나오는 수림을 보고서야, 이해했다는 듯 질투 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본인이 왜 여기에 서 있는지를 아랫배로부터 다시금 전해 받고는,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여자 덕분이었을까, 수림과 영후는 긴장에서 해소되며 밝게 웃을 수 있었다. - “오전에 발표하신 선발 라인업에서 하근명 선수를 비롯해 A매치 경험이 풍부한 선수들을 모두 제외하셨는데요. 이번 선발진은 너무 무게감이 떨어진다고 보진 않으십니까?” 한 기자의 질문이 쏟아지자 마자, 무덤덤하게 인터뷰 단상에 앉아있는 노감독에게로 플래쉬 세례가 쏟아졌다. 질문이 불편했을까, 카메라 불빛이 불편했을까. 꽤나 인상을 쓰면서 노감독의 입이 열렸다. “선발된 선수들은 K리그에서 충분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리그를 지켜보신 축구기자시라면 충분히 납득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연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축구 전문기자가 아닌 야구 전문 기자가 한 ‘우문’에 노감독은 아무렇지도 않게 ‘현답’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혹시 선수들이 대표팀에 소집된 후에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건 아닙니까? 역시나 노감독의 탓으로 몰아가려는 사냥이 시작되기 시작하자, 하연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본인과 소속팀에서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어리광을 부릴 거라면, 처음부터 대표팀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덤덤하지만 단호한 노감독의 답변에 하연은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예전과는 달리 A매치를 앞두고 선수 소집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48시간에서 72시간이 고작이었으니 노감독의 말은 결코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제 국가대표팀 감독이란 자리는 새로운 선수를 발굴해 훈련시킬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저, 각 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면밀히 검토해서, 그에 맞는 전술을 완성해야 했고 그렇게 그들과 이삼 일을 보낸 후 경기를 치러 내야 했다. 때문에, 손 발이 맞지 않을 것을 우려한 전 국가대표감독들은 어지간하면 세대교체를 하지 못했고, 네임 밸류만 넘치는 선수들을 선발로 내세워, 혹여 경기에 패하더라도 그 선수들을 방패로 내세워 언론의 집중포화에서 도망가곤 했었다. 하지만 노감독은 이미 불러들인 선수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오로지 실력만을 평가해서 뽑았기에, 어찌 보면 기자들의 먹이감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인터넷에 나돌고 있는 대표팀 연습경기 결과가 이번 선발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이 질문이 왜 안 나오나 했던 하연은,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연습은… 그저 연습일 뿐입니다.” 간단한 대답 후 앞에 놓은 물컵을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시는 노감독에게 또다시 엄청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그 영상을 보고 난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이영후 선수가 완전히 부활했다는 평이 많습니다. 노감독님께서는 이영후 선수의 은사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이영후 선수가 언제쯤 축구계로 돌아올지 알고 계신 건가요?”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노감독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 기자의 질문이 더해졌다. “돌아오는 건 확실한 건가요?” 이번 인터뷰 중에서 어쩌면 가장 고심하는 듯 한 노감독의 모습이었다. “그건…그 놈만이 알고 있지 않겠소?” 노감독조차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기에, 언제나 스트라이커 부재에 골머리를 앓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불운한 이영후’를 추억하며 잠시 침묵을 하고 말았다. 허나 갑자기 고요해지는 공간을 깨뜨리는 낭랑한 하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근명 선수의 컨디션은 어느 정도 인가요? 정말 후보에서도 제외될 정도로 최악인 건가요?” 어지러운 회견장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하연이었기에, 질문과는 상관없이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로 쏠렸고, 노감독도 하연을 발견하고는 조금 미소를 지었던 것도 같았다. “그 놈은…컨디션보다는…자신감 회복이 먼저일 것 같소만.” 노감독의 답변을 듣고 난 하연은 자신이 들고 있는 레코더에 녹음되지 않을 만큼 약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어 보았다. - 영후는, 왜 여자들이 다이어트에 목을 매는 건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각종 요리로 가득했었던(!) 접시들이 모두 설거지를 마친 그릇처럼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아직 그녀들의 저녁식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는 것이었다. “에이, 먹다가 자꾸 흐름 끊기면 많이 못 먹는데.” 포크를 쪽쪽 빨아대며, 윤지가 입을 열었고,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빨아대던 수림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이러다 괜히 헛배만 부르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시선을 돌려본 영후의 눈에 잡힌 아무 말도 없는 혜미는, 계속 리필 되고 있는 빵에 연신 잼을 발라 우물거리고 있었고, 설마 하는 눈으로 바라본 남희마저도 남아있는 소스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으며 다음에 나올 음식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도대체…저 음식들이 다 어디로 들어갔다는 거야?’ 전혀 배가 나온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 여자들의 모습은 기적만 같았기에, 한 끼 식사비용으로는 오늘 지출할 비용이 최대가 될 것임을 확신하며 영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저씨, 아 참, 감독님. 오늘 입부한 인원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세요?” 윤지의 갑작스런 질문에, 영후는 그제야 오늘부터 자신들의 축구팀 창단 작업이 시작되었었음을 깨달았다. “글쎄…한 스무 명 넘었니?” 입에 넣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남희가 입을 열었다. “0을 하나 빼먹으셨어요.” “예에? 그게 정말이에요?” 담담하게 입을 연 남희와는 달리 영후는 새삼 놀라고 있었다. 하루 만에 그 인원이 모였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이내 그것보다 더 대단했던 건 윤지의 발상이었다고 영후는 생각했다. ‘좀 갑작스런 짓만 안 하면 좋은데 말야…’ 잠시 윤지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는 영후를 부른 건 수림이었다. “영후씨! 또 어디 가 있는 거에요!” 수림의 말에 흠칫 놀라며, 영후는 순간 나이프 하나를 떨어뜨렸다. “아, 미안해요. 남희씨 말에 너무 놀라서 그만…” 영후는 떨어진 나이프를 집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고, 무심코 테이블 속 광경을 정면으로 바라본 영후는 순간 놀라 고개를 들다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쾅! ‘윽!’ 하지만 아프다고 찡그릴 사이도 없이 영후는 재빨리 고개를 테이블 위로 들어올릴 수 밖에 없었다. “영후씨, 괜찮아요? 그냥 두지 그랬어요.” “아 예, 괜찮아요.” 멋 적은 듯, 머리를 긁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영후였지만, 괜히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었기에 혹시나 누군가 심장소리를 들을까 조마조마 한 눈치였다. 그 이윤, 역시나 윤지 때문이었다. 영후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윤지는 영후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은밀한 속살이 그대로 보일 수 있도록, 자신의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노 팬티였던 윤지의 다리 사이를 보게 된 영후는 그제야, 화장실에서 왜 그렇게 쉽게 섹스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경계 대상 1호야, 쟤는…’ 테이블 위로 몸을 일으킨 영후와 살짝 눈이 마주친 윤지는 역시나 아무도 못 알아챌 만큼 빠르게 ‘찡긋’하며 윙크를 보내주었고, 영후는 짐짓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감독님, 인원이 많이 모인 건 좋지만, 그 인원을 모두 통솔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겠죠?” 남희의 걱정스런 발언에 영후도 그제야 같이 걱정을 해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영후 혼자서 그들을 가르치기에는 조금 벅찬 감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 하루만으로 입부 지원을 마감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인원은 더 늘어갈 가능성이 다분했으니 뭔가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 했다. “제가…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수림에게로 향했다. “수림씨…” “전, 지금이야 수영장에서 강사를 하고는 있지만, 원래 체육교육과를 나오기도 했고, 또 예전에 운동하다 다쳤을 때 재활했던 경험도 있었어서, 기초체력에 관련된 것들은 어느 정도 지도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수림의 갑작스런 제안에 모두들 당황하는 가운데, 특히 남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건 역시나 이번에도 윤지였다. “그럼 저도 도울래요!” “야, 네가 뭘 한다구?” 아무리 축구 보는 걸 좋아한다지만, 축구에 관한 직접적인 것은 젬병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혜미는 바로 윤지를 만류했다. “이래봬도 난 캠코더 촬영에 자신 있단 말야. 분명, 이런 것도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정보가 중요한 시대니까.”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희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코칭 스텝 환영회인건가요? 어쨌든 모두들 환영합니다.” 순간 모든 이들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음료수 잔을 들어올렸고, 그야말로 엉겁결에 한국여대 축구단 코치가 그 곳에서 인선되고 있었다. - “휘~익!” 취재를 마치고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를 찾고 있던 하연은 생경한 휘파람 소리에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휘파람의 근원지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청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누구…?”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하연을 위해, 그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 챙을 손가락 하나를 이용해 조금쯤 들어올려 주었고, 그제야 하연은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계산을 마치고 나온 영후에게 남희 일행은 포만감에 만족한 듯,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감독님.”, “저두요, 감독님!”, “이번 한 번으로 끝내는 건 아니시죠?” 하나같이 다들 예쁘고, 착한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은 영후 또한 기분 좋게 답례인사를 했다. “오늘 다들 애써줘서 고맙고, 내일부터는 더 바빠질 테니 각오들 하라구.” 영후의 인사를 끝으로 남희와 혜미는 발걸음을 돌렸고, 윤지는 그들보다 한 박자 늦춘 채 영후와 수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혜미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귀여운 아이들이에요.” 너무나 귀여워 꽉 깨물어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수림이 말했고, 영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그런가요?” 수림의 말에 떨떠름하게 답변을 하던 영후였지만, 여전히 시선은 윤지에서 떨어질 줄 몰랐기에 그런 영후 덕분에 수림은 또다시 기분이 살짝 상할 뻔했다. “흥, 나도 저맘때는 꽤 귀여웠다구요.” 나름 날카롭게 세운 팔꿈치로 영후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가격하며 수림이 삐친 듯 한마디 했고 불의의 일격을 당한 영후는 숨을 겨우 쉬며, 변명을 해보았다. “아이구야, 지금도 수림씬 충분히 귀여운걸요. 켁켁…” 영후의 말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 수림은 다시 헤헤거리며 영후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우리 좀 아쉬운데, 어디서 한 잔 더 할래요? 내가 진~짜 분위기 좋은데 알고 있는데.” 수림덕분에 술꾼이 될까 걱정이 되던 영후는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나 너무나 귀여운 수림의 눈망울이 처연함을 가장한 채 영후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나마 기자 월급 생각해줘서 고마운데요?” 작지만 아담한 재즈바에 앉은 하연이 마티니 잔에 담겨져 있는 가니쉬 ( 칵테일에 레몬이나 체리, 올리브를 꽂아놓은 막대 : 작가 주)를 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크아~! 뭐, 같이 취하자고 마시는 건데 좋은 게 좋은 거죠.” 맥켈란 한잔을 스트레이트로 넘기며, 근명이 ‘쓴’ 답을 하고는, 연이어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그나저나 오늘 영감님 진땀 꽤나 뺐죠?” “뭐, 기자들이란 다 그런 식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셈이니까요.” 음미하듯 마티니를 마시는 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근명은, 자신의 잔에 다시금 술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박기자님 같은 분만 계시면 참 좋은 데 말이죠.” “훗, 알고 보면 저도 다른 기자 못지 않아요.” 역삼각형 모양의 잔에 담겨있는, 마티니 속 올리브의 묘한 일그러짐을 바라보며 하연은 한숨 쉬듯 말을 했다. “아니요, 분명 다릅니다.” 마치 확신을 하듯 말하는 근명을 그제야 조금은 똥그란 눈을 해서 바라보는 하연이었다. “뭐가 그렇게 달라 보이던가요, 제가…?” “그건…그건 저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다를 거라고, 또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근명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하연은 잠자코 마티니를 한 모금 더 넘겨보았다. “다르니까…그러니까…박기자님을 선배가 좋아하는” “하연아…!” 순간, 이런 장소, 이런 시간대엔 절대 들려선 안될 낯익은 목소리가 근명의 말을 가로막으며 하연의 귀에 흘러 들어왔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하연은 너무나 기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가 있을 법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하연의 기대와는 달리 그 곳에는 영후뿐 만 아니라 처음 보는 단발머리의 귀여운 아가씨가 행여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아이처럼 영후의 어깨에 꼭 붙어있었다. 누군가는 무슨 말을 해야만 했지만, 하연은 수림을, 영후는 근명을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고만 있었다. 영후는 순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받았던 전화속 근명의 질문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고 그제야 이 상황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물론, 이해가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선배…” 이상한 기류 때문에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근명을 붙든 건 다름아닌 하연이었다. “어쩌지? 우린 다른 데 가서 한 잔 더 하려고 했는데, 아쉽네. 아 다행인가?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게 돼서? 어쨌든 나중에 보자. 가요 근명씨.”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마치 기계음처럼 읊조리던 하연은 근명의 팔짱을 끼고는 카운터로 걸어갔고, 마지못해 끌려가던 근명은 우물거리며 인사를 남겼다. “선배, 그럼 나중에…” 그렇게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영후는 차마 돌아보지 못했고, 그런 영후의 팔을 붙들고 있던 수림의 손에는 조금씩 힘이 풀려가고 있었다. ‘그랬구나. 이 사람 마음에 들어와 있던 건…’ 조금씩 떨리고 있는 한 남자의 어깨에, 손도 대보지 못할 정도의 거리감을 느껴본 것은 수림으로선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었지만, 처음치고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 “우와, 데따 넓다. 근데, 진짜 여기서 너 혼자 살아?” 윤지의 아파트에 처음 와 본 혜미는, 연신 이 방 저 방을 들락거리며, 집 구경에 여념이 없었고, 윤지는 그런 혜미를 내버려둔 채 욕실에 들어가 욕조의 온수를 틀었고, 시원한 소리와 함께 밀려나온 물들은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며 거울을 뿌옇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미국에 들어가셨거든!” 물소리에 묻힐까 꽤나 큰소리로 대답하는 윤지였다. 그제야, 욕실 문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혜미가 물어왔다. “안 무서워? 혼자서?” 소매를 걷은 한 팔로 욕조의 물 온도를 가늠해보며 휘휘 저으며 윤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전혀.” “보기보다 강심장이구나 너?” 티셔츠 하나를 천천히 벗으며 혜미는 던지듯 툭 말을 했지만, 그 질문에 윤지는 조금쯤 쓸쓸한 얼굴이 되었던 것도 같았다. ‘글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언제부턴가, 윤지는 홀로 있는 것만큼 편한 순간이 없었던 것도 같았다. “먼저 할래?”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윤지가 정신을 차린 건, 혜미의 물음 덕분이었다. “아니…아…” 어느새 몸에 걸치고 있던 옷가지들을 전부 벗어 버린 혜미의 나신에, 윤지는 잠깐 넋을 놓고 말았다. 여자의 몸이라고 하기엔 너무 탄력이 넘쳐 보였고, 남자의 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드러움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리 뛰어난 ‘명마’의 몸이라 해도 혜미 앞에선 고개를 숙여야 할 거라고 윤지는 생각해 보았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니? 여자 처음 봐?” 하루에 몇 번이고 남자 몸을 바라봤어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던 윤지였건만, 같은 여자인 혜미의 알몸을 보고 있노라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미안…근데 너 몸이 참 예쁘다…” “흥, 이래봬도 내가 쫌 한 몸매 하시지!” 창피한 것도 모르고, 혜미는 윤지가 보란 듯이 한껏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런 혜미의 아름다운 몸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윤지도 이내 티셔츠를 벗으며 한마디 했다. “같이 하자, 목욕” - 맞은 편에 앉아 홀로 잔을 채워가며 연거푸 들이키고 있는 수림을 만류할 생각도 못한 채, 영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건 도대체…’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에 영후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냉랭했던 하연도 처음이었거니와, 그런 하연에게 아무런 말도 해보지 못한 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도 처음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고민에 괴로워하는 영후를 환기시켜준 건 다름아닌 수림이었다. “뭐에요…이게…” 혀가 꼬일 대로 꼬인 채 영후에게 인지 스스로에게 인지 말을 하고 있는 수림 덕분에, 이미 반 이상이나 비워져 있는 잭다니엘을 바라보고는 수림의 손에서 빼앗아 들고는 조용히 말을 하는 영후였다. “그만 마셔요. 그만 마시고 이제…” “내놔요!” 술을 마셔서 인지, 힘도 조금은 세진 수림은 기어코 영후의 손에서 다시금 술병을 빼앗아 갔고, 또다시 넘칠 만큼 술잔에 술을 부었으며, 힘겹게 또다시 들이켰다. ‘탁!’소리를 내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수림은 주정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영후씨도…사람이 그럼 못써요…못 쓴다구요…어떻게…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예?” 수림의 한 맺힌 듯한 절규에 영후는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도대체 나란 놈은 어떻게…’ - 하연 또한 근명과 함께 호텔의 바로 자리를 옮겨 어두침침한 조명과 분위기에는 걸맞지 않게 연신 잔을 비워대고 있었다. “좀 천천히 마셔도 되는 게 술 입니다만…?” 은근슬쩍 ‘발렌타인’을 빼앗아 드는 근명의 손을 잡아채며, 하연은 또다시 비워진 자신의 술잔에 넘치도록 술을 부었다. 그리고 타는 듯한 통증을 무시하며 또다시 식도로 흘려 보냈다. 이 정도의 고통은 왠지 고통 같지도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리, 밤을 새우며 아무리 술을 마셔보아도, 지금 느껴지는 가슴의 고통은 절대 치유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연은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들이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 따윈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아파해야 하는 거지…? 난…난 그 녀석과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그저…그저 친구였을 뿐이었잖아…친구…그런 거 아니였어? 박하연, 혹시 너…혼자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거야?’ 옆에 앉아 있는 근명은, 또 다른 자아와 다투고 있는 하연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박기자님은 어떤 겁니까?” 조금쯤 풀린 눈으로 그제야 하연은 근명을 바라보았다. “뭐…가요…?” 멍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던 근명은 이내 답답하다는 듯이 술잔에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겨우 숨을 쉴 수 있어진 듯, 숨을 몰아 쉬어보곤 다시 하연을 바라보았다. “선배를…그러니까 영후 선배를…” 마치 금기시 된 단어를 들어버린 양,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근명을 바라보던 하연의 눈에선 ‘똑’하고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더니만, 이내 거침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마침내 하연은 고개를 파묻고 엉엉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 나…이 아가씨… 우는 것도 이쁘네…’ 이런 격조 있는 장소에서, 은은한 음악소리를 죽일 정도로 울어대고 있는 하연 덕분에 모든 손님들의 시선은 근명과 하연의 자리로 쏠렸지만, 달래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근명은 하연의 대성통곡을 그저 재밌다는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욕조에 거품제를 넣어 거품제가 그득해진 덕분에, 혜미와 윤지는 그야말로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비누 방울도 만들어보며 천천히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리, 돌아앉아봐.” 윤지가 시키는 대로, 윤지에게 등을 보인 채 앉은 혜미는 이내 느껴지는 부드러운 솔의 느낌에 저절로 눈이 감기는 것만 같았다. 타월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드러웠고, 야릇했기 때문이었다. “아, 부드럽다…뭐야 지금 그건?” “어어, 그냥 뭐. 좀 좋은 타월 같은 거야.” 실은 남자들을 흥분케 하는데 효과적으로 쓰이는, 동물들의 희귀한 털만으로 만들어진 타월이라는 말은 윤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미는 윤지가 닦아주고 있는 등으로부터 이상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을 느껴가고 있었다. “어때? 기분 좋아?” “으응…근데 있지…나 쉬 마려운 거 같애…” 혜미의 말에 둘은 동시에 키득거렸지만, 윤지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이내 등만 닦아주던 타월을 조금씩 앞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드러나버린 목덜미를 시작으로, 겨드랑이와 옆구리를 부드럽게 애무하듯 닦아주었고, 혜미는 너무나 소리 내고 싶었지만, 윤지가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두려워,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윤지는 그런 혜미를 가지고 놀듯, 점점 손을 혜미의 앞쪽으로 이동시켰고, 어느새 타월은 혜미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마사지하고 있었다. “하아~” 순간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신음소리에 스스로 놀라, 다시금 입을 꼭 다물어 버린 혜미의 귀에 대고 윤지는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이제 다시 돌아 앉아 봐…” 마치 꼭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명령처럼, 혜미는 곧바로 윤지를 바라보도록 돌아 앉았고, 그런 혜미가 귀여운 듯, 윤지는 혜미의 입에 ‘쪽’하고 입맞춤을 해 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혜미는 그저 눈만 똥그랗게 뜬 채 윤지를 바라봤지만, 윤지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전히 손에 든 타월을 이용해 자신에게로 뻗어 있는 기나긴 다리를 천천히 그러나 부드럽게 매만져주고 있었다. ‘이 아이…입술도 참 부드럽구나…’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입을 스치고 간 윤지의 입술에 대해 돌이켜보며, 조금쯤 더 머물렀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혜미는 갑자기 숨이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거품 사이로, 윤지의 손가락이 자신의 보지 둔덕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게 지금…무슨…’ 혜미가 미처 생각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윤지의 다른 한 손은 혜미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고, 어찌할 줄 몰라 벌리고 있던 입으로 이내 윤지의 혀가 들어오고 있었다. - 자신의 등에 업힌 채 곤하게 잠들어 있는 수림은 너무나 가벼웠지만, 수림으로부터 전해지는 마음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영후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 여자는 나에게 몸도, 마음도 아낌없이 내어주었는데…난 뭘 줬던 것일까…’ 여태껏 이 귀엽고도 불쌍한 여인에게 자신이 준 것이라고는 그저 눈물 밖에 없었던 것 같아, 영후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과연 사랑인지는 영후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지금 자신의 등에 업혀있는 이 여자를, 사랑이 아닌 연민으로 대하는 거라면 그것만큼 이 여자에게 잔인한 것도 없을 것이었다. ‘이런 게…이런 게 과연 사랑인 걸까…?’ 축구만을 생각하며 살아오다가, 스물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영후는 사랑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있었다. - “박기자님! 박기자님, 일어나봐요! 이봐요, 박기자님! 아, 이거 완전 맛이 갔네. 어쩐다…?” 엎어져 펑펑 울던 하연은 어느새 술에 곯아떨어져 잠이 들어있었고, 그런 하연을 깨워보려던 근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지갑에서 수표 몇 장과 파란색 지폐 몇 장을 꺼내 들며 바텐더를 불렀다. “여기 이 취객 좀 업혀 주쇼.” “네 손님.” 나비넥타이 차림의 남자는 깃털같은 하연을 쉽사리 근명의 등 위로 옮겨주며 지폐의 장수를 확인하더니 괜한 친절을 더 베풀려는 듯, 몸에 베인 가식적인 목소리로 근명에게 물어왔다. “손님, 대리운전도 불러드릴까요?” 잠깐 바텐더의 물음에 멈칫했던 근명이었지만, 이내 하연이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괜히 밖으로 나다니며 스캔들을 만들긴 싫었기에, 하연을 업고 일어나며 바텐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그건 내 알아서 할 테니까, 저기 문이나 좀 열어 주쇼.” 등으로 전해지는 하연의 뭉클한 가슴과 손으로 만져지는 탱글탱글한 엉덩이 덕분에 아랫도리가 순간 묵직해 지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근명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로 올라갔지만, 그곳이야 말로 피해야 될 종족들이 숨어있었음을 근명은 알지 못했고, 어설피 펼쳐 든 신문 틈 사이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파파라치들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 “나와~ 한 잔 하자.” 거실로 술상을 내가며 수건으로 몸을 두른 윤지가 소리쳤고, 혜미는 아직도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한거지…?’ 혜미의 몸은 어느정도 식어버린 욕조의 물보다 훨씬 더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자신의 몸이 만져졌고, 19년을 간직해 온 입술의 순결이 사라져버린 좀 전의 순간이었다. 그것도 다름아닌 같은 여자인 윤지에 의해서 말이다. 하지만 더욱 당황스러운 건, 그런 윤지 덕분에 혜미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어쩌지…?’ 하지만 이렇듯 갈팡질팡하는 혜미와는 반대로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목소리 높여 부르는 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나올 거야?” “어? 어어, 나갈게…” 그냥, 너무 친하다 보니까, 다른 아이들보다는 조금쯤 더 스킨쉽이 진했던 거였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혜미는 거품 가득한 몸을 수건으로 닦아내고는 윤지가 놓아준 큰 타월로 가슴부터 엉덩이까지 감은 채 거실로 나갔다. 구릿빛 피부에서부터 발산되는 건강미를 달콤한 눈으로 바라보던 윤지는, 조금쯤 긴장하고 있는 혜미에게 맥주 캔 뚜껑을 ‘칙’ 따서 내밀며 윤지가 말했다. “앉어, 자.”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자신과는 달리, 너무나 자연스러운 윤지 덕에, 조금 더 긴장이 해소된 혜미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진짜 천국이 따로 없구나. 난 맨날 아빠 등살에 숨막혀 죽을 지경인데.” “그럼 이리 와서 같이 살래?” “진짜?” 혜미의 눈은 금새 동그란 토끼 눈이 되었고, 그런 혜미를 바라보며 윤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진짜.” 잠시 고민하던 혜미는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그건 안될 거 같아.” 맥주를 들이키며, 눈으로 묻고 있는 윤지에게 혜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빠한테는 내가 있어줘야 할 거 같아서…” 김빠진다는 듯, 삐죽거리며 윤지는 핀잔을 주었다. “핏, 그럼 시집갈 땐 어쩔래?” “풉, 그땐 그때고” 두 사람은 키득거리며 한참을 웃어댔다. “아 맞다, 혹시 컴퓨터 있니?” 혜미의 갑작스런 물음에 윤지는 순간 멈칫했지만, 혜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으응, 저 방에. 근데 왜?” “아, 메일 좀 확인할 게 있어서. 잠깐 써도 되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윤지가 가리킨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혜미가 물었고, 윤지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내 ‘별일 없을테지’라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어? 어어.” - 수림을 침대에 눕혀 놓고 나서도 영후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행복했었던 며칠 간이었었다. 그건 오로지 이 여자, 수림 덕분이었다. 마치 간밤에 몰래 산타클로스가 두고 간 ‘선물’ 같은 이 여자 때문에, 너무 행복했고, 즐거웠고, 정말이지 지금 스스로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만일 지금이라도 당장 이 여자가 자신을 떠나가겠다고 한다면, 분명 영후는 붙잡고 싶어질 것이었다. 이 여자를 절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정녕 사랑이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영후는 절대 그렇다, 고 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수림을, 하연을, 그리고 지금의 자기 자신을 너무나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미안…해요.’ 천천히 손으로 수림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는, 이불을 목 언저리까지 끌어올려 주던 영후는 스러지듯 침대 옆 바닥으로 누워보았다. - “으핫!” 샤워를 마치며, 자신의 사타구니께로 찬물을 틀어보았던 근명은 순간 너무나 차가운 충격 때문에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 질렀다. “으…떨어져 나갈뻔했네. 호텔에 클레임 좀 걸어 줘야 겠는 걸.” 그런 악동 같은 생각도 잠시, 거울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던 근명은, 은근히 자아 도취되고 있었다. 완벽한 ‘왕’자에, 탄탄한 등 근육, 그리고 넓은 허벅지는 자신이 보기에도 멋진 남자의 몸이었다. ‘잠들어서 이런 멋진 그림을 못 보는 게 아쉬울 겁니다 박기자님.’ 하반신만을 타월로 가린 채, 욕실 밖으로 나와 침대에 널 부러진 하연을 바라보며 근명은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도드라지는 하연의 가슴선과 매력적인 허벅지는 어느새 근명의 물건이 타월 밖으로 솟아나오게 해 주었다. 근명은 그런 자신의 물건을 쓰다듬으며 다독거렸다. “걱정마라 요 녀석아. 밤은 길고, 시간은 많단다…” 기절한 토끼를 바라보고 있는 하이에나의 눈처럼 맹렬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던 근명은 천천히 하연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특별판> '스물 세 살의 크리스마스' 고막을 먹먹하게 만들며 비행기가 궤도에 오르고 나자, 좌석에서 안전 벨트를 풀고는 창 밖으로 점점 지도처럼 변하고 있는 육지와 바다를 내려다보며, 영후가 입을 열었다. “친구로 기자도 하나 있을 만 하구나. 이런 황금 같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두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영국도 다 가보고.”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잠시 생각해보던 하연은 손가락을 안쪽부터 말아 쥐어 단단한 주먹을 만들고는 바로 영후의 복부에 훅을 날리려다 마주 오던 스튜어디스의 ‘저 멋진 남자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스쳤다가는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는 강한 협박성의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부르르 떨며 분노를 애써 삭히며 말했다. “도착하면 말도 안 통하고, 길도 모를 테니까 절대 이 누나 곁에서 떨어지지나 말아라. 알았냐? 괜히 길 잃어버리고 질질 짜지나 말고, 앙?” 하연은 으르릉 거리긴 했지만, 속마음은 그것과 정반대였다. 취재차 영국을 방문하는 하연에게 회사에서는 겨우 이코노미 클래스 한 장을 준비해주었을 뿐이었지만, 2003 시즌을 마친 영후를 대동했기에, 퍼스트 클래스 좌석으로 이렇게 편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후와 같이하는 여행이 아니었다면, 그 비좁은 좌석에서 하연은 12시간을 꼬박 벌 섰어야 했을런지도 몰랐다. 물론 그 돈은 모두 영후의 주머니를 강탈해서 얻어 낸 것이었지만. “근데 갑자기 왠 영국이야?” 하연이 시키는 대로 표도 구입했던 영후였지만, 그럼에도 왜 갑자기 해외까지 날아가 현장취재를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했었다. ‘바보야 그건 너 때문이잖아’,라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은 채 하연은 대충 얼버무렸다. “뭐, TV에서도 조금씩 해외 경기들이 방영되고 있다 보니까, 팬들의 수준에 맞추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된다고 하더라.” 사실, 국내 리그에서 뛰다가 곧바로 빅리그로의 직행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영후 때문에, 방송사에서도 이미 중계권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하연의 잡지사에서도 뭔가 특별한 취재를 해야 만 했었던 것이었다. “쳇, 우리한테나 관심 좀 가져주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영후는 구름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린 분명히 방 두 개를 예약했단 말이에요!” “죄송합니다만, 현재 확인해본 바로는 싱글 침대 두 개가 놓여있는 방 하나를 예약하신 걸로 나와있습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하연은 분명, 상대를 가리지않고 원 투 스트레이트를 작열시킬거란 영후의 기대와는 달리, 타국에 까지 나와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던지, 최대한 성질을 억누르며 정중하게 다시 호텔 데스크에 있는 안내원에게 물었다. “좋아요, 그럼 지금이라도 방 하나를 더 추가해 주세요. 그래 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안내원은 영국 발음만큼 이나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현재로선 예약 가능한 객실이 없습니다.” 안내원의 최후 발언에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하연에게서 위기의식을 느끼며 슬며시 멀어지던 영후는 그러나 곧이어 하연에게 귀를 잡힌 채 호텔 방으로 질질 끌려들어가야만 했다. - ‘한 번 만 볼까?’ 물줄기 소리가 요란한 욕실을 등진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혈기 왕성한 스물 세 살의 영후는 꽤나 갈등을 하고 있었다. 욕실 문이 불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기에 그저 실루엣만을 보는 거니까, 그쯤은 서로에 대한 서비스가 될 거라고 생각도 했지만, 혹여 하연이 알아채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쩌면 자신의 묘를 타국에 써야 하게 될지도 몰랐기에 쉽사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영후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전혀 영후를 남자로 생각 안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하연이었다. “야, 거기 가방에서 내 속옷 좀 꺼내줘.” 순간 영후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뻔 한 걸 억지로 참아 넘겼다. 그리고는 짐짓 화난 목소리로 욕실 쪽을 향해 소리질렀다. “야 임마! 넌 부끄럽지도 않냐! 말만한 처녀가…” 하지만 이미 영후의 손은 하연의 여행가방을 열고, 부드러운 하연의 속옷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부…부드럽다!’ 야한 영화에서 보여지던 ‘레이스’라던지, 망사 같은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야말로 단정하기만 한 속옷이었지만, 원래 그 나이 때 남자들이란 다 그러하지 않던가. 그저 여자의 속옷을 보고, 또 직접 만지고만 있었음에도 영후의 그것은 9시간의 시차 따윈 전혀 상관하지 않는 다는 듯, 늠름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 빨리 안 가져오고 뭐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영후는 괜히 당황하며 얼른 속옷을 집어 들고 욕실 쪽으로 향했고, 영후의 실루엣 또한 볼 수 있었던 하연은 뿌연 유리문을 살짝 열고 손을 내밀어 속옷을 받아가려 했다. 순간 영후의 손에 들려있던 속옷 중 브래지어가 떨어지며 영후의 ‘그것’위에 살포시 얹혀지고 말았다. 하지만 열린 문틈으로 연신 하연의 속살을 훔쳐보던 영후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브래지어도 받기 위해서 손을 더듬던 하연은 왜 영후가 브래지어를 낮게 들고 있는 건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채 문을 조금 더 열고 손을 뻗기 시작했다. 당연히 영후의 입에선 침이 흐르고 있었고 하연의 손은 잽싸게 브래지어를 낚아채려 했으나 그만 영후의 물건과 브래지어를 동시에 꽉 잡은 채 당기기 시작했다. “어! 야야~!” 엄청난 하연의 팔 힘 덕분에 그야말로 유리문에 딱 붙을 정도로 딸려 가버린 영후는 그야말로 당황할 수 밖에 없었고, 문 틈으로 영후의 그것을 본의 아니게 끌어들여버린 하연은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잡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꺄~악! 이 변태야! 죽을래! 안 나가!” 하연은 물기가 가시지 않은 매끈한 다리로 거침없이 영후의 그것을 ‘프리킥’해버렸고, 문틈으로 드러나는 뿌연 증기 속의 나신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노력하다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영후는 입에 거품을 물며 욕실 앞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으…내가 뭘…” - ‘아, 좀 자줘야 하는 데…’ 연신 모든 게 마음에 안든 다는 표정의 하연을 따라나선 영후는, 시차 덕분에 비몽사몽 했기에, 그저 호텔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인 후 편안한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자길 바랬지만, 일정이 빡빡하다는 하연 덕분에 구질구질하게 비가 오락가락하는 시내 풍경을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택시 안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야 안 내리고 뭐해?” “으응? 벌써 다 왔어?”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영후는 눈을 비비며 택시에서 내려섰다. 그 순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엄청난 경기장의 외관에 영후는 다시 한번 눈을 비벼봐야 했다. ‘여긴…?’ 하연과 영후가 내린 곳은 다름아닌 리버풀의 홈 구장인 ‘앤 필드’ 였던 것이다. ‘여기가 앤 필드구나…’ 드디어, 실제로 구장을 돌아보며, 경기장 잔디도 밟아볼 수 있겠다는 꿈에 잔뜩 부풀던 영후는 그러나 곧 이어지는 하연의 황당한 발언에, 어이가 없었다. “야, 넌 기자가 아니라서 못 들어가니까,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누나 금방 온다.” ‘마…말도 안돼!’ 영후는 그야말로 하연에게 속아 넘어 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기자인 하연과 같이 다니면, 여러 유명한 팀의 구장에는 물론이고, 쟁쟁한 선수들을 직접 만나 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이 사비를 털어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은 불여우에게 완전히 속아버린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킨다고 그곳에 멍하니 서 있을 영후가 아니었다. 이내 영후는 천천히 구장 밖을 돌며 그나마 봐 둘만한 것이 없나 둘러보기 시작했다. 역시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동네답게, 구장 한 편에는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빌 생클리’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힐스브러 기념관( 1989년 4월 15일 영국 셰필드에 있는 힐즈브러 스타디움에서 발생한 96명의 팬이 사망한 사건을 기리며 만든 기념관. 당시,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간의 FA컵 준결승전이 힐즈브러 스타디움에서 열렸고, 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25,000여명의 리버풀 팬들이 찾아왔는데,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 킥오프 이후 96명이 압사한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의 모든 스타디움에는 기존의 입석 형태가 아닌 좌석 형태의 좌석을 갖추고, 보호 철망을 철거하게 되었다. 작가 주)과 함께 생클리 문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You'll Never Walk Alone’ 언제나 후반 말미에 리버풀의 홈에서 응원가로도 불리는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저 글귀를 바라보자 진정한 축구팬의 열정이 바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참 대단한 동네야…’ 영후는 정말 부러웠다. 물론 죽은 팬들이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원 없이 축구를 즐기다 가버린 사람들이었으니, '한' 같은 것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내 영후는 기념관과 방문자 센터에 들러볼까 했지만, 왠지 그러기는 싫었다. 지금의 영후가 진정 해보고 싶었던 일은 바로, 선수들을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영후는 결국 미적대며, 구장 경비원인 듯한 사람에게 더듬더듬 말을 걸어보았다. “저…리버풀 선수들은 어디 가야 만날 수 있나요?” 영후의 질문에 경비원은 알아들었다는 듯 바로 이야기 해 주었지만, 영후는 쉽게 알아 들을 수 가 없었다. “네? 뭐라고요?” 그제야 경비원은 천천히 알아듣기 쉽도록 다시 한번 이야기 해 주었다. 물론 그래도 영후가 알아들은 것은 고작 ‘멜우드’가 전부였지만. 어쨌든 물어물어 영후는 ‘멜우드’라는 곳이 있다는 웨스트 더비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후의 시야에 빨간 벽돌로 가득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랬다. ‘멜우드’라는 곳은 다름아닌 리버풀의 연습구장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일반인들이 들어갈 순 없었지만, 자가용을 탄 채로 들어가던 선수들이 가끔씩 차를 세운 후 기다리고 있던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는 들어가곤 했다. 멍하니 있는 영후 앞으로 이미 바로시도 캐러거도 지나가 버렸지만, 왠지 사인을 해달라고 하기가 무척 쑥스럽게 느껴지는 영후였다. ‘응? 저 친구… 설마?’ 순간 누군가 영후를 알아보고는 멍하니 입구 쪽에서 발걸음을 돌리려는 영후 앞에 자신의 차를 세우고는 문을 열고 내려섰다. “어? 어어…” 영후는 순간 자신의 앞에 꿈처럼 서있는 오언을 보고는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가뜩이나 현지 영어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영후에게, 오언 같은 대 선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까지 더해져 잔뜩 움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언제 이런 선수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겠는가 싶어진 영후는 용기를 내어 과감히 먼저 인사를 해 보았다. “하…하이…”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그저 오른손을 선서하듯이 든 채로 멍청하게 ‘하이’라니. 하지만 그런 영후를 전혀 웃기게 보지 않으며 오언은 영후의 인사에 답했다. “헤이~ 시간 있으면 들어가서 우리랑 같이 놀아보지 않을래?” 파란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말을 건네는 오언에게 영후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 “마이클, 감독도 없는데 이러면 내가 곤란하다구…” 리버풀의 체력코치인 나이든 남자가, 락커룸에 조용히 앉아 축구화 끈을 묶고 있는 영후를 바라보며, 근심스런 얼굴로 말을 했지만, 오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런 패배주의에 찌든 감독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 없다구. 안 그래?” 담담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는 오언 앞에서 그 나이든 체력코치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03~04 시즌의 리버풀은 그야말로 부상병동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인 훌리에르 마저 별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그 뿐만이 아니라 단지 선수 부족을 변명으로 내세우며 막무가내로 이적자금을 소비하며, 불필요한 선수들을 영입해 버렸기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경질이 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버풀의 역사로 볼 때, 감독 경질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황인종은 왜 들여보낸 거야?” 혹시나 영후가 알아들을까 그들만의 은어를 써가며 오언에게 물었고, 오언은 놀란 표정으로 체력코치를 바라봤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어안이 벙벙한 체력코치의 얼굴을 오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제군들~ 여기 우리의 새 친구가 왔다구!” 한참 연습을 하다가 쉬는 모양인지, 그라운드에 널브러져 있는 선수들이 꽤나 관심을 보이며 영후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여~ 이적하기로 동의한 거야? 그 멍청한 감독이 그나마 최고의 계약을 해냈군.” 제라드가 반색을 하며 영후에게 악수를 청했고,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무척이나 반겨주는 제라드의 손을 덥석 잡으며 영후는 환하게 웃었다. 분명, 오언과 제라드는 영후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기는 영후였다. 물론 오언에게 설명을 들은 후 조금 어두워지는 표정의 제라드를 영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럼 마저 훈련을 끝내고 간단하게 연습게임이나 해 보자고~” 잔디를 털며 일어나는 캐러거가 모두를 독려했고, 이내 영후에게는 지금 빌려 입고 있는 유니폼과 축구화 만큼이나 생소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뛰지 않는 축구. 굳이 설명을 상세하게 듣지 않더라도, 영후는 이 훈련 방법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는데, 수비든 공격이든 모두들 이른바 ‘경보’를 하는 것처럼 축구경기를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보다 쉽지 않은 훈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넓은 공간을 지배하려면, 선수들은 자신의 스피드를 최대한 살려야 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러지 못하자 선수들의 몸에선 마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뛰고자 하는 욕구를 억누르는 게 이렇게 힘들줄은 영후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빨리 이동할 수 없는 규칙 덕분에 공격은 너무나 쉽게 이루어 졌지만, 수비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제야 영후는 이 훈련이, 패스의 질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몸에 인식하는 훈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사람보다 공이 더 빠르다는 건 절대 변하지 않는 만고의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지만, 때때로 선수들은 그 점을 망각했기에, 결정적인 패스의 타이밍을 놓치곤 했는데, 이 훈련을 하고 있자니 확실히 공간 패스를 떠올리게 되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쉽게 공간을 허용하고 마는 수비수들은 공격수들의 유니폼을 장난스레 늘어지도록 잡아 채기도 했기에 나동그라지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영후에게도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는 선수들 덕분에, 영후는 잠시나마 자신도 이 팀의 일원이 된 기분이 들기 까지 했다. “어때? 이제 몸 좀 풀렸나?” 스미체르가 영후의 어깨를 툭 쳐주며, 장난스럽게 물었고, 영후는 영어도 아닌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웠을 뿐이었다. 이윽고 조끼를 나눠 입으며 선수들은 각자의 포지션으로 달려갔다. 물론 영후도 파란 조끼를 얻어 입었지만, 어느 포지션에서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자신의 보직은 물론 스트라이커 였지만, 이곳에서도 그렇게 뛰어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쫄 거 없어. 넌 그냥 너의 포지션을 소화하면 된다구.” 그런 영후의 생각을 읽은 듯, 자신과 같은 파란 조끼를 입은 오언이 영후의 등을 두드려 주며 따뜻하게 말했고, 영후는 이윽고 천천히 센터서클로 걸어갔다. “포워드…인가? 너?” 노란 조끼를 입은 바로시가 영후를 바라보며 물었고, 아마 자신의 포지션을 말하고 있는 거라 추측한 영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긴장감이 흐르는 것도 같았지만, 이내 오언의 박수소리에 긴장감은 바로 해소 되었다. “자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보자고!” 박수를 치며 모두에게 큰소리로 말하던 오언은 이내 영후에게 찡긋 윙크하며 말했다. “잘 부탁해, 리.” 영후는 오언의 말이 끝나자 잠시 상대편의 진영을 살펴보았다. ………… Baros Heskey Kewell Smicer Biscan Murphy Riise Henchoz Hyypia Finnan ...................dudek 우선 자신의 맞은 편에 서 있는 바로시와 헤스키가 투 톱을 이루고 있었고, 미드필더에는 키웰과 스미체르가 눈에 띄었다. 또한 리세를 시작으로 히피야와 피난을 지나, 철벽 수문장 두덱이 장갑을 연신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는 모습까지 본 후 영후는 다시 자신의 진영을 뒤돌아 보았다. ……………Owen Lee Cheyrou Diouf Hamann Gerrard Carragher Traore Otsemobor Welsh ……………………luzi 확실히 주전과 비주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스쿼드였다. 물론, 영후가 속해있는 쪽의 선수들 중 오언과 제라드, 그리고 캐러거를 제외하면 선발로 경기를 나선 빈도가 조금은 적은 축에 속하긴 했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에도 나서는 등 엄청난 살인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팀답게 전력의 편차가 크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영후는 지금 이 선수들과 함께 피치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직접 만나보긴 모두들 처음이었지만, 그럼에도 영후는 이들에게 주눅들긴 싫었다. 아니 이미 피치 위에 서 있는 이상, 팬처럼 좋아할 일이 아니라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할 선수들이었으니까.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한껏 피치 위의 공기를 들이마셔본 영후는 휘슬소리와 함께 그라운드 위의 ‘남자’로 돌아오고 있었다. 삐~익! 드디어 휘슬이 울리자, 오언은 자신의 뒤에 있는 디우프에게 패스를 하며 빠르게 전방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영후보고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보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스피드라면 나도 지지 않아!’ 이제야 진짜 시합을 뛰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 영후는 오언과 짝을 이루며 전방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디우프는 오른쪽 윙으로 뛰는 제라드에게 패스를 했고, 전방으로 달려나가는 오언과 영후를 힐끗 쳐다본 제라드는 자신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키웰이 미처 다가오기도 전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장거리 패스를 했고, 그렇게 제라드의 발끝을 떠난 공은 포물선보다는 직선에 가까운 형태인 채로 전방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킥 앤 러쉬.’ 일명 ‘뻥 축구’도 수준이 다르면 평가도 달라지는 거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고, 영후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공을 어찌할지 판단해보고 있었다. 이미 미드필드를 지나쳐 날아오고 있는 공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헨쵸즈와 히피야, 그리고 영후의 중간 즈음에 떨어질 것이었다. ‘어떻게 하나 한 번 구경해볼까?’ 평소와 달리 페널티에어리어로의 직접 침투를 하지 않고 오언은 슬쩍 방향을 선회하며 공을 영후에게 양보해 주었고, 오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히피야와 피난은 오언을 막기 위해 영후가 침투하고 있는 가운데 공간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여전히 자신의 등뒤로 날아오는 공의 방향과 같은 곳으로 뛰어가던 영후는, 그러나 오언이 왼쪽으로 공간을 벌리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자, 자신은 바로 페널티 에어리어 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순간 중앙에 홀로 남은 헨쵸즈는 영후를 막을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영후를 막아 서려던 헨쵸즈는 어중간한 지점에 떨어질 공의 낙하지점 덕분에, 사람을 막을 것인가 공을 커트해 낼 것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저런 강력한 장거리 패스는 쉽게 트래핑 해 낼 수 없을 거라 판단하고는 조금 거리를 둔 채 영후의 몸에서 잠시 후 튕겨나올 공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자, 어쩔 거냐…’ 하지만 헨쵸즈의 생각과는 달리 영후는 달려오던 속도를 줄일 생각도, 그렇다고 날아오는 공을 중간에 멈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제야 오언과 영후의 의도를 뒤늦게 눈치 챈 히피야 역시 방향을 틀어 영후에게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고 말았다. 이윽고 등뒤의 공이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영후의 머리를 넘어와 발 아래 떨어지려 하는 순간 영후는 지체 없이 강력한 오른발 발리 슛을 날렸다. 팡! 그야말로 영후의 발등에 제대로 얹힌 공은 그러나 순간 하늘로 솟구치는 듯 보였다. ‘뭐야, 헛발질인가?’ 헨쵸즈와 모든 선수들의 생각처럼 전방의 골대로 향하기엔 너무나 높은 각도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공은 정작 헨쵸즈의 머리 위를 지나자마자 급격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순간 헨쵸즈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이 걸린 채 자신의 뒤에서부터 뚝 떨어지고 있는 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설마 슈팅 타이밍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두덱은 자신이 서있는 반대편 골대 쪽으로 날아와 꽂히는 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만 했다. 철썩! 삐~익! 트래핑도, 페인팅도 없이 그저 단 한번의 터치로 순식간에 골을 성공시키자 아군이며 적군이며 할 것 없이, 영후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첫 골을 성공시킨 것에 대해 축하를 해 주기 시작했다. “뭐야 이 녀석!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걸 해버렸잖아!”, “야야, 르탈렉하고, 퐁골레 녀석들 좀 보고 배우라고 해라.” 선수들의 칭찬을 들으며, 영후는 센터라인 즈음에 서 있는, 자신이 패스를 하고서도 조금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제라드에게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드롭 슛을…그것도 머리 뒤에서 날아오는 공을 발리 슛으로 마무리 짓다니…저 녀석…!’ 그저 단 한번의 슈팅을 본 것뿐 이었는데, 제라드의 가슴은 후반 45분까지 전력으로 뛰고 났을 때보다 더 뛰어대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부터 리버풀의 주장완장을 차고 있던 제라드는 그야말로 미지의 국가에서 날아온 ‘이영후’라는 남자에게 매료되어 버렸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맨유와 첼시, 그리고 아스날의 들러리가 되어버린 듯한 자신의 팀에 최대의 문제점은 바로 해결사의 부재였다. 물론, 원더보이 오언이 있었지만, 언제나 부상으로 골골거리는 유리 몸이었고, 바로시와 헤스키 역시 기대에 2프로 못 미치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처음임에도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자신과 손 발을 맞춘 듯이 패스를 바로 골로 연결해 주는 영후를, 제라드는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어 졌다. ‘우리 팀에서 먼저 잡지 않는다면, 분명 엄청난 적이 되어 돌아올 거야.’ 삐~익! 이윽고 첫 골의 감흥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지만, 그 한 골 덕분에 어느새 다들 분위기가 달아올라버렸는지, 눈빛들이 확 달라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진짜 하려는 건가…’ 모든 게 영후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그런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스미체르와 키웰로부터 이어지는 패스가 순식간에 전방의 헤스키로 연결되려는 것을 바라보며 영후는 머리보다는 몸이 시키듯 곧장 그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디우푸와 하만이 가로막고 있는 중앙에 도착한 헤스키는 자신의 뒤로 돌아나가는 바로시를 알아채고 패스를 하려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영후의 숨결이 등뒤에서 느껴졌다. ‘뭐…야?’ 촤~악! 헤스키에게 달려온 영후는 스트라이커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된 태클을 시도했고, 설마 최전방 공격수가 그것도 태클을 걸어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헤스키는 당황하며 결국 공을 놓치고 말았다. “이봐!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안 해도 된다고! 공격수는 그냥…?” 자신의 수비영역에 침범해서였을까 조금 자존심이 상해 괜히 볼멘소리를 늘어놓으려던 디우프는 태클을 시도한 후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센터라인을 넘어서고 있는 영후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쳇, 그래 네 거니까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디우프의 발끝을 떠난 공은 다시금 번개처럼 뛰쳐나가는 영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 얼굴 좋아 보이는 리버풀의 홍보담당자를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그저 사전에 준비해 둔 질문들 중의 하나였던 내용을 물어보았다. “혹시 구단에선 아시아 선수의 영입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기분 나쁘실런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로서는 팀의 전력에 보탬이 되는 방향을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말끝을 조금 흐리는 담당자의 모습을 하연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다만…이라면…? 그럼…?” 굳이 얘기할 이유가 없었건만 이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단아한 동양의 미와 함께 육감적인 매력 또한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는 여기자에게 사소한 이야기 하나라도 더 해주면서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졌다. “그러니까…지금 드릴 말씀은…흠…지금부터는 ‘오프 더 레코드’ 부탁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나 확실히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남자였던 듯, 본분을 잃지 않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 예. 물론입니다.” 그제야 하연은 레코더의 중지 버튼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눈 앞에서 꺼 보였다. “실은… 얼마 전까지 저희 극동 담당의 스카우터가 코리아의 한 선수를 꽤 주의 깊게 살펴보긴 했었습니다.” 그런 정도의 발언이라면 하연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새로운 수익성을 추구하기 시작한 프리미어리그의 팀들은, 아시아 마켓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고, 싼값에 꽤 괜찮은 선수들을 사들여 이른바 유니폼 판매원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실행의 시기만을 조율하는 중이라는 풍문 아닌 풍문이 떠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저희 스카우터가 관심 있게 지켜본 선수는, 참으로 이상한 선수였습니다. 분명 실력만큼은 탑 클래스로 판단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국가대표로 선발된 적은 없더군요, 단 한번도.” ‘설마…’ 그런 선수라면, 하연도 알고 있었다. 알아도 너무나 잘. “아시다시피, 프리미어리그 규정상, ‘워크 퍼밋’을 발급받으려면, 지난 2년간 자국의 A매치에 75퍼센트 이상 출전을 해야 가능합니다. 물론 벤치에 앉아만 있는 것도 허용되지 않구요. 우선은 영국 선수들의 취업권을 보장해 주기 위한 영국 노동부의 의지에 반하는 영입을 시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감독들의 추천서를 이용하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미 그 선수 말고도 많은 영입이 이루어졌기에 노동부의 허가가 떨어지기엔 가능성이 더욱 낮아져 버렸지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목이 마른 지 물을 마셔보는 담당자의 얼굴엔 그야말로 아쉬움이 짙게 베어 나오고 있었다. “결국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비단 워크 퍼밋이 문제가 아니라 솔직히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려면 국가를 대표해서 플레이를 한 커리어가 있어야 저희도 어느 정도 안심하고 영입을 고려할 수 있는 거니까요. 어쨌든 그것이 우리가 그 선수의 영입을 포기하게 된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첫 번째라…그럼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하연은 바로 두 번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 또 하나는… 사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단장 및 코치들과 팀닥터 간에 상당한 고성이 오가기도 했구요.” “도대체 그 이유란 게…” “아 그건…” 순간 담당 직원의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고, 남자는 하연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한동안 하연을 내버려둔 채 통화를 하던 그 남자는 이내 전화를 끊고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봤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지금 바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며칠 있으면 ‘박싱데이’가 시작되어서 구단에서도 준비할 것도 많아졌습니다. 물론 이 삼일 간격으로 경기를 소화해야 하는 우리 선수들이 가장 힘들겠지만요.” 하연도 백을 챙겨 들며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죄송하긴요, 덕분에 많은 걸 알고 가는 걸요.” “이런 미인 기자 분하고 인터뷰를 하는 줄 알았더라면, 다른 스케쥴은 몽땅 비워놓았을 텐데 말이죠. 하하” 황공한 듯 하연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놓지 않으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남자에게 하연은 역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바쁘시겠지만 좀 전에 말씀해 주시던 거 마저 들을 수 있을까요?” “아, 그건…”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한 직원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죠…” 하연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조금씩 손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 디우프의 짧은 패스를 받자마자 영후는 어느 샌가 자신의 자리와 스위치 하며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는 오언을 발견하고는 그 스피드를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스미체르와 비스칸을 바보로 만드는 스루패스를 찔러 넣어주었다. ‘이 녀석은 정말…!’ 수비수들과 동일 선상에서 횡 뛰기를 하다가 영후의 발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종 뛰기로 바꾸어 뛰어들어가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뜨리던 오언은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스피드에 맞춰 절묘하게 수비수들을 통과해 오는 공은 그저 단순한 스루패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비수들을 지나칠 땐 너무나 빠른 속도로 잔디를 미끄러지듯 빠져 나왔지만, 정작 자신의 발 앞에 이르러서는 적절하게 속도가 줄어드는 이런 양질의 패스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호흡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어찌된 일인지 영후는 오언의 호흡을 정말 ‘그대로’ 맞춰주고 있었다. 마치, 더 빠르게도, 더 강하게도 보낼 수 있지만, 그저 너에게 맞춰 준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때문에 그저 패스 하나를 연결 받았을 뿐이었음에도 오언의 등줄기는 싸늘해질 정도였다. ‘아차!’ 너무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오언은 이미 근접해버린 헨쵸즈의 존재를 그제야 인식했고 그로 인해 타이밍이 살짝 어긋난 오언의 슈팅은 두덱의 선방에 가로막혀 골 라인을 넘어가 코너킥이 주어졌다. 오언은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이 미안할 지경이었기에, 영후를 바라보며 엄지를 세워 보였고, 그런 오언을 바라보던 영후는 그저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윽고 코너킥을 차기 위해 제라드가 나섰고,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듯, 히피야와 헨쵸즈는 영후를 앞뒤로 에워싸며 적극 마크했다. 아무래도 작은 키의 오언보다 영후를 마크하는 게 누가 봐도 당연해 보였으니까. 한편 제라드는 몰려있는 선수들을 바라보다가 영후와 눈이 맞았다. 갈색의 선한 눈동자로부터, 제라드는 ‘걱정 말고 내게로 공을 보내라.’는 듯한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자구.’ 잠시 후 제라드의 발끝에서부터 솟아오른 공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순식간에 골대 앞 접전지역으로 날아왔고, 순간적으로 헨쵸즈를 따돌리는 몸놀림을 보이는 영후를 놓칠까, 히피야는 바로 따라붙으며 영후의 어깨를 짚고 먼저 뛰어오르는 반칙을 하기에 이르렀다. ‘날뛰는 것도 지금까지야!’ 하지만, 히피야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이 내리 누르는 느낌이 아니라, 솟구치는 무언가에 자신의 손이 밀리는 느낌이랄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히피야의 앞으로 어깨를 짚고 누르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히피야와 거의 동등한 높이로 뛰어오르는 영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뭐야…?!’ 당황한 히피야는 순간 공의 궤적을 잃어버렸고, 날아오던 공은 영후의 머리에 맞으며 골문 앞에서 마크맨 하나 없이 기다리고 있던 오언의 발 앞에 떨어졌다. 그런 공을 오언은 그저 ‘툭’ 밀어 넣으면 될 뿐이었다. 삐~익! 2 : 0 두 번째 골이 들어가자, 오언은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천천히 센터서클로 되돌아 가는 영후를 바라보았다. 분명, 영후는 스스로 골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치 오언이 저지른 좀 전의 실수 정도는 언제든 다시 만회할 수 있을 테니, 머리 속에 담아두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곧바로 자신에게로 공을 밀어준 것 만 같았다. 만일, 오언의 생각이 맞는 거라면, 이 남자는 정말 ‘위험한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만일 같은 팀의 일원이 되어 준다면, 언제고 아니 당장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것이었고, 또 다른 팀의 선수로서 마주친다면…그건 절대 꿈도 꾸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말, 팀닥터의 의견이 맞긴 맞는 거야?’ - “지금은 절대 이 선수를 영입해선 안됩니다!” 단장과 코칭스텝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에 참석했던 오언과 제라드도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코치들처럼 왜 저렇게 팀닥터가 극구 반대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시겠습니까? 지금 저 선수는 부상을 숨긴 채 뛰고 있단 말입니다.” 팀닥터의 강경한 반대 때문에 모두들 스카우터가 촬영해온 비디오를 몇 번이고 되돌려 보며,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확실히 지나친 해석 같기만 했다. 부상이 있는 선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헌신적인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는 화면 속의 영후는, 설사 부상이 있는 선수라 해도 영입을 추진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기만 했다. 하지만, 예순을 바라보는 노련한 팀닥터의 시선은 예리했고, 그만큼 세밀한 관찰력을 지닌 사람은 그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분명 왼쪽 무릎에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점들을 팀닥터는 이내 조목조목 찾아내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여기…이 장면에서의 착지…어떤가요…조금 어긋나는 거 같죠? 그리고…여기…확실히 디딤발이 불안정해서 킥을 할 때 완전히 힘이 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팀닥터의 완벽한 설명에 누구도, 특히나 그 덕분에 항상 자신도 모르는 잔 부상들을 발견하곤 했던 오언은 더더욱 별다른 의견을 피력해 볼 수가 없었다. “흠. 그럼, 우선 메디컬 테스트를 받게 해보면 어떻겠소? 그럼 좀더 정확하게 판단 할 수 도 있지 않을까?” 그저 비디오 화면으로만 접했음에도 간결하면서도 화려한 영후의 플레이에 매료된 단장은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지만, 수석코치는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게…실은 점점 노동부의 취업비자 발급이 어려워지고 있는데다가, 이 선수는 국가대표로 경기를 뛴 경력이 전무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젭니다.” 수석코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단장은 스카우터를 바라봤고, 수석코치의 말이 맞다는 듯, 스카우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으음…” 이제야, 리버풀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무거운 어깨’의 제라드에게 이른바 ‘영혼의 파트너’를 찾아 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 밖에 없자, 단장은 물끄러미 제라드를 바라보았고, 제라드는 벌써 화면 속의 영후와 같이 플레이 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팀의 에이스로부터 그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단장은 그야말로 참담한 심정일 수 밖에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린 손으로 주먹을 쥐어보며 단장은 결국 분한 마음을 속으로 삭힐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젠장!’ - “이 자식이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꼭 붙어 있으라니까…으휴!” 앤 필드에서 모든 취재를 마치고 걸어 나온 하연은, 영후가 멜우드 연습구장에서 신나게 축구를 하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며 금방 눈에 띌 잘생긴 동양 남자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잡히기만 해봐. 아주 요절을 낼 테니까!” 영국 신사들의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른 채 무척이나 화난 얼굴로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난 닥터 의견에 동의 못하겠어, 절대로.” 팔짱을 낀 채 오언의 옆에 서서 갑작스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급히 피치 밖으로 뛰어가는 영후를 바라보며 제라드가 입을 열었고, 그런 제라드의 의견에 역시 오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결국 우린 저 남자를 데려오지 못할 거야. 이미 ‘씨세’와 계약을 마쳤다는 얘기가 있더군. 아마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1월 이적시장이 열리자 마자, 그가 저 남자 대신 우리 팀에 합류할 테지.”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결코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오언은 담담하게 말을 마쳤고, 그런 오언의 말에 울컥하려다 겨우 참아내며 제라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저리들이 또다시 쓸데없는 곳에 돈을 쏟아 붓고 말았군.” 단장과 감독의 연이은 삽질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제라드의 표정이었다. 한편 영후가 갑작스레 피치 밖으로 나가자 모든 선수들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이봐, 리! 하던 경기는 마저 해야지!”, “이래봬도 우린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구!” 하지만 동시 다발적으로 쏟아지는 다국적 언어를 영후가 이해하기엔 쉽지 않았기에, 그저 영후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락커룸 쪽으로 내 달렸다. “화장실인 건가?” 키웰이 화장실이 급한 자세를 흉내 내며 모두를 웃겼지만, 정답은 캐러거가 맞췄다. “여자인 거야. 암, 확실하고 말고. 나랑 내기할래?” “좋아, 난 화장실에 10파운드 걸겠어.”, “난 여자에 20파운드 걸지.”,”나도나도!” 순간 모든 선수들이 캐러거가 제시한 내기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 또다시 축구에 빠져버려 하연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던 영후는 유니폼을 벗을 사이도 없이, 자신의 손에 입고왔던 옷을 든 채 버스에 올랐고,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껏 영후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듣도 보도 못 했을 동양인 하나가, 마치 방금 위대한 리버풀 선수들과 함께 막 연습을 하고 온 것 같은 유니폼 차림으로 버스에 타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엄청난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누구도 영후가 타고 있는 이 버스가 앤필드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한편, 앤필드 주변을 몇 번이고 돌며 영후를 찾아보던 하연도 나름 지쳐가고 있었다. “이 바보가 또 어디로 가버린거야 진짜!!” 이제는 화를 넘어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하연이었다. 그러길래, 우겨서라도 핸드폰을 로밍해서 가져오게 했어야 했는데, 설마 했었던 일이 결국 벌어지자 하연은 난감했다. 도대체 어디가서 이 남자를 찾는 단 말인가… 순간 하연의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든 하연은 창에 뜨는 너무나도 생소한 번호에 기쁨을 느껴보기는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여보세요! 야 이영후! 너 지금 어디야!” ‘여보세요? 하연아? 하연이니? 나 있지, 아까 거기로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그래서 거기가 어디냐고!” ‘그게, 잘은 모르겠는데…교회인 것도 같고, 성당인 것도 같고…’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그리 갈 테니까, 알았지!” 전화를 끊자마자 지나가는 택시를 잡은 하연의 마음은 이미 택시보다도 먼저 '그곳'으로 가 있는 듯 했다. - 리버풀 대성당 앞에서 내린 하연은 잠시 긴장할 뻔 했다. 영후의 말 대로라면, 분명, 이곳 리버풀 대성당 앞에 있었어야 했는데, 영후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연은 지나가던 리버풀 광팬인 듯한 남자들의 대화 덕분에 그나마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왠 동양인 녀석이 레즈 (리버풀의 애칭 : 작가주)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던데, 봤어?” 리버풀 저지를 입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자신의 옆을 같이 걷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고, “설마, 이제는 훌리에르 그 망할 녀석이 유니폼 판매원까지 사들인 건가? 그래서, 일본인이래?” 어느덧 동네북이 되어버린 훌리에르는 여전히 욕을 먹고 있었다. “그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유니폼을 입은 채로 성당에 들어가더만…” 순간 하연은 그 남자에게 감사하고 싶었고, 또한 이어지는 그 남자의 친구의 말에도 일정부분 동의했다. “별 미친놈 다 보겠군.” - 성당에 들어선 하연은, 잠시 그야말로 ‘대성당’이 주는 위엄에 조금 위축이 될 뻔도 했다. 또한 원형으로 된 높은 천정에 장식되어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여러 가지의 색유리를 도안에 따라 절단하여 일정한 형에 따라 철물과 납으로 짠 것으로 종교적 신비감 등을 주기 위해 교회의 천장, 창 등에 사용되는 특수한 형태의 유리 : 작가 주) 의 신비스러움에 잠시 넋을 잃을 뻔도 했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하연의 시선을 붙잡은 건, 역시 성당의 길다란 의자 한곳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던 영후의 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르며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결국 하연은 조용히 영후의 옆에 가 앉았다. (뭐해 지금…)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진 하연과 마찬가지로 하연이 자신의 옆에 있는 게 너무나 신기했던 영후 또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 도!) 하지만 하연은 영후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종교도 없는 놈이 무슨 기도일까 싶었지만, 잠시 영후의 행색을 살펴보던 하연은 그의 기도가 어쩌면 꽤나 진지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땀에 절어있는 유니폼 그대로, 그윽한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기도하고 있는 영후의 볼에 잠깐이나마 하연은 뽀뽀해 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 같았다. 괜한 생각 덕분에 자신의 볼이 빨갛게 물들어버린 하연은, 혹시 그런 모습을 영후에게 들킬까 싶어 재빨리 의자 밑으로 무릎을 꿇고 영후처럼 기도해보기 시작했다. 두 남녀가 그렇게 두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고개를 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주는 것으로 기도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고, 왠지 기분 좋아 보이는 영후에게 하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바보같이 웃는데?” “그냥… 기도라는 거 처음 해본 건데, 왠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께서 들어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바보 같은 영후의 답변에 하연은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기껏 성당에 와서 산타에게 소원을 빌다니. 하지만 하연은 영후의 소원이 꼭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환하게 웃는 이 남자의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감상적이 되어버린 채 천천히 영후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나가는 하연에게 영후는 큰 소리로 외치며 하연을 돌아보았다. “하연아, 눈!” 정말 눈이었다. 잠시 성당 안에 들어와 있는 동안, 어느새 하늘에선 큼지막한 함박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사실은 별것도 아닌 일이었건만, 왠지 낯선 이국의 땅에서 눈 내리는 정경을 지켜보고 있으니 괜히 낭만적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하연의 기분을 영후는 조금쯤 알아챈 건지, 더없이 낭만적인 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메리크리스마스다, 하연아.” 영후의 갑작스런 발언에 하연은 어이없다는 듯 되받아 쳤다. “야, 아직 하루 남았거든요?” 하연의 말에 영후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생각하더니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시간으로 벌써 4시가 넘었는걸, 그러니까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일거야.” “칫, 좋아… 이번만큼은 인정이다.” 그렇게 서로가 좋으면서도 미처 손도 잡지 못한 스물 세 살의 두 남녀는, 그저 성당 앞에서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는 눈을 맞으며, 이번 크리스마스는 절대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 또 다짐하고 있었다. 13부. 너에게 간다. 잠옷차림의 남희는 침대에 모로 누운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 남자와 함께 해 왔던 당당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하연과, 하연과는 정반대이면서 역시나 그 남자를 그대로 녹여버릴 듯한 애교 넘치는 수림에 비해, 남희 자신은 이렇다 할 장점이 없다는 사실이 긴긴 밤 동안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복잡한 수식처럼 보이는 영후와 주변 여자들의 ‘관계도’ 덕분에, 문제를 풀기 위한 도전 조차 해보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한숨밖에 내 쉴 수가 없었다. ‘머리 아파…’ 마치 ‘리만 가설’ (1859년 독일 수학자 ‘리만’에 의해서 처음 제기된 미해결 수학 문제 : 작가 주) 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와 동일한 수준의 혼란스러움이 온몸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에, 남희는 침대의 이쪽 저쪽으로 뒹굴 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 윤지의 컴퓨터를 이용해 메일을 확인한 혜미는 윈도우를 종료하려다, 문득 윤지에게서 받은 ‘아이팟’ 속의 동영상이 생각났다. 하지만, 아이팟에 들어있는 것은 아쉽게도 연습경기의 후반전밖에 없었기에, 아마 전반전도 윤지의 컴퓨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디쯤에 있을까나.’ 혹시나 컴퓨터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하면서, 혜미는 탐색기를 열어 디렉토리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얼마나 찾아 다녔을까, 이내 년도와 월, 날짜 별로 구분되어 있는 디렉토리가 보였고, 대충 날짜를 가늠해본 혜미는 한 폴더 안의 동영상 파일을 선택하곤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자, 나와라 얼른…” 손바닥을 비벼가며 잔뜩 기대하고 있던 혜미는 그러나 이내 실망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보여지는 화면엔 초록색의 운동장이 아닌, 붉고 어두 침침한 조명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캠코더가 계속 움직이고 있는 듯, 멀미가 날 듯 한 기분에 혜미는 창을 닫으려 했지만 이내, 캠코더가 한 곳에 자리를 잡은 듯, 화면이 고정되었고 혜미 또한 잠시 그대로 고정되어 버렸다. 그렇게 고정된 화면엔 하반신에만 수건을 걸친 채 침대에 엎드려 있는 늙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서 수건을 걷어내는 낯익은 여자의 나신 또한 카메라에 잡히기 시작했다. “어…?” 아는 여자였다. 분명, 혜미도 알고 있는 여자였다. 그것도 그냥 아는 여자가 아닌, 너무나도 잘 아는, 그래서 더욱 충격적일 수 밖에 없는.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고 그러니?” 갑작스레 등뒤로 들리는 윤지의 목소리에, 놀란 혜미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창을 닫아보려 했지만 닫히기는커녕, 음성만이 증폭되었고,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떨어뜨린 채 원망스런 얼굴로 바라보는 윤지와 그런 윤지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혜미 사이로 동영상 속의 남녀가 맞부딪히는 살들의 질퍽한 소리만이, 바닥에 떨어진 캔에서 흘러나오는 맥주처럼, 쉬지 않고 흘러 나오고 있었다. - 이른 아침. 나란히 운동장 한 켠에 마련해 놓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분명 같은 공간에 있긴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만 같았다. 그 중 가장 먼 곳에 가있는 듯한 표정의 영후가 아침 잠에서 깨어났었을 땐, 수림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기에, 영후는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영후는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었고,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 그녀의 집 앞에 다다랐었지만, 차마 문을 두드리지도, 벨을 눌러보지도 못했었다. 그저, 영후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무너지듯 앉아 수림의 이름을 불러 보았었다. “수림씨…”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영후 옆으로 혜미 또한 간밤의 윤지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메일만 본다더니…다른 것도 봐 버렸구나…” 혜미로서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윤지의 표정이었다. 그것은 마치, 얼음 송곳으로 가슴을 찔린 직후의 고통과 차가움을 동시에 내보이는 듯한 복잡한 얼굴이었다. “윤지야, 나는…” “괜찮아. 혜미 네가 본 건 사실일 뿐이고, 난 그런 아이일 뿐이니까.” 심각한 두 사람의 대화와는 반대로, 모니터 속의 남녀는 점점 높은 소리를 질러대며, 살끼리 맞부딪히는 소리를 저만치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살기 위해서였었어.” 윤지의 고백은 진정 사실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이 사업에 실패한 채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며 어디론가 사라졌을 무렵, 윤지는 부모들 대신 하루가 멀다 하고, 고등학교로 찾아오는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다 결국 그나마 착한(?) 사채업자에게 소개받은 업소에서 일을 하면서 그 많은 빚을 청산 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엔 빚만 갚고 나면 절대로 이런 ‘개 같은’ 생활을 계속 해 나갈 마음은 정말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쉽게 돈 맛을 알아버린 윤지는 너무나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기에, ‘이번만, 단 한 번만…’ 하며 차일피일 미뤄왔던 일이 어느덧 하루 일과가 되었고, 윤지의 생계수단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편 혜미는 지금 자신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 건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여지껏 윤지에게 받은 선물들을, 윤지에게 돌려주며, ‘더러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라고 말하며 대뜸 먼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저 친구의 일기장 정도를 몰래 훔쳐 본 직후처럼, 헤헤 웃으며 ‘미안하다'고, '그러니 어서 나가서 마시던 술을 마저 먹자’고 해야 하는 건지 쉽사리 마음 속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 했다. “그래도 우린… 친구 맞지?” 눈물이 고여있는 눈으로 애써 웃어 보이며, 혜미는 윤지에게 물었었지만, 무표정한 윤지는 혜미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모니터 속의 남자 위에서 가식적인 교성을 내 지르고 있는 낯설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윤지의 비밀을 본의 아니게 알아버린 후, 혜미는 또 보자는 말도 해보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윤지의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기에 바보 같았던 그때의 자신을 돌아보며 한숨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운동장에 놓인 의자 맨 끝에 앉아있던 남희 또한, 하연 한 명으로도 족했거늘, 영후의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수림의 모습을 목격한 어제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었기에, 아직까지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은 듯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에휴…” 약속이나 한 듯, 셋이 동시에 한숨을 내 쉬게 되자 그 모양이 웃겨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순간, 그런 세사람들을 질투하듯,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뭔 한숨들을 그렇게 쉬는 거에요? 예?” 아침햇살보다도 훨씬 밝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혜미는 놀란 얼굴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유…윤지야…” 그런 혜미의 표정에 개의치 않으며 심드렁하게 의자에 앉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스포츠 신문을 책상에 툭 내려놓으며 윤지의 입이 열렸다. “왜 그렇게 놀라? 하근명 스캔들 기사보다 더 놀랄 일이라도 있는 거야?” “뭐?” 윤지의 말에 놀라, 신문을 집어 든 영후는 순간, 얼굴이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기사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신문에 실린 사진만으로도 영후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업혀있는 뒷모습 일 뿐 이었음에도, 영후는 근명의 등에 업혀 있는, 한 여자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하연아…’ 영후의 가슴은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이 저릿한 느낌은, 마치 누군가 영후의 심장을 꼭 잡은 채 천천히 움켜쥐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영후의 뜨거운 심장을 잡고 있는 그 손은 절대 이 고통을 쉽게 잊게 하지 않겠다는 듯, 점점 손에 힘을 주고 있었고, 절대 영후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들, 영후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만일 이것이 감내해야만 할 고통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참아내겠다고, 하연을 내버려둔 죄로 평생 이렇게 아파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며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삼키며 영후는 다짐하고 있었다. 순간, 영후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지만, 영후는 신문을 꼭 쥔 채로 그 어떤 다른 것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모습에 남희는 영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보았다. “감독님, 전화가…” 남희의 말 덕분에 겨우 꿈에서 깨어난 듯한 영후는, 그래도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전화를 꺼내 받았다. “여보세요…” ‘흑흑, 영후야!’ 또, 울고 있는 하연이 있었다. 언제나 영후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들었던 아이… 언제나 다시는 울게 만들지 않겠다고 했었는데…언제나… “하연아! 너…” ‘흑…나 좀… 데리러 와주라…응? 흑흑…’ 흐느끼듯 말하고 있는 하연 덕분에 영후는 아직, 여전히 자신이 하연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에 감사하며 생각할 것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 “기다려! 지금 바로 간다!”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그야말로 벼락처럼 달려 나가는 영후를, 남은 세 사람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잠에서 깨어난 하연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다. 속옷만을 입고 잠들어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도 그랬지만,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방을 나서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하연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소음과 플래시 불빛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음은 당연지사였다. “하근명 선수와는 어떤 사이 입니까?”, “문 좀 잠깐 열어주세요!” , “오늘 있을 A매치에서 하근명 선수가 제외된 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하선수의 전 여자친구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겨우 1센티미터 정도의 문틈 사이로, 엄청난 질문들이 쏟아져 들어왔었고, 결국 힘겹게 문을 걸어 잠근 하연은 그야말로 호텔방에 감금되고 말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버린 하연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도와줘, 영후야…’ - 아침부터 스포츠와 연예기자들에게 시달리다 들어온 노감독은 그야말로 노기가 뻗친 얼굴 그대로 근명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 놈! 고작 이러라고 외출 허가를 해 준 줄 아느냐!” 잠에 취한 근명이 침대에서 엎드린 채 꿈쩍도 안 하자, 노감독은 근명이 덮고 있던 이불을 단번에 걷어내 버렸다. “아이 또 왜 그래요…잠도 못 자게…” 상황 파악이 안된 근명은 노감독 앞에서 여전히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짝! 불이 날 정도로 근명의 등 짝을 후려치는 노감독 덕분에 그제야 근명의 잠은 훌쩍 달아나 버렸다. “앗 따거! 아 진짜 왜 그러는데요!”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로 일어나 앉아 근명이 툴툴댔다. 그런 근명의 얼굴에 노감독은 손에 들고 있던 스포츠신문을 던져주었다. 근명은 자신의 얼굴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느릿느릿 집어 들었다. “졸려 죽겠는데, 뭐요…제 기사라도 났어요? 선발에서 제외돼서 불쌍하다고?” “그래 났다. 그것도 아주 대단하게!” 비단 농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게 느껴져 그제야, 근명은 신문을 펴 보았다. ‘하근명, 선발제외 반발? 묘령의 여인과 심야 호텔 데이트!’ 근명이 바라본 신문의 지면엔, 엄청난 크기의 제목과 함께, 어젯밤의 근명과 근명이 업어준 하연의 모습이 흐릿한 화질로 실려있었다. 다행이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없었지만, 투덜대는 듯한 표정의 근명은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 아잇! 이게 뭐야…!” 제자의 놀라는 표정에, 노감독은 더 황당하다는 듯 호통을 쳐댔다. “그게 뭔지는, 네놈이 더 잘 알 것 아니냐!!” “아이씨! 아무 일도 없었다구요! 이건 그냥, 그냥 취해있길래 업어다가 준 거라구요! 술 한잔 얻어 먹을라다가 옴팡 뒤집어 쓴 게 누군데…” 답답하다는 듯 근명은 변명을 늘어놓아보았지만, 노감독에겐 별 소용없었다. “어쨌든, 경기 앞두고 좋은 선물 해줘서 고맙구나. 쯧!” ‘쾅!’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노감독이 사라지도록, 근명은 억울해하기만 했다. “아 젠장, 어차피 이럴 거면 뭐라도 해볼걸, 썅!” 노감독이 닫고 나간 문을 향해 신문을 집어 던지며, 이른 아침부터 욕을 해보았지만 이내 근명은 어제밤을 떠올리며 그래도 잘한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 어느덧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은 것도 모른 채 침대에 누워있는 하연의 모습은 더 이상 근명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여태껏 호텔에서 벗겨봤던 그 어떤 여자들 것 보다 전혀 야하지 않은 그저 순백색의 속옷들을 입고 있음에도, 너무나 야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저 브래지어를 튕겨내 버릴듯한 가슴의 크기 때문도 아니었고, 팬티 위로 비치는 검은 수풀들의 풍성함 때문도 아니었다. 어쩌면, 근명의 것이 아님에도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넘쳐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맛있게 먹겠습니다아~” 어디를 먼저 만져봐야 할지 갈피를 못 잡으면서 침대로 올라간 근명은, 우선은 가슴부터 만져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순간, 하연이 몸을 돌리며 잠꼬대하듯 도톰한 입술을 움직거리며 중얼거렸다. “으응…영후야…” 근명으로선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그녀는 하필 지금 힘겹게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근명의 몸은 순간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이내 ‘훗’하고 웃어버려야만 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하연이 누워있는 침대에서 물러나 근명은 이내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하나를 꺼내 마개를 열고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쉼 없이 물을 들이켰다. 이내 더 이상 자신의 입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지 않자, 근명은 페트병을 바닥에 힘껏 던져버리곤 의자에 털썩 앉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날’ 이후…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이영후에게 패배감을 갖게 되었던 것도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 남자를 이겨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의 상태로는 절대로. 하지만, 적어도 이 여자를 갖게 되면, 그렇게 되고 나면, 그래도 어느 한 부분은 그 남자에게 이겨볼 수 있는 부분이 될 것만 같았었나 보다. 그러나 의식을 잃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저 여자는 여전히 그 남자를 찾고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 또한 완벽한 근명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하여간 오늘 완전 병신 짓만 하는 구나.” 이내 볼일은 다 끝났다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려있는 자신의 옷들을 천천히 입고 나서, 근명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저녁때 영후와의 전화 통화내용이 생각나는 근명이었다. “쳇! 어차피 말해줘도 모를텐데…” 하지만 자신의 말과는 달리 근명은 마지막으로 하연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가 귓속말로 무언가를 조용히 말을 해 주고는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려다가, 하연에게 한마디를 더 말해주었다. “알고나 있으라고요.” 이내 문을 열고 나가버린 근명이 해준 귓속말 때문이었을까, 하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은 꿈을 꾸듯 웃으며 더욱 깊이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좀더 빨리 갈 수 없을까요?” 택시에 몸을 실은 채로 기사를 재촉하고 있던 영후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연이 부르고 있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서라도 가장 빨리 그 아이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교통상황은 이 남자의 마음은 애써 모른 척 하듯, 너무나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덧 저 멀리에 하연이 갇혀 있을 요새 같은 모습의 호텔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고, 그에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영후는 기사에게 던지듯 돈을 지불하고는 다짜고짜 문을 열고 차들이 서있는 도로 사이로, 차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하 고놈 참, 더럽게 바쁜가보네…” 그래도 돈을 집어 들어 계산해보더니 나름 희희낙락 거리던 기사는 또다시 손님을 태우러, 움직이지도 않는 차들을 비집고 인도 가까이로 이동하고 있었다. - 호텔 로비로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들어서던 영후는 순간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로비에는 냄새를 맡고 모여든 취재진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자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작업은 이미 끝났는지, 옹기종기 모여 열심히 수다들을 떨고 있는 기자들을 모른 척 하며, 영후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몇 층이래?” “17층. 12호라는데, 문도 안 열고 꼼짝 않고 있나 봐.” “하근명은, 같이 있나?” “뭘, 아까 확인해보니까 새벽에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던데.” “그 새끼, 또 지만 쏙 빠져 나갔구만? 재미 볼 거 다 봤다 이건가?” 기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영후는 입술을 꾹 깨물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어떤 것’을 우연히 바라보고는 잠시 환한 표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 수림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처럼 문의 안쪽에 기댄 채, 영원히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이른 아침에, 영후가 그녀의 대문 앞까지 왔었을 때, 어쩌면 수림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주길 바랬었는지도 몰랐다. 그랬기 때문에 잠기지도 않은 그녀의 대문에 그저 등을 기댄 채 영후가 앉아 버렸을 땐, 수림은 자칫 스스로 문을 열고 뛰어나가 그의 품에 안길 뻔도 했다. 하지만 나직하게 영후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을 무렵, 수림은 행여, 울음이 터질까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영후의 등에 자신의 등을 맞대고 앉듯, 문을 사이로 그렇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화 많이 났죠? 나 때문에…” 수림은 여전히 착한 그의 독백에 숨죽인 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왜 화가 나겠는가…왜 그의 탓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이 영후의 여자가 될 수 없음을 이제야 알아버렸을 뿐이었는데… “저는 지금도…아무것도 모르겠네요…” 수림은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린 어떤 바보 같은 ‘여자’ 때문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어차피 모든 것은 수림으로부터 시작되었을 뿐이었기에, 어쩌면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애초에 하나도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그거 하나는 알 거 같아요.” 다행이었다. 정말…정말 다행이었다. 그가, 수림에 대해 하나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래서 이 남자가 자그마한 것 하나라도 추억해주며 자신에 대해서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수림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거짓의 형상이었다. “수림씬… 참 좋은 여자에요.” 그 말을 끝으로 이내 영후는 천천히 일어서서 뚜벅뚜벅 걸어가버렸지만, 그래서 멀어지는 그 남자를 어떻게든 문을 열고 뛰어가 잡아보고도 싶었지만, 그럼에도 수림은 문 너머로 전해지는 그 남자의 등의 체온이 점점 식어버리는 게 두려워, 조금도 움직일 생각은 해보지도 못한 채 여전히 그렇게 문에 등을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 “잠시만요, 잠시만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별 소득 없이 호텔 룸의 복도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사이로, 커다란 세탁바구니가 담긴 카트를 밀며, 청소부가 등장하자 기자들은 혹여 비싼 카메라 장비들이 부딪힐까, 주섬주섬 짐을 챙기느라 갑자기 분주해 졌다. 하지만 그런 기자들을 뒤로 하며, 청소부는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룸의 방문을 열며 카트와 함께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순간, 기자들은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벙 찐 표정이었다. “쟤는 저렇게 막 들어가도 되는 거야?”, “그럼 우리는?”, “문 다시 열어 보라구.” 그제야 몇몇 기자들이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처음처럼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려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 “누구…?”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청소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굳어버린 하연은 그제야 구세주를 만난 듯 달려나오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영후야!” “쉬…” 혹시나 밖으로 들릴까, 영후는 모자를 벗어 들며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에 세워보였고, 그런 건 이제 아무 상관없다는 듯, 영후의 품에 꼭 안겨있는 하연은, 이대로 문을 열어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바로 이 남자라고 말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이내 그것도 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이 남자가 자신의 앞에 있어주었으니까. 그거면. 그거면 하연은 족할 뿐이었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영후의 가슴에 몸을 맡긴 하연은 그것만으로도 모든 게 해결된 것만 같은 희열을 느꼈고, 영후 또한 그저 친구인 줄로만 알았던 하연을 처음으로 안아보면서 이제야 길게 이어져 온 ‘친구란 이름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지 간에 영후는 하연을 좀더 꼭 끌어안아 주면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주고만 싶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어쩌지?” 이제는 떨어질 만도 하건만, 하연은 영후의 가슴팍에 꼭 붙은 채 마치 가슴에게 물어보는 듯 속삭였고, 영후는 그런 하연의 물음에 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어 안아 주는 것으로 대답했고, 하연은 영후의 드넓은 가슴 속에서 이미 답을 들은 듯 희망에 젖은 얼굴로 변해갔다. - 딸깍. “어? 열렸다!” 한 기자의 외침과 동시에, 청소부로 변한 영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침대 시트가 가득 담겨있는 빨래 바구니 카트를 밀며 나왔다. 당연히 문은 언제나 그랬듯 자동으로 잠겼을 뿐이었고.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문틈으로 카메라를 들이밀던 기자들은 곳 문이 닫히자, 영후에게로 몰려들었다. “이봐요? 안에 상황이 어떻든 가요?”, “혹시 아는 얼굴이던가요?”, “한 명인가요? 아님 여러 명?” 영후에게라도 실마리를 얻어보려는 기자들이 한꺼번에 질문을 하며 달려들었지만, 영후는 쓰고 있던 위생모를 더욱 눌러 쓰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카트를 밀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결국 별 소득이 없을 거란 결론을 내린 기자들은 영후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듯 했다. 하지만, “이봐요!” 한 기자의 부름 덕분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던 영후였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자 쪽을 잠시 돌아보았다. “네…?” “그런데… 여기 일하시는 분들은 객실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나 보죠?” 뭔가 답변을 해야 했지만, 순간 영후의 머릿속은 텅 빈 것만 같았고, 뭔가 이상한 조짐을 느낀 기자가 영후에게로 다가오는 순간, ‘땡!’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영후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쏜살같이 카트를 밀고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눌러댔다. 한편 그 기자를 필두로 모든 기자들이 뒤늦게 영후에게로 뛰어왔지만, 다행스럽게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속도가 조금은 더 빨랐다. “후…” 그야말로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던 영후와 하연의 탈출작전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나 나가도 돼?” 시트 속에서 답답했던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카메라가 달려있었으니.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에, 영후는 시트 속에 손을 넣어 하연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조금만,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봐.” 땡.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섰지만, 6층이었다. 재빨리 하연의 손을 놔버린 불안한 영후와는 달리, 문이 열리자 선글라스를 낀 꽤나 섹시한 여자가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섰고, 청소부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옆구리에 샤넬 핸드백을 낀 채로 꽤나 도도한 척을 하며 문이 닫힘과 동시에 1층 버튼을 눌렀다. ‘이런 젠장!’ 순간 영후는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위에 있던 기자들과 로비에 있던 기자들끼리 연락을 주고 받았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지하 주차장에 서겠거니 하고 멍청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분명 1층에서 기자들과 맞닥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어쩌지…’ 미처 영후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최신형이라는 것을 뽐내듯 빠른 속도를 내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5,4,3,2…그리고 결국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은 결국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고, 영후는 순간 바지춤을 뒤져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열렸다! 열렸어!”, “사진 찍어!”, “비켜봐! 안보이잖아!” 그야말로 열린 문 밖으로 기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영후는 다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허리를 굽히며, 6층에서 탄 여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물론, 이때 손에 든 만 원짜리 한 장을 높이 치켜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순간 그 여자는 별꼴 다 보겠다는 눈으로 선글라스를 한 번 치켜올리고는 영후를 피해 얼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지만, 모든 기자들은 그저 청소부와 여자가 탈출했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영후 옆에 있던 여자에게 시선을 줄 수 밖에 없었고,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아도 될 만큼의 뛰어난 영후의 연기력 덕분에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기자들은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는 다들 그 여자만을 쫓기 시작했다. “하근명 선수와는 어떤 사이세요?”,”언제부터 교제 중이셨나요?”, 왠지, 부적절한 이유로 호텔을 찾았던 것 같은 그 여자는 선글라스만으로도 충분히 가려진 얼굴을 핸드백으로 더 가려가며 기자들에게 벗어나려 뛰고 있었고, 그 덕분에 플래시와 질문으로부터 벗어난 영후와 하연은 그제야 한숨 놓으며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땡.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직원인 듯한 남자가 영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 또한 조금은 긴장한 듯 주위를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내리셔도 될 겁니다.” 남자의 말에 하연은 그제서야 시트더미 속에서 숨을 몰아 쉬며 튀어 올랐고, 그런 하연을 영후는 가뿐하게 들어 바닥에 내려주곤 남자에게 파란 지폐 몇 장을 건네며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남자는 돈을 받기 미안한 표정으로 받아 들며, 주차장 한 쪽을 가리킨 채 말했다. “아 그리고 차는 저기에 있습니다. 물론, 시동도 걸어놓았습니다.” 하연은 자신의 차가 보이자 얼른 그 곳으로 달려갔고, 영후도 하연을 뒤따라 가려다, 남자에게 뭐라 한마디를 더 건넨 후에야 하연의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숨은 듯 타고 있던 하연은 이내 고개를 조금 내밀며 영후에게 물었다. “뭐야? 저 사람한테 뭐라 그랬어?” 남자에게 영후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어느 정도 긴장이 해소된 하연의 질문이었다. 그런 하연을 느끼며 영후도 빙긋 웃고는 엑셀을 밟으며 말했다. “글쎄…언젠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여전히 궁금증에 왕방울 만한 눈으로 쳐다보던 하연은 이내 지상으로 차가 올라오자 쥐 죽은 듯 납작 엎드렸고, 몰려있는 취재차량들을 뒤로하고 그들의 비밀스런 자동차는 어느덧 복잡한 시내 도로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 어제보다는 덜 했지만, 그래도 여학교답게 입 소문은 빠르게 퍼졌기에 단 이틀 동안 모집한 것 치고는 상당한 학생들이 입부를 희망했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올 줄 모르는 영후와 혜미가 듣지 않는 강의를 수강하러 간 윤지를 빼고 나니, 고작 남희와 혜미 둘 뿐이었다. 하지만 뜻하는 목표가 같은 두 사람 이었기에 말만 없었을 뿐, 서류 정리 등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오늘은 이걸로 마감할까나?” 지원서 뭉치를 들어 책상 면을 이용해 탁탁 치며 가지런히 모으던 남희의 입이 열렸고, 그제야 혜미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요…” 혜미의 말에 남희는 눈으로 ‘어서 말해보라’고 대답했고, 혜미는 조금쯤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윤지 있잖아요…” “윤지? 윤지가 왜?” 혜미의 질문에 긴장할 이유가 없었던 남희는 가볍게 혜미의 질문을 받아주었다. “정말, 윤지 말대로 축구부에 코치로 써 주시는 건가요?” “음…아마 그렇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분명, 윤지의 역할도 필요할 거라 생각되니까.” 확실히 그랬다. 윤지의 캠코더 촬영은 분명, 도움이 될만한 요소였다. 넓은 공간을 콘트롤해야 하는 경기인 이상, 분명 현장에서 놓치는 요소들이 더 많을 게 분명했는데, 그런 문제점들이 윤지의 캠코더 촬영을 통해서 어느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에, 감독님 또한 달리 생각하실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그럼, 윤지도 코치님처럼 월급…같은 거 받을 수 있을 까요?” “아…” 그제야 남희는 혜미가 하고 싶은 질문의 핵심을 알 것 도 같았다. “그 문제는, 그러게…확실히 나 혼자서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진 않구나.” 남희의 불확실한 대답에, 혜미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져 갔다. 그런 혜미의 얼굴에 남희는 혜미가 지금은 털어 놓을 수 없는 고민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에 따르는 대가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분명, 감독님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이실거구.” 그나마 희망적인 남희의 답변이 이어지자, 조금 안도하는 것도 같았지만, 혜미는 그럼에도 또다시 남희에게 질문을 했다. “그럼요…만약에요…윤지를 선수로도 등록하게 된다면요. 그러니까 만약이에요.” 남희는 혜미의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이번엔 쉽게 이해 할 수 없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선수가 되면 등록금을 내준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윤지가 만약 선수도 하고 코치도 한다고 하면…” 아, 그런 뜻이 었던가. 남희는 혜미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등록금 면제에다, 코치 월급도 받을 수 있을까…가 궁금한 거니?” 혜미는 자신의 입으로 말해놓고서도, 불가능 할 것만 같은 이야기에 스스로 고개를 숙였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남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지금 그래도 조금은 긍정적으로 말해주고만 싶었다. 언제나 정확한 답변만을 해오던 남희로서는 너무나 엄청난 변화였지만, 그렇게 변하고 있다는 걸 본인은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음…불가능할 것 같지만은 않은 걸?” 웃음지으며 말하는 남희의 말에, 혜미도 여지껏 고민했던 숙제들을 다 해버린 양 밝은 얼굴이 되었다. - 어느덧, 창가에 서서 푸른 잔디의 운동장과 그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총장은, 여전히 뒷짐 진 채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물론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게 달라졌고, 또 달라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으니 총장은 꽤 흡족해하고 있었다. 총장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한 얼굴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누군가, 총장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네.” “실례하겠습니다.” 인사와 함께, 말쑥한 양복차림의 한 젊은 남자가 총장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는지…” “실례지만 총장님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이거 인사가 늦었습니다. 여기…” 남자는 간사하게 웃음지으며, 양복의 안주머니에서 하얀 명함 하나를 꺼내 총장에게 내밀었다. 덤덤히 명함을 받아 든 총장은 명함에 적혀있는 직함을 보고는 조금 멈칫 했던 것도 같았다. ‘FIFA 에이전트’ 총장이 명함에서 눈을 뗄 사이도 없이, 남자는 단도를 꺼내듯 본론을 끄집어 냈다. “여기 한국여대에 이영후 선수, 아 감독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튼, 이영후가 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총장은 남자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끄덕임 속에는 이미 다음에 나올 이야기도 짐작하고 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건만, 남자는 여지없이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 하고 있었다. “이영후를 제게 주신다면, 처음 계약하신 금액의 열 배를 보상해 드리겠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 열 배. 장난처럼 이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 덕분에, 잠시 총장은 이 영후의 연봉이 순간 가볍게 느껴질 뻔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다시 생각해 보았을 땐, 그건 실로 어마 어마 한 금액이라는 것을 총장은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그 금액을 보전해주고도, 분명 이 남자는 영후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충분한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은 그 ‘능력’이란 것은 모두 영후가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겠지만. 어쨌든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총장은 새삼, 이영후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우린 이 감독을 돈 만으로 임명한 건 아닙니다.” 겨우 마음을 진정 시키며 총장은 운을 떼 봤지만, 그쯤은 이 남자에겐 아무것도 아닌 듯 보였다. “그러셨겠지요. 하지만 선수의 가치는 결국 돈으로 귀결 된답니다. 그게 프로의 세계인 것이지요. 그리고 전 이영후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에선 얼마든지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확인 했구요.”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그 남자의 궤변을 듣고 있노라니, 총장은 하마터면 구역질이 나올뻔했다. 최고의 선수를 만들겠다니. 거기다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이라니. 참으로 어이없는 발언들이 난무하고 있었지만, 총장은 그저 담담하게 입을 열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로서는 원론적인 답변 외에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말씀은…” 남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총장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이 영후 선수를 제가 직접 만나봐도 상관없으시단 말씀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이미 모든 경우의 수를 쥐고 있다는 듯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총장은 조금 현기증이 날 뻔 했다. 이영후와 함께 가는 길은, 앞으로 이보다 더 험하고 괴로울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묵묵히 걸어나가야만 했다. 안될 거라고 처음부터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치면, 결국 아무것도 바꿔나갈 수 없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었으니까. 그러자면 우선은, ‘이영후’를 믿어야만 했다. 절대적으로. “그러시던지요.” 마음을 다잡은 총장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답을 주었고, 총장의 답변에 정중히 인사하며 물러나던 그 남자는 문을 닫고 나갈 때 까지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의자에 주저 앉은 총장은 누군가에게 말하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어째야 할까요…” - 한강고수부지의 벤치에 앉은 하연의 어깨너머로 영후는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내밀었고, 하연은 캔커피의 따뜻함보다 더 따뜻한 영후의 마음에 잠시나마 꽁꽁 얼어있던 가슴을 녹일 수 있었다. 이윽고 하연의 옆자리에 앉으며 영후는 고수부지 공터에서 먼지를 날리며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축구만 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상관없을 것 같던 때가 있었는데…” 양손으로 뜨거운 캔커피를 굴리듯 만지며 영후가 입을 열었고, 하연은 그런 고즈넉한 영후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왠지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 다소 뜬금없는 하연의 말에, 영후는 물끄러미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냥…뭐랄까…축구를 하고 있을 때의 너… 그런 네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거 같아.” 조금은 빨갛게 물들고 있는 하연의 볼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영후는 캔커피의 뚜껑을 따서 하연의 손에 들고 있는 캔과 바꿔 주었다. “나도…축구가 처음부터 좋았던 게 아니라고 말하면, 믿어줄래?” 마치, 손에 든 캔의 뚜껑을 따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영후의 말에 하연은 자칫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놓칠 뻔 했다. 잘못 들은 걸까…? “알잖아.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던 나였다는 걸. 근데말야, 축구를 하고 있을 때 만큼은… 항상 지켜봐 주는, 네가 있어서 정말 좋았다.” 지금, 나에게 고백하려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지만, 차마 하연은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없었다. 만약, 여전히 자신만의 감정뿐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어 버린다면, 다시는 영후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저 온기라고는 손에 들고 있는 캔커피에서만 느껴지는 듯 얼어붙은 하연에게로 영후는 천천히 말해주었다. “언제가 될지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말하는 ‘언제’의 의미를 하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가슴으로부터 뭉클한 느낌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뜨거워지는 가슴을 느껴가며, 그제야 얼어있던 모든 것들이 봄 눈 녹듯 녹아버린 하연은 영후의 입에서 나올 마지막 말에 최선을 다해서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그 때가 될 때까지 나…지켜봐 줄래?” 영후의 물음에 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면서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영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자신의 마음은 너무나 기뻤기에, 활짝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캔을 들고 있는 손등 위로 뜨거운 눈물이 똑, 똑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후의 표정을 미루어 짐작 하건 데, 하연은 분명 웃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연이 또 울고 있었다면, 저기 저 따뜻한 남자또한 저렇게 웃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14부. 사람은 언제쯤 사랑을 하나요? 맑은 하늘만큼이나 푸르른 전라남도 강진의 축구 전용 구장에선 어느덧 조촐한 개회식을 마치고, 개막 시합이 내정되어 있는 여주대와 영진전문대 선수들이 천천히 그라운드 위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영후는 꽤나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시선을 그라운드에 고정시킨 채 손만 옆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남희씨, 거기 팜플렛 좀 줄래요?” 관중석 한 켠에 영후와 나란히 앉아있던 남희는 들고 있던 춘계여자축구연맹전의 설명과 각 팀 소개가 담겨 있는 팜플렛을 영후에게 건네줬다. 그리곤 역시 안경을 날렵한 콧대 위로 추켜세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경기부터 엄청나네요. 우승후보들끼리의 경기라니…” 어느새 완벽한 정보를 숙지하고 있는 남희의 말이었다. 그런 남희를 그제야 돌아보며 영후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그녀와 만난 지도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흘러 4월의 중순이 되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남희는 정말 어느 축구팀을 맡아 지도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을 선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4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위해 영후로부터 지시 받은 여러 훈련을 분석하고, 모든 학생들이 즐겁게 훈련해 나갈 수 있도록 개개인 별로 구분 지어 운동을 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버거워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운동량을 늘려 효과를 배가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일일이 학생들이 제출한 ‘하루에 먹은 것들 리스트’들을 검토해 먹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해서도 확실히 체크해 줬기에, 모든 학생들은 생각보다 쉽게 ‘다이어트’를 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계획해준 남희가 있었다면, 영후와 함께 직접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큰 힘이 되어준 수림도 참 소중한 사람이었다. 또다시 착하기만 한 그녀가 첫 훈련을 앞둔 시기에 다시 영후 앞에 나타난, 한달 전 그때를 떠올리게 되자 영후는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 “근데… 좀 힘들지 않을까요?” 새내기들을 유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학생들이 들어차 있는 동아리 방들이 즐비한 건물에 자리한, 학교로부터 지원받은 자그마한 사무실 안에 앉은 사람들 중 혜미가 영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영후 혼자 현장 지도 하기엔 너무나 많은 수의 입부를 받아버린 것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을 그 말 속엔, 왜 수림의 모습은 일주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는 건지에 대한 궁금증도 포함되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혜미의 말 덕분인지, 훈련 계획서를 건네던 남희 또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영후는 그 질문에 달리 뭐라 말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일을 추진해버린 건 다름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영후의 모습을 보며 질문을 꺼낸 혜미를 비롯한 모두가 한동안 약속이나 한 듯이 다들 침묵하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윤지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윽고 열리는 문으로 등장한 사람을 보고는 모두들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지고 있었다. “언니~!”, “수림씨!” “죄송합니다아~ 제가 좀 늦었죠? 헤헤!” 그랬다. 문이 열린 그 곳에는 거짓말처럼, 환하게 웃는 수림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은 그녀의 수척해진 얼굴에 더욱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수림씨…’ 모든 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난 수림 또한 마지막으로 영후와 마주서고는 이윽고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영후는 복잡한 심정으로 수림의 손을 잡았지만, 잡은 그 손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마음은 여전한 것만 같았다. 아니 그간 더욱더 진해졌을지도.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감독님.” 하지만 너무나 예의 바른 수림의 모습에 순간 그녀와의 거리감이 일 억 광년만큼이나 먼 것처럼 느껴지던 영후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영후를 대하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었던 영후였다. 한편 수림은 간단하게 영후와의 악수를 마치고는 남희에게 훈련계획서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고 바로 이어지는 남희의 설명을 꽤나 열심히 듣는 척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아스라한 눈으로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저 남자가 혹여 들을까 걱정이 되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괜찮아. 이렇게라도…이렇게라도 저 남자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혼란과 슬픔으로 가득했을 일주일간,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결심들을 곱씹듯 또다시 해 보면서 수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시선은 당연히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영후에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다시 저 남자의 눈을 바라보게 되자, 그 굳은 맹세와 결심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아, 수림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계획서 뭉치에 머리를 파묻었다. ‘수림씨…’ 그런 수림의 모습과, 수림을 바라보는 영후의 애잔한 눈빛 덕분에 설명을 하다가 멈춘 남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여주대와 영진전문대의 경기는, 소위 ‘창과 방패’의 싸움일거라 예측한 전문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작하자마자 서로 치고 받는 내용을 보여주었다. 국가대표 공격수 트리오를 보유한 여주대와 역시 국가대표 수비수들로 가득한 영진전문대의 싸움이었으니 당연히 일방적인 공격과 수비만이 있을 거라 남희도 생각했기에, 그와 정반대의 내용이 보여지자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여주대의 공격축구는 수비수들의 뒷받침이 되지 못했기에, 번번히 차단되기 일쑤였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영진전문대의 수비수들에서부터 시작되는 긴 패스에 의한 역습덕분에 오히려 슈팅수는 영진전문대가 더 많기까지 했다. 다만, 역시 여주대의 공격수들보다 뒤쳐지는 실력덕분에 득점 기회가 날아가곤 했지만. ‘축구는 역시 기록지만으로 모든 게 평가될 수는 없는 거구나.’ 남희는 점점 축구의 오묘함에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또한 무척 흥미 있다는 듯 옆자리에 앉은 채 연신 웃으며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영후에게도. “너무 힘주면서 보진 말아요. 남희씨도, 저도, 아직은 우리 팀의 실력이 어느 정도가 될는지는 모르니까요.” 그저 실력을 모르고 있을 때 경기를 즐기라는 것인지, 아니면 저 정도보다 훨씬 강력한 팀을 만들 자신이 있다는 것인지 언뜻 이해하지 못한 남희는 곧바로 영후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직 선수조차 선발하지도 못한 지금, 너무 앞선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괜히 예민해지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남희는 그러나 이어지는 영후의 질문에 마음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참, 어때요?” “네?” 무슨 질문이든 그가 궁금한 거라면 어떻게든 완벽한 답을 내어 보이겠다는 듯 한 남희의 얼굴은 그러나 영후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올 뜬금없는 질문에 대해선 전혀 예상하고 있지 못한 듯 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던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경기장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남희에게 묻는 영후 덕분에, 갑작스레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던 남희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안경테너머의 눈동자 또한 훨씬 더 커지고 있었다. 그저 지금 ‘다이어트’를 하는 학생들 중에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영후의 의도였지만, 그만 앞 뒤 다 자르고 묻는 통에, 순간 남희는 마치 속마음을 들킨 소녀처럼 얼굴이 빨개진 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아, 저…그러니까…그게…”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영후를 돌아보니 남희에게 질문한 것 자체를 어느새 잊어버린 듯, 또다시 경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제야 남희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긴 했지만, 여전히 드는 생각에, 영후란 남자는 남희에게만큼은 항상 어려운 질문만을 던져주는 이상한 학생 같기만 했다. 물론, 너무나 이상했기에 남희의 마음 또한 온통 그에게로 쏠릴 수 밖에 없었지만. - 여자 축구에 있어선 꽤나 굵직한 대회의 개막일이었으니, 조전무 또한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귀빈석에 삐딱하게 앉은 채 그보다 더 지루할 순 없다는 듯한 얼굴로 경기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시합을 하고 있는 선수들의 수 만큼이나 될까 싶은 관중석을 하품을 애써 참아가며 돌아보았다. ‘응? 뭐야, 저 녀석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그리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찾게 되자, 조전무는 며칠 전 정회장과 가졌던 일식 집에서의 저녁식사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 둘이 앉아있기에는 꽤나 넓은 공간과 길다란 테이블이 놓여있는 다다미 방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그러나 직급의 차이 만큼이나 분위기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저, 회장과 전무라는 직함을 떠나서, 돈이 전해주는 위력이 조전무도 모르게 위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 앞의 쥐 마냥 조신하게 앉아있던 조전무는 그나마 문이 열리고, 초밥이 들어오자 조금은 긴장이 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초밥이 놓여있는 그릇은 다름아닌 한 여인의 나체였기에, 조전무는 또 다른 의미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들어요.” “아 예.” 허나, 그런 것 따위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정회장은 여인의 유두에 놓인 초밥 하나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고, 황송하다는 듯 두 손을 조아리며 대답을 한 조전무는 전혀 야하지 않은 부위를 찾다가 겨우 배 언저리 즈음에 젓가락을 옮겼다. 생각 같아선 음부 바로 위에 놓여진 초밥을 집어 보지 속에 충분히 담궜다가 먹고 싶었지만, 아니 젓가락도 필요 없이 그저 입과 손으로 여자의 곳곳을 주무르며 맛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채,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앞 접시에 초밥 하나를 옮겨놓았다. “요새 국가대표 경기가 영 시원치가 않던데... 어때요, 조전무님은?” “예? 아, 맞습니다.” “뭐, 요전에 있었던 경기를 지켜보니까, 노감독이 잘 통솔하기는 하는 것 같던데, 그래도 골을 넣는 사람은 필요해 보이더만요?” 정회장은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확실히 노감독이 다루기 힘든 사람인 건 확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잘 해서 꽤나 선전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허나 국가대표 축구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흥행을 하기 위해선 언제나 ‘승리’가 따라주어야 했기에,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진정한 스트라이커가 필요했다. 하지만, 조전무의 학연과 지연에 맞닿아있는 선수들은 어딘가 모르게 하나씩 부족하기만 했기에 조전무 또한 답답하기가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그렇게나 싫어하던 망나니가 대통령에 덜컥 당선 되어버렸으니…나도, 내년이면 협회 회장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입니다. 더 이상 무의미하게 돈을 낭비하기도 싫고, 또 엉망이 되어버린 사업도 이제는 좀 관리를 할 필요도 있고. 그러니…” 정회장의 젓가락은 누워있는 여자의 음부를 향했고, 그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멍하니 누워있는 여자의 눈을 잠깐 훔쳐본 조전무는 돈과 권력의 무서움을 새삼 깨달으며 잠깐이지만 소름이 돋는 듯 했다. “유종의 미는 거둬야 하지 않겠소?” 초밥 위의 생선회에만 약간의 간장을 찍어 입에 넣은 후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내뱉은 정회장의 말에 조전무는 또다시 움찔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씀은…?” “기술위원회 소집해서, 이영후 국가대표 기용에 관한 건 의논해 보도록 하세요.” 결국, 이것 이었나… 조전무는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모든 걸 포기 할 수는 없었다. 만일, 정회장의 공언대로 대한축구협회의 수장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리면 어쩌면, 그 자리는 자신의 자리가 될 수도 있었기에, 조전무 또한 무턱대고 정회장의 바램 대로 움직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에 하나, 지시한 일이 잘못될 시에는 정회장은 물러나면 그만이었지만, 차기 회장 자리를 노리는 자신에게는 더 없는 치명타가 될 것이 뻔했으니까. “하…하지만 회장님 그렇게 하면 저희가 추진하던 유망주 프로젝트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버렸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는 것 밖에는” 조전무의 다급한 발언에 정회장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유망주 프로젝트’ 어린 축구 소년들을 발굴해서 해외 선진 축구 국가로의 유학을 통해 진정한 축구 강국을 만들기 위해 시작했던 제도였으나, 생각만큼 엄청난 성장을 보여준 선수들도 없었을 뿐더러 언론을 통해서 잘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홍보는 해 놓았지만, 사실은 향수병을 비롯해서 현지 적응에 실패한 아이들이 대다수였고, 그나마 현지 적응에 성공한 몇몇은 그러나 군입대에 대한 걱정 때문에 국적 변경마저 고려하고 있기도 했기에, 기대를 가장 많이 했었던 정회장은 그만큼 실망도 컸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정치와 사업, 그리고 축구판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았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때’였다. 즉, 지금 이 시기가 자신의 치적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최적의 ‘때’라고 정회장은 굳게 믿고 있었다. “실패를 부정하진 맙시다. 하지만 ‘성공’ 또한, 그 녀석들이 제대로 성장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질 않소?” 그랬다. 진정 그들이 추구하는 성공이란, 언제나 그랬듯 ‘서울’에서만 열리는 국가대표 평가전이 매진되는 것이었고, FC코리아 팀이 항상 월드컵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언제나 족할 따름이었다. 하나도 틀릴 것이 없는 정회장의 말에 조전무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후 놈을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조전무의 자존심이 허락 치 않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미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놈’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물밑작업을 하고 있었건만, 이런 갑작스런 정회장의 명은 조전무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어쨌든, 잘 알아들었을 테니, 그럼 먼저 일어나겠소. 천천히 마저 드시고 오시오.” 초밥을 두어 개나 먹었을까. 이내 정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런 정회장을 배웅하려던 조전무를 만류하며 이내 나가버렸다. 이내 허탈하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조전무는 정회장의 명대로 영후를 받아들이되 뭔가 그 녀석에게 소중한 것을 빼앗아버려야만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놈에겐 아무런 연고도, 소중한 가족도 없었고, 때문에 더 이상 빼앗을 것 조차 없어 보여서, 조전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고, 그 때문이었는지 그 전까지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기만 했던 눈앞의 ‘인간 접시’ 여자는 살짝 떨었던 것도 같았다. ‘응?’ 순간, 그 여자는 ‘접시’가 아닌 알몸의 여자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더불어 조전무의 물건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웃기게도 조전무의 뇌 또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그 놈에게도 분명 소중한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여자…?’ 자신도 모르게 해버린 생각에, 스스로도 기특한 생각이 들어버린 조전무는 갑자기 식욕이 샘솟았지만, 그보다도 성욕이 더욱 솟구쳤기에 얌전히 누워있는 나체의 여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스륵. 어느새 검은 양말만을 신고 있는 추한 알몸을 드러낸 조전무는 무릎으로 기어가 여자의 몸 위에 놓여진 초밥을 입으로 먹으며 흥건한 침을 그녀의 몸 위에 흘리기 시작했다. 민망함 때문이었는지 정회장이 일어섬과 동시에 눈을 감고 있었기에 갑작스런 조전무의 행동에 너무 놀란 여자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보다 조전무의 물건이 그녀의 입 속에 들어오는 속도가 조금은 더 빨랐다. “읍…으읍…” “흐흐, 나만 먹으면…으으… 미안하잖느냐…” 육중한 몸으로 연신 여자의 몸을 내리 누르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조전무는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음부 쪽으로 옮겨 두 손으로 초밥 위에 얹혀져 있는 생선회만큼이나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꼭 움켜쥐고는 맛있게 그녀의 보지를 물어뜯듯이 질겅거렸다. 이내 조전무의 입안에 남아있던 밥알들이 그녀의 보지 살에 붙었다가 다시 조전무의 입안으로 사라지곤 했고, 여자는 끔찍한 고통 덕분에 소리를 질러보려 했지만 물컹거리는 조전무의 자지가 전혀 틈을 주지 않았기에 눈물 콧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으으읍!!!! 흑흑……으으우우!!!!” 그저, 입으로 벌어진 보지 살들을 씹어대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조전무는 이내, 손가락을 이용해 거칠게 보지 안을 휘젓는가 싶더니,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각종 초밥을 집어 들어 연달아 보지 속으로 쑤셔 넣었고, 그것만으로는 별 감흥이 없었던지 잠시 후 손가락을 이용해 항문을 유린하기 시작했기에, 여자는 어떻게라도 벗어나고도 싶었고, 또 비명을 질러보고도 싶었지만, 입 안 가득한 조전무의 자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팽창하는 듯 싶더니 결국 폭발하며 여자의 입에 한 가득 정액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읍…커억…컥!” 갑작스레 입안 가득하게 차오르는 정액을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삼키는 수 밖에 없었고, 더 이상 자신의 자지에서 정액이 나오지 않자 조전무는 여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누워버렸다. 여자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테이블에 알몸으로 누워있었지만, 입술엔 흘러나온 누런 정액이 번들거렸고 손으로 애써 가려보려 노력하는 보지에서는 연신 밥알과 생선회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고했어.” 조전무는 알몸인 채로 벗어놓은 양복 바지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 몇 장을 탐스러운 가슴 사이에 놓아주며, 유두를 거칠게 꼬집어 주었고 여자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이윽고, 불꽃 튀기는 우승 후보들간의 경기는 결국 0 : 0 으로 끝났지만, 주심의 휘슬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물 속에서 참았던 숨을 그제야 몰아 쉬듯 단번에 ‘푸하!’ 하고 내뱉는 남희를 돌아보며, 영후가 웃으며 물었다. “직접 보니까, 또 다르죠?” “네…정말이지, 여자 선수들이라 좀 경기 속도가 느릴 거라고만 생각 했었거든요.” 남희는 입을 다물지 못한 표정으로 경기를 마친 채 악수를 나누고 있는 아쉬운 표정의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간 TV로만 보던 경기를, 처음으로 현장에서 지켜 본 남희가 받은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게다가 그 스피드 그대로 90분을 유지하던 엄청난 체력을 소유한 선수들을 코앞에서 지켜본 것 만으로도 이미 남희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돌아가면, 조금 더 체력 훈련 강도를 높여야겠다.’ 분명 지금 훈련 상태로는 모든 학생들이 (물론 아직 선수 선발을 하진 않았지만) 저 스피드를 유지하기는커녕, 45분도 채 뛰지 못할 게 분명했기에, 벌써부터 새로운 훈련계획서를 머릿속으로 나마 작성해보기 시작했다. “뭣 좀 마실래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희에게 영후가 묻자, 언제 머릿속이 복잡했었냐는 듯 남희는 벌떡 일어나며 답했다. “아, 네. 저도 같이 가요.” - 학점과 출석률이 나쁘면 퇴출시키겠다는 영후의 협박 덕분에 강진에 따라가지 못해 뿔이 난 윤지는 삼각대 위에 놓여진 캠코더로 토실토실한 여학생 틈바구니에서 그라운드에 놓여있는 ‘콘’ 사이를 반복해서 뛰어다니는 혜미를 바라보다가, 아이들 곁에서 박수를 쳐가며 독려하고 있는 트레이닝 복 차림의 수림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왜 혜미도 다른 애들하고 똑 같은 훈련을 받는 거죠? 혜미 정도면 이런 것쯤은 이미 다 할 줄 알 텐데…” “감독님 지시야. 감독님이 보시기엔, 혜미도 기본기가 조금 부족하다고 보셨나 봐. 체력도 그렇고.” 자자, 조금 더 힘내자! 라며 역시나 쉬지 않고 외치는 수림 옆에서 윤지는 괜히 영후에게 고분고분한 혜미와 특히나 수림에게 심술이 났다. “그래서, 감독님이랑은 이제 아주 끝난 거에요?” 윤지의 난데없는 질문에, 순간 수림의 모든 동작은 캠코더의 정지 버튼을 눌러놓은 것처럼 멎어버렸고, 그제야 윤지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결국 윤지는 스스로 물을 닦아 내보려 할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렇잖아요. 코치님 같은 여자가 또 어딨다고…자기가 뭐 엄청 잘난 줄 아나 봐요.” 꽤나 누그러진 윤지의 말을 듣기는 한 건지, 마치 그라운드 어딘가에 그 남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 마냥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를 쳐다보며 수림은 천천히 입을 열였다. “끝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 그냥…그냥 나 혼자 그런 거였으니까.” 정말이지 착한 건지, 바보인 건지 수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열불이 나는 윤지였다. “정말 아무 신경도 안 쓰인다 이거죠? 그런데 어쩌나… 지금쯤, 권코치님하고 단 둘이서만 오붓하게 여행을 즐기고 있을 텐데…” 하지만 다시금 되살아난 윤지의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여전히 훈련 받는 학생들의 지도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수림이었다. - 간이 스넥바 앞에 선 영후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남희에게 물었다. “뭐 마실래요?” “커피 할게요 아메리카노. 그리고 저기 좀…” 남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보던 영후는 화장실 표지판을 발견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남희는 화장실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영후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며 덧붙여 물었다. “여기 우유도 있나요?” “네, 있어요.” “그럼 우유 하나도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인이 커피를 만들고 있는 사이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영후에게 꽤나 묵직하지만 간사함이 묻어나는 노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누군가?” 영후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는 대한축구협회의 조전무가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닥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었건만, 그럼에도 영후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런 영후에게 마치 너무나 친했었다는 양, 조전무는 대뜸 다가와 손을 잡고는 연신 흔들어 댔다. “그래, 다시 돌아온 겐가? 아니 왔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오지 않구선, 응?” “아, 그게…” “자네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마음 졸이며 산 줄 아나? 이 사람…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모습 다시 보니 반갑구만, 응?” 누가 보면, 정말이지 영후에게 둘도 없는 은인처럼 굴고 있는 조전무의 행동에 영후는 구역질이 나올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감독님…” 순간 남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영후와 조전무의 시선은 영후의 뒤쪽으로 다가오던 남희에게 쏠렸고, 한 순간 남희는 자신의 몸을 빠르게 훑고 내려가는 조전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끼며 가슴께를 괜히 움츠려보고 있었다. “누구…신가…?” 남희의 옷 속에 숨겨진 풍만한 몸을 알아본 조전무는 입에 고인 침을 삼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물어왔고, 그런 조전무의 시선을 영후 또한 느끼고 있었기에 솔직히 그 어떤 대답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동료입니다. 절 도와주시는.” 동료라는 영후의 말에, 남희는 잠깐이지만 서운함 마음도 들었으나 지금은 그보다 이 늙은 너구리 같은 남자의 눈빛이 더 거슬릴 지경이었다. “오? 그래요? 거참 대단하시군요, 이런 대 선수가 도움을 요청할 정도라니…어쨌든 반갑습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미는 손을 남희는 잠시 잡아주고는 곧이어 영후의 뒤로 숨듯이 물러났다. 그런 남희가 더욱 먹음직스럽게 느껴지는 지 조전무 얼굴에는 점점 탐욕의 그늘이 더해져만 갔지만, 겨우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 들며 영후에게 인사를 건넸다. “간만에 만나서 반갑긴 하네만,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지. 아 그래, 다음에 한 번 시간 좀 내 보라고, 우리 그때 회포나 푸세, 응? 이만 가지.” 수행원들을 데리고 ‘저녁 즈음에 윤지를 찾아가 다시 한 번 안마를 받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며 조전무가 사라지자, 그제야 영후의 소매 자락을 꼭 붙잡고 있던 남희는 스스로 놀라 손을 내려놓고는 잠시 얼굴이 빨갛게 물들기도 했지만, 이내 화가 치미는 듯 영후에게 따지듯 물었다. “누군가요? 저 이상한 남자는?” “아 뭐, 있어요 그런 사람. 참, ‘아메리카노’였죠? 블랙?” 영후는 남희에게 물으며 커피와 우유 값을 스넥바 속의 판매원에게 지불하고는 길다란 종이컵 속에 든 커피에 플라스틱 마개를 덮고는 남희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잠시나마 싸늘해졌었던 남희의 마음은 영후의 속마음만큼이나 따뜻한 테이크 아웃 커피를 받아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기를 되찾고 있었다. - 정중히 인사하고 나서야 남자가 총장실에서 나가버리자, 총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렀고, 몇 번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서둘러 받아 든 노감독이었을 테지만 역시나 들리는 목소리는 더없이 느긋하기만 했다. ‘음, 무슨 일이오?’ “이번이 벌써 다섯 번 째에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비어있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러보며 한탄하듯 말을 꺼내보는 총장에게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노감독이 물었다. ‘또 영후를 내달라고 하던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냥 제 생각이지만, 이건 그저 에이전트들이 부리는 선수 욕심만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확실히 총장의 느낌은 정확했다. 선수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도 아닌 영후에게 이렇게나 동시다발적으로 에이전트들이 들러붙는다는 건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노감독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묻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요?’ “혹시, 누군가가 그 사람들 뒤에 있는 건 아닐 테죠?” ‘으음…’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었고, 노감독 또한 그런 수작을 부릴만한 사람들이 떠올랐지만, 아직은 섣불리 넘겨짚기엔 조금 위험부담이 컸다. ‘조금만 더 지켜 보기로 합시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지 않소.’ “확실해 지면, 그때는 무슨 생각해두신 거라도 있는 건가요?” ‘그…렇진 않지만 그때는 또 무슨 방도가 있지 않겠소?’ 전혀 대책이라곤 없어 보이는 노감독의 느릿한 말 덕분에 더욱 기운이 빠지는 것만 같은 총장이었다. - 뻘쭘한 얼굴로 전화를 끊는 노감독의 시선이 머문 맞은 편 의자에서는 하연이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누?” 일부러 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노감독이 물었지만, 하연은 그 모습이 더 웃겨 결국 ‘빵’ 터지고 말았다. “크큭…아 죄송해요…크크…” 어쩌면 저렇게 소년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는지 하연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진지하고, 고지식하기만 한 노감독을 전화통화만으로 저렇게 만들 수 있는 황총장의 마법을 배우고 싶어질 정도였기에 하연의 웃음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못했다. “흠흠, 자네가 지금 그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은데…?” “크크…아…배 아파…네? 아휴…근데,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배를 움켜쥐며 쉽게 말조차 하지 못하는 하연의 약점을 잡고 있다는 듯이 눈꼬리를 가늘게 만들며 노감독은 놀리듯 입을 열었다. “영후 놈이 저 땅끝 쪽으로 권코친가 뭔가 하고 단 둘이 여행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그야… 여자축구 연맹전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그제야 웃음이 멈춘 하연에게 노감독은 적절한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호~? 그러니까 자네 말은, 영후 놈 정도는 그런 미녀 코치와 단 둘이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내놔도 별 걱정 안 된다는 뜻인겐가?” “그건…” 얼마 전 있었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 중 하나인 북한과의 경기 소감과 더불어 앞으로의 국가대표팀 운용에 대한 인터뷰를 하러 왔던 하연은 어느새 자신의 목적을 잊고서 신나게 노감독과 수다를 떨다가 그제야 영후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도 전화 통화를 했으니, 자네가 전화를 잠깐 해 본대도 굳이 말리지는 않을 생각일세.” 다소 긴장하는 하연의 표정으로 인해, 충분히 승리감을 맛보고 있는 노감독은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하연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영후의 번호를 눌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도착하면 전화 한다더니…’ 그제야, 영후에게 전화가 올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는 걸 깨달은 하연은 뿌드득 이를 갈며 연결음 만을 들려주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 도로를 벗어난 지 한참이나 됐지만, 영후와 남희가 타고 있던 렌터카는 여전히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비포장 길을 헤매고 있었다. “남희씨…강진에 오면 길 걱정은 말라면서요…” 자칫 도랑 같은 곳에 빠질 까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며 핸들을 연신 돌리며 영후가 물었지만, 그런 영후에게 미안한 감정은 둘째치고, 남희 또한 사방을 둘러보며 핸드폰 또한 꺼내 들어 전화를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안테나도 잡히지 않았기에 연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저도 여기에 와 본지가 좀 돼서…” “아직도 안테나는 안 잡히나요?” 이제는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 안테나를 확인하고 있는 남희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후가 물었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다. “네…그러네요…” “우선 저기에 가서 길 좀 물어 보죠.” 갑작스레 전방에 나타난 초가집을 발견한 영후는 그리로 방향을 돌렸고, 그와 동시에 남희의 입에서도 환호성처럼 들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저기에요, 저기!” “예? 저기요?!” 정말 외딴 곳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는 거의 쓰러져가는 초가집을 가리키고 있는 남희의 손가락이 부디 잘못된 것이기를 잠시나마 바래봤지만 너무나 설레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희의 표정덕분에 영후는 헛된 기대를 일찌감치 접어야만 했다. 이윽고 다 쓰러져가는 돌담 앞에 차를 세우기도 전에 차문을 열며 뛰쳐나간 남희를 따라 영후도 시동을 끈 후, 경첩이 수명을 다해 무너져 내릴듯한 나무문을 조심스레 열며 따라 들어가 보았지만 쉽사리 남희에게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서둘러 들어갔던 남희는 어느새,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있던 것만 같은 작디작은 할머니 한 분과 꼭 끌어안은 채 떨어질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 둘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남희의 얼굴을 연신 쓸어보는, 등을 애기 다루듯 쓰다듬어 보는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낸 작고 주름진 손은 그대로 남희에게 안정이 됐고, 사랑이 되어 주는 듯 했다. 영후도 절대 그 둘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고, 남희 또한 그 순간만큼은 영후의 존재조차도 잊어버린 듯 한껏 어리광을 부려보고 있었지만, 그런 남희를 돌려 세우며, 영후를 바라보게 만든 건 다름아닌 할머니였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할머니, 제가 모시는 감독님이세요. 감독님, 우리 할머니에요.” “안녕하세요, 이 영후라고 합니다.” 환하게 웃으며 그 작은 할머니의 키보다 훨씬 더 아래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영후의 귀에는 그러나, 잡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으악 으악’ 거리며 괴상스레 웃어넘기는 어느 새의 지저귐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꽤나 생소한 장소에서, 그것보다 훨씬 더 생소한 고요함에 잔뜩 주눅이 들 뻔도 한 영후에게 할머니는 그제야 다가와 손을 잡으며 역시나 몇 번이나 영후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이렇게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영후는 무척 놀라웠지만 이어지는 남희의 말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저희 할머니는 듣지도, 말씀도 못하세요.” “아…” 그래서였구나. 이 한없이 가냘프고도 고운 손 끝에서 왜 그렇게 많은 감정과 마음들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는지, 영후는 그제야 조금쯤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 촤~악! 혜미의 발끝을 떠난 공이 골대의 그물망에 시원스레 꽂힐 때마다, 스탠드에 앉아있는 많은 남학생들의 입에선 한결같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야…정말 그림 같지 않냐?” 한 남학생이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혜미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의 남학생 또한 같은 양의 침을 적절하게 흘리고 있었다. “말도 마. 하마터면 저 애한테 홀딱 반할 뻔 했다니까…” “야, 우리 한번 번호라도 따볼까?” 결국 결심했다는 투로, 벌떡 일어서는 한 녀석을 끌어 앉히며 다른 남학생이 만류했다. “네 여자친구한테 죽고 싶어 환장했냐?” 결국 이도 저도 못하며 그저 멍하니 혜미를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남학생들은 자신들의 현실이 암울한 것만 같았다. “근데 우리 애인 님들은 언제쯤 저런 슛을 날릴 수 있어진대냐?” “슛은 둘째치고, 몸매라도 좀 비슷해졌으면 좋겠다.” “하~아!” 대화를 나누던 남학생들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고, 혜미는 아는 지 모르는 지 연습이 모두 끝나버린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슈팅 연습을 하고 있었고, 수림은 운동이 마친 학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다가 스탠드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남학생들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녀석들…’ 언제부터인가, 금남의 지역이었던 한국여대에 모든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남학생들이 하나 둘 스탠드에 모이는 진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점관리에 철저한 여학생들은 학업에도 열심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축구 다이어트’에도 열심이었기에, 점점 데이트할 시간이 줄어든 남자들은 결국 이곳에라도 와서 애인들의 운동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느새 ‘한국여대에서 미녀축구단을 만든다’는 허황된 입소문이 모든 남학생들에게도 퍼져나갔고, 뿐만 아니라 코치들까지 특급 미녀들이라는 확인된 소문까지 덧붙어 그야말로, 애인이 없는 남학생들까지도 몰려들었기에 한적한 분위기에서 운동을 시작했던 한달 전과는 달리, 이제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연습 구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열띤 분위기를 자아냈고, 확실히 남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훈련을 받는 여학생들의 태도는 더할 수 없이 진지해져만 갔다. 하지만 혜미가 슛을 하기 좋도록 패스를 하던 윤지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저딴 놈들이 학교에서 판을 치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윤지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강력한 오른발 슛을 날린 후에야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혜미가 말했다. “어때? 심심하지 않아서 좋은데 난?” “어이없잖아. 그럼 넌, 그저 여자 한번 낚아보겠다고 다들 헤벌쭉 하고 있는 꼴이 좋아보인단 거야 지금?” “귀엽잖아~” 자신만의 혜미를 언제고 저 늑대들에게 빼앗길 것만 같은 느낌에 더 없이 열을 내고 있는 윤지와는 반대로 남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혜미였고, 그 손짓 하나에 순간 엄청난 수의 남학생들이 서로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든 거라며 감동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어휴, 언제 이렇게나…” 할머니의 그 작은 체구로 들고 오기엔 너무나 푸짐한 밥상을 얼른 일어나 받아 들며, 영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곳에서, 이런 갖가지 찬을 만들어 내 오실 줄은 그야말로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돼지고기 수육부터 시작해서, 희한한 젓갈과 국까지 그야말로 어지간한 한정식보다 훨씬 정갈했고, 먹음직스러웠기에 영후는 체면도 잊은 채 입에 고이는 침을 연신 삼키고 있었다. “같이 드시죠?” 밥그릇이 두 개밖에 없는 것에 영후는 할머니와 남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빨갛게 맛나 보이는 긴 김치 한쪽을 들어 손수 쭉쭉 찢어 영후에게 어서 수저를 들라는 손짓을 했고, 그제야 영후는 숟가락 가득 밥을 뜨자 그 위에 김치를 살포시 얹어주었다. “아...잘 먹겠습니…” 무한한 할머니의 인자함에 영후는 순간, 인사말을 끝맺지도 못할 만큼 목이 메어 우격다짐으로 입안 한 가득 밥을 채워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밥 숟가락에 이렇게 잔 신경을 써주던 어머니의 향기를 느껴 본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기에,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괜히 감상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양 볼이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입안 가득했던 밥을 어떻게든 넘기려 영후는 국을 그릇째 들어 마셔보았고, 그제야 좀 숨을 쉴 만 해 졌다. “아우, 미역국도 정말 맛있네요.” 영후가 민망함을 감추려 꺼낸 말에 남희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거 매생이국이에요. 우리 할머니가 끓여 주신 매생이국이 정말 제일 맛있긴 하죠.” “아…” 그제야, 미역보다 훨씬 가는, 마치 파래 같은 모양의 매생이가 눈에 들어오는 영후였다. 남도 음식이 가장 맛깔스럽다더니 그저 빈말은 아니었던 듯 했다. 매생이국 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반찬들이 너무나 많아 영후는 처음으로 밥상 앞에서 궁금증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럼 이건요?” “토하젓이요. 민물 새우하고, 찹쌀밥하고 이런 저런 양념으로 만드시더라구요. 한 아홉 달 정도 삭히는 것 같던데…실은 저도 잘은 몰라요…” 남희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토하젓을 집어 들어 입안에 넣어본 영후는 꽤나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뭐랄까, 특이한 흙 내음이 나는 것도 같았고, 젓갈스럽지 않게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찬 하나하나에 집중을 하며 맛을 보는 영후를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반찬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넣는 남희를 따라 영후 또한 ‘그것’을 집어 들었고 입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어머 이건 좀…’ 입에 음식이 있어 차마 영후를 말리지 못한 남희였고, 그게 뭔지도 모른 체 가장 큰 덩어리 하나를 입에 집어넣어 본 영후의 얼굴은 순간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으그…’ 갑작스레 입안 가득 퍼지는 알싸하고도, 암모니아 내음이 진동하는 ‘그것’ 덕분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할머니를 앞에 두고 차마 음식을 뱉어내지 못하는 영후를 바라보며, 남희는 억지로 웃음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아류 홍어회가 아닌 진짜 홍어를 처음 먹어본 영후였으니 그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마치 남희가 영후를 상대로 장난을 치게 된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기에 남희는 웃음을 참느라 쉽게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 금침 이불이 펼쳐진 아늑한 사랑방에 홀로 멀뚱멀뚱 앉아있던 영후는 핸드폰을 연신 들어보며 안테나를 확인해봤지만 한 개 정도는 떠줄 만도 했거늘, 전혀 통화가 가능해질 것 같지 않아 보여, 결국 벌렁 이불 위에 누웠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할머니 집 답게 집전화 또한 없었기에, 통화를 하려면 시내로 나가야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늦은 시각이었고 조금은 귀찮은 감도 없지 않았다. 몇시간동안 운전을 했던 영후였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었다. “에효, 뭐 어쩔 수 없잖아? 누가 전화가 안 되는 지역으로 올 줄 알았나 뭐?” 괜히 하연에게 몇 대 맞을 걱정을 벌써부터 하고 있는 영후였지만 걱정도 잠시, 이내 창호문 밖에서 들려오는 남희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영후였다. “주무세요?” “아, 아뇨…” 영후는 황급히 문을 열어 주었고, 문 밖에 서 있던 남희의 손엔 군데 군데 찌그러져 있는 은색의 작은 주전자와 함께, 주전부리가 담긴 쟁반이 들려있었고, 무엇이냐고 물을 사이도 없이 남희는 쟁반을 들고 불쑥 방으로 들어섰다. “춥거나 불편하진 않으세요?” 남희는 쟁반을 방바닥 한 켠에 놓아두고는 이불 밑으로 손을 집어 넣어 구들장이 제대로 데워지고 있는지 확인하며 물었고 영후는 엉거주춤 선 채로 대답했다. “네, 뜨끈뜨끈 하던데요. 너무 장작을 많이 쓰신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순간, 남희는 저녁 무렵에 소화나 시켜야겠다며 뒷마당에 있던 통나무들을 도끼로 패던 영후의 티셔츠위로 드러나던 늠름한 어깨 근육을 툇마루에 앉아 한참이나 감상했었던 자신이 떠올라 조금쯤 얼굴이 붉어진 것도 같았다. “할머님은요?” “막 잠드셨어요.” “괜히 저 때문에 피곤하셨겠어요… 참, 그런데 늦은 시간에 또 뭘…?” 주전자뿐이었다면 자리께라고 생각했을 법도 했겠지만, 왠지 안주거리 같아 보이는 주전부리 덕분에 아무래도 주전자 속에 들어있는 것은 99% 술이라고 예상하던 영후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1%에 기대를 걸며 부디 술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물었고, 역시나 남희는 영후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홍주에요. 할머니께서 직접 담그신 거거든요. 한번 드셔보시면 좋아하실 거에요.” 영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남희는 주전자를 들어 자그마한 잔에 따르기 시작했고 붉은 빛깔의 홍주는 향긋한 향기를 동반하며 어느새 잔에 가득 차 버렸다. 그러자 영후는 남희의 손에서 주전자를 받아 들고는 또 다른 비어있는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건배…할까요?” 어색하게 잔을 들며 건네는 영후의 말에, 남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살짝 영후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고, 이내 반쯤 마시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을 넌지시 바라보며 역시 잔을 입으로 가져갔던 영후는 자신도 모르게 잔을 모두 비워버렸다. ‘얼래? 맛이 묘하네…?’ 영후의 마음을 꿰뚫어보듯 남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독특하죠? 술 맛이.” “그러네요.” 입맛을 다시며 영후가 대답했고, 채 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남희는 주전자를 들어 영후의 잔을 또다시 가득 채워주었다. “’지초’ 때문이래요.” “지초…요?” “네. 고산지대에서나 나오는 희귀한 약초래요. 불로초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병을 낫게 하고, 또…” “또?” 정력에도 좋다는 말을 무심코 할 뻔 했던 남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남자한테 좋대요…” 남희의 대답을 듣자마자 어느새 영후는 게눈 감추듯 또다시 잔을 비웠고, 남희 또한 조심스럽게 잔을 비웠다. 어느새 몇 잔을 주고 받자, 40도가 넘는 듯한 홍주의 빛깔만큼이나 영후의 얼굴도 붉어졌고, 남희의 얼굴은 그야말로 첫날 밤을 맞이하는 새색시의 볼 마냥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남희의 얼굴을 마주하자 영후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술과 여자, 그리고 독립된 공간에서의 고요함. 이제는 그것들이 가지고 올 ‘의미’들을 영후는 벌써 누군가를 통해 알아버렸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다른 여자도 아닌 남희 아니던가. 권남희. 영후가 아는 그 어떤 여자들보다 올곧고, 확고하며, 소신 있는 완벽한 여자! 괜한 생각은 말자며 혼자 웃으며 잔을 드는 영후에게 남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낮에 하신 말씀…답 해드리기 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영후는 자신이 낮에 무슨 말을 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다가, 남희가 그것과 연계해서 또 다른 질문을 하겠다고 하니 갑자기 마셨던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내색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람은… 언제쯤 사랑을 하는 건가요…?”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하면서도, 수줍은 듯이 방바닥만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남희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영후는, 조금쯤 더 ‘홍주’의 힘이 필요한 것만 같아 거침없이 잔을 들어 단번에 식도 저 편으로 홍주를 보내고 있었다. 15부. 거짓말 “장…혜…미…여기요…됐죠? 야! 송윤지! 같이 가~!” “어어~ 우리는 요?!” “미안해요! 다음 번에 해줄게요~!” 혜미는 먼저 저만치 가버리고 있는 윤지를 다급하게 부르며, 미처 사인을 받지 못해 우울해 하는 남학생들에게 사인한 종이와 펜을 돌려주고는 한달음에 윤지에게로 달려가 팔짱을 확 끼워보았다. 하지만 혜미의 팔을 같이 부여잡아 주기는커녕, 팔짱을 꼈는지 어쨌는지 관심 없다는 듯 윤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랬다. 혜미가 윤지의 비밀스런 아르바이트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 윤지는 서서히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고, 또 실제로 멀어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하지만 혜미 또한 전처럼 윤지에게만 신경을 쓰기에는 많은 것들이 변해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축구 연습이 끝나는 저녁 무렵엔 스탠드에서 기다렸다가 몰려드는 남학생들 덕분에 혜미는 경기를 치뤄 보기도 전부터 사인 공세에 시달리곤 했었는데, 점점 남학생의 수가 늘어날수록 윤지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점점 따로따로 집으로 가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혜미는 이 모든 게 미안했고, 또 미안했지만 그럼에도 축구 또한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꿈이었기에, 조금만 윤지가 이해해 주길 바랬지만 아직까지는 그러기가 쉽지 않아 보여서 오늘도 변함없이 윤지의 눈치를 살피는 혜미였다. “또 왜 그래~애, 응?” 어색하지만 애써 애교를 떨어보는 혜미의 모습에, 무표정하기만 하던 윤지는 잠깐이지만 웃음기를 보일 뻔도 했지만, 결국 겨우 참아내고야 말았다. 그렇게까지 혜미가 미워진 걸까. “왜 벌써 왔니? 아직도 사인해달라는 놈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야, 스타는 원래 사인도 조금 해주다 말고 그러는 거다 너?” 요새 들어 부쩍 많아진 혜미의 너스레에 윤지는 순간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풉…” “어? 웃었다 그치? 윤지 너 지금 웃은 거지? 응?” “피이,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야. 넘겨짚지 마.” 간만에 기분이 풀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혜미는 윤지를 꼬드겨보려 했다. “근데 배 안고프니? 난 배고파서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인데… 그러지 말고 우리, 어디 가서 뭐라도 좀 먹을까?” “안돼 지금은. 나 일하러 가야 돼.” “야 송윤지! 이젠 그 일 그만해도 되잖아. 많이는 아니어도, 코치로 받는 월급이면… 그 정도면 더 이상은… 이러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결국 흥분을 주체 못하고 터져버린 혜미와는 반대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로 빤히 혜미를 바라보던 윤지는 아주 잠깐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이내 얼굴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내일 보자.” 결국은 다시 ‘쌩’하고 찬바람이 불만큼 냉랭해져 버린 윤지가 혜미의 팔을 풀고 저만치 가고 있었고, 혜미는 차마 그런 윤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 밤 이었음에도 너무나 맑은 하늘에 속속 박혀있는 별들이 내는 ‘반짝반짝’ 소리를 시작으로, 귀뚤거리는 소리, 개굴거리는 소리, 그리고 뻐꾹 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 사랑방이었지만, 정작 마주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선 그 흔한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고 있었다. 영후에게 질문을 던진 이후로 남희는 여전히 방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영후는 영후대로 천정을 바라보며 적절한 답을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축구 말고는 영후가 남에게 명쾌한 답을 해 줄 수 있을 리가 만무 했기에, 점점 길어만 지고 있는 침묵의 시간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수림씨하고는… 이제 끝난 건가요?” 갑작스런 남희의 질문에, 그제야 영후는 조금쯤 놀란 눈으로 남희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남희는 세운 오른 무릎에 턱을 고인 채 방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 들은 걸까… 영후는 잠시 생각해봤지만, 남희는 그런 영후에게 다시금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수림씨랑… 끝난 거냐구요.” “…네…” 그제야, 질문도 또 해야 할 대답도 모두가 현실이었음을 깨달은 영후는 그 짧은 대답을 내놓기가 너무나 어려웠지만, 결국은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영후와는 너무나 상반될 정도로 남희의 입에선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술술 질문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 박기자님과 사귀시는 건가요?” “남희씨, 갑자기 왜…” “그냥… 궁금했어요.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사랑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시는 것 같아서 좀… 신기했거든요.” 자연스럽게라니… 영후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었는지 알고나 말하는 건지 화가 나기도 했지만, 곧 술 한잔에 풀어버리고 말았다. 어찌됐든, 이미 지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왜 그랬던 건지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실은, 저도 아직까지 뭐가 뭔지 모르겠는걸요.” “그래도… 저보단 나으시잖아요.” “?” “전… 아직까지 ‘사랑’이란 걸 해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이제야 사랑이란 걸 해보고 싶은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났지만 결국 할 수 없었다, 라고도 말하고 싶었던 남희였지만 차마 그 이야기까지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랬다가는 어쩌면 눈 앞에서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이런 말 하면 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직까지 사랑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더군요. 뭐랄까… 수림씨와 함께 했었던 그 순간 순간들이 사랑이 맞는 건지…아니면 오랜 시간 친구처럼 서로를 지켜봐 온 하연이와의 편안한 감정이 진짜 사랑인 건지…솔직히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영후의 입에서 나온 두 여자들에 대해 남희도 다시 떠올려보며, 전에도 생각했었던, 그 두 여자에 비해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처지가 오버랩 되자 또다시 우울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저 우울해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또다시 패배하지 않으려면 배워야 했고, 익혀야 했다. 물론 하연과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영후와 함께 한다는 건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우선은, 수림이 어떻게 영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어떻게… 만나게 된 건 가요? 수림씨 하고는…” 그저 남희에게 받은 짧은 질문 만으로도 영후의 머릿속에선 불꽃같았던 수림과의 나날들이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고, 보이는 그대로를 말하듯 영후의 입에선 천천히 그러나 하나도 빠짐없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영후와 수림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이제는 거의 모든 직원이 퇴근했을 불 꺼진 커다란 빌딩 건물 유리창 사이로 홀로 밝게 빛나는 공간 속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기사 작성에 여념이 없던 하연은 갑자기 다짜고짜 키보드를 열손가락 모두를 사용해 ‘퍽퍽퍽!’ 내려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려 대느라 산발이 된 머리를 언제 그랬냐는 듯, 뒤로 모아 머리 끈으로 대충 묶더니 저녁부터 골백번은 더 들여다보았을 핸드폰을 또다시 들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번에도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버렸다. “이 자식이 진짜…” 걱정스럽던 마음은 어느덧 열불로 바뀌어 이제는 눈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다짐을 하던 하연은 지금이라도 한국여대에 가볼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고 있었다. 혹 누구라도 연락이 닿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울려대는 핸드폰 벨소리에 모든 생각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고, 처음 보는 전화번호가 너무나 반가웠기에 채 한번 울리기도 전에 다급히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영후니? 영후야!” 다급한 목소리의 하연과는 반대로 전화를 건 상대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박기자님 되시죠? 전, 오수림이라고… 한국 여대 축구부 코친데요. 혹시 감독님께서 연락 없으셨었나 해서요.’ 수림의 이름을 듣고 난 하연은 우선은 영후가 아니라는 것에 금방 목소리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게다가 영후를 걱정하는 또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분이 더욱 상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연락이 닿질 않아서요. 그래서… 지금 학교에 나와서 권코치님 연락처로 전화를 드려봤는데도 역시나 안돼서… 혹시나 전화 받으셨나 해서요.’ 그제야, 이 여자가 영후를 그렇게나 다급하게 만들었던, 그때의 여자였구나 하는 생각을 겨우 해낼 수 있는 하연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던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지만 대뜸 그것부터 묻기엔 조금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았다. “저도, 궁금해 하던 차였어요.” ‘네에…’ 서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전혀 ‘통화’하지 못하는 듯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기에, 전화를 끊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저…’ 생각이 같았기에 동시에 입을 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연과 수림은 동시에 운을 떼놓고는 또다시 동시에 가볍게 웃었다. “말씀하세요.” ‘아뇨, 먼저...’ “지금… 시간 괜찮으시다면, 좀 볼 수 있을까요?” 수림은 하연의 말에 조금 놀랄 뻔도 했다. 실은 수림이 하고 싶었던 말 또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 “이걸 어쩌죠? 오늘은 윤지가 ‘애인 모드’라서요. ” 다리부터 엉덩이 부분까지 깊게 파여있는 진한 다홍색의 ‘치파오’를 입고 있는 40대를 갓 넘긴 것으로 보이는 마담이 살가운 눈웃음을 치며 조전무에게 말을 했지만, 조전무는 쉽게 포기 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굴긴… 하여간 젊으나 늙으나 남자는 남자란 말이지? 훗~’ 조전무의 비위를 맞춰주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속마음은 여지없이 비웃음 그 자체였던 마담의 속을 짐작도 못하는 조전무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솔직히 오늘은 여러 스케줄로 인해 이 곳으로 올 상황이 아니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년…분명히 예사 몸매가 아닐 거야 흐흐…조금만 기다려라. 곧, 내 몸 위에서 죽는다고 신음을 지를 날이 올 테니까.’ 강진에서 처음 본 남희의 토끼같이 놀라는 눈을 떠올리던 조전무의 그것은 어느덧 조금씩 커지고 있었지만, 눈썰미 좋은 마담이 눈치 채지도 못할 만큼 바지 위 그 어느 곳에서도 전혀 티가 나지 않고 있었고, 마담은 어찌됐든 조전무 같은 거물을 섭섭하게 했다간 뒷일을 감당할 수 없을 거란 걸 뻔히 알고 있었기에, 바로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김군아, 지금 쉬고 있는 에이스들 모두 올라오라고 해… 응, 지금 바로.” 인터폰을 내려놓은 마담을 바라보며, 조전무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애들은 뭐 하러? 괜찮다면 마담은 어떤가? 응?” “아이, 놀리시는 거에요? 젊은 애들만 품으시던 분이 저 같이 한 물 간 노계가 성에 차시기나 하실려구요~” 이 바닥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몸에 스며든 교태를 부려보며 조전무의 팔에 매달려 C컵에 가까운 가슴을 부벼 댔지만, 사실은 노계 따위와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마담 또한 손톱만큼도 없었음을 슬슬 녹아가고 있는 조전무는 절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 룸에 옷을 입고 앉아있는 것 자체가 어색할 지경이었던 윤지는 그러나, 자신과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남자 덕분에 꽤나 긴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분명 윤지는 이 남자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건만 이 남자, 근명은 전혀 윤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실망감도 조금은 있었지만 어쩌면 그게 더 다행스럽기도 했었던 것도 같았다. “옷 벗겨줄까 오빠?” 아직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앉아있는 근명의 어깨에 달라붙으며 윤지는 속삭였지만, 근명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옷을 벗기기 쉽도록 협조 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리곤 무표정한 얼굴로 윤지에게 묻고 있었다. “너 오늘 내 애인하는 거 맞지?” “그럼 오빠~, 오늘은 내가 진짜 애인 해줄게. 뭐하고 싶어? 입으로 해줄까? 아님 손으로? 우선 씻을래? 내가 씻겨줄게.” 이런 저런 말을 하며 윤지가 어느새 옷을 벗으며 어느덧 알몸으로 근명의 앞에 서자, 근명은 윤지의 환히 빛나는 몸을 보기는커녕, 윤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윤지는 자신의 몸이 아닌 눈을 바라보고 있는 근명 덕분에 꽤나 부끄러움이 느껴졌고, 근명 또한 낯선 여자가 돈을 받는 다는 이유 만으로 자신의 눈 앞에 부끄러움도 모른 채 알몸으로 서있는 모양이 참 어이가 없었다. ‘왜 이런 걸까. 이런 곳에 오는 게 처음도 아니면서.’ 근명은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우선은 알몸으로 서있는 저 아이에게 자신의 현 상태를 어떻게든 이해시켜보고 싶었고,또 마음을 전해보고 싶었기에 근명은 슬금슬금 피어 오르는 욕망을 애써 잠재우고 있었다.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여느 남자 같으면 벌써 짐승처럼 달려들었을 텐데, 지금의 근명은 너무나 침착하게, 아니 슬픈 눈으로 윤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남자와 알몸으로 있을 땐 단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스산한 한기가 온몸을 휘감는 탓에 윤지는 조금쯤 부르르 몸을 떨기도 했다. “아무 여자와 시도 때도 없이 그걸 해대도 남는 건 없더라…” 하연을 그렇게 보낸 이후로 자신도 모르게 허탈감에 빠져버린 근명의 심경을 알 리 없었던 윤지는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벗어놓은 옷을 집어 들어 입었고, 그런 윤지를 보며 근명은 자신의 옆자리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이리 앉아. 그리고 내 얘기 좀 들어줄래?” 윤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치 연애의 한 과정인 ‘섹스’를 하기 위해 처음으로 모텔 같은 곳에 들어선 커플마냥, 어색하리만치 나란히 침대에 앉아 보았다. “어째서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그 짓을 할 수 있는 걸까?” 남자들이라면 전혀 궁금해 하지 않을 문제를, 그것도 너무나 진지하게 물어오고 있는 근명 덕분에 윤지는 처음으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일이 무척 수치스럽게 느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시각 전혀 다른 공간에서 여자에게 같은 질문을 받고 있는 남자의 마음 또한 윤지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 “그러니까… 감독님은 연애보다… 그… ’섹스’를 먼저 하게 된 거군요?” 차마 침이 마른 입으로 묻기 뭐했는지, 홍주를 한 잔 들이킨 후에야 남희가 물어왔고, 영후도 역시 한잔을 마셔본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랬다. 수림과의 첫 만남부터 돌이켜 보면, 둘 사이에 사랑 아니 애정 같은 게 미처 자리잡기도 전에 몸을 먼저 섞었던 셈이었으니까. “그런… 셈이죠.” “그게, 정말 가능하던가요?” “네? 뭐… 가요?” “그거 말이에요… 섹스…” 너무나 직접적인 남희의 질문에 영후는 대답대신 술 한잔을 더 들이켜야 했다. 하지만 남희에게 ‘벌주’는 통하지 않는 듯, 다시금 길게 풀어서 질문을 해왔다. “애정도 없이, 그저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섹스’가 가능한 거냐구요.” “가능했으니까… 그랬겠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굳이 남희에게 믿어달란 이야기 따윈 하고 싶지도 않았건만, 왜 먼저 이야기를 꺼내놓고 흥분을 하고 있는 건지 영후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섹스가 중요했던 게 아닌데… 그것 때문에 마음을 다친 수림씨가 문제인 건데… 그런 마음들을 남희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이해 시킬 수 있단 말인가. 영후는 답답한 마음에 또다시 한 잔을 넘겨보고 있었다. “그럼… 지금도 같은 건가요? 그때하고?” 뭐가 같다는 말인가? 달지만 도수가 높았던 홍주의 기운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한 영후에게 모를 말만 하는 남희가 이상해 보였지만, 남희는 영후의 상태를 짐작하지도 못한 채 연신 이상한 말을 해대는 것만 같았다. “증명해 보세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남희의 발 아래로, 카키색의 가디건이 떨어져 내린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그러나 차근차근 남희의 몸에서 옷이란 거추장스러운 문명의 이기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남희는 속옷 차림이 되어 있었다. 아이보리 색의 브래지어는 그야말로 풍만한 그녀의 가슴을 담고 있는 기능에 충실하다 못해 버거워 보일 지경이었고, 역시나 동일한 색의 삼각 팬티는 수림의 엉덩이에 뒤지지 않는 탄력 덕분에 더욱 앞면이 팽팽해 보였고, 그에 유난히 검게 보이는 수풀은 꽃처럼 피어올라 반쯤 비치고 있었다. 그 광경만으로도 영후의 숨은 막힐 지경이었지만, 그렇지만 이래선 안 되는 것이었기에 영후는 남희를 외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만류해보았다. “이러지 말아요.” “왜요? 왜 안되나요? 수림씨하곤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저하고는 못하시겠다는 거죠?” “그건… 이제는… 더 이상은 술 따위에 휩쓸려서 사람 마음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애써 남희의 눈부신 몸매를 외면하며 또다시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입으로 가져가려는 영후의 손을 어느새 눈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잡고 있는 남희가 있었다. “감독님 마음은 알겠어요. 근데…” “?” “거긴 왜 그렇게 된 거죠?” 전혀 수줍음도 없이 커질 대로 커져버린 영후의 앞섬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남희 덕에 영후는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건… 그러니까 남자들은 다 이런 거에요. 머리하고, 마음하고는 상관 없이…” “본능… 이란 거네요, 그쵸?” “하지만… 꼭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그걸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구요.” “그렇지만, 이렇게 되면 할 수는 있는 거죠? 섹스.” 무슨 여자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이렇게나 직설적인 단어들만을 골라 말한단 말인가. 어떻게든 이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영후였지만, 이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벽한 남희 앞에서 도망칠 틈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다칠지도 몰라요. 남희씨 마음…” “사랑하거나 그래서 그런 건 아니니까, 다칠 마음 같은 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금 나누고 있던 대화 중 유일하게 남희는 영후에게 거짓말을 해 보였지만, 극도로 당황하고 있던 영후가 그 사실을 눈치 챌 리가 없었고, 이내 체념한 듯한 영후도 천천히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 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켜보았다. 영후가 겨우 티셔츠 하나를 벗었을 뿐인데도 드러나는 상체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탄탄한 가슴과 너무나 음영이 뚜렷한 조각난 복근은 운동에 전념한 남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기에 남희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윽고 영후가 벨트를 풀어 바지를 벗어버리자, 흡사 말의 다리와 비견될 만큼 세세한 근육들이 허벅지 근처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고 그 다리 가운데에 자리한 영후의 그것은 이미 타이트한 사각 팬티에서 튀어나와 머리를 슬며시 내밀고 있었다. 그 모양을 바로 눈 앞에서 숨도 쉬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던 남희는 그러나 역시 궁금함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시선은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벌써… 나온 건가요? 정액… 이란 게?” 남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남희였지만, 그래도 책으로 접한 지식들은 충만했기에 지금 영후의 물건 끝에 맺혀 있는 맑은 물을 바라보며 묻는 것이었다. “아…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커지면 조금씩 나오는 거에요.” 영후의 말에 남희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그녀의 궁금증은 조금도 해소되지 못한 듯 했다. “음… 조금쯤 더…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왠지 지금 이 상황은 연인들이 나누는 섹스의 과정이 아니라, 마치 인체의 신비를 탐구하는 자리인 것만 같아 어느덧 창피함도 느껴지지 않는 듯 했기에 영후는 남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천천히 팬티마저 내려 보였다. 그제야 답답한 곳에 속박되어 있었던 영후의 그것은 튕겨나오 듯 갑작스럽게 남희의 눈 앞에 등장했고, 그 엄청난 크기와 굵기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분명 여자의 질은 신축성이 있기에 발기한 남자의 몸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지금 보는 그것은 그럴만한 크기가 아닌 것만 같았다. 게다가 영후의 밝은 피부 톤과는 너무나 다른 검붉은 색의 살갗과 핏줄, 그리고 근육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 남희는 정말로 영후와는 상관없는 그저 다른 객체인 것만 같아 무서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처음 본 영후에게 이끌린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처음 본 영후의 물건에 점점 매료되기 시작했다. “헉!” 달아오른 방의 분위기 탓 이었을까. 남희는 하나하나 양해를 구하던 질문을 멈추고는 이내 조심스럽게 영후의 자지를 잡아보았지만 방심하고 있던 영후는 깜짝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고 있던 건 다름아닌 남희였다. ‘이렇게나…’ 하마터면, 잡자마자 놓을 뻔 했을 정도로 뜨거웠던 영후의 자지는 게다가 정말로 살아 숨쉬듯 맥박이 느껴졌고,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또한 맑은 물은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갈라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남희는 남은 한 손의 손가락으로 그것을 살짝 찍어보았다. 약간 점성이 있는 것도 같았고, 그렇게 나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손가락을 살짝 혀에 가져다 대어본 남희는 그러나 너무나 소량이었던지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었기에 이윽고 혀를 직접 영후의 그것에 대어보았다. “남희씨… 지금… 뭐 하는… 흡!” 영후는 영후대로 지금 엄청난 흥분에 휩싸이는 중이었다. 이렇게 조신한 여자가 남자의 몸을, 그리고 성관계에 대해서 그렇게 궁금해 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지경이었는데, 아무리 궁금해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탐험을 하고 있으니 그 묘한 상황이 가져다 주는 흥분도는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저 혀로 귀두의 갈라진 틈 사이를 몇 번 핥아보던 남희는 그저 그 행위 만으로도 온 몸을 휘감는 짜릿한 느낌이 들어 너무나 놀라고 있었다. 진지하게 애무를 한 것도, 받은 것도 아니었음에도 느껴지는 짜릿함이 이 정도일 진데, 진짜 애무, 진짜 섹스를 하게 된다면 어쩌면 남희는 엄청난 느낌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남자 품에서라면 어쩌면 죽는 것도 행복한 일일 거라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고 있는 남희였다. “해… 주세요.” 방안의 열기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의 욕정에 달아올랐기 때문인지, 더없이 빨간 볼을 더욱더 물들이며 수줍게 입을 열었고, 설마 했던 말이 남희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영후는 더욱 당황하고 있었다. “네? 남희씨… 지금 무슨 소리를…” “부탁… 드릴게요.” 자신의 물건을 부여잡은 채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남희의 얼굴을 보며 영후는 난감하기만 했다. - 한참을 묵묵히 근명의 옆에 앉은 채 하연과 있었던 (물론 하연의 이름을 근명은 말하지 않았기에 윤지도 근명의 속을 태우고 있는 그녀의 존재가 하연이라고는 알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난 윤지는 확실하게 말 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도 같았다. “어쩜… 그 여자, 좋아하게 됐나 보다 오빠.” “설마… 좋아하고 말고 할 거리도 없었는 걸 뭐. 게다가…” “게다가?”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여태껏 그런 완벽한 남자는 또 없었기에, 도저히 싸워 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 ‘한 남자’ 떠올리며 쓸쓸하게 대답하는 근명이었다. “그 여자는 벌써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구.” “헤에…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진 않는다 뭐.” 이런 상황에서 축구에 관한 예를 들어주는 이 아이가 왠지 귀여워 보이는 근명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오빠 마음 알 것도 같애. 뭐랄까,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아끼고 싶어지는 거, 그런 기분 아냐? 그 여자가 오빠 맘에 들어오기 전까진 그저 여자라면 먼저 하고 보던 그런 거 하고는 다른 거… 그래서 전에 없던 감정 때문에 머리 아프고 그런 거 아닌가?” “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윤지는 이야기의 근원이 되었을 혜미를 잠시 떠올려 봤지만 이내 털어버리고는 빙긋 웃으며 대충 둘러대 보았다. “나야 뭐, 여기에 있으면 별의별 남자들 다 만나게 되는 걸? 그러다 보니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뭐. 그저 몸에 대한 욕구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욕구, 사랑에 대한 욕구… 뭐 그런 것들에 대해 또 누구에게 얘기하고 풀 수 있겠어? 너무 가까운 사람한테는 꺼내보지도 못할 것들일 테고, 그렇다고 또 생뚱맞게 모르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는 더더욱 없을 거 아냐. 그러니 이런 곳에 있는 나를 찾아 오는 거 아니겠어?” “하긴.” 윤지의 말을 듣고 난 근명은 오랜만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근명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윤지와 같이 고민을 들어주고, 나름대로의 조언도 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였다. 하지만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근명은 친구를 만들 여유조차 없었기에 지금 눈 앞에 있는 윤지가 참 고마웠다. “그럼 어쨌든 오빠 고민은 해결 된 거지?” “뭐 일단은.” “그럼 우리 이제 뭐 할래?” 은근히 근명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곧 진행될 ‘그것’을 예상하며 윤지가 물었지만 근명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의외였다. “음… 우선 좀 잘까?” “그냥 잠? 섹스 말고? 이렇게 누워서 자는 잠?” 설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잠을 자자는 말인지 몇 번이고 다시금 확인하려 드는 윤지를 안심시키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주며 근명은 대답을 했다. “응. 너도 내 옆에서 같이 자주면 더 좋고.” 그제야 이 남자, 진심이구나 싶어진 윤지는 밝게 웃으며 근명에게 매달려 보았다. “당근이지 오빠. 잊었어? 오늘은 내가 오빠 애인이잖아~” 이내 근명에게 떨어져 나와 깡총 뛰어 침대위로 올라간 윤지는 한쪽 자리를 차지한 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옆에 놓인 베개를 툭툭 치며 올라오라는 사인을 보냈고, 그제야 근명도 외투를 벗으며 씨익 웃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보자고 해서.” 조금은 긴장하며 자리에 앉는 수림에게 역시나 긴장하며 인사를 건네는 하연이었다. “아니에요. 저도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 수림 또한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커피숍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밝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인사를 건넨 이후로 똑 같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며 서로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 여자 였었구나…’ 하연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여지껏 단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영후의 절박했던 모습을. 그리고 역시 기억할 수 있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영후를 그렇게 만들었던 그 이유가 바로 이 여자, 오수림 때문이었다는 것을.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연을 역시나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수림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후의 핸드폰으로 아무 때나 전화를 걸 수 있었던 유일한 여자이기도 했던 여자. 얼굴도 몰랐지만 그저 번호만이라도 외워 두었었기에 이런 늦은 시간에 얼굴을 볼 수 있었기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엔 바보같이 그때 그 번호를 외워두었던 걸 후회 하고 있는 수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우는 것 밖에는 모르는 바보 같기만 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지적인 모습의 여기자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는데, 영후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박마녀’라는 닉네임과는 천지차이일 정도로, 여자가 보기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과 분위기까지 자아내고 있었기에 수림은 그야말로 울고 싶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안해요.” 영문 모를 사과를 하는 하연 덕분에 수림은 하마터면 화를 낼 뻔도 했다. ‘왜…? 왜 지금 이 여자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걸까? 영후씨를 가졌기 때문에? 영후씨를 빼앗아 갔으니까?’ 하지만 겨우 마음을 억누르며 하연을 바라보고서야, 수림은 진정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여유를 부리는 것으로는 볼 수 없었을 하연의 진지함 덕분에 수림은 자칫 비뚤어질 뻔한 자신의 마음을 애써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례인 줄은 알지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그러니까… 그게… 혹시 말이에요…” 처음과 다르게 머뭇거리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수림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걸 묻고 싶은지 조금쯤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어떠한 대답을 원하는 지도. 수림은 꽤나 긴장하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남자의 몸을 가졌었지만, 마음을 얻진 못했었는데… 이 여잔, 그렇게도 소중한 남자의 마음을 얻고서도 이렇게 불안해 하는 구나…’ 어쩐지 불안해 하는 하연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리만치 평온해짐을 느끼던 수림은 편안한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 하실 만한 일은 없었어요, 전혀… 그냥, 그냥 저 혼자 좋아했던 것 뿐이었으니까요.” 꽤나 어색하지 않게 거짓말을 하고 난 수림은 조금은 우울해질 것도 같았지만, 어쩐 일인지 환하게 밝아지는 하연의 얼굴을 보니 그만큼 자신의 마음도 밝아지는 것 같았기에 오늘, 그리고 이 늦은 시간에 하연이란 여자를, 진짜 영후의 여자를 만나보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불도 끄지 않은 환한 방에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드러낸 채 그녀의 몸 만큼이나 새하얀 요 위에 누워있는 남희를 옆에 앉은 채 내려다보며 영후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분명 취한 것 같지도 않았을 뿐 더러, 욕정에 이끌려 영후를 유혹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섹스란 게 어디 몸으로만 즐기고 끝낼 수 있는 ‘스포츠’ 와 같던가.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둘 중의 하나는, 아니 어쩌면 둘 모두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만 한 영후의 마음이었다. “정말 이래야만 하겠어요?” 발기된 자신의 자지와는 상반되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영후는 남희에게 물었지만, 자신의 몸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똑바로 누워 있던 남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떨고 있는 그대로 남희의 젖가슴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젖가슴의 정점에 솟아있는 선분홍빛 유두는 쉬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쿡… 쿠쿡… 크크크… 하하하…” “왜… 왜 그러세요?” 농염하고 끈적거리던 분위기가 갑작스레 돌변하자 그제야 가슴과 음부를 살짝 가려보며 상체를 일으킨 채 나란히 앉아서 영후를 흘겨보는 남희였다. “크크크… 아… 못살겠다 정말… 아니, 궁금하다고 하더니, 누가 보면 내가 남희씰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풋… 그럼 어떡해요,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 걸…” “감기 들겠다. 이리 와봐요.” 영후는 이불을 들어 알몸의 남희를 포근하게 덮으며 다독여줬다. 물론 자신도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남희의 알몸과 맞닿아 앉은 채 서로 목만 내놓고서 또다시 웃고 있었다. “이러니까, 좀 낫죠?”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굳어있던 얼굴이 풀어지며 환히 웃는 남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제 알겠어요? 그저 생각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에요.” “그럼, 감독님 눈엔 제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 다는 그런 말씀인 건가요?”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난 그저… 그래요, 남희씨를 아끼고 싶은 마음 때문인 거에요. 남희씨는 지금도 저한테 충분히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란 거네요… 하며 속으로 속삭이던 남희의 독백을 영후는 당연히 들을 수조차 없었지만 또다시 볼멘 소리를 하는 남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전 오늘 꼭 했으면 좋겠어요.” “아, 이거 참… 흡!” 순간 남희가 방심하고 있던 영후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며 영후를 쓰러뜨렸다. 안경 너머의 눈을 꽉 감은 채 그저 입을 맞대고 있던 남희가 하는 것은, 키스도 아니고 뽀뽀도 아니었기에 그나마 조금쯤 그 방면으론 선배인 영후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남희의 머리와 허리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혀로 남희의 입술을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아…” 그저 단 한번 쓰다듬었을 뿐이었음에도 깜짝 놀란 남희의 입은 그대로 열려버렸고, 영후의 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희 입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더욱 놀란 남희는 눈을 더 이상 커지지 않을 만큼 크게 떠 보았지만, 영후의 그윽하게 감겨 있는 두 눈을 바라보고는 그제야 남희도 양 손으로 영후를 안으며 더욱 가슴 속으로 파고들면서 입 안에 들어와 있는 영후의 혀를 절대로, 절대로 놓아 주지 않겠다는 양 어느덧 적극적으로 빨아대고 있었다. 하지만 키스는 그저 섹스의 시발점일 뿐이라는 걸 남희는 모르고 있었기에, 여전히 진행되던 둘의 키스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남희의 등을 천천히 거닐고 있는 영후의 손길에 깜짝 놀라 입을 떼어 보았지만, 영후의 입은 다시금 그녀에게로 다가오더니 촉촉히 젖은 입술을 지나 동그란 귀로 향했다. “으음…” 귓불을 깨물기도 하다가, 혀를 동그랗게 말아 귓속으로 넣자 청각적 자극과 촉각적인 자극이 혼합되어 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희의 신경이 온통 귀에 쏠려있는 것을 놓치지 않은 영후의 손은 어느덧 등을 지나 격한 경사를 이루는 엉덩이로 향했다. “아… 어쩌면… 어쩌면 이렇게 능숙… 할 수가 있… 는 거죠, 하아~” 이런 와중에도 남희의 호기심은 여전히 발동되고 있는 게 신기했지만, 지금 그런 것에 까지 대답을 해 주다간, 또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줘야 할지도 몰랐기에 영후는 대답 않고 묵묵히 그녀의 솜털 하나하나에 까지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남희가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영후는 엉거주춤 자신의 위에 얹혀있는 남희의 상체를 조금 들어올리며 쏟아질 듯 한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물론 그 커다란 가슴 하나가 몽땅 영후의 입안에 들어올 리 만무했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가능한 만큼 베어 물었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남희의 성격만큼이나 꼿꼿하게 도드라져 있는 유두를 한없이 혀로 간지럽혀 주었다. 남희의 상체를 조금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영후의 뜨거운 자지가 아랫배에 짓눌리며 묘한 자극이 되고 있어서 호흡이 불규칙적이게 되어버렸고, 게다가 가슴 한쪽은 영후의 입 속에서 한없이 사랑 받고 있었고 한쪽 엉덩이 마저 부드럽기 그지없는 애무를 받고 있었기에, 도무지 어느 부분에서 신음을 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한 채 그저 입을 벌린 채로 흥분의 고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 저… 저 이상… 한 거 같… 아요…” 남희로부터 달뜬 목소리가 들려오자, 영후는 그녀를 포근히 감싸 안고는 요 위에 눕힌 채 반대로 자신이 남희의 몸 위로 올라갔다. 모든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이미 그녀의 눈은 풀려있었기에 영후는 조심스럽게 안경을 벗겨주었다. “아… 왜… 요?” 이제는 보는 것보다 몸 속 깊이 들어올 영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남희는 그 와중에도 질문을 던졌지만, 영후는 대답대신 자지를 남희의 보지에 갖다 대었다. “앗! 자…잠깐만요!” 순간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이 벌떡 몸을 일으킨 남희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는 치마를 집어 들더니 이쪽 저쪽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영후는 또 이 엉뚱한 아가씨가 뭘 하나 싶었지만, 결국 남희가 조심스럽게 내미는 것을 보고는 이마를 탁 칠 수 밖에 없었다. 콘돔. 확실히 학습하는 것에 있어서의 준비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 했다. 영후는 남희의 손에 있는 콘돔을 받으려 했지만 남희는 갑자기 콘돔을 자신의 등뒤로 숨겼다. “왜…왜요?” “제가 해볼래요. 괜찮죠?” 또다시 그 놈의 호기심이 발동한 남희를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영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이내 벌어진 영후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앉은 남희는 거대하게 발기된 자지를 영후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손으로 쓰다듬어 본 후에야 손에 쥐고 있던 콘돔의 포장을 벗긴 후 귀두 위에 살짝 올려보았다. ‘그 다음은…’ 분명 몇 번이고 사용법을 숙지했건만, 실전은 역시 쉽지 않은 것이었던 듯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생각이 난 것인지, 콘돔의 끝부분을 공기가 통하지 않게 손가락으로 집은 상태에서 천천히 나머지 부분을 모자 씌우듯 기둥으로 밀어 내렸다. ‘어?’ 내려갈 수 있을 만큼 내려보았지만, 커다란 영후의 자지 끝까지 덮기에는 생각보다 많이 모자랐기에 남희는 또다시 당황했지만, 살짝 영후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신이 잘못한 거 같지는 않아 보였기에,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요 위에 눕는 남희였다. “그럼 이제 할게요. 괜찮은 거죠?” “네…” 이윽고, 가장 편한 정상위 자세로 포개진 두 사람은 또다시 긴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고, 남희가 어느새 키스에 온통 정신이 팔려 영후의 자지를 잊어갈 때쯤, 영후는 조심스럽게 귀두의 앞부분을 남희의 보지에 밀어 넣었다. ‘앗! 들어… 온 건가…?’ 순간 움찔하며 숨죽이던 남희의 기대와는 달리 자지와 보지가 서로 맞닿아 있는 채로 영후는 남희의 커다란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고 번갈아 가며 키스해주었고, 깨물어 주었다. 또다시 밑에서 위로 남희의 신경이 올라왔을 무렵, 영후는 또다시 조금쯤 자지를 전진 시켰다. “아앗!” 어느덧 귀두만이 겨우 소음순을 밀며 들어서자,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남희의 몸은 팝콘처럼 튀어 오를 뻔 했지만 여전히 가슴을 애무하던 영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한없는 열락 속에서 헤매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남희는 책으로 접한 지식과는 너무나 다른 섹스의 느낌에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분명 첫경험은 언제나 거칠고, 고통스러우며, 전혀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니라고 나와있었다. 하지만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아프지 않았고, 너무나 부드러웠으며, 온 몸 구석구석 느껴지는 기분은 마치 이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희는 아직 간과한 사실 하나가 있었음을 영후의 속삭임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들어갈게요.” “네? 아… 네…” 설마, 아직 들어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미 자신의 보지는 가득 찬 것만 같은 기분이었건만, 분명 영후는 ‘조금’ 그것도 ‘들어온다’고 했다. 아, 그럼 아직 시작도 아닌 것이었던가? 책의 내용이 그럼 정말 이었을까? 점점 복잡해지는 남희의 머릿속은 그러나 잠시 후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흑!” 그야말로 뜨거운 불기둥에게 온몸을 관통 당하는 느낌이 아랫배로부터 전해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이십 육 년간 지켜온 처녀를 잃었기 때문이었을까?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남희의 눈에선 한줄기 눈물이 ‘또르륵’ 흘러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경을 벗었기에 흐릿하게 보이는 영후의 얼굴엔 분명 미안함이 가득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남희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 “들어… 온 거죠? 그쵸?”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영후의 목을 두 손으로 휘감으며 남희는 스스로 영후의 입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고, 혀를 집어 넣고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양 영후의 혀를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영후는 혀를 내어준 대신, 그녀의 가슴을 깨어질까 조심스레 움켜쥔 채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 음… 으으…하아…윽…윽…” 이제 시작일 뿐이었음에도 어느새 영후의 입에서 떨어져 나간 남희의 혀는 정신 없었을 남희의 머릿속 상황을 그대로 소리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못 들으신 다던 할머니께서 귀가 트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밤하늘로 퍼져나갈 만큼의 신음을 내기 시작한 남희 덕분에 영후의 흥분도도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후는 잠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이라 힘들 것이 분명한 남희를 생각한다면 너무 길게 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희의 학구열을 채워주려면 어쩌면 이걸로는 부족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 영후가 고민을 거듭하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고 있을 무렵, 꽤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저 수동적으로 영후의 자지를 받아들이고 있던 남희의 허리가 조금씩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후가 전진할 때는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 같이 전진했고, 물러날 때는 더더욱 깊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듯 같이 물러나고 있었다. 게다가 영후의 등을 안고 있었던 두 손은 언제부턴가 영후의 엉덩이로 내려와 연신 영후의 움직임을 돕고 있었기에 그제야 조금쯤 걱정을 접을 수 있었던 영후는 서서히 속도를 올려갔고, 덕분에 살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와 맞물려 남희의 신음소리는 더욱더 음란하게 퍼져나갔다. “앗! 아앗! … 으음 윽! 아흑!” 첫경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희의 보지 속에선 순간 왈칵하며 애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어쩐지 영후는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언제부턴가 영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지가 남희의 보지 속으로 연신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었다. ‘무…무슨?’ 그랬다. 이미 정신조차 챙기지 못하는 남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희의 보지는 영후의 자지를 빨아들이고 있었고, 또 밀어내고 있었다. 영후가 금기의 문을 깨뜨리고 나자, 영후도 그리고 남희도 몰랐던 그녀만의 명기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나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질 벽의 세세한 부분 부분이 자지의 모든 부위에 들러붙은 채 휘감고 있었고, 어느덧 영후 정도의 크기는 별 무리 안된 다는 듯 스스로 밀어내었다가, 빨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남희의 사경을 헤매는 듯한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분명 남희가 의도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걸 알만한 영후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윽! … 으윽! …앗!” 결국 명기의 공세를 참아내지 못한 영후는 처음으로 짜릿한 쾌감과 함께 ‘울컥울컥’하며 엄청난 사정을 하고야 말았고, 그제야 영후는 보지 속에서 자지를 빼낼 수가 있었다. “휴우…” 그야말로 난생 처음 겪어보는 황당한 경험에 겨우 숨을 몰아 쉬어 보던 영후는 조금씩 작아져 가는 자신의 물건을 덮은 채 늘어져 있는 콘돔을 벗겨보았다. “원래 이렇게 많은 거였나…?” 콘돔의 앞부분이 엄청난 양의 정액 덕분에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있는 모양을 보고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정 후의 진득한 나른함에 모든 것이 귀찮아진 영후는 남희의 옆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고, 그제야 한동안 요란했었던 시골하늘의 밤은, 겨우 고요함을 되찾은 듯 다시금 평소와 같은 자연의 소리로 천천히 메워지고 있었다. 16부. 움직임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호텔 커피숍 라운지 소파에 앉아있던 노감독은 이윽고 저 앞에서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한껏 거들먹거리며 다가오는 조전무를 발견하고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큰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만류하는 조전무 덕분에 노감독은 엉거주춤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 아, 앉으세요. 뭐 대단한 사람 왔다고…” 이윽고, 간단하게 악수를 나누며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얼굴은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그리 밝지 못했다. “일전에 있었던 북한과의 경기는 잘 봤습니다. 선수들에게 동기 부여를 잘 해주셨더군요.” 어차피 빈 말이었을 조전무의 인사에 노감독도 가볍게 응대하려 했다. “축구만 하는 놈들입니다. 굳이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이봐 다음 경기는 언제쯤이지? 허나 노감독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조전무는 자신의 뒤에 병풍처럼 서있던 수행원을 돌아보며 물었고, 수행원은 기계적으로 대답을 했다. “최종 3차 예선이 다음달 6월에 있습니다. 총 네 경기로, 요르단과 두 경기,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과의 어웨이, 마지막으로 북한과의 홈경기 이렇게 각각 한 경기씩 남아있습니다.” “자, 들으셨죠?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도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노감독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조전무 또한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슬슬 불러들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 무슨…?” “이영후 말입니다. 그 선수, 대표팀에 합류시켰으면 하십니다.” 노감독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조전무는 노감독의 그런 반응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슬며시 웃음지으며 며칠 전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 “예?! 그게 정말입니까?” 자그마한 병에 담겨있는 따뜻한 사케를 따르기 위해 앉아있던 무릎을 세우며 일어서려던 남자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것도 조전무의 입을 통해 듣고 있자니 갑자기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겁니까? 예?”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기에 남자의 음성은 둘이 있기에는 너무나 커 보이는 일식 다다미 방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난들, 회장님의 마음을 어찌 알겠나? 그저 나야 지시한 일을 이행하는 사람일 뿐이니…” 참으로 자신도 답답할 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조전무는 가슴을 쳐 보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 선배를 대표팀에 합류시킨다 하더라도, 저를 포함한 다른 선수들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원래 큰 그림을 그리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신 줄은 알았지만… 즉흥적으로 해서 될 일이 따로 있지...” 흥분한 채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있는, 테이블 건너편의 남자가 더욱 더 과열돼서 이성을 잃기를 기다리던 조전무는 입질이 오는 것을 느끼며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 분도 내년이면 자리에서 물러나신다니, 그렇게 걱정할 일만은 아닐세. 게다가 내년에 있을 협회 회장 선거도 유명무실한 일이라는 건 자네도 알고 있겠지?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 정회장의 뒤를 이어 내가 수장이 될 거란 건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자네 내년쯤 외국 물 좀 먹어볼 텐가?” 외국…!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꿈은 간직하고 있었지만, 해외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나니 이 남자의 가슴은 숨길 수 없을 만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조전무라면 분명,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다못해 대기업의 스폰서를 이용해서라도. 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턱대고 자신을 해외로 보내줄 리는 절대로 없을 것이었다. 축구만 알뿐, 사회생활경험이 없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하는 겁니까…?” “허 이사람, 보기보단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군 그래? 크하하하하!”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하게 웃는 조전무와 잔뜩 긴장한 남자의 은밀한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었다. - 비위를 상하게 할 만큼 기분 나쁜 미소를 지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전무의 눈빛을 피하지 않는 노감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지 모를 일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려 한다는 느낌에 등줄기에서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후가 고공비행을 할 때도 모르쇠로 일관했었던 저 광기의 집단들이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로 이런 발언을 하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하십니다…? 그럼 조전무의 윗 선에서? 설마 정회장이?’ 간단한 추론만으로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노감독은 또다시 ‘끄응’하고 버릇처럼 깊은 숨을 내쉬어 보았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바라던 일 이었다. 아니, 그 녀석이 축구를 다시 시작해 주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기쁠 따름이었다. 때문에, 언젠가는 협회에서 반대를 한대도 자신이 감독직에 계속 앉아 있는 동안에 꼭 영후를 데려오고도 싶었다. 바로 그 녀석이 꿈에도 그리던 국가대표팀으로… 하지만, “저는 리그에서의 활약도를 중심으로 대표를 선발하고 있습니다. 전무님께서 그걸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그러니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드리는 거 아닙니까?” “저뿐만이 아닙니다. 아마 다른 선수들 또한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지금의 그 녀석이라면 더욱.” 드디어 살짝 눈썹 꼬리가 올라가며 조전무의 심사가 뒤틀리는 꼴이 노감독의 오래된 눈으로도 확인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감독이란 자리가 선수들 눈치를 보는 그런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뒤에 말씀하신 건 또 무슨 뜻이랍니까? 설마, 대표팀으로 불러주겠다고 해도 그 놈이 고사를 할 거다, 뭐 이런 뜻인가요?” “그런 말씀이 아니라, 그 녀석은 부상에서 회복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고, 게다가 지금은 여느 팀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갑작스런 제의는 다른 선수를 배려하는 차원에서라도 그 녀석이 받아들이지 않을 공산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선수생활을 쉰 지도 벌써 3년이나…” “당신 의견 따윈 중요치 않소! 그리고 인터넷에 나도는 그 잘난 영상을 보아하니 제법 폼이 돌아온 거 같던데, 그럼 감사합니다! 하고 고분고분 들어 올 일이지, 제깟 놈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나라에서 부르는 데 거절을 하나!”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조전무였고, 그런 조전무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노감독이었다. 곳곳에 탐욕이 서려있는 만큼씩 늘어진 얼굴은 한창 날리던 젊은 시절의 선수 때 와는 너무나 천양지차였다. ‘정말 저 사람이 한때 한국 축구의 선봉장에 섰던 사람이 맞는가…’ 그런 노감독의 시선이 자신의 알몸을 훔쳐보는 것마냥 불편했던 조전무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노감독을 향해 명령하듯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몸을 만들게 하시오! 그래서 대표팀에 꼭 승선 시키세요! 이건 제의가 아닙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도 없이 저만치 걸어가던 조전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초라하게 앉아있는 노감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 놈을 대표팀에 합류 시키라구. 그러면 그 다음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해 주지. 이번에야 말로 당신도, 정회장도 모두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크크크.’ 품격이 넘치던 고요한 호텔 커피숍의 물을 그렇게나 흐려놓고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전무는 나가버렸고, 특이한 투명 유리컵에 담겨 있는 맑은 물 위로 비치는 노감독의 이마엔 더 깊은 주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보이는 군요.” 총장이 작설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총장실엔 녹차 향이 어느새 가득 차 있었지만, 그런 향이 코에 스며들 정도의 평온함은 어쩐 일인지 느껴지지 않는 영후의 모습이었다. 살짝 들떠 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그냥, 조금쯤 욕심을 부려보고 싶었습니다.” “욕심이라… 감독님의 그 욕심엔 강진으로의 출장도 한몫을 했겠구요?”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그래, 어떻든 가요? 앞으로 상대해야 할 팀들의 수준이란 것이. 예상대로 우리 학교 학생들 만으로도 해볼 만 하겠던가요?” 정곡을 찌르는 총장의 질문에 영후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그래도 속이려고 들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사람도 아니었지만. “솔직히… 반 반 입니다. 그래서 예상보다 조금 더 일찍 선수들을 선발하려고 하는 거구요.” “그런데, 듣자 하니 학생들에게 등록금 전액 지원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안 하셨다고요?” 어쩌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해버린 거냐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총장이 입을 열었지만, 그런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건지, 영후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진심으로 합류하는 학생들을 위한 깜짝 선물로 남겨 두려 구요.” “그래요… 어쨌든 건투를 빌죠. 자, 들어요.” 그제야 영후도 찻잔을 들어, 총장을 따라 하듯 진한 녹차의 향을 음미해보기 시작했다. - 총장실에서 나와 강당이 있는 건물로 걸어 가는 영후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얼굴은 그보다 훨씬 들떠 있는 듯했다. 게다가 밝게 비추고 있는 햇살마저 어쩐지 오늘만큼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을 높여만 주었다. 하지만, 강당이 있는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던 영후는 조금은 어두컴컴한 강당의 닫힌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림을 발견했다. “수림…씨?” 너무나 화창한 밖의 날씨와는 대조될 정도로 음침한 지하의 공간에서 그보다 더 우울한 얼굴로 서있는 수림의 모습에 영후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윽고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안 들어 가고 여기서 뭐해요?” “감독님, 그게…” 싱글벙글 거리는 영후와는 반대로, 어느덧 창백해진 얼굴의 수림은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영후를 붙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기대하던 사람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고 싶지도 않았기에, 조심스럽게 영후의 뒷소매 자락을 잡아보았다. “수림… 씨?” 그저 영후의 소매를 잡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툭’하고 울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얼굴의 수림을 바라보며, 영후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수림의 양 어깨를 잡아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수림은 그대로 언제나 따뜻할 것만 같은 영후의 품에 안겨보고도 싶었지만, 어쩌면 잠시 후 가장 상처받고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영후가 될 것임을 알기에, 수림은 그저 그렇게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거꾸로 수림을 위로하듯 건네는 따뜻한 영후의 말이 수림의 가슴에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동안, 바보 같은 저 때문에 마음 고생 많았죠? 미안하다는 말… 몇 번이고 하려고 했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구요… 수림씨… 정말 미안했어요.” 수림은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저어보려 했으나 그 순간만큼은 어쩐지 자신의 몸이 아닌 양 전혀 움직여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이런 말하면, 나 정말 나쁜 놈 소리 들어도 할말 없는 건데… 그래도 해야겠네요.” 그 어떤 말이라도 이 남자가 하는 말이라면, 죽을 때 까지 기억할거란 다짐을 하며 영후의 입이 열리기를 숨죽이며 기다리는 수림의 귀에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남자의 말들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에겐 여전히 수림씨가 필요해요. 수림씨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 이렇게 아이들을 모아서 축구부를 만들려고 했던 제 어설픈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만 그쳤을 거에요. 그러니까… 고마워요 진심으로. 그리고 계속 남아줘요. 제 옆에…” 자신이 어떤 얼굴로 어떤 대답을 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수림은 그래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의 얼굴이 한껏 웃고 있는 것으로 짐작해 보건데, 분명, 자신의 마음과 같은 답을 한 거구나 싶었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영후 또한 그런 수림의 얼굴에 안심하며, 그제야 수림의 어깨 위에 놓여있던 손을 내려보았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제 가죠.” 그러나 곧바로 문을 열고 강당으로 들어서려는 영후의 뒷모습을 수림은 결국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영후씨…’ - 400여명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는 강당에선, ‘축구 다이어트’에 참가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축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잠시 남아달라는 말과 함께 영후가 사라진 뒤로 점차 술렁임이 커져가기 시작했고,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하나 둘 강당을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그런 광경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다는 듯, 앞 무대 위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있던 남희는 강진에 다녀오고 난 후부터 생각에 잠기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물론 그 생각의 중심엔 언제나 영후가 자리하고 있었고. - 보름 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러보며 무거운 눈을 겨우 떠본 남희는 대충 손을 뻗어 안경을 찾아 쓰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신혼부부가 처가에 와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의 아침인 것 마냥 자신이 금침이불을 영후와 나란히 덮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랄 지경이었는데, 자신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영후의 상반신과, 좋다고 그 남자의 팔을 베고 있는 자신의 상반신 또한 완벽한 알몸이었기에 태어나서 그보다 더 놀란 순간은 없었을 남희는 기어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딸꾹!” ‘아이 참! 하필 이럴 때…’ 최대한 숨을 쉬지 않으며 딸꾹질이 멎길 바래봤지만, 그것보다는 어서 빨리 영후가 잠에서 깨기 전에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이 더 급할 것만 같았기에 남희는 조심스레 영후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 이불을 들췄지만, 역시나 자신의 하반신도 상반신과 마찬가지로 매끈한 알몸이었기에, 더욱 얼굴이 빨개져만 가던 남희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는 결국 기억도 못할 사고를 친 것을 겨우 깨닫게 되었다. ‘아실까…? 딸꾹!’ 자신이 기억 못하듯, 영후 또한 기억 못할 수도 있을 거란 허무맹랑한 생각을 해보며, 남희는 조심스럽게 속옷을 챙겨 입고 겉옷을 챙겨 입으려는데, 구석쯤에 휴지에 쌓여진 채 버려져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손수 들어 확인해 본 남희의 딸꾹질은 더욱더 심해졌다. ‘딸꾹! 딸꾹!’ 그것은 남희가 언제나 부적처럼 항상 가지고 다니던 ‘콘돔’이었다. 물론 이미 사용해 버린… ‘진짜... 딸꾹! 해버린 건가… 딸꾹!’ 역사적인 순간의 기억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게 너무나 황당했던 남희였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희는 마음 같아선 이 남자가 잠에서 깰 때까지 바라보며 옆에 있고도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칠 않았고,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딸꾹질 덕분에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희는 창호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갔지만, 사실은 남희는 자신의 바람대로 영후가 깰 때까지 옆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남희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을 때 즈음 영후도 그제야 겨우 참고 있었다는 듯 바로 일어나 앉아 밤새 저렸을 팔을 연신 접었다 펴보며 남은 손으로는 세번쯤 침을 묻혀 코에 찍어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 정신 없었던 그날 새벽의 일을 떠올려보다가 겨우 꿈에서 헤어나오듯 정신을 차려본 남희는 순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안돼요, 감독님! 오시면… 오시면 절대로 안돼요!” - 머그컵에 따뜻한 커피를 그득하게 타가지고 자신의 자리에 앉은 하연은 커피향을 느껴보기는 커녕, 바로 손가락을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한껏 풀어보더니 영후와의 인터뷰 내용이 담긴 레코더를 재생시키고는 이어폰을 연결해 귀에 꼽은 채 거침없이 키보드를 두드려대며 기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불운의 스트라이커, 이영후를 아는가? 이제는 사라진, 부천 축구팀과 함께 했던 전도 유망한 공격수로서 차범근, 황선홍을 이을 재목으로 추앙 받던 유일무이한 남자. 그러나 언제나 불분명한 이유로 대표팀 선발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었었고, 그런 시선들을 실력으로 제압하며 처음으로 K리그에서 빅리그로의 직행을 앞두고 있던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그러나 3년 전 무릎 부상을 끝으로 모두의 머릿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 이 남자는 그 모든 회한을 털어버린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창단만을 앞두고 있는 ‘한국여대 축구팀’의 초대 감독으로 돌아왔다. 이에 본 기자는 잽싸게 이 영후 선수, 아니 이 영후 감독과의 단독 인터뷰를 시도해 보았다. Q. 반갑다. 우선 선수 이영후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팬들에게 인사 부탁드린다. A. 그간 걱정시켜드려 죄송하다. 하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그라운드에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이 모든 건 날 응원해준 팬 덕분이다. 감사드린다. Q. 정말 상투적이다. 그간 너무 감이 떨어진 건 아닌가? A. (웃음)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축구에 대한 감은 조금씩 살려보고 있는 중이다. Q. 3년간 뭐했나? A. 재활에 근 2년을 소비했고, 어학공부도 했고, 여행도 많이 했다. 축구만 하느라 진짜 세상이란 게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았었는데, 지난 3년 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Q. 어학공부도 했나? A. 선수 때부터 하던 것이었기에, 하다가 멈추긴 아까웠을 뿐이다. Q. 기자 생각엔 빅리그 이적 무산이 더 아깝다. A. 아쉽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때의 내 운이 그것밖에 안됐던 거라고 생각한다. Q. 그럼 지금의 운은 좋은 것 같은가? A. 아직까지는 나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고. Q. 그런데 왜 감독으로 돌아온 건가?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로 선수를 포기하기엔 좀 이르지 않나? A. 누가 그러던가? 내가 선수이기를 포기했다고. 다만 지금은 감독이라는 직함에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Q. 그럼 선수로 돌아오겠다는 말인가? 언제쯤? A. 음… (한참 고민하다가) 여름에 있을 전국 여자 축구대회와 가을에 있을 추계 연맹전 중 하나라도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게 된다면 차후에 생각해 볼 셈이다. 물론 날 받아줄 팀이 있어야겠지만. Q. 만일 부르는 팀이 있다면 연봉은 싸게 부를 텐가? A. 좀 세게 부를 예정이다. (웃음) 그간 벌었던 돈도 다 써가고. Q. 꽤 고액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벌써 다 썼나? 유흥비로 쓴 건 아닌가? A. (웃음) 동생들이 워낙 많아서 벌어도 벌어도 모자란다. Q. 그럼 잡담은 그만하고, 한국여대 선수단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들리는 이야기로는 진짜 선수들을 스카우트한 게 아니라 현재 한국여대에 재학중인 학생들을 훈련시켜 그 중에 선발하려 한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들린다. 한국 여자 축구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아닌가? A. (진지한 표정) 전혀 아니다. 다만… 축구만 할 줄 아는 나 같은 바보들을 더 이상은 만들어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쉬는 3년간 해보았다. 축구만 시키기에는 세상이 너무 험난하지 않나? 대학에서 전공, 부전공, 제 3전공까지 이수한 학생들도 취업이 힘든 세상이다. 그러니 축구는 그저 즐겁게 취미 삼아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처음엔 ‘축구’가 아닌 ‘축구 다이어트’로 속여 부원들을 모집하기도 했고. Q. 천재적 사기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가뜩이나 움직이기도 싫어하는 여학생들이 운동 자체를 좋아하게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진짜 ‘축구’를 하겠다는 학생들은 있었나? A.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말할 생각이다. 예상일 뿐이지만, 분명 진심으로 축구를 좋아하게 된 학생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작성하다가 하연은 책상 구석에서 연신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레코더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노감독님…?’ 기사 작성을 하던 때면 언제나 잔뜩 웅크리고 있었던 하연이었기에 기지개를 편 후에 받을 법도 했건만, 왠지 노감독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그렇게 가벼울 것 같지 않았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액정을 밀어 올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한참 바쁠 때 늙은이가 방해한 건 아닌가?’ “방해라뇨? 섭섭한데요? 감독님하고 제 사이에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럼, 시간 괜찮다면 잠시 내려올 수 있겠는가? 자네 있는 건물 1층에 있는 커피숍이네만…’ 노감독의 근심스런 목소리에서 하연은 직감적으로 ‘영후’와 연결된 문제임을 느꼈고, 이미 구석에 처박혀 있는 백을 집어 들며 곧 내려가겠다고 말한 뒤,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복도의 엘리베이터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막 닫히려는 문에 과감하게 슬라이딩을 하고 있었다. - 끼~익. 영후가 조심스럽게 강당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나란히 줄지어 있는 강당 의자들의 뒷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러나 좀 전까지 가득했었던 학생들은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것처럼 지금 그 곳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의 수는 그야말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영후는 믿을 수 없었지만, 침착하게 무대 쪽으로 걸어 내려가며 그나마 앉아있는 학생들의 수를 헤아려 보고 있었다. 한편, 강당의 무대 위에 놓여있는 간이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후들 거리는 다리로 겨우 서있던 남희 또한 묵묵히 뒤편에서부터 학생들의 머릿수를 세어가며 내려오고 있는 영후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다. 저렇게 착하고, 꿈 많은 남자에게 하늘은 왜 이렇게 시련을 주는 건지, 무교인 남희는 처음으로 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디엔가 있는 것만 같아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영후씨…’ - 14명. 거짓말 같은 숫자였다. 실전 게임을 연달아 3번쯤 소화한 것 마냥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무대위로 올라서서 영후는 또 한번 세어봤지만 역시나 그 숫자는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운동을 좋아하게 된 만큼, 분명 축구란 운동을 해보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분명 이보다는 많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권코치님… 축구부 창단 신청을 하려면 몇 명이 필요하다고 했죠?” 수림이 영후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고, 남희 또한 쓰러질 것만 같은 아찔한 정신을 애써 차려보며 입을 열었다. “15명이요.” “아…” 그 자리에 모여있는 혜미를 비롯한 14명의 학생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수림과 남희는 어쩌지도 못한 채 허탈해 하는 영후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순간 모두의 시선을 집중 시키는 귀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목소리의 근원지를 좇는 영후의 시선에선 어느새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영후와 눈빛을 교환하던 단발의 곱슬머리 소녀는 그러나 조전무의 입에서 처음 튀어나온 ‘이영후’란 이름 덕분에 자제력을 잃어버렸던, 떠올리기조차 싫던 ‘그때’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 나고 있었다. - “이…영후?” 무덤덤하게 발가벗은 조전무의 몸 위에서 역시 알몸으로 엉덩이를 움직이던 윤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영후의 이름이 튀어나와 버렸던 것이다. 스스로도 놀라, 순간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아 보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게다가 평생 눈치로 살아온 조전무는 그 찰나의 순간을 절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뭐야… 아는 거냐, 너? 이 영후란 놈을?” “그…그게…” “호오~ 아가야, 너 뭔가 알고 있구나? 그렇지?” 능글 거리며 어느새 윤지를 자신의 몸 위에서 내려놓은 조전무는 자신의 몸을 가릴 생각도 그렇다고 윤지의 몸 또한 가려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조금쯤 떨고 있는 윤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혹시 그 놈이 이곳에, 너에게 왔던 거냐? 그런 거냐?” “아, 아뇨. 그냥, 어쩌다 들어 본 것 같아서…” 그 썩어가는 듯한 눈동자로 마치 마음 깊은 속까지 들여다 보는 기분에 윤지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께를 가려보았지만, 이미 윤지의 젖가슴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실망한 기색으로 조전무는 윤지에게서 시선을 떼며 일어났다. “쳇! 그럴 만도 하지. 그럴 놈이었다면 애시당초 이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을테니까. 괜히 들떴었군.” 왠지 섹스마저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린 조전무는 속옷을 집어 들다가, 퍼뜩 재밌는 생각 하나를 해보기 시작했다. ‘가만… 저 년에게 영후 놈을 꼬셔내게 해보면 어떨까?’ 순간 죽어버렸던 성욕이 다시 살아나며, 역시나 뒤돌아서 옷을 입으려 하던 윤지의 엉덩이를 잡고서는 다짜고짜 보잘것없는 자신의 물건을 삽입시키는 조전무였다. “헉!” “흐읍! 왜… 또… 아앗!” 갑작스런 공격에 그새 말라버린 속살 속으로 파고드는 조전무의 물건이 짜증스럽기만 했지만, 윤지는 애써 신음을 지어내 보였다. “돈은… 허헉!… 달라는 대… 윽!… 로 얼마든지 줄 테니… 내 시…시키는 일 하나만… 허읍! 해보지 않겠느냐? 응? 으윽!” 윤지의 신음소리에 조전무는 더욱더 흥분하며 개처럼 몰아붙였고, 어느덧 벽에 붙어버리듯 밀려버린 윤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물어보았다. “아앙~ 그게… 뭐… 뭔데요 하앗!” “그 놈!… 이영… 으헛!… 후의 마음을 빼…뺏어오기만 하면 된다… 으으… 그러기만… 그러기만 하면…!” ‘모든 언론에 네 녀석을 낱낱이 까발려주마!’ 이윽고 모든 할말을 마친 조전무의 입은 멈췄고, 동시에 그의 물건에서도 꿀럭꿀럭 정액이 터져 나왔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정신이 윤지에게는 조금도 없었다. ‘지금 내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거야…?!’ - “윤지야!”, “왜 이렇게 놀래 키는데!”,”하여간 못말린다니까~” 모든 학생들은 일어나 윤지를 반겨 주었고, 특히나 혜미는 달려가 윤지를 얼싸 안으며 기뻐해주었다. “잘왔어… 정말 잘 생각했어! 고마워!” “뭐니 그런 얼굴은… 그럼 내가 그만 두기라도 할 줄 알았어?” 학생들의 환대에 아무렇지도 않게 응대하던 윤지였지만, 속마음은 그야말로 검게 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공간의 어느 누구도 절대 알아채지 못했다. ‘난 그만 두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단 말야…’ 바로 저기에 섹스 만으로는 여느 남자처럼 넘어와주지 않는 ‘축구’만을 사랑하는 남자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 지경이었는데 조전무에게 돈으로 얽매여있는 자신의 처지가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버거웠던 윤지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감추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기에, 어느덧 눈가에 이슬까지 맺혀가며 좋아하는 혜미를 놀리듯 윤지는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고, 그런 윤지를 그제야 고맙게 바라보며 영후는 남희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된 거죠?” 역시나 가슴을 쓸어 내리며 남희는 영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영후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에게 힘이 되어준 강당 내의 모든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밝은 목소리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다들 운동장으로 나가볼까요?” - “감독님!” 통화를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자신을 찾아 온 하연에게 노감독은 반가움도 느껴졌지만, 그도 잠시뿐 얼굴에서 근심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제가 보고 싶어서 오신 건 아니실 테고.” 반가운 얼굴로 노감독의 반대편 의자에 털썩 앉으며 하연이 물었고, 노감독도 인사 만큼은 언제나 활기차게 받아주었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가 자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면 반겨줄 텐가?”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요? 후훗.” 심각함을 앞두고 꽤나 재미없는 농을 주고 받던 두 사람은 그러나 언제 그랬었냐는 듯 어느새 진지함을 되찾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건가요? 영후랑 관련된…?” 생긴 것처럼 눈치도 빠르다,라고 생각한 노감독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지고 우스개 소리를 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압력을 좀 받았네. 좀 전에 여기와는 다른 찻집에서 말이지.” “예? 그게 무슨…” “영후 놈을 대표팀에 집어 넣으라더군.” “예에?!” 가뜩이나 얼굴의 반이 눈일 만큼 커다란 눈망울이 더욱더 커졌던 하연이었고, 그런 하연만큼 노감독도 놀랐었기에 충분히 심정을 짐작할 만 했다. “하… 하지만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게다가 선수들의 반발도 그렇고… 설마…?”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던 하연은 그제야 노감독의 걱정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소속팀에서의 활약도를 중점적으로 파악해 국가대표 선수를 소집한 노감독의 소신은 성적을 떠나 꽤나 팬들에게 인상적이었고, 또 성공적이었다. 또한 이름, 학연, 지연 등이 철저히 배제되었기에 특히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지 않았던 비주류 선수들에겐 어느새 꿈이자 희망을 주는 감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노감독을 압박하고 있는 무리들은 이런 노감독의 철학을 완전히 깔아뭉개며 단순한 결과물을 원하고 있었을 테고, 게다가 어쩌면 ‘영후’가 대표팀에 승선하고 나서 일어날지도 모를 선수와 여론의 역풍을 기대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축구협회는 대표팀의 성적으로 먹고 사는 집단일 텐데, 왜 그런 위험을 그것도 일부러…?' “뭔가 협회 내부에서도 진통이 있었을 것으로 보네만, 아무래도 협회 수장이라는 작자가 원하고 있는 모양인 듯 허이.” “아…” 올해를 끝으로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을 천명한 정회장의 의중을 하연은 알 것도 같았다. “임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마치겠다, 뭐 이런 뜻이겠네요.” “하지만 왜 그 중심에 영후가 있느냔 말일세.” “그건…” 역시나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인지 하연도 노감독도 알지 못했기에 그 둘은 잠시 대화를 중단한 채 내쉬고 싶을 만큼 원 없이 한숨을 내쉬어보기 시작했다. - 5월의 햇살 아래 푸르름이 한껏 더해가는 잔디 위에 서 있는 15명의 여학생들은 그간 다이어트 운동이라고 생각하며 해왔었던 축구 게임 중 자신이 소화했었던 포지션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희는 재빨리 그들의 주특기 및 신체 정보 등이 담겨있는 서류를 영후에게 건넸고, 영후는 서류와 학생들의 위치를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혜미 --------------------------------아라 -----------민지---------수정--------------은채---------나경 -----------------------(지영)-------------(정화) -----------하늘---------진희--------------미애---------소영 ----------(승은) --------------------------------미자 윤지 ? ‘흠… 선수단을 꾸릴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긴 한데… 좀 문제가 있긴 하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어진다 했던가. 영후의 눈엔 급조된 한국여대 축구팀의 약점이 어느새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더블 스쿼드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교체의 이유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포지션의 후보군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포지션은 어느 정도 백업을 해 볼 수 있겠지만, 스트라이커와 골키퍼의 백업이 없다는 건 꽤나 치명적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부상 때문에 저들을 교체해야 할 순간이 도래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는지 영후는 당장은 답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원하는 포지션 조차 모른 채로 엉거주춤 서 있는 ‘윤지’였다. 전력 분석 코치를 한답시고, 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윤지는 방금 이루어진 축구부 창단에는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력에도 보탬이 될지는 미지수였기에, 실제로는 14명으로 꾸려가야 하는 상황인 것이었다. ‘그래도 뭐… 이만하면 다들 멋지잖아?’ 그렇게 고민하던 영후는 그러나, 당사자들만은 젖살이라고 우기던 체지방들이 근 두 달 만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어느덧 건강하고 늘씬한 미녀들이 되어버린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감독님, 그럼 이제 이야기 해 줄까요?” 남희의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영후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남희에게 사인을 받은 수림은 기쁜 얼굴로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힘든 결정해준 모든 학생 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그 보답으로 학교에서는 여러분들에게 등록금 전액 면제를 약속했으니까 모쪼록 앞으로 더 힘들어지더라도, 다같이 즐겁게 계속 운동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은 학생들의 환호성으로 학교가 떠나갈 듯 했지만, 그런 기쁨에 브레이크를 거는 건 역시나 냉정한 남희의 몫이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한국여대 축구부는 무조건 운동만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잊지 말아야 할 거에요. 즉, 운동을 핑계로 학점관리가 안될 시에는 장학금 회수뿐 만 아니라, 축구부에서도 퇴출 시킬 테니까 이점 꼭 명심하길 바랍니다.”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금새 기쁨에서 실망으로 바뀌는 듯 한 학생들이었으나, 이어지는 수림의 발언으로 다시금 활기를 되찾는 아이들 이었다. “그럼 어쨌든 축구부 창단도 했겠다 회식하러 갈까요? 어때요 감독님? 괜찮겠죠?” 자신만만하게 제안을 하고서도 어느덧 남희의 눈치를 살피던 수림은 그러나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는 남희 덕분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정작 영후가 수림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데 어쩌죠? 전 오늘 동생들 생일 챙겨주러 가야 해서요…” “동생이 있으셨나요?” 의아해하는 수림의 질문에 남희는 조금 얼굴을 찡그려보았다. 이미 영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또 기억하고 있는 남희와는 달리 덤벙거리기만 하는 수림이 그의 아픈 과거를 알고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질문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영후는 활짝 웃기 까지 했다. “그럼요, 얼마나 많은데요? 아마 여기서 저보다 동생이 많은 사람은 없을걸요?” 꽤나 자신 만만하게 대답하는 영후에게 혜미는 즉석에서 의견을 내보았다. “그럼, 감독님 가시는 곳에 가서 동생분들하고 함께 회식하는 건 어때요?” “아, 그건…” 조금 난감해하는 얼굴의 영후와는 달리,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좋다는 뜻을 표했고, 바로 학생들에게 둘러 쌓이는 지금의 저 남자가 아닌, 저 남자의 집에서 봤었던 앨범 속의 어린 영후를 떠올리며 잠시나마 가슴이 저릿해지는 남희였다. 17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영후 네 주변엔 항상 웃는 사람들이 가득하구나.” 예순이 훌쩍 넘어 보이는 희망 보육원의 원장은 푸짐한 몸매 만큼이나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원장실 창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무척이나 흐뭇해했다. “그거야 뭐, 원장님 덕분이죠.” “호호, 빈말도 다 할 줄 알고… 영후 너도 나이를 먹긴 먹는구나. 그렇게 어리기만 하더니” “그러게요. 좀 불공평하네요. 저는 자꾸 나이를 먹어만 가는데, 원장님은 더 젊어지시니 말이에요.” “오호호호! 능글맞기까지 하고, 더 아저씨 같아 지기 전에 결혼을 하긴 해야 겠구나.” “예에? 결혼은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요.” “그래도 안 하겠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안 하는걸 보면, 역시… 하연이 때문일 테지?” “아하하하~ 글쎄요…” 겸연쩍게 웃어 보이는 영후에게 원장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노파심에 묻는 거다만, 혹시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거니? 실은 엊그제 하연이도 왔었더랬는데 늬들이 언제 이렇게 따로 왔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싸우긴요… 그냥 좀…” 싸운 게 아니라고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실은, 싸운 것 보다 훨씬 더 문제가 있을 지도 몰랐다. ‘왜 그랬던 걸까… 그때의 난…’ 걱정스런 원장의 눈빛 만큼이나 아스라한 표정으로 그때의 전화 통화를 떠올려 보던 영후였다. - “여…” 보세요, 라고 말하기도 전에 수화기 저편에서는 영후의 목소리임을 확인하자마자 ‘왁!’하고 하연의 윽박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왜 전화는 안되고!!!’ 를 시작으로 한동안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있어야 했을 만큼 하연의 잔소리는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잔소리가 영후에겐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싶은 마음에 살짝 안도감이 들기도 했었던 것도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잠잠해진 공중전화 속 하연에게 그제야 슬며시 입을 열어보는 영후였다. “미안. 걱정…했어?” ‘누가 그랬대!’ 여전히 성이 가득 난 하연을 다독이는 법은 그저 나 죽었소 하는 것 뿐이라는 걸, 다년간의 노하우로 알고 있었던 영후였기에 그저 미안하다고 하면 될 뿐이었음에도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쓸데없는 변명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숙소 잡으면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막상 그러고 나니까 안테나가 안 잡히는 거야, 그래서” ‘이 작아 터진 나라에서 핸드폰이 안 터지는 곳이 있다는 거짓말은 그렇다 쳐. 그치만 숙소에도 전화가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지금?’ “그러게 말야… 전화가 없드라구…” ‘지금 나랑 장난해! 그럼 지금은? 지금은 어떻게 하는 건데!’ “어제는… 길도 서툴고 밤도 늦었고 해서… 어쨌든 그래서 이렇게 눈 뜨자마자 너한테 전화하려고 읍내까지 나왔잖아.” ‘도대체 어디서 묵었길래 이 난린거야?’ “아, 그게…” 영후는 자신의 뒤에 조금 떨어진 채, 마치 통화 내용은 전혀 훔쳐 듣고 있지 않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어설프게 서서 애꿎은 바닥의 돌들을 툭툭 쳐보고 있는 남희를 돌아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은… 권코치가 아는 집이 있다고 해서… 그래서 거기서 신세 좀 지는 중이야.” 영후의 입에서 남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야 수화기 저편의 하연은 멈칫했다. ‘그것… 뿐인 거야?’ “으응…” 갑자기 조심스럽게 묻는 하연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고도 있다는 걸 영후도 느낄 수 있었지만, 달리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우연히 마주친 남희의 시선 또한 애써 외면할 수 밖에 없었고. ‘살아있으면 됐어. 몸조심이 있다가 와.’ 혹시 영후의 속내를 그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연은 쓸쓸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전했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서 하연을 붙잡았어야 했을 영후는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한 채 먹먹한 수화기를 여전히 들고 있었다. - 남희로부터 축구부 창단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전화로 보고 받은 총장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간 끓였었던 속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만 같아, 책상 서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들여다보며 조금쯤 속상해 하는 얼굴을 해보고 있었다. ‘피부마사지라도 받아봐야 할까 보네.’ 언제 또 갑작스럽게 노감독을 만나게 될지 모르니, 더 늦기 전에 집 근처의 유명하다는 피부관리실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총장실에 앉아 있으면 지겨우리만치 듣게 되는 노크소리가 또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총장은 입을 엶과 동시에 손거울을 서랍에 집어 넣고선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출입문을 바라보았지만, 평소보다는 조금쯤 더 볼이 발그레해진 것도 같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총장님.” 이윽고 열리는 문으로 들어선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건네는 어색한 첫인사를 받으며, 총장은 자신도 모르게 어수룩해 보이는 이 남자에겐 왠지 양복보다는 축구 선수들의 유니폼이 훨씬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 하연은 지하 주차장에서 미등을 깜박이는 자신의 차를 찾아내고는 꽤나 바쁜 듯 잰 걸음으로 다가갔지만, 문을 열고 타려는 순간, 번쩍이는 라이트 불빛이 그녀의 발걸음을 막아서고 있었다. ‘뭐야…?’ 하연은 이내 번쩍거리는 빛의 근원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시선을 붙잡은 걸 확인한 남자는 갓 뽑은 듯한 스포츠카에서 멋있는 척을 있는 대로 하며 내렸다. “여~ 오랜만입니다. 박기자님!” 선글라스를 벗으며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면상을 확인한 하연은, 순간 그간 잊고 있었던 악감정이 폭발하는 듯 다짜고짜 그 남자에게로 뛰어가 들고 있던 백을 정확히 얼굴을 향해 휘둘렀고, 전혀 무방비로 서있던 남자는 그야말로 단 한방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퍽! “아악!” 하지만 그정도 한방으로는 화가 전혀 풀리지 않은 듯 하연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다시금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연신 씩씩대고 있었다. “너… 하근명…!” “에잇! 갑자기 뭡니까 이게? 사과하러 온 사람한테!” “뭐 사과?! 이게 진짜!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이거지? 그래 알았어.” 하연은 씩씩대다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쓰러진 채 콧대를 만져보고 있는 근명의 뒤로 보이는 삐까 뻔쩍한 스포츠카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자동차 키를 손가락에 끼워 돌려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종착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한 근명은 그제야 차 앞을 가로막으며 이내 무릎까지 꿇어가며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아씨 이거 뽑은 지 몇 시간도 안 지난 건데! 아 박기자님! 아니 누나! 내가 잘못했다니까? 그래서 이렇게 사과하러 왔잖아요, 네?” 커다란 덩치에 애교를 부리는 얼굴로 두 손을 싹싹 빌고 있는 근명의 모습에, 하연은 어이가 없어서 ‘픽’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으로 하연의 기분이 풀어졌다고 생각한 근명은 역시 그 웃음에 합류하며 슬쩍 일어서려 했지만, 어느새 무섭게 눈을 치켜 뜨는 하연 덕분에 다시금 엉거주춤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 “큭큭, 간지러워요~” “참으세요. 동생들도 가만있었는데, 언니가 이러면 안되지~ 자 뒤로 도세요.” 보육원 아이들이 한국여대 학생들과 운동장에서 한참을 놀고 난 후, 식사 전 목욕 담당이 되어버린 수림은 거품이 그득한 타월로, 돌아선 아이의 등을 씻겨주며 아동비만이 사회문제가 된지도 한참 된 요즘, 아직도 이렇게 마른 아이들이 있었구나 싶어 순간 눈물이 날 뻔도 했다. 게다가, 수림을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느새 ‘언니, 언니’하며 품으로 달려드는 이 아이들은 모두 사람 냄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마냥 즐거운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운 얼굴들은 수림의 가슴을 더욱 미어지게 할 뿐이었다. ‘그 남자도 이 아이들처럼…’ 수림은 어쩌면, 영후의 이런 잠재된 마음을 자신이 이용해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더욱 미안해졌다. 결국 그랬을 것이었다. 영후라는 남자는 그저 사람이 그리웠기에, 얼토당토않은 수림의 접근에도 이상한 생각 하나 없이 받아 주었던 것이고, 안아 주었던 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 분명 ‘사랑’일 거라고 믿어버린 건, 수림 혼자 였을 뿐이었고.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 고팠던 거였구나 그남잔…’ 먹먹해지는 가슴을 수림이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조심스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이~ 좀 아픈데…” “어? 어 미안…”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수림의 눈에 그제야 새빨갛게 변해버린 아이의 등이 들어왔다. 아팠을텐데… 이렇게 빨개질 정도였으면 분명 아팠을 텐데, 이 아이… 겨우 ‘좀’ 아프단다. 아픈데도, 혹여 수림의 손길이 떨어질까 싶어 웃고 있었다. 잘못한 건 수림인데, 이 아이 수림의 마음이 상할까 먼저 웃어주고 있었다. 수림은 그 미소를 보며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미안해… 정말 미안해…” 수림은 거품이 묻는 것에 개의치 않고, 와락 아이를 뒤에서 안고서는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 탁탁탁탁탁! 희망 보육원의 주방에서는 그저 빛 바랜 앞치마 하나를 둘렀을 뿐인데도 빛이 나고 있는 남희가 각종 재료들을 능숙하게 칼로 자르자 연신 경쾌한 도마 소리가 울려 퍼졌고, 도우미를 자청한 아이들은 물론, 윤지도 꽤나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코치님, 진짜 남자만 있으면 되겠네요. 도대체 못하는 게 뭐에요?” 윤지의 부러움이 가득 담긴 말을 들으며, 남희는 별것도 아닌 일에 칭찬을 받는 것 같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윤지의 말을 비롯해서, 남희의 요리과정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모두 진짜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료만큼이나 주방에 가득 들어찬 작은 도우미들의 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썰고, 끓이고, 볶는 일련의 모든 과정들을 혼자 일사천리로 하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구경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남희의 이런 숙련된 요리 실력을 수림이 직접 봤다면 아마 까무러쳤을지도 모를 일이었겠지만, 남희에겐 그저 당연할 정도로 쉬운 일인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희는 이 음식을 분명, ‘그 남자’도 먹을 거란 생각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 “야이 미친놈아! 도로 전세 냈냐!!!”, “이 새끼야~ 차가 아깝다!” 정말로 버라이어티한 욕들을 열린 창문으로 가득 먹으면서도,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잔뜩 긴장한 채로 근명은 정면만 바라보며 운전 중이었고, 근명 대신 욕을 먹고 있는 기분이었던 하연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야, 차 세워.” “예? 뭐라구요?” “차 세우라고!” “아… 자…잠깐만요.” 차선을 바꿔 차도의 끝으로 나가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던 근명을 기다릴 인내심 따윈 어느새 지나가던 개에게 줘버린 하연은, 근명이 부들거리며 양손으로 잡고 있는 핸들을 갑자기 오른쪽으로 확 꺾었고, 순간 급정차한 뒷차들은 고급 스포츠카의 급작스런 도발에 욕을 바가지로 퍼 부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들이받을 자신은 없어 보였다. “야, 너 솔직히 말해. 이거 누구 차야?” “아, 잠깐만요.” 근명은 놀란 가슴을 겨우 쓸어보고 나서야 비상등을 켜고는 이내 기어를 중립에 놓고 잊을 뻔 했다는 듯, 사이드 브레이크를 힘껏 올려놓은 후에야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을 닦으며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은 마치 ‘초보운전자’ 흉내를 내고 있는 것만 같은 근명의 그런 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제야 하연이 자신에게 뭔가를 물었던 것 같았던 근명은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하연에게 말을 건넸다. “참, 뭐라고 그랬어요?” “너… 설마 초보인 거냐?” “예에?! 그럴리가요!? 이래봬도 도로 연수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그제야, 당했다는 표정의 하연은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며 생각하다가 이내 안전벨트를 풀고는 문을 열고 내렸다. “어어, 어디가요? 오늘은 같이 놀아 준다며요!” 설마, 이대로 가버리는 건가 근명은 당황했지만, 하연은 유유히 차를 한바퀴 돌아 운전석 쪽으로 다가왔고 이내 운전석쪽 문을 벌컥 열었다. “뭐…뭐에요?!” “내려.” “예? 하지만…” “내 말 안 들려? 내리라고!!!” 결국, 서슬이 퍼런 하연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르며 근명이 내리자, 하연은 바로 운전석에 터프하게 오른 후 문을 탕소리가 나게 닫으며 입을 열었다. “타라.” “예?” “놀자며. 안 갈 거야?” “아… 가, 가야죠…” 언뜻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근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올랐고, 근명이 문을 닫자마자 하연은 한마디를 던졌다. “꽉 잡아라.” “네?” 안전벨트를 하려다 되묻던 근명은 하연이 기어를 옮김과 동시에 엑셀레이터를 깊숙이 밟는 순간 그대로 시트에 붙듯이 밀착되었고, 그제야 짙은 은색의 ‘아우디 R8’은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굉음을 내지르더니 자신만의 위용을 뽐내며 다른 자동차 사이를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모든 불이 꺼진 식당으로 윤지와 혜미가 촛불이 환히 빛나는 커다란 케이크를 가지고 등장하자,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 앞에 쑥스러운 듯 서 있는 아이들을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5월에 생일이 있던 아이들의 눈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해 보였다. 이윽고, 영후가 준비해 온 선물을 받아 든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포장을 풀었고, 거짓말처럼 자신이 원하던 물건들이 나오자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물론, 그 순간 원장과 영후는 윙크를 주고 받으며 이번에도 깜짝 선물이 성공했음을 기뻐했다. “자, 이제 언니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어야지?” “잘 먹겠습니다아!”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감사해하며 인사를 하는 아이들 덕분에 언제나 냉정한 남희마저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만 같아 겨우 참고 있었지만, 사실은 수림을 비롯한 한국여대의 모든 학생들 마음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웃음을 잃지 않고, 아이들 옆에서 먹여주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마치 자신의 생일을 축하 받은 것처럼 기쁜 얼굴로 인사하는 영후를 바라보며, 남희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별로 한 것도 없는 걸요.” “아이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오랜만에 보네요.” “자주 와요. 우리…” 남희는 무의식 중에 마음속에 있던 ‘우리’ 라는 말을 내뱉고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으나, 그에 개의치 않고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영후의 모습에 아련함이 느껴졌다. “어… 근데 한 녀석이 안보이네…?” 이 많은 아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건가 싶어 새삼 놀랄 뻔 했던 남희였지만, 이내 또다시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남자에겐 이 아이들 모두가 가족이기에, 단순히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또다시 깜빡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희는 영후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슬쩍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며 스스로를 조금 자책해보았다. - 건장한 체구의 남자를 응대하기 위해 소파에 앉아있던 총장은 그러나, 이런 접대 때마다 마시는 차는 참으로 맛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한 모금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좀 많이 늦으셨네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벌써 꽤 많은 에이전트 분들이 다녀가셨답니다.” “아…” 여태 다녀갔던 에이전트들과는 달리 순박해 보이는 얼굴에 그대로 실망감이 잠시간 드러나 보이는 탓에 총장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그랬군요. 영후 정도의 선수라면 당연히 그랬을 텐데…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도 않다니… 휴… 저는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마치 이영후와 깊은 인연이라도 있는 양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겨우 닦아내며 말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총장은 다시금 자신의 찻잔 옆에 받아 놓아둔 남자의 명함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구 철용’ 이름도, 얼굴도 낯선 이 남자를 총장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이 남자는 어쩌면 이영후와 한번 쯤은 꼭 만나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거기에 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그간 에이전트들을 만날 때마다 긴장하기 바빴던 총장의 마음은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이감독님을 직접 만나본 에이전트들은 없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철용은 총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한국여대의 감독으로 몸담고 있다지만, 총장이 영후의 대리인도 아니기에, 아무런 걸림돌이 있는 것도 아니었을 진데 자유계약 선수 신분과도 다름없는 영후를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총장만을 만나보고 갔다니…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 안 드십니까?” 분명 영후를 두고, 쉽게 알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단 걱정스런 눈빛으로 철용은 총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총장은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실은 전, 그저 총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영후를 바로 만나러 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왜 다른 에이전트들은 영후를 직접 만나지 않았던 걸까요?” 철용에게 연달아 질문을 받고서 총장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용의 말 그대로, 에이전트들이 총장인 자신을 만날 이유는 사실 전혀 없었다. 그저 예의상 방문이라면 모를까, 영후를 자신들의 선수로 만들기 위해선 분명 당사자를 만나야 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총장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뭐라고 했었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건…” 총장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다시 떠올려보기도 싫을 만큼의 역겨운 얼굴들이 되살아났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가지를 말하고 있었기에, 총장은 어렵지 않게 철용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었다. “일본…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 “얏호! 아하하하하!” “으아아아악!” 바이킹의 뱃머리에 해당하는 끝자리에 앉은 채 공중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고 있는 하연과 근명의 반응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물론,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스포츠카를 운전하면서 기분이 조금은 풀린 하연은 놀이동산에까지 와서 노는 동안 점점 스트레스가 풀려가는 중이었지만, 문제는 근명이었다. 원래도 멀미가 원체 심했던 근명은, 그 때문에 해외 원정 경기에서의 활약도가 국내에서의 그것에 전혀 미치지 못할 정도였었는데, 비행기를 타도 쉽게 접할 수 없을 강도의 멀미를, 하연이 운전하는 차 속에서 느낀데다가 먼저 놀자고 했으니 놀이기구에 안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놀이기구를 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안전바 정도는 잡게 해줘도 좋으련만, 만세를 부르며 타야 재밌다는 하연 덕분에 근명은 그야말로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심정이었다. “우웨~~~~엑!” “아 자식, 거참 드럽게 구네. 등 좀 이쪽으로 대봐.” 누가 보면, 말술쯤 마신 듯한 남자의 등을 두드려대고 있는 가녀린 여자친구 정도로 봤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퍽! 팍! 퍽! 팍! 꽤나 단련된 근명의 몸으로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무게를 실어, 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두드려대고 있었고, 어찌나 손이 매운지 근명은 이러다 정말이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돼…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무릎으로 기다시피 해서 하연의 손길을 벗어난 근명은 다행히도 좀 나아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근명이 살아난 것을 확인한 하연은 그제야 뾰루퉁한 얼굴이 되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뭐냐 이게? 간만에 놀아보나 했더니.” ‘간만에’란 단어에 조금은 놀란 근명은 바닥을 기다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하연을 바라봤다. “왜 또?” “선배가 자주 안놀아 줘요?” 그저 가볍게 던지는 근명의 질문에 순간 하연의 마음은 덜컹 소리가 날만큼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애송이 앞에서 그런 내색 같은 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하연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너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다니는 개날라린줄 아냐? 영후는 자나깨나 축구 밖에 모른다고.” “그러니까… 그 선배한테는 축구가 일 순위란 거군요? 박기자님이 일 순위가 아니라. 흠… 좀 그렇지 않나요? 나 같으면 사랑하는 여자가 당연히 일순위였을 텐데.” 근명의 놀리는 듯한 말에 하연은 무어라 톡 쏴주고 싶었지만 사실은 근명의 말이 그닥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주도권을 잡은 듯한 표정의 근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난 어때요?” “뭐가 어때?” “아직 선배랑은 좀 미적지근한 상태인 거 같으니까… 이 참에 나랑… 예?”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고 있는 근명을 하연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윽고 근명의 뒷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퍽! “아 왜 또 때려요!!!” “왜? 요새 하도 밥만 먹었더니, 라면이 먹고 싶디? 응?” “그게 또 뭔 말이에요!!!”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다가 질리니까, 이번엔 좀 색다른 여자랑 자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냐고!” “아 진짜, 너무 무시하시네. 박기자님 잡아 먹고 싶었음 그때 벌써 잤지! 안그래요?! 박기자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저 여자에 미친 그런 놈 아닙니다. 왜 이러세요 진짜.”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하고 있는 근명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연은 주먹질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고 홀연히 일어서서 근명을 내버려두고,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또 어디가요!!” “놀아야지. 놀자며. 또 언제 이렇게 놀겠니.” 망연한 하연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한 근명은 그래도 자신의 고백이 어느정도 먹힌 것으로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진 듯 했지만 그래도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하연의 주먹 덕분에 긴장은 절대 풀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기자님하고 애인하는 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어지간한 남자 아니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란히 걷고 있는 근명을, 하연은 무슨 소린가 싶어 바라보다가 이내 근명과 같은 사람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당연하지, 애초에 너 같은 애송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쳇! 그래도 아직 경기 안 끝났다구요!” “오호, 그래? 좋아, 그럼 영후보다 더 많은 골을 넣는다면 이 누나가 한번 고려해 보마.” “예? 그게 무슨…?” “한국말 못 알아들어? 영후보다 더 많은 골을 넣어보라고. 물론 절대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설마? 돌아 온대요? 선배가 그러던가요? 언제요? 예?!” 엄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동그란 풍선보다도 훨씬 더 큰 눈으로 하연을 바라봤지만, 하연은 ‘글쎄?’란 표정으로 놀리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놀란 나머지 발걸음도 멈춘 채 생각에 잠겨버린 근명 만큼이나 하연의 머릿속도 복잡하기만 했다. '너에게 난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 ‘녀석, 참…’ 영후는 보육원의 어둑어둑한 운동장에서 홀로 축구공을 가지고 드리블링을 하고 있는 꼬마를 바라보며, 청바지 뒷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꼬마는 여전히 이리저리 축구공을 드리블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영후는 조금 떨어진 뒤에서 지켜보다가 어느새 꼬마의 발에서 흘러나온 공을 오른발을 이용해 부드럽게 세워보았다. “누나들이 맛있는 거 많이 만들었는데, 찬이는 배 안고파?” 하지만 뾰로통한 얼굴의 찬이는 대답도 않고 그저 영후의 발 아래에 있는 공을 뺏으려 다가왔고, 영후는 그런 찬이에게 쉽게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리 줘요~!” 결국 찬이는 꽤나 거칠게 영후에게 달려들었지만, 영후는 살짝 발 뒤꿈치로 공을 뒤로 감췄다. “그러지 말고 밥 먹으러 가자 찬아.” “이씨~!”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찬이는 영후에게 공을 뺏으려 결사적으로 달려들었고, 평소같으면 그런 찬이에게 공을 내어줄만도 했건만 영후는 절대로 공을 내어주지 않았다. 또한 애초에 영후에게서 공을 빼앗아 온다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걸 알고 있던 찬이였지만, 이상하리만치 계속해서 영후에게 달려들 뿐이었고, 어느덧 터져나오는 울음을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게 영후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찬아…” 결국 공을 저만치 굴려버린 후 조심스럽게 어깨를 잡은 영후 덕분에 멈춰선 찬이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약속 했잖아… 흑… 꼭 세계 제일의 스트라이커가 되기로… 흑흑… 약속했잖아…” “찬아…” “이게 뭐야… 나랑 약속한 건 까먹어버리고! 흑흑… 고작… 고작 여자들한테 축구나 가르치고…” 아, 그것이었나. 영후는 그제야 찬이와의 약속을 생각해내곤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찬아, 형이 찬이랑 약속한 걸 잊을 리가 있겠니? 그건 찬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언젠데!! 언제 약속을 지킬건데?! 언제!” “그건…” 자신도 짐작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약속’이란 걸 해버린 영후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찬이와 한 약속의 무게감이 너무나 묵직한 것만 같아 그저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찬이가 한 살 더 먹기 전에 그 약속, 꼭 지킬게.” “진짜?” “진짜.” “약속.” 찬이가 내미는 새끼손가락에 영후도 손가락을 걸었고, 도장과 복사를 마친 후에야 찬이의 얼굴에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영후는 찬이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가서 밥 먹자. 오늘 누나들이 진짜 맛있는 거 많이 했던데.” “형, 근데 왜 오늘은 그 기자 누나랑 같이 안 왔어?” “어? 어어… 그건 그냥… 이번엔 바빠서 시간이 안 맞아서 그랬어.” “으응…” “근데 왜?” “아니, 난 세상에서 하연이 누나가 젤루 이쁜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인 거 같아서.” 고작 열살 된 찬이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난 영후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풋! 그래 오래 오래 살아라 임마!” 찬이의 머리칼을 ‘왁’ 흐트러트리며 영후는 간만에 환하게 웃어보았다. - 끼이이익!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근명의 차가 멋지게 멈춰섰고, 시동이 꺼지자 이내 고요함이 밀려오고 있었다. 영후 이외의 남자와 함께 있으면서 느껴지는 어색함이 하연은 너무나 이상했기에 괜히 차 내부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뭐, 수동이 아니라서 조금 아쉽지만, 나름 괜찮네.” “아, 네.” 왠지 어색하기는 근명도 마찬가진 듯 싶었지만, 근명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하연도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리기사 임무 완수 했으니까, 누나 이제 간다.” 하연이 자동차 키를 근명에게 건네주고 나서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오자 근명도 그제야 안전벨트를 풀고는 황급히 따라나왔다. “저기…” “응? 왜?” “커피 한 잔 하고 갈래요?” 잠깐 흔들렸던 눈동자 만큼이나 하연의 마음도 흔들렸을까? 잠시나마 고민하던 하연에게는 그 순간이 꽤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아니.” 꽤나 힘들게 하연에게 말을 꺼냈을 근명은 너무나 간단한 하연의 거절에 금새 풀죽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근명의 얼굴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하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재미없게 커피가 뭐냐? 남자가. 술은 없냐? 술 있으면 좀 놀다 가고.” 하연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자 근명의 얼굴은 그야말로 헤트트릭을 해버린 순간 보다 훨씬 더 밝아지고 있었다. “있어요! 있어 술!” - 보육원에서의 저녁식사 후 집으로 오기 위해 같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영후와 수림은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미안한 감정으로 인해 입을 못 열고 있었던 영후와는 달리, 영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산처럼 쌓여있었던 수림은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영후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타이밍만 가늠하고 있었기에 결국 발을 헛딛고는 휘청거렸고, 순간 수림이 넘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영후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아…” “괜찮아요?” “네에…” 수림이 안정을 되찾자 그제야 팔을 붙잡히고 있었던 여자나 붙들고 있던 남자 모두 황급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 모양새가 너무나 어색했기에 결국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풉…”, “큭…” 터지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결국 새어 나온 웃음은 결국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고, 어두 침침한 가로등만이 깜박 거리는 어두운 길가에 선 채로 두 사람은 한동안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아, 배 아파… 너무 웃었다.” “괜찮은거죠?” 어느덧 웃음기를 걷어내고 진지하게 물어오는 영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림은 또다시 긴장할 뻔도 했지만, 이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사적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게 또 언제 였었나 싶었기에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보였다. “안 괜찮을 것도 없잖아요?” 언제나 밝은 모습 그대로 영후를 대하는 수림의 그 눈빛 덕분에 영후는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영후는 스스로 깨우친 게 하나 있었다. 아무리 강한 척 하는 세상 그 어떤 여자라도 알고보면 모두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랬기에 지금 자신을 마주보는 여자의 눈동자를 응시하면서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왜…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뇨.” 그제야 너무 대책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싶었던 영후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걷기 시작했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림도 뒤질세라 영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근데, 오늘 저녁 정말 맛있지 않았어요?” “네, 정말 맛있던데요?” “그… 그쵸…?” 그래도 영후의 입에서 부정적인 대답이 나왔으면 했던 수림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 만족했다는 듯한 뉘앙스의 답변이 나오자, 수림의 어깨는 그야말로 축 쳐지고 있었다. “그랬을 거에요. 실은, 권코치가… 다 만들었거든요…” “아…” 수림의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영후는 수림의 역작, ‘식어버린 깐풍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또한 한없이 울음을 터뜨렸었던 그때의 수림도. “하지만 가끔씩 먹고 싶어질 때가 있더라구요 그때 그 깐풍기.” “진짜요!?” 그게 뭐 그리 기쁜 말이라고, 수림은 당장이라도 높이뛰기 세계 신기록을 경신할 것 마냥 깡총깡총 뛰기 시작했고, 그런 수림의 모습을 보자 영후의 마음도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가슴 한 구석 어딘가에선 아련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렇게 착한 여자를…’ 이윽고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원룸 건물에 다다랐을 즈음, 영후는 잠시 고민을 해 보았다. 어렵게 다시 마음을 터놓게 되었는데, 이렇게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오늘 내로는 자신의 입이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기에, 머리를 벅벅 긁어보던 영후의 귀에 수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가서 차 한잔 하실… 래요?” 땅을 바라보며 마치 길가의 돌맹이에게 말을 하는 듯한 수림의 모습에 자신의 바보같음을 한탄하며 영후가 기꺼이 대답을 하려는 데, 어디에선가 낯익은 노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거기에, 나도 좀 끼워주면 안되겠는가?” - 짙은 커피향이 작은 수림의 원룸에 그득하게 퍼져나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세 사람이 작은 찻상 앞에 둘러앉아 있는 원룸의 공기는 너무나 무거웠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 만큼이나 엄청난 반응을 보여주는 영후의 모습에 수림의 가슴도 덩달아 두근 거리기 시작했고. “예에? 그게 무슨…?” 영후가 저렇게 놀라는 모습을 그야말로 처음 목격한 수림은, 마주앉아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 파악을 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분명, 영후가 감독님이라고 불렀으니 저 할아버지 또한 영후와 같은 감독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무턱대고 하신다는 말씀이, 대표팀에 들어오라니… 그럼 설마…? “녀석 참… 예나 지금이나 이 늙은이한테 두 번 말하게 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감히 숨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두 젊은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노감독은 또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림의 눈에도 이미 영후의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얗게 변해버린 것만 같았는데,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감독은 쐐기를 박듯, 무겁게 뒷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대표팀에… 들어오너라.” 18부. 너무나 안타까운. “장혜미 파이팅~!” 한국여대의 첫 연습경기가 열린다는 소문은 부지불식간에 많은 남학생들에게 퍼져나갔던 모양인지, 벌써부터 스탠드에는 마치 국가대표팀의 연습경기를 관람하러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인파들이 운집해 있었다. 게다가 혜미의 골수 팬이 되어버린 남학생들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한국여대의 유니폼을 맞춰 입은 채 경기 시작 전부터 방방 뛰며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해대고 있었다. “야, 야, 근데 저기, 저기 좀 봐.” “뭐 임마, 우리 혜미님 보기도 바빠 죽겠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이영후 감독이 나와있는데?” “그게 뭐가 색햐~! 당연히 감독이 나와야지. 그럼 지금 이 와중에 PC방에 처박혀 있겠냐?” “하여간 이 상병신을 친구라고… 미친 새꺄~ 넌 신문도 안보냐? 오늘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예선 앞두고 요르단으로 출국하는 날이잖아!” “근데 뭐!” “이게 완전 국대엔 관심 끊었구만? 새꺄 이영후도 이번 국가대표 엔트리에 포함된 거 몰라?!” “뭐어? 진짜?! 근데 왜 지금 여ㅤㄱㅣㅆ어?” “내 말이!” 혜미만을 바라보다 잠시 샛길로 빠져 이상한 대화를 나누던 남학생들은 어느새, 조금은 경직된 얼굴로 터치라인 부근에 서 있는 영후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준비를 마친 선수들이 각자의 포지션에 자리를 잡고 나자 심판인 듯한 남자가 양쪽 진영을 점검한 후 센터라인에 섰고, 남학생들은 언제 이영후를 걱정했었냐는 듯 다시금 연신 ‘장혜미 파이팅!’을 외치기 시작했다. 삐~익! 이윽고 일요일 아침을 여는 휘슬이, 고즈넉한 안개들을 날려버리려는 듯 심판의 입에서부터 청명하게 울려 퍼졌고, 그와 동시에 혜미가 공을 아라에게로 패스하고는 적진을 향해 날렵하게 달려나갔다. “자 평소대로 해보자~!” 잔뜩 긴장한 선수들을 독려하듯 터치라인에 바짝 서 있는 채로 연신 박수를 치는 영후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남희는, 도대체 이 남자는 천운을 타고 난 것인지, 아님 임기응변이 뛰어날 뿐인 건지 쉽사리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며칠 전 죽고 싶을 만큼 무기력했었던 하루를 떠올려 보고 있었다. - “감독님…”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힘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희의 그늘진 얼굴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며, 영후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물었었다. “그래, 어디에요? 우리가 연습경기를 할 첫 팀은? 설마 다들 자기들이 먼저 하겠다고 서로 싸우는 건 아니죠?” 너스레까지 떨며 묻는 영후의 말처럼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지만 남희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선물을 기대하며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양말로 달려가는, 아이 같은 눈망울의 영후를 바라보며 그 순간 쥐구멍이 있다면 바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팀이 만들어졌으니 자체 훈련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부터는 다른 팀들과 연습 경기를 통해 실전 감각을 익혀야만 했기에, 남희는 며칠 전부터 영후의 지시대로 몇몇 학교에 연습경기 협조에 관한 공문을 보냈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마치 약속이나 한 것 마냥 모든 학교에선 ‘불가’ 답변만이 돌아왔던 것이었다. 자신이 맡은 팀은 도대체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것이 없는 것만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만두고 싶을 만큼 마음이 저만치 쯤 떠나기도 했었던 남희였더랬다. 하지만, 그런 마음들은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또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저 갓 꺼진 촛불의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르륵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랬기에, 지금의 이 상황을, 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알려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참으로 못된 짓 같기만 했던 것이었다. “저… 감독님…” 어렵사리 입을 떼는 남희의 모습을 바라보던 영후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환했던 표정을 거두며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남희씨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요.” “감독님…” “차라리 잘됐네요. 실은 나도 우리 팀의 비밀을 벌써부터 알려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 “연습 상대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차고 넘치니까요.” 남희의 어깨를 몇 번이며 다독여주는 이 남자는 역시나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고, 이런 남자에게 자신의 첫 순정을 내어준 것은 절대로, 절대로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한 여자였다. - “혜미! 수비한테 떨어지지 말고, 자리를 차지해야지!” 자꾸만 센터백에게 밀려나는 혜미에게 아니나 다를까 수림의 외침이 들려왔다. ‘쳇, 나도 그러고 싶다구요.’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혜미는 단 한 명의 센터백에게 꽁꽁 묶여 있었기에, 마치 혜미를 꿰뚫고 있다는 것 같은 수비수의 움직임에 혜미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 이었다. 게다가 작심을 한 듯 아저씨들의 도발도 틈만나면 이어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평정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혜미야, 너 임마 일요일 아침에도 볼 차러 안 나오고. 선수니 뭐니 한다고 하더니만 도대체 뭘 배운 거냐?” 또다시 자신을 마크하고 있는 걸걸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바로 등뒤에서 들려왔지만, 혜미는 대꾸할 여력조차 없어 보였기에 묵묵부답이었고 그런 혜미를 지켜보는 아저씨도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유가 넘치는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거참, 내가 천하의 혜미를 다 막아보는 구먼.’ 그저 경기 시작 전 영후로부터 들었던 혜미의 수비 방법 그대로, 꽤나 어렵지 않게 막아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아저씨는 그러나 자칫 혜미를 놓칠까 다시금 그림자처럼 붙기 시작했다. - “감독님, 도대체 어떤 팀이 온다는 거죠?” 경기를 앞둔 약 한 시간 전, 각자 몸을 풀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던 조금은 긴장한 표정의 영후에게 남희 또한 그에 못지 않은 긴장을 가득 담은 얼굴로 묻고 있었다. “팀… 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의 우리 팀에겐 무척 도움이 될만한 분들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영후를 믿을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남희는 그저 아무 차질 없이 연습경기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만 같았다. 한편 그라운드에선 수림의 지도하에, 선수들이 이른 아침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경기 준비를 위해 꼼꼼하게 몸을 풀고 있었고, 모든 훈련 때마다 가장 솔선수범을 보이던 혜미는 역시나 가장 열심히 몸을 풀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어디론가 시선을 고정하기 시작했다. “혜미, 왜 그래?” 수림이 의아해 하며 혜미에게 물었지만, 혜미는 수림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도 못한 채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제야 다른 선수들도 저 멀리 보이는 남자들의 무리들을 보고는 준비운동을 하던 움직임을 하나 둘 멈추기 시작했고, 그 중 가장 먼저 그들을 알아본 혜미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아저씨… 들?” - “얘기도 없이 갑자기 이러시기에요?” 간만에 공을 잡고서 센터백과 마주선 혜미가 단단히 뿔이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임마, 우릴 버리고 간 게 누군데 그래?” 대화를 하면서도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막아선 남자는, 결코 더 다가서지도 그렇다고 더 멀어지지도 않은 채 이른바 영후가 알려준 ‘혜미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혜미는 이상하리만치 그 간격을 겁내며 수비를 따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 “에? 혜미를… 막는 방법… 이라고라?” 조기 축구회원들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놀라고 있었지만, 영후는 그런 아저씨들의 얼굴과는 달리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예,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비밀이 있는 건 아니구요.” “그치만, 뭐시냐 그때 감독 슨상도 혜미한테 한 꼴 먹어부렀잖여~?” “하하! 네 그랬었죠. 그래서 알게 된 겁니다.” 조기축구회의 모든 아저씨들은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후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가끔, 선수들은 선수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말하자면 일종의 ‘합’과 같은 건데요. 보통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선수들은, 어느 정도 공격과 수비의 절차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럴 땐 돌파를 하겠구나, 또 저럴 땐 패스를 하겠지… 뭐 이런 식이죠.” “이잉, 그니까 감독 슨상 말씀은, 혜미는 선수들하곤 다르게 그 뭐냐 잉, 마구잡이, 마구잡이다 이런 것인감?” “마구잡이는 아니더라도, 체계적으로 축구를 배운 게 아닌 혜미의 경우엔 의외로 쉬운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니까, 각설하고, 고것이 뭐당가요 대체?” “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주세요. 그거면 될 겁니다. 우선은요.” “거리를 두라고라고라? 그게 무신 말씀이라요? 그랬다가는 후딱 제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슛도 못 막을텐디?” “그 점은 걱정 마시고, 우선은 그렇게 해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늘 혜미와 공을 차던 아저씨들은 수비 시에 혜미를 일정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으라는 영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 그리고 거짓말처럼, 혜미는 조금 떨어진 채로 자신을 수비하고 있는 아저씨 한 명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압박감을 받고 있었고 어쩐지 그 애매한 거리 덕분에 돌파도, 슛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 했다. “쳇!” 결국 혜미는 다시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공격형 미드필더 아라에게 패스를 한 채 다시 활로를 모색해보려 했지만, 역시나 미리 백패스의 길목을 막고 있던 상대 미드필더에 의해 인터셉트를 당하고 말았고, 공수가 전환되자 마치 20대 때의 체력을 보여주겠다는 듯 중년의 공격수들 전부가 전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자, 간만에 공세 중이었기에 수비라고는 센터백인 진희와 미애 뿐이었던 한국여대의 진영은 그 순간 너무나 공허해 보이기만 했다. 이내 전방에서 어렵지 않게 볼을 건네 받고는 잠시 멈춰선 마흔이 넘은 아저씨는 꽤나 저돌적인 돌파로 간단하게 미애를 제친 후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들어서자마자 강력한 오른발 막슛을 날렸고, 그 정도 강도의 공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미자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어렵지 않은 궤도의 공을 막기는 커녕,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피하고 말았다. 결국 아무런 제지도, 방해도 받지 않은 공은 유유히 한국여대의 골망을 가르고야 말았고, 관중석에선 갑작스레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운 고요함만이 퍼져가고 있었다. 삐~익! 주심의 휘슬소리와 함께, 전광판의 스코어는 곧바로 1 : 0 으로 바뀌었고, 그저 처음으로 내준 실점이었지만, 선수와 코치들이 받는 충격은 꽤 커 보였다. 게다가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팀의 중심인 혜미의 활로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수비도 문제지만 혜미가 너무 고립되는 데요?” 보다 못한 수림이 남희와 영후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지만, 연신 손에 든 수첩에 메모를 해가며 역시나 근심스럽게 경기를 지켜보던 남희와는 달리 영후는 그리 걱정스런 얼굴이 아니었다. “성장하는데, 아프지 않을 순 없으니까요.” 영후의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들으며, 수림은 이 남자 역시 성장통이 진행중인 걸까 싶은 생각에 자신의 집에 노감독이 방문했던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 가장 편해야 할 자신의 집에서, 수림은 편하기는커녕 숨이 막힐 것 같아 죽을 지경이었다. 원래 의도한 대로였다면, 영후와 단 둘이 오붓하게 차도 마시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눴을테고, 또 그랬으면 너무나 멀어져 버린 둘 사이의 마음도 조금쯤은 가까워 질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휴우… 흡!” 몇 십 분이 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마주 앉아 바라만 보고 있는 두 남자들을 앞에 두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다 놀래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본 수림은 이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수림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남자의 눈동자는 여전히 상대방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고, 수림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지만, 마치 두 사람은 꽤나 심도 있는 대화를 쉬지 않고 나누고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실은 정말 그러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짜고짜 대표팀에 들어오라니?’ ‘놈! 네 입으로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돌아오겠다고.’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고집을 피울 감독님이 아니란 걸 아니까 이러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은 제가 책임지고 있는 팀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신 분이…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결국 눈싸움, 아니 기 싸움에서 먼저 백기를 든 건 노감독 쪽이었다. 어렵게 눈을 내리 깐 노감독은 그러나 그러고도 한참을 찻잔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민을 거듭하는 모양이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수도 있구나 싶을 만큼 고요한 적막감이 흘렀지만, 그 이공간을 깨뜨리며 입을 연 것은 다름아닌 노감독이었다. “그런데, 처자는…?” 갑작스럽게 대화에 참여하게 된 수림은 꽤나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네? 아, 저요? 아 그러니까 저는 그…” “절 돕고 있는 코칩니다.” 당황하는 수림을 구해줬다는 사람이 영후였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질 뻔도 했지만, 그저 영후의 주변사람에게 코치로 밖에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에 수림은 조금쯤 서글퍼지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까지 꿰뚫겠다는 듯 물끄러미 수림을 바라보는 노감독의 눈빛에 수림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옷깃을 여며보았다. “그럼, 굳이 자리를 피해 달라는 말은 필요치 않겠구먼.” 잠시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난 노감독은 다시 약간의 망설임 후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점점 나이가 먹어갈수록, 왜 그리도 아까워지는 게 많은지. 그러니 늙는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겠지만 서도.” 도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지, 영후와 수림은 쉽게 짐작해보지도 못한 채 느릿하게 이어지는 노감독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모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나만 묻자꾸나.” “…?” “지금 네놈이 바라는 소원은 무어냐? 아니 소원이란 게 있긴 있느냐?” 수림은 점점 이상한 소리를 하는 노감독과 점점 굳어가고 있는 얼굴의 영후를 번갈아 볼 수 밖에 없었다. 소원이라니… 소원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하지만, 문득 수림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가 바라고 있는 게 과연 뭘까…’ 하지만 영후가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노감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경험도 미천한, 그것도 축구와 한동안 동떨어져 있던 네놈에게, 축구부조차 없는 한국여대에서 덜컥 감독 제의를 했던 건지 단 한번도 궁금하지 않았느냐?” 자꾸만 이상한 얘기를 하는 노감독을 이해할 수 없었던 수림은, 그러나 아무생각없이 고개를 돌려 영후의 얼굴을 보고는 너무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분노. 저 착한 얼굴에도 그처럼 엄청난 감정의 표출이 가능할 거라고는 한번도,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었기에, 수림은 그 기세에 눌리는 것만 같아 너무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였다.” 또다시 노감독의 입이 열린 직후, 영후의 혈압을 재보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림이 보기엔 영후 몸 속의 피는 그야말로 들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감정을 다스리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며 노감독을 바라보는 영후의 눈은 그러나 그야말로 원망의 눈초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노감독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오늘 죽을 지 내일 죽을 지 모르는 이 늙은이에게도 소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네놈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는 것이었지. 물론 내 원래 하고자 했던 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그래도 내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바로 이 눈앞에! 그저 손만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아서, 그래서…” “결국… 감독님이셨던 겁니까? 저는 그럼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했었던 겁니까!? 그런 거에요!?” “어차피 내가 아니었어도 네놈은 돌아올 게 아니었느냐!” “다릅니다! 그런 줄… 그런 줄 알았더라면 전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절대로!!” “괜한 고집 부리지 마라 놈! 축구에 미친 건 네놈 하나만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이런 건 아닙니다!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 하셨잖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제가 왜 감독님을 따랐었는지 정말… 정말 모르셨단 말입니까?!” 절규와 같은 영후의 말에 노감독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하신 말씀들,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감독님께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은입니다.” 결국,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는 영후의 뒤통수에 대고 노감독은 지지 않겠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놈! 이미 엔트리는 정해졌다! 네놈이 안온대도, 난 네놈 자리를 비워놓은 채로 출국 할게야!!” 노감독의 말을 듣고는 문을 열고 나가다 멈칫 했던 영후는 그러나 이내 문이 부서져라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고 정작 집주인이었던 수림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 나가야 하나? 하지만 손님이… 어쩌지…?’ 어째야 하는지 갈피조차 못 잡고 있는 수림을 그제야 인식한 노감독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직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더 마셔보았다. “그래, 코치를 하신다고?” 갑자기 질문을 받은 수림은 조금 전까지의 긴박했던 상황에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진정되지 않았지만, 겨우 내색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보았다. “예에…” “흐음. 그래 어떠신가, 영후와 일 하기가?” “그게… 실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야 하는데,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되려 도움만 받고 있어요.” 진심으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수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감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순수한 마음씨가 그대로 전해진 덕에, 노감독 자신의 마음은, 지금은 영후를 이런 식으로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사실은 영후의 의견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처자에게라도 말하고도 싶었지만, 그래 봤자 자신이 기득권 세력에게 굴복하고 말았다는 현실 앞에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기에 마음으로나마 수림에게 속삭여보고 있었다. ‘그만하면 충분히 그 녀석을 돕고 있는 걸세.’ 하지만 그 뿐이었다. 노감독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속마음을 들킬까, 이내 ‘끄응’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실례가 안된다면…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꽤나 용기에 용기를 냈을 수림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감독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 끄덕임 덕분에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수림은 다시금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다. “저희 감독님이 다시 선수로 뛸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건가요? 아까…” “뛸 수 있냐고? 허허…” 노감독에게 영후는 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꼭 뛰게 해야만 하는 제자였기에 반신반의하며 묻고 있는 수림의 물음에 노감독은 그만 너털웃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이거, 갑자기 웃어서 미안하구만. 그럼, 코치 선생은 어쩌길 바라시나?” “네? 그건…” 답변만을 들으려 했었기에 갑작스레 질문을 받아든 수림은 역시나 우물주물 하고 있었지만, 역시 영후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까. 수림의 입이 열리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희 감독님 스스로 결정을 내리시겠지만…” 축 처진 눈꺼풀을 위로 올려보며 노감독은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수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내 노감독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감독님이라면, 감독님을 아끼는 모든 사람들이 실망할 결정 같은 건 절대 내리지 않을 거에요.” 부디 그랬으면 좋으련만. 확실한 건 하나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하는 노감독에겐 그나마 수림의 말 한마디가 크나큰 위안이 됐음은 물론이었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구먼. 미안하외다.” “아, 아니에요. 저희 감독님의 감독님이시잖아요.” 맹목적으로 영후에게 믿음을 싣고 있는, 단발머리 만큼이나 귀여운 수림을 한동안 다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노감독은, 그 순간 이상하게도 하연이 떠올라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문을 나섰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어느새 평소의 수림의 방이 되어버리며 고요함이 밀려들 무렵, 혹시나 싶어 바로 창가로 뛰어가 창 밖을 내다본 수림의 눈엔, 핸드폰을 들고서 몇 번이고 통화를 시도하다가 안되자 더 화가 치미는 것 같아 보이는 여전히 머리끝까지 흥분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 점차 시합이 거듭될수록, 남희가 배정한 선수들의 포지션 별 능력에 영후는 조금쯤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혜미 …………………………스트라이커 ……………………………아라 ………………………공격형 미드필더 ……민지…………수정………… 은채…………나경 …레프트 윙……미드필더……미드필더……라이트 윙 ……하늘…………진희…………미애…………소영 …레프트 풀백…센터백…………센터백……라이트 풀백 ………………………………미자 ………………………………골키퍼 윤지 (?), 지영 (수비형 미드필더), 승은 (양 풀백) , 정화 (윙플레이어) 단순히 장기 말을 늘어놓은 것 같은 작전지시서를 들여다보며 영후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첫 실전을 치르며 많이 긴장하고 주눅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선수들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이 원했던, 그리고 남희가 수락했던 포지션이 제법 마음에 드는 지, 나름대로 임무를 잘 수행해내고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했다. 적어도 선수들이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미애! 라인 유지하고! 그렇지! 민지! 수비! 수비!” 한편, 포지션 지정과는 별도로 정말 축구를 했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현장을 읽는 눈이 뛰어난 수림의 지시와 조련은 남희와는 또 다르게 영후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 ‘이러다 정말 내가 할 일이 없어지겠는걸?’ 영후는 두 여인의 절대적인 도움에 감사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라운드 위에선 체격적인 열세와 성별의 차이를 쉽게 만회할 수는 없었는지, 한국여대 선수들은 조기축구 아저씨들에게 점차 밀리고 있었고, 어느덧 센터라인도 넘어오지 못한 채 하프코트게임을 하듯 자신의 진영에 갇혀 있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이 터져라 지시를 하던 수림은 역시 안되겠는지, 영후를 돌아보았지만 영후는 전혀 급해보이지 않았기에 어느덧 승부욕이 발동하고 있는 수림의 눈에선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감독님!!!” “예? 예? 왜요?” “계속 그러고만 계실 거에요? “아…” 한심스럽게도 스스로 감상적이 되어버린 채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던 영후 였기에 그제야 그라운드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이미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팀은 단순한 지시 만으로 바뀔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보였기에 영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좀 그렇고… 전반 끝나고 좀 다독여 줘야겠네요.” “네?” 수림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독여 준다고? 단지 그것 뿐? 수림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영후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이윽고 주심의 입에선 인저리 타임 없이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렸고, 전광판에는 7 : 0 이라는 축구 스코어 같지 않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 ‘뭐 하는 거냐 이영후.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잖아.’ 전반전이 끝나자 스코어 만큼이나 답답한 심정으로 스탠드 한 켠에 앉은 채, 연신 담배에 불을 붙이던 철용은 당장이라도 뛰어가 영후에게 한방을 먹여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직은 축구 경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선수 시절 그 누구보다도 진득했던 자신의 인내심을 다시 발동시켜보며 폐 속 깊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여보았다. - 영후의 지시로 열심히 경기를 촬영하고 있었던 윤지는 어느새 라커룸으로 들어와 선수들에게 음료와 타올을 건네며 파이팅을 외쳐봤지만 녹초가 된 몸 만큼이나 주눅이 들어버린 선수들의 귀에 그런 응원 따위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연습경기였지만 ‘첫 경기’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가 남달랐을 모두는 너무나 처참한 결과에 대해 그 누구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남희나 수림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역시 감독 밖에 없었을까. 다 죽어가는 얼굴들을 하고 있는 모두들을 바라보던 영후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힘들었나요?”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영후의 질문에 그 누구도 입을 뻥긋 하지 못했다. 물론 힘들었다. 아니 곧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해왔던 결과가 고작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었나 싶어서, 그토록 희망적이었던 마음마저 다 죽을 것 같았기에, 정작 몸이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었다. “혹시… 오늘 연습 경기를 하는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 있을까요?” 계속 이상한 말만 하고 있는 영후를 남희와 수림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남희와 수림은 도대체 이 남자가 이토록 아까운 10분을 왜 저렇게 허비하고 있는 것인지 황당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미녀 코치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영후는 혹시 자신의 물음에 답을 줄 사람이 있을까 조금 기다려 보았지만 대답은 커녕 점점 시무룩해지는 것만 같아 결국 자신의 입을 다시 열었다. “자, 우린 신생 팀입니다. 맞죠? 게다가 어쩌면, 공식적인 시합이 잡히기 전까지 다른 축구팀과의 연습경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남희는 괜히 뜨끔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누구도 탓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영후의 표정 덕분에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그럼, 우린 결국 시합 당일에야 그 팀들과 부딪혀 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 이제 내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겠나요?” 점점 어려운 말만 하는 영후 덕분에 선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리둥절해 했고, 남희만이, 처음 만난 상대에 대해 최대한 빨리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영후의 뜻을 정확히 이해했을 뿐이었기에, 선수들의 모습을 보던 영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수정이는 어땠니? 허리라인에서 제일 많이 부딪혔을 것 같은데.” “음… 솔직히 힘들었어요.” “왜 힘들었지?” “그건… 그건 힘도 그렇고, 스피드도 너무 차이가 나서…” “음… 그랬겠지. 그래서, 어떤 생각이 들었니?”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이대로는…”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인 건가?” 영후는 선수들을 돌아보며 눈으로 묻고 있었지만, 애써 시선을 피하는 모습들이 결국 수정의 생각과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혹시… 경기 전에 내가 ‘꼭 이겨!’라고 한 말 들었던 사람?” 장난을 치듯 선수들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질문을 던지는 영후를 그제야 모두 바라보며 황당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영후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음을 알고 있는 모두는 한 방 거하게 맞은 것만 같았다. “그럼 하나 더 물을게. 왜 꼭 이겨야 하는 경기도 아닌데 왜들 즐겁게 플레이 하지 못하는 거지? 우린 언제나 즐겁게 운동하기로 하지 않았나? 난 한번도 승부에 집착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었는데.” 순간 락커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그랬다. 왜 승부에 집착하고 있었던 가.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그 정적을 깬 건, 그 순간 아니 전반전 내내 가장 반성하고 있었던 혜미였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하지만 반성하고 있는 건 혜미 뿐만이 아니었다. “아니야. 내가 바보 같았어. 평소처럼만 침착했어야 했는데…” “나도 미안해. 공을 막아야 될 내가, 피하기 바빴어…” 혜미를 필두로 어느덧 모든 아이들의 고해성사가 시작되었고, 급기야 모두들 감정이 북받쳐올라 울먹이기 시작할 때 즈음 영후가 끼어들었다. “자,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해 나가 보자. 음… 우선 아까 수정이가 말했듯이 저 아저씨들하고 우리는 체격도 스피드도, 모든 게 현격하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 다른 해결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겨우 울음을 그치고 있던 터라 역시 쉽게 답을 내는 선수들은 없었고 그런 선수들이 너무나 예쁘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다가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던 영후는 장난스런 얼굴로 한마디를 남긴 후 먼저 락커룸을 빠져나갔고, 영후의 말 한마디에 코치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직접 45분을 피치 위에서 해결방법을 찾고 있었던 선수들 머릿속은 확실한 해결책을 얻은 것도 아니었건만 갑자기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라운드는 넓어. 그러니까… 좀더 재밌는 곳을 찾아보렴.” - 먼저 그라운드로 나온 영후를 반기는 건 어김없이 간식시간을 가지고 있는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 이었다. “어이~! 여 와서 한잔 하드라고~” “하하, 아닙니다. 선수들 지켜봐야죠.” “이잉, 이 선수! 아니 이 감독이라고 해야 하나? 좌우당간, 아니 난 또 그렇게 유명한 선순 줄 몰랐네 그랴?” “근데 아직도 창창해 보이는 구먼, 왜 선수 안하고 감독을 한데? 테레비에서 보아 하니, 오늘 대표팀이 출국 한다든디… 자넨 안가나? 어디 망가진 데라도 있는가?” 한 아저씨의 돌발 질문에 잠시나마 멈칫하는 영후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아저씨가 잽싸게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었고, 별 무리 없이 다들 웃으며 넘어가고 있었다. “이 사람~! 그때 보고도 몰라? 은둔 고수아냐 은둔고수!!! 고수는 암때나 나타나는 게 아니랑께.” “그나저나, 우리가 너무 시게 몰아 붙인 거 아녀? 그저 감독 슨상이 아리켜 주는 데로 허긴 했지만 서도 맴이 좀 짠~ 한 것이… 우리야 공짜로 잔디운동장도 쓸 수 있고 좋긴 한디…” “잘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네 분들께도 소문 좀 많이 내 주세요. 앞으로도 저희 팀 연습상대가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런 거라면 걱정 붙들어 매야~? 여그저그 그 잘난 운동장 한번 쓰것다는 디 임대비를 어찌나 그리도 쳐 올리는지 말여. 여그 봐. 얼매나 이뻐? 이렇게 좋은 데도 아닌 데들도 시방 그 모냥인데, 여그가 소문이 안 나것어? 쉬쉬해도 다 천리가게 되 있당께.”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약주 너무 많이 하진 마시고 남은 45분 열심히 뛰어주세요.” 아저씨들이 권유하는 막걸리를 마다한 채 겨우 자리를 벗어난 영후의 눈엔, 그 많은 관중 속에 섞인 채로 앉아있었지만, 언제 어디서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여자가 들어왔지만, 또한 그 여자도 영후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지금 떨어져 있는 거리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멀어져 버린 것만 같았기에 영후는 그녀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주는 것 조차도 할 수 없었다. - “이번엔 이거 어때요?” 근명이 비틀거리며 주방에서 들고 나온 건 다름아닌 원두커피를 담아내 온 컵이었다. “죽기야 하겠어? 넣어봐 넣어봐.” 하연의 덤덤한 반응에 근명은, 하연이 앉아 있는 맞은 편 바닥에 털썩 앉은 채 소주가 조금 담겨 있는 잔에 커피를 역시 조금 부어보았다. 마치 처음 과학실험을 하는 어린아이들 같은 눈으로 커피와 소주가 섞이는 묘한 그림을 바라보는 두 사람 주변엔 커피 말고도 그동안 넣어 봤음직한 많은 것들이 놓여져 있었다. 요거트를 시작으로, 콜라, 사과, 오이 등과 믹서기까지 보이는 것으로 볼 때 굳이 빈병을 헤아려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많이 마셨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마치 소믈리에가 된듯 조심스럽게 술을 마셔보는 하연의 입술을 바라보며 근명은 꽤나 에로틱한 느낌을 받았지만, 어쩐지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쉽사리 그녀를 덮칠 수가 없었다. 아니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을런지도. “음… 괜찮은데? 커피향도 그윽하고. 너도 마셔봐.”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마시던 잔을 내밀며, 남은 술을 마시라는 하연 덕분에 근명은 술잔에 남아있는 나머지를 단번에 들이켰지만, 어쩐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것만 같아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어때? 괜찮지?” “뭐, 나쁘지 않네요.” 이윽고, 하연이 다시 커피를 소주와 섞고 있는 사이에, 테이블 구석에 놓여있던 하연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려대기 시작했다. 별 생각 없이 하연 대신 집어 든 근명은, 그러나 하연에게 건네줄 생각이 없는 듯 그저 한동안 액정에 나타나는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누군데?” “… 선배요.” “뭐? 빨리 줘. 이리 내!” 술을 따르다 말고, 근명에게 무릎으로 걸어가 손을 뻗는 하연이었지만, 근명은 어쩐지 핸드폰을 건네주기가 싫었던 것도 같았다. 영후에게 하연을 건네주기가 싫은 것 만큼이나. 결국 근명은 핸드폰을 쥔 손을 등 뒤로 감추기 시작했고, 하연의 손이 적극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하자, 이내 머리 위로 한껏 손을 올려 하연이 뺏기 힘들도록 억지를 부려보고 있었다. “안 내놔!” “시…싫어욧! 으악!” 우당탕! 앉은 채로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결국 하연의 엄청난 힘으로 인해 몸이 포개진 채로 바닥으로 넘어졌지만, 근명의 몸 위로 포개진 채 였음에도 하연은 팔을 뻗어 연신 핸드폰을 뺏으려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몸이 맞닿은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서히 흥분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 중 더욱 난처했던 건 하연의 봉긋한 가슴에 눌려 있는 근명이었고. ‘아 씨바… 좆됐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근명의 사타구니엔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것도 모르고 근명의 몸 위에서 핸드폰만을 뺏기 위해 바둥거리던 하연의 동작도, 어느새 끊겨버린 핸드폰 벨소리 마냥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수는 없었다. 서로의 알코올 내음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 눈이 있었고, 코가 있었고, 입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아니 전 세계의 청춘 남녀라면 누구나 그 순간에 가장 어울릴 만한 행위에 대해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었으니까. ‘제…젠장, 키스타임 한번 절묘하네.’ 뜻하지 않게 너무나 가깝게, 그리고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근명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고, 그랬던 만큼, 당연히 함부로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있던 근명의 입대신, 거짓말처럼 하연의 촉촉한 입술이 먼저 닿아주었다. ‘어?’ 근명은 순간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우연이라 할지라도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양, 적극적으로 하연의 입술을 빨아대었고, 또다시 울리는 핸드폰은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저쪽으로 던져버린 채 잘록한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으응…” 입술이 맞닿아 있던 관계로 하연은 코로 나마 은근한 신음소리를 내 주었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탄력을 받은 근명은 언제나 그랬듯, 천천히 오른손을 이동시켜 하연의 가슴을 움켜쥐어 보았다. “너……?” 순간 몇 분이 넘도록 붙어 있었던 그녀의 입술이 갑자기 떨어지며, 근명을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 눈빛 덕분에 너무 진도를 나갔나 싶었던 근명은 재빨리 수습하려 했지만, 하연의 입술이 닿았던 때문이었을까? 입술이 굳은 것 처럼 말을 더듬고 있었다. “아 이건… 나…나도 모르게…” 그제야, 여전히 하연의 가슴에 놓여져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고, 그것과 맞물려 또다시 하연의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근명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하연은 구석에 처박혀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감독님. 박기자에요.” ‘지금 막, 영후 놈을 만나고 오는 길이네.’ “네에…” ‘뭐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길길이 날뛰더구먼.’ “그랬겠지요. 안 그랬음 영후가 아니죠.” ‘흐음… 이놈이나 저놈이나 늙은이를 난감하게만 하는구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님 말씀을 끝까지 거역할 녀석은 아니잖아요.” ‘박기자 말처럼만 된다면 야… 참, 그런데 그 녀석 하고는 요새 어떠신가?’ 문득, 수림을 떠올린 노감독은 하연에게 불현듯 물어왔고, 덕분에 하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앉은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근명을 돌아보며 잠시 어물 거리고 있었다. “뭐, 어떻고 말고가 있나요… 늘 거기서 거기죠.” ‘그… 아닐세. 어쨌든 알았네. 그나마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구먼. 그럼 또 통화하세.’ 노감독은 하연에게 작은 충고를 해주려다 이내 그만 두었고, 다행스럽게도(?) 하연은 노감독의 머뭇거림을 눈치채지 못했다. “네, 들어가세요.” 하지만 여자의 육감 덕분이었을까. 왠지, 노감독의 미적지근한 마무리가 마음에 걸렸던 하연은 그러나 자신의 뒤에 남겨진 근명의 시선에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금 술잔이 놓여진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감독님이에요?” “응.” “이 선배… 때문에?” “뭐. 그 녀석 다운거지.” “감독님하고 이 선배, 각별한 사이라면서요. 근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언제나 올곧은 사람들이라는 게 문제지. 물론 이번엔 윗선의 요청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노감독님의 욕심도 한 몫 하긴 했지만.” “요는 낙하산 선발은 싫다… 이건가요?” “오~ 자식, 머리 좋은데? 한잔 하자.” “잠깐만요. 나 머리가 워낙 좋아서 낮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거든요? 어때요? 오늘은 이 정도로 멈췄지만, 내가 이 선배보다 골을 더 넣고 오면, 허락해 줄래요?” “…!” 하연은 이상하리만치 근명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후에 비해 아무것도 나을 것도 없는, 연하의 성질 더러운 녀석 따위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게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나쁜 녀석은, 그렇게 착하고 멋진 영후가 하연에게 해주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 주었고 그것들은 마치… 마치 연인들이 한다던 ‘데이트’라는 것과 그닥 다르지 않았기에 생각과 달리 자꾸만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에 환장할 지경이었다. ‘영후는… 결국 나에겐 소중한 친구일 뿐인 걸까…’ 꽤나 쿨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을 해버린 근명은, 그러나 그 순간 또다시 영후를 생각하느라 어디론가 떠나버린 하연의 넋을 눈치 채고는 씁쓸하게 술을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 19부. 모두가 바란다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직위와 사건들은 소설로서 재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인천공항 로비에서는 요르단과의 일전을 위해 출국 준비중인 선수들의 포토타임이 이어지고 있었고, 촬영을 위해 줄 서 있는 각각의 양쪽 끝에는 노감독과 조전무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얼굴로 사진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영후 선수는 어떻게 된 겁니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영후 선수는 대표팀 소집에 불응할 거라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스물 세 명 모두를 데려가도 부족할 판에, 한 명이 적은 채로 출국하게 됐는데 괜찮을까요?” 어느새 스트로보 불빛들이 뜸해지자 역시나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답변은 굳은 얼굴의 노감독이 아닌, 꽤나 기뻐 보이는 듯한 조전무의 몫이었다. “아, 그 문제는 전적으로 대표팀을 맡고 있는 감독의 결정에 따르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축구 관계자 얘기를 빌자면, 이영후의 소집은 협회 고위층의 뜻 때문이었다고 하던데요, 사실입니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감독이 원하는 것들을 서포트할 뿐,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그럴 권한도 없구요.” 그 자리에 있는 선수며 기자들 모두가 조전무의 발언이 거짓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아마 하연이 그곳에 있었다면 조금은 다른 류의 질문이 튀어나올 법도 했겠지만, 아쉽게도 하연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노감독의 한숨이 더 짙어질 법도 해보였다. 그나마 어디에 있든 노감독을 도울 수 있는 건 언제나 밝은 눈을 더욱 빛내던 하연 뿐이었으니까. - ‘재밌는 곳…’ 혜미는 후반전이 시작 된 이후로 계속 영후가 내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를 써봤지만, 전반전에 이어 후반전에도 여전히 자신을 막아서는 아저씨 덕분에 집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순간 혜미의 머릿속에 번뜩이며 지나가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계속…? 설마?’ 분명, 혜미를 막고 있는 아저씨는 경기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 자신만을 막고 있었다. 조기 축구 때와는 달리 어떻게 자신을 막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자신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아저씨들은 절대로 혜미를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혜미는 자신도 모르게 잔뜩 좁아져 있던 시야를 그제야 넓혀보았다. ‘아…’ 혜미 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여대의 모든 선수들은 너무나 가지런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영후의 손에 들려있는 작전지에 그려진 포메이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경직된 모습 그대로였다. ‘그랬구나… 감독님이 말씀하신 게…’ 재미없는 곳들에 갇혀 있는, 더 재미없는 모습들. 혜미는 그제야 영후가 내준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었지만, 과연 자신의 생각이 맞을런지는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혜미의 귓가에는 역시나 영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꼭 이겨야 하는 경기도 아닌데 왜들 즐겁게 플레이 하지 못하는 거지?’ ‘그래! 밑져야 본전이야. 해보자!’ 생각을 정리한 혜미는 왼쪽 날개인 민지와 오른쪽 날개인 나경이에게 싸인을 보냈고, 의아해하던 공격형 미드필더 아라는 어느 정도 혜미의 뜻을 알아차리고 조금쯤 자신의 위치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어~?” 순간 혜미를 잃어버린 센터백과 갑자기 혜미를 맞닥뜨린 오른쪽 풀백은 동시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센터백들은 갑자기 센터로 들어서는 오른쪽 날개 나경 덕분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왼쪽 풀백 또한 왼쪽 날개였던 민지와 맞서며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첫 시합에서 벽에 부딪히자 선수들은 드디어 ‘포지션 스위칭’을 스스로 생각해내며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생각보다 훨씬 쉽게 ‘재밌는 현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저… 감독님…” 수림은 갑작스레 벤치로 찾아든 손님을 알아차리고, 전반과 달리 싱그러움을 되찾은 선수들의 플레이 덕분에 완전히 경기에 빠져든 영후를 몇 번이고 조심스럽게 불러보았지만, 축구에 빠져든 남자의 정신을 돌려놓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남자가 영후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런 영후를 단번에 돌아보게 만들 수 있는 여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림도 남희도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야, 이영후…” 그저,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범한 목소리로 단지 한번 불렀을 뿐인데 영후는 단번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여자를 돌아보았고, 영후의 시선이 머문 자리에는 역시나 하연이 서 있었다. “하연아…” “정말… 안 갈거니?” 잠시 의아해하던 영후의 얼굴은 잠시 일그러지는 듯 했지만, 적어도 그런 얼굴을 하연에게 보이기는 싫었던 듯 어렵사리 피치로 얼굴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하연아, 너까지… 그 얘기라면 그만둬.” “바보야! 그런 게 아냐! 노감독님도 원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구! 너보다 더하셨음 더하셨지 덜할 분이 아니란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무슨 말이야 그게…? 원하신 게 아니라니…?” 그제야 다시 남자의 시선이 한 여자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후… 말 그대로야. 알잖아, 이 축구판이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 감독님도 결국은 피해자일 뿐이라구.”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감독님께서 널 부르고 있잖아…” 놀란 입을 제대로 다물지도 못하는 영후와 담담하지만 영후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하연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는 수림과 남희의 생각은 그 순간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 ‘이 남자가 즐겁게 뛰는 모습… 보고 싶다…’ - “출국 전에 전화라니, 다 늦게 철이라도 드신 거에요?” 차마 그라운드에 직접 나가볼 수 없었던 총장은 총장실에서나마 한국여대의 첫 연습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영후가 더욱 신경 쓰이고 있었건만, 역시나 노감독 또한 총장보다는 영후 때문에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평소보다는 조금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직, 좀 이런 저런 절차가 좀 남았길래...’ “몸 조심이 잘 다녀오세요. 괜히 무리하시지 말고요.” ‘뭐 내가 힘들 게 있겠소…’ 분명, 묻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노감독의 마음에 역시나 총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먼저 말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기다리시는 거에요? 이영후를…?” ‘……’ 갑자기 침묵하는 수화기 저편에 있을 한 노신사의 구겨진 얼굴이 안 봐도 떠오르는 통에 총장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어떻게든 희망적인 내용이라도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기에, 총장은 체면불구하고 까치발을 들고, 목을 조금이라도 더 빼며 영후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박기자가… 설득 중이긴 한 거 같은데…” ‘미안하오.’ 갑작스레 사과를 하는 노감독의 목소리에 총장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서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젊은 날, 처음으로 그 남자가 했었던 말이 바로 ‘미안하다’ 였었기에, 그 때 이후로 이 남자에게 장난으로라도 ‘미안하다’라는 말이라도 듣게 되는 날에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었다. 그랬기에, 이 남자에게서 그 말 만은 절대로,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었던 총장이었기에, 하연을 먼 발치에서나마 하연을 열심히 응원하기 시작했다. - 혜미의 기지 덕분에 4-4-1-1 포메이션에서 4-3-3의 무한 스위칭 플레이 스타일로 변신한 한국여대의 플레이에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은 갑작스레 밸런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조심~!” 마치 놀리듯 저만치서 소리치는 혜미의 목소리를 듣고 난 아저씨 미드필더는 순간 움찔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은채의 멋진 슬라이딩 태클이 이어졌다. “쏘리, 아저씨~” “앗!” 그간 잔디 운동장에서의 경험이 별로 없었기에 태클을 하는 것도, 당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던 조기축구회의 미드필더는 그와 정반대로 어느덧 잔디와 친숙해져 있던 미드필더 은채의, 공을 향한 깊은 태클에 당황하며 공을 놓치고 말았고, 은채와 동시에 압박 수비에 참가하던 미드필더 수정은 곧바로 오른쪽 빈 공간을 찾아 이동해있는 전방의 민지에게 센터라인에서부터 시작되는 장거리 패스를 시도 했다. 수정의 발끝에서 공이 떠남과 동시에 조기축구회의 어설픈 오프사이드 라인을 붕괴시킨 민지는 트래핑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공의 스피드를 살리며 터치라인을 따라 깊숙이 돌파하기 시작했고, 전반 내내 나경만을 수비하다 갑자기 전혀 다른 타입의 민지를 수비하는데 애를 먹던 왼쪽 풀백은 허둥거리며 민지의 돌파를 차단하기는 커녕, 미처 따라붙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결국 민지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으며 골라인을 따라 공을 툭툭 치며 들어가다가 지체 없이 크로스를 올렸다. 한편, 민지의 움직임에 맞춰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진입해 있던 아라와 나경은 이내 낮고 빠르게 날아오는 공을 향해 연달아 뛰어 올랐고, 센터백들도 그녀들을 막기 위해 동시에 뛰어올랐지만, 공은 아라도, 나경도 외면한 채 지나쳐 갔고 그녀들에게 헤딩을 허용치 않기 위해 뛰어올랐다가 허공에서 허망하게 추락하던 센터백들을 비웃듯, 그제야 그들의 뒤편에서 돌고래처럼 튀어 오르던 혜미의 점프를 바라보며, 수림은 자신도 모르게 땀으로 젖어 있는 손을 한껏 말아 쥐어 보았다. ‘수평의 스피드를 수직의 스피드로 바꾸는 게 중요해!’ - “도대체, 헤딩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다른 선수들은 벌써 돌아간 늦은 저녁시간. 몇 백개쯤 프리킥을 날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은 채 그라운드에 남아있는 소품들을 정리하고 있는 수림에게 문득, 혜미는 혼잣말하듯 물었고, 수림 은 그 귀엽고 작은 얼굴을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헤딩하고 높이 뛰기는 좀 다르긴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좀 비슷할 것도 같기도 하고…” “아 맞다. 코치님이 하셨던 게 높이뛰기 였댔죠? 그럼 높이 뛰기는 어떻게 하는 건데요?” “높이뛰기? 아, 그건 말야… 가만있자…” 자신의 주 종목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수림은 반색을 하며 넓은 공간을 찾아 섰다. “여긴 아무것도 없으니까, 배면 뛰기는 그렇고…우선은 그냥 기본 도약 정도만 해볼게. 괜찮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혜미의 눈 앞으로 곧바로 수림은 가볍게 반원을 그리며 뛰기 시작했고, 이내 그리 두껍지 않은, 아니 차라리 얇다고 해야 할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꿈틀대며 응집하는 가 싶더니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한없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수림의 모습은, 때마침 저물어 가는 태양에 가려지며 마치 명마가 솟구쳐 오르는 것 같은 실루엣을 만들어 냈고, 혜미는 그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 “들어…갓!!!” 절대로 눈을 감지 않은 채 모든 탄력을 끌어 모아 뛰어올랐던 혜미는, 그러나 순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보다 낮게 날아오는 공과는 달리 훨씬 높이 뛰어올랐던 덕분에, 공은 어처구니 없게도 혜미의 가슴께로 날아오고 있었고, 허공에서 어쩌지 못했던 혜미는 결국 트래핑 하듯, 가슴으로 공을 튕겨낼 수 밖에 없었다. 툭…툭… 데구르르르… 골키퍼를 비롯해 그라운드의 모든 선수들은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췄고, 혜미의 가슴을 맞고 나오는 공이 천천히 골라인을 넘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삐~익!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혜미의 ‘가슴슛’을 골로 인정하는 휘슬이 심판의 입에서 울리자, 드디어 고대하던 첫 골 소식에, 스탠드에 있던 남학생들은 (가슴 슛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까?) 일제히 우뢰와 같은 함성을 보내주었고, 혜미에게 모여든 모든 선수들은 마치 역전 우승이라도 한 것 마냥 기쁨의 포옹을 해 주었지만, 혜미는 지금의 이 기쁨을 다른 사람이 아닌 영후와 나누고 싶었기에 모든 선수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영후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영후와 영후를 둘러싸고 있는 세 명의 여자들은 그라운드 안의 분위기는 전혀 상관 없는 것 같아 보였기에, 혜미를 비롯한 모든 선수들은 순간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선뜻 영후에게 달려들지도,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듯, 그 난처한 공기를 가르며 수림의 입이 먼저 열리고 있었다. “보셨죠? 감독님, 다녀오세요. 아직 시간은 충분해요.”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감독님께서 실전을 많이 치르고 오시면, 그만큼 우리 팀에도 플러스 요인이 될테니까요.” 남희까지 거들자, 하연은 의기양양해 하며 팔짱을 끼며 영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 이래도 버틸거야?” 의도치 않았던 지원군까지 나서자, 영후는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작이 어찌됐든 자신은 감독이었고, 자신이 만든 팀이 있었고, 그리고 이렇게 예쁘고 착한 선수들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런 영후의 당혹스런 표정은, 그대로 윤지의 캠코더 속으로 확대되어 보이고 있었기에, 윤지는 자기도 모르게 속삭이고 있었다. “가면… 가면 안되요…제발…” 하지만… 그때였다. 스탠드 어디선가 작은 외침이 들렸던 건. “갔다와…” 갔다와…갔다와… 윤지의 바램과는 달리, 이 간략하고 절실한 한마디는 스탠드 전체로 마치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방금 첫 골의 함성까지 배가 되어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영후는 감전이 된 것 마냥, 온몸이 떨려왔다. 이 함성, 이 느낌. 영후는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고별경기 때도 분명 이러했었으니까. 순식간에 흡사 용광로처럼 달궈진 스탠드의 열기에 영후는 난감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약속’이 가져다 주는 무게 때문이었는지 쉽사리 입을 열 수는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둔탁한 구둣발 소리를 내며 영후 쪽으로 다가오던 남자의 모습은 어찌됐든 간에 영후의 입을 열게 할 자신이 있는 모습이었다. “야 임마 이영후! 언제까지 응석부리고 있을 셈이야!”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하나같이 맘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를 알아보는 사람은 하연과 또 한 사람 뿐이었다. “선배…” ‘구철용…선수?’ 철용의 출현에 영후는 자신도 모르게 왼쪽 무릎이 시큰거려지는 것만 같아, 자칫하면 손을 뻗어 매만져 볼 뻔 했다. “이 자식, 이런 미녀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아주 호강에 겨워서 오강에 빠졌구만?! 앙?! 머리가 이렇게 나쁜 줄은 몰랐는데 말야. 그새 네 본분을 잊어버린 거냐? 앙? 그런거야?” 그 남자의 위용 덕분에 영후의 입은 정말로 반쯤 벌어져 있었고, 하연은 괜히 무슨 불상사라도 날까 싶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누구…?” 수림이 속삭이듯 뭔가 아는 얼굴의 하연에게 물었기에 하연은 철용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려 했지만, 정작 철용은 자신의 소개를 남의 입을 통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던지, 직접 대답을 해줬다. “나, 영후 놈 앞길을 막은 장본인 이올시다!” 굳이 저렇게 인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실은 확실치 않았음에도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철용의 모습에 하연은 영후의 프로 첫 데뷔전에서 바람처럼 질주하던 영후의 모습과 동시에 들소처럼 쫓아가 영후의 뒤에서 왼쪽 무릎에 깊은 태클을 시도하던 센터백 구철용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 삐~익! 휘슬을 불어대며 뒤늦게 달려오던 심판은 카드를 꺼낼 생각보다 먼저 피치에 나동그라져있는 영후에게 다가가 상태를 물었고, 쉽게 대답을 못하며 다리를 부여잡고 있던 영후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철용은 매섭게 노려보는 심판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바로 앞에 보이는 흰색 라인을 바라보았다. ‘어쩌라는거야? 이렇게라도 안했으면 바로 골이었을텐데. 쳇!’ 그나마 죽을 힘을 다해 따라붙은 끝에 겨우 막아낸 위치가 페널티박스 바로 앞이었다는데 안도의 숨을 내쉴 뿐이었다. 이윽고, 들것이 들어와 영후는 실려나갔고, 당연히 철용에겐 옐로카드가 주어졌지만, 철용은 레드카드가 아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만큼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과한 태클이었기에 심판의 판정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곧바로 시합 속으로 다시 녹아들어갔다. 이윽고 영후의 부상으로 인해 인저리 타임이 조금쯤 더 배려될 동안, 심판을 비롯해 모든 선수들은 경기가 무승부로 곧 끝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일어나 터치 라인 밖에서 심판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영후의 모습에 철용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저자식…!’ 분명 제대로 태클을, 아니 가격을 했었더랬다. 프로 무대에, 그것도 고등학교를 갓 마치고 데뷔한 풋내기에게 두 골을 내어준 건 철용의 선수 커리어에 있어서 치욕과 같은 결과였기에, 퇴장을 각오하고 영후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던 것인데, 그리고 느낌상 꽤나 데미지가 있을 거란 것은 태클을 행한 철용이 가장 잘 알 수 있었는데, 그런데… ‘웃…어?’ 아무리 젊음이 좋다지만, 언제 태클을 당했었냐는 듯 팔짝팔짝 뛰며 아직은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듯, 아니 들여보내만 주면 꼭 역전골을 넣어버리겠다는 얼굴로, 그때의 영후는 심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직도 그때가 선하다.” 삐딱하게 담배를 입에 문 채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철용이 입을 열자, 영후는 또다시 버릇처럼 왼쪽 무릎에 손을 가져갈 뻔 했다. “그냥… 수많은 시합 중에 하나였을 뿐인걸요.” 영후가 평생 자신을 원망하며 살 줄 알았던 철용은, 의외의 대답에 살짝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섭섭한 감정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영후의 해외 이적이 불발되어버리고, 철용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은퇴를 했었으니까. “그래, 수많은 시합 중에 하나였지. 하지만, 내가 한 놈에게 세 골을 내어줬던 건 그 경기가 유일했다.” 그랬다. 결국 다시 경기에 합류한 영후는 충격은 커녕, 전반전을 막 맞이하는 선수처럼 뛰어다녔고 당연하다는 듯 역전골을 성공시켰던 것이었다. “그때의 넌, 정말 대단했다. 축구 선수인 내가 다른 선수를, 그것도 우리나라 선수를 보고 반했던 건, 네놈이 처음이었으니까.” 마치 오래된 연인과 재회를 하며, 때늦은 사랑고백을 하는 것 마냥 철용의 얼굴은 조금은 발갛게 물들어갔고, 그런 모습이 조금은 재밌게 느껴지던 영후는 철용의 얼굴을 보며 조금 미소짓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 에이전트가 되신 거에요?” “얼마 되지 않았다. 굳은 머리로 영어 공부하기가 정말 죽을 맛이었지.” “대단하시네요. 매년 한 두명 밖에 안뽑는다고 알고 있는데…” “이 정돈 사실 그렇게 힘든 게 아니었다. 언젠간 되겠거니 했으니까. 정말 힘들었던 건…” 철용은, ‘네놈이 정말로 다시 축구를 하러 돌아올 건지 불확실했었던 게 나에겐 너무나 힘들었다.’라고 말하려다 화제를 돌렸다. 이미 ‘축구선수’ 영후가 돌아와 있었으니까. 그거면 된 거니까. 언젠가 돌아올 영후를 꼭 자신의 손으로 최고의 팀으로 이적시킬 거라는 꿈 하나로 여기까지 온 철용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키스를 해버리다니, 박기자도 대단한 여자다.” “아…” 철용의 이야기에 영후는 아직도 입술에 여운이 남은 듯, 잠시 입술 언저리를 매만져 보았다. - 갔다와~! 갔다와~! 엄청난 함성에 둘러싸여있건만,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영후의 입에서 ‘예스’라는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건만,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허둥거리는 한 남자를 일깨워준건 다름아닌 하연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영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일순간에 증발해버리고,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영후의 입술에, 하연의 입술이 마법처럼 닿아있었다. 그저, 입술과 입술이 닿아있었을 뿐이었는데, 영후는 어쩐지 하연이 말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억겹의 시간들 거쳐 하연의 가슴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던 아련한 '무엇'이었음을 영후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영후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뗀 하연은 조금은 부끄러운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영후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젖어있는 듯한 선분홍빛 입술을 움직였다. “다녀와…” 하연은 차마, ‘다시는 너의 앞길을 막지 않을게.’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영후를 보내게 되면, 결국은 영후는 자신에게서 서서히 멀어질 것이었다. 사랑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하연에게는 영후보다 더 소중한 건 절대 없었다. 그러니, 그러니… ‘한 번이면 족해. 널 보내지 않으려던 그 때 한 번으로…’ 촉촉한 눈망울로 영후를 올려보는 하연에게서 영후도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아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영후가 있었고, 고대하던 답이 나오자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함성과 함께 서로를 껴안으며 마치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것 마냥 기뻐하며 뛰어올랐다. - “전무님, 여기 전화…” “어 그래, 잠시 실례하겠소.” 많은 기자들을 뒤로하고 조전무는 수행비서로부터 핸드폰을 건네 받으며 예의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예, 조전무 올시다.” ‘저… 윤지에요.’ “아, 그래. 어쩌고 있느냐?” ‘공항으로 떠났어요.’ “그랬군. 뭐 어찌됐든 상관없지. 그정돈 이미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래 알았다. 어쨌든, 기쁘구나. 이제 우리의 계약이 이뤄진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 끊을…게요…’ 아직도 마음을 다잡지 못한 윤지의 흐릿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조전무는 핸드폰을 다시 비서에게 건네며 꽤나 활짝 웃는 얼굴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노감독에게 다가갔다. “자자, 여러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조전무의 재등장에 기자들의 눈은 일제히 쏠렸고, 노감독도 의아한 표정으로 조전무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시선들엔 항상 익숙했다는 얼굴로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영후가 오고 있다는 군요. 지금, 바로 이곳으로.”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 엇갈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노감독의 얼굴을 감상하며 조전무는 더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모든 게 착착 맞아가는구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전무는 얼마 전 있었던 한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 “전무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예, 예.” 청와대 접견실로 들어서며, 조전무는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켜보고 있었다. 결국, 이곳에 까지 온 것이다. 그 누구의 힘이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이제 잠시 후면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었다. 이내 비서관이 봉황의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문을 열자, 어울리지 않는 무게를 잡으며 일어서는 한 남자가 보였고, 조전무의 허리는 조건 반사되듯 바로 90도로 꺾이고 있었다. “대통령님, 조전무입니다.” 간단한 비서관의 소개와 함께, 대통령이 내민 손을 잡으며 그제야 조전무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정말 사람 일이란 모르는 일이란 걸, 대통령을 바라보며 다시금 깨닫는 조전무였다. 세상에, 누가 알았겠는가. 전과만 14범에, 이제는 고인이 된 정회장의 부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의 문제아였던 남자가, 어이없게도 지금 자신의 앞에, 그것도 대한민국의 수장의 역할로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래, 어쩐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겁니까?” “그게, 저…” 조전무가 대통령의 뒤편에 서 있는 경호원들과 비서관들을 돌아보며 주저하자, 대통령은 알겠다는 듯, 손을 들어 모든 사람들을 잠시 밖으로 내 보냈다. “이제, 편하게 얘기 하세요.” “예… 대통령님.” 조전무는 입을 열려다 결국, 자신의 앞에 놓인 꽤나 값비싸 보이는 찻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무슨 맛인지도 모를 맛의 붉은 색 액체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그제야 얼어붙었던 입에 조금은 온기가 도는 것 같은 조전무였다. “대통령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대한축구협회의 수장인 정회장이 올해를 끝으로 더 이상 회장직을 맡지 않겠다고 해서 말입니다.” “아, 그얘긴 전해 들었습니다. 아마, FIFA인가? 그쪽 부회장직에 더 신경을 쓸 모양인가 보더군요.” “예,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결국,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다시금 차 한모금을 들이킨 조전무는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자리, 제가 취할까 합니다.” “호오, 그래요? 뭐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라면 굳이 날 찾아올 것 까진 없지 않나?” 살짝 반말이 섞이기 시작하며 간단하게 조전무를 낮추는 모습에 평소같으면 불 같은 화를 냈을법도 했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었다. “예,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게 아니라 월드컵 유치에 관한 말씀입니다.” “응? 월드컵? 그건 이미 한 번 했었잖소?”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일본도 2018년이나 2022년 유치를 위해 월드컵 유치 신청을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보의 신뢰도도 꽤 높은 편이구요” “일본이?”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고향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귀가 솔깃해지는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젠장, 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일본사람인 거야?’ “그래서… 일본의 계획을 방해하겠다 뭐 그런…?”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희도 참가 신청을 하는 모양새만 갖추고나면, 가능성이 없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것이고, 그러면 좀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는 대표팀에도 관심이 생길 겁니다. 그러면 스폰서들의 지원금 폭이 늘어날거고.” “지원금?” “예, 약소하지만 그 지원금을 대통령님께서 좋은 데 써 주십사 드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아흔아홉을 취하고 있는 부자들은 백이면 백, 나머지 하나를 취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는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니었고, 대통령이라고 별반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적어도 지금의 저 탐욕스런 눈빛으로만 판단하기에도. “그래, 뭐 나쁘지 않은 생각 같구먼. 그래서 내가 뭐 도울 거라도 있는건가?” “그게… 실은” 순간 대통령과 조전무의 시선이 부딪히며 탐욕의 크기를 서로가 재어보았지만, 결국 먼저 눈을 내리깐 건 역시나 조전무일 수 밖에 없었다. - “어? 왔다!”, “어디어디!”, “저기 이영후다!” 눈썰미 좋은 한 기자가 발견한 공항 입구에는 조금은 긴장한 듯한 이영후가 홀로 서 있었다. “크하하! 됐다 됐어! 이제 대표팀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구먼, 안그렇습니까 노감독? 크하하하!”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조전무는 웃음을 멈출 줄을 몰랐고, 노감독은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영후의 얼굴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영후 또한, 노감독에게 해야만 할 이야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왔으니, 됐다.” 그것뿐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역사적인 재결합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기자들은 순간 맥이 빠져버리는 듯 했지만, 이내 엄청난 질문공세와 함께 공항 로비를 환하게 만들정도로 스트로보의 불빛이 쉴새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 “아빠! 빨리빨리~!” 캔맥주와 오징어를 진열대에서 집어 들자마자 골방으로 후다닥 뛰어들어오며 혜미가 다그쳤지만, 규식은 혜미에게 캔맥주를 건네 받고서야 TV전원을 켰다. “얌마, 니네 감독 선발도 아니라면서 뭐가 그리 급해?” “축구는 흐름이라고 한게 누군데 이러셔? 흐름을 읽으려면 당연히 처음부터 봐야지, 안그래요 아버님?” “뭐, 그건 그렇지. 어라? 야?” “또 뭐?” “근데 왜 맥주가 두개냐?” “하나는 사랑하는 우리 아버님꺼, 하나는” 혜미가 배시시 웃으며 슬쩍 자신의 품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규식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쭈? 요새 훈련이 힘들다며?” “그러니까, 한잔 쭉…어어, 왜 그래 또!!” 규식이 혜미의 입 바로 앞까지 다다랐던 맥주 캔을 빼앗자 혜미는 입이 한 주먹이 나온 채 규식을 흘겨보았지만, 규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저기 가서 우유나 가져와. 유통기한 한참 남은 걸로.” “칫! 알았어~!” 일부러 더 ‘퉁퉁’ 소리를 내며 걸어 나온 혜미와 맞물려 ‘딸랑’ 소리와 함께 혜미 또래의 남자아이가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왔지만 예상치 못했던 듯 곧바로 혜미와 마주치자 문도 채 닫지 못한 채 그만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단순한 손님이라고만 여긴 혜미는 의아해하긴 했지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오세요.” “아… 예, 예…” 그제야 마법에 풀린 듯 다시금 움직이는 남학생은 그러나 마치 로봇이 걸어다니는 양 너무나 어색하게 진열대로 향했고 냉장고에서 우유 하나를 꺼내든 혜미는 갑작스런 손님 때문에 방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오줌마련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하지 못했지만, 그 남학생 또한 엉뚱한 생리대 진열대 앞에 선채로 혜미를 힐끔힐끔 쳐다보느라 규식이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얌마.” “헉!” 그리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니었는데, 규식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당황한 남학생은 그만 휘청거리다 넘어지며 진열대를 붙잡았지만 조악한 진열대가 소년의 몸무게를 버텨줄리 만무했기에 결국 뒤로 벌렁 넘어지며 색색깔의 생리대 더미에 묻히고야 말았다. “허, 거참 녀석하고는…”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쓰러진 남학생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 혜미와 그런 혜미의 손길이 너무나 당황스러워 귀까지 빨갛게 물든 남학생을 번갈아 바라보던 규식은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혜미녀석… 연애 같은 걸 할 나이가 된건가…’ 혜미가 축구를 하기로 한 뒤로, 혜미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기웃거리던 놈들 덕분에 점점 삼거리 슈퍼의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고 있었지만, 도대체 자신들이 뭘 사기 위해 왔었던 건지도 잊어버린 바보 같은 녀석들에게 금쪽 같은 혜미를 맡기고 싶은 마음은 정말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이녀석은 조금 다른 것도 같아 보여서 규식은 요새 알게 모르게 관찰하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이봐 학생,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돌아다닐 땐가?” “예? 아뇨, 저는”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축구선수가 돌아왔는데, 축구 안보냔 말일세.” “아, 저 그게… 전 축구를 잘 몰라서요… 그닥 좋아하지도 않구…” “뭐엇!” 아뿔싸! 혜미는 그만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자신의 아빠 면전 앞에서 축구가 싫다는 말을 하다니… 비록 혜미가 축구에 빠질까 내심 감춰오기는 했었지만, 혜미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규식이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어릴 적부터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혜미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감출 필요가 없어진 이후부터는 감추기는커녕, 축구 비하 발언이란 건 절대 용서치 않는 규식이었기에 지금은 사단이 나도 크게 날 상황이었다. 그런데… “크크크… 그래? 축구를 잘 모른단 말이지? 하하하하!” 축구를 모른다는 남학생의 말에, 규식은 갑자기 시원스레 웃고 있었고, 혜미는 남학생을 바라보며 눈으로 다그쳐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남학생의 도리질 뿐이었고, 결국 반대로 혜미에게 눈으로 물어오는 남학생에게 혜미는 어깨를 으쓱거려야 했을 뿐이었다. - “6회 연속을 넘어 7회 연속 월드컵 진출에 도전하는 거침없는 붉은 전사들의 질주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안녕하십니까 신승댑니다. 오늘 해설에는 이상윤 해설 위원이 함께 합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간 무승부만을 거듭해온 대한민국 대표팀이 오늘 요르단과의 경기에서 과연 승점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요?” “그렇죠? 게다가 지난 5월 31일에 서울에서 벌어진 홈경기에서는 아쉽게 무승부로 그쳤었는데요, 일주일만에 입장을 바꿔서 이번엔 어웨이 경기를 갖게 됐습니다.” “지금 순위가 나오고 있죠?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에 이어 한 경기 덜 치른 가운데 승점 5점으로 조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 큰 실점 없이 승리를 거둔다면 승점은 8점으로 같아지겠지만, 골득실차로 조 선두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있었던 경기에서도 그랬듯이 요르단은 전형적으로 선수비 후역습 형태를 띌 것으로 보이고 있어서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게다가 요르단의 카운터 어택에 지난 경기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대한민국 아니었습니까? 오늘도 후반까지 걸어 잠그며 역습을 해올게 분명한데요. 결국 오늘 경기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선취 골을 얻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되겠습니다.” “골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까요? 결국 엔트리에 이영후 선수가 포함이 되었는데요?” “네, 아마도 감독 판단으로는 수비보다는 공격에 치중해야 하는 만큼, 골을 넣을 줄 아는 선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소속팀도 없고 현역 선수도 아닌 이영후의 대표 발탁에 언론이 들끓고 있죠?” “아무래도, 대표팀의 근간은 K리그 아닙니까? 리그에도 충분히 통할만한 공격수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재량으로 한동안 축구계를 떠났었던 이영후를 뽑았다는 것에 특히 선수들의 불만도 없진 않을 겁니다.” “네, 요르단 라인업이 나오고 있습니다. 골키퍼 엘라마이레, 카미스, 압델라만, 알무타심, 하수네 카셈,바와드, 압달라 디브, 알사이피, 마탈카, 하템 아켈, 압델 파타, 그리고 마르티뉴 빈가다 감독이 이끌고 있습니다…” 잠시 캐스터와 해설자간의 '이영후' 발언에 살짝 속도 상했지만, 이어지는 한국팀 선발 라인업에 영후의 이름이 없자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남희의 두근거리던 가슴은 조금은 진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지 카메라가 노감독의 모습을 비추는 사이 스치듯 지나간 트레이닝 복 차림의 영후의 모습에 남희의 가슴은 다시금 터질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요르단의 암만 주 경기장. 그저 축구 경기일 뿐임에도 왕실의 왕자까지 참석할 정도로 축구에 관한 열기가 경기장에 가득 차 있었기에, 실로 오랜만에 실전의 감각을 피부로 느껴보던 영후는 긴장감과는 다른, 가슴 깊은 곳에서 부터 끓어오르고 있는 뜨거운 감정을 애써 가라앉혀보았다. ‘그러고보니…’ 처음이었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로 경기를 앞두고 뛰고 싶은 열망을 애써 누른 채 벤치에 앉은 채 경기를 시작했던 적은. ‘이런 기분이었나.’ 단번에 깨달을 수는 없었지만, 언제나 당연히 주전이라고만 생각했던 지난날, 뜨겁게 벤치를 달구고 있었을 동료들의 마음을 영후는 조금쯤 헤아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단 1분을 뛰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뛰어야 겠다고. 그러지 않았다간, 경기에 교체되어 나온 동료와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는 또다른 동료에게 너무 미안할 테니까. 그럼에도 결코 자리에 쉽게 앉지 못하는 영후를 바라보며 노감독은 작게 한숨을 내쉬어보았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 것을…’ 트레이닝 복 속으로 언뜻 보이는 붉은 색 유니폼은 마치 영후가 언제나 입어왔던 것처럼 너무나 멋져 보였지만, 분명 가슴속에는 저 유니폼보다 더 진한 붉은 열정을 감추고 있을 터였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안보일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감독에게는 영후가 겨우 감추고 있는 그 뜨거운 심장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였을까. 아직도 자신의 결정이 잘한 것이었는지 어떤지 노감독은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답답한 지금이었다. ‘늙은이 욕심에 결국 널 예까지 데려오긴 했다만, 흐음… 이제부터가 실로 문제일 터, 부디 네놈이 힘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소리가 호주 심판의 입에서 울리자, 노감독도 영후도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시작부터 달아오르는 녹색의 그라운드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 수림은 차마 앉지도 못한 채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기축구회 아저씨들과 가졌던 한국여대의 첫 연습경기 이후 완전히 선수단의 장단점을 파악해버린 남희가 제시한 새로운 훈련 매뉴얼 중 체력훈련부분이 너무나 혹독했기에 기본 체력이 출중한 수림마저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것이다. 물론 수림은 선수들을 독려하기만 해도 되었을텐데, 그 착한 성격 탓에 안쓰러움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선수들과 하나가 되어 훈련을 하기 시작했으니, 지금 당장 앉기라도 하면 금방 잠들어버릴 것만 같아 벌서듯 선 채로 텔레 비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앗! 감독님!’ 순간 수림은 깜짝 놀라 잠이 확 달아나 버리는 듯 했다. 남희와 마찬가지로 그저 카메라에 스치듯 영후가 나왔을 뿐인데, 마치 월드컵 결승전에 마지막 승부차기 선수로 등장한 것 마냥 가슴이 콩닥거리고 있었다. -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대한민국 팀은 쉴새없이 요르단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요르단은 공격수인 하템 아켈과 압델 파타만을 제외한 전원이 페널티 박스에 몰린 채로 수비에 치중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허둥대거나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대한민국은 강민수와 곽희주만을 제외한 전원이 센터라인을 넘어선 채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축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너무나 일방적인 게임이었고, 도저히 대한민국이 질거란 생각이 들 수가 없어보였다. 게다가, ------------정성룡 오범석, 강민수, 곽희주, 이영표 박지성, 김남일, 조원희, 이근호 --------박주영, 하근명 그야말로, 해외파와 국내파가 어우러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하는 축구선수들의 총집합이었다. 그랬기에 영후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며칠 전 철용이 자신을 공항에 내려주며 했던 이야기를 영후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럼, 다녀올게요.” 자동차 문을 닫으며 인사를 하는 영후를 철용은 차창을 내리고 잠시 불러 세웠다. “영후야!” “?” “아무래도 이야기 해줘야 할거 같아서...” “네? 무슨…?” “실은 에이전트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 뭐든지 호탕하던 철용이 저렇게 미적거리고 있었기에 영후도 간단히 넘길 일은 아닌것만 같아서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철용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확실한 얘기는 아닌데…” 결국, 조심스레 이야기를 하던 철용보다 더 영후 얼굴이 굳어져가기 시작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영후는 철용의 이야기가 그저 자신을 놀리려 하는 선배로서의 장난이길 바랬지만, 철용의 눈빛은 ‘실제상황’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게임을 망치려는 선수가… 있다는 거에요?” 겨우 철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난 영후가 힘들게 정리해서 되물어봤지만, 실은 농담이었다고 이야기해주길 바래봤지만, 철용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영후는 그런 철용의 답에 그저 한 사람만이 걱정스럽게 떠오를 뿐이었다. ‘노감독님…!’ 20부. 그가 넘은 하얀 선.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헤이! 여기!’ 전방의 근명이 겨우 틈새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자, 남일이 곧바로 패스를 해주었지만, 어느새 다가온 알무타심이 헤딩으로 길목을 차단했고, 바로 옆에 있던 압델라만은 곧 의미 없이 전방으로 힘껏 공을 차버렸기에 대한민국 팀은 결국 골대를 비우고 한참을 나와있던 골키퍼 성룡에서부터 또다시 공격작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 고작 서너 번 반복됐을 뿐이었을 뿐이었음에도 근명은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중석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이상한 피리소리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주영과 더불어 수비를 끌어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있었어도, 도무지 8명이 가득 찬 페널티에어리어에는 전혀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날고 긴다는 지성이 공간을 창출해 준다 해도 골을 넣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이자, 경기가 시작되기 전, 라커룸 밖 복도에서의 전화통화를 떠올리며, 근명은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난 지금 골이 필요하단 말이야!!!’ - ‘뭐야, 시합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거야?’ “누가 그렇대요!!!” 자기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금 조심스럽게 핸드폰에 집중하던 근명은 이미 충분히 몸을 풀고 났는지, 유니폼이 군데군데 땀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그저, 긴장을 풀어줄 누군가와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현실이 기쁘고 또 기뻤을 뿐이었으니까. “시합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란 말 하려고 전화한 거에요.” ‘내 직업이 뭔지 잊었냐? 시합 뛰는 너보다 내가 더 자세히 보고 있을 거다.’ “딴 건 볼 것도 없어요. 그냥 나만 보면, 기사쓰기엔 충분할 테니까.” ‘어쭈?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냐?’ “잊지 않고 있죠?” ‘뭐가?’ “내가 더 많이 넣을 거에요. 영후 선배보단. 두고 보라 구요.” ‘……’ “여보세요? 듣고 있는 거에요?” ‘…… 듣고 있어.’ 수화기 건너편의 하연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노트북 액정화면을 잠시 접으며 애매한 감정을 애써 추스르고 있었고, 근명 또한 막 첫사랑을 시작하려는 소년처럼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벽에 기댄 채 축구화 앞 코 부분으로 연신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열심히 해. 지켜볼게.’ 지켜볼게… 라고 하연이 말하는 순간, 환호하며 자리에서 몇 미터는 뛰어오르려고 했던 근명은, 그러나 뒤를 돌아본 순간 영후의 얼굴이 들어오자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뒤로 감추며 종료버튼을 누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래?” “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니까… 놀랬잖아요!!” “아… 미안.” “됐어요!” 하연과의 달콤한 통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영후 덕분에 끊겨버렸기에 근명은 괜히 심통을 부리며 사라졌지만, 영후는 그런 근명의 행동을 왠지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 ‘설마…?’ 경기가 시작된 이후로 영후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뜬금없는 경기 전 전화통화와 영후 자신을 보고 놀란 점. 게다가 해외 진출의 가능성이 꽤 높은 점. 그리고… ‘저렇게 밸런스가 엉망일 이유가 없는 데…’ 원래 의욕이 넘치는 선수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욕심만 앞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더더욱 걱정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비수들을 끌어내기는커녕, 그들과 뒤엉킨 채 누군가 밥상만을 차려주길 기다리며 ‘골’ 말고는 동료도 경기의 템포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일부러 열심히 하는 척하며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어떠냐, 오랜만에 실전 경기를 바라보는 기분이?”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앉지도 못한 채 경기를 근심스레 바라보던 제자가 조금 걱정스러웠던지 노감독은 지루한 공격작업만큼이나 덤덤한 목소리로 영후에게 말을 건넸다. “글쎄요. 조금 답답하네요.” “’답답하다’라…” 영후의 걱정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경기를 뛰지 못해 답답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노감독은 입꼬리를 올리며 조금은 미소 지을 뻔도 했지만 아직은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네놈의 희생, 내 평생 간직하마… 남은 여생이 얼마가 됐든지 말이다.’ 노감독의 속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건지 어떤 건진 몰라도,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노감독과 눈이 마주친 영후는 마치 ‘내가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어 보였고, 그 웃음에 노감독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예상과 별다르지 않게 일방적인 공격과 수비가 이루어지며 어느덧 전반 45분이 거의 다 되어 갈즈음, 좁은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영과 감각적인 이대일 패스를 주고 받으며 압달라 디브와 알사이피를 순간적으로 벗겨낸 근명은 골키퍼와 맞닥뜨리자 마자 강력한 오른발 슈팅을 날렸지만, 슛의 각도가 너무나 정직했던 탓에 그만 엘라마이레 골키퍼의 가슴팍에 안겨주고 말았다. “씨발!!!” 완벽한 골이었다고 생각한 근명은 끊임없이 자책하며 자신의 얼굴을 잡는 카메라를 상관하지 않은 채 마구마구 욕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정말 욕을 해야 할 상황은 그 뒤에 곧바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격수 하템 아켈과 압델 파타는 엘라마이레 골키퍼가 공을 잡자마자 곧바로 전방을 향해 내달렸고, 골키퍼는 꽤 정확한 롱 킥을 선보이며 역습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잡아!” 코칭 스텝의 외침과 동시에 그나마 요르단 공격수들과 비슷하게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영표와 범석은 황급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하템 아켈이 공을 몰며 득달같이 달려가는 와중에 영표는 감각적인 태클로 공을 흘려버렸지만, 운이 없게도 그 공은 압델 파타에게 흘러가버렸기에 잔디밭에 쓰러진 영표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고 부디 범석이 저지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막아라 제발!’ 영표 뿐만 아니라 전방에 나가있던 선수들과 벤치의 코칭 스텝, 그리고 후보선수들의 마음은 모두 한결 같았다. 하지만 페널티박스에 진입해서야 겨우 압델 파타를 따라잡은 범석은, 그러나 어깨싸움에서 너무나 간단히 밀려 넘어져버리며 골키퍼 정성룡과 일대 일 상황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결국 홀로 골문을 지켜내야 할 운명에 처해진 성룡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공격수의 발을 노려보았다. ‘어디냐! 왼쪽? 오른쪽?’ 각을 좁히며 앞으로 튀어 나오던 성룡은 압델 파타의 디딤발 형성 과정을 기다리며 방향을 예측하고 있었고 이내 슛을 하려는 듯 압델 파타의 왼발이 고정되며 오른발로 슈팅을 때리기 직전, ‘왼쪽이다!’ 압델 파타의 오른발에서 공이 떠남과 동시에 왼쪽으로 성룡이 몸을 날려봤지만, 성룡의 그런 의도는 이미 간파했다는 듯, 압델 파타는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공의 왼쪽 부분을 차올려 오른쪽 포스트로 슛을 날렸고 공은 유유히 대한민국의 골망을 흔들고야 말았다. 0 : 1 순간 암만 스타디움은 관중들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 했고, 고작 단 한번의 역습으로 실점을 허용한 대한민국 선수들은 모두 허망한 얼굴들이었다. 이제 이기고 있는 팀은 요르단이었으니 지금보다 더욱 수비가 두터워 질 것이었고, 당연히 골을 넣기는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어쩌면 영후만이 짊어지고 있는 무겁디 무거운 짐이었을지도 몰랐다. ‘저 녀석… 이었나…?’ 이윽고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소리가 호주 심판의 입에서 울려퍼지자, 어깨가 축 쳐진 채로 경기장을 빠져 나오는 선수들이 영후를 스쳐 지나 갔지만, 영후의 눈은 범석에게 고정된 채로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아빠? 저런 게 국가대표 맞아!?” “……” 혜미는 단순히 대한민국이 한 골 실점을 했다는 사실에 씩씩대며 흥분을 한 채 무턱대고 비난을 퍼붓고 있었지만, 수비수 출신의 규식 또한 그리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일부러…?’ 하지만, 무엇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태극마크를 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때가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 태극마크가 이글거리는 것 이상으로 선수들은 자신들이 가진 백 퍼센트를,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곤 했고 또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대표 선수가 짊어져야 할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빠! 쟤 곯아떨어졌잖아!” “응? 뭐?” 너무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었던 규식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혜미 덕분에 정신을 차려보니, 고작 캔맥주 두 개 정도에 해롱대며 잠들어있는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긴 뭘 어째? 장에서 이불이라도 꺼내 덮어주지 않구. 감기 걸릴라.” “아니 생판 모르는 애보고 뭐 하러 축구를 같이 보재? 게다가 안 마신다는 술도 일부러 먹게 하고!” 툴툴거리는 혜미를 바라보던 규식은 갑자기 반달눈을 하며 놀리듯 입을 열었다. “너 임마, 여태까지 연애 한 번 못해봤지?” 뜬금없는 규식의 돌발질문에 혜미는 잠시 멈칫거렸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들어보았다. “가…갑자기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내가 안하고 싶어서 안했겠어? 그게 다 엄마 대신 아빠 챙기느라…” 장난처럼 얘기를 하다가 혜미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엄마 이야기를 꺼내고 나면, 언제나 무겁게 가라앉는 아빠의 모습을 또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조심스레 혜미는 규식을 바라봤지만, 규식은 심각해지기는커녕 대견스러운 눈으로 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징그럽게…” “이 녀석 말이다. 아빠 맘에 좀 들더라. 자고로 남자는 남자가 판단하는 거다.” “그… 그래서 뭐? 나보고 얘랑 사귀기라도 하라는 거야 지금?” “꼭 그러라는 건 아닌데… 어쨌든 괜찮은 놈 같다 이거지 뭐… 보자… 맥주가 다 떨어졌군.” 규식은 맥주 핑계를 대며 골방을 나갔고, 멍하니 남겨진 혜미는 뾰로통한 얼굴로 구석에서 술에 취해 잠든 남학생을 바라보다 주먹을 쥐어 한대 콕 쥐어 박으려다 말았다. “아빠가 널 살렸다.” 혜미는 화장실에 가려 일어서다, 아무 상관없는 윤지가 떠올랐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자신이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그러면 윤지는 뭐라 할까. 아니, 윤지를 두고 자신 혼자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평소답지 않은 아빠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돼서인지 몰라도 괜히 이상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지만, 혜미는 이내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라커룸에 들어서자 마자, 근명은 범석의 멱살을 잡고 다짜고짜 벽에 밀어붙였다. “그러고도 너 같은 새끼가 국가대표 수비수냐? 그 따위로 할거면 당장 때려 쳐!!!” “이 자식이! 그러는 넌 뭘 잘했는데? 그렇게 죽어라 찔러줬는데도 골 하나 못 넣은 건 누군데!!!” 결국, 범석도 폭발해 근명의 멱살을 잡은 채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 뭣들 하는 겐가!!!!” 근명과 범석, 그리고 다른 모든 선수들의 시선은 순간 모두 노감독에게로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조용조용한 분이기만 했었던 노감독의 엄청난 일갈에 다들 놀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끝났나? 그게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난다 긴다 하던 네놈들의 한계는 고작 여기까지였던 게냐!!!” 그제야, 근명과 범석은 눈을 부라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떨어졌고, 이내 범석은 라커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뿐만아니라 다른 선수들 또한 몸만 라커룸에 남아있었을 뿐이지 마음은 이 귀찮은 A매치를 끝내고 팀으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었기에 노감독은 그런 선수들의 속내를 어렵지 않게 읽어내고는 잠시 한숨을 내 쉬더니 다시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가슴팍에 태극마크 한번 달아보는 걸 평생의 목표로 삼는 미련한 놈도 있다는 얘길 하고 싶구나.” 하지만, 당장 이런 이야기가 선수들에게 먹힐 리 만무했기에, 노감독은 경기장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줄 단 한 명의 남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영후야.’ - “범석아.” 라커룸을 뛰쳐나오던 범석은 복도에 기대 서 있던 영후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섰다. “실점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눈빛이라는 걸, 영후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때문에 영후는 들고 있던 음료병을 흔들어보였다. “자, 마셔.” 짧은 10분을 이렇게 허비하고 나면 후반전엔 더욱 힘들어 질 것이었기에, 영후는 이온음료와 물을 일정비율로 희석한 물을 건넸고, 가뜩이나 목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던 범석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물병을 받아 들었고, 꽤나 달게 물을 들이키고 난 후 이내 영후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머리를 드는 것도 지쳐 보이던 범석은 그러나 말없이 고개를 들어 영후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 영후는 몇 번이고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 면? 혹은 틀리다 면? 결과가 어찌되든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유망한 선수가 그런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그 짐을 덜어주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난 네가 대한민국 최고의 오른쪽 윙백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최고의 윙백!’ ‘최고’라는 수식어에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부르르 전율이 일었지만, 차마 영후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범석은 고개를 떨궜고, 영후는 그 남자의 어깨를 따뜻하게 다독여 주며,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자신의 꿈은 그 누구의 힘을 빌려 이룰 순 없는 거야. 그러니” ‘누구’라는 단어에 꿈틀하는 범석의 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던 영후였지만, 그 손을 자신의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주며 말을 이었다. “후반엔 네 녀석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줘라.” 참으로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어쩐지 영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범석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것 같아 보였고, 운동장으로 나가려는 영후를 붙잡으며 범석이 입을 열었다. “잠깐… 제 이야기… 들어줄 수 있어요…?” 너무나 간절해 보이는 범석의 눈빛에 영후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잠시 후 범석은 고개를 떨군 채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윤아 네가 복덩이는 복덩인가 보다. 이런 물주들도 잘 물어오고 호호!” 윤지의 예명을 부르며 희희낙락 하는 마담 언니의 이야기 덕분에 윤지는 겨우 잊고 있었던 축구 경기가 떠올랐 다. 요르단과의 경기는 분명히 영후에게 ‘덫’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지의 마음은 가시방석 같았다. 그리고 사실은 경기를 마치고 실망할 선수들이,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영후가 걱정되고 있었던 것이 다. 조전무의 마수가 분명히 실제 경기에도 뻗쳐있을 것이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기에 윤지는 지금 이렇게 쉬는 날 임에도 요정에 나와 일을 하며 애써 텔레비전 중계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젊고 힘 좋은 것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는데, 전무님께서 돈까지 두둑하게 챙겨주신다니 얼마나 좋으니?” ‘미친년.’ 윤지는 속으로나마 마담언니를 비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자신도 별반 그녀와 다를 것이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 훨씬 더 돈이 필요한 건 다름아닌 윤지였으니까. ‘아빠 엄마를 찾으려면, 그래서 셋이서 행복하게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돈을 위해서 악마 같은 조전무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던 윤지는 며칠 전 가게를 찾아온 조전무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 “어머, 전무님! 그러니까 우리 애들 전부랑 축구 대표팀 선수들 전부랑요? 정말이세요?” 룸에서 조전무의 팔짱을 낀 채 딸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어주며 마담이 물었고, 조전무는 입에 들어온 딸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조금은 쳐졌지만 충분히 풍만한 마담의 가슴을 주물러대며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빈말하는 거 봤나? 힘든 경기 하고 돌아온 선수들에게 기운도 북돋아 줄 겸, 서울로 돌아오면 호텔에 가서 밤새 다독거려 주라고.” “근데, 서울로 와도 경기가 또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있지, 그러니까 더더욱 자네들이 필요하다는 거 아닌가? 피로를 제대로 풀려면 합방만큼 좋은 게 또 있겠나? 그러니 밤새 즐기게 해 주라고 흐흐흐!” “암요 암요! 호호호!” 장죽이 맞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서 조전무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지는 조전무의 끝없는 계획에 치를 떨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전무의 바람대로 선수들이 이곳의 여자들과 경기 전날 밤 섹스를 나누게 된다면 그 다음날의 경기력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었다. ‘감독님…’ - 이야기를 마친 범석이 화장실로 가버린 후에도 한동안 영후는 멍하니 복도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국의 팀 승리를 위해 심판의 매수는 못할망정, 팀의 패배를 위해 저 어린 선수의 미래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다니. 결국 축구는 여전히 정치의 더러운 수렁에서 한발자국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 거리고 있던 것이었다. 노감독의 젊은 시절에도 그랬듯.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범석의 말에 의하면 조전무와의 자리에서 범석은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고 하니, 후반전엔 조금은 부담감을 털어버린 채 경기에 임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영후는 불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조전무에게 범석이 만으로 충분했을까?’ “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게냐?” 생각에 잠겨있던 영후에게 꽤나 퉁명스런 노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선수들은 하나 둘 경기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예?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 순간에도 영후는 끊임없이 고민을 했다. 조전무와 범석의 일을 노감독에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만일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노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언제 터져도 터질 시한폭탄을 지니고 있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노감독은 당연히 범석을 교체해 버릴 것이었다. 경기를 책임져야 하는 노감독과 한 젊은 선수의 미래가 걸린 갈림길에서 영후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다…’ “놈! 이렇게 넋을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게야?” “?” “경기장에 나가있는 놈들처럼, 하프타임에 충실히 몸을 풀어놨어야지!” “아…!” “후반에 바로 투입하기는 글렀구먼, 쯧!” 이내 혀를 차며 뒷짐을 진 채 경기장으로 걸어나가는 노감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후는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실타래처럼 묶여있는 범석과 노감독의 문제를 적어도 자신이 피치에 들어서는 순간 어떻게든 해결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것도 같았다. - 이윽고 후반전이 시작됐지만, 경기 양상은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무의미한 크로스 남발에 중거리 슛은 번번히 밀집수비에 막히기 일쑤였고, 요르단은 아예 공격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기에 참으로 지루한 상황이 남은 시간을 좀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경기장 밖의 분위기는 아주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대한민국 벤치에 있던 한 선수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터치라인 밖에서 몸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먼저 대한민국에서 교체카드를 빼 들 것 같군요?” “네, 지금 이영후 선수가 몸을 풀고 있죠?” “그런데… 웃고 있는 거 같은데요. 저 웃음의 의미는 뭘까요?” “아마도 공격수로서의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영후 선수 부디 자신감에 그치지 말고, 대한민국 팀의 골 가뭄에 단비를 내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바로 교체 하는 군요? 누가 교체 되어 나올까요?” “김남일 선수가 교체될 것 같죠?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몸 상태가 그리 좋지도 않았는데 자원했다고 하는데요. 열심히 뛰어 줬어요.” “이영후 선수가 트레이닝 복을 벗고 있습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붉은 태극 유니폼을 입은 이영후 선수가 교체라인에 들어섭니다.” - “나온다!!!” 수림은, 갑자기 썰렁했던 자신의 방이 - 비록 텔레비전 속이었지만 - 그 남자의 등장만으로도 그때 그 꿈같은 날들 처럼 따뜻해지고 꽉 차는 기분이 드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고, ‘감독님…’ 남희 또한, 텔레비전을 지켜보며 한국여대 축구팀에 접목시킬 수 있을만한 작전 구상과 포지션 이동, 그리고 시간대별 체력적 소비에 관한 통계 자료를 작성하다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왔다! 나왔어!!!” 혜미와 규식은 누가 활달한 부녀 아니랄 까봐 구석에서 잠들어 있는 남학생이 깨던 말던 방안에서 방방 뛰며 난리 법석을 피워대고 있었으며 ‘영후야…’ 경기를 보며, 기사 작성에 여념이 없던 하연마저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육원의 원장과 아이들도, 한국여대의 총장 및 선수들과 그 선수들의 추종자들도, 마지막으로 철용과 수많은 에이전트들도, 비록 뿔뿔이 흩어진 채로 장소는 제 각각인 채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이영후, 그가 돌아왔다고. 다만, 윤지만이 ‘지금쯤 후반전이 시작됐겠지’ 라는 체념과 함께, 길고 긴 새벽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도하면서 이름 모를 남자의 몸 위에서 의미 없는 교성을 내질러가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 ‘이것만 넘으면…’ 영후는 터치라인 바깥에서 남일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잠시 하연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선을 넘으면 자신은 선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선수가 아닌, 그토록 염원해 마지않던 ‘국.가.대.표.’ 선수로. 그리고 저기, 자신을 이 선의 안쪽으로 이끌어 줄 교체 선수가 한시가 아깝다는 듯 뛰어나오고 있었고, 이내 영후를 끌어안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부탁한다.” 영후는 대답대신 남일에게 빙긋 웃어주었고, 그 미소를 읽은 남일은 너털웃음을 짓더니 코칭 스텝에게 받은 타월을 어깨에 두르며 벤치에 앉았다. “수고 많았다.” 훈련 전부터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남일이었건만, 허리 라인에 있어서 달리 대체할 자원이 부족했던 터라 노감독의 고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때, 남일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출전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해왔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일분 일초를 사력을 다해 플레이 해준 것으로도 노감독은 남일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랬기에, 평소에 않던 인사를 건넸던 것이었고. 그래서였을까? 남일은 꽤나 평소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노감독에게 슬쩍 질문을 건네보았다. “감독님. 근데, 영후에겐 뭐 따로 지시하신 게 있습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다.” “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노감독과 반대로 남일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노감독과 영후의 사제관계가 돈독하다고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남일이었던 것이다. ‘국가대표팀에서, 그것도 프리롤이라…’ 하지만, 영후의 미소도 그렇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노감독을 보니 남일은, 후반전은 생각보다 재밌게 흘러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영후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근명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하연에게는 큰소리를 뻥뻥 쳐두긴 했었지만, 솔직히 영후의 플레이를 본 이후로 영후보다 골을 많이 넣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파주NFC에서의 연습경기 이후로 언제나 꾸던 꿈 속에서조차 영후보다 많이 골을 넣는 꿈같은 것은 한번도 꿔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압박감이 상당했었던 것이다. 그나마 영후가 상대팀 선수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 까.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는 것 또한 남자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 근명은 꽤나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그때처럼 쓰러지지나 마쇼.” “그때? 아…” 그제야 영후도 그때의 연습경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이내 아군과 적군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페널티에어리어를 벗어나 하프라인과 페널티에어리어 사이 공간으로 유유히 자리를 옮겼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요?” “골 넣으러~” “골대는 이쪽이라구요! 이쪽!” 꽥 소리를 질러대는 근명을 뒤로 하고 잔디밭에 놀러 나온 소년처럼 너무나 즐겁게 뛰어가는 영후의 모습은 근명 뿐만 아니라 요르단 선수들까지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영표의 드로잉으로부터 다시금 경기가 속개되자 영후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180도 변하기 시작했다. “원희!” 영표로부터 공을 받은 원희에게 영후가 사인을 보내자 원희는 영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영후가 자리잡고 있던 곳은 참으로 이상한 공간이었다. 요르단 선수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밀착되어있는 곳도 아닌. 패스를 보내게 되면 요르단 선수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충분히 패싱 루트를 차단당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커트 당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연신 사인을 보내는 영후에게 결국 원희는 패스를 조금은 빠른 속도로 보냈고, 아니나 다를까 충분히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한 알 사이피가 득달같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못살아, 그러길래… 어?’ 패스를 하자마자 판단미스라고 생각한 원희가 다시금 알 사이피가 달려가는 쪽으로 다가가려는 찰나 영후는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폭발시키며 원희의 패스를 받음과 동시에 알 사이피가 튀어나온 공간으로 드리블하며 그간 완벽하기만 했던 수비공간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어떻게 저럴 수가…’ 원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일어난 상황으로만 보자면, 영후는 일부러 수비가 공을 커트하길 유도한 것이고, 더불어 수비보다 자신의 스피드가 더 우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공간을 홀로 창출해 낸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전부일 것이었다. 겨우 한 명을 벗겨냈을 뿐, 저 오밀조밀한 수비벽을 허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원희의 예상대로 마탈카와 압달라 디브가 득달같이 영후에게 달려들었다. ‘패스?’ 결국은 줄 곳이 없을 영후는 다시금 원희에게로 백패스를 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전반의 상황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라고 모두가 생각할 즈음, 영후는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수비수들을 향해 돌진했고, 당연히 패스를 할거라 생각했던 요르단 수비수들은 적잖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막아! 공간을 허용하지마!” 골키퍼 엘라마이레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압달라 디브와 마탈카는 전력으로 영후에게 접근했고, 결국 영후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 마냥 움직일 곳도, 패스할 곳도 없어 보였다. “잡았… 어?” 수비수 둘에게 완전히 묶인 것만 같았던 영후는 그러나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아예 수비수들이 완전히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슬쩍 발바닥으로 공을 자신의 몸 쪽으로 긁었고, 백스핀이 걸린 축구공은 마법에 걸린 듯 영후의 발등으로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어?” 툭. 어리둥절한 수비수들을 바보로 만들듯, 발등에 오른 공을 발목만으로 공중으로 툭 차올린 영후는 순간 도약 없이 뛰어올라 간단히 헤딩 패스를 지성에게 해주었다. ‘좋은 공간을 만들고 있었군 지성.’ 역시 프리미어리거답게 쉬지 않고 움직이며 만들어놓은 공간에 영후는 어렵지 않게 공을 넘겨 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패스를 받자 마자 공에 가속도를 붙이며 페널티에어리어 안으로 진입을 하려던 지성의 뒤로 바와드가 따라붙었지만, 홀로 지성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어찌됐든 페널티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 어쩔 수 없이 태클을 시도했다. 퍼버벅! 삐~익! 꽤나 거친 태클이 들어갔지만, 태클 당하는 것에는 이골이 났는지 지성은 휘슬이 울리자 곧장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며 영후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결국 영후와 지성의 공간 창출은 수비하던 바와드로 인해 맥이 끊겨버리고 말았지만 골대를 바라보는 좋은 자리에서의 프리킥 찬스를 얻었으니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차지?” 프리킥 지점에 주심이 공을 놓고서 요르단 선수들을 9.15m 밖으로 세우는 동안 주영과 지성, 그리고 근명은 적잖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프리킥 지점에서 골대까지의 거리는 30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였다. 전반전에도 몇 번 이런 기회가 찾아왔었지만, 그때는 골대 쪽으로 뛰어들어가는 선수들의 머리를 겨냥한 프리킥을 시도했었는데,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번엔 그와는 다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이른바 직접 슈팅을 노릴 강력한 키커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장거리 프리킥 전담 선수들은 모두 부상 및 컨디션 저하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만에 얻은 좋은 기회였음에도 어쩌지 못하는 한심한 상황 덕분에 선수들은 허탈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내가… 차도 될까?” - “아빠 아빠! 감독님이! 우리 감독님이!” “나도 봤다.” 분명, 영후가 프리킥 지점에 놓인 공을 다시금 집어 들어 유니폼에 쓱쓱 닦는 영상이 고스란히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공을 직접 만지는 선수가 프리킥을 차게 된다는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영후가 프리킥을 준비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빠, 저 정도 거리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은 거야?” “글쎄, 수비수 입장에서 보면 낮고 빠르게 골키퍼와 수비수 사이로 차는 게 정석이긴 하지. 그렇게 하면 골키퍼는 골대를 비우고 나와야 하는 가, 아니면 수비수에게 맡겨야 하는 가에 대해 순간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어려울 테고, 수비수는 수비수대로 공격수들을 막기 위해서 전방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뒤쪽으로 공이 날아오게되니 그것만큼 힘든 것도 없을테지.” “그치만 전반엔 모두 실패했잖아.” “그야…” 전반전엔 너희 감독이란 놈이 없었으니까, 라고 말하려다 규식은 캔맥주 한 모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영후가 ‘정답’을 알려줄 테니까. - “어쩔 셈이에요?” 주영이 영후의 의중을 알고 싶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영후는 그다지 특별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 맥 빠지는 답을 던져줬는지도. “뭐 나라고 다르겠어? 되도록 머리에 맞춰줄 테니까 다들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구.” 결국, 영후를 제외한 전원이 페널티에어리어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영후는 자신과 골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네 명의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그 선수들은 주심의 눈을 피해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오며 영후가 직접 슈팅을 때리지 못하도록 각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영후는 심판에게 항의하기는 커녕 되려 이상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다가와라…’ - “놈… 그걸 할 생각인가…?” “네? 그거… 라뇨?” 노감독의 혼잣말을 놓치지 않고 남일이 물었지만, 노감독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뭐, 저놈의 잔재주라고나 할까?” 적지에서 지고 있는 팀의 감독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웃음 가득한 얼굴에서 남일은 그 감독의 그 제자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쩐지 이 경기에서 아니, 앞으로의 경기에서도 결코 질 것 같은 기분은 절대로 들지 않는 남일이었다. -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의 경합을 애써 진정시키고 나자 그제야 주심은 휘슬을 불었고, 그와 함께 긴장한 수비벽들은 점점 더 야금야금 영후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됐다!’ 영후는 천천히 그러나 가속도를 붙이며 공을 향해 달려나갔고, 공의 왼편에 말뚝을 박듯 왼발을 잔디가 푹 꺼지도록 지지시키자마자, 오른발 끝으로 공의 한 가운데를 정확하게, 그리고 힘껏 찼고, 수비수들은 얼굴과 급소를 손으로 가린 채 공의 각도를 줄이고자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한편, 영후의 발 끝에서 공이 떠나자 마자 대한민국의 공격수들은 모두 허공을 바라보며 공이 날아오길 기다렸고, 그건 수비수와 골키퍼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촤~악! 삐~익! 모두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공은 요르단의 골 문을 통과한 상태였고, 주심은 단호하게 골을 인정하는 휘슬을 불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아아아~!”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지만 어쨌든 골이 됐기에 모든 선수들은 일제히 영후에게로 뛰어가 엎치고 덮쳤고, 그런 선수들의 칭찬에도 웃어주기만 할 뿐 영후는 과한 세레모니 같은 걸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노감독을 바라보며 자신의 유니폼에 박힌 태극마크를 끌어당겨 키스를 했고, 그에 화답하듯 노감독은 작은 박수를 몇 번 치는 둥 마는 둥 했을 뿐이었다. 한편, 근명은 아직도 요르단 골대 주변에 멈춰 선채로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고올~! 골입니다!!!’를 해설위원과 연신 외치다 겨우 잠잠해진 스튜디오에서는 신승대 아나운서의 멘트로 중계가 다시금 이어지고 있었다. “자, 현지 카메라마저 모두 속인 이영후 선수의 멋진 프리킥 골이었습니다.” 이상윤 해설위원 또한 상당히 상기된 목소리로 해설을 이어주었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수비벽이 뛰어올랐을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밑 공간으로 차 넣은 게 아닌가 싶은데요!” “페널티에어리어쪽만을 잡고 있던 카메라엔 전혀 공이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에 저희나 시청자분들께서도 골이 들어간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실 수가 있으실 겁니다. 아, 마침 다른 각도에서 잡은 화면이 나오는 군요?” “아…… 네…… 저런 슛을…… 아……” 이상윤 해설위원은 리플레이 되고 있는 이영후의 슛을 보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신승대 캐스터는 결국 혼자 이영후의 슈팅상황을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승대 캐스터 또한 쉽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영후의 슈팅은 모두의 예상과 틀을 깬 모험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영후 선수, 앞으로 다가온 수비벽들에게 강하게 슛을 날릴 듯한 모션을 취했는데요? 그리곤…공의 한 가운데를… 축구화의 발 끝으로 정확히 찼습니다. 당연히 강하게 위로 날아올 줄 알았던 수비수들은 뒤로 돌며 공의 궤도를 확인하지 못했고, 이영후! 높은 점프를 이용해서 낮게 깔리는 공! 아… 하지만 공은 마치 잔디 위를 미끄러지듯 수비를 통과했습니다!” 신승대의 긴 해설이 이어지자 그제야 정신차린 이상윤 해설위원은 신이 난 듯 부연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대단한 건 말이죠. 킥을 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여기 보세요… 수비 뿐만 아니라 저희도 이영후 선수가 공을 ‘찼다’라고 생각했을 타이밍에, 실은 반의 반 박자, 아니 반의 반의 반 박자를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었다가 찬 거에요. 보세요. 분명 이영후 선수가 찼다고 생각한 타이밍이었다면 분명히 덜 뛰어오른 수비수의 발에 걸렸겠죠. 결국, 이영후 선수는 오른발의 스윙을 멈춰냈다가 순간적인 발목의 힘만으로 엄청난 슈팅을 날렸어요. 게다가 저 먼 거리를 저렇게 낮게 떠있는 채로 공을 보낸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나올 지경입니다.” “그렇군요. 실로 대단한 슈팅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축구 천재의 귀환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죠?” “물론 아직 단정짓긴 이르지만,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 그리고 이영후 선수가 후반이 지난 이후에 투입되었기에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점이 요르단에게는 공포로 다가올게 틀림 없습니다. 정말 경기 재밌게 변하네요.” - “천재의 귀환이라… 크크크… 고작 한 골 넣은 걸 가지고 호들갑 떠는 꼴이라니…” 불 꺼진 거실 소파에 앉아 얼음이 담긴 위스키 잔을 빙빙 돌리며 벽에 붙은 채 환하게 빛나고 있는 엘씨디 티비를 바라보며, 조전무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한 골로 대한민국의 축구가 살아날 거라고 생각하나? 어리석은 것들. 대한민국의 축구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우매한 너희들이 알기야 하겠냔 말이다!” 조전무는 손에 든 위스키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이내 빈 잔을 텔레비전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쨍그랑! 텔레비전 화면엔 술인지 물인지가 얼룩진 채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바닥엔 깨진 유리와 얼음들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영롱한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축구를 살리기 위해선… 우선 죽여야 한다 이 말씀이시다. 살아있는 걸 또 어떻게 살린 단 말이냐? 그러니 우선은 죽일 수 밖에…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환희 하는 선수들과는 반대로, 조전무는 광기에 젖은 채, 자신의 마음처럼 텅 비어있는 거실 한 가운데서 마음껏 웃고 있었다. 마음껏. 21부. 불타오르는 명검(名劍)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결코 열릴 것 같지 않던 요르단 골 문을 열어 재친 것 치고는 영후나 노감독은 덤덤함 그 자체였기에 남일은 더욱 황당한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정도 쯤은 당연한 결과였다,라는 듯한 표정이라니… “저렇게 할 거란 거, 정말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남일의 꿈결 같은 표정을 슬쩍 곁눈질하던 노감독은 마치 제 자식 자랑이라도 하려는 아버지의 표정으로 영후에 관한 과거 일화를 이야기 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저놈이 고등학생 때였을 걸세.” 동점이 되고 난 뒤 더욱더 치열해질 게 분명한 시합은 이제 별반 중요하지 않다는 듯, 잠시 노감독은 그때를 회상하며 조금은 웃음을 지었던 것도 같았다. - 중년의 한 남자가 스피드 건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자동차 조수석에 올라탔고, 운전석에서 기다리던 또 다른 남자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묻기 시작했다. “어때? 여기도 그냥 그렇던가?” “글쎄, 구속이 좀 잘 나오는 왼손 투수가 있으면 좋겠는데 말야. 영 찾기가 힘드네.” 지금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 뿐만 아니라, 프로야구팀의 스카우터들은 일년 내내 전국의 고등학교를 이 잡 듯 뒤져가며 즉시 전력감의, 혹은 잠재성이 보이는 선수들을 찾느라 늘 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특히나 이 두 사람이 몸담고 있던 팀의 지난해 성적이 바닥을 기었던 관계로 드래프트를 앞두고 꼭 새로운 선수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어디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서로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똑같았던 것이다. “어쨌든 이 지역은 거의 다 본 거 같지?” “뭐, 그런 거 같아. 그닥 유명한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도 없고…” “그럼 이만 올라갈까?” “가기 전에 어디 가서 뜨끈한 국밥에 소주나 한잔 하자고~” “그럽시다~” 어둡고 조용한 동네를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그들의 눈에 자그마한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 이봐 김형, 저기 저거 학교 맞지? 지도 좀 줘봐.” “여기. 학교 맞긴 한 거 같은데, 야구부가 있을 거 같진 않지 않어?” “거참 딱하네. 김형, 저기 저거 안보여?” “어라? 라이트잖아?” “이런 늦은 시각에 운동장에 라이트를 켜놓는 학교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그것도 그렇구만.” “우리 마지막으로 저기만 들렀다가 올라갑시다. 응?” “오케이~” 결국 두 스카우터들을 실은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조용히 교문을 통과한 후에 멈춰 섰지만, 그들이 원했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장면이 보여지고 있었기에 두 사람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뭐야, 야구가 아니라 축구였잖아 나 원 참.” “그러게. 오늘은 뭐가 씌워도 단단히 씌운 날인가보네. 차 돌립시다.” “그럽… 어…? 잠깐…” “왜요?” “아니… 저 녀석 볼 차는 것 좀 봐봐…” “사람 참, 지금 저런 걸 지켜 볼… 어?” 순간적으로 두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한 소년의 멈추지 않는 슈팅 연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겨우 정신을 차린 운전석의 남자가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수석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김형, 스피드 건… 스피드 건 좀, 빨리!” “어? 어어.” 겨우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차 속에서 쥐 죽은 듯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그저 소년의 다음 슈팅이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지켜본 것 만으로도 이미 수십 번은 넘게 찼던 소년이었지만, 또다시 한결 같은 폼으로 달려나간 소년은 오른발을 고정시키자마자 왼발로 강력한 슈팅을 날렸고, 소년의 발을 떠난 축구공은 그야말로 포물선이란 걸 모른다는 듯 쭉 뻗어나가 골망을 흔들었다. “정말 깨끗한 폼이구먼. 야구 선수들이 저런 걸 배워야 하는 데… 몇 십 번을 차도 폼의 변화가 없고, 부드러운 데다가, 순간적으로 힘을 실을 줄 아는군.” “마… 맙소사…” “왜? 얼마나 나왔는데?” 스피드 건을 들고 있던 남자는 말없이 옆의 남자에게 건네줬고, 스피드 건을 건네 받은 남자 또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들이 굳게 입을 다문 이유를 스피드 건만이 정직하게 표시하고 있었을 뿐. ‘141km’ - “예에? 141? 그것도 고등학생때? 영후가요?”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 노감독 덕분에 남일은 ‘지금 이 영감탱이가 소설쓰고 있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뻔도 했지만, 방금 전 영후의 벼락같은 슈팅을 보고 난 뒤라 그저 마른침만 꿀꺽 삼킬 뿐이었다. “그래 한동안 그 스카우터들이 영후를 야구선수로 전향시켜주면 안되겠냐고 무던히도 찾아왔었지.” 남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야구에서도 분명 하체의 튼튼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건 같은 운동선수로서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고등학생 때의 하체가 그 정도였다는 건 더 이상 조련이 필요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고, 가뜩이나 고교대회 덕분에 혹사당하고 있는 투수들의 망가진 어깨를 고려했을 때, 영후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재목이었을 테니까. ‘하마터면,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엄청난 선수 하나를 잃어버릴 뻔 했었군.’ 부상으로 인해 그 오랜 시간을 공백으로 둘 수 밖에 없었던 남자는 기어이 피나는 재활훈련에 매달려 오른발을 부활시켰고, 결국은 꿈을 이뤄내고 있었기에, 공을 쫓으며 그야말로 신이 난 듯 뛰어다니는 꼬마아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국가대표 선수’ 영후의 활기찬 모습을 보며, 남일은 ‘난 저 남자만큼 축구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하는 반문을 스스로에게 조심스레 해보고 있었다. - 하연은 영후의 슛이 성공되자마자, 곧바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실측을 할 순 없었지만, 분명 영후의 발을 떠난 공의 속도는 흡사 일류 투수가 던지는 패스트 볼의 속도에 맞먹는 속도였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토 카를로스의 150km인가…’ 확실히 기자 하기 편한 세상인건 틀림없었다. 벌써 10년이 넘은 영상을 인터넷 웹사이트에선 단 몇 초 만에 찾아내어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역시나 하연의 기억은 정확했고, 하연은 잠시 텔레비전을 뒤로 한 채 그 영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때는 1997년 6월 프랑스에서 열린 4개국 초청 프레월드컵 프랑스전 이었다. 로베르토 카를로스 (Roberto Carlos DA SILVA . 브라질)는 상대진영 한 가운데에서 얻은 프리킥을 왼발 아웃사이드로 강하게 찼고, 이내 공은 마치 예술당구처럼 벽을 이루고 있던 수비진을 휘돌아 골대에 꽂히며 수비벽의 반대편에서 마음 놓고 있던 골키퍼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렸다. ‘직구와 변화구라… 훗, 야구기자 녀석들이 이 경기를 보고는 있으려나?’ 하연은 계속해서 리플레이되고 있는 카를로스의 프리킥과 영후의 프리킥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대한민국 국가대표 팀은 영후의 골 덕분에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지만, 유독 한 사람만은 더더욱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삐~익! “뭐야! 뭐가 오프사이드란 거야? 동일 선상이었다고!” 근명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호주의 마크 쉴드 주심에게 어필을 하자 주심은 단호한 표정으로 다가와 근명에게 주의를 주었고, 괜한 카드를 받을까 근명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까지 안정시킬 순 없었다. ‘젠장, 난 지금 골이 필요하다고!!’ 누가 보더라도 안달 난 근명에게 영후는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를 건넸다. “좋은 침투였다. 오프사이드라고 쫄 거 없어. 계속 시도해줘. 패스 보낼 테니까.” “쳇! 한 골 넣었다고 우쭐대는 겁니까? 두고 보시지, 내가 더 많이 넣을 테니까!” 심판에게 뺨 맞고 영후에게 화풀이를 하며 근명은 터덜터덜 다른 쪽으로 사라졌고, 영후는 그런 근명의 열정에 빙긋 웃어주며 전반과 달리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앙 허리라인 쪽에 합류했다. 드디어 동점이 되자 자신들의 왕자가 보는 앞에서 만큼은 꼭 이겨야 하는 부담감이 작용한 요르단 이었기에 전반과 달리 공격의 빈도가 조금씩 늘고 있었고, 반대로 대한민국의 입장에선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모두의 생각과는 달리 영후의 마음엔 한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지나친 추측일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지나친 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한심한 상상 이었기에 이내 떨쳐버리고 경기에 임하려고 하는 찰나, “영후! 볼!” 그저 잠깐이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그러나 경기장에선 분위기를 순식간에 뒤바꿔 놓을 만큼의 필요충분시간이었기에 지성은 당연히 받아줄 줄 알았던 영후에게로 공을 보내고서 '아차!' 했다. 영후는 생각에 잠겨 지성의 패스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에게로 돌진하는 바와드를 깨닫고서야 급하게 리턴 패스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와드는 애초에 공 따위엔 관심 없었다는 듯, 발을 높이 들어 영후의 발목을 노리며 태클을 들어왔고, 패스는 이뤄냈지만 미처 태클을 피하지 못한 영후는 자신의 발목을 부러뜨리려는 듯한 스터드의 날카로움을 그대로 느끼며 ‘악!’ 소리조차 지를 사이도 없이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졌다. 순간, 태클을 한 바와드 조차, 생각보다 강한 강도의 반칙이라 생각하고 멈칫하고 있었고, 요르단 선수들과 대한민국 선수들 모두는 제자리에 선 채 걱정스런 눈빛으로 영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마크 쉴드 주심만은 그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영후에게 일어나라는 제스쳐를 하고는 이내 공의 흐름을 좇아 이동하려 했다. “뭐… 뭐야! 심판 지금 뭐 하는 거야!!!” 근명은 어이가 없어서 경기가 속개된 것과 상관없이 주심의 앞길을 막아서며 눈을 부라렸지만, 주심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둥글게 만들며, 이른바 ‘공을 향한 정당한 태클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었고, 정당한 태클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파 보이던 영후는 여전히 그라운드에 쓰러져 발목을 부여잡은 채 일어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 “아… 아빠… 감독님이… 우리 감독님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조차 잇지 못하는 혜미와 마찬가지로 규식도 영후의 상태가 걱정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분명, 공이 영후의 발에서 떠난 후에 들어온 악의적인 태클이었다. 의도가 다분하니만큼, 영후의 발목에 가해진 충격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 이상일 것이었다. 하지만, 규식이 더 걱정스러운 것은 그 상황에서의 판정이었다. ‘그저, 순간적인 실수였기를…’ 규식은 자신도 모르게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며 묵묵히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저건, 분명 잘못된 판정이야… 저건…” 수림은 그 장면에서 순간 스포츠에서 가장 공정해야 할 심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했었던 기초 육상종목들은 심판들이 개입할 여지가 가장 적은 운동이기도 했었기에 지금까지는 그저 심판이란, 개개인 선수들의 기록을 두 눈으로 지켜봐 주고, 인정해주는 보조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랬기에, 지금까지도 심판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볼 이유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수림은 자신도 모르게 분함을 삭히지 못하며 부들부들 온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스포츠라는, 인간의 몸을 이용한 순수한 대결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훼방을 놓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방금 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수림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며 마치 자신이 경기를 뛰는 것처럼 흥분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이런 게임은 질 수 없어! 절대로!’ - 이윽고 들것에 실려 나온 영후는 발목에 스프레이 진통 파스를 잔뜩 뿌리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일어섰던 것일 뿐,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통증의 정도는 본인만이 느끼고 있을 터였다. 결국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영후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팀닥터는, 반대편 터치라인에서 영후의 상태를 묻는 노감독 때문에 순간 고심하고 있었다. ‘부상 전력도 있는 선수다. 지금은 아드레날린 때문에 통증을 못 느낄 수도 있어. 촉진으로는 쉽게 짐작할 순 없지만, 그래도 선수를 보호하는 건 내 의무야!’ 결국, 팀닥터는 노감독에게 수신호를 통해 ‘X’를 표시하려고 마음먹고 일어서는데, 영후는 황급하게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자신의 입을 최대한 가까이 대고선 속삭이기 시작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선생님.” “하, 하지만 영후야…” “저도 오늘은 그저 대표팀 경기에 데뷔한 것 만으로 만족하려고 했어요, 근데…” “?” “아무래도, 저… 이기고 싶어졌어요.” 통증이 그대로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영후가 팀닥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빛을 바라본 어떤 사람이든 그 순간만큼은 영후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믿음직스러웠고, 맑았지만, 그럼에도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 “후…” 영후의 발목에 테이핑을 마친 팀닥터의 오케이 사인이 보이자, 노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하지만, 노감독의 속은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네놈을 아끼자니 가상한 노력이 아깝고… 네놈을 내놓자니 아플까 두렵구나…’ 이런 노감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후는 주심에게 손을 흔들며 자신을 경기 속에 넣어달라며 사인을 보내고 있었고, 슬쩍 영후를 바라본 주심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영후의 경기 참가를 허락했다. “괜찮은 거에요? 그 새끼 완전 발목보고 들어 오던 데…” 아무렇지도 않게 경기장으로 뛰어들어온 영후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근명이 물었지만, 영후는 발을 탕탕 바닥에 굴러 보이며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연기가 좀 괜찮았지?” 그 말을 끝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공을 가지고 돌파하는 지성에서 사인을 보내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 영후는 사라졌지만, 근명은 왠지 영후의 발목을 감싸고 있는 살색 테이핑이 어쩐지 붉어진 것만 같아 보여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에이 씨!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병신아, 난 지금 한 골도 못 넣고 있다는 거 그새 까먹었냐?” 역시나 단순한 근명은 영후에게 뒤질세라 곧바로 영후와의 반대 공간을 침투하며 지성과 주영에게 사인을 보내기 시작했다. - ‘도대체, 저 선수는…?’ 마크 쉴드 주심은 어쩐지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조전무에게서 이상한 제의를 받았기 때문도, 다른 경기와는 달리 꽤나 엄청난 대가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너무나 이상한 한 남자 때문이었다. ‘분명, 충격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저럴 수가…’ 게다가 아시아의 에이스 박지성이 공과는 상관없이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기에 자신의 시야에서 순간순간 사라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저 후반에 교체되어 들어온 ‘리’는 항상 자신의 시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곧, 공과 연계된 모든 플레이에 관여하고 있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하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이 남자를 보기 전에는.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공은 항상 공격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가 항상 눈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공격과 수비 모두를 아우르는 엄청난 활동량과 스피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결론을, 마크 쉴드 주심은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막을 수… 있을까…?’ 요르단 선수들이 막지 못한 다면, 어쩌면 자신이 막아야 할 남자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지만, 방금 전 입은 부상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저렇게 행복하게 뛰어다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마크 쉴드 주심은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후반 30분에 근접해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도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몰입하고 있는 경기였다. 이대로 경기가 계속 진행된다면 요르단이 승점 3점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단 1점이라도 요르단에게 안겨줘야 했다. 아니 대한민국 팀의 승점을 어떻게든 깎아야 했다. 하지만 저 남자가 버티고 있는 대한민국은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너무나 막강해 보였다. ‘저 남자를 막지 못할 거라면… 그렇다면…?’ 선수들 만큼이나 흠뻑 젖은 심판 유니폼이 오늘따라 너무나 갑갑하게 느껴지던 마크쉴드 주심의 눈엔 이윽고 잔뜩 흥분해 있는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미드필드에서는 뺏고 뺏기는 엄청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조금씩 대한민국 선수들이 우위를 점하며 땅따먹기를 하듯, 전체적으로 전진하고 있었고, 지성과 주영은 영후와 근명, 그리고 근호에게 쉬지 않고 스루패스를 시도했지만, 번번히 길목을 차단당하자 근호와 근명은 최대한 오프사이드를 주의하며 짧고 간결하게 주고 들어가는 2대 1 패스를 이용해 수비를 허물어뜨리려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주영에게 순간적인 로빙 패스를 받으며 뛰어들어가던 영후는 수비수와 골키퍼의 시선을 모두 모았다고 생각하자마자 전혀 반대편을 바라보며, 자신의 뒤쪽으로 다가올 근명의 숨결을 느끼며 곧장 힐패스를 밀어주었고, 드디어 근명은 골키퍼도 없는 무주공산의 단독 찬스를 맞으며 가볍게 골대에 공을 차 넣었다. '골이다!' 근명은 환호하며 세레모니를 펼치려는 순간,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낌은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삐삑! 삑! 그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뭐야? 말도 안돼. 무슨 판정이 이따위야!!!” 분명 오프사이드도 아니었고, 선심도 기를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크쉴드 주심은 직접 근명의 오프사이드를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곧장 주심은 근명에게 다가와 옐로카드 한 장을 선사해 주었다. “뭐, 뭐야? 심판 미쳤어? 이게 오프사이드야? 어? 눈을 대체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야?” 마크 쉴드 주심은 근명에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근명은 계속 항의를 했다. 결국 원희와 주영이 근명을 가로막으며 지성이 주장의 자격으로 어필을 해봤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주심과 근명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고, 이윽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옐로카드. 그리고 가차없이 주머니에서 주심은 레드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야말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모두들 동상이 된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지성은 열심히 주심에게 어필해 봤지만, 마크쉴드 주심은 계속되는 근명의 불만 섞인 태도에 주의를 줬었고, 지금도 오프사이드 이후에 공을 터치했기 때문에 카드가 나온 것이었으며, 반성의 기미도 없이 계속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에 자신으로선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설명해주었다. 결국 지성도 포기하고 물러났고, 노감독도 억울해 죽으려 하는 근명을 향해 들어오라며 손짓으로 지시해줬지만, 그 순간 가장 분노하고 있던 사람은 근명도, 지성도, 노감독도 아니었다. ‘이런… 거 였단 말이지…?!’ 한껏 불타오르려는 한 남자에게 고급 휘발유를 들이 붓는 행위를 한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한 채 마크 쉴드 주심은, 이 정도면 적어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낸 것이라고 생각하며,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카드에 하근명의 번호를 적고 있었다. - 남희는 예상치 못한 전개가 곧, 쉽게 얻을 수 없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11대 10의 경기를, 그리고 꼭 이겨야 하는 경기를 어떤 방법으로 풀어가야 하는 것인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려고 했지만, 그보다 더 기대되는 건 바로 ‘그 남자’의 ‘분노’였다. 그랬기에 새하얀 A4지에 확률공식을 써내려 가며, 담담하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착한 우리 감독님 앞에서, 저런 짓을 하다니… 이 경기, 요르단이 지게 될 확률이… 거의 99.7% 이상이겠지?” 대한민국 팀의 선수 한 명이 퇴장을 당하는, 게다가 경기가 인저리 타임까지 해도 15분 남짓 남은 시점에서 더욱더 마음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던 사람은 그러나 남희 만이 아니었다. - 드디어 내 팀, 자신의 팀이란 생각이 자리잡고 난 영후의 결연한 얼굴을 처연히 바라보며 노감독은 그저 빙긋 웃고 있었다. “이 경기… 우리가 이기겠구먼.” 대한민국 팀의 스텝들은 하나같이 초비상사태였건만, 노감독은 덤덤한 표정으로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고, 옆에 앉아있다가 의도치 않게 홀로 노감독의 이야기를 듣게 된 팀닥터는 순간 움찔했다. ‘어쩜, 저렇게 닮았단 말이냐… 저런 말을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팀닥터가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니, 진짜 놀랄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게 더 옳은 표현이었을지도. - “미안해요.” 근명은 그라운드를 나서기 전, 영후에게 다가가 우물쭈물하며 사과를 했다.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 때문에 팀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에 대한 사과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완벽한 아웃룩 패스를 날려버린 것에 대한 사과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찌됐든, 자신의 득점도 날아갔지만, 동시에 영후의 어시스트 기록도 날려버린 것이었으니까. “좋은 침투였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먼저 손을 내미는 영후의 손을 맞잡은 근명은, 그러나 순간 자신의 손이 무척이나 뜨겁게 느껴지고 있었기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이 남자… 웃고 있는 게 아니야…’ 같은 분노라도 외부로 폭발시켜버린 자신과 달리, 영후는 몸 안에 응축시키며 언제고 ‘골’로서 터뜨리려 하고 있다는 걸, 그저 간단한 악수 한 번 만으로도 근명은 느낄 수 있었다. ‘이 경기, 우리가 이긴다!’ 그 수많은 퇴장 경험 중에도 이렇게 마음 편한 퇴장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근명은 그제야 가벼운 마음으로 그라운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경기가 속개되기 전 영후는 잠시 골키퍼 성룡에게로 다가갔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언제나 부동의 국가대표 골키퍼 운재에게 가려져있었기에 이번 경기에서의 실점 또한 한동안 마음에 남아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골키퍼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실점을 한 순간에 대한 아쉬움만을 속으로 삼킬 뿐. 때문에 영후가 다가오자 성룡은 꽤나 당황했다. “심심하지?” “예?” “심심하잖아, 안 그래?” “그게 무슨…?” “경기에 끼워줄게. 그러니까 우선 잡으면 무조건 질러라. 내가 어디에 있든 상관 말고. 최대한 높고 길게” “예?” 마치 어릴 적, 골목에서 아이들과 놀고는 싶은데 끼워주지 않는 무리들 속에서 친절하게도 먼저 다가와 손을 내미는 동네 형처럼 영후는 성룡에게 장난치듯 말을 했지만, 그 말의 의미는 쉽게 파악 할 수 없었다. 무조건 지르라니… “받은 건 돌려줘야지, 안 그래?” 도무지 못 알아 들을 말들만을 실컷 하고는 유유히 전방으로 달려가는 영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성룡은 어쩐지 그 어떤 때보다도 묵직한 믿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경기가 속개되자 성룡은 마침 자신에게 돌아오는 공을 잡고는 곧바로 자신의 전매특허인 롱킥을 시도했다. 영후의 말대로, 그가 어디에 있든지 전혀 파악하지도, 상관하지도 않은 채. “저 자식! 뭐… 뭐 하는 거야?” 코칭 스텝들은 순간 어이없는 성룡의 롱킥에 아연 실색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 이때에 상대편 진영에 넘어가 있는 선수들도 없었는데, 시간을 쪼개 쓰며 차근차근 공격작업을 수행해 나가도 모자랄 판에, 아무 생각도 없이 게다가 저 장거리 롱킥을 시도해버렸으니, 결국은 또다시 시간만 허비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아무도 없… 아니었다! 결코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다! 하프라인에서 요르단의 수비수들과 뒤섞여있던 영후는 성룡의 발에서 공이 떠나자 마자 총알을 탄 듯 튀어나가기 시작했고, 멍하니 서있던 요르단의 최종 수비들은 미처 영후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겨우 뒤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수네 카셈이 제법 영후의 스피드를 따라잡으려 노력했지만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고, 기어이 하수네 카셈은 영후의 유니폼을 붙잡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영후의 골을 향한 집념을 막을 수 없었다. 찌이이익~! 결국 영후의 유니폼 상의는 찢어져 나갔고, 그것만으로도 하수네 카셈은 경고를 받아 마땅했지만 주심은 지금 상황엔 차라리 어드밴티지를 선언하는 게 요르단에게 훨씬 좋을 것이라 생각을 하며 휘슬을 아낀 채 두 손을 쭉 펴보였고, 영후 또한 주심의 휘슬소리 따윈 기대하지도 않고 전력을 다해 가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자식, 롱킥 하난 기차군’ 예상보다 훨씬 더 멀고, 더 높게 날아가는 공보다 더 빠른 스피드로 영후는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지만, 요르단의 엘라마이레 골키퍼는 나오기도, 또 골대에 머물러 있기에도 너무나 애매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렇게 높은 곳에서 날아오는 공의 바운드 예측도 쉽지 않거니와, 자칫 상대 공격수와 엉켜버리면 어이없게 실점을 할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못 잡을 거야. 행여 따라잡더라도, 트래핑 하진 못 할거야. 기다리자…’ 영후를 처음 맞닥뜨리는 모든 골키퍼가 그러했듯, 엘라마이레 골키퍼도 그 순간 오판을 하고 있었다. 하긴, 다른 판단을 내렸다 한들, 더 나은 결과를 담보했을 거란 보장도 없었긴 했지만. ‘조금 길다!’ 영후는 생각보다 길게 날아가는 공을 힐끔 쳐다보며 발목의 부상도 잊은 채 기어를 한 단 더 올렸다. 그러지 않는다면 공은 쭉쭉 뻗어나가 자칫하면 그대로 상대 골키퍼의 품에 안겨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하지만 승산은 있었다. 전방까지 나와있던 최종 수비들은 아직 채 따라붙지 못한 상태였기에, 공의 낙하지점까지 자신의 스피드가 유지되기만 해 준다면 해볼만했다. 하지만 시큰거리는 발목 덕분에 생각보다 스피드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기에 영후는 평소 같으면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저 하늘의 공을,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추격하고 있었다. ‘떨어진다!’ 엘라마이레 골키퍼는 순간 낙하하기 시작하는 공의 낙하지점을 계산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골 에어리어를 벗어나 페널티 에어리어로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골 에어리어에서 공격수와 충돌한다면 당연히 골키퍼 보호지역이니 만큼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었으나, 그렇게 머물러 있다가 골을 허용할 수도 있었다. 결국 엘라마이레 골키퍼는 페널티 에어리어로 넘어가야 할지에 관한 결정을 순간적으로 해야만 했다. 그것도 들소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저 남자를 앞에 두고서. ‘잡을까? 아니면 펀칭?’ 점점 남자와 공이 하나가 되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만 같은 엄청난 압박감 속에 엘라마이레 골키퍼는 결국 골 에어리어를 벗어나 뛰어나가기 시작했고, 자신의 속도와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영후의 속도가 배가되어 자칫 충돌이라도 했다간 엄청난 참사가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골대를 지켜야 하는 숙명을 지닌 골키퍼의 운명이란 언제나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와 마찬가지였기에 영후의 기백에 뒤지지 않으려 소리를 질러보며 스스로에게 응원을 보낸 후 공을 향해 뛰어오르며 손을 뻗었다. - “아…!” 수림은 순간, 그보다 더 멋진 도약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솟아오르는 영후의 모습을 보며, ‘이 남자, 높이뛰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축구 이외의 것을 하는 남자, ‘이영후’란. - ‘잡았…!’ 퍼억! 그것은 그 누구도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엘라마이레가 순간적으로 위협을 느끼며 생각을 바꿔 급하게 쳐 내려던 공은, 그러나 자신의 손에 닿기도 전에 영후의 머리에 살짝 빗맞으며 방향이 급변했기에, 결국 간단하게 자신의 키를 넘겼고, 자신의 머리위로 지나가는 축구공은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의 하얀 선을 유유히 넘고 있었다. 또한 엘라마이레가 뻗은 주먹보다 조금 더 뛰어오르며 ‘믿을 수 없는’ 헤딩을 시도한 영후는 그대로 골키퍼의 주먹에 안면을 강타당하며 그라운드로 내동댕이쳐 졌으며, 자신도 모르게 영후의 플레이에 매료된 마크쉴드 주심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후에 힘차게 휘슬을 불었다. 삐~익! 2 : 1 드디어, 경기의 추가 기울자 모든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대자로 뻗어있는 영후에게로 달려들었고, 영후는 자신의 몸 위로 연이어 포개 엎어지는 선수들 틈 사이로 주먹을 뻗어 보였다. 물론 그 주먹의 의미는 충분히 노감독에게로 전해졌음은 물론이었고. - 골키퍼의 롱 킥에 의한 오프사이드 트랩 붕괴. 롱 킥이 되는 순간 공을 따라잡을 수 있는 스피드. 그리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득점을 위한 집념. 이 모든 게 하나가 되었을 때 가능한 득점 루트였다. 그리고 이 공식에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건, 바로 ‘이영후’라는 선수였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하~아, 이런 건 여자 축구에는 적용할 수 없는 공식 이라구요, 감독님.” 괜히 주의 깊게 지켜봤다는 푸념 섞인 혼잣말을 내뱉으면서도 남희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끼야악~! 봤어? 봤어 아빠? 지금 우리 감독님이 얼마나 높이 뛰어 올랐는지?” “그래 임마, 봤다 봤어.” 어느덧 부쩍 커버린 딸이 언제 자신의 목에 매달리며 이렇게 좋아했었는지, 규식은 오래고 빛 바랜 옛 기억을 한참이나 더듬어봐야 했을 지경이었지만, 허나 분명한 건, 이런 혜미의 모습을, 이런 부녀의 관계를 되돌려 준 건 다름아닌 축구, 그 자체였고, 그 가운데 ‘이영후’라는 남자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고맙네, 이 사람아.’ - 하지만 선수들의 축하를 받으며 몸을 일으키는 영후의 얼굴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골키퍼와의 충돌 때 눈썹부위가 찢어진 듯 싶었다. “나가서 지혈을 하고 오게.” 마크쉴드 주심이 영후에게 말을 건넸고, 영후는 이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쓱쓱 유니폼으로 닦아내며 유창한 영어로 뼈있는 농담을 했다. “이번 골은 인정해줘서 고맙군요.” 마크 쉴드 주심은 마치 정곡을 찔린 듯 잠시 멈칫 했지만, 그 한마디 덕분에 막혀있던 시합 내내 꽉 막혀 있던 속이 그 순간 ‘뻥’하고 뚫리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방금 전의 상황은 그야말로 심판이 필요 없는 상황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공이 골키퍼의 발에서 떠나기 전, 영후는 하프라인을 넘지 않고 있었기에 오프사이드도 불 수 없었고, 수비수 하나를 일부러 달고 뛰다가 반칙을 유도해 상대팀 선수의 퇴장도 유도했으며, 골키퍼 보호지역이 아닌 곳에서 골키퍼와의 충돌을 유도한데다, 공을 먼저 건드린 공격수를 차징한 골키퍼 덕분에 골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페널티킥을 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설마, 이 모든 걸 계산하고 플레이를 했다곤 생각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마크쉴드 주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남자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남자였어.’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터치라인 밖으로 걸어나가는 영후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크쉴드 주심은 허탈하지만 개운한 표정으로 경기를 속개하는 휘슬을 불었다. - “빨리 지혈해주세요.” 닥달하듯, 팀닥터에게로 달려드는 영후의 뒤에서 노감독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오늘은 그만하면 됐다.” “예? 하지만…” “너와 나의 팀은 네놈에게 모든 짐을 떠넘길 정도로 허약하진 않다. 그러니 오늘은 그만 쉬려므나.” “아…” 팀. 그랬다. 드디어 영후는 ‘팀’의 일원이 된 것이었다. 그것도 그렇게 바라 마지 않던 국가대표란 팀의. 결국 영후는 타월과 음료수를 받아 들며 벤치에 앉았지만 가슴만은 식히지 않은 채 경기 종료를 알리는 마크쉴드 주심의 휘슬 소리를 듣고 나서야 축구화 끈을 풀 수 있었다. - ‘불타오르는 검과, 그 검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장수… 인가?’ 철용은, 영후를 교체시키는 노감독의 모습을 보며, 우습게도 삼류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노감독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노감독 만큼이나 자신도 애지중지 해야 할 ‘영후’의 몸에 또다시 이상이 생긴다면, 지금껏 영후 하나만을 바라보며 노력해온 자신의 꿈도 일시에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 출전시간 32분 2 득점. 국가대표 이영후의 데뷔전 성적표였다. 하연은 너무나 간단한 텍스트를 적은 노트북 액정화면을 두고두고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이뤄냈구나. 너의 꿈을… 아니, 이제부터 시작인거니…?” 벅찬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하연은 결국은 자신이 마음 먹은 것들을 하나씩 이뤄내고야 마는 영후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지만, 그 남자의 꿈 속에 과연 ‘박하연’이라는 여자가 자리잡고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기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럼 어떤 꿈을 쫓아가야 하겠니…?” 어쩐지 하연은 처음으로 영후의 경기기사를 쉽게 써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한없이 길고 긴 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기에,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양 어깨를 감싸보았다. - “아 진짜… 야,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어?” 혜미는 가로등이 깜빡 거리며 들어왔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어두운 동네 골목길을, 두 어 걸음 먼저 걸어나가다가 갑자기 홱 뒤돌아서더니 엉거주춤 서 있는, 겨우 술과 잠에서 깨어난 남학생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어? 어어…” 당황한 남학생은 혜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며 겨우 입을 열었지만,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혜미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앞서 걸어나갔다. “그렇지? 너도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아무리 자식을 강하게 키우는 아버지래도, 세상에 딸보고 이 야심한 밤에 남자애를 바래다 주고 오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상식 밖의 일 인 거야. 안 그래?” “어? 어어…” 계속 맥 빠진 대답이 이어지자, 혜미는 또다시 성난 얼굴로 돌아서며 꽥 소리를 질렀다. “어어, 어어… 뭐야, 넌 ‘어어’ 말고는 할 줄 아는 말 없어?” “어? 어… 아니…” “아니…? 어어 말고 고작 할 줄 아는 말이 ‘아니’야?” “미, 미안…” “에구구, 됐다 됐어. 자 여기 큰길까지 데려다 줬으니까 됐지? 설마 나보고 택시라도 잡아달라고 하진 않을 거지? 앗! 택시! 아… 사람 있구나. 쳇!” “괘… 괜찮아…그리고…” “…그리고?”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오오~! 이 녀석 보게? 누나의 에스코트가 그렇게나 조아쪄? 누나가 엉덩이라도 두드려주까? 헤헤~” 남학생은 장난 거는 혜미가 싫지 않은 듯, 꽤나 조심스러우면서도 밝게 웃었고, 혜미는 이내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뒤돌아 온 길을 걸어갔다. “나… 또… 가도 될까?” 조금씩 멀어지는 혜미의 뒷모습에 대고 지금껏 했던 어느 말보다 크고 또렷하게 남학생은 물었고, 혜미는 발걸음을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만 들어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혜미가 멀어지고, 더 이상 찰랑거리는 긴 머리조차 보이지 않을 무렵, 남학생의 앞에는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고, 운전석에선 말끔한 차림의 운전사가 내려섰다. “도련님.” “아, 왔어요?” 어느새 뒷좌석 문을 열고 대기하는 운전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남학생은 차에 올랐고, 운전사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는 재빨리 운전석에 몸을 싣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습니다.” “아, 그랬었던가요? 미안해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봐요.” “아,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남학생은 혜미와 있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빠르진 않지만 꽤나 많은 말들을 스스럼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저씨, 축구라는 운동… 어떻게 생각해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치적인 축구 말고, 땀 냄새 나는 진짜 축구 말이에요.” 순간, 운전사는 꽤나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정치적인 축구’란 결국 ‘어르신’을 뜻하는 것이었을 테고, 진짜 축구란… 운전사가 답을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고 있었지만, 남학생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난… 지금까지 축구라는 건, 나쁜 사람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유지하는 그런 것 들 인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만은 않더라구요.” 남학생은, 좀 전 혜미와 혜미의 아버지가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잠결에 일어나 지켜보며, 축구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 축구가 인간에게 선사해주는 ‘기쁨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 분’께는 오늘 일 비밀로 해주세요. 하긴 어차피 큰 집, 아니면 또 다른 여자와 있겠지만요.” 그렇게 기뻐 보이던 얼굴이, ‘그 분’ 아니 ‘아버지’라는 어르신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잔뜩 굳어지는 모습에, 운전사의 마음도 무척이나 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다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씩 웃음이 배어 나오는 도련님의 얼굴에 운전사는 한편으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나 있죠?” “예, 도련님.” “오늘 꽤 즐거웠던 거 같아요. 정말로.” 정말로 진지하게 고백하는 남학생의 얼굴을 잠시 룸밀러로 지켜보던 운전사는 다행이라고,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고, 남학생 또한 차창을 내다보며 오늘 있었던 웃지 못할 일들을 생각해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떠나기 직전, 혜미와 남학생을 지나쳤던 택시에서 내려선 윤지는 멀어지는 고급 세단과, 더 멀어져 있는 혜미를 생각하며 왠지 모를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혜미야… 안돼… 남자는… 남자는 안돼…!” 22부.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라면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남아도는 힘을 주체 못하듯, 다들 곤하게 잠들어있는 비행기 좌석의 가지런한 통로를 가로지르며 근명은 괜히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요르단 전 퇴장으로 인해 코칭 스텝의 얼굴 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그득했기에, 이제 막 투르크메니스탄 전을 마치고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은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편히 잠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끼익. 근명은 화장실에서 애꿎은 손만 벌써 몇 번 째 닦고 나서, 수도꼭지를 잠궜다. ‘바보새끼…’ 근명은 거울 속의 초조함이 그득한 한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나직이 속삭여보았다. 이제 한국으로 되돌아가면, 북한과의 일전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경기를 끝으로 한동안 월드컵 예선전은 없을 것이었다. 그 얘기는 곧, 시한부 국가대표선수인 영후보다 더 많은 골을 넣을 기회는, 어쩌면 이번 북한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와 다름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역시나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자책하고 있을 때, 순간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있어요! 쳇, 눈깔이 삐었나...” 밖에 있는 사람을 신경 써줄 겨를이 지금의 근명에겐 전혀 없어 보였기에 퉁명스럽게 대답이 튀어나왔지만, 문 밖에선 의외로 걱정스런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괜찮으신가 해서요.” “아, 네. 괜찮습니다.” 여자였기 때문이었을까. 근명은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근명의 대답에도 문 밖의 여자에게선 한동안 아무런 답이 없었다. ‘갔나?’ 근명은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는데, 순간 스튜어디스 복장의 한 여자가 근명이 나가기도 전에 화장실에 급하게 들이닥쳤다. “이… 이봐요 이게 무슨!!” “하근명 선수 맞죠? 저 열렬한 팬이에요!” “아, 예… 근데 갑자기 이러시면…” “사인, 해주실수 있으세요?” “예? 예에… 근데 어디다…?” “여기요.” 근명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하며, 여자는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하얀색 팬티를 순식간에 벗어 손에 들어 보였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앞에서 팬티를 벗어버린 여자를 바라보며 근명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마른 침만 꿀꺽 삼키고 있었다. “하…하지만 펜이 없어서…” “여기…있지 않나요…?” 근명의 질문이 떨어지자 마자, 여자는 근명의 몸에 밀착하며 한 손으로 근명의 하복부를 쓰다듬었고, 여자의 도발적인 유혹에 근명의 것은 금방이라도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솟아올랐다.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되려 그런 모양이 재미있다는 듯, 이내 근명의 것을 꼬옥 잡아보았다. “쓸 준비… 됐나요?” 마법에 걸린 듯, 근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여자는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근명의 것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근명의 앞에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더니, 근명의 바지 허리띠를 풀고는 바지와 팬티를 단번에 내려버렸다. “흡!” 하체가 서늘해짐을 느끼자마자, 근명의 붉게 성난 자지는 곧바로 여자의 입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목젖까지 닿을 정도로 단번에 자지를 깊숙하게 빨아들이던 여자는 다시금 귀두만을 입에 머금고는 침으로 번들거리는 기둥을 손으로 부드럽게 훑어주며 섹시한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고, 그런 여자의 눈을 흥분된 얼굴로 바라보며, 근명은 지금 상황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마음이 되어 그저 본능에 몸을 맡겨버리고 있었다. - 하연은 부상의 여파로 영후가 출전하지 않은 대한민국과 투르크메니스탄과의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경기가 막 끝나자, 경기 관전평을 거침없이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이겼지만 답답했던 경기 비록 경기는 3-1로 승부가 확실하게 갈렸지만, 전체적인 경기 양상을 들여다 보면 한 수 위의 대한민국은 경기 내내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답답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이미 예선 탈락이 확정된 투르크메니스탄의 경기력은 대한민국보다는 확실하게 한 수 아래였고, 이로 인해 경기가 계속되는 동안 공략당할만한 공간을 수시로 노출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이 조 최하위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선수들은 번번히 공간을 놓치거나 목적 없는 플레이를 반복했다. 대표팀이 부진하기만 하면 나오는 합숙훈련의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현재 3주째 이어지는 예선전과 함께 합숙을 하고 있는 팀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번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자꾸 손발이 맞지 않거나, 필요한 공간에 공이 없는 선수들이 들어가지 않아서 결국 공을 가진 선수의 드리블이 길어지거나 백패스가 많아지는 모습도 보였다. 보통 축구팀은 빠른 템포로 전진패스를 시도한다거나, 혹은 짧은 패스를 반복하며 상대의 조직력을 흔든다거나, 측면 뒷공간을 노리는 플레이를 한다던가, 측면 돌파 위주의 플레이를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목표와 색깔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 만큼은 선수들이 도무지 어떤 축구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약체를 상대로는 이런 모습이 먹혀 들어갈지 몰라도, 최종예선에 올라가 일본이나 이란을 상대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단숨에 적고는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어 보았다. ‘좀… 그런가?’ 선수의 몸을 걱정해서라면, 영후를 당연히 이번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은 것은 노감독으로선 당연히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팬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기명단에서조차 제외된 영후의 이름에 충분히 빈정이 상할 만 했고, 게다가 스코어는 흠잡을 데 없었지만, 게임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충분히 비판을 가할만한 경기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노감독님께서 한 소리 하시겠군, 크크”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기지개를 쭈욱 펴던 하연은 문득 영후와는 별개로, 석연치 않은 퇴장으로 인해 이번 경기에 참가하지 못했던 ‘그 녀석’ 또한 궁금해지고 있었다. 약속은 커녕, 영후에게 제대로 비교당해버린 뒤였으니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지금쯤 아마 비행기 속에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그러길래, 상대를 잘 보고 덤볐어야지, 멍충아.’ 하연은 그러나 그런 근명의 무모함이, 또 끝없는 투쟁심이 조금은 예전의 영후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 같아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와 반대로 가끔은 실없는 농담을 할 지 언정, 옛날과 달리 지금은 너무나 의젓해진 영후가 조금은 멀게 느껴지고 있는 현실이 괜히 안타까울 따름이었으니까. - 발목과 눈썹 부위의 붓기가 어느 정도 빠진 영후는, 정작 자신의 부상과는 다른 쪽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노감독이 앉아있는 좌석으로 다가갔다. 노감독은 자그마한 체구가 더욱 작아 보일 정도로 의자에 푹 파묻힌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영후는 한동안 말없이 노감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불과 몇 년 사이에 노감독의 얼굴은 너무나 늙어 있었다. 어느 종목이나 매한가지겠지만, 감독이란 자리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그야말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지위였다. 비록 영후 또한 초보이긴 했지만, 축구팀 감독이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후였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노감독님이 거쳐왔을 ‘수라의 장’을 모두 알 수는 없었겠지만. 노감독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던 영후는 그냥 자리로 돌아갈까 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보았다. “감독님.” 결코 그 정도의 속삭임으로는 쉽게 깨어날 것 같지 않았던 노감독이었지만, 영후가 불렀기 때문이었을까. 노감독은 거짓말처럼, 그러나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으음… 누구냐?” 노감독은 불을 켜려 팔을 뻗었지만, 영후는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영후냐?” “네, 감독님. 죄송합니다 괜히. 곤히 주무시는데.” “좀 쉬지 않고, 갑자기 왜…?” “그게…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순간 심각한 영후의 얼굴에 노감독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설마…’ 노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반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의 옆에 바싹 앉아있던 영후의 왼쪽 무릎으로 손을 뻗어보려 했다. 갑작스런 노감독의 행동에 잠시 이해를 못하던 영후는 또다시 노감독의 손을 잡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노감독은 더욱 걱정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놈… 그럼 발목이 좋지 않은 게냐?” “아, 하하. 아니에요, 감독님.” 꽤나 엉뚱한 쪽으로 놀라고 있는 노감독의 얼굴을 보며, 영후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차라리 노감독이 걱정하는 그런 문제 때문에 상담을 하는 거라면, 차라리 좋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영후는 어느새 근심스런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 기내 화장실 벽에 숨겨져 있던 아기 기저귀를 갈기 위한 트레이 위에는, 아기 대신 스튜어디스 유니폼 차림이었던 여자가 올라앉아있었지만, 지금의 여자는 통제 안 되는 아기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입고 있던 새하얀 블라우스는 어디로 가버린 지 오래였고, 역시나 느슨해진 하얀 브래지어 밖으로 풍만한 젖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데다가, 언제나 정숙해 보여야 할 치마는 허리까지 올라간 채로 근명의 하복부와 완전히 밀착되어 있었다. 아니, 근명의 자지와 그 여자의 보지가 완벽하게 밀착이 됐다가 또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었다. “아앙, 으읍…아아…너무…너무…으윽…꽉…차요…” 연신 교태를 부리는 스튜어디스를 근명은 숨 쉴 틈 없이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고, 여자는 신음을 참으려는 듯 근명을 더욱 꼭 끌어안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근명을 안고 있다기보다, 겨우 매달려 있는 모양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근명은 질퍽거리는 여자의 보지 속으로 부드러움 따윈 모른다는 듯 최대 속도로 박아대고 있었기에, 여자의 눈동자엔 검은 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아~! 정말…으윽… 정말 대단…해…요…아읍!” ‘정말 말 많군’ 근명은 쉴새 없이 신음소리를 내뱉는 여자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성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헉헉…사…사인 어디다 해줄까…?” “아앙… 나 몰라… 그냥… 으윽! 그냥 안에다 해…아아~ 줘요…” 여자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근명의 자지는 귀두가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며 여자의 보지 속에서 폭발했고, 이내 끊임없이 껄떡거리며 여자의 질 벽을 정액으로 두들겨대고 있었다. 여자는 근명의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묻은 채, 오르가즘을 느끼느라 꿈쩍도 않고 있었지만 어느덧 사정이 끝나버린 근명은 여자에 대한 배려 없이 바로 여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결국 여자는 베이비 트레이에 올라앉아 있는 채로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낼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의 여자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때문에 여자의 보지에서는 꾸역꾸역 근명의 정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자신의 옷차림만 추스른 근명은 그 모습을 보다 못하고는 벽에 붙어있는 티슈 통에서 티슈 몇 장을 뽑아 보지부근에 대충 던져 주었다. “닦아.”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던진 채 근명은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고, 여자는 근명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주머니에서 위성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저에요.” ‘그래.’ “한 녀석만 건드려봤는데, 괜찮을 것 같아요. 다들 안달 난 상탤 테니까요.” ‘그렇군. 알았네.’ 여자는 간단하게 통화가 끝나자,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면서 근명이 바닥에흘린 정액엔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었지만, 여자는 미련 없이 티슈로 바닥을 닦았고, 몇 장의 티슈를 더 뽑아 아직도 자신의 보지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을 닦기 위해 치마를 허리까지 올린 채 다시금 보지를 노출했지만, 아직도 흥분이 남아있어야 할 보지도, 또 여자의 얼굴 어느 곳에서도 정사 후에 느껴지는 만족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병신… 좆도 손가락 만한 게…” 마치 똥 밟았다는 표정으로 티슈를 휴지통에 던져 넣고는 화장을 고친 후,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장실 문을 나섰다. -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렸을 그 새벽녘에, 영후가 출전하지 않은, 투르크메니스탄 전의 녹화본을 틀어놓은 텔레비전은 불 꺼진 거실을 가득 채우려는 듯 쉴새 없이 번쩍이며 발광하고 있었지만, 윤지는 경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진한 화장을 채 지우지 못한 무표정한 여자의 얼굴은, 차라리 울고 있을 때보다 더 슬퍼 보이는 법 이었다. ‘혜미에게… 남자가…’ 꽤나 순진한 것 처럼 생겼고, 또 그렇게 구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 남자애를 태워간 건 분명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이었다. 그렇다는 건, 십 중 팔구 혜미를 가지고 놀고 싶어진 여느 부잣집 아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란 뜻과 다를 바 없을 것이었다. 그저 섹스만 탐하는 무지한 남자라는 동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족속들과 한치도 다를 게 없는. ‘혜미가 상처받기 전에 어떻게든…’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윤지는 거실의 창가에 붉은 태양이 고개를 내밀 때까지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 “아…” 기내 좌석으로 돌아오던 근명은, 노감독과의 밀담을 마친 후 화장실에 가려는 영후와 마주쳤다. 하지만, 영후를 보자마자 방금 전의 상황과 맞물려 하연의 얼굴이 떠올라 근명은 영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다. “왜? 배탈이라도 난 거야?” “아, 아니에요. 신경 쓸 거 없어요.” “사소한 문제라도 가볍게 넘기면 안돼. 게다가 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골잡이잖아.” 순간 영후의 조언이 비아냥으로 들렸을까. 근명은 자기도 모르게 ‘욱’하며 영후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딴 식으로 날 놀릴 생각 말아! 안 그래도 충분히 열 받고 있는 중이니까!” “무…무슨 짓이야 갑자기!” 갑작스레 근명에게 당해버린 영후는 당황하며 근명에게 되물었지만, 근명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확 놔버렸다. “아직, 게임은 끝난 게 아니야.” 모를 말들만 잔뜩 내뱉으며 근명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갔고, 영후는 그런 근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쩐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 철용은, 영후의 전화를 받고 나서도 한동안 믿을 수가 없었기에 전화를 받은 지 며칠이 지났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국 영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이동하는 차 속에서 한 손으론 핸들을 거머쥔 채 길게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사실이었군. 축구협회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풍문이… 어쩌면 정회장과 조전무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 일지도…’ 올해를 끝으로 연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정회장과, 정회장의 뒤를 이어 축구협회 회장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조전무는 겉으로는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파트너관계였다. 게다가 막대한 재산과 지위를 이용해 국내 축구계는 물론, 아시아를 넘어 세계 축구계에 힘을 쓸 수 있는 정회장이 자신의 부하직원들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축구계 핵심 인사이자, 자신의 오른팔인 조전무를 내친다거나, 관계가 소원해질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었다. 즉,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팀의 선전이 이익이 됐으면 됐지, 손해가 날 일은 절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조전무는 왜 국가대표팀의 패배를 바라는 걸까… 그렇게 된다 한들, 자신에게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텐데…’ 지금으로선, 철용의 머리만으론 그 어떤 추론도 쉽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후로 인해 확실한 물증이 생겼기에,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유불문하고 어떻게든 ‘한국 축구계의 붕괴’를 막아야만 했다. “일단은 범석이 놈인가…” 철용이 생각하기에, 협회는 현 소속팀과 트레이드 건에 휘말리며 마음이 심란했을 ‘오범석’을 적절하게 유혹해 낸 것으로 보였다. 국내 이적규정과 해외 이적규정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계약 당시 삽입했었던 바이 아웃 조항과 보스만 룰을 통해 자유로운 신분으로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원하는 범석과, 국내 이적을 통해 약 18억원 이상이 될 이적료를 원하는 소속팀은 서로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채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아무래도 개인 대 집단의 힘겨루기 싸움이었으니만큼, 자신에게 해외이적을 도와주겠다는 협회의 꾀임에 범석이 넘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어 달라는 영후의 부탁을 철용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이놈의 ‘착한 병’ 가진 놈들하고는 일을 하지 말아야 되는 건데, 쯧!” 철용은 괜한 화풀이를 하듯, 거칠게 차를 주차시키고 프로축구연맹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기 전, 바닥에 ‘툭’ 담배를 던지고는 마치 더러운 집단들을 그러하고 싶은 것처럼, 번쩍거리는 구둣발로 지긋이 즈려 밟았다. - “코치니~임”, “잠깐만 갔다 오면 되잖아요, 네?” “안돼요. 오늘 훈련도 아직 남았고, 조금 있다가 아저씨들 오시면 연습 경기도 치러야 하는데, 그 분들도 다 생업이 있으신데도 우리 때문에 겨우 시간 맞춰서 와주시는 거잖니. 그런데 정작 우리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 오전부터 내내 자신을 조르고 있는 아이들 모두는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마음 한 켠으로는 아쉬움이 계속 남았던지, 수림이 훈련 중간중간마다 겨우 달래는 중이었다. 드디어 오늘 감독님이 한국으로 돌아오시는 날이란 걸, 아이들 뿐만 아니라 수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고 또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마도 자신이 알고 있는 ‘이영후’라면 분명 충실하게 훈련하고 있는 모두의 모습들을 보는 걸 더 행복해 할거란 생각에,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훈련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북한’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잠시라도 들를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윤지! 제대로 찍고 있는 거 맞지?” 한편 남희는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과 체력 등 모든 것들을 자료화하고 통계화시켜 실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윤지에게 세세한 촬영을 부탁해 두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윤지의 카메라 촬영기술은 꽤 쓸만해서, 굳이 다시 손 댈 것도 없이 그대로 소중한 자료가 되 주었기에, 남희는 오늘도 변함없이 윤지에게 촬영을 맡겼지만, 스탠드 쪽에서 꽤나 많은 서포터즈와 뒤섞여 있던 윤지는 어쩐지 평소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어디다 정신을 놓고 있는 거야, 윤지!’ 남희가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윤지는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남자애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물론 그 남자애는 혜미에게 시선을 고정해 놓고 있었지만, 며칠 전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덕분에 조금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 의도치는 않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고,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먼저 시선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자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애의 눈빛이 낯설지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라는 남자를 바라보는, 그 남자의 첩이자 자신의 어머니란 여자의 눈빛이 그랬고, 언젠가 불려나간 술자리에서 ‘아버지’란 남자의 품에 안겨있던 자기 또래의 여자애 또한 그랬었으니까. 쓰레기… 윤지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보통의 남자애라면, 부끄러워하며 먼저 시선을 회피하거나, 마주보며 웃어주거나 했을 텐데, 저 남자애는 아스라한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내 일어서서는 뚜벅뚜벅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쟤?!’ “혹시, 옆에 자리 있니?” “그, 그건 왜?” “아니, 뭐… 비어있으면 앉아도 될까?” “그러든지 말든지.” 전후 사정도 제대로 모른 채 굳이 그렇게 차갑게 대할 이유는 사실 없었음에도, 윤지는 ‘쌩’하고 찬바람이 불 정도로 대응을 했지만, 그 남자애는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윤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곤 오랜 친구에게 말을 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내…내가 뭘?!” “오해하지 말라구. 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 아니니까…” ‘그런 남자…!’ 마치 자신이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낱낱이 까발려진 것 같은 기분에 윤지는 순간적으로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렀다. 도대체 이 녀석의 정체가 뭔지 점점 알 수 없었지만, 편안함과 위험함이 동시에 느껴지고 있었기에 윤지는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윤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남자애는 쭉 기지개를 펴며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혜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 사람… 싫거든.” “야! 나현우!” 뭐라 윤지가 대꾸하기도 전에 운동장에서부터 혜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고, 현우는 그런 혜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혜미로부터 들려온 답은 너무나 거칠기만 했다. “우리 윤지 건들면 죽는다!!” “풉!” 꽉 쥔 주먹을 들어 보이며 꽤나 괄괄할 정도로 소리지르는 혜미 덕분에 현우도, 윤지도 웃음이 터졌고, 어쩐지 현우와 윤지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에 혜미는 기분이 조금은 좋아질 것만 같았다. “혜미… 좋아하는 거야?” 다짜고짜 엉뚱한 질문을 해대는 윤지를, 그러나 현우는 별 놀람 없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 저렇게 축구하고 있을 때의 혜미라면… 그런 거 같기도 해. 그럼 너는?” 갑작스레, 되돌아오는 질문을 받은 윤지는 괜히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 나 뭐?” “너도 혜미 좋아하냐고.” 윤지는 마치 정곡을 찔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애… 뭔가 있어… 혜미가 위험해질 거야… 분명!’ 같은 또래의 아이답지 않은 여유로움과 순수함으로 가장된 얼굴은, 어쩐지 윤지의 머릿속에 빨간불이 들어오도록 하고 있었다. - 인천 공항의 출입국장의 문이 열리며 선수들이 카트 하나씩 밀며 등장하자 당연하게도 수많은 기자들의 질문과 스트로보 세례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은, 채 한 경기도 풀 타임으로 소화하지 못했던 ‘이영후’였다. “이 영후 선수! 여기 좀 봐주세요!”, “꿈에도 그리던 국가대표가 되셨는데 소감은 어떠십니까?”, ”부상 정도는 어떻죠?”, “북한 전엔 출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던 영후는 그러나 옆에 있던 노감독의 귀에 몇 마디를 건넸고, 노감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자들을 향해 제법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다른 여행자 분들께 폐가 되니 잠시 후 이곳 기자실에서 보도록 합시다.” 대부분의 선수들과 스텝들은 공항 외부에 정차해 있는 대표팀 전용 버스 쪽으로 이동했고, 노감독은 기자실 쪽으로 안내를 받으며 이동했기에 기자들 모두는 우르르 노감독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기자는, 노감독을 뒤따르다 순간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영후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 “택시!” 원정을 떠날 때도 별 짐 없이 갑작스레 떠났었던 영후였기에 홀홀 단신으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 선 건 낯익은 자동차였다. 이윽고, 영후는 빙긋 미소 지으며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실었고, 차는 곧바로 가속하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야야, 좀 천천히 몰아. 시간 많으니까.” “그럴리가. 선수로 한 건 했으니, 또 빨리 가서 감독하셔야지, 안 그래?” “훗, 못 당하겠다 정말.” “그치만, 택시비 대신에 나랑 인터뷰 좀 해 주셔야 겠어.” “그럼 그렇지… 본심을 너무 빨리 드러내는 거 아니냐?” 말과는 달리 만면에 웃음을 띄며 영후와 하연은 연신 투닥거렸고, 영후는 정말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뭘 또 그런 징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거 같아서. 너… 연애하는 구나?” “뭐, 뭣!” 빠~앙! 하연의 차가 차선을 잃고 비틀거리자 옆을 지나던 다른 차에서 급하게 경적을 울렸고, 하연은 가까스로 핸들을 제대로 잡아보았지만, 놀라는 하연의 반응에 영후는 더 놀라고 있었다. “헛… 뭘 그렇게 놀래? 진짠가 보네… 진짜 맞아? 너 연애해?” “우 씨… 그래 연애한다 어쩔래! 그럼 난 뭐 연애도 못하냐?” “어어~? 얘봐라?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얼마나 됐는데?” “웃겨?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걸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건데!” “아니 뭐. 하긴 그럴 이유는 없지. 근데… 그럼 나한테 했던 뽀뽀는 또 뭐냐?” “으…” 영후의 계속되는 공격에 하연은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바보야, 그건 너한테만 해본 게 아니란 말야…’ ‘키스’라는 연애의 첫걸음을, 스물 여덟이 되도록 떼지 못할 줄은, 하연은 정말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더랬다. 하지만 기자라는 직업과 단 하나의 남자, 바로 ‘이영후’에게 집중하며 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꿈도 낭만도 증발해버린 것만 같아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하연은 ‘키스’를 하게 되면, 남자의 마음도, 또 자신의 마음도 확인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엔 늘 변함이 없었기에, 과감하리만치 근명에게 먼저 키스를 해봤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지금껏 꿈꿔왔던 ‘키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몸도, 마음도, 그 어떤 것도 다가오거나 느껴지지 않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후를 떠나 보내기 위해 갑작스레 했었던 ‘뽀뽀’는 어쩐지 근본적으로 뭔가가 달랐었다. ‘그러고 보니…’ 파주 NFC에서 갑작스레 경기를 치르고 왔었던 날. 하연의 차 속에서 잠들어있던 영후에게 했었던 짧은 입맞춤 또한, 뭔가 말로는 쉽게 표현할 수 없었던 아른한 느낌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아…’ 생각해보니, 다행이었다. 적어도 ‘첫뽀뽀’ 만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언젠가 꼭 할거라고 생각했었던 바로 ‘저녀석’과 할 수 있었으니까. 이런 복잡다단한 하연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영후는 또 영후대로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근명이 녀석. 잘 하고 있을라나…’ - 공항 내 기자실은 약간 김빠진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들 자칫하면 나락으로 빠질 수 있었던 요르단 전을 드라마틱하게 승리로 이끈 영후의 소감을 중심으로 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건데, 기대하던 영후는 온데간데 없고 최악의 부진과 퇴장을 일삼은 근명이 노감독의 옆에 앉은 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자들은 아쉬움을 삼키며 노감독에게 질문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계속 이어지고 있는 주심의 편파 판정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요, 선수들 사이에서 동요 같은 것은 없습니까?” “오심도 시합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 정도 쯤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야 더 높은 목표를 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투르크메니스탄 전엔 이영후 선수를 기용하지 않으셨는데요, 혹시 예전 입은 부상이나 요르단 전의 부상 때문에 투입을 못하신 겁니까?” “그 놈… 아니 이영후 선수는 손발을 맞출 시간이 거의 없었기도 했거니와, 체력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뿐입니다.” “그럼, 이번 ‘북한’전에는 이영후 선수를 출전시킬 예정이십니까?” “개인보다 팀이 우선입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선수들을 구성해서 경기에임하도록 할 것입니다.” “어쨌든 노감독님의 ‘팀에서 활약하는 선수만을 뽑는다’는 소신을 깨고 합류시킨 이영후 선수의 활약이 눈부셨는데요, 이대로 계속 소속팀이 없어도 함께 가는 겁니까?” 결국, 나올거라 예상했던 질문이 다시금 튀어나오자, 노감독은 단상에 놓여있는 물컵을 집어 들어 목을 축일까 했지만, 그 사이에 근명의 돌발 발언이 터져 나왔다. “이영후 선수는 대한민국 팀 소속입니다. 그거면 된 거 아닙니까?!” 잠시 고요해졌던 기자실은 다시금 스트로보의 불빛들로 인해 달아오르며, 모든 포커스가 근명에게 맞춰진 채 잔뜩 속 뒤집힐 질문들을 쏟아냈지만, 근명은 한순간도 거만함을 잃지 않으며 일일이 답을 해 주었고, 게다가 인터뷰 말미엔 노감독도 움찔할 만큼의 폭탄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두고 보시죠? 북한 전만큼은 이영후 선수보다 더 많은 골을 넣을 테니까.” 정말 호기로운 발언이었음에도 어쩐지, 그 어떤 기자들도 그다지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때문에 근명은 더욱 더 초조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젠장, 박기자님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설마 벌써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한창 연습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한국 여대의 녹색 그라운드 위에선 꽤나 이색적인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매일 30분에서 45분 정도로 체력 훈련과 전술 훈련을 겸한 연습 경기가 실시되고 있었는데, 어느덧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과 한국여대 학생들은 몸을 부딪히는 횟수가 늘어난 만큼 의외로 쉽게 친숙해져 가고 있었다. 때문에 벌써부터 젊은 아가씨들이 아저씨들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불쑥불쑥 등장하곤 했다. “아저씨?” “왜? 헉!” 장난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수정을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본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순간 코피를 쏟을 뻔했다. 한참 시합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은 스스로 그녀의 유니폼 상의를 뒤로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브래지어 대신 탱크탑을 입고 있어 젖꼭지의 윤곽이 비치는 것 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볼록한 앞가슴 라인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 채 유혹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아저씨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수정은 아저씨 쪽으로 굴러오는 공을 어렵지 않게 인터셉트해 버렸다. “앗!” “아저씨 미안~!” “으…” 순간적으로 당해버린 아저씨는 벌써 오늘만 두 번 째였지만,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한창 풋풋한 아가씨들과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꿈 같은 경험이었던 데다가, 어느덧 어린 아가씨들과 자신들이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 자체가 기분 좋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또한 힘든 요즘 자신들이 웃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녀들이 아저씨들은 너무나 고맙기까지 했다. 결국, 왼쪽 날개 민지는 수정에게 공을 이어 받은 후 왼쪽 터치라인을 타고 돌파하다가 간단하게 크로스를 올려주었고, 어느덧 멋진 헤딩 폼으로 뛰어오른 혜미가 어쩔 줄 모르는 골키퍼 아저씨의 반대편으로 더 간단하게 헤딩을 하며 득점을 올렸다. 이윽고 혜미와 아라, 민지, 수정 등이 한 데 모여 스탠드에 모여있는 서포터즈들 앞에서 멋진 골 세레머니를 할 정도로 더 이상 아저씨들은 그녀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물론, 들쭉날쭉한 조기축구회의 멤버 소집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철저한 훈련을 반복한 그녀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었다. ‘후… 이제 앞으로 어쩐다…?’ 선수들의 성장이 물론 반가운 남희였지만, 이분들 말고는 달리 스파링 상대를 구할 수 없다는 현실에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권코치님, 이젠 어쩌죠? 더 이상 이분들과 연습게임을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데…” 수림 역시 남희와 다르지 않게 걱정이 앞선 얼굴이었고, 남희 또한 수림에게 정답을 내어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 사람들하고는… 축구가 장난인가!” 그 때였다. 혜미의 아버지이자, 한국 프로축구 원년 멤버였던, 수비수 출신의 장규식이 등장한 건. “아…빠?” “욘석!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게 훈련이냐? 놀이냐?” “아니… 아빠 그게 아니고…” “내 현우 아니었으면, 다들 열심히 연습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을 거 아냐?” 순간 혜미는 윤지의 옆에 앉아있는 현우를 구멍이라도 내 버리겠다는 눈으로 흘겨보았고, 현우는 슬금슬금 윤지의 뒤로 숨고 있었다. “어이, 코치선생! 나 혜미 애비 되는 사람인데, 학부형의 입장으로 시합에 좀 끼어들어도 되겠소?” 수림과 남희는 혜미의 스카우트 일화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오케이였고, 정말 오랜만에 축구 유니폼과 축구화를 신고 그라운드로 들어서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혜미의 심정은 꽤나 복잡했다. ‘이러다 시집갈 때도 따라오시는 거 아냐?’ 괜히 심통 난 얼굴로 볼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혜미 뒤편으로 하연의 차가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차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을 정도로 운동장의 분위기는 또다시 달아오르려 하고 있었다. - 똑똑. “네, 들어오세요.” 총장실의 문이 열리자, 총장은 순간 환해지는 자신의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총장님.” “안녕하세요 총장님, 저도 왔어요.” “어서와요. 박기자님도 반가워요.”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며, 총장은 소파에 앉길 권하며 먼저 상석에 앉았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왔습니다.” ‘즐거운 시간이라…’ 정말 영후 다운 말이었다. 온 몸이 부서져라 뛰고 온 사람 치고는 너무나 행복한 얼굴이었기에 총장은 급하게 떠나는 영후에게 당연히 허락을 해줬던 그때를 돌이켜보며, 꿈을 가진 남자는 얼마나 위대한 지 알고 싶다면, 그저 눈 앞의 이 남자를 지켜보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보았다. “이감독님의 경기는 아주 감명 깊게 잘 봤답니다.” 이어지는 총장의 발언에 하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 남자의 헌신적인 플레이에 그 누가 감명받지 않으랴. 그저 한 경기 뛰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영후의 몸에는 그가 기록한 골 만큼이나 상처의 개수도 늘어있을 정도니, 이 남자의 플레이보다 더 감동적인 드라마는 없을 것이었다. “아직 한 경기가 더 남아있습니다. 모쪼록 마지막까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과연 그렇게 될까? 총장도 하연도 결코 영후의 ‘마지막’이란 말은 믿지 않았지만, ‘실망시키지 않겠다’라는 말은 굳게 믿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 행동을 해도 괜찮다 하시던가요?” 역시나 노감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총장의 걱정스런 물음이 이어졌지만, 영후는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해 주시더라구요. 저 같은 놈도 감독이라니까…” 영후의 말에 미소를 짓던 총장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며 그라운드를 바라본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럼, 더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보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 확실히 선수 출신의 규식이 중앙 수비수 자리에 들어가자, 조기축구팀의 전체적인 수비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었고, 본능적으로 위압감을 느낀 혜미는 경기 초반과는 달리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결국, 경기가 속개된 후 혜미는 좀더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다른 아저씨들과는 달리 규식은 전체적인 수비 라인을 정렬하며 빈틈없는 공간 점유를 지시했다. ‘흥, 아무리 아빠래도 안 봐줄 거라구!’ 드디어 마음을 정한 혜미는 미드필더 진영에서 공을 돌리고 있던 수정과 은채, 그리고 아라에게 사인을 보냈고, 그녀들은 별 어려움없이 조금 밑으로 내려와있던 혜미에게 패스해 주었다. ‘이래봬도, 아빠 딸은 이영후 선수의 수비도 뚫었었단 말씀이야!’ 혜미는 영후와의 첫만남을 떠올리며, 이제는 나이 들어 버린 아빠는 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내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일거에 정리한 혜미는 공을 드리블하며 규식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 순간적으로 규식을 돌파해냈다고 생각한 혜미는 곧바로 골키퍼와 일 대일 상황을 맞이하는 가 싶었지만, 혜미와 골키퍼 사이엔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어…어느틈에…?’ 혜미가 규식을 스쳐지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규식은 그저 볼만 살짝 건드려 자신의 소유로 만든 것이었다. “혜미야, 축구는 장난이 아니란다.” 규식은 짐짓 엄한 표정으로 혜미에게 충고를 하고는 꽤나 강력한 장거리 패스를 전방으로 날려보냈다. “늬들 감독이란 사람은 즐거워야 한다고 했겠지만, 혜미야… 실전에서도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될 걸?” 혜미는 아빠덕분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있었다. ‘정말, 이런 것이 진짜 수비수의 플레이란 건가…?!’ 혜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아니 안다고 생각했던 아빠의 본 모습은 사실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실력의 소유자가 은퇴를 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현역의 선수들 실력은 더 어마어마하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국가대표 선수라면 더더욱! ‘그럼 도대체 감독님의 레벨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있던 혜미에게, 오른쪽 날개 나경은 패스를 보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패스의 길목을 알아차린 규식이 어느새 나타나 혜미보다 먼저 공을 소유해버린 것이었다. “자네들도 정신들 차리라고!!! 언제까지 수비만 하다가 끝낼거야???” 또다시 전방으로 공을 차 내며, 모든 아저씨들에게 호통을 치던 규식에게 순간 가뭄의 단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공격수가 필요하신가요?” 소리소문도 없이 스탠드에 나타난 영후의 발언에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그라운드에 있던 한국여대 선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달음에 달려가 영후를 에워싼 채로 그간 그리움에 몸서리 쳤던 순간들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절대로 영후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선수들과 달리 영후의 곁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있던 수림과 남희는 그저 애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고, 반대편 스탠드에 앉은 채 그저 캠코더의 뷰 파인더 속으로 영후를 바라보고 있던 윤지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짧은 플레어 스커트 자락을 꼬옥 쥐어 보았다. 23부. 호텔에서의 하룻밤 - part I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호텔 방에 막 들어온 노감독은 오늘 하루만큼은 전에 없이 더욱 무던한 척 했지만, 실은 그리 쉽지 않았던 기자들과의 인터뷰 덕분에 몇 년은 더 늙어버린 기분이었기에,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소파에 맥없이 앉아보았다. 게다가 비행기에서 영후에게 들었던 충격적인 이야기 덕분에 머릿속에선 벌이 날아다니듯 ‘윙윙’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는 중이었다. ‘도대체… 지금도 모든 걸 가진 자들이… 정녕 취하고자 하는 게 아직도 남았단 말이냐…’ 차라리 지금 이대로 영영 깨지 않을 깊은 잠에라도 빠져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감독은 잠시 눈을 감아보았지만, 바지 속 핸드폰은 잠깐 동안의 여유조차도 허용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울려대고 있었고, 이내 힘겹게 핸드폰 액정화면을 들여다보는 노감독의 얼굴은 잠시나마 마음의 위로를 받고 있는 듯 해 보였다. “미안하오, 내 먼저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거 모른 척하며 화낼 시기는 벌써 지난 지 오래잖아요.’ 시기가 지났다라… 노감독은 황총장의 뼈있는 답 덕분에 잠시간 젊은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다,는 반성도 하면서. ‘이영후가 학교로 찾아왔더군요.’ “그러겠다 길래, 그러라 했소만.” 총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기에 기쁘지만, 복잡한 머릿속 덕분에 답변이 시원치 않았던 노감독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는 듯 총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는 거에요?’ “일은 무슨… 그냥 좀 피곤한가 보오.” 설령 무슨 일이 있었대도 쉽게 내색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총장은, 노감독이 자신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건성으로 답하는 중이라는 것 쯤은 뻔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노감독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총장 역시 그래 주어야 했다. ‘그래요… 알았어요. 쉬세요.’ 총장은 애써 담담하게 인사말을 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왠지 끊을 수가 없었는데, 역시나 수화기 저편의 노감독 또한 ‘끄응’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하는 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이쪽으로 와 줄테요? 아니면 내가…” ‘갈게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노감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대답해버린 총장은, 순간 홍조가 된 얼굴을 매만지며 창피함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이내 전화를 끊자마자 책상 서랍 속에서 거울을 꺼내 들고는 반백의 머리를 매만지다 이제는 푸석함 만이 남아버린 자신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괜한 한숨이 나왔다. ‘황여실, 너도 이제 많이 낡았구나…’ 자신의 남자 앞에서 가장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이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가 매한가지였을 터였다. 허나 누구나 그러하듯 황총장 또한 세월을 비켜갈 순 없었기에, 좀 전의 다급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채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춰보며 또다시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호텔 로비에 마련되어 있는 개방형 커피ㅤㅅㅛㅍ에 들어서던 근명은, 하연이 채 손을 들어주기도 전에 찾아내고는 잔뜩 반가운 얼굴로 하연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지키지 못한 약속과 비행기에서의 난데없는 ‘정사’가 생각나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겨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어~! 카드 수집가~!” 역시나 첫 인사부터 장난스럽게 건네주는 하연 덕분에 근명은 경직된 몸과 마음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줄 수 있었다. “아까 기자회견장에서 안보이데요?” “어이구, 그 정신 없는 와중에 누나 찾고 있었어요? 왜, 젖이라도 주랴?” 하연은 농담을 한다는 게 조금은 수위가 높아지며, 괜히 근명이 자신의 가슴을 만졌던 때를 떠올라 괜히 헛기침을 해 보았다. “영후 자식 때문에. 학교에 데려다 주고 왔다.” “아, 예…” 영후 이야기가 나오자, 근명은 역시나 표정이 어두울 수 밖에 없었고, 하연은 또 하연대로 근명을 이렇게 만나고 있으면서 영후의 이름을 거론 하다 보니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쾡’해지는 듯 했기에, 결국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저기…” , “근데…” 순간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은 이내 픽 웃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겨우 날려버리고는 예의 평소의 모습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어때? 원정까지 가서 푹 쉰 소감이?” “으으… 그건 정말 잘못된 판정이었다구요!” “뭐,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은 있다더라.” 꼬투리만 잡으면 근명 놀리기에 재미 붙인 하연이었지만 잔뜩 의기소침해진 근명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 – 엄밀히 말하자면 여자들 - 때문에 자꾸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기우일런진 모르겠지만, 커피ㅤㅅㅛㅍ에 앉아서 근명을 기다릴 때부터 어쩐지 호텔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한 여성들이 하나씩 하나씩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뭐… 호텔도 엄밀히 말하자면 그 짓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니까…’ 너무 과민한 반응인 것만 같아,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이내 잊어버리려는 하연이었다. “어쨌든, 심심했는데 와줘서 고마워요.” “심심해? 왜?” “어찌된 건진 모르겠지만, 호텔에 와보니까 한 사람당 방을 하나씩 배정 해주더라구요. 전에는 두사람이 방 하나를 같이 썼었는데. 장기 원정 다녀온 위로차원인가?” “일인 일실?” 근명의 이야기를 듣고 난 하연은 기자로서의 직감으로 보건 데 뭔가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박기자님!” “어? 어, 왜?” “뭔 생각을 하길래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어요?” “어어, 아냐 아무것도. 참, 그래서 컨디션은 어때? 아직 기대해도 되는 거야?” 하연은 별 기대도 없이 무심코 꺼낸 이야기였지만, 단순한 근명은 기다렸다는 듯 발끈했다. “당연하죠! 이번 북한 전 꼭 헤트트릭 할 테니까, 두고 보라구요!”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공약을 남발하는 근명 덕분에 하연은 어이가 없어서 픽 웃고 말았지만, 그런 하연의 눈에 또다시 여자 하나가 포착되었고, 이내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여자의 모습에, 하연은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어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 “안돼욧!!!” 영후 복귀 인사로 인해 잠시 중단됐다가 재개되었던 연습 경기에서, 순식간에 영후에게 다섯 번 째 골을 허용하고 또다시 그 다음 골을 허용할 것 같자, 센터백 진희는 결국 영후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매달렸고, 그에 질세라 또 다른 센터백 미애 역시 영후의 팔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어어~?” 결국, 너무나 경기 자체에 몰입했었다는 걸 깨닫고는 겨우 정신을 차린 영후는 자신들에게 매달리는 아이들의 힘에 와르르 넘어져 주었지만, 진희와 미애는 그대로 영후의 몸 위로 엎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하늘이와 소영이도 합세하며 영후의 몸 위로 차례차례 포개지고 있었다. “아이고 얘들아~” 영후는 결국 아이들에게 항복하고 말았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남희와 수림은, 방금 영후가 깨달았던 것처럼, 그간 즐거움을 뒤로한 채 너무 아이들을 몰아붙인 건 아니었을까 잠시 반성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벌써 잊어버렸다는 듯 아이들은 영후와 장난을 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참내, 저렇게 사람이 물러서야…” 팔짱을 낀 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규식은 아이들의 응석을 받아주는 영후가 조금은 못마땅했지만, 어쩌면 저런 사소하지만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영후가 바라던 것이었던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편 혜미는 어느 샌가 스탠드에서 사라져버린 윤지의 모습을 찾아 눈으로 스탠드의 구석구석을 살펴봤지만, 윤지의 캠코더를 지키고 있는 현우만 어색하게 앉아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윤지의 그림자 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윤지야…’ - “잠깐 올라갔다 갈래요?” “내가! 으… 내가 머리에 총 맞았냐? 그때 그 짓거리를 또 하고 싶진 않다.” 하연은 근명의 물음에 하마터면 ‘버럭’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겨우 냉정을 되찾고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조곤조곤 억지로 웃으며 말을 하곤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이상하게 엮이기 전에 난 일어 날란다. 기사 작성도 해야 하고.” 근명은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호텔에 하연만을 남겨두고 사라졌던 그 때를 생각하면, 하연에겐 미안해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결국 두 사람은 로비로 나와 호텔의 출입구로 향하고 있었는데, 하연의 눈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다. “어머? 총장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때문이었을까? 총장은 호텔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린 듯 했다. “아… 바… 박기자님…?” “예, 이쪽으로 오시는 줄 알았으면 모시고 왔을텐데요.” “아뇨 아뇨, 예정에 없었던 일이라서… 그런데…?” 총장은 조금 안정을 되찾으며 하연의 바로 뒤에 서 있는 근명을 바라보았다. 하연은 총장의 시선이 머문 곳을 확인하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괜히 과장될 정도로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아, 일이에요, 일.” 하연의 대답에 근명은 잠깐이지만 인상이 찌푸려졌고, 총장은 그런 근명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박기자는 영후씨와 사귀는 사이 아니었던가…?’ 하연과 근명을 번갈아 바라보며 총장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이어지는 하연의 질문 덕분에 자신이 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아, 이곳에서 누굴 좀 만나기로 했어요.” “네에…” “그럼.” 어쩐지 조금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하연에게서 멀어지는 총장을 한동안 바라보던 하연은 역시나 직업은 못 속이는 것인지 궁금증이 잔뜩 밀려왔지만, 기사를 마감하려면 어쨌든 서둘러야 했다. 때문에 하연은 또다시 의문스러운 여자 하나와 스쳐 지나갔지만 애써 외면하며 호텔 밖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 딩동. 노감독은 벨이 울리자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호텔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엔 – 적어도 노감독의 눈엔 - 그 옛날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황총장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총장이 그간 사두고서도 아껴두었었던 옅은 하늘색의 스리피스를 차려 입고 온 것 같은 소소한 것들 까지는 노감독도 미처 몰라봤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총장은 충분히 지금의 노감독의 마음을 설레게 할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들어오구려.” 한때는 부부의 연을 나누며 슬하에 자식까지 뒀었던 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누가 더하고 덜하다고 구분 지을 수 없을 만큼 동작이나 말투가 딱딱함 그 자체였지만, 그 누구도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협회엔 돈이 넘쳐나는가 보네요. 이런 불경기에 고급 호텔이라니.” 어색함을 줄여볼까, 입을 연다는 것이 괜히 심통부리는 것 같은 기색이 되어버려 총장은 조금 민망했지만, 노감독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게 말이오. 게다가 이렇게 넓은 방을 혼자서 쓰라 하니 원, 좀 적적해야 말이지…” 화를 내기는 커녕,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게다가 적적함을 달래줄 사람은 총장밖에 없다는 투로 말하는 노감독 덕분에 총장은 괜히 새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저녁은 들었소?” 그 나이 대 사람들의 인사가 그러하듯, 노감독은 인사차 말을 건넸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총장은 의외로 시장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배고프다는 말을 꺼내기엔 역시나 총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을 너무 많이 탄다는 게 문제였다. 허나 노감독은 총장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한쪽에 놓여있는 호텔 전화기를 들어 이것 저것 주문을 넣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총장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그랬다. 그래서 총장은 이 남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자신의 깊은 속을 한 눈에 들여다 보는 듯한 배려. 망할 축구만, 그것만 아니었다면 분명 자신은 이 남자의 인생에 있어 최우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하시는 일은 잘 되고 있는 거에요?” “당신 눈썰미엔 당할 수 없겠지… 솔직히 말하면 조금 버겁기도 하다오. 생각과는 달리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넘쳐나서 말이지…” “그래도… 영후씨가 있으니 든든하시겠지요, 아닌가요?” 마치 영후를 자신의 연적으로 정해두고 말하는 듯 약간의 투정이 포함된 말투였기에 노감독은 그저 ‘허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오. 그나마 그 눔이 있으니 다행이지… 암, 그렇고 말고…” 꽤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노감독의 모습에 총장도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어쩌면 오늘 밤 만큼은 노감독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를 내심 해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또다시 혼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 자신에게로 배정된 호텔방에 앉아있는 영후는 조금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어색함은 그저 그간의 훈련 경과 보고를 하기 위해 남희가 한국여대에서 부터 부득불 자신의 호텔방까지 따라왔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또한 여태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극도로 노출을 자제하던 남희의 옷차림이 오늘만큼은 평소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그건… 아마도 강진에서의 정사 이후 처음으로 또다시 단 두 사람만의 공간에 놓여진 것 때문일 거라고 영후는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남희는 남희대로 열심히 영후에게 훈련에 관한 여러 가지 진척사항들에 대해 보고를 하고는 있었지만, 얼굴은 달뜬 표정 그대로 어딘가 꿈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었고, 영후는 영후대로 한쪽 어깨 선이 들어날 정도로 루즈한 블라우스 사이로 자연스럽게 보이고 있는 가슴 골 덕분에 설명을 귀로 듣는 지 코로 듣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결국, 영후는 주책 맞게도 아랫도리가 뻐근해짐을 느껴버리곤 불룩해진 앞섬을 숨기려 엉덩이를한껏 뒤로 뺀 채 엉거주춤 일어서며 잔뜩 숨을 참았다 한번에 내뱉는 모양으로 남희에게 급하게 제안을 했다. “배 안고파요? 뭐 먹고 할까요?” “그럴…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감독님하고면 뭐든지요!’ 자칫 속마음이 드러날 뻔 했던 남희는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무거나요’라고 말한 뒤 괜한 어색함을 감추려 손에 든 자료 철을 내려놓고는 머리 뒤로 작게 기지개를 폈지만, 덕분에 그녀의 풍만한 가슴라인이 더욱 도드라지는 통에 영후는 남희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물론 거꾸로 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여보세요? 아, 이런…” 왜 소리가 안 들리나 싶었던 영후는 그제야 수화기를 거꾸로 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통화를 했지만, 남희 또한 평소 답지 않은 엉뚱한 영후의 모습에도 전혀 웃지 못할 만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 “아~ 배-고-프-다-!” 아빠의 은밀한 명령 때문이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항상 자신의 뒤를 따라 삼거리 슈퍼까지 ‘배웅’ 같은 걸 해주던 현우가 들으라는 듯, 혜미는 크게 소리치듯 입을 열었지만, 현우는 못들은 척하고 혜미의 뒤를 따라오기만 했다. 그러자 혜미는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고 홱 뒤로 돌아섰고, 순간 땅만 보며 따라오던 현우의 머리는 혜미의 가슴에 ‘출렁’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아…앗! 미… 미안…” “흐응, 요녀석 보게?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너어~ 일부러 그랬지?” “아, 아니야! 진짜 아니야!” “바보야,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을 하니까 더 그런 거 같다!” “으…” “그나저나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감독님도 간만에 오셨으면 한 턱 쏘고 가시지…” 아쉬움 그득한 얼굴로 혜미가 투덜거리자 현우는 괜히 헛기침 몇 번 하더니 슬쩍 입을 열었다. “그…그럼 뭣 좀 먹고 갈래?” “진짜? 그럴까? 아, 아니다. 나 용돈 다 떨어졌거든.” “나는 좀 남았어. 아 참…근데, 아저씨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헹! 나도 언제까지 아빠 품에서만 있을 순 없다고.” “음… 그럼… 어디 호텔에라도 갈까?” 길거리 음식은 커녕, 언제나 일류 레스토랑이나 호텔 음식만을 먹던 현우였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호텔 얘기를 꺼냈지만, 그런 사정을 알리 없던 혜미는 눈이 똥그래지며 되 물었다. “야… 이게 진짜…미… 미친 거 아냐? 야, 이제 보니까 너 아주 선수구나?” “응? 왜…왜?” “아니 나이도 어린 놈이 모텔도 아니고, 여관도 아니고, 뭐? 호텔? 이게 그냥 콱!” “아… 그게… 뭔가 약간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호텔이라고 꼭 잠만 자는 곳은…” “이게 그래두!” 콱 쥐어 박으려는 혜미의 행동 덕분에 현우는 입을 다물어 버릴 수 밖에 없었지만, 혜미는 자신이 너무 오버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다시 앞서서 걷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 그런데 가보긴 한 거야?” “어? 어디? 아… 호텔? 으응…” “자주?” “으응…” “여자랑?” “으응…니! 아니! 아니아니!”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 혜미의 유도 심문에 넘어가버린 현우는 다급하게 부정을 해보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혜미의 눈초리 덕분에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현우가 복잡한 머리를 애써 굴려가며 변명거리를 찾는 동안, 의외로 혜미의 입이 먼저 열렸다. “좋아, 가자. 그대신 네가 쏘는 거다? 오케이?” “어? 어어, 그래… 알았어.” “맛만 없어 봐라. 아빠한테 다 이를 거다, 쬐끄만 놈이 호텔 가자 그래서 갔다 왔다고. 알았지?” 어쩐지 혜미는 신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현우는 방정맞은 자신의 입을 탓하며 역시나 쫄래쫄래 혜미의 그림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 딩동. 운동하는 것보다, 무료하게 쉬고 있는 것 만큼 운동선수들에게 지루한 것은 또 없었기에 근명은 벌써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호텔방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남아도는 체력을 조금이라도 소비하려는 듯 애를 쓰는 와중에 초인종이 울리자 너무나 반가워 번개같이 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혹시나 하연이 와주리란 턱없는 기대치를 올리며. “누구세요?” “……” 대답은 없었지만, 어찌됐든 하연을 기대하며 덜컥 문을 열고 본 근명은 이내 낯설면서도 낯익은 단발 퍼머 머리의 여자와 마주섰다. “누…구…? 어? 너? 그때…!” “오랜만이야 오빠~” 깜짝 놀라는 근명의 얼굴 같은 건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방으로 들어서기 전 복도에 자신을 보는 눈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 윤지는 근명의 허락도 없이 스르륵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근명은 갑작스레 방문한 윤지에게 반가움 반 놀라움 반이 가득한 얼굴을 그대로 보여준 채로 문을 닫았다. “너… 아니 그것보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중요해? 좀 실망이네 오빠” “그게 아니라… 근데 지금 여기서 뭐 하려는 건데?” “잠자코 보고만 계셔.” 혼자 별의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근명을 뒤로 하고 윤지는 백에서 커다란 비닐을 꺼내 넓직한 킹사이즈 침대 위에 펼치며 입을 열었다. “됐다. 자, 침대에 누워.”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 마사지해주려는 거지.” “마사지? 난 그런 거 주문한 적 없는데? 너…? 설마… 그 뭐냐, 스토킹… 그래 스토킹한거야? 날?” “좀, 황당한 소린 그만하고. 금액은 이미 선불 완납됐으니까, 오빤 그냥 마사지만 받으면 돼.” “선불? 완납? 그게 도대체 무슨…?” 여전히 당황스런 표정의 근명이 분명 자신을 기억해주긴 했지만, 정작 윤지가 근명의 팬클럽 부회장이란 것조차 몰라봐주는 게, 윤지로선 불행중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때’와는 달리 결단코 근명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옷 벗고 얼른 누워 오빠.” “근데 갑자기 왠 마사지? 감독님 지신가?” “뭐, 비슷해. 어쨌든 얼른 이리 누워봐.” 근명은 미적거리며 옷을 벗기 시작했고, 얼마 걸리지 않아 팬티만 남겨진 채 꽤나 탄탄한 몸매가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창피한 듯 했다. “바로… 누워? 아님,” “엎드려.” “음. 그나저나 비닐 위에 눕는 기분은 그닥 안좋네.” 침대 위를 덮고 있는 비닐 덕분에 부시럭 부시럭 대며 근명은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이내 윤지의 몸에서부터 옷이 떨어져 내리자,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침묵을 지킨 채 마른 침만 삼키고 있었다. “앗, 차거!” 맥 놓고 있던 근명의 등에 한 가득 오일이 떨어지자, 잠시 몸서리를 치기도 했지만 이내 검은 색 브래지어와 끈 팬티 차림으로 침대에 올라온 능숙한 윤지의 손길이 한곳에 뭉쳐있던 오일들을 흩뜨리며 등과 어깨로 퍼지자 남자의 얼굴은 금새 노곤노곤한 얼굴이 되었다. 작은 체구의 어딘가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지 궁금할 정도로 윤지의 손엔 힘이 있었고, 또 부드러웠기에 깜빡했다간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것만 같았다. “아우 야…그나저나, 정말 잘하는 구나, 너?” 잠꼬대를 하듯 입을 여는 근명에게, 윤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으며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등을 지나 길고도 두꺼운 허벅지와 탄력 있는 엉덩이께로 손을 옮기자, 잠깐 움찔하는 근명이었지만 이내 긴장이 풀어지며 온 몸의 신경을 오로지 윤지의 손에 맡겨두고 있었다. “으음…” 정말 이런 기분은 근명으로선 처음이었다. 자칫했다간 그간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들이 한꺼번에 와해될 정도로 뭉쳐진 부위 그 이상의 것들이 스르륵 풀려나가는 느낌이었고, 게다가 믿지 못할 정도로 혈액 순환이 왕성해 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근명의 그것에도 피가 한가득 몰려버렸지만. “자, 이제 반대로 돌아 누우세요.” “아… 그래…”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자신의 자지가 팬티를 입고는 있었지만, 그대로 드러나 버린다는 상황에 근명은 조금 난감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윤지의 손길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더 다급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근명이 돌아눕자 윤지는 발기된 자지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와버려 자신도 모르게 잠깐 한숨을 내쉬어봤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능숙한 솜씨로 근명의 가슴과 다리에 오일을 뿌려댔고, 또다시 윤지의 손길이 닿아주길 기대한 근명의 바램과는 달리 이번엔 좀더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이 들자 근명은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가슴. 그것도 믿을 수 없이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가슴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근명이 조금쯤 실눈을 떴을 땐, 땀으로 반들거리는 윤지의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 위에 있었고, 달작지근한 내음이 그녀의 입에서 풍겨지고 있었기에 근명은 고개를 들어 윤지의 입에 입을 맞춰보고 싶었다. 그 후의 일은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한편, 적어도 지금 입을 맞춰보지 못하면, 마치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아 불안해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근명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윤지는 잠깐 멈칫하는 가 싶더니 이내 근명의 얼굴에서 사라지며 점점 하복부 쪽으로 그녀의 가슴을 옮겨가기 시작했고, 어느덧 근명의 자지부근에 다다르자 팬티 속을 뚫고 나올 듯 한 단단한 자지를 부드럽게 짓누르기도 했다가, 가슴 골 사이에 넣은 채 위아래로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흐음…” 드디어 근명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윤지는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근명의 몸에서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오빠, 다음 단계도… 계속 할까?” “아… 그래… 그거 좋지…” ‘다음 단계’라는 게 뭔지 알고나 좋다는 건지, 윤지는 살짝 근명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물론, 어차피 근명이 바라던, 바라지 않던 그와의 섹스는 해야만 했던 윤지였지만, 적어도 이쯤에서 싫다고 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윤지는 근명의 팬티를 조금 아래로 내리고는 곧바로 검붉은 근명의 자지를 입 안 깊숙이 넣고 있었다. “엇! 아아…” 기대가 현실이 되어가는 농염한 순간에 근명은 간헐적인 신음을 흘렸고, 윤지는 근명의 반응을 만들어내는 듯, 입 속의 자지를 능수능란하게 빨아대고 있었다. 혀는 자지를 감싸쥐기도 했고, 간지럽히기도 했으며, 입안은 그대로 보지가 되어 흡입하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했다. 게다가 간간히 이로 자지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자극하듯 깨물기도 하며, 점점 자극의 정도를 높여가고 있었고, 근명은 자신의 손하나 까딱하지도 않으면서도 성적 만족도가 극대화 되는 새로운 경험을 체험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윤지의 핸드백 속 캠코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낱낱이 녹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영후는 눈앞에 음식을 두고서도 그저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먹는 모습까지 천사가 따로 없네.’ 영후는 처음 남희를 봤을 때 떠올렸던 천사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오버랩 시키며 정신을 놓고 있었고, 행여 소리가 날까 조심스러워하면서 잘게 썰은 스테이크를 입안에 넣던 남희는, 물론 자신을 정신 없이 바라보는 영후의 시선을 못 느끼기는 커녕, 너무나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아하게 하던 식사를 계속 하고 있었다. “참, 오코치님 말인데요.” “네? 오코… 아, 수림씨요. 근데 왜…?” “정말 오코치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아…” 그제야 영후는 수림과의 지난 날을 회상하며 잠시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괜찮으시다면,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그럼요.” “지금은 누군가요?” “네? 누구…라뇨?” “감독님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람, 지금은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아, 그게… 그건…” “수림씨와는 어느 정도 정리되신 거란 건, 그때 말씀해 주셔서 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니 굳이 그때 그 말씀 아니었더라도 누구라도 수림씨의 얼굴을, 그러니까 감독님하고 그렇게 되기 전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 영후는 그제야, 얼떨결에 시작하고 흐지부지 되어버린 수림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생각해본들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기에, 영후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죄지은 표정 하시라고 여쭤본 건 아닙니다. 그저, 남녀 사이의 일은 언제가 됐든, 또 어느때가 됐든 갑작스럽게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그랬던 것 처럼요…’ 남희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마지막 말을 가슴속으로 삭이며 냅킨으로 도톰한 입술을 닦았다. “어쨌든 알고 싶습니다. 지금 감독님의 마음에 들어와있는 사람이 수림씨인지, 박기자님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남희는 너무 나가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진에서의 그날 이후, 남자에 대해 눈 떠버린 자신의 육체를 죄스러워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밤마다 영후의 품을 그리워하기 시작하는 바보 같은 여자가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밤을 지나 벌건 대낮임에도 영후와의 섹스를 꿈꾸며 순식간에 가랑이 사이가 젖어 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몸 때문에 이렇게라도 영후 앞에서 심통을 부려야만 했던 것이다. “남희씨…” “왜 남자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겁니까? 왜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의 잠자리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에게 고백하는 것보다 더 쉬워 보이는 겁니까? 네? 도대체 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남희의 눈엔 어느덧 이슬이 맺혀있었고, 그런 남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영후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도… 사실은 나도 왜 그런 건지……’ 식어버린 요리들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시간을 보내버리던 두 사람 중, 먼저 용기를 낸 사람은 역시나 남희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나 봐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죠?” 자리에서 일어서며 약간은 떨고 있는 듯한 남희를 영후는 알아채지 못하며, 그저 뚜벅뚜벅 걸어가 욕실 문을 열어 주었고, 남희는 영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욕실로 들어갔지만 문이 닫히자 의미 없이 세면대의 수도 꼭지를 한껏 열어버린 후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며 남희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후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어느덧 어둠이 내린 거리 사이로 수많은 인조 별빛들이 반짝이고 있는 창 밖의 정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 “손님? 죄송하지만, 대기 손님이 많은 관계로 한 시간 정도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단 말이에요?”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혜미의 속마음이 그대로 ‘말’이 되어 튀어나와 버리는 통에, 호텔 레스토랑의 홀 매니저의 왼쪽 눈썹은 약간 들썩거리기도 했지만, 현우는 덤덤한 얼굴로 알았다고만 하고는 혜미와 호텔 로비 쪽으로 걸어나왔다. “참나, 불경기라고 하는 건 돈 없는 사람들한테나 있는 건가? 이런 데에 사람이 꽉 차 있다니, 이게 제대로 된 사회냐고!” 혜미는 얼마 전 들었던 ‘현대사회의 계급전쟁’ 이라는 강의를 떠올리며 제법 어른스럽게 이야기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배 고픈 건 숨길 수 없었다. “미안… 예약을 하지 않으면 좀 기다려야 한다는 걸 깜빡 했네.” “됐다 됐어, 기대를 했던 내가 바보지. 우리 주제에 뭔 호텔 음식이냐? 어차피 배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혜미의 얼굴은 그러나 허기와 짜증의 완결판이나 다름없었기에, 현우는 생각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럼 말야, 룸에서 먹을래…?” “룸? 그건 또 어딘데?” “그게… 그러니까…” 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가만히 엄지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고, 멍하니 현우의 손을 바라보며 천정을 올려다보던 혜미는 그제야 눈이 똥그래지며 화다닥 얼굴이 붉어졌다. “미쳤어 미쳤어! 야 임마! 나현우! 아무리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왔다고 내가 그렇게 쉽게 보여?” “아,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정말 미쳤지. 밥 먹자고 호텔로 오자고 할 때부터 진작에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 “너 혼자 룸에 들어가서 많이 먹고 오세요, 알았냐? 누나 간다.” 찬바람이 쌩하고 불 정도로 현우 옆을 스쳐가던 혜미는 순간, 자신의 손목을 잡은 현우의 손길 덕분에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뭐… 뭐야 너? 이거 안 놔?” “그런 거… 아니야.” 진심이 담긴 현우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혜미는 어쩐지 자신의 반응이 너무 과했나 싶을 정도로 미안함 마저 느끼고 있었다. 남자가 이런 곳에 오자고 한다면, 당연히 여자는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적어도 사귀기 전에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우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혜미 자신이 무척이나 잘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버리고 있었다. “그럼…” 결국, 단 몇 초 만에 수 만가지 갈등을 하던 혜미는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룸에 가면… 밥 빨리 먹을 수 있다는 거야? 아까 거기서 파는 거랑 같은 걸로?” 현우는 심각한 얼굴에서 조금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혜미는 결국 결정을 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그대신 맛없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혜미는 붉게 물들어가는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며 입을 열었고, 이윽고 현우에게 잡힌 손목이 불편하기도 했을 텐데, 어쩐지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으며 현우의 손에 이끌려 뒤를 따라가는 혜미였다. - 끼익. 한동안 욕실을 가득 채우던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가 끊기자, 뿌연 수증기 사이로 관능적인 남희의 나신이 드러나고 있었고 조심스레 수건으로 몸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물기들을 닦아내는 그녀의 정신은 이미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것만 같았다. ‘미쳤다고 생각하실까…’ 분명, 남희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 섹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여자도 아니었고, 대학 때 조금쯤 친밀했던 선배와 낯선 모텔 방에서 가졌던 첫경험으로 남자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영후로인해 느껴졌던 공식화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프기만 하고, 힘들기만 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었던 강진의 하룻밤 덕분에 남희는 자신의 몸에 숨죽이고 있던 특별한 감각에 눈을 떴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느낌이었고, 포만감과 행복, 슬픔, 환희… 그야말로 모든 인간의 감정들을 한번에 아우르며 느끼게 해주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은 다른 어떤 행위로도 대체될 수 없었고, 마치 금단 현상이 지속되는 것처럼 남희를 그날 이후 매일 밤, 매일 낮을 고통 아닌 고통의 시간 속에서 보내게 만들었다. 멍한 얼굴로 바라본 거울 속에선, 남희였으나 남희가 아닌 또 다른 여자가 음탕한 얼굴로 유방과 보지를 연신 애타게 매만지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남희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니 더욱더 무서워지고 있었다. 기나긴 물줄기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그만큼 기다림도 길었을 것이었다. 분명 감독님은 자신이 샤워를 하고 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단순한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 왔다가, 샤워를 하고 있는 자신을 감독님은 얼마나 황당해 하실지 뻔히 보여 남희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희는 벗어놓은 자신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욕실 한 켠에 걸려있는 비치타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맨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가슴께까지만 타월을 이용해 몸을 가렸고,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더욱 커져버린 자신의 가슴 때문에 겨우 매듭지은 타월은 손가락만 갖다 대어도 ‘툭’하고 풀려버릴 것만 같았다. 만일 타월이 흘러내린다면 자신은 감독님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여과 없이 보여주게 될 것이었다. ‘아…’ 그저 잠깐의 상상만 했을 뿐이었는데 남희의 보지는 금새 젖어 들며 애액을 흘리기 시작했고, 이내 자신의 허벅지 안쪽으로 쪼르륵 흘러내리는 애액을 겨우 닦고 나서 남희는 떨리는 손으로 욕실의 문고리를 잡은 채 심호흡을 몇 번 해보고 있었다. 딸깍. 이윽고 욕실의 문이 열리자 담담한 표정으로 영후가 남희를 돌아보았고, 남희의 보지는 또다시 울컥하며 애액을 뿜어댔지만, 그런 걸 알리 없던 영후는 그야말로 더는 당황스러울 수 없다는 얼굴로 남희를 바라보았다. “나…남희씨…” 남희는 욕실에 안경을 벗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남자의 눈길을 그대로 마주보았다가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을 테니까. “남희씨, 지금 무슨…?” “… 않아요…” “네?” “아무리… 아무리 애를 써도… 잊혀지지가 않는 다구요…” “남희씨…” 영후는 남희가 못 잊겠다는 말의 뜻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신도, 아니 자신의 몸이 그 날 밤을, 그날 밤 남희의 몸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혹여 잠시라도 잊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었다. 지금이라도, 영후는 남희의 마음을 핑계로 이 이상 같은 현실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남희씨… 남희씨는 알고 있잖아요. 내가…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래서 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이러면, 또다시 이렇게 돼버리면… 난 남희씨한테 줄 거라곤 상처밖에 없어요.” “그것도… 알아요. 안다구요…” 안경을 안 쓴 남희의 얼굴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영후는 새삼 깨닫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타월로 겨우 가린 가슴 사이로 격한 굴곡이 만들어 지고 있었지만, 역시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유빛깔의 허벅지 안쪽에서 반짝이며 흘러내리는 물기 – 라고 영후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 가 일말의 거침도 없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릴 정도로 너무나 완벽한 각선미를 뽐내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지금의 영후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 남희씨… 그럼 왜 이러는 거에요… 우리… 우리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왜… 안 되는 건데요?” “그… 그건…” “알려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전… 답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알려주세요…” 이윽고 남희가 천천히 입을 열며 한걸음, 한걸음 영후에게 다가갈 수록, 남희의 몸을 겨우 가려주고 있는 타월의 매듭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겠다며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막을 수 없었기에 결국 영후와 한걸음, 아니 반걸음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무렵, 타월은 자연스럽게 남희의 발치로 흘러내렸고 영후는 감히 남희의 몸을 내려다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남희의 흐릿한 눈망울 만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남희의 눈이 스르륵 감기며 동시에 남희의 두 팔이 영후의 목을 감고 있었다. 키스. 굳이 갓 목욕을 마치고 나온 여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여자와의 키스는 언제나 달콤하고 또 촉촉하다는 걸 영후는 알리 없었지만, 고목나무처럼 뻣뻣하게 서 있던 영후는 결국 자신의 입술을 배회하는 남희의 부드러운 혀에게 자신의 입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고, 그제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 거침없이 영후의 입 속으로 들어선 남희의 혀는, 다시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영후의 혀를 휘감고 또 붙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24부. 호텔에서의 하룻밤 - part II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근명은 자신의 몸 위에서 말을 타듯 엉덩이를, 또는 허리를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윤지의 모습을 겨우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두 번 사정을 한 뒤였지만 이런 여자와의 섹스라면, 아니 윤지와의 섹스라면 열 번을 넘어 스무 번 이상이라도 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다못해 지난 번 윤지를 그냥 보내버린 것조차 너무나 아깝게 느껴질 정도이기까지 했으니, 분명 근명은 지금 늦게 배운 도둑질 덕분에 밤새는 것은 기본이고 몸이 축나는 것도 모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행기에서 갑작스럽게 만나 정사를 벌였던 여자와는 달리, 저급하지도 않고 또 신음을 애써 참는 윤지의 모습에 근명은 더욱 흥분하고 있었다.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비슷한 체위들로 윤지가 그저 시간만을 흘려 보내는 듯 한 모습이었지만, 그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근명이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근명은 흥분이 극에 달해 또다시 폭발할 것만 같아 애써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살짝살짝 움직이고 있는 겉모습과는 달리 윤지의 보지는 다년간 숙련된 노하우로 근명의 자지를 잘근잘근 씹어대기도 하고, 블랙홀이 되어버린 것처럼 끊임없이 빨아들이기도 했으며, 소위 자지 마사지를 하고 있는 듯 쉴새 없이 마사지 오일 같은 미끈거리는 애액을 내뿜으며 빈틈없이 자지의 구석구석에 발라주곤 했던 것이다. 너무나 완벽한 봉사였기 때문 이었을까. 근명은 차마 윤지의 몸 어디에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혹여, 손을 대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까봐… 지금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의 꿈처럼 지워질까 봐. 그저 누운 채로 윤지의 퍼포먼스를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윤지는 어느새 근명의 한 손을 잡고는 자신의 가슴께로 이끌어 주었고, 이윽고 탄력과 말랑함이 느껴지는 동그란 가슴을 조심스레 손안에 쥐어보던 근명은, 어느새 점점 속도를 내고 있는 윤지 덕분에 채 가슴의 느낌을 맛보기도 전에 또다시 절정의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었다. “아… 나… 나온… 으윽!” “……으흑……아……” 또다시 근명은 윤지의 몸 속으로 정액을 쥐어짜 내보내고 있었지만, 단 한 방울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윤지는 쉬지 않고 엉덩이를 움직였고, 보지를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몸과는 별개로 윤지는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감독님한테, 들렀다 가야 할까?’ 조전무에게 각 선수들에 대해 배정받던 순간을 떠올리던 윤지는 그 당시 조금 이상했던 점을 회상해 보았다. 코칭스태프를 제외한 대표선수 모두에겐 한 사람당 여자 한 명이 배정되었지만, 정작 조전무에게 눈엣가시가 분명한 이영후에겐 의외로 여자를 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이유를 물을까도 잠시 생각했었지만, 윤지는 차라리 잘된 거라고 생각해버렸었다. 때문에,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보지 속으로 근명의 정액을 받아들이면서 영후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냥… 잠깐 얼굴만 보고 가지 뭐.’ 어느덧 세 번째 사정을 마친 근명의 자지가 자신의 보지 속에서 조금씩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윤지는 어차피 북한 전이 있는 전날까지 다른 아가씨들과 마찬가지로 밤마다 근명을 찾아와야 했기에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긴 머리를 틀어 올려 고무줄 하나로 질끈 묶은 채, 사무실에서 마감시간을 앞두고 의자에 책상다리로 앉은 채 정신 없이 타이핑을 하던 하연은, 그러나 영후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인터뷰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는, 스페이스 바를 의미 없이 ‘또각또각’ 누르며 고민하다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 아니지. 간만에 쬐끔 놀래켜줄까나…?” 하연은 이윽고 음흉하게 웃으며 백을 집어 들고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어차피 지금쯤이면 감독님 말씀 대로 호텔에서 얌전하게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 고급 세단의 뒷좌석에 몸을 묻은 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소시민들의 얼굴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던 늙은 남자의 바지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해대기 시작했고,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안경 너머로 번호를 확인하고 나서도 전혀 바뀌지 않은 눈빛으로 전화를 받았다. “음, 마담.” ‘네, 전무님. 저희 아이들, 오늘 말씀해주신 호텔로 몽땅 보냈어요.’ “차질은… 없겠지?” ‘그러믄요. 전무님께서 기자들까지 처리해주셨잖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에요. 근데…’ “음? 뭔가?” ‘왜 그 한 명은 놔두시는 거죠? 그 누구였더라…이…’ 이영후. 마담으로부터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 덕분에, 조전무의 어금니에는 조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마담답지 않게 궁금한 게 너무 많군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고.” 마담의 불필요한 관심에 인상을 찌푸리며 조전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마담 덕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기에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하여간 쓸데없는 호기심들이란… 쯧. 이봐, XX호텔로 가자고.” “네, 전무님.” 운전기사는 룸미러로 잠깐 조전무를 바라본 뒤 묵묵히 핸들을 돌려 XX호텔로 차를 돌렸다. - “뭐, 먹을래?” “어? 어… 그… 그냥 맛있는 걸로 네가 알아서 시켜줘.” 호텔 룸에 들어온 이후로 완전히 얼어있는 혜미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음에도 허리를 90도로 세운 채 뻣뻣하게 앉아있었기에 현우의 별 것 아닌 질문에도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그래 그럼.” 이윽고 현우는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달리 한치의 어색함이나 어눌함 없이 전화를 집어 들어 혜미로서는 전혀 못 알아들을 말들만 잔뜩 늘어놓고서 전화를 내려놓은 후에 혜미의 건너편에 앉았다. “맛… 있는 거 시켰어?” “어? 어어. 그럴 거야 아마…” “흥, 어설픈 핑계는 안 통한다는 거 알지? 맛만 없어 봐라. 그것까지 몽땅 아빠한테 일러 줄 테니까.” 꽤나 호기롭게 말하던 혜미였지만, 또다시 정적이 흐르자 마주앉은 두 선남선녀는 또다시 어색한 상황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런 고요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딩동. “어? 벌써 룸 서비스가 왔나?” 어색한 침묵이 못 견딜 것 같았던 지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먼저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정말이지 너무나 뻣뻣한 동작으로 혜미는 문으로 걸어갔고, 현우는 당연히 룸 서비스가 아닐 거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려봤지만 말릴 사이도 없이 혜미는 벌써 문을 열고 있었다. “어?”, “어?” 혜미는 문밖에 서 있는 초면의 여자 덕분에 놀라고 있었고, 문 밖의 여자는 예상치 못하게 룸에서 여자가 튀어나오자 적잖게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내 룸 넘버를 확인하더니 혀를 낼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아닌가? 미안, 방을 잘못 찾았나 보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 혜미에게 묘한 미소를 흘리며 여자는 다른 곳으로 사라졌고, 혜미는 여자의 간단한 인사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즐거운… 시간이라니…’ 그저 간단한 인사를 건네 받은 것뿐 이었음에도 혜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여전히 열려있는 문 밖으로 지나가던 또 다른 여자는 혜미의 얼굴 이상으로 충격을 먹은 듯 지나가다 멈칫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혜… 혜미…?” 순간, 혜미의 눈은 더할 수 없이 커져만 갔고, 윤지는 놀라는 혜미를 보자 순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게 느껴지는 통에, 굳게 입술을 다문 채로 혜미의 옆을 스치며 혜미와 현우가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룸 안으로 초대받은 듯이 들어서고 있었다. - 점점 농밀해지는 키스로 영후를 유도하면서도 남희는 좀 더 애태우려는 듯 조금씩 침대로 뒷걸음질 쳤고, 영후는 남희의 입술에 이끌려 따라 가다 보니 어느새 알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후의 손 말고도, 영후의 손보다 더 빨리, 더 급하게 움직이는 손 덕분에. 흡사 슈퍼모델들의 몸매를 뺨칠만한 남희의 글래머러스한 몸에 군더더기 없는 탄탄한 근육의 영후가 함께하자, 그야말로 눈부신 알몸의 두 남녀는 그대로도 그림 같았지만, 적어도 이 남녀는 그림처럼 멈춰있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으음…” 뒷걸음질치던 종아리에 침대가 느껴지자 천천히 등쪽으로 몸을 누이며 남희는 영후의 목에 감은 손을 풀지 않았고, 영후는 겨우 남희의 입술에서 떨어지며 물었다. “불… 끌까요?” 밝은 불빛에 그녀의 화려한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음에도, 남희는 자신의 부끄러움보다 영후의 몸에 대해 더 자세히 보고, 또 기억하고 싶었기에 절대로 불을 끄게 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영후의 목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영후의 입술은 남희의 입술로 가지 않았고, 그녀의 반듯한 이마와 날렵한 콧날을 지나, 어느새 뽀얀 목덜미로, 그리고 종내엔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어주려 귓가로 천천히 옮겨가고 있었다. 게다가 남희의 손에 이끌려 한 손은 이미 그녀의 가슴에 놓인 채였기에, 영후는 전체적인 가슴의 윤곽 그대로 살며시 움켜쥐었다가, 손바닥 그대로 가슴을 부드럽게 문질러도 보았다. 정말이지, 남희의 가슴은 보기에만 예쁜 것이 아니라 만지면 만질수록 말랑말랑한 감촉이 더욱 살아나며 더욱 봉긋해지고 있었기에, 사실 한 손으로만 가슴을 희롱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 보일 정도였을 정도로 아름다운 가슴이었다. 그럼에도 남희가 애써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었던 입을 열어주며 겨우 신음소리를 들려주었던 건, 그 커다란 봉우리 위에 놓여져 있던 영후의 손가락 한 개가 자그맣고도 귀여운 선 분홍빛 유두를, 마치 기타를 연주하듯 장난스러우리만치 몇 번이고 튕겨주었을 때였다. “아앙…” 게다가 영후의 또 다른 손은 활시위처럼 꺾여있는 남희의 등을 스르륵 지나 가슴에 비해 너무나 잘록한 허리를 매만지더니, 어느새 그녀의 가슴보다 더 풍만한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기에, 남희로서는 그야말로 애정의 ‘삼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남희가 더 참을 수 없던 건, 아직도 ‘섹스’는 전.혀.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여자는 남자보다 섹스를 시작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길다고. 남희는 그런 오답은 아마 진정한 섹스는 해보지도 못한, 그저 책만 읽어대는 바보 같은 학자들이 만들어낸 웃기지도 않은 학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하아… 난, 벌써 준비됐는데…’ 달아 오를 대로 달아오른 남희의 몸을, 아니 마음을 영후는 알아차렸던 것일까? 남희의 몸 여기저기서 각개전투를 하던 병사들을 순식간에 한데 모은 영후는 이윽고, 잔뜩 긴장해있는 남희의 하체로 내려갔다. 부드럽게 내려선 두 손은 각기 남희의 엉덩이를 가득 담으며 긴장을 풀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고, 영후의 입은 어느새 날렵하게 찢어져 있는 배꼽을 한참 동안 맛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 흥건히 젖어있는 남희의 보지로 향하는 듯 했다. 그러나, “아흑!” 그것은 순간이었다. 영후의 두 손이 갑작스레 남희의 양 허벅지를 잡아 무릎이 남희의 가슴께에 닿을 정도로 들어올린 건. ‘아아, 어쩌면 좋아…’ 남희는 너무나 부끄러우면서도 그 부끄러움 덕분에 흥분이 배가 되는 바람에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 영후가 자신의 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다리를 벌리며 들어올린 바람에 자신의 보지가 더 이상 흥건할 수 없을 정도로 젖어있는 모습뿐만 아니라, 애액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려 항문까지 번들거리며 숨쉬는 모습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앗! 감… 감독님!! 앗!” 영후는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여전히 남희의 다리를 양손으로 잡은 채 그녀의 보지에 혀를 대었다. 아마도 영후는 그녀의 아랫입 역시 촉촉하게 젖어가며 ‘키스’를 부르고 있었다고 착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만큼 남희의 보지는 스스로 움직이며 애액을 분출하고 있었으니까. “아아… 거긴… 거긴… 아아…” 남희는 당황한 나머지 겨우 손을 뻗어 자신의 사타구니에 파묻혀 있는 영후의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그 모양새는 마치 머리를 밀어 내려 하기 보다는 더욱더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남희의 행동이 영후는 응원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결국 물을 마실 줄 모르는 동물들이 그러하듯, 영후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된 것 마냥 혀를 이용해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애액의 샘을 핥았고, 혀가 닿을 때마다 남희의 온몸은 마치 전기 감전을 당하는 사람처럼 꿈틀거렸다. ‘할짝’, 혹은 ‘쩝쩝’거리는 소리에 더욱 흥분하던 남희의 보지는 더욱더 애액을 분수처럼 뿜어내기 시작했고, 영후는 이제 혀가 아닌 입을 이용해 그야말로 키스를 하는 모양처럼 쭉쭉 빨아먹고 있었다. 게다가, “앗! 거긴…! 안돼요 감독님!! 거긴… 거긴 더러… 아흑!!!” 더 이상 남희의 보지에서 애액이 나오지 않아서 였을까? 아니었다. 점점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있는 애액이 자신의 보지를 넘쳐 이미 허벅지 안쪽을 모두 적시고 있을 정도라는 건 남희 스스로가 느끼고 있었기에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영후는 그저 본능을 따르는 듯, 어느새 남희의 항문으로 옮겨와 뾰족하게 만든 혀를 이용해 그녀의 은밀한 부위를 찔러보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하며 농락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보지에 그러했듯 또다시 깊은 키스를 해댔기에, 그제야 남희는 ‘꺽꺽’거리며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가…감독님…아앙…제발…제발 해… 주세요…네…?...아흑…!!” 더 이상 다급할 수 없는 남희의 목소리를 듣자, 영후는 고개를 들어 남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풀릴 대로 풀려버린 여자의 눈은 그러나 평소의 단정함이나 냉철함 따위완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저 음탕할 뿐이었고, 음란할 뿐이었다. 하지만 영후는 그런 여자의 눈에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으며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자신의 자지와 함께 천천히 남희의 몸 위로 올라갔다. - “어머?” 총장과 노감독이 어느덧 식사를 마치고 나자마자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룸 서비스가 이어졌고, 이내 접시에 담겨 나온 요리를 확인하고는 총장은 작게나마 탄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총장과 노감독에겐 추억의 음식일 수 밖에 없는 요리와 맥주 두 잔이 눈 앞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쉬 앤 칩스. 영국사람들이 왜 그리 이 음식에 자부심을 가지는 지는 영국 유학 시절에도 그랬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레몬식초와 소금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감자튀김과 별 것 없는 생선 튀김을 가지고 대단한 요리나 되는 양 난리법석을 부리는 영국인 들이란. 하지만 음식의 맛과는 별개로 실은 총장과 노감독에게는 이 ‘피쉬 앤 칩스’는 음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 젊은 날. 겨우겨우 성사된 두 사람의 첫 데이트 때, 노감독은 멋진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기대했던 총장을 결국 허름한 선술집 같은 곳으로 데려갔었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는 왁자지껄한 술집 분위기와는 달리 여전히 어색했던 두 사람이었으나, 그 어색함을 한 번에 날려버릴 만큼 음식 맛이 너무나 맛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노감독은 총장이 좋아할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맥주 잔을 들었고, 총장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투명 맥주잔을 들어 ‘쨍’소리가 나도록 맞부딪힌 후, 목 울대가 크게 움직일 정도로 한 모금 들이키자, 노감독은 총장에게 손수 감자튀김을 집어 건넨 후 입을 열었다. “그때는 솔직히 당신과 함께 했기에 망정이었지 난 이게 뭔 맛인가 했다오.” 노감독의 웃음 섞인 고백을 듣다보니 총장 또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시고 짠 음식을 좋아하는 자신과는 달리 노감독은 무척이나 싱겁게 먹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끔 생각이 나더구만. 당신도 아마 그럴거라 생각이 들었소.” “그럼, 당신도요? 저는 또 저만 그런가 했더랬지요.” “허허, 미안하게 됐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실은 그때 내 주머니에 있던 돈으로 당신에게 사줄 수 있었던 음식이 이것 뿐이었다오. 물론 주머니사정만 넉넉했다면야 더 맛있는 걸 사줬었겠지만.” “아…” 역시나… 언제나 묵묵하지만,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주는 이 남자다웠다. 때문에 총장은 괜히 목이 메이는 것 같았기에, 얼른 감자튀김 한 개를 더 입에 넣어보았다. “맛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차마 뒷말은 입에 올리지도 못하고 감자튀김으로 애써 막아버린 총장은 이 남자 때문에 죽고 싶었고, 이 남자 때문에 아직도 살고 싶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총장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 이렇게 자상했던 뒤엔 언제나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버리곤 했었으니까. ‘설마…?’ 총장은 떨리는 손으로 맥주잔을 내려놓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총장을 바라보았다. 맥주를 다시 마시려던 노감독은 총장의 낯빛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며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러는 게요? 갑자기 그런 눈으로…?”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무슨…?” “또… 떠나시려는 거지요? 그렇지요?” “…” “언제나 그러셨잖아요, 언제나…” 언제 눈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총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감독은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마른 세수를 하듯 얼굴을 한참이나 쓸어 내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우선은 이제 그만 감독 직에서 내려올까 하오만…” 매사에 항상 담담하지만, 당당함도 잃지 않던 노감독은 그러나 황총장 앞에선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고, 역시나 자신의 예감이 맞아 들었다고 생각한 황총장은 자신의 새 치마위로 어디선가 한 방울씩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기에, 자꾸만 티슈를 들어 치마 위의 얼룩을 지워보려 애쓰고 있었다. - 똑바로 누운 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던 남희는, 그러나 영후의 양손에 잡힌 발목덕분에 두 다리가 하늘을 향해 V자로 벌어진 채 하체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한편 영후는 군더더기 없는 남희의 매끈한 흰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며 우람한 자신의 자지를 조금씩 밀어 넣었고, 결코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자지는 어느새 남희의 보지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 “윽…!” 잠시 작은 신음을 주고 받은 두 사람 중, 먼저 반응하기 시작한 건 남희의 몸이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움이 느껴지는 남희의 보지 속에서 영후는 잠시 길을 잃은 것마냥 헤매기도 했지만, 그도 잠시 영후의 자지를 휘감기 시작한 남희의 보지속살들은 자지를 안내하며 더 깊이 들어오도록 당기기 시작했다. “읍!... 아아!... 우욱!...어흑!” 영후는 그리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건만, 남희의 입에선 벌써부터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끊이지 않는 신음과는 달리, 살아 움직이고 있는 남희의 보지는 너무나 여유로웠다. 아니 여유로움을 넘어서 조금씩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영후의 자지를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어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으윽, 도대체 이런…’ 이윽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허리를 놀리기 시작한 영후는 이내 쉴새 없이 움직이며 자신의 자지를 남희의 보지에 박아대고 있었지만, 정작 남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이미 절반쯤 실신 상태에 이르러 있었기에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움직이는 건지, 빨려 들어가는 건지…’ 그랬다. 한 순간도 멈추지 못하는 영후의 자지는, 남희의 보지로 말미암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남희의 보지는 엄청난 흡입력으로 영후의 자지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가, 또다시 엄청난 압력으로 영후의 자지를 밀어냈고, 채 영후의 자지가 빠져나가기 직전에 귀두의 끝부분을 물고 늘어지며 다시 처음과 같이 부드럽지만 강력하게 흡입해버리는 것이었다. ‘정말… 본인은 모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영후가 곰곰이 생각할 틈은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남희의 다리가 영후의 양 어깨에서 내려와 허리를 감싸는 가 싶었더니 곧바로 구부러지며 단번에 남희의 상체를 들어올렸기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앉아있는 영후의 몸 위로 남희가 올라앉아있는 모양이 되어 있었다. ‘미치겠군.’ 마주보고 앉은 채로 여성상위체위가 되어버린 것만으로도 모자라 드디어 남희의 허리가 움직이며 영후의 자지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지만, 분명 긴 머리를 산발한 채 자신의 가슴을 영후의 얼굴에 잔뜩 밀착 시키고 있는 남희의 의식은 이미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에 영후는 달아오르는 흥분과는 상관없이 이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파악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허나, 남희의 몸은 영후가 딴 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영후를 완전히 바닥에 눕히더니 천천히 타던 말에 채찍질을 한것 마냥 허리와 엉덩이를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남희의 보지에 그대로 묶여버린 영후의 자지는 보지가 이끄는 대로 보지 속의 이곳 저곳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남희의 보지 속은 긴 일자의 모습이었다가, 순간적으로 ‘ㄱ’자로 구부러지기도 했고, 또는 ‘S’자의 모습이 되기도 하는 등 자지가 쉽게 출구를 찾지 못하도록 시시각각 새로운 미로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물론 영후의 자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두드려도 보고, 긁어도 봤지만 그것만으로는 영원히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자 조금씩 화를 내며 앞뒤 가리지 않고 때려대고 쑤셔대기 시작했다. “아악! 아읍! 읍! 읍! 으으… 읍! 아앗! 앗! 앗!” 완벽한 여성상위체위로 영후의 자지를 정복했다고 착각하던 남희와 남희의 보지는, 그러나 영후가 엄청난 허리 힘을 동반하며 남희의 몸 전체가 공중으로 붕 떴다가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 해야 할 정도의 속도로 박아대기 시작하자 당황함을 넘어서 또다시 느껴지는 새로운 감각에 몸서리를 치기 시작했다. 턱!턱!턱!턱!턱! “으흑! 아! 나… 나 몰라… 아흥! 아앗! 앗! 앗!” 남희의 엉덩이와 영후의 사타구니가 맞부딪히며 엄청난 마찰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남희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겨우 양손을 영후의 가슴에 댄 채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몸과 마음을 지탱하던 남희의 보지는 급기야 침대 시트를 흠뻑 적실 정도로 애액을 분수처럼 터뜨리고 있었지만, 영후는 좀 전의 약올림(?)에 복수라도 하려는 듯 멈추기는 커녕 더욱더 빠르게 박아대었고, 드디어 영후의 허리 움직임이 더할 수 없이 빨라지다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자, 남희의 보지 속에선 영후의 정액들이 ‘울컥울컥’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영후의 사정과 함께, 영후에게는 길고긴 섹스의 과정이 끝난 것과 다름 없었지만 남희는 아니었다. 새로운 감각에의 문이 지금부터 열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마치 불꽃 놀이가 그러하듯, ‘펑! 펑!’ 터지며 영후의 싱싱한 정자들이 질 벽들을 연신 두드려대자 남희의 아득한 머릿속에서도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보지 속에서 하나의 불꽃이 솟아올라 ‘펑’ 터지며 커다란 꽃을 만들자마자, 또 다른 불꽃들이 머릿속 새하얀 도화지위에 솟아오르며 연이어 수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그래… 이거였어… 내가 그리워하던 건…이 포만감…이 아찔함…나는…나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불꽃놀이가 끝나자 기력이 다 한 듯, 온몸에 땀이 범벅이 된 채로 헐떡거리며 영후의 몸 위에 스러진 남희는 그러나 수림이 그러했듯, 영후의 세심한 배려에 또다시 감동하고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남희를 가만히 보듬어 안으며 머리에서부터 등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까지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영후의 다정한 손길로 인해, 남희는 여전히 자신의 보지 안에 들어있는 싱싱한 자지에 또 한번 왈칵 애액을 뿌릴 수 밖에 없었고, 그 답례로 다시금 힘차게 꿈틀대는 보지 속 영후를 느끼고 나서야 남희는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후……” 남희가 꿈결처럼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욕실로 사라져 버린 뒤에야, 영후는 또다시 본능에 이끌린 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점점 늘어날수록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버려 영후는 침대에 누운 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 그런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비슷했다 ‘축구와 섹스’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버리는 것도 그렇고, 처음 시작할 때와 달리 몰입이 되고 나면 어느새 긴장했었던가 싶을 정도로 전력을 다하게 되고, 심지어 골을 넣은 후에 느껴지는 환희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역시 ‘하연’ 이었다. ‘왜… 그 녀석은…’ 축구를 할 땐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바라봐주는 하연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영후는 언제나 제 실력 이상의 것을 해낼 수 있었더랬다. 하지만 ‘섹스’를 하고 있을 때만큼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볼 하연의 모습이 떠올라, 늘 행위를 마치고 나면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것이다. 잠시 영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리던 시원한 샤워기의 물줄기소리가 멈췄고 영후는 답답함을 날리려는 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딩동. “누구…지? 이 시간에…?” 영후는 조금 당황하며 재빨리 가운을 집어 입고는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누구긴! 누님이시다! 얼른 문 열지 못할까! 크크!” 문 밖에서 예상치 못했던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영후는 너무나 당황했다. ‘크...큰일났네… 이를 어쩐다…?’ “자…잠깐만!” 영후는 그보다 더 빠를 수 없는 속도로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자신의 옷들을 집어 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팬티가 어디로 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결국 노팬티인 채로 바지를 입고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욕실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출입문을 열었다. “뭐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려? 너 혼자 또 이상한 거 보고 있었지? 그치?” “아, 아니야! 그런 거… 근데 갑자기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 “뭐냐, 그 전혀 반갑지 않은 것 같은 대사는. 나 그냥 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하지만 정작 하연은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불쑥 들어서며 소파에 몸을 던졌고, 영후는 자꾸만 욕실 문을 바라보며 불안한 얼굴로 하연의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응? 근데 이게 다 뭐야? …… 훈련보고서…? 너희 학교꺼? 뭐야, 여태 이거 보고 있었어? 오오, 이영후 사람 다됐네? 제법 감독다운 걸? 근데… 뭘 먹다 말았…?” 하연은 소파에 앉은 채 널려있는 보고서들을 보다, 한쪽 간이 식탁에 놓여있는 음식 접시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릇의 개수가, 일 인분이 아닌 이 인분이었기에 말문이 막힌 채 영후를 돌아보았다. “아, 이거… 그러니까 그게…” 영후는 점점 진땀을 흘리며 욕실 문 쪽을 자꾸 신경 쓰고 있었는데, 영후의 시선을 따라 하연도 욕실 쪽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문을 사이에 두고서도 시선에 몸이 따가웠을까. 결국 문제의 욕실이 열리기 시작했다. 딸깍. “누구… 손님하고 있었던 거야? 그럼 진작 말을 하…!!” 욕실의 문이 열리며 남희가 등장하자, 하연은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 여자가… 저 여자가 왜… 지금 저기서 나오는 거야…?’ 하연은 그대로 굳어버린 채,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해 보라는 눈으로 노팬티가 어색해 엉거주춤 서있는 영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설명은 옷을 완벽하게 차려 입고 나온 남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박기자님. 마침 훈련 경과 보고가 다 끝난 뒤에 오셔서 다행입니다. 꽤 시간이 걸렸거든요.” 차마 입도 못 여는 채로 하연은 그저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받았을 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는지 시선은 시트가 흐트러져 있을 침대 쪽으로 옮겨가려 하고 있었고, 순간 하연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영후는 다급하게 하연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할 말을 생각해내려 했지만, 하연의 뒤로 자신의 팬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그래 진짜, 자… 잘 왔네. 근데 뭐… 먹었니? 배 안고파? 좀만 일찍 왔으면 같이 먹는 건데… 지금도 주문이 될라나? 하연아, 한번 전화해 볼래?” 하연은 영후의 어설픈 방해공작에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며 영후 너머에 있는 침대 쪽을 살펴보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자료들을 가방에 챙겨 넣고 일어서는 남희 때문에 심증만으로 우선 만족해야만 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감독님.” “벌써, 가시려구요? 괜히 제가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시간도 늦었고, 제 할 일도 마쳤으니까 이제 가봐야지요. 그럼.” “네, 그럼 다음에.” “아, 남… 아니 권코치님 고생했어요. 그럼 조심이 가세요.” 영후가 남희를 배웅해야 할지, 하연을 계속 방해하고 있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남희는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열린 문 앞에는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오, 어떻게 알고 손수 문을 다 열어주시고. 이런, 내가 숙녀분들의 시간을 방해한 건가?” 순간 남희는 강진에서의 기분 나쁜 시선을 떠올리며 움찔했고, 하연은 하연대로 뭔가 불길한 느낌에 극도로 예민해지기 시작했으며, 영후는 노감독을 떠올리며 괜시리 주먹을 쥐어보고 있었다. - 윤지는 룸에 들어오고서도 한동안 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또한 현우 역시 담담한 얼굴로 윤지를 응시하고 있었고, 혜미만이 중간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진작에 이런 델 따라온 내가 바보지 어휴!’ 먹는 것에 혹해 여기까지 따라와버린 자신을 자책하는 혜미를, 윤지는 살짝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혜미야, 나 잠깐 현우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피해줄 수 있겠니?” “아… 으응… 그… 그럴게…” 그저, 의견을 묻는 것 치고는 꽤나 묵직함이 느껴져 혜미는 황급히 대답을 하고 룸 밖으로 나가버렸다. “자, 이제 혜미도 나갔으니… 솔직하게 이야기 해줄래?” 혜미가 나가자마자 갑자기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해 버린 윤지의 표정을 바라보며 현우는 조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뜻이야?” “계속… 그런 순진한 얼굴로 진짜 순진한 애들 건드리는 게, 너희 있는 집 자제분들 취미잖아, 아니야?” “음…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네… 너 같은 애들에겐…” “!” “뭐 그건 그렇고… 넌 어쩌려고 친구를 내보낸 거야? 네가 혜미 대신 뭐라도 해주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는 거야?” 마치 손님이 된 모양으로 소파에 편히 앉은 채 말을 하고 있는 현우를 마주하던 윤지는 결국 올게 왔다는 생각을 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로 만족해준다면… 못할 것도 없지.” 윤지는 현우를 그대로 마주선 상태로 옷을 벗기 시작했고, 그리 많은 것들을 걸치고 있지 않았었던 탓에 몇 초 만에 완벽한 나신의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윤지의 몸은 방금 격렬한 섹스를 마치고 나온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키에 비해 너무나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가슴은 그야말로 탱글탱글한 사과의 반쪽씩을 보는 듯했고, 가슴라인에 비해 턱없이 들어가버린 허리라인은 말 그대로 콜라 병의 손잡이 부분을 연상시키듯 톡 쏘는 탄력이 느껴졌으며, 야들야들하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새하얀 마른 다리는 그러나 힘없이 마른 보통의 여자들의 다리와는 달리 각선미와 단단함 둘 다 겸비하고 있었기에 맨다리였음에도 스타킹을 신은 듯 한없는 매력이 넘쳐 흘렀다. 현우는 아무 말없이 윤지의 몸 이곳 저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비로소 윤지의 그곳을 감추고 있을 보드라운 털에 시선이 닿았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기분이었나… 그분은 그래서 이런 걸 즐기는 걸까…?’ 자기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르는 순간, 현우는 절대 ‘아버지’라 불러서는 안 되는 조전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러자 마치 마법이 풀린 듯 온몸을 휘감고 있던 야릇한 흥분감이 일거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현우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윤지는 어쩐지 그런 현우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며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옷 입어.” 정신을 차린 윤지는 조금 놀라고 있었다. 현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들어 자신의 몸에 걸쳐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빨리 입지 않으면 배고픈 혜미가 날 잡아먹을 지도 몰라.” “너…! 왜… 설마 나 같은 애로는 안 된다는 거니?” “바보 같기는. 되고 안되고가 어딨어? 그래 알았어 너도 끼워주면 되잖아. 너도 배고픈 거지? 그렇지? 그럼 너도 우리랑 밥 먹고가. 주문은… 그냥 내가 알아서 시킬게. 괜찮지? 그럼 미안한데 나 대신 혜미 좀 불러주라. 아무래도 내가 가면 날 통째로 삼켜버릴 테니까.” 전화기를 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현우 덕분에, 윤지는 그 순간 자시의 어깨에 걸쳐진 옷을꼭 쥐어보며 살짝 미소지었던 것도 같았다. 가슴에 꽉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는 듯이. - “숙녀분들께는 미안하지만, 남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지 않겠소?” 전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훑어보며 군침을 머금은 조전무의 눈빛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남희는 문 앞에 선 채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비켜드려야지요. 그대신 저도 영후에게 볼 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니, 너무 독점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럼.” ‘그래서, 호텔안팎으로 기자들이 하나도 없었던 건가? 영후를 만나러 오기 위해서…? 그런데 왜…?’ 하연은 몇 초 안 되는 시간 동안 조전무와 영후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를 유추해봤지만 쉽게 답이 나올 리가 없었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 옆에 놓아둔 백을 집어 들려 했지만 살짝 손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에 떨어졌고, 이내 백 속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덕분에 조전무의 눈썹은 불만이 섞인 듯 조금 꿈틀거렸지만, 하연은 곧바로 물건들을 챙기고 일어서서 남희와 함께 문 밖으로 나섰다. “그럼.” 하연까지 문 밖으로 나가자, 조전무는 하연과 남희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며 문을 닫았고, 결국 복도에 남희와 단 둘이 남게 되자 하연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또다시 남희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저기… 무거워 보이는데 좀 들어드릴까요?” 하연은 다짜고짜 이런저런 취조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남희와 유대감을 형성하려 짐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남희는 조금 움찔하며 짐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류를 정리하며 바닥에 떨어져있던 영후의 팬티를 발견한 남희는 그대로 서류와 함께 백에 담았던 것이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일 만도 했던 것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하연은 조금 뻘쭘해져 버렸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저 종이 몇 가지 뿐 인걸요.” 결국 하연의 계획과는 달리 간단한 이야기 조차 나누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버렸기에 하연은 결국 물증을 밝혀내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어쩌면 하연이 섹스에 관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어쩌면 평소와는 달리 한껏 나른해져 있는 남희의 모습 만으로도 충분히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에 빠진 채로 침묵을 유지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내려섰고, 간단한 인사를 하며 헤어지려 하는 순간, 두 사람에게 꽤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치님? 어, 박기자님?” “어? 혜미야? 네가 여긴 어쩐 일로…” “아, 그게… 아 맞다! 감독님 좀 만나뵐까 해서...요.” 혜미는 순간 거짓말을 지어내며 남희의 얼굴을 살폈지만, 남희는 물어놓고서도 이미 정신은 다른 곳으로 흘러 가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허나, 혜미가 영후를 찾아왔다는 얘기를 하자 하연 또한 남희의 표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점점 부아가 치미는 듯 했다. ‘이 자식,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점점 여자가 꼬이고 있잖아!!!’ - “허, 사람 하고는… 고개 좀 들어 보시게.” 차마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있던 총장의 얼굴을 가만히 들어올리며 노감독은 손수건으로 총장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훔쳐주었다. “내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게 그리도 슬픈 일이오?” 총장은 노감독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노감독이 물음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건 아주 작은 이유에 불과했으니까. 그 보다, 또다시 자신의 자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버리려는 노감독이 언제라도 방랑을 시작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총장은 또다시 이 남자와 멀어질 것임을 직감하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계속 울기만 하면, 내 당신에게 또 어찌 부탁을 할 수 있겠소?” ‘망할 놈의 영감탱이… 이런 상황에서도 또다시 날 부려먹을 생각인 건가…’ 그 놈의 부탁이야기가 나오자, 총장도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아니 조금은 화가 났기 때문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고 해야 할까. “흠, 이제 좀 낫군. 자네 우는 모습은 그렇게 보기 좋진 못하다오.” “이렇게 만든 게 다 누군데 그러세요?” “그야, 험험…” 역시나 면목없다는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이는 노감독에게 총장은 조금은 툴툴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엔 또 뭔가요?” “그…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부탁이긴 하오만…” “……?” “다 늙어 백수가 될 이 늙은이와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 보지 않겠소? 한창 나이 때 우리가 그러했듯 말이오. 아, 물론 그때와는 좀 다를 거요. 이번엔 우리가 늙어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여행일 테니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노감독의 말을 듣고 난 총장은 갑자기 멍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 또다시 나에게 프러포즈… 하는 건가…? 지금?’ 지금 이 상황을 총장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노감독의 눈을 바라보며 총장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저 눈빛은 그들이 젊었던 그 날에 허름한 영국의 한 술집에서 자신에게 프러포즈를 했었던 그 때와 한치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 빈 몸으로 나간 혜미를 직접 부르기 위해 윤지가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는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의 조전무가 타고 있었다. 윤지는 잠시 멈칫했지만 결국 엘리베이터에 탔고, 그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모르는 사람인 양 꽤나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그래… 잘하고 있겠지?” “… 네……” “그렇군…” “저… 그때 말씀하셨던 그건…?” “아, 잊지 않았다. 조만간 입금시켜 주도록 하지.” 또다시 두 사람간엔 침묵만이 감돌았지만 어쩐지 윤지는 조전무에게서 현우의 향기가 느껴지는 탓에 자신의 ‘감’이 떨어진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다. 땡.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조전무가 먼저 내리고, 윤지가 뒤이어 내리자 하연과 남희, 그리고 혜미가 모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들 또한 조전무와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구, 이런. 미녀 분들께서 아직도 안 가시고 계셨구만? 그래, 댁이 어디신지? 괜찮다면 내가 모셔다 드리고 싶은데 말이지요.” 넉살 좋게 웃음을 흘리며 조전무가 남희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하연에게서 다급하게 튀어나왔다. “권코치님은! 저와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그렇죠? 남희씨?” “네? 아… 아… 네…” 갑작스런 하연의 발언에 잠깐 멈칫하던 남희는, 그제야 하연의 속뜻을 깨닫고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너희들도 같이 가야지?” 남희가 혜미와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재촉하자, 혜미는 꽤나 난감해 하고 있었다. ‘으… 어쩌지…? 현우가 기다릴 텐데… 그나저나 윤지는 현우랑 무슨 얘길 한 거지…? 도대체 오늘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거야~ 으앙~!’ 혜미가 고민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윤지는 혜미의 손을 꼬옥 잡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남희에게 말을 했다. “코치님, 혜미랑 저는 친구들이 방 잡고 놀자고 해서, 위에 올라가 봐야 하는 데… 어쩌죠?” “어? 어어. 그랬구나… 혜미, 너어… 실은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면서 감독님 핑계나 대고…!” 한창 놀고 싶은 나이의 아이들이었으니 그러려니 하는 남희였지만, 곱게 눈을 흘겨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너무 늦게까지 놀지는 마. 내일도 힘든 하루가 될 테니까. 그럼 갈까요, 박기자님?” 남희는 하연의 팔짱을 끼우며 꽤나 친근한 척 돌아섰지만 조전무의 한마디는 순간 하연을 그 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참, 그런데 박기자는 이영후 선수에게 볼일이 남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 집요한 조전무는 하연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었지만, 꼬투리를 잡혀버린 하연은 미약하게나마 떨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이 상황에서 자신만 영후에게로 올라가 버리면 결국 남희를 조전무의 입안에 넣어주게 되는 것이란 걸 뻔히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남희를 데려가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미 기자들 사이에선 조전무의 여성편력에 대한 소문 아닌 소문이 자자했기에 같은 여자로서 결코 남희를 혼자 둘 순 없었던 것이다. “뭐… 생각해보니 그리 급한 것 같지도 않고, 나중에 전화로 물어봐도 될 것 같네요. 가죠 권코치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연은 남희와 경보를 하다시피 하며 호텔 밖으로 빠져나갔고, 조전무는 사라져버리는 남희를 아깝다는 듯이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지만, 이미 떠나버린 버스였다. 이에 조전무는 꿩 대신 닭이라고, 윤지를 찾았지만 윤지 또한 어느 샌가 혜미를 데리고 사라져버린 뒤 오래였다. “허, 간만에 기집년들에게 한방 먹었구먼, 쳇!” 하지만 조전무는 휴대폰을 꺼내 차를 대기 시킬 것을 지시하고 나서도 그리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랄까? “이제, 놈의 선택만 남았다… 이건가? 크크크… 크하하하하!” 조전무는 뭐가 그리 좋은 지 조용한 호텔 로비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 “박기자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서로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진 않았지만 남희는 지금 하연이 자신을 궁지에서 구해주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영후가 하연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면서, 성적인 욕구 해결을 위해 영후를 이용해버린 자신을 구해준 하연에게 남희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너무 늦기도 했고… 또 할 일은 다 하고 온 셈인 걸요.” ‘할 일을… 다 하고 왔다…?’ 의아해 하는 남희의 표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하연은 씨익 웃으며 가속페달을 밟고 있었다. 가뜩이나 현재 속도도 빠른데, 또다시 가속을 하는 하연을 바라보며 남희는 안전벨트를 하고 있음에도 천정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부여잡으며, 조수석 쪽에도 에어백이 설치가 되어 있는지 슬쩍 바라보고 있었다. - 한편 조전무가 나가버린 텅 비어버린 룸 안에서 영후는 소파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런 게… 이런 게 감독님이 말씀하신 가진 자들의 횡포인 겁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이런 건… 이런 건 너무 잔인하다구요…!’ 도대체 조전무로부터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영후가 괴로워하는 건지는 오직 영후와, 좀 전 영후의 룸 안에서 하연이 백을 떨어뜨린 후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집어넣는 와중에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소파 밑으로 슬쩍 밀어 넣어 둔 ‘보이스 레코더’의 불빛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25부. 타인은 지옥이다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북한전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을 무렵, 며칠 동안 철야근무를 해야 했던 하연은 그제야 사무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입사원들은 점점 뽑기 어려워지고 있었고, 동료들은 좀더 연봉이 많은 타 언론사로 옮겨가는 실정 속에, 하연이 담당해야 할 기사 꼭지는 당연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버려 지난 3일 동안은 그야말로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내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자신의 승용차에 몸을 실은 하연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잠시 눈을 붙여볼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그럴 겨를이 없었다. 영후의 호텔 룸 바닥에 놓여있는 ‘보이스 레코더’에 담겨있을 내용이 하연의 머리를 다시금 맑게 만들어 주고 있었으니까. 하연은 결국 시동을 걸자마자 엔진 예열 따윈 무시하고 곧바로 엑셀을 밟으며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딩동! 슬슬 호텔의 근명과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단장을 하던 윤지는 늦은 저녁시간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이 걸려있는 거실로 나가 작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혜미…?’ 윤지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친구 사이에 집에 찾아오는 것은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혜미를 집으로 초대했었던 ‘그 날’ 이후 윤지는 혜미를 다시는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었고 혜미 또한 윤지의 집에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당연히 의아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윤지는 작은 모니터 속의 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끼익. 인터폰으로 주고 받는 말도 없이 갑자기 문이 열렸음에도 혜미는 놀라기는커녕 꽤나 복잡한 심경의 얼굴로 서 있었다. “윤…지야…” “……들어와.” “으응…” 화장 때문이었을까.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있는 윤지의 무표정한 얼굴에 혜미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지만, 계속 찾아왔었던 요 며칠과는 달리 오늘은 대문 앞에 마냥 세워두지는 않아준 윤지 덕분에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실 거라도 줄까?” “아, 아니. 괜찮아.” “……” “나가려고 하는 중… 이었니?” “…응.” 황량하리만치 넓은 거실에 선 채로 윤지와 혜미는 의미 없는 대화만 주고 받고 있었지만,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다름아닌 윤지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니…?” “아, 그게…” 혜미는 윤지의 직접적인 물음에 괜한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시간에 윤지를 찾아온 건지 자책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지는 그런 혜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현우… 때문이구나, 그렇지?” “앗! 그… 그게…” 순간 윤지에게 허를 찔린 혜미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윤지의 말은 100% 정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호텔에서 셋이서 식사를 하는 동안 갑작스럽게 친해진 현우와 윤지를 본 뒤로는 마음이 뒤숭숭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잠시 자신이 로비에 나가있다가 들어온 이후에 더욱 그래 보였기에 혜미의 머릿속은 그 날 이후로 완전히 혼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설마… “그 날… 내가 현우랑 잤을까봐, 걱정됐던 거겠지. 난 원래 그런 애니까… 아니니?”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잤다면?” “!” “잤다면… 넌 어쩔건데…?” “나… 난… 그런 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굵은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통에,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혜미는 그러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혜미는 현우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던 걸까. 자신보다 한 뼘이나 더 큰 혜미가 그야말로 여자처럼 울고 서 있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윤지는, 혜미의 아빠 ‘규식’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드디어 혜미도 남자를 사귈 때가 됐다는 것을. “바보… 그래가지고 어디 남자랑 사귈 수 있겠니?” 혜미는 갑자기 따뜻한 말을 건네며 자신의 눈가를 티슈로 닦아주는 윤지의 행동에도 당황하긴 했지만, 더 당황해야 할 일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자신을 한동안 바라보던 윤지는 살짝 까치발을 하며 혜미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 딩동. 고민을 안은 채 틀어박혀 있는 호텔 룸은 영후에겐 감옥과도 같았기에, 초인종이 울리자 방문자가 고민을 해결해주지는 못할 지라도 잠시만 같이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영후는 곧바로 달려나가 문을 열었다. “어… 하연아…?” “들어가도… 돼?” 언제 하연이 자신에게로 오면서 한 번이라도 양해를 구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어, 영후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미 고개는 자동으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연은 하연대로 전과 달리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며 룸 안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서 소파에 앉았다. 기억대로라면 분명 맞은 편 소파의 바닥에 ‘보이스 레코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깊숙하게 넣었던가…?’ 하연은 앉은 채로 조금씩 고개를 낮춰봤지만, 여간 해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하연은 소파에 앉으려는 영후에게 말을 걸었다. “야, 뭐하냐? 손님이 왔으면 마실 거라도 내와야 하는 거 아냐? 너무 박해졌다 너?” “아, 미안. 그래 뭐 마실래?” “뭐 뭐 있는데?” “그러게. 나도 봐야 알겠는걸?” 잠시 마실 만 한 게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 영후는 결국 일어나 냉장고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고, 하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일어나 맞은 편 소파의 바닥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이리저리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소파의 바닥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손톱만한 먼지도. “으… 뭐야. 어디 간 거야… 설마 내가 착각하고 있나?” 하연은 혹여 자신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걸까 싶어 자신이 앉았던 소파의 바닥 밑으로도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거… 찾는거니?” “어?” 발소리도 없이 어느새 하연의 뒤로 다가와 서있는 영후의 손엔 음료수 대신 하연의 ‘보이스 레코더’가 들려있었다. “아, 그거… 그래… 그때 내가 떨어뜨리고 갔나 봐. 찾아봐도 없더라고. 혹시나 해서 여기에 있나 찾아 본 건 데… 영후 네가 보관하고 있어줬구나? 고마워.” 천하의 하연 답지 않게 말을 조금 더듬으며 영후의 손에 들린 ‘보이스 레코더’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하연의 손이 닫기도 전에 뒤로 감춰버린 영후는 쉽게 하연에게 건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왜그래, 영후야? 장난치지마.” “왜 그러는 거냐 고는 내가 묻고 싶은 얘기야. 설마 했었는데. 하연아, 이게 지금 무슨 짓인거냐?” “무슨… 짓… 이냐니… 그냥 난…” “난 널 기자이기 이전에 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에게 난 한낱 뉴스거리로 밖에 안 되는 거였잖아. 아니야?” “아, 아니야 영후야. 그게 아니라 난, 난 그저…” “자.” 영후는 당황하는 하연의 손에 ‘보이스 레코더’를 쥐어주었다. 하지만 그 손은 여느 때와 달리 너무나 차가웠고, 눈빛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차가워 보였다. “이제 네가 원하는 거 줬으니까, 내가 원하는 걸 말할게.” “여…영후야…?” “여기서… 당장 나가줘. 그리고… 당분간 우리 얼굴 보지 말자.” “!!” 하연이 뭐라 변명을 하기 전에 영후는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어서 빨리 하연에게 나가달라는 얼굴로. 하연은 이 모든 게 꿈인 것만 같았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과 같은. 영후가 열어놓은 문으로 걸어나가면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딜 걷고 있는 지 조차 전혀 인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몸은 문 밖으로 나와있었고, 뒤돌아 봤을 땐 이미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영후야…’ - 대한민국과 북한 전이 열릴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관중석은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음에도 빈자리가 꽤 많이 눈에 띄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그득했을 관중석이었지만, 계속되는 축협과 연맹의 팬을 저버리는 행정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한편 관중의 숫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던 노감독이었지만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는 대한민국 선수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수심이 그득해 보였다. 장거리 원정을 다녀왔다고는 해도, 근 일주일간 체력회복 훈련 이외에 셋트피스 상황에 대한 연습 말고는 달리 한 것도 없었음에도 거의 모든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인 것으로 체크됐고, 게다가 체력 보충에 가장 필요한 수면을, 거의 취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에 이번 ‘북한’전은 꽤나 고전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언제나 믿음직한 이영후만큼은 별다른 체력저하를 보이지 않았기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지만, 정작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표정’이 평소의 것과 너무나 달랐기에 노감독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놈… 표정이…’ 하지만 영후를 걱정하고 있는 노감독 자신이야 말로 평소의 냉철함만 유지했다면 분명 영후를 선발 목록에서 제외시키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은 결국, 어쩌면 이번 경기가 영후를 자신의 선수로서 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늘만큼은 황총장이 관중석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승부라는 것과 애제자 영후에게, 꽤나 과한 욕심을 부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안 그래도 평소의 마음가짐과 많이 다른 오늘이었지만, 어제 밤 전화 통화를 나눈 하연과의 대화가 떠오르자 경기를 앞둔 선수들의 심장 이상으로 노감독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 기자석에 앉은 채 경기 시작을 기다리던 하연은 주변에 앉아있는 기자들이 승리했을 때와 패배했을 때를 대비하며 미리미리 시작도 안된 경기 기사를 작성하는 꼴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쏘아보다가 자신의 노트북 옆에 놓인 오늘 경기의 선발 라인업이 적혀있는 A4용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 - 하근명 - 이영후 - 이청용 - - 오장은 - 김두현 - 김정우 - 김치우-강민수-이정수-최효진 - 정성룡 - [북한] - 홍영조 - 정대세 - 문인국 - 남성철-김영준-안영학-차종혁 - 리광천 - 리준일 - 박철진 - 리명국 – 확실히 이번 경기의 라인업엔 노감독이 고심한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미리 계획된 4-3-3 포메이션이 아닌, 어쩔 수 없는 4-3-3 이라는 게 드러날 정도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하연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아니 전 포지션에 걸쳐 주전급 선수들의 컨디션에 확실히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이영후’가 문제였다. 하연은 혹시나 자신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나 핸드폰을 몇 번이고 들여다 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영후는 조전무와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걸까…?’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영후는 하연이 감춰두었던 ‘보이스 레코더’의 녹음 내역을 삭제시킨 채 건네 주었기에 하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는 선배에게 메모리 복구를 부탁한 채 당장이라도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용을 모르더라도 분명 영후와 조전무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하연은 어젯밤 노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을 떠올리며 자신의 결정이 정말 옳은 것이었을까, 생각해보고 있었다. - 정말 얼마 만에 단잠이 들었던 건지도 모를 만큼 노감독은 황총장을 자신의 품에 안은 채 달고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지만, 핸드폰이 울려대자 한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황급하게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고, 걱정스럽게 총장을 바라봤지만 다행스럽게도 황총장은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자 노감독은 황총장에게 베개를 베어주며 침대에서 빠져 나와 조심스럽게 호텔 욕실로 들어갔다. “여보세요?” ‘감독님, 저 박기잡니다. 밤늦게 죄송해요.’ “음, 괜찮네. 그런데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것 보니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구먼.” 노감독은 욕실용 벽시계의 시침이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음을 확인하며 걱정스레 대답했다. ‘그게… 실은 며칠 전 호텔로 조전무가 영후를 찾아왔었어요.’ “조…전무가? 그 사람이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좋은 일로 영후를 찾을 사람은 절대 아닐거란 거 아시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감독님께 말씀 드리는 거에요.’ “……” ‘혹시 뭐 짚이는 거 없으신가요?’ “글쎄… 지금은 딱히 없는데. 그런데 왜… 영후 놈에게 직접 묻지 않고서…?” ‘실은 그게…’ 잠시 망설이던 하연은 ‘보이스 레코더’ 사건에 대해 노감독에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고, 노감독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욕실의 양변기에 앉은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랬군.” ‘아시잖아요, 영후가 어떤 애라는 거.’ 노감독은 하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또한 하연만큼이나 노감독 또한 영후가 어떤 남자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무거운 짐을 들려줘도, 절대 남에게 하소연하거나 나눠 들길 바라는 녀석이 절대 아니었기에, 또다시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있을 놈을 생각하자니 노감독의 눈시울은 조금 붉어지는 듯도 했다. “잘… 알았네. 내 지켜보도록 하지. 그리고,” ‘……’ “그 놈을 이해하게.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라고 말을 하고 싶었던 하연이었으나 그저 ‘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노감독은 그 뒤로도 한참을 너무나 밝은 욕실에 앉은 채, 혼자만의 어둠에 휩싸이고 있을 영후를 떠올리고 있었다. - “형, 정말 고마워요.” 주전, 비주전 구분 없이 모든 선수들이 경기를 앞두고 그라운드 위에서 가볍게 다리 스트레칭을 하던 중, 범석은 영후에게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있었다. “어? 뭐가?” “그 분이요, 에이전트.” “아, 구선배…” “그 분한테 얘기 다 들었어요. 제가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감사는 뭐… 근데, 잘 해결될 거는 같니?” “조금 복잡하게 얽혀있긴 하지만, 그분도 선수 출신이시라 제 경우가 선례로 남길 바라시나 봐요.” “그렇구나… 어쨌든 웃는 얼굴 보게 돼서 나도 마음 좋다. 그럼 이제 다 괜찮아진 거지?” “아직 해결할 건 많지만, 우선은 좋게 좋게 생각하려 구요.” “그래. 잘 생각했어.” “오늘 잘 하세요. 저도 응원할게요.” “라인업에서 빠져있다고 마음 놓고 있지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몸이나 잘 풀어둬. 오늘 경기는 쉽지 않을 거 같으니까. 어째 오늘은 다들 몸이 무거워 보이는 거 같아.” “헤헤, 그럴 수 밖에요. 정말 멋진 밤들 아니었어요?” “어? 멋진… 밤? 그게 무슨 소리야?” 순간, 영후는 자신의 방에 찾아왔던 남희와 또 한 명의 여자를 떠올리며 당황했지만, 겨우 침착하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고, 그런 영후가 내숭을 떠는 걸로 판단한 범석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시잖아요, 밤마다…” “그니까 밤마다 뭐?” 분명, 범석은 그녀들과 영후의 관계를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영후는 계속 모른 척 잡아 떼기 바빴고, 범석은 영후가 계속 극구 부인을 하자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 아니에요. 어쨌든 파이팅이에요, 형!” 범석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선수들이 ‘환락의 밤’을 보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영후는 도통 못 알아듣는 것 같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무리에 합류한 채로 다시 스트레칭을 시작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상하다… 다른 선수들 얼굴 보면 다들 잠 못 잔 듯한 얼굴 하며… 맞는데… 영후 형도 분명 잠 못 잔 얼굴 맞는데…’ 하지만, 범석은 영후나 다른 선수들이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조금 쑥스러운 얘기니 만큼, 서로가 모르는 척 하는 걸 거라고 간단하게 생각해버리고 있었고, 영후는 어젯밤 자신의 방을 찾아온 여자를 떠올려 보고 있었다. - 딩동. 하연을 복잡한 일에 휘말리는 것을 막으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돌려 보낸 뒤, 마음이 편치 않았던 영후는 또다시 초인종이 울리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만일 하연이 다시 돌아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다면, 어쩌면 솔직하게 다 털어놔 버릴지도 모를 만큼 마음이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림…씨…?” 문을 열었을 땐, 그곳에 서있던 건 하연이 아니라 바로 수림이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그럼요. 들어오세요.” 조심스런 얼굴에서 금방 화색이 도는 얼굴로 바뀌며 수림은 혹여 영후의 마음이 바뀔까 얼른 룸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그게… 그러니까… 훈련이요, 훈련 진척 상황에 대해서 말씀 좀 드리려고요…” 영후는 어설프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미 훈련에 관한 보고는 남희로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받은 후였기에 더 이상 영후가 들어야 할 보고 따위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림을 소파로 안내한 후 마주 앉아 두서없이 시작되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고, 남희와는 달리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섞어가며 재미있게 이야기 하는 수림 덕분에 영후의 기분은 조금 좋아지고 있었다. “그랬군요. 정말 고생했어요, 제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해버리는 바람에…”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저희들 모두 얼마나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정말로 미안한 마음에 영후가 입을 열었지만, 수림은 절대 아니라는 듯 손사래까지 쳐가며 영후를 변호했고, 그런 수림을 바라보며 영후는 예전 생각이 나 더 미안해지는 듯 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것 저것 다…” 영후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림의 눈에는 괜히 눈물이 고이려고 했다.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이 남자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고 온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밀려드는 그리움 때문에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오다 보니 영후가 투숙해있는 호텔이었던 것이었고, 온 김에 잠깐만 영후의 얼굴을 보기만 하고 갈 생각이었다. 이제는 이 남자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남자의 마음엔 이미 다른 여자가 완벽하게 들어차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잠시라도, 이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고, 또 자신을 바라봐 주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듣기는 정말로,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러지 마세요… 감독님은… 아니 영후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아니요, 저는…” 무언가 고해성사를 하려는 듯한 영후의 입은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있다가 영후의 옆자리로 다가온 수림의 입술 덕분에 간단하게 막히고 말았다. 익숙한 느낌. 몸이 기억하는 감촉. 수림에게 이별을 고한 이후 모두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생각이었을 뿐, 영후의 입술은 아직까지 수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완벽하리만치. 때문에 먼저 키스를 시작한 수림도, 갑작스레 당해버린 영후도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가 서로의 혀를 감싸며 길고 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채 대지 않은 채 그저 입술만이 닿아있을 뿐이었음에도 두 사람의 키스는 온 몸이 닿아있는 것 이상으로 뜨거웠다. - 관중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한국여대 선수들 주변엔 그야말로 남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장에서 여자들을 구경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멋진 미녀들이 그야말로 주르륵 앉아있었으니 오늘만큼은 축구장 입장료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얼굴들이었다. 게다가, 그 미녀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남희와 수림, 그리고 윤지와 혜미들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느라 핸드폰 촬영 소리와 플래쉬가 끊이질 않고 있을 정도로 인기절정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간만에 경기장을 찾은 황총장은 조금 어색해하는 얼굴이었다. “총장님, 자리가 불편하십니까?” 역시나 총장을 가장 먼저 챙긴 건 남희였지만, 총장은 괜찮다는 얼굴로 응대해주었다. “괜찮아요. 오랜만에 축구 경기장을 찾았더니 조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네요. 참,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한국여대도 첫 실전 경기를 치르게 될 테죠?” “네. 정말 하루 하루가 아까워요. 솔직히 오늘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 건데…” 어느덧 남희를 닮아가는 듯, 훈련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수림이 거들었고, 총장은 그런 두 코치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길 바라며 속마음을 잠깐 내비쳐보았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감독님도 그러셨다면서요, ‘즐거운 축구’를 하자고.” “네, 그래야 되긴 하는데… 그게 맘처럼 쉽게 안되네요.”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수림의 얼굴에, 남희는 잠깐 불안함도 느껴졌지만 그저 너무 예민하게 구는 탓이려니 하고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운동장에 늘어선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선수들 중에서도 당연히 영후를 바라보고 있었음은 당연지사였고. 한편 남희의 시선이 닿아있는 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센터서클에 서있는 정대세를 바라보는 영후의 시선은 꽤나 걱정스러워 보였다. 정대세의 탄탄한 몸과 도전적인 눈빛 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기량을 가늠해 볼 수 있었기에, 영후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대한민국 선수들의 컨디션을 고려해볼 때 오늘의 경기는 분명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다행스러운 건가…’ 어쩐지 오늘 경기가 어려워지길 바라는 이상한 영후의 복잡한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어느새 이 남자의 표정을 읽으며 걱정스러워하던 건 다름아닌 수림이었다. ‘감독님…’ - “수… 수림씨, 수림씨… 이러지 말아요!” 키스를 하면서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느껴버린 수림은 그대로 영후를 소파에 쓰러뜨리며 영후의 몸 위에 포개지듯 누운 채 영후의 얼굴과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과 더불어 키스 세례를 쏟아 부었지만, 영후는 불룩해지는 자신의 하체와는 달리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수림의 어깨를 잡고는 수림의 눈을 바라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림씨, 이러지 말아요… 이러지 말아요 제발…” 영후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을까. 이윽고 수림은 모든 동작을 멈춘 채 그저 영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요… 왜 안 되는 데요? 박기자 때문에요? 영후씬 아직 박기자하고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요.” 영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수림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솔직한 것은 이남자의 심장과 자신의 사타구니께를 압박하고 있는 영후의 그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꽤나 용기를 내보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 않을게요. 날 사랑해달라는 말도 절대로 하지 않을게요. 그니까 그냥… 그냥 영후씨… 그냥 아무 말 말고… 잠시만… 이렇게 안아주세요.” 응석부리듯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수림을 영후는 결국 조심스럽게 안아주었지만, 자신의 가슴언저리가 축축한 느낌이 들고 있었기에, 영후는 수림이 울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거냐 이영후. 하연이는… 하연이는 근명이와 사귀고 있잖아. 게다가 하연일 기다린다면서 너란 놈은 수림씨도, 윤지도, 그리고 남희씨하고도 관계를 맺어버렸잖아.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뭐가 안 된다고… 너란 놈은 정말…’ 여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얼마 전과 달리 벌써 여러 여자와 섹스를 해버리고도 짐짓 하연이 앞에서 깨끗한 척을 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영후는 쓴웃음을 지어보았다. ‘차라리 하연이를 마음에서 지워야 할까… 그게 서로에게 편한 길 일까…’ 자신의 몸 위에 수림이 있었음에도 영후는 습관처럼 하연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지만, 겨우 진정된 수림이 얼굴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았을 땐 영후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던 모양인지, 수림의 입에 다시금 입을 맞추기 시작했고, 수림은 기다렸다는 듯이 영후의 목에 손을 두르며 영후보다 더 적극적으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 경기가 시작된 지 벌써 30분이 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경기는 상당히 지지부진했다. 예상대로 아시아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맞불을 놓을 만한 상대는 거의 없었기에 북한은 정대세를 제외한 전원이 하프라인 밑에서 수비를 하며 호시탐탐 역습을 꾀하고 있었고, 그와 달리 대한민국은 김두현과 김정우로부터 잘게 썰어가는 플레이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허나 두 팀 다 별 소득도 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고, 더불어 대한민국 선수들은 체력 또한 소비하고 있었다. 결국 전반 30분을 넘어서면서부터, 대한민국 팀의 체력이 급격하게 하락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에 정대세 만을 전담 마크할 뿐 전체적으로 최종 수비선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던 대한민국 팀의 수비벽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수! 잡아!” 두현의 영후에게로 향한 스루패스가 안영학 덕분에 차단당하고 나자, 곧바로 달려나가는 정대세를 겨냥해 장거리 패스가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고, 미리 약속되어 있었기에 이정수는 사람을, 강민수는 공을 차단하려 부랴부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대세의 스피드와 파워를 이정수는 제대로 지혈하지 못한 채 어깨싸움에서 밀리며 바닥에 뒹굴고 말았지만, 천만다행으로 강민수는 적절한 볼 커팅으로 북한의 역습을 막아내었다. 허나 겨우 위기를 차단하긴 했지만 분명 이정수의 대인마크는 점점 흔들리고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전체적인 팀 분위기는 갑작스레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감독의 눈으로 보기에 수비보다 더 걱정되던 장면은 바로 김두현의 패스가 차단당하기 직전의 장면이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김두현의 패스가 차단당한 것으로만 보였겠지만, 그 전에 볼을 받기 위해 빈 공간으로 이동해줘야 할 영후의 움직임이 너무나 좋지 않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모든 선수들이 물먹은 솜마냥 몸이 무거워 보이는 시점에서 선취점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모를 영후가 아니었기에, 고도의 집중력은커녕 그야말로 노감독으로서도 처음 보는 영후의 생각 없는 플레이에 애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속은 타 들어가고 있었다. ‘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노감독 답지 않게 경기의 전반적인 상황을 지켜보지 못하고 그저 영후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즈음, 또다시 김영준으로부터 시작된 패스를 이어받은 홍영조는 왼쪽 터치라인을 파고들다 최효진을 간단히 따돌리고는 침착하게 정대세에게 크로스를 올렸고, 순간 이정수의 그림자 수비를 따돌리며 공을 커트하려던 강민수의 앞에서 거침없이 뛰어오른 정대세는 날아온 공을 파워풀하게 헤딩해버렸고, 골키퍼 정성룡은 그저 자신의 반대편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공을 허망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0 : 1 결국 전반 내내 근근이 정대세를 막아주었던 두 수비수는 결국 단 한번 실수를 저질렀지만, 아쉽게도 그 한 번이 북한에게 한 골을 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흐음… 당장은 답이 없군.’ 환호하며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북한 선수들과는 대조적으로 한결같이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바라보고 있는 대한민국 선수들을 바라보며 노감독은 잠깐이나마 벤치에 앉아있는 선수들을 둘러봤지만, 나오는 건 나직한 한숨 뿐 이었다. - 경기가 지루하게 흐르다 결국 대한민국이 한 골을 허용하자, 그나마 관중이 적은 서울월드컵 경기장 분위기는 완전히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져 갔지만, 정작 혜미는 틈만 나면 자신을 바라보며 귀엽게 웃고 있는 윤지 덕분에 얼굴이 빨개진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분명, 윤지는 그날 밤 자신과 은밀한 행위(?)를 했던 것을 떠올리며 웃고 있는 것이란 걸 혜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기에 더 그랬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만큼은 혜미는 윤지와의 교감에 꽤나 감동 받았었고, 그 때문에 여자를, 또 남자를 바라보는 혜미의 시선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정말… 현우도 그런 걸 좋아할까…’ 윤지는 기분 좋을 만큼 혜미를 자극해가며 혜미 자신도 몰랐던 혜미의 성감대를 찾아내 주기까지 했기에 정말이지 ‘그런 것’들을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윤지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젯밤의 경험은 정말 특별한 것임에는 분명했다. -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채, 꽤나 짧게 느껴지는 것이 아쉬울 정도의 입맞춤을 마치고 윤지가 입술을 떼자 혜미는 잠시 어질어질 했다. 또다시 해버린 여자와의, 아니 윤지와의 입맞춤. 하지만 창피하다거나 이상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근사한 기분이 들어, 혜미는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내가… 좀 이상한 건가… 아님…’ “너, 이런 걸 현우랑 해보고 싶은 거지?” 채 혜미가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윤지는 혜미의 곁에서 떨어지면서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흥, 거울이나 보고 말하시지?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너.” “으으… 아니라니깐!” “알았어, 알았어. 그나저나, 하나만 묻자. 너 도대체 현우가 왜 좋은 거니?” 갑작스럽게 윤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튀어나오자, 혜미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게…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현우를 좋아하는 건 아빠지 내가 아니었는데…’ 분명 시작은 그러했었다. 그저, 뭘 보고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아빠는 틈만 나면 현우 칭찬하기에 바빴고, 또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현우가 혜미네 슈퍼마켓에 놀러 오는 횟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주 보면 정 든다는 말과는 뭔가 다른 것도 같았다. 어쩌면 여지껏 혜미가 봐왔던 아빠나 기타 또래의 남자들에 비해, 뭔가 달라 보이는 (물론 그게 뭔지는 몰라도!) 것 때문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렸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자연스레 친구가 되어버린, 언제부턴가 항상 자신의 주위에 있어주는 현우가 혜미는 싫지 않았다. “하긴 좋아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니.” “누, 누가 좋대!?” “아아, 그래? 그럼 내가 현우랑 사귀어도 돼?” 혜미를 가지고 놀 듯, 연이어 장난스런 이야기를 꺼내는 윤지 덕분에 혜미는 거의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윤지야! 그… 그건…” “난, 혜미 네가 알다시피 남자하고 자는 것도 할 수 있어. 너처럼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초짜가 아니라구.”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고!!! 으아앙~!” 결국 터져버린 혜미의 눈물에 윤지는 빙그레 웃으며 혜미의 손을 잡았다. “기집애… 그렇게 엉성해서 어떻게 현우랑 사귈래? 좋아 인심 썼다. 오늘 이 언니가 제대로 강습해 줄게, 이리와.” 늘 선머슴같이 행동하던 혜미가 고작 ‘남자문제’로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는 게 재밌기도 했지만, 아직 윤지의 눈엔 혜미가 여자가 되려면 조금 더 배워야 할 것 같았기에, 혜미의 손을 잡은 채 윤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0 : 2 하연은 대한민국이 또다시 정대세에게 한 골을 헌납하자, 전반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경기의 추가 기울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 골을 내준 뒤 다급해진 대한민국 선수들은 결국 마음만 앞선 채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기에, 역습을 노리고 있는 북한으로선 그보다 더 좋은 먹이감은 없었을 것이었다. 차라리 노감독이 세세한 부분에 대해 지시를 내리는 타입의 감독형이었다면 모를까, 선수들을 믿으며 지켜보는 스타일임을 고려해볼 때,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후반전도 전반전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었다. 한숨을 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기사를 작성하던 하연은 그러나 노트북 옆에 꺼내두었던 핸드폰이 울리자마자, 번개같이 받으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선배? 선배지! 어떻게 됐어? 복구했어? 그런 거야?” ‘야야, 숨 넘어 가겠다.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구는 했다. 다행이 녹음됐던 메모리 블록에 재녹음 같이 덮어 쓰기 된 적이 없었어서 복구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 복구 파일 백업본은 네 메일로 보냈으니까 확인해봐라. 근데, 잠깐 들어봤는데 녹음하려는 대상하고 좀 멀었던 거 아냐? 아무리 볼륨을 올려도 겨우 한 사람 목소리 밖에 확인이 안되던데 말야. 뭐, 어쨌든 그건 네가 확인할 일이고 나중에 알지? 소주 한 잔 사라! 끊는다!’ “땡큐 선배!” 하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자신의 메일을 확인하고는 첨부파일을 다운로드 했다. 파일의 용량은 꽤나 컸기에, 하연은 파일을 다운로드 하면서 동시에 재생 버튼을 누르며 노트북에 이어폰을 꽂은 채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 ‘……게 무슨……’ ‘…………’ ‘…………얻는 게…………’ 확실히 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은 ‘보이스 레코더’의 녹음 수준은 조악했다. 조전무의 목소리는 커녕, 겨우 영후의 목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당시엔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 어떻게든 지금 이 자료에서 뭔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어폰으로 들리는 것은 잡음 뿐 이었기에 하연은 더 이상 올라갈 리 없는 볼륨 버튼을 계속 눌러대기만 하며 짜증을 폭발시켰는데 바로 그 때였다. ‘……부스럭부스럭………하연이가……?’ 이미 조전무가 나가버린 뒤, 망연자실하던 영후의 눈에 분명 ‘보이스 레코더’의 불빛이 들어왔음에 틀림없었다. 또한 영후는 하연의 ‘보이스 레코더’를 찾아내기까지 했고. 하지만 바로 전원을 끄진 않은 듯 했기에 하연은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역시 너답다. 그런 순간에 이런 생각을 다… 하지만 하연아 난 이걸 너에게 줄 순 없을 것 같아…후…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건 어느정도 대충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하연아,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경기에서 이기면 감독님을 해고시키겠다니…… 이 사람들은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다… 하연아, 난 어쩌면 좋니……?’ 이거다! 하연은 영후의 독백을 듣자마자 기자석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라운드에선 이미 전반전을 끝내기 위해 주심이 휘슬을 입에 물고 있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하연은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이동할 복도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을 우당탕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운로드 되고 있는 파일은 계속 재생되고 있었고,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이어폰에선 여전히 영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에게… 언제나 너에게 가고 싶었는데… 왜 나는… 왜 우리는…’ - 수심이 그득한 얼굴로 그라운드에서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들어선 노감독은 선수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줄 것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라커룸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익숙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는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이윽고 노감독이 고개를 돌렸을 땐, 출입증을 잊은 채 내려온 하연이 경기장 안전 요원들에게 제지 당한 채 라커룸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목이 터져라 노감독을 불러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나 기자라고요!! 감독님! 저 박기자에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급해요!” 다급하지만 반짝이고 있는 하연의 눈을 바라보며, 노감독은 선수들에게 해줄 이야기를 조금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이미 선수들은 라커룸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노감독은 하프타임의 절반인 5분이 지나도록 나타날 생각을 안하고 있었고, 선수들은 그것보다 마음만큼 안 따라주고 있는 몸 덕분에 며칠간 이어진 달콤했던 섹스에 대해 자연스레 반성하고 있었다. 물론 그와는 예외로 여전히 힘이 남아도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니 이 영감님이, 혹시 화장실에 빠진 거 아냐? 뭐이리 오래 걸려?” 조금은 가라앉아있는 분위기를 띄워볼 겸 근명은 실없는 농담을 던져봤지만 아무도 웃어 주지 않았고, 어느새 노감독이 들어오며 근명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네 녀석도 내 나이 돼 보면 알게 된다. 힘만 남아도는 눔 같으니라구.” 노감독까지 가세하자 그제야 몇몇 선수들이 킥킥 대긴 했지만, 그래도 2점 실점의 무게감은 그리 쉽게 걷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지고 있는 소감들이 어떠냐?” 지고 있는 데 소감이랄 게 있겠는가 마는, 감독이라는 사람이 그닥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긴 했다. “내 간만에 충격 요법 하나를 써보마.” 갑자기 의아해하는 선수들을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던 노감독은 이윽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후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이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날 생각이다.” “!!!” “네놈들하고 계속 놀아주기엔 이젠 나도 힘에 부치기도 하거니와,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살아볼까 한다.” 선수들은 노감독의 갑작스런 선포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지만, 노감독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내 마지막 경기를 부디 후회 없도록 만들어다오. 이상!” 노감독의 연설이 끝나자 선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를 하나 둘 떴지만, 마지막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있던 한 선수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 모습 만으로도 노감독은 가슴이 먹먹해져 갔지만 애써 호통을 치며 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놈! 빨리 그라운드로 나가지 않고 뭣하는 게냐? 벌써 다리가 풀려서 못 일어 나는 게냐? 교체가 필요한 거냔 말이다!” “…… 감독님……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무슨 얘긴지 당최 못 알아먹겠구나. 그래서, 경기를 뛰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노감독의 당당하지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영후는 젖은 유니폼으로 얼굴을 쓱쓱 닦고서는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이 남자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기에, 노감독은 애써 영후의 눈을 애써 외면하며 화난 모양으로 서 있었다. “뛸 겁니다. 당연히…” 담담하게 답을 하고는 영후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지만, 노감독은 그제야 다리가 풀린 듯 비어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보았다. ‘놈…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너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몰아넣는 것은 아닌 가 모르겠구나. 그저, 아무런 고민 걱정 없이 볼을 차는 네놈의 플레이를 보고 싶었을 뿐 이었거늘…’ 노감독은 어쩌면 영후에게만큼은 모든 타인들이 지옥 같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보았다. 다만 공교롭게도 자신의 은퇴 경기 일정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 천만 다행이라 여기며 의자 모서리를 짚으며 ‘끄응’ 소리와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26부. 신들의 질투. ----------------------------------------------------------------------------------------------------- 긴급공지!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27부 업데이트를 잠시 미룹니다. 너무 경황이 없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제대로 글을 쓰기는 커녕,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괜찮으시다면 조문 많이 해주시고,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해주세요. 노무현 대통령님,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얘, 혜미야.” “으,응?” 후반전을 기다리면서도 자꾸만 남자들의 가랑이 사이에 눈이 가는 걸 어쩌지 못하던 달뜬 표정의 혜미를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던 윤지는 혜미의 어깨를 툭 치며 혜미를 불렀고,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듯 화들짝 놀라며 윤지를 바라본 혜미에게 윤지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옮긴 시선에 얌전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현우가 들어오자 혜미는 순간 반갑기도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번엔 현우의 바지가랑이 사이로 눈이 가버리는 바람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고개를 떨궜고,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달라져버린 혜미의 반응에 의아해하던 현우는 눈으로 윤지에게 물었지만 윤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 “유…윤지야…” 가벼운 윤지의 입맞춤에 이어 방으로 손을 잡힌 채 따라 들어온 혜미는 푹신푹신한 침대에 앉으면서도 편한지 어떤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남자를 사귀려면, 아니 현우와 사귀려면 뭐가 필요하다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혜미는 윤지가 자신의 컴퓨터를 켜며 동영상 파일 하나를 재생시킬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걸 알아야 연애하는 데 진짜 도움이 되는 거야.” 이윽고 동영상을 재생시키고 침대로 올라와 혜미의 다리를 베고 누운 윤지는 장난치듯 손을 뒤로 돌려 혜미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말했고, 설마 또다시 윤지 자신이 나오는 영상을 또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어 혜미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우선은 까맣던 화면에서 조그만 방으로 배경이 바뀌면서 남자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적어도 그때 만큼은. ‘휴…’ 그제야 작게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혜미는 잠시 긴장을 풀었지만 그건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영상 속의 남자는 직접 캠코더를 설치하던 중이었는지 한참을 렌즈를 바라보며 녹화가 잘되고 있는 지 확인을 하는 듯 하다가 이윽고 뒤쪽에 놓여있는 침대에 벌렁 누웠다. 허나 놀랍게도 남자는 완벽한 알몸이었기에, 혜미는 순식간에 귀까지 빨갛게 변하고 있었고 윤지는 그런 혜미를 너무나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혜미는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나 커서 스스로 놀라고 있었고, 또 창피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일 지금에 와서 눈을 뗀다면, 윤지의 눈과 마주치게 될 것이었고 그건 어쩐지 더욱 무안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면에서는 어디선가 또 하나의 늘씬한 알몸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알몸의 주인공은 등장하자마자 남자의 품에 폭 안기며 침대에 마주 누운 채 길고 긴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뭐,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닌데, 어쨌든 저게 보통의 남자와 보통의 여자가 하는 키스란 거야. 혜미 너도 키스는 알지? 모르나 아직?” 윤지는 여전히 혜미의 다리를 베고 누운 채, 엉덩이를 토닥거리던 손을 치우기는커녕, 은근하게 매만지면서 물었지만, 혜미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화면에 완전 고정되어 있었다. “어? 어어… 알아… 나, 나도 키스.” “오, 그래? 그래서 키스 해봤어? 어? 아직 못해봤지? 그치??” “해…해봤어 나도!” “그래? 진짜?” “그, 그래… 나도 해봤어… 키스.” 윤지는 지금 혜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점점 진도를 나가는 화면 속의 커플들 덕에 아무런 경험도 없던 혜미의 눈은 점점 커지고 있었으니까. 화면의 남녀는 처음엔 그저 키스만 나누었지만, 점점 키스가 길어지면서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주물러대기 시작했고, 여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자의 물렁거리는 자지 쪽으로 손을 내려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커… 커진다…!!’ 당연하게도 화면 속 남자의 자지는 여자의 손길 덕분에 무럭무럭 자라났고 어느새 보기 좋을 정도로 발기되어 있었다. 물론, 윤지의 눈으로 보기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물건이었지만 적어도 혜미에게는 엄청난 ‘성적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신기하지? 저게 남자들이 달고 다니는 ‘자지’라는 거야. 혜미 너 저것도 본 적 있어?” 어느덧 혜미는 대답도 할 정신이 없는 듯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혜미의 얼굴을 보며 윤지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혜미가 감독님의 그걸 보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해보자 괜히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 같아 억지로 참아보았다. 이윽고 화면의 여자는 한동안 남자의 입에 의해 가슴을 빨리면서도 여전히 자지를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고 어느새 남자의 자지가 만족스러울 만치 커진 것을 확인하자 아무 거리낌없이 몸을 일으켜 남자의 자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것 만으로도 혜미에겐 놀랄만한 광경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윤지는 슬그머니 혜미의 트레이닝 복 상의 속으로 손을 넣었기에 혜미는 더욱더 깜짝 놀라고 있었다. “꺄악!” “어, 저거 봐! 저 여자 남자 위로 올라간다.” 혜미가 윤지의 손을 막을 사이도 없이 화면 속의 여자는 자지를 입에 문 채 남자의 몸 위로 올라가고 있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다리 쪽으로 올라갔기에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묻었고, 늘 하던 자세였던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곧바로 ‘후룩, 쩝쩝’ 소리가 날 정도로 자지를 입에 문 채로 정신 없이 머리를 흔들어댔다. 게다가 남자 역시 여자의 보지를 한껏 손으로 벌린 채 혓바닥으로 연신 간지럽히듯 터치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남자는 잠시 손을 화면 쪽으로 뻗더니 이내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시 어느 정도 고정된 화면엔 여자의 보지가 확대되며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도 남자는 한 손엔 캠코더를 든 채로 여자의 보지를 촬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남자는 여전히 한 손엔 캠코더를 든 채로 여자의 보지에 달려있는 날개 같은 것을 손으로 벌리며 완전히 드러난 보지의 빨간 속살에 혀를 집어 넣기도 하고, 키스하듯 입으로 쭉쭉 빨기도 했다. 한편 간간히 남자의 다리 쪽 쯤에서 보이는 여자 또한 한 손으로 열심히 남자의 자지를 위아래로 훑으며 동시에 입에 넣은 채 점점 속도를 빨리 하며 빨아댔지만, 중간중간 남자가 보지 속으로 혀를 깊숙하게 넣을 때마다 자지를 부여잡은 채 짙은 신음을 흘리며 남자의 배 위에 얼굴을 누이며 몽롱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하아……” 혜미의 다리를 베고 있던 윤지가 얼굴을 돌려 혜미의 가랑이 사이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자, 화면 때문인지, 아니면 윤지의 능숙한 손놀림으로 만져지고 있는 자신의 가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화장실에 가고 싶을 만큼 이상한 느낌이 들어 혜미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어느새 자신의 티셔츠와 브래지어가 가슴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었고, 그런 혜미의 반응을 즐기듯 윤지는 혜미의 탄탄한 배에 ‘쪽’ 소리를 내며 연신 키스를 했다가 움푹 들어가 있는 배꼽에도 살짝 혀를 집어넣어 보기도 했다. 한편 화면의 남자는 이번엔 손가락을 이용해 여자의 보지 틈새를 쓰윽 몇 번 문지르더니 양쪽 날개를 빠르게 오가며 자극을 주기 시작했고, 여자는 점점 남자의 자지를 입으로 빨아주지 못한 채 겨우 손으로 부여잡고 있기만 했으며, 남자는 그런 여자를 장난으로 괴롭히려는 듯 여자의 보지의 위쪽에 솟아 있는 작은 콩알만한 것을 손가락 하나를 이용해 더 빠른 속도로 문질러댔다. “아앙! 아아… 아흑! 아……” 급기야 여자는 우는 듯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지만, 남자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더욱 속도를 올렸고 여자는 결국 새우등처럼 크게 허리를 구부리며 동시에 남자의 얼굴에 애액을 왈칵 뿜고는 이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나서야 안정이 되었다. ‘끝난…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혜미의 머리와는 달리, 몸은 어느새 조금씩 달아올라 있었기에 못내 아쉬워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였을까 여전히 자신의 가슴에 놓여진, 이제는 발딱 곧추선 자신의 유두를 만지작거리는 윤지의 손이 어쩐지 계속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고 있었다. 허나 화면의 커플은 혜미의 생각과는 달리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 같았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몸 위로 늘어지듯 포개지자 다시금 여자를 일으켜 세우는 마법을 사용하려는 듯, 흥건히 젖어있는 여자의 보지 속으로 손가락 두 개를 쑥 넣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윤지는 몸을 조금 세우며 혜미의 가슴을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동시에 트레이닝 바지 속으로 손을 쑥 집어 넣었다. “흡!” 화면 속 여자의 소리였을까, 아님 혜미의 소리였을까. 순간적으로 겹쳐진 신음소리 때문에 방안은 좀더 고요해졌지만 공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화면 속에선 거짓말처럼 여자가 깨어났고,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 넣었다 빼는 동작을 반복했는데, 점점 속도를 빨리 하기도 했고, 안쪽에서 이리저리 휘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피아노 건반처럼 수도 없는 소리를 생산해냈지만, 그 정도 음색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듯 남자는 이윽고 손가락의 스피드를 점점 올리며 동시에 혀로 작은 콩알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저게… 여기야…” 윤지의 손은 어느새 혜미의 꽃무늬 흰팬티 위로 축축해지던 보지의 윗부분 중 화면의 여자 것과 같은 부위를 만지고 있었고, 혜미의 다리는 급격하게 경직되고 있었지만, 작고 예쁜 윤지의 손은 아무 거리낌없이 작은 공간을 누비며 농락하고 있었다. “아앙, 자기야… 빨리… 빨리…” “빨리 뭐어…? 응? 말해봐…” “나 하고 싶어… 넣어줘…” “넣어줘? 뭘 넣어줘?” 화면 속에선 여전히 숨이 넘어가는 여자를 상대로 남자는 여유롭게 장난을 치듯 물었고, 여자는 더욱 신음소리를 흘려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자기 꺼… 넣어줘.” “내 꺼? 그게 뭔데? 말을 해야 넣어주지.” “아앙, 몰라. 자…지 넣어주세요.” “그래, 알았어. 똑바로 누워봐.” 여자의 입으로부터 ‘자지’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그제야 만족한다는 얼굴로 남자는 여자를 침대에 눕혔고 여자는 더 이상 음란해 보일 수 없을 정도로 두 다리를 활짝 벌리며 남자를, 아니 남자의 자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들어간다.” 남자는 친절하게 여자에게 삽입의 시작을 알렸고, 화면 또한 여자의 전신을 담던 모습에서 남자의 자지와 보지의 접점을 비추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지와 보지의 모습에 넋을 잃던 혜미는 그러나 순간적으로 남자의 자지가 여자의 보지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 했다. 게다가 그 커다란 물건이 여자의 그곳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자지가 다시 나올 때는 여자의 질벽이 그대로 딸려 나오듯 했고, 또다시 삽입될 때는 여자의 보지에서 ‘찔꺽’소리가 날 정도로 촉촉한 애액을 내뿜고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윤지의 손가락이 팬티 속으로 들어와 혜미의 보지에 직접 닿았을 때도 화면 속 여자와 별 다르지 않은 애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응… 유, 윤지야 나… 나…” 한편 화면 속 자지는 점점 속도를 올리며 여자의 보지를 사정없이 들락거리고 있었고, 그에 발맞춰 윤지 또한 혜미의 한껏 벌어진 보지의 틈을 손가락 하나로 빠르게 문질러주었기에 지금 방안을 채우기 시작한 신음소리가 혜미의 것인지, 아니면 화면 속 여자의 것인지 분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윤지의 침으로 번들거리는 혜미의 가슴 한쪽은 여전히 윤지의 입 속에 들어가 있었지만 다른 쪽 가슴도 역시 윤지의 손가락이 아무도 범하지 않았던 선 분홍빛 유두를 굴리듯 매만지고 있었다. 게다가 어느새 무릎까지 내려간 트레이닝 복과 팬티 덕분에 남은 한 손은 자유롭게 혜미의 보지를 탐 할 수 있어 보였다. “아흑! 아! 나… 나 어떡… 아… 아… 나 이제… 나 그만…” 점점 흥분도가 높아져 갈수록 어쩐지 화장실에 가지 못하면 윤지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일 것만 같은 기분에 입으로는 그만 해달라며 애원하고 있었지만, 그와 달리 혜미의 다리는 윤지의 손이 더욱 편해지도록 조금씩이지만 분명 점점 벌어져가고 있었다. 때문에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혜미는 꽤나 근사한 기분에 젖을 수 있을 것이라고 윤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혜미는 갑자기 못 볼 것을 본 양 ‘꺄악!’ 비명을 지르며 일어서 겨우 옷을 추려 입고는 윤지의 방을, 윤지의 집을 도망치듯 뛰쳐나갔고, 어느새 혜미의 보지 속으로 조금쯤 손가락을 집어 넣어 완벽히 순수한 질 벽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던 윤지는 모니터 속 남자가 앙탈을 부리는 여자를 무시하며 엎드려 있는 그녀의 항문에 자지를 밀어 넣는 장면을 보다가 여전히 자신의 손가락에 남아있는 혜미의 애액을 조심스럽게 핥으며 속삭이고 있었다. “처음치고 조금 심했나…?” - 이제 곧 후반전을 맞이하기 위해 모든 선수들은 각자의 포지션에 위치해있었고 영후와 근명은 센터서클에 선 채 주심의 휘슬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영후의 발 아래가 아닌 근명의 발 아래 축구공이 놓여있었지만, 지금의 영후에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얼핏 보기에도 북한 선수들의 얼굴엔 이 경기를 잡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기에 영후는 잠시 고개를 돌려 대한민국 선수들의 표정을 바라보았지만, 예상대로 전반전과는 달리 그들도 자못 비장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근명아, 아직 더 뛸 수 있겠어?” “더 뛸 수 있냐고요? 어이가 없네. 난 지금부터 시작이라고요. 그나저나 망할 노인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그런 폭탄 발언을 해버리다니…” 근명을 비롯해 선수들 모두 겉으로 내색을 안 해 버릇하는 거친 남자들이었지만, 사실 속정만큼은 누구보다도 깊다는 걸 영후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마도 후반전을 뛰고 난 후 탈진으로 쓰러질 지언 정 모두들 전력을 다해 경기에 임할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내가 옆으로 빠져줄게 네가 가운데로 들어가라. 어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한데 왜요, 벌써 후달려요? 뭐 어쨌든 그러자 고요. 근데 사이드로 빠져서 편히 쉴 생각하지 말고, 크로스나 열심히 올려요. 올리는 족족 다 넣어줄 테니까.” 언제나 자신만만한 근명이 이럴 때만큼은 마음에 힘이 되어주고 있었기에 영후는 미소 지을 수 있었고, 이윽고 후반전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리려 하고 있었다. - 후반전을 알리는 휘슬소리가 울렸지만, 휘슬 소리와 상관없이 공격수마저 하프라인을 넘어오지 않으며 100% 수비 일변도로 경기를 시작하고 있는 북한 진영을 보자 벌써부터 답답해지는 것만 같아 철용은 습관대로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관중석 곳곳에 붙어있는 ‘NO SMOKING’ 스티커를 바라보며 세상 참 웃긴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세금까지 내며 사는 담배와 흡연가들은 폐암의 근원지로 낙인 찍힌 채 어느새 길거리에서 조차 흡연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었기에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철용의 뒤에서 꽤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몸 다 망쳤구먼. 이제 어디 100미터 달리기나 제대로 뛸 수 있겠나?” 가뜩이나 짜증나 있는 철용은 눈을 부라리며 뒤를 돌아봤지만, 그곳엔 하늘 같은 대선배 ‘장규식’이 의자에 앉은 채 혀를 ‘쯧쯧’ 차고 있었기에 철용은 당황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서, 선배님… 여긴 어떻게…?” “왜? 나는 여기 오면 안되나?”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딸내미 가르치는 놈 좀 두 눈으로 직접 보려고 왔다. 오늘 아니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 “내 머리는 무식해도, 딸 하나 있는 건 공부를 좀 곧잘 해서 한국여대에 다니고 있다 이 말씀이야.” “아…” 그제야 철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여대와 이영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두 존재는, 그러나 결합하자마자 이영후의 부활과 함께 전혀 관심 밖에 있던 여자축구라는 것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었기에, 축구계 안팎에서는 이미 큰 이슈가 되고 있었다.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이영후는 그 동안 잠자고 있던 많은 사람들 (이를 테면 바로 코앞에 있는 장규식 선배 같은) 을 깨우고 있었고, 영후 자신의 주변으로 집결시키고 있었기에 철용은 더욱더 그 둘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한 이영후가 만에 하나 감독으로서도 흥행한다면,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큰 사건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알게 모르게 모든 시선은 이영후와 신생팀 한국여대에 쏠리고 있었다. 허나 이영후가 자신의 플레이를 대한민국에서 직접 보이게 된 오늘, 경기가 이대로 실망스럽게 끝나게 된다면 이영후의 돌풍은 그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관중석을 둘러본 철용의 눈엔 꽤나 안면이 있는 일본 프로팀들의 스카우터들이 들어왔다. ‘쳇! 잽머니가 좋긴 좋군 그래.’ 환율의 영향도 영향이지만, 다음 시즌부터 아시아 용병은 3명으로 제한되는 외국인 선수 쿼터제와 달리 자국 선수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대신 용병의 수가 다 차더라도 아시아권 선수라면 1명을 더 영입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AFC의 결정에 맞춰, 일본은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확실히 일본 선수들에 비해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골 결정력까지 뛰어난 대한민국과 북한 선수들이야 말로 가격대 성능비로는 최고였을 테니 이렇게 모두들 몰려와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일본 스카우터들 사이로 어디선가 본 듯도 한 외국인이 눈에 띄었지만, 설마 그 외국인이 인테르의 스카우터라는 사실을 철용은 미처 알지 못했다. 허나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어느 팀의 누가 보러 왔든지 간에, 그보다 먼저 영후 스스로 기복 없는 플레이를 펼쳐야만 철용으로서도 그것에 맞춰 다리를 놓아 줄 수 있을 테니까. ‘뭐라도 좀 보여줘라 임마. 네놈이 엉망으로 뛰면 내 업무에도 차질이 생긴단 말이다!’ 자신 때문에 축구를 잃을 뻔한 영후를, 철용은 어떻게든 최고의 팀으로 손수 이적시키기 위해 안 굴러 가는 머리를 애써 굴려가며 지금 이자리 까지 온 것이었기에 여느 경기, 여느 선수를 바라볼 때와는 달리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어떨 것 같나?” “네? 무슨…?”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규식의 말을 언뜻 못 알아듣는 철용에게 규식은 그라운드를 턱으로 가리켰고 그제야 철용은 규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솔직히…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공격의 의지가 전혀 없어진 팀을 상대로 하자면…” “그러니까, 자네라면 어쩌겠냐고.” “아… 그게…” 솔직히 이런 상태에서는 백약이 무효일 것만 같았기에 철용은 쉽게 답을 내지 못했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규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축구도 과학적으로 바뀌고 있다지만 우리 때만 해도 포메이션은 개뿔! 우르르 몰려갔다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네 축구나 다름 없었지. 또 의욕들은 왜들 그리 넘쳤던지 싸움도 뻔질나게 벌이기도 했고…” 철용은 규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랬을 것이었다. 군부 출신 대통령 덕분에 급조된 프로팀들은 맨땅이나 다름없는 경기장에서 체계적인 관리는커녕, 선수와 경기 전반을 아우르는 경험이 넘치는 감독들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맨몸으로 살얼음판을 걷듯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뤘을 것이었다. 물론 그때의 것들이 지금의 현 상황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건 자명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우리 때는 저런 상황이 비일비재했었다고.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 줄 알겠나?” “……” “답답하긴. 이럴 땐,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공을 집어넣는 게 첫 번 째고, 그 다음엔 그 공을 어떻게든 우격다짐으로라도 넣어야 한다고! 자네도 알잖아,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공이 들어올 때 느끼게 되는 수비수들의 압박감을. 예쁘게? 작품을 만들어? 그딴 거 다 집어치우라고 해! 저기 봐, 그런 시대를 걸어온 저기 저 노인네는 이미 알고 있다고.” 규식의 말처럼, 노감독은 곧바로 오장은을 빼고 공격수 박주영을 투입시키고 있었다. “영감탱이가 슬슬 발동이 걸리는 것 같으니 경기는 이제부터 시작일 테고, 우린 지금부터 누가 우겨 넣고 누가 주워먹는 지나 천천히 구경하자고.” 어느덧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마냥 길게 다리를 뻗어 앞줄 의자에 걸친 채 관람모드로 돌입하는 규식을 뒤로하고 철용은 여전히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 김두현과 김정우는 북한의 진영 한가운데 서서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조금이라도 수비가 나오거나 해서 틈이 생기길 바라고 있었지만, 공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북한의 수비는 자신의 자리를 지킨 채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전반과 달리 왼쪽 사이드에서 활발히 움직이다가 순간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붉은 유니폼이 눈에 들어오자 김두현은 곧바로 패스를 날렸다. ‘오케이!’ 몸싸움에 조금 약한 감이 있는 두현이었지만, 패싱력 하나는 발군이었기에 그것을 노리며 움직이다 순간적으로 돌아들어간 영후는 달려가면서 왼발로 적절하게 트래핑했지만, 어느새 차종혁과 박철진이 달라붙어 영후를 코너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고 영후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간결하게 드리블 하며 터치라인과 골 라인이 만나는 코너플래그에 이르렀다. “막으라우! 돌아서지 못하게 막으라우!” 리명국 골키퍼의 외침이 격하게 들려왔지만, 굳이 그런 외침이 없었더라도 차종혁과 박철진은 이미 그러리라 마음 먹고 있었다. 때문에 틈을 주기는커녕 영후의 공을 빼앗기 위해 두 수비수들의 다리는 거침없이 잔 태클을 걸어왔고, 그들을 등진 채 돌아서지 못하고 있던 영후는 공을 발바닥으로 멈춰놓고, 잠시 숨을 고르려는 듯 허리를 폈다. 순간 수비수들도 멈칫하고 있었는데, 영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 뒤꿈치로 차종혁의 다리 사이로 공을 흘려 보냈지만, 당황한 두 수비수들이 뒤를 돌아본 순간 그들의 사이를 뚫고 영후는 그 둘보다 먼저 공을 쫓아 달려나갔다. “주영, 받아!” 수비수 둘을 벗겨내자 마자 골 라인을 따라 골대 쪽으로 파고 들던 영후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치며 오른발로 낮고 빠른 크로스를 올렸고, 덕분에 리준일과 안영학 김영준 등이 한번에 박주영에게 쏠리며 마크하기 시작했다. '저 선배, 미친 거 아냐?' 주영은 다른 나라도 아닌 북한과의 경기에서 다 들으라는 듯 소리치며 크로스를 올리는 영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허공의 공은 그러나 그들을 지나쳐 뒤쪽에서부터 쇄도 하던 근명의 발끝에 정확히 떨어지고 있었다. ‘우선 하나는 됐다!’ 근명의 쇄도는 그야말로 영후와 약속이나 한 것 마냥 타이밍이 완벽했기에, 영후는 골이 되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묵묵히 하프라인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관중석에선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기에 슬쩍 영후는 미소를 지었던 것도 같았다. - ‘드디어…!’ 기자석에 앉아있던 하연은 골을 넣자마자 세레머니를 할 사이도 없이 골 문안의 공을 집어 들고 전력으로 달려나가는 근명과 역시나 언제 크로스를 올렸나 싶을 정도로 하프라인으로 빠르게 복귀하는 영후를 바라보며 하프타임에 복도에서 나눴던 노감독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감독님이 보기엔 어떠세요? 아무래도 지금의 영후는…” 하연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영후의 교체를 거론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상태로는 죽도 밥도 안되게 생겼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자네의 축구를 보는 눈은 여전히 형편없구먼.” “네?” 그때라면 파주 NFC에서의 연습경기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때와 달리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던 하연은 조금 당황했다. 분명 지금 이대로라면 영후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며 경기를 그르치게 될 것이었고, 또 그렇게 되면 조전무의 협박과는 상관없이 노감독의 자리도 위태로워 질 것이 자명한 일이었을 텐데, 지금의 노감독에겐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 보였기에 하연은 점점 조바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자네가 보기에 영후는 어떤 타입의 공격수 같은가?” “아, 그야…” 갑작스런 질문에 하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그야말로 영후는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특이한 타입의 공격수였다. 수비와 공격 전체를 아우르는 활동량에 탁월한 힘과 스피드, 그리고 골을 직접 만들어 내는 능력까지… ‘아!’ 하연이 겨우 답을 쥐어 짜냈을 즈음, 노감독의 입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영후는 골을 스스로 만들어 낼 줄 아는 놈이지. 그럼 근명이 놈은 또 어떤 타입 같은가?” ‘으…’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노감독은 계속 재밌다는 얼굴로 퀴즈를 내고 있었기에 하연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감추며 애써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역시나 답은 노감독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놈은 얄밉게도 무척이나 잘 주워먹는 타입이지. 그래,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니 감독님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험, 이렇게 까지 힌트를 줬는 데도 모른다면 나도 방법이 없구먼. 그럼 나는 풀 죽어 있을 놈들한테 사탕이나 주러 가야겠네. 어쨌든 경기가 끝나면 기사나 잘 써주게나.” 바로 전, 조전무가 개입되어있는 영후의 고민을 알려주었음에도 노감독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산보하듯 느긋한 걸음으로 라커룸으로 들어가버렸고, 홀로 남겨진 하연은 그때까지만 해도 노감독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허망하게 서 있었다. - ‘이런 걸 노린 거였나… 노감독님은?’ 분명, 영후와 근명은 겉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었다. 골 욕심이 많은 건 닮아있었지만, 그게 독이 되어 서로에게 독이 되는 조합으로 생각되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골 장면’을 그릴 줄 아는 영후와 ‘골 냄새’를 잘 맡는 근명이 손을 잡자, 그야말로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르단 전에 있었던 오프사이드로 판명됐던 근명의 골도 영후와 근명이 점점 맞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나…?’ 하연의 추측이 지나친 게 아니라면, 어쩌면 대한민국은 지금 엄청난 스트라이커 조합을 찾아낸 건지도 몰랐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며, 골을 위해서 자신의 욕심을 희생할 줄 아는 남자와, 그런 남자가 그리려는 그림에 화룡점정 하듯,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나 마무리 지어주는 남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이 짜릿함이 느껴지는 하연이었지만, 노감독이 내준 수수께끼가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 같아 조금 의아해 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경기는 1 : 2로 끌려가고 있었기에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한 하연은 수많은 조명 덕분에 대낮보다 더 밝게 빛나는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고, 그 중에서도 더욱더 빛나기 시작하는 영후에게로 고정되고 있었다. - ‘휴우… 겨우 급한 불을 껐고, 이제 어떻게 한다…?’ 이제 한 골 넣었을 뿐, 어떻게든 빠른 시간 내에 동점을 만들지 않으면, 지금의 대한민국 선수들 체력으로는 남은 시간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나마 수비적으로 나오는 북한이었기에 원 사이드 게임으로 몰아가며 체력을 아끼기는 했지만 분명 서있기만 해도 힘들다는 A매치였다. 때문에 어떻게든 빨리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야 했다. 영후는 여전히 왼쪽 터치라인 쪽으로 빠진 채 들락거리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영후가 다시 내려오며 수비라인을 빠져나올 무렵, 김정우로부터 패스가 연결되고 있었고 그에 발맞춰 김치우가 오버래핑을 나오며 영후의 등 뒤로 돌아나갔다. ‘지금이다!’ 순간 영후가 김치우에게 공을 흘려 줄 것이라 생각한 북한 수비수들의 무게중심이 왼쪽으로 기운다고 생각이 들 무렵, 영후는 김치우에게 공을 주지 않고 횡으로 두 번 정도 공을 터치하며 가볍게 드리블을 하다가, 거의 40미터에 육박하는 거리부근에서 사전 준비 동작도 없이 갑자기 골대를 향해 벼락 같은 슛을 날렸다. 팡! 순간적으로 열린 수비벽 사이로 공은 조금씩 상승하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고, 전혀 슈팅타이밍이라고 생각지 못한 리명국 골키퍼는 골대 왼쪽에 가깝게 서 있다가 깜짝 놀라며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지만, 골키퍼의 손은 골 포스트와 크로스바가 만나는 오른쪽 상단 모서리 쪽까지 닿기에는 너무나 멀었다. 게다가 공은 거짓말처럼 점점 탄력이 붙으며 쭉쭉 뻗기 시작했기에 모두들 ‘골’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터~엉! 그대로 골 망을 가를 것 같던 공은 아쉽게도 크로스바를 강타하고는 수직으로 떨어졌기에 관중석에서는 아쉬운 탄성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쉬운 탄성이 환호성으로 바뀌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바로 그곳엔 어느 샌가 나타나 다이빙 헤딩을 하고 있는 근명이 있었으니까. 촤~악! 삐~익! “우와아아아아아!!!!!!!!” 2 : 2.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었기에, 경기장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에 보답이라도 하듯, 또다시 골대 안에서 공을 꺼내 옆구리에 낀 채 돌아오던 근명은 자신을 기대 이상이라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영후에게 씨익 웃어주었고 둘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 “결국 증명이 됐군.” “네? 뭐…가요?” 그저 경기를 관람만 하고 있음에도 영후의 플레이에 어느덧 자신도 경기를 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설레던 철용은 그러나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규식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두 놈들 말야. 각각 뛰어난 놈들이긴 하지만 원 톱으론 적합하지 않다는 걸 노감독도 알고 있었단 말이다.” “예에? 그건 좀 너무 심한 비약 아닙니까? 저 놈들이 원 톱으로 적합하지 않다면 지금 대한민국에 원 톱 재목은…”” “왜 내 말이 틀린 것 같나? 하긴 쉽게 이해하긴 힘들 테지. 허나 내가 감독이래도 두 놈 중 어느 한 놈을 원 톱으로 내세우진 않았을 거란 건 장담하네. 아, 자네가 더 잘 알겠구먼 영후가 원 톱으로 섰을 때의 문제점을.” ‘영후의… 문제점?’ 드디어 공격을 감행하는 북한 선수들의 기민한 움직임에 경기장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상황에서 철용은 규식이 자꾸만 말을 붙여 조금 짜증이 났지만 어쩐지 그냥 넘기기에는 꽤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이야기들뿐이었기에 이번에도 경기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 “오늘은 정말 다행인 거 같아요. 그렇지 않으세요?” 경기는 이제부터 시작일 만큼 어려운 경기였음에도 수림의 얼굴은 왠지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때문에 남희는 조심스럽게 수림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물었고, 수림은 별 고민 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있었다. “우리 감독님 말이에요. 지난 요르단 전만 해도, 골을 넣어 좋긴 했지만 뭐랄까… 왠지 몸이 부서져라 뛰는 느낌이었어서 보는 내내 경기하고는 상관없이 조마조마 했었잖아요. 권코치님은 안 그러셨어요?” “……” “그런데 오늘 경기는 뭐랄까요, 우리 감독님만 따로 노는 느낌이 없네요. 마치 이제 슬슬 맞아 돌아간다는 느낌? 제가 표현력이 좀 부족해서 잘 설명드릴 순 없지만, 대충 그런 기분이 들어요.” “아…” 그제야 남희도 수림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감독님은 그야말로 감독이란 직책을 수행하고도 남을 만큼 경기 전반에 걸쳐 모든 것을 신경 쓰고 걱정하는 유형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선수들이 자신에게 맞춰주길 기대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다른 선수들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선수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팀에게도 영후에게도 마이너스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선수들이 선수 이영후의 레벨에 근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골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 밖에 없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언제라도 자신의 한계치 이상으로 체력을 소진하게 되고, 결국 그러다 보면 부상의 위험에 더욱더 쉽게 노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랬구나…’ 남희도 수림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어쩐지 오늘의 팽팽한 경기 분위기와는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골을 넣기 위한 노력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남희의 눈엔 그제야 하근명이란 선수가 들어왔다. ‘드디어… 파트너를 만났다…는 건가…?’ - 드디어 근명의 골로 대한민국이 북한과 동점을 이루자 대한민국의 벤치에 앉아있던 코치가 신바람이 난 듯 노감독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감독님, 오늘 근명이의 컨디션이 꽤 좋아 보이는데요?” “컨디션이 좋다? 허허…” 그러나 노감독은 벤치에 앉은 채, 코치라는 사람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어서 그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감독님이시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는 거지만, 사실 성격도 좀 그렇고, 제멋대로인 면도 없지 않고. 뭐 그래도 나름 골을 잘 넣어주니까 코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거죠. 물론 대부분 주워먹는 골이긴 하지만…” “주워먹는 골? 하지만 그것도 골은 골 아니던가?” “아, 네 그렇죠. 당연히. 하지만” “자네는 미드필더 출신이었지? 흠, 그럼 조금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구먼. 그럼 내 하나 물어봄세. 미드필더 입장에서 보자면 골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던가?” “예? 그야… 패스를 하던지, 드리블을 하던지 해서 어쨌든 활로를 만들고” “만들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역시나 몸은 알고 있지만 머리로는 쉽게 답을 못 내는 코치답게, 한동안 뜸을 들이고 있었기에 기다리다 지친 노감독의 입이 먼저 열렸다. “바로 최적의 위치에 있는 선수를 찾아 공을 넘겨야 하지. 물론 자신이 최적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면 바로 슛을 하겠지만.” “그… 그렇죠 물론.” “그래, 바로 그 최적의 위치… 최상의 위치를 찾아내는 능력을 근명이 놈은 가지고 있다네. 물론 영후 놈도 그러하지만, 그치만 그 놈은 너무 자신을 혹사시킨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제야 코치는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면서 아직도 자신은 노감독에 비하면 너무나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걸 또 한번 깨닫고 있었다. - 경기장 귀빈석에 앉아있는 정회장은 꽤나 흥미롭다는 듯이 경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지만, 정회장의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아 있던 조전무는 동점 상황에 이르자 영후 협박 건이 결국 물 건너 갔음을 깨닫고는 정회장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월드컵에서의 좋은 활약을 기약해야 할 시점에서 이렇게 북한 정도의 상대를 만나 힘겨워 한다니요.” “아, 그런가요? 전 꽤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뭐, 송구스럽지만 제 눈으로 보기엔 선수들의 체력 관리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선수 기용에 있어서도…” “그럼 어쩌실 생각인가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지금의 코칭 스탭 구성으론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설마 또… 하지만 오늘 경기가 이대로 끝난다면 골 득실 차로 우리가 조 선두가 되고, 어쨌든 3차 예선을 통과하게 되는 거 아니었나요? 이정도 실적을 내고 있는 감독을 내 친다는 건 좀…” “회장님, 그새 잊으셨습니까? 감독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축구 체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란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루다간 자칫 모든 것을 그르칠 수 도 있습니다. 게다가 회장님께서도 FIFA 부회장 직으로만 만족하실 순 없지 않습니까?” 계속되는 조전무의 사탕발림에 정회장도 은근히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일본이 2018년과 2022년에 열릴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그것에 대항해 대한민국이, 아니 정회장 자신이 월드컵 유치에 명함이라도 내밀어 보려면, 분명 그에 준하는 실적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뭐… 그 문제는 우선 이 경기나 끝 마치고 고민해봅시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는 정회장의 마음을 조전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새 자신의 손바닥 위에 정회장을 올려놓은 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언제나 사람 보는 눈이 어두운 정회장은 그런 계략 따위는 눈치채지도 못한 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 결국 2점자의 리드를 지켜내지 못한 북한 팀은 그러나, 대한민국 선수들의 체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점을 물고 늘어지며 끊임없는 침투와 패싱으로 대한민국 선수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고, 대한민국 선수들은 그야말로 정신력으로 버티며 근근이 북한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 뿐, 전체적인 선수들의 발은 땅에 붙은 듯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영후와 근명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미드필드에 합류해 다른 선수들의 체력을 대신하느라 후반이 시작될 때와는 달리 공격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40분이 가까워 졌는가…’ 치열한 미드필드에서 잠시 공이 터치라인 바깥으로 굴러나갔을 때, 영후는 전광판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자신이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 또다시 초야로 돌아가려고 하는 벤치의 노감독을 바라보며 영후는 어떻게든 이 경기, 이기는 경기로 만들겠다고 마음 먹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그와 동시에 이청용의 드로잉이 자신의 앞으로 던져지자 마자 그대로 발에 공을 달고 신속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 ‘2 : 2 …’ 하연은 북한과 대한민국의 스코어가 아닌 영후와 근명의 득점을 떠올려보고 있었다. 요르단 전에서 두골을 몰아넣은 영후와 오늘 북한 전에서 두골을 넣은 근명의 승부.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서 약속을 해버린 후, 궁지에 몰리자 급기야 헤트트릭을 입에 담았던 근명의 호기로움도 나쁘지 않았지만, 하연은 결국은 영후의 승리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꼭 그래 주길, 하연은 질주하는 영후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 영후가 공을 받자 마자 경기장을 관통하듯 정 가운데로 거침없이 돌파를 감행하자 김영준과 안영학은 뒤늦게 따라붙어 봤지만, 영후의 체력은 지금 막 경기를 시작하는 선수의 것보다도 더욱 남아 도는 것만 같았기에 김영준이 옐로카드를 감수하고서라도 막으려 뒤에서 태클을 시도 했지만 영후의 발끝에 닿질 못했다. 결국 영후를 막지 못하며 뒤쳐지는 김영준을 스쳐 지나가며 안영학 또한 유니폼이라도 붙잡아 채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따라 붙어 봤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멀어지는 영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영학도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동무들… 부탁하자우…’ 한편, 북한의 스리백 중 리광천과 리준일은 미드필더들 보다 조금 먼저 복귀했기에 영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영후는 그들을 정면 돌파할 생각은 없었는지, 이번엔 오른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다가 수비가 미처 따라붙지 못하며 거리를 유지하자, 곧바로 몸을 180도 돌리며 왼쪽 사이드 쪽으로 크로스를 날렸다. 갑자기 이상한 공간으로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는 북한 수비수들의 생각으로는 그곳엔 분명 아무도 없었어야 했지만, “헤트트릭 나간다~앗!!!” 한 남자가 영후 못지 않은 스피드로 정 반대편에 갑자기 나타나며 약속이나 한 듯 크로스 된 공을 적절하게 가슴을 이용해 앞으로 떨궈 놓으며 달려나갔고, 어느새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진입한 남자는 각을 좁히며 뛰쳐나오는 골키퍼 리명국을 바라보며 슈팅을 하려 하고 있었다. “이걸로 쫑 내자고!!!” 그러나, 퍼버벅!!! “으아악!!!!!!” 순간 다른 센터백들에 비해 조금 늦게 복귀하던 박철진의, 발을 노리고 들어오는 무자비한 백태클이 근명의 디딤발로 작렬했고,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슈팅을 하기 위해 온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근명의 왼쪽 무릎은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이상한 각도로 급격하게 꺾였고, 근명은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떨어지며 그대로 무릎을 부여잡고 잔디 위를 구르고 있었다. 삐~익! 곧바로 따라온 주심은 박철진에게 레드 카드를,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에겐 페널티 킥을 선사 했지만, 경기를 지켜보던 많은 이들에겐, 아니 영후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으아아아… 내다리… 아아아……” 울부짖는 근명에게 가장 먼저 달려간 영후는, 차마 근명의 무릎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어느샌가 잊고 있었던 자신의 무릎에 대한 기억이 육체를 넘어 정신까지 지배할까 두려워졌던 것이었다. 때문에 영후는 근명의 손을 잡아주며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줄 뿐이었다. “근명!!! 괜찮아? 괜찮은거야? 근명아!!!” 허나 근명은 대답할 정신도 없는지 데굴데굴 잔디를 구르고 있었고, 의료진이 들어갔지만 자리에서 쉽게 이동시킬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 극심한 듯 보였다. 당연히 팀닥터는 노감독 쪽을 향해 손으로 ‘X’를 표시하고 있었지만 그 표시를 다같이 지켜본 관중석에서는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합류한 침묵 덕분에 그라운드 위에선 적막감이 한동안 유지되고 있었다. - “결국, 상처투성이인 승리가 됐군.” 규식이 입안이 쓴 것처럼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지만, 철용은 그 순간 마치 자신이 예전에 행했었던, 영후에게의 태클이 생각나 죄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 하연은, 왜 근명에게 그런 승부 따위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라고 말해주지 못했을까 하고, 그 순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왜… 말리지 못한 거야… 이 바보야…’ - 노감독은 벤치에 앉아있던 고기구에게 몸을 풀 것을 지시하면서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보았다. ‘하늘도 무심하군. 이제야 겨우 최적의 조합을 찾아 냈는데…’ - 잔디밭을 가르며 등장한 의료용 후송 차량에 근명이 조심스럽게 실리는 동안 영후는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근명은 차량에 오르기 직전 다시금 손을 뻗어 영후의 손을 잡았다. “근명!” “으으…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러니까, 우선은 선배가 차요.” “뭐? 그게 무슨…?” “페널티 킥이요!!!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말고! 선배가 차라구요, 내 말 알아들어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영후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근명은 영후의 손을 놓아주었고, 이내 이어지는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고 있었지만 영후는 거짓말 처럼 실려나가는 근명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근명아…’ - 이윽고 그라운드가 정리되고, 영후가 경건한 마음으로 유니폼으로 공을 닦은 후 페널티 스폿에 놓자, 규식은 그제야 언제 늘어지게 앉아있었냐 싶을 정도로 벌떡 일어나, 공에서 떨어지며 뒷걸음질 치는 영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단단히 마음먹었구먼.” “네? 그건 또 무슨?” “자네 정말 아는 게 뭔가? 저 녀석 선수 생활 하는 내내 페널티 킥을 차본 적이 없단 말일세, 단 한 번도.” “그런… 그럼 갑자기 왜…?” “쳇, 오늘 만큼은, 이기고 싶은 가 보지… 절대로.” 규식과 철용의 대화가 멈춘 사이 골키퍼와 11미터의 거리를 두고 선 채로 호흡을 가다듬던 영후는 물끄러미 근명이 잡아줬던 손을 바라보다가, 꽤나 경직되어 있는 리명국 골키퍼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천천히 그러나 점점 가속하며 공을 향해 달려 나오고 있었다. 27부. 종료.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드디어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리자 모든 선수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모조리 쥐어 짜내 버린 듯 그라운드 여기 저기에서 풀썩풀썩 쓰러지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지쳐있던 영후 또한 그러하고 싶었지만 북한 감독과 악수를 하고 있는 노감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감독님…' 스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던 노감독은 어느새 그라운드로 들어와 쓰러져 있는 선수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하고, 또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주기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한민국 선수들 뿐만 아니라 북한 선수들에게도 노감독은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었기에 승부를 떠나 그 모습만으로도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될만 했다. 이윽고 모든 선수들을 돌아보고 나서야 영후에게로 다가온 노감독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허나 영후의 몸을 영후보다도 잘 알고 있을 노감독이었기에 영후의 어깨에 손을 대었을 뿐이었음에도 순간 눈이 조금 커지고 있었다. ‘놈… 설마…’ 아무리 영후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실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없음을 노감독 또한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영후’였기에 노감독은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하지만 손으로 전해지는 영후의 몸은, 그야말로 정신력이라는 것에 기대며 겨우 서 있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홀로 몸 관리를 해왔다고는 하더라도 체계적인 관리도, 실전감각도 갖추지 못했을 영후를 그저 ‘믿음’ 하나로 괴롭힌 스스로를 자책할 수 밖에 없었던 노감독은 그러나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입을 열었지만 평소와 달리 목소리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간, 수고 많았구나… 부족한 늙은이 덕분에… 네놈이… 정말 고생 많았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해야 할 건 다름아닌 자신이었음에도, 먼저 이런 인사를 건네는 노감독 덕분에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것들이 영후의 눈가에서 흘러내렸지만 영후는 차마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아니 돌리지 않았다. 잠시 후면 자신의 앞에 있는 노감독은 스스로를 버리며 모두를 구할 것이었다. 때문에 영후는 지금 이 순간 노감독의 모습을 한시라도 놓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제가 조금만 더…” “그런 말 말거라. 오늘 보여준 네놈의 모습, 내 꼭 가슴에 간직할 테니…”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영후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고 노감독 또한 연신 영후의 어깨를 손으로 쥐어보며 애써 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이윽고 잔디밭에 누운 채 한동안 숨을 헐떡이던 선수들은 다시금 한데 모여 관중석 앞까지 와서 관중들에게 보답의 인사를 했는데, 단연 한국여대 선수들의 환호성이 최고였고, 남희와 수림도 영후 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한편 그 기쁜 와중에도 총장은, 평소와 별 다르지 않아 보이는 모습으로 출입 통로 쪽으로 사라지는 노감독을 먼 발치서 바라보며 기쁘면서도 아쉬움이 담긴 복잡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고생이 많았네요, 나 때문에…’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노감독은 분명 이 경기의 결과에 전과 다르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총장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정말 오늘 이 경기가 그에게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이니 만큼, 총장 자신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노감독에게 있었음을 총장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총장은 어쩐지 복잡한 심정이 될 수 밖에 없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관중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는 충혈된 눈의 영후를 바라보며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저 남자라면, 노감독도 충분히 등에 지고 있던 짐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 - 하연은 평소 같았으면 바로 그라운드로 내려가 영후의 단독 인터뷰를 시도하고도 남았겠지만, 오늘만은 그럴수가 없었기에 경기장 기자석에서 기사 송고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근명이 실려온 병원으로 달려왔다. 굳게 닫혀있는 출입문에 면회금지 푯말이 걸려있던 병실에 하연이 조심스레 들어서자 근명은 어느 정도 고통이 해소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운 채 잠들어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병실로 올라오기 전에 의사의 입을 통해 알아버린 하연이었기에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근명이란 남자는, 어쩌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근명아…’ - “기자…시라구요?” 피곤에 찌든 얼굴에, 무척이나 지저분한 가운을 입고 있던 당직의사는 늦은 시간에 갑작스레 응급실을 찾아온 절세 미녀 덕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얼굴에 활력을 찾았고, 근명의 엑스레이 필름을 비추고 있는 형광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하연의 얼굴만 자신의 눈으로 CT라도 찍어두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줄줄 해주고 있었다. “우선… MRI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습니다만, 환자 상태를 봤을 때 왼쪽 무릎의 전방 십자 인대와 후방 십자 인대, 내, 외측부 인대, 그리고 반월상 연골 및 슬개골 등에 심각한 손상이 있을 걸로 보여집니다. 뭐 아직 나이가 젊으니 연골이야 재생이 된다 치지만, 문제는 전후방 십자 인대 중 파열된 것이 있느냐 인데…” “만일 그렇다면… 그럼… 하근명 선수는…” “음,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지금 예상하고 있는 부위들에 문제가 있다고 나오면, 수술을 하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겠지요. 완치 여부는 그 이후에나 판단할 수 있을 테고요, 완치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재활 과정도 더해질테니… 물론 긴 시간 동안 재활을 해야 하는 본인의 몫도 있겠고요. 하여간 지금 바로 어떤 조치를 취하긴 어렵구요. 어느 정도 무릎의 부종이 없어진 후에 다각도로 수술방법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을 수는 있는 건가요?” “그것도 물론 다친 부위가 어디냐에 따라서 다른 문제고, 또 상태가 어느 정돈지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 지금 섣불리 뭐라 말씀 드리기는 쉽지 않겠네요.” “축구… 축구는 요? 계속… 할 수 있을까요?” “그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이후에나 말씀드릴 수 있는 사안입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수술도 수술이지만, 길고 긴 재활 시간을 견뎌내느냐 못하느냐 하는, 본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 본인의 의지. 진료실을 빠져나오며, 하연은 그런 의지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지를 짐작해보았다. 종종 부상 후 재활을 시작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재활기간을 참지 못하고 복귀했다가 또다시 부상이 재발해서 결국 은퇴하고 마는 많은 선수들을 떠올리며 하연은 새삼 영후의 복귀가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 잠시 한숨을 내쉬며 병실로 들어와 근명을 내려다보던 하연은 근명을 포함한 모든 선수들이 혹시 하늘을 날고 있는 새와 같은 부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잠시라도 날갯짓을 하지 않으면 추락하고 마는 새들. 잠시 가지에 내려앉아 쉬어가도 좋으련만 새들은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어느새 파란 하늘을 하염없이 날아다니곤 했으니까. 하연은 그러한 새들이 날개가 완전히 꺾였을 때의 마음은 과연 어떨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며 근명을 바라보았다. 꽤나 곤하게 잠든 상태에서 절대로 깨어날 것 같지 않은 모습에 하연은 조심스럽게 병실을 나오려 했지만, 거짓말처럼 근명이 잠에서 깨어나 하연을 부르고 있었다. “으음… 응? 박기자님?” “어, 어어. 깼니? 나 때문에 깼나 보네, 미안.” “아… 아니에요. 간만에 늘어지게 잤는데요 뭐. 근데, 언제부터 와 있던 거에요?” “얼마 안됐어.” “헤~ 걱정돼서 온 거에요? 별거 아니에요 이런 건…” “……” “봐요, 지금은 별로 아프지도 않고. 내일 되면 바로 뛰어다닐 수 있을걸요?” 진통제 덕분에 잠시 동안 고통이 감소된 다리를 근명은 꽤나 신기해했지만, 하연은 그런 근명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참, 어떻게 됐어요? 영후 선배. 넣었죠? 그렇죠? 내가 미쳤지… 왜 하필 그 선배한테 페널을 차라고 했나 몰라.” 근명은 절정으로 치달은 승부욕 때문에 무조건 영후에게 페널티 킥을 차라고 종용하고 떠났지만, 이렇게 편하게 누워있자니 다시금 하연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했던 ‘헤트트릭’과 영후보다 꼭 더 많은 골을 넣겠다고 했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조금 후회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허나 하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궁금한 게 꽤나 많았던지, 곧바로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하는 근명이었다. “어땠어요? 내가 골 넣는 모습…” “멋있었어… 정말로.” “풋… 박기자님도 꽤 거짓말이 늘었네요.” “?” “나도 다 알고 있다구요. 골을 넣은 것보다, 영후 선배의 패스가 좋았다는 걸…” “그치만, 너도 꽤나 멋지게 넣어줬어.” “그래도… 결국 진 건 진 거잖아요.” 밝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며 입을 다문 근명을 바라보며 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렇게 속상해 할 거면서… 그럴거면서… ‘그럴 거면서 왜 페널티킥을 영후에게 부탁한거야…’ 하연은 차마 근명이 왜 영후에게 페널티 킥을 차도록 부탁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지만, 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이영후’라는 남자와 함께 플레이하며 자신도 모르게 감화되었을 것이었다. 이미 그렇게 영후에게 끌려버린 다른 선수들과 한치도 다를 것 없이. 또한 근명은 영후라는 선수와 그라운드 위에서 뛰고 있는 그 순간의 기쁨을 즐기고 싶었을 것이었다. 영후를 따라 플레이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성장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 기쁨을, 환희를 느끼게 해준 보답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골’을 양보했을 것이었고. “참, 내 정신 좀 봐.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영후 선배, 넣은 거 맞죠? 설마 바보같이 이 천재 하근명이 얻어낸 페널티 킥을 날려먹은 건 아니겠죠? 그쵸?” 하연은 근명이 발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운 손을 들어 보이며 다그치듯 물어오자, 근명의 손이 눈에 들어오면서 동시에, 페널티 스폿에 놓여진 공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채 근명이 잡아주었던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영후를 떠올릴 수 있었다. - 페널티 에어리어가 그려진 선 밖에는 대한민국과 북한 선수들이 혹시나 리명국 골키퍼가 선방 할 때를 대비해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보다 조금 더 골키퍼와 가까운 지점에 홀로 서있던 영후가, 공을 차러 나가기 직전, 근명과 잠시였지만 뜨겁게 맞잡았던 손을 말아 쥐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는 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 아새끼래, 떨고 있디 안ㅤㅋㅏㅆ어! 동무들 지켜보라우! 내래 이것만큼은 꼭 막아 보이갔어!’ 리명국 골키퍼는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영후의 모습에 어쩌면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페널티킥을 차라는 주심의 휘슬이 벌써 진작에 울렸음에도 영후가 쉽게 차지 못하는 모습에서 더 그러했겠지만, 이내 일말의 속임 동작도 없이 너무 정직하다 할 만큼 정면으로 뛰어나오는 영후의 슛 모션에서 더욱 확신을 가지는 것도 같았다. ‘고조, 왼쪽이네!’ 영후의 왼발이 공의 왼쪽부근의 땅에 깊숙이 박히자 리명국 골키퍼는 자신의 왼쪽으로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고, 엄청나게 백스윙을 하던 영후의 오른발이 드디어 공을 부숴 버릴 듯이 강타하자 리명국 골키퍼는 자신의 생각이 맞아 들었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몸을 왼쪽으로 날리려 했다. 하지만, 촤~악! 삐~익! 리명국 골키퍼가 채 땅에서 발을 떼기도 전, 아니 막기 위해 손을 뻗어 보기도 전에 이미 공은 골 망을 찢어버릴 듯 그물을 한참이나 찌르고 나서야 천천히 골문 밖으로 굴러 나오고 있었고, 가공할만한 스피드로 공을 차 넣은 남자는 별 기쁜 기색도 없이 벌써 뒤돌아 저만큼 가버리고 난 뒤였기에 리명국 골키퍼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 뭐이니? 지금… 지금 뭐이가 지나갔네?’ - “휘유… 녀석, 그때는 장난이었던 겐가.” 그야말로 골키퍼의 간담을 서늘케 할만한 파워와 스피드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영후의 모습을 보며 규식은 자신의 딸 혜미를 걸고 영후와 했었던 페널티킥 대결 때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페널티킥이라는 건 굳이 과학이란 걸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연히 킥커가 유리한 것이었고, 당연히 확률이 높을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골키퍼에겐 잔인하기만 한 순간이었다. 허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간이란 존재는 항상 불확실성을 껴안은 채 스스로 확률을 낮추기도 했기에 의외로 골키퍼의 선방도, 스스로의 실축도 많은 게 바로 축구에서의 페널티킥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규식은 그때 이영후에게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무엇이 남아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이영후를 보고나니 더 이상은 그런 걱정 자체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안함은 커녕, 경기장의 그 누구보다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축구를 하고 있을 때의 영후 녀석의 머리는 그야말로 얼음장같군.’ 하지만 철용은 규식과는 반대로, 영후의 페널티킥을 바라보며 뭔지 모를 뜨거움을 전해 받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근명의 다리를 그렇게 만든 수비수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어하는 영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었으니 영후는 결국 이렇게라도 빚을 갚고 있을 뿐이었고, 페널티킥을 성공했지만 어쨌든 근명을 위해서 더는 뭘 어찌 할 수 없다는 현실의 벽 덕분에 자괴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땐 내가 뭣도 모르고 사자의 콧털을 건드렸던 건가…’ 철용은 그 옛날 영후에게 깊은 태클을 해버렸던 영후의 데뷔 시합 때를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려 보았다. - 드디어 기자회견장에서 인터뷰가 시작되자, 선수 대동 없이 홀로 등장한 노감독은 승장 다운 모습과는 거리가 먼 굳은 얼굴로 앉은 채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우선 오늘 승리 거두신 것 축하 드립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을 1위로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전체적으로 대한민국 선수들의 몸이 무거워 보였는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제가 미처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도 잘못이 크다 하겠습니다.” “그래도 결과가 말해주듯이 3경기 연속 승리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모든 선수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해 줬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고생한 선수들에게 고맙단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전반에는 두 골을 내리 실점하면서 불안한 출발을 보이기도 했지만 후반전엔 선수들의 몸놀림이 완전히 달라졌는데요, 어떠세요?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뭐, 별 얘긴 안했고… 그냥… 내가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을 하는 노감독 덕분에 기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고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회견장은 잠시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히딩크 감독 이후로 4-3-3 포메이션이 고착화 되면서 한국은 원 톱에 대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오늘 후반 경기를 보면 4-4-2 로 포메이션을 변경하면서 투 톱으로의 변화를 꾀하셨습니다. 결국 변화를 주신 덕분에 오늘 경기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는데요, 그럼 전부터 이영후-하근명의 투 톱 기용에 대해 구상을 하셨던 건가요? 앞으로도 계속 이 두 선수를 투 톱으로 기용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에 대한 판단은… 다음 감독에게 맡기기로 합시다.” 너무나 덤덤하리 만치 다음 감독에 대한 발언을 하는 노감독 덕분에 일순간 회견장이 고요해졌고,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고생하던 기자들 중 한 명이 ‘설마…’하며 질문을 날렸다. “정말… 그만 두시는 겁니까?” 기자의 질문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노감독은 그러나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순간 그 어둡던 기자회견장은 엄청난 플래쉬 세례로 대낮이 되어버린 듯 했기에 노감독의 눈살은 조금더 찌푸려졌지만, 그보다 더 엄청난 질문 공세 덕분에 노감독은 경기를 지켜보던 것보다 더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 약 기운에 다시 곯아 떨어지는 근명을 지켜보고 나서야, 하연은 병실을 나왔는데 병실 문 앞에는 어느새 와 있었는지, 트레이닝 복장의 영후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서 있었다. 그대로 어딘가 누워 쉬어야 할 만큼 피곤해 보였지만, 근명에 대한 걱정 때문에 여기에 이렇게 달려와 있었던 것임을 하연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 “… 하연…아…” 호텔 방에서 그렇게 헤어졌었기 때문일까. 두 사람은 속으로는 너무나 반가웠음에도 꽤나 어색하게 마주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라고 아마도 두 사람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었고. “한참… 된 거야?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결국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지만, 영후는 마치 근명의 간병인인 것처럼 말을 하는 하연 덕분에 마음 한 구석이 퀭하긴 했지만 애써 담담한 척 하고 있었다. “근명이는… 괜찮은 거야?” “……” 하연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길 기대하며 물었던 영후였지만, 근명의 이야기를 묻자 벽에 가지런히 붙어있는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하연의 모습에 그만 영후의 가슴속에서도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럼…?” “검사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꽤 심각한 거 같아.” 털썩. 그제야 영후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하연과 몇 칸 떨어진 의자에 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 영후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하연은 말은 안 했지만 분명 영후는 근명에게 했던 마지막 패스를 후회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근명의 부상 이유가 되진 못한 다는 건 본인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아파하는 모습에 하연은 이렇게 여린 남자가 그라운드 위에만 서면 어찌 그리 변하는 건지 놀랄 따름이었다. “내가… 내가 조금만 더 체력이 남아있었어도…” ‘영후야…’ 설마 했었던 하연은, 그제야 영후가 미안해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즉, 영후는 자신의 체력이 소진되어버린 것을 인식하고 원래는 자신이 있었어야 할 자리에 어느새 자리잡고 있어주는 근명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후의 체력 문제는 영후의 탓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후야 말로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경기에 출전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영후를 역시나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하연이었기에, 하연은 조심스레 영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넌 어때… 괜찮은 거야?” “힘들지… 나라고 왜 안 힘들겠어. 근데, 아무리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그만둘 수 없으니까.” 나를 바라봐주는 너 때문에, 라고 영후는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때문에 하연도 영후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병실의 적막한 복도에 침묵만을 더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금 걱정돼. 이런 말 하면 안되겠지만, 만에 하나… 혹시라도 검사결과가 좋지 않게 나온다면… 근명이 잘 견뎌낼 수 있을까…” 하필이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연다는 게 고작 영후 앞에서 근명을 걱정하는 말이라니. 게다가 지금도 충분히 자책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하연은 이미 뱉어버린 말을 곱씹어보며 후회하고 있었지만,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영후는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술… 한 잔 안 할래?”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영후를 바라보는 하연은 천천히 그러나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하연이 보기엔 지금 영후의 머릿속에는 근명의 걱정으로 가득해 보였을 뿐이었다. - 결국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 덕분에 심기가 불편했던 조전무는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실은 채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핸드폰을 꺼내 한동안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다. “으음, 여ㅤㄱㅣㅆ군.” 이윽고 찾고자 하는 번호를 찾았는지 조전무는 꽤나 온화한 표정으로 통화버튼을 누른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꽤나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네…’ “그래 나다. 어디냐?” ‘그냥… 좀 밖에 나왔어요.’ “내 오늘 네 녀석 좀 볼까 하는데…” ‘…… 어디신데요?’ “음, 나도 밖인 데… 그래 거기 기억하니? 우리 지난번에 술 마셨던…” ‘… 네, 알고 있어요.’ “그래 그래, 잠시 후에 거기서 보자꾸나. 나도 곧 갈 테니까.” ‘네…’ 이윽고 전화통화를 마치자 조전무는 꽤나 밝아 보이는 표정으로 바뀌어있었다. 운전기사는 조전무를 룸미러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무님, 그럼 그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아, 그래 그러도록 해.” 언제나 조전무는 현우와의 만남을 생각하면 언제나 들떠있는 어린아이 같아 졌기에 운전기사는 좀 전까지만 해도 저기압이었던 조전무의 기분이 나아진 것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핸들을 돌렸다. - 지하철 승강장에선 혜미가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운 마음에 연신 윤지를 꼬드기고 있었지만 어쩐지 윤지는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올 것 같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근명의 부상이 어쩌면 자신의 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괴롭히지 않았더라면…’ 때문에 윤지와 근명간에 있었던 은밀한 일들을 알리 없던 혜미는 그저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윤지야 같이 가자~ 응? 내가 맛난 거 쏠게.” “미안, 나 지금도 조금 늦었어.” “치… 기집애. 어? 뭐야, 혀, 현우 너, 너도 가는 거야? 아깐 같이 놀자고 했잖아!” “그, 그게, 갑자기 누가 좀 보자고 해서…” “니네들 진짜! 점점 나만 왕따 시킬래?” 급기야 폭발하는 혜미를 달래주느라 현우는 진땀을 뺐지만, 윤지는 꽤나 초조한 얼굴이었기에 혜미를 달래주던 현우는 그러나 윤지에게 조금은 더 마음이 쓰이고 있었다. - 홀가분한 표정으로 기자 회견장을 빠져 나오는 노감독의 눈엔, 꽤나 긴 시간을 서 있는 채로 기다려줬을 황총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앉아라도 있지 그랬소?” “…… 괜찮으신 거에요?” “안 괜찮을 게 있겠소? 애초에 나 같은 사람이 어울리는 자리도 아니었고…” “그래도, 그간 고생 많이 하셨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총장이 그런 말을 건네자, 노감독은 그제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끝났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 하나 남았는가…’ 노감독은 고마움이 담긴 눈빛으로 총장을 바라보며, 앞으론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여자와 함께 남은 여생을 즐기며 보낼 거라고 다짐도 해보았다. 그러나 총장을 바라보던 노감독은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축구와 이별하려는 자신을 총장은 무척이나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노감독이었지만, 총장은 어느새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젠 어쩌실 생각이세요?” “글쎄… 우선은 당신도 주변 정리를 해야 할 테니, 그래 당신이 말해보구려. 내가 뭘 하며 당신을 기다려주면 되겠소?” 노감독의 입에서 ‘기다려준다’라는 말이 튀어 나오자 총장은 어쩐지 젊은 날의 그때로 돌아 간 듯 가슴이 콩닥거리고 있었지만, 우선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우선은 지켜봐 주세요.” “응? 무엇을 말이오?” “저희 학교 축구부를요. 이제 곧 있으면…” “허, 방금 감독직에서 물러난 내게 또다시 축구를 지켜보라고 부탁하는 거요?” 노감독은 내심 총장의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음에도 이번엔 어쩐지 예전의 총장이 그러했듯 투정을 살짝 부려보고 싶었기에 애써 퉁명스러운 척하며 입을 열었지만, 장난을 치기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총장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해 보였다. “그런 게 아니에요.” “응?” “이영후 감독을 지켜봐 달라는 말이에요. 물론 제가 이런 말씀 안 드려도 그러실 테지만요.” “……” 총장은 순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감독의 눈에 조금 당황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설마, 나보다 그 놈이 더 좋아진 게요?” “참나 진짜 당신이란 사람은, 어맛!” 순간 노감독은 총장을 가슴 깊숙이 안아주었고, 생각지도 못한 포옹을 당한 총장은 주변 사람들의 눈을 돌아보느라 정신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더욱 꽉 끌어안는 노감독의 품에서 겨우 빠져 나온 총장은 그야말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욧!” 꽥 소리를 지르려다 겨우 어금니를 깨문 채 조곤조곤 말을 하던 총장에게 노감독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을 했다. “고맙구려. 그런 것에 다 신경을 써주고…” 역시나 고맙다는 말을 노감독에게 들어버린 총장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기에 싫지 않은 눈빛으로 잠시 노감독을 흘겨보고는 이내 천천히 앞서 걷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노감독이 총장의 손을 잡으며 어깨를 나란히 했고, 총장의 손 또한 바로잡은 것에서 손가락 하나하나씩 깍지를 끼며 조금씩 노감독의 손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 “어머 현우 아니니? 여긴 어쩐 일로?” 주춤거리며 현우가 음침한 붉은 조명과 아가씨들이 가득한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안면이 있던 반라의 아가씨가 한달음에 현우의 팔짱을 끼며 달려들었고, 역시나 현우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 마담의 단호한 목소리 덕분에 현우는 겨우 자신의 팔에 비벼대고 있는 아가씨의 가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떨어지지 못하니!” 이윽고, 화장한 얼굴이 미워지도록 입을 삐죽거리며 아가씨가 룸 한 쪽으로 사라지자, 마담은 그제야 인자한 얼굴로 바뀌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서 와요. 전무님께 미리 전화 받았어요.” “네에…” “시간이 늦었는데, 뭐 간단한 요기라도 하겠어요?” “아, 아니에요. 전 아까…” 하지만 현우의 대답과는 달리 현우의 배는 아니라며 ‘꼬르륵’ 소리를 내며 마담에게 답해버렸고, 마담은 괜찮다는 웃음을, 현우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들어가 있어요. 내 애들 시켜서 금방 들여보낼게.” 마치 엄마 같은 태도로 VIP 룸으로 현우를 들여보낸 마담은 이내 문을 닫고 사라졌지만, 혼자 앉아있기에는 너무나 광활한 룸의 소파에 앉아있던 현우는 언제나 이런 곳에서만 자신을 보길 원하는 조전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내가 그 분을 이해하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어.’ 언제나 그랬듯 쉽게 체념하며 벌서는 모양으로 편안히 허리를 소파에 기대지도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현우는, 그러나 ‘똑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통에 엉거주춤 일어섰고, 열린 문으로는 마담이 얘기했듯 쟁반에 허기를 해결할만한 술안주를 담은 채 들어서는 아가씨가 있었다. “오래 기다리… !!” “!!!” 그 순간 현우는 윤지를, 윤지는 현우를 마주보며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두 사람은 한참을 고민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때문에 그 잠깐의 멈춤이 실로 몇 년은 되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현우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윤지가 뒷걸음질 치며 나가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윤지가 뒤를 돌아 나가려고 할 즈음, 다시 문이 열리며 조전무와 두 아가씨들이 룸으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오? 윤지! 마침 잘됐구나 그래 너도 이리 앉거라 오늘 우리 기분 한 번 내보자꾸나 하하하하~!” 조전무의 등장과 더불어 갑자기 엉켜 버린 두 사람의 관계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빠져버린 윤지였지만 예의 무표정하게 조전무의 손에 이끌려 현우의 옆자리로 앉혀져 버렸고, 곧바로 두 명의 여자가 조전무의 양 옆에 앉고 나서야 질펀한 술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꺄아~!” “아, 네에…” 팬이라던 사람들이 영후의 사인에 뛸 듯이 기뻐하며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영후는 지금 이 포장마차에서 벌써 몇 번 째 사인요청을 받고 있는 건지 셀 수 조차 없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연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예전처럼 포장마차를 찾았지만, 오늘은 앉기도 전부터 사진촬영이며 사인공세가 숨쉴 새 없이 밀려들고 있었기에 홀로 남겨진 하연은 그런 영후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벌써 두 병 째 비우고 있었다. “크아~! 이모~ 여기 소주 일병 추가요~” 탁! 하연은 이내 잔을 테이블에 부서져라 내려놓고 있었고, 팬들에게서 이제야 해방된 영후는 그제야 자리에 앉으며 미안함과 걱정이 그득한 표정으로 자신도 술잔을 조심스레 비운 후 아줌마가 가져다 준 소주병을 받아 하연의 잔에도 또 자신의 잔에도 소주를 채웠다. 그러자 하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술잔을 들어 또다시 단숨에 식도로 넘겨버렸고, 그런 하연의 모습을 영후는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미안. 괜히 이런 곳으로 왔다. 근데 혼자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니?” “괜찮아 괜찮아. 이정도 쯤은, 암 것도 아니야. 암 것도 아니라구. 이 정도는…” 그러나 하연은 자신의 말과 달리 이내 테이블에 고꾸라지듯 쓰러지고 말았고, 그런 하연을 말없이 바라보던 영후는 지갑을 꺼내 돈을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는 이내 하연을 들쳐 업고 포장마차를 나섰다. “임마, 박하연. 너 왜 이렇게 가벼워진 거냐.”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술에 곯아 떨어진 하연을 업은 채 집으로 향하며 영후는 그제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보고 있었다. “너에게… 그때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했다 하연아…” 왜 언제나 밝은 정신에는 이런 말을 하지 못하는 건지 영후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업혀있는 하연의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 바로 옆에 있었으니, 그 어떤 때보다도 가까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후는 자신의 등에 업혀있는 하연이 아직도 정신이 말짱했다는 것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연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 왼쪽 편에 앉아있는 여자의 젖가슴과 오른편에 앉아있는 여자의 사타구니를 안주 삼아 폭탄주를 몇 번이고 마시던 조전무는 윤지와 나란히 앉은 채 아무 말 없는 현우를 간간히 훔쳐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 놈이… 저 놈이 내 처의 자식이었으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도 아들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조전무였건만, 정작 엉뚱한 술집 여자의 배속에 생겨버린 ‘아들’ 덕분에 사실 조전무는 하루 하루가 늘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혼자만의 기쁨이자 고민거리인 현우 덕분에 조전무는 하루하루가 즐겁다가도 괴로워져 미칠지경이었다. 때문에 조전무는 어쩌면 더욱 독해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누구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을 정도의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현우를 지키기 위해 조전무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위로, 더 위로 올라가려 했었던 것이었다. 허나 아이러니 하게도 조전무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현우의 존재는 조전무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고, 언젠가는 현우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공개하려 했었지만, 어쩐지 점점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감정이 전혀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현우 때문에 조전무는 언제나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아들임에도 아들이라 부를 수 없었고, 현우 또한 아버지 였음에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실로 삼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조전무 앞에 펼쳐 치고 있었기에, 차라리 아버지에 대한 기대감을 없애주기 위해 조전무는 오늘도 이렇게 현우 앞에서 처참하게 망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쩍슬쩍 현우만을 바라보던 조전무의 슬픈 눈엔 현우의 옆에 앉아 이것저것 챙겨주고 있는 윤지도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인 것만 같았다. 이런 자리에서, 현우가 이렇게 오래 있어주었던 건. 설마 윤지 때문인가, 하고 조전무는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럴 리 없었다. 술집 여자라면, 자신의 어머니마저도 싫어했던 현우 아니던가. 물론 그것도 조전무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지만. 하지만, 현우는 윤지가 간간이 집어주는 과일도 받아 먹으며 마치 오늘 만큼은 자신의 눈앞에 오래오래 있어주겠노라 말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이 두 선남선녀가 너무나도 멋진 그림이 되어 주고 있었기에 조전무는 처음으로 윤지와 관계를 가졌던 지난 날을 후회해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들과 구멍동서가 될 순 없잖나…’ 한참을 괴로워하던 조전무는 이내 자신의 바지 속에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황급히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뉴스 못봤습니까? 노감독 말이오. 사퇴했단 말입니다!’ “그… 그럴리가요, 회장님. 뭔가… 뭔가 잘못된 걸 겁니다 제가 알아보고 다시 전화를…” ‘도대체 무슨 일처리를 이렇게 하는 겁니까! 우리가 잘랐으면 잘랐지, 먼저 내쳐지다니요? 쯧!’ 극도로 짜증이 나있는 정회장의 전화를 받아버린 조전무는 현우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하게 룸을 빠져나가 버렸고, 조전무가 사라져버리자 조전무의 양 옆을 장식하던 여자들은 팁도 없이 사라져버린 조전무에게 입을 삐죽 대려다가 현우의 존재를 깨닫고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현우는 윤지가 과일을 찍어 건네줬던 포크로 파인애플 한 조각을 찍고는 윤지에게로 건넸다. 계속 주기만 하던 윤지가 눈을 말똥거리며 의아해하자 현우는 자신의 배를 퉁퉁 치면서 입을 열었다. “나만 계속 먹었더니… 배 좀 봐.” “풉…” “큭큭큭…” 결국 웃음을 애써 참던 두 사람은 그 공허한 룸 안을 시원스런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 보았다. “근데, 전무님이랑 어떻게 아는 거니?” “아, 뭐… 아는 분의 아는 분이라고 해야 하나…?” “복잡하기도 하다. 하긴, 그런 게 너 답긴 하지만.” “나 답…다고?” “그래. 혜미랑 바로 사귀자는 말도 못하는 평소의 너랑 똑 같다고.” “아…” 그제야 현우는 혜미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또한 조전무도. ‘그 분도, 혜미처럼 축구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던 때가 있었을까…’ “참, 나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응? 뭐?” “너… 여자랑 자봤지? 그것도 많이?” “에에? 설마…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그때 내 몸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아, 그때…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너 참 근사했었는데…” 딱콩! “아얏!” 순간적으로 그때를 떠올리는 현우의 얼굴에 윤지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꿀밤을 날렸고 현우는 갑작스런 공격에 머리를 감싸쥐고 엄살을 떨고 있었다. “요게! 뭐니 너? 그럼 나 같은 건 풋내 나서 무시한 거야?” “아, 아냐 그런 거!” “그럼 뭐야? 뭔데!” “나 실은 아직… 여자랑 자본 적 없단 말야…” “뭐어?!” 윤지는 믿을 수 없는 현우의 대답에 놀라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했지만, 아무리 봐도 현우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기에 윤지는 괜한 짓을 해버렸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우야 말로 분명 여자 경험이 많을 거라 판단을 해버렸었기에, 윤지는 혜미도 어느 정도 남자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혜미에게 꽤나 무리한 짓을 해버렸던 것이었다. ‘으… 그것도 모르고 괜히 혜미만 괴롭혔잖아…’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에 윤지는 현우를 바라보다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지? 그럼 혜미나 현우 둘 다 처음이란 소린데, 그것도 별로 좋은 건 아니잖아? 그럼… 어쩔까나… 이번엔 현우를 가르쳐 볼까…?’ 윤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현우는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윤지 덕분에 잔뜩 긴장한 채 이 룸에 너무 오래있었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28부. 밤을 잊은 사람들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깊은 잠에 빠져든 영후의 숨소리가 일정하게 들리자, 주인대신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속옷 차림의 하연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보았다. 어두운 방이었음에도 창으로 스며드는 밝은 달빛 덕분에 하연은 침대 옆 바닥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영후의 얼굴 정도는 쉽게 바라볼 수 있었는데, 볼 수 있는 건 비단 영후의 얼굴만은 아니었다. 팬티 하나만을 걸친 채 잠들어있는 영후가 그러나 평소에는 알몸으로 잔다는 사실을 알리 없던 하연이었지만, 조각 같은 남자의 몸이 눈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지자 조금 무안해 하면서도 그렇다고 시선을 돌릴 생각은 없었던지, 한동안 영후의 몸을 큰 눈을 깜빡 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순간 영후가 잠결에 돌아누우려 몸을 움직이자, 하연은 번개같이 침대에 누우며 짐짓 약하게 코까지 골아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영후의 자연스런 숨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다시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이 달빛이 아니더라도 영후의 얼굴은 언제 어디서나 단번에 알아 볼 수 있는 하연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언제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본 적 있나 싶었기에, 지금은 어찌보면 꽤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랬듯 축구 선수라 하기엔 너무나 근사한 영후였기에, 하연은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최대한 영후의 얼굴에 근접하고 나서야 눈, 코, 입 하나하나를 정밀하리만치 자세하게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다시 영후가 하연을 등지며 돌아눕자 깜짝 놀라며 숨으려 했지만, 역시나 잠결에 돌아누운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한숨을 내 쉬어 보던 하연은, 이윽고 저 드넓은 영후의 등을 바라보며, 몇 시간 전 자신을 업은 채 밤길을 걷고 있던 영후의 등이 얼마나 넓고 듬직했던지 떠올려 보았다. 또한 영후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지도… - “근데 임마, 너 맨날 이렇게 몸도 못 가누면서 자꾸 술 마시고 그러면 진짜 큰일 나.” 방금 북한 전을 마친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뿐하리만치 하연을 업고 있던 영후는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 듯 거친 숨소리 하나 내지 않으며 어둠이 내려앉은 언덕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어찌나 편안하던지 하연은 자칫 살짝 졸 뻔 하기도 했었다. 허나 힘없이 떨어뜨린 자신의 얼굴이 공교롭게도 영후의 뺨에 맞닿아 있었기에 하연의 볼은 조금씩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는 건, 영후는 절대 알 수 없었으리라. “가슴 커진 거 하며, 이 엉덩이 봐라. 너도 이제 다 큰 처년데, 이렇게 아무데서나 쓰러지고 그러면… 내가 항상 옆에 있어 줄 수도 없잖냐.” 영후는 하연을 한 번 크게 추켜 올리며 자신의 등에 부드럽게 눌려지는 가슴의 느낌과 양손에 감겨지는 부드러운 엉덩이의 감촉을 느끼며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하연은 영후의 ‘항상 옆에 있어 줄 수는 없다.’는 말 덕분에 괜히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아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 옆에는 항상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했었는데…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많이 달라져 버린 것 같지…? 나도, 또 너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영후야…’ 왜 영후가 달라졌다고 말하는 건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던 하연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영후의 등에서 뛰어내려 아니라고,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순간 병원에 있는 근명이 떠오르자 하연은 자신의 마음이 도대체 누구를 갈망하고 있는 것인지 점점 알 수 없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후의 진심 어린 마음을 알아버린 지금, 하연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상할 정도로 근명에게 미안한 마음이 그득해지는 바람에 그저 묵묵히 영후의 목덜미에 얼굴을 더욱 깊숙이 파묻을 뿐이었다. ‘하필 이런 때 내가 영후 등에 업혀서 영후 집으로 가고 있는 걸 알면, 근명인 뭐라 할까…?’ 어느덧 영후가 살고 있는 원룸의 건물이 눈에 들어올 무렵, 하연은 어쩌면 오늘이야 말로 영후와 깊은 관계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되고 나면, 영후와 근명으로 복잡해졌던 머릿속의 것들이 어쩌면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때문에 계단을 오르며 영후의 집에 가까워 질수록 하연의 가슴은 콩닥콩닥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아…”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영후의 방이 있는 원룸 건물의 2층에 당도해있던 남희는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오는 인기척 덕분에 센서등에 불이 들어오자 계단을 막 올라오고 있는 영후의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기다렸던 영후는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기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남희는 황급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삼층 계단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계단의 중간 즈음에 선 채로 남희는 조심스럽게 영후의 등에 업혀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숨죽인 채 살펴보기 시작했다. ‘누구…? 설마 박기자님…?’ 확실하진 않지만, 분명 눈에 익은 모습으로 유추해볼 때 영후의 등에 업혀있는 여자는 분명 박하연 기자였다. 그제야 남희는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저렇게 취한 채 남자 등에 업힌 여자와 취한 여자를 업고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면 차마 못 볼 걸 본 것 마냥 얼굴을 돌리며 마음 속으로나마 흉을 엄청 보았을 텐데, 지금의 남희는 영후의 등에 업혀 있는 하연이, 영후의 집으로 들어가버리는 하연이 너무나 부럽고 또 부러웠다. 자신이 얻어보려 그렇게 노력했었던 영후의 마음은 결국 박하연이라는 여자에게로 온통 쏠려 있었다는 걸,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삑삑삑삑삑. 이윽고 도어락의 버튼 키를 누른 후 문이 열리자 영후와 또 영후의 등에 업혀있는 여자가 문 안쪽으로 사라졌지만, 그 소리가 들리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삼층의 영후의 방과 같은 자리에 있던 집의 문이 쏜살같이 열렸고, 그곳엔 커다란 접시에 뭔가를 잔뜩 담은 채 들고 나오는 수림이 있었다. “어? 권 코치님…?” “쉬잇…” 수림의 목소리를 혹시나 영후가 들을 까, 남희는 재빨리 수림에게 다가서며 자신의 입에 손가락 하나를 대어 보였다.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권코치의 지시대로 잔뜩 소리를 죽인 수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남희는 수림을 떠밀며 다시 집으로 들어가도록 했고, 자신도 수림의 집에 들어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어 보았다. (무… 무슨 일 있으세요?) 아직도 남희 때문에 속삭이듯 말을 하는 수림 덕분에 남희는 조금 웃어 볼 수도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미안해요, 밤늦게 찾아와서.” (그냥 말해도 괜찮아요?) 수림은 아직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남희는 그런 수림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제야 수림도 ‘후아~’하고 숨을 몰아 쉬어 보았다. “근데 진짜 어쩐 일이세요? 오실 거면 미리 전화라도 주시지 않고선.” “그게… 그러니까…” “참, 감독님 오신 거 같던데 보셨어요? 안 그래도 감독님 드리려고 이것저것 만들던 중이었거든요. 물론 성공한 거 보다 실패한 게 더 많긴 하지만요.” 수림의 이야기 덕분에 남희는 그제야 수림이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요리 한 접시와 아수라장이 되어있는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안됐지만, 오늘은 감독님을 좀 쉬시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잠깐 뵈러 온 거긴 한데…” “어머 그래요? 많이 안 좋으신 거에요? 어쩌죠? 약이라도 사다 드려야 할까요?” 남희의 어설픈 거짓말에도 순식간에 넘어가버린 수림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모습에 남희는 왜 감독님이 수림이란 여자를 잠깐이나마 좋아했었던 것인지 조금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엽고, 생글거리는 얼굴에 단번에 남자들을 녹여버리는 애교. 그리고 운동으로 다져진 멋진 몸매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자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런 수림을 가만히 보고 있는 남희조차 바보같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그냥… 좀 푹 주무시면 될 거에요.” “아아,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하지만 수림은 다행이라는 말과는 달리 손에 들고 있던 음식 접시를 바라보며 꽤나 아쉬워 하고 있었다. “근데, 뭘 그렇게 만들었어요?” “아, 이거요? 수림표 특제 깐풍기에요! 감독님께서 좋아하시거든요.” 수림은 지난 날 억지로 영후가 먹던 모습을 마치 너무나 맛있어서 아껴 먹던 것으로 ‘잘못’ 회상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남희는 그런 수림의 추억마저도 괜히 부러워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분명 수림도 남희도 하연에게 완벽하게 밀려버린 날이었기에 남희는 그런 사정을 혼자만 삼키며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괜찮다면, 그 깐풍기 안주 삼아 우리 둘이 한잔 할까요?” “진짜요? 그래 주시면 저야 좋죠! 가만, 술을 어디다 뒀더라…” 남희가 제안을 하자마자 수림은 단박에 오케이 사인을 내고서는 술을 찾으러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고, 영후의 방과 구조가 똑 같은 여자의 방에 들어서는 남희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바로 아래엔 영후와 하연이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방바닥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는 수림의 동태를 살피며 귀를 바닥에 대어 보았다. 하지만 여간 해서 아래층의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으니, 수림이 신나 하며 소주병을 내오는 모습을 보며 남희는 얼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른 자세로 앉았다. 하지만 급기야 이런 행동까지 스스럼없이 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일 또한 잊지 않는 남희였다. ‘권남희… 너 진짜 미친 거 아냐?’ - “진짜?! 알았어! 금방 갈게! 먼저 시작하면 안돼!!! 알았지?” 뭔 전화길래 다급하리만치 옷을 꿰어 입으면서 전화를 받는 건지 규식은 의아해할 수 밖에 없었지만, 혜미는 슈퍼마켓의 허름한 문을 부서 버릴 기세로 우당탕 뛰어나가며 규식에게 허락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통고하며 사라져버렸다. “아빠! 나 윤지네서 놀다 올게~!!!”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얌마! 너무 늦지 마!!!” 백미터 달리기 경주라도 하는 듯 벌써 저만치 사라져버린 혜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규식은 허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원 자식, 뭐가 그리 급해 가지고…” - 띵동! 띵동띵동띵동!!! “왔나 보다. 기집애 빨리도 왔네.” 윤지는 몇 번이고 벨을 눌러대고 있는 혜미의 모습을 인터폰으로 확인하고는 문으로 걸어 나갔다. “하아, 하아. 나… 왔어… 하아… 윤지야…” “얘, 내가 오랄 때는 세월아 네월아 하더니만, 기집애…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니니?” 놀리듯 흘겨보는 윤지 덕분에 혜미는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버렸지만, 얼굴 색은 잠시 후 더욱 빨개지고 있었다. “혜미야~” “어, 어어. 안녕 현우야…” 경기장에서 헤어진 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또다시 반가운 얼굴인양 인사하며 서로 겸연쩍어 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윤지는 두 사람이 눈치 못 챌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영후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하연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자신의 몰골을 살폈다. 가방에서 파우더를 꺼내 그 안의 거울로 얼굴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또 엉켜있는 머리를 손가락으로나마 억지로 빗어 내려 보았다. 분명, 영후도 남자라면 자신의 집에 까지 업고 데려온 여자를 십 중 팔구 가만 놔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물론 근명은 자신을 건드리려다 말았지만, 그때는 자신이 정말로 만취상태였을 때였고, 그 때와 다른 오늘은 만일 영후가 근명과 달리 좀더 적극적으로 달려든다면, 하연은 근명과 영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마음을 자신의 몸 만큼은 어렵지 않게 결정해주리라 생각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영후의 착한 성격과 자신의 옷차림이었다. ‘아이 참! 하필 이런 날 청바지를 입고 올게 뭐람. 그렇다고 내 손으로 벗고 있을 수도 없고… 아니지? 난 지금 술에 취한 거잖아. 술에 취하면 막 옷도 벗도 그러는 건 절대 이상한 게 아니지.’ 참으로 취기가 사람을 대범하게 만드는 듯, 하연은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 시키며 단번에 청바지를 벗어버렸다. 그러자 어두웠던 방안이 그녀의 늘씬한 다리 덕분에 환히 빛나며 잠깐 밝아지는 듯 했지만 이내 이불 속으로 사라져버린 뒤엔 다시금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만… 이러면 내가 옷을 벗었는지 어쨌는지 저 바보가 알게 뭐야? 그럼 어쩌지? 블라우스도 벗어버릴까? 에라 모르겠다!’ 점점 대범해지고 있던 하연은 결국 하얀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에이씨! 뭔 단추가 이렇게도 많아!!!’ 가뜩이나 초긴장상태에서 단추를 풀려다 보니, 손이 떨려 제대로 풀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느새 위쪽의 몇 개를 풀고 나니 살색의 브래지어에 갇혀있던 하연의 가슴 윤곽은 하늘에 걸려있는 달 보다 더욱 둥글고 탐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어느덧 욕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줄어들자 하연은 결국 블라우스 단추 푸는 것을 포기하고는 머리위로 한번에 벗어 던져버리곤 잽싸게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지만, ‘아차!’하며 이불을 단번에 ‘킥’하며 걷어차 버렸고, 동시에 욕실에서 영후가 나오는 소리가 하연의 귀에 들려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하연은 자신의 커다란 심장소리 때문에 영후가 자신이 깨어있다는 걸 눈치 챌까 봐 식은땀이 다 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안자고 있었다며 일어나 버리면, 영후나 자신이나 둘 다 꽤나 무안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릴 테니까. 게다가 오늘 밤 치러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거사’ 또한 물거품이 되어버릴게 분명하고.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봐도 하연의 바램과는 달리 그 어떤 일도 쉽사리 일어나고 있지 않았기에, 하연은 ‘에이씨! 그냥 내가 먼저 확 덮칠까?’ 하는 생각마저 해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영후의 음성이 들려오자 하연은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급에 버금가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연기에 더욱 열중해보고 있었다. “녀석, 잠버릇 하고는…” 분명 영후는 하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말이 없는 것을 보면 분명 영후는 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보고 있는 것임을 하연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서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다가온다면 영후는 여과 없이 드러나 있는 자신의 반라를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지켜볼 수 있을 것이었다. 이윽고 영후의 조심스런 손길이 하연의 다리를 스치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지만 절대로 자는 척하며 눈을 뜨지 않았고, 계속 숨죽인 채 영후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더듬어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영후의 손은 하연의 발치 아래로 떨어져 있던 이불을 집어 들어 속옷 차림인 하연의 몸 위에 살포시 덮어 주었다. “너 예쁜 거 아는데, 그래도 근명이하고 페어플레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 답답하리만치 몸 전부를 덮어버린 이불 덕분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영후의 속삭임 때문인지 하연은 잠시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윽고 하연의 이마에 ‘쪽’소리를 내며 영후의 뽀뽀가 이어지자, 하연은 또다시 움찔 했고 다음에 이어지는 영후의 속삭임 덕분에 하마터면 눈을 번쩍 뜰 뻔도 했다. “잘자라… 내사랑…” - 꽤나 늦은 시각. 윤지의 집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있던 혜미와 현우는 적잖게 당황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윤지의 손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자, 우선 한 잔씩 마셔. 그래야 분위기가 살지.” 윤지는 장식장에서 꺼내온 양주를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큰 잔에 따라놓은 맥주잔에 빠뜨리고선 혜미와 현우에게 각각 건네주며 말했고, 윤지도 역시 미리 만들어놓은 자신의 잔을 들었다. “꽃 같은 청춘 남녀들을 위하여~!” ‘쨍!’ 소리가 나도록 잔을 부딪힌 혜미와 현우는 그러나 각기 다른 모양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술잔을 비웠지만, 윤지는 그 둘을 지켜보며 자신의 잔에 있던 술을 교묘하게 비워버렸다. “으… 써!” “아아~ 목에서 불 난다!” 역시나 맹물 같은 두 남녀를 바라보며 윤지는 곧바로 폭탄주를 또다시 제조해 마시게 했고, 결국 네 잔이나 마시고 나서야 현우나 혜미는 완전히 무장해제 되었다. “자, 어때? 기분 좋지?” “좋긴! 딸꾹! 어뜨…게 이런 걸 어른들은 매일같이 마신다는 거야? 딸꾹! 현우 넌 괜찮아?” 벌써 꼬여버린 혀로 툴툴거리면서 혜미가 현우에게 물었지만, 그런 혜미를 바라보며 어느새 어색함이 없어져 버린 모습에 만족하는 듯 윤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윤지야, 아무래도 이렇게 계속 마시다간 나도 그렇고 혜미도…” “어쭈? 현우 너 벌써 혜미만 챙기고 그러기야? 흠, 좋아 어쨌든 그냥 무턱대고 마시는 건 이쯤하고, 그래 우리 게임 하면서 마실래?” “게임? 무슨… 딸꾹! … 게임?” “서…설마 윤지 너…?” 아무것도 모르는 혜미와는 달리 현우는 윤지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그러지 말라는 얼굴로 몇 번이고 고개를 저어보고 있었지만, 이미 악마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윤지는 현우의 간곡한 얼굴을 가볍게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왕 게임.” “왕… 게임? 그게 뭔데? 궁금해! 딸꾹! 궁금해! 하자하자! 빨리빨리!” 도대체 대학생이 그런 것조차 모르며 어이없게도 빨리 하자고 보채는 혜미의 얼굴과 윤지의 음흉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현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덫’에 빠져버린 걸 눈치 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자, 기다려봐…” 윤지는 이윽고 거실 장식장 서랍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더니, 메모지 세 장을 찢어내어 각각 ‘1, 2, 3’ 을 적어 넣었다. 그리곤 종이를 접고는 몇 번이고 섞더니 주먹을 쥐듯 한 손에 세 장 모두를 쥐고는 혜미와 현우 앞에 들이밀었다. “뭐… 뭐야? 딸꾹!” “백문이 불여일견, 해보면 알 거야. 그니까 하나씩 뽑아. 혜미도 하나 뽑고, 현우 너도 하나 뽑고.” 윤지의 말에 따라 혜미는 한 장을 뽑았지만, 현우는 어쩐지 뭔가 속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윤지의 손놀림을 현우는 결코 눈치 챌 리 없었기에 결국 남은 두 장 중 한 장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혜미는 몇 번?” “응? 응? 나? 난 2번인데?” “흐응, 그럼 현우는 몇 번이니?” “나… 나는…” 현우는 절대 1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접혀있는 종이를 펼쳐 보였지만, 역시나 종이엔 3번이 적혀 있었다. ‘으윽, 큰일이다.’ 잔뜩 일그러지고 있는 현우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윤지는 호기로운 표정으로 1번이 적힌 종이를 펴 보였다. 그러자 이젠 끝이라고 생각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현우와는 반대로 완전 신이 난 혜미는 윤지에게 궁금증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 건데? 딸꾹!” “응, ‘왕게임’이란 건 1번을 뽑는 사람이 왕이 돼서, 나머지 숫자들을 뽑은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거야. 물론, 거절하고 싶으면 대신 술 한잔을 마시면 되고. 간단하지?” “아하~! 그런 거구나. 오케이! 알았어 알았어. 재밌겠다아~ 자 빨리 하자.” 너무나 친절한 윤지의 설명을 듣고서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저렇게 해맑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혜미 덕분에 현우는 그야말로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자, 그럼 우선 가볍게 출발할까? 2번 3번 술 한잔씩 원샷!” 드디어 윤지의 첫 명령이 떨어졌지만 의외로 적당한 벌칙을 내리자, 혜미는 거침없이 스트레이트 잔에 담긴 양주를 단숨에 들이켰고, 현우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얼마 후 엄청난 벌칙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건 두 선남선녀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 “권코치님도 깐풍기 좋아하시나 봐요. 저기 많이 있는데 더 가지고 올까요?” “아, 아닙니다. 꽤 많이 먹었는걸요.” 수림의 권유에 남희는 두 손을 들어 만류할 만큼, 인사치레로 하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림이 만들어놓은 깐풍기는 솔직히 너무나 기름졌고, 짰고, 또 너무 달았는데, 고기는 또 너무나 바싹 튀긴 바람에 제대로 씹지도 못할 정도였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맛없는 음식의 결정판을 코앞에 둔 채 어쩔 수 없이 계속 깡소주만 들이키던 남희였지만, 빈속에 그도 못할 짓이었기에 결국 술을 안주 삼아, 억지로 깐풍기를 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의 바닥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수림은 그런 남희의 마음을 손톱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과잉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괜찮아요. 사양하지 말고 드세요.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가지고 빼고 그러세요 호호!” 게다가 수림은 술도 들어갔겠다, 자신이 만든 음식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도 있겠다, 완전히 기분이 최고조인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처음보다 더 많은 깐풍기를 접시에 담아 내왔고, 그 접시를 보며 남희는 또다시 술잔을 비울 수 밖에 없었다. “우와, 정말 술도 잘 드시네요. 완전 여장부 같으세요.” “여장…부요? 훗!” 수림은 별 의미 없이 꺼낸 말이었겠으나, 그 말을 듣고 난 남희는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여장부란 말은 어찌 보면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 남자 같은 여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기사 저렇게 애교 넘치는 여자의 눈으로 보기엔, 남희는 무뚝뚝하기가 보통 남자들 이상이었겠지만. 때문에 자신에게는 없는 수림의 여성스러움을 남희는 배울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코치님.” “네?” “어떻게 하면, 오코치님처럼 애교가 많아질 수 있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통 여자들과는 달리 차갑고, 무뚝뚝하고, 사교성 따윈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더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도 오코치님처럼 여자다워질 수 있을까 하고요.” 정말 진지하리 만치 속내를 털어놓는 남희의 비장한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수림은 갑자기 큰 소리로 한참을 웃기 시작했다. “오호호호호......” 얼마나 수림이 웃었을까. 더 이상 배가 아파 제대로 웃지도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수림은 겨우 진정을 하며 술 한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캬~! 오늘 술 맛 정말 최고네요. 안 그래요 권코치님?” “……” 갑자기 웃지를 않나, 이상한 동문서답을 하질 않나, 남희는 갑자기 이상하게 구는 수림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수림은 조금은 서글픈 눈이 되어 남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다 필요 없드라구요… 어떤 남자한테 만큼은…” “!” “그거 알아요?” “네? 무슨…? 어맛!!” 다짜고짜 뭘 아느냐고 묻는 수림에게 재차 묻던 남희는 갑자기 다가와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는 수림의 손 때문에 순간 까무러치듯 놀라 펄쩍 뛰듯 뒤로 물러나 버렸다. 하지만 그런 남희의 반응이 재밌었다는 듯, 수림은 어느새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아직도 남희의 가슴 감촉이 남아있는 자신의 손을 연신 오므렸다 펴보고 있었다. “수, 수림씨!” “헤헤, 미안요. 근데 있죠, 애교 같은 건 권코치님이 가지고 있는 가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남자들은 있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애교보다 권코치님 같은 왕가슴을 더 좋아한다구요.” “수림씨… 그런…” “왜요, 제 말 못 믿으시겠어요? 음… 그럼 내꺼 한 번 보실래요?” “아, 아뇨 수림씨 그러지…!!” 남희가 만류하기도 전에 수림은 훨훨 티셔츠를 벗어버렸고, 브래지어도 안하고 있었던 듯한 수림의 가슴은 밝은 조명아래 완벽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헤헤, 어때요? 권코치님에 비하면 애들 가슴 같죠? 그쵸?” 수림은 장난치듯 자신의 가슴을 애써 모아보며 남희에게 묻고 있었지만, 남희는 남희대로 수림의 몸이 가지는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수림 자신만 모르고 있었지, 수림의 몸은 운동으로 단련된 멋진 몸이었다. 다만 운동을 지속하게 되어 체지방이 감소된 덕에 꽤나 큼지막하고 통통했을 그녀의 가슴크기가 조금은 줄어들었을 뿐, 따지고 보면 크기만 큰 자신의 가슴보다 백배, 천배는 아름다운 가슴이었다. 게다가 눈으로도 확인 가능한 가슴의 탄력이란… “어머!” 이번엔 남희가 뻗은 손에 수림의 가슴이 쥐어지고 있었기에, 반대로 수림이 놀라고 있었다. “정말… 멋지네요. 이 탄력하며, 부드럽고… 또… 어머!” “권코치님껀 또 얼마나 부드럽다고요.” 수림은 남희에 뒤질세라 곧바로 남희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남희의 젖가슴을 쥐었기에 남희는 또다시 놀라기는 했지만, 처음처럼 화들짝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 여자가 서로의 가슴을 손에 쥔 채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참 황당해 보여야 했음에도, 너무나 예쁜 여자 둘이 그러하고 있으니 그것대로 참 예쁜 광경이 되고 있었다. “근데, 감독님은 또 막상 섹스… 아 죄송해요, 이런 말씀 드리면 안되겠죠?” 이윽고 손을 거둬드린 수림은 술 한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 남희의 심기를 살폈다. “아닙니다. 계속, 말씀해주세요.” “헤헤, 역시 권코치님이시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잠깐이나마 감독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을 때 말이죠, 그래도 제가 엉덩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섹스 할 때 마다 제 몸 그 어디라도 똑같이 사랑해 주셨어요. 제 엉덩이하고 또옥~ 같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보통 남자들은 넣기 전에 겨우 두 군데, 많아야 세 군데 대충 만져주다 말거든요. 아, 제가 너무 나가버렸나요?” “……” 남희는 차마 자신도 감독님과 잤노라고 말할 수 없어서 답답할 뿐이었지, 계속되는 수림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남희 자신도 모르는 남희의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져주던 영후의 손길 덕분에, 생각지도 못하게 영후의 ‘섹스파트너’라도 되기를 갈급하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확실히 감독님은 축구도 잘 하시지만, 섹스에도 도가 튼 사람 같았어요. 애무도 정말 다정하시지만, 감독님 그게, 아 맞다. 감독님 건 또 얼마나 크고 두툼한 줄 아세요? 그건 마치… 마치… 맞다! 고구마! 그 왜 있죠? 마트에서 파는 커다란 밤고구마? 색깔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고 딱 그거라니까요? 여튼, 그런 게 제 몸 속으로 들어오면 그때는 뭐랄까… 뜨끈한 열기 같은 게 이 뱃속 뿐만 아니라 머리에까지 꽉 차는 기분인 게, 이러다 내가 정말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니까요?” 맞아요, 맞아! 라고 하마터면 맞장구를 칠 뻔도 했던 남희는 겨우 술잔을 들어 입을 막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아있었지만, 점점 표현의 농도가 짙어지는 수림의 이야기 덕분에 보지 안에선 둑이 터진 듯 애액이 쉴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달궈진 몸을 식혀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림의 이야기 만큼은 끝까지 계속 듣고 싶었다. 수림이 어찌나 이야기를 구성지게 하는 지, 마치 지금 영후와 관계를 갖고 있는 기분마저 들고 있었고, 더불어 그런 섹스를 지금쯤 영후는 바로 아랫층에서 하고 있을 거란 생각마저 들자, 남희는 팬티를 넘어 검은색 플레어 스커트까지 젖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헙!” 현우는 자칫하면 숨이 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생전 처음으로 해보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거의 대부분 1번의 주인은 윤지가 되어버린 탓에 혜미와 현우는 연거푸 술을 마셨는데, 그 이후로 윤지의 명령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현우와 혜미는 명령 이행대신 술을 마셨지만, 언제부터인가 오기가 생겨 그 둘은 윤지의 명령을 하나하나 받아들이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엔 그 명령 덕분에 혜미가 아무렇지도 않게 바지를 벗어버리는 통에, 늘씬한 혜미의 다리와 더불어 깜찍한 팬티까지 서비스로 보게 된 현우는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야, 나 현우 뭐해? 넌 안 벗어? 하나 벗으라니깐?” “어? 어어…” 현우는 혜미처럼 바지를 벗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티셔츠를 벗으면 상반신은 고스란히 알몸이 될 것이었기에, 차라리 바지를 벗을까 고민을 해 보았다. 그렇게 되면 그나마 팬티라도 남게 될 테니 그게 더 효율적(?)일 거란 생각을 해 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팬티가 아니었다. 팬티를 뚫어버릴 듯이 발기해 있는 자신의 ‘물건’이었지. ‘으으… 어쩔 수 없다.’ 결국 현우는 알몸을 보이더라도 티셔츠를 벗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생각 외로 제법 남자다운 몸이 드러나는 통에, 혜미는 부끄러움도 잊어버린 채 현우의 탄탄한 가슴과 어깨를 안보는 척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런 혜미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윤지도 있었고. “흠흠, 빨리 시작하자!” 어째 혜미보다 훨씬 더 부끄러워진 듯한 현우가 게임의 재개를 종용했고, 윤지가 다시금 숫자가 적혀진 종이를 섞으려 하자 현우가 윤지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어? 왜?” “이번엔 내가 섞을게. 그래도 되지?” “어? 어어. 그래 그럼.” 윤지는 갑작스런 현우의 반격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별 이의 없이 현우에게 종이를 넘겨주었고 현우는 꽤나 신중하게 종이를 섞더니 윤지와 혜미의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역시나 혜미는 별 고민 없이 한 장을 바로 뽑아 들었지만, 윤지는 현우의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한 장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역시나 이어지는 현우의 미소를 바라보며 윤지는 그제야 이번엔 당했다, 는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2번, 3번 옷 하나씩 벗기!” 역시나 현우는 혼자만 당할 수는 없다는 듯, 윤지에게도 똑 같은 명령을 내렸고 결국 올게 왔다는 표정의 혜미는 티셔츠 끝자락을 부여잡은 채, 갈등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는 윤지 덕분에 이제 게임을 끝내려나 보다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쉴 뻔 했는데, 결코 그런 게 아니었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선 윤지는 입고 있던 미니 청치마 속으로 양 손을 집어 넣더니, 천천히 그러나 요염하게 무언가를 끌어내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혜미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윤지의 팬티와 현우의 얼굴을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툭. 드디어 윤지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분홍빛 팬티가 바닥에 떨어지자, 현우는 ‘꿀꺽’ 하고 침을 삼켰지만 그 소리가 거실을 울릴 만큼 컸기에 혜미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더욱 조바심이 나고 있었다. “자, 됐지?” 아무렇지도 않게 팬티를 먼저 벗어버리고는 윤지는 전혀 조심할 생각 따윈 없다는 듯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고, 덕분에 현우의 바지 앞섬은 마구마구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만, 역시나 더욱더 부풀어 오른 현우의 다리 사이를 눈치 챈 혜미는 다급해진 나머지 자신의 티셔츠를 훌렁 벗어버렸다. “자! 나도 됐지?” 순간적으로 속옷차림이 되어버린 혜미의 눈부신 나신까지 더해지자 현우는 더욱더 커져버리는 자신의 물건과 더불어 미약하나마 현기증까지 나는 것만 같았다. “아, 저기 나 화장실 좀…” “어딜 가~!” 화장실을 핑계로 엉거주춤 일어서는 현우를 잡아 앉힌 건 그러나 윤지가 아니라 혜미였다. “빨리 다음 판 해야지!” ‘으… 혜미야 너 지금 이용당하는 거야… 정신차려 제발…’ 차마 대놓고 말을 할 수는 없는 현우의 마음을 알리 없던 혜미는 승부욕이 타오르는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며 바닥에 놓인 종이를 주섬주섬 모아 스스로 섞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윤지와 현우가 뽑아 들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1번의 주인은 윤지였다. 자신이 왕이 된 것을 확인한 윤지는 점점 당혹스러워 하는 현우의 시선을 무시한 채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3번, 2번에게 술 먹여줘.” “휴우…” 꽤나 단순한 명령인지라 2번을 뽑은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입. 으. 로.” 순간 현우는 경악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머리 꼭대기까지 취해버린 혜미는 한술 더 떠서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입에 그득하게 머금었고, 점점 현우의 얼굴로 다가왔다. 결국 피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현우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뒤이어 벌어진 광경은 현우의 예상을 180도 빗나가고 있었다. “우~웨엑!!!” 드디어 극에 달한 취기 덕분에 혜미는 현우의 바지 앞섬에 그대로 오바이트를 하고 말았고, 그 내용물을 구분할 수 없는 뜨끈하고도 걸죽한 것들은 고스란히 현우의 우뚝 서 있는 ‘물건’을 뒤덮고 있었다. - 침대에 누운 채 고개만 내놓고는 침대 밑으로, 달빛에 비춰지는 너무나 평화로운 영후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니, 하연은 점점 영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손에 닿을 거리에 있는데… 왜 나는 너에게 아무런 표현도 할 수 없는 거니…’ 하지만 하연은 영후를 붙들고자 했었던 3년 전 자신의 못된 마음을 떠올리며, 영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뻗어보았던 손을 다시금 불러들일 수 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면, 논리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마련, 아직까지도 하연은 영후의 부상과 그로 인해 좌절된 해외 이적에 대한 책임이 영후가 떠나지 말기를 바랬던 자기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영후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만일, 너를 기쁘게 보내주려 마음 먹었었다면, 너는 분명 지금보다도 더 멋진 곳에서 네가 좋아하는 축구를 하고 있었겠지…?’ 차라리 그때 웃으며 영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하연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편히 누워있는 영후의 팔을 한쪽으로 펴고는 베고 누워 더 가까워진 영후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영후가 들어주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속삭여 보았다. “나도 사랑해. 영후야…” 하연의 속삭임을 들었을까. 영후는 이내 기분 좋은 얼굴로 바뀌고 있었고, 푹신한 침대 위에서 내려와 딱딱한 방바닥에 누운 채, 영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곤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그렇게 올 것 같지 않던 잠이 쏟아지는 통에 하연은 어느새 스르륵 눈이 감기고 말았는데, 속옷 차림으로 나란히 누운 연인은 어느새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 욕실에서 씻고 나온 현우는 대충 윤지의 여성용 트레이닝 복 하의를 빌려 입었지만, 당연히 윤지의 옷이 현우에게 맞을 턱이 없었기에 그야말로 사타구니께가 꽉 조이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거실로 가면서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통에 조심스럽게 손으로 앞을 가려봤는데, 순간 방에서 윤지가 나오며 그런 현우를 보더니 ‘푸핫!’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제법 예쁘게 맞는다?” “으… 그러게 왜 그런 장난을 쳐가지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드니?” “호오, 좀 전에 이따만하게 커졌던 그건 그럼 왜 그랬던 건데?” 윤지가 두 손바닥을 꽤나 떨어뜨리며 대충 현우의 물건 크기를 표현하자, 현우는 단박에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그, 그건! 네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잖아! 나랑 혜미 놀려먹으려고!” “아~ 그래? 그랬구나. 난 또, 너도 그런 거 좋아하는 줄 알았지. 미안. 그럼 난 들어가서 혜미 좀 돌봐줘야겠다. 애가 정신을 못 차리네…” “괘…괜찮은 거야? 혜미는?” “글쎄…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왜 네가 좀 봐줄래? 나도 좀 씻기도 해야 겠고.” “그래 알았어 그럼. 내가 있을게.” 윤지는 현우가 안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고는 욕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는 알몸으로 들어가 버렸다. - 윤지의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선 현우는 꽤나 곤하게 잠든 혜미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쯤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침대 옆에 놓인 은은한 조명 덕분에 잠들어 있는 혜미의 얼굴은 낮에 보던 것과는 달리 꽤나 여성스러움이 느껴졌기에 현우는 침대 옆에 있는 화장대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은 채 한동안 혜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화장하는 걸 즐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축구에만 빠져버린 꼬마 숙녀는 그러나 축구 덕분에 땀으로 노폐물들이 빠져나가 버려 오히려 화학 화장품을 애용하는 보통의 여자들보다 훨씬 매끈한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혜미였기 때문에 반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현우는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았다. 조전무를 통해서 바라본 여자들은 하나같이 화장으로 범벅이 된 얼굴들이었고, 창피한 것도 몰랐으며, 자신의 몸을 아낄 줄 모르는 것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언젠가 잠시 도로에 정차된 자신의 승용차 속에서 처음 본 거리에서의 혜미는 그야말로 한 마리의 야생마 같은 모습이었다. 제대로 묶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한 긴 생머리하며, 남자들의 옷을 입은 것 마냥 꾸밈없는 선머슴 같은 모습에서 오히려 현우는 묘한 이끌림을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기사를 시켜 조용히 혜미를 뒤따라가 삼거리 슈퍼에 산다는 것도 알아내었고, 한국여대에 다닌다는 것도 알 수 있었지만, 정작 그녀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현우는 왜 자신이 혜미에게 빠져드는 건지에 대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불쌍한 아버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던 현우는 잠결에 이불을 걷어차는 혜미에게 이불을 덮어주려다가 그만 그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헉!” 현우를 등진 채 이불을 걷어차며 모로 눕고 있는 혜미의 뒷모습은 고스란히 알몸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봐왔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순수한 혜미의 눈부신 뒷태 덕분에 현우는 차마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때? 혜미 몸을 본 소감이?” 어느새 들어왔는지, 샤워를 마친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샤워 가운 차림의 윤지가 현우의 옆에 선채 묻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지금의 현우를 놀래켜 주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알아챈 듯, 윤지는 침대에 털썩 앉아서는 자신의 손으로 혜미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정말 예쁘지 않니? 잘록한 허리하며… 이 엉덩이 좀 봐, 손가락만 대면 톡 터질 것만 같애… 너도 한 번 만져볼래?” 어느새 윤지의 손이 혜미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현우를 유혹하고 있었기에, 또다시 현우의 물건은 빌려 입은 윤지의 옷을 뚫고 나올 것처럼 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참고 있는 현우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던 윤지는, “엉덩이보다, 이쪽이 더 좋니?” 하며 혜미의 모로 누운 몸을 반듯이 눕혔고, 그러자 그야말로 비밀의 문이 열리듯 혜미의 완벽한 나신이 현우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기에 현우는 그야말로 어질어질한 기분이었다. “이 가슴 한 번 만져 보고 싶지 않니? 만져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질텐데…” “하… 하지마… 곤히 자고 있는 애한테… 지금…” “뭐 어때? 닳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일어나도 절대 모를걸? 너만 입 다물고 있어준다면.” 윤지는 한 손으로 부드럽게 혜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현우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기에 윤지는 남은 한 손으로 현우의 손을 잡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혜미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컹. 드디어 혜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은 현우는 그러나 잠들어있는 혜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너무나 미안한 얼굴로 바뀌며 순식간에 방에서 뛰쳐나가버렸고, 그런 현우의 반응에 윤지는 혜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았다. “니들 정말 어쩜 그렇게 똑같니?” - “아… 안…. 안돼!!! 헉! 헉!” 병실에 누워있던 근명은, 부상을 당하던 직전의 장면이 꿈속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모두가 잠들어 있을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긴…? 참 그랬지…” 아직은 병원에 누워있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던 근명이었기에,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나서야 부상의 기억과 함께 이곳이 병원의 한 병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으… 통증이…” 새벽이 되자 임시로 고정해 놓은 왼쪽 다리에서 은근한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근명은 간호사를 호출하는 대신 핸드폰을 집어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새벽에 잠에서 깨어버린 뒤 다리의 통증보다도 홀로 남겨진 외로움의 고통이 더욱 컸던 탓인지, 부디 전화를 받아주길 바라며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어둠에 휩싸여 있는 자신의 왼쪽 무릎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우~~웅, 우~~~웅…… 갑자기 어디선가 진동소리가 느껴지는 통에 영후는 잠에서 깨어났지만 쉽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때문에 대충 소리의 근원지인 머리 위쪽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눈도 뜨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아보았다. “으음, 여보세요…” ‘……!’ “여보세요? 누구세요?” ‘……’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을” ‘삐리릭’ 결국 전화를 건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고, 그제야 눈을 뜬 영후의 손엔 하연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영후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느새 그런 걱정 쯤은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자신의 품 안에 너무나도 예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하연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하연아…’ 하연에게 만큼은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그득했지만, 이렇게 자신의 품에 스스로 들어와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후는 마치 모든 것들이 해결돼버린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하연과 평생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해 볼 정도로. 영후는 그대로 하연을 더욱 깊이 안아주려 했으나 이불도 없이 속옷 차림으로 잠을 잤기 때문인지 꽤나 하연으로부터 서늘한 체온이 느껴져, 영후는 자유로운 팔 하나를 이용해 침대 위에 있는 이불을 조심스레 당겨와 하연과 자신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조심스럽게 하연의 차가워진 맨 어깨를 감싸 안자, 하연은 그 예쁜 뺨을 영후의 팔과 가슴에 문질러대더니 더욱 영후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왔기에, 아직은 어슴푸레한 창 밖의 새벽이 오늘은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잠을 청해보는 영후였다. 29부. 구원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총장실의 창가 밖으로 꽤나 멋들어진 축구단 버스와 버스를 들락날락 거리며 너무들 좋아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 얼굴로 총장은 핸드폰으로 노감독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 진 거에요? 며칠 동안 이리저리 시달리셨잖아요.” ‘뭐, 그럴 걸 모르고 그런 것도 아니고… 조금 있으면 잠잠해질 테지.’ 벌써 대 북한 전이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모든 언론들 덕분에 노감독의 갑작스런 사퇴 이유에 대해 억측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사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별 것 아닌 일을 더욱 부풀리고 있는 언론의 행태에 총장은 전 같았다면 기가 차고도 남았겠지만, 그런 것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자신의 남자와 남은 여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었으니, 그거면 족할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대회가 코 앞으로 다가왔을 텐데, 영후 놈은 어쩌고 있는감…?’ “아이들도 훈련하느라 조금 지쳐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감독도 그렇고 해서 2박 3일로 휴가를 좀 내줬어요.” ‘그래도 적지 않은 인원인데, 어떻게 여행을 보내려고…?’ “뭐, 이감독 덕분에 학교 홍보 효과도 꽤 있었던지, 이사회에서 덜컥 리무진 버스 한대를 구입해줬지 뭐에요? 그래서 겸사겸사 학교 재단하고 연계된 강원도 쪽 콘도도 예약해주고 그랬죠 뭐.” ‘허, 이거 지원 만큼은 국가대표 저리 가라구먼.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일찌감치 당신 학교 감독에나 지원할 걸 그랬소.’ “흥, 우리 학교엔 당신 같은 늙다리는 안받아준다고요. 나니까 당신하고 만나는 거지.” 역시나 속마음과는 달리 톡톡 쏘아 붙이는 총장 덕분에 노감독은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고, 총장은 그런 노감독에게 또다시 장난을 걸려는 데,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기에 총장은 아쉽지만 노감독과의 통화를 잠시 끊어야만 했다. “누가 왔나 봐요. 조금 있다 다시 할게요. 끊어요… 네~ 들어오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총장은 평소의 격조는 잠시 어디로 사라진 듯 조금은 높다 싶을 정도의 톤으로 출입문을 향해 입을 열었고, 총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문을 열며 성큼 들어서는 철용의 모습에 총장은 조금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총장님.” - “우와~~~!” 그야말로 어지간한 버스보다도 훨씬 큰 최신식 리무진 버스를 만나본 아이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하고 있었고, 모두들 믿어지지 않는 다는 얼굴들이었다. 때문에 윙 플레이어 정화가 다시금 수림에게 물었고, 수림은 몇 번이고 대답해 줄 수 있다는 얼굴로 입을 열어주었다. “짱이다! 코치님, 진짜 이게 우리 차에요? 진짜요?” “그래, 진짜야. 저기 옆면에 써있지 않니, ‘한국여대 축구선수단’이라고.” 수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다시금 ‘오오~!’하며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럼 오늘 가는 여행도 이 버스 타고 가는 거에요?” 역시나 가장 큰 몸집의 골키퍼 미자가 버스의 윤기 나는 옆면을 매만지며 묻자, 수림은 역시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곧바로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들 묻지만 하지 말고, 직접 타보렴. 안은 또 얼마나 좋다구.” 수림의 이야기가 떨어지자 마자, 아이들은 우르르 버스 안으로 사라져 들어갔고 그런 아이들을 웃으며 바라보던 수림의 눈엔 저만치서 심통이 난 듯한 남희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로 남희를 설득하려는 난감한 표정의 영후가 버스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솔직히 총장님께서 보내주시는 여행이긴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찬성하지 못하겠습니다.” “권코치님, 그러지 말고, 이왕 가는 거 기분 좋게 갔다 오자 구요.” “하지만, 여자축구선수권대회가 바로 코앞입니다. 하루하루가 아쉬운 시점에서, 어맛!” “권코치님…” 순간 남희는 자신의 어깨를 잡으며 돌려세운 영후와 눈을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남희씨. 저길 봐요.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 즐거워하잖아요. 그러면 된 거잖아요. 네?” 마치 영후의 눈은 엄마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애원하는 것 이상이었기에 남희는 더 이상 자신의 뜻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어지는 영후의 말이 백 번 옳았으니까. “알겠습니다. 다만…” “?” “거기에 가서도 무조건 놀게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것까진 저도 양보 못합니다.” 역시나 자신의 책임감에 언제나 완벽을 기하려는 남희의 모습에 영후는 결국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줄 수 밖에 없었고, 어느덧 버스에 다다랐을 즈음엔 수림만 빼놓고 전부 버스에 탑승해 있었다. “자,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이들은 다 온거죠?” 수림을 바라보며 영후가 묻자, 수림은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예, 다 왔구말구요. 다들 좋아 죽어요.” “그럼 우리도 탈까요?” 영후의 권유에 수림과 남희가 버스에 올랐고, 영후도 버스에 올랐다. 그러자 영후의 눈에 정말 멋진 버스의 실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한쪽은 둘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의자가, 또 한쪽엔 홀로 누울 수도 있을 정도의 긴 의자가 양분해 있었고, 꽤나 멋졌다는 것 말고도 모든 면을 객관적으로 비교를 하자 해도, 결코 국가대표 선수들의 버스에 비해 절대 모자란 점이 없어 보였기에 영후도 꽤나 놀라고 있었는데 그런 영후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수림이 거들었다. “정말 멋지죠? 감독님.” “그러네요. 아이들 생각하면 당연히 좋아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조금 과분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영후는 자신의 활약 덕분에 한국여대가 얻은 홍보 효과의 가치가 어느 정도가 되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마냥 미안한 얼굴이었지만, 그런 영후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아이들은 새 집에 이사온 어린아이들 마냥 버스 안에서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기에, 영후는 그것만으로도 방금전의 미안함이 상쇄돼버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자자, 얘들아 이제 그만하고 다들 자리에 앉자. 기사님 정신 없으실 라~” 겨우 수림이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인원을 확인 하자 드디어 버스는 미끄러지듯 교정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는데, 영후는 그제야 의자에 몸을 묻으며 잠시나마 잠을 청해볼 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보다는 맨 뒷자리로 옮겨 아이들과 신나게 놀며 가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이윽고 진동을 해대는 핸드폰을 바지주머니 속에서 꺼내고는 잠시 미소를 지어보기도 했다. “어, 하연아?” 순간 영후의 입에서 하연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수림과 남희는 자신들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만, 두 여자의 마음을 알리 없는 하연은 다짜고짜 다급한 목소리로 영후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영후야! 큰일났어! 근명이가… 근명이가…’ “하연아,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 볼래? 근명이가 뭐 어쨌다고?” ‘근명이가… 근명이가 지금 병원 옥상에서 투신하려고 한대! 어쩌면 좋아!!’ “뭐어?! 이 자식 진짜…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지금 갈게!” 영후는 전화를 끊자마자 다급하게 운전기사에게 부탁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잠시만 저 앞에 세워주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감독님, 무슨 일 입니까?” “아, 그게… 나중에 얘기해 드릴게요. 우선 아이들 데리고 먼저 가고 계세요. 저도 곧 따라 가겠습니다.” 남희의 물음에도 영후는 그 어떤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는 버스 정차 후 문이 열리자마자 급하게 뛰쳐나가, 곧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에 화기애애하던 버스 안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버스는 이윽고 문을 닫은 후 영후의 마음과는 달리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총장은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한 모금을 마신 후,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건너편 소파의 철용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또 어쩐 일로…?” “그게 다름이 아니라…” 철용은 총장의 궁금해하는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다가 결국 마음을 굳힌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총장님. 현재 영후의 소속은 이곳 한국여대인 게 맞는 거죠?” “그… 렇죠. 근데 그게 왜…?” 철용은 목이 타는 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음미할 생각도 없이 벌컥벌컥 마시고 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어보려 했지만 이번엔 너무 뜨거웠던 차 덕분에 한동안 목을 움켜쥐며 '켁켁'거릴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겨우 진정이 된 철용은 짐짓 언제 그랬었냐는 얼굴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영후를 원하는 팀에서 접촉을 해 왔습니다.” “팀… 이라뇨? 혹시 우리 이 감독님께서 그러시길 바라셨단 말씀이신가요?” “아, 그게 말이죠…” 결국 철용은 예선전을 치르러 공항으로 영후를 데려다 줬던 때에, 영후의 대리인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냈다는 이야기를 총장에게 털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철용이 영후에게 진 빚(?)에 관한 이야기도 결국 나올 수 밖에 없었고. “그랬군요…” 꽤나 긴 이야기를 듣고 난 총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았고, 생각보다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어서 철용은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원론적으론, 아니 실은 ‘우리’도 이감독이 그래주길 바라고 있지만, 그 문제는 이미 제 손을 떠났답니다.” “예? 그게 무슨…?” “이번에 있을 여자축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겠다, 고 이감독님께서 직접 공언하셨거든요. 구 에이전트 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이감독은 약속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잖아요.” “아…” 그제야 철용은 왜 총장이 자신의 손을 떠난 문제라고 하는 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자식, 사람 머리 아프게 만드는 구만.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는지 알 수 없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 철용을 바라보던 총장은 그러나 궁금하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우리 감독님을 원하는 팀이 어딘지… 물어도 될까요?” “그게, 아직은 외부에 알리면 안 되는 거라서…” 하긴, 총장은 철용의 입장을 이해했다. 아니 지금 철용의 처신이 훨씬 더 올바른 행동이라는 것을 총장은 알고 있었다. 능력도 없으면서, 언론에 먼저 나불거려 결국은 선수만 피해입고, 상처받게 만드는 에이전트가 넘치는 요즘이었기에 총장은 되려 철용의 마음 씀씀이가 더욱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으니, 총장은 눈을 말똥거리며 철용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고, 그래도 한동안 미적거리는 철용에게 총장은 자신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철용은 못 당하겠다는 얼굴로 결국 조심스럽고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철용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팀 명을 하나씩 듣던 총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소파의 손잡이를 자신도 모르게 꽉 움켜쥐어보고 있었다. “저, 총장님. 그런데…” “네?” “좀전에, ‘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총장님 말고도 또 누가 있는 겁니까?” “아, 그건…” 그제야 총장은 노감독과 자신을 묶어 ‘우리’라고 말해버린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고는 아무말도 못한 채 그저 얼굴만 붉히고 있을 뿐이었다. - “이게… 뭡니까…?” 청와대 접견실 소파에 앉은 이 대통령은 조전무가 자신의 앞으로 밀어놓는 작은 ‘아타셰케이스’ (007가방이라고도 한다. 보통 가죽이나 합성피혁을 바른 경금속제로서 딱딱하게 각형으로 만든다. 미국의 상용(商用)업자 사이에 이용되어 널리 유행하였으며, 아타셰란 원래 프랑스어로서 대공사관원(大公使館員)이란 뜻이다. 네이년 참조.) 를 보며 물었지만, 조전무는 대답대신 가방을 다시금 자신의 쪽으로 끌어와 양쪽의 잠김쇠를 눌러 열고는 다시 이 대통령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가방에 들어있는 ‘양도성 예금증서’를 확인하며 잠시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애써 위엄 있는 표정을 지으며 조전무의 의중을 물었다. “그래… 이렇게 오는 게 있으니, 가는 것도 있어야 할 텐데…?” “아하하,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조전무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돈과 권력에 대한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대통령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작은 눈으로 날카롭게 계속 자신을 쏘아보는 통에 조전무는 몇 번이고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보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실은… 대검 중수부를 좀 움직여 주십사 해서…” “중수부…요?” 이 대통령은 조전무의 조금은 위험한 부탁에 잠시 멈칫했다. 지금 조전무가 부탁한 중수부는 바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인 1981년 4월 설립된 중수부는 이후 검찰총장의 명령을 받아 직접 수사를 진행하는 특수부대 역할을 해왔는데, 공안부, 형사부, 마약조직 범죄부 등이 일선 지검 등의 관련 수사를 지휘, 기획하는 업무만을 하도록 규정돼 있는 데 반해 중수부만 유일하게 직접 수사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대통령 자신의 지시가 떨어지면 중수부는 언제 어디든 소위 ‘먼지떨이 수사’를 할 것이었다. “안… 되겠습니까?” “안될 거야 없지만, 흐음…” 잠시 고뇌하는 이 대통령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조전무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축구협회 회장직 당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축구대표팀과 갑작스런 노감독의 사퇴에 이은 정회장의 질책까지 겹치며 말 그대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조전무는 결국 최후의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검찰의 힘이 필요한 곳이 어딥니까?” “명단은 대통령님께서 굳이 아시는 건 좋지 않을 듯 해서… 나중에 제가 따로 검찰에 넘겨주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차기 축구 협회 회장에 출마하는 경쟁자… 인 겁니까?” “아, 그게…”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이 대통령의 예리함 덕분에 조전무는 다시 한 번 땀을 닦아 내리느라 정신 없었지만, 수북이 쌓인 양도성 예금 증서를 이리저리 들춰보던 대통령은 이내 또다시 질문을 쏟아냈다. “이 물건… 받아도 체하진 않는 거겠죠?” “예, 예. 물론입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한가지만 더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괜찮으시다면 국세청의 조사 4과에게 축구 연구소와 한국여대 세무조사를 지시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이번엔 조사 4과… 인 겁니까?” 조전무는 조금 지나친 부탁이었을까 하는 후회도 해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까. 국세청의 저승사자라고 불리는 조사4과에게 걸리면 대한민국의 모든 곳에서 탈세를 만들어서라도 잡아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한국여대에 조사 4과를 투입시켜 달라는 부탁은 다시 말해 어떻게든 한국여대와 노감독이 몸담고 있는 ‘축구연구소’의 모든 것을 ‘정지’시켜달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때문에 조전무는 두 번째 건의는 없던 것으로 해달라 할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대통령의 입에선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런 거라면… 액수가 많은 건 아니구만. 하나도 아닌 두 가지 부탁이라니.” “아… 소, 송구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좀더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당황해 하며 곧바로 고개를 숙이는 조전무의 모습에 흡족해하며 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액수의 문제였지 일의 성사 여부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전무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 쉬어보았지만, 이윽고 눈앞의 막대한 금액을 이 대통령에게 건네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저것도 모자라다니…’ 국가대표팀을 후원하는 후원사들과 기업체들을 상대로 갈퀴를 긁듯 모은 비자금인 만큼, 저 돈만 해도 사실 조전무는 현우와 함께 행복하게 남은 여생을 즐기며 살아 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조전무에게 행복한 삶을 누릴 여유를 주지 않았고,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있는 지금이었다. ‘어차피… 회장직에 오르게 되면, 이 정도 돈 쯤이야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벌어들일 수 있어. 그러니, 지금 이 투자를 아까워 해선 안돼.’ 조전무는 탐욕스런 표정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대통령을 앞에 두고 자신의 탐욕을 겨우 감추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 “아…!” 영후를 태운 택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병원에 도착했지만, 건물에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로 기자들과 취재차량으로 뒤죽박죽 이었기에 영후는 대강 요금을 집어 던지듯 지불하고는 택시에서 뛰어내려 병원 건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영후의 눈엔 병원 옥상을 바라보느라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고 있었고, 더불어 그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올려다 본 병원 옥상에선 위태위태하게 다리를 늘어뜨린 채 앉아있는 환자 한 명이 눈에 띄고 있었다. ‘근명!’ “영후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역시나 영후를 제일 먼저 발견한 하연은 영후의 팔에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매달리고 있었기에 영후는 잠깐이나마 하연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난 후에야 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연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그게, 오늘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데…” 말끝을 흐리는 하연의 모습에 영후는 굳이 끝까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근명은 선수 생명에 위기를 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때문에 영후는 잠시 하연을 떼어 놓고는 다짜고짜 병원 건물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 “인간들 참 많네… 구경났나, 젠장…” 근명은 불편한 다리로 어떻게 올라갔는지 옥상의 높은 외벽 위로 올라가 꽤나 편안하게 앉아있었고, 근명에게 한참이나 떨어진 옥상 출입구엔 경찰들이 근명을 설득하는 것에 실패 한 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근명은 뒤를 돌아보며 경찰들의 일그러진 얼굴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 하나를 펴서 들어보이고는 다시 발 아래에 1층에 근명이 추락할 때를 대비해 펼쳐진 커다란 에어쿠션을 여러 명이 맞잡고 있는 모양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병신들, 저걸로 내가 뛰어내리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여간 공무원 놈들 생각하는 거 하고는…” 정말 이 모든 게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그저 재밌는 구경을 하고 있는 근명의 귀에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놔요! 내가 설득할 수 있다잖아요!” “안됩니다! 자칫하면 하선수를 더욱 자극할 수 있습니다.” “누가 자극한다고 그래요?!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근명! 내 목소리 들려? 나야 영후! 너 임마 지금 뭐하는 거야!?” 역시나 영후가 어느새 나타나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근명은 손을 들어 인사하며 씨익 웃어 보였다. “여어~ 선배, 왔어요?” 근명이 꽤나 친근한 척하며 인사를 건네자, 경찰들은 잠시 멈칫했고 영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으며 옥상의 한 가운데로 와 섰다. “너 이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는 선배는 지금 여기서 뭐 하는 데요?” “근명아! 지금 다들 널 걱정하고 있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야? 부상? 그런 것쯤 수술 잘 받고, 재활 잘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된다는 거 다른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근데 왜 그렇게 열을 내고 그래요? 사람 쫄게스리…” 꽤나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영후에 비해, 근명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으로 영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답답해서 그런다 임마! 도대체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너 원래 이렇게 약해빠진 녀석이었던 거냐!” “에에? 거참 듣자 듣자 하니까 너무하네요 선배!” 영후의 말을 듣고 있던 근명이 몸을 잠시 움직이자, 근명의 발아래 있던 사람들의 입에선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근명은 답답하단 표정으로 영후에게 손을 들어 자기 쪽으로 부르고 있었고, 영후는 조심스럽게 근명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명과 영후의 거리가 1미터 정도가 되자, 그제야 근명은 손바닥을 세워 영후를 멈춰 세웠다. 영후 또한 조금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섰고. 그러자 근명은 생글거리던 얼굴을 180도 바꾸며 입을 열었다.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난 선배완 달리 이제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요… 축구도… 여자도…” “!” “그런 내가 무슨 낙으로 살아가야 하는 건지, 선밴 알려줄 수 있어요?” “근명아…” “이렇게… 불꽃처럼 살다가 가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잖아요. 안 그래요?” “근명아… 아니야,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 넌 지금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래,내가 있었던 독일 병원으로 가보자. 내가 연락해 볼게 응? 그곳에 가면 분명 지금보다 훨씬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나면요? 또 선배처럼 몇 년을 병원에서 보내라고요? 훗… 나한테 바랄 걸 바래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근명은 서서히 오른발만을 이용해 옥상 외벽에서 일어서기 시작했고, 근명의 발아래 사람들은 드디어 엄청난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런 모습들이 더욱 재밌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던 근명은 다시 영후 쪽을 뒤돌아 보며 씨익 웃었다. “근명아! 그러지마!” “선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추한 꼴만 보여서 미안했어요.”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아니긴, 제발 좀 그런 착한 얼굴로만 살지 말고, 쿨하게 삽시다 예? 알아들었죠?!” 정말 자살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평이하게 할 말을 마친 근명은 예의 그 '씨익' 웃는 표정으로 옥상 외벽에서 뛰어내렸고, 그와 동시에 영후는 그보다 더 빠를 수 없을 정도로 근명에게 달려나갔다. - “힘 안 드니 영후야?” 자신을 바라보는 커다란 몸집의 아빠는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다정다감한 얼굴이었기에 그런 아빠와 함께 걷고 있는 산길은 전혀 무서울 것도, 힘이 들 것도 없었다. 때문에 영후는 일부러 아빠보다도 훨씬 앞서서 저만치 걷고 있었다. 아빠 아들이 이렇게나 커졌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이. 이제 겨우 5살이 막 지난 영후를 아무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은 욕심에, 아빠는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후와 둘이 산에 오르고 있었는데, 영후는 기특하게도 다리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묵묵하게 거친 산을 오르고 있었기에 영후의 아빠는 꽤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해외의 거친 산들을 정복하기 위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녀석과 그 예쁜 마누라를 버려둔 채 몇 달이고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기에 그것만 생각하면 너무나도 미안했건만, 이 어린 아들녀석은 그런 내색도 없이 간만에 만난 아빠라는 존재에도 어색함은 커녕 그저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해주고 있었기에 영후의 아빠는 이제는 그만 등반을 그만 두고 가정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에 빠진 자신에게서 벗어난 영후는 그러나 저만치 앞서 가다가 뭔지 모를 꽃을 따려 급한 경사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고, 영후의 아빠는 위험하니, 말려야겠다고 생각을 하려는 순간, 영후는 거짓말처럼 벼랑 아래로 미끄러지며 떨어지고 있었다. “영후야!!!” 사색이 되어 달려온 영후 아빠의 눈엔 그야말로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영후가 나뭇가지 하나에 의지한 채 매달려 있었고, 영후의 아빠는 그야말로 눈에 불이 나는 심정이었다. “우와아~~~~앙! 아빠!” “영후야!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그래 그렇지… 아빠가 갈게…” 하지만 영후에게 건네는 말과는 달리 손을 뻗기에는 너무나 가파른 곳에 매달려 있는 영후였기에 아빠는 하필 이럴 때 로프 하나 없이 아들을 대동한 채 산행을 나섰다는 걸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점점 어린 영후의 팔에선 힘이 빠지고 있었고, 나무 또한 영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듯 조금씩 조금씩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아빠! 아빠! 나 떨어져어~! 아빠! 으아~앙!” “영후야! 정신차려! 아빠가 있잖아! 절대 안 떨어질 거니까 울지마! 뚝! 영후 아빠 믿지? 그래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참아!” 결국 영후의 아빠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아무런 의지도 없이 격한 경사 쪽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고, 조금만, 그저 한 뼘 정도만 더 손을 내밀면 영후를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다 왔다 영후야! 아빠가… 아빠가 구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이제 거의…” 영후와 아빠의 손이 거의 맞닿을 무렵, 그러나 영후를 지탱해주던 나무가 갑자기 뿌리 채 뽑혀버리며 영후는 결국 끝도 모를 계속 아래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후의 아빠는 기적적으로 영후의 손을 잡았고, 그와 동시에 있는 힘을 다해 영후를 자신의 몸 쪽으로 던지듯 올려놓았다. “올라 갓!!!!” 털썩. 공중으로 붕 뜨다시피 했다가 이윽고 내동댕이쳐지듯 평평한 바닥 위로 던져진 영후는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파할 겨를도 없이 아빠를 찾았다. “아빠! 아빠아~!!!!” 하지만 방금 까지도 보였던 아빠의 모습은 그러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영후를 던진 반동으로 영후의 아빠는 영후 대신 계곡으로 떨어져 내렸고, 때문에 방금 전만해도 영후의 눈앞에 있어주었던 세상에서 가장 늠름했던 아빠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영 아빠가 없어진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영후는, 더는 돌아오지 않을 아빠를 끊임없이 불러 볼 뿐이었다. - “아… 아빠… 아빠!!! 헉! 헉……” “여, 영후야! 깼어?” 식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잠에서 깨어난 영후의 곁엔 역시나 하연이 지켜주고 있었기에 그나마 영후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힘든 것 같았다. “아… 여긴…?” “병원이잖아… 기억 안나?” “아…” 그랬다. 영후는 그제야 이곳이 병원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병원에 자신이 와 있는 것인지도. “근명인? 근명인 괜찮아?!” “응, 영후 네가 근명일 구했어.” “그래… 정말… 다행이다…” 아직도 꿈결처럼 이야기 하는 영후를 바라보며 하연은 영후가 근명을 구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 꺄악~! 정말 병원 건물 아래서 모여있던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 순간, 하연 또한 결국 근명이 떨어지는 걸 거라고 생각하고는 그 끔찍하고도 가슴아픈 광경 따윈 차마 볼 수 없었기에 질끈 눈을 감았지만, 이내 다시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떠 보았을 땐 커다란 에어매트나, 그 어디에도 근명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에 다시금 올려다 보았는데, 옥상에선 축 늘어져 있는 근명의 모습과 그런 근명의 한쪽 팔을 꼭 부여잡고 있는 또 하나의 믿음직한 팔이 보였다. ‘영후야!’ 하연은 그 손의 정체가 당연히 영후의 손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장정을 혼자 들어올리는 것은 커녕,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었기에 다른 도움이 손길이 필요했음에도 쉽사리 움직여주지 않고 있는 경찰 무리 탓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즈음, 곧이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번쩍 들어올리듯, 근명을 끌어올리는 것도 모자라, 유도에서 엎어치기를 하는 모양으로 근명의 몸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옥상 안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하연이 옥상으로 달려가 보았을 땐, 경찰들에 의해 진압당하는 근명과 더불어 몸 안에서 모든 힘이 빠져 나가버린 듯 곤하게 잠들어 있는 영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휴우…” 실시간으로 근명의 구조 현장이 버스 안의 커다란 모니터 안에서 보여지자 여행을 가는 버스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안도의 숨이 아이들로부터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물론 남희와 수림도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겨우 진정시킨 마음을 달래며 수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정말 다행이다. 그쵸 권코치님?” “네, 그러네요.” “그런데 저 하근명이란 선수, 왜 갑자기 저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 사람이…” 역시나 평소에 무엇이든 정답을 이야기 해주는 남희에게 수림은 무심코 물었지만, 이번에도 남희는 아무런 답을 내어주지 못했다. 다만 남희 답지 않게 마음속으로나마 짐작을 해 보고 있었을 뿐. ‘남자에겐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이 있는가 봅니다.’ 한편 이인석에 나란히 앉아있던 혜미와 윤지도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하고 있었다.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그치 윤지야?” “어? 어어… 그러게…” 혜미의 물음에 윤지는 대충 대답을 하고는 있었지만, 윤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 패기 넘치는 남자를 저 지경까지 몰아붙인 이유가, 그저 치명적인 부상 그것 뿐이었을까.’ 왠지 윤지는 근명의 부상보다 근명이 영후와 얽혀있는 것이 좀 더 신경이 쓰였지만, 어쨌든 영후는 근명을 구한 것이고, 근명은 살아있다는 게 더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거면 된 거였다. - “잠깐이면 됩니다.” 입원이 아닌 감금 수준으로 격리되어버린 근명을 만나기 위해, 병실을 찾은 영후는 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경찰에게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고, 경찰은 근명을 살린 것이 영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여주며 비켜서 주었기에, 영후는 문을 열고는 병실로 들어섰다. “근명…” 역시나 근명은 침대에 양손과 한 쪽 발이 결박된 채 침대에 누워있다가 영후가 다가서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었다. “왜 왔어요? 아, 내가 어떻게 망가져가는 지 꼭 두 눈으로 지켜봐야 겠어요? 그래, 이런 꼴 보니 속이 시원해요?” “임마, 그런 말이 어딨어! 다들 너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데, 네 녀석은 고작, 고작 그런 것 밖에 생각 못하는 거냐?!” “그래요, 저 원래 이런 놈이었어요. 제가 원래 이런 놈이었다는 거 선배 몰랐어요?” “제발… 그러지 마라… 너 그러는 거, 널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왜 내가 상관도 없는 남들 생각하며 살아야 되는 건데요?! 선밴 그렇게 살아서 행복해요? 네!?” “그래! 난 행복해 죽을 것 같다! 그러니까 너도” “물론 그러시겠죠!! 선밴 박기자님을 얻었으니까!!!” “!” 갑자기 근명의 입에서 하연이 튀어 나오자, 영후는 멈칫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요…” “뭐? 뭐라고 근명아?” “왜 그랬냐구요!” “뭐… 뭐가? 뭘 왜 그래?” “반칙이잖아요… 내가… 내 다리가 이렇게 됐다고… 선배랑 박기자님… 그러면 안 되는 거였잖아요… 아직… 아직 승부는 끝난 게 아니잖아요!” “아…” 묶인 손 덕분에 흐르는 눈물도 어쩌지 못하며 근명은 발악하듯 속마음을 내지르고 있었고, 영후는 그제야 근명의 마음을 조금쯤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영후는 순간 그 새벽에 울렸던 하연의 핸드폰을 떠올리고 있었고, 결국 영후는 뭔가 커다란 오해가 있었음을 깨달았지만, 그것에 대해 입을 열기도 전에 근명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영후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인 거에요? 박기자님에 대한 마음…?” 이런 상황에서 영후는 어떤 말을 해야만 할까, 하는 고민했지만 그런 모습에 근명은 그 엉망인 얼굴로 ‘픽’ 웃고 말았다. “역시 선배 답네요. 후배가 이렇게 징징 짜고 있으면 좀 거짓말도 해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치만… 그런대도 네가 납득할 거란 생각, 전혀 안드니까…” “쳇, 정말이지 선배란 사람은… 에휴 더 이상 말을 맙시다. 해봤자 내 입만 더 아플테니까.” “……” “행복하게 해줘요 박기자님.” “그럴…거야…” “조금이라도 박기자님 아프게 하면 선배고 뭐고 없을 줄 알라는 말이에요. 알아들어요?” “그래. 알았어. 그리고…” “그리고 뭐요?” “미안하다.” “쳇! 그렇게 미안할거였으면 처음부터 미안할 짓을 하지 말던가요! 덕분에 나만 미친놈 돼 버렸잖아요…” “그건, 어떻게든 갚을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그래 줄 수 있지?” “그럼 반병신 된 놈이 여기서 뭘 더 할 수나 있겠어요? 얌전히 수술이나 해야지. 왜요, 또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요?” “믿어도… 되는 거지? 그렇지?” “가뜩이나 묶여있어서 기분도 안 좋은 사람 속을 꼭 그렇게 긁어야 겠어요? 안 뛰어내릴 거에요. 안 뛰어내릴 테니까, 그만 나가주실래요?” “그래, 알았어. 그럼 또 올게.” “오던지 말던지…” 근명은 좀 전에 있었던 끔찍한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 있었지만 영후는 불안정한 상태의 근명을 이대로 두고 가야 할지 걱정스런 얼굴로 병실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경찰과 하연이 동시에 문에서 떨어졌는데, ‘마치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듯 경찰은 예의 엄숙한 표정으로 닫힌 문에 처음처럼 지켜서기 시작했고, 하연은 영후를 보자 겸연쩍은 미소를 보내주고 있었다. “하여간… 궁금한 건 그렇게나 못 참겠니?” 영후는 하연을 부드럽게 흘겨보며 입을 열었지만, 정작 서있던 경찰의 얼굴이 시뻘개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자질이라도 해먹는 거지. 그나저나 괜찮은 거야?” “그렇게 엿듣고도 몰라? 뭐, 일단은 괜찮은 거 같아. 그치만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라…” “알았어. 내가 시간 나는 대로 들를 테니까, 걱정하지마.” “어?” 영후는 하연이 시키지도 않은 대답을 하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제 하연이와 완전히 교감하고 있다고 생각했었기에 하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근명에게 와 보겠다고 하니 영후는 그제야 남들이 다 해본다는 질투를 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라? 영후 너 얼굴이 왜 그래? 너어, 설마…? 질투하는 거니? 그치 맞지? 질투하는 거지?” “아, 아냐! 내가 무슨… 넘겨짚지 마.” “에이, 아닌 거 같은데? 큭큭. 천하의 이영후가 질투를 다 한다 이거지? 헤헤, 이거 완전 기분 좋은데?” “아니라니깐! 아냐, 아니라고!” 벌써 저만치 걷고 있는 하연의 뒤를 따라가며 영후는 절대 아니라고 소리질러 봤지만, 이미 하연의 귀는 굳게 닫힌 뒤였다. - “어서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예약한 객실 체크 인 하려고 합니다. 이영후 란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남희는 콘도의 프론트 데스크 앞에서 총장이 알려준 대로 ‘이영후’의 이름을 말했고, 직원은 모니터로 예약 현황을 확인하고는 바로 답을 주었다. “네, 손님 예약 확인 되었습니다. 객실은 총 6개 구요, 침대, 온돌 중 어떤 방으로 드릴까요?” “아, 침대…로 주세요.” 별 것 아닌 물음에 남희는 괜히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을 했지만,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컴퓨터로 객실 확인 후 카드키 6개를 남희에게 건네주었다. “1701호부터 6호까지 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남희는 카드키를 몽땅 손에 쥔 채 로비 이곳 저곳에 흩어져있던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는 꽤나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카드키를 줄 테니까 1702호부터 6호까지 3명씩 나눠서 짐을 푸세요.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모이는 데 15분 주겠습니다. 감독님 오시기 전까지 간단한 몸풀기 훈련을 할 테니까, 그리 알고 바로 움직이세요.” 역시나 남희의 카리스마에 눌린 아이들은 여행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우르르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졌고 어느새 수림과 남희만이 로비에 남았다. “근데 권코치님, 방이 총 몇 개에요?” “아, 객실은 6개입니다. 그래서 우리 총 인원이 18명이니, 3명씩 방을 나눴습니다.” “그렇군요. 근데요, 그럼 이제 방은 하나만 남은 건가요? 아이들한테 5개를 배정해줬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럼… 남은 방 하나엔, 권코치님하고 저하고… 그리고 감독님, 이렇게 세 명이 쓰는 건가요?” “어머!” 수림의 어눌한 계산을 듣고 난 남희는 그제야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독님이 남자라는 걸 생각조차 못하고는 그저 18 나누기 6을 해버린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영후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이 그러한 실수를 불러일으켰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아, 어쩌죠? 감독님을 깜빡 했습니다!” “헤헤, 괜찮아요. 어차피, 아이들도 저희랑 같이 방 쓰는 거보단 친구들끼리 있는 게 좋을 테고, 또…음… 아 맞다, 저흰 미성년자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감독님께서도 괜찮다고 하실 거에요.” “그러…시겠죠?” 이럴 때마다 참으로 힘이 되어주는 수림 덕분에 남희는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이상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을 자책하며 이 모든 게 ‘이영후’란 남자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30부. 그녀들을 구할 수 있는 남자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던 두 여자는 성수기 전의 인적이 드문 바닷가 백사장을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짧은 숏커트의 수림은 그보다 더 짧은 살짝 배꼽이 보일 정도의 탑에다 스포티한 핫팬츠를 입고 있던 것과 달리 긴 생머리의 남희는 바다 빛 보다 더 푸른 하늘색의 원피스에 가디건 보다 짤막한 하얀 볼레로를 걸치고 있었기에 여성스러움 만으로는 남희가 앞서는 듯 했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수림의 간편함 또한 절대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비교야 그녀들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몫이었을 뿐, 정작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사이가 되어버렸기에 이런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밤바람을 나란히 맞으며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아… 밤에 듣는 파도소리 참 좋네요.” 그야말로 바다의 웅장함과 낭만에 푹 빠져버린 수림이 맨발에 모래를 가득 담아 앞으로 날려보내며 꿈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남희는 어릴 적 지겹게 보고 자란 바다였기에, 전 같았으면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고지식하게 굴었을 텐데, 지금의 남희는 저렇게 좋아하는 수림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지 쉽게 동의해주고 있었다. “네에.” “참, 근데 어떻게 애들이 술을 가져왔을 거라는 걸 아셨어요?” “그야… 저도 그땐 그랬으니까요. 수림씬 안그랬어요? 나만 안 착했던 겁니까?” “에이그, 학창시절에 안그랬던 사람이 어딨겠어요! 저는 사실 더 했는걸요? 크크.” 이제는 다 추억일 뿐이라며 수림과 남희는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고, 그녀들의 기나긴 웃음소리를 바다는 시샘하듯 커다란 파도를 부수며 그보다 더 큰소리로 삼켜버렸지만, 그럼에도 그녀들의 수다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참, 오늘 좀 너무 하셨어요. 애들이 아주 죽을 려고 하더라구요.” “아, 그거요.” 수림의 걱정스런 표정에 남희는 오후 내내 백사장에서 아이들을 훈련시켰던 때를 생각하며 조금은 미안한 얼굴을 지어보았지만, 달빛을 머금은 반짝이는 모래 덕분에 수림이 그녀의 표정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또한 아까부터 계속 그녀들을 몰래 따라오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도. - “다들 어디간거지…?” 영후는 1701호 실을 몇 번이고 두드려보기도 하고, 수림과 남희를 불러도 봤지만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자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어보았다. 허나 남희, 수림 모두 놓고 나간 핸드폰을 누군가 받아줄리 만무했고, 결국 영후는 2호실부터 6호실까지 다니며 벨을 눌러보았지만 그 어느곳에서도 문을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낮에 백사장에서의 지독한 훈련 덕분에 아이들은 술이고 뭐고 일찍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리 없었던 영후는 결국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는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휴우… 바다나 보러 가야겠다…” - “(윤지야! 괜찮을까?)” 1702호에선 다른 방들과 달리 미자와 윤지, 그리고 혜미가 술판을 몰래 벌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후에 의해 벨이 울리자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불을 끈 뒤, 마치 자는 것처럼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을 거야… 잠시만 이러고 있자)” 윤지는 미자의 겁먹은 얼굴을 보며 안심시키듯 입을 열었고, 이윽고 이곳 저곳을 두드리며 벨을 울리던 영후가 사라지자 윤지는 다시금 미자와 혜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미자의 잔은 그득하게 채워줬지만, 혜미의 잔은 절반도 못 미치게 따르고 있었는데도 윤지의 새로운 계획 따윈 눈치채지도 못한 채 혜미는 그저 놀러 와서 몰래 술을 마신다는 기쁨에 젖어 단번에 술잔의 술을 비우고 있었고, 미자는 그야말로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시며 윤지를 도와주고 있었다. “근데, 윤지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니?” “뭘?” 한참 술 마시는데 집중하던 미자는 꽤나 만족할 만큼 마셨던지 기분 좋은 얼굴로 혜미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그렇잖아. 코치님들 안 계시는 건 그렇다 쳐도, 베란다 쪽으로 넘어가서 술을 가져올 생각을 다 하고 말야.” 미자의 질문에도 그저 미소만 짓고 있는 윤지 대신, 혜미가 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며 미자와 윤지를 웃겨주었다. “그게 다 너희들 걷어 먹이려는 이 언니의 훈훈한 마음씨야 이것들아~!” - “아직은 봄이라 좀 서늘한 거 같죠?” “네, 짧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니까요.” 바다를 보며 낭만에 젖어보는 것도 잠시, 두 여자들은 이내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로 오소소 떨고 있었고, 때문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숙소로 돌아가는 것에 합의를 할 수 있었다. “잠깐만요, 그래도 이렇게 왔으니까 핸드폰에 기념사진이라도 남겨야죠! 밤바다를 배경으로.” “아, 그럴까요?” 이윽고 수림과 남희는 바다를 등진 채 나란히 섰지만 뭔가 허전한 감이 있었다. “근데, 오코치님… 사진 왜 안찍으세요?” “아, 전 주머니가 없어서 핸드폰을 숙소에 두고 왔거든요. 그래두 뭐, 권코치님 핸드폰으로 찍으면 되죠.” “저도… 안가져 왔는데…” “에에? 그럼… 감독님은…??” 그제야 두 숙녀분들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사색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빨리 가봐야 겠어요! 우리가 나와있는 바람에 숙소에도 못들어가고 계실지도…어맛!!” “헤헤, 아가씨들 이렇게 늦게 어디들 가시나 그래?” 그때였다. 다급하게 돌아서는 두 여자를 남자 셋이 가로막은 건. “왜, 왜들 이러세요?” “아, 왜 이러긴 이아가씨야, 갈데없는 청춘끼리 재미 좀 보자는 거지.” 세명의 남자 중 우두머리 인 것 같은 작달만한 남자가 지저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고, 잔뜩 얼어있던 수림을 바라보던 남희는 겨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저흰 따로 일행이 있습니다.” “거참, 나도 일행있걸랑? 반반한 것들이 튕기기는 또 오지게 튕기는 구먼. 얘들아!” 결국 우두머리가 명령을 내리자, 뒤에 서 있던 남자 둘은 각각 수림과 남희를 붙잡았고, 그 어둠 속에 대고 몇 번이고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 봤지만 그 소리들은 좀 전 까지만 해도 낭만적이었던 파도소리에 모두 삼켜지고 말았는데, 그들이 사라진 자리엔 남희의 부서진 안경만이 덩그라니 남아있었다. - 점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탓에 챙이 긴 야구 모자를 구해 깊게 눌러쓰고 있던 영후는 밤바다를 향해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자신의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어때? 파도소리 들려?” ‘응, 소리만 들어도 좋다.’ “너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거야.” ‘그러게…’ 말끝을 흐리는 하연의 마음 한 구석에 아직도 근명에 대한 연민이 남아있다는 걸, 영후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잠시 양보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근명인, 좀 어때? 아무래도 그렇게 두고 온 게 마음에 좀 걸리네.” ‘일단은 안정을 찾은 거 같아.’ “수술 날짜는 나왔어?” ‘뭐, 아직인가봐. 무릎 붓기도 빠지지 않았고, 좀 복합적인 수술이 될 거라 의사들도 회의를 하는 모양이던데…’ “그럼… 내가 있었던 독일 병원으로 보내는 건 어떨까?” ‘글쎄… 지금도 이 모양인데… 그 먼 곳에 혼자 떨어져 있게 되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하연 덕분에 영후는 홀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때’를 떠올리고는 하연이 걱정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독하고도 슬플 정도의 외로움. 이런 바다에서 느껴지는 쓸쓸함 정도는 절대 비교조차 되지 못할 정도의 혹독한 외로움은 축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득한 사람일수록 더 진할 것이었다. 한동안 영후는 아무 말 없이 백사장을 걷고 있었고, 핸드폰 저편에 있을 하연도 잠시 침묵하고 있었는데, 문득 영후의 눈에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뭔가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고, 영후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지만,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고는 갑자기 심박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하연아! 내가…나중에…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끊는다!” 전화를 끊고 영후는 부서진 안경을 손에 꽉 쥐어보며, 너무나 넓은 바닷가 백사장 어딘가에 있을 남희가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하며 마치 잔디 위에서 달리듯,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 “어어… 그래 알았어.” 하연은 갑작스런 영후의 목소리와 함께 끊겨버린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백에 넣은 후 근명의 병실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어? 아직도 안가고 여기서 뭐해요?” “글쎄… 아무래도 마음이 놓여야 말이지. 네녀석이 또 뭔가 저지르지나 않을까 싶어서.” “이거 안보여요?” 근명은 꽁꽁 묶여있는 자신의 두 팔과 다리 하나를 보여주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하연은 놀리듯 근명의 머리를 ‘탁!’ 하고 한대 때리고는 의자를 가져다 침대 옆에 자리하고 앉았다. “하긴, 그렇게 묶여 있으니까 아무것도 못하겠구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제야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표정의 하연을 보며, 근명은 괜히 인식시켜 줬다고 후회해 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하연의 눈이 갑자기 야시시하게 바뀌면서 한 손으로 근명의 배부터 시작해서 가슴까지 서서히 문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하는 거에요?!” “뭐하는 거긴… 오늘 맘고생 시킨 벌이지!” 허나 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뜨거운 손길이 그저 얇은 환자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곳 저곳을 쓰다듬고 다니자 근명의 하복부는 어느새 팽팽하게 텐트를 치고 말았는데, 그걸 아는지 어쩐지 하연은 이내 환자복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슬금슬금 근명의 가슴께로 옮겨갔고, 덕분에 노곤한 표정을 지어보던 근명은 그러나 하연의 손이 갑자기 젖꼭지를 꽉 꼬집자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아얏!! 아아!!!” “또 그랬담 봐, 그땐 진짜 젖꼭지를 똑 떼줄 테니까!” “으으… 환자를 이렇게 괴롭히는 데가 어딨어요!!!” “어딨긴? 여ㅤㄱㅣㅆ지! 어린노무시키가 하여간… 철 좀 들어라, 알았냐?” “남자는 늙어 죽을 때까지 철 안든답디다!” “뭐?” “그러니까, 나한테 뭐라 그럴 시간에 이선배나 관리 잘하라고요! 지금쯤 여자 틈바구니에서 헤롱대고 있을 지 누가 알겠어요!” “이게 누굴 어디다 갖다 붙이고 있어! 또 혼날래?!” “헹! 그럼 직접 가보시던지… 전화로는 확인 못하는 남자들의 세계가 있다니까요…아~아~!” 꽤나 거만하게 입을 나불대던 근명은 역시나 하연에게 귓불을 잡힌 채 또다시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참을 근명의 귀를 꼬집으며 화풀이 하던 하연은 한편으론 근명의 이야기가 너무나 그럴 듯 해서 ‘정말 한 번 가볼까?’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고 있었다. - “제발… 이러지 마세요…꺄~아!” 바닷가 한편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 뒤쪽으로 남희와 수림을 끌고온 남자들 중 우두머리는 우선 똘마니를 시켜 남희를 백사장에 눕히고는 양손을 똘마니에게 잡고 있게 한 후 그 풍만한 가슴을 우악스럽게 잡아보았다. “헤헤, 거참 서울 물을 먹어서 그런지 젖탱이도 큼지막하구만!!! 그럼 어디 실물을 좀 구경해 볼까나?” 체념한 듯한 남희는 차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런 정도로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우칠 인간들은 절대 아니었다. 투두둑! 결국 남자의 손에 의해 단번에 원피스의 상체 부분의 단추가 뜯겨져 나가자 아이보리 색상의 브래지어에 갇혀 있는 남희의 탐스런 젖가슴이 드러나고 있었기에 수림은 다른 남자에게 붙잡힌 채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마! 하지마 개새끼들아!!! 차라리 날 가지란 말이야 나쁜 새끼야!!!!” 퍽! 순간 수림을 잡고 있던 남자가 수림의 배에 주먹을 날렸고, 수림은 숨이 막히는 고통을 느끼며 축 늘어지듯 실신해 버렸다. “야야, 살살 다뤄라. 그러다 못쓰게 되겠다. 그리고 너도 물론 따먹어 줄 테니까, 너무 그렇게 보채지 말라고…” 쓰러지는 수림을 힐끗 보며 더러운 미소를 짓던 우두머리는 이윽고 다시 남희에게 집중하며 이번엔 남희의 원피스 아래로 손을 집어 넣고는 단번에 팬티를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팬티를 자신의 코에 가져가 팬티에 남아있을 은밀한 살내음을 맡아보았다. “흐음…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니까. 네년은 분명 최고로 쫄깃할 거야… 내가 곧 천국을 구경시켜줄게. 흐흐흐…” 우두머리는 이내 일어서고는 입맛을 다시며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는데, 그때였다. 마치 경주마가 땅을 박차는 듯한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한 건. "뭐야, 무슨 소리 안들리" 퍽! “으악!” 허리띠를 풀다 말고 갑자기 달려든 영후의 어깨에 우두머리는 거의 3미터 이상을 공중에 붕 떠서 날아가 모래밭에 고꾸라지고 있었고 그제야, 남희는 울먹거리며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모자 쓴 남자를 바라볼 수 있었는데, 안경도 없는 상태에서도 절대, 절대 못 알아 볼 리 없는 남자가 그야말로 꿈처럼 나타나 있었다. “가… 감독님!” “남희씨! 수림씨!” “이새끼 뭐야?! 죽고 싶어?!” 아직 상황파악을 못하던 똘마니 두명은 이내 남희와 수림을 팽개치고는 영후를 앞뒤로 에워싸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 남희는 쓰러지는 수림에게 달려가 꼭 끌어안았지만,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기에 온몸을 사로잡는 공포감에 턱까지 덜덜 떨면서도 수림의 귀에 몇 번이고 속삭여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제…” 남희의 품 안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수림의 눈에도 그제야 영후의 뒷모습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저 남자의 등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수림은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이새끼가 그냥 가던 길이나 쳐 갈 것이지… 뒤지고 싶어 환장했냐? 엉?” 하지만 영후는 똘마니들의 이야기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남희와 수림을 바라보았고, 무슨 생각에선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괜찮을 거니까… 잠깐만… 눈 감고 있어 줄래요?” 그것은 영후가 권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싸움이 시작되면, 이기든 지든 그것 자체로 여자들에게는 크나큰 공포가 될 게 분명했으니까. 이유야 어찌됐든 그녀들은 영후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꼭 감아보았고, 그러자 좀 전까지만 해도 무섭기만 했던 파도 소리가 조금씩 낭만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허, 이새끼 보게? 왜? 저년들 눈 감게 해 놓고 잘못했다고 빌면, 우리가 ‘아이구 예, 그러세요?’하고 보내주고, 뭐 아름답게 화해하고, 막 그래야 되는 거에요? 이 시발놈아?” 늘 그렇듯 똘마니들은 허세를 부리며 영후를 겁주려 해봤지만, 이미 극도의 분노심에 사로잡힌 영후에겐 오히려 역효과일 뿐이었다. 결국 영후가 전혀 물러설 기미가 안보이며 의외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자 남희를 잡고 있었던 똘마니 하나도 건들거리며 영후의 앞으로 다가오며 슬슬 영후에게 한방 먹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쭈? 이새끼가 귓대기에 좆대가릴 박았나… 내 말이 우습냐? 이새끼가…” 하지만. 퍼억! 우두둑! “으아아아악!!!!” 남자가 주먹을 뻗기도 전에 영후의 강력한 오른발 킥이 그대로 남자의 무릎을 강타하자, 뒤에 서 있던 남자의 귀에도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영후의 오른발 킥을 맞은 남자는 그대로 휘청거리며 무릎을 부여잡은 채 모랫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후의 뒤에 서있던 남자는 다급한 나머지 영후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탁월한 스피드와 동체시력을 가진 영후에게 그깟 장난질 같은 주먹은 그야말로 슬로우 비디오나 다름없었기에, 영후는 가볍게 주먹을 피하고는 이내 남자의 복부에 발리킥을 날렸다. 퍽! “커~억!” 남자는 방금 전 수림이 맛봤을 극한의 숨막힘을 몇십배로 되받으며 무릎을 꿇었지만, 영후는 그걸로 끝내지 않고 곧바로 남자의 턱을 롱 킥 해버렸다. 퍼~억! 그러자 남자는 머리가 90도 이상으로 꺾이며 그야말로 ‘끽’소리도 내보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모래사장에 고꾸라졌고, 두 남자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걸 확인하자 영후는 천천히 그러나 모자 아래로 저승사자의 얼굴을 한 채, 일어설 용기조차 없어 보이는 우두머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우두머리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는 연신 머리를 조아려 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저는 안 그럴려고 그랬는데… 저녀석들이… 형님 여자들인 줄도 모르고…” 영후는 비굴함을 감추지 않는 우두머리 앞에 서서,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남희와 수림을 확인한 후 작달만한 키의 우두머리의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남자는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그대로 목이 졸리는 듯한 고통을 맛 볼 수 있었다. “켁켁!… 사… 살려… 주십쇼… 다… 다신… 안그러겠… 습니…켁켁!” 레이저가 발사되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던 영후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우두머리가 애원하자 영후는 그대로 우두머리를 백사장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이미 영후로부터 엄청난 공포를 느낀 우두머리는 내동댕이 쳐지자마자 곧바로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었고, 그런 우두머리에게 영후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들 앞에서 사라져… 당장…” “예…? 예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정말 감사하다는 얼굴로 우두머리는 쓰러져 있는 두 남자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더 이상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영후는 남희와 수림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둘이 꼭 안은 채 그대로 떨고 있는 그녀들을 품에 안으며 속삭이듯 말을 건넸고, “이제… 다 끝났으니까, 눈 떠도 돼요.” 그러자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희와 수림은 엉엉 울며 영후의 품 속으로 동시에 파고들었다. - 끼익. 수림이 샤워기의 밸브를 잠그고 샤워부스에서 나왔음에도, 남희는 좀 전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따뜻한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에 웅크린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권코치님…” 수림이 욕조 옆에 앉으며 남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남희는 움찔하며 놀라는 듯 했지만 이내 잠잠해지며 무릎을 더욱 가슴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후… 어쩌지…” 수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욕조 안의 남희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안되겠던지 욕실 문을 조금 열고는 영후를 불러보았다. “저, 감독님…” “네, 수림씨.” “아무래도, 감독님께서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 “네? 그게 무슨…?” “우선, 좀 이리 들어와 주실래요?” “예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후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림은 문 틈으로 팔을 뻗어 영후의 손을 잡고는 바로 욕실로 끌어들였다. “아, 수, 수림씨!!” 갑작스럽게 욕실로 들어와버린 영후는 물을 머금어 더욱 반짝이는 수림의 알몸보다도, 멍한 눈빛으로 웅크리고 있는 욕조 속의 남희가 더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계세요.” 역시나 엄청난 일을 당할 뻔했던 남희는 아직까지도 남자들에게 받은 정신적 충격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때문에 영후는 조심스럽게 욕조 옆 바닥에 앉아 남희를 불러보았다. “남희씨…” 그러자 거짓말처럼 남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후를 돌아보았지만, 그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보던 수림도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희씨… 이제 괜찮아요. 그니까…” 하지만 영후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희는 영후의 목을 꼭 끌어안았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침착하게 남희를 안아준 영후는 알몸의 수림에게 한편에 걸려있는 샤워가운을 바라보며 눈짓을 했고, 영후의 눈빛을 이해한 수림은 가운과 수건을 몇 장 꺼내 침실로 나가자, 영후는 자신의 옷이 젖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욕조에 있던 남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자, 내가 같이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아무 것도 걱정할 거 없어요. 알았죠?” 이윽고 영후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남희의 나신을 안아 들고 침실로 걸어 나왔고, 침대에는 이미 수림이 자신의 몸은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샤워가운을 펼쳐 놓고는 수건을 들고 남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눕히세요. 물기는 제가 닦을게요.” 수림의 이야기대로 영후는 침대에 남희를 눕혔지만, 남희는 절대로 영후의 목을 감고 있는 손을 풀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영후는 그대로 남희의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고, 그런 남희의 반대편에 자리잡으며 수림은 남희의 눈부신 몸매에 남아있는 물기를 천천히 닦아 주기 시작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희는 영후의 목을 감싸 안으며 점점 더 영후의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 “(혜미야… 일어나봐. 혜미야…)” 윤지는 미자가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침대에서 일어나 혜미를 깨우고 있었다. “으응, 왜그러는데에… 아직 아침 되려면 멀었잖어…” “(혜미 너한테 재밌는 거 보여주려고 그래… 그러니까 일어나 얼른…)” 결국 혜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는데, 윤지가 또다시 베란다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잠이 확 달아나는 얼굴이었다. “(유, 윤지야! 뭐해!!!)” “(쉬잇! 조용히 해! 그리고 넌 나가서 문 앞에서 기다려)” 놀란 눈을 한 혜미를 내버려둔 채 윤지는 술을 가지러 갔던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또다시 감독님과 코치들이 잠들어 있을 1701호실로 넘어가고 있었다. - 사락… 커튼을 조심스럽게 젖히며 거실로 들어와 이윽고 영후와 코치들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서던 윤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더블 침대에 세 명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콘도의 구조 상, 거실과 침대방, 그리고 또 하나 작은 방이 있었기에 만일 영후가 침대에서 잔다면, 여자들은 방에서 요를 깔고 따로 잠들어야 했을 테고, 그 반대라면 침대 위엔 두 명의 여자만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분명 침대 위엔 세 명의 남녀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게다가 권코치는 바로 누워있는 영후의 팔베개까지 한 채로 누워있었고. ‘호오… 그렇단 말이지…?’ 뭔가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윤지는 곤히 자고 있는 수림과 남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출입문 쪽으로 걸어나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엔 아직도 조금 잠의 부스러기가 남은 듯한 혜미가 서 있었다. “(들어와)” 윤지가 손짓하며, 혜미를 불러들이자, 혜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헉…” 윤지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세사람이 잠든 방으로 들어온 혜미는 역시나 침대 안의 광경을 바라보고는 놀람을 넘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큰 성인 남녀가 바닥도 아닌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코치님들의 상태가 너무나 야하다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덮여있는 이불 속으로 보이는 매끈한 수림의 다리와 더불어 영후의 팔을 베고 누운 남희의 몸은 고스란히 알몸 상태였기 때문에, 알몸의 두 여자와 함께 누워있는 영후의 모습에 혜미는 현기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윤지는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발걸음을 옮겨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있는 영후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이내 영후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영후의 바지를 슬금슬금 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거야 윤지얏!!!)” “(쉬잇… 잠자코 보고만 있어봐…)” 이윽고 윤지의 손에 의해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영후의 바지 앞섬이 얼마 내려가기도 전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자지의 귀두가 보여지자, 혜미는 그만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지만, 윤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씩, 아주 천천히 바지와 팬티를 허벅지까지 내려버렸다. 그러자 전혀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꽤나 두툼한 영후의 자지가 여과 없이 드러나버렸고, 눈을 돌릴 힘도 없는 혜미를 빙긋 웃으며 바라보던 윤지는 손을 뻗어 영후의 자지를 부드럽게 움켜쥐기 시작했다. “(자, 잘 봐. 이게 진짜 ‘자지’라는 거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면…)” 윤지는 진지한 설명을 곁들이며 영후의 물컹한 자지를 잡고 있던 손을 위아래로 왕복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지의 손 두 개도 모자랄 만큼 두꺼워지고 길어져 버린 자지의 위용에 혜미는 얼마전 윤지의 집에서 봤었던 동영상 속에서의 남자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지만, 또 저렇게 거대한 물건이 여자의, 아니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자 순간 온몸에 찌르르 전기가 흐르는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그런데, “(유…윤지야…!)” 이윽고 윤지가 배시시 웃으며 영후의 자지를 입에 머금자 그야말로 혜미는 울기 직전의 얼굴이 되어버렸다. “(유…윤지야 그만… 그만해…)” 결국, 영후의 자지를 입에 머금은 채 바쁘게 움직이던 윤지는 혜미의 울음섞인 부탁을 외면 못하고는 잠시 입을 떼었지만, 영후의 자지와 윤지의 입술은 여전히 가느다란 실 같은 액체로 이어져 있었다. “(나 무서워 윤지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헉!)” 그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윤지가 혜미의 손을 잡아 끌어 영후의 자지를 잡게 한 것은. “아아…”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없이 혜미는 놀란 감정을 그대로 표출시키자 윤지는 자신의 입술로 혜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자 혜미는 한 손으론 영후의 자지를 잡은 채, 윤지와 키스를 나누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맞이했지만 그 어떤 반항도 어쩐지 할 수 가 없는 혜미였다. 그건, 아마도 윤지의 손이 자신의 가슴 속으로 쑥 들어와 거침없이 젖가슴을 움켜쥐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고, 영후의 자지를 가만히 잡고 있는 자신의 손 위로 윤지가 손을 포개 잡고는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이게 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자 뜨거워지는 자신의 젖가슴의 온도 보다도 더 영후의 자지는 점점 달궈지기 시작했고, 매끈해보이던 처음과는 달리 이곳 저곳이 울퉁불퉁해진 탓에 점점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너무나 적나라했고, 또 야했다. 게다가, 혜미의 입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온 윤지의 혀가 혜미의 혀를 가지고 놀기도 하고, 휘감기도 하자 혜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되는 탓에 영후의 자지를 왕복하고 있는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윤지의 손은 자지에서 떨어졌음에도 말이다. 이윽고 진득한 키스를 해주던 윤지는 잠시 혜미의 입술에서 떨어지며 영후의 자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혜미의 몸을 이끌어 영후의 허벅지 쪽으로 오게 했고, 혜미가 영후의 자지를 여전히 부여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자, 윤지는 혜미의 등 뒤쪽에서 왼손으로는 혜미의 가슴을, 그리고 오른손으론 혜미의 팬티 위를 은밀하게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아응… 윤… 지야… 그… 그러지… 아흑!)” 어느새 바짝 서버린 유두의 주위를 살살 약올리는 윤지의 손가락과 더불어, 어느새 팬티 속으로 진입한 윤지의 손가락이 혜미의 갈라진 보지 틈새를 미끌어지듯 애무하기 시작하자, 혜미는 입으로는 그만하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하고 있었지만, 영후의 자지를 잡고 있는 손은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영후의 귀두는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윤지는 혜미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는 혜미의 머리를 영후의 자지 쪽으로 이끌었고, 혜미는 그야말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영후의 자지를 코앞에 두고 보게 되었다. “(아까 봤지? 내가 했던 것 처럼…)” 정말 말도 안 되는 윤지의 명령이었지만, 혜미는 점점 자신의 보지를 농락하는 윤지의 손길에 녹아 내리며 조심스럽게 입 속으로 영후의 자지를 넣어 보았다. 처음 맛보는 남자의 자지는 그러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었고, 더욱 뜨거웠으며, 입안을 가득채워주는 것이 마치 가슴속을 그득하게 만들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혀로 아이스크림 먹듯이… 그러면 남자들이 좋아해…)” 왜 지금 이 상황에서 윤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 혜미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미 윤지가 시키는 대로 혜미는 열심히 혀를 놀려 영후의 자지를 쓰다듬고, 또 핥아보고 있었는데, 어찌된 게 점점 더 영후의 자지는 부풀어 올라 혜미의 입 속을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으음… 혜미야… 이게 자꾸…)” 아직 남자의 생리에 대해 알 턱이 없는 혜미가 이상한 기분에 윤지에게 질문을 하려 했지만 머리를 계속 누르고 있는 윤지 탓에 혜미는 계속 손으로 자지의 기둥을 흔들며 동시에 입안에 가득 찬 귀두를 겨우 빨아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두가 확 커지는 것 같더니 뭔가가 왈칵하고 입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지! 우웁!… 읍!” 그야말로 엄청난 정액이 순식간에 혜미의 입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윤지는 자지의 꺼떡거림이 멎을 때까지 혜미의 입을 절대로 떼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고, 이윽고 혜미의 입에서 정액이 넘쳐 흐르는 광경을 보고 나서야, 눈물 콧물 범벅이 된 혜미의 얼굴을 영후의 자지와 떼어 주었다. 그리고는 고생한 혜미를 위로하듯, 혜미의 입에 다시금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혜미의 입에 그득했던 영후의 정액은 고스란히 윤지의 입으로 넘어갔고, 기나긴 키스를 마치고 떨어진 혜미와 윤지의 입술은 그러나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느다란 정액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으응…” 서늘한 공기에 눈이 떠진 수림은 가만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와보았다. “어… 문이 열려있었나…” 수림은 상상조차 못했을 그 밤에, 윤지 일행이 몰래 들어왔던 베란다 문이 그대로 열려 있었기에 커튼이 나풀거릴 정도의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고, 여전히 알몸이었던 수림은 오소소 닭살이 되는 팔뚝을 쓸어보며 문을 닫고는 아직 남아있는 잠을 더 청해보려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수림은 침실에 들어서자 마자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감독님하고… 권코치님이…? 설마… 하지만…?’ 그 좋아하는 잠을 잊은 채 수림이 고민을 하며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남희와 영후의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어제 밤, 남희가 알몸 그대로 잠들었다는 건 수림도 알고 있었다. 수림 자신이 그녀의 알몸에 남아있는 물기들을 닦아주었으니까. 하지만, 영후의 바지와 팬티가 허벅지 아래에까지 내려와 있는 모습에 수림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닐거야… 어제 그런 일까지 있었고… 또 감독님은 박기자님을…’ 하지만 수림의 또다른 마음은 자꾸만 수림을 부추기고 있었다. ‘바보야!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되잖아! 그저 한번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어!’ 결국 부추김에 넘어가버린 수림은 언제 추위를 느꼈나 싶을 정도로 온 몸이 따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영후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 곧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을 직감하며 눈을 감으라고 영후가 부탁을 했지만, 이미 수림은 이 남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며 꼭 감고 있었지만, 남희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걱정이 돼서? 아님, 이 남자의 통렬한 복수극을 보기 위해서? 아니, 그런 이유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이유를 댈 수도 없었음에도 남희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흐릿한 눈앞의 영후에게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영후의 발 아래 추풍낙엽처럼 스러지는 나쁜 남자들도 볼 수 있었고, 또…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남희 자신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분노하는 한 남자의 불 같은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미 인내의 끈을 놓아버린 남자는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불한당들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고,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던 작달만한 남자를 들어올렸을 땐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살의를 내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남희의 눈에는 너무나 슬프고 또 슬프게 비춰지고 있었다. ‘나 같은 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 작은 남자가 모래밭에 내동댕이쳐질 때, 이상하게도 남희의 마음도 그리 되는 것만 같았고 때문에 의식의 끈이란 것이 그 순간 ‘툭’하고 끊기는 소리를 영후도 또 수림도 들을 순 없었지만, 남희는 어느새 몸에서 힘이 빠지며 동시에 동공이 풀리고 있었다. - “아…” 남희가 슬픈 꿈에서 깨어났을 땐 여전히 한결 같은 남자가 자신에게 한 팔을 내어준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지만, 남희는 또 그게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이 팔 조차도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을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 수 밖에 없는 자신이 참으로 밉고 또 미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스산한 감정을 다스리려던 찰나, 남희는 영후의 물건을 입안 가득 담고 있던 수림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머! 수림씨…” “읍…!” 잠시 남희와 수림은 눈이 마주친 채 일시정지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윽고 수림이 조심스럽게 영후의 자지를 입에서 뱉어 낸 후, 번들거리는 영후의 자지를 바라보던 남희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어… 언니 그러니까요, 이건… 그러니까…” 너무나 놀란 나머지 수림은 생전 하지도 않던 ‘언니’소리까지 입에 담아보며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려 했지만, 딱히 변명거리가 떠오를 리 없었기에 결국은 입을 다물고 말았는데 수림이 더 놀랄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츄릅…” 몽롱한 눈을 한 남희가 수림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영후의 자지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에 머금었으니까. - 영후는 새벽에 이어 또다시 기분 좋은 꿈을 꾸는 듯 했다. 이번에도 좀 전의 꿈과 같이 두 여자가 등장했는데, 이전 꿈과 다른 점이었다면 이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완벽한 나신이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두 여자들은 자신의 자지에 동시에 키스를 해대고 있었기에, 남자로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남희를 닮은 듯한 여자는 자신의 물건을 입 속 가득 넣는 것도 모자라, 거의 기도에 근접할 정도로 넣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반쯤 남아있는 부분은 또 수림을 닮은 여자가 허겁지겁 혀를 놀리며 자극하고 있었다. 이윽고 숨을 고르듯 자신의 귀두를 뱉어낸 남희를 닮은 여자는 다시금 기둥을 고루 핥기 시작했고, 여전히 반대편에 앉아 역시나 두툼한 기둥을 빨아대던 수림을 닮은 여자는 조금씩 입술의 위치를 옮겨가더니, 급기야 자신의 기둥을 벗어나며 그 두 여자들은 서로의 혀를 조우시키며 진득한 키스를 나누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 정말… 예쁘다… 남희씨랑 비슷한 여자하고… 수림씨를 닮은 여자하고… 닮은… 닮은?’ “허억!” 그제야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키는 영후 덕분에 남희는 수림의 혀를 자신의 입으로 빨아들이다가 그 상태로 멈췄고, 수림은 키스를 하면서도 영후의 자지를 계속 해서 흔들어 대고 있다가 얼음이 되고 있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하지만 입술을 뗀 남희와 수림은 당황하기는커녕, 둘이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손을 뻗어 영후의 상체를 다시금 밀어 쓰러뜨리고는 수림이 먼저 영후의 몸 위로 올라가 영후의 자지를 잡고는 곧바로 자신의 보지에 맞춰 그대로 앉아버렸다. “아흑!” “어읍!” 게다가 그 뿐이 아니었다. 영후가 수림의 몸을 바라볼 사이도 없이, 곧바로 남희의 얼굴이 영후의 얼굴을 덮으며 격렬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으니까. 달콤한 키스와 짜릿한 보지의 느낌 때문에 영후는 정신을 차릴 수 조차 없었지만, 그나마 남희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서 떨어져 나가자 영후는 묘한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일말의 아쉬움은 곧바로 더 진한 자극으로 돌아왔으니, 남희의 커다란 엉덩이가 영후의 얼굴 쪽으로 향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영후의 가슴에 조심스럽게 앉은 채, 수림과 마주보며 수림의 가슴을 잡기 시작한 남희는 양 손을 이용해 열심히 수림의 가슴을 꽉 잡기도 했다가, 둥글게 문지르듯 만지기도 했다. 그러자 수림은 남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남희의 얼굴을 잡아 끌어 진한 키스를 해주기 시작했지만, 갑자기 ‘꺽꺽’거리는 남희 때문에 키스를 중단 할 수 밖에 없었던 수림이 고개를 옆으로 해서 바라보자, 당하고만 있던 영후가 드디어 스스로 움직이기로 마음 먹고는 곧바로 남희의 보지 속으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영후의 자지를 조금 먼저 삽입해버린 미안함이 남아있었던 수림은 그제야 안심하며 더욱 몸놀림을 빨리 하기 시작했고, 수림의 템포에 맞춰 영후도 남희의 보지 속에 넣어둔 손가락 두 개를 점점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앙! 아…! 아아…! 아흑! 흐윽! 아아아!” “으응! 흡! 나 모… 몰라… 아욱! 흑…!” 그야말로 절세미녀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이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영후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갑자기 허리를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수림은 정말 말을 타듯 몇 번이고 붕붕 뜨기까지 할 만큼 강하게 영후의 자지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헉! 앗! 아! 아앗! 읍! 나… 나와… 아앗! 아앙!” 역시나 영후의 손가락 보다 자지를 받아들이는 쪽이 훨씬 힘들었던지, 수림은 단번에 왈칵 애액을 쏟아내고는 남희의 가슴에 고꾸라졌고, 그런 수림을 꼭 끌어안아 주던 남희는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보지 속을 헤집고 있는 영후의 손가락 때문에 점점 숨이 거칠어 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림이 이내 침대 옆으로 쓰러지듯 누워버리자, 영후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남희를 그대로 엎드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미 손가락 만으로 흥건하게 젖어버린 남희의 보지에 자신의 자지를 그대로 꽂아 넣었다. “하악!!!” 그야말로 남희가 기다리던 느낌이었다. 손가락 따위는 절대 비할 수 없는 엄청난 포만감과 짜릿함. 하지만 남희가 감상적이 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엔 전혀 불필요 하다는 것처럼, 영후의 자지는 드디어 현실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찌걱… 찌걱… 찌걱… 찌걱… 처음에는 언제나 부드럽게 시작하는 영후의 자지였기에 남희는 엎드린 상태에서 가장 깊으면서도 부드럽게 진입했다 나가버리는 영후의 자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때문에 그 사랑하는 마음을 자신의 보지에 담고자 했고, 아니나 다를까 남희의 보지는 다시금 살아 움직이며 영후의 자지를 빨아들이고, 주무르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으윽…!” 드디어 그때처럼 남희의 보지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영후는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빠질 것 같지 않던 자지를 귀두만 남긴 채 빼 보았고, 그러자마자 곧바로 재 진격을 했다. 퍽! “하악!” “으엇!” 그것은 그야말로 전쟁과도 같은 일진일퇴였다. 때문에 서로의 몸이 충돌하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먼저 그만 두고자 하지 않았다. 터억! 턱! 턱! 턱! 하지만 승부의 추가 기운 건 다름아닌 수림 덕분이었다. 어느새 기운을 차린 수림이 엎드려있는 남희의 몸 아래로 들어가 겨우 버티고 있는 남희의 가슴을 입에 한 가득 담기 시작했고, 게다가 한 손을 아래로 내려 한참 전쟁중인 남희의 보지를 아슬아슬하게 매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외의 협력자가 나타나자 영후는 동그란 남희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잡은 채 점점 스피드를 올리기 시작했고, 다시금 수림의 키스까지 이어지자 입까지 틀어 막혀버린 남희는 그야말로 사면초가가 되어버린 듯, 야생마처럼 울부짖으며 온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보지에서는 폭포처럼 애액이 쏟아지며 영후의 사타구니를 적시고도 모자라 침대 시트를 온통 애액 바다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결국 남희야말로 정신 줄을 놓으며 침대에 고꾸라졌고, 그럼에도 아직도 건재한 영후의 자지를 대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수림을 영후는 침대에서 내려와 번쩍 안아 들고는 그대로 자지를 수림의 보지에 넣어버리자, 수림은 그저 영후의 목에 양손을 두른 채 바짝 안겨있을 뿐이었고, 그런 수림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받치며 영후는 또다시 엄청난 허리 놀림을 시작하고 있었다. 착! 착! 착! 착!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임에도, 어찌 이리 다른 소리가 나는 건지 영후는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새 수림마저, 영후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다리가 풀리며 동시에 눈동자마저 하얗게 뒤집힐 정도로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였다. 세사람의 은밀한 교감이 그대로 멈출 수 밖에 없던 건. 딩동. 딩동딩동 딩동~! 쿵쿵쿵! “영후야!” 벨소리도 천둥소리처럼 들리고 있었지만, 뒤이어 문을 두드리며 ‘영후’를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너무나 쉽게 알아채버린 세 사람은 그야말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31부. 어른… 그 슬프고도 오묘한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꿀꺽…’ 그야말로 올 스톱이 되어버린 알몸의 세 남녀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며 ‘영후’를 부르고 있는 하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 마른 침만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런 상황에서 가장 논리적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남희였다. “감독님! 베란다로 나가세요! 어서요!” “하… 하지만…” “그렇게 하세요 감독님! 박기자님은 저희가 어떻게든 막아볼게요.” 분명, 잘못한 건 영후 자신이었음에도 남희와 수림이 합심해서 자신과 하연의 사이를 지켜주려 하는 모습을 영후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대로 옷을 입기도 전에 수림과 남희에게 등을 떠밀리며 결국 옷을 손에 든 채 베란다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영후가 베란다로 나간 걸 확인 하자마자, 수림은 티셔츠와 핫팬츠를 속옷도 입지 않은 맨몸에 바로 입어버렸고, 남희는 아예 알몸 위에 샤워가운만을 걸친 채 허리끈만을 질끈 묶었다. 그리고는 현관 앞에서 서로 마주보고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는 문을 열려는 찰나, “수림씨! 신발!” “헉!” 자칫했다면 영후의 신발을 현관에 그대로 둔 채, 영후가 없다며 금방 탄로날 거짓말을 할 뻔했던 상황을 겨우 넘기며 수림은 재빨리 베란다로 신발을 들고 달려가 던지듯 두고는 베란다 문을 닫고는 바로 두꺼운 커튼을 촤~악 치고야 다시금 현관으로 돌아왔다. 딸깍. “야 임마! 뭐 하느라…? 어…? 권코치님, 오코치님…”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리자 하연은 영후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남희와 수림이 동시에 자신을 맞이하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분명 1701호라고 했는데…’ 어젯밤 전화통화를 했을 때, 하연은 분명 영후가 1701호에서 묵는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지금 1701호에서 영후가 아닌 여자 둘이, 그것도 꽤나 허술한 차림으로 등장하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심증만으로 다짜고짜 들이닥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서기 위한 묘책을 마련하느라 하연의 머리는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영후… 없나요 여기에?” “아, 저희 감독님요?” 역시나 거짓말을 그리 능숙하게 할 줄 모르는 수림의 대답이 꽤나 굼뜨다는 것을 느낀 남희는 곧바로 수림의 말을 이어받았다. “네, 여기 없으십니다. 어제 저희 선수들하고 얘기할 게 있으시다고 나가신 뒤로는 저희도 뵙지 못했습니다.” “아, 그래요…?” 하연은 남희의 말은 귓등으로 들으면서 수림의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또한 수림이 힐끔힐끔 뒤쪽의 커튼이 쳐져 있는 베란다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이 자식, 또 어느 방에선가 술 마시고 뻗어 있겠군요. 그쵸? 아, 난 그것도 모르고 새벽부터 운전하면서 왔는데, 에구구… 혹시, 안에 마실 만 한 거 있을까요? 이왕이면 정신이 좀 번쩍 들만한 걸로다가.” 역시나 하연의 말에 순간이나마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 수림 덕분에 하연은 분명 이 두 여자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수림의 티셔츠 위로 드러나 보이는 젖꼭지와 핫팬츠의 가운데 부분에 은밀하게 갈라져 보이는 계곡의 윤곽이 더욱 심증을 굳히게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더욱 의심스러운 건 남희였다. 하연이 알고 있는 남희라면, 분명 영후가 있던 없던 저런 샤워가운 차림으로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도대체 들 뭘 감추고 있는 거야…?’ 보이지 않게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세 사람은 그러나 무표정하게 입을 여는 남희 덕분에 잠시 느슨해지고 있었다. “이리, 들어오세요.” - ‘으으… 갑자기 이게 왠 날벼락이야…’ 영후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베란다에서 옷도 미처 입지 못한 채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문이 닫힌 거실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부디 커튼을 젖히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며 입을 손으로 틀어 막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뛰어내릴 수도 없고, 하연이가 커튼이라도 여는 날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찬공기가 닿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잔뜩 긴장한 탓에 영후의 몸에선 식은땀마저 흐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영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가만… 어쩌면…?’ - “와, 요새 콘도 정말 좋아졌네요~!” 하연은 꽤나 과장스럽게 놀라는 척을 하며 은근슬쩍 콘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박기자님, 여기…” “아, 잘 마실게요.” 하연은 로보트처럼 딱딱한 움직임으로 물컵을 건네는 수림 덕분에 더욱 심증을 굳힐 수 있었는데, 욕실의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욕조 주변엔 수림의 것과 남희의 것으로 보이는 속옷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자, 하연은 거의 99% 확신을 하고는 갑자기 수림과 남희를 밀치며 다짜고짜 침실로 쳐들어갔다. “앗! 안되요!!! 거긴!!!!” 갑작스런 하연의 돌발 행동으로 수림은 급기야 비명을 지르며 하연을 잡아보려 했지만, 역시나 하연이 더 빨랐고, 이내 침실로 들어가는 하연을 바라보던 남희는 좀 전의 하연보다 더욱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침실로 뛰어들어온 하연은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바라보며 이제는 확실한 물증을 찾아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고는 CSI 수사대가 된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시트를 들춰가며 증거를 찾기 시작했고 그리 오래지 않아, 마치 오줌을 싼 것만 같이 푹 젖은 시트의 한 부분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건…!’ 하연은 시트를 들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분명 소변은 아니었다. 때문에 하연은 시트를 들고 일어나 어느새 뒤에 다가와있는 수림과 남희를 바라보았다. 이 액체의 정체가 뭐냐고 묻는 얼굴로. “바… 박기자님, 그건요…” “제겁니다.” “!!!” 하연은 남희의 돌발 발언에 얼굴이 일그러져갔고,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려던 수림은 갑자기 남희가 솔직하게 털어놓자 그만 다리에서 힘이 풀려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큰일났다…’ 하지만 하연은 어쨌든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 젖은 시트는… 권코치님이… 이렇게 만들었다… 이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후…” 역시나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하연의 모습을 보고, 남희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꽤나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윽고 결심한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수림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하연에게 입을 열었다. “실은, 저와 수림씨… 서로 사랑하는 사이거든요.” “뭐… 뭐라구요…?” 정말 엄청난 비밀을 발설해버린 남희 덕분에 하연의 큰 눈은 더욱 커지고 있었지만, 수림 또한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하연은 차마 남희의 말을 믿지 못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런… 그런 거짓말에 내가 속아넘어갈 것 같아요!?” “그럼…” 절대 못 믿겠다는 얼굴의 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희는 고개를 돌려 수림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다가가 촉촉한 수림의 입술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아… 아…” 그야말로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을 진하고도 농염한 키스가 이어지자, 하연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그저 한다는 말이 고작 ‘아’ 일 뿐이었다. - 철용은 꿈길을 걷는 듯 비척비척 거리며 호텔의 개방형 커피ㅤㅅㅛㅍ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 여깁니다!” 하지만, 절대 꿈이 아님을 알리는 턱수염과 콧수염이 인상적인 정장차림의 이탈리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수를 청하는 통에, 철용은 길고도 두툼한 남자의 손을 맞잡아 보고서야 이것이 진정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한국은 사람들 만큼이나 도로도 다이나믹하더군요.” 철용의 한국식 영어에 남자는 이탈리아 억양이 잔뜩 실린 영어로 답해주었다. “아 예…” “그건 그렇고, FA 요건을 충분히 갖춘 이영후 선수를 왜 바로 영입할 수 없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선약이 있으시다는 말씀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 뵙자고 했습니다만…” “그건…” 철용는 그야말로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명문 구단의, 다른 팀도 아닌 ‘인테르’의 스카우터가 공식 의향서도 아닌, 직접 영후를 관찰하고 영후의 에이전트인 자신을 만나주고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철용 자신의 커리어에도 엄청난 플러스가 될 것이었지만. ‘나야말로 그 놈을 당장 이적시키고 싶단 말이오!’ 문제는, 감독이 되어 있는 영후를 지금은 그 어떤 협상 테이블에도 앉힐 수가 없었기에 철용은 그야말로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은, 이영후 선수가 아직… 이 곳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고 하더군요. 워낙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친구라…” “아하! 그래요? 전 또… 실은 이번에 새로 부임한 저희 감독님께선 이번만큼은 꼭 이영후 선수를 영입하고 말겠다고 잔뜩 벼르고 계셔서 말이지요.” ‘이번 만큼은… 이라고…?’ 언제나 영후에게 지고 있던 마음의 빚을 또다시 인테르의 스카우터가 일깨워주자 철용의 마음은 또다시 무거워지고 말았지만,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100 퍼센트 장담할 순 없을 것 같군요.” “?” “이영후를 원하고 있는 팀은, 이번에도 당신네 팀만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언제나 협상 테이블은 열어놓고 있겠습니다. 그럼 전 선약이 있어서 이만.” 역시나 자신만만해하던 스카우터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뒤로하고는 철용은 거침없이 걸어나오며 혼잣말을 해보고 있었다. “다음 약속은, 리버풀인가…? 뭐, 그건 그렇고… 이 정도는 영후 놈에게 알려줘도 될까…?” 호텔 로비를 빠져나오며 철용은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전화번호를 눌러보고 있었다. - “아, 저… 제가 괜한…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급기야, 남희의 키스를 받던 수림이 한술 더 떠 남희의 샤워가운 사이로 손을 집어 넣으며 남희의 봉긋한 가슴을 매만지자, 하연은 그야말로 뭘 해야 할지 몰라 하며 뒷걸음 쳤고, 그야말로 기세 당당하게 들어왔던 출입문으로 지금은 도망치듯 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벨렐렐렐레… 벨렐렐렐레… 그 순간, 세 여자들을 멈칫하게 만드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출입문의 손잡이까지 잡고 있었던 하연은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벨소리 덕분에 다시 돌아섰다. 역시 남희와 수림도 잔뜩 긴장한 채로 침실에서 나왔지만, 그 둘을 지나치며 하연은 핸드폰 벨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헤맸고, 드디어 거실 쪽 베란다에서 들리는 것임을 알아차린 하연은 베란다 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단번에 걷어버렸는데, 그와 동시에 남희와 수림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 듯 했지만, 커튼이 젖혀진 베란다 테라스에는 영후의 핸드폰만이 덩그러니 놓인 채 홀로 울고 있었다. - 1701호에 몰려있는 여자들이 몽땅 베란다 테라스로 나왔을 무렵, 영후는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1702호 베란다 문을 열고 숨어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실 한편에선 미자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미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선 윤지와 혜미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된 양, 꼬옥 끌어안은 채 거실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술병 및 각종 과자봉지들이 그야말로 지뢰밭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영후는 숨소리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옷을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야말로 천둥처럼 들리는 미자의 목소리에 영후는 완전 얼어붙었지만, 이윽고 미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는 쩝쩝 입맛을 다시자, 잠꼬대였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하며 이리저리 빈 공간을 찾아 발을 옮겼는데, 바로 그때였다. 윤지의 손이 영후의 발목을 잡은 건. “헉!” 영후는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스스로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천천히 발 밑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똑바로 누워 아직도 잠이 부족해 보이는 윤지가 그러나 눈동자를 반짝이며 알몸의 영후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영후의 맨 등에는 그야말로 식은 땀이 또로록 떨어지고 있었다. “(유… 윤지야…)” 영후는 애원하는 얼굴로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윤지를 불러보고 있었지만, 윤지는 조금은 부은 눈으로 쌩긋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행동 만으로도 영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혜미와 미자가 잠들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둘이 당장이라도 깨어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윤지야… 장난치지 말고… 그만 놔줘… 응?)” 정말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는 영후의 얼굴을 바라보던 윤지는 잠깐이나마 ‘그럴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영후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반쯤 풀이 죽어있는, 남희와 수림의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자지를 바라보고는 다시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유… 윤지야!)” 결국 영후는 점점 일이 커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풀어버린 윤지는 그러나 바로 일어서서는 입고 있던 핫팬츠와 팬티를 한번에 벗어버리고는 결국 영후의 앞을, 정확히는 영후의 사타구니를 가로막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읍…!” 또다시 영후의 의지와 상관없이 잔뜩 성을 내기 시작하는 자지를 윤지는 그 작은 입으로 머금기 시작했지만, 단번에 목젖까지 닿게끔 깊숙하게도 집어넣고 있었지만, 그 상태에서 언제나 그랬듯 예쁜 눈을 해서 올려다본 영후의 얼굴은 그러나 너무나 슬퍼 보였다. 혹시, 이 남자에게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었나 싶었던 윤지는 점점 머리를 흔들어가며 ‘쭈읍 쭈읍’ 소리가 날 정도로 영후의 자지를 빨아대고 있었지만, 점점 일그러지던 표정의 영후는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만두렴… 장난은 새벽에 친 걸로 충분하잖아.” 윤지는 그제야 영후의 자지를 뱉어내고는 물끄러미 영후를 올려다 보았다. 분명, 영후는 그 밤에 윤지와 혜미의 은밀한 장난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자신들을 막지 않았던 영후가 이제 와서 윤지의 도발을 거절하는 것에 윤지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고 있었다. 혜미가 놀랄까 어쩔 수 없이 자는 척을 해야만 했던 영후의 마음도 몰라준 채. “(왜요… 그때는 되고, 왜 지금은 안 되는 건데요…?)” 자못 화가 나버린 윤지의 볼과 입술이 심통으로 튀어나오자, 영후는 그제야 무릎을 꿇은 채 윤지를 자신의 품에 가만히 안아보았다. “윤지 넌… 너무나 예쁘고 귀여운 아이야. 그런 네가 이런 어른들의 놀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려고 드는 게 걱정돼. 나중에… 네가 정말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게 된다면, 지금 이런 우리 모습들이 얼마나 미안해지겠니…” 그저 담담한 어투의 고백이었으나, 윤지는 괜히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던 윤지는 영후의 품에서 벗어나며 아직도 마음이 안 풀린 듯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쏟아내 보았다.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요? 감독님은 숫총각도 아니잖아요. 이런 짓 몇 번 더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달라져…” “뭐가요… 뭐가 달라지는데요…?” “네 마음… 그리고 내 마음이…” 영후의 마지막 말 덕분에 무겁게 가라앉은 윤지의 마음을 아는지 영후의 자지도 어느덧 수그러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어느새 잠에서 깨어있었던 혜미는 그대로 자는 척 하며 누운 채로 영후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꽤나 멀리도 떨어져 있는 현우가 괜히 생각나고 있었다. - 빙과 회사에서 납품된 아이스크림 박스를 뜯어 냉동고에 차곡차곡 넣고 있던 규식은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예의 습관처럼 인사를 하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서오… 어, 현우 아니냐?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냐? 혜미 놀러 간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아, 지나는 길에 아이스크림 생각이 나서 잠깐 들렀어요.” “원 녀석, 아이스크림이야, 저 앞 차도에 있는 대형 편의점에서 사도 될 것을, 굳이 차에서부터 예까지 걸어올 건 또 뭐냐?” “에? 아저씨…?” 현우는 규식의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인석아, 그럼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냐? 네가 어디에 사는 지는 몰라도, 그 비싼 차에 기사까지 두고 다니는 네 녀석이 부러 우리 가게까지 오곤 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원래 어른들이란 너희들보다 아는 게 조금 더 많은 법이니까.” “……” “그렇다고 내가 혜미를 네놈한테 완전히 허락한 건 아니니까 착각은 하지 말고.”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자식… 옛다!” “엇…” 규식은 아이스크림 냉동고에서 제일 비싼 콘을 두 개 집어서 현우에게 던져 주었다. “오늘은 혜미도 없는데 우리 가게에 와준 보답이다. 가서 기사 아저씨랑 나눠 먹어.”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현우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도 쭈뼛거리며 얼른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아이스크림을 정리하다 말고, 규식은 간이의자를 끌어다 놓고는 털썩 앉아 현우를 바라보았다. “왜? 또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 게냐?” “아, 아니요…” 하지만 아니라는 대답과 달리,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아 보이는 현우의 얼굴 덕에 규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스크림 박스를 단번에 뜯어 정리할 것도 없이 우르르 냉동고에 쏟아 버리고는 다시 현우를 돌아보았다. “그럼, 무슨 듣고 싶은 얘기라도 있는거냐?” “아 저기… 그게…” 짜증이 날 정도로 뜸을 들이는 현우의 모습에, 평소 같으면 버럭 소리부터 질렀을 규식이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좋아하는 녀석인 만큼, 규식은 애써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저씨… 실은, 제가 혜미를 더 좋아하게 된 거 같아서요.” “풉… 푸하하하!” 실로 대단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 싶었던 규식은 그저 어린아이의 사랑고백이 튀어나오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순진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자면 꽤나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었다. 때문에 규식은 간단명료하게 답해 주었다. “요녀석! 용기는 가상하다만,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좋아하는 여자 부모님한테 와서 의향을 묻고 하는 건 좀 웃기는 거 아니냐?” “그치만…” “너희의 문제는 너희가 해결해가면 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해결하다 보면 너희도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을 거다.” “……” 꽤나 진지한 규식의 이야기에 현우는 수긍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하나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어 보였고, 결국 현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일… 제가 어떤 아이인지, 또 제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 드린 대도 그렇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 현우의 꽤나 직접적인 공격에, 규식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만에 하나 현우의 입에서 뭔가 엄청난 얘기라도 터져 나오게 된다면, 솔직히 규식도 어찌 대답을 해줘야 할지 난감해 질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규식은 먼저 선수를 쳤다. “야 임마, 지금 니네들이 벌써 그런 걸 걱정할 나이냐? 너 임마, 군대도 안갔다 왔지? 그리고 너도 혜미도 대학 졸업은 커녕, 이제 1학년 이잖아. 요새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거 몰라? 게다가 남녀 사이란 건 무릇 오늘 다르고, 또 내일이 다른 거야. 그러니 벌써부터 혜미 책임질 걱정하지 말고, 우선은 즐겁게 만나고 즐겁게 사귀어 봐. 그리고 그렇게 지내다가 시간이 흘러도 너희들 마음이 변하지 않게 되면, 그 때가 돼서 걱정해도 늦지 않아.” 역시나 현우는 자신의 입장을 밝힐 기회를 잃어버리자, 조금은 낙담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런 현우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규식은 재빨리 덧붙여 말해 주었다. “그리고 너희 부모님들이 어떤 분들인진 모르겠지만, 그런 건 난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너희 둘만 좋다면, 그걸로 된 거야. 난, 아줌마들이 푹 빠져있는 삼류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유치하게 반대나 하는 그런 어른은 아니니까. 이 정도 답변이면 만족하겠냐?” 그제야 우울해질 뻔 하던 현우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고, 역시나 규식도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인석아 아이스크림 다 녹았겠다. 이리 내.” 규식은 현우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다시 냉동고로 던져 넣고는 다시금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두 개 집어 현우에게 건네줬다. “오전인데도 벌써 더워지려고 하는 구나. 녹기 전에 어서 빨리 가봐라. 그리고 앞으론 괜한 걱정 사서하지 말고, 알았지?” 규식은 이내 현우의 등을 떠밀며 가게 밖으로 내보냈고, 현우는 그럼에도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기쁜 마음으로 큰 길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규식은 현우가 멀어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다가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해 보았다. “휴우… 벌써 저렇게 컸구나. 저 녀석이나, 혜미나… 결혼시켜달라고 생떼를 부릴 날이 머지 않았군.” - 겨우 윤지를 다독거린 후에야 영후가 옷을 입고 조심스럽게 1702호를 나가고 나자, 혜미는 몸을 일으켰다. “어… 혜미야… 너… 깨어 있었던 거야?” 혜미는 윤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윤지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줄래?” “무슨 말이야…?” “감독님하고 권코치님, 오코치님. 그리고 너까지… 단순한 내 머리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거든?” “……” 윤지는 그제야 혜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 하나에 다수의 여자들이 매달려 있는 상황이 혜미로서는 분명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윤지야 말로 이런 것들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혜미에게 어떤 말부터 해줘야 하는 것인지 조금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혜미도 언젠가는 알게 될 ‘어른들의 이야기’를 윤지는 해줄 수 밖에 없었다. “너, 우리나라에 있는 커피ㅤㅅㅛㅍ이 몇 개인지 아니?”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윤지의 얼굴을 보며 혜미는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윤지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충 2만 7천개 정도 된다더라. 그럼 우리나라에 있는 모텔은 또 몇 개인지 아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지, 혜미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역시나 윤지는 곧바로 스스로 답을 말해주었다. “모텔은 커피ㅤㅅㅛㅍ보다 많은 3만개 이상이래.” 그제야 혜미는 윤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알 것도 같았다.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야. 다만, 우리가 쉬쉬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해주고 싶은 거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는 나도 알겠어. 하지만, 하지만 이런 건 절대 옳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 “맞아, 네 말대로 그런 게 옳은 건 아니야. 하지만, 사람은 가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을 때도 있어.” “……” “너, 오코치님이 우리 감독님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또 지금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알…아 나도 그건. 그치만 지금은 헤어진 거잖아. 게다가 권코치님까지 그러는 건…!” “그건, 권코치님 마음인 거야. 오코치님이 감독님을 좋아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주체할 수 없었나보지… 감독님을 좋아하게 된 자신의 마음을…” 하지만 윤지 자신도 그랬노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그럼 그렇게 셋이서… 그러기로 한 거라는 얘기야? 감독님도, 코치님들도?” “그야, 나도 거기까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너무 착해서 탈인 우리 감독님에게 그 예쁜 여자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면 절대로 뿌리치지 못했을 거라는 건, 혜미 너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니?” 그랬다. 그렇게 착한 남자가 하물며 여자들의 부탁을 무시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치만 정말 코치님들이 그러기로 한 걸까? 앞으로도?” “그야… 나도 모르지. 근데, 감독님하고 코치님들하고 그렇고 그런 게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우선 넌, 현우부터 먼저 지키고 봐야 하지 않겠니?” “윽! 그녀석하고 난… 아직 그런 사이 아니라니깐!” “아아, 아무것도 아닌 사인데도 막 호텔도 같이 가고 그러는 구나? 흐응…” 결국 역으로 궁지에 몰려버린 혜미는 ‘아니야! 아니라고!’라는 말을 몇 번이고 외치며 욕실로 뛰어들어가 버렸고, 그 덕에 침을 홍수처럼 흘리며 자고 있던 미자가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입가가 하얗게 변해있는 미자에게 윤지는 곱게 눈을 흘겨주며 대답해 주었다. “뭐,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우선 그 침 좀 닦을래?” - 콘도 내에 있는 아쿠아 월드 입구 옆에선 하연의 수영복을 고르기 위해, 하연보다도 남희와 수림이 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굳이 수영복을 구입할 이유가 없다는 하연에게, 빌려 입는 수영복은 절대 예쁘지 않다는 수림의 의견에 남희까지 가세하자 어쩔 수 없이 하연은 수영복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거 어떠세요? 박기자님이 입으면 진짜 예쁠 거 같아요.” 수림이 먼저 오렌지색 비키니를 집어 들고는 하연의 몸에 대보자, 하연은 꽤나 난감해했다. 비키니자체도 어색할 지경이었는데, 수림이 골라준 것은 팬티도 그렇고 브래지어도 무척이나 면적이 작은 것들이었기에 만약 그걸 입는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 차라리 덜 야해 보일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저기, 그건 좀…” 때문에 겨우 수림의 안목을 거절하던 하연은 그러나 남희가 골라든 수영복을 보고는 이 두 코치들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고 있었다. 게다가 남희가 집어 든 수영복은 그야말로 이름만 수영복이었지 가슴과 팬티의 결정적인 부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끈으로 되어서, 역시나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을 수영복이었기에 하연은 역시나 겨우 마다하고 결국, 일반적인 검은색 원피스를 골라 들었지만 수림과 남희의 짜고 치는 이야기에 하연은 스스로 비키니 진열대 쪽으로 다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권코치님도 비키니 가지고 오셨죠?” “네. 감독님께서 좋아하실 거 같아서 말입니다. 오코치님도 비키니죠?” “그럼요! 수영복 하면 역시 비키닌걸요? - 한참을 야외 풀장에서 아이들과 비치볼을 주고 받으며 놀아주던 영후는 슬그머니 빠져 나와 따뜻한 물이 그득한 스파에 몸을 담가보았다. “아… 좋다…” 밤새 피곤했을(?) 영후의 긴장된 몸 상태가 따뜻한 물 덕분에 잠시나마 이완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호사를 그닥 길게 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시 감고 있던 눈앞엔 언제 와 있었는지 하연과 남희, 그리고 수림이 눈부신 수영복 차림으로 화보 촬영이라도 하듯 나란히 자신의 앞에 서 있었으니까. “여기 계신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잖아요.” 하늘색의 스포티한 탱크 탑과 핫팬츠형 비키니를 입고 있던 수림이 가장 먼저 반가워하며 스파에 들어왔고, 이윽고 펄이 들어간 검은 비키니를 입은 남희도 살짝 눈인사를 하며 스파에 들어왔는데 하의에 랩 스커트를 덧입고 있어 조금 아쉬웠지만 어깨끈이 아닌 목에 감는 이른바 홀터넥 스타일의 상의 덕분에 더욱 가슴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안경이 아닌 렌즈를 착용한 얼굴은 정말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야, 이영후!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냐?” 역시나 마지막으로 하연이 등장하자 영후는 바짝 긴장하며 시선을 허공으로 향하려 했지만, 어느새 준비했는지 밝은 형광색의 비키니를 입고 있는 하연의 몸이 눈에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게, 하연이 입고 있는 수영복은 정말 수영복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천의 사용량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가슴은 겨우 젖꼭지만을 가려주며 전체적인 윤곽은 겉으로 드러나 있던 데다, 하의 또한 엉덩이의 볼륨이 커진 덕분에 앞부분의 보지 둔덕이 더욱 타이트해져서 너무나 야해 보였다. “내, 내가 뭘…?” “어쭈, 내가 뭘? 지금도 내꺼 몰래 보고 있잖아! 아니지 대놓고 보고 있구만.” “으… 말을 말자.” 결국 꼬리를 내린 건 영후였고, 그런 둘을 재밌게 바라보던 남희는 수림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일어섰다. “감독님, 저흰 잠깐 아이들에게 가 보겠습니다.” “아니 왜요? 그냥 애들 편하게 놀도록 놔두죠.” “그러게요… 아얏!” 남희의 속마음도 모른 채 영후의 말에 동의하던 수림은 남희가 옆구리를 살짝 꼬집어주자 깜짝 놀랐고, 남희는 안 그런 척 하며 말을 이었다. “아, 물론 그럴 겁니다. 다만, 아이들 주변에 보호자가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럼, 제가 가볼게요. 코치님들은” “아닙니다. 박기자님도 와 계신데 여기서 푹 쉬고 계세요. 저희도 아이들 조금 지켜보다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결국 남희는 가기 싫어라 하는 수림의 팔을 잡아 끌며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 “권코치님, 그냥 애들 놀게 놔두면 안되요? 우리는 우리끼리 놀면 되잖아요.” 볼멘소리를 하는 수림에게 남희는 빙긋 웃으며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했다. “아시잖습니까. 감독님께서 박기자님을 좋아한다는 걸. 괜히 우리가 있으면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래두… 참, 그건 그렇구 권코치님은 감독님하고 언제부터 그런 사이셨어요? 새벽에 저는 진짜깜짝 놀랐잖아요!” 수림은 새벽에 영후의 자지를 입에 머금은 채 남희와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을 떠올리고는 히죽 웃으며 물었고, 갑작스런 수림의 질문에 남희는 또다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그건… 그냥 궁금했을 뿐입니다. 남자의 몸에 대한 것들이.” “아항, 그래서 그 궁금증을 감독님께서 풀어주셨구요? 헤헤… 그럴싸한데요?” “저, 정말입니다! 저는 그저…” “아아,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신,” “?” “나중에 한번만 더 해주실래요?” “네? 뭘…?” “아까, 박기자님 앞에서 해 주셨던 거요. 키. 스.” “아…” 남희는 그제야 급한 마음에 정신 없이 수림의 입술에 했었던 키스를 떠올리자 비키니를 입고 있는 온 몸이 다 붉어질 정도로 창피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수림은 그런 남희의 팔짱을 끼며 꽤나 다정하게 아이들이 있을 풀장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 하연은 영후와 나란히 머리만 내놓은 채 멀어지는 남희와 수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축구부 코치라고 하기엔 너무들 예쁜 거 아니야?” “그럼, 예쁘고 말고… 윽!” 남희와 수림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하연의 떠보는 질문에 답을 해버린 영후는 곧장 이어진 하연의 복부 공격에 숨이 막히는 공포를 체험할 수 있었기에 결국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 붙였다. “켁켁! 그치만, 너보다 예쁜 사람은 없어.” “어쭈구리? 이영후 많이 발전했다~ 그런 접대성 멘트도 날릴 줄 알고.” “접대는… 진짜 그렇다니까. 내가 이래봬도 안 예쁘면 안 좋아한다. 네가 그나마 예쁘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지.” “흥!” 괜히 툴툴거리는 척하고는 있었지만, 하연은 꽤나 기분이 좋은 얼굴이었다. 남희와 수림의 관계(?)를 알아버린 뒤라 더욱 마음이 편해져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영후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을 연인으로 대해주기 시작해서 더 그런 것도 같았다. “참, 아까 네 핸드폰으로 구철용 선수, 아니 에이전트 한테 전화 왔었다.” “어어, 뭐라셔?” “인테르 쪽 사람이 꽤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양이더라. 그리고 리버풀 있지? 그곳 사람들하고도 미팅이 잡혀있다고 하더라고.” 리버풀. 하연의 입에서 ‘리버풀’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영후는 자신의 꿈꾸던 미래에 다시금 한 발 다가섰다는 기쁨 보다는 그 옛날 하연과 단 둘이 갔었던 영국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넌 어때? 어느 팀으로 가고 싶니?” 역시나 직업의식을 버릴 수 없었던 하연은 은연중에 취재하듯 영후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영후는 대답 없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물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야, 이영후. 이건 중요한 문제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를 더 좋은 환경에서 할 수 있게 된거라고!” 하지만 영후는 여간 해서는 물 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하연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기다리려고 했지만, 영후의 얼굴이 향해있는 방향이 뭔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의 가슴을 대놓고 훔쳐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하연은 급기야 물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영후의 머리채를 잡고는 그대로 물 밖으로 끌어올렸다. “야 임마! 이런 상황에서 자꾸 장난만 칠래?” “푸하! 난 어디든 좋아! 네가 나하고 함께 가 준다면!” 그야말로 황당한 프러포즈였다. 여자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있고, 남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픔을 호소하는 표정으로 돌발 프러포즈라니. 정말이지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 하연은 농담인 것만 같아 재차 물었다. “뭐? 지금 너 뭐라고 했어?” “거참, 영어는 그렇게 잘하면서, 한국말은 못 알아 듣니? 너만 좋다면 나도 좋다고!” 분명 영후의 입에서 하연을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에 하연은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표정에서 현실로 돌아오며 점점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 “셋! 둘! 하나! 점화!” 사방이 어두운 바닷가 백사장에서 푸릇푸릇한 수영복 차림의 소녀들이 원을 그리며 선 채로 일제히 입을 모아 소리치자, 그 원의 가운데 차곡차곡 쌓여있던 장작들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고, 장작더미들은 이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격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여대 아이들은 모두 정말 아이들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후와 하연도, 남희와 수림도 모두 한껏 낭만적인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결국 휴가의 마지막 날인 만큼, 남희가 술을 허락해 준 덕분에 아이들은 자신들 앞에 놓여있는 종이컵에 한가득씩 술을 채워놓았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걸 윤지가 주도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자자, 다들 잔들 채웠죠? 그럼 잔을 높이 들어주시고. 감독님! 한 말씀 해주세요!” 윤지가 한껏 분위기를 띄우며 영후를 부르자, 영후는 몇 번 사양도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여러분들 고생 많았습니다. 게다가 잠시 외도를 하느라 모든 걸 함께 해주지 못해서 참 미안했는데,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까 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었던 거 같네요. 이게 다 우리 미녀 코치님들 덕분일 텐데 우선 코치님들께 박수 한 번 보내드릴까요?” 역시나 아이들은 남희와 수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고, 그에 남희와 수림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이제 축구선수권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알고들 있죠? 여러분들 하나하나가 저에겐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거. 그러니까 부디 대회가 끝날 때까지 한 명도 다치지 말고 건강했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자, 모두들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들 짧지만 따뜻함이 서려있는 영후의 말에 감동 받은 선수들 모두는 밤하늘을 울리도록 우렁차게 건배를 외치고는 잔에 있는 술들을 단번에 비웠고, 모닥불의 붉은 빛을 받으며 더욱 멋진 얼굴이 되어가는 영후의 얼굴에 남희와 수림은 또다시 꿈 같은 얼굴이 되었지만, 그들보다도 더욱 그윽한 눈으로 영후를 바라보는 건 다름아닌 하연이었다. - “에구구, 요새 애들답지 않게 술도 어지간히 못 마시네요.” 몇몇 취한 아이들을 그나마 멀쩡한 아이들과 함께 모두 방으로 옮기고 나서 수림은 허리, 어깨를 주무르며 1701호로 들어가려 했지만, 남희는 그런 수림의 팔을 잡아 세웠다. “어? 왜 그러세요 권코치님?” “오늘은, 우리… 아이들 방에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아…!” 그제야 수림은 남희의 뜻을 알아 차리고는 바닷가에서 영후를 바라보던 하연의 눈빛을 떠올리며 결국 남희를 따라 1702호로 들어가려 했지만, 1701호 내부에 남겨진 영후와 하연 그 둘이 만들어낼 밤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 수림은 선뜻 문을 닫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32부. 내가… 처음이니…?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똑똑. “아무도 없으니까 들어오지 마쇼!” 여전히 손발이 묶인 채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근명은 노크소리가 들리자 퉁명스럽게 소리질렀지만, 문이 열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박… 기자님? 뭐, 뭐에요? 선배한테 갔던 거 아니었어요?” “뭐, 그게… 좀 그렇게 됐어. 그건 그렇고 넌 좀 어때?” “왠 종일 이렇게 묶여 있으면 어떨지,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그러게… 미안…” “에? 박기자님… 무슨 일… 있던 거에요?” 몸은 이곳에 있으나 정신은 여전히 다른 곳에 두고 온 듯한 하연의 얼굴을 보며 근명은 역시나 바보 같은 선배가 평소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보며 물었지만, 하연은 근명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너하곤 너무나 달라서… 그래서 나… 영후한테 실망한 거 같아…” 뭐가 자신과 다르다는 건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근명이었지만, 묻지도 않았음에도 간밤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하는 하연을 바라보며 근명은 꽤나 당황하기 시작했다. - “애들이 어쩜 그렇게 다들 예쁘고 착하니?” “그렇지?” 숙소로 돌아와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영후와 하연은 소파에 마주앉은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빙긋 웃어보았다. “그래서 더 실감이 안나. 저런 아이들이 그렇게 거친 축구를 하려 한다는 게.” “실은… 나도 그래. 내 욕심에 너무 일을 크게 벌인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때? 정말, 영후 네가 공언한 대로 저 아이들 이번 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일을 낼 수 있을까?”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자신 없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꽤나 재밌는 표정으로 변하는 영후를 하연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였다. “분명한 건, 저 녀석들은 그 어떤 선수들보다 즐겁게 놀아 줄 거란 거지. 난 그거면 족해.” “그치만…” 영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하연은 그런 우유부단한 영후의 모습에 조바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분명 한국여대가 이번 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못한 다면, 해외 이적은 커녕 영후는 선수로도 돌아가지 못한 채, 몇 번이고 우승을 위해 이 아이들과 함께 할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영후는… “걱정하지마 하연아. 어찌됐든, 너하고 나 이렇게 둘이 있을 수만 있으면 그걸로 되는 거잖아… 안그래?” 그야말로 늘 고대하고 기대했던 말이, 이제야 영후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어쩐지 하연은 손톱만큼도 기쁘지 않았다. 때문에 하연은 영후가 부상을 당했던 그 날부터 해왔던, 더 이상 영후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마음을 지금 이 순간 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이야기가 이내 턱밑까지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 순간 테이블 한 켠에 놓여있던 영후의 핸드폰이 하연의 입을 가로막았다. 벨렐렐렐레… 벨렐렐렐레… - ‘어, 권코치님? 왜 안 들어 오시고 전화를…?’ 1702호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남희의 주변엔 수림을 비롯해 윤지와 혜미, 그리고 미자까지 잔뜩 머리를 들이민 채 휴대폰 속 영후의 목소리를 들으며 킥킥거리고 있었지만, 남희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덤덤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감독님 죄송합니다만 옆에 박기자님 계십니까?” ‘예… 그런…데요…?’ “그럼 잠시만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예… 잠깐만요. (하연아, 전화 좀 받아볼래? 권코치님이신데…)’ ‘(나? 날 왜?) …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남희는 하연이 전화를 받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수림에게 핸드폰을 넘겼고, 수림은 장난끼 넘치는 목소리로 와락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박기자님! 방해 안 할 테니까요, 오늘은 꼭 감독님하고 둘이서 오붓한 밤 보내세요!” 딸깍. 그렇게 수림이 후다닥 전화를 끊고 나자, 1702호실은 그야말로 떠나갈 듯 웃음바다가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남희, 수림 그리고 윤지는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 “뭐랬는데?” 영후는 한마디도 제대로 못한 채 끊겨버린 전화를 건네는 하연에게 물었지만, 하연은 괜히 귀까지 빨갛게 변한 채 곧바로 욕실로 뛰어들어가 버렸고, 결국 홀로 남겨진 영후는 그저 뻘쭘하게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반대로 욕실 문을 잠근 채 양변기 뚜껑을 덮고는 무릎을 가슴에 품은 채 올라앉아있던 하연의 가슴은 말 그대로 콩닥콩닥 뛰어대기 시작했다. ‘오늘이… 지금까지 꿈꿔왔던 그런 밤이 되어줄까…?’ 그야말로 하연이 지금 이 순간이 오길 얼마나 꿈꿔왔었는지 영후는 모를 것이었다. 결혼은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사랑을, 그리고 섹스를 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분명 그 상대는 영후이길 바래왔었고, 그랬기에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올 수 있었다. 물론 영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순간순간 인내의 끈을 놓으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근명 같은 남자에게 기대어 보기도 했지만 언제나 결론은 ‘영후’였었다. 그러니, 잠시 후 욕실을 나서게 되면, 욕실에서 나가 영후의 품에 안기고 나면, 그 이후엔, 오늘 이후의 모든 것들을 저 밖에 홀로 앉아있을 착한 남자는 다 알아서 해줄 것이었다. 결국 마음 속으로 결심을 내린 하연은 조심스럽게 옷을 벗고는 샤워기의 밸브를 틀어 온 몸을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한편, 욕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자 영후는 다시 한 번 욕실을 바라보고는 이내 핸드폰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베란다 테라스로 걸어나간 후 베란다 문을 닫았다. -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고 있던 여자들 사이로 남희의 핸드폰 벨소리가 끼어들자 냉큼 수림이 먼저 집어 들어 발신자를 확인해보았다. “어? 감독님께서…? 쉿! 쉿! 여보세요?” ‘아, 수림씨 저에요.’ “네, 알아요.” ‘하연이한테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저러는 건가요?’ “아, 그게요…” 역시나 수림이 조금 당황스런 얼굴로 남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을 짓자, 이번엔 남희가 얼른 전화를 건네 받고는 베란다 테라스로 나가서는 전화를 받았다. “감독님, 저 권코칩니다.” ‘네, 아니 다들 오시지는 않고서… 또 하연인 왜 갑자기 욕실로 도망가질 않나… 저만 빼놓고… 뭐가 있긴 있는 거죠?’ 순간, 전화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한 목소리가 겹쳐 들리자 남희와 영후는 동시에 서로가 서있는 베란다를 돌아보았고, 그제야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멋쩍게 잠깐이나마 웃어보았지만, 그래도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서로를 바라보면서… “실은, 박기자님께 오늘 수림씨하고 저는 아이들 방에서 같이 있겠노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에에?! 아니 갑자기 왜요?’ “그야… 두 분 오붓하게 보내시라는 뜻에서 제가 그러자 했습니다.” ‘나, 남희씨…’ 너무나 미안해하는 영후의 얼굴을 보며 남희는 슬쩍 뒤돌아 거실에서 희희낙락인 수림과 아이들을 바라보고는 다시금 영후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독님, 미안해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처음부터, 전 감독님을 소유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도, 근심도 하지 마시고 박기자님… 꼭 안아주십시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과연 영후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길 바라고 있었던 건지, 남희는 스스로의 마음을 읽을 수조차 없었기에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함께 하늘에 떠 있는 조금 일그러진 달을 보며 겨우 마음을 다잡고 있었고, 그런 남희를 끝없이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영후는 결국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커다랗고 슬퍼 보이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달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 끼익. 샤워기 밸브를 잠그고 하연은 타월로 몸을 닦다가 벽면에 붙어있는 뿌옇게 김이 서려있는 반신거울을 손으로 원을 그리며 닦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의 하연과 그녀의 나신이 어렴풋이 투영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하연… 괜찮은 거지?’ 하연은 평소와 많이 다른 느낌의 자신을 마주하고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우유 빛깔을 머금은 그녀의 피부는 그러나 더욱 투명하게 변하며 확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그야말로 처음으로 남자에게 보이게 될 아껴두었던 가슴은, 떨리고 떨리는 마음을 대변하듯 미약하게나마 계속 떨리고 있었다. 때문에 하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위로 올려 가슴에 얹어보았지만 이내 심장에서부터 두서 없는 두근거림이 그대로 전해졌기에 하연은 마치 뜨거운 것에 데인 양 손을 황급히 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 한편 영후는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어쩌지…? 하연이를… 이제는 정말… 붙잡아도 되는 걸까…?’ 정말 이상하게도 하연과 단 둘이 남겨져 있는 공간에서 근명과, 남희, 수림, 그리고 윤지까지 오버랩 되자 영후는 점점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이런 느낌은 이제껏 처음 느껴보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른 채 수림과 나눴던 섹스때도, 탐구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가졌던 남희와의 섹스때도, 그리고 엉겁결에 해치워버린 윤지와의 섹스때도 이런 기분은 느껴진 적이 없었더랬다. ‘그런데 하필 왜 지금…?’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을 채 다스리기도 전에 욕실에선 물소리가 잦아져버렸고, 이내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에 결국, 영후는 정리도 안된 생각과 마음을 일거에 멈춰버릴 수 밖에 없었다. 딸깍. 이윽고 욕실 문이 열리며 하연이 거실로 나오자 영후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나마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 샤워가운이 아닌 샤워타월로 가슴께까지만 가려 투명한 어깨선과 함께 늘씬한 다리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하연의 모습에 영후는 그저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기 때문인지, 여자로 보일 때 보다는 친구로 보일 때가 더 많았건만 지금의 하연은 말 그대로 ‘완벽한 여자’였기에 전혀 무방비 상태로 방심하고 있었던 영후의 아랫도리는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영후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 지 하연은 여전히 발그레한 볼을 한 채로 영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 전화 말야…” “으응? 어어…” “오늘 코치들… 아이들 방에서 잔다고…” “아 그, 그래…” 영후는 이미 남희와의 통화(?)로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스토린지 이해하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든지, 아니었든지 는 이미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영후의 입에선 의외의 대사가 튀어나왔기에 하연은 그제야 영후를 똑바로 바라보고 시작했다. “하연아, 그렇다고 굳이… 이럴 필요 까지는…” “왜…? 이젠 항상 내 곁에 있어준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 이제… 이래도 되는 거잖아… 아니야?” “그건… 그건 그런데… 그렇긴 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러면, 너…” “걱정…돼? 내가?” 하연은 자신의 물음에 결국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후를 바라보며, 욕실에서 했던 결심이 더욱 확고해 지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하연은 들릴락말락 한 목소리로 영후에게 부탁을 했다. “불 좀… 꺼줄래?” “어… 그, 그래.”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영후가 거실의 불을 끄자, 푸른 달빛이 거실로 스며들며 하연의 눈부신 반라를 더욱 빛내주기 시작했지만, 영후는 차마 소파로 돌아오지 못한 채 스위치가 달려있는 벽 쪽에 그대로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질까봐… 하지만, 영후를 등진 채 서 있던 하연은 어둠 속 달빛 덕분에 용기를 얻었는지 이내 천천히 타월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고, 그러자 그 두툼한 타월은 힘을 잃고 하연의 발치로 스륵 흘러내렸다. “하… 연아…” “나… 역시 좀 부끄러운 거 같아… 그러니까… 와서 안아 주지 않을래?” 영원히 벽에 붙은 채로 서 있을 것 같던 영후는, 그러나 하연이 주문을 걸자 마법에 걸린 듯 천천히 하연의 뒤로 다가서기 시작했고, 점점 영후가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하연의 심장은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 베란다에서 전화 통화를 끝내고 들어온 남희의 얼굴엔 좀 전의 웃음기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야말로 사랑으로 속앓이를 하는 전형적인 표정으로 뒤바뀌어 있다는 것을 수림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이 겪었던, 영후를 보내줄 수 밖에 없는 그 때와 한치도 다름이 없었던 표정이었으니까. 결국 수림은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남희의 술잔에 자신의 것을 ‘쨍’하고 맞부딪혀 주고는 애틋한 얼굴로 남희를 바라봐주었다. 어쩌면 수림은 자신보다 남희가 훨씬 더 가슴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나마 사귀어 볼 뻔도 했었지만, 남희는 그런 과정조차 거치지 못했을 뿐더러 정작 자신의 마음 속에 영후가 가득 들어차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버린 후였기에 결국은 처음처럼 그저 영후를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을 테니까. 한창 즐겁던 술자리가 이런 저런 가슴앓이를 하는 남희와 수림 덕분에 한숨만이 가득 차자 보다 못한 윤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에이 진짜, 다들 그렇게 초상집 분위기만 내고 있을 거에요?” “윤지야…” 코치들에게 거의 막 대하는 듯한 윤지의 태도에 혜미는 눈이 똥그래지며 놀라고 있었지만, 윤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란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남희와 수림을 돌아보며 ‘왁!’ 소리질렀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가서 보면 될 거 아니에요!”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런 윤지의 행동과 말에 남희와 수림은 그저 눈만 깜빡 거릴 뿐이었다. - 하연은 자신의 어깨를 스치는 영후의 손길에 흠칫 놀란 것도 같았지만, 이내 마음처럼 따뜻한 체온이 자신의 두 어깨를 감싸자 하연의 떨리던 몸은 거짓말처럼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연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영후에게로 천천히 돌아 섰고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의 왼쪽 눈동자를, 혹은 오른쪽 눈동자를 한없이 바라보며 그 속에 담겨있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언제 벗어버렸는지 영후 또한 자신처럼 알몸임을 알게 된 하연은 영후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다행이다…” “응?” “나만 벗고 있었음… 좀 창피했을 거야.” 역시나 연약한 여자가 되어있던 하연의 속삭임에 영후는 하연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겨주고는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자 더욱 영후의 몸에 밀착되던 하연은 그러나 자신의 배 언저리에 느껴지는 거대하고도 뜨거운 영후의 물건을 느끼고는 아주 조금쯤 몸을 부르르 떨었던 것도 같았다. “이거… 뜨거워…” “어? 어어…” 잠시 하연의 이야기를 이해 못했던 영후는 그러나 바로 이해하고는 답을 주었지만, 하연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그러니까…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응…” “이렇게 커다랗게 된 것도?” “응…” “이렇게 뜨거워 진 것도?” “맞아…” 자신 때문에 영후의 물건이 흥분한 것임을 확인한 하연은 그것만으로도 감동이었던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는 영후의 입술을 급하게 찾기 시작했고, 영후는 그런 하연을 부드럽게 맞이하며 입술을 내 주었다. “하음…” 시작은 하연이 했으나, 주도권은 어느새 영후에게로 넘어가버린 키스는 그야말로 달콤하다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의 황홀감을 두 선남선녀에게 선사해주기 시작했다. 혀가 엉키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해 질 수 있다는 경험을 처음 해보고 있는 하연은 그간 했었던, 근명과의 키스나, 혹은 영후에게 해줬었던 것들은 애들 장난과도 같았던 것이었음을 그 와중에도 깨닫고 있었지만, 어느새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영후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등을 타고 내려가 잘록한 허리를 감싸자 맥놓고 있던 하연의 손 또한 천천히 영후의 목을 감싸 주었다. 정말 한참이나 이어지던 격정적이고도 부드러운 키스가 잠시 멈춰지자, 하연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능숙한 걸까…’ 하지만 그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영후의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와 눈, 그리고 코와 양쪽 뺨을 지나 귓불에 머물렀다가, 어느새 목덜미로 이어지자 하연은 언제 궁금증을 가졌었냐는 듯 또다시 마냥 녹아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어느새 따로 움직이기 시작한 영후의 손 하나가 옆구리를 타 오르며 봉긋한 가슴에 안착하자 하연의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격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흡!” 하지만, 영후의 또 다른 손은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허리에서 서서히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다 다시금 조금 올라오더니 동그랗고 예쁜 하연의 엉덩이에 자리를 잡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기에 하연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넘어지지 않으려 영후의 목에 두른 팔에 애써 힘을 실어보고 있었지만 그도 잠시, 목덜미를 탐하던 영후의 입술이 어느새 어깨 선에 수 없는 키스를 하다가 가슴과 가슴이 만들어 낸 천혜의 계속에 이르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여… 영후야…” 때문에 애타는 목소리로 영후를 불러보는 하연이었지만, 영후는 그 대답으로 점점 솟아 오르고 있는 하연의 가슴을 한 입 베어 무는 것으로 대신했기에, 하연은 결국 까무러치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아흑!” 결국, 영후에게 젖가슴을 물린 채로 하연은 뒷걸음질 치며 겨우 소파에 앉을 수 있었고 그러자 잠시 가슴에서 입을 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영후의 멋진 몸과 함께 엄청나게 커진 채로 밤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그것’이 그대로 눈앞에 드러났기에 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려보았다. “엄마야!”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은 얼마 안돼 금새 풀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새 무릎을 꿇은 영후가 하연의 매끈한 배에 몇 번이고 뽀뽀를 퍼붓기 시작했으니까. 게다가 오목한 무릎과 늘씬한 허벅지에 마저 끈적하고도 따스한 키스가 이어지자 하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영후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가 놓는 것 뿐 이었다. “하아…” 그러다 문득 영후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며 모든 행위가 멎어버리자, 하연은 그간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어 봤지만 이상하게도 영후의 몸이 그새 그리워지기 시작했기에 거의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 순식간에 하연을 번쩍 안아 든 영후가 놀란 표정의 하연의 입에 다시금 짧지만 강렬한 키스를 해주고는 침실로 들어가자 하연은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그완 반대로 베란다 밖에서 숨 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반짝이는 여덟 개의 눈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각각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그야말로 해먹 (hammock은 기둥 사이나 나무 그늘 같은 곳에 달아매어 침상으로 쓰는 그물이다. 페루와 브라질 원주민이 처음 사용하였으며, 오늘날은 야외에서 많이 사용한다. 역자 주)에 누운 것보다도 훨씬 편안한 영후의 품에 안긴 채 하연은 정말 그림 같은 영후의 얼굴을 살며시 바라보며 괜히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이내 부드럽게 침대에 눕혀지자마자 다시금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영후의 키스 덕분에 하연은 전신이 녹아 내리는 기분을 느끼며 부끄럼 따위는 벌써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여자가 창피함조자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보듬어 주는 건지 하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입술과 양손은 완전한 독립체처럼 움직이며 하연도 알지 못했던 하연의 몸에 감추어져 있던 은밀한 느낌들을 되살려주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하연은 이러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겨드랑이를 더듬는가 하면 어느새 종아리를 매만져주고 있었고, 손가락을 입안 가득 넣어 빨아주는 가 싶더니 어느새 배꼽을 혀로 간지럼을 태우는 영후의 일사분란 함에 하연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순간 너무나 은밀한 곳에 참으로 생소한 느낌이 가해지자 하연은 다급한 나머지 다리를 오므려보려 했지만, 이미 영후의 머리가 자리잡고 있었기에 어쩌지 못하고 그저 영후의 머리만을 손으로 잡아 보았지만, 그 손짓이 밀어내려는 것인지 끌어들이는 것인지는 하연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키스를 하듯, 자신의 보지에 깊숙하게 혀를 넣은 영후는 너무나 맛있다는 듯 ‘쭉쭉’ 빨아먹기도 했고, 보지 입구를 혀로 매만져 주었으며, 어느새 슬금슬금 올라와 있던 영후의 두 손은 점점 더 부풀어 오르는 하연의 가슴을 지긋이 움켜쥐었기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영후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좀더 꽉 잡아달라는 표현을 은근하게 해 주기까지 했다. “아아… 아… 아앗! 앗! 으읍!” 하지만 역시나 그도 잠시, 하연은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영후의 혀 놀림 덕분에 활시위가 당겨지듯 허리가 꺾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체 못할 정도의 애액이 왈칵 쏟아지며 영후의 입가를 적시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한차례 격정적인 파도가 지나가자 하연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영후는 분명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었다. 때문에 조금 다른 느낌으로 하연의 얼굴을 마주보며 영후가 하연의 몸 위로 올라오자, 하연은 그제야 자신의 배 위에 닿아있는 뜨거운 물건을 인식하며 지금부터 진짜 ‘섹스’가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한차례 폭풍 같은 전희를 견뎌냈기 때문이었을까. 하연은 영후와 키스를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고, 때문에 천천히 눈을 바라보며 자신의 물건을 보지 앞까지 접근시키는 영후에게 하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영후야…” “응…”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럼…” 아마 다른 남자들 같았으면 절대 멈추지 않았을 상황에도 영후는 친절하리만치 그 자세 그대로 하연에게 답해 주었고, 덕분에 하연은 조금, 아주 조금쯤 이성을 되찾으며 영후의 눈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처음이니…?” - “뭐라구요?!” 하연의 이야기를 듣던 근명은 그야말로 복장이 터질듯한 표정이었다. 분명 손이 묶여있지 않았더라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릴 때까지 몇 번이고 두드려 댔을 것이었다. “세상에… 요새 그런 걸 묻는 사람들이 어딨어요 진짜! 그래, 그래서 그 바보 같은 선밴 또 뭐라던가요?” “그, 그게… 그러니까…” 너무나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근명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서야 자신이 잘못한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 하연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때문에 조금만 건드려도 ‘와락’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다시금 어렵게 어렵게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지만, 근명의 표정은 점점 더 어이없어 미치기 일보 직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 “하, 하연아…” 어둠 속이었지만, 너무나 맑았던 남자의 눈동자는 그러나 잠시 초점을 잡지 못한 채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런 남자의 눈에서 어느 정도 답을 얻었건만, 여자는 그래도 남자의 입을 통해서 확답을 듣길 원하고 있었다. “실은, 네가 키스해 줄 때 부터… 묻고 싶었어. 네가 나한테 해줬던 것들이 안 좋았다는 건 아닌데… 그게 있지, 그러니까…” “아니야…” “어?” “너… 나한테 처음 아니라구…” “아…” 그제야 우려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자, 순간 하연의 눈에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떨어져 내렸고, 이윽고 그 작은 방울이 도화선이 되어버린 듯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시트를 적시고 있었지만, 그런 하연을 바라보던 영후는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잘못한 건 분명 자신이었으니까. 결국, 그렇게나 뜨겁게 달아오르던 두 남녀는 한 순간에 얼음장 못지 않게 식어버렸고, 영후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어느덧 여자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영후의 뒷모습을 보는 것 조차 괴로울 수 밖에 없었던 하연은 힘없이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고, 이내 한참이 지난 후에 나왔지만 이미 완벽하게 옷을 갖춰 입고 나왔기에 영후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하연을 잡을 수 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결국,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하연은 그렇게 문을 열고 객실을 빠져나갔고, 영후는 그대로 어두운 방 침대에 앉은 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뜨거웠던 하연의 체온이 남아있었어야 할 침대 한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보았지만, 어느새 식어버린 그곳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영후는 결국 그 빈 공간을 메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감싸 쥐기 시작했다. -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마친 하연이 바라본 근명은 기가 차지도 않는 다는 얼굴이었다. “그, 그래서 선배한테 그러고 그냥 와버렸단 거에요 지금?!” 대답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하연을 다시 바라보며 근명은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아니, 선배도 그렇고 박기자님 나이가 몇인데… 지금까지 서로 연애 한 번 안해봤길 바라는 건, 그거야 말로 정말 웃긴 거 아니에요?” “그, 그치만, 넌 그날 날 지켜줬잖아. 나이도 훨씬 어린 너도 참을 수 있는 걸, 영후는 그러지 않은 거잖아. 게다가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그걸’ 했다고 했단 말야…” “아 나 진짜 미치겠네…” 근명은 자신이야 말로 난잡하기 그지없는 섹스를 했노라고 곧바로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건 결국 하연을 다시 영후에게로 돌려보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기에, 결국 비겁하게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내가 기대했던 영후 모습하고는 너무나 달라서 많이 실망했어.” “이봐요, 숫처녀 박기자님! 어차피 이선배가 그랬던 때에는 박기자님하고 사귀는 때도 아니었잖아요, 아니에요? 그런데도 이제 와서 그 따위 과거까지 왈가왈부하는 건 좀 요새 트랜드하고 안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연애나 섹스나 별다를 거 없어요! 몸을 섞었다고 불결하고, 마음만 주는 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박기자님 원래 그렇게 보수적인 사람이었어요?” “몰라, 모르겠어… 근데 정작 남의 일이 아니라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나도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이 나이 될 때까지 선배 같은 훈남한테 여자가 한 번도 안 꼬였을 거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리고 그 착해빠진 선배가 그런 여자들을 무조건 밀어낼 수 있었겠냐고요! 그러길래 진작에 대쉬 했으면 이런 걱정 따윈 안 해도 됐잖아요!!!” 사실은 영후와 하연의 사이가 틀어진 건 근명 자신에게는 너무나 잘된 일이었건만, 도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근명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엔 그렇게나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가 한낱 ‘첫경험’ 운운하며 우울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던 것도 같았다. “그럼, 앞으로 어쩔 건데요? 뭐 선배가 다시 순결해지는 방법이라도 찾아 볼 거에요?” “……”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하연에게 근명은 결국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로 마음 먹었다. 자신을 구해준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까발려서라도 설득해 줘야 할 의무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박기자님, 이 선배가 나하고는 달라 보여서 실망했다고 했죠?” “?” “그럼 이건 어때요? 내가 벌써 수많은 여자들하고 자고 다닌 난봉꾼이라면…” “!!!” “아마, 그 날. 그러니까 내가 박기자님하고 호텔로 갔었던 때를 생각하고 날 선배하고는 다른 순진한 남자라고 생각했나 본데요, 나 사실 안 그런 놈이거든요? 그 때 왜 박기자님을 그냥 놔뒀는지 알아요?” “그건…” “바로 박기자님 입에서 이 선배, 아니 ‘이영후’란 이름이 몇 번이나 튀어나오고 있었단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치마만 두르면 다 좋아하는 놈이긴 하지만, 차마 좋아하는 남자 이름을 술에 쩔어 있으면서도 그렇게 불러대는 여자한테는 당연히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라고요. 이제 이해하겠어요?!” 서른에서 겨우 둘이 빠지는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남자에 대해 제대로 몰랐던, 막연히 영후 하나만을 바라보며 꿈꾸듯 살아왔었던 자신이 그제야 너무나 바보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하연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핑핑 돌기 시작했다. - 1701호 베란다로 넘어왔었던 1702호의 여자들은 영후가 하연을 안고 침실로 사라지자 더 이상 구경거리가 사라졌다며 김샌 표정으로 다시 그들의 숙소로 하나씩 넘어가버렸지만, 남희 만큼은 어쩐지 돌아갈 수가 없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육감이랄까? 분명, 자신과 영후가 벌였던 뜨거웠던 정사가 어쩐지 지금의 두 남녀에겐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남희는 여전히 숨을 죽인 채 불이 꺼진 거실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오래 지나지 않아 뭔가 심각한 분위기의 하연이 욕실로 들어가 버린 후 이내 옷을 갖춰 입고는 쓸쓸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모습을 남희는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영후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하연이 그렇게 사라지고 난 뒤에도 침실에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 움직임도 없는 것 같았지만, 정작 남희의 가슴은 더욱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을 어쩌지도 못한 채 남희는 조심스럽게 베란다 문을 열고는 거실로 들어서 보았다. 역시나 아무런 기척이 없는 1701호의 거실을 지나 남희는 열려있는 침실의 문 가까이에 서서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남희의 예상대로 영후는 침대 모서리에 앉은 채 망부석이 된 듯,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남희가 알던 남자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슬퍼서, 남희는 한달음에 달려가 가슴에 안고 그 슬픔에 빠진 남자를 언제까지라도 안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던 남희는 그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영후의 곁으로 다가갔고 고작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려 보는, 지금의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전부를 해보고 있었다. “아… 남희…씨…” 고개를 들 힘도 없어 보이는 영후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남희의 이름을 겨우 속삭이자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남희는 괜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왜 이러는 건데요…” “나, 난… 나쁜 놈이었나 봐요… 너무 나쁜 놈이었는데…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누가 그래요…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감독님이… 영후씨가 나쁘다고 누가 그래요!” “하, 하지만… 난… 난 하연이한테 처음이 될 수 없었어요… 처음이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 명석한 두뇌의 남희는 그제야 영후와 하연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어느 여자나 매한가지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있어서 자신이 첫 여자이길 바래보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박기자 역시 감독님께 자신이 첫 여자냐고 확인해보고 싶었을 것이었고, 그에 감독님은 분명 바보처럼 너무나 솔직하게 말해주었을 것이었다. 아니라고… “나… 왜 이렇게 바보처럼 살아 왔을까요… 이제야… 이제야 겨우 하연이가 내게 와 주었는데…” “아니에요! 감독님은 바보 아니에요! 이렇게 착한데… 이렇게 따뜻한데…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영후를 가슴에 안으며 남희는 몇 번이고 아니라며 울부짖었다. 그랬다. 영후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남희 자신이었다. 사랑을 얻을 수도 없으면서, 이 바보 같은 남자의 품에라도 안겨보려 발버둥쳤었던 자신이 나쁜 년이었다. 그런데도… 분명, 자신이 잘못한 거였는데도, 아픈 건 이 남자였다. 그래서 남희는 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돌아올 거에요 하연씨… 아니 돌려놓을게요. 내가…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돌아오게 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아프지 마요 영후씨…흑흑…” 남희는 그야말로 통곡을 하듯이 울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우는 것보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가슴을 적시고 있는 영후의 눈물에 더욱 감정이 북받치고 있었다. - 근명에게 괜히 혼쭐이 난 후 하연은 복잡한 심경으로 병원 주차장으로 내려왔지만, 차에 타고서도 한동안 시동을 거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순간 백 속에서 핸드폰이 울려대고 있었다. 하연은 순간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도 못한 채 너무나 반갑게 받으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분명 영후일 것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전화를 받으면 분명 미안하다고, 또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게 정리될 수 있는 걸까?’ 결국 하연은 지금 당장은 영후와 통화 할 만큼 마음의 정리가 안되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는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어봤지만, 꽤나 끈질기게 울려대는 덕분에 하연은 결국 핸드폰을 꺼내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권코치.’ “아, 예…” ‘이런 식으로 가시는 게 어딨습니까…’ “네? 무슨…?” ‘이런 식으로, 우리 감독님 이런 식으로 버려두고 가시는 게 어딨습니까!’ 처음으로 불같이 화내는 남희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하연이었지만, 남희가 화난 것 보다도 남희 덕분에 또다시 혼자 남겨져 버린 영후를 떠올리자 하연은 마음이 ‘퀭’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안한 감정을 표출해 보이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하면 다시 오세요. 지금 당장.’ 하지만 평소의 남희완 달리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하는 것 같아, 하연도 조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보세요 권코치님. 뭔가 좀 착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이건 저와 영후의 개인적인 일일 뿐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님과 박기자님 뿐만 아니라, 저도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아…!” 그제야 남희가 왜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는 하연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추측을 하고 나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 권코치… 아니 남희씨가 그럼… 영후와…?” ‘네!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더 얘기를 하고 싶으시면 지금 다시 이곳으로 오십시오. 박기자님께 해드릴 말씀은 오늘, 여기서 전부 하도록 할 테니까요.’ 남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하연은 이제는 영후와 완전히 끝나버린 거라고, 그러니 남희의 이야기를 들어본대도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지만, 남희는 그런 하연의 생각을 꿰뚫어보듯 바로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저희 감독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희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지만, 하연에게는 아직 끊어진 게 아니었다. 때문에 하연은 브레이크를 깊숙하게 밟은 채 단번에 시동을 걸어보고 있었다. 33부. 섹스 몬스터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사무실 자신의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채 모나미 볼펜을 계속 ‘딱딱’ 누르며 불안한 정서를 표출하고 있던 하연은 역시나 부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동시에 불 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박하연이! 일루와 봐!” 하연은 그러나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건한 얼굴로 부장실로 들어갔지만,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자 꽤나 긴장이 되는 듯한 얼굴로 부장의 책상 앞에 열중 쉬엇! 을 한 채로 서 보았다. “야 임마, 지금 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야?” “아닙니다.” “그럼, 그럼 이게 뭐야 이게!” 부장은 하연이 급하게 작성한, 기사 꼭지가 프린트 된 A4 용지를 던지며 꽥 소리를 질렀지만, 하연도 그에 지지 않으며 대꾸했다. “기삽니다!” “이게 기사야? 이게 기사냐고!!! 이건 기사가 아냐! 그냥 너랑 나랑 죽자는 거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부장은 하연의 기사가 가져올 파장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야, 증거 있어? 조전무가 국세청을 움직이게 만든 증거 있냐고?” “그런 건 없지만… 그래도 부장님도 아시잖습니까? 갑자기 노감독님이 몸담고 계신 축구 연구소나 이영후가 감독으로 있는 한국여대에 갑작스런 세무조사가 시행된다는 건” “그니까, 증거 있냐고…” “……” 역시나 부장 앞에선 하연도 어쩔 수 없었기에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부장은 마치 자신의 젊었을 때를 보는 듯해서 꽤나 안쓰럽기도 했기에 조금쯤 언성을 낮추고 다시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야, 박기자야 너 이 바닥이 어떤 덴지 아직도 모르겠냐?” “하지만 부장님…” “임마, 됐고! 이 건은 우선 묻어둬. 그리고” 부장은 실망으로 일그러지는 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 봉투를 건넸다. “우선 이 건이나 취재해 와 봐.” “부장님!” “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그거나 보고 얘기하자, 엉?” 부장은 하연의 씁쓸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갔지만, 이 기사가 뭘 포기하고 취재해온 기사인지 손톱만큼도 알아주지 않는 부장 때문에 하연은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 취재해 온 기산데…’ 하연은 부장이 남기고 간 서류 봉투 속에, 조전무에 대항하고 있는 차기 축구협회회장 후보군들의 대검 중수부 수사 정보가 들어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대로 손에 쥔 채로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았지만, 책상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다시는 그 순간으로, 다시는 영후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대로 책상에 스러지듯 엎드려 보았다. ‘영후야…’ - “그래,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난 건가요?” “네, 총장님.” 남희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 후 걱정스런 눈빛으로 총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총장은 생각보다 잘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처럼’ 보였을 뿐이지 정말로 괜찮은지 어쩐지는 본인만이 알 터였다. “괜찮으신 겁니까…?” “안 괜찮으면 어쩌겠어요.” 역시 한국여대에 들이닥친 세무조사의 여파에 총장도 분명 골머리를 썩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지탱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덕분인지, 못 견딜 정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남희씨는 젊어서 모르겠지만… 원래, 우리 사회가 이런 식이었답니다. 비록 지난 10년 동안은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긴 했었지만…” “……” “그래, 이 감독님은 어떤가요? 지금쯤 잔뜩 기대하고 있을 것 같은 데… 맞나요?” “아, 예…” 남희는 총장과 한국여대를 걱정을 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영후의 갑작스런 변화를 떠올리자 또다시 젖어 드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느끼며 점점 홍조를 띈 얼굴로 바뀌어 가고 있었지만, 그나마 총장 역시 이런 저런 고민 때문에 남희에게 이전처럼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날 밤, 콘도에서의 영후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던 남희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감독님…?“ 남희가 하연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영후의 곁을 잠시 비우느라 부탁을 받은 수림이 영후를 지켜보기 위해 그 어두운 방안에 들어섰지만, 달빛을 받으며 빛나던 알몸의 영후는 그러나 수림의 부름에도 전혀 미동도 없이 여전히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었기에 수림은 괜히 또 그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해요.” “네? 감독님…? 뭐라고 하셨어요?” 낮고 작은 소리긴 했지만 분명 영후의 목소리였기에 수림은 기쁜 마음에 영후의 곁으로 한걸음에 다가섰는데, 다시금 들리고 있는 영후의 확실한 음성에 수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나랑… 섹스해요…” 평소 수림이 알고 있는 영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절대로 믿을 수 없었기에, 수림은 자신도 모르게 처음으로 영후를 둔 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수림이 채 멀어지기도 전에 영후는 튕기듯 일어나서는 다짜고짜 수림을 안아 들어 침대에 던지듯 눕혀버리곤, 전에 없이 거칠고 또 포악스럽게 수림의 몸 위에 올라타서 옷을 찢을 듯이 벗겨내기 시작했다. “가, 감독님! 가… 갑자기 이러시면…!” 하지만 이미 수림의 이야기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영후는 어느새 수림의 팬티까지 찢어버렸고, 그러자마자 그 어떤 애무도, 전희도 없이 영후는 거대한 자지를 그대로 수림의 보지에 밀어 넣었는데, 순식간에 침범하고 있는 영후의 자지에, 수림은 순간 보지가 찢어질듯한 고통을 느끼고는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꺄악!!!!!!!!!!” 하지만 영후는, 아니 영후의 얼굴을 한 ‘괴물’은 자신을 밀어내려 가슴팍을 연신 밀고있는 수림의 양팔과 버둥거리는 다리가 신경쓰이는 지 이내 수림의 양 다리를 그녀의 머리께까지 들어올린 후 양 손으로 수림의 발목과 손목을 동시에 결박해버렸다. “아앗! 안돼요!!!” 결국 자신의 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리자 수림은 영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남자에게 보여지는 것이 너무나 창피해 처음으로 싫은 마음을 표현해보고 있었지만, 이미 수림의 보지에 깊숙하게 박혀 있는 괴물의 자지에는 귀도 감정도 없었기에, 수림의 마음과는 달리 곧바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퍼억! 퍽! 퍽! 퍽! 퍽! 퍽! 퍽! “아앗! 아파! 아파! 아파!” 전과 달리 전혀 젖어있지 않았던 수림의 보지는 그제야 영후의 자지가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지만, 이제와 대비하기엔 너무 늦은 후였다. “아파… 가… 감독니임… 아파… 아파요… 으으윽!!!” 게다가 수림이 울부짖을수록 그것이 흥분제가 되는 양, 영후는 점점 더 속도를 올리고 있었고, ‘찌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그저 ‘퍽! 퍽!’하며 체벌할 때나 들을 수 있는 소리만이 그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남희의 전화를 끊고는 시동을 걸자마자 바로 급가속을 하며 지하주차장을 급하게 빠져 나오던 하연은 또다시 울려대는 핸드폰 벨소리에 핸들의 핸즈프리 버튼을 눌러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박하연입니다.” ‘날세, 노감독.’ “네, 감독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괜찮다면, 잠시 이리 와줄 수 있겠는가?’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노감독의 목소리에 수심이 그득해 보였기에 하연은 잠시 고민을 해 보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은 분명 영후에게 다시 돌아가 봐야 할 순간이었으니까. “네? 감독님,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급히 가볼 때가…” ‘아무래도 조전무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네.’ “아…!” ‘우리 축구연구소 뿐만 아니라, 한국여대에 까지 동시에 압박하려 하는 것 같더군.’ “……” 하연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콘도에 홀로 남은 영후는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자책하며 괴로워할 것이었다. 게다가 영후에게 몸을 내줬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남희가 그 녀석 곁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언론이고 뭐고, 이런 방면에선 자네 말고는 딱히 믿을 사람이 없더구먼…’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축구계 또한 분명 영후와 관련이 있는 건 틀림없었다. 게다가 앞으로 여자축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노감독과 황총장 모두가 흔들리게 된다면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었다. 결국 하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어 보고는 노감독에게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감독님. 지금 그리로 가겠습니다.” 이내 전화를 끊은 하연은 그러나 차도 드믄 새벽 도로 위에서 여전히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잠시 정차를 했지만, 그리고는 핸들에 이마를 기댄 채 한동안 어째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결국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해 영후야…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 가슴이 찢어져 내리는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하연은 결국 기어를 변속하며 단번에 광활한 도로에서 크게 반원을 그리듯 유턴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아무리 객실이 붙어있다고는 하지만 한동안 비명에 가까운 수림의 신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듯 들려오더니 어느새 잠잠해지자, 윤지는 잠들어있는 혜미와 미자를 돌아보고는 현관 앞에 꽂혀있는 카드키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객실은 그야말로 암흑 속에 묻혔지만, 윤지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카드키를 들고는 밖으로 나가보았다. ‘어차피 문으론 들어가지도 못할텐데… 그냥 한 번만 더 넘어가 볼걸 그랬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와 1701호실 문을 바라본 윤지는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1701호실의 문이 조금 열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희가 되돌아올 때 벨을 누르지 않아도 되도록 수림이 조금 열어놓은 것이었지만 그런 전후 사정을 알리 없었던 윤지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헉!헉!헉!헉!헉!” 뭔가 격렬한 운동을, 아니 이른바 격렬한 섹스를 하는 듯한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이상한 건 그 숨소리와 동반되어야 할 여자의 숨소리, 그러니까 수림의 신음소리가 조금도 그야말로 조금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윤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의 근원지인 침실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문을 살짝 열어보았지만 윤지의 눈에 들어오는 건 한 쌍의 커플이 아니었다. 커플은 커녕, 실신한 듯한 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찍어내리 듯 끊임없이 범하고 있는 한 마리의 괴물만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고, 문이 열리자 등줄기에 약간의 서늘한 바람이 느껴진 듯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그 동물은 천천히 그러나 정확한 시선으로 윤지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는데, 그 눈은 절대 사람의 눈이 아니었고, 평소의 영후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 표정에선 이윽고 더욱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섹스…하자…나하고…섹스…하자…”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광경에서 더 말이 안 되는 영후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자 윤지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히며 수림이 그러했듯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었지만, 이미 효용성이 없어진 수림의 몸을 그제야 놓아주듯 버려두고는 그 거대한 물건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 괴물은 이윽고 윤지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섹스… 섹스하자…” 그렇게 멋진, 그렇게 착한 남자가 지금은 한낱 섹스만을 갈급하는 동물이 된 채로 커다랗게 하늘로 치솟은 자지를 덜렁거리며 다가오자 윤지는 허둥대며 뒷걸음질 치다 뒤로 넘어졌지만, 그럼에도 넘어진 상태로 점점 도망칠 수 밖에 없었지만, 순간 윤지의 뒷통수에 닿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기에, 더더욱 놀란 얼굴로 돌아보자 그곳엔 슬픈 눈을 한 남희가 서 있었다. 하지만 이미 괴물이 되어있었던 영후에겐 남희가 나타났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고, 역시나 남희를 보는 건지, 윤지를 보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그 입에선 계속 같은 말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정작 남희는 그런 영후가 하나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요, 감독님… 해요 우리… 그거…” 꿈결처럼 입을 열던 남희는 그러나 윤지를 바라보며 미안하지만 자리를 비켜달라는 눈짓을 했고, 그런 남희 덕분에 윤지는 현관으로 기듯이 나와 겨우 신발을 신을 수 있었지만, 저런 괴물에게 여전히 사랑한다는 얼굴로 다가가는 남희의 순교자 같은 모습 때문이었을까. 윤지는 결국 다시 신발을 벗고 들어서서는 남희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티셔츠를 단번에 벗어버리며 영후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윤지! 지금 무슨 짓이야!” 갑작스런 윤지의 돌발행동에 남희는 깜짝 놀라며 윤지를 제지하려 했지만, 남희의 말을 무시하며 윤지는 어느새 팬티까지 벗어버리곤 영후의 품으로 달려들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건 제가 더 자신 있거든요? 그러니까 암말 말고, 지켜보기나 하시라구요.” - 그 새벽에 축구 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는 건물로 들어서던 하연은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국세청 직원들이 지나간 사무실 곳곳은 태풍이 분 것 마냥 이곳 저곳에 서류들이 떨어져있었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모니터들은 하나같이 컴퓨터 본체를 잃어버린 채 검은 화면에는 신호를 잡을 수 없다는 표시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예 매장시켜버리겠다는 뜻 인가…’ 다른 사무실보다 조금 더 난잡하게 뒤집혀 있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서자 여전히 반갑게 자신을 맞아주는 노감독 덕분에 하연은 조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우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영후를 위해서도 가장 바람직한 일일 테니까. “감독님…” “그래, 와주었구먼. 너무 늦은 시간에 부른건가, 아님 너무 이른 시간에 부른 건가?” “기자한텐, 그런 거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아무튼, 괜찮으신 거에요?” “뭐, 다시 옛날 생각나게 해주는 것 같아 그리 나쁘진 않더군. 그렇지만…” “?” “어찌됐든, 영후 놈에게는 비밀로 해주게나. 축구 말고는 제 머리도 못 깎는 부족한 놈인지라, 여전히 걱정이 되놔서 말일세.” 영후를 걱정하는 하연과 별 다를 바 없이 노감독의 머릿속에도 영후에 대한 걱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는 걸, 하연은 그제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때문에 더 이상 콘도에 남아있는 영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고는, 보이스 레코더와 수첩을 가방에서 꺼내며 자못 기자답게 입을 여는 하연이었다. “그럼 우선, 오늘 있었던 일부터 말씀해 주실래요?” - 남희는 어린아이라고만 여겼던 윤지의 매끈한 몸매에 놀랐고, 나이답지 않은 요염함으로 영후를 감싸 안으며 침대에 눕히고는 엄청나게 발기되어 있는 자지를 천천히 입에 머금기 시작하자,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걱정을 넘어 그 광경만으로도 보지가 시큰거리기 시작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대신해 영후를 보듬고 있는 윤지가 처음엔 고맙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조금쯤은 더 커진 것도 같았다. “츄릅…츄읍…” 커다란 영후의 자지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연신 쓸어 내리며, 입으로는 어지간한 자두 이상으로 큰 귀두를 입안에서 굴리고 있었고, 틈나는 대로 타액을 묻혀 미리 삽입에 대비하려는 치밀함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렇게 자세한 것 까지는 남희가 알아챌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윽고 자신의 목젖에 닿을 정도로 깊이 자지를 머금으며 영후의 고환을 부드럽게 주무르자 괴물의 얼굴은 꽤나 만족스럽게 변해가고 있었고 어느정도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윤지가 이윽고 자신의 손에 침을 뱉고는 스스로 보지에 문지르듯 바르자 남희는 하마터면 다리에서 힘이 풀릴 뻔도 했다. “아…” 남희의 탄성이었는지, 윤지의 탄성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윤지의 보지가 별 어려움 없이 괴물의 자지를 단번에 머금자 탄성이 터져 나왔고, 이윽고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윤지의 모습에 현기증마저 느껴버린 남희는 고개를 돌리다, 그제야 바닥에 혼절해 있는 수림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안아 들었다. “수, 수림씨! 정신차려요! 수림씨!” “아… 언니…” 정신은 겨우 들었지만, 아직도 꿈길을 헤매는 듯한 수림의 얼굴엔 그러나 극심한 고통이 서려있었다. “수림씨, 괜찮은 거에요?” “네… 전… 아! 감독님! 감독님은요!” 자신의 안위보다 영후를 더 걱정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수림은 그러나 사타구니로부터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자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아야…” “수림씨… 괜찮으니까… 그냥 그대로 잠시 있어요.” 남희의 품에 안기며 그제야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수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리를 제대로 오므리지조차 못하는 수림의 하체를 바라보던 남희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도 했다. 보지의 둔덕은 시뻘건 게 그야말로 퉁퉁 부어있었고, 허벅지 이곳 저곳에선 약간의 혈흔마저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왁스럽게 잡혔던 듯한 가슴 이곳 저곳은 실핏줄이 터졌는지 곳곳이 붉게 멍까지 들어있었다. 분명 그것은 사랑을 담은 섹스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저, 그것은 ‘강간’의 흔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도저히 그간의 영후가 해왔었던 섹스의 흔적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섹스의 흔적들 때문에, 남희는 어느새 윤지의 아래에 순한 양이 되어 그저 자지에 전해지는 보지의 느낌을 느끼고 있는 영후를 겁먹은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지만, 찰싹! 찰싹! 턱! 턱! “아흑! 아… 아앙… 하악! 하읍…” 이미 열락에 빠져들고 있는 윤지는 그런 남희의 걱정엔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듯 점점 가속도를 붙여가며 허리와 엉덩이를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 콘도에서의 영후와 윤지의 끈적이며 격정적인 섹스를 떠올려 보던 남희는 총장의 이야기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려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렇게 먼 일 같더니… 벌써, 내일이군요.” “네, 총장님.” 총장실 소파에 앉은 채 조금은 수척한 얼굴로 총장의 물음에 답을 하는 남희를 바라보며, 총장은 학교에 들이닥친 세무조사 덕분에 남희마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걸로만 생각하며 괜히 더 마음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럼 오늘 전주로 내려가는 건가요?” “예, 조금 있다가 내려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내려가는 건가요? 잘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축구라는 게 현지 적응 문제도 중요하다고 들었는 데…” “아, 그건…” 남희는 차마 현재의 영후의 증세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적절한 변명거리를 찾아내려 머리를 굴려보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총장에게 자신은 축구단의 소소한 소식을 물고와 알려주는 비둘기와도 같은 존재였었거늘, 언제부턴가는 점점 총장보다는 영후 쪽으로 점점 기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새삼 느끼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연하게 총장의 물음에 곧 답을 해 주었다. “현장 답사를 해본 결과, 경기를 치를 전주 월드컵 경기장 잔디가 저희 학교 잔디와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의한 결과 미리 그곳에 가서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받으면서 적응 훈련을 하느니 학교 내에서 마무리 훈련을 마친 후, 그 곳에선 분위기만 익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아, 그랬군요. 미안해요. 나이가 드니 점점 노파심만 많아지네요. 그치만, 이왕 노파심을 부려보는 김에 하나만 더 물을까요? 그래,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요?” “아이들 마음을 물으시는 거라면… 역시 아이들이라 그런지, 그리 긴장하거나 걱정하는 등의 모습은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아이들하고는 다르게 남희씨는 조금 걱정스럽다… 이거군요?” “……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영후 감독 생각은 남희씨와는 조금 다를 테죠?” “……” 힘든 세무조사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애써 웃음지어 보며 묻고 있는 총장에게, 그러나 남희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어젯밤까지의 영후는 그 어떤 답도 내어줄 상황이 못 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걸 알리 없는 총장 또한 무한하게 영후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힘들겠지만, 지금 어수선한 학교 상황을 이감독님께는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군요. 남희씨, 그래줄 수 있겠죠?” 노감독 또한 하연에게 한치도 다름 없는 부탁을 했다는 걸 남희는 알리 없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남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동시에 출정을 하루 남겨둔 어젯밤을 떠올리며 더 없이 광폭했던 영후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 “왔니?” 영후의 원룸에 당도한 윤지가 벨을 누르자 영후가 아닌 남희가 문을 열며 맞이해주었지만, 윤지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하며 원룸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한 눈에 들어오는 원룸 내부 한쪽의 침대 위엔 영후가 아이처럼 잠들어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윤지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 “테스토… 뭐라구요?” “테스토스테론 ( 테스토스테론은 뇌하수체의 황체자극호르몬(interstitial cell stimulating hormone)에 의해 조절되며 주로 남성의 정소에서 분비된다. 콜레스테롤이 원료인 스테로이드 계열의 이 호르몬은 대부분 성호르몬 결합단백질인 알부민 등과 결합한다. 혈액을 통해 뇌로 이동한 호르몬은 성적 신호에 대한 반응에 관여한다… 브리태니커 대 백과사전 인용. )이요.” 꽤나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는 남희덕분에 수림과 윤지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했지만, 남희는 예의 강의를 하는 듯한 얼굴로 돌아가 정신과 전문의에게서 받은 조언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지금 감독님의 상태는, 그러니까 ‘섹스 중독증’과 유사하답니다.” “섹스… 중독이요?” “뭐, 마약 중독 같은 그런 중독이요?” 남희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수림보다 윤지가 훨씬 빨리 이해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역시 윤지였다. “그래서요, 왜 그렇게 된 건데요?” “그건, 감독님을 직접 모시고 가서 진료를 받은 게 아니라서 확실하진 않지만, 그 의사 말로는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테스토스테론의 과다 분비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라면…” “지나친 성적 욕구가 생겨나서,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불안, 초조에 시달리는 것 뿐만 아니라 극도로 폭력적으로 변하는 지금의 감독님 모습처럼 말입니다.” “아…” 어려운 내용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수림과는 달리 윤지는 또다시 질문을 해보았다. “근데, 병이라면 왜 낮에는 괜찮으신 거죠? 밤에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 지도 기억 못 하고…” “그러게, 그것까지는 의사도 뭐라 답을 못 주더구나.” “그나마 다행이죠 뭐. 낮에는 그래도 아이들하고 대회 준비를 하실 수 있으시니까요.” 역시나 매사에 긍정적인 수림의 말에 남희와 윤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지만 이윽고 침대에서 뒤척이기 시작하는 영후의 모습에 세 여자들은 잠시 긴장하며 침묵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깨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거대하게 발기된 자지를 무턱대고 들이밀며 세 여자를 돌아가며 괴롭힐 것이었으니까. “참, 이거…” 윤지는 자신의 가방에서 화장품처럼 생긴 튜브타입의 물건을 하나 꺼내 보였다. “뭐니, 이게…?” 수림은 윤지에게 받아 들고는 이리 저리 살펴봤지만, 일본어와 영어만이 적혀있었기에 읽을 수 있을 리 없었고, 이윽고 수림에게서 건네 받은 남희는 잠시 후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왜요, 권코치님? 뭔데요? 뭔데 윤지야?” 남희와 윤지를 번갈아 보며 묻던 수림에게 윤지는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고, 결국 남희의 입이 어렵게 열리며 수림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젤… 입니다.” 차마 앞에 붙는 ‘러브’까지는 입에 올리지 못한 남희였지만 그래도 당연히 수림도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수림은 수림이었다. “젤… 이요? 그… 머리에 바르는… 그 젤이요? 근데 왜 이걸…?” 역시나 감을 못 잡고 있는 수림과 달리, 남희는 그 젤의 용도를 알면서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한 채 맹랑한 표정의 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까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킨 영후가 뒤에서 와락 껴안는 바람에 남희는 그대로 침대로 끌어올려 졌고, 수림과 윤지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또다시 단번에 원피스가 벗겨졌지만, 이제는 부끄러움 보다는 부디 지독한 성욕을 해소하고 예전의 그 다정다감한 남자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컸기에 남희는 스스로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버렸다. 그러자 수림과 윤지는 동시에 꿀꺽 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처음 보는 것도 아님에도, 어찌된 것인지 영후의 손길을 받으면 받을수록 꽃이 피는 것마냥 더욱 아름다워지는 남희의 몸매는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가슴 좀 봐…’ 영후의 손에 어느새 우왁스럽게 잡혀지고 있는 남희의 거대하면서도 봉긋한 젖가슴을 바라보며 수림은 부러움을 금치 못했고, 아직은 남희에 비해 덜 숙성된 윤지 또한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는데,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사이 어느새 괴물의 자지가 남희의 보지 입구를 찾아 헤매는 모습에 윤지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바닥에 놓여있던 ‘젤’의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적당량을 짜내고는 재빨리 자지에 흠뻑 발라 주었고, “앗, 차거!” 또한 생경한 느낌의 손과 젤이 동시에 침입해오자 남희는 잠깐이나마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지만, 윤지는 덤덤한 표정으로 남희의 보지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은 채 이곳 저곳을 휘저으며 역시 충분히 발라주었다. 젤 덕분인지, 윤지의 손길 덕분인지 조금쯤 부드러워진 남희의 보지에 영후의 자지는 곧장 박혀 들어갔고, 침대에 편히 누운 채 다리를 벌리고 있던 남희는 별 고통 없이 영후의 자지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앙…” 허나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그 거대한 크기는 한치도 변하지 않았기에 남희의 입에선 신음이 흘러나왔는데, 드디어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이 아닌,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자 격한 속도로 움직이는 영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수림과 윤지도 오늘만큼은 조금씩 흥분을 하고 있었다. - “아빠! 진짜 안 올 거야?!” 혜미는 긴 여행을 떠나는 듯 커다란 짐 가방을 발 아래 내려놓은 채 먼지떨이로 가게 진열대의 먼지를 이리저리 털어내고 있는 규식의 뒷통수에 대고 ‘꽥!’ 소리를 질렀지만, 혜미의 그런 볼멘소리를 귓등으로 듣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규식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야 이 녀석아, 그럼 가게는 어쩌고?” “쳇! 어차피 길 건너에 생긴 대형 마트 때문에 손님도 없는데, 며칠 문닫고 있는다고 누가 뭐라겠냐고!” “그래도 인석아, 단골 손님이란 게 있는 법인데 내 맘대로 가게 문닫고 놀러 갈 순 없는 거 아니냐!” “누가 놀러 오래? 하나밖에 없는 아빠 딸이 지금 축구 선수로 데뷔를 하는 역사적인 현장을 보러 오라는 건데!” “그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런 것쯤, 후딱 우승하고 언능 와버려라.” 장난스럽게 ‘우승’을 입에 담는 규식관 다르게 혜미는 갑자기 쪼그라들며 입을 열었다. “치… 우승이 말처럼 쉬운가 뭐…” “에? 뭐야? 우승할 자신도 없으면서 아빠한테 보러 오라고 하는 거야 지금?” 그제야 의외라는 듯 뒤돌아 서서 혜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규식이 묻자, 혜미는 더욱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아 그야…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니까…” “그럼 결승까지 올라가 봐.” “에에~!? 겨…결승?!” 감독이란 사람부터가 처음부터 우승이란 말을 너무나 쉽게 하는 통에 혜미도 얼마 전까진 우승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며칠 전 시청각 실을 빌려 아이들과 함께 분석해 본 상대팀들의 경기 모습을 본 뒤로 혜미는 어쩐지 우승은 고사하고, 경기를 뛴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만 같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잔뜩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정작 아빠마저 결승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으니 혜미의 속은 더욱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 또 모르지, 아빠가 하나밖에 없는 딸이 하는 경기 보러 갈런지도…” “진짜지!? 얏호!!! 좋아! 약속했다! 두고보라고! 아빠가 꼭 경기장에 이 장혜미를 보러 오게 만들테니까!” 갈지도 모른다는 아빠의 말 한마디가 혜미에겐 그렇게나 힘이 되었을까. 혜미는 동네가 떠나갈 듯 좋아하며 방방 뛰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런 혜미를 말리는 목소린 의외로 젊었다. “혜미야…” “어? 현우야~!”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 현우 아니냐? 허 이 자식, 그래, 당분간 혜미 못 볼 생각하니까 잠이 안오더냐? 크큭!” “아, 아저씨는… 아니에요. 혜미 가방이 무거울 것 같아서 들어다 주러 온 거에요.” 요새 현우와 혜미를 놀려먹는 재미에 사는 지 규식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우나 혜미는 그대로 얼굴이 빨개지며 귀여워지곤 했고,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와~ 진짜?! 아빠 봤지? 내 친구는 이정도거든요?” “쳇! 짝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 아침부터 염장 지르지 말고, 어여 들 가봐.” “그럼, 아저씨 다음에 뵐게요.” “아빠, 안뇽~! 꼭 약속 지키기다? 알았지? 빠이빠이~!” “그래, 늦을라 빨리 가보렴. 현우도 다음에 보자~” 꼭 신혼여행을 떠나는 듯, 아침부터 예쁜 아이들 둘이 티격태격하며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규식은 가게로 들어와서는 이리 저리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경기 있는 날마다 누구한테 맡긴다…? 항상 걸어 잠그고 갈 수도 없고…” - 어느새 규식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한 혜미는 그제야 조금쯤 현우와의 거리를 좁히며 나란히 걸어보았다. “야, 나현우.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 어떻게 온 거냐?” “네 말대로라면, 거의 3주가 넘게 못 보게 되는 거잖아. 그래서…” “워어~! 이 누나가 보고 싶을까봐 그렇게 걱정돼쪄요?” “그래, 그렇게 오래 못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장난을 치는 자신과는 달리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 현우 덕분에 혜미는 괜히 더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몸의 거리는 좁히기기 별로 어렵지 않았건만, 마음의 거리는 어쩐지 점점 더 좁히기가 어렵기만 해지는 걸 어리숙한 혜미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현우는 혜미의 발걸음에 자신의 발걸음을 맞춰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떠니?” “응? 뭐가?” “시합 말야. 잘 할 수 있는 거지?” “음… 글쎄…?” 현우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속시원한 답변이 나오지 않자 조금은 의아한 얼굴로 혜미를 바라봤지만, 혜미는 이윽고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 해주면…” “응? 뭐라고? 뭐라고 그랬니 혜미야?” “아이 참… 뽀뽀!” “어? 뽀…뽀?” “그래 뽀뽀… 그거 해주면… 나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 부끄러운 마음에 현우보다 빨라진 걸음으로 저만치 앞서가던 혜미는 그러나 뒤에 쳐진 채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현우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혜미의 얼굴은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처럼 변하기 시작했고, 팔을 벌린 채 다시금 자신에게 달려오는 혜미를 가슴 깊이 안아 주면서 현우는 혜미의 뺨에 몇 번이고 뽀뽀를 해 주었고, 마지막으로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해주고는 혜미의 귓가에 나른하리 만치 속삭여 주었고, 혜미는 그런 현우의 눈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해… 알았지?” - 한국여대 정문 앞에는 선수단의 버스가 정차되어 있었고, 그 버스 안에선 몇 명 되지 않는 선수들의 인원 파악을 수 차례나 해보던 수림은 이윽고 별 이상이 없자, 조금은 불편한 걸음으로 버스에서 나와 남희에게 보고를 했다. “권 코치님, 인원 파악 마쳤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요…?” “화장실에 잠깐 다녀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네. 윤지도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했는데, 그럼 윤지랑 감독님만 오시면 바로 출발하면 되겠네요.” 수림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하던 두 사람은 그러나 서로의 표정을 바라보며 역시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간밤의 길고도 불꽃같았던 정사를 떠올리며 지금도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죠?” “네, 지금은 요…” - “후우…” 소변기에 서서 소변을 보던 영후는 어쩐 일인지 전처럼 시원하게 볼 일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조금쯤 부어있는 자신의 물건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정작 요 며칠 밤마다 일어난 사건(?)을 알리 없었기에 이윽고 소변 줄기가 멎자 조심스럽게 바지속으로 물건을 집어 넣었다. 그리곤 세면대로 가 손을 씻고 수도밸브를 잠그며 고개를 들어 아무 생각없이 거울을 바라보자, 한 쪽에 서 있는 윤지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윤지야…?” “기억나세요? 여기서 우리 처음 만났잖아요.” “으응, 그랬지…” 영후는 윤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자 괜히 어색해져 머리를 긁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런 영후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윤지는 밤마다 만나야 하는 ‘괴물’의 존재를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어젯밤 조차 기억 못하고 계신 걸까…?’ 어떻게 이렇게 낮과 밤이 다른 남자가 되어버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윤지는 결국 스스로 확인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이내 자신의 티셔츠 끝자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어 보았다. “감독님, 저 좀 보세요…” “응? 뭐라… 헉!!!” 아무 생각없이 돌아본 영후는 어느틈엔가 자신의 티셔츠를 목까지 끌어올려 예쁜 두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윤지를 보고는 기겁을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그런 모습을 본 윤지는 창피함보다 걱정이 더 앞서고 있었다. ‘감독님…’ - 이윽고, 영후와 윤지가 버스로 돌아왔고 윤지는 쪼르르 버스에 먼저 올랐지만, 남희와 수림 그리고 영후는 버스에 오르기 전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고 있었다. 남희는 한낱 시간 강사에 불과했던 희망이란 걸 모르던 자신을 코치로서 인정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여자’로까지 만들어 준 저 남자에게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수림 또한, 뻔히 영후를 향한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받아 준 저 남자 덕분에 이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음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섹스 몬스터'가 되어버린 저 남자 걱정에, 남희와 수림은 힘을 내야 할 시점에 한숨만 연달아 쉴 수 밖에 없었다. “자, 코치님들! 이제 출발하도록 하죠?” 하지만 어젯밤의 괴물은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여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영후 덕분에 남희와 수림은 꿈에서 깨듯 정신을 차리고는 버스에 올랐고, 영후 또한 가장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려다 한국여대의 건물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에 올랐다. 34부. 할 수 밖에 없는 선택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리무진이란 이름에 걸맞게 부드럽고도 빠르게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맨 앞 좌석에 앉아 있던 영후는 짙게 틴팅되어 있는 창 밖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건너편에 좌석에 곤히 잠들어있는 남희와 수림을 바라보았다. ‘요새… 무슨 일들이 있는 건가…?’ 정작, 영후는 자신 때문이라는 것조차 짐작하지 못했지만 걱정도 잠시, 그녀들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잠깐이지만 빙긋 웃었던 것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의 그녀들답지 않게 수림은 입까지 벌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고, 남희 또한 그런 수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수림 못지 않게 깊은 수면 속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들이 흉하기는커녕 너무나 예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아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참 동안이나 그녀들의 모습에 홀려 멍해 있던 영후는 그러나 왜 자신이 그녀들을 바라봤는지 떠올렸고, 그제서야 남희의 무릎에 놓여있는 정보지를 슬며시 집어 들었다. 혹여 남희가 깰까 영후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정보 책자를 자신 쪽으로 옮겨왔는데, 그 과정에서 남희는 잠결에 조금 뒤척이는가도 싶었지만, 역시나 지금은 한밤중이나 다름없어 보였기에 영후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영후는 그래도 남희가 깨지나 않을지 잠시 동안 지켜본 후에야 책자를 펴 들 수 있었다. ‘여주대, 영진전문대, 위덕대, 울산과학대, 강원도립대, 한양여대…’ 작년 까지는 6개 대학 팀이 토너먼트가 아닌 올 라운드 경기 방식으로 팀 당 5경기씩 치른 후 승점과 골득실, 그리고 다득점 순으로 순위를 매겼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던 영후는 이번 대회를 맞아 대폭 수정된 경기 방식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영후는 언젠가 남희에게도 들었었던 이번 대회의 경기 방식을 떠올려 보고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영후가 홀로 고민에 빠져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감독님…” 어느새 잠에서 깬 남희가 미간 사이로 손가락을 올려 안경을 추켜 올리고는 영후를 부르고 있었으니까. “이런, 저 때문에 깼나 보네요. 그나저나 요새 신경 쓸 게 많아서 피곤하죠?” “뭐, 그냥 그렇죠… 근데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경기 방식이요.” “……” “왜 모든 팀이 한 번씩 경기를 치르는 올 라운드 방식에서, 비대칭적인 조별 방식으로 바뀐 걸까하구요.” 남희는 영후의 궁금증에 혹여 자신이 설명을 제대로 못해준 부분이 있던 가 싶어서 다시 한 번 이번 여자축구 선수권대회의 변경된 경기 방식에 대해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우선, 총 일곱 개 팀 참가가 확정된 이번 대회는 작년과 달리 두 개조로 나뉘어 각 조에서 승점별로 두 팀씩을 뽑아 올려 네 팀으로 추리고, 네 팀은 다시 토너먼트 방식으로 준결승과 결승을 치르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남희는 분명 제대로 설명했다고 확신하며 영후에게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글…쎄요. 근데, 어찌됐든 저희로선 훨씬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요? 만일 작년처럼 모든 팀을 상대해야 하는 경기 방식이었다면, 여섯 경기를 그것도 이틀에 한 번씩 치러야 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승패를 떠나 하루 휴식 밖에 못할 우리 아이들, 체력적으로 분명 힘에 부쳤을 겁니다.” “……” 분명 남희의 분석은 정확했다. 게다가 실전을 치른 적이 없었던 아이들에게 실전은 한 경기 만으로도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설령 4팀으로 만들어지는 조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결승까지 생각해 볼 때 다섯 경기만 치르면 되게 됐으니 분명 이번 대회는 시작부터 저희에게 행운이 따르는 대회인 겁니다.” 게다가 오늘 저녁에 있을 추첨에서 혹시라도 세 개 팀으로 이루어지는 조에 들어갈 수 있다면, 휴식일이 하루가 아닌 이틀씩 주어질 테니 그야말로 더 바랄 수 없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어쩐지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살짝 드는 통에 영후는 또 다시 생각에 잠겼지만, 그런 영후의 모습을 바라보는 남희는 그나마 낮에는 너무나 정상적으로 돌아와있는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아이고, 전무님! 몸소 이곳까지 직접 와주시고… 이거 정말 감사드립니다.” 조전무의 갑작스런 방문에 대회 사무위원장은 쌍수를 들어 환영의 뜻을 전하고 있었지만, 조전무는 애써 자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악수를 나눈 뒤 위원장실에 마련되어 있던 부드러운 천연 가죽 소파에 몸을 묻었다. “별말씀을요, 그래도 명실공히 우리나라 여자 축구의 최고봉을 가리는 대회 아닙니까? 그런 자리에 제가 안 오면 또 누가 오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훌륭한 대회가 고작 4강전부터 방송을 탄다니 얼마나 속상하셨습니까?” “예? 아예, 그야…” 사실 사무위원장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가뜩이나 인기도 없는 여자 축구 대회로 입장권 수익을 올릴 가능성은 100%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방송사와 중계 협상을 벌여 그에 따라 붙는 광고 수익을 기대해 봐야 했다. 허나 이번 대회도 어김없이 4강전부터 방송 중계가 잡혀 있었고, 그것도 겨우 케이블 한 개 채널에 국한 되었으니 위원장으로선 더 이상 수익이란 것 자체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왜 다짜고짜 아픈 곳을 후벼 파는 것인지 위원장은 조전무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가 힘 좀 썼습니다.” “예? 지금 무슨 말씀을…?” “내일부터 벌어지는 모든 경기는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전 경기 생중계가 될 거란 얘깁니다. 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있을 조 추첨식부터가 되겠군요.” “예에?! 그게 정말… 이십니까?! 아…하하…하하하하…” 대회 위원장은 조전무의 이야기에 바로 두뇌를 회전시키며 조전무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광고 수익이 발생하게 될 거란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희소식에 너무나 쉽게 반응하는 위원장을 조전무는 느긋하게 감상하듯 바라보다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예! 예, 말씀하십시오.” 그저 두 사람밖에 없는 공간이었음에도 조전무는 뭐가 그리 조심스러운지 소파에서 조금 몸을 일으켜 위원장에게 다가갔고, 그 덕분에 소파에선 당연히 가죽이 마찰되며 ‘뿌드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서도…”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모두 해드리겠습니다!” 역시 돈이 싫은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눈 앞의 대회 위원장의 흥분된 모습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조전무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았다. '이제 편히 지켜보시게. 전국적으로 자신의 제자가 감독으로서 개망신 당하는 꼴을. 크크크!' - 국세청 직원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덕에 학교의 모든 전산 행정은 마비되고 말았기에, 총장은 저녁 늦게 까지 수작업으로 업무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윽고 핸드폰의 벨이 울리자 그제야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의자에 앉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저에요.” ‘괜찮은 게요?’ “새삼스럽게… 우리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일 처음도 아니잖아요.” 총장은 어색한 노감독의 위로에 이마를 짚어보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를 노감독이 아니었건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그저 말을 아낄 뿐이었다. ‘그야 그렇지만…’ “우리보다 이감독 쪽이 더 걱정일 뿐이에요. 본인과 상관도 없는 일 때문에…” ‘그 놈은 그리 생각 안 할게요.’ “네?” ‘지금 이 모든 게 ‘축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니까.’ 축구 때문이라… 총장은 비단 지금 노감독의 얘기 때문이 아닌, ‘축구’가 도대체 뭘까 가끔씩 생각해 볼 때도 있었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그저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좋아하는 것’일 뿐이었다. 때문에 사실은 그 놈의 축구 때문에 이지경이 된 거 아니냐고 그 옛날처럼 한바탕 해주고 싶기도 했지만, 그 때처럼 왕성하게 노감독을 몰아붙이기에는 총장도 이미 늙어버린 후였다. “그나저나 우린 이번에도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 ‘뭐, 당신도 알다시피 박기자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긴 했소만…’ 말끝을 흐리는 노감독 덕분에 총장도 조금은 기운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역시 역부족이었군요.” ‘아무래도, 지금의 정권은 방송과 신문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니…’ “그래도 해보는 데 까진 해봐야죠.” 총장은 순간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에 스스로도 조금 놀라고 있었다. 전 같으면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을 텐데… 어쩌면 이 남자 덕분에 전과 달리 더욱 힘을 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흐음…’ 이런 총장의 마음을 짐작이나 할는지 더욱 짙어지는 노감독의 한숨 소리는 총장이 들고 있는 핸드폰마저 무겁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 “앗!” 대검찰청의 검사실 중 중수부에 배치된 검사의 방 앞에서 두 시간이 넘게 대기하던 하연은 이윽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사무실 앞으로 걸어오는 검사를 빙긋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강검사님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가동되는 중수부에 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요.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축구 협회장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후보들과 그 주변을 중수부에서 직접 캐고 있다던데 수사에 진전은 좀 있습니까?” 검사는 하연의 넘겨짚는 발언에 넘어가버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이러쿵 저러쿵 발표할 단계는 아닙니다. 그런데 어디서 오신 건지…” “아 그게…” 하연은 차마 스포츠, 그것도 축구 전문 기자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기에 조금 망설이고 있었지만, “하긴, 벌써 저희 움직임을 알고 계실 정도면, ‘거기’서 나오셨겠군요?” “네, 그…렇죠, 잘 아시네요.” 생각지도 못하게 검사의 입에서 먼저 호의적인 발언이 튀어나오자 하연은 이미 정치와 검찰, 그리고 언론이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던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스에 의하면 그 이면에 조전무의 개입도 있었다던데요, 그건 알고 계셨습니까?” “전 모르는 일입니다.” “?” “…라고 대답했다고 적어주십시오.” “예? 아, 예.” “뭐, 실은 저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관례대로 라면 중수부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움직이는 건데, 결국 유추하자면 대통령과 조전무 간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던 거라고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겠지요. 뭐, 이런 별것도 아닌 일에 중수부까지 기동시킨다는 게 좀 짜증이… 아, 이건 못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그럼…?” “뭐 어쨌든 저흰 그저 부장님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결과가 어찌되든 중수부의 수사가 진행된다는 것 만으로도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각 시도 축구협회 회장들과 축구 연맹들, 그리고 정회장 체제의 협회 이사회를 간접적으로 압박할 수 있겠죠?” 하연은 각 시,도 축구협회장 16명, 프로,실업,대학,고등,중등,유소년,여자축구연맹 회장 7명, 그리고 정회장 체제의 협회 이사회에서 선출하는 중앙대의원 5명등 총 28명의 투표로 결정되는 축구협회 회장 선거방식에서 이번 중수부 수사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아마도요. 어쨌든 나중에 수사 결과에 대한 발표가 따로 있을 테지만, 그 전에 언론사의 서포트도 중요할 겁니다. 그러니 알아서 좀 미리 잘 써주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참,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요.” “?” “얼마 전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점점 추락하고 있다는 한 여론 조사기관의 결과 발표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뭐, 상관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러다 말 거라는 거. 늘 그랬듯…” “그…렇군요. 어쨌든 오늘 바쁘신데 시간 할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새끼야…)” 마음속으로 진득하게 욕을 하며 웃는 얼굴의 하연에게, 꽤나 느끼한 미소를 건네고 이내 자신의 방으로 검사가 사라져버리자, 하연은 자신의 백 귀퉁이에 살짝 나와있던 핀 마이크를 재빨리 백 속으로 집어 넣고는 그 핀 마이크의 선에 연결되어 있던 보이스 레코더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제대로다.’ 그야말로 물증을 잡은 하연은 곧바로 백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부장에게 전화를 걸려다 문득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터뜨릴 거면… 좀 더 큰 곳이 좋지 않을까?’ 결국 하연은 부장의 번호를 취소하고는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 중 하나를 선택해 통화버튼을 눌렀다. - 어느새 전주에 도착한 영후와 선수단 전체는 저녁식사와 함께 벌어지는 조 추첨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호텔의 크리스탈볼룸으로 이동했는데, 원형의 고급스런 탁자들이 줄지어 있는 공간의 앞쪽엔 대형 스크린과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꽤 성대하네요.” 수림이 조금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이윽고 타 대학 선수단이 들이닥치자 조용했던 공간은 이내 시끌벅적한 시장처럼 바뀌었고, 남희는 혹여 타 팀 선수들과 괜한 충돌이나 생기지 않을까 싶어 아이들을 이끌고 지정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혔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모든 테이블이 꽉 차기 시작했고, 이윽고 장내에 불이 꺼지자 식전 행사로 아이돌 그룹 두 세 팀이 현란한 춤과 함께 노래를 몇 곡 부르고 퇴장했고, 그 이후 TV에서 본 듯한 사회자가 무대 위로 등장해 인사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든 선수단들의 긴장감을 해소시켜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사회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조 추첨에 쏠려 있었기에, 얼마 안 있어 조 추첨을 위한 번호가 적힌 공들이 담긴 네모난 상자와 함께 커다란 보드 판이 등장하자 장내는 이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보드 판엔 네 개 팀으로 이루어질 A조와 세 개 팀으로 이루어질 B조의 공란이 보여지고 있었는데, A조에는 1번부터 4번이, 그리고 B조에는 5번부터 7번이 적혀있었다. 틀림없이 모든 팀의 스텝들은 하나같이 B조에 속할 수 있도록 5번과 6번 혹은 7번을 뽑길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보다 공정한 조 추첨을 위해서 각 학교에서 한 분씩 나와주셔서 직접 공 하나씩을 바구니에서 꺼내주시면 되겠는데요, 자 그럼 다들 한 분씩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겠습니까?” 다들 갑작스런 사회자의 발언에 당황한 듯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느라 또다시 장내는 소란스러워졌지만, 한국여대에서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어깨 끈이 없는 연한 민트 색의 탱크탑과 함께 새하얀 초미니스커트, 그리고 ‘킬 힐’까지 신고 있던 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걸어나가자, 갑자기 각 학교들은 더욱 난리가 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은 트레이닝 복 차림의 편한 복장으로 왔건만, 너무나 도발적인 윤지의 등장으로 거의 남자들과 같은 모습의 일반 여자 선수들은 그야말로 카메라를 통해 전국적으로 외모가 비교 될 게 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타 대학 팀에선 감독 이하 스텝들이 나올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윤지의 축구 선수답지 않은 외모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런 윤지를 바라보는 영후는 식전에 있었던 윤지와의 조우를 떠올리자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배정되어 있던 호텔 룸에 짐을 풀고 난 영후의 룸에 초인종이 울리자, 영후는 남희나 수림일거라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지만, 그 곳엔 의외로 윤지가 서 있었다. “윤지야…?” 조금 의외라는 표정의 영후를 바라보던 윤지는 그러나 자기집 드나들 듯 아무렇지도 않게 영후의 룸으로 들어섰고, 영후는 무덤덤하게 윤지를 안으로 들이고는 문을 닫았다. “차 타고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좀 쉬지 않구.” “차 타는 것 보다 다른 걸 타느라 요새 더 힘들다구요.” “어?” 윤지는 영후를 지칭하며 농담 삼아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지만, 밤마다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알 리 없었던 영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기에 윤지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별 것도 없는 룸을 거닐다가 침대에 털썩 앉고는 영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또… 왜…?” 역시나 눈빛 만으로도 긴장하는 영후를 바라보던 윤지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시죠? 오늘 있을 조 추첨식?” “으응, 그렇지. 근데 왜…?” “거기, 그러니까 조 추첨식에 제가 나가게 해주세요.” “어? 그게 무슨…?” 조 추첨식이 잠시 후 이 호텔의 크리스탈 볼룸에서 거행된다는 것은 영후도 알고 있었지만, 그 추첨을 각 팀의 일원이 하게 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기에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놀라시긴… 그냥 올라가서 공 하나 뽑고 오는 거니까, 딱히 걱정하실 거 없어요.” “아니…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게… 그러니까, 그런 방식으로 할 거란 거… 그런 걸 너 어떻게 알고 있었니?” 순간 윤지의 눈동자는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평소의 윤지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잊으셨어요? 저도 어엿한 코치라고요. 물론 선수로도 등록되어 있지만…” “아, 그래 그건 잊지 않고 있었어. 그치만…” “어쨌든 제가 나가도 되는 거죠?” 거의 막무가내로 이야기하는 윤지를 보며 결국 영후는 양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 누가 나가든 무슨 상관이겠니. 근데 왜 갑자기…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꾼 거니?” “그렇게 생각하시던지요. 그럼 그렇게 알고 전 가볼게요.” “그, 그래.” 예상과 달리 별 일 없이 윤지가 방을 나가려 하자 꽤나 긴장했던 영후는 겨우 숨을 내 쉬어 보고 있었지만, 문을 나가기 전 윤지는 영후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직하게 물었다. “이번 대회… 많이 힘들겠죠?” 들어올 때와 달리 꽤나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윤지 덕분에 영후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렇겠지.” 역시나 이 남자도 현실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기에 윤지는 조금은 우울한 얼굴을 한 채로 영후의 대답을 끝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 하고 있었지만, 바로 이어지는 영후의 첨언에 윤지는 가슴이 두근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재밌을거야. 그러니까 이 초보 감독만 믿고 따라오렴. 윤지, 너라면… 그래 줄 수 있지?” 그제야 다시금 뒤돌아 영후를 바라보던 윤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이내 문을 열고 나갔지만, 닫힌 문 밖에서 윤지가 여전히 문에 기댄 채로 마음을 다잡고는 이내 조전무와 전화 통화를 하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건 영후는 알지 못했다. “네, 저에요.” ‘그래, 어찌됐느냐?’ “제가… 하기로 했어요.” ‘역시, 넌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그래 그럼, 잠시 후에 있을 조 추첨식에서 해야 할 일을 말해주마.’ 휴대폰으로 들려오는 조전무의 이야기에 윤지는 도대체 이 남자의 욕망은 어디가 끝일지 짐작도 못해 볼 얼굴로 변해 버렸고, 그런 윤지의 얼굴을 알리 없던 조전무는 윤지에게 계속해서 ‘지령’을 내리고 있었다. - “감독님, 왜 윤지가…?” 무대위로 냉큼 올라간 윤지 때문에 당황하며 남희는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영후에게 물었다. 물론 처음에 윤지가 나서지 않았다면 타 대학에서도 선수가 등장 했을는지 도 모를 일이었지만, 정작 지금은 한국여대만 선수가 나가 있었고, 나머지 대학에선 전부 코칭 스텝 중 한 명이 나와 있었기에 초반부터 기세에 밀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든 남희는 영후에게 투정을 부려보고 있었다. “잊으셨어요? 윤지도 코치잖아요 후후.” 역시나 영후는 윤지에게 들었던 멘트를 그대로 재활용하며 빙긋 웃어주었다. 하지만 남희보다 더 속으로 걱정하고 있던 건 역시 영후였다. ‘윤지…’ 하지만 이런 영후의 마음을 알리 없는 무대 위의 사회자는 예상치 못했던 윤지의 출현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 듯 한 옥타브는 더 올라간 목소리로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네, 그럼 제일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오신 분과 한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자, 자기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여대 1학년 송윤지 입니다. 팀에서 선수 겸 비디오 분석 코치를 맡고 있습니다.” “아, 대단하시네요~? 이제 1학년 밖에 안된 학생이 선수와 코치를 동시에 맡고 있다니요? 근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축구를 대학에 와서 시작하셨다던데 사실인가요?” “예…” “야… 그럼 떨리지 않으세요? 이런 축구 대회엔 처음이실 텐데요…?” “조금 떨리긴 하지만, 감독님께서 즐겁게 축구하자고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한 경기 한 경기 즐겁게 하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대단하시네요, 감독님도 그렇고 선수들도… 그래 개인적으로 이번 대회에서 목표가 있을 텐데요? 살짝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건…” 윤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는 영후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 먹은 듯 입을 열었다. “감독님의 목표가 곧 저희 목표니까요… 그러니까…” “……”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윤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 주었지만, 이내 윤지의 입이 열리자 장내는 그야말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승 입니다.” - ‘드르륵’ 소리와 함께 삼거리 슈퍼의 문이 열리자 규식은 자연스레 입에 밴 인사를 하려다 말았다. “어서오…? 어라? 현우야? 갑자기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어? 아저씨, 왜 지금 이러고 계세요?” “응? 뭐가? 그럼 내 가게에 내가 이러고 있지, 또 뭘 하고 있어야 되는 거냐?”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의 규식을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현우는 무척이나 답답했지만, 겨우 안 그런 척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왜, 텔레비전 안 보고 계시냐고요. 지금 전야제 겸 조 추첨식을 하는데…” “어? 조 추첨식? 무슨 조 추첨식?” “무슨 조 추첨식은요! 혜미가 출전하는 여자축구 선수권대회 조 추첨식이요!” 현우의 말을 듣자마자 규식의 눈은 더없이 커지고 있었다. “앗! 뭐라고라! 진짜냐?! 근데 왜 이제야 그 얘기를 하는 거ㅤㄴㅑㅅ!!” “그야… 저는 당연히 아시는 줄로 만…” 하지만 현우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규식은 우당탕 골방으로 뛰어들어가 TV를 켰고 그러자 마침 카메라가 한국 여대 쪽 테이블을 비춰주었는데, 역시나 규식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아닌 혜미였다. “헛! 혜미다! 야, 야 현우야 혜미 나왔다!!” “풉, 저도 보고 있어요.” 그러나 그도 잠시 카메라는 무대 위로 돌아갔고, 무대 위에 서 있는 윤지의 모습에도 규식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또 언제 나올지 모를 혜미를 기다리는 사이, 현우는 새초롬한 윤지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의 이유없는 근심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는 괜히 주먹을 한 번 꽉 쥐어 보고 있었다. - 이윽고 각 팀을 대표해 나온 사람들의 간략 소개가 끝나자 7개의 공을 담은 상자가 등장했고, 무대위로 올라온 순서대로 뽑기로 했기에 한국여대가 가장 먼저 공을 꺼내도록 했고, 나머지 팀들도 별 이의 없이 동의했기에, 윤지는 곧 앞으로 나와 손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는 네모난 상자에 손을 집어 넣었다. ‘아…’ 그제야 윤지는 조전무가 말해줬던 ‘차가운 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상자에 들어있는 공이 차가울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분명 윤지의 손가락 끝에 닿고 있는 공은 마치 꽁꽁 얼린 얼음처럼 차가웠으니까. ‘이걸 꺼내면… 그러면 우리 팀은 어떻게 되는 거지…?’ 윤지의 머릿속에서는 그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에 영후를 비롯해, 두 미녀코치와 혜미, 그리고 다른 모든 선수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윤지는 눈을 꽉 감은 채 차가운 공을 꺼내 들어 떨리는 손으로 사회자에게 건넸다. 그러나, 분명 차가웠을 텐데, 사회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잠시나마 윤지에게 미소를 건넨 후 힘차게 번호를 외쳤고, 그런 사회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윤지는 생각보다 전반에 걸쳐있는 조전무의 거미줄 같은 마수에 더욱 긴장 할 수 밖에 없었다. ‘알고… 있던 거야? 사회자도…?’ 하지만 그런 윤지의 놀란 표정에 전혀 동요하지 않던 사회자는 더욱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좌중을 향해 외쳤다. “한국여대, 5번을 뽑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이얏호!!!” 윤지가 뽑아 든 공이 5,6,7 이렇게 세 개 팀으로 이루어질 B조에 속한 것임을 확인한 한국여대 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고, 남희와 수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지만, 차가운 공이 결코 한 개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무대 위의 윤지와 그런 윤지의 표정을 읽은 무대 아래의 영후만큼은 어쩐지 더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국장님. 일레븐의 박하연이라고 합니다.” “네, 어서오세요.” 하연은 설마, 문화방송의 보도국장이 자신을 만나 줄 거란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었지만, 보도국에 전화를 하기로 한 결단이 결국 이 상황까지 만들어 주었기에 하연은 마음을 단단히 먹어보았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 드립니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그런 인사치레는 생략하기로 하고요, 그래 어디까지 진척이 있는 겁니까?” “우선, 오늘 중수부에 편재된 검사 한 명을 만났었는데, 수사가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오늘 녹취한 대화 내용입니다. 먼저 들어보시죠.” 하연은 보이스레코더를 백에서 꺼내 바로 재생버튼을 눌렀고, 이번엔 검사와 하연의 대화가 무척이나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흐음… 설마 했었는데…” 이내 하연과 검사가 나누었던 대화내용을 모두 듣고 난 보도국장은 꽤나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연 또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는 심정으로 곧바로 입을 열었다. “또한 한국여대와 축구연구소에 갑작스런 세무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그것도 조사 4과가 직접…” “조사 4과요!?” 그제야 보도국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는 테이블에 한 켠에 놓여있는 담뱃갑을 집어 들고는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하연을 바라보며 양해를 구했다. “네, 괜찮습니다.” 칙. 칙. 치익. 싸구려 라이터의 부싯돌을 몇 번 돌리고서야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었던 보도국장은 폐 속 깊숙하게 연기를 들이마셔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점이 있군요.” “네? 무슨…?” “조전무의 경쟁자들 뒤를 캐는 건 그렇다 치지만, 축구 연구소는… 아, 그 쪽에서도 한 명 후보가 나온다고 했으니 그건 넘어가고… 그치만 한국여대는 왜…?” 확실히 그 점까지 설명하기엔 하연도 자신이 없었다. 노감독이 미우니, 노감독의 제자까지도 미울 수 밖에 없는 조전무의 속내를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하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이곳 저곳 들쑤셔서, 자신들의 진짜 목표가 어딘지 쉽게 밝혀지지 않도록 하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국장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필터까지 타 들어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얼굴이었고, 조용한 가운데 커다란 벽시계의 초침소리만이 유독 크게 들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이윽고 타 들어 간 길다란 담뱃재가 소리 없이 떨어짐과 동시에 국장의 붙어있던 입술도 떨어졌다. “좋습니다. 한 번 해 보십시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나, 박기자님께서 구해오신 것 만으로는 조금 부족할 것 같으니 우리도 나름대로 취재를 해서 되도록 빨리 방송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휴우… 아무튼 이제야 저도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수 있겠네요. 그럼 잘 부탁 드립니다!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본연의… 임무? 아…!” 그제야 국장은 방금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여자의 직업이 축구전문 기자라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축구 기자라는 직함은 그리 알아주는 명함이 못 된다는 걸 국장은 알고 있었기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국장은 분명 박하연이란 기자도 그저 괜찮은 뉴스거리를 물어온 공으로 방송국의 정치부 기자로 들어오려 하는 건 아닌가 잠시 의심하기도 했었지만, 저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축구계의 앞날도 그렇게 어두운 것 만은 아니군. 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국장은 테이블에 놓여진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책상 머리에 붙어있는 정치부 기자들 전부 집합!” 그리곤 다시금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들어 불을 붙이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우리 방송국이 정치권에 의해 난도질 당했다 해도, 축구 기자한테까지 밀릴 순 없지. 암, 그렇고 말고…” - 조 추첨이 끝났음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는 아이들을 방으로 돌려보낸 후, 남희와 수림은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영후에게 돌아왔지만, 영후는 한동안 조별 편성이 적혀 있는 종이를 들여다 보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A조 강원도립대, 영진전문대, 한양여대, 울산과학대 B조 한국여대, 위덕대, 여주대 여자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당연히 한 팀만이 떨어지는 B조가 훨씬 좋아 보일 테지만, 남희는 강진에서 영후와 지켜봤었던 여주대와 위덕대의 경기력을 떠올리자 벌써부터 근심이 쌓이는 것만 같았다. 여주대와 위덕대. 지난 몇 년간 우리나라 여자 국가대표를 길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팀이니 만큼, 작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여주대도, 준우승을 차지한 위덕대도 올해 역시 우승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필이면…’ 남희는 바로 조금 전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한 뒤라 더욱 아쉬움이 짙은 마음에 입술을 질끈 깨물어 보고 있었지만, 정작 영후의 고민은 조별 편성이 아닌, 윤지 때문이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남희와 수림이 꽤나 걱정스런 얼굴로 각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영후는 마치 ‘기면증(발작적으로 졸음에 빠져드는 증세를 말한다.대부분이 스트레스 때문에 나타난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몸이 긴장하게 되어 평소보다 피로가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되면 피로가 한번에 몰려 잠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피로뿐만 아니라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도 원인이 되는데, 두려움과 갈등에서 벗어나는 수단이 잠이 되는 것이다. 위키백과 참조)’에 걸린 듯 또다시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 들었다. - “아, 시원하다. 윤지야, 넌 안 씻을 거야?” 혜미가 갓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말아 올린 채 나올 동안 윤지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틀어놓은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 어어. 씻어야지, 씻어야지…” 허나 말만 그렇게 할 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윤지의 시선을 따라 TV를 바라보던 혜미는 스포츠뉴스에서 오늘 있었던 조 추첨식에 대한 간단한 멘트가 흘러나오자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작년 한국 여자 축구선수권대회 우승팀인 여주대와 준우승팀 위덕대의 조 추첨 장면을 끝으로 오늘 스포츠뉴스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좀 전에 현장에서 봤었던, 여주대와 위덕대의 코칭 스텝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보여지자 혜미는 그 팀들이 그렇게나 좋아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그럼, 그 두 팀들은 무조건 우리 한국여대를 이기고 4강에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정말 우리가 싸워야 할 두 팀이 작년 1,2위 팀이란 거야…?’ 혜미가 당황스런 얼굴로 복잡하게 고민을 하는 것을 알고는 윤지는 이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 “무… 무슨 소리야 윤지야?! 저건, 저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 모두 얼마나 좋아했는데!? 윤지 네 덕분에 이틀씩 쉴 수 있는 B조에 들어갔다고!” 그제야 혜미는 자신이 윤지 앞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최악의 조 추첨을 해버린 아이 앞에서 당황한 표정을 지어 버리다니… 때문에 혜미는 더욱 적극적으로 윤지의 편을 들어주려 했다. “그치만…” “걱정하지마! 고작 6개 팀끼리 붙었던 대회에서 1등 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잖아? 이번엔 우리가 우승할 수도 있는 거야. 아니 꼭 우리가 우승할 거야!” 하지만 혜미는 알지 못했다. 여주대는 작년 뿐만 아니라, 2년 전에도, 3년 전에도 이 대회, 그러니까 전국 여자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것과, 작년엔 국내의 모든 대회를 석권하며 3관왕에 올랐다는 것도. - 어느새 전주로 내려왔다는 하연의 전화를 받고 호텔의 로비에 내려와 있던 남희는 자동 회전문을 빠져 나오는 예쁜 여자를 발견하고는 조금 손을 들어 보였다. “박기자님.” “아, 권코치님…” 원래 친한 사이도 아니었건만 요 며칠 간 더욱 멀어진 것만 같은 어색함에 하연과 남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마주 서 있었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하연이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괜찮다면 커피 한 잔 하면서 얘기 할 수 있을까요?” “보시다시피 호텔 커피ㅤㅅㅛㅍ은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아…” “그것보다는, 밤바람이 꽤 좋던데… 나가서 조금 걸을까요?” 하연은 남희의 제안에 이내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먼저 나선 남희의 뒤를 따라 호텔을 빠져나갔다. - ‘으…’ 머리가 깨질듯한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영후의 눈엔 또다시 수림의 탈을 쓴 몹쓸 괴물 하나가 보이고 있었고, 영후의 머릿속에선 여지없이 은밀한 속삭임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또 괴물이 있어…… 주저하지 말고 처단해야 해……’ ‘하…하지만 저건 괴물이 아니야…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바보같이 굴지 마! 저건 네가 아는 그 여자가 아니야! 그저 널 괴롭히는 괴물일 뿐이지!!’ 영후가 스스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수림은 조금은 겁먹은 표정으로 영후에게서 한발 떨어진 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도, 윤지도 없는데… 나 혼자 어쩌지…?’ 셋이 있을 때도 힘에 부쳤었는데 지금은 홀홀단신으로 영후를 상대해야 한다는 공포감에 수림의 몸은 더욱 굳어져 가기만 했다. 하지만 수림이 겁에 질려 엉거주춤 서 있는 동안 영후는 계속해서 자기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벌써 잊었어? 널 아프게 한 것도 다 저 괴물들이었어! 널 힘들게 한 것도 다 저 괴물들이었어! 저 괴물들만 없었다면, 넌 지금쯤 하연이와 함께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 거라구! 그러니 어서, 어서 저 괴물을 너의 무기로 해치워 버렷!!! 섹스!!! 그래, 섹스해!!! 섹스해버렷!!!!’ ‘아… 하연이… 나의…’ 결국, 또 하나의 자신에게서 ‘하연’의 이름이 거론되자 영후는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한 채 옷을 벗고는 어느새 거대하게 발기된 자신의 자지를 드러내며 수림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 낮은 여름이라고 해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날씨였지만, 밤은 그런대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기에 호텔 밖의 산책로를 나란히 걷고 있는 하연과 남희의 머리칼은 아름답게 날리고 있었다. “저기… 정말 미안해요. 그날, 바로 오려고 했는데” 어렵게 먼저 이야기를 꺼낸 하연은 그러나 이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아직은, 취재 건에 대해서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남희는 이내 바람을 한껏 즐기는 얼굴로, 그와는 정 반대의 무게를 실어 입을 열었다. “박기자님. 우리 감독님이, 아직도 순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건…” “순결하다는 것의 정의는 대체 뭡니까?” “……” “절대 순결이란 정의가 존재하긴 하는 겁니까?” “남희씨, 저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다투려고 온 게 아니에요.” 하연이 괴롭다는 얼굴로 조금 소리를 높이자, 남희는 그제야 하연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니요, 이건 중요한 문젭니다. 솔직히 전, 이 세상에 완전 무결한 순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여자와 섹스를 했다고 순결하지 않다면, 그럼 마음만 허락한 남자는요? 그런 남자는 순결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남희씨, 저는 지금 철학이나 정의를 논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한 여자와 백 번쯤 섹스를 한 남자와 세 여자와 몇 번씩 섹스를 한 남자. 둘 중 어느 남자가 더 순결함에 가까운 겁니까? 아니 여자와 한번이라도 몸을 섞은 남잔 무조건 불결한겁니까?!” “남희씨! 저는 지금 영후 얘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저도 지금 저희 감독님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남희는 더욱 크게 소리쳤다. “감독님은! 그 누구보다 박기자님을 원하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그래, 당신한테는 고작 한 남자의 순결함이 그렇게나 중요했었단 겁니까?!” “그건… 그런 건 당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잖아요!” “아니요! 상관 있습니다! 당신만 바라보는 남자를 유혹한 게, 자나깨나 박하연이라는 여자만 입버릇처럼 말하던 남자의 품에 먼저 뛰어든 게! 바로 저니까요!”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바로 자신의 앞에서 다시금 남희가 울부짖자 하연은 온몸에서 바람이 빠져버린 듯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고 있었다. “…… 기억하고 있어요… 알고 있다구요… 그때… 남희씨가 말해주었으니까…”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하연의 눈이 남희의 눈에 비춰지자 남희는 조금 마음이 아팠지만, 그런 남희의 마음을 더욱 독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하연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남희의 눈엔 그야말로 불똥이 튀었다. “그래서… 영후가 원하는 건 ‘여자’였던 거지… 구태여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더는… 더 이상은… 이제는 영후를 그냥 놓아주려고” 찰싹! 순간이었다. 남희의 손이 번개처럼 하연의 뺨을 후려갈긴 건. “…?!” 뺨을 맞아서라기 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남희의 반응에 더 놀란 하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뺨을 만져보고 있었지만, 남희는 그런 하연에게 버럭 소리를 내 질렀다. “박기자님! 박하연씨! 아니 박하연!” 너무나 격한 반응을 보이는 남희의 얼굴을 하연은 고작 바라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남희는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뺨을 때려서라도 하연을 정신차리게 하고 싶은 눈으로 쏘아보았다. “당신 때문에! 지금 영후씨가 어떻게 돼버렸는지 알기나 햇!!!” “그… 그게 무슨…?!” 빨갛게 변해버린 뺨을 아파할 사이도 없이 하연은 영후가 어떻게 됐다는 건지 놀란 눈으로 남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악~~~~!!!!” 점점 더 포악해진 영후의 자지는 급기야 애액이 범벅이 된 채로 한껏 벌어져버린 수림의 보지를 외면하고는 이내 촘촘하게 주름진 채로 꼭 입을 다물고 있는 항문으로 직행했고, 그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수림의 입에선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 안돼요 거기는!! 아악!!! 여… 영후씨!!! 아니 감독님!!!! 거긴… 아아… 아흑! 아아…” 하지만 거짓말처럼 자리가 항문 속으로 삽입되자 마자 흡사 기계적으로 반복되기 시작하는 엄청난 펌프질에 수림은 고통 속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이상한 흥분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아흑… 아… 감독님… 으으…… 아항… 아응…” 엎드린 채로 얼굴을 침대에 묻은 채 시트를 손으로 쥐어 뜯으면서도 수림은 이 이상한 고통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은 어느새 더욱 빨라진 자지의 움직임 덕에 산산 조각나 버리며 머릿속은 그야말로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헉! 헉! 헉! 헉!” “아흑! 윽! 윽! 아앗! 앗!” 턱! 턱! 턱! 턱! 턱! 손가락 조차 들어가지 못할 곳처럼 보였던 수림의 항문은 그러나 이미 영후의 자지의 둘레만큼이나 벌어진 채 움찔대며 영후의 자지를 꽉 물어주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한 다는 듯 영후는 보지에 박아대던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자지를 박아대고 있었다. 이윽고, 수림의 항문 속에서 빠르게 왕복하던 자지는 이내 점점 더 부풀어 오르더니 결국 정점에 도달했는지 엄청나게 뜨겁고 또 많은 양의 정액을 난사시키며 폭발하기 시작했고, 수림은 마치 온몸의 내장 곳곳으로 그 뜨거운 영후의 정액들이 달려드는 느낌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댈 수 밖에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영후 또한 빠져나간 정액과 함께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수림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열린 호텔의 문에 서있는 남희의 얼굴을 확인하며 수림은 다행이라고도 생각하려 했는데, 이내 남희의 뒤로 보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하연을 발견하고는 ‘큰일이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쥐어짜듯 힘을 내보려 했다. 허나 여전히 자신의 등에 포개진 채로 몸을 짓누르고 있는 영후의 축 쳐진 몸과 더불어 아직도 자신의 항문에 그대로 박혀 있는 영후의 자지 때문에 어쩌지도 못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듯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 “후…” 처음이 아닌 듯 꽤나 능숙하게 영후와 수림을 침대에 바로 누이고서야 한숨을 쉬며 돌아서는 남희를 바라보다가 하연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곤히 잠들어있는 영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저기 잠들어 있는 게 영후란 말야…?’ 굳이 영후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섹스 행위를 보이게 되면 당연히 창피해하고 또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것이었는데, 분명 자신과 그 순간 눈이 마주쳤던 영후는 지금까지 하연이 알고 있던 ‘영후’가 아닌 듯 아무렇지도 않게 수림의 몸 속에 사정을 하고 있었으니 하연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기자님이 그렇게 가버린 날부터, 매일 밤마다 이렇게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매일…” “물론 저희도 처음엔 놀라기도 했지만, 그 다음엔… 기분 나쁘실지 모르겠지만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 “마음은 얻지 못할 지언정, 저 남자의 몸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말입니다. 하지만… 점점 무의식 상태의 감독님과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저희 마음속 무언가도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남희가 그리 얘기하지 않았더라도, 찡그린 얼굴로 잠이 들어버린 수림을 바라보며 하연은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도 같았다. “그게 뭔지는 저도, 또 수림씨도 자세히 알 순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밤 저 남자와 몇 번씩 섹스를 나눈다 해도 그저 잠깐의 쾌락은 얻을 수 있어도, 누군가에게로 향해 있는 마음까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남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영후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하연에게 남희는 결국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저 남자의 마음은, 처음부터 오로지 당신, 박하연 이라는 한 여자에게로 쏠려 있었으니까요.” 남희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하연을 바라보자, 하연의 얼굴은 웃고 있으면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하연은 남희에게 천천히 묻고 있었다. “그럼, 난 이제 어떡해 하면 되는 거죠…?” - 똑똑. 이미 잠들어버린 혜미와는 반대로 잠들 수 없었던 윤지는 초인종대신 들리는 노크소리에 침대 위에서 내려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 ‘윤지야, 나야 권코치.’ 왜 전화를 하지 않고 직접 찾아왔는지 조금 이상했지만, 윤지는 바로 문을 열었다. “다행이다. 아직 안자고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는 표정의 남희 뒤에는 복잡한 심경으로 서 있는 하연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윤지는 눈으로 남희에게 묻고 있었고, 남희는 그제야 윤지와 하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간간히 잠든 혜미의 옅은 숨소리가 침실 쪽에서 들려왔기에, 거실에 앉아있던 남희와 하연, 그리고 윤지는 꽤나 신경을 쓰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세요?” 꽤나 의외라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질문은 남희에게 하던 윤지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남희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옮겼다. “윤지, 네가 어째서 그런 방면에 능숙한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지금 박기자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왜… 도움이 필요한 거죠? 저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분한테…?” “그게… 우선은 지금 감독님이 많이 아프시기도 하고, 평소 같지 않은 면도 있잖니. 게다가 계속 이 상태로 가다간 또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 될는지도 모를 일이고…” 꽤나 직접적인 윤지의 물음에 남희는 다소 당황스런 표정으로 이런 저런 이유를 끌어다 대며 하연과 윤지를 바라보았지만, 하연은 남희와 달리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아직 나, 그런 경험이 없거든.” “에에?! 진짜요?!” 여태 심드렁한 얼굴이었던 윤지는 하연의 입이 열리고 나서야 꽤나 놀란 얼굴로 바뀌었다. “그… 그러니까 지금… 박기자님이… 우리 감독님하고… 그거, 그거… 그러니까 ‘섹…스’를 할거니까… 나보고… 응?” 윤지 답지 않게 무척이나 더듬거리며 두 여자에게 묻자 남희도, 하연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제야 윤지는 이게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 묘한 미소를 흘리며 하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35부. 용서받은 남과 여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개막식이 끝난 후 개막 경기를 위해 한양여대와 울산과학대 선수들이 푸른 그라운드 위에서 몸을 풀고 있었지만, 남희야 말로 그들보다 더 잰 몸놀림으로 관중석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는데 정작 그 예쁜 얼굴에는 온통 근심스런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딜 가신 거지? 조금 있으면 경기가 시작 될 텐데…’ 남희는 개막식이 끝나자마자 (생각 같아선 개막식이고 뭐고!) 바로 옆 연습 경기 장에서 한국여대 선수들의 마무리 훈련을 지도하려 했지만, 부득불 오늘 있을 A조의 경기를 봐야겠다며 사라져버린 영후를 보좌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뒤쫓아 전주 월드컵 경기장으로 부리나케 와 보았던 것이다. 허나 개막경기가 열리는 경기장 치고는 너무나 한산한 관중석 어디에서도 영후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게다가 나타나라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는 의외의 인물이 꽤나 반가워하며 남희에게 인사를 건넸기에 남희는 조금쯤 뿔난 얼굴을 한 채로 홱 돌아보았다. “어라, 혹시 한국여대 코치님… 아니십니까?” “아, 구… 에이전트 님…?” “하핫!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다행이네요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근데 영후는…?” “저도 실은 그게 궁금한 참입니다만.” 남희의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 철용의 눈엔 꽤나 귀엽게 보였던지, 그만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곧바로 안경 너머로 남희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자신에게로 쏟아지자 철용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다, 담배를 끊어야 되는데… 점점 헛기침이 잦아져서 원…” 하지만 말과는 반대로 양복 주머니를 뒤지며 또다시 담배와 라이터를 찾는 철용의 모습에 남희는 또다시 눈을 흘겨 보았지만 그도 잠시, 다시금 관중석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에 철용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 “후아…” 택시에서 내려선 영후는 곧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국내의 보통의 성당과는 다른, 무척이나 이국적인 모습의 ‘전동성당’의 외관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유럽의 성당같이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쟌틴 양식’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에, 한국의 성당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또 가장 화려하다는 게 허언이 아니었음을 두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영후는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도 잊을 정도로 한동안 성당의 멋진 자태에 넋을 잃고 있었다.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한참을 서서 성당의 웅장함에 넋을 잃고 있던 영후는 겨우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생각해 내고는, 오래된 나무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웅장한 외관과는 달리 경건하고 또 애잔한 분위기의 실내 정경에 절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아무도 없는 고해실의 문을 열어 보았는데, 그것 뿐이었다 영후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어쩌지…?’ 딱히 종교도, 믿음도 없는 영후였지만, 어쨌든 하연에게, 또 그 많은 여자들에게 미안함을 넘어 ‘죄’를 지었다는 마음에, 예전 영국에서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금 성당이란 곳을 찾았지만, 정작 어떻게 잘못을 이야기하고 또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지 그 방법은 알 수 없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흠흠.” 사제복을 입은 신부님께서 영후가 열고 있는 고해실의 반대편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간 건. 결국 영후는 자신이 열고 있던 고해실 안으로 들어가 어색하게 무릎을 꿇어 보았다. 그러자 영후의 얼굴 부분에 있던 조그만 나무문이 ‘드르륵’ 열리고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손바닥 크기의 망을 사이에 두고 이내 엄숙한 신부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다행스럽게도 오른편으로 영후의 얼굴 높이 즈음에 고해성사 절차가 간단히 적혀 있었기에 영후도 덩달아 손가락으로 어색하게나마 성호를 그으며 신부님과 함께 성호경을 읊었고, 그러자 신부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굳게 믿으며 그 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아…” 신부님의 말씀이 끝나면 곧바로 ‘아멘’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도, ‘고해한지 얼마나 되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던 영후였기에 신부님도 충분히 영후가 신자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아 채셨을 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기다려 주었고, 결국 영후는 겨우 용기를 내어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저, 저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바보같이… 그 여자에게 마음을 표현하기는 커녕, 그보다 먼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런… 그래서요…?” “그런데, 이제야 제가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알게 됐지만,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어서… 사실대로 말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결국 그 친구에게도 또 저와 잠자리를 했던 사람들에게도 바보 같은 제가 죄를 지은 것이란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흠, 그럼 그 잠자리를 했다는 분들도 다, 알고 계시는 겁니까? 교우님의 마음은 오직 한 분께 향해 있다는 것을요…?” “네...” 영후의 대답을 끝으로 건너편의 신부님 또한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후가 지금 고백하는 죄는 십계명 중에서도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간음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져버린 것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그것을 떠나서 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어야 할지 꽤나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우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그 분만을 사랑하고 있나요?”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가 신부님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영후는 잠시 멈칫하기도 했지만, 무릎을 꿇은 채로 기도하듯 맞잡고 있던 두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합니다. 사랑합니다. 정말입니다.” 영후의 진심이 전해져서 였을까, 신부님의 인자한 웃음소리가 조금쯤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다시 엄숙한 목소리로 영후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 앞으로는 한 사람만 보며, 한 사람만 사랑할 자신이 있습니까?” “네! 물론 입니다! 절대로 그럴 겁니다!” “그래요. 그럼, 사도신경…은 하실 줄 모를 테니, 되도록 빨리 그 분께 가서 진심으로 사과를 해서 용서를 구하고 또 화해를 하도록 하세요. 지금처럼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면 그 분도 분명 알아 주실 겁니다.” “감사… 합니다 신부님…” 그리 길지도 않은 신부님의 말씀에 정말로 마음의 안식을 받은 듯 영후는 목이 메이는 듯 했지만, 이내 신부님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절차를 이행했다. “또한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멘. 이제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럼, 평안히 가십시오.” 이윽고 영후 얼굴 앞에 열려있던 작은 문이 닫히고, 신부님이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고해실에 무릎을 꿇은 채로 영후는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 한양여대와 울산과학대의 선수들이 경기를 앞두고 포토타임을 갖는 동안, 영후가 아닌 철용이 남희와 함께 관중석에 앉은 채 무척이나 진지하게 스카우트 리포트에 적혀있는 선수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며, 악수를 나누고 있는 선수들의 얼굴을 간간히 바라보곤 했다. “한양 여대는 오늘 베스트로 나오는 거죠?” “네.” 철용이 여전히 경기장과 정보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남희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묻자, 남희는 한시라도 빨리 연습경기장으로 달려가 아이들의 부족한 셋트 피스를 좀더 다듬어야겠다는 마음이 그득했지만 나타나지도 않는 영후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마음을 감추며 바로 답을 주었다. “특히 현재 대학 팀 중에 유니버시아드 대표를 제외한다면 한양여대에 국가 대표 멤버가 가장 많습니다. 수비수엔 임선주, 신민아, 그리고 공격수에 지소연, 김수연이 현재 국가대표 멤버입니다. 반면, 울산과학대에는 골키퍼인 김스리 말고는 국가대표 멤버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여주대에는 심서연이라는 중앙 수비수하고…” 철용이 ‘한국여대’를 스스럼없이 ‘우리’라 칭하자 남희는 처음과 달리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짐을 느끼며 철용에게 이런 저런 정보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공격수에 김진영이 있습니다. 위덕대도 국가대표 선수가 두 명 있고요.” “그렇게 따지면 여주대나 위덕대 보다 지금의 한양여대가 훨씬 껄끄러울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유니버시아드 대표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여주대야 말로 여전히 최강이라는 것과 여주대와 위덕대를 물리치기 위해 묘수를 짜내야 할 순간에 이렇게 한가롭게 관중석에 앉아있을 수가 없는 남희의 눈엔 그제야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영후가 포착되어 곧바로 남희는 감독에의 예우를 갖추듯 자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철용은 간만의 화기애애한(?) 시간을 방해 당한 듯 남희와는 반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얌마, 숙녀분을 이런 데 혼자 두고서 어디 갔다 오는 거냐?” “아, 선배. 언제 왔어요?” “이제 공은 네 놈한테 넘어갔는데, 내가 발 뻗고 잠이나 잘 수 있었겠냐? 차라리 여기 와서 응원이라도 하는 게 마음 편치.” 철용의 이야기에 남희는 점점 해외 이적을 앞둔 영후와 이별 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었다. 우선은 한국여대의 시합이 코 앞이었으니까. “늦어서 미안해요. 아직 경기 시작 안했죠?” 영후의 물음에 남희가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영후 너머를 바라보는 남희의 시선에 영후도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트레이닝 복 차림의 중년 남성과 역시 트레이닝 복 차림의 여자애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영후는 자리에 앉을 사이도 없이 그들을 맞이해야 했다. “어이쿠, 이거 이영후 선수 아닙니까? 아니, 이 감독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는 건가?” “누구…신지…?” “여주대의 이 영기 감독님이십니다.” 조금 어리둥절해하는 영후에게 남희가 슬쩍 알려주며 여주대의 감독과 그 뒤에 서 있는 국가대표 센터백 심서연을 알아보고 있었고, 그제야 영후도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했다. “안녕… 하세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별 말씀을. 이렇게 만나서 제가 영광인걸요? 그 때 그 월드컵 예선 경기 정말 잘 봤습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저도 정말 많이 감명 받았습니다. 아 맞다, 사인 좀… 부탁해도 될까요?” “네, 그럼요…” 이영기 감독은 심서연 선수에게 노트와 펜을 건네 받고는 다시 영후에게로 건네자, 영후는 빈 노트 위에 커다랗게 사인을 해 건네주었는데 영후에게 다시 노트를 건네 받은 이영기 감독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아이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좋아할 겁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들 몽땅 데리고 올 걸 그랬습니다.” “별 말씀을요… 그리고 어차피 첫 경기 때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때는… 설마 지금처럼 웃으면서 볼 수 있겠습니까, 하하…” “네…? 그게 무슨…?” 영후는 언뜻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남희는 이영기 감독의 도발적인 언사를 듣고는 얼굴이 경직되는 것만 같았는데, 남희의 얼굴과는 달리 이영기 감독의 뒤에 서 있던 심서연의 얼굴 또한 다분히 무시하는 표정이었기에 남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철용이 먼저 심드렁하게 한 방을 날렸다. “감독이라는 분이 꽤나 경솔하시구만? 여주대 선수들도 당.신.처럼 이미 결과가 예정된 것처럼 생각했으면 좋겠군. 그래야 축구공은 둥글다는 만고의 격언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오.”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는 이영기 감독과 곧바로 한 방을 날릴 기세로 앞으로 나서려는 철용의 사이에 남희가 나서며 무척이나 냉정한 어투로 이들을 만류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경기를 관람해야 해서 말입니다. 볼 일이 다 끝나신 거라면, 이만 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이영기 감독은 철용을 노려보던 눈을 거두며 어색하게 안면 근육을 풀어 보였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암요, 경기 보셔야지요. 어차피 저 팀들하고는 직접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르니, 하하하하!” 결국 4강에도 올라가지 못할 것이란 말을 우회적으로 내 뱉는, 그야말로 영후를 깔아뭉개는 듯한 이영기 감독의 안하무인 때문에 또다시 철용이 울컥하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그보다 더 빨리 영후의 따뜻한 손이 철용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으며‘그러지 말라고’말하고 있었기에 철용은 말아 쥔 주먹을 어쩌지 못한 채 씩씩거릴 뿐이었다. 이내 멀어지는 이영기 감독과 심서연 선수의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영후 보다 먼저‘털썩!’하고 큰 소리가 날만큼 남희가 의자에 앉았고, 철용 또한 위압적인 바람소리가 나도록 주먹으로 허공을 몇 번 가르고 나서야 진정을 했는데, 그런 두 사람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던 영후는 그러나 이영기 감독의 언행보다도 동행하고 있던 심서연에게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중앙 센터백… 혜미와 매치 업인가…?’ - 연습경기장에서 수림의 지도하에 여러 가지 세트 피스를 연습하던 한국여대 아이들은 수림의 뒤로 다가오는 하연을 보고는 잠시 연습을 멈췄지만 미처 하연을 보지 못했던 수림은 의아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왜? 왜들 그러니?” “저기, 손님 오셨는데요?” 프리킥 연습을 하는 아라에게로 공을 옮겨주던 윤지가 손가락으로 수림의 뒷편을 가리키며 알려주었고, “응? 아…” 그제야 수림은 자신의 뒤에 와있던 하연이 존재를 알아차렸는데, 하연의 얼굴은 윤지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고 수림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잠시 아이들에게 휴식할 것을 지시하고 하연에게로 다가왔다. “박기자님…?” “오… 코치님…”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선 두 사람은 그제야 어젯밤 있었던 어색한 만남을 떠올리고는 이번엔 동시에 얼굴을 붉혔지만, 하연은 애써 담담한 척하며 인사를 건넸다. “죄송해요, 제가 방해를 한 거 같은 데…” “방해라뇨, 별말씀을요.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영후… 여기 없나요?” “아, 감독님이요. 감독님은 아마 지금 요 옆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 계실 거에요. 오늘 있을 경기들 보고 오실 모양이시던데…” “그렇…군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듯한 얼굴이 그제야 조금쯤 느슨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오늘 꼭!'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또다시 결연한 표정이 되어버리는 하연을 말없이 지켜보던 수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네?” “괜찮으신 거에요?” 수림은 간밤의 하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하연도 수림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있었기에 양 볼을 조금은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어서 경기장으로 가보세요. 지금 쯤이면… 후반전 정도 보고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그럼…” 어찌된 건지 평소의 하연 같지 않아 보이는 비척거리는 모습에 수림은 어젯밤을 떠올리고는 또다시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 “으음… 어?” 영후의 엄청난 괴롭힘 덕분에 남희과 하연의 방문을 뒤로 하고 곤히 잠들어 있던 수림은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에 단잠에서 깨어났는데, 이내 남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놓이는 것도 같았지만, 이내 눈 앞에 벌어지는 광경 덕분에 수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꿈 속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등장인물도 많았고, 여전히 자신의 항문 부위도 화끈거리고 있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반듯하게 누워있는 알몸의 남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세 여자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 보였기 때문에 수림은 이게 결코 꿈이 아니란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자, 이게 남자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자지’라는 거에요.” 윤지는 전혀 발기되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크기와 굵기를 자랑하는 영후의 말캉거리는 자지를 가리키다가 이내 손가락을 이용해 귀두 부분을 조심스럽게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 “지금은 감독님이 잠든 것처럼, 얘도 잠들어 있어서 이렇게 얌전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얘가 얼마나 커지는 지 아세요?” 하연은 마치 수업을 듣는 초등학생의 얼굴로 돌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윤지는 양 손바닥을 서로 한참이나 떨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이~마~안 하게 되요.” “마… 말도 안돼…” 하연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상태만으로도 너무나 커 보여서 저게 몸 속으로 들어온다는 생각만으로도 겁이 날 지경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커진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긴, 믿으실 수 없겠죠. 누구나 처음엔 그러니까. 그럼… 한 번 보여드릴게요.” “윤지야, 그러다 감독님께서 잠에서 깨시기라도 하면…” “권코치님, 장사 하루 이틀 해요? 감독님은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고요. 게다가 지금은 더 그러실 테고요.” 그제야 남희는 얼마 전 콘도에서 있었던 자신과 수림, 그리고 영후와의 일(?)을 떠올리며 그때도 감독님은 잠들어있었다는 걸 상기할 수 있었다. 또한 하연은 이 세 여자들이 영후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렇게 엮여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에 또다시 열불이 나려 했지만, 억지로 꾹 참으며 다시금 강의에 집중했다. “자,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하면 돼요…” 윤지는 영후의 자지를 조심스레 손으로 쥔 채 천천히 기둥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하연을 바라보았고, 하연은 정말 알았다는 건지, 무의식 중에 그러는 건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 번 해보실래요?” 윤지는 하연의 손을 이끌어 영후의 자지를 잡게 했는데, 하연은 손 끝에 영후의 자지가 닿자 잠깐이지만 온 몸을 부르르 떨었던 것도 같았다. ‘따뜻해…’ 비록, 그날처럼은 아니었지만 분명 영후의 자지는 영후의 마음처럼 따스했다. 때문에 하연은 영후의 자지를 잡은 것 만으로도 이미 용서를 하고, 또 용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조금씩 움직여 보세요. 위로, 또 아래로.” 하연은 어느새 윤지의 학생이 되어버린 듯, 시키는 대로 영후의 자지를 잡은 한 손을 천천히 위아래로 부드럽게 왕복시켜보았다. 그런데, 몇 번 왕복을 하기도 전에 어느새 영후의 자지는 윤지의 설명보다도 훨씬 더 커져버렸기에 하연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럼에도 결코 영후의 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 그 정도면 충분히 된 거구요. 이제 하나만 더 하면 준비 완료가 되요.” “하나…더?” 어느새 남희와 수림도 윤지의 강의(?)에 빠져들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었기에, 조금 우쭐한 기분도 드는지 윤지는 약간은 도도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구석에 있는 자신의 백에서 조그만 비닐에 쌓여있는 납작한 크래커 모양의 은박 비닐 한 개를 가져왔다. “자, 이거요.” “이건…?” “콘돔이라는 거에요. 여자들이 하는 피임방법보다 건강에 무해하고, 또 간편하기도 하고, 확률도 가장 높아요. 사실 피임은 여자의 몫이라는 건 잘못된 상식인 거죠. 얼마나 편해요? 그저 하기 전에 끼우고, 다 하고 나면 벗겨서 버리면 되니까…” 윤지의 간단한 설명에 특히나 수영강사 시절에 피임약을 달고 살다시피 했던 수림이야말로 윤지의 말에 동의하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수림의 반응에 신경쓸 겨를 조차 없는 하연의 손바닥 위에 그 작은 물건이 건네지자 하연은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또다시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치만 무작정 씌우면 안되고요…” 윤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연의 손바닥 위에 놓인 콘돔을 집어 들어 은박껍질을 벗겨냈고, 그러자 그 속에 들어있던 분홍색의‘콘돔이란 놈이 나타났는데, 그 반투명하고 반질거리는 것을 다시 하연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속옷 종류 만큼이나 콘돔도 종류가 많아요. 지금 이건 겉에 아무것도 없지만, 어떤 건 오돌도돌한 돌기가 있는 것도 있고 그래요. 어쨌든 우선은 기본 모양은 이렇다는 걸 알아두세요. 자, 한 번 만져보세요.” “어? 으응…” 윤지가 이내 허락을 했지만, 하연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에 커다란 나비라도 올려 놓아준 양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참나, 아무것도 아니니까 한 번 만져 보세요.” 윤지의 타박이 이어지자 그제야 하연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진 콘돔을 만져보았다. “어때요?” “미끌… 거리는 거 같아.” “맞아요, 미끌 거리는 게. 그게 바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는 거에요.” “윤지 네가 보여줬던 그때 그 ‘러브젤’처럼?” 역시나 남희는 모범생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재빨리 기억해냈고 윤지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 콘돔에 포함된 건 극히 소량이기도 하고, 품질도 낮으니까 애액이 많지 않은 여자들은, 아니 비단 그렇지 않더라도 좀더 좋은 느낌, 편한 결합을 위해선 꼭 좋은 젤을 사용해야 해요. 그건 조금 나중에 알려 드릴 테니까요, 우선 이걸 감독님한테 씌워보세요.” “내, 내가?” “그럼, 제가 할까요?” “아니, 아니…” 하연은 잠시 겁을 내다가도 이제는 어떻게든 영후에게 자신만이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생겨버렸는지 꽤나 황급히 대답을 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영후의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자지의 귀두 위에 콘돔을 가져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요.” “어? 그게…뭔데?” “바로… 여기를 이렇게 꼬옥… 누른 상태에서 씌워야 한다는 거죠.” 윤지는 콘돔의 맨 앞에 작은 젖꼭지처럼 돌출되어 있는 부분을 손가락을 이용해 꼬옥 잡아 보였다. “그, 그건 왜 그러는 거지?”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 쭉 윤지의 강의를 경청하던 수림이 그제야 이해 못하겠다는 듯 윤지에게 묻자, 윤지는 수림 뿐만 아니라 세 여자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럴 거 같아요?” “그…글쎄…?” “그건, 역시 앞부분에 공기를 빼줘야 나중에 정액이 그 부분에 모일 수 있어서가 아닐까? 그 부분에 공기가 가득 차있는 상태로 씌우게 되면, 정액이 고무줄 부분으로 넘치거나, 혹은 앞부분이 마찰에 의해서 그대로 터질 수도 있을 테니까… 맞니?” “빙고! 역시 권코치님이시네요. 맞아요. 콘돔의 앞부분의 공기를 빼지 않은 채 씌워 놓으면, 둘 중 하나에요. 터지거나, 아니면 넘치거나. 그리고 또 하나, 남자들은 가끔 사정에 임박했을 때가 돼서야 콘돔을 사용하곤 하는데요, 절대! 절대! 절대! 그러면 안돼요. 남자의 정액은 절정의 순간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오니까요. 그러니까 꼭! 여자와 하나가 되기 전에 반드시 콘돔을 착용해야 해요. 완벽한 피임을 위해선 꼭 이 점을 유의하세요. 자, 설명 다 들으셨으면 한 번 씌워보세요.” 역시나 윤지의 설명이 끝나자 하연은 더욱 떨리는 손으로 콘돔을 붙들고 영후의 자지 위로 다가갔는데, 그래도 설명은 잊지 않았는지 왼손 집게 손가락으로 콘돔의 앞부분을 살며시 잡아 공기를 뺀 채로 영후의 자지 위에서부터 천천히 말려 있는 고무를 펴 내리기 시작했다. “네, 네… 그렇죠. 그렇게 부드럽게… 말려있는 걸 내리는 거에요. 더 이상 펼 부분이 없을 때까지…” 윤지의 설명과 응원이 합해지자, 하연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울퉁불퉁한 자지의 기둥을 손가락 마디마디로 느껴가며 꽤나 정확하게 콘돔을 씌웠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 근데… 이거 좀 짧은 거 같은데…?” “아…” 그제야 남희도 강진에서 있었던 그 때를 떠올리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궜다. “원래 보통 남자들은 끝까지 씌워지는데요, 뭐 우리 감독님 거가 좀… 커요. 아니 많이 크다고 해야 하나…? 실은 저도 감독님 거 같이 큰 걸 본적이 없거든요.” “……” 하연은 윤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남희와 수림이 왜 바로 자신을 영후와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하려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첫경험이라는 건 언제나 아름다울 것만 같지만, 생각보다 아픔을 많이 남기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도 기억이 났고. 남자는 몰라도 여자에게 있어 첫 경험은 간단한 통과의례가 아닌, 그 이후부터 시작될 만족스런 성생활의 단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했었다. 또한 의외로 첫 경험 때문에 평생 섹스의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여자가 많다는 것도 얼핏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던 건 비단 하연 만이 아니었다. “그런데요…” 한참 실습이 진행되는 와중에 수림이 다시 조심스럽게 끼어들자, 수림을 제외한 세 여자의 시선이 수림에게 모였고 그제야 수림은 부끄러운 듯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가슴께로 더욱 시트를 끌어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알려준다고 해도, 어쨌든 처음… 그걸 하게 되면, 많이 아플 텐데요…” 수림은 자신의 고통만이 그득했던 어린 날의 첫경험을 떠올려보고는 조금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준비를 하는 겁니다.” “아니요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일방적으로… 그러니까… 감독님의 마음은 어쩐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진행시키다가… 만에 하나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상처가 되지나 않을까 해서요…” “……” 수림의 말은 그닥 틀린 게 아니었기에 잠시 네 여자 사이에선 침묵만이 맴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대로 감독님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 “아이 참… 방치하자는 게 아니라요. 제가 조리 있게 말을 잘 못해서 그렇지만, 그러니까… 감독님은 지금… 밤만 되면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럼 낮에 하자는 거… 에요?” 눈치 빠른 윤지가 수림의 의도를 간파하고 되묻자, 수림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모두들 그게 좋겠다는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하연은 당혹스런 얼굴이었다. “난… 아직… 영후를 똑바로 볼 자신이…” 역시나 사랑에 있어선 나이도, 경험도, 소용없는 일이었기에 주저하는 하연을 다들 이해할 수 있다는 얼굴이었고, 결국 또다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던 여자들 중, 윤지가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럼, 그건 박기자님이 알아서 하시고요. 오늘은 배우던 거나 마저 배우고 가세요. 그게 좋겠죠?” “하지만, 내일 꼭 감독님과 화해를 하도록 하십시오. 그것까지 저희가 해드릴 수는 없는 거니까 말입니다.” 결국 내일 하연이 영후와 만나는 것으로 결론을 내자 잠시 멈췄었던 윤지의 강의가 이어졌다. “어디까지 했었죠? 아 맞다. 뭐, 어쨌든 콘돔이 끝까지 펴졌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의외로 콘돔의 고무링 부분은 견고해서 흘러내린다거나 말려 올라가거나 하진 않으니까요. 아, 물론 남자의 사정이 끝나면 그땐 또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건 조금 나중에 설명할게요. 자, 그럼… 누가 올라가죠?” 이미 거대하게 발기되어버린 영후의 자지 기둥과 더욱 부풀어 오른 귀두 부분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윤지가 묻자, “어?” 하연과 남희, 그리고 수림은 무척이나 당황한 채로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거 해야 하잖아요? 가르치는 입장에서 내가 올라가는 건 좀 그렇고, 박기자님은 배우시는 입장이고…” 그렇게 말하며 윤지가 남희와 수림을 바라보자, 남희와 수림은 창피하면서도 어쩐지 물러서기가 싫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수림은 아직도 화끈거리는 항문의 느낌 때문에 차마 먼저 나설 수가 없을 것만 같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남희가 먼저 나서 주었다. “저, 괜찮다면 내가 할게. 오코치님은 좀 전에도 그렇고… 많이 힘들 테니까. 박기자님… 괜찮겠습니까?” “아… 네…” 하연은 욕심 같아선 당장이라도 자신이 영후의 몸 위로 올라가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곳에 있는 여자들 모두가 영후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럼, 권코치님께서 올라가시는 걸로 할게요. 권코치님, 그럼 옷 벗고 기다리세요. 전 가서 그때 그거, 젤 좀 가져올게요.” “으응…” 남희는 자신이 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막상 하연 앞에서 자신만 옷을 벗으려니 조금 난감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남희는 곧 일어섰고 잠시나마 다른 방에 가서 옷을 벗고 올까도 생각했으나 그렇게 하면 왠지 더 부끄러울 것만 같아 결국 그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 “야… 이거 장난이 아닌데?” 한양여대와 울산과학대의 전반전이 거의 끝날 즈음 철용은 실제로 처음 보는 여자들의 경기력에 놀라며 더욱 근심스런 표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양여대가 보여주는 플레이는 마치 K리그의 팀들 중 패싱 플레이에 일가견이 있는 성남이나 포항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울산과학대의 안정된 수비 조직력 또한 말이 필요 없을 정도였기에 철용은 여주대의 이영기 감독에게 호언장담을 해버린 자신의 언행을 자기도 모르게 반성마저 하고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런 철용의 마음을 짐작하는 지 영후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철용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저희 아이들도 저 팀들에 못지 않다구요 선배.” “아, 그냐…? 뭐 그렇다면야 다행이다만...” 그제야 막혔던 숨통이 트이듯 철용은 크게 숨을 내 쉬어 보곤 단도직입적으로 영후에게 물었다. “그렇담 네놈이 말하던 그 우승이란 거, 정말 할 수 있을 거 같냐?” “뭐, 해 봐야죠.” “이 자식이 근데… 자신 있다는 말을 해도 모자랄 판에…” 미적지근하게 답하는 영후에게 겉으로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영후의 눈을 바라 본 철용은 어쩐지 걱정 따윈 불필요할 거란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철용 자신은 여전히 좌불안석일 수 밖에 없었지만. 점점 영후를 원하는 팀 수는 늘어만 가고 있는데, 이놈의 한국여대 감독직을 맡고 있는 바람에, 명색이 에이전트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한국여대의 선전을 기원하는 것 뿐이었으니 오죽 했을까. “이런 엉터리 감독 놈 때문에 골치 깨나 아프겠소?” 철용은 결국 답답한 마음에 영후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남희에게 하소연하듯 말을 건넸고, 남희는 예의 걱정스런 마음을 감추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기자들 때문에 힘들진 않냐?” “네? 네… 별로, 그런 건 모르겠던데… 왜요?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니 뭐…” 꽤나 영후가 의외의 대답을 하자 철용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영후를 원하는 유럽의 내로라하는 팀들의 영입설이 불거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평소 같으면 ‘급물살'이니, '초읽기'니 하는 표현들을 쓰며 거의 매일 지면을 도배 했을 텐데, 어쩐지 너무나 조용했던 것이다. ‘뭐야… 내 수완을 믿지 못하는 거야, 아니면 설마 이자식이 가지 못할 거라고 다들 생각하는 거야?’ 그도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단 생각에, 어쩐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걸, 철용은 내색하진 않고 있었지만, 어찌됐든 남은 변수는 한국여대의 우승뿐이었다. 당분간 공식 경기가 없는 영후가 부상을 당할 일은 없을 터, 2주간 벌어지는 이 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의 우승컵만 들어올리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 갈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낌이…’ -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 당도한 하연은 영후를 만날 생각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다스리며 복도를 지나가는 와중에, 저 멀리서 걸어오는 조전무를 발견하고는 피해갈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는 조전무의 앞으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무님.” “어? 아이고, 이거 미녀기자 박기자 아니신가? 그래, 여긴 취재차 들렀소?” 역시나 인사말과 함께 자신의 몸을 훑는 느끼한 시선을 하연은 애써 모른 척했다. “뭐 그렇죠. 그런데…” “응? 뭐 궁금한 거라도 있으신가?” “전에 없이 이번 대회, 전 경기가 TV로 방송된다 던데요?” “아, 그 얘기… 그야 뭐, 늘 그러길 바랬지만 그게 그렇게 안돼왔던 것 뿐이고, 이번엔 어떻게 잘 해결이 됐으니까…” “네에…” 하연은 마치 성인군자처럼 입을 여는 조전무의 면상에 대고 중수부와 조사4과까지 동원한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턱 아랫까지 차 올라왔지만, 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고생하셨네요. 아무쪼록 끝까지 힘 좀 써주세요.” “아이구, 내가 뭐 하는 게 있나? 나보단 기자들이 잘 해줘야지, 안 그런가? 하하하…” ‘많이 웃어둬라.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가식적인 웃음을 흘리는 조전무를 애써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며 하연은 윤지의 강의(?)가 끝나고 난 새벽녘에 숙소로 돌아가 했었던 총장과 전화통화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어보았다. - 깊은 밤의 정적을 깨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총장은, 그러나 이번엔 반대로 자신의 옆에 곤하게 잠들어 있는 노감독이 혹여 잠에서 깨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핸드폰을 품 안에 안듯이 소리를 죽인 채로 거실로 걸어 나온 후에야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네…” ‘총장님, 저 박기잡니다. 혹시 주무셨던 건 아닌지…’ “아니에요, 근데 왜…?”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저런 취재 꼭지들 방송국으로 넘겨줬다는 거 알려 드리려 구요. 먼저 전화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깜빡 했어요.’ “아, 그랬군요. 그럼…?” ‘물론 백 프로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곳이니까요, 어떻게든 방송을 해 줄 거라고 기대해 봐야죠.’ “그래요… 저희 때문에 고생이 많네요. 정말 미안하고, 또 고맙고 그렇답니다…” ‘별 말씀을요… 저한테도 상관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하연의 진심이 담긴 말 덕분에 총장은 이영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참, 전주… 내려가 계신 건가요?” ‘네…’ “그럼, 염치없지만 저희 이감독님 좀 부탁할게요.” ‘아, 그게…’ 그저 형식적인 인사였음에도 멈칫거리는 하연의 모습이 눈에 선한 듯 총장은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실례되는 게 아니라면…무슨 일… 있으신 거 같은데…?” ‘……’ 마음의 갈등을 겪으며 하연이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지만, 총장은 묵묵하게 기다려 주었고 이내 탁 풀어지듯 한숨을 내쉰 후에야 풀이 죽을 대로 죽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하연이 있었다. ‘실은 영후가…’ “……” ‘아니에요. 바보같이… 죄송해요, 지금 이런 얘길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마 축구 하는 때 만큼은 영민하지 못한 우리 이감독님이 또다시 박기자님을 힘들게 하고 있나 보네요. 그래… 박기자님 마음은 어떤가요…? 괜찮은 거죠?” 마음… 하연은 총장의 부드럽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 덕에 또다시 잠시 생각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총장은 이미 하연의 마음쯤은 짐작할 수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나이 먹은 게 자랑은 아니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 돌아보니, 언제나 그랬던 거 같아요. 뭐랄까… 남자와 여자, 그 사이에는 언제나‘문제’가 있었구나 하는… 이를테면, 좋아하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문제… 언제나 스스로가 먼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들…” ‘……’ “그리고 또 힘들게나마 사귀는 사이가 되고 나면, 그 이후엔 더 많은 ‘문제’들이 쌓이기 시작하더군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 같은 것도 있고, 또…” 총장은 이런 말까지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잠시 잠깐 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었고 또 지금의 이 예쁜 청춘 남녀들을 위해서라면 굳이 인생의 선배로서 밝히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어갔다. “굳이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바로 저와 노감독님도 동반자로서 인생을 시작하기 직전에… 작은 문제가 있었답니다.” ‘네…? 그게 무슨…?’ 하연은 총장이 말하는 ‘작은’ 문제가 무엇인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직업병일지도 모르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자신도 모르게 묻고 있었지만, 정말 사소한 문제인 양 웃으며 답해주는 총장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동침을 했던 거죠.” ‘네…?! 설마 노감독님도…?’ 은연중에 ‘도’라는 표현을 써버리며 하연은 영후의 ‘바람’을 실토해버리고 말았지만, 그건 다음에 이어지는 총장의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후훗, 아니요 아니요. 그이가 아니라 나였어요. 다른 남자와 잤던 건…” ‘!!’ “놀랐…나요?” ‘아, 아니요… 아니에요…’ “놀랄 만도 하죠. 하지만 더 놀랍게도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란 거죠. 다만 이렇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겠구요. 설마, 우리 이 감독님이 그러했다고 해도. 또 반대로 박기자님께서 그러했다고 해도, 그래도 결코 해결하지 못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 “그래서 물었던 거랍니다. 지금 박기자님의 마음은 어떠한건지…” 정말이지 심안의 눈을 가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며 묻는 듯한 총장의 물음에 하연은 어쩐지 체한 것 같았던 가슴 한 구석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손을 올려 자신의 살아 숨쉬는 심장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보고 있었다. - 전반전이 끝나고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들어갈 즈음, 갑자기 남희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서더니 철용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저와 음료수 좀 사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아, 나야 뭐… 이런 미녀께서 같이 가주신 다면야 당연히, 콜! 이죠. 하핫!” “아니, 권코치님 저하고 가시지 않고요…” “이 자식은 꼭 결정적일 때 방해하고 그러드라? 넌 좀 앉아서 작전이나 짜고 있어랏, 마!” 결국 꽤나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통로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낯익은 여자가 다가오자 그제야 영후는 남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야, 이영후.” “하…연아…?” 아무렇지도 않게 영후를 부른 하연과의 거리는 고작 의자 4개, 혹은 5개 밖에 되지 않았지만 영후는 그 어떤 때보다 훨씬 더 하연이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전에 없이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채로 영후는 엉거주춤 일어서다만 모습으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하연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기에 영후의 마음은 그나마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뭐하냐? 여기서. 선수들은 내팽겨치고.”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영후의 자리에서 두 칸 떨어진 곳에 앉으며 하연이 입을 열자 영후는 잠시 동안 머리가 멈췄던 듯, 다시금 열심히 생각을 한 끝에 입을 열고 있었다. “아, 으응… 그야 뭐… 다른 팀들 좀 봐 둬야 할 거 같아서…” “흐응, 그러니까 4강은 당연하다 이거구나?”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하던 영후는 그러나 정말 하나도 변함 없이 장난을 거는 모습으로 돌아와 준 하연의 얼굴에 괜히 마음이 아려왔다. 하지만 이제 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편 몸과 마음, 그리고 머리가 온통 따로 노는 영후를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하연은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감추며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치듯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 “어?” “나한테 말야. 무지무지 미안하지?” “어어…” “아주 미안해 죽겠어서, 아무 말도 못하겠지? 그치?” “…… 그래…” “그럼… 오늘 밤 네가 묵고 있는 룸으로 갈 테니까…” “어… 어? 뭐라고?” 순간 영후는 하연의 말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금 하연에게 되묻고 있었지만, 하연은 역시나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기회를 줄 테니까, 네 마음… 보여줘.” “하, 하연아…?!” 그야말로 잔뜩 혼날 거라 생각하다 용서를 받은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영후의 얼굴은 도무지 믿을 수 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런 영후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연은 또다시 어젯밤이 떠올라 조금쯤 양 볼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 어느새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이 되어버린 남희의 모습에, 하연 뿐만 아니라 수림도, 그리고 윤지도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보통 여자들의 브래지어가 모양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야말로 남희의 브래지어는 커다란 두 젖가슴을 ‘담는’ 역할을 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같은 여잔데도 반할 정돈 데… 영후는…’ 하연은 그제야 예전 총장실에서 남희를 처음 보자마자 두 눈이 하트가 되어버린 영후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쉴 뻔도 했다. 하지만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남희는 벌써부터 흠뻑 젖어버린 자신의 보지를 어쩌지 못한 채 선 채로 다리를 배배 꼬고 있다가 윤지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후의 몸 위로 스스럼없이 올라갔다. “그… 젤은 필요가 없을 거 같네요.” 윤지는 육안으로도 확인 가능할 만큼 촉촉하게 젖은 남희의 보지를 얼핏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윽고 남희는 조심스럽게 영후의 자지를 손으로 잡은 채 큼직한 자두만한 귀두 부분만을 보지 안으로 집어 넣기 시작했고,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오자 남희는 다급하게 입을 가려보았다. 하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윤지는 무덤덤하게 하연에게 강의를 이어갔다. “자, 이렇게 시작되는 거에요. 박기자님 것하고 감독님 것하고 지금처럼 이렇게.” “그, 근데… 정말… 저게 다… 들어… 가는 거니?” “사람 몸이라는 게 그래요. 머리론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가능한 게 우리들 몸이라구요.” 이윽고 윤지가 또다시 남희에게 눈짓을 하자 그제야 남희는 천천히 영후의 몸에 내려앉기 시작했고, 말도 안될 만큼 커다란 영후의 자지는 귀두부터 시작해서 거짓말처럼 남희의 몸 속으로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으흡!”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모든 신음을 막을 수 없었기에 남희의 입에선 점점 더 농염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소리와 자태 덕분에 윤지와 수림의 몸도 점점 달아 오르고 있었지만, 그러나 가장 달아오르기 시작한 건 다름아닌 하연의 몸이었다. “자, 그럼 박기자님도 여기 누워보세요.” “으응? 나? 난 왜…?” “글쎄, 우선 누워 보시라구요.” 다짜고짜 하연을 눕히는 윤지 때문에 하연은 영후와 남희가 한 몸이 되어 있는 침대의 건너편에 누울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마치 영후의 몸 위에 앉아있는 남희가 마치 자신의 몸 위에 올라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몽롱한 기분도 잠시, 갑자기 옷 위로 느껴지는 윤지의 손길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쉬…” 그러나 영후가 깰까 손가락 하나로 하연의 입을 가로막는 윤지 덕분에 하연은 더 이상 숨소리도 내지 못하며 잔뜩 긴장한 채 누워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하연의 몸 위에 남희처럼 올라 앉은 윤지는 비록 옷 위로였지만, 하연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기 시작했다. “흐읍… 얘… 지금 무슨…?” “아마… 처음엔 이렇게 해 주실 거에요…” 하연의 당황하는 모습에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윤지는 이내 양 손으로 하연의 가슴을 마사지하듯 원을 그리며 애무하기 시작했고, 옆 침대에선 조금씩 속도를 내는 남희의 허리 움직임과 맞물려 짙은 신음과 질척거리는 마찰음이 울려 퍼지자 하연은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림까지 거들려는 모양이었다. “그치만 감독님은 그렇게 몸만 탐하는 분이 아니세요…”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던 시트를 던져 버리고는 알몸인 채로 하연에게로 다가와 농도 짙은 키스를 퍼 부었고, 윤지의 가슴 애무 만으로도 정신을 놓고 있던 하연은 그대로 수림의 촉촉한 혀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츄읍… ㅤㅊㅠㅂ…” “흐읍… 헙…” 수림의 혀는 영후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이제는 돌려 주겠다는 양, 하연의 이 사이사이를 쓰다듬어 주었고 또 어쩔 줄 모르는 하연의 혀를 감싸 안고는 자신의 입 속으로 빨아들여 살살 깨물어주기도 했다. 그러자 윤지의 손은 어느새 블라우스 속으로 들어와 하연의 브래지어를 위로 올려 버린 채 남희 못지 않은 크기의 가슴을 밝은 불빛에 드러내고는 그 동안 아무도 침범한 흔적이 없는 선 분홍빛의 작은 유두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튕겼는데, 그럴 때마다 수림의 입에 맞닿아 있는 하연의 입 대신 코에서 거친 숨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질꺽, 질꺽, 질꺽… “아항… 아… 나… 어뜩해…” 바로 옆 침대의 남희가 양 손을 영후의 가슴에 댄 채로 허리와 엉덩이 놀림 속도를 점점 올리며 애액과 마찰하고 있는 자지의 소리를 들려주자 그야말로 하연은 미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어느새 자신의 치마 속으로 들어와 있던 윤지의 손이 허벅지를 지나 이내 팬티 위로 옮겨오자 순간 숨이 멎을 것도 같았다. 직접 관계를 가지는 것도 아니었건만, 자신의 보지를 능숙하게 팬티 위로 애무하는 윤지 덕분에 하연은 지금 혹시 영후와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놀라고 있는 건 하연보다 윤지였다. ‘처음인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민감하잖아?’ 윤지는 하연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 한 손으론 탐스런 젖가슴을, 그리고 또 한 손으론 점점 젖어드는 팬티 위로 갈라진 보지 입구를 매만져주며 적잖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하다가는 흥분을 못 이겨, 스스로 감독님의 몸 위로 올라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윤지는 결국 하연의 몸에서 슬며시 손을 떼고는 곧바로 박수를 세 번 크게 쳤다. 짝! 짝! 짝! 그러자 수림의 입은 하연의 입술에서 떨어지며 가느다란 타액의 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남희는 이미 풀려버린 눈을 한 채로 그대로 영후의 몸 위로 포개듯 엎어졌다. “자, 이만하면 다 이해하셨을 것 같은데… 맞죠?” 윤지의 물음에 세 여자들 모두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힘이 빠진 듯 침대에 누워있던 하연이 가장 진한 아쉬움을 얼굴 가득 담아 보였기에 윤지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이미 꽤나 높은 격랑의 파고를 넘어버린 듯한 세 여자는 그대로 누운 채로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할 정도로 거칠게 숨을 내 쉬고 있을 뿐이었다. - “감독님!” 수림의 지도하에 여러 가지 상황의 세트 피스를 연습하던 혜미는 영후가 남희와 나타나자 가장 먼저 연습을 멈추고는 영후에게로 뛰어왔고, 이내 모든 아이들이 영후에게로 달려와 둘러싼 채로 모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들처럼 영후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후는 그런 아이들을 뚱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아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그제야 결국 빙긋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음… 이길 수 있겠더라.” 장난처럼 말하는 영후의 말에 그러나 모든 아이들은 벌써 우승이라도 한 듯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지만, 정작 영후의 뒤에 숨은 듯 서 있던 남희는 연습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을 떠올리며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 “권코치님, 잠시만요.” “?” 한양여대가 지난 번 춘계 대회 때 보다 더 강력해진 모습으로 울산 과학대를 5 : 1로 물리치는 모습을 목격한 후 한시라도 빨리 아이들에게 달려가 벼락치기로라도 더 지도하고 싶은 남희의 마음을 붙들 듯, 영후는 남희의 어깨를 붙잡았기에 남희는 구겨진 얼굴로 영후를 돌아 볼 수 밖에 없었는데, 영후는 벌써 남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 감독님…?” 영후의 그러지 말라는 의미를 건네 받은 남희는 의아한 얼굴로 영후에게 반문하고 싶었지만 영후는 그러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러니… 미리부터 아이들 기 죽이진 말자고요. 부탁할게요.” “하지만 감독님…” “나… 믿죠?” 남희는 정말 할 말이 많았음에도 영후의 그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지며 그저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고, 그런 남희가 고마운 듯 영후는 남희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연신 쓰다듬어 주며 남희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 아이들의 마무리 훈련을 마치게 하고 호텔 룸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곰곰이 내일 경기에 대해 생각에 빠진 영후를 움직인 건 다름아닌 핸드폰 벨소리였다. “감독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그래, 어떠냐?’ “예? 뭐, 좀 생각이 많아진 거 빼곤 그냥 그렇습니다.” ‘녀석, 이제야 좀 감독 티가 나는 거 같구나.’ “그런가요?” ‘감독이란 건, 하면 할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지.’ “……” ‘그래, 목소리 들어보니 괜한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구나. 나이가 들면 괜한 것에 잔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감독님…” ‘…?’ “감사합니다.” ‘원 녀석, 계집애처럼 굴기는… 그럼 이만 끊는다.’ 이윽고 노감독의 전화가 끊기자 얼마 안 있어 초인종 소리가 룸에 울려 퍼졌고, 영후가 연 문 앞에는 방금 전 노감독에게 영후의 응원을 부탁했던 하연이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얼굴로 새초롬하게 서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 없었다. 이미 하연을 본 것 만으로도 영후의 마음은 평온을 얻고 있었으니까. “하연아…” “으응…” 분명 평소처럼 행동해야지, 하고 다짐했던 게 불과 몇 분 전이었건만, 하연은 너무나 경직된 모습으로 팔다리가 마치 남의 것처럼 움직이며 룸으로 들어갔는데, 그럼에도 웃긴 건, 영후 또한 꽤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 지 하연의 그런 모습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문을 닫고 난 후에 뭘 할지 모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룸으로 들어와 어떻게 소파에 앉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하연에게 역시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 인식하지 못하던 영후는 그러나 약하게 나마 떨기까지 하는 하연이 겨우 눈에 들어오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하…연아,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으응, 아니…” 달라는 건지, 싫다는 건지 모호한 대답을 하는 하연 덕분에 괜히 영후는 더 목이 타는 것만 같아 결국 냉장고로 어색하게 걸어갔지만 정작 왜 자신이 냉장고 문을 열고 있는 건지 잊어버리고는 이내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작은 플라스틱 물병을 꺼내 단번에 벌컥벌컥 마셔댔는데,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을 뻔 했다. “돌아보지 마…” 어느새 다가온 하연이 영후를 등 뒤에서 가만히 앉은 채, 나직하게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영후는 하연의 명령 그대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우린… 아직도 어릴 때하고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아.” 영후의 귀가 아닌 넓은 등과 대화하듯, 얼굴을 파묻은 채 이야기하는 하연에게 영후는 그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아니, 하연이 해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걸까. “…” “오늘… 밤이 지나면, 너하고 나… 조금은 달라질까…? 어쩌면… 어른이 될 수도 있는 거겠지?” “하연아… 네가 싫다면…” 겨우 용기를 낸 영후가 하연의 팔을 조금 느슨히 하곤 천천히 돌아서서 하연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지만, 그 입은 그리 많은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물기를 머금은 영후의 입술에 수분을 탐하듯 곧바로 하연의 입술이 진하게 닿아주었으니까. 35.5부. 두 사람만의 밤 (부제 : 하연의 시선)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쏴아… 나는 한동안 욕실에 틀어박힌 채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 놓고있었다. 거울 속의 전혀 나답지 않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거울 속으로 보이는 내 얼굴이, 아니 얼굴 뿐만 아니라 팔뚝이며 목까지 빨갛지 않은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 그랬던 걸까 나는… 바보같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키스를 해버리다니… 하긴 지금까지 내가 했었던 키스들은 사실 모두다 갑작스러웠었다. 그치만, 이번만큼은 꽤 몽롱해질 만큼 근사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물론 너무 능숙한 나머지 또다시 조금쯤 기분이 상할 뻔도 했지만, 우리 나이도 벌써 내일 모레면 서른이니 어쩌면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그것, 그러니까 키스도 그렇고,‘섹스’에도 능숙하다는 건 어찌 보면 차라리 다행스런 일일 수도 있었다. 키스와 섹스. 그 둘이 달라 봤자 또 얼마나 다르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여자들에게!) 저 녀석의 ‘처음’을 빼앗겨 버린 분함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건 아니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지금은 그저 지금이란 말일 뿐이지. 똑똑. 역시나 내가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자 분명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을 저 녀석, 노크를 하고 있었다. 센스 하고는. “하연아… 괜…찮은 거야…?” 하여간 내가 아는 한 저 녀석, ‘이 영후’라는 남자는 지구 최고 바보였다. 그저 ‘키스’ 뿐 이었는데, 겨우 그 정도로 일로 안 괜찮을 리가 없는데. 그런 걸 일일이 화장실 문까지 두드려대며 확인 하려 들다니 말이다. “어… 괜찮아.” 세면대의 수도 밸브를 잠그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어 대답했지만, 곧바로 조금 후회를 했다. 평소 같았으면 ‘버럭’하고 소리를 지르고도 남았을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는 저 녀석, 더 걱정할 게 분명했으니까. 걸려있는 타월에 손을 닦으며, ‘여자가 마음을 준비할 시간 따위, 보통의 남자는 생각해주지 않는다’던 윤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치만 난 영후는 분명‘보통의 남자들’이 아닐 거라며 윤지의 말을 조심스럽게 부정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 부정하고 나니 또 남는 의문이 생겼다. 설마, 다른 여자와 그렇게나 많이 ‘그걸’ 해봤으면서도 저 녀석은 또다시 ‘긴장’이란 걸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발정이 나서 급한 마음에? 그도 아니면 설마 나… 때문에? 뭐, 어쨌든 나가보면 알게 될 것이었다. 딸깍.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고 나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팔에 닿아 주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영후 녀석은 걱정스런 얼굴로 앉지도 못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저 눈, 남자의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저 눈에, 정말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란 애도 참. 하지만 나 또한 한 마리의, 아니지 한 대의 로보트가 되어버린 것 마냥 기계적으로 걸어가 털썩, 소파에 앉았다. “생각해 봤는데…” 저 바보, 또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어쩐지 나도 꽤나 경직된 채로 녀석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지금의 컨셉은 어쨌든 요조 숙녀였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꼭! 성공해야 하니까. “이렇게, 하연이 너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오늘 밤을 같이 보내고 나면… 그러면… 내일부턴 우리, 많이 변할 거야.” “무슨… 뜻이야?” “글쎄…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역시나 내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저 녀석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는 것 만큼이나 여자에 대해선 더욱 더 모르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그렇고 그렇게 되어버렸던 걸까. “후회… 할 거 같아?”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모습에 답답한 나머지 먼저 입을 열어버린 건 나였다. 딱히 어떤 류의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던 건 아니었는데, 녀석과 대화를 해야겠기에 되는 대로 물어놓고는 덜컥 겁이 났다. 이 녀석, 설마 또 여기까지 와서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니! 그럴 리가… 그런 말이 아니라…” 휴, 아니란다. 다행이었다.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표정으로 건너편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는 녀석의 모습이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점점 난감한 표정을 하는 영후를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서 그것도 단 둘이 있는 이 순간에, 바로 코 앞에서 보는 재미란. “말했다시피, 나… 너에게 평생 미안할 수 밖에 없으니까.” “나한테…? 평생…? 설마… 그… 처음이 아니라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겨우 묻자, 역시나 바보 같은 녀석은 더욱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벌써 머리로 이해했고, 마음으로 받아 들였으며, 몸으로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녀석… 여태 저렇게 담아두고 있다. 만일 지난 번에… 근명이와 내가 일을 치렀었다면, 이 녀석의 마음, 지금하곤 달리 조금은 편안했을까? “처음이 아닌 건 솔직히 조금 실망이었지만” 조금 더 진지하게 내가 입을 열자, 녀석 내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좀 아쉬웠다. 정말이지 (앞서도 얘기했지만 또다시 밝혀두고 싶다!) 남자의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영롱한 흑갈색의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대신… 마지막이 되어 주면 되잖아.” 으으… 결국 해버렸다! 이런 닭살 멘트를! 그것도 내 입으로 하게 될 줄이야! 게다가 미리 연습한 듯이 그윽한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는 난 또 뭐지?! 하,하… 그런데 저 녀석, 엄청 감동 받은 얼굴로 변해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내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털썩 앉았고. “하연아…” “어맛!”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쭈뼛거리기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내 몸을 꽉 (정말로 으스러질 정도로!) 끌어안자, 이상하리만치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쉬운 거였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왜 이렇게 먼 길로 돌아 왔을까. 혹시, 이 녀석의 앞길을 가로막으면 안 된다는 것은 핑계였을 뿐, 사실은. 거절당할까 두려웠던 걸까 난. 아, 그나저나 더 이상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안고만 있을 줄 알았건만, 어느새 나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더니만… 이렇게 부드럽게, 좀 전하고는 또 전혀 다른 느낌으로 키스를 해주기 시작했으니까. “흐음…” 아, 누군가 그랬었다. 키스를 하면 머릿속에서‘종소리’가 들린다고. 나, 스물 여덟의 박하연, 지금까지 그런 말들은 다 이 한마디로 일축했었다. ‘뻥치시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종소리’로는 부족했다. '에밀레 종' 정도라면 또 모를까. 정말이지 지금의 난, 마치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만일 윤지가 캠코더로 우리의 키스신을 ( 그것도 클로즈업으로!) 찍어주었다면 분명 어지간한 영화 속 키스신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영후의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를 소파 위에 눕힌 후 영후 녀석, 여전히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자신의 입술로 빨아대면서도 오른팔로 내 허리를 부드럽게 안은 채로, 왼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뜨거웠다. 아니, 내 뺨이 뜨거웠던 걸까?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나의 아랫배를 지긋이 누르고 있는 ‘작은 영후’보다는 뜨겁지 않았다. 그 뜨거운 것. 아직 온전히 ‘내 것’이 되진 못했지만, 오늘이, 이 밤이 지나면 오롯이 내 것이 되어줄 것이었다. 아아, 조금만 있으면 이 뜨겁고 또 단단한 것이 내 몸으로 들어오게 된다니, 그렇게 되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어머…’ 그나저나 지금은 그걸 걱정할 여유 따윈 없을 거 같았다. 이 녀석, 또 어느 샌가 뺨을 어루만지던 왼손을 슬금슬금 내리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내 가슴으로 내려 올 테지. 아, 그래. 이 녀석이 내 가슴을 만져줬던 그 날 이후에 한번쯤인가, 목욕을 하다 말고 내 손으로 슬쩍 가슴을 만져본 적이 있었다. 물론 아무 느낌 안 들었다. 근데, 아… 어느 틈에 가슴까지 녀석의 손이 내려와 버렸다. 그저 스치기만 했는데, 내 작은 젖꼭지가 어쩐지 빳빳하게 일어서버린 기분이 들었다. 왜?! 내 껀 데, 남의 손에만 반응하는 거냐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능숙해질 수 있는 걸까? 그저 가슴을 만져주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 그라운드 위의 영후 같은 왼손은, 정말로 잠깐 가슴을 스쳤을 뿐, 나의 쇄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가, 또 어느 틈엔가 나의 겨드랑이 사이를 간지럼 피우고 있었다. 참, 내가 제모를 했었던가? 아아~ 모르겠다. 겨드랑이에서 천천히 내려온 왼손은 내 오른 쪽 옆구리에서 잠시 쉬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이 자식, 내가 보지 못하게 내 양 눈에 번갈아 가며 ‘쪽!’키스를 했다. 흥, 그런다고 내가 못 볼 줄 알고? 오늘 있을 모든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 머릿속에 기억해 둘 거라고! 출처는? 그야, 당연히 ‘내 눈’이지! 아아, 잠깐잠깐! 이마랑, 볼이랑, 코에 키스를 하는 건 좋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귀로 가서 바람을 집어 넣으면… “흐윽…!” 게다가 잠시 쉬는 척을 하던 왼손은 그 틈을 타고 어느 샌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적인 부위를 탐하는 것도 아닌데, 하아… 이 느낌은 뭐랄까… 그 어떤 연관 단어를 생각해 낼 수조차 없지만, 그런데… 그런데 자꾸만 달아올라 버린다. 참, 왼손에 홀딱 홀려서 잊고 있었다만, 대체 오른손은 뭐하고 있는 거지? 어디 있냐 너?! “아흡!” 창피했다. 내 왼쪽 허리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영후의 오른 손이 단번에 내 블라우스 밑으로 들어와 내 왼쪽 가슴을 꽉 움켜쥐자 마자, 조건 반사하듯 소리를 질러 버렸기에. “아, 미안… 아팠어?” 하여간 이 바보, 조금이라도 아프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관둘 기세로 물었다. 너 자꾸 그럴래? 누나 화낸다?! “아, 아니… 해줘… 계속… 흐응…” 아무래도 난 기자보다 연기자의 길을 걸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잔뜩 겁먹고 있는 영후의 목을 양손으로 감싸며 제법 콧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백 퍼센트 실제 상황이지. 어쨌든, 이내 안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영후 녀석의 얼굴보다 그 녀석의 오른손이 더 빨리 안심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확실히 더욱 세심하게 내 브래지어 위를 움직이고 있었고. ‘근데, 옷이며 속옷이며 바로 벗겨버리는 거 아니었었나…’ 전에는 욕실에서 모두 벗고 나왔어서 몰랐는데, 이거 의외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차라리 영화에서처럼 곧바로 옷을, 그리고 속옷을 벗겨 주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 전혀 옷에는 손대지 않은 상태로 내 몸의 이곳 저곳을 더듬는 영후의 손에, 아주 잠깐이지만 운전면허를 따기 전, 콩나물 시루 같던 버스 속에서 내 몸을 더듬던 중년의 아저씨 손길이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기분이 더러웠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야릇한 기분이 온 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옷을 입은 채로 애무를 받는 다는 건, 뭔가 색다른 느낌을 주는 것인 가 싶었다. 특히나 브래지어 컵의 윗 부분과 아랫부분의 라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손, 아니 손가락은 점점 야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막 다뤄지지 않는 탓에 나도 모르게 공생하고 있던 내 가슴이 이제야 담뿍 사랑 받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듦과 동시에 자꾸 몽롱한 기분 또한 들어 버리려고 했다. “으흡…!” 이 자식… 안 그럴 거 같이 움직이다가 갑자기 브래지어를 들추며 내 가슴을 손 안에 가득 담아버렸다. 뭐냐, 네 손으로 브래지어라도 해주려는 거냐…? 그치만… 이런 느낌의 브라라면 뭐, 하고 다닐 의향은 있다. 아니, 완전 느낌 좋다. 누구 이런 브래지어 개발해서 판매할 생각 없는 거야? 이런 느낌을 잘 살려서 말이지, 남자친구의 손으로 사랑 받는 느낌이에요~ 라는 모토를 달고 나올 수 있도록. 물론 이 정도의 부드러움은 꼭 살려야 한다. 절대로. 그러고 보니 어느새 손 안으로 내 가슴을 폭~ 감싸던 손이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슬쩍슬쩍 내 젖꼭지도 손가락 사이사이로 끼워 넣기도 하고, 또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손바닥 전체로 내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번엔 또 오른손에만 신경 쓰고 있었더니 레이다 망을 벗어나 있던 왼손이 내 오른쪽 엉덩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더듬고 있었다. “ 흐응…” 하지만 그리 기분 나쁘지 않으니 조금 더 지켜볼까? 아니 나쁘기는커녕, 조금은 더 힘을 줘서 꽉 잡아줘도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래, 바로 그거야! 이 녀석, 설마 독심술을 하는 건 아니겠지? 뭐, 어쨌든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나저나 한동안 내 혀를 자기 입 속으로 가져가 물고 빨던 키스는… 이제 끝난 건가? “아학…” 또다시 귓불을… 으으… 귓속으로 혀가 들어왔어! 이건… 이건 마치… 고요한 세상에서 오직 영후의 혀만이 온통 나에게만 이야기하고 있는 거 같아… “아…” 왼손마저 블라우스를 들추고 들어온다… 내 배… 잠깐 숨을 들이마셔볼까…? 아아… 그렇게 부드럽게 배를 만지면… 하아… 숨을 참을 수가 없다구…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점심을 조금 덜 먹을 걸… 하지만 콩나물국밥은 정말 최고였어… 전주에 온 이상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순 없잖아? “아흑!” 그냥 목에 키스를 하는 것 뿐이잖아… 근데 왜 이렇게 말로는 표현 못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야…? 어, 이 녀석… 배를 만지는 가 싶더니, 밑에서부터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있네. 그럼 나도 녀석의 셔츠 단추를 풀어줘야겠지? 아, 그러면 또 너무 밝히는 것 같을까? 아니아니야. 난 그런 여자들의 생각이 잘못된 거라 생각해. 이런 상황은 둘이 함께 행복해지는 과정이잖아. 그런데 무책임하게 모든 걸 남자에게만 미뤄버리는 건, 뭔가 좀 아니지 않아? “으음.” 키스를 하면서, 한 손으론 내 가슴을 만져주고 있고, 다른 손으론 내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있는 영후의 모든 행위는 한마디로 ‘부드러웠다’. 때문에 놀고 있는 내 두 손으로 영후의 셔츠 단추를 풀려고 했던 생각도 잠시 잊어버리고 그저 몸을 맡긴 채로 있는 내가 있었다. ‘아… 나도… 나도 영후의 옷을 벗겨주고 싶어…’ 약에 취한 것만 같은 정신을 겨우 차리며, 어느새 내 블라우스 단추를 모조리 풀어버린 영후의 셔츠를, 똑바로 누워있는 상태에서 올려보며 풀어본다. ‘풀려있는 첫 번 째 단추아래 두 번 째 단추만 풀어볼까…? 세상에, 멋지잖아! 이건, 마치…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한다 해도 이렇게 멋지게 하진 못할 것 같아!’ 나의 몸 위에 올라와 있었기에 그저 단추 하나만을 풀었을 뿐이었음에도 엷은 셔츠에 숨어있던 근육질의 섬세한 몸매가 벌어진 옷깃 사이로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었는데, 나는 더 이상 영후의 셔츠의 단추를 풀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간, 나도 모르게 오늘의 컨셉을 한방에 무너뜨린 채 먼저 영후를 덮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래, 조금 분위기를 환기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중간 정도만큼만.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침대로… 갈까?” 역시 이미 나의 매력에 푹 빠진 영후 녀석은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내 몸에서 내려와 침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워있던 나를, 지구의 중력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 다는 듯 또 한 번 번쩍 안아 들었다. “어맛!!!” 하지만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블라우스의 모든 단추가 풀린 채로 점점 벌어지며 브래지어가 드러나는 통에 옷을 여몄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되려 얼굴을 영후의 가슴에 묻어보았다. 그런데 정말 그러기를 잘했던 것 같았다. 나의 부끄러움도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도 사라진 것이지만, 영후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마치 지금 이 순간, 경기를 치르고 있는 것 같이 정신 없이 뛰어대고 있는 심장은, 분명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만을 위한 경기…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해서 그 따뜻한 것이 점점 빨리, 그리고 세차게 뛰어대고 있었기에 나는 괜히 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따뜻한 남자인데…’ 잠깐 동안이었지만, 꽤나 깊게 감상에 젖어있던 나를 영후는 벌써 침대에 내려놓고 있었는데, 영후가 걸어왔다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나는‘설마 벌써?’ 라는 생각과 함께 역시나 벗어버리지 못한 블라우스가 더욱 야한 느낌이 나게 하는 것만 같아 또다시 드는 창피한 생각에 시트 속으로 숨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는 커녕, 그완 반대로 누워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오려는 영후를 가로막으며 벌어진 블라우스 차림 그대로 침대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침대 밖에 서 있는 영후와 마주섰다. 또다시 이어지는 키스. 이번엔 내가 영후의 혀를 감싸 안았다. 쭈읍… 쭙… 나의 적극적인 모습에 영후는 이번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저 지금 내 양 어깨를 쓰다듬고 있는 것 마냥, 그냥 그런 걸까. 나는 혹시 나만 흥분하고 있는 건가 싶어 잠시 입술을 떼고는 이번엔 내 손을 놀려 영후의 남은 셔츠 단추를 풀어보았다. 물론, 단추를 풀며 곁눈질로 영후의 중심을 관찰하려 한 것이 내 의도였고. “아…” 아니었다. 나만 흥분하고 있던 게. 영후의 ‘그것’은 좀 전에 내 아랫배를 눌러대던 때 보다도 더욱 커져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살에 닿았던 느낌과 눈으로 확인 하는 것, 그 두 가지 방법으로 동일한 비교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영후의 셔츠를 내 손으로 벗겨 내고 나면, 바지도, 벗겨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또다시 난 그런 결심을 했었다는 것 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내 눈앞엔 그야말로 눈부신 한 남자의 완벽한 상반신이 보여지고 있었으니까. “하연아…” 영후는 내가 자기의 옷을 벗겨 준 것만으로도 감동받았는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가슴에 내 머리를 폭 감싸며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내 볼을 감싸고는 다시 키스를 해 주었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한참을 영후의 혀에 도취되어 있던 나는 순간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키스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혀를 휘감고 입술을 탐하는 전혀 말도 안 되는 행위가 누구로부터 파생된 거냔 말이다. 왜 갑자기 그런 걸 궁금해 하냐고? 그야… 너무 고마워서, 키스…는 말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랬다. 정말이지, 키스란 건 너무나 달콤해! 그런데 키스에 매진하고 있던 내 귀에, 순간 ‘툭’하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어깨가 순간 서늘해 지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이런 낭만적인 순간에 내가 감상에 빠져있을 동안, 은근슬쩍 내 블라우스를 벗겨 낸 것이었다. 치밀한 녀석 같으니라구.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블라우스를 벗겨낸 것으로도 모자라, 브래지어의 어깨 끈을 조심스럽게 내려버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내 등 뒤로 손을 옮긴 영후 녀석은 그러나, 브래지어의 후크를 잡고는 한동안 헤매고 있었기에, 잠깐이지만 난 내가 스스로 풀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풉…” 분명, 동정도 아니었으면서 이렇게 처음처럼 헤매기도 한다는 점이 결국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동시에 영후의 키스도 멈췄고. “…왜…?” “아, 미안… 자기가 못 풀고 허둥대는 게 너무 재밌어서 그만…” 어머, 나 지금 뭐래니? 자기…? 설마, 영후도 들었을까? “하연아… 너…?” 정말 똥그랗게 커지는 그 예쁜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게 꽤나 부담스러웠기에 난 허겁지겁 등 뒤로 손을 돌려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고, 그러자 그대로 드러나는 나의 가슴에 잠깐이었지만 영후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져서 더 빨개진 볼을 해서는 급하게 영후의 입을 찾았다. 하지만 나의 다급함을 달래듯, 역시나 뜨겁게 받아주는 ‘내 자기’의 혀가 있었고, 더욱 다정한 입술이 있었다. 그리고, 격하게 맞닿는 그이의 가슴과 내 가슴이 있었고. 영후의 혀에 녹아 내리며 정신을 차릴 수 조차 없었을 즈음, 내 입에서 조심스럽게 떨어진 입술은 곧바로 내 목을 타고 내려가더니, 갑자기 덥석 내 왼쪽 젖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흐윽!” 나도 모르게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지고 있었고, 무척이나 음탕한 신음소리가 질끈 깨물고 있는 입술 틈새로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 손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영후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더욱 가슴에 밀착시켰다. ㅤㅉㅡㅂ… 쯔읍… 혹여 이러다 정말 내 가슴에서 우유라도 나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성 들여 빨아대고 있는 영후의 모습에 난 모성애마저 느껴지려 했다. 설마, 수 많은 엄마들이 이 맛으로 일부러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는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혼자 별의 별 생각을 다하는 동안, 내 양쪽 젖가슴을 빨갛게 변할 정도로 빨아대고 만져대던 영후의 입이 흔들리고 있었고, 어느새 손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뭘 하려고 그러나 싶어 힘겹게 내려다 보니, 여전히 입으론 내 젖가슴을 부드럽게 깨물어주면서 손으론 바지를 벗으려 하고 있었다. 그냥 놔둘까…? “내가…” “…?” “내가 벗겨줄래.” “아… 으응.”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던 영후가 이내 내 앞에 반듯하게 섰다. 역시나 빈틈없이 이어지는 상체의 근육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난, 무릎 걸음으로 한발 다가가 영후의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단추와 지퍼를 떨리는 손으로 내렸는데, 그와 동시에 지퍼 사이로 검은색의 팬티가 정말로 텐트가 된 듯 돌출되어 나왔다. 하지만, 그 튼실한 허벅지 덕분에 바지는 바로 내려가주지 않았기에 난, 양 손으로 바지의 허리춤을 잡고는 천천히 내려보았는데, 그러고 있자니 팬티 속에 숨어있는 ‘작은 영후’가 바로 코앞에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양 손에 힘을 주며 바지를 내렸고, 이내 허벅지를 통과하자 바지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난 또 잠시 이 대목에서 고민을 하려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영후가 그 고민을 해소해 주었다. “나도… 벗겨줄게…” 이번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영후는 천천히 내 옆구리 부분에 있는 치마의 지퍼를 찾아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그러자 영후의 팬티와는 대비되는 나의 아이보리색의 팬티가 나타났다. 하지만 무릎을 꿇고 서 있던 탓에 내 치마 또한 허벅지께에 머물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상태에서 날 바라보는 영후의 눈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던 나는 영후의 양 어깨를 짚으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러자 치마는 그대로 침대 위 내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 나니 팬티만을 걸친 영후와 난, 침대와 바닥에 따로 서있다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영후의 어깨를 잡은 채로 서서, 내 가슴을 영후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며 고개를 들고 있는 영후와 한동안 눈빛을 교환해 보았다. 아, 황홀한 듯 바라보는 영후의 눈에 괜히 난 세상의 여왕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벌거벗어버린 한 사람의 여자일 뿐이었는데. 하지만 역시 영후는 내 마음을 알아채듯, 여왕보다 더 극진하게 나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온몸에의 키스세례. 아마, 이 남자의 입에 노랑색 립스틱을 발라놓았었다면, 아마 내 온몸은 개나리보다도 훨씬 더 진하게 온통 노란색으로 변했을 것이었다. 아, 아직 모든 부분은 아니었나? 하지만 역시 이 남자, 이제는 나의 그곳에 키스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하는 듯, 내 배꼽을 혀로 적시면서 양손을 이용해 팬티를 천천히 내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영후의 손을 도와 허리와 엉덩이를 조금 들어주었는데, 그러자 그 팬티는 내 허벅지를돌돌 말려 내려가 어느새 내 발목을 통과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팬티도 번개같이 벗어버리는 모습에 잠깐이지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내 손으로 벗겨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런 마음 따윈,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작은 영후’때문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또한 내 발가락과 종아리, 그리고 허벅지로 이어지는 키스 덕에, 그런 마음이 있었던가 싶기까지 했다. 찰락. 그건 소리였을까, 아니면 느낌이었을까. 영후의 입술이, 영후의 혀가 나의 은밀한 수풀 속에 숨어있던 동굴에 닿으며 내던 것은. 마음의 준비가 안됐었던 지난 번과는 달리, 오늘의 나는 더욱 젖어있는 것만 같았다. 영후의 혀가 닿아주기도 전, 한참 전부터. 영후의 혀가 닿아주는 부분을 차마 바라보지는 못한 채로 난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다. 세로로 가늘게 벌어져 있는 그곳은, 영후가 입술로 살짝 물어주자 날개처럼 펼쳐질 것도 같았는데 그 날개가 맞닿아 있는 곳엔 자그마한 콩알 같은 것이 있었나 보다. 영후는 한참이나 혀로 그 작은 콩알 같은 것을 핥아주었고, 입술로 빨거나 깨물어주기도 했는데, 나의 입에선 그때 그때 전혀 다른 소리가 흘러나와 주었기에, 나는 시트를 끌어당겨 입을 막아보기도 했지만 그런 걸로 쉽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것에만 그치지 않고, 날개들 사이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혀를 넣는 통에 나는 허리를 허공으로 띄운 채로 꽤나 격하게 비틀고 있었다. (내 허리가 그렇게 유연한 줄은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아… 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안돼…! 나도… 나도 해주고 싶은 게 있단 말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는 영후의 머리를 내 양다리로 조여보았다. “켁켁…! 하…하연아 왜…?!” 그제야 나의 동굴에서 입을 뗀 영후가 코까지 내 샘물에 젖은 채로 물었지만, 난 영후의 가슴팍을 밀어 영후가 뒤로 벌렁 넘어가도록 만들고는 이번엔 내가 영후의 다리 사이에 앉게끔 기어갔다. (물론 매력을 유지하면서!) “하… 연아…” 어쩔 줄 모르는 영후의 얼굴보다 더 가까이에, 전혀 작지 않은 ‘작은 영후’가 끄덕거리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붉은 색으로 이루어진, 마치 저도 헬스 같은 것을 했다는 듯, 여기저기 힘줄과 핏줄이 툭툭 튀어나와있는 모습에 난 마법에 걸린 듯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잡아보았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하는 게 맞다. 적어도 한번이라도 공부를 하고 나니, 두려움도 망설임도 많이 잦아들었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으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킬레스의 약점이 발 뒤꿈치의 아킬레스 건이라면, 영후의 약점은 분명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영후의 온몸은 내가 ‘작은 영후’를 잡음과 동시에 꽤나 나른해지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그렇게 겁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자고 있을 때의 크기와 지금의 크기는 또 달랐다. 역시, 나의 미모 때문에 더 흥분하고 있는 걸까? 나는 윤지에게 배운 대로 천천히 영후의 ‘그것’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런데 내 손이 뿌리 쪽으로 움직일 땐, 영후의 몸은 반대로 밀려올라오는 듯 했고, 다시 내 쪽으로 쓰다듬었을 땐 영후의 몸이 내게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건 비단 기분만이 아니었다. 분명 영후의 몸은 조금씩 앞 뒤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오래 쓰다듬어 준 것도 아니었는데, 어지간한 자두보다도 훨씬 큰 머리부분의 갈라진 틈새에서 맑은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 건진 모르겠지만, 그걸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척이나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저걸 먹어도 된다는 것은 윤지에게서 배우지 못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물어봐야지. 어쨌든 이제 모든 게 준비 완료된 거겠지? 그럼… 아, 맞다. 콘돔을 씌워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그 순간 나는 또다시 잠깐 고민을 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영후와의 사이에 인공적인 그 무엇이 끼어드는 게 싫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건 지금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난 영후의 물건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영후의 눈을 바라봤다. 이 정도까지 하고 났으니, 윤지의 말마따나 나머지는 남자가 알아서 하겠지. 굳이 남희씨가 했던 것처럼, 내가 영후의 몸 위로 올라가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만일 처음부터 남희씨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거였다면… 그래도 했을까 난?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망설이는 사이 영후는 나에게 또 한번의 깊은 키스를 해주고는 반듯하게 날 눕혔다. 그리고 또다시 내게 키스를 해주며 가슴과 배, 엉덩이를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하지만 내 신경은 처음과 달리 온통 허벅지와 아랫배 부근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작은 영후’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 놈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또 하나의 생명체처럼 내 허벅지 안쪽을 옮겨 다니며 탐색을 하기도 했고, 불쑥 내 수풀의 언덕위로 미끄러지듯 올라타기도 하며 색다른 자극을 선사해 주었는데, 그러다 조금씩 길이 익숙해 졌는지 나의 동굴 입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이십 팔 년간 고이 간직해 왔던 ‘순결’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벗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 참.” “응? 왜…? 갑자기 영후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잊었던 뭔가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의 물음에 별 것 아니라며 고개를 저어 보였는데, 직업병은 고칠 수 없었던 난 영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아, 그게… 실은 콘돔을 쓸까 했는데…” “…했…는데?” “상관없을 거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인가. 배란기가 지난 여성이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한다는 건 들어봤어도, 남자가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는 건가 싶었다. 설마 이자식, 나도 모르게 ‘정관 수술’이라도 한 걸까? “그게… 무슨 말이야? 상관이 없다니…?” “아, 그게…” 영후 녀석. 어릴 적 그때와 똑같이 사람을 녹이는 미소를 짓고 있다. 내 마음을 처음 빼앗아 갔던 어릴 적, 운동장에서의 그 눈을 해서는.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줄게.” 또 나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나쁜 짓을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머리가 ‘작은 영후’를 더 궁금해 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넣을게.” “…으응…” 이런 거… 물어보고 하는 거였나? 확실히 배움이 아직은 부족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교습은 없을 거였으니, 이제는 독학을 하던지, 영후와 함께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 “아앗!” 순간, 말도 못할 고통이 하복부에 전해졌기에 나도 모르게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영후의 허리를 감싸고 말았다. 그러자 영후의 움직임도 잠시 멈춰졌고. 나는 얼굴에 고통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일그러진 얼굴로 영후의 두 눈을 바라봤다. 게다가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영후의 눈을 보고나니 더욱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마 난… 속은 걸까?' 이건… 이건 마치 불에 달군 커다란 몽둥이를 나의 신성한 동굴에 억지로 밀어 넣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랬으니, 정말… 이러고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맞는 말일까 의심이 들 수 밖에. “드… 들어 온 거야…?” 설마, 이런 걸 내 입으로 묻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의 난 너무나 심각하고 또 다급했다. 만에하나 내 좁디 좁은 동굴이 찢어진다면, 과다출혈로 인해 지금 이 시간에, 그것도 옷을 벗은 채로 응급실에 실려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영후의 대답 덕분에 난 더욱 공포를 느껴야 했다. “그게… 실은 조금… 밖에…”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이미 내 동굴은 포화상태가 된 것만 같은데, ‘조금’이라니! 우선은 막아야 했다. 이 상태 그대로 계속 진행하다간, 분명 뭔가 잘못될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 잠시 휴전요청을 하자. “저… 영후야, 있지… 잠시만… 그대로 있어줄래…?” 나의 부탁과 동시에 영후는 그야말로 ‘얼음’이 된 상태로 눈동자만 움직이며 잠시 나를 바라봐주었다. 착한 녀석 같으니라구. 물론 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더 이상의 진입을 하지 않아주는 모습에 난 조금 감동을 받은 것도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보통의 남자들은 이런 거 쉽게 참을 수 없다고들 하던데. 하지만 그것도 나만의 착각이었다. 진입을 잠시 멈췄다고 해서, 영후의 모든 움직임이 완전히 멎은 건 아니었으니까. 깜빡 했었다는 듯, 또다시 그 상태 그대로 내 입술을 찾아와 키스를 해 주었고, 내 볼을, 내 목을, 그리고 어깨와 젖가슴을 부드럽게 보듬어 주는 손이 있었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내 동굴에 들어와있는 ‘작은 영후’가 어쩐지 조금쯤 부드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영후의 다정한 손길 덕에 내 동굴 어딘가에서 촉촉한 샘물이 솟아 난 건지도. 맞다, 윤지가 알려 줬던… 뭐라더라… 그래 ‘젤!’, 그게 이런 순간에 필요한 거였을텐데… 하지만 역시 콘돔도, 젤도, 처음엔 내 스스로가 싫어라 했을 거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영후를 느끼고 싶으니까. “영후야… 나 조금 괜찮아진 거 같은데…” “그래? 그럼, 조금만 더 넣어볼게. 아프면 바로 얘기해, 알았지?” “으응…” 하지만 영후는 걱정이 되었는지, 여전히 내 몸을 구석구석 매만져주며 나의 신경을 분산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렇게 해 주어도, 지금 내 몸의 모든 신경들은 오직 한 곳에만 몰려 있었기에 영후에게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얘기해줘야 했는데, 또 그 다정한 손놀림의 느낌이 너무나 좋아서 차마 입에 담지도 않았다. “으윽…” 아, 더… 들어온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아팠고, 여전히 힘겨웠는데, 그럼에도 왠지 여기서 그만두고 ‘작은 영후’를 내보낸다면 무척이나 아쉽고, 또 허전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치만 아프긴 했고. 어쩔 수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눈 질끈 감고 딱 한번만 참아보기로 했다. 분명, 윤지가 몸 안으로 모두 들어올 수 있다고 했고, 또 남희씨가 직접 그 모습을 보여줬으니 같은 여자인 내가 못 할 리 없었다. “영후야… 나… 참아 볼 테니까… 넣어줘…” “그치만…” “어서…” 무척 난감한 표정을 하던 영후는 결국 내 몸 위에 천천히 포개 누웠다. 그러자 그 따뜻한 가슴이 내 가슴을 부드럽게 눌러주었고, 그러자 한결 몸과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갈게…” “으응…” 영후는 내 대답을 끝으로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허리와 엉덩이를 움직이며 점점점, 동굴 안으로, 아니 내 몸 속 전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으으… 으윽…”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작은 영후’는 계속해서 밀려들어왔고, 이러다가 내 머릿속까지 들어오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까지 들었는데, 찢어질 것 같은 느낌도 느낌이었지만, 뭔가 동굴 안에서 ‘작은 영후’의 머리와 맞닥뜨린 느낌이 들었다. ‘뭐…?’ 하지만 내가 궁금해할 사이도 없이, ‘작은 영후’는 돌진했고, “꺄~악!” 내 입에선 정말로 비명다운 비명이 튀어나왔으며, 갑자기 나의 동굴의 모든 벽들이 일순간에 해체되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이거…였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었지만, 어쩐지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순결’이라는 이름의 두 글자가 지금 막 사라지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순간의 기분은 항상 꿈꿔왔었던 것 만큼, 대단히 행복하다거나, 꿈만 같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시원 섭섭한 정도? 그럼에도 왜 눈물이 흘렀는지는 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거의 삼 십 년 가까이 같이 해온, 친구 같은 존재가 떠나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런 눈물은 흘려볼 만도 한 것 같았다. 이 눈물 한 방울에 영후의 입술이 닿으며 마음을 온통 내게로 주고 있는 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하연아…” 걱정스런 얼굴로 내 눈에 입맞춰주며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때문에 나는 조금 고개를 들어 영후의 입에 입을 맞춰보았다. 영후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내 눈물 맛은 조금 짠 것도 같았다. - 그렇게 어렵사리 첫경험을 끝내고 시트를 몸에 감은 채 욕실로 들어와버린 나는 안 그런 척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는 통에 하마터면 욕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뻔도 했다. 질질 끌리고 있는 시트를 펴보니 중간 즈음에 조금 선혈이 묻어있었다. 영후도 이걸 봤을까. 봤다면 여느 남자들처럼 만족 했을까.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시트는 둘둘 말아 구석에 던져놓고 다시 긴 타월로 가슴께까지 가려보았다. 나가면, 영후는 또 어떤 얼굴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황망하게 욕실로 뛰어들어올게 아니라 조금쯤 녀석의 품에 안긴 채 육체의 고통을 희석시키기라도 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난 욕실에 있었고, 이제 막 나갈 참이었다. 딸깍. 문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지만, 의외로 영후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까치발을 해서 침실로 가보니 영후 녀석,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언제나 이 녀석의 잠든 모습은 아름다웠다. 남자임에도 아름답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니, 여자로서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내 것이 되어주었으니까.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영후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눈썹이 무척이나 긴 눈. 성격과는 전혀 달리 너무나 높은 코. 그리고 언제나 키스를 부르는 것만 같은 촉촉한 입술.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 남자가 가진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난, 그런 남자가 알몸으로 잠들어 있는 이 순간을, 가장 절호의 기회를 거머쥐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이, 나 혼자만이 이 남자의 아름다운 몸을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마치 영화배우 조니 뎁을 연상시키는 샤프한 턱 선을 지나 내려오면, 운동선수 같지 않은 부드러운 목 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시선을 내리면 좀 전에도 반해버렸던 이 남자의 탄탄한 가슴이 있었다. 그 따뜻한 마음과 정열적인 심장을 숨겨놓은. 다시 가슴을 지나 한 뼘 정도 더 내려오면, 여섯 개 이상으로 조각난 복근이 숨을 쉴 때마다 진해졌다가 작아졌다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 오면… 지금은 잠들어 있는 ‘작은 영후’가 있었고. 나는 잠시 얼굴을 붉혔다가, 좀더 시선을 옮기다가 이내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묵직한 허벅지 아래, 왼 무릎에는 내가 만든 것인지도 모를 수술 자국이 있었다. 물론 이 남자의 몸 구석구석엔 크고 작은 흉터들이 남아 있었지만, 이것만큼 가슴 아픈 상처는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영후의 왼쪽 무릎을 매만져보았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크지 않은 흉터였지만, 이 남자의 마음엔 무엇보다도 커다란 상처가 됐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남자가 날 떠나지 않게 되길 바랬었던 나의 마음에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고. 나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참으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남자의 무릎을 잡고 있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나 보다. 곤하게 자던 남자가 잠시 뒤척이고 있었으니까. 순간 나는 감상적이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세 여자들은 영후가 밤만 되면 ‘괴물’로 돌변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현장을 직접 목격했었고. 하지만 내 눈으로도 확인해 놓고서도 지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때 그건 신기루 였을지도. 때문에 난 잠깐이지만 공포를 느꼈던 것도 같았다. 만에 하나 돌변한 영후가 지금의 나를 덮친다면, 난 아마 죽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금 전, 그렇게 다정하게, 그렇게 부드럽게 날 안아주었음에도 죽을 것만 같았는데. 분명 난 못 견딜 것이었다. 하지만… 남희씨의 말에 의하면 분명, 나와 헤어진 직후부터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로 인해 시작된 병이란 얘기였다. 그렇다면, 어쩌면 나로서 고쳐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과연 혼자서 그 모든 과정을 해 낼 수 있을까. 그것도 지금?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걱정을 결심으로 바꿔보았다. 이 남자에게 상처를 준 건 언제나 나였다. 지금도 그랬고. 그러니 결국 내가 해야만 했다. 나는 결국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자신’에게‘그러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곧바로 조심스럽게 ‘작은 영후’에게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길다란 ‘작은 영후’는 그러나 내 안으로 들어 왔을 때하고는 전혀 다르게 말캉말캉하게 변해있었다. 평소 영후 마음처럼 부드럽고, 말랑거리던 게 그 짓, 그러니까 ‘섹스’만 하려고 하면 그야말로 스포츠 모드가 되어버린다는 게 무척이나 신기했다. “아…” 분명 영후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음에도, ‘작은 영후’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평소에 잠은 자는 건지?!) 어느새 빳빳하게 일어서 있었다. 그렇다는 건, 영후가 잠에서 깨기 전까지는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해 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작은 영후’에게서 또다시 맑고 투명한 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기에, 난 별다른 고민도 없이 촉촉한‘작은 영후’를 맛보려 입에 덥썩 물어보았다. 그러자 입안 가득 ‘작은 영후’ 특유의 맛이 퍼졌다. 그건, 그건 마치 바닷가에서 부는 바람의 맛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리 오래 ‘작은 영후’를 입에 넣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작은 입으로는 절대 작지 않은‘작은 영후’를 입에 넣은 채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혀를 움직일 수도, 하다못해 기도에까지 닿아주는 것만 같아 숨을 쉴 수 조차 없었으며, 침을 삼키기도 힘들어 벌써 ‘작은 영후’의 군데군데엔 나의 침이 흘러내려 번들거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 앞니에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작은 영후’를 뱉어냈고,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분명, 처음에 이 녀석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땐 아팠다. 아프기만 할 뿐,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작은 영후’가 들어오기 전이 더욱 기분은 좋았던 것도 같았다. 세 여자가 날 가지고 놀았을 때도 그랬고. 하지만 결심하지 않았던가. 오늘만큼은 어떻게든 영후의 여자가 되겠노라고. 맞다 ‘젤!’. 또 잊고 있었다. 윤지 말로는 그걸 쓰면 훨씬 고통이 덜해진다고 했었다. 그래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런데… 아쉽게도 내 수중엔 지금 그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받으러 이 늦은 시간에 윤지에게 가는 건, 나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어쩐다… 방금 생각해낸 해결책은 그야말로 오아시스 처럼 보이던 신기루 였기에 난 또다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래 콘돔! 윤지가 또 그랬었다! 콘돔에도 소량이지만 ‘젤’이 들어있다고! 그리고 분명 윤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건네줬던 콘돔이 백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난 알몸의 남자에게서 떨어져 나와 테이블에 놓여져 있는 백을 들고는 그대로 뒤집어 카페트 위에다 탈탈 털어대기 시작했다. 핸드폰부터 시작해서, 파우더 팩트와 필기도구, 그리고 지갑과 보이스 레코더가 차례로 떨어지고 나서 마지막으로 팔락거리며 은박에 쌓여있는 콘돔 두 개가 거꾸로 뒤집힌 백 속에서 떨어져 내렸는데, 난 환희에 찬 얼굴로 그것을 집어 들어보았고, 미친 듯이 그러나 소리내지 않은 채 웃어보았다. - 기특하게도 ‘작은 영후’는 여전히, 그것도 내 침으로 번들거리는 채로 가끔씩 인사를 해주기도 하며 그곳에서 여전히 선 채로, 콘돔을 찾으러 자리를 비웠던 나를 잊지 않은 채 기다려 주고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어떻게라도 마음을 표현해 주고 싶었지만… 내가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더 결심이 공고해 졌는지도. 나는 윤지의 손놀림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며 은박의 톱니무늬결 부분을 손가락으로 잡아 뜯고는, 그 안에 들어있던 분홍색의 콘돔을 꺼내보았다. 아… 이런 미끌거림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혹여 이 미끌거림이 수분처럼 증발돼버리는 건 아닌지 불현듯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난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한달음에 ‘잠든 호텔 속의 영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켜보았다. (도대체 왜 이런 순간엔 꼭 입안 가득 침이 고이는 걸까?) 그리고는 윤지가 알려준 대로 정갈하게 말려있는 콘돔의 볼록한 가운데 부분을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해 살짝 잡아보았다. 그리고 ‘작은 영후’의 머리 부분에 콘돔을 얹고는 말려있는 부분을 펴려 했다. 그런데… 안 펴졌다. 순간 내 등에는 식은 땀이 흘렀던 것도 같았다. 왜지? 왜지? 뭐가 문제인 거지? 내가 뭔가를 잊고 있었나? 그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뒤섞이고 있었는데, 난 그 중 가장 현실적인 답을 추려냈다. ‘불량이거나, 사용방법 오류 이거나.’ 하지만, 난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 콘돔 착용법에 대해 놓치고 있는 것은 절대 없었다. 그러니, 결국 불량이라는 것이 답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불량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 다른 하나와 비교해 보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난 아깝지만, 남은 한 개를 다시 뜯어 보았다. 그리고 먼저 뜯어 놓은 것과 새 것을 양 손에 올려 놓은 채 무척이나 면밀하게 비교 분석을 해 보았다. 만일, 누군가가 지금의 내 모습을 봤다면 ‘미친년’이라고 했을 게 분명했다. 알몸으로 잠든 남자 앞에서, 콘돔 두 개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채 심각하게 관찰하고 있는 여자라니.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무런 차이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두 개가 동시에 불량일 확률은 아마 극히 미미할 것이었고. 결국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릿속을 번뜩이는 한 가지가 있었다. ‘설마?’ 나는 다시 영후에게로 다가가 콘돔의 앞부분을 지긋이 잡은 채로 ‘작은 영후’의 머리부분에 얹고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말려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내려보았다. 아… 내려간다.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다. 처음에 내려가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반대 방향으로 씌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문제였는데, 그 순간 만큼은 그렇게 행복하고, 또 짜릿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콘돔을 ‘작은 영후’에게 예쁘게 입혀 줄 수 있었다. 조금은 검붉고 굵은 핏줄 덕에 무서워 보이기도 했던 ‘작은 영후’도 이렇게 옷을 입혀 놓으니 꽤 예뻐 보였다. 물론 조금 작은 감이 없진 않았지만. 어쨌든 예쁜 김에 부디 내 안으로 들어와서도 예쁘게 굴길. 나는 이내 내 몸을 감싸고 있던 타월의 매듭을 풀고는 카우보이가 밧줄을 던지듯 소파 한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아름다운 남자는 잠들어있고, 난 지금 그 남자를 범하려 하는 중이었다. 그제야 남자들의 심정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눈 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을 외면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조차도 벌써 이렇게 남자의 몸 위로 올라가고 있는데 말이다. “아…으응…”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 손에 이끌려 동굴 앞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던 ‘작은 영후’는 정말 콘돔의 젤 성분 덕분인지, 처음처럼 어느새 조금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엉거주춤 영후의 몸을 가운데 둔 채 무릎으로 서 있던 나는 콘돔의 미끌거림의 도움을 받으며 이내 완전히 앉을 수 있었다. “하아…” 그래, 결국 내 안으로 ‘작은 영후’가 완전히 들어왔다. 내 마음에 영후가 들어찼듯, ‘작은 영후’도 내 몸 속에 들어차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처음과는 또 달랐다. 뜨겁긴 했지만, 미세하게 달랐다. 따뜻한 기분도 들었고, 여전히 크고, 딱딱하고, 또 두꺼웠지만, 감내할 만큼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쯤 숨을 고르고 난 후에야, 남희씨의 움직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후의 옆에 바르게 누운 상태에서 봤었던 그녀의 허리는 유연했고, 엉덩이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뇌쇄적이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영후의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그 손에 조금 나의 체중을 옮겨보자 그 순간 내 안에 꽉 들어차있던 ‘작은 영후’가 조금 빠져나오며 동굴의 벽 이곳 저곳을 순식간에 훑어주었는데, 그와 동시에 내 동굴의 벽들이 ‘작은 영후’를 따라나가려는 통에 내 전신에는 일순간 전율이 일었고 그 덕에 난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로 입만 벌린 채 그대로 멈춰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모든 시간과 공간을 정지해버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그러나 이미 깨닫고 있었다. 방금 느꼈던 그 짜릿했던 순간을, 단 한번으로 끝내진 못할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머리로 깨달았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나도 모르게 반쯤 내게서 빠져나간 ‘작은 영후’와 나의 ‘동굴 벽’들을 온몸으로 내리 눌러 내 안으로 오롯이 집어넣으며 또 한번 탄식 같은 신음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였다. 영후가 조금은 놀란, 그러나 이내 더 이상 사랑스러울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본 것은. “하아… 영후야… 일어… 난 거야…? 흐윽…” “하연아…” 분명, 영후는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영후의 두 손은 어느새 나의 허리를 부드럽게 잡아주었으니까. -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영후가 따뜻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연아… 괜찮은거야…?” “나… 왜…?” 난 잠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영후의 몸 위로 올라갔고, 그 짜릿함을 단 한번, 아니 두번 정도 느끼자마자 영후가 일어났고… 일어났고? 설마…? “하연아… 그렇게 무리하면 어쩌니… 괜찮은 거야?” 무…리? 그러니까… 내가… 했다고…? 그걸…? 그러니까… 섹스…를? 그야말로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난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내가 그걸 해버리고 혼자 정신을 잃었던 거라면… 너무 창피하니까! “좋…았어?” 때문에 난 무리수를 던지고야 말았다. 좋았냐,니… 무슨 몸 파는 여자도 아니고 지금 그런 걸, “어, 정말 좋았어. 너무 좋았고, 너무 행복했어.” 하지만 영후가 그렇게 말해 주자 어쩐지 내가 더 행복해 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몽롱한 머리를 들어 영후의 입술을 찾았고, 영후는 재빨리 내 머리를 받쳐주며 키스를 해 주었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키스를 하다가 ‘꼬르륵’이라니. 도대체 누구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내 얼굴이 화끈 거리는 걸 보면, 범인은 바로 나였던 것 같았다. “하연아, 배… 고파? 룸 서비스라도 시킬까?” 참 절묘한 순간에 낭만을 깨는 소리를 듣고 나서도 이렇게 상냥할 수 있다니… 영후는 정말 멋진 놈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영후를 보며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거 말고, 나 먹고 싶은 게 있는데…” “?” - 이런 고급 호텔에서 밤늦게 끓여먹는 라면은 의외로 별미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마주앉아 신나게 라면 3개를 끓여 먹었다. 그리고 소화시킬 겸 그 자리에서 그대로 또 한번 관계를 가졌고. 역시 이번엔 두 번 째 보다 훨씬 아픔이 덜했다. 콘돔 같은 건 필요도 없었고. 물론 아직 구름에 붕 뜬 것 같다는 느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는 느낌까지는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물론 도중에 계속 정신을 잃어서 중요한 하이라이트 부분이 기억나지 않는 다는 게 조금 답답도 했지만. 편한 침대를 놔두고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카페트 위에 그대로 나란히 누워 영후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제나 이 순간이 오길 꿈꿨었는데…” “그래서… 좋아?” 나는 어느새 부끄러움 따윈 개나 줘버린 듯, 아무렇지도 않게 영후의 가슴위로 머리를 얹으며 손가락으로 영후의 가슴과 배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입을 열었다. 영후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거리는 가슴을 따라 내 머리도 부드럽게 오르락 거리는 느낌이 참 좋았다. “응, 좋아.” “네가 좋다면, 나도 좋아.” “이제 난 아무것도 바랄게 없어. 너만 있어주면 돼.” 설마 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나는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일어나 정색을 하며 말해주었다. “바보, 그러지마. 넌, 나 같은 애보다 훨씬 더 큰 꿈이 있잖아.” “그런 거, 이제 아무래도 좋은 걸. 나한테 너, 하연이라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데, 다른 게 무슨 소용이야.” 정말로 더 이상의 행복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여전히 카페트 바닥에 누운 채로 천정을응시하며 말하는 녀석의 얼굴에 내 가슴은 또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너, 왜 그래 진짜… 설마… 설마 이번에도 눈 앞에 있는 기회를 날려버릴 셈이야?” “어디서 축구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어디든 상관없어. 또 축구 같은 거 안 하면 어때? 그저 너하고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자신의 꿈을 위해 차마 나의 꿈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의 꿈, 축구 전문 기자. 하지만 내 꿈의 의미도, 이 남자의 꿈이 사라져 버린 후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이대로 영후가 꿈을 접으려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나… 실은 그냥 확인해보고 싶었어. 내 마음이 어떤 건지…” 하지만 차마,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이 남자가 가진 꿈의 실현을 위해, 나란 여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노라고 말을 꺼낼 순 없었다. 그랬다간,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얼마 후에 벌어질 감독데뷔전이고 뭐고 다 때려 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런 이별 준비는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나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기에 영후를 일으켰다. 그리곤 조금 의아해 하는 영후의 손을 이끌며 욕실로 향하며 말해주었다. “같이 목욕하자.” - 따뜻한 물이 넘치는 욕조에서 또 한번의 관계를 갖고 나와서, 영후는 침대에 누운 채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엔 또 다른 이유로 겁이 났다. 이 남자가 정말, 나를 위해서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면, 난… 난 어째야 하는 걸까. 꿈… 아…! 남자의 꿈을 생각하다 문득, 또 하나의 남자가 불현듯 떠오르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그 남자애 생각이 났을까. 나는 영후가 깊이 잠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는 카페트 위에서 뒹굴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든 채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욕실 안에서 또 몇 분 고민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난 전화번호부에서 녀석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금 쯤이면 한참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까. 근명이가 꾸는 꿈은 또 어떤 것들일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음성통화로 넘어가기 직전에, 전혀 변하지 않은 퉁명스런 말투가 들리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으으… 누구야… 누군데 잠이나 쳐 잘 것이지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잤니…?” ‘바,박기자님?! 어…어쩐 일이에요?’ 다행이었다. 잠에서 깨어 준 것도, 단번에 내 목소리를 알아들어 준 것도. 하지만 그랬기에 더 미안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엔 모든 게 다 미안하기만 했다. “미안, 자는 거 깨웠나 보네.” ‘아니에요 아니에요! 자긴 누가 잤다 그래요?! 이런 초저녁에.’ 말도 안 되는 말을 되는 대로 늘어놓는 근명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뭐가 그리 조바심이 나는지 잠시를 못 참고 먼저 입을 열어 주었다. ‘여보세요? 박기자님?! 끊은 거에요?’ “아니, 나 여기 있어.” ‘뭐에요, 놀랐잖아요. 전화 건 사람이 말은 않고…’ 그게 그렇게 기뻤을까. 하지만 전화 말고, 더한 것이 끊어졌다고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난 또다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은 타인에게 이렇게 잔인함을 동반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아, 그런데… 이 녀석,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뭔가를 눈치챈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목이 메이는 소리가 갑자기 들릴 리 없었으니까. 내 사랑을 찾고자 다른 사람의 기다림을 짓밟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내가 뭐라고. 이런 아이에게 까지 상처를 입히는 걸까. 그저 눈만 한 번 질끈 감아버리면 될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이미 영후의 여자가 되어버렸으니까. 물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영후의 여자란 걸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너’하고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니 장난스럽게라도 ‘꿈 깨!’라고 놀려주기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장난기는 온데간데 사라져 버리고 나답지 않은 심각하고도 조심스런 말이 흘러나오려 했다. “근명아, 나…” ‘선배는 잘 있죠?’ “어? 어어…” “정신 바짝 차리라고 전해줘요.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축구 선수권대회를 지켜보겠다는 건지, 아니면 영후와 나의 관계를 지켜보겠다는 건지 난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어쨌든 녀석의 마음, 어쩐지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때문에 난 그저 내 안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보였다. “미안해… 그리고 고맙구…” 확실하게 뭐가 미안한 건지, 또 뭐가 고마운 건지는 말하는 나 조차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말하고 나니, 근명이와의 거리가 마치 지구와 명왕성의 거리 만큼이나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녀석도 그랬을까. ‘더 할말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요새 잠이 늘었는지, 졸리네요.’ “…그래… 미안…” ‘그 미안하다는 말 좀!!!’ 그건 정말 순간이었다. 남자의 감정이 이런 거란 걸 느끼게 된 것은. 휴대폰으로는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너… 우는 구나…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여자 때문에… ‘소리질러서… 미안해요. 그럼 끊을게요.’ “그래… 그럼 잘자…” 난 마지막 인사를 했지만, 인사를 하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핸드폰의 종료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인사야 어쨌건, 끊기지 않은 휴대폰으로 무언의 통화가 계속 되는 것처럼, 그녀석의 마음이 아른하게 들려져 오는 것만 같았으니까. 36부. 잘 할 수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라커룸으로 들어온 아이들의 얼굴은 어느정도 배어져 나온 땀 덕분에 아침 때와는 달리 긴장이 해소되어 보였고, 그것만으로도 수림은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샌가 준비해온 진한 블랙 커피를 한 잔씩 나눠주는 남희의 모습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설마…’ “근데, 왠 커피에요? 나 커피 안 좋아 하는데…” 혜미가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종이컵에 가득 담긴 커피를 바라보며 투덜거리자 남희는 나무라는 투로 대답해주었다. “후식으로 마시라는 거 아니야. 전, 후반 내내 지구력을 유지하기 위한 일환인 거지.” “에에? 그게 이 진한 블랙 커피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보통 운동을 할 때 소비되는 에너지는 글리코겐에서 공급되는데, 그 글리코겐이 없어지면 대신 피하지방이 에너지로 변하거든. 그치만 커피에 함유된 카페인은 글리코겐보다 먼저 피하지방을 에너지로 변환하는 작용을 해. “아, 어려워요~” “그니까, 다시 말하면 ‘카페인은 탄수화물보다는 지방을 에너지 원으로 먼저 사용하도록 근육을 자극하기 때문에 소량의 카페인을 섭취하면 운동 중 지구력을 연장시킬 수 있다’뭐, 이런 건가요?” 수림은 자신의 학창시절 그나마 졸지 않고 들었던 스포츠과학 강의의 내용을 떠올리며 쉽게 풀어 이야기 하며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커피를 한 잔 마신다고 갑자기 지구력이 늘어날 리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혜미가 입을 열었지만, 바로 이어지는 남희의 말 덕분에 입을 쏙 닫을 수 밖에 없었다. “30프로야.” “예?” “지구력이 30프로 증가된다고. 게다가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량의 카페인으로도 운동 중이나 후에 느껴지는 피로도를 60프로까지 지연시킬 수 있다고 하니까, 싫더라도 한 잔씩 마시고 나가도록 해.” 남희가 그렇다면 군말없이 따라야 한다는 걸 알고 있던 혜미는 의외로 잘 마시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남자친구를 만들어서 하루라도 빨리, 그리도 자주 커피ㅤㅅㅛㅍ에 다녀봐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순간 그 누구도 아닌 ‘현우’를 떠올린 것은 당연했고. “저, 권코치님.” 한편 수림이 평소와 다른 딱딱한 음성과 함께 근심스런 표정으로 남희를 부르자 남희는 전에 없이 안정되지 못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분명 첫 시합 날이니 만큼,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수림은 그래서 더욱 그냥 넘어가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네…? 무슨…?” “커피요, 커피! 지금 권코치님은 눈앞의 승부에 집착해서, 정작 아이들의 건강을 외면하고 계시잖아요!” 그제야 남희는 수림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카페인. 지금 수림은 카페인의 유해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 자신은 카페인의 단기적 효용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고. “잊으셨어요? 감독님은 언제나 즐겁게 운동을 하자고 하셨잖아요. 근데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아이들을, 아니 권코치님부터 이렇게 승부에 집착을 하신다면, 전 절대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저 전, 오늘 있을 시합을 위한 경기력 향상을 위해” “그런 생각이 바로 문제 아닌가요? 경기력은 아이들이 지금껏 해온 훈련량이 말해주는 거지, 이런 커피 따위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구요!” “커피 따위라뇨! 이건 그저 단순한 커피일 뿐입니다! 게다가 요새 아이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커피란 말입니다!” 남희의 말 그대로 그저 커피 한 잔이었을 뿐이었음에도, 두 코치가 처음으로 반목하며 언성을 높이자 괜히 투정을 부려봤던 혜미는 그야말로 눈동자만 굴리며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고, 비단 다른 아이들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두 코치는 여전히 서로를 쏘아보느라 아이들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에, 윤지만이 어젯밤 하연과 단 둘이 밤을 보낸 영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거란 걸 눈치 채고 있었을 뿐, 다른 아이들은 오늘의 경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더해져 몸을 풀기 전보다 더욱 경직되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 몸들 잘 풀었니 얘들아?” 겨우 영후가 구세주처럼 커피 향이 가득한 라커룸에 들어섰지만, 냉랭해진 분위기는 쉽게 바뀌질 않았고, 영문을 알리 없던 영후는 갑자기 찬바람이 쌩 부는 두 코치들을 바라보다가 윤지에게 눈으로 물었지만 윤지는 심드렁하게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 ‘후…’ 기자석에 앉아 여주대와 한국여대의 출전선수 명단을 바라보던 하연은 중, 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을 하러 온 것 말고는 텅텅 비어있는 관중석을 확인하고는 조금 한숨을 내쉬어보았다. “괜찮으려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관중의 수라면 보통, 잔뜩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첫 출전의 선수들에겐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 축구선수답지 않은 아이들의 미모 덕분에 매일 한국여대의 스탠드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관중들이 들어찼었기에, 어쩌면 관중들의 환호에 길들여져 있던 한국여대 선수들로선 맥이 빠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때문에 이럴 때 일수록 선수들을 다독거려야 할 감독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는데, 어제까지와는 확실히 뭔가가 달라져버린 것만 같은 자신처럼, 혹여 영후도 그런 건 아닌 지 하연은 걱정해 볼 수 밖에 없었으나 그도 잠시, 아직도 뭔가가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은 자신의 하복부의 느낌 때문에 하연은 아직도 떨리고 있는 두 다리를 애써 오므리며 주변의 기자들 모르게 얼굴을 붉혀보고 있었다. - 병원의 재활 센터에서 도우미의 지시를 받으며 의자에 앉은 채 천천히 왼 무릎을 접었다 펴는 동작을 하면서도 근명은 입을 쉬지 않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니 다음주면 독일로 수술하러 갈 사람을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진짜…” “몇 번을 말씀 드려요, 이런 류의 부상은 우선은 간단한 재활 과정을 거친 후에 수술을 받는 거라니까요. 안 그럼 수술을 받는다 해도 걷기는커녕, 무릎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게 된다고요. 아니지, 어쩌면 수술 자체가 힘들어질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독일 병원 측에서도 자기네로 오기 전까지 이렇게 스케줄 진행을 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또…” “아, 누가 뭐래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성질 더러운 근명을 위해 특별 배치된 만만치 않은 도우미들 덕분에 근명은 꽤나 순한 양이 되어 버린 듯, 금새 말꼬리를 흐리며 묵묵히 왼 발에 정신을 집중하며 움직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근명은 무릎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티비 좀 보면서 하면 안돼요?” “예? 왜요?” “축구 경기 좀 보게요.” “지금 이 시간에요? 무슨…? 아, 프리미어리그 재방송이라도 하나요?” “프리미어리그는 얼어 죽을… 축구 선수권대회요.” “축구… 선수권 대회요? 그게 뭔데요?” “아, 진짜… 그런 거 있어요! 여자애들 나와서 하는…” “에에? 여자들이 축구를 해요? 금시초문이네요. 근데 그걸 무슨 재미로 봐요? 적어도 프리미어리그나 세리아 정도는 돼야” “이봐요…” “…?” “나, 대한민국 K리그 선수거든? 당신 우리나라 축구 경기장에는 한 번 가보기라도 하고 주둥이를 나불대는 거야 지금?” “……” “잔말 말고 빨리 티비나 틀라고!” 그제야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달은 도우미는 근명의 눈치를 보며 리모컨으로 천정에 매달려 있는 넓은 화면의 엘씨디 티비를 켰고, 그러자 마침 그라운드로 꼬마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는데, 푸른 색의 그라운드를 보자마자 근명은 하마터면 자신의 다리 부상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날 뻔 했을 정도로 그리움을 짙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또다시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에 전화를 해준 ‘그녀’에게로 옮겨가고 있었고. - 정말 평소의 근명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간단한 재활 운동이었음에도 ‘부상’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고, 또 환자복을 입고 있자니 괜히 더해지는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기에 다른 생각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깊은 단잠에 빠져있던 새벽. 아스라히 먼 어디선가 울리고 있는 음악소리에 베고 있던 베개로 귀를 막을 까도 생각해 봤지만 어쩐지 눈을 떠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머리맡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으으… 누구야… 누군데 잠이나 쳐 잘 것이지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잠결에도 성격은 변치 않는 것인지, 아니면 단잠을 깨웠기에 더욱 화가 난 건지, 근명은 중얼거리듯 잠 내음을 풍기며 입을 열었는데, 수화기로 들려오는 너무나 간절했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어쩌면 침대 위로 일 미터는 뛰어 오를 것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잤니…?’ “바,박기자님?! 어…어쩐 일이에요?” ‘미안, 자는 거 깨웠나 보네.’ “아니에요 아니에요! 자긴 누가 잤다 그래요?! 이런 초저녁에.” 말도 안 되는 말을 되는 대로 늘어놓는 근명의 목소리에 수화기 저편에선 잠시 침묵을 유지했고, 그 때문에 근명은 더욱 조바심을 내며 핸드폰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꿔 잡으며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박기자님?! 끊은 거에요?” ‘아니, 나 여기 있어.’ “뭐에요, 놀랐잖아요. 전화 건 사람이 말은 않고…” 겨우 하연의 전화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던 근명은, 그러나 뭔지 모를 느낌이 뇌리를 스치자 갑자기 전혀 알 수 없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어 홀연히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소중한 것을 눈 앞에서 잃어버린 것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그런 기분이었기에 근명은 차마 더 이상 하연에게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지만, 이내 하연이 망설임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자 근명이 얼른 말을 가로 막았다. ‘근명아, 나…’ “선배는 잘 있죠?” ‘어? 어어…’ “정신 바짝 차리라고 전해줘요.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축구 선수권대회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영후와 자신의 사이를 말하는 건지 언뜻 이해하지 못하던 하연은 그러나 어쨌든 근명의 마음, 이해했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맙구…’ 근명 또한 뭐가 그리 미안하고, 또 뭐가 그리 고맙다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이 말을 끝으로 하연이란 여자는 이제 완전히 자신에게서 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할말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요새 잠이 늘었는지, 졸리네요.” ‘…그래… 미안…’ “그 미안하다는 말 좀!!!” 순간 울컥하며 소리를 질러버리고는 이내 후회가 밀려오자 근명은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뗀 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환자복 소매로 닦아 보았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목소리만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소리질러서… 미안해요. 그럼 끊을게요.” ‘그래… 그럼 잘자…’ 근명은 결국 할 말만 하고 황급히 핸드폰을 끊으려 했지만, 자신보다 먼저 끊지 않고 대답해주는 하연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한 손에 든 채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 전주 월드컵 경기장을 다시 찾은 철용은 오늘은 편안히 혼자 관람할 요량으로 그늘을 찾아 관중석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겨우 좋은 자리를 찾아냈지만, 그곳은 이미 이상한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남자애 하나와 역시나 비슷한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커다란 몸집의 중년 남자 하나가 이미 선점하고 있었다. “어, 선배님…?” “엇!?” 혹여 혜미가 알아볼 까 꽤나 공들여 변장을 했건만, 너무나 손쉽게 철용이 자신을 알아보자 규식은 무척이나 당황해 하며 옆에 앉아 있던 애꿎은 현우만 잡았다. “임마! 이러면 몰라볼 거라며!? ” “으… 얼굴이야 그렇지만요…” 그 커다란 덩치는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말하려던 현우는 그러나 철용이 규식의 옆에 앉으며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여긴 또 어떻게…?” “아, 뭐… 딸을 둔 애비의 심정이라고 해 두세.” “아차, 그때 말씀해 주셨었는데, 깜빡 했습니다. 근데 그게 누굽니까…?” “두고 보면 알 걸세. 그 어떤 선수보다도 눈에 띌 테니까.” 역시나 자식 자랑은 그 어떤 부모이던 간에 마찬가지였던 건지, 규식의 무한한 신뢰를 지켜보며 현우는 괜히 조전무를 떠올리고 있었고, 철용은 철용대로 규식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며 조금쯤 커지는 눈으로 물었다. “그 정도… 인 겁니까? 그럼, 진작에 저한테 맡겨 주셨으면” “임마, 영후나 해결하고 들이대라. 그럼 한 번 생각해 보고.” “아, 그거야…” 규식의 입에서 조차 영후가 거론되자, 하여간 그 놈이야 말로 만병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하며 철용은 얼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여자 애들 축구 수준은 좀 어때? 한 번 보기는 했나?” “음, 네 어제 개막 경기 봤었습니다. 생각보다 아기자기 한 면도 있고, 남자 경기 만큼이나 터프한 면도 있고, 뭐 그렇더군요.” “그래…?” 철용의 진지한 대답에 규식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현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오늘 한국여대와 붙는 저 ‘경기 여주대’에 대해서 아시나요?” “아, 뭐 조금… 근데 넌 누구냐?” “아, 안녕하세요 저는” 현우가 머쓱해하며 인사를 하려하자, 냉큼 규식이 먼저 끼어들었다. “현우라고, 딸내미 남자친구일세. 잘 키워서 사위 삼을 까 생각 중이고.” “에에?” 철용은 이제 겨우 고등학생 티를 갓 벗은 것 같은 현우를 꽤나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내 똘망 똘망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덕분에 질문을 다시 떠올리곤 어제 남희와 나눴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간단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너 혹시 우리나라 여자 축구 선수들의 꿈이 뭔지 아냐?” 철용에게서 의외의 질문이 먼저 건네지자 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혀…요.” “하나는 대표팀에 승선하는 거고, 또 하나는 해외 진출을 하는 거야.” “보통의 남자 선수들도 꾸는 꿈 아닌가 그건? 새삼스럽게… 싱겁긴.” 조금 기대했었던 탓에 무척이나 원론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규식은 헛웃음을 지었지만, 철용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치만 그것 말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선배.” “?” “그건 바로… 여주대를 이겨보는 거라더군요.” “!!!”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하는 철용을 그제야 규식과 현우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철용은 모른 척하고 계속 이야기를 했다. “지금이야 해외 이적과 신설된 프로리그로 선수들이 빠져나가서 국가대표 선수가 적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지금도 공격수, 미드필더, 그리고 중앙 수비에 한 명씩, 모두 세 명의 국가대표 선수가 있고, 또” “또?!” “오늘의 여주대 스타팅 멤버 전원이 유니버시아드 선발진 입니다. 즉, 다시 말해 대학 선발 대표팀이나 다름 없단 말이죠.” “마…말도 안돼… 그래도 그렇지, 저… 전원이…?!” 그제야 규식은 철용이 뭘 얘기하고 싶은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혜미야…’ - 혜미는 센터서클에 선 채로 제법 영후와 비슷하게 축구공 위에 발을 올려 놓은 채 휘슬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상대 진영을 바라보았다. ---------------김나래-----김진영 ----강나루-----박성은-----김인영-----윤지수 ----김소정-----이유라-----심서연-----홍진아 --------------------윤사랑 여주대 선수들의 온통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혹여 까맣게 탈까 얼굴과 팔 다리 등에 잔뜩 선 블록을 바르고 나온 한국여대 선수들과 더욱 대비되어 보였고, 자유분방한 헤어스타일 또한 단정한 여주대의 선수들에 비해 오합지졸로 비쳐지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혜미가 느끼고 있는 뭔지 모를 압박감에 비하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만만치 않겠는걸…’ 국가대표니, 대학 선발이니 그런 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조기 축구회의 아저씨들을 마주섰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이 느껴지는 통에 혜미는 애써 심호흡을 해보며 뒤를 돌아보았다. -------------------혜미 -------------------아라 ----민지------수정------은채------나경 ----하늘------진희------미애------소영 -------------------미자 그런데 혜미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아이들도 모두 느끼고 있었던 듯, 꽤나 얼어있는 모습이었기에 혜미는 어떻게 해야 경기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을까 고민하며 벤치에 묵묵히 서 있는 영후를 돌아보았는데, 저기 서 있는 감독이라는 직함을 가진 남자가 라커룸을 빠져 나오기 전 자신을 따로 불러 세워 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어 보았다. - “혜미야, 잠깐 감독님 좀 볼까.” “?” 라커룸을 나와 곧바로 경기장으로 나가려는 혜미를 멈춰 세운 건 다름아닌 영후였다. 경기를 앞두고 결국은 아이들에게 평소대로 ‘즐겁게’ 경기를 할 것을 주문하는 모습에, 혜미는 역시 감독님답다고 생각을 했지만,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서야 자신을 따로 불러 세우자 혜미는 조금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경기… 쉽지 않은 건가…?’ 하지만 이내 영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혜미에게 물어왔다. “어떠니 그거. 괜찮다면 오늘 보고 싶은데, 혹시 안될까? ” “네? 그거… 라뇨?” “그거 있잖니, 너하고 처음 만났던 날.” “처음… 만났던 날이요?” “그래,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그거’말야. 시작하자마자 바로 해보지 않을래?” 영후의 수수께끼를 곧바로 풀지 못한 혜미는 그러나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먼저 통로를 빠져나가는 영후의 뒷모습을 뒤쫓아 우선은 경기장으로 나왔지만, 영후는 더 이상의 힌트를 주지 않은 채 상대팀의 벤치로 걸어가고 있었다. - “오늘 경기, 잘 부탁 드립니다.”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며 세세한 관찰을 하던 여주대의 이영기 감독은 뜻하지 않게 영후가 먼저 찾아와 반듯하게 인사를 건네자, 조금쯤 마음이 흔들릴 뻔도 했다. 선수로서 활약은 커녕, 프로에 데뷔도 못해본 자신의 미천한 경력, 그리고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여자축구의 감독이란 자리를 맡고 있는 자신을, 당연히 이 남자 깔보고 업신여기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허나 영후의 인사 한번으로 모든 게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기분마저 들었기에 이영기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기쁘게 맞아주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뭐, 잘해봅시다.” 그리고 예의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맞잡아 본 영후의 손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축구인만이 느낄 수 있는 열정이 느껴지는 통에 하마터면 이영기 감독은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영후의 손을 홱 뿌리칠 뻔도 했다. “그럼.” 악수를 나누고서 다시 간략한 목례를 하고 돌아가는 영후의 뒷모습에 이영기 감독은 생각했다. 절대 봐주거나, 소홀히 하지 말자고. 그것이 이 남자에게 해줄 수 있는 자신의 유일한 인사일 테니까. - ‘시작하자마자 바로 해보지 않을래?’ 삐~익! ‘아…! 맞다!’ 위 아래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있던 한국여대 아이들과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파이팅을 외칠 때도, 자신들의 포지션을 찾아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후에도, 혜미는 영후가 내준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지만, 이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려 퍼지자, 머리에 번뜩이며 지나가는 것 하나가 있었다. ‘바보! 늘 연습해왔으면서! 그 날 이후로, 항상 연습해 왔으면서!!’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낸 완전 신난 혜미는, 센터서클에서 곧바로 아라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가 다시 돌려 받고는 곧바로 공을 몰며 여주대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센터서클을 넘어 얼마 전진하기도 전, 그러니까 여주대 선수들이 채 진영을 가다듬기도 전에 갑자기 왼발을 잔디에 견고하게 파 묻고는 오른발로 벼락같은 슈팅을 날렸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감독님이 보여준 그 슛을!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연습을 거른 적이 없다구요!!!’ - “아니 쟤가 갑자기 왜…!?” 남희과 수림 모두 갑자기 먼 거리에서 무모한 슛을 시도한 혜미를 보며 어이가 없는 듯, 자리에앉으려다 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멋진 폼이다 혜미야.’ 벤치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지붕의 한 쪽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영후는 빙긋 웃었을 뿐이었다. - “어… 어어… 어어어…!!” 그야말로 철용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분명, 지금 철용은 꿈을 꾸는 것도, 환상을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엄청난 슛을 목격한 것이었을 뿐. 낮은 무게 중심을 유지한 채로, 무척이나 작고 간결한 폼으로 멋지게 찬 공은, 온몸의 무게가 실린 듯 묵직하고도 꽤 빠르게 날아갔으며, 미처 그렇게 먼 거리에서의 슈팅을 예상하지 못했던 여주대의 골키퍼 윤사랑을 비웃듯, 공은 왼쪽 골 포스트의 중간 지점으로 정확히 날아가 골네트를 가르고 있었다. - “우와아아아아!!!!!!!!!!” 그야말로 경기 시작을 알린 지 채 10초나 지났을까. 혜미의 엄청난 슛이 성공하자 한국여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혜미에게 달려갔지만, 혜미는 그 누구에게도 따라 잡히지 않으며 곧바로 영후에게로 달려가 그대로 덥석 안겼다. “감독님! 봤어요? 내가 넣었어요! 내가 넣었다고요!!!” 영후는 땅에서 두 발이 떨어진 채 자신의 품에 와락 안겨있는 혜미를 대견스럽다는 듯, 등을 두드려 주었고, 두 코치와 아이들도 그런 영후와 혜미를 둘러 싸고는 한동안 선취 골의 기쁨을 나눴는데, 윤지만큼은 그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채 영후와 진정한 교감을 나누고 있는 혜미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지…?’ 당연히 기뻐해야 할 순간에 이상하리만치 질투심이 나는 것을 윤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윤지 말고도 그 순간에 좋아해야 함에도 좋아하지 못한 사람은 또 한 명이 있었고. - 철용이 현우의 목을 조르며 여전히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어쩐지 규식은 좋아하기는커녕 근심스런 얼굴로 다시 시작되는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돌아가는 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슛을 보고, 자네가 뭔가 깨달았길 바라네만… 행여 그랬대두… 저 엷은 스쿼드로는 그 어떤감독이 와도 어쩔 수 없겠지.’ 부디 자신의 예상이 틀리길 바람과 동시에 한국여대가 어떻게든 이 선취 골을 잘 지켜내어 승리를 얻기를 바라며 규식은 더욱 심각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 다시 전열이 정비되고 휘슬이 울리자, 불의의 일격을 맞은 이영기 감독은 그러나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수비를 보고 있는 심서연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고, 이영기 감독의 사인을 확인한 심서연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백의 수비라인을 전체적으로 조금씩 끌어올리며 전진시킴과 동시에, 자신은 그보다 조금 더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변화를 한국여대 선수들은 감지하지 못했고, 어느새 자신의 코 앞에 서 있는 심서연을 마주 하게 된 혜미는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제대로 한 방 먹여줬단 생각에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으며 움직였는데, 심서연은 순간 놓치지 않고 혜미에게 따라 붙었다. “너… 뭐야…?” 농구경기도 아닌데 경기 시작부터 일대일 맨마킹이라니, 혜미는 꽤나 당황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래봬도 자신은 이영후 감독님의 마크도 따돌리고 슛을 성공시킨 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미 이 경기에서 한 골을 넣었으니까. 하지만 혜미는 알지 못했다. 심서연 뿐만 아니라 모든 여주대 선수들이 기민하게 움직이며 공간과 사람 둘 다 숨 쉴 틈 없이 옥죄기 시작했다는 것을. - 하연은 기자석에 앉아 기사 작성도 잊은 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한국여대가 아닌, 여주대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중심엔 바로 심서연이란 국가대표 중앙수비수가 있었고. ‘저 아이… 국가대표의 수준이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 하연은 현대축구에서 중원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중앙 수비수가 허리싸움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새롭게 깨닫고 있었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자리로 올라가 한국여대의 반격의 싹을 바로 바로 잘라버리기도 하고, 때론 다른 3명의 수비수들을 지휘하며 오프사이드 라인을 형성할 수 있도록 지휘했으며, 오버래핑을 나가는 양 윙백의 빈 공간을 적절하게 지켜내기도 하는 중앙수비수.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때때로 직접 전진하다가 적재적소로 지체 없이 장거리 패스를 날려 공격의 시발점까지 해 내고 있는, 국가대표 수비수‘심서연’이야말로 여주대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는 선수였던 것이다. 혜미의 골 이후로, 심서연의 지휘아래 여주대 선수들의 엄청난 압박 수비가 시작되자 그야말로 단 한번도 센터라인을 넘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모든 한국여대 선수들은 여주대 선수들에게 완벽하게 장악 당했고, 종내에는 자신감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영후야…’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하연이 간절하게 영후를 불러보고 있었지만, 하연의 간절함 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여주대의 최종수비라인과 미들진들이 미친 듯이 허리를 압박하고 장악하자, 여주대의 투 톱인 155센티미터의 작은 키의 김진영과 176센티미터의 김나래는 스피드와 제공권을 이용해 한국여대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휘저으며 간단하게 3골을 쓸어 넣었고, 그럼에도 성에 차지 않은 듯 전반 종료 직전까지 거세게 몰아붙인 여주대는 결국 코너킥까지 얻어내고야 말았다. ‘더 이상 벌어지면 안돼!’ 이미 체력이 많이 소진되어있을 시간에 이루어지는 세트피스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던 혜미는 전방에서부터 돌아와 수비진에 합류했다. 이윽고 여주대의 모든 선수들은 한국여대 진영의 페널티 에어리어에 모여들어 이리저리 공간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한국여대 선수들은 각자가 맡은 선수들을 따라다녔는데, 혜미 역시 심서연을 막아 섰지만, 그런 혜미를 보며 심서연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날 막겠다고? 너 수비는 할 줄 아니? 아니지. 축구는 할 줄 아는 거야?” 다분히 도발적인 심서연의 비웃음 섞인 물음에 발끈하며 뭐라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이내 오른쪽 코너플래그에 있던 여주대 중앙 미드필더 박성은이 코너킥을 감아 차 올리자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심서연을 쫓으려 했지만, 어느새 정확한 낙하지점을 포착한 심서연은 그대로 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이걸로 끝이야!” 그야말로 완전한 단독 찬스를 맞이하며 뛰어오른 심서연은 그저 공의 방향만 바꿔놓으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똑바로 뜨고 날아오는 공을 바라봤지만, 그 때였다. 그 공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은 여자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건. “마음대로 안될걸!!!” 심서연이 간단하게 제쳤다고 생각했던 혜미라는 공격수는, 그러나 어느샌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 그것도 자신보다 더 높이 뛰어오르며 공을 막아서고 있었고, 당황한 심서연은 헤딩을 하고 난 혜미와 엉키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는데, 혜미의 이마를 맞고 튕긴 공은 그러나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잡아!!!” 누가 외쳤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리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모두들 그리했을 테지만, 불운하게도 그 공은 골에어리어의 한편에 서 있던 여주대의 공격수 김나래의 발아래 떨어졌고, 김나래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뛰쳐나오는 골키퍼 미자의 손과 몸을 날리는 한국여대 선수들의 몸을 피해, 간단히 차 넣고 있었다. 삐~익! 1 : 4 이제는 골을 넣는 것에 별 감흥도 없는 듯 간단히 다른 여주대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며 돌아가는 김나래를,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는 혜미가 있었지만, 심서연만은 쉽게 자신의 진영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분명, 심서연의 타이밍은 완벽했다. 또한 완벽하게 도약을 했었고. 게다가 멀찌감치 혜미를 따돌렸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혜미에게 헤딩을 빼앗겨버리자, 골이 들어갔음에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여대 선수들은 모두 케이오 펀치를 맞아버린 듯 이곳 저곳에서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있었기에 심서연은 너무 깊이 생각할 것 없다는 마음으로 애써 ‘이질감’을 잠재우며 자신들의 진영으로 뛰어갔는데, 김나래로부터 시선을 거둔 혜미는, 뭔지 모를 분노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듯한 눈으로,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소리에 그라운드 밖으로 걸어나가는 심서연에게로 고정하고는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한편 속절없이 무너지는 선수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남희와 수림은 골을 허용할 때마다 영후가 어떻게든 처방전을 내어주길 기대했지만, 결국 아무런 지혈도 없이 전반전의 마지막 순간까지 처참하게 난도질 당해버리자 무심해도 이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하는 눈으로 영후를 바라봤는데, 이런 코치들의 애타는 심정을 눈치 못 채고 있는 듯 영후는 심서연과 심서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혜미를 꽤나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아 젠장! 져도 좋으니까 뭐라도 좀 보여주라고 임마!” 어느새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버린 철용이 관중석에서 영후 보고 들으라는 듯, 고함을 질러봤지만 들릴 리 만무했기에 답답한 심정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봤지만, 규식과 현우가 눈에 들어와 결국 주머니에 꾸겨 넣고는 규식에게 볼멘 소리를 했다. “이게 뭡니까 선배?!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결국 한 골로 끝인 겁니까?” “임마, 축구가 전반만 하고 끝인 경기냐? 너희 땐 그랬냐?” “아무리 그래도요. 이건 뭐, 프로팀하고 중학생 팀이 싸우는 거 같잖습니까?!” “……” 딱히 철용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규식은 차마 변명을 해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여주대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전혀 흠잡을 곳이 없어 보였으니까. 포백의 철저한 라인 컨트롤과 미들진의 엄청난 협력 수비, 그리고 서로가 시너지를 내는 투 톱의 움직임까지. 지금으로선 그 어느 하나도 한국여대가 여주대를 넘어설 가능성은 손끝만큼도 없어 보였다. ‘이 녀석아,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 전반전이 끝나고 티비에서 광고가 나오자, 총장은 답답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들어 1번을 꾹 눌렀고 오래 걸리지 않아 자신 만큼이나 가라앉아있는 노감독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요.’ “알아요 당신인줄. 내가 걸었잖아요.” 한국여대가 처참하게 지고 있는 게 딱히 노감독의 탓도 아니었건만, 총장은 괜히 노감독에게 심통을 부려보고 있었는데, 그런대도 지금의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총장은 더욱 답답한 마음이 되었다. ‘목소리가 왜… 설마, 벌써 포기한 게요?’ “무,무슨 소리에요 그게. 누가 포기했다고 그래요? 축구는 모르는 거라구요!” ‘허허, 다행이 잘 알고 있구먼…’ “그치만!” ‘당신 마음 모르는 바 아니지만, 조금만 참고 지켜보구려. 내가 보기엔 이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으니. 또 그러라고 그럴 놈도 아니고.’ 총장은 너무나 덤덤하게 이야기 하는 노감독 덕분에 더 답답해 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날고 기는 영후라 해도 그건 선수였을 때나 가능한 것일 텐데, 마치 영후가 선수로 뛸 때처럼 이야기하듯 너무나 원론적인 말만 늘어놓는 노감독이 괘씸했기에, 바로 옆에 있었다면 분명 팔이 새빨개지도록 꼬집어 주었을 거라 생각하며 총장은 오늘 밤 노감독을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다짐 또 다짐해 보았다. - 라커룸으로 들어가려던 고민하는 표정의 영후는 그러나 통로 끝에 자신 만큼이나 안쓰러운 얼굴로 서 있는 하연 때문에 잠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하연아…” “괜…찮은 거야? 이대로…?” 하연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영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첫 경기를 앞두고 그런 ‘거사’를 치르고 난 후에 공교롭게도 이렇게 처참하게 지고 있으니 당연히‘여자’로써 미안한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었으리라. 때문에 영후는 차마 자신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하연의 양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보았다. “하연아, 이번 경기… 아직 기사 다 작성한 건 아니지?” “어…? 으응, 아직.” “그럼, 아직 경기는 끝난 게 아니네, 그치?” 영후의 이야기에 정신이 퍼뜩 드는 것 같던 하연은 고개를 연신 끄덕여 주었고, 그러자 영후는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하연의 양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들 다독여 주려면 조금 시간이 빠듯한 것도 같아서 그런데, 미안하지만 ‘자.기.야.’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순간 또다시 어젯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후의 장난기 덕에 하연은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지만, 이내 자신에게 장난을 걸 정도로 여전히 유연한 모습에 첫 공식 경기를 치르는 감독이라는 생각도, 크게 지고 있다는 느낌도 전혀 받지 못했기에 그제야 걱정이 안도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 “그나저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힌 건… 그 처자들인가…?” 노감독은 총장과의 통화를 끝낸 뒤, 하프타임 동안 다시 보여주는 전반전 하이라이트를 지켜보며 한국여대의 코치를 맡고 있다는 남희와 수림을 떠올리고는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노감독의 눈으로 보기엔 화면 속에 보이는 한국여대 선수들은 하나같이 ‘열심히’는 뛰고 있었지만,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포지션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구먼 다들. 미드필더도 그렇고, 수비진도. 허나, 영후 놈이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보는 눈이 없지는 않을 터. 역시 대표팀 차출 때문에 선수들을 지켜볼 여유가 없었던 것인가…’ 노감독은 자신이 지도했었던 숱한 선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선수의 적성을 파악해 가장 적정한 포지션과 임무를 부여해줘야 했음에도, 말처럼 쉽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아니 빈번하다 할 정도로 많았었다. 그것은 역시 ‘즐거움’보다 ‘승부’에 집착하는 축구인 모두의 잘못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는 것을 노감독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승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선수들의 마음을 애써 모른 체 한 적도 부지기수 였더랬다. 하지만 그런 건 비단 노감독만의 잘못도 아니었다. 어릴 적 동네에서 공을 차도 좀 잘한다 싶으면 무조건 공격수를 했고, 가장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아이는 수비수나 골키퍼를 맡곤 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이기는 것’에 더 목을 매는 습관이 문제였지. 하긴, 언제나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생각을 그 누가 고칠 수 있었을까. 때문에, 노감독은 항상 선수의 적성에 맞는 포지션을 찾아주는 것에 진땀을 빼곤 했다. 옛날에 한 번은 최전방에서 공격 작업을 하고 있는 선수를 관찰한 결과 중앙 수비가 적합한 것이 분명해 조심스럽게 권유를 해주었었는데, 본인은 그것을 굴욕이라 여기곤, 쉽사리 생각을 바꾸지 못하곤 괴로워했고 결국 그런 모습을 보고, 노감독 자신은 더 괴로운 마음이 들었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어찌어찌 설득에 성공했다고 안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을 찾아 입혀 주었건만, 자신이 좋아했던 옷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선수들은 일부러 자신이 낼 수 있는 기량 자체를 숨기기도 하곤 했으니까. 또한 포지션 별로 발달되는 근육 부위가 달라, 생각만큼 경기력이 올라오지 못하는 적도 많았고. 그러니, 감독의 눈이 항상 백 퍼센트 맞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고. 하지만 적어도 실전을 치르며 선수가 바닥을 드러냈을 때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지도하는 감독의 눈이 가장 정확한 법이었다. 때문에 실전에서 한국여대의 플레이를, 그것도 45분간이나 코 앞에서 지켜봤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터였다. 게다가 축구에 있어서 만큼은 수라의 장을 지나왔다고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영후가 한국여대의 감독이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한국여대라는 신생 축구팀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영후 또한 이미 인식하고 있을 터, 결국 선수 스스로가 먼저 깨달을 수 있도록 전반전은 알면서도 그대로 놔뒀다고 보면 또 그렇게 이해 못할 전반전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원 톱을 맡고 있는 여자애가 날린 갑작스런 슈팅만 하더라도 분명, 영후의 계략이었음이 노감독의 눈엔 훤히 보였으니까. 다만, 노감독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쉽게 넘을 수 없을 수준의 차와 남은 시간이 고작 45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놈, 그래 어떻게 하겠느냐…?’ 어쩐지 전반전과는 180도 달라질 한국 여대의 모습을 기대하며 소파에서 조금쯤 티비 쪽으로 몸을 당기고 있는 노감독이었다. - 하연을 돌려 보낸 후 잠시 라커룸 문 밖에서 자신도 모르게 굳어있던 얼굴을 애써 풀고 나서야 영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하하, 미안하구나 얘들아. 내가 생각이 짧았다. 바보 같은 감독 때문에 애꿎은 너희들만 엄청 고생하게 만들었구나. 미안해. 모두 내 잘못이니까, 그러니까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기게 찌푸리지들 말고, 좀 웃어주지 않을래?” 그러나 경기 시작 전보다도 더욱 싸늘하게 식어버린 라커룸의 공기는 야단 치기는 커녕, 애써 위로해주려는 영후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곧바로 반응했고 모두들 설움이 북받치는 듯, 여기 저기서 참았던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는데, 결국 모든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합창으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하하, 이것 참…” 정말로 앳되고 예쁜 아이들이 이렇게나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영후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 경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잠시 후 시작될 후반전이 진짜일 것이었으니까. “얘들아, 설마 벌써 포기한 거니?” “흐흑… 그치만… 실력차가… 실력차가 너무 많이 나잖아요… 흑흑…” 중앙 미드필드에서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당해버린 은채가 꺽꺽 거리며 입을 열었고, 다른 아이들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이어지는 영후의 말에 아이들의 울음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내가 보기엔 너희들하고 여주대 선수들, 그저 종이 한 장 차이던데?” 도저히 위로랍시고 하는 말치곤 너무나 진지했기에 아이들은 지금 감독이 놀리는 건가 싶어, 울음을 그친 채 영후를 바라봤고, 수림과 특히 남희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전반전을 보고 나니까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수정을 좀 해야 할 거 같더라. 물론 이렇게 얘기하면, ‘즐겁게’ 축구하자는 애초의 말하고 많이 달라지는 거 같긴 한데…” “할래요! 감독님 말씀대로!” 순간, 중앙 수비수 미애가 영후의 말을 자르며 다급하게 외쳤고, 다른 아이들도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고 있었다. “그치만, 어쩌면 너희들이 좋아서 선택했던 것들이 많이 바뀌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이해해 줄수 있을까?” “그래도… 그래도 ‘축구’는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실로 가장 힘들었을 골키퍼 미자가 울먹이며 입을 열자, 아이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게다가 정말 미안한 마음을 담은 영후의 눈빛에 그 어떤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은 처음으로 ‘승리’에 대한 갈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승리’를 쟁취했을 때, 비로소 더 큰 ‘즐거움’이란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눈으로. 결국, 아이들의 눈빛만으로 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던 영후는 오른쪽 풀백의 소영이와 오른쪽 윙의 나경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영이는 무게 중심이 조금 높아 보여서, 수비 보다는 전진할 수 있는 공격 작업에 어울리는 거 같고, 반대로 나경이는 협력 수비가 아주 좋아졌더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소영이랑 나경이 둘이 포지션을 바꿔보지 않을래? 그러면 좀더 재밌을 거 같은데.” “네에?!” 시합 중에 포지션 변경을, 그것도 공격수와 수비수의 자리를 맞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책’과 여러 자료를 접해 알고 있던 남희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외마디 소리를 질렀지만, 어쩐지 소영이와 나경이는 잠자코 영후의 말에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본인들도 경기를 치르면서 깨닫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두 아이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내고 난 영후는 이윽고,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센터백 진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 권코치님. 진희는 많이 지친 거 같죠?” “네? 아… 네, 감독님.” 남희는 아이들의 체력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선수 하나하나의 남은 체력까지 파악하고 있는 영후의 눈썰미에 조금 놀라고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전반에 여주대 투 톱 덕분에 체력 소비가 심했습니다. 그치만…” “음, 그럼 지금 그라운드에서 몸 풀고 있는 지영이를 교체하도록 준비해주세요. 진희야, 수고 많았다. 고생했어. 다들 수고한 진희에게 박수 쳐줄까?” 정말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것만 같은 진희는 그러나 영후의 따뜻한 배려와 친구들의 진심 어린 박수 덕분에 더욱 눈물이 흐르는 걸 애써 수건으로 닦으며 감추고 있었다. “감독님 하지만…” 그러나 남희는 영후의 지시에 조금 의아한 눈으로 질문을 하려 했다. 영후가 교체를 지시한 지영이의 포지션은 센터백이 아닌 수비형 미드 필더였기에 중앙 수비의 경험이 일천한 선수를 중앙 수비에 세우기에는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영이는 수비형 미드 필더입니다! 이런 경기에서, 그것도 갑자기 중앙 수비를 맡기기에는…” 설마, 이번 경기를 포기하고, 교체 멤버가 없는 센터백 포지션 진희의 체력을 세이브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남희는 잠시 실망스런 눈빛으로 영후의 의견에 반대하는 뜻을 내비쳤지만, 영후는 의외의 대답을 해 주었다. “아뇨, 지영이는 그대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될 겁니다. 즉, 우리는 후반전엔 포메이션을 변경해서 ‘4-1-4-1’ 로 갑니다.” “네?! 그럼, 중앙 수비는…?” “물론, 방법이 있습니다. 혜미야, 미안하지만 후반에는 중앙 수비 좀 봐주지 않으련?” “예에?!” 순간 그 곳에 있던 모든 선수들과 코치들은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영후와 또 혜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혜미는 영후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이윽고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혜미의 마음을 대변하듯 결국 남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후에게 반기를 들었다. “감독님! 지금 저희 팀에 혜미 말고는 공격을 맡을 선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혜미조차도 수비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있는 데, 아라를 올려서 투 톱으로 만들기는커녕 혜미를 수비로 돌리다니요!” “아뇨, 있어요. 여주대를, 아니 심서연을 이길 수 있는 선수가.” 너무나 여유 만만하게 여주대를, 아니 심서연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도대체 지금 영후가 제정신으로 이야기 하는 것인지 남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남아있는 교체 멤버라고는, 지영이와 승은이, 그리고 정화 뿐이었는데, 그나마 지영이는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승은이는 윙백인지라 공격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윙어인 정화가 그나마 공격수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곤 하지만, 혜미의 레벨과는 천양지차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을 정도였기에 남희는 영후의 이번 지시만큼은 절대로 틀린 것이라고 확신마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희는 영후가 한 소녀를 떠올리며 자신 만만해 하고 있었다는 건 절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소녀를 영후조차 절대 따라잡아보지 못했었다는 것 또한. “송윤지.” “…네?!” 왜 갑자기 영후가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전혀 알리 없던 윤지는 엉겁결에 라커룸 구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을 했는데, 순간 영후가 눈을 맞춰주며 빙긋 웃어주며 입을 열자 그 가느다란 다리가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도 못 느낄 정도로 아찔함을 느끼고 있었고, 동시에 혜미의 얼굴은 경직되어가고 있었다. “아라하고 교체다.” “네?! 그게 무슨…?” “몸 풀어 두라고. 후반전 원 톱은 바로 너, 윤지니까.” “감독님!!!” 드디어 참을 수 없다는 듯, 남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영후와 대치 했다. “정말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인 겁니까?! 윤지는 제대로 연습을 소화하기는 커녕, 출석 횟수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란 말입니다!!! 무늬만 선수란 말입니다!!!” “권코치님…” 그야말로 모든 아이들의 앞에서 이른바 하극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영후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얼굴로, 아니 남희의 그런 열정에 기분이 좋아졌다는 얼굴로 남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윤지, 잘 해 낼 거에요. 윤지도 우리 한국여대 선수니까요, 그렇지 윤지야?” 남희를 보던 시선이 이윽고 자신에게로 넘어오자 윤지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도 했지만, 영후와는 전혀 다른 남희와 수림, 그리고 혜미의 시선에 윤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을 뿐이었는데, 그런 모든 시선을 잠재우듯 영후는 나머지 자잘한 처방전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 영후와 아이들이 모든 미팅을 마치고 나가버리자 남희는 비어있는 라커룸이 마치 자신의 머릿속과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어질어질한 기분이 드는 탓에 힘없이 의자에 앉아 보았다. “권코치님… 괜찮으세요?” 그라운드로 나가려던 수림이 조금 이상한 기분에 다시금 돌아와, 역시나 창백한 얼굴의 남희를 보고는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남희는 그런 수림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한 겁니까? 아이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게… 결국… 저… 인 겁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권코치님!!” “하지만… 감독님 말씀은 결국… 제 판단이 잘못됐다는 걸로 밖에는…” 수림이 보기에도 확실히 남희가 그렇게 생각할 만 했다. 혜미야 감독님의 선택이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포지션에 별 의문을 갖지 않은 채 훈련을 시킨 것은 분명 명백한 실책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런 상태로 연습경기를 수없이 치렀음에도 별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던 남희와 달리 단지 전반전만을 치렀을 뿐임에도 아이들의 장단점을 파악해버리고는, 양 윙백에 대한 수비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양 윙들에게 수비에 적극 협력할 것을 주문한 것도 그렇고. 2선과 3선의 벌어진 공간을 메우기 위해 공격형 미드필더인 아라를 빼고 수비형 미드필더 지영이를 기용하기로 결정한 영후 덕분에 남희와 수림 자신의 무능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버렸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게 코치들, 자신의 탓은 아니었다. 적어도 수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건 그저…” 여전히 안경 너머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남희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수림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감독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거, 그게 같을 수만은 없는 거 같다고. 저흰 감독님 뜻에 따라 아이들이 즐겁게 운동하길 바랬던 거였잖아요, 아니에요?” 수림의 따뜻한 말이 이어지자, 남희는 그제야 안경을 잠시 벗고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려 했는데 그 손을 잡아주며 남희 앞에 반 무릎을 꿇은 수림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남희의 눈물을 부드럽게 자신의 손으로 닦아주고는 짧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수림의 입맞춤에 남희의 얼굴은 꽤나 홍조를 띄게 되어버렸지만, 그런 남희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수림은 나머지 말을 해주었다. “우리들의 감독님이, 이제야 돌아왔다는 것 뿐이라구요.” - “에… 수비수하고 동일 선상에서 움직이다가… 수정이나 다른 애들의 발에서 공이 떠나자 마자… 바로 앞으로 뛰어 들어 갈 것… 에 또…” 검은 유니폼과 축구화가 어색하기만 한 윤지는, 화장실의 양변기에 앉은 채 영후의 지시를 몇 번이고 외워보고 있었다. “패스가 오면… 트래핑 할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슈팅을 하고… 으으…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진짜!!!” 감독의 지시인지라 결국 후반전 출전을 준비하던 윤지는 마음의 진정이 안돼 언제나 편안했던 한국여대의 화장실 대신 경기장의 화장실에 틀어박힌 채 몇 개 안 되는 영후의 주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외워보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화장실 문 밖에서 혜미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윤지야…” 순간 윤지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평소 같았다면 전혀 그럴 일이 아니었건만, 지금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나 달랐으니까. 다름아닌 혜미의 꿈을, 바로 자신이 산산 조각을 내고 있었으니까. “혜…혜미야…” “아무 말도 하지마… 문도 열지 말고…” 윤지의 손은 혜미의 말 덕분에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멈춰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내 혜미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로 계속 입을 열었다. “긴장할 거 없어. 감독님 말씀대로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하지만 혜미야 나는…” 쾅! “아무말도 말랬잖아!!” 순간 주먹으로 문을 치며 외치는 혜미 때문에 윤지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그보다 혜미의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목소리에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나 있지… 여주대가 더 이상은 골… 못 넣게 막아 볼 테니까… 그러니까… 너도… 절대로… 절대로 내 눈, 놓치지 마… 부탁… 할게…” 울음을 참은 채 겨우 할말을 마친 혜미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윤지는 작은 손으로 제법 단단해 보일 만큼 주먹을 쥐어 보았다. ‘혜미야… 절대로… 죽어도 안 놓칠게!’ 37부. 캠코더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녀석하고는, 잠깐 거기 서봐.” 화장실에서 막 나와 그라운드로 나가려는 윤지를 잠시 멈춰 세워둔 영후는 고양이 같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윤지의 발 아래에 무릎을 꿇으며 조금은 허술하게 묶여있는 축구화 끈을 손수 단단히 묶어주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발 아래에 아무렇지도 않게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의 넓은 등과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자니 윤지는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자, 됐다!” “……” 하마터면 어깨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는 이 남자의 등 어딘가에 눈물을 떨어뜨릴 뻔도 했던 윤지는 자신의 축구화 끈을 묶어주고는 일어서서 너무나 밝게 웃고 있는 영후를 바라보려 했지만, 평소엔 무표정하기만 했던 자신의 얼굴을 그 순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을 바라봤다면 아마도 자신의 얼굴은 잔뜩 화를 내고 싶어하는 표정으로 그득했을 거라고 생각해보았다. 지금 제 정신이냐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내가 제대로 뛰기나 할 거 같으냐고. 이 경기, 당신의 감독 데뷔 경기를 그냥 이렇게 끝내고 싶은 거냐고… 하지만 윤지는 그 어떤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묻기는커녕, 입을 열 수 조차 없었다. 그 한없이 따뜻한 남자의 눈을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왜 저렇게… 왜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왜 저렇게 끝없이 믿어주는 눈으로…’ 그러나 그런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윤지는 더욱 힘겨워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어떤 여자애인지 모든 걸 알고 난 후에는 제 아무리 착한 남자라도 또다시 저런 눈으로 바라봐줄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목표했었던 ‘행복한 가족’을 위한 자금이, 아니 행복이란 사치조차도 필요 없는, 그저 남들과 똑같이 엄마 아빠와 함께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채워질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어중간한 감정에 휘둘려 처음의 마음을 잊을 순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족을 찾아 이 지긋지긋한 나라를 떠나면 그만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윤지의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는 건지, 영후는 윤지의 얼굴을 더욱 부드럽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놀라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윤지 너라면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음… 내가 널 믿듯이 너도 네 자신을 믿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렴. 뭐, 네 나름대로 생각해서 움직여주면 더 좋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윤지는 이윽고 자신의 어깨를 살짝 어루만져준 뒤 먼저 통로 밖으로 나가고 있는 남자의 넓은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며, 오른 발을 뒤로 살짝 들고는, 누구 덕분에 절대로 벗겨지지 않을 것만 같은 축구화 앞 코를 ‘톡톡’ 소리가 나도록 몇 번이고 바닥에 찍어보고 있었다. - 선수들이 후반전을 앞두고 그라운드로 바로 들어선 것과는 달리 지영이와 함께 윤지가 어색한 유니폼 차림으로 터치라인 바깥에 서자, 관중석에 앉아 있던 현우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혜미의 아빠 옆에 앉은 터라 내색도 못한 채 그저 빨갛게 변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런 답답한 현우와는 달리 철용은 그야말로 입을 쉴 틈이 없는 것만 같았다. “어, 벌써 두 명이나 교체시키는 건가? 자식, 어지간히 급했군. 그나저나 숨겨둔 비밀 병기라도 있었던 거라면 다행인데…” 철용은 영후가 단행한 선수 교체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일방적이었던 경기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바뀌길 바라고 있었는데, 규식은 철용과 현우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미소를 짓고 있던 것도 같았다. ‘녀석… 그래도 감독이다 이거냐…? 훗.’ 그리고 그 미소 지은 얼굴로, 후반전 파이팅을 하기 위해 아이들이 둥그렇게 모여있는 원을 잠시 떠나 현역 때의 자신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자리에 가 서보는 ‘중앙 수비수’ 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영기 감독은 터치라인에 선채 대기심에게 유니폼과 축구화를 점검 받으며 교체를 준비하고 있는 선수들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송윤지… 인가?’ 이영기 감독은 한국여대의 비밀스런 선수 한 명의 실체를 이렇게나 빨리 접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윤지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최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걸 알고 있던 이영기 감독은 이번 축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단 하나의 여지도 남기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한국여대에 정보 분석관을 파견했었는데, 비밀은커녕 마치 그 지역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프로 축구팀인 것 마냥 한국여대의 스탠드에는 항상 관중들이 넘쳐났기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별 문제없이 한국여대의 열 다섯 명의 선수들을 연구할 수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수들 중 열 네 명의 정보를 얻었을 뿐, ‘이상한 선수’ 한 명의 정보는 끝끝내 얻을 수 없었다. 분명 선수로 등록되어 있었음에도 체력훈련과 기초훈련에만 간간이 참가할 뿐, 전술 훈련이나 연습경기에는 단 한번도 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막상 선수가 아니라고 하기엔 또 뭔가 이상했기 때문에 정보 분석관과 이 영기 감독은 베일에 싸여있는 단 한 명의 선수 ‘송윤지’에 대해서 궁금하다 못해 조바심을 느낄 정도였던 것이었다. 그랬는데, 결국 포지션조차 전혀 파악되지 않았던 ‘그’ 선수가 지금 이 순간 등장하자 이영기 감독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드는 탓에 잠시 고민을 해 보기도 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관리를 하며 속으로도 편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어차피 선수 하나일 뿐이었다. 축구는 열 한 명이 하는 경기였고. 선수 하나쯤에 휘둘릴 '자신의 여주대'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반만을 마치고 선수 교체를 한다는 건 그저 수비수를 질책하기 위한 교체일 수도 있었고, 어차피 지고 있는 경기, 어떻게든 한 골이라도 만회 하기 위해 공격수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교체일 수도 있었다. 물론, 자신이라면 당연히 공격수를 늘릴 것이었고. 하지만… ‘설마 이 점수차를 우리가 지키기만 할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공격을 하면 통할 거라고?’ 이영기 감독은 어렵지 않게 머릿속이 정리되자 잠시 코웃음을 쳤다. 그런 전술을 들고 나오는 것 자체가, 감독의 경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또한 ‘여주대’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결국 진짜 공격 축구가 뭔지를 후반전에 제대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영기 감독이었지만, 전반과 달리 한국여대의 한 선수가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 선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혜미…? 공격수를… 수비로? 설마 그 정도로 스쿼드가 엷은 건가? 아니면…’ 설마 스쿼드 때문에 그리 한 거라면 정말 한심한 팀이었고, 공격수가 수비를 잘 볼 거라고 생각했다면 더 한심한 감독이라고 생각하며 그나마 전반에 홀로 고군분투한 혜미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봤지만, 그런데 순간 이영기 감독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저 모습…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지…?’ - 주심의 휘슬을 기다리는 동안, 선수의 교체가 이루어지자 지영이와 윤지가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가 미완성된 원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이 비워놓은 자리에 합류해 어깨동무를 했고, 혜미도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 돌아와 동료들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맞대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검은 색의 예쁜 원이 그제야 완성이 되고 있었다. “감독님 말씀 믿지?” 골키퍼 미자가 덩치처럼 듬직하게 아이들을 돌아보며 물었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윤지만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런 윤지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혜미는 이내 아이들의 땀에 젖은 검은 색 유니폼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유니폼 처음 받았을 때… 다들 기억나니?” 그러자 새로 들어온 지영이가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어떻게 그땔 까먹겠어?!” 지영이만 직접 대답했을 뿐이었지, 모든 아이들의 생각도 지영이와 매 한가지였던 듯 전반전이 끝날 무렵과는 달리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진심 어린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덕분에 다행스럽게 생각한 혜미는 그제야 왼팔에 끼워져 있는 노란 색의 주장완장이 주는 무게를 느끼며 마음 깊은 곳에 담아 두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감독님 덕분에 즐거웠잖아. 재밌고 즐겁게 살도 뺄 수 있었고, 또 운동하는 즐거움도 알게됐고.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감독님한테 즐거움을 드릴 차례라고 생각해.” 그러자 갑자기 아이들의 닫혀있던 입들이 하나 둘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실은, 나도 경기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어. 우리 때문에 감독님께서 즐겁지 않으시다면, 우리도 결국 즐겁지 못할 거야.” “맞아맞아! 지든, 이기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 받는 건 우리답지 않아!” “그래, 잘 생각해보면 분명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나 있지, 생각보다 일대 일 수비가 조금 부족한 거 같으니까, 미안하지만 내 쪽으로 공격작업이 이루어지면, 좀 도와줘.” “수비할 때 우리 너무 많은 생각하지 말고, 간단하게 클리어링 하자.” “난 뛰어 보니까 좀 더 많은 지역 커버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니까, 나 어떡해서든 수비에 적극가담할께. 또 빈 공간도 만들어볼테니까 내 쪽으로 많이 돌아 나가줘.” “항상 말 많이 해서 서로 알려주고!” 처음과 달리 자신의 장점과 단점들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적나라하게 꺼내놓으며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고민해주기 시작했으며, 조금씩 융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직은 불완전한 것만 같은 윤지를 혜미는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순간 아이들은 또 뭐가 남았다는 건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혜미를 돌아보았는데, 혜미는 결심한 듯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무조건이야, 우린 윤지를 믿고 공을 보내주는 거야. 감독님 말씀대로. 다들 그럴 거지?” 어쩌면 굴욕적일 수도 있는 포지션 교체를 당한 혜미의 입에서 상상 이상의 말이 튀어 나오자 아이들은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린 듯 더욱 얼굴이 활짝 개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후반전 원 톱은 윤지 너야! 감독님께서 그러겠다고 하셨으면 그런 거라구!” 혜미의 말을 받아, 왼쪽 날개 민지가 입을 열자, ‘맞아 맞아!’ 등등의 맞장구 치는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윤지는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지만, 겨우 내색하지 않고는 가만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 위로 아이들의 손이 하나씩 하나씩 겹쳐졌는데, 어느새 열 한 개의 손이 모두 모이자 열 명의 아이들은 윤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윤지는 아이들의 뜻을 알겠다는 듯 심호흡을 하더니 단번에 선창을 했다. “한국여대!”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아이들은 지지 않겠다는 듯 더 크게 외치며 그녀들 마음만큼이나 맑은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한국여대! 파이팅!” - 전반전과는 달리 한국여대 선수들이 호기롭게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을 티비로 나마 지켜볼 수 있었던 노감독은 꽤나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고 있었다. “놈… 선수들 스스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를 기다렸던 것이냐…” 노감독은 ‘영후가 가진, 축구에 관한 능력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잠깐 해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감독 자신 또한 감독의 역할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가를 고민하곤 했었음에도,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답은 완벽하게 얻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어찌된 것인지 영후 녀석은 이미 답안지를 손에 넣은 듯 여유만만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 노감독이 알고 있던 감독의 직책이란 저렇게 여유로울 수만은 없는 자리였다. 항상 선수들에게 하기 싫은 훈련을 지시해야만 하는 자리였고, 시합의 승패에 대한 질책과 더불어 승패를 떠나 경기 내용의 부족함에 대한 책임을 본인부터 시작해 스탭과 선수들에게 추궁해야 하는 자리였다. 게다가 그것 뿐이었다고 해도 쉽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개인이, 그리고 팀이 가진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극한까지 훈련을 시켜야만 한다는 게 늘 고민이었다. 선수들에게 훈련이란 것이 필요하고 또 경기에 참여하고 싶은 만큼 의무가 주어져야 하는 게 당연함에도, 그게 뭔지도 모르고 왜 해야 되는지 선수들이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 하나를 더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걸 알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연습경기장에 붙들어 놓은 채, 제 시간에 훈련을 시키며,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른바 ‘선의의 권력과 강제’가 필요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피를 나눈 혈연 관계에서도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하물며 생판 남남인 감독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보다 더, 정말 감독으로서 괴로운 것은, 선수가 절실해 하지 않을 때엔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내밀 수 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후는 지금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었고. “너란 놈은 대체…” 몇 십 년 동안 감독을 해온 자신도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던 것들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듯 하프타임에 해결해버린 영후 놈 덕분에 노감독은 허탈함 마저 느껴지는 듯 했지만 화면에 선수들이 보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 막 후반전이 시작 되려 하는 티비 속 경기장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 이윽고 휘슬이 울리고 여주대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자, 뒤에 있는 자신에게로 돌려진 공을 받은 심서연은 잠시 공을 멈추고 선채로 뭔가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축구에 대한 경험도 별로 없는 선수들이, 이미 큰 점수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뿜어내는 뜻밖의 활기찬 분위기에, 심서연은 선뜻 전방으로 패스를 보내지 못하고 주변의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지만, 이내 이영기 감독의 사인이 이어지자, 여전히 공격을 감행하려는 것임을 알게 된 또 다른 센터백 이유라는 심서연에게 다시 공을 밀어주며 손으로 패스할 곳을 표시해주었고, 심서연은 결국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없애고는 곧장 전방의 공격수 김진영에게 장거리 패스를 날렸다. 하지만 패스를 하고 나서도 자신이 패스를 하던 말던, 계속 여주대의 수비라인과 나란히 서 있기 위해 신경을 쓰면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새로운 공격수' 때문에 어쩐지 경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기에 심서연은 결국 반쯤 정신이 나간 것만 같은 윤지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야.” “……” 서연은 윤지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고 싶기도 했거니와, 그와 더불어 일종의 기선 제압도 해 볼 겸 거칠게 윤지를 불러봤지만,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채 하고 있었기에 조금쯤 자존심이 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지는 결코 심서연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집중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직접 서 본 녹색의 그라운드가 생각보다 너무나 넓었고 또 황망했을 따름이었지. - 그라운드는 정말 넓었다. 또한 무척이나 생소했고. 그리고 도대체 자신이 서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도 감이 오질 않았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라운드에 선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구나…’ 그 순간 윤지는 자신이 촬영해 두었던 동영상 속에서, 이 황량한 그라운드를 마치 들소처럼 누벼대던 한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지금은 벤치에 묵묵하게 서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보며 새삼 위대함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진 채 마냥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윤지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 하나씩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영후의 주문을 외워보며 심서연의 곁으로 따라 붙었다. ‘우선, 오프사이드 라인을 유지하랬지?’ 오프사이드 라인을 유지하라는 얘기는 결국 자신에게 패스를 보내려고 노력하는 한국여대 선수들의 발에서 공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여주대의 수비수보다 한발이라도 앞서 있으면 안 된다는 얘기였지만, 수비수들과 떨어져 있자니 윤지는 수시로 움직이는 여주대의 수비라인을 넘었는지 어쨌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때문에 윤지는 스스로 고육지책을 짜내기 시작했다. ‘그렇담 수비하고 붙어 있으면 얼추 맞겠지?’’ “야, 너 뭐냐?” 순간,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그와 동시에 윤지의 시선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혜미의 눈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 “간닷!” 혜미는 심서연으로부터 시작된 공격루트를 정확히 파악하며 단번에 여주대의 공격수 김진영의 머리에서 페널티 에어리어로 파고드는 김나래로 향하던 공을 가로채자 마자 순간적으로 미드필드로 전진하더니만 다짜고짜 공을 전방으로 내질렀는데, 심서연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 윤지에게 관심을 끄곤 다시금 자신 쪽으로 되돌아 오는 공을 보며 기껏 뺏은 공격권을 저렇게 어이없는 뻥패스로 날려버리는 건가 의아해했지만, 그와 동시에 언제 서있었던 가 싶을 정도로 자신의 옆을 순식간에 스치듯 달려가며 바람을 일으키는 한 선수 때문에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뭐…뭐야?!’ 그야말로 순.식.간.에. 윤지를 놓쳐버린 심서연은 뒤늦게 나마 윤지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삐~익! 심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과 동시에 휘슬이 울렸고, 그제야 심서연과 윤지 모두 발걸음을 멈추며 터치라인을 돌아보자 다행이 선심이 깃발을 든 채로 윤지의 오프사이드를 선언했기에 윤지는 실망을, 심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는데, 별 감정의 동요 없이 다시금 여주대의 수비라인에 맞춰서는 윤지와는 달리 심서연은 축구를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간담이 서늘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깨닫고 있었다. ‘지금건 대체…?!’ - “심서연! 정신 안 차릴랫!!!” 이영기 감독은 심서연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이용한답시고 윤지를 잠시 놓친 것으로 보곤 전체적인 분위기를 환기 시킬 겸 불호령을 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영기 감독은 한국여대가 뽑아 든 칼이 겨우 이것인가 하는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키도 165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그렇다고 체격이 좋아서 몸싸움에 능할 것 같지도 않은 아이를, 원 톱으로 세워놓고는 역습이랍시고 한 번의 패스로 수비를 뚫겠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초짜 감독의 티를 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심서연이를 무시하는 건가… 아니면 아예 모르는 건가…?’ 하지만 이영기 감독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의 전혀 비상식적인 움직임이 심서연의 전진을 아주 조금씩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 박성은과 김인영 두 명이 버티는 여주대의 중원과는 달리 수정이와 은채, 그리고 지영이가 합세한 한국여대는 일방적이었던 전반전과는 달리 점점 미드필드에서 살아나기 시작했고, 양팀 모두 미드필드에서 공을 소유하는 시간이 채 1초도 안될 정도로 어느새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기에 그런 한국여대 선수들의 모습에 철용은 흥분한 듯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본인도 공을 차고 있는 것처럼 연신 발을 앞으로 내 지르고 있었다. “걷어 내라고! 더 붙어야지 더! 더! 그래! 그렇지!” “녀석… 누가 선수 출신 아니랄까봐…” 규식은 철용보다는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은 채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확실히 미드필더 다섯 명과 수시로 올라와 수비에 적극 가담하는 양 윙백 덕분에 여주대와의 실력 차를 단번에 극복하는 한국여대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이런 전술은 체력적으로 힘들어도 한 발씩 더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쉽게 구사할 수 없는 전술이기도 했으니 규식은 영후가 언제 이렇게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런 선수들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이런 팀의 일원이 되어 있는 자신의 딸 혜미를 현우는 어떻게 보고 있을 지 자못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현우야, 네가 보기엔 어떠냐?” “예? 어떠냐…뇨?” “한국여대 플레이가 전반전하고는 많이 달라 보이지 않느냔 말이다.” “아… 예… 그런 것도 같고…” 역시나 축구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 현우 덕분에 규식은 잠시나마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가있던 힘이 풀썩 빠지는 것만 같았지만, 애써 아닌 척하며 입을 열었다. “네녀석에게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럼, 왜 그런 건지는 알겠냐?” “예? 글쎄요… 그건…” “임마! 혜미잖아! 그게 다 혜미로부터 시작된 거라고!!!” “예에? 그게 무슨…?” 규식의 뜬금없는 말에 현우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비비며 그라운드 위의 혜미를 바라봤지만, 보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아…” 하연은 기자석에 앉은 채 방금 전 오프사이드 장면을 떠올리며 장혜미의 모습에서 심서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심서연이 한국여대의 수비를 보는 건가 착각을 할 정도로 헛갈리고 있었다. 아니, 심서연 그 이상일 지도. ‘영후야, 도대체 하프타임 때 무슨 마법을 쓴 거야?’ - 남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포지션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았음에도, 또 전혀 훈련되지도 않은 포메이션까지 지시했음에도, 아이들은 전혀 어색해하지 않은 채 경기를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색해하기는커녕, 마치 이제야 자신들에게 맞는 옷을 입은 양, 전반전과는 전혀 다른 팀이 된 것처럼 최강 여주대와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런 선수들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는 영후가 있었고. “감독님.” “네?” “하나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네…” 영후는 좋아지는 경기 분위기와는 정 반대로 굳어진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남희 덕분에 의아한 얼굴로 대답을 해 주었지만, 대답을 하자마자 남희는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포지션 변경은… 처음부터 염두에 두셨던 겁니까?” “예? 아, 소영이랑 나경이요? 그건… 그건 그냥, 보고 있자니 그랬으면 좋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두 녀석들에게 부탁했던 거구요.” “…” 남희는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달을 지켜보고 지도한 자신보다 고작 45분만을 지켜보고도 선수들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때문에 남희는 지금 처음으로 코치라는 직책에 회의감 마저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이어지는 영후의 이야기 때문에 더욱 상처를 받았고. “다행히 기초적인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포지션 변경을 한다 하더라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것도 같았구요.” 즉, 자신과 달리 오코치, 그러니까 수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그리고 제대로 해냈던 것이다. 게다가, “보시면 알겠지만, 포지션을 바꿨다고는 하지만 저 녀석 둘이 뛰는 자리나 모습은 전반하고 거의 같아요.” “예? 그게 무슨…?” 남희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봤는데,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포지션을 맞바꾼 소영이과 나경이는 그러나 마치 원래 자신들의 포지션에 있을 때처럼 플레이하고 있었으니까. ‘수비수가 공격을… 공격수는 수비를…?’ 남희는 점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분명, 수비수는 수비를, 공격수는 공격에 전념하고 나서 나머지 부분에 대한 것들에 대해 신경을 써야 했다. 자신의 머리로는 분명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영후의 말 그대로 소영이는 오른쪽 풀백에서 윙으로 포지션을 바꿨지만 전반처럼 한국여대 진영에까지 깊숙하게 내려와 수비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고, 반대로 원래 오른쪽 날개였던 나경이는 오른쪽 풀백을 맡겨놨음에도 불구하고 잦은 오버래핑을 시도하며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하고 있었기에, 여주대의 왼쪽 라인 강나루와 김소정은 한국여대의 오른쪽을 공략하기는 커녕 전반과는 정반대로 수비하기에 급급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야…?!’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는지 영후는 또 다른 변화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또 한 녀석 때문에 여주대 공격 루트가 단순해지고 있고요. 아, 두 녀석인가…?” 영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희의 눈엔 여주대 투 톱 김나래와 김진영의 앞길을 제대로 틀어막고 있는 혜미가 눈에 들어왔지만, 또 한 명은 누굴 말하는 것인지 남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재차 남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영후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려보면 꽤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영후는 웃고 있었지만, 영후가 그럴수록 남희는 울고 싶기만 했는데,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감추며 조심스럽게 하나를 더 물었다. “감독님 그럼… 포메이션 변경은…?” “에? 아, 그거요… 그건… 아 저기 보세요, 지금 지영이 위치가 어디 쯤인 거 같은가요?” 남희는 영후의 기다란 손가락 끝을 따라 그라운드로 시선을 옮겼는데, 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분명 지영이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투입되었었다. 허나, 남희의 눈에 보이는 지영이는 마치 중앙 미드필더가 된 듯, 아니 미드필더인 수정이와 은채보다도 더 전진할 때가 있을 정도로 중원 싸움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고, 지영이의 넓은 활동 폭에 힘입어, 수정이나 혹은 은채가 마치 전반의 아라처럼 공격형 미드필더의 위치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저건… 결국 4-4-1-1 ! 아니… 4-3-3 인가?’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게 변하고 있는 한국여대의 포메이션에 남희는 딱 떨어지는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영후는 알고 있었다. “아시겠지만, 포메이션은 어차피 숫자 놀음이에요. 이 넓은 운동장을 단지 그 숫자 배열로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선수들은 아무 생각 없는 장기 말이 아니에요. 살아있는 ‘선수’인 거죠. 그러니, 우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직접 깨뜨릴 수 있게끔 힌트만 주면 되는 거였죠.” 그랬다. 어차피 축구를 시작한지 몇 개월 되지도 않는 이 아이들이 4-4-2 니, 4-4-1-1 이니 하는 포메이션에 대한 깊은 이해는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죽어라 연습해온 한가지 포메이션의 틀에 박힌 채, 자신의 자리에서만 플레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전반전은 결국 그 이유로 인해 4골을 헌납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예로, 포지션을 바꾼 나경이와 소영이는 지금 전반전보다도 훨씬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지 않은가! 즉, 어느 것 하나를 확인해 보더라도 남희의 코치 수행 능력은 완전히 낙제점이라는 사실만 검증될 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확인 사살이라도 하려는 듯, 남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영후에게 또 하나를 물었다. “그럼… 윤지는… 윤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 윤지요… 윤지는… 훗,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윤지가 알려드릴 것 같은데요?” 지고 있는 팀의 감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미소로 답하는 영후의 모습에 남희는 또 하나를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선수 발굴 능력조차도 난 안 되는 거였나… 역시… 이 경기가 끝나면… 코치라는 맞지 않는 옷은 이제…’ 남희는 이 경기가 어떻게 끝나던지, 한국여대의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의의 뜻을 표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자신은 이 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짐스런 존재일 뿐이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윤지는… ‘윤지…’ 남희는 그 순간 더욱 윤지가 부럽게 느껴졌다. 선수로서, 코치로서, 그리고 한 여자로서… - 심서연은 수비를 따돌리기는커녕, 자신과 일 미터 이상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윤지에게 다시 말을 걸어 보았다. “야! 안 들리는 거야? 안 들리는 척 하는 거야?!” “어? 어? 뭐가?” 수비라인과 나란히 하랴, 혜미를 바라보랴 정신없던 윤지는 겨우 심서연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귀가 트였냐? 그건 그렇고. 대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어? 지금? 그야… 축구… 경기…?” 윤지는 마치 어려운 문제를 받아 든 초등학생 처럼 한참을 생각하다가 맞을 까 틀릴 까 걱정하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답했는데, 그 모습에 심서연은 더욱 열불이 뻗치는 것 같았다. “뭐? 경기? 진짜 하고는 있는 거냐!?” “응, 지금 하고 있잖아.” “으으…하고 있기는!!! 경기 한다는 애가 나랑 떨어질 생각은 안하고 이렇게 자꾸 따라 붙냐!!!” “아… 그럼 안 되는 거야?”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얼굴로 되묻는 윤지 덕분에 심서연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 아니 누가 안 된데?!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너 축구 알기는 아는 거냐?!” “어? 어…” “그걸 아는 애가 이래? 축구에서 공격수랑 수비수는 술래잡기 놀이하는 거랑 같은 거라고! 수비수가 술래고, 공격수는 90분 내내 도망 다녀야 하는 거고! 그러니까 이렇게 친한 척하고 붙어있으면 안 되는 거라고!” “아… 그래… 알았어…” 윤지는 평소와는 180도 다른 얼굴로 온순한 양이 된 듯, 고분고분하게 굴었지만, 심서연은 이어지는 윤지의 행동에 결국 뒷목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기껏 알아들었나 싶었더니만 그 예쁜 얼굴을 한 채로 마치 산보하듯 옆으로 사뿐사뿐 걸어가 고작 일 미터에서 오십 센티미터 정도만 더 떨어졌을 뿐이었으니까. ‘쳇!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경기에나 집중해야지.’ 겨우 윤지에게서 시선을 돌린 심서연은 그러나 전반과는 달리 왼쪽 라인의 강나루와 김소정이 힘을 못쓰고, 더불어 김진영과 김나래 투 톱이 제대로 공을 만져보지도 못하자, 미드필드 상황을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국여대는 기본적으로 5명이 포진한 채, 간간히 풀백들이 전진하며 공간을 내주지 않고 있었기에 여주대의 잔패스들이 원활해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칫, 바보들. 이럴 땐 미드필드를 생략하면 되는 거라구!’ 꽤나 고전하며 한국여대의 중원을 공략하지 못하던 미드필더 박성은은 오른쪽 날개 윤지수에게 공을 건넸고 공을 줄 곳을 찾던 윤지수는 결국 뒤쪽으로 공을 길게 빼서 심서연에게로 밀어줬는데, 심서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을 받자마자 전방의 김진영을 향해 장거리 패스를 날렸다. “질질 끌 것도 없어! 한 골이면 끝나!” 그리고 심서연의 발끝을 떠난 공은 치열했던 중원 전쟁을 잠시 휴전상태로 만들며 미드필더들의 머리위로 쏜살같이 날아갔고, 그 공은 곧 김진영의 가슴에 안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겐 안되지!” 순간이었다. 김진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정확하게 가슴으로 가로채는 혜미가 등장한 건. “진짜 간닷!” 그리고 동시에 심서연이 그러했듯, 혜미 또한 가슴으로 트래핑한 공이 발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더욱 강력한 장거리 패스를 전방을 향해 날렸는데,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이 강하고 또 빠르며, 게다가 정확하게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던 혜미는 그제야 영후가 자신에게 보여준 장거리 슛이, 지금과 같은 장거리 패스를 염두에 둔 것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진짜…?! 에이 설마… 하지만…?’ 도대체 생긴 것과는 너무나 다른 능구렁이 같은 영후의 속 마음을 더욱 모르겠다는 듯 혜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고는 이내 공보다 더욱 빠르게 달려나가는 윤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설마! 저 모습은…!’ 혜미의 깔끔한 수비에 이은 간결하고도 파워 넘치는 패스를 지켜본 이영기 감독은 그제야 벤치에서 벌떡 일어서며 한 선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장규식. 상대방의 공격 루트를 읽는 탁월한 시야, 일대일 마크에서는 무시무시함을 발휘하는 박력, 그리고 정교하고도 빠른 장거리 패스까지. 그야말로 중앙 수비수가 갖춰야 할 것을 모두 갖춘 남자의 모습을 이영기 감독은 아이러니 하게도 혜미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반엔 공격수로 뛴 아이에게서. ‘그렇지만… 수비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게 축구일터. 제대로 된 공격수도 없이 뭘 어쩌겠다는 건가?’ 절대로 여주대가 질리 없다는 생각에 변함없던 이영기 감독은 그러나 큰 스코어 차로 이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합이 시작된 지 처음으로 손목 시계를 바라보며 초조하게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 ‘온다!’ 여주대의 심서연이 장거리 패스를 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채 올라가 버린 사이, 남아있던 또 다른 센터백 이유라의 곁에서 맴돌고 있던 윤지는 절대 혜미의 눈을 놓치지 않고 있었고, 그런 혜미의 발에서 떠난 공이 유도 미사일처럼 자신 쪽으로 날아오자 윤지는 앞 뒤 생각할 것도 없이 전방으로 내 달렸다. “잡아!” 설마 하고 윤지를 놔뒀던 심서연은 또다시 같은 상황이 재연되려 한다는 것을 직감하며 후방에 남겨져 있던 이유라를 향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고, 이유라 또한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역습 상황에 대비하려 전방을 향해 있던 몸을 돌려 윤지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뭐… 뭐야…?!” 발을 뗄수록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윤지의 순간스피드는 이유라로선 생각처럼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분명,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는데… 게다가 아무리 나보다 먼저 뛰어들어갔다고 해도… 이건… 이건 말이 안돼!!’ 하지만 차라리 뒤쫓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만 같이, 쫓으면 쫓을수록 윤지는 점점 더 시야에서 멀어져 갔고, 어느새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공과 윤지, 그리고 여주대의 골키퍼 윤사랑은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 어딘가에서 곧 만날 것만 같았다. - 혜미가 언제 이렇게 정확한 패스를 익혔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뛰어가던 윤지의 발 아래 정확히 떨어진 공은 트래핑 할 생각조차 못하는 윤지와 나란히 골대 쪽으로 구르고 있었지만, 정작 윤지는 그런 공과 골대, 그리고 뛰어나오는 윤사랑을 보느라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듯 했다. ‘어쩌지! 어쩌지?! 트래핑은 하지 않아도 된 댔으니, 트래핑은 하지 않아도 돼! 근데 벌써 골키퍼가 코 앞이잖아! 골키퍼를 제칠까? 공은 어떻게 하고?! 내가 드리블 할 수 있을까?! 어떡해!? 어떡해!!!!’ 윤사랑의 공격적인 대쉬에 윤지는 골대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살아 움직이듯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구르고 있는 공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선 영후의 한마디가 계속 맴돌고 있었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렴.’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구!!! 내가 할 수 있는 거 뭐! 난 지금까지 촬영만 해왔다구, 촬영만! …… 촬영…?’ 하지만 그 순간 윤지의 머릿속에선 수 천 편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축구 경기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 많은 영상 중 몇 천 번도 더 돌려 본 영상이 이 다급한 순간 떠오르자 윤지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살짝 미소를 지었던 것도 같았다. - 툭. 윤지가 각을 좁히며 무섭게 달려 나오는 골키퍼를 힐끗 바라보며, 파주 NFC에서의 연습경기에서 영후가 그러했듯, 힘을 뺀 오른 발등으로 공을 살짝 걷어 올리자 관중석에 앉아있던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서기만 했을 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또한 그 시끄럽던 철용도,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있던 규식도, 그 순간만큼은 다같이 자리에서 일어선 채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만 있었다. - 고요함. 그리고 아름다움. 빠르게 움직이기만을 반복하던 그 둥근 공 하나가, 잠시 잠깐 그 경기장에서 만큼은 시간을 완전히 멈추려는 것처럼 경기를 통틀어 가장 느리고도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자 어느 누구도 그 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숨을 죽였는데, 이윽고 여주대 골키퍼 윤사랑의 머리위로 무지개를 그리듯 아름답게 날아가던 공은 이내 텅 비어있는 골대로 향했고, 절대 나올 수 없을 엉성한 자세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칩 슛에 온 몸이 얼어붙은 듯 쓰러진 채 고개만 돌려 공의 궤적을 확인하던 윤사랑은 결국 축구공이 아이들 구슬 치기 할 때 마냥 통통 튀며 골 라인을 우습게 통과하자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대자로 누워버렸지만, 윤지는 아직 머릿속의 영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달리던 탄력을 유지한 채 골대 안으로 그대로 뛰어들어가 그물에 걸려있는 공을 집어 들고는 옆구리에 낀 채로 다시금 센터서클을 향해 전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 “우와아아아아!!!!!!!!!!!!!” 이미 주심이 골을 선언하는 휘슬을 분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정작 한국여대 아이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가 어느새 돌아온 윤지가 센터서클 한 가운데에 공을 놓으려 하자, 그제야 너도 나도 윤지에게 달려들었다. “송윤지! 요 나쁜 년! 이렇게 잘할 거면서! 사람을 그렇게 걱정시키기냐!!!” “뭐야 진짜! 우리 몰래 맨날 특훈이라도 받은 거 아냐?! 요 귀여운 년!!!!” 이제 겨우 2 : 4 가 되었을 뿐이었음에도 마치 이긴 것마냥 즐거워하는 아이들에게 싸이기 시작하던 윤지는 벤치에서 박수를 치며 미소를 보내주는 영후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괜히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그런 윤지와 영후를 바라보던 혜미는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우와! 봤어요 지금? 여자들도 저런 걸 다 할 줄 아네요?” 떨떠름했었던 처음관 달리 어느새 경기에 빠져든 병원의 재활 도우미는, 반대로 그 슛을 보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근명을 돌아보았지만 근명은 꽤나 기분 나쁜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엉망이었다. ‘하필, 저 딴 걸 가르쳐 가지고는… 쳇!’ 근명도 파주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했지만 그리 기분 좋은 순간은 아니었기에 얼굴을 찡그려봤는데, 그보다 너무나 낯익은 얼굴의 여자애가 영후 흉내를 내는 모습에 안 돌아가는 머리를 회전시키며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역시나 그도 잠시 또다시 울리는 경기 재개 휘슬 소리에 다시금 최면에 걸린 듯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오, 오코치님, 윤지에게 저런 슛 가르쳐주신 적 있으신가요?” 남희는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윤지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입으로만 수림에게 물었다. “아, 아뇨. 전혀요. 체력 훈련이나 간단한 패스 정도 훈련 말고는 없었어요. 원체 연습 경기 때마다 부분 전술 촬영을 하느라 바빴던 아이였어서… 저런 슛은 전혀…” 수림은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과의 경기 때면 항상 캠코더 촬영을 하느라 실전에 참가하지 못했던 윤지가 믿을 수 없는 슛을 성공시키자 자신이야 말로 놀라고 있는 중이라는 얼굴로 답했고, 그런 수림의 말을 듣고 있던 영후는 여전히 심서연에게 들러붙듯 하는 윤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캠코더라…’ - 아직은 두 골 차였지만, 넉넉하게 곳간을 채워뒀다고 생각하고 있던 쪽에겐 꽤나 데미지가 컸다. 어느새 모든 공격 루트가 막혀버린 시점에서 간단하게 최종수비를 돌파 당하고 먹힌 골이라 더 그랬겠지만, 문제는 한국여대의 공수 밸런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되어갔다는 것이고, 더욱 큰 문제는 한국여대의 새로운 공격수는 아직까지 모든 것을 다 보여준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주대의 걱정은 또다시 현실로 이루어지려 하고 있었고. ‘분명히 내가 더 빨랐어. 그렇다면…?’ 윤지는 드디어 한 골을 넣고 나자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동시에 시야까지 넓어졌기에 그를 바탕으로 더욱 활발히 두뇌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영후에게서 사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윤지는 너무나 황당한 영후의 사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영후의 사인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으니까. ‘해 볼까…?’ 윤지는 조심스럽게 심서연의 곁에서 떨어지며 일부러 오프사이드 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여주대의 수비 라인을 넘어서 보았다. 물론 지금 당장 자신에게로 공이 오면 분명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려들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윤지에게 스피드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이유라는 윤지를 따라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고, 그러자 여주대의 전체적인 수비라인은 완벽한 일자였던 전반과는 달리 삐뚤 빼뚤 해지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라인 정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최종 수비라인 덕에 후방의 지원군을 잃은 여주대의 미드필더들은 한국여대의 협력 수비까지 더해지자 점점 갈 곳을 잃어가고 있었다. ‘혜미야!’ 그제야 윤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드필드의 우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혜미를 입 모양으로 불러보았고, 혜미는 즉각 윤지에게 역시 ‘왜?’라는 입 모양으로 물었는데, 윤지는 혜미에게 자신이 서 있는 곳과 정 반대쪽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기에 혜미는 잠시 무슨 뜻인지 생각해봤지만, 그 와중에도 미드필드에서 흘러나온 공을 잡으려는 김나래보다도 먼저 어깨를 집어 넣으며 공을 가로채고는 씨익 웃었던 것도 같았다. ‘오케이 윤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구! 간닷!’ 그와 동시에 혜미는 여주대의 왼쪽 진영 쪽으로 쏠려있던 윤지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슛과 같은 장거리 패스를 날렸고, 그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어처구니 없는 패스가 향하자 그라운드 위의 모든 선수들뿐만 아니라 관중들 조차 어이없어 하고 있었지만, 영후와 또 한 명의 선수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 “처음엔 영후 놈이더니… 이번엔 근명이 놈인 게냐…? 허허허…” 미처 카메라도 따라가지 못하는 혜미의 패스와 예측 불허한 윤지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대각선 대쉬를 보며 노감독은 기특한 듯 만면에 웃음을 지어 보고 있었다. 약속에 의한 것인지, 미리 훈련된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두 번 째 골을 성공시켰을 때와는 또 달리, 골키퍼의 전진도 쉽지 않도록 공과 공격수가 떨어져 있었기에, 최종수비들은 상관관계가 전혀 없어 보이는 공과 사람 중 그 어느 것도 쉽게 취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공을 택한 여주대 수비수가 공을 취하려 내달리고 있었지만, 공격권을 포기하기는커녕 어느새 번개처럼 내달려 그 공을 차지하려는 공격수가 있었으니, 마치 그 모습은 대표팀에서의 근명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흠… 보기에는 쉬워도 절대 쉬운 게 아니거늘… 도대체 저 아이는…?’ 설마 윤지의 머릿속에 1테라바이트 용량의 하드디스크 보다도 더 많은 축구 영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도 하지 못한 노감독은 꽤나 간만에 나타난 흥미로운 재목을 바라보며 연신 흐뭇해 하고 있었다. - ‘이럴 땐 분명 이렇게 움직였었어!’ 윤지는 이번엔 공과 반대 지역에 있다가 돌아 뛰어들어가는 것이 특기였던 근명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추격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공만을 쫓는 심서연의 뒤를 맹렬히 뒤쫓았다. 분명 심서연이 훨씬 더 공에 가까웠지만 어쩐지 윤지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따라잡는 것을 넘어 심서연을 제치고 공을 따내 어떻게든 골대로 뛰어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뛰면 뛸수록, 그건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았고 어느새 심서연보다 한 걸음 앞서고 있는 윤지가 있었다. ‘뭐… 뭐야!!!’ 거의 왼쪽 터치라인에 가깝게 있던 아이가, 어느새 오른쪽 터치라인 부근으로까지 넘어와 그것도 자신의 발에 거의 닿으려던 공을 가로채고 있는 모습에 심서연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을 멀찌감치 차 놓고는 또다시 변속기어를 올리려는 모습에 또다시 골키퍼와 일대 일 단독 찬스를 내 줄 것만 같아, 카드를 받는 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윤지를 막아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윤지는 또다시 자신의 앞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기에, 다급한 나머지 심서연은 죽을 만큼 뛰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억지로 손을 뻗어 윤지의 조금은 헐렁한 유니폼 상의의 뒷면을 겨우 잡아 챘다. 찌~익! “꺄악!!!” 우당탕! 달려가던 탄력을 제지 당한 윤지와 그저 유니폼 상의의 끝자락을 부여잡았을 뿐이었음에도 그 힘에 끌려가버린 심서연은 그대로 윤지와 뒤엉켜 그라운드를 굴렀고, 그와 동시에 뒤따라온 심판의 입에선 휘슬이 울렸는데, 곧바로 카드를 빼 들지 않는 심판의 모습에 심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저 수신호가 무슨 뜻이더라…?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게다가 자신은 죽을 힘을 다해 카드까지 받을 각오로 윤지의 돌파를 막아냈건만, 여주대 선수들은 땅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반면 한국여대 선수들은 하나같이 윤지에게로 두 팔 벌려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심서연은 자신이 넘어져 있는 곳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윤지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잔디에 주먹을 박아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 틈에… 어느 틈에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앞서가던 윤지를 쫓아 겨우 막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죽을 힘을 다해 쫓아왔더니만, 어느새 파울을 범하면 그대로 페널티 킥을 헌납할 수 밖에 없는 지점에까지 와 있었던 것이었다. - ‘쳇, 결국 스피드를 앞세운 스트라이커였던 건가.’ 이영기 감독은 바닥에 누운 채로 한국여대 선수들에게 파묻히고 있는 윤지를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어 보았다. 당해도 제대로 당한 것이었다. 정보가 부족했으면 그만큼 경계했어야 했다. 게다가 여주대의 두 센터백의 발이 빠르지 못하다는 약점을 감독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대비책을 세워두지 못했다는 것도 꽤나 뼈 아팠다. 하지만 국내에 저런 스피드를 보유한 선수가 있을 거라고는 이영기 감독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랬다면 어떻게 해서든 여주대로 스카우트를 했을 테니까. 아무리 축구가 공간싸움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해도, 스피드만큼 무서운 건 또 없었다. 오프사이드 트랩도, 태클도, 엄청난 스피드 앞에선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체격? 웃기는 소리. 어깨싸움도, 몸싸움도 손에 잡혔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지금으로선, 저 새로운 공격수를 직접 막을 방법은 없었다. 다리라도 부러뜨리지 않는 한. ‘훗,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우리 여주대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팀이었냐?’ 잠깐이지만 동반자 의식을 상실한 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이영기 감독은 다시금 한국여대의 벤치를, 이영후를 바라보았다. 경기 시작 때처럼 변함없이 미소를 지으며 덤덤하게 서 있었지만, 결국 초보 감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곡을 찌르며 들어오는 무서운 이영후란 감독을, 이영기 감독은 이제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감독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이제라도 제대로 보여주고도 싶었고. ‘하지만 사람을 막을 수 없다면…’ 아직은 경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영기 감독은 윤지를 일으켜주고 있는 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윤지 너 어쩜…!” 아이들이 만들었던 인간 산이 사라지고서야 겨우 일어선 윤지를 혜미는 한번 더 와락 품에 안아 주었고, 그제야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던 미안한 감정들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기분을 윤지는 느낄 수 있었다. “윤지 네가 우리 한국여대 선수라 다행이야! 내 친구라 더 다행이구!”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혜미의 품 속에 가만히 안겨있던 윤지는 이내 혜미의 팔을 풀고는 주심에게로 다가가 주심이 들고 있던 공을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혜미에게로 걸어와 손에 들고 있던 축구공을 그대로 혜미의 품에 건네주었다. “유… 윤지야…?” “부탁할게 혜미야.” “유, 윤지야? 그치만…?” 페널티 킥은 어렵게 유도해 낸 윤지가 찰 거라고 생각했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혜미는 갑작스레 윤지가 자신에게 공을 건네자 윤지와 벤치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정작 영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그 어떤 사인도 내주지 않은 채 빙긋 웃고만 있었기에 혜미는 다시 윤지를 바라보았다. “이건 혜미 네가 차야 해.” “윤지야… 그래도…” “혜미 너야말로 우리 한국여대의 진짜 스트라이커니까.” ‘진짜… 스트라이커…!’ 전반 45분 동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자신을 비웃기는 커녕,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봐주며 말하고 있는 윤지 덕분에 혜미는 괜히 땀이 흐르는 양, 유니폼 소매로 눈가를 연신 닦아보고 있었다. 38부. 경기는 끝났지만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혜미가 페널티 킥을 차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동안, 여주대의 벤치에선 급하게 트레이닝 복을 벗으며 교체 준비를 하는 선수가 눈에 띄었고, 그에 남희는 나중에야 어찌되든 이번 경기만큼은 어떻게든 코치의 임무를 마지막으로라도 수행하려는 듯 곧바로 영후에게 알렸다. “여주대 측에선 수비수 여외은과 공격수 이새움 두 명을 준비 시키는 것 같습니다.” “아, 네…” “윤지의 발을 묶기 위해서 발 빠른 수비수로 교체를 하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 남희는 그러나 영후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기는커녕, 터치라인에 들어서는 여주대 선수들을 바라보고만 있자, 괜한 부연 설명을 덧붙였던 가 싶어 겨우 짜냈던 기운마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있었다. 하지만 영후는 그런 남희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이번엔 여주대 벤치에 앉아있는 이영기 감독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뭘 그렇게 꾸물거려?! 빨리 한 골 넣고 또 한 골 넣으라 가자고! 으랏차!!” 역시나 신이 난 철용을 웃으며 바라보던 현우는 그러나 규식도 그럴 줄로만 알았는데, 철용의 반응과는 전혀 다르자 조금 의아한 얼굴로 규식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경기 내내 여유로웠던 규식은, 혜미가 가슴에 공을 품은 채 유니폼으로 한참이나 정성스럽게 문지른 후에야 페널티 스폿에 내려놓고 이내 뒤로 몇 걸음 이동하는 동안, 차마 가슴이 떨려 보지 못하겠다는 듯,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니까. “아저씨…” 현우는 그런 규식을 보며 조심스럽게 불러봤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들지 않는 규식을 현우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한 그랬기에 지금 이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려있는 곳에 당당하게 서 있는 혜미가 대단해 보였고. ‘혜미야…’ - ‘이것만 성공하면 드디어 한 골 차! 그렇게 된다면…!’ 혜미는 가만히 선 채로 몇 발자국 앞에 어색하게 멈춰있는 축구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경기 내내 쉼 없이 뛰어다니고 있을 때보다, 더욱 더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때문에 잠시라도 뒤를 돌아, 여주대 선수들과 뒤섞인 채 페널티 에어리어와 페널티 아크에 정렬하고 있을 한국여대의 아이들에게 응원의 눈빛이라도 받아 볼까도 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도울 수 없을 테니까. 지금이야 말로 그 어떤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삐~익! 드디어 공을 차라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혜미는 천천히 첫발을 내딛었지만, 그 다음 발부터는 점점 가속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에 가까워지자, 왼발은 정확히 공의 왼편에 놓여졌고 이내 간결한 스윙과 함께 오른발이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와 완벽하게 둥글었던 공을 일순간 찌그러뜨리고 있었다. - ‘왼쪽이다!’ 골키퍼 윤사랑은 자신의 몸이 더욱 커 보이도록 골 라인에 선 채로 한껏 양 팔을 벌린 채 혜미의 디딤발과 슛을 날리는 발을 끝까지 바라봤는데, 역시나 경험이 부족한 팀의 선수였던 만큼 디딤발도, 그리고 오른발목도 온전하게 자신의 왼쪽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오른쪽 골 포스트 쪽으로 장갑을 낀 팔을 뻗으며 온몸을 날렸다. 하지만, 촤~악! ‘뭐…야…?!’ 공중에 떠 있던 자신의 몸이 채 땅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몸을 날린 방향과는 정 반대의 공간을 통과한 축구공이 통렬하게 골 네트를 흔드는 소리에 윤사랑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삐~익! 그와 동시에 득점을 인정하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윤사랑은 바닥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혜미의 방금 전 슛 모션을 머릿속에서 되돌려 보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최후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너무나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 정도로 발목을 꺾다니…’ 완전히 오른쪽 골 포스트를, 그러니까 자신이 막는 왼쪽을 겨누고 있던 혜미의 오른발 인사이드는 그러나 자신이 몸을 날림과 동시에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자신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왼쪽 골 포스트를 노렸던 것이다. 즉, 경기 내내 보여준 장거리 패스를 비추어 볼 때 절대 그렇게까지 발목이 유연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그저 힘으로만 밀어붙일 거라고 생각했던 윤사랑의 완벽한 판단 미스였던 것이다. 결국 완전한 패배에 분을 삭이지 못한 윤사랑은 이내 그물을 출렁인 후 다시금 굴러 나오던 공을 집어 들곤 센터라인을 향해 뻥 내지르고는, 그러던 말던 너무나 즐거운 표정으로 기다리던 선수들과 어깨 동무를 하며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혜미와, 그 누구보다도 가장 기뻐하는 듯한 표정의 윤지를 씩씩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 “이거 이거, 오늘 경기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젠장, 미리 써 둔 원고가 다 소용 없어 졌잖아.” 하연은 드디어 스코어가 3 : 4 가 되어버리자 기자석 어디선가 푸념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잠시 눈살을 찌푸려보기도 했지만, 부디 그 말처럼 되길 바래보고 있었다. 왜냐면, 하연이 기자라는 직업으로서 알고 있는 여주대란, 겨우 이 정도로 멈춰줄 팀이 아니었으니까. ‘여주대가 과연 이대로 무너져 줄까…?’ 게다가 다시 경기가 재개되기 전, 드디어 이영기 감독이 칼을 뽑아 들었기에 하연은,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검 승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 “어? 공격수를 둘… 다?” 수림은 여주대에서 교체되어 나오는 투 톱 김나래와 김진영을 보고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가, 감독님. 이게 무슨 뜻일까요?” 수림의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과 질문에, 남희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영후보다 먼저 대답해주려다 그만 두었다. 이제는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또 다시 금새 후회하고 있는 남희였다. 이어지는 영후의 이야기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뭐, 표면적으로 보면 투 톱을 원 톱으로 바꾸면서, 수비 강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남희는 또다시 아무 말 않고 있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엔 답 대신 되묻는 영후 덕분에 지금의 교체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권코치님.” “예?” “여주대가 중앙 수비 세 명을 기용하는 스리백 시스템을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게…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분명, 여주대는 단 한번도 스리백을 차용한 적이 없었음에도 남희는 어찌된 일인지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타인을 배려해주던 영후였건만 확실히 지금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기에 남희는 또다시 속상할 뻔 했지만, 중얼거리듯 입을 여는 영후의 얼굴을 바라보곤 이내 속상한 마음보다 걱정스런 마음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겉으론 여유 있어 보였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모습만으로도 지금 이순간 감독의 자리라는 곳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음… 그렇군요.” 확실히 늘 싱글벙글 거리기만 하던 영후가 고민을 하고 있을 정도로 여주대의 이번 교체는 단순한 교체가 아니란 것도 남희는 어렴풋이 알수 있었다. 때문에 남희와 수림 또한 한창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도 불구하고 크게 뒤지고 있었을 때보다 더 근심스럽게 그라운드를 주시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이윽고 여주대의 선공으로 경기가 재개되려 했지만, 최종 수비라인에 선 채 전방의 센터 서클을 바라보던 혜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 뭐야…? 쟤가 왜 저기에…?’ - 티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진지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던 노감독은 센터 서클 안에서 새로 투입된 공격수 이새움의 옆에 서 있는 선수 덕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영기 감독… 장군을 부르니 멍군으로 받겠다는 것인가…?” - “너…?” 후반 시작과 달리 이번엔 조금은 놀란 눈으로 윤지는, 센터 서클과 센터 라인이 만나는 지점에 선 채로, 그 원을 가르고 있는 선의 가운데에 이새움과 함께 서 있는 심서연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하지만 뭔가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던 심서연은 윤지를 애써 모른 체 했고, 그런 심서연에게 윤지는 또다시 뭐라 말을 붙여 보려 했지만 곧바로 울리는 휘슬에 자신을 스쳐지나 한국여대의 수비진 쪽으로 스며드는 심서연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윤지도 결국 여주대의 수비진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 “여주대 감독놈도 다급했구만.” “예?”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규식이 혼잣말하는 것을 잽싸게 알아들은 철용이 묻자 규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여자 축구라고 하지만, 수비수가 갑자기 공격수로 바뀐다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줄 아냐?” “뭐, 그야 그렇죠.” 떨떠름한 표정으로 규식의 말에 수긍하는 철용 대신 이번엔 현우가 물었다. “그치만 아저씨, 혜미는 가능했잖아요. 그렇담 다른 선수들도” “혜미가 가능했던 건, 원래 혜미의 재능이 처음부터 공격이 아닌 수비에 무게가 실려있었기 때문이었고.” “예에? 그런…?!” “그러니까 분명 저 여주대 수비수가 최전방에 올라선 건, 혜미처럼 공격을 하겠다는 게 아닐 거란 얘기란다.” 규식의 이야기에 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현우는 결국 더 되묻지 못한 채 잠자코 있었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자니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닌가 싶었던 철용이 결국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그건 너무 지나친 추측 아니십니까? 그럼 뭐 하러 중앙수비수가 공격을 그것도 투 톱 자리 중 하나를 꿰찼겠습니까?” “얼레? 너 임마 하늘 같은 선배님 말씀 못 믿냐? 많이 컸다? 그럼 맞는 지 아닌 지 나랑 내기할래?” “그거 좋죠! 전 공격, 공격! 무조건 공격이다! 에 만원 겁니다.” “이자식이, 돈 만원 벌기가 얼마나 힘든 건데… 여튼 후회하지 마라? 현우 너 똑똑히 들었지? 저 놈이랑 만원 건 거다?” “으…” 꽤나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싶었더니만 결국은 돈 내기로 귀결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지만 그도 잠시,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경기에 빠져드는 두 사람 덕분에 현우도 진지한 얼굴로 경기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너… 공격…수 였던 거야?” 혜미는 자신의 옆에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심서연에게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냉소 섞인 대답뿐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던지.” 직접 맞부딪혔었던 전반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아이가 되어 있는 심서연의 모습에 혜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뭐 상관없었다. 지금은 친구를 사귀는 자리가 아니라, 승부를 겨루는 자리였으니까. ‘왔다!’ 이윽고, 치열한 중원 싸움에서 승리한 미드필더 은채가 곧바로 공을 뒤로 돌려 지영이에게 넘겨주자, 지영이는 다시 그 공을 당연한 듯이 혜미에게 밀어 주었다. 때문에 혜미는 심서연에 대한 생각을 지우며 낮게 깔려 오는 공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간다 윤지!’ 혜미는 공을 잡자 마자 최전방의 윤지를 찾으며 시선을 맞추려고 했는데 그 순간이었다. 혜미의 앞을 가로막으려는 심서연이 혜미의 시야에 들어온 건. - ‘저 것… 이었나…!’ 심서연이 혜미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을 지켜 본 영후는, 설마 했던 예상이 맞아 떨어지자 여주대 벤치의 이영기 감독을 바라봤다. 감독의 능력으로 보자면, 역시나 자신보다 몇 수는 위였다. 고작 경기 시작한 지 15분 만에 윤지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해버리다니. 하지만 앉아서 감탄만 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던 영후는 더욱 근심스런 표정으로 한국여대의 벤치를 돌아봤다. ‘우리 팀에 남아있는 멤버는, 승은이와 정화인가…’ 양 발의 사용이 가능한 승은이는 그러나 풀백을 보는 수비요원이었고, 윙 플레이어인 정화는 수림의 말에 따르면 생리 중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두 장의 교체 카드를 써버렸기 때문에 결국 풀백의 승은이 만이 교체가 가능한 자원인 셈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 풀백을 교체하는 것은 현재 뛰고 있는 풀백 중 한 명의 체력을 세이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수비라인을 헝클어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었다. ‘교체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엔 무리고… 그렇다면…’ 영후는 이윽고 터치라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양 손가락을 입에 넣고는 중원을 향해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어 보았다. - 그저 단순한 움직임인 줄로만 알았던 혜미는 뭔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좀 전에 윤지에게 패스를 하려다 갑작스레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심서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요샌 공격수도 전방에서 약간의 수비를 하니까.’라는 생각을 하곤 별 동요 없이 옆에 있는 센터백 미애에게 공을 건네줬고, 그 공은 다시금 중원으로 옮겨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빌미를 제공했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간혹이 아닌, 전방에서부터 아예 중앙 수비수인 자신만을 집중 마크를 하는 심서연 덕분에 혜미는 패스를 하기는커녕 공을 만져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겨우 심서연을 피해 지영이로부터 간만에 공을 건네 받은 혜미는 그러나, 다시금 심서연이 따라붙어 만에 하나 공을 빼앗기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으로 움츠려 들며 멋진 드리블로 심서연을 제쳐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던 생각을 접고는 왼쪽 풀백 하늘이에게 공을 건네 주었다. 그러자 역시나 예상대로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심서연이 있었지만, 그보다 심서연이 던지는 무미건조한 한 마디를 듣고는 혜미는 멍한 얼굴 그대로 그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그 패스가, 오늘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패스가 될 거야.” “무… 무슨 뜻이야…?!” “한국말 못 알아들어? 나, 이 심서연이 자존심을 굽히고 너 하나만을 막으러 온 거라구. 그러니까 더 이상 넌 아무것도 못할 거란 말이야.” “!!!” 아무리 상대팀 선수를 도발하려는 말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심한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 가 싶은 혜미였지만,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축구공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심서연은 자신에게서 떠나기는커녕, 숨소리가 확연하게 들려올 정도로 가까이 선 채로 여전히 자신의 곁에 붙어 있었기에 혜미는 뭔가 잘못 돼도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뭐야… 정말, 날 막기 위해서…? 설마… 오로지 나만?!’ - “그야말로 좋은 작전이구먼…” 노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하고 있었다. 윤지의 스피드를 저하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닥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윤지보다 빠른 수비수를 기용하는 것이었겠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 했을 테고, 그렇다고 선수 하나를 막자고 전체적인 수비라인을 뒷걸음질 치게 하는 것도 그리 좋지 못한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공격의 시발점을 틀어 막는다… 는 것…” 허나 패스라는 것은, 언제나 정해진 선수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드필더도, 수비진도, 하다못해 골키퍼조차 할 수 있는 게 패스였다. 그러니 다른 선수들이 혜미가 하지 못하는 패스를 윤지에게 해주면 그만일 것이었다. “허나, 저 아이가 보여줬던 첫 볼 터치가… 트래핑이 아니었다면…” 어쩐지 한껏 분위기가 달아오르려던 한국여대의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꺾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탓에 노감독은 마치 자신이 벤치에 감독으로 앉아있는 것 마냥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한편 혜미가 더 이상 패스를 보내지 않자 소득 없이 여주대의 수비라인에 붙은 채 서 있던 윤지는 이번엔 새로 투입된 센터백 여외은이 말을 걸어오자, 발로 뛰는 축구 경기에 이렇게 잡담이 많은 건지는 처음 알았다는 얼굴로 ‘이번엔 또 왜? 뭐?’라고 다그치듯 바라봤다. 하지만 처음부터 한다는 말이 꽤나 직설적이었기에 윤지는 무척이나 당황하기 시작했다. “야, 너 트래핑 같은 거 못하지? 아, 트래핑이라는 말은 알려나? 왜 그거 있잖아 볼이 오면 이렇게 딱 멈추는 거 말야.” “뭐?! 누… 누가 그래?” “헤헤, 그렇게 발끈하는 거 보니까 맞는데 뭐… 설마 했는데. 역시 우리 감독님 눈은 못 속인다니까.” “우, 웃기지 말고, 경기에나 집중하셔!” “집중은… 이제 너랑 나는 놀아도 될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어차피 너한테 패스해주던 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 말야.” “!!!” 그제야 윤지는 한국여대 진영을 돌아보았지만, 혜미의 눈을 볼 수 있기는커녕, 혜미의 모습을 완전히 가리고 선 심서연의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 혜미가 완전히 봉쇄당함과 동시에 영후의 사인을 받은 왼쪽 날개 민지는 공을 몰고 올라오는 왼쪽 풀백 하늘이가 공을 건네 주고는 공간을 점유하려 더 위로 오버래핑을 나가자, 여주대의 수비가 일순간 벌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대각선 방향의 윤지에게 패스를 했다. 그러자 민지의 패스를 받기 위해 오프사이드 트랩을 단번에 붕괴시키며 오른쪽 측면의 빈 공간으로 달려나가던 윤지는 그러나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따라붙지 않는 거지?’ 설마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려든 것인가 싶어 달리는 와중에도 슬쩍 터치라인 쪽 부심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경기는 진행 중이었기에 윤지는 불현듯 고개를 쳐들던 불안감을 잠재우며 잔디를 가르며 다가오는 공을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틱. 윤지를 방해하는 건 그 누구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리 거칠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었던 공은, 그러나 조심스레 멈추려던 윤지의 오른 발등에 불규칙하게 부딪히더니만 윤지가 원하는 곳과는 정반대로 튀더니 곧바로 터치라인을 넘어가 버리고 있었다. ‘아차!’ 결국 간만에 이어진 찬스를 어이없게 날려버린 윤지는 민지에게 미안하다는 수신호를 보내고는 터치라인 밖에서 드로잉을 하려는 여주대 왼쪽 풀백 김소정의 손끝을 지켜보며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영기 감독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하연은 왠지 너무나 빨리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은 전광판 시계를 바라보곤 애꿎은 손톱만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중앙 수비수 하나를 막고 있을 뿐인데, 공격이 전혀 안되고 있다니…’ 하연은 혜미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은 채 몇 번이나 보내준 패스를 단 한번도 받아 내지 못하고 있는 윤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눈으로 보기에도 혜미의 패스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스트라이커라면 그 정도 패스는 어떻게든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윤지는 자신에게로 전해지는 공을 받기는커녕, 트래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경기가 계속 될수록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축구 경기라면 전혀 말도 안 되는 여주대의 ‘이상한 작전’에 그대로 말리고 있는 한국여대의 모습에, 하연은 윤지라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아니 다른 축구 선수들처럼 조금만 더 부모님의 관심아래 어릴 적부터 축구를 시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나마 영후를 만나서 다행인 걸까?’ - 영후는 고민에 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윤지와 처음으로 조우했었던, 화장실에서 알게 된 순간 스피드와 잠재된 운동신경을 믿고, 혜미가 아닌 미드필더들을 통해 몇 번이고 잔 패스를 보내보았지만 무위로 그치자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후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혜미를 수비에서 공격으로 올리는 방법과 그와는 전혀 다른 방법 하나. 전자는 수비수 한 명이 늘어난 여주대를 상대로 어쩔 수 없이 그 어떤 감독이라도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것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고 있는 팀이라면 어쨌든 공격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과연 여주대의 수비가 생각대로 열려 줄 것인가 하면, 그렇게 확신할 수 만은 없었다. 게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수만의 공간을 과연 혜미와 윤지가 겹치지 않고 활동해 줄 수 있을 것인지도 알 수 없었고. ‘그럼, 그 반대로 할 수 밖에.’ 그야말로 영후 답지 않게 몸보다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찰나에 이영기 감독이 마지막 교체 카드를 쓰려하자 영후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곤 결심한 듯, 터치라인으로 걸어나가 가까이에 있던 오른쪽 날개 소영이에게 물병을 집어주며 뭔가를 얘기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본 이영기 감독은 영후에게 또 무슨 얕은 수가 남아있는 가 싶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미드필더 강인혜가 그라운드에서 걸어 나오는 박성은과 교체되어 들어가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비해주자 영후와 마찬가지로 손목시계를 바라보고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3분 남짓. 인저리 타임까지 계산한다 해도 길어야 5분. 이 경기, 우리가 이겼다!’ 이영기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리하지 말고, 빈 공간을 찾아 공을 돌릴 것을 지시하며 조금씩 경기 결과에 대해 확신을 하고 있었다. - "공수 간격을…? 정말??" 한편 소영이에게 감독님의 지시를 전해 들은 한국여대 아이들은 조금 놀라는 것도 같았지만, 이내 모두들 수긍하는 모습이었고, 이윽고 남아있는 체력을 모조리 소비하겠다는 듯 또다시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새로 교체되어 들어간 중앙 미드필더 강인혜의 눈엔 한국여대 선수들이 마치 좀비 같아 보였다. 체력은 거의 고갈되어 보임에도 정신력으로 버티는 듯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모습에 잠깐이지만 오싹한 기분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런 상태의 팀을 상대로 감독님의 지시대로 후방에서 공을 돌리기만 한다는 건 어째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 것만 같았다. 이미 한국여대의 허리라인과 최후방의 수비라인의 간격은 더 이상 넓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던 데다가 먼저 투입된 공격수 이새움 또한 몸이 근질거리는 듯 연신 손을 들어 보이며 자신에게 공을 넣어달라고 사인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감독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후방에서 볼을 돌려서 시간을 보내라는 거야…? 그저 패스 한번이면 무너질 텐데…’ 얼마 전 청소년 대표에 선발된 것이 기폭제가 되어 컨디션이 한창 상승세에 있던 강인혜에겐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축구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때문에 강인혜는 최종 수비라인의 이유라에게 손짓을 했다. 자신에게 공을 달라고. - 혜미는 그야말로 구토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정신을 차리면 또다시 심서연의 숨소리가 들렸고, 얼굴이 코 앞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심서연의 모습이 잠시 사라지려 했고, 그제야 혜미는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자유를 느끼던 혜미는 그러나 심서연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사라지기는커녕, 이번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여주대의 미드필더들과 함께 공격에 가담하고 있었으니까. ‘칫, 우리가 그냥 당하고 있을 것 같애?!’ 혜미는 심서연에게서 해방됨과 동시에 더 많은 공격수들이 몰려왔지만 어쩐지 더 편안함을 느끼며 수비라인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한편, 김인영과 2대 1 패스를 주고 받으며 수정이와 은채를 단번에 제쳐버린 강인혜는 후반 시작과 달리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져 있는 한국여대의 오른쪽 라인을 확인하고는, 마침 오버래핑을 나가는 왼쪽 풀백 김소정에게 매끄러운 스루패스를 해 주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한국여대 오른쪽 풀백 나경이가 김소정을 막아 서려 했지만, 그와 동시에 왼쪽 날개 강나루가 뒤로 돌아가며 갑자기 멈춰선 김소정에게 힐 패스로 공을 받자, 나경인 오른쪽 날개 소영이가 미처 미드필더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하고 있었다. ‘뚫렸나?!’ 하지만, 그때였다. 자신을 멀찌감치 떼어놓고는 이내 골 라인을 따라 파고드는 강나루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든 혜미가 멋진 태클을 시도하며 골 라인 아웃을 만든 건. - “야 이 새끼들아!!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이영기 감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수들에게 한껏 고함을 지르며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이미 공격을 감행하고 있던 선수들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결국, 이영기 감독은 의외로 공격의 실마리를 잘 풀어가고 있는 선수들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는데, 그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아무리 막판이라지만, 이건 너무… 너무 순조로운데…?’ - 한국여대 진영의 왼쪽 코너플래그에 공을 세워둔 채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이던 윤지수는 골 에어리어 안팎으로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한국여대와 여주대 선수들을 바라보다가 누군가와 눈이 맞았는지 곧바로 오른발로 감아 찼고, 윤지수의 발을 떠난 공은 빠르게 휘어지며 날아갔는데 생각보다 짧고 낮게 날아간 공은, 채 니어 포스트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 순간 공을 잘라먹으려는 듯 낮은 자세로 뛰어들며 몸을 날리는 공격수 이 새움이 있었다. ‘골이다!’ 자신의 이마에 공이 부딪히는 순간, 무척이나 시원한 기분을 느끼며 직감적으로 ‘골’이라고 확신하던 이새움은 그러나 니어포스트를 지키고 서있던 한국여대 오른쪽 풀백 나경이 순간적으로 오른발로 걷어내자 아쉬운 얼굴을 한 채로 바닥에 넘어졌고, 그렇게 날아간 공은 그러나 그리 멀리 날아가지 못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공의 낙하지점을 정확히 파악한 혜미가 공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주심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슬슬 휘슬을 입에 물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혜미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지고 있었다. ‘감독님! 이 방법이 정말 맞는 거죠?! 그렇죠?!’ 공을 잡자마자 페널티 에어리어를 넘어선 혜미는 곧장 전방의 윤지를 찾았고, 역시나 한시도 혜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윤지는 곧바로 스피드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탁해 윤지야!’ 혜미는 윤지를 보자마자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발 아래 놓인 공에 남아 있는 힘을 끌어 모아 강력하게 공을 강타하려 했다. - “가랏! 혜미야!!!” 급기야 규식은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나 목이 쉬도록 혜미를 연호했고, 철용과 현우도 마치 경기장으로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갈 기세로 합창하기 시작했다. “윤지! 달려!!!” - “옳거니! 이거였군, 이거였어! 그렇지! 그대로 가거라!!” 노감독도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선 채로 허공에 주먹을 휘둘러가며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 “혜미야!! 윤지야!!!” 그 예쁜 코치 둘이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당장이라도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만 같은 목소리로 혜미와 윤지를 불러보고 있었지만, 삑! 삑! 삐~익! 혜미의 패스가 채 허공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매정하게 울려 퍼지는 휘슬 소리에 영후는 결국 굳게 다문 입술을 한 채로 여주대의 벤치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 ‘이런, 시간이… 벌써…’ 노감독은 응원을 하다 말고 허탈한 얼굴로 의자에 앉은 채,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그라운드 여기 저기에 쓰러지며 정렬도 못하고 있는 한국여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코끝이 찡해졌지만, 이윽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진작에 총장임을 직감하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핸드폰을 받았다. “나요.” ‘……’ 분명 총장이었음에도 전화를 걸고는 아무 소리가 없는 게 노감독에겐 더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화라도 내 주었더라면 마음이 덜 아팠을거라고도 노감독은 생각해 보았다. “화… 난 게요?” ‘…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당신이 왜 여태껏 축구란 것에 목을 매고 있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서 그래요…’ 노감독은 총장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오자, 안도의 숨과 함께, 보이진 않겠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며 총장의 말에 동의해주고 있었다. 이제야, 총장에게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자신만의 팀이 생긴 것이었으니까. 때문에 노감독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음 경기” ‘보러 가요 우리! 이번엔 응원이 부족해서 이렇게 됐을 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러니까 다음 경기는 보러 가요 꼭!’ “허허, 그럽시다.” 노감독은 자신이 하려 했던 말을 총장이 해버리자 잠시 입맛을 다시기도 했지만, 총장이 의기소침해 하기는커녕, 좀 더 힘을 내주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고 있었다. - 그라운드에서 관중들을 향한 인사가 끝난 후 아이들과 코치들을 라커룸으로 돌려보낸 뒤에도 영후는 한동안 그라운드를 거닐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후를 규식과 철용, 그리고 현우는 채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요?” “생각은 무슨! 감독 해먹기도 만만치 않구나 싶겠지. 그니까 진작에 내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좀 좋아?!” 철용은 현우의 조심스런 물음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대충 둘러댔지만, 철용이 보기에도 영후의 모습은 선수 시절 때의 모습과는 또 사뭇 달라 보였다. ‘녀석, 감독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거냐?’ - 그라운드를 한참이나 방황하던 영후가 라커룸에 들어섰을 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더없이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첫 패배. 영후는 그것이 가져다 주는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 아이들은 달랐다. 게다가 이 치열하고 잔인한 스포츠를 ‘즐겁게 하자’며 말도 안 되는 감언이설로 꼬드긴 게 자신아니었던가. 때문에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솔직히 영후도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미처, 이야기 해주지 못한 우리 잘못이야 얘들아.” 여전히 울먹이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수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수림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도통 알지 못한 채 애써 또 터질 것만 같은 울음을 참아보고 있었다. 그러자 수림은 영후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고, 영후 또한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실은… 오늘 너희와 경기를 치른 여주대는, 여자 대학부 최강팀이었어.” “!!!” 이윽고 수림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자, 라커룸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다양하게 바뀌어가기 시작했고, 그 중 누군가가 어렵게 입을 열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들이 들은 그대로야. 오늘 경기, 사실은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남희가 수림을 거들며 말해주자 그제야 아이들은 원망스런 눈으로 코치들을 바라봤기에, 수림과 남희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영후가 거들었다. “늦기는 했지만, 오늘 경기를 치르면서 최선을 다해준 너희들 덕분에 우리 한국여대 팀의 힘이 어떤 건지 알게 돼서 기뻐. 물론 감독이랍시고, 너희들과 함께 지내지 못한 내 탓에 오늘 좀 힘들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 한 경기로 이 대회, 끝난 건 아니잖니. 비록 오늘은 아깝게 졌지만, 다음 경기를 승리로 이끈다면, 우리 팀은 4강에 들 수 있을 거고, 또 그렇게 되면 오늘 보다 더 성장한 너희들 모습 볼 수 있을 거란 생각하니까 어쩐지 더 힘이 나는데? 너희들은 어때?” 역시나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말들로 마음을 풀어주고, 기분을 좋게 해주는 영후의 모습에 두 코치들도 아이들도 피식 웃어볼 정도로 고통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고, 이에 미자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그래, 어차피 오늘 경기는 끝났으니까 이제 징징거리는 거 그만하고, 종아리랑 허벅지에 못생긴 근육 뭉치기 전에 어서 경기장에 가서 마무리 훈련이나 하자! 어때?” 그러자 아이들은 미자의 의견에 동의하며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라커룸을 빠져 나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혜미는 어쩐지 처음부터 윤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을 불러 세우는 영후 덕에 윤지를 찾아 나서려던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참, 혜미는 감독님하고 같이 갈 데가 있으니까, 간단하게 옷 갈아입고 나오렴. 복도에서 기다리마.” “네에…” - 철용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규식과 현우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바삐 걸음을 옮겨 한국여대의 라커룸으로 향했다. ‘다른 녀석들이 노리기 전에!’ 분명, 잔 실수도 많았고 어쩌면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만큼 형편없는 모습도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용의 눈에는 분명 ‘대어’로 보였기에 다른 에이전트들이 낚아채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때문에 거의 날다시피 해서 한국여대 라커룸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라커룸이 자리한 복도에조차 들어서지도 못한 채 그대로 벽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는 유니폼 차림의 윤지 모습을 보고 철용은 반갑게 손을 들며 불러 세우려 했지만, 그보다 다른 남자가 좀 더 빨랐다. “허허, 그래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름 잘해주었구나 윤지…” ‘헉! 저 분은… 설마 대한 축구협회 조전무…?!’ 철용은 왠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잠시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아, 복도 모퉁이 벽에 숨은 채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며 그 쪽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여,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한 윤지가 주변을 살피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지만 조전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어쩐 일은? 우리 귀여운 아가씨께서 경기를 뛰신다는 데 안 와볼 수가 있나? 흐흐흐… 게다가 이렇게까지 도와주고 있으니, 다음 경기도 기대해도 되겠다 싶은데 말이지…” “이런 건… 계약에 없던 일이잖아요.” “아니, 지금 막 바뀌었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출전해서 이렇게 경기를 망치는 거다. 물론, 오늘처럼 아주 그럴싸하게…” “그런…!?” “윤지 너라면 할 수 있지 않느냐? 조 편성 때도 시킨 대로 잘도 공을 뽑더니만… 왜,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뀐 게냐?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언론에다 네 년이 어떤 년인지, 네 년의 보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대로 까발리는 수 밖에. 어떠냐, 설마 내가 진짜로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닐테지…? 흐흐흐… 하하하하!!!” ‘뭐야…?! 조 편성 때는 또 뭐고… 경기를 망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조전무는?? 또 윤지는…?!’ 그저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를 미리 찜 하러 왔던 철용은 그러나 들어선 안될 이야기를 듣고는 윤지와 조전무를 번갈아 바라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경기가 끝난 후 차례를 기다리며 기자회견장의 단상 옆 통로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던 영후와 혜미는 그러나 아무런 말도 나누지 못했다. 라커룸에서 모든 걸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었음에도 다시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자, 영후도 또 혜미도 여전히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후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미를 바라보다 팔을 뻗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어깨를 보듬어 주었는데,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혜미의 모습에 영후는 무척이나 가슴이 아려왔다. ‘내 욕심에… 이 아이들에게 희망 고문이라도 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영후는 왜 진작 이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더더욱 자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실망하고 있는 혜미와 함께, 경기가 끝난 후 하나같이 울음을 터뜨리던 한국여대의 모든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영후는 지금껏 자신이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가 하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인 꿈을 위해, 이렇게 어리고 여린 아이들의 꿈을 아무것도 아닌 양,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영후는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던 거지…’ “한국여대, 준비하세요.” 그러나 그 순간 기자회견장의 스텝이 다가와 영후에게 알려주고 사라지자, 영후는 뭔가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혜미의 축 늘어져 있는 손을 잡고는 일으켜주었다. “가자, 혜미야.” 그리고 통로 밖으로 보이는 기자회견장으로 나가려는 데, 이영기 감독과 트레이닝 복 차림의 심서연이 막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 “…” 하지만 영후도, 이영기 감독도 서로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이미 나누고 싶은 말들은 경기를 통해, 또 아이들을 통해 나누었으니까. 그럼에도 이영기 감독은 잠깐이나마 입술을 들썩이다 말았다. ‘어차피, 말해주지 않아도 살아 돌아 올 테지…’ 결국 두 사람은 가벼운 목례를 나누며 스쳐지나 갔고, 뒤따르던 심서연도 혜미를 스쳐지나 가다가 경기 종료 직전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아까웠다.’라고 말하려다 겨우 참아보았다. ‘그때 막지 못했더라면…!’ 심서연은 경기 종료 후에 왜 자신의 지시를 듣지 않았던 거냐며 라커룸에서 자신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던 이영기 감독의 모습을 떠올렸다. - “왜! 왜!! 감독 말을 무시하는 거야!!! 너희들이 너희들 힘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으냐? 엉?! 하마터면 다 잡은 경기를 그르칠 뻔 했잖아!!!” 도저히 이긴 팀의 라커룸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에 여주대 선수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수들 모두는 도대체 자신들이 뭘 잘못한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직 심서연 만이 감독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격이 막힐 때는 수비를 느슨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작전이었다. 아니, 아주 고급 작전이었다. 즉, 이기고 있는 팀을 상대로 공격을 해야만 하는 팀은, 공격의 의지를 접은 채 공을 뒤로 돌리는 선수들을 자극해야만 했다. 또한 탄탄한 수비로 인해 모든 공격 루트가 막혀있다면 일시적으로 자신의 팀 조직력을 무너뜨려 허점을 보여야 했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 짜릿한 골 맛을 온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선수들은 결국 이기고 있음에도 차마 공격 본능을 감출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게 실전에 통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심서연은 단박에 '그렇다'라고 말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한 작전을 머리로 알고 있던 자신마저도 경기 종료 직전, 마지막 공격이라 생각하고는 안심해버리며 코너킥 때 잠시나마 혜미를 놓칠 뻔 했으니까. - 여주대의 마지막 코너킥 찬스를 나경이가 겨우 무력화시키고 혜미가 그 공을 따낸 뒤 전방의 윤지를 바라보며 마지막이 될 장거리 패스를 날리려 했지만, 그 순간이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뒤따라 오던 심서연이 역시나 죽을 힘을 다해 뒤에서 발을 뻗어 혜미의 발끝을 막 떠나는 공을 건드리고 있던 건. 결국 마음먹은 것과 달리 공이 이상한 궤적을 그리며 힘없이 날아가자, 혜미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심서연을 바라봤지만, 지칠 대로 지쳐 바닥에 거의 누워있다시피 하던 심서연은 그런 혜미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거봐. 못할 거라고 했잖아…” - 혜미의 패스라고 하기엔 뭔가 조금 다른 스피드와 다른 궤적으로 날아오는 공을, 어쨌든 잡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윤지는 무조건 달리고 있었지만,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분명, 오프사이드 라인을 제대로 유지하다가 달려 나왔건만, 심판은 휘슬을, 그것도 세 번이나 길게 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윤지는 관중석 어디선가 장난을 치는 걸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만 있으면 허공에서 떨어질 공을 바라봤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을 방해하고 못살게 굴어야 할 여주대 선수들은 하나같이 바닥에 주저앉거나 터덜터덜 걸으며 터치라인을 넘어서고 있었다. ‘잘못된 거야… 이건 뭔가… 뭔가 잘못된 거야… 아직…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구!!!’ 순간 여전히 달리고 있던 윤지의 눈엔 눈물이 가득 맺히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놓칠 순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혜미가 보내준 공이 지금 막 발 아래에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또한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정말 제대로 슈팅을 날릴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이봐!? 야!!! 어, 어디로 가는 거야?! 막아야지! 나를! 내 슛을!!” 급기야 윤지는 공도 버려둔 채 골대를 비우며 어깨에 수건을 걸친 후 천천히 걸어 나오는 윤사랑에게 달려가 어깨를 잡아 채 봤지만, 윤사랑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윤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우리가 이겼고, 너희가 진 거라고.” “아…아니야… 아니라구!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이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해대는 윤사랑에게 윤지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며 거짓말이라고, 장난이었다고 말해주길 바래보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장난도 아니라는 듯 윤사랑은 끼고 있던 장갑마저 벗어버리며 여주대 벤치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기에 윤지는 또다시 한달음에 달려가 윤사랑을 잡아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때였다.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아이의 등 뒤로 영후가 다가와 그 넓은 가슴으로 포근하게 안아 준 건. “그만… 그만하면 됐다 윤지야… 그만하면 됐어…” “아… 아니야… 아직…” “잘해줬다 너는… 정말로 잘해줬어…” “흐흑… 아직이라구요… 아직… 나는… 흐허헝…” 그제야 윤지의 눈에선 폭포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영후는 그런 윤지의 어깨를 다독거려주며 그 넓은 그라운드에 한참을 서 있었지만, 어느새 모든 한국여대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영후는 결국 모든 아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듬어 주며 가슴속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 영후와 혜미가 기자회견장에 등장하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플래쉬 세례가 쏟아졌는데, 그야말로 대낮이 되어버린 것처럼 환해진 탓에, 경기가 끝난 직후 울음 바다에 동참해 가뜩이나 눈이 부어있던 혜미는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에 영후는 그런 혜미가 안쓰러워 결국 기자들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고. “오늘 경기 재밌게들 보셨나요?” 역시나 영후가 애써 웃으며 말문을 열자, 잠깐이지만 더욱 플래쉬가 터졌으나 그와 동시에 기자들의 입이 열리면서 카메라들은 잠시 조용해지고 있었다. “이영후 선수! 감독으로서 처녀경기를 치렀는데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음… 우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어준 우리 한국여대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 해주고 싶습니다.” “첫 경기를 아쉽게도 패배했는데요, 과연 한국여대가 조별 리그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쉽진 않겠지만, 처음에 아이들과 했던 약속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스타 선수출신의 감독 발언에 다들 잔뜩 기대를 했던 탓이었을까. 기자들은 초보 감독의 너무나 교과서적인 답변에 흥미를 잃은 듯, 이윽고 영후 대신 새롭게 등장한 신예 혜미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장혜미 선수에게 묻겠습니다. 오늘 공, 수에 걸쳐 꽤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줬는데요. 비결이라도 있을까요?” “아, 그건…” “혹시 장규식 선수가 아버지라던데, 맞습니까?” 혜미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또 다른 기자의 질문이 이어지자 장내는 다시금 술렁거렸고, 동시에 플래쉬가 동시 다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혜미는 잠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고, 그에 보다 못한 영후가 결국 대신 입을 열었다. “장규식 선수가 혜미의 아버지라는 건 사실입니다, 허나” 이번엔 또다시 플래쉬 세례가 영후와 혜미 두 사람 모두에게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고 영후가 계속 답했다. “혜미가 익힌 모든 것들은 본인의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일 뿐, 그 외에 그 어떤 것도 혜미의 노력을 대신한 것은 없습니다. 그건 감독인 제가 보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내의 술렁임도 플래쉬 세례도 늘어나기만 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영후 감독님, 소문에 의하면 국가대표 경기에서의 활약을 눈 여겨 본 해외 빅리그 팀에서 오퍼가 끊이지 않고 있다 던데요, 감독님께선 해외 진출의 조건으로 이번 대회의 우승을 내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하연으로부터 금시초문의 이야기를 듣게 된 기자들은 갑자기 웅성거리며 당황하고 있는 혜미와 영후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지만, 영후는 별반 고민하는 흔적도 없이 바로 입을 열려 했고, 반면 질문을 던진 하연은 절대 그러지 말길 바라고 있었다. ‘영후야… 제발 그러지 마…’ 허나 하연의 바램과는 달리 영후는 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경기와 상관없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우리 한국여대가 우승을 하게 되면, 해외 진출은 그 때나 타진해 볼 생각입니다.” 그러자 하연은 부디 일말의 여지를 남겨주길 기대하며 다시금 질문을 날렸다. “그럼,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영후 선수, 아니 감독님의 해외 이적은 불발되는 겁니까? 설마… 아니겠죠?” “아니오. 그렇게 된다면 전, 그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겁니다. 지금의 제겐 한국 여대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요.” 그야말로 하연의 마음에 비수를 꽂듯 웃으며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 하는 영후 덕에 하연은 질문을 하다 말고 왈칵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지만, 이어지는 다른 기자들의 정신 없는 질문 공세 덕분에 겨우 참을 수 있었다. - 현우는 차마 낙담하고 있을 혜미를 보지 못하겠다는 규식을 차에서 기다리게 한 채, 전주 월드컵 경기장 옆의 보조 구장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규식의 말대로 선수들은 힘든 경기를 치르고 나서도 마무리 훈련이란 걸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엔 혜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조금 늦게 도착한 듯한 윤지가 현우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주었다. “너… 일부러 온 거야…? 혜미 보러?” “어? 어 뭐… 그것도 그렇고… 그보다 윤지 넌… 괜찮은 거니?” 이런 땐 위로를 해야 하는 건지, 농담을 건네야 하는 건지 아직은 판단하지 못하는 나이의 현우는 윤지의 물음에 겨우 용기를 내며 윤지의 상태를 물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윤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기억해?” “어? 으응. 근데 그건 왜…?” “ ‘8374’야.” “어? 그게… 뭔데?” “도어락 비밀번호.” “그…그걸 왜…?” “들어가면, 왼편으로 컴퓨터가 있는 작은 방이 있을 거야.” “그, 근데…?” “그럼 컴퓨터 본체를 열고 그 안에 연결돼 있는 하드디스크 전부랑, 그 아래 두 번 째 책상 서랍 열면 또 외장 하드디스크가 몇 개 있을 거거든? 그거, 미안한데 좀 갖다 줘.” “가, 갑자기 하드디스크는 왜…?” “그럴 일이 있어. 그래 줄 수 있지?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고.” “8374…?” 다시 한 번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되묻는 현우를 바라보며 윤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곤 연습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며 수림을 찾았다. “코치님!” 그러자 아이들의 뭉쳐있는 근육을 푸는 스트레칭을 지도하던 수림은 윤지를 발견하고 ‘왜?’라는 입 모양을 만들어 물었지만, 그런 수림에게 윤지는 회복 훈련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 바람처럼 달려가며 더 큰 소리로 답했다. “트래핑 알려주세요!!!” - 어렵사리 기자회견을 마친 영후는 혜미를 다독이며 연습 경기장으로 들어서려 했는데, 남희가 경기장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남희의 모습에 영후는 혜미의 어깨를 마지막으로 두드려주며 먼저 보냈고, 혜미가 남희에게 인사를 하고 경기장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남희는 영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권코치님. 들어가시지 않고 왜 여기에…?” 영후의 물음에도 남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영후를 등지며 돌아서서 철조망 사이로 아이들이 힘들어 하면서도 회복 훈련을 군말 없이 해 나가고 있는 모습을 한동안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영후는 지금 남희가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입을 열려 했지만 그보다 남희가 조금 더 빨랐다. “어느 분께 먼저 말씀 드려야 하는 지 몰라서…” “네?” “저, 이런 시기에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안 되는 줄 알지만…” “?” “한국여대 코치직… 여기서 그만 두겠습니다.” “나… 남희씨…?!” 그야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남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영후는 뭔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더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는 남희를 바라봤지만,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에 영후는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못한 채 그저 남희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39부. 틀림, 혹은 다름.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그게…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희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영후는 그제야 남희의 양 어깨를 붙들고는 훈련을 하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모일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런 시선들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영후는 이내 헛웃음을 흘리다가도 다시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애써 피하는 남희의 시선을 억지로 찾으며 물었다. “아…니죠? 하하, 제가 잘못들은 거죠? 그죠?” “아닙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남희씨…?!” 영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남희에게 말을 하려 했지만, 철조망 사이로 하나 둘 훈련을 멈춘 채 다가오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보이자, 안되겠던지 갑자기 남희의 손목을 잡고는 다짜고짜 달리기 시작했다. -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리는 고급 세단의 뒷좌석에 몸을 묻은 채 조전무는 운전석의 기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은밀한 목소리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그 때 말했던… 그래 그래… 되도록 빨리… 가능하면 오늘이라도… 그래… 음… 그럼 연락 기다리지.” 이윽고 전화를 끊고는 잠시 운전석을 바라보기도 했던 조전무는 이내 시선을 돌려 차창을 내다보며 복도에서 만난 윤지의 흔들리는 눈빛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이제 약발이 다돼간다 이건가… 그렇다고 제까짓 게 내 손아귈 벗어날 순 없지… 암.’ 조전무는 붉게 충혈된 눈과 대비될 정도로 입 꼬리를 올리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괜히 꽉 쥐어보고 있었다. - 조전무와 윤지가 은밀한 대화를 끝내고 복도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다리가 풀린 듯, 한동안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철용은 그러나 지금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것들을 누군가에게 한시라도 빨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분명, 있어서는 안될 엄청난 이야기였지만, 과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었음에도 믿지 못할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야 할지 철용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녀석에게 직접 말해줘야 하나?’ 하지만 철용은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뜩이나 첫 경기를 패배한 팀의 감독에게 곧바로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면, 분명 심각한 내분이 일어날 게 뻔할 것이었으니까. 아니, 설령 내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 녀석이라면, 어쩌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채 그대로 이 모든 걸 안고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러니 어떻게든 빠른 시간 내에 영후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 이 사태를 조속히 해결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이 언론에 밝혀진다면, 분명 그 더러운 진흙탕 싸움에서 영후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만큼 승부조작이란, 스포츠에선 가장 무서운 범죄였으니까. ‘눈치 빠른 기자들이 알기 전에 조용히… 기자? … 기자?! 그래! 기자!!’ 순간 철용은 ‘그 누군가’를 떠올려내고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 영후와 남희가 조금은 이상한 분위기로 사라지자, 수림은 자신의 궁금증부터 애써 잠재우고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문제는 윤지였다. “코치니~임! 트래핑 가르쳐 달라구요!” “글쎄! 그것보다 지금은 마무리 훈련이 우선이라고 했잖니! 너 제대로 연습도 하지 않다가 오늘 갑작스레 45분이나 뛰었잖아, 자칫하면 다친단 말야!” “아이 참, 저 아무렇지도 않다 구요. 보세요!” 윤지는 정말 전혀 피곤하지 않다는 얼굴로 수림의 곁을 재빠르게 한 바퀴 돌아 보이고는 다시 앞에 섰다. “보셨죠? 그니까, 가르쳐주세요오~! 전, 지금 그게 더 급하다구요!!” 수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윤지를 바라보았고,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윤지도 수림을 바라봤지만, 조금은 애원의 눈빛도 담겨있었다. 물론, 수림은 마음이 흔들릴까 애써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결국 윤지도 수림도 자신의 뜻을 굽힐 것 같지 않자, 오늘 출전하지 않았던 승은이가 슬쩍 둘 사이에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코치님, 공 주고 받는 건 그렇게 힘든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윤지하고 있을게요. 코치님은 아이들 봐주세요, 네?” 결국 윤지에게만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었던 수림은 곱게 눈을 흘겨주곤, 한데 모여 마무리 훈련에 한창인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고 그제야 승은이는 윤지를 향해 눈을 찡끗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자, 코치님은 가셨고… 난 뭘 도와주면 되겠니?” “어? 어어, 그럼 우선 나한테 공을 차줘. 잘 차줄 필요 없고, 그냥 막.” “어디, 여기서?” “우선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는 거겠지?” 자신에게서 거리를 가늠하며 진지하게 떨어지는, 그저 장난으로 시작하는 것 같지는 않은 윤지의 얼굴에 승은인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발 아래 놓여있는 축구공을 ‘툭’ 밀어주었다. - 하연은 영후의 기자회견 내용 전문을 본사로 전송시키자 마자 노트북을 대충 백에 집어 넣고는 기자회견장을 빠져 나와 영후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설마 했었지만, 공개석상에서 이번 대회의 우승과 해외이적을 결부시켜버리자, 차라리 묻지 말았어야 했을까 후회도 잠시 해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때문에 영후의 말을 되담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엔 그 녀석에게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바보! 이 바보야! 그러지 말았어야지! 어쩌자고… 어쩌자고…’ 하지만 경기장에도, 라커룸에도 영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하연은 여전히 발걸음을 옮기며 머리로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안되겠는지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그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한 곳이 있었다. ‘그래, 보조 경기장!’ - “자, 이제 다시 얘기해 봐요. 남희씨, 그게 진심입니까?” 보조 경기장에서 조금 떨어진, 주 경기장과 보조 경기장 사이에 있는 야외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한국여대의 리무진 버스의 뒤꽁무니에 서 있던 남희는 여전히 영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남희씨,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이런 건, 도무지 남희씨 같지 않잖아요! 지금의 남희씬 제가 알고 있는 남희씨가 아닌 거 같단 말이에요!” “제가… 어떤데요…? 감독님께서 보시기엔 제가 어땠습니까?” 드디어 남희의 입이 열리자 영후는 조금쯤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떠냐뇨? 그걸 몰라서 묻는 거에요?” 그러나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여전히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희의 눈에 영후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책임감 강하고, 언제나 올곧고…” 하지만 그렇게 많을 것만 같던 남희의 장점을 영후는 더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왜 갑자기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는 거지…?!’ 분명, 영후가 아는 남희는, 권남희란 여자는 정말 좋은 여자였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남자에게 의존하기만 하는 여자들과는 차원부터가 다른, 진짜 여자였다. 그렇게 좋은 여자인데, 그런데… ‘도대체 난… 남희씨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정말 뭘 알고는 있던 걸까? 아님… 그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제야 영후는 남희를 비롯해 이렇게 소중한, 자신의 주변에서 항상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 무심했던 건 아니었을까, 반성에 또 반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됐습니다. 그런 이유만으로 계속 팀에 머물며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한편 자신의 능력에 대해선 전혀 언급해주지 않는 영후의 모습에 남희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입을 열었지만, 그와 동시에 영후의 입이 열릴 것 같자 남희는 의도적으로 반 박자 먼저 끼어들고는 연이어 속내를 털어놨다. “처음부터 제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시작부터 총장님 덕분에 일을 시작했던 것뿐 이었으니, 이제는 원래 제 자리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바보 같은 저 때문에 오늘 경기도 이렇게 되어버려서 죄송했습니다.” “후… 그게 대체!!! 오늘 경기에 진 건, 남희씨 때문이 아니잖아요!” 남희는 자신이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정답’을 이야기 했다고 생각했기에, 눈앞에서 갑자기 화를 내는 영후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희가 이해를 하던 말던 영후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부터, 우리 한국여대가 우승이란 걸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됐어요?! 하지만!” “!”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지 않고서는… 그렇게 내 입으로 말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야말로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남자의 입에서, 길을 가다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남자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나약한 마음에 대한 고백이 흘러나오자 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이미 영후는 남희의 반응을 살필 여력이 없었던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남희씬 제가 어떤 놈인지 알아요? 저야말로 우유부단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놈이에요. 하지만 내가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또 스스로를 극복하기 위해서 늘, 난 버거운 목표만을 세우기 시작했죠. 목표라도 그렇게 세워보지 못하면 현실의 난 여전히 망나니로 주저앉았을 테니까요.” 남희는 벌어진 입 만큼이나 안경 너머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실은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여리다는 사실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제 앞에 갑자기 나타나준 남희씨는 모든 면에서 제게 귀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남희씨가 우리 팀 코치였기 때문에 전, 더욱 높은 목표를 세울 수 있었구요.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남희씨는… 남희씨는 분명” “……” “제가 본 최고의 코칩니다.” “!” 이미 마음을 접고 나서야 영후의 입에서 최고의 찬사가 튀어나오자 남희는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지만, 영후는 그런 남희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러니, 어때요? 다음 위덕대와의 경기… 한 번 지휘해 보지 않겠어요?” “예?! 그게 무슨…?!” 분명, 농담이어야 할 말이 그러나 영후의 표정 덕분에 진심으로 들리자 남희는 자칫 오해를 할 뻔도 했다. 이미 한국여대의 탈락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게다가 작년 이 대회의 준우승팀을 맞아 싸워야 하는 경기를, 감독이 다짜고짜 코치에게 맡아보라고 하니 그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책임회피였다. 하지만, 그 어떤 이도 지금 이 남자의 눈을 바라본다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지금의 남희 또한 그러했으니. “남희씬 저와 생각이 달랐을 뿐이지, ‘틀린’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경기에 패배한 걸로 보자면, 남희씨보단 제가 틀린 거겠죠.” “그런…!” “전 남희씨 믿어요.”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할 수 없었던 남희는 그러나 진심으로 자신을 믿는 영후의 눈빛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하연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경기장을 빠져 나와 연습 경기장을 가기 위해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던 중, 한국여대의 리무진 버스가 세워진 곳에 서 있는 영후와 남희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항상 사리분별이 정확한 남희까지 있으니 마침 더욱 잘됐다 싶은 마음에 하연은 한달음에 그 쪽으로 다가갔지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예상치 못했던 분위기가 감도는 탓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는 버스의 운전석 쪽 앞 머리에 몸을 숨긴 채 둘의 이야기를 엿듣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로 또 한남자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 남희는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영후를 바라보다 보니, 지금 이 상황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겠지만, 어쩐지 지금이야 말로 자신의 마음을 밝혀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의 순결을 내어주면서도 결코 말할 수 없었던 마음을, 이제는 부담 없이 말해도 될 것만 같았다. “그럼, 절 선택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에요? 난 이미 남희씨를 선택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같은 길을 가고 있잖아요.” “아니요, 그런 것 말고…” “?” “위덕대와의 경기를 맡는 대가로, 박기자님 대신 절 선택하실 수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네?! 그… 그건…” 순간 영후보다도 숨어서 엿듣고 있던 하연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만 가고 있었지만, 그래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남희의 뺨을 후려치고는, 지금 제정신이냐고, 이런 긴박한 순간에 남의 남자가 가로채려하는 당신, 미친 거 아니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머리채도 휘어잡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러지 말라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바보, 안 그러기로 했잖아… 이제 영후, 놓아주기로 했잖아… 영후야, 난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어서 남희씰 잡아… 어서!’ 이렇게 하연이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남희가 꺼내든 말도 안 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영후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입을 열 생각도 못한 채 남희의 눈에서 땅으로, 땅에서 다시 하늘로, 그리고 또다시 남희의 눈으로 영후의 시선은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대답도 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남희의 입이 다시 열리고 있었고. “당연히, 아니 막연하게 박기자님을 감독님께선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오래된 사이였으니까요.” 남희의 말과 동시에 영후도, 하연도 그 옛날부터 이어져 온, 친구라는 이름의 굴레를 떠올렸다. 그리고 바로 어젯밤, 그 지독한 멍에를 벗어버렸다는 것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나 불공평했습니다. 감독님을, 제가 늦게 만나고 싶어서 이제야 만난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제야, 하연은 영후의 원룸에서 영후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한없이 부러워하던 남희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때는 뭐가 그리 부러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남희의 말 또한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남희보다 영후를 일찍 만난 ‘행운’이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누가 누굴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 시간은 아무런 핑계가 되지 못한 다는 결론을, 저는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길고도 절박한 남희의 독백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후는 그러나 별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남희씨가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네요.” ‘안돼, 안돼, 영후야 그러면 안돼!’ 하연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그 둘의 앞에 나타나려 했지만, 그와 동시에 하연의 팔을 붙드는 손이 있었다. 때문에 하연은 자신의 팔을 붙드는 손의 주인을 확인했지만 ‘처…철용씨…?!’ 그 팔의 주인 또한 지금의 상황을 듣고 있었다는 듯, 그리고 하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겠으나 부디 그러지 말라는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어주고 있었다. - “오늘 혜미가 아저씨께서 온 줄 알았더라면 무척 좋아했을 거에요.” 물론, 더욱 신나서 경기도 잘했을 거라는 말은 현우는 하지 않았다. 경기는 이미 끝났으니까. 하지만 현우가 차마 하지 못한 말만을 들은 듯 규식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혜미였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을 게다.” “아저씨두 참… 아 맞다, 내일 모레 위덕대하고 경기 있잖아요. 가실거죠?” “봐서…” 분명 가고 싶은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써 있었음에도 미지근하게 말하는 규식을 바라보며 현우는 괜히 무안한 마음에 뒷통수를 긁적일 수 밖에 없었다. 왜 어른들은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현우였지만, 그래도 어쩐지 규식과 혜미를 보면 볼수록 부녀의 모습 그대로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덕분에 편히 갔다 왔다. 나중에 가게에 들리렴, 시원한 음료수 하나, 아니 두 개 정도는 공짜로 주마.” “진짜요?! 약속하셨어요? 헤헤.” 별것도 아닌 것에 착한 웃음을 흘리며 좋아라하는 현우를 보고 있노라니 규식은 그나마 오늘의 경기를 보며 받았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지만, 이틀 후 다시 가슴을 졸이며 딸의 경기를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금 이마엔 주름이 깊게 패이고 있었다. ‘혜미 엄마도 하루하루가 이랬던 걸까…?’ 어쩐지, 이제야 처음으로 헤어진 혜미의 엄마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여자에 대해 ‘이해’라는 것을 해보는 규식이었다. 아니 이해라는 건 부질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하려면 그때 했어야 했다. 가정을 돌보지 않은 채 무조건 그라운드만 내달렸던 바로 그 때. 규식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가게가 보이자 현우는 평소완 달리 조금은 바쁜 듯 인사를 했다. “그럼, 저 가볼게요 아저씨.” “그래, 조심이 가거라.”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내내 조금은 안절부절 못하더니만, 바쁘면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도 부득불 큰 길가에 차를 세워 둔 채 가게에까지 같이 동행해준, 그리고 다시 큰길가로 되돌아가는 현우를 규식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수림을 비롯해 모든 아이들이 돌아가버린 후, 연습 경기장에 남은 건 혜미와 윤지 뿐이었다. 혜미는 시합 중에 했었던 패스와는 전혀 다른, 꽤나 딱딱한 느낌의 패스를 높게, 혹은 낮게 윤지에게 뿌려댔고, 윤지는 그 공을 가슴으로, 머리로, 허벅지로, 발등으로 최대한 몸 가까이에 떨어뜨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튕겨내는 게 아니라, 힘을 죽인다는 느낌으로!” 혜미는 패스 한 번을 할 때마다 윤지에게 큰 소리로 조언과 응원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이제 한 두 시간 남짓 연습을 했을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윤지는 어느덧 자신에게 오는 공을 반경 일 미터 안으로 들어오게끔 공을 받아내고 있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슛하는 거 말고도 패스 주고 받는 것도 자세히 좀 봐둘 걸 그랬어.” “!!” 혜미는 정신없이 트래핑만을 하는 줄 알았던 윤지가 어느새 여유가 생겼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패스를 보내다 말고 선 채로 윤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안보내? 혜미야?” “윤지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어? 뭐가?” “지금… 뭐라고 했잖아… 슛하는 거… 봤다고?” “어? 어어. 너도 축구 좋아하지만, 나도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 놀라는 척하긴…” “아니, 그게 아니라… 너 그럼, 오늘 보여준 슛도, 어디선가 본 걸… 따라한거야…?” “그게… 처음에 넣은 건, 너도 봤잖아. 그때 내가 아이팟에 넣어준 거.” 그제야 혜미도 생각이 났다. 그 작은 아이팟 화면으로만 봤음에도 온 몸에 전율이 일었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칩 슛이. 하지만 지금 혜미는 그 때 보다 더욱 충격과 놀람으로 말문조차 막히고 있었다. “그…니까… 너… 그냥… 본 걸… 따라서…”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윤지를 바라보며, 혜미는 눈으로 보고 또 자신의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것만 같았다. - 현우는 자신이 타고 온 고급 승용차와 함께, 자신을 기다리느라 차 밖에 나와 서 있는 운전 기사를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언제나 똑 같은 모습으로 운전기사는 뒷좌석 쪽의 문을 부드럽게 연 채로 현우가 차에 타길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현우가 차에 타자 문을 조심스럽게 닫아주고는, 운전 기사도 자신의 자리에 타 시동을 걸려고 했는데, “저 아저씨…” “예, 도련님.” “죄송한데요, 오늘은 먼저 집에 가서 기다려 주시면 안될까요?” “네? 도련님 갑자기 왜…?” “그냥… 좀 걷고 싶어서요. 바람도 좀 쐬고 싶고… 안될…까요?” 운전기사는 조금 고민을 하고 있었다. 현우는 몰랐지만 조전무는 언제나 현우의 귀가 여부를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때문에 운전 기사는 항상 현우와 함께 해야만 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현우가 혼자 있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다…’ 운전기사가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현우는 그 어릴 적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바라봐주고 있었기에 결국 운전 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현우는 그제야 밝은 얼굴이 되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튕기듯 뛰쳐나갔지만, 현우가 멀어지는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한참이나 지켜보던 운전 기사는 충분히 현우의 모습이 멀어지자, 시동 버튼을 가만히 눌러보았다. - 편의점안에서 밖이 내다보이는 통 유리에 하연과 나란히 선 채로 철용은 컵라면의 남은 국물을 들이키고는 버릇처럼 담배를 꺼내려다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 따윈 하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캔커피를 손에 든 채 거리의 사람들과 자동차들을 처연하게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고. 철용은 나무젓가락을 간단하게 두 동강 내 빈 컵라면용기와 함께 휴지통에 쑤셔 넣고는 입을 열었다. “아, 배고파 뒤지는 줄 알았네. 근데, 뭐라도 안 먹어도 되겠어요?” 철용은 자신만 허기를 달랜 것이 그제야 미안했던 지 짐짓 하연에게 또 한 번 물었지만 하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 모습에 철용은 방금 먹었던 라면발이 곤두서는 것만 같아 ‘왁!’ 소리를 질렀다. “뭡니까?! 영후가 박기자님을 두고 딴 마음이라도 품을 것 같았어요?!” “……” 그럼에도 아무런 말이 없는 하연의 캔커피를 쥐고 있는 손을 바라보다 철용은 겨우 성질머리를 죽였다. “남녀 사이 이렇게 끼어드는 거 아니라는 건 아는데, 쳇!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아서 말이오.” 철용의 긴 서론에 목이 말라옴을 느꼈던 탓일까, 하연이 그제야 손에 들려있던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제야 철용도 갈증이 해소된 듯, 다시 입을 열었고. “마음에 짐이 있는 거죠?” “!” “뭐, 나하고 똑같지는 않겠지만. 왠지 그럴 거 같았수다. 영후의 앞길을 막은 게 혹시 ‘내가’아닐까 하는 마음. 물론 나야, 진짜 그 놈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긴 하지만, 나 말고도 영후 주변엔 우리 말고도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치만 기어코 놈이 싫다는데도 이럴 필요는 없잖소. 그러니 우리 이제 그런 착한 척은 그만 합시다. 까놓고 말해서, 모든 선택은 그 놈이 한 거 아뇨, 아닙니까?” 그제야 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철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철용은 하연의 슬프디 슬픈 눈빛에 주춤할 뻔도 했지만, 짐짓 유리창으로 고개를 돌리며 계속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부상을 감춘 것도 그 놈이었고, 선수가 아닌 감독을 택한 것도 그 놈이었잖소. 그런데 왜 우리가 지레 미안해하고 걱정을 해야 되느냔 말이오. 아, 물론 좋아하는 사이라면 또 달라지겠지만, 난 이래봬도 여자를 좋아하지, 남자를 사랑하진 않거든.” 나름 재밌는 유머를 구사했다고 생각한 철용은 그러나 하연이 웃어주기는커녕, 자신처럼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머쓱해졌다. 하지만 하연의 시선은 그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걸, 오로지 좀 전 한국여대 코치와 함께 있던 영후에게로 향해 있다는 걸 아는 철용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아까 그 두 사람 앞에 나타나서 뭘 어쩌려고 그랬어요? 뭐, 난 괜찮으니까 그 코치를 택하라고? 사랑보단 영후 놈의 꿈이 더 소중하니까?” “…” “누가 그럽디까? 놈의 꿈이 박기자님의 사랑보다 중요하다고.” “!” “꿈은 말이오, 나 혼자 노력하면 죽기 전까지는 어찌됐든 이뤄볼 수 있는 게 꿈이란 놈이요.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란 놈은 그렇게 꿈을 위해 죽도록 노력할 각오가 된,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사람의 마음이, 그것도 동시에 필요한 건데, 그런데도 감히 꿈보다 사랑이 가볍다고 어느 미친놈이 말할 수 있겠소?” 꿈과 사랑. 하연은 무척이나 투박한 남자의 입에서 그 두 단어가 튀어나오자, 마음이 더 아련해지는 것만 같았다. 다른 선수들이 꾸는 꿈은, 지금 그 남자에게는 꿈이 아니었다. 그대신 그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라는 것만 같은 꿈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여자 때문에…’ 여전히 한숨만을 내쉬는 하연 때문에 속이 터질듯하던 철용은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탁’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치며 입을 열었다. “내 참,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네. 이봐요, 박기자님. 내가 박기자님 고민을 덜어줬으니, 이번엔 내 얘기 좀 들어주겠소? 이번엔 진짜 영후 놈 문젠데 말이오.”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목소리를 낮춘 철용의 목소리는 더없이 작았지만,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철용의 억양과 분위기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기자로서의 본능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이 편의점에 들어온 이래로 철용의 말에 가장 집중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영후의 안위를 먼저 물었다. “무슨… 설마 영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하연은 꽤나 심각하게 변하고 있는 철용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디 별 일이 아니길 바랬지만, 자신의 육감은 그러나 단단히 각오해두라고 속삭이고 있었기에 하연은 손에 든 커피캔이 찌그러질 정도로 힘을 줘보고 있었다. - 현우는 차에서 내리자 마자 윤지가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한달음에 달려왔고, 숨도 고를 새 없이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스르륵 문이 닫히고는 기분좋은 중력의 느낌을 주며 부드럽게 올라갔고, 층 수를 나타내는 숫자는 빠르게 바뀌어 어느새 11층을 표시하더니만 이윽고 문이 열렸다. 현우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윤지가 사는 맞은 편 집의 굳게 닫혀있는 문을 잠시 바라보고는 이내 윤지의 집 도어락의 덮개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8374랬지?’ 현우는 윤지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버튼을 누르자, 맑고 경쾌한 멜로디 소리와 함께 도어락의 걸쇠가 돌아갔고, 그러자 현우는 다시 한 번 맞은 편 집의 문을 바라봤지만, 처음과 같이 굳게 닫혀 있음을 재차 확인하곤 천천히 윤지의 집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이었건만 갑자기 환한 불빛이 천정에서부터 비춰졌다. “헉!” 그건 현관 천정에 설치되어 있던 센서등이 현우의 인기척을 알아채고는 스스로 켜진 것이었다. “깜짝…이야…휴우…”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현우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고는 컴퓨터가 있을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거실을, 또 안방 침실 쪽의 문을 바라보고는 괜히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으… 나 현우 지금 그런 거 떠올릴 때가 아니거든?’ 하지만 현우의 머리와는 달리 예전에 거실에서의 ‘왕게임’과 더불어 침실에서 윤지 덕분에(?) 잠든 혜미의 나신을 봤었던 것이 생각나 현우의 아랫도리는 단번에 불룩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현우는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는데, 윤지가 얘기했던 서랍을 열자, 에어캡에 잘 싸인 채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하드디스크들이 서랍을 가득 채운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뭔 하드디스크가 이렇게나…” 하나하나의 무게가 꽤 나갈 것이었기에, 현우는 아저씨와 함께 올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었을 뿐이었다. 결국, 현우는 한쪽에 놓여져 있는 꽤 큼직한 백을 (짐 가방으로 쓰기에는 너무나 비싼 명품 백을!) 집어 들고는 하드디스크를 넣기 시작했다. 거의 스무 개가 넘는 수의 하드디스크가 백을 가득 채우자, 현우는 겨우 다 넣었다는 생각에 일어섰는데 아차 싶었다. “참, 컴퓨터 본체에 있는 것도 갖다 달랬지.” 결국, 현우는 컴퓨터 본체의 뒤편의 손 나사를 풀고는 케이스를 벗겨냈고, 그러자 먼지 하나 없는 내부가 드러났는데, 역시 본체에도 하드디스크가 3개나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사로 옆면이 본체에 고정되어 있었기에 현우는 드라이버를 찾으려 서랍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신발장 같은데 있으려나…?” 현우는 거실로 다시 나와 현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신발장을 열었고, 그러자 중간 높이에 있던 서랍이 보였고, 역시나 그곳에 드라이버가 있었다. “헤헤, 찾았다.” 현우는 보물이라도 찾은 양 꽤나 기분이 좋아졌는데, 그 순간이었다. 현관 문을 사이에 두고 뭔가 은밀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여기가 맞지?’ ‘맞으니까, 꾸물대지 말고 빨리 장비나 꺼내!’ ‘근데, 정말 아무도 없는 거 맞어? 괜히 작업하는 데 누가 있다거나 하면 큰일이라구! 또다시 빵에 들어가면 이번엔 언제 나올지 몰라.’ ‘그럴 일 없으니까, 어서 시작하기나 해!’ ‘보채기는… 걱정되니까 그러는 거지… 알았어!’ 분명 순수한 방문자들은 아니라는 걸, 현우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윤지를 찾아 온 사람들이라면 벨을 눌렀으면 눌렀지, 대문 앞에서 목소리를 줄인 채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윽고 목소리를 낮춘 남자 두 명의 대화가 끊기자, 현우는 현관에 선 채 그대로 숨을 죽이고 있다가 현관문의 볼록렌즈로 남자들의 정체가 뭔지 확인을 하려 했는데, 현우가 눈을 대려 하는 그 순간 눈높이에 달려있던 현관문의 렌즈는 그러나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뭐…뭐야?!’ 정상적인 방문자들은 ‘벨’을 누르지, 현관문에 달려있는 볼록렌즈를 돌리지는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이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던 현우는 동시에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드라이버를 바라보았다. ‘하드디스크!’ 현우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고는 다시 컴퓨터 방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나사 하나 하나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에 두 개씩, 총 여섯 개! 침착해! 별거 아니야!’ 현우는 밖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여섯 개의 나사를 모두 풀고, 하드디스크에 연결되어 있는 S-ATA선과 파워케이블을 뽑고는 하드디스크를 빼내려 했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다. ‘왜 안 빠지는 거야?!’ 잠시 나가 현관문을 확인한 현우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렌즈가 빠질 것이었다. 현우는 다시 방으로 뛰어들어와 본체 안을 확인하다가 겨우 깨달았다. ‘이런!’ 반대편의 옆면을 열어야 했다. 분명, 하드디스크는 양쪽 모두 나사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현우는 또다시 본체의 뒷 편으로 손을 뻗어 옆판을 고정하고 있던 손 나사 두 개를 풀었고, 동시에 옆판을 제거 한 후, 그제야 드러난 하드디스크 고정 나사 여섯 개를 발견했다. 하나… 둘… 셋… 그저 나사를 푸는 뿐이었는데, 현우에겐 그 순간이 마치 그 어떤 순간보다도 길게 느껴지고 있었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 나사가 한 바퀴 도는 것이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공전과도 같을 정도로 느리게 느껴지고 있었다. 넷… 그 순간, 현관문에 달려있던 안쪽의 볼록렌즈가 힘을 잃고 현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현우는 나사를 풀던 손을 멈추고 머리만 내민 채 현관을 바라봤는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렌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렌즈가 있던 자리였다. 허망하게 뚫려있는 렌즈 구멍으로 뭔가 기다란 것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저건…?!’ 그건 마치 내시경을 할 때 쓰이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관절 카메라였다. 분명, 저것을 이용해 도어락의 열림 버튼을 찾아, 열고 들어오려는 것이 확실했다. 현우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남아있는 나사 세 개를 풀기 시작했다. 셋… 둘… 그와 동시에 현우가 이 집에 들어올 때 들었던 맑은 멜로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현우는 그와 동시에 마지막 남은 한 개의 나사를 풀고 있었다. - “쉬는 것도 운동이야 얘들아!” 모든 아이들과 수림도 돌아가버린 빈 운동장에서 어느새 점점 거리를 늘려 패스를 주고 받던 혜미와 윤지는 동시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엔 두 아가씨를 향해 빙긋 웃어주는 영후가 서 있었다. “감독님, 저희 땜에 못 주무신 거에요?” 혜미가 머쓱해하며 묻자, 영후가 다가와 혜미의 코를 살짝 쥐어보며 말했다. “그래, 임마. 너희들이 허가도 안받고 계속 운동장을 사용한다고 연락이 왔더라.” “으윽! 치사하긴… 이깟 운동장, 우리 학교 꺼가 훨씬 더 좋은데 쳇!” “근데, 무슨 연습들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니?” 영후는 혜미와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고, 그에 윤지는 머뭇거리며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혜미는 자랑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감독님 그거 아세요? 우리 윤지, 어쩌면 천재일지도 몰라요!” “천재?” “야, 장혜미! 너 진짜~!” “글쎄 오늘 넣은 골 있죠? 그게 세상에, 그냥 본 걸 따라 해 본 거래요! 연습 해본 것도 아니고, 그냥 본 걸 말이에요!” 혜미의 말에 영후는 그닥 놀라지 않으며 윤지를 바라봤지만, 윤지는 어쩐지 영후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어쩌나? 감독님이 보기엔 우리 팀엔 천재가 하나가 아니라 둘 같던데?” “네?!” “오늘 공수에 걸쳐서 나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군말 없이 잘 따라줘서 고마웠어 혜미야. 물론 예정에도 없이 뛰어준 윤지도 고맙고.” 영후의 인사에 혜미는 조금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같았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실은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윤지의 재능과 활약에 질투를 느낄 뻔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모든 게 잘 된거란 마음으로 혜미는 윤지에게 어깨 동무를 했고, 윤지 또한 그런 혜미에게 옅은 미소를 보내주었다. “근데, 도대체 뭘 하느라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여기 남아있는 거니?” “아, 그게…” 영후의 질문에 윤지가 머뭇거리자, 혜미가 숨길 게 뭐가 있냐는 눈으로 윤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트래핑 연습했어요! 윤지가 하고 싶다고 해서요.” “트래…핑?” “실은, 오늘… 제가 평소 훈련만 제대로 해왔었다면, 이렇게 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영후는 조금 의외라는 듯 담담하게 입을 여는 윤지를 바라봤다. ‘이 녀석… 오늘 경기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가…’ 오늘의 경기는 굳이 윤지의 탓도 아니었었다. 굳이 책임 소재를 가리자면, 선수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감독의 잘못이 더 컸다. 때문에 윤지에게 감독인 자신이 사과를 하는 게 더 옳을 일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축구공을 자신의 발에서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양, 축구공을 꼭 밟고 있는 윤지의 발을 내려보던 영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트래핑 연습이라…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근데…” 영후는 이내 윤지의 발에서 자신의 발끝으로 공을 옮겨오더니, 발목만을 이용해 부드럽게 공을 찼는데 그 공은 꽤나 멀리 날아가더니, 이내 몇 번 튕기지 않아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지금 한 건, 슈팅일까 슈팅이 아닐까?” “네…?”, ”예…?” 장난처럼 묻는 영후의 모습에 윤지와 혜미는 동시에 물었지만, 어느새 영후는 뒤로 돌아 기지개를 펴며 골대 쪽으로 걸어가며 경기장을 빠져 나가려 했는데, 그런 영후의 뒷통수에 대고 혜미는 꽥 소리를 질렀다. “감독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혜미는 만날 알 듯 모를 듯한 수수께끼만 내주며 사라지는 감독이 미워서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던 축구공을 냅다 영후에게로 찼는데, 그 순간이었다. “거참, 녀석들 하고는.” 영후는 등뒤로 날아오는 공을 멈추기는커녕, 공과 같은 방향으로 갑자기 속도를 내어 달리더니 트래핑은커녕, 자신의 발 옆으로 떨어진 채 빠르게 구르고 있는 공의 속도에 자신의 발등을 더했고, 그러자 공은 그대로 날아가 골 네트를 흔들었다. ‘트래핑… 없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플레이에 혜미도 윤지도 놀라고 있었지만, 영후는 가던 길 그대로 걸어가며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 호텔로 돌아온 남희는 한시가 급한 듯, 노트북을 꺼내 들고 강진에 내려가서 촬영했었던 위덕대의 경기 실황 파일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폴더를 뒤져도 노트북 하드디스크에는 없었다. “아, 윤지가 가지고 있으려나…” 남희는 윤지에게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호텔룸을 나서려 문을 열었지만, 문 밖에는 하연이 서 있었다. “박… 기자님?!” “남희씨,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아, 제가 지금 좀 바빠서” “중요한! 일이에요.” 남희는 그 순간, 처음보는 하연의 다급한 눈길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 다시금 윤지의 집 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자 현관이 밝아지며 텁텁한 남자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 냄새는 키는 작지만 뚱뚱한 남자의 것일 수도 있었고, 키는 크지만 호리호리한 몸을 한 남자의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것이든 향긋한 내음이 나는 윤지의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시펄, 요새 대문엔 우유 투입구가 없어서 꼭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킨다니까.” “그럼, 남의 돈 먹기가 쉬운 줄 아냐? 사람도 다 발전을 해야 벌어 먹는 거지.” “지랄, 잡소리 말고 뭘 찾는 건지나 말해. 도대체 어디서 이런 일은 물어와가지고.” “낸들. 어차피 몇 다리 거쳐서 우리한테 까지 온 걸 텐데 누가 시켰는지 알게 뭐야. 이런 거 저런 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이야 그냥 돈만 많이 준다면야 닥치고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제길, 돈 있는 놈은 돈으로 나쁜 짓을 해도 잡혀가는 건 항상 우리 같은 돈 없는 사람인 거구만.” “불평할 시간있으면, 하나라도 더 뒤져봐.” “아 글쎄, 뭘 가져오라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 데 뭔줄 알고 무턱대고 뒤져, 뒤지길?!” 두 남자의 대화가 이루어질 동안, 현우는 컴퓨터가 놓여있는 방의 침대 밑에 숨은 채 남자들의 신발이 멀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드디스크가 담긴 가방을 들고 뛰기엔 쉽지 않을 텐데…’ 현우는 가방의 무게를 가늠해보며 그들이 떠날 때까지 기다려볼까도 생각했지만, 듣자 하니 자신들이 뭘 찾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고 있었고, 그렇다면 집안의 모든 것들을 샅샅이 살펴볼 것이었으니, 그 얘기는 결국 자신이 기어들어와 있는 침대 밑 또한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러니 현우는 어쨌든 빠른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어이, 일루 좀 와봐.” “왜, 뭐라도 나왔어?”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사는 여자 보통이 아닌가 본데? 이 옷장에 옷들 좀 보라고.” “흐미… 이게 옷이냐 천 쪼가리냐? 하여간 요새 것들은 창피한 줄을 모른다니까. 이러니 강간하는 놈들만 잘못했다고 할게 아니라니까.” 남자들의 목소리 진원지를 살펴볼 때, 분명 그 두 사람은 안방에 들어가 옷장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에, 현우는 조심스럽게 침대밑에서 기어나와 가방을 든 채, 거실로 나왔다. 그리곤 여전히 윤지의 화려한 옷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남자들의 동태를 살피며 현관으로 살금살금 걸어나와 도어락의 걸쇠를 수동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걸쇠가 완전히 도어락 안으로 사라지자, 현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는데 집에서 나온 후, 현우는 그러나 바보같이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도어락센서는 자동으로 구멍을 감지하고는 ‘삐리릭’소리를 내며 득달같이 움직였고. ‘아차!’ 현우가 뒤늦은 후회를 할 사이도 없이, 안에선 두 남자가 우당탕 달려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현우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분명 남자들이 더 빨리 달려나올 게 분명했기에, 무거운 가방을 든 채 갈팡질팡하다가 갑자기 윗층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현우의 모습이 막 층계 위로 사라짐과 동시에 남자들이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더니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에게 다급하게 입을 열며 층계로 뛰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못 탔을 거야! 쫓아가자!” “뭐야? 누군 줄 알고?! 혹시 집주인이기라도 하면…” “바보야, 집주인이 왔으면 숫자 버튼을 먼저 누르는 소리가 났겠지. 분명, 우리보다 한발 먼저 온 놈이 있던 거라고.지금쯤 얼마 못 갔을 거야. 그 놈을 잡으면 우리가 찾아야 했던 게 뭔지도 알게 되겠지. 어서 가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자,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도 곧바로 뒤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서 아무도 없는 공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동태를 살피던 현우는 재빨리 가방을 든 채 달려내려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에 발을 집어 넣어 다시 열리게 한 후 1층 버튼을 누르며 안도의 숨을 내 쉬었지만, 이내 1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현우는 그대로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절대로 먼저 내려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두 남자가 어느새 숨을 몰아 쉬며 현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햐~ 요 쪼끄만 새끼가 어른을 놀려먹으려고 그래? 나와, 이리 나와 새꺄!”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가 웃기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로 손을 까딱거리며 현우를 부르고 있었지만, 현우는 가방을 뒤로 감춘 채 겨우 도리질을 했다. 그러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뛰어들어오더니 현우의 아랫배를 거칠게 한 대 강타하고는 머리채를 꽉 움켜잡으며 질질 끌고 나왔다. “하여간 요새 어린 것들은 어른 말을 들어 쳐먹질 않지.” 결국 두 남자에게 이끌려 아파트를 빠져 나오게 된 현우는 그 어떤 방법도 생각나질 않았다. 자신의 힘으론 거친 두 어른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도망치자니 너무나 무거운 가방이 발목을 잡아챘다. '미안, 윤지야.' 처음으로 자신이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뻔도 했던 현우는 그러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았다. “도련님!” - 하연 때문에 호텔 룸으로 다시 들어온 남희는 가뜩이나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자신을 붙잡아 놓는 하연이 처음엔 마뜩지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입을 다문 채 하연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도저히 상황이 가늠이 안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윤지를… 기용하면 안된다니…” “말 그대로예요. 윤지와 조전무… 은밀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치만, 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조전무의 행태도 그렇고, 또 윤지도…” “윤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전무는 그럴 수 밖에 없을 거에요.” “?” “원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일 수록,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면 일부러라도 적으로 만들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학연, 지연, 그리고 여러가지 이권관계로 엮여 있는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려면, 그 본보기로라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 무너뜨려야만 하니까요. 그래야만 자신의 위치를 더 공고히 할 수 있을테니까요.” “아무… 이유도 없이 말입니까?” “없긴 왜 없어요.” “?” “자신들과 ‘다르다’는 크고도 아주 명백한 이유가 있잖아요.” 그제야 남희는 자신이 여태껏 알지 못했던, 세상의 무서움을 또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틀린’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 대항해 온, 이영후란 남자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먼저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려야 할 거 같은데요…” 남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눈빛이 흔들리는 하연의 모습에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단단히 결심한 듯한 하연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허나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리, 완전히 잠겨가고 있었다. “좀 전에 주차장에서… 본의 아니게 영후랑 이야기 나누는 거 들었어요.” “!” 남희는 순간 영후에게 사랑을 졸라댔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그러기도 전에 하연의 입에서 먼저 놀랄만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 이제 됐으니까… 영후 보내주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그러니까… 남희씨… 남희씨가 내대신… 앞으로 영후… 평생 지켜봐 주세요…” “바…박기자님… 지금 무슨 말씀을…?!” 남희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지만, 이내 하연이 남희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자, 손을 어쩌지도 못하며 하연을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부탁할게요… 어떻게든, 어떻게든 위덕대전 승리해줘요. 그리고, 4강에 올라가서 승리해줘요. 아니, 우승해줘요. 부디 우승해서, 우승해서… 우리 영후… 해외로 이적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연씨…’ 남희는 중요한 시점에서 하연이 스스로를 내던지려 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이 아는 이 세상의 단 한 남자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저 자신의 손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온도가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40부. 각자의 노림수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새벽의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있는 고급 세단 안에선 뒷좌석에 묻혀있는 현우도, 운전석에서 핸들을 가끔씩 좌 우로 움직이는 운전기사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요함과는 달리 현우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또 복잡했다. ‘그 사람들은 누구고… 또 아저씬 도대체 어떻게 알고…’ 분명, 앞에 앉아있는 남자와 차를 먼저 보내며, 현우는 어디에 간다는 말 따윈 전혀 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윤지의 집이라면, 길가에서 차를 보낸 후 혜미의 집에서부터 걸어갔었던 게 전부라면 전부였다. 그렇다면 결국 운전석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핸들을 잡고 있는 저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행을 했다는 결론만이 남을 뿐이었다. ‘전무님이… 시킨 걸까?’ 하지만 그도 잠시, 윤지의 아파트에 침입했던, 그리고 자신을 붙잡았던 두 남자를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그저 운전과 짧은 대답만을 할 줄 아는 남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돼버린 현우의 몸은 계속해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도련님!!” “아… 아저씨…” 두 명의 괴한에게 붙들린 채, 어두움에 인기척이라곤 모두 사라져버린 아파트 바깥으로 끌려 나오던 현우는, 윤지의 이런 사소한 부탁조차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자신을 한없이 원망하기만 했었는데, 그 순간 들려오던 운전기사 아저씨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빛이요 희망과도 같았다. 게다가 갑작스런 돌발상황에 두 괴한은 주춤거리고 있었고. “뭐… 뭐야?!” “우리 도련님께 그 더러운 손 떼지 못해!! 타앗!” 입을 염과 동시에 운전기사는 날아오르듯 그 둘에게 돌진했고, 숫적 우세라는 것도 잊어버린 듯, 두 괴한들은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정말 순식간이었다. 말쑥한 양복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동작으로 두 남자들의 복부와 턱에 단 한 번씩의 타격만으로 그것도 동시에 장정 둘을 간단히 쓰러뜨린 건. 퍽! 퍼벅! “어이쿠!” “어억!” 두 남자가 반격조차 시도하지 못한 채 길바닥에 그대로 나동그라지는 건 커녕, 늘 신사 같기만 하던 아저씨의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그보다 좀더 은색이었던 넥타이가 평소와 다르게 허공에서 휘날리는 모습 말고는 현우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은 참으로 멋있었다. 그리고 그 멋있는 모습에 반해 쓰러지듯, 이내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며 스르륵 쓰러지려 했고. “도련님!” 하지만 결코 현우는 바닥에 쓰러지지 않았다. 현우의 운전기사가 그전에 먼저 안아 들어주었으니까. 현우는 남자의 품이 너무나 편하고 아늑해서, 차라리 지금 이 남자의 품이 아빠의 품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가져본 것 같았다. “도련님, 정신차리세요! 안되겠군… 우선 병원으로” “아저씨…”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제가 보이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병원으로 모시고” “아니에요… 거기 말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던 현우는 그러나 겨우 기운을 내어 입을 열고 있었다. “네?” “전주… 전주로 가요.” 현우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운전기사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도련님?!” “그리고 저 가방도…” 현우의 시선을 따라가 본 남자는 두 괴한과 자신의 거리 그 중간에 놓여진 꽤나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바라봤지만, 이내 그보다 먼저 현우를 가볍게 안아 들고는 곧바로 차로 데려가 뒷좌석에 앉혔다. 그리곤 다시금 가방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걸어와 가방을 잠시 바라보았지만, 이내 한 손으로 집어 들곤 현우가 앉아있는 뒷좌석 발치에 놓아주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인사를 하는 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운전기사는 잡고 있던 문을 조심스럽게 닫아주었고,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로 어안이 벙벙해 하는 두 남자들을 바라봤지만, 그 시선에 담긴 의미와 고개 짓을, 또한 이어진 그 남자들의 의미심장한 끄덕거림 또한 현우는 보지도, 절대 알지도 못했다. - “하~암… 안 주무세요?” 어둠을 밝히는 침대 옆 스탠드의 불빛이 아직도 눈가에 가물거리자 수림은 한참을 자고 난 부스스한 몰골로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하지만 남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권코치…님?” 전혀 반응이 없는 남희를 다시금 부르려다 수림은 목소리를 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침대에서 상체만을 일으킨 채로 있던 남희는, 동영상 재생이 벌써 끝나 검은 화면이 된, 다리 위에 있던 노트북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깊게 잠이 들어있었으니까. “차암… 언니두…” 수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대에서 빠져 나와 남희에게로 다가갔고, 이내 노트북과 각종 자료들을 소리내지 않게 조심하며 정리하고는 이내 남희를 침대에 편히 눕혀주었다. “아…” 모든 게 다 정리된 거라 생각했던 수림은 그러나 하나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남희의 얼굴로 손을 뻗었고, 이내 남희의 날렵한 코끝에 걸쳐있는 안경을 조심스레 벗겨주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침대로 가려 했지만, 수림은 어쩐지 그냥 돌아설 수 없었고, 결국 한 손에 안경을 쥔 채로 허리를 숙여 살짝 벌어져 있는 남희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 주었다. “잘자요, 언니…” 수림의 키스 덕분일까. 남희는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하던 흔적 따윈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낮에 봤었던 하연의 그 눈물 덕분에 더 이상 번민할 사치 따윈 없었기도 했지만. - 우승을, 영후를 부탁한다며 남희의 손을 부여잡은 채 호텔 룸 안에서 한없이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다 남희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하나는 해보겠지만, 다른 하나는 아무래도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하연이 눈물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남희를 바라보자, 남희는 그 심연보다도 깊은 눈을 마주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기에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사실대로 말씀 드리자면… 감독님께선, 저의 제안에… ‘노’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 하연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이 바보가… 이 멍충이가…!’ “그래서… 전 한국여대 코치 업무를…” “……” “지금보다 더 전력으로 해볼 생각입니다.” “나… 남희씨?!” “처음부터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감독님이 아니실 테니까 말입니다.” 하연은 도대체 영후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들 어찌 이럴까 싶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남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런 하연에게 이번엔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며 남희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렇지만…” “네?” “하나, 들어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하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남희를 보며 부탁이 나오기도 전에 무조건, 무조건 들어 줄거란, 아니 꼭 들어주어야만 한다는 다짐을 해보고 있었다. - 혜미가 곤하게 잠들어있는 동안, 윤지는 반대편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 영후란 남자를, 그리고 한국여대를 생각하면, 자신의 머리는 그러지 말라했지만, 아직도 소재가 불분명한 아빠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그러지 말라했다. 이제 겨우 열 아홉의 나이의 소녀에겐 이런 극단적인 선택의 요구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고, 버거운 무게였다. ‘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침대 어딘가에 숨어있던 핸드폰이 소리도 진동도 내지 못한 채 불빛만을 깜빡이고 있는 게 윤지의 눈에 들어왔고 윤지는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어 핸드폰 액정화면을 바라봤는데, 액정화면엔 현우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얘가… 설마 벌써…?’ 윤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4시에서 5분이 모자라는 시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부탁에 이렇게 목숨을 걸 듯 들어주는 애도 있는데, 자신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저울질을 하고 있었던 건지 스스로가 어이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 고민은 여기서 그만하자.’ 드디어 윤지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고, 옆 침대의 혜미를 의식하며 꽤나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현우야.” ‘미, 미안. 혹시 자는 거 깨운 거니?’ “아니야 그런 거. 근데, 이 시간에 안자고 뭐해?” 윤지는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모른 척 현우에게 물었고, 역시나 현우는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 그게 실은… 윤지 네가 말했던 거… 아무래도 급한 거 같아서 가져왔어.’ “그랬구나… 지금 어딘데?” ‘어, 여기 호텔 주차장.’ 윤지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미안하지만 이리로 올라와 줄래?” ‘엇… 지금?’ 분명 현우는 혜미를 떠올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윤지의 눈엔 선했다. 때문에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 장난기는 여지없이 발동했고. “싫어? 그럼 뭐… 내가 내려가서 들고 오지 뭐.” 뻔히 하드디스크의 무게를 알고 있으면서도 윤지는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지만, 역시나 현우는 다급하게 만류했다. ‘아냐, 아냐! 그럴 거 없어. 이거 생각보다 무겁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가 올라갈게.’ “그래, 그럼. 문 열어놓을 테니까 벨 누르지 말고 들어와. 혜미 깰라.” 윤지는 왜 이런 순간에는 꼭 남자들을 약 올리고 싶어지는 건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벌써 혜미가 옆에 곤하게 잠들어있다는 사실을 현우에게 넌지시 알려주며 알게 모르게 가뜩이나 순진한 남자애 하나를 묘하게 자극시키고 있었다. - 주차장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현우는 무거운 가방을 든 채, 윤지의 방을 찾았고 이내 윤지가 알려준 숫자가 써 있는 룸을 찾았다. “여긴…가?” 윤지의 말 대로라면 문이 열려있을 것이었기에 현우는 잠깐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려 했는데, 순간 문고리에 손이 닫기도 전에 현우의 손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구…?” “헉!”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자의 목소리에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린 현우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또르륵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하연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한 채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누가 보기에도 여간해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을 만큼 노곤해 보였다.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하연은 그저 영후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는 서울로 올라가려 했었다. 결코, 영후가 붙잡아 주길 바라지 않았었고, 키스를 하며 룸으로 끌어들여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또한 알아차릴 새도 없이 자신의 옷을 벗겨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절대로, 절대로 이렇게 뜨거운 섹스를 몇 번이고 하게 되길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또 이렇게 몇 번의 격렬한 섹스를 해버리고 나니, 머릿속을 가득하게 채우고 있었던 고민과 걱정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것 따위, 이 따뜻한 남자의 품에선 티끌만도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이 남자가 허기를 느끼는 자신을 걱정하며 먹을 거리를 사러 나간 사이에 또다시 잊고 있었던, 산적해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엄습해오고 있었다. 하연은 노곤한 몸을 겨우 움직여 침대에 모로 누우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남희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철용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곤경에 빠진 한국여대 총장과 노감독.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단 한 남자, 바로 이영후라는 남자에게 귀결되어 있었다. ‘왜 하필…’ 하연은 점점 태풍의 핵이 되어버리는 듯한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 밖에 해주질 못하고 있는 자신이 답답했다. ‘차라리 영후가 보통 남자들 같았더라면…’ 늘 한숨처럼 머릿속에 스며드는 생각이 또다시 들자 하연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곧 영후가 컵라면과 소소한 군것질거리를 손에 들고 돌아올 것이었다. 그 남자에게 더 이상 복잡다단한 얼굴을 보이긴 싫었던 하연이었기에, 욕실에 가서 세수라도 하고, 엘리베이터 앞까지라도 마중 나가볼 요량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아찔한 전라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그곳에 그 멋진 하연의 알몸을 보아줄 그 누구도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 한편 모두가 잠든 시각, 가뜩이나 조용한 호텔 룸의 복도에선 때아닌 실랑이가 벌어지며 조금쯤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현우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후의 존재란 마치 티비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였을텐데, 그런 남자가 코 앞에서 자신을 멈춰세우고 있었으니 오죽 놀라고 또 신기했을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두 남자는 결국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입씨름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주면 내일 아침에 윤지한테 준다고 하잖니.” “그치만… 그럴 수 없어요. 이건, 이건 제가 직접, 그리고 지금 전해줘야 하는 거라…” “이 녀석아, 지금이 몇신 데 자고 있을 녀석에게 전해준다는 거야.” 윤지의 룸 앞에서 영후와 현우가 가방의 손잡이 한쪽씩을 각각 잡은 채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두 남자의 입씨름을 멈추게 하는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후야…?” 그제야 두 남자는 가방을 밀고 당기던 것을 멈춘 채 동시에 룸의 열쇠를 꼭 쥐고 있는 하연을 바라봤다. - “뭐?! 그러니까 이걸… 윤지가 가져다 달랬다고?!” 가뜩이나 가방에 한 가득 담겨져 있는 하드디스크의 수량에도 놀라고 있던 하연이었지만, 현우의 입에서 또다시 윤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물론 영후는 하연과는 다른 이유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고. “하지만, 이런 시간에 이런 식으로 방문하는 건 결코 좋아보이진 않는다구.” 하지만 영후와는 달리 하연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현우에게 말했다. “현우…랬니? 현우야, 괜찮다면… 하드 디스크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조금만 확인해볼 수 있을까?” “하지만…” 현우는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건 모두 윤지의 사적인 물품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예측할 수 없는 아이가 쓰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였다. 즉, 하드디스크 안에 그 어떤 충격적인 것들 것 들어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보여준 윤지의 돌발 행동과 더불어 윤지의 집에서 있었던 해괴망측한 일들을 떠올리자면 그것만으로도 절대적으로 거절해야만 했다. ‘참… 윤지의 집?’ 고민을 하던 현우는 그제야 방금 전 윤지의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보, 왜 잊고 있었던 거야?! 근데… 이 분들께 이야기 해도 되는 걸까…?’ 현우는 또다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대면해 본 남자의 눈은 참으로 맑았기에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근데, 아까 이걸 가지고 나오려는데 이상한 도둑 같은 남자들 둘이 윤지의 집에 들어왔었어요.” “뭐?!”, “그런…?!” 하연과 영후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말이 현우의 입에서 튀어 나오자 더욱 놀랐다. “근데… 보통 도둑 같았다면 돈 될 것들을 찾았을 텐데, 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뭔가를 찾는 것 같았어요. 꼭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은 것 같이…” “사주…?!” 순간 하연의 머리는 빠른 속도로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이것은 기회였다. 어쩌면 하드디스크 안엔 윤지와 조전무가 연결되어있는 무언가의 자료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영후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영후와 윤지의 관계는 하연이 걱정할 것도 없이 손쉽게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 더욱, 이 자료에 뭐가 들어있는지 봐야겠다.” 하연은 현우를 압박하며, 영후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는데, 역시나 그냥 넘어가 줄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고 결국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가는 데…?” “영후야, 그, 그건…” 영후의 말에 하연은 차마 백 퍼센트 확실치 않은 윤지와 조전무에 대한 의구심을 털어 놓을 순 없었기에 답답한 표정이었지만, 반대로 현우는 다행이라는 얼굴로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가만있을 하연이 아니었다. “모르는 거잖아. 이 아이!” “뭐? 그게 무슨…” “얘가 정말 윤지를 아는 건지, 아무도 모르게 윤지가 있는 방으로 숨어들어가려고 그런 건 지 모르잖아! 영후 너도 얘 모른다며! 저 가방은 핑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저 하드디스크 안에 들어있는 게 뭔지 확인해보면 되잖아!” “에에?!” 그야말로 억지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하연의 의견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현우는 자신의 말 말고는 지금 이 순간엔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하연과 현우를 중재하는 방법은 의외로 영후의 입에서 쉽게 흘러나왔다. “그것보다… 다같이 윤지가 있는 방으로 가보면 되지 않을까?” - 똑똑. 어두운 룸을 울리는 노크소리에 윤지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출입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는데, 역시 그곳엔 현우가 서 있었다. “열어놨다니까, 노크는… 어?” 그러나 현우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뒤에 서 있는 영후와 하연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윤지는 조금 놀랐지만 겨우 내색하지 않았다. “감독…님?” “어어, 아직 안자고 있었구나? 피곤할 텐데.” “다들… 어쩐 일이세요? 전 현우만 오는 줄 알았는데…?” “아… 그게… 그러니까…” 결국 현우의 말이 모두 사실로 드러나자 머쓱해진 영후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 했고, 그러면서 하연을 바라봤지만 하연은 영후와 달리 성큼 앞으로 나섰다. “가방 안에 든 하드디스크, 도대체 무슨 자료가 들어있는 거니?” 꽤나 도전적으로 들이대는 하연의 모습에도 윤지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잡고 있던 문 옆으로 비켜서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궁금하시면… 들어오시던지요.” - ‘휴우… 다행이다.’ 현우는 미안해하는 영후와 떨떠름한 표정의 하연이 겨우 돌아가고 나자, 속으로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행스러워했다. 물론, 갑자기 태도를 바꿔 영후를 잡아 끄는 것마냥 돌아가버린 하연의 얼굴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든. 결국 자신의 뜻대로 윤지와 혜미의 룸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한 하연은 자신만만하게 하드디스크를 요구했고, 하연의 요구대로 임의로 고른 하드디스크를 받아 든 윤지는 거리낌없이 노트북에 연결해서 보여주었는데, 잘 정리된 폴더 안에는 축구경기 동영상 뿐이었기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하연은 몇 번이고 손수 파일을 확인했지만 그 뿐이었다. 각종 축구경기의 영상만을 확인한지 일곱 번 째인가 되었을 때, 갑자기 하연은 밤새 앉아있을 것만 같던 얼굴을 180도 바꾸며 황급히 영후를 끌고 돌아갔지만, 여전히 그 방에 남아있던 현우는 괜히 일을 크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둠 속에 희석되어 버렸기에 윤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미안…” “뭐, 난 괜찮아… 근데… 넌, 괜찮아?” “어? 나야 뭐…” “그건 그렇고, 쟨 참 잘도 잔다. 꽤나 시끄러웠을 텐데…” 현우 또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윤지의 말을 듣고 보니 곤히 잠들어있는 혜미의 고른 숨소리가 이제야 들리고 있었다. “하긴 오늘 경기도 치뤘으니까, 피곤하기도 했겠지.” “경기는… 너도 출전했잖아. 넌… 괜찮은거야?” “나? 지금 내 걱정해주는 거야?” 어둠 속에서도 고양이 같은 눈을 반달로 만들며 미소 짓는 윤지의 얼굴에 현우는 역시나 금방 얼굴이 빨개졌지만, 윤지는 평소처럼 장난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현우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참 내가 가져온 거, 제대로 가져온 거 맞지?” “응, 고마워.” “근데 있지…” “?” “실은, 윤지 너희 집에 도둑이 들었었어.” “!” “내가 막 들어가서 나오려는데 들이닥치더라고.” “그…래서?” “으응, 우선은 컴퓨터 있는 방 침대 밑에 숨었지. 그런데, 좀 이상했어. 뭔가를 찾는 거 같았는데… 그게 돈이나, 뭐 그런 건 아닌 것 같았어.” “그랬구나.” 현우는 조금 놀라다 마는 윤지의 반응에 더 놀라고 있었다. ‘뭐지…? 별 일 아니라는 이 표정은?’ 하지만 이윽고 들리는 윤지의 말에 현우는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알고…싶니?” ‘알고 싶냐니… 그렇다면 정말 박기자님의 생각대로 뭔가가 더 있었단 건가?’ 현우는 또다시 급변하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겉으론 애써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어? 뭘?” “그 사람들이 찾던 게 뭔지.” “그…글쎄…?” “원한다면, 그게 현우 너라면, 보여줄 수도 있긴 한데…”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현우완 달리 역시나 윤지는 장난스레 손을 뻗어 현우의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었고, 역시나 현우는 질색하며 저만큼 도망갔지만, 이내 윤지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는 하드디스크 하나를 연결했다. ‘분명 저기에 들어있던 건 온통 축구 동영상 뿐이었을텐데… 그런데 대체 또 뭘 보여준다는 거지?’ 하지만 현우의 생각과 달리 윤지가 윈도우 탐색기가 아닌 이상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자, 어디엔게 숨어있던 폴더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윤지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차라리 그때 혜미에게 들켰던 게 전화위복이 됐네.’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볼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이 방치해 뒀었던 파일들을 감추기로 결심했던 건, 혜미가 윤지의 집을 찾았던 그 날 이후였으니까. 한편, 숨어있던 폴더 중 하나를 선택해 그 안에 있던 동영상 파일을 재생시키자, 난데없이 붉은 조명 아래 옷을 모두 벗고 누워있는 남자의 전신이 등장했다. “이게 무슨…?!” “보고 싶다며.” 현우는 영상 속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남자의 모습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곧이어 등장하는, 그것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리고 역시나 알몸의 여자의 모습에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현우의 순진한 모습에 윤지는 더욱 흥미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 “아라! 거기선 바로 돌아들어가야지! 그리고 나경이랑 하늘이는 이럴 땐 역습에 대비해서 항상 무게중심을 뒤쪽으로 두고!” 오전 훈련시간이 되자 수림은, 밤새 연구했던 셋트피스에 대해 세밀하게 지도하는 남희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지만, 셋트피스 훈련에서 제외된 윤지가 혼자 반대쪽 진영에서 공을 몰며 이런저런 드리블을 해보고 있는 것을 보다가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셋트피스 훈련에서 윤지를 제외시키는 거지…?’ “영후 놈 또 어디서 농땡이 부리는 겁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수림은 먼 발치에서 묻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는데, 역시나 그곳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철용이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서 있었다. 이에 수림은 양손을 나팔처럼 모아 입 주위에 모은 뒤 조금 크게 소리를 질러 답했다. “아, 요 옆 경기장에 계실 거에요! 오늘 있는 A조 경기 보러 가신다고 했거든요!” “하, 이 자식… 천하태평이군.” “네? 뭐라구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일 경기 잘 하십쇼~!” 철용은 수림에게 간단하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연습 경기장을 빠져나가려다, 다른 선수들과는 따로 떨어진 채 공을 가지고 드리블을 하다 넘어지곤 하는 윤지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하지만 철용과는 또 다른 이유로 윤지를 바라보고 있던 혜미가 훈련하는 도중에도 순간순간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 그리 크지도 않은 ‘이상한 신음 소리’에 잠귀도 밝지 않은 혜미가 깨어난 건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자는 척 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더욱 어이가 없었다. 이상한 신음소리와 뒤섞이며, 그렇게 보고 싶던 현우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고 있는데도, 등 진 채로 일정한 숨소리를 내며 자는 척을 하고만 있어야 하다니. 하지만 차마 겁이나 돌아볼 수가 없었다. 동영상 속 남녀의 달뜬 신음소리에 희석되어 들리는 현우와 윤지의 대화가 혜미의 여린 마음을 무섭게 만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현우는 현우대로 윤지의, 동영상 속의 모습을 지금 막 확인하고는 너무나 황당해하고 있었다. “이거… 설마… 윤지… 너…?!” 하지만 윤지는 현우의 이런 반응은 그닥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아직도 그대로인 거지? ” “뭐… 뭐가?” “첫경험 말야. 저렇게 하는 거. 여전히 아직인 거지?” 윤지가 동영상을 가리키며 현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황당한 것을 묻자, 혜미는 너무나 놀라 벌떡 일어날 뻔도 했지만, 놀랄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현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뱀과 같은 윤지의 손길이 어느새 현우의 바지 앞섬에 와 있었으니까. 게다가 어느새 반쯤 발기되어 있던 현우의 자지는 당황해 하는 현우와는 반대로 뜨겁게 윤지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고. “에엣!? 또 왜그래?” “얘 좀 보게? 그때 자는 혜미 알몸도 봤으면서 내숭은.” ‘뭐어?!’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하필 이런 때 듣게 되자 혜미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심정은 황급히 혜미쪽을 돌아보는 현우도 매한가지인건 분명했고. “그건… 그땐…!” “그땐 뭐?” “으으… 그건 그냥 실수였다고!” ‘그렇지? 그냥 실수였지? 현우 네가 그럴 아이가 아니잖아.’ 혜미는 겨우 진정하며 현우의 말에 안도했지만, 그도 잠시 뿐이었다. “그래, 실수였겠지. 실수로 혜미 가슴도 만지고. 네, 네, 모두다 실수였겠죠.” ‘뭣!!! 가슴을!!!’ “그건 네가 억지로…!” “아아, 그래. 내 힘이 너보다 더 센가 보네… 그치?” 윤지는 말을 마치며 장난스럽게 현우의 한껏 부풀어 오른 자지를 손안에 담아 꾸욱 잡았고, 이에 현우는 아찔한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 이러면 안돼… 혜미가…’ 그야말로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며 현우는 윤지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며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윤지는 현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왜, 왜냐니? 이런 얘기를, 또 이런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네가 더 이상한 거라고!” 정말 다급하게 이야기하는 현우와는 달리 윤지는 자신의 손에 잡혔었던 현우의 자지 크기를 가늠해보며 이미 영후의 자지를 입에 머금어봤던 혜미에게 생각보다 부담스럽진 않을 거란 생각을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글쎄, 현우 너도 내 친구지만, 혜미야 말로 내 둘도 없는 친구라서 말이지. 아무래도 베프인 혜미의 첫 경험이 나로서는 걱정된다 이거야.” 계속되는 윤지의 이야기에 혜미는 정신이 혼미했지만 어이없게도 마음이 놓이는 것도 같았다. 이런 윤지를 왜 믿지 못하고… 게다가 이어지는 현우의 대답 또한 혜미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그, 그런 거 배운다고 잘하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 “아니, 배우면 더 잘할 수 있거든?” 윤지는 조금은 다독이는 말투로 말하며 동시에 현우의 바지 지퍼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헉!’ 잠시 마음을 놓고 있던 혜미는 그러나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배우다니… 뭘?! 그리고 이건 무슨 소리지…? 이건 꼭…?’ 어느새 뒷걸음질 치던 현우는 혜미의 침대에 멈춰서 있었기에 혜미의 귀에는 모든 상황이 그 어느때보다도 실감나게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현우의 바지가 거짓말처럼 발목까지 내려가 있다는 것과, 윤지는 이미 고지를 점령한 장군의 눈빛으로 여유롭게 팬티위로 자지를 부드럽게 쥐어보고 있었다는 것은 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점점 감각의 초점이 자지로 모이고 있던 현우 또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음은 당연했고. “자, 잘하는 게 꼭 좋은 건…” “좋아.” “뭐?” “잘하면 좋다고. 여자도, 남자도.” “그,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어디가서 배워오기라도 하란 말이야?” 급기야 겨우 윤지의 손을 뿌리치는가 싶었지만,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고 우습게도 팬티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현우의 자지는 윤지의 시선에 정확히 일치하게 되었다. ‘뭐… 뭘! 배우긴 뭘 배워!!!!’ “안될 건 없지 않아?” ‘윤지야 너 지금 무슨!!!’ “그, 그렇게 되면 첫경험이 아닌 게 되잖아!!” ‘옳지! 잘한다 우리 현우!’ “첫경험이 뭐가 중요해?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처음 하게 될 때 안 아픈 게 더 좋지 않겠어? 너, 만약에 지금이라도 혜미가 섹스하자고 하면, 혜미가 만족할 만큼, 아니 아프지 않을 만큼 잘할 자신 있어?” “그, 그야…” ‘그… 그런가…?’ “바보야, 여자한텐 첫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건줄 알어? 첫경험때 기분이 좋기는커녕, 아프기만 한 게 대부분인데 만약에 다른 여자하고 달리 혜미가 아프지도 않고, 좋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면, 그건 누구에게 좋은 일이겠니?” ‘으… 묘하게 설득력있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이 몸이 몸소 가르쳐 주시겠다 이말씀이지.” “뭐, 네가?!” ‘뭐?! 윤지 네가?!’ “그래, 내가. 바로 지금.” “지…지금?! 설마… 여…기서?” ‘윤지야! 나 지금 안자거든?!’ “응, 왜 싫어?” ‘당연히 싫지! 현우야! 어서 대답해! 절대 싫다고! 안 된다고!’ “그, 그치만… 혜미가 깨기라도 하면…” ‘헐… 안 깨면 하고 싶단 얘기냐…?!’ “그거야, 운에 맡겨야지.” ‘으으… 하여간 믿은 내가 멍청이다…’ 결국 윤지의 말장난이었다고 생각한 현우는 바지는 발목까지 내려간 채로 이도 저도 못하고 있었지만, 윤지는 현우가 들어오자 마자 벗어버리려던 샤워가운을 이제야 단번에 벗어버렸고, 전혀 예상치 못한 윤지의 행동과 그로 인해 완벽하게 드러나버린 윤지의 나신에 현우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헉!” ‘뭐…뭐야? 무슨 일이야? 왜 현우가 놀라는 거지? 으… 답답해!’ “자, 슬슬 야간 수업을 시작해 볼까?” 남자 앞에서 알몸이 되어버렸음에도 부끄럼조차 보이지 않던 윤지는 반대로 어쩔 줄 모르는 현우 앞에 반무릎을 꿇더니 한 손을 팬티의 다리 부분으로 집어 넣어 꽤나 딱딱한 자지를 휘어잡았다. “으윽!” ‘뭐…뭐야?! 현우야, 왜그래?’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던 혜미는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잠들어 있는 것이었으니. 이 상황에서 갑자기 깨어 있었다며 벌떡 일어나기도 우스웠고, 또 계속 자는 척 하고 있자니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아니지…? 뒤척이는 척 하면서 돌아누워볼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생각이었지만, 혜미는 스스로 기특하다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최고의 '잠 연기'를 펼치며 윤지와 현우의 방향으로 돌아눕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역시나 귀로 들리는 것에 더욱 집중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지…?’ 아마도 자신이 뒤척이자 놀란 두 사람이 놀라며 저만치 떨어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 또한 생각 뿐이었으니 결국 혜미는 마음을 굳게 먹으며 조금 실눈을 떠 보았는데, 그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바로 코 앞에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현우의 말캉말캉하고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엉덩이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 무슨…?!’ 그런 현우의 엉덩이 앞쪽으로 언뜻 보이는 윤지의 머리에 혜미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저건… 설마…?!’ 분명 윤지는 지금 현우의 자지를 입에 머금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콘도에서 잠든 영후의 자지를 혜미의 입에 머금게 했었던 것처럼.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 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혜미는 그러나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부드럽게 머리를 움직이던 윤지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심서연은 한양여대와 강원도립대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는 전주 월드컵 경기장의 관중석에 들어섰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그 남자’가 와 있을 것만 같았기에 어두운 통로를 빠져나오자마자 텅 빈 관중석을 둘러보았고, 이내 다행스러운 미소를 지어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괜히 떨려오는 마음을 진정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저…” “네… 어? 너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 여기 계셨네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심서연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영후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며 의아한 얼굴로 심서연을 마주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그냥, 그러실 것 같았어요.” “아, 좀 앉을래? 아니지, 뭐라도 마실래?” “아니에요, 저 금방 가봐야 해요.” “그…래? 참, 바쁠 때지. 근데 왜 나를…?” “그냥,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 “어제… 하프타임 때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하프타임… 때?” “네, 전반전하고는 전혀 다른 팀이 되어버렸잖아요 한국여대 아이들. 도대체 뭘 어떻게 하신 거죠?” “글쎄… 내가 뭘 했더라…” 도대체 정말 감독답지 않은 장난스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남자 덕분에 심서연은 답변 따윈 아무 상관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얼마가 됐든 이 남자의 얼굴, 이렇게 바라보고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을 것만 같았다. “응, 생각났다.” “…?” “조금쯤 마음을 풀어줬던 거 같구나.” “마음…이요?” “응. 다들 평소답지 않게 딱딱해져 있었거든. 그래서 조금 다독여서 말랑말랑하게 해줬지.” “그…게 다에요?” “그렇지 뭐, 내가 대신 뛰어 줄 수도 없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영후의 농담 같은 말을 듣고 난 심서연은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대단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게 무언지는 심서연으로선 알 길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선수만이 알고 있는 최고의 방법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현역시절 선수로서의 활약이 미미했던 여주대의 감독과는 달리, 이영후라는 선수, 아니 감독은 언제부터인가 ‘벽’ 같은 것에 가로막혀 정체되고 있던 자신에게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거라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그랬는데 겨우… “아, 맞다. 언젠가 널 만나면 해주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는데…” “네?!” 심서연은 마치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듯 곧바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이영후의 친절한 눈빛에 덜컥 겁이 났다. 그제야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것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고. ‘적이 될 팀의 감독이잖아…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서연이 너, 참 편하게 얘기해도 되겠니? 우리 아이들이나 너나 전혀 다른 거 같지 않아서…” “네에…” “그래, 고맙구나. 음… 뭐부터 이야기를 해줄까? 아 맞다. 그래, 서연이 넌 분명 어릴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겠지? 맞니?” 심서연은 잔뜩 긴장한 채로 고개를 겨우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랬을거야. 그정도 실력을 갖추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을테지.”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심서연은 이 남자가 해주는 말이라면 단 한마디도, 아니 남자가 중간중간 들이쉬고 내쉬는 숨의 간격도 기억하겠다는 얼굴로 집중했다. “근데… 서연이 넌 그때만큼, 지금도 축구 하는 게 즐겁니?” “!!!” 영후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진 질문에 심서연은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것만 같았다. '즐겁냐니… 축구가 애들 장난이던가?' 축구는 전쟁과도 같았다. 아니, 그 옛날 잉글랜드에서 시작된 축구는 정말 전쟁과도 같았다고 했다. 마을과 마을이 벌이는 경기는 동네의 모든 남자들이 참가해 전쟁을 방불케 할만큼 치열하게 ‘축구’라는 것을 했다고 들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잉글랜드의 남자들은 그 지역에 태어난 것만으로 그 지역의 축구팀을 응원하는 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듯, 현대 스포츠 중에서 치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축구를 하는 선수에게 즐겁냐니…!? “누구나 첫 마음을 잊어버리고 살곤 하지만… 그 마음을 되돌리는 건 그리 어려운 건 아니더라. 특히, 내가 보기에 서연이 넌, 그때의 마음이 가장 필요한 것 같고.” “…” “내가 알기론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그것도 축구를 한다고 했을 때 좋아할 부모는 없었을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그런 우려를 물리치며 축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건, 그건 네 마음이 시켰기 때문이었겠지. 그치만 왜 지금의 넌 그때의 행복을, 즐거움을 잊고 있는 거니?” 마치 자신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 지켜봤다는 듯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심서연의 마음은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다…?!’ “만일 네가 좀더 즐겁게 축구를 할 수 있다면, 분명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예뻐질 수 있을 거다.” “감독님…” 좋은 해답을 제시해줬는진 모르겠지만, 꽤나 좋은 표정으로 변하는 심서연의 얼굴에 영후도 기분이 좋아지려했지만, 심서연의 어깨 너머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철용을 발견하고는 영후는 난감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또 구 선배한테 한 소리 듣겠는 걸?’ 하지만 이런 영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서연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 꼭 이기셔야 해요.” “어? 뭐라고 그랬니?” “이겨서, 꼭 다시 한번 제 모습 봐 주세요.” 철용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버렸던 영후는 그제야 미소 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심서연은 다시금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 “꼭이요!” 그러자 부드럽게 자신의 손을 맞잡아 주는 남자의 손길에 심서연은, 가슴 속으로 혼자만의 약속을 해보고 있었다. 결승에서 이 남자, 꼭 다시 만나겠노라고. - 씩씩거리며 경기장을 찾은 철용은 혼자 한가롭게 관중석에서 남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또다시 ‘적이 될 팀의 선수’와 정답게 이야기를 하는 영후를 발견하고는 제대로 한 방 날려줄 심산으로 빠르게 다가갔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심서연의 얼굴 덕분에 잠시 자신이 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행복한 얼굴로 멀어지는 심서연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다가 이내 겨우 생각이 났다는 듯 영후를 향해 고함치듯 소리쳤다. “얌마, 너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냐?!” “선배? 여긴 또 어떻게 알고…?” “그게 중요하냐?! 이 자식 이제 보니까 아주 악랄한 구석이 있네?! 임마, 아무것도 모르는 병아리 코치들한테 내일 경기를 맡겨놓고, 지는 여기 와서 한가하게 상관도 없는 경기를 보고 자빠져 있냐고!” “아아, 그거요… 후훗.” “’아아, 그거요?’ 이게 진짜… 웃어? 웃음이 나오냐 임마!” “근데 그 얘긴 또 어디서 들었어요? 권코치가 직접 얘기 했을리는 없고.” “그, 그래 임마! 권코치는 얘기 안했다! 근데 난 눈 없고 귀 없는 병신이냐? 엉?! 그리고, 아직 희망이 있는데도 포기하고 있는 바보 같은 네놈이 더 문제지!” “누가 그래요? 포기했다고.” “그럼 이러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냐, 앙?!” 그런데 어찌나 열을 냈던지, 영후는 꽤나 놀란 눈으로 철용을 바라봤는데, 그제야 철용은 조금 오버한건가 싶기도 했다. 처음엔 그저 영후의 해외 이적을 위해 막연히 한국여대의 경기를 지켜봤지만, 어쩐지 계속해서 그 녀석들이 성장해가는 모습들을 몇 번이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싹터오고 있었으니까. 물론 철용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있진 못했지만. “내일 경기는, 잘하면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뭐, 잘하면? 그럼 못하면?” “그야, 못하면 당연히 지겠죠.” “이자식이 진짜!” “으악~!” 급기야 철용은 세상 편한 영후에게 헤드락을 걸며 사정없이 조르기 시작했다. “진짜 이자식이 생각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너 임마, 축구 안할거야? 네놈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빅리그 팀들은 안중에도 없냐! 그리고 나는, 또 애들은 안보이냐고 이자식아!!! 내가 너 땜에 깡통이라도 차야 속이 시원하겠냐!!!! 애들이 실망해도 괜찮냐고!!!!” “켁켁, 서…선배… 숨막혀 죽어요!!” “넌 임마, 이럴 거면 죽어도 돼!” 영후의 머리를 겨우 풀어준 철용은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툭 던지고는 좌석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걱정되세요?” “그럼 임마! 내가 지금…! 에휴 말을 말자.” “저도 걱정스러워요. 내일 경기가 마지막이 될 까봐.” “!” “그치만, 내일 있을 경기 준비한답시고 제가 아이들에게 붙어 있으면, 안 좋을 것 같았어요. 저나, 또 아이들에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임마! 알아듣게 좀 쉽게 말해!” “아이들한테 안도감 같은 거… 주고 싶었어요.” ‘이 자식…!?’ 순간 철용은 영후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코치들에게 경기를 맡기고 감독은 4강에서나 붙을 팀의 전력을 분석하러 와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은 모두 조별 예선을 통과할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게 될 것이었다. 아니 꼭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더라도 영후 또한 신선이 아닌 이상, 한 순간이나마 아이들에게 다급한 속내를 내비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이자식은 수술하러 독일에 갔던 거야… 득도하러 갔던 거야…?’ “에라 나도 모르겠다!” 결국 철용은 일렬로 놓여진 의자 몇 개에 벌렁 누워버렸고, 그런 철용을 웃으며 지켜보던 영후가 이내 연이어 열리는 경기를 지켜보는 동안 어느새 저녁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고, 스탠드에는 밤하늘의 별이 빛나기도 전에 한발 빨리 조명이 먼저 밝아지고 있었다. - 주차장의 시동이 꺼진 자동차 속에서 노트북의 불빛에 하연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빛나는 눈으론 동영상 파일 이상의 크기를 표시하고 있는 탐색기에서의 하드디스크 용량 표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손으론 핸드폰을 쥔 채로 상대방이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있어.’ 하연은 노트북에 연결되어 있는, 지난 밤 윤지의 것에서 슬쩍 해온, 하드디스크를 바라보며 확신을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핸드폰에선 인사도 생략한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박하연 또 뭘 부탁하려고 전화질이냐?!’ “선배, 하드디스크에 들어있는 감춰진 파일 찾는 것도 가능해?” ‘어? 어어…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가능한거지? 그럼, 나 지금 바로 출발할테니까, 기다려! 가서 전화할께!” ‘어? 야 임마!? 지금이 몇신데!!’ 하연은 그러나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선배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며 전화를 끊고는 시동을 걸었고, 곧바로 엑셀레이터를 급히 밟으며 제발 조전무와 윤지의 연결고리가, 아니 조전무를 압박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나오기만을 바래보는 하연이었다. 41부. 혜미의 선택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언제 또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수림이 잠결에 요의를 느껴 일어나자, 남희도 덩달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아, 언니, 아직도 못자고 있던 거에요?” “아뇨, 잘 겁니다.” “근데 왜…?”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은 어쩐지 잠이 잘 안옵니다.” 남희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림은 내일, 아니 12시가 지났으니, 오늘 있을 위덕대와의 경기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코치 임에도 자신은 너무나 무사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으니 괜히 부끄럽고 또 미안했다. 때문에 수림은 남희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 얼굴로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흐음, 그럼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코치를 맡고 있지만 아직도 학생 같은 귀여움을 그대로 간직한 수림이 ‘곰돌이 푸우’가 가슴에 그려져 있는 잠옷을 드러내며 화장실로 사라지자, 남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내 수림이 힘차게 물이 내려가는 양변기 소리를 뒤로 하고 화장실에서 번개처럼 돌아와 자신의 침대로 가지 않고 남희의 침대에 뛰어들자, 남희는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수림씨, 왜…” “잠 안 올 땐, 사람이 안아주는 게 제일이거든요. 물론, 남자가 안아주는 게 더 좋긴 하지만 뭐 아쉬운 대로, 자! 누워보세요.” 수림은 당황하고 있는 남희 보다 먼저 침대에 눕더니, 양팔을 벌리며 남희에게 누우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 대회 사일 째. 위덕대와의 운명을 건 일전을 앞두고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에 나서던 아이들은, 관중석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우뢰와 같은 함성에 놀랄 뻔도 했지만, 어느새 너무나 정겨운 얼굴들이 보여지자, 아이들은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연습경기의 상대가 되어줬던 아저씨들과, 감독님과 함께 했었던 희망원의 아이들, 그리고 매일 스탠드에서 신바람 응원을 해줬던 남자애들과, ‘축구 다이어트’를 함께 해온 친구들까지 그야말로 스탠드 한쪽을 꽉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누군 좋겠네?” 윤지의 놀리는 듯한 말에 혜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윤지를 바라봤지만, 윤지의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관중석 어딘가를 가리키는 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절대 보러 오지 않을 거라 했었던 아빠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도 잠시, 이내 혜미의 눈에 가득 찬 건, 환한 미소와 함께 다름아닌 현우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는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아빠 규식의 눈치를 보느라 혜미도 소심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말았지만. ‘현우야…’ 분명, 기뻤지만 기쁜 마음보다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에 혜미는 이틀 전의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와 동시에 현우는 지금 메고 있는 가방 속에 들어있는 윤지의 선물을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 손을 뒤로 뻗어 확인해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윤지의 호텔 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측하고 있던 것처럼. - 호텔의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새 침대 시트와 휴지 등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카드를 밀며 청소 담당 여직원이 내렸고, 같은 복장의 또 다른 여자도 내리려 했지만, 먼저 내린 여자가 만류하고 있었다. “여긴 내가 할게.” “에에? 여긴 축구 선수들인가 뭔가가 쓰는 방이 많아서 힘들텐데… 그냥 같이 해요, 네?” “아냐, 너 보니까 오늘 좀 피곤해 보이더라. 그니까 여긴 내가 금방 해치우고 갈 테니까 내려가서 좀 쉬고 있어.” “그래도…” “어서 가. 나 맘 변하기 전에. 얼른?” “알았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은 여자는 고마운 얼굴을 문이 닫힐 때까지 유지하고 있었고, 밖에 서 있던 여자 또한 걱정말라는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내 문이 닫히자 표정이 바뀌며 바쁘게 카트를 밀고 윤지와 혜미가 있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직원용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조심스럽게 윤지와 혜미의 룸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침대 옆에 놓여있는 윤지의 묵직해보이는 가방이 눈에 들어오자 그 여직원은 흡족해 했지만, 그 여직원 또한 이틀 전의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 혜미는 눈을 감을 수도, 그렇다고 다시 돌아 누울 수도 없었다. 현우의 발가벗은 엉덩이가 눈 앞에 그득했기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것보단 현우의 그 단단할 자지를 입안에 가득 넣은 채로 고양이 같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 채로 윤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유...윤지야...?’ 윤지는 분명, 혜미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똑똑히 잘 보고 있으라는 듯 양손으로 현우의 엉덩이를 잡고는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양 볼을 불룩하게 만들어가며 정성스럽게 빨아댔는데, 그 순간 윤지는 자신을 갑작스레 밀치며 도망가는 현우 덕분에 뒤로 나동그라졌고, 혜미는 곧바로 눈을 다시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는 건데? 갑자기.” 윤지는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는데, 혜미의 귀에도 현우가 다급하게 바지를 챙겨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아. 난, 네 부탁 땜에 온 거지, 이러려고 온 건 아니니까.” 혜미는 윤지의 새초롬한 눈빛도, 현우의 꽤나 비장한 얼굴도 볼 순 없었지만 이제야 심박수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간다.” 이윽고 수습을 마친 현우가 담담하게 입을 열고는 나가려 했지만, 윤지는 현우를 그냥 보내려 하지 않았다. “기다려.” 그저 간단한 대화였지만, 그러나 혜미의 가슴은 순간 또 ‘덜컹!’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윤지야… 제발…!’ 하지만 혜미의 걱정과는 달리, 윤지는 현우에게 또다시 추파를 날리지는 않았다. 다만, 현우가 가져온 가방 속을 잠시 뒤지더니, 에어 캡으로 잘 포장되어 있는 하드디스크 하나를 꺼내고는 현우에게 내밀었을 뿐. “이거, 맡아줄래?” “이걸… 왜…?” “선물…이랄까?” 윤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잠시 고민하던 현우는 그러나 이내 조심스럽게 윤지의 손에서 하드디스크를 건네 받았는데, 윤지는 하드디스크가 자신의 손을 막 떠나려는 순간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워.” “……” 현우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윤지의 눈빛을 잠시 말없이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나갔고, 윤지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스탠드를 끄고는 침대에 누웠는데, 그 어둠 속에서 윤지는 혜미에게 나직하게 읊조렸다. “나… 밉니?” 혜미는 뜬금없이 물어오는 윤지에게 하마터면 입을 열고 뭐라 대답해 줄 뻔도 했지만, 잘 참아냈고, 묵묵히 혜미의 반응을 기다리던 윤지는 혜미에게 등을 지며 돌아눕고는 다시 말했다. “너도 지금 봐서 알겠지만… 현우, 좋은 애야. 그니까… 놓치지 마.” 혜미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에 윤지의 의도를 파악할 순 없었지만, 현우가 가고 나자 바짝 긴장했었던 것들이 일순간에 해소되며 잠이 쏟아졌기에 어느 순간 스르르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 기분 좋을 만큼 몸에 땀을 내고 라커 룸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그러나 영후 대신 커다란 화이트 보드에 그려져 있는 작전판 앞에 서 있는 남희와 자신들 틈에 섞인 채 미소만 짓고 있는 영후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야, 감독님이랑, 코치님이랑 무슨 일 있었냐?)” 어쩐지 조금은 어색한 현 상황에 골키퍼 미자는 조심스럽게 옆에 앉아 있던 아라에게 귓속말로 물었지만, 아라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미자와 아라 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얼굴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이 그득했는데, 이내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여는 남희에게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 주목. 오늘은 우리의 4강 진출에 가장 중요한 경기를 하는 날이야. 다들 알고 있지?” 남희의 말에 아이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A조에 비해 한 경기를 덜 치르는 운이 따랐지만, 한 경기를 지고 보니 사실은 어느새 벼랑 끝에 몰려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던 현실을 그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었는데, 겨우 한 경기만에 이제는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시점에 다다라 있었기에 오늘 경기는 중요함을 넘어서 자칫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경기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늘 경기 말고도, 내일 모레 있을 여주대와 위덕대의 경기가 남아있지만, 그 결과는 차후에 생각하도록 하고, 오늘은 오늘 경기에만 집중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어제도 설명해줬지만, 경기 시작 전에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오늘 경기의 포인트를 설명해줄게.” 남희는 잠시 아이들을 등지고 돌아선 후 보드 마커를 집어 들어 새하얀 보드 위에 한국여대의 포메이션을 적기 시작했다. ……………………………혜미 ……………………………아라 ……정화………………………………………소영 ……………………………………은채 …………………………지영 ……승은 ……………………진희…………미애………나경 ……………………………미자 서브 : 윤지, 하늘, 민지, 수정 후보명단까지 적고 나자, 남희는 별 다른 설명 없이, 곧바로 위덕대의 포메이션을 그 옆에 적기 시작했는데, 보드 위에 적혀지는 위덕대의 명단을 확인하던 아이들의 눈은 더없이 커져만 갔다. …………권하늘………곽지혜 ………홍은지…최수은…강기연 김도연………………………… 강주영 ………전이슬…한송이…신인숙 …………………정지수 이내 남희가 오늘 확정된 멤버들로 구성된 위덕대의 포메이션을 다 적고 돌아서자, 아이들의 표정은 모두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혜미도 당연히 놀라고 있었고. ‘코치님이 예상했던 멤버 그대로잖아?’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벤치에는 정선영, 윤선주, 이남영, 박현희, 그리고 서나래가 대기하고 있을 거야.” 급기야 벤치 멤버까지 정확하게 맞춰내자 아이들은 남희의 치밀한 분석력에 혀를 내둘렀다. 위덕대 선수가 총 23명이었음에도 선발과 벤치 멤버에 대한 예측이 완벽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 이제 이해가 가니? 우리의 포메이션이?” 남희는 공격수 두명, 즉 권하늘과 곽지혜, 그리고 왼쪽 윙백 김도연의 이름에 몇 번이고 동그라미를 쳤다. “이 세 명이야. 세 명 모두 현재 국가대표라는 건 더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러니 미애랑 진희, 그리고 지영이는 권하늘과 곽지혜를 막는데 중점을 두는 거야.” “코치님, 근데 은채는 왜 저렇게 삐딱하게 쓰셨어요?” 아이들 중 은채와 같은 미드필더를 보던 수정이 물었다. “그건…” 남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은채와 오른쪽 풀백 나경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위덕대의 키 플레이어인 김도연을 막기 위해서야.” “!!!” 남희에게서 답이 나오자, 아이들은 모두들 놀라는 얼굴이었지만, 계속 설명하는 남희 덕분에 아이들은 더욱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의 오른쪽 라인은 없다고 생각하고 플레이 하자. 즉, 오른쪽 라인은 수비에만 중점을 두잔 얘기야.” “코치님… 그럼…?” 역시나 보통 때보다 조금 더 위로 전진되어 있는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며 왼쪽 윙백인 승은이 입을 열자, 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그래, 우리의 오른쪽 라인을 버리는 대신, 위덕대의 오른쪽 라인은 우리가 점하는 거야.” “하지만, 포메이션으로 보자면, 미들라인이 엄청 단단할 거 같은데, 저 혼자선…” 은채가 덜렁 혼자만 그려져 있는 중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지만, 남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바로 답을 했다. “지난 번에 위덕대의 경기를 분석한 결과, 위덕대의 중원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어. 그러니 은채 넌, 오늘은 중원보다는 역시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김도연의 활동범위를 줄이는 데 역점을 둬야해. 돌파와 크로스를 경기 내내 막기는 무리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럼…?” 이번엔, 가뜩이나 지난 경기로 의기소침해 있던 두 중앙수비수 중 하나인 미애가 입을 열려 하자, 남희는 미애와 진희, 그리고 수비형 미드필더 지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중원이 아니라 양 사이드에서 경기의 추가 기울거야. 그러니 너희 셋은 조금 더 라인을 끌어올려서 가끔씩 중원에 도움을 주면 돼. 그리고,” 이내 남희는 왼쪽 윙 정화와, 왼쪽 풀백 승은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너희 둘의 호흡이 중요해. 소영이랑 나경이, 그리고 은채가 오른쪽을 지혈하는 동안, 너희는 왼쪽을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수비적인 하늘이 대신 투입된 공격성향이 짙은 나경이는 데뷔 전을 앞두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소영이와 눈빛을 교환해 보았다. “그리고 이 작전은, 아라와 혜미 너희 둘의 체력을 믿고 걸어보는 거야. 할 수 있겠지?” 남희의 물음에 혜미도, 아라도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리 사이드를 이용해 경기를 한다고 해도, 마냥 중원을 비워놓은 채 경기를 할 수 만은 없었다. 그러니 결국 혜미와 아라가 미드필더까지 내려와 수비에 가담해주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사실을 남희는 에둘러 말했지만, 어느새 두 아이들은 남희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예상을 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를 치르고 나면, 그 다음 4강 경기는 나흘 뒤니까, 이 경기에서 모든 체력을 소모한다고 생각하고 뛰어주렴.” 물론 오늘 경기를 무조건 이겨야만, 그리고도 여주대가 위덕대에게 패배하지 않아야만 하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모두들 그런 건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계산 같은 거, 하나도 즐겁지 않은 거니까. “자, 모두 준비 됐으면 경기장으로 나가자!” 그야말로 도박성이 짙은 작전이었기에 아이들은 남희가 모든 지시를 마치고 라커룸을 나가자 반신반의하며 하나같이 자신들과 같이 앉아 남희의 말을 경청하던 영후를 바라봤지만, 이번에도 예의 빙긋 웃어줄 뿐 영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나온다!” 관중석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선 것도 모자라 목을 길게 뺀 채로, 몸을 푼 후 다시 라커룸으로 사라져 버렸었던 한국 여대 선수들이 트레이닝 복에서 새하얀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채 등장하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금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여대 파이팅!”, “힘내라 한국여대!”, "누나 화이팅!", "언니, 힘내요~!" 게다가, 늘 한국여대의 스탠드를 메웠던 남학생들이 주도하는, 약속된 응원 ‘콜’이 외쳐지자 그렇게도 황량하기만 했던 이 경기장이 어쩐지 무척이나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는지, 첫 경기 때 보여줬던 긴장감 따윈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파이팅을 외치려 원을 짠 순간에도 모두들에겐 진지함보단 장난기가 넘쳐났다.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 거의 다 온 거 같지?” "희망원 아이들도 다들 왔던데?" “어, 게다가 남자애들도 꽤나 많이 왔는 걸?” “다들 강의 째고 왔나보다. 그치?” “그나저나 우리 이 경기 마치면, 단체로 미팅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너 남자 친구 있잖아?” “뭐, 그건 그거고.” “으이구, 있는 것들이 더 한다니까.” 그야말로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아이들의 모습에 혜미는 웃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풀어지면 좋지 않을 거란 생각에 짐짓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자, 다들 알지? 오늘 지면, 그걸로 끝이야.” 역시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아이들은 잠시 침묵속으로 빠져들었는데, 혜미는 그런 아이들을 하나 하나 돌아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치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해. 감독님도 우리가 그런 거에 연연해 하길 바라진 않으실거란거 다 알잖아. 그치?”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우린 항상 즐겁게 경기하면 되는 거잖아! 안그래?” 혜미의 구구절절한 연설에 골키퍼 미자가 어깨 동무하고 있던 아라와 소영이의 등을 장갑 낀 손으로 ‘팡!’ 때리며 말하자, 역시나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게 하는 거야, 알았지?” 이내, 혜미가 손을 내밀자 아이들은 너나 할것없이 손을 포갰고, 이어 혜미의 선창이 이어지자 아이들은 모두들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한국여대! 파이팅!” - 관중석에 앉아있던 총장은 꽤나 근심스런 얼굴로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노감독의 시선은 천하 태평하게 벤치에 앉아있는 영후가 아닌 조금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오늘의 감독은 놈이 아닌 겐가?” “네? 무슨 말씀이세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노감독 덕분에 총장은 깜짝 놀라며 물었고, 노감독은 그에 손가락으로 한국여대의 벤치를 가리켰다. 노감독의 손가락을 따라가 본 총장은 조금은 생경한 풍경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이영후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남희는 그와 반대로 앉는 것을 잊은 양 선채로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권코치가… 왜…?” 평소의 침착한 모습이 아닌, 뭔가에 쫓기는 듯 그라운드 바로 밖에 선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남희의 모습에 그제야 뭔가가 있음을 눈치 챈 총장은 노감독에게 다시금 물었지만 노감독은 대답대신 총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저 코치가 가르치던 과목이 뭐라 했던가?” “그때 말씀 드리지 않았던가요? 수학이에요.” “수학이라…” 노감독은 총장의 답변을 듣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고도 한동안 남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 이윽고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위덕대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는데 두 공격수 중 권하늘이 곽지혜에게 공을 받아 뒤로 돌리고 한국여대의 진영으로 올라섰지만, 혜미는 그와는 반대로 공을 쫓아 그들을 가로지르며 위덕대의 진영으로 달려 올라갔다. ‘역시 김도연 쪽인가…?’ 위덕대의 중앙 수비수 한송이가 권하늘에게 받은 공을 다시 센터백 전이슬에게 밀어주자, 그에 맞춰 한국여대의 오른쪽 터치라인을 타고 올라가는 김도연을 향해 전이슬이 패스를 날렸다. 하지만, “뻔히 보인다고!” 김도연에게 향하는 공은 어느새 길목을 가로막고 있던 은채에게 차단당했고, 은채는 공을 가로채자 마자, 텅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간 아라에게 재빠르게 패스를 했는데, 아라는 공을 받자마자 세 명의 센터백 틈바구니에서 손을 들며 달려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혜미와 눈빛을 맞추고는 공을 발등으로 부드럽게 차 올려 수비수들의 머리를 살짝 넘길 정도의 로빙 패스를 했다. ‘내 꺼야!’ 혜미는 아라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달리며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며 속력을 냈는데, 그 때였다. 위덕대 센터백 세 명이 동시에 손을 번쩍 든 것은. 삐~익! “무슨…?!” 오프사이드. 세 명의 센터백을 절묘하게 벗겨내며 공을 받으려던 혜미는 어이없게도 선심과 주심이 오프사이드를 선언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오늘 경기, 한국 여대로서는 힘들지도 모르겠군.” 오늘도 어김없이 현우와 함께 앉아있던 규식이 한숨 쉬듯 입을 열자, 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 규식은 그저 혼잣말이었음에도 현우가 귀담아 듣고 물어오자 결국 설명을 해주었다. “아 그게… 이거 참, 어디서부터 설명해줘야 하나… 그래, 현우 네가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실은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 선수들은 어떻게든 심판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애를 쓴단다.” “심판의… 눈을요?” “그래. 심판도 결국은 사람인지라 백 프로 완벽할 수 없으니까.” 규식의 말에 현우는 그제야 그라운드에 서 있는 주심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치만, 그런 걸 가려내는 게 심판인 거잖아요.” “물론 그렇지. 그렇지만, 속이려고 드는 데는 장사 없는 법이거든.” “그럼…? 지금 위덕대 선수들이 심판을 속이고 있단 말씀이세요?” “딱히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뭐랄까…” 규식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방금 전 혜미의 완벽한 돌파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오프사이드를 지적하려 센터백 세 명이 동시에 손을 번쩍 들어올린, 그래서 그 어필에 주심과 선심이 속아넘어가 버린 상황은 분명, 센터백들의 속임수였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것이냐 하면 또 그렇진 않았다. 그것은 현대 축구에선 실제로 노련함으로 포장되면 되었지, 악의 섞인 행동이라고 해석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영후 녀석, 그런 것까지 가르칠 위인은 아니란 말이지…’ 규식은 현우에게 설명 중이었다는 것도 잊은 채, 위덕대 골키퍼 정지수의 짧은 패스를 건네 받은 센터백 한송이가 공을 툭툭 치며 앞으로 나서는 것을 주시해 보았다. - ‘도연아, 간다!’ 열린 공간으로 공을 툭툭 치며 올라가다가 한국여대의 혜미와 아라가 접근해오자 한송이는 곧장 왼쪽 윙백 김도연에게 패스를 했다. ‘흥, 그런 작전이라면 벌써 알고 있다고!’ 혜미는 이미 소영과 은채가 김도연 쪽을 수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걱정을 접었지만, 접었던 걱정을 다시 해야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채, 붙어!” 소영이가 공을 몰고 달려나가는 김도연을 막으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미드필더 홍은지와 2대 1패스를 주고 받으며 간단히 제쳐지자, 멀어진 김도연을 보며 소리질렀는데, 은채는 겨우 김도연에게 따라붙고 있었다. “흥, 여기 까지야!” 이미 센터라인을 넘어서 달려 나오는 김도연에게 은채는 강력한 태클을 시도했는데, 김도연은 예상했다는 듯 공을 미리 전방으로 차 놓고 은채의 태클을 간단히 뛰어 넘고는 곧바로 가속하며 달려나갔고, 이윽고 오른쪽 풀백 나경이가 돌파 당할 것을 염려하며 조금 간격을 두며 가로막자, 갑자기 왼발을 이용해 오른쪽 중앙으로 달려드는 공격수 곽지혜를 향해 지체 없이 크로스를 날렸다. “진희, 지영이 어서 막아!” 자리에 앉기는커녕, 터치라인 앞 박스까지 나와 독려하던 남희가 평소와 달리 목이 쉬어라 외치는 것과 동시에 수비형 미드필더 지영이가 공의 낙하지점으로 뛰어가 몸을 솟구쳤지만, 곽지혜 또한 뛰어올랐기에 두 선수는 공중에서 동시에 충돌했는데, 마치 곽지혜는 부당한 충돌을 당한 양 추락하며 나뒹굴었고 그와 동시에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삐~익!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주인을 잃은 공을 집어 들며, 당연히 공격자 파울이라고 생각하던 한국여대 아이들은 그러나 주심이 지영이의 파울을 선언하자 어이가 없는 표정일 수 밖에 없었고, 주심에게 어필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한국여대 아이들은 하나같이 억울하다는 듯 벤치를 바라봤지만, 더 어이없는 상황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파울 상황이 석연치 않았었기도 했지만, 페널티 에어리어의 오른쪽 바깥 지점에서의 파울이었기에 당연히 선수들이 벽을 쌓고 나서야 시작 될 거라 시작했던 예상이, 위덕대 공격수 권하늘이 공을 바닥에 찍자마자 바로 프리킥을 날려 한국여대의 골네트를 흔들자 완전히 깨져버렸으니까. - ‘저런…!’ 본부석 쪽 기자석에 앉아있던 하연은 실점을 허용한 한국여대보다 위덕대의 플레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분명, 파울이 아닌 인플레이였다. 하지만, 가끔씩 프로 선수들 조차 타성에 젖어 상황상황마다 스스로 해야 할 것들에 대해 잊곤 했으니, 가뜩이나 경험이 부족한 한국여대 아이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프로선수들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았을, 위덕대 선수들의 노련함에 칭찬을 해 주어야 할 상황이었을 뿐. 사실 방금 전 프리킥이 주어진 상황도 그랬다. 파울이 선언 된 직후, 공격권을 가진 팀은 축구 규칙상, 곧바로 플레이를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린 다음에 곧바로 플레이를 펼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또한 플레이가 재개되는 것은 골 문에 멀고 가까운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는데, 그 점을 간과해버린 한국여대의 잘못이 더 컸을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런 때에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수비하는 팀은 곧바로 프리킥을 하지 못하도록 파울 지점으로 가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동료들이 단단한 벽을 형성할 때까지 그 어떤 플레이도 할 수 없게끔 막아야만 했다. 그러니 결국, 이런 ‘축구의 룰’을 완전하게 숙지하고 이용한 위덕대의 플레이에 하연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순하게 위덕대의 영민함에 반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하연은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남희씨, 어떻게 좀 해봐요…!’ - “뭐야, 벌써 한 골 먹은거야?” 조금 늦게 도착한 철용이 의외로 불어난 관중 덕에 규식과 현우의 자리를 겨우 찾아 앉으려다 말고, 전광판의 스코어와, 웃으며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위덕대 선수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왔냐?”, “안녕하세요.” “네, 어어 그래. 근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경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된 거 아닌가?” “위덕대 감독이 누군진 몰라도 잔재주들을 잘도 가르쳐 놨더군.” “잔… 재주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또 규식이 말하는 잔재주는 또 뭔지, 철용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 채 벤치의 남희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분명, 작전은 빈틈이 없었는 데… 그랬는데…’ 남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뒤에 앉아 있는 영후를 돌아봤지만, 영후는 초반부터 궁지에 몰린 남희를 돕기 위한 조언을 해주기는커녕,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터치라인으로 걸어나가 혜미에게 물병을 건네고 있었다. - “……” 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목이 마를 리 없었던 혜미였지만, 영후가 물병을 달랑달랑 흔들며 사인을 보내자, 경기가 재개 되기 전 터덜터덜 영후에게로 걸어와 물병을 건네 받았다. “임마, 잘 좀 해봐.” “네?” 영후의 말을 이해 못한 혜미는 곧바로 되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알 듯 모를 듯한 영후의 대답 뿐이었다. “윤지가 보고 있다고.” ‘윤지…!’ 혜미는 영후의 등 뒤로 보이는 윤지의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며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 벤치로 돌아온 영후는 이내 윤지의 옆에 털썩 앉았는데, 윤지는 혜미의 시선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시선은 경기장에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대체 혜미한텐 또 무슨 얘길 한 거에요?” “뭐가?” 윤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싱글거리는 영후를 미워 죽겠다는 얼굴로 흘겨보며 물었다. “혜미한테 뭔가 얘기하고 오셨잖아요.” “아, 그거? 그냥… 잘 하라고…” “……” 윤지는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는 남자의 미소를 보며 괜히 약이 올라 한마디 톡 쏴주려 했지만, 그보단 영후의 입이 조금 더 빨리 열렸다. “그보다… 잘 봐두렴. 혜미의 움직임.” “?” “비디오나 동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지금 현장에서 제대로 봐 두는 게 백배는 더 도움이 될 테니까.” “!” “이제부터가 진짜 혜미의 모습일 테니까, 단 일 분, 일 초도 놓치지 마.” 그제야 윤지는 영후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당장은 윤지가 메울 수 없는 간극이었던 스트라이커의 움직임. 그것을 지금 이 순간, 이 경기에서 보고 배우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윤지는 경기를 뛸 때보다도 더 집중하며 모든 초점을 혜미에게로 고정해보고 있었다. - 다시금 경기가 재개되고, 혜미는 좀더 기민한 움직임으로 세 명의 센터백을 달고 다니며 공간을 창출해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는데, 문제는 혜미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의 대처였다. 위덕대 선수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플레이가 계속 되자, 알게 모르게 서서히 짜증스러워 졌던 것이었다. “공 내놔!” 지영이 파울을 당한 후, 재빨리 플레이를 하려 공을 찾았지만, 위덕대 미드필더 최수은은 공을 집어 들고는 유유히 자신의 진영으로 몇 걸음 걸어가고 있었고, 그에 지영인 최수은에게 달려 들며 손으로 밀었는데, 순간 최수은은 마치 엄청난 태클을 당한 것 마냥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러자 주심은 지영에게 다가와 가차없이 옐로카드를 선사했고, 지영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벤치를 바라봤지만, 그럼에도 남희나 수림은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벤치에선 지금 그 무엇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혜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슨 말도, 지금 흥분한 한국여대 아이들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도. 오직 '골'만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벌써 20분. 어떻게든 한 골을 넣어야…!’ 하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미드필드를 생략한 플레이는 너무나 변칙적이었기에, 솔직히 정화와 승은이가 맡고 있는 왼쪽 라인에서만 올라오는 크로스를 원활히 받기가 쉽지 않았고,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어느 상황에서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있는 세 명의 센터백이었다. 간혹 혜미가 공을 받을 땐, 두 명은 앞 뒤로 혜미를 포위했고, 나머지 한명은 공을 앞에서 잘라먹거나, 혹은 뒤로 흘려 골키퍼에게 안착시켰기에 도대체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 “경험이 문제인가…” “예?” 역시나 버릇처럼 혼잣말을 하는 규식의 말을 놓치지 않고 현우가 재차 묻자, 규식은 말하기 좀 창피하다는 얼굴을 맨손으로 쓸어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실은, 지금 위덕대의 쓰리백은 그다지 강하지가 못하단다.” “네? 그게 무슨… 그치만, 혜미가 저렇게 고전하고 있는 걸요.” “그게… 현우 너도 보면 알겠지만, 위덕대의 쓰리백은 상당히 호흡이 잘 맞고 있는 걸 알 수 있을게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혜미가 저렇게” “하지만, 왜 위덕대는 쓰리백을 운용하고 있을까?” 규식의 스무고개를 하는 듯한 이야기에 현우가 머리를 굴릴 동안, 듣고만 있던 철용이 불쑥 끼어들었다. “설마, 선배. 위덕대 센터백들 개개인의 함량이 부족하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잣대 아닌가요? 세상에 선배 눈에 만족스러운 센터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물며 여자 선수들이라면…” “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철용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규식은 여주대의 심서연과, 자신의 딸 혜미가 플레이 했었던 센터백의 모습을 떠올리며 비단 그 녀석들을 갖다 대지 않더라도, 자신의 눈은 결코 틀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그 딸 답게, 혜미 또한 그 순간 비슷한 생각을 해보고 있었고. - 왼쪽 윙 정화가 볼을 트래핑 하다가 놓치며 터치 아웃 되자, 위덕대 오른쪽 윙백 강주영이 또다시 한국여대 선수들의 신경을 긁으려는 듯, 볼을 잡은 채 한참이나 올라와 거의 센터라인 즈음에서 드로잉 했는데, 그 순간이었다. 볼을 받으려던 곽지혜의 앞을 가로 막으며 혜미가 공을 인터셉트 한 것은. “아라, 달려!” 공을 잡자 마자, 전방에 머물러 있던 아라를 찾으며 혜미는 소리쳤는데, 그 순간 위덕대의 센터백들이 움찔하는 것을 눈에 넣어두고는, 단번에 아라 쪽으로 패스를 하지 않고, 반대로 왼쪽 터치라인에 서있던 왼쪽 윙 정화에게 간결하게 패스를 줬다 받으며 간단하게 위덕대 오른쪽 윙백 강주영을 벗겨냈다. 그러자 센터백 중 하나인 신인숙이 어쩔 수 없이 혜미를 막아 서려 라인을 깨뜨리며 올라왔는데, 패스를 할 것인지, 돌파를 할 것인지 고민하던 중, 마치 규식의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혜미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혹시 세명의 센터백이라면, 설마 세 명이 아니라면?!’ 결국 그 짧은 순간, 결단을 내린 혜미는 방향을 전환하기는커녕, 저돌적으로 달려들다가 순간적으로 ‘크루이프 턴’을 했고, 그러자 신인숙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로 혜미를 놓쳐버렸는데, 그러자 혜미는 곧바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진입함과 동시에 골키퍼 정지수와 맞닥뜨렸다. 하지만, 동시에 뒤에서 달려드는 한송이의 가쁜 숨결도 느껴졌는데, 분명 다급함을 느낄 수도 있는 순간이었지만, 혜미는 이상하리 만치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꼭 봐줘 윤지야!’ - 윤지는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순간적인 이대 일 패스에 이은, 완벽한 드리블, 그리고 수비 한 명을 그대로 바보로 만드는 턴까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에 윤지는 전율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비 하나를 달고 들어가며 동시에 골키퍼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세밀함은, 분명 현장에서 두 눈으로 보지 않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혜미야!’ 이윽고, 왼쪽 페널티 에어리어로 파고들던 혜미는 골대에서 결국 튀어나오는 골키퍼 정지수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슛을 날리려 했는데, 뒤에서 쇄도하던 한송이가 태클을 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혜미의 슛 모션은 너무나 빨랐고 또 간결했다. “안ㅤㄷㅙㅅ!!!” 마지막으로 골키퍼 정지수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각도를 줄이며 달려 나왔지만, 미처 두 다리 사이는 줄이지 못했는데, 혜미는 바로 그 다리 사이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 위덕대 골키퍼 정지수가 뒤늦게 다리를 오므려봤지만 이미 공은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 매끄럽게 잔디 위를 구르며 이내 골네트를 흔들었고, 역시 한 발 늦은 태클을 시도하던 한송이와 엉키며 잔디위를 뒹구는 혜미였지만, 이내 언제 넘어졌냐는 듯 벌떡 일어나 관중들의 환호를 유도하며 터치라인 바깥을 전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골이에요! 골! 혜미가! 혜미가!” 그야말로 답답했던 가슴을 뻥 뚫어주는 골을 혜미가 성공시키자, 관중석은 한번 크게 들썩이고 있었고, 수림은 남희에게 안겨 방방 뛰고 있었는데, 혜미는 기쁨을 나누려던 선수들을 피하며 전속력으로 달려오더니 남희도, 수림도, 그리고 영후마저 제쳐둔 채 곧바로 일어서있던 윤지에게 와락 안기고 있었다. “혜… 혜미야…?!” “윤지야, 봤어? 내가 넣었어! 내가 넣었다구!” “그래, 잘 봤어. 정말 멋있었구.” “진짜? 진짜 멋있었어?” 윤지보다 키가 큰 혜미가 양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진 채 윤지의 품에 안겨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는데, 그 둘을 바라보는 현우의 마음만이 참으로 복잡했을 뿐이었다. - 이윽고, 1 : 1 의 팽팽한 스코어가 증명하듯, 한치의 물러섬도 없던 두 팀은 결국 그 점수 그대로 전반을 마쳤고, 선수들을 다독이며 라커룸으로 들어서던 남희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안심하는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무승부는 필요없었기도 해서 였지만, ‘너무… 오버 페이스 해버린 것 같은데…’ 남희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이들 중 몇몇은 이미 전반전을 치른 것 만으로도 체력이 바닥이 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위덕대는 오늘이 첫 경기였으니 충분히 체력적으로 준비가 된 상태였을 테고, 반면 한국여대는 바로 이틀 전 최강 여주대를 맞아 90분간 사력을 다해 싸웠으니, 실은 시작부터 체력적인 열세를 안고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었다. 허나 체력적인 문제를 처음부터 지적했더라면, 아이들은 체력 안배에만 신경쓰다 경기를 그르칠 수도 있었기에 남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지. 우선은 급한 불부터.’ 결국, 남희는 수림과 상의해본 후 한 명, 혹은 두 명을 교체해서 후반을 맞이해야겠다는 구상을 해보고 있었다. - “휴우… 녀석 이제야 깨달은 건가. 그나저나 후반전은 그리 어렵지 않겠군.” 숨막히는 전반전이 끝나자 그제야 숨을 몰아쉬는 규식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현우는 마냥 신이 나 있었다. “아저씨, 혜미가 진짜 잘한 거죠?” “그게 무슨 말이냐?” “아니요, 눈으로 봤으면서도 안 믿겨 져서요. 세상에 몇 명이나 혜미를 막았는데…”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여는 현우의 모습에 규식은 괜히 우쭐해지는 것 같았고, 동시에 철용의 추파에 규식은 더욱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니까 선배, 혜미도 제가 찜했습니다. 아셨죠? 예?!” - 이렇게 밝은 분위기의 관중석과는 달리, 간략한 설명을 마친 남희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휴식을 부여해주기 위해 라커룸을 빠져 나왔는데, 남희를 뒤따라 혜미가 득달같이 달려나왔다. “코치님!” “?” “코치님, 후반전엔 윤지를 투입시켜 주세요. 분명, 위덕대 수비는 윤지의 스피드를 감당하지 못할 거에요. 그러니까” “그건… 안돼.” 혜미는 정색하며 안 된다고 말하는 남희 때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윤지를 걱정해서 그런가보다 싶어서 더욱 매달렸다. “네? 갑자기 왜… 아, 설마 윤지가 피로감을 느낄까 봐 그러시나 본데요, 윤지는 저보다” “그런 게 아니야.” “네? 그런 게 아니라니… 그런 게 아니라면, 윤지가 못 나올 이유가 없잖아요!” “후우…” 남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납득시켜 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분명 윤지가 있었다면 경기의 상황은 180도 달라졌을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건 '이전의 윤지'일 때 얘기였다. 지금의 윤지라면, 남희는 그것이 좋은 쪽으로 바뀔지, 나쁜 쪽으로 바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나쁜 쪽으로 바뀌리란 것에 거의 확신할 수 있었고. 때문에 남희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윤지는 절대로 출전하지 않을 거야.” “네?!” 혜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 “물론 오늘 경기를 이겨야 또 경기를 치를 수 있을 테지만, 그렇게 된다 해도… 윤지는 앞으로 출전하지 않을 거다.” “왜… 왜요? 왜 그런 건데요? 윤지가 어디 아프데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무슨 문제라도…?!” “이유는 나중에 차차 말해줄게. 오늘은 우선 그렇게 알고, 체력안배에 신경 쓰도록 해. 후반 시작하면서 하늘이와 수정이 두 명의 교체 카드를 쓰기로 했지만, 공격수는 현재로선 혜미 바로 너 뿐이니까.” 혜미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마치고 사라지는 남희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게… 아닌데…’ 혜미는 윤지의 천재적인 재능에 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되는 건 결코 바라지 않았다. 이런 건, 전혀 즐겁지 않았으니까. 혜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때마침 영후가 나타나자 혜미는 다짜고짜 영후의 앞을 막아서며 ‘꽥!’ 소리질렀다. “도대체 무슨 얘기에요?! 윤지를 출전시키지 않는다니요!!!” “혜, 혜미야? 그게 무슨 얘기니? 윤지를 뭐?” “무슨 생각이신 거냐구요!!! 누구보다도 윤지가 이번 경기 벼르고 있을 거라는 거 감독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근데, 근데 그런 윤지를…” “혜미야…?” 도대체 혜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영후는 서 있었지만, 그 울음 그득한 얼굴로 혜미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영후는 잠자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듣고 있었다. “음… 그랬구나…” 혜미에게서 남희가 했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영후는 그러나 그리 놀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감독님도 모르셨던 거에요? 그런 거에요?” “그렇긴 한데, 코치님도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한국여대 감독은 바로 감독님이시잖아요! 이영후 감독님이 우리 감독님이시잖아요!” “혜미야, 그치만 우리는 모두 한 팀이잖니. 감독이라고 해서 항상 독단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는 거란다.” “그치만…” “분명, 코치님이 보기엔 윤지에게 위험요소가 있는가 보지.” “……” “하지만 감독님도 혜미 생각에 동의한단다. 모두가 함께 해야, 더 기쁘고 즐거운 법이니까.” 그제야 영후의 생각도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된 혜미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그걸로 모든 게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 ‘윤지는 출전하지 않을거야.’ 남희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혜미는 후반전이 시작한 이래로 위덕대의 전방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얜 갑자기 왜이래?’ 혜미의 옆에 서 있던 센터백 한송이는 또 뭔가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날까 잔뜩 긴장한 채로 혜미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마치 성난 들소같던 전반과는 달리 후반엔 마치 목석이 되어버린 양,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아라가 혜미의 위치만을 확인하고 패스를 보낸 건. “혜미!” 하지만 패스를 보내고 나서야 넋이 나간 듯한 혜미를 보게 된 아라는 ‘꽥!’ 소리를 질렀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혜미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공을 알아보고는 받으러 달리려 했지만, 그 순간, 같이 움직이던 한송이의 발에 걸려 넘어지며 그라운드를 굴렀다. “저런!” 관중석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고, 순간 한국여대에서 파견된 의료진이 그라운드로 달려들어가,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혜미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혜미야, 괜찮아? 어디 좀…” 의료진에게 상태를 보이려던 혜미의 머릿속에서 순간, 하프타임 때 남희의 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공격수는 현재로선 혜미 바로 너 뿐이니까.’ 그 말이 떠오르자마자 혜미는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동시에 발목을 잡고 더욱더 그라운드를 뒹굴기 시작했다. “아…! 아파요! 손대지 마세요!” 생각보다 크게 다친 것 같은 혜미의 모습에 의료진은 손도 쓰지 못하고 있다가, 들것이 들어 오자 가까운 터치라인으로 혜미를 데리고 나가 상태를 살피려 했지만, “아프다구요!!! 쫌!!” 버럭 화까지 내는 혜미 덕분에 의료진은 뭘 해보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은, 반대편 터치라인에 서 있는 남희에게 양손을 교차 시켜 ‘X’자를 그려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낙심하며 고개를 떨구는 남희를 바라보며 혜미는 그제야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흥, 이래도 윤지 안 내보낼 건가요!’ - ‘윙인 민지와 윤지…’ 남희는 머리가 깨지는 것만 같았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미드필더와 풀백을 위해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하늘이와 수정이 두 명을 투입한 것이 이렇게 패착이 될 거란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럼, 아라를 위로 올리고…’ 하지만 윙 포지션이 세 명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남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경우의수를 동원하며 궁여지책을 짜내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남희의 귀에는 영후의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임마, 축구화 끈을 맨날 내가 묶어 줘야겠냐?” “아잇 참, 잘 묶었다니까요~” 지금의 긴박한 상황이 두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에 남희는 아련한 눈으로 영후와 윤지를 바라봤다. ‘저렇게 사이 좋은 사람들인데, 왜…’ 조전무만, 아니 축구만 아니었다면, 분명 더없이 좋은 사이가 되었을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권코치님, 권코치님!” “네? 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느라 정신을 놓고 있던 남희에게 수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야 남희는 정신을 차렸다. “어쩌실 거냐구요? 혜미 대신 누굴 넣으실 건가요?” 수림의 촌각을 다투는 물음에도 남희는 여전히 윤지의 축구화 끈을 묶어 주는 남자의 듬직한 등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남자는 일어서서 윤지에게 어깨 동무를 한 채로 남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남희는 잠시 얼굴이 붉어지는 듯도 했지만, 이내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분명, 선수 선발에 관한 것을 포함해서 오늘 경기에 대한 전권을 제게 넘겨주신 걸로 아는데요?” “그야, 물론이에요.” 그제야 왜 오늘 영후 대신, 남희가 홀로 방방 뛰어 댔는지 수림과 윤지는 비로소 알 수 있었는데, 그것과 별개로 남희는 영후의 어깨 사이의 윤지를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 쉬듯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준비는… 됐겠지?” 결국, 어쩔 수 없이 남희는 윤지에게 물었지만, 윤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수림은 부리나케 대기심에게 달려가 교체 번호를 알려주었고, 그와 동시에 윤지는 영후가 묶어준 축구화 끈의 단단함을 느끼며 터치라인에 조심스럽게 서보고 있었다. 42부. 반짝반짝 빛나는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윤지가 혜미를 대신하기 위해 대기심에게 복장 상태를 확인시키며 터치라인에 서자, 관중석에 있던 철용과, 기자석에 앉아있던 하연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둘은 동시에 마음속으로 똑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고. ‘저 아인, 윤지는 안돼!!!’ - 노감독은 먼 쪽의 터치라인 바깥에서 부축을 받으며 이제야 일어서는 혜미와 이제 곧 경기에 투입되기 위해 준비중인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조금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셔보았다. 그리고 그런 노감독의 반응을 총장은 놓치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그런 총장의 모습에는 ‘혹시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하는 걱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 그냥 좀… 아쉽다랄까, 뭐 그런 기분이 들어서 말이오.” “네? 아쉽다니요… 그게 무슨...?” 총장은 언뜻 노감독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꽤나 볼만 할 것 같던 ‘두 명의 조합’을 기대하고 있던 노감독의 속내는커녕, 그저 혜미의 부상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리라 어렴풋이 짐작해볼 뿐이었다. 그리고 노감독의 아쉬운 표정은 어느새 새로운 기대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기에, 총장은 괜한 걱정을 했나 싶어 안도의 숨을 내 쉬어 보았다. - 벤치의 반대편 쪽 터치라인에서 부축을 받으며 벤치로 돌아온 혜미는 여전히 터치라인에 선 채로 주심의 사인을 기다리는 윤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꽤나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괜찮은 거야?” 남희가 경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벤치에 앉는 혜미를 돌아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남희를 대신해 수림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는데, 혜미는 그제야 너무 표정 관리를 안하고 있었나 싶었던지, 잔뜩 얼굴을 찡그려 보았다. “뭐, 그럭저럭요.” “휴, 난 또. 십 년 감수했잖니. 어쨌든 괜찮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모르니까, 아이싱이라도 해두자. 발 좀 이리 내보렴.” 수림은 혜미의 앞에 무릎을 꿇은 뒤 조심스럽게 축구화를 벗겨주었고, 미리 준비해 놓은 얼음주머니를 혜미의 발목에 대고 랩으로 테이핑을 해주었는데, 발 뿐만 아니라 심장에 이르기까지 꽤나 열이 올라있던 혜미는 얼음이 주는 시원함이 반가워 양 손을 얼음에 댄 채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지만 혹여 열정마저 식을까 싶어 윤지에게 그 뜨거운 마음을 전해주려는 듯, 속으로 외쳤다. '윤지야, 힘내!' - 하지만 혜미가 그렇게 응원을 해주고 있었음에도, 윤지가 교체를 요구하며 서있는 것을 주심은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혜미에게 당하던 공간의 압박이 사라지자 마자, 위덕대 왼쪽 윙백 김도연은 공을 단 채로 한국여대의 오른쪽 터치 라인을 따라 올라갔다. ‘이렇게 어수선할 때가 골이 나기에 가장 좋은 때니까!’ 역시 위덕대의 키플레이어답게 김도연은 경기의 전반적인 소강상태를 알아채며 그 틈을 노리고 있었다. 은채를 대신해 들어온 미드필더 수정인, 아직 자신을 수비하는 데 있어서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인데다, 제대로 자신을 막고 있던 오른쪽 풀백 나경이 아웃 되고, 왼쪽에 있던 승은이 오른쪽으로 옮겨 왔기에 지금 이 순간이 한국여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라고 김도연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드리블해가는 자신의 속도를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미드필더 수정을 확인하며 더욱 굳어져 갔고. ‘승은이라는 풀백, 돌파해버릴까? 아님, 크로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드리블하면서도 김도연은 전방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했는데, 이윽고 승은이 자신을 향해 접근해오자, 그대로 크로스를 날리려는 모션을 취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승은이 몸으로 크로스를 막으려 뒤돌아 뛰어올랐는데, 승은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써 김도연은 자신을 비웃듯 공을 몰고 저만치 달려나가고 있었으니까. 승은이 김도연의 속임 동작에 너무나 가볍게 돌파 당하자, 권하늘을 주시하고 있던 중앙수비수 미애는 어쩔 수 없이 김도연을 막기 위해 중앙을 진희에게만 맡겨둔 채 오른쪽 사이드로 빠져 나왔는데, 김도연은 그런 미애를 슬쩍 보더니 텅 비어있던 미애의 빈자리로 가볍게 땅볼 크로스를 날렸고, 그와 동시에 공격수 곽지혜가 파고드는 것 같자 홀로 남아있던 진희가 사력을 다해 태클을 했지만, 곽지혜는 공을 터치하기는커녕 전혀 건드리지도 않은 채 그 궤도 그대로 옆으로 흘려버렸고, 그 흘러간 공은 그 뒤에서 득달같이 쇄도하던 권하늘의 발에 제대로 걸리고 있었다. 촤~악! 1 : 2 드디어 역전에 성공하자, 권하늘과 곽지혜, 그리고 김도연이 한데 엉켜 즐거워하며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갔지만, 그들 중 김도연만을 윤지는 여전히 터치라인 밖에 선 채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이윽고 센터라인에서 경기가 재개되기 전에야 윤지는 경기에 들어갈 수 있었고, 중앙 센터서클에서 공을 뒤로 돌린 후 혜미가 있었던 자리로 한달음에 올라갔지만, 나름 좋은 공간을 찾아 다니며 후방의 동료들에게 몇 번이고 손을 들어 보였는데, 어쩐지 공은 전혀 윤지에게로 날아오지 않았다. ‘왜…?’ 그에 윤지는 미드필드 상황을 바라보았는데, 확실히 김도연의 왼쪽 라인이 살아나자 그와 더불어 위덕대의 미드필더들 또한 기세를 올리고 있는 게 그대로 확인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여대의 진영은 별반 변화가 없었기에 윤지는 자연스럽게 혜미의 존재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혜미가 나갔다고 이렇게…?’ 윤지는 혜미가 한국여대 팀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 정도였던가 싶어 새삼 경외심마저 들었지만, 지금은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전반과 달리 중앙 미드필드에서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지만 한국여대의 중원은 너무나 허술해보였고, 결국 세기에서 밀린 수정이가 공을 빼앗기자 그 공을 점유한 위덕대 미드필더 홍은지는 가볍게 오버래핑을 나가는 김도연에게 밀어주었는데, 역시나 김도연은 공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바람을 가르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이거, 어렵겠는걸…” 규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을 하자, 현우가 그런 규식을 못미덥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어? 왜?” “아저씨, 솔직히 잘 모르시는 거죠?” 대 선수 규식을 앞에 두고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는 말을 꺼내는 현우가 철용은 너무나 어이없었지만, 규식은 그런 애송이를 혼내기는커녕,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묻고 있었기에 철용은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어? 뭘 몰라?” “그렇잖아요! 잔뜩 인상을 쓰면서 ‘힘들겠는걸~’ 했다가, 또 조금 있으니까 이번엔 ‘이길 수 있겠다’고 하질 않나, 또 이번엔 ‘어렵겠다’ 하시잖아요!” 전혀 말이 안되는 얘기가 아닌, 꽤나 그럴 듯한 말이 현우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이런 다급한 순간에도 불구하고 철용은 하마터면 ‘풉!’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도 했다. ‘그런… 얘기였나.’ “아 그야…” 규식은 자신이 그랬던가 싶어, 잠시 쓴웃음을 지어보았다. 현우의 말은 아마 맞을 것이었다. 솔직히 규식은 한국여대 아이들의 경기만큼은 어쩐지 쉽게 파악할 수가 없었으니까. 분명 규식의 눈에 들어오는 한국여대란 팀은, 이미 자신도 알다시피 완벽하게 조련된 팀도 아니었거니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와있기는커녕, 순간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삼류 팀을 방불케 할 정도였었다. 게다가, 그나마 축구선수로서 성장세에 있던 혜미가 교체되자 그 지배력이 사라져버린 시점이었으니 더욱더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 더욱 정의할 수 없는 저 아이, ‘윤지’ 때문에라도 규식은 이 시합의 결과에 대해서 한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식은 한국여대란 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보였다. 규식이 지금 느끼고 있는 느낌은 마치, 마치 그것과 비슷했다. 아무리 연패를 달리고 있어도 내 팀은 내 팀일 수 밖에 없었던 그 옛날의 선수 시절과. 그랬다. 규식은 정말 오랜만에 ‘내 팀’이라는 애정을 담아 한국여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누군가 물어온다면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때문에, 또다시 측면이 손쉽게 무너지고 있는 한국여대를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었다. - 김도연은 혜미라는 아이는 뭐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야말로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뛰어다니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으니까. 때문에 혜미가 나가버린 좀 전의 순간에, 이 경기의 결과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한국여대의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 달려갔다. ‘봐, 이런 날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그야말로 연습경기 때보다 더 손쉽게 돌파를 감행하며 긴장감 같은 건 어느새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것 같은 김도연이었지만, 그 때였다. 절대로 자신을 따라잡을 스피드는 없다고 생각했던 김도연의 귓가에 처음 듣는 숨소리가 들려온 건. ‘어?! 이게 무슨…?’ 하지만 채 그 숨결의 주인공을 확인할 새도 없이 뒤에서부터 김도연의 발 아래로 공을 향한 태클이 들어왔고, 김도연은 무방비로 있던 상황에 그대로 공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공이 사라지자 무게 중심을 잃고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도대체 누가?!’ 너무나 정교한, 그리고 과감한 태클에 주심은 나동그라지는 김도연을 보고도 휘슬을 입에 조차 물지 않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맞이한 김도연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그 이상한 숨소리는 이미, 무덤덤한 한마디를 남긴 채로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너무 느리다구.” ‘뭐?!’ 김도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한 마디에, 바닥에 넘어진 채로 겨우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 했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그저 벌써 공을 가로채 저만치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새로운 스트라이커’의 뒷모습만이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에 김도연은 충격을 받은 듯 쉽게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귓가에 맴돌던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곱씹어 보고 있었다. ‘느리… 다구? 누가? 설마… 내가?’ - ‘녀석 하고는…’ 영후는 전반전의 치열한 상황들 속에서 혜미가 보여준 수비 가담까지 눈 여겨 봐둔 윤지가 기특하기만 했다. 그저 공격수가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들을 눈과 머리에 담아두라고 했던 것뿐 이었는데, 윤지는 마치 먹을 빨아들이는 화선지 마냥, 보는 것 모두를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노감독의 제자 아니랄까 봐, 그런 기특함에 영후 또한 옆에 앉은 혜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아쉬운 감정을 삭이고 있었는데, 혜미는 영후가 칭찬의 뜻으로 자신을 보듬어 주는 것을 느끼자 그제야 수줍은 미소로 영후를 바라봐 주었지만, 가만 보니 영후의 얼굴엔 뭔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 때문인가…?’ 영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더 뛸 만 함에도 스스로 교체를 선택한 것이 미안해지려 했지만, 그래도 혜미는 잘 한 거라고 자신을 다독거렸고, 그런 혜미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영후는 혜미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어 준 후에야 그라운드로 시선을 옮겼다. - 그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건만, 너무나 손쉽게 김도연을 따라잡고는,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간단하리만치 공까지 빼앗은 윤지는 그 여세를 몰아, 눈 깜짝할 사이에 하프라인에서부터 반원이 그려진 페널티 에어리어 앞까지 다가가고 있었는데, 김도연의 활발한 공격 가담과 더불어 위덕대의 2선 모두가 한국여대의 진영에 몸 담고 있었기에 윤지는 별다른 제약 없이 위덕대의 수비진영으로 들어와 곧바로 센터백 중 한명인 전이슬과 바로 맞닥뜨렸다. ‘어쩌지?’ 윤지는 숨이 가빠지는 와중에도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혜미가 전반전에 보여준 ‘그것’들을 하기엔, 전이슬 뒤에 또다시 기다리고 있는 한송이와 신인숙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처음 본 것들을 무조건 바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세 명의 센터백이라…’ 하지만 그때 윤지의 머리에 떠오르는 (수 백, 아니 수 천 번은 본 것 같은) 또 다른 돌파 방법이 있었다. 물론, 수 십 번을 돌려 본 다른 것들은 어렵지 않게 따라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건만, 아무리 몇 번을 돌려봐도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그것’만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거… 될까?’ 이제 와서 또 다른 생각을 쥐어짜내기에는 이미 전이슬과 너무나 가까워져 있었던 윤지였기에, 결국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기로 하고, 그대로 전이슬을 향해 더욱더 가속을 하며 달려나갔다. - “어, 어?” 현우는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윤지의 방향이 너무나 이상해 자꾸 ‘어?’를 연발하고 있었지만, 규식도 현우에 못지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아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수비를 피하기는커녕, 수비수를 향해 달려드는 듯한 윤지의 모습에 규식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는데, 그 옆의 철용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어 보고 있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거냐!' 철용은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겨우 10분 남짓 남아있는 시간을 확인해보고는 시계줄이 끊어질 정도로 손목에 힘줄이 서도록 주먹을 꽉 쥐어보고 있었다. - ‘설마…?!’ 노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윤지는 파주에서 영후가 직접 보여준 ‘그것’을 하려는 것이었다. 노감독 자신도 그 현장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만,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그 드리블을, 한낱 열 아홉 살의 소녀가 지금, 바로 눈 앞에서 하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지난 번 경기 때의 모습을 비추어봤을 때, 아니 당장 오늘 경기에서의 모습으로만 보더라도, 그런 드리블은커녕 기본적인 플레이조차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음이 자명했는데,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것을 보여 주려 하니 노감독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녕… 그 정도로 배움의 속도가 빠른 것인 게냐…’ 하지만 이윽고 노감독이 놀란 눈으로 바라본 벤치에는 영후가 평온한 얼굴로 흥분은커녕, 심심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한가하게 앉아있었기 때문에 노감독은 도무지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또한 윤지의 드리블 속도를 따라잡으며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 “간닷!!!” 수비수들을 향해 달려오는 건 그저 위장일 뿐, 결국은 방향을 선회하며 사이드로 빠진 후 지원군을 기다릴 것이란 예상을 깨고, 홀홀 단신의 윤지가 그대로 돌진해오자 전이슬은 당황할 뻔 했지만 애써 침착 하려 했다. 드리블 속도는 분명 그 빠르다는 김도연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지만, 그 속도는 다른 한국여대 선수들조차 따라붙지 못할 정도였기에 수비수 셋과 공격수 하나인, 즉 3대 1의 구도가 만들어 진 지금 상황은, 저 공격수의 같은 편에게도 ‘독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어떤 잔재주도 없이 직선일변도의 드리블에, 의외로 혜미보다 막기 쉬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전이슬은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달려드는 윤지를 두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아 보고 있었다. ‘별거 아니야. 침착하게, 침착하게!’ 하지만 전이슬이 채 마음의 준비를 완벽히 하기도 전에 어느새 윤지는 더욱더 불 같은 속도로 코 앞까지 다가왔는데, 그런데 그 순간, 전이슬은 마치 환영을 본 것도 같았다. ‘어?! 뭐…야?!’ 퍼~억! “아얏!”, “으악!” 순간적으로 시선이 흔들렸던 전이슬과, 무슨 생각에선지 그대로 전이슬에게 달려든 윤지는 그대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정면 충돌하고는 동시에 그라운드에 쓰러졌고, 주심은 황급히 다가와 두 선수의 상태를 살폈는데, 큰 부상이 없어 보이자 엄청난 충격에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고르고 있는 전이슬과는 반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떡 일어서는 윤지에게 너무 위험한 플레이였다는 것을 지적하며 옐로 카드 한 장을 선사했다. 하지만 윤지는 카드를 받은 것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곧바로 뒤로 걸어갔는데, 윤지와의 충돌에 타격을 입은 전이슬은 겨우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지만, 괜찮냐는 동료들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한 채 윤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자꾸만 눈을 비벼보고 있었다. ‘눈이… 왜 갑자기 흔들려 보인 거지…?’ - ‘허, 이런… 아직은 미진한 겐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던 노감독은 윤지의 오른쪽 어깨와 전이슬의 오른쪽 어깨가 충돌하며 드리블이 결국 그것으로 끝나버리자 아쉬운 표정을 하며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간만에 축구장을 찾아 가뜩이나 어색했던 총장은, 자신을 신경 써주기는커녕 자꾸만 노감독이 시선을 끌만한 이상한 행동들을 반복하자, 민망해하며 노감독의 허벅지를 약하게 꼬집으며 다그쳤다. “오늘 대체 왜 자꾸 이러시는 거에요? 갑자기 일어나시질 않나…” “아, 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오.” 노감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입으로는 말하고 있었지만, 분명 윤지가 보여준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 하지만, 윤지의 그런 행동은 여전히 불안해 하던 몇몇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오해를 사기 딱 좋을 행동이었다. ‘기어코, 경기를 망치겠다는 건가…’ 하연과 남희, 그리고 철용은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전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해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영후만은 여전히 재밌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며 잔뜩 걱정스런 눈으로 윤지를 바라보는 혜미에게 말을 해주고 있었다. “혜미야, 남은 시간 동안 윤지의 동선을 잘 봐두렴.” “네? 동선… 이요?” 혜미가 영후의 말을 확인하려 영후를 바라보며 되물었지만, 어느새 영후는 다시 재개된 경기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기에, 혜미는 그저 윤지가 공격수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 좀더 편한 패스를 할 수 있도록 윤지의 플레이 범위를 기억해 두라는 뜻으로 해석하고는 역시나 영후와 똑같이 진지한 모습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고작 단 한 번 뿐이었지만, 윤지의 스피드를 두 눈으로 확인한 위덕대의 쓰리백들은 더 이상 함부로 중원으로 올라오지 못했고, 올라오기는커녕 항상 윤지보다 몇 걸음 위치를 내린 채로 윤지의 주변에서 떠나지 않았다. 허나 윤지 덕분에 중원에서 운신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어진 지영은 위덕대 미드필더 최수은이 공격수 권하늘에게 패스를 보내자 간단하게 중간에서 커트해내고는 곧바로 왼쪽 측면을 돌아나가는 왼쪽 풀백 하늘이에게 스루패스를 보냈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코치님의 사인이 좀…’ 지영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윤지와 위덕대 수비수의 충돌이 있은 직후 받은 남희의 사인은 분명 윤지에게로의 패스 빈도를 최대한 줄이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트래핑이 불안하다고 여기시는 걸까?’ 확실히 윤지의 트래핑은 특훈의 결과로 조금, 아주 조금쯤 나이지긴 했지만, 그건 자유로울 때나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물며 실전에서 그것도 두 명 이상의 센터백들이 순간적으로 에워 싸는 데는, 윤지가 아닌 혜미일 지라도 공을 트래핑 하기는커녕 간수하는 것도 벅찰 것이었다. 때문에 수정이와 아라가 미드필드에서 간간히 찔러주는 패스를 윤지는 계속해서 위덕대의 센터백들에게 손쉽게 뺏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윤지의 플레이를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 이해 못할 것은 남희의 지시였다. ‘그렇다고 패스를 하지 말라니…?’ 지영이는 잠시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았는데, 자신들의 원 톱에게 패스를 하지 않고 경기를 풀어나가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때문에 지영인 전방을 바라봤는데, 윤지가 센터백들을 달고 다니며 거의 사이드 쪽으로 빠져있으면서 손으론 페널티 아크 쪽을 가리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려는 거지?’ - 하연은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으면 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 아인?!’ 혜미가 아웃 되고 나서, 당연히 위덕대의 거센 공격이 계속될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지금은 정 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물론, 혜미가 빠진 순간에 이루어진 득점으로 인해 이기고 있는 팀이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수비를 하는 것에 있어 자의에 의한 것과 타의에 의한 것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위덕대가 타의에 의해 일방적인 수비를 하도록 만든 선수가 단 한 명이라는 것에 놀랄 수 밖에 없었고. ‘홀로 세 명의 센터백들을 끌고 다니는 모습도 그렇고, 단 한번의 스피드 경쟁으로 김도연을 무력화시켜 버린 모습, 그리고 그 결과 사이드 대 사이드의 전쟁이었던 경기 내용을 충실한 미드필드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변화시킨 것까지… 확실히 지금의 MOM (Man of the Match)은 분명 저 아이야!’ 이 모든 건, 오직 ‘윤지’라는 아이가 투입되고 나서 해 낸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을 때처럼 마냥 저 아이에게 반해있을 수만은 없었다. 저 아이의 실체를 지금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하연의 윤지를 바라보는 시선엔 한 가득 애증이 담기고 있었다. - 한결 수월해진 미드필드에서 공을 건네 받은 수정이의 눈에도, 역시나 자꾸 사이드로 빠지면서도 순간순간 중앙으로 패스를 넣어달라고 손짓을 하는 윤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지만…’ 수정이도 남희의 사인을 마냥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분명, 윤지에게 혜미와 같은 플레이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었고. 겨우 한 경기의 실전을 치렀을 뿐인 한국여대 아이들은 어느새 경기를 보는 눈이 생겼기에, 혜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리고 그 대단한 플레이를 윤지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수정인 애써 윤지의 시선을 외면하며 전방의 아라에게 패스를 했다. - 분명, 아라의 눈엔 윤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몇 번이나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다른 아이들이 어이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첫 경기 때 윤지가 해줬던 것들을 그새 잊어버린 거야?!’ 지금의 원 톱은 윤지였다. 그럼 윤지를 믿고 공을 보내주어야 했다. 남희에게는 나중에 혼나면 될 것이었다. 때문에 아라는 공을 잡자 마자 센터라인과 페널티 에어리어의 중간 부근에서부터 곧바로 페널티 에어리어로 파고드는 윤지의 모습을 확인하며 별 고민도 없이 그대로 페널티 아크 쪽으로 스루 패스를 찔러 넣었다. ‘윤지야! 해봐!’ - 드디어 아라로부터 패스가 들어올 것 같자, 윤지는 어슬렁거리던 것을 멈추고는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로 뛰어들었고, 갑작스럽게 가속도를 낸 윤지를 세 명의 센터백들은 무방비로 놓칠 수 밖에 없었기에, 윤지는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며 골키퍼 정지수와 일대 일의 찬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공이 골대로 향하지 않고, 페널티 에어리어의 구석 쪽으로 방향이 변하자 트래핑을 하지 못하던 윤지는 그대로 공을 쫓아 달렸고, 그 덕에 센터백들은 일제히 귀환해 윤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골키퍼와 세 명의 센터백들이 일제히 윤지에게 슈팅 타이밍과 각을 내어 주지 않은 채 오른쪽 골 포스트 바깥쪽으로 몰았다고 생각한 순간, 결국 윤지의 몸은 달려오던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골라인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듯했는데, 그 순간, 윤지는 자신의 뒤에 남은 채 자신처럼 골라인을 넘어가려는 공을 향해 사력을 다해 발을 뻗었는데, 공이 아웃되기는 커녕 살아 움직이자 완전히 윤지를 봉쇄했다고 생각한 위덕대 선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국 윤지가 경기장 밖으로 튕겨져 나가면서도 가까스로 힐패스를 해버리자 공은 윤지와는 정 반대로 골키퍼와 수비수 사이를 부드럽게 빠져 나와 마침 뒤따라 쇄도하던 무주공산의 아라에게 건네졌고, 아라는 그야말로 골키퍼까지 자리를 비워버린 텅 비어있던 골대에 간단히 공을 차 넣었을 뿐이었다. - “어머!? 어쩜 좋아! 들어갔어요! 동점이라구요!!” 얌전하게 앉아만 있다가 갈 것 같았던 총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노감독은 겉으론 ‘허허’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지만, 속으론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설마… 의도한 겐가?!’ 노감독은 윤지가 저것을 의도했다면 그야말로 믿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윤지라는 아이의 스피드는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하루 이틀 만에 축구의 모든 기술들을 완벽히 구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공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결국, 저 아인 지금 경기를 치르며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노감독은 저 아이의 성장을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싶다는 욕심마저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것이냐…’ - 잔디를 미끄러지는 세레머니를 하는 아라에게 모든 아이들이 달려들어 기쁨을 나누고 있었지만, 남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함께,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윤지에 대한 의혹으로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윤지의 고급 기술을 전혀 파악 못하고 있었기에, 좋은 기회를 일부러 날리려던 것이 어떻게 골로 연결된 것이라 생각하며 남희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달리 담담하게 공을 집어 들어 센터서클로 돌아가는 윤지를 바라보며 더욱 마음을 졸일 뿐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기회를 날려버리려 했던 거야!’ - 후반 말미가 되어서야 완전히 경기의 주도권을 쥔 한국여대는 그러나 여전히 한 골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기쁨도 잠시 접어 둔 채 또다시 공격의 고삐를 죄고 있었다. 때문에 남은 힘을 그러모아 한 발 더 움직이며 공과 사람을 막아서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정인 최수은에게 공을 빼앗을 수 있었고, 다시금 달려드는 홍은지를 피해 뒤쪽의 지영에게 공을 돌렸는데, 지영인 공을 받자마자 곧바로 오버래핑 나가는 왼쪽풀백 하늘이에게 패스를 했다. 자신이 달려나가는 속도에 맞춰 보내준 지영의 정교한 스루패스에 하늘인 감탄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위덕대 미드필더 강기연을 보며, 잡생각은 한 순간에 떨쳐버리고는 자신의 속도와 맞춰 달리고 있는 왼쪽 윙 정화에게 살짝 공을 내줬다가 강기연을 따돌리고는 다시금 돌려 받았다. ‘한 명? 아니 두 명인가?’ 하늘인 여전히 속도를 죽이지 않고 드리블 해 나가면서, 자신의 앞을 막아 설 오른쪽 윙백 강주영과 함께 센터백 중 하나인 신인숙이, 윤지를 두고 협력 수비를 하러 올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이는 모습을 확인했는데, 결국 돌파나 크로스가 올라오기 전에 애초에 막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신인숙이 윤지의 곁에서 떨어져 나오며 자신 쪽으로 달려들자, 하늘인 그 두 명이 가까워지기도 전에 전방을 확인하며 왼발로 낮고 빠르게 크로스를 날렸다. 하지만 전반전부터 해오던 대로 크로스를 날리는 것에 집중하고 나서야 하늘인 센터백 한송이와 전이슬이 에워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윤지의 모습과 동시에 남희의 사인이 기억나 아차 싶었지만, 이미 공은 발을 떠났기에 어쩔 수 없었다. ‘윤지! 이겨내!’ - 하늘이를 막기 위해 다른 두 명의 센터백들과 떨어져 버린 신인숙은 그러나 자신의 머리위로 쏜살같이 날아가는 공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지만,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송이와 전이슬의 제공권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미 윤지의 트래핑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못할 거야!’ 그리고 신인숙의 생각처럼, 윤지는 전이슬과 한송이의 벽에 가로막히며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고 있었다. - 윤지는 어정쩡한 높이로 날아오는 하늘이의 패스를 받으려 낙하지점을 찾아 자리를 잡았지만, 어느새 따라붙은 전이슬과 한송이 덕분에 공을 쉽게 받기는커녕, 받는다 해도 뒤돌아 설 수 조차 없을 것만 같았다. ‘어쩌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두 센터백들에게 파묻혀버린 윤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가장 자신 없는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랴, 센터백들과의 어깨 싸움에 버티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한송이가 자신의 앞으로 튀어나오며 번개같이 공을 가로막으며 머리로 막아냈는데,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듯 공은 한송이의 머리에 빗겨 맞으며 앞으로 튕겨나가지 못하고는 머리 바로 위로 솟구쳤다. - “아아…” 남희는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윤지에게 공을 투입하지 말라는 사인을 동점이 된 이후에도 몇 번이고 보냈었는데, 혜미를 위시해서 중원을 비우고 사이드에서의 크로스를 지시한 작전 자체를 지금에 와서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작전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이들의 저런 무의미한 크로스는 결국 남희의 잘못인 것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동점골을 만들어준 윤지를 완전히 의지하고 있었고. ‘이래서는… 이래서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릴 텐데…’ 한국여대의 우승은 커녕, 4강 진출도, 또한 이영후란 대 선수의 해외 이적까지. 그 모든 게 그대로 여기서 멈춰질 것이었다. 그리고 하연과의 약속 또한. 남희는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어그러질 거란 상상 조차 하기 싫었기에 질끈 눈을 감아보았는데, 그 때였다. 관중석과 벤치에서 천둥 같은 환호성이 들려온 건. ‘무…슨?!’ 영문을 모르던 남희가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땐, 이미 저 만치서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윤지가 보이고 있었다. - 이젠 아예 기사 작성은 나몰라라 하고는, 선 채로 경기장을 주시하던 하연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건?! 설마 저 아이… 그때 그곳에 있었던 건가?’ 하연은 그제야 윤지의 플레이가 낯설지 않은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좀 전의 실패한 드리블도, 지난 여주대전에서 보여준 칩 슛도, 그리고 지금 보여준 믿을 수 없는 플레이도 모두 그 때 영후가 보여줬던 것이었다. 바로 그때, 파주NFC에서. - 이미 골네트를 흔들던 공이 흘러나와 골라인을 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위덕대 골키퍼 정지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하지만, 윤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던 전이슬만이 골키퍼 정지수에게 자신이 본 (그럼에도 믿을 수 없는)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 전이슬은 분명 자신과 같이 서 있던 한송이가 윤지의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다급하게 헤딩을 하는 모습을 기억했다. 하지만 한송이의 그런 실수를 또 언제 보았던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엉성했던 헤딩 덕분에 공은 멀리 날아가기는커녕 그대로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송이는 헤딩을 하던 탄력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 있었기에 전이슬은 홀로 남아 윤지를 막아야 하는 다급함에 주심의 눈을 피해 몰래 윤지의 유니폼을 잡아 당겼고, 그에 윤지는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지는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어이없는 착각이었다. - 윤지는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정점에 다다른 후에 다시금 떨어지는 공을 바라보며, 어떻게 트래핑을 해야 하는지 고심해보았다. ‘가슴으로? 아니면 허벅지? 그것도 아니면 발등으로?’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바로 뒤에 찰떡같이 붙어있는 전이슬 덕분에 행여 트래핑을 성공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면…?!’ 하지만, 그 순간 영후의 따뜻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지금 한 건, 슈팅일까 슈팅이 아닐까?’ 왜 갑자기 이 순간에 영후의 이야기가 생각난 건지, 윤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혜미가 선사했던 뿔난 패스를 가지고 영후가 보여준 ‘다이렉트 슈팅’ 장면도 떠오르자, 더욱 더 머리가 아파왔다. ‘도대체 왜 지금 그게… 아!’ 그제야 윤지는 그렇게 고민하던 트래핑 따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자 머리가 맑아지는 것과 동시에 마음도 편안해졌다. 비록 유니폼을 잡힌 채로 뒤로 넘어지려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어느 때 보다 어렵지 않게 슈팅을 해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윤지는 처음으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풍선처럼 둥실 떠 있는 축구공을 누워서 자전거 타는 모습 그대로 멋지게 ‘킥’ 해 보았다. - 윤지의 강력한 오른발 슈팅에 위덕대 골키퍼 정지수가 손도 쓸 사이도 없이 공이 골네트를 그대로 가르자 철용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바이시클 킥!’ 그랬다. 그것은 분명, ‘바이시클 킥’이었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얼굴로 그라운드에 앉아있는 한송이의 얼굴을 보건대, 분명 한송이도 아니, 위덕대의 모든 수비진들도 그런 슈팅은 실전에선 처음 접해봤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이런 곳에서 보게 되리라고는 나 또한 상상조차 못했으니…’ 하지만 윤지의 모습에 매료된 것도 잠시, 철용은 윤지가 결국 골을 성공시키자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뭘 어쩌자고…’ - 남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남희의 품에 바람처럼 달려온 윤지가 와락 안겨 있었고, 여전히 얼떨떨 하기만 한 남희의 주변엔 어느덧 한국여대 아이들 모두가 구름처럼 달라붙어 윤지를, 그리고 남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윤지는 자신의 품에 폭 안긴 채 환호하고 있었기에 남희는 더욱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3 : 2 ? 여… 역전인거야?! 그런거야? 윤지야…?’ 남희는 관중석에 있는 철용보다도 훨씬 더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남희의 품 안에 있던 윤지는, "코치님 봤어요?! 방금 내가 넣었어요! 내가 넣었다구요!!!" 그 누구보다도 남희가 좋아해주길 진심으로 바라며 환호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어지러울 뿐이었다. ‘왜 윤지가 골을 성공시킨 걸까… 과연 윤지는 조전무와 손을 잡고 있는 게 사실일까… 설마 박기자님의 말은 그럼 틀린 걸까… 그럼 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남희는 온통 땀에 젖어 있던 윤지의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낌과 동시에, 윤지를 안고 있는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 숱한 고민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렇게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고 있듯, 윤지 또한 믿어주고 있었는데, 윤지를 직접 가르치는 입장인 자신이야 말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싶어졌다. ‘나에게… 나에게 있어서 축구란 대체…’ 순간 남희의 머릿속에선 총장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의미 없음에 의미를 부여해보세요.’ 남희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바로 그 날,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났었는데. 게다가 그 날, 축구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거칠고, 지루하고, 의미 없이 달리기만 하는 해답 없는 운동’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분석까지 해대지 않았었던가. 그 때를 잠시 회상하며, 남희는 총장이 자신을 얼마나 어리게 봤을까 싶어 얼굴이 화끈대는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만일 다시 한번 총장이 자신에게 물어온다면, 남희는 자신이 찾은 의미를, 아니 이 아이들이 자신에게 알려준 의미를 지금은 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 있어 축구란, 바로 이 아이들이고, 이 아이들이 가지는 믿음, 바로 그것이라고. - 드디어 경기의 균형이 무너지자, 위덕대의 안경호 감독은 홍상현 코치와 심각하게 의견을 주고 받더니 결국, 두 명의 교체 카드를 뽑아 들었다. ‘공격수 서나래와 미드필더 윤선주라…’ 남희는 급하게 트레이닝 복을 벗으며 교체 준비를 하는 두 명의 선수를 바라보며 이미 예상했던 포메이션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권하늘……곽지혜……서나래 김도연……홍은지……윤선주……강주영 ……전이슬……한송이……신인숙 …………………정지수 결국, 무승부에도 만족했을 위덕대였지만 패배한다면 여주대와의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기에 끌려가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이런 포메이션이 될 거란 걸 남희는 알고 있었기에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바라던 바…!’ 남희는 그라운드로 걸어나가 사인을 보내려 했는데, 순간 수림이 남희의 옆에 서며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주고 있었고, 남희는 그 누구도 몰랐을 새벽의 일을 떠올리고는 갑자기 아이들에게 내릴 지시도 잠시 잊은 채 화끈 달아오르고 있는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져 보고 있었다. - 수림의 침대가 아닌, 남희의 침대로 뛰어들어와 마치 자신의 침대인 양 편히 누운 채로 팔을 벌리며 잠 못 이루던 남희에게 누우라며 재촉하는 통에 남희는 머뭇거리며 수림의 팔에 조심스럽게 누워보았다. “어때요? 베개하고는 또 다르죠?” 그렇긴 하지만, 남희는 그래도 그 순간 ‘그 남자’의 팔베개가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수림은 남희의 속에 들어앉은 사람마냥, 입을 열었다. “알아요, 안다구요. ‘누구’ 팔보단 못하다는 거.” 살짝 삐죽거리는 수림의 말에 남희는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에 정면을 보고 누웠던 자세를 바꿔 수림의 품으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남자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향긋한 내음이 코를 자극했는데, 그 내음에 이끌려서 였을까, 남희는 더욱더 수림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어느새 남희에게로 돌아누운 수림은 자신의 가슴에 남희의 얼굴을 폭 감싸 안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남희의 정수리에 짧은 입맞춤을 해 주었다. ‘아…’ 정말, 별것 아닌 행위였지만, 남희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다정한 것들을 그 남자에게 받고 싶었고, 또 주고 싶었었다. “언니…” “…”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사색에 빠져버린 남희의 얼굴을, 수림은 조심스럽게 들어올렸고 잠시 남희의 오른쪽 눈동자를, 다시 왼쪽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다 더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남희의 입술에 포갰다.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 남희는 같은 여자끼리 이런 키스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예전 같았으면 ‘정신병’이라도 되는 양 더러운 것으로 치부해버렸을 터 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윤지와, 수림 덕분에 성별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거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때문에 시작은 어설펐지만, 이내 남희의 혀는 금새 과감해져 갔고, 어느덧 수림의 혀를 휘감고 있었다. “하아…” 하지만 수림도 질 수 없다는 듯, 잠옷 위로 봉긋하게 솟아있는 남희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고, 남희 또한 그다지 팽팽하지 않은 잠옷 바지 뒤쪽으로 손을 넣어 여전히 싱그러운 수림의 명품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것만으로도 자극이 되어버렸는지, 수림은 또 한번 낮은 탄성을 질렀지만 이내 남희의 잠옷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 넣고는 언제나 잘 때 만큼은 너무나 답답했기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던, 그래서 너무나 자유로워있던 가슴 하나를 그대로 꼬옥 잡아보았다. “역시 언니 가슴은 최고라니까.” “하…음… 조금… 세게…” 의외로 남희 스스로 ‘요구’를 하자 수림이 배시시 웃으며 남희의 바램과는 달리 손을 뺏는데, 남희가 조금 당황하며 수림을 바라보자, 수림은 갑자기 남희의 잠옷을 목까지 추켜올리고는 남희의 가슴 한쪽을 불빛에 드러내고는 그대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아흑!” 물론, 수림의 입으로 모든 것을 담아 내기에는 역부족인 크기였지만 느낌 만큼은 소중했기에, 남희는 수림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는데, 수림은 그것도 모자라 손을 옮겨 다른쪽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젖꼭지를 살짝 꼬집어 주기도 했다. “아… 수림씨…” 여자 대 여자로서, 남자하고와는 달리 자신도 무언가 수림에게 해 주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을 했지만,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함에 남희는 어쩌지도 못했는데, 그 때였다. 남희의 허리가 갑자기 들썩인 건. “아앗! 수림…씨! 거긴… 거긴…?! 아아…” 방심하고 있던 사이 남희의 하복부에서 놀던 수림의 남은 한 손이 그대로 잠옷 바지와 팬티를 지나 그대로 은밀한 숲 속으로 들어와 버렸던 것이었다. 때문에 응당 다리에 힘을 주며, 수림의 손이 더 이상 침입하지 못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희의 다리는 가만히 있는 것도 모자라 수림의 손을 환영이라도 한다는 듯 활짝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이미 홍수가 나버린 남희의 보지에 수림의 작은 손가락이 당도했고, 그 손가락은 그저 겉부분만을 산책하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남희의 보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흡입력을 발휘하며 수림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아!”, “어맛!” 남희의 입에선 탄성이 튀어나왔지만, 반대로 갑작스런 남희의 반응에 놀란 수림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남희는 얼른 수림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자 수림은 당황하기도 했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에 남희가 민망했을까 싶어 다시금 남희에게로 다가갔는데, 남희는 그런 수림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꺼냈다. “조금만… 조금만 참기로 해요.” “네? 언니, 그게 무슨…?” 하지만 수림은 더 이상 남희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이미 머리끝까지 시트를 끌어당겨 덮은 채 남희가 돌아누워버렸으니까. 때문에 수림은 남희가 왜 참으라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물론 하연과 남희가 했던 약속도. - “수… 아니 오코치님, 왜…?” 막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던 남희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수림을 바라보자, 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걸어 잠그실 거에요?” “그야…” 남희는 대답을 하려 했지만, 수림의 눈을 바라보다 멈칫 할 수 밖에 없었다. “작전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아이들 바라 보시라구요.” “그게 무슨…?” 하지만 수림은 말 대신, 손을 들어 그라운드의 아이들을 가리켰다. “지금, 한창 즐거워하잖아요.“ 수림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남희의 눈엔 연습 때와 같은, 아니 그때보다도 훨씬 즐거워 보이는 아이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평소의 새침한 모습은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조차 없는,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윤지도 당연히 들어왔고. - ‘호오, 꽤나 대처가 빠르군 그래.’ 노감독은 선수가 교체되기도 전에, 상대방의 작전을 알아차리며 변화를 꾀하려는 남희의 모습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경기 초반만 하더라도 코치 스스로부터가 너무 경직된 채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경직은커녕, 경기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다는 듯 의연하게 대처하기 시작했으니 더욱 놀랄 수 밖에. 게다가 남희의 간략한 수신호 만으로 어느덧 진짜 축구 선수들처럼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는 ‘공부벌레’ 아이들이 노감독은 기특하기만 했다. ‘그래, 이번엔 다시 4-1-4-1인 겐가?’ 이제는 쉽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게 위치한 아이들 덕분에 포메이션을 구분하기가 쉽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노감독의 눈엔 모든 것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윤지 정화……아라……수정……소영 ………………지영 하늘……진희……미애……승은 ………………미자 확실히 여주대와의 경기에서도 증명된 수비적인 포메이션이었다. 게다가 순간적인 역습도 가능한. ‘허나, 혜미라는 아이가 수비에 섰었던 지난 번과는 조금 다르지 않겠는가? 게다가 저 원 톱에 서 있는 아이의 트래핑 실력은 그렇게 는 것 같지도 않으니…’ 하지만 노감독의 이성적인 생각과는 달리, 그라운드에 서서 마치 엔진 예열을 하는 것 마냥 축구화의 앞 코 부분으로 땅을 톡톡 찍어보는 윤지의 모습에 괜히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이윽고 3 : 2의 스코어로 경기가 재개되자, 센터서클에 있던 공을 건네 받은 센터백 한송이는 그대로 전방으로 달려나가는 공격수 곽지혜에게 롱 패스를 날렸다. 지금 이 상태에서 미드필드를 거쳐 가려면 아까운 시간만 낭비할 것이 자명했기에, 공중볼을 따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곽지혜의 머리를 노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하지만, 멀리서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는 곽지혜의 마음은 그리 편치가 못했다. 실은 자꾸만 뭔지 모를 위화감이 후반전부터 느껴졌기 때문이었는데, ‘왜, 나보다 크지도 않은데…’ 전반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경기의 말미에 다다를수록 곽지혜는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이 실제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을 향해 뛰어오르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여대 센터백 진희가 부드러운 도약에 이어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점프를 하며 간단하게 헤딩 클리어링을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곽지혜에게 그런 진희의 헤딩을 바라보며 뿌듯해 하고 있는 수림의 얼굴을 확인할 여유 따윈 없었다. “지영!” 게다가 진희는 헤딩으로 공을 수비형 미드필더 지영에게 건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전방을 향해 손으로 가리켜 주었는데, 그에 지영은 지체 없이 전방의 수정이에게 패스를 보내주었고, 수정인 패스를 받자마자 옆의 아라에게 패스를 했으며, 아라는 다시 뒤쪽의 지영이에게 공을 돌리며 속이 타는 위덕대 선수들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히 공을 돌리며 시간을 보내라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다급해하는 위덕대 아이들을 비웃듯, 수비에 치중하기만 했었던 오른쪽 윙 소영은 그간 숨겨두었던 공격 본능을 과시하려는 듯 앞에 김도연을 두고도 그대로 공을 터치라인을 따라 간결하게 몰고 들어갔다. ‘공격적인 네가 과연 수비도 잘할까?’ 전반 내내 김도연에게 휘둘린 소영의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은 적중했고, 공격만을 머릿속에 넣고 있던 김도연은 무게중심을 미처 되돌리지 못하고 갑자기 드리블을 해 오는 소영을 제대로 마크하지 못했는데, 소영은 그 속도 그대로 오른쪽 사이드 라인을 파고들다 오프사이드 라인이 의미가 없어진 쓰리백들이 골 에어리어까지 내려서자 수비수들의 앞쪽, 그리니까 페널티 아크 부근으로 재빨리 크로스를 날렸고, 애석하게도 빗맞으며 땅볼 크로스가 되고 말았지만, 그 때였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바람처럼 윤지가 나타난 건. ‘트래핑 없이! 트래핑 없이!’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쉼 없이 되풀이하며 달려들던 윤지는, 적은 몸무게로는 어쩔 수 없는 모자란 파워 대신, 곧바로 흘러오는 공에 달려 오는 탄력을 실어 오른발 인사이드를 정확히 갖다 대고 있었다. - “안돼!!!” 윤지의 스피드를 염려하며 한껏 내려앉아 있던 센터백들이 거꾸로 윤지의 중거리 슛 궤도를 가리자 위덕대 골키퍼 정지수는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는데, 순간 공을 막으려 몸을 날리는 한송이와 전이슬 사이를 꿰뚫고 제법 달려오던 속도까지 더해진 듯한 공은 정지수의 손이 닿지 않는 왼쪽 골 포스트를 스치며 그대로 골네트를 흔들었다. - “우와! 우와우와! 원장님 보셨어요? 저 누나 진짜 잘해요!” “원, 녀석두…훗” 희망원의 원장은 마치 자신이 축구를 하는 것 마냥 신이나 있는 찬이의 모습을 보고는 겨우 웃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엔 여자가 하는 축구, 재미 없을 게 뻔하다며 떠나기 직전까지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찬이였건만, 지금은 저렇듯 그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고, 아예 자리에 앉을 생각도 없이 응원을 하는 형들의 ‘콜’들을 어떻게든 따라 하며 어느새 한국여대의 가장 어리고도, 가장 열혈 서포터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후야, 이게 다 네 덕분이구나.’ 원장은 옆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쓰다듬어주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해 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과 기쁨을 선사해준 영후가 언젠간 부디, 자신의 바램을 이룰 수 있기를. - “아저씨! 윤지 잘하는 거죠? 잘하는 거 맞죠?” 현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4 : 2 로 표시되는 전광판과 단번에 3골을 만들어 낸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규식에게 자꾸만 물었고, 규식은 좀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업신여기더니만 지금은 또 재차 확인하려 드는 현우의 물음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줄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윤지라는 아이는 지금 이 순간 그라운드 위의 그 누구보다도 빛났으니까. 철용 또한 그런 규식의 답에 지금은 동의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승리를 환호하는 한국여대 아이들을 바라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라는 걸까, 설마?!’ 어쩌면 조전무라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시점에 가장 큰 시련을 주는 게 더 재밌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해보는 철용이었고, 그랬기에 한국여대의 대승을 눈 앞에서 확인하면서도 차마 기쁜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43부. 패스워드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하연은, 경기장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던 차에 몸을 싣고는, 시동을 걸기는커녕, 다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빠르게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석에서 작성했어도 되었을 것을 차에 와서 쓰는 이유는 별 다를 게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국여대와 윤지에게 감동을 받아 버렸었기에, 기사 작성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객관적인 시선을 담기 위해, 조용한 공간을 찾아 왔던 것이었다. [새로운 별이 뜨다. X월 X일. 전국 여자축구 선수권대회가 열리는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선, 어쩌면 한국 여자 축구계를 이끌어 갈지도 모를 샛별 하나가 떴다. 그 별의 이름은 다름 아닌 ‘송윤지’. 송 선수는 경기 후반 20분 경 한국여대 스트라이커 장혜미가 부상으로 아웃되자 그를 대신해 교체되어 들어왔는데, 2 : 1로 뒤지던 경기를 기적 같은 한 개의 어시스트와 환상적인 두 골로 뒤집으며 결국 스코어 4 : 2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내 하연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대로 저장하지 않고 창을 닫아버렸다. 분명, 한국여대의 경기는 손가락에 꼽을 만한 멋진 경기였고, 그런 경기를 만들어낸 윤지야 말로 더욱 멋진 선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결과일 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꽤나 거칠게 다뤄지며 상처가 많이 생겨난 노트북의 모서리를 매만지던 하연의 마음은 그러나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경기장 그라운드로 향하고 있었다. - 경기가 끝난 건 벌써 한참이나 지났지만, 공식 경기에서 첫 승리의 맛을 본 한국여대 아이들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관중석 앞까지 다가와 일렬로 선 채 어깨동무를 하고는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어댔다. 이에 한국여대를 응원하러 온 관중들과 그저 축구를 관람하러 왔던 관중들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모두들 선수들을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한편, 혜미도 선수들의 환호에 동참하고 있었는데, 다리에 아이싱을 한 채로 다른 아이들보다 더 격하게 뛰어대는 모습에 윤지는 혜미를 걱정스럽게 바라봤고, 문득 윤지의 시선을 느낀 혜미는 그제야 윤지를 돌아보았다. “왜?” “괜찮…은 거야?” 그제야 윤지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혜미는 보란듯이 다리를 더욱 세게 바닥에 굴러 보이고는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그에 윤지는 그나마 부상이 아니라는 것에 마음을 놓긴 했지만 조금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혜미를 바라봤는데 혜미는 그에 아랑곳하지않고 그 누구보다도 더욱 높이 뛰어댔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치열했던 그라운드를 양복차림으로 천천히 거닐고 있던 영후의 귓가에 조심스런 인기척이 느껴졌고, 천천히 돌아보자 그곳엔 남희가 복잡한 얼굴을 한 채로 서 있었다. “남희씨…” “지금은, 아닙니다.” “?” 고마운 마음에 남희를 불러본 영후였지만, 돌아온 남희의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 언뜻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런 영후를 남희는 잠시 동안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희는 영후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나지막하게 불러주는 게 참 좋았다. 오직 자신의 이름은, 눈 앞의 이 남자만이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서 만큼은 자신은 '권남희'가 아니었다. 때문에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남희는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권코칩니다. 감독님.” 남희의 입으로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한 영후는 양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남희를, 아니 권코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물론 남희는 영후의 손이 자신을 안아주지 않고 여전히 바지 속에 머물러 있는 아쉬움을 남몰래 감춰야만 했지만. - “아응… 아… 아… 너무 좋아요…” 호텔의 룸 어디에선가 어린 소녀들의 이상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 소녀들의 몸 위에 올라탄 수림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사이도 없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정말 죽어라 한 거구나?” “참나, 그럼 뭐 장난으로 했겠어요? 아!” 침대에 엎드린 채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수림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수비수 진희가 발끈했지만, 그런 진희의 종아리를 잡고 있던 손에 수림이 일부러 힘을 주자, 자지러지는 진희였고 그런 진희를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며 말하는 수림이었다. “또 까불어라, 응?” “칫, 코치님 미워요! 윤지가 있었으면 훨씬 안 아프게 해줬을 텐데…” “뭐, 윤지?” “윤지가 얼마나 마사지를 잘 하는지 모르시죠? 맨날 우리 연습 마치고 나면 윤지가 우리들 뭉친 근육들을 풀어주곤 했었다구요.” “정말?” “그러니까 맨날 그 많은 훈련을 받았죠. 안 그랬음 죽었다 깨나도 못했을걸요?” “훈…련? 그럼 학교에서부터? 마사지를 해줬단거니? 윤지가?” “네…에.” 수림이 처음 알았다는 듯, 꽤나 놀라는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마사지를 멈추고 생각에 잠기자 진희는 덜컥 잘못 얘기했나 싶어, 수림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윽고 수림의 입이 열렸다. “근데, 윤지 방에는 아무도 없나 보던데…?” “아마… 혜미랑 연습 경기장에 있을걸요?” “뭐어?! 거긴 왜? 마무리 훈련은 아까 다 끝났잖니?” “그게…” 그제야 제대로 혼나겠다 싶어진 진희가 입을 다물었지만, 뭣도 모르고 샤워를 마치고 등장한 미애가 타월로 머리를 말리며 말했다. “그 녀석들, 축구에 제대로 미쳤거든요. 아마 지금도 개인 훈련 하고 있을걸요? 어제도 그제도 그랬으니까.” ‘지쳐있을 텐데, 또 개인 훈련을?!’ 수림은 시합을 마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시점에 또다시 훈련을 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러나 그 이전에 윤지의 마사지에 대해 듣고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자, 왜 아이들이, 훈련에 별반 참여를 하지도 않았었던 윤지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또한, 이제 경기에서마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훈련을 하고 있을 그라운드 위의 윤지를 떠올릴 수 있었고. - “간다~” 혜미는 이제 거의 3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패스를 해도 제법 그럴싸하게 트래핑 해 내는 윤지를 향해 그 느낌을 잊지 말길 바라며 몇 번이고 장거리 패스를 보내주었다. 한편 윤지는 일부러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종잡을 수 없이 패스를 보내는 혜미에게 불평조차 하지 않으며 열심히 공을 받기 위해 쉴새 없이 뛰어다녔다. “에고, 좀 길다~” 강약 조절에 조금 실패했던지, 패스를 날리자마자 혜미는 미안하다는 투로 얘기했지만, 윤지는 그것마저 받아내겠다는 듯 달려갔다. 허나 의외로 점점 더 뻗어나가는 공을 잡으려 바람처럼 달려나가던 윤지는 자신의 앞에서 날아온 공을 너무나 가볍게 발 아래로 멈춰놓는 남자의 발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 먼저 반응을 한 건 윤지가 아닌 혜미였다. “어? 아빠?!” “푹 쉬지 않고,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딸.” “아 그게… 어, 근데 아빤 여기 어떻게…?” “그…” 그제야 규식은 딸의 경기를 보러 오지 않겠노라고 선언했었던 걸 기억해내곤 잠시 궁지에 몰렸지만, 이내 이곳에 온 이유가 생각났다는 듯 바로 역공을 했다. “그나저나 너 이 녀석, 아까 다친 데는 어쩌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야?” “으…” 혜미는 딱히 뭐라고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윤지를 위해서 일부러 그랬던 거라 하면 경기가 장난이냐며 혼날 것이었고, 실제로 다쳤던 거라면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혜미가 슬그머니 규식의 눈치를 살폈을 땐, 규식의 시선은 이미 윤지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윽고 윤지가 가볍게 목례를 하자, 규식은 눈으로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아직, 뛸 만 한 거냐?” “……” 윤지는 언뜻 규식의 말을 이해 못했지만, 규식은 이미 그라운드로 들어서며 말했다. “괜찮다면, 오늘 시합에서 보여줬던 거…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말이다.” “아, 아빠? 지금 무슨…? 우린 그냥 몸 풀기 정도로 하고 있었지 뭘 보여달라고… 어 윤지야? 넌 또 왜…?” 이해할 수 없는 아빠의 등장과 윤지에의 요구, 그리고 행동에 혜미는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당황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윤지는 페널티 에어리어 즈음으로 걸어가는 규식과는 반대로 센터라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총장의 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노감독과 총장은 좀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총장은 실제로 확인한 한국여대 팀의 플레이를 보고 받은 감동이 사라질까 말을 아낀 것이었고, 노감독은 그와는 좀 달랐지만 총장을 슬쩍 바라보고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 괜찮았소?” “뭐가요?” “경기 말이오. 당신이 보기에 꽤나 조마조마 했을 성 싶던데…” “말도 마세요. 아주 죽는 줄 알았는걸요. 참, 다음 경기는 나흘 뒤랬죠? 그 때도 저하고 같이 와요. 네? 그러실 거죠?” “허허…” 노감독은 방금 전까지 관중들과 하나가 되어 열광을 하던 총장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너털웃음을 지어보았지만, 그도 잠시 여전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윤지의 모습에 다시금 차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헌데, 놈은… 왜 실전에선 그 드리블을 보여주지 않았던 겐가…’ - 약한 바람이 불고 있는 연습경기장의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와있던 혜미는 페널티 아크 즈음에 서 있는 자신의 아빠와 센터서클에 서 있는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뭣들을 하려고…’ 하지만, 혜미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갑자기 윤지가 공을 툭 차고는 발걸음을 떼자마자 톱 기어를 넣고 전속력으로 달려나갔고, 그에 규식 또한 조금은 긴장되는 듯한 자세로 윤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혜미는 시합 중 위덕대의 수비수와 부딪혔던, 윤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왜 또 저러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규식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윤지의 모습에서 절대 눈을 떼지 않으려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수비수들이 애 먹을 만 하구먼.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닐 테지? 어서, 어서 보여봐 봐! 그 드리블을!’ 하지만 그 빠른 속도에서 한 단 더 가속이 되며 거의 규식의 코 앞으로 윤지가 다가왔을 즈음, 규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이건?!’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규식에게 충돌하는 윤지가 있었고, 규식은 윤지가 무턱대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통에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규식은 윤지가 다치지 않게끔 충격을 완화시키며 윤지를 껴안은 채 그라운드 위로 붕 떴다가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털썩! “윤지야! 아빠!” 윤지와 규식이 충돌함과 동시에 그라운드로 달려들어온 혜미는 쓰러져있는 규식과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겨우 몸을 일으키는 두 사람 모두 괜찮은 건지 몇 번이고 확인해보고 나서야 되려 규식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다칠 뻔 했잖아!” “아이구 허리야… 그래. 다칠 뻔했다. 그런데 어쩌면 더 크게 다칠 수도 있을 게다. 그렇지 않냐?!” 혜미는 갑자기 규식이 큰 소리로 외치며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만 같자, 윤지를 일으켜 세우다 규식의 시선이 닿는 곳을 돌아보았는데, 그곳엔 다름아닌 한국여대의 감독이 서 있었다. - 한 손만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창틀에 손을 얹어 머리를 괸 채로 지루한 밤길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하연은 그러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자 핸들에 달려있는 스피커폰 버튼을 눌러 통화를 시작했다. “네, 박하연입니다.” ‘박기자, 날세.’ “엇, 국장님?!” 하연은 방송국의 보도 국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바로 자세를 고치고 앉았다. ‘우선, 미안하단 말을 해야겠네.’ “네? 그게 무슨…?” ‘자네가 말했던, 축구 협회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네.’ “네? 왜요? 충분히 취재해볼 만한 거였잖아요! 국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게… 실은… 모든 루트가 막혀버렸네.’ “그런…” 아무리 심증이 있다 해도, 물증, 그러니까 ‘팩트’가 없다면 뉴스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걸 하연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취재자체가 막혀버린다면 그건 더 이상 팩트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네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새롭게 선임된 이사진이 모두 그쪽 계열 사람들이라, 압력이 심해.’ 설마 했지만, 하연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 방송국의 몇몇 시사 고발 프로그램들이 폐지되거나 축소되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허나 뉴스라면, 그래도 희망을 걸어볼 만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때문에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힘이 빠져나가버린 듯한 하연이 풀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국장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미안하네만, 내 힘으로도 여기까지가 한계라네.’ “그런 말씀 마세요. 어려운 부탁 드렸던 제가 더 죄송한걸요. 그럼 들어가세요.” 이윽고 국장의 전화가 끊기자 하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어중간하게 밟고 있던 악셀레이터를 깊숙이 밟으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이윽고 호텔로 돌아온 혜미와 윤지가 거리낌 없이 유니폼을 벗어 던지자 그 폐쇄된 공간에 두 명의 늘씬한 미녀의 반라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 상태로 윤지는 혜미의 엉덩이를 장난스레 주물러대고는 웃으며 도망치는 혜미를 따라 욕실로 들어가려 했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 탓에 다시금 룸을 둘러보았다. “왜 그래?” 욕실로 뛰어들어가려던 윤지가 멈춰선 채로 룸을 바라보자 역시나 속옷 차림의 혜미가 물었는데, 윤지는 다시 혜미에게 물었다. “혹시, 침대 옆에 뒀던 내 가방 못 봤니?” “가방? 글쎄… 왜, 없어? 어떤 가방인데? 중요한 거라도 들은 거야? 누가 여기 들어올리는 없었을 텐데…” 현우가 가지고 온 가방을 직접 보지 못했던 혜미였기에 알 리가 없을 거라 생각한 윤지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혜미를 돌아보고 말했다. “먼저 씻을래? 난 조금 쉬었다가 씻을게.” “왜, 같이 씻지…” 어느새 윤지와 같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에 어색함이 사라진 혜미는 윤지에게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윤지는 그런 혜미의 시선을 외면하며 침대에 앉았고 결국 윤지와의 목욕을 포기한 혜미는 욕실로 들어섰다. “그럼, 나 먼저 씻는다.” 이윽고 혜미가 욕실로 사라지자 윤지는 잠시 욕실 문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곤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윽고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린 후에야 언제나 들어도 탐욕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튀어나왔다. ‘그래, 연락할 줄 알았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러는 넌 무슨 생각인 게냐? 나는 우리가 무척이나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 ‘뭐 상관없다. 이제 또다시 서로의 입장이 달라졌으니 새로운 계약을 맺으면 되는 거니까.’ “말 했잖아요, 더는…!” ‘지시를 내리는 건 내 쪽이다! 네가 아니라.’ “!” ‘그리고 넌, 지시한 그대로 움직여야 하는 거고. 물론, 네 물건을 돌려받고 싶다면.’ “그치만!” 결국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는 듯, 조전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고 윤지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한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뜨끈한 국수국물 덕분에 자욱한 김이 서려있는 포장마차 안에서, 규식은 소주병을 들어 영후의 잔에 채워주고는 이내 자신의 잔에 가득 담은 후 간단하게 원 샷을 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규식을 영후는 바라만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 했지만, 규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보게.” “네?” “왜, 저런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몹쓸 기술을 가르쳤는지. 물론, 아직 완전하게 익히진 못한 모양이긴 했지만.” “……” “내 눈이 틀린 게 아니라면, 그 드리블, 전신 페인팅이더군. 아닌가?” 규식의 입에서 드리블 이야기가 나오자 영후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지만 잠자코 소주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맞습니다. 어느 정도는…” “……” 규식은 영후가 별 동요 없이 인정을 하자 더욱 놀랐다. 또한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것 또한. 설마 했지만 윤지가 보여준 동작은 그야말로 축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급 기술의 집약체였다. 게다가 수준이 높은 선수들일수록 더욱 속이기 쉬운. 수비수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공격수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수비수는 절대적인 반응을 보이며 미리 움직이기 위해 행동을 하는 법이었다. 때문에 그런 수비수들에 대항하려 공격수들은 더욱 치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방금 확인한 윤지의 드리블을 영후가 한다고 생각하자 규식은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듯 했다. 사실 윤지의 드리블은 그렇게 큰 동작은 없었다. 하지만 거의 마주치기 일보직전에 윤지가 보여준 미세한 움직임은 규식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미세한 움직임에 먼저 반응하며 규식 스스로 길을 터주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분명 윤지는 일직선 그대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도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놀라다니.” “윤지에겐 그런 걸 가르친 적은커녕, 그 드리블을 했던 적은 단 한번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비공식 연습 경기에서.” 규식은 영후의 이야기에 더욱 놀랐다. 예상은 했었지만, 영후조차도 겨우 한 번을 해봤을 정도로버거운 기술일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여린 여자아이에게는 더더욱 고통스러운 기술일 것이었다. 시선은 기본이고, 방향을 급속도로 몇 번이고 전환시켜야 하는 드리블은 말 그대로 온 몸의 근육을 혹사시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럼 그 윤지라는 아이는 도대체…?” “아마, 그 때의 제 모습을 보고 흉내를 내는 거 겠지요.” 영후는 파주의 화장실에서 윤지를 만났던 것을 떠올리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규식은 그런 영후의 미소와는 반대로 경악스러운 얼굴로 변해갔다. “뭐?! 흉내…를 내? 설마, 그저 눈으로 본 것 만으로? 그 말을 지금 내게 믿으라는 건가?!” “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있을 줄은…” 영후와 규식은 각각 비워져 있는 술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고, 이내 영후가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자, 규식은 잔을 들어 또다시 간단하게 비워버리곤, 탁자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어쩔건가? 계속, 저 드리블을 하도록 가만 놔둘 겐가? 눈앞의 승리에 집착해서 저 어린 것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도록 놔둘 거냔 말일세!” 영후는 규식의 물음에 역시 소주잔을 비우며 말했다. “크으,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제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래서도 안되고요…” 영후는 파주NFC에서 했었던 드리블을 떠올리자, 또다시 온 몸의 뼈와 근육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아,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 어두운 방안에서 현우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아둔 윤지의 하드디스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만 볼까?’ 하지만, 분명 암호가 걸려 있을 것이었다. ‘에이, 뭐하는 거야 지금. 윤지는 그냥 맡아달라고만 했는데… ’ 현우는 호기심과 윤지의 부탁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하드디스크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보았고, 이내 에어캡을 풀고는 컴퓨터 케이스를 열고 케이블과 전원선을 연결하고는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뭐, 그냥… 잠깐만 보는 것 뿐이야.’ 이윽고 모니터에 바탕화면이 나타나자 현우는 탐색기로 윤지의 하드디스크를 찾아 열어보았다. 그러자 여러 동영상 들이 썸네일로 보여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녹색의 그라운드들 뿐이었다. “축구… 경기 같은 것들인가?” 어느덧 긴장감이 사라진 현우는 이런 저런 동영상들을 재생시켜 보았지만, 예상대로 각종 축구 경기들을 직접 촬영한 듯한 화면이었기에 흥미가 떨어졌는데, 결국 숨김 파일 형식으로 잠겨있는 폴더를 찾아냈지만, 두근거리며 클릭을 하자 패스워드를 요구하는 창이 떴기에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더 이상 이럴 필요는 없겠다 싶어진 현우는 컴퓨터를 끌까 했지만, 뭐 다른 재밌는 건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머지 재생 가능한 목록을 살펴봤는데 그 때였다. “어? 이건 뭐지?” 한참이나 아래에 있던 동영상의 썸네일은 그라운드가 아닌 다른 것이었기에 현우는 이내 그 동영상을 재생시켜 보았는데, 확실히 그 동영상은 축구 경기가 나오는 동영상이 아니었다. 어떤 남자가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볼일을 보려 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을 뿐. “뭐, 뭐야…?!” 하지만, 이내 화면은 전환됐고, 이번엔 눈에 익은 한국여대 아이들과 즐겁게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여졌다. 그리고 또다시 전환된 화면에선 이내 사무실인 것 같은 곳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여졌다. 그에 카메라는 더욱 접근하여,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의자에서 졸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는데, 카메라 워킹은 카메라 촬영기술을 전혀 모르는 현우가 보기에도 피사체에 무척이나 애정이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부드럽게 감겨져 있는 남자의 눈과, 오똑한 콧날, 그리고 짙은 눈썹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화면에 현우는 자기도 모르게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의 진동 소리가 들려온 건. 우우우웅, 우우우웅. “까…깜짝이야… 도대체 누가 이 밤중에…” 미처 진동에서 벨소리로 변경하지 않았던 핸드폰이 책상 위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며 진동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 이 밤 중에 누구인가 싶어 액정을 들여다보던 현우는 마치 도둑질 하다 들킨 심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다가 재빨리 동영상을 일시 정지시켰는데, 때문에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남자의 얼굴은 그대로 커다란 사진처럼 멈춰버렸고, 현우는 그 화면을 그대로 방치한 채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으응, 윤지야.” ‘어, 밤늦게 미안.’ “아, 아니야 괜찮아. 근데 무슨 일로…?” ‘그냥 해봤어.’ “어어…” 너무나 놀란 현우는 그 어떤 말도 쉽게 할 수 없었지만, 윤지 또한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때문에 현우는 어떤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위덕대와의 경기 이야기를 꺼냈다. “참, 경기 잘봤어. 정말 대단하더라.” ‘그 얘긴,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아, 그, 그런가?” 그러고 보니 혜미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던 걸 떠올리고, 아차 싶었는데 그런 현우의 멈칫거림으로 인해 역시나 대화가 단절되어 버리자 현우는 답답했지만, 이번엔 윤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어? 뭐…가?” ‘하드디스크 말야.’ “아… 난 또 뭐라고.”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윤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중에, 나… 엄마랑 아빠 만나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보여 드리고 싶었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좋은 모습이든, 나쁜 모습이든…’ “……” 현우는 그제야 하드디스크에는 윤지의 모든 것이 들어있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었다. 또한 윤지와는 정반대로, 현실에 비관하며 ‘그 분’을 경멸하면서도 ‘그 분’의 힘을 빌어 편하게 생활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어리고, 바보 같기만 했다. 때문에 현우는 이런 윤지의 모습에 존경심마저 느껴졌기에, 이내 진심을 담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아하실 거야. 분명히.” 하지만 그런 현우의 격려에도, 이젠 그럴 수가 없는 걸… 이라며 윤지는 나지막하게 속삭였지만 현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또 통화하자.’ “어, 그래.” ‘참.’ “어?” 전화를 끊으려던 현우는 곧이어 윤지가 아스라히 남겨놓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는데, ‘좋아하는 사람 이름이야.’ “어? 뭐?” 통화를 끝내기 직전, 다짜고짜 이상한 말을 하는 윤지에게 현우는 곧바로 무슨 얘기냐고 되물었지만, 어느새 핸드폰은 끊겨있었다. ‘무슨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 이름이라니…’ 현우는 도대체 모를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윤지를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옮긴 순간, ‘아!’하는 탄성을 질렀다. 그곳엔 누구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의 얼굴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까. ‘좋아하는…! 윤지가… 좋아하는 사람…! 설마…?!’ 현우는 서둘러 잠겨있는 폴더를 클릭했고, 패스워드 입력란이 뜨자,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력을 해 보았다. ㅇ,ㅣ,ㅇ,ㅕ,ㅇ,ㅎ,ㅜ 그리고 엔터키를 누르자, 폴더는 거짓말처럼 열렸고, 현우는 조심스럽게 파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지금까지 열어 본 동영상들과는 달리 하나같이 어두운 배경의 썸네일들이 보여지고 있었기에 결국 그 중 하나를 클릭해서 내용을 확인하는 현우의 눈은 더없이 커져만 갔다. ‘이… 이건?!’ - 조전무는 윤지에게 한 방을 먹여준 생각에 희희낙락이었다. 또한 현우에게 먼저 전화를 받고, 게다가 만나자는 얘기를 듣고 나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비밀스런 요정에 들어서면서도 새로 들어왔을 법한 아가씨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현우와 만나기로 한 룸으로 안내를 받으며 들어섰다. “……”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목례를 하고 있었지만, 그건 정말 ‘현우’였다. 마치 꿈처럼 현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문에 조전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평소와 달리 안절부절 못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그래. 오랜 만이구나. 그간, 별일 없었고?” “말씀 안 드려도… 다 아시잖아요.” 따뜻한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조전무는 평소보다 더욱 차가워진 현우의 말투에 조금 주춤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뭘 어찌 안다고…” 현우는 운전 기사 얘기를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런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시잖아요. 윤지… 송.윤.지.” “!” 조전무는 순간 당황했지만, 숱한 경험과 연륜이 그것을 얼른 감춰주었다.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난 통 모르겠구나.” “그 아이, 그냥 내버려 둬 주세요.” “뭐?” “못 알아 들으세요? 그 아이, 윤지! 괴롭히지 마시라구요.” 평소엔 볼 수 없었던 현우의 격한 반응에 조전무는 황당해하는 얼굴이었다가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허, 허허… 하하하하…!” “……” 현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동안 룸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웃음을 터뜨리는 조전무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당황했지만, 이내 조전무가 웃음을 멈추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조금 움찔한 것도 같았다. “그래, 현우 네 말대로 내가 그리한다 치자. 그러면 넌 내게 무엇을 해 줄 거지?” “?” “그래, 부인하지 않으마. 내가 그 아이, 실은 조금 ‘사용’하고 있긴 하다만, 그건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야. 나는 돈을, 그리고 그 아인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그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현우를 보던 조전무는 그에 정색을 하며 꾸중하듯 언성을 높였다. “세상은 그런 거다! 필요에 의해 움직이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기대기 마련이지. 그 아이에겐 내가, 아니 나의 돈이 필요했던 거고!” “하지만 고작 어린 여자애에게 뭘…?” “고작 어린아이? 훗… 내가 일하는 곳이 어떤 곳인 줄 아느냐? 잠시라도 방심하면 나이를 막론하고 수많은 적들이 개떼처럼 달려드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알량한 자존심, 양심 따윈 내가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말아야 하지! 이래서 봐주고, 저래서 봐주려는 얄팍한 동정심 또한 금물이고! 그렇게 이런 저런 나약함들을 벗어버린 몸으로, 그리고 그보다 더 독한 마음으로! 상대가 누구든, 앞길에 훼방을 놓으려 한다면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뭉개줘야 하는 거다!” “그런데 왜… 왜 하필 그게 윤진 건데요!?” “그 아이가 한국여대에 다니고 있으니까! 그 아이가 그 놈! 이영후가 감독을 맡고 있는 한국여대에 몸을 담고 있으니까!” “!!!!!!!” 그제야, 현우는 조전무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때문에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실 수 없을 거에요… 제가, 제가 막을 거니까요.” “훗, 네가? 그리고 나를?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러고 있는 거 같으냐? 나 혼자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러는 거 같으냐?! 모두 너를 위해서다! 나를, 또 너를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그래야, 우리 같은 어정쩡한 위치의 사람들도 숨쉬며 살아갈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 난!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야겠다! 아니, 꼭 그렇게 할 거야! 하고 말고! 그게! 내가 이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결국 조전무는 잔뜩 기대를 하고 왔다가 어이없게 기분을 잡치자 현우를 남겨둔 채 바로 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큰 룸에 다시 홀로 남겨진 현우는 자신 앞에서 이리도 열을 올리는 조전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때, 조전무의 말은 그리 틀린 게 아니었기에 반박은커녕 할말이 없었다는 것에 분 할 따름이었다. ‘윤지야… 난…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현우는 윤지를 떠올리자 더욱 괴로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 복잡한 머리 덕분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하연은 미처 작성하지 못한 기사꼭지들을 마무리 하기 위해 새벽부터 집을 나와 차를 이끌고 사무실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기 전, 생각이 난 듯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했고, 역시나 잠 내음이 풀풀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잠을 싹 날려보내겠다는 듯 버럭 소리질러 물었다. “아직도야?! 도대체 언제까지!” ‘아우, 인간아… 지금이 몇신데…’ “몇 시는! 사람이 일어나서 일할 시간이지!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뭐 뀐 놈이 성낸다고, 부탁을 한 입장의 하연이 성질을 내고 있었는데도, 그 선배는 원래 그런 성격인지 별반 짜증도 내지 않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그럼…?” 하연은 갑자기 짜증스럽던 마음이 단번에 누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이건 역부족이다.’ “뭐어? 하지만 선배라면?!” ‘야, 내가 뭐 영화에 나오는 만능 해컨줄 아냐?’ “아니 도대체 뭐가 문젠데?” ‘그게, 그러니까… 패스워드를 모르는 상태에서 잘못 건드렸다간 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자동으로 삭제 될 거야. 그런 프로그램이니까.’ 삭제. 그 한 단어에 하연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봐! 할 수 있잖아 선배!! 나한텐 그것 뿐이야… 그것 뿐이라구… 남은 건 그것 뿐이라고!!!” 씩씩거리며 급기야 핸드폰을 집어 던진 하연은 어제 밤 전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받았던 국장의 전화를 떠올리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눈 앞이 캄캄했다. ‘방송도… 결국 막혀버렸단 말이야…’ - 대회 5일째. 한양여대와 영진 전문대의 경기가 벌어질 경기장을 다시 찾은 철용은 그러나 영후 대신 남희 혼자 관중석에 앉아 여러 가지 자료들을 살펴보며 경기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참, 복도 많은 놈이라니까.’ 철용은 무슨 복에 미녀들이 영후의 주변에서 득시글거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눈 앞의 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런 질투심조차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혼자 오신 겁니까?” “어, 구 에이전트님?” “네. 근데 영후 녀석은…?” “그게…” 실은 진작에 오늘 경기를 같이 관람하자고 했었지만, ‘볼만큼 봤다’고 단번에 퇴짜를 놔버린 영후가 떠올라 남희는 살짝 뾰로통해졌다. 하지만 그런 남희의 모습이 볼 만해서였는지 철용은 영후를 보러 왔다면서도 영후도 없는 경기장 관중석에 그대로 눌러 앉아버렸다. “저기… 저희 감독님은 아마 연습 경기장에 계실 겁니다…” “압니다. 아는데… 뭐, 그 자식 보면 또 속 터지고, 어차피 이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저도 백수인지라, 축구 경기나 좀 볼 랍니다. 아, 제가 방해되는 가요?” “아, 아닙니다.” 농담으로 한 얘기를 진담으로 받아들이며 당황하는 남희가 철용은 귀여웠고, 남희는 그런 철용의 시선에 더욱 난감했지만, 어느새 한양여대와 영진 전문대의 경기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사람은 어느새 경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말게 하라는 영후의 지시에 수림도 간만에 남희와 휴식을 즐겨볼까 했지만, 남희는 아침 일찍부터 오늘 있을 A조의 두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나가버리자 외톨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뭐하지 오늘은…?’ 여전히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궁리하던 수림은 갑자기 침대에서 번쩍 뛰어올랐다. ‘그럼! 혹시 감독님도 오늘은 프리?! 아싸~!’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온 양, 수림은 우당탕 침대에서 뛰어내려와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영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로. - ‘녀석도 참…’ 연습경기장엔 역시나 영후의 예상대로 윤지가 촉촉한 잔디 위에서 공을 가지고 이런 저런 것들을 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윤지만 비웃을 게 못된 던 건, 영후 또한 트레이닝 복 차림에 축구화를 꺼내 들고 왔다는 것이었다. “잠은 좀 잔 거니?” “감독님?” 윤지는 설마 이런 시간에 누가 올 거라고는, 아니 그 사람이 영후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는 얼굴로 공을 내버려 두고 쪼르르 달려왔다. “어쩐 일이세요? 오늘은…” “오늘은 그래, 내가 모두들 꼼짝 말고 쉬라고 했을 텐데?” “헤헤, 그게… 심심해서요.” 다른 사람들에겐 무표정한 윤지였지만, 언제나 영후 앞에선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변하는 윤지였다. 그런 윤지가 밉지 않다는 양, 영후는 살짝 꿀밤을 날리는 시늉을 했고. “욘석아, 쉬는 것도 운동이에요. 근데 네 짝꿍은 어디다 버려두고 혼자 와있는 거야?” “혜미는 감독님 말씀대로 쿨쿨 자고 있는 걸요?” “거봐라. 혜미도 힘들어서 그럴 정돈데, 너는…” 영후의 잔소리가 길어지려 하자 윤지는 잽싸게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화제를 돌려보았다. “참, 감독님 한양여대는 어떤 팀이에요?” “어? 그건 갑자기 왜?” “그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내일 여주대가 위덕대를 이긴다면, 4강에서 우리가 싸우게 될 팀이 한양여대라면서요.” “뭐, 권코치님께서 따로 말씀해 주시지 않겠니?” “그건 그거구요, 감독님한테 직접 듣고 싶어서 그래요.” “흐음, 글쎄다. 어떤 팀이라고 해야 할까…”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 영후의 모습을 보며, 한양여대가 어떤 팀이건 간에 그런 건 이미 상관없어진 윤지는 마냥 고개를 조금 처든 채 생각에 잠긴 남자의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전반전 내내 엄청난 플레이를 선보인 한양여대 덕분에 철용은 전반 종류를 알리는 휘슬 소리에 맞춰 겨우 숨을 몰아 쉬어볼 수 있었다. 그건 남희도 매한가지였고. “허… 한양여대엔 국가 대표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하지만, 유니버시아드 대표 멤버가 네 명 있습니다.” “에에? 그럼, 국가대표나 다름 없는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철용이 남희에게 물었지만, 남희도 철용의 황당함을 이해할 만 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도 몰랐지만, 요샌 여자 축구도 실업 팀들이 생겨나면서, 고등학생부터 실업 팀에 이르기까지 국가대표 차출 범위가 넓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흠, 뭐 그렇다면 여주대의 심서연이나 위덕대의 김도연 같은 애들보다야 조금은 수월해 보여야 하는데…” 철용은 이미 전반을 마친 전광판의 스코어보드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임마, 산 넘어 산이다. 너는 그렇다 치고 나는 이게 뭔 팔자냐?’ 늘 그렇지만, 영후가 도대체 뭘 믿고 이런 팀들과의 경쟁에서 우승을 해버리겠다고 선언해버린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한 철용이었다. - “하여간, 여자 축구는 재미가 없다니까…” 전반전이 끝나고 잠시 티비 화면에서 광고가 흘러나오자 멈췄던 재활운동을 시작하려는 근명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근데 왜 재미도 없는 걸 계속 보고 있는 건데?” “어, 박기자님?” “어때, 좀 괜찮은 거야?” “뭐 그냥 그렇죠. 수술이나 빨리 시켜줄 것이지. 계속 운동이나 하게 하고. 이거 원 병원오면 당분간 운동 안해도 되겠다 했더니 되려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요.” 하연은 근명의 얼굴과 다리를 바라보고는 또 마음이 짠해지는 것 같았는데, 근명 또한 그런 낌새를 눈치챘는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긴 또 어쩐 일이에요? 나 아무 때나 인터뷰할 수 있는 그런 선수 아닌데…” “안다 임마! 비싸게 굴긴. 그냥 생각나서 와봤는데, 그냥 갈까?” “참내, 하여간 져주질 않는다니까. 마음대로 놀려먹으슈, 어차피 난 다음주에 비행기 타고 나를거니까.” “다음 주…?” “여기 병원새끼들이 실력은 쥐뿔도 없는지 처음부터 재활만 죽어라 시키더니만, 수술은 독일로 가서 하라는 거 있죠? 나중에 수술하고 와서 한 번 확 뒤집어 줄까보다.” “……” “참, 선배가 감독하는 팀, 한국여댄가 뭔가 맞죠?” “어… 그건 왜?” “거기 뛰는 애들중에, 혹시 윤지라고 알아요?” “어…? 유, 윤지? 걔는 왜…?” “아니… 좀 웃겨서요.” “뭐가?” “아니 그게… 꼭 내 팬클럽 부회장이었던 애랑 닮은 거 같기도 하고… 또…” “또?” “또… 에이 하여튼요.” 근명은 A매치 기간에 자신의 호텔 룸으로 찾아왔었던 여자애와도 비슷한 것 같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싱겁긴.” “근데, 정말 닮은 거 같더라구요.” “또 누굴.” “저랑, 이 선배 둘 다요.” “!” ‘그랬었나…?!’ 하연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근명의 입으로 듣게 되자 미처 놓치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되짚어볼 수 있었다. ‘영후와도, 근명이와도 비슷하다…?’ 그제야 하연은 위덕대 전에서 윤지가 마지막에 기록한 골 장면이 근명의 것과 유사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수록 하연의 마음은 더욱 답답해져만 갔다. ‘그런 아이를… 윤지를… 그리고 영후를… 도울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 “자, 노는 건 이정도로 하고,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렴.” 영후는 윤지가 트래핑을 하는 데 있어 점점 실수가 잦아지자, 확실히 휴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공을 발등으로 가볍게 차 올려 손으로 잡아내고는 윤지를 부르며 먼저 뒤돌아 연습경기장을 빠져나가려 했는데 그 때였다. 윤지의 목소리가 영후를 잡아챈 건. “감독님.” “?” “보여주세요.” “응? 뭘?” 영후는 조금 당황했지만, 겨우 안 그런 척 하며 되물었다. 부디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며. “드리블이요. 감독님께서 파주NFC에서 보여주셨던 거…” “!” 난감한 영후의 얼굴과 당돌한 윤지의 얼굴이 겹치며 고즈넉했던 연습경기장엔 갑자기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그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서로의 시선을 먼저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한참을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44부. 갈등하는 남자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한국여대의 경기가 없는 날이었기에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주대와 위덕대의 B조 마지막 경기가 벌어질 전주 월드컵 경기장의 관중석은 꽤나 을씨년스럽기가 그지없었다. 때문에 영후의 지시에 따라 연습 계획을 모두 접은 채 관중석에 자리를 잡으려던 한국여대 아이들은 무척이나 어리둥절해했다. “뭐가 이렇게 텅텅 비었대?” 아라가 사람을 찾기가 더욱 힘든 관중석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지만, 미자는 마침 잘됐다는 듯 덩치에 걸맞게 의자 두 개를 단번에 차지하며 앉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떠냐? 넓직하니 좋기만 한걸.” “그래도… 우리 경기 땐 이렇지 않았는데.” “그럼 그럼. 그땐 진짜 분위기 죽여줬지. 그치?” 진희가 미자 옆에 앉으며 다른 아이들을 향해 슬쩍 입을 열자, 모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는데, 혜미는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거드름을 피웠다. “그야, 우리 경기가 제일 재밌었으니까 그런 거지, 안 그래?” 허나 지영이는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얼굴로 혜미의 말을 되받아 쳤다. “재밌었겠지… 여기에 이렇게 편히 앉아서 보기에는. 고작 두 경기뿐이었는데도 쉬운 경기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지영이와는 달리 미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자신의 바디라인을 쫘악 훑어 보이며 말했다. “난 또, 우리가 좀~ 몸매가 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야! 넌 아직도 뺄 곳이 수두룩하거든? ” 지영이가 미자의 뱃살을 쿡 찌르며 말하자, 미자는 움찔하며 흘겨봤고, 그에 나머지 아이들은 한바탕 폭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혜미만은, 고집을 부리며 여전히 연습경기장에 홀로 남아있는 윤지를 떠올리자 아이들의 웃음에 마냥 동조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하지만 어느새 웃음기를 거둔 채 조심스레 입을 여는 아라 덕분에 정신을 차린 혜미는 아라의 눈길이 향해있는 한 블록 떨어진 즈음의 관중석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중국사람들 같지 않니…?” “중국사람들?” 아라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혜미 역시 혼잣말처럼 답을 했지만, 혜미가 보기에도 분명 그렇게 보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리 중 한 사내가 갑자기 꽤나 적대적으로 한국여대 아이들 쪽을 바라보는 것만 같아 혜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뭐야, 저 사람들…?’ - 혜미를 잠시 쏘아보던 남자는 쉽사리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베이지 색 반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꽤나 신경질 적인 남성의 목소리가 핸드폰 속에서 흘러나왔다. ‘뭔가? 갑자기 이런 시간에. 가급적이면 전화는 주고 받지 않기로 했을텐데?’ “한국여대 선수들이 훈련도 하지 않고 관람을 하러 와 있군요.”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내가 그럼 그년들 훈련 스케쥴까지 짜줘야 하나? 엉?!’ 어설픈 한국말과 더불어 뭔가를 꼬아 말하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핸드폰 속 남자의 억양은 더욱 상승했다. “아니 뭐 어떻다기 보다는…” ‘회의에 들어가 봐야 하니 이만 끊지.’ 동의를 구한 것이 아니었던 듯, 곧바로 전화는 끊겼지만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익숙한 중국말로 조용히 속담을 읊어보았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흔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일 경우가 많은 법’이거늘…”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던 남자의 시선은 다시금 한국여대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관중석으로 꽂혔다. - “음. 잠깐 들렀다 갈까나~” 호텔을 나와 경기장으로 향하려던 영후는 어쩐지 이끌리듯 발걸음을 돌려 연습경기장에 잠시 들러보았는데, 역시나 그곳엔 윤지가 혼자 드리블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때문에 보는 입장에 따라선 걱정이 앞설 수도 있었겠지만, 보이는 사람이 윤지였고, 또 바라보는 사람이 영후였기에 그랬을까. 영후는 걱정은커녕 너무나 당돌했던 한 소녀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피식 웃어볼 뿐이었다. - 드넓은 그라운드 위에서 마주 서있기엔 두 사람의 간극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윤지는 기어코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조금은 긴장하는 듯한 영후를 재촉했다. “가르쳐… 주세요.” “윤지야…” 영후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지의 고양이 같은 눈망울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 결국 ‘항복한다’는 양 장난스레 두 손을 살짝 들어올려 보였다. “녀석… 좋아, 내가 졌다.” “!” 생각지도 못한 흔쾌한 영후의 오케이 사인에 윤지는 그 순간 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하마터면 깡총 뛰어오르며 영후의 품에 와락 안길 뻔도 했지만, 역시나 이 남자 그리 간단한 남자는 아니라는 걸 윤지는 얼마 안 있어 깨달을 수 있었다. “그치만, 그보다 먼저” “?” 윤지는, 발치에 놓여있던 축구공 하나를 발끝으로 가져와 이내 늘 그러했듯 지긋이 한쪽 발로 밟고 선 채로 입을 여는 영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익혀야 할 게 있는데… 어때? 해볼래?” 언제나 장난 속에 진심을, 진심 속엔 장난끼를 섞는 이 남자의 짓궂음에 윤지는 화를 내기는커녕,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양 단 한 번이었지만 무척이나 무거워 보이도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훗, 녀석…’ 영후는 ‘재능’이란 단어는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가파르게 변모하는 윤지를 잠시 지켜본 것 만으로도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시간가는 줄 몰랐던 영후는 어느새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런, 권코치에게 또 한 소리 듣겠네.” 오늘 훈련 계획을 모두 접게 하고 선수들에게 경기 관람을 지시 내렸음에도 자신이 더 늦어지게 되자 연습경기장에서 벗어나 걸음을 재촉했는데 그때였다. 바지 속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한 건. 하지만 핸드폰을 꺼내 든 영후는 그러나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원장님?!” ‘영후니?’ “네, 원장님!” ‘그래, 용케 전화를 받았구나. 바쁜데 전화한 건 아니지?’ 몸매만큼이나 넉넉한 인심의 음성이 그대로 귓가에 전해지자 영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때문에 또다시 발걸음은 느릿느릿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바쁘긴요. 참, 잘 다녀가셨어요? 미처 인사도 못 드렸었는데.” ‘인사는. 네가 챙겨준 표 덕분에 경기 잘 봤단다. 아이들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벌써부터 다음 경기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지 뭐니.’ “네에. 좋아했다니 다행이네요. 또… 와 주실 거죠?” ‘그럼, 가야지. 이제 널 이렇게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기쁨 반 걱정 반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하는 원장의 목소리에 영후는 조금 당황할 뻔도 했다. “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얼마 남지 않았다뇨…?” ‘어머, 내 정신 좀 봐. 너한텐 말하지 말아달랬는데…’ 말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하며 얼버무리는 원장 덕에 영후는 어렵지 않게 하연이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하연이…죠?” ‘얘, 그게 아니구. 그러니까…’ “당황하실 것 없으세요… 하연이가 뭐라고 했는진 모르겠지만,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영후야…’ “이제야 희망원도, 원장님도 도울 수 있게 됐는데, 제가 또 어딜” ‘영후야, 그러지 말어. 왜 모든 짐을 네가 지려고 그래… 지금까지 네가 얼마나 희생하며 살아왔는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잖니, 안 그래?’ “원장님, 가족끼리 희생이 어딨어요. 그리고 원장님이야 말로 늘 속만 썩이던 저를, 이렇게 키워 주시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켜봐 주셨는데” ‘얘.’ “?” 영후는 어릴 적 자신을 혼낼 때의 모습이 떠오를만한 원장의 어조에 조금 당황했는데, 역시나 원장의 입에선 그때와 단 한치도 다르지 않을 정도의 짧지만 강렬한 꾸짖음이 쏟아져 나왔다. ‘서운하게 갑자기 무슨 소리니? 이래봬도 난 네 엄마야 영후야. 엄마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구.’ 엄…마? 그 순간 마법에 걸린 듯 경기장을 향하던 영후의 발걸음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엄마.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이 지금 자신의 엄마를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에 영후는 묘한 감흥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생김새가 모두 다른 희망원의 동생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또한 해 보았다. 가족으로서. 그러니 영후 또한 지켜보아야 했다. 자신의 아이들, 한국여대 아이들을. 아니, 이 힘든 배경에 축구를 하고 있는 모든 아이들의 모습들을. ‘영후야, 네 말대로 우린 가족이야. 그런데 있잖니, 가족은 누구 하나에게 매달리고 그러지 않는단다. 아니 매달리기는커녕 이 각박한 세상에서 형제 중 누구 하나라도 잘되길 바랄 뿐이지.’ “원장님…” ‘그러니까, 앞으로 또 한번 약한 소리 하면, 이 엄마한테 혼날 줄 알어! 너 이 엄마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하지만…” 영후가 원장에게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영후의 핸드폰으로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는지 ‘뚜뚜’거리며 연결음이 들리자 원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얘, 전화 온 거 아니니? 어쨌든 목소리 들었으니 됐고, 내일 모레 또 갈 테니까, 딴 생각 말고 열심히 해!’ “아…” 미처 인사도 할 새도 없이 원장이 전화를 끊자, 영후는 그제야, 네, 엄마, 라고 읊조려봤지만 그런 애잔했던 감정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원장님과는 달리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철용 덕분에 단 몇 초 만에 현실로 돌아와 버렸으니까. ‘임마! 여기 XX커피ㅤㅅㅛㅍ이니까, 빨리 뛰어왓!!’ “에? 선…배? 저는 지금” ‘오라면 빨리 올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어?! 후딱 튀어왔!!!’ “아, 예…” 영후는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갔다 나온 얼굴이 되어 코 앞의 경기장을 뒤로한 채 철용이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 편의점에서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수림은, 맛은 있지만 꽤나 해로운 과자거리를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간섭하기는커녕 평소와 달리 모든 음료수들의 이름을 외울 것처럼 냉장고와 마주서 있는 남희에게 품에 한 가득 과자봉지를 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려 했다. ‘아차!’ 하지만 수림은 이대로 과자를 안고 남희 앞으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다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살포시 계산대 위에 내려놓은 후 남희에게 다가갔다. 역시나 남희는 냉장고 앞에 그저 ‘서’ 있었을 뿐 머리는 저 먼 곳으로 떠나 있는 것만 같았다. 때문에 수림은 역시나 쓸데없는 간식거리를 골라대며 주책 맞게 군 자신 때문에 마음이 상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보았다. “권코치님, 왜… 그러세요?” “예? 아, 아뇨 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남희는 수림 덕분에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지만, 그럼에도 얼굴에 남아있던 그늘은 바로 사라지지 않는 듯 했다. 그에 감정적인 것 들 만큼은 남희보다 좀더 예민한 수림은 계산대에서 하나씩 바코드가 찍히며 계산되고 있는 과자들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쉬운 거죠? 이 중요한 시간에 다른 팀 경기나 관람하라니…” “…” 남희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수림 덕분에 또 한번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남희의 걱정은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서 이 대회가 완전히 끝난 그 이후까지였으니까. 물론 그런 속내까지는 알리 없었던 수림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투명한 냉장고 문에 등을 기대며 섰다. “저도 좀 아쉽긴 하지만, 아이들 힘들었잖아요. 하루 건너 한 경기씩 실전을 두 번이나 치러내고.” “하지만,” “네,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죠. 그치만, 보는 것도 훈련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에요. 우리 감독님께선.” 사실 남희의 생각도 수림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마도 영후는 이렇게 다른 팀의 경기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오늘 말고는 없을 거란 생각으로 아이들 모두를 경기장으로 보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남희는 또 하나를 덧붙여보았다. ‘보여주고 싶으신 걸까 여주대를? 결승… 상대로서?’ 또다시 생각에 잠기던 남희가 아무 생각 없이 전면 유리로 된 냉장고에서 다이어트 콜라도 아닌 그냥 콜라 캔 하나를 집어 들자, 수림은 조금 더 놀랐지만, 혹여 남희가 정신차릴까 싶어 냉큼 손에서 콜라를 뺏어 들고는 계산대로 후다닥 달려가버렸다. - 철용이 답답하다는 듯 커피ㅤㅅㅛㅍ 한 쪽 자리에 앉은 채 식어버린 커피를 단번에 비워버리자, 그와 동시에 문을 열며 영후가 들어섰는데, 철용은 그저 세상 편해 보이는 영후의 얼굴에 더욱 갈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험한 얼굴, 뭘 그렇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어요?” 영후가 철용의 맞은편에 앉으며 되도 않는 농을 던지자, 철용은 대꾸하기도 싫다는 듯 이미 비어버린 커피잔을 입에 털어보다가 커피잔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고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영후의 얼굴을 미운 듯 일부러 외면했다. “선배…?” “내가 지금 여기서 누구랑 미팅을 했는지 아냐?” “참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첼시다 첼시! 첼시 스카우터!” “…”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러본 철용은 그러나 영후가 전혀 반응이 없자, 철용은 EPL의 빅4팀 모두가 접촉해왔다는 것도, 프리메라리가 아니 심지어 세리아A 에서도 미팅 약속을 잡자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해봤자 ‘이 놈’에겐 소득이 없을 거란 생각에 한숨만 푹 쉴 수 밖에 없었다. “관두자 관둬. 이런 얘기 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속 편한 네 놈이 뭔 고민을 하겠냐.” “……” 철용은 그러나 갑자기 조금쯤 고민하는 듯한 영후의 얼굴에 조금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가, 싶어 기대감을 가져봤지만, 이윽고 영후의 머릿속을 지나 입으로 빠져 나온 그 말은 그저 말 일 뿐이었지,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선배… 나 꼭 나가야 하는 건가?” “나가다니 어딜… 너 설마…?! 야, 임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맥 놓고 있다 갑자기 뒷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철용의 얼굴과는 정반대로, 영후의 얼굴은 마치 ‘점심 뭐 먹을까?’라고 묻고 난 뒤의 얼굴처럼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기에 철용은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치며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바로 이어지는 철용의 일갈에 커피ㅤㅅㅛㅍ의 모든 시선은 일순간 두 남자에게 쏠려버렸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린 남자는 부들거리는 몸으로 벌떡 일어선 채 영후를 쏘아볼 뿐, 타인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이…! 이새끼야! 네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앉아요 선배. 나도 쉽게 말하는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철용은 자신의 주먹에 의해 잠시 접시와 함께 마찰음을 내던 커피잔소리가 잦아지자 철용은 다시금 털썩 자리에 앉고는 빈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지금 다들 누구 때문에 말도 못하고 속을 끓이고 있는데! 다들 왜 네 주위에 이렇게 모여든 건데! 다들…! 다들…!” “그치만 선배, 축구는 여기서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영후는 원장과의 통화를 떠올리며, 진심인지 어떤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지만 철용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곧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 새끼야! 너 진짜! 정말 모르는 거냐, 아님 애써 모른 척 하는 거냐!!” “예?” “너 이 새끼! 어이구… 어이구 속 터져… 내 이걸 그냥! 아니다 아니야… 후우… 그래 좋아, 다 좋으니까 하나만 묻자.” “…” 철용은 진짜 주먹이 올라가려는 걸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참았고, 그래도 쉽지 않았던지 몇 번의 큰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맨유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거기에 가 있는 지성이… 네 놈 눈엔 어때 보이냐?” “…” “난, 지금 그 놈이 네놈보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야…” “실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지금 그 녀석이 선택한 것들 하나하나가 너무나 대단해서, 부러워 미칠 지경이란 말이다!” 이미 국민에게 칭송 받는 선수가 되어버린 지성이었기에,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하는 철용을 영후는 덤덤하게 바라봤다. 철용의 말은 분명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의 방향은 영후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제대로 선발로도 출전 못하고 있는 요새라면 대단해 보이지 않겠지. 아니, 출전은커녕 얼마부턴가 이적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로 하향세라서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임마!” “…” “진짜 그 놈이 대단한 이유는! 첫째로는 이 어처구니 없는 나라를 미련 없이 벗어났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쉬지 않고 계속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향해 걸어갔다는 거다. 그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또… 있어요?” 영후는 철용이 빅리그로 이적한 지성을 이렇게도 부러워했었나 싶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이내 그 웃음은 지워질 수 밖에 없었다. 철용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그 자식이, 결국 최고의 클럽에 들어감으로써 협회나 연맹, 아니 이 나라 대통령조차 건드릴 수 없는 자리에 올랐다는 거야 임마! 난 그게 부러워 미치겠단 말이다!” “!” “만일 네 놈 생각대로 네가 계속 이 나라에 남은 채로 축구를 하게 된다면, 그럼 넌 은퇴 후 또 뭘 할 수 있겠냐?” “그야…” “천상 축구감독 말고는 할 게 없는 노감독님도 축협 라인이 아닌 까닭에 저렇게 되신 거는 네 놈이 더 잘 알 테니, 감독은 언감생심일 테고. 그래 그간 내가 모르게 돈이라도 모아뒀냐? 그래서 축구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축구 할 수 있는 환경을 너 같은 놈이 만들어 줄 수 있겠냐?” “…” “이 자식아! 그럴 수 없다면… 아니 네놈이 입만 열면 자랑을 늘어놓는 너희 학교 선수들처럼 공부하면서 축구 하는 아이들을 더 많이 길러내고 싶다면! 그 전에! 네 놈을 아무도 어쩌지 못하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래만 주면, 그래 그 이후엔 나도, 그 누구도 너에게 뭐라 하지 않을 거다.” “선배…” “그래!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처지에서 너에게 빌붙는 거 모양새 빠지는 일이란 거 인정하마.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우리는, 지금 유일한 희망인 ‘너’라는 새끼에게 모든 걸 걸고 있는 거란 말이다!” 철용의 ‘우리’라는 말에 영후의 머리 속에선 원장과 아이들을 시작해, 노감독과 총장, 그리고 남희와 수림, 또한 한국여대 선수들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물론 하연이의 잔상이 가장 오래 남았음은 당연한 일이었고. - 그라운드 위에 선수들이 자리를 잡자 여주대와 위덕대의 경기가 이제 곧 시작되려 했지만, 심서연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몇 걸음 전진해 있던 자리에서 자꾸만 관중석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영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전혀 걱정거리 없어 보이는 한국여대 아이들만이 관중석 한 켠에 자리하고 있자, 심서연은 괜히 몸풀기 전부터 잔뜩 들어가 있던 온 몸의 힘이 단번에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뭐, 상관없잖아. 난 내 플레이를 하면 되는 걸.’ 별일 아니라는 듯 심서연이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주심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힘차게 불었고, 경기는 위덕대의 선공으로 시작되었지만, 심서연은 생각과는 달리 여전히 관중석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영후를 찾느라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 “야, 위덕대는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많아졌는데?” 승은이가 그라운드와 전광판의 라인업을 확인하며 입을 열자, 수정이도 의외라는 듯 얼굴을 갸웃거렸다. “그러게… 아직 피로가 덜 풀려서 그런가?”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듯, 정화는 확신한다는 얼굴로 수정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그만큼 선수 층이 두텁다는 뜻이겠지. 또, 우리에게 졌던 라인업 그대로 나왔다간 분위기가 더 가라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닐까? 적어도 우리보단 여주대가 더 힘든 상대일 테니까.” 어느새 수림과 함께 편의점에서 돌아온 남희는 아이들 스스로 생각을 하며 꽤나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꽤나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남희 또한 벤치에서 마음 졸이며 바라보던 때와 달리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두 팀의 라인업을 살펴보았다. 위덕대--------------------------------------------------------- 여주대 --------권하늘--곽지혜--------------------------------------김진영-김나래 -----이남영 윤선주 김유정-----------------------------강나루 박성은 김인영 윤지수 김도연---------------- 강주영 -----박현희 박다정 신인숙 ----------------------------김소정 이유라 심서연 홍진아 -----------정선영---------------------------------------------- 윤사랑 ‘확실히 위덕대의 미드필더 세 명이 모두 바뀌었고, 센터백도 신인숙만 남기고 모두 새 얼굴이네.’ 하지만 남희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4강에서 어느 팀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모든 선수들을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물론 4강 진출이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런 저런 생각을 하던 남희는 위덕대보다 여전히 무언가를 숨겨두고 있는 것 같은 여주대에 더욱 의구심이 들 뿐이었다. ‘그런데… 여주대는 이번 경기에서도 미드필더 강인혜와 공격수 강소연을 후보명단에 조차 넣지 않고 있잖아. 왜지?’ 남희는 여주대 벤치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강인혜와 강소연을 바라봤지만, 후보명단에서 조차 제외된 선수들치고 너무나 여유로웠기에 더욱 조바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비밀 병기가 아니라고 해도 경기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에서라도 한 번쯤은, 아니 경기 막판이라도 출전을 시켜야만 했다. 적어도 남희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저… 후보일 뿐인 걸까…? 정말… 그것 뿐인 걸까?’ - 모두가 여주대와 위덕대의 경기를 보러 간 사이, 트레이닝 복 차림의 윤지는 여전히 연습경기장에서 홀로 축구공과 함께 그라운드를 내달리고 있었다. 며칠간 연습한 실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발끝으로 공을 간결하게 터치하는 모습이 멋졌다. 그치만 언제나 그랬듯 바람처럼 달려나가긴 했지만 감독의 지시대로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걸며 멈춰 서려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잔디 깊숙이 축구화가 박히자 그와 동시에 넘어지며 몇 바퀴를 굴러서야 멈춰 섰고, 결국 대자로 뻗어버렸다. ‘쳇, 이런 거 말고, 그 드리블을 가르쳐 달라니까…’ 좀처럼 생각을 알 수 없는 감독이라는 작자 때문에 기분이 살짝 나빠질 뻔도 했지만, 대자로 드러누워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자 마음대로 멈춰주지 않는 축구공을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늘 참 좋다…’ 윤지는 이렇게 하늘을 똑바로 바라봤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어졌다. 그럴 정도의 여유조차 없이 살아온 지금까지의 나날들이 후회되기도 했고. 하지만, 그 여유롭던 하늘과 윤지의 시야를 가리며 한 남자가 나타나자 윤지의 미간은 조금 찡그려지고 있었다. “윤지야…” 하지만 역광이 되며 온통 검은 얼굴로만 보이는 현우의 목소리에 윤지는 잠깐이나마 느껴지던 짜증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고, 감히 하늘을 가려버린 것에 대한 용서를 이미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윤지는 반가운 마음을 애써 감추려 괜히 조금은 무심한 척 입을 열었다. “비켜 줄래?” “어?” “좋은 하늘, 다 가리고 서있지 말고.” 이윽고 윤지를 지켜보고 있던 현우가 뒤로 물러나자 윤지는 다시금 드러난 하늘에 눈을 좀 찡그려보았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는 트레이닝 복 상의를 끌어당겨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혜미 여기 없는데…” 하지만 현우는 애초에 혜미를 찾아 온 것이 아니었던 듯, 공을 집은 채 앞으로 걸어가던 윤지의 뒤통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나한테 그걸 준거야?” 뜻밖의 질문에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선 윤지는 그제야 현우가 왜 자신을 찾아 온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우의 지금 같은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응대했다. “글쎄…” “글쎄, 라니… 너, 그 분하고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급기야 겨우 용기를 내서 묻던 현우는 그러나 곧바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달콤한 땀 내음을 물씬 풍기려는 듯 갑자기 윤지가 현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가져가며 입을 열었으니까. “… 그러는 넌? 넌 그 사람하고 어떤 사이인 건데?” “나…? 난…” 현우에겐 ‘그 분’이었고 윤지에겐 ‘그 사람’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그래야 어디서부터 실타래가 엉켜있는지, 엉킴의 시작은 어디부터인지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현우의 기대를 져버리듯 윤지의 입에선 이내 심드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난, 그 사람에 대해 잘 몰라.” “하, 하지만…” 현우는 부정하고 있는 윤지의 얼굴에 그 순간 오버랩 되는 ‘동영상’이 떠오르며,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렇다고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으니까. “너…” “?” “그분 때문에… 포기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지?” “?” “절대로 포기하지마. 나도… 나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윤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할 말만을 남겨둔 채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현우의 뒷모습에서, 윤지는 어쩐지 자신이 아는 남자의 뒷모습과 비슷해 보이는 것 같아 잠시 눈을 비벼보고 있었다. 때문에 윤지는 어느새 멀어진 현우를 향해 두 손을 나팔 모양으로 모아 입에 대고는 크게 소리 질렀다. “포기 안해!!!! 절! 대! 로!” 현우는 윤지의 대답에 안도하며 잠시 멈춰 서서 윤지를 돌아보았는데, 그제야 그라운드가 한눈에 들어 오며 무척이나 이상한 잔디 상태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왜… 이렇게 파여있는 거지?’ 그제야 넓은 시야로 그라운드를 살펴본 현우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라운드 곳곳이 마치 밭을 일궈놓은 것 마냥 움푹움푹 파여있었으니까. ‘윤지야…? 도대체 넌 지금 뭘…?!’ 하지만 현우가 윤지를 돌아보았을 땐, 윤지는 이미 충분히 체력이 회복되었는지 또다시 바람처럼 그라운드를 내달리고 있었다. - 고즈넉한 연습경기장과는 달리, 전주 월드컵 경기장의 그라운드는 시작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고, 불을 당긴 건 역시나 승리에 목마른 위덕대였다. ‘절박함의 차이인가…’ 남희는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위덕대의 공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덕대의 총공세는 말 그대로 ‘매서웠다’. 물론 남희의 생각처럼 1승을 챙기고 있는 팀과 1패를 안고 있는 팀의 절박함의 크기가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시작하자마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여주대였기에 조금 이상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 느낌을 그라운드의 선수들 또한 못 느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혹여 위덕대가 승리하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는 한국여대 아이들의 소풍 나온 듯한 얼굴에 남희는 또다시 한숨이 나올 뻔도 했지만, 어쩐지 한국여대 감독의 성격이 아이들을 넘어, 자신에게로까지 전염된 것만 같아 조금 황당했다. 실은 자신도 여주대가 질 거라는,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있었으니까. - 위덕대의 미드필더 이남영과 윤선주, 그리고 김유정이 공간에서 숏패스를 주고 받으며 여주대의 중원을 농락하자 위덕대의 왼쪽 윙백 김도연은 이미 밸런스가 무너진 여주대의 2선과 3선을 예의주시했다. ‘이 흐름을 놓치면 안돼. 여기서 어떻게든 먼저 한 골을!’ 김도연은 미드필더에서 다툼이 일어나기는커녕, 연습게임처럼 원활한 패스가 이루어지며 공간마저 손쉽게 점유할 수 있자, 지금의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축구에서 골을 넣을 수 있을 때 넣지 않으면 그 대가는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즉, 김도연은 지금의 공세를 그대로 이어나가고 싶었다. 때문에 미드필더 윤선주가 뒤의 센터백 박다정에게 밀어준 공이 곧바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으며 곧바로 왼쪽 터치라인을 타고 오버래핑을 나갔다. ‘쳇, 너무 날뛰잖아.’ 한편 머리위로 날아오는 공과 함께 내달려오는 김도연을 막아 서려 다급히 전진하던 여주대 오른쪽 풀백 홍진아는, 그러나 김도연이 공을 가볍게 트래핑하며 나란히 돌진해오던 미드필더 이남영에게 밀어주자 순간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지?’ 분명, 미드필더 이남영을 막지 않으면 그대로 중원으로 파고들거나 크로스를 올릴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김도연을 놔두면 골 라인을 따라 골대까지 파고 들것이었고. 하지만, 이런 상황은 늘 해오던 연습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었기에 홍진아는 간단히 결정을 내렸다. ‘김도연은 서연이에게 맡기면 돼!’ 홍진아는 곧바로 답을 내고는 공을 잡은 채 빠르게 전진하는 이남영에게 들러붙었다. 그러자 역시 예상대로 이남영은 망설임없이 발등을 이용해 홍진아의 키를 넘기며 김도연에게 로빙 패스를 보냈다. 그에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넘어온 공을 간단하게 트래핑을 한 김도연은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홍진아도 김도연도 조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던 심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찬스!’ 그에 김도연은 무주공산의 공간을 노리며 그대로 터치라인을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연!! 막아!!!” “어?” 믿었던 심서연이 김도연에게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멍하니 서 있자, 홍진아의 다급한 외침이 있었고, 그에 심서연은 정신을 차려봤지만, 이미 김도연은 심서연이 돌아보기도 전에 간결하고 짧은 크로스를 차 올렸다. “이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심서연이 김도연에게 접근하려다 포기하고는 이내 공의 궤적을 따라 도착점으로 달려봤지만, 결국 어느새 먼저 달려들어오던 공격수 곽지혜의 머리에 정확히 맞는 모습을 뜬 눈으로 구경밖에 할 수 없었다. ‘아…’ 심서연의 탄식과 동시에 곽지혜의 머리에 정확하게 맞고 방향이 꺾인 공은, 골키퍼 정선영이 그대로 서 있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크로스바와 골 포스트의 연결지점으로 정확하게 날아가 이내 골네트를 흔들고 있었다. - 1 : 0 경기 시작과 함께 쉼 없이 몰아친 결과, 결국 골을 만들어낸 위덕대의 공격력은 이해할 수 있다는 얼굴들이었지만, 자신들에게 보여주었던 여주대의 그 ‘숨막히던’ 수비와는 너무나 다른 지금의 모습에 한국여대 아이들은 수긍은커녕,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얼굴들이었다. “얼래? 쟤들 왜 그러지?” 잠시 말문을 잃은 아이들 중, 그나마 정신을 차린 정화가 여주대의 수비진들이 허둥대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에 수림도 동의하며 혼잣말을 해 보았다. “너무 쉽게 점수를 주네…” 그러자 아라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럴걸 왜 우리한테는 그렇게 힘들게 한 거야?” 아라의 이야기에 여주대에 심하게 당했던 한국여대의 미드필더진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보다 바로 이어진 하늘이의 물음에 갑자기 다들 정신이 퍼뜩 들어버렸고, 누가 얘기하는 건지도 모르게 갑자기 수다가 이어지며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뭐야 위덕대가 이 상태로 이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맞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세 팀 모두 1승 1패가 되는 거지 뭐.”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어느 팀이 떨어지는 거냐구? 승점은 3점씩 같아지잖아.” “그야…” 그나마 아라가 아수라장을 만들어버리는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입을 열려다 머릿속에서 엉켰는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는데, 이에 수림이 대신 답해주었다. “동률이 되면, 골 득실 차로 순서를 가리게 될 거야.” “에, 골 득실 차요? 그게 뭔데요?” 수정이가 미처 몰랐다는 듯 물었고, 그에 아라가 그것도 몰랐냐는 듯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바보! 몇 골 넣고, 몇 골 먹었는지 따져보는 게 골 득실 차잖아!” “그럼, 우리는 몇 점인데요?” 하지만 여전히 수정인 궁금증을 풀어야겠다는 얼굴로 아라를 무시하며 묻자, 수림은 수정이를 돌아보며 대답해주었다. “우리? 우리는 여주대하고 했을 때 4 : 3으로 졌으니까 -1이었지만, 위덕대하고 했을 땐 4 : 2로 이겼으니까 2가 되고… 그 득실을 더하면, 1이 되는 거겠지?” 수림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면서 비로소 윤지가 위덕대전에 만든, 수많은 점수가 이렇게 팀에 편안함을 가져다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마운 마음을 가져보았다. “그럼 여주대는 지금 이렇게 지면 0이 되는 거죠?” “그래. 위덕대는 -1이 되는 거고.” “뭐야, 그럼 우리가 조 1위가 되는 거에요? 아싸~! 이대로 끝나라!” 득실을 따져본 아이들은 이내 지금의 상황이 최상의 시나리오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욱 웃음꽃이 피었지만, 혜미는 이 경기가 이대로 끝날 거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심서연의 여주대라면 더더욱. ‘뭐 하는 거야, 심서연!’ - 전주 월드컵 경기장의 치열함과는 달리 노감독과 총장, 그리고 하연이 삼각형을 그리며 소파에 앉아있는 한국여대의 총장실에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는데, 결국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던지 총장이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에요 박기자님?” “그게…” 처음부터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몰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하연이었기에 총장의 물음에도 뭐라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한국여대와 축구연구소에 그 어떤 힘도 되어주지 못한 하연이었으니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하연에게 더욱 무거운 질문을 던진 건 다름아닌 노감독이었다. “뭐, 그건 그렇고 자네가 얘기했던 그 아이, 윤…?” “윤지요.” “그래, 윤지. 그 아이가 조전무와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있다… 이런 말인가?” “네.” 하필이면 이런 이야기만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현실이 하연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겐가?” “네?” 하연은 다시금 되묻는 노감독의 의도를 알 리 없었다. 노감독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윤지란 아이는, 분명 조전무의 사주를 받아 경기 도중에 장난을 치는 모습이기는커녕, 죽을 힘을 다하는 모습만이 선했기에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하연에게 또 한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어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하연은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가 조전무와 엮여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느냔 말일세.” “그, 그야…” 하연은 철용의 이야기와, 비단 그것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그 끄덕임의 무게가 꽤나 묵직했기에 백마디 말 이상으로 노감독도 같이 고개를 끄덕거려주며 받아들였다. “그래… 그럼 영후 놈도 이 사실을 알고는 있고?” “그건…” “역시… 아직 말하지 못했나 보구먼. 그래,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역시 안되겠는가?” 하연은 노감독의 부드러운 다그침에 한동안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 “이감독님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 봤자, 뭐가 달라졌겠어요. 괜히 분란만 만드는 꼴이지.” 하연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다는 듯 총장이 애써 거들었지만, 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감독의 시선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는 겐가, 자네도?” 역시나 노감독의 눈빛이 말하고자 했었던 것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하연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러자 노감독은 하연에게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생각만 할게 아니라, 어디 한 번… 직접 물어보면 어떻겠는가?” “네?! 하, 하지만…” “설령 자네 말대로 그 아이가 조전무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그 아이에게 물어보지도 못할 것은 아니지 않겠나?” “그렇지만, 물어본다고 그렇다고 얘기해준다는 보장도 없고, 또…” “그 아이가 그렇다고 인정을 한다고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물론.” “그런데 왜…?” “글쎄… 그냥 그래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하지만 ‘그냥 그래 봤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하기엔 노감독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반짝였기에 하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요? 차도 다 안 들고…”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총장의 만류에도 하연은 바로 백을 챙겨 총장실을 나가버렸고, 총장은 그에 노감독의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쏘아보았지만, 노감독은 ‘허허’ 웃을 뿐이었다. “다 큰 어른을 데리고 스무고개 하시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 하시는 거에요?”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소?” “아니, 잘못이 아니라… 해결책을 알고 계시면 알아듣기 쉽게 바로 바로 얘기해 주시면 좀 좋아요? 맨날 이게 뭐에요? 듣는 사람 속 터지게…” “허허, 아직도 그럴 속이 남아있던 게요?” “뭐라구요? 어이가 없어서… 하여간 내가 정말 못살아!” 총장은 왜 이런 남자 때문에 자신이 이 나이까지 죽고 못살았던 건지 답답하다는 얼굴로 노감독을 흘겨봤지만 노감독은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 “어? 감독님! 왜 이제야 오세요~!” 어느새 여주대와 위덕대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등장한 영후의 모습에 아이들은 반색을 하며 다들 자리에서 손을 흔들어댔다. 버릇없이 앉은 채로 무려 ‘감독님’께 손만 까딱거리며 인사하는 아이들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던 남희는, 그러나 영후 또한 더욱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며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옆에 앉자,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나직하게 한숨을 내 쉬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근데, 경기는 어땠어요?” “조금 예상을 빗나가고 있습니다.” “?” 영후는 그제야 남희의 대답을 들으며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여주대가 아닌 위덕대의 아래에 ‘1’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물론 여주대의 아래에는 ‘0’이 적혀 있을 뿐이었고. 하지만 그런 스코어는 별로 신기한 게 아니라는 듯 영후는 다시 남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될 거 같던가요?” “무승부는 곧 탈락이 되는 위덕대가 전반시작부터 공세를 펼칠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을 예상 못할 여주대가 아닌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이상…해요?” “네, 감독님. 특히나 심서연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어요.” “…” 이어진 수림의 이야기에 영후는 다시 후반전을 시작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서는 선수들을 바라봤는데, 여주대 아이들의 걸음걸이가 한결같이 조금씩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에 수림의 말대로인가 싶어 별 생각 없이 지켜보던 영후의 눈은 그러나 갑자기 커지고 있었다. ‘저거… 설마?!’ - 라커룸을 나와 그라운드로 나서기 전, 잠시 화장실에 들른 심서연은, 거울 속에 서있는 또 다른 자신의 부어있는 왼쪽 뺨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유니폼 하의를 살짝 들자 밑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허벅지의 불그스름한 각목 자국에도 조심스레 손을 대어 보았다. “앗… 따거…” 전반전의 안일한 플레이에 대한 대가로 감독에게 하프타임 내내 작전지시는커녕 흠씬 두드려 맞은 덕에 엉덩이와 허벅지는 점점 부풀어 오르며 뜨거워지고 있었고, 뺨 또한 손자국이 도드라지며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싫다 진짜… 감독도… 축구도…’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무엇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축구만을 해왔으니까.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운동을 하려면 그러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달랐을까? 그 남자하고 였다면…’ 자꾸만 드는 하릴없는 생각에 심서연은 씁쓸하게 웃다가 수도꼭지를 틀고는 몇 번 거칠게 세수를 하며 이유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물기로 감춰보았다. 하지만 유니폼 상의로 얼굴을 대충 닦고 나자 물이 한껏 튄 거울 속으로, 어쩐지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더욱 바보 같아 보였다. ‘이제 와서 뭐 어쩌라고!’ 심서연은 또다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자, 이를 꽉 깨물며 화장실을 달려 나왔는데 그런 소녀를 등 뒤에서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서연아…” “!” 분명 심서연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 뒤돌아 볼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얼굴은 바보 같은 얼굴이었고, 지금의 자신 또한 바보였으니까. “지금… 오신 거에요?” “응… 근데 서연아 너” “다행이다. 전반전엔 저… 좀 못했거든요… 그치만 후반전엔 잘 할 수 있을 거니까요… 그러니까요…” 여전히 등진 채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이야기하는 심서연의 어깨를 잡아보려다, 영후는 좀 전에 철용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진짜 축구를 하고 싶다면… 아니 네가 아끼는 선수들처럼 공부하면서 축구 할 수 있는 아이들을 더 많이 길러내고 싶다면! 그 전에! 네 놈을 아무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러자 영후는 심서연의 어깨로 향하던 팔을 더 이상 뻗지 못했고, 그대로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영후가 그저 와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심서연은 모든 것이 안정되는 기분이 드는 듯 했다. “후반전은 꼭… 지켜봐 주세요. 그래 주실 거죠?” “…그래… 그래 서연아… 꼭 지켜보마.” “늦겠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심서연은 끝까지 영후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라운드 쪽 통로로 뛰어나갔고, 그런 심서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영후는 처음으로 무기력한 자신에 대해 분노하며 벽에 대고 그대로 주먹을 박아 넣었다. - 주심의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휘슬소리와 함께 영후가 다시 관중석에 나타나자 다른 사람들과 달리 수림은 영후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바지 주머니 속의 벌겋게 달아오른 주먹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일… 있으셨던 걸까?’ 하지만 차마 묻지도 못할 만큼 진중해 보이는 모습에 수림은 자꾸만 자신 때문에 영후가 힘겨워하던 때가 생각 나는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려 경기에 집중하려 애써보았다. “위덕대나 여주대 모두 별 변화 없이 후반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희랑 경기를 했을 때와는 몇 명이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역시나 코치의 임무를 다하려는 듯, 남희는 자리에 앉는 영후에게 이런 저런 정보를 알려주고 있었지만 이미 영후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걸 남희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희는 속으로만 애태우고 있는 수림과 달리 영후에게 곧바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여주대 아이들… 그 정도로 못했던 건가요?” “네? 그게 무슨…?” 남희는 분노에 이글거리는 듯한 영후의 목소리에 순간 당황했지만, 영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못했다고… 맞을 만큼… 그렇게 못했었냔 말입니다!” 영후는 혹여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어금니를 꽉 깨문채로 속삭이듯 말했지만, 남희는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모두 알아들었다.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맞… 다니요…? 설마?!” 그제야 남희는 그라운드에 서있는 11명의 여주대 선수들을 바라보았고, 몇 몇 아이들의 붉게 부풀어오른 뺨과 언뜻 언뜻 보이는 허벅지께의 매질자국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왜… 저렇게까지…?!” 여주대 아이들의 모습에 놀라는 남희에게 영후는 입을 다물었지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속으로 되묻고 있었다. ‘선배… 내가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그러면 저 아이들… 웃게 해줄 수 있는 겁니까? 정말 그런 거에요?’ 복잡한 심경으로 그라운드 위의 여주대 아이들을 바라보던 영후는 심서연을 찾았고, 심서연 역시 전반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되살아난 채 영후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지켜봐 주세요!’ -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후반전이 시작함과 동시에 김도연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었다. ‘어차피 흐름은 계속 변하기 마련인 걸. 개의치 말고 하나만 더 넣자!’ 김도연은 애써 불길한 생각을 잠재우며 후방에서 볼을 돌리던 센터백 신인숙에게 사인을 보냈고, 신인숙은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공을 몰며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주대 공격수 김나래가 신인숙에게 달려들었지만, 신인숙은 김나래가 다가오기 전에 공을 받으러 내려온 미드필더 윤선주에게 공을 건넸다. 이에 윤선주는 공을 받자 마자 역시나 왼쪽 터치라인을 따라 달려나가는 김도연의 앞 공간을 보며 과감한 장거리 대각선 패스를 날렸다. ‘한 골이면 무너질 거야! 도연아 부탁해!’ 윤선주의 발을 떠나 꽤나 멀리 날아가는 것 같던 공은, 그러나 더욱 속도를 붙이며 달려나가는 도연의 발아래 떨어졌고, 뒷걸음질 치던 오른쪽 윙 윤지수는 그대로 김도연을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또다시 오른쪽 풀백 홍진아와 맞닥뜨린 김도연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가 중앙 쪽으로 파고드는 척하며 몸의 균형을 옮겼고 그와 동시에 오른발 뒷꿈치로 공을 왼발 뒤로 굴려 보냈다. “아차!” 중앙으로 드리블할 줄 알았던 홍진아는 무게중심이 쏠린 채로 그대로 속아넘어가며 김도연을 놓쳤고, 홍진아를 제친 김도연은 크로스를 올릴까 좀더 안으로 파고들어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려 했지만, 그 때였다. 김도연의 발 밑으로 군더더기 없는 태클이 들어온 건. ‘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격에 김도연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심서연을 돌아보았고, 역시나 자신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심서연의 모습에 순간이지만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재미없게 해서 미안.” 당황하는 김도연을 뒤로하고 알 듯 모를 듯한 한마디를 남긴 심서연은 빼앗은 공을 그대로 전방으로 날려보냈다. 그러자 사이드로 빠진 채 전방에서 패스를 기다리던 공격수 김진영의 깔끔한 트래핑이 이루어졌지만, 김도연은 그 이후의 상황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전방의 상황은 관심 없다는 듯 바로 돌아서서 자신에게 걸어오는 심서연이 있었으니까. “너, 빠르다고 생각해?” “무슨…?!” “알잖아. 너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애가 있다는 거.” “!!” 그제야 심서연의 시선을 따라 관중석을 바라봤지만 그 어디에도 윤지는 없었다. ‘뭐야, 우리 경기 따윈 안 봐도 된다는 거야?’ 한국여대 선수들은 와 있음에도 윤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더욱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만 같은 도연이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보이지 않는 윤지 뿐이 아니었다. “죽을 만큼 달려들어봐.” “?” “그래 봤자 그 애에 비하면 넌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덤덤하게 말하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심서연과 상관없이, 전방에선 김진영의 돌파에 의한 땅볼 크로스를 공격수 김나래가 간단하게 골문 안으로 차 넣으며 환호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의 김도연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내가? 이 김도연이…?!’ - 그저 심서연의 장거리 패스 한 번으로 위덕대의 수비진이 와르르 무너지자 한국여대 아이들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지만, 은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저 정도 패스는 우리 혜미도 할 수 있잖아, 그치…?” “그치만, 혜미는 공격수잖아. 혜미가 패스하고 혜미가 받으러 가냐?” “그것보다 우리도 심서연의 패스에 번번히 당했잖아. 그걸 어떻게 막을 거냐가 더 문젠 거 아냐?” 역시 걱정과 우려만 있을 뿐, 딱히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혜미는 걱정 말라는 듯 호기롭게 말했다. “야, 걱정하지마 내가 막을게. 전방에서든, 후방에서든… 그리고…” 하지만 혜미는 차마 윤지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적어도 경기에 몰입하고 있는 남희의 앞에선. ‘드디어 살아난 건가, 심서연!’ 확실히 심서연은 한국 여자축구를 책임질 대형 수비수인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남희는 여주대가 위덕대에게 졌으면 하고 바래봤지만, 지금의 한 골로, 아니 심서연의 장거리 킬패스 한방으로 더 이상 그런 바램 따윈 소용없어졌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감독님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남희는 여주대의 골 세레모니 동안 잠시 기지개를 펴는 척하며 바로 옆에 앉아있는 영후를 슬쩍 바라봤지만, 경기에 상관없이 이 남자는 무엇엔가에 한없이 분노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45부. 요즘 아이들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다시 경기가 재개되자 위덕대의 공격수 권하늘은 뒤쪽의 윤선주에게 공을 밀어주고는 곽지혜와 함께 전방으로 올라섰지만, 순간 느껴지는 뭔지 모를 압박감에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심서연!’ 그저 두 공격수의 움직임에 맞춰 라인을 컨트롤하고 있는 모습일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압도적인 분위기가 느껴져 공격수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에 발맞춰 여주대의 미드필더 박성은과 김인영이 전방을 압박하자 움직임이 둔화된 위덕대의 공격수에게도, 미드필드 부근의 동료들에게도 패스를 할 수 없었던 윤선주는 어쩔 수 없이 뒤로 공을 돌렸지만, 그것은 패착이었다. 윤선주의 발을 떠난 공은 자신의 동료가 아닌 여주대 공격수의 발끝에 제대로 건네지고 있었으니까. “나이스 패스!” 여주대의 두 공격수가 미드필드에까지 내려와 수비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윤선주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지만, 센터백들에게 가야 했을 공을 중간에서 가로챈 공격수 김나래는 예의 발 빠른 드리블을 선보이며 위덕대의 센터백 신인숙과 박다정을 그대로 돌파했다. “막아!” 위덕대의 골키퍼 정선영이 다급하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뒤늦게 홀로 남은 센터백 박현희가 김나래를 막아 서려 했지만, 골 에어리어에 들어서던 김나래는 곧바로 슈팅을 날리려는 모션을 취하다가 발목을 꺾으며 살짝 오른쪽으로 공을 내어주었다. 그에 박현희와 골키퍼 정선영마저 따돌린 채 김나래의 뒤를 따라 오프사이드라인을 붕괴시키며 쇄도하던 김진영은 그저 오른발 인사이드로 패스를 하듯 골문 안으로 살짝 공을 밀어 넣었을 뿐이었다. 2 : 1 아무도 여주대의 득점을 인정하는 주심의 휘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그제야 여주대 선수들은 환호하며 한데 뭉쳐 기쁨을 나눴다. 또한 여주대의 이영기 감독도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지만, 심서연만은 선수들과 함께 하지 않은 채 관중석의 영후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묻고 있었다. ‘보셨죠? 보고 계신 거죠?’ - “아직…인가?” 위덕대와 여주대의 경기가 더욱 치열해지는 동안, 개인 연습을 마치고 호텔 로비로 들어서던 윤지는 호텔로 돌아왔다면 분명 여기 저기에서 눈에 띌 한국여대 아이들의 모습이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자, 벽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는데, 그때였다. 조금은 야비한 목소리의 남자가 윤지를 불러 세운 건. “송윤지… 선수?” “…?” 목소리 만큼이나 빼빼 마른 체구의 30대 초반의 남자가 윤지를 보며 꽤나 기쁘다는 듯 방긋 미소 짓고 있었지만, 윤지는 어쩐지 능글맞아 보이기만 하는 그 남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 난 스포츠 앤 조이의 정기잔데, 잠깐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 - 남희는 핸드백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해대자 경기에 몰입해있는 영후에게서 떨어져 통로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통로 안으로 들어와 밖을 바라보니 네모나게 보이는 축구장 위의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계속해서 진동해대는 핸드폰 때문에 더 이상 감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액정화면엔 뜻밖의 이름이 떠 있었기에 순간 남희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박…기자님?!’ 다른 사람도 아닌 하연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남희는 통화를 하기 전 몇 번이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안정시키려 심호흡을 해보았다. 그리곤 결국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박기자님. 감독님께서 경기 관람하시는데 방해가 될까 싶어서요.” 남희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지만, 그런 남희는 전혀 관심사가 아니라는 듯, 하연은 속사포 랩을 하듯 말을 쏟아냈다.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하죠. 근데 윤지 거기 있죠?’ “네? 윤지요? 윤지는 갑자기 왜…?”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윤지… 여기 없습니다.” ‘네? 그럼 어디에 있죠? 어디로 가야 볼 수 있는 거죠?’ “지금쯤이면 아마도 연습 끝내고 호텔로 들어갔을지도” 하지만 남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고, 남희는 다시 관중석으로 걸어가려 했지만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통에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윤지를… 왜?’ - 조금 경직될 뻔 했던 윤지는 그러나 호텔 라운지 커피ㅤㅅㅛㅍ의 개방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하연과같은, 기자라는 말 덕분인지 조금 경계심을 늦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물러나자 물잔으로 목을 축이곤 정기자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아, 뭐 이번 대회에 여러모로 윤지 네가 조명을 받고 있어서 말야.” 아무리 기자라고는 하지만 초면부터 말을 놓는 모습에 윤지는 살짝 눈살이 찌푸려질 뻔 했다. “그런 거라면, 지금은 좀 곤란한데요. 감독님도 안 계시고…” 괜한 불안감이었나 싶어진 윤지는 정기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잠깐이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어 보려 했지만, 그 때였다. 정기자의 눈매가 음흉하게 바뀐 건. “그러니까, 더 잘 된 거지.” “네?” “이건,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긴 좀 그렇잖아?” 윤지는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싶었지만, 잠시 종업원이 내려놓는 커피잔 덕분에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종업원이 사라지고 나자 정기자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갈색의 A4크기 봉투였을 뿐이었기에 윤지는 무표정하게 커피잔을 들어 블랙의 진한 맛을 음미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흐릿한 사진 한 장을 꺼내자 윤지의 머릿속은 커피를 담고 있는 커피잔의 색처럼 그야말로 하얗게 변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알몸의 남자 위에, 알몸의 여자가 올라타 있는 ‘사진’.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동영상의 한 장면을 캡쳐 해 프린트 한 것이었다. 비록, 또렷한 화질이 아니어서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쉽게 확인할 수는 없어 보였지만, 적어도 윤지는 충분히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또한 정기자란 남자도 알아보고 있는 것만 같았고. 하지만, 윤지는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남자에게 되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에요? 이건 또 뭐고…” “아, 뭐 나도 이런 거 즐겨보는 취향은 아닌데. 나도 어렵게 구한 거라…” “…” “내가 보기엔 송윤지 네가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나도 특종 한 번 터뜨려보자고 흐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 묘한 미소를 짓는 남자도 끔찍했지만, 그보다는 점점 목을 죄어오고 있는 단 한 사람. 조전무의 악의적인 대응에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듯 그 편한 커피ㅤㅅㅛㅍ 소파에 앉아서도 고른 숨조차 쉬지 못하는 윤지였다. - 남희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 곧바로 호텔 주차장으로 차를 돌린 하연은 이내 드리프트하듯 나사 같은 호텔 주차장 진입로를 난폭하게 내려갔다. 이윽고 타이어와 바닥의 마찰음이 주차장 가득 하이톤으로 울려 퍼졌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단번에 주차라인에 차를 주차하고 다급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찾아 상승 버튼을 누른 후 기다렸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연은 이윽고 지하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발을 움직이려 했지만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열린 엘리베이터 속에서 먼저 내리려는 사람이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그 순간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낯익은 얼굴에 몸이 얼어붙어 버렸던 것이었다. 그 짧고도 길었던 순간이 지나자 하연은 여전히 엘리베이터에 오르지 못한 채로 겨우 뒤를 돌아보았다. ‘정…기자…?! 저 사람이 이곳엔 왜…?!’ 하연만의 직감은 그 때부터 들끓기 시작했기에, 머리는 움직이라 외쳤고, 다리는 그 외침을 이어받아 드디어 움직여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놀란 몸과 마음은 생각처럼 빨리 움직여주지 않았기에 겨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하연은 쉽게 닫혀주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려 연신 닫힘 버튼을 눌러댔다. - 룸으로 어떻게 올라온 건지도 기억나지 않던 윤지는 소파에 앉은 채 테이블에 여전히 놓여있는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윤지의 눈엔 그 사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 커다란 눈망울엔 한 가득 눈물이 차고 넘쳐 벌써 사진 위에 쉼 없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나… 어떡하지…? 감독님… 나 이제 어쩌죠…?’ 언제고 터질 시한 폭탄이었다는 걸 모르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뭘 어쩔 수 있던 것도 역시 아니었다. 그저 돈을 모아 가족을 찾겠다는 생각과 행동에 대한 대가를 이제야 치르게 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지는 왜 이 순간, 가족도, 그 누구도 아닌 이 영후란 남자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여기서 그만둬야겠지…?’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버린 윤지는 그러나 문소리가 나자 황급하게 사진을 뒤로 감추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혜미를 맞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두웠던 윤지의 상태를 다행스럽게도 알아채지 못한 혜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와 있었어? 안 그래도 옷 갈아입고 가보려고 했는데…” “어어…” 하지만 건성으로 대답을 할 뿐, 정신은 전혀 이 곳에 없는 것 같은 윤지의 모습에 혜미는 그제야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며 옷을 벗으려다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심서연의 엄청난 플레이에 고민만 가득 안고서 관람도중 먼저 돌아와 버린 지금의 걱정스런 모습이 그대로 들킨 건가 싶은 마음도 들었던 것이다. “윤…지야…?” 혜미는 조심스럽게 윤지를 부르며 다가가려 했는데 그 순간이었다. 룸의 초인종이 울린 건. 딩~동! 때문에 혜미는 윤지에게 다가가려다 말고,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을 한 채로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누구…?” “윤지 있니?”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윤지를 찾자 혜미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어, 박…기자님?” 혜미는 뜬금없이 나타나 윤지를 찾는 하연의 복잡한 얼굴에서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윤지를 돌아봤지만, 윤지는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선 채로 하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 “후아~! 여주대, 정말 대단했죠?” 호텔 룸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앉으며 수림이 믿기지 않는 다는 얼굴로 말하자, 남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여주대도 여주대지만 역시 심서연의 존재는 대단했습니다.” “그치만, 저런 팀하고 우리가 대등하게 경기 했었다는 게 더 신기한 거 같아요.” ‘대등…하다고?’ 수림이 조금은 쉽게 이야기를 하자 남희는 차라리 수림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래보았다. 하지만 오늘 눈으로 확인한 그 팀의 컨디션은 점점 올라오고 있었음이 확실했기에, 강팀은 경기를 치르면서 결승에 맞춰 경기력을 끌어올린다는 속설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만 같아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때문에 남희는 수림에게 잘못 본거라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하려 했지만, 그 순간 룸의 초인종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기에 남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딩~동! “어? 누구지? 누구세요?” 수림이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자, 그곳엔 한국여대의 감독 이영후가 서 있었다. “쉬는 데, 방해…한 건가요?” “아… 아뇨아뇨! 들어오세요! 언…아니 권코치님! 권코치님!” 수림이 꽤나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부르자 남희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나와보았는데, 그곳엔 그런 생각을 일거에 날려 버려주는 남자가 간단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서 있었기에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버리고 있었다. “감…독님…” “괜찮으시다면, 저녁 같이 할래요?” “저녁…말입니까?” 당연히 기쁘면서도 언제나 곧바로 표현하지 못하는 남희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역시나 통통 튀는 목소리의 수림이 끼어들었다. “네, 네! 물론이죠! 안 그래도 엄청 배고팠다구요!” 남희는 수림의 말에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 뿐이라는 얼굴을 지어 보였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영후의 표정을 읽고는 그 남자의 고민 이상으로 굳어지려 하는 심장을 느껴보고 있었다. 하지만 남희 또한 이 남자와 사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기뻤던 모양이었다. 하연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 - 혜미는 갑자기 출현한 하연과,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혜미 또한 어쩌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은 꽤나 길고도 고통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두 사람 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한동안을 서 있더니만 다행스럽게도 윤지가 먼저 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혜미야, 미안한데…” 하지만 정작 목적을 이야기 한 건 아직도 닫힌 출입문을 여전히 등진 채 서 있던 하연이었다. “잠깐, 자리 좀 피해줄래?” “아, 네.” 혜미는 그제야 숨막힐 것만 같았던 상황을 벗어날 수 있어서 차라리 잘 됐다는 표정으로 바뀌며 바로 하연에게 목례를 하며 룸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문은 또다시 두 사람의 표정처럼 굳게 닫혀버렸고. “휴우~ 갑자기 왜들 저래?”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지만 이렇게 쫓겨나서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다시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에 문고리를 잡으려 했는데 그때였다. “어, 혜미야?” “에?”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는 혜미의 뒤로 영후와 남희, 수림이 와 서자 혜미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 버…벌써 오신 거에요?” “벌써라니 경기 다 보고 오는 길인걸?” 혜미는 경기를 끝까지 보고 오지 않은 것에 혼날 것을 걱정하며 조심스레 눈치를 봤지만, 이미 두 코치의 마음은 콩밭으로 떠나버렸는지 입이 귀에 걸려있었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아니 근데 지금 다들 어디 가세요?” “아, 우리? 우리는 감독님께서 저녁 사주신다고 했지롱~” 혜미의 물음에 수림이 신이 난 듯 깡총 뛰며 말하자, 혜미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영후에게 들이댔다.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이런 중차대한 순간에!” “아, 그게…” 영후는 정색하며 달려드는 혜미의 모습에 순간 자신이 잘못한 건가 싶어 당황했지만, 혜미는 곧바로 은밀하게 덧붙였다.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 “저도 데려가욧!” 영후 못지않게 당황하던 남희와 수림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영후는 그에 혜미에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앞서 걸어갔다. 물론 뒤에 쳐진 남희와 수림은 그 어깨동무마저도 너무나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기에 어느새 눈에 불을 켜며 걷고 있었고. - 저녁을 얻어 먹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혜미가 까맣게 잊어버린 두 사람은 여전히 선 채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먼저 하연이 백을 뒤져 뭔가를 꺼내더니 윤지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거.” 윤지는 잠깐 커진 눈으로 하연의 손에 들린 하드디스크를 잠시 바라보았지만 이내 받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다시 하연을 바라보았다. “왜죠?” “그야… 네 허락 없이는 아무 소용도 없는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 “묻고 싶은 게 많아. 윤지 너에게.” 허락만 하면 수십, 수백 가지의 질문을 쏟아내겠노라 다짐하고 있는 하연과 달리, 어느새 발걸음을 옮겨 창가에 선 채로 밖을 내다보는 듯한 모습으로 윤지는 무색무취한 음성을 내뱉었다. “묻는 건 자유지만…” “?” “내가 모두 대답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테죠?” “도대체… 이 안엔 뭐가 들어있는 거지? 분명, 보여지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아까, 정기자를 봤어.” “!” 윤지가 자신을 등지고 서 있었지만, 하연은 창에 비친 모습으로,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윤지의 몸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부디 자신의 직감이 맞기를 바라진 않았지만. “그 사람, 이 계통에선 하이에나 같은 사람으로 유명해. 스포츠기자지만, 정작 스포츠보다 루머나 가쉽 같은 걸로 한가닥 하는 사람이라고.” “그…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결국 심증이 굳어진 하연은 피를 토하는 심정을 애써 감추며 지체 없이 윤지를 몰아붙였다. “조전무.” “!” “왜… 그 작자와 네가 연결돼 있는 거지?!” 더 이상 에둘러 말하는 건 윤지에게 더욱 깊은 상처를 입히는 걸 거라 결론 내린 하연의 정공법에 윤지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무슨 상관인데요? 그게.” 하지만 윤지의 대답에 분명 윤지와 조전무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확신한 하연은 이제야 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지에게 멈추지 않았다. “상관 있어!” “?” “그 작자… 너희들을… 그리고 영후의 앞을 가로막으려 하니까!” 영후의 이름이 거론되자, 순간적으로 윤지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고, 그에 하연 역시 다그치는 얼굴과는 달리 마음이 아파오는 것 같았기에 마음속으로 부탁해보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마음을 열어줘…’ - “아, 행복해~” 커다란 상을 그득하게 채우고도 여전히 계속 나오고 있는 전주 특유의 한정식 반찬들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혜미는 다른 이유로 더 행복한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대도 하지 않았던 ‘현우’까지 호텔 초입에서 만나 이렇게 마주보며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근데, 무슨 일 있어? 오늘은 우리 경기도 없는데…” “아, 그게…” 차마 조전무와 윤지 때문이라고는 말 할 수 없었던 현우가 조금 망설이고 있는 사이, 남희가 영후에게 물었다. “그런데 감독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그게… 뭐 별건 아니고요. 한양여대와 있을 4강전에 대한 얘기나 해볼까 해서요.” 정말 별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꺼내는 영후였지만, 남희와 수림, 그리고 혜미는 갑자기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가, 감독님?! 그게 별게 아닌 게 아니잖아요!!!” “어? 그런가?” 정말 못 말리겠다는 양 혜미가 버럭 소리지르자 영후는 겸연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렸지만, 남희는 충분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에도 전혀 상대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 따윈 가져볼 생각도 하지 않던 사람이 이렇게 일부러 코치들을 찾아와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있으니 오죽 했을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수림도 하고 있었던 듯, 먼저 영후에게 물었다. “감독님?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이런 적 없으셨잖아요?” “아, 그랬…나요?” 역시나 배시시 웃음으로 때우는 영후의 모습에 다들 어이없어 했지만, 혜미도 걱정은 하고 있었다는 얼굴로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양여대… 쎈가요?” 짧지만 직설적인 물음에 모두의 입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는데, 의외로 영후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글쎄?” “에? 뭐에요 그게!!!” 잔뜩 겁먹고 있던 혜미는 ‘왁!’ 소리를 질렀지만, 마음속으론 다행이라 여겼다. “현재 아이들 체력 상태는 어떤가요?” 영후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수림에게 물었지만, 수림은 코치로서 직분을 다 하겠다는 듯 곧바로 답해주었다. “체력적으로 거의 다 올라왔구요. 부상도 없어요.” “미드필드와 수비 사이의 공간은 어느 정도 메웠을까요?” 역시 한양여대의 미드필더진을 고려한 질문에 이번엔 남희의 대답이 이어졌다.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는 지영이를 선발로 내세워서 4-1-4-1의 전형으로 맞선다면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4-1-4-1이라…” 남희의 이야기를 듣고서 곰곰이 생각을 하던 영후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조심스레 가로젓자 남희는 어쩐지 조바심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영후의 의중을 묻고 싶었다. 때문에 바로 옆자리의 영후에게 조금 더 몸을 당겨 앉으며 매끈한 남자의 옆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간 후 귀에 대고 넌지시 속삭여보았다. 물론 순간이었지만, 이런 자리가 아닌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은밀한 공간에서 지금처럼 이 남자의 귓가에 뜨거운 밀어를 해줄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는 남희였다. “저… 오늘 하프타임때 여주대 말입니다.” “…” “그대로 지나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선수들을 폭행한 건이 공론화되면 저희에게 손해가 날 것도 없을테고, 또” 하지만 영후는 속삭일 일이 아니라는 듯, 남희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돌려 두 눈망울을 번갈아바라보았다. 때문에 남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갔다.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가깝게…’ “아뇨. 그냥 갑니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선 예상과 다른 답이 튀어나와 남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조금쯤 뒤로 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기자님을 통해서 모두들에게 알리는 편이 우리팀에게도” “그 아이들에게 이번 대회의 시합을, 축구를 뺏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어요.” “!” 담담하게 입을 여는 영후의 모습에 남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남자는 한국여대를 넘어서 이미 모든 아이들, 아니 모든 축구선수들을 바라보는 거대한 시야를 가지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대로 가서, 굳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아이들은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 역할… 우리 아이들이 해낼 수 있을거라 믿고 있구요. 그리고…” 영후는 오늘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떠올리며 사실은 두 코치들에게 오늘 자신이 결심한 것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려다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사소한 행동 조차 경외심을 담아 바라보는 사람은 남희였다. 도대체 이 남자의 말도 안되는 자신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남희였지만, 또다시 조바심이 느껴진 건 곧이어 영후에게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 하연아? 왜? … 그래? 나? 아, 저녁 먹으러… 여기? 코치 분들이랑… 왜? … 이쪽으로 오면 안되니? … 아직 밥도 안 먹었을 거 아냐…? 어? … 어… 그래 그럼… 그래 알았어.” 전화통화를 마친 영후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일어나 모두를 바라보며 먼저 인사를 했다. “미안하지만, 잠깐 다녀올게요. 하연이가 지금 좀 보자고 해서…” “가보셔야죠. 저흰 괜찮으니까 빨리 가보세요. 숙녀를 기다리게 해선 안되는 거라구요.” 마음은 그러하지 않았을텐데, 겨우 웃음을 잃지 않으며 영후를 보내주는 수림에게 모두들 동조해주었기에 영후는 먼저 그 자리를 떠났지만, 영후가 떠나자 어쩐지 구심점을 잃은 사람들처럼 또다시 조용한 침묵만이 가득 찰 뿐이었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테이블을 한 가득 채워가고 있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쩐지 더욱 공허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그 자리에있는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던지 식사를 하면서도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어이없게도 그 침묵을 깬 건 그들 중 누구도 아니었다. “합석해도 될까요?” “바… 박기자님?!” 영후가 만나러 간다던 사람이 갑자기 홀로 이곳에 등장하자 모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누가 좀 설명해달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역시나 그 답 또한 하연이 내어주었다. “아무래도 영후가 들어서 좋을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리고…” 하연은 영후가 앉았었던 자리에 털썩 앉으며 혜미와 현우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은 이내 남희의 질문에 거두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윤지에 관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연은 자꾸 혜미와 현우가 신경이 쓰이는지 그 둘과 남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는데, 하연의 의도를 눈치 챈 혜미는 자리에서 일어서기는커녕, 하연에게 당돌하게 입을 열었다. “윤지에 관한 일이라면, 저도 들을래요.” 혜미의 말에 남희도 수림도 만류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다시 하연을 바라봤지만, 정작 현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현우를 신경 쓸 겨를이 없던 하연은 결국 방금 전 영후가 마셨던 물컵을 집어 들어 바짝 타 들어가던 목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좀 전에, 연예인의 사생활을 전문적으로 캐고 다니는 기자를 호텔에서 봤어요.” 그게 대체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로 모두들 하연을 바라봤지만, 하연은 순간 굳어지는 혜미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윤지에게 우리가 모르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니 혜미야?” “그… 그게…” 혜미는 사생활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처음 윤지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봤었던 컴퓨터 동영상이 떠오르는 걸 애써 잠재우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윤지의 모습이 더욱 뚜렷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너무나 긴장하고 있는 혜미의 모습에 남희도 수림도 혜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순간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기자님.” “?” “잠시만 둘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하연은 갑자기 입을 여는 현우를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이내 하연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분명 하드디스크 건만 하더라도 현우는 어쩌면 혜미보다 현우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를 따라 밖으로 나갔고, 혜미는 그 두 사람이 사라지고도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혜미야, 도대체 무슨 일인 거야? 윤지가 왜? 또 현우는 왜 저러는 거고?” 작금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수림이 덜덜 떨고 있는 혜미에게 쉬지 않고 물었지만, 혜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하연은 한정식 집의 휴게공간으로 나와 현우와 마주서자 곧바로 입을 열었는데, 현우는 복잡다단한 얼굴을 한 채로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때문에 하연은 다시금 다그쳐볼까도 했지만,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고, 한정식 집에서 흐르는 잔잔한 음악이 한동안 두 사람의 공간을 메우는가 싶더니 이내 현우의 입은 열리기 시작했다. “하드디스크… 기억하세요?” “윤지의…? 갑자기 그건 왜… 설마?! 그 안의 자료들… 열어본 거야?! 맞지? 그랬구나!?” 하연은 믿을 수 없었지만 분명 현우의 얼굴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거대한 실타래의 실마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껏 급해진 얼굴의 하연을 진정시키려는 듯,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인 현우는 더욱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건, 아니 그 전에 윤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해요.” “깊은… 이해?” “그래 주실 수 있으세요?” 현우가 하려는 이야기가 뭔지 알리 없던 하연은 그러나 알겠다는 듯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그에 현우는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짐을 내려놓는 양 천천히 그러나 하나씩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 “그게… 대체 무슨…?!” 한편 그득한 음식상을 앞에 두고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어렵게 입을 여는 혜미의 이야기에 수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남희를 돌아보았지만, 남희는 어렵게나마 그간의 일들을 종합해보며 수긍하고 있었다. 물론 수림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고. “정말… 윤지가 그런 생활을 해왔었다는 거니? 낮에는 학생으로, 밤에는…?!” “그래서… 혜미 네가 그랬었구나.” 남희는 그제야 혜미가 축구부 창단을 앞두고 윤지가 선수 겸 코치를 하며 장학금 및 코치로서의 임금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문의했었던 것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흑흑… 윤지 절대 나쁜 애 아니에요…흑흑…” 몇 번이고 항변하는 혜미의 말이 아니더라도 윤지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남희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윤지가 앞으로 몰고 올 ‘나쁜 상황’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만일 윤지의 이중생활이 밝혀지게 되면, 윤지가 나쁘고 나쁘지 않고를 떠나서 언론은 윤지를 생매장 시킬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한국여대의 축구부 전체에 미칠 파급력은 상상 이상일 것이었다. 게다가, ‘감독님은… 우리 감독님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더라도 최악과 별반 차이가 없을 막다른 골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때문에 이미 울음이 터져버린 혜미와 달리 맘 편히 울지도 못하고 있는 남희와 수림은 그 순간만큼은 혜미가 무척이나 부러울 뿐이었다. - “그랬구나…” 하연 또한 현우를 통해 혜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 한가지는 남아있었다. 때문에 마치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는 듯, 절망스런 얼굴로 멍하게 서 있는 현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넌 대체… 넌 누구니? 누구길래 윤지에 관한 걸, 아니 조전무에 관한 걸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지?” 하연의 물음에 마치 환영에 휩싸여있다가 겨우 깨어난 얼굴로 현우는 하연을 바라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금은… 말씀 드릴 수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그래… 알았다. 어쨌든 지금 해준 이야기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어. 정말 고맙구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윤지는…?” 정말로 걱정이 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현우의 얼굴에 하연은 차마 최악의 사태를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글쎄… 이 문젠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 싶으니 아무래도” “감독님께… 말씀 드려야 할까요?” “아마도…”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모든 게 해결될까…?’ 하연은 빛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서 출구를 찾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생각해보며 자신 만큼이나 당혹스런 얼굴을 보여주는 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 남희, 그리고 수림과 혜미는 호텔 룸으로 돌아와 삼각형을 그린 채로 앉아 각자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지만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해결책을 꺼내진 못했고, 같은 시각 영후의 룸에 가 있던 하연은 영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으… 뚫어질라 그런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만나기로 하고는 한참이나 늦은 사람 답지 않게.” “너,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인데 말야… 너희 팀에 문제가 생긴다면, 넌 어떻게 할거야?” “문제? 무슨 문제?” “뭐든.” “글쎄… 문제라…” 하연의 질문에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던 영후는 이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뭐, 나라고 별 수 있나. 다같이 모여서 고민하는 수 밖에.” “다…같이…?! 다같이… 그래! 그거야!!!” 정말 아무것도 아닌 답변에 황금열쇠를 얻는 것 마냥 침대에 뛰어올라 몇 번이고 뽀뽀를 해주고는 밖으로 뛰쳐나가버리는 하연을 영후는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오늘 참 여러 번 바람맞는 구나 이영후.” 하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고는 여전히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채로 천정에 포메이션을 그려보는 영후였지만 막 뛰쳐나간 하연이 지금 자신 몰래 코치들과 아이들 모두를 불러모으려 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부탁하셔서 다들 불러 모으긴 했는데…” 남희는 하연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는 듯 룸에 가득한 아이들의 모습과 하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지만 하연은 그런 남희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뜨거운 시선으로 아이들 하나하나를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가득해진 듯, 잠시 숨을 들이마시는 듯 하더니 곧바로 내뱉듯 입을 열었다. “실은 너희 동료중의 한 명이…” “박기자님! 설마?!” 하연이 모두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설마했던 남희가 그러지 말라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하연은 무시하며 하려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안 좋은 일에 휩싸였어. 그래서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안…좋은 일이요? 무슨…?”, “누가요? 누구한테요?” 하연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마자 아이들은 순간 웅성거리기 시작했는데, 하연은 다시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며 말했다. “지금 여기에 없는, 윤지.” “윤…지요? 걔가 왜요? 어디 아프대요?” 하연이 한마디를 내 뱉으면 아이들은 수 십 개의 질문을 쏟아냈기에 하연은 통제되지 못하는 상황을 일순간에 주도하려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섹스!” “…!” 꽤나 의외의 단어가 하연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나서야 아이들의 입이 일순간 멈췄고, 그에 하연은 조금은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섹스 비디오. 후… 아무래도 윤지가 그런 걸 찍어뒀던 거 같고… 또 그게 유출된 거 같아. 그래서…” “근데요?” 꽤나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던 하연과 달리 아라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자 하연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근데요…라니? 내 말 못 알아들은 거니? 그러니까 윤지가” “아니, 알겠는데요. 그게 대체 뭐가 큰일이라는 거죠?” “!” 정말 말도 안 되는 아라의 반문에 하연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더욱 놀랄 말은 지영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잘한 짓은 아니지만, 솔직히 저희들도 그런 거 찍고 노는 걸요? 친한 애들끼리는 핸드폰으로 보내주고 받기도 하고… 요새 남자친구랑 못 그러는 애들이 더 바보라구요.” 지영이의 말에 단번에 바보가 되어버린 혜미는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지만, 정작 남희와 수림 그리고 하연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한때나마 아르바이트로 룸싸롱에 다녔었던 진희와 승은이가 입을 열었다면 더욱 놀랐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마… 말도 안돼…” 특히나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아이들을 돌아본 하연은 지영이의 말이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남희와 수림도 놀라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두 코치들도 몰랐던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래서요? 겨우 지금 그것 때문에 이 귀한 휴식시간에 우리를 불러모은 거에요?” “어? 어어, 그게 그러니까…” 하연은 그제야 조금 주눅이 든 얼굴로 아이들에게 그 비디오를 악의적으로 언론에 퍼뜨리게 되면 팀과 학교에도 분명 문제가 될 거다, 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한 톨의 심각함도 없이 지겨운 강의를 듣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요는 언론이 문제다, 그거네요? 그럼… 우리도 언론을 이용하면 되잖아요?” “뭐?” “왜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잘 써먹는 거 있잖아요. 자기들의 비리가 터질 때면 어김없이 연예인들의 안 좋은 기사들을 숨겨놓고 있다가 빵 터뜨려서 이용해 먹는 거.” “?” 하연과 두 코치는 아이들의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이미 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아이들이 방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야 남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선 하연의 발상이 너무나 당황스러웠기에 그랬고, 또 그런 하연의 발상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니 재밌어 하기까지 하는 아이들의 대범함에 놀랄 수 밖에 없었으니까. 왁자지껄했던 공간이 고요함으로 가득 채워지고 나서야 하연도 남희의 생각을 읽은 건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상의도 없이…” “아, 아닙니다. 아이들도 반대하지 않는 일이니 다행입니다만… 정말 아이들 말대로 효과가 있을까 싶습니다.” “실은 좀 전에 한 아이가 얘기했듯이, 원래 언론사들은 연예인들의 기사거리를 항상 묵혀두고 있어요. 그러다가 가끔 정치계에서 문제가 불거지게 되면 무마용으로 연예인들의 기사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내서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키곤 하죠. 그러니 이번엔 우리가 그걸 이용하자는 이론은 결코 나쁘지 않아요.” 게다가 언론에 섹스 동영상 자체가 음지면 모를까, 언론에 직접적으로 적나라하게 퍼질리는 만무했으니 어쩌면 해볼만 한 시도였다. 하지만 점점 확신을 하는 하연과 달리 수림마저 조심스럽게 걱정의 뜻을 내 비췄다. “물론… 의도는 이해하겠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 의도와는 다르게 한국여대 아이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비춰질까 걱정돼요. 또 학교의 명예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라 총장님의 안위도…”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제가 유명한 분을 꼭 모셔올 테니까, 너무 앞서서 걱정은 말아주세요.” 말이 쉽지 어찌 걱정이 안되겠냐는 표정의 두 여자들을 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연은 이내 거침없이 백을 집어 들고는 문으로 걸어나가다 멈추고는 갑자기 재미난 상상을 한 듯, 마중하려던 남희와 수림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참.” “?” “그거, 꼭 선수들만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면 말이죠… 어때요?” 하연이 말을 하다 말고 두 여자들의 몸매를 투시하듯 바라보는 통에 남희도 수림도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가슴을 가려보았지만, 이미 하연은 문을 열고 바람처럼 사라진 뒤였고 어쩐지 두 여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다음날. 오전부터 이어진 한국여대 아이들의 연습은 결전을 앞두고 있는 전날이라고 하기엔 별 다를 게 없었다. 그저 세 명이 한 두 명을 가운데 두고 패스를 하는 지극히 평범한 연습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물론 그 평범함의 연속이 조금쯤은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했지만. “감독님, 왜 오늘은 저만 계속 술래만 해요?” 한국여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고 있는 아라가 기어이 지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볼멘소리를 하자 영후가 두 손을 맞잡아 일으켜주며 다독거려주었다. “내일 있을 한양여대와의 경기에서는 너랑 지영이가 잘해줘야 하니까.” “에에? 저요?” 뜬금없이 거론되는 자신의 이름에 아라보다 지영이 더 놀란 눈을 해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보다 기량에서 월등한 수정이와 은채라는 미드필더가 있었기에 당연히 자신은 언제나 후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내일 경기에 나가기 싫으니?”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은채랑 수정인요?” “물론 뛰어야지?” “에? 지금 놀리시는 거에요? 미드필더 네 명이 모두 뛴다고요?” “물론 한 번에 다같이 뛰진 못하겠지. 하지만 아마도 네 명이 모두 뛰게는 될 거야.” 알 듯 말듯한 말들만 계속 늘어놓는 영후의 모습에 지영은 뭔가를 더 물으려고 했지만 ‘꽥!’ 소리지르는 아라 때문에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 근데 왜 오늘 계속 저만 술래냐고요!!!”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아라를 겨우 다독이는 영후에게 남희가 다가왔다. “감독님, 저기…” “?” 남희의 귀띔과 함께 돌아본 곳에는 하연이 손을 흔들고 있었기에 영후는 남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한 번 감싸주려다 말고 미안한 미소를 보이고는 하연에게로 걸어갔다. 그런 의미 없는 남자의 가벼운 행동 하나에도 남희란 여자의 온몸은 반응하고 있다는 건 전혀 모른 채. “왔어?” “오늘은 업무상 온 거니까 괴롭힐 생각 마.” 하연은 영후의 얼굴을 바라보자 괜히 먼저 야한 상상을 하며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런 모습만으로도 영후의 얼굴은 더욱 행복해지는 것만 같았다. “괴롭히기는… 근데 업무라니?” “내일 경기 있으니까 오늘 연습은 별거 없지?” “뭐, 그렇긴 한데… 왜?” “그럼 너랑 윤지 인터뷰 좀 따자.” “인터뷰? 지금?” “윤지~!” 영후의 반문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하연은 혜미와 함께 트래핑 연습에 몰두해있는 윤지를 향해 손을 입 주위에 나팔처럼 모아 소리쳐 불렀고 그에 윤지는 마지막 공을 혜미에게로 패스하고는 천천히 두 사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그 연습경기장에서 세 사람이 사라지자 곧바로 수림이 남희 곁에 다가왔다. “저희도 슬슬 준비해야 되지 않을까요?” 수림의 꽤나 진지한 발언에 남희는 살짝 웃음이 터질 뻔도 했으나 이렇게 웃을 수 있게 해준, 어젯밤의 아이들이 자연스레 고마워 뒤를 돌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 “참내, 밥을 떠 먹여줘야 되나… 그니까, 우리 사진이면 되지 않겠냐구요.” “사… 사진?” 하연은 나경이의 돌출 발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이라니, 이 아이들이 도대체 그 ‘사진’이 말하는 의미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하고 하연은 쉽게 말을 하지 못하며 역시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남희와 수림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나경이는 거침없었다. “왜 있잖아요. 단체 누드 사진 같은 거. 스포츠 신문 같은 거 보는 나이 먹은 남자들, 그런 거 좋아한다면서요? 그런 거 우리도 찍으면 되잖아요. 안 그래 얘들아?” “너희들… 설마?!” 하연은 아이들이 이 정도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터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이미 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재밌겠다! 그치? 그치?”, “안 그래도 운동 덕분에 몸매에 자신감도 생겼겠다 못할 이유도 없지!”, “우와, 그럼 우리 신문에 나오는 거야?” 도대체 요새 아이들이 다 이런 건지, 아니면 엉뚱한 감독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연은 어쩌면 이 모든 답을 영후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만 같았고, 중간자의 입장에서 쉽게 거들지 못하고 있던 혜미는 아이들이 너무나 고마워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 “모두 샤워실로 달렷~!” 영후와 함께 하연과 윤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민지의 외침과 동시에 아이들은 연습경기장에서 부리나케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 때였다. “스톱, 스톱!” 남자 것인지 여자 것인지 쉽사리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에 의외로 가장 선두에 서서 달려가던 수림의 뒤로 와장창 아이들이 충돌에 충돌을 거듭했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쏘리. 포토그ㅤㄹㅐㅍ에는 뭣보다 리얼리티! 리얼리티가 포인트거든요.” “혹시…?” 수림의 바로 뒤에선 채로 뒤따라 뛰어온 아이들 덕분에 햄버거의 치즈 신세로 고개만 빼꼼하게 내민 정화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자 그제야 꽁지머리 헤어스타일의 주인공은 깜빡 했다는 듯, 박수를 ‘짝!’쳤다. “오, 이런 이런 인트로듀스가 늦었군요. 난” “사진작가세요?” 그사이를 못 참고 불쑥 끼어든 미애의 말을 바로 받은 주인공은 잘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우, 브라보! 제대로 맞췄어요. 그래요 난 리키 쵭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미국에서 온, 아주 유명한 포토그래퍼에요.” 하지만 본인 입으로 말한 ‘유명함’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아이들과 두 코치는 어쩐지 불안한 기운이 엄습하는 것만 같았다. 유명하다고는 했지만, 아무런 장비도 없이 그저 카메라를, 그것도 이미 대중화가 되어버린 DSLR 카메라도 아닌, 조그만 자동 카메라 하나를 목에 걸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만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유명한 작가가 맞긴 한거야?’ - “어때? 이번 준결승전?” 하연은 커피ㅤㅅㅛㅍ에 들어와 카운터 앞에 선채로 천정 가까이에 주르륵 쓰여있는 메뉴들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영후는 자리를 찾아 앉아있는 윤지를 돌아보곤 다시 못 말리겠다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어떠냐니? 설마 벌써 취재하는 거야?” “그럼 내가 한가해서 너랑 저 아이 데리고 나왔겠어?” “나야 그렇다 치지만 윤지는…” 영후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윤지를 바라보았지만, 하연은 어제 일은 없었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윤지를 바라봤다. “왜, 감추고 싶었어?”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 “이미 늦었어.” “뭐?” “저 아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이미 이번 대회의 중심에 서 버렸다구.” 하연의 이야기에 다시금 물끄러미 윤지를 되돌아 보는 영후의 모습에, 어쩌면 여자 축구계의 중심에 설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란 말을 하연은 차마 할 수 없었다. - 한편 남희와 수림, 그리고 한국여대 아이들은 한동안 멍하니 그라운드를 걸어 다니며 이곳 저곳을 찍어보고 있는 리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연습경기장에서 자리를 옮겨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 들어선 리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쉼 없이 셔터를 누르며 다녔는데, 사진 촬영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던 한국여대 아이들은 점점 긴장은커녕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 원래 우리를 찍는다고 하지 않았냐?” 소영이 정화에게 속삭이듯 물었지만, 정화가 입을 열 사이도 없이 리키가 다가왔다. “와우, 원더풀~ 정말이지 멋진 경기장이네요. 마음에 들었어요. 자, 그럼 이제 레이디스?” 리키가 손으로 하는 모양새를 보던 아이들은 그제야 엄청나게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키가 보여주고 있는 제스츄어는 옷을 벗으라는 것이었으니까. - 인터뷰 도중, 잠시 영후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선 후 영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하연은 레코더의 중지 버튼을 누르곤 이내 목소리를 낮추며 윤지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윤지 널 돕고 싶어. 네 동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고. 그러니까 너도 날 도와줘야만 해.” “동료들…이라뇨?” “뭐, 그건…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거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조전무가 나오는 촬영본, 현우가 가지고 있는 거 맞지?” “!” “맞구나? 그럼, 거기에 너도 나와?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윤지 네 얼굴도 나오냐는 거야… 그러니? 나오니?” 화장실 쪽을 자꾸만 의식하며 윤지의 대답을 듣고 있던 하연은 결국 윤지의 답을 듣지도 못했다. 이내 영후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자 하연은 겨우 표정을 관리하며 기자로서의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일 있을 한양여대와의 준결승,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거니?” “내일? 글쎄… 어떻게라… 어떻게 할래?” 영후는 장난스레 질문을 윤지에게 떠넘겼지만, 윤지는 여전히 떨리는 눈으로 멈춰버린 하연의 레코더를 바라볼 뿐이었다. ----------------------------------------------------------------------------------------------------- 안녕하세요, 지나친 환대에 몸둘바를 몰라 몸부림 치던 '에로'에요. 아직도 절 잊지 않고 기다려주신 분들이 많다는 것에 눈물이 나더라구요. 아직 제가 살아있는 게 진짜라는 걸 인지시켜 주시는 건 오로지 여러분들이세요.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축하, 이번 만큼은 사양않고 받을게요. 그리고 그것을 양분삼아 남은 분량 더욱 재밌는 글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비록 전처럼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순 없지만, 또 오랜만에 글을 쓰는 거라 어색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노력할테니까, 귀찮으시더라도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그래주실 수 있죠? 그럼, 간만에 엄청난 양의 '리플을 위한 리플' 보내드릴게요.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참, 보너스 소식 하나. 19일부터 중국 청두에서 우리 여자대표팀의 아시안컵 일정이 시작됩니다. 선수 이름을 살펴보시면 익숙한 이름들도 눈에 보이실 텐데요,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한국여대를 제외한 나머지 대학팀 선수들의 소속과 이름은 홍보를 겸해서 그대로 차용해서 썼었거든요. (물론 지금은 글을 쓰기 시작했을때와는 소속들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소중한 우리 선수들입니다) 방송에서 중계를 해주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운 좋으면 글로만 볼 수 있었던 선수들의 활약을 어쩌면 실제로 지켜보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적어봅니다. 특히나 이번대회 3위까지는 2011 독일 여자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으니까요 많은 분들의 응원 부탁드립니다. 19일 19:30(현지시각) vs. 중국 21일 15:00(현지시각) vs. 호주 23일 16:00(현지시각)vs. 베트남 4강전 조1위시 27일 19:30(현지시각) 조2위시 27일 16:00(현지시각) 3/4위전 30일 16:00(현지시각) 결승전 30일 19:30(현지시각) 여자대표팀 아시안컵 최종명단 (2010년 5월 12일 현재) GK: 김정미(인천 현대제철), 전민경(고양 대교), 김스리(부산 상무) DF: 류지은, 강선미(이상 고양 대교), 김도연(서울시청), 임선주(한양여대), 심서연, 조소현(이상 수원 FMC), 신순남(인천 현대제철), 최수진(충남 일화) MF: 김수연(충남 일화), 이세은(인천 현대제철), 지소연(한양여대), 이은미, 김희영(이상 고양 대교), 권하늘(부산 상무), 이장미(프랑크푸르트) FW: 정혜인(인천 현대제철), 전가을(수원 FMC), 유영아, 최선진(이상 부산 상무), 차연희(바드노이에나르) 46부. 사진의 전말(顚末)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전주 월드컵 경기장은 시합이 없는 관계로 조명도 켜지지 않았건만, 모두 옷을 벗은 채로 커다란 담요로 몸을 가리고 있는 풋풋한 여자 아이들로 인해 무척이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가리고는 있다지만 서늘한 바람이 곧바로 품 안으로 들어와 맨 살을 간지럽히는 것도, 또 축구화가 아닌 맨발로 잔디 위에 서 있는 생경한 느낌에 다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더없이 부끄러운 것 같았다. 때문에 수림은 금방 사진을 찍기는커녕 의미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사진작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 “왜 바로 촬영을 하지 않으시는지…?” “오, 임파시블! 안돼요. 바디에 레드라인이 남아있으니까요.” “네? 레드…라인이요…? 아…” 그제야 수림은 리키의 뜻을 알아챘다. 지금 자신들이 촬영하기로 한 것은, 그냥 사진이 아니라 누드사진이었으니 어쩌면 리키의 의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확실히 아직 아이들의 몸엔 브래지어 착용 자국이나 유니폼의 허리라인 자국이 남아있을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저기, 저쪽에 가서 한 번 서 보겠어요?” “네? 저요? 왜, 왜요?” “와이낫? 여기 있는 모든 레이디들, 사진 촬영하는 거 아니었나요?” 리키가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수림은 도와달라는 눈빛을 한 채로 남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희는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는데 리키는 그런 남희에게도 작은 명령을 내렸다. “참, 그쪽은 그거…” “네?” 남희는 맥없이 수림만을 지켜보고 있다가 허를 찔려 깜짝 놀랐지만, 리키가 자신의 코와 눈 언저리를 손으로 가리키는 모습에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안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케이, 그거 빼고 있어요. 예쁜 얼굴에 안경자국이 남아있으면 안되니까.” - 어두워진 여의도의 공원에서는 간이 조명아래 몇몇 남자들이 삼대 삼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을 벤치에 앉은 채로 물끄러미 지켜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하릴없이 그저 앉아만 있는 것 같던 남자는 그러나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이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앉자 조금 경직되기도 했다. 어쩌면 남자를 경직시킨 것은 홀연히 나타난 묘령의 남자의 묵직한 분위기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그보다는 그 남자의 옆에 놓여있는 꾸깃꾸깃한 황토색 봉투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남자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전거를, 또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젊은 남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먼저 와 앉아있던 남자의 자켓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린 건. “네, 정기잡니다.” ‘준비는 됐겠지?’ “물론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부디 그 말, 책임질 수 있길 바라네.’ 짧지만 중요한 통화가 끝나자 정기자는 다시 옆을 돌아보았는데, 어느새 사라진 남자자리엔 여전히 꾸깃꾸깃한 황색 봉투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정기자는 남자의 존재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듯, 봉투의 구김 만큼이나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굳이 꺼내어 세어보지 않아도 무척이나 묵직한 느낌에 정기자의 입에선 휘파람이 절로 나오는 듯 했다. “내일 아침이면 꽤나 시끌시끌 하겠구만, 흐흐흐” - “그럼.” 인터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윤지는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기가 머쓱했던지 간단히 목례를 하고 먼저 저 만치 사라졌고, 그런 윤지를 영후와 하연은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자, 그럼. 우리도 갈까?” “어딜?” “어디긴, 그야…” 하연은 영후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바라보자마자 하마터면 바로 ‘그래!’라고 먼저 달려들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에 괜히 조신한 척 영후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꼬집어주었다. “아얏! 왜그래…?” “이래봬도 나 바쁜 여자거든요?” “칫, 많이 튕겨둬라. 이제 그럴 날도 멀지 않았으니까.” “에? 무슨… 말이야? 멀지 않았다니.” 여자의 직감이랄까, 하연은 갑자기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기에 영후의 팔에 끼었던 자신의 팔을 풀고는 조금 떨어진 채로 영후를 다시 바라봤다. “실은 오늘, 남희씨, 수림씨에게 이야기 하려고 했었어.” “뭐…뭘?” “이번 대회, 꼭 우승하고 싶다고.” “……” 하연은 기대했던 이야기가 아니라서 조금 실망할 뻔도 했지만, 그보다는 좀 이상했다. ‘우승? 그거야 이미 처음부터…’ “꼭, 우승해서 나 다시 축구 선수로 돌아가려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 하연이 너하고 읍!” 순간 영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입술에 그 무엇보다 부드럽고 따스한 하연의 입술이 포개졌으니까. 영후도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품 안 가득 하연을 안아주었다. 그렇게 길고 긴 키스가 멈추고나자 하연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영후의 품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었는데, 덕분에 점점 가빠져오는 하연의 숨소리도, 또 세게 진동해오는 심장소리도 영후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연아…” “있지… 나…” “?” “하고…싶어…” “응? 하고 싶다니… 뭐를…?” “아이 참… 이거…” 어둠 속에서마저 선명하게 보일 만큼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해가지고 조심스럽게 허리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린 하연이 터치한 건, 역시나 ‘작은 영후’였다. “아… 그… 그거… 그럼… 우리 올라갈까?” 괜한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영후가 반색을 하며 묻자, 하연은 도리질을 했다. “올라갈 시간은 없는데…” 하연은 분명 호텔로 들어서게 되면 촉박한 시간도 시간이지만 단 한번으로는 끝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영후든, 자신이든. 때문에 여전히 영후의 품에 안긴 채로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순간 눈에 들어오는 한 곳이 있었다. “저기… 갈래?” “저… 저기?” 하연이 보고있는 곳을 따라 바라본 영후는, 하연이 꽤나 황당한 선택을 해버린 것만 같아 입이 반쯤 벌어지고 있었지만, 어느새 하연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고, 영후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에 이끌리듯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 ‘쉬잇!’ 발소리마저 죽인 채로 하연의 손에 이끌린 채 따라 들어온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그것도 빨간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가 그려져 있는 화장실이었으니 하연에게 끌려만 가던 영후의 발걸음은 잠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하연아, 여긴…) (괜찮아, 지금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을 거야.) 도대체 이런 용기는 어디서 생긴 건지, 영후는 짐작조차 못했지만 하연은 벌써 각 칸에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면밀히 확인하고는 그 중 한 칸으로 들어가더니 손을 뻗어 불렀다. (이리와.) 영후는 결국 쭈뼛쭈뼛 하연을 따라 들어갔는데, 문을 닫자 홀로 사용해야만 하는 공간이었던 만큼 그곳은 더욱더 좁아졌지만, 그만큼 두 사람은 그대로 하나처럼 붙어있을 수 있었다. 딸깍. 마지막으로 하연은 조금은 다급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걸어 잠갔고 이윽고 완전한 둘 만의 세상이 되자 뭔가를 갈급하는 눈빛으로 영후를 바라보았다. 그에 영후는 장소와 상황이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하연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으며 다시 하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러는 나… 이상해?) 갑자기 샘솟는 욕정에 자기도 모르게 일을 벌여놓고는, 이제와 조금 민망한 듯한 얼굴이 되어버리는 하연을 영후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또다시 입을 맞춰주었다. 하지만 첫 입맞춤과는 달리 두 사람의 입이 조금씩 열리며 드디어 분홍빛 혀가 조우를 하기 시작했고, 간간히 ‘츄읍, ㅤㅉㅡㅂ’하는 소리만이 고요한 여자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저 조금 진한 듯한 키스였을 뿐이었는데, 마치 ‘러브스위치’가 눌러진 듯 하연은 더욱 더 남자의 품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그 풍만한 가슴을 남자의 딱딱한 가슴에 계속해서 문질러댔다. 하지만 그저 서로의 가슴이 맞닿은 것 뿐이었음에도, 하연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듯, 영후의 목덜미에 두 손을 감고는 입을 뗀 채 고개를 묻은 채 가뿐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하연은 흠칫 몸을 떨 수 밖에 없었다. “아흑…”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버린 영후의 손이 H라인의 검은색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 올리고는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양손 가득 담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느새 어른이 된 ‘작은 영후’가 더욱 하복부에 밀착되어 흥분이 배가되고 있었다. 거기다 비록 팬티스타킹 위였지만 남자의 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통에 스타킹 속에 감춰진 살구색 팬티의 앞부분은 어느새 촉촉히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았지만 스스로 부끄러움이 느껴졌는지 하연은 황급히 영후의 목에 더욱 키스를 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손수 영후의 하얀색 셔츠의 단추를 힘겹게 풀었다. 그러자 다 풀기도 전에 탄탄한 남자의 가슴이 드러났고, 하연은 그 가슴을 끝없이 탐하고 또 탐했다. “흐읍…쪽…” 하지만 하연이 그렇게 한눈을 파는 사이 영후는 조심스럽게 스타킹 속에 들어가 있던 양 손을 이용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스타킹을 내렸고 더불어 엄지 손가락을 팬티에 걸치며 마찬가지로 스타킹과 함께 조금씩 내려갔다. “아잉…” 부지불식간에 하체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자 평소의 하연이 아닌 듯, 작은 아양을 부려봤는데 영후는 그런 하연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곧장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부드럽게 막아주었다. 그리곤 혀를 이용해 하연의 혀 마저 뜨겁게 휘감자, 그녀의 코에선 더없이 뜨거운 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대로 농락당할 것만 같던 엉덩이가 완벽히 노출된 뒤로 아무런 손길이 느껴지지 않자 하연은 이내 더욱 몸이 달았다. ‘어디로 숨은 거… 어맛!’ 어디론가 도망가버린 줄로만 알았던 남자의 손은 어느새 아이보리 색 블라우스 위에 놓여 단호하게 가슴을 움켜쥐어주었기에 하연은 그만 다리에 힘이 빠지며 주저앉을 뻔했다. 물론 이 남자의 견고한 팔 하나가 여전히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기에 그럴 일은 없었지만. ‘어쩜… 아무것도 못하겠어…’ 그저 이 남자의 팔에 안긴 채 여전히 키스만 받아도 좋을 것 같았고, 가슴을 온전히 내어주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지금 시간이 없어!’ 순간 퍼뜩 정신이 든 하연은 황급히 영후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꽤나 놀란 듯한 영후가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입모양으로 ‘왜그래?’라고 물었는데 하연은 다짜고짜 영후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곧바로 영후의 바지 허리띠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리곤 여전히 영후를 올려다보며 단번에 바지를 무릎 아래까지 내려버렸다. (하연아…?) 영후는 갑작스레 진도를 빨리나가는 하연의 모습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팬티까지 내린 채 입안 가득 어른이 되어있던 ‘작은 영후’를 넣어버리자 질끈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후릅…쩝…쩌업…후르릅…” 하연이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하연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기에 영후는 기분이 묘했고, 또 황홀했다. 게다가 부드러운 손을 이용해 작은 영후의 몸을 천천히, 또는 빠르게, 그리고 돌리기도 하며 자극하자 영후는 땅을 딛고 서 있었음에도 공중에 붕 떠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연아…으…) 영후의 표정과 더불어, 작은 영후가 더 이상 단단해질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자, 그제야 하연은 ‘작은 영후’를 손과 입에서 해방시켜 줌과 동시에 돌아서서 양변기를 양손으로 잡은 채 엉덩이를 한껏 노출시켰다 바로 자신만의 남자 앞에. 영후는 치마는 허리에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스타킹과 팬티는 무릎께에 까지 내려가 있는, 그래서 엉덩이와 그 비밀스런 계속이 한눈에 들어오는 완벽한 섹시함에 잠시나마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어쩌면 그 계곡이 아름답게 젖어있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잉… 어…서……응?” 하지만 너무나 도발적으로 변해있던 여자는 감상할 여유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애교를 발산했기에 영후는 자신의 작지 않은 ‘작은 영후’를 그 계곡문에 위치시켰는데, 언제나 그랬듯 조심스럽게 다가섰지만, 하연은 그러지 않았다. 푹! “아흑!”, “엇!” ‘작은 영후’가 다가온 것을 알고는 순간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빼 그대로 계곡 속으로 ‘작은 영후’를 삼켜버리곤, 욕심이 과했는지 한동안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도 못한 채 그대로 멈춰있었다. (하연아… 괜…찮아?) (하음…으응…괜…찮…으니까…움… 움직여줘…어서…어…) 영후는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가장 사랑하는 하연의 부탁이었기에 여전히 좁은 계곡을 조금씩, 아주 천천히 왕래해보았다. 질…꺽…질…꺽…질… 그저 길이의 반 정도만을 이용해 움직였음에도 하연의 다리는 점점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머리는 양변기 한쪽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왼손만은 여전히 영후의 엉덩이 쪽으로 뻗은 채 움직여주길 바라는 듯 당기고 또 당겼기에 영후는 조금씩 더 넣었고 또 빼 보았다. “후… 으…아… 아앙…… 아…” 느리게 움직이니 하연의 입은 느리게 교성을 질러댔는데, 그 소리는 또 그대로 영후의 귀로 스며들며 더욱 자극을 해주었다. 때문에 영후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속도를, 그리고 깊이를 더 해가기 시작했다. 질꺽… 질꺽… 질꺽… 질꺽… 질꺽… “아흥…아…아…어흑…어엉…” 그러자 하연은 또다시 다른 류의 악기가 된 듯 조금 더 높은 음색의 그리고 좀 더 빠른 소리를 내어주었다. 게다가 소리 자체도 커져버려서 영후는 누군가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황 자체가 너무나 자극적이었기에 멈추기는커녕 더욱 하연의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만 싶었다. “하… 하연아… 넌… 정말…” “더 세게… 더 세…게…아…아앙…하앗…아윽…” 착!착!착!착!착!착!착!착!착! 하연의 계곡이 점점 뜨겁고 질척해지자, 제약이 없어져버린 ‘작은 영후’는 물만난 물고기처럼 드디어 가속에 가속을 더했고, 그러자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빨리, 그리고 크게 화장실에 울려퍼졌다. 화장실을 가득채우는 신음소리와 마찰음 소리가 극에 달할즈음, 갑자기 하연의 허리가 새우등처럼 휘어지는 듯 했다. “아윽! 윽…흐윽! … 으으…하아…하아…아하…” 드디어 절정에 다다랐는지, 모든 움직임을 일시에 멈춰버린 하연은,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는 생선처럼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채 펄떡거리는 ‘작은 영후’를 온몸으로 느껴보았다. ‘아응… 난 벌써 가버렸는데… 얘는… 하아… 아직도…’ 하연은 어느새 자신의 등 뒤로 다가온 영후의 목을 뒤로 뻗은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자신만을 위해 오롯이 배어 나온 남자의 땀이, 무척이나 따스했다. 때문에 하연은 겨우 고개를 뒤로 돌려 남자의 입술을 찾았고, 기다렸다는 듯 영후 또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주었다. ㅤㅉㅡㅂ…쭈읍…쭙… 여전히 한 몸이 된 상태에서 간단히 키스를 하고 나자 영후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건축물에서 중요한 버팀목이 빠진 것처럼 하연의 몸이 가라앉을 뻔 했는데, 역시나 남자의 팔은 그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긴… 아직이지…?) 겨우 정신을 차리며 옷도 추스리지 못한 채 양변기에 앉은 하연은 미안한 듯 영후를 바라봤지만, 영후는 언제나 그랬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그리고 나도 좋았는 걸…) 하지만 하연의 눈 앞에서 여전히 꺼떡거리며 울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는 ‘작은 영후’ 달라보였다. 때문에 이제는 정말 가야 했지만, 하연은 영후의 손을 잡아 끌었다. (왜…?) 영후가 물었지만, 하연은 대답대신 영후를 끌어다 양변기에 앉혔고 대신 일어서더니 다시금 등진채로 영후 위에 포개듯 앉았다. 하지만 제멋대로 움직이던 ‘작은 영후’가 계곡이 아닌 다른 곳을 찔러대자 하연은 나무라는 투로 조심스럽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넣어 길안내를 했다. (이녀석… 거기 아니거든? 아흑! 그…래…거기…아항…!) 분명 서 있을 힘도 없어보였건만, 스스로 엉덩이를 돌리며 ‘작은 영후’에게 계곡 속 동굴 여기저기를 안내해주자 영후는 보답의 차원에서 하연의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브래지어가 터져나올만큼 가슴은 부풀어 올라 있었고, 설마하며 브래지어를 밀어올리자 정말 ‘탱’소리를 내며 가슴이 터져 나와 주었다. 그에 영후는 부드럽게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는데, 그 애무가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부족하다는 뜻이었는지 하연의 엉덩이는 더욱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영후 또한 원을 그리며 가슴을 매만져주었다. 그러자 점점 가슴 쪽으로 신경이 집중되기 시작했는지, 하연의 허리돌림이 점점 불규칙적으로 변하더니 결국 멈추고 말았다. “하아…하아…잠…깐만… 나… 자기…보고싶어…” “응?” “잠깐…만…” 도대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더니, 어느새 자기 힘으로 몸에서 내려와서는 이번엔 얼굴을 마주보는 모양으로 다시 올라타기 시작하는 하연의 모습에 영후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괜…찮겠어…?) “으응…하앗! 아응!아… 아항! 어으…” 정자세로 이번엔 손도 필요없다는 듯 단번에 계곡 속으로 ‘작은 영후’를 삼키며 앉더니 양 손으로 영후의 목을 감싸 안고는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말을 타듯 상하운동을 시작했다. 물론 그 속도를 유지하기엔 여자의 몸으로서는 쉽지 않았을 테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언제부턴가 영후의 양 손이 하연의 엉덩이를 받치며 힘들지 않게끔 해주었기에 더욱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의 결합부위는 계곡의 질펀한 물이 없었다면 분명 마찰열에 의해 부싯돌 보다 훨씬 더 쉽게 불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를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왕복 운동이 행해지고 있었다.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게다가 그리 견고하지 못한 양변기의 커버는 언제 부서져도 당연해보일 정도로 삐걱거려 주었고.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그렇게 달리며 또 달리던 두 사람 중 역시나 먼저 멈춰선 건 다름아닌 하연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어흑! …아…아앙…” “우욱! 읍…! 아아…” 하지만 곧이어 하연의 몸 속으로 뜨거운 액체가 쉼없이 맥박치듯 밀려들어온 것을 보면 그리 큰 차이 없이 두 사람의 질주는 동시에 멈춰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남자도 여자도 섹스 후에 느껴지는 나른함에 한동안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껴안고서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때였다. 콰르르르르! ‘!’, ‘!’ 분명 어느 칸에선가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뜩해! 누가 있나봐…!) (쉬…) 순간적으로 하연의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계곡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작은 영후’를 통해 계곡이 수축함과 동시에 메말라가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하연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안정시켰다. (괜찮아, 잠시만 기다렸다가 나가자.) (몰라, 정말 미쳤나봐 나…) 하연은 현실로 돌아와보니 너무나도 황당한 일을 저질러 버린 것만 같아 차마 영후의 얼굴 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지만, 영후는 그런 하연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쪽’하고 뽀뽀를 해 주었다. 그러자 조금 누그러지는 하연이었지만 그럼에도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몰라, 이 바보야.) 하연은 아프지 않게 영후의 어깨를 주먹으로 톡 때려보고는 또다시 남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덜컹. 또깍 또깍 또깍 또깍. 쏴아… 끼익. 드디어 다른 칸에 있던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왔는지 하이힐 굽소리와 수도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다시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또깍 또깍 또깍 또깍… 이윽고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두 사람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풉’하고 웃을 수 있었다. 물론 뭐가 그리 웃기냐며 장난스레 날린 하연의 레프트 훅에 영후의 턱은 그대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지만. - 정기자와의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조전무는 아무래도 술 생각이 들어 서재에서 일어서 거실로 나가려 했지만, 곧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통화상대는 좀 전보다 조금 더 기분 나쁜 상대였다.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금 덜 나쁘건, 더 나쁘건, 나쁜 건 매한가지였고, 모두 지금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그러니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고 버리면 그 뿐이었다. “음. 또 무슨 일인가?” ‘내일은 한양여대에 배팅해도 지난 번처럼 탈나지 않는 건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지난 번이라면, 필시 위덕대와 한국여대 경기결과로 비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조전무는 언제나 들어도 정나미 떨어지는 중국말과 북한말이 섞인 듯한 말투가 거슬렸지만 내일이면, 내일 한국여대가 한양여대에 패하면 더 이상 이들과 말을 섞을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네. 이미 손을 써두었으니까.” ‘그 말씀 다시 한번 믿겠습니다. 믿는데… 이미 위덕대 전에도 그렇게 확신을 하셨어서…’ “그 땐! … 어쨌든 이번엔 틀림없을 테니 걱정 마시게.” 순간 조전무는 울컥하고 화를 낼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는데, 상대방은 마치 그런 조전무의 심리 상태를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혹시 잊으셨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 ‘우리는 그저 도박만 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조전무는 순간 ‘끄응’하는 신음소리를 냈지만 상대방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뭐, 어쨌든 저희 힘이 필요하게 되면, 말씀하시길… 그럼.’ 호의인지 협박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에 조전무는 통화가 끝났음에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후… 망할 삼합회 놈들…” - 하연의 자동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서야 호텔 룸으로 돌아온 영후는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둠에 휩싸여 있는 전주 월드컵 경기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파로 돌아와 몸을 묻었다. 하지만 뭔가 생각이 난 듯, 몸을 테이블 앞으로 끌어당겼고, 이내 빈 종이 위에 볼펜으로 뭔가를 써보기 시작했다. “내일은…” 맨 처음, 골키퍼 미자를 그려 넣었고 이내 미자 위로 네 명의 포백을 적어보았다. 그리곤 그 위로 다시 일렬로 미드필더를 나열해 보았다. 하지만 곧 중앙 미드필더인 수정이와 은채의 이름을 지웠다. 그리곤 공격형 미드필더 아라와 수비형 미드필더 지영의 이름을 가운데 나란히 적어보았다. “내일 이 녀석들 또 방방 뛰겠지? 후후.” 하지만 그 이후 이 남자는 꽤나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결국 원 톱의 자리에 혜미의 이름을 적어보았다가, 다시 지우고 윤지의 이름을 적어보았다. 윤지의 이름을 적을 땐 혜미의 이름이 미드필더와 포백의 중간에 적히기도 했고, 센터백 중 한 명의 이름을 지우고는 혜미를 넣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혜미의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에 적으려는 순간 룸의 벨이 울렸다. 때문에 영후는 종이를 접어 한 쪽으로 치워둔 채 문으로 걸어가 열었는데 그곳엔 윤지가 서 있었다. “윤지야?” 새초롬하게 서 있는 윤지는 영후의 어깨 너머로 남희나 수림이 있는지 슬쩍 확인해봤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때문에 혜미도, 그 누구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그냥 좀, 잠이 안 와서요.” “흠, 내일이 시합인데 잠이 안 온다니… 너무 연습량이 많았었구나. 그럼… 잠깐 들어올래?” “괜찮아요? 그래도…?” 윤지는 조심스럽게 물으며 들어섰지만, 역시나 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 간 거지? 혜미도 연락조차 안되고…’ “뭣 좀 마실래?”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윤지에게 냉장고 문을 열고 선 채로 영후가 물었고, 윤지는 좀 전까지 영후가 앉았었던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아무거나 요.” “아무거나 라… 그럼 오렌지 주스 마시자.” “근데 박기자님은 가신 거에요?” “어? 어. 그 친구도 나름 바쁘니까. 자 받아.” 영후는 마치 윤지에게 좀 전에 있었던 ‘화장실 사건’을 들킨 것 마냥 깜짝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마치 친구를 대하듯 냉장고에서 종이팩에 든 오렌지 주스를 꺼내 윤지에게 던졌다. 던졌다고는 하지만 아기에게 주듯 부드럽게 던져줬기에 윤지는 어렵지 않게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혹시… 그 친구가 윤지 괴롭히거나 뭐 그랬니?” “네?! 아, 아니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 아, 다행이다.” “?” “아니 난 또 그 녀석이 널 귀찮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좀 걱정했거든. 낮에 인터뷰도 그렇고…” “예에…” “그 녀석, 나쁜 애는 아닌데 나만큼이나 축구에 미쳐있어서, 가끔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거든.” ‘박기자님이 미쳐있는 건 축구가 아니던 걸요…’ 윤지는 팩에 달려있던 빨대를 떼어 팩에 꽂아 묵묵히 빨면서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영후의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축구가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 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이야기를 늘어놓던 영후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지의 눈빛 덕분에 홀로 너무 길게 떠들었구나 싶었다. “에구, 미안미안. 내가 좀 정신 없이 굴었구나.” “아니에요…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만약에요… 그러니까 진짜 만약에요, 제가 경기에 뛰지 못했다면, 또 앞으로 뛰지 못한다면 감독님은 어떻게 하실래요?” “망했다!” “에?” “윤지 너 못 뛰는 거야? 이거 정말 큰일인데?! 어쩌지? 내일 경기는 꼭 윤지 네가 있어야 되는데!!” 순간 영후가 펄쩍 뛰며 머리를 움켜쥔 채 룸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시피 하며 연기를 펼치자 윤지는 그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그러자 영후도 그제야 빙긋 웃으며 윤지에게 손을 내 밀었다. 윤지는 그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리듯 일어서 다가갔고 영후는 그 손으로 윤지를 안아주진 않았지만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주었다. “저기 봐라.” “?” 영후가 한 손을 들어 가리킨 어둠 속에선 전주 월드컵 경기장이 흐릿하게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마치 마법처럼 전주 월드컵 경기장의 모든 조명에 불이 들어오며 그야말로 거대한 궁전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예쁘지 않니?” “…” “저렇게 아름다운 곳을 두고, 윤지 네가 그만둘 수 있을까?” “……” 윤지는 영후의 말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가 감싸 안아준 어깨가 너무나 좋아서 그랬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어둠이 짙게 깔린 밤하늘 사이로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는 전주 월드컵 경기장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깬 황총장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 같으면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할 리 없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온 노감독 덕분이랄까. 하지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옆자리를 보던 총장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분명 잠들어 있어야 할 노감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총장은 시트를 박차고 침대에서 내려와 가운도 걸치지 않은 채로 막 방을 나서려 했는데 마침 문이 열리고 노감독이 들어섰다. “이런, 나 때문에 깬 거요?”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총장은 노감독이 들고 있는 쟁반 위의 커피와 샌드위치를 보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침대위로 올라섰고, 노감독은 침대용 간이 식탁을 총장의 다리 위에 놓아주곤 그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랬다. 요새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는 노감독의 친절에 총장은 적응이 될 만도 했건만, 아침마다 눈을 뜨면 놀라곤 했던 것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늘 내색하지 않은 채 조용히 커피를 음미했지만. “그런데…” “네?” “당신네 학교 선수들이 꽤나 재미진 일을 꾸몄구려.” “재미진… 일요?” 노감독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총장 앞에 조간 신문을 건네 주었다. 총장은 아무런 생각 없이 신문을 펼쳐, 전에는 읽어보지도 않았을 스포츠 면을 단번에 펴 보았는데, 그곳엔 무려 남희와 수림이 한국여대 유니폼을 입은 채 상의를 아슬아슬하게 가슴언저리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사진이 전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말이 가슴언저리였지, 중요한 ‘꼭지’부분만 보이지 않았을 뿐 둥그런 윤곽 그대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그 둘은 그 자세 그대로 등을 맞댄 채로 무척이나 농염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총장은 기함할 수 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두 코치의 믿을 수 없는 사진 바로 아래에는 선수들 모두가 전라인 채로 일렬로 서서, 끈을 양쪽으로 묶어 목에 건 축구화로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고, 손으론 축구공을 들어 하체의 은밀한 곳을 감추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갑자기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총장은 좋아하던 커피도 내던진 채 휴대폰을 들고는 거실로 뛰쳐나갔고 그런 총장을 바라보던 노감독은 그저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오늘 관중 몰이는 성공하겠구먼 허허…” - “권코치!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에욧!!!” 아침 햇살이 엷은 커튼마저 뚫고 거실로 들어와 따사로운 분위기를 자아낼 법도 했지만, 총장의 집 거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시베리아나 다름없었다. ‘총장님, 그게… 그러니까…’ “내가 이런 문제를 일으키라고 남희씨를!” ‘죄송합니다.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 벌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 하지만 총장은 제대로 변명조차 못하고 있는 남희의 모습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명확한 남희가 이 정도의 일을 벌였을 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총장은 겨우 화를 누그러뜨리고 물었다. 어차피 남희에게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오늘, 경기에는 지장 없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이따가 경기장에서 보도록 하죠.” ‘그럼.’ 하지만 통화를 끝내고 나자 총장은 이마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아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았다. ‘다들 편해서 좋겠어 정말… 당장 오늘 이사회 임원들이 또 얼마나 들볶아 칠는지… 에구구 머리야…’ - 조전무 역시 기분 좋게 일어나 잠옷 차림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들었지만, 윤지에 관한 기사는 보이지도 않는 구석 즈음에 그야말로 가쉽처럼 짤막하게 다뤄지고 있었고, 정작 한국여대의 세미 누드 사진이 크게 박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문을 구기다 찢어 구석으로 던져버렸고,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걸었다. ‘아, 전무님…’ “거두절미하고! 어찌 된 건가?!” ‘그게… 갑자기 한국여대에서 이런 사진을 퍼뜨린 데다, 확실치 않은 사진 하나 가지고 이슈를 만들기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어서… 혹시 동영상 원본을 주시면 이번에는 제가 확실하게…’ “이딴 식으로 일 하려면 그만두게!” 조전무는 전화기를 그대로 던져버렸다. “그런 게 있었으면… 그랬으면…” 조전무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며 소파에 눕다시피 털썩 쓰러졌다. 실은 윤지에게서 훔쳐온 하드디스크의 엄청난 보안프로그램으로 인해 자동 삭제가 되기 직전에 겨우 건진 프레임 하나, 그 사진이 사실은 조전무가 가진 카드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이번 건이 해결되리라 생각했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그야말로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 강원도립대와의 준결승전을 앞두고 그라운드로 들어선 여주대 선수들은 꽤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수요일, 게다가 낮 3시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관중들이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갑자기…?’ 여주대의 센터백 심서연은 의외의 광경에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저 몸을 풀러 그라운드에 들어섰을 뿐임에도 엄청난 환호와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오자 괜히 으쓱한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 “하~ 암.” 무슨 고민을 했는지 밤새 제대로 잠을 못 잔듯한 영후가 하품을 하며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갑자기 수많은 플래쉬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응?” 졸린 눈을 비비며 지금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나 싶어 꿈벅꿈벅 눈을 감았다 떴다 해 본 영후는 그러나 역시나 기자들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뭐야… 설마 어제 화장실에서의 일이…?’ 순간 기자들이 몰려들 일이라고는 어젯밤 그 일 밖에 생각나질 않는 통에 영후는 무척이나 당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쏟아지는 질문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이 감독님! 선수들과 코치들, 감독님의 지시로 사진을 찍은 겁니까?”, “여성부에선 여성을 상품화 한 것은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한 말씀만 해주세요!”, “항간엔 준결승전을 통과하면 또다른 사진을 공개하겠다는 정보도 있던데 사실입니까?” 정말 무수히 많은 질문이 스트로보 불빛과 비례하며 쏟아졌지만, 영후는 누군가의 손이 전해준 신문을 받아들고서야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 아무 이유없이 자신과 윤지를 빼돌린(?) 하연이 생각났다. ‘이그, 하연아…’ - “설명을 해 보세요! 왜 우리 학교 학생들이 이런 불경스런 사진을 찍은 건지!!”, “우리 한국여대의 전통과 역사를 이렇게 단번에 무너뜨려도 되는 겁니까?!”, “처음부터 공부만 하던 애들을 축구경기에 내 보낸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이게 뭡니까?!” 역시나 총장이 학교에 나왔을 땐 일찌감치 이사회가 비상소집 되어 있었고, 이사들은 마치 물 만난 고기마냥 한꺼번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때문에 총장은 무어라 이야기를 해 볼까 했지만 일단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에겐 입씨름보다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어 입 닥치게 하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으니까. 때문에 총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순간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다른 안건 없으시다면, 전 오늘 한국여대 준결승전을 관람하러 가야 해서 이만.”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니만큼, 뭔가 해결책이나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던 이사진들은 발칵 뒤집어졌고 그러던지 말던지 회의실을 빠져 나온 총장은 어쩐지 무척이나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통에 복도를 걸어가며 한참을 혼자 웃어보았다. “뭐가 좋아서 그리 혼자 웃는게요?” “어머, 언제 왔어요? 한참 기다리셨어요?” 총장은 언제왔는지 복도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노감독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다가갔다. “여기도 난리난게요?” 총장은 대답대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도 그렇죠?” “뭐 그렇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조전무 측이 걸고 넘어진대도 크게 문제될 건 없으니까 말이오. 이미 운동 선수들 화보가 넘쳐나는 게 요즘 현실이니까.” “뭐 그렇담 다행이구요.” “허허…” “왜그러세요?” “어쩐지 당신도 이런 일에 익숙해지는 가 싶어서 말이오.” “어쩌겠어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라도 해야지.” “그럼 우린” “슬슬 가 볼까요? 호호.” 어느새 현실을 초월해버린 듯한 두 사람은 더 이상 어색해하지도 않은 채 팔짱을 끼고는 뭐가 좋은지 한참을 웃으며 걸어나갔다. - 호텔에서 기자들에게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영후는 그러나 연습경기장에 와서야 자신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연습경기장 주변엔 안에서 몸을 풀고 있는 한국여대 아이들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철조망마다 다닥다닥 기자들이 달라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결국 어쩌지도 못하고 서 있는 영후를 가만히 내버려둘 기자들이 아니었다. “어어, 저기 이영후 선수다!!”, “이 영후 선수! 선수들이 갑작스럽게 누드 사진을 찍은 이유가 뭡니까?”, “벌써부터 연예 기획사 측에서 물밑 접촉을 해온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수들 중에 가장 몸매가 좋은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역시나 이번에도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영후는 그러나 연습경기장에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미안한 눈길로 바라보는 남희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 “자, 누구 이 사태에 대해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줄 사람?” 어렵사리 연습경기장으로 들어온 영후가 아이들을 불러모으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있었다. “흠,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 그럼 코치님들은 어떤가요?” “……” 결국 영후가 남희와 수림을 돌아보며 물었지만 그들도 선뜻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윤지가 입을 열었다. “감독님, 저…” 하지만 영후는 윤지를 보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엔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움직여준 덕분에 이렇게 인기 만점이 됐으니까” 영후가 경기장 밖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생각보다 화는 나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 저녁에 있을 시합에선, 전력을 다해줬으면 좋겠구나.” 결국 영후의 입에서 짜증은커녕, 평상시와 똑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기에 아이들도 또한 코치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려 했지만 아직 감독의 지시는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대신," "?" "오늘 윤지는 출전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청천벽력. “가, 감독님?!” 어쩐지 모든 게 너무 순조롭게 해결된다 싶었더니만 영후의 입에서 의외의 지시가 흘러나오자 모두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남희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이미 알고 계셨던 거야. 사진을 보시고…’ 분명 영후는 사진에 실린 사람들 중, 윤지가 빠져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때문에 확실한 내막은 알지 못했지만, 뭔가 ‘팀’ 전체가 동료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쯤은 어렵지않게 짐작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감독의 지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너희들의 동료를 위한 거라면, 너희들이 직접 보여주렴. 이런 사진이 아닌, 그라운드에서. 그럴 수 있지?” “네!!!!!!!!!!!!!!” 크게 혼날 것을 걱정하던 아이들은 그야말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고,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궁금해하던 철조망 밖의 기자들은 내막도 모른 채 무조건 카메라 셔터만 눌러대고 있었지만 그 어떤 카메라도 영후의 윤지를 향한 걱정스런 시선과 윤지의 당혹스런 표정은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47부. ‘1’의 자리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에에? N석 밖에 안 남았다고요?” 철용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매표소 안의 직원에게 다시금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남아있는 표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말 또한 덧붙여주었고. “이거 어쩌죠? E석 하고 W석은 아예 동이 난 모양인데요?”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냥 N석이라도 구매하는 수 밖에. 참 한 장 더 구입하게.” “예? 그건 왜…?” 철용은 남자 둘이 축구 보러 온 것도 우울한 데 거기다 왠 ‘한 장 더’인지 궁금해했지만, 그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저씨!” “어? 넌?” “왔니?” “죄송해요. 제가 모시고 왔어야 했는데…” “아니다. 후배 놈 차 타고 편하게 왔는 걸?” “아, 안녕하세요.” 현우는 규식에 이어 철용에게도 꾸벅 인사를 했는데 순간 깜빡 했다는 듯, 막 티켓 값을 지불하려는 철용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오늘 티켓은 제가 준비했어요! 여기 세 장이요! 거기다 특별석W요!” “뭐어? 학생인 네가 무슨 돈으로…?” “학생이니까 이런 경기는 꼭꼭 챙겨봐야죠!” “거참 선배 말 많수다. 이래도 꽁짜 저래도 꽁짠데 잔말말고 들어가기나 합시다 예? 크크크.” 철용은 돈 굳었다는 표정으로 현우에게 찡긋 윙크를 날리며 규식을 떠밀며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 “와우! 환타스틱한데요?” 리키는 하연의 도움으로 기자석에 앉은 채 사만석이 거의 들어 찬 광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다 작가님 덕분이에요.” 아직 강원도립대와 여주대의 경기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관중들의 웅성거림에 두 사람은 꽤나 소리를 질러가며 대화를 해야 했다. “오~노노. 절대 그렇지 않아요. 장소와 컨셉 그리고 뭣보다도 모델이 뷰티풀했죠.” “어쨌든 고생 많으셨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게임 플레이도 한번 찍어보고 싶네요.” “그러실 수 있을 거에요.” 하연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모든 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리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리키가 아니었다면, 오늘 있을 시합은 커녕 윤지도, 영후도 모두 곤란한 상황에 빠질 것이 뻔했으니까. “참 리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사진은 신문에 실은 것들이 전부인가요?” “엄… 그럴리가요, 그치만 약간 보정을 해야해요.” “보정…이요?” 하연은 익히 알고 있던 리키의 작업 스타일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분명 리키는 날 것, 그러니까 살아있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 그대로 사진을 촬영하는 작가로 유명했다. 때문에 비록 누드사진이 전문분야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보정’이라니. “레이디스가 모두 신인이나 다름없는 걸 알면서도 내 장비 모두를 동원해서 찍을 순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거, 알죠? 그걸로 찍었더니 생각보다 손 볼 곳이 있더라구요.” 리키가 손가락으로 작은 네모를 그리며 스냅카메라의 크기를 그려보이며 말하자, 그제야 하연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전문 모델이 아닌 이상 보통의 사람도 아닌, 전문 사진작가가 대포만한 카메라와 렌즈를 들이대면 평소의 얼굴은 커녕 얼토당토 않은 기계적 모습밖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물며 그저 어린 학생들에게 누드 모델을 시키면서 그런 카메라와 조명을 동원했다면 기사 마감시간은 물론 하루만에 작업이 끝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연은 역시나 또하나의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어떻게 단시간내에 리키가 찍은 사진들이 퍼져나갔던 건지 하연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분명 조전무 쪽이 가지고 있는 것도 사진이었고, 리키가 가지고 있는 것도 사진이었다. 게다가 조전무 쪽은 이 계통에서 악명 높은 기자까지 동원해서 일을 크게 만들 심산이었을텐데 어떻게 리키의 사진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던 걸까? 게다가 하연이 속한 신문사에서만 기사를 내려 했었다. 허나 모든 신문들이 일제히 같은 류의 기사를 내어줬기에 설마 이 사진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한가지를 더 물었다. “참, 사진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퍼져나간 거죠? 우리 신문 뿐만 아니라 오늘 아침 다른 신문들에 모두 실려있던데… 혹시…” “오, 노 프라블럼! 마이 트위터에 팔로워들 많아요! 업로드 하면 모두가 똑같이 보게 되요!” “아…” 그랬다. 대중과 얼마나 소통하고 있느냐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서로가 소식을 올리고, 퍼트리고, 의논하고, 확대 재생산해내는 것이 인터넷이었다. 하지만 권력에 빌붙은 기사 따윈 모두가 알아차리고, 정확한 뉴스들만을 골라내는 현 세대들의 현명함에 하연은 기자로서의 두려움도 살짝 느껴졌다. ‘어쨌든 위기는 넘겼으니까, 영후야… 이번엔 네 차례야!’ - “오늘은 꽤나 사람들이 많은가 보오.” 경기장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주차장에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차들을 보며 노감독은 무심코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건 총장의 볼멘소리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면 그게 더 창피한 거 아니겠어요?” “또 그러는 구먼… 허허…” 쿨하게 이사진의 긴급회의장을 박차고 나올 때는 언제고, 역시나 마냥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던지 황총장은 무슨 말만 하면 '누드사진' 건을 걸고 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진심을 그라운드에서 확인하고나면 나아지리라 확신하며 노감독은 황총장의 가는 허리에 손을 둘러보았다. 물론 '어흠!'하는 겸연적은 헛기침도 덧붙여보며. - “다녀왔습니다.” 수림이 잠시 경기장을 다녀왔는지 덤덤하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연습경기장에서 몸을 풀고 있던 아이들은 모두들 수림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누가 이기고 있어요?”, “연장전은 안 갈 거 같아요?”, “몇 대 몇인데요?”,”강원도립대 애들은 잘 하던가요?” “아이구, 아이구. 얘들아, 숨 넘어 가겠다. 하나씩 물어보면 안되겠니?” “여주대가 이기고 있죠?” 아라가 당연히 그럴거라는 얼굴로 묻자 수림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응. 점수 차가 꽤 나더라.” “실점은 없구요?” “아쉽게도.” “심서연은 어땠어요?” 불쑥 혜미가 물었지만 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안 나왔던데? 부상인가?” “…” 혜미는 수림에게서 심서연의 소식을 듣고나자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심서연이 나오지 않았다는 건, 어찌보면 한국여대의 실력을 인정해서 그에 맞춰 체력을 아끼기 위해 출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정말 부상 때문에 출전을 못했을 수도 있었고.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체력안배를 위해서라면?’ 혜미는 자신도 모르게 윤지를 바라보았다. 감독님의 말대로라면 윤지는 오늘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승전엔 윤지와 심서연의 진검승부가 펼쳐질 것이었다. 혜미는 결승전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는데, 그런 혜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다른 아이들은 연신 철조망 밖의 카메라를 향해 요상야릇한 포즈를 취해보이고 있었다. - 경기장에 들어설 때는 무척이나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섰지만, 자리를 잡고 경기가 시작된 뒤에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후반전이 시작된 지 20분 정도가 지났음에도 전광판에는 준결승전의 스코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6 : 0 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기에 현우도 철용도, 그리고 규식도 벌써부터 결승에서 맞닥뜨릴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강원도립대가 대진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군. 물론 그 운도 이 경기로 끝이겠지만.” “그러게 말입니다. 만약 강원도립대가 한국여대 자리에 있었다면 단 두 경기 뿐이었다고는 해도 쉽지 않았을 거 같네요.” “그럼 한국여대도 어렵지 않게 결승에 갈 수 있겠죠?” 현우가 철용과 규식의 대화에 조심스럽게 끼어들었지만, 현우의 바램과는 달리 규식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건 그렇게 쉽게 장담하긴 힘들단다. 여주대의 경우는 비상식적으로 강한 팀인 거고, 그에 비해 강원도립대는 예선 2위팀이니까. 그리고 한양여대는 2위와는 달리 확실한 1위를 차지했으니까, 저런…” 이야기를 하다 말고 규식은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 혀를 찼는데, 그곳을 바라본 현우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강원도립대의 선수 중 한 명이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은 채 오바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많은 체력을 소비하는 축구 경기에서 다리에 쥐가 나는 모습은 몇 번 본적이 있었지만 토를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여주대 선수들은 한 경기 쯤은 더 뛰어도 좋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아보였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겠다는 거야…?!’ - “감독님,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준결승전 첫번째 경기가 거의 끝나가는 시간이어서 남희는 아이들을 모으고는 벤치에 앉아있는 영후에게 다가갔는데, 가까이 가서야 영후가 뭘 하고 있는지 알게 되고서는 단번에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영후는 벤치 의자에 놓여있는 문제의 스포츠 신문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남희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어느새 와있던 혜미가 남희의 소매를 잡으며 잠시만 시간을 달라는 애절한 눈빛을 보냈기에 핑계 삼아 남희는 잠시 자리를 피했다. “감독님…” “어? 그래, 다 준비 된거니?” “네에. 근데 있죠…” “?” “아까는, 실은 장난치신거죠?” “어? 무슨 말이니? 장난…이라니?” 하지만, 혜미가 말한 ‘장난’의 의미를, 영후는 혜미가 돌아본 곳에 있던 윤지를 보고서야 무슨 의민지 깨달을 수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혹시, 자신없는 거야?” “아니, 그런게 아니라요. 윤지는 정말 아무잘못 없단 말이에요.” “그럼 혜미 넌?” “예?” “넌 뭘 잘못하기라도 했단 말이니?” “아이 참! 감독님, 제 말씀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제일 친한 친구의 포지션을 뺏기 싫다… 뭐 이런 거?” “!” 대화의 과정을 건너뛰고 마치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와있는 듯한 영후의 돌발 발언에 혜미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서 있던 윤지는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혜미야, 이 모자란 감독이란 놈은 혜미 너에게 늘 미안한 마음 뿐이란다.” “예?” “혜미 너야말로 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을 갈망하고 있었잖니.” “……” “알고 있었고, 또 그랬어야 했지만… 어쨌든 팀 사정상 묵묵히 빈자리를 메워주는 네 덕분에 부끄럽지만 여기까지 오게 됐단다.” “가, 감독님…?” “그치만 오늘 마지막으로 미진했던 부분을 아이들이 ‘배우고’나면,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감독님! 전 어디에서 뛰던 아무 상관없었어요! 그냥, 그냥 전…” 혜미는 ‘감독님과 함께라면’,이란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조용한, 그리고 단 둘이 있었다면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었을까? 혜미는 잠시 생각해봤지만 역시나 그랬대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혜미야, 그러니 오늘 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면 망설이지 말고 모두 해보렴.” “?” “저기 너의 파트너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배울 수 있게, 응?” 영후가 바라보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윤지가 혜미를 바라봤고, 혜미도 윤지를 향해 겨우 웃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윤지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는 게 느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후가 자신의 어깨에 장난치듯 팔을 두르며 윤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 감독님?!” 여태까지 나눴던 무거웠던 이야기가 한순간에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듯한 기분에 혜미는 당황했지만, 어쩌면 이런 남자라서 모두가 끌리는 건 아닐까 혜미는 짐작해볼 뿐이었다. 물론 이 남자는 그런 것들은 아무상관도 없다는 듯, 마치 산책하러 가자는 투로 가볍게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슬슬 가 볼까?” 영후가 혜미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저만치 걸어가자, 조금 거리를 둔 채 서 있던 남희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에 놓여있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전혀 자신 같지 않은 여자가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신문 사진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남희는 그 신문을 곧바로 휴지통에 던져버릴까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어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도 사라질지는 미지수였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신문을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감독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설마 감독님을 유혹했었던 때도 이런 표정이었을까 싶어 남희는 더욱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사진기자들의 집요함에 남희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사뿐사뿐 자리를 옮겼는데 어쩐지 걸음걸이가 평소와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 걸음걸이는 마치,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사진촬영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남희는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리 멋을 낼 줄 모르는 여자라 하더라도 사진촬영이라는 말에 나름대로 복장을 준비했음에도 이렇게, 땀에 절은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촬영이라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하지만 리키는 남희의 마음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얼굴로 조그만 카메라 뷰 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재빠르게 몇 번의 셔터를 눌러댔는데, 그 때였다. 민지가 끼어든건. “저기요.” “?” “저도 사진이라면 좀 아는데 말이죠. 이런 식으로 촬영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애들 장난도 아니고 조명도 없이…” 알몸으로, 그것도 담요 하나만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여자애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당돌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리키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오우 땡큐! 잊고 있었네요.” 이윽고 리키는 관중석 어딘가를 향해 손짓을 했는데, 그러자 어둠이 막 내리기 시작한 전주 월드컵 경기장의 조명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저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뿐이었음에도 경기장은 낮에 보여주던 모습과 또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아이들은 물론 리키도, 또 두 코치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편 그 조명 빛을 그대로 머금기 시작한 남희의 몸은 더욱 빛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환해지는 탓에 남희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지만 정말 놀란 건 남희가 아닌 리키인 것 만 같았다. “와우! 뷰티풀… 그대로 있어요!”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해 놓고는 카메라의 엘시디 화면을 들여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리키 덕분에 남희의 얼굴은 점점 더 홍조를 띄어갔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었기에, 아니 진정한 촬영은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이었기에 남희는 더욱 난감할 따름이었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리키의 입에서 튀어나온 ‘시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를 알고 있는 남희는 순간 온 몸의 솜털이 파르르 떨리는 듯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팀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 남자를 위해서라면. 때문에 남희는 트레이닝 복의 상의 지퍼를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직 한 남자에게만 보여주고 싶었던 그녀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같은 여자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수림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숨소리 조차 내지 못하며 남희의 노출을 지켜볼 뿐이었다. - 전주 월드컵 경기장으로 들어선 한국여대 선수단은 선수들 및 관계자들만이 다닐 수 있는 통로로 들어섰는데, 마침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 여주대 선수들과 마주쳤다. 하지만 지난 경기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달리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영후를 지나쳐가던 여주대의 이영기 감독은 기어이 한국여대의 속을 긁어놓았다. “운이든 뭐든 결승전에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아마도 천운이 필요하겠지만… 하하하하…” 순간 수림은 '욱'하며 무어라 쏘아주려 했지만, 남희의 제지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후도 이번 만큼은 다정다감하지만은 않았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 운은 원체 좋은 편이라서요. 그럼.” 간단하지만 꽤나 강단이 있는 대답에 이영기 감독은 한마디를 더 하려다 말고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내 선수들이 따라 들어갔는데, 오늘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탓에 트레이닝 복 차림이었던 심서연만이 영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래, 서연아. 몸은 괜찮아졌니?” “네에…” 어찌된 건지 다른 팀의, 그것도 여.주.대.의 심서연에게 저리도 따뜻한 말을 영후가 건네자 순간 한국여대 선수들과 두 코치들의 질투심은 그대로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눈치 없는 남자가 그런 걸 알리 없었다. 게다가 그라운드에서의 모습과 달리 상냥한 소녀로 돌아가버린 듯한 심서연의 모습에 다들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만드는가 싶었는데 그나마 십 수개의 눈치화살을 온몸으로 맞던 서연이 결국 영후와의 조우를 짧게 마치고 걸음을 옮기자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지는 듯 했다. 하지만,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던 서연이 불현듯 윤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또다시 분위기는 급랭했다. “꼭, 다시 보자. 결승전에서 기다릴게.” 서연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윤지는 서연의 손을 지긋이 내려보다가 다시 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 “?” “오늘은 악수를 해줄 수가 없어.” “그게 무슨…?” “결승전에 너희 팀을 만나게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늘 내 동료들의 발등에 달려있거든.” “무슨 말이야 윤지! 우린 꼭 오늘 승리해서 결승전에 진출 할거라고!!”, “다시 만나면 지난 번 빚은 그대로 돌려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셔!”, “윤지야, 빨리 안 오고 뭐해?!” 그야말로 아이들은 윤지의 말에 폭발해버렸고, 당장이라도 싸우자는 투로 달려들었지만 수림과 혜미가 적극적으로 말려 다행스럽게 충돌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연은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윤지가 손을 잡아주지 않는 것에 더욱 실망하는 얼굴이었다. “악수… 해주지 않을 거니?” “응.” “그렇구나… 알았어… 그럼.” 결국 포기하며 윤지를 스쳐 지나가던 서연은 그러나 조금은 마음이 풀어질 수 있었다. 윤지가 서연의 뒷모습에 대고 담담하게 한마디를 해 주었으니까. “그대신,” “?” “결승전에서 꼭 해줄게. 악수.” 순간 서연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윤지는 벌써 저만치 통로 끝으로 사라져버린 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중석에서 엄청난 환호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윤지에게 반해버린 팬들의 그것일 거라 어림짐작해본 서연은 어쩐지 가슴 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듯 했다. ‘꼭… 다시 보자!’ - 우와아아아아!!!!!!!!!!!!!!!!!! 윤지는 선수 전용 통로를 통과해 그라운드로 들어서자마자 소용돌이치는 관중들의 함성에 압도되어 그대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앞선 경기인 여주대와 강원도립대의 경기 중에도 계속 들어찬 관중석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조차 없어 보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해왔던 낮 경기와는 달리 조명까지 눈부시게 그라운드를 비추자 마치 신세계에 발을 디딘 것만 같았다. 게다가, “우와아아아앗! 우리의 여신! 등! 자아아아아앙!!!!!!!!!” 연습 때마다 학교 스탠드를 빼놓지 않고 찾아준 남자아이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N석의 서포터석을 점령하고서는 모두 웃통을 벗은 채 탐을 치며 윤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주었기에 윤지는 기뻐했어야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억울하고 또 분했다. 그건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윤지는 출전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 엄청난 관중의 열기에도 별반 동요하지 않던 영후는 벤치에 자리를 잡기 전에 먼저 한양여대 벤치로 찾아가 이상엽 감독과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이영ㅤㅎㅜㅂ니다.” “어이구 이거 영광입니다. 이영후 선수, 아니 감독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뭐, 보시다시피 지금 이렇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참 좋은 일 하셨습니다.” “네?” “한국여대 아이들 말입니다. 감독입장이 아니라, 축구인의 입장으로서도 무척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기계가 아닌 생활축구로서 이만큼이나 만들어내시다니요.” “아, 과찬이세요.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걸요.” “겸손도 국가대표급 이시네요. 그럼 원래 똑똑한 아이들이라 그만큼 발전이 빨랐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하하.” “오늘 많이 가르쳐 주세요.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이상엽 감독과 이영후는 표면상으론 너무나 밝게 인사를 나눴지만, 마지막으로 맞잡은 서로의 손을 통해 이 시합, 만만치 않겠다는 느낌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이영후란 사람이 선수로서 참가하지 않는 이상, 그리 어려울 것은 없을 거란 생각을 이상엽 감독은 해 보았다. 게다가 축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팀을, 그것도 준결승전에서 만나게 된 걸 보면 이 대회에서만큼은 계속 승리의 여신이 한양여대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것만 같아 기쁘기 까지 했다. “생각보다 좋은 느낌의 감독님이신 것 같아요.” “네?” 한국여대 벤치로 돌아오면서 수림이 말하자 영후는 못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수림이 고개로 살짝 한양여대 감독을 가리키자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 네…” 하지만 영후는 이내 이상엽 감독과 맞잡았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혜미 ………………지영 …민지… 수정… 아라… 소영 …하늘… 진희… 미애… 나경 ………………미자 몸을 풀고 경기 시작 전, 선수들과 라커룸으로 돌아온 영후는 화이트보드에 이렇게 적고 돌아섰다. 그러자 의자들로 반원형을 그리며 앉아있던 아이들이 곧바로 지적에 들어갔다. “감독님, 지영이 자리 잘못 적으셨는데요?”, “아라하고 바뀌었어요 감독님.”, “아니, 아라 자리엔 은채가 들어갔었는데요, 지금까진?”, “감독님, 저 지영이에요. 수비형 미드필더라구요.” 하지만 영후는 배시시 웃을 뿐 둘의 위치를 수정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렇게 시작할거야.” 뭐 감독이 그렇다니 그런 가 보다 해야 했지만, 한국여대의 팀 분위기로 봤을 땐 분명 태클이 들어올 것이 분명했기에 누가 먼저 시작할까 궁금했던 영후였지만 의외로 남희가 먼저 시작했다. “감독님, 죄송하지만 현재 적어놓은 포메이션은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건… 왜죠?” 역시나 화는커녕 적절한 의견을 원하는 얼굴로 영후는 남희를 돌아보았고, 남희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분명 오늘 저희가 상대해야 하는 한양여대는 공격형 미드필더 전현아의 지휘로 공수가 조율되는 팀이란 거, 같이 지켜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팀이라면 당연히 미드필드에서의 연계 및 압박이 중요한 데, 그러자면 지영이의 수비능력과 아라의 공격적인 능력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음, 일리있네요. 그럼 하나 물어볼까요? 아라야?” “네?” “아라는 여주대와 경기할 때 어떤 느낌이었니?” “아, 그땐… 으으…” 아라는 그때 경기를 생각하기도 싫은 듯 머리를 감싸 쥐었고, 마찬가지로 그 시합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 했었던 수정이와 은채도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난 질책하려는 게 아니고… 그래, 그 시합에서 뭔가 얻은 건 없었을까?” “얻은…거요?” 영후가 아라 뿐만 아니라 지영이와 은채, 그리고 수정이까지 돌아보며 말해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영후는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모두 믿지 않겠지만, 지금의 이 침묵이 실은 정답이란다. 그땐 누가 봐도 답이 없었지.” “?” “하지만 이번 시합에서 전반전이 끝나면, 너희들은 여주대 전하곤 달리 진짜 답을 얻게 될 거야. 약속하마.” 도대체 이놈의 감독은 왜 하나같이 어렵고 힘들게 뭔가를 알려주려 하는 건지 수림은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이들의 얼굴은 또다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정말이지, 그 감독의 그 제자들이라니까…’ - 드디어 양쪽 선수들이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들의 손을 맞잡고 경기장에 들어서자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에 들어섰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함성이 다시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학교 스탠드를 메워주던 관중들 덕분에 면역(?)되어있던 한국여대 선수들과는 달리 역시나 한양여대 선수들은 흔치 않은 광경에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저 아이는…’ 수림은 남희가 누누이 경고를 했던 전현아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확실히 다른 아이들의 얼굴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준결승 전에, 그것도 만원관중 앞에서 짓는 표정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막을 수… 있을까…? 게다가 윤지도 없이…’ 수림은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드는 탓에 자신도 모르게 벤치에 앉아있는 윤지를 바라봤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지만 수림은 부인할 수 없었다. 단 두 경기만에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은 소녀가 있다는 사실을. - “뭐 경기를 보러 오면 라이브로 벗어주기라도 하는 줄 알았나 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온 거야? 쳇!” 평소 같았으면 관중석을 가득 채워준 관객들에게 고마워 하고도 남았을 철용이었겠지만, 오늘만큼은 사건이 사건이었는지라 특히나 남성 관객들에게 쓸데없는 적의를 내뿜어보았다. 이에 규식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었지만 이내 굳게 다물어 버렸고, 그런 모습에 현우는 혹여 이미 자신이 혜미의 알몸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규식이 얼마나 놀랄까 싶어 규식도, 또 혜미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규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래도 혜미가 플레이 하는 걸 보면, 사람들도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요?” “퍽이나, 아마 열이면 열 시합 도중에 유니폼이 찢어지길 바라는 놈들이 태반일거다.” 하지만 현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용은 불을 지폈는데, 그제야 규식이 입을 열었다. “네깟 놈이 뭘 안다고 그래?!” “예…? 선배…?” “우리 때만 해도 프로축구라고 하면 언제나 구름 관중이 들어찼었지. 물론 미친 문어대가리 같은 놈 때문에 그렇게 됐던 거긴 하지만. 근데 지금은? 프로 야구에 치이고, 해외 축구에 치이고, 게다가 언론은 돈이 안되니 방송 조차 해주지 않고 있잖나.” “…”, “…” “나라도, 내가 혜미고 영후였대도, 이렇게라도 관중이 모여준다면, 그래서 이렇게 뜨거운 열기를 뿜어준다면 몸뚱아리가 아니라 내 영혼이라도 팔았겠네 이 사람아!” 확실히 규식의 확고부동한 이론에 여지가 없던 철용은 머쓱해하며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솔직히 규식도 부모 된 입장에서 이번 ‘누드 사진 사건’은 쉽게 용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파장을 만들어낸 아이들인 만큼 어쩐지 야단치기 보단, 우선은 조금 더 지켜보고만 싶었다. 아니 될 수 있으면 아주 길게. 한편 현우는 오늘도 벤치에 앉아서 경기의 시작을 맞이하는 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오늘도 윤지는 선발이 아닌 건가…?’ - 규식 일행이 자리잡은 관중석과 좀 떨어진 곳에서도 현우와 같은 생각을 하는, 그러나 현우보다 한참이나 많은 나이를 자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놈… 아직도 우물쭈물 하는 게냐…? 그도 아니면…” “네? 뭐라고 하신 거에요?” “음? 아, 아무것도. 나이가 드니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구먼.” 총장은 노감독의 중얼거림을 용케도 놓치지 않고 물어왔지만, 노감독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즉답을 피했다. 하지만 노감독의 시선이 그라운드가 아닌 한국여대의 벤치 쪽을 -- 정확히는 윤지에게로 -- 향해 있는 것에 총장은 또 이놈의 사제지간이 무슨 꿍꿍이인 건가 싶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이었으니,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침대 위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해보고 있었다. - ‘이 아이인가?’ 경기 시작 전 늘 그랬듯이 심판들과 더불어 일렬로 서있는 한양여대 선수들에게 한국여대 선수들이 줄지어 이동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 와중에 아라는 ‘전현아’라는 아이의 손을 잡아보면서 어떤 특별한 점이 느껴질까 싶어 집중했지만, 특별함은커녕 정말 축구 선수가 맞는가 싶어 재차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육십이 될까 말까 한 키에, 체구는 마치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호리호리한 몸매. 한마디로 어렵지 않겠다,라는 '위험한' 생각이 아라의 머리에 구체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생각이 100 퍼센트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삐~익! 드디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소리가 울려 퍼지자 또 한번 관중석에선 우뢰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센터서클에 서있던 한양여대 공격수 지소연은 같은 포지션의 김수연에게, 그리고 김소연은 다시 자신들의 바로 뒤에 자리잡고 있던 공격형 미드필더 전현아에게 공을 돌렸다. 시작하자마자 요주의 인물에게 공이 전달되자 특히나 한국여대 미드필더진은 바짝 긴장했다. 허나 전현아마저 특이한 움직임 없이 이내 공을 뒤로 돌려 최후방 센터백에까지 후퇴시키자 어쩐지 그간 시작하자마자 불꽃을 튀겼던 지난 두 경기와 다르게 흘러버려 한국여대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경각심이 조금씩 무뎌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 “뭐 대충 이정도 포메이션인가?” 규식은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가 보기 좋게 메모지를 꺼내 한양여대의 포메이션을 그려주었다. 한양여대----------------------------------------------한국여대 ------지소연 김수연---------------------------혜미 ---------전현아-------------------------------지영 고혜란 조효선 이지윤 권선희--------민지 수정 아라 소영 ---신설혜 임선주 신민아----------- 하늘 진희 미애 나경 ---------김현주------------------------------미자 “그럼… 한양여대는 3-4-1-2라고 읽는 거죠? 한국여대는 4-4-1-1이고요.” “그래, 하지만 전에도 이야기 했었지? 포메이션은 절대 고정적인 게 아니란다. 하물며 현대 축구에서는.” “그렇담 역시 한양여대 전술도 한국여대처럼 수시로 바뀌고 그러겠죠?” “물론이지. 특히나 지금의 모양은 수세시에는 5-3-2 혹은 5-4-1로 변형될 수도 있을테고, 공세시에는 극단적으로 보자면 3-2-3-2로 몰아붙일 수도 있는 전술이란다. 물론 여기엔 양 윙백들의 공격능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되어야 하겠지만.” “그치만 선배, 이 전술의 문제는 투 톱을 지원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의 능력이 좋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1’의 자리는 보시다시피 커버해야 하는 공간도 상당하다 구요.” 철용이 규식의 이야기에 끼어들었지만 어쩐 일로 규식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이 전술의 포인트는 ‘1’의 자리군. 어때, 동의하나?” “뭐, 일단은 요.” “만일에 ‘1’의 자리를 뒷받침하는 뒤의 두 명, 그러니까 홀딩 미드필더들의 활동 반경이 넓다면?” “에~이, 선배. 그런… 그건 남자들 경기에서도 흔치 않다구요. 아시면서…” “가정이긴 한데, 만약 그렇다면 어쩔건가?” “그, 그야… 미드필더에서 박터지는 거죠 뭐…” 규식은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설마 그럴리는 없을 거라면서도 괜한 불안함에 또다시 담배를 찾으려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적거리는 철용의 모습에 현우마저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 전방에서 한양여대 세 명의 센터백들과 라인을 유지한 채로 이리 저리 공간을 찾아 다니던 혜미는 그러나 느슨한 경기 운영과는 달리 생각보다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론적으론 분명 4명이 포백을 이룰 때가 훨씬 촘촘한 간격으로 되어있으니 공격이 쉽지 않았어야 했는데, 당장 3명의 최종 수비를 홀로 맞서보니 생각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포백은 센터백이 두 명, 스리백은 센터백이 세 명이라 이건가?’ 확실히 스리백은 포백처럼 오프사이드 라인을 형성하는데 주력하기 보단, 실질적인 대인마크에 더욱 집중한다는 것을 혜미는 지금에서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떻게 됐든 자신이 해결해야만 했다. 오늘의 한국여대 감독에겐 지난번의 ‘엄살’같은 교체는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때문에 이러한 잡다한 생각을 하기도 전에 혜미의 몸은 먼저 반응하며 전력으로 돌진했다. ‘찬스!’ 한양여대의 후방에서 공을 돌리던 수비형 미드필더 조효선은 레프트 센터백 신설혜에게 공을 돌리려 백패스를 했는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혜미가 거칠게 신설혜를 몰아붙이며 몸싸움을 걸었다. 그러자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신설혜는 혜미의 어깨에 밀려 넘어지고 말았는데,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공을 자신의 발 아래로 놓은 후 슬쩍 주심을 돌아본 혜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됐다!’ 드디어 공의 소유권을 빼앗은 혜미는 빙글 몸을 돌려 곧바로 골키퍼를 향해 돌진했는데, 역시나 아직도 남아있던 나머지 두 명의 센터백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때문에 혜미는 무리하게 드리블 하기보단 간단하게 마무리 짓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페널티 에어리어에 진입하기도 전에 그대로 슈팅을 날렸다. 파~앙! 그러나 공은 생각보다 좀더 밑부분을 맞았는지 골대에서 한참 벗어나 버리며 관중석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그럼에도 공의 궤적을 끝까지 바라보던 혜미는 어쩐지 경기 시작 전까지 먹먹했었던 가슴이 뚫리는 듯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뭐, 다음 기회에!’ - 골 라인 아웃 된 공을 볼보이로부터 건네 받은 한양여대 골키퍼 김현주는 골에어리어 모서리에 공을 놓고는 멀리 차지 않고 가까운 신설혜에게 다시금 공을 넘겨주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 플레이는 좀 전의 실책에 대한 다독임과 같았기에 신설혜는 김현주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공을 받았다. ‘미안, 현주야.’ 이후 신설혜는 조금 전진하다가 한국여대와 한양여대의 딱 중간 지점에서 기다리던 전현아에게 길게 패스를 했는데 이 패스 또한 그리 정확하지 못했다. 때문에 한국여대 미드필더 수정이 단번에 가로채어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혜미는 수정에게 공격형 미드필더로 올라와있는 지영이의 위치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신은 그와 정 반대 방향으로 공간을 찾아 달렸다. 하지만, ‘이런!’ 수정이에게 공을 건네 받은 지영은 그러나 잠시 뜸을 들였고, 덕분에 뛰어들어가던 혜미는 결국 가속도 해보지 못한 채 오프사이드 트랩을 빠져 나오기 위해 다시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줄 곳이 사라져버린 지영은 결국 다시 한국여대 후방으로 공을 넘긴 후 혜미에게 미안하단 사인을 보냈지만, 혜미 역시 괜찮다며 얼굴께로 두 손을 들어 작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 수림은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좌불안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아라가 원래의 포지션에 있었다면 분명 간단히 혜미에게 공을 건네줄 수 있었을 테고, 그럼 혜미는 좋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분명 잔뜩 굳어있는 얼굴의 남희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걸 수림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초반에 실책성 플레이가 계속되는 한양여대를 밀어붙이지 못한다면 어쩌면 경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벤치 기둥에 기댄 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는 감독의 얼굴을 보자니 코치로서는 감히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가 싶어질 정도였다. 때문에 조심스럽게 영후의 시선을 따라가 본 수림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공과 전혀 상관없는 곳을…?’ - ‘같은 경기장 안인데도, 전혀 다른 곳인 것만 같잖아.’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에 위치한 지영인 처음 서보는 위치에서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 미드필더나 수비형 미드필더와 별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경기 시작전의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었음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적당히 수비하고 적당히 공격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자리는 최전방 공격수인 혜미의 위치에도 계속 신경을 써야만 했다. 또한 원활한 패스 루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쉬지않고 위치 이동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수비만을 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수비를 당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수비 한 명을 따돌리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지영인 뼈저리게 느껴보고 있었다. ‘아라… 너는 어떻게 이 자리에 서 있던 거니…?’ - 한편 아라는 수정이와 나란히 서지 않고, 영후의 지시대로 조금 더 후방에 내려서 있었는데, 그 자리는 다시 말해 평소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던 지영이의 자리, 바로 그곳이었다. 아라 역시, 지영이와의 역할교대로 인해 공이 없음에도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한양여대의 공격형 미드필더 전현아를 마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점점 전현아에게로 향해지는 패스의 빈도수가 잦아지자 선수 하나만이 아니라 상대 선수가 움직이는 공간을 선점해야 했고, 패스의 진로를 예측해서 차단해야만 했다. 또한 전현아에게로 시선이, 그리고 공간이 쏠려버리면 순식간에 빈 공간을 점하려 올라오는 다른 미드필더들 또한 견제 해야 했고. 하지만 이 모든 걸 90분 내내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영이에 대한 경외심마저 들고 있었는데 그 때였다. 아라의 상태를 알아차린 것 마냥 갑자기 전현아가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건. ‘놓치면 안돼!’ 아라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전현아에게 전력으로 따라붙었다. - 경기장에선 눈으로 보이지 않는 수싸움,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깊은 부분을 음미하지 못하는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소강상태’일 뿐이었기에 경기 시작 전까지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던 황총장마저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하~암…” “피곤하오?” “아뇨, 그냥 좀…” “지루한 게로구먼.” “실은… 좀 그러네요. 시작할 땐 무척이나 떨렸었는데, 막상 골도 나지 않고 계속 중간에서 공을 뺏었다가 뺏겼다가, 그러고만 있으니까요.” “흠, 그럴만도 하겠구려.” 노감독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축구인의 눈으로 보자면 지금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투’중이었다. 이곳이 밀리면 죽는다는 느낌으로 서로가 서로의 고지를 뺏고 뺏기는. 게다가 노감독은 두 선수의 포지션을 가지고 장난 친 영후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아 무척이나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놈… 그러나 수업료가 그리 녹록치는 않을 게야…’ 축구라는 경기는 빈 공간이 많아 보이는 경기지만, 알고 보면 모두 자신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또 침범하여 허물어뜨리는 운동이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그 순간 모든 것이 와해될 수 있는 것이 또 축구였다. 그러니 노감독은 슬슬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한국여대의 중원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한양여대의 김상진 코치 역시 무척이나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엽 감독에게 말했다. “꽉 들어찬 관중 덕에 설혜나 다른 애들이 평소 같지 않더니만 이제 좀 나아졌네요. 근데 한국여대도 혹시 뭔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가 봅니다.” “아무래도 선수로서 경기장을 바라보는 것과 감독으로서 보는 것과는 상당한 갭이 있을 수 밖에 없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같은 미드필더라 해도 임무와 활동 범위가 다를 텐데 선수 능력과 상관없이 지난 경기와 달리 포지션을 마구잡이로 정해주다니요.” “뭐, 초보 감독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 아니겠나.”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슬슬 시작해볼까요?” “더 지켜볼 필요 있겠나? 시작하세.” 이상엽 감독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벤치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자, 김상진 코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치라인 가까이로 걸어나갔다. - “드디어 한양여대가 먼저 움직이는 군.” 김상진코치가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선 채로 아이들에게 수신호를 주는 모습에 규식은 조금 긴장하기 시작했고, 그런 규식의 모습에 현우도 철용도 숨 죽인 채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 ‘여기!’ 전현아는 수비형 미드필더인 조효선과 이지윤이 동시에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자 한국여대의 중앙 미드필더 수정이와 아라를 간단히 따돌리고 공간을 점하며 손을 들었고, 조효선은 수정이 미처 달려들기도 전 곧바로 전현아에게 패스를 찔러 주었다. ‘아차!’ 순식간에 사람과 공, 그리고 공간 이 모든 것들을 놓쳐버린 아라는 다급하게 전현아를 추격했는데 의외로 전현아는 속도가 빠른 드리블을 하지 못했다. ‘됐다! 거의 다…?!’ 하지만 순식간이었다. 조효선이 패스한 공을 전현아는 전혀 터치도 하지 않으며 몸을 빙글 돌리고는 공이 움직이는 방향 그대로 달려나가다가 전방을 힐끗 보더니 그대로 센터백 미애와 진희의 사이로 스루패스를 찔러 넣은 건. ‘뭐야?!’ 오프사이드 라인 컨트롤에 신경 쓰며 덫을 놓고 있던 미애와 진희 사이를 간단히 통과한 공은 곧바로 미애 곁을 맴돌고 있던 한양여대 스트라이커 지소연의 발에 걸렸는데 지소연은 단 한번의 간결한 볼 터치로 단번에 페널티 에어리어에 진입했다. “에이그 진짜!!” 결국 모든 수비수들이 공격수를 순간적으로 놓치며 노 마크 찬스를 허용하자 골키퍼 미자가 골문을 비우고 지소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반대 방향에서 동시에 쇄도하는 또 다른 공격수 김수연도 눈에 밟히고 있었기에 미자의 공을 향한 대쉬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남아있었고 그러다보니 결국 제대로 각도를 줄이지 못했다. 물론 국가 대표 멤버인 지소연은 그런 점을 인지하며 충분히 김수연을 바라보며 골키퍼의 판단을 흐린 후에 침착하게 오른발 인사이드로 파 포스트를 바라보며 감아 찼다. ‘들어간다!’ - 1 : 0 어렵지 않게 한양여대가 첫 득점에 성공하자 귀빈석에 앉아있던 조전무는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하지만 겨우 그런 마음을 감추고 묵묵히 물잔의 물을 마셨다. ‘됐어! 이 정도 실력 차이면 걱정할 필요 없겠어!’ 오늘 경기마저 이변이 생기게 되면, 아무래도 삼합회 놈들과 껄끄러워질 것이 분명했기에 이 한골은 분명 조전무에겐 의미 있는 골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경기의 해설을 맡았던 경험으로 보건 데 이 경기는 꽤나 수준차이가 많이 나는 팀 간의 경기였다. 물론 앞으로 한 골을 어느 팀이 취하는 가가 중요했지만, 우선 이른 시간대에 집어넣은 첫 골은 분명 컸다. - “괜찮아! 괜찮아! 그냥 어쩌다 한 골 허용한 거야. 쫄 거 없어.” 혜미는 센터서클에 공을 가져다 놓고선 경기가 재개되기 전, 아이들을 돌아보며 박수를 치며 독려했다. 분명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이번 골은 그저 어쩌다 허용한 것일 뿐이었다. 실수투성이에 호흡도 그저 그런 것 같은 팀이었다. 그러니 그저, 곧바로 되갚아주면 될 것이었다. 때문에 혜미는 더욱 의욕적으로 휘슬이 울리길 기다렸고, 이윽고 경기가 다시 시작되자 혜미는 다시 한양여대의 진영으로 달려 올라갔다. - 남희는 지금 감독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려 하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 만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시작부터 엉켜버린 중원에선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기에 한양여대처럼 코치의 자격으로 앞으로 나가 양 윙 소영이와 민지에게 사이드에서 공격의 실마리를 풀어보라고 지시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일차방정식 감도 안 되는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하지만 이런 남희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독보다 선수들이 한 발 빨랐다. 드디어 오른쪽 윙 소영이와 윙백 나경이가 유기적으로 전진하기 시작했기에 남희는 그제야 막혀있던 숨을 조금 내 쉬어보았다. - ‘허리싸움은 가운데서만 하는 건 아니라구!’ 소영인 과감하게 미드필더 수정이에게 건네 받은 공을 소유하며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 전진했는데 역시나 상대편 왼쪽 윙백 고혜란이 막아서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한양여대엔 ‘윙’이 없었기에 자신의 뒤로 오버래핑을 나가는 나경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케이! 지금이야!’ 소영인 고혜란을 마주한 채 잠시 멈춰 섰고 당연히 고혜란도 소영이를 수비하기 위해 멈춰선 순간 수없이 연습했던 패스를 고혜란의 뒤로 찔러 넣었고, 그와 동시에 나경인 소영이와 고혜란을 순식간에 지나치며 한양여대의 왼쪽라인을 무너뜨렸다. ‘날 놔두면 후회할걸!’ 공격성향의 나경이 터치라인을 따라 드리블하다 그대로 골 라인 가까이까지 수월하게 돌파하자 그제야 센터백 신설혜가 급히 다가오려 했는데 나경인 개의치 않고 달려가던 타이밍 그대로 자연스럽게 오른 발 크로스를 올렸다. 공이 낙하하는 지점엔 언제나 그랬듯 틀림없이 혜미가 있어 줄 것이었다. - ‘골이닷!’ 뒷걸음질 치며 자신을 막으려던 한양여대 센터백 임선주와 신민아완 달리 달려들어가는 탄력이 더해진 혜미는 그대로 다리를 뻗으며 골키퍼 위치까지 보며 낮고 빠르게 날아온 공을 오른발등으로 그대로 강타했다.. ‘들어, 갔!’ “이런!” 임선주나 신민아보다 반 발짝 이상 빨랐던 혜미의 모습에 골키퍼 김현주는 순간적으로 경직됐지만 훈련에 의한 조건반사로 인해 공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지만 건드릴수 조차 없을 정도로 멀었다. 때문에 실점이라고 생각해버릴 무렵, 거짓말처럼 공은 골키퍼의 손에 걸리지도 않은 채 골 문을 벗어나 아슬아슬하게 왼쪽 골포스트를 넘어가고 있었다. - 아~아… 그 순간 전주 월드컵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약속이나 한 듯 머리를 움켜쥐며 탄식의 숨을 내뱉었지만, 오로지 한 남자 ‘영후’만은 뭐가 그리 미안한지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 “수준 높은 축구를 하는군.” 혜미의 결정적 찬스가 무산된 이후로 한국여대는 양 사이드를 통해 쉴새 없이 몰아쳤지만 그럼에도 스코어는 변함이 없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허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한양여대의 미드필더들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라운드 위의 모든 것을 진두 지휘하는 ‘전현아’ 덕분이었고. 하지만 규식은 자신도 모르게 상대팀을 칭찬하고 말았기에 왜 상대방을 응원하느냐는 듯한 현우의 퉁퉁거리는 물음이 돌아왔다. “수준이 높다구요? 고작 한 골을 넣고 한국여대한테 이렇게 밀리고 있는데도요?” 현우의 목소리에 규식은 아차 싶었지만, 무어라 운을 떼기도 전에 현우의 질문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버렸다. 눈치 없는 철용이 곧바로 규식의 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임마, 계속 공격만 하면 어디 힘들어서 축구 선수 해 먹겠냐? 그나저나 확실히 템포를 조절하면서 경기를 하는 게 능숙하네요.” “생각해보니 한국여대의 공격은 언제나 빠른 역습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양여대가 증명해주고 있고 말이지.” “확실히 미드필드에서 조율하면서 서두르지 않으니 한 골 뒤져있는 한국여대로서는 난감하겠어요.” “그 중심엔 바로 저 전현아라는 선수가 있으니까.” “전,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저 선수가 혜미나 윤지처럼 돌파나 슛을 잘 하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두 분 다 칭찬만 하시니까 이상하거든요.” “음, 현우가 보기엔 아니 우리가 보기에도 저 아이가 너무나 쉽게 플레이를 하고 있어서 대단한 게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구나.” 어떻게 쉽게 설명해 줘야 할까 규식이 잠시 고민을 하는 사이 역시나 철용이 끼어들었다. “아 자식 참… 야, 현대 축구에서 가장 치열한 곳이 바로 미드필드란 건 알 거 아냐.” “그야…” “그럼 미드필드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냐?” “뭐, 패스를 하거나, 막거나 그런 거 아닌가요?” 그제야 규식도 고개를 끄덕이며 철용을 거들어주었다. “그래 맞다. 미드필드에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현우 네가 얘기한 것들을 하는 선수들이 미드필더들이고.” “그럼, 저 아이가 그런 걸 잘하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잘하다마다. 그리고 그런 것 뿐만이 아니란다. 이를테면, 경기장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 자신의 팀과 상대팀의 스피드를 조절하는 능력이 엄청난 선수인 것 같구나.” “골키핑 능력은 또 어떻구요? 보니까 왼발도 무척이나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 같은데. 게다가 패스 타이밍도 죽여준다고요.” 현우는 규식과 철용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규식은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공격수와 수비수는 윤지와 혜미로 어찌어찌 만들어왔다만, 미드필더들은 쉽지 않을 텐데… 자, 어쩔 거냐 영후야.’ - “그래도 의외로 잘해주고 있군 그래.” 노감독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적지않게 감탄도 하는 것 같았기에 황총장은 더욱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네? 벌써 치매라도 온 거에요? 아님 눈이 침침하기라도 하셔요? 지금 지고 있는 거 안보이냐구요! 제가 전광판 숫자 읽어드려요?!” “아, 뭐 실점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이후부터 의외로 쉽게 뚫리지 않고 있지 않소?” 노감독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황총장은 화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미 이기고 있는 쪽에선 일부러 무리해서 공격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요?” “그도 그렇소만…” 하지만 축구에서의 1점차는 그야말로 이기고 있는 팀에게는 살얼음판을 걷게 만드는 점수였다. 때문에 한양여대로서도 더욱 점수차를 벌려놔야 하건만, 의외로 한국여대는 경기 초반과는 달리 섣불리 덤벼들기는커녕, 수비를 탄탄하게 가져가며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한국여대의 미드필더 아라, 지영, 수정이가 있었고. 노감독은 어색함에서 벗어나 조금은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한국여대의 세 미드필더들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놈, 이게 네놈이 택한 아이들의 성장 방식인 게냐.’ 확실히 한국여대의 얇은 스쿼드로는 최대한 선수를 성장시켜야만 했다. 공격수는 윤지와 혜미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사이드가 강했던 위덕대 전을 통해 양 윙과 풀백의 능력이 눈에 띄게 성장되어 있었다. 게다가 센터백에는 윤지가 원 톱으로 서는 한, 혜미가 규식의 피를 이어받은 플레이로 그 어느 팀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견고함을 보여줄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가르치기 힘든 포지션은 바로 미드필더였다. 수비와 공격을, 그리고 그라운드 전체를 관통하는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체력과 기술, 그리고 판단력과 동료와의 호흡 등, 무엇 하나 간과해선 안됐다. 그곳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했으니까. 그러한 중원에서의 미드필더의 중요성을 그러나 여주대 전에선 엄청난 실력차에 의해, 그리고 위덕대 전에선 중원을 회피하는 플레이 덕에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결국 오늘과 같은 실전이 명약이긴 했을 것이었다. 허나 설마 이런 단판 승부에서, 그것도 실점을 예상하면서 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면이 영후에게 있었는가 싶어 노감독은 내심 축구에 관한 한 승부욕을 숨기지 않고 있는 한 남자에게 무서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한양여대의 공격이 멈출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노감독은 황총장도 내버려둔 채 그라운드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 신생팀으로서 이 정도로 침착할 거라고는 전현아는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토너먼트 전이라면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서 공격 일변도로 분위기가 급변할 줄 알았건만, 한국여대 아이들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전히 각자의 포지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트라이커는 조금 평정심이 무너진 것 같지만.’ 사실 실점한 팀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조급함이었다. 즉, 실점 이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공간을 내버려둔 채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다 보면 결국 공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어있고, 그러다 보면 다시 역습을 맞아 결국 침몰하게 되기가 다반사였다. 그리고 한양여대를 위해선 반드시 그렇게 돼야만 했다. 또한 전현아 자신을 위해서도. 한국여대는 고작 2경기를, 그것도 넓은 간격으로 치렀지만, 한양여대는 예선 3경기를 치렀기에, 여주대와 결승에서 맞닥뜨리려면 적어도 점수를 벌려놓고 체력을 축적해놔야만 했다. 때문에 전현아는 전방의 투 톱 지소연과 김수연을 예의주시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여의치 않자 생각을 바꿨다. ‘굴에서 안 나온다면, 잡으러 들어가주마.’ - 열릴 듯 열리지 않는 한양여대의 골문 때문에 한국여대 선수들은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벌써 35분… 시간 참 안가네…’ 그 중 중앙 미드필더 수정인 부디 이 분위기가 전반 동안만큼은 지속됐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영이와 아라의 포지션이 뒤바뀐 채 경기가 시작되자, 아라가 수비해야 하는 부분의 공백과 지영이를 서포트 해줘야 하는 공간이 평소보다 훨씬 많아지면서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체력의 급격한 저하가 느껴졌던 것이다. 때문에 차라리 은채와 둘이 나란히 플레이 할 때가 훨씬 부담이 덜했던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수정이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설마, 그럼 그때 은채는…?’ 혹시 그동안 은채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이 움직이고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친 수정인 그제야 벤치에 앉은 채 미드필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은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때였다.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전현아가 공을 몰며 한국여대 진영으로 넘어오고 있던 건. “막아!” 지영이가 수정이와 아라를 향해 소리쳐 봤지만, 이미 수정일 지나친 전현아는 왼발로 공을 콘트롤하며 아라와 맞닥뜨리고 있었다. ‘왼발?’ 오른발이나 왼발이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평소엔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아라였지만 정작 직접 맞닥뜨려보니 갑작스런 왼발 드리블에 무척이나 생소함을 느꼈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 방향을 전환할 건지에 대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기에 아라는 빠르게 뒷걸음질치며 공간을 내주지 않기 위해 일정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패스만 할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 설마, 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 속에 채 자리잡기도 전에 전현아는 왼발 인프론트를 이용해 오른쪽방향으로 차며 전환하는 듯 하다가 갑자기 오른발로 벼락 같은 슈팅을 날렸다. 그야말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그것도 왼발이 아닌 오른발 슈팅은 빨랫줄처럼 날아갔고, 반응했다면 어쩌면 쳐내기라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미처 준비조차 못하고 있던 미자는 그저 공이 골망을 흔드는 걸 두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48부. 감독과 선수의 경계(境界)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2 : 0 골이 터지자 한동안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관중석에서 간만에 함성이 터져 나왔고, 전현아는 터치라인 바깥으로 유유히 내달리며 관중들에게 보답해주었다. 처음엔 한국여대의 누드사진 때문에 경기장을 찾았던 많은 인파들이 이제는 한양여대 전현아의 눈부신 플레이와 골에 반해 응원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진작가 리키는 관중들의 열기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와우! 관중들 열기가 엄청나네요!” “…” 영후가 이렇게 분위기도 모르고 하연 앞에서 입을 놀렸다면 분명 크게 한 방 먹였을 하연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기에 속으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시작할 땐 모두가 한국여대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골이 터질 때마다 환호를 하는 것을 보니 이 사람들은 모두 어느 팀을 응원하러 나온 게 아닌 그저 관람하러 나온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재 확인한 하연은 답답하기만 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영후야!!!’ - 심각한 표정이라도 지어주면 좋으련만 감독이란 남자는 꽤나 흥미로운 장면에 매료된 사람처럼 전현아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 반대급부로 남희는 그 예쁜 얼굴로 떫은 감을 몇 개는 씹고 있는 사람처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때문에 수림은 두 사람의 간극을 어떻게든 메워야 할 것만 같은 느낌에 조심스럽게 영후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감독님, 지금이라도 지영이와 아라를…” “아 뭐,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조금만 더 두고 봅시다. 아직 경기가 끝난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수림은 경기결과와는 달리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는 영후가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며 안심시키자, 머릿속과 달리 마음은 고요한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하지만 확실히 오늘의 한국여대 감독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만 같았다. 뭐랄까, 서두르는 감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뭔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전처럼 코치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있었기에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그야말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처럼 느껴졌다. - ‘이제 즐길 시간이군.’ 다시 경기가 시작되자, 한국여대에는 더 이상 이길 의지는 없을 거라고 판단한 전현아는 처음과 다르게 숏패스의 빈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물론 강력한 한국여대의 저항에 간간히 패스가 차단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역습을 허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한국여대의 미드필더들은 전현아의 발끝에서 부터 시작되는 공격을 막아내기조차 버거워 보였으니까. 이에 전현아는 한국여대의 리듬을 흩뜨려 놓기 위한 방편으로 점차 장거리 패스도 늘려가기 시작했는데, 전반보다 정확도가 떨어진 덕분에 한국여대의 풀백들은 어떻게든 공을 차단해 아라에게 건네주었다. ‘아…’ 하지만 공을 받고 전방을 바라본 아라는 수비형 미드필더란 자리에 있었기에 평소보다 자신이 공격진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인지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렇구나… 여기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은 그렇게 많은 게 아니었어.’ 아라는 그동안 패스를 잘 안 준다고 가끔씩 후방의 동료들에게 짜증을 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잘못했던 건, 친구들이 아니라 좋은 곳에 있지 못했던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라는 하지만 미안하단 말은 경기가 끝난 후에 하기로 마음먹고 조금 더 전진하며 전방을 살폈고, 그러던 중 드디어 빈 공간으로 살아나오는 지영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 ‘조금 위치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지영인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따라다니며 수비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를 떼어놓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게다가 공을 자주 만져볼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기에 피로감은 더 쉽게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보내는 공을 받으려 아라는 이렇게 많은 거리를 이동하고 다녔던 걸까?’ 지영인 그간 연습이건 실전이건 공을 잡는 족족 무조건 뻥뻥 내질렀던 자신이 죽도록 미워졌다. 이렇게 공 하나가 소중한데, 아라는 그 공을 소유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을텐데,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을 차버리곤 했다니… 지영인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 뿌연 시야 사이로 자신을 다급하게 바라보는 아라가 들어왔다. 때문에 눈물을 훔칠 사이도 없이 이를 악물며 빈 공간을 찾아 뛰어갔다. ‘내가, 꼭 받을게!’ - 아라는 드디어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들을 뿌리치고 제법 공간을 잘 찾아 들어가는 지영이에게 바로 패스를 해 줄 수 있었는데, 지영인 자신의 왼쪽 전방에서 오프사이드 트랩을 붕괴시키며 들어가는 혜미에게 절묘하게 스루패스를 넣어줬다. ‘들어갔나?’ 삐~익! 오프사이드. 아슬아슬하게 반 발쯤 앞섰던 혜미를 지적하며 선심의 기는 매섭게 올라갔고, 한껏 가속하던 혜미는 헛심을 팔고 다시 후방으로 내려서야 했지만, 그럼에도 혜미는 지영이에게 그리고 아라에게 작은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 - “미안했어.” 바로 전 상황을 이야기 하는 건지, 아니면 이제야 깨달은 자신의 편협한 생각을 반성하는 건지는 몰라도 지영이는 아라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곤 자신에게 패스를 하며 넘어진 후 여전히 바닥에 앉아 흘러내린 스타킹을 올리고 있던 아라의 손을 맞잡아 일으켜주었다. 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조금은 수비형 미드필더를, 아니 지영이 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 “조금만 더 해보자. 그래 줄 수 있지?” 아라는 자연스럽게 지영이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격려해주었고, 지영인 대답의 의미로 얼굴 가득 흐르는 땀방울들에 눈물을 감추며 유니폼 상의를 끌어올려 단번에 닦으며 전방으로 나아갔다. - “허… 그나저나 이러면 안 되는데…” “네? 안되긴 뭐가 안 된다는 거에요? 뜬금없이…” “아니, 뭐. 그런 게 있소.” “싱거우시기는…” 노감독은 이 와중에도 한가롭게 벤치 기둥에 기댄 채 –- 게다가 경기 내내 온화한 미소마저 유지하며 –-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여대 감독에게서 진짜 감독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축구계로 돌아오라고 감독의 자리에 잠시 앉힌 것이었지, 정말 감독의 위치에 매료되어서 그곳에 그냥 눌러앉을 것 같은 얼굴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인정하긴 싫었지만 지금의 영후는 감독의 위치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누…’ 게다가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피치 위의 선수들마저 경기에는 별 긴장을 하지 않는 것이 어찌나 제 감독을 그리 닮았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확실히 2 : 0으로 점수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한양여대의 수비는 더욱 견고해지기 시작했다. 전현아를 대신해 중원을 책임지던 조효선과 이지윤은 조금 더 내려앉아 두터운 수비벽을 형성했고, 전현아 마저 센터라인에 걸친 채 간간히 지소연과 김수연에게 장거리 패스를 날려 전진해있는 한국여대 센터백들과 경합을 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그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한 채 전반전은 그대로 마무리 되었고, 한양여대 이상엽 감독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통로로 사라졌지만, 한국여대 감독이라고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노감독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놈, 이 정도의 수업료라면 적당하다는 게냐…’ 선수들보다 먼저 사라져버린 한양여대 이상엽 감독과 달리 그라운드를 걸어나오는 선수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하며 등을 두드려주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노감독은 어쩐지 후반전이 더욱더 기다려지는 것만 같았다. - “아 진짜! 이게 뭐에요!” “왜 가만히만 계셨어요!! 다 알고 계셨던 거죠!? 그렇죠?!” 라커룸으로 들어서자 마자 지영인 과장된 볼멘 소리를 했고, 지영이를 필두로 아라도 지지 않고 영후에게 투정을 부렸다. 물론 조금쯤 새어 나오려는 웃음들을 억지로 참아보면서. 그래서였을까, 두 아이들 덕에 전반전에 두 골이나 먹혔다는 실망감이 아닌, 이상한 활기찬 기운이 라커룸에 감돌았고 비단 다른 아이들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는 듯 저마다 몇 마디씩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단 한 남자는 장승처럼 서서 양쪽 검지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안 들린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었지만. 얼마나 떠들어댔을까. 겨우 소녀들이 입을 닫고 라커룸이 잠잠해지자 그제야 감독의 입이 열리며 그 고른 치열이 반짝였다. “자, 이제 다 끝난 거지? 그럼 이제 몇 가지만 물을게. 음… 우선 수정아, 많이 힘들었지?” “아… 예…” 수정인 땀으로 흠뻑 젖은 유니폼 상의를 벗다가 멈칫하며 겨우 답했다. “그래, 생각보다 체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늦는 것 같아서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전반전은 잘 뛰어줬구나. 고맙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감독과 선수의 대화였건만, 순간 수림은 깜짝 놀랐다. ‘서…설마… 아, 아니겠지… 아닐…거야…’ 하지만 확실히 체력적 한계가 찾아온 게 확실해 보이는 수정이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수림은 생각하기도 싫은 ‘그 날’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상 유약해질 수 없었던, 이 남자와 시작도 제대로 못해본 사랑을 끝내기로 했던 바로 ‘그 날’을. - “수림씬… 참 좋은 여자에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잠그지도 않았던 원룸의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정말이지 평생을 사랑해도 좋을 것만 같던 남자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을 들으며 수림은 입을 틀어 막은 채 한없이 울고 또 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울어본대도 그 남자가 기대고 있었던 문의 반대편에선 점점 남자의 체온이 식어가고 있었고, 그 순간 수림이 해 볼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걸로… 끝일까…’ - 더 이상 남자를 볼 자신이 없어진 여자는 그렇게 문에 기대어 앉은 채 얼마큼의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낯선 발자국 소리에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거울 앞으로 달려가 퉁퉁 붓다 못해 벌겋게 불어있는 양쪽 눈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냉장고로 달려가 얼음을 꺼냈지만, 그래서 그 차가움의 결정체들을 눈에 대어보려 했지만, 그보단 초인종 소리가 조금 더 빨랐다. 딩~동! “네…에 나가요…” 이 시간에, 그리고 이 곳으로 찾아올 사람은 ‘그 남자’ 뿐이었기에 수림은 손에 든 얼음을 눈가에 몇 번 대어 보다가 싱크대에 던져버리곤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엔 자신이 생각했던 남자와는 전혀 다른, 감청색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혹시, 한국여대 코치를 맡고 계시는 오 수림씨 되십니까?” 게다가 말투마저 목에 매고 있던 넥타이마냥 목을 죄어오는 듯한 기분에 수림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용건을 전달했다. “잠시 뵙고 싶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괜찮으시다면…” - 원룸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있는 검은색 에쿠스 차량까지 안내를 해준 남자는 이내 뒷좌석의 문을 열고 수림이 타기만을 기다렸고, 수림이 차에 몸을 싣자 문을 닫고는 지금은 가고싶어도 보내줄 수 없다는 듯 문을 등지고 묵직하게 정자세로 섰다.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에서 고개를 돌린 수림은 옆 좌석에 앉아있는 나이 든 남자의 존재를 그제야 눈치챘다. “아, 놀라실 것 없소이다. 놀라셨다면 사과드리겠소만.”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얼굴에 걸맞지 않게 썬그라스를 쓰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쉽게 알아보지 못한 수림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남자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뭐, 그건 중요치 않고. 그… 한국여대 축구부 코치를 맡고 있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긴 한데,” 수림은 처음보는 남자의 입에서 한국여대, 그리고 축구부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이제는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친절하게 손수건을 건네는 남자의 손에 수림은 애써 눈물을 참아보았다. "괜찮으신지?" "아, 네. 죄송해요. 근데 어디까지, 아 맞다. 네 맞아요, 저 한국여대 축구단에서 일했어요. 하지만" 수림은 더 이상 그러지 않게 되었다고 말을 하려 했지만, 그 남자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그럼, 아이들의 체력적인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시겠군요?” “예? 그건… 왜?” “아,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앞으로 진행될 체력 훈련의 강도를 조금 낮춰줬으면 해서 말입니다.” “네?! 그게 무슨…” “아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건 그저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질까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니까.” “멀어…지다뇨?” “뭐, 기분나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희가 조금 조사를 해보니 아가씨가, 아니 오코치님께서 이영후 감독과 교제중이라던 데…” “!” “아시다시피 이영후 감독은 감독이 아니라 선수가 되고 싶어한답니다. 그런데…” “?” “우리 협회에서 파악해 본 바로는 이영후 감독이 선수로 돌아가기엔 아직 몸 상태가 충분치가 않아요. 그러니 덜컥 축구 선수로 돌아간다면 분명 또다시 큰 부상을 입게 되고 말겁니다.” “…” “짐작컨데 이영후 감독은 한국여대 감독을 맡으면서 언론에 몸을 드러낸 후 K리그든, 해외든 나가려고 할 거란 말이죠.” “그런데, 왜…?” “아, 그러니 그 시기를 조금 조절해주고 싶은 노파심이 들어서 말입니다. 아까운 인재를 잃고 싶지는 않은데, 그 선수 아니 이영후 감독의 성격상 분명 하루라도 빨리 선수로 돌아가고 싶을 테니 코치된 입장으로 일종의 책임감을 불어넣어달란 얘기랄까요?” “책임감이요?” “아마 이영후 감독은 아무리 아마추어, 그것도 여자 축구부라고는 해도 어느정도의 결과를 내고 난 다음에야 선수로 복귀할 가능성이 크지요. 그러니 어차피 복귀는 하겠지만, 그 시기를 조금만 늦춰보자 이런 말입니다. 이영후 감독을 아끼는 건 아무래도 저보다 그쪽이 더 하지 않습니까?” “!” “더불어 처음 축구를 접하는 아이들의 부상문제도 줄이고, 이영후 감독의 몸도 생각하고, 게다가 좀더 길게 아가씨 곁에 두고 이영후 감독을 볼 수 도 있는, 일석 삼조 아니겠소?” ‘좀더 길게…!’ “아 뭐 공인된 입장에서 오코치님께 대뜸 뭔가를 드리지도 못하면서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합니다만, 한 번쯤 고민해주시길 바란다, 뭐 그런 얘기올시다.” 이윽고, 이야기를 마친 남자가 차창을 ‘똑똑’ 두드리자 문에서 대기하던 '벽'같던 남자가 수림 쪽 문을 열었고 수림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로 차에서 내려섰지만 차문이 닫히고 대기하던 남자가 운전석에 몸을 싣고 시동을 걸자 다시 뒷좌석 차창이 내려가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진지하게 고려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 그 날 이후 더 이상 그 남자는 수림을 찾아오진 않았지만, 그 이후 억지로 용기를 내어 다시금 영후를, 그리고 아이들을 찾아갔던 수림은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다는 듯 여느날과 똑같이 코치의 임무를 수행하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에선 오로지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특히나 아이들이 체력 훈련을 할 때면 어김없이 머릿속에선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곤했다. ‘좀더 길게…’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그것으로 훈련을 종료시키거나, 좀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음에도 무리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그 남자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랬었던 것이 지금, 바로 이 순간, 수림의 발목을, 그리고 한국여대 감독의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 수림이 너무나 놀란 얼굴로 차마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영후는 수림이 아닌 은채를 바라봤다. “은채도 마찬가지겠지만, 수정이랑 반반 나누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때? 후반전엔 해줄 수 있겠니?” “네, 감독님.” ‘은채까지…’ 그제야 수림은 영후의 생각을 조금 읽을 수 있었다. 수정이와 은채는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었기에 처음부터 교체를 염두에 두고서 수정이를 먼저 기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바로 나 때문에…’ 놀람을 너머서 자책을 하기에 이른 수림과 달리 남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수정이와 은채의 교체는 체력적 문제 때문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지영이와 아라의 위치를 뒤바꿔 기용한 것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한국여대 감독은 이미 아이들과 교감하고 있는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 하나하나와 '소통'하고 있었다. “자, 지영인 어땠니? 아라의 위치가.” “그건…” 지영인 잠시 아라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아라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됐어요. 미안해 아라야, 그것도 모르고 난…” “아니야! 나야 말로 지영이 네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많이 반성하고 있어…” “흠… 그것 뿐?” 두 아이들의 아름다운 대화에 초를 치듯 영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들었다. 그에 수림은 설마 이 남자, 드디어 아이들을 혼내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감독님께서 뭘 알려주려고 하신 건지 알았어요. 아라 너도 그렇지?” 지영이의 물음에 아라 역시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서야 영후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좋아! 그럼 후반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그야말로 제 삼자가 보기엔 잡담 수준으로 하프타임 회의가 막을 내리자 가장 당황한 건 바로 남희였다. ‘이…이게 무슨 작전회의야…?!’ 남희는 수석코치인 자신은 전혀 배제된 채 흘러가버린 하프타임이 너무나 황망했다. 게다가 감독과 선수가 나눈 대화를 정작 수석코치인 남희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더욱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때문에 아이들이 전부 나가버렸음에도 남희는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바라봐주는 남자가 있었다. “권코치님, 안 갈 거에요?” “네? 아… 저… 저는…” “?” “저는… 점점… 잘 모르겠습니다 축구라는 걸…” “아, 남희씨…” 그제야 영후는 당황하며, 푹 숙이고 있는 남희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려 했지만 들어올려줘야 하는 건 남희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저야 말로! 아이들 체력이… 죄송해요 모두 저 때문에! 흑…” 어느샌가 다시 들어온 수림이 문 앞에 선 채로 소리치자, 영후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리고 남희는 안경의 안쪽 렌즈면에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영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 “…”,”…” “다음 번에 코치를 뽑을 때는 절대 울보는 뽑지 마세요.” “?”,”?” 마세요? 말아야지,가 아니라 마세요? 순간 두 여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영후를 바라봤다. 그러자 영후는 아이들이 떠나버린 라커룸의 가운데에 선 채로 한동안 방황하는 듯 했지만 이내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러니까… 이번 경기도, 다음 경기도 절대 이기려고 해요. 그래서… 미안하지만 오늘도, 또 다음 경기 때도 코치들을 챙겨주는 따뜻한 감독은 될 수 없을 거 같아요. 왜냐면… 왜냐면…” 이윽고 이어지는 감독의 이야기에 남희도, 수림도 그제야 자신들이야말로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구나 하는 미안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영후야말로 이런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너무나 미안해하고 있었기에 두 코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숨에 달려가 남자의 품에 덜컥 안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두 코치들을 선뜻 두 손으로 보듬어 주지도 못한 채 독백을 하듯 입을 열었다. “나는 여전히 감독과 선수의 경계(境界)에 서 있으니까요. 그래서…” “감독님! 죄송합니다.”, “저두요 감독님! 흑흑…” “그런말 말아요. 나는 그저 남은 두 경기 동안 이기고 싶고, 또 즐겁고 싶어요. 그게 내가 한국여대 축구부에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한없이 보잘것없는 거 랍니다.” ‘아니에요… 감독님… 절대 아니에요…’ 말도 안되는 감독의 생각과 마음을 이제야 직접 듣게 되자 그 어떤 말도 코치들은 할 수 없었고, 그저 그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드넓은 남자의 품 속에서 두 여자들은 동시에 안긴 채로 소리도 내지 않고 마음으로 울어 볼 뿐이었다. - 영후가 겨우 두 여자들을 다독거리고 나서야 경기장으로 나서자, 아이들은 전반전과 다른 진영에서 원을 그리며 뭉쳐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가 빠진 채였기에 영후는 아직 나오지 않은 두 코치 대신 대기심에게 선수 교체를 알렸다. “은채야, 준비됐지?” 감독의 물음에 은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이내 간단한 복장 검사를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뛰어가 한국여대의 원을 완성했다. “늦어 늦어.”, “한참 기다렸잖아.”, “그나저나 후반은 어떻게 시작할거야?” 아이들의 장난기 섞인 수다에 은채는 피식 웃으며 주장인 혜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지영이랑 아라한테 물어야 하는거 아니니?” 혜미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의 시선은 그 둘에게 향했다. “볼만큼 봤고,”, “배울만큼 배웠어, 그치?” 아라와 지영인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은 그것으로 안심이라는 듯 격하게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몸을 숙였다. “그래, 그게 바로 우리의 힘이야. 그렇지?” “야! 두말하면 입 아프거든? 시간 없으니까 주심아저씨한테 빨리 시작해달라고 전해줄래?” 혜미의 진지한 물음에 미자가 통통한 다리를 동동거리며 아이들을 웃겼고, 그에 아라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준비 된 거지?” 그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혜미는 모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자! 한국여대!” - 두골차로 벌어졌음에도 의외로 더욱 활기차게 돌아온 한국여대 팀이 ‘파이팅’을 외치자 관중석은 다시금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그 열기 그대로 주심도 다시금 힘차게 휘슬을 불어 후반전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한국여대의 감독은 그제야 생각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미처 하지 못했던 지시를 하기 위해 터치라인 가까이에 서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포지션을 확인하자 이내 슬그머니 손을 내려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 선 채로 뿌듯한 얼굴을 하며 한동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어느샌가 벤치로 나와 그 모습을 바라본 두 눈이 퉁퉁 부은 두 코치들은 왜 지시를 내리려다 말고 가만히 서 있는 건가 싶어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지영이…?’, ‘아라…?’ 그랬다. 지영이와 아라가 그 누구의 지시도 없었건만 후반전을 맞이하며 원래 자신들의 포지션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즉, 지영이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그리고 아라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때문에 아이들이 지시도 없이 자신들 마음대로 포지션 변경을 한 것에 대해 습관적으로 감독에게 말을 하려 남희가 벤치에서 일어서려 하자, 수림이 남희의 손을 잡았다. “오코치님…?” 남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지만, 수림은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제야 남희는 또 한 번 실수를 할 뻔 했다는 걸 깨닫고 힘없이 다시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수림이 따뜻하게 남희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말했다. “우리가 감독님의 뒷모습을 이렇게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오늘… 그리고 다음 경기 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수림의 말을 듣고서야, 남희도 한국여대 감독의 넓고도 듬직한 뒷모습이 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마지막…’ 저 남자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그것도 언제나 볼 수 있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남희는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운 채 영후의 모든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자 아라는 왜 지영이가 고전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이 한양여대의 중원에 올라서자 완벽한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전현아에게 수비의 부담을 덜어주려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수시로 압박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특히 다른 경기와는 다르게 좀더 빠듯하네…’ 하지만 아라는 지지 않겠다는 듯, 그들에게서 공간을 뺏어오기 위해 좀더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공간을 지배하던 한양여대의 수비형 미드필더 조효선은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야? 얘?’ 한국여대의 공격형 미드필더 아라가 갑자기 터치라인에 근접할 만큼 자리를 이동했다가, 어느새 한양여대 최종 수비라인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일반적인 공격형 미드필더의 움직임과는 너무나 달랐다. 때문에 조효선은 아라에게 따라붙으면서도 쉽게 이해를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런 동선은…?’ 하지만 조효선이 이해할 수 없던 건 당연한 것이었다. 아라의 현재 반경은 그야말로 한국여대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위한 움직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전반전 내내 낯설기만 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소화했던 아라는 결국 그곳에서 바라본 후에야 진정 자신의 포지션에 대해 이해를 한 것이었다. - ‘결국 바뀐 건가?’ 한편 아라에서 지영으로 마크가 바뀌자 별 의미 없이 생각한 전현아는 특별히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수비수가 바뀐다고 한들, 축구 경기장의 모든 곳을 커버할 순 없었다. 때문에 늘 그래왔듯, 그런 빈 공간에 한양여대 공격수가 공을 잡기 쉽도록 자신은 패스를 찔러 넣어주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의 발 아래에 수비형 미드필더 이지윤이 건네준 볼이 놓여있었기에, 전방을 힐끗 바라보며 단번에 장거리 패스를 날리려 했다. 하지만, ‘뭐…?!’ 분명 제쳤다고 생각했던 한국여대 수비형 미드필더 지영이 어느샌가 달려들어 전현아가 참과 동시에 공을 살짝 건드리고 있었다. 때문에 제대로 날아갔다면 공격수 김수연이 차지할 가능성이 높았던, 한국여대 센터백 진희와 풀백 하늘이의 사이에 떨어졌어야 할 공은 그러나 분명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한참이나 내려서 있던 중앙미드필더 은채에 의해 단번에 차단 되었다. ‘왜, 미드필더가 지금 저기에…?!’ 전현아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또한 아라와 지영이 뿐만 아니라, 전반전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수정이의 움직임 덕분에 은채 또한 자신의 영역 이상의 것을 보게 됐다는 것도. - “이건 크군.” “예? 뭐…가요?” 단순히 패스 하나가 끊겼을 뿐이었는데 무척이나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투로 말하는 규식을 현우는 역시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때문에 아차 싶었던 규식은 머리를 굴리며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려 애썼다. “음, 한국여대 감독 녀석이 어떤 마술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반과 다르게 미드필더들의 활동 반경이 변했단다 예측 못할 정도로. 게다가 넓어지기도 했고.” “체력으로 밀어붙이겠다 이런 거 아닐까요? 아무래도 한양여대에 비해서 경기수도 하나 적었고.” 규식은 철용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영후 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놈일지도 모르겠다.” “예? 무서…워요?” 규식은 현우가 또다시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지만 이번에는 답을 해주기는커녕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어갔다. ‘센터백끼리 충돌시켰던 여주대전. 사이드에서 맞부딪히게 만든 위덕대전에 이어서, 오늘은 상대팀에서 가장 강하다는 미드필더에서 맞불을 놓다니. 이 자식,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거냐…?’ - 은채가 다리를 쭉 뻗어 차단한 공은 그러나 아직 누구의 차지도 되지 않았기에 전현아는 곧바로 공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전현아는 더 이상 달려갈 수 없었다. 후반전부터 자신과 매치업이 되어버린 지영이가 자신의 앞을 막아 섰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 사이에 은채는 어렵지 않게 전방의 아라에게 패스를 건넸다. 때문에 공격 작업이 끝나버린 전현아는 수비에 참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지영인 달랐다. “덕분에 많이 배웠다.” “?” 상대 선수의 알 수 없는 한마디를 전현아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전방을 향해 공격에 가담하러 떠나는 지영이 연이어 남긴 마지막 말에 꽤나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전반에는.” ‘전반… 에는? 그럼… 후반전엔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다는 거야? 고작, 45분 이후에??’ 그럴 리 없었다. 축구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하던 선수가 고작 45분 동안 뭐가 어떻게, 또 얼마나 달라진 말인가?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전현아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을 마음먹은 대로 멈추기 위해, 또 원하는 곳으로 보내기 위해 투자했던 그 헤아릴 수 없던 시간들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어주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그대로 모여 지금의 ‘전현아’를 만들어 준 것이었고. ‘그런데 고작 45분 동안 뭘 배웠다는 거야? 그래, 백 번 천 번 양보해 ‘뭔가’를 배웠다고 치자. 그럼 정말 그게 벌써 네 것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 한국여대 아이는?!’ 하지만 갑자기 자신이 서 있던 공간이 추워진 느낌에 전현아는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는데 그제야 뭔가 잘못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여대 진영에선 센터백 두 명과 풀백 한 명 만이 남아있었을 뿐, 한국여대 전원은 어느새 한양여대의 공간으로 속속들이 들어가 제대로 맞불을 놓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전현아는 수비진영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심을 해보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건. “너는 죽을 만큼 공만 찼을 지 모르지만” 전현아는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곳엔 한국여대 센터백 미애가 최종 수비라인에서 꽤나 올라온 상태에서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관중의 함성이 고막을 찢을 듯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상대방 수비수의 나직한 이야기가 귀에 꽂히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지만, 분명히 들리고 있었다. “우리도 이 학교에 들어오려고 죽을 만큼 공부했거든.” “?” “그리고 분명 우리에게 감독님은 공은 발로 차는 게 아니라 여기로 하는 거랬어.” 전현아는 미애가 스스로의 머리를 가리키며 당차게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자 헛웃음이 나올 뻔 한걸 억지로 참아보았다.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논리는.’ 하지만 한국여대의 벤치를 돌아보자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저 남자라면 그럴 것만 같았다. 여전히 두 골 차로 지고 있음에도 평온한 얼굴로 아이들을 지켜봐 주는 저런 남자라면. - 수림은 아이들의 창의적인, 그리고 유기적인 플레이에 점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저런 플레이나 포지션 파괴 같은 이상한 짓(?)들을 전혀 보여준 적도, 가르쳐 준 적도 없었다. 그저 수림은 영후의 지시에 따라 남희가 작성해준 연습 계획서 대로 축구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들만을 매일 반복시켰을 뿐이었다. 그것도 조금씩 부족하게끔. 물론 놀이를 이용한 체력 훈련도 병행하긴 했지만, 역시나 축구의 정석적인 활동이라든지 전술 훈련은 거의 시키지 않았었다. 그저 이상한 감독의 이상한 지시대로 항상 즐거움이 첫 번째였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즐거워하지 않으면 그날 훈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때문에 늘 힘들게 운동을 했었던 수림은 신기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과연 이렇게 해서 능률이 날까 싶었었다. 게다가 시합까지 치러야 하는 데 그저 즐겁기만 하면 된다니… 하지만, ‘너희들… 정말 즐기고 있는 거야…?!’ - 은채에게 공을 건네 받은 전방의 아라는 순간적으로 공간을 좁혀오는 수비형 미드필더 조효선과 이지윤을 흘깃 바라보곤 뒤따라 쇄도해오던 은채에게 다시 공을 돌렸다. 그러자 아라를 따라 들어가던 수비수 둘은 내려선 채 공간을 그냥 비워둘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센터백들에게 벗어나며 그 공간으로 뛰어들어오는 혜미가 있었다. “막아!” 누군가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들렸지만, 은채의 발끝이 한 박자 더 빨리 움직였고 공은 곧바로 혜미에게로 전달되었다. 최적의 움직임과 완벽한 패스로 위험지역까지 도달한 혜미는 그대로 골문을 향해 돌아서려 했지만 왼쪽 윙백 고혜란과 센터백 신설혜가 따라 붙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느껴진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톡. 혜미는 터치라인 쪽으로 몸을 이동시키려는 듯 하면서 동시에 뒷꿈치를 이용해 뒤쪽으로 흘려주었기에 한양여대 수비수들은 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공은 곧바로 다시 뛰어들어오던 아라의 차지가 되었다. 그에 아라는 곧바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슛을 하려고 했는데 역시나 센터백 임선주가 슛만은 막겠다고 슬라이딩 태클을 날렸다. 하지만 아라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당황은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또다시 장난치듯 공을 옆으로 툭 밀어놓았다. ‘뭐??’ 도대체 누가 공격을 하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한 한양여대 수비수들은 갑작스럽게 혼란을 겪기 시작했는데 그 공을 마지막으로 잡기 위해 뛰어든 건 바로 수비형 미드필더 지영이었다. 한양여대의 모든 수비들이 혜미와 아라에게 쏠려 있던 사이 지영인 어렵지 않게 그대로 공을 향해 왼발을 뻗었는데 그 순간 한양여대 수비수들의 생각은 모두 동일했다. '열렸다!' 그리고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영의 왼발은 공의 바로 옆에 놓였고 그 후 오른발이 정확하게 공을 강타했다. - 1 : 2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지영이의 발을 떠난 공이 그대로 한양여대의 골문을 가르자 그야말로 전주 월드컵 경기장엔 지진이라도 난 듯,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머, 들어갔어요! 보셨어요? 우리 애들이!!!” “그래요, 그래! 나도 봤다오.” 역시나 황총장도 그 함성에 자신의 목소리를 보태더니만, 아예 나이를 잊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깡총깡총 뛰고 있었기에 노총장도 어흠, 헛기침을 하면서 못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사실은 좀더 확실하게 아이들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노감독도 진작부터 일어서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저리 빨리 발전시킬 수 있을고…’ - “아저씨! 이제 따라잡을 수 있는 거죠? 그쵸? 이길 수 있겠죠!” 이제는 고함을 질러야 대화가 가능할 지경이 되어버린 관중석에선 현우가 규식과 철용에게 번갈아 가며 묻고 있었고, 철용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규식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고작 5번의 패스로 센터라인에서부터 골이라… 게다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패스 게임은…?’ 은채에서 아라, 그리고 다시 은채로부터 혜미, 그리곤 다시 아라에서 지영에게까지, 끊기기는커녕 물흐르는 듯 이어진 패스. 도저히 반년 전엔 축구의 ‘축’자도 몰랐던 아이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눈부신 플레이였다. 그것도 책만 보던 공부벌레 아이들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축구를 알만큼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규식도 지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볼 뿐이었다. - 혜미는 무척이나 기뻤지만, 지금은 한 골로 만족 할 시간이 없었다. 아직 자신은 이렇다 할 것들 것 보여주지도 못했거니와, 아직도 한국여대는 한 골 차로 지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골문 안에 있는 공을 집어 들고 하프라인으로 뛰어가면서 아이들에게 빨리 돌아가자고 손짓을 연신 해주었다. 그리곤 이내 센터서클에 공을 놓으면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벌써 시작한지 10분이나 지난 건가…’ 혜미는 조금이라도 빨리 주심이 휘슬을 불어주길 간절히 바래보고 있었다. - “허, 이거 상황이 완전히 변해버렸구려.” “변했죠! 변하다 마다요. 이제 한 골만 더 넣으면 결승까지 가는 건 시간 문제라구요!” 노감독은 어린아이처럼 자리에서 계속 일어선 채로 응원을 하며 목이 벌써 쉬어버린 황총장을 덤덤히 바라보다가 다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부디 그리 되길 바라오만…’ 허나 경기의 양상은 황총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갈 것 같았다. 첫 실점을 허용하자 한양여대에선 곧바로 선수 교체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 “감독님, 한양여대에서 선수 교체를 할 모양입니다.” 남희는 여전히 벤치의 기둥에 기대어 있던 영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영후는 한양여대 공격수 김수연이 교체를 위해 그라운드를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남희를 돌아보았다. “승은이랑, 정화 슬슬 몸을 풀어두라고 전해주실래요?” “감독님, 하지만…” 남희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지시를 내리는 남자 때문에 잠시 멈칫했다. 때문에 영후는 남희에게 왜 그러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남희는 이윽고 벤치에 남아있는 세 아이 중, 풀백 승은이와 윙 정화에게 지시를 내렸다. “몸 풀어두라는 감독님 지시야.” 드디어 자신들에게 차례가 돌아오자 승은이와 정화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벤치 옆 트랙으로 나갔다. 그러자 가뜩이나 선수 층도 엷은 한국여대의 벤치엔 교체된 수정이와 윤지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남희는 그런 윤지를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봤는데, 윤지도 그런 남희를 갈망하는 눈빛으로 올려보았다. 남희는 그런 윤지에게 ‘너는 뭐하고 있는 거니? 빨리 몸 풀러 가지 않고!’라고 몇 번이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줄 수 없다는 게 너무나 마음이 아파, 그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윤지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어주는 게 전부였다. - 한양여대 김수연이 왼쪽 풀백 황주화와 교체되어 나오고 나서야 주심은 경기 재개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때문에 그 시간마저 아까웠던 혜미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내 모든 걸 보여주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야!’ 이윽고 센터서클에 서 있던 지소연의 발끝에서부터 공이 한양여대의 진영으로 공이 물러나자 혜미는 거침없이 달려 올라갔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건…?!’ 한양여대의 공격형 미드필더 전현아와 공격수 지소연을 제외한 전원이 실점을 하기 전에 비해 무척이나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벌써… 잠근다고? 쳇,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지금부턴 우리페이스라고!’ 혜미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공을 쫓아 한양여대 수비진들에게 달려들었다. - “뭔가… 이상한데?” “예? 뭐가요?” 규식은 거의 여덟 명이 잔뜩 내려앉아 수비에 가담하기 시작하는 한양여대 진영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배, 이상하기는… 이기는 쪽은 당연히 이렇게 나오는 게 정석이죠. 게다가 볼 관리도 잘하는 전현아 같은 애가 있으면 잠그기엔 그만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시간대도 그렇고… 게다가 고작 한 골만으로 대등하던 싸움에 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숨어버리는 듯한 모습이 어쩐지…” “그럼, 뭔가 숨기고 있는, 그런 게 있는 걸까요?” 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축구에는 있는 것인지 걱정하며 묻는 현우에게 규식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그건…모르겠구나.” “에이, 선배 그건 좀 오밥니다. 그러려면 공격수를 빼버리지는 않았겠죠. 안그래요?” “그야…” 하지만 어쩐지 규식은 한영여대의 썰물에 맞춰 밀물처럼 올라가는 한국여대의 수비진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그야말로 8백처럼 촘촘히 후방에 박혀있는 수비진 덕분에 혜미는 공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공을 잡지 않아도 공격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때문에 혜미는 공을 뒤로 돌리며 아라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리곤 자신은 한양여대 진영으로 깊숙하게 스며들어갔다. 아라는 공을 잡은 상태에서 혜미의 사인을 받은 동료, 왼쪽 윙 민지가 터치라인을 따라 달려들어가는 것을 순간적으로 바라보며 그대로 대각선 장거리 패스를 날렸다. 그러자 공은 뛰어가는 민지의 앞 공간에 적절하게 떨어졌고, 민지는 달려가는 탄력 그대로 단 한번의 왼발 터치 후 곧바로 다시 왼발 크로스를 올렸다. ‘혜미야!’ 민지의 외침이 들리기라도 한 듯, 혜미 또한 민지가 공을 잡으며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동시에 페널티 에어리어로 달려들어갔기에 정말 멋진 타이밍으로 날아오는 공을 향해 돌고래처럼 솟아올랐다. 확실히 점프만큼은 수림의 지도아래 엄청난 발전을 해온 혜미였기에 그 어떤 수비수들보다 훨씬 높고 아름답게 뛰어올랐다. 그리곤 절대로 눈을 감지 않으며 날아오는 공을 이마에 정확히 맞췄다. ‘들어간다!’ 빠르게 날아오던 공은 골 에어리어 라인 즈음에서 멋지게 뛰어 오른 혜미의 이마에 정확히 맞으며 골문을 향했고, 그야말로 누가 보더라도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터~엉! 분명 정확히 날아갔다고 생각한 공은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크로스바를 강타하고는 수직으로 공중으로 솟구쳤고 골을 허용했다고 생각했던 한양여대 골키퍼 김현주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그대로 뛰어올라 공을 잡았다. 아아~~! 그러자 관중석에선 또다시 신음에 가까운 탄식소리가 들려왔고, 모두가 골이길 기대했던 한국여대 선수들 모두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골키퍼 김현주는 실망하는 한국여대 선수들을 비웃듯 그대로 공을 멀리 던졌고, 그 공은 그대로 전방에 홀홀 단신으로 남아있던 전현아의 발 아래에 전달됐다. ‘이런!’ 골이 되지 않으면 경기는 중단된 것이 아니었건만, 한국여대 선수들은 완벽한 골이 무산되자 잠시 멍한 상태가 되어있었기에, 노련한 한양여대 선수들은 그 틈을 그대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양여대 공격의 핵 전현아는 그대로 공을 몰며 한국여대 진영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막아!” 누가 소리를 질렀는지 모르지만, 한양여대 진영으로 잔뜩 넘어와 있던 한국여대 미드필더 진들은 빠르게 복귀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현아의 드리블이 그리 빠르지 않았다는 것과 전방에 남아있던 공격수 지소연 또한 센터백 미애에게 어느정도 잡혀있었다는 점이었다. ‘잡았…?!’ 그나마 지영이 가장 먼저 전현아를 따라잡으며 어깨싸움을 걸었는데, 순간 연약해보이기만 하던 전현아의 어깨에 지영이 부딪혀 나가며 그대로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때문에 뒤따르던 아라는 무척이나 놀랐지만, 지영이가 떨어져 나갈 정도라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현아의 속도를 따라잡고는 그대로 앞서나가 정면을 막아 섰다. 하지만, ‘뭐?!’ 전현아는 아라를 앞에 두고 멈춰서기는커녕, 순간적으로 공의 윗부분을 발바닥으로 돌리며 자신의 몸도 빙글돌리는 이른바 '마르세유 턴'을 하며 단번에 아라를 제치고 달려나갔다. 아라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얼굴로 변한 채 전현아를 다시 따라갈 생각조차 못했는데, 그럼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던 은채가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복구되지 못한, 그래서 더욱 일찍 소진된 체력때문에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기에 정교한 태클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은채의 눈엔 그러나 더이상 전현아를 막아설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치잇! 어쩔 수 없잖아!' 결국 따라가던 속도 그대로 은채는 전현아의 뒤에서 카드를 받을 것을 각오하고 태클을 걸었고, 아슬아슬하게 은채가 뻗은 오른발은 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전현아의 왼발 뒤꿈치를 겨우 건드릴 수 있었다. 삐~익! 그제야 멈출 것 같지 않던 전현아가 스텝이 엉키며 그대로 엎어지듯 미끄러졌고, 주심은 곧바로 전현아가 넘어진 곳으로 달려와 은채의 반칙을 선언했다. 그런데 은채는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주심이 꺼내든 카드의 색깔을 확인하고는 그 하얀 얼굴이 더욱 사색으로 변했다. “마… 말도 안돼!” - “…”, “…”, “…” 규식과 철용, 그리고 현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백태클은 기본적으로 카드를 받을 각오를 해야 했지만, 그 순간 다른 수비수가 없는, 이른바 단독 찬스를 무산시킨 경우라면 심판 재량에 따라 카드의 색깔은 충분히 바뀔 수 있었다. 아니 정석적으로라면 분명 레드카드가 정답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자세히는 몰라도, 1 : 2 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 명이 빠지게 된다면, 승부의 추는 완전히 기울게 되는 것이라는 것 쯤은 현우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잠시 고개를 들어 조명에 가리워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끝인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적어도 결승에 올라야만 했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이렇게 혜미의, 윤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선 안되는 거였다. 하지만 자꾸만 좋지 않은 생각이 드는 통에 현우는 차마 경기장을 바라보지 못했는데 그런 현우를 붙들어준 건 다름아닌 혜미의 아버지였다. “녀석…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저기 보렴.” 현우는 규식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손을 뻗어 가리키자, 겨우 눈물을 감추며 흐릿해진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 승은이와 정화가 다급하게 트레이닝 복을 벗고 교체를 위해 터치라인에 다가섰지만, 뜻밖의 퇴장으로 인해 눈물 범벅이 된 채 달려 나오는 은채를 영후는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감독님… 억울해요… 흑흑…” 영후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그라운드 상황은 접어둔 채, 은채를 잠시 품에 안고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은채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여 주었고 그제야 은채는 겨우 눈물을 멈추고 벤치로 가려 했는데, 순간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윤…지야…?” 은채의 당황스런 반응에 영후도 그제야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윤지를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영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윤지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 했는데 그 순간, 윤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윤지야?!”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 전개되자 남희와 수림, 그리고 은채는 어쩔 줄 모르며 영후와 윤지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잠시 후 윤지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잘……요…”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갑작스런 윤지의 행동에 술렁이던 관중석 때문이었는지 영후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에 윤지가 고개를 들고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잘못했다구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제야 윤지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은 영후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만 있었다. “절 내보내 주세요…” 하지만 윤지에게 돌아온 답은 간단명료했다. “그건, 곤란한데? 자, 정화랑 승은이, 예정대로 소영이랑 하늘이하고 교체해.” “!!” 그러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윤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왜요! 왜 이러는 건데요!! 이겨야 하잖아요! 이 경기 이기고! 다음 경기도 이겨야 하잖아요!! 근데 왜!!!” “인석아, 동료들은 널 위해서 죽어라 뛰고 있는데, 근데 윤지 넌 동료를 그 정도로 밖에 못 믿는 거냐?” “!” 윤지는 그제야 이 남자,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치만…” “감독인 나한테까지 감출 필요 없잖니.” “!” 윤지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설마?!' 동료들보다 훨씬 연습량이 적었던 이유로 사실은 체력적으로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경기장에만 들어서면 어떻게든 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감독은 이런 순간에도 무척이나 냉철했다. “그리고, 경기에 뛰지 않아도 넌 이미 뛰고 있잖아, 여기로.” 영후가 손을 들어 윤지의 머리를 쓰다듬자, 윤지는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후는 몸을 돌려 윤지와 나란히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 했다. “경기장 밖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보면 아이들의 움직임이 좀더 잘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 “나는 윤지 너의 축구 지능에 기대하고 있단다. 그러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플레이들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기억하렴. 그러면 그 모든 것이 네 것이 될 테니까.” “가… 감독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을 거야. 윤지 넌, 지금까지 내가 본 최고의 선수니까.” 최고의 선.수. 윤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윤지의 심장은 전속력으로 그라운드를 내달릴 때보다도 훨씬 더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네 단짝은 윤지 너에게 보여주겠다고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구나.” 영후는 윤지의 어깨를 살짝 보듬어 주고는 교체하기 전, 정화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이야기 하기 시작했고, 정화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윽고 소영이와 하늘이가 교체되어 나오자 영후는 악수와 함께 포옹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두 아이들이 벤치에 앉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리려다 윤지와 눈빛이 마주치자, 자신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그라운드를 가리켰다. 그에 윤지는 영후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눈을 크게 떴다. ‘볼 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기억할거야. 그러니까… 지지 말아줘!!’ 49부. 90분이 지나고…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은채가 퇴장을 불사하며 반칙을 범한 지점은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페널티에어리어 라인에서 조금 떨어진 왼쪽 지점이었기에 모든 한국여대 선수들은 그 지점에서부터 9.15미터 떨어진 페널티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와 일렬로 선 채 인간 벽을 형성했는데, 혜미도 당연히 동참했다. “참, 혜미야 감독님께서 너한테 전해달라더라.” “뭘?” “뭐라더라… 아 맞다, ‘패스라고 생각하라’던데?” “뭐?! 그게 무슨 얘기야?” “몰라 나도! 온다!” 혜미와 정화의 대화는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전현아의 프리킥으로 끊길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여대의 오른쪽 진영, 그러니까 한양여대가 공격하는 왼쪽 진영의 45도 각도에서 전현아가 오른발로 차 올린 공은 그러나 무척이나 높게 점프한 혜미의 머리에 간신히 닿았고, 미자는 어렵지 않게 공을 품 안에 안을 수 있었다. “올라가!” 골키퍼 미자가 한 손에 공을 든 채 전방 이곳 저곳을 바라보며 던질 곳을 찾다가 왼쪽 진영에서 손짓을 하는 새로 투입된 왼쪽 풀백 승은이에게 신속하게 던져주었다. 한편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되면서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한양여대 진영으로 달려 올라가던 혜미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그나저나, 패스라고 생각하라니… 도대체 무슨 얘기야?’ 정말 이 중요한 찰나에까지 수수께끼 놀이나 즐기는 감독님이 야속했지만, 그건 경기가 끝난 다음에나 하소연할 일이었다. - “뭐야, 그 애는 왜 안 내보내는 건데?” 근명은 병원 침대에 누운 채 한국여대가 마지막 교체 카드를 모두 써버리자 어이가 없어했다. “뭐 신주단지라도 되는 거야 뭐야… 그 애만 있으면 저런 자질구레한 팀 따윈 쉽게 이기겠구만… 쳇, 꼴에 감독이랍시고 쉽게 가긴 싫다 이건가?” “하근명님,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아 지금 축구 보고 있는 거 안보여요? 지금 주사가 문젠가…” 근명은 여전히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웅얼거리다가 뭔가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져 조심스럽게 눈을 돌려 바라보자, 역시나 공포의 수간호사가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을 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맞는 다구요. 맞으면 되잖아. 거참, 왜 눈은 그렇게 해서 보는데…요?” 근명은 지난번에 맞은 수간호사 식 특별 주사의 고통을 떠올리며 얼른 환자복 하의를 내렸다. “아프지 않게 좀… 부” 탁! “윽! 으윽…” 근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간호사는 손자국이 날만큼의 강력한 스윙과 함께 번갯불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주사 바늘을 꽂아넣었다. 이후 바늘을 빼고 알코올솜만을 엉덩이 한구석에 남겨주었는데 그와 더불어 무미건조한 말 한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1분 정도 문지르세요.” 하지만 수간호사의 의례적인 당부의 말은 근명의 귀에는 이미 들리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매서운 손끝 이후에 이어진 피하근육주사는 입에서 비명조차 나오지 못하게끔 만들어주었으니까. 때문에 근명은 당장 축구고 뭐고 무조건 엎드린 채 주사 맞은 부위를 열심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씨… 간호사는 여자 아닌가? 좀 꼬드겨봤기로서니 다른 간호사들은 코빼기도 안 비치고 무조건 수간호사야…” 하지만 근명은 다시금 티비를 통해 흘러나오는 관중들의 환호성에 어렵사리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 쫌! 시원시원하게 이겨보라고!!!” - 왼쪽 풀백 하늘이에게 공을 건네 받은 왼쪽 윙 민지는 전방으로 올라가려다 한양여대 오른쪽 미드필더 권선희를 맞서자 모험을 하기보다 안전하게 중앙의 지영이에게 패스했다. 그러자 지영인 다시 아라에게 공을 건넸고, 아라는 곧바로 터치라인을 따라 달려들어가는 오른쪽 윙 정화의 앞 공간으로 단번에 패스를 날려주었다. 간단하면서도 왼쪽에서부터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전환된 공격에 단번에 공간을 허용한 한양여대는 곧바로 이어진 정화의 땅볼 크로스를 막지 못했고, 이 공은 그대로 중앙으로 쇄도하던 혜미의 발끝에 걸려들었다. ‘이번엔!’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앞섰던 혜미의 오른발 슈팅은 또다시 한양여대의 오른쪽 골포스트를 백지 한 장 차이로 빗겨나가고 말았다. “으아~~~~~~! 미치겠네!!!” 혜미는 벌써 절호의 기회를 몇 번이나 날려버리자 스스로를 자책하며 유니폼 상의를 올려 얼굴에 뒤집어 썼다. 동료들 보기가 창피했던 것인지, 달아오른 머리의 열을 식히고자 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그 순간 유니폼 속에 감춰져 있던 혜미의 봉긋한 가슴 선이 탱크 탑을 사이에 두고 그대로 드러나자 관중석 여기저기에선 바로 그런 것을 기대했었다는 양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않던 혜미는 다시 후방으로 내려서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도대체 뭐냐구… 패스로 생각하라니…’ - “…” 평소같지않은 혜미의 모습에 윤지는 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분명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게 빤히 보일 정도였으니 윤지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헌데 이런 마음을 한국여대 감독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인지, 경기 내내 서있기만 하던 남자는 처음으로 윤지의 옆자리 벤치에 털썩 앉았다. “녀석, 하여간 엄청 의식하고 있나 보다.” “네?” 윤지는 계속해서 혜미가 득점 기회를 놓치고 있음에도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싱글벙글인 감독을 어이없어하며 바라보았다. “넌 어떠니?” “어떠냐니… 뭐가요?” “혜미가 잘할까, 아님 네가 더 잘할까?” “가, 감독님…?” “근데 무조건 일방적이면 라이벌이 될 수 없거든?” “지…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그럼 슬슬 약을 좀 올려볼까?” 라이벌은 뭐고, 또 약을 올리다니… 윤지는 점점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남자의 속을 짐작해볼 수도 없었건만, 또다시 한양여대는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드디어 한국여대 감독은 테크니컬 에어리어로 걸어나가곤 손가락 두개를 입에 집어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 한양여대 공격수 지소연은 대기심이 들고 있는 번호판에서 자신의 백넘버를 확인하고는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때문에 남희와 수림은 시간을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발끈하려 했지만, 정작 감독이라는 남자는 교체되어 나오는 지소연보다도 먼저 달려온 혜미와 뭐가 그리 재미난지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기에 더욱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못살아 진짜!’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코치의 머릿속에선 그러나 똑같이 열불이 나고 있었지만,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혜미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 영후는 어쩐지 이번엔 혼날 것 같다는 느낌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혜미를 가재미 눈을 해서 바라보며 놀려댔다. “임마, 윤지가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라던데?” “에에?” 감독의 입에서 묘한 이간질 성 발언이 튀어나오자, 혜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영후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윤지의 초조한 얼굴을 살짝 바라보았다. “쳇! 감독님, 거짓말이죠!!” “응.” “아 진짜! 뭐에요!!” “근데, 너 지금 진짜 그래.” “!” “아까 정화에게 전해달랬는데 못 들었니?” “들…었어요. 패스처럼 생각하라고…” “에? 그 앞엣말은?” “제가 들은 건 그게 단데요?” “아이구야… 하하!” 그제야 혜미가 못 알아들었던 이유를 깨달은 듯 영후는 자신의 이마를 탁 치고는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이윽고 지소연과 정혜인이 교체되어 들어가자 몸이 단 혜미는 거의 영후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매달려 너무나 여유로운 감독을 닥달하기 시작했다. “뭔데요!? 앞엣 말이 도대체 뭔데요!!!” “이봐! 경기 중이다! 빨리 돌아가!!” 하지만 영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혜미는 대기심의 엄포에 영후에게서 떨어져 나왔는데, 그제서야 영후의 입이 열렸다. “슛이다 슛!” ‘… 슈…슛?!’ 단순한 대답에 혜미는 얼떨떨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기는 다시 재개되었고, 어서 빨리 혜미는 한양여대의 진영으로 달려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혜미의 머릿속은 달리는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정리되는 것만 같았다. - 한국여대 센터백 진희와 미애는 최대한 공수 간격을 좁히며 센터라인 가까이 까지 다가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새로 투입된 한양여대 공격수 정혜인이었다. 때문에 미애는 꽤나 갈등 중이었다.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네.’ 정혜인의 훤칠한 키도 그랬지만, 무척이나 정확한 전현아의 장거리 패스 또한 주의할 수 밖에 없었기에 마음만큼 전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숫적 열세를 극복해야 했기에 양 풀백 나경이와 하늘이가 미드필더인 아라와 지영이가 위치한 선상까지 올라섰다. 그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아이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애, 넌 올라가.” “진…희야…?” “걱정 말고 어서. 난 혼자가 아니잖아.” 미애는 진희가 자신의 등뒤를 가리키자, 비로소 손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고있는 골키퍼 미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럼, 부탁할게.” 미애는 진희에게 한양여대 공격수 정혜인을 맡기고는 그대로 전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러자 어이가 없다는 듯, 진희와 미애를 번갈아 돌아보곤 정혜인이 코웃음을 쳤다. “괜찮겠냐? 너 혼자서?” “너나 걱정하시지? 나중에 울지 말고, 흥!” 진희는 결코 기에 눌리지 않으며 정혜인에게 바짝 따라붙었고, 동시에 전방의 상황을 살폈다. - 미드필드에선 편하게 공을 돌리는 한양여대 선수들 때문에 아라와 지영이를 비롯해, 양 윙 소영이와 민지도 정신없이 공과 사람을 압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거의 공에 닿았다고 생각되면 언제나 약올리듯 골키퍼 김현주에게 백패스를 하곤 다시 공을 돌리기 시작했기에 언제부턴가 관중석에선 조금씩 야유가 흘러나왔다. “치사하다!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뭐가 무서워서 공을 돌리냐! 비겁하다!”, “한국여대 한 골 넣어라!!” 게다가 점점 관중들이 동시에 ‘우~’하며 한양여대를 나무라자, 규식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런다고 함부로 공격을 나선다면, 그것도 또 축구가 아니건만…” “그치만 아저씨, 한 명이 더 적은 팀을 상대로 너무해요!” “아마 한양여대는 더 이상 체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 같은데? 고작 이틀 쉬고 바로 결승전이니 내가 감독이라도 이렇게 지시했을거다.” “그치만, 정정당당하게 공격도 하고 해야” “지금 한양여대가 공격을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란다.” “예? 그게 무슨…” 현우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규식이 손가락으로 그라운드를 가리키자 순간 공을 잡는 전현아가 눈에 들어왔다. ‘아…!’ - 전현아는 거의 자신들의 진영으로 대부분 넘어와있는 한국여대 아이들을 비웃듯, 골키퍼 김현주가 길게 패스해준 공을 잡자마자 그대로 한국여대의 왼쪽 공간을 향해 롱패스를 날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혜인이 긴 다리를 자랑하며 성큼성큼 내달리기 시작했고, 진희도 놓칠 새라 전력을 다해 따라붙었다. 하지만 진희는 무척이나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혜인에게 돌파를 허용하면 자신 말고는 더 이상의 수비수가 남아있지 않은 한국여대에겐 희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게다가 그 와중에 살짝 고개를 들어 확인한 전광판의 시계는 야속하리만치 빨리 지나가 있었다. ‘벌써 30분이 넘었어!’ 진희는 다행스럽게 정혜인에게 중앙 돌파를 허용하진 않았지만, 공을 뺏진 못했다. 게다가 정혜인은 어차피 돌파가 되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었다는 듯, 코너 플래그까지 밀리는 척 하며 여전히 공을 소유하고만 있었다. 결국 코너에 공을 세운 뒤 진희를 등진 채 서 있던 정혜인의 의도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첫째였고, 그 다음은 코너킥을 얻어내 한국여대 선수들을 한양여대 진영에서 귀환시키려는 것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진희 또한 정혜인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섣불리 덤벼들지 않고 발을 정혜인의 다리 사이에 넣어 공을 빼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 순간, 정혜인은 기지를 발휘하며 발뒤꿈치를 이용해 진희의 다리 사이로 공을 뺐고, 동시에 코너에서 몸을 돌려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런! 안돼!!’ 갑작스레 공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정혜인보다 스타트가 늦었던 진희는 너무나 놀라 정혜인을 따라 달리려 했지만, 이미 정혜인도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미 한국여대 최후의 수비수인 골키퍼 미자가 언제 달려왔는지 그대로 공을 전방으로 차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자야!” “잘했어 진희야.” 진희는 골키퍼 장갑을 낀 채 ‘팡팡!’ 박수를 보내는 미자에게 손을 들어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멀리 날아간 공은 다시 한양여대 센터백 임선주의 가슴에 멈췄고, 임선주는 다시 전현아에게로 패스를 보냈는데, 순간 임선주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미스!’ 노리고 있었던 지, 아라가 전현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패스를 차단하며 곧바로 자신의 옆으로 전진하는 지영에게 전진 패스를 해줬던 것이다. 때문에 임선주와 신민아는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지영인 공을 가지고 전진하는 듯 하다가, 임선주와 신민아 두 센터백의 사이로 절묘하게 공을 찔러 넣었다. ‘아라였다면, 분명히 이렇게 했을테지!’ 돌아보진 않았지만, 지영은 자신의 플레이처럼 한 발 먼저 나서 압박 수비를 펼친 아라가 자신을 칭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부디 이번 패스를 혜미가 꼭 잡아 주길 바래보았다. - 한양여대의 왼쪽 진영, 그러니까 한국여대의 오른쪽 공격 진영에서 오프사이드 트랩을 적절하게 빠져 나왔던 혜미는 그러나 지영이의 발에서 공이 떠남과 동시에 공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친 숨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뒤따라 붙는 왼쪽 풀백 황주화와 앞에서 달려드는 신설혜를 의식하며 드리블하던 혜미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패스처럼…’ 혜미는 자신의 뒤에서 심판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어깨를 잡는 황주화를 간단히 뿌리치면서도 생각을 했다. ‘패스처럼…’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신설혜를 앞에 두고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으며 달려들다가 순간적으로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을 터치했다가, 신설혜의 무게 중심이 무너지자 다시 한 번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순식간에 공의 방향을 바꾸며 그대로 돌파했다. ‘플립…플랩?!’ 신설혜는 동영상으로만 보던 고급 기술을 눈으로 확인함과 동시에 그대로 나동그라졌지만,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아이…?!’ 신설혜를 간단히 통과하며 골라인을 따라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에 진입한 혜미는 다시 센터백 임선주와 수비형 미드필더 조효선이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과는 다른, 너무나 익숙한 호흡 소리 또한 느껴졌다. ‘미애!?!’ 최종수비수인 센터백 미애가 셋트피스가 아닌 상황에서 이곳까지 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느껴지고 있었다. 때문에 혜미는 골라인을 아슬아슬하게 타며 전진하면서도 골키퍼를 앞에 두고 왼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분명 미애가 후방에서부터 달려와 골 에어리어 안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마저 혜미의 머릿속에선 감독의 지시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명확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패스…처럼!’ “막아!!” 골키퍼 김현주의 외침과 동시에 임선주와 조효선의 태클이 거의 혜미의 발 아래에 당도할 무렵, 혜미는 마치 패스 연습 때처럼 발목의 힘을 빼고 오른발을 이용해 ‘툭’하고 공을 찼다. 그 누구도 슈팅의 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특히나 골키퍼 김현주는 각도가 없었기에 슛이 아닌 패스라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공이 아닌 뛰어드는 미애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김현주가 몸을 날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른발… 아웃사이드?! 인사이드가 아니라?!’ 김현주는 그제야 자신이 미애와 혜미의 오른발에 완전히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공은 이미 아무도 없는 골 문을 그대로 통과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혜미는 가벼운 슈팅 후, 태클을 시도한 임선주와 조효선의 발에 엉키며 그대로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졌지만, 관중의 함성소리와, 주심의 휘슬소리, 그리고 달려드는 한국여대의 동료들 덕분에 드.디.어. 골을 성공시켰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거였죠? 그렇죠? 감독님!’ 아이들이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며 인간 탑을 쌓고 있었지만, 혜미는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 어쩜 저리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주는 건지, 너무너무 신기하기만 했다. - 삐~익! 삑! 삐~익! 드디어 치열했던 90분의 혈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소리가 들리자 다 잡았던 경기를 놓쳐버린 한양여대 선수들은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지만, 한국여대 아이들은 달랐다. “감독님! 감독니~임!!” 가장 먼저 영후를 향해 혜미가 달려왔고, 뒤이어 아라와 나경이 뒤질세라 혜미를 추격하듯 달려왔다. 그리곤 어느새 모든 아이들이 영후를 둘러싸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건 마치 유치원생들이 착한 일을 하고선 선생님께 쪼르르 달려가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그런 모습과 한치도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감독이란 남자는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고, 한 명 한 명씩 꼬옥 끌어안아주었다. 하지만 이런 눈꼴사나운 장면을 그냥 두고 볼 남희가 아니었다. “얘들아, 그렇게 서있지 말고 어서 누워! 잠깐이라도 체력을 회복해야지! 수정이랑, 은채, 하늘이, 윤지! 다들 뭐해? 빨리 동료들 뭉친 근육 풀어줘!” 미처 영후의 품에 안기지 못한 아이들은 입이 댓발은 나왔지만 가장 황당한 얼굴의 주인공은 바로 미자였다. 바로 앞에서 민지의 포옹이 끝나자 잔뜩 기대하며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우이씨…’ 하지만 이 정도의 여유를 부릴 정도로, 도저히 단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수림도 누운 채 두 다리를 맡기고 있는 아라의 양 다리를 흔들어주면서도 연신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런 모습들 조차 긍정적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 보았다. 슬쩍 옆 벤치를 돌아보니 한양여대 선수들은 다잡은 경기를 놓친 충격에 망연자실한 분위기였다. 그에 반해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서도 여전히 여유롭기만 한 한 남자가 한국여대엔 있었다. “자, 그럼 누워있는 상태에서 퀴즈다.” “에? 감독님, 또 뭐에요~!” “뭐긴 인석아, 퀴즈가 퀴즈지. 자 문제 하나. 같은 대회 기간 동안 세 경기를 치른 팀과 두 경기를 치른 팀 중 어느 팀이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을까?” “그야, 두 경기 치른 팀이죠.” “미자 빙고. 좋아, 그럼 두 번째 문제. 그 두 팀이 만나서 경기를 했는데 연장전에 돌입하게 된다면? 어느 팀이 더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을까?” “그것도… 당근 두 경기를 치른 팀이죠.” “이번엔 혜미 정답. 그럼, 두 경기를 치른 팀에서 한 명이 빠진 채로 경기를 치르게 된다면? 연장전엔 어느 팀에게 유리할까?” “그건…” 순간 아이들은 섣불리 정답을 얘기하지 못했다. 분명 한양여대가 예선에서 세 경기를 치르고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체력적인 소비를 최소화하며 플레이를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후반에 은채의 퇴장과 함께 수비라인까지 공격에 가담하느라 한국여대의 체력도 과히 좋은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극적인 동점을 이뤄 잠시 기운이 났었을 뿐이었지. “누구 아는 사람 없어?” “……” 아이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자 역시나 한국여대 감독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모두들 모르는 게 맞단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 “그러니 마지막 삼십 분, 지금까지보다 더욱 즐겁게 뛰고 나서 너희들이 나에게 알려줬으면 좋겠구나. 그래 줄 수 있겠지?” “네!!!!!!!!!!!!!!!!!!” 또다시 유치원생들이 선생님을 향해 왁 소리지르며 대답하는 것처럼, 한국여대 선수들은 질세라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대답했고, 그제야 영후는 만족스런 답을 얻은 양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영후의 시선은 터덜터덜 그라운드를 걸어 나오는 전현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 윤지는 그 누구도 아닌 혜미의 다리 근육을 풀어주고 있었다. 분명, 평소 밤마다 자신이 마사지를 해 줬을 때보다 훨씬 더 무겁고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에 가슴이 아려왔다. ‘정말, 혜미는 내게 친구란 걸까…’ “윤지야.” “?” “나, 조금쯤 널 따라 잡은 거지?” “혜, 혜미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야, 기운 빠져 소리지르지 마.” “…” “여주대땐 설마 했지만, 위덕대 애들이랑 싸웠을 때 확실히 깨달았어. 너야말로 '진짜'라는 걸.” “아, 아니야 혜미야. 난… 나는…” “넌 아니라고 해도,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걸? 물론 나도 그렇고. 그니까…” “…” “다음 경기 때, 꼭 멋지게 돌아와줘. 그래 줄 수 있지?” 혜미의 다리를 흔드는 것도 잊은 채 윤지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는 혜미의 눈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좋았어! 그럼 이번 경기 꼭 우리가 가져올게. 윤지 바로 네 앞에!” 혜미는 언제 구십 분을 뛰어다녔냐 싶을 정도로 벌떡 일어나 그라운드로 걸어나갔고, 그런 혜미의 뒷모습을 보며 윤지야 말로 생각해보았다. ‘너야말로, 내가 모든 걸 배워야 할 최고의 선수야 혜미야.’ - 한양여대의 이상엽 감독은 안쓰러운 눈길로 전현아를 바라보며 김상진 코치와 긴밀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어때, 아무래도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현아 상태를 감안하면 차라리 그게 나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 그럼. 아이들한테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자고.” 감독과 간단한 협의를 마친 김코치는 바닥에 철퍼덕 앉은 채 물병의 물로 목을 축이고 머리를 적시던 전현아에게 다가가 신중하게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현아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이상엽 감독을 돌아보았는데, 감독은 전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어 보였다. 때문에 전현아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런 게 뭐가 축구야!!!’ 전현아는 이내 들고 있던 물병을 신경질적으로 던지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라운드로 걸어나갔다. - 현우는 선수들이 다시 한 번 경기의 시작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아저씨, 그럼 연장 전후반 십오 분씩, 또 삼십 분이나 뛰어야 하는 거죠? 어휴…” “그래, 한때는 골든 골 제도라고 먼저 한 골을 넣는 팀이 승리하도록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렇지.” “그럼, 삼십 분이 지나도 계속 승부가 안 나면요?” “그야…” “당연히 승부차기 돌입이지!” 철용이 다시 호기롭게 끼어들며 입을 열자, 규식은 조금 심각해졌다. ‘그렇게 까진 되지 말아야 할텐데…’ - “할아버지!” 노감독은 연장전 시작을 앞두고 잠시 들른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자꾸만 들리는 아이의 외침에 설마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어느새 밤톨 만 한 아이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응? 넌 누구냐?” “할아버지! 할아버지 축구 감독 맞죠? 그쵸?” “음, 그렇긴 한데… 근데 왜 그러누?” “우리 형아가 할아버지한테 배워서 축구 잘하게 됐다고 했는데 진짜에요?” “원 녀석, 네 녀석 형이 누군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 “아 씨, 왜 몰라요? 우리 형아는 우리나라 최고 선순데, 우리 형아가 감독님이 우리나라 최고라 그랬단 말에요!” “허… 고놈 참 맹랑하긴, 그래 그 우리나라 최고인 네 형아가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이영후요! 난 ‘강 찬’이구요.” “뭐라? 이영후? 난 애당초 영후에게 너 같은 동생이 있단 얘길 들은 적도 없다만?” “우씨, 뭐 그렇게 된 사정이 있어요. 어쨌든! 나도 축구 가르쳐 주세요! 난 형보다 훨씬 더 잘 할 자신 있단 말이에요!” “이 녀석 좀 보게…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근데 이놈아, 세상에 공짜가 어딨느냐?” “치… 치사하게 할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찬인 바지 주머니를 한참이나 뒤적뒤적 거리던 끝에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빛바랜오백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양 손에 쥔 채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두 눈 딱 감고 두 손을 모두 내밀었다. “자요!” 노감독은 그런 찬이의 모습을 보고는 속으론 한참을 웃었지만, 겉으론 진지한 얼굴로 왼손바닥에 놓여있는 오백원짜리 동전 하나만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것으로 계약 성립이다. 됐느냐?” “아뇨? 아직이요. 손 줘보세요.” “?” 노감독은 찬이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는데, 순간 찬이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노감독의 손가락에 걸었다. “약속하고, 지장 찍고, 복사! 됐어요.” 순식간에 약속부터 지장, 복사까지 당한(?) 노감독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이윽고 수첩과 연필을 꺼내든 찬이는 여전히 갈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또 남은 게 있느냐?” “전화번호 불러주세요. 엄마가 요샌 아무나 믿지 말라 그랬단 말예요.” “허허…” 노감독은 결국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찬이는 진지하게 번호를 받아 적었다. 그제야 찬이는 안심을 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가려다 내심 걱정됐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소리쳤다. “감독 할아버지! 꼭 약속 지키기에요!” - 다시 관중석 자리로 돌아온 노감독을 황총장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벌써 연장전이 시작되었건만 평소 같지 않게 늦게 돌아온 것에 걱정을 했던 참이었던 것이다. “뭔 일 있으셨어요? 이렇게 늦으시고.” “아, 갑자기 중요한 계약 건이 있어서 말이오.” “계약…요?” “허허, 뭐 그런 게 있소. 그나저나 벌써 경기가 시작된 게요?” 노감독은 역시나 앉자마자 경기에 몰입하기 시작했지만, 황총장은 왜 이남자가 손에 오백 원짜리 동전을 계속 쥐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 혜미는 경기가 시작되자 한양여대 센터백 신설혜와 임선주 사이를 파고들며 연신 빈공간을 찾아들었다. 한 명이 적은 상태에서는 최전방 공격수의 왕성한 움직임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한양여대도…?’ 혜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한 명이 더 많은 팀으로선 승부차기로 가는 것만큼 최악의 시나리오는 없었을텐데, 공격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한국여대에 전혀 맞부딪혀오지 않고 있었다. ‘순간적인 역습을 노리는 건가?’ - “이거 어렵게 됐군.” “네? 뭐가요?” 현우는 규식이 또다시 근심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곧바로 궁금증을 표출했다. 현우의 눈으로 보기엔 생각보다 한국여대가 잘 해나가고 있어 보였기에 규식의 얼굴 표정이 더 이해가 안되고 있었다. “이봐, 자네 승부차기 해봤나?” 철용은 뜬금없이 자신에게 묻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야, 컵대회 때나, FA대회 땐 승부를 가려야 했으니까 당연히…” “혹, 처음으로 승부차기를 했었던 때를 기억하나?” “가만… 음… 생각해보면 아마 고등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되는 데요? 근데 왜 물으시는 거에요?” “하나만 더 묻지. 그럼 처음 승부차기 키커로 나섰을 때, 긴장되지 않던가?” “아휴, 긴장 안될리가 있었겠습니까? 다리가 다 후덜덜 떨렸었는데.” “그랬겠지… 누구나 그랬을거네. 안그랬다면 그건 거짓말일테고…” 규식은 물론 예외였던 한국여대 감독놈과의 승부차기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건 ‘그 놈’이기에 가능했을 터였다. “그럼 답은 나왔군.” “예?” 규식이 먹먹한 표정으로 읊조리자 철용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이내 규식의 생각을 읽었는지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반박했다. “선배?! 지금 그건 말이 안된다구요! 한 명이 더 많은 팀이 공격만 퍼부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승부차기까지 끌고 간다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야…” 규식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던 것은 확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양여대의 모습은 공세적이지 못했기에 더욱 머리가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고, 그 순간 한가지가 머릿속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설마, 한양여대도 지금은 한 명이 빠진 것과 같은 상태인 건가…?’ 하지만 어쩐지 점점 활동 반경이 좁아지고 있는 전현아를 보고 있자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연장전에 들어서자 한양여대의 경기 템포는 눈에 띄게 느려졌고, 단순한 롱패스에 의존하는 모습만을 보여 주자 수림은 고심하며 남희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좀 더 공격적으로 밀어 붙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좀처럼 한양여대에선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공격을 감행했다간 역습을 허용할 가능성이 커질 겁니다. 이미 저희는 한 명이 적은 상태잖습니까. 게다가 전현아의 스루 패스에 아이들의 수비 조직력이 무너질 가능성도 더욱 크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경기를 마무리 짓기에는…” 수림은 마음 속에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려다 말았다. ‘말이 씨가 될라…’ - “치잇, 또 빗나갔나…” 아라는 지영이가 미드필드에서 빼앗아 건네준 공을 그대로 롱패스를 했지만, 이중 삼중으로 혜미를 수비하는 한양여대 수비진 때문에 차단되고 말았다. 상대가 이런 수비적인 상태라면 아무리 혜미라 하더라도 혼자서 적진에 자리잡은 채 날아오는 공을 모두 받아낼 순 없었다. ‘하지만…’ 막상 공을 가로챈 한양여대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누가 공을 잡더라도 우선은 골키퍼 김현주의 발에 건네주었고, 마치 연습을 하듯 이윽고 후방에 남아있는 모든 선수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역시나 단번에 전방의 공격수 정혜인을 노리는 패스를 했다. 물론 한국여대 수비진들 또한 어렵지 않게 차단했지만. ‘벌써 시간이…’ 아라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있는 주심의 모습을 보며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었다. 사십오 분과는 확연히 다르게 지나가버린 십오 분은 참 이상하고 어색했다. 결국 어떤 플레이를 해보기도 전에 연장 십오 분이 지나자 주심은 휘슬을 불어 곧바로 진영을 옮길 것을 지시했고, 아이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서로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한양여대 전현아와 스치듯 교차되던 아라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화… 난 거?’ 연장전 전반 동안 전현아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아라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분명 전현아는 화가 나 있었다. - “야, 혜인.” “?”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진영을 옮기던 전현아가 불러 세우자 혜인은 곧바로 돌아보았다. 혹시 더 이상 뛰지 못하겠다는 걸까 싶은 걱정이 앞섰기에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하지만 전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너 이대로 승부차기까지 가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이야? 감독님께서 그렇게 하라셨다며. 설마… 너?” “이렇게 이기면 재밌냐?” “재밌냐니, 축구가 재밌자고 하는 거야? 그저 우린 어떻게든” “저 애들은 안 그런 거 같던데?” 고갯짓으로 전현아가 가리킨 곳엔, 뭐가 그리 재미난 지 수다를 떨며 킥킥 거리며 삼삼오오 그라운드로 걸어 다니는 한국여대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이제 와서 감독님 지시를 어기자는 거야?” “어떻게든 이기면 되는 거잖아. 결국 그게 감독이 원하는 거 아냐?” “하지만 현아 너…” 정혜인은 감독의 마음과 전현아의 승부욕 사이에서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누구라도 불확실한 확률의 승부차기까지 가고 싶어하진 않을 것이었다. 아니, 연장전도 탐탁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난 아직 내 한계를 시험해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전현아의 담담한 한마디에도 불구하고 정혜인은 걱정스런 눈으로 전현아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전현아의 체력은 한계점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사실 전현아의 체력은 무척이나 약했다. 그러나 이상엽 감독은 체력보다 전현아의 테크닉과 시야를 높이 사며 이런 체력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을 배치해 전현아의 공격력의 극대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분을 풀타임으로 소화하지 못했던 전현아의 체력은 한양여대 최대의 난제였던 것이다. ‘우리가 한 골을 잘 지켜냈더라면…’ 정혜인은 전현아가 좀더 편한 승리를 위해 자신의 남은 체력을 순간적으로 쏟아 부으며 직접 만들어 넣은 전반의 한 골을 떠올려보았다. 평소 같은 패턴이었다면 분명 상대팀의 추격 의지는 꺾였을 것이고, 그럼 상황을 봐서 언제나 그랬듯, 후반 중반 즈음에 감독은 전현아를 교체해주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여대는 포기란 건 모르는 단어라는 듯, 곧바로 따라붙었으니 어느 감독이라도 이 상황에선 전현아를 쉽게 뺄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전현아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기에 이상엽 감독은 자존심을 접고 한국여대의 경험이 미천한, 즉 ‘승부차기’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보내는 것에도 기술이 필요했기에 감히 전현아를 뺄 수는 없었다. ‘감독님, 현아가 또다시 성장 하려나 봐요.’ 정혜인은 비척거리면서도 여전히 의지를 불태우는 전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지영인 연장 전반에 비해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 느낌… 뭐지?’ 분명, 자신 앞에 겨우 서 있는 전현아는 연장전에 돌입하면서부터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걸음조차 옮기기 힘들어 보이는 상황에서 한양여대에 고작 한 명이 더 많다는 것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연장 전반과 달리 전방으로 올라서서 다른 한양여대 아이들을 독려하고 있는 전현아의 모습은, 어쩌면 남은 시간 동안 모든 역량을 동원해 골을 넣겠다는 의지로 느껴졌다. ‘위험해!’ - 혜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간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지? 갑자기…?’ 하지만 그 궁금증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풀렸다. 센터백 바로 위에 위치해 있던 두 명의 견고한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 조효선과 이지윤이 전방으로 올라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공격할 셈인가?!’ - 갑작스런 선수들의 이동에 지영과 아라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건 양 윙 민지와 정화도 매한가지였다. ‘공도 없이 무슨 생각으로…?!’ 하지만 민지와 정화도 그리고 지영이와 아라도 각각 선수들에게 따라붙으며 결국 수비적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였다. 센터백 신설혜에게 공을 받은 골키퍼 김현주의 롱 킥이 이어진 건. ‘설마…?!’ 혜미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그 공은 자유로운 상태의 전현아에게로 전달되고 있었다. 전현아는 힘겨워 보이면서도 날아오는 공을 가슴으로 가볍게 멈춰 떨어뜨리곤 몸을 빙글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건 분명, 정확한 패스를 위한 조준이나 다름없다는 걸 혜미는 직감하고 어떻게든 막아보려 전속력으로 달려들었지만, 그러기엔 두 선수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팡! 센터서클에서 날리는 패스치고는 너무나 가볍게 차는 전현아였지만 패스줄기는 무척이나 날카롭게 한국여대의 왼쪽 진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막을 수 있어!’ 한국여대 왼쪽 윙 민지는 공을 받기 위해 달려오는 한양여대 오른쪽 윙 권선희를 막으려 했지만 그 순간 경기 중 처음으로 권선희의 뒤에 자리해있던 오른쪽 풀백 신민아가 언제부터 노리고 있었는지 권선희의 뒤로 돌아들어가며 날아오는 공을 받아내었다. ‘속았다!’ 때문에 민지는 그대로 뒤로 돌아 뛰어들어 갔는데, 신민아는 공을 가지고 한국여대의 왼쪽 터치라인을 따라 달렸다. “승은아!” 하지만 한국여대 왼쪽 풀백 승은이도 쉽게 내줄 수 없다는 얼굴로 신민아의 앞을 가로막았는데, 신민아는 자신의 앞에 승은이가 보이지 마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왼쪽으로 공을 흘렸다. 그러자 신민아의 동선에만 집중하던 승은이는 미처 공에 반응하지 못했는데, 그 공은 그대로 다시 달려들어오던 권선희의 것이 되어버렸다. “안돼!!!” 승은이의 수비를 벗겨낸 권선희의 돌파로 자칫하면 그대로 골문 앞까지 돌진 할 것만 같자, 중앙을 비우고 달려온 센터백 진희가 권선희의 발 아래 공을 노리고 정확하게 태클을 시도했다. 촤~악! 진희의 태클은 무척이나 정교하게 권선희의 발 밑에 놓인 공을 향해 들어갔지만, 애석하게도 발끼리 약간의 부딪힘이 있었기에 달려들어가던 탄력 그대로 권선희는 한바퀴를 구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가까이서 지켜보던 부심과 주심 모두 동시에 휘슬을 입에 물었다. 삐~익! ‘뭐?!’ 휘슬 소리와 함께 주심은 득달같이 달려왔는데, 순간 진희는 깜짝 놀라며 현재의 위치를 돌아보았다. ‘휴우… 다행이다…’ 다행히 페널티 에어리어의 바깥이었기에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그 위치였다. 직사각형 라인 중 한국여대의 왼쪽 풀백이 자리하는 쪽의 꼭지점 바로 앞이었기에 프리킥의 위치로서는 무척이나 치명적인 지점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진희는 어쩐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지만 애써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았다. 그러나 파울 선언이 나자 마자 저 멀리서 여전히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전현아가 프리킥을 차기 위해 걷는 듯 달려오고 있었기에 진희는 차라리 페널티킥을 허용한 것보다 더욱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 감독의 지시와는 정 반대로 미드필더들도 모자라 양 윙과 풀백들까지 전력으로 공격에 가담하자 한양여대 김상진코치는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감독님, 선수들이…” “조금만… 두고 보자고.” 이상엽 감독은 지금 모든 선수들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체력비축이 아닌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 아이들의 모습을 말리지 않고 지켜보고 싶었다. 이건, 오직 아이들이 선택한 결과였으니까. 그리고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텨주고 있는 전현아의 선택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이 순간, 전현아가 이 경기를 통틀어 최고의 프리킥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 혜미는 파울 지점에서 9.15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생각보다 무척이나 미자가 가까이에 있었기에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됐어? 옮길까?’ 어느덧 일반적인 고함은 들리지도 않게 되어버린 경기장에서 혜미는 입 모양으로 미자에게 물었고, 미자는 각도를 계산하며 골문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각도를 계산해보곤 조금만 움직여줄 것을 요구했다. 이내 혜미가 같이 서 있는 아라와 지영이의 위치를 조정하자 미자는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막을 수 있을 거야, 막을 수 있을 거야…’ 혜미도 미자도 그 순간 한치도 다르지 않은 생각을 연신 해보며 공을 앞에 두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전현아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은채가 파울을 범했던 곳보다 가까운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이긴 하지만, 각도가 있으니까 직접 노리진 않을 테고… 그럼 역시 쇄도하는 공격수의 머리를…?!’ 혜미가 머릿속으로 복잡한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반대편 진영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봤는데, 순간 다시 한번 주심의 휘슬이 울렸고 그에 걸어갈 힘 조차 없어 보이는 전현아가 멈춰있는 공을 향해 천천히 달려 나왔다. 때문에 혜미는 잔뜩 긴장하며 전현아의 발끝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아차! 왼발!?’ 순간 경우의 수에서 빠뜨린 한 가지, 바로 전현아의 ‘왼발’을 떠올리자 마자 혜미는 미자에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이미 공은 전현아의 발에 의해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혜미는 죽을 힘을 다해 제자리에서 뛰어보았지만 공은 아슬아슬하게 혜미의 오른쪽 머리부분을 스치며 날아갔다. 철썩! 활처럼 휘어지며 거짓말처럼 빠르게 날아간 공은 크로스로 날아오는 줄로만 알고 비워뒀던, 미자의 반대편 텅 빈 골문 안으로 그대로 꽂혀버렸고, 전현아의 슈팅을 감추기 위해 마치 헤딩을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던 한양여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전현아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프리킥을 차자마자 다리에 쥐가 나버린 전현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쥐고 있었다. “현아야!”, “전현아!!” 모든 한양여대 아이들은 한 골을 넣었다는 기쁨도 잠시, 전현아를 둘러싸고 몇 번이고 현아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대답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왼쪽 다리를 움켜쥔 채 고통을 느끼는 얼굴에 모든 아이들은 벤치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들것을 요청했다. - 결국 전현아가 들것에 실려 나오자 관중석에선 기립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라운드에서 실려 나오던 전현아의 귀에 가장 잘 들린 건 바로 상대팀의 감독, 이영후의 박수소리였다. 때문에 겨우 힘을 짜내 고개를 들어보니 이영후 감독은 자신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여주었다. 그에 전현아는 괜히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돌리곤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지만, 어쩐지 가슴이 더욱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이내 하나의 생각으로 응축되고 있었다. ‘좀 더 보여주고 싶다… 저 남자에게…’ - 윤지는 조금쯤 얼굴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감독인 남자가 상대팀, 그것도 역전골을 넣고 나오는 선수에게 박수도 모자라 최고라 추켜세워주다니. 하지만 이런 윤지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영후는 조금쯤 볼이 부어있는 윤지 옆에 털썩 앉아보았다. “임마, 뛰고 싶지?” “……” “뛰고 싶어 죽겠지? 그치?” “아 몰라요!! 누구 때문에 못나가고 있는데!! 약 올리기는…” 소리는 지르고 있지만, 감독의 마음을 이미 전해 받았던 윤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풀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이 경기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요!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 널 끔찍이도 생각해주는 네 동료들이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후후.” 작전은 커녕, 남의 팀 경기를 보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감독의 얼굴을 바라보는 윤지의 표정은 정말이지 황당하다는 그 자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의 말처럼 그라운드 위의 아이들은 여전히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얼굴로 어서 빨리 경기가 재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드디어 전현아가 아웃 되고 교체 선수로 임지혜가 들어오자 주심은 곧바로 경기를 속행시켰다. 하지만 아라는 경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전현아가 있을 때는 그나마 공격에 치중했기 때문이었는지 미드필드에 공간이 조금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세 명의 미드필더가 일자 형태를 유지하며 나란히 선 채로 수비에 무게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현아에게 배워버린 것이 있었다. ‘민지!’ 그 순간, 아라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왼쪽 터치라인을 따라 올라가며 빈 공간을 점하고 있던 왼쪽 풀백 민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훤하게 보여지는 느낌이었다. 또한 체력이 떨어지려 하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해 아라의 몸이 진화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 첫 번째는 다름 아닌 ‘넓어진 시야’였다. ‘민지 받아!’ 아라는 신속한 판단과 더불어 곧바로 다리를 반응시켜 민지에게 대각선으로 크게 공을 빼주었다. ‘오케이!’ 생각보다 공이 빨리 전달되자 민지는 조금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한양여대 오른쪽 풀백 신민아가 다가오는 것을 대비했다. 하지만 신민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수비의 무게가 왼쪽으로 쏠리자 민지는 서두르지 않고 다시 공을 뒤로 빠르게 돌렸다. 한편 지영인 아라와 수평을 이루며 서 있다가 민지에게서 돌아오는 공을 받곤 아라에게 패스를 할까 했지만, 순간 민지 쪽으로 쏠리는 만큼 비어버린 한양여대의 오른쪽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나 그 공간엔 오른쪽 윙 정화가 남은 힘을 그러모아 득달같이 달려들어가고 있었다. ‘정화, 그대로 달려!’ 지영인 마치 스스로 아라가, 아니 전현아가 된 듯 그대로 왼발 대각선 패스를 날렸고, 그 공은 오른쪽 터치라인을 타고 달려들어가는 정화만의 속도와 공간에 적절하게 떨어져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반대쪽 수비가 허물어져버린 한양여대는 다시 정화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는데 정화는 터치라인을 따라 공을 몰고 들어가다 질끈 묶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페널티 에어리어로 빠르게 쇄도해오는 한국여대의 스트라이커를 ‘느끼며’ 단번에 크로스를 날렸다. ‘혜미야, 부탁해!’ - 혜미는 갑자기 아이들의 실력이 늘어버린 건지, 아니면 그만큼 전현아의 지배력이 컸던 것인지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연장 후반도 시간이 다 되어가는지 주심은 손목의 시계를 연신 확인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한 골을 만들어야만 했다. 때문에 패스가 이어지는 동안 혜미는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들 사이에서 배회하는 척하다가 순간적으로 뛰어들어갔다. ‘내가 넣겠어!’ 미처 혜미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한 센터백들은 완벽하게 혜미를 놓쳤고, 정화가 올려준 크로스는 꽤나 날카롭게 휘어져 날아오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꿰뚫고 있었다는 듯 뛰어오른 한양여대 골키퍼 김현주의 펀칭이 한 발, 아니 반 발 먼저 빨랐다. 투~웅! 아슬아슬하게 혜미의 머리 위에서 쳐 낸 공은 그대로 튕겨나갔지만, 혜미에게 달려들던 센터백들은 그 누구도 그 공을 소유할 수 없었고, 한 번 지면에 튕긴 공은 이제 막 페널티에어리어 라인을 벗어나고 있었다. “잡아!!” 누구의 외침이었는지 몰라도 양 선수들은 순식간에 공을 차지하기 위해 달렸는데, 그곳엔 어느새 후방에서부터 달려온 센터백 진희가 있었다. “내꺼야!!!” 하지만 역시나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한양여대 수비형 미드필더 이지윤이 가만둘 리 만무했다. “그렇겐 안돼!!!” 퍼억! 다리와 다리가 부딪히며 만들어낸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는 그대로 그라운드로 내동댕이 쳐 진 건, 다름아닌 한국여대 센터백 진희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부상이 예상될 정도로 진희가 공중에서 무방비로 떨어지자, 경기장은 적막에 휩싸였는데, 주심은 달려와 단호하게 한양여대 진영을 가리키며 휘슬을 불었다. 결국 발을 먼저 공을 향해 뻗었던 진희의 승리였다. “진희야!”, “괜찮은 거야?”, “야 진희야!!” 하지만 공의 소유권과 상관없이 모든 한국여대 아이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진희에게 몰려들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진희는 누운 상태에서 스타킹을 내려 그 안에 들어있던 신가드(shin guard. 정강이 보호대.)를 꺼내 들어보였다. “부서…졌잖아? 진희야? 괜찮은거야?” 혜미는 거의 반으로 쪼개지기 일보 직전인 진희의 신가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지만, 진희는 그래도 기쁜 얼굴이었다. “으… 어쨌든, 우리 볼 인 거지?” 분명 신가드가 있었음에도 벌겋게 부어있는 오른쪽 정강이를 애써 스타킹으로 가리며 진희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아니 그 투혼은 이미 한국여대 아이들에게 전염이 되고 난 후였다. - 잠시 치료를 위해 들것에 실려나간 진희가 파울을 당한 지역은 그러나 직접 슛을 노리기에는 너무나 먼, 페널티 에어리어에서도 몇 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때문에 아라와 혜미는 공을 가운데 놓고 골문을 바라보며 심각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거, 해볼까?” “해도 될까? 그거 아직 써먹으란 말 못 들었는데?” 혜미의 물음에 아라는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반문했다. 때문에 혜미와 아라 둘 다 조심스럽게 벤치 쪽을 바라봤는데, 남희는 감독 몰래 손가락 세 개를 표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혜미도 아라도 이제야 연습한 세트플레이를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간이고 뭐고 갑자기 흥미 진진해진 듯한 얼굴로 변해버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본 남희는 몇 달간 감독 모르게 열심히 연습에 따라와 준 아이들에게 세트플레이를 허락해준 게 저리도 기쁠까 싶어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애들 하고는, 참…’ - “아, 맨날 연습만 하고, 왜 써먹으면 안 된다는 건데요!!!” 꽤나 호흡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덕에 벌써 수 십 번이나 실패를 하며 지쳤다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던 아라가 수림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축구는 볼이 움직이고 있을 때도 중요하지만, 멈춰 있을 때 또한 중요하다는 거 알지?” “그러니까, 맨날 연습하고 있는 거잖아요. 근데 왜 아무 때나 써먹으면 안 되냐 구요!!” “음, 이런 저런 이유가 있지만… 그래, 감독님께 드리는 우리만의 깜짝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선물…이요?” “그래! 선물. 아마 감독님께선 실전에서 진짜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트플레이를 보시면 진짜 좋아하실 거야. 안 그러니?” 역시나 아이들은 감독님 이야기가 나오자 금방 수긍해버렸고, 그렇게 또 한번의 고비를 넘긴 수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던 남희에게 찡긋 윙크를 날려주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정규 연습이 끝나고도 감독 몰래 남희가 섬세하게 계획한 세트플레이를 수림의 지도하에 열심히 또 열심히 연습을 했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낼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 “’세 개’ 맞지?” 어느새 달려온 지영이 혜미와 아라에게 물었고, 혜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지영이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는 9.15미터 떨어진 곳에 벽을 형성하고 있는 한양여대 아이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한 번 뿐이야, 할 수 있지?” 아라는 혜미에게 진지하게 물었고, 혜미는 터치라인 바깥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진희를 바라 보곤 역시나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윽고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혜미는 반대편 페널티에어리어 근처에서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아이들을 힐끗 바라보고는 그대로 공을 향해 달려나갔다. - ‘역시, 저 애인가?!’ 벽에 가려진 상태에서도 정지된 공을 향해 유력한 후보 혜미가 달려 나오자 골키퍼 김현주는 움찔했는데, 그 순간 혜미는 공을 그대로 놔두곤 벽의 오른쪽을 향해 달려나갔고, 그와 동시에 아라가 자리에 선 채로 가볍게 공을 올려 찼다. 예상치 못하게 혜미가 아닌 아라가 공을 차자 한양여대 아이들은 어쨌든 조건 반사적으로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며 모두 자리에서 최대한 높게 뛰어올랐는데, 그 벽에 파묻혀 있던 단 한 사람. 한국여대 지영이만이 그완 반대로 몸을 낮추며 자신을 향해 약하게 날아오는 공을 향해 정확하게 머리를 갖다 댔다. 그러자 공은 방향을 완전히 바꾸며 벽 옆으로 흘렀고, 때마침 절묘한 타이밍으로 벽을 스치며 달려가는 혜미의 발 아래에 정확히 떨어졌다. “땡큐!” 그야말로 남희에 의해 100% 계산된 셋트피스로 순식간에 오프사이드라인과 수비벽을 완벽하게 통과해버린 혜미는 반대편으로 쏠려있는 선수들에게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며 그대로 골키퍼 김현주와 일대 일로 맞닥뜨렸다. 그러자 다급했던 김현주는 각도를 줄이고자 득달같이 달려 나왔는데, 그 순간 희한하게도 혜미의 머릿속에선 단 한마디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패스처럼.’ 그러자 마치 모든 장면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껴졌고, 다가오는 골키퍼보다 골키퍼 뒤로 보이는 골문이 더욱 더 광활하게 보였다. 게다가 그 골문은 마치 ‘어서 나에게 패스해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고. 때문에 혜미는 그 와중에도 어떤 남자의 얼굴을 떠 올려보며 그 남자의 미소를 흉내 내듯 씨익 웃어 보았다. -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연장전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드디어 한국여대가 혜미의 오른발 인사이드 슈팅으로 극적인 동점을 만들어내자, 전주월드컵 경기장은 한마디로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고, 처음엔 그저 ‘누드사진’ 덕분에 호기심에 경기장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는 진정 ‘축구’라는 것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 “꺄악!!! 넣었어요!! 여보 넣었어!!!” 노감독은 나이도 잊은 듯 자신을 부둥켜 안은 채 연신 볼에다 뽀뽀를 해대는 황총장이 싫지 않았다. 아니 축구로 이 나이든 사람들을 한때나마 젊은 시절로 되돌려 주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보고 있었다. - “아저씨!!! 혜미가… 혜미가…” “선배! 아예 지금 여기서 계약 도장 찍읍시다 예? 나 원, 점점 몸값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크하하하하!” “…” 규식은 그러나 현우나 철용의 이런 반응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어쩐지 혜미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한없이 저려오고 있었으니까. ‘이렇게나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를…’ 처음부터 축구를 가르쳤다면 좀 더 일찍 저렇게 행복해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보며 규식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남몰래 눈시울을 훔쳐보았다. 50부. 긴 하루의 끝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왼쪽 종아리에 아이싱을 하고서 텅 비어있는 라커룸에 들어와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라운드 어디엔가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기에 전현아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장 전체에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엄청난 함성과 함께 진동이 전해져 오자, 본인이 없는 그라운드 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진 건지 전현아는 눈으로 확인해볼 순 없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었다. ‘결국…’ 축구화도, 유니폼 상의도 벗어버린 모습의 전현아는 그러나 생각보다 별로 분하지도, 마음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모조리 진이 빠진 듯한 다리가 미세하게나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떨리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차피 내가 없을 때의 결과는 아무 의미 없는 걸…’ 하지만 자꾸만 마음에 걸리던 것은, 바로 경기장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순간 자신을 바라봐 준 한국여대 감독이었다. 똑. 순간 자신도 모르게 땀으로 번들거리던 허벅지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뭐야, 바보같이…’ 현아는 목에 두르고 있던 타월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댔다. 한번도 축구를 하면서 이렇게 감성적이 된 적이 없어서였을까, 별것도 아닌 것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 창피한 기분이 들어 지켜보는 이도 없었건만 얼른 감추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 그렇게 샘솟는 건지,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현아의 귀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여전히 시합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누구도 이 곳에 올 리 없었다. 때문에 현아는 잘못 들었나 싶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나 다시 한번 누군가가 손가락을 이용해 노크를 하고 있었다. 똑똑. “누…구?” 현아는 도대체 누가 노크까지 해가며 라커룸을 찾아왔는지 짐작도 못했지만, 이윽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자 몸이 아닌 머리만이 장난스럽게 툭 튀어나오며 빙긋 웃고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가, 감독님?!” 자신의 팀 감독이 아니었음에도 전현아의 입에선 대뜸 ‘감독님’이란 호칭이 튀어나왔고, 그에 한국여대 감독은 머리를 긁적이며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괜찮아졌니? 흠흠.” “네? 네에… 앗 차! 자, 잠시만요!” 현아는 왜 이 남자가 자신을 찾아 온 건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무척 놀라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깜짝 선물을 해 준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들어와서는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왜 그런가 했는데, 전현아는 이내 스스로를 돌아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유니폼 상의를 벗은 탓에 그나마 가슴을 가려주고 있던, 땀에 젖은 탑이 늘어지며 살짝 노출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현아는 깜짝 놀라며 옆에 놓여있던 축축한 유니폼을 번개 같은 속도로 입었지만 이미 얼굴은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뒤였다. “죄, 죄송해요…” “아, 아냐 아냐. 갑자기 찾아온 내가 더 미안하지.” 창피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듯 복잡한 심정의 전현아를 바라보며 영후는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정말 아니라는 의미를 전해주었고, 소녀는 그제야 조금쯤 마음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지금 경기 중 아니에요??” 현아는 이미 유니폼 입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월로 조심스럽게 앞섬을 가린 채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마저 감춰지길 바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럴걸?” “에? 그럼 지금 여기에 계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그런가?” 여전히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고 있는 남자를 현아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이 참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듯 했다. “참, 그건 그렇고. 오늘, 우리 아이들한테 공부할 거리를 전해줘서 고마웠어.” “공부…요?” “그래, 물론 현아 너처럼 되려면 한참 멀었겠지만.” “…” 생각지도 못하게 이 남자의 입에서 칭찬이 흘러나오자 현아는 가슴이 더욱 '쿵쾅'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 “초면에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니? 아 물론 지금 당장 들어달라는 건 아니고…” “부탁…이요?” 뜬금없이 자신을 찾아와 더 황당하게도 ‘부탁’이라니, 현아는 지금 이 남자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도 믿겨지지 않았지만, 이윽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 삑. 삑. 삐~익! 주심이 드디어 경기 종료를 선언하는 휘슬을 불자, 지쳐버린 한양여대 아이들은 그대로 그라운드에 쓰러지듯 드러누웠지만, 한국여대 아이들은 피로도 느껴지지 않는지 너나 할 것 없이 또다시 벤치를 향해 백 미터 달리기 시합을 하듯 경쟁하며 뛰어갔다. “감독님! 감독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에요?”, “이제 승부차기 하는 거죠? 그쵸?”, “누가 차는 건데요?” 하지만 정작 그 어디에서도 한국여대 감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물론 두 코치들 또한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지만, 조용히 벤치 구석에 앉아있던 윤지는 어쩐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전현아는 분명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바로 눈 앞에서 보고, 또 들었지만 그럼에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한국여대 감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안… 될까?” “그치만… 그치만 아직 경기 안 끝났잖아요.” “그야… 그렇지.” “그럼, 감독직을 그만 두실 지 마실 지는 아직 결정된 거 아니잖아요?!” 현아는 물론 자신의 팀을 맡고 있는 감독도 아니었건만, 눈 앞의 남자를 머지않아 먼 타국으로 보내게 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찡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남자의 장난기 섞인 말에 감출 수 없을 것 같았던 심정은 다행스럽게도 조금은 희석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질 거 같진 않던데?” “에에? 그걸 어떻게 아세요?! 우리 한양여대도 호락호락하진 않다구요!” “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 게요?” “오늘 경기, 우리 한국여대가 이긴다면. 그러면 좀 전에 말한 내 부탁, 들어주겠니?” “!” 도대체 이 남자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전현아는 짐작조차 해볼 수 없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눈으로 답을 주길 원하고 있었기에 결국 뭐에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앗! 저기! 감독님이다!!!” 지영이를 필두로 아이들은, 입장 통로를 막 벗어나 벤치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에게 우르르 몰려가 그대로 품에 안겼다. “감독님! 우리가 해냈다고요! 아직 경기 안 끝났다고요!”, “이제 승부차기 하는 거 맞죠? 그런 거죠?”, “감독님! 그럼 누가 차는 거에요?”, “승부차기만 이기면 진짜 이기는 거죠?”, “근데 몇 명이 차는 거에요?” “아이고 얘들아, 숨이나 돌리고 물어라. 그렇게 뛰고도 안 힘드니?” 감독의 걱정스런 물음에 아이들은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방금 대기심으로부터 승부차기 순번을 정해 달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오던 남희는 지금부터가 고민이었다. 분명 승부차기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승부차기에 나설 아이들을 뽑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가장 중요한 ‘골키퍼’ 미자에 대해선 또 어떤 조언을 해 줄 것인지도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때문에 감독의 품에서 떠날 줄 모르는 아이들을 겨우 떼어 놓고서야 근심스런 표정으로 남자의 직함을 불러보았다. “저, 감독님.” “?” “승부차기에 참여할 5명과 이후 예비 명단을 제출하라고 합니다.” “아, 그래야지요 물론.” “그래서 말인데 우선은 킥력이 좋은 순서로” “감독님, 저 할래요!” 남희는 지금 무척이나 중요한 말을, 그것도 코치가 감독에게 하고 있는데도 갑자기 끼어드는 아라 덕에 살짝 눈꼬리가 올라갈 뻔했지만 그걸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에에? 아라 너만? 감독님 저두요!”, “아니아니 저 먼저 찰래요!”, “야야, 원래 내가 제일 먼저 차기로 했거든?” 하지만 남희의 걱정과는 반대로 아이들은 서로가 먼저 승부차기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기에 더욱 황당했다. ‘얘들이…?!’ 게다가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 보건 데 아이들이 이 정도라면 분명 한국여대 감독이란 남자는 이런 아이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란 걸 어렵게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에 괜히 조바심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또 무슨 엉뚱한 일을 저지르려고…?!’ 때문에 남희는 어서 빨리 아이들부터라도 진압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감독의 입이 먼저 열렸다. “자자, 다들 진정하고. 하나만 묻자꾸나. 왜들 승부차기가 하고 싶은 거니? 생각보다 꽤 긴장 될 텐데?” “감독님 모르셨어요?” 아이들 중 오른쪽 풀백 나경이가 그것도 몰랐냐는 듯 되묻자 감독은 더 궁금해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어? 뭘?” “참나, 이 경기 지금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되고 있다고요.” “그…래서?” “와 진짜, 그래서라뇨! 그러니까 승부차기란 게 뭐에요! 공 차는 사람 한 명, 막는 사람 한 명, 딱 이렇게 단 둘만 카메라에 잡히는 거잖아요. 그니까!” “아하!”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영후는 이마를 탁 치며 한참을 웃었고, 남희와 수림도 그제야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요녀석들, 다들 노리는 바가 있었구나? 후후. 그치만, 미안하게도 규정상 너희들 모두가 참여할 수는 없단다.” “그럼 우리 중에 누가 차요?” 아라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묻자, 아이들도 숨 죽인 채 영후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영후는 한참을 뜸 들이다 드디어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결론은…” 모두들 침을 꼴깍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리자 감독이란 남자는 역시나 장난끼를 그대로 발동시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제비 뽑기로 하자.” “?????” 아이들 만큼이나, 아니 아이들 보다 더 아이들 같은 말을 내뱉는 감독 덕에 남희는 그만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고, 수림은 그저 ‘뽑기를 뭘로 만들어야 하지?’하며 감독 만큼이나 엉뚱한 생각에 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단 한 사람, 골키퍼 미자야 말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제비 뽑기 없어도, 단독으로, 그것도 5번이나 풀 샷으로 나온다 이거지? 아자!!!’ - 이런 한국여대의 황당한 상황도 모른 체 관중석의 한국여대 서포터를 자청하던 남학생들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와, 진짜 오늘 경기 대박 아니냐?” “존나 빠르고! 존나 재밌어! 진짜 장난안치고 텔레비전으로 보는 이피엘보다 수천배는 재밌어!” “근데 시바 우리 이 경기 놓치면 가슴이 존내 욱씬욱씬 거릴 거 같지 않냐?” 언제부턴가 남학생들의 머릿속에선 한국여대가 이미 ‘우리 팀’으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라는 단어는 생소하기는 커녕 너무나 자연스럽기만 했다. “미친년! 경기 끝났냐? 다들 비싼 기차표 끊고 12번째 선수로 전주까지 내려 온 이상 그런 생각말고 죽어라 응원해주는 게 도리 아니냐? 새끼들, 부정타게 질 생각부터 하고 지랄들이야.” 커다란 탐을 든 채 리딩을 하던 남학생이 거칠지만 진지하게 외치자, 다른 남학생들도 일말의 긴장감을 벗어 던지고 더욱 목소리를 높여 힘차게 한국여대를 연호했다. - 금방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황총장이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감독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우며 철썩 달라붙자 노감독은 팔에 전해지는 뭉클한 느낌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황총장은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는 듯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이제… 승부차기인 거지요?” “뭐, 승부를 가리려면 그래야겠지.” “분명, 다섯 명이 차던가, 그랬지요?” “당신 기억이 맞소. 하지만 경기에 참여하고 있던 선수들 중에서만 뽑을 수 있는 거지.” “그럼, 교체돼서 나가거나, 아직 경기에 들어오지 못한 선수들은 찰 수 없는 거에요?” “그렇다오. 그래서 가끔 교체 여유가 있는 팀들은 승부차기를 앞두고 승부차기에 능한 킥커나 골키퍼를 넣고 하는 거지.” '승부차기에 능한…' 황총장은 노감독의 말에 어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분명 ‘능하다’라는 말은 다시 말해 능숙하다는 말과 다름이 없을 것이었다. 물론 한국여대 감독이라면 이런 상황까지 고려해 분명 충분한 연습을 해 뒀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실전에서 90분을, 그리고 거기에 30분을 더 뛰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이렇게 잔인한 승부차기를 맞닥뜨리게 된다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수많은 관중들은 분명 한 골 한 골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테니, 선수들이 생전 처음으로 받을 압박감은 상상 이상일 것이었다. 이렇게 지켜 보고만 있는 자신의 가슴도 터질 것만 같아 미칠 지경인데, 하물며 아이들의 마음은 어떠할는지 굳이 들여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얘들아…’ 그 순간 황총장은 처음으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가슴 깊이 느껴보고 있었다. - “여기 승부차기에 참여할 선수 명단입니다.” 대기심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의 남희에게 선수 목록이 적힌 종이를 받아 들었는데, 그런 남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한국여대 아이들의 표정은 코치와는 정 반대였기에 조금 신기한 나머지 돌아가려는 남희를 붙들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실은 한국여대 아이들이 아니라, 한국여대 코치가 괜찮은 건지 묻고 싶었겠지만. “저기, 한국여대 선수들… 괜찮은 겁니까?” “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굳이 대기심의 말이 아니더라도 벤치 쪽 상황은 이미 안 봐도 비디오였기에 남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국여대 벤치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역시나 승부차기에 뽑힌 아이들은 환호를, 그리고 뽑히지 못한 아이들은 말 그대로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모르겠다 정말…’ - 경기에 참여하던 아이들 중 부상을 당한 센터백 진희를 제외한 모두는 센터라인으로 걸어나갔고, 골키퍼 미자만이 그 아이들과 반대쪽인 골대 쪽으로 걸어나가야 했는데, 순간 감독은 미자를 불러 세웠다. “미자야.” “네? 어맛!” 그라운드로 걸어나가려다 무심결에 돌아본 미자는 그러나 격하게 자신을 안아주는 남자 덕분에 순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코 꿈이 아니었다. 분명 이 남자, 자신을 꼭 안아준 상태에서 자신의 귓속에 따스한 마음을 불어넣어주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아, 아니에요 감독님 저는…” 분명 좀 전까지도 이 남자의 품에 안기고만 싶었던 미자는 그러나, 무척이나 쑥스러운 나머지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영후는 그런 미자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속삭여주었다. “아니긴… 이 바보 같은 감독도 우리 미자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다 알고 있었단다. 근데, 너무미안하니까, 그러니까 더 미안하다고 말할 수가 없더라. 그만큼 늘 빛나지 않는 자리에서 고생만 했던 너니까…” “감독님…” “그래서 난, 지금 승부차기까지 오게 된 게 무척이나 기쁘구나.” “?” “이 승부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미자일테니까.” “!” “그러니… 나가서 ‘너의 경기’를 멋지게 마무리 해주지 않겠니?” 미자는 남자의 마지막 물음과 함께 품에서 빠져 나와 양 어깨를 그의 손에 맡긴 채로 말없이 두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의 갈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눈에서 어느새 긴장감은 사라진 채 열정만이 남아있음을 미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감독님, 금방 해치우고 올게요.” 미자는 실은 경기고 뭐고, 몇 시간이고 이 남자의 품에 머물고 싶었지만 지금은 어리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때문에 보란 듯이 골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장갑을 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팡!’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려보았지만 결국 금방 후회를 하는 미자였다. ‘우이씨… 아프잖아…’ - 센터서클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한국여대 아이들은 주심의 동전 던지기에 이어 혜미가 손가락으로‘V’자를 그리며 기세 등등하게 돌아오자, 마치 벌써 승부에서 이긴 양 환호성을 질러댔다. 아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만일 동전 던지기에서 이겼을 경우 선축을 하자고 했었는데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었다. 물론 심리적인 측면에서 먼저 차는 것이 조금은 유리하다는 이론이 있긴 했지만 아이들이 그런 이론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첫 번째 킥커로 나서는 아라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나마 먼저 차게 돼서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이들이 달려드는 것에 난감해하던 감독에게 승부차기 킥커로 나서겠다고 끝까지 홀로 생떼를 부리던 때에 비해 무척이나 떨려왔다. 그건 아마도 이 커다란 공간에서 완전히 혼자가 됐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라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 마다 관중들의 시선이 그대로 온 몸을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느낌은 바로 어제 이 곳에서 누드 사진을 찍을 때의 느낌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래, 확실히 비슷해… 그러니까 지금 이건, 별거 아닌 거야… 그냥, 어제 그랬듯이, 가볍게 하고 오자…’ 어제의 누드 사진 촬영이 이런 순간에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분명 어제의 순간들을 떠올리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 수림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줄 수 없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미안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이들의 체력을 끌어올려 주었더라면, 이런 승부차기 따윈 마음 졸이며 지켜보지 않아도 됐을 거란 생각에 까지 미치자,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 위로 한참이나 올라간 청치마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수림을 바라보는 남희 또한 수림의 마음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코치로서, 완벽한 실수를 저지른 건 다름아닌 나에요…’ 코치라면, 그것도 수석코치라면 분명 이러한 상황까지 완벽하게 준비를 했어야만 했다. 이런 토너먼트 경기에선 당연히 이런 상황이 나올 수 있음을 인지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승부차기만큼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인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승부차기에 관련된 책까지 읽었으면서…’ 남희는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 축구 관련 서적 중 ‘승부차기’에 관한 내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0.6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과학적 근거는 바로 골키퍼의 질량에 의한 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관성의 크기에 가장 중요한 물리량은 바로 질량이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 중에는 의외로 키가 작은 선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메시(아르헨티나)나 카를로스(브라질) 등과 같은 선수들은 키가 작으면서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물론 어려서부터 계속적인 트레이닝이 가장 큰 원동력이겠지만, 분명 키 작은 선수가 큰 선수들에 비해 장점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질량과 관성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관성의 크기는 질량의 크기에 비례한다. 즉 질량이 작은 선수들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관성이 작아 정지에서 움직이기, 또는 움직이다 정지하기가 큰 선수들에 비해 유리하다는 것이다. 관성을 좀 더 세밀하게 분류하자면 정지관성, 운동관성, 회전관성이 있다. 정지관성은 말 그대로 ‘정지되어 있는 물체가 계속 정지하려고 하는 성질’이고, 운동관성은 ‘직선 운동하던 물체는 계속 등속직선운동을 하려는 성질’이며, 회전관성은 ‘어떤 축에 대하여 회전하는 물체가 계속 그 축에 대해 회전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골키퍼의 경우 공이 오는 방향을 예상하지만 그 공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골키퍼는 바로 현재의 운동 상태인 정지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으로, 이는 정지관성에 해당된다. 또한 호날두(레알 마드리드)가 자랑하는 헛다리짚기 기술도 정지관성을 이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좌우로 여러 번 헛다리를 짚음으로 해서 상대방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면 상대방의 반응속도는 그만큼 느리게 되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골키퍼의 질량을 가볍게 하고 힘을 기르고 키를 키우면 골을 막기 위한 훨씬 좋은 조건이라고 상상해 볼 수는 있지만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시간적 분석을 보면 페널티킥의 성공률은 100%%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약 70∼80%% 정도라는 것이다. 아마도 킥을 차는 사람의 심리적 압박감이 실수를 부르는 큰 이유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도 조차 완벽한 답을 주지는 않았었다. 마치 승부차기 만큼은 정답이 없다는 것 처럼. ‘이런 상황… 역시 운에 맡길 수 밖에 없는 걸까…’ 수학 전공 강사출신으로서 ‘운’에 맡길 수 밖에 없는 현 상황이 남희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오로지 아이들의,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감독이 가지고 있는 ‘운’ 말고는 기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아라는 초록색 잔디 위에 동그랗고 하얗게 칠해져 있는 페널티 마크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축구공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뒷걸음을 몇 번 걷다가 멈춰 섰다. 그리곤 골대를 바라보았는데, 11m라는 거리는 생각보다 먼 것도 같았고, 골문은 평소보다 엄청 좁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며 잡생각을 없애려 노력해보았다. 그런데 순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뜩이기 시작했다. ‘맞아! 지금 난 TV에 나오고 있는 거지?!’ 그제야 왜 자신이 승부차기에, 그것도 제일 먼저 나서려 했던 것인지 생각이 났다. 그러자 갑자기 불안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서 빨리 주심이 휘슬을 불어주었으면 하고 설레이기 까지 했다. 이윽고 휘슬소리가 들리자 아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오른팔을 번쩍 들고는 –- 마치 체조선수가 그러하듯 –- 제자리에서 각 관중석쪽으로 돌며 승부차기를 시작하겠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관중석에선 그야말로 엄청난 호응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탐탐탐! 아라, 골! 탐탐탐! 아라, 골! 어느새 4만이 넘는 관중 모두가 한 목소리로 아라를 응원하자 아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었지만, 벤치의 남희는 역시나 졌다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역시… 뭔가 저지를 것 같더니…’ 하지만 남희의 반응과 달리 아라는 불안함 따윈 날려버린 듯 담담하지만 결의에 찬 얼굴로 앞으로 달려나가며 골키퍼 김현주의 움직임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쉽게 움직일 것 같지 않아 보이자 아라는 어쩐지 그 순간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어디로 찰지 지켜보고 움직이겠다?’ 아라는 공의 왼쪽에 서있다가 공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기에 김현주는 그 순간 무수히 많은 예상을 해보고 있었다. ‘달려오는 방향 그대로 찰까? 아니면… 페인트?!’ 하지만 너무나 보일 정도로 한 방향으로만 달려 나오고 있었기에 김현주는 순간적인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페인트다!’ 골키퍼 김현주는 아라의 발에서 공이 떠남과 동시에 자신의 오른쪽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출~렁! 거짓말처럼 아라는 달려오던 방향을 전혀 바꾸지도 않았고 오히려 막아 보라는 듯 오른쪽, 그러니까 김현주의 왼쪽으로, 그것도 크로스바와 골 포스트가 만나는 지점에 거의 근접할 정도의 부근으로 가볍게 차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은 빠르지 않았기에 방향만 예측했더라면 충분히 잡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치잇! 너무 생각이 많았나…’ 김현주는 아깝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쉽게 지울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 밖에 없다고 좀 전의 상황을 애써 지워보려 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김현주는 그 ‘이상함’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기에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 “성공했어요? 그랬어요?” 황총장은 너무나 떨렸던 듯 눈을 꼭 감은 채 노감독의 등 뒤로 숨어있다가 관중들의 환호소리에 실눈을 뜨며 경기장을 바라보고는 재차 노감독에게 물었다. “그러지 말고, 제대로 보는 게 어떻겠소? 어차피 당신이 본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진데.” “그게, 그렇지가 않단 말이에요. 중요한 경기 같은 걸 내가 보고 있노라면 꼭 지…” 지곤 했었다,는 말을 하려다 황총장은 스스로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며 노감독은 그 모습마저 귀엽다는 얼굴로 황총장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비단 황총장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은 어찌 그리 마음이 여린지, 특히나 국가대표의 주요한 경기 때마다 자신이 보면 경기를 지더라는 말도 안 되는 징크스까지 들먹이곤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노감독은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 그런 소중한 마음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적도 무수히 많았으니까. 때문에 이런 순간에도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처음처럼 아이들을 지켜봐 주고 있는 한국여대 감독을 노감독은 이미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라면, 관중들에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게 할 수 있을 터…’ - 드디어 아라가 첫 포문을 열고 센터서클로 돌아오자, 한양여대 측에선 첫 번째 킥커로 후반에 교체 출전한 공격수 정혜인이 천천히 걸어나갔다. 하지만 아라는 정혜인에게는 신경도 안 쓰며 키득키득 웃으며 한국여대 아이들 무리에 합류했다. 그러자 역시 예상한 대로 아이들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땠어? 안 떨렸어?”, “사실은 엄청 떨렸지? 그치?”, “웃지만 말고 얘기해봐! 어땠니?”, “야, 웃겨 죽는 줄 알았잖아!”, “거기서 그런 걸 할 생각을 하다니 크크크!”, 아무리 승부차기가 하고 싶던 아이들이었더라도, 실전은 실전이었던 만큼 나름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첫 번째 주자로서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 아라 덕분에 다들 난리법석이었다. 게다가 이미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아라야 말로 홀가분한 모습으로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야야! 한 개도 안 떨려. 만날 우리 하던 것처럼 만 하면, 읍!” 아라가 무척 기세 등등 하게 말을 하는 순간, 정화가 깜짝 놀라며 아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괜히 벤치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자못 무서운 얼굴로 변하며 아라를 다그쳤다. 물론 그 표정은 너무나 귀엽기만 했지만. “야! 너 벌써 잊은 거야? 그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했잖아!” “읍…우웅…미안…” 거리상으로도, 그리고 환호하는 관중들 때문에라도 벤치에 아라의 말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지만, 정화를 비롯한 나머지 아이들의 눈도 깜짝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기에 그제야 아라도 여전히 정화의 손으로 입을 틀어 막힌 채 알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잠시 긴장하는 것 같던 아이들은 조금쯤 안심하는 얼굴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 일’은 절대 알려져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그 날들’을 떠올려 보았다. - “아, 뭐 재미난 거 없을까?” 평소처럼 예정된 연습을 마친 어느 날, 한국여대 아이들은 남희와 수림마저 감독을 따라 사라지자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운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씩 운동이란 것에 익숙해지자 훈련을 마치고서도 생각보다 지치지 않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욱 재밌는 무엇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딱히 어디선가 재밌는 무엇이 뚝 떨어져 줄리 없었으니, 결국 그 어떤 것도 생각해내지 못했기에 결국 하늘이가 포기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에 놓여있던 공을 냅다 골문을 향해 ‘뻥’ 차보았다. 그러자 공은 아슬아슬하게 크로스바를 ‘텅!’하고 맞고는 그라운드에 몇번 통통 튀다가 움직임을 멈췄는데, 그것은 참 단순한 상황이었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보자마자 동시에 똑 같은 ‘놀이’를 떠올렸다. “얘들아, 우리 그거 어때? 승부차기!”, “지영이 너도?”, “재밌을 거 같다 그치?”, “근데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 “그럼?”, “적어도 뭔가를 걸어야 하지 않니?”, “걸어? 그럼 내기 같은 거 하자고?”, “그래! 하다못해 식권 내기라던가…”, “하지만 그런 거 하다가 감독님이나 코치님들이 알게 되면…”, “야, 누가 지금 여기서 돈 꺼내놓고 고스톱이라도 치재? 우리만 입 다물면 알게 될 일 전혀 없거든?” 지영이의 연이은 감언이설에 아이들은 하나 둘 씩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순간 미자마저 재밌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벗었던 장갑을 양손에 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막아주면 되는 거야?” 하지만 순간 미애가 발끈했다. “그럼 안되지! 미자만 막는 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봐. 그리고 미자도 참여해야 완벽한 내기가 되는데 미자가 찰 땐 누가 막을 건데?” “그건 그러네…” 모든 아이들이 미애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승부차기 놀이’는 그저 생각에만 그칠 것 같았는데 그때였다. 아라가 벌떡 일어나 꽤 그럴싸한 룰을 제시한 건. “그럼, 저기 페널티마크에 공을 놓고 골대를 맞추는 거 어때? 그냥 골문 안으로 차 넣는 건 너무 쉽잖아. 미자도 막을 필요 없이 함께 할 수 있고.”, “그거 좋은데? 난 찬성!”, “나도 나도!”, “참, 그럼 내기는 뭘 걸지?”, “뭐 오늘은 간단하게 별다방 커피 어때?”, “오케이! 나는 할래! 또 할 사람 없어?” 결국 아라가 완벽하게 문제를 정리하며 경기 방식까지 정해주자 아이들은 저마다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 날 이후 연습이 끝난 후 장비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감독 및 코치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선한 내기거리를 그때 그때 생각해내며 말 그대로 ‘도박’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기껏해야 레포트 대신 해주기나 밥값 내기 정도였지만, 여지껏 남의 것을 ‘내기’라는 허울아래 빼앗아 본 적이 없었던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리’였던 것이었다. - 센터서클에 모인 한양여대 선수들이 지친 모습으로 이곳 저곳에 흩어져 앉아 있는 모습과 한국여대 아이들이 일렬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대조되는 가운데, 한양여대의 첫 번째 킥커 정혜인이 페널티 아크 즈음에 놓여있던 공을 집어 들고 천천히 페널티 마크로 다가왔다. ‘처음은 저 애인가?’ 미자는 경기에서 보여준 정혜인의 습관이 무엇이었던가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에잇 몰라! 그냥 감에 맡기지 뭐!’ 라는 얼토당토않은 자신감과 함께 양 팔을 벌리며 조금이라도 골문을 작게 만들려 노력해 보았다. - 드디어 한양여대의 정혜인이 공을 옆구리에 낀 채 천천히 페널티 마크까지 걸어 나오자, 황총장은 골키퍼보다 더 긴장되는 지 노감독의 팔을 꼭 붙들어 보았다. “걱정되는 게요?” “그럼 안 그러겠어요? 당신은 뭐 감독 생활 하실 때 안 그러셨어요?” “그야…” 노감독은 솔직히 승부차기까지 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승부에 관한 모든 것은 감독의 손을 떠나게 되는 것이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했기에, 감독 시절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황총장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궁금했다. 감독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이 순간에 영후는 과연 어찌 대처할는지. ‘놈,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뭔가를 할 수 있겠느냐…’ - 정혜인은 페널티마크 부분을 축구화로 최대한 평평하게 만들려는 듯 열심히 밟고는 조심스럽게 공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4만이 가득한 관중석의 웅장함이 그제야 느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골키퍼와는 달리 킥커는 골키퍼와 함께 그 뒤에 가득 차 있는 수많은 관중들의 정제되지않은 움직임과 연이어 터지는 플래쉬까지 눈에 한가득 들어와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칫, 축구는 장난이 아니란 말야!’ 이 만원 관중이 모두 한국여대의 장난질로 인해 축구가 좋아 온 것이 아닌, 그저 장난처럼 축구장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한 정혜인은 관중들에게 축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때문에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머릿속을 깔끔하게 비우고는 천천히 공을 향해 달려나갔다. - 미자는 골대 앞에 서 있었지만, 어쩐지 그 순간 자꾸만 한국여대 감독의 눈이 마음에 걸렸다. ‘왜 그런 눈으로…’ 하지만 미자가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혜인은 간결하게 오른발 인사이드로 슛을 날렸고, 미자는 왼쪽을 포기하며 자신의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오른발의 거의 뒷꿈치에 맞은 공은 골대의 오른쪽, 그러니까 미자가 몸을 날린 반대쪽으로 가볍게 날아들어갔다. 때문에 너무나 허탈하게 첫 번째 기회를 날려버린 미자는 자책하며 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몇 번이고 두드려댔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정신차려야 된다고!!’ 미자는 벌써 네 번의 기회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너무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겨우 몸을 일으켜 코너플래그로 걸어갔고, 반대로 한양여대 골키퍼 김현주가 또다시 빈 골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현우는 손을 대보기는커녕, 방향조차 예측하지 못하는 미자의 모습을 보자 더욱 걱정이 앞섰다. “승부차기를 잘 막는, 그런 방법 같은 거… 있긴 있나요?” “잘 막는 방법? 풉, 그런 게 어딨어! 그저 운에 맡기는 거지.” 현우의 물음에 철용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고, 규식도 일정부분 그것에 동의했다. “확실히 과학적으로만 보자면 키퍼는 절대 공을 막을 순 없단다.” 규식은 현우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서도 우선은 객관적 사실을 말해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계속되는 리그나, 페널티 킥을 전담하는 선수의 경우, 상대팀 코칭스텝들은 그 선수 스스로도 모르는 습관 같은 것이나 선호하는 방향 같은 것들을 기록해 두었다가 이런 상황이 오면 골키퍼에게 참고하도록 알려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이 항상 적중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하물며 이렇게 처음 대하는 상대라면 그 어떤 기록도 존재치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오직 상대 킥커의 실축이나 골키퍼의 기적과 같은 선방 그 둘 중에 하나만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규식도 지금은 답답하기만 했는데, 여전히 한국여대 벤치에 있는 유일한 남자는 흥미롭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황당할 뿐이었다. ‘임마, 이런 상황에서도 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냐…’ - 겨우 한번씩 번갈아 차서 이제야 1 : 1이 되었을 뿐인데도 리키는 남자답지 않게 잔뜩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나직하게 혼잣말을 해보려 했지만 서툰 우리말 때문에 쉽게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거 꽤, 잔…잔…” “잔? 아… 잔인…하다구요?” “댓츠 롸잇! 맞아요. 잔인, 잔인해요. 선수들은 얼마나 떨릴까요?” 분명, 리키는 축구라는 스포츠가 최후로 선택한, 승부를 가리는 방법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잔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축구선수들의 보호차원에서 마련된, 승부를 가릴 수 있는 가장 공평한 방법이었으니까. 물론 실력이 출중한 팀은 억울한 면이 있겠지만, 어쨌든 승부를 내지 못해 이 시점까지 끌고 왔다면 그건 분명 자신들이 더 세다고 착각하고 있는 팀들 탓이었다. 때문에 하연은 잔인하다는 생각보다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축구 대회에 처녀출전하고 있는 팀의 골키퍼가 과연 상대를 정확히 꿰뚫어보기는커녕, 대처라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거짓말일 테니까. - 여전히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미자는 그러나 골대에 안정적으로 서 있는 한양여대의 골키퍼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아인, 이런 경험이 많았겠지? 적어도 나보단… 그래! 그거야!’ 미자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꼭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골키퍼 김현주의 사소한 행동까지 모든 것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 이윽고 한국여대 두번째 킥커 승은이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오자 김현주는 또다시 승은이의 서 있는 모양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김현주를 미자 또한 바라보고 있었고. ‘우선, 발을 관찰하는 건가?’ 확실히 김현주는 천천히 달려 나오는 승은이의 방향과 디딤발이 놓이는 위치까지 세심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찰~랑 역시나 아라처럼, 그러나 정반대 방향으로 크로스바와 골 포스트의 교차점 가까이에 공을 차 넣은 승은이의 슛을 김현주는 손도 대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상했던 무엇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 “허, 저녀석들…?” “왜요? 아저씨? 뭐 잘못하고 있는 건가요? 성공한 거 아니에요?” 현우는 혹시나 승은이의 두 번째 골이 잘못된 건가 싶어 깜짝 놀라며 물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규식이 아닌 철용의 입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영후 자식, 승부차기 연습도 지독하게 시킨 모양인데요? 남자 선수들도 여간 해선 함부로 차지 못하는 공간으로 연달아 차 넣게 하다니 말입니다.” “과연 그럴지도…” 확실히 저 정도로 골대 상단을 노려서 차는 것은 남자 선수들조차 쉽게 차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크로스바와 골 포스트가 만나는 부근은 골키퍼가 알아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스피드만 있다면 절.대.로. 막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골키퍼의 손에서 멀어지는 만큼 반대로 골문을 벗어날 위험도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승부차기에서 보통의 선수들이 방향만을 선택해서 강하게 땅볼로 차는 이유는, 공을 조금이라도 띄웠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각도가 빗나가 골문을 외면하지 않을까 하는, 이른바 인간만이 가지는 ‘실수’의 확률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일반적인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여대 아이들은 두 골 모두 완벽하게 구석 상단으로 차 넣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모든 게 아이들이 평소 즐기던, 아니 푹 빠졌었던 ‘내기 놀이’였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식과 철용은 그 순간 똑같이 영후에 대해 오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서운 놈…’ - 한편, 두 번째 골도 허용한 김현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터치라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교대를 위해서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미자를 보자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바심을 감추려 했지만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리는 미자의 말에 김현주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뭐야… 별 차이 없잖아…” ‘무슨…?! 차이가 없다고…? 설마 나하고 제 까짓 게?!’ 하지만 이미 자신을 스쳐 지나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한국여대 골키퍼의 뒷모습이 어쩐지 무척이나 듬직해 보였다는 건 김현주도 부정할 수 만은 없었다. - “후우…” 아이들이 긴장할까 싶어, 억지로라도 침착한 척 하려 했던 수림이었건만, 역시나 팽팽하게 승부차기가 이어지자 손에 들고 있던 쪽지가 벌써 잔뜩 구겨져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때문에 누가 볼까 조심스레 쪽지를 펴서 방금 끝난 한양여대의 4번째 순서의 결과를 적어보았다. 한국여대 : 아라, 승은, 나경, 지영, 혜미, ----------- O---O----O----O 한양여대 : 정혜인, 고혜란, 임지혜, 신민아, 신설혜, ------------O------O------O------O “이제 마지막 한번씩 남은 건가…” 하지만 그 순간 수림은 남희의 계략(?)으로 혜미를 뽑는 것 뿐만 아니라 순서까지 마지막으로 정한 것에 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혜미는 아이들 중 가장 축구를 잘 알고, 또 잘하는 아이였기에 남희의 선택은 옳은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때문에 분명 수림은 조금쯤 안심해도 될것 같았지만, 아이들 몰래 묘한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더욱 긴장되는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쪽지를 꽉 움켜쥘 수 밖에 없었다. - 한편 혜미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오로지 승부차기에만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순서는 뒤에 아무도 없는 마지막이었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내가 넣으면 한양여대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혜미는 결단코 성공해야 한다는 얼굴로 센터서클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런데 90분, 아니 연장전까지 합해 120분을 뛰어다녔던 공간이었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현우는 한국여대의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지만, 역시나 혜미가 등장하자 긴장감이 더욱 배가 되는 것 같았다. 때문에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규식에게 말을 건넸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혜미… 잘 해내겠죠?” 현우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규식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딱히 그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규식 또한 현우에 버금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규식이 긴장하고 있던 이유는 현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에서였다. ‘설마… 아니겠지…’ 그 순간 규식은 자꾸만 중요한 순간에 실축을 하곤 했던 유명한 스트라이커들의 ‘나쁜 예’가 떠올라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 혜미는 페널티마크에 공을 내려놓고 무심코 골대를 바라본다는 것을, 그만 골키퍼 김현주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혜미는 마치 자신이 어디로 찰 것인 것 눈치를 채인 것만 같아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말도 안 되는 거잖아.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이야…’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 속 어디에선가 스믈스믈 기어 나오고 있었지만, 혜미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며, 주심이 휘슬을 불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나왔지만, 어쩐지 평소의 스텝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넣을거야!’ 하지만 혜미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공의 왼편에 왼발을 정확히 고정하고는 오른발 인사이드로, 그 누구보다도 유연한 발목을 오른쪽으로 꺾으며 가볍게 공을 찼다. 하지만, 한양여대 골키퍼 김현주의 왼쪽으로 날아간 공은, 김현주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날아가는 듯 했지만, 때문에 당연히 골망을 흔들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공은 오른쪽 골포스트를 강타하며 혜미를 놀리듯 다시 데굴데굴 굴러 혜미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 “오코치님, 다 끝나셨어요?” 아라와 지영이의 방에서 막 마사지를 마치고 나온 윤지는 역시나 승은이와 나경이의 방에서 나오는, 이미 티셔츠의 등 전체가 땀으로 젖어버린 수림을 불러보았다. 그러자 수림은 마치 꿈속을 걷고 있던것 같은 얼굴로 힘겹게 윤지를 돌아보았다. “어, 그래… 이제 막. 윤지 너는?” “저는 이제 방에 들어가서 혜미만 해주면 돼요.” “그래… 윤지 네가 고생이 많구나. 참, 그리고…” “?” “혜미한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주렴. 내 말, 무슨 뜻인 줄 알지?” “네에…” 이윽고 윤지가 자신의 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수림도 룸으로 들어왔지만, 룸 안엔 아무도 없었기에 남희가 어디에 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아니, 지금도 충분히 남희가 어디에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고, 또 평소같았으면 눈에 불을 켜고 득달같이 따라갔겠지만, 수림은 우선 잠깐만 눕고만 싶었다. 때문에 수림은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졌고, 무슨 말인지 쉽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 눕자… 잠깐만 누웠다가… 언니가 어디갔는지… 찾아봐야…지…” 하지만 그 웅얼거림조차 얼마 가지 않아 잠잠해졌고, 스스로 말하던 ‘잠깐’은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 한편 호텔 룸으로 들어온 윤지는 침대에 누워있을 줄로만 알았던 혜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조금 이상했는데 이윽고 욕실 문이 열리며 혜미가 수건으로 틀어 올린 머리만을 내놓자 내심 안심할 수 있었다. “왔어?” “응. 근데 뭐해? 마사지 해주려고 그랬는데…” “뭐, 그건 됐구… 오랜만에 같이 목욕하지 않을래?” “목…욕? 지금?” 윤지는 조금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물었지만, 혜미는 빨리 들어오라는 듯 여전히 윤지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윤지는 결국 혜미가 바라보는 앞에서 티셔츠를 훌렁 벗어버렸다. 그러자 아이보리 색 브래지어에 담겨있는 아담한 두 개의 가슴과 그 가슴이 만들어낸 깊은 골에 흐르는 땀이 윤지를 더욱 뇌쇄적으로 보여지게 했다. “그래. 하자 목욕.” 윤지가 거침없이 옷을 벗으며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혜미는 무척이나 얼굴이 밝아졌고, 그런 혜미의 모습에 윤지 또한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혹시나 승부차기의 실수를 가슴에 담아두고 있지나 않을지 윤지 또한 걱정하고 있었는데 생각 외로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조금쯤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때문에 윤지는 자신의 몸에 남아있던 팬티 마저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엉덩이에서 벗어난 팬티는 언제 그렇게 늘어났었냐는 양 손바닥 보다 작아진 모양으로 앙증맞게 변했다. “나 들어간다?” 윤지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혜미의 마음을 다독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며 조심스럽게 욕실로 들어섰다. 그래서 였을까. 거품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 있던 혜미의 눈과 마주치자 윤지는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자꾸만 승부차기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르는 것만 같아 미안했다. - 한국여대의 마지막 킥커인 혜미가 믿을 수 없는 실축을 하자 경기장은 갑자기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공에 손도 대지 못했건만 한양여대 골키퍼 김현주는 마치 엄청난 선방을 펼친 것 마냥 방방 뛰며 환호했다. 때문에 그런 김현주와 교대하며 골문으로 들어서던 미자는 더욱 머리에 쥐가 나는 것만 같았다. ‘아 진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는 거지??’ 도무지 11m라는 거리는 너무나 가깝게만 느껴졌고, 킥커의 발을 떠난 공을 따라간다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즉, 먼저 예측하고 움직여야 했는데 그 예측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예측을 할 수 없다…? 설마…’ 하지만 그 순간 미자는 갑자기 자신을 안고서 의미심장한 말을 해준 남자가 떠올랐다. ‘그거였죠! 그걸 알려주고 싶으셨던 거죠?! 그렇죠!’ 미자는 지금까지 킥커에게 끌려다녔던 스스로가 무척이나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해보았다. 또한 분명 감독님 말씀대로라면 틀림없을 거라고 미자는 믿고 또 믿어보았다. - 공교롭게도 경기 초반에 실수를 저질렀던 자신을 승부차기에, 그것도 마지막 킥커로 지정해줄 줄은 신설혜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럴 때야 말로 자신을 믿고 기용해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다. 때문에 설혜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페널티 에어리어로 걸어나갔다. ‘내가 끝낼 수 있어. 절대로 해 낼거야!’ 설혜는 간간히 야유를 보내고는 있지만, 완전히 적막에 휩싸인 관중석의 반응에 마치 자신이 ‘역적’이 된 것만 같았지만 그런 느낌 따윈 조금만 지나면 모두 사라질 것이었다. 때문에 설혜는 9명의 선수들이 수없이 밟아댔을 페널티 마크 위에 조심스럽게 축구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골문을 바라보았는데 설혜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쟤…?! 지금 뭐하는…?!’ - 미자는 꽤 도발적으로 정면으로 바라보며 장갑을 낀 손 그대로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곤 자신의 왼쪽 공간을 가리켰다. 여전히 설혜에게서는 눈을 떼지 않으면서. ‘그게 무슨…?!’ 설혜는 지금 미자가 무슨 행동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미자가 다시 손을앞으로 쭉 뻗어 검지로 설혜를 가리키고는 마찬가지로 골키퍼의 왼쪽 공간을 다시 가리키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뭐, 뭐야… 지금 그러니까…’ 분명 미자가 보여준 행동은, 골키퍼인 나는 왼쪽을 막을 테니, 킥커인 설혜 또한 골키퍼의 왼쪽으로 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먼저 가위를 내겠다고 선언해서 상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황한 설혜는 주심을 바라봤지만 이미 휘슬을 분 주심은 어서 빨리 차라는 제스처만 보여줄 뿐이었다. ‘그럼… 어느 쪽으로 차야 되지? 저 애가 말한 쪽으로 차면, 정말 저 애가 막을까? 그럼 반대로 차야 하지 않나? 설마, 날 속이려고? 도대체 난…?!’ 설혜는 그러나 주심이 자꾸만 빨리 차라는 신호를 보내자 미처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달려 나왔고, 결국 오른발 인사이드로 미자가 가리킨 방향이 아닌 왼쪽, 그러니까 골키퍼의 오른쪽으로 공을 보냈다. ‘얕은 꾀엔 속아넘어가지 않겠어!’ 그러나 미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혜가 슈팅을 날림과 동시에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설혜의 발을 떠난, 그러나 일말의 망설임이 묻어있던 공은 미자의 오른손에 기적적으로 가로막히며 그대로 골라인 밖으로 벗어났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솔직히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완벽한 선방을 미자가 해내자 관중석에선 마치 우승이라도 한 양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 나왔고, 미자는 언제 쓰러졌었냐 싶을 정도로 벌떡 일어나 벤치의 한 남자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감독님! 이거였죠? 이게 바로 나의 경기인 거죠?! 그렇죠??!!’ - 또다시 손안에 잡힐 것만 같던 경기를 허무하게 놓쳐버리자 한양여대 아이들은 초조함이 배가 되었지만, 한국여대 아이들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특히 골키퍼 미자는 더더욱. 때문에 규식은 자신의 딸이 경기를 망쳐버릴 뻔한 순간이 지났다는 안도감을 넘어서 더 이상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여간 골키퍼까지… 감독 녀석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구만.” “와, 진짜 저 골키퍼 보는 아이도 대단한데요? 어떻게 저런 생각을 다…” 철용은 몸매에 비해 기지가 넘치는 미자 역시 영입 리스트에 올려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한편 현우야 말로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진짜 혜”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 드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현우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닫았는데, 그런 현우의 마음을 아는지 규식은 두툼한 손으로 현우의 어깨를 지긋이 잡아주었다. 그러자 그 손을 통해 흐릿하게나마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게 전해지는 것 같아 현우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만 같았다. - “뭐어? 거짓~말!!” 따뜻한 물이 거품이 되어 찰랑찰랑 담겨있던 욕조에서 혜미를 마주보며 앉아있던 윤지는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손으로 물을 튕겨 몇 번이고 혜미의 얼굴을 적셔주었다. “어푸푸! 아 진짜라니까? 아무래도 내가 끝내버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라니깐??” “어이구, 그러셨어요? 그래서 지켜보는 사람들 간 떨어지는 건 생각도 안하고?” “뭐, 그야… 아 몰라몰라! 어쨌든 이겼으면 됐지 뭐, 안그래?” “피이, 그게 뭐야…” 하지만 혜미가 확실히 실수 같은 건 담아두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윤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기의 승부를 떠나 자신을 위해서 꼭 이기겠다고 했었다. 그랬던 경기를 놓칠 뻔했으니 어쩌면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난 약속 지켰다?” “…” 역시나 혜미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고서야 윤지는 참았던 눈물이 흐를 뻔 했지만, 곧 혜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빨개진 눈을 감추어보았다. “고마워… 고마워 혜미야…” - 이윽고 갑작스레 예정에도 없던 여섯 번째 킥커로 나서게 된 민지는 페널티 마크에 공을 놓고서도 이게 왠 떡이냐 싶은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비 뽑기에서 순번에 밀려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이런 극적인 상황에서 단독 샷을 받게 되었으니 왜 안 그랬을까. 때문에 이미 민지의 눈엔 한양여대 골키퍼 김현주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흥, 나야말로 오늘 경기의 승자라구!’ 예정된 킥커도 아니었건만, 갑작스레 승부차기를 하게 된 민지는 그러나 압박감 따윈 모르는 단어라는 듯 너무나 가볍게 달려나갔다. 팡! 여지껏 한국여대 아이들이 보여준 장난같은 슈팅에 한양여대 골키퍼 김현주는 몸의 긴장을 풀고는 또다시 천천히 날아오는 공을 잡아보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하나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민지는 항상 '내기 놀이'의 최대 피해자 였다는 것을. 때문에 힘을 빼고 있던 김현주를 놀리듯, 민지의 발끝을 떠난 공은 그러나 빠르게 땅을 굴러가며 왼쪽 구석에 그대로 꽂혔다. 우와아아아아아!!!!!!!!!! 민지는 슈팅을 성공하자 마자 관중들과 함께 환호하며 곧바로 뒤로 돌아 아이들에게 신나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뭐, 뭐야…’ 즐거워는 하는데 뭔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아이들의 분위기에 민지는 이내 아이들은 지금 승부차기가 아니라 누가 더욱 골대에 가깝게 차는지를 두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진 건 민지 자신이었고. ‘으… 이런 내기 싫다! 싫어!!’ - 이윽고 미자가 관중들의 함성을 등에 업은 채 더욱 기세 등등하게 김현주와 교대하며 골문에 서자, 벤치에 앉아있던 수림은 이미 손안에 땀을 모두 흡수해버린 눅눅한 쪽지를 다시 펴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윤지가 수림의 손에 있던 쪽지를 가볍게 빼앗아가곤 옆에 놓인 볼펜으로 뭔가를 표시해서 다시 수림에게 건네주었다. 수림은 언뜻 윤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손안의 쪽지를 다시 펴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여대 : 아라, 승은, 나경, 지영, 혜미, 민지 -----------O----O----O---O----X----O 한양여대 : 정혜인, 고혜란, 임지혜, 신민아, 신설혜, 권선희 ------------O------O------O------O------X-----X 쪽지엔 분명 지금 막 한양여대 여섯 번째 킥커로 나서고 있는 권선희의 이름과 함께 그 밑에 몇 번이고 그어댄 것이 확실한 ‘X’ 표시가 눈에 확 들어오고 있었다. 때문에 수림은 다시 한 번 윤지를 바라봤는데, 윤지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에 수림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고. - 권선희는 또다시 한국여대 골키퍼 미자가 신설혜에게 했듯 자신에게도 그런 제스처를 하자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런 수에 당할 것 같애?’ 권선희는 물론 미자의 수를 완전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 흥, 그게 다가 아니라구!’ 이미 미자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기로 작정한 권선희는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미자를 외면하며 공을 향해 달려 나왔다. 그리고, ‘난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을거야!’ 절대 넣어버리겠다는 얼굴로 권선희는 공을 쪼개버릴 듯 강타했다. 팡!! 하지만, 권선희의 발을 떠난 공은 미자의 왼쪽도, 그리고 오른쪽도 아닌 골문의 정 가운데로 쏜살같이 날아갔는데, 마치 권선희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듯이 전혀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미자는 무척이나 강하게 날아온 공에 손도 써보지 못했지만, 손이 아닌 또 다른 부위 즉, 자신의 얼굴로 그것도 정면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퍼~억!! 미자의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한 공은 그러나 하늘 높이 떠 올랐고, 미자는 그대로 뒤로 대자로 넘어갔다. 그러자 한양여대 권선희야 말로 그 자리에서 얼굴을 감싸며 무너져 내렸고, 센터서클에 서 있던 한국여대 아이들은 그대로 전력질주를 하며 대자로 뻗어있는 미자에게로 달려갔다. 물론 관중석에선 목이 쉬어라 함성을 질러주었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이미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을 수림이 짐작할만한 곳에 남희는 물론 있었다. 그것도 남자와 단 둘이서. 하지만 수림이 걱정할 만한 그런 끈적한 분위기 따윈 그 어느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결승을 앞두고 있는 수석코치에게는 지금 그럴 여유따윈 없는 것만 같았으니까. “은채는 퇴장으로 인해 결승전에 나설 수 없고, 진희 또한 왼쪽 정강이 부상이 확실치 않아서 출전을 낙관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미드필더진의 체력이 이틀 동안 어느 정도까지 회복이 될는지 몰라서…” 경기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남희는 벌써부터, 이틀 휴식 후 치러야 할 여주대와의 결승전 때문에 몸이 단 나머지 영후의 방으로 찾아와 열심히 브리핑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혼자 열을 내고 있는 것과 달리 감독에게서 이렇다할 반응은 커녕,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오자 남희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들어 맞은 편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감독님…’ 그런데 남희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는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제야 남희는 오늘 경기 내내 가장 치열했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남자였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본인이 직접 뛸 수도 없는 경기, 하지만 꼭 이기고 싶은 경기였으니 또 얼마나 속이 타 들어갔을까. 결코 아닌 것처럼 행동했지만, 결국 누구보다도 가장 힘들었을 남자였다. 때문에 남희는 테이블에 놓여있는 자료들을 챙길 생각도 하지 않고, 침실로 걸어가 시트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영후가 깰까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는데, 그러다 보니 남자의 얼굴에 무척이나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아름…답다…’ 언제나 느끼고는 있었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때문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 벌어져 있는 남자의 입술에 살짝 이라도 키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지만, 남희는 그러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이 남자가 버텨낸 오늘 하루의 마침표를 이쯤에서 찍어야만 했으니까. 결국 남희는 조심스럽게 출입문까지 걸어와 문을 열고는 전등 스위치의 불을 내려보았다. 그러자 룸의 모든 불빛은 사라졌지만, 반 정도 열린 출입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복도의 조명 빛에 잠들어있는 남자의 얼굴이 더욱 매력적으로 빛나주었다. 때문에 남희는 이미 남자에게로 중독되어버린 마음을 애써 참고 또 참으며 문을 닫고는 잠시 동안 문에 기댄 채로 나직하게 속삭여보았다. “잘자요. 나의 감독님…” 51부. 벼랑 끝에 서는 남자 part1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이른 아침. 밤새 내려앉은 이슬을 여전히 머금고 있던 잔디 위에서 윤지는 홀로 골대를 향해 연신 공을 차 보았다.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던 윤지의 폼은 꽤 그럴 듯 해 보였지만,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탓인지 페널티 아크 부근에서부터 날아간 공은 몇 번의 바운드 끝에 겨우 골문 안으로 굴러 들어가고 있었다. ‘…’ 때문에 윤지는 잠시 슈팅 연습을 멈춘 채 머릿속으로 혜미를 비롯해 수많은 선수들의 슛 폼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윤지는 고민하던 것을 잠시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럴 거 같더라니… 잠도 안자고 혼자 뭐하냐?” “은채…?” “혜미가 걱정하길래 와봤더만 역시나구만…” 은채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공 중 하나를 발등으로 가볍게 차 올려 손으로 잡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그러는 넌, 왜…” 윤지는 아무 생각 없이 은채에게 ‘일찍 나온거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소하게라도 더 이상은 그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은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얼마 뛰지도 못하고 일찍 퇴장까지 당하고 나니까 잠도 안 오고, 뭐 그러더라.” “…” 그랬다. 분명 은채는 어제 있었던 한양여대와의 경기에서 퇴장을 당하면서 이틀 후에 있을 여주대와의 결승전에 나설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제의 경기가 은채에게는 이번 대회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던 셈이었다. 경기를 나설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어떤 마음을 들게 하는지 윤지는 어제 경기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에, 별 내색하지 않고 있는 은채의 마음 또한 어떠할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윤지의 입에선 마음과 다르게 꽤나 호기로운 말이 흘러나왔다. “이왕 왔으면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패스나 해봐. 실전에선 공이 멈춰있을 리 없잖아.” 축구를 알기 전이었다면, 이렇게 가슴 아파질 순간엔 시시콜콜 수다를 떨며 딴에는 위로를 한다 했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저 축구로, 그리고 마음으로 위로를 할 수 있었고, 또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은 은채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인지 몹시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공을 발 아래에 떨어뜨리더니 곧바로 윤지의 옆 공간으로 빠르게 차 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 난 체력이 남아 도니까, 각오하라고~!” - 하연은 평소보다도 훨씬 이른 시간에 출근했지만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 모니터 속의 하얀 창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넋을 놓고 있는 건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손이 쥐고 있던 핸드폰을 연신 쥐락펴락 하고 있다는 것을 봤다면 달리 생각해야 했을 것이었다. 기어코 하연은 손에서 핸드폰이 진동해대자 채 1초가 되기도 전에 번개처럼 받았다. “선배?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부탁했던 거 다 된 거야? 설마 안되겠다는 말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지?” ‘임마, 지금 후배 잘못 둔 덕에 죽어라 작업하고는 있는데, 격려는 못해줄 망정 전화하자마자 닥달이냐? 가뜩이나 다시 제거 못하게 프레임 하나하나 수작업을 해야 해서 죽을 맛이구만. 너 1초당 프레임이 몇 갠줄은 알고 지금 그러는 거지?’ “그래서 얼마나 걸린다는 건데? 어쨌든 오늘 내로는 가능한 거야?”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며 파티션 위로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스럽게도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다행스럽게 여기면서도 왼손을 들어 입가와 핸드폰 수화부분을 가려보았다. "가능한거지? 그렇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얘가 얘가. 너 지금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한다는 거 알고는 있는 거지?’ “아, 알아! 아는데… 지금 나도 장난 칠 여유 없다고!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건데!!” ‘아 자식, 하여간 승질 하고는… 뭐, 남은 분량으로 봤을 땐 아무리 빨라도 삼 일은 더 줘야 돼.’ “뭐어?! 삼일?! 안 된다고!! 결승전이 내일 모렌데! 그 전까지 어떻게든 완성해야 한단 말야!!!” 하연은 결국 성질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그러자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대로 그녀에게 향했다. 하지만 하연은 쉽게 자리에 다시 앉지 못했다. 다시 자리에 앉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모든 걸 포기하며 그대로 주저 앉게 되는 기분이 들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야, 보조도 없이 나 혼자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그럼 다른 사람하고 작업하는 걸 허락해주던지!!’ “그건… 그건 더 안 된다는 거 선배도 알잖아!”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그럼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임마!!’ “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럴 시간도 아끼고 제발… 응?” 여간해선 이렇게 까지 저자세로 나오지 않는 여자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던 남자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는 소리와 함께 머리칼을 박박 긁어대는 소리를 들려주고나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좋아 이틀 하고 스무시간.” “아니 이틀하고 3시간. 그 이상으론 진짜 안돼!” “와 진짜 후배라고 하나 있는 게 완전 칼만 안 들었지… 알았다, 알았어. 그대신 이번엔 진짜 새끈한 여자랑 소개팅 시켜주는 거다? 오케이?” “그래, 약속할게! 선배 고마워! 진짜 고마워!!” 하연은 그렇게 통화가 끝나자 여전히 자신에게 꽂혀있는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곧바로 부장 자리로 직행했다. - 지~~~~~잉! 꿈결처럼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영후는 소파에서 눈도 뜨지 않고서 간밤에 남희가 덮어주었던 시트 밖으로 팔만 길게 뻗어 테이블 위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있는 핸드폰을 겨우 집어 들었다. “으음… 여보세요…” ‘뭡니까? 세월 편하게 아직도 잠이나 자고 있고?’ “누구…? 근명? 어쩐 일이야?” 영후는 상대방이 근명인 것을 확인하자 저절로 눈이 떠지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은, 내가 뭐 전화도 못할 그런 사이에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나 내일 모레 독일로 갑니다.’ “아…” 영후는 근명의 입에서 독일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왼쪽 무릎이 욱신거리는 것만 같아 누워 있던 몸을 힘겹게 일으켜 앉고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께로 손을 뻗어 보고 있었다. “그래… 그랬구나.” ‘그 뭐냐, 결승전 못보고 간다고요. 어차피 여자축구, 별 재미도 없었는데 잘 됐죠 뭐.’ 항상 마음을 비뚤게 표현해야만 진정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근명의 인사법이라는 걸 모를 리 없던 영후는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수술 잘 받고, 간만에 푹 쉬고 온다 생각해.” ‘선배는요? 이제 쉴 만큼 쉰 거죠?’ “나? 나야 뭐…” ‘먼저 한 발 앞서 가게 됐다고 나 모른 척 하기 없기에요. 금방 따라갈 테니까.’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내말 못 들었어요? 따라갈 거라고요.’ “그래 알아들었어. 그리고 믿을게 금방 따라 올 거라고.” ‘참나, 내가 그 말을 그냥 믿을 거 같아요? 진짜로 오늘부터 죽어라 선배를 따라다닐 거라구요.’ “?” 영후는 근명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어지는 근명의 말에 잠시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화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별것도 아닌 대회로 꽤나 큰 성과를 내주고 있더군요. 물론 연맹이 주도를 했겠지만, 조전무님도 무척이나 신경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협회 사무실로 출근 중이던 조전무는 정회장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마치 영상통화라도 하고 있는 양 고급 세단의 뒷좌석에서 등을 뗀 채 허리마저 꼿꼿이 세우고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사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어쩐지 조전무는 ‘삼합회’와 손을 잡고 나서는 도무지 누굴 믿어야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삼합회’가 알게 모르게 대한민국 사회에도 암조직처럼 퍼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자 이제는 심지어 자신의 운전기사조차 함부로 믿을 수가 없어진 것이었다. ‘현우 녀석에게 붙여 놓은 운전기사 반만큼이라도 믿음직스러우면 좀 좋아… 쳇!’ 때문에 통화를 하면서도 간간이 조전무는 룸미러를 통해 힐끔힐끔 운전기사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오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허리에 잔뜩 들어가 있던 긴장을 조금은 풀고 조심스럽게 시트에 몸을 기대어 보았다. ‘어쨌든 이번 대회를 마치면 우선 부회장 자리부터 시작합시다.’ “어이쿠,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어떻게…” ‘이번 여자축구에 사람들 관심이 진 건, 모두 조전무 덕 아닙니까? 너무 겸손하실 것 없어요. 게다가 나는 이제 당 대표를 맡아야 될 거 같기도 하니,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 하지만 그래도 어찌 제가…” ‘겸손은 거기까지만 하고, 어쨌든 마지막까지 잘 해주세요. 조만간 한 번 봅시다.’ “예, 예. 들어가십시오.” 조전무는 마지막까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고, 통화가 완전히 끝나고 나자 예의 그 음흉한 미소를 잠시 지어봤지만 그도 잠시,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전무는 역시나 운전기사를 마냥 믿을 수는 없었다. “이봐, 어디 잠깐 차 세우고 목 축일 것 좀 사오지.” “네, 전무님.” 운전기사는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사무적인 대답과 함께 이윽고 길가에 보이는 편의점 앞에 차를 정차시켰다. “아, 뭐 오는 길에 담배라도 한대 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전무님.” 이윽고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리자, 말끝마다 ‘전무님’을 붙여대는 것까지 거짓으로 들리는 것 같아 조전무는 잠시 인상을 찡그려 봤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때문에 조전무는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폴더를 다시 열어, 안경을 눈썹 위로 추켜올리고 제법 빠른 속도로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신호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역시나 적응되지 않을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요? 연락은 최대한 자제하자더니…’ “자제 할 때 하더라도, 우리 돈이 걸린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언제 들어도 기분 나쁜 어색한 우리말은 조전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 정돈 결승전 이후 자신에게로 들어올 배당금액을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훗, 이제야 결단을 내린 거요? 그간 별로 협조적이지 않아서 꽤나 고민하는 줄로 알았는데.’ “이런 거사를 앞두고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법 아니겠는가?” ‘뭐, 그렇긴 하겠지만… 그런데 하나 물어도 되겠소?’ “뭐든지.” ‘적어도 한국의, 그것도 축구협회의 전무 정도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왜 하필 우리 삼합회와 손을 잡으려 하는 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고작 돈 뿐일 텐데.’ 조전무는 의외의 질문을 받고는 잠시 생각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처음엔, 그저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학연과 지연의 구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이유는 점점 흐려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오로지 한 남자의 불행에만 목을 매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남자는 자신에게 불행은커녕, 온갖 행운과 명성을 가져다 주고 있었기에 어리둥절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앞으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어있을 때 눈 앞에 나타나 준 무리들이 바로 ‘삼합회’였다. 그들은 이렇게 갈팡질팡하던 조전무에게 새로운 목표 즉, '돈'을 제시해주었다. 게다가 그들이 제시한 카드는 ‘고작 돈’이 아니었다. ‘돈’이야말로 최고의 수단이였고, 목표였으며, 권좌였다. 점점 높은 자리의 사람들과 접촉할수록 조전무는 막대한 ‘돈’만이 유일한 권력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그 ‘돈’은 자신의 가족과, 주변인들, 그리고 가장 소중하고도 유일한 ‘아들’에게도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걸로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하다못해 대통령마저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세상이니.” ‘하긴 그렇군…’ “어쨌든 팩스로 사진 하나 보내지. 보고 알아서 처리해주시게.” ‘그거면 되겠소?’ “아마도.” ‘아시겠지만, 이번 만큼은 절대 실수가 없어야 할거요. 전무 당신 돈도 돈이겠지만, 결승전인 만큼 우리 조직의 투자금액도 만만치 않을 테니.’ 하지만 조전무 또한 입장이 다르지 않았다. 이미 투자한 금액의 상당수에는 협회의 공적 자금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에 굳이 금액의 크기를 비교하지 않아도 충분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건 걱정 마시게. 어차피 ‘그 팀’은 ‘그 놈’이 없다면 필시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까.” ‘그렇게까지 자신만만하시다면야, 믿어드려야지. 그럼 결행 일시나 나중에 알려주시오, 그럼.’ 통화를 마치자 조전무의 입은 더없이 기분 좋게 벌어지고 있었다. ‘부회장이면 조만간 회장으로… 거기다 내일 경기를 이기고 나면 내게로 굴러들어올 배당액까지…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 조전무는 대통령과 정회장에게 들어간 돈 뿐만 아니라 그 돈의 몇 십 배, 아니 몇 백배가 수중에 들어올 상상을 하자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흐흐흐흐흐…하하하하하!” - 하강하는 호텔 엘리베이터에 단 둘이 그러나 조금 떨어진 채 타고 있던 남희와 영후는 별 말도 없이 줄어들고 있는 엘리베이터 숫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똑같이 고개를 들고 있던 둘 중, 남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오늘, 잠시 외출을 좀 하고 오겠습니다.” 남희가 입고 있던 블랙의 H라인 스커트만으로도 이미 어딘가를 갈 모양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던 영후는 허락을 안 할 이유가 없었기에 흔쾌히 답했다. “아, 네. 어차피 오늘은 훈련 일정도 없는데, 편히 일 보고 오세요.”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멈춰 서자 남희는 영후에게 목례를 한 후에야 스커트 색과 동일한 그러나 에나멜의 광택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구두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앞서 걸어갔고, 이윽고 호텔 앞에 대기하던 택시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영후는 어쩜 저렇게 옷차림이 바뀌는 것 만으로도 다른 사람처럼 변할 수 있는 것인지 감탄하고만 있었는데, 남희를 태운 택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꿈에서 깨어난 듯 기지개를 흐드러지게 펴곤 잠시 턱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애매하긴 하지만, 잠깐 들러볼까." - ‘오늘은 슈팅연습인가…?’ 영후는 예상대로 연습경기장에 나와있던 윤지가 은채의 도움을 받으며 슈팅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바라보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약하게, 그리고 날아가기는커녕, 연신 잔디 위로 굴러만 가는 공을 보며 가만히 윤지를 바라보던 영후는 조금쯤 힌트를 줄까 싶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주머니 속에서 또다시 진동해대고 있는 핸드폰에서 또다시 보여지는 철용의 이름 때문에 영후는 힌트는커녕 더 이상 윤지를 지켜보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 “선배.” 유리로 된 출입문을 열고 커피ㅤㅅㅛㅍ으로 들어가자 바로 보이는 철용에게 영후는 손을 들며 인사를 했지만, 그 맞은 편에 앉아있던 은발의 외국인이 말끔한 슈트 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후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철용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못했기에 영후는 머뭇거리며 철용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인사해라. 네가 원했던 팀의 아시아 담당 스카우터시다.” 역시나 잔뜩 부어터진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하는 철용에겐 미안했지만, 이윽고 맞은 편에 서 있던 은발의 외국인이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자 그간 잊고 있었던 ‘축구 선수에의 꿈’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 영후의 얼굴은 상기되기 시작했다. 철용 또한 그런 영후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무조건 가장 좋은 조건을 내세우던 팀만을 들이대던 자신의 모습이 바보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왜 하필, 좋지도 않은 조건을 제시하는 이 팀과, 또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하는 불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 어느덧 연습 경기장에도 어둠이 짙게 깔리자 은채도 숙소로 돌아갔고, 축구공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됐지만, 언제나처럼 홀로 남은 윤지는 여전히 이곳 저곳에 놓여져 있는 축구공에 달려들어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하지만 슛의 강도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기에 체력이 아닌 정신적으로 피로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거지…?’ 윤지는 너무나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지만, 순간 연습경기장의 조명이 환하게 밝혀지자 조금 당황했는데, 게다가 처음 보는 남자가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서자 윤지는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헤이, 걸~!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다구.” “누구…?” “응? 나 몰라? 나 베리 베리 페이머스한데?” 도대체 뭐가 유명하다는 건지 윤지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꽤나 큼직한 DSLR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있는 한국남자 같지만 한국남자 같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경각심보다는 어쩐지 묘한 궁금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은채는 퇴장으로 제외됐고… 진희는 정강이 타박상으로 경기를 소화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미자는 어쩌면 안면 보호구를 착용해야 할지도…?” 영후의 방에선 두 코치가 그 어떤 대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자책하는 얼굴로 묵묵히 앉아있었고, 영후는 남희와 수림이 작성한 현재 한국여대의 상황에 대한 자료들을 담담하게 읽고 있었다. “뭐, 그래도 어찌어찌 경기는 치를 수 있겠네요. 그죠?” 이윽고, 손에 들고 있던 A4용지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영후가 기지개를 펴듯 두 팔을 머리위로 쭉 올리며 장난스레 입을 열자, 남희와 수림은 마치 죽을 죄를 진 것 마냥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두 코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후는 평소완 달리 그 둘을 보듬어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곤 한참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남희와 수림은 순간 창에 비치는 남자의 외로운 모습을 얼핏 볼 수 있었던 것도 같았다. “진희는… 정말 어려울 것 같은가요?” “시합 당일이 되어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리 길어야 20분 정도뿐 일 것 같습니다.” “그럼, 가능은 하다는 말씀인가요?” 그제야 얼굴이 환해지며 두 코치를 향해 돌아서자, 수림은 그제야 안도했지만 남희는 예의 안경을 추켜올리며 영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굳이 진희를 무리시켜가면서까지 기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난 번 경기 때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진희 미애 라인으로는 여주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다는 것을요. 그러니 결승전에선 당연히 혜미를 변칙적인 수비자원이 아닌 정식 센터백으로 기용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혜미라…” 영후는 또다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다시금 두 코치들을 등진 채 뒤로 돌아 어둠 속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고, 남희도 수림도 그런 남자를 쉬 건드릴 수 없었다. “아, 참.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희는 결승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뜬금없이 화제를 돌리는 영후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설마…’ “실은 저 오늘, 계약을 하고 왔습니다. 물론 구두 계약이긴 하지만…” “계약…이라니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수림과 달리 남희는 역시나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남희는 수림과 다른 이유로 영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필, 결승전을 앞두고 이런 말씀을…’ 영후의 이적이 기정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얘기를 듣고 있는 자신들도 순간적으로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하물며 아이들이라면 더욱 심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심리적인 평온함을 유지하는 데 힘을 써야 할 감독의 입장에서 스스로 ‘이적’이야기를 먼저 꺼내다니, 남희는 또다시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남자의 한마디 때문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남희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영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아요, 왜 하필 결승전을 앞두고 계약을 했는지… 그게 궁금하겠죠. 아니 원망할 수도 있겠네요.” “…”, “…” “하지만, 원망한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 “?” “꼭,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제가 감독을 그만 두는 건, 이미 정해졌다고요.” 남희도 수림도,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남자가 꺼내는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여태까지 자신들이 봐왔던 남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냉정하게 말을 하고 있었으니 어찌 그러지 아니했을까.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남자에게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또다시 이 남자는 그녀들을 등진 채 창밖 어딘가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 다음날 아침. 침대 위에서 눈을 뜬 황총장은 역시나 옆에 없던 노감독이 오늘도 변함없이 자신을 위해 조식을 준비하러 주방으로 가 있을 거란 생각에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나섰다. 분명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는 남자에게 몰래 다가가 뒤에서 꼭 안아준다면 그 무뚝뚝한 남자가 지난 밤, 자신을 품에 안아주며 그랬듯, 해맑게 웃어 줄 거란 생각을 해 보면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까치발을 해가지고 주방으로 다가가 보았다. 하지만 홀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스 렌지 위의 주전자만이 눈에 들어올 뿐 노감독의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는데, 조금 더 주방 쪽으로 다가가서야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워 하며 쓰러져 있는 노감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 여보…?!” 황총장은 그대로 노감독에게 달려가 자신의 품에 안으며 연신 그의 어깨를 흔들어보았다. “여보! 여보 왜이래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여보!!!” 하지만 노감독은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봐주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었기에 황총장은 도대체 어찌 해야 할지 판단 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이런 상황에 떠오른 건 해외에 나가있는 자식들도 아닌 바로 한국여대의 감독뿐이었다. - “총장님!” 분명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왔을 남자는 그러나 애써 숨이 차오르는 것을 감추며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노감독과 그를 지키고 있는 총장을 바라보았다. 총장 또한 전화를 하자마자 역시나 한달음에 달려와 준 남자의 등장에 힘겹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 이감독님…” “어떻게 되신… 아니 괜찮으신 건가요?” “일단은요.” 총장의 ‘일단은’ 이란 말에 영후의 표정은 더욱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는데, 그런 남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총장도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남자의 어깨 한편을 살짝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워낙에 경황이 없다 보니 내일 중요한 일이 있는 사람한테 다 전화를 해버렸네요…”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하지만 총장의 얼굴엔 고마움이 그대로 묻어났는데, 정말 영후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 쉬운 ‘119’조차 떠올리지도 못한 채 그저 노감독을 품에 안고만 있었을 것이었기에,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와준 남자가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총장은 무어라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도 싶었지만 어쩐지 쉽지 않았다. 타 환자들도 가득한 응급실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응급실 침대에 누운 채 호흡기를 착용하고 있는 노감독의 모습과 그런 은사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하나같이 너무나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 같았던 남자의 입이 조금쯤 떨리며 열리자 총장은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보다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의사 말로는 ‘급성심근경색’이라더군요. 다행이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 고장 날 때가 된 거겠지요. 이이나 저나…” “…” 차마 괜찮으신 거냐고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은 영후의 등을 두드려주며 총장은 응급실 밖으로 나섰고, 영후도 그새 많이도 늙어버린 노감독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총장을 따라 나섰다. - 응급실의 자동문 앞에 멀뚱하게 서있던 커피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든 총장은 뒤따라 나오던 영후에게 내밀었다. “블랙, 괜찮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영후에게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건넨 총장은 여전히 불이 들어와 있던 버튼을 눌러 또 한잔을 뽑아 들었다. 역시나 총장의 심정과 비슷한 빛깔이었을 블랙 커피였다. 그리고 잠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느끼고 있을 공허함처럼 종이컵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더니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며 마치 ‘인생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그 의견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총장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드릴 수가 없네요. 아직 함께 해보지 못한 것들이 한참이나 많이 남아있는데…” 한없이 길고도 굴곡진 인생을 침대 위의 노신사와 함께 해왔을 황혼의 여인이 여전히 아쉽다는 얼굴로 시를 읊듯 이야기하자, 영후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리고 일백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이라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때문에 영후는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계속 함께 하실 수 있으실 거에요. 언제나 그런 분이셨으니까요.” 서른도 안된, 총장의 입장에선 갓난 아기나 다름없어 보이는 나이의 남자가 이렇게나 의지가 될 수 있는가 싶어 총장은 물끄러미 영후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지금까지 저이를 지탱하고 있던 것 중에, 팔할은 이감독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곤 했답니다.” “…” “그랬던 양반이니, 비단 내가 아니더라도 아직도 해 나갈 일이 많으실 텐데… 그런데 왜 저렇게…” 안 그러려고 해도 마음 같지 않게 자꾸만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자, 황총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영후는 비어있던 한 팔로 조심스럽게 총장을 보듬어주었다. “그러셨다면 더더욱, 금방 일어나실 거에요. 저 또한, 아직 보여드려야 할게 많이 남았거든요.” 자신보다도 더 슬펐을 남자가 감정을 억누른 채 단호하게 말하자 총장은 당장이라도 거짓말처럼 노감독이 일어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 점심 식사 후 연습경기장에서 또다시 간단한 패스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남희의 옆에 앉아서 멀거니 바라보던 진희는 역시 어디론가 정신을 팔고 있던 남희에게 넌지시 물었다. “감독님은, 어디 가신 거에요? 아침 먹을 때도 안보이시던데…” “어? 어어. 그냥… 잠시 볼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어. 곧 오시겠지.” “네에…” 남희의 얼굴로 미루어 짐작컨데 분명 뭔가 일이 터진 것은 확실한데, 무턱대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진희는 무척이나 답답했다. 하지만 진희와 달리 남희는 남희대로 머릿속이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한테 도대체 어떻게 얘기를 하란 말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내일 있을 결승전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는 아이들에게 덜컥, ‘감독님의 계약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분명 아이들은 실망할 테고, 그 실망은 고스란히 경기력 저하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가뜩이나 체력도 떨어져 있는 아이들인데, 사기까지 떨어뜨릴 수는…’ 하지만 남희는 연습경기장에 막 들어서고 있는 철용의 모습에 잠시 고민을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아이고, 이거 고생하십니다. 날도 점점 더워지는데, 가르치는 입장도 쉽지는 않겠군요.” 언제 그리 친해졌다고 손을 들어 보이며 걸어오던 철용은 남희의 덤덤한 표정에 괜히 머쓱해지며 손 부채질을 하는 둥 마는 둥 걸음을 멈췄다. 남희는 남의 속도 모른 채 걱정 없어 보이는 철용이 더욱 못마땅했지만 혹여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싶어 먼저 다가서며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근데, 영후는 어디 갔나요? 코빼기도 안보이네?” “네, 볼일이 있으시다고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 남희는 노감독님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실히 알지 못했기에, 우선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지만 철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볼일이요? 그 자식, 지금 그럴 마음이 아닐 텐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그 자식 얘기 안 했나 보군요. 하긴 그래야지, 지가 양심이 있으면. 도대체 지금 그 얘길 꺼낸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니…” “혹, 계약 건에 대한 말씀이신 겁니까?” “에에?! 그 자식, 기어이 말해버렸단 말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똥그랗게 뜨며 화를 버럭 내버리는 철용 때문에 남희는 자신이야말로 화를 내고 싶었건만 그럴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도대체 두 남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한없이 궁금해지기만 했다. - 철용은 너무나 기뻐하던 은발의 스카우터가 몇 번이고 한국식으로 고개를 조아리기 까지 하며 인사를 하고 떠나자 답답함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는 듯 영후 옆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스카우터 자리에 놓여있던 물잔을 기어이 원샷 하고는 부셔질 듯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 물론 무슨 생각이 있었기에 그랬겠지, 라고 어렴풋이 짐작은 해 볼 수 있었던 철용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아스라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 무조건 퍼붓고 싶었지만, 억지로 화를 누그러뜨리며 숨은 의중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임마, 뭐 하나만 묻자.” “네?” “갑자기 왜 이렇게 몰아치는 거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전에는 계약을 하자하자 해도 꿈쩍도 않던 놈이, 갑자기, 그것도 이런 중차대한 일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먼저 하자고 보채니 말이다.”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잖아요.” “근데, 이번 건은 확실히 평소의 네가 아닌 것 같다 이 말이라고! 진짜 이게 지금 뭐 하는 거냐? 내일 모레가 결승전인데,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해버리면, 나는 둘째치고 애들하고 코치들은 뭐가 되겠냐!” “…” 역시 그 어떤 명쾌한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는 남자의 모습에 철용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번뜩이는 무언가가 생각났다. “너 이 자식… 설마… 아니지…?” “…” 순간 철용은 설마,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눈 앞에 있는 남자야 말로 세상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만큼은 가장 엄격한 남자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남자에게 철용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음에도 자기도 모르게 눈 앞의 남자에게 ‘연민’의 감정이 느껴져 철용은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곤 폐 속 깊이 빨아들이고 나서야 조금쯤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자 스스로가 내뱉은 희뿌연 연기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마치 벼랑 끝에 스스로 선 것처럼 처연하게 보여지는 것 같아 철용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녀석아, 마지막까지 꼭 그래야만 하겠냐…’ - 철용의 이야기가 끝나자 남희는 당연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철용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아니 그러고도 남을 남자라는 걸 알고 있던 남희는 그제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한양여대와의 시합 중 하프타임에도 그런 의중을 자신과 수림에게 잠시 내비쳤던 남자였다. 준결승에서도 그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세웠던 남자였으니 결승전이야말로 불을 보듯 뻔할 것이었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내 생각이…” 하지만 철용의 말과 상관없이 남희는 이미 지난 밤 소파에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남자의 얼굴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 “내일 있을 여주대와의 결승전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차원이 다르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저희가 가동할 수 있는 가용인원은 총 열 다섯 명 중에 열 세 명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한 명은 퇴장으로, 또 한 명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 합니다. 게다가 연장전마저 치르느라 체력마저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남희가 말끝을 흐렸지만, 철용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국여대는 분명 최고는 커녕, 최악의 상황에서 결승을 맞이해야 했다. 반면 준결승전 마저 교체전력만으로 여유롭게 해결한 여주대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팀보다 강한 상대가 되어 줄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여대가 최고의 전력으로 맞붙는다고 해도 솔직히 승률은 높지 않았을 텐데, 하물며… “그럼, 역시 이 자식…?” 철용은 설마 했던 자신의 추측이 얼추 맞아 들어가는 것만 같아 열불이 났다. 분명, 이 멍청한 자식은 배수의 진이라도 치는 것마냥, 자신의 해외진출을 걸고 내일 결승전에 임하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내일 패배를 하게 된다면, 결승전을 치르기도 전에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해외 팀과 급하게 계약해버린 감독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내일 결승전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철용은 자신은 언제 이렇게 뜨겁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싶어 괜히 숙연해지기 까지 했다. “어쨌든, 아이들에겐 비밀로 하는 게 좋겠지요?” “저도 일단은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녀석이 어쩌려는지…”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너무나 심각했던 나머지 아이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수림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 장난치듯 패스 놀이를 즐기던 정화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굴러오던 공을 발바닥으로 멈춘 채 ‘왜그러냐’는 듯 얼굴로 묻고 있던 수림에게 물었다. “근데, 감독님은 왜 아직도 안 오세요? 우리가 워낙에 알아서 잘 하니까 너무 방치시키시는 거 아니에요?” “맞아 맞아, 요새 감독님이 너무 우리에 대한 애정이 너무 적어지신 거 같애.” 역시 정화가 포문을 열자 승은이의 첨언을 비롯해 모두들 마치 감독이 이곳에 없는 게 수림 탓인 것마냥 쏘아보았고, 그에 수림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소리 마 얘들아. 안 그래도 우리 감독님이 얼마나 힘드신데.” “아무리 그래도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다른 날도 아니고 결승전 하기 바로 전날인데.” 하지만 역시나 아이들의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기에 수림은 답답하기만 했다. “참나, 지금 감독님께서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거든?” “에? 무슨 상황이요?” “있지, 이건 특급 비밀인데 말이지…” 수림은 괜히 주위를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추고는 손으로 아이들을 불러모았고 아이들이 마치 경기 시작 전 파이팅을 외칠 때처럼 둥그렇게 모여들자 ‘요건 몰랐지!’라는 얼굴로 ‘왁!’하고 말해버렸다. “우리 감독님이… 드디어 해외로 진출하시게 됐단 말야!!!” “해외… 진출이요?” 수림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모든 아이들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버리자, 그제야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은 뒤였다. - 영후는 황총장이 잠시 전화통화를 하러 나간 사이에 노감독과 단 둘이 남겨지게 되자, 침대 옆에 앉아 노감독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보았다. 역시나 뼈만 남은 듯한 앙상한 손은 결국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던 듯, 잔 검버섯 등이 손과 팔 전체에 깨알처럼 박혀있었고 살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가죽은 이미 탄력이라곤 찾을래야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감독님…” 아끼던 제자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노감독은 영후의 부름에 쉽게 응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영후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빨리… 일어나세요. 잠은 이 정도면 충분히 주무셨잖아요. 저한테 그러셨죠? 점점 잠이 줄어든다고요. 그건 다 거짓말이었던 거에요? 설마 그래서 이렇게 몰아서 주무시는 거에요?” 영후는 두 손을 모아 노감독의 손을 잡아 자신의 볼에 가져가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거칠었지만, 하나도 거칠게 느껴지지 않던 손은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 움직여주지 않았기에 영후의 마음은 더욱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 다시 선수로 돌아가요. 감독님께서 원하셨던 거잖아요. 감독님이 원하신 대로 저 선수로 다시 돌아 간다 구요. 그렇게 되면, 제게 뭐가 가장 필요한지 아시죠? 그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감독님이라구요. 선수한테 감독이란 존재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서요… 저란 놈은… 저는 감독님 없으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마침 학교와의 통화를 마치고 응급실로 돌아온 총장은 차마 사제지간의 대화를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가로막기는커녕, 부디 제자의 부름에 ‘지금까지 모두 장난이었다’고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주길 진심으로 바라 마지 않았다. 때문에 좀 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려던 총장의 귀에 불현듯, 한없이 연약한 남자의 한마디가 꽂혔다. “저… 많이 무섭단 말이에요… 흐흑…” 그러자 차마 발걸음 조차 떼지 못하던 총장의 눈에선 또다시 한줄기 눈물이 주룩 떨어지고 있었다. 52부. 벼랑끝에 서는 남자 part2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말씀해주세요! 감독님께서 해외로 가시려고 계약을 하셨다는 게 정말이냐 구요?!” 남희를 다그치는 미애 이외에도 몇몇 아이들이 훈련을 모두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자 마자 남희의 룸에 들이닥쳤고, 남희는 결국 수림을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자 수림은 아이들을 막지도, 또 남희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는데, 남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잠시 심호흡을 해보고는 결국 아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이야. 그리고 너희들에게 말해주라고도 하셨어.” 결국 모든 게 엎질러 졌다는 생각에 남희는 담담하게 얘기를 했지만, 아이들은 순간 하나같이 얼굴이 바뀌고 있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거봐! 진짜 맞지? 오코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겠어??” “우왓!! 그럼 진짜 우리 감독님께서 해외로 가시는 거야? 그…” “빅리그!!!” “아, 실감 안 난다 진짜!!! 근데 왜 이렇게 안오시는 거지?? 감독님 오시면 우리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다 우선 다들 노트, 아니 이왕이면 그보다 더 큰 스케치북 같은 거 사러 가자고 해야 겠다!” “스, 스케치북??” 수림은 아이들의 황당한 반응에 더욱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인 받아놔야죠!! 우리가 축구를, 그것도 빅리그 선수와 함께 했었다는 걸 증거로 남겨야 하잖아요!!!” “야,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가자!!!!!!!” 순간 아이들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룸에서 모조리 빠져나가자 남희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이었나.’ 설마 이런 상황까지 예상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 생각해보는 남희였지만, 아무래도 그렇진 않았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남자의 마음은 단순했을 것이었다. “거짓말은 안 되는 거니까…” “그, 그렇죠?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셨죠? 저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히익?!” 수림은 남희의 속삭임을 놓치지 않고 겨우 마음을 놓으며 남희의 옆으로 다가섰지만 더 이상 무서울 수 없을 만큼의 눈으로 남희가 흘겨보는 통에 수림은 순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고 말았다. - 은밀한 하복부를 간신히 가리고 있는 길이의 유니폼 상의와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오는 검은 스타킹, 그리고 그 스타킹을 잡아주고 있는 가터벨트 차림의 윤지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어둠이 내려앉자 연 이틀 동안 무미건조하게 카메라 렌즈를 향해 포즈를 잡고 있었지만, 점점 재미가 없어지는 듯 했다. 물론 어제보다 훨씬 전문적인 조명과 여러 가지 의상도 윤지를 위해 특별히 준비되어 있었지만 역시, 재미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 앞에서 옷을 벗는 다는 게 윤지에게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저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촬영하길 바라던 리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루함은 감출 수 없었다. 한편 이런 윤지의 표정은 뷰파인더에 그대로 드러났던 모양인지, 리키는 그제야 쉴새 없이 눌러대던 셔터를 멈췄다. “힘드니?” “그보단, 지루해요.” “아,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할까?” 리키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리키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 뿐이었다. ‘계속… 계속 이 아이와 촬영을 하고 싶다…’ 윤지라는 천의 얼굴과 몸을 가진 모델을 만났다는 기적. 기성 모델도 아니었으면서도 자연스러움을 넘어, 도도함이 느껴지는 표정과 더불어 순수함과 섹시함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바디라인 또한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유니폼 상의 위로 양 옆구리에 팔을 구부려 대고 있는 뾰루퉁한 모습마저 리키는 지금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플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모델이 느끼는 감정은 사진을 담는 작가의 탓이 크다는 걸 모를 리키가 아니었기에 잠시 고민을 했는데, 순간 자신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괜찮다면 저기 ‘볼’ 가져와서 몇 컷만 더 찍을 수 있을까?” “볼? 아, 축구공이요?” 역시 축구 이야기를 꺼내자 소녀의 가슴 깊숙이 감춰져 있던 원초적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었고, 역시나 곧장 뛰어가 공을, 그것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스타킹을 신고 있는 발로 가볍게 드리블 해 오는 모습에 리키는 지금부터야 말로 이 모델과 함께 최고의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 한국여대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의 지하 주차장에 고급 세단이 멈춰 서자, 시동이 꺼지기도 전에 뒤에 타고 있던 현우가 냉큼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운전기사가 곧바로 운전석 문을 열고 뒤따라 내렸다. 언제나 문을 열어드리면 내리시라고 했음에도 언제나 미안해하며 불쑥 먼저 내리는 어린 소년을 바라보는 중년 남자의 눈은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아저씨.” “예, 도련님.” “요새 너무 피곤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오늘도 그렇고…” 뜬금없는 현우의 말에 운전기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을 뻔 했지만, 예의 평소의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도련님을 모시는 게 제가 할 일인걸요.” “저, 금방 올 거지만 혹시 늦으면요” “그런 건 걱정 마시고 천천히 말씀 나누다 오십시오.” “아저씨…” “예, 도련님.” “고맙습니다 늘…” “도련님, 갑자기 그런 말씀을…” “사실은 매일,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그러시다면, 저도 말씀 드려야겠군요.” “?” “저야말로 감사 드립니다. 아무 재주도 없는 저 같은 놈을 도련님은 언제나 사람처럼 대해주셨습니다.” “아…저씨, 그런 말씀은…” “그것보십시오. 지금 도련님께서 느끼시는 마음처럼, 저도 방금 그렇게 느꼈답니다.” “…” 현우는 운전기사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은 잘 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평소에 더 자주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도 해보고 있었다. “친구분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이윽고 충분히 소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운전기사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고, 현우 또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윽고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까지 운전기사는 현우를 계속 지켜봐 주고 있었고, 문이 닫혔음에도 현우는 여전히 자신을 지켜주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우는 핸드폰이 바지 속에서 진동해대는 통에 운전기사에 대한 고마움은 잠시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네, 저 현우에요.” ‘내일, 내 쪽은 어떻게든 될 거야.’ “저도… 준비 됐어요.” ‘괜… 찮겠니?’ 상대가 걱정하는 것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현우의 안위였기에 현우는 잠시 씁쓸하기만 했다. 언제쯤이면 남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현우는 안 할 수 없었지만, 내일이면 분명 지금까지와는 모든 게 달라질 것이었다. “제가 잘못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내일, 늦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그럼 내일 보자.’ 통화가 끝나자 현우는 멍하니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가 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는 건지 의아해했지만, 몇 층에 갈지 버튼을 누르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버튼을 누르려 했는데 누군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움직였는지 이윽고 부드럽게 상승하기 시작했고, 현우는 약간의 중력을 느끼며 서 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내 1층에 서더니 문이 열렸고, 그러자 그곳엔 다름아닌 윤지가 서 있었다. “너…?” “연습하다 오는 거야?” 현우는 조금은 놀란 눈을 한 채로 엘리베이터에 타는 윤지와 나란히 서서 물었다. 하지만 윤지는 어쩐지 평소 느껴지는 것과는 많이 다르게 느껴지는 현우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지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을 계속 감출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반짝거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현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갑자기 어쩐 일이야?” “그냥… 아무래도 내일은 인사나누기가 쉽지 않을 거 같아서.” 현우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지만, 어쩐지 윤지의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아니… 무슨 일은…” 하지만 그 무엇도 말해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소년에게 소녀는 더 이상 그 무엇도 물을 수 없었다. 때문에 너무나 답답하기만 했던 윤지는 결국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내일은, 아마 여태껏 했던 경기보다 몇 배는 힘들 거야.” “그래… 그렇겠지…” “내 말은… 그러니까, 네 응원이 필요할거란 뜻이야.” “으응… 내일 꼭 응원할게.” “내일 말고 지금. 그리고…” “?” “응원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야.” 현우는 윤지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딩동’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느새 윤지의 손에 이끌려 내리고 있었다. - 만류하는 황총장 때문에 더 이상 병원에 머물 수 없었던 영후는 결국 떠밀리듯 호텔로 돌아와 있었다. 때문에 소파에 앉은 채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여져 있는 각종 자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만 그러했을 뿐 마음은 여전히 병원에 두고 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일 결승전이 벌어진 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에 힘겹게 손을 뻗어 글씨가 빼곡한 A4 용지를 집어 들었는데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딩~동! 영후는 마치 바람이 빠져나간 듯한 인형처럼 부스스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나갔고,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는데, 그곳엔 다름아닌 윤지가 서 있었다. “감독님…” 윤지는 영후가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윤지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남자는 그제야 조금쯤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도 같았다. - “왜 이렇게 늦었어! 물 받아놓은 거 다 식었잖아…” 인기척이 들리자 혜미는 당연히 윤지 일거라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알몸 그대로 욕실에서 나와보았지만, 윤지가 아닌, 그것도 현우가 떡 하니 선 채로 자신을 바라보자 혜미는 순간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혀, 현우야? 왜 네가 여기에…?” “아, 그게… 근데 그것보단… 저기…” 어쩐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우의 모습에 혜미는 멍한 표정 그대로 자신을 내려다보고서야 그야말로 기함을 하며 욕실로 뛰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놀란 혜미는 옷을 입거나 가운을 걸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따뜻한 물이 가득 차 있던 욕조에 숨듯이 퐁당 들어가버렸다. ‘어떡해 어떡해… 바보같이 왜 옷도 안 입고! 난 몰라 히~잉…’ 혜미는 다른 사람도 아닌 현우에게 어이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게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물론 현우를 좋아하는 건 분명하지만, 좋아한다고 이런 상황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때문에 지금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바로 욕실 문 앞까지 다가와있었던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안해 혜미야. 목욕 중인 줄도 모르고…” “아, 아니야! 난 그냥… 그냥 윤지가 온 줄로만 알고…” 혜미는 어쩐지 현우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기에, 욕조 위로 길게 목을 빼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혜미의 외침이 욕실에서 공명하며 크게 울려퍼졌고 그에 더욱 창피한 기분이 들어 또다시 냉큼 물 속으로 턱 밑까지 담글 수 밖에 없었다. “내일, 결승전이지?” “으응, 여주대하고.” “자신 있지?” “누가 지켜봐 준다면. 그럴 거야.” “…” 혜미는 조금 여유가 생겨서 농담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현우로부터 당연히 돌아올 줄 알았던 답이 없자 그것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혀, 현우야, 거기 있어?” “으응…” “내일도, 꼭 보러 와 줄 거지?” “…응. 꼭, 그럴게.” 하지만 혜미는 어쩐지 현우의 미적지근한 대답이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아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욕조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혜미의 매끈한 몸에 매달리기 쉽지 않았던 물방울들이 일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딸깍. 이윽고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욕실의 문이 열리자 문을 등진 채 양 무릎을 세우고 바닥에 털썩 앉아있던 현우는 무심코 뒤로 돌아보려 했다. “혜미야.” 하지만, “돌아보지마…” 현우는 혜미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쉽게 돌아볼 수 조차 없었다. 이미 현우의 등 뒤로 촉촉한 혜미의 몸이 밀착된 채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혜미야…” “나 있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드네…” “…” “이런 적 없었는데, 이상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현우는 등으로 전해지는 혜미의 불규칙한 심장 소리를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혜미의 마음을 진정시켜 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뿐이라는 것을. 때문에 현우는 조심스럽게 뒤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작은 물방울들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혜미의 눈부신 나신이 드러났지만 혜미는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고, 현우도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에도 벅찼으니까. “헤헤, 다 젖었다…” 혜미가 눈가의 눈물을 감추려 억지로 웃으며 현우의 어깨를 어루만지자, 현우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고 또다시 무언가 말을 하려는 혜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주었다. 그러자 혜미는 양 팔로 현우의 목을 그러안으며 더욱 달려들었고, 현우도 옷이 젖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혜미의 탄력 넘치는 허리를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소년과 소녀의 키스는 결코 능숙하진 않았지만 진심이 담겨있었고, 현란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웠다. 그렇게 짧지만 평생 추억에 남을 두 사람만의 인증이 끝나자 혜미의 불규칙했던 심장은 그러나 안정되기는커녕 더욱 맹렬하게 뛰어댔다. 그러자 현우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들어 혜미의 심장언저리에 가져가 보았고, 흠칫 몸을 떨기도 했던 혜미였지만 애써 숨을 죽인 채 현우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여기에 물고기가 들어 있나 봐. 쉴새 없이 팔딱팔딱 뛰어…” “큭… 읍!” 조금은 야한 행위를 하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여는 현우 때문에 혜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결국 웃을 수 없었다. 또다시 현우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그대로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참 기분 좋은 역습이었기에 혜미는 막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입술을 열어줌과 동시에 마음의 문까지 활짝 열어주었다. - “언제 오셨어요?” “어? 아 좀 전에.” “…” 대화는 하고 있었지만 뭔가 중요한 알맹이는 쏙 빠져버린 느낌이 드는 통에 윤지는 여전히 선 채로 가만히 영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화는 잠시 멈췄음에도 영후는 금방 알아채지 못한 채 홀로 소파에 다시 앉아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는데, 한참 후에야 뭔가 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들어 윤지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 근데 왜 그러고 있니, 여기 와서 좀 앉지 않고.” “제가 방해하는 건가 싶어서요.” “응? 아 이거…” 영후는 그제야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그러나 제대로 읽지도 않고 있었던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았다. “됐지? 근데 잠 좀 자 두는 게 좋지 않겠니? 내일 경기도 있는데…” “잠이… 잘 안 와서요.” “?” 윤지는 차마 혜미와 현우를 한 방에 몰아넣고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영후는 물끄러미 윤지를 바라보더니 이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리와 보렴.” 그저 단순한 거짓말이었음에도 선수의 말 한마디를 가볍게 지나치는 법이 없는 감독답게 영후는 침실로 들어가며 윤지를 불렀다. 그러자 윤지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마치 자력에 이끌리듯 순순히 영후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섰다. “자, 여기 누워봐.” “?” 게다가 영후가 침대 옆에 서서 시트를 들어올려주며 말하자 윤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어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바보, 늘 원했던 거였잖아…’ 윤지는 늘 바래왔으면서도 이제 와서 놀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울 지경이었지만, 애써 새침한 척하며 침대위로 올라섰다. 그렇지만 섣불리 눕지는 못했는데, 윤지를 바라보는 남자는 괜찮다는 듯 고갯짓으로 어서 누우라고 말했기에 윤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후는 시트를 들어 윤지의 목 아래까지 포옥 감싸주고는 잠시 거실로 나갔다. ‘어딜…?’ 설마 자신을 내버려 둔 채 나가버리려는 것인가 해서 윤지는 살짝 걱정도 했지만, 이내 어두워지는 거실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남자는 정말로, 자신을 위해 숙면을 위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윽고 다시 침실로 들어온 영후는 이내 침실 마저 모든 등을 끄고는 침대 옆에 놓여있는 작은 무드 등 만을 약하게 남겨두고 윤지의 머리맡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자, 이제 자자.” 영후가 윤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하자 윤지는 정말 그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이 남자와의 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로. “…” “왜 그렇게 보니?” “그러고 계시면 제가 잠이 오겠어요?” “그럼… 어떻게 해줄까?” 드디어 영후가 묻자 윤지는 기다렸다는 듯 누운 채로 침대에서 한 켠으로 몸을 옮기며 빈 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올라오세요.” 뜬금없는 윤지의 행동에 영후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이내 침대에 누웠는데, 그러자 마자 윤지는 영후의 팔 하나를 낚아채고는 곧바로 자신의 베개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잠이 잘 올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저 잠들 때 까지만 이렇게 해주세요. 그래 주실 수 있죠?” “그대신 빨리 잠들기 다?” 결국 남자의 품을 얻은 대신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던 윤지는 밤이 새도록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만 싶었지만, 겨우 참으며 눈을 감아보았다. 그러자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독특한 남자의 것이 느껴지는 듯 했다. 땀도 나지 않은 몸에서 맡아지는 남자 내음이 그랬고, 일정한 간격으로 이마의 머리칼을 흔들어주는 남자의 콧바람 또한 그랬다. 게다가 팔에서조차 느껴지는 강인한 남자의 맥박이 신기해서 윤지는 잠시 자신의 들숨 날숨을 그것에 맞춰보기도 했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이 남자에게서 새로운 것들을 느껴보자 윤지는 이 남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그 때, 갑작스럽게 가졌던 섹스가 떠올랐다. ‘지금도… 그때처럼 그럴 수 있을까?’ 문득 윤지는 묘한 궁금증이 생겨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남자의 하복부 쪽을 더듬어 봤지만, 돌아오는 건 남자의 엄한 척 내뱉는 한마디였다. “어허, 코 자야지…” 때문에 윤지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조금은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혜미는 지금쯤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텐데…’ - 결승전이 열리는 아침. 3,4위전을 위해 그라운드로 몸을 풀러 나가던 전현아는 역시나 경기장으로 들어서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 4만여 관중들의 함성에 이틀간 식어있던 피를 다시금 뜨겁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저기 봐!” 앞서 나가던 설혜가 경기장 상단을 가리키며 입을 열자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무심코 바라봤지만 곧바로 하나같이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관중석은 온통 길다란 통천으로 뒤덮여 무척이나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커다란 통천 하나하나엔 한국여대 선수들의 세미누드 사진이 커다랗게 프린팅 되어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엄청난 힘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통천의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던 건, 다름아닌 ‘윤지’였기에 전현아는 꽤나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아인…’ - 한편 연습경기장에서 가볍게 몸을 풀던 아이들과는 달리 편하게 그늘에 앉아있던 은채가 핸드폰 DMB 방송을 통해 바로 옆 전주 월드컵 경기장 상황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아이들에게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야야! 이것좀 봐! 이거 다 우리 맞지??” 그 조그만 화면으로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통천의 크기는 어마 어마 했기에, 너도나도 몰려든 아이들은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것은 다름아닌 윤지의 것이었기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근데 이거 윤지 아니야? ?”, “얘 좀 보게, 얜 또 언제 이렇게 찍은 거야?”, “얼레? 우리가 찍은 거랑은 좀 많이 다르지 않어? 의상도 그렇고… 뭔가 더 고급스러운데?” 자신들의 사진도 사진이지만, 예상치 못했던 윤지의 사진과 그 사진의 고급스러움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지만, 갑자기 무슨 난린지 궁금해하며 수림과 남희가 아이들의 무리에 다가가자 은채는 감추기는커녕 두 코치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빨리요! 지금 코치님들 사진도 나오고 있다구요!!” 은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던 수림과 남희는 곧이어 작은 핸드폰 화면을 보기위해 머리를 맞대고 바라보았는데, 역시나 신문에 났었던 사진이 아닌, 또 다른 사진이 그것도 통천에 프린팅 되어 관중석에 걸려있자 남희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어머, 정말 권코치님하고 저에요!” 하지만 수림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통천을 보자 신기하다는 듯 탄성을 질렀지만, 남희는 곧바로 카메라가 가장 눈에 띄는 윤지의 사진을 비추자 고개를 들어 그라운드 어딘가를 바라보았는데 역시나 그런 사진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몸을 푸는 윤지와 혜미가 보일 뿐이었다. - 호들갑을 떠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윤지는 어쩐지 이전까지와는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듯한 혜미가 더 궁금했던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잘 잤어?” 윤지는 그저 말 그대로 ‘잘 잤냐’고 아침인사를 건넸지만, 받아들인 혜미는 ‘섹스 잘했냐’라고 느꼈는지, 깜짝 놀라며 주위를 돌아보곤 윤지에게 눈을 크게 떠 보이며 곧바로 입을 막고 있었다. “아, 진짜! 이러기야 너어?” 혜미는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주변 아이들을 경계했는데, 윤지는 그런 혜미가 참 귀엽게 느껴졌다. “뭐, 죄지었니?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그래서, 성공 한 거야?” “아, 몰라!” 혜미는 윤지의 '성공'이 뜻하는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더 당황하며 윤지를 흘겨보았지만, 긍정도 부정도 안 하는 모양새에서 윤지는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총총 걸음으로 그라운드를 산책하듯 몸을 풀기 시작했다. - 하연은 급하게 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들고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앞에 서서 하강 버튼을 누르고서 기다리는 동안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보이는 통화목록엔 오로지 ‘선배’ 뿐 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하연은 또다시 그 목록에 다시 한 번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린 후 이미 몽롱한 상태인 것만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너냐~’ “선배, 어떻게 됐어?” ‘하~암… 그렇게 밤새 전화를 하면 어떻게 될 거 같냐?’ “에이 된 거지? 그치?” ‘그래 임마, 덕분에 지금부터 한 삼박 사일은 잠만 퍼자야 할 지경이시다.’ “아, 안돼! 잘 때 자더라도 파일은 보내주고 자야지!” ‘뭐야, 네가 직접 찾으러 올 거 아니었어?’ “난 지금 경기장으로 가야 해서 그러기엔 시간이 없단 말야!” ‘아 그럼 FTP 열어놓고 핸드폰으로 아이디랑 비밀번호 보내줄 테니까 알아서 받아가라. 이 하늘같은 선배님은 지금부터 취침 하시겠으니까.’ “그래, 알았어 수고했어 선배. 그치만 혹시 모르니까 너무 깊이 잠들지는 마. 알았지?” 하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 순간만큼 엘리베이터의 하강속도가 늦게 느껴지는 적도 없었던 것 같은 하연이었다. 이내 주차장으로 내려온 하연은 자신의 차를 찾아내고는 차에 타려 했는데 난데없이 저 만치에 담배를 물고 서있던 검은 양복 차림의 두 사내가 눈에 띄었다. 하연은 순간 왜 이렇게 먼 곳에 차를 주차해놨던 건지 후회를 해 보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 다는 얼굴로 천천히 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남자들을 막 지나치려던 순간 그 중 한남자가 여유롭게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구둣발로 짓밟아 끄면서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혹시 박하연 기자님 되십니까?” “그런… 데요? 누구시죠?” “잠시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 지금 여자 축구 결승전 취재하러 가야 해서요.” 하연은 두 남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뒷걸음질 치면서 핸드백을 뒤로 돌려 호신용 최루액 분사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젠장, 어디에 있는 거야…” 하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남자가 하연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하연의 손은 더욱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겁 먹지 마시고 저희와… 으악!!” 순간, 핸드백에서 겨우 찾은 최루액이 남자의 얼굴에 분사됐고,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연은 차는 버려둔 채 주차장 밖으로 뛰어나가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했다. ‘제발 받아 선배!!!’ “저년 잡아!!!”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는 남자의 외침과 동시에 다른 남자와 차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남자 둘이 득달같이 하연을 쫓아왔고, 하연은 죽을 힘을 다해 달려봤지만 남자들의 주력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거의 남자들의 손에 하연이 따라 잡히기 직전, 핸드폰에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왜 또’ “선배! 그 파일 아악!” 하연이 겨우 연결된 선배와 통화를 하려던 순간 결국 뒤쫓아오던 한 남자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히며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여보세요? 하연아! 하연아!!’ 퍼억! 퍽! 퍽! 미처 하연과 통화를 하지 못한 하연의 선배의 소리는 그러나 바로 빼앗겨 구둣발에 뭉개지고 말았다. 이윽고 최루액을 마셨던 남자가 도착하자 다른 남자의 손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하연은 공포로 인해 온 몸이 떨리고는 있었지만, 애써 기죽지 않으며 노려봤는데, 그런 행동은 정체 모를 남자에겐 화만 돋굴 뿐이었다. 짝! 방심하고 있다가 크게 당한 남자는 잡혀온 하연의 뺨을 고개가 돌아갈 정도의 강도로 때렸고, 하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는데 입술에선 붉은 피가 배어져 나왔다. “멍청한 년… 어서 차에 태워!” 이어지는 남자의 명령에 거구의 남자는 하연을 바로 어깨에 들춰 메고는 그들의 양복 색깔과 똑같은 검은 색 승용차에 태웠다. - “내가 찾아온 걸 알면 좀 놀라는 척이라도 해주려나…?” 부상을 입은 왼쪽 무릎에 임시 고정 부목을 한 채로 어렵게 자신의 스포츠카를 몰고 온 근명은 하연의 잡지사가 있는 건물 주차장 입구를 찾아내곤 들어가려는 순간, 맞은 편에서 거칠게 올라오는 차 소리가 들려 잠시 멈춰 섰다. “주차장에서 뭐 저렇게 거칠게 운전들을… 어… 바… 박기자님? 박기자님!!!” 자신의 차를 스쳐 지나가는 검은색 승용차의 앞 유리를 통해 보이는 뒷좌석의 가운데엔 분명 정신을 잃은 듯한 하연이 타고 있었고, 하연과 같이 동승해 있는 남자들은 전혀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딱 보기에도 ‘우린 나쁜 놈들 입니다.’라고 말하는 얼굴들이었기에, 근명은 자신이 아직도 운전에 서투르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악셀레이터를 깊숙이 밟아 빠른 속도로 주차장으로 내려가 다시 차를 돌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 “경기가 막 끝났습니다.” 경기장에 갔다가 라커룸으로 숨가쁘게 달려온 수림은 문을 벌컥 열고는 급한 소식을 알려주는 것 마냥 입을 열었지만, 아이들은 그리 놀라는 얼굴도 아니었다. “경기는…?” 남희 또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수림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답했다. “당연히 한양여대가 이겼어요. 3 : 1 로.” 그러자 아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쩐지 더 힘을 내는 것만 같았다. ‘다행이다.’ 남희는 타 팀의 시합 결과마저 좋은 쪽으로 흘러 무척이나 안도했다. 분명 아이들이 어렵게 이긴 상대였던 만큼 3,4위 전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실력을 내 주지 않는다면, 자칫 상대적 비교라는 함정에 빠지며 경기 시작 전부터 힘이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남자는 경기를 소화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땀이 난 상태로 라커룸으로 돌아와 있던 아이들을 고마움을 담은 눈으로 한 명 한 명 바라봤다. 처음엔 축구 다이어트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에 넘어와 축구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영후 자신 만큼이나 축구를 사랑하게 된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서며, 이렇게 결승까지 올라와버렸으니, 영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간간히 자신을 바라봐주는 아이들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때문에 영후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에서 마음으로 모든 게 전해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자, 그럼 또 즐기러 나가볼까?” 아이들의 손을 모으고 영후는 파이팅을 외쳐주었고, 아이들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듯 쩌렁쩌렁한 구호들이 라커룸을 맴돌았다. 이내 아이들이 복도로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 영후는 잠시 남희와 수림을 불러 세웠다.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 윤지는 아이들과 함께 라커룸을 빠져 나왔지만 어쩐지 라커룸 문 밖에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이 이 남자와 즐거울 수 있는 마지막 날이란 걸 누구보다도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즐겁게 축구를 하는 것도. 그리고 저 남자를 두 눈에 넣고 있는 것도. “윤지야, 뭐해?” “어? 어… 아니야 아무것도, 나 화장실에 갔다가 나갈게.” “그래… 알았어.” 뭔가 평소와 같지 않은 윤지의 행동과 얼굴에 혜미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하지만 지금의 혜미는 지난 밤에 경험했던 생소한 느낌들이 아직도 온 몸을 휘감고 있는 것만 같아, 윤지에게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라운드로 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남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때문에 혜미는 윤지를 그대로 남겨두고 그라운드로 나가기 위해 아이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믹스트 존으로 달려나갔지만, 윤지는 여전히 라커룸의 출입문을 등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 “드디어, 오늘이 와버렸네요.” 수림과 남희는 영후가 말하는 ‘오늘’이 ‘결승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오늘’은 분명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란 걸 수림도 남희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 그리고 남희씨와 수림씨에게 늘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구요. 하지만” 이 남자의 입에서 ‘하지만’이란 말이 튀어나오자, 무슨 말이 이어질 것인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두 코치의 마음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직 제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까지 외면하며 살아갈 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좋은 코치 두 분이 계셔서 전 걱정 없이 떠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오늘…” 남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정말 이길 수 있을까요?” 비겁한 줄은 알지만, 남희는 영후가 처음 한국 여대 총장실에서 했었던 ‘약속’을 기억해내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후에게 물었고, 수림마저 그 순간만큼은 남희의 물음대로 영후가 ‘약속’이란 것을 지켜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두 분은 그럼 우리 아이들이 오늘 질 거라고 생각하나요?” 분명 오늘 경기만큼은 남희도 수림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또 허망하게 질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경기는 아니었지만 분명 우승후보로 꼽히던 팀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올라온 한국 여대 축구팀 이었다. 물론 체력도 떨어졌고, 부상과 퇴장으로 인해 더욱 입지가 좁아지긴 했지만, 애초부터 한국여대의 체력도 입지도 그리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아이들의 축구 두뇌와 축구공이 둥글다는 속설, 그리고 바로 ‘이 남자’를 믿으면 되는 것이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아이들을 믿기로 합시다. 그게 우리가 아이들에게 했던 약속 아니겠어요?” 그 때였다. 문 밖에서 반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누군가가 외쳤던 건. “저도 꼭! 약속 지킬게요!!!” 그리곤 뛰어나가는 소리에 영후는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윤지의 메모가 떠올라 조금은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던 윤지를 재워준 후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윤지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지만, 윤지의 앙증맞은 글씨가 적혀있던 메모지 한 장이 남아있었다. 때문에 코치들에게 윤지의 메모를 보여주려 바지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지만, 영후가 꺼내 들어야 했던 건 메모지가 아니라 맹렬하게 진동해대던 핸드폰이었다. “어, 근명아.” ‘선배! 지금 박기자님이 납치됐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하연이가 뭐?!” ‘아이 씨발! 한국말 못 알아 들어요?! 어떤 미친 새끼들이 박기자님을 납치해갔다고요!!!’ “그런…! 알았어! 내가 지금!” 영후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뛰어 나가려 했지만, 순간 우뚝 멈춰 섰다. “감… 독님?! 무슨 전환데 그렇게…” “아, 그게… 지금 하연이가… 하연이가…” 두 코치는 더없이 창백해져 가는 남자의 얼굴만으로도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라커룸에 남겨진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랬다. 조금 있으면 바로 이곳에서도 한국여대와 여주대의 '엄청난' 결승전이 벌어질 것이었다. 때문에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영후의 얼굴만으로도 두 코치는 더없이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희는 알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 그 여자를 앗아가게 된다면 이 남자의 세계는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때문에 남희는 결승전이 끝나면 홀가분하게 감독을 놓아주기 위해 취득했던, 그래서 엊그제 찾아왔던 작은 면허증을 남자 앞에 조심스럽게 내 밀었다. “나, 남희씨… 이건…” 남희가 영후에게 내민 건 다름아닌 ‘축구지도자 D급 라이센스’였다. 그리고 그 자격증엔 선명하게 ‘권남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때문에 영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남희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것 가지고는 안심하실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요 감독님! 어서요!!” 영후는 두 코치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지만, 이윽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남희의 허락과 동시에 그대로 라커룸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53부. Last Scene part1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그야말로 사색이 된 얼굴을 하고서 무작정 경기장 밖으로 한달음에 뛰쳐나온 영후는 그러나 과연 어디로 가야 할지 감조차 잡지도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하지만 그 순간 영후의 머릿속에선 마치 한줄기 빛처럼 이틀 전 근명과의 전화 통화가 떠오르고 있었다. - ‘말로만 그럴게 아니라, 내가 좀 전에 메일 보냈으니까 무조건 동의 하기나 해요. 알았죠?’ “응? 동의? 그게 무슨 말이야?” 잠결에 전화를 받자마자 영후는 근명에게 황당한 동의를 강요 받고 있었지만, 하도 난리를 치는 덕에 엉겁결에 허락했는데 알고 보니 이미 전화를 받기도 전에 이메일 하나가 와있었다. “이건가?” 영후는 잠시 통화를 멈추고 핸드폰 화면을 열심히 터치하며 메일을 열었는데, 쉽게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동의하라고 했으니 ‘동의’ 버튼을 누를 수 밖에 없었다. - ‘제발…!’ 영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근명에 의해 인스톨 되었던 프로그램 하나를 실행시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핸드폰에는 지도 모양의 그림과 함께 근명의 대략적인 위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됐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로라니…” 우선 근명의 위치라도 확인한 영후는 잠깐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고속도로 중 가장 분기점이 많은 경부고속도로에서 내려오고 있다면 거꾸로 전주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영후로서는 함부로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도대체 뭘 타고 가야…’ 하지만 그 순간 영후의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무엇’이 보이고 있었다. - 남희와 수림에겐 그저 한 남자가 빠져 나가버렸을 뿐인 고요한 라커룸마저 마치 자신들의 마음 속처럼 텅 비어 보이는 것 같았다. 때문에 남희도 수림도 이제는 경기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선수들이 입장하는 듯 경기장 가득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어김없이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기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가요, 언니.” 조금 먼저 정신을 차린 수림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한 남희를 부축하며 말하자 남희는 그제야 겨우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는데 순간 한국여대 감독이 서 있던 자리에 작은 메모가 떨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건…?’ 남희는 그 순간 무척이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메모를 집어 들었는데, 절반이 곱게 접힌 메모지의 한쪽엔 언제나 익숙했던 남자의 필체로 한국여대의 포메이션이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그 포메이션은 이미 라커룸의 화이트보드에 크게 적어놓았던 것과 다를 게 없었기에 남희는 잠시나마 샘솟았던 기대를 접고 이내 들고 있던 노트 사이에 끼워 넣었다. - 한편 관중석에 홀로 자리잡고 있던 현우는 한국여대 선수들과 그 선수들을 에스코트해주는 아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경기장으로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감독과 코칭스탭은 언제나 경기가 시작하기 바로 직전 즈음에 등장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등장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일렬로 선 채 애국가를 부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한국여대 감독의 모습은 코빼기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나오시는 건가…?’ 어쩌면 보통의 경기와는 다른, ‘결승전’이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더욱 심사숙고를 하느라 한국여대 감독이 늦게 나오는 것인가 싶어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지만 역시나 감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잔뜩 곤경에 처한 듯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곤 차마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는 두 코치의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현우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있을 뿐이었다. ‘박기자님…’ 때문에 현우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확신으로 바꾸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마침 그때 현우 옆으로 비어있던 두 자리의 주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현우는 두 남자들에게 먼저 인사를 했어야 했지만, 그보다 먼저 뭔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한국여대의 벤치를 가리켰다. “아이고 현우야, 좀 늦었” “아저씨! 뭔가 이상해요!” “응? 뭐?” “저기 좀 보세요! 한국여대에… 감독님이 없어요!” 평소답지 않은 현우의 어수선함에 규식은 조금 놀라며 현우의 손끝을 따라 한국여대 벤치를 바라보았다. “보자… 에이, 경기도 아직 시작 안 했으니 아직 안 나왔겠지. 설마 결승전을 앞두고 어디 도망이라도 갔으려고…” “하지만…” 현우는 공교롭게도 하연의 전화마저 꺼져있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기자’의 핸드폰이었다. 소식과 정보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의 전화가 꺼져있다는 것 만으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그라운드로 들어서고 있는 ‘그분’의 표정이 묘하게 대비되고 있었기에 더욱 현우의 마음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 “응? 왜?” 철용은 이번엔 현우가 자신을 다급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부르자 역시 규식처럼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현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박기자님 전화번호 아세요?” “박기자? 아, 하연씨? 그야, 알지. 근데 그건 왜?” “그럼 지금 한번 만 전화 좀 해보시면 안될까요?” “지금? 글쎄, 뭐 전화를 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뜬금없이 박기자한테 전화는 왜?” “빨리요!” 철용은 갑자기 현우가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좋은 자리를 몇 번이고 신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정도쯤은 당연히 들어주겠단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내 철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귀에서 떼며 말했다. “어라, 꺼져있다는 데?” “그죠? 꺼져있다고 하죠??” “어. 근데 왜 네가 박기자 전화를?” 철용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현우는 이미 꽉 들어찬 관중석을 헤치며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기에 그 어떤 답도 들을 수 없었다. - “코치님!!! 코치님!!!!” 남희와 수림은 소란스런 관중석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남자애의 외침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곳엔 다름아닌 현우가 있었다. 관계자가 아니었기에 경기장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현우는 경기장에서 벤치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내려와 수도 없이 두 코치들을 불렀던 것이다. “현우야!?” 그저 인사를 하기 위함이 아닌 뭔가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기에 수림이 먼저 관중석 가까이로 걸어가자 현우는 무어라 수림을 향해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누드 사진 속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수림이 가까이에 오자 관중석에선 카메라 플래쉬 세례와 함께 환호성이 쏟아지고 있었기에 그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았다. 때문에 현우는 팔을 휘저으며 밖으로 나와달라고 사인을 보내고는 자신도 인파를 헤치며 출구로 뛰어나갔다. - 영후의 시선이 머문 그 곳에선, 마치 말발굽소리 같은 불규칙적인 배기음이 들리고 있었고, 영후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소리의 진원지인 외부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야, 죽이지 않냐? 이번에 내가 장만한 할리데이비슨 로드킹 클래식이시다. 야야, 아무데나 함부로 만지지 말고!!” “오, 이게 그 유명한 할리데이비슨이구나. 하여간 졸라 비싸 보인다. 거기다 네비게이션까지 달아놓고… 대체 이번엔 또 얼마나 꼴아 박고 샀냐?” 돈지랄 참 잘한다는 친구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연신 거들먹거리기 바빠 보이던 오토바이 주인은, 터질 것 같은 검은색 가죽바지와 더워 죽을 것만 같은 가죽 자켓이 무척이나 불편했지만 전혀 안 그런 척 양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씩을 펴 보였다. 그러자 친구들 중 한 사람이 놀라며 물었다. “유…육 백만원? 그렇게나 비싸?” “야, 장난해?” “그렇지? 그렇게 비싸진 않지? 뭔 오토바이가…” 하지만 오토바이 주인이 머리에 두르고 있던 붉은색 두건을 세심하게 고치며 입을 열자 더욱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삼천삼백이라고.” “에에?! 고작 오토바이를 삼천 삼백이나 주고 샀다고…?!” “고작 오토바이라니!!! 이래봬도 이 모델은 돈만 준다고 쉽게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냐 하면 트윈 캠 엔진에 배기량만 1584cc에다가” 하지만 그 순간 오토바이를 등지고 일장연설을 하던 남자의 뒤로 다급하게 영후가 뛰어와 그대로 올라타고는 지진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은 천둥소리만을 남기며 유유히 사라지자 오토바이 주인은 너무나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고, 친구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바, 진짜 좋은 오토바이긴 하구나. 졸라리 폼 나지 않냐?” “근데 왜 네 오토바인데 남이 타니까 더 뽀대가 나는 거냐? 크크크” 때문에 눈뜨고 코 베인 오토바이 주인은 화를 내거나 신고를 했어야 할 타이밍이었건만, 역시나 친구들의 의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 본부석 쪽 터치라인 가까이의 그라운드에 일렬로 정렬해 있던 선수들 앞으로 조전무를 비롯한 축구계 인사들이 결승전인 만큼 직접 인사를 하러 다가오자 역시 윤지는 조금은 경직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목적을 위해서 손을 잡고 있었을 때 조차 무섭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서로가 완벽한 적이 되어버렸으니 왜 그렇지 않았을까. 때문에 마치 그 누구보다도 자애롭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로 점점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조전무에 윤지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바로 옆의 지영이와의 악수를 끝내고 나서 드디어 조전무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서자 윤지는 최대한 덤덤한 얼굴을 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허허, 재밌는 경기 부탁합니다.” 그러나 윤지의 우려완 달리 마치 전혀 모르는 사이라는 듯 조전무는 느끼한 웃음을 흘리며 악수를 하는 손을 왼손으로 한 번 더 덮어주었는데, 안경 너머의 시선과 함께 손에 느껴지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더러운 느낌에 윤지는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 라커룸이 보이는 통로로 수림이 들어서자 현우와 그 뒤로 규식과 철용이 서 있었다. 때문에 수림은 잠시 멈칫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현우에게 다가갔다. “현우야 갑자기 무슨” “저, 감독님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아, 그게…” 다짜고짜 현우가 인사도 없이 곧바로, 그러나 그저 영후의 위치를 묻고 있었음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수림의 얼굴을 보고서야 규식도 철용도 현우의 걱정이 그저 웃어 넘기고 말 것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영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역시나 영후에게 모든 걸 걸고 있던 철용이 그제야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신중한 모습으로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정황을 짜맞춰보던 규식은 현우의 추측까지 종합해보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영후놈이 아닌, 영후의 주변 사람에게 문제가 생긴 거군요. 이를테면, 박기자라던가…” “!” 역시나 정곡을 찔린 듯 사색이 되는 수림의 얼굴에 현우도 그제야 자신의 걱정이 기우에 그칠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때문에 현우는 자기도 모르게 양 손으로 수림의 양 어깨를 부여잡고 몇 번이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런 거에요? 코치님! 정말 그런거냐구요?!” “현우야, 그게… 실은…” 감추려 해도 더 이상은 감출 수 없음을 깨달은 수림은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영후에게 걸려왔던 전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러자 세 남자의 얼굴은 모두가 한치도 다르지 않게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역시나 가장 분노하고 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현우였다. - 국민 의례가 끝나자 한국여대 아이들이 가운데 서 있는 주,부심들과의 악수를 시작으로 여주대 선수들과 차례차례 악수를 하기 시작했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들을 따라 여주대 선수들의 손을 잡았다 놨다를 반복하던 윤지는 그러나 자신의 손을 조금은 힘을 주며 잡고 있는 강인혜 때문에 잠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윤지?” “?” 늘 의례적인 절차였던 만큼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 했던 윤지는 여전히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있는 강인혜의 얼굴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강인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곤, 이윽고 윤지의 손을 놓아줌과 동시에 담담하게 한마디를 남기곤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오늘, 기대할게.” “…” 윤지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사진촬영을 위해 여주대 벤치 쪽으로 돌아가는 강인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내 자신을 부르는 한국여대 아이들 목소리에 자꾸만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흔들어 깨끗이 비우고는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한편 한국여대 아이들 또한 경기 시작 전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벤치 앞에 이열로 서서 어깨동무를 했는데 그 순간, 꽤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노! 너무 노멀하다구~” 언제 왔는지 포토라인에 사진기자들과 섞여있던 사진작가 리키가 한국여대 선수들 앞에서 장난스런 얼굴로 나타나자 아이들은 어쩐지 잠시 긴장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고는 이내 씨익 미소 짓기 시작했다. 그리곤 딱딱했던 이열 횡대를 허물어뜨리곤 미자를 가운데 두고는 마치 모델이라도 된 양 서로 다른 그러나 꽤나 멋들어진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백미는 역시 과감하게 맨 앞으로 나와 마치 그라운드가 침대라도 되는 양 잔디에 비스듬히 누워버린 아라였다. - 사진 촬영이 끝나고 아이들이 그라운드로 달려나가자 경기 시작 전 주심의 동전 던지기를 통해 여주대의 진영을 선택한 심서연은 주심 및 선심들과 악수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혜미의 손을 잡았지만 자꾸만 한국여대의 벤치쪽을 힐끔거리며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근데 너희 감독님, 어디 계신 거니?” “글쎄, 아마 화장실에라도 가신 거 아닐까?” 혜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경기장 어느 곳에서도 아빠와 현우마저 보여지지 않고 있었기에 그로 인한 불안감이 더욱 배가 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저 애가 원톱?” 서연이 윤지를 돌아보며 묻자 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어쩐지 조금은 걱정을 하는 얼굴로 서연이 말했다. “오늘 경기는 그때처럼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전해줘.” “글쎄… 그 말은 아마 너희 팀에게도 해당되는 말 일거야.” 충고를 도발이라고 받아들인 혜미는 물론 담담하게 말했지만 결연했기에 심서연은 무어라 더 말을 하지 못한 채 결국 선수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라운드로 달려나갔다. - 이미 경기장 전체가 ‘쿵쿵’거리며 울려댈 정도로 관중들의 함성이 가득 차 있었지만, 복도에 있던 세 남자의 얼굴엔 긴장감만 감돌고 있었고, 가장 안절부절 못하는 건 역시나 연신 영후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있던 철용이었다. “어쩌죠 선배? 이 자식 진짜 전화도 안받는데요. 이거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 먼저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 해결이 되는 문제 같았으면 진작에 그랬을 테지. 아마도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럼 무작정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을 겁니까? 예?!” “난들 어떻게 하겠나?!”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철용에게 버럭 화를 내버렸지만, 사실 규식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영후가 어디로 갔는지도 짐작할 수도 없었을 뿐 더러 행여 영후가 전화를 받아준다고 해도 자신들에게까지 위험부담을 나누려 하진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깊은 침묵으로 일관하던 소년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 “?” “감독님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현우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규식도, 철용도 알 수는 없었지만 부디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래볼 뿐이었다. - 혜미가 그라운드 안으로 달려오자 드디어 완전한 원을 이룬 한국여대 아이들은 언제나 그랬듯 농담을 주고 받으며 최대한 즐겁게 경기를 시작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늦어 늦어. 만날 혜미 너 때문에 경기를 늦게 시작 한다니깐?”, “맞아맞아. 아무래도 우리 빼놓고 몇 장이라도 더 찍힐까 싶어서 그런 거 같애.”, “그나저나 관중석의 저 녀석들은 언제 또 저런 걸 만들어 온 거야? 창피하게.”, “왜? 난 좋은데? 생각해봐 또 언제 우리 사진을 저렇게 크게 볼 수 있겠어? 난 경기 끝나면 달라고 할까 생각 중인데?”, “야, 저렇게 큰 걸 어디다 놓을려구? 설마 너희 집, 저만한 걸 걸어놓고 살 정도로 부자였던 거야?” 긴장을 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시나 아이들의 대화가 잡다한 수다로 발전되자 결국 혜미가 제동을 걸었다. “자자, 그만들 하고. 오늘 경기 마지막이라는 거 다들 잊지 않았지?” “두말하면 잔소리지.” 역시나 미자가 장갑을 낀 손으로 양쪽의 미애와 승은이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며 답했다. “하지만 우리 감독님한테도 이 경기는 마지막이니까, 그러니까…” 혜미는 무심코 말을 꺼내다 말았다. 이 이야기는 사기를 올리는 데 그리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잠시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윤지만은 예외였다. “감독님께 ‘골’로 답하자.” 역시나 간단명료한 윤지 덕분에 아이들은 모두가 진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기세를 이어가려는 듯 곧바로 혜미가 손을 내밀자 아이들의 손이 순식간에 위로 포개졌다. 그러자 혜미는 관중석의 함성을 이기겠다는 듯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한국여대!” 물론, 곧바로 그에 뒤지지 않겠다는 아이들의 합창 또한 이어졌고, “파이팅!!!!!!!!!!!!!!!!” - 한편 남희는 영후와 아이들 앞에선 내색하지 못했었지만 실은 여주대의 선발 명단을 받아 들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려했었던, 그러나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 결국 결승전에서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강소연, 강인혜… 설마 했는데 하필 전혀 알지 못하는 이 두 명이 그것도 동시에 선발 출전 하다니…’ 게다가 그 둘은 센터서클에 마주선 채 주심이 휘슬을 불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남희는 당황하며 여주대의 벤치를 쳐다봤지만, 느물거리는 얼굴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는 여주대 이영기 감독의 표정은 전혀 결승전을 맞이하는 감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보였다. - ‘투톱…인가?’ 윤지는 센터 서클 밖에 선채로 여주대의 투톱을 바라보며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남자 같은 체격을 갖추고 있던 강소연보다 어쩐지 그 옆의 강인혜에게 좀더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예상하고 겁부터 먹을 필욘 없었다. 어차피 경기가 시작되면 이들에 대해 알게 될 것이었고, 더군다나 이 둘이 ‘공격수’라면 혜미가 어떻게든 막아줄 것이었으니까. 때문에 이윽고 휘슬소리가 울려 펴지자 윤지는 또다시 복잡해지던 머릿속을 깔끔하게 지우며 여주대 진영으로 바람처럼 달려 올라갔다. - 수림은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양 선수들이 서 있는 모양 그대로 노트에 포메이션을 그려보았다. 여주대--------------------------------------------------한국여대 ------------강소연-----------------------------윤지 ------------강인혜-----------------------------아라 강나루--박성은--김인영--윤지수-----정화----지영----수정----소영 김소정--이유라--심서연--홍진아-----승은----혜미----미애----나경 ------------윤사랑-----------------------------미자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노트에 적어보고 나니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두 팀의 포메이션이 똑같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거울로 비춰놓은 것처럼 똑같잖아?! 그럼, 포메이션이 같다면 어느 팀이 더 유리하지? 투톱 보다는원톱을 막아내기가 우리 아이들이 편할까? 아니지 미드필드 싸움이 치열할텐데 아라랑 수정이 지영이가 더 힘들지 않을까? 참, 그럼 설마 저 강인혜라는 아이도 설마 전현아 같은 타입일까…’ 경기가 시작되자 수림은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고민에 또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변화된 여주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에 밑도 끝도 없는 고민은 일단 멈춘 채 집중해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시작했다. - “아까부터 차 한대가 따라붙고 있는데, 어쩔까요?” 고속도로를 달리던 검은색 벤츠의 운전기사가 조금은 경직된 얼굴로 중국어로 묻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조금은 더 무게감이 느껴지는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역시 중국어로 물었다. “경찰… 인가?”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경찰이 저런 비싼 차를 몰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요.” 운전기사는 백미러로 다시 한번 근명의 차를 확인하며 답했다. “그럼, 이 년과 아는 놈이겠지. 뭐 어차피 잘됐군. 이 년의 기둥서방한테 따로 전화를 하지 않아도 지금쯤 이미 상황파악이 됐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상황 봐서 알아서 따돌리던지 하라고. 어차피 우린 이년으로 그 감독 놈만 유인하면 되는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윽고 운전기사는 악셀레이터를 밟아 조금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자신이 따라붙고 있다는 것을 절대 모를 거라고 생각하던 초보 운전자 근명은 이윽고 점점 거리가 벌어지자 역시 악셀레이터를 좀더 깊숙이 밟아보았는데,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기에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참, 선배!’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운전에만 집중하느라 도무지 어디로 가려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던 근명은 전방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단축 번호를 눌러 영후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자 철용이 전화했을때완 달리 소란스런 엔진음과 함께 거센 바람소리까지 섞이며 영후의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어! 근명!’ “선배! 나 지금 고속도로에 들어섰어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근명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뒤쫓기만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따라가긴 하는 데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건지, 난 지리에 어둡다고요!” ‘일단은 고속도로를 탔지만, 분기점이 많으니까 어디서든 빠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난 국도로 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어쨌든 네 핸드폰 위치를 계속 확인하면서 가고 있으니까 근명아, 절대 놓치면 안돼!’ “알았어요 선배! 어떻게든 따라가고 있을 테니까 빨리 와야 돼요!” ‘그래, 곧 만나자!’ 이윽고 전화가 끊기자 그새 또다시 거리가 벌어졌기에 근명은 또다시 악셀레이터를 밟아보았고, 그러자 아우디 R8의 엔진은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 주심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자 여주대 공격수 강소연과 강인혜의 발에 연달아 터치된 공은 그대로 후방으로 패스됐다. 하지만 바로 뒤에서 공을 받은 중앙 미드필더 박성은은 곧바로 한국여대 진영으로 크게 질러 넣었다. 팡! 그와 함께 전방으로 공격수 강소연이 득달같이 올라섰지만, 한국여대의 페널티 에어리어에 거의 근접할 정도로 날아온 공은 곧바로 혜미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자 혜미는 곧바로 전방을 쳐다보았고 역시나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윤지가 보여지고 있었기에 지체 않고 장거리 패스를 날렸다. 파~앙!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공과 더불어 윤지를 바라보던 혜미는 그러나 공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러나 속도를 전혀 줄이지도 않고 돌진하던 강소연과 그대로 어깨를 부딪혔다. 퍼억! “으앗!” 공과 전방을 바라보느라, 그리고 공도 안가진 상태로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파울을 당하자 혜미는 그대로 한 바퀴를 구르며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졌는데, 강소연은 마치 겨우 스친 것 뿐인데 이 정도로 넘어질 줄 몰랐다는 얼굴로 심판에게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하지만 심판이 미처 바라보지 못하고 경기를 계속 이어가자 강소연은 그제야 왼쪽 어깨를 어루만지며 일어서고 있던 혜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 난 또 그렇게 쉽게 넘어질 줄 몰랐지.” 도발하기 위함인지 어쨌든 고의적으로 몸을 날린 것이 분명해보여 혜미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어보았지만, 그보단 어쩐지 앞으로 수비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더욱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 정도 체격으로 계속해서 밀고 들어온다면…’ 게다가 강인혜 또한 아직 어떤 스타일의 공격수인지 보여주지 않고 있었기에 혜미는 경기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점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고 싶은 마음에 관중석으로 잠시 눈을 돌려보았지만, 관중석 그 어디에서도 현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기에 자꾸만 어젯밤이 떠올라 조바심마저 생기고 있었다. - 어떻게 침대로 오게 된 건지 혜미도 현우도 알 수는 없었지만, 길고도 진했던 키스를 잠시 멈췄을 땐 이미 그 둘은 침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어머, 근데 잘못 올라왔다.” “응?” “여기, 윤지 침대야.” “에? 진짜?!” 그제야 현우가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는데, 이미 늦은 뒤였다. 미처 물기를 닦지 않았던 혜미의 젖은 몸 덕분에 윤지의 침대는 흥건하게 젖어있었으니까. 때문에 현우는 어쩔 줄 몰랐지만, 그런 현우의 모습마저 혜미는 무척이나 좋았다. “아, 이거 어쩌지?” “괜찮아. 그것보다… 이리와…” 여전히 누워있던 혜미는 침대 시트로 살짝 몸을 가리면서도 한 손을 뻗어 현우를 끌어당겼고, 그제야 현우도 혜미의 손에 그대로 무너지며 혜미의 몸 위로 조심스레 올라갔다. “근데 언제 이렇게 벗었어?” “어? 어어… 너 혼자 그러면 창피할까봐…” “피이… 핑계는. 역시 넌 바람둥이였어.” “에에?!” “키스도 그렇고, 침대로 날 데려온 것도 그렇고, 옷도 순식간에 벗고 말이지…” “아, 아니야 난 그저…” “바보.” 도대체 여자에 대해, 아니 혜미에 대해 종잡을 수 없었던 현우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혜미는 그런 현우를 그대로 꼭 끌어안아 주었고, 그제야 현우는 이번에도 장난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얇은 시트 한장을 사이에 두고 온 몸을 밀착한 두 사람 중 아무래도 조금 더 긴장하고 있던 건 역시나 혜미였다. 그냥 몸을 맞대고 있기만 해도 긴장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어느새 잔뜩 부풀어 있던 현우의 그것이 자꾸만 자신의 하복부를 찔러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혜미는 계속 키스를 하고 있으면서도 조금씩 그쪽으로 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키스를 잠시 멈추곤 숨을 고르던 현우 역시 조금 더 경직되고 있는 혜미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니?” 혜미는 이렇게 순수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며 묻고 있는 현우가 차라리 진짜로 바람둥이였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해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키스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안고 있었으면서도 도무지 함부로 자신의 몸을 탐하지 않고 있었기에 괜히 뭔가를 바라고 있던 자신만 야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현우에 혜미는 어쩐지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달리 생각해보니 현우가 또 여체에 무척이나 능숙했더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좋아지지 않았을 것도 같았다. '아니. 어쨌든 현우니까 좋은거야. 현우라서.' 때문에 혜미는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옆으로 나란히 누운 상태에서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보았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현우의 한껏 부풀어 있는 물건을 조심스럽게 잡아보았다. “앗!” 역시 현우는 갑작스런 혜미의 행동에 무척이나 놀란 눈으로 혜미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현우를 바라보던 혜미도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아직, 다 커진 게 아닌가?’ 하필이면 혜미가 처음 본 남자의 물건이 전지훈련을 떠났었던 그때, 윤지 때문에 억지로 본 영후의 것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혜미는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감독님 것 같은 게 몸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난 아마 거기가 찢어져서 죽어버릴걸?’ 때문에 혜미는 호흡도 불규칙해지며 얼굴마저 빨개져 있는 현우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물론 한 손엔 여전히 현우의 물건을 꼬옥 쥔 채로. “혜, 혜미야…” 현우는 혜미의 행동을 한치도 예측할 수 없어 조금은 다급하게 혜미를 불러봤지만, 곧바로 자신의 물건을 입에 가득 넣어버리는 혜미를 막을 순 없었다. “아앗! 혜, 혜미…야…” ‘분명 이렇게 하면 남자들이 좋아한다고 윤지가 그랬어! 그러니까 현우야 너도 좋은 거지?’ 혜미는 입에 넣기에도 좋은, 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린 분홍빛의 현우 물건을 정성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입 속으로 빨아들여보았다. 그러자 순간 현우의 엉덩이까지 딸려 올라오는 것 같았는데, 그런 반응 만으로도 혜미는 처음이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거라는 자신감이 생겨 과감히 현우의 물건을 손으로 왕복시키며 귀두부분을 사탕을 빨듯이 정성스럽게 빨아주었다. "쩝, 후룩. 쩌업… 후룹 쩝…" 한편 현우는 혜미의 돌발행동 덕에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침대까진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했기에 무척이나 조심스럽기도 했고 또한편으론 남자답지 못하다고 실망할 까봐 조금은 불안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 자신의 물건을 정성스럽게 입에 넣고 사랑해주는, 게다가 몸을 가리고 있던 침대 시트마저 흘러내려 작지만 예쁜 가슴을 드러내 보여주는 혜미 때문에 현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결국 척추를 타고 오르는 짜릿한 쾌감이 느껴져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혜, 혜미야! 그, 그, 그만… 나, 나올 거 같!!!!” “읍!” 순간 현우는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기는커녕 혜미의 따뜻한 입 속에 그것도 순식간에 폭발해버리고 말았기에 무척이나 당황했는데 그러나 혜미는 여전히 폭발하며 정액을 내뿜고 있는 현우의 물건을 입안 가득 넣은 채 사랑을 담은 눈으로 현우를 올려다 보았다. “아… 혜미야…” “쭈읍 쭈읍… 꿀꺽!” “혜, 혜미야?!” 현우는 눈으로 보고 있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혜미는 자신의 정액을 아무 거리낌없이 그대로 삼키고 있었다. “헤헤, 맛있다.” “혜미야…” 현우는 미안함 마음과 고마움, 그리고 복잡한 마음들이 한데 뒤엉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런 현우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혜미는 현우가 사정을 마쳤건만 여전히 물건을 놓아주지 않았고, 여전히 입 속에서 한동안 사랑해주었는데, 그 느낌은 현우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때문에 현우는 뭘 어쩌지도 못하고 누운 채로 숨만 헐떡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윽고 혜미가 완벽하게 입술과 혀를 이용해 조금씩 작아지고있던 물건을 처리하고는 곧바로 현우의 가슴을 베고 눕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되려 혜미가 빙긋 웃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너 내꺼지? 그치?” “혜미야.”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 “실은, 널 보고 있으면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꼭 언젠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았거든…” 현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하는 혜미의 말에 순간 뜨거워졌었던 체온이 식으며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올라갔기에 몸을 일으키며 혜미를 가슴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놓았다. 그리곤 자신을 따라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있던 혜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나 두고 어디 못 가겠지? 그렇지?” “혜미야, 실은… 읍?!” 현우는 이제는, 아니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또다시 키스를 하며 입을 가로막은 혜미 때문에 현우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윽고 겨우 입술을 떼어낸 혜미는 조심스럽게 몸을 눕히곤 한 손으론 가슴을,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검은 풀숲을 가리며 말했다. “해줘…” 현우는 그 순간 혜미의 눈가에 고이는 이슬을 보자 움직일 수 없었지만 혜미는 그럼에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네 거 할래. 그러니까… 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 할 텐데도 이렇게 애절한 혜미를 보고 있자니 현우도 목이 메이는 것만 같았지만 억지로 참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혜미의 몸 위로 올라갔다. - 여주대의 진영으로 올라서던 윤지는 여주대 중앙 미드필더 박성은의 발에서부터 장거리 패스가 시작됨과 동시에 그완 반대로 여주대 미드필더 진을 가로지르며 올라섰고, 역시나 공을 가로챈 혜미가 자신을 바라보며 패스를 날리자 참으로 멋지게 날아오자 궤도를 힐끗보곤 곧바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 언제 나타났는지 윤지의 옆엔 강인혜가 달라붙었는데 꽤나 빠르게 달려나가던 윤지에 버금갈 속도를 내고 있었다. 때문에 조금은 놀란 윤지가 멈춰 서자 날아오던 공은 그대로 한번 크게 바운드 되더니 이내 여주대 골키퍼 윤사랑의 품에 안겼다. 윤사랑은 그러나 곧장 자신의 앞에 있던 심서연에게 공을 굴려 주었지만, 윤지는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역시나 공에 상관없이 자신을 떠나지 않고 있는 강인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설마… 윤지 전담 마크…?!’ 남희는 그저 한번의 달음질이었지만 윤지와 대등할 정도로 스피드를 뽐낸 후 그 이후에도 윤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강인혜를 바라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누구에게도 따라 잡히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원톱의 윤지가, 그것도 속도 경쟁으로 발이 묶일 거라곤 한번도 예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욱 당황하고 있던 건 수림이었다. “저 아이…?!” “?” 남희는 수림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놀라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수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더욱 믿고 싶지 않았다. “달리는 폼이… 완벽한 육상부에요…!” ‘육상부…?!’ 그제야 남희는 놀란 눈으로 여주대 벤치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여주대 이영기 감독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 “왜? 놀랐니? 너만 빠른 게 아니라서?” “…” “달리는 거라면 절대 지지 않아. 그러니 오늘 날 이길 생각은 일찌감치 그만 두는 게 나을 거야.” 윤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발뒤꿈치를 들어 발목을 돌리고 있는 강인혜를 잠시 바라보다가 묵묵히 또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강인혜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 ‘훗, 꽤나 놀란 얼굴이군. 그래, 그럴만도 하겠지.’ 여주대 이영기 감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당혹해하는 모습이 역력한 한국여대 벤치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영기 감독도 첫 경기 때는 놀랐었다. 저런 스피드를 가진 선수가, 그것도 여자 축구 선수 중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고 난 후에는 역시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송윤지라는 아이는 축구를 이제 막 시작한 ‘아기’ 수준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여주대에서도 실력은 쥐뿔도 없지만 쓸데없는 달리기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빠른 선수를 그저 '붙여' 놓기만하면 될 뿐이었다. ‘원래 실력도 없는 녀석을 써먹을 수 있어서 좋고, 상대 원톱의 발을 묶어놓을 수 있어서 더 좋으니. 이거야 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크크크!’ 하지만 이영기 감독은 하찮게 생각하던 강인혜에 대한 마음을 겨우 감춘 채 몇 번의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 강인혜는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도 같았다. 간만에 경기에 그것도 선발로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달리기’라는 것이 이렇게 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축구는 지금도 싫지만…’ 강인혜는 자꾸만 고등학교까지 했었던 육상부에서의 운동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달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입을 앞두고 생각보다 기록이 나오지 않아주었기에 기대했었던 각종 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했고 결국 그녀를 원하는 대학교는 그 어떤 곳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운동을 하는 곳 아니면 달리 진학할 곳이 없었던 그녀는 결국 어렵게 어렵게 이곳 여주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라운드 밖의 트랙을 달리기만 했던 그녀가 그라운드 안에서 보여줄 수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보았지만, 어쩐지 축구라는 운동은 익숙해지지도 또 좋아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축구가 아닌 순수한 달리기만을 해 보이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만큼은 이 그라운드 위의 그 어떤 선수보다도 잘 할 자신이 있었다. - “아저씨!” 한참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현우가 경기장의 외부 주차장으로 돌아오자 차에 타고 있던 정장차림의 운전기사는 황급히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도련님, 왜 경기는 안보시고…?” 운전기사는 그러나 현우의 뒤로 보이는 두 남자의 얼굴에 잠시 인상이 굳어졌지만, 곧바로 질문을 하는 현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상을 풀 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알고 계시죠?” “네? 무슨…” “박기자님이 납치됐다는 거 말이에요.” “!” 운전기사는 당돌하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고 있는 현우를 표정의 변화 없이 잠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물론 아저씨께 화를 내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제가 기댈 수 있는 건 아저씨뿐이라서 그래요. 그러니까 아시는 게 있으시면…” 예상치 못한 현우의 다그침에 운전기사는 잠시 고심을 하다가 이윽고 현우가 아닌 뒤의 두 남자에게 시선을 옮기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잠시 도련님과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역시 이번에도 현우의 생각이 맞아 들어 간 건가 싶은 규식은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보다 도대체 현우의 정체가 뭔지 그게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혜미는 그러나 윤지가 강인혜에게 마크를 당하고 있었어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윤지만 막는다고 주저앉는 우리가 아니라구!’ 게다가 이미 경험해 본 윤지 효과로 인해 전과 달리 여주대 2선과 3선의 간격이 형편없이 벌어지며 전체적인 라인 자체가 흐트러져 있었기에 혜미는 직접 공을 몰고 올라가며 한국여대의 2선과 3선라인을 공격적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체력적 차이가 적을 때 밀어붙여서 무너뜨리자.’ 혜미는 어쨌든 기선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왼쪽 터치라인 부근에서 손을 번쩍 들어 보이는 왼쪽 윙 정화에게 곧바로 패스를 해 주었다. ‘오케이!’ 정화 또한 어쩐지 지난 경기와는 달리 뭔가 느슨한 여주대의 수비를 느끼며 이 정도면 충분히 파고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때문에 혜미에게서 공이 전달되자 마지 곧바로 라인을 따라 거침없이 파고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여주대 오른쪽 풀백 홍진아가 막아 서자 잠시 멈춰 섰던 정화는 곧바로 홍진아의 옆으로 공을 툭 찔러 넣었고 역시나 자신의 뒤로 오버래핑을 나왔던 승은이 그대로 홍진아를 바람처럼 지나치며 돌파해나갔다. 하지만, 촤~악! 언제 나타났는지 중앙수비수 심서연이 득달같이 태클을 해왔고, 크로스만을 염두에 두다가 예측못한 태클에 나동그라진 승은은 그러나 공을 향한 태클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곧바로 수비를 위해 자신의 자리로 급하게 복귀했다. 또한 공격 작업이 무산되자 승은이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공격으로 올라서던 한국여대 선수들은 황급히 수비진영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자 심서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거리 패스를 날렸는데, 역시나 공은 공격수 강소연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 패스는 이미 예측하고 있던 혜미에게 곧바로 차단당했다. '이런 건 이제 안 통한다구!' 혜미는 역시나 공을 잡자 마자 다시금 공격라인에게 올라가라고 사인을 보냈고 이번엔 오른쪽 좋은 공간으로 벌리고 있던 오른쪽 윙 소영에게 장거리 패스를 내 주었다. ‘어디 한 번 좌우로 흔들어보자고!’ 혜미의 패스가 오른쪽 공간으로 뻗어나가자 오른쪽 풀백인 나경이 또한 소영이의 공간까지 올라섰고 한국여대 아이들은 이번엔 전체적으로 오른쪽 공간으로 신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일사분란했고 유기적이었으며, 마치 하나의 덩어리와도 같았다. 분명 한국여대 아이들은 자신들의 성장을 믿기 시작했고, 처음 만났던 여주대와 지금의 여주대는 많이 다르다는 것 또한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여주대 진영을 향해 전력 질주해 나갔다. - 이윽고 꽤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두 남자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운전기사는 그러나 여전히 현우만은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네, 아저씨.” “전 그저 운전만 하는 사람이라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도 없지만 그래도 한 말씀 드리고 싶은데괜찮으시겠습니까?” 운전기사는 언제나 그렇듯 정중히 물어왔고, 현우 또한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지금 이러시는 건, '그분'께도 또 도련님께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설마 이번 일에 그분이…?! 그런 거에요? 정말 그런 거에요?!” “진정하십시오 도련님. 저도 확실한 건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분'이 보여주신 감정을 미루어보자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만에 하나 정말 저의 허튼 생각이 맞기라도 한다면 그건 박기자님이 문제가 아니라 '그분'과 도련님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 하지만…” “정말로 만에 하나 이번 일에 '그분'이 연계되어있다면, 그럼에도 도련님은 한국여대를 도와야겠다면” “?” “도련님께선 필시 둘 중 하나를 영영 잃어버리실지도 모릅니다. 이해하시기 힘드시겠지만, 잃어버린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를테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과 같게 되는 거니까요.” “알아요 아저씨. 근데…” “?” “그 분과 저는 같은 피를 가지고 있잖아요. 핏줄이라는 건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니까…” “도련님…” 운전기사는 항상 아이만 같던 현우가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렸는지 놀랄 수 밖에 없었지만, 이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늠름해진 모습을 확인했으니 이제 지나친 보호는 필요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자신의 효용가치는 이로써 충분히 낮아졌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 소년을 '그 곳'에까지 데리고 갈 순 없었다. 그건,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 소년에게 해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럼, 저 두 분만 모시고 가면 되겠습니까?” “저는…? 아…” 한편 현우는 왜 자신은 안되냐고 물으려다가 바로 ‘이 곳’에서 잠시 후 해야 할 자신만의 일이 생각나 입을 다물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저씨, 마지막까지 어려운 부탁만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아닙니다 도련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야말로 도련님을 모실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꼭, 다시 오실 거죠?” “다녀… 오겠습니다.” 운전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 앞에 서 있는 소년의 머리를 한 번쯤은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조금은 서글퍼졌다. ‘나도 이제 늙었는가…’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운전기사는 감정을 극도로 숨긴 채 현우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주차 되어 있는 세단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아저씨들과 운전기사가 탄 차가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머릿속에 걱정을 한 가득 담고 경기장에 들어선 현우는 그러나 순간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전광판의 시계는 이제 막 20분에 접어들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모든 한국여대 선수들의 발걸음이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작 20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현우는 아저씨들도 없는 상황에서 그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조차 없었기에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한국여대의 벤치를 바라봤지만, 보여지는 건 침통한 얼굴의 두 코치 뿐이었다. - 남희는 붉은 피가 베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전혀… 조금도, 눈치도 채지 못했어…’ 이제는 뛰기는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읽었던 신문에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축구 경기 중 선수들이 실제로 플레이하는 시간은 고작 60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랬다. 제 아무리 뛰어난 축구 선수라 해도 90분 중 30분이 넘는 시간은 ‘축구’를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게다가 60분이란 시간은 빅리그의 선수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라는 것이 더욱 충격이었다. 즉, 국내 프로축구의 실제경기 시간은 55분 정도에 머문다는 통계에 비추어 본다면, 아무리 남자선수들이라도 35분은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남자도 아닌 그것도 체력적 문제까지 있는 아이들이 벌써 전반전의 마지노선인 27.5분에 7.5분밖에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소비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 같지 않은 여주대의 모습을 보며 좋은 기회가 연속해서 주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도 또 코치인 자신도 무조건 공격과 수비 그리고 역습을 독려해 결국 쉬지 않고 20분 간 내내 달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이들의 발이 그대로 잔디에 뿌리를 내린 것마냥 붙어버리자 남희는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한 함정.' 여주대는 마치 조직력이 와해된 것처럼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포백라인은 공세시에도 절대 올라서지 않았고 결국 미드필드 라인과 한 명의 공격수만 마치 역습을 하는 것처럼 보여주다가 일부러 공을 빼앗겨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공격진은 빠르게 복귀하지 않았기에 그 모습만으로도 복수심에 불타던 한국여대에겐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2선과 3선의 간격을 벌려놓고서도 공격과 수비가 가능했던 건 역시나 완벽하게 수비를 해 내는 센터백 심서연의 존재 때문이었고, 더불어 토털싸커를 하듯 모두가 한 데 뭉쳐 공격 및 수비 위치로 쉴새 없이 전환하곤 했던 한국여대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완벽한 ‘덫’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당했다…’ 하지만 진짜 당하는 건 지금부터라는 듯 여주대의 감독이 미소를 머금은 채 벤치에서 일어나 테크니컬 에어리어로 천천히 걸어 나오자 남희는 처음으로 공포심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서연!” 테크니컬 에어리어로 천천히 걸어나온 여주대 이영기 감독은 두 손을 입주위로 모아 나팔을 만들고는 큰 소리로 심서연을 불렀다. 그러자 곧바로 심서연이 감독을 바라보았고, 그에 이영기 감독은 간단하게 엄지를 추켜세워 보이고는 곧바로 뒤집어 보였다. 그러자 심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윽고 발 아래에 공을 멈춰두고는 전방의 공격수 강소연을 바라보았다. '슬슬 시작하자고.' 이윽고 심서연은 전방으로 한 번에 공을 보내려 했지만, 그 때였다. 윤지가 서연을 가로막고 선 건. “그렇게 쉽게 허용하지 않아!” 심서연은 순간적으로 나타난 윤지에 적잖게 당황할 뻔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굳이 롱패스를 이용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잠시 윤지를 놓아준 그러나 여전히 지근거리에 있던 강인혜에게 짧은 패스를 보냈다. “!” 윤지는 단번에 긴 패스로 공격작업을 할 줄 알았던 서연이 짧은 패스를 선택하자 더욱 다급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위험해!’ 하지만 자신을 따라 여주대의 3선까지 내려와있던 강인혜는 곧바로 중앙 미드필더 김인영에게 공을 건넸기에 윤지는 죽을 힘을 다해 후방으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치 자로 잰 듯 한 정확한 패스 줄기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미 체력이 바닥난 한국여대 미드필더진과 수비진은 눈으로 따라가는 것마저 힘들어 보였다. 부지불식간에 한국여대의 페널티 에어리어 앞까지 점령한 여주대 공격수 강소연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같은 팀의 미드필더 박성은에게 곧바로 공을 받으며 골문을 향해 돌아서려 했는데 역시 그곳엔 한국여대 최후의 보루인 혜미가 있었다. “여기까지야!” 혜미는 공을 가진 강소연이 돌아서지 못하도록 어깨로 밀어붙이며 철벽 수비를 펼쳤지만, 강소연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다. “아직 힘이 남았나 보지? 근데 다른 애들도 그럴까?” “!” 혜미는 순간 강소연의 어깨 너머로 미드필더 김인영의 쇄도가 보였지만, 한국여대 미드필더 그 누구도 따라붙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혜미는 고함을 치며 아이들에게 알리려 했지만 함성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고 곧바로 강소연이 혜미를 등진 채 공을 툭 밀어주자 달려들어오던 김인영의 오른발에 제대로 걸리고 있었다. - 근명은 여전히 검은 색 벤츠를 바짝 추격하며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는데 순간 계기판 어딘가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경고음이 들리자 무슨 소리인지 한참 고민을 했지만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기름…?!” 안 그래도 기름을 많이 잡아먹는 스포츠카의 특성상 주유를 미리 했어야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그대로 추격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 이쯤에서 추격을 접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씨발, 좆까라 그래. 누가 포기한대?!” 주유 경고등이 계속 깜빡 거리고 있었지만, 웃기지 말라는 듯 근명은 더욱 더 엑셀레이터를 밟아대기 시작했고, 이윽고 주인의 마음을 알아들었는지 은색의 아우디 R8은 굉음을 내며 검은색 벤츠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이윽고 근명의 차는 벤츠의 오른쪽에 바짝 다가섰고 근명은 다짜고짜 운전석쪽 창문을 내리고는 거친 바람에 맞서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야이 개새끼들아!! 차 세워!! 세우라고!!!” 그러나 벤츠는 멈추기는커녕 더욱 속도를 내며 근명의 차를 조금 앞지르려 했는데 그걸 두고 볼 근명이 아니었다. 때문에 근명 또한 더욱 가속하며 벤츠의 옆에 더욱 바짝 다가갔다. 하지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결국 근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놈들이… 나를 만만하게 봤다 이거지? 어디 그래 한 번 해 보자고!!!” 근명은 이를 악물고는 그대로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다. 콰~앙! 콰과과과~ 끼익~ 끼익~ 급기야 근명의 차와 검은색 벤츠의 옆면이 나란히 충돌하기 시작했고 그 값비싼 차들이 순식간에형편없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충돌로 인해 커튼 에어백이 터지자 근명은 잠시 그것들을 치워버리느라 곤욕을 치뤘다. “씨발, 안보이잖아!!!” 하지만 겨우 에어백을 치워버렸을 땐 곧바로 벤츠의 오른쪽 측면이 자신에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으왁!!!” 콰직! 쾅! 끼기기긱! 순간적으로 역습을 당한 근명은 잠시 오른쪽으로 밀려났지만 이내 이판 사판이라는 듯 씩씩거리며 다시 한번 왼쪽으로 핸들을 격하게 틀었다. 와작!! 그러자 이번엔 벤츠의 조수석쪽 유리가 완전히 박살 나며 드디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는 삼합회 놈들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그와 동시에 입에 테이핑을 당한 채 뒷좌석에 붙잡혀 있던 하연의 모습도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박기자님! 이런 쳐죽일 새끼들이!!!” 하연의 모습을 두 눈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한 근명은 분노에 휩싸였고, 이내 다시 한번 차간 사이를 잠시 벌리더니 곧바로 다시 한 번 옆 면을 충돌시켰다. 콰~앙! 콱! 콰아~ 그러자 벤츠에 타고 있던 놈들이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순간 근명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투투… 투… 투툭… ‘에이씨, 하필 지금…’ 드디어 기름이 바닥을 드러내며 엔진에서 부조음이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문에 근명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벤츠를, 아니 하연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왜 이 차를 뒤쫓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래! 어떻게든…!’ 근명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자신의 애마를 다독이며 다시 한번 엑셀레이터를 꾸욱 밟아 벤츠 옆으로 붙여댔다. “야이 개새끼들아 이거나 먹어라!!!” 근명은 손에 집히는 대로 차 안의 물건을 무조건 벤츠의 차 안으로 집어 던졌고, 역시나 당황한 놈들은 손으로 막기 바빴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투두, 투, 투둑. 크르릉." 이윽고 근명의 차는 완전히 시동이 꺼지며 스스로 떨어져 나갔으니까. 때문에 피식 거리며 자신을 비웃는 삼합회 놈들의 비웃음을 그대로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시동이 꺼진 근명의 차는 점점 속도가 떨어지더니 고속도로의 코너구간 즈음에서 결국 비스듬하게 멈춰 설 수 밖에 없었지만, 근명 또한 어쩐지 피식 웃고 있었다. “새끼들, 조금만 기다려라. 나보다 몇 백배는 무서운 남자가 곧 찾아갈 테니까…” 근명은 다른 물건들에 섞어 던진 자신의 핸드폰과 영후를 믿으며 이제는 할 만큼 했다는 마음으로 운전석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지만, 순간 박살 난 운전석 유리창 쪽으로 들려오는 트럭의 거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만으로도 엄청난 크기의 트럭일거라 쉽게 짐작되었으니 근명은 그제야 이곳이 고속도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씨발…?!” 근명은 순간 당황하며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려 했지만, 계속된 충돌로 인해 찌그러졌는지 문은 쉽사리 열려주지 않았는데 순간 코너를 막 돌고 난 25톤의 거대한 트럭은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와있었다. 다급해진 근명은 클락숀을 연신 눌러 위험을 알렸지만, 트럭 운전사가 졸음 운전을 하고 있었는지 트럭의 속도는 줄기는커녕 더욱 맹렬하게 다가오고 있었고, 결국 근명은 나직하게 한 마디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좆됐네…” 콰~~~~앙!!!!!!!!!!!!!!!!! 이윽고 25톤 트럭은 옆으로 비스듬히 서 있던 근명의 아우디 R8을 그대로 들이받았고, 격렬한 충돌음과 함께 트럭에 받힌 근명의 차는 마치 아이가 던진 장난감 자동차처럼 몇 번을 연속해서 고속도로 위를 날아 구르며 점점 휴지조각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54부. Last Scene part2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다시 센터서클에서부터 경기가 시작되기 전, 혜미는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 힘겹게 선 채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국여대 아이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얘들아…’ 물론 한 골을 실점하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모든 아이들의 움직임이 한결같이 둔해지는 것을 넘어 점점 멈춰서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감독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혜미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몰라 벤치 쪽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그 남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엔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두 코치들만이 서 있었기에 더욱 침울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국여대 에이스, 윤지마저 완벽하게 발이 묶여버렸기에 혜미는 차마 전방의 센터서클을 바라볼 수 조차 없었다. - “윤지야. 있지…” “?” 한편 센터서클에서 경기가 재개되길 기다리던 윤지는 벤치 쪽에서 수림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달려 온 아라가 이윽고 귓속말로 전해주자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 그대로 눈만을 움직여 자신의 앞에 서 있던 강인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지의 그런 모습이 답답했는지 아라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데… 이제 어쩔거니? 정말 오코치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행이네.” “?” 강인혜가 육상부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도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아라는 윤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윤지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희미하게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 한편 수림과 아라의 모습, 그리고 다시 아라와 윤지의 대화를 지켜보던 여주대 이영기 감독은 그러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 깨달았다고 해도 이제와서 어쩔 수는 없을 걸. 게다가…” 고작 민지와 하늘이, 그리고 부상당한 진희와 교체 불가능한 은채만이 남아있는 한국여대의 휑한 벤치를 바라보며 더욱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이영기 감독이었다. ‘패를 모두 까놓고도 승리를 바라면 그거야 말로 도둑놈 심보지.’ - 이윽고 경기의 재개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아라에게서 짧게 공을 건네 받은 윤지는 곧바로 후방을 향해 뒤로 공을 돌리곤 혜미와 눈을 맞췄다. ‘윤지야…’ 혜미는 윤지가 무엇을 원하는 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지만, 전방으로 달려가는 윤지는 여전히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기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몇 번의 긴 패스는 여전히 불안한 윤지의 트래핑으로 인해 곧바로 강인혜에게 빼앗기기 일쑤였었다. 게다가 전담 마크를 당하는 부담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체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건지 윤지는 평소와 같은 스피드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에 혜미는 여전히 고민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치워버리라는 듯, 자꾸만 혜미에게 사인을 보내며 천천히 전방으로 올라서던 윤지는 숨소리마저 확연하게 들릴 거리에 또다시 따라 붙어있던 강인혜에게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너…” “?” “정말 육상부 출신이야?” 순간 강인혜는 멈칫할 뻔 했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흥,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럼, 네가 달리는 폼은 ‘정확한’ 거야?” “뭐? 그게 무슨…?” 도대체 윤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강인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순간 한국여대의 후방에서 길게 볼이 날아오자 윤지는 달리기 시작했기에 강인혜 역시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비우며 따라붙었다. 하지만, ‘뭐, 뭐야?!’ 등 뒤로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기는커녕 오히려 바짝 따라붙는 자신의 몸에 시선을 고정하는 윤지의 모습에 강인혜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 삼합회 남자들에 의해 어딘가의 의자에 앉혀진 하연은 머리 전체에 씌워져 있는 검은색 두건이 벗겨지자 갑작스런 햇빛이 부담스러웠던지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빛에 적응하며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되자 하연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여긴…?!’ 분명 둔탁한 남자의 어깨에 온 몸이 얹혀진 채 계단을 한참 올라왔다는 것 쯤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연의 눈에 보이는 곳은 쉽게 예상할 수 없던 곳이었다. ‘아파트 건물인가…?’ 사방이 뚫려있는 회색빛 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것 만으로도 꽤나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분명 이 곳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사자체가 그대로 멈춰버린 곳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 곳으로 인적이 찾아올 가능성은 더욱 적을 터였다. “왜? 너무 동떨어진 곳이라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되나?” 마치 하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어눌한 한국말소리가 들리자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우왁스런 남자의 손이 바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눌렀기에 그저 고개를 돌려볼 뿐이었다. 그러자 스포츠머리의, 자신을 납치하기 직전 뺨을 때렸던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때문에 하연은 지지않겠다는 듯 한층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는데, 남자의 손이 또다시 하연의 얼굴께로 다가오더니 그간 입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단번에 떼어냈다. 쫙! 그제야 숨통이 트인 것 같은 하연은 그러나 곧바로 우두머리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 지금 실수하는 거야.” “실수라…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내가 네 년을 죽여버리는 실수를 범하기 전에 어때? 전화 한통 하지 않겠나?” 하연은 우두머리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칼을 턱선에 갖다 대자 마른 침을 꿀꺽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무, 무슨 전화?!” “긴장하기는… 긴장할 것 없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한국여대 코치들, 설마 모른다고는 못하겠지? 그냥 지금 바로 한국여대 코칭 스텝에 전화를 걸어주기만 하면 돼.” “한국…여대?!” “그래. 전화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여주대와의 경기에서 절대로 이기지 말라고 말하기만 하면 돼.” “!!!” ‘이것이었나… 나를 납치한 건…?!’ 하연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중국인인지 조선족인지 알 수 없는 남자들은 분명 오늘 경기의 승패에 관심이 있었다. 즉,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만 한다는 얘기였다. 그럼 답은 뻔 했다. ‘불법 도박!’ 하연 뿐만 아니라 축구기자들은 언제부턴가 암암리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도박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특히나 그들 나라의 C리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K리그 및 N리그나 K3리그에까지 마수를 뻗친 그들에 의해 심심찮게 승부 조작 이야기가 흘러나오곤 했으니 그리 놀랄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손길이 심지어 대학의, 그것도 여자축구에까지 닿아 있다는 게 놀라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왜 한국여대와는 직접적으로 상관도 없는 자신을 납치 했는지에 대해선 잠시 이해할 수 없었기에 하연은 조금은 우습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전화를 한다고 쳐. 근데 과연 한국여대에서 나 같은 기자 나부랭이 때문에 경기를 포기할거 같애?” 설사 전화를 하라고 해도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하연은 자신이 전화를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이해시켜야만 했는데 그때였다.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려는 듯 우두머리의 남자가 칼을 거둬드리며 입을 연 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 하연은 도대체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이윽고 음란한 눈을 한 채로 흘리는 남자의 이야기에 하연은 놀란 입을 차마 다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네년이 한국여대 감독놈의 여자라는 걸 말이지.” - 이미 한 경기를 오롯이 끝낸 것과 같은 느낌의 전반전이 종료된 후 라커룸에 들어오기도 전에 물병부터 찾던 수정이가 급기야 의자에 앉기도 전에 한없이 물을 들이키자 혜미가 보다못해 물병을 빼앗고는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렇게 한꺼번에 마셨다간 복부 통증 때문에 뛰지도 못한다고!!!” “이리 내! 어차피 다들 뛰지도 못하고 있었잖아. 아니야?!” “수정이 너…?!” 혜미는 평소와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수정이 때문에 적잖게 당황하곤 다른 아이들의 도움을 바라며 주위를 돌아봤지만 이미 다른 아이들 역시 수정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작 한 골 실점했을 뿐인데…’ 혜미는 설마 아이들의 뇌리에 여주대가 이렇게나 공포스럽게 자리하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물론 첫 경기에서의 패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위덕대와 한양여대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여주대로 인해 입었던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난 번 경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도 더욱 잔인하게 당해버리자 곧바로 그 때의 충격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감독님! 그래 감독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뭔가 아이들에게 해답을 제시해 주실거야!’ 혜미는 완벽한 패잔병이 되어있는 아이들을 근심스럽게 돌아보곤 곧바로 라커룸으로 들어서는 수림에게 물었다. “코치님! 감독님은요?” “아, 혜미야…” 수림은 다짜고짜 들이대는 혜미 때문에 역시나 당황하고 있었지만 뒤따라 들어선 남희 덕분에 겨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혜미, 우선 자리에 가서 앉으렴.” “그치만” “설명해줄 테니까. 어서.” 언제나 그랬듯 냉정한 모습으로 남희가 말했지만, 어쩐지 혜미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완 달리 무척이나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비단 혜미만 느끼고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감독님께… 무슨 일 있으신 거에요? 그런 거죠? 그죠?!” “소영아…” 소영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며 말하자 수림이 재빨리 다가가 소영이를 다독거려주었지만, 문제는 소영이 뿐만이 아니였다. 코치들이 손을 써 보기도 전에 어느새 모든 아이들 사이로 '불안함'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가 급속히 퍼지고 있었기에 라커룸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바이러스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던 단 한 명 만큼은 달랐다. “웃기고들 있네.” 모두의 감정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던진 윤지의 한마디는 마치 불길에 휘발유를 들이붓는 격이었기에 순간 서너명의 아이들이 발끈하며 의자에서 일어섰고, 그에 수림은 황급히 윤지와 아이들 사이를 가리며 섰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미애가 수림을 밀치며 윤지에게 다가가려 애쓰며 소리를 질렀지만, 여전히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윤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즐거운 모습이야? 감독님이 없으니 경기에서 져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만 찾고 있는 건 아니고?” 순간 라커룸은 정적에 휩싸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윤지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우릴 떠날 분이라는 거 설마 몰랐어? 어제 얘기해줬잖아. 어젠 다들 좋아 죽더니… 설마 하루 만에 다 까먹는 바보인 거야? 그래, 정말 감독님이 우릴 떠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될지 나도, 그 누구도 몰라. 하지만 아직은 아니지. 아직 감독님은 우리한테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인사도 없이 떠나실,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거 설마 여기에서 모르는 사람 있어? 그런데도 우리끼리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감독님이 참, 좋아도 하시겠다.” “하지만… 도대체 왜 안 보이시는 건데…” 윤지의 완벽한 해답 때문에 주눅이 들어버린 아이들 중 미자가 울먹거리며 겨우 입을 열자 윤지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답했다. “시험하는 거야 우리를.” “시…험?” “그래. 감독님께선 당신이 떠나게 돼도 과연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궁금하셨을 테니까. 자, 어쩔래. 그래도 그냥 우리끼린 어차피 안되니까 일찌감치 포기하고 감독님 붙들고 그냥 천년 만년 계속 같이 '즐겁네 어쩌네' 하고 있을까? 다들 그럴래?” 순간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선택의 기로에 선 아이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지만, 윤지는 어느정도 상황이 정리된 듯 하자 이번엔 남희를 바라보았다. “코치님?” “아…” 남희는 자신이 했어야 할 정리를 윤지가 깔끔하게 끝내고 바통을 넘기자 잠깐 당황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것 저것 따질 새가 없었다. “그래, 얘들아 이제 감독님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우선 전반전 얘기를 해보자면…!” 남희는 곧바로 아이들을 등지며 화이트 보드에 뭔가를 쓰려다 우뚝 멈춰 섰다. ‘지금, 내가 뭐 하려고 하는 거지?’ 분명 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딱딱한 수학 강의를 하듯 문제를 적고 공식을 동원해 해답을 적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감독님께서 계셨다면… 그랬다면…’ 남희는 그제야 어깨에 들어가있던 힘을 뺄 수 있었다. 때문에 화이트 보드를 마주한 채로 조금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던 것도 같았다. 그에 남희는 들었던 펜을 다시 내려놓고는 어렵지 않게 아이들을 향해 뒤돌아 설 수 있었다. “자, 전반전엔 다들 좀 힘들었지?” 지금 이 순간, 감독을 대신하는 코치로서 뭔가 문제점을 파악해서 꼭 집어 줄줄 알았던 아이들은 또다시 황당하다는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확인 사살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힘들었던 전반전 상황을 묻고 있으니 왜 안 그랬을까. 하지만 남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대단하더라 너희들 모두. 난 솔직히 우리가 이렇게 잘해낼 줄 몰랐어.” “?” 병주고 약주는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이번엔 칭찬을 하자 아이들은 답답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어지는 남희의 이야기에 아이들의 마음은 그제야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희들, 윤지 말대로 즐거워 보이진 않더구나.” “!” 아무도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남희의 말을 부정할 순 없었다. 정답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남희가 그제야 조금은 감독처럼 보였으니까. “후반전엔, 조금만 더 즐겁게 해보자. 그라운드 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건 나도, 오코치님도 그리고 감독님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그건, 오로지 너희들만히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들 그래줄 수 있지?” 작전회의에 전술수정을 해도 모자랄 황금 같은 시간에 남희는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 했지만, 아이들 중 그 누구도 불만스럽지 않아 보였다. 아니 이미 아이들의 눈동자엔 조금이나마 희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때문에 그 한마디로 하프타임은 끝나버렸음에도 아이들은 얻고자 한 모든 것을 얻은 양 힘차게 라커룸을 나섰다. 그런데, “참, 윤지야.” “?” 아이들을 따라 나서던 윤지를 따로 불러 세운 건 다름아닌 수림이었다. “괜찮은 거니?” 윤지는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 수림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수림은 무척이나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윤지는 수림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 알만하다는 얼굴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답해보였다. “아… 네 뭐…” “강인혜 그 아이, 분명 육상을 하던 아이인 거 같던데 정말로 내 눈이 맞는 거라면 어쩌지? 윤지 너, 혼자 공격수 역할을 하기도 버거울텐데, 그 아이까지 경기내내 너에게 따라붙는다면…” “잘해줬다 윤지야.” 수림은 윤지에게 걱정을 늘어놓는 와중에 갑자기 남희가 끼어들자 조금은 황당했다. 게다가 ‘잘해줬다’니, 도대체 남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수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윤지야, 전반전에 잘해줬다는 거 아는데.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볼 수 있겠니?” ‘참다니 뭘?’ 수림은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윤지는 무덤덤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언제까지…요?” “그게… 아직 점수차가 크지 않으니까 여주대도 마냥 안심하진 못할 거야. 그러니 적절한 시점이 될 때까지 우리가 지금 상태로 버텨낼 수 있다면, 그때 우리에게도 분명 기회가 올 거야. 그러니까 그때가 되기 전까진, 전반전에 해줬듯이 절대 무리해선 안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전반전에 해줬듯?' 수림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윤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남희의 지시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편 역시나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남희였지만, 그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윤지에게 만큼은 체력을 비축하라는 사인을 보냈을 만큼 후반전을 위한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던 윤지였기에 충분히 믿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윽고 윤지는 곧바로 경기장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는데, 남희는 그 뒷모습에 대고 차마 쑥쓰러워 라커룸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한마디를 큰 소리로 해 주고 있었다. “윤지야, 고마워!!!” 그러자 윤지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왼팔을 들어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이곳 어디일텐데…’ 천안분기점에서 빠져 나온 걸 확인한 이후 계속 멈춰있는 근명의 핸드폰 위치를 따라 영후가 네비게이션을 확인하며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아산 신도시였다. 하지만 신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미완성의 건물들이 여기 저기 지어지다 멈춰있었고 당연히 공사가 한창이어야 할 지역이었건만 어쩐지 고요한 분위기가 마치 폐허를 방불케할 만큼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기에 영후는 오토바이의 속도를 늦추고는 여전히 긴장을 유지한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 후반전을 맞이하기 위해 한국여대 아이들은 다시 한번 원을 그린 후 흩어졌는데, 그 순간 윤지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한국여대에서 가장 지쳐있는 선수를 불러 세웠다. “수정아.” “?” 수정인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체력을 버거워하면서도 똑바로 윤지를 바라보았다. “날 좀 도와줄래?” “?” 이미 체력적 한계에 도달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자신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단 한 순간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윤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들어버리는 수정이었다. - 이윽고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자 윤지는 공을 후방으로 돌리고 전방으로 올라섰는데, 이번에도 역시 스스로 강인혜에게 다가섰기에 강인혜는 적잖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 “너, 육상과 축구의 달리기가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게다가 윤지가 대뜸 이상한 질문을 날리자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도 잠시 다짜고짜 내달리는 윤지를 따라가기 위해 강인혜는 다른 생각을 할 사이도 없었다. 하지만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될 무렵, 갑자기 스터드를 잔디에 깊숙하게 박아넣으며 자리에 우뚝 서버리는 윤지 때문에 강인혜는 그만 윤지를 지나치고 나서야 겨우 제동을 걸 수 있었다. 순간 강인혜는 곧바로 뒤돌아 윤지를 바라봤지만, 윤지는 그 어디로 도망가지도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는데, 그 순간 윤지가 한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걸 강인혜는 절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연습경기장의 잔디에 마주 앉은 채 영후는 드리블을 가르쳐달라고 졸라대는 윤지에게 반쯤 허락을 하고 난 후에 뜬금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근데, 이쪽 골대부터 저쪽 골대까지의 길이가 얼마나 될 것 같니?” “세로 길이요? 글쎄요…” “뭐 경기장마다 조금은 편차가 있겠지만, 보통 100미터 안팎이란다.” “그래서요?” “인석아, 그래서는. 축구 경기는 무조건 달리기만 하는 육상하고는 다르단 얘기지.” 경기장 규격은 또 뭐고, 육상은 또 무슨 얘긴지 윤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드리블을 가르쳐준다고 했으니 급한 마음을 다잡고 잠자코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남자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자 윤지도 따라 일어섰다. “음, 어차피 나도 말로 설명할 자신은 없고… 그래, 어디 한 번 날 따라잡아 볼래?” 윤지는 또다시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남자를 멀뚱멀뚱 바라보려 했지만, 어느새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기에 할 수 없이 감독 명령대로 술래잡기를 하듯 전력으로 내 달렸다. 그러자 생각보다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기에 윤지는 손을 뻗어 영후를 잡아보려 했지만 그 때였다. 남자가 달리는 속도 그대로 살짝 방향을 바꾸며 그대로 멈춘 건. 그러자 달리던 관성을 막을 수 없었던 윤지는 눈으로 보면서도 영후를 지나쳐버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뒤늦게 멈추고 나서 바라본 영후와 윤지의 거리는 족히 3~4미터는 넘고 있었다. “!” 그저 살짝 방향을 바꾸며 멈춰 섰을 뿐이었음에도 따라가는 입장에선 예측이 불가능 했기에 잡기는 커녕 거리가 더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뭐하니? 안 잡을 거야?”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던 듯 영후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기에 윤지는 더욱 사력을 다해 달렸는데, 정말로 남자는 술래잡기를 하듯 그 빠른 스피드로 내달리다가도 갑자기 방향을 바꾸고는 또다시 전력으로 달렸다. 그제야 윤지는 그저 일직선으로 달리는 것보다 훨씬 따라잡기 힘들다는 것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윽!” 꽈당! 순간적인 방향전환을 몇 번 해보기도 전에 무릎이 풀려버린 윤지는 결국 잔디밭에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고, 그제야 영후는 놀라 쓰러진 윤지에게로 달려왔다. “괜찮니?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그야말로 황망한 눈으로 달려온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고 걱정해주자 윤지는 참 행복했지만, 그런 내색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무척 슬펐을 뿐이었다. “거봐, 인석아. 아무래도 안되겠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 했잖니.” “괜찮아요 저.” “괜찮긴! 순간적인 방향전환은 무릎부터 시작해서 온 몸에 무리가 될 수 밖에 없어. 방금 윤지 너도 느꼈을 거야. 그치?” “그럼,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게…” “그래. 어차피 윤지 네가 배우고 싶어하는 드리블은 지금 내가 보여준 이 동작들이 조금 더 빨라지고, 좀더 작아질 뿐이란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따르는 거고.” 연신 윤지의 무릎을 주물러주며 괜한 짓을 했나 싶은 얼굴로 난감해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윤지는 그깟 무릎 정도는 이 남자를 위해서 내어줘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때문에 계속 남자의 품에 안겨있고도 싶었지만, 꾹 참으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해요, 감독님.” “이 녀석아, 도대체 드리블을 배워서 어쩌려고?” 영후는 굳이 드리블을 배우려고 하는 윤지가 걱정되자 어떻게든 만류하려 짐짓 화가 났다는 얼굴로 물었지만, 소녀는 남자를 바라보지 않고 그 순간 텅 빈 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심서연은 여전히 여주대의 3선 라인을 컨트롤하며 동시에 윤지의 동선 또한 한시도 소홀히 하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나 윤지는 여전히 여주대의 3선과 2선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며 공이 넘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상한 건 한국여대 미드필더 수정이였다. ‘갑자기 왜…?’ 전반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마치 윤지와 투톱으로 서 보겠다는 양 한껏 전방으로 올라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수정이었기에 심서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여주대의 공격작업에 더욱 집중해야 했으니까. 확실히 전반전엔 감독의 의도대로 한국여대의 체력을 소진시키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득점에 실패한 것은, 알게 모르게 심서연의 마음속 어딘가에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원체 체격만 좋은 원톱의 강소연의 기량이 다른 주전 공격수들에 비해서 쳐지는 문제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단 며칠 사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국여대의 수비 조직력이 단단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중심엔 센터백 ‘장혜미’가 있었음을 심서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 예상했던 대로 여주대는 철저하게 미드필더를 거치는 세밀한 플레이를 펼쳤지만, 한국여대의 미드필더 진은 선수도, 패스 루트도 막아서지 못했기에 혜미는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의 힘으로나마 갑작스런 중거리 슛 말고는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체격은 좋지만, 지능적이진 않아.’ 확실히 남자 같은 골격의 강소연은 직접적으로 막기는 쉽지 않았지만 오프사이드 트랩을 이용하거나 사이드에서 올라오는 크로스는 낙구 지점을 선점하기만 하면 되었기에 의외로 수비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전반전 그 실점 상황에 강소연에게만 시선을 쏠린 채 무방비로 중거리 슛을 허용하진 않았겠지만. ‘치잇, 역시 또 중거리 슛인가?!’ 한편 여주대 중앙 미드필더 김인영은 같은 포지션의 박성은과 이대일 패스를 주고 받으며 곧장 중앙을 돌파했는데, 전혀 방해하는 수비들이 없자 열린 공간에서 그대로 슛을 하려 했기에 혜미는 강소연을 버려둘까 했지만, 그때였다. 혜미의 옆에 있던 줄로만 알았던 센터백 미애가 어느새 달려나가 몸을 던지며 슛의 궤도를 막아선 건. 팡! 퍼억! 김인영의 발끝에서 떠난 공은 그대로 미애의 등에 맞고는 하늘로 솟구쳤는데, 그 공은 황급히 달려나온 혜미의 소유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을 발 아래에 두고서도 혜미는 중원을 바라보고는 또다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평소같으면 빈 공간을 찾아 서로 공을 달라고 했을 아이들이 지금은 빈 공간은 커녕, 공격작업 자체에 참가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죽어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패스를 하게 되면 어떻게든 플레이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경기 양상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주어야만 했다. ‘무작정 체력을 소비하게 할 수는…’ 때문에 혜미는 중원을 포기한 채 전방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윤지야…’ 여전히 윤지는 강인혜를 달고 다니면서도 자꾸만 혜미에게 사인을 보냈기에 혜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 여주대와 미드필더 싸움을 벌이게 된다면 뻔한 결과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지가 공을 제대로 간수해주지 못하게 되면 결국 점점 수세적으로 몰릴 수 밖에 없었기에 무척이나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쨌든 윤지를 믿는 수 밖에 없어.’ 결국 결정을 내린 혜미는 공을 조금씩 몰고 전진하다가 윤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전방으로 긴 패스를 날려주었다. - 또다시 윤지를 향해 한국여대의 후방에서부터 공이 날아오자 강인혜는 더욱더 윤지에게 따라붙었고 윤지 역시 강인혜를 의식하긴 했지만, 꿋꿋하게 공을 향해 달려나갔다. 드디어 공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좀더 앞으로 달려나가야 했지만, 윤지는 또다시 축구화 스터드를 잔디 깊숙하게 박으며 달려가던 걸음을 단번에 멈추고 있었다. ‘저건 그때…?!’ 관중석에서 홀로 경기를 지켜보면서도 규식과 철용, 그리고 하연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던 현우는 순간 그때 연습경기장이 왜 그렇게 여기저기 패여있었던 건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달려가다가 저렇게 갑자기 멈추다니…?!’ 현우는 그게 얼마나 힘든 동작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지만, 멈추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 윤지는 달려가던 탄력을 살려 그대로 뒤로 돌아 높이 점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강인혜는 윤지보다 서너 발자국을 더 뛴 다음에야 멈출 수 있었기에 뛰어오른 윤지의 머리에 공이 연결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원 톱으로서 공을 따낸다고 해도 한국여대 미드필드진은 이미 지쳐버린 상태였으니 공은 당연히 여주대 소유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강인혜는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완전한 오판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정!’ 어느새 다가왔는지, 윤지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공을 재빨리 받아낸 수정의 모습에 당황한 여주대 미드필더 박성은과 김인영은 마음놓고 공격에 가담했었다가 뒤늦게 복귀하며 달려들었지만 거리가 멀었고, 그 순간 수정은 어느새 자신에게 시선을 뺏기며 정지해있던 강인혜의 왼쪽 옆으로 단번에 멋진 패스를 찔러 넣어 주었다. “윤지!” 그제야 강인혜는 윤지의 마크를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뒤로 돌아 달려봤지만, 이미 속도가 붙은 윤지를 붙잡을 순 없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수비가 벗겨진 건 아니었다. 때문에 강인혜는 이미 준비자세를 잡고 있는 심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 부탁해!’ 윤지는 수정이 해준 스루패스를 단 한번도 터치 하지 않으며 여주대의 왼쪽 진영에서 중앙으로 그대로 달려나가다 심서연의 모습이 보이자 힐끗 바라보더니 그대로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다. 파~앙! ‘들어 갓!’ 그러나, 데구르르… 동료 선수를 이용한 트래핑과 치밀한 침투에 이은 완벽한 스텝과 타이밍, 그리고 아름다운 폼이 한데 어우러진 ‘굿’ 슈팅이었지만, 너무나도 황당하게 공은 땅을 느릿느릿하게 굴러가고 있었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여주대 골키퍼 윤사랑은 어렵지 않게 품에 안을 수 있었다. - 아아~ 관중석에선 아쉬운 탄성이 흘러나왔고, 3,4위전을 마치고 시상식을 기다리던 한양여대 아이들 또한 꽤나 아쉬워하고 있었다. “와, 아까웠네. 근데, 원 톱치고는 너무 슛이 약한데? 지금 수비보고 있는 혜미였다면 저 정도는 그대로 넣지 않았을까?” 한양여대 미드필더 조효선이 무척이나 아깝다는 얼굴로 입을 열자, 역시 센터백 신설혜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확실히 킥력은 굉장한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공격형 미드필더 전현아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그치만 타이밍, 폼은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어. 제대로 힘만 실렸다면 절대 막을 수 없었을 거야.” “그럼 뭘해? 분명 땅을 찬 것도 아니고 정확히 공을 찼는데도 저 정도밖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면, 수비와 골키퍼에게 위협은커녕 긴장도 못 시킨다고.” “…” 공격수 지소연마저 거들자 전현아는 잠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윤지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아 보여 자꾸만 자신도 모르게 변호를 하고만 싶어지는 모양이었다. - “아…” 병원의 1인실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노감독을 간병하던 황총장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무음으로나마 티비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윤지의 슛이 아쉽게 불발로 끝나자 자신도 모르게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때였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렇게 소리를 줄이고 혼자 몰래 보면 더 재밌는 게요?” “여, 여보!? 정신이 들어요? 괜찮은 거에요?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금 빨리 가서 의사를, 참 간호사를 벨로 부르면” 너무나 기쁘고 당황되던 총장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선을 피웠는데, 노감독은 그런 총장의 손을 힘겹게 잡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면 경기를 못 보지 않겠소? 그러니 경기가 끝날 때까지만 좀 기다려주시게.” “하지만…” “그나저나 벌써 전반전은 지나간 게요? 이거 참, 아쉽게 됐구먼.”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티비에 몰입하려는 남자의 모습에 평소 같았다면 살짝이라도 팔뚝을 꼬집어 주었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고맙고 또 감사했기에 총장은 그대로 노감독의 가슴에 안기고 있었다. “못됐어요…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키고…” “걱정… 끼쳤던 게요? 이거 참, 면목 없게 되었구려.” 남자는 검은색보다 은색이 훨씬 더 많은 여자의 머리칼을, 주름이 가득한 손을 들어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 ‘저건…?!’ 천천히 주변을 돌며 비포장 흙길을 오토바이로 내달리던 영후는 순간 검은색 벤츠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벤츠차량의 조수석쪽 면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기에 영후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기다!’ 때문에 영후는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고는 좀더 주변과 건물을 살펴보았다. 흉물처럼 우뚝 솟아있는 그러나 공사 자체가 멈춰있는 아파트 건물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언뜻 건물의 층 중간중간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결국 영후는 허리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건물로 접근해갔고, 이윽고 벤츠에 다가설 수 있었다. 하지만 차 속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영후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참, 근명인?!’ 그제야 근명이 생각난 영후는 주변을 계속 경계하며 핸드폰을 꺼내 근명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자 곧바로 차 안 어딘가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에 영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유리창이 없는 조수석 쪽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운전석의자 밑에서 반짝이고 있는 핸드폰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 영후는 바로 전화를 끊었는데, 그와 동시에 운전석 밑에서 반짝이던 핸드폰이 꺼졌기에 그 핸드폰은 바로 근명의 것이라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해볼 수 있었다. ‘근명아…’ 영후는 근명의 사정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설마 하연과 같이 납치된 것인가 더욱 불안해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건물 어딘가에 하연과 근명이 있을 거란 결론을 내린 영후는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 윤지의 슛이 불발은 되었지만 그 순간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남희는 곧바로 수림에게 물었다. “오코치님, 진희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왜요? 설마…?” “네, 이 경기, 아무래도 진희가 필요하겠습니다.” 수림은 남희의 이야기에 영후 또한 진희에 대해 물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때문에 수림은 왜 하필 너도나도 ’진희’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그대로 진희에게로 다가갔다. “진희야, 어떠니?” “네? 뭐가요?” “권코치님께서 진희 널 투입하고 싶어하시는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힘들겠지?” “힘들긴요! 당연히 뛸 수 있죠! 아무 문제 없다고 말씀해주세요! 전 지금 바로 몸 풀러 갈게요!” 수림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듯 진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곧바로 트랙으로 이동했는데, 여전히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진희에 영후와 남희가 왜 이렇게 목을 매는 건지 수림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무척이나 난감할 따름이었다. - 진희는 진작부터 몸을 풀고 있던 민지와 하늘이 쪽으로 합류했는데, 순간 흥분으로 한껏 달아오른 진희의 오른쪽 뺨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때문에 진희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는데 또다시 뺨에 조금 더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설마… 비?” - 심서연은 윤지의 첫 슈팅 때 조금은 긴장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 윤지가 또다시 시도한 슈팅에 이내 여전히 힘이 실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윤지의 존재도, 수정의 전진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감독님. 이제 여기서 끝내야겠어요.’ 심서연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는 영후를 향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며 전방을 봤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혜미의 발끝에서부터 윤지를 겨냥한 공이 날아오고 있었다. ‘안 통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심서연은 고집스러우리만치 윤지에게 계속해서 롱패스를 날리는 혜미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벌써 세 번째였음에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질 뿐이었다. 윤지가 가슴으로 받아 떨어뜨려 준 공을 또다시 수정이 강인혜의 뒷공간을 보며 찔러주는. 강인혜에 의해 발이 묶여 공 자체를 잡을 수 없어진 윤지가 그나마 원톱으로서 해 볼 수 있는 건 바로 이와 같은 다이렉트 슈팅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공엔 여전히 힘이 실리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수정이의 체력마저 고갈됨에 따라 스루 패스의 정확도마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 ‘아, 이제 힘 조절도 안돼…’ 수정인 나름대로 세밀하게 패스를 넣어준다고 찼는데 페널티 아크 서클의 오른쪽을 향해 달려들어가려던 윤지의 방향관 달리 왼쪽으로 흘러가 버렸기에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는데, 윤지는 패스 하나라도 너무나 소중하다는 듯이 절대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틀어 공을 향해 달려갔다. ‘슛을 해야만 해!’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공이 흐르자 센터백 이유라와 심서연은 순간 서로 나가서 공을 받을 거라 생각하며 미뤘는데, 결국 절대 포기하지 않은 윤지의 차지가 되고 있었다. 때문에 이유라도 심서연도 아차 싶었지만, 그 뿐이겠거니 했다. 어차피 지금 자신들이 버티고 있는 라인에서부터 골대까지의 거리는 족히 20미터가 넘었기에 지금까지 보여줬던 윤지의 킥력으로 골을 노리기에는 절대 불가능했으니까. 물론 겨우 공에 가까이 다가간 윤지 또한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공을 잡고 몸을 돌리기엔 곧 들이닥칠 강인혜와 심서연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대로 슛을 날리기엔 어색한 왼발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책임져야만 했다. 그것이 공격수의 운명이란 걸 윤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오른발이 아닌 왼발로 슛을 하려면?’ 윤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열심히 자신의 폼의 정반대 모습을 그려보았는데, 그 때였다. 윤지의 머릿속에서 한양여대의 공격형 미드필더 전현아의 슛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보여지기 시작한 건. 때문에 윤지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발 앞으로 흐르는 공에 달려들며 순간적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휙 돌렸고, 골대가 흐릿하게 보여지는 순간 그대로 왼발을 이용해 슈팅을 날렸다. - “아!” 순간 전현아는 관중석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아이…! 설마…?! 나와 같은 왼발 잡이!!!’ 현아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슛 폼을 본 적이 없던 것만 같았다. 그만큼 윤지의 중거리 슛은 무리한 턴 동작 때문에 '찬다는 것'에 의의를 둘 만큼, 무척이나 가볍게 찬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의 슈팅과는 다르게 완벽하게 힘이 실리며 그 먼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빨랫줄처럼 쭉쭉 뻗어나갔다. 한편 설마 슈팅타이밍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여주대의 골키퍼 윤사랑은 자신의 왼쪽 골 포스트와 크로스바가 만나는 지점을 통과하며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 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생각지도 못한 골로 한국여대가 드디어 답답함을 벗어 던지고 득점에 성공하자 관중석에선 벌써 우승컵이라도 거머쥔 듯 엄청난 함성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곳곳에서 휴지폭탄이 하얀 곡선을 만들며 투하되고 있었고 이곳 저곳에서 홍염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관중석 한편에선 윤지의 요염한 사진이 프린팅된 통천을 펼쳐 사람들의 머리위로 한껏 뒤덮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야 돌아온 에이스를 환영하는 팬들의 하나같은 마음이었다. - 윤지는 드디어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그대로 ‘골’이 만들어지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곳에 없는 남자에게 나직하게 답해보았다. ‘드리블 다음엔… 꼭 슛을 하고 싶었어요 감독님…’ 그리곤 윤지는 세레모니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수정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수정인 체력의 한계가 왔는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누워있었다. “수정아…” “아, 진짜 이제 더는 못 뛰겠다. 나, 이제 그만 들어가도 되겠지? 그래도 된다고 해줘.” 모든 체력을 소진했건만 그래도 자신의 패스를 어시스트로 만들어준 윤지가 고마워 수정인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윤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수정이의 몸 위로 포개지며 수정이의 목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계속 지켜보고 있어줘. 알았지?” “그야, 당근이, 헉!!” 수정인 윤지의 이야기에 가볍게 답해주려 했지만, 어느새 모여든 한국여대 아이들이 수정이와 윤지의 몸 위로 산을 만들어버렸기에 수정인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살짝 해보았지만, 경기장의 조명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 덕분에 지금 이 기분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보았다. - 한편 한국여대 벤치는, 아니 오직 두 명의 여 코치들은 기적적인 동점에 환희를 느끼는 것도 잠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코치님, 수정인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수림의 이야기에 남희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후반전도 벌써 2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추가시간까지 더한다면 27분에서 30분…’ 아직은 센터백 진희를 투입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때문에 남희는 왼쪽 윙 민지와 풀백 하늘이를 이용한 교체를 생각해봤지만, 그 누구도 미드필더로 기용하기엔 역시나 불안함이 있었다. 결국 지금 한국여대에서 가용할 수 있는 미드필더는 이미 그라운드에 서 있는 아라와 지영이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아라와 지영이를 좀더 미드필더에 최적화 시켜준 감독의 선견지명에 남희는 잠시 소름이 끼칠 정도였지만, 어쨌든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 그 포메이션… 해볼까? 그치만… 과연 진희가 버텨줄까?’ 남희는 그간 축구이론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포메이션을 문득 떠올려봤지만, 문제는 진희였다. 진희의 부상회복이 확실치 않은 시점에서 무리하게 투입한다 한들 남은 시간 동안 버텨 줄는지도 의문이었지만, 혜미 정도의 피지컬로도 겨우 막아내고 있는 여주대 공격수 강소연의 존재도 확실히 문제였다. ‘15분 정도, 아무리 길어도 20분이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러… 일러도 너무 일러…’ 남희는 퇴장으로 인해 기용할 수 조차 없어진 은채의 존재감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지금은 은채를 탓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스스로도 미안한 마음에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은채를 차마 남희는 쳐다볼 수 조차 없었다. “코치님, 저 교체해주세요.” 하지만 이런 남희의 걱정을 불식시키려는 듯 진희가 트레이닝 복을 벗고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진희야, 나도 그러고 싶지만 네가 뛰기엔 아직…” “코치님…” “?” “걱정하지 마세요. 무리하지 않을게요.” 걱정하지 말라니, 남희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럽게 말하는 진희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순간 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진희를 두 팔로 한껏 안아보았다. “코…치님?!” 갑작스런 남희의 행동에 진희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지만, 남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희를 한참 안고만 있었다. ‘감독님… 이제야… 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이런 아이들이었기에 그렇게도 그 남자는 소중히 하고 싶었던 것이었음을 남희는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한껏 안아주고 싶어졌다는 것도. 때문에 남희는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진희를 꼭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어떻게 돼도 괜찮으니까… 절대로, 절대로 다치지 말기다. 알았지?” 남희의 신신당부에 진희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이윽고 남희는 수림에게 센터백 진희와 왼쪽 윙 민지를 투입하자고 수림에게 말했다. 그에 수림은 번개처럼 대기심에게 달려가 교체에 대해 보고를 하고 돌아섰는데, 그 순간 수림은 궁금증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잠깐, 민지야 정화 자리 그대로 왼쪽 윙으로 들어간다 치고, 그럼 진희는 미애랑 함께 센터백을 서는 건가…? 그럼 혜미가 그때처럼 수비형 미드필더로 들어가고?’ 결국 체력적인 배려를 위한 교체라고 생각한 수림은 어쨌든 동점이라도 만들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과연 이제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당장 그 문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수림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비…?!’ 시합에 집중하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빗줄기가 갑자기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55부. Last Scene part3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비록 지금은 흉물스러웠지만 건물이 완공되었다면 비상계단이 되었을, 먼지 가득한 외부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서던 영후는 몇 층 오르지 않아서 어디선가 조금씩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중국어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다!’ 하지만 무턱대고 돌진할 수는 없었다. 하연과 근명이 어딘가에 어떤 식으로라도 붙잡혀 있다면 당장 그 두사람이 먼저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될테고 그렇게 된다면 그 순간 모든 건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으니까. 이에 영후는 발소리마저 죽이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서곤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의 벽에 붙은 채 옆으로 머리만을 반쯤 넣어 조심스럽게 내부를 살펴보았다. 안에선 서너 명의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만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그러나 생각보다 수가 적었기에 영후는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그저 저들 뿐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텐데.' 하지만 어디에서도 하연과 근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무턱대고 저들 뿐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기둥 몇 개 만이 서 있는 커다란 빈 공간에 대한 관찰을 그만두고 더욱 신중하게 위층으로 올라섰는데, 그때였다. 밑에서부터 무심코 계단을 올라오던 남자 중의 하나가 영후를 보고 소리를 지른 건, “침입자다!” 생각지도 못하게 엉뚱한 곳에서 위치가 탄로난 영후는 그대로 두 세 계단씩 뛰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위에서도 놈들이 쏟아져 내려왔으니까. ‘역시 더 있었던가!’ 하연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궁지에 몰려버린 영후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뛰어내려오는 남자를 향해 더욱 빠르게 위로 돌진하고는 그대로 남자의 다리 밑으로 몸을 집어넣고는 그대로 들어올려 등 뒤로 뒤집어 던져버렸다. “으아악!!!” 순식간에 공격을 받은 남자는 그대로 영후의 뒤쪽 계단으로 떨어져 구르기 시작했고, 뒤따라 오던 남자들과 던져진 남자가 한데 엉키자 계단을 올라오던 무리들의 추격은 잠시 주춤해졌다. 그러자 그 기세를 몰아 영후는 여전히 몰려 내려오는 남자들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놈의 무릎 옆으로 정교하고도 힘이 가득 실린 오른발 발리 킥을 작렬시켰다. 퍽! 우두둑! “억!” 영후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다리에서 뼈가 부러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난 남자는 이윽고 기묘하게 꺾이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졌지만, 마치 6.25 때 그러했듯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나는 중국인들을 헤쳐나가기엔 영후 혼자선 너무나 벅찰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후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에 쉴새 없이 주먹을 날렸고, 또 킥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워댔을까. 영후 단 한 명이었음에도 쉽게 제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놈들은 처음처럼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고 잠시간 거리를 둔 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덕분에 조금 숨을 돌릴 시간을 얻게 된 영후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좁은 계단에 또 다른 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오직 놈들이 가득 채우고 있는 위, 아니면 아래 그렇게 두 가지의 선택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올라가야 돼. 그러자면…’ 영후는 결국 두 갈래의 길 중 하나인 ‘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기에 호흡을 조절하는 척 하다가 갑자기 위쪽 계단으로 달려 올라갔다. 막다른 골목의 쥐라고만 생각했던 영후가 또다시 덤벼들자 맥을 놓고 있던 놈들은 우왕좌왕하며 쉽게 대응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영후는 몇 명 쯤을 더 쓰러뜨릴 수 있었고, 조금 더 위로 몇 계단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빠각!! 그저 위로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하던 영후의 뒤통수를, 아래계단에서 주춤거리던 놈 들 중 하나가 손에 들고 있던 두툼한 각목으로 가격하자, 전혀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영후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풀썩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퍽! 퍼억! 툭! 팍! 이미 의식을 잃고 있던 영후는 그러나 그제야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뒤늦게 달려들어 집단 구타를 하는 놈들에 의해 맘편히 쓰러지지도 못하고 있었다. - “뭐?! 진짜?!!!” 혜미는 수정이와 교체되어 들어온 센터백 진희가 다가오자 당연히 수정이의 빈자리를 채울 겸 그전처럼 수비형 미드필더 쪽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진희에 의해 남희의 전술 변경을 알게된 혜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희를 그리고 벤치의 남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뭐해? 경기 안 할거야?” 보다못해 다그치는 진희 덕분에 혜미는 얼떨떨한 표정 그대로 전방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리곤 이윽고 센터라인에서 여주대의 킥을 기다리며 서 있던 윤지의 맞은 편에 서자 윤지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혜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에 혜미도 좀더 집중력을 높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뭐야, 투 톱…인가? 설마 4-4-2 ?’ 주심의 휘슬소리와 함께 윤지와 혜미가 여주대의 전방으로 올라서자 여주대 이영기 감독은 한국여대의 벤치쪽을 돌아보며 '의외의 수'를 내놓은 남희를 바라보았다. 확실한 전력의 차이와 체력, 그리고 어렵사리 동점을 만든 지금같은 분위기라면 초보 감독들 중 열에 아홉은 안정을 택하기 위해 공격수를 빼곤 미드필드에 수비적인 성향의 선수 한 명을 더 추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좀더 앞을 내다보는 경험많은 감독이라면 그 순간이야 말로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것을 직감하며 또 하나의 공격수를 투입하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도 갖지 않는 법이었다. 축구란 스포츠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격이 최선의 수비도 되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초보 코치' 주제에 그 정도의 수까지 생각했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영기 감독이었다. ‘뭐야, 여전히 감독 놈도 없는데도 이런 전술을? 설마 관중석 어디선가 지켜보며 전화로 연락이라도 주고 받는 건가? 내가 방심하기를 바라고?!’ 하지만 이영기 감독의 이러한 추측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이미 경기에 푹 빠져들어버린 남희야말로 경기 직전 라커룸에서 자신의 수첩 사이에 끼워 넣은, 영후가 떨어뜨린 메모지의 접힌 안쪽에 4-4-2 전술이 적혀져 있다는 것도, 게다가 그 '투 톱'의 자리에 윤지와 혜미의 이름이 적혀져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 “옳거니!” 드디어 윤지와 혜미가 동시에 여주대의 진영으로 파고들자 노감독은 그제야 무릎을 탁 치며 제대로 맥을 짚은 남희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지지를 보냈다. “왜요? 뭐가 어떻게 된 건데 그러셔요?” “아, 당신이 선택한 코치 말이외다. 그…” “권남희 양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렇지, 권코치. 당신이야 말로 아주 엄청난 재목을 발굴했구려.” “그야… 이래봬도 제가 사람 보는 눈 하난 정확하니까요.” 황총장은 노감독의 칭찬에 얼떨떨해하며 기분이 좋아졌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못했다. 실은 도무지 노감독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쉽게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남희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니 역시 기분 좋은 일이었고, 어쩐지 남은 시간 동안 좀더 재미있게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운이 따라주는 것 같아요 우리 팀에.” “운? 운이라…”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축구에서 ‘골’이 나는 순간은 언제나 ‘운’이 따라주어야만 만들어지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많은 선수들은 그 ‘운’이란 것이 경기가 펼쳐지는 그라운드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감독들은 그 ‘운’을 선수들 스스로 찾아내고 또 거머쥐게 하고 싶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며 훈련을 시키곤 했지만, 정작 그 ‘운’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만은 그 어떤 훈련으로도 가르칠 수 없었다. 노감독 또한 그 때문에 감독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노감독은 윤지의 득점을 그저 ‘운’으로 치부하고 있는 황총장이 귀여워 순간 총장의 팔을 당겨 또다시 품에 꼭 안아보았다. “어머, 이이가? 누가 오면 어쩌시려고…?!” “그것도 운 아니겠소? 허허~” 노감독은 이렇게 황총장을 언제라도 안아볼 수 있게 된 것도 기뻤지만, 또 다른 이유로도 기쁠 수 밖에 없었다. 살아 생전, 영후 놈 말고 스스로 그라운드 곳곳에 숨어있는 ‘운’이란 것을 잡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또 다른 선수를 직접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그 ‘운’을 손에 넣기 위해, 아니 그 ‘운’을 그대로 골대로 쳐 넣어버리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한 소녀가 늙은 남자의 흐릿한 눈동자에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 천하의 심서연이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되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윤지에 혜미까지…?!’ 운이든 실력이든, 윤지에게 엄청난 중거리 슛 능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 이상 강인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욱 윤지에게 거리를 주지 말고 달라붙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언제나 쫓는 입장일 수 밖에 없는 수비는 공격수의 순간적인 움직임 하나에도 그대로 돌파 당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럼 당연히 최종 수비수인 자신이 윤지의 길목을 막아 설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되면 공격수가 된 혜미에 대해선 속수 무책이 될 수 밖에 없을 터였다. ‘유라가 과연 혜미를 막아낼 수 있을까?’ 같은 라인에 선채 수비에 집중하고 있던 센터백 이유라를 슬쩍 바라보던 심서연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아 머리가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막아 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수비수의 운명이었으니까. “집중해! 간격 유지하고!” 심서연은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는 포백 라인에 호통치며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종용하곤 윤지와 혜미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사건은 중앙이 아닌 측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 또다시 미드필드 중앙에 단 둘이 서게 된 아라와 지영인 그러나 어쩐지 더욱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이유가 윤지와 혜미에 의해 자동적으로 후퇴되어버린 여주대의 수비진영 때문이라는 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편해졌으면 그걸로 됐을 뿐이었다. 때문에 멀찌감치 들어가버린 여주대 미드필더 두 명과 센터백 두 명, 그리고 강인혜까지 모두 다섯 명의 수비에 둘러싸이기 시작한 윤지와 혜미의 공간을 바라보자 자신들의 공간과는 너무나 비교돼 부담스러웠는데 그 때였다. 왼쪽 측면에서 달려 올라가며 손을 든 민지가 눈에 들어온 건. ‘그래, 민지라면!’ 아라는 공을 잡고 있던 지영이에게 손으로 민지가 달려 올라가는 왼쪽 측면을 가리켰고, 마침 아라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던지 지영이 또한 일말의 망설임없이 민지의 앞 공간을 향해 그대로 전진 패스를 날렸다. ‘지영 땡큐!’ 공격수의 위치로 올라간 혜미에 가려져 있었지만, 진희와 함께 투입된 왼쪽 윙 민지야 말로 사실은 남희의 승부수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민지의 현재 컨디션은 팀 내 그 누구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는 것도. 때문에 민지가 올라서기 전에 공을 막기 위해 다가서던 오른쪽 풀백 홍진아는 그러나 비에 젖은 잔디 탓에 지영이로부터 시작된 패스의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자 자신의 뒤로 흐르는 공을 막지 못했고 결국 민지라도 막아서려 했지만, '어디... 간 거야?!' 홍진아는 공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자신의 앞에 있던 민지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 민지는 공도 사람도 막지 못한 홍진아를 피해 터치라인 밖으로 살짝 나간 채로 이미 홍진아를 통과해버린 공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자 민지는 완전하게 공간과 공을 점유하며 거의 코너플래그를 몇 미터 남겨 둔 시점까지 진입할 수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민지의 눈엔 손을 번쩍 들며 페널티 에어리어로 질주해 들어오는 윤지와 혜미가 들어왔다. 그에 민지는 달려가던 탄력과 타이밍을 유지하며 그대로 크로스를 올리려고 했지만, 그보단 여주대 오른쪽 윙 윤지수의 과격한 백태클이 좀 더 빨랐다. 퍼버벅! “으악!!!!!!” 언제 따라붙었는지, 여주대 오른쪽 윙 윤지수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민지의 발목을 노리는 깊숙한 태클을 걸었고,민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백태클에 완전히 뒷 발목을 채이며 그대로 빗물 가득한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질 수 밖에 없었다. 삐~익! 그러자 주심은 곧바로 달려와 윤지수의 반칙을 선언했지만, 발바닥이 보일 정도로 악의적인 반칙인데다가, 설사 걸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위협적인 반칙이었기에 그 어떤 주심이라도 색깔의 문제였지, 카드는 당연히 꺼내야만 했던 상황이었건만, 어쩐지 공을 보고 태클이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는 주심은 그저 한국여대에게 프리킥 찬스 하나만을 달랑 선사해 줄 뿐이었다. 때문에 그런 주심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윤지는 잠시 고개를 들어 빗속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본부석의 VIP석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 촤~악! 갑작스런 물세례에 정신을 차린 영후는 몇 미터 앞 의자에 묶여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때문에 영후는 그대로 하연에게 달려가고만 싶었지만, 바닥에 앉은 채로 꽁꽁 묶여 있는 몸으로는 달려갈 수 없었고, 입가에 단단히 붙어있는 테이프로 인해 하연의 이름을 불러볼 수도 없었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한편 영후, 하연과 함께 삼각형을 그리듯 서 있던 우두머리 남자는 빈 양동이를 집어 던지곤 이내 축구공을 집어 들어 구둣발로 어설픈 리프팅(Lifting : 발, 이마, 어깨 등으로 볼을 퉁기는 일을 계속하는 것) 을 몇 번하다가 자꾸만 공이 바닥에 떨어지자 흥미를 잃었는지 그만 두었다. 그리곤 이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하연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겨우 몇 대 얻어터졌다고 그렇게 정신을 잃어버리면, 이 여자는 대체 누가 구한다는 거야?” 우두머리 남자는 영후의 반응을 즐기려는 양 손에 든 칼로 역시 테이프로 입이 봉해진 하연의 얼굴 위를 천천히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연은 간지럽기는커녕 공포감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영후는 영후대로 기둥에 묶인 채 발버둥을 쳐 댔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아, 이 여자 얼굴에 손을 댈 생각은 나도 없다구. 여자에게는 자고로 얼굴이 가장 중요하니까.” 정말이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영후는 그 남자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고 또 믿고 싶었다. 하지만 우두머리 남자는 여전히 칼을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하연의 목 선을 따라 칼을 움직여갔다. 그러자 반짝이는 칼날은 이윽고 하연의 블라우스에 닿고 있었다. “어디, 몸매는 얼굴에 비해 어떤지 한 번 구경해볼까?” “읍, 으으읍!!!” 순간 영후는 더할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지만 목소리는 끈적거리는 테이프에 걸러지며 그저 웅얼거림으로 밖에 들리지 않고 있었고, 칼을 든 남자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킬킬 거리며 칼끝을 이용해 하연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했다. 팔랑. 그러자 얇고도 얇은 블라우스는 그대로 벌어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하연의 뽀얀 속살과 브래지어를 가득 채우고 있는 풍만한 가슴이 여과 없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자, 어때 이만하면 한국여대 벤치에 전화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여전히 칼끝으로 하연의 선명한 쇄골을 쓰다듬으며 남자는 하연에게 물었지만, 또다시 테이프로 입이 막혀버린 하연은 몇 번이나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남자는 가차없이 하연의 브래지어 가운데 부분을 간단하게 칼로 동강내버렸고, 마침내 영후가 아닌 또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수줍은 가슴을 드러내 보이게 되자 참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아닌 척 하려 했지만 결국 하연의 눈에선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우우우우!!!!!!!!!!!!!!!!” 한편 하연에게 몹쓸 짓을 하는 남자를 그저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던 영후의 두 눈속 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새빨갛게 곤두섰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양 다리로 그야말로 미친듯이 발버둥을 쳐 댔다. 그러자 하연을 괴롭히던 우두머리 남자는 조금 기분이 상했는지 하연에게서 떨어지고는 영후에게 다가가 그대로 복부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퍽! 퍽! 퍼억!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영후는 그러나 차라리 죽을 때까지 이렇게 맞아도 좋으니 절대 하연에게 저 남자가 다가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남자가 충분히 분풀이를 하고 돌아서자 또다시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욱 심기가 불편해진 우두머리 남자는 다시 영후에게로 다가가려다 자신의 옆에 놓여있던 축구공을 보곤 재미난 게임이 생각났다는 얼굴로 발끝으로 자신의 앞에 끌어다 놓았다. “역시 축구 선수는 축구로 이야기 해야 말을 듣겠지?” 이윽고 남자는 눈으로나마 하연의 탐스런 가슴을 감상하고는 곧바로 기둥에 온 몸이 묶인 채 앉아있는 영후를 향해 꽤나 강력한 슈팅을 날리고 있었다. - 여주대의 오른쪽 풀백이 담당하는 지역에서 얻은 프리킥을 차기 위해 아라가 비에 젖은 공을 들어 유니폼 상의 속에 넣고 닦자 예전 같았다면 관중석의 남자아이들은 하나같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하나같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심각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 팬들의 마음을 아는지 혜미를 비롯한 한국여대 아이들은 점점 장대비로 변해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여주대의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그러자 여주대 선수들도 각자의 마크 상대를 확인하며 들러붙었는데, 역시나 심서연은 공격수 혜미를 마크하기 시작했다. ‘분명 혜미야. 혜미보다 더 높게 뛰는 선수는 없어!’ 심서연은 프리킥의 종착지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내곤 주심의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무조건 혜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대고도 남을 정도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리킥을 차려는 아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던 혜미의 시선이 심서연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런 허술한 시선처리에 쉽게 속아 넘어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 한편 세트 플레이 연습에 몇 번 참가한 적이 없었던 윤지는 역시나 골대에서 30미터 떨어진 즈음에 서 있었다. 그것은 전술적으로 한국여대의 세트플레이가 실패했을 때를 가정해 윤지의 스피드를 살려 여주대의 즉각적인 역습을 차단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물론 강인혜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윤지에게로 따라붙고 있었지만. 하지만 이윽고 주심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달려들어가 거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선수들을 불러내 몇 번의 중재를 거치고 나서야 입에 휘슬을 물자, 뜬금없이 윤지가 강인혜에게 질문을 했다. “비가 내리면 육상은 어떻게 하지?” “뭐?” 그야말로 축구와 하등의 상관도 없는 것을 물어보는 윤지의 모습에 강인혜는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달릴 준비를 마친 윤지에게는 그 어떤 답도 필요 없는 것만 같았다. “그게, 궁금했거든.” 이윽고 총알처럼 튀어나가는 윤지를 놓치지 않으려 강인혜는 곧바로 따라 달리기 시작했지만, 어쩐지 윤지와의 거리는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기에 강인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어떻게 이런 일이…?!’ 비가 내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같은 조건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윤지 따위는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었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육상을 체계적으로 배운 자신이 육상은커녕 축구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푹푹 꺼지는, 게다가 물기 때문에 더욱 미끄러워진 잔디 위를, 마치 맑은 날 트랙 위를 달리고 있는 모습처럼 완벽한 폼과 밸런스를 유지하며 달려가는 윤지를 강인혜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강인혜는 어떻게든 따라잡아보려 노력했지만, 발을 떼면 뗄 수록 점점 멀어지는 윤지의 뒷모습에 순간 자신감이 완전히 꺾인채 한껏 젖은 그라운드 위로 그대로 미끄러지며 넘어지고 말았다. 철퍼덕! 하지만 강인혜는 다시 일어서서 추격하기는커녕 잔디에 처박혔던 얼굴을 겨우 들어올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명확히 보여지는, 그렇게도 꿈꿔왔던 완벽에 가까운 폼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윤지에게서 발견하고 있었다. ‘아름… 답… 다…’ - 한편 겨우 페널티 에어리어의 엄청난 몸싸움을 진정시키는데 성공한 주심이 이윽고 휘슬을 불자 아라는 왼 손을 들어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한국여대 아이들은 일제히 골대 가까이로 붙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혜미만은 그들과 반대로 골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분명 달려들어오면서 헤딩을 하려는 거야!’ 심서연은 어리숙한 세트피스 따윈 벌써 다 알아차렸다는 듯 혜미의 얼굴을 자신 만만하게 마주하며 따라붙었다. 그러자 잠시 후 아라의 오른발에서부터 시작된 프리킥은 이내 격하게 휘며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선수들을 외면하며 빠르게 뒷공간으로 날아갔는데, 역시나 목표는 혜미였던듯 뒤로 빠져있다가 순식간에 달려들어오며 한없이 높게 뛰어오르는 혜미의 모습에 여주대 선수들은 당황을, 그리고 한국여대 아이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돼!!!!!!!!” 역시나 혜미에게 전력으로 따라붙었던 심서연은 생각보다 더욱 높게 솟아오르는 혜미를 방해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주심의 눈을 피해 혜미의 유니폼 상의를 잡아당기며 뛰어올랐다. ‘서연!!!’ 혜미는 생각지도 못한 반칙을, 그것도 서연이 저지르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봤지만 서연의 얼굴은 결연했기에 혜미도 이내 지지않겠다는 얼굴로 공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려했다. 하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뛰어오른 덕에 혜미도 서연도 결코 머리를 공에 댈 수 없었다. 때문에 서연은 결국 수비를 성공했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어쩐지 혜미 또한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아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무, 무슨?!’ 심서연은 여전히 공중에 뜬 채로 날아오는 공의 궤도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았다. 분명 공은 자신과 혜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며 파포스트를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느낌은… 설마?!’ 심서연은 축구를 해 오면서 몇 번 느껴보지 못했던, 그래서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느낌’이 지금 막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러자 서연은 그러지 않으려 했음에도 자신에게 그 ‘느낌’을 선사해 준 단 하나의 선수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윤지?!" - 윤지는 혜미의 눈빛을 바라보자, 소위 ‘눈빛만 봐도 통한다’던 선수들의 이야기가 그저 허튼 소리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혜미는 '기회가 올 테니 그 기회를 잡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때문에 윤지는 앞 뒤 재볼 것도 없이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로 더욱 가속하며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빗속을 헤치며 달려드는 윤지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심서연도 혜미도 자신들의 머리 위를 지나 떨어져 내리는 공을 허공에 뜬 채 바라보고 있었는데,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줄로만 알았던 윤지가 물보라를 일으킬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페널티 에어리어에 진입하고 있음을 그제야 바라볼 수 있었다. '닿지 못할거야! 그러기엔 너무 멀…?!' 서연은 윤지의 대쉬를 바라보며 그래도 절대로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있는, 아니 점점 가속에 가속을 더하던 윤지의 생각은 달랐다. '넣겠어!!!' 거의 땅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공을 향해 마치 스스로 저공 미사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멀리뛰기를 하듯 다리의 엄청난 탄력을 이용해 낮은 도약을 하고는 곧바로 머리부터 들이밀며 ‘날아오르자’ 그 찰나의 순간, 심서연은 혜미의 미소도, 또 왜 자신이 불안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심서연은 그대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 때였다. “안돼!!!” 순간 골대 한쪽을 지키고 있던 여주대 왼쪽 풀백 김소정이 공을 걷어내기 위해 튀어나오며 발바닥이 보일 정도로 윤지를 향해 거친 태클을 시도한 건. 하지만 결코 혜미는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윤지의 공에 대한 집념은 그 정도로는 꺾이지 않을 것이었으니까. 투웅! 퍼벅! 촤악! 결국 윤지의 머리에 공이 닿음과 동시에 윤지의 머리 왼쪽 부분에 김소정의 스터드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지만, 공은 그대로 골라인을 넘어서 여주대의 골망 중 가장 깊고 낮은 부분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드디어 윤지가 역전골을 성공시키자 전주성은 그야말로 광풍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관중들은 정말이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껴안고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2 : 1’ 이미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 덕분에 흠뻑 젖어버린 현우도 빗물에 시야가 흐려진 걸까 싶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스코어를 두 눈을 비비며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역시나 2 : 1 이란 전광판의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현우는 도대체 저 작은 체구 어디에서 골을 향한 의지가 샘솟는 것인지 멀리서나마 확인하고 싶어 바라봤지만 겨우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드러눕고마는 윤지의 얼굴은 온통 피 범벅이 되어있었기에 현우는 그만 다리가 풀려 의자에 쓰러지듯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윤지야…’ 저렇게 약하고, 늘 당하기만 하던 아이조차 어떤 목표를 위해선 죽을 힘을 다하고 있었건만, 자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건지 현우는 무척이나 비참하고 또 미안해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치만, 나에게도 아직 기회가 남아있어!’ 현우는 그 순간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관중석을 홀연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 “들어갔죠? 그런 거죠?! 어머 어쩜 좋아!! 난 몰라!!!” 황총장은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도, 노감독이 방금 깨어난 중환자란 것도 잊어버린 채 노감독의 침대 위에 올라 껑충껑충 뛰며 환호하고 있었지만, 노감독은 그런 황총장의 애교를 기분 좋게 바라보다 다시금 티비 화면 속에서 느리게 리플레이되는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높이와 스피드, 희생과 결정력. 이 두 가지들을 상호 보완해주며 게다가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이런 엄청난 투 톱을… 놈, 그래 여태껏 잘도 숨겨놨구나…’ 노감독은 참으로 이상적인 투 톱의 모습을 병원 침대 위에서, 그것도 작은 티비 화면으로밖에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에 통탄했지만, 이윽고 지혈을 위해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윤지의 모습을 보며 또다시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저 투 톱마저 여기서 이렇게 끝나버리는 겐가…’ 어쩐지 노감독은 저 두 소녀들의 모습이 영후와 근명이가 보여준 눈부신 플레이의 결말에 너무나도 비슷하게 다가가는 것만 같아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 윤지가 골을 넣음과 동시에 부상으로 인해 실려 나오자, 역시나 가장 쾌재를 부른 건 다름아닌 여주대의 이영기 감독이었다. ‘휴우, 어쨌든 앓던 이가 빠졌구만. 한 골을 더 넣었다고는 해도 결국 거기까지야!’ 결국 이영기 감독은 곧바로 윤지를 마크하던 강인혜와 오른쪽 윙 윤지수를 불러들였고, 공격수 이새움과 김진영을 준비 시켰다. - ‘여주대에서 드디어 교체를…?!’ 수림은 곧바로 그라운드를 떠나는 선수들과 준비하는 선수들을 관찰하며 포메이션을 그려보았다. ‘강소연은 어쨌든 원 톱으로 계속 뛰겠고, 김진영이 투 톱으로 서나? 그럼 이새움이 오른쪽 윙?’ 여주대----------------------------------------------------------한국여대 ---------강소연---김진영-------------------------------윤지---혜미 강나루---박성은---김인영---이새움---------------민지---지영---아라---소영 김소정---이유라---심서연---홍진아---------------승은---진희---미애---나경 -------------윤사랑----------------------------------------미자 결국 또다시 경기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똑 같은 포메이션이 되어버린 두 팀이었기에 수림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꾸만 여주대와 한국여대의 포메이션이 같아지는 건지. 또 여주대의 첫 득점과 한국여대의 첫 득점 장면이 왜 그렇게 비슷했던 건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 수림은 남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권코치님. 여주대가 또다시 포메이션을 변경한 것 같은데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희는…” “우선, 지켜보기로 하죠.” 남희는 지금 여주대의 선수교체보다 윤지의 부상여부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제야 겨우 남몰래 선망해오던 4-4-2 전술이 성공을 거두려 했었다. 게다가 이렇게 역전까지 되었는데, 이 순간 윤지가 빠져버린다면 4-4-2는 더이상 4-4-2일 수 없었다. 때문에 남희는 세레모니조차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여주대쪽의 골라인 밖에 누워있는 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지야…’ - 한편 한국여대에서 파견된 팀닥터는 똑바로 누워있는 윤지의 머리 왼쪽 부분에 물을 뿌려 흥건한 피를 닦아내고는 부상 부위를 면밀히 관찰했는데, 그 결과 왼쪽 귀의 바로 윗부분이 3~4센티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찢어진 것도 찢어진 것이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쉽게 출혈이 멎을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거즈로 상처부위를 누른 채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지야, 아무래도…” “아, 정말 멋졌어요.” “?” 팀닥터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모양으로 보건대 어쩌면 뇌진탕 증상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 윤지야? 지금 무슨 소리를…?!” “그거 아세요? 골이 들어가는 순간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단 거.” “!”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내게서 그 느낌을 빼앗아 갈 순 없어요 그러니까…” 순간 윤지는 팔 하나를 뻗어 그대로 팀닥터의 멱살을 그러쥐고는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단번에 끌어당겼다. “유,윤지야…” “의사면 의사가 해야할 일을 하라고요! 당장 솜으로 틀어막든 어떻게든 해서 피를 멈추란 말이에요!!!” 이내 손을 내리고는 눈을 감은 채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온 몸으로 맞고 있던 윤지가 억울함에, 분함에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남몰래 비에 섞어 흘려보내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팀닥터는 이윽고 묵묵히 약품과 각종 도구를 꺼내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연같은 절세미녀의 가슴을 바로 옆에 두고도 핸드폰 DMB로 경기를 보느라 정신을 놓고 있던 우두머리 남자는 결국 한국여대가 역전에 성공하자 갑자기 흥분하며 영후에게 달려와 그대로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퍽! 퍼억! 퍽! 퍽! “전화해! 전화하라고! 지금이라도 빨리 전화해서 이길 생각 따위 하지 말라고 말하란 말이야! 어서! 어서!” ‘그만해! 제발 부탁이야… 흐흑… 그 남자한테 그러지 마…흑흑…’ 눈두덩인 이미 부풀어오를 대로 부풀어올라 영후의 눈은 보이지도 않았고, 코와 입술 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되어버렸기에 하연은 온 몸을 동원해 얘기해봤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분이 풀릴 때까지 한참을 더 가격하고 나서야 양복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가 묻은 자신의 주먹을 닦으며 일어섰다. 그러자 뭔가 이야기 할 것처럼 영후의 입 주변이 들썩거리자 남자는 그제야 영후의 입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단번에 떼어냈다. “……” “그래, 얘기해! 전화하겠다고 얘기하라고!” “…군…” “뭐? 뭐라고?” 입 속에까지 피가 흥건했던지 영후는 힘겹게 입 속의 피를 뱉어내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ㅤㅌㅞㅅ! 후후, 고맙다고…” “뭐가? 뭐가 고마운데?!” “걱정했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나 없이도 잘하고 있다는 걸 알려줬잖아…” “이, 이… 이 자식이!!!!!!!! 야, 거기 누구 없어!” 우두머리 남자는 급기야 성질이 뻗쳤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영후를 괴롭힐 것을 찾았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지 곧바로 부하를 불러댔다. “예, 형님!” “아무래도 이 자식 다리를 뭉개버려야겠으니까, 해머 가지고 와!” “예, 형님!” 하연도 영후도 흥분한 남자가 부하에게 한 중국어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극도로 화가 나있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 드디어 경기가 재개되자 여주대는 포백 수비라인을 극단적으로 하프라인 가까이까지 끌어올린 상태로 경기를 시작했다. 때문에 혜미는 여전히 짝을 잃은 채 혼자서라도 여주대 진영으로 올라서려다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는 공격은커녕… 차라리 윤지가 복귀할 때까지 수비에 가담하면서 여주대의 공격을 막는 게 더 나을 거야.’ 하지만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윤지 때문에 혜미는 여주대에게 앞서고 있었음에도 이기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길한 마음은 곧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 하프라인 부근까지 올라선 심서연은 공을 가진 채 한국여대 진영을 살펴봤다. 하지만, ‘이거…?!’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한 명이 적어졌다는 위기감 때문에 선수들 모두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분명 혜미를 제외한 여덟명의 한국여대 선수들은 마치 바둑판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촘촘하게 수비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간격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이제는 공이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을 정도의 그라운드 사정을 감안했을 때 기본적인 이대 일 패스는 아예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한국여대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약점이 있었다. ‘혜미, 네가 공격수로 나와있어줘서 다행이야!’ 서연은 한국여대의 수비라인 중, 센터백 진희에 달려들고 있는 공격수 강소연을 바라보았다. - 진희는 거칠게 달려드는 강소연과 한 두 번의 몸싸움을 벌였을 뿐이었음에도 호기롭게 그라운드에 들어섰을 때완 달리 막막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공격수를 그것도 전반 내내…!’ 이 정도일 줄은 진희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혜미가 어렵지 않게 막아내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거의 남자처럼 밀고 들어오는 엄청난 체격의 강소연을 막기엔 자신의 능력도, 또 다리의 상태도 그리 온전치 못한 것만 같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진희 혼자 만이 아니었다. ‘강소연!’ 순간적으로 후방의 심서연으로부터 롱패스가 이어지자 페널티 에어리어로의 침투를 호시탐탐 노리던 강소연은 그러나 갑자기 오프사이드 라인에서 몸을 돌려 뒤로 빠져나와선 공을 가슴으로 가볍게 트래핑했다. 진희는 어쨌든 패스를 막진 못했어도 골대쪽으로 돌아서지 못하게 하려 곧바로 따라붙었는데 강소연은 공을 가지고 돌아서기는커녕 새로 오른쪽 윙으로 투입되어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 올라오는 공격수 이새움에게 넓게 벌려주었다. ‘이런!’ 당연히 중앙쪽으로 공격해올 줄 알았던 진희와 왼쪽 풀백 승은이는 순간적으로 이새움을 놓쳤는데 승은이가 곧바로 따라가려 했지만, 이미 이새움의 발끝에선 폭우를 뚫고 날카로운 크로스가 올라오고 있었다. “막아!!!”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갑작스런 공격방향 선회에 한국여대 수비진은 붕괴되기 일보직전이었고, 센터백 진희와 미애, 그리고 골키퍼 미자는 순간적으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몰려들어오는 공격수 강소연과 김진영, 그리고 미드필더 박성은과 김인영 중 누구를 막아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에 미자는 차라리 사람보다 공을 잡아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하곤 이윽고 골 에어리어의 중앙 라인으로 날아오는 공을 향해 뛰쳐나갔고 공은 그대로 손에 닿아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비키라고!” 자신을 마크하는 진희를 그대로 밀어내며 미자를 향해 거칠게 뛰어오른 강소연은 공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미자를 노리며 스스로 머리와 어깨를 들이밀며 공중에서 충돌했다. 퍼억! “아악!” 게다가 강소연은 충돌 후 그대로 미자의 몸 위로 자신의 육중한 몸을 그대로 떨어뜨리며 또 한번 미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쿵! 퍼억!!! "으윽!" 그야말로 극심한 통증이 온 몸에 퍼지는 듯 했지만, 그럼에도 골키퍼야 말로 최후의 수비라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일으킨 미자는 그러나 자신의 손에 맞고 그대로 허공으로 떠오른 공이 어디로 갔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공은 한국여대의 수비가 아닌, 언제 달려왔는지 정확히 낙구 지점에서 헤딩을 하기 위해 뛰어오르는 심서연의 이마에 맞으며 그대로 골라인을 넘으려 했기에, 미자는 손을 뻗어 어떻게든 막고 싶었지만, 순간 극심한 고통과 함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왼팔 때문에 그저 뜬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 “후우…” 조전무는 본부석의 VIP석에 앉은 채 한동안 좌불안석일 수 밖에 없었지만, 다행스럽게 여주대가 또다시 동점을 만들자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나마 미리 주심에게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상황은 완벽한 골키퍼 차징으로 공격자 파울을 줄 수 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강소연의 플레이가 거칠었지만, 어쨌든 동점을 만들었으니 다행이었는데, 그럼에도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그에 조전무는 주위를 살피며 슬쩍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안 그래도 흥미 진진하게 보고 있었소.” 우두머리 남자는 핸드폰을 통해 경기를 보다 말고 걸려온 조전무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거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승리라는 것을… 아아, 그렇게나 걱정되면 이리 직접 와서 해결하시던가! … 흥, 말은 똑바로 하시지? 이번 판에 협회 돈까지 끌어들이라고 한 건 내가 아니잖소! … 훗, 어쨌든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그러니 당신은 망할 주심 놈이나 제대로 건사하시오!” 우두머리 남자는 꽤나 일방적으로 통화를 마치고는 핸드폰으로 다시 DMB를 볼까 했지만 이내 할 일은 해야 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옆의 기둥에 놓여있던 둔탁하게 생긴 해머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하연의 눈이 더없이 커졌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흐흐, 드디어 여주대가 따라잡았거든. 그래도 전무 놈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다는 군. 그래서 우선 네 놈의 다리 하나는 보험 삼아 받아놓으려는데, 어때, 그래도 전화 안할텐가?” 남자는 이미 사색이 되어 있는 하연을 뒤로 하고 해머를 질질 끌고 영후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영후는 대답할 기력도 없이 반쯤은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대답은커녕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하연은 ‘전화를 하겠다!’고 몇 번이나 발버둥치며 외치려 했지만 여전히 테이프로 막혀 있는 입으론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자, 어느 다리가 더 좋을까나… 그래, 남자는 오른쪽!” 남자는 드디어 영후의 무릎에 몇 번이고 해머를 조준해보고는 그대로 내려치려 머리위로 해머를 들었는데 그때였다. 연이은 타격음과 더불어 부하들의 비명이 벽 뒤에서 들려온 건, “?” 무슨 일인지 짐작도 못하는 우두머리 남자의 눈엔 얼마 후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등장하는 두 명의 악귀들이 보이고 있었다. "좆도 아닌 것들이 깝치기는.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놈들이. 그죠 선배?" 말과는 달리, 거의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듯한 얼굴로 말하는 철용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규식은 그러나 역시 장난스레 혀를 쯧쯧 찼다. "자넨, 명색이 에이전트라는 사람 입이 그렇게 걸어서 쓰겠나?" "에이, 선배 왜그래요~ 선배나 나나 사선을 넘은 사이잖수." "하, 이 사람하고는. 자네가 뛰던 때와 내가 뛰던 때가 같은 줄 아나? 내가 뛰던 때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전쟁터였다고!"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지만,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 여유로워 보이는 두 악귀는 분명 자신들의 부하들을 모두 해치우고 온 것이 분명했기에 우두머리는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무척이나 당황한 남자는 해머고 뭐고 내팽겨둔 채 곧장 의자에 묶여 있던 하연의 뒤로 달려가 숨은 채 칼을 꺼내 들고는 하연의 목에 바짝 대며 입을 열었다. “네, 네 놈들은, 누, 누구냐?!” 방금 전까지의 그 기세 당당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우두머리 남자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런 건 신경쓰기조차 귀찮다는 듯 악귀 중 한명인 철용이 옆의 악귀 규식에게 물었다. “햐, 저 짱개 노무새끼 한국말 하는 것 좀 보게? 선배, 어쩔래요? 선배가 할겁니까?” “아니, 난 저딴 놈에겐 관심없다. 그나저나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규식은 잔뜩 쫄아있는 우두머리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기둥에 묶여있는 영후에게로 다가갔다. “이보게! 이보게 영후! 정신이 드나?” “아, 선배…님…” “어떻게 이 지경까지…” 입안이 어떻게 된 건지 발음조차 불분명한 영후를 바라보던 규식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달려가 우두머리의 모가지를 꺾어놓아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리곤 묵묵히 영후를 속박하고 있는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곧바로 쓰러질 것만 같던 영후는 그러나 규식의 어깨에 기대며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규식은 영후의 한 여자를 향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전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이제 걱정 말게. 우리가 왔으니.” “서, 선배님… 우리 하, 하연이는…” “이 사람하고는…” 규식은 이윽고 영후의 단 하나의 관심사인 하연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하연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남자는 더욱 놀라 하연의 목에 더욱 칼을 바짝 들이댈 뿐이었다. 확실히 놈을 잡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영후의 여자를 구하자면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여자 때문에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놈도 있었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때문에 결국 다시 영후에게로 고개를 돌리던 규식의 눈엔 순간 영후의 옆에 놓여있는 피묻은 축구공이 들어왔다. “일어설 수 있겠나?” “예…” 규식의 부축을 받으며 어렵게 일어서서 겨우 기둥에 기댄 영후의 눈엔 그제야 하연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다. “하연아…” “이보게, 저 여자를 구하려면 자네의 힘이 필요하네. 어때, 해 볼텐가?” 규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당연히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하연을 구하는 일이라고 한 것 같았기에 영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몇 번이 됐든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규식은 그제야 철용을 불렀다. “이봐, 이쯤에서 슬슬 마무리 짓자고.” “에?” 규식이 다짜고짜 옆에 서있던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자 철용은 깜짝 놀랐지만, 규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후가 있던 곳에서부터 시작해 제법 큰 걸음으로 철용을 끌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착한 놈이 끝에 가서 이기는 게 맞지? 그렇지?” 게다가 하연에게 걸어가면서 규식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자 철용은 갑자기 뭘 하려는 건지 짐작조차 못했는데, 드디어 규식이 걸음을 멈추자 팔짱을 끼고 있던 철용도 덩달아 멈춰 섰다. “이게 뭐 하는 건데요 지금!?” 철용은 가뜩이나 하연의 목에 칼이 겨눠진 다급한 상황에서 뭘 하냐는 거냐고 물었지만, 규식은 덤덤하게 물었다. “우리가 지금 몇 걸음 걸었는지 아나?” “그야… 열…?!” 그제야 철용은 깨달을 수 있었다. 큰 걸음으로 열 걸음! 그것은 축구 시합 중 심판이 프리킥을 하려는 선수의 자리에서 수비벽까지의 거리를 지정해 주기 위해 9.15미터를 측정할 때 걷는 일반적인 걸음 수였다. ‘설마…?!’ 철용은 규식이 지금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으나 차마 믿기지가 않아 함부로 영후를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당장 돌아보지 않아도 녀석은 충분히 망가져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정말 영후가 저 상태에서 규식의 바램대로 해 줄 수 있을지 확신조차 서지 않았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여자를 구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영후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철용은 더 이상 의심 따윈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식아, 이런 것쯤 빨랑빨랑 해결하고 이 지긋지긋한 대한민국, 내일이라도 당장 뜨자!’ 한편 이런 두 남자의 속내를 알 길 없던 우두머리는 여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규식과 철용의 모습에 다급한 나머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지마!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오면 그땐!” 게다가 우두머리 남자는 규식과 철용을 어떻게든 위협해보겠다는 양 하연의 목에 대고 있던 칼을 그대로 규식과 철용에게 겨눴는데, 그 순간 규식은 철용을 자신의 반대쪽으로 힘차게 밀어냄과 동시에 자신도 옆으로 쓰러지며 그대로 외쳤다. “지금이야!!!!!” - 왼쪽 눈두덩인 부어 오르고 눈가에까지 피가 스며들어 그나마 오른쪽 눈만으로 겨우 볼 수 있던 영후는 그러나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온통 붉은 색 투성이라는 것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겨우 고개를 돌리며 이곳 저곳을 바라보았다. ‘여긴… 그래… 장선배,구선배… 그리고 저기에 하연이가 있고… 그리고… 축구… 공?’ 영후는 그제야 자신의 발 아래 놓여있는 축구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행복했었음을 영후는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이 공 하나와 보냈던 이루 헤아릴 수 없던 밤과 낮의 기억 또한 온 몸으로 되새겨보았다. 또한 앞으로 이 공과 보냈던 시간 만큼이나 밤과 낮을 함께 할 사람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도. 그러자 그 순간 규식이 방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여자를 구하려면 자네의 힘이 필요하네.’ ‘나의… 힘?’ 지금 이런 상태로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던 영후는 그러나 자신의 앞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두 남자의 등을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온 몸에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통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도 했지만 겨우 참아냈고 이내 두 손으로 공을 살짝 들어올렸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것은 역시나 수많은 경기를 거치며 수도 없이 했었던 동작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그 동작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고. 이윽고 영후는 천천히 공에서부터 뒷걸음질 치곤 다시 한 번 정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불편한 시야와 두 선배들이 만든 인간 벽에 의해 타이밍을 재던 영후는 순간, ‘지금이야!’라고 외치며 두 선배들이 벽을 허물며 사라지자, 완벽하게 선명해진 목표물을 노려보며 그대로 공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던 두 남자들이 흩어지자 지금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짐작도 못한 우두머리 남자는 그러나 저 뒤편에서 귀신처럼 서 있던 남자가 축구공을 향해서 달려 나오는 것도, 그리고 그 남자의 발에 강렬하게 충돌한 축구공이 마치 미사일처럼 날아오는 것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곧바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마치 엄청나게 느린 ‘슬로우 비디오’처럼 보여지고 있었다. 때문에 얼굴 정면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는 축구공을 남자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의 몸마저 슬로우 비디오가 된 듯, 빠르게 움직여주지 못했기에 피하기는커녕 공이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을 그저 뜬 눈으로 공포스럽게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퍼~억! 결국 우두머리 남자는 축구공에 얼굴을 강타 당하고 나자 마치 권투 선수의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직격으로 맞은 것처럼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동시에 일격을 날리기 위해 모든 힘을 그러모았던 영후 또한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한편 경기가 끝나면 감독과 선수들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인터뷰 홀에 모여있던 방송 관계자들 중, 기자들은 기자들끼리 카메라 맨들은 또 그들끼리 지루함을 달래려 이런 저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거 이거, 이러다가 또 연장 가는 거 아냐?” “아직도 2 : 2 래?” “여자 경기 치고 꽤나 격렬한가봐. 관중들도 꽉꽉 들어찬 것 보면.” “근데, 자네는 누가 이길 것 같애?” “글쎄, 나야 뭐 여자 축구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도, 왜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어때, 우리 오늘 누가 이길 지 내기해보지 않겠나?” “내기? 뭔 내기?” “뭐, 가볍게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어때?” “그거 좋지! 그럼… 난 한국여대 승에 걸지.” “에? 한국여대엔 내가 걸려고 그랬는데?!” “원 사람하고는. 어쨌든 내가 한국여대에 걸었으니 자네는 여주대에 걸면 되겠구만?” “아, 나 이사람~” 별것도 아닌 내기에도 목숨을 걸던 카메라 맨들과 기자들은 그러나 언제 와 있었는지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한 소년의 존재를 깨달았다. “저기…” “응? 넌 누구니? 여긴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전… 현우라고 합니다.” “현우? 근데?” “기자 분들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말? 무슨…?” 도대체 꼬마 하나가 갑자기 등장해 난데없이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카메라맨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엔 소년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때문에 그들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 말...이라니?” “실은, 제 아버지가 대한 축구협회에 전무로 계시는…” “축협 전무... 에? 조전무? 아니… 님?! 자네 아버지가?” 순간 카메라맨들과 기자들은 잠시 얼음이 되어버렸지만, 그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그제야 모두들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떽! 인석아, 여기가 어딘데 와서 뻥이냐 뻥이! 조전무한텐 아들이 없다는 걸 우리가 다 알고 있구만. 임마 네가 조전무 아들이면, 난 쥐새끼 애비다 자식아~” 전혀 현우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현우에게 꿀밤을 날리며 화를 내는 카메라 맨 때문에 현우는 잠시 주춤할 수 밖에 없었지만, 마침 그 때 등 뒤에서 들리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 네가… 정말 현우냐?” “누구…세요?” 현우는 혹시 ‘그 분’이 보낸 사람인가 싶어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꽤나 후줄근한 양복차림을 한 중년의 남자는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빠르게 답했다. “아, 난… 그래, 박기자라고 알지? 박하연 기자. 난 하연이 직장 상산데, 안그래도 박기자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여기까지 와봤다. 하필 오늘은 계속 박기자한테 연락조차 안되기도 하고. 그런데 정말 네가 박기자 말대로 조전무가 숨겨놓은 아들인 거냐? 정말 그런 거야?” 현우는 다급한 남자의 물음에 무어라 설명을 하려 했지만, 그만두고는 이윽고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재생시켰다. 그러자 이윽고 현우의 핸드폰에선 하연의 직장 상사인 부장을 비롯해 그곳에 있는 모든 기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내가 일하는 곳이 어떤 곳인 줄 아느냐? 잠시라도 방심하면 나이를 막론하고 수많은 적들이 개떼처럼 달려드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알량한 자존심, 양심 따윈 내가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말아야 하지! 이래서 봐주고, 저래서 봐주려는 얄팍한 동정심 또한 금물이고! 그렇게 이런 저런 나약함들을 벗어버린 몸으로, 그리고 그보다 더 독한 마음으로! 상대가 누구든, 앞길에 훼방을 놓으려 한다면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뭉개줘야 하는 거다! …” 그러자 그저 한 소년의 장난인 줄로만 알았던 기자들이 현우의 주변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어느덧 여기저기서 갑자기 카메라 플래쉬가 우후죽순으로 터지기 시작했는데 그 때였다. 누군가가 외친 건. “엇?! 저거 뭐야?!!” 그 외침에 다같이 바라본 곳에선 어떻게 된 건지 천장에 달려있던 빔 프로젝트를 통해 어떤 영상이 커다란 스크린에 투영되고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선 절묘하게도 지금 막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조전무가 그것도 알몸으로 등장하고 있었고, 이윽고 같이 등장하는 모자이크 처리된 여자와 함께 질펀한 섹스를 하려 하고 있었기에 순간 인터뷰 라운지는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인터뷰 라운지 밖에선 배전함 속 전선 가닥에 노트북의 외부 영상 단자를 브릿지시키고 있던 하연의 선배가 몰려드는 졸음을 겨우 참은 채 개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아얏!” 팀닥터가 손을 함부로 댈 수도 없을 만큼 왼쪽 어깨에 심한 충격을 당한 미자는 그러나 자신의 부상이 아닌 골을 막지 못했다는 허탈감에 눈물이 흘렀다. 게다가 골키퍼는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더욱 슬펐고, 또 화가 났다. 이대로라면 연장전까지 갈 수 조차 없을 것이었고, 만에 하나 운이 좋게 연장전까지 마친다 해도 한양여대 전처럼 또다시 승부차기에 돌입한다면 승리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터였다. ‘젠장… 하필 이런 때에…’ 미자는 생애 처음으로 혼자서는 어쩌지 못할 비참함을 느끼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남희는 팀닥터가 여전히 'O'의 수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는 것에 더욱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겨우 풀백 하늘이 만이 교체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당연히 그 누구도 골키퍼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벌써 90분…’ 고개를 돌려 확인해본 전광판의 시계는 벌써 90분에 다다라 있었고, 골키퍼의 부상 치료에 의한 추가시간까지 더한다 해도 길어야 5분이 될 것이었다. 가뜩이나 윤지까지 투입되지 못해 한 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자까지 부상을 입었다면 남희로서는 더이상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 때였다. 머리에 온통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맨 한 소녀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터치라인에 서서 주심에게 손을 흔든 건. “유, 윤지야?!” “한 골이면, 되는 거죠?” 윤지가 무덤덤하게 돌아보며 말하자 남희는 깜짝 놀라며 윤지를 만류하려 했지만, 그보다 주심의 수신호를 받고 그라운드로 달려들어가는 윤지가 조금 더 빨랐다. ‘윤지야…’ 남희는 어쩐지 빗속의 그라운드로 외롭게 달려들어가는 윤지의 뒷모습에서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었던 한 남자가 오버랩되는 것 같아 물방울 가득한 안경을 벗어 블라우스에 슥슥 문질러 닦고는 다시 쓰고 바라봤지만, 여전히 윤지의 모습에서 그 남자의 잔상이 남아있는 것 같아 남희의 가슴은 점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풉!” 고통을 느끼는 와중에서도 미자는 마치 양파처럼 변해버린 윤지의 머리모양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그에 윤지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살아있었구나? 그건 그렇고, 넌 여기서 끝낼거야?” “뭐?” “이제 다 끝나가잖아. 그러니까 혼자 먼저 들어가지 말라고.” “그게 무슨...?” 미자는 윤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쉽게 이해하지 못해 다시 물었지만, 윤지는 미자가 아닌 의사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있었다. “의사 아저씨, 됐으니까 그 정도로 하고 들어가요.” “유, 윤지야?” 팀닥터도 미자도 윤지의 뜬금없는 행동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어지는 윤지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골, 넣으면 되잖아. 이 언니가 한 골 넣어줄 테니까 엄살 그만 부리고 잠깐만 여기 서서 구경이나 하라고.” “?” “잠깐이면 돼.” 팀닥터는 도대체 윤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시 돌아본 미자의 얼굴은 이미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표정이었기에 혼자만 이상한 나라에 와있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해보고 있었다. - 남희는 어쩔 수 없이 하늘이를 골키퍼로 준비시켜야 하는 가 싶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팀닥터가 간단한 치료를 마치고 홀로 돌아오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자는 괜찮던가요?” “아, 그게…” 남희는 예의상 팀닥터에게 고생했다는 의미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생각보다 미적지근하자 그제야 뭔가 잘못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선생님…?” 남희는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순간 핸드폰이 진동하자 그 어떤 생각도 중단한 채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그런데 어쩌자고 두 분이 함께 오신 거에요?” 모든 상황이 종료되자 하연이 철용과 함께 영후를 부축한채로 힘겹게 걸어가며 묻자, 철용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이 놈은 내 최고 고객이니까 어쩔 수 없죠.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습니까?” 하연은 단지 그런 마음만으로 온 것이 아님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남자들은 어쩜 그리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에 야박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나이든 남자는 다를까 싶어 이번엔 규식을 돌아보자 규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 말이오? 나는… 뭐 학부형으로서 왔다고 해 둡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 자식 가르치는 선생에게 나 죽었소 할 수 밖에 없는 게 우리나라 학부형 아니겠습니까?” 규식의 말에 하연은 그제야 마음 편히 미소 지어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 위험에 빠져버린 것조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영후 곁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걱정할 건 없는 것만 같았으니까. 때문에 하연은 이제는 영후의 축구 인생에 그 어떤 것도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 예상해보았다. 비단 하연 자신도. - 차창을 순식간에 뒤덮는 빗물을 치워내려 쉴 새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영후 일행이 드디어 건물에서 빠져 나오는 모습을 확인한 현우의 운전기사는 잠시 이유 모를 한숨을 쉬고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 우산을 펴고 섰다. 한편 하연은 여전히 힘겨운 걸음을 걷고 있는 영후를 부축하며 걷다가 흐릿하게 보이는 자동차와 정장차림의 중년 남자를 발견하고는 순간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저 사람은…?” “네? 아, 놀랄 것 없어요. 저 분은 현우와 함께 다니는 기사 분입니다. 저 분 덕에 우리가 늦지 않고 기자님과 영후 녀석을 찾을 수 있었지요.” “네에…” 규식의 대답에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끄덕이던 하연이었지만 어쩐지 이상한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때문에 점점 운전기사와 가까워지는 것에 이유 모를 불안함을 느끼며 철용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분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던 거죠?” “아 여보세요? 남희씨? 네네! 저 구철용입니다!” 하지만 철용은 남희에게 전화를 거느라 하연의 질문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때문에 하연은 규식을 찾았지만 규식은 규식대로 영후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려 먼저 빗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영후를 홀로 부축하며 걷던 하연은 이윽고 우산을 든 채 천천히 다가오던 운전기사와 점점 가까워졌고, 이윽고 운전기사가 들고 있는 커다란 검정 우산 속으로 영후와 함께 들어섰다. - “네?! 정말입니까? 감독님도 박기자님도 모두 무사하시다고요?” 남희의 한층 높아진 톤의 목소리에 수림도 남희의 핸드폰에 귀를 바짝 대고 붙어버렸는데, 갑자기 아비규환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전화는 그대로 끊기고 말았다. "여보세요?! 철용씨!! 여보세요?!" 남희는 몇 번이고 철용을 불러보았지만, 끊긴 핸드폰에선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코치님? 우리 감독님, 괜찮으신 거죠? 그런거죠??” 수림은 답답한 나머지 남희에게 몇 번이고 묻고 있었지만, 남희는 차마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었다고, 그리곤 갑자기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때문에 다시금 경기가 재개되기 시작하는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수림에게 말했다. “감독님께선 곧 오실 겁니다. 그러니… 우린, 우리의 할일을 하도록 합시다.” -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간 경기에 혜미는 낙담할 수 밖에 없었지만, 센터서클에 마주선 윤지를 바라보며 그나마 윤지가 돌아와 주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윤지가 돌아와주었으니 우선은 경기를 이대로 마치고 재정비하고나면 윤지와 어떻게든 골을 만들어 넣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시간, 아직 조금은 남은 거겠지?” “어? 으응. 그치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닐거야. 그러니 어떻게든 버티면” “버텨? 뭘? 설마 연장전까지 끌고 가자는 거야?” “물론 아이들 체력을 감안하면 안좋은 선택이란 건 알지만, 지금은 동점까지 허용한 터라 아이들이 받고 있을 심리적 부담감도 무시할 순 없어.” “…” 윤지는 혜미의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니었기에 뭐라 반박하지 못했지만, 어쩐지 골대 앞에 홀로 서 있는 미자를 돌아보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주심의 휘슬 소리가 들리자 윤지는 자신의 발 아래 있던 공을 혜미에게 밀어주었고, 혜미는 아무 생각없이 늘 그랬듯 그대로 뒤의 아라에게 밀어주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주대 선수들의 상당수가 센터라인을 빠르게 넘어서고 있었기에 혜미는 자신의 안일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 이건 설마?!' 혜미 뿐만 아니라 한국여대 아이들 모두는 경기 말미에 갑작스럽게 재개된 여주대의 전원 압박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뭐, 뭐야? 경기가 끝나가는 시점에도 저렇게 압박을 할 정도로 체력이 남아있었다는 거?’ 지영인 어느새 아라에게 달려들고 있는 공격수 강소연과 김진영을 비롯해 네 명의 미드필더들과 심서연을 포함한 포백 모두가 하프라인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농구경기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올 코트 프레싱’과 같은 모습이었다. 때문에 아라는 급하게 뒤에 서 있던 센터백 진희에게 백패스를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부상당한 다리 때문이었는지 진희는 공을 그대로 흘리고 말았고, 역시나 진희가 공을 놓칠 것이라고는 예상못한 미자 또한 함부로 몸을 날려볼 생각도 하지 못하며 공이 그대로 골라인 아웃이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훗,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이영기 감독은 여전히 비를 피하며 벤치에 앉은 채 미자의 움직임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명 그 정도의 높이에서 충돌한 것도 모자라, 떨어지면서 받았을 충격에 강소연의 체중까지 더해졌을텐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때문에 생각보다 부상의 정도가 경미한가 싶었지만, 서연의 헤딩슛을 막아내지 못하는 모습과 방금 몸을 날리기는커녕 손도 뻗어보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서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경합시키면 게임 오바겠지.’ 이영기 감독은 단 한 명의 골키퍼밖에 없는 한국여대의 약점이 이런 식으로 드러나게 될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드러난 약점이라면 감사히 들쑤셔줘야 했다. 때문에 이감독은 코너킥에 의한 셋트피스를 준비하는 선수들에게 간단하게 사인을 보내기 시작했다. - 그저 시간을 보내며 연장전을 준비하려 했던 혜미는 갑작스런 위기상황에 당황했지만, 어쨌든 여주대의 득점을 막기 위해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하지만, ‘다른 공격수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혜미는 당연히 심서연을 마크해야 했지만, 여전히 힘이 남아도는 강소연을 진희나 미애에게만 맡겨놓기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게다가 심서연 말고도 코너킥을 올리기 위해 오른쪽 코너플래그에서 준비중인 오른쪽 윙 이새움을 제외한 전원이 시간이 다 됐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공격을 하기 위해 페널티 에어리어에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에 머릿속은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머릿속을 채 정리도 하기 전에 이새움의 왼발에서부터 올려진 코너킥은 쏟아지는 폭우를 가르며 낮고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공은 미자와 한국여대 수비들의 가운데 공간으로 날아오고 있었기에 혜미도, 그 누구도 공을 클리어 해내기엔 쉽지 않았는데, 그 순간 믿을 수 없이 골문에서부터 튀어나온 미자가 오른팔 하나로 펀칭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없어!!!” 때문에 여주대의 마지막 공격은 무위에 그치는 것만 같았는데, 미자의 펀칭에 튕겨나간 공은 그러나 멀리 날아가지 못하며 페널티 아크 부분에 떨어졌고, 공은 빗물이 고여버린 그라운드 탓에 더 이상 튕기지도, 또 구르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순간 한국여대 수비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을 차 내기 위해 벌떼처럼 달려들었지만,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주대 미드필더 김인영이 한 발 더 빨랐다. ‘이걸로 끝이야!!!!’ 마치 프리킥을 차듯, 김인영은 멈춰있는 공의 왼쪽에 왼발을 박아넣고는 그대로 오른발로 슈팅을 날렸다. 파~앙! 그러자 공은 슛을 막기 위해 몸을 날리는 한국여대 선수들과 공을 피하는 여주대 선수들이 한데 엉키는 공간을 절묘하게 빠져나가며 골문을 향해 날아갔고, 미자는 펀칭이후 미처 골대로 회귀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절망스런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때였다. "누구 맘대로!!!" 공이 골라인을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혜미가 가까스로 빗물에 슬라이딩을 하며 공을 막아낸 건. "혜미야!!!!!" 그야말로 한 골을 넣은 것과 비견될 정도의 결정적 플레이로 한 골을 선방한 혜미는 동료들에게 칭찬이 쏟아질거란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침없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여주대 선수들 때문에 우선은 골라인 아웃을 시킬까 했지만, 순간 언제 와있었는지 오른쪽 풀백의 지역에서 손을 들어보이는 선수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윤지!!!!!!!!!!” 혜미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대로 윤지에게 그대로 패스를 날렸다. 그러자 여주대의 모든 선수들은 순간적으로 윤지에게 쏠리며 압박하려 했는데 윤지는 자신의 앞에 떨어진, 그러나 전혀 바운드 될 생각도, 구를 생각도 하지 않는 공을 여주대의 진영으로 꽤나 멀리 차 놓고는 그대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골대까진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니까, 감독님… 저 마음껏 달려봐도 되는 거죠?’ 윤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그라운드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그 누구도 윤지를 따라잡을 순 없을 것만 같았다. - 하연은 뭔지 모를 불안감에 영후를 부축하고 있는 손에 자신도 모르게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괜찮을 거라고, 이제 다 끝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운전기사를 바라봤는데, 우산을 든 채 한동안 장승처럼 서 있던 운전기사의 입이 그제야 열리고 있었다. “…니다…” “?” 하지만 하연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영후에게 이야기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어쩌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을 정도로 불안정한 눈빛이 하연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 하지만 운전기사는 다시 한 번 읊조리고 있었기에, 하연은 이번엔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어서…” “네? 그게 무슨…?!” 하지만 하연은 채 묻기도 전에 우산을 들고 있던 운전 기사의 오른손이 이내 우산을 던져버림과 동시에 양복 안 주머니에 들어있었던 칼을 꺼내들자, 그 와중에서도 그 칼의 모양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설마?!’ 그랬다. 운전기사가 꺼내든 칼은, 방금 전까지 자신을 농락하던 삼합회의 우두머리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칼’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우두머리의 칼은 자신을 노리고 있었지만, 지금의 ‘칼’은 바로 자신의 남자, 이영후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하연은 칼을 쥔 남자의 손이 그대로 영후를 향해 뻗어지자 고민할 것도 없이 날카로운 칼과 영후의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영후를 감싸안았다. 푹. 생각지도 못하게 영후가 아닌 하연의 오른쪽 옆구리에 칼이 박히자 운전기사는 칼을 빼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고, 남희와 통화를 하던 철용과 차문을 열고 서 있던 규식은 그제야 미친듯이 달려와 운전기사를 제압했지만, 영후만은 왜 하연이 갑자기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천천히 스러져 가는건지, 왜 점점 발 밑으로 붉은 색의 빗물이 늘어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자신 앞에선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애써 희미하게 웃어주는 하연의 얼굴을 보고서야 영후는 정글의 사자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안돼!!!!!!!!!!!!!!!!!!!!!!!!!!!!!!!!!!!!!!!!!!!!!!!!!” Goal! 단편 - '그 남자의 하루'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고속도로의 한 가운데에 길게 이어진 하얀색 실선과 거의 직각을 형성하며 완전히 멈춰 서있던 아우디 R8은, 곧이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굉음을 내며 코너를 돌아 나오면서도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무자비하게 가속하며 달려오고 있는 거대한 트럭과 비교하니 장난감 같기만 했다. 하지만 그 장난감 속에선 온통 찌그러져 있던 운전석 문을 끝내 열지 못한 근명이 안전벨트조차 다시 매지 못한 채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클락숀을 죽어라 눌러대고 있었다. “씨~바아알! 사람 있다고오!!!!!!!!!” 빠아아아아앙!!!!!!!!!!!!!!!!!! 하지만 25톤과 그 무게 이상의 가속력이 주는 거대한 위압감에 결국 근명은 모든 것을 포기하곤 나직하게 한 마디를 읊조려보았다. “좆됐네…” 그리곤 눈깜짝할 사이에 코 앞까지 다가온 트럭의 모습에 근명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이윽고 엄청난 충돌음이 고막을 찢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잠시 후 느껴질 고통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란 것 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콰광!!!!!!!!!!!!!!!!!!!!!!!!!!!!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근명은 온 세상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 아비규환 속에서 근명은 몸 전체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순간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더니 갑자기 그 소란의 소용돌이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뭐…야?” 벌써 천국이라도 온 건가 싶은 기묘한 느낌에 슬며시 눈을 뜨는 순간 눈 앞엔 잔뜩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하늘이 들어왔다. 천국, 혹은 지옥에도 저런 하늘이 있구나 싶던 그 순간, 잠시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만 같았던 몸은 중력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근명의 몸은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지고 있었고 다리와 어깨 그리고 뒷통수에 엄청난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근명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으… 아… 안돼!!!!!!!!!!!!!!! 헉헉…” 하연을 납치하는 차를 추격하던 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꿈에서 또다시 힘겹게 빠져 나온 근명은 마치 바로 전에 사고를 당한 것 마냥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게다가 침대의 시트가 푹 젖을 정도로 식은 땀까지 흘린 터라 그렇게 잠에서 깨고 나자 결국 다시 잠들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럼에도 근명은 침대 위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회복기간을 몇 개월이나 거친 후에야 가능했던 무릎 수술은 받은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었다. 하지만 어쩐지 겁이 사라져주지 않는 통에 혼자 있을 땐 차마 함부로 움직여볼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 때문에 근명은 조심스레 상체만을 반쯤 일으킨 채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과 함께 아직도 낯설기만 한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간단한 원목 옷장과 스탠드, 그리고 일인용 소파 두 개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 말고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몇 년 전에 ‘이영후’가 있었던 방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알 수 없는 신비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이내 문 밖에서 정적을 깨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아, 네.” 근명은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오늘도 또다시 잠결에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나 근명의 비명소리에 놀란 한일동 전 재독한인축구협회장이 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한회장의 집이었으니만큼 손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왔겠지만 근명의 입장에선 그런 식의 친절함은 언제나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괜찮은 겐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잠옷 차림의 키 작은 노인이 골동품 같은 서양식 램프를 들고 들어서자 근명은 조금쯤 눈을 찡그리기도 했지만, 이윽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또 꿈을 꾼 게로군.” “죄송합니다 매번 이렇게… ” 본의 아니게 번번이 어르신의 단잠을 깨운 근명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독일 의료 체계는 어지간한 중상자가 아니라면 수술을 마친 후엔 계속 입원해 있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지근 거리에 숙소를 마련한 채 병원 및 재활센터를 왕래해야 했다. 때문에 영후의 소개로 이곳 한회장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송스러웠는데, 예순을 넘긴 노인을 이렇게 밤낮을 안 가리고 귀찮게 해드리고 있었으니 차마 얼굴을 대할 면목조차 없었다. 하지만 한회장은 회장이라는 직함과는 달리 예의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램프를 내려놓고는 소파에 앉았다. “아픈 몸으로 타국에 나와있으니 좀 적적할 게요. 나도 하선수 나이 쯤 이곳 독일에 왔을 때 비슷하게 느꼈었으니까.” “…” 근명은 한회장의 아들이자 이곳 현지에서 통역사 겸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는 ‘마쿠스 한’에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전 까진 전혀 몰랐었지만 사실 전 재독한인축구협회장 한일동 씨는 국내 축구인 사이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긴 세월이 흘렀구먼…” 근명은 깊은 주름을 이마에 새기며 과거 속으로 회귀하고 있는 한회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한국 축구사에 이 남자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도 해보면서. “왜, 돌아가시지 않으셨나요?” “음? 아, 조국에… 말인가요?” 근명은 한국이나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아닌 ‘조국’이란 단어가 한회장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자 괜히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 국가는 힘들고 배고픈 국민들에게 그 무엇을 해주기는커녕 착취만 일삼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창때의 청년이었던 자신을 외화벌이라는 명목으로 빈 몸뚱아리만을 생소한 외국으로 보내버린 나라를, 그리고 이제는 그런 나라에게 외면 당하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의 입으로 ‘조국’이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자 그것 만으로도 근명은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가만있자… 내가 독일에 건너왔을 때가 1965년이었으니까, 참 긴 세월이 흘렀구려.” 한회장은 마치 그때가 어제 같은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아직은 밤의 기운이 가득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저 3년만 열심히 일해서 돌아가려고 했었지. 근데, 이 코쟁이 독일 놈들이 우리 같이 천한 것들을 사람으로 대해주는 거야. 사람으로 말이지…” ‘사람으로…’ 근명은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정을 어림짐작해볼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도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극심한 계급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며 한회장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일하는 시간은 일정했고, 조금이라도 몸이 아프다면 여지없이 병원에 보내 진료를 받게 해 줬지. 그때의 우리나라였다면 꾀병 부린다고 대번에 짤라 버렸겠지만 말일세. 그렇게 사람대우를 받으며 잠깐씩 일을 하고 나오면 또 빵과 고기는 차고 넘치도록 제공해줬었다네. 그리고 일 끝나고 가끔 사먹던 맥주 맛은 또 왜 그렇게 좋던지.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3년이 5년으로, 또 5년이 10년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늘어나버렸다오. 게다가 그 중간에” “절 만나셨구요.” 순간 한회장의 말에 끼어드는, 한회장만큼이나 연륜이 묻어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한회장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하얗게 바랜 머리칼 사이를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 당신… 또 나 때문에 깬 거요?” “어쩜? 당신만 젊은 척 하기에요?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이제 새벽잠은 없을 나이면서~” 역시나 한회장의 부인 이영숙은 짐짓 토라진 척하며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 근명의 방에 들어섰는데, 그러나 소파에 앉기 전 근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남자들끼리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저도 잠시 끼어들어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거기 앉으셔도…” 당연히 노부부의 집이었으니 근명은 침대에 어정쩡하게 앉은 채 두 손으로 남은 소파를 가리켰고, 그제야 영숙은 나이트 가운을 조금쯤 여미며 한회장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으로 한회장을 넌지시 바라보며 근명에게 말했다. “잠도 못 자고 이이 얘기 듣느라 곤욕이죠?” “아, 아닙니다.” “이 사람, 난 그저 선수 보호차원에서 걱정스러워 와 본거라오. 집 떠나면 누구나 힘들고 외롭지않소?” 영숙의 인사치레에 한회장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근명을 돌아보며 절대로 동의해 주길 바라며물었지만, 영숙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거야 우리 때 얘기고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우리같이 나이든 사람들 얘기 듣는 거 어디 좋아하는 줄 아세요?” “아, 그렇던가?” 부부싸움을 가장한 부부금슬을 왜 이 야심한 밤에 그것도 여기까지 와서 자랑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근명은 어쩐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왠지 모를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또한 지금의 이 노부부처럼, 자신도 누군가와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도 조금은 궁금해졌고. 하지만, 머릿속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한 여자 때문에 근명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런 근명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인지, 영숙이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근명을 깨웠다. “이이가 또 광부로 일했던 얘기를 하던가요?” “아, 아뇨. 그냥.” “흠, 그럼 아직 저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또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는 아직 못 들었겠군요?” 영숙은 그나마 자신의 몫이 남아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기뻐하는 얼굴이었는데, 그에 한회장이 조금 거들고 나섰다. “내 안 그래도 지금 막 그 얘기를 하려고 그랬다오. 이 사람은 그때 간호사로 독일에 와 있었는데, 그땐 참 꽃 같았지.” “어머? 지금은 아니구요?” “응? 아, 지금도 꽃은 꽃이지, 할미꽃! 크하하하!” 점점 창문 밖에선 세 사람 몰래 동이 터오고 있었지만, 한회장도 한회장의 와이프도 어쩐지 근명의 방에서 나가려 하기는커녕, 서로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없이 그리울 나라의 진한 내음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이 노부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근명은 아침이 올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근명은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잠들어버렸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근명씨, 근명씨.” “으음… 예에…” “아이고, 또 저희 어머니 아버지께서 밤새 괴롭혀드린 모양이군요?” 하지만 노부부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그들의 아들인 마쿠스 한(Markus Han)이 조심스럽게 잠든 근명을 흔들어 깨우며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근데 벌써 시간이…?” “네, 예약 시간에 늦지 않게 가려면 슬슬 준비하셔야 되거든요.” 마쿠스 한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역시나 미안하단 표정으로 말하자 근명은 떡진 머리를 한 채로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잠 기운을 떨치려 눈에 힘을 주어 부릅 떠 보았다. - 마쿠스 한의 부축을 받으며 흰색 아우디 Q5의 조수석에 몸을 싣고 나자 근명은 완벽하게 박살 난 자신의 애마 R8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운전석에 탄 마쿠스 한은 시동을 걸기 전 무척이나 굳어져 있는 근명을 바라보더니 그제야 어렵지 않게 이유를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합니다. 공교롭게도 제 차가…” “네? 아, 아닙니다.” “그래도, 독일 사람들이 차 하나는 정말 잘 만들어서 말이죠.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애국심만으론 한국 차를 사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하지만 근명은 여전히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마쿠스 한이야 말로 어지간한 애국심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해합니다. 덕분에 저도 이렇게 살아있으니까요.” “그래도 참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합니다. 안전벨트를 다시 못 매서 차에서 튕겨져 나온 덕분에 살 수 있었다니요…” 마쿠스 한의 덧붙임 말에 근명도 그 당시의 상황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지만,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야 말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나중에 보험사 직원이 보여준,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있던 차량의 사진을 본 이후엔 더더욱. 어쨌든 곧바로 마쿠스 한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자, 여전히 익숙지 않은 차창 밖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근명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센터페시아에 있는 엘씨디 화면에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좀 일찍 가는 거 아닌가요?” “아, 오늘은 레하 센터(주석 참고) 직원들이 조금 바쁜 날이거든요.” (독일 Reha-Training 주식회사. 레하 트레이닝은 한국선수들이 가장 많이 찾고 있는 재활센터로 김동우, 양희승, 김일두 등 농구 선수를 비롯해 축구 선수 김남일, 야구 선수 박경완 등이 거쳐 간 곳이다.) 근명은 마쿠스 한의 말을 듣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는 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 쾰른의 한회장 집에서부터 40분 정도 달리자, 이윽고 레버쿠젠에 위치한 레하 센터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마쿠스 한은 그제야 생각난 듯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 근명에게 말했다. “참, 오늘은 죄송하지만 치료를 혼자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볼일이 있어서 잠시 어딜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아, 네. 신경쓰지 마세요.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닌데요 뭐.” “하지만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올 테니까, 걱정하실 필욘 없어요.” “걱정은요.” 근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마쿠스 한의 통역 없이 재활 치료는커녕 진료실에서의 상담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영어라도 익혀놓는 건데.' - “그럼, 시간에 맞춰서 모시러 오겠습니다.” 이윽고 마쿠스 한이 매끈한 흰색의 Q5를 돌려 사라지자 근명은 목발을 짚으며 마치 가정집 같은 모습의 레하 센터의 입구에 들어섰다. 그리곤 작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근명은 역시나 하얀 색 벽에 가득 붙어있는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그 사진들은 그간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 중 유명한 선수들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놓은 것이라고 했다. 군데 군데 사진이 붙어있던 자국만 남아있는 공간이 조금은 이상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어디서도 영후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근명은 매일같이 이 벽을 지나며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긴, 그 선배도 여기 사람들에겐…’ 언제부턴가 마음 속으로 가장 존경하게 된 남자였지만, 이곳은 한국이 아닌 독일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깨닫곤 하는 근명이었다. “하근명 선수?” “?”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한국어' 소리에 놀란 근명은, 그러나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곤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선은 예상치 못했던 미모를 소유한 여자였기에 그랬기도 했지만, 미모에 버금갈 정도의 탐스러운 가슴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면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부터 뚫어지게 바라보다 멋 적어진 근명은 그녀의 왼쪽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을 바라본 척 해 보았다. “소…” “‘소피(sophie)’에요. 반가워요. 전 오늘 하근명 선수의 마사지와 통역을 담당할 겁니다.” 소피. 이름은 분명 독일인 같았지만, 어쩐지 똑 부러지는 한국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한국 사람 같은 느낌도 느껴졌기에 근명은 그녀가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을 잡으면서도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박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 쪽으로 가시죠.” 하지만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 양 다소 사무적인 억양으로 안내하자 근명은 여전히 어색한 목발을 짚으며 그녀가 열고 서 있는 문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근명의 무릎 수술을 집도한 파이퍼(Thomas Pfeifer)박사가 예의 반짝거리는 민머리를 자랑하며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미스터 하! 기분은 어떤가요?” 역시나 간단한 박사의 물음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던 근명은 결국 소피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기분 어떠냐고 물으시네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습니다. 빨리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이죠.” 이내 소피가 다시 근명의 말을 독일어로 통역하자 무표정한 근명을 바라보던 파이퍼 박사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고정운, 김남일, 송종국, 박동혁 등 자신이 집도한 한국의 스포츠 스타들의 얼굴 또한 지금의 근명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었으니까. 게다가 그때의 ‘이영후’ 도. 때문에 파이퍼 박사는 언제나 그랬듯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인대가 완전히 붙는데 만도 6주가 걸리는데다가 손상된 연골에 물이 차오르지 않게 하려면 최대한 무리하지 말아야 하니까요. 오늘도 마사지나 트레이닝을 하면서 세심하게 본인 몸의 느낌을 살피도록 하세요.” 한국 같았다면 길어야 3분 정도면 끝날 진료 상담은 그러나 거의 15분이 넘도록 끝날 줄을 몰랐는데, 이윽고 모든 상담이 끝났는지 파이퍼 박사는 소피를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 그 말조차도 무척이나 지루해하던 근명은 알아듣진 못했지만 충분히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소피, 그럼 부탁할까요?” - 너무나도 지루했던 상담을 뒤로 하고 2층으로 오른 근명은 각종 헬스 기구들이 즐비한 가운데 삼등분으로 나눠져 있는 검은색의 얇은 침대에 소피의 도움을 받으며 누웠다. 그러자 숙련된 소피의 손길이 근명의 왼쪽 다리에 와 닿았다. “림프 마사지 시작하겠습니다.” 림프 마사지란 수술부위와 함께 평소보다 부어 오른 다리의 붓기를 빼기 위한 일환으로 치유작용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림프의 흐름을 개선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소피가 아닌 다른 피지컬 트레이너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도 마사지가 끝나면 전기치료가 시작될 것이었다. 물론 치료가 끝나면 지옥 같은 상체와 복근 위주의 트레이닝 메뉴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하지만, 근명은 소피에게서 지금까지 만나봤던 이곳의 트레이너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 느낌을 어렵지 않게 받고 있었다. 뭐랄까, 조금 화가 나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때문에 평소엔 마사지를 받는 것 자체로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기분이었다면 오늘은 어쩐지 마사지를 받는 것 자체가 어색하기만 했기에 근명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요…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아, 아니요.” “그럼,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설마 근명은 초면에 가슴을 넋 놓고 바라본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싶어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소피의 한숨뿐이었다. “그쪽 때문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니, 뭐… 걱정한다기보다 마사지 해주는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받는 나까지 마음이 불편한 것 같아서 그럽니다.” “…” 그러자 연신 부드럽지만 바쁘게 근명의 다리 위를 오가던 그녀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미안해요.” “아, 아뇨 미안하단 얘길 듣자고 한 건 아니고” 순간 너무나 쉽게 사과를 하는 소피의 모습에 근명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근명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소피는 그제야 속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실은…” “?” “오늘 중요한 시합이 있어요. 근데, 하필 오늘 대신 근무해주기로 한 친구가 일이 생겨서…” “시합…이요? 무슨…?” “축구 시합이요. 오늘 이곳 레하 식구들하고 크랑켄 하우스 병원 사람들하고 축구 시합이 있는 날이거든요.” “그럼, 가면 되잖아요?” “네? 참나, 난 지금 직장에서 일을 하는 중이라구요. 아무리 축구가 좋다지만, 내 할 일을 미뤄 둘 정도로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는다구요.” “뭐, 그러시다면야… 근데 어디서 시합하는데요? 여기서 멀어요?” “멀진 않아요. ‘바이 아레나’도 여기 레버쿠젠에 있으니까요.” “아, 멀진 않군요… 자, 잠깐?! 어디… 라구요? 바이…?” “’바이아레나(BayArena)’요…” “그… 그러니까 그 바이아레나가 설마 독일 레버쿠젠팀의 홈 경기장, 바이아레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죠?” “거기 맞는데요?” “헉!!” 근명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소피의 얼굴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소피를 비롯한 아마추어 동호회 팀들간의 경기를 독일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유명한 구단의 홈 경기장에서 한다니 어찌 놀라지 않았을까. 하지만 소피야 말로 눈 앞의 근명보다 더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랐던 몇 년 전의 남자를 떠올리자 묘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소피는 지금껏 이 남자가 이렇게나 반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때문에 괜히 겁먹은 얼굴로 영후를 바라봤지만, 이미 그의 눈엔 그녀가 들어있지 않았다. “정말… 바이아레나에서 경기를… 한단 말인가요?” “영후씨…?” 더 이상 기대감이 높을 순 없을 정도로 귓불까지 달아오르던 남자는, 그러나 이윽고 자신의 왼쪽 무릎을 바라보고서야 현실을 깨달은 듯, 눈동자에 서리던 기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자 아무 상관도 없어야 했을 소피의 마음마저 더할 수 없이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소피는 영후에게 조심스럽게 권유를 해 보았다. “저… 괜찮다면, 경기장에 같이 가면 되잖아요.” “하지만…” “?” 차마 이런 모습을 한 채로는 신성한 경기장에 들어서고 싶지 않았던 영후의 마음을 소피는 짐작조차 못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남자의 식지 않은 열정이 뜨겁게 꿈틀대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 그녀의 1997년식 검은색 골프 Mk4를 타고 도착한 경기장의 주차장엔 벌써 꽤나 많은 수의 차가 주차되어있었다. “벌써들 도착해서 몸을 풀고 있을 거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피는 경기장에 도착하니 더욱 조바심이 느껴지는 듯 운전석의 안전벨트를 바삐 풀고는 트렁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영후의 휠체어를 꺼내어 익숙하게 펼치고는 한달음에 조수석까지 밀고 와선 조수석의 문을 벌컥 열었다. “자, 여기 영후씨 전용 자가용 대령이요~” 영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재기발랄해진 소피의 얼굴을 보자 자신의 마음도 한결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경기장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간다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영후는 휠체어에 앉자마자 소피에게 말했다. “늦겠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소피는” “아… 그러실래요? 그럼, 금방 오세요! 저는 그라운드에 있을 테니까 찾기 쉬우실 거에요! 그럼 이따 봐요~!” 마치 영후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소피는 작은 가방을 챙겨선 그대로 경기장으로 달려들어갔고, 결국 홀로 남겨진 영후는 픽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미안한 마음에 인사치레로 해본 말을 넙죽 받아 들고 사라져버린 소피를 바라보자 그제야 이곳이 한국이 아닌 독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식 인사는 역시 안 통하는 군, 훗.” - 하지만 영후는 바이아레나의 클럽하우스까지 생각보다 너무나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장애우를 배려한 경사도 낮은 진입로엔 휠체어가 이동하기에 걸림돌이 될 낮은 턱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큰길에서부터 바로 입장해 안전시설이 있는 특별석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의 장애우들이 이용하는 방법이었지만,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던 영후는 다른 장애우들 보다 힘들게 경기장에 들어서고 있었음에도 꽤나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어…?”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클럽하우스 입구에는 너무나 놀랍게도 유럽축구연맹(UEFA)컵을 치켜든 차범근의 사진이 큰 액자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기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레버쿠젠 팀이 유일하게 들어올린 UEAF 우승컵을 그 누구도 아닌 차범근이 들고 있었다. 때문에 뭔지 모를 뜨거운 감정을 주체 못하며 사진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보고 있었는데, 순간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로 독일어가 들려오자 영후는 꽤나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자넨 뭔가? 감히 차붐의 사진에!” “아, 그…” 영어 말고는 아직 자신이 없었던 영후는 더듬더듬 독일어를 해보려다, 결국 포기하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영어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저 사진 속 주인공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 선수라서요. 저와 같은 나라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치만 사진을 손상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오? 자네도 차붐의 나라에서 온 건가?” 이윽고 방금전까진 무척이나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엄청나게 뚱뚱한 남자는 그제야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 턱수염 하나 하나가 살아 움직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한국에서 왔다는 영후에게 무척이나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헤이, 소피! 어떻게 된 거야? 오늘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바쁘게 유니폼을 갈아입고 그라운드의 벤치로 달려 나온 소피는, 무척이나 다행이란 얼굴로 맞아주던 에바의 물음에 간단하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뭐 어떻게 해결됐어.” 하지만 그 어디에도 감독이 보이지 않자 반대로 에바에게 물었다. “근데, 감독님은?” “모르겠다 그 술꾼. 또 어느 펍에 가서 쳐 자고 있을는지!” 감독이 오늘처럼 무책임했던 적이 한 두 번도 아니었지만, 영후처럼 축구라면 눈빛마저 달라지는 남자를 알게 되고 나자 소피는 더욱 감독의 허술함이 대비되며 화가 치밀어 오를 뿐이었다. - 하지만 이런 소피의 마음을 알 턱이 없던 두 남자는 여전히 차범근의 사진 앞에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거 아나? 차붐이 308경기를 뛰며 98골을 넣은 것 말일세.” “그 골 중엔 단 한 골도 PK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건 아시나요? 게다가 패널티 에어리어 내에서 얻어낸 반칙 수만 41개였다구요.” “흥, 그때 당시엔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관습이 없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만 40여 개는 족히 될걸세.” “리그에서만 잘한 게 아니라구요. A매치 127경기에선 55골이나 넣었는걸요!” 서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붐의 기록들을 쏟아내던 두 남자 중 중년의 남자가 꽤나 놀란 얼굴로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는 얼굴로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허, 이거 만만치 않군 그래. 하지만, 이건 몰랐을 걸?” “?” “그렇게 리그 경기를 뛰면서, 그가 받았던 옐로 카드의 수는 고작 한 장이었다네.” “!” 영후는 남자의 충격적인 이야기에 입을 다물 수 조차 없었다.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몰랐었으니까. 하지만, 그 뿐이 아니었다. “게다가 레드 카드 따윈 한 장도 받지 않았었지. 단 한 장도.” 드디어 말문이 막힌 영후는 결국 두 손을 들어 보였고, 그제야 의기양양해진 뚱뚱보 독일 할아버지는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난 ‘베언트’라고 하네. 그나저나 자네 꽤나 마음에 드는 데, 어때? 나랑 요 앞 펍에 가서 시원한 맥주 한 잔 하지 않겠나? 분명 차붐의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나보다 훨씬 더 반겨줄 걸세.” “네, 그…” 영후는 베언트의 분위기에 휩쓸리며 당연히 가겠노라고 이야기하려 했지만, 순간 소피와 소피의 팀이 시합을 치르고 있을 거란 생각을 겨우 해내곤,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에서 친구가 시합을 한다고 해서 응원가야 하거든요.” “이런, 이것 참 아쉽게 됐군. 그럼 다음 기회에 보자고~” 어쩐지 시합 이야기를 하자 남자가 조금은 당황하며 육중한 몸을 돌려 영후에게서 멀어지자 영후는 이윽고 힘차게 휠체어의 바퀴를 돌리려 했지만, 어쩐지 또 한번 차범근의 사진을 바라보고 싶어졌기에 잠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이내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 어렵지 않게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경기장의 관람석으로 들어선 영후는 그러나 무척이나 아담한 경기장의 규모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3만명도 못 들어올 것 같은데…?’ 확실히 영후의 눈썰미는 그닥 틀린 것이 아니었다. 바이아레나의 관중 수용 능력은 약 3만 210명에 불과했으니까. 그것도 재건축이 끝난 1998년 이후 늘어난 규모였으니 영후가 조금 실망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레버쿠젠은 2006년 독일 월드컵 개최 도시 가운데 한 곳으로 선정되었으나, 경기 장으로 사용해야 할 바이아레나가 피파(FIFA)의 규정인 4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없어 아쉽게 월드컵 개최를 취소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팀은 이곳 바이아레나를 연습경기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구글 참조.) 하지만, 그라운드 색상과 동일한 초록색의 관중석에 들어찬 관중들의 수는 동호회 간의 경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벌써 시작된 지 20분을 막 넘어서고 있는 피치 위에선 남자가 아닌 여자들이 사력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었기에 영후는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동호회라고 하기엔 유니폼과 축구화, 그리고 갖가지 주변 장비들이 완벽했기에 놀랐고, 게다가 주심의 수까지 대기심을 포함해 실제 경기와 한치도 다르지 않았기에 더욱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 영후씨?!” “?” 그렇게 놀라고만 있던 영후의 정신을 그나마 돌아오게 한 건, 다름아닌 마쿠스 한이었다. “어? 여긴 어떻게?” “아이고, 그건 제가 물어보고 싶은 건데요? 아직 치료가 끝날 시간은 아닌 거 같은데요?” 마쿠스 한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어 보이며 영후에게 미소 짓자, 영후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그렇게 됐네요. 근데 일이 있다고 하신 게 설마…?” “네. 오늘 시합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주는 게 제 담당이라서요. 어쨌든 이왕 오신 거 좀더 제대로 즐기고 가시죠?” “에?” 순간 마쿠스 한이 영후의 휠체어 뒤로 다가가 이동시키자 영후는 이윽고 일반 관람석보다 훨씬 그라운드에 가까운 장애우석에 자리할 수 있었다. “이래봬도, 여기가 명당석이라구요.” 마쿠스 한이 뒤쪽을 가리키며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자 영후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쿠스 한이 데려다 준 곳은 다름아닌 귀빈용 스카이 박스 바로 앞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곳엔 해드셋과 함께 점자로 되어있는 자료들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이 경기장에 들어선 이상 축구를 그야말로 ‘누구나’ 즐길 수 있을 것이었다. 한편 경기장의 완벽함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마쿠스 한은 조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오늘 레하팀 컨디션이 생각보다 별로인가 본데요?” 아닌 게 아니라 레하 팀은 영후가 막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이미 2골이나 실점한 상태였는데, 마쿠스 한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또다시 한 골을 더 실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영후는 어쩐지 그라운드 위에서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는 소피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그래, 지금은 또 어딘가?” 베언트는 어느새 투명한 맥주잔의 맥주 거품을 콧수염에 한 가득 묻혀가며 비워버리곤 ‘끄윽’ 트림을 하며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었다. ‘난 지금 암스테르담에 있지.’ “오, 이런, 그럼 여기서 멀지 않군 그래. 어떤가? 설마 이렇게 가까이까지 와 있으면서 나랑 맥주 한잔 할 시간도 없다곤 못하겠지, 미스터 노?” ‘하, 이보게. 난 자네처럼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네.’ “흥, 그깟 더치(Dutch: 타국사람들이 네덜란드 인을 낮춰 부르는 말)놈들에게 무슨 축구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시간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여기로 날아오라고!” ‘거참. 사람 하고는… 그나저나 부탁한 건 어떻게 됐나?’ “뭐, 아 당신이 아낀다는 제자 놈 말인가?” ‘아낀다고 까지야… 어쨌든 그 놈 근황이 좀 궁금하구먼.’ “안 그래도 그 녀석 소식을 알려주려 전화했는데, 애꿎은 수다만 떨다 전화비만 날렸구만. 그래, 자네 뜻대로 우선은 경기장에 밀어 넣었지. 거기엔 내 애제자 소피의 공이 컸고 말이지.”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래.’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라네. 부상과 시련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오직 당사자만이 해낼 수 있는 걸 테니까.” ‘그 놈은 아마 자네도, 또 나도 실망시키지 않을 걸세.’ “허, 너무 기대를 거는 모양이 평소의 자네답지 않군 그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처음으로 베언트는 지금의 노감독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친구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한 남자’에게 더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생소했던 것이다. ‘그럴만한 놈이니까.’ “어쨌든 난 자네가 부탁한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으니, 자네도 어서 빨리 여기로 날아오기나 하라고. 그럼 내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독일 맥주를 한 잔 사지.”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구먼. 어쨌든 알았네. 또 통화함세.’ 이윽고 오랜 친구 같은 노감독과의 통화가 끝나자 베언트는 잔에 남아있던 맥주를 단번에 들이키고는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베언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미스터 노의 생각대로 될까…?’ 베언트는 솔직히 반신반의할 수 밖에 없었다. 미스터 노의 얘기대로라면 영후는 분명 골을 넣는 공격수 출신이라고 했다. 사실 베언트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감독 중에 공격수 출신의 감독이 많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공격수들의 성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나 수비수들은 그리고 벤치의 선수들은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면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전술과 현재 상황 등을 파악하려 하지만, 공격수들은, 그리고 영후와 같은 슈퍼스타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스트라이커들은 달랐다. 경기가 풀리지 않거나 뒤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쨌든 스스로 만들어 넣으려는 마음이 더욱 커지곤 하는 법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런 공격수 출신의 영후에게 비록 아마추어들의 경기일 뿐이지만, 관람케 한다는 건, 경기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주는 것 이전에 어찌 보면 그라운드에 서고 싶은 마음만 더욱 가중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스터 노가 가지는 ‘이영후’란 남자에 대한 기대감은 방금전의 통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 무척이나 남달랐다. ‘이 사람아. 누군가의 기대를 짊어지고 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 줄 뻔히 알면서…’ 베언트는 나이를 먹어가며 한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바로 '어른이라면 사람의 기대를 져버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 건 애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걸 베언트는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언트는 그 누구보다도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으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붐의 사진 앞에서 마치 ‘아이처럼’ 초롱초롱해지는 그 남자의 눈망울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그 남자야말로 축구인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유일한 ‘아이’ 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자 더욱 술이 땡기는 탓에 맥주잔을 들어올렸지만, 이미 비어버린 맥주잔은 가볍기만 했기에 그에 탁자를 탕탕 내려치며 점원을 불러보았다. “이봐! 여기 불알이 오그라들 정도로 시원한 맥주 한잔 더!” - 이윽고 전반전 경기가 주심의 휘슬소리와 함께 끝나자 크랑켄 하우스 병원 팀과, 레하 트레이닝 주식회사 팀 선수들은 그대로 라커룸으로 사라지고 있었는데, 여전히 답답한 표정이던 소피는 갑자기 생각난 듯 발걸음을 돌려 영후에게로 달려왔다. “소피…?” “영후씨, 우리 팀을 좀 도와주세요!” “네? 그게 무슨…?” 무척이나 절박한 소피의 얼굴에 무척이나 난감할 수 밖에 없었지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 건지 영후는 그 순간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동호회간의 경기라고는 하지만, 지고 있는 상황에선 마냥 기쁠 수는 없었던지 소피의 도움아래 라커룸에 들어선 영후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마음마저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뜬금없는 외부인의 출현으로 레하 사람들은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소피, 지금 뭐 하는 거야? 베언트를 데려오라고 그랬지, 누가 동양인을 데려오랬어!”, “하여간 이 감독은 꼭 필요할 땐 사라진단 말이야!”, “이 참에, 우리 팀 감독을 바꾸는 게 어때?!” 그야말로 물 만난 듯, 영후의 출현으로 더욱 소란스러워진 라커룸은 한동안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신기하게도 영후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해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신들은… 누굴 위해서 축구를 하는 거죠?” 그저 간단한 물음이었지만, 영후가 영어로 내뱉은 한마디에 여자들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영후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며 좀더 앞으로 나가 선수들 가운데 자리하고는 또다시 물었다. “감독을 위해서 뛰는 건가요? 아니면, 돈이라도 생기는 겁니까? 이 경기에서 이긴다면?” 그러자 여자들은 영후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건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왜 축구를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하고 있는지를. “뭐가 문제인가요? 이렇게 좋은 경기장에서 완벽한 장비들을 갖춘 채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들은 친목을 위해서 모인 거 아니었던가요?” 그제야 영후의 이야기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순간 소피의 친구 에바가 볼멘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우리 팀의 감독이란 사람은 늘 중요한 순간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진다고요. 감독이 없는 팀이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겠어요?” “그럼… 많이 부족하겠지만, 남은 후반전엔 내가 감독을 하죠. 어때요, 그러면 되겠어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난데없이 라커룸까지 쳐들어와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건지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신비로운 동양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놓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순 없었다. -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난 근명은 후의 이야기가 궁금한 나머지 소피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그 경기 어떻게 됐죠? 설마, 이겼… 나요?”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소피가 무척이나 재밌다는 얼굴로 근명을 놀리듯 되묻자 근명은 더욱 보채보았다. “아, 장난치지 말구요! 그래서 이겼어요?” “아뇨. 결국 5 : 1 로 졌어요.” “아…” 순간 근명은 괜히 만화 같은 이야기를 기대했었던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한 골을 넣은 것만으로도 다들 행복했었어요.” “?” “그 날, 우리는 그 남자 덕분에 축구를 즐기는 방법을 깨닫게 됐으니까요.” “!” 즐기는 축구. 근명은 그제야 영후와 자신의 좁힐 수 없을 것만 같던 간극에 있던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즐거움' 이란 건, 분명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일 것이었다.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즐거움’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기에,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게 되면, 결국은 남들보다 조금 더 노력하게 되는 것이고, 그럼 결국 즐거움으로 시작한 것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정점에 올려 놓아줄 것이었다. 때문에 근명은 지금은 영후와의 차이가 꽤나 많이 벌어져 있음을 이제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영원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엄청난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진짜 노력해야겠다는 결심도 해보았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영후라는 선배와, 그리고 축구가 진심으로 좋아진 이 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그렇게 잊지 않고 있다보면, 언제고 지금처럼 힘든 일이 닥칠 때 ‘내가 왜 축구를 하고 있는거지?’라고 스스로 반문해 보곤 어렵지 않게 지금의 순간을 떠올리며 여전히 남아있을 축구를 좋아하는 마음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며 참고 인내하고 극복하다 보면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그러다보면 언제 힘들었었냐는 듯 또다시 즐거워지게 될 것이었다. 한편, 이영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소피는 그제야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에고, 이야기를 하느라 벌써 시간이…” “내 걱정 말고, 어서 가세요.” “그래도, 되겠어요?” “물론이죠. 그대신…” “?” “다음 경기 땐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근명의 입에서 생각보다 빠르게 원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소피는 그제야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굳이 다음 경기까지 기다릴 것 있나요?” “?” “당장 가죠.” 그제야 근명과 소피 두 사람의 얼굴엔 동시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윽고 뜻을 모은 두 사람은 2층에서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근명의 눈엔 역시나 벽면에 붙어있던 사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잊고 있었던 궁금증 하나를 이 순간에 해결하고만 싶었던 근명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영후 선배 사진은 없나요?” “네? 그게 무슨?” “아니요. 보아하니 이곳을 거쳐간 유명한 선수들 사진은 죄다 붙어있는 것 같던데, 영후 선배 사진만 없는 것 같아서요.” 그제야 근명의 의아함을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 소피는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아아, 그거라면 말도 마세요. 안 그래도 늘 시간 날 때마다 인화해서 새 사진을 붙여놨었지만, 워낙 그 남자 인기가 좋아서요. 붙여놓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바로 떼어가거든요. 환자든, 직원이든요. 그래서, 요샌 포기 했구요. 지금 남아있는 사진은… 아 저기, 저것뿐이에요.” 소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서야 근명은 왜 영후의 사진을 찾지 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곳엔 가로 24인치크기로 확대된 단체 사진속에서, 그 수많은 여자들 속에 파묻힌 채 유일하게 두 여자에게 양 볼에 뽀뽀를 당하고 있는 영후가 있었는데, 쑥쓰러운 듯한 표정조차 꽤나 진하게 들러붙은 여자들의 얼굴에 거의 가려지다시피 안보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남자의 손엔 그 무엇보다 유별나게 반짝이는 우승컵이 들려있었지만. 에필로그 - 우리들의 Goal!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 한국을 향하는 비행기의 이코노미 석에선 이제야 잠잠해진 승객들의 분위기에 감사해하며 양복 차림의 리버풀 선수들이 좌석을 조금만 젖힌 채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유독 검은 머리의 한 남자만은 펼쳐진 자신의 지갑 속에 들어있던 낡은 메모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아직도 리그 우승의 기쁨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일반 승객들보다 더 신난 얼굴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제라드가 살금살금 뒤에서부터 다가와선 냉큼 남자의 손에서 지갑을 뺏어 들었다. “스티비(제라드의 애칭), 넌 피곤하지도 않어? 어제도 그렇게 마셔대고선.” 역시나 제라드일줄 알았다는 영후의 덤덤한 물음에 제라드는 이마의 주름살을 활짝 펴 보이며 그럴리가 있겠냐는 얼굴을 해 보였다. “너 같으면 잠이 오겠냐? 우리 리버풀이 리그 우승을 한 건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일이라고!” “하아… 그래, 네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여기엔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니 목소리 좀 낮추는 게 어때?” 아직도 이곳이 비즈니스 석인 줄로만 착각하고 있는 제라드 때문에 영후는 자꾸만 일반 승객들을 걱정하며 주의를 줬지만 제라드는 그보다는 구단주에 대한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힉스와 질레트(리버풀의 공동 구단주)! 다른 팀은 다들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데 우리만 이렇게 불쌍하게 다닌다는 게 웃기지 않아? 하다못해 시티즌스 (맨체스터 시티) 놈들도 가지고 있는 전용기를 말야.” “다른 팀들이 전용기 타고 다니는 게 그렇게 부러웠던 거야?” “영후, 넌 모를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런 거 하나하나가 프로의 세계에서는 비교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걸. 계속 이런 식으로 선수들을 홀대한다면 이제는 나도 레즈를 떠날 수도 있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어.” “아하, 그런 거였어? 그럼, 다음 시즌엔 나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겠는걸?” “에에?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내 말은 꼭 그렇다기보다… 그래! 영후 네 말대로 이코노미 석에 타보니 의외로 팬들을 가깝게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뭐 이런 얘기지…” 그저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제라드는 화들짝 놀라며, 애써 이번 여행 중 한번쯤은 이코노미 석을 이용해보지 않겠냐던 영후의 의견에 적극 동의하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자신을 겁주려던 말은 미끼였던 듯 이윽고 뭔가를 향해 길게 손을 뻗는 모습에 그제야 손에 들려져 있던 영후의 지갑을 깨달았다. 때문에 제라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영후에게서 도망쳤다. “그건 그렇고. 지갑 속에 뭔가 있긴 있는가 본데, 좋은 게 있으면 같이 좀 공유하자고!” 이윽고 제라드는 따라오면 곧 도망쳐보이겠다는 제스쳐를 취해봤지만 영후가 소란을 피울 의지가 없어 보이자 이내 의기양양하게 지갑을 펴서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봤다. 하지만 지갑 사이에 사진을 넣을 수 있는 공간엔 정작 여자 사진이 아닌, 빛 바랜 메모지 한 장만이 끼워져 있었는데 꽤나 지저분해 보이는 메모지엔 그저 한 단어가 쓰여져 있었을 뿐이었다. ‘Goal! ?’ 제라드는 그저 동양인들이라면 한 두 개쯤 가지고 있다는 부적인 건가 싶어 흥미를 잃고는 그대로 덮으려 했지만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때문에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러자 메모지 군데군데 피와 물에 젖은 흔적이 보여져 조금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녀석, 정말 이런 부적 때문에 올 시즌 득점왕을 차지 한 건가?’ 확실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늦게 합류한 탓에 영후는 리그 경기에 고작 23번 출전했을 뿐이었지만, 여전히 적응 따윈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31골을 넣어, 07-08 시즌에 토레스가 기록한 외국인 이적생 첫시즌 23골의 기록을 단숨에 갈아치워버렸기에 더욱 대단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영후 덕분에 (언제나 리버풀의 공격수들이 그랬듯) 부상에 신음한 토레스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리그가 출범한 이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리그 우승컵을 이제야 비로소 들어올릴 수 있었다. 때문에 제라드는 이 부적의 출처를 알고 싶었지만, 어느새 또다시 다가온 꼬마 팬과 대화중인 영후에게 바로 다가갈 수는 없었기에 역시나 다시 한번 영후의 지갑 속 메모지를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Goal!’이란 단어를 한국의 한 소녀가, 그것도 호텔 룸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영후의 품에서 막 깨어나자마자 적어주었을 거라고는 제라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아직도 호텔 룸의 창 밖으론 한없이 짙은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지만, 여주대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있던 윤지는 어렵지 않게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지는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더없이 깊게 잠이 들어버린 자신을 감독이라는 남자는 가슴에 한없이 폭 감싸 안은 채 곤한 숨을 내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윤지는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남자의 품에 안긴 채 그대로 누워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바로 코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그 어떤 방해도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조금쯤 턱에 자라난 거뭇거뭇한 수염도 신기했고, 감은 두 눈꺼풀 아래로 드리워진 길고 진한 속눈썹은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끓이고 있었을 속마음을 대변하듯 조금은 말라버린 입술이 윤지의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그렇게 매일 바라봐오던 남자의 얼굴에 그간 몰랐던 세세한 느낌들을 하나씩 발견해내다보니 더욱 남자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기 싫어지고 있었지만, 결국 윤지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어보곤 자신의 어깨에 둘러져 있던 남자의 손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보았다. 그리곤 자신의 몸을 살포시 빼내고는 다시 천천히 침대 위에 손을 내려놓았다. 절대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남자의 품속에서 아쉽게 빠져 나오고 나자 이 남자와 그리고 이 남자의 품 속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윤지는 이 하룻밤이야말로 남자가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선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윤지는 남자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었지만, 딱히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다시금 남자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자 문득 딱 한가지가 생각이 났다. 때문에 윤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지에 조심스럽게 한 단어를 써 넣어보았다. 그리곤 남자가 깊은 숙면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해주길 바라며 테이블 위에서도 가장 눈에 띌 만한 자리를 고르고 골라 신중하게 내려놓고는 다시금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물론 한국여대가 우승을 한다는 가정하에, 이 남자는 더 이상 이 작은 세상에 머물지 않을 것이었다. 때문에 누구나 그랬을 테지만, 지금 윤지의 마음 또한 반 반이었다. 이 남자와 계속 같이 하고 싶은 마음과 더 높고 넓은 곳으로 비상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이미 이 남자의 마음을 처음부터 모조리 차지한 여자가 이제는 완전하게 ‘사랑’으로 완성되어버렸으니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때문에 윤지는 테이블 위에 놓아 둔 메모지를 다시 집어들고는 가볍게 구겨버리곤, 이내 다시 새하얀 메모지를 집어 처음과는 다른 단어를 써 보았다. 그리곤 역시 처음에 놓았던 자리에 놓아두고는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여 보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감독님께는 이게 더 좋겠죠?” - 팡! 이른 아침 여름 방학을 맞아 조용하기만 했던 한양여대 운동장에선 트레이닝 복을 입은 한 소녀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되는 청아한 프리킥 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몇 번이고 공을 차던 소녀는 이내 더 이상 찰 공이 없자 골대 쪽으로 공을 주워오기 위해 공을 담는 녹색 망을 질질 끌며 발걸음을 옮겼다. “야 전현아! 또 혼자 하기야?” 망 속에 공을 두어 개 집어 넣었을까, 역시나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가 전현아의 입에 왠지 모를 미소를 만들어 주었지만, 짐짓 무덤덤한 표정을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좀, 같이 하면 어디가 덧나냐?” 그곳엔 다름아닌 한국여대의 미드필더 아라와 지영이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에 전현아는 자동적으로 지금은 이 나라에 없는, 일년전의 한 남자를 떠올려 보았다. - 한국여대와의 경기, 그것도 연장전에 체력적 한계를 느끼며 교체된 현아는 한양여대의 라커룸에 불현듯 찾아온 한국여대 감독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이요?” “실은, 오늘 널 본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널 찾아가서 귀찮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절… 찾아요? 한국여대 애들이요? 왜…?” “음, 우선 이 감독이란 놈이 한동안 감독 자리를 비워놓을 예정이거든.” “어디 가세…아!” 그제야 현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었다. 월드컵 예선에서 선보인 녹슬지 않은, 아니 여전히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이 남자를 국내외 어느 팀이든 분명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지금 이렇게 여자 축구팀의 감독으로 남아있다는 것 자체도 여전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라도 우리 애들이 널 찾아가면, 너무 문전박대는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할까 해서 왔단다.” “그치만, 아이들이 제게 와서 뭘…” “아마, 친구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까?” ‘친…구?’ 도대체 당장 싸워 이겨야 하는 상대팀의, 그것도 감독이 와서 한다는 말이, ‘친구’라니. 현아는 이 상황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기에 역시나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한참이나 바라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농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아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 그때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설마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현실이 되어 그의 제자들이 고스란히 눈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현아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연신 툴툴거렸다. “오지 말라니까 왜 또 왔냐?” “오지 말란다고 우리가 안 올 줄 알았어? 이래봬도 우리도 꽤 질기거든?” 지영이 발끈하며 맞받아쳤지만, 아라의 제지에 지영은 ‘운 좋은 줄 알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첫 인사는 언제나 으르렁거리게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팀’이 달라서였을 것이었다. “오늘은 프리킥 연습 중이었어?” 아라가 지영이와는 반대로 나긋하게 묻자, 현아도 조금 누그러지며 공을 망에 담아가며 답했다. “보면 알 거 아냐.” “같이 하자. 거들어줄게. 지영아, 응?” 언제나처럼 아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분위기를 조절해주었고, 지영도 그제야 못이기는 척 골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공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현아는 여전히 마음에 앙금이 남아있던 듯 또다시 '그 일'을 끄집어 냈다. “만날 나한테 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정작 시합에는 출전도 하지 않을 거였으면서…” 역시나 현아는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때문에 ‘그 일’의 주범 중 하나였던 지영도 그때만큼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 “에에?! 서…성적 반영이요?”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더욱 신나게 추계 대회를 준비하느라 한창이었던 한국여대 아이들은 수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 너희들 성적을 반영할거야. 아무리 축구가 좋다고 해도, 너희는 축구만 하는 아이들이 되어선 안되는 거니까.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건 감독님의 뜻이기도 하셨다는 거 다들 알지?” “아, 그…건 알겠는데요… 그럼 어느 정도가 커트라인인 건데요…?” 가뜩이나 강의를 빼먹기 일쑤였던 지영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지만 이번엔 남희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높진 않아. 그저 평점 ‘4.0’만 넘으면 되니까.” “에엑!!!!”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남희의 얼굴에 지영이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얼굴 또한 하나같이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하루 종일 공부만 하더라도 장담하기 쉽지 않은 목표였다. 게다가 취업난에 시달리는 학우들 또한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아이들 입장에선 한숨만 내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남희가 간단히 입장을 밝히고 수림과 함께 동아리 방을 나가자 한동안 아이들은 침묵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순간 지영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야야, 쫄지들 마. 우리가 총 몇 명이냐?” “그야…” “생각할 것도 없이 15명 아니니. 근데 그 중에 성적이 모자라서 몇 명을 코치님 말대로 뺀다고 쳐. 그럼 과연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겠니?” “오오~!” 남희의 완강함을 알리 없던 아이들은 설마 극단적인 상황까진 가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고는 그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지만, 그 순간의 안일함이 결국 추계대회 출전 포기라는 강수를 불러올 줄은 그 때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었다. - “아 진짜,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야!” 혜미는 예정되어 있던 연습 경기 때문에 학교에 가야 했음에도 오실 생각을 안 하는 아빠 때문에 슈퍼마켓 계산대에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딸랑’ 하는 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들리자 기쁜 얼굴로 바라봤지만, 그곳엔 의외의 얼굴들이 보여지고 있었다. “어? 너희들…?” “뭐냐, 손님을 맞이하는 그 불손한 태도는?” “이래서 어디 이마트랑 홈 플러스한테 배겨나겠어?” 생각지도 못한 여주대의 심서연과 위덕대의 김도연이 트레이닝 복이 아닌 청바지 차림으로 장난스런 얼굴을 한 채로 들어서자 혜미는 좋았다 말았다는 얼굴로 털썩 의자에 앉아버렸다. “또 왜왔냐? 아아, 오늘도 내 속 뒤집어 놓으려고 온 거지? 그치?” “이거 왜이래? 우린 너무 더워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을까 하고 온 건데. 그치?” 도연이 서연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리자 서연도 괜히 아이스크림 냉동고문을 벌컥 밀어 올리곤 고르지도 않을 거였으면서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괜히 휘젓기 시작했다. 물론 도연도 합세했고. “아 진짜! 또 왜 그러는데!!! 기껏 정리 잘 해논 걸!!!!” 혜미는 잔뜩 볼멘 소리를 하며 달려와 도연과 서연의 손이 들어가 있는 냉동고 문을 그대로 닫아버렸다. 그러자 두 아이들은 그대로 문 사이에 팔뚝이 끼어버렸지만, 역시나 장난스럽게 닫은 혜미 덕분에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면서도 한동안 비명을 지르며 마치 팔이 잘라지기라도 한 양 난리법석을 피워댔다. “근데, 그 훈남 아르바이트 생은 어디 갔냐?” “맞아, 나도 궁금했어.” 역시나 땡깡을 부릴 만큼 부리다가 멈춘 두 아이들의 본심이 드러나자 혜미는 그제야 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서연과 도연이 이야기 하는 아르바이트 생이란 다름아닌 현우를 이야기 하는 것이었으니까. “짤랐어! 늬들 때문에 신경 쓰여서 짤랐다구! 그러니까 이제 그만 와!!!” “에이, 말도 안돼. 내가 그때 물어봤을 땐 여기서 계속 일한다고 했는 걸?” “오늘 짤랐어, 오늘! 됐냐?!” 결국 혜미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계산도 안하고 '더위사냥'을 반 뚝잘라 작은 부분을 도연에게 건네곤 큰 놈을 아무렇지도 않게 빨며 서연이 물었다. “야. 근데, 넌 계속 이러고 있을 거냐?” “뭐가 또!” “오늘 말야. 너희 감독님 오시는 날 아니냐고.” 역시나 도연도 꽤나 약올리듯 혀를 현란하게 움직여 커피색의 얼음 기둥을 핥으며 묻자 혜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야…” “우린 지금 공항에 가 볼 건데, 그냥 이러고 있어도 정말 후회 안 하겠어?” 서연에 이어 도연까지 바람을 집어넣자 혜미는 어찌해야 할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는데, 하필 오늘 무슨 일이 있길래 두 남자가 동시에 사라진 건지 알 수 없었기에 연습경기를 위해 학교로 가지도, 또 감독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공항으로 가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던 혜미였다. - 적막한 공간의, 그것도 투명한 유리로 나뉘어진 한편에 홀로 어색하게 앉아있던 현우는 이윽고 반대편 공간으로 무표정한 교도관과 함께 들어서는, 푸른색 수의 차림의 조전무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은 비단 현우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교도관이 자리에 앉았음에도 조전무는 차마 현우의 앞에 앉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죄…” 무심코 조전무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현우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한 조전무의 모습에 그제야 옆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죄송해요. 자주 찾아 뵈려고 했었는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현우의 모습을 넌지시 바라보던 조전무는 역시 무슨 말을 하려다 뒤늦게 깨닫고는 현우처럼 전화기를 집어 들고 말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아니에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 떨리는 가슴과는 너무나 다르게 심심한 대화를 겨우 주고 받고는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볼 뿐 그 어떤 말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현우도, 또 조전무도 이와 같은 상황에 그 어떤 말을 한들 귀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으니까. “참, 영치금하고 드실 것 조금 넣었어요.”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아르바이트로 받는 돈이 의외로 꽤 되요.” 현우의 말은 맞는 것도 있었고 틀린 것도 있었다. 맞는 것은, 혜미네 삼거리 슈퍼에서 일한 대가는 꽤나 보수가 많았지만, 새벽에 배달하고 있는 신문과 우유는 생각보다 보수가 적었다. 하지만 스스로 일하며 그 대가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로 현우는 이제야 살아있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새로이 느낄 수 있었기에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러나 조전무는 돈과 안락한 삶이 사라진 지금에야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활기’가 현우의 눈동자에 보여지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이 어린 아이가 바랐던 건,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올바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 단지 그것 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자 더욱 그랬다. “현우 네게 면목이 없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가족끼리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혜미네 아저씨께서 그러셨어요.” “!” 현우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말이 너무나 쉽게 튀어나오자 조전무의 가슴은 순간 ‘덜컹’ 하는 소리를 내며 한껏 내려앉았다. 조전무의 가족이라는 원래의 구성원들은 그 누구도 자신을 찾기는커녕 조전무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창피해하며 이제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외부에 가족이라고 드러내지도 못했던 아이가 이제는 더없이 힘이 되어주는 유일한 ‘아들’이 되어주고 있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점점 더워지는데 건강 유의하시고요.” “아… 그래, 내 걱정 말고, 너도 몸 건강히 잘 지내거라.” “그럼, 또 올게요… 아버지.” “!” 현우의 입에서 역시나 ‘아버지’라는 호칭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자 조전무의 눈에선 그제야 참고 있던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 내렸고, 현우 또한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지만, 두 남자는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분명, 웃고 있었다. - 규식은 현우와 같이 온 김에 오늘도 현우의 운전기사에게 면회 신청을 해 보았지만, 역시나 거부당했기에 면회실의 바깥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때… 그 남자는 과연 왜 그랬던 걸까.’ 이미 법원은 승부조작과 관련해 조전무에게 공금 유용 및 상해교사 혐의까지 포함시켜 형을 집행시켰지만, 규식은 정말 영후를 해 하라는 조전무의 지시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여전히 삭히지 못하며 일년 전, 다급하기만 했던 그 날을 떠올려 보았다. - 폭우가 미친듯이 쏟아지는 가운데 영후는 하연을 품에 안은 채 오열을 하고 있었는데, 철용과 규식은 운전기사를 바닥에 쓰러뜨린 채 그런 영후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철용과 규식이 막았어야 했던 건 운전기사가 아니라 영후였을지도 몰랐다. 이미 정신을 잃고 있던 하연의 오른쪽 옆구리 뒤에 꽂혀있던 칼을 향해 영후가 떨리는 손을 뻗고 있었으니까. 그런 영후의 행동을 바라보던 세 남자들은 그제야 영후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운전기사는 철용과 규식에게 제압 당해 있었으면서도 빗소리를 뚫고 몇 번이고 소리를 질러댔다. “뽑지 마시오! 그녀 몸에서 칼을 뽑으면 안됩니다!!!” 도대체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규식은 알지 못했지만, 운전기사의 말을 이해한 철용이 몸을 던져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영후와 하연을 떼어놓았다. "놔! 이거 놓으란 말야!!! 하연아! 하연아!!!" "임마! 정신차렷!!!" 철용에게 붙들린 영후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눈으로 하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을 수 없었고, 하연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규식도 철용도 입술을 질끈 깨물며 영후도, 하연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순간 꽤나 멀리 떨어진 거리에 정차해 있던 검은 승용차 한대가 급하게 출발하며 운전기사의 시야에서 멀어졌고 그제야 운전기사는 모든 게 끝났다는 얼굴로 흙탕물에 얼굴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런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와 더불어 구급차가 등장하고 있었고, 그제야 규식은 비로소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 그 당시에는 너무나 경황이 없었기에 누가 신고를 하고 구급차까지 불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규식은 그 일련의 모든 것들은 운전기사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곤 했다. 하연과 함께 응급실로 다급하게 들어갔다가 여유롭게 나온 의사는 천만다행이라고, 칼이 아슬아슬하게 중요 장기들을 비껴나갔노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것조차 규식은 ‘운’과는 다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결국 경찰과 구급차를 미리 불러놓은 것 하며, 영후를 찌르려다 하연이 가로막았음에도 그 찰나의 순간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위를 정확하게 노려 깊지 않게 찌른 것은…’ 운전기사의 이해할 수 없던 행동은 결국 현우와 영후를 위한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다. 재판과정에서조차 조전무의 지시였다는 것 말고는 일체 입을 함구했던 운전기사는 그러나 분명 삼합회의 일원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승부 조작에 실패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보복을 염두에 둘게 분명한 조직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모든 계획이 틀어진 이상, 삼합회의 다음 목표는 조전무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일 것이었고, 또한 작전 자체를 어그러뜨린 ‘이영후’였을 것이다. 때문에 운전기사는 스스로 영후를 심하지 않게 해하고 법원에서 조전무의 사주를 받았다고 진술함으로써 어느 정도 삼합회에게 만족감을 주려고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 조직이 얼마만큼이나 만족을 할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겠지만. 하지만 이 모든 가설은 오로지 규식만의 생각이었을 뿐이었기에 언제가 됐든 현우의 운전기사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론 오늘도 결국 퇴짜를 맞아버렸지만. 때문에 규식은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지만, 벌써 면회를 끝내고 나오는 현우가 보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만면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저씨!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다 아니야. 간만에 바람도 쐬고 좋기만 한걸?” “그치만 매번 이렇게 저랑 오셔서 혼자만 이렇게…” 운전기사와의 면회를 하려던 규식의 생각을 알리 없었던 현우는 언제나 그랬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 현우의 마음씨까지 마음에 드는 듯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규식은 천천히 발걸음으로 옮겼다. 한편 규식의 이러한 단순한 행동이 현우는 무척이나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는 것, 그건 참 말로는 쉽게 형용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기분이 들곤 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마냥 규식의 손길에 기쁜 얼굴을 지어보던 현우는 그러나 갑자기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절망스런 표정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아, 벌써 시간이…! 아저씨! 큰일났어요! 혜미가 또 엄청 뿔이 났을 거에요.” “응? 근데 이거 어쩌나? 우린 지금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에에?! 그럼 혜미는 어쩌구요?” “뭐, 아마 혜미도 우리가 가는 곳으로 올게다.” “…” 현우는 규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쉽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규식을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규식과 함께 있는다면 혜미의 손에 죽을 염려는 없었으니까. - 한국여대와 축구연구소가 손잡고 마련한 유소년 축구 클럽의 작은 그라운드에선 노감독이 손수 바구니를 끌고 다니며 이곳 저곳에 놓여진 축구공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잠시 허리를 펴 볼까 하는 사이 무척이나 개구진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 할아버지!!!” 역시나 찬이는 군말 없이 훈련을 마무리하는 아이들과는 달리 쪼르르 달려와 노감독에게 스스럼없이 달려왔다. “왜 또 그러느냐?” “아니, 왜 오늘은 훈련을 이것밖에 안 해요?” “음, 오늘은 축구 경기를 참관하러 가야 하니까 그렇단다. 왜, 힘든 훈련 안 하면 좋지 않느냐?” “으… 훈련을 요만큼밖에 안 하면 난 언제 우리 형아처럼 되냐구요?!” “녀석하고는. 찬아, 축구란 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공부란다. 물론 축구가 아닌 다른 것들도 매한가지고.” “축구는 축구지, 축구가 왜 공부에요? 난 공부 싫은데…” “인석아, 축구도 공부를 잘해야 할 수 있는 운동이란다.” “그럼, 할아버지께서 만드신다는 축구 고등학교에 갈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되는 거에요?” “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 학교엔 공부 하기 싫어라 하는 아이들은 절대 안받을 거니까, 그때가 돼서 울고 짜고 해봐도 어쩔 수 없을 게다.” 꽤나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노감독 때문에 찬이는 결국 뜨악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지만, 찬이를 놀리는 게 낙이 되어버린 노감독은 찬이의 눈을 피해 몰래 웃어보고 있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아파트를 나서는 윤지는 언제나 해보고 싶었던 인사를 배웅을 나온 엄마에게 건네고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달려나갔지만, 엘리베이터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비상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하지만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철용이 등장했고, 곧바로 윤지가 나온 곳으로 한치도 다르지 않게 뚜벅뚜벅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얘는 또 뭘 두고 간 거니? 어머?” 윤지의 엄마는 역시나 또 찾아온 철용을 보고는 조금 놀랐지만, 애석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쩌죠? 윤지 지금 막 나갔는데…” “에? 진짜요? 하, 오늘도 또 늦은 건가…” 역시나 철용은 한 발 늦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았지만, 그 모양이 재밌다는 듯 윤지의 엄마는 마치 윤지가 그러하듯 고양이 같은 눈을 해서는 철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철용은 왜 그러느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희 윤지 때문에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시네요.” “고생은요.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 걸요.” “하지만, 딱히 윤지에게나 제게도 계약의 ‘ㄱ’자도 꺼내시지 않는 거 보면, 꼭 그러신 것 같지도 않네요.” “아, 그게…” 어쩜 모녀가 이리도 눈치가 빠른 건지 철용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그치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작에 다른 에이전트나, 팀의 스카우터들이 많이 찾아왔었지만 윤지는 어쨌든 공부를 계속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아…” “괜찮으시면 들어와서 뭐라도 드실래요? 애 아빠도 막 나가시고 해서, 저 혼자 아침을 먹어야 했는데.” “아, 저는” "그렇게 사양만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극구 사양했지만 한껏 팔을 당기는 윤지의 엄마 덕분에 본의 아니게 이른 아침부터 남의 집에 들어선 철용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언제나 봐도 생동감이 넘치는 윤지의 커다란 사진에 자신도 모르게 잠시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듣기로 한국여대의 누드 사진을 찍어주었던 사진 작가 '리키'가 여주대의 골문 뒤에서 찍었다던 사진이었는데, 그 시합을 현장에서 볼 수 없었던 철용으로선 볼 때마다 무척이나 아쉬움을 느끼게 해주는 사진이었다. 물론 윤지에게는 헤어져 있던 부모님과 재회를 하게 해준 고마운 사진이었겠지만. ‘정말 엄청난 경기였을 텐데…’ 분명 그 날 이후 방송 테이프를 구해 몇 번이고 경기를 돌려봤지만, 볼 때마다 현장에서 보지 못한 아쉬움이 더욱 커지기만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사진 속 윤지의 모습은 지금이라도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이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 윤지는 빗물이 만든 웅덩이 덕분에 여주대의 왼쪽 미드필드 공간에 멈춰서 있는 공을 향해 오른쪽 터치라인을 타고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그러자 하나도 빠짐없이 마지막 공격에 가담하고 있던 여주대 선수들은 윤지를 저지하기 위해 다급하게 회귀했지만 그 누구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윤지는 경기를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윤지의 전력질주를 바라보며 역시나 여주대의 진영으로 따라 올라가던 혜미는 윤지를 막아 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란 생각을 해보았지만, 공을 따라 같이 달려가야 했을 주심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모습이 어쩐지 석연치가 않았다. ‘설마?!’ 추가시간이 아직 충분하게 남아있었음에도 주심은 공을 따라 달려 올라가기는커녕 윤지를 바라보며 천천히 휘슬을 입에 물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경기가 급박하게 흐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혜미는 절대 모든 시간이 흘러갔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오프사이드도, 터치라인 아웃도 결코 아니었음에도 휘슬을 입에 물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렇게 경기를 마무리 지으려는 주심의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혜미는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역시나 ‘의도적’으로 주심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윤지의 마지막 공격을 가로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휘슬을 입에 물던 주심은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혜미의 ‘백태클’에 그대로 빗물 가득한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졌다. “어이쿠!!!!” “어머 죄송해요 선생님!!!”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혜미는 무척이나 미안한 듯이 주심을 일으켜 세워줬지만, 주심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휘슬을 찾으려 혜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물이 흥건한 잔디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혜미가 밟고 있던 휘슬을 찾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주심도 혜미도 어느덧 질풍처럼 달려나가는 윤지의 뒷모습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여주대 골키퍼 윤사랑은 뛰쳐나가야 하는 지, 아니면 골문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지 쉽게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분명 이런 폭우 속에선 장거리 슛이 성공할 확률도 적을 뿐더러 조금만 지혈해준다면 분명 동료들이 복귀해 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드리블 또한 아직은 미숙한 것이 분명한 윤지의 앞을 잠시 막아 설 수만 있다면 이런 폭우 속에선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럼 우선은 속도를 죽이자!’ 결국 골키퍼 윤사랑은 윤지가 페널티 에어리어에 진입하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을 내리자마자 질풍처럼 달려오는 윤지를 향해 윤사랑 또한 멈춰있는 공을 향해 페널티 에어리어를 벗어나며 달려 나왔다. ‘이것만 막으면!’ 윤사랑은 골키퍼를 보면서 여태까지 나와본 것 중에 가장 멀리 뛰쳐나왔지만,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온 윤지는 그대로 공을 차지 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멈출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드리블을 하며 윤사랑에게로 달려들었다. ‘뭐야?! 나에게 정면으로?!’ 공을 차지하고 나서의 예측불허한 윤지의 행동 때문에 윤사랑은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완전히 물이 가득 차 버린 그라운드 덕에 공이 윤지의 발끝에서 채 삼십센티미터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다가 윤지의 가공할만한 속도까지 더해지니 그 박력이란 점점 가까워지는 윤사랑만이 느껴볼 수 있는 유일한 무시무시함이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하지만 여기서만 막아내면!' 어차피 체력적 열세를 감안하면 한 명이 적어진다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여주대였다. 때문에 윤사랑은 골문으로 뒷걸음치지 않고 차라리 잘됐다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퇴장을 당하더라도 윤지를 막아보려 양 팔을 벌리며 덮치려 했다. '여기까지야!!!' 하지만, 순간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공을 몰며 달려오던 윤지의 모습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기에 윤사랑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뭐…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지 못하던 윤사랑은 그러나 겨우 정신을 차린 후에야 자신의 뒤로 여전히 달려나가는 윤지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윤지의 발끝을 떠난 뒤 골라인을 가볍게 넘어가는 공과 함께 여전히 달리고 싶다는 듯 유유히 관중들을 바라보며 달려나가는 윤지가 있었고, 엄청나게 터져 나오는 사진기자들의 플래쉬 불빛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관중들의 열광적인 모습을 바라보고 나서야 윤사랑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 한편 한국여대의 회의실에선 방금 모두 발언을 마친 황총장을 바라보는 각 대학 총장들의 찌그러진 얼굴들이 참으로 볼만했다. “그러니까… 지금, 여자 축구 리그제를 시행하자… 그 말씀 입니까? 주말마다?” “안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하지만…” 역시나 타 대학들은 처음부터 순수한 학생이 아닌 선수들을 스카우트했기 때문에 정작 주중에 그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작년 춘계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한국여대가 추계대회도, 또 올해의 춘계 대회도 학업을 이유로 대회에 출전하지 않자 당연히 한국여대가 팬들에게 비난을 받을 줄 알았건만 황당하게도 선수들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머지 학교들이 거센 비난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러니 황총장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의견을 내세우고 있는 모습도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리그를 시행하게 되면, 다들 아시다시피 한 경기 한 경기에 목매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선수들과 감독들 모두 승리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구요.” 다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이유도 찾을 수 없었을 뿐 더러 조전무의 몰락과 함께 축협과 연맹 모두 당분간은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노감독의 측근이자 부인인 황총장의 이야기를 무턱대고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똥씹은 얼굴로 앉아만 있었고, 황총장은 이미 타 대학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주시하다가 더 이상 질문이 없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입 꼬리를 살짝 올려보았다. “뭐 제 뜻은 이 정도면 충분히 전달됐을 거라 생각하고요. 자세한 논의는 차후에 해보기로 하죠. 참, 좀 있으면 저희 학교 축구 경기장에서 친선 경기가 있을 예정입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은 보고 가셔도 좋겠군요. 그럼.” 역시나 마지막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타 대학의 총장들을 뒤로 하고 황총장은 곧게 허리를 편 채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 인천공항에 들어선 혜미 일행은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어느 정도 인파가 몰릴 거라고는 예상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결국 혜미 일행은 사람들에 밀려 꽃다발 증정은커녕, 얼굴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야, 도대체 우린 여기 왜 온 거냐?” “낸들 이럴 줄 알았나. 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어? 나오나 보다!” 그제야 고막을 찢을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지만, 혜미 일행은 영후의 모습은커녕 리버풀 선수들의 머리카락 조차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인파의 맨 앞에 있었다고 한들 영후의 모습은 누구도 볼 수 없었다는 건 혜미 일행은 알지 못했다. - 비행기에서 내려진 수하물들이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계속해서 보여지고 있었지만, 다급해보이는 부자의 짐은 아직도 나오고 있지 않았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계속해서 졸라대고 있었다. “아빠아~! 우리 짐은 언제 나오는데! 빨리 가야 한단 말이야!!” “아들, 아무래도 기념사진은 포기하자. 너 그래도 이영후 선수한테 사인도 받았잖니.” “히잉, 그치만 분명히 기다려준다고 했단 말야.” 아들은 착륙이 가까워지자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이영후와 기념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이영후는 선뜻 ‘그럼,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다’라고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했던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아들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던 아빠는 그러나 이영후 선수가 아무것도 아닌 자신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이처럼 오래 기다려 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대 선수가 전용기가 아닌 자신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것도 왔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일반 승객들과 달리 빠르게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그가 아직도 기다려 줄 거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었을 당시엔 자신도 모르게 당연히 그의 말을 믿고 있었다. “아빠, 저기! 우리 가방 맞죠!? 빨리! 빨리 빨리!!”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난 아빠는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나온 가방을 그대로 집어들고는 아들과 함께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나갔다. ‘아!’ 있었다. 그 남자가. 아무것도 아닌 일개 꼬마 팬과의 약속을 위해 정말로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잊지 않고 있었다는 듯 아들을 향해 방긋 웃어주기까지 했기에 아빠는 정말 눈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세계 축구계가 주시하고 있는 남자가 맞는 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저, 조금은 빨리 찍어야 할 것 같은데요?” 모자를 푹 눌러 쓴 영후가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 공항 로비를 슬쩍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하자 아이의 아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아들을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는 어깨 동무를 해주는 남자의 모습을 뷰 파인더에 가득 담고선 몇 번이고 셔터를 눌러보았다. - 타 대학 총장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총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 온 황총장은 그러나 총장실의 소파에서 일어서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서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기자님~!” “총장님!” 그녀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가 꽤나 진한 포옹을 했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에요? 잘 지낸 거에요?”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정신 없었죠 뭐.” 충분히 그랬을 거라고 총장은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그간 하연은 병원에서 회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축협의 비리에 관한 심도 깊은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축구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버렸으니까. 하지만 총장이 바쁘길 바랬던 건, 일 보다는 연애사였기에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 우리 감독님하고는 어떻게 돼 가는지?” “아, 하하… 뭐 그런 걸 물어 보시고… 하하…” 총장은 전 같지 않게 무척이나 쑥쓰러워 하는 하연의 얼굴이 생소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깜빡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구, 내 정신 좀 봐. 손님이 오셨는데 마실 것도 안 내어 드렸네요. 커피 괜찮죠?” “아, 저는… 우유가 좋겠는데요.” “우유…요? 어머?! 박기자님 설마?” 눈치 빠른 총장이 놀란 눈으로 하연의 배를 바라보자 하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어 보이며 몇 개월 전의 뜨거운 밤을 떠올려보았다. - “아흑!” 마치 계속해서 발기하겠다는 것 마냥 하연의 몸 속에 들어오고 나서도 점점 부풀어오르는 영후의 자지덕분에 하연은 벌어진 보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야… 너무…하악~!” 숨가쁜 리그 일정을 생각하며 부담감을 주지 않으려 어떻게든 리드하고자 영후의 몸 위로 올라가 있던 하연은 그러나 여지없이 말을 타고 있듯 온몸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안장도 없이 영후의 몸 위에 올랐던 하연은 중심을 잡으려 왼손을 뻗어보았지만, 땀으로 흥건한 남자의 매끈한 가슴밖에 느낄 수 없었기에 오른손을 겨우 뒤로 뻗어 세워져 있는 영후의 왼쪽 무릎을 겨우 붙들어보았다. 그러자 수차례의 수술자국이 남아있던 남자의 상처를 본의 아니게 만지게 된 하연이었지만, 어쩐지 이제는 전처럼 마냥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감성적일 시간조차 없었다. 여전히 말은 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것 가지고는 점점 격하게 달리고 있는 야생마 위에서 견딜 수 없었기에 결국 영후의 몸 위로 쓰러지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새 영후의 두 손이 장난스럽게 하연의 풍만간 두 가슴을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하연은 장난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남자의 두 손에 가슴이 한가득 담겨지자 짜릿함이 더욱 배가 되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흥!" 게다가 고삐를 제대로 쥔 건 남자 쪽이었던지, 드디어 점점 달리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고 그에 영국의 한 작은 집안엔 그야말로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하연의 신음소리만이 가득 찰 뿐이었다. 턱턱턱턱! 착착착착! “하으으으으응~!!!!” “읍! 하앗!”, “아흑! 흑!” 커플의 비명과도 같은 신음으로 기나긴 레이스가 끝나자 말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지만, 기수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로 말 위로 그대로 포개지듯 쓰러졌다. “으… 못됐어 진짜… 간만에 얼굴 보러 온 사람을 이렇게 못살게 굴고.” “보고 싶었어. 이것두, 이것두… 그리고 이것두.” 영후는 장난스럽게 하연의 볼과, 어깨를 쓰다듬어주곤, 마지막으로 여전히 보지 속에 들어있던 자신의 자지에 힘을 넣어보았다. 그러자 하연이 또다시 못됐다는 듯 영후의 가슴팍을 살짝 꼬집어주었다. “이래가지고 다음 시합 뛸 수 있겠어?” “응, 너랑 이렇게 했으니까 더 잘 뛸 수 있어.” “칫, 이렇게 야한 남잔 줄 알았으면” “알았으면?” “진작에 내가 먼저 덮칠 걸 그랬어!” 하연은 자신이 말하고서도 조금은 부끄러운 듯 곧바로 영후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틀어막으며 한참을 남자의 입술과 혀를 부드럽게 빨아보았다. “참, 생각해봤어?” 이윽고 겨우 입술이 떨어지자 영후는 진지하게 하연의 눈망울에 대고 물었다. “뭘?” “우리 결혼하기 전에 서로에게 멋진 선물 하나씩 해주기로 했잖아.” “그…랬지. 하지만 시즌 마치고 한국에 가서 하기로 했으니까, 벌써부터 보챌 건 없잖아!” “보채는 게 아니라, 여전히 바쁘신 기자님께서 까먹었을까 봐 그러지.” 타국에 나와 축구만 하느라 당연히 잊고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잊기는커녕 자신을 닥달하는 영후의 모습에 하연은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프리미어리그 전 구단 뿐만 아니라 타 리그의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남자에게 도대체 어떤 선물을 해줘야 하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자신의 허리께를 조심스럽게 만지는 남자의 동작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미, 미안…” “아니야. 괜찮아 자기가 만지는 건.” 영후와 뜨거운 한때를 보낸 하연은 언제나 그랬듯 안쓰러운 눈으로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 뒤쪽의 작은 상처를 매만져주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항상 자신이 안겨준 것만 같던 이 남자의 무릎 수술 상처에 이제는 조금쯤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두사람이 애절하게 떨어질 줄 모르던 사이 영후의 몸에서 출발한 아기씨는 빠른 속도로 아기집을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는 걸, 그때의 하연이나 영후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어쨌든 이제는 알게 된 뱃속에 잉태된 존재로 하연은 기나긴 고민에 대한 답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영후의 힘(?)을 빌긴 했지만 아이야 말로 분명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완벽한 '결혼 선물'이 되어 줄 것이었다. 영후에게나 또 하연에게도. 뱃속의 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를 생각하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봤는데 이윽고 조심스럽게 잔기침을 하는 황총장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때문에 하연은 겨우 다시 기자로 돌아와 한국여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참, 그건 그렇고. 한국여대는 언제쯤 다시 시합에 참가하게 될까요?” “뭐, 이제 슬슬 참가할 때가 되었지요. 더군다나 그간 공석이었던 감독도 새로 영입했으니까요.” “예? 감독…이요?” 뜻밖의 소식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는데, 그녀의 귀에 들린 건 둔탁한 노크소리였다. “네, 들어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황총장의 답에 이어 총장실의 문이 열리자, 하연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그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 윤지는 언제나처럼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 양변기의 뚜껑을 내리고는 그곳에 두 다리를 모아 올리곤 얼굴을 묻고 마음의 안식을 얻어보려 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이미 위아래로 새하얀 유니폼을 입은 채라는 것 뿐이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같았다. “후우…”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는 협소한 공간에 앉은 채 마음을 가다듬던 윤지는 그러나 바로 옆 칸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울 것만 같던 옆 칸에선 그러나 쥐 죽은 듯 고요함만 전해져 왔기에 다시금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눈을 감았다. 처음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화장실을 찾았었는데, 언제부턴가 이 학교도, 밤마다 일해야 하는 업소도, 아니 이 세상 모두가 더러웠음에도,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나 몸 속의 더러운 것을 배출하고 나서듯, 자신도 깨끗하게 나설 수 있을 거란 이유 없는 믿음이 자라났다. 게다가 바로 이 곳이야말로 어둡기만 했던 자신의 삶을 바꾸어 준 한 남자를 만났던 곳이었으니 더욱 윤지는 애착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고요한 남자 화장실 변기에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의 평온을 거의 찾아갈 무렵, 옆 칸의 남자는 결국 살짝 윤지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똑똑. "?" “저기, 휴지 좀 있으면 좀 건네주시겠습니까?” 때문에 윤지는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둬야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별 생각 없이 옆에 걸려있던 휴지를 둘둘 풀어대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서는 바로 옆 칸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곳엔 꿈에 그리던 남자가 붉은 색의 유니폼을 입은 채로 배시시 웃으며 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독님!!!!!!!!!!!!!" 때문에 윤지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며 그대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기고 있었다. - 그저 오늘도 한국여대의 연습경기가 벌어지는 날이었기에 많은 팬들은 어김없이 한국여대의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그 누구도 오늘의 상대팀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랬기에 한국여대의 홈페이지와 트위터 등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는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방학임에도 천사들의 플레이를 볼 수 있다는 마음 반과 평소완 달리 베일에 싸여 있는 상대팀에 대한 궁금증 반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이제 막 경기장을 찾은 현우 또한 매한가지였다. “아, 맞다! 아저씨, 오늘 한국여대가 연습경기를 한다고 했던 날이었죠?” “당연하지! 안 그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지금 이러고 있겠니?” “근데 오늘은 경기 시작 시간도 확실히 알려주지 않고, 게다가 어느 팀하고 붙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설마 했었거든요.” “상대팀이 무슨 상관이냐? 우리 이쁜이들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지!” “하긴 그렇죠. 어? 아저씨!”, "어, 왔나?" 한편 때마침 나타난 철용의 모습에 현우는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철용은 규식과 악수를 나눈 후 현우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자리에 앉았다. “참, 선배. 듣자 하니 한국여대 2기 멤버들도 이제 곧 선발 한다던데요. 혜미는 별 말 없던가요?” “뭐 혜미 말로는 축구 다이어트 동아리 중에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개 테스트 한다더라.” “그럼 한국여대 스쿼드도 조금은 두터워지겠네요?” 이제는 ‘스쿼드’란 말도 스스럼없이 할 줄 알게 된 현우가 신기해서 철용은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규식은 조금은 진지하게 현우에게 답을 해 주었다. “선수가 많아진다는 건 우선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보단 여전히 공석인 감독 자리가 가장 큰 문제 아닐까?” “총장이나 권 코치 모두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더군요.” 역시 철용도 그런 문제를 걱정하며 몇 번이고 총장과 남희에게 물었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자격이 안 되는 남희로는 미안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기에 어떻게든 한국여대의 보석 같은 선수들을 위해서라도 백방으로 감독을 알아봐 줄 수도 있었건만 정작 당사자들은 너무나 태평했기에 철용도 결국 손을 놓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어? 나와요 나와!” 순간 현우가 자리에서 또다시 일어서며 그라운드를 바라보자, 하얀 유니폼을 입어 더욱 천사같아 보이는 한국여대 선수들이 천천히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관중들은 박수와 함께 엄청난 함성으로 인사해주었고, 선수들은 이제는 익숙해진 듯 간간히 손을 흔들어 보이며 수림의 지시아래 스트레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혜미만은 스트레칭보다 현우와 눈을 맞추는 게 더 중요해보였지만. - “할아버지!” 한편 노감독과 함께 한국여대를 찾은 찬이는 한국여대 선수들의 등장과 함께 신이 나는가 싶었지만 자꾸만 노감독을 부르며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는데, 노감독은 왜그런가 싶었지만 찬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왔소?” “앉아도 되겠니?” 덤덤한 노감독의 인사를 받으며 총장은 노감독이 아닌 찬이에게 물었는데, 찬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네가 찬이지? 할아버지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단다.” “에? 진짜요?” 찬이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노감독을 바라봤지만, 노감독은 짐짓 딴청을 하며 그라운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근데, 할머니. 오늘 어디랑 붙는 거에요? 아직 싸울 팀이 안보이는데요?” “그건… 아, 마침 저기 오는 구나.” 때마침 총장은 그라운드 밖으로 등장하고 있는 리무진 버스를 가리키며 찬이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려 했지만, 짙은 색으로 썬팅되어있는 버스 안의 선수들은 아직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팀의 선수들이 타고 있는 버스는 부드럽게 그라운드 밖에 정차했고, 동시에 관중들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버스의 문이 열리고 상대팀의 감독인 베니테즈가 내려서서 관중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관중들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섰는데, 이윽고 그 뒤를 이어 붉은 색의 유니폼을 입은 제라드가 내려서자 그야말로 관중석에선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 침착함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남희조차 전혀 알지 못했던 상대팀의 등장에 순간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남희의 긴장을 풀어준 건 다름아닌 벤치를 찾은 하연이었다. “권코치님, 권코치님!” “아, 박기자님.” 이미 소란스러워질대로 소란스러워진 관중석 소리에 하연은 몇 번이나 불러본 후에야 남희와 눈을 맞춰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남희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도 반가운 얼굴을 하기 보다는 하연의 옆에 목발을 짚고 서 있는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 근명 선수?” “아, 이거 미녀 코치께서 다 알아봐 주고… 반갑습니다. 하근명입니다.” “권남희입니다.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아, 그게…” 근명이 쑥쓰러워하며 내민 손을 여전히 잡고 있으면서도 남희는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인지 하연에게 눈으로 묻고 있었는데, 하연은 근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글쎄, 이 자식… 아니 하근명 선수가 한국여대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말이죠.” “저희 학교…요?” 그제야 남희는 근명의 손을 슬며시 내려놓았고, 근명은 더욱 어색해진 얼굴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어느새 다가와있던 수림은 펄쩍 뛰며 반대를 했다. “설마? 감독은 아니죠?! 우리 한국여대 감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우리 감독님도 아직 그만두신 게…” “오코치님 됐습니다.” 남희는 꽤나 흥분해버린 수림을 만류하며 여전히 황당해하는 근명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희 학교의 감독 직은 엄밀히 말하면 ‘공석’이 아닙니다. 저희 감독님께선 잠시 휴가를 떠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나 원 참.” 순간 근명이 피식 웃어버리는 것을 바라본 남희와 수림은 조금은 경직되기 시작했고, 하연 또한 조금은 철이 든 줄로만 알았던 근명의 성격이 폭발할 것만 같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명은 그런 세 여자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한참이나 웃고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아이고 배야… 아 죽겠네. 지금까지 하신 말씀들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요. 그리고 박기자님, 내가 언제 감독 직에 관심 있다고 했습니까? 난 수비코치를 하고 싶어서 온 거라구요! 다들 알지도 못하면서, 참나…” “수비… 코치?” “그래요! 내가 뭐 영후 선배 흉내나 내러 온 줄 압니까? 나도 나름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요!” "하지만 총장님께선" "아, 그건 그분 생각이고요." “근데 왜 공격이 아닌 수비 코치를?” 하연은 조금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근명에게 물었는데 근명은 설마 하연이 몰라줄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니까, 난 공격수 출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공격작업이 이루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이말이에요. 그럼 이런 것들을 고스란히 수비수들에게 알려주면…”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근명의 이야기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관중들의 함성소리에 완전히 묻히고 말았기에, 남희와 수림, 그리고 하연과 근명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진원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어?! 이영후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 후 관중석은 리버풀 선수들이 보여질 때보다 더욱 더 함성이 높아지고 있었고 마치 결승골을 넣은 직후처럼 관중석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거봐요. 모두들 기다리고 있을 거랬죠?” 윤지가 여전히 영후의 팔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말했지만, 영후는 리버풀에서 데뷔 경기를 할 때보다, 아니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을 때보다 더욱 깊은 감흥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잠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한국여대 아이들 덕분에 영후는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골 세레머니를 받는 것만 같았다. "감~~~~~~독~~~~~니~~~~~~임~~~~~~!!!!!!!!!!!!!!!!!!!" “감독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그새 우릴 잊어버린 건 아니죠?”,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그야말로 이산가족이 상봉한 듯 한국여대 아이들은 눈시울까지 붉히며 그라운드에 누워버린 영후를 뒤덮고는 절대로 안 떨어질 것 마냥 들러붙고 있었는데, 남희와 수림 또한 아이들처럼 그렇게 달려들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애절한 눈으로 한국여대 감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한편 제라드와 토레스 역시 그라운드에서 이영후의 등장과 함께 아이들이 달려드는 모습을 팔짱을 끼고 선채로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나라였으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긴 했겠지만,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에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영후란 남자의 이력 또한 지금의 상황처럼, 아니 그보다 더 이색적이기만 했기에 제라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부상을 감추고 몇 년을 뛰었다고는 믿을 수 없었던 골 기록들과, 부상 이후에 여자 축구팀의 감독을 했다는 것, 그리고 구단주들 덕에 빚더미에 올라앉은 리버풀이란 구단을 선택한 것까지. 특히나 아무리 지금까지 팀에 충성하고 있던 제라드조차도 마지막 항목엔 더욱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때문에 제라드는 여전히 아이들과 즐거워하고 있는 영후에게 마음속으로 물어보았다. ‘이봐, 영후. 도대체 넌 왜 우리 팀을 선택해 준거지?’ 물론 여전히 행복해 보일 뿐인 남자의 모습에 이번에도 답을 얻지 못할 거라는 걸 제라드는 알 수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남자의 시선이 결국은 또다시 한 여자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으로 조금쯤은 짐작을 해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 눈물 자국이 빨간 양 볼에 선명했던 9살의 하연은 그러나 정말로 자신의 몫까지 뛰어준, 그래서 셀 수도 없이 많은 골을 넣어버린 꼬마 영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어쩐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반해버린, 그 나이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감정 덕분에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들킬까 싶어 하연은 영후와 조금쯤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칼에도 흙먼지가 가득했던 영후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바가지 머리에 눈만 커다란 귀여운 하연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그러자 하연의 얼굴은 더없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전혀 안그런 것 처럼 새침하게 굴고 있었다. “뭐, 뭘 그렇게 보니?” “아니… 어쩐지 너야말로 나를 계속 보고 있었던 거 같아서…” “보, 보긴 누가! 나, 난 그냥… 그래! 네가 입고 있는 티가,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라서 그래!” “내 옷…? 이거? 빨간…색?” 순간 영후는 자신이 입고 있는 흙먼지 가득한 티셔츠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하연을 바라보았다. “빨간색, 좋아하니?” “그, 그래.” “그렇단 말이지? 좋아. 알았어. 알았다구.” 뭐가 그리 좋은지 영후는 또다시 개선장군처럼 하연을 앞서 걸어나갔고, 하연도 겨우 가슴을 진정시키며 영후를 좇아 발걸음을 옮겼지만, 두 사람 모두 그날 따라 노을 지는 석양이 무척이나 빨갛다는 생각을 동시에 해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