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비공개] 마왕, 발정하다.上 하늘늑대 09-15 23:50 | HIT : 529 비공개님의 실수로 다른동 퍼감이 한테 가야하는 마왕 파일이 제 메일로 왔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비공개님 소설 퍼오게 됐습니다. 예전에 마왕 안 퍼오냐고 문의 주셨던 야밤님(쪽지가 날라가서 누군지 모르겠습니다ㅜㅜ) 늦게 나마 이렇게 퍼왔으니 지금이라도 즐겁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비공개"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오 ㅠㅠ 빙구짓으로 연락 되다니 --; 이번 주 안에 파일 드릴께요오. 마왕은 드리다 안 드려서 마음에 많이 걸렸는데, 잘 되었네요! 연락드리겠심둥-------- 즐거운 밤 되세요! +++++ 고3 담임 놈이 말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미로라고. 미로고 나발이고 당장 먹고 사는 게 빠듯했던 나는 성적표를 펼쳐들고 훈계하려는 담임머리 새끼의 통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던 걸로 기억이 한다. 돈 많은 집 자식, 공부 잘 하는 놈만 골라서 선생 노릇하는 인간 치곤 어울리지 않는 대사였으니까. 대학은 꼭 가야한다, 인생의 쓴 맛을 보고 싶냐, 대학이 최고의 자격증이다, 라고 필사적으로 말하는 담임에게 취업한다, 어쩐다. 둘러대고 감옥 같기만 했던 고등학교를 졸업한지가 벌써 7년 전이었다. 그때 담임의 말을 들어야 했을까. 졸업하고 내 삶은 감옥처럼 답답하기만 했던 학창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생활의 무게와 한 해씩 더해지는 나이에 치여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러나 정작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하고 가장 처절하게 느낄 때는 거울을 보고 있을 때도 아니고 곱셈, 나눗셈 기호를 봐도 멍해질 때도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알바 생들의 나이가 나와 두 살, 다섯 살, 일곱 살, 무려 열 살 이상이 차이 날 때였다! 그 좋은 나이에 왜 벌써부터 돈을 번다고 설쳐 대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그들의 부모를 붙잡고 당신네들 자식들이 시급 '2100원짜리' 알바를 하는 바람에 알바 인들의 최저 임금제가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특히나 방학이면 와글와글 쏟아지는 고삘 때문에 3100원하던 시간당 페이가 150원, 200원, 무려 500원씩 깎기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거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겠는가. 어린나이에 용돈을 벌려는 생각자체가 기특하다는 것 외에 그들에겐 노동법이니 최저임금제니 하는 건 도깨비 콧구멍에서 삐져나온 코털처럼 관심 밖의 이야기일 뿐이다. 젊고 싱싱한 것들이 ‘ 사장님, 2000원이라도 좋아요, 제발 저 좀 소처럼 부려 먹어주세요.’ 하고 달려드는 추세니 나처럼 나이 많은 놈이 ‘2000원은 무슨 소리! 무조건 3100원!’하는 고집은 ‘못 배운 놈들의 설움’ 취급을 받는 것이 요새 알바계의 생리였다. 어느 정도 얼굴이라도 반반한 여자로 태어났다면 당장 코 높이고 턱 깎고 눈 찢어서 백마 탄 왕자를 꿈꾸며 신분상승의 꿈의 나래라도 펼쳤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남자였다. 남자. 그래, 남자. 그것도 무시무시한 대한민국의 남자. 대학 들어갔다고 술 먹고, 군대 가기 전 모여서 국방의 의무를 실컷 욕하며 술 먹고, 군대 나와서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추억을 곱씹으며 술 먹고, 당장 눈앞에 닥친 복학 문제에 모르는 후배가 반말이라도 할까봐 방황하면서 술 먹고, 정작 복학해서 굳어진 대가리에 슬퍼서 술 먹고, 얼렁뚱땅 4학년 되면 취업 못할까봐 술 먹고, 지방대 4년이란 졸업장 들고 그저 그런 회사에 들어가서 보너스 적다고 술 먹다가 갑자기 ‘어라? 속이 왜 이렇게 안 좋지.’ 하는 순간 서른이 된다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사나이. 물론 나는 대학을 가지 않았으니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건 권 솔, 그 놈도 마찬가지였다. 녀석과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히 있어야 할 부모라는 존재는 없었다. 그렇다고 보잘것없는 밑바닥 인생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치는 소년, 소년 가장도 아니었다. 나는 연말연시에 티브이에 나오는 그들처럼 무턱대고 온순하지도 않았고 끈기가 있는 성격도 아니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내심이 강하지도 않았다. 알바 비 전부를 먹는 것과 방값에 쓰며 어영부영 하루하루를 사는 그저 그런 녀석이었다. 권솔을 만난 곳은 허름한 동네 고아원이었다. 확실하진 않다. 다만 그렇게 추정된다. 놈과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그래서 녀석과 나에겐 애초부터 엄마, 아빠라는 그 흔한 단어가 허용되지 않았다. 원장님한테 들은 말로는 날 버리고 간 여자가 얼핏 교복을 입고 있었던 거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모 중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아이였을 가능성이 컸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자식이 된단 건 말할 수 없을 만큼 억울한 일이었지만 자아나 사고력을 가진 나이에 버려진 것 보단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오히려 더 낫단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놈과 더 빨리 친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아원에선 정확히 나이가 맞는 녀석이 드물었다. 3살 위아래는 그냥 친구로 구분했다. 물론 한두 명 있다고 해도 거의 무리를 지어 놀거나 힘이 센 녀석들이 내 소시지나 사탕 따위를 뺏어먹기 일쑤였다. 나는 왕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까쟁이’ 부류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쉽게 구분 짓기 애매한 말 그대로 어중간한 위치였다. 원에 후원자가 가끔씩 들려 단체로 햄버거를 사올 때, 힘센 형이 달라고 고함을 지르면 징징 울면서 뺏기고, 형이 가끔가다 기분이 좋을 때면 그 날은 햄버거 하나를 완전히 다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놈. 그게 권 이 힘을 갖기 전까지의 내 삶이었다. 권솔 새끼가 초능력 같은 힘을 갖고 무서운 파괴력을 쌓아가면서 내 삶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나는 얼굴도 마음도 성격도 모든 것들이 평범하디 평범한 무엇 하나 특출 난 것이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다르게 권솔은 남자치곤 꽤나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속단 말라! 놈은 예쁜 생김새와 다르게 싸움을 하기 위해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주먹과 특유의 거지같은 리더십으로 초등학교 때는 골목대장, 중학교는 쌩 양아치, 고등학교 땐 학교 짱, 고3땐 일대 최고의 주먹으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차츰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녀석의 핵주먹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싸움실력으로 인해 권솔의 베스트인 나의 지위는 녀석 못지않게 높아만 갔다. 그래서 중학교 땐 이런 소문까지 있었다고 한다. 솔이 새끼가 나랑 친한 이유는 놈 못 지 않게 뛰어난 내 주먹을 녀석이 알기 때문에 나랑 싸우기 싫어서 일부로 친한 척 하는 게 아니냐고. 밥 처먹고 할 일이 없는 놈들이 만들어낸 헛소문이었다. 자고로 나는 평화주의자다. 평화주의자이기에 앞서서 비폭력주의자다. 쉽게 말해 좆 빠지게 싸움을 못한다는 말이다. 좀 더 원활한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보자. 이제 와서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치욕스러운 일화지만 나는 김 지만과의 소소한 말다툼에 병신처럼 피 떡이 되게 얻어 터졌다. 권솔이 말리지 않았다면 스물이 되기도 전에 관에 들어갈 뻔 했다. 지만이 새끼의 주먹은 일명 핵주먹으로 통하는 권솔과 대등할 정도니 대충 젖혀두고라도 김 지만의 사랑스러운 애인 이 경원에게까지 땅바닥에 짐짝처럼 팽개쳐져서 팔이 부러진 사건은 나의 여과 없는 싸움실력이 거지같음을 시사해주는 바였다. 권솔을 어느 정도 설명했다면 이제 김 지만과 이 경원으로 넘어가보자. 솔이 새끼가 고등학교에 올라오자마자 처음 일대일로 붙은 상대가 김 지만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감칠맛 보다 더 유혹적이라는 주먹맛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 권솔 옆에 붙어서 사태를 아슬아슬하게 관전하던 나는 일명 ‘곰’ 지만으로 통하는 김 지만의 소문정도는 눈을 감고도 달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다. 김 지만은 단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청송의 호모사이코. 김 지만이 호모라는 소문은 워낙 유명했지만 녀석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지어내서 떠벌리기 좋아하는 놈들의 농담거리일거라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 없다. 전설로 통하는 청송의 호모사이코는 솔이 새끼와 일전을 벌일 허름한 공사장에 이 경원을 데리고 나왔다. 예쁘다 못해 괴기스러울 정도로 인형 같은 이 경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남자도 저렇게 생길수도 있구나. 하는 순수한 감탄에 빠져 넋을 잃었다. 놈은 살아 있는 바비인형이었다. 그러나 바비인형이 환경과 속세에 찌들어 욕쟁이 인형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녀석을 처음 본 나도 당장 눈앞에 에이 포 용지만 있다면 이 경원의 얼굴에 대해 감상문을 몇 장씩 쓸 수 있을 만큼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힌 새끼였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질질 흘리며 이 경원을 보고 있는데 등 뒤로 솔이 새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 뭐냐, 저년은.” 그날 이후 시간이 흘러 지만이 새끼와 경원이놈까지 덤으로 친구가 된 다음 솔이 새끼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로 여잔 줄 알았다는 거다. 그 말에 이경원은 당연히 발끈하고 나섰다. 놈은 들고 있던 포크로 솔의 대가리를 찍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싸움판만 아니면 착하다 못해 순수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김 지만이 오징어 다리를 쭉 찢어 질겅질겅 씹으며 경원이 놈의 허리를 끌어안음으로서 다행히 싸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싸움. 그거 참 생각보다 몸만 괴로운 거다. 권솔과 김 지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녀석들의 첫 맞짱이자 마지막 주먹다툼은 이렇게 끝이 났다. 권솔, 3일간의 응급실행,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음. 4일 후, 일반병동으로 옮김. 김 지만 과다출혈로 인한 일시적인 호흡정지, 일주일간 중환자실. 그 뒤, 일반병동으로 직행. 이것이 바로, 현 고삐리들 폭력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후, 정말 개 구라처럼 일반병동에서 다시 만났을 땐 녀석들과 우린 친구가 되어 있었다. 가난한 이유로 8인실의 바글바글한 병실에 입원한 권솔과 놈의 병간호를 이유로 병원에 죽치고 있는 내 곁에 노환으로 입원한 노인들 뿐, 흔한 말 상대도 없었다는 것이 값싼 우정을 쌓기엔 충분했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전혀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봤을 땐, 주먹싸움이어도 우리가 느끼기엔 단순한 의견충돌 수준으로 매듭이 지어지곤 했다. 지금까지 인물들을 쭉 지켜봤으면 이제 나의 생활들을 쭉 지켜보라. 권솔과 나는 십 만원씩 반 땅해서 방값을 내는 콧구멍보다 작은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원래는 25만원인데 우리들 사정을 알기 때문에 5만원은 까준다 어쨌다나. 그 이유로 항상 우리만 보면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말라,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기타 등등의 훈계로 치매를 방지하며 살아가는 정자 할머니의 잔소리를 덤으로 듣고 있었다. 어느 날은 징그러울 정도로 아침잠이 많은 권솔이 할머니의 딱따구리 잔소리에 베개를 벽에 집어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 시발. 거지같은 잔소리 들어주는데 우리가 돈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 심각하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수중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으론 이런 집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니 놈에게 알아서 아가리 닥치라고 일러두었다. 흥부가 살다 살다, 도저히 못살겠다고 뛰쳐나갔을 것 같은 정자 할머니의 허름한 기와집은 할머니가 쓰는 큰 방을 필두로 안방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작은방은 할머니의 손녀 정자. 그 옆방은 손자 정만이 차지하고 있다. 세를 주고 있는 사글세방은 나와 솔이 새끼가 쓰는 가장 싸고 지저분한 방을 시작으로 방구석에만 처박혀 고시공부에 청춘을 허비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총각. 솔이 새끼의 말로는 우리와 비슷한 또래라고 하는데 3년 가까이 살고 있어도 그 남자의 얼굴은 이사 때 말고 자세히 본적이 없다. 총각의 방에서 가끔 새벽에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릴 때엔, 경원이 말로는 그 날이 바로 고시발표 날이라고 했다. 아직까지 확인된 바는 없다. 만년고시생 총각의 방 옆엔 할머니가 고추도 말리고 메주도 직접 만들어 말려놓는 다용도의창고가 있다. 창고 옆엔 공동이용의 절대적인 원칙을 추구하는 화장실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방에 김 지만과 이경원의 신혼 방이 있다. 사실 이건 좀 할 말이 많다. 이유인즉슨 경원이 놈의 대기업은 아니어도 중소기업 중에서도 좀 잘나가는 집의 외아들이다. 근데 왜 이런 집에서 사냐하면……. 이 모든 게 김 지만 때문이었다. 새벽에 술 처먹고 이 경원의 이층 방에 돌을 던지며 달콤한 사랑 노래를 속삭이고 싶었던 마음은 알겠다만 진짜로 그러면 안 될 일이었다. 왜냐면 경원이놈은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었다면 엄두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김 지만은 원래부터 맹한 구석이 있었고 더군다나 술로 뇌가 흠뻑 마비 돼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외아들의 이름을 고래고래 부르는 시커먼 사내새끼를 본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론 여기서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섰다면 친구사인가보다 하고 넘어 갈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놈은 듣도 보도 못한 노골적인 성 묘사를 가득담은 노래로 경원이 놈의 이웃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미리 준비해온 기타를 발가락으로 튕기는 희한한 퍼포먼스로 주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녀석은 하루아침에 깡패에서 행위예술가로 돌변해있었다. 그것도 새벽 4시에. 지만이 새끼는 그 일만 나오면 분에 못 이겨 열심히 씩씩댔지만 그래도 아들과 관련된 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신고 안한 게 다행이다. 놀란 이경원이 2층에서 뛰어내려 왔을 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느새 분노의 오로라를 내뿜은 경원이놈 아버지가 김 지만의 머리에 물을 한바가지 끼얹었다. 그리고 경원이가 말릴 틈도 없이 놈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경원이 놈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아버지.” 손이 날아왔다. 응당 당연한 결과였다. 하나 뿐인 아들이 게이라고 밝히는데 오냐 축하한다고 박수쳐줄 부모가 과연 있을까. 하물며 상대는 정신 나간 놈이라면 뺨 한 대가 아니라 발도 날아왔을 법하다. 하지만 알코올에 빠져 있던 김 지만은 이해와 타협이 없었다. 녀석은 밤의 야수, 술의 노예의 진면목을 과시했다. “ 뭐냐. 네가 뭔데 때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허나 김 지만은 중간을 거부했다. 고개가 꺾어져 쉽게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경원이 놈을 보고 김 지만은 그제야 비로소 술에 깨어나 이런 돼먹지도 않은 말을 씨불였다고 했다. “ 시발, 이 개새끼. 나도 아까워서 손도 못 대는데 어디서 지랄이야! 너 진짜 죽어볼래!!” 당연히 둘 다 쫓겨났다. 개새끼 앞에 장사 없었다. 집 없는 이것들이 어디로 갔겠는가. 놈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날로 짐 싸 들고 우리 집으로 쳐들어왔다. 지만이 새끼는 솔이 놈이 가장 좋아하는 목살세근을 내밀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 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소주 두병도 주섬주섬 꺼냈다. 먹는 거에 무척이나 약한 권솔은 목살과 소주를 장롱 속에 숨기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승낙의 표시였다. 그렇게 방한 칸에서 시커먼 사내 넷이 3주일을 살았다. 밥 먹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하게 경원이 새끼와 나는 눈뜨자마자 눈감고 잠들기 전까지 싸워댔고 솔이 놈과 지만이놈은 알바자리를 알아본다고 아침에 나갔다가 한밤중에나 들어왔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너무나 쉽게 승낙을 해버린 솔이 놈이 괘씸했지만 놈은 그때마다 붕어빵이나 계란빵을 사와서 내 비위를 슬슬 달래주었다. 그러나 때마다 사주기 뭐 했는지 권솔은 갈수록 지능적으로 변해 앙금이 없는 붕어빵을 떨이로 사오거나 유통기한이 극으로 치닫는 계란으로 만든 비릿한 계란빵을 헐값에 사들고 와서 내 화를 돋우었다. 그럴 때 나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김 지만과 이 경원을 갈군 뒤 빨리 나가라고 윽박을 지르는 걸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러나 놈들은 애초부터 내 잔소리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급기야 분에 못 이겨 무당처럼 날뛰는 날 보며 놈들은 반찬이 거지같다, 이 옷은 꼭 손빨래를 해야 한다, 옷에 빨래집게 자국 남아서 미치겠다는 식의 정나미 떨어지는 말만 지껄여댔다. 그 쯤 놈들이 이 집으로 나간다는 희망 따위를 차츰 포기했다. 금욕적인 생활에 눈알이 뒤집혀 지고 입에 거품 물기 일보직전인 김 지만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마땅한 집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의 창고 옆방엔 한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다. 김치를 담그면 항상 한포기라도 가져다주고 솔이 놈이 늦거나 야근으로 남편이 늦으면 일명 새댁이, 경자 누나는 저녁을 같이 먹자며 나를 부르곤 했다. 그렇게 착했던 사람들이 지만이 새끼의 협박과 강압에 못 이겨 계약을 몇 달이나 남겨둔 재작년 가을에 쫓기듯 집을 떠나 버렸다. 누나가 내게 인사도 없이 떠난 이유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누나는 할머니하고도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딱히 현관문을 잠그고 다니지 않을 정도였다. 그 일은 아마 누나가 시장을 갔거나 슈퍼에 간 사이 일어난 걸로 추정된다. 지만이 놈은 경원이 새끼를 끌고 누나의 신혼 방에 들어가 베테랑 게이포르노 배우들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꺼리는 덕분에 프리미엄 회원들 한에서만 보여준다는 동영상에 나오는 일명 ‘체조 선수 자세’를 화려하게 구사하며 대낮 섹스를 벌인 것이다. 그때 누나는 남자들의 성관계. 즉 게이들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누나는 임심을 한 상태였다. 태교를 목숨처럼 하는 누나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당연히 집을 옮길 생각을 했던 것이다. 누나는 이사를 하는 순간에도 나와 권솔을 향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김 지만과 이 경원처럼 그렇고 그런 사이로 단단히 오해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추접함과 지능적인 두뇌로 신혼부부를 사지로 내 몰은 뒤에야 방 한 칸을 얻는데 성공한 김 지만은 도배 중에도 느끼한 얼굴로 경원이놈 엉덩이를 쿡쿡 찌르며 좋아죽겠는지 연신 싱글벙글 거렸다. 누군 좋아 죽겠는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지금 충격으로 뜬눈을 지새울지 모르지. 착하고 좋은 누나였는데 굉장히 아쉬웠다. 녀석들은 우리 집 식량만 파괴한 게 아니라 내 소중한 인간관계도 좀비처럼 갉아 먹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출출해질 시간이다. 꼬르륵 거리려고 준비하는 뱃가죽을 움켜잡고 있을 때 눈에 띄게 초조해진 얼굴로 애꿎은 신문귀퉁이를 구기고 있는 경원이놈이 눈에 들어왔다. 초조한 얼굴도 사실 너무 예뻤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배가 아플 지경이다. “ 풍 걸렸냐? 왜 가만히 못 있고 풍 걸린 놈처럼 몸을 달달 떨고 있냐.” 고양이 같은 놈이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며 말했다. " 됐어. 너는 몰라도 된다.” 모르긴 뭘 몰라도 된다는 거냐.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운다고 해서 내가 네 속을 모르겠냐. 한심한 놈. 나는 요란스럽게 혀를 끌끌 찼다. 경원이 놈이 사팔뜨기처럼 나를 노려봤다. 인형 같은 이경원의 이마에 열십자 모양의 주름이 잡혔다. 너는 단순히 노려봐도 예쁘구나. 놈의 구겨진 얼굴을 보자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들고 있던 걸레로 열과 성의를 다해 책상을 닦으며 말했다. “ 그렇게 걱정되면 너도 거기 가서 일하면 되잖아.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이 경원이 버럭 고함을 지른다. “ 내가 언제 걱정된다고 했어?” 역시 놀리는 재미가 쏠쏠 하구만. 자연스럽게 코웃음이 나왔다. “ 너 지금 지만이놈이 게이 바에서 일한다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내 말에 놈의 예쁜 얼굴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하긴 불안 할 만도 하다. 그랬다. 김 지만과 권솔이 라는 이 시답지도 않은 두 놈이 알바자리라고 알아온 것은 게이 바였다. 진성게이인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김 지만이야 그렇다 쳐도 권솔이 이 자식은 저, 엉덩이로 뻑 치는 거 좋아합니다. 라는 별 거지같은 말로 면접 때 사장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 대답 듣고 만족해서 녀석을 뽑은 사장도 웃기는 놈이다. 엉덩이로 뻑 치는 거 좋아한다니. 영 말세구나 고등학교 때 만난 놈들이니 김 지만의 과거 따위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언뜻 들은 풍문으론 김 지만의 애정관계는 유명하다 못해 놈의 별명 청송의 호모사이코에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게 바로. 걸레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경원이 놈의 신경을 자극하듯 마음 놓고 깝죽댔다. “ 걱정하지마라. 설마 지만이가 바람이라도 피우겠냐. 하긴 너보다 예쁜 애들이 나타난다면 또 모르지. “ 그 말에 경원이 놈의 눈알이 반쯤 튀어나와선 붉게 달아올랐다. “ 그만 까불어라.” 그러나 나는 계속 까불었다. “ 생각해봐. 넌 항상 지만이 놈한테 자신 만만 했지만 좀 둔하긴 해도 은근히 곰 같이 푸짐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게이들이 많을 수 있어. 그래서 말인데…악!!!! 왜 때려?” 대가리에서 뻑 소리가 났다. 곱상한 외모와 다르게 손이 거친 놈이다. 내 주위엔 왜 하나같이 주먹만 키운 새끼들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빌어먹을! “ 너 죽을래? 보자보자 하니까 은근히 많이 때린다니까!” 경원이 놈이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 네가 개소리 하니까 그렇지.” “ 내가 뭘! 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김 지만 바람기야 중학교 때부터 알아 줬잖아!” 녀석이 팔짱을 끼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뭐냐, 그 표정. 심하게 띠껍하는 눈빛이다. “ 나 만나고 나서 버릇 고쳤어.” 버릇 고쳤다고? 놀고 있네. 고친 놈 전화기에 하루가 멀다고 모르는 사내새끼들의 낯간지러운 목소리가 잘만 흘러나오더라. “ 너는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냐.” “ 오늘 적.” “ 개기냐? 형님이 오늘은 너랑 말싸움 할 기분 아니시다.” 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놈을 향해 근질거리는 주먹을 말아 올리려는 그 순간 거지같게도 미친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아, 그렇지. 신성한 근무시간에 딴 생각을 하다니! 이런 되먹지 못한 알바 생 같으니라고! 나는 등 뒤에 설치되어 있든 CCTV를 힐끔 돌아봤다. 왠지 카메라 앵글이 나와 경원이 놈을 동시에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벨은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울려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강력하게 헛기침을 몇 번하고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편해보여도 나름대로 이것도 일이니까. 손가락으로 성대를 부드럽게 누르며 청아한 심호흡을 하고 있자니 옆에서 불쌍하단 얼굴로 경원이놈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이 자식은 나랑 돈도 똑같이 받는 주제에 왜 전화는 안 받고 도도한 척 손톱만 자르고 앉아 있는 거야! 녀석의 코앞에 주먹을 들이밀고 위협적으로 흔들며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다음 전화는 무조건 네가 받아.」 놈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팩 돌렸다. 나는 한 마디 더할까 하다가 어차피 저놈하고 싸워봤자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라는 현실을 즉시하고 조용히 전화기를 들었다. 허나 놈을 끝까지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 건 마치 이 경원과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지켜야 할 과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 네. 안녕하십니다. 친절한 택시입니다. "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나의 29번째 직업이었다. 이 경원과 내가 일하는 곳은 택시회사의 콜센터 안이었다. 콜센터라고 별거 없다. 전화기 다섯 대 정도 놔두고 ‘안녕하세요.’ 만 뻐꾸기처럼 외쳐댄 다음 근방에 기다리고 있는 택시 기사들 개인 인터폰에 연결시키고 손님이 원하는 곳까지 차를 보내는 게 일의 전부다. 일은 생각처럼 굉장히 쉽다. 내가 지금까지 일해 왔던 다른 알바와 비교해 봐도 별점 두 개 반 정도의 간단한 일이다. 다만 일이 너무 쉽다 보니 돈도 적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나는 쏟아져오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비어 있는 뇌 속에 직업정신을 불어넣었다. 전화기에 대고 조근 조근 속삭이는 내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 손님, 말씀하십시오. 지금 어디 계시는지요? 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침묵했다. 나는 다시 말했다. “ 손님, 말씀을 하셔야 차를 보낼 수 있습니다.”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수화기 속의 술 취한 놈이( 딱 봐도 이십대 초반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어린 목소리) 반 토막 말로 씨불여댔다. 「야, 귀여운 척 하지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해!」 너 같은 놈만 아니면 항상 일은 똑바로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댕강하고 목이 잘려 나갈 것이 분명하다. 참을 인자 석자면 살인도 피한다고 하지 않던가. 참자, 참자. 나는 꿋꿋하게 주먹을 말아 쥐며 억지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손님. 술에 취하신거 같군요. 어디신지요?” 「 내가 어디 있는지 네가 알아서 뭐할 건데.」 “ 알아야 차를 보내드릴 수 있어요. 손님.” 내 말에 놈이 잠시 뜸을 들이다 대뜸 고함을 쳤다. 「 내가 어디 있냐고? 어디 있을까? 자 맞춰봐. 1번. 한강, 2번. 성대 앞. 3번, 명동. 4번. 우리 집. 자자, 어딜까요. 」 이런 거북이 십장생을 보았나. 수화기에 입을 뗀 채 ‘시발’ 이라고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벽에 걸린 전신거울 앞에서 턱밑에 난 여드름을 짜고 있던 경원이 새끼가 나를 돌아보며 ‘왜’ 라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았다. 어두운 시야에 드넓은 파도와 초록빛 공원, 따뜻한 순백의 털 뭉치 같은 흰 눈을 상상했다. 삭막했던 가슴속이 한결 부드러워진 거 같기도 했다. “ 아이-잉. 손님, 너무 어려워요. 어디계실까요.” 프로답게 감정을 숨긴 나긋나긋 내 목소리에 수화기 속에 있는 놈이 침묵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자칫 역겨운 말투로 바뀔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놈들을 잘 안다. 비위를 맞춰야 그에 맞는 답을 한다. 식당을 가도 그런 놈들이 있지 않나. 물 컵이나 물수건 따위를 뒷사람보다 늦게 가져다주면 종업원한테 말하면 될 것이지 꼭 사장한테 고자질 하는 놈들. 내 쪽을 쳐다보고 있던 경원이 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인상도 짙어지는 게 진심으로 역겨운 모양이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돈과 관련된 일이잖니. 후-아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고 있는데 수화기 속 버르장머리 없는(어린놈의) 새끼가 내 고막을 찢어버릴 듯이 성질을 냈다. 「시발. 어디서 되먹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고 있어!!!!!」 어찌나 목청이 튼튼한지 호두를 껍질 채 삼켜도 까딱없을 놈이었다. 우렁찬 놈의 목소리는 내가 전화를 받고 있는 책상과 정 반대방향에 있는 창가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 경원에게도 매우 잘 들렸는지, 놈이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배를 부여잡고 낄낄댔다. 그래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 좋다, 좋아. “ 야, 손님! 그렇게 갑자기 화를 내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놈이 부정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 성대입구 앞으로 차하나 보내라. 늦으면 차비 없어!!!」 “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너 몇 살이야! 딱 봐도 나이가….” 놈이 내 말을 잘랐다. 「 닥쳐! 이 못생긴 놈아! 빨리 차나 보내!!」 술 취한 놈은 술 취한 놈답게 자기 말만 하고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망할 자식, 내가 외모 콤플렉스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동정심을 유발하는 나의 외모가 단순히 목소리 만 들어봐도 바로 느껴졌단 말인가. 열 받아서 씩씩거리고 있는데 어느새 사발면 안에 스프를 넣고 있던 경원이 놈이 너도 먹을래? 하고 물었다. 당연한 걸 새삼스럽게 뭘 묻고 있어! 근데 웬일이지. 경원이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흘기듯 쳐다보더니 정수기 옆에 있는 서랍에서 라면 한 개를 더 꺼냈다. 자세히 봤더니 자기건 팔백오십 원짜리 큰 거고 내 것은 육백오십 원짜리 작은 거였다. 그럼 그렇지. 치사한 자식. 이경원이 저런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기에 놈에게서 시선을 틀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1번 단축버튼을 길게 두 번 정도 누르자신호음이 반짝하고 들어왔다. 감정을 훌훌 털어 버리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아아- 지금 성대근처에 계신 운전사님 계십니까. 계시면 말씀 좀 해주십시오!” 인터폰을 켜고 지금 운행을 하고 있지 않은 택시수를 세었다. 고작 스무 대가 넘지 않았다. 하긴 쥐방울만한 회사에 스무 대도 많은 거지. 우리에게 바통터치를 해준 선배 콜 보이 형님의 말을 빌리자면 그가 있을 땐 차 열두 대로 회사 운영을 했다고 한다. 안 될 말이지. 그때 깜빡이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띠-디-띡. 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자 나는 내려놓으려던 수화기를 재빨리 들었다. 「 어느 쪽 성대 말이냐.」 굵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이 일을 하면서 보낸 시간이 이제 3개월이 넘어가는데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다. 목소리 톤이 매우 낮고 음침해서 그렇지 나이가 많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피곤이 절은 목소리엔 극심한 짜증과 신경질이 묻어 있었다. “ 아…” 그러고 보니 성대라면 성균관대 입구인가. 아니면 혹 성신여대? 여대는 거의 여대라는 말을 하니까 성대라면 성균관대가 아닐까.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느라 중요한걸. 물어 보지 못했다. 발신번호가 찍혀있어서 다시 전화를 걸어 물어서 물어볼 수 있지만 왠지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뜸을 들이는 내가 답답했는지 상대방이 대뜸 성을 냈다. 「 야. 이 멍청아. 아 라는 데가 어디 있나.」 이놈도 까칠한 놈이네. 근데 성대면 뭐 성균관대겠지? 혹시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했지만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 “ 성균관대 입구로 가주세요. 좀 빨리요.”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짜증이 섞여 있었다. 「 내가 왜.」 내가 왜라니. 새벽3시 30분이 넘어가는 이 추운날씨에 손님이 기다릴까봐 빨리 가주라는데 뭐가 왜냐. 이 자식아! “ 손님이 빨리 좀 와달라고 하시네요.” 「 그놈 때문에 빨리 가다가 나는 과속으로 뒈져도 상관없단 말이냐?」 상대방의 목소리는 더 음울해지고 점차 피로에 물들어갔다. 참고로 나도 성격 면에선 그다지 참을성이 없었기에 남자의 말투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오려고 했다. “ 무슨 말이 그래요. 그런 뜻으로 한말이 아니에요.” 「 나한텐 그런 뜻으로 들리는데?」 “ 그럼 아주 천천히, 완전 천천히 가주세요. 그럼 되겠죠?” 남자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 더럽게 천천히 가다가 뒤차에 깔려 죽으라고?」 뭐 이런 거지같은 놈이 다 있나. 이 일을 하면서 술 취한 놈, 이유 없이 세상에 빌빌 꼬인 놈, 괜히 폼 잡는 놈, 별별 놈을 상대해 봤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토를 달아 막돼먹은 말싸움을 붙이는 놈은 또 처음이다. 꼬투리 잡는 게 인생의 낙으로 사는 이경원보다 더한 놈이잖아 시발. 생각남 김에 뒤통수에 비치는 거울로 슬쩍 보니 경원이 놈은 벌써부터 라면을 와그작거리며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은근한 눈길로 내 라면까지 넘보더니 내가 자신을 거울로 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내 사발 면을 두 젓가락이나 가지고 갔다. 획 돌아서 녀석을 저릿하게 노려봤다. 내 강열한 눈빛에 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져간 면발을 도로 갖다 놓으며 ‘ 잘 익었나 봐줘도 지랄이야.’ 라는 거지같은 말을 지껄였다. 상종말자! 나는 다시 수화기에 대고 중얼거렸다. “ 빨리 가다가 과속 할 거 같으면 늦게 달리고 또 늦게 달리다가 뒤차에 치여 죽을 거 같으면 빨리 달리세요. 그럼 되잖아요.” 쌍욕을 할 것 같았던 놈이 예상외로 낄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미친놈아 뭐가 웃기냐? 사람을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가 조용히 읊조렸다. 「 은근히 말 되네.」 “ 저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꽈 베기 좋아하죠?” 남자가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 왜.」 “ 사람을 빌빌 잘 꼬길래요.” 이게 언제 적 개그인가. 배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이하 생략) 그 시대가 아니던가. 내가 말 해놓고도 민망함에 괜한 헛기침을 했다. 놈은 아무 말이 없었다. 5초. 10초. 15초. 드디어 침묵을 뚫고 남자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 개그맨 지망생인가?」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 왜요? 아닌데요.” 「 재능 있는 거 같은데 한번 도전해봐. 」 어이가 없다. 그러나 더 어이가 없는 건 이 남자의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한 말투 때문이었다. 나는 서둘러 화재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고선 내가 이상해 질 것 같았다. “ 지금 가고 있는 거죠?” 그래도 일은 일이다. 내가 조심성 있게 묻자 놈은 짧게 ‘거의 다 왔어’ 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놈의 귀에 까지 들렸는지 사내가 끌끌 혀를 찼다. 끊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남자가 말했다. 「 야. 」 “ 네.” 「 너 이름이 뭐냐?」 예상치 못한 질문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모나미볼펜을 떨어뜨렸다. “ 그건 왜요?” 「 이봐, 내가 묻잖아.」 그러니까 네가 물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네’ 하고 대답을 해줘야 된다 이거냐. 하지만 묘하게 강압적인 목소리에 나는 쥐방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저는 김 계진입니다.”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였다. 갑갑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성의 없는 그의 목소리로 인해 어색한 분위기가 깨졌다. 「 계진? 계집? 개집?」 망할 놈. 눈앞에 있었으면 목을 따주었을 것이다. “ 아니요! 김 계진이라고요!” 하지만 눈앞에 없다. 고로 나는 그렇게 말했다. 병신처럼 전화기를 들고 연달아 내 이름을 외쳐대는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경원이 놈이 요란스럽게 지껄이는 ‘경원아, 전화 받아, 전화 받아.’ 하는 벨소리를 듣자마자 안색이 활짝 핀 할미꽃 같이 변하더니 핸드폰을 들고 나가버렸다. 딱 보니 김 지만이었다. 「 알았다. 김 계진.」 남자가 그렇게 말 한 뒤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할 말도 없고 해서 전화를 끊으려고 ‘그럼 수고하세요.’ 라고 말하는데 어느새 신경질적으로 변한 남자가 내 말을 잘랐다. 「 예의가 없는 새끼로군.」 “ 네?” 얼음처럼 딱딱하게 변한 남자의 목소리에서 원망이 섞여 있었다. 「 상대가 이름을 물었으면 그쪽도 물어야 봐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뭐 이런 콘크리트에 묻어버릴 놈이 다 있어. 네 이름 하나도 안 궁금해 인마. 라는 말이 목구멍에 간질간질 거렸지만 나는 동방예의지국의 시민답게 예의를 중시해서 궁금하지 않아도 물어보는 성의를 보였다. “ 이름이 뭔데요?” 「 안 가르쳐주지.」 미친놈.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민망했는지 거짓된 헛기침을 함으로서 시간을 끄는 노련함을 선보였다. 어느 정도 자신이 예상한 시간이 흐르고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 이 복희.」 이 복희라. 네가 방금 전에 내 신성한 이름을 가지고 계집, 개집 그랬지. 이때가 싶었다. 나는 성급하게 소리쳤다. “ 뭐요? 윤 복희요? 아, 그 노래 부른 사람! 알아요, 알아. 그 사람! 내가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 놈도 내 이름을 가지고 놀렸지 않는가. 나도 못할 거 없다 싶어서 바로 대응에 들어갔지만 내 구슬픈 노랫가락은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놈이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지는 내 이름가지고 놀려놓고, 내가 자기 이름 좀 놀렸다고 쪼잔 하게 삐져버리다니. 세상에 별에 별 인간들이 다 있구나. 아.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얼굴 볼일도 없는 놈 인데 뭐. 나는 털듯이 머리털을 손으로 빗으며 손가락 두개로 창문을 밀어 닫고 탁자로 갔다. 그리고 멸치국물에 며칠 동안 우려낸 것처럼 퉁퉁 불어터진 라면을 엄청난 속도로 먹었다. 길거리에서 오천 원 주고 산 방수 안 되는 사꾸려 손목시계를 슬쩍 내려다보자 작은 바늘이 벌써 4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까지 겨우 한 시간이 남았다. 어차피 집에 가면 놈들이 밥 먹자고 졸라 될 테니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진 않다. 라면국물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따뜻한 물을 한잔마신 뒤,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런 망할! 이제야 깨달았다.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간 척 하는 그 짧은 틈에 이 경원 이 개 씨발놈이 가방까지 들고 갔다는 사실을. 놈은 의리도 없이 감히 1시간이나 먼저 퇴근해 버린 것이다. 나 혼자서 심심하게 여기서 뭐 하라고!!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다. 속으로 경원이놈을 실컷 욕하고 교묘한 시간에 전화를 해서 빼돌린 김 지만 놈도 쌍으로 실컷 욕해주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나는 솔이 새끼한테 전화를 했다. [왜.] 베스트란 놈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씨불였다. “ 솔. 뭐해?” [ 게이 바에서 뭐하겠냐.] “ 뭐하는데?” [호모새끼들이 싸질러 놓고 간 거 뒤치다꺼리 한다.] 호모 분들이 참 많이 싸셨나 보구나. 그래 미안하다.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였다. 그래도 어두컴컴한 달동네를 혼자 올라가기 싫다는 일념하게 나는 최대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권솔. 언제 끝나니?” [ 5시 넘어서. 왜.] “ 그래. 어떻게 퇴근시간이 이렇게 짠 듯이 정확하게 딱 떨어지냐. 하-하하.” 솔이 놈은 뒤에서 누가 등 떠밀어서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 이젠 연기도 하냐. 너 나랑 퇴근시간 맞추려고 일부러 거기 들어갔잖아. 새끼야.]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사람 무안하게 직접적으로 말해야 직성이 풀리겠냐. 난 속으로 이를 갈며 겉으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 그랬지? 그럼 우리 오늘 같이 갈까? 우리 회사 근처로 올…….” 뚜-뚜-뚜-뚜 이런. 망할!!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먼저 끊어 버리다니. 1번에 저장된 버튼을 눌러 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봄직한 성숙된 여성의 음성이었다. [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으로 연결되오니 원치 않으면…….] 원치 않았다. 냉장고만큼 무거운 폴더를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마음으로 덮었다. 한 시간 남았다. 가슴속에서 위험하다고 외치는 무언의 소리를 무시해 버리며 미니장롱에 있는 군용담요를 꺼내 덮은 뒤 난로를 켰다. 어차피 이 시간에 내가 할 일은 없다. 좀 누워있는 다고 사장 놈이 내가 그 동안 쌓은 신뢰를 무시하면서까지 자르진 하진 않겠지. 이 경원도 같은 녀석도 아직도 안 잘렸는데. 그나저나 아! 따뜻하다. 겨울엔 역시 난방! 난로의 중요성을 실감하며 나는 그렇게 꼬빡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시발. 누가 자는데 불 켜놓으라고 했어! " 고함소리다. 그것도 단단히 악에 바친.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의식이란 놈을 제대로 불러들이기 위해 눈꺼풀을 비볐다. 그리고 엉거주춤 일어나려는데 등 뒤로 조금 전 악에 바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 어떤 놈이 내 허락 없이 난로 틀었냐. 여기 경식이 새끼한테 임대해준 내 회사인거 모르냐! 좋은 말로 할 때 이실직고해라!” 분명히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낯익은 목소리였다. 보통 남자보다 조금 낮은 중저음의 담배에 절은 텁텁한 목소리. 누구였더라. 나는 게슴츠레한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 마이 갓. 소스라치게 놀라 반쯤 누워있던 몸이 저절로 발딱 일으켜졌다. 중심을 못 잡고 휘청하던 몸이 의자 모서리에 부딪혀 골반 뼈를 지그시 눌러댔다. 그러나 아픔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픔을 뛰어넘는 놀라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다 무어란 말인가. 한국 조폭 영화의 한 장면이 지금 비로소 내 눈 앞에 한 토막의 필름처럼 상영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꿈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볼을 꼬집었다. 역시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생생하게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실제? 내가 전생이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나? 제발 내 목숨만은 무사하길 바라며 담요로 얼굴과 몸을 감쌌다. 내가 누군가에게 아직까지 노출되지 않았다는 유치한 사실에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놓인 김에 조금 용기를 내서 주위를 둘러봤다. 검은 양복을 입은 설렁탕의 영원한 친구, 깍두기 형님들께서 무슨 연유인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작두를 타는 무당처럼 야구 방망이를 들고 지랄발광에 가까운 성질을 내는 놈을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구령에 맞춰 ‘형님, 잘 못했습니다’를 외쳐댔다. 그럼 또 다른 쪽에선 지지 않으려는 듯 ‘형님, 죽여주십시오.’ 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중창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때 아닌 화음으로서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지나친 결속력을 눈물 나게 열심히 보여주고 있었다. 언뜻 세어 봐도 악다구니를 쓰는 조폭 무리들은 서른 명이 넘어 보였다. 벌떼처럼 와글와글한 머릿수였다. 그들의 위협적인 대가리 수에 등골이 오싹해 지며 식은땀이 비질비질 나기 시작했다. 저건 마치 주먹세계와 영원한 안녕을 고한 솔이 놈과 지만이 놈을 불러도 해결되지 못할 어마어마한 숫자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제주도에 거치적거리는 바윗돌 같은 대가리를 굴려 봐도 영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 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서 두 발로 사무실을 나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정답 없는 고민에 빠졌다.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한참동안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비좁은 땅 바닥에 허벅지를 최대한 꼬불쳐 앉아서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손을 싹싹 빌고 있는 조폭똘마니 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가 적선한 셈 치고 날 못 본 척 바라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똘마니 놈의 눈알이 순식간에 빤짝였다. 놈의 눈빛이 야수같이 돌변했다. 딱 봐도 감이 왔다. 일러바치겠다는 뜻이었다. 두려움에 흠칫거리며 사정없이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놈은 질질 흐르는 콧물을 양복주머니에 쓱 닦더니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사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 형님! 일어나셨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발견했습니다!!” 으-윽! 조폭답게 저렇게 쪼잔 하다니! 고세 이르냐. 난 이제 어떻게 될까? 조폭 놈들이 결속력을 다지는 이 중대한 상황에 바보처럼 처 자빠져 잤다는 이유로 산채로 매장될까. 아니면 저 야구방망이로 야구공을 쳐내듯이 병신처럼 맞은 다음에 처음 보는 길바닥에 버려지게 될까. 아니야! 긍정의 힘! 좋게 생각하자! 제발 좋게……. 살인무기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야구 방망이로 싱크대를 내리찍으려던 대장으로 추정되는 사내의 행동이 일순간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우뚝 멈췄다. 그의 행동이 갑자기 멈추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조폭 놈들이 땅에 고개를 처박던 머리를 번쩍 들고 서른 명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느글느글 거리는 그들의 눈빛이 심각하게 부담스러웠다. 대장이 몸을 돌렸다. 빠른 행동이었지만 불안하게 보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 보이기만 했다. 그는 방망이로 구두 끝을 툭-툭 치며 언제 화냈나 싶게 격하게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 더럽게 잠이 많은 새끼네.” 근데 정말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누구였지? 누구더라? 특이한 목소리라 한 번 들어도 기억하기 쉽겠는데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대장 남자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 앞에 멈춰 섰다. 시-이발. 요새 조폭 놈들이 투잡으로 ‘제비’ 생활을 한다더니 아주 반지르르한 얼굴이 강남의 사모님들 주머니를 야금야금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너 참 주먹 쓰는 놈답게(?) 더럽게 잘생겼구나. 이 경원과 권솔이 예쁘장하게 잘생긴 거라면 대장 놈은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지만이 놈이 190을 넘는데 녀석과 서도 키나 등치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거구이기도 했다. 일부러 얼굴을 태워 빛이 나는 인조적인 어두운 피부와 짙은 눈썹. 그리고 검은 눈을 감싼 쌍꺼풀 없이 큰 눈과 오뚝하고 매끈한 콧날. 남자치곤 조금은 얇은 입술. 목덜미를 스칠 정도로 긴 갈색 머리와 시원하게 넘어간 앞머리 덕에 드러난 곧은 이마. 이 남자는 얼굴 하나만큼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잘생겼다. 삼박자를 고루 가쳤다는 진부한 표현이 그를 위해 존재할 것 만 같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거의 넋을 잃은 수준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순간 본능적으로 ‘아’ 하는 힘 빠진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가 그런 나를 보며 천천히 입 꼬리를 올렸다. 대장의 풀어헤쳐진 남방 사이로 보이는 마른 근육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내가 생각해도 변태처럼 엉큼한 행동이었다. 나는 정녕 게이였단 말인가. 게이란 생각은 안 해봤는데……, 아니야, 이건 아니다. 게이 놈들 사이에 있더니 나도 모르게 성 정체성의 혼란이? 말도 안 돼. 그때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넋을 잃은 나를 보던 다비드가 이해한다는 듯이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졌다. 다비드는 노골적으로 날 빤히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배고픈가? 왜 더럽게 침을 흘리고 있지?” 이런! 젠장. 이 무슨 추한 꼴을……. 간단히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다비드는 정수기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똘마니의 머리통을 구둣발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 간단히 먹을 것 좀 사와.” “ 알겠당게요. 행님.” 얼굴은 네가 더 형님 같다. 절과 인사 사이가 오묘한 자세를 선보인 똘마니 놈이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모습을 힐끔거리던 다른 깍두기 놈들이 부럽다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다른 놈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던 다비드가 팔짱을 끼고 내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창가로 고개를 팩 돌렸다. “ 여기선 언제부터 일했지?”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 세달 조금 안된 거 같은데요.” 다비드가 나를 돌아봤다. “ 춘만아.” 그의 입에서 ‘춘만’ 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두 번째 줄에서 맨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뚱뚱하다 못해 거의 굴러다닐 것 같은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수정하겠다.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살덩이 때문에 덜거덕대며 일어났다. 그는 두껍게 접혀지는 목살을 위협적으로 위아래로 흔들었다 놨다 하며 조금 전 그놈처럼 절에 가까운 인사를 함으로서 자신의 충성심을 발휘해보였다. “ 예! 부르셨습니까! 형님!” 역시 뻥이 아니었다. 조폭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꼭 저런 식으로 인사를 해도 설마 과장되게 하는 거겠지 하고 넘겼는데 아니었다. 진짜였다! 항상 그 모습을 보며 구십도 일까. 아니다. 한 팔 십 오도 쯤 되지 않을까 하는 반론을 제기해서 나와 입 싸움을 벌인 경원이 새끼가 생각났다. 집에 가자마자 말해줘야지! 다비드가 턱 끝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말했다. “ 여기 아직도 경식이가 맡고 있냐?” 뚱보가 넙죽 인사를 했다. “ 네! 형님. 아직도 경식이 형님이 맡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비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 내일 경식이 보고 내 사무실에 들르라고 해라.” “ 네!! 형님. 형님이 말씀하신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똑같은 말을 왜 저렇게 길게 할까. 그냥 ‘네’ 만하면 될 것을. 저것들이 은근히 인생을 어렵게 산단 말이지. 쯧쯧. 꼬르륵- 이게 무슨 소리지? 다비드와 뚱보 ‘춘만’의 대화에 긴장되어 있던 사무실 분위기가 살짝 생기를 돌았다. 그러나 꼬르륵 소리에 다시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정적감이 감돌았다. 누구지? 나는 의미 없이 그들을 둘러봤다. 잠들기 전까지 라면덕분에 벙벙했던 배가 왠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지만 처음엔 내가 아닌 줄 알았다. 무거운 분위기를 단번에 가르며 사무실을 울려 퍼지는 그 고동소리가 내 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길 바랐다. 꼴-르-르르르르륵. 두 번째도 아닐 거라 믿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퍼지는 한줄기 불안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꼬꼬꼬꼬꼬꼬-르르르륵_ 이 씨발놈의 뱃속!!!! 어쩌지, 어쩐다. 쪽팔림과 어이없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노기를 띤 다비드의 목소리가 머리위에서 들려왔다. “ 아까 심부름 보낸 그 새끼 이름이 뭐였지?” 다비드가 서 있는 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무릎 꿇고 있던 놈이 ‘이때다’ 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말했다. “ 네, 형님. 작년에 들어온 성대라는 놈입니다.” 다비드는 자신을 우러러보며 그의 시선을 받고 싶어 안달 나서 죽으려고 하는 부하 놈 따위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 군기가 빠졌네, 오는 즉시 숨통을 끊어버려.’ 라고 감정 없이 지껄였다. 숨통을 끊어놓는다? 낄낄- 사람이 모기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살기의 오로라를 마구마구 뿜어내는 놈에게 그런 말을 겁 대가리 없이 지껄일 만큼 나는 강심장이 되지 못했다. “ 이봐, 김 계진. 나갈까?” 김 계진. 김 계진. 김 계……. 어라? 어디서 들어본…!!!! 아! 드디어 생각났다. 전화 속의 그 남자다. 확실하다, 확실해. 낮은 저음의 굵은 목소리. 짜증에 들끓는 말투. 명령 투의 분위기. 나도 모르게 반쯤 일어나서 다비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러자 다비드보다 더 빨리 내 손가락을 본 삼 십 명의 검은 무리들이 ‘감히 네깟 놈이 우리형님에게 삿대질을! 당장 조져버리겠다.’ 하는 감정을 담아 눈알을 실룩였다. 나는 살며시 손을 내려놓고 극도로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어 자숙의 시간을 선보였다. 깍두기님들의 눈알이 차츰 고요해졌다. “ 저기요. 아까 전에 전화하셨던 분 맞으시지요?” 조폭 놈들이 다시 나를 정신없이 야렸다. 내 말투가 문제였나? 진짜 왜들 저러냐. 다비드가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생각보다 아주 돌대가리는 아닌가 보네.” 네 생각이 어땠는데? 응? 응? 말해보시지. “ 일어나. 나가자.” “ 예?” “ 그럼 여기에 계속 있을 생각인가? 집 없어?” “ 아니요. 집이 없다는 게 아니라……. ” “ 그러니까 일어나라고.” 왜 자꾸 일어나라는 걸까. 혹시 납치? 에이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해도 안 뜬 이 새벽에 자꾸 나가자는 뜻이 뭘까. 안 가면 안 되냐고 말하려고 하는데 컥컥대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렸다. 다비드가 심부름을 보냈던 그 놈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늘 숨통이 끊어질 놈. 놈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티가 몸 전체에서 솔솔 풍겼다. “ 형님!! 이 시간에 문이 다 닫아서 이것밖에 못 사왔습니다.” 놈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덜덜 떨며 내민 두 손엔 빵빵해서 터지기 일보직전의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다. 슈퍼하나를 휩쓸고 왔는지 삼각 김밥, 캔 커피, 컵라면, 우유, 소시지가 종류별로 들어가 있었다. 다비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에 들린 봉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숨통을 끊어놓을까 말까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뚱보 춘만이를 향해 눈짓을 해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근데 분위기가 어째! 그럼 진짠가!! 춘만은 무려 세 겹으로 뭉쳐진 목을 끄덕이며 누군가에게 고개를 턱짓을 했다. 사전계획 없이도 호흡이 척척 이다. 춘만의 뒤에, 뒤에 서 있던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볼품없이 마른 일본 앞잡이 같은 놈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 까닥 대며 간단하게 몸을 푼 뒤, 주머니를 뒤적여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앞잡이 놈은 눈을 반짝이며 불안하게 떠는 심부름 녀석 앞으로 쿵쾅쿵쾅 다가갔다. 다비드는 창가에 기대서 심판처럼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설마가 아니었어! 말려야 한다. 근데 내가 무슨 수로? 아니야!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김 계진이야! 나는 소중하니까요. 우선 다비드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부터 낚아챘다. 계산적인 ‘황홀한’ 표정을 옵션으로 지어주며 나는 손을 맞잡고 빙빙 몸을 흔들었다. “ 어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다 들어 있네.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대단하네요!!” 당연히 나 하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대충 눈치로 볼 때 심부름이 늦어져서 숨통을 끊는다, 어쩐다. 흉측스러운 말이 나오는 걸 봐선 먹힐 수도 있다. 아니 사실 반반이다. 반신반의한 마음에 급기야 나는 좀 더 오버를 하기에 이르렀다. “ 삼각 김밥!!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아! 좋아, 좋아. 너무 좋아!” “ …….” “ 이렇게 많은 삼각 김밥을 보다니 졸라 꿈만 같아요!” 나는 연소자 관람불가 표정을 지어보이며 포장된 김밥을 서른 명이 넘은 조폭들 앞에서 미친 듯이 먹어치웠다. 너무 급히 먹었는지 목구멍이 꽉 막혔다. 막힌 수챗구멍에서 나는 것처럼 꽥꽥 거리고 있을 쯤, 다비드는 아무 말 없이 사이다 캔을 따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진지하다 못해 아픔이 배어나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표정에 대해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아도 안 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얼마나 가난했으면 삼각 김밥이 제일 좋아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 그게 아니라……. ” “ 삼각 김밥에 꿈만 같다니. 정말 안타까운 녀석이군.” 그의 눈과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먹고 있던 게 다 올라올 뻔했다. 인마, 그게 아니라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다비드의 뇌 구조에 지긋한 염증을 느끼며 가슴을 팍팍 두드렸다. 그는 김밥 때문에 목이 막힌 게 아직도 안내려갔다고 판단하고 내 등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자기는 도와주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유도 없이 맞고 있는 표현이 옳다. 속으로 피 눈물을 삼켰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되나 싶었다. 그때 천만 다행스럽게도 삐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당연히 먼저 퇴근했을 거라 생각했던 녀석들이었다. 군밤껍질을 까서 경원이놈의 주둥이에 넣어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김 지만과 그 옆에 붙어서 대놓고 역겨운 표정을 만들어 내는 이 경원, 그런 그들을 보며 똥 씹은 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들어오는 권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건 같지만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문득 녀석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권솔과 김 지만의 얼굴에 순간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놀랐겠지. 암! 이해한다. 서른 명이 넘는 조폭무더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모습에 나도 처음엔 놀랐단다. “ 안녕하십니까.” 의외다. 아니, 이건 특종감이다! 김 지만의 머리가 다른 놈 앞에 구십 도로 꺾였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거 같지도 않다. 지만이 놈은 다비드를 향해 다시 한 번 구십 도로 인사를 한 뒤, 멀뚱히 서 있는 솔이 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녀석이 오만 인상을 쓰며 지만이 놈을 노려봤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 충분히 짜증을 내고 있으면서도 의외로 구십 도로 인사를 했다. 두 놈 사이에 껴서 멀뚱히 내 얼굴만 보고 있던 경원이 놈이 눈으로 다비드를 가리키며 ‘누구냐’ 고 묻는다. 녀석은 모르는가보다.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근데 정말 이 사람이 누구지……. 지만이 놈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분위기를 가르며 공손하게 말했다. “ 큰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던 권솔 놈이 역시나 마지못한 얼굴로 ‘오랜만입니다. 형님‘ 이라고 지껄이며 형님존칭쓰기 대열에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 오랜만이다.” 지만이 놈이 자신의 유일한 필살기, 웃고 있어도 진짜로 웃는 게 아니여. 표정을 지었다. “ 학교에서 나오셨단 말은 들었는데 미처 찾아뵙질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학교? 얼굴이 동안으론 보인다만 학교를 나올 나이는 아닌 거 같은데……. 설마 대학원생인가? 궁금해서 물어볼까 싶었지만 분위기만 망칠 것 같아 나름대로 침묵을 지켰다. 그 순간 경원이 놈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지는 게 보였다. 하얀 얼굴이 퍼렇게 질려 보이는 건 착각일까. 낡은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척 꼬아 앉으며 다비드가 권솔을 향해 물었다. “ 요새 일은 할 만하냐?” 그의 시선을 피하며 솔이 놈이 지만이 새끼를 쳐다봤지만 다비드의 얼굴은 여전히 솔이 놈에게 고정되어 떠날 줄 몰랐다. 지만이가 한숨을 쉬며 대신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다비드는 오른손을 까딱해서 지만이를 제지하고 권솔을 지목했다. 돌아가는 상황 보니 권솔이 직접 대답하라는 뉘앙스다. 지만이 놈은 조금 전보다 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권솔 귓가에 뭐라 속삭거렸다. 솔이 놈은 지만이 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힐끔 바라봤다. 녀석은 마지못한 티가 팍팍 묻어나는 얼굴로 부루퉁하게 말했다. “ 편하고 할 만 합니다.” 다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 돈은.” “ 좋습니다.” 그때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경원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만이 새끼 앞에 다가가 녀석의 뺨을 퍽 소리 나게 갈겨버린 것이다. 저 놈이 미쳤나. 심하게 꺾인 고개를 들고 상황을 다 파악도 하지 못한 지만이 놈이 얼빠진 얼굴로 이 경원을 보자 녀석은 ‘너에게 실망했어.’ 라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말을 씨불인 후 울먹이며 뛰쳐나갔다. 뭐지? 방금 뭐가 지나갔지? 멍해진 내 눈에 잔뜩 화가 난 솔 이놈과 경원이가 나가자마자 뒤따라 나가려는 지만의 얼굴이 들어왔다. “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지만이 놈이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원망으로 눈으로 바라봤다. 다비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 너도 권솔 닮아 가냐? 안 본 사이에 더럽게 버르장머리 없어졌다.” 지만이한테 저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데……. 그대로 박차고 뛰어 나갈 거라 예상했던 지만이놈이 기계처럼 오뚝하니 멈춰 섰다. 김 지만이 남의 말을 듣는다니! 정말 경기 일으킬 만한 일들이 빵빵 터지는구나. 지금 그 놀라운 일들이 다비드의 말 한마디에 계속해서 일어났다. “ 내일부터 이 녀석이랑 네 애인도 가게로 데리고 나와.” 슬쩍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보자 그도 나를 보고 있었는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눈빛이 굉장히 차갑다. 조금 전 삼각 김밥 운운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녀석들이 사무실에 오기 전까지 보여줬던 장난스런 얼굴이 아니다. 같은 사람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멜레온 같은 놈. 다비드의 명령조의 목소리에 폭발하기 일보직전의 솔이 놈이 눈알을 부라렸다. 이 녀석 화났나? 화나기 시작하면 눈앞에 보이는 건 무조건 닥치는 대로 갈아엎어야 분이 풀리는 녀석인데 이놈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의외로 참고 있었다. 왜 참고 있을까? 지만이 놈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다비드 앞에서는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 왜 그래야 됩니까.” 권솔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변했다. 일본 앞잡이 놈이 솔이 놈 앞에 다가가며 격앙된 목소리로 성을 냈다. “ 너 이 새끼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 그러나 다비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 앉아라. 쭉정이.” 쭉정이? 그러고 보니 쭉정이처럼 생긴 거 같기도 했다. 일본 앞잡이 놈이 다비드의 말씀을 차마 거역하진 못하고 솔과 지만이를 노려보는 걸 자신을 울분을 대처하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 권솔. 내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마.” “ …….” “ 죽고 싶지 않으면.” 다비드의 말에 지만이 놈이 흠칫 몸을 떨었다. 솔이 놈은 여전히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면서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 쓸데없이 머리 쓰게 하지 말고 내일부터 가게로 나와.” 다비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특별히 강압적인 구석은 없었지만 희한하게 어떤 말이든 명령적으로 들렸다. 뭐랄까. 남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표현에 있어 설득하기 보다는 지시를 내리는 쪽에 굉장히 길들여졌다고나 할까. 지만이 놈과 솔이 녀석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비드가 두 녀석을 살펴보며 감정 없이 단조롭게 말했다. " 몸을 움직여서 꼭 직접적으로 보여줘야 알아먹겠냐? 한두 살 먹은 어린애들도 아니고." 두 놈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다비드는 턱에 손등을 바치고 살며시 머리를 기울였다. 그는 이런 상황이 대단히 귀찮고 지루한 모양이었다. “ 알아들었으면 대답이나 좀 해라.” 지만이 놈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형님’ 이라고 읊조렸다. 솔이 놈 역시 마지못해 개미허리만한 목소리로 ‘네.’ 라고 지만이 놈 따라 대답했다. 그들을 아무 말 없이 보던 다비드는 피곤하단 얼굴로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헐렁하게 풀며 ‘나가서, 애인 잘 달래줘라.’ 라는 말을 끝으로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넌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라는 눈빛으로 솔이 녀석이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 나가자”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어엉’ 하고 대답하며 경원이 놈이 열어둔 문 앞으로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고 했다. “ 넌 남아.” 솔아. 너 남으래. 그렇게 뻐기더니 얻어터지는 거 아닌가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친구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몸약하고 놀림거리나 되는 내가 대신 맞아 줄 수는 없는 법. 상황이 안타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석한 생각에 심심치 않게 위로의 표정을 지으며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두 발자국 정도 걷자 휙 하고 팔을 억세게 낚아채며 제지하는 녀석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솔이 자식이 내 귀에 대고 씨불였다. “ 너 미쳤냐!” 귀에 왜 바람은 넣고 지랄이야! 인-마. 놈은 반성은커녕 끝끝내 어이없단 얼굴을 지우지 않고 내 목덜미를 복날 개잡듯이 잡아채서는 ‘별명이 미친개다. 물리지 않게 조심해라’ 라는 비빔밥의 썩은 콩나물 같은 말을 지껄인 후 채 내가 대꾸도 하기 전에 쿵쾅 거리며 나가 버렸다. 미친놈이다. 형님이 남으라고 했는데 왜 멋대로 나가고 지랄이야. 저게 진짜 미쳤나? 근데 뒤통수가 욱신거리는 오로라는 또 뭐야……. 불안한 마음에 슬쩍 뒤를 돌아봤다. 열 받았는지 당황했는지 조금 전 장난스런 표정으로 돌아온 다비드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자식아 너는 또 뭘 꼴아봐!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인생의 미로. 담임이 주구장창 외치던 미로라는 건 출발점이 중요하다. 사실 미로의 출구는 의외로 사소한 곳에 나타난다. 그 의외의 사소함 때문에 사람들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허나 막상 출발점을 찾고 한 발자국 내딛었을 땐 모른다. 인생이란 내가 직접 선택하지 않은 방향대로 누군가에 의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 갈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 오늘은 이만 해산.” 다비드는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젓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른 명이나 되던 조폭님들이 벌떡 일어나 흡사 체조와 같은 구십도 인사를 선보이며 ‘내일 뵙겠습니다, 형님.’ 이라고 말한 뒤 사무실을 뛰어 나가버렸다. ……두 명만 빼고. 왜 진작 못 봤을까. 아무리 개성시대라고 하지만 저건 아니었다. 저 정도면 풍기문란에 범죄행위다. 다비드를 보좌하고 서있는 두 놈 중에 오른쪽에 있는 깍두기님은 유독 한라산 만 한 덩치로 시선을 끌었다. 타고난 신체사이즈부터 주먹 쓰는 직업을 위해 태어났을 것 같은 그는 철사머리띠로 앞머리를 넘기고 뒷머리는 대걸레 자루에서 몇 가닥 빼온 두꺼운 실로 정체불명의 레게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 꼬락서니만 봐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허나 여기서 더 괴기스러운 건 전혀 어울리지 않게 큰 옥동색의 링 귀걸이, 점입가경으로 고목나무에 매미가 달라붙은 것 같은 모양세의 코에 붙은 피어싱. 호러영화가 따로 없었다. 보고만 있어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 도끼야. 지금 몇 시냐?” 고개만 까딱하면 머리위에 시계가 보일 텐데도 다비드는 떡대놈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니까 저 거지같은 레게머리가 도끼라는 거군. 우리나라에 있는 조폭만 해도 꼭 ‘도끼’와 ‘쌍칼’이란 이름은 빠지지 않으니 몇 천 명은 되지 않을까, 싶어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 “ 인상 풀어라.” 사뭇 진지해진 다비드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선인장을 액날로 씹어 먹어도 나는 절대 따라 갈수조차 없을 것 같은 얼굴을 보며 차마 ‘너나 펴’ 라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 그럼 저 사람은 쌍칼인가요? 흐흐흐 ” “ 뭐?” “ 도끼, 쌍칼. 아주 탁이네, 탁이야. 진짜 영화 같잖아. 흐-흐흐.” 다비드의 눈썹이 움찔움찔 춤을 춘다. 나와 다비드를 번갈아 보고 있던 레게머리 떡대에 비해 심각하게 마르다 못해, 딱 체중도 반만 나갈 것 같이 홀쭉한 놈이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놀라움과 경악스러움에 커진 눈. 그래도 얼굴은 네가 도끼보다 간발의 차이로 조금 낫구나. 내가 외모로 누군가를 평가할 입장은 아니다만 살쾡이처럼 생긴 얼굴이 영 꺼림칙한 외모였다. 그러나 한라산만한 덩치 놈이 외모로는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향 후 조폭 계에 몇 년 간은 도끼 놈을 따라 올 자는 쉽게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갑자기 살쾡이가 머쓱하게 웃으며 탁탁 박수를 쳤다. ……쟤는 왜 저러냐. “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처음본 사람 이름을 그렇게 쉽게 맞출 수 있으십니까!” 이건 또 뭐지. “ 그럼. 설마 진짜 이름이 쌍칼?” “ 네, 습니다. 본명이 오 쌍칼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총각 때 정육점을 하셔서 칼잡이로 유명했거든요.” 헉! 며달 굶은 인간처럼 홀쭉한 놈이 눈을 반짝였다. 그는 멍해있는 내게 구십 도를 넘어 신고 있는 백구두에 대가리가 닿을 정도로 인사를 했다. “ 정말 대단 하십니다.” ……뭐야. 예명도 아니고 진짜이름이 쌍칼이라고? 설마. 아니지. 방금 그랬잖아. 진짜 신기한 일이네. 떡대놈과 홀쭉이 놈의 감탄해 마지않는 부담스러운 눈빛은 그렇다 쳐도 다비드는 나를 은근한 눈길로 바라보며 ‘역시, 대단하군.’ 이라는 돼먹지 않은 칭찬을 해주었다. 상황은 참 뭐 같았지만 나는 이때다 싶어 나름대로 용기를 내보기로 결심했다. 슬슬 잠도 오고, 계속 서 있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빨리 씻고 싶고, 뜨끈한 아랫목에서 잠도 자고 싶고. 아, 연탄 떨어졌지……. “ 저기요. 형님.” 권솔도 아니고 김 지만도 아니고 더군다나 깍두기도 아니지만 돌아가는 상황과 눈치코치발치로 봐서 ‘형님’ 이란 호칭을 안 붙이면 산 매장 당할 분위기인지라 나는 일단 그렇게 불렀다. 근데 이 심각해진 분위기는 또 뭐야. 처음 본 놈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싫은가? 그럼…… “ 저기요. 짱.” 솔직히 ‘짱, 짱’ 거릴 나이는 아니었다. 허나 형님이란 단어가 조금 늙어 보여 나름대로 다비드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짱이라고 불러본 것이다. 그러나 다비드의 인상은 더 짙어질 뿐이었다. 짱이 싫다면 그럼 혹시 이런 표현은 어떨까. “ 저기요. 보스.” “ …….” “ 저기요. 캡틴.” 젠장! 영어가 안 통한다. 저 사람 애국자? 다비드의 인상이 급속도로 더러워졌다. 그럼 우리말로 해보자. 나는 얍삽하게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 저기요. 두목.” “ …….” “ 저기요. 대장.” 뭐, 뭐지. 너무 강력해. 도대체가 통하지가 않아! 나보라고 뭘 어쩌라는 거야! 마지막이다. 이것만 해보고 안 되면 그냥 토끼자. “ 저기요. 대가리!” 왜 다들 그러지 않나. 싸움 잘하는 놈들을 일컬어 모모 학교의 대가리. 나는 순수하게 그런 차원으로 ‘대가리’란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이다. 허나 다비드의 등 뒤에 서있는 쌍칼과 도끼 놈의 표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눈에 ‘어떻게 형님에게 그런 말을’ 또는 ‘감히 우리형님께 대가리라니!! 네 대가리를 당장 없어버리겠다.’ 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빨리 사과를 해서 잘못했음을 시인하자. 그 방법밖에 없다. “ 죄송해요.” 다비드의 눈 꼬리가 신경질적으로 올라갔다. 매섭다 못해 날 찢어죽일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병신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다비드가 거센 힘으로 내 머리통을 한손으로 휘어 감더니 ‘내가 이름 가르쳐 줬잖아.’ 라고 지껄여댔다. 복희씨. 이 복희씨. 그래. 네가 이름을 가르쳐 주긴 했지. 분위기가 분위기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급격한 이미지 관리에 들어갔다. “ 혀…엉님. 이름은 왜요?” 딱 잘라 형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지 관리 때문에 ‘혀-엉님’하고 코맹맹이소리를 냈다. 어느 정도의 만족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내 비음 섞인 목소리에 쌍칼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눈을 감아 버렸고 도끼는 무언가를 간절히 갈망하는 얼굴로 두 손을 모아 가슴에 가져다댔다. 뭐냐, 쟤네들. 흥! 꺼져라 조무래기들은! “ 목구멍에 가래 꼈냐?” 다비드의 음산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내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갑자기 내 목을 손바닥으로 감싸더니 앞뒤로 짤-짤짤 흔들어대며 ‘뱉어, 가래! 배고파도 그런 건 먹지 마.’ 따위의 개소리를 지껄였다. 놈의 팔 힘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중심을 못 잡은 몸뚱이가 저절로 휘청거렸다. 흐물흐물 거리는 내 몸을 확인한 다비드가 그제야 목에서 손을 걷어 들였다. “ 복희씨.” “ 네.” 잘 모르겠지만 우선 살고 봐야겠다. 지금은 ‘네’라는 말로 묻어가자. 다비드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는 전혀 덮어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내 말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뭐가 네냐?’ 라고 대꾸를 했으니. “ 형님 이름이 복희씨라고요.” “ …….” 그가 의외로 조용하기에 아차 싶었다. 그래서 급 조정에 들어갔다. “ 죄송해요, 성함이요.” “ 형님 자는 빼고.” “ 네. 형님 자는 빼……예?” “ 형님 자는 빼고 앞으로 그렇게 부르라고. 이 멍청한 놈아.” 내가 네 하수인도 아니고 막말로 권솔이나 김 지만이 놈들처럼 주먹을 써서 네 얼굴을 계속 볼 것도 아닌데 내가 널 이제부터 왜 그렇게 불러야 되는 거냐! 응? 응? 이 심하게 잘생긴 놈아. 물론 생각은 이랬다. 그러나 행동은 달랐다. 내 입은 주인의 생각을 전혀 무시하며 알아서 지껄이고 있었다. “ 네. 좋습니다! 복희씨.” “ 응 ” “ 네, 네. 복희씨.” 부르라고 불렀는데 다비드 놈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가 내 이마를 검지로 쿡 밀며 입을 열었다. “ 야.” “ 네? 복희씨.” “ 너무 복희씨, 복희씨 하지 마. 애들 장난 같잖아!” 이랬다저랬다 지랄이야. “ 네, 죄송해요.” “ 오냐.” 다비드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볼에 살며시 보조개가 들어갔다. 중학교 때까지 내가 미친 듯이 만들고 싶어서 볼펜 뒷구멍으로 볼따구니를 후비고 지랄발광을 해도 만들어지지 않던 그 전설적인 환상의 이중 보조개가 내 볼이 아닌 타인의 볼에 떡하니 붙어 있었다. 잘생긴 놈들은 끝까지 잘 생겼구나. 웃는 모습이 가히 살인적이다, 복희씨.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배 창자안쪽이 슬슬 아파왔다. 사돈에 팔촌이 땅을 사도 배창자가 꼴린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 저 복희씨. 그럼 전 이만 집에 가면 안 되겠습니까.” 다비드 이 복희씨의 웃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구겨진다. “ 그 말은 나랑 있는 게 너무 싫어서 지금 당장 집으로 가버리겠다 뭐 그런 뜻이냐?” 나는 붕붕 팔을 저었다. “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다만 너무 잠이 와서요.” 복희씨로 불리고 싶어 하는 다비드가 집요한 눈으로 나를 훑어본다. 그 눈빛에 괜히 주눅이 들어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 새싹아.” 응? 새싹이? 새싹이가 누구지? 다비드의 등 뒤에서 나 못지않게 그의 표정변화를 아슬아슬하게 살피고 있던 떡대놈이 프라이팬에 콩 볶아 먹는 것보다 더 빨리 ‘네, 형님’ 이라고 지껄이며 다가왔다. 이게 뭐야. 네가 새싹이? 도끼는 예칭, 새싹인 본명? 참, 넌 참으로 생긴 거랑 완전 다른 이름을 가졌구나. 새싹아. “ 오늘 운전은 네가 해라.” “ 네, 형님.” 이 복희씨가 내 팔을 쭉 잡아당겼다. 그는 나를 질질 끌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 가자.” “ 어디를요?” “ 집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집에 데려다 주려는 건가. 생각보다 나쁜 놈은 아니었군. 집이란 단어에 사람의 인상이 달라져 보인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이 복희씨를 가벼운 마음으로 졸졸 쫒아갔다. 새싹이 놈이 이 복희씨를 돌아보며 물었다. “ 형님. 추우십니까? 히터 좀 틀까요?” 새싹은 룸미러를 통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능글능글 웃어보였다.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어색하게 따라 웃자 놈은 살며시 이를 드러내 보이는 과감함까지 보였다. 히죽 웃는 대로 입술에 위에 매달려있는 피어싱이 실룩였다. “ 히터는 무슨 놈에 히터. 너희 집 잘 사냐?” 복희씨는 그렇게 말하다말고 깜빡 잊고 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보고 물었다. “ 추워?” “ 아니요. 안 추워요.” “ 안 춥다고?” “ 네. 제가 추위를 잘 안타는 체질이거든요.” “ 그나마 봐줄만한 구석이 있긴 있네.”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복희씨가 휘황찬란한 레게머리로 요란스러움을 넘어 무서움까지 선사해주는 새싹의 머리통을 억세게 휘어잡았다. “ 히터 꺼.”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는 회색빛이 도는 자신의 긴 코트단추를 꼼꼼히 여민 후 안에 입은 와이셔츠 깃을 날카롭게 세워 목을 감쌌다. 딱 보니 복희씨는 추운모양이었다. 근데 왜 히터를 끄라고 했을까. 궁금해서 물어보려 그에게 조금 바짝 다가가 않는데 다비드씨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요새 놈들은 아낄 줄을 몰라.” 역시 신은 공평하다고 했다. 저렇게 잘생긴 놈이 속은 밴댕이 같은 구두쇠일줄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물론 절대 겉으론 표현 못했다. 새벽의 어스름한 푸름 들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서리가 하얗게 낀 창문을 손가락 끝으로 쓰윽 하고 문지르자 금세 물방울이 되어 툭툭하고 떨어진다. “ 창밖에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냐.”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와 중얼거리는 이 복희씨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 새싹아.” “ 네, 형님. 말씀하십시오.” “ 신호등 반대편에 있는 육교 밑으로 차 좀 돌려라.” “ 네, 알겠습니다.” 복희씨의 명령에 새싹이 부드럽게 커브를 돌렸다. 비싼 차는 단순한 커브 길에도 부드러움의 강도가 여느 차와 월등히 차이가 났다. 끽 소리하나 안 난다. 블록 위를 넘는데도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기만 하다. 이 부르주아의 안락한 냄새. 부자인가. 어느새 차는 육교 앞에 도착했다. 노련한 운전솜씨를 뽐내던 새싹이 ‘형님, 다 왔습니다.’ 라고 씨불였다. “ 가서 붕어빵 좀 사와.” 붕어빵은 왜? 배고픈가. “ 형님, 출출하십니까?”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느낀 오 쌍칼이 고개를 반쯤 돌린 채 뒤 복희씨를 향해 물었다. 다비드의 길고 잘생긴 눈썹이 깊게 감겨 있었다. “ 잔말 말고 가서 사오기나 해.” “ 얼마나 사올까요.” “ 많이.” 복희씨가 조금 짜증을 내자 새싹의 거대한 몸이 창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조폭들의 마스트코트인 위계질서는 허무맹랑한 소문만이 아니었다. 입에 풀칠을 했는지 벙어리 마냥 아무 말이 없는 복희씨와 쌍칼. 눈치만 살피고 있는 나. 우리는 침묵했다. 그렇게 침묵 속에 적어도 10분쯤 지났을 때, 양손 가득 검은 봉지 꾸러미를 들고 새싹이 나타났다. “ 장사가 끝나가는 시간이라 반죽이 떨어져서 이거 밖에 못 사왔습니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어 복희씨한테 거대한 검은 봉지 두 개를 공손히 내밀었다. 봉지를 내려다보던 복희씨가 달랑 한마디 뱉어냈다. “ 받아라.” 나는 얼떨결에 새싹에게서 봉지를 건네받았다. 품 안에 붕어빵 봉지 두개를 들고 있자니 스멀스멀 향긋한 냄새가 콧구멍을 간질이기 시작한다. “ 갑자기 붕어빵은 왜요? 드시고 싶으면 드세요.” “ 내가? 네가 먹고 싶어 했잖아.” “ 저 그런 적 없는데.” 이 복희씨가 한심하단 눈빛으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애써 거짓말 할 필요 없다. 빨리 먹기나 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복희씨의 눈빛이 갑자기 구슬프게 바뀌었다. “ 먹고 싶으면 말을 해라. 내가 신도 아니고 네 속마음까진 일일이 알 수는 없는 거다.” “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복희씨가 코웃음을 쳤다. “ 그렇게 슬픈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붕어빵을 가리킬 필요는 없단 말이다.” 미치겠다, 진짜. 네 눈엔 내가 배고파서 창문을 가리켰단 말이냐? 하물며 내가 붕어빵하나 못 사먹을 정도로 가난해 보인다 이거네? 복희씨 말에 한술 더 떠서 눈에 띄게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새싹이놈이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 그런 겁니까.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이것들이 단체로 개그 하네. “ 그런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사오는 건데요. 너무 적진 않습니까?” 내가 알아주는 대식가라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대꾸할 가치도 없기에 아무 말 안하고 있는데 은근히 내 대답을 기다렸는지 복희씨가 말했다. “ 진짜 적은가 보군.” “ 제가 미처 파악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새싹이 넌 내일 일 끝나고 나 좀 따로 만나자.” ……라는 말로 다비드는 새싹이 적어도 내게 수십 번은 ‘죄송합니다.’ 소리를 하게 만들었다. 새싹의 부담스런 얼굴이 자꾸 내 쪽을 보는 것도 지겹고 해서 나는 주섬주섬 검은 봉지 안을 뒤적여 붕어빵을 몇 개 꺼냈다. 대가리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붕어 속에 가장 탄 붕어 한 마리를 꺼내 이 복희씨의 코앞에 달랑달랑 흔들었다. “ 자, 드셔보세요.” 그의 눈썹이 두어 번 꿈틀댔다. 마음에 안 들거나 짜증나거나 아니면 어이없을 때 지어지는 이 복희씨만의 버릇인 싶다. 그는 붕어빵을 들고 있는 내 손을 말없이 노려봤다. 이번엔 또 무슨 이유에서 인지 자기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 너 나 많이 처먹어.” “ 왜요. 이거 보기보다 맛있어요. 그러지 말고 자자, 드셔보세요.” “ 안 먹는다니까.” 이 경원의 말대로라면 거동이 불편한 중환자들도 불끈 주먹을 들어 올리게끔 만들기에 충분한 나만의 살인미소를 복희씨에게 지어보였다. “ 한 번도 안 먹어봤어요?” “ ……” 복희씨가 아무 말이 없다. 눈썹이 더욱더 심하게 구겨지는 걸로 봐선 그렇다는 의미일 것이다. “ 먹어봐요. 자, 입 벌리시고.” 주둥이에 붕어꼬리를 슬쩍 밀어 넣자, 이 복희씨가 ‘안 먹는다고.’ 라고 화를 내며 내 손을 팍 하고 밀쳐버렸다. 휙 하고 꺾인 팔 때문에 들고 있던 초라한 붕어빵의 꼬리가 뚝 하고 갈라지며 비싼 차 바닥에 톡 떨어졌다. 말로 하면 되지 왜 아깝게 밀고 지랄이야. 누가 주먹 쓰는 놈 아니랄까봐 난폭하게 굴긴. 열 받아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도끼와 쌍칼의 뒤통수, 이 복희씨의 직업들로 하여금 내가 얌전히 입 닥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인형 안 사준다고 토라진 여자애처럼 팩하고 토라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존심 상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 밖에 없었다. “ 비려 보이잖아.” “ 그게 무슨 말이에요?” 궁금한 놈이 손해다. 내 물음에 복희씨의 얼굴이 기상천외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난 그래도 잘생긴 놈이야 하는 포즈로 팔짱을 꼈다. “ 붕어빵은 조금 비리게 생겼다고.” 설마……. “ 붕어빵에 붕어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 너 나 지금 놀 리냐? 붕어빵에 무슨 붕어냐.” “ 그럼 뭐가 비리게 생겼다는 겁니까.” “ 나는 태어날 때부터 회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다. 붕어빵도 붕어를 닮아서 못 먹는다.” 정말이지 삼가고인의 명복을 빌어주고 싶었다. 어이가 없어서 아예 대꾸할 필요성을 상실했다. 먹기 싫으면 말아라. 나는 붕어빵 봉지를 열고 바삭바삭 구워진 붕어들을 입 속에 열심히 몰아넣었다. 예상대로 다비드께서는 자신의 말이 씹혔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어느새 목소리가 짜증 투로 바뀌어져 있었다. “ 새싹아.” ” 네, 형님. “ “ 너도 오늘은 이만 퇴근해라.” “ 형님. 설마 여기 서요?” 새싹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룸미러에 비친 이 복희씨를 열심히 살폈다. “ 형님. 댁 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복희씨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 됐다. 빨리 들어가서 쉬어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해도 안 떴다. 사방에 어둠이 깔린 채 육식동물들이 판을 칠거 같은 이 도로는 과연 어디란 말인가. 동물의 왕국이나 찍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이런 곳에 산다는 건가, 저 놈은. 산 도둑놈처럼 생겨서 이런 곳에 살아도 전혀 무방하겠지만 전봇대 하나 보이지 않는 산길엔 집한 채 보이지 않았다. “ 내일보자.” 복희씨의 말에 새싹의 얼굴이 썩은 무를 씹은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진짜 여기에 사나? 현재로서 눈에 보이는 건 어둠과 시야를 가리는 뿌연 안개가 전부였다. “ 알겠습니다, 형님. 내일 뵙겠습니다.” 새싹은 그렇게 말 한 뒤, 축 쳐지고 두껍다 못해 바짓단 하나는 쉽게 잡아먹을 것 같은 허벅지를 일으켜 차에서 내렸다. 새싹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쌍칼이 자리를 옮겨 운전대를 잡았다. 그 후 차는 새싹을 지나쳐 쌩하니 출발했다. 쌍칼이 운전하고 한 30분쯤 왔나. 열심히 운전을 하던 그에게 이 복희씨가 새싹이놈에게 했던 것처럼 ‘너도 이만 퇴근해라.’ 라고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쌍칼의 얼굴이 180도로 굳어졌다. 놈은 반쯤 혼이 나가서 ‘형님, 내일 뵙겠습니다.’ 라고 중얼거린 후 차에서 내렸다. “ 저 그럼 운전은 누가 해요? 제가 아직 면허증이 없어서요.” 그 나이 먹도록 면허증도 안 따고 뭐했냐는 말이 나올까봐 의기소침해졌다. “ 내가.” 복희씨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차문을 열고 반대편으로 돌아 내 문까지 열었다. 뭐하는가 싶어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가 ‘조수석에 타’ 라고 말했다. 그는 순식간에 쌍칼과 새싹을 퇴근 시키고 본인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겸연쩍은 얼굴로 내가 조수석에 앉자마자 이 복희씨는 차를 출발시켰다. ……침묵. 바람소리 외엔 무겁디무거운 침묵만이 이어졌다. 어색해도 보통어색한 게 아니다. 그로부터 또 몇 분이 흘러갔다. 참다못한 나는 무뚝뚝하게 운전만 하는 이 복희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아까 그 사람들 집이 다 그 근처인가 봐요?” 이 복희씨가 묵묵히 앞만 보며 대답했다. “ 아니.” “ 아니에요? 그럼 왜 거기서 내리라고 했어요?” “ 재밌잖아.” 참으로 몰상식한 놈이다. 가만히 있어도 동물들이 뛰쳐나올 거 같은 도로에 부하들을 덩그러니 세워놓고 오다니. 하물며 두 사람 모두 한 곳에 내려줬으면 같이 걸어올 때 덜 무섭고 덜 외로울 텐데 저 인간은 그걸 알고 일부러 따로, 따로 떨어뜨려 놓은 것이 분명했다. 딱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데 귓가에 ‘ 권솔의 집을 아니까, 넌 걱정하지 마.’ 라는 나름 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저 사람 내가 솔이랑 같이 사는 걸 어떻게 알았지? 뭐, 아는 게 대수냐. 집에 데려다 준다는데. 잠을 못 잤더니 눈알이 빠져버릴 것처럼 쓰라려 온다. 욱신거리는 눈꺼풀을 주물럭거리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창문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스멀스멀. 꼬물꼬물.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거 같은 이 이질적인 기분의 원인은 무엇일까. 본능적으로 눈이 벌컥 떠졌다. 힘차게 달리던 차는 어느새 멈춰져 있었다. 주위를 휙휙 둘러봤더니 눈에 익은 장소다. 우리 동네였다. 다행이구나. 집을 알고 있다는 말은 최소한 구라가 아니었다. 그건 그거고 이 등골이 아연하게 질려오는 기운은 뭐지. 아! 시발. “ 으, 으윽!” 내 후줄근한 남방은 이미 저 멀리 뒷좌석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강한 힘으로 내 젖꼭지가 누군가에게 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변태 같은 놈을 보았나.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주먹질 하나 못한다지만 남자한테 성폭행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내자식이 되어서 젖꼭지 관리 하나 못하고 이게 무슨 개망신 이란 말인가. “ 이 복희씨!” 납작하게 달라붙어서 빨 것도 없는 내 젖꼭지를 애기가 엄마모유 먹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것처럼 물고 빨고 깨물고 지랄을 했는지 벌겋다 못해 파랗게 변해 꽁꽁 얼어붙은 유두가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한손으론 내 허리를 다른 손은 내 은밀한 그곳을 사정없이 주물럭대는 이 자식!!! 나는 그의 머리통을 내려칠 기세로 급하게 손을 들었으나 대가리 정수리 쪽에도 눈이 붙었는지 놈이 내손을 너무도 가볍게 낚아채서는 간단하게 한번 돌려 말아 쥐었다. “ 역시.” 이 변태 놈 이 뭐가 역시라는 거야. “ 우유 같은 건 없었어. 넌 참 젖소처럼 생겼는데 좀 아쉽네.”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놈을 팍 밀쳐내고 잽싸게 뒷좌석으로 넘어가 지만이놈이 내 생일 때 용달차에서 사준 이천오백 원짜리 남방을 반쯤 정신이 나가서 꿰차 입고 단추를 꼼꼼하게 여몄다. “ 이게 무슨 짓이죠? 내가 그렇게 쉬워보였나요?"?" 정신이 없어 우선 악부터 질러야겠다는 생각으로 되는 대로 지껄였더니 영 소녀 같은 발언이 아닐 수 없구나, 젠장. “ 내가 안 일어났으면 어쩔 뻔 했죠? 대답해! 어쩔 뻔 했냐고!”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 이 복희씨! 이 강간범!” 혼자서 자책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날 보고도 말 한마디 없던 이 복희씨가 태연한 얼굴로 소매 단추를 잠그며 뚱하게 말했다. “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뭘 보고 강간범이래.” 그건 그렇지만. 어쨌건 내가 안 일어났으면 그랬을 거 아니냐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로 들렸지만 이대로 질수 없다는 일념 하에 나는 더욱더 목청을 가다듬고 악을 썼다. “ 내가 안 일어났으면 그랬을 테지요!” 내 말에 이 복희씨가 너무 쉽게 인정했다. “ 그건 그러네.” “ 우리 권솔한테 다 일러줄 거야! 씹!” “ 뭐? 십?” “ 십 말고 씹!!” “ 나한테 감히 욕을 하다니 넌 인생 길게 살고 싶은 욕심은 없나봐.” 미친놈, 끝까지 잘난 척은. 변태 같은 놈과 한시도 한 차에 같이 있고 싶지 않다. “ 저는 이만 내리겠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으, 윽!” 나는 이 복희씨의 대답 따위는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는 운전석에 있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상태라 뭐 그다지 잡으려고 할 거 같지도 않지만 만약 잡는 다해도 도망만 제대로 가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큰 오산이었다. 손잡이에 손을 뻗기가 무섭게 복희씨가 몸을 돌려 거대한 주먹으로 내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성희롱에 이젠 구타까지. 졸라 안구에 쓰나미였다. 내가 왜 저딴 범죄자 새끼한테 맞아야 할까. 힘없이 내 자신이 못내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물론 서글퍼지기만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다. 나는 대성통곡을 하며 울어댔다. 원래부터 눈물이 많은 놈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졸라 쪽팔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눈물에 이 복희씨의 악마 같은 눈이 약간은 죄책감이 떠올랐다. 그래도 양심은 있긴 있는 모양이었지. “ 어-어엉엉. 씨발놈이 나 죽이네! 나 죽는다! 나 죽어.” 이 복희씨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했다. “ 뭐?” “ 미친놈. 지 멋대로 젖꼭지 빨고. 이젠 때리고!! 엉-어엉.” 이 복희씨가 팔짱을 끼고 입으로 ‘끙’ 소리를 냈다. “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힌 새끼네.” “ 왜 네가 귀가 막혀? 난 그럼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힌다!” 이 복희씨의 눈빛이 갑자기 야릇하게 변했다. “ 어느 구멍?” “ 그냥 구멍 다!” “ 은근히 야한 새끼, 저거.” 내가 야해? 뭐가 야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식을 들통 내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놓고 물어보고 싶지 않다. “ 더럽다. 콧물이나 좀 닦아라.” 이 복희씨가 자기 딴에는 친절한 척 폼을 잡으며 티슈 두 장을 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놈의 손과 닿고 싶지도 않았기에 휙 하고 낚아채서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 나는 것과 같은 굉음소리를 입으로 내며 ‘흥-흥흥’ 코를 풀어댔다. 질척하게 많이도 나왔다. 흥건하게 젖은 티슈뭉치를 다시 놈에게 건네자 복희씨의 이마에 손톱자국의 주름과 함께 눈썹이 갈매기 모양으로 구부려졌다. 그래도 자기가 한 짓이 있어서 인지 마지못한 얼굴이지만 휴지 끝을 집어 들어 검은 봉지 안에 집어넣는다. 어라? 거기 붕어빵 남았는데. 씹. 집에 갈 때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저놈이 끝까지 나를 도와주지 않는구나. 다시 울려고 폼을 잡고 엉엉 소리에 엉-까지 하고 있는데 복희씨의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 날 자세히 본 소감이 어떠냐.” 무슨 말이냐고 꽥 악이라도 써주려 입을 여는데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 뭐 잘생겼다, 조각 같다, 황홀하다. 그런 너무나 당연한 말은 하지 말고.” 뭐냐. 왕자 병을 넘어선 이 염병할 놈의 황제 병은. 그 후 빠른 속도로 이 복희씨의 심문조사가 계속되었다. “ 사귀는 사람은” “ 없는데요.” 순간 이 복희씨가 너무나 당연한 걸 물어서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 권솔하고는 무슨 사이냐.” “ 친구요.” “ 그럼 김 지만이랑도 친구겠다?” “ 네.” “ 그럼 너도 주먹 꽤나 쓰겠네?” 그랬으면 오죽 좋았겠냐. 내가 권솔 반만큼만 주먹질을 했으면 이 경원의 거지같은 잔소리받이 인생으로 전락하진 않을 것이다. “ 아니요. 그리고 제가 권솔만큼 주먹질을 했으면 당신한테 내 젖꼭지를 그렇게 쉽게 내줬을 거 같아요? “ 다시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주인 잘못 만난 내 젖꼭지. “ 잘됐네. 걔네들은 무턱대고 너무 드세. 사람은 조금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지.” “ 그러세요. 그럼 빨리 나긋나긋한 분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재빨리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다시금 이 복희씨의 매서운 주먹이 내 목덜미를 직방으로 후려갈겼다. 퍽 소리도 아니고 뻑 소리가 났다. 빈 수레가 요란하단 말처럼 소리만 컸지 처음엔 별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뼈에 감각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까. 왜 이렇게 안 아프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섭게 서서히 뼈가 욱신거리더니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 넌 왜 매를 버는 거냐.” 붕어빵으로 채운 속이 울렁울렁 댔다. 윙하고 머릿골에 적신호가 켜지며 잠재된 깊숙한 곳에 축적된 음식물이 쏟아져 나오려고 하는데 나의 심각한 몸 상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 복희씨는 자기 할 말만 느긋하게 해댔다. 우-욱. 참으려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젠 더는 못 참겠다. 우선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 지금만 굽히고 들어가자. “ 이 복희씨. 차 문 열어-주-세요.” “ 왜. 도망가려고?” 역시나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그게 아니고 네 주먹에 두 대 맞았다고 토할 거 같단 말이다, 나 지금! 생각 같아선 그렇게 또박또박 말해주고 싶었으나 속에서 급격하게 박차고 올라오는 거북스런 느낌 때문에 애절한 목소리로 ‘차…제발, 문….’ 까지 말했다. 그 후, 놈은 긴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싫어’ 라고 지껄인 후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지 잔뜩 싱글벙글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나는 그런 이 복희씨의 눈을 보며…… “ 우-욱!” 순간을 못 참고 그의 비싼 차에 오바이트를 하고 말았다. 어제하루동안 뭘 먹었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복희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변명이라고 하고 싶었으나 눈치 없는 속에선 다시 한 번 ‘욱’ 하는 소리를 동반한 채 빠져나가지 못한 음식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복희씨는 성난 발걸음으로 씩씩대며 나가버렸다. 나도 뒤따라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달칵-달칵. 이 복희씨가 한 것처럼 손잡이를 열었는데 근데 이 망할 놈이 기계주제에 사람을 가리는지 도통 문을 열리지가 않았다. 나는 독안에 든 쥐처럼 순식간에 오바이트로 얼룩진 차 안에 갇혀 버렸다. 냄새는 올라오고 완전 죽을 맛이었다. 5분이 흘렀다. 이 복희씨는 정녕 나를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그럼 난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걸까. 병신처럼 문 하나를 못 열고 이 새벽에 삽질중이라니. 내 자신이 치욕스럽기까지 하다. “ 뭐해. 나와.” 그때 갑자기 이 복희씨가 나타났다. 그는 차문을 가볍게 열고 내 팔을 밖으로 잡아당겼다. 순간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려다 저 인간은 조금 전까지 나를 때리고 강간하려던 놈이란 사실을 머릿속에 인지시키고 고맙단 말 대신 내가 보기보다 쉬운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발밑에 굴러다니는 큰 돌멩이를 뻥-뻥 걷어차는 터프함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 복희씨는 내가 사람 머리통을 차든, 돌멩이를 차든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이다. 그는 불쑥 1.5리터짜리 생수병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 입이라도 게워 내라.” 생수병에 차가운 김이 서려있었다.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지는 걸 보니 조금 전 밖에 나가서 사온 것이 틀림없다. 나는 ‘받기 싫지만 사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라는 말로 다시 한 번 내 자존심을 높이며 생수병을 받았다. 내가 잠시 입을 게워내는 사이 그는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권솔 집 앞이다.’ 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해 ‘사람 없을 때 차 좀 치워라.’ 마지막으론 ‘ 아니, 필요 없어. 버려.’라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아무리 더럽다지만 깨끗이 씻으면 다시 탈수 있을 텐데. ……유난스럽게 깔 끔을 떨긴. “ 제가 세차해 드릴까요?” 이 복희씨가 핸드폰을 양복 주머니에 넣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 네가 왜.” “ 아깝잖아요. 저것도 무지 좋아 보이는데.” “ 그래. 좋은 차였지.” “ 그러니까 제가 깨끗하게 세차를…….” “ 좋은 차였지만 네가 오바이트 한 다음부터 세상에서 제일 고물차가 됐지.” 그렇다고 사람 대놓고 그런 식으로 말 하냐. 나 상처 받았다. “ 죄송해요.” “ 뭐가.” 내가 너한테 죄송할 일이 그거 말고 뭐가 있겠냐. 인마. “ 제가 최대한 참아보려고 했는데요. 생각처럼 안 되더라고요. 정말 죄송해요.” 이 복희씨가 희미하게 웃었다. “ 괜찮아. 그 정도는.” “ 네, 고맙습니다. 이 복희씨.” “ 봐주는 대신 머리꼭대기에 기어오르지나 마.” 헉! 저런 면도 있구나, 저 사람. 얼굴 말고 유일한 장점을 찾아냈다. 이 복희씨는 이상한 걸로 통이 크다. 차는 쉽게 버리면서 히터 트는 건 싫어한다. 경제관념이 조금 거지같지만 나한테 피해는 없으니 그런대로 너그러운 놈이다. “ 아직 많이 어둡다. 집 앞까지 데려다 줄께. 이리와.” 비싼 차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이 복희씨의 얼굴은 의외로 즐거워보였다. 휘파람으로 정체불명, 국적불문의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솔직히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저건 안 불렀으면 좋겠다. 굽이진 골목을 긴 다리로 척척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야, 너 음정박자 다 틀렸어‘ 라는 말로 복희씨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지만 진짜 휘파람은 아니었다. “ 이런 이상한 동네는 처음이네. 여긴 개들이 많이 사나봐.” 그는 궁금하단 얼굴로 ‘개집들이 진짜 많네.’ 라고 덧붙였다. 이 복희씨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떠날 줄 몰랐다. 이 복희씨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가 어느 한 곳을 지정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연신 ‘저 개집 좀 봐. 저런 건 철거 안 하나.’ 따위의 말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이 복희씨가 가리키는 ‘개집’ 이라는 것을 자세히 보자 왠지 굉장히 눈에 익은 녹슨 대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엔 잘 못 봤다 싶었다. 그만큼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이 복희씨가 자신의 고귀한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개집’은 바로……. 우리집이였다. 그는 쯧쯧 혀를 찼다. “ 아무리 개집이라도 저건 너무하지 않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개라는 동물을 함부로 대하다니. 진짜 충격적이군.” 그렇게 씨불이는 망할 놈에게 네가 말한 ‘개’ 라는 동물이 나라는 사실을 알리기까진 몇 초 동안의 숙성된 용기가 필요했다. “ 그 개집이 우리 집인데요.” “ 그래. 너희 집. 잠깐 뭐?” 내 짧은 다리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혼자 잘난 맛에 긴 다리로 다박다박 걸어가던 이 복희씨가 우뚝하니 걸음을 멈췄다. 그는 오늘하루 본 놈의 얼굴 중 가장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짝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진 얼굴. 아무리 잘생겼다지만 다비드의 잘난 외모로서도 쉽게 커버되지 못할 괴물 같은 표정이었다. 한 3초 동안 그 표정을 유지하던 복희씨가 놀란 눈으로 내 앞으로 다가가 일명 ‘개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 저 개집이?” “ 개집 아니고요. 사람 사는 집인데요.” “ 구라 까면 네 대가리 깐다.” 저돌적인 표현 앞에 나는 조금 움찔했다. “ 진짜에요. 내가 사는 집입니다.” 복희씨의 충격 받은 얼굴에 신혼 방 차렸다고 기뻐하던 지만이놈과 경원이 새끼의 얼굴, 합의금 물어준다고 가지고 있는 돈 다 털어 붓고 전세금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다 얻게 된 집이라고 좋아하던 솔이 새끼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아, 이 썩을 놈의 빈부격차. “ 충격적이군.” “ 괜찮아요, 살만한데. 연탄 갈기가 좀 그래서 그렇지.” “ 뭐?” 캔 깡통처럼 일그러지는 이 복희씨의 표정. 너무나 한꺼번에 충격을 줬나. 그는 남자치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생각 할 시간이 필요하다 ’ 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낙담하지 말고.” “ 네. 걱정 마세요. 전 완전 긍정적인 성격이니까요.” “ 그래 다행이네. 이런 집에 산다고 너무 비관하고 그러면 안 돼.” 어라? 어째 말하는 방향이 이상하다. 심각한 얼굴 진지한 표정. 이건 또 뭐야? “ 이런 집에 들어가기조차 싫겠지만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 “ 네, 안녕히 가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 들기가 무섭게 복희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 근데 어찌 방향이 이상한데. 다세대 주택이 태반이고 굽이진 골목길에 다닥다닥 집들이 교묘히 붙어있는 달동네촌인지라 길 찾기가 아무리 어렵다지만 그는 우리가 올라온 쪽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 충격을 줬나, 싶어 미안한 마음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복희씨를 보고 있는데 그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골목을 꺾어서는 말릴 틈도 없이 걸어가 버렸다. 골목 담벼락에 빨간 페인트로 써진 큰 글씨. 개 조심. “ 그쪽으로 가면 안 되는데…….” 복희씨가 꺾어 들어간 쪽은 순자 할매집이 있는 집으로서 동네 사람들 전부가 꺼리는 골목이었다. 할머니 때문이 아니라 문제는 할머니가 키우는 개에 있었다. 망할 놈의 개새끼가 눈서린 겨울에도 침을 질질 흘리고 자신이 사자나, 호랑이 쯤 되는 맹수로 착각을 해선 보는 사람 족족 물고 뜯고 지랄발광을 하는 통에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대 가까이 하면 안 될 골목으로 인식이 된 곳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 복희씨가 한 치의 의심 없이 걸어 들어간 골목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었다. 이윽고 미친개들이 발동을 하기 시작했다. 왈-왈-왈-왈-왈- 으-르-르-킁-킁-킁- 보통 개 짓는 소리는 멍-멍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친개라면 보통 개와 소리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예상했듯이 미친 개새끼들이 앞 다투어 으르렁 짖어대는 소리가 동네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두 마리다. 더욱더 불안한건 할머니는 개들을 누군가에게 구속 없이 자유롭게 키우고 싶다는 이유로 항상 풀어놓는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꺾인 골목에서 복희씨의 모습이 보였다. 비싼 남방단추가 다 떨어져서 가슴을 풀어 헤쳐진 그의 남성스러운 모습이 멋져 보일수도 있겠다만 이 복희씨의 뒤를 맹렬하게 쫓아오는 개들에 의해 내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다급하면서도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다는 얼굴로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내 앞에 잠시 멈춰 섰다. “ 개새끼들이 왜 날 쫓아오는 거지?” 덩달아 나까지 다급해져서 ‘복희씨가 도망가니까, 도둑인줄 알고 그런가 봐요.’ 라고 말해주었으나 우뚝 멈춰선 그를 보고도 미친놈의 개새끼들은 혀를 반쯤 내놓고 침을 질질 흘리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 씨발놈의 거지같은 동네.” 그 동네에 내가 산다는 말을 해주기도 전에 그는 개들을 돌아보며 엄청난 속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조심하란 말을 꼭 해주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다. 사람이 달리는데 바람소리가 날 정도면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빠른 속도일까. 살기 위해 달려가는 이 복희씨의 두 다리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부디 살아남기를. “ 애들아. 개년이 왔어.” 쥐방울만한 싱크대에서 깻잎을 씻고 있던 경원이가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 모습을 보고 활짝 열려있던 방문을 향해 외쳤다. 강호동이 쇼프로에 나와서 아침 8시에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고 해서 사람들은 놀라워했지만 나는 그 소리에 속으로 콧방귀만 꼈다. 그건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에 삼겹살과 소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초비자연적인 위장을 가진 놈들이 내 주위에 세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원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끼눈을 한 권솔과 붉게 충혈 된 토끼눈의 김 지만이 앞 다투어 달려 나왔다.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부여잡고 놈들이 동시에 물어왔다. “ 계진아, 그 새끼가 뭐라더냐!” “ 도대체 왜 남으라는 거야? 무슨 말 했어? 응?” 관심 없는 척 무심함을 가장한 경원이놈의 뚱한 얼굴도 내 뒤통수로 박혀 있었다. “ 그냥. 별일 없었어.” 별일이야 이 복희씨 쪽에서 있었다면 있었지. 지금쯤 미친개들을 잘 따돌렸을까. 진심으로 애도의 마음이 들었다. “ 야, 근데 네가 거지같은 복가네 큰형님을 어찌 알고 있냐.” 이 복희씨 앞에선 ‘네, 형님’만 주구장창 외치던 비굴한 녀석이 이 복희씨가 없다고 그런 막말을 해도 되는 것이냐, 권솔. “ 큰 형님? 그럼 작은 형님도 있냐?” 오히려 되묻는 내게 뭘 새삼스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지만이놈이 말했다. “ 응. 걔네 삼형제거든. 첫째가 이 복희, 둘째가 이 복귀, 셋째가 이 복신.” “ 얼마나 복을 많이 받으려고 촌스럽게 이름을 ‘복’ 자를 넣어.” ……재미없다 경원아. 네 말이라면 죽는시늉을 떠나 아예 죽어버릴 것 같은 지만이 놈도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지냐. 자제해라. 경원이 놈은 다 씻은 깻잎을 빨간 바구니에 차곡차곡 개여 놓으며 자신의 유머가 잘 먹히지 않자 여과 없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 반응들이 왜 이렇게 저급해! 뭐야. 내가 한 말에 불만 있냐?” “ 여러모로 유명한 형제들이야. 그 삼형제 전부 다.” 경원이의 투덜거림이 본격적으로 발동되기 전에 솔이 놈이 선수를 치고 말했다. ‘알아듣게 설명해.’ 라는 내 말에 김 지만이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 주먹으로.” 싸움? 그래, 그 독특한 성격으로 누군가에게 맞고 있을 거 같진 않더구나. “ 그 사람들과 연관되지 않는 게 좋아. 특히 이 복희는 두 형제와 비교해서도 또 다르게 유별난 사람이야. 솔이랑 나랑 알고 지낸지가 횟수로 몇 년째 되는데 도대체가 그 속을 모르겠어. 겉은 물렁해보여도 실제로는 과격한 거 같다가 또 그냥 별생각 없이 사람사람 같기도 하고. 쉽게 파악할 수가 없어.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지.” 이번엔 권솔이 ‘이 복희씨 뒷담화 까기 대화’ 에 합류했다. “ 종잡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종잡기 싫은 놈이지. 그 새낀 완전 타고난 미친놈이야. 사람이 사람을 때리면 적어도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은 하게 되는데 걘 그런 게 없어. 자기가 죄를 짓는다는 개념자체를 상실했거든. 그러니 그 새낀 단순히 나쁜 놈이 아니라 애초에 인격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아.” 지만이 놈이 권솔에게 바통을 받아 ‘이 복희씨 씹기 마무리’ 에 들어갔다. “ 나는 큰 형님처럼 몰상식할 정도의 마이페이스는 처음 봤어. 뭐랄까. 이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모토로 인생을 산다고 해야 되나. 그런 사람들 곁엔 애초에 다가가지 않는 게 좋아. 이기적인 인간들은 자신이 상처받지 않아. 대신 주위사람들이 상처를 받지.” 사돈남발하고 자빠졌네. 바야흐로 몇 년 전 오후, 전철에서 변태 아저씨가 이 경원이 여잔 줄 착각해서 놈의 허리에 거시기를 살살 문질렀다는 이유로 아저씨의 팔을 그 즉시 부러뜨려 놓고 내가 단순히 경원이 놈에게 시비 좀 붙였다고 내 팔을 꺾어 한 달 동안 기브스 하게 만든 놈치곤 참 뻔뻔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가 한일은 싹 잊고 당사자가 없다는 이유로 마음 내키는 대로 흉을 본다 이거냐. “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 나도 처음엔 그랬어. 형님이 확실히 더러운 인상은 아니지. 주먹 쓰는 사람치곤 조금 곱상한 외모라고 해야 되나. 못 배운 티도 안 나고.” 더부룩한 속에 힘들어 하던 내게 생수병을 내미는 복희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 특별히 착해 보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놈은 아닌 거 같던데.” 다만, 좀 변태 같을 뿐이지. 내 젖꼭지를 넘보는. 흥! “ 야, 김 계진! 넌 그것부터가 그 새끼 겉모습에 속은 거다!” 버럭 화를 내는 권솔 놈을 보며 대답했다. “ 솔아, 양심에 찔리지 않냐.” “ 씨발. 내가 뭐!!” 굉장히 찔리는 모양이다. “ 저 새끼 말이 맞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지만이놈 말에 솔이 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 그 새끼를 계속 보면 살아있는 미친개가 이런 거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게 나와 뭔 상관이야. 이 복희씨도 겨우 한번 본거고 그것도 이젠 만날 일이 있을까 말까한 사람인데……. 뜬금없이 심각모드로 돌변한 김 지만과 권솔을 가로질러 방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 방바닥엔 신문이 깔려 있었고 불판위엔 지글지글 노릿하게 익어가는 구수한 삼겹살이 보였다. 삼겹살 봉지 옆에 버젓이 굴러 돌아다니는 소주병 네 개. 저것들이 아침부터 어지간히 처먹었군. 겉옷을 이불더미에 대충 던져놓고 문턱에 기대어 담소를 나누는 두 놈을 지나쳐 부엌으로 나왔다.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퐁퐁을 몇 방울 짜서 뽀득뽀득 손을 씻는데 언제부터 날 노려보고 있었는지 눈깔이 사시되기 일보직전의 경원이 자식이 어울리지 않게 폼을 잡으며 거들먹거렸다. “ 너 솔직히 말해.” “ 뭘.” “ 이 복희라는 놈. 너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 그 무슨 호랑말코 같은 말이냐.” “ 그럼 왜 그 새끼가 너만 남으래. 구라 깔 생각이면 죽어.” 그건 나도 알고 싶다. 고작 집에 데려다 준거 말고는 한 것도 없으면서 왜 남으라고 했을까. 구원의 눈빛으로 김 지만과 권솔을 돌아봤다. 두 녀석들은 언제 들어갔는지 방구석에 앉아서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가히 입에 털어 붓는 수준으로 나발을 불어대고 있는 것이 한 쌍의 바퀴벌레들 같았다. 진짜 위대한 놈들이었다. 나는 거품 묻은 손을 물에 다 씻어내고 손을 탈탈 털며 경원이 놈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꼴아보는 눈알을 평온하게 풀지 않은 상태였다. “ 4시 되기 전에 장난전화 왔던 거 기억나? 장난전화 다음에 걸려온 전화는?” “ 하루에 전화가 몇 통이나 오는데 그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냐.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줄 아냐.” 이년은 왜 이리 딱따구리처럼 주둥이를 세우고 지랄이야. 확, 성질나면 말 안 해줄까 보다. 하지만 이 경원 이 놈도 나 하나 정도는 가볍게 목을 딸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기에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 아무튼 장난전화 다음 전화가 그 사람의 전화였어. 이 복희씨 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택시운전을 하고 있더라고.” “ 뭐?” 경원이 년이 눈살을 찌푸리며 번개 맞은 속도로 순식간에 방안으로 달려갔다. 놀란 두 놈이 바람소리에 깜짝 놀라 ‘어-버버.’ 하는 사이 이경원은 지만이놈이 마시려던 종이소주잔을 팍 구겨서 방바닥에 팽개치며 잔뜩 골이 나서 열심히 씩씩댔다. “ 그 사람 택시운전사라는데! 또 구라쳤냐, 이 새끼야!” “ 자기. 그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봐.” 자기? 자기는 무슨 뷁이다! “ 너 나한테 아직 이실직고 안했지?” “ 그게…….” 나는 방으로 들어와 삼겹살 때문에 역하게 올라오는 누린내를 쫓아내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방충망 덕분에 여름엔 모기들에게 반쯤 목숨을 내걸고 문을 열어야 하는데 겨울엔 마음대로 창문을 열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다. 창 문밖으로 반쯤 고개를 내밀고 바람을 쐬고 있자, 등 뒤로 경원이 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택시운전은 또 뭐냐고! 이 개새끼야!” “ 자기. 네가 걱정할 거 같아서 미리 말 안했어. 미안해.” 아무리 예쁘다지만 똑같이 달릴 거 달린 사내새끼한테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야’ 라고 부르는 김 지만의 뇌구조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 형님이 경찰들도 눈치 못 채게 하려고 잠시 입막음으로 회사에 등록시켜 놓은 거야. “ 경원이 놈의 손을 끌어와서 가슴에 가져다대며 사근사근 속삭이는 김 지만의 얼굴에서 지금 당장 이방에서라도 경원이놈과 그 짓거리를 벌이고 싶어 죽겠다는 짐승의 본능이 엿보였다. 허나 놈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고 싶지 않은지 경원이년은 지만이 새끼가 쥐고 있는 손을 거칠게 후려쳐서 떨쳐냈다. “ 나도 내일부터 거기로 간다. 가서 네가 빌어먹을 깡패 짓을 하고 있었던 건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만약 나 몰래 주먹 쓰면서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던 게 밝혀지면 우린 그날로 끝이다. 알았냐? “ 지만이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풀죽은 강아지 같은 지만이의 얼굴을 보며 권솔은 ‘역시, 마누라를 잘 얻어야 된다니까.’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경원이 새끼가 졸라 눈을 흘기며 ‘부러우면 넌 계진이랑 사 겨라.’ 라는 개똥보다 못한 말을 씨불였는데 그 말에 솔 이놈이 썩은 대파를 씹어 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도 눈이라는 게 있다’ 는 말로 가만히 있던 내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그 새낀 얼굴부터가 짜증나.” 경원이 놈의 신경질에 솔이 새끼가 웃음을 터뜨렸다. “ 이 복희가 기생오라비면 넌 기생쯤 되겠다.” “ 죽을래?” “ 생각해 봐라, 그렇잖아. 누가 누구보고 기생 어쩌고저쩌고 지껄이는지 모르겠네.” 솔은 끝까지 경원이 놈을 물고 늘어졌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경원이 놈이 아니다. 녀석은 강력한 주먹으로 권솔의 허벅다리를 걷어찼다. 그러나 솔이 새끼는 맞아놓고 뭐가 그리 재밌어 죽겠는지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뒹굴 거리느라 맛이 간 상태였다. “ 너도 경원이년이랑 내일부터 같이 나와라.” 솔이 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기 묻은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 어딜?” “ 나랑 지만이랑 일하는 가게.” 말없이 그냥 빤히 놈을 쳐다보았다. 의외로 경원이 놈이 입을 열었다. “ 콜센터 해봤자 어차피 돈도 안 되니까 때려치우자.” 나는 입안에 있는 고기를 오물오물 씹어 먹으며 성의 없이 말했다. “ 너나 때려치워.” “ 언제까지 거기서 일할 순 없잖아. 이참에 그만 두고 다른 데로 옮기자니까!” “ 너나 때려치우라니까. 그렇게 쉬운 일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러냐.” 내가 너무 맞는 말을 해서인지 딱히 반박거리를 찾지 못해 은근히 열 받아 보이는 경원이 놈이 빽 하고 악을 질렀다. “ 지만이 감시해야 돼! 내일부터 같이 나가자고!” “ 너나 감시해! 나까지 지만이놈 감시해야 되는 거 아니잖아!” 이것도 너무 맞는 말이었기에 경원이 놈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해야 내가 얌전히 입을 닥칠 수 있을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잠시 뜸을 들이더니. “ 같이 감시해. 개새끼야!” “ …….” 흥분하면 욕하고 악쓰는 버릇 또 나왔다. 그 모습까지 귀여워 돌아 버리겠는지 지만이 새끼는 경원이 자식 볼에 뽀뽀를 하고 아주 난리가 났다. 한술 더 떠 미세하게 꿈틀대는 주름을 손끝으로 꼼꼼하게 펴주며 이마, 콧등, 입술 턱 끝을 빠른 시간 내에 비벼주고, 핥아주고, 빨아주고 개지랄을 했다. 권솔은 못 볼 것 봤다는 얼굴로 진작 고개를 돌려버렸다. 녀석의 시선이 방구석 끝을 향해 있었다. 불쌍한 자식. “ 이 복희 그놈이 우리 지만이한테 너랑 안 오면 안 써 준다고 했대! 그니까 무조건 나랑 같이 가! 알았냐. 토 달지 마! 이로서 대화 끝. 뭘 봐, 고기나 처먹어.” 그때 난 이 복희씨가 ‘왜 나와 같이 오라고 했을까’에 대한 의문보단 ‘그럼 진짜 같이 가야되나’ 하는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나랑 같이 오라고 했을까. 무슨 생각일까. 하긴 그렇게 생각이 깊어 보이진 않는 사람이었다. 알바자리가 남으니까 그냥 오라는 걸 테지. 나는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고 잠시 내려두었던 젓가락을 바짝 집어 들었다. ♠ 우리는 바스키아라는 이름의 허름한 술집 앞에서 멈춰 섰다. 지하철을 타고 올 때, 김 지만에게 들은 대로 가게를 소재하자면 이곳은 회원전용 카드를 따로 만들어 쓸 만큼 체계적인 게이바란다. 바스키아라는 이름은 클럽의 창시자였던 ‘초대 사장’의 애인께서 미국의 낙서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를 닮았다는 이유로 가게 명칭까지 바스키아가 되었다는데 이건 확인해 볼 바 없는 풍문이고, 후자는 그럴듯한 영어를 갖다 붙이고 싶었는데 그때 문득 생각난 게 바스키아라는 이름 밖에 없었다는 말이 거의 지배적이었다. 바스키아엔 몇 가지 꼭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단다. 술집 주제에 참 꼴값 하고 있다. 첫 번째는 절대 회원전용의 카드를 이용할 것, 카드는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본인 외엔 절대 다른 이에게 빌려줄 수 없고 만약 카드를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가게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재발급은 절대 해주지 않는다. 그럼 대부분의 손님들이 선불로 카드로 샀을 텐데 잃어버리면 그대로 돈을 버리는 게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네 사정이다.’ 라는 모토를 바탕으로 손님들을 무식한 배짱으로 일괄처리, 그에 따른 거대한 원성과 반발 심리들을 묵살로 해결했다고 한다. 그 고집스러운 뚝심으로 원칙 첫 번째를 지켜낸 결과 처음엔 ‘사기꾼이다, 돈 벌려는 꼼수다’ 하고 외치던 사람들도 그런대로 수긍하는 분위기란다. 두 번째는 가게 내에서 있던 모든 일을 밖에서 함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건 왜 그런지 아직 잘 모르겠단다. 카드는 해 년마다 1년, 2년 기간으로 개인당 한 장씩 살 수 있고 클럽 내에선 고객들을 포인트로 분류하는데 점수가 미달되는 자는 카드를 자체적으로 회수해 간단다. 물론 돈은 돌려주지 않는다. 클럽은 고액의 손님을 상대로 하는 술장사인 만큼 여러 가지 비리와 부정부패가 난무하는데 혹시나 짭새가 뜨는 걸 대비해 내부를 복잡하게 빙빙 꼬이게 만들어 처음 온 사람은 어디가 어딘지 조차 찾기 힘들다고 한다. 여느 클럽과 비교해봤을 때 가장 좋은 점은 수도권지역에 있는 다른 게이 바 보다 월등히 물이 좋다는 것을 자부할 수 있다고 한다. 그건 철저한 회원제 전용의 철칙도 한몫했지만 회원을 뽑을 때, 3대 기준 외모, 몸매, 돈을 철저하게 파헤쳐 뽑는 사장의 남다른 경영철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다. 다만, 단점을 하나 꼽자면 술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우수개소리로 바스키아에서 과일껍질만 씹어 먹어도 몇 백만 원이라는 농담이 오고갈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가게 매출과 회원은 끊이질 않고 몰려드니 그것이 바로 돈 있고 할 일없는 사람들의 고상한 술 문화 아니겠는가. 백퍼센트 회원 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하지만 아주 가끔(사장이 지 배알 꼴릴 때)초저녁까지만 일반손님도 받을 때가 간혹 있다. 다만 새벽 2시 이후로는 가게 정문과 후문을 완전 봉쇄시켜 회원외의 일반 손님은 아예 얼씬도 못하게 만든다. 바로 그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일, 즉 돈은 없는데 술 먹고 싶은 사람들을 이유 없이 겁주고 내쫒는 게 김 지만과 권솔의 일이라고 했다. 바쁘면 가끔씩 홀도 보고. 여기까지가 김 지만과 권솔이‘듣지 않아도 가면 알 텐데 왜 말해 주냐고’잔소리를 해도 꿋꿋이 말한 가게의 이야기다. 장황한 설명 다 집어치고 한마디로 고급 게이바란 말만 하면 될 텐데 꼴에 자기네들이 일하는 곳이라고 졸라 부풀려 말하긴. 권솔과 김 지만은 직원이다. 그래서 회원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잘난 기억력은 개가 물어 갔는지 이놈의 망할 새끼들은 하나같이 회원카드를 집에 놓고 왔다는 이유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만이 놈이 안내하는 일명 개구멍’즉 직원용 탈의실로 이어진 후문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살금살금 기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1분 동안 아무 말 없기에 웬일인가 싶었더니 어김없이 경원이년 주둥이가 쌍욕과 함께 열렸다 “ 시발. 이거 진짜 사람이 못할 짓이다. 졸라 가오 죽게 이게 뭐냐. 왁스로 고정시킨 머리 완전 닭 벼슬 됐잖아.” 지만이 놈이 가장 먼저 앞장서고 그런 녀석 바로 뒤에 경원이 놈, 그 뒤에 나, 제일 마지막에 권솔.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몸을 쭈그리고 기어가고 있는 상황에 경원이 년의 걸음이 뚝 멈추는 바람에 솔이 놈과 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앞차가 멈추니 뒤차도 자연스럽게 멈춰야 하는 상황과 똑같다. 순간 내 옆구리를 한쪽으로 밀치고 솔이 놈이 경원이 새끼의 티를 쭉쭉 잡아당겼다. 두 녀석의 얼굴이 자로 잰 듯 동시에 짜증스럽게 변했다. “ 너 오늘 달거리 하냐. 아주 작작 좀 떽떽거려라. 밤일도 못하게 얻어터지는 수가 있다.” 집에서 나와 전철을 탈 때부터 20분이나 늦었다고 서두르던 기색이 역력했던 지만이놈과 솔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나 경원이 놈은 그때에도 사람냄새 많이 나는 전철을 죽어도 타지 않겠다는 허무맹랑한 억지를 부려 가뜩이나 늦은 시간을 더 늦게 만들며 지만이 놈의 ‘차 가 없어서 미안해.’ 하는 풀죽은 사과까지 받아내는 저력을 과시했다. 그랬던 놈이니 권솔의 항의를 얌전히 받아들일 이가 전무하다. “ 너 방금 뭐라고 했냐?” “ 주둥이 찢어지기 전에 입 닥치고 있으라고 했다. 요년아.” “ 요년? 너 방금 요년이라고 했냐? 저거 완전 미친년 아니냐.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냐?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을 하고 지랄이야.” 솔이 놈이 경원이 새끼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지껄였다. “ 한번 먹고 버려도 시원찮을 년.” “ 성희롱 하지 마라. 시발새끼야!” “ 왜? 내가 너무 맞는 말만 해서 배알이 꼴 리냐, 새끼야.” 경원이 놈이 여차파면 나를 뛰어넘어 권솔 새끼에게 달려갈 채비를 했다. “ 이 개자식아! 넌 오늘 제삿날이다!” “ 웃기지마라. 오빠가 봐줄 때 그만 개겨라. 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깜찍한 자식아.” 솔 이놈의 말을 끝으로 경원이년의 뒷다리가 날아왔다. 그러나 권솔 앞에 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롱 다리여도 닿지 않을 것이 확실히 계산된 뒷발차기였다. 빌어먹을! 가식과 오기로 똘똘 뭉친 경원이놈의 개구리 같은 뒷다리가 애꿎은 내팔 뚝만 지근지근 밟아댔다. 괜히 나만 아파죽겠다. 이것들은 싸우고 싶으면 뒷산에 가서 정식으로 일대 일로 붙을 것이지 왜 이런데서 이 지랄일까. 그런 내 마음과 상황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두 놈들은 내가 가운데 껴있기 때문에 크게 싸움 날 일은 없다는 확신 하에 저주받을 주둥이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 김 지만. 빨리 저거랑 깨져라. 그래야 내가 쟤랑 완전 연을 끊지.” 지만이 놈은 발밑에 거치적거리는 돌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원이 놈이 콧방귀를 꼈다. “ 야, 말 다했냐?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난 뭐 너랑 노는 게 즐거운 줄 아냐?” “ 말다안했다. 너 때문에 30분이나 늦은 거 모르냐? 웃으면서 말할 때 주둥이에 지퍼 채워라.” “ 그게 왜 나 때문이냐? 카드하나 못 챙긴 너 때문이잖아.” “ 오- 그러셔? 그럼 왜 지만이 새끼한텐 아무 말 안하고 나한테만 이 지랄이냐?” 경원이 놈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녀석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자각 못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지껄이기에 이르렀다. “ 지, 지만이는 지만이니까 그런다. 왜 떫으면 너도 애인 사겨라!” “ 내가 상종을 말아야지. 저거는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화내고 흥분하는 거 밖에 못한다니까.” 하수도 통로 만 한 구멍에서 누가 더 목소리 큰 가 내기하는 놈들처럼 한 치의 양보 없이 악다구니를 써재끼던 놈들이 솔이 새끼의 일방적인 대화종료로 인해 싸움은 일단락 지어지나 싶었다. 쭈그려 있는 자세가 계속되다보니 허리가 쿡쿡 쑤셔왔다. 이리저리 허리를 비틀며 조금씩 앞으로 가는데 순간, 여차하면 권솔에게 달려들 기세로 몸을 획 돌리고 있는 경원이 놈의 등 뒤로 지만이의 풀죽은 모습이 비쳤다. 전철타기 전, 경원이 새끼가 ‘이 나이 처먹도록 차하나 없이 인생 헛살았다’는 둥 돈 ‘많은 애인만나고 싶다’는 둥 하는 어이없는 짜증에 잔뜩 기가 죽은 얼굴 그대로였다. 측은한 마음에 지만이 놈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녀석에게 누구도 가공할 수 없는 초 일류급 살인미소를 지어보이며 힘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나 놈은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자식들이 없구나. 제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내가 한마디 했다. “ 애들아 왜들 그러니. 싸우지 마. 우린 친구잖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에선 ‘넌 또 뭐야’ 뒤에선 ‘넌 빠져’ 와 같은 말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면서 두 놈은 애꿎은 내 등짝과 이마를 쿵 소리 나게 쥐어박았다. 시발, 둘이 싸우기엔 차마 뒷일이 감당이 안 되기에 몸싸움까진 가진 못하고 애꿎은 나를 상대로 분을 풀려는 놈들의 거지같은 속셈이 눈에 보였다. 월급 받으면 다음 달부터 태권도 학원이라도 다녀야겠다. 두 놈을 속으로 저주하며 피눈물을 삼키고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 말 없던 지만이 놈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쉿’하고 속삭였다. “ 쉿! 다들 조용히 해. 위에 누가 있어.” 역시 녀석의 말처럼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녀석들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개구멍 바로 위가 주방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이렇게 자세히 들리는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네 사람은 동시에 귀를 기울였다. ‘ 아직도 안 왔냐.’ ‘ 이 자식들 군기…,빠져….’ ‘ 무슨 일이…까요.’ 띄엄띄엄 들리는 대화 속에서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우리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만이 새끼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야. 서두르자! 이러다 복귀새끼 지랄한다. 지금도 너무 늦었어.” 솔이 놈과 나는 동시에 끄덕였다. 경원이 놈은 끝까지 찜찜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우리는 지만이의 지휘 하에 개미떼들처럼 머리를 맞대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웬일로 고분고분 말을 듣나 싶었던 경원이 놈이 몇 초 후에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가히 지능적이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몰상식한 욕을 씨불였는데 ‘그 말 어디서 배웠냐.' 는 내 물음에 놈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내가 지었다.’ 고 지껄이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 너 이젠 욕도 만들어서 쓰냐?” “ 당연하지. 기존의 것을 탈피하고 뭐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야 말로 내 유일한 기쁨이니까.”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 욕도?” “ 예외가 있겠냐.” “ 그렇게 사는 거 재밌어?” “ 개년아. 이게 다 창작의 기쁨이라는 거다. 넌 말해도 모르겠지만…” 안 듣는 척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솔이 새끼가 ‘어쩐지 유치하더라.’ 는 말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참고 있던 경원이 놈의 성질머리에 불을 붙일 뻔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만이놈의 간곡한 부탁에 힘입어 ‘넌 집에서 보자’ 라는 말로 그나마 사태를 수습했다. 저런 수준 낮은 녀석들과 친구라는 사실에 저절로 한숨이 터졌다. 그러자 ‘네가 뭔데 한숨을 쉬냐.’ ‘어린놈이 세상 다 산거 같은 표정 짓지 말라‘는 막대 먹은 훈계가 오갔다. 아아- 정말 이럴 때는 친구만 많았으면 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특히나 간절해진다. “ 형님, 저희 왔습니다.” 많아봤자 이십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자 뒤에선 우리들을 대표하여 지만이 놈이 공손히 인사했다. 탈색된 노랑머리를 싸구려 고무줄로 질끈 동여 묶은 찌질한 모습이 묘하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지금으로선 고작 뒷모습 밖에 보이진 않지만 테이블에 기대어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몸이 일 년 열두 달 헬스클럽에 죽치고 사는 남자들이 절대 부러워 할 정도로 딱 부러진 어깨와 거대한 체구를 자랑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묻은 더러운 반팔 티도 절대적인 바디라인에 걸치니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조금 튀는 게 있다면 푹 파진 목덜미에 드러난 호랑이 문신이랄까. 왜 조폭들은 저렇게 문신을 좋아할까.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는 지만이 놈의 인사를 들어놓고도 굳이 우리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곧은 자세로 연습장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미처 보지 못한 그의 어깨에 단소로 추정되는 대나무 악기가 걸려 있었다. 아직 영업시간이 아니라 조용하던 클럽에 남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웅장하게 들려온 건, 녀석들과 내가 멀뚱히 서있고도 10분이 지나서였다. " 갈수록 늦어지는구나.” “ 네. 차들이 너무 막혀서 좀 늦었습니다.” 지만이놈의 말에 남자가 단소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 지만아.” “ 네, 형님.” “ 어제 지하철 타고 다닌다고 하지 않았느냐. 요새 지하철은 어떤 식으로 막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지만이 놈 이마에 맺혀있던 땀이 한줄기 곧게 흘러내려 턱밑에 달랑거렸다. 이 복희씨 앞에서 다음으로 녀석이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당황한 녀석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다소 무리가 있었다. 놈을 저렇게 만드는 남자의 정체가 조금씩 궁금해졌다. “ 아-하하. 버, 버스를 탈 때도 가끔 있습니다. 저 형님 지금 뭐하고 계셨습니까.”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우리가 있는 무대기둥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몇 달 깍지 않은 듯 자라난 거뭇거뭇한 난 수염이 굉장히 인상적인 사내는 전체적으로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누구지? 누구를 닮았지? 아- 진짜 닮았는데.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자의 검은 눈이 지만이 놈에게서 경원이, 나로 이어졌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한 놀라움 보단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가 입을 열었다. “ 사회에 대한 울분을 토해낸 갱스터 랩을 단소소리에 맞춰보고 있었단다.” 이건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란 말인가. 남자는 너무나 소중해 죽겠다는 얼굴로 마른수건으로 단소를 닦은 후, 쇠 젓가락에 휴지를 묻혀 구멍 난 부분을 쑤셔 넣었다, 뺏다 반복하며 미세한 먼지를 제거 하는 세심함까지 보였다.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며 솔이 새끼가 대뜸 소리쳤다. “ 왜요. 형님 또 음반 내시게요?” “ 슬슬 준비할 때가 되지 않았겠느냐.” “ 형님! 저번 주까지 국악 한다고 하지 하셨잖아요!” 남자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말끔해진 단소를 허공에 붕붕 저으며 갑자기 단소를 지휘봉으로 착각하고는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는 음악에 맞춰 지휘를 시작했다. 그는 어느새 눈을 감고 묵음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 국악은 손을 끊었단다.” “ 왜요. 국악이야 말로 형님의 적성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솔이 새끼의 말에 그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요샌 랩이 대세더구나’ 라는 발언으로 우리 모두를 그 자리에서 굳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금 아이러니 한 건, 지만이 새끼와 솔이 두 놈들은 그의 정체불명의 발언들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는 것이다. 적응이 안 돼서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고 열심히 시선을 피하는 경원이 놈과 나랑 다르게 두 녀석들은 그런대로 사내의 시선을 꿋꿋이 받아내는 강인함이 있었다. “ 내 재능을 시기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참으로 많더구나.” 남자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단소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 며칠 전, 전국 국악협회에서 국악을 모독하는 앨범을 다시 한 번 만들면 전국에 있는 국악 연주자 지망생들이 모두 음악을 포기해버리겠다는 혈서를 보내왔더구나. 이 단소와 함께 말이다. 제길! “ “ 형님. 그래서 국악은 그만두신 겁니까?” 지만이 놈의 물음에 사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갑자기 사내의 눈빛에 빛이 돌았다. 그건 광기였다. “ 그래. 대신 굿거리장단에 랩을 곁들인 크로스오버적인 장르의 새로운 음악을 창출해냈단다. 다음 주 정도면 음반들이 나올 것 같구나. “ 그 음반 너라면 돈 주고 사겠냐? 진심으로 그렇게 묻고 싶었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말을 얼굴하나 안 바뀌고 잘도 지껄여대는 남자가 탁자위에 다소곳이 단소를 내려놓으며 빙빙 의자를 돌려 정면으로 우리를 마주했다. “ 근데 저 아름다운 레이디는 누구냐.” 그의 가운데 손가락이 경원이놈에게 향했다. 눈에 띄게 당황한 지만이 새끼가 경원이놈 옆으로 재빨리 다가와 녀석의 어깨를 바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 내 앞에서 그런 부적절한 행동을 하다니 많이 컸구나, 지만아.” “ 죄송합니다. 형님.” “ 괜찮다. 남자는 자고로 그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내 여자를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오늘은 특별히 용서해 주마.” “ 감사합니다. 형님.” “ 그래. 그리고 다행히 내 입맛은 아니니 안심하거라.” 그는 말을 마치고 경원이 놈에게서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남자의 노골적인 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요하다 싶을 만큼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피해 허공 위로 시선을 틀자,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 저 주먹 올라오게 생긴 놈은 누구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휘-히-잉. 바람소리가 들린다. 삭막하다. 조용하다. 미치겠다. 빨리 친구라고 말해줘야지 이 미친놈들아! “ 권솔. 네 이거냐?” 그는 새끼손가락을 방정맞게 까딱 까닥댔다. 그 모습에 내가 미쳐 '아닌데요.’라고 말을 하기가 무섭게 권솔이 이보다 더 웃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표정이 황당하게 변해선…… “ 형님! 제가 형님에게 평소에 그렇게 지은 죄가 컸습니까!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뭐야. 왜 지가 화를 내고 지랄이야. 정확히 내 고막에 대놓고 악을 쓰는 녀석의 거나한 목청 때문에 순간 귓구멍이 멍멍해졌다. 사내의 목소리가 웅성웅성 부정확하게 들렸다. " 미안하다. 너에게 너무 심각한 수치심을 안겨준 거 같구나. “ “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마십시오!” “ 알았다. 형님으로서 면목 없구나.”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두 놈들은 앞 다투어 그렇게 지껄였다. 남자는 권솔을 상당히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나긋한 시선과 상반될 정도로 권솔의 모습은 바람소리가 쌩쌩 불어 닥칠 만큼 차가웠다. 처음에는 분위기에 휩쓸려 뭐가 뭔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는데 이거 은근히 열 받는다. “ 너만 기분 나쁘냐! 나도 보는 눈이란 게 있고, 추구하는 스타일이 있다! 진짜 웃기지도 않아!” 권솔에게 한말인데 대답은 엉뚱하게 남자에게서 들려왔다. " 저 아이는 화내는 모습도 참으로 암담하구나.” 짐짓 심각해진 남자의 말투에 경원이 새끼가 도저히 못 참겠단 듯이 박장대소를 했다. “ 내가 지만이 여인과 저 암울하게 생긴 아이를 주방에 소개를 시켜 줄 터이니 너희는 오늘 팔 양주박스부터 정리해 두어라. “ “ 그럼 형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만이는 그렇게 말하고 칠월칠석에 한번 만날까 말까한 직녀를 바라보는 견우의 표정처럼 애처롭게 변해선 경원이놈의 목덜미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며 ‘네 얼굴 잊어버리며 어쩌지.’ 라는 개똥같은 말을 지껄여댔다. 그러자 지만이놈의 이마에 화답의 키스를 날리며 경원이 년이 ‘1분을 못 보면 10년은 늙은 거 같아’ 라는 꼭 그 수준에 맞는 대답을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남자는 방금 전까지 단소 닦던 수건으로 슬쩍 눈가를 훔쳐내며 ‘아름다운 사랑이군.’ 이라는 비정상적인 말로 순간적으로 솔이 놈의 눈가에 퍼지는 살기를 불러 일으켰다. “ 오, 플라토닉 러브! 지고지순한 너희들의 사랑이 가뭄처럼 메말라 있던 나의 가슴을 적셔주는구나. “ 눈물 닦던 수건을 눈언저리에서 내려놓는 남자를 향해 방금 전 살기를 담은 눈주름을 금세 풀며 솔이 새끼가 말했다. “ 복귀 형님. 그럼 저흰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 그렇게 하려무나.” ……잠깐잠깐. 솔아. 방금 뭐라고? 복귀? 복귀!! 닮아도 너무 닮은 얼굴. 짜 맞춘 것처럼 똑같은 이목구비.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순간 경원이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 너도 방금 들었지.’ 하는 의문 섞인 물음에 슬쩍 고개를 끄덕여 주자 고양이처럼 새치름하게 눈을 찌푸리며 녀석이 말했다. “ 그럼 당신이 이 복희씨 친 동생인가요?” 남자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 복희씨? 이 복희씨라. 그 사람은 또 누구지?” 저렇게 닮았는데 아니라고? “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긴 한데. 팍 생각이 안 나는구나.” 경원이 놈과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몇 초 동안 골똘히 생각하며 팔짱을 꼈다. 이윽고 그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야 생각났다! 지금생각해보니 내 형님의 성함이 이 복희씨라고 했던 거 같기도 하구나!” 그 형에 그 아우다. 연기라면 절대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이제야 생각난 자신을 나무라듯이 이마를 톡톡 때리며 남자가 말했다. “ 형님께선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 “ 큰형님 택시운전 하고 계시던데요.” 솔이 놈이 뚱한 목소리로 말하자 복희씨의 동생 이 복귀씨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 택시운전?” 지만이놈이 대답했다. “ 네. 어제 뵈었습니다. 사정상 잠시 운전하시고 계신 거 같았습니다. 모르셨습니까?” “ 몰랐다. 2년 전에 학교를 쓸어버리겠다고 집을 나가셨던 형님께서 드디어 택시운전사로 돌아오시는구나. 혹 옥체에 별 탈은 없어 보이더냐. “ “ 예. 충분히 건강해 보이셨습니다.” “ 다행이구나. 형님은 항상 기골이 장대하신 분이셨지.” “ 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무턱대고 장대하셔서 문제였죠.” 짜증이 팍팍 묻어나는 말투로 솔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남자는 녀석의 말을 애초에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꿈에 달뜬 목소리로 반쯤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 아아……. 그리운 나의 형님.” 이 복귀씨의 얼굴에 사 묻힌 슬픔이 떠올랐다. “ 형님께선 성질이 좀 거지같아서 문제였지만 나에게 슈퍼맨과 동일한 존재였느니라.” 이 복귀씨의 추억과 슬픔에 젖어드는 눈동자를 살피며 권솔에게 귓속말로 ‘저 사람말투가 왜 저러냐.’ 라고 물자, 놈은 대답하기조차 싫다는 얼굴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정철이래.’ 이라고 대답했다. ……정철이라.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으로 수험생의 최대 안티수를 보유하고 계시는 그 분 말이더냐? 너희 형님만큼 너도 참 인생 복잡하게 사는구나. 이 복귀씨. “ 시상이 떠오르는구나.” 지만이 놈과 솔이 새끼의 얼굴이 캔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 형님에 대한 내 우애의 정을 관동별곡의 운율에 맞춰 뉴 버전으로 번영한 시를 들어 보겠느냐? “ 복귀씨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열심히 중얼거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솔 이놈과 지만이 새끼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들의 존재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미 비어버린 자리에는 솔 이놈 새끼가 주머니에 미어터지게 담고 다니며 출출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는 튀긴 건빵만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어 그들이 그 자리에 한때나마 존재하긴 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 어리석은 중생들이 어찌 나의 높은 시세계를 알 수 있겠느냐.” 이 복귀씨는 애처로운 눈동자를 흔들며 저벅저벅 걸어와 귀퉁이가 부서진 건빵을 집어 올리며 오늘의 명언을 던졌다. “ 이제 넌 혼자가 아니니라. 내가 너를 구제함으로서 넌 이제 나의 친우로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니라. “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 부끄러워하지 말거라. 네가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 우애를 쌓는데 뭐 그리 큰 대수이겠느냐." 그는 테이블로 돌아가 티슈 한 장을 빼왔다. 집어든 건빵을 휴지 위에 조심스럽게 감싼 후 남장 주머니에 넣는 그의 눈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 내 품에서 잠시나마 편안하게 숨 쉬려무나.” 인생 26년 살면서 그때 처음 보았다. 살아 있는 생 또라이 새끼를. 이 복귀씨가 있어야 할 곳은 고급 바 안의 바텐더석이 아니라 언덕위의 하얀 집이였다. 조금 전부터 침묵을 지키며 서있던 경원이놈은 이 복귀씨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녀석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공포영화 마니아에게도 살아있는 돌 아이는 두려움의 존재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시상과 뜨거워지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 이 복귀사장은 재즈음악을 30분 동안 들으며 그의 심신을 나른하게 달랜 뒤에야 우리를 끌고 다니며 클럽 을 본격적으로 소개시켜주었다. 복희씨의 붕어빵 이 복귀씨의 소개로 둘러본 바스키아 안은 실로 화려하다 못해 장엄했고 장엄하다 못해 웅장했다. 총 2층으로 이루어진 바는 1층에는 고급 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무대와 음향 기기들이 설비된 작은 음악 홀을 연상케 했다. 입구 반대편에 둥그런 스탠딩 탁자로 이루어진 칵테일 바는 1층의 삼분의 일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굉장히 컸다. 아직 영업시간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어두운 조명이 켜지면 굉장히 아름답겠지. 칵테일 바에서 조금 떨어져 한참동안 굽이진 복도를 돌면, 일명 빨간 방으로 통하는 ‘밀실’이 나올 것이라고 복귀 사장이 열심히 설명했다. 그는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우리 가게 매출의 구십 프로를 담당하는 곳이지.’ 라고 살짝 귀띔을 했다. 그 말에 경원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 밀실은 왜 그렇게 많이 만들었어요?” “ 게이들이 아무리 거리낌이 없다지만 엉덩이로 하는 장사니 그렇구나.” “ 엉덩이로 하는 장사가 뭔데요?” 알고 있으면서 순진한척 묻는 경원이 놈에게 이 복귀 씨가 ‘ 거짓된 숫처녀 같은 질문을 잘도 하는구나. ‘ 라는 소리로 단박에 순수의 가면을 쓴 녀석의 얼굴을 깨뜨려 주었다. 참으로 고소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할일은 1층 홀 서빙인데 서빙도 얼굴 면접을 꼭 본다는 말을 강조하며 그는 경원이 새끼를 훑어보며 단번에 ‘합격’ 이라고 말하고 내 얼굴을 보며 애매모호한 말투로 속삭였다. “ 너는 솔직히 조금 아슬아슬했다.” 정떨어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재밌어 죽으려는 경원이놈의 발을 꾹 밟으며 ‘내가 뭐 어때서요.’ 라는 말로 맞대응을 했으나 복귀 씨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공주거울을 꺼내 내 앞으로 내밀며 대답했다. “ 시간 있을 때 거울을 보고 오거라.” “ 거울 봐도 괜찮기만 한데요. 전 제 얼굴 마음에 듭니다.” “ 너란 아이는 정답이란 게 없을 거 같구나.” “ 이-이씨.” 그는 내 대답 따위는 듣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밀실로 통하는 복도를 벗어났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경원이 놈과 나는 열심히 따라갔다. 이 복귀 사장이 몸을 튼 곳은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쪽이었다. 계단 바로 밑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틈 같은 게 보였는데 문 전체가 계단 색과 똑같이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으리라. “ 여기가 주방으로 이어진 지름길 이다. 잊어버리지 말고 유용하게 쓰도록 해라.” “ 네.” 이미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이 복귀 사장이 말했다. “ 접니다, 스티븐 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스티븐 리? 분명히 솔 이놈이 ‘복귀형님’ 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두 개인가. 어렸을 때 외국에서 살던 사람이나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은 외국이름이 하나씩 있으니 처음엔 외국에 살다왔구나 하고 단순하게 여겼다. “ 누구라고?” …심하게 짜증 섞인 탁한 목소리. 40대 후반쯤 되었을 법한 중년남자 목소리는 자신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 누구라고!” “ 주방장님. 스티븐 입니다.” “ 뭐가 어째? 누구?” 이 복귀사장이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싸고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다. “ 으… 젠장. 계속 이러실 겁니까! 복귀입니다!” “ 오냐. 들어와라!” 딱 떨어지는 대답에 이 복귀 사장이 문을 마저 활짝 열고 앞으로 걸어갔다. 경원이 놈과 나는 그의 뒤를 쫒았다. 젖어 있는 쾌쾌한 음식물 냄새. 달그락달그락 지지고 볶는 소리. 현재 프라이팬 위에 탁탁 소리를 내며 소시지가 볶아지는 소리와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은 주방이었다. 주방이 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은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언뜻 둘러봐도 경원이놈 신혼방과 솔이 새끼와 내방을 합친 거에 열배는 넘어 보인다. 사람 기를 죽이게 할 만큼 크고 화려한 주방이었다. “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스티브 뭐시라고?” “ 스티브 립니다. 그렇게 말했지요. 주방장 님.” “ 넌 28살이나 처먹은 새끼가 언제 철들래! 하긴 29씩이나 처먹은 네 형님이란 놈도 상태는 마찬가지다만.”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철은 진작 다 들었습니다.” “ 철들은 새끼가 LA 3박4일 갔다 온 다음에 스티븐인가 뭔가로 이름 바꾼다고 법원이나 들락날락 거리고 자빠졌냐! “ …아아, 그렇게 된 거구나. 이 복귀씨 사장은 주방장님의 말에 뭐라 반박하려 입을 열었으나 살짝 이대근을 닮은 그의 험악한 인상에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중년의 나이가 무색 할 정도로 사람을 얼빠지게 만드는 패션을 고수하고 있었다. 달마시안 얼룩무늬 털조끼를 입고 조끼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아 아저씨의 우람하다 못해 미어터질 정도로 실로 많은 양의 근육들이 너무나 입체적으로 보였다. 형광등에 반짝이는 가슴은 잠기지 않은 단추들로 풀어헤쳐져 태생이 의심될 정도로 빽빽한 가슴 털들이 보는 사람 기겁하게 만든다. “ 주방장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전 이름을 꼭 바꾸고 말겁니다.” “ 그것부터가 네놈이 철이 안 들었다는 증거다.” “ 이름 바꾸는 게 철드는 거랑 뭔 상관이랍니까?” “ 왜 상관이 없어. 철이 없으니 그 나이에 이름 바꾼다고 지랄이지!” 중년남자는 자신의 가슴털이 남에게 주는 충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건지 아니면 알고도 무시하는 건지 어쨌건 당분간은 조끼의 단추를 잠글 생각이 없어 보임이 분명했다. “ 저도 외국물은 먹을 만큼 먹었고.” “ 호텔에서만 처박혀서 한국 드마마만 빌려보던 놈이 말은 잘 한다.” “ 그건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드라마를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 개소리하네. 네 놈의 외국인 친구들은 왜 하나같이 영어는 못하고 한국어만 그렇게 잘하는 거냐. “ 마지막 말이 충격이었을까. 이 복귀 사장은 순간 휘청댔다. 그는 서둘러 ‘메이크업을 고친 후 다시 ’돌아오겠다‘ 는 말만 남기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가 흔들어 놓고 간 덜컹대는 문을 먼 산 보듯이 보던 주방장 아저씨가 들고 있던 개 작두 만 한 칼을 집어던져 정확히 나무도마 한 가운데 내리찍곤 살벌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우리가 서있는 문 앞으로 다가왔다. “ 건달새끼들은 신성한 주방에 들어 올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서있는 이 경원 놈을 대신해서 내가 말했다. “ 저희 건달 아니에요.” “ 건달도 아니라면서 왜 저런 몹쓸 깡패 이 복귀랑 같이 있는 거냐.” “ 저희 오늘부터 일하기로 되어있는데….” 저주받은 주둥이를 중요할 땐 꾹 닫아버리는 이경원은 언제부터 친했다고 굉장히 친한 척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굳어있었다. 정말 짜증났지만 한번 입을 다물면 지 좋을 때까진 죽어라 말을 안 하는 놈의 특기를 알기에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내가 말했다. “ 김 지만이랑 권솔 친군데요. 오늘부터 일한다고 말씀드렸다고 그러시던데.” “ 아! 그 깡패새끼들 친구가 너희들이었냐?” “ 예. 아마도 그런 거 같은데요.” “ 지금까진 정상적이게 보이네. 그거야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저렇게 가슴털이 많은 사람이 왜 머리는 대머리일까. 가슴 털을 뽑아서 머리에 심으면 안 되는 걸까. 빨리 의학기술이 발전했으면 좋겠다. “ 근데 저 예쁘게 생긴 놈은 왜 말이 없냐?” “ 조금 내성적이거든요.”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했던 구라 중에 이번 구라가 가장 쌨다. …이경원이 내성적이라.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 권솔이 들었으면 토할 일이었다. 아저씨의 반짝반짝 광채 나는 휑하니 비어버린 머리위엔 무지개 색 두건이 씌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어디를 보고 있어야 될지 몰라 잠시 무지개의 색을 하나, 둘 씩 세고 있는데 주방장 아저씨가 몸을 돌려 도마에 아슬아슬 서있는 칼을 뽑아들었다. “ 깡패친구라면서 건달은 아니란 놈들은 처음이네.” “ 진짜에요. 저흰 그런 일 해본 적 없어요.” “ 둘 다 게이냐?” “ 전 잘 모르겠어요.” 내 말에 주방장님은 ‘그럼 저쪽은 게이란 말이군.’ 이라고 속삭였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라가 있는 솥단지가 점차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애기 머리통만한 국자로 국물을 대강 휙휙 저으며 맛을 보고 은박지에 쌓인 정체불명의 양념장을 푹푹 집어넣었다. 과연 맛은 있을까? “ 게이면 게이지 모르겠다는 건 또 뭐냐?” “ 남자를 사견본 적은 없거든요.” “ 그럼 여자는?” “ 여자도요.” “ 왜 사냐?” 아저씨는 한심하단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말하고 나니 조금 쪽팔렸다. 26살이나 먹도록 여자한번 안 사겨 봤다는 말을 하면 순수하다고 박수쳐줄 사람 아무도 없다. 다 숙맥이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 앞 뒤 다 깨끗하단 말이군.” 헉! 뭐야. 저 간지러운 표현은. “ 관리 잘해라. 노리는 새끼들 많다. 세상에 워낙 골빈 놈들이 넘쳐나야 말이지.” …진짜 얼굴 색 하나 안 바뀌고 말도 잘한다. 그때 끼-이익 거리는 녹슨 철문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소리도 같이 불어왔다. 열린 문은 우리가 들어온 지름길이라는 쪽문 반대편에 있었다. 저쪽이 정문, 우리가 들어온 쪽이 후문. 뭐, 그런 식인가 보다. 열린 문 사이로 가게오기 전까지만 해도 보슬보슬 내리던 눈이 뭉텅이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자, 조금 있다 녀석들하고 집에 가면서 눈싸움하자고 말해볼까 싶었지만 개 무시만 당할 것 같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사이 문 밖에 서 있던 젊은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서글서글한 눈매의 인상이 좋아 보이는 이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그는 배추 몇 포기를 낑낑대며 들고 들어왔다. 머리엔 파란색 두건을 쓰고 손에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무겁네.’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드는 순간 자세히 보이는 얼굴에 만화 주인공 ‘요리 왕, 비룡’ 이 떠올랐다. 약간 살집이 올라 통통한 얼굴에 완전 판박이다. “ 저 스승님. 오늘 배추가 다 떨어져서 이거 밖에 없대요." 아저씨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 넌 어째 젊은 놈이 그렇게 물러 터졌냐. 그 할망구 있는데도 좋은 물건 안주려고 쌔 비쳐 놓은 거 다 아는데 떨어지긴 뭐가 떨어져! “ 요리 왕, 비룡이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 쭈물댔다. “ 스승님.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 너무 착한 것도 나쁜 것만 못한다.” “ 네, 죄송합니다.” 요리 왕, 비룡은 들고 온 배추를 차례대로 마른 바닥에 포개어 놓고 손등으로 쓱 하니 이마를 닦았다. 그는 배추 단을 묶어둔 빨간 끈을 자르기 위해 가위를 들다가 처음 전학 와 적응 못한 꼬마들처럼 머쓱하게 서있는 나와 경원이 놈을 바라보았다. 놀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요리 왕께서 말했다. “ 오늘부터 홀에 온다는 사람들이에요?” “ 그래. 잘들 지내라.” 과도로 시들시들한 배춧잎 끝부분을 서걱서걱 자르며 요리 왕이 나와 시선이 맞췄다. “ 안녕하세요. 정말 반가워요.” “ 네? 네. 잘 부…부탁드려요.” “ 아니에요. 저야 말로.” 전학 왔으면 당연히 피해갈 수 없는 시간, 나는 곧장 자기소개에 들어갔다. “ 저는 김계진 입니다. 제 옆에는 이 경원이라는 애고요.” 고귀한 어느 나라 공주처럼 콧대만 더럽게 높아서는 자기이름에 금딱지라도 붙었는지 처음 보는 사람에겐 절대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경원이 년을 대신에 내가 놈의 이름까지 말해주었다. 옵션으로 급격한 친한 척에 들어갔다. “ 요리 왕, 비룡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어요! 진짜 이름이 비룡이 아니에요? 흐-흐흐” …요리 왕께서 웃으신다. 그것도 졸라 활짝. 이십육 년 살면서 내 유머가 최초로 먹히는 순간이었다. 의외로 감동스러웠다. “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신기해요. 나 진짜 이름이 비룡이에요.” “ 그럴 리가! 뻥…뻥치지 마세요.” “ 본명이 금 비룡이에요! 이거 진짜 신기한데.” “ 설마.” 어제 만난 오 쌍칼 다음으로 충격적이었다. 신들렸나? 찍어서 대충 대보면 진짜 이름이란다. 당장 돗자리 깔아야겠다. “ 눈썰미가 정말 좋은데요.” “ 별말씀을요.” 순박한 이 남자는 바에서 본 세 명중에 유일하게 인간적인 면모가 보여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나에게 안도감을 선물한 그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활짝 웃어주자 그는 나보다 더 활짝 웃어서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다는 말을 실천해주었는데 자세히 보면 볼수록 웃는 모습이 조금 없어 보이는 거 같아서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았다. 웃는 모습이 슬퍼 보이는 요리 왕이 말씀하셨다. “ 솔이 친구들 맞죠? 그럼 나보다 동생들이네요. 동생들이 한꺼번에 생겨서 좋네.” “ 저보다 나이 많으면 말 놓으세요! 그게 편하거든요!” 요리 왕이 머쓱하게 웃었다. “ 그럼 그럴까? 근데 옆에 친구는 말이 없네? 조용한 성격 인가봐?” 경원이 놈은 그제야 대화의 중심에 자신이 부각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작은 목소리로 ‘안녕 하세요’ 하고 말한 뒤, 건방지게 고개만 까딱거려 인사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주방장 아저씨가 국자를 설거지통에 담그며 입을 열었다. “ 저 놈이 김 지만 애인이지?” “ 네. 지만이 애….” 내말을 자르며 경원이놈이 사납게 말했다. “ 그런데요. 왜요?” “ 말투가 영 싸가지 없네.” “ 머리털 나고 그런 소리 처음 들어보네요.” 이 경원이 밥 먹고 가장 많이 들어본 말 중에 하나가 ‘넌 참 얼굴은 안 그런데 성격은 참 거지같다.’ 는 말이었다. 그러나 놈은 확인해 볼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능청스럽게 구라를 쳐댔다. “ 얼굴에 싸가지 없음이 줄줄 읽히는데?” “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저씨 얼굴도 만만치 않거든요? 애석하게도 누구에게 지적할 수준의 외모가 아니세요. 그쪽도.” 경원이 놈의 도발에 아저씨는 허허 웃는 얼굴로 묵묵히 대처했다. “ 예쁜이. 지금 나하고 여기서 한판 해보자는 거냐?” 따발총처럼 대꾸하려고 폼 잡는 경원이 놈의 입을 손으로 재빨리 막았다. 녀석이 신경질을 내며 발을 쿵쿵 거렸다. 내 손을 떼어내려고 혀끝으로 침을 묻히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 뜸을 들이고 손을 떼자 침범 벅이 된 오른손이 썩어들어 갈 것 같았다. “ 싸가지 있든 없는 그건 상관없다만 지금 주문받은 요리해야 하니까 좀 조용히들 하고 있어라. “ 아저씨는 두꺼운 스티로폼 뚜껑을 열고 도미인지 가자미 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은 생선 한 마리를 옥 도마 위에 탁 때려눕혀 일시적으로 기절을 시켰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파닥대는 생선눈알이 하얗게 달아올라 있었다. “ 비룡아 가서 토마토랑 딸기 좀 씻어라.” “ 네. 스승님.” 비룡이형은 열심히 냉장고를 뒤적여 방울토마토와 딸기를 찾아냈다. 형이 싱크대에서 과일을 씻어대는 사이 아저씨는 도마 뒤에 칼날크기대로 일렬로 진열되어 있는 칼들을 쭉 훑어보더니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펜싱 칼을 꺼내들었다. 칼날이 번쩍번쩍 빛이 났다. 한손으론 억척스럽게 생선아가미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론 펜싱 칼끝을 이용해 정교한 솜씨로 비늘을 벗겨낸다. 싱크대에서 그 모습을 홀린 듯 훔쳐보 는 비룡형의 눈에 ‘존경’ 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때마침 경원이 놈이 내 귓가에 ‘언제까지 여기 이렇게 서있어야 되냐’ 라고 속삭였다. ‘잘 모르겠어.’ 라는 내 신중한 대답에 ‘물어 본 내가 병신이다.’라는 거지같은 말이 날아왔다. 그럼 왜 물어봤냐고 말하려 했지만 놈은 평소답게 자기말만 한 후, 가볍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리는 그 대화를 끝으로 15분정도 비린내가 진동하는 주방에 멍청하게 서있었다. “ 다됐다!” 비늘이 깨끗하게 벗겨진 불쌍한 물고기가 축 늘어져 있었다. 아저씨는 그 위에 굵은 소금을 팍팍 뿌려대며 의문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 요새 직원 뽑을 시기도 지났고 월급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세서 아무리 그놈들 친구라지만 여기 들어오긴 쉽지 않았을 텐데 너희들 꽤나 빽이 든든한가 보다?” “ 빽은요, 무슨. 아는 사람이라고는 지만이랑 솔이 밖에 없어요.” 아저씨의 눈동자에 호기심이라는 단어가 번쩍 거렸다. “ 이 씨 형제 중에 아는 사람 있는 건 아니고?” 부루퉁한 얼굴로 이경원이가 대답했다. “ 전혀 몰라요.” 아저씨가 도마 위에 고정되어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는 피 묻은 칼날을 하얀 행주에 쓱-쓱 문질러 닦고 ‘빽이 없다면 더 의심스러운데 ’ 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나이가 많으니 의심스러운 것도 많아지나 보죠.’ 라는 경원이의 대답이 흘러나왔지만 아저씨는 놈에게서 내게 시선을 돌린 채 다시 물어왔다. “ 혹시 복귀랑 아는 사이냐?” “ 네? 아니요. 오늘 처음 봤어요.” 그는 ‘하긴 그렇겠지’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꽁꽁 얼다 못해 명태인지 얼음인지조차 쉽게 구분이 가지 않는 생선들을 떼어냈다. “ 그럼 복신이랑 아는 사이냐?” “ 누구에요? 그 사람은 아예 얼굴도 모르는데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아저씨가 비룡이형을 향해 ‘복신이 아직도 절에서 안내려 왔냐.’ 라고 물었다. 방울토마토 하나를 씻는데 몇 분씩 투자하고 있던 형이 ‘아마 그럴걸요’ 라고 대답했다. 절? …스님인가. 녀석도 궁금하긴 궁금한 모양이다. 경원이 놈이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 절엔 왜 가있는데요?” 칼끝으로 거의 묘기를 부리듯이 교묘하게 명태눈알을 도려내고 있던 아저씨가 ‘공부’ 라고 짧게 답해왔는데 이에 지지 않고 놈은 ‘무슨 공부요’ 라고 묻는 가상함을 보여주었다. “ 수능공부. 대학 간다고 절에 그러고 자빠져 있다.” “ 몇 살인데요?” “ 그러는 너희들은 몇 살이냐?” “ 26살인데요.” “ 그래? 동갑이네.” …26살이라. 이 복희씨의 막내 동생이 26살이군. “ 정말 너희들 어떻게 들어 왔는지 말 안할 거냐?” “ 정말 권솔하고 김 지만 밖에 몰라요.” “ 이사장네 놈들 얼굴도 모르냐? 그 놈들만 안다면 말이 안 되는데.” “ 안다고 할 순 없고요. 안면이 조금, 아주 조금 있긴 한데.” 내말에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안면이란 게 어느 순간 완벽한 빽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게 나라가 우리나라란다, 아가들아. 그 안면 있는 놈 이름이 뭐냐? “ 나는 딱 잘라 말했다. “ 이 복희씨라고요. 이 복귀 사장 친 형님이라는데 아세요?” …챙. 두-투툭! 냉각된 용암처럼 순식간에 굳어진 아저씨는 잡고 있던 펜싱 칼마저 바닥에 떨어뜨리고 인생을 다산 사람처럼 침체된 표정을 지었다. 급기야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이 과일 씻기에 전념하고 있던 비룡 형은 틀어놓은 물에 방울토마토가 둥둥 떠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병아리처럼 입만 뻐금 뻐금거렸다. …왜들 그러실까. “ 제가 뭐 잘못 말했어요?” “…….” “…….” 기다려도 두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경원이 놈에게 ‘ 내가 무슨 실수했냐?’ 하고 진지하게 묻자 녀석은 심각한 얼굴로 ‘ 네 얼굴.’ 이라고 꼭 자기수준에 걸맞은 대답을 지껄였다. 놈을 외면하고 싶었기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자 ‘나 무시 하냐. 엉? 씹 새끼야’ 라는 쌍욕이 날아왔다. 그래도 끝내 놈을 바라보진 않았다. …그렇게 1분이 흘렀다. 아저씨가 뒤 늦게 손에 낀 비닐장갑과 그 안의 겹겹이 끼고 있던 면장갑을 한꺼번에 벗었다. 그는 휑해진 손가락으로 사정없이 귓구멍을 후비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잘못 들었겠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지 비룡아?” “ 네! 그런 거 같은데요. 스승님.” “ 그래. 그런 거다. 계진아, 사람 이름을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 너 방금 누구라고 했냐?” …뭘 자꾸 물어봐요. 그래도 혹 이 복희를 ‘이북희나, 이뽁희로’ 말하지 않았나 싶어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 이.복.희씨요. 복희씨!! 이제 잘 들렸지요?” 두 사람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다시 굳어졌다. 그때 갑자기 닫혀 있던 주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고함의 소프라노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 누구야! 누가 감히 우리 복희씨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야!” 누군가 싶어 고개를 빼고 보고 있는데 헉 소리가 나게 예쁜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 죽고 싶어? 우리 복희씨는 복희씨라고 부르는걸! 제일 싫어한다고!” …그러는 자기는 복희씨, 복희씨 잘만 지껄이네. 아름다웠던 그녀의 외모는 거리가 좁혀질수록 가지고 있는 동전을 나도 모르게 던져주고 싶을 만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노란 색 긴 가발을 쓰고 그 위에 캡 모자를 눌러쓴 초 절정 ‘미인’은 세일러문 콘셉트로 코스튬 플레이라도 하고 왔는지 완벽한 ‘달의요정’이 되어있었다. 알 록달록한 플리츠스커트와 삼 단짜리 굽 높은 가죽부츠만 빼면 얼굴 하나는 완벽했다. 그러나 완벽함을 선보이는 얼굴도 요목조목 자세히 뜯어보자, 기본적인 신부화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스모키 화장의 지긋지긋한 병폐가 숨어있었다. 긴 속눈썹에 붙은 눈뭉치가 내려와 어느새 물기가 되어 눈 화장을 번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부지깽이로 눈알 주위를 쓱쓱 문질러 놓은 거 같기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예쁘긴 예뻤다. 이 세상 자기가 제일 예쁜 줄 알며 26년 미인의 기준에서 독주를 하며 살아온 이경원이 눈에 띄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달의 요정은 냉장고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가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켜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그녀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경원이 놈에게 멈춰 있었다. 달의 요정의 검은 눈알이 장작불처럼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그녀는 말보다 손이 더 빠르게 나왔다. 퍽! 퍽! 어라? 우선 나는 아닌데…. 그렇다면. 사태를 파악하도 전에 달의요정의 주먹에 고스란히 뺨을 내주고 고개가 꺾인 경원이놈을 발견했다. 저 새끼가 누군가에게 맞고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당황해서 잠시 멍해져 있는 것이리라. “ 너 죽을래? 네가 감히 복희씨라고 불렀냐? 차마 내가 그렇게 불렀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요정께선 아직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경원이 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입 꼬리가 비릿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 계진아. 내가 맞은 거지?” “ 응.” “ 진짜?” “ 응! 너 졸라 맞았어!” “ 뻥 아니지? 내가 맞은 게 맞지? 진짜지?” “ 응! 그래. 이 자식아! 너 싸대기 두개나 맞았어!” 진심으로 싸움을 부추길 생각은 없었다. 뻥이다. …아주 조금은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사태를 방관하던 아저씨는 녀석들 때문에 잠시 중단한 요리를 시작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다시금 주방에 울려 펴지는 주먹소리에 다시 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퍽! 퍽! 퍽-퍽퍽! 왜 맞고 가만있나 했다. 총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경원이 놈이 달의요정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본인이 때리는 것에만 치중하고 잠시 방심하고 있던 요정께선 무릎을 휘청대며 힘없이 팔랑거리더니 결국은 주방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의외로 약골인데. “ 이거 완전 미친년이잖아? 어디서 굴러먹다 기어온 요부 같은 년이 감히 나를 때려? 주먹을 안 쓰고 살려고 했으니 이런 치욕을 맛보네. 나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 이이! 왜 때려!” “ 덜 맞았냐? 넌 때릴 가치도 없다. 너 같은 놈이랑 싸웠다고 소문나면 내 이미지만 안 좋아진다. 봐줄 때 아가리 닥치고 꺼져라.” 말이 안 나온다는 놈치곤 졸라 말을 잘했다. “ 너 지금 첩 주제에 조강지처를 때렸냐!” 요정은 뜬금없이 케케묵은 정부 론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눈부신 금빛가발을 풀어헤쳤다. 검은머리가 드러났다. 생각보다 머리길이가 짧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무뚝뚝하게 서있는 경원이 놈을 향해 무턱대고 달려들었다. 타고난 싸움꾼은 아니었지만 필요에 따라선 자기 몸 하나는 가볍게 지킬 줄 아는 놈이 민첩하게 요정을 피했다. 앞도 안 보고 대책 없이 두-두두 달려오던 요정이 그대로 주방 벽까지 달려가 쿵하고 머리를 부딪치며 출혈사태를 일으켰다. “ 헉! 이걸 어떻게! 미군. 장미군!” 미군? 군? 그럼 남자야? 저 얼굴이? 충격적이었다. 놀란 비룡이 형이 한손에 토마토를 다른 손엔 딸기를 쥐고 달려왔다. 형은 무릎을 꿇고 쭈그려 앉아 달의 요정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 괜찮아요? 장미 군.” “ 필요 없으니까 꺼져요!” 달의 요정은 벌떡 일어나 당당하게 경원이 놈 앞에 서서 삿대질을 했다. “ 너 누구야? 우리 복희씨랑 무슨 사이야!” “ 또 맞고 싶지?” “ 말…말로 해!! 이 첩실 년아!!” “ 난 말보다 주먹으로 대화하는 걸 더 좋아한다.” 경원이 말에 그녀의 (정정-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너 솔직히 불어. 뻥치면 죽는다. 네가 복희씨가 요즘 만난다는 그 새끼냐?” 경원이 놈이 짜증나 죽겠다는 투로 ‘미친년’ 이라고 중얼거렸다. 녀석의 빈정거림에 갑자기 어디서 용기가 생겨났는지 달의 요정이 싱크대 설거지물에 담겨져 있던 국자만한 주걱으로 경원이 새끼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아프겠다! “ 묻는 말에 대답해! 너 맞지?” 경원이 놈이 인상을 썼다. 녀석은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패딩잠바를 벗어던졌다. 흠칫 굳어진 요정의 얼굴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저놈 화났다. 진심으로 싸우려는 거다. “ 움직이지 마.” 그 한마디를 끝으로 경원이 놈은 무자비한 주먹질로 달의요정을 달의흡혈귀로 급속도로 바꾸어 놓았다. 주먹이 허공에서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퍽-하는 뼈 부러지는 소리와 살 찢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울고 있는 요정의 두꺼운 마스카라가 검은 눈물로 변해 턱까지 줄줄 흘러 내렸다. “ 지만이 애인, 특별히 뛰어나진 않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주먹을 가졌군.” “ 스승님! 지금 그렇게 말씀 하실 때가 아니에요. 저러다 미군 죽겠어요! 말려야 합니다!” “ 내버려 둬. 어느 정돈지 자세히 좀 보게.” 한번 이성을 잃은 경원이 놈은 나조차도 쉽게 말릴 수가 없다. 지만이 새끼에게 구조요청 문자를 보내려 했으나 오래된 내 꼬진 핸드폰이 단순히 폴더만 열었는데 배터리가 없다고 지랄 맞게 울려댄 뒤에 결국은 전원이 꺼져버렸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경원이 놈의 뒤로 다가가 녀석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만해, 저러다 죽겠어’ 라는 말로 싸움을 중지 시키려 했지만 ‘너도 죽고 싶지?’ 하고 오히려 되묻는 놈 때문에 슬쩍 허리를 놓고 다시 말했다. “ 그만해라. 고소하면 어떡해! 너 쟤 상대할 합의금 있냐?” 피 묻은 주먹을 다시 추켜올리던 녀석은 내말에 ‘항상 돈이 문제야’ 하고 지껄였다. 그때 쿵쿵 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쪽문이 열렸다. 이 복귀 사장이었다. 정말 메이크업은 고치러 갔다 온 모양이다. 얼굴이 여러 방면에서 다듬어져 있었다. …저게 그 유명 화장발. 그래도 멋있어 보인다. “ 난 또 큰 소리가 나서 와봤더니 별일 아니네. 테이블 정리하게 빨리들 나오려무나.”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 한가운데 피 떡이 되어 징징거리는 달의 요정을 보고도 아무 일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태평함이 존경스러웠다. “ 마무리는 우리가 할 테니까 나가봐.” 아저씨의 말씀에 경원이 놈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홀 서빙 따위가 무슨 대수냐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졸라 대수였다. 대한민국에 게이가 이렇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 손님들이 넘쳐났다. 현재 홀 안은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1, 2층 모두 빡빡하게 사람들로 들어차 있는 상태다. 흡사 개미떼들 같았다. 이 경원과 나는 주의사항과 몇 가지 꼭 알아야 될 주문법칙, 팁, 서빙의 기본들을 꼼꼼하게 듣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어영부영하게 3시간은 후딱 지나갔다. 무슨 일을 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다리가 빠질 듯이 후들후들 떨리는 걸 보면 일을 하긴 했구나 싶은 생각만 든다. 홀에 있는 3시간 동안 지만이 놈과 솔이 녀석의 모습은 찾아보려야 볼 수조차 없었다. 명분상으로 김 지만 감시라는 목적 하에 일을 하고 있는 경원이 새끼가 차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빈 테이블을 치우고 스탠딩 바 구석 쪽으로 가자 이미 그 곳에 와있던 경원이 놈이 의자 뒤에 숨어 손님들 몰래 양주에 물을 섞고 있던 복귀 사장을 향해 물었다. “ 김 지만은 지하에서 무슨 일 해요?” “ 사내가 하는 일에 안 사람이 지나치게 따지고 드는 것도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니라.” " 설마 주먹질 하는걸 아니겠죠? " 이 복귀 사장은 물과 술이 잘 섞일 수 있게끔 쇠 젓가락으로 병을 흔들며 말했다. " 주먹질이라 함은 단련된 신체로 할 수 있는 최적합의 직업이지 않느냐. " " 그래서 지금 깡패새끼들이 잘났다는 말을 하자는 겁니까? " 부정 타느니라, 사내일 에 그만 나서 거라. " 한마디 하려던 경원이 놈이 억지로 입을 다문다. 나는 그 모습에 히죽 웃으며 다시 홀 안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클럽 문을 당당히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 무시무시한 거구의 사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누구를 찾으러 온 모양이다. 사내는 입구에서 또 다시 몇 발자국 들어와 열심히 두리번댔다. 그는 급기야 홀 가운데까지 들어왔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 저 레게머리 놈이 새싹이라고 했나. “ 하-하하. 아 이고 숨차다. 계진씨 여기 계셨군요.” 계진씨? 내가 언제부터 계진씨가 되었을까. “ 네. 근데 왜 그렇게 뛰어 다니세요? 누구 찾아요?” “ 아 그게 말입니다. 저희 형님이…어? 작은형님 계셨습니까!” 농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양주에 물 타기를 반복하던 복귀 사장을 발견한 새싹이 꾸벅 구십도 인사를 했다. 이 복귀 사장은 자신을 향해 깍듯한 인사를 건네는 상대방을 보지도 않고 ‘새싹이구나 ’하고 대답했다. 형님의 내공이 무섭긴 무섭구나. “ 언제부터 가게에 다시 나오신 겁니까?” “ 넉 달이 좀 넘어가는구나.” “ 형님, 왜 진작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큰 형님 졸업하셨습니다.” “ 형님께는 곧 문안인사라도 드리러 간다고 전해드려라.” “ 네, 알겠습니다. 형님. 저 그런데.” “ 왜 그러느냐 ?” 의외로 뜸을 들이는 새싹의 행동에 양주병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이 복귀씨가 고개를 들었다. 새싹이 연신 머리를 긁적이며 나와 이 복귀 사장을 번갈아 살펴봤다. “ 큰 형님께서요 말입니다. 지금 계진씨 조퇴 좀 시켜달라고 하시는데.” 그때 갑자기 이 복귀 사장이 굳어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 조퇴? 그건 안 되는구나.” “ 예?” “ 안 된다. 오늘 처음 온 놈을 조퇴시켜 주면 다른 녀석들이 얼마나 기분 나빠 하겠느냐.” “ 형님, 가게 앞에서 큰 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대장부가 한 번 뱉은 말을 다시 번복할 순 없는 일이다.” 이 복귀 사장의 눈이 검게 빛났다. 순간 겁을 집어먹고 얼어붙은 새싹이 손을 덜덜 떨며 양복 안주머니를 뒤적여 쪽지하나를 꺼냈다. 둥그렇게 모여 있던 경원이 놈과 나, 이 복귀씨의 시선이 저절로 쪽지로 향했다. “ 큰형님께선 분명히 작은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끝나면 이 쪽지를 읽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형님, 지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 새싹은 자기 가슴을 퍽퍽 때리며 거친 심호흡을 한 뒤에야 천천히 쪽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너 많이 컸다. 오래 살면서 그 게이바 죽기 전까지 장사하려면 올바른 행동 하리가 믿는다. 이 복희씀. 여기까집니다, 형님.” “ 어서 데려가거라!” “ 형님, 감사합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 계진씨! 빨리 나가요.” 무조건 내 손을 잡아 이끄는 새싹을 따라 얼떨결에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쌍칼의 안내 하에 후문으로 돌아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휘한 찬란한 새 차와 백미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고 있는 이 복희씨였다. 얼굴과 몸 상태가 멀쩡한 걸 보면 어제 미친개는 그런대로 잘 따돌리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 오랜만이다.” …어젯밤에 계속 봐놓고 오랜만은 개뿔. 그러나 기분 좋게 인사하는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분위기에 맞게 대꾸했다. “ 네. 오랜만이네요. 복희씨.” “ 진짜 이상한 놈이네. 뭐가 오랜만이냐, 어제 봤잖아.” 대략 할 말 없다. “ 춥다. 우선 차에 타." 그는 말 만 그렇게 해놓고 자기가 먼저 차에 탄 뒤 문을 쾅 닫아버렸다. 기가 막힌다. 어쩔 수 없이 직접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이 복희씨가 하얗게 얼은 손을 후후 불며 내 후드 티 안으로 차가운 손을 쑥 집어넣었다. 졸라 깜짝 놀랐다. 잘못했으면 앞으로 넘어질 뻔 했다. 놀란 내 모습을 보고 복희씨는 해맑은 표정으로 깔깔 웃었다. 그는 오늘 운전대를 잡은 쌍칼에게 ‘가자’ 한마디를 내뱉었다. 쌍칼이 공손히 대답하며 시동을 걸었다. 가게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 밥 먹었어?” 오늘 이 복희씨는 위에는 하얀색과 밑에는 검은색의 고급 슈트를 입고 있었다. 안에 받쳐 입은 빨간색 와이셔츠와 노랑 실크 넥타이 때문에 안 그래도 젊어 보이는 놈이 나보다 어려 보였다. “ 아직요. 복희씨는요?” “ 먹었어.” “ 저 근데 우리 어디가요?” “ 밥 먹으러.” “ 식사하셨다면서.” 슬쩍 말꼬리를 흐리자 이 복희씨는 ‘또 먹으면 안 되냐.’ 하고 되물었다. 어제부터 은근슬쩍 우리 대화를 엿듣는 취미를 가진 새싹과 쌍칼이 ‘레스토랑 예약 했어요.’ 하고 2중 합창을 했다. 고작 밥 먹으려고 첫 출근한 사람을 데리고 나오다니. 참 대책 없다. “ 오늘 복희씨 동생 분 봤어요. 신기할 정도로 닮았던데요.” “ 누구.” “ 이 복귀씨요.” “ 이 복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긴 한데." 복희씨는 너무나 심각한 얼굴로 손등에 턱을 받히며 ‘이 복귀, 이 복귀라.’ 하고 중얼거렸다. 피가 통한 형제라지만 하는 말과 행동, 표정까지 전부 똑같았다. …신기한 일이로세. 이 복귀란 이름 앞에 잠시 뜸을 들이던 이 복희씨가 대뜸 코웃음을 쳤다. “ 무슨 놈의 이름이 그렇게 촌스러워.” 심각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네 이름은? “ 21세기와 동떨어진 이름이군.” “ 어떤 이름이 21세기에 적합한 이름인데요?” “ 내 이름.” 이 복희씨는 정말 양심이 없는 사람이 분명하다. “ 쌍칼 춥다. 히터 좀 틀어라.” 놀랬다. 기름 아깝다고 와이셔츠 깃 세우던 그 복희씨 맞나 싶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은근슬쩍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 웃으면 더 멋있을 뻔 했다. 이 복희씨가 히터 운운한 뒤에도 거의 20분 쯤 더 달렸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조금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 쯤, 쌍칼이 전망 좋아 보이는 큰 레스토랑 앞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 기다리고 있어.” 당연하다는 듯이 꾸벅 인사를 하는 새싹과 쌍칼에게 복희씨는 ‘차 밖에서’ 라는 실로 엄청난 말을 씨불여댔다. 두 사람의 몸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복희씨가 ‘농담이다.’ 라고 덧붙였다. 그는 차안에서 엉기적거리는 내 겨드랑이에 손을 푹 꽂아 넣고 짐짝처럼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뭔 놈의 레스토랑에 입구에 문지기가 세 명이나 서있단 말인가. 복희씨를 보며 ‘오랜만에 오십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대장문지기의 구령에 맞춰 두 놈들이 밥 먹고 인사만 했을 법한 절도 있는 고품격 인사를 했다. 그들에게 복희씨가 대답 차원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도 해야 되나 싶어 가볍게 손을 흔들었으나 그들의 눈빛에 ‘너랑 우리가게는 졸라 안 어울려’ 하는 무시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 들어가자.” 복희씨는 그들의 인사에 산뜻한 마음으로 나는 더러운 마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음식을 시키기도 전에 정신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받으며 신경질적으로 변한 이 복희씨는 잠시만 이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게 벌써 30분전의 일이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게 분명한 레스토랑에 혼자 멀뚱히 앉아 있기가 뭐해서 메뉴판을 펼쳐보자 사람을 농락하는 꼬부랑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덮고 묵념을 올리려는 찰나, 복희씨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이 복희씨의 모습에 일렬로 서있던 종업원 하나가 그의 앞으로 뛰어갔다. “ 손님, 죄송하지만 실내에선 금연입니다.” 표정 없던 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오, 이건 아니야. 하는 외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 뭐?” “ 실내에선 금연입니다. 담배를 꺼주시겠습니까?” “ 좋아.” 심각할 정도로 의외다. 이 복희씨를 잘 안다고는 할 수는 없으나 그동안의 그의 언행과 행동들을 종합해봤을 때 선뜻 ‘좋아’ 라고 대답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종업원을 뚱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 담배를 끄라 말이냐?” “ 예. 손님.” “ 알았다. 쓰레기통은 어디 있는데?” “ 입구 들어오기 전 문 앞에 있습니다. 손님.” “ 그게 무슨 소리야. 더 가까운 데도 있는데. 괜히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지.” …설마.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제발 아니어야 하는데. 종업원은 쓰레기통이 어디 있나 하는 얼굴로 홀 안을 휙휙 둘러보며 ‘쓰레기통이 어디에?’ 하고 복희씨를 향해 물었다. 그의 입고리가 씨-익 올라간다. 이 복희씨가 검지로 종업원 이마를 꾹꾹 눌러 놈의 머리를 때렸다. 어린 종업원이 본의 아니게 뒤로 자꾸만 밀려났다. “ 자 아, 해봐라. 이 새끼야.” 아, 맙소사!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한 번에 말귀를 못 알아먹고 ‘네?’ 하고 되묻는 어린종업원을 답답하게 내려다보던 이 복희씨가 ‘빨리!’ 라고 중얼거렸다. 무언의 강압적인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벌린 종업원의 주둥이에 그는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빨리 집어넣고 손끝으로 입술을 오므려 닫아주기 까지 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영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낄낄 웃으며 ‘혀를 지져버리고 전에 꺼져! 이 쪼다 같은 놈아!’ 라고 덧붙였다. 얼어붙은 종업원이 불쌍했다.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이 복희씨를 돌아서 어디론가 미친 듯이 뛰어갔다. 이 복희씨는 종업원의 입장과 건강상태 따위는 전혀 알바 아니라는 듯이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걸음걸이로 테이블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의 쑥덕거림과 멸시의 시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씹어 주는 내공을 발휘했다. 여러모로 참 대단한 사람이다. “ 애들이 일을 개판으로 해서 문제가 생겼어.” “ 왜요?” “ 오늘 꼭 죽일 놈이 있었는데 놓쳐버렸단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이.” “ 네?” “ 농담이다.” 그의 얼굴은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 나는 애꿎은 유리테이블을 검지로 밀며 말했다. “ 그래서 일은 잘 해결 된 거예요?” “ 내가 하는 일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냐.” “ 네. 제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네요.” “ 다음부터는 그런 의미 없는 질문 자제해라.” “ 네.” 이 복희씨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메뉴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그는 ‘왜, 안 시켰어?’ 하고 물었는데 그 얼굴을 보고 차마 ‘잘 몰라서요.’ 하는 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잘 몰라서 못시켰다고 해.’ 라는 말로 내 얼굴을 단숨에 홍시로 만들어 버렸다. “ 그럴 줄 알고 시켜 놓고 나갔다.”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빌어먹을! 나도 나름대로 민망을 아는 인간이었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 만 바라봤다. 그러자 이 복희씨가 탁자 아래로 내 종아리를 약하게 걷어찼다. 본인은 약한 건지 모르겠지만 맞는 사람에겐 눈물 핑 돌게 아팠다. “ 일은 할 만해?” “ 네. 손님이 굉장히 많아요.” “ 우리나라의 경제가 아무리 흔들려도 절대 망하지 않는 장사가 딱 두 가지 있어. 그게 뭔 줄 아냐? “ 만약 내가 맞는 대답을 해도 자존심 상해서 갑자기 답을 바꿀 놈이다. 크게 궁금하진 않았지만 ‘안 물어보며 죽어’ 하는 오라를 품고 있는 복희씨의 주먹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물었다. “ 뭔데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복희씨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 술장사. 몸 장사.” “ 아….” “ 그 두개를 같이 하고 있는데 돈이 안 벌리겠냐.” 복희씨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극도로 열 받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이 복귀 이 개자식은 장사도 잘되면서 내가 없는 틈에 쥐새끼처럼 상납금을 반이나 줄여!” …상납금이라. 이 얼마나 조폭에게 친숙한 단어란 말인가. 이 복희씨의 철두철미한 금전관리는 친동생 에게도 예외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들고 어디론가 전화해서는 대뜸 ‘좀 있다 이 복귀네 가게로 간다.’ 고 말했다. 전화기를 통해 깍듯이 ‘예, 형님’ 하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새싹이 목소리 같았다. 그는 정말 상납금을 받으러 갈 모양인가 보다. 이 복희씨가 전화를 하는 통에 나는 할 일이 없어져 냅킨을 북북 찢고 있었다. 때마침 탤런트 싸대기를 백대를 치고 남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음식을 들고 왔다. 전화를 하고 있는 이 복희씨와 멍하게 앉아서 냅킨을 북북 찢어대고 있는 나를 번갈라 보는 여자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당연했다. 레스토랑 안엔 남녀 쌍쌍이 아닌 테이블은 우리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 복희씨는 깔끔한 슈트차림이었고 나는 웨이터 복장이었다.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오느라 유니폼을 입고 온 게 눈물 나게 후회스러운 순간이었다. 여자는 본 음식들을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놓고 커피 잔을 어디에 놓을까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통화중에도 여자의 행동을 눈치 챈 이 복희씨가 바로 자기 앞을 가리키며 ‘여기’ 하고 말했다. 단순히 여기 한마디에 여자의 볼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잘 생긴 남자가 좋겠지. 하물며 미인은 용기 있는 남자가 차지하는 게 아니라 돈 있는 남자가 차지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복희씨가 눈썹을 꿈틀댔다. “ 밥상머리 앞에서 한숨 쉬면 복 나간다. 한숨 쉬지 마라.” 그 말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여자가 이를 드러내고 히히 웃었다. 이 복희씨의 시선이 여자에게 옮겨졌다. 그는 ‘알았다’ 소리를 끝으로 폴더를 닫았다. 아직도 실실대며 웃고 있는 여자를 보며 이 복희씨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 뭐가 그렇게 웃기지? 생이 빨을 다 뽑아버리기 전에 빨리 꺼져. 이 호박아.”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는 정말 심각하게 빨리 꺼졌다. ‘맛-맛있게 드세요.’ 그녀의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작은 환청을 일으킨다. 그러나 복희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금은 무심한 듯 보이는 표정으로 양팔을 뒤로 살짝 구부려 기지개를 폈다. “ 안 먹어?” “ 네? 이제 먹으려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그가 잠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 작게 쉼 호흡을 했다. 복희씨 앞에 놓인 물그릇이 눈에 띄었다. 예쁜 사기그릇에 반쯤 담긴 물에는 코스모스 한 잎이 뚱뚱 떠다니고 있었다. 웃겼다. 조금 전 탤런트 뺨을 후려갈길 만큼 아름다웠던 여자가 이 복희씨에게 잘 보이기기 위해 이런 귀여운 짓을 했으리라. 흥! 나는 그다지 목이 마른 것도 아니었지만 오기로 한 번에 원 샷을 했다. 앞니에 달라붙는 꽃잎도 꼭꼭 씹어 먹었다. 창가에서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이 복희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왜 저러지. “ 여기 있던 물 못 봤냐.” “ 그거 제가 먹….” “ 도대체 손 씻을 물이 갑자기 어디로 간 거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죽고 싶었다. 진심이다. 혹시나 이 복희씨가 내가 그 물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까봐 두근두근 했다. 순간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 조금 전 내가 침 뱉을 때만해도 분명히 있었던 거 같은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서양 풍경화에나 나올 법한 바구니에 넘쳐나는 빵 하나를 주둥이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퍽퍽했지만 참고 계속해서 몰아넣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복희씨의 얼굴이 애잔해졌다. “ 빵도 처음 먹어봐?”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먹어봤어요.’ 라고 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는 날 보고 그는 ‘그랬던 거군’ 하고 결론을 지었다. 그리고 내 턱 밑으로 빵 바구니를 가까이 밀며 ‘배터지게 먹어라.’ 하는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지막지한 식욕으로 빵만 먹어 대는 내게 복희씨는 접시를 내밀었다. 접시엔 먹기 좋게 발라진 게살이 담겨있었다. 반대로 테이블 위엔 조금 전까지 몸통 옆에 붙어있던 왕 다리 집게두개가 껍질째 나뒹굴고 있었다. …의외였다. 그가 이렇게 친절할 때가 있다니. “ 먹어봐. 비싼 거니까 맛은 좋을 거다.” …그렇지. 비싼 것들은 대체로 맛이 좋지. 한 숟가락 푹 퍼서 입안에 넣자 사르륵 녹는 게살의 맛이 죽였다. 고등학교 때 공사판에서 일해서 받은 돈으로 솔이 새끼가 사준 ‘꽃 등심.’과 맞먹을 맛이었다. 맛있어서 저절로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날 유심히 보던 복희씨가 ‘게가 상했어? 표정이 안 좋다.’ 하고 말했다. 씹고 있던 게살을 꿀꺽하고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 맛있어서 웃은 거였는데요?” “ 꼭 몇 대 맞은 새끼처럼 웃는군.” 복희씨는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화재를 바꾸자는 생각에 나는 그의 빈 커피 잔 옆에 놓인 나무망치를 가리키며 ‘저게 뭐에요.’ 하고 물었다. 복희씨가 망치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 탁탁.” 그는 게 몸통을 나무망치로 탁탁 두들겼다. 관심 없이 멀뚱히 보고 있는 내게 복희씨는 ‘해봐’ 하고 말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망치를 쥐었다. 복희씨 앞에서 촌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나름대로 조심해서 게 몸통을 살살 두들겼는데 그가 한 것처럼 잘되진 않았다. 그래서 몸 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쉬워 보이는 다리를 사정없이 찍었다. ……아! 순간 눈을 감아 버렸다. 아찔했다. 게 다리에 갑자기 날개를 달고 하늘로 붕 솟아 이 복희씨와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건너편에 앉아 뒷모습만 보이는 사내의 뒤통수를 명중시켰다. 날카로운 게다리가 사내의 목덜미와 머리통에 아슬아슬 매달렸다. 국가대표 양궁선수도 못할 실로 대단한 묘기였다. 복희씨도 그렇게 생각한 게 분명하다. 그는 재밌어 돌아버리겠다는 얼굴로 박수를 쳤다. 급기야 휘파람 불며 ‘잘했어, 또해봐’ 하는 말도 안 되는 칭찬까지 쏟아냈다. 제발 복희씨가 얌전히 입을 닥치고 있길 바랐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남자는 이미 복희씨의 말을 다 들어버린 모양이다.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 복희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낄낄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 사이 걸리면 누구든 죽여 버리겠다는 폼으로 걸어오던 남자가 나와 이 복희씨가 앉아있는 테이블 앞에 섰다. “ 너희야? 이 좆만 한 새끼들아!!” 이 복희씨가 187-9 쯤 될 텐데 네 좆은 그렇게 크냐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라 침묵을 지켰다. 자기를 생각해서 입을 닥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몸무게 100 킬로그램 안팎의 암담한 몸매의 소유자인 남자가 탁자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찍었다. 유리컵과 포크, 나이프들이 일시적으로 흔들거렸다. “ 이것들이 뒤에선 잘만 나불나불 대더니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내가 누군 줄이나 알고 까불었냐? 엉?”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꼬진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탁자 밑으로 폰을 꺼내서 내려다보자 ‘권솔.’ 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액정에 깜박였다. “ 받고 와.” “ 네?” “ 전화 왔잖아. 받고 오라고.” 눈치도 빠른 이 복희씨였다. 그는 턱짓으로 탁자 밑을 가리켰다. 내가 핸드폰을 내려다 본 것까지 다 본 모양이었다. 화내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한 복희씨와 나의 대화에 왕 덩치 놈의 인생이 졸라 구려졌다. “ 이 새끼들이 미쳤나! 죽고 싶어서 아주 발악을 하는 군!” 이 복희씨는 흥분하는 사내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나만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갔다 와.” “ 아니에요. 괜찮은데.” “ 갔다 오라니까!” 복희씨의 말투가 묘하게 강압적이게 변해있었다. 그의 차가운 얼굴에 나는 반강제적으로 일어났다. 한손엔 징그럽게 울리는 폰을 꼭 쥔 채였다. 소란을 피우는 남자와 갑자기 자리에 일어난 나를 본 중년의 지배인이 서둘러 달려왔다. 나는 그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친절한 얼굴로 나를 안내했다. 불안해서 슬쩍 뒤를 돌아보자 이 복희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시익하고 웃으며 입모양으로만 ‘천천히 와도 돼.’하고 속삭였다. 핸드폰은 한번 끊어졌다가 다시 울려대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폴더 뚜껑을 열었다. 전화기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솔이 새끼라고 예상했는데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는 뜬금없이 경원이 놈이었다. 「 너 어디냐?」 “ 그건 왜 물어.” 「 너 혹시 가게로 올까봐. 오늘 빨리 끝났걸랑. 그냥 집으로 오면 돼. 」 “ 알았어. 집으로 바로 갈께. 근데 왜 네 전화 놔두고 솔이 폰으로 전화했냐?” 「 내 폰은 이번 달에 지만이가 게이포르노 다운받느라 돈 많이 나와. 」 녀석의 말에 며칠 전 솔 이놈과 함께 놈들의 신혼 방에 아침 먹으러 갔다가 컴퓨터로 게이동영상 틀어놓고 아침섹스를 놈들의 짐승 같은 모습이 영상처럼 머릿속에 지나갔다. 그걸 돈 주고 다운받았냐고 묻는 내게 지만이 놈은 섹스도 항상 노력이 필요한 거라고 말했었다. 그러면서 어느 자세에 어느 각도로 삽입을 해야 가장 황홀 한지를 꼼꼼히 메모한 수첩까지 보여주었다. 그림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네가 그렸냐.’ 고 묻는 내게 지만이 놈이 귓속말로 ‘경원이가.’ 라고 속삭였었다. “ 알았으니까 빨리 끊어라.” 「 야, 아직 끝지마.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장봐가지고 갈 건데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 …웬일이냐, 네가. 나한테 그런 걸 다 물어보고. 신기한 일이었다. “ 나, 닭발.” 「 넌 어떻게 먹는 것도 너랑 딱 어울리는 것만 좋아하냐. 」 “ 씨. 죽을래? 나 바쁘다. 할 말 없으면 빨리 끊어!” 「 안 그래도 끊으려고 했다. 요금 나온다고 솔이 새끼 졸라 째려본다. 닭발 안 산다. 대신 순대랑 오리고기 사간다! 오케이? 」 “ 그래, 오케이. 고맙다.” 「 야, 참고로 콜센터하고 네 앞으로 들어온 돈으로 사는 거니까 나한테 너무 고마워하진 마라. 집에서 보자.」 이미 전화는 끊겼다. 그럴 줄 알았다. 믿었던 내가 바보였다. 핸드폰을 덮어 잠바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복희씨가 조금 전 ‘천천히 와.’ 라고 말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애초에 내가 돼지 놈 대가리에 꽃게를 맞힌 것이 시발점인데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도 사내대장부가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손을 씻고 느릿느릿 화장실에서 나왔다. 앞으로 열 발짝 정도 걸어갔을까. 나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와 풍경에 굳은 듯 발걸음을 멈췄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거리며 눈에 띄게 웅성대는 종업원들과 돼지 놈의 일행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 그들을 제외하면 홀 안에 북적북적 거리던 손님들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불어 닥쳤다. 그 예감의 중심엔 이 복희씨가 있었다. 그는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전혀 아랑곳없이 지나치게 여유롭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무던한 얼굴로 홀 안을 훑어보는 그의 옆으로 새싹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 형님.” 놈은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형님.’ 한 단어만 뱉어내고 입을 다물었다. “ 조용히 해라.” 그는 이미 손님들이 전부 빠져나가 테이블 태반이 비어있는 한산한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돌아다녔다. 그러던 이 복희씨의 걸음이 멈춘 건 뚜껑 없는 와인이 바닥이 뒹굴어 다니는 것을 보고나서였다. 그는 발끝으로 병을 살짝 걷어차 한손으로 집어 들었다. 이 복희씨의 입술 살며시 말아 올라갔다. 비릿한 웃음이다. 그는 널브러져 있는 똥 돼지 앞으로 다가갔다. 힘없이 축 처진 몸. 중심을 못 잡고 꼬꾸라진 머리. 놈은 이미 여러 번 있었던 구타로 얼굴과 목 부분에 선명한 주먹자국과 붉은 흉터 같은 것이 남아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 복희씨가 빈와인 병을 가슴높이로 치켜들어 똥 돼지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맙소사! 뒤통수에서 검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복희씨는 핏물이 닿지 못하게 살며시 허리를 비틀었다. 그 순간 똥 돼지의 피에 흉물스럽게 적셔진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복희씨는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뭐랄까. 그는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신이나 보인다. 무엇이 그를 신나게 만드는 걸까. 사람을 때린다는 자체가? 아니면 붉은 피가? “ 이렇게 재밌는 게 왜 불법인지 모르겠다. 안 그러냐? 새싹아. “ “ 형님! 경찰이 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 합니다. 분명 손님 중에 한명이라도 신고했을 게 분명합니다!” 걸레를 반대쪽으로 접고 있던 쌍칼도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 형님, 뒷일은 애들에게 맡기고 가게에서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그제야 아수라장이 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똥 돼지의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와인 병. 적어도 다섯, 여섯 개는 넘어 보인다. ……저 병들로 똥 돼지 놈의 머리통을 계속해서 내리쳤던 걸까. 머릿속에 빙글빙글 도는 질문들. 그러나 해답은 간단했다. 병 입구 주위에 붙어있는 핏물과 찢어져 엉켜 붙어 있는 인육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쌍칼과 새싹의 간청을 묵묵히 듣고 있던 이 복희씨가 몸을 돌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다행이 그보다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복희씨는 날 보지 못했다. “ 화장실에 갔다. 이제 가서 데려와.” 쌍칼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다가왔다. …젠장!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나가야지! 제자리에서 일부러 뚜벅뚜벅 발소리를 냈다. 지금 걸어온 것처럼 위장을 하는 거다! 나는 기둥에서 나와 불쑥 쌍칼 앞에 나타났다. 나를 본 쌍칼 놈이 화들짝 놀라 복희씨를 돌아보는 숙성되지 않은 연기력을 뽐냈다. “ 계진씨. 언제 나오셨습니까.” “ 방…방금요.”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망할 놈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게 흘러나왔다. 쌍칼과 서 있는 나를 확인한 이 복희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 도끼새끼 좀 참으라니까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빨리 나가자.” 차에 타라는 그의 명령에 처음으로 거절이라는 것을 하며 나는 걷고 싶다고 말했다. ‘궁상스럽다, 놀고 있다.’ 라고 투덜대면서도 복희씨는 차키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20분 째 시내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왜 걷자고 했을까. 졸라 후회스럽다. 계절이 계절이라 코끝이 시리다 못해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손톱으로 콕콕 찔러봐도 감각이 없다. 바람이 살을 찢고 들어와 뼈를 절단을 낼 것 같은 강추위였다. 그런데도 시내에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이 추위에 이것들은 뭐 하러 요로고 싸돌아다닐까. 그건 아마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럴 테지. 겨울의 상징, 연말의 꽃.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고작 3일도 안 남았다! 작년엔 권솔 하고 둘이서 ( 경원이랑 지만이 놈은 둘이서만 몰래 놀러감) 처량하게 군고구마 구워먹다가 장판 태워 버리고 재작년엔 넷이서 암울하게 술 먹다가 술값내기 싫어서 싸움 나고 그럼 이번에는 또 어떤 짜증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구나. 이유는 모르겠다. 문득 솔이 새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넌 그것부터가 그 새끼 겉모습에 속은 거다.] [이 복희는 두 형제와 비교해서도 또 다르게 유별난 사람이야. 종잡을 수 없는 놈이지.] …설마, 설마 했는데. 녀석들의 말이 사실이었어. “ 추운 겨울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전합시다! 사랑을 나눕시다! 나누면 배가 됩니다!” 상념에 빠진 생각을 단박에 가르며 등 뒤로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의식중에 몸을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루돌프 복장의 중년 남자와 그의 옆에서 플라스틱 종을 딸랑딸랑 흔들고 있는 꼬마아이 세 명이 보였다. 아이들은 루돌프를 따라 ‘사랑을 전해 주세요.’ 하고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그 중 개구지게 생긴 남자아이가 루돌프의 코를 잡아당기는 못 땐 짓거리를 하기 했지만 대체로 보고만 있어도 훈훈해지는 모습이었다.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순간 머리에 빨강두건을 쓴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졸라 난감하게 돼버렸다. 나는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걸어오는 나를 확인 한 루돌프 씨의 구슬픈 눈이 빤짝였다. 열심히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나오는 거라곤 오천 원짜리 하나와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뭐든 마음이 제일 중요한 법이지! 나는 잠바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돈이란 돈은 전부 긁어 자선냄비 안에 넣었다. 루돌프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마음이 중요하다고 여긴 건 나뿐이었다. 꼬마 천사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어린것들이 더 무섭다고 큰돈을 기대했나보다. 어쩌지, 어쩐다! 천사들의 실망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 시발.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좆나 놀랬잖아. 추운데 엿 좀 먹어봐라 이거냐?” 어느새 다가온 이 복희씨가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성을 냈다. 루돌프 아저씨가 이 복희씨를 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 사장님!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해 주세요! 작은 사랑이어도 좋습니다!” 이 복희씨가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대뜸 고함을 쳤다. “ 이보쇼! 작은 사랑이든 큰 사랑이든 불쌍한 이웃이 있어야 돕든 말든 할 것 아니오!” “ 네?” “ 말이 그렇지 않소? 나한테 아는 이웃이 없는데 뭘 도우라는 거요. 무작정 도와달라고 하면 다라고 생각하시나?” 루돌프 아저씨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얼마나 고개 짓을 열심히 하는지 빨강 루돌프 코가 흔들거릴 정도였다. “ 사장님!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제 말은 삶이 무게에 지쳐있는 안타까운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을….” “ 이 양반 참 답답하시네.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안타까운 이웃이나 삶의 무게나 나불나불 대는 이유가 한 가지 밖에 더 있소?” …정말 이 사람 대책이 없다. 여기서 화를 내면 뭘 어쩌자는 건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고 같은 일행이라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급기야 천사들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어렸다. 천사들을 올망졸망 모여 이 복희씨를 지옥에서 올라온 도깨비쯤으로 부들부들 떨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 앞이라고 자신의 성질을 죽일 이 복희씨가 아니었다. “ 그래서 결론은 얼마를 넣어 달란 말을 하고 싶은 거요?”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루돌프 씨를 잡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순간 분위기 파악 을 상실한 아저씨의 빨간 코가 툭 떨어져 바닥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열심히 굴러가던 코는 재수 없게도 이 복희씨의 발밑에 멈춰 섰다. 빨강두건 소녀가 코를 주우러 가다가 이 복희씨의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루돌프 아저씨가 두건소녀를 토닥이며 이 복희씨에게 말했다. “ 천…천원이라도 저희에겐 고맙습니다. 성의만 보여주시면 족합니다.” “ 천원? 이웃이고 지랄이고 읊어대기 전에 그렇게 말 했으면 좀 좋아. 기다려 보시오!” 그는 양복안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두툼한 지갑을 본 천사들이 깜짝 놀라 악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천사가 아니라 은근히 속물근성이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꺅꺅대는 아이들의 고함소리에 이 복희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들 안 닥칠래!’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는 놀라서 단체로 딸꾹질을 하는 천사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 너희들만 사냐!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들이야. 무슨 놈의 애새끼 들이 사람을 배려할 줄을 몰라!’ 라고 말했다.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복희씨는 악마가 틀림없다. 이 복희씨는 결국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자선냄비에 구겨 넣으며 루돌프 아저씨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 구십구만 구천 원이나 거슬러 주시오.” “ 예?” “ 이제 돈 먹었다고 오리발 내밀자 이거요? 아까 그렇게 말했지 않소! 천원이라도 성의를 보여 달라고. 나는 천원으로 성의를 보였으니 나머지 돈은 거슬러 줘야 할 거 아니오!” 루돌프 씨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이 복희씨에게 말했다. “ 선…생님. 그…그건요.” “ 듣다 듣자 하니 내가 왜 당신 선생이오!” 그는 신경질 적으로 구세군 냄비를 걷어찼다. 통 안에 들어가 있던 동전들이 정신없이 찰랑찰랑 춤을 추며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동전 소리에 놀란 (돈을 좋아하는) 천사들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꼬마들의 우는 모습에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큰소리로 복희씨에게 소리를 질렀다. “ 제발 그만 좀 해요!” 복희씨가 순간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 봤다. 나 역시 지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 그만하라고요!” “ 너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냐! 고작 저 루돌프 새끼 때문에 감히 나한테 대들어?” 그는 내가 루돌프아저씨 편을 들었다고 혼자 착각하고 자선냄비를 더 힘껏 걷어찼다. 쾅쾅 울려대는 철 깡통소리에 천사들이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복희씨에게 진심으로 화가 났다. 신나게 사람 패고 와서 어디서 성질이야! “ 내가 빌린 걸로 할게요.” “ 뭘?” “ 구십구만 구천 원. 월급 받으면 갚을게요. 지금 돈 때문에 화를 내는 거잖아요.” 화가 풀릴 거라 예상했던 이 복희씨는 잡아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걸로 분노를 대신했다. 말을 해 놓고 차마 그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묵묵히 땅만 보고 있자, 이 복희씨가 무뚝뚝하게 말씀하셨다. “ 난 돈 되는 일이면 뭐든 다 한다. 사채든 주식이든. 수단과 방법에 따라선 그게 불법이든 그 보다 더 험한 짓이든 또는 그걸 뛰어넘는 더러운 짓이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또 저렇게 뜸을 들이실까나. “ 그런 놈한테 돈을 빌리는 게 어떤 일인지 알고나 있으라고 하는 말이다.” “ 나는 그대로 복희씨를 아니까 돈을 빌려달라는 거잖아요. 그거랑 다른 문제야.” “ 너는 나의 어떤 점을 보고 나를 안다는 말하는 거지? 그거 참 궁금해지는군.” “ 그야 당연…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요!” 진짜다. 가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내게 등을 보이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아니 저 놈이! 이렇게 당황스러울 때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루돌프 아저씨에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고 말하고 서둘러 복희씨 뒤를 쫓아갔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더니 내가 딱 그 짝 낫다. 걸어가는 복희씨를 달려가는 대로 못 잡고 있다. 빌어먹을! 갈수록 차이가 벌어진다. 많은 인파속에 이 복희씨의 뒷모습조차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계속 쫒아 가봤자 찾지도 못한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무작정 꽥 소리를 질렀다. “ 이 복희씨!!” 그는 분명히 내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전혀 안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동정의 눈빛으로 ‘쟤 좀 봐, 주름 생기니까 졸라 도라에몽 닮았다!’ ‘어디, 어디.’ ‘이 야-똑같다, 똑같다.’ 따위의 별 영양가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생각 같아선 저 년 놈들 앞으로 당장 쫒아가서 ‘야! 내가 어디가 도라에몽 닮았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우선은 이 복희씨를 불러야겠기에 꾹 참았다. “ 복희씨! 미안해요!” 졸라 미안하지 않다. 하지만 우선 그렇게 외쳤다.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던 복희씨의 긴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정-적.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짜 죽을 맛이다. “ 대들어서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멈췄다. 드디어 이 복희씨가 유턴을 해서 내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생각보다 더 단순한 놈이었잖아! 생긴 게 별나게 깐깐해서 그렇지 별거 아니었어! 내 턱 위에 멈춰선 복희씨가 ‘ 나 좀 달래주겠니.’ 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불러 놓고 나니 왠지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다. 우물쭈물 거리는 내 행동이 답답했는지 그는 ‘뭐!’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돈 빌려주는 김에 조금만 더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빨리 갚을게요. 대신 무이자로 좀 안 될까요?” “ 사람 불러놓고 고작 한 다는 말이 그거냐?” “ 고작이 아닌데요. 저는 지금 급하거든요. 좀 빌려주세요! 네?” “ 기가 차네.” ‘꺼져.’ 또는 ‘싫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이 복희씨는 지갑을 꺼내 내 코앞에 내밀었다. 멀뚱히 그의 손에 들인 지갑을 보고 있는데 복희씨가 성의 없이 말했다. “ 돈 안 받을 건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지 지갑을 빌려달라고는 안 했는데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 오만원만 빌려주면 되는데요.” “ 만 원짜리 없다.” “ 그럼, 십만 원짜리 한 장만 주세요.” “ 십만 원짜리도 없다.” 그의 얼굴엔 십만 원 따위의 푼돈은 절대 상종 못해 하는 자만심이 깔려있었다. “ 그럼 어쩔 수 없겠네요. 많이 빌리면 제가 갚을 수가 없어요. 이제 됐어요.” …콜센터에서 한 달에 받은 월급이 76만7800원이였다. 그것도 지금으로선 아껴야 할 돈. 더는 빌릴 수 없다. 이 복희씨는 분명 구십구만 구천 원도 꼭 받아낼 위인이다. 어쩔 수 없지.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몸뚱이가 순식간에 원래 자세로 되돌아가 있었다. 실로 놀라운 속도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데 정수리 위로 분노로 일그러진 복희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져가.” “ 아니에요. 이제 됐어요.” “ 좋은 말로 할 때 가져가!” 그는 내 후줄근한 잠바 주머니에 무턱대고 지갑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살짝 벌어져 있던 나의 앵두 같은 입술을 오므려 닫아주었다. 이 복희씨는 화난 거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거 같기도 한 어중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 지금 개기냐?” “ 아니에요! 그럼 뭐 어쩔 수 없네요. 오만원어치만 쓰고 지갑은 그대로 돌려 드릴게요.” 고개를 까닥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한 이 복희씨에게 ‘기다려 주세요.’ 라고 말하고 나는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뛰어가는 나를 얼빠진 놈으로 여기는 그의 눈빛이 심히 마음에 걸렸지만 조금 전까지 눈여겨 봐왔던 은행 옆으로 계속해서 달렸다. 은행 옆엔 리어카 장수들이 밀집해 있었다. 귀엽고 아담한 봉고도 있다! 알록달록한 천막을 이용해 헝겊처럼 뒤집어 씌어놓고 그 안에 목도리, 장갑, 모자 따위의 소품들을 팔고 있는 장사꾼들 눈에 띈다. 나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덥석 손부터 잡고 좌우로 빙빙 흔들어댔다. “ 총각! 와줘서 고맙소!” 손님 하나에 얼굴에 꽃을 다는 걸 보면 어지간히 장사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근데 어째 손님들이 없을 만도하다. 이곳저곳 푹푹 쌓인 먼지. 70-80년대에나 쓰고 다녔을 법한 군밤 모자와 인조 여우목도리, 아톰 머리와 마징가제트의 몸통이 판박이 되어 있는 장갑들. 그에 반에 삼십대로 추정되는 젊은 남자가 하는 곳은 모든 것에서 시대를 앞서 나가고 있었다. 장갑의 손끝에 꽃봉오리가 달리다니! 그 쪽으로 가고 싶다. “ 할머니 꼬마 애들이 쓸 건데요. 장갑 있어요?” “ 아! 그 정도는 있소! 몇 개나 필요 하쇼?” “ 세 개요.” 내말에 할머니는 ‘졸라 땡잡았네.’ 하는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타이어가 구멍 난 리어카 안을 한참동안 뒤적여 썩 예쁘지는 않은 장갑 세 개를 꺼냈다. 내가 ‘얼마냐고.’ 묻자 할머니가 ‘두개 값만 내면 하나는 서비스로 가시고 가쇼!’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팔면 남는 것도 없겠다 싶어서 그냥 세 개 값을 그대로 드리겠다고 했으나 할머니는 무조건 ‘괜찮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 했다. ……이렇게 되면 당초 생각한 것보단 예산초과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산 김에 집에 있는 식충이 새끼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사줘야지. 자고로 크리스마스는 기쁜 날이니까! “ 26살의 남자들이 하기에 적당한 목도리 두개랑 모자 하나만 주세요.” “ 옹? 왜 선물하시게? 친구들 거요?” 친구들이요? 아니요! …내 인생에 피라미 새끼들 같은 놈들이죠. “ 뭐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 선물할 친구가 세 명이오?” “ 네.” “ 그럼 내 모자하나 서비스로 드리리다.” 경원이 같은 놈이라면 ‘아 싸! 땡잡았다.’ 춤이라도 췄겠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많이 받았다 생각하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자는 사람이다. 빚을 진 기분이다. 꼭 갚아줘야 할 빚. 그래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 아니에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주시면 남는 것도 없겠어요!” “ 친구가 세 명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럼 부족하지 않소.” “ 맞는데요? 세 명이이니까 모자 하나, 목도리 두 개.” “ 그러니 부족하단 말이오. 사람이 넷인데 왜 세 개만 사는 거요! 줄 때 그냥 받아 가시구려.” 할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훌쩍훌쩍 세어 나오던 콧물을 ‘드르렁’ 대며 목으로 삼켰다! …으윽! 최악이다. 할머니는 리어카 위에 주섬주섬 꺼내 놓은 꼬마들 장갑을 넣은 봉지를 질끈 묶고 성인들이 할 수 있는 목도리 두 개와 실로 뜬 비니 모자 두 개를 다른 봉지에 싸서 끈을 꼭꼭 묵었다. “ 본인 건 왜 안사시오? 거울 안 보오? 코가 빨갛게 얼었소. 또 손은 어떻고! 꽁꽁 얼어서 아주 얼음장이네. 감기 걸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소! 내가 있어야 내 친구도 있는 거요. 총각은 생긴 것만큼 선한 사람이오! 구세군 냄비에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줄 때부터 내 알아봤지. 요새 그런 사람 드물다오. 하늘에 고마워하시오.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것도 큰 복이니까.” 천사들 앞에서 지지리 궁상을 떨 때부터 보고 있었나 보다. 이 할머니! “ 아니에요! 전 사실 완전 싸가지 없고, 성질 더러운 놈이에요!” “ 자신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선한 거요. 아시겠소?” 추운 날씨 때문일 것이다. 날씨 때문에 마음이 시리다고 생각했다. 리어카 쇼핑은 합쳐서 고작 6만 5천원이 나왔다. 딱 봐도 삼분의 일은 깎아준 게 티가 났다. 팔아주려고 한 건데 도리어 얻어 가는 기분이었다. ‘또 오시오.’ 하고 인사말을 건네는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하고 ‘많이 파세요.’ 라는 말만 남긴 채 나는 봉지 두개를 들고 돌아섰다. ……정말 이상한 할머니야. 추운 날 하루 종일 밖에서 달달 떨고 있어봤자 얼마 벌지도 못했을 텐데 왜 손해 볼 장사를 하는 걸까. 당신은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일하고 있었으면서 말이야. 일부러 거스름돈을 남겨주는 기분은 어떨까. 아깝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솔아, 나도 늙으면 내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 있을까. 가슴 속에서 그렇게 묻고 있었다. 다행이 루돌프 아저씨와 천사들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딸랑딸랑 울려대는 종소리도 그대로다. 다만 아저씨의 빨간 코만이 귀퉁이가 움푹 패어 찌그러진 채 변해 있었다. 복희씨가 밟은 다음부터 저렇게 되었으리라. 내가 다 면목이 없구나. 덜컥 사오긴 사왔는데 어떻게 주지? 코앞에 와서 쭈뼛쭈뼛 거리고 있으니 애꾸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다. “ 아까 그 남자 분! 뭐 잃어버리고 간 거라도 있어요?” 루돌프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뜸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루돌프 씨와 천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손에 걸려 있는 봉지로 향했다. “ 뭐에요?” “ 장갑이에요. 손이 시릴 거 같아서요. 애기들이요.” 애기들이요. 라는 말은 안 했으면 혹시 의심할 수 있는 멘트였다. 말하고 나서 쑥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루돌프 씨가 검은 봉지와 천사들을 번갈아 보며 그제야 ‘아!’ 한숨 섞인 탄성을 내질렀다. 아저씨의 팔에 붙어서 아이들이 ‘뭐에요!’ ‘먹을 거다! ‘ 하고 나이답게 열심히 꽥꽥거렸다. 내가 빨리 결혼만 했으면 저만한 아이가 있을 텐데. 너희들 참 눈에 안 아플 정도로 귀엽구나. “ 아이들 나눠 주세요. 싼 겁니다. 조~오기 리어카에서 샀습니다.” “ 아닙니다. 지금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구세군 생활 12년 만에 선물은 처음이에요!” “ 네. 그…그렇군요. 저도 기쁘네요. 처음이라 왠지 기념 적이라고나 할까.” 루돌프 씨가 머리통이 땅바닥에 맞닿을 정도로 심도 있는 구십도 인사를 펼쳐보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사들이 뭐 재밌는 거라고 그걸 고세 따라하며 킥킥댔다. “ 고맙습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하-하하. 별것도 아닌데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 가시려고요? 장갑 잘 쓸게요. 아이들이 이번 겨울은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거 같아요. 덕분입니다.” 오버 한다. 저 교과서적인 말투! 나는 괜히 바쁜 척 손목시계를 힐끔대며 ‘약속이 있어서요.’ 라고 둘러댔다. 근데 이게 웬걸. 손목시계는 있지도 않았다. 시계 줄 자국을 보고 시간을 보며 생 쇼를 부린 건가. “ 아저씨!” 이 복희씨가 기다리고 있는 전봇대로 향하는 내 발길을 붙잡은 건 빨강두건 소녀였다. 아이는 내 유니폼 바지를 질질 잡아당겨 ‘아저씨, 아저씨.’ 하고 속삭였다. 나는 꼬마 소녀의 눈에 맞춰주기 위해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 왜 그러니. 빨강모자야.” “ 아저씨! 이거 먹어.” 빨강두건 소녀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물러터진 초콜릿이었다. 아이는 내 손바닥 위에 초콜릿을 올려두고 루돌프 씨의 옆으로 콩콩 뛰어갔다. 콩콩 뛰다니 귀엽다. 나도 콩콩 뛰어볼까. 생각이 짧았다. 콩콩 뛰는 것도 나이제한이 있을 거 같아 그만뒀다. 뭐든 나이가 걸리는 세상이다. “ 아저씨. 메리 크리스마스! “ 응! 메리 크리스마스.” 복희씨는 짜리몽땅한 담배꽁초를 입으로 후 날려버리고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들고 있는 게 뭐냐.” “ 목도리하고 모자에요.” “ 그런걸 뭐 하러 돈 주고 사냐.” “ 춥잖아요! 그리고 겨울이니까요.” “ 대가리가 시리면 머리카락을 기르면 되고 손이 시리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된다.” “ 제가 하려고 산 게 아니거든요.” 복희씨는 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봉지를 낚아채갔다. 그리고 리본모양으로 묶인 손잡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풀면 쉽게 열릴 텐데 굳이 달칵달칵 손장난을 치고 있던 라이터로 봉지에 불을 질러버렸다. 봉지가 불타올라 그을림이 되어 떨어졌다. 그러자 안에 있던 목도리 두 개와 털 비니 모자가 드러났다. “ 다 싸구려네. 이 많은걸 뭐하려고? 너 개 키우고 있냐.” 개 = 녀석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 친구들 거예요. 일종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나 할까.” “ 나는.” “ 네?” “ 나는 뭐 없냐.” 없다. 네 선물 따위 생각도 안 했는데. 그는 그걸 알고 미리 선수 쳤다. “ 없다고 하면 죽인다.” 진짜 죽일까? 설마. 아니야. 저 새낀 죽인다면 진짜 죽일 수도 있는 놈이야. 까불다가 아까 똥 돼지 꼴 나지 말자. 자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리하여 나는 이 복희씨 선물을 단숨에 생각해냈다. 타고난 순발력과 재치를 갖춘 내가 은근히 자랑스럽다. “ 복희씨 선물도 당연히 있지요! 내가 그렇게 인정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어요?” 복희씨는 깔깔깔 웃고 싶은데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 때문에 이를 드러내고 웃진 못하고 한 쪽 입 꼬리만 들쑥날쑥 거렸다. 내가 주먹질만 잘했으면 뒤통수를 팍 쳐주고 ‘야, 사내새끼가 시원하게 좀 못 웃어봐라.’ 소리를 치고 싶을 정도로 레벨에 떨어지는 미소였다. “ 그건 바로 두-구-두-구-두-구!” 복희씨가 픽 웃었다. 느껴진다. 그는 나를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내가 이런 요란한 짓거리를 했을 때 웃어준 사람은 이 복희씨 하나뿐이었다. 친구라는 것들은 다들 주먹을 날려 왔기 때문에. “ 까불지 말고.” “ 바로바로!! 김 계진. 저에요!” 나는 손바닥을 활짝 펴서 턱 밑에 받쳐 들고 여차하면 ‘나 잡아봐라.’까지 무난하게 보여줄 예정이었다. 물론 이 복희씨가 호응이 좋았다면 말이다. “ …….” 그의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잘 못 생각했다. 그는 나를 전혀 귀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겨워 하고 있다. “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내말을 끝으로 우린 10분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겨우 십분 인데 그 짧은 시간동안 복희씨는 담배 한 갑을 다 피우며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사람처럼 깊은 무력감을 나타냈다. 나는 그 앞에 멀뚱히 서서 짧은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 요새 버버리 목도리에 왜 말 타는 모양이 붙어 있을까.” 모자와 목도리를 주물럭거리다 무심코 내려다 본 이 복희씨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가 들춰내는 모자 안쪽에도 보였다. 사고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상표에 무려 ‘빈팔’ ‘버블이’ ‘펄럭’ 이라는 텍이 나부꼈다. 다행히 그는 목도리와 모자에 더 이상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복희씨는 봉지 없이 너덜너덜한 그것들을 내 가슴에 떠넘기다 시피 밀쳐버리고 빈 담배 값을 바닥에 던지며 중얼거렸다. “ 혼자갈 수 있지?” “ 네?” “ 급한 약속이 생겨서 이만 가봐야 될 거 같다. 데려다 줄 시간이 없어. 네가 사는 개집 아니, 너희 집까지.” 당연하지. 26살이나 처먹고 집하나 못 찾아 가겠냐. 복희씨. “ 당연하죠. 걱정 마세요.” “ 착각도 유분수다. 누가 너 걱정된다고 그러디?” 성질 같았으면 저 주둥이에 성냥불을 그어버리고 싶다. 그는 바닥에 버린 담뱃값을 구두 뒤꿈치로 꾹 밟으며 말했다. “ 아까 준 내 지갑 가지고 있지?” “ 아, 죄송해요. 드린다는 걸 깜빡하고.” 잠바 지퍼를 열고 지갑을 꺼내려 했으나 복희씨는 ‘됐어, 가져가.’ 라고 말하며 내 행동을 제지했다. ‘왜요.’ 하고 묻는 내게 그는 ‘ 궁상떨지 말고 택시타고가.’ 라는 말로 날 1초 동안 감동스럽게 만들었다가 ‘하긴 얼굴 보면 잡아가지도 않겠지만. ‘ 이란 말로 단박에 내 기분을 절벽 아래로 추락시켰다. 망할 자식. “ 내일 1시 넘어서 가게로 갈 거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그는 ‘이복귀가 괴롭히면 언제든 말해.’ 하고 속삭였다. 그 말에 날 괴롭히는 건 ‘네 동생이 아니라, 너야!’ 라고 씨불여 주고 싶었으나 나의 목숨은 하나였기에 나라도 소중히 다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말대답을 못 했단 뜻이다. “ 일하는 거에 비해 돈이 많다. 덜렁대다가 잘리지 말고 요령껏 잘 붙어있어라.” “ 네. 걱정하지 마세요.” “ 네 자체가 걱정덩어리다.” …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라이터 뚜껑을 못살게 구는 이 복희씨를 보며 문득 어제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했지만 물어보는 것 자체가 그의 생활의 한 부분일 터, 주제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싶어 꺼렸던 것이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는 법. “ 저기요.” 복희씨가 앞으로 걸어다가 말고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 왜.” “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런데 화내실 예정이면 안 물어보고요.” “ 네가 안 물어보면 화낼 예정이다. 말이나 해.”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 장미라고 아세요? 애인인가요?” 복희씨는 뭔 자다가 봉창 후벼 파냐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눈에서 레이저 빔이 나올 정도로 매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 걘 또 누구냐. 사람 이름이 장미냐?” “ 모르세요? 정말 장미를 몰라요?” 그는 내 질문이 상식 밖으로 너무 유치해 같이 못 놀겠다는 듯이 말했다. “ 몰라. 내가 알 게 뭐냐. 그리고 나 바쁜 사람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택시타고 집에나 가.” 달의 요정을 모르다니. 그렇다면 달의 요정은 짝사랑 중? 그 새끼도 참 심각하구나. “ 네. 알았어요.” “ 오냐.” 복희씨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다시 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 택시타면 졸지 마. 요새 대가리에 히로뽕 맞은 새끼들 깔리고 깔렸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맞는지 이상한 놈이랑 합석을 하자고 하지는 않는지 잘 살피면서 다녀라.” 아! 복희씨 같은 사람을 조심하면 되겠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러다 1분 간격으로 멈춰 섰다,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걸음을 멈출 때마다 잊고 있던 말들이 생각나는 모양인지 나를 힐끔거리며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나도 걷기 시작했다. 집에 올라오기 전 큰길가에 모여 있는 만두가게 중 유일하게 한곳에서만 불이 켜져 있었다. 문득 만두가게를 보자 고기만두에 미치는 지만이 놈 생각이 났다. 육식 동물들은 만두도 고기만두 밖에 안 먹는다. 김치만두 따위는 초식동물에게나 귀한 법. 놈은 참치김치찌개도 안 먹는다. 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만 먹는다. 제일 좋아하는 김밥, 소고기 김밥. 카레에 고기 없으면 안 먹음. 잡채에 고기 안 들어가 있으면 거들떠도 안 봄. 피자 시킬 때 불고기 피자 안 시키면 분노함. 3일 안에 고기 한번이라도 안 먹으면 금단 현상과 일시적인 착시 현상 일으킴. 5일 지나면 닥치는 대로 갈아엎고 경기 일으킨 뒤 혼절. 7일 지나면 사망. 그런데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일주일을 넘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놈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기위해 만두 가게에 들어갔단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젊은 남자 손님을 보고도 잠옷 차림 그대로 나온 주인아줌마가 얼마 줄까 하고 물었다. 2인분씩 따로 포장해달라고 말했다. 아줌마! 아무리 내가 선하게 생겼어도 잠옷은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따지고 들자 그녀는 가게와 연결되어 있는 집을 가리키며 ‘우리 남편도 처음엔 안 좋은 생각으로 들어왔다가 여기에 정착하고 사는 거라오, 후후!’ 하고 이유도 없이 내 등짝을 졸라 강하게 후려갈겼다. 여자들은 약하지만 아줌마는 무섭다더니. 쯧! 만두 두 봉지를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녹슨 대문을 열고 우측 정면 보이는 경원이네 부엌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뜬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여과 없이 지만이놈의 정력이 발휘되는가 보다. 녀석들이 듣지 않게 조심히 철색 밥상위에 만두봉지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닫혀 있던 문이 드르륵 열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우람한 알몸의 지만이 새끼였다. “ 왜 이제와. 걱정 되서 죽는 줄 알았다” “ 걱정? 넌 양심 좀 있어봐라. 그리고 웬만하면 옷 좀 입지 그러냐.” “ 귀찮게 뭐 하러, 어차피 또 벗을 건데.” 그래. 이 정력 놈아 밤새도록 닳고 닳을 때까지 응응 이나 해라! 역시나 알몸으로 비단이불에 뒹굴 거리고 있던 경원이 놈이 나를 보고 후다닥 달려 나왔다. 녀석은 지만이가 집고 있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쭉 빼내고 살쾡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암울하기만 했던 녀석들의 맨 몸뚱이도 이젠 무덤덤하게 보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걸 보면 시간이 약이란 말이 정답인 모양이다. “ 만두 사왔다. 지금 배 안고프면 아침에 먹어라.” “ 어. 근데 어쩌느냐. 우린 오돌 뼈 다 먹었는데.” “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이 자식아!” 나는 보고 있던 경원이 놈이 지만이 새끼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물어뜯었다. 가려운지 지만이 놈이 킥킥 웃어댔다. 새벽에 참 쇼들 하고 자빠졌다. “ 봐봐. 쟤, 기대도 안 했다고 하잖아. 내가 다 먹자고 그랬지? 시발, 괜히 남기자고 그래서! 아까워 죽겠네.” 지만이 놈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 계진아. 너희 부엌 가봐. 냉장고에 넣어 놨다. 솔이 새끼가 안 먹었다면 있을 거다. 가서 먹어.” “ 그래. 알았다. 나는 이만 간다. 빨리 자라.” “ 응.” “ 스톱!” 나는 돌아섰던 몸을 다시 녀석들에게 돌려세웠다. 여우같은 경원이 놈이 볼록한 내 배를 발등으로 콕콕 찍으며 말했다. “ 어떤 새끼 씨를 품었냐. 애비 없는 새끼를 낳을 작정이냐? 누구냐! 이실직고하렷다!” …아!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었지. 나는 지퍼를 열고 안에 있던 봉지를 꺼냈다. 이미 복희씨가 태워버려 반 이상은 날아간 형태를 알 수 없게 변한 비닐이었다. 참새 새끼들처럼 방문턱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짹짹대는 두 놈들이 멀뚱히 나를 올려다보며 ‘오오.’ 감탄사를 연발했다. “ 뭐냐. 먹을 거냐?” “ 크리스마스 선물! 사양 말고 받아라.” 봉지 채 녀석들 앞으로 던져주웠다. 단숨에 봉지를 공중분해하고 목도리와 모자를 꺼낸 경원이 놈이 ‘뭐냐, 걸레를 뭐 하러 돈 주고 샀냐.’ 며 내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 놓았다. 나는 저것들에게 무슨 좋은 말을 듣겠다고 선물을 샀을까. “ 비니는 대가리 작은 애들만 어울린다더라. 지만아 너는 쓰지 마라!!” 지만이 놈이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원이 놈이 ‘야. 좆뱅이 좆나 덜렁거리잖아. 가만히 앉아있어.’ 라고 녀석을 제지했다. 상식적으론 참으로 민망한 대사였으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지만이 놈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대답하기를. “ 미안! 미안. 깜빡했다.” 나는 잠시 아가리에 묵념을 고했다. 경원이 놈이 열심히 씨불였다. “ 생각해봐라. 너는 쑤시는 쪽이라 상관없지만 네 좆뱅이 받는 나한테는 네 자지가 차가워져 있으면 내 속도 춥단 말이다. 만날 말해도 모르냐. 주의 좀 해라, 네가 깔리기 싫으면. 알았냐.” 자-자 뭐? 쟤네들 정말 싫다. “ 알았어. 24시간 적절 온도를 유지하고 있으마.” 지만이 놈은 방구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내고 뜨뜻한 방구석에 물건을 정신 사납게 비벼댔다. 보고만 있어도 정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경원이 놈은 그런 저질스러운 노력을 보이는 지만이 놈이 기특한지 두두두 하고 달려가 맨 엉덩이에 뽀뽀를 하고 지랄을 해댔다. 가렵다면 서도 좋아 죽는 지만이놈이 거대한 몸을 비틀고 발광을 하자 놈의 무식하게 큰 물건이 드러났다. 경원이 새끼는 녀석의 분신 끝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며 ‘카와이, 졸라 카와이!’ 하고 씨불여 댔다. 진심으로 토할 거 같았다. 작년에 먹었던 라면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빨리 나가자! 재빨리 문을 열었다. 등 뒤로 경원이 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일 아침은 우리 집으로와.” “ 왜?” “ 오빠 말씀하시는데 일일이 토 다는 거 아니다.” 어느 새 놈은 비니를 쓰고 있었다. 싫다는 놈이 잘만 쓴다. …올 누드에 비니라. 성냥 같다. “ 왜? 맛있는 거 있어?” “ 아니. 너희 집에 밥 없거든. 지만이가 다 먹어서.” 그럼 그렇지. “ 알았다. 제발 좀 적당히 하고 자라.” 닫히는 문틈 사이로 지만이 놈이 ‘내 사전에 적당히는 있을 수 없다!’ 라고 악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정체불명의 악기소리에 놀라 신발도 안 벗고 방문부터 열어젖혔다. “ 왔냐.” 문소리에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권솔 놈이 내게 건넨 첫 인사였다. 녀석보단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방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분산됐다. 방바닥의 삼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고 넉넉하게 깔려 있는 신문지 위에 세숫대야에 흘러넘치는 물, 휴지 묻은 쇠 젓가락, 시커먼 구정물이 젖어 있는 흰 수건 등이 옹기종이 모여 있었다. 그 오물단지 속에 놈이 있었다. 놈은 가야금 하나를 어깨에 메고 꼴 같지도 않은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수건으로 줄을 다 닦았다 싶으면 젓가락으로 튕겨보고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는 마무리 작업을 하는 녀석에게 장인 정신의 열정이 살아 숨 쉬는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끈기 없기로 소문난 놈이 땀을 흘리며 가야금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참 별일이다. 나는 우선 신발을 벗은 뒤 만두봉지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 너 저녁 뭐먹었냐?” “ 소고기 김밥 네 줄하고 오돌 뼈랑 순대.” “ 내일 병원 가봐라. 광우병 아니면 조류독감 걸렸다. 확실해.” 솔이 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질질 눈을 흘겼다. “ 복귀 새끼가 요즘에 제대로 까고 있다. 어제 황진이 보고 가야금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지랄하더라.” “ 황진이? 황진이면 대부분에 하지원에에게 빠져야 되는 거 아니냐? “ 좆 달린 정상적인 놈은 거의 그렇지. 하지만 이 복귀는 정상인이 아니잖아.” 그 말에 심각하게 공감한다. 권솔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엄지손가락으로 가야 금줄을 팅 하고 튕겨보았다. 둥-둥 울리는 줄을 내려다보며 눈썹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놈이 나를 매섭게 꼴아보더니 ‘손대지마! 줄맞추느라 좆 빠지는 줄 알았단 말이다.’ 라며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꽥댔다. “ 야. 그래도 다행이다.” “ 시발. 밤새도록 가야금 줄 맞추고 있는데 뭐가 다행이냐.” “ 반대로 춤에 미쳤다고 생각해 봐. 백무가 어떻게 죽었냐. 학춤을 추다가 죽었잖아. 이 복귀 사장님도 충분히 절벽 위로 올라가서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어. “ 놈이 뿡뿡 콧방귀를 꼈다. 그리고 이 복귀 사장 앞이 아니란 이유로 마음 놓고 그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 걱정마라. 그 자식은 지 목숨 줄은 좆 나게 챙기니까. 뭐, 자기 대신 다른 놈 하나 잡아다 학춤을 추게 만들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 하긴.” “ 짜증나 타 죽겠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냐고! 빌어먹을.” …티브이가 한사람 인생에 이토록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구나. 그래서 시청자의 의견이 필요한 거지. 잠시 숙연해 졌다. 그러다 가야금 닦기에 혼이 나간 듯 열중해 있는 권솔 앞에 만주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예상처럼 녀석의 눈이 흔들흔들 춤을 췄다. “ 만두다. 먹어라. 식충아.” 놈이 만두 봉지를 잡아 뜯으며 말했다. “ 다꽝은?” “ 다꽝이 뭐냐. 못 배운 티 내냐?” “ 새끼 앙탈은. 알았다. 다꽝이라고 안 하면 될 거 아니냐. 야, 아르바시랑 찌깨다시는 없냐?” 재미 들린 모양이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놈은 자기 유머가 제대로 먹힌 줄 알고는 배를 움켜쥐고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라고 지껄여대며 방바닥을 뒹굴 거렸다. 상종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 찾아봐라 나무젓가락은 있을 거다. 야. 근데 만두 파는데 누가 밑반찬을 주냐.” “ 그러냐? 시발, 만두가게들 좆나 건방지네.” “ 원래부터 그랬다.” “ 아쉽군. 근데 양이 왜 이러냐? 사람 둘이라도 딱 2인분만 사왔냐? 너는 여유분도 모르냐?” 놈이 대놓고 나를 비난했다. 어이가 없다. 이것들은 사다줘도 지랄들이네. “ 경원이랑 지만이네도 한 봉지 주고 와서 그래. 부족하면 그거 너 혼자 배터지게 다 먹어라.” 그때 갑자기 솔이 새끼가 내 턱을 머리통으로 들이받았다. 황당하다 못해 기가차서 턱을 감싸 쥐고 놈을 빤히 바라보자 놈이 만두봉지를 팔락대며 말했다. “ 그것들은 왜 사주냐. 그 동안 우리가 너무 허물없이 지냈어. 이제부터라도 그 암 고양이 새끼들하고 틈을 벌여놔야겠어.” 이건 또 무슨 개 소리야. “ 갑자기 왜?” “ 말도 마라! 더럽고 서러워서 나 다시는 걔네들하고 상종 안 한다. 너도 하지 마!” “ 나는 왜.” 솔이 새끼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거짓된 눈물을 급조한 뒤, 모노드라마에 들어갔다. “ 넌 내 친구냐? 아니면 치사하고 더러운 암 고양이들 친구냐? 왜 갑자기 뜸을 들이지? 빨리 말해봐. 누구 친구냐고!” “ 놀고 있네. 나이 먹고 편 가르기 하냐? 할 일 없으면 발 닦고 잠이나 퍼질러 자.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일어서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권솔은 하소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 개집아. 너 없을 때 무슨 일 있었는지 아냐. 너 들으면 나보다 더 분노했으면 했지 그냥 못 넘길 거다.” “ 씻고 와서 들을 테니까 비켜라.” 놈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씨불였다. “ 나 간 좆나 좋아하는 거 알지? 오늘 나랑 암 고양이들이 집에 와서 찹쌀순대를 사다 먹었거든? 근데 마지막에 짠 듯이 간이 두 개만 남은거야. 지금도 살이 떨린다! 농담 아니야. 한번 만져봐. 그 치욕 절대 잊지 못할 거다.” 뒷말은 대충 짐작이 간다. “ 간 두 개 남았는데 하나는 경원이가 먹고 하나는 경원이가 지만이 새끼를 줬다. 그거냐?” 솔이 새끼가 뜨-악 하는 표정으로 기겁을 해서는 내 바지춤에서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 네가 몇 살이냐! 제발 철 좀 들어라. 부탁이다!” 녀석은 가야금을 방바닥에 거침없이 팽개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가 내가 암 고양이들에게 홀렸네, 자기는 한명이고 암 고양이들은 두 명이니까 그 쪽으로 가고 싶은 거네, 불알친구도 필요 없네. 자고 있으면 불알을 당장 찢어버리겠네. 따위의 지능낮은 말들을 무더기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휴.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놈을 무시하고 부엌으로 나와 세수를 했다. 방에 들어와 불을 끄고 잠이 들기까지 놈은 쉴 새 없이 암 고양이와 불알타령을 번갈아 하며 나에게 악담을 퍼부어댔다. 그래서 그날 밤은 정말로 불알달린 고양이 꿈을 꿨다. 으악! 믿을 수가 없다. 알람을 두 개나 맞춰놨는데 왜 항상 이 모양이지. 부랴부랴 고양이 세수만 했는데도 벌써 5시 45분이었다. 정확히 15분 남았다! 첫날부터 조퇴를 했으니 오늘은 무조건 빨리 가야 한다.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발바닥으로 솔이 놈의 얼굴을 닥치는 대로 밟아댔다. 그러나 어제 새벽 내내 고양이와 불알타령을 하던 놈답게 꿈쩍도 안 했다. 그냥 갈까 싶었지만 후한이 두려워 참는다. 나는 다시 놈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녀석의 얼굴과 중요 부위를 번갈아 가며 한참동안 짓이겨 놓은 끝에 놈은 벌집이 된 머리를 북북 긁으며 ‘대줄 거 아니면 밟지 마! 안 그래도 욕구불만이란 말이다!’ 하고 도리어 고함을 질렀다. 화를 내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 잠시 방심한 틈에 게슴츠레하게라도 떠졌던 솔이 놈의 눈꺼풀이 다시 감기려고 한다. 은근슬쩍 다시 잠에 빠지려는 놈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며칠 동안 샤워도 안 한 때 낀 목에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남방에 패딩잠바까지 입혀서 질질 끌고 나왔다. 퇴근시간이라 꽉 들어찬 지하철에 겨우 몸을 끼워 넣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솔이 새끼의 튜닝 한 가야금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놈과 나에게 집중됐다. 얼룩무늬 판박이가 붙은 가야금은 처음 봤겠지. 솔이 새끼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지하철 문틈에 낀 가야금을 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 쪽팔려 조금 떨어져 있으면 일행이 아닌 줄 알겠다 싶어 두어 발자국 뒷걸음을 치자 놈은 귀신같이 눈치 채곤 ‘쪽팔리다 이거냐! 엉. 인마! 말해보시지!’ 하고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옆에 있던 여고생들이 웃고 난리가 났다. 권솔은 더러운 성질은 여고생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놈은 쓸모없는 괴력을 발휘해 가야금을 붕붕 저으며 ‘너흰 뭐가 좋다고 낄낄대고 지랄이야! 가야금에 얼굴 한번 씩 끼게 해줘? 그래서 줄 좀 튕겨줘 볼까!!’ 하고 지랄을 했다. 필시 경원이 놈은 이런 상황을 짐작하고 데이트 나부랭이를 한다는 핑계로 지만이 놈과 가게로 먼저 가버린 것이리라. 아니면 밥 먹고, 자고, 술 먹는 것이 사귀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갑자기 데이트 따위를 할 리가 없다. 아직도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권솔을 보자 일찍 일어나서 녀석들을 따라갈 걸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 계진이 왔구나.” 바를 지나 주방문을 열자 비룡이형이 비쩍 마른 생 무를 씹어 먹으며 환한 웃음으로 내게 말했다. 플라스틱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과도로 당근 쪼가리를 집어 먹고 있던 경원이 놈이 고개도 안 돌리고 ‘여-어.’ 라고 휘파람을 불며 하고 깐죽거렸다. 냉장고 밑에 처박혀 있는 의자를 질질 끌고 와 녀석의 옆에 앉았다. 경원이 놈이 나를 힐끔대며 들고 있던 과도를 칼잡이처럼 빙빙 돌리고 난리를 쳤다. …지랄이다. 기어코 칼이 뚝 떨어졌다. 떨어진 과도를 줍기 위해 순간 허리를 숙이는 놈의 등에 살색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 작작 좀 해대라.” 놈이 내 멱살을 잡아채며 귓속말로 ‘지만이 새끼한테 말하면 죽을 줄 알아.’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파스 붙인 거 하나까지 속일만큼 네가 그렇게 김 지만이 새끼를 좋아했구나. ‘알았다.’ 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리는 내게 놈은 찜찜한 시선을 풀지 않고 ‘그 새끼가 알면 다신 안한단 말이야.’ 하고 말했다. 선뜻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자 ‘파스 붙여서 그 새끼 3개월 동안 안 한적 있다고.’라는 말로 웬일인지 내 물음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그랬구나. 3개월 동안 못해서 얼마나 힘들었겠냐. 이 옹녀야! “ 아 졸라 배고파. 너 밥 먹었냐? 나 배고파 죽겠다.”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을 비룡이형이 듣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계진아. 배고파?” “ 네, 조금요.” 날 보며 경원이 새끼가 건들건들 하게 말했다. “ 야, 까지 마라. 우리 집에 밥 있었는데 왜 안 먹고 왔냐. 너 일부러 여기서 먹으려고 안 처먹고 온 거 아니냐? “ 이 새끼는 꼭 자기다운 말만 골라한다. 고통스러운 허기에 내 목소리가 약간 비틀려서 나왔다. “ 너희 집 밥통 들춰보니까 오래되어 이상한 벌레 나오던데 무슨 밥이냐.” 놈이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당근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 시발! 그게 진짜냐?” “ 응. 시큼한 냄새나고 미끈거리고 완전 노랗게 둥둥 떴다.” “ 빌어먹을! 오늘 아침에 그 밥 먹고 왔는데. 그것도 두 그릇이나.” 오오, 졸라 잘됐다. 쌤통이다! 그때 경원이 놈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신기하네. 근데 지만이는 왜 오늘따라 밥맛이 좋다고 했지?” 식중독 예정자 김 지만을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때 비룡이 형이 우리 앞에서 국자를 짤짤 흔들었다. “ 밥은 원래 잘 쉬어. 그러니까 빨리빨리 버리는 게 좋아.” “ 응.” “ 네.” 먼저 한 말은 경원이었고 그 다음은 나였다. 어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더니 두 번 봤다고 은근슬쩍 반말이네. “ 뭘 꼴아보냐. 형이 말 놓으라고 해서 놓은 건데. 새끼야, 왜 띠껍냐.” “ 말 놓으라고 했다고?” 대답은 놈이 아니라 형에게서 날아왔다. “ 응. 계진아 너도 말 놔. 난 존댓말 듣는 거 불편하거든.” “ 그래도 얼마나 봤다고 벌써 말을 놔요. 차차 놓을게요.” “ 괜찮아. 어차피 3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 뭘.” “ 그럼 어쩔 수 없지. 알았어.” 1초의 망설임 없이 내 대답에 형이 괜히 말했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밥 안 먹었지? 뭐 먹고 싶어?’하고 물었다. 양심도 없는 경원이 놈이 ‘해물 탕!’하고 소리쳤다. 여기가 무슨 식당도 아니고 그런 복잡한 음식을 시키다니 이런 뻔뻔한 자식. 이놈 대가리에 양심이란 걸 심히 주입시켜 주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내가 말했다. “ 형. 라면 두개 끓여줘.” “ 라면? 근데 방금 경원이가 해물 뭐라고 한 거 같은데?” “ 응. 해물라면이 먹고 싶대.” “ 야! 돌았냐. 내가 언제 해물라면 먹고 싶다고 그랬냐? 형 나는 해물….” “ 형 빨리 해물라면 두 개 끓여줘!” 자신의 말이 씹혔다고 생각한 경원이 놈이 내게 귓속말로 ‘또 다시 내말을 씹으면 네 놈 신경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겠다.’고 속삭였지만 살면서 밥 먹었냐는 말보단 더 많이 들어왔던 악담이기에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형은 3분도 안되어 라면 두개를 끓여왔다. 실로 놀라운 속도였다. 형이 내민 라면 위에 계란 두 배만 한 타조 알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놀라서 ‘이거 무슨 알이야.’ 하고 묻는데 경원이 놈에게 형이 활짝 웃으며 ‘오리 알이야.’ 하고 대답했다. 으음. 오리 알이었군.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먹고 의미 없이 주위를 훑어보다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 형. 오늘 아저씨가 안보이네?” “ 응. 연수 가셨어.” “ 연수요? 요리사 연수 같은 거야?” 내 말에 형이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대답했다. “ 비슷한 맥락이지. 전국 게이바 주방장 협회라고.” “ 웃긴다. 뭐 그딴 게 다 있냐. 별 놈의 협회가 다 생겨나네.” “ 할 일없이 노닥거리는 협회들하곤 많이 달라. 경원아.” “ 이봐, 비룡 씨. 그런 협회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할 일이 없는 거야. 대머리 아저씨 벌써 노망났냐. 하여튼 얼굴처럼 하는 짓도 졸라 구려요.” 경원이 놈이 대놓고 비웃었다. 형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 스승님은 사비로 게이바 주방장 학회를 설립하셨어. 그분의 순수한 열정과 실력이 대단히 존경스러울 뿐이야. 내 이십년 후의 모습이랄까. 너희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경원이 놈이 억지로 시선을 피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 라면 맛있지 않냐. 많이 먹어라.” “ 응. 너도 많이 처먹어라.” 그러나 형은 이미 우리의 대답이 필요치 않은 경지에 올라가 있었다. “ 생선을 잡아 올릴 때의 담력과 지느러미를 자를 때의 정교함. 과일 껍질을 깎을 때의 세심함과 채소를 씻을 때의 유연함. 스승님은 요리를 위해 타고난 사람일이야.” 착하고 순한 얼굴로 저렇게 광적인 눈빛을 빛내며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도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비룡이형은 아저씨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빙자해 알 수 없는 상상의 나래로 완벽하게 빠져든 거 같았다. 형의 안타까운 모습을 무시하며 경원이 새끼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쪼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라면만 먹었다. 오늘도 여전히 손님은 바글바글 만원상태였다. 굳이 양주에 물을 타지 않아도 매출에는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넘쳐나는데도 그런 짓을 멈추지 않는 걸 보면 이 복귀 사장도 이 복희씨에게서 짠돌이의 피를 물려받은 게 분명하다. 경원이 놈과 나는 1층 홀 담당이다. 어제 조퇴한 사이에 그렇게 되어있었다.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않고 이 복귀 사장과 경원이 놈이 상의한 내용이란다. 어이가 없다. 하물며 직원으로 뽑은 사람은 경원이 새끼랑 나, 그리고 장미군 밖에 없다. 돈이 잘 벌리긴 하지만 의외로 빨리 때려치우는 사람들 때문에 파트타임 외엔 정식 직원은 절대 채용하지 않는 다는 이 복귀 사장의 두서없는 경영철학 때문이라고 비룡 형은 말했었다. 유니폼만 갈아입고 바로 일에 들어갔다. 정신없이 술 나르고, 콘돔사와라, 담배사와라, 재떨이 가져와라. 심지어는 바로 자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오늘파트너 있냐.’ 고 물어 보 는 심부름까지 해댔더니 팔, 다리 중 안 아픈 데가 없다. 뿌연 담배연기가 가시고 끈적이는 노래로 바뀌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몇 분전 다른 테이블과 소소한 말다툼에 열 받은 몰상식한 놈들이 주먹으론 안 되겠는지 바닥에 땅콩 부스러기만 잔뜩 흘려놓고 갔다. 물걸레로 대충 바닥을 훔치고 테이블을 치우려고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경원이 놈이 다가와 소파에 다리를 걸쳐 안고 들고 있던 쟁반을 발밑으로 집어던졌다. “ 일하기 싫어 뒈지겠다.” “ 그럼 뒈져라.” “ 오, 심심한데 한판 하자 이거냐?” “ 말을 말자. 야, 이 복희씨 봤냐?” “ 내가 어떻게 아냐! 그건 왜 물어보냐?” 순가 셜록 이 경원이 된 놈이 턱에 팔을 받히고 나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 뭐…뭐냐, 그 눈빛은. 어제 1시에 온다고 해서 물어보는 거다! 오해 말아라.” “ 내가 뭐라고 했냐? 의심스럽게 왜 말을 더듬고 지랄이실까.” 마땅히 할 말을 못 찾고 녀석의 고양이 눈을 피하고 있자 분홍색 빵모자를 쓴 장미 군이 움직일 때 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최첨단 요술공주 슬리퍼를 질질 끌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의 패션에 애도의 마음이 드는 나와 다르게 경원이 놈은 무심한 얼굴로 떨어진 쟁반을 집어 올렸다. 자신에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자 기분이 나빠진 어제는 달의요정, 오늘은 카드캡터 씨가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 야, 너. 이 세상에서 네가 젤 예쁜 줄 알았지?” 오, 마이 갓. 경원이 새끼의 행동이 굳은 듯 멈췄다. “ 네가 젤 예쁜 줄 알다가 더 예쁜 사람을 보니까 기분이 어떠냐?” …제발. 거기 예쁜이. 부탁이니까 그 입 좀 닥쳐줘. 하지만 요술공주는 내 바람을 싹 무시하고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 복희씨가 잠시 너한테 관심 가져줬다고 우쭐해하지 말란 말이야. 지금은 나한테 화가 나서 그러는 것뿐이니까. 알았냐.” “ …….” “ 그 사람 가끔 그럴 때 있거든. 나한테 열 받으면 다른 놈을 만나서 애태우게 했다가 돌아오는 경우. 너도 그런 경우야. 나한테 까불지 마. 첩실 년아!” 경원이 놈이 장미 놈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맥주병을 집어 드는 게 보였다. 맙소사! 이거 큰일이다. 구급차가 와서 자신의 미모를 뽐내다가 실려 가는 사람이 생기는 최악의 상황은 만들지 말아야 했기에 어떻게 하면 경원이놈을 말릴 수 있을까 잔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장미군은 더위 먹은 삽살개처럼 제자리에서 삼심 센티쯤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는 하이 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복희씨!” 경원이 놈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장미군 말처럼 정말 복희씨였다. 그는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를 따라 클럽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복희씨는 웬만한 남자들도 소화하기 힘든 빨다가 잘못말린 듯 보이는 얼룩무늬의 연보라색 마이를 입고 있었다. 그가 걸어오는 모습을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 도깨비에 홀린 눈으로 복희씨를 뚫어져라 보고 있자 순간 민망하게도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복희씨는 자신을 보고 팔딱팔딱 뛰어오는 미군을 어느 집 개가 짖나하는 표정으로 단숨에 지나쳐 내가 있는 테이블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복희씨의 눈매가 신경질적으로 올라가 있었다. 화나는 일이 있거나 아니면 대단히 심사가 뒤틀려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 너희 사장은 어디 처박혀있냐.” …아아. 그거 때문에 온 거였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바텐더 석에 계실 거예요. 거기 안 계시면 룸에 계시지 않을까요.” “ 확실해?” “ 아마도요.” 복희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 확실해요.” “ 퇴근하지 말고 후문에서 기다려라.” “ 네?” 내가 한 번에 못 알아듣자 그가 신경질을 냈다. “ 길어봤자 1시간도 안 넘으니까 집에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다. 이 멍청아.” 뭐가 1시간도 안 넘는단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더 물어봤다간 나부터 아작 낼 얼굴이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몸을 돌려 입구를 에워싸고 있는 검은 양복의 조폭님들에게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이 복희씨를 황망하게 보고 있던 장미 놈의 얼굴이 놀라움에 벌겋게 변했다. 놈은 당연히 복희씨가 경원이 놈에게 말을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나에게 말을 걸자 그때부터 개 거품 물기 일보직전으로 변해있었다. 놈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지 연신 귀를 막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읊조리는 장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러니까 누가 멋대로 경원이 새끼를 의심 하라고하디. 복희씨가 대동해온 조폭들은 적어도 사, 오십 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의 출현에 홀 안이 무서운 속도로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복희씨가 손을 까닥이자 그를 양측에 보좌하고 서있던 새싹과 쌍칼이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또 자신의 바로 옆에 서있는 가장 서열이 높은 똘마니로 추정되는 곰보자국 조폭님에게 무언가 일일이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곰보자국이 바로 옆에 서있는 그다음 서열 조폭 놈에게 명령을 내렸다. 또 그다음 놈이 그다음 놈에게, 또 그다음 놈이 또 그다음 놈에게 명령과 지시를 반복했다. …저것이 다 뭣이 다냐. 여기서 도미노 놀이를 하자는 것인가.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처음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일제히 우루-루 몰려나올 때 자세히 보자 조폭 새끼들 손엔 각목, 쇠파이프, 죽도 심지어 잭나이프까지 들려 있었다. 짜 맞춘 것처럼 한꺼번에 몰려나와 클럽을 점령하듯 테이블과 무대, 비싼 조명, 유리창까지 박살내기 시작했다. 경원이놈에게 따질 때의 배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장미군은 깜짝 놀라 본능에 이끌려 열심히 훌쩍대고 있었다. 그리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뒤 번개 맞은 속도로 복희씨를 향해 다다다 달려갔다.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는 당연히 복희씨가 녀석을 밀쳐버리거나 떼어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엔 녀석을 못 본 척 지나쳤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녀석의 볼을 쓰다듬으며 퉁퉁 부은 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심지어 끅끅대는 장미군의 등을 다독이며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장미 놈에게 웃어 보이며 키스를 한다. 그들의 모습을 홀리듯 보고 있는 나에게 쌍칼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민망한 웃음이다. 와-장-창창. 무대의 값비싼 음향 기기들이 완벽하게 박살나는 소리를 끝으로 나는 경원이년의 손에 이끌려 주방으로 달려가 숨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고 주방으로 들어오던 비룡이형이 걱정스런 얼굴로 ‘홀에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깡패새끼들이 어쩌고저쩌고 중얼대는 경원 녀석의 불평이 홀 안을 울려 퍼지는 주먹과 고함소리에 뒤섞였다. 나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어제까진 분명히 모른다고 했으면서. 정말 모르겠단 얼굴로 그렇게 말했으면서. 거짓말인가. 난 극도로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 모른다고 그랬잖아. 이 시발 새끼야! 만만하다고 마음대로 구라를 까다니!” 벌떡 일어나 주방문을 걷어찼다. 씩씩대며 나가려 하는데 경원이 놈이 내 머리끄덩이를 움켜쥐고 억지로 제자리에 앉혔다. 뒤통수가 욱신욱신 졸라 아파왔다. 고통에 허덕이는 나를 본 비룡이형이 들고 있던 대파를 팽개치고 다가와 ‘괜찮아?’ 하고 걱정스레 물었다. “ 안 괜찮아요, 형! 너 미쳤어? 내 남의 머리는 함부로 쥐어뜯고 지랄이야!” " 지금 나가면 괜히 불똥 떨어진다. 얼쩡대다 얻어맞지 말고 얌전히 여기 있어. " " 씨. “ “ 아무리 생각해도 쟤네들 완전 미친놈들이네. 무슨 형제끼리 싸우는데 애들을 저렇게 많이 끌고 오냐. 진짜 가게를 뒤집어엎을 생각인가.” 조금 전 놈이 잡았다 놓은 머리가 너무 아파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아직도 욱신욱신하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나름대로 미안한 얼굴로 경원 놈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많이 아프냐?” “ 네가 한 대로 나도 한번 해줄까? 그럼 얼마나 아픈지 알거다.” “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으니까 나는 안 해줘도 된다.” 놈은 은근슬쩍 상황을 모면했다. 비룡이 형이 어느새 따뜻한 코코아를 타서 경원이 놈과 내 앞에 내밀었다. 형에게 고맙단 말을 하고 냉큼 컵을 받았다. “ 혹시 홀에 이 사장님 오셨어?” “ 이 사장이 이 복희가 맞는다면 맞아. 그 새끼 왔어. 그것도 똘마니 새끼들을 한 트럭씩이나 끌고 납시셨지.” “ 역시나 그렇구나.” “ 이 복희가 온지 어떻게 알았어? 계속 주방에만 있었잖아.” “ 오늘처럼 클럽이 요란스러울 땐 이사장님과 복신이 밖에 없어. 그런데 복신 이는 절에 가있으니 그럼 이 사장님 밖에 없잖아.” “ 먼일인데 똘마니새끼들을 다 끌고 왔데?” 비룡이형이 ‘아’ 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 음. 아마도 이 상무가 상납금을 줄였을 거야.” “ 상납금? 놀고 있네.” “ 일명 텃세지. 가게 매출의 삼분의 일이 상납금으로 나가니까 좀 많긴 하지?” 나는 비로소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 형젠데 상납금 그런 게 있어?” 비룡이형이 도마를 닦다말고 허리를 쭉 피고 좌우로 흔들었다. “ 복신이가 다른 가게를 했을 때에도 이 상무에게 갖다 바친 상납금이 지금 이 상무가 사장님에게 받치는 만큼은 될 걸.” “ 지랄한다. 사이코 형제들.” “ 조금 특이하긴 하지. 하지만 뒷배를 든든히 해줘야 다른 구역에서 태클이 안 들어와. 깨끗하면 술장사 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 그렇다고 동생가게를 저렇게 박살을 내냐?” 경원이놈이 흥분해서 물었다. 그러자 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동생가게라도 봐주면 상납금을 받치는 다른 가게에서 불신해 질 수 있잖아. 하지만 애초부터 이 사장님 같은 분이 동생가게라는 이유로 대충 넘어갈 위인도 아니고.” 그 말에 경원이 놈이 ‘하여간 미친놈들이 미친 짓거리만 골라서 하네.’ 라고 중얼거렸지만 내 귓속엔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조금 전 복희씨와 장미 놈의 다정한 분위기 밖에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출 정도면 두 사람 사귀는 사일까. 정말 장미군의 말대로 조강지처였단 말인가! …안되겠다. 이러고 있을 수가 없어. 궁금한 건 도저히 못 참겠단 말이다. 나는 경원이년이나 비룡이형이 말릴 틈 없이 주방을 뛰쳐나왔다. 복도를 따라 나와 쪽문을 가린 발을 팍 쳐내자 눈앞에 보이는 홀은 이틀 동안 보아왔던 클럽의 모습이 아니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창문은 깨지고 테이블을 부서지고 무대는 엎어지고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일방적으로 가게를 박살내던 복희씨의 검은 무리에 대등하진 않아도 힘겹게 주먹질을 하고 있는 또 다른 검은 무리들이 생겨났다는 정도. 그 가운데 이 복귀 사장이 있었다. 그는 한 마리의 표범처럼 탁자위에 올라가 지시를 내렸다. 단소를 지휘봉으로 삼으며 ‘야 이 미친놈들아, 그쪽에서 어퍼컷을 날리라고’ 라고 또는, ‘쪼다 같은 놈들아. 상대의 눈을 봐! 그땐 공중 이 회전으로 날라 차기를 해야지!’ 라며 열심히 악을 썼다. 언뜻 봐도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았다. 검음 무리들이 넘실거리는 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복희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악!! 놀라 뒤로 발라당 자빠지는 줄 알았다. 갑자기 탁자위에서 요란스럽게 뛰어내린 이 복귀 사장이 내 코앞에 와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반 뼘 정도의 간격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사장님의 콧김이 이마에 불어 닥칠 정도였다. 그는 보는 사람이 더 꺼려지는 미소로 히죽 웃더니 성난 들소에 가까운 힘으로 내 팔목을 잡아채서는 문틈에 끼어있는 내 몸을 완벽하게 끌어냈다. 팔이 덜덜 떨렸다. “ 사내대장부로서 자존심 상해서 이런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룸에 계신 형님께 당장 고해라! 오늘 저 개새끼들 좀 이만 해산 시켜주라고! 이러다 이번 달 장사는 하지도 못하고 문 닫게 생겼단 말이다!" “ 사장님. 팔 좀 놔주세요!” “ 형님도 정말 징그러운 분이시다. 하루만 더 봐주라고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 그분은 피도 눈물도 없이 결국은 이렇게 피를 부르는구나!” “ 아파요! 팔이 찢어질 거 같단 말이에요!” “ 암울하게 생긴 아이야! 지금 팔이 문제냐? 이번 달 월급 없어도 너는 정녕 괜찮은 것이더냐? 저 무식하게 생긴 놈들이 우리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단다. 자, 보거라!” 이 복귀 사장은 내 얼굴을 억지로 잡고 채서 이리저리 휘둘러 대는 끝에 결국은 홀을 둘러보게 만들었다. 그는 입으로 ‘휙휙’ 바람소리도 직접 내는 어딘가 부실한 효과음까지 담당했다. “ 내가 말한다고 해도 복희씨는 듣는 시늉도 안 할 거예요.” “ 물론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인생에선 만에 하나 라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하물며 너는 형님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한 사람이지 않느냐. 그걸 보면 아예 가망이 없지만도 않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장미군도 복희씨, 복희씨. 잘만하던데요. 한숨을 쉬는 내 입을 손바닥으로 덥석 감싼 이 복귀 사장은 나를 질질 끌고 밀실로 이어진 방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놈도 자기 형만큼 기럭지가 길었다. 도무지 보폭을 맞추기가 힘들어 ‘다리가 아픕니다! 제발 천천히 좀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복귀 사장은 ‘천천히 라는 말은 침대에서나 필요한 말‘ 이라며 내 말을 싹 무시했다. 사장님에게 끌려오다 시피한 방은 제일 구석진 VIP룸이었다. 똘마니들끼리는 피 튀기는 주먹질을 시켜 놓고 그는 술이나 마시고 있나 싶었다. 뭘 어쩌라고요 라는 표정으로 이 복귀 사장을 올려다보자 그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얼어 젖혔다. 순간 나는 방안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어렵게 눈을 떴을 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으로 소파 위에 바짝 엎드려 있는 장미 군과 녀석의 뒤에 바지만 내린 복희씨가 놈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얼음처럼 굳어진 나에게 이 복귀 사장님은 ‘괜찮으냐.’ 하고 물어주었다. 뭐가 괜찮으냔 걸까. 복희씨가 누군가랑 자든가 말든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나 그런 생각과 다르게 내 기분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 복귀 사장님은 데려다줄까 하는 어색한 친절을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녀석들에게도 아무 말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와버렸다. 기분이 급속도로 침울해져 집에 왔는데 집에 오자 기분은 더 엿 같아졌다. 이미 꺼져 있는 연탄불을 새것으로 바꿔갈고 얼굴만 대충 씻은 다음 방안으로 들어왔다. 싸늘한 공기가 가슴속 깊은 곳을 콕콕 건드렸다. ……왜 이럴까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 나 참, 정말 어이가 없네.” 눈앞에 경원이라도 있었으면 속 시원히 말다툼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녀석은 지금 없다. 고로, 난 지금 이 기분을 풀어낼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이럴 땐 먹을게 최고다. 솔이 새끼가 술 처먹고 다리하나를 부숴버린 뒤로 보는 사람이 더 아슬아슬 할 정도로 기울어진 책상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리고 박스로 엮은 책꽂이를 뒤적여 음식집 전화번호 책을 꺼냈다. 월급 받으면 먹으려고 했던 걸 오늘 깡그리 다 먹어버려야겠어! 팸플릿을 열심히 뒤진 끝에 그동안 너무 비싸서 먹지 못했던 고급 중화요리 집 번호를 찾아냈다. 「마왕 루」 배터리가 없다고 졸라 지랄거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더듬더듬 전화번호를 눌렀다. 세, 네 번 신호음이 울린 후 굵직한 목소리의 남자가 ‘마왕루입니다.’ 하고 말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그런 잡생각들이 오늘 내 일탈에 방해가 될 순 없었다. “ 저, 음식 좀 시키려고 하는데요.” 「 네. 말씀하십쇼.」 “ 팔보채, 유산 슬, 양장 피, 해삼 주스, 깐풍기, 복어탕수육. 이렇게 가져다주세요.” 「 회식이신가요? 몇 분이나 계신데요?」 “ 저 혼자 있는데요. “ 잠시 뜸을 들인 남자가 벌컥 짜증을 내며 더럽게 왈왈댔다. 「 장난하면 국물도 없다! 」 “ 아, 국물도 시켜야 되나요? 그럼 짬뽕하나 갖다 주시던 지요.” 「 뭐 이런 멍청한 새끼가 맛있어!! 누가 짬뽕국물 말 하냐? 」 “ 아. 오늘 짬뽕 안 되나요? 그럼 우동으로요.” 「 이건 멍청한 거야, 둔한거야! 야 그 국물 말고 장난치면 국물도 없다 이 말이잖아.」 “ 더는 못 시켜요! 그것만 갖다 줘요. 정말 이상한 아저씨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왕 루의 남자는 뭐라 뭐라 쌍발 음이 발음이 나는 험악한 말을 정신없이 읊어댔다. 하지만 난 오늘만큼은 그 어느 누구도 구속되지 않는 날라리로서의 본분을 다할 생각이었기에 주소만 말해 주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림으로서 나의 터프함을 과시했다. 전화를 끊고 방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시발 놈의 연탄 방. 북극곰들이 널뛰기를 할 정도로 시린 방바닥에 누워있으니 기분이 더 메롱이다. 그때 핸드폰에서 여자의 달뜬 신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경원이 새끼다. 누가 뭣대로 신음소리로 벨을 바꾸고 지랄이야. 16화음 벨소리가 쪽팔려 진동으로 해놨는데 주인 말 무시하고 도로 벨소리로 바뀌어 울리고 염병이다. 안 받을까 생각했지만 액정에 뜬 이름이 ‘이 경원’ 이였다. 안 받으면 집에 와서 뭔 일 날지 모르기에 억지로 받았다. 「 집이냐? 」 의외로 권솔이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 톤을 봐서 경원이놈 몰래 폰을 쓰는 모양이다. 고작 한다는 짓거리들이 어떻게 이렇게 짠 것처럼 똑같을까? 심히 궁금했지만 물어볼 여력도 없어 그냥 힘없어 대꾸했다. “ 그래. “ 「 의리 없는 새끼, 먼저 쌔 비치니까 기분 째지냐? 」 “ 그래, 째져 죽겠어서 배달시켰다.” 「 배달? 배달 뭐? 」 “팔보채, 유산 슬, 양장 피…, 너무 많아서 기억도 안 난다.” 「 돈 생겼냐? 」 “ 아니, 우선 시키고 봤다…“ 「 너 골 깨졌냐. 여하튼 우리지금 간다.」 “ 응. 끊어” 「 먹지 말고 있어.」 녀석은 ‘꼭’ 하는 다짐 성 멘트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연탄 방은 급하게 뜨거워 졌다가 급하게 불이 내려간다. 슬슬 방바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분이 조금 나아지려고 한다.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발가락으로 몸을 밀어 아랫목 이불더미 안으로 낑낑대며 기어들어갔다. 꽁꽁 얼었던 몸이 슬슬 녹는구먼. 뜨끈한 방에 누워있자니 불현듯 복희씨 생각이 났다. 망할 놈. 거짓말을 한 걸까. 사람이 정신상태가 거지같아서 그렇지 거짓말을 할 사람 같진 않았는데. 그럼 뭐해. 거짓말을 했잖아! 급속도로 기분이 다운됐다. 복희씨가 누구랑 자든 말든 내가 무슨 사이라고 참견을 하겠는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복희씨가 장미군의 하얀 엉덩이를 쥐고 뒤에 바싹 붙어서 샤바 샤바를 할 때 내 가슴을 미친 듯이 뛰어댔다. 혼란스럽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 기분은 별로 안 좋고, 그게 복희씨 때문은 확실했다. …오랜만에 고민한 기념으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게 자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난 잠이 들었다. 누군 엄한 짓거리도 하는데 그깟 잠 하나 내 맘대로 못자겠는가. 그러나 30분후 가만히 있어도 이번겨울이 심히 걱정되는 부엌문을 미친 듯이 발길질 해대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시끄러. 어떤 소도둑놈이야!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라. 내가 까칠한 놈 이란걸 보여주겠다!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비몽사몽 한 정신에 엉기적거리며 부엌문을 열었다. 누군가 싶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눈앞에 불쑥 철가방두개가 나타났다. 그제야 생각났다. 아, 나 배달시켰지! 문 뒤에 숨어있던 짱깨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등학생 정도로 추정되는 날티 나게 생긴 놈이었다. 놈은 담배를 꼬나물며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야려댔다. “ 형씨! 배달시켜놓고 잠이나 퍼 자고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이놈도 성격 심하게 있네. 나는 벌집이 되어 있을 머리를 긁적이며 최대한 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 미안. 안 자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잖아. 어쨌든 졸라 쏘리!” “ 참 사람 태평하십니다. 배달경력 2년 만에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 미안. 미안. 춥지? 우선 들어와.” 문을 활짝 열고 고삐리 놈이 들어올 수 있게 비켜섰다. 놈은 성난 호랑이처럼 쿵쿵 대며 철가방을 좌우로 흔든 채 부엌방으로 들어왔다. 야, 그렇게 흔들면 음식 섞이자나.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꽁꽁 얼은 놈의 손과 잠바 위에 수북이 쌓인 눈을 보자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부엌에 철가방을 내려놓던 놈이 방안을 힐끔거리며 ‘혼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난 ‘응. 근데 친구들하고 살아. 곧 올 거야.’ 하고 대답한 후 돈을 찾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 무슨 날입니까? 비싼 음식만 시켰던데.” 어느새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는지 등 뒤로 고삐리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놈이 뚱한 얼굴로 날 내려다봤다. 그러면서 ‘너무 추운데, 돈 찾을 때까지 방에 있을 라고요’ 하고 말하며 다람쥐처럼 붕하고 날아서 방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자고 있던 이불동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황당해서 돈을 꺼내다 말고 굳어있는데 놈이 손바닥을 방바닥에 개미핥기처럼 비비며 말했다. “ 형 때문에 밖에서 15분이나 기다렸잖아요. 벌벌 떨면서.” 놈은 묘하게 벌벌 떨면서 라는 말을 강조했다. 실실 웃으면 말하는 폼이 대단한 넉살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랬냐.’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지퍼달린 장롱 문을 열고 솔이 놈이 가끔 비상금을 쌔 비쳐 비밀금고를 찾아냈다. 단순한 녀석 답께 자기 생일로 비번을 맞춰놓다니, 쯧쯧. 비밀번호를 맞추면서 고삐리 놈에게 얼마나 줘야 되냐고 묻자 녀석은 ‘23만원이요.’ 하고 대답했다. 뭐라고? 이십 삼 만원? 껌을 떡처럼 길게 늘어뜨려 씹고 있는 놈에게 따지듯 물었다. “ 십삼만 원도 아니고 이십삼만 원? 뭐가 그렇게 비싸냐?” “ 아, 이형 또 뭘 모르시네. 이봐요, 형님. 근방 중화요리계의 권력을 좆나 움켜쥐고 있는 마왕 루의 음식 가격이 그 정도는 돼야 가오가 날아다니지 않겠습니까? “ “ 웃기고 있네. 야, 좀 깎아줘!” 놈이 흥분해서 몸을 일으켰다. “ 깎아줘? 이 형님 큰일 날 사람이네. 그리고 제가 웃기고 있는 게 아니에요. 비싼 음식은 다 그런 이유가 있으니까 잔말 말고 이십삼만 원 내놔요.” “ 말도 못하냐. 그래도 너무 비싸. 이러다 너희 가게 파리 날리겠다.” “ 파리는 형 집에나 날리겠죠. 청소는 하고 삽니까. 빵 꼴이 좆나 거지네.” 말하는 꼴이 웃기다 못해 코미디다. “ 남에 집에 와서 이러쿵저러쿵 참견마라.” “ 형! 우리가 가게가 왜 안 망하는 줄 압니까. 개업을 할 때부터 음식이 비싸면 웬만하면 안 망하거든요.” 놈은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말을 이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싸면 의심부터 해요.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싸겠지, 하면서요. 반대로 너무 비싸면요, 또 비싸니까 이유가 있겠지. 라고 생각하더랍니다. 똑같은 것도 싸면 거들떠도 안보면서 되레 돈을 올리면 불티가 난다니까요. 인간들이 불쌍하게 시리. 왜 그러나 몰라. “ 놈은 순식간에 경제학자로 돌변해 나에게 ‘사회는 험난한 정글 같은 곳이란다.’ 하고 가르치는 선생 같은 얼굴로 지껄여 댔다. “ 하기는 그게 상업주의 병폐죠. 뭐 세상살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 너 진짜 웃긴다. 무슨 세상살이.”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뭐 그런 거죠. 뭘 또 그걸 꼬치꼬치 캐물으실까.” …그러시냐. 아주 웃기고 있어요. 동그란 가운데 철을 빙그르 하고 돌리자 솔이 놈이 모아둔 비상금이 눈에 들어왔다. 어림 봐도 꽤 많아 보였다. 이십삼만 원 이라고 했지. 십만 원짜리 수표 두 장과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 들고 다시 빙그르 하고 돌려 금고 문을 잠갔다. 다시 이불을 눈알 바로 아래까지 덮어 쓰고 방바닥을 뒹굴 거리는 놈에게 건네자 녀석이 ‘아, 돈 받아야 되지’ 하면서 돈을 낚아채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말 안했으면 잊어먹고 갔겠군. 그거 아쉽네. “ 너도 먹을래?” 부엌방을 향해 걸어가면 말했다. 놈이 검은머리가 윗자리 지저분해 보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진짜요? 진짜 그래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난 짧게 ‘응.’이라고 대꾸하며 철가방 두개를 방으로 들고 왔다. 드는데 꽤나 묵직한걸 보니 많이 시키긴 많이 시켰나 보다. 너무 대책 없는 짓을 했나 생각하는데 짱깨 놈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2년 만에 처음 봐요.” “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뜸을 들이냐. 그냥 말해라.” “ 배달하면서 같이 먹자고 한 사람 말입니다.” “ 당연히 그렇겠지.” “ 형, 완전 천사네요. 아니면 왕따거나.” “ 천사는 아니다만 그렇다고 왕따도 아니다. 먹으라고 할 때 그냥 먹고 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 알았습니다!” 철가방 문을 열어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음식들을 하나씩 꺼냈다. 1년 전부터 티브이 위에 누워있던 신문을 끌어다 바닥에 깔고 팽팽한 랩 가운데를 젓가락으로 폭 하고 구멍을 내서 가볍게 포장을 뜯어냈다. 어울리지 않게 우물쭈물 거리는 놈에게 젓가락을 내밀자 녀석이 ‘왕 땡-큐.’ 라고 지껄이기가 무섭게 가장 비싼 전복탕수육부터 공략해나가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웃기는 녀석일세. “ 너 몇 살이야?” 녀석이 단무지 두개를 깔고 그 가운데 탕수육을 끼워 단무지 탕수육 샌드위치를 먹다말고 대답했다. “ 17살이요. 나이는 왜요.” “ 학교는?” “ 때려치웠죠. 그 귀찮은 걸 졸업까지 어떻게 다녀요.” 건성으로 대답을 끝낸 녀석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주둥이에 비싼 전복탕수육을 쑤셔 넣다가 목이 막힌 척 숙달된 연기를 뽐낸 뒤, 자연스럽게 해삼 주스를 마셨다. 유심히 관찰하니 은근히 비싼 것만 처먹어 대고 있다. 저 자식! 녀석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신들린 솜씨로 젓가락질을 하려는데 전방 3미터 근처부터 쿵쾅쿵쾅 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오려나보다. 대한민국 최고의 걸신들이. 예상처럼 정확히 10초 후 덜컹이는 문소리와 함께 평소보다 상기된 솔이 새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 마이 스위트 홈 개집!” 녀석은 거의 돌격대 수준으로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권솔의 등 뒤로 경원이 놈과 지만이놈이 차례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째 오늘은 솔이 놈이 아닌 지만이 새끼의 어깨에 장구가 들려 있는걸 보니 복귀 씨의 국악에 대한 열정은 아직 식지 않은 모양이다. “ 쟨 뭐냐.” ‘죽고 싶지 않으면 내 탕수육 내려놓고 당장 사라져’의 뜻을 담은 살벌한 눈빛을 담은 권솔이 짱깨 녀석을 가리켰다. 그때 마침 접시에 코를 처박고 먹고 있던 고삐리 놈의 고개가 들렸다. “ 나요? 나 짱깬데요.” 권솔은 대담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녀석의 당당함에 경계의 눈을 풀지 않은 채, 외투만 벗고 곧장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녀석은 손 씻으란 내말에 ‘먹고.’ 라고 짤막하게 지껄인 다음 짱깨 놈이 먹고 있던 전복탕수육 접시를 획 하니 낚아챘다. 괜히 헛손질을 하게 된 짱깨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오냐 하고 넘어갈 권솔도 아니었다. “ 네 놈은 뭐라고 여기서 이걸 처먹고 자빠졌냐.” “ 형이 먹으라고 한 거예요. 접시 줘요. 왜이래요!” “ 왜 이러긴 뭘 왜이래. 좋은 말로 할 때 젓가락 내려놓고 꺼져라.” 짱깨 놈이 다시 접시를 낚아채며 대들 듯이 말했다. “ 꺼지긴 제가 왜 꺼집니까. 제가 불입니까, 바람입니까.” “ 터진 주둥이 그렇게 나불대다 호적에서 영원히 꺼지게 만들 수도 있다.” 불쌍한 짱깨 놈이 짜증난다는 얼굴로 대답하기 전에 경원이 새끼와 지만이 놈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안풍경을 보고 어라 하는 표정으로 지만이놈이 눈으로 ‘쟨 누구냐.’ 하고 물었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방에 누가 있든가 말든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 경원께서는 아랫목으로 기어들어가 검은 봉지에 빵빵하게 담겨 있는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뭐냐. 꽁꽁 묶여 잘 풀어지지도 않는 봉지를 풀어보니 한라 봉만 한 귤이 열개 정도 들어 있었다. 웬일이냐 하는 얼굴로 경원이놈을 보자 놈은 ‘오다가 리어카에서 샀어.’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봉지를 만진 손에 진득한 물기가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봉지 안을 자세히 봤더니 귤이 절반 이상은 다 썩거나 곪아 터져있었다. 그럼 그렇지. 경원이놈을 노려보는데 이년은 생긋 웃으며 ‘너 귤 좋아하잖아.’ 하는 되먹지도 않는 말을 쏟아냈다. “ 시발, 좆나 예쁘다.” 짱깨 놈이었다. 녀석은 이미 반쯤 넋이나 간 얼굴로 경원이년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접시를 통째로 씹어 먹을 것 같이 맹렬한 기세를 보이던 솔이 놈과 나무젓가락을 짝 뜯어서 정신없이 비벼대고 있던 지만이놈, 그리고 차가운 손바닥을 방바닥에 지지고 있던 경원이 새끼의 얼굴이 순식간에 짱깨 놈에게 집중됐다. 아, 불길하다. “ 누구? 나?” 졸라 깜찍하게 경원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모습에 복날 사형직전의 미친개에게 물린 표정으로 변한 고삐리 놈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불쌍한 놈아 제발 경원이년의 마수에 걸려들지 마라. 그러나 나의 간곡한 바람을 무시하고 짱깨 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인…인형이 말도 한다.” “ 말도 하고 밥도 먹어. 더 놀랍지?” “ 네, 네. 완전 신기해요.” 짱깨 놈이 침을 꼴깍 삼킨 후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졸라 섹…섹시하세요!” 경원이 놈이 싱긋 웃었다. 녀석은 짱깨 놈의 귀를 쭉 잡아당겨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 그거 할 땐 더 섹시해. 혹시 궁금하지 않아?” 녀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네! 네! 궁, 궁금해요!” 제발 그러지마. 이 미친놈아! 죽고 싶지 않으면 지만이 새끼를 자극하지 말란 말이다. 그러나 놈은 지만이 새끼를 열심히 자극하고 있었다. “ 저기요. 애인 있으세요?” “ 글쎄. 있을 거 같아? 없을 거 같아?” 냉큼 있다고 대답하면 될 것을 경원이년은 김 지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짱깨 놈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짱깨 놈이 ‘아 싸! 나에게도 기회는 있어.’ 하는 얼굴로 밝게 대답했다. “ 없을 거 같아요!!” “ 왜.” “ 뭐랄까. 너무 아름다운 꽃이라 벌레도 안 꼬일 거 같거든요!” 저 새끼의 주둥이 아리를 어쩌면 좋을까. 경원이 놈이 히죽대며 짱깨 놈의 볼을 꼬집었다. “ 야. 너 되게 웃긴다?” 놈은 자신이 경원이년을 웃겼다는 사실이 졸라 자랑스러운지 ‘애인이 있으면 그냥 나뒀겠어요?’하고 씨불였는데 그 말에 ‘왜’ 하고 솔이 놈이 물었다. 안 듣는 척 하더니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간사한 놈. “ 있다면 말 그대로 정말 병신 같은 놈이죠.” “ 정말 그렇게 생각해?” 경원이 놈이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말에 짱깨 놈이 머리통이 떨어질 정도로 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죠.’ 하고 대꾸했다. 저 끄덕이고 있는 대가리가 지만이놈 주먹에 영원히 끊어지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 처한 위험 따위는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경원이년 미모에 혹한 짱깨 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저라면 불안해서 방에 모셔놓고 문 잠가놓고 다닐 거 같아요. 이거야 원 보통 예뻐야 말이죠!” 난 네가 더 불안하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딱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변한 지만이 놈이 벌떡 일어나 아직 랩을 벗기지도 않은 깐풍기 접시를 그대로 짱깨 놈 얼굴에 집어 던졌다. 벌어진 틈 사이로 깐풍기의 뜨거운 양념이 짱깨 놈의 얼굴에 쏟아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봐선 굉장히 뜨거워 보인다. 역시나 ‘아 뜨거워!’ 꽥 괴성을 지르며 1미터를 가뿐히 뛰었다 내려오는 녀석의 얼굴에 지만이놈의 거대한 주먹이 날아갔다. 청송의 호모 사이코야. 제발 부탁이다. 여기서 초상 치르진 않게 해주렴.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 오늘 병신 같은 놈한테 얻어터져서 너나 병신이나 돼라!” 살육의 현장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옆에서 즐거운지 킬킬대며 경원이년이 ‘지만아. 넌 주먹 쓸 때가 진짜 섹시해.’ 하는 거지같은 말을 퍼부었다. 복희씨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이 녀석들 때문에 우울증으로 추락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몰골이 아리송하게 변한 짱깨 놈이 벌벌 떨며 지만이 놈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질질 짜고 있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음식만 축내고 있던 권솔이 갑자기 내 옆에 달라붙어 귓속말을 해왔다. “ 이 복희 새끼가 너 찾더라. 그 새끼랑 무슨 일 있었냐.” 복희씨가 날 찾는다고? 놀란 눈으로 놈을 보는데 솔 이놈이 다시 내 귓불을 쭉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 네 번호 물어보더라.” “ 그래서? 가르쳐줬어? 너 가르쳐 줬지? 응?” “ 응.” “ 야, 왜. 멋대로 가르쳐 주고 지랄이야!!” 내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자 권솔 놈이 덩달아 고함을 질렀다. “ 번호 물어보러 그 새끼가 직접 찾아왔는데 그럼 모른다고 하냐!” “ 그래. 모른다고 해야지!! 왜 나한테 말도 없이 가르쳐 주냐고 이 자식아!” “ 내가 네 번호를 모른다고 하면 그걸 믿겠냐. 그리고 그 새끼가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물어보는데 어떤 골나간 새끼가 모른다고 잡아 떼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난 굴하지 않고 말했다. “ 몰라. 전화와도 난 잘못 거셨는데요, 라고 말할 거다.” “ 이거 미친 거 아냐? 그럼 내가 잘못 된 번호를 가르쳐줬다고 생각할 거 아니냐! 넌 내가 맞아 죽어도 좋냐.” “ 그래.” 놈이 생뚱맞게 어깨동무를 하며 내 몸을 옆으로 흔들었다. “ 계진아 왜 그래. 우리 친구잖아.” “ 쇼하지 마라. 장례식장에서 보자.” 내 말에 솔이 새끼가 토라져서 ‘흥.’ 하는 연소자관람불가의 여음 구를 내며 살 떨리게 징그러운 말투로 ‘계진아, 전화받아줘’ 하고 지랄을 했다. 고개를 돌려버리려고 했으나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 놈이 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춰댔다. 시발. 더러워 죽겠네. 그러고 보니 어째 눈썹이 축축하다. 이런 젠장. 눈썹에 탕수육 양념 묻었잖아! “ 복희새끼 너한테 긴히 할 말이 있는 거 같더라니까.” 귀찮아서 온갖 저항을 멈추고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솔이 놈이 그럼 그렇지 하는 자만심이 깔린 표정을 지으며 ‘전화 꼭 받아.’ 하는 천박한 협박으로 구구절절한 부탁을 마무리 지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자 놈은 만족스러운지 내 엉덩이를 두어 번 팡팡 두드려댔다. 그나저나 진짜 전화를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된다. 짱깨 놈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설교를 하는 지만이 놈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드르륵 진동음이 울려왔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벨소리로 울렸는데 어느새 핸드폰은 알아서 진동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액정을 보자 처음 보는 번호가 떴다. 지만이놈과 경원이 새끼가 짱깨 놈에게 신경을 뺏긴 틈을 타서 방바닥에 널려 있는 음식을 다 아작 낼 계획이 보이는 솔이 새끼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 혹시 이번호야?” “ 응. 참나 이 새끼도 양반은 못되겠네.” 설마 복희씨가 해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핸드폰을 들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등 뒤로 솔이 놈이 ‘전화 잘 받아.’ 하는 소몰이 창법을 구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씹어주고 문을 닫았다. 옥상으로 올라오는 사이 진동은 정신 사납게 징징대다 폴더를 열려는 순간에서 뚝 끊어졌다. 끊어진 폰을 허망하고 보고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엔 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바꾸지도 않았는데 또 알아서 잘도 바뀌어있다. 폴더를 열었다. " 여보세요. “ 「 나. 」 이봐요, 복희씨. 비교적 처음 전화를 하면 자기이름을 밝히는 게 순서입니다. “ 네.” 「 내가 누군데? 」 “ 이 복희씨 아니세요?” 「 맞다.」 “ 네, 알고 있었어요.” 「 너 내 말 씹으니까 기분 째지냐.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먼저 가고 염병이냐. 」 그는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덧붙였다. 「 내일 출근하지 말고 기다려. 너희 집 앞으로 간다. 」 “ 왜요?” 복희씨는 날선 목소리로 버럭 성질을 부렸다. 「 왜요 라니? 그 말은 어째 오지 말라는 말 같다? 」 “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오시려는 이유가 있을 거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 꼭 이유가 있어야 만나냐? 」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묘하게 신경질적인 부분이 있었다. 화가 나는 일이 있었거나 아니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일이보다는 화나는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냥 느낌상 그랬다. 「 쓸데없이 어디 나다니지 말고 집 앞에서 기다려.」 “ 네. 아, 잠시 만요!” 「 왜. 」 순간 나는 갈등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그냥 아무 말이나.” 그는 또 몇 초간 뜸을 들인 끝에 껄렁하게 대답했다. 「 없어. 」 “ 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 신경 쓰여. 」 “ 네?”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끝냈다. 「 늦었다. 빨리 자라. 」 내가 마지막 인사를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그는 분명 신경 쓰인다고 말했다. 뭐가 신경 쓰인다는 건 좋은 걸까. 신경 쓰인다는 것은 좋은 걸까. 아니다. 재수 없으니까 거치적거리지 마라. 이런 뜻일 수도 있다. 바보같이 나 좋은 쪽으로 파악만 하다니! 나는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꽁꽁 언 대나무 평상에 다리를 오므려 쭈그리고 앉았다. 녀석들이 보면 궁상맞다고 손가락질하기에 충분한 폼이다. 그때 경원이놈이 쿵쾅대며 옥상으로 올라왔다. 녀석은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기 위해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 추운데 웬 궁상이냐. 너다운 짓거리다.” “ 바람을 쐬는 거다. 뇌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놈이 나와 똑같은 자세로 평상에 쭈그리고 앉아 하얀 눈 위에 담뱃재를 털어냈다. “ 까고 있네. 너 고민 있냐.” 뜨끔했다. 대충 넘어가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 놈이다. 최대한 무뚝뚝하게 말했다. “ 없다. 고민 같은 거.” “ 혼자 어디 가서 삽질하지 말고 빨리 말해봐.” 순간 갈등했다. 불 여시 같은 놈이지만 그래도 내 말에 유일하게 귀 기울여 줄 놈이기도 하다. 그때 마침 머릿속에서 섬광과도 같은 거대한 빛줄기가 번뜩였다. 그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이러면 되겠구나. “ 야, 잘 들어봐. 이건 절대 내 얘기가 절대 아니고 내 친구 얘긴데 말이야.” 경원이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살쾡이처럼 짝 찢어진 눈이 갸름해졌다. 놈의 독살스러운 눈빛에 뜨끔했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러나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상시와 다름없는 사가지 없는 얼굴로 돌아와 무뚝뚝하게 툭 내뱉었다. “ 말해.” 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잘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왕 꺼낸 거 매듭을 짓고 싶었다. “ 좋아하는 건 아닌데, 뭐랄까. 그래 맞다! 왠지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대!” “ 그래서.” “ 그 사람이 어떤 예쁜 남자랑 그걸 뭐라고 해야 될까. 그거 있잖아. 성 관계.” 경원이 놈이 내 말을 정정했다. “ 씹질.” “ 야. 말을 해도 씹 질이 뭐냐, 씹질 이 .” 녀석이 다시 언어순화에 나섰다. “ 알았다. 그럼 빠구리.” “ 말을 말자. 여하튼 내 친구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하고 그걸 하는 모습을 봤나봐.” “ 응.” “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대.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화도 나고 그랬대.” “ 끝이냐?” 경원이 놈이 담배꽁초를 눈 위에 지그시 눌러 밟으며 입 꼬리를 올렸다. 녀석의 웃음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놈의 저 불길한 비딱한 웃음 뒤엔 항상 내가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졌으니까. 역시나 오늘도 예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러니까 결론을 내보면.” “ 응.” “ 친구가 너고, 그 남자가 이 복희고, 그 예쁜 년이 장미. 그 새끼란 말이네?” “ 그래 맞아. 뭐? 아니! 내 얘기가 아니야. 내 친구 얘기라고! 너 지금까지 무슨 얘기를 들은 거냐!” 얼마나 놀랐는지 벌떡 하고 일어나서 미친 듯이 손사래를 쳐댔다. 그런 날 올려다보며 경원이놈은 팔짱을 낀 채 승자의 여유와 같은 나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새끼, 졸라 지랄하네.’라고 거들먹거렸다. “ 너 주방 나가고 나서 나도 따라 나갔다. 뻥칠 생각마라.” 나는 그 자리에서 꽁꽁 얼어붙었다. “ 너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님 아버님 오, 할렐루야. “ 그리고 넌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 “ 내가 뭘?” 놈이 마음 놓고 나를 비웃었다. “ 넌 우리 말고 친구가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간과했어.” 청년 탐정 이 경원은 순간 자기도 나와 권솔을 제외하곤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재빨리 말을 바꾸어 사건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개수작을 부렸다. “ 새끼 은근히 취향 독특하네. 너 이 복희가 왜 좋냐?” “ 아직 좋단 말은 안했잖아!” 내 풀죽은 대답에 경원이 놈의 사기가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다. 녀석은 당당하게 말했다. “ 그건 시간문제다.” “ 뭐가.” “ 처음에 좋아지는 게 어렵지, 그담엔 시간문제라고. 사람 좋아하게 되는 거.” “ 정말?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데?” “ 어쩌긴 뭘 어째. 시간에 맡겨야지. 근데 너도 참 너다. 이 복희를 얼마나 봤다고 벌써 좋다, 어쩐단 말이 나오고 그러냐.” “ 아직 좋다 까지는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거지. 진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야. 이러는 내가 조금 한심하기도 하고.” 경원이 놈의 얼굴이 얄궂게 변했다. 녀석은 내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어울리지도 않는 위로의 포즈를 취했다. 어찌나 힘이 센지 녀석의 걸쳐놓은 어깨를 낑낑대며 겨우 떨쳐버리자 놈은 눈을 반짝이며 ‘장미 고 망할 년은 내게 맡겨.’ 라고 지껄였다. 됐다고 말하려 했는데 얼핏 스친 녀석의 얼굴이 지나치게 의욕적이라 난 조용히 주둥이를 닫았다. …그나저나 지만이 새끼한테 습격을 당한 어린짱깨는 어찌 되었을까. “ 짱깨 놈은 갔냐. 혹시 고소한다는 말은 안 했겠지?” 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지만이 몰래 손 한번 잡아줬더니 고소는 안한다고 하더라.” “ 미모 덕 많이 보네.” “ 워낙 빼어나야 말이지.” 알았다. 잡놈아. 경원이놈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끝으로 우린 5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녀석대로, 난 나대로 하늘과 땅으로 시선을 돌린 채 어울리지 않는 상념에 빠져있었다. 하늘에서 알갱이로 떨어지는 눈을 맞으면서 말이다. 눈발이 굵어졌다. 어느새 운동화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경원이 놈의 얼굴빛이 나못지 않게 시무룩하게 변해 있었다. 365일중에 364일은 밝은 녀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무슨 고민이 있나 녀석을 보는 내 마음 역시 편치만은 않았다. “ 계진아.” 방금 뭐라 그랬지? 잘못 들었나 싶어 귓구멍을 엄지손가락으로 콕콕 찍어댔다. 다시 ‘계진아.’ 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 귀만 팠던 것 같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옥상엔 경원이놈 외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계진이라 함은 저 새끼가 날 그렇게 불렀단 말인가. 내년이면 이 경원을 알고지낸지 횟수로 10년.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 녀석이 ‘계진아.’ 하고 부른 적이 과연 있기나 했었나? 기필코 없었다. 저 놈이 썩은 음식을 주워 먹은 것이 틀림없다. 더럭 겁이 났다. “ 내가 잘못 했다.” 대뜸 사과를 하는 나를 보는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 잘못 해? 그건 또 무슨 말이냐.” “ 너 지금 나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러니까 갑자기 이름을 부르고 생 쇼를 하지.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다.” “ 지랄한다. 그런 거 아니다. 계진아, 있잖아.” “ 야! 그만해. 내가 잘못 했다고 했잖아. 얼마나 더 사과를 해야 화가 풀릴 거냐! 이 독한 놈아.” 경원이 놈이 갑자기 일어나 발밑에 쌓인 눈뭉치를 미친 듯이 걷어찼다. “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냐. 야, 나 말 좀 하자, 말 좀 해!” 나는 겸연쩍게 말했다. “ 그렇다고 성질부리냐. 알았어. 말해라.” 녀석은 여전히 씩씩대며 다시 평상에 앉아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 들어봐! 내가 널 처음 본 게 언젠지 아냐?” “ 언제긴 뭘 언제야. 내가 그것도 기억 못하겠냐. 솔이랑 지만이 싸울 때 처음 봤잖아.” 내말이 끝나자마자 경원이 놈이 딱 잘라 말했다. “ 아니다. 그때가 아니다.” …아니라고? 의문스러운 눈길로 녀석을 보자 놈은 여전히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청송에 입학하자마자 지만이 새끼가 선배하나를 아작 냈다. 병신새끼, 운도 더럽게 없지. 맞은 새끼가 대단한 집 아들이었는데 그 개새끼가 부모한테 뻐꾸기 짓거리 하는 바람에 지만이 새끼 현행범으로 경찰서에 곧장 잡혀 들어갔어. 너도 알겠지만 난 돈 걱정은 안하고 살았어. 우리 꼰대한테 자식도 나하나 밖에 없거니와, 불임판정 받고 난 자식이라 더럽게 오냐오냐 컸거든. “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 정도는. 그래서 네 놈이 부모를 버리고 지만이 새끼를 택했을 때 우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거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말을 계속 할 수 있도록 기다리기만 했다. “ 우리 부모도 안다. 나 성격 더러운 거나 학교에서 좆나 까대고 다니는 거. 그런데 한 번도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땐가 낮잠 자고 있는데 꼰대새끼가 성질을 긁기에 보란 듯이 칼 쇼 좀 보여줬더니 그 다음부턴 말 안 해도 엎어져 있더라. 뭐, 엄마는 원래부터 내 밥이었고. 그 뒤로 학교 다닐 때는 술 먹고 집에 가서 개지랄 좀 떨어주고 합의금 만드는 거 따윈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날도 그렇고 그런 날 중 하나였어. 공부하겠다는 각서 쓰고 돈 뜯어내서 지만이 새끼 빼내려고 곧장 경찰서로 달려갔어.” “ …….” “ 그날이었을 꺼다. 내가 널 처음 본 게. “ 녀석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느릿하게 담배하나를 더 꺼내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후 쾌쾌한 연기를 뱉어냈다. “ 그때가 우리가 17살이었을 거다. 너도 알다시피 지만이 새끼가 좀 멍청하잖아. 서에 잡혀 들어간 새끼가 경찰들이 시켜준 설렁탕에 소주 처먹고 기분 좋아져 있더라. 급기야 식후 땡 하러 나간다고 고집을 피워서 내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어. 그때 갑자기 내 옆에 앉아 있던 놈이 인상을 쓰면서 경찰 새끼한테 달려드는 거야. 본의 아니게 듣게 된 거다. 뭐, 합의금 때문이더군. 그 새낀 합의금을 죽어도 못 내놓는다, 경찰은 합의금 없으면 소년원에 들어가야 된다. 뭐 그런 시답지 않는 얘기였다. 돈 때문에 싸우고 있는 꼴이 한심하고 재미도 없었어. 단순히 빨리 집에 가고 싶단 생각만 들었지.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난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전혀 감이 안 온다. 녀석은 담배꽁초를 슬리퍼로 비벼 꺼뜨리며 뜬금없이 킥킥 웃었다. “ 그때 어떤 병신 같은 새끼가 좆나 희한한 얼굴로 엉엉 울면서 달려오는 거다. 서에 다시 들어온 지만이 새끼 붙들고 재밌는 일 생겼다고 열심히 지켜봤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재밌을 거 같았다. 근데 말이다. 그 병신 같은 새끼가 갑자기 경찰새끼한테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리 같은 사인 줄 알았지. 근데 보면 볼수록 더 가간이었다. 그 멍청한 놈이 싸구려 손가방을 뒤적거리며 두꺼운 돈 봉투를 꺼내서 경찰 새끼한테 내밀더라고. 그리곤 최대한 모았는데 이것밖에 없다는 둥 한번 만 봐달라고는 둥 어쩌고저쩌고 지껄이는데 솔직히 한심하고 꼴사나웠다. “ 경원이 놈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웃어댔다. 퍽이나 재밌는 모양이었다. “ 좆나 웃기지 않냐. 자기가 한일도 아니면서 봐달라고 질질 짜고 있는 상황이 말이야. 난처해하는 경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우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지만이놈이 합의금을 죽어라 못 내놓겠다고 지랄 대는 놈을 가리키면서 권솔이네, 하고 말하더라고. 나는 녀석에게 물어봤어. 울고 있는 병신이 권솔의 애인이냐고. 의외였어. 친구라고 말하더라고. 그리고 저 새끼들 우정 유명해 라고 지껄여대는데 뭐랄까, 진심으로 놀라웠다. “ 녀석은 나를 곁눈질하며 바라봤다. “ 그리고 신기해졌다.” 아, 생각난다. 그날은 주유소 월급 받는 날이었었다. 방세도 빼고, 몇 달 치 모아둔 월급도 탈탈 털어 주유소 소장님 돈 가방을 잠시 빌려 들고 경찰서로 달려갔었다. 필요 없다고, 자기는 잘못한 게 없으니 그 돈을 바칠 바에 차라리 빵에서 썩겠다고 무대포로 나오는 솔이 새끼를 달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죽을 것처럼 힘들었던 일도 이젠 그런 일들이 있었지 하고 넘기는 걸 보면 역시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때처럼 고생스러운 일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진 않지만 가끔씩 옛일을 돌아보면 어느 새 추억이 되어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러고 보면 고생스러웠던 일, 힘들었던 일조차 없이 무난하게만 시간을 보내서 추억이 하나도 없는 것보단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참 별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억을 되돌아 볼 때 서글퍼지는 걸까. “ 그래. 그땐 진짜 힘들었어.” “ 너도 솔이 새끼 봐서 알겠지만 학교 다닐 때는 주먹으로 위치가 바뀌잖아. 그래서 나와 지만이 놈 옆엔 친구란 이름으로 들어붙는 쪽발이 같은 새끼들이 넘쳐났어. 별생각 없이 그저 그렇게 돈을 쓰고 친구란 허울로 대충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술 먹고, 싸우면서 다른 새끼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부정하진 못하겠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진짜 그런 생각이 들었다니까. 그리고 문득 내 옆에 지만이 새끼 외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하게 허무해졌어.” 녀석이 코를 찡긋 해보이며 말을 이었다. “ 서에서 나오자마자 지만이 놈에게 내가 말했다. 권솔인가 하는 새끼랑 싸워보라고. 그때는 나도 따라 가겠다고 말이야. 사실 주먹질이란 건 최소 자기 방어만 하면 돼. 하지만 지만이 새끼는 항상 판을 크게 벌려서 문제지. 내가 큰판을 좋아하지 않다는 다는 건 그 새끼도 잘 알아. 그랬던 내가 나서서 싸움을 하라고 시키고 또 따라가겠다고 하는데 녀석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는 권솔이잖아. 일종의 승부욕 같은 것도 자극이 되었겠지. “ “ …….” “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어. 권솔이 싸우는데 김 계진이 따라 나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바늘 가는데 실 안가냐. 너흰 그런 사이잖아. 나는 그런 너를 조금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해야 되나. 너희 사이는 그 정도로 나에게 충격이었거든. 특히 너의 그 바보 같은 행동이.” 녀석의 얼굴은 깊은 수심 아래로 가라앉아 보였다. 쾌활하지만 무턱대고 쾌활한 건 아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 멍청한 새끼.” “ 야!” “ 넌 그때랑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멍청한 성격에 남들에게 당하고 사는 지긋지긋한 어수룩함까지 정말 단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 비록 너를 완벽하게 확인하는 데까지 십년이나 걸렸지만 뭐, 결론적으로 시간낭비는 아니었다고 본다.” 녀석은 말을 하다 말고 평상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눈뭉치를 탈탈 털어났다. 이미 젖어버린 물기까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놈은 계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계단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놀려 나를 바라보았다. “ 그 멍청함 말이다. 절대 변하지 마라. 그게 변하면 지만이 새끼한테 싸움까지 시켜가면서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했던 내가 한 짓거리가 좆나 병신이 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경원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다. 기분 좋은 말인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경원이 놈이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뒷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쯤, 다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 다음부터 우리 밥순이가 연락 오면 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고 해라.” 너, 설마 알고 있었냐. 무슨 말을 해야 될까 고민하고 있는 나에 비해 녀석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뱉어냈다. “ 나는 내가 생각해도 호로 새끼야. 낳아준 부모보다 김 지만이 더 좋아서 집이랑 다 팽개치고 뛰쳐나온 걸 보면 그게 호로 새끼지 별개 호로 새끼냐. 하지만 내 선택에 후회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제 와서 괜히 흔들리고 싶지도 않아. 오늘 이후로 우리 밥순이가 전화 오면 죽었다고 해. 아니면 한국 떴다고 하던지.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교통사고 나서 김 지만이랑 같이 뒈졌다고 해도 나쁘진 않겠지.” “ 경원아. 그래도 그건….” 내 말을 막고 서둘러 말하는 녀석의 음성이 떨려왔다. 지금의 녀석은 감정을 억누르기에도 벅차보였다. “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 목소리 듣고 있는 거 그거 말이다. 생각보다 미칠 만큼 힘들다.” 녀석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악바리 이경원이 운다.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지금 내가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알기에 더 가슴이 아파왔다. 서러운 마음에 마음 놓고 엉엉 우는데 머리위로 정신없이 눈뭉치들이 휘날렸다. 겨울의 어느 밤은 또 그렇게 지나가려나보다. R-rrrrr. 짜증나게 열심히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겨우 눈을 떴을 땐,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푸우 베개에 머리통을 처박고 꿈나라에 빠져있는 솔이 놈의 궁둥이였다. 아침부터 졸라 재수도 없지. 이 새끼의 궁둥이가 바로 얼굴 앞에 있다니. 나는 놈의 궁둥이를 발바닥으로 뻥 걷어차며 ‘전화 좀 받아.’ 라고 꽥꽥 거렸지만, 역시나 내말은 겨울잠을 자는 놈에 씨도 먹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 방바닥을 더듬어 핸드폰을 쥐었다. “ 네, 김 계진인데요.” 「 나. 」 씨발놈아.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질을 해서 대뜸 나라고만 말하면 다냐! 라고 고함을 지를 예정이었으나 비몽사몽 한 정신에도 나라는 신원을 밝힌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잠에 감겨 있던 목을 열심히 가다듬었다. 그러나 성질 급한 이 복희씨는 그 세를 못 참고 나 열 받아 죽겠으니 맞아 죽기 싫은 놈들은 알아서 피해보시지 하는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 모가지 분질러 놓기 전에 빨리 말해. 」 “ 네. 죄송해요.” 「 집 앞이다. 빨리 나와라. 」 “ 지금이 몇 신데 집 앞이래요. 사람이 잠도 없어요? 지금 겨울이에요. 아침엔 추워요.” 「 시간은 아홉시 반이고 잠도 없냐고? 나는 원래부터 잠이 없다. 겨울인 거 나도 알고 아침에도 그다지 춥진 않은데. 」 “ 아침부터 무슨 일로 오셨어요?” 「 전화비 많이 나오니까 나와서 얼굴보고 말해. 」 “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반쯤 미친 듯이 입을만한 옷을 찾았다. 여기저기 헤집고 다닌 통에 방 꼴은 쑥대밭인데 입을만한 옷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괜히 인생 헛살았다 싶은 게 울컥 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솔이 녀석이 깨지 않게 슬금슬금 고양이 발로 방을 나와 경원이네 방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언제나처럼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노크를 해도 기척이 없다. 그냥 무턱대고 들어갔다. 문소리를 들은 지나치게 잠귀가 밝은 경원이년이 ‘어떤 십장생이야!!!’하고 고함을 질렀다. 나다. 나라는 십장생이다. “ 야 옷 좀 빌려줘.” “ 싫어! 너는 옷 더럽게 입잖아. 네가 입으면 그 다음엔 바로 누더기가 된단 말이야! 절대 못 빌려줘. 네 옷 입어라.” 녀석의 잔소리를 한귀로 흘려들으며 방안으로 척-척척 들어와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저게 미쳤냐. 내말 안 들 리냐.’ 하고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는 놈에게 ‘응. 하나도 안 들려.’ 라고 대꾸했다. 녀석이 열 받은 얼굴로 지만이 새끼 품에 안겨 누우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썼다. 약 올라 죽겠는지 연시 ‘시발, 시발’ 거리며 발로 이불을 뻥뻥 걷어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근히 귀여운 자식이라니까. 패션이야 말로 그 인간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울부짖던 놈답게 역시나 옷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입을 만한 옷은 드물었다. 날개달린 티셔츠, 레이스 달린 리본이 묶여진 와이셔츠. 등등 평범한 대한민국 26살 남자가 소화하지 못할 옷들이 넘쳐났다. 경원이 놈이 안 입는다고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딱, 한명을 제외하곤 돈 쥐어주고 가져가라고 사정해도 쳐다보지도 않을 옷들이었다. 그 한명은 어제이후로 내 적이 된 장미 그 망할 놈이었다. “ 이 경원. 나 이거 가지고 간다. 잘 입으마.” 그나마 가장 평범한 하얀색 코트를 꺼내며 녀석에게 말했다. 즉각 이불을 걷어내며 녀석이 반쯤 일어나 ‘그거 좆나 비싸! 절대 안 돼.’ 하고 말했다. 난 가볍게 무시하고 코트를 옆구리에 끼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등 뒤로 ‘뭐 묻히면 너 얼굴에도 똑같은걸 영원히 묻히게 살게 해준다. ‘ 하는 3류 저질의 협박이 들려왔다. 하지만 난 놈의 말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옷을 들고 다시 집으로 뛰어와 대충 머리를 빗고 안에 티를 받쳐 입은 후 코드를 걸쳤다. 역시 옷이 날개구만. 이정도면 브레드 피드도 질질 짜고 가겠어. 흐흐. 순간 복희씨를 까맣게 잊고 나름대로 거만해하게 웃고 있는데 띠-리링 하는 문자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열었다. 「 ㄴㅓ ㅁ ㅡ l ㄴㅡ ㅈ ㄷㅏ. ㅈ ㅜ ㄱ ㅡ ㄹㅐ 」 어떤 나사 풀린 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장난 문자 질이냐. 한심하기 그지없는 없는 놈이다. 삭제버튼을 눌러 가벼운 마음으로 문자를 지워버렸다. 턱에 구멍 난 낙타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자는 솔이 놈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나저나 복희씨는 어디 있지. 당연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 복희씨가 안 보였다. 굽이진 골목을 훑어봐도 없다. 급기야 갈림길을 꺾어 돌아 나와 큰 길로 이어지는 골목 밑에 전봇대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핵심은 전봇대였다. 그늘진 전봇대 밑에 건장한 청년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뒷모습이 포착되었다. 검은 니트에 회색정장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청년은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숨죽여 웃느라 어깨를 부들 떨고 있었다. 섬뜩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청년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나는 언제나 역시나 하는 감탄을 가져다주었다. “ 복희씨 뭐하세요.” “ 왔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는 사이 자세히 보니 복희씨는 라이터로 공 벌레를 잡아다가 태우고 있었다. 옆에 공 벌레의 등껍질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것이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7살 이후로는 유치하다고 절대 하지도 않는다는 벌레 태워죽이기 놀이를 29살이나 먹은 사람이 저렇게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짜증날 정도로 생소했다. “ 복희씨 재밌으세요?” 난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내 말에 복희씨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누가 재밌데?’ 하고 대답했으나 그러면서도 일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공 벌레를 열심히 태웠다. 그는 15분이 넘는 시간동안 왕개미, 공 벌레, 지네, 무당벌레 등을 구두로 밟아 1차로 기절을 시킨 후 라이터를 화형을 입히는 2차 살인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보면 볼수록 극악무도한 새끼였다. 물론 나는 옆에서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드디어 흡족한 양을 다 태웠는지 복희씨가 ‘재미없다.’ 라고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재미없다는 놈이 왜 아쉬운 눈으로 입맛을 다시는 걸까. “ 야. 죽을래? 왜 문자 씹어!” “ 문자요? 문자 온 거 없던데. 설마, 조금 전에 보낸 문자가 복희씨가 보낸 거였어요?” “ 그래.” 문자를 보낸 자신이 자랑스러운지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보내는 사람은 흡족했는지 모르겠지만 받는 사람은 고문이다. 도대체가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는 ‘왜 답문 안 하냐.’ 는 이기적인 투정을 부렸다. 그 얼굴을 보면 차마 네가 보낸 문자 내가 다시 보내 줄 테니 너라면 알아먹을 수 있겠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 죄송해요. 뭐라고 보내셨는데요?” “ 너무 늦는다. 죽을래, 라고 보냈다.” 네. 별 쓸 때 없는 문자였군요. “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불러내고, 우리 어디가나요?” “ 응. 조조 보러.” 영화요 라고 묻는 내게 복희씨는 ‘그렇게 좋냐. 나랑 같이 있을 생각하니까 아주 껌뻑 죽는 군.’ 하고 잘난 척을 했다. 앞으로 쏜살같이 걸어가는 그를 붙잡으며 ‘저기요, 복희씨.’ 하고 운을 떼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 저기 있잖아요. 복희씨.” “ 내 이름이 그렇게 좋아? 왜 자꾸 복희씨, 복희씨 하고 말을 안 하냐.” 그의 차가운 눈을 오롯이 받아내고 있자니 정말이지 떨려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말 안했다가 맞아죽는 거나 떨려 죽는 거나 매한가지란 생각에 나름 박력 있게 말했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물어보려고 했다. 장미 놈하고 무슨 사인지.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복희씨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 있는 것 자체로도 가슴이 오그라들어 버릴 것 같은데 그가 대뜸 ‘애인이야.’ 라고 말해버린다면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장담할 수가 없다. 불러놓고 아무 말 없는 내게 그는 ‘싱거운 놈.’ 이라고 말 한 뒤 주차된 검은 자가용 앞으로 갔다. 난 힘없이 뒤를 따라갔다. 차안에선 무섭게 입을 다무는 복희씨 덕분에 나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다. 다만 예기치 못한 순간 복병을 만나 갑갑했던 침묵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졌다. 하지만 그 복병이라는 것이 아침순찰을 도는 경찰차였다. 그는 갑자기 앞을 끼어드는 경찰차에 빡 돌기일보직전으로 변해 당장 조조고 나발이고 미친 듯이 경찰차를 쫓아가는 통에 그를 겨우 어르느라 달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아침의 레이서를 끝내고 부랴부랴 극장에 도착했을 때엔 조조는 이미 물 건너가 버렸다. 그래서 우린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영화 시간대에 맞는 영화중에 왜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황금용의 누런 이빨이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복희씨와 나는 나란히 앉았다. 표는 물론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어딘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팝콘과 음료수가 보였다. “ 먹고 싶어요?” 복희씨는 자신이 팝콘을 먹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매우 자존심 상하는지 갑자기 고개를 돌려버렸다. “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내가 왜 저런 불량식품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지?” “ 왜 화를 내요. 아니면 말지.” “ 내가 언제 화를 냈냐. 그냥 그렇다 말을 한 거뿐이잖아. 화낸 적 없어.” 말을 하면서 그의 시선이 어느새 다시 팝콘으로 돌아가 있었다. 폼 잡다가 언젠가 굶어 뒈질 놈이다. 난 주섬주섬 일어나 ‘잠시만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고 팝콘과 콜라를 사왔다. 사온 팝콘을 복희씨 앞에 쭉 내밀자 그는 먹기 싫어 죽겠는데 네가 사온 거라 어쩔 수 없이 먹는다, 같은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팝콘상자를 건네받았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팝콘 한주먹을 쥐어 내 앞에 내민다. “ 자, 먹어라.” “ 진짜 고마워 죽겠네요.” 우린 그렇게 영화시작 10분 동안 팝콘만 와그작와그작 먹어댔다. 얼추 배를 채웠는지 복희씨가 내 앞으로 팝콘 상자를 내밀었다. 팝콘은 온데간데없고 옥수수 잔 부스러기들만 바닥에 깔려 있었다. 나는 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람들을 슬쩍슬쩍 살피며 기름기 묻은 손가락을 소파에 문질러 닦고 있는 복희씨를 이끌고 4층으로 올라갔다.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매표원에게 눈싸움을 시작하려는 그를 힘겹게 타일러 상영관으로 들어왔다. 너무나 당연히 객석은 싸늘하게 텅텅 비어있었다. 관객을 손으로 셀 수도 있을 정도였다. 정확히 6명이다. 두 사람은 커플이고 다른 네 명은 각자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 복희씨 앉으세요.” 멀뚱히 서있는 그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사람이 그렇게 말해주면 그냥 말없이 앉으면 될 것이지 그는 ‘앉으려고 했었다.’ 하고 아침부터 사람 기분을 잡치게 만들었다. 기다려라, 속에서 칼을 갈고 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복희씨와 내가 앉은 바로 앞에 이상한 커플이 다가와 앉았다. …텅 빈 자리에 놔두고 앞뒤로 나란히 붙여놓은 건 또 뭐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어깨에 예상치 못한 무게가 실렸다. 옆을 보자 복희씨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조금 떨렸다. 아니 조금 많이 떨렸다. “ 영화 끝나면 깨워라.” 팝콘을 먹으러 온 건지 영화를 보러 온 건인지 모르겠네. “ 피곤하세요?” “ 응. 조금.” 그는 더 이상 말시키지 말라는 듯이 눈을 감았다. 반듯한 눈썹 아래 긴 속눈썹. 눈을 감고 있어도 잘생긴 오라는 어쩔 수 없군. 어쩌면 나는 특별히 그를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삼스럽게 그의 얼굴에 감탄하고 있을 쯤에나 되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황금용의 누런 이빨은, 황금색의 코끼리 네 배 정도로 무식하게 뚱뚱한 용이 누렇게 변한 이빨의 원인을 찾아가는 퓨전 판타지 영화였다. 보자마자 돈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기에 충분한 소재와 구성이었다.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타자기 그래픽으로 보일 만큼 수작업이 대놓고 보인 괴상망측한 영화는 한국영화의 극장관객 점유율을 현저히 떨어뜨리는데 알게 모르게 일조하고 있었다. 속으로 돈 아깝단 생각을 열심히 하며 그래도 영화에 주의 깊게 보고 있는데 앞에 앉아 있는 커플 둘이 쏙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너무 재밌다. 그치 자기야?’ ‘ 응. 완전 재밌어.’ ' 역시 자기는 영화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니까. ‘ ‘ 그래도 자기만 하겠어? 이리 와봐. 진짜 귀여워 죽겠다니까.’ ‘ 자기. 우리 영화 다 보고 뭐 먹을까?’ ‘ 응. 글쎄, 난 자기가 맛있을 거 같은데?’ ‘ 꺅. 아 몰라, 몰라. 자기는 야만인.’ 조금만 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는 내가 야만인이 될 거 같았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귀에 바람을 불고 몸을 비벼대고 안아주고 아주 난리가 났다. 완전 꼴사나웠다. 삿대질을 하고 싶은 생각을 억누르고 억지로 영화로 눈을 돌렸다. “ 심심하지?” 언제 일어났는지 게슴츠레하게 반만 눈을 뜬 복희씨가 손에 턱을 개고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 아주 조금요.” “ 심심한데 우리 내기나 하나 할까?” “ 내기요? 무슨 내기.” “ 간단한 거야. 지는 사람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괜찮지?”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이젠 무서워지기 까지 한다. 복희씨는 나의 불안함을 증폭시키기로 작정했는지 앞에 앉아 닭털을 날려대는 커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지금부터 5분 안에 저 닭들이 헤어진다, 안 헤진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 말도 안 돼. 그 짧은 시간 안에 헤어질 리가 있겠어요?” 복희씨의 내기에 자신들이 희생양의 제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볼 만지고 희희낙락 거렸다. 안타까웠다. 조금 불쌍하기도 하고 뒤숭숭한 마음에 한숨을 폭 내쉬는데 복희씨는 ‘내기 할 거야, 말 거야.’ 하고 다그쳐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겠냐고. “ 네가 좋은 쪽으로 골라. 헤어진다, 안 헤어진다. 둘 중에 뭐할래?” “ 당연히 안 헤어진다죠.” “ 후회안하냐?” 짓궂게 입 꼬리를 올리는 복희씨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저렇게 좋다고 난린데 5분 안에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하는 생각에 명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희씨는 입 꼬리를 내리며 알았다고 중얼거렸다. 그의 그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갑자기 불안했다. 복희씨는 다시 눈을 감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꺼림직 했지만 나름 안심하기 위해 누런 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그 사이에도 커플들은 닭살행각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번뜩! 남은 음료수를 마시려고 몸을 비스듬히 돌리는 순간 복희씨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손목에 채워진 비싼 시곌 내려다보며 ‘거의 다됐군.’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기지개를 쭉 폈다. 그러자 우두둑하는 뼈 소리가 들렸다. “ 팝콘 어디 있어?” 일어나자마자 팝콘을 찾는걸 보니 배가 고픈 모양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상자를 버리고 왔는데…. “ 복희씨가 다 먹어서 버리고 왔어요. 왜요? 배고프세요?” “ 배고픈 건 아닌데 필요해. 지금 당장.” 그는 앞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복희씨는 굴하지 않고 팝콘 두 개만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인상을 더러웠지만 사내가 그런대로 사냥하게 팝콘을 건네고 다시 몸을 돌렸다. 복희씨는 나를 보고 씩 입술을 말아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커플이 앉아 있는 앞좌석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플라스틱에서 퍽 하고 울리는 소리가 크게 진동이 되어 울렸다. 뭐냐. 이번엔 인상이 더러운 사내와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사내의 애인도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에 자세히 보지 못했던 사내의 칼자국이 번쩍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애인이었다. 당연하게 여자일거라 생각했었던 사람이 무려 남자였던 것이었다. 칼자국 놈이 예쁘장한 남자에게 ‘잠시만, 자기야.’ 하고 느끼하게 속삭이고 ‘이 개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라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다행이다. “ 죄…죄송합니다. 모르고 그랬어요.” 나는 서둘러 사과했다. 어차피 복희씨가 누군가에게 사과할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이 더 크게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남자의 혐오스러운 인상을 갈수록 짙어졌다. “ 너냐? 이 도그새끼야! 영화를 보러 왔으면 얌전히 보다가 갈 것이지 왜 의자를 걷어차고 지랄이냐!” 그때 갑자기 복희씨가 좌석에 느긋하게 등을 받치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들고 있던 캐러멜 팝콘을 칼자국 남자의 콧구멍에 쑤셔 박았다. 그는 자신이 한 행동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의 콧구멍에 박힌 팝콘부스러기를 보고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복희씨는 결정적으로 여차파면 사과를 하려고 폼을 잡고 있는 내게 엄지를 치켜 올리며 ‘잘 봐.’ 하고 말했다. 뭘 잘 보라는……. 맙소사! 그는 말이 끝내기가 무섭게 칼자국 사내의 뒤통수를 거침없이 걷어찼다. 순간 압력을 이기지 못한 콧구멍에 박힌 팝콘이 튕겨져 나왔다. 복희씨는 공중에 튕겨 오른 팝콘을 민첩한 속도로 낚아채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사내의 예쁜 애인의 주둥이 속에 콧물이 흥건하게 묻은 팝콘을 집어넣었다. 이물질이 묻어 있는걸 봐서 콧구멍 청소가 덜된 듯 보이는데 저 남자 비위가 괜찮을까. 예쁜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팝콘을 퉤퉤 바닥에 뱉어내고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울먹였다. “ 윽! 더러워. 더러워! 물컹한 게 씹혔어! 내가 미쳤지. 저게 뭐가 좋다고 이런 꼴을 당해!” 칼자국 사내의 고개가 예쁜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분노했던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언뜻 상처 입은 거 같기도 하고 충격을 받은 거 같기도 했다. 여전히 복희씨는 넘치는 자신감에 느긋하게 그들을 관찰했다. 급기야 다시 좌석에 등을 기대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발을 까딱까딱 박자를 맞춰댄다. “ 자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콧구멍이 그렇게 더러워?” “ 아! 미…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 나도 사람이니까!” “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이 그 정도로 가볍다니. 진짜 실망이다.” “ 자기! 정말 미안해.” 예쁜 남자는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얼굴로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영화가 상영되는 중이라 어두운 실내 때문에 쉽게 문을 못 찾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정신 사납게 굴던 그는 겨우 문을 찾아 ‘ 자기, 콧구멍 속 까지 사랑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만나.‘ 하고 고함을 지르며 뒤도 안돌아 보고 사라져버렸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복희씨의 말대로 5분 안에 그들은 헤어졌다. 콧구멍 청소를 게을리 해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사내가 비적비적 일어났다. 그는 복희씨에게 자신이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사실도 잊고 ‘애인의 사랑을 시험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허무맹랑한 말을 쏟아내고 깍듯하게 꾸벅 구십도 인사를 끝으로 영화관을 나갔다. 복희씨가 내기를 하자는 말을 하고 불과 4분 10초만의 일이었다. “ 이런. 내가 이겨버렸네?” 망할 새끼. 엿이나 먹어라. “ 네.” 의기소침하게 대답하자 복희씨가 의기양양해졌다. “ 소원은 두개다.” “ 두…두개요?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두 개는 안 돼요!” 소원이라고 해봤자 분명히 괴상망측한 상식 밖에 것을 주문할 텐데 그것도 두 개씩이나. 하!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 억지에요. 솔직히 저 사람들도 의심스러워요. 하는 짓도 어설프고 왠지 연기 같고!” 복희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 의심도 많다. 그리고 나는 하나라는 말도 안했어.” “ 그래도요! 아이 씨!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말씀해보세요. 하지만 이상한 거면 들어 들인다는 장담은 못해요.” 가난한 거 뻔히 아는데 돈 드는 건 아니겠지. 기분이 영 구렸지만 진건 진거였다.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물릴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오냐, 그러마. 하고 넘어갈 사람도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매도 먼저 맞자는 심정으로 ‘말씀 하세요.’ 하고 그를 재촉했다.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뒷목을 주무르고 있던 복희씨가 손가락을 까딱 까닥 해보였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음침하게 들려왔다. “ 하나는 나중에 써도 되냐.” “ 이게 무슨 쿠폰이에요? 그냥 둘 다 말해요.” “ 싫다. 하나는 나중에 더 필요할 때 쓸 거다.” “ 마음대로 해요. 그럼 하나는 뭔데요?” 복희씨가 장난기를 머금고 있던 입술을 내렸다. 입고리가 처지자 상대적으로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표정 없이 가만히 있을 땐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딱딱한 얼굴에 굳은 표정.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그의 모습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지 마라.”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무슨 말이라는 건 없고. 말 그대로다. 넌 멍청하니까 보이는 것만 믿을까봐 하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일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 잊지 말라면서 그게 내가 멍청한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복희씨! “ 단순히 보여 지는 것에만 정신이 팔리면 내가 진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걸 못 보게 되잖아. 특별히 너는 더 그럴 수 있는 녀석이니까.” “ ……” “ 그래. 너는 그런 녀석이니까. 너는 그런 녀석이다.”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 내 첫 번째 부탁은 그거다.” 복희씨는 나를 가게 앞에 내려주면서 ‘일 끝나고 기다려.’ 라는 말만 덜렁 남기고 뒤도 안돌아 보고 가버렸다. 극장에서 했던 그의 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소화되지 못해 목구멍에 꽉 막힌 음식물처럼. 그러나 사뭇 진지하게 변한 그에게 다시 되묻고 싶진 않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특별히 궁금하지도 않다. 머리를 긁적이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위해 카드를 꺼내려고 자자 그때서야 생각났다. 이 복귀 사장님한테 카드 받는 걸 깜빡했다는 것을. 오늘도 어쩔 수 없이 개구멍으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머리 위에서 두런두런 목소리들이 엉켜 들리는 걸 보아 게이 바 주방장 협회에 다녀온 온 아저씨가 무사히 돌아온 모양이었다. 냄새나는 통로를 겨우 지나 주방으로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걸었다. 쪽문으로 이어진 발이 쳐내고 문을 활짝 열자 예상했듯이 아저씨와 비룡 형이 보였다. 그리고 오후 2시도 안된 시간에 이곳에 절대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 경원과 권솔이었다. 두 녀석과 비룡이 형은 주방의 마른 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아 양푼에 만리장성처럼 높게 쌓아진 밥을 정열적으로 비벼먹고 있었다. 먹는 폼을 보자 즉시 감이 왔다. 집에 밥이 없었구나. 식충새끼들아. “ 계진이 왔어? 숟가락만 들고 빨리 와서 먹어. 아직 많이 남았어!” 빨간 밥풀을 콧등에 묻히고 활짝 웃으며 말하는 비룡이형의 목소리에 권솔과 이 경원이가 나를 돌아봤다. 출근시간에 무려 4시간이나 빨리 와도 도대체가 저것들은 놀라지도 않는다. 놈들은 내가 와서 양푼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정신없이 밥을 주둥이에 몰아넣으며 자신들의 위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방에서 열정을 쏟아 붇는 사람은 녀석들만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도마 위에 달랑 김치 한포기를 올려놓고 개 작두만 한 칼로 김치 꼭지를 썰고 있었다. 저러고 몇 분 동안이나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도마엔 이미 김치 물이 진득하게 배어있었다. “ 아저씨. 연수는 재밌으셨나요?” “ 계진아. 그 일은 재미로만 하는 게 아니다.” 사비까지 털어서 설립하셨다는데 단순히 재미는 아니겠지요. 예의상 ‘그럼요?’ 하고 묻자 아저씨는 깜빡거리던 눈을 부릅떴다. “ 요리는 예술이다. 예술은 노력과 장인정신에서 나오는 법. 음침한 게이 새끼들이 모인 곳에 있다고 해서 우리 같은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까지 음침하게 살수는 없지 않냐. “ “ 그렇게 깊은 뜻을 숨기고 계셨다니 역시 스승님은 존경스러운 분이 십니다!” 밥풀 묻은 숟가락을 쪽쪽 빨며 비룡이 형이 한 말이었다. 그때 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아저씨는 ‘비룡아, 이제 촬영을 해라.’ 하고 말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숟가락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형이 아저씨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앞치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동영상을 찍는지 사진을 찍는지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 뭐하는 건데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형이 ‘응. 동영상을 찍어서 나도 배우려고.’ 하고 대답했다. 도대체 뭘 배우겠다는 거지? 도마엔 김치 한포기 밖에 없고 아저씨는 그걸 칼로 써는 거 밖에 안하는데 지금 김치 써는 걸 배우겠다는 건가. “ 스승님은 김치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으시는 분이야. 나도 당연히 그렇고.” 기가 막힌다. “ 그래서 ” “ 생명을 분해하는 일은 정신집중을 요하는 일이야. 의대생들도 시체해부를 할 때, 경건함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과 비슷하지. 그래서 살아있던 김치를 분해할 때 스승님은 잠시 애도의 묵념을 표하시지. 스승님의 그 거룩한 모습과 해부되어 가는 김치가 어떤 요리로 탈바꿈이 되는지 그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는 거야. 그리고 난 그 영상을 보고 공부하는거야. “ ……그러니까. 헛소리였구나. 방금 전까지 형이 앉아 있어서 따뜻한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았다. 양푼이 바닥을 닥닥 긁어 대는 경원이 놈에게 ‘지만이 놈은.’ 하고 물었다. ‘벌써 다 먹고 내려갔다.’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구나. 그때 나조차 놀랄 만큼 번득이는 생각이 들었다. 복희씨 얼굴을 보면서 물어볼 용기가 없다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 보면 되는 거였잖아. 이 복귀 사장님은 요주의 인물이라 영구제명, 그렇다면 저 두 사람이 있다. 딱 봐도 가게에서 일한지 오래 되어 보이는 두 사람이. 그럼, 승산이 있다. 분명히 알고 있을 거다. 저 사람들이라면…. “ 아저씨.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 말해라.” “ 대답해 주실 거죠? 그것부터 말씀해 주세요.” “ 봐서.” 뒤도 안돌아 보고 대답이 들려왔다. 경원이 새끼가 숟가락을 아쉽다는 듯이 내려다보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표정으로 나를 훑어 봤다. 놈을 가볍게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 이 복희씨랑 장미군은 어떤 사인가요?” 질문한 사람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대답이 날아왔다. “ 아무 사이도 아니다.” “ 정말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겁니까?” 조급하게 묻는 나를 향해 아저씨는 몸을 돌렸다. 이제 칼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응해줄 기세다. “ 그럼 나부터 하나 묻자. 넌 이사장의 뭐냐?” 글쎄요. 내가 뭘까요. 사실 전 뭣도 아니에요. “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으로선 아무사이도 아니에요. 대충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 이 사장이 자기 이름으로 친히 널 이 가게에 밀어 넣은 걸 보면 아무사이도 아닌 건 아닐 거다.” “ 명확한 구분이 없어요. 특별히 사이랄 것도 없지만 전혀 안면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난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아저씨가 흐흠 하며 팔짱을 낀 채 말했다. “ 네가 모른다면 이 사장도 잘 모를 테니 너무 조급하게 여기진 마라.” “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저씨가 반짝반짝 빗나는 머리에 둘러진 두건을 벗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 네가 혼란스러워하면 딱 그 만큼 이 사장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대답해주는 척하면서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하시네. 어리둥절해 있는데 옆에서 경원이 놈이 재밌어 죽겠는지 낄낄 거렸다. 그리고 귓속말로 ‘멍청한 놈.’ 하고 속삭였다. 경원이 놈 옆에서 세숫대야 양푼을 거덜 낸 비운 권솔 놈이 ‘더 먹고 싶다.’ 라는 분위기상 절대 어울리지 않는 말을 지껄였다. 나는 놈들을 무시하고 아저씨에게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 아저씬 이상한 말씀만 하시네요. 저는 복희씨랑 장미 놈의 사이를 물었는데요.” 아저씨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 음. 그러니까 네가 지금 궁금한 게 장미가 이 복희의 애인이냐 아니냐. 뭐 그런 거냐?” “ 이제야 알아들으시네요. 네. 맞아요.” “ 결론만 말하자면 장미는 이 사장의 애인이 아니다.” “ 정말요?” “ 그래. 아니어도 한참 아니다. 어디서 이상한 것을 주워듣고 왔는지 모르겠다만 네가 잘못 짚었다.” 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도 가슴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 사실은 어제 복희씨랑 장미 자식이랑 섹스 하는 걸 봤거든요.” 내말에 비룡이 형과 아저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물며 솔이 새끼까지 굳어진 얼굴이었다. 유일하게 이 경원 혼자서 ‘그거 참 재밌는데 더해봐.’ 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잘하는 건가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거의 말해버렸다. 나는 아저씨의 대답이 들려오길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는 싱크대로 가서 손을 씻고 물기 묻은 손을 수건에 닦으며 평상시와 다름없는 여유로움을 보였다. “ 지금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사장이 너한테 알아서 잘 말하겠지만 굳이 내가 말을 한다면 이 사장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새끼가 하나 있었다.” 가슴이 움찔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이 복희씨가 사랑을 한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개가 웃을 일이 벌어졌었다는 얘기다.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 이 사장, 이 복희 그놈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참 여기저기 많이 들쑤시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되는대로 주먹자랑에 인물자랑, 돈 자랑, 몸 자랑. 그러다 알게 모르게 만난 놈 중에 장 우현이란 새끼가 하나 있었는데. “ 아저씬 어울리지 않게 말을 끊고 내 안색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 그때는 조직 내에서 복희 새끼의 위치가 그다지 높지 않은 상태였어. 지금에야 나름대로 거물이 되었지만 그땐 그냥 그런 놈에 불과했다. 그런데 운이 없게 때마침 일이 터져서 수배 망에 걸려들었다. 그 정도는 이 바닥에서 밥 먹는 일처럼 흔한 일이었지. 그때 녀석이 도망치다 시피 일본으로 잠적했는데, 그때 장 우현을 한국에 두고 간 게 실수였어. “ 내가 전혀 모르는 복희씨의 과거였다. 비룡형도 알고 있는 눈치다. 형은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들의 그런 모습에 머리가 아파왔다. 잡생각들과 복희씨의 모습이 겹쳐 하나의 망상을 만들어 낸다. “ 이 사장이 한국을 뜨자마자 녀석의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던 새끼들이 장 우현을 납치했다.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지만 들은 말로는 그래. 그다음엔 뭐, 말 안 해도 대충 짐작이 가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돌림 빵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두 팔로 어깨를 감쌌다.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뭐라고 복희씨의 과거를 알려고 한단 말인가. 정말 내가 생각해도 주제넘은 행동이었다. “ 들은 바론 장 우현은 맞아 죽었으니까.” 아저씨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말을 이었다. “ 네가 말한 장미는 그런 장 우현의 쌍둥이 형이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솔이 새끼가 거들었다. “ 나도 가끔 우연치 않게 가게에서 형님이 장미새끼랑 자는 모습을 봤어. 그럴 땐 장 우현을 그리워해서 그러는가 보다 넘겼지만 의심스러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야.” “ 너도 봤어?” “ 아주 가끔씩은.” 그때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방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나를 포함한 주방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뛰어왔는지 얼굴에 번지는 땀을 닦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새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거대한 몸을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며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쳐보지 못한 그의 손엔 거대한 상자박스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는 곧장 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들고 있던 박스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 계진 씨! 오늘은 여기 계셨네요. 형님이 이걸 깜빡하셨다고 해서 제가 다시 왔습니다.” 새싹의 모습을 매우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아저씨가 저벅저벅 걸어와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 야, 이 복희 똘마니새끼야!! 너는 어른 공경도 모르냐! 계진이 보다 나한테 먼저 와서 인사를 하는 게 예의다!” “ 죄송해요. 곧 나가봐야 되거든요. 시간이 없어요!” 새싹은 붉으락푸르락 변한 아저씨를 보고 전혀 동조하지 않은 배짱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전히 용가리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내려놓은 상자를 톡톡 두드렸다. “ 이것 때문에 아침에 만난다고 하셨는데 요새 형님이 정신없이 바쁘셔서 깜빡 하신 모양입니다.” “ 이게 뭔데요?” “ 형님이 드리는 겁니다. 계진 씨, 빨리 풀어보세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상자로 쏠렸다. 며칠 굶은 짐승들 마냥 눈을 반짝인다. 노란과자 박스에 빨간 리본의 조화란 참으로 유치했다. 그러나 오매불망 내 손만 보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재빨리 리본 끈을 풀었다. …아! 다시 묶어 버리고 싶다. “ 형님이 직접 아이디어를 냈지만 포장은 우리가 도와드렸습니다.” 어쩐지 포장이 별나게 유치하다 했다. 그러나 포장 유치하다 욕할 시간이 없었다. 선물은 더 유치했다. 궁금증에 꽁지 빠지기 일보직전으로 변한 경원이 놈이 ‘뭐냐.’ 하고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엄마에게 성적표를 내미는 어린아이처럼 오들오들 떠는 새싹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나는 안 웃으려 했다. 그러나 이 경원에게는 남의 기분 따위를 맞춰줄 작은 아량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 푸-하하하.” 새싹의 얼굴이 급격한 실망으로 인해 어두워졌다.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다 보고 있던 솔이 놈이 헉하고 놀래다가 급기야 경원이 놈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음은 아저씨, 또 그다음은 비룡형의 차례였다. 그들의 반응에 처음엔 실망, 그 다음엔 우울, 급기야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으로 변한 새싹은 시무룩해졌다. 그는 거대한 등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게 이상합니까? 저희는 어젯밤 세워서 한 건데요.” “ 아…아니요. 그게 조금 의외라서.” " 의외요? 형님은 굉장히 만족스러워 하셨는데. “ “ 아, 정말 고마워요.” 그의 얼굴에 일순 희망이란 단어가 피어올랐다. “ 저희 형님께서 몇 시간이나 생각하신 겁니다.” 새싹의 우물쭈물한 목소리가 딱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방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아저씨만이 겨우 웃음을 참으며 삑 사리 나는 목소리로 ‘복희 놈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상자를 벗겨내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생크림 케이크 위에 붕어빵과 삼각 김밥이 데커레이션 된 괴상망측한 모양에 벌써부터 기가 질렸다. 이딴 걸 만드느라 몇 시간 동안 아이디어를 짤 필요가 있었을까. “ 이걸 갑자기 왜 만들 생각을 하셨대요?” 새싹은 심각하게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 계진 씨가 제일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삼각 김밥하고 붕어 빵 말입니다. 형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아는 불쌍하게 생긴 녀석은 세상에서 삼각 김밥을 제일 좋아하고 붕어빵은 돈이 없어서 평소에 잘 못 먹는다고.” 나는 굳어버렸다. “ 계진 씨. 아직 놀라지 마십시오. 맨 꼭대기에 달린 황금잉어 빵 드셔보세요. 얼른요!” …꼭대기라, 꼭대기. 붕어빵의 꼬리 두개를 엮어 트리 모양을 만든 꼭대기 인가 아니면 삼각 김밥 위에 붕어대가리를 꽃아 놓은 꼭대기를 말하는 건가. 갈팡질팡 꼭대기 하나 못 찾고 있는 내가 측은 했는지 경원이 놈이 ‘야, 저거.’ 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녀석이 가리키는 손끝으로 시선을 돌리자 계란빵 하나를 분질러 만든 부채꼴 모양의 꼭대기가 보였다. 그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대왕 잉어 빵이 ‘계진아, 제발 날 먹어줘.’ 하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부담스럽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 생크림에 꽂혀진 황금 잉어 빵을 퐁 빼냈다. “ 빨리 드세요. 계진 씨!” 재촉하는 것이 영 불안하다. 선물한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 으-악!!!!!!!” …이게 뭐냐. 잉어 빵에 웬 돌이야! 생 이빨이 다 뽑혀나갈 뻔 했다. 입안에 있는 잉어 빵을 전부 뱉어 냈다. 덜덜 떨리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열심히 매만지고 있을 때, 내가 뱉어놓은 잉어 빵 머리와 질질 흘러나온 단팥을 유심히 살펴보던 권솔 놈이 갑자기 운동화를 벗어 빵 위를 열심히 비벼댔다. 그러자 내 눈에도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금속성의 물체가. 그건 열쇠였다. 등 뒤로 명랑한 새싹의 목소리가 들렸다. “ 계진 씨, 그건 형님의 오피스텔 열쇠입니다.” 새벽4시가 넘어가자 홀 안에 사람들이 서서히 줄어들기가 무섭게 경원이놈이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 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테이블 위를 정신없게 나뒹구는 과일껍질과 맥주병을 치우고 있느라 녀석의 말을 잘 들리지 않아 반문해서 묻자 놈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열쇠 말이다. 열쇠.” “ 아, 열쇠. 그게 왜.” “ 그게 왜 라니. 집 열쇠라잖아. 남자가 집 열쇠를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 하냐.” 놈은 유니폼 조끼에 달린 플라스틱 명함을 팡팡 때리며 나를 한심하게 올려다봤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감은 왔지만 괜한 기대로 들떠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생각을 떨쳐버리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어느 집 귀한 개아들 놈들이 소파구석에 짱박아 놓은 오징어 뒷다리를 열심히 빼내서 쟁반에 올려 담았다. 이런 식으로 빼낸 오징어랑 쥐포 따위가 쟁반에 한 가득이었다. “ 무식한 놈. 자고로 집 열쇠를 누구한테 준다는 건 말이다. 자신의 가장 치밀한 내부를 누군가 에게 보여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야. 너, 내말 이해는 하고 있냐? “ 아, 그래서 너희들은 숟가락만 들고 쳐들어 온 거냐! 내가 아무런 대답도 않자 표정이 얄궂게 변한 녀석이 과일접시에 남은 파인애플 꽁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팔짱을 꼈다. 지금 테이블을 대충 다 치운 거 같았기에 다른 자리로 옮기려 발을 돌리는데 녀석의 부루퉁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 지금이 기회라니까 그러네.” “ 무슨 기회. 너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고개를 반만 돌려 말했다. 그러자 녀석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 복희를 너의 남자로 만들 기회.’ 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쪽팔려서 당장 죽고 싶었다. 누가 들었을까 싶어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다행이도 피크시간이 지나 1층 홀엔 네다섯 테이블 외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것도 파트너를 찾은 들끓는 정력의 게이들이 상대의 몸을 더듬느라 정신이 없는 통에 녀석의 말을 들었을 확률은 거의 영 퍼센트에 가까웠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폭 내셨다. 나는 녀석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 말도 안 돼. 이 복희씨는 그런 단순한 놈이 아니야.” “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하지만 집 열쇠를 준다는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다.” “ 뭐가 의미심장하다는 건데?” 사막에 떨어져도 선인장에 고인 물 빼먹고 살 놈이다. 곧 죽어도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나불 대는 이 경원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녀석의 말이 묘하게 날 끌어당겼다. 들고 있던 쟁반과 행주를 테이블 위에 집어던져 놓고 경원이 놈의 맞은편 앉아 ‘진짜 그럴까.’하고 운을 뗐다. 말하고 보니 조금 유치한 구석이 있었지만 녀석은 웬일로 ‘당연하지.’ 라는 말로 내 흥을 돋궈주었다. “ 나보고 들어와서 살라는 뜻인가?” “ 지금 내 생각으론 그거 밖에 없다고 봐. 그리고 딱히 이유도 없잖아.” “ 같이 살자고? 갑자기 왜?” “ 글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딱 두 개로 간추리자면 말이야. 하나는 돈 안 들이고 집안일을 시킬 목적으로 너를 불러들인다. 또 다른 하나는…….” “ 뭐.” “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경원이 놈은 자신이 한 말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뿌듯하게 웃었다. 그리고 유니폼 조끼 주머니를 뒤적여 쥐포 한주먹을 꺼내 주둥이에 쑤셔 넣었다. 요새 녀석들의 냉장고에 반찬이 좀 있다 싶었더니 저런 식으로 쌔 비쳐서 집으로 나르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혼자 먹기 민망했는지 열심히 먹다말고 다 늦게 ‘너도 먹을래.’ 하고 뒷북을 때렸다. ‘아니.’ 하고 단호하게 거절하자 이젠 바지 주머니를 열심히 뒤적여 땅콩을 꺼내서 내밀었다. 정말이지 참으로 녀석 다운 짓거리였다. 놈은 알게 모르게 흥이 나있었다. 나는 이 기세를 몰라 아리송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보았다. “ 근데 너무 갑자기지 않아? 얼마나 봤다고 벌써 같이 살자는 말이 나와.” “ 내가 언제 같이 살자고 한다고 했냐?” …이 새끼 뭐냐. 방금까지 네가 한 말이 그거 아니었냐고. “ 네가 방금 전까지 그랬잖아. 집 열쇠를 준건 다 그런 이유가 있다고.” “ 내가?” “ 그래, 네가.” “ 아, 그 말이 그 말이었냐?” 대꾸할 가치를 못 느껴서 침묵하자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 고등학교도 못나왔다고 무시 하냐.’ 고 왈왈 지랄을 했다. 어이가 없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놈은 ‘맞네. 맞네, 나 무시하는 거 맞잖아.’ 하고 돼지 멱따는 목소리로 끝까지 못 배운 티를 냈다. 그런 놈에게 ‘사실 나도 힘들게 졸업했어.’ 하는 말은 마지막으로 남은 내 자존심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민감한 문제였기에 말 할 순 없었다. 대신 농도 짙은 비웃음으로 녀석과의 대화에 지쳐있던 심신을 가볍게 달래던 중, 시야에 괴상스럽다 못해 희귀한 장면이 포착됐다. 분명 조금 전만 하더라도 내가 조명을 닦을 때까진 썰렁할 정도로 텅 비어있던 무대 위에 정체불명의 사물놀이패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게이 바에 사물놀이가 웬 말이냐. 엉뚱함을 넘어 다소 엽기적인 연출에 무대 위를 유심히 관찰했다. 뿌연 연기가 가시자 각기 다른 악기를 들고 앉아 있는 네 사람의 윤곽이 점점 명확해졌다. 네 명 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누구지. 어디서 본 얼굴들인데. 누구였지. 그때 갑자기 안개가 삽시간에 흩어지며 흐릿했던 인영이 뚜렷해졌다. 그들을 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앉은 자리에서 천장까지 뛰어 오를 뻔 했다. ……저 놈들이 왜 저기 있는 거지? “ 김 지만! 저 미친 새끼 저기서 뭐하고 자빠져 있는 거야!” 눈에 띄게 당황한 경원이 놈의 말이 아니어도 눈치 깠다. 무대 중심에 꿩 꼬리를 잘라 붙인 거 같은 넙적한 상모를 쓴 이 복귀 사장과 그의 오른쪽에 앉아 장구채를 잡고 있는 지만이 새끼, 사장님의 왼쪽에서 가야금을 붙들고 있는 권솔. 그리고 하나 남은 사람은 아뿔싸! 설마 했던 그 사람이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의 비룡이 형이었다. 형은 주방에 있다 끌려 나왔는지 고무장갑을 낀 손에 국자 대신 북 채를 잡고 둥둥-둥 북을 치고 있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경원이 새끼를 돌아보자 녀석도 놀랬는지 소파에 반쯤 일어나 있었다. …하긴 모습에 과연 안 놀랠 사람이 있겠는가. “ 저것들이 단체로 농약을 처먹지 않은 이상 저런 짓거리를 할 수는 없다고 본다.” “ 그런 거 같다.” “ 쪽팔려서 뒈져버리겠네 진짜.” 지금까지 얌전히 꿩 꼬리를 쓰다듬고 있던 이 복귀 사장이 벌떡 일어나 스탠딩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런 그의 행동이 당황스러울 만도 하건만 1층 홀과 2층 베란다에 앉아 있는 손님들이 너무나 익숙하게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러대며 손뼉이 찢어져라 박수를 쳐댔다. 사장만큼이나 손님들의 상태도 개판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이 복귀 밴드의 리더, 이복귀입니다.” 나사가 반쯤 풀린 손님들은 이 복귀 사장님의 유치한 멘트에 역시나 홀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이거 심각하게 웃긴데. “ 드럼담당이었던 이 복신군의 부제로 새로운 멤버를 영입 했습니다.” 그는 바다에서 방금 잡아 올린 갈치 비닐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마이를 입고 빨강색 스키니 진 바지를 입고 있었다. 미끈한 얼굴만 믿고 심각하게 삿대질을 불러일으키는 패션이었다. 멤버를 소개한답시고 몸을 빙그르 돌릴 때 드러나는 탄력 있는 엉덩이가 유독 돋우라져 보였다. 그나저나 가장 걱정이 되는 건 비룡이 형이었다. 빵떡모자에 태홍초 고추장이라는 마크가 가슴팍에 자랑스럽게 찍힌 빨간 앞치마를 입고 안절부절 못하고 형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 어제 나눠 드린 제 32번째 싱글 앨범은 다 들어보셨습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깡통, 귤껍질, 오징어대가리, 술병 등이 무대 위로 날아들었다. 이보다 더 활짝 웃을 순 없다 할 정도로 심각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에도 양주뚜껑과 과일 껍질들이 사정없이 날아갔다. 그러나 이 복귀 사장은 뺨에 묻은 거품을 유유히 걷어내며 굳어진 인상을 재빨리 풀고 가식용 미소를 지었다. 그로고보면 손님들은 좋아서 박수를 친 것이 아니라 싫어서 경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 자자, 알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원하시던 라이브로!” 이번에는 맥주병이 무대 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예상했다는 고개만 까딱해서 병을 가볍게 피한 이 복귀 사장은 ‘과격하시군요.’ 라고 말하며 브이 자를 해 보이는 수준 낮은 제스처까지 취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슬슬 공포의 라이브가 시작될 조짐이 보이자 대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손님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서 숨어있었는지 단체로 베컴 머리를 한 깍두기 여섯 일곱 명이 킹콩처럼 우루-루 다가와 일어서 있는 손님들의 귓가에 무언가 속닥거렸다. 여기선 안 들리지만 그들의 한 마디에 사색이 되어 곧장 자리에 앉는 걸 보면 직업적인 멘트나 격한 협박에 오갔을 것이라 추정된다. “ 그럼 이제 시작합니다.” 이 복귀 사장의 말을 끝으로 음악은 시작됐다. 차마 눈 뜨고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듣고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었다.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음악은 엉망진창이었다. 한참 북을 치다가 손이 미끄러졌는지 북 채를 떨어뜨린 비룡이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형이 그러든가 말든가 옆에서 자신만의 연주세계에 빠져든 이 복귀 사장님의 황홀한 표정이 보였다. 오리지널 돌 아이 같았다. 그런 그의 옆엔 말로는 싫다, 싫다 하면서 어느새 가야금에 재미 들린 권솔이 자기가 황진이라도 된 줄 알고 극심한 필에 취해 줄을 튕기고 있었다. 줄도 두 개나 끊어져 있었다. 소리에서 확연이 차이가 나는데 연주하고 있는 사람만 모르고 있으니 제대로 된 연주가 될 리가 없다. 그리고 김 지만은 정말이지 어디 나가서 친구라고 말도 섞기 싫었다. 살다 살다 처음 봤다. 장구를 세워서 치는 놈을. 오늘로서 저 사람들 모두다 인연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경원이놈도 마찬가지로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너도 부끄럽긴 부끄럽구나. 너의 애인이란 놈이. 비질 흐르는 땀을 닦는 녀석의 얼굴에 상실감이 깃들어 있었다. 사실 졸라 쌤통이었다. “ 쟤네들 언제부터 저 밴드에 들어갔었지.” “ 그걸 내가 아냐. 좆나 쪽 팔릴 짓만 처 골라서 하고 자빠졌네.” “ 그러게 말이야.” “ 오늘 집에 오면 죽었어. 개새끼!” 제발 죽여서 다신 저 연주 좀 안 듣게 해줘. “ 어라? 아저씨가 홀에 왜 나왔어요? 아저씨 때문에 물 흐리니까 빨리 주방으로 가세요.” 아저씨가 홀? 녀석의 말대로 웬만해선 홀에 나오지 않는다는 아저씨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콧구멍에 콧김이 씩씩대는 폼을 보아 아저씨는 굉장히 열 받아 있었다. 화난 중에도 놓지 않는 국보급 펜싱 칼과 허리에 끼워진 목욕타월이 인상적이었다. “ 너희들! 금 비룡이 그 망할 자식들 못 봤냐?” 내가 무대를 가리키며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 저기 있어요, 무대에요. 지금 형 북치느라 정신없어요.” “ 헉!” 내 손끝을 따라 얼굴을 돌리던 아저씨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 비룡이 저 자식은 홍합 삶다말고 왜 저기 있는 거냐?” 그건 저희도 사실 모릅니다. 다만 형 얼굴을 보아 본인이 원해서 저러고 있는 거 같진 않군요. “ 이런 빌어먹을! 이 복귀 밴드가 또 부활을 할 모양이군.” “ 부활이라면.” 아리송한 말투로 내가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땅콩이나 까먹고 있던 경원이 녀석이 ‘부활.’ 하고 앵무새처럼 따라 말했다. 아저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 복귀를 필두로 구성된 4인조 록 밴드.”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저씨를 향해 ‘4인조라면?’ 하고 운을 떼자 아저씨는 심각해진 얼굴로 ‘절에 간 복신이.’ 하고 중얼거리셨다. 이복신씨. 날이 갈수록 꽁지 빠지게 궁금한 인물이 아닐 수 없구나. 언뜻 솔이 놈에게 물었을 때 안색이 썩어빠진 무말랭이처럼 변한 녀석 표정만 봐도 안면이 있는 사이인건 분명해 보였는데 의외로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론 녀석의 반응 때문에 더 궁금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눈치코치 없이 ‘그놈이 어떤 놈이에요.’ 하고 물어볼 수 없었다. 아저씨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혼잣말을 하고 쌩하니 쪽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이 복귀 사장님이 연주에 몰두에 있는 있으니 일하지 않아도 잔소리 할 사람 없어 농땡이 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아 빈 접시에 몇 개 남지 않은 노가리를 집어 드는데 경원이놈이 내 노가리를 낚아채 손으로 북북 찢었다. “ 야!” “ 왜.” 좋은 말로 할 때 내 노가리 내려놔! “ 왜 장미 그년은 왜 코빼기도 안 비치냐.” “ 나야 모르지.” “ 네가 아는 게 뭐 있냐.” “ 너 죽을래?” “ 야 생각해봐. 이 복귀 사장이 우리가 처음 가게에 들어왔을 때 뭐라고 지껄였냐. 1층 홀이 너랑 나랑 장미 그 씨방새끼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년은 안 보이냐 이 말이다! “ “ 이 경원! 사람 없을 때 씹는 게 취미니?” 이놈도 양반은 못될 모양새다. 오늘도 난감한 패션의 장미 군이 어느새 우리 곁에 와있었다. 백설 공주 블라우스, 일명 어깨 왕 뽕 분홍색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으신 이놈은 당장에라도 일곱 난장이를 찾아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놈은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아 있는 경원이 놈과 나를 사정없이 꼴아보며 ‘흥! 뭘 봐, 이 미개한 녀석들아’ 하고 지껄였다. 녀석이 신고 있는 왕방울 달린 갈색 털 부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차마 말은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경원이 놈을 향해 ‘너도 하나 사다줄까. 이게 바로 최첨단 요술 어그 부츠다.’ 라고 늘어놓으며 장미 놈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녀석은 털썩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 같은 홀 이여도 너희랑 나는 급이 달라. 난 룸 담당이야! 알았어? 이 경원!” “ 계집애 같은 년이 뭐라 찍찍 대냐.” “ 찍찍? 내가 왜 찍찍 이야! 나 찍찍 아니야! 내가 생쥐도 아닌데 왜 찍찍 이야. 빨리 사과해!” “ 시발. 갑자기 기어와서 좆나 염병하네.” “ 염병? 나 염병 안 했어! 그리고 넌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깡패처럼 건들건들 사람이 왜 그러냐고! 나는 너한테 나쁘게 한 거 없는데! 너 깡패였지? 맞지? 그렇지?” 장미 놈은 경원이 놈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열심히 쫑알거렸다. 경원이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깡패였으면 네가 어쩔 건데 이 년아! 너 좋은 말로 할 때 안 꺼지냐!” “ 안 꺼져! 안 꺼져! 내가 왜 꺼져! 꺼지고 싶으면 너나 꺼져!” “ 그럼 꺼지게 만들어 줄까.” “ 뭐…뭐야! 이젠 협박하는 거야! 내가 여기서 일한지 너보다 더 오래됐어! 선배한테 까부는 거 아니야!” 그때 갑자기 경원이 놈이 손에 쥐고 있던 땅콩껍질을 장미 놈의 눈 위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파에 발딱 뛰어오르며 어푸어푸 국적이 묘한 물고기 춤을 췄다. 그 모습에 경원이 놈은 배를 움켜잡고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장미 놈은 속눈썹에 붙은 땅콩 껍질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눈! 눈, 내 눈!’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녀석은 차마 마스카라와 인조속눈썹 때문에 눈을 시원하게 비비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러다 결국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거대한 눈물을 콸콸 쏟아내기 시작했다. 간혹 경원이 놈에게 삿대질을 하며 ‘나쁜 놈!’ 이라고 욕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암담해졌다. “ 야! 너 괜찮아?” “ 너는 신경 쓰지 마! 날 내버려두란 말이야! 씨!” 부루퉁해져서 울먹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건 주방에서 경원이 놈에게 악으로 달려들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점들이었다. 그때의 녀석은 날이 선 독살스러움이 있었다. 독을 품은 여왕벌처럼 잘못 건드리면 누구든 쏘아 버리겠다는 날카로운. 툭 까놓고 말해 싸가지가 없다고 해야 되나. 그러나 지금 녀석은 여전히 쫑알쫑알 대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경원이가 뿌린 땅콩껍질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은 어이없게도 순수했다. 뭘까. 뭐가 다르긴 한데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감은 안 온다. 미묘하지만 그건 확실한 차이점이었다. 무대에선 여전히 정체불명 국적불명의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하기만 한 음악이었다. 어느새 장미 놈은 땅콩껍질을 눈에서 떼어 냈는지 다시 소파에 올라와 경원이 놈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 너 내가 싫어?”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다니, 웃겼다. 경원이 놈은 너 뭐 잘못 먹었냐 하는 표정이었다. 녀석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 완전심각하게 그렇다.” “ 왜 왜 왜! 왜 싫은데? 내가 너한테 특별히 잘못 한 것도 없잖아.” “ 주는 거 없이 싫은 새끼들 있다. 나한테 네가 그런 놈이다.” “ 뭐야!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 그런 거 있다. 왜 어쩔래, 또 덤벼볼래?” “ 누…누가 주먹으로 싸우자고 했어? 왜 말만하면 주먹을 세워!” 경원이 놈이 코웃음을 쳤다. “ 야. 그럼 너는 내가 좋냐.” 장미 놈이 우울했던 얼굴을 풀고 가소롭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녀석은 미련 없이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나도 너 절대 싫어!” 드디어 경원이놈이 더는 못 들어주겠는지 발딱 일어나 주먹을 말아 올려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 너 콩트 하냐? 이참에 한 번 죽어볼래?” 녀석의 주먹에 겁을 집어먹은 장미 놈이 어이없게 내 등 뒤로 숨었다. 야! 얘, 좀 어떻게 해봐. 구조요청 눈길을 보냈지만 경원이놈은 평소처럼 내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 아주 뻔질나게 드나드는 구나.” “ 인마, 얘 좀 어떻게 해보라니까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거야!” “ 저기 좀 봐.” 경원이 놈이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갑자기 어디론가 턱짓을 해보였다. 녀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옵션으로 장미 놈의 작은 머리통까지 덩달아 돌아갔다. 어느 댁 상갓집을 다녀왔는지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맨 블랙 맨, 복희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구에 서서 옆에 있는 새싹과 쌍칼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평소에 비해 찌푸려진 인상의 농도가 더 진한걸로 봐선 심사가 매우 뒤틀려 있다는 증거다. 그는 파일첩을 보며 자신에게 조목조목 읊어대는 새싹을 무시하고 홀 안을 빙 둘러보기 시작했다. 복희씨의 차가운 눈이 한 곳에 머물렀다. 몇 테이블이 없는 상황이라 참 빨리도 발견한다 싶다. 나와 눈이 마주친 복희씨가 쌍칼에게 다시 한 번 무언가를 긴급하게 일러주고 녀석들과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는 무언가에 쫒기는 사람처럼 대뜸 한마디만 툭 내뱉었다. “ 케이크는.” “ 케이크라니요?” “ 내가 준 선물 말이다.” “ 아! 그 케이크. 탈의실에 놔뒀어요.” 그제야 복희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우선 담배부터 찾았다. 아오! 저 놈의 골초새끼. “ 마음에 들었냐.” “ 그냥 뭐.” 복희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 마음에 안 들었냐?” “ 아니요! 정말 족집게처럼 제 마음을 너무 잘 아시더군요.” “ 당연하지. 난 모르는 게 없다. 나는 완벽한 남자니까.” 조금만 띄워주면 저 지랄이다. “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복희씨는 참 완벽한 분이시죠.” “ 속 보인다. 너무 까지 마라.” “ 네.” “ 너 혼자 다 먹었냐?” “ 뭘요?” “ 내가 준 케이크 말이다. 한번 말하면 빨리빨리 좀 알아먹어라.” 느낌상 나눠먹었다고 말하면 실망하거나 삐질 위험이 있어 나는 사전방지 차원에서 구라를 깠다. “ 네. 혼자 다 먹었어요. 아무도 안 주고요!”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복희씨가 담배연기를 내 얼굴에 뱉어내며 ‘너 은근히 치사하다. 너무 그러진 말아라. ‘ 라고 말해 나의 구라를 빛을 바라게 만들었다. “ 쟤는 뭐냐. 네 친구냐.” 복희씨가 담배를 들고 있는 손으로 경원이 놈을 가리켰다. 고양이 앞에 쥐새끼처럼 복희씨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나를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었을 경원이 놈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 네. 친구에요. 저번에 한 번 봤는데 모르세요?” 복희씨가 갑자기 경원이 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길게 타들어간 담뱃재를 녀석의 손바닥에 탁탁 털어냈다. 경원이 놈의 얼굴이 굳어졌다. “ 몰라. 왜 알아야 되냐.” “ 그런 건 아니고요. 하지만 쟤는 조금 특이하잖아요.” “ 특이하긴 뭐가 특이하냐. 특이한 걸로 치면 대한민국에 너 따라올 사람 없지.” … 저것이 칭찬이 다냐. 욕이 다냐. “ 특별한 기억이 없으면 사람 구분 잘 못해. 그리고 쟤는.” 복희씨가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더 기억이 안 난다.” 복희씨의 그 말은 녀석의 인생 26년에 최고의 수치스러운 발언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녀석은 이미 차가운 얼음동상이 되어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경원이 놈의 창백했던 얼굴에 빠르게 열기가 퍼져갔다. 그 열기는 분노와 굴욕, 민망함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어 녀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암, 놀랐겠지. 한 평생 자기가 제일 예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놈이 얼굴 면전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하지만 미동도 않는 경원이 놈을 봐도 복희씨는 자기가 한 말이 뭐가 잘못 되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경원이 놈에게 붙잡혀 있던 그의 시선이 뒤늦게 장미 놈에게 향했다. 녀석은 아직도 내 등 뒤에 숨어 있는 상태였다. 힐끔힐끔 복희씨를 곁눈질 하긴 하지만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손을 떨고 있었다. 녀석의 떨림이 내 등에까지 전해져왔다. 그런 녀석에게 이상한 점을 또 하나 발견했다. 당연히 복희씨 하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을 녀석이 잠잠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의구심에 불을 지필만 한 일이 또 하나 생겨났다. 복희씨와 눈이 마주친 장미 놈이 번개 맞은 놈처럼 일어나 주방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녀석의 눈에 공포와 두려움만이 존재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갔는지 잘 벗겨지지 않는다는 부츠 한 짝이 신데렐라의 구두처럼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녀석은 그것도 모르고 앞으로 전진만 하다가 남은 신발 한 짝에 맨 발이 뒤엉켜 앞으로 꼬꾸라질 뻔 했다. 그래도 휘청휘청 아슬아슬한 걸음이었지만 결국은 본인 뜻대로 주방으로 사라지긴 했다. 좋다고 달려들 땐 언제고 쟤도 참 이상한 녀석이다. 한 놈은 수치심으로 다른 놈은 두려움으로 얼게 만든 복희씨가 다 피운 담배를 테이블에 그냥 꺼뜨리고 일어섰다. “ 여긴 너무 답답해. 나가자. 너한테 할 말 있거든.” 복희씨와 나는 근처 놀이터로 갔다. 복희씨는 차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고 나는 놀이터로 가자고 했다. 웬일로 그가 양보를 했다. 그래서 복희씨는 벤치에 앉고 나는 그네를 탔다. 벤치에 말없이 앉아 있던 복희씨가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돌멩이 두개를 꺼냈다. 그는 돌 두 개를 마찰을 일으키듯이 마구 긁어댔다. 순간 칙하며 섬광 같은 불이 일었다가 사그라졌다. 은근히 타는 냄새도 났다. 그는 생각처럼 불이 잘 안 붙는 돌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보며 시발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돌을 부딪쳐 칙칙 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싶어 그네에서 내려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복희씨는 나를 보며 ‘왜 불이 안 붙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양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오면서 라이터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원시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저렇게 해서 불을 붙게 만들려는 걸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복희씨의 처음 보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은 끝내 붙지 않았다. 그는 연신 시발, 시발 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뜻대로 되지 않은 돌멩이 두개를 냅다 걷어찼다. 그리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가 있었으면서 저 염병을 했었단 말인가. 그의 행동에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그는 요건 몰랐지 하는 얼굴로 담뱃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입에 문 담배를 연신 쩝쩝대던 복희씨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 우리 같이 살까.” 복희씨는 밥이나 먹을까 하는 말투로 감정 없이 말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벌렁 거렸다. 기절할 정도였다. 나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여러 번 심호흡을 했다. 의외로 복희씨는 그런 날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 같이 살아요? 우리 둘이?” “ 그래. 우리.” “ …….” 복희씨는 고개 숙인 내 머리통을 억세게 잡아 올려 억지로 눈을 맞췄다.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내리자 또 다시 강한 힘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의 눈은 꿈 따위가 아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거짓이 없어 보였다. 그 눈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확신에 가까운 감정이 움찔댔다. 나는 복희씨를 좋아하고 있는 거 같다. 아니다. 좋아하고 있다.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비슷한 감정은 될 것 이다. 왜 하필 복희씨일까 생각할 틈도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은 순간에 복희씨가 나타나 그를 좋아하는 건지, 복희씨라서 좋은 건지는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좋아한다. 뒤죽박죽 엉켜 있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진 틈에 복희씨의 입술이 추워서 벌어져 있던 내 입술위에 포개어졌다. 싫지 않다. 하지만 살이 맞닿자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내가 보이는 힘은 복희씨 앞에서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는 내 팔을 아프지 않게 간단히 꺾어 비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술이 겹쳐왔다. 복희씨는 한 손으로 내 볼을 지그시 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 그의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굳어있는 내 혀를 휘감는 복희씨의 혀가 매우 뜨거웠다. 그건 마치 누군가 내 머리꼭지를 뒤흔드는 것 같은 놀라움과 생소함이었다. 나는 눈만 감고 석고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복희씨는 한참동안 흔들어 놓던 혀를 놓아주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혀 사이에 진득한 침이 고였다. 그는 계속해서 내 볼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속이 거북해졌다. 뒤늦게 볼을 놓아주던 복희씨가 내 뒷머리에 손을 집어넣고 얼굴을 바짝 끌어당겼다. “ 저기요.” 그는 들은 척도 안했다. 다만 내 조끼 안에 다른 손을 집어넣고 정신없이 맨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복희씨가 내 순수한 젖꼭지를 꼬집었다. 징그럽게 아팠다. 살도 없는 부분을 딱 잡아 꼬집는데 누군들 안 아플까.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아직도 입안을 가득매우는 끈질긴 복희씨의 혀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복희씨가 살짝 몸을 비틀자 이때다 싶어 난 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왔다. “ 오, 오줌 마려워요.” 그는 다소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 뭐?” “ 오줌 마렵단 말입니다! 오줌.” “ …….” “ 진짜 마려워요.” “ 이거 은근히 명물이네.” “ 오줌 싸고 와서 마저 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복희씨가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 어디 까지 갈 생각인데? 여기서 볼일 봐.” “ 여기서 어떻게 싸요! 그럴 순 없죠. 가게 화장실 갔다 오면 돼요. 얼마 멀지도 않잖아요.” “ 기다리기 싫어. 그냥 여기서 보라니까 그러네.” “ 여기서 하면 노상방뇨잖아요! 이럴 시간에 갔다 오는 게 더 빠를 거예요.” “ 오줌 싼 놈 잡아갈 정도로 요새 경찰들 할 일 없지 않다.” “ 그래도 나는 싫어요.” 더 길게 말해봤자 억지만 부릴게 분명했기에 나는 가게가 있는 방향으로 무조건 뛰었다. 볼일을 보고 나올 때는 이 복귀 사장님의 눈에 띄지 않게 특별히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근무시간이 아니던가. 내가 돌아와 복희씨 옆에 서자 그는 사람이 왔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을 하세요?” “ 너.” ……오. “ 네가 오줌 싸는 모습.” 네가 그럼 그렇지다. 나는 복희씨 옆에 앉았다. 복희씨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 별 좀 봐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경할 정도의 별은 없었다. 듬성듬성 박혀 있는 수준이었다. 간혹 반짝이는 것도 있긴 있었다. “ 별을 좋아하면 빨리 죽는다고 하잖아. 그래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본적이 없어. 혹시나 별을 좋아하게 되면 진짜 빨리 죽게 될 까봐.” “ 그래요? 별을 좋아하면 빨리 죽는대요? 누가요?” 복희씨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하늘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 소낙비라는 소설에 나오잖아. 그 계집애가 별을 좋아해서 빨리 뒈진 거 아니냐.” “ 소낙비가 아니라 소나기 아니에요?” 복희씨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 야. 소낙비나 소나기가 하늘에서 내리는 거 피차일반이잖아. 장마만 아니면 되는 거다!” 나는 이런 사람 뭐가 좋다는 걸까. 집에 가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였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하다. “ 뭐 그냥 그렇다는 말이에요.” “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 알았어요.” “ 빨리 5분 안에 생각해. 나 바쁘다. 가봐야 돼.” “ 뭘 생각해요?” “ 돌아,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내가 같이 살자고 했잖아. 대답을 들어야 가지.” …아. 그 답변 말이구나. “ 같이 살아봐요.” “ 더 할 말이 있을 거 같은데.” 선뜻 나온 내 대답에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요.” “ 부탁?” 나는 조금 전부터 망설이던 말을 천천히 꺼내놓았다. “ 복희씨 오피스텔은 싫어요.” “ 왜?” 순간 갈등했다. 대답을 재촉하는 섣부른 복희씨의 얼굴도 그렇지만 그가 들려줄 대답이 대충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 나는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 야!” 예상보다 복희씨의 반응은 더 열화와 같았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상상하는 것조차 싫은 모양이었다.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약 올라 미치겠다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급기야 내 멱살을 잡고 앞뒤로 짤짤 흔들며 ‘다시 말해봐.’ 하고 윽박을 질렀다. “ 우리 집이요 말이에요. 다 들어놓고 뭘 또 물어요.” “ 너 지금 제 정신이냐!” “ 우리 집 싫어요?” 사실 나도 싫었다. 하지만 복희씨의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건 조금 더 싫었다. 어차피 이거 아니면 저거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복희씨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 내가 그 개집 아니, 너희 집에서 산다고?” “ 개집 아니에요. 엄연히 사람 사는 집이….” “ 시끄럽다.” 이봐, 깡패 놈아. 개집이라니! 한 순간에 개집에 사는 (나를 제외한) 세 놈들이 측은해졌다. “ 장판도 새로 깔고 도배도 새로 하면 어느 정도는 괜찮을 걸요.” 복희씨가 지겹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 아무리 그러면 뭐해. 집이 그대로잖아.” “ 그…그렇긴 하죠.” 복희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게 생각처럼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눈에 고통스러운 근심이 엿보였다. “ 좋아.” “ 네?” 그는 즉시 뭐라 할 말을 잃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 거기서 살자니까.” 싫다고 말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생각보다 쉽게 그러 마, 하고 대답하는 지금이 더 놀라웠다. 왜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같이 살려는 걸까. 정말 생각보다 더 난감한 사람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는 내가 더 쉽게 안길 수 있도록 가슴을 내어주었다. 사소한 그런 행동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때다 싶어 까치발을 세우고 복희씨의 어깨 언저리에 정신없이 코를 문질렀다. 은은한 향수냄새가 알싸하게 퍼졌다. 좋았다. 순간 또 심각해진 복희씨가 ‘내 어깨에 코풀면 죽어.’ 하고 말해 처음으로 분위기다운 분위기를 잡아보려는 내 노력을 가볍게 짓밟았다. “ 언제 오실 거예요? 솔이 자식한테도 말해야 되니까.” “ 권솔?” “ 네, 권솔. 미리 말해야 돼요. 갑자기 복희씨가 들어온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복희씨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안고 있는 그의 가슴에 갑자기 냉기가 스며들었다. “ 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내가 너랑 같이 사는 게 권솔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 덧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다. “ 너희 둘 혹시 같은 방에서 살았냐.” “ 네.” 그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으로 향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 언제부터?” “ 잘은 기억 안 나고요. 아마 태어나고 나서부터 계속 그랬을 거예요.” 복희씨가 내 말을 차갑게 비꼬았다. “ 미치겠네. 이거 갈수록 첩첩산중이야.” “ 제가 솔이랑 같이 살았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에요?” 복희씨가 나를 노려보며 심각하게 발끈하고 나섰다. “ 그럼 안 중요해? 다른 놈하고 살림까지 차린 새끼가 참 순진한 질문한다.” “ 무슨 말이 그래요! 걔랑 나랑은 활딱 벗고 있어도 아무 감정도 안 드는 그런 사이라고요. 오해할 걸 하세요!” “ 그거야 네 생각이지. 나는 처음부터 권솔 그 자식이 마음에 안 들었어. 다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던 모양이군.” “ 솔이도 복희씨 졸라 싫어해요!” 욱해서 한 말이었다. 나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복희씨의 얼굴이 점차 무시무시하게 변해갔다. “ 그 새끼가 직접 그래? 언제 한 번 따로 만나야겠네.” …솔아 미안. 복희씨는 그 뒤 생각 좀 하자라는 말을 끝으로 5분 동안 침묵했다. 다만 연신 줄담배만 정신없이 피워댔다. …저렇게 피다보면 폐암 걸리기 딱 좋을 텐데.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나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히 생각에 빠진 복희씨. 우리사이에 어색함만이 존재했다. 드디어 복희씨가 생각을 끝냈는지 구둣발로 담뱃불을 꺼뜨리며 나를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나도 조건이 하나 있다. 들어 줄 거냐.” 불안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싶어 매끄럽게 대답했다. “ 말씀하세요.” “ 권솔을 몰아내자.” “ 네?” “ 왜 안 되냐?” 안된다고 했다간 그날로 저승길로 보낼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이 겨울에 좋아하는 사람과 꿍짝을 맞춘다는 이유를 들어 친구 놈을 길바닥에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황금 같은 월급을 고스란히 합의금으로 꼴아 박고 전세금을 몽땅 주식에 투자하는 것도 모자라 매달 1일만 되면 자기 핸드폰 놔두고 내 폰으로 야동머니를 충천하는 녀석이었지만 미운 정이라도 정이라고 친구인 걸 어쩌겠는가. “ 방이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럼 솔이는 어디서 자요? 겨울인데 마당에서 자요?” “ 텐트 사준다고 해. 거기서 실컷 자라고 하면 되지 않냐.”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뿌듯한지 그는 입 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 난로도.” “ 그건 안 돼요. 걔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서 아마 얼어 죽을 걸요.” “ 그 새끼가 얼어 죽는 더위를 먹고 죽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 왜 상관이 없어요! 제 일이 솔이 일이고 솔이 일이 제 일이에요.” “ 어지간히 눈물겨운 사이네. 하긴 그건 처음부터 그랬지.” 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빈정대며 대답했다. “ 친구라고 하기엔 이상하다고 너희 두 사람. 정작 본인들은 못 느끼고 있나 본데 보는 사람은 참 짜증난다.” “ 왜 짜증이 나요?” 복희씨가 나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거슬려. 너희 둘 다. 특히 권솔 말이다.” “ 그러지 마세요. 철이 없어서 그렇지 애 자체는 괜찮은 녀석이에요.” “ 내 앞에서 그 새끼 편드는 거냐.” “ 편드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래요. 솔이를 안 좋게 보시는 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복희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냉소를 머금고 있던 차가운 표정마저 뒤로 감추어졌다. 그는 결국 지나친 무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나는 두려움에 숨이 막힐 듯 했다. 입술이 바르르 떨려 정확하게 발음을 하기가 힘겨워졌다. “ 기분 나빠요? 나빴다면 죄송해요.” “ 나쁘다. 아주 많이.” “ 죄송해요.” 복희씨가 싸늘하게 나를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 화가 나지만 참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 너 참 그거 잘 하더라. 기분 나쁘게 해놓고 뒤에 가서 죄송해요. 그럼 끝이냐.” “ 제 말은 그게 아니라….” “ 진짜 죄송하면 앞으로 죄송할 일이 만들지 마.” “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복희씨는 자신의 한 말이 누군가에게 씹혔다는 사실이 굉장히 열 받아했다. 그래서 결국 죄 없는 벤치를 정신없이 발길질을 하며 울분을 토했다. 딱히 말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무 한 가운데가 움푹 파일 때까지 내버려두자 그는 어울리지 않게 토라져서 ‘왜 안 말리고 지랄이야.’ 하고 날 쏘아보았다. 표정을 보니 조금 전 복희씨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죄송해요 라는 말로 사건을 산뜻하게 마무리 지었다. “ 그런데 말이다. 네가 살고 있는 집, 다세대 주택 아니었나.” “ 맞아요. 여러 명이 같이 살아요.” “ 친구들만 사는 게 아니었어?” “ 네. 아니에요. 주인집 할머니, 할머니 손녀, 손자. 나랑 솔이. 지만이 경원이, 또 고시생….” “ 잠깐! 마지막에 누구라고?” 복희씨는 후크선장처럼 한쪽 눈을 찡긋 해보이며 악당처럼 웃었다. “ 만년 고시생 있어요. 3년 가까이 밤마다 우는 고시생이에요. 왜요?” “ 고시생이라.” 그때까진 정말 몰랐다. 고시생의 운명을 말이다. 알았으면 복희씨에게 고시생을 거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새 담배를 입에 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후문에서 밖으로 나와 존경하고 친애하는 우리 형님 대기모드로 오매불망 복희씨의 명령을 기다리는 쌍칼과 새싹이 눈에 띄었다. 복희씨는 개그프로 어느 놈처럼 손가락만 까딱해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복희씨에게 자신이 먼저 달려오기 위해 얼마 되지도 않은 거리를 뛰어오면서 서로에게 발길질을 하고 주먹다툼을 하는 둥 유치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결국은 한 사람은 머리가 뜯기고 다른 한 놈은 코피가 나는 콧구멍을 막으며 동시에 ‘형님 부르셨습니까.’ 하고 말했다. …대단히 눈물겨운 충성심이 아닐 수 없구나. “ 새싹아. 너 지금 당장 구례 좀 다녀와야겠다.” 의문스러운 표정의 새싹을 무시 하고 복희씨는 이번엔 쌍칼을 향해 똑같은 비슷한 말을 했다. “ 쌍칼. 너는 벌교 좀 다녀와야겠다.” 구례? 벌교? 왜? 순수한 의문은 내일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었다. “ 야.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시끄럽게 굴지 말고 더 자!” “ 쉿! 조용히 해.” 나는 침 묻은 볼을 비비며 베개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뜨자 아침부터 쉿, 쉿 거리던 놈이 다락방에 기어 올라가 야구방망이 하나를 챙겨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해도 안 떴는데 야구하러 갈일은 없을 테고. 저것이 뭐하는 짓거리지. 연탄불이 그세 내려갔나, 방바닥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으슬으슬 춥다. 두툼한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걸레로 먼지 묻은 방망이를 꼼꼼하게 닦던 권솔이 갑자기 이불을 걷어내며 ‘야! 빨리 일어나! 도둑 들었단 말이라.’ 라고 속보를 전했다. ……그래 도, 도둑. 도둑! 이런 집에도 도둑놈이 들어왔단 말인가! 비몽사몽 하던 정신이 단박에 달아났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썼다. “ 이제 우린 어떡해! 죽는 거 아냐?” 며칠 전 경원이 놈이 사다준 썩은 귤을 지근지근 밟으며 방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솔이 놈을 졸졸 쫓아 ‘이제 우리 죽는 거야.’ 하고 물었다. 놈은 눈썹을 꿈틀대며 ‘초치지 마. 새끼야!’ 하고 내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런 미친놈이 죽을라고.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둑놈을 때려잡고 난 뒤에도 저 뒤통수는 어디 가지 않는다. 녀석은 최대한 조용히 방문을 열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방에 혼자 있는 것도 싫어서 도살장에 소 끌려가 듯 따라나섰다. 180센티를 넘어가는 산만한 놈이 몸을 웅크린 채 앞장서고 173센티의 적당히 암담하고 귀여운 사이즈를 자랑하는 내가 뒤를 쫓았다. 경원이 놈과 지만이 새끼의 신혼 방을 지나쳤다. 도둑이 들던 말든 꿈나라에 빠진 녀석들의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순간 솔이 놈은 혼자서는 안 되겠는지 왔던 길을 다시 돌아 지만이네 부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물로 나 역시 따라갔다. “ 야! 김 지만. 일어나라! 지만아!” 문은 생각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권솔은 신경질을 부리며 반찬통에 꽂혀있던 쇠 젓가락 하나를 들고 왔다. 안에서 걸어 잠그는 허술한 문답게 젓가락을 꽂고 슬쩍슬쩍 건드리자 달칵하고 문이 열렸다. 왕년에 질리게 써먹던 버릇 이럴 때나 활용하는 놈이 자랑스럽게 자기 가슴을 팍팍 때리며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방안으로 들어갔다. 두 놈들은 팬티 한 장 없이 알몸으로 부둥켜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 이제는 어쩌지?” “ 어쩌긴 뭘 어째. 좆도 깨워야지.” 솔이 새끼는 들고 있던 쇠 젓가락으로 지만이 새끼의 토실토실 궁둥이를 푹푹 찔러댔다. 지만이놈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적이었다. 그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솔이 새끼가 잠바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하고 보는데. 그거였다. 놈은 라이터로 젓가락을 달구기 시작했다. 적당히 달궈진 쇠 젓가락이 빨갛게 열이 올랐다. 솔이 새끼는 ‘알맞은 농도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괜히 젓가락의 냄새를 맡는 둥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폼을 잡았다. 그리고 달아오른 젓가락을 지만이 새끼의 엉덩이 깊숙한 곳을 푹 하고 찔러 넣었다. 좋은 말로 할 땐 죽어라 안 일어나던 놈이 즉각 반응이 왔다. “ 악!!! 아-오 시발!!” “ 새끼야. 일어나라고 할 때 즉각 일어나면 너도 좋고, 나도 좋았지. 미숙한 새끼들은 꼭 매를 벌어요.” 지만이 놈은 앉아 있지도 서있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방안을 왔다갔다 거렸다. “ 지만아. 나는 잘 못 없다. 다 권솔이가 한 짓이다. 저 근데 궁둥이 괜찮나?” 녀석은 내 말을 씹고 권솔과 나를 한 패거리로 분류하는 눈치였다. 그 소란스러움에 잠자는 단칸방의 여왕 이 경원도 엉기적엉기적 몸을 뒤적이다 결국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나를 찜찜하던 훑던 녀석이 ‘뭐야.’하고 묻자 나는 말 보다 지만이놈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물대던 녀석의 눈이 반짝 떠졌다. 경원이 놈은 벌떡 일어나 지만이 놈 앞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 지만이 새끼는 차가운 벽에 민 궁둥이를 비비고 난리가 아주 볼썽사나운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권솔은 끝까지 당당했다. “ 너 왜이래. 괜찮아? 누가 이랬어? 계진이가 그랬어?” 지만이 놈이 파리한 안색으로 겨우 말을 뱉어냈다. “ 권솔 새끼가 불 꼬챙이로 내 엉덩이 지졌어! 저 시발 새끼가!” “ 뭐? 저 새끼 완전 미친 거 아냐!” “ 마누라. 나대신 복수해줘! 안 그럼 나 치욕스러워서 입에 개 거품 물 거 같아!” 경원이 놈이 억울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 계진이 년이 그랬으면 죽여 놨을 텐데 솔직히 권솔까지는 아직 나한테 무리다. 미안.” …우리는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관계였다. 가만히 앉아서 손톱만 내려다보고 있던 권솔이 한 마디 던졌다. “ 염병. 신파 찍고 자빠졌네. 야, 그래도 박히는 쪽 엉덩이를 보존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경원이 놈이 날쌔게 받아쳤다. “ 그걸 말이라고 하냐?” “ 말? 푸-히힝! 이 말?” 이와 중에도 유머를 때리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솔이 놈의 바람과 다르게 녀석의 유머는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분위기에 극도의 어색함을 선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빡 돌기 일보직전으로 변한 경원이 놈이 손톱을 세워 솔이 새끼에게 달려들려는 조짐이 보이자 나는 녀석들에게 ‘야! 도둑 들었어! 서둘러.’ 하고 말했다. 순식간에 녀석들의 행동이 멈췄다. 엉덩이에 열을 식히느라 반쯤 정신이 나간 지만이 놈까지 귀를 쫑긋 세웠다. 다만 솔이 새끼 혼자만 ‘저거 은근히 짱 놀이 하는데.’ 하고 빈정댔다. 나는 녀석을 무시했다.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도둑 때려잡아야 돼!” 경원이 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 그 새끼도 참 병신이네. 이놈의 집구석에 쌔 비쳐 갈게 뭐가 있다고 헛수고를 한 대냐.” “ 몰라. 어쨌든 옷 입고 빨리 나와.” 제일 먼저 솔이 새끼가 야구 방망이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알몸의 녀석들이 옷 갈아입을 시간을 생각해 나도 놈을 따라 잽싸게 마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마당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간간히 부는 바람소리 외엔 새벽의 고요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놈이 새벽에 장난질하나 싶어 솔이 새끼를 정신없이 꼴아봤다. 그러자 놈이 답답하다는 듯이 ‘멍청아, 위를 봐.’ 하고 살짝 귀띔을 했다. 녀석 말대로 위를 올려다봤다. 오, 마이 갓. 저건 분명히 강도다. 복면을 쓴 3인조 강도가 고시생 방의 위 지붕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솔이 새끼는 담배를 뻐끔 뻐끔 피워 물며 야구방망이를 더 세게 쥐었다 폈다 했다. 등 뒤에 끼이익 녹슨 문소리가 들리며 두툼한 파카를 걸친 경원이 놈과 위아래 빨강 추리닝의 지만이 새끼가 건들건들 기어 나왔다. 나는 고개만 까딱해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녀석들에게 손가락으로 지붕 위를 가리켰다. 얼굴을 들던 녀석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 저것들 저기서 뭐하냐?” 옆에 바짝 달라붙으며 경원이 놈이 속삭였다. 난 진지하게 대답했다. “ 기왓장을 훔쳐가는 게 아닐까?” “ 기왓장은 왜?” “ 공사하는데 팔아넘기면 돈 되지 않을까 하고.” “ 네가 도둑놈이면 고작 기왓장 뜯으러 지붕에 올라가겠냐?” “ 아니.” 놈이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었다. “ 그럼 아가리 닥치고 있어라.” “ 알았다. 씨방 새야.” 그때 갑자기 3년 동안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아 존재자체를 의심케 했던 고시생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것도 잠시 빨간 레이스 내복을 입은 고시생이 반쯤 정신이 나가 입에 싱싱한 개 거품을 물고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 다투어 그에게 달려갔다. 돌부리에 걸려 눈밭에 꼬꾸라진 그는 사정없이 몸을 떨며 ‘쥐! 쥐! 쥐!’ 하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고시생은 원초적인 두려움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신종 바이러스인가. 무슨 병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쥐! 쥐! 쥐!’ 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고시생을 지켜보면 우리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지붕위에 올라가 있던 한 놈이 마당으로 팔딱 뛰어내렸다. 육중한 몸매가 땅에 떨어지자 마당이 징 하는 진동이 울렸다. 쿵-쾅! 놈이 비틀비틀 내 앞으로 달려왔다. 상대적으로 나는 주춤 물러났다. 솔은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 계진 씨. 안녕하세요?” 계진 씨? 이 목소리는. …설마. 눈, 코, 입만 뚫린 검은 복면을 거칠게 벗겨낸 사내는 탈탈 머리를 털며 ‘저에요.’ 하고 말했다. 숙였던 고개가 들리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쌍칼이었다. 그의 얼굴은 확인한 나와 녀석들은 쌍칼을 둘러싸고 질문을 퍼부어댔다. “ 도대체 그 위에서 뭐 한 거예요?” “ 너 요새 담타냐?” “ 할일이 그렇게 없냐?” 처음은 나, 그 뒤엔 솔이, 그 뒤엔 지만이가 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놈들은 마흔에 가까워 보이는 쌍칼에게 감히 반말을 찍찍 대고 있었다. 어른공경이란 말도 모르나. 아무리 복희씨 밑에 있는 사람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지만이 새끼의 귀를 잡아당기며 ‘너 왜 쌍칼 씨한테 반말이야?’ 하고 혼을 냈다. 그러자 놈이 의문가득한 눈으로 ‘그럼 내가 저 새끼한테까지 존댓말을 해야 되냐.’ 고 오히려 따지고 들었다. “ 형님들 정말 오랜만입니다! 여기 계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형님? 형님이란다. 지만이 놈이 친근하게 귓속말을 해왔다. “ 쟤 올해 23살이다.” 기절 졸도하는 줄 알았다. 저 얼굴이 23살이라니!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저렇게 망가질 수 있을까. “ 한약을 잘 못 먹었대.” 한약을 잘못 먹은 쌍칼이 꾸벅꾸벅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 계진 씨 많이 놀라셨어요? 놀라셨다면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 저 보다는 저기 있는 고시생이 더 놀란 거 같은데요?” 쌍칼 (군)은 잠시 고시생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나에게 눈을 고정시켰다. “ 형님이 저놈이 쓰고 있는 방이 괜찮을 거 같다고 말씀하셔서요. 뭐 어쩔 수 없죠. 저희 형님 같은 분이 방을 써준다는데 오히려 고마워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이런 영광이 또 어디 있다고. 쳇!” “ 고시생이 쓰는 방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아! 그게 무슨 말이냐면….” 시체처럼 누워있던 고시생이 감전된 듯 벌떡 일어나 쌍칼을 밀쳐내고 밖으로 나갔다. “ 시발 놈의 집구석!! 싸다고 좀 살아줬더니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어! 다시오나봐라!” 그는 마지막 그 한마디를 남기고 한 겨울에 내복 바람으로 사라져갔다. 쌍칼은 고시생의 흔적을 남겨주려 작정한 듯 삐거덕 거리는 대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뿌듯하게 말했다. “ 저 새끼 다신 이집에 발길도 못할 겁니다. 계진 씨는 걱정 마십시오.” “ 왜요.” “ 혹시 때린 거야?” 지만이 놈이 반말을 하자 자기도 마음 놓고 반말을 지껄이는 경원이놈도 덩달아 물었다. 쌍칼은 의기양양하게 ‘그건 형님께서 말씀해 드릴 겁니다.’ 라고 이제 와서 급하게 말을 아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지붕 위를 향해 ‘이만 내려오십시오.’ 하고 고함을 질렀다. 주인집 할머니가 동네 할머니들 하고 온천여행을 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새벽에 이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 쫓겨날 판이었다. “ 형님! 빨리 내려오십시오! 이제 오셔도 됩니다.” …형님이라면. 아마도 그 사람? 지붕위에 쭈그려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쌍칼의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마당 위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해 기우뚱대던 검은 복면 투가 엉기적엉기적 일어나 공사판에서 쓰는 면장갑을 벗어 마당에 집어던졌다. 그는 얼굴복면까지 시원하게 벗었다. 예상대로 새싹이었다.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구십도 인사를 해보였다. “ 형님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계셨습니까. 건강은 어떠십니까!” 솔이 놈이 담배꽁초를 공중에 날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 잘 있긴 했다만 너희들 요새 단체로 담타고 노냐.” 옆에 있던 지만이 새끼가 히죽 웃으며 거들었다. “ 넌 어째 갈수록 살이 빠진다. 못 먹고 사냐.” “ 그래 보입니까? 다이어트를 하긴 했는데 그거 때문인가 봅니다.” 새싹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직도 쭈그리고 앉아 있는 스파이더맨 복장의 사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 형님. 일어나십시오.” 스파이더맨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하며 팔을 양쪽으로 요란스럽게 휘저어 근육들을 풀었다. 뭉쳐있던 팔에서 뼈 소리가 울렸다. 스파이더맨은 얼굴을 조이고 있던 가면을 쭉 잡아 벗어던지고 눌려 있던 머리를 성의 없이 매만졌다. 그리고 시원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물론 스파이더맨은 복희씨였다. 복희씨는 내 앞으로 다가와 요것 봐라 하는 얼굴로 고시생 방문을 가리키며 새삼스럽게 점잔은 척 뒷짐을 졌다. “ 이젠 방 생겼지?” “ 네?” “ 방말이다. 네가 방 때문에 고민 했잖아.” 복희씨는 내 등 뒤에 서 있던 권솔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지만이 놈과 솔이 새끼가 당황해서 그에게 구십도 인사를 했다. 그러나 복희씨는 인사 때문에 녀석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 그럼 방 때문에 고시생을 쫓아낸 거예요?” “ 그래.” 아주 고고한 표정이다. 살짝 기가 찼다. “ 왜요?” “ 네가 방이 하나 밖에 없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냐.” “ 기억나요. 그래서요?” “ 그래서긴 뭘 그래서야. 방 만들려고 그랬다니까.” “ 왜 방을 만들려는 건데요?” “ 진짜 웃기는 애네. 왜 자꾸 묻는 거냐. 이미 다 말했잖아. 네가 나랑 둘이서만 방 못쓴다고 하니까 그랬다니까.” 복희씨가 솔이 새끼를 눈으로 가리켰다. “ 네가 저 새끼 때문에 고민했잖아. 물론 처음 들었을 땐 자존심도 상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게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한발 양보한 거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이다.” 웃음이 난다. 입가가 자꾸만 떨려왔다. 나를 내려다보는 복희씨의 얼굴은 사탕을 뺏긴 아이처럼 부루퉁해졌다. “ 나랑 둘이서만 방 쓰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네요?” “ 뭐.” 그는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 맞죠? 그런 거죠?” 복희씨가 대뜸 성질을 부렸다. “ 당연한 거 아니냐.” 말을 마치고 내 마음하나 몰라줘 하는 어린아이처럼 토라진 그에게 바짝 붙어서 엉덩이라도 다다다 때려주고 싶었지만 형님이란 그의 호칭과 그 동안 그가 어렵게 쌓아왔던 가오와 이미지를 위해 꾹 참았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내 생명선의 문제였다. “ 방은 그렇다 치고 지붕에선 뭐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라. 모든 것에 거만했던 복희씨가 의외로 흠칫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새싹과 쌍칼 역시 마찬가지였다. 티 나지 않게 나와 복희씨의 주위를 빙빙 돌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녀석들이 옹기종기 몰려들었다. 그때 문득 경원이 놈이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는 작은 탄성과 함께 고시생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함성처럼 들려오는 녀석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 으-악!!” 저놈이 못 볼 것을 봤나. 나는 서둘러 경원이 놈에게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복희씨가 내 팔을 낚아채서 고시생의 방과 정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왜 그래요.’ 하고 묻자 그는 ‘안 보는 게 정신건강에 좋아.’ 라고 뚱하게 대답했다. 때마침 경원이 놈의 고함소리가 다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참다못한 지만이 놈이 나를 지나쳐 녀석에게 달려갔다. 솔이 새끼는 도둑이 아니라는 사실에 은근히 김 센 표정으로 방망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장독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경원이 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왜 저러지. 이미 열어진 방문을 더 활짝 열어젖히며 지만이놈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쥐! 쥐! 쥐! 개굴…개구리!” 녀석은 어느새 고시생화가 되어 있었다. 녀석의 울분 터진 목소리에 눈이 반짝 빛난 솔이 새끼가 발바닥에 모터를 달고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방안을 기웃거리던 놈이 겁에 질려 뒷걸음을 쳤다. 강심장인 솔이 새끼까지 저럴 정도면 정말 대단한 일 인거다. 복희씨가 쌍칼에게 이것저것 명령하는 틈을 타 나는 재빨리 고시생 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방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차라리 안 봤다면 좋았을 걸. 방바닥 전체에 새카만 쥐들이 깔려 있었다. 벽엔 황소개구리들이 논바닥인줄 알고 쩍쩍 달라붙어 있었다. ……찍-찍찍. 개굴개굴. 황소개구리들은 개굴도 아니다. 개굴이 성에 안차는지 거대한 울음보로 와글와글 울어댔다. 자이언트 특대 들쥐와 어른손바닥만한 흙 갈색의 황소 개구리들이 차지하고 앉아 있는 노란 장판은 조금의 틈도 없이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너무 많아 자세히 봐야 꿈틀꿈틀 거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실로 엄청난 양의 쥐들이었다. 징그러웠다. 그때 사정없이 날 노려보고 있던 문지방에 있던 눈알이 새빨간 대왕 쥐가 짹짹거리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다행이 간발의 차로 솔이 놈이 부술 듯이 거칠게 문을 닫았다. 대왕 쥐의 머리통이 방문에 정통으로 부딪혔는지 쾅 소리가 들렸다. 이건 악몽이었다. 속이 넘어올 것 만 같았다. 웩! 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아 보이는 복희씨가 앉은키에 맞춰 몸을 낮췄다. “ 정신 건강에 안 좋다고 미리 경고 했잖아.” “ 저, 저 많은걸. 어, 어디서 구했어요?” “ 들쥐는 구례 하수도, 황소개구리는 벌교 논바닥에서 오늘 잡아온 거다. 모두 싱싱한 것들이지.” 그래서 새싹과 쌍칼에게 구례를 다녀와라, 벌교를 다녀와라 했었던 거로군요. 정말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복희씨는. “ 지붕까지 올라갈 생각은 없었는데 망할 놈의 고시나부랭이 새끼가 방문을 더럽게 꼭꼭 잠가놓고 처 자빠져 자고 있잖아. “ “ 그래서요?” “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냐.” 그는 이보다 더 멋질 수 없다는 얼굴로 순식간에 의기양양해져서 큰 소리로 말했다. “ 기왓장을 깼다. 그리고 망치로 천장 귀퉁이를 헐고 구멍을 냈지.” 이런 미친놈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내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희씨는 ‘그렇게 멋있냐?’ 하고 자기 좋을 대로만 파악하더니 말을 이었다. “ 뚫린 구멍 속으로 포대 그대로 쏟아 부었더니, 뭐 방이 저 꼴이네?” 일동 묵념의 자세로 복희씨의 말을 듣고 있던 우리들은 짠 듯이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그의 무용담을 존경의 시선으로 받들며 경청하는 쌍칼과 새싹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헛구역질을 해대는 내 등을 퍽퍽 때리며 즐거운 듯 낄낄댔다. “ 생각만큼 쥐들이 활약이 미흡했다만 그런대로 나름 만족하고 있다.” 암, 그러시겠죠. “ 야. 이젠 방 생겼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분간 복희씨의 얼굴만 봐도 방바닥을 빽빽이 수놓은 쥐떼들과 한 벽을 차지하고도 남을 정도로 징그럽게 달라붙어 있던 황소개구리가 생각날 것 만 같았다. 무서워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내게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렇게 좋아죽겠냐?’ 하고 속삭였다. “ 이제 침대나 사러가자.” 일어서는 그의 발걸음이 굉장히 가벼워 보였다. “ 담배 너무 많이 피면 건강에 안 좋아요.” 나는 그네를 빙그르 돌려 복희씨를 향해 말했다. 그랬다. 복희씨와 난 그네에 앉아 있었다. 아침 여덟시도 안 된 시간에 가구를 사러 가야겠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그를 겨우 달래서 데려 온 곳이 우리 집 앞 아파트 놀이터. 아침이란 시간대에 맞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거운 침묵으로 날 잡아 죽일 작정인지 복희씨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담배만 피워댈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난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상냥하게 말했다. “ 복희씨, 담배!” “ 담배 끊으면서 까지 오래 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쓸데없는 잔소리 하지 마.” “ 그게 아니라 담배가요.” “ 신경 쓰지 말라잖아.” “ 정말 그게 아니고, 제 말 좀 들어….” “ 시발!” ……미친 새끼. 왜 갑자기 성질을 내고 지랄이야. 복희씨는 불현듯 벌떡 일어나 들고 있던 담배를 모래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집어던질 담배 따위는 없었다. 당연했다. 무슨 놈의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상념에 빠진 복희씨가 이미 다 피워 꽁초가 되어버린 담배를 툭툭 털 때 그의 양복 호주머니로 들어간 것이다. 난 걱정 되서 말해 주려했는데 본인이 저렇게 됐다고 난리를 치니 나라고 별수 있겠냔 말이야. 예상대로 복희씨의 우렁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난 관심 없는 척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 너 나 엿 먹이냐.” “ 제가 뭘요.” 복희씨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양복 주머니가 심각할 정도로 예쁘게 담배 빵 자국이 나있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 참 아깝겠습니다. “ 이게 얼마나 비싼 옷 인줄 알아? 빌어먹을!” “ 그러니까 제가 담배얘기 할 때 말 들었으면 이런 일 없잖아요.” “ 오, 재밌어? 재밌어 죽겠지? 더 재밌게 해줄까.” 설마요. 그만 재밌을게요, 흥! 구멍 난 양복주머니를 어찌나 노려보시는지 사시되기 일보 직전인 복희씨는 욕설을 콸콸 쏟아내며 다시 그네에 앉았다. 그는 아침 이슬에 젖인 그네 철을 한참동안 킁킁대며 냄새를 맡더니 찝찝한 얼굴로 양복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꺼냈다. 어울리지 않게 꽃무늬였다. 그는 각진 손수건을 탈탈 털어 세모모양으로 접은 후 고리마다 고여 있던 물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다 닦았다. 의외로 청결한 복희씨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네 줄을 조심히 잡았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을 몇 초 안되어 싹 사라졌다.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복희씨가 악당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어? 너 이마에 땀났다.” 그는 쇳물에 젖어있는 손수건으로 내 이마를 박박 문질러 닦았다. 나는 분명히 똥 밟은 얼굴로 변했을 것이다. 그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한참 동안 낄낄댔다. 그 얼굴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나도 제대로 한번 골려 주고 싶다. ……제발, 한번만이라도. 그때 내 머리에 섬광 같은 빛줄기가 내리며 믿을 수 없을 만큼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 우리 게임해요! 지는 사람이 밥 사기. 어때요? 재밌겠죠? 완전 신나지 않아요?” 복희씨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 게임 안 해. 밥도 안 산다. 재미없겠다. 안 신나.” 나는 못들은 척 아양을 떨었다. 복희씨를 만나고 의외로 얼굴이 두껍게 변한 나였다. “ 좋다고요? 저도 좋아요. 뭐 먹을지 정해놔요. 나도 지금 정했거든요.” 복희씨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맑게 웃으며 네 놈이 뛰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 그래, 좋아. 뭐.” 나는 모래를 가리키며 천천히 일어나 미끄럼틀 밑으로 달려갔다. “ 이리로 오세요. 빨리요!” “ 이게 어디서 명령이야.” 그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끄럼틀 아래로 다가왔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모래를 끌어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았다. 복희씨는 미끄럼틀 밑에 고인 모래를 발로 걷어찬 뒤 방금 전 쇳물이 묻은 손수건을 바닥에 깔았다. 유난스럽긴. 반듯하게 깔아진 손수건 위에 사뿐히 앉는 복희씨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구멍이 생긴 모래무덤을 미친 듯이 파헤쳐 부러진 나무젓가락을 찾아냈다. 나는 산처럼 높게 쌓아놓은 모래성에 나무 조각을 푹 꽂았다. “ 모래를 끌어 갈수 있을 만큼 가지고 가서 이 막대기가 무너지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 한다는 게임이 고작 그거냐.” “ 고작이 아니에요. 할거죠? 하실 거죠? 제발요. 부탁이에요!” “ 대신 지는 사람이 오천 대 맞기. 이건 어떠냐?” 복희씨는 살인적인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려 내 코앞에 드밀었다. 심장이 덜컹했다. “ 주먹은 안돼요. 나한테 너무 불리하잖아요!” “ 뭐가 불리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양심도 없는 놈이 아닐 수 없구나. 주먹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놈이 천진하게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 시발 놈. 지옥에나 떨어져라. “ 이리와요. 주먹 말고, 밥 하고 커피만 해요. 네?” “ 새끼 까다롭게 굴긴.” 복희씨가 내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코앞에서 그의 얼굴이 보니까 새삼스럽게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모래에 벼룩 있는 거 아니냐.’ 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예의상 없어요.’ 하고 대답했다. “ 저부터 할게요.” “ 마음대로 해” 젓가락이 꽂혀진 반대쪽의 모래를 손끝으로 긁었다. 벌써 휑하니 모래성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보슬보슬 모래부스럼이 떨어져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나무젓가락이 덜렁거렸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가져갔나. 빨리요 하는 재촉의 눈빛으로 복희씨를 보자 그는 픽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제길, 또 뭘 꾸미는 거야. 불안했다. 복희씨는 뒷주머니를 한참 동안 뒤적이더니 빨간 플라스틱 테두리로 감싸진 잭나이프를 꺼냈다. 섬뜩했다. 그는 갑자기 나이프 칼날을 허공에 치켜 올려 후들거리는 나무젓가락을 미친 듯이 자르기 시작했다. 이건 시나리오에 없는 상황이었다. “ 지금 뭐하는 거예요! 무효! 절대 무효! 반칙이에요!! 반칙! 반칙! 스톱!” “ 뭐가.” 젓가락을 계속 자르면서 천진한 얼굴로 잘도 물어본다. “ 젓가락을 자르면 어떡해요. 젓가락이 중심인데!” “ 중심을 무너뜨리면 게임은 끝.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해.” “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요!” “ 그런 말 없었잖아.” 복희씨는 빙그레 웃으며 순식간에 나무젓가락을 다 잘랐다. 똑 부러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는 부러진 나무 조각을 허공에 휙 날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 뭐 살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 나는 ‘끝까지 해봐요.’ 하고 말했고 복희씨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좋을 대로 해.’ 하고 아량을 베푼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나는 가벼운 심호흡으로 복희씨의 만행으로 지쳐있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모래더미 속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그러나 깃발처럼 휘날려야 할 나무젓가락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질 않았다. “ 비열한 복희씨!” “ 그런 말은 또 처음 듣는다.” 최대한 조심스러운 손길로 모래를 아주 조금 긁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복희씨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다. 현실을 직시 하고 싶지 않았기에 모래가 묻은 손으로 서둘러 귀를 막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전 뭉쳐 놓은 모래들을 살펴보니 역시나 그랬다. 부러진 나무 조각이 끼어 있었다. 이런 시발 같은 경우를 보았나. “ 뭘 먹을까.” 악마 같은 이 복희씨가 히죽히죽 웃었다. “ 죄송해요.” 정말 몰랐다고 말하겠다. 남방 주머니, 청바지, 잠바를 다 뒤져도 나오는 돈은 고작 만 이천 오백 원. 싫다고 뻐기는 그를 설득하고 애원하고 눈물로 호소한 끝에 데려온 곳은……. 5000원의 행복. 한 접시에서 오는 삶의 풍요로움. 싼 가격에 푸짐하게 맘껏 드십시오. 오천 원 뷔페의 묘미. 이런 싼 음식은 내 수준이 아니야 하는 눈빛으로 복희씨는 빈 접시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들고 있던 포크로 그의 접시를 톡톡 건드렸다. 복희씨가 성의 없이 고개를 들어 ‘한번 얻어먹기 더럽게 힘드네.’ 하고 말했다. 그리고 화낼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픽 웃었다. 천진한 웃음이었다. 가슴이 설랬다. 괜히 붉게 달아 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 뭐 좋아해요? 말만하세요.” 박물관의 진열장처럼 펼쳐진 어마어마한 음식들을 가리키자 그는 무뚝뚝한 말투로 ‘아무거나 가져와. 어차피 다 싼 거잖아. 생색내지마!’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어째 잘나간다 싶으면 저렇게 재를 뿌려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복희씨가 눈치 채지 못하게 쏘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 놓인 접시와 내 접시를 들고 음식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점심시간이 아직 멀어 사람들이 그렇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음식들이 새것처럼 깨끗했다. 싸든지 어쩌든지 맛만 좋아 보인다. 내 접시엔 유부초밥 몇 개와 튀김종류를 담고 분명히 먹지 않을 것이 분명한 복희씨 접시엔 샐러드와 간단한 과일들을 담았다. 차곡차곡 쌓아진 샐러드 위에 방울토마토를 무더기로 쏟아놓고 소스를 뿌리는데 겨울잠을 자다 만 것 같은 곰 발바닥 같은 손이 내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뭐야. 나는 몸을 돌려 까칠한 눈빛으로 상대를 올려다봤다. “ 안녕하쇼! 형씨. 껌 하나 사실라우?” 미래의 조폭지망생 쯤 되어 보이는 고등학생 3명이 껄렁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점에 요런 불량 고삘 놈들이 버젓이 껌을 팔고 다닌 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러나 기가 막힌 것과 다르게 심장은 무섭게 뛰어댔다. 방금 나에게 껌을 내민 놈, 딱 봐도 대왕으로 추정되는 겉늙은 고삘 놈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날 사정없이 야렸다. 난 기죽지 않고 맞대응에 들어갔다. ……물론 마음으로만. “ 껌 있는데요.” “ 뒤져서 없으면 야구 방망이로 백 대. 오케이?” 대왕 고삘 놈이 늘어진 껌을 새끼손가락으로 빙빙 꼬며 말을 이었다. “ 껌 없는 거 들키면 형씨 사는데 까지 쫓아가서 죽사발로 만들어 줄 텐데, 그래도 있어?” “ 없어요. 정말이에요. 진심이에요!” 나는 구원의 눈길로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그는 상당히 심각한 얼굴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요새 조폭들은 전화로 싸움질 하나. 만날 때마다 보면 은근히 전화만 한다. 나는 다급해졌다. 식은땀도 흘러 내렸다. 하긴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복희씨가 개입되면 더 심각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예전 레스토랑에서 만난 뚱 돼지가 떠올랐다. 아 차 싶었다.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어 생각을 떨쳐버렸다. “ 아! 생각해 보니까 없네요 글쎄. 저도 껌 필요했어요. 얼마에요?” “ 오천 원.” 대왕 고삘 말에 쫄 다구 고삘 두 놈이 배를 움켜쥐고 열심히 낄낄댔다. 삼백 원짜리 껌을 오천 원에 팔다니. 이것들이 단체로 돌았나. 도저히 못 참겠다. 난 짐짓 화난 척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 제발 깎아 주세요!” “ 안 돼. 우린 뭐 땅 파서 장사하나.” 껌이 오천 원. 뷔페 한 접시에 오천 원. 그럼 복희씨랑 내가 각자 오천 원이니까 만원. 그럼 가지고 있는 돈에 이천오백이 부족했다. 이미 밥 먹었다고 할까. 복희씨는 눈치가 없으니까 분명히 믿을 수도 있다. 나는 운동화 끝을 내려다보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잠시 만요. 돈 가져올게요.” “ 우리가 보고 있다! 도망갈 생각이면 꿈 깨. 형씨.” 순식간에 불량 고삘 셋을 아우로 둔 나는 힘없이 복희씨가 앉아 있는 구석진 자리로 걸어갔다. 울먹이는 얼굴로 복희씨를 내려다봤다. 이제 어쩌지, 뭐라고 해야 할까. 복희씨는 가만히 서있는 날 살짝 올려다보더니 상대방에게 아무 말 없이 멋대로 폴더를 닫아 통화를 끝냈다. 그는 비싼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팽개치듯 집어던지고 팔짱을 꼈다. 그의 시선이 잠시 고삘 놈에게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 접시는.” “ 네?” “ 너 음식 가지러 간 거였잖아. 아냐?” 그는 휑하게 비어있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 그건 그렇다 치고 쟤네는 누구냐?” 벌써 봤단 말인가. “ 아, 아는 동생들이래요.” ……쟤네들이요. 틀린 말은 아니다. 저놈들이 분명히 형씨라고 했으니까. 그는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나와 불량 놈들을 번갈아 보며 갑자기 픽 웃었다. 나는 그의 웃음에 얼음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벗어놓은 잠바를 뒤적여 오천 원을 꺼낼 때에도 앞, 뒤 눈치를 보느라 죽을 맛이었다. “ 그럼 나한테 네 동생들 좀 소개시켜줘 봐.” 놀라서 심장이 브레이크 댄스라도 출 지경이었다. 복희씨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섰다 “ 네가 아는 동생이라며, 같이 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친 듯이 손을 저었다. “ 아니에요. 별로 친한 동생들은 아니에요. 앉아 계세요.” “ 싫어.” “ 그냥 제발 좀.” “ 그러니까 더 싫다. 빨리 앞장 서.” 복희씨는 멍하게 서 있는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그리고 내가 아픈 이마를 문지르며 방심하고 있는 때 손을 깍지 끼고 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혈압이 상승한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왜이래요. 할 것도 없었다. 그는 힘없이 휘청거리는 내 몸을 와력으로 질질 끌고 고삘 놈들 앞으로 걸어갔다. 한 놈은 벽에 기대있었고 한 놈은 앞니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다가 나와 복희씨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대왕 고삘 새끼는 빈 담뱃갑을 보며 성질을 부렸다. “ 자, 이제 소개시켜봐라.” 녀석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복희씨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고삘 놈들 앞으로 떠다밀었다. 놈들의 눈알이 한꺼번에 나에게 쏠렸다.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죽기 아니면 살기다. 젠장! 나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걸어서 대왕 고삘 놈에게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했다. 놈의 표정이 말린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다. " 인마, 형님을 오랜만에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자식, 많이 컸구나! 하하. “ “ 뭐? 시발, 이 새끼 뭐여! 이게 드디어 미쳤나!… 악!” 나는 리얼한 연기를 위해 놈의 대가리를 후려치는 와일드 액션도 서슴없이 추가했다. “ 이놈 떽! 형님한테 시발이라니! 존경하는 형님한테 그딴 식으로 지껄일 테냐!!” “ 이 자식이 미쳤나! 너 죽고 싶어!” “ 그래도 이놈이 형님한테!” 난 발끈하고 발끈했다. 그럴수록 복희씨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웃고 있는 모습이 흡사 음모와 계략을 꾸미는 악당 같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급기야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까지 한다. 내 연기가 그렇게 가공적이었단 말인가. “ 김 계진.” 복희씨는 가까이 다가와 고삘 놈의 어깨에 어색하게 걸쳐있는 내 팔을 가볍게 떼어내며 귓가에 속삭였다. “ 연기까지 하느라 참 죽을 맛이겠어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숨결이 귓가에 살랑살랑 닿았다 떨어졌다. 그때 어째 조용하나 싶었던 불량 고삘 들의 욕설이 지글지글 들려왔다. 놈들은 식당 바닥에 퉤하고 걸쭉한 가래침을 뱉으며 들고 있던 껌 한통씩을 단체로 유유히 흔들어 댔다. 대장 놈이 앞장서 나왔다. “ 어이, 그래서 형씨 살 거야, 말 거야.” 들통난거겠지. 아무렴 그럴 테지. 졸라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억지로 말했다. “ 사요. 잠시 만요.” “ 얼만데.” “ 네?” 사지도 않을 거면서, 묻긴 왜 물을까. 복희씨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껌 말이다.’ 하고 말했다. 나는 구겨진 오천 원짜리 지폐를 펼쳐 보이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오천 원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긴 불필요한 곳에 전혀 돈을 쓰지 않는 복희씨에겐 껌 한통에 오천 원이면 어마어마하게 큰 지출거리겠지. 분위기 파악도 더럽게 못하는 녀석들은 돈을 보자 흡사 개가 개뼈다귀를 발견한 것처럼 달려들어 내 손에 있던 오천 원을 낚아채 교복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까운 내 돈. 대왕 고삘 놈은 들고 있던 이름도 민망한 자위리톨 껌 한통을 내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형씨, 맛나게 씹으쇼.’ 라는 말을 끝으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깡패 놈들도 아닌 깡패 지망생들에게 아까운 내 돈 오천 원을 그냥 날리는 구나. 암울하구나, 김 계진. “ 멈춰.” 싸늘하게 들려오는 복희씨의 목소리에 나는 부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내 등 뒤에 서있던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쉽게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뚝뚝한 모습 그대로였다. 복희씨의 말에 대왕 고삘 놈을 필두로 날라리 두 놈들의 걸음이 문 앞에서 똑같이 멈추었다. 몸을 돌리는 녀석들의 얼굴이 장난 아니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걸 확인하고 복희씨는 자연스럽게 녀석들 앞으로 걸어갔다. 놈들의 오히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뭡니까? 혹시 형씨도 껌 살 생각입니까.” 놈들은 자기들끼리 희희낙락 열심히 소란을 피웠다. “ 나 형씨 아니고 이 씨다.”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와중에도 장난을 치고 싶은 건지 쉽게 구분이 안 된다. 녀석들은 복희씨의 한 마디에 숨겨두고 있던 비웃음을 꺼내들었다. “ 뭐냐. 이 새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대왕 놈이 이죽거리는 말에 두 놈이 맞장구를 쳤다. 복희씨는 끝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 나는 너희처럼 냄새나게 생긴 놈을 동생으로 둔 기억이 없어. 그런데 왜 형씨지?” 지금쯤 가게에서 장구나 북을 닦고 있을 이 복귀 사장님이 떠올랐다. 정신상태가 영 꺼림직 하지만 그런대로 얼굴하나는 괜찮지. 눈앞에서 외모 지적을 받은 대왕 놈이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 내가 뭐 어때서! 이 자식아! 나 정도면 남자답게 잘 생겼지!” “ 거울 없냐? 너 참 환경오염 시키게 생겼다.” 복희씨는 감정 없이 대답했다. 대왕 고삘 놈의 얼굴이 먹다 버린 쑥떡처럼 변했다. “ 지금 장난 하자는 거야, 뭐야! 네가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못 봤나본데 한번 보고 싶냐!” …제발 그러지마. 미친 자식아. “ 세상의 쓴 맛이 어떤 건데?” 복희씨의 천진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빠른 시간 내에 점차 무시무시하게 변해갔다. 나는 보다 못해 그들 앞으로 종종 걸음으로 다가가 대왕 고삘 놈과 복희씨 사이를 가로 막아섰다. “ 비켜라.” 복희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나에게 하는 소리겠지. 그러나 나는 못들은 척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호소력 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치가 졸라 없는 대왕 고삘 놈이 내 어깨를 밀치고 복희씨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툭 밀어붙였다. “ 뭘 꼴아봐, 새끼야!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띠껍냐? 띠껍냐고!” “ 내가 아니라 네가 세상의 쓴 맛을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 뭐라고? 보자보자 하니까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 미치겠네, 진짜.” “ 개새끼! 내 주먹맛을 보고도 그런 소리하나 보자!” 버럭 고함을 지르던 대왕 고삘 놈이 무섭도록 빠르게 복희씨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고삘 놈의 주먹을 피한 복희씨가 쪽팔림에 얼굴과 목 주변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녀석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챘다. 중심을 잡지 못한 놈이 아등바등 댔다. 녀석은 결국 복희씨의 한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들려 올려졌다. 대가리를 꺾으니 상대적으로 몸과 다리는 간단했다. 복희씨에 의해 한 순간 시답지도 않는 놈을 짱으로 모셔왔던 두 녀석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대왕 고삘 놈의 목덜미를 옥죄고 있는 복희씨의 팔에 소소한 힘줄이 붉혀졌다. 그리고 녀석의 목에 핏물이 맺혀 팔꿈치 부근으로 또르르 떨어졌다. 복희씨의 손톱이 녀석의 목을 심각하게 파고들었던 모양이었다. 복희씨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경력과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지금 멈추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복희씨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일을 크게 벌이진 않았다. 그는 대왕 고삘 놈의 목덜미를 거꾸로 집어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시멘트 바닥이라 특히 더 아팠을 텐데. 나는 녀석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복희씨가 내 앞을 막아서더니 자신이 직접 놈에게 다가갔다. “ 예를 들어 쓴 맛이라는 건 보통 이런 거지.” 놈이 입에 고여 있던 피를 뱉어냈다. 그러고 보니 입술도 많이 찢어져 있었다. 복희씨에게 바닥으로 내팽개쳐질 때 찢긴 흔적이었다. “ 상대를 봐가면서 주먹질을 하는 것도 기술이다.” 그때 복희씨는 눈에 띄게 기가 죽인 녀석의 귓가에 뭐라 뭐라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는데 귓속말까지 할까. 나는 궁금증에 귀를 쫑긋 세웠다. 복희씨는 구부정했던 몸을 펴고 손을 탈탈 털고 일어나 주머니에서 목캔디 하나를 꺼내 쭈그려 앉아 있는 녀석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녀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복희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구두 모서리로 놈의 턱밑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뻑 소리가 울렸다. ……아프겠지. 보고 있는 내 얼굴도 덩달아 달달 떨리는 느낌에 사로잡혀 본능적으로 턱을 감쌌다. “ 복희씨. 너무 심하게 하진 마세요.” 복희씨는 간단하게 내 말을 씹었다. 그는 고삘 놈이 교복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놈이 갑자기 돈을 꺼냈다. 그리곤 어림잡아 오만 원이나 되는 돈을 곧게 펴서 무릎을 꿇고 복희씨 앞에 공손히 내밀었다. 어린놈을 때려서 고작 돈이나 뺏는 거야, 뭐야. 고삘 놈이 건넨 돈을 낚아채듯 빼앗은 복희씨가 나를 보고 어이없게 윙크를 했다. “ 이제 가봐.” 졸개 두 놈의 엉성한 부축을 받으며 대왕 고삘 놈은 사라져갔다. 시작에 비해 비참한 최후였다. 역시 남자는 힘이란 말인가. 나는 녀석들이 도망가다 시피 뛰어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복희씨가 거칠게 어깨를 잡아 돌려 눈을 맞추는 통에 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 받아라.” “ 이게 뭔데요?” 복희씨가 고삘 놈의 목덜미를 잡아 뜯어서 가로챈 오만 원을 나에게 내민 것이다. “ 보면 모르냐. 돈이잖아.” “ 누가 돈인 줄 몰라요. 왜 나한테 주느냐는 거죠.” 복희씨는 내 잠바 주머니에 성의 없이 돈을 쑤셔 넣고 단추까지 꼼꼼하게 잠갔다. “ 네가 껌 한통에 오천 원에 샀잖아. 그래서 난 캔디하나에 오만 원에 팔았다. 왜 불만 있냐.” 그는 그러는 자신이 못내 자랑스러웠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를 외면했다. 예상대로 그는 샐러드를 찜찜하게 내려다볼 뿐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그의 접시와 산처럼 쌓아진 내 접시에 있던 음식들을 모조리 다 먹어치우는 괴력을 발휘했다. 웬만하면 철근까지 소화하는데 이건 심했나. 배가 빵빵하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가게를 나와 더부룩한 배를 움켜잡고 뒤뚱뒤뚱 그를 따라갔다. 복희씨는 간혹 내가 보폭을 맞출 수 있게 기다려주웠다가 뚱뚱한 배를 찌르며 임신했냐고 낄낄댔다.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그의 놀림과 장난을 무시하며 복희씨와 내가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미용실 앞. 사실 나는 미용실은 가본 적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이발소를 가는 것도 아니다. 내가 머리를 자르러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만든 것은 권솔 새끼였다. 바야흐로 시간을 거슬러 17살로 내려가자. 같은 반에 미용학원에 다니는 놈이 하나 있었다.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가위질을 하는 놈이 부러웠던 모양인지 권솔은 말릴 틈도 없이 미용학원에 등록했다. 추후에 밝혀지긴 했지만 녀석이 다닌 학원은 허가증 하나 없는 야매학원이었다. 그래서 놈의 실력도 야매가 되었다. 결론적으론 내 머리 상태로 항상 야매였다. 그러나 놈은 곧 죽어도 자신의 실력은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스무 살이 넘어서도 내 머리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당연히 처음엔 싫다는 거부의사도 밝혔고 상황에 따라선 발광도 했다. 녀석 몰래 동네 미용실도 한두 번 갔었다. 그러나 녀석은 직감적으로 내 머리 변화를 약삭빠르게 눈치 챘고 그럴 때마다 권솔은 풀이 죽어 꼬리 잘린 개처럼 낑낑댔다. 그런 우여곡절 아닌 우여곡절 끝에 나를 포함한 경원이 놈과 지만이 새끼 할 것 없이 놈에게 머리를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 빨리 와.” 미용실에 대한 상념에 빠져있을 때 복희씨가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는 화려한 간판에 휘어 갈겨써진 곤드레 김, 뷰티샵 문을 활짝 열었다. 앞서 가는 그를 열심히 쫓아 들어갔다. 머리털 나고 이렇게 큰 미용실은 또 처음이었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건 일렬로 쭉 서서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미용실 누님들의 함성에 가까운 인사였다. “ 어서 오십시오!” 밥 먹고 인사만 연습했는지 여러 명에게서 한 목소리로 통일되어 흘러나왔다. 알록달록 유니폼에 하나같이 예쁜 누님들을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들이 복희씨의 얼굴을 확인하고 이사장님이 왔네, 오랜만에 뵙네, 더 멋있어졌네. 소리를 퍼부어대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그녀들의 소란스러움에 복희씨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때 곤드레 김으로 추정되는 중년의 남자가 누님들 사이를 정신없이 헤치며 달려왔다. 그는 고개를 방정맞게 휘휘 저으며 복희씨를 찾는지 연신 ‘이사장님, 어디계세요.’ 하고 여자들 못지않은 높은 하이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복희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희씨가 대답을 하지 않자 곤드레 김은 그를 더욱 더 쉽게 찾아냈다. “ 아니. 아니, 이게 누군가요. 이 사장님 아니세요!! 곤드레 김은 다정스럽게 복희씨 팔뚝을 잡았다. 복희씨는 곤드레 김에게 잡혀 있는 팔을 내려다보다 손을 가볍게 흔들어 그를 한 번에 쳐냈다. 그러나 곤드레 김은 굴하지 않았다. “ 요새 왜 통 들려주지 않으셨어요. 얼마나 섭섭했다고요!!” “ 바빴어.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준비나 해줘.” 복희씨는 버릇이 없는 게 분명해. 오십도 넘어 보이는데 아저씨한테 반말을 찍찍 갈겨대고 말이야. “ 마사지? 머리? 옷? 뭐요. 말씀만 하세요!” “ 머리만. 저기 있는 녀석도 같이.” 복희씨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곤드레 김과 스무 명에 누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향했다. ……그러니까 참 민망하구나.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복희씨 옆에 다가와 바짝 붙어 섰다. “ 나도요?” “ 응.” “ 왜요. 나 머리 자른 지 얼마 안 됐어요.” “ 자르라면 그냥 잘라. 더러워 보이니까.” 권솔이 심열을 기울려 해준 머리는 순식간에 더러운 머리로 돌변했다. 그녀들의 우레와 같은 킥킥거림과 곤드레 김의 따가운 질투와 같은 눈빛을 받으며 난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앉았다. 그나마 위안거리라곤 복희씨가 내 옆에 앉았다는 것뿐이었다. 정말 그도 머리를 자르긴 할 모양이었다. 그러나 복희씨는 피곤한지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새벽부터 남의 집 지붕을 타고 다녔으니 피곤할 만도하겠지. “ 복희씨, 저 머리하기 진짜 싫은데요.” “ 해.” “ 진짜 싫은데.” 복희씨가 도끼눈을 뜨며 날 쏘아봤다. “ 그럼 머리하고 싶게 만들어 줄까?” 순식간에 머리가 하고 싶어졌다. 나는 부루퉁하게 갑자기 머리하고 싶어졌다고 말했고 그는 잘 생각 했어 라고 어울리지 않는 위로를 한 뒤 다시 눈을 감았다. 5분 정도가 지나자 곤드레 김은 조수 누님 한명을 대동하고 나와 복희씨 옆에 섰다. 복희씨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 저 녀석부터 해줘.” “ 알았어요. 이 사장님. 근데 말입니다. 실례되는 질문인 줄 알지만….” 복희씨가 딱 잘라 말했다. “ 실례 돼. 하지 마.” 곤드레 김이 어색하게 날 힐끔힐끔 살펴보더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속삭거렸다. “ 저분하곤 어떤 사이신지?” 나는 조심스럽게 복희씨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때 복희씨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흘러나왔다. “ 지금 만나고 있어.” …지금 만나고 있어. 지금 만나고 있어. 지금 만나고 있어. 그게 무슨 뜻이지? 아!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거울을 통해 본 곤드레 김과 조수 누님이 동시에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들의 갓 잡아 올린 생생한 표정이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뭘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 저 잡것들이. 곤드레 김은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며 자신을 타이르듯 릴 렉스, 릴 렉스 하고 중얼거렸다. “ 지금 만나는 사람이라면.” “ 맞아.” “ 그럼 예전에 그 분은 어떻게….” 복희씨가 번뜩 눈을 떴다. 그는 한 손에 얼굴을 받히고 곤드레 김을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러자 곤드레 김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 이제 그만 까불고 네 할 일이나 해.” 그 후 곤드레 김은 침묵했다. 대신 무섭게 나를 노려보다 자신이 가위손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감고 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를 자른 지 중반쯤 되어서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세계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다. 머리는 순식간에 듬성듬성 잘려나갔다. 잘려진 머리가 눈앞에 우수수 떨어졌다. 서걱 서걱 하는 가위소리가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제발 눈이라도 뜨고 잘라라, 하고 바라는 순간 머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목선을 덮을 정도로 긴 머리였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그 절반으로 사라지고 기묘한 머리길이가 되었다. 따라서 내 얼굴도 기묘하게 변해갔다. “ 다 됐습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눈을 감았다. 영원히 뜨고 싶지 않았다. 마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까지 쭉 눈을 감고 있던 복희씨가 부스럭 거리며 일어났다. 느껴진다. 느껴져. 복희씨가 몸을 틀어 날 보고 있는 게 생생하게 느껴진다. “ 복, 복희씨.” 의도하지 않게 목소리가 떨려나갔다. 나를 뚫어지다 못해 찢어죽일 정도로 빤히 바라보고 있던 복희씨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 머리를 자르라고 했는데 왜 갑자기 가발을 씌워놨지?” 곤드레 김과 나를 제외한 미용실 그녀들의 함성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용기를 내어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일명 호섭이 머리, 이건 70년대 사람들도 하지 않는 다는 오리지널 바가지 머리가 아닌가. 머리카락이 다시 길 때까지 적어도 몇 달은 이 꼴로 살아야 된단 말인가. 암울했다. “ 으악! 왜이래요! 아파요!” 남의 기분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복희씨가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내 머리꼭지를 한 움큼 움켜쥐고 짤짤 흔들어댔다. “ 이게 뭐야. 가발이 아니었잖아.” 나는 울부짖었다. “ 아니에요! 가발. 저 아저씨가 이렇게 잘라났단 말이에요! 저는 당장 죽고 싶단 말입니다!” 복희씨는 고개를 비틀고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어깨가 들썩들썩 춤을 췄다. 고개만 돌리면 안 보인다고 생각하십니까! “ 송이버섯 대가리만 따서 붙여놓은 거 같네.” “ 뭐에요!” 복희씨가 내 머리를 앞, 뒤로 살펴보며 말했다. “ 은근히 잘 어울린다. 그 머리스타일이 너를 위해 존재해왔던 거 같을 정도로.” 의도치 않게 내 머리 실패로 의기소침해진 곤드레 김은 복희씨의 눈치를 심하게 살피며 그의 머리는 눈이 찢어질 만큼 부릅뜨고 한 가닥씩 조심스럽게 잘라나갔다. 내 머리도 눈만 뜨고 잘랐으면 이 꼴은 안 되었다. 씨발. 어느새 자신감을 되찾은 곤드레 김이 복희씨의 머리를 황홀하게 매만져 대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려댔다.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전화를 받았다. “ 누구십니까.” 「 나다. 뭐하냐.」 …그래. 이 경원. “ 머리 잘랐어.” 「 으윽.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불난 집에 부채질 하냐. 할 말 없으면 끊어라.” 「 끊으면 죽는다. 이복희랑 대충 다 놀았으면 바로 가게로 와라.」 “ 왜. 가게 갈 시간 멀었잖아.” 「 홀에 뭐하나 만드는데 와서 도우란다. 보너스도 따로 준대.」 아아, 그렇구나. 나는 힘없이 말했다. “ 그래 알았어. 가게에서 보자.” 「 응. 데이트 잘해. 졸라 파이팅이다.」 끊어진 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경원이 놈의 목소리에 녀석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지금쯤 가게로 가거 있거나 밥 먹고 있을게다.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아직 12시가 안됐다. 빨리 가면 그만큼 빨리 끝내주려나. 나는 아직도 옷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툭툭 떼어내며 복희씨 머리는 다 됐나 하고 그를 살폈다. 보자마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복희씨의 머리는 과연 자르기나 한 걸까 의심이들정도로 조금 잘려져 있었다. 거의 변화가 없다고 해도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주문한대로 머리가 다듬어져만 있었던 것이다. 돈이 아까울 만큼 차이가 없는 머리를 보며 나는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역시 암울하다. “ 다 된 거예요?” 복희씨가 앞머리를 매만지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 응.” “ 그렇게 자르면 돈 안 아까워요?” “ 안 아까워. 내 지갑에서 나간 적이 없어서.” 복희씨는 의자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놓여있던 빗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앞머리를 내리는 것보단 올백이 훨씬 잘 어울리는 그였다. 머리를 내릴 때 모습은 그다지 본적이 없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고. “ 머리 자른 값은 이 복귀 밑으로 달아 놔.” 이것이 그 유명한 외상이라는 건가. 곤드레 김의 반응을 살피자 그는 눈에 띄게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 며칠 전에 이 복귀 상무님이 오셔서 이 사장님 밑으로 달아놓고 머리 자르셨는데….” 곤드레 김의 말을 듣자마자 복희씨는 들고 있던 빗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아무리 형제라지만 하는 것 까지 이렇게 똑같을 수가. 기가 찼다. 잠시 생각을 하던 복희씨가 곤드레 김의 멱살을 감아쥐고 원장실이란 팻말이 붙은 으슥한 곳으로 그를 끌고 사라졌다. 스무 명의 누님들과 손님하나 없어 샵의 제정상태를 걱정할 정도로 썰렁한 홀에 덩그러니 남겨지자 극도로 민망해졌다. 할 일이 없어서 다시 거울을 보았지만 거지같은 머리는 사람의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머리를 이딴 식으로! 생각하니까 열 받네. 복수를 해야겠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창가에 잡지들과 손님들이 마실 수 있는 차 종류들이 빼곡하게 쌓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수의 누님들이 나를 보고 있었고 대다수의 누님들은 청소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창가로 갔다. 그리고 빠른 손놀림으로 인스턴트커피와 녹차티백을 주머니에 빵빵하게 담았다. 나를 보고 있던 소수의 누님들의 쑥덕거림이 들려왔다. 한귀로 흘려들었다. 묵묵히 후드 티, 청바지, 잠바 주머니에 율무 차, 커피, 녹차, 초콜릿, 사탕 따위를 열심히 집어넣었다. 목표를 세웠던 양엔 조금 못 미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양이 채워지자 나는 뿌듯하게 몸을 돌렸고 언제부터 인지 복희씨가 그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뿔싸! 그의 얼굴에 측은함이 번졌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능에 이끌려 무턱대고 소리쳤다. “ 아니에요! 이건 처음 먹어봐서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 설마 했는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말하는 걸 보니 이제야 확실하군.” “ 제발요!” “ 역시 그랬어.” “ 야, 너 커피에 밥 말아 먹을 거냐.” “ 계진아 이제 차 장사할 거야?” “ 쟤 좀 봐. 좆나 가지가지 하는데. 볼썽사납다.” “ 나 저 새끼 창피하다. 지금까지 놀아준 것도 힘든데 이 기회에 다신 아는 척 안 해야지.”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쏟아낸 말들이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반응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조롱과 야유를 가볍게 무시하고 계단 틈새에 거치적거리느라 갈 길을 방해하는 파란봉투를 가슴에 바짝 안아들었다. ……100리터의 쓰레기봉투에 가득 담긴 커피와 기겁 할 정도의 다양한 차 종류에 놀랄 만도 하겠지. 복희씨는 간곡한 내 부탁에도 믿어주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게로 가겠다는 나를 억지로 질질 끌고 다니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슈퍼에서 인스턴트 차를 닥닥 긁어모아 봉투에 쓸어 담고는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는 아껴 먹으라는 말을 누차 강조했다.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그러 마, 하고 대답했다. 복희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밤에 보자는 말만 덜렁 남기고 가게까지 데려다 주기엔 시간이 없다며 혼자서 쌩하니 가버렸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지하철을 타느라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가게까지 이 무거운 걸 얼마나 힘들게 들고 왔는지도 모르면서 저 인간들이 저딴 말을 씨불여 대고 있다. 그나저나 공사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정말 가게 안이 난장판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구석으로 밀쳐진 테이블과 소파, 바닥을 나뒹구는 건축자재들과 부서진 기둥, 그 밑에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모래와 시멘트.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정신 사나운 것은 보란 듯이 홀 가운데에 떡 하니 신문을 깔고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 깐풍기 등을 먹고 있는 비룡이 형과 세 놈들. 그리고 아저씨였다. 그들은 소풍 나온 어린애들처럼 낄낄대며 뭐가 그리도 좋은지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거참 아주 즐거워들 보이십니다, 그려. “ 계진아 밥 먹었어? 안 먹었으면 와서 좀 먹어. 많이 남았어.” 친절한 비룡 씨. 형 밖에 없구나. 비형이 형은 들고 있던 우동그릇을 들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배불러, 형’ 하고 대답하고 깨끗한 신문을 하나 더 깔았다. 공사 중이라더니 하나도 안 바뀌었네. 하는 순간 있어야할 자리에 테이블 서너 개가 사라지고 유리로 만들어 안이 훤히 내다보이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 저게 뭐야.” 짬뽕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면발을 주둥이에 몰아넣는 것으로 인생을 끝장 보려던 경원이 놈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 거기서 물건 판대.” “ 물건? 뭐.” 녀석들을 시작으로 아저씨와 비룡 형까지 동시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뭘 잘못 먹었나. 다들 왜 저런다니…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경원이 놈이 옆구리를 콕콕 쑤시며 귓속말을 해왔다. 듣자하니 딱 히 귓속말을 할 정도의 얘기는 아니었다. “ 콘돔, 젤, 속옷, 자위기구, 모조성기, 최음제. 스패니쉬 플라이.” “ 잠깐! 스패니쉬 플라이라면 굳이 여기서 안 팔아도 되잖아?” 경원이 놈이 어깨를 으쓱했다. “ 장미 같은 새끼들은 위해서지.” 아무리 그래도 여성최음제를 게이 바에서 판다는 것은 조금 억지였다. “ 왜 갑자기 그런 걸 팔 생각을 했대?” “ 음반 때문에 가게 좆나 적자났대.” “ 대단한 사람이네. 근데 잘 팔리기나 할까 모르겠네.” “ 어느 정도는 팔리지 않겠냐. 게이들의 필수품이잖아. 쫄딱 망하진 않겠지.” …그 게이들의 필수품이란 걸 너도 꼭 사야겠구나. 경원이 놈은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소리 내서 웃었다. “ 오늘부터 같이 살겠네?” “ 뭐가. 아!” 놈이 엉큼하게 눈썹을 실룩이며 팔꿈치로 사정없이 옆구리를 찔렀다. “ 좋지? 좋지? 좋아 죽겠지?” “ 농약 먹었냐. 귀찮게 굴지 말고 저리 가라.” “ 아-오. 새끼 좋으면서 이제 와서 내숭은!”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 나는 훈계차원에서 녀석의 머리통을 아프지 않게 후려갈겼다. 사실 속마음으로는 두개골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게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부터 김 지만이 보고 있었기에 적당한 강도에서 손을 쓰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 저놈 눈치를 보느라 아주 죽을 맛이다. “ 엉덩이 조심. 또 조심!” 녀석은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도 모르고 내 엉덩이를 콕콕 찌르며 낄낄댔다. 더 이상의 대화는 정신건강만 좀비처럼 파먹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아저씨가 후루룩 마시고 있던 짬뽕 그릇을 내려놓으며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 정말 비룡이 말처럼 커피 장사라도 할 거냐.” “ 제가요? 설마요.” “ 그럼 그 봉지를 다 뭐냐. 사은품으로 그 많은 걸 줬을 리는 없을 테고.” “ 이 복희씨가 사줬어요.” 이번엔 칼을 안 떨어뜨려 다행입니다. 아저씨는 아주 잠깐 눈썹을 꿈틀대다 들고 있던 나무젓가락을 분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오래살고 볼일이네. 이 사장 그놈이 남에게 돈을 쓰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아저씨는 동강낸 젓가락을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마저 다 먹어라.’ 라고 말하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아저씨가 앉아있던 자리로 옮겨 앉았다. “ 야, 권솔. 너 형님 없이 혼자 방 쓴다고 너무 적적해 하지 마라.” 탕수육 접시를 내려놓고 고개를 든 솔이 새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vip 룸이 있는 밀실에서 별안간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소리의 주인공께서 전화통화를 하며 홀로 걸어 나왔다. 이 복귀 사장님은 무언가에 대단히 흥분해 있었다. “ 뭐? 이 치사한 새끼! 내가 형님이름 달고 머리한 걸 벌써 일러 바쳤단 말이냐!” 그의 말 한마디에 무슨 일인지 단박에 알아 차렸다. 곤드레 김 선생님께서 전화를 한 모양이로군요. 이 복귀 사장님은 쿵쾅대며 ‘이런 시발, 개새끼, 당장 죽여 버리겠다. ‘를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는 핸드폰을 바텐더 석에 집어 던지고 우리가 모여 있는 홀 중앙까지 걸어왔다. 지금까지 이 복귀 사장님의 큰 덩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장미 놈이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아와 애교 섞인 몸뚱이를 흔들며 귓가에 뭐라고 속삭여댔다. 그러자 이 복귀 사장님의 얼굴이 극도로 차가워졌다. “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이 날 파리 같은 새끼가 무슨 놈의 가불을 하루걸러 해 달래!” 장미 놈이 사장님의 팔에 매달려 앙앙거렸다. “ 신발이랑 옷 살돈 떨어졌단 말이에요! 아아! 그러지 말고 사장니-임!” “ 당장 안 꺼져! 셋 셀 동안에 사라져. 하나!” “ 치사하게 자꾸 그럴 거예요? 아-아아아!” “ 둘!” “ 제발요! 반만 줘도 돼요! 네? 사장님! 이번 한번만!” “ 둘 반.” “ 사장-!” 이 복귀 사장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 셋! 넌 이제 죽었어.” 장미 놈은 이 복귀 사장의 주먹에 화들짝 놀라 룸이 있는 복도로 걸음아 나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그나저나 사장님의 말투가 정철 선생을 표방하는 사군자다운 어투에서 어느새 날건달로 바뀌어있었다. …역시 저 형제들은 돈 앞에서는 체면 따위는 없구나. “ 저 돌 아이 같은 년. 매일 이상한 옷만 입고 다니더니 잘 됐다. 쯧쯧.” 이 경원 이상한 옷이라면 너도 누구한테 뒤처지진 않으니 아가리 닫으렴. 이 복귀 사장은 왔던 길을 되돌아 가까운 룸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룸에서 가게가 떠나갈 듯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된 후 종종 보았던 풍경이라 새삼스럽게 놀라운 것도 없었다. 남아 있던 탕수육이나 하나 집어 먹었다. 아직까지 튀김옷이 바삭바삭해서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 이제부터 나 혼자 방 쓰냐? 왜 너는 이 복희랑 살려고?” 권솔은 남은 짜장 국물에 밥을 말다 말고 나를 올려다봤다. “ 미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 “ 완전 나이스!” …후레자식. 놈은 히딩크의 어퍼컷을 연달아 날려대며 김 지만의 밥그릇에 몰래 숨어들어가 있던 군만두를 은근슬쩍 가로채 탕수육 소스에 찍어 먹으며 며칠간 잠잠했던 이상증세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 나 오늘 홈쇼핑으로 옥장 판 샀는데 잘 됐다.” “ 야!! 돈이 있으면 내가 사라고 애원할 때 좀 사지!” “ 미쳤냐. 너 추위 많이 타잖아, 너랑 같이 쓰면 전기세 열라 많이 나와서 안 돼.” “ 기름도 아니고 전기세가 나와 봤자 얼마나 나온다고 그러냐. 진짜 치사하다!” 내가 저딴 새끼를 친구랍시고 합의금 마련한다고 알바 비에 집 보증금을 빼서 뒷바라지의 수난을 겪었단 말이던가. 보상받지 못할 아까운 내 청춘의 시간들이여… “ 내일쯤에 복신이 온다는데 같이 방같이 쓰면 되겠네. 권솔.” 양배추 샐러드에 소스를 열정적으로 비비고 있던 지만이 새끼가 한 말이었다. 녀석은 자신이 한 말이지만 심각하게 마음에 들었는지 아랫배를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잠시 정신을 차리는가 싶으면 거대한 몸 하나를 가누지 못해 비룡이 형의 등에 얼굴을 묻으며 또다시 킥킥댔다. 거인새끼의 웃음 한방에 바닥에 놓여 있던 음식들이 후들거렸다. 웬만하면 꼭 웃어야 될 때만 웃지 그러냐. 지진 나겠다, 인마. " 아주 대놓고 까불어라! “ 솔이 새끼가 으르렁댔다. 맙소사! 화를 내는 녀석의 얼굴이 평상시보다 붉어져 있었다. 내가 알던 권솔이 맞나.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 새끼야! 왜 화를 내고 지랄이냐. 나는 네 생각해서 한 말이다. 둘이 같이 쓰면 좋을 거…….” 솔이 새끼가 지만이 놈의 얼굴에 빈 만두접시를 내리찍었다. 녀석이 살짝 고개를 돌려 피하자 권솔이 바짝 약이 올랐다. “ 나는 분명히 입 닥치라고 했다.” 오냐, 말들어줄 김 지만도 아니었다. “ 공주야.” 제발 저런 호칭 좀 안 썼으면 소원이 없겠다. 경원이 새끼가 예쁘긴 하지만 공주나 나비, 애기 따위의 호칭과는 전혀 어울릴 만 한 놈이 아니었다. “ 왜 부르냐. 개새끼야. 불러놓고 말 안하면 칼로 대가리 찢는다.” ……봐라. 어떤 공주가 저렇게 입이 거칠겠냐 이 말이다. 지만이 놈이 칼로 대가리를 찍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했다. “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이 복신이라고 현대판 꼴통새끼 하나 있는데 그 새끼가 사실은.” 듣고 있던 솔이 새끼가 사색이 됐다. “ 야! 진짜 뒈진다!” “ 천하의 권솔도 발 뻗고 자던 세상 이젠 끝났지, 암. 그렇고말고.” “ 그래도 이 자식이!” 솔이 새끼가 몸을 날려 지만이 놈의 멱살을 제대로 낚아채 앞뒤로 거칠게 흔들어댔다. 고함을 치는 녀석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애원 빛이 서려있었다. 그러나 지만이 놈은 녀석의 필사적인 눈을 교묘하게 피해 나와 경원이 놈을 번갈아 보며 히죽 이죽거렸다. “ 궁금하지? 복신이랑 권솔이 어떤 사이냐면, 솔이 새끼가 유일하게…….” “ 야!! 제발 좀!” 저것들 새로운 콩트하나. 경원이 놈의 얼굴이 답답함에 붉게 익었다. 참다못한 녀석이 버럭 성질을 냈다. “ 김 지만. 빨리 말해. 궁금해 타 죽겠어." " 공주야, 그게 뭐냐면. 권솔 저게 남자다운 척 좆나 해도 복신이 앞에 가면……“ 드디어 권솔이 주먹을 썼다. 놈은 지만이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며 악을 질렀다. “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내가 언제! 이 복신 앞에 가면 쪽을 못 썼냐!” ……솔아. 아직 거기까진 말 안했다. 음, 그런 거였구나. 네가 쪽을 못 쓰는 사람도 있었구나. 터지기 일보직전으로 변한 이경원이 바닥을 쿵쿵대며 말했다. “ 뭐야, 진짜 궁금해 죽겠네. 복신인가 고무신인가 하는 놈한테 따먹히기라고 했냐?” 어라. 솔이 새끼가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나마 오기로 쥐고 있던 지만이 놈의 멱살까지 풀었다.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갑자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쉽게 바뀌는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된다. 그럼 사실이란 말인가. 의구심 섞인 궁금증은 솔이 놈의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서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너 정말 그런 거였냐. 주먹으로는 상대가 없어서 따분해하던 놈이 너였는데. 남자다움의 결정체인 너였는데. 내기 싸움을 해서 알바 비를 충당하던 내 친구, 권솔이었는데……. 그랬던 너였는데.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경원이 놈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녀석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굳어진 녀석을 대변해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권솔. 너 정말 깔려?” 솔이 새끼가 오버를 했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 아니야! 저 새끼 말 믿지 마! 너 나 못 믿어? 너 누구랑 더 친해! 빨리 말해 봐.” 녀석은 갑자기 우정도 테스트를 하려 했다. 화재를 그쪽으로 돌리려는 속셈이 확실했다. 순순히 넘어가지 않겠다. “ 그럼 네가 깔아?” “ 뭐?” “ 들어놓고 일부러 못들은 척 하는 거 보니까 맞네. 네가 깔리는 거야! 권솔이 바텀이라니! 내 친구 권솔이 바텀이었어!” 권솔은 괜히 지만이 놈의 허리를 냅다 걷어차고 창고로 이어진 지하실로 뛰어가 버렸다. 사라져가는 권솔의 뒷모습을 보며 김 지만 새끼가 낄낄댔다. “ 계진아, 너도 몰랐어? 걔네들 사귄지 8년이 넘어가잖아.” “ 실망이다. 최악이다. 짜증난다. 어이없다. 말도 하기 싫다. 지금 내가 너한테 그렇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솔이 새끼한테 꽥 악을 지른 말이다. 녀석은 계속해서 묵묵부답. “ 어쩐지 학교 다닐 때에도 여자애들이 사귀자고 하면 다 거절하고 이상하긴 했었어.”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놈, 형제라고 했던 생각 녀석이 8년을 사귄 애인을 감쪽같이 속이다니.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망할 자식. “ 지만이가 말 안했으면 넌 계속 속였겠지. 나쁜 놈!” “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말….”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놈은 우물쭈물 거리다 내가 노려보자 급하게 입을 다문다. “ 정말 망실이다! 망실, 망실 대 망실! 넌 날 친구로서 무시했어!!” “ 그게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 필요 없어, 이 자식아! 이복신이라면 복희씨 동생 맞지? 빨리 대답해!” “ 맞아.” “ 너 나한테는 뭐라고 했냐. 복희씨 얘기하면서 걔네 형제는 다 이상하다 어쩐다 했었지? 기억 안나? 아주 호박씨를 제대로 까주시고 계셨던 거로군! “ 웬일로 조용하던 이 경원이 운동화 끝만 내려다보며 대답을 못하는 권솔을 보고 농도 짙은 비웃음을 날렸다. “ 왜 기억이 안 나겠어. 권솔이 친히 깔려 주기까지 한다는데. 시발. 생각하니까 열 받네. 그럼 저 새끼도 깔리는 주제에 나만 갈군 거였네? 이중인격자! “ 솔이 새끼가 고개를 쳐들고 저릿하게 놈을 노려봤다. “ 아주 물 만난 고기 되셨어. 죽기 싫으면 너는 그만 빠져라.” “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다고 빠지라 마라냐. 권솔, 젤 있으니까 받아가라, 끈 팬티만 입어라 이 말 들으니까 뭐 기억나는 거 없냐?” “ 전혀. 완전 기억 안나.” “ 그래? 그럼 너는 이제부터 권솔이 아니라 권 돌이다. “ 솔이 놈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 그래도 기억 안 나는 건 안 나는 거다. 근데 이 새끼가 진짜! 김 지만 빽 만 믿고 좆나 날 뛸래?” “ 저 새끼는 꼭 불리하면 김 지만 빽 얘기를 하더라! 정식으로 한판 붙어볼까? 응?” “ 병신 되서 처 울지나 마라.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새끼야.” ……오랜만에 마음 놓고 화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또 왜이래. 놈들은 내가 화도 못 내게 서로 잡아 죽일 듯이 으르렁 거렸다. 이경원의 그 빽 이라는 놈을 보자 먹다 남은 탕수육을 언제 비닐봉지에 싸왔는지 하나씩 꺼내 먹느라 도둑고양이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긴 대화를 해봤자 나오는 건 한숨이요 올라오는 건 혈압이다. 나는 여전히 으르렁거림을 멈추지 않는 이 경원과 권솔에 지쳐 나 먼저 집으로 올아 왔다. 오늘 날 잡았나. 대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자 제일 먼저 보이는 두 사람. 그들은 평상 위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다 나를 발견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 계진 씨, 안녕하세요.” ……이 세상에서 나를 계진 씨라고 부를 사람은 새싹과 쌍칼밖에 없지. 그런데 그들은 웬일인지 처음으로 양복을 벗고 심하게 캐주얼한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짝이 맞지 않은 슬리퍼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다. 평소처럼 왁스로 뒤범벅을 해서 뒤로 넘긴 전형적인 조폭 머리도 아니었다. 쌍칼은 모자를 쓰고 새싹은 젖어 있는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흐트러진 모습은 또 처음이라 생소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그들은 입고 있던 추리닝과 모자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쌍칼이 아직 불씨가 남은 담배꽁초를 슬리퍼 앞으로 비벼 꺼뜨리며 입을 열었다. “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이상합니까.” 특별한 날? 도대체 그 특별한 날이 뭐 길래 너희들이 추리닝까지 입은 거냐. 마침 대문이 우당탕탕 요란스럽게 열리며 녀석들이 들어왔다. 놈들은 평소처럼 각자 방으로 흩어지려다 ‘어라.’ 하는 여음 구를 내며 걸음을 멈추었다. 야심한 시간에 온다간다는 말없이 찾아온 새싹과 쌍칼을 보고 멈춘 것이리라. 녀석들이 한꺼번에 평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 어? 저거 봐!” 경원이 놈이 갑자기 나사가 풀린 놈처럼 발을 구르며 고시생의 방을 가리켰다. 미쳐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지만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다. 뿌듯한 얼굴로 서로의 가슴을 팍팍 쳐대는 쌍칼과 새싹의 행동이 아니어도 놀랄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고시생의 방으로 달려가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중국집 발처럼 쳐놓은 커튼을 걷어내자 제일 먼저 천장에서 윙윙대는 모빌이 시선을 잡아 끌었다. 무늬도 유치했다. 천사를 중심으로 별과 달이 옹기종기 붙어 시끄럽게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모빌 때문에 숙이고 있던 머리를 살짝 들자 정수기 부근이 천사의 발끝에 걸렸다. 그러자 모빌전체에서 다라라라라 하는 노래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 계진 씨! 제 아이디어에요! 접니다, 당신의 쌍칼!” 그래. 딱 네 수준에 맞게 했구나. 그때 쌍칼의 뿌듯한 목소리에 뒤질세라 새싹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계진 씨, 쌍칼의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가지 마세요! 벽지는 제가 골랐어요. 도배도 저 혼자서 다 했습니다! 물론 쌍칼은 저에 비하면 하루 종일 논 거나 다름이 없어요! “ “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아니에요! 계진 씨. 장판은 저 혼자 깔았어요! 새싹이 새끼가 한 말이 거짓말입니다!” " 야, 너 안 닥칠래? “ “ 닭은 양계장에나 가서 너나 실컷 쳐라.” “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은근슬쩍 유머를 치고….” 바락바락 대들 듯 말하는 새싹의 말을 재빨리 가로채며 경원이 놈이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 둘 다 조용히 해! 정신 사나워 죽겠으니까.”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러나 의외로 새싹과 쌍칼은 옥식각신 하면서도 마침내 입을 닫았고 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방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 짧은 시간에 대단들 하군. 자이언트 황소개구리가 붙어 있었던 벽은 분홍색 꽃무늬 벽지로 감춰져 있었고 팔뚝만한 쥐들이 들러붙어 있던 방바닥은 연한 하늘색 장판이 깔려 있었다. 뭐든 꾸미기 나름이라고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그러나 장판과 벽지는 좋다고 쳐도 쥐구멍만한 방 한 칸에 화장대, 침대, 냉장고, 장롱이 빼곡히 들여놓은 것은 무리였다. 방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는데 욕심이 너무 과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상이 앉을 틈도 없이 방바닥이 좁아져 버렸다. 내가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닐 때마다 녀석들의 우와 하는 감탄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귀로 흘려들으며 비싼 건 둘째 치고 불필요 할 정도로 큰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냉동실에 붙은 저 찬란한 마크. 성능 좋다고 소문난 ‘디오 싸’ 냉장고가 아니던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의미 없이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당연히 비어있을 거라 예상했던 냉장고에선 의외로… “ 으-악! 놀랬지?” 난 무덤덤하게 말했다. “ 복희씨, 냉장고엔 왜 들어가 계세요?” 의외의 인물은 복희씨였다. 복희씨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의외였기도 했고 엄마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처럼 산만한 덩치를 말아서 냉장실에 쭈그리고 앉던 그의 행동도 의외였다. 이 남자는 문을 열자마자 천진하게 웃으며 날 놀래어 주려는 얼토당토않은 수작을 부렸다. ……지능이 있긴 한 걸까. “ 나와요. 옷 다 구겨져요.” 당초 자신이 예상한 반응에 전혀 미치지 않는 내 행동 때문에 복희씨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빨리 나오라니까요.” 그러고 보니 복희씨도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정장은 깔끔하고 도시적인 멋이 있었고 추리닝은 나이에 비해 훨씬 어려보이는 멋이 있었다. 둘 중에 하나만 고르자면 슈트나 코트처럼 형식적인 옷이 더 잘 어울리는 그였지만 편안한 복장도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역 시 뭐든 본판이 좋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한 사람에게서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진 사이 급기야 열 받아서 부루퉁하게 변한 그는 냉장고 귀퉁이를 주먹으로 내리찍으며 요란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가 내밀고 있던 손바닥을 보고 코웃음을 치고는 침대로 가서 다리를 꼬고 눈알을 실룩였다. 싸늘하게 굳어진 눈매. 삐죽거리는 입술. 또 화났네. “ 화났어요?” “ 전혀. 내가 왜.” …화났구나. 어색하게 서있는 내 옆으로 방안을 쥐새끼처럼 기웃거리던 쌍칼이 슬리퍼를 공중에 휘날리며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 형님께서 계진 씨 놀래주려고 1시간 전부터 들어가 계셨어요.” 기가 찼다. 기만 찬 게 아니라 코도 차겠다. 말을 마친 쌍칼은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났다 하는 뿌듯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호텔 지배인처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라고 말하며 방문을 닫았다. 방 문 사이로 웅성거리는 놈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왜 문 닫고 지랄이야.’ ‘ 문열어봐, 쌍칼’ ‘ 난 가서 잠이나 잘래.’ 녀석들은 곧장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략 십 분이 넘도록 옥신각신 한 끝에 발길을 돌렸다. 십오 분쯤 되자 두런두런 말소리도 완전히 사라졌다. 둘만 남았다. 이거 생각보다 민망한데. 그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을 좀처럼 지우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창문도 없는데 잘도 핀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잘못 말했다가 뷔페의 대왕 고삘 꼴이 되고 싶진 않았다. “ 사실은요. 완전 놀래서 말이 잘 못 나왔어요.” 복희씨가 담뱃재를 방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어냈다. “ 너 말이다.” “ 네?”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 내가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속을 정도로 한심해 보이냐.” 난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 아니에요! 너무 놀라서 말이 엇 나온 거예요. 얼마나 놀랬다고!”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의 인상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 아직도 심장이 벌렁하네! 하하, 식은땀까지 다나요. 볼래요? 봐요, 자.” 나는 괜히 팔을 내밀었다. 그 사이 복희씨의 주름이 거의 다 풀어졌다. “ 그러지 말고 화 풀어요! 복희씨는 참 기발한 사람 같아요! 감히 냉장고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니요! 아마 이 지구상에서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진심이에요!” 입 꼬리가 올라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충 성공인가. “ 화 푸는 거 아니다. 다만 네 노력이 가상해서 오늘만 봐주는 거다.” ……시발 놈. “ 네. 고맙습니다.” “ 오냐.” 복희씨가 화도 풀었겠다, 방에 들어와서 의아했던 점을 하나 둘씩 꺼내놓았다. “ 화장대는 왜 샀어요?” “ 필요해서.” “ 왜요.” 복희씨의 눈동자에 경멸감과 혐오스러움이 스쳤다. “ 눈썹도 다듬고 가끔씩 마사지도 해줘야 될 거 아니냐.” “ 예? 마사지 까지요?” “ 너는 가끔씩 기본상식이 덜 되었단 생각이 들게 만든단 말이지. 내가 노력하나 없이 그냥 잘생겼는지 아냐?” “ 마사지가 노력 중에 하나에요?” “ 말하자면 그렇다.” 나는 도저히 못 참겠어서 배를 잡고 킥킥 웃었다. 그러나 나의 예기치 못한 킥킥거림에 복희씨는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꼈는지 인상이 매우 더러워졌다. 저 사람에겐 말할 틈을 주면 안 된다. 쓸데없는 말을 잔뜩 늘어놓기 때문에. 예상대로 복희씨의 입술이 리듬을 타고 달싹이기 시작했고 나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 왜 침대가 하나에요?” “ 그럼 이 좁아터진 방에 침대를 두개씩이나 두라고?” “ 그건 아니지만, 예를 들자면… 맞다! 이층침대가 있잖아요.” 복희씨는 맥이 풀린 한숨소리를 뱉어냈다. “ 이놈의 황홀한 집구석이 천장이 워낙 낮아서 그게 들어오기나 할까 몰라.” “ 아, 그건 그러네요.”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복희씨는 날 째려보는 것도 처음에 비해 흥미가 떨어졌는지 침대에 들어 누워 베개를 팡팡 때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 중얼거렸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고 ‘세수 좀 할게요.’ 하고 말 한 후 마당으로 나왔다. 쌀쌀한 바람이 남방 안으로 쏴하게 들어온다. 문 밖에 포개진 전자제품 박스를 훌쩍 뛰어넘어 어제까지 내가 살던, 이제는 솔이 새끼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은 물론 열려있었다. “ 솔아, 자냐.” 문을 열자마자 후각을 강하게 찔러오는 소주의 톡 쏘는 향기. 평소보다 빨리 끝났다고 벌써 잘 리가 없지. 술병이 나뒹구는 방안엔 예상외의 인물들까지 앉아 있었다. “ 계진 씨! 새싹과 쌍칼. 너희는 집에 안 가고 왜 여기 있는 거냐. 방안 풍경을 살펴보자 벌써 거나하게 취해 벌게진 얼굴의 권솔이 비릿하게 웃었다. “ 뭐 하러 왔냐. 오늘 밤 홍콩가야 될 새끼께서.” 녀석의 말에 한밤중 소주 파티에 참가한 놈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나는 문지방을 지근지근 밟으며 방문 앞에 쓰러지듯 자고 있는 김 지만의 엉덩이까지 덤으로 밟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토실한 엉덩이 한 번 밟았다고 골반이 쉽게 무너지겠냐만 경원이 자식이 꼴뚜기 눈알을 해서 졸라 야려댔다. “ 왜 우리 신랑 엉덩이는 밟고 난리냐!” “ 야, 걱정 마! 네 서방 궁둥이 내가 한번 밟는다고 없어 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 놈의 눈깔을 손가락 두 개로 푹 찔러대는 시늉을 해보이곤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입을 만한 게 뭐 없을까나. 마지막 서랍을 열자 그나마 괜찮은 하얀색 추리닝이 보였다. 솔이 놈이 눈치 채지 않길 바라며 추리닝을 옷 속에 감췄다. “ 적당히 먹어, 골병난다. 난 이만.” 방문을 닫는 순간에도 파이팅, 잘해봐, 죽이게 해. 하는 거지같은 말들이 날아왔다.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세숫대야에 물을 받았다. 보일러가 고장 났나. 제길! 차가운 물만 졸라 나왔다. 덜덜 떨며 세수를 하고 뿌득뿌득 얼굴을 닦았다. 입고 있던 청바지와 남방을 벗고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뭐 빠진 건 없나. 아! …병신같이 그걸 잊어버릴 뻔 했다. 간줄 알았던 내가 다시 방문을 열자 녀석들의 ‘왜.’ 하는 물음 섞인 표정을 단체로 지어보였다. 나는 곧장 책상서랍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불안했었는데 그대로 있었다. 귀퉁이가 약간 찢어져 있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새끼들이 안본 게 어딘가. 나는 그들의 의아한 얼굴을 끝까지 풀어주지 않고 복희씨가 있는 방으로 당장 뛰어갔다. “ 약수로 세수를 했냐. 왜 이렇게 늦게 와.” 짜증으로 찌푸려진 복희씨의 얼굴을 보며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이런 감정만 가지고 덜렁 좋아한다고 쉽게 정의를 내리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가슴을 떨리게 만든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럼 좋아한다는 건가. 모르겠다. 하지만……. 결단이 필요하다.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떨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작 이딴 유치한 것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다행이 바람대로 목소리는 무덤덤하고 삭막하게 흘러나와 주었다. “ 복희씨, 저랑 하고 싶으세요?” …5초의 정적. 오히려 말한 사람이 더 떨고 있는 상황은 또 뭐냐. 복희씨는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표정이 풀어지고 사악한 악당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침대 등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워 바른 자세로 앉았다. 앉은 폼이 꼭 협상을 하자는 식이다. “ 뭘.” 악마 같은 자식. 다 알고 있으면서 이제 와서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꼴이 더럽게 얄미웠다. 나는 조금 전 패기를 순식간에 잃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그런 거 있잖아요.” “ 그런 게 뭔데.” “ 결합.” “ 결합이 뭔데.” 목소리는 이미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 사람과 사람이 몸으로 하는 그…뭐랄까. 육체의 노동?” 복희씨가 빈정대며 말했다. “ 육체의 노동이라면. 노가다?” 후레자식. 그는 다리를 올려 침대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나도 괜히 그를 따라 양반다리도 앉았다. “ 하고 싶어.” 심장이 뛰다 못해 찢어질 정도로 아팠다. 반대로 복희씨의 얼굴은 지나치게 나른해 보였다. 하고 싶다는 중대한 말을 밥 먹고 싶어, 샤워 하고 싶어. 하는 것 처럼 평 상시와 다를 바 없는 담담한 목소리에 난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 복희씨 제가 말하는 건 그런 노가다가 아니에요.” “ 나도 아니다.” “ 네?” “ 결합이라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노가다가 결합은 아니잖아.” …뭐야. 알고 있잖아! “ 알고 있었어요?” “ 그래.” 그러니까 당신은 나쁜 놈이란 겁니다. 그가 또 무슨 이유로 변덕을 부릴지 모르기에 난 서둘러 추리닝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복희씨는 무작정 인상부터 찌푸렸다. 추리닝 지퍼를 잠그기가 무섭게 그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 그렇다면 빨리 읽어보세요.” “ 이게 뭔데.” “ 간단한 몇 가지 적어봤어요.” 복희씨는 마지못해 봉투를 받아 들었고 난 침대위로 올라와 그 옆에 얌전히 앉았다. 복희씨는 나와 봉투를 한참동안 번갈아 본 끝에 (여전히 찜찜하단 표정은 풀지 않았지만) 봉투를 찢고 안에 있던 편지지를 꺼냈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드디어 이런 순간이 왔구나. 나는 저것을 얼마나 고심 끝에 적었던가. 찢어진 봉투와 함께 편지지 귀퉁이가 조금 찢어져 나갔다. 그래도 읽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복희씨의 눈이 편지지 사이로 빠르게 움직였다. ……10초, 20초, 30초. 복희씨는 편지지를 툭 떨어뜨렸다. 무표정했던 얼굴이 점점 되돌아온다.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이다. 복희씨의 눈썹이 갈매기 모양으로 일그러지며 그는 떨어진 편지지를 집어 들고 침대 밑으로 거칠게 팽개쳤다. 3시간 동안 쓴 걸 30초 만에 다 읽었단 말인가. 허무해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복희씨는 씩씩댔다. “ 가지가지 하는군.” 나는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 가지가지 아니에요. 얼마나 고민하고 고민해서 적은 건데요!” 복희씨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나를 천박하게 훑어보며 말했다. “ 다 이해하겠는데.” “ 이해? 정말요? 진심이로?” “ 마지막 항목은 무슨 뜻이냐?” 복희씨는 침대 밑에 떨어진 편지지를 다시 주워들고 내 코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마지막 항목. 5번째 줄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떨어뜨리자 삐뚤삐뚤한 악필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밤에 써서 몰랐는데, 이정도로 글씨를 못 썼단 말인가. 편지지 귀퉁이를 소심하게 접으며 딴전을 피우자 복희씨가 으르렁거렸다. “ 읽어 봐.” “ 보신 그대로에요. 뭘 새삼스럽게 또 읽어 보라고…….” “ 네가 썼잖아. 좋은 말로 할 때 읽어라.” “ 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 항목 5번째, 관계 후 김 계진이 혹시라도 임신하면 이 복희는 무조건 결혼식을 올려준다.” “ 무슨 뜻이냐.” “ 사람일은 모르잖아요. 나도 알아요. 남자가 임신할 확률은 겨울에 담근 김장김치가 알고 봤더니 배추도사, 무 도사 일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요. “ “ 그런데.” “ 하지만 복희씨 생각해보세요! 만에 하나 제가 그 말도 안 되는 확률을 깨고 복희씨 아기를 임신했다고 가정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고요. 더군다나 복희씨가 절 축구공 차듯 뻥 하고 차버리면 전 뭐가 되겠어요! 바로바로 미혼모에요! 미혼모라고요! “ “ 계속해.” “ 아기에겐 따뜻한 가정이 필요해요. 그래서 썼어요. 별 뜻은 없지만 혹시나 하고…….” “ 지랄하네.” 그는 남의 고민을 수준 낮은 욕설로 정의 내렸다. 나는 상처받은 눈으로 복희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생각에 잠긴 듯 망설이다 말했다. “ 그건 그렇다 치고. 나머지 항목은 뭔데. 마저 읽어라.” “ 다 보셨잖아요. 제가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 있어.” 나는 울상을 지었다. 그는 그런 내 반응에 꽤 만족스러운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만하란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나는 힘없는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 항목 1. 관계 후 당신 이 복희씨와 저 김 계진은 무조건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 항목 2. 관계 후 당신 이 복희씨와 저 김 계진은 무조건 비밀을 만들지 않는다. 항목 3. 관계 후 당신 이 복희씨와 저 김 계진은 무조건 남녀관계를 정리한다. ……사실 항목 3에선 찔렸다. 나는 애초에 정리 따위를 할 남녀관계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 복희씨라면 사정이 다르다. 그는 하루살이 같은 장미 자식부터 시작해 묘령의 장우현도 걸리고, 이것저것 잔챙이처럼 꼬이는 놈들이 많다. 그렇기에 더욱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눈치를 살피자 복희씨는 계속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저 읽었다. “ 항목 4. 관계 후 당신 이 복희씨는 저 김 계진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놀림을 그만둔다. 항목 5. 관계 후 김 계진이 혹시라도 임신하면 이 복희씨는 무조건 결혼식을 올려준다. 다섯 가지 항목이 끝나자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접어 복희씨의 처분을 기다렸다. ……빌어먹을. 김 계진 인생에서 이렇게 떨려 본적이 있었나. 기필코 없었을 것이다. “ 해.” 난 바보처럼 되물었다. “ 해?” “ 알았으니까 하자고.” “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진짜?” “ 그래.” “ 그럼 잠시 만요.” 나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주머니에 넣어온 볼펜을 꺼내 복희씨 앞에 내밀었다. “ 자요.” “ 또 뭐하자는 거냐.” “ 밑에 사인해요.” 복희씨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이 나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 다 들어준다니까. 사인 따위는 필요 없어. 너나 실컷 해라.” “ 뭐가 어렵다고 그래요. 그냥 서명만 해주면 된다는데 그러시네.” 그 말에 복희씨의 심기가 불편해진 모양이다. 그는 내가 열심히 설명을 해도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아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떨리는 가슴을 통제할 수 없는 이 순간이 저주스럽기만 했다. 그때 사악한 기쁨에 촉촉이 젖어든 복희씨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꼬깃꼬깃한 편지지를 손으로 대충 매만져 주름을 펴서 베개 밑에 바쳤다. 그리고 놀랍게도 순순히 사인을 했다. 사인에서 살짝 인조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불안했지만 그는 편지지를 반듯하게 접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 만족하냐?” “ 네.”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그의 사인이 담긴 계약서를 고이 접어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복희씨의 사악한 눈빛이 한층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한번 하기 더럽게 어렵다. 이젠 해도 되냐?” “ 생각해 봤는데요. 오늘은 이사 첫날이고.” “ 시끄럽다.” “ 네?” “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어. 그럼 이젠 네가 해 줄 차례지.” 나는 재빨리 방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복희씨가 갑자기 내 멱살을 거칠게 휘어 감고 침대 위로 잡아당겼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예상대로 역부족이었다. 필사적으로 버티는 발바닥이 방바닥에 쩍하고 달라붙었다가 떼었다 반복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복희씨는 히죽 웃으며 이때다 하고 주저앉으려는 내 허리와 허벅지에 각각 손을 끼워 넣고 어깨에 들쳐 멨다. 순식간에 나는 그의 등에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매달려 거꾸로 뒤집어 업혀졌다. 복희씨가 침대로 가까이 끌수록 코가 쿵쿵대며 그의 허리에 닿았다 떨어졌다. ……제길, 낭패였다. 나는 당황해서 애원하듯 말했다. “ 내일요! 우리 이야기 좀 더 해요!” 복희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 얘기는 즐기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중학교 때부터 주먹질에 눈을 뜬 권솔도 모자라 고등학교 때 만난 지만이 놈까지 내 옆에 싸움꾼이 두 놈이나 있다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찢어져서 꿰맨 자국 정도는 무수히 많이 봐왔다고 자부하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다. 침대에 앉아 순식간에 추리닝 지퍼를 여는 복희씨의 행동에 멍해져 있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심각할 정도로 화려한 상처들이었다. 어깻죽지 양쪽은 날카로운 뭔가로 뭉툭하게 살이 파여져 오버 좀 더 하자면 뼈가 보일정였도고 옆구리는 찢어져서 꿰맨 자국들이 많다 못해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부스럼과 딱지가 앉은 자잘한 상처부터 약간의 핏물이 묻은 흉터들까지. 하지만 그 많은 상처와 자국들을 제치고 오랜 시간동안 내 시선을 잡아끄는 건 단연이거겠지? “ 이 문신 진짜에요?” 복희씨 등의 전체를 뒤덮고도 모자라 오른쪽 옆구리까지 두꺼운 꼬리를 내리고 있는 푸른 용에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누워있던 용님께선 그가 움찔거릴 때 마다 물고 있던 농구공만한 여의주를 뱉을까, 말까하는 얼굴로 날 노려보고 계셨다. “ 이거 설마 판박이는 아니겠죠?” 복희씨는 침대에 배를 깔고 얼굴은 베개에 푹 파묻고 누워있는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가 반쯤 들렸다. 자존심 상 한다 이거냐. “ 그럼 내가 가짜를 했을까봐?” 묻지도 못 하냐. 나는 복희씨 몰래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에 진득하게 침을 묻혔다. 그리고 용의 부리부리한 눈깔에 손을 가져다 대기가 무섭게 미친 듯이 박박 문질러보았다. 어라? 안 지워지잖아……. 역시 진짜였단 말인가. 손가락과 침 한방에 내 궁금증은 자연히 풀렸지만 복희씨의 짜증은 쌓였나 보다. 그가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 너 혹시 침 묻혀서 문질렀지?” “ 아니요. 제가 설마 그랬겠어요?” “ 응.” “ 아니에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의심이 많아요?” “ 네가 의심가게 하는 건 생각 안 하냐.” “ 아무튼 아니에요. 침 안 묻혔으니까 졸라 안심하세요.” “ 졸라?” “ 어? 내가 졸라라고 했어요? 잘 못들은 거예요! 진짜라고 했어요. 진짜 안심하세요. 이렇게 말했는데…….” 그는 못 믿겠지만 오늘만 한번 믿어보겠다 하는 눈으로 날 한번 쏘아보더니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고마움에 보답할 겸 그의 뭉쳐있는 어깨를 열심히 주물렀다. 그럼 어느 정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맙다 또는 괜찮다는 말을 해줄 법도 한데 복희씨는 간지럼 태우면 죽인다, 등에 침 떨어뜨리면 당장 칼로 배 쑤셔버리겠다 같은 3류 저질 양아치대사를 주구장창 읊어댔다. 물론 그렇다고 겁먹을 나도 아니었다. ……몸과 손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된다더니 역시 그 말이 맞구나. 복희씨의 벗은 몸을 보고 난 지금에서야 그의 직업이 단순한 회사원이 따위가 아닌 조폭이란 사실을 실감했다면 역시 나는 둔한 놈일까. “ 안 아팠어요?” “ 응.” 거짓말. 무뚝뚝하게 하는 응 이라고 하는 그 말이 왜 나에겐 ‘아파 죽겠어’ 하는 투정으로만 들리는 걸까. 신기한 일이었다. “ 복희씨 싸움 못하나요?” 그때 갑자기 복희씨는 누워있는 몸을 반대로 돌려 널브러진 이불을 끌어다가 등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감추었다. “ 뭐야?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 매일 맞고 다닌 거 아니…….” 그가 엉겁결에 일어났을 때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상처가 눈에 들어 왔다. 배와 옆구리를 칭칭 동여매어 두꺼울 정도로 무거워 보이는 붕대와 진득하게 베여있는 핏물들. 복희씨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핏자국은 더 짙어졌다. 뭉게뭉게 피어오른다는 느낌이 이럴 것이다. “ 내가 병신처럼 누군가한테 맞고 다닌단 말이야?” “ 상처가.” “ 대답 해봐. 그 말이냐고.” 복희씨의 성난 목소리를 귓전에 흘리며 상처부위를 가리켰다. 그의 얼굴에 순간 낭패감이 서렸다. 그리곤 서둘러 이불 모퉁이로 배를 감싸더니 별일 아니야.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피 냄새. 아직도 비릿하게 풍겨오는 피 냄새를 봐서는 아주, 아주 최근의 상처가 분명하다. 도대체가 성한 구석이 없었다. 가슴은 찢기고 파여지고 멍들고 꿰매지고 무슨 일은 얼마나 대단한 걸 하기에 몸이 이렇게 망가졌단 말인가. 그때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복희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너 왜 울어.” 누가? 내가 운다고? “ 누가요!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 지금 울고 있잖아! 병신새끼야.” “ 안 울었어요! 절대 안 울어요!” 자연스럽게 버럭 고함을 지르자 복희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 병신처럼 눈물 질질 짜고 있잖아, 지금도.” “ 그거야. 그 쪽이 머저리처럼 맞고 다니니까 그렇죠!" 그는 이보다 더 이상할 수 없다 할 정도로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구부리고 있던 몸을 완전히 펴고 날 인정사정없이 노려보았다. “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머저리? 다시 한 번 말해봐.” 그의 살기에 찬 오로라가 내 자존심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난 굴하지 않고 복희씨에게 대들었다. “ 머저리요! 무슨 놈에 상처가 그렇게 많아요! 매일 매일 얻어맞고 다니죠? 그렇죠?” 그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머저리’ 란 단어는 어느새 싹 잊고 ‘맞고 다녀, 맞고 다녀.’ 를 소리 내어 여러 번 중얼거린 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한 동시에 내 머리통을 아프지 않게 (나한테는 오지게 아팠음) 때렸다. “ 왜 때려요! 다른 사람한테는 졸라 맞고 와서! 왜 힘 약한 나만 때리고 난리에요!!!” “ 내 어깨에 상처 낸 놈은 관에 들어갔고 옆구리를 찢은 새끼는 식물인간이 됐다. 나는 보통 이런 사람이야.” 그는 어린애처럼 뿌듯하게 웃다가 지금까지 자신이 화내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빠르게 감지하고 얼떨결에 입을 다물었다. ‘알아요. 나도 당신이 맞고 가만히 있을 놈이라곤 생각 안 했습니다.’ 라고 말해면 이미 늦었을까. 분노로 찜통모드로 돌변한 복희씨의 머리에 뜨거운 김이 느껴졌다. “ 배는 또 왜 그래요? 붕대 좀 풀어 보세요.” “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니요. 나는 신경 쓰여 죽겠습니다. 그는 보란 듯이 내 말을 씹고 스탠드 아래 놓인 담뱃갑을 집어 들기 위해 상체를 반쯤 들어 올렸다. 맹수가 먹이를 치나 칠 리가 없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의 등에 올라타 돌돌 뭉쳐진 붕대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으나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반창고를 거의 떼어낸 후였다. 엉겨있던 실 뭉치와 핏물에 고여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밀어내는데……. 오 마이 갓. 복희씨의 배에 긁혀진 상처를 보며 잇 사이로 고통스럽게 뱉은 말을 이거였다. “ 당신, 정말 미쳤군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눈이 있다면 본인도 자기 상처를 봤을 테니까. 두꺼운 칼에 찔렸는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처는 적어도 7, 8센티는 피부가 갈라져 있었고 그 안에 치료되지 못해 부식된 살과 엉켜있는 피 딱지들이 뭉쳐 있었다. ……새싹이나 쌍칼 이 자식들은 말로만 ‘형님, 형님’ 했지 병원도 안 데리고 가고 뭐 한 거야. 지금쯤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있을 두 놈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리고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이 복희씨에게도 화가 났다. 아직도 검붉은 피가 물컹물컹하게 뿜어져 나오는 배를 보며 분노해서 소리쳤다. “ 병원가요! 아직도 피가 나요! 쌍칼이나 새싹일 부를게요.” 그의 상처를 보면 볼수록 겁이 났다. 그러나 복희씨는 나와 배를 한 번씩 번갈아 보며 태연한 얼굴로 픽 웃는 것이 전부였다.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는 웃음이었는데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인간 자체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됐어, 치료는 무슨. 밥 먹으면 낫는다. 괜히 소란 떨 필요 없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번엔 제발 내 말 들으세요!” “ 들을 만한 가치가 있어야 듣지.” “ 가치가 왜 없어! 암튼 계세요. 누구하나 데리고 올 테니 기다려……어!” 방문으로 달려가기 위해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지만 비딱하게 누워있던 복희씨가 엉거주춤 서있던 내 허리를 거칠게 휘어감아 다시 침대에 앉혔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자 어느새 내 목덜미에 머리를 묻고 있던 복희씨가 나지막이 말했다. “ 초상난 거 아니다. 제발 그만 울어라.” 내가 아직도 울고 있었단 말인가? 그의 말에 다소 당황스러웠다. 슬쩍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흥건하게 젖어있는 뺨과 턱에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힘없이 문지르며 불만에 찬 목소리로 쏘아댔다. “ 운 거 아니에요! 이건 다만, 그래 다만 그냥…….” 더듬더듬 말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복희씨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 기분이 이상해.” “ 뭐가요.” “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네가 울면 기분이 묘해져.” ……무슨 뜻일까. 대답을 하려다 멈추고 우물쭈물 가만히 있었다. 그 역시 딱히 내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니었는지 무성의하게 말을 이었다. “ 술에 취한 느낌이야. 조금 알딸딸하기도 하고 살짝 기분이 좋아지는 거 같기도 해.” “ 나를 울리는 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저는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엄청 재미없어요!” “ 왜 그럴까. 왜 술 취한 기분이 들까.” 복희씨도 모르는 일을 내가 알 리가 없다. 녀석들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가끔 충동적이거나 돌발적인 행동을 한다고 했다. 그것이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거 나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어이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면 더 돋우라져 보이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말이다. 왜 생뚱맞게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미 나는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일이냐 하면…… 어깨에 기대어 있던 복희씨를 떼어내고 그의 입술에 주둥이를 갖다 댔다. 근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다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입술을 갖다 대긴 했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젠장! 진도가 안 나간다, 안 나가. 한 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나는 비참할 정도로 얌전히 그의 목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이경원이 말한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천장을 쓱 훑고 내려와서 혓바닥을 휘어 감으라던 말은 씨도 안 먹힐 상황이었다. 단순히 입술만 맞물려 있으니 뭐가 되겠냔 말이여……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눈을 꽉 감고 복희씨 입술을 혀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이런 좆같은 일이 다 있나. 기분은 나락 끝으로 치닫고 숨겨져 있던 민망함이 뻣뻣이 고개를 들었다. 이 복희씨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다. ……그런데. “ 야. 너 내 턱에다가 뭐하냐.” 무조건 들이댄다고 다가 아니구나. 내가 한참동안 입술을 비벼댄 곳은 그의 푸른 수염이 돋아난 까칠한 턱이었다. 이래서 모든 것에 경험이 중요한 거다. 그의 턱밑에 붙어 있는 입술을 조용히 떼어 내고 처분을 기다리는 불량학생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쪽팔려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 죄송해요. 입술인줄 알았어요.” 복희씨가 조롱하는 말투로 말했다. “ 내 입술이 턱밑에 달릴 정도로 병신 같아 보였냐? “ 꼭 그런 건 아니었어요. 실수에요. 실수.” “ 무슨 실수? 턱에다 침 뱉는 실수?” “ 몰라요. 하지만 이건 제 잘못이 아니……, 으!” 아니,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복희씨는 답답하단 얼굴을 1초 동안 지어보이더니 그것도 잠시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감싸서 침대 한 가운데 억지로 눕혔다. ……올려다보니 뭐랄까, 참으로 민망하군요. “ 복희씨. 저랑 한 계약 꼭 지키세요. 잊으면 안돼요. 아셨죠?” 나의 협박성 멘트에도 불구하고 복희씨는 경멸의 눈초리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 계약? 그게 뭔데. 내가 아는 건 다른 건데.” 나쁜 놈. 난 예의상 물었다. “ 뭔데요.” “ 내가 이제 네 안에 들어간다는 거.” 시발, 더럽게 부끄러운 말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잘도 하시는 군요.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목구멍에 넘어가는 침 소리를 쥐새끼처럼 잘도 들은 복희씨가 목젖을 퍽 하고 치는 바람에 사례에 걸려 콜록콜록 댈 수밖에 없었다. 폭력적인 새끼. “ 복희씨. 안 믿어지겠지만 전 처음…….” “ 좆나 믿겨.” …시발. “ 말은 그렇게 해도 안 믿는 거 다 알아요. 저처럼 귀여운 사람은 인기가 많잖아요.” 복희씨가 날 은밀하게 바라보다 순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귀여운 사람? 누가 네가?” “ 네.” “ 민망한 말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잘도 지껄이네.” “ 사실이니까요. 농, 농담이에요. 죄송해요.” “ 그렇다 치고, 이제 집중 좀 하지.” 그는 서둘러 지퍼를 열고 추리닝 상의를 쓱 벗겼다. 훤하게 들어난 가슴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민망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옛날 옛적 첫날밤에 서방님을 맞이하는 새 각시처럼 브이 모양으로 젖꼭지를 가렸다. 무슨 대단한 황금 젖꼭지라도 되는 건 아니었지만 느낌상 그래야 될 거 같았다. 그러나 못 본 척 넘어갈 복희씨도 아니었다. “ 재미없다. 빨리 손 풀지 그래.” “ 저…….” “ 야!” 복희씨의 협박에 못 이겨 얌전히 손을 풀고 차렷 자세로 반듯하게 누웠다. 복희씨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 대단히 불만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해보였지만 불필요한 잔소리로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진 않았다. 그의 얼굴엔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아주,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추리닝 바지까지 간단하게 쓱 벗겨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맨 다리를 한번 힐끔 내려다보자 ‘아, 내가 드디어 먹히는 구나’ 하는 생각에 오금이 저렸다. 누가 툭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오줌보가 콸콸 터질 것 같았다. “ 너는 왜 팬티를 안 입고 있지?” 복희씨의 시선이 향한 곳은 현재 내가 입고 있는 김 지만의 왕 특대 팬티였다. 몰아놓은 속옷을 어제 한꺼번에 빤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삼키며 입은 지만이 놈 팬티가 내 체면을 사정없이 스크래치 했다. 어이없는 건 복희씨는 진심으로 지만이 놈의 팬티를 반바지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반바지냐, 걸레냐.’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빨갛게 달아 오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열심히 항의했다. “ 이거 팬티에요! 지만이 거예요! 난 원래 이렇게 큰 거 안 입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물론 그는 오해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꺾었을 뿐이다. “ 속옷 살 돈 없어?”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믿어줄 사람도 아니었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혼잣말로 ‘그랬군.’ 이라고 결론을 내린 뒤에 지만이 놈의 반바지 팬티를 단숨에 홀라당 벗겨 바닥에 던져버렸다. ……아, 진짜 민망해 돌아버리겠다. 문제는 복희씨는 상의 외엔 옷을 다 입고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완전 나체라는 것이다.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며 멀뚱히 천장을 보고 있 는데 갑자기 복희씨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그는 바닥에 팽개쳐 놓은 양복주머니를 뒤적여 꼼꼼하게 포장되어 있던 분홍색 뭔가를 꺼내 침대로 다가왔다. “ 그게 뭐에요?” 복희씨는 꾸림하고 음습한 시선으로 나를 훑으며 포장된 것을 부스럭댔다. “ 찢어질까봐.” “ 어디가 찢어져요?” 궁금증에 못 이겨 복희씨 손에 들린 것을 낚아채 요리조리 살펴봤다. “ 이거 먹는 거예요?” “ 먹을 수 있으면 먹어보던지.” “ 안 먹을래요. 불안해. 근데 뭐가 찢어져요? 어디가, 왜요?” 복희씨의 얼굴이 사악하게 변했다. “ 네 거기가.” “ 거기가 어딘데요?” 복희씨는 음모를 꾸미는 놈처럼 음침하게 웃었다. “ 곧 알게 될 거다.” 그랬다. 곧 알게 되었다. 그것도 심각하게 철저하게 알게 되었다. 복희씨는 방금 전 걸려온 전화 한통에 얼굴색이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장난스럽게 나와 농담 따먹기 (지극히 내가 보기엔)를 할 때 비해 표정이 굳어졌고 차가워졌으며 냉기가 흘렀다. 상대가 누군 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곤조곤한 목소리 톤을 봐선 조직에 있는 사람은 아닌 게 확실했다. 내가 앉아 있는 쪽에서 일부러 몸을 반대방향으로 돌려 통화를 하고 있던 복희씨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날 버렸던 것처럼 냉정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 말한 마디에 내 몸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버렸다? 누구를 말하는 걸까. 일부러 참고 내색하려 하지 않지만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복희씨의 냉정하고 무뚝뚝한 말 한마디에 전화를 건 상대방의 목소리가 애원조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울먹거림에 많이 흔들려 불분명하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복희씨의 안색을 살폈다. 지나치게 나른해 보였다. 평상시와 비교해 봤을 때 이렇다 할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눈동자는 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복희씨의 눈동자를 전화 한통화로 흔들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굴까. “ 나는 더 이상 쥐어짜낼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놈이 아니다.”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상대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낮은 목소리. 이번에도 복희씨의 말에 상대방은 분주할 정도로 애원 섞인 말들을 쏟아냈다. 그는 확실히 고통스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힘겹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붉어진 그의 눈빛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상대방이 뭐라고 말을 하는 도중에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 거칠게 꺾어 벽에 집어던졌다. 따각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목소리는 줄어들었고 대신 핸드폰 액정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방인처럼 멍청하게 앉아 그의 얼굴과 고장 난 핸드폰을 보며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기위에 억지로 눈두덩을 때렸다. 이유는 없지만 그냥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때 무거운 침묵에 사로잡혀 허망할 정도로 멍하게 앉아 있던 복희씨가 벌떡 일어나 내 앞에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성격대로 별 다른 말없이 갑자기 나를 거칠게 돌려 눕혔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컸던 걸까. 부드럽다는 표현자체가 포괄적인 의미라는 건 알지만 복희씨가 적어도 지금보다 좀 더 다정하게 나를 대할 거라 예상했었다. 지만이가 경원이 놈을 안을 때는 어미기린이 갓 낳은 새끼기린의 탯줄을 모조리 핥아먹는 것처럼 열심히 물고 빨아대는 통에 섹스를 할 때면 다 저렇게 하는 구나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복희씨는 키스나 흔한 애무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중심을 잡지 못했던 몸이 쉽게 돌려지며 침대 모서리에 머리가 쿵쿵 부딪혔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내 목덜미를 거칠게 부여잡았다. 복희씨는 침대난간에 몸을 지탱시키게 만들고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었다. “ 복희씨, 이 자세는 싫은데…….” “ 쉿! 조용.” 욕하고 윽박지르던 모습과 사뭇 달라진 말투.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에서 더할 나위 없이 낯설음을 느꼈다. 엉덩이 뒤에 바싹 붙어 오는 복희씨의 맨 다리의 감촉이 서늘했다. 본능적으로 다리와 허리부근에 힘이 들어갔다. 이질적인 느낌과 생경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내 엉덩이를 강하게 붙잡고 있던 복희씨가 문득 힘을 풀더니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 넌 나에게 화가 나겠지.” 무슨 말일까. 몸이 완전히 돌려진 상태라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나 작은 한숨소리를 봐서 복희씨는 지금 충분히 고민과 혼란스러움에 쌓여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 복희씨, 왜 그래요.” 복희씨가 건조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 뭐가.” “ 고민 있어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엎드려 있던 내 몸을 바짝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침대 한가운데로 번쩍 끌어 올려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평범한 자세로 만들었다. 복희씨는 확실히 다소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에 멍해졌다. ……전화 온 그 사람 때문일까. 살짝 일그러져 있는 복희씨의 얼굴에 조심히 손을 가져다 대려는데 그가 몸을 다소 우악스럽게 뒤집어엎었다. 그리고 바스락 거리며 풀던 분홍색 물건을 방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지며 내 허리를 민망할 정도로 높이 치켜 올렸다. 당황스럽다는 것보단 부끄러움이 앞섰다. “ 왜 이래요! 좀 놔요!" 복희씨의 단단한 배가 엉덩이 부근에 바짝 붙었다. 그는 짧게 숨을 토해내며 손가락으로 허리를 문질렀다. 그때까진 얼마나 아프겠어,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만이 새끼의 거대한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경원이 놈만 봐도 일주일에 한두 번만 했다고 아쉬워서 발광을 해대는 거 보면. 괜찮을 것이다. ……참을 만하겠지. 그랬던 단순한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 으-아!” 복희씨는 예고하나 없이 거칠게 내 안을 파고들었다. 순간 반사적으로 오므려지는 다리를 양손으로 잡고 벌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벌리며 그는 허리를 거칠게 몰아 붙였다. 교접되어 있던 부분이 빈틈없이 꽉 맞물렸다. 생각보다,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아팠다. 아프다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남자끼리 하는 건 원래 이렇게 아픈가. 즐겁지 않다! 쾌락을 느낄 수가 없어! 도대체 이딴 걸 좋아하는 사람은 제정신이란 말인가. 팔에 얼굴을 파묻고 필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복희씨는 잔혹하게 다리만 벌렸다. 이를 앙다물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덜덜 떨며 말했다. “ 너, 너무 아픈데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비좁은 몸 안에 받아들이기 버거워 자연스럽게 풀어져 나온 성기를 구겨 넣듯 강하게 몰아붙였다. 불에 달궈진 쇠꼬챙이가 내장을 푹푹 쑤시는 기분이었다. 그의 것을 삼키고 있는 은밀하게 부위가 미칠 듯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복희씨는 아파서 바동거리는 목덜미를 지그시 누르고 낮은 신음을 목안으로 삼켰을 뿐이다. “ 움, 움직이지 마세요!” 이번에도 복희씨는 대답을 아꼈다. 그러나 보란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비좁았던 내부가 그의 움직임에 찢어질 듯이 욱신거리며 힘없이 휘둘렸다. 그의 것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곳은 복희씨가 움직이는 대로 오므려지고 벌어지고를 기계처럼 반복했다. 복희씨가 말했던 ‘찢어질까.’ 하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섹스를 하는 걸까, 딴 생각을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 음성으로 복희씨가 말했다. “ 옆으로 비스듬히 서 봐라.” 어깨가 달달 떨렸고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복희씨는 내가 바보처럼 가만히 있자 못마땅한 말투로 ‘시발’ 이라고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비스듬히 돌려 세웠다. 밀접하게 교접되어 있던 부분이 미끈한 정액으로 저도 모르게 스륵 풀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그는 구부정한 종아리를 사정없이 걷어차 무릎을 꺾어 엎드리게 만들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내가 생각해왔던 건 이런 게 아니잖아. 멋대로 생각하고 특이한 사고방식의 유별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정도로 상대 기분을 배려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를 전혀 모르는 주제에, 복희씨의 어떤 면을 보고 좋아한다. 아니다, 혹은 그럴 것이다 하는 섣부른 감정을 나 스스로에게 합리화시켰단 말인가. 그러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동시에 하찮게 느껴졌다. 그는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 했던 불안감이 어느새 완벽한 사실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 순간 복희씨는 낮은 한숨을 끝으로 무자비할 정도로 폭력적인 남자로 돌변해 있었다. 허공에 붕하게 들려져 있던 내 발목을 꺾어 이미 그의 정액으로 번들거리는 입구에 침을 뱉었다. 엄지손가락으로 항문주변을 성의 없이 매만지며 반사적으로 조여드는 그곳에 손가락 두 개를 감정 없이 쑤셔 넣었다. 하늘이 샛노랗게 보인다는 것이 이럴까. “ 악!!!!” 처음보다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생경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으슬으슬 추웠고 반대로 열이 나는 느낌이었다. 섹스 한번으로 너덜너덜 해 질 수 있다면 내가 그랬다. 지금 내 기분이 그랬다. 복희씨는 여전히 말 한마디 없었다. 그가 나에게 보여주는 행위보다 그것이 더 끔찍하게 무섭게 다가왔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 나도 무슨 말을 해야 될지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와 나 사이에 대화는 어느새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그 틈에 복희씨의 세 번째 손가락이 들어왔다. 그의 성기로 충분히 벌어져 있던 안에 왜 어울리지 않는 수고스러움을 할까. 의문스러웠는데 그 궁금증은 쉽게 풀렸다. “ 으-악!!” 전초전이었나.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며 악을 지르자 그는 ‘조용히 해.’ 한마디로 사람의 기분이 어느 정도까지 처참해질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조금 전까지의 고통스러웠던 삽입은 그의 성기의 삼분의 일도 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찔끔찔끔 새어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복희씨는 네 번째 손가락을 구겨 넣고 안에서 밖으로 강하게 휘저었다. 그리고 발기해 팽팽할 정도로 부풀어 올라있던 성기를 뿌리 끝까지 쑤셔 박았다. 빽빽할 정도로 맞물려 있던 입구가 그의 것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기어코 찢어졌다. 복희씨는 상처에 벌어진 다리사이를 살피며 그 곳에 다시 한 번 침을 뱉었다. ……아, 이게 비참하다는 거구나. 나는 멍청하게 또 다시 그런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찢어진 살덩이가 복희씨가 움직일 때마다 후끈후끈 쓰려왔다. 피와 그의 침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을 항문에 검지하나를 끼워 넣으며 복희씨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시발.” “ 무서워요! 으-윽. 나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요? 더 하다간 죽을 거 같은데요.” “ 쉿!” 그는 벌어져 있던 항문 주위를 매만지다 찢어진 부위를 손톱으로 살짝 벌였다. 다음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피가 흐르는 게 나았다. 좀 더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피가 윤활제가 되어 그의 남성을 빨아들였다. 그러나 엉엉 우는 내 얼굴이 보기 싫었는지 복희씨가 베개로 얼굴을 덮었다. 나는 그게 더 서러워서 소리 내어 엉엉 울어댔다. 그러자 복희씨는 내 어깨를 잡고 팔에 체중을 실었다. 그리고 한 손을 허리사이에 끼고 몸을 살짝 들어 올리자 고환 끝까지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는 기형적으로 벌어져 있던 이미 왼쪽 까지 다리를 평평하게 벌렸다. 그의 성기로 가득 차있던 배 안이 더 답답해져왔다. 나는 숨을 토해내듯 기침을 해댔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단순히 그의 성난 남성만 엉덩이 사이에 품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의 정액이 배출될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처럼 말이다. 그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방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새싹입니다, 큰형님. 지금 나와 보셔야 될 거 같습니다. 급한 일입니다.” 무섭게 조용하던 복희씨가 새싹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복희씨는 엉망으로 변한 내 몸과 눈물자국에 흉해져 있을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보는 사람이 오히려 당황스럽도록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확 바뀐 그 표정이 너무 리얼해 보고 있던 내가 더 놀랐다. 하지만 그는 사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사과를 하면 복희씨는 복희씨가 아닐 것이다. 그는 내 얼굴에 파묻혀 있던 베개를 천천히 들어내 방바닥에 집어던지고 엉덩이 사이에 파묻혀 있던 성기를 거칠게 빼냈다. 주르륵 하는 더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의 정액이 엉덩이 사이사이와 허벅지로 쏟아져 내렸다. 복희씨는 스탠드에 놓인 티슈 몇 장을 뽑아들고 정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를 거칠게 닦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할까, 말까 하는 얼굴로 나에게 시선을 던지다 이내 고개를 돌려 침대에서 내려갔다. 나는 그때까지 성폭행 당한 소녀처럼 멍하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복희씨를 처음 만나고 나서 솔과 지만이 놈이 당부했던 말들과 레스토랑에서 뚱 돼지의 머리통을 와인 병으로 감정 없이 내리치던 복희씨의 얼굴. 크리스마스 시즌에 구세군 냄비 앞에서 ‘네가 날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군.’ 이라고 했던 그의 목소리까지.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기억과 혼 란스러움에 사로잡힌 채 멍해졌다. 복희씨가 벽에 걸어둔 양복을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갈아입고 도끼의 부름에 방문을 닫고 나갈 때 까지 엉덩이에 질금질금 베어 나오는 그의 정액과 비릿한 내 피 냄새를 맡으며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예기치 못한 전화벨 소리에 뚝 끊겼다. 나는 흐릿해진 정신으로도 열심히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복희씨가 집어던져 액정이 산산조각 난 핸드폰이었다. 다행인지 핸드폰 자체가 부러지진 않았던 것이다. 힘없이 기우뚱 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 엉기적엉기적 방바닥을 기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화상에 대인 것처럼 엉덩이와 항문 안이 쓰라렸다. 걸어오는 방바닥엔 흔적처럼 정액과 피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병신처럼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속으로 열심히 끅끅댔다. ……복희씨의 핸드폰이지 않은가. 혹시 바쁜 일이 생겼거나 중요한 일이 있을지 모르기에 받아두려는 얼토당토않은 마음이 초라해서 죽고 싶어졌다. 나는 분을 삭이듯 한참동안이나 울먹이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때려 울음소리를 잦아들게 만든 뒤에야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 여보 세…….” 「 복희씨 나에요. 우현이에요. 오늘은 내 말만 들어줘요.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했어. 그래도 우리 이건 아니잖아. 지금 그 녀석하고 같이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당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장난이 너무 심해요. 나한테 화나서 분풀이 할 상대가 필요했다면 좀 더 그럴 듯한 녀석을 만나요. 지금 그 놈은…… 」 나는 전화기를 들고 있던 손을 힘없이 놓았다. “ 나가! 나가란 말이야! 망할 놈들아!” 마구잡이로 집어던지는 베개를 유유히 피하며 세 놈들은 보란 듯이 방안을 점령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이 자식들한테는 씨도 안 먹히겠지, 제길! 이불을 턱밑까지 덮고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엉덩이에선 아직도 더러운 이물질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내렸다. 가만히 앉아 있기조차 너무 고통스러워 허벅지를 이리저리 뒤틀고 있는 꼴이 우스웠는지 녀석들이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 몰골이 얼마나 엉망인지 나도 알고 있으니까,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봐. 좀! 놈들은 평소와 어울리지도 않는 침묵을 내게 떠넘기며 방에 들어온 십 여분 동안 한마디도하지 않았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애써 시선을 피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드디어 무겁다 못해 차가워진 침묵을 깨부수며 피와 정액으로 흥건히 젖은 방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만 보고 있던 권솔이 중얼거렸다. “ 연애한번 하면서 더럽게 살벌하게 논다.” " 약 올리지 마, 나도 비참하니까. “ “ 말은 잘 하네. 그럼 하나만 묻자. 뭐가 비참하다는 거냐? 이 복희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강간당한 게?” “ 강간당한 거 아냐! 멋대로 말하지 마! 이 새끼야!!” 나조차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내가 죄 없는 솔이 새끼한테 화를 내는 거지. 그러자 참을 수 없는 죄책감에 몸이 떨렸다.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자 솔이 새끼의 눈에 분노가 담겨졌다. 당황한 얼굴로 방안 구석구석을 살피던 지만이 놈과 의외로 얌전히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휴지로 핏자국을 닦고 있던 경원이 놈의 눈도 나를 향해 있었다. 그 눈들 뭐냐, 부담스럽게 왜들 지랄이야. 그래서 내가 시선을 피했던 거라고! 나는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경원이 녀석의 옆에 놓인 티슈 각을 뻥 걷어차며 권솔이 내 앞에 쿵쾅대며 요란스럽게 다가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언의 압력으로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녀석의 분노에 살며시 꼬리를 내렸다. 놈은 비참한 내 기분을 지근지근 밟아대듯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 뭐 대단한 일 했다고 계집애처럼 이불은 부둥켜안고 지랄이야.” “ 내버려 두고 가. 나 잘 거야. 잠 와.” “ 누군 네가 걱정 되서 이러는 줄 아냐? 꼴값 떨지 마라.” “ 진짜 왜 그래! 갑자기 방에 들이닥쳐서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 화가 나니까 화를 내지! 왜 떫어?” “ 나 지금 너랑 싸울 기분 아니야! 제발 돌아가! 부탁이야.” 녀석은 내가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던 이불을 휙 걷어내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비웃음이 잔뜩 실린 입가를 실룩이다 결국은 할 말을 잃은 듯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 허벅지를 찢어죽일 듯 빤히 노려보며 놈은 말을 이었다. “ 애 낳았냐. 야, 이리 와서 이 새끼 엉덩이 좀 구경해봐.” ……역시나 본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베개 두 개를 가져와 엉덩이 부근을 열심히 가렸지만 권솔은 고깝게 웃으며 베개를 낚아채 보란 듯이 발로 뻥 걷어 차버렸다. 이 자식은 끝까지 날 도와주지 않을 작정인가, 망할 새끼. 엿이나 처먹어라. 그때 경원이 놈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 왜.” “ 피로 엉덩이를 제대로 절여났네. 이 경원, 빨리 와서 이 병신새끼 엉덩이 좀 닦아봐.” “ 가만히 내버려 둬, 안 그래도 비참한 놈 열 받게 만들지 말….” “ 너랑 놀아줄 기분 아니니까 좆도 까불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권솔. 네가 정녕 천하의 이 경원을 상대로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으나 웬일인지 경원이 년은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한번 올렸다 내린 것 외에 군말 없이 일어나 휴지를 돌돌 말아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내 몸을 닦아 줄 생각인가. 경원이 놈은 앞에 서있던 권솔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내고 어느새 내 앞에 섰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간 정말 녀석들 앞에 엉덩이를 까 내보여야 할 판이었다. “ 다들 제발 좀 나가. 혼자 있고 싶어.” 솔이 새끼가 대놓고 비웃었다. 녀석은 내 속을 있는 대로 긁어놔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 비린내 나는 방구석에 이 복희에 정액이나 끼고 퍽이나 혼자 있고 싶겠다.” “ 뭐?” “ 말이 그렇지 않냐. 얼마나 좋았으면 아, 강간이라도 환영이에요. 뭐, 그런 상황이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나왔다. “ 권솔. 네가 어떻게 나한테…….” “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데. 알면 좀 가르쳐 주라.” 말이 심하잖아, 이 나쁜 놈아. 너는, 너는, 너 하는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잖아, 권솔. 시발 놈! 비참함과 더불어 실망스러움까지 겹쳐졌다. 권솔은 복희씨에게 상식이하의 취급을 받은 나를 끝까지 한심스럽게만 바라보고 있었다. 힘들게 참고 있던 눈물샘이 터져버릴 듯 욱신거렸다.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학교에서 친구에게 맞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한테 일렀더니 고작 엄마가 한다는 소리하곤 잘 맞고 왔네, 하는 딱 그 수준이었다. 급기야 바보처럼 줄줄 새어나오는 눈물이 줄기가 되어 턱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머저리처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필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 네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이 복희씨 정액을 끼고 있던 다른 새끼 정액을 품던 네가 뭔데 이제 와서 참견이냐고! 넌 내가 그 사람 만날 때 신경도 안 썼잖아! 관심도 없었잖아! 안 그래? 그랬던 놈이 내가 이런 꼴로 앉아 있으니까 꼴사납냐?” ……왜 그랬을까. 나는 왜 녀석에게 화를 내는 걸까. 어쩌면 복희씨에게 쏟아내고 싶은 울분을 만만한 솔이 새끼에게 분노를 표출해 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을 무방비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녀석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서러운 감정에 터져 나오는 말은 쉽게 멈출 수 없었다. “ 신경 꺼라! 솔직히 나도 네가 이복신인가 하는 놈 하고 사귀든 말든 신경 안 쓰여!” “ 누구한테 뺨 맞고 와서 누구한테 지랄이냐!” “ 듣기 싫으면 꺼져! 그럼 되겠네. 누가 남에 방에 멋대로 오라고 했냐!” “ 좋은 말로 할 때 그 주둥이 닥쳐라.” “ 나한테 명령하지 마! 나한테, 나한테, 함부로 굴지 말란 말이야, 다들!” 숨죽이고 있던 눈물이 또 다시 터져 나왔다. 체면도, 나이도, 녀석들 앞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서러움에 복받쳐 지붕이 떠나가라 엉엉거리며 울어댔다. 옆에 앉아 있던 경원이 놈이 보다 못해 다가와 내 머리를 품에 안으며 등을 토닥토닥 때렸다. ……근데 얘도 참 웃긴 새끼란 말이야. 은근슬쩍 어울리지도 않게 착한 척은! “ 너도 가! 나도 필요 없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너희들 따위 친구도 아니야! 그러니까 날 제발 내버려둬!” 권솔의 눈이 황당함에 커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놈은 뭐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눈으로 구석지로 달려가 반쯤 정신이 나간 놈처럼 장롱 문짝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성난 공룡처럼 다가와 내 몸을 꽉 껴안고 있던 경원이 놈을 신경질적으로 떼며내며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 내버려 둬? 그게 진심이냐.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처럼 쉬워야지! 시발. 저 쪼다 같은 이경원만 아니었으면 보고만 있지도 않았다. 친구가 아니야? 너 참 말 쉽게 한다. 네가 그 새끼에 대해서 뭘 얼마나 대단하게 안다고 납죽납죽 잘만 엎드리다가 이제 와서 괜히 엄한 놈한테 화풀이냐! 아직도 좋냐? 좋다면 넌 진짜 완벽한 병신새끼고.” ……경원이 놈이 말하긴 뭘 말해. 주뼛주뼛 서있던 경원이 놈에게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솔이 놈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다 방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 너무 과하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라고. 정도가 지나치면 주제 넘는 거잖아. 뭐,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잖아” 조용히 있으면 있을수록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물로 뿌옇게 변한 흐리멍덩한 눈으로 녀석들을 번갈아 보며 이불을 끌어 얼굴을 반쯤 가렸다. 목소리는 여전이 수심아래 잠겨있는 것처럼 탁하게 흘러나왔다. “ 그럼 계속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제발 그래줘! 날 내버려 둬! 제발 좀!” 권솔이 못 봐주겠다는 듯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 병신 삽질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 내가 미쳤냐. 올해 들어본 말 중에 제일 웃긴 말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다 때려치워. 정신 차리라고 골 빠진 새끼야! 이 복희는 너랑 어울리는 놈이 아니야. 네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새끼도 아닐뿐더러….” 녀석은 잠시 말을 끊고 내 반응을 살폈다. 솔이 새끼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 그 새끼는 죽었다 깨어놔도 너 안 좋아해!” 나는 악에 바쳐 소리쳤다. “ 그럼 죽었다가 깨어나면 되잖아! 그럼 되잖아! 그…그럼 좋아할 수…도 있지.” “ 이제 보니 완전 돌았네.” “ 사람은 생명이 꼭 끊어져야지만 죽는 게 아니야. 죽었다가 깨어날 수도 있어. 간절히 바라면…바란다면….” “ 진짜 돌겠다.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라! 네가 지금 어줍지 않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접는 게 더 빠를 거다. 너를 위해 하는 소리야. 제발 새겨들어.” 권솔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는 갔지만 영원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 젓는 날 비웃으며 솔이 놈은 신경질적으로 화장대 서랍을 주먹을 내리찍었다. “ 네가 그 새끼를 알기나 하냐. 안다고 말하면 죽인다. 네가 알고 있는 그 빌어먹을 새끼는 수천 만 가지 그 놈 머릿속에 계산되어 있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 넌 몰라. 이 복희가 얼마나 악과 폭력에 길들여진 채 살아왔는지. 난 지금까지 그런 놈을 본 적이 없어. 그 새끼는 자신 외에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심과 배려가 없어. “ 아직도 쏟아내고 싶은 말이 남은 표정이었지만 녀석은 말을 끊고 방문에 기대어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만이 놈에게 시선을 틀었다. 턱을 까딱하는 뜻은 동의를 구하거나 말을 이으라는 표시였다. 지만이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녀석의 목소리는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았다. “ 내가 봤을 때 형님은 악의 결정체야.” 나 못지않게 경원이 놈의 눈도 커졌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권솔과 김 지만이 알고 있는 복희씨와 나와 녀석이 알고 있는 복희씨의 모습은 극히 단면적이었으니까. “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알고 있는 복희씨의 모습이 일부분이라면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도 일부일 수 있어. 그러니까 복희씨를 나쁘게만 말하지 마. “ 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웠지만 녀석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험담은 듣기 싫었다. 흑 아니면 백으로 단정 짓기엔 여전히 아리송한 감정이었다. 그러자 가슴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해졌다. 솔은 복희씨가 화장대에 놓아둔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 “ 내가 그 새끼 밑에 들어간 게 18살 때다. 그리고 버려질 때가 24살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6년 동안 개처럼 일한 셈이지. 써먹을 때 까지 다 써먹고 수배 망 걸리니까 그 새끼는 지만이 하고 나를 헌신짝처럼 잘도 갖다 버리더군. 밑에 있는 새끼 두 명만 붙여서 땜빵 시키면 짭새 놈들이 입 닥치고 가만히 있겠다다는데도 친절을 베풀어 입에 덥석 떠 넘겨주더군. “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놈이 히죽 웃어 보였다. 한때 경원이 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만이놈과 솔이 새끼는 지방에 큰 공사가 있다는 이유로 1년간 충남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1년은 아니었지만 그런 이유로 8, 9 개월 동안 녀석들 얼굴을 못 봤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와 관련이 있었던 걸까. 복희씨를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솔이 새끼 적개심어린 행동과 말투들이 그제야 비로소 이해가 갔다. 나못지 않게 경원이 녀석의 눈동자도 심하게 일렁거렸다. 녀석의 시선은 당연히 지만이 새끼를 향해 있었지만 지만이는 의외로 말을 아꼈다. “ 설마.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목소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불완전하고 힘이 없었다. 솔이 새끼가 비웃었다. “ 설마? 난 분명히 말했는데 네가 안 믿은 거다. 보고나서 후회하지나 마라.” 뭘? 도대체 뭘 보고나서 후회하지 말라는 거냐. 솔이 입에 물고 있던 담뱃불이 사그라지다가 밝게 빛났고 다시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때 지만이 놈이 방 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녀석의 눈과 얼굴이 평소에 비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상황에 따라선 큰 변화가 없는 표정만으로도 더 무서울 수 있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녀석은 수심아래 가라앉은 살벌한 눈동자로 솔이 놈을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 너, 설마 저 녀석 데려갈 생각이냐.” “ 그래.” “ 친구란 놈이 고작 한다는 게 그런 거냐. 더 이상 계진이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라.” “ 혼란? 아니. 나는 현실을 가르쳐 주려는 거다. 너나 까불지 마.” “ 나 농담하는 거 아니다. 삐딱하게 말하지 마라, 권솔. 너한테만 중요한 녀석 아니다. 경원이나 나에게도 지나치게 소중한 녀석이야.” “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냐.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운 건 없어. 난 그 엉켜있는 생각들에 종지부를 찍게 해주겠다는 거야. 말리지 마. 그리고 나한테만 중요한 놈 아니라고? 네가 아무리 소중하다고 생각해봤자 나보다는 아닐 거다. 네가 나만큼 저 새끼를 더 오랫동안 지켜봤냐? 더 잘 알아? 둘 다 아니잖아. 그럼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어. “ 지만이 새끼가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녀석은 지금 충분히 짜증스러운 상황인 거다. “ 넌 계진이 보고 유치하고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네가 더 유치한 거 알고는 있냐? 모르면 이 기회에 꼭 알아둬라. 넌 꼭 진지한 상황만 되면 편 가르려고 해. 그게 얼마나 짜증나는 줄 알아? 여기서 누가 더 친하고 덜 친하고 가 중요한 거냐.” 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 적어도 나한테는 중요해. 너희는 우리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 밖에 없으니까.” “ 그건 피해 의식 아니냐.” “ 좋은 대로 생각하고 편할 대로 놀려라. 다만 이거 하나는 새겨들어라. 너는 친구기 때문에 이성적일지 몰라도 나는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감성적이다.” ……무슨 말이지. 다행이 지만이 새끼가 의문을 표했다. “ 무슨 뜻이냐.” “ 말 그대로. 저 새끼랑 관련된 일이면 나는 감성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어느 누가 가족 중에 강간을 당한 걸 보고 이성을 찾을 수 있겠냐. 너는 계속 이성적이게 행동해. 나는 나대로 감정적이게 할 테니까.” 솔이 새끼의 말은 그럴 듯하면서도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부분이 있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지만이 새끼가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그러나 인상의 더 짙어진 걸 보면 확실히 열 받았다는 증거였다. 상대가 화났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정도로 무른 권솔도 아니었다. “ 너희랑 나는 출발점부터가 달라. 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가자고 하면 무조건 가는 거다. 그게 옳아. 친구 집에서 하루 자고 싶어도 엄마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되는 거랑 똑같은 거다. 너는 친구고 나는 엄마다. 이젠 무슨 뜻인지 알겠냐?” ……미친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기지도 않는다. 다만 진심으로 기가 막힐 뿐이었다. 평소엔 싫다고 으르렁거리던 놈들이 갑자기 누가 더 소중하네 마네, 낯간지러운 말만 하고 자빠졌다. 어떻게 하면 더 자연스럽게 등골을 빼먹을 까, 어떤 식으로 해야 뒤통수를 치고도 들통 나지 않을까 그 생각만으로 머릿속에 가득했던 녀석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다 늦게 이제 와서 은근슬쩍 착한 척을 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상황도 잊고 한 마디 해줄까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놈들은 아직도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지 서로 지그시 노려보며 여차하면 서로에게 달려들 기세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싸움을 말린 건 의외로 조용하게 있던 경원이 새끼였다. 녀석은 지만이 놈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뜨거운 물 좀 데워 오라고 명령했다. 녀석은 마지못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지만이 새끼가 밖으로 나가자 방안은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자칫 잘못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누군가 하나는 튕겨져 나갈 미세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끈이 답답해졌다. 그나마 지만이 새끼가 빨리 돌아와 다행이었다. 놈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나는 철 세숫대야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건은 목어 걸고 있는 상태였다. 억지로 시선을 피하고 있던 녀석들이 놈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만이 녀석은 어색한 분위기를 살리려 억지로 환하게 웃으면서 세숫대야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 애 하나 키우는 기분이다.” 성격이 좋은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쟤네 둘은 상종하기도 싫구나. 권솔은 퍼뜩 일어나 지만이 놈의 목에 감겨있던 수건을 억지로 풀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때 앉아 있던 경원이 놈도 덩달아 일어났다. 녀석은 솔이 새끼가 했던 것처럼 놈의 목에 감겨 있던 수건을 억지로 풀며 ‘내가 할게.’하고 말했다. 뭘 자기들이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권솔의 알아들은 모양이다. 녀석의 눈꺼풀이 새치름하게 가늘어 졌다. 이 경원은 못 본 척 돌아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갑자기 등과 허벅지 사이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화들짝 놀라 녀석의 손을 내리쳤다. 당연히 화를 낼 줄 알았던 놈이 다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얼굴만 예뻤지 하는 짓은 남자다움을 뛰어넘어 다소 과격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표정변화 없이 나를 방바닥에서 들어올렸다. 역시 사람은 생긴 것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법이다. 벌어져 있던 항문 안에서 아직 다 빠져나오지 못한 복희씨의 정액이 허벅지와 방바닥에 조르륵 흘렀다. 찐득찐득한 액체는 물처럼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들었을 녀석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못들은 척 했다. 고마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비참하기도 했다. 경원이 놈은 나를 침대위에 내려놓았다. 녀석이 펄럭이는 파란수건을 펼쳤다. 맨 밑에 햇빛 목욕탕이라고 써진걸 봐선 목욕탕 갔을 때 훔쳐온 게 분명했다. 녀석은 마른수건을 뜨거운 물에 푹 담가 양 끝을 짜낸 뒤 배와 무릎을 닦아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말라 있던 정액자국과 피는 쉽게 닦이지 않아 한참을 문질러 비벼댄 끝에야 조금씩 사라져갔다. 의외로 정성스럽게 날 닦아주는 경원이 놈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미안.” “ 그런 말 하지 마. 기분 엿 같아지니까.” 녀석이 갑자기 수건을 한 쪽으로 팽개치고 고개를 들었다. “ 남자가 남자를 좋아해도 최소한 지켜야 할선이 있어. 그건 자존심이야. 그 선을 넘지 마.” 이경원은 두 놈이 보지 못하게 몸을 틀어 내 얼굴과 상체를 가려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무뚝뚝하게 발목을 살짝 벌리더니 손가락으로 흉터가 남은 허벅지 연한 부분을 뽀득뽀득 문질렀다. 뜨거운 물에 닿은 핏자국에 비린 냄새가 풍겼다.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경원이 우렁차게 말했다. “ 시발, 이 새끼 때 좀 봐. 목욕 좀 해라!!” 나는 당황에서 소리쳤다. “ 뭐가! 뭐가! 저번 달에 목욕탕 갔다 왔어! 나 깨끗해!” 솔이 새끼가 그런 나를 한심하게 보며 한 마디만 툭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 이 경원. 다 닦았으면 저 새끼 옷 입혀. 밖에 아직도 추우니까 두툼한 잠바로 입혀서 데리고 나와.” 대경물산.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라, 싫다, 안 나오면 죽인다, 너나 죽어라 하는 우여곡절 끝에 택시가 멈춰선 곳은 허름하고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이 아슬아슬한 건물 앞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지만이가 기사아저씨에게 돈을 지불하는 사이 나는 솔과 경원이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부축할 정도로 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운 동네, 사람하나 다니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골목. 컹컹거리며 정신 사납게 짖어대는 개소리만 여기저기서 울려댔다.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일었다. 경원이 놈도 마찬가지였는지 사나운 눈으로 주위를 훑어본다. 김 지만과 권솔 새끼만이 익숙한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나는 아직도 팔을 붙잡고 있는 솔의 어깨를 가볍게 툭 밀쳐냈다. “ 여긴 어디야?” “ 너희 이 복희씨가 불법을 저지르면서 돈을 긁어모으는 곳.” 나는 녀석의 대답대신 건물 입구에 세워진 개인택시를 보고나서야 복희씨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뒤늦게 실감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와버렸다. 나는 이 새벽에 뭘 더 확인해보겠다고 여기까지 쫒아 왔을까. 가슴이 철렁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나저나 복희씨는 아직도 택시운전을 하고 있었구나. “ 돌아가자. 그 사람은 우리가 지금 이러는 거 되게 웃기다고 생각할거야. 내 생각이 짧았어. 그냥 돌아가.” 녀석들은 나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건물 문 앞에 다다라 있던 놈들이 내 말에 몸을 돌렸다. 솔이 새끼가 짜증난다는 얼굴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지만이 새끼가 녀석을 막아서고 자신이 직접 되돌아 왔다. “ 만나라는 건 아니야. 그냥 보기만 해. 들어가 보면 무슨 말인지 알거야.” “ 하지만.” “ 정 내키지 않으면 돌아가도 되고.” ……돌아간다고 하자. 그래, 하지만 조금은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복희씨의 모습들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정하고 않으려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지금이 아니면 확인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권솔 말대로 그가 포장된 모습중 하나를 꺼내 내게 거짓된 자신을 보여준 거라면 포장되지 않는 복희씨의 속을 알고 싶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만이 놈은 단번에 그 뜻을 알아차린 듯 했다. 놈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축 처진 내 어깨를 천천히 두드렸다. 그 리고 멀뚱히 서있던 솔과 경원이 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녀석의 뒤를 따랐다. 솔은 걸어오는 나와 지만이 놈을 확인하고 후드주머니에서 오래된 열쇠하나를 꺼냈다. 열쇠까지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놈은 확실히 이곳이 처음이 아닌 것이다. 녀석은 구멍 입구에 맞춰 열쇠를 끼워 넣으며 오른쪽으로 가볍게 돌렸다. 딸깍 소리가 나고 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을 까딱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의 뒤를 경원이 놈이 또 다음엔 지만이 새끼와 내가 차례대로 들어섰다. 밖에서 보는 것 보다 건물 안은 더 엉망이었다. 건물이 크게 무너져 보수공사를 한티가 열실이 드러났다. 위층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벽 구석구석이 허물어지고 깨지고 부서져 있었다. 실내에서는 퀴퀴한 시멘트 냄새와 나무 썩는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건물에 처음 들어 왔을 때부터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하게 퍼져 있는 정체불명의 비린 냄새까지. 극심한 악취에 관자놀이 부근이 욱신욱신했다. 기역자 모양으로 꺾인 건물 안은 밤이 아니어도 실내 자체에 빛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음침했다. 처음 온 사람은 물론이고 몇 번 와본 사람도 쉽게 길을 찾기가 곤란하게 뒤엉켜 있는 건물구조에 나는 벌써부터 기가 질렸다. 확실히 이상했다. 걸을 때마다 운동화 끝에 체이는 동강난 벽돌에 기어코 넘어진 경원이 놈이 성질을 부렸다. “ 시발, 여기서 무슨 미로 놀이 하냐! 건물이 왜 이렇게 제 멋대로야.” 녀석의 고함소리에 지만이와 솔이 놈에게 동시에 ‘쉿, 조용히 해!’ 하는 말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실내 덕분에 깜빡이는 눈동자조차 잘 보이지 않던 허공에 순간 솔이 새끼의 손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재빨리 경원이 놈의 주둥이를 억지로 틀어막았다.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묘하게 열이 띠었다. “ 송장되기 싫으면 그 입 다물어. 이제부터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마. 들키며 다 죽는 거다!” 솔이 녀석의 목소리는 필사적인 구석이 있었다. 옆에 있던 지만이 새끼가 경원이 놈의 몸을 살짝 틀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경원이 놈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멈춰있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기다시피 살금살금 걸어가 기역자 모양으로 꺾인 모서리 부근을 돌았다. 코너를 하나 더 꺾자 어둡던 실내에 뿌연 불빛이 반짝였다. 건물과 건물의 사이를 가르는 벽 전체가 무너져 내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자세히 보였다. 권솔과 김 지만은 짠 듯이 불쑥 기둥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말아 경원이 놈과 내게도 따라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엉겁결에 녀석들을 따라 몸을 최대한 가렸다. 누가 우리 꼴을 본다면 말이 아닐 것이다. 숨죽여 다닥다닥 붙어 있는 꼴이 고양이 앞에 쥐새끼 같겠지. 나는 최대한 숨을 들이 마시고 앞에 앉아 있던 솔이 새끼 귓가에 속삭였다. “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 보면 알아. 눈 똑바로 뜨고 잘 봐둬. 그리고 제발 정신 차려라.”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려 무너진 벽 너머 모여 있는 검은 양복 무리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림잡아 30명에서 40명이 조금 안 되는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때 둥그런 원을 만들듯 서있는 조폭들 사이에 익숙한 새싹과 쌍칼의 얼굴이 보였다. 그나마 아는 놈들이라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에 보여줬던 장난기어린 표정이 아닌 딱딱하게 굳어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매우 낯설게 다가왔다. 추리닝에서 어느새 양복으로 갈아입고 검은 무리들 틈에 섞여있는 그들의 모습은 뉴스에나 나올법한 조직폭력배들과 조금의 차이점이 없었다. 새싹과 시선을 교환하던 쌍칼이 느릿하게 움직여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창문이 절반이상이 깨져 문틈사이로 거센 겨울바람 들어오고 있었다. 조용했던 건물 안에 느닷없이 바람소리만 맴돌았다. 나와 녀석들이 있는 반대편에선 뒷모습만 보이던 남자가 쌍칼이 걸음을 멈추자 몸을 돌렸다. 복희씨였다. 쌍칼은 그에게 새삼스레 깍듯이 인사했다. “ 형님.” 단순히 뛰고 있던 심장에 갑자기 불이 붙은 기분이 들었다. 화끈거렸다. 복희씨는 이미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창틀 사이에 비벼 꺼뜨리고 부동의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조폭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에서의 얼굴 그대로다. 달라진 건 없었다. 아주 조금 더 신경질 적으로 변한 것은 제외한다면. 복희씨는 새싹이 내미는 서류를 낚아채 건성으로 휙휙 넘기며 사납게 말했다. “ 그래서 박 태열을 놓쳤다고?” “ 죄송합니다. 형님. 내일은 기필코….” “ 우리가 언제부터 내일 생각하면서 살았냐. 엎드려라.” 새싹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서류더미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고 쌍칼에게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복희씨의 손짓하나에도 쌍칼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먹고 새싹 못지않게 안색이 파리해졌다. 쌍칼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쪽문이 떨어져 나간 장롱에서 긴 나무막대기 하나를 가져와 복희씨 앞으로 내밀었다. 그제야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던 복희씨의 고개가 들렸다. 그는 쌍칼이 내민 나무막대와 녀석을 건성으로 한번 씩 훑어보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지금 날 놀리는 거냐.” 그때 갑자기 복희씨가 나무막대기를 빼앗아 쌍칼의 뒤통수를 거칠게 후려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쌍칼의 무릎이 허망하게 꺾였다. 고통스럽게 감싸는 팔 사이로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내렸다. 복희씨가 입고 있던 추리닝 상의에도 녀석의 붉은 피가 빠르게 번져갔다. 그는 피 묻은 각목을 바닥에 툭툭 쳤다. 그리고 누워있는 쌍칼의 복부에 모서리가 맞닿게 집어 던졌다. 꿈틀꿈틀 미동을 보이던 쌍칼의 팔이 축 늘어졌다. 그러나 복희씨의 행동에 누구하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고 나서서 쌍칼을 도우려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자주 보아왔던 일처럼 지극히 무덤덤했다. 폭력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겐 동정심과 연민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복희씨는 쌍칼의 다리를 뾰족한 구두 뒤꿈치로 으스러지게 밟아댔다. 그것도 잠시 장롱 앞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무언가를 찾더니 쇠파이프를 꺼내들었다. 담배 연기로 뿌옇게 변한 형광등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권솔. 네가 보여주려는 이 복희씨의 모습이 이런 거라면 미안하지만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 엎드려.” 되돌아오던 복희씨가 말했다. 새싹은 군말 없이 바닥에 엎드려 자세를 취했다. 복희씨는 새싹에게서 고개를 돌려 들고 있던 쇠파이프 끝으로 쌍칼을 가리켰다. “ 상식아, 저 새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아직은 필요한 놈이니까.” 복희씨가 서있던 우측에서 제일 가장자리에 있던 남자가 나왔다. “ 네, 알겠습니다.” …아직은 필요한 놈이니까 복희씨의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솔이 녀석이 방에서 했던 말과 조금 겹쳐지는 부분이었다. ‘개처럼 일했어, 개처럼 일했어.’ 녀석이 거짓말을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곧이어 울려 퍼지는 괴기스러운 고함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 잘못했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새싹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복희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추리닝 지퍼를 살짝 내리며 뜸을 들였다. 그의 얼굴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하게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는 이번엔 나른한 얼굴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였다. 복희씨는 책상에 걸쳐 놓은 쇠파이프를 가볍게 들어 올려 새싹 앞에 섰다. “ 3일을 주겠다.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박 태열을 잡아와.” 새싹은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놈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피곤에 젖은 미소를 거두며 쇠파이프를 허공에 치켜 올렸다. 퍼-억! 복희씨는 새싹의 허벅지를 인정사정없이 내리찍기 시작했다. 쳤다는 말은 어쩐지 느슨했다. 으윽! 하는 짧은 신음소리를 힘겹게 내뱉으며 새싹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복희씨는 여전히 감정 없는 눈으로 녀석의 허벅지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 누워서 맞으면 뼈 부러진다. 다리를 세워라.” 그의 명령에 새싹은 겨우 일어나 다시 엎드려보았지만 복희씨의 이어지는 구타에 또 다시 중심을 못 잡고 흐트러졌다. 그러나 복희씨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 엎드려라.” 바닥을 짚고 있는 녀석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마에 흐르는 땀이 손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매우 고통스러운 얼굴이다. 복희씨는 녀석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안 보이는 걸까.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계적으로 녀석을 때린다는 사실에만 급급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쇠파이프가 허공에 들림과 동시에 무자비한 폭력이 또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새싹이 강한 철제에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자 복희씨는 녀석의 허벅지와 허리, 엉덩이 부근을 구둣발로 사정없이 밟았다. 귓불과 코에서 기어코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복희씨는 조금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핏줄이 터졌는지 새싹의 회색 정장바지가 빨갛게 물들어갔다. 복희씨는 바닥에 나동 그러진 쇠파이프를 다시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새싹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며 입 꼬리를 올렸다. 그는 핏물에 젖은 쇠파이프를 추리닝 바지에 쓱 문지르자마자 녀석의 턱을 거침없이 쳐올렸다. 새싹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진 듯 했다. 복희씨의 말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 엎드려.” 복희씨는 한참동안 아등바등 거리는 새싹이 일어날 수 있게 잠시 기다렸다. 녀석은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질질 끌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엉성할 만큼 기묘한 폼이었지만 언뜻 보면 엎드린 자세처럼 보이기도 했다. 복희씨가 픽 웃으며 칭찬하듯 새싹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쓰다듬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두 번째 줄에 서있던 녀석 중에 하나가 달려와 즉각 담뱃불을 붙여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 잘했다.” 그 말을 끝으로 복희씨는 새싹의 온 몸을 집요 하리 만큼 처절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뒤에도 복희씨는 ‘일어나’ ‘엎드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고 그때마다 새싹은 힘겹게 일어나 복희씨의 주먹에 얻어맞고 또 다시 쓰러지길 되풀이했다. 결국 새싹은 시체처럼 쓰러져 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복희씨는 쌍칼에게 했던 것처럼 한 녀석을 불러 ‘병원에 데려가.’ 라고 말로 새싹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는 땀에 젖은 추리닝 깃을 누이고 소매를 더 걷어 올렸다. 나는 그 모습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동안 그를 상상했던 모습과 또 다른 충격이 나를 덮쳐왔다. 혼란스러움에 몸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그에 대한 무서움에 손이 달달 떨렸다. 솔이 새끼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그는 여기서 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원이 놈과 지만이 녀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녀석들도 잠시 말을 잃은 듯 했다. 나는 솔이 새끼에 등에 머리를 파묻으며 기대었다. 녀석에게 힘을 쏟자 그런대로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 다 봤어. 네가 말하는 복희씨 모습이 이런 거라면 다 봤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 기다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야. 일러도 아직 한참 일러.” 아르다고? 도대체 뭐가. 따지듯 한 마디 하려는데 솔이 놈이 턱짓으로 건물 안을 가리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복희씨를 바라봤다. 왜 이제야 봤을까. 까만 까마귀 때처럼 조폭 새끼들이 만들어 낸 원안에 중년남자 한명과 이십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젊은 남자가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저 사람들은 또 뭘까. 복희씨는 새싹의 몸에 흘러나온 피로 촉촉이 젖은 바닥을 구두 끝으로 문지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날 물어다 주고 아주 재밌게 사셨나 보네. 얼굴이 몰라보게 팽팽해졌어.” 복희씨의 빈정거림에 중년 사내가 사시나무 떨듯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손을 비비며 애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아, 아니, 이 사장! 무슨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구먼. 내가 아닐세! 난 절대 아니야.” “ 오해? 퍽이나 귀여운 말이네.” “ 나는 태열이네 식구는 하나도 안 쓰는 거 잘 알잖아! 내가 얼마나 자네를 믿고 있는데!” 복희씨가 빙그레 웃으며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중년남자는 복희씨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자 한시름 놓인 듯 고개를 숙이고 들키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 자네가 이렇게 건강하게 다시 나왔으니 내일부터 태열이네 하고는 거래를 끊겠네!”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복희씨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그러자 중년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 하하, 미, 미안하네. 내가 나이가 먹어서 오락가락 하나 봐. 자네가 이해해주게.” 복희씨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본능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건 느낌이었다. 복희씨는 책상 첫 번째 서랍을 뒤적였다. 그리고 얇은 주사기 하나와 진득진득한 액체가 담긴 손마디 크기에 유리병을 꺼냈다. 그는 한 손에 주사기와 유리병을 들고 중년 남자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와 한 쪽 다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주사기와 유리병, 복희씨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속을 알 수가 없다. 복희씨는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변명이나 애원 한 마디 없던 젊은 남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희씨가 사내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감아 땅바닥에 내리 찍었다. 이마 부근에서 빡 하는 뼈 소리가 들렸다. 복희씨는 신경질적으로 사내의 머리채를 다시 들어 올렸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어지간히 기구한 새끼네. 애초에 도망갈 생각이었으면 잘 좀 해보던가. 병신처럼 왜 붙잡혀서 험한 꼴을 당하나.” 턱 끝에 뚝뚝 떨어지는 피를 한 손으로 닦으며 사내는 입 꼬리를 올렸다. “ 결국엔 잡힐 거 처음부터 힘 빼고 싶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오해 마십시오.” “ 오늘로서 세 번째 보는 건가. 태열이 밑에서 썩히기엔 참 아깝단 말이야. 이봐,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사내가 대놓고 비웃었다. “ 차라리 당신 개가 되라고 하십시오.” “ 내가 바라는 바가 바로 그거다.” “ 절 죽인 뒤에나 그렇게 될 겁니다.” “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방법이네.” 복희씨는 성의 없이 말하고 젊은 남자에게서 중년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들고 있던 주사기와 유리병으로 잠시 시선을 미끄러뜨리며 픽 웃었다. 그리고 병뚜껑을 열고 주사 바늘을 꽂아 넣은 뒤 안에 있는 내용물을 절반 쯤 채웠나갔다. 복희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 자랑스러운 너희 형님을 내 손안에 넣을 때까진 살려두겠다.” “ 제가 고맙다고 해야 됩니까?” “ 그건 내가 해야 될 말이 아닐까 싶은데.” 복희씨는 꼬꾸라져 있는 사내의 머리통을 발로 지근 밟으며 감정 없이 읊조렸다. “ 너는 결국 내 밑에 있게 될 거다. 물론 박 태열을 잡기 전까지만.” 남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 비열한 새끼! 당신과 태열이 형님의 차이점이 뭔 줄 압니까? 당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건 기본적인 도덕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적어도 태열이 형님은 자신보다 우리를 생각합니다. 우리를 식구로 받아들여 줍니다. 당신처럼 한번 쓰고 버릴 도구로 대하진 않을 겁니다. 그와 당신은 같은 주먹질을 해도 그 쓰임에 있어 차원이 다릅니다. 당신에겐 인격이 없습니다. 태열이 형님은 주먹질 위에 사람을 둡니다. 그게 형님이 당신과 다르다는 이유…으-악! “ …떠나갈듯 한 고함소리. 오히려 악을 지르고 싶은 건 나였다. 뒤틀려 버린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먹은 게 없기에 나온 건 아무것도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깨가 벌벌 떨렸다. 복희씨의 손에 들린 담배가 젊은 남자의 눈에 반쯤 꽂혀 들어갔다. 사내는 손으로 눈을 감싸며 고통스러움에 발버둥을 쳤다. 그는 결국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져 헛구역질을 해댔다. 복희씨는 그런 사내를 보며 심술궂게 웃었다. “ 미안하다. 쓰레기통이 너무 멀어서 그랬다.” 익숙한 말이었다.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갔을 때 웨이터에게도 그런 말을 했었지. 그때는 마냥 엉뚱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 형신아.” 첫 번째 줄에 가장 키 작은 남자가 걸어 나오며 복희씨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 병원에 데려갈 필요 없다. 치료하지 마. 그냥 흉터로 남게 내버려 둬.” “ 네, 형님. 알겠습니다.” “ 박 태열이 연락해 올 때까진 절대적으로 유용한 놈이니까 놓치지 마라. 애들 두어 명 붙여서 잘 감시해.” “ 네, 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복희씨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재밌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그의 표정이다. “ 말 안 들으면 알아서들 해라. 생각해서 한쪽 눈은 남겨뒀으니까.” 키 작은 사내가 이를 드러내고 히죽히죽 웃었다. “ 여부가 있겠습니다.” 그 사이 젊은 남자는 눈알에 꽂힌 담배를 겨우 빼내었다. 대단한 의지였다. 피가 흐르는 눈도 개의치 않고 입고 있던 남방소매를 북 찢어 상처 난 눈과 머리를 빈틈없이 감싸는 모습에 나는 거의 넋을 잃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복희씨가 들고 있던 빈 유리병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박수를 쳤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는 남자에게 어떤 식으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자존심이 상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다. 나에겐 그 모습조차 낯설게만 느껴졌다. 키 작은 사내의 지시에 두 번째 줄에 서있던 거구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단순한 줄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서열과도 비슷한 순서였나. 거구의 사내는 젊은 남자의 복부를 거칠게 걷어 차 일시적으로 기절을 시킨 뒤 어깨에 들쳐 멨다. 복희씨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그는 깍듯하게 인사를 마치고 창문 옆에 이어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복희씨가 기지개를 폈다. 조금은 졸린 눈이다. 복희씨는 상황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은 나른한 표정으로 출렁이는 액으로 가득 찬 주사기를 이리저리 살폈다. “ 한 놈은 처리했고.” 복희씨의 눈이 중년남자에게 향해 돌아갔다. 중년남자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가다듬고 자존심도 체면도 다 내팽개친 채 눈물을 질질 흘렸다. “ 이 사장! 한 번만 봐주게! 난 처자식이 있는 몸일세!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아들놈이 둘이야! 제발, 제발 이번 한번만 넘어가 주면 내 다시는 자네를 배신하는 일 따위는 하지도 않을 걸세! 안, 안 되겠나. “ “ 처자식에 그것도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아들이 둘이라.” 복희씨는 중년 남자 앞으로 다가와 감정 없이 말을 이었다. “ 오래 사셔야 되겠습니다.” “ 그, 그렇다네! 내가 없으면 마누라랑 자식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게 분명해!!” “ 그러게 말입니다.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오래 사셔야지요.” “ 정말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이 사장? 자, 자넬 너무 몰라 봤어.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복희씨는 들고 있던 주사기를 허공에 한 두 방울 떨어뜨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공포에서 안심하는 눈빛으로 변한 중년남자를 보며 복희씨가 나지막이 말했다. “ 나이가 들면 다른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 중요한 법이지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 무, 무무슨!” “ 제가 김 사장님의 두 아들을 생각해서 오래사시라는 차원에 특별히 영양제를 하나 준비했는데 어찌 생각이 있으십니까.” 순식간에 중년남자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복희씨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생각인가요. 조금 전 그 남자처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나는 솔이 놈 등에 얼굴을 파묻고 불안하게 복희씨의 다음 행동을 조심히 지켜보았다. 말릴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복희씨는 들고 있던 주사바늘을 중년남자 목덜미에 거칠게 꽂아 넣고 안에 있던 내용물을 주입시켰다. 진짜 영양제 일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약물이 채 반도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벌벌 떠는 남자의 행동에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챘다. 복희씨는 아직 반이 남은 약물에 주사바늘을 느릿하게 누르며 입을 열었다. “ 테트로도톡신입니다. 일명 복어 독이지요.” 그는 주사바늘을 빼내고 바닥에 집어던졌다. 복희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한 마리 복어에서 빼낸 독에 서른 명을 죽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혹시 몰라 넉넉하게 두 마리에서 빼냈으니 희망 따위는 버리십시오. 어차피 볼 장 다본 인생 아니었습니까. “ 복희씨는 입에 흰 거품을 물며 사지를 비비 꼬는 중년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저런 모습이 내가 모르는 복희씨의 모습이라는 거야. 네가 바라는 것이 내가 복희씨에게 가지고 있던 강함의 동경이었다면 성공했다, 권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저런 식으로 쓰는 건 진정 강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유와 변명에도 불구하고 살인과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어. 뭐, 하긴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어. 내가 그를 얼마나 안다고 같잖게 좋아한다,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자. 집에 가고 싶다.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왜 이렇게 서러운 마음이 드는 거야, 왜, 왜! 녀석들에게 울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앞으로 걸어갔다. 버티고 있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장이 떨렸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 때, 비명소리에 가까운 찌르르한 고함소리에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 복희씨, 이젠 그만해요. 재미없잖아.” …이 목소리는.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다. 분명히 전화 속에 그 목소리다. 확실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세 놈들이 모두 다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녀석들이 나에게 바라는 게 뭔지 알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솔이 녀석 어깨를 발판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장미군의 얼굴을 찍어놓은 것처럼 똑같은 얼굴. 화장이나 가발 같은 요란스러운 치장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장미 놈이라고 해도 믿겠다. 남자치곤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고 야리야리한 놈이었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와 대조적인 검은 머리카락에 큰 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고 또 예뻤다. 복희씨의 취향은 저렇게 예쁜 사람일까. 장우현은 복희씨 등에 기대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무슨 말인지 전혀 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덜컥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눈 꼬리를 사납게 벌리고 눈두덩을 꼭꼭 눌렀다. 속눈썹 사이로 복희씨가 환하게 웃으며 장우현의 작은 머리를 품에 안고 장난을 쳤다. 놈은 복희씨의 팔을 억지로 풀며 까르르 웃어댔다. 사내새끼 주제에 까르르 라니 졸라 재수 없었다. 하지만 희한한 웃음마저도 잘 어울리는 놈이었다. 나는 절망했다. 솔과 지만이 놈, 급기야 경원이 자식까지 흔한 위로나 집에 가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돌아서서 이젠 집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꼭 확인해 보고 싶다. 그러자 갑자기 무서운 용기가 솟아났다. 나는 녀석들이 말릴 틈도 없이 벽돌 사이를 뛰어넘어 복희씨와 장 우현 개놈이 있는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다다다 하는 소리에 놀란 조폭 놈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졌다. 몇 십 명이나 되는 사내들의 시선을 오롯이 받고 있자니 죽을 만큼 쪽팔렸다. 그들은 나를 외부의 스파이쯤으로 여기며 복희씨와 장 우현을 보호하듯 가로막고 섰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눈을 꽉 감고 복희씨를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 복희씨! 복희씨! 나와 보세요!” 어딜 나와 보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저 검은 무리들 사이를 뚫고 그가 나를 봐야한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다르게 모습을 들어 낸 사람은 장 우현이었다. 멀리서 봐서 몰랐지만 장미 놈과는 미묘하게 느낌이 다른 녀석이었다. 장미 놈이 어린애 같다면 이놈은 은근히 남자답다. 그러나 쌍둥이는 쌍둥이다. 얼굴 하나는 붕어빵처럼 닮아 있었다. “ 복희씨와 동거를 한다는 녀석이 너야?” 얼굴은 다르지만 버르장머리 없는 성격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 복희씨는요! 당신 말고, 그 사람 좀 나와 보라고 하세요!” “ 그 사람이 나고 내가 그 사람이다.” 매우 자신 있어 하는 말투다. 오랜 시간동안을 연인으로 함께 보냈으니 당연한 거겠지. 그렇다면 두 사람은 계속 만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지금?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나도 모르겠어. 젠장!! “ 난 복희씨 얼굴보고 할 말이 있어요! 당신 따위가 아니에요!” 장우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서글서글한 표정의 가면이 휙 벗겨져 나갔다. 놈은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다. “ 건들지 마. 지금까지도 충분히 재밌었지 않아? 네 신분을 망각하지 마. 애송이 새끼야.” “ 내 신분? 내 신분이라고? 내 신분이 어때서요?” “ 네가 덜 잘 알잖아. 그렇게 주제 파악이 안 되냐.” “ 몰라서 묻는 겁니다. 이 시발 놈아!” 마지막은 욱해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장 우현은 조폭들 사이에 파묻혀 서있던 복희씨를 힐끔 돌아보더니 갑자기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꽤 아프게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저게 갑자기 미쳤나. 운동화 자국에 장우현의 뺨이 빠른 속도로 달아올랐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진짜 뺨을 맞은 것처럼 선명해졌다. 갑자기 왜 이래요…,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장우현은 날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뺨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울먹였다. “ 난 그냥 복희씨를 사랑한다고 한 것 밖에 없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미친놈아. 너야 말로 정말 왜이래! 울고 싶은 건 나였다. 장 우현이 급기야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놈은 구원의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녀석의 생 쇼를 보지 못한 조폭 놈들의 얼굴엔 나를 향한 살기가, 장우현의 말도 안 되는 개지랄을 지켜보고 있던 놈들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고개를 돌려 친구란 이름의 세 놈을 보았다. 녀석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단순한 황당함을 떠나 장 우현을 향한 살기가 두 눈에 가득 번져 있었다. 그나마 이럴 때 써먹는 친구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당당히 고개를 돌렸을 땐, 복희씨가 조폭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장 우현 앞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몰랐다. 복희씨가 보이는 그대로만 믿고 내가 장 우현을 정말로 때렸을 거란 생각을 할 줄은……. 그건 복희씨에 대한 보잘것없는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내 희망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복희씨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다. 그는 꺼이꺼이 울고 있는 장 우현의 겨드랑이 양쪽에 손을 집어넣어 가볍게 안아 올렸다. 생 연기를 펼치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매우 부드러워 보였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장미 놈이 울고 있을 때, 복희씨의 행동.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복희씨가 장우현과 장미를 구분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우현아. 울지 마라.” 아니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나는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초라하게 서있는 나를 훑어보는 복희씨의 눈이 사늘하게 식어 있었다. ……한마디만 해주세요. 제발 미안했다고 용서하라는 한마디만 해주세요. 그럼 나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갈 겁니다. 퍼-억! 나는 그때까지 내가 맞았단 사실도 모르고 병신처럼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복희씨의 손이 지나간 뺨이 욱신거렸다. 볼이 후들 후들댔다. 감각이 없던 뺨이 화끈거리며 빠르게 달아올랐다. …복희씨가 나를 때리다니. 나를, 나를. 그가 나를 때렸다는 사실보다 때린 이유가 고작 장 우현이란 사실에 나는 비참해졌다. “ 네가 함부로 때릴 수 있을 만큼 하찮은 사람 아니다.” “ 그럼 나는 하찮은 사람이란 말이군요.” 나는 눈물로 어른어른 해진 눈으로 그를 열심히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이 내겐 고통스럽게 가라앉은 걸로 보였다. “ 복희씨에게 뭔가요? 어떤 존잰가요. 저 녀석 말이에요. 나를 때리고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게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인가요?” 나는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복희씨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질문한 내가 오히려 민망해지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간단히 대답했다. “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다.” “ 그럼 나는요! 난 당신한테 뭔데요! 나, 나는!” 복희씨는 미련 없이 장 우현에게 몸을 돌리며 건조하게 말했다. “ 고민거리.” “ 고민, 고민.”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 틈에 복희씨는 무거운 걸음으로 장 우현에게 걸어가 버렸다. 그러다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의 입모양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그리고 약점.” 나는 복희씨를 잊기로 했다. 사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잊어간다는 게 끔찍하게 쪽팔리는 짓거리였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더 이상 바보처럼 울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복희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장 우현 같은 잔챙이 새끼에게 채이지 않는 강인한 남자 김 계진이 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강인한 남자로 다시 태어 난지 하루 만에 감기에 걸려버렸다. 어제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쐰 탓이다. 아침부터 열심히 전화를 한 끝에 이 복귀 사장님에게 겨우 2틀 휴가를 받아냈다. 병원에 가서 엉덩이에 주사 한방 맞고 약도 타 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집에서 편하게 쉬려는데 친구라고 있는 세 놈들이 터무니없는 이유로 나를 억지로 깨우며 달달 볶아대기 시작했다. 볶아대는 이유도 유치했다. 놈들은 내가 시발 놈의 장 우현자식에게 맞고 온 것에 대해 분노하고 치를 떨었다. 거의 경기 수준이었다. 친구라면 응당 당연히 내 몸 상태를 걱정해 해주는 말로 넘겼겠지만 놈들은 보통친구가 아니었다. 자기네들은 어디 가서 싫은 소리 한번 안 듣고 살았는데 친 구인 내가 누군가에게 맞고 왔다는 사실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한껏 서두를 잡아놓고 녀석들이 진짜 속내를 드러냈다. 권솔은 월 3만원에 맞짱의 기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김 지만은 월 2만 5천원에 코피 빨리 터트리는 법과 1+1 서비스로 간단하게 팔을 부러뜨리는 법을 알 려주겠다고 했다. 셋 중 가장 싸움을 못하는 이경원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녀석들이 선수를 치자 당황해했다. 그리고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월 2만원에 말싸움을 가르쳐주겠다고 나를 못살게 굴었다. 난 미쳤냐고 그 돈 있으면 꽃등심이나 사 먹겠다고 극구 거부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감기약을 몰래갖다 버리고 잠들만 하면 형광등을 켜고 도망갔으며 그것도 잘 안 먹히면 방문을 활짝 열어 추위에 지쳐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놈들은 실시간으로 바뀌는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해 교대로 방문을 지키고 서 있다가 20분씩 순서를 바꾸기도 했다. 급기야 허무맹랑한 싸움준비 동작 같은 것들을 프린트해서 방문 사이에 끼어 넣고 수업은 시작됐다는 둥, 빨리 선불을 내놓으라는 둥 능지처참을 당할 정도의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일삼았다. 짜증나고 속에서 천불이 일어났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적당히 상대해주고 빨리 자고 싶었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수업료를 조절했다. 권솔에겐 2만원, 김 지만에게도 2만원, 셋 중 가장 값어치가 떨어지는 이 경원에겐 만원을 줬다. 당연히 이경원은 흥분했다. 하지만 너희 셋 중 누가제일 싸움을 못하냐고 반박하는 나의 주장에 차마 아니라는 말은 못하고 '친구니까 특별히 싸게 해준다.' 는 저급한 우정 론을 펼쳐들었다. 녀석들은 내가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오 만원을 방바닥 한 군데에 뭉쳐서 미친놈들처럼 한참을 낄낄댔다. 그리고 삼겹살과 돼지갈비를 사와 내방에서 구워먹으며 나는 감기에 걸려서 먹으면 안 된다, 불쌍하다 따위를 말을 늘어놓음으로서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발휘되는 우정에 조금씩 취해갔다. 어제 밤에 보여준 녀석들의 행동은 일순 흥분상태에 나오는 헛말에 지나지 않았다. 놈들은 이런 자식들이었다. 잠시 틈을 주면 내 주머니를 아귀아귀 빼 먹으려 노리는 흡혈귀 새끼들. 집에서 놀고 있으니 시간은 더 빨리 가는 기분이 든다.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복희씨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도 난 예전 고시생 방, 지금은 주인 없는 방이 되어버린 그 방에서 지냈다. 그리고 녀석들은 그냥 오 만원 버린 걸로 치겠다고 거부하는 나를 억지로 앉히고 주먹 뻗는 법, 급소 가격하는 법, 코뼈를 부러트리는 법 따위를 하나씩, 하나씩 가르쳤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각자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 의견 차이가 보이자 바로 우정이 틀어졌다. 그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뻗고, 동시에 급소를 무자비하게 가격했으며 코뼈를 부러뜨릴 듯 시끄럽게 싸우면서 역시나 잠을 못 자게 만들었다. 나와 세 놈들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황금 같은 2틀 휴가를 언제나처럼 엉망으로 흘려보냈다. 가게에 출근하는 시간이 인근 고등학생들 보충수업 받고 학교에서 끝나는 시간이라 교복무리들과 심심치 않게 전철에서 자주 마주쳤다. 오 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귀엽게 한 여고생이 다가와 권솔에게 다가와서 사탕과 초콜릿을 내밀었다. 며칠 전부터 힐끔힐끔 살펴본다 했더니 경원이가 아니라 이번엔 솔이 새끼였나. 하긴 여고생들이 좋아하게 생긴 얼굴이긴 하지. 솔은 가식용 미소를 지으며 특유의 상냥한 목소리로 ‘오빠가, 오빠가 말이야’ 하고 대꾸를 했다.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는 폼이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은 오랜만에 써먹는 오빠타령에 나름대로 흡족해 있었다. 그러나 옆에서 보고 있던 경원이 놈이 ‘호박 같은 년, 보는 눈 졸라 없네. 옆에 나를 놔두고, 흥! ‘ 하는 바람에 여고생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문 앞으로 달려갔다. 솔의 오빠 타령도 싱겁게 끝이 났다. 아무리 재주 많은 사람도 달리는 전철에서 뛰어내릴 순 없는 법. 여고생은 주위에 모여 있던 남학생들의 시선에 눈물을 터트렸고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권솔과 이경원의 값어치 없는 말싸움을 벌였다. 지만이 새끼와 나는 놈들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가게 앞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가게 간판 위에 펄럭이는 형형색색의 유치한 플랜카드. 카드를 양쪽에 붙잡고 사다리에 올라가 전봇대에 묶고 있는 조폭 놈들을 올려다봤다. 검은색 페인트로 뭐라고 장황하게 써놓은 거 같긴 한데 너무 높아서 잘 보이진 않았다. “ 너희들 뭐하냐. 무슨 날이냐.” 솔이 새끼의 고함소리에 두 놈이 동시에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고개만 까닥 숙여 솔과 지만이 새끼에게 각자 인사를 했다. 한 놈은 다시 망치를 쥐었다. 다른 한 놈이 군밤 모자를 벗으며 사다리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 오셨습니까. 그런데 오늘 정말 무슨 날인지 모르십니까?”" 이 미친 새끼야. 모르니까 묻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을 하다 말고 권솔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러자 군밤 모자 놈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서렸다. …뭐냐 저 미소는. 솔을 빤히 보고 있던 지만이 놈의 얼굴도 군밤 놈 못지않게 유들유들 변했다. “ 돌 복신새끼 대학에 들어가긴 갔나보다. 참 오래살고 볼일이야. 안 그러냐. 권솔.” “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관심 없다!” “ 관심 없다고? 와, 대학 간다고 떨어져 있자고 하니까 열 받아 난리치던 놈이 말은 잘 하네.” “ 시끄럽다! 안 들려! 안 들려!” 권솔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우리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듣기 싫다는 듯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이미 열려 있던 가게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버렸다. 권솔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이경원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이 하는 말이야 뻔했기에 지만이놈과 나는 짠 것처럼 놈을 무시하고 가게 안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 이경원의 악당 같은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푸-하하하! 시발, 완전 나이스! 앞으로 2년 동안은 놀릴 거 생겼다! 기다려라, 좆 솔 새끼.” 2틀 안 본 사이에 가게는 이 복귀 사장님의 소망대로 장사하기에 충분한 여건들을 마련한 듯 보였다. 칸을 나눠 일이층을 만든 유리박스 안엔 제대로 정신 박힌 놈이라면 눈뜨고 보기 흉한 잡다한 성기구들이 크기에 맞춰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밑에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를 확인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릴 거 같은 무언가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아무리 바글바글한 게이 소굴이라지만 민망하지도 않았을까. 하여간 희한한 놈이다. 다시 한 번 그의 상태가 꺼림칙하다는 걸 실감하며 나와 경원이 놈은 주방으로 지만이 새끼는 권솔을 쫒아 창고 쪽으로 내려갔다. 유리박스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경원이 녀석을 끌고 복도를 지나 주방문을 열었다. " 계진아!!!! “ 나를 보자마자 싱크대에 머리를 박고 설거지를 하던 비룡이형이 대뜸 악을 질렀다. 형 목소리가 어찌나 구슬프게 들렸던지 나와 경원이 놈은 주방을 들어오다 말고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 계진아, 아팠다면서? 복귀 상무님이 그러시더라. 얼마나 아팠는데? 이젠 다 나았어?” 비룡이형은 내 어깨를 흔들며 심지어 킁킁거리며 냄새까지 맡아댔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형을 바라보았다. “ 보다시피 멀쩡해. 걱정해줘서 고마워, 형.” …역시 형은 착한사람이야. 그리고 이 가게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말이야. “ 당연히 걱정했지! 이런! 내 정신 좀 봐. 너 오면 주려고 했는데. 잠시만.” 형은 바람소리 나게 몸을 휙 돌려 가스레인지 위에 보글보글 끓고 있던 의심스러운 냄비뚜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비룡이 형의 얼굴을 덮었다. 단순히 연기하나만 보고도 불안해진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아팠다는 이유로 형의 관심을 독차지 하자 사람들의 관심과 초점의 중심엔 항상 자신이 있어야 하는데 조금 밀려났다고 이경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 야, 형! 나는 안 보이냐?” “ 미안, 경원아. 경원이도 잘 쉬었어?” ……유치한 자식. “ 당연하지. 그나저나 아저씨는 왜 또 안보여? 우리보고 군기가 빠졌네, 어쩐다 하더니 자기가 제일 빠졌다니까.” “ 아, 스승님은 룸에 음식 나르고 계셔. 오늘이 그날이잖아.” 냄비 안에 숟가락을 푹 꽂고 이리저리 휙휙 저으며 형이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형의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그날이라면 솔이 새끼 애인이 오는 날은 말하는 건가. 나는 냉장고 밑에 넣어둔 마늘 깔기 전용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 앉으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 형, 그날이 이복신인가 하는 놈이 오는 날이야?” 형은 일초의 망설임 없이 ‘응.’ 하고 대답했다. 경원이 놈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낄낄대며 말했다. “ 6년 만에 온다고 다들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야? 플랜카드에, 음식에 좆도 웃기고 자빠졌네.” 너 오랜만에 참 맞는 말 한다. 아무렴 플랜카드는 진짜 오버였지. 형은 가스 불을 끄고 냄비 안에 보글보글 끓고 있던 음식을 대야만한 사발그릇 속에 콸콸 쏟아 부었다. …뭐야, 이런. 죽이었잖아. 비룡이 형은 싱크대 위에서 쟁반을 꺼내 사발과 숟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니까 이거 나 먹으라고? “ 전복죽이야. 스승님이 사 놓은 건데 내가 계진이 죽 만든다고 하니까 몇 개 주셨어.” “ 나주는 거야? 정말? 형, 정말 고마워! 완전 감동이야!” “ 별개 다 감동이래. 식기 전에 먹어.” “ 응!” 숟가락을 들자 옆에서 고양이 눈으로 보고 있던 경원이 놈이 갑자기 죽사발을 뺏어 갔다. 나는 당장 죽사발을 원래자리에 안 내려놓으면 숟가락으로 목젖을 찢어버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녀석은 아니꼽다는 듯이 죽사발을 툭 던져놓았다. “ 콧구멍에 냄새만 쐬어줬다. 그것도 안 되냐. 가만 보면 이 새끼도 먹는 걸로 은근히 치사하단 말이야.” 나는 어느 개가 짖나, 식으로 놈의 말을 싹 무시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경원이 놈을 보고 있던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경원이도 배고파? 한 그릇정도 남았어. 잠시만.” “ 뭐야, 남았는데 처음부터 한 그릇만 가져온 거야? 당장 가져와! 열 받아 죽겠는데 경원이도 배고파가 뭐야!”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이 자식이 그 짝이었다. 비룡이형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 미안. 넌 안 먹을 줄 알고.’ 라고 속삭이며 싱크대 위에 있던 냄비에 숟가락만 하나 푹 꽃아 들고 왔다. 이경원이 하는 말에 일일이 상종하다니 비룡이형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반은 귀담아 듣는 척하고 나머지 반은 못들은 척하면 편할 텐데. 다음에 경원이 새끼가 없을 때 가르쳐줘야겠다. 녀석은 그 흔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형에게서 냄비를 빼앗아 옆구리에 끼고 정신 나간 놈처럼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흡사 머슴처럼 처먹는 꼴이 죽돌이가 따로 없구만. 비룡이형은 자기가 한 음식에 정신없이 먹고 있는 놈이 좋은지 아니면 자기가 만든 음식이 자랑스러웠는지 의미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경원아, 호들갑 떠는 게 아니야. 복신이가 6년 만에 돌아오는 거야! 더군다나 대학생이 되어서 말이야!” 형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을 흔들며 사뭇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이 사장님 집엔 대학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다들 공부 쪽으론 영 소질이 없어서.” 경원이 놈이 죽을 먹다 말고 어울리지 않게 내 눈치를 살펴댔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대충 감이 왔다. “ 그 자식 있잖아, 이 복희씨. 적어도 그 사람은 대학 나왔을 거 아니야.” 먹고 있던 죽이 목구멍에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 얼굴을 노골적으로 살피는 경원이 놈의 뜨거운 눈빛에 고개를 푹 숙이는 것 외엔 할 게 없었다. 숟가락을 쥐고 있던 손이 나도 모르게 후들거렸다. 다행히 비룡이형의 빠른 대답소리에 경원이 놈의 고개가 형에게 쏠렸다. “ 응. 몰랐어? 이 사장님은 중학교밖에 안 나왔잖아.” …잠깐,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 형. 경원이 놈과 나는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다가 형에게 고개를 돌리며 거의 동시에 말했다. “ 진짜야?” “ 정말?” 녀석과 내 고함소리에 놀란 형이 움찔 물러섰다. “ 응. 이 복귀 상무. 아! 이 가게에선 사장이지. 아무튼 이 복귀 상무도 고등학교 못 나왔어. 자기는 안 나온 거라고 박박 우기는데 자퇴가 아니라 퇴학당한걸 보면 잘린 거지, 뭐.” ……그럼 예전에 학교를 나왔네, 마네 했던 말들은 다 뭐야. 설마. 학교란 게 조폭 새끼들이 꼭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한 번씩 다녀온다는 그런 학교란 말이야? 김 계진, 이 멍청한 놈. 난 왜 지금까지 복희씨가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한 거지. 혼란스러워서 멍해져 있는 나완 달리 경원이 놈은 아주 대놓고 신이나 있었다. 못 배운 것에 대한 무한한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 형, 그럼 이복신은 왜 대학 가려고 지랄을 떨고 있냐. 자기 형들도 다 고등학교도 못나왔으면 상관없잖아. 어차피 대학 나오나 안 나오나 할 건 깡패짓거리 밖에 없으면서.” “ 바로 그거야! 이사장님하고 이상무는 대학을 못 나왔어! 그렇지만 적어도 집안에 한명은 대학을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신거야. 사실, 우리끼리 말이지만 복신이도 공부 쪽으로 심각하게 머리가 굳었어. 하지만 단지 막내라는 이유로 두 형들의 주먹과 강압에 못 이겨 절어 들어간 거야. 처음엔 이사장님이 이상무한테 대학을 가라고 했는데 이상무가 복신 이한테 책임을 미룬 거야. 그 집안이 대체로 형제간의 위계질서가 엄청 유별나거든. 그런 집에 막내로 태어난 복신이 인생도 참 기구하지.” 형은 구슬픈 눈빛으로 연신 ‘아 불쌍한 복신이, 복신이.’ 하고 중얼거렸다. “ 6년전 까지만 하더라도 이사장님은 녀석을 총무로 데리고 있을 생각을 하셨나봐. 근데 말이 총무지 주먹 쓰는 곳에 있으면 어차피 주먹질을 할 수 밖에 없잖아. 그때 문제가 발생했어. 두 사람이 보기에 복신이가 유별나게 주먹질에 소질이 없다고 판단했대. 그래서 잠시 사그라졌던 대학문제가 불거져 나온 거야. 사실 나는 잘 모르겠어. 얼마나 주먹질을 잘해야 되는지. 내가 봤을 때 복신이 놈은 무서울 정도로 싸움을 잘하거든.” 얼마나 시원찮게 보였으면 동생을 6년씩이나 절에서 썩혀서까지 대학을 보내려 한 걸까. 지만이 놈이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리길 복신 군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주먹을 쓴다.’ 라고 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더군다나 고집불통 권솔 새끼가 자기보다 약한 놈에게 얌전히 깔려 줄 것 같지도 않고. 이윽고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에 궁금증은 저만치 달아났다. “ 고등학교 때 복신이가 칼에 찔렸대. 놀다가 그랬는지 싸우다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 상대 쪽에 일곱 명인가, 여덟 명쯤 있었대. 근데 녀석이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칼날이 옆구리를 스쳐 갔다나봐.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걸 보면 뒷일은 잘 처리했겠지? 하지만 이사장님과 이상무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나봐. 어떻게 옆구리 하나 단속 못하냐고, 당장 호적을 파버리겠다고 두 달이 넘게 날뛰었다는 전설이 있어. 물론 확인된 바는 없지만. “ 화내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비로소 비룡이형의 경험에 바탕 된 증언을 끝으로 이 복희씨와 이 복귀 사장님은 정상적일 수조차 외계의 인물로 젖혀두고 다신 상종 말아야겠다는 의 지를 다지게 되었다. 복희씨 때문이었는지 비싼 전복죽이었는데 희한하게 맛이 없어졌다. 식어있는 내죽을 곁눈질로 힐끔거리다 이제 대놓고 노려보는 경원이 년에게 죽사발을 냄비에 부어주는 그 순간, 닫혀있던 주방문이 벌컥 열렸다. 동생도 모자라 이젠 형까지 상대해야 하는가. 무지개 색 꽃무늬 십자수가 박혀진 털모자를 쓴 장미 놈이었다. 주방 안으로 들어서는 녀석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녀석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가발이나 키 높이 구두, 진한 화장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밤톨처럼 오돌토돌한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오리지널 생 얼굴을 빳빳하게 들고 서있는 것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흰색 니트 티에 청바지라니. 녀석은 무려 평범한 복장이었다. 녀석을 보자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놈이 제발 그냥 사라주기만 바라고 침묵하자 내 바람을 무시하고 녀석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비룡이 형! 아저씨 어디 있어요? 나 보고 오늘 홀로 빠지래! 사장도 아니면서 자기 마음대로야! 흥, 졸 짜증나!!” “ 아! 장미 군. 아마 룸에 계실 거예요. 왜 갑자기 홀로 빠지라고 하셨을까.” 그때 죽만 퍼 먹고 있던 이경원이 내 왼쪽 귀를 쭉쭉 잡아당기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 내가 말싸움 요령 가르쳐 준거 있지? 우선 시험 삼아 저 새끼한테 써먹어봐.” “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라. 그게 요령이냐. 그건 단순한 시비도 안 된다. “ 야! 한번 써먹고 나서 말해라.” “ 됐다. 가만히 잘 있는 사람한테 뭐 하러 그래.” “ 그러니까 네가 병신소리 듣고 뺨이나 처 맞고 다니는 거다, 새끼야.” 나는 녀석을 지그시 노려봤다. “ 그거랑 이거랑 달라! 그리고 지금 네가 나하네 하는 게 시비다! 알고 있냐.” “ 모른다. 야! 병신 육갑떨지 마라. 뭐든 적당히 해야 귀엽지, 착한척이 심하면 멍청한 거다. 이유 없이 그러고 싶지 않다고? 그럼 넌 이유가 있어서 장 우현한테 당하고 이 복희한테 뺨맞았냐! 답답하게 굴지 마, 멍청아! “ 놈이 한심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댔다. 순간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가 사르라졌다. 경원이 놈은 내 볼을 숟가락 끝으로 콕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 “ 어제 배운 거 복습 들어간다, 귓구멍 열고 잘 들어라. 말싸움 법칙 1, 나이 상관없이 무조건 반말을 한다. 법칙 2, 마지막엔 무조건 시발을 붙인다. 법칙 3, 할 말이 생각 안 나면 막무가내로 우긴다. 법칙 4, 생각하기 전에 말하고 본다. 빨리 가라. 싸움소, 김 계진아. “ “ 싫다니까!” 이 경원은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비룡이 형과 이야기를 하던 장미 놈이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놈의 얼굴을 보자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웃기게도 나도 감정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녀석의 얼굴에 순간 장우현의 얄미운 얼굴이 오버랩 되어 겹쳐졌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경원이 자식은 작은 목소리로 ‘화이 팅.’ 하고 외치고 있었다. 장우현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멍청한 나를 무찔렀다고 신나게 파티를 벌이고 있을까? 아니면 복희씨 품에 안겨 나를 불량식품 껌 딱지처럼 질겅질겅 씹어댈까? ……빌어먹을! 나는 싱크대에 기대어 벽에 걸린 가위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비룡이형을 지나 일부러 더 쿵쾅거리며 요란스럽게 장미 놈 앞에 섰다. 그제야 놈이 뭐 잘못 먹었냐. 하는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아, 졸라 환장하겠다. 김 지만-192, 권 솔- 184, 이 경원-179. 주위에 있는 놈이라곤 저렇게 장신새끼들 밖에 없으니 이렇게 작은 놈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놈은 174 센티인 나보다 무려 머리통 하나로도 모자라 그 절반이나 더 작았다. 지금까지 엇비슷했던 건 다 키 높이 구두의 위력에 의존했던 것이었다. 땅바닥에 축 꺼져있던 자신감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장미 놈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키 큰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제스처였다. “ 야! 너, 주, 주방은 뭐 하러 왔어! 씨발!” 시발을 무사히 성공시키고 경원이 놈을 돌아보자 녀석이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원위치 시켜 장미 꼴아보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자 놈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 야! 멍청이! 방금 뭐라고 했어? 딴 생각하느라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줄래?” 입에서 맥 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 엉?” 오히려 짜증난 건 장미새끼였다. “ 못 들었다고! 멍청아. 다시 말해 봐. 뭐라고 했어?” …뭐 이딴 거지같은 상황이! 돋아난 자신감의 잎이 하나 뚝 떨어졌다. “ 야! 너, 주방은 뭐 하러 왔냐고. 시발!” 성공이다. 장미 놈 얼굴이 순식간에 굽다 만 오징어 뒷다리처럼 구겨졌다. “ 너 미쳤어? 누가 누구보고 시발이래. 멍청하게 주제에.” “ 멍청하게 생긴 놈? 내가 왜 멍청해! 너희형제 보단 더 나아! 너…너희 형제는 사이코야! 졸라 연기나 하는 주제에. 시발.” 놈이 거만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 사이코? 사이코는 일본에서 최고란 말이다. 그래 난 미모로 최고야! 고맙다, 멍청이!” 경원이 놈을 돌아봤다.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히 놈도 예상 못한 상황인거다. 코치부터가 당황하는데 선수라고 별 수 있나. 나는 대놓고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쓸데없는 말들을 무더기로 뱉어내며 시간을 때웠다. “ 넌 나보다 안 예뻐!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시발.” “ 지랄하네. 너처럼 복고적이게 생긴 놈은 내 24년 인생에 처음이다! 진상 주제에!” …24년? 그럼 장 우현이 나보다 무려 2살이나 어렸다는 말이잖아. 맞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것도 어린놈한테 얻어맞다니!! 굴욕이었다. 급습을 당해 휘청거리는 나에게 장미 녀석은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복고야, 칭찬 고마워.’ 라는 씨불이며 과도한 잉크를 남발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 폼을 잡았다. 안 된다, 이래도 놈을 보낼 수 없다. 난 발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 넌 뭐야! 너흰 뭐야! 뭔데 갑자기 날아와서 날 비참하게 만들어!!! 시발.” 장미 놈이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 누가 해야 되는 말인지 모르겠네, 그런 넌 뭔데? 넌 뭐니. 복고새끼.” 경원이 놈은 장미새끼 입에서 복고 어쩌고 할 때부터 눈을 감아 버렸다. 코치가 링 위에 하얀 수건을 집어던진 상황이었다. 나는 전의를 상실했다. “ 뭐긴 뭐야! 네, 네 똥구멍이다!! 시발.” “ 이, 이!!” 이경원이 말싸움에 가장 우선시 하는 건 무조건 마지막말은 하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정이 거지같아도 결국은 내가 이긴 것이었다. 장미 놈은 똥꼬란 단어에 수치심을 느끼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똥꼬 한방에 녀석을 k.o 시키고 가벼운 마음으로 주방에서 나와 버렸다. “ 거기서 그런 말이 기어 나오는 걸 보면 너는 아직도 멀었다, 멀었어.” “ 한번만 더하면 정확히 벌써 13번째다. 제발 그만 좀 해라.” 기둥에 기대고 있던 몸을 비틀어 나를 내려다보던 경원이 놈이 눈썹을 꿈틀댔다. 할 말이 있다는 녀석 특유의 버릇이다. “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한테 두 달 수업 더 받아라. 어때? 세일해서 만 오천 원 정….” “ 시끄러워! 미친놈아!” …멍멍이 새끼. 잠시 틈을 주면 어떤 방법으로든 돈 이나 뜯어가려 안달이다. 으-윽! 놈은 뜻대로 내가 넘어오지 않자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몸을 원래방향대로 돌렸다. 그때 허망한 눈으로 홀을 둘러보던 녀석의 눈에 사냥감은 발견한 늑대처럼 야비하게 빛났다. “ 야! 저 새끼 지금 3번방에서 기어 나왔다. 염병, 오늘 홀 담당 년이 왜 번지르르하게 룸에 기어 다니고 지랄이야. 잘 걸렸다! 아주 와작을 내 주겠어. 너는 여기서 이 사부의 현란한 입놀림을 잘 봐뒀다가 실전에서 꼭 써먹길 바란다.” “ 됐어. 그냥 우리가 오늘 홀 뛰면 되지. 뭐 하러 그래.” “ 미쳤냐? 누구 좋으라고 내가 그 짓을 하냐. 룸이 얼마나 편한데. 너는 그냥 얌전히 입만 헤벌리고 기다리고 있어. 형님이 꼭 룸을 따오고 말겠다.” 녀석과 나는 바텐더 기둥에 기대어 서서 홀에 있는 손님들이 심부름을 시킬 때를 대비해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한 팔엔 쟁반을 들고 다른 손엔 마른 행주를 들고 언제든지 뛰어갈 수 있게 말이다. 사실 아저씨의 말대로라면 오늘 룸을 뛰어야 될 사람은 나였다. 몸 상태를 생각해서 홀보다 편한 룸으로 배려를 해줬다 어쨌다나. 뭐, 따지고 보면 장미 놈이 홀을 본다고 해도 경원이 놈은 녀석과 상관없이 홀에 있어야 했다. ……홀을 팽개치고 두 사람이나 룸을 뛸 정도로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녀석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은근슬쩍 기회를 봐서 룸으로 끼어들 심산이었다. 그리고 더군다나 오늘은 권솔의 8년 애인, 이복신 군이 오는 날이라 예약손님을 제외한 외부사람은 룸에 들이지 않는다는 이 복귀 사장님의 어명이 있었기에 확실히 룸이 편했다. 그러나 얄미운 장미 놈은 우리가 룸에 나가기도 전에 무슨 꼼수를 썼는지 버젓이 vip룸에서 이미 서빙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경원은 당연히 빡이 돌았고 그리하여 하라는 청소는 젖혀두고 놈이 룸에 나올 때까지 기다려 잡아 족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도에 술 취한 녀석들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리는 걸 봤을 때 지만이랑 솔이 새끼까지 올라온 것이 분명했다. …뭐 믿거나 말거나 친구사이라니까. 오늘 같은 날은 흔하지 않다. 술 공짜에 일도 미루고 제대로 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날은 이경원이 의미 없이 흘려 넘길 놈이 아니었다. 놈은 3번 방문을 조용히 닫고 홀 쪽으로 나오는 장미 놈 앞으로 재빨리 달려가 녀석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 안녕, 자기! 오늘 우리가 룸인데 가로채니까 기분 좆나 째지냐?” 경원이 놈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장미 놈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 왜 이래! 이거 놔! 안 놔! 안 놔! 동료 상습폭행죄로 사장님한테 이를 거야!” “ 오, 상습폭행죄는 죄고 여우같이 가로채는 건 죄가 아니고?” “ 그, 그건! 홀은 더 어려우니까 그렇지! 나는 홀 안 해봤단 말이야! 빨리 놔줘!” “ 아, 그러셨어? 그래서 혼자만 쉽게 일하고 돈은 똑같이 받아 챙기게요?” 경원이 놈이 묘하게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장미 놈의 오른팔을 꺾어 등에 바짝 갖다 붙였다. 우둑하는 뼈 소리가 났다. 힘이 축 빠진 다리로 열심히 부들부들 떨며 장미 녀석은 최대한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다. “ 이거 놔! 아…, 근데 너 뭐하는……야!” “ 못 놓겠는데요. 뭐긴 뭐겠습니까? 네가 어제 기분 째지는 일 해주겠다고 그랬지? 왜 이제 와서 기억 안 난다고 해보시지 그러냐.” “ 제발, 놔줘! 야! 으-윽!” 나도 참 어지간히 둔한 놈인가 보다. 보고 있으면서도 처음엔 무슨 일인지 몰랐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상야릇한 목소리를 내는 장미 놈의 얼굴에 경원이 놈이 뭘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경원은 하얗게 드러나 있는 장미 놈의 목덜미를 혀끝으로 살살 핥으며 녀석의 청바지 안에 억지로 손을 쑤셔 넣더니 엉덩이를 살벌할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김 지만이 복도를 지나간다면 의심이 필요 없는 완벽한 상황이었다. 저 새끼도 완전 돌았지! 사람들 지나다니는 홀에서 뭐하는 짓이람. 경원이 놈의 손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녀석은 장미 놈의 앞섬을 더듬거려 결국 바지지퍼를 여는데 까지 진도를 나갔다. 장미 놈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바락바락 욕하고 윽박지를 줄 알았던 녀석은 거의 속삭임 수준으로 ‘놔줘, 놔줘, 놔줘!’ 따위를 연 발했다. 겨우 말을 내뱉는 녀석의 얼굴이 감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첫 키스를 기다리는 소녀처럼 말이다. 이경원은 가볍게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벌어진 지퍼에 놈의 작고 쪼글쪼글한 성기가 드러났다. 그런데 저 자식은 평소에 팬티도 안 입는단 산단 말인가. 놈의 앙증맞은 고추보다 노팬티라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경원이 놈은 장미 자식의 자그마한 성기를 거칠게 주물럭거리더니 오들오들 떨며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놈을 갑자기 떼어냈다. 그리고 멍하게 있는 녀석을 질질 끌고 거리가 가장 가까웠던 1번 방문을 벌컥 열었다. 경원이 놈은 평소와 다르게 대뜸 ‘안녕하세요.’ 예의바른 인사를 하며 장미 놈을 가리켰다. “ 오늘 새로 들어온 신참인데요. 맛 좀 보시라고요.” 장미 놈이 경원이 놈의 등을 후려쳤다. “ 뭐, 뭐야! 싫어! 싫단 말이야!” “ 얘도 좋다고 난리네요. 그럼 전 이만.” “ 경원아, 경원아!! 나, 싫어! 경원아.” 맙소사.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장미 놈이 이토록 애절하게 이 경원의 이름을 부르다니. 장미 놈은 여전히 경원이 새끼의 손 안에서 빠져 나오려 버둥버둥 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비켜줄 녀석이 아니었다. 이경원은 겁에 질려 사색이 된 장미 놈을 번쩍 안아 올려 룸 테이블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여러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흘러나왔다. 야유소리와 휘파람소리가 대부분이었다. 경원이 녀석은 손님들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조용히 방에서 나와 장미 놈이 떨어트리고 간 쟁반을 태평한 얼굴로 주워들었다. “ 야, 좀 심하지 않냐.” “ 전혀. 저 새끼가 나한테 한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또, 뭘 얼마나 심했다고.” 녀석이 눈썹을 사정없이 실룩였다. “ 심했다. 그것만 알고 있어라.” “ 너도 제발 양심 좀 있어봐라.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심하긴 네가 쟤한테 그랬지. 저번에 탈의실에서 지갑에 있던 돈도 훔쳐가고 유니폼 지퍼 터져서 몰래 옷도 바꿔놨지? 너는 할 말 없다. 물론 나야 엄청 많다만.” 이 경원이 분노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그게 아니라!” “ 아니긴 또 뭐가 아니냐.” “ 진짜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경원이 놈의 얼굴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긴장된 표정으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며 이제 와서 말할까, 말까 잠시 갈등하다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녀석은 혹시나 지만이 새끼가 듣지나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것이리라. 그런 녀석을 보는 내가 오히려 애가 닳았다. “ 왜. 빨리 말해 봐. 그게 아니라 뭐, 뭐.” 녀석은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놈은 경계의 눈을 풀지 않게 조곤조곤 귓속말을 해왔다. “ 약속해라. 절대 소리 지르지 않는다고.” “ 오케이, 오케이! 말이나 하셔!” 녀석이 거대한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녀석의 말은 경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저 새끼가 나랑 사귀고 싶대.” ……아아!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분명 장미 놈이 사귀자고 했다고? 누구한테? 그것도 김 지만처럼 거대한 산이 있는 이 경원에게? 이럴 수가. 완전 패닉상태에 빠진 나를 보며 경원이 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너 이 복희 때문에 가게 빨리 나간 날 있었잖아. 그때였나. 그 뒷날이었나.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는데 갑자기 와서 무릎 꿇고 울고불고 생 쇼에 완전 개지랄을 떨더라니까. 처음 보고 반했대. 그 동안 너무 좋아서 싸가지 없게 군거란다. 어이없지? 시발, 나도 어이없어 죽는 줄 알았다. “ 녀석의 눈에 경멸의 빛이 반짝이며 푸념 섞은 말이 이어졌다. “ 내가 좋아 죽겠대. 돌아버리겠다고 난리를 치더라. 사귀기만 해주면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시키는 대로 다하겠대. 자기를 안 좋아해도 되는데 한 번씩 자주기만 하면 된대. 그 말이 더 웃기지 않냐? 저 새끼 생각보다 더 골 때리는 자식이었다니까! 몸 파는 게 꺼림칙하면 가게도 때려치우겠대! 돌겠다. 야, 근데 김 지만한테는 말하지 마라. 알았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놈이 조금 안심한 듯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우현은 장 우현이고 장미는 장미였어. 동일인물이 아니었구나. 확실해졌다. “ 야,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 않냐? 그 자식이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아니면 얼굴에 철가면 쓰고 연기를 하는 건지 개 소리만 지껄이더라. “ “ 뭔데! 그 개소리가 뭔데! 빨리 말해봐!” 흥분하는 나를 보며 경원이 놈이 덩달아 흥분해서 대답했다. “ 이 복희 사장을 무서워만 했지 자기는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대.” …역시. 머리가 띵해졌다. 휘청거리는 나를 한 팔로 감싸며 녀석이 말을 이었다. “ 얼굴만 보면 무서워서 도망가느라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적조차 없다고 바락바락 우기는데 희한하게도 그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아무튼 찝찝한 새끼지.” …쌍둥이라 편했겠구나, 장우현은. 언제든 마음만 내키며 장미 놈의 분장을 하고 가게에 나타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예전에 룸에서 복희씨와 관계를 맺고 있던 녀석도 장 우현이겠지? 사람들은 당연히 놈이 죽은 줄 아니까 장미일거라 착각을 했을 것이고. 결론은 복희씨도 장 우현인 줄 알고 녀석을 안았다는 말이 된다. 이제 와서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그날 저녁 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복희씨의 반응이었다. ……그는 왜 녀석의 전화를 오랜만에 듣는 것처럼 행동했을까.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원이 놈에게 말했다. “ 장미 녀석 화장 말이야. 혹시 네가 하지 말라고 했지?” “ 그게 말이다. 솔직히 나도 반신반의 했다. 나한테 고백할 시간에 그 더러운 화장이나 제발 좀 지우고 와라, 한마디 했더니 정말 화장을 지울 줄은 나도 몰랐다니까. 자기가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이거 완전 정신 나간 새끼 아니냐. “ “ 그래도 널 좋아한다잖아. 너무 심하게 대하진 마라.” “ 뭐가 심해. 그 새끼는 당해도 싸!” “ 불쌍하잖아. 오늘처럼 몰아세우진 마.” 뒤이어 녀석이 주절주절 욕지거리를 읊어댔지만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장우현과 이 복희씨 관계에 끼어들 명분이라도 남아있나. 확실한 건 복희씨는 장 현을 좋아한다는 것이고 녀석 역시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좋아하는 상대를 착각하는 실수 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은 두 사람 일이다. 나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나는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걸까. 이유가 어쨌든 간에 장미 놈이 없으니 나와 경원이 놈이 홀을 맡았다. 녀석의 예상대로 예약손님 몇 명만 제외하고 룸 안이 텅텅 비어있었다. 하물며 새벽타임으로 넘어가면 우리가 할 일이 극히 드물어지기 때문에 경원이 놈과 나는 녀석이 기대하던 인물 솔이 놈의 8년 애인 이복신군이 와있다는 최고급 vip 룸 앞에 섰다. 솔직히 궁금한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다. 경원이 놈은 장미 놈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아가고 특유의 껄렁한 폼으로 방문에 서너 번 노크를 했다. ……침묵. 녀석은 이번에 발로 노크를 했다. 그러나 이상 안에서 들어오란 말이 없었다. 녀석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경원이 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자극적인 양주냄새와 비릿한 안주냄새가 콧구멍에 몰아닥쳤다. 경원이 놈이 앞서서 룸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을 따라 한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시선을 사로잡는 인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복희씨네 형제는 확실히 유전자가 강한 게 분명했다. 지구 한 복판에 떨어트려도 바로 형제 사이로 알아보겠다 싶을 만큼 빼다 박은 외모. 그 생각에 확신이 드는 건 복희씨의 도플갱어 옆에 붙어 앉아 있는 권솔 때문이겠지……. 권솔은 오랜만에 만난 애인이고 자시고 평소처럼 더러운 인상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었다. 녀석을 보는 이복신 군까지 덩달아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에 주름이 잔득 잡혀있었다. 현재 룸에는 맨 윗자리에 이 복귀 사장님, 오른쪽 소파에 이복신군과 권솔, 녀석들 반대 편 소파에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김 지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테이블과 바닥을 돌아다니는 빈 술병은 어림잡아도 양주병이 10병은 넘어 보였다. 저들이 문제의 록 밴드 멤버구나. 경원이 놈과 나는 우리가 들어오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잠시 방황했다. “ 안녕하세요, 사장님. 안녕, 얘들아.” 순간 경원이 놈의 어색 인사에 네 사람의 얼굴이 우리에게 동시에 향했다. …참 민망하구나. 하지만 이 경원은 애초에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해있던 놈답게 민망한 기색하나 없이 가만히 서있는 나를 잡아당겨 지만이 옆에 빈 소파에 앉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경원의 인사를 개 무시로 일관하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나마 예의와 매너를 아는 정열의 남자 김 지만만이 경원이 놈과 내게 과일안주를 내밀며 말했다. “ 늦었네. 이제 일 한만해?” “ 응.” 경원이 놈의 건방진 대답에 지만이 놈이 이를 드러내며 낄낄 웃었다. 녀석에게 입과 몸에서 술 냄새가 빠르게 올라왔다. 코를 아주 콕콕 쏜다. 술고래 놈에게 이정도 술 냄새라면 심각하게 많이 마셨다는 증거일 텐데. …역시나. “ 우리 각시야. 무능력한 깡패새끼 만나서 고생 많다.” “ 개소리 하지 마. 죽인다.” “ 왜. 뭐가 개소리야. 내가 재벌 아들이나 됐으면 일 안해도 될 텐데.” 지만이 놈은 방울토마토를 집어먹으려 손을 뻗는 경원이 새끼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한손으론 가볍게 어깨를 주물러댔다. 경원이 놈이 집어든 토마토의 꼭지를 따서 김 지만의 입에 살며시 넣어주며 ‘좋은 말로 할 때 술 깨라.’ 하고 협박했다. 뒤이어 지만이 놈의 재벌타령과 돈 타령은 계속 이어졌다. …이제 재미없다. 나는 녀석들에게서 조용히 고개를 돌려 또 다른 커플 이복신 군과 권솔을 바라보았다. 어울릴 거 같단 생각은 못했는데 희한하게 어울렸다. 솔이 하는 짓에 비해 예쁜 얼굴이라 그런가. 반대로 이복신군은 이 복희씨와 이 복귀 사장님을 적절히 닮아 남자답게 꽤 잘생긴 외모였다. 짙은 눈썹과 쌍꺼풀 없이 눈동자가 큰 건 그들 집안의 내력인가. 아무튼 대체로 잘생긴 놈이란 것엔 의심 할 수가 없었다. 솔이 놈이 외모에 반 했나 할 정도로 말이다. 얼굴은 그렇다 쳐도 성격만 두 형을 안 닮았다면 정말 완벽할 텐데. 그러나 그런 내 바램은 얼마가지 않아 다른 방향에, 다른 각도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권솔과 이복신군은 얼굴이 상기될 정도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궁금증에 관심 없는 얼굴로 단단히 무장해 그들의 대화를 주시했다. 그때 메뉴판을 성의 없이 휙휙 넘기고 있던 권솔이 대뜸 버럭 화를 냈다. “ 오므라이스 먹는다고 했잖아. 이 돌대가리야!” 이복신 군이 녀석을 매섭게 노려보며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 밥 먹으라니까 그러네. 술만 먹으면 위장 다 버려.” “ 절에 있다 보니까 뇌가 불공드리러 나갔냐. 야, 인마! 그러니까 오므라이스 먹겠다잖아!” 얼굴이 붉게 상기된 권솔을 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복신 군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 서양음식먹지 마. 몸에 안 좋잖아.” “ 이게 진짜 장난하나! 그래서 네가 원하는 밥 먹는다고! 오므라이스 먹는다고! 개새끼야!” 이복신군은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며 끄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갑자기 카멜레온처럼 차갑게 변해 으르렁거렸다. “ 오므랄? 그게 무슨 밥이냐. 이상한 서양음식 먹지 말란 말이다. 몸에 안 좋아.” 나는 그 한마디에 그가 왜 돌 복신인지 스스로 납득하게 되었다. 이복신군은 권솔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 한국 사람은 밥을 먹어야 된다. 무조건 밥이야. 알았냐? 밋밋한 밥이 싫으면 주방장한테 볶음밥에 계란으로 싸서 케첩 뿌린 거 있잖아. 그거 뭐야. 갑자기 말하려다 보니까 이름이 생각 안 나네. 아무튼 그걸로 만들어 달라고 해서 먹어라. “ …처음엔 단순히 웃기기 위해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복신군의 얼굴은 무섭도록 진지했고 권솔의 얼굴엔 순식간에 ‘창피해 죽겠다.’ 다는 수치심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인데 왜 이렇게 웃기냐. 픽 웃음이 났다. 고개를 돌리던 솔이 놈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머쓱하게 웃었다. 웃는 거 보니까 창피하긴 하구나. 그때 이복신 군은 맥주잔에 독한 양주를 반 쯤 따라 붓고 고개를 돌리고 있던 솔이 놈 머리통을 돌려 자신의 눈에 맞추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 서방님 없이 뭐 하고 지냈냐?” “ 좆도 지랄하네. 서방은 개뿔, 죽고 싶냐. 그리고 뭘 뭐하고 지내. 창자 꼴리게 잘 먹고 잘 살았지. 특히 너희 형 때문에 귀한 1년을 생으로 날리면서 아주, 특별한 경험에 기분 째지게 살았다. “ 복신군은 녀석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단박에 눈치 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따라놓은 양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저 독한 걸 인상한번 안 쓰고 잘도 처먹는다. “ 애석하네. 나는 별로 재미없었어. 공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군.” 솔이 놈 얼굴이 희한하게 변했다. 녀석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미치겠다, 진짜. 6년 공부해서 개나 소나 다 간다는 완전 똥통 대학가면서 공부가 뭐가 어째? 계진아, 이 새끼 가는 대학은 총장도 없다는 말이 있어. 그리고 과대가 교수란 말이 돌더라. 돈만 주면 다 가는 대학을 6년 만에 가면서 말은 잘 한다. “ 그래서 돌 복신이구나, 하고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복신군의 반응을 살폈다. 당연히 화낼 줄 알았다. 애인이란 놈이 대놓고 무시하고 자신을 깎아내리는데 좋아할 놈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그는 픽 웃는 것 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술만 마셨다. 솔이 새끼가 복신 군의 술잔을 뺏어 한 번에 원 샷을 했다. “ 생각해보니까 이상하네. 야, 너 어제 내려왔잖아. 근데 어디서 뭐하다가 오늘 기어와!” “ 영화 한편 때렸다.” 권솔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 웃기시네. 너 영화 보면 졸잖아.” “ 응. 졸기야 졸지.” “ 근데?” “ 재밌어서 안 졸고 다 봤다.” 권솔의 눈이 더욱더 심하게 가늘어졌다. “ 뭘 봤는데?” 복신 군이 땅콩을 집던 손을 허공에 멈췄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땅콩을 한주먹 쥐고 손바닥을 비벼 껍질을 훅훅 불어냈다. “ 패션에 관한 영화였다.” “ 패션! 뭐!” 복신 군이 대충 때우려 하자 권솔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복신군의 얼굴이 난감해졌다. “ 악마는 악, 악 뭐였더라. 아! 악마는 브라자를 입는다.” 신중하게 전화를 받고 있던 이 복귀 사장님도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지만과 경원이 놈도 당연히 나와 솔도 할 말을 잃었다. 이 복신. 그 만이 태평한 얼굴로 땅콩을 만들어 입에 탈탈 털어 넣고 있었다. ……우리는 쉽사리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 했다. 10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서로의 얼굴을 무의식중에 피하며 어색한 몸짓으로 각자 하던 일로 돌아갔다. 가만히 있어도 무겁던 분위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복신 군에게 애인이란 이유로 총대를 멘 솔이 놈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야, 좋은 말로 할 때 다시 생각해봐. 악마가 입는 게 정말 브라자였냐?” “ 응. 맞아, 브라자야.” “ 야! 되는대로 지껄이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새끼야!” 솔의 계속 대는 추궁에 복신 군이 미심쩍은 눈으로 녀석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 혹시 너도 브라자 입고 싶냐? 왜 자꾸 브라자에 악센트를 주는 거지?” 솔이 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복신군은 자신이 무려 ‘악센트’ 라는 단어를 무리 없이 소화해 낸 것에 기뻐하며 노골적으로 입 꼬리를 활짝 올렸다. 뭐랄까, 사람이 악의는 없어 보이긴 한데 뇌를 조이는 나사가 빠진 것이 안타까웠다. 지능적인 문제만 아니었으면 완벽할 텐데 진심으로 애석했다. 권솔은 드디어 분노의 오로라를 휘날리며 이 복귀 사장님이 전화통화에 정신없는 틈에 테이블을 마음껏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 정말 너랑은 안 되겠다. 우리 다신 보지 말자!” “ 뭐!” “ 솔직히 네가 싫은 건 아니었다만 그 텅 빈 대가리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잔에 양주를 따르고 있던 복신 군이 들고 있던 술병을 밀치며 솔이 새끼의 어깨를 힘주어 눌렀다. 그의 얼굴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 네가 날 이길 수 있으면 그때 헤어져! 그 전까진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절대 안 돼. 다신 그 소리 입 밖에 내지마. 죽는다.”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떠는 걸 보면 솔이 새끼를 퍽이나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좋겠다, 녀석. 뒤늦게 누군가에게 사랑도 받고.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의 마지막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 알았지? 권솔, 제발. P.l.e.a.s.o." 그의 느끼한 속삭임에 권솔과 나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계속 앉아 있어봤자 할 일도 없고 해서 녀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일어나 살금살금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돌리려는데 이미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불빛에 가려 내 머리를 가렸다.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희씨였다. 왜 생각을 못 했을까. 복신 군이 복희씨의 막내 동생이니 당연히 그가 올 거란 평범한 생각 을 했어야 했는데. 알았다면 이룸에 오지도 않았을 거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복희씨가 지나갈 수 있게 비켜섰다. 그러나 한 참이 지나도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있기만 했다. 뭐하자는 건가 싶어 올려다보니 언제부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어색해서 타죽을 것 같았다. 움직이지 않는 복희씨를 지나쳐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복희씨 등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장 우현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다 나를 발견했다. “ 네가 여긴 왜 있어.” …아. 망할 새끼, 정말 기분 하나 끝내주게 만드네. 나는 지지 않고 따지듯 말했다. “ 그런 너는 왜 있냐.” “ 나야 당연히 복희씨 따라왔지. 어라? 너 갑자기 왜 반말이야!” “ 그럼 두 살이나 어린놈의 새끼한테 존댓말 하냐! 나 너보다 두 살이나 많다. 내가 형님이야. 너나 반말 하지 마!” 어리다는 말에 자극받은 장 우현이 복희씨의 등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내 앞에 섰다. 소란스러움 틈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방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건 중요치 않다.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이 악당 같은 장 우현을 지금 당장 물리쳐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 나이만 많으면 다냐. 꼭 못난 것들이 나이 따지더라. 딱 그 짝이다.” ……뭐시라. 장우현의 뱀눈 같은 눈알을 억지로 파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연기가 지망생 주제에 지랄은. 일인이역 하느라 졸라 힘드시겠다.” “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 못생긴 새끼가!” “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놈보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천배는 더 낫다!” “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이 못생긴 놈이!” “ 자꾸 못생겼다고 하지 마! 내가 어디가 어때서! 나도 어디서 빠지는 인물이란 소리는 안 들어 봤어. 이거 왜 이래!” 많이 빠지는 외모였다. 그러나 나는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계속해서 늘어놓기에 급급해 있었다. “ 나도 나름대로 매력 있어! 나는 너보다 수억 배는 성격이 좋다. 그리고 너에겐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천연적인 귀여움이 있단 말이다! 인조적인 새끼야!” 등 뒤에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터져 나왔다. 신경 쓰지 않겠다. 나는 강한 사나이로 다시 태어났으니까. “ 너 밥 잘해? 난 밥에 넣은 검은콩도 1분 안에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다. 너 십자수는 할 수 있냐? 나는 십자수로 식탁보 만들어서 부업도 했던 사람이야! 그럼 뜨개질은? 물어본 내가 바보지. 당연히 못하겠지? 나는 바늘하나로 목도리 세 개를 동시에 뜰 수도 있어! 너 눈감고 밤 껍질은 깔 수 있냐? 나는 밤 깐 돈으로 아디다스 운동화도 샀어! 나…나는 보통 이런 사람이다! “ 그때 가만히 서서 묵묵히 장우현과 날 내려다보고만 있던 복희씨가 소리 내어 픽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장우현의 얼굴은 일그러졌다가 펴졌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울고 싶어졌다. 나는 심각했으나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코미디 프로를 본 것처럼 자지러지며 웃어댔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잊고 훨훨 날아 가버리고 싶었다. 재빨리 실천에 들어갔다. 복희씨와 장 우현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을 미친 듯이 파고들어 복도를 향해 질주했다. 허나 도망가는 것 마저 쉽게 이루어지진 않았다. 장 우현이 시발 놈이 달려가고 있는 내 오른쪽 다리를 가볍게 걸어 엎어뜨렸다. 무릎이 꺾이고 쿵하는 엄청난 굉음을 내며 몸이 돌바닥에 꼬꾸라졌다. 장 우현 놈이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녀석은 한쪽 무릎을 굽히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 이봐, 못난이. 내가 복희씨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지? 이게 어디서 감히…으-악!” 나는 씨불대는 녀석의 주둥이를 손톱으로 미친 듯이 눌러버렸다. 오늘 낮에 손톱 깎고 고르게 문질러 두지 않은 것이 이리도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녀석은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바닥에 머리통을 부딪치며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놈의 고함소리에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하고 몰려 나왔다. 내 옆에 바짝 붙은 이 복귀, 이복신 형제가 장우현과 나를 두고 누가 이길까 하는 값싼 돈내기를 벌였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장 우현이 비틀비틀 일어나 뾰족한 구둣발로 내 옆구리를 걷어찼다. 씨발! 죽을 만큼 아팠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쥐고 몸을 틀자, 방문 뒤 기둥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나와 장 우현을 보고 있는 복희씨가 보였다. 폐가 헐떡였다. 쓰러질 만큼 아파서 생각 같아선 주저앉고 싶었지만 복희씨의 눈빛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뒤돌아 서있는 장 우현 새끼의 머리통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운동화를 벗어 녀석의 대가리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고무바닥에 붙었다 떨어진 놈의 머리에 흙과 이물질이 끼었다. 복희씨는 이번에도 픽 웃기만 할 뿐 침묵했다. 표정은 재밌어죽겠다는 얼굴인데 눈은 차갑게 가라 앉아 있었다. 그래. 화난다 이거냐? 사랑하는 애인을 때리는 내가 재수 없겠지. 하지만 나도 화났다. 장 우현이 드라이를 이용해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는 볼썽사납게 변해갔다. 녀석의 머리를 보고 삿대질을 하며 경원이 놈이 배를 움켜쥐고 깔깔댔다. 녀석은 ‘힘내라, 잘한다. 잘 싸운다. 계속해라.’ 하는 영양가 없는 말을 지껄였다. 장우현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놈은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휙 돌려 나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주먹을 뻗어왔다.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서있던 나는 녀석의 꽤나 날카로운 주먹에 맥없이 나가 떨어져 구석에 처박혔다. 몸이 절반으로 접혀졌다. 아프기 보단 쪽팔렸다. 장 우현 새끼가 히죽 웃으며 앞으로 걸어왔다. “ 이거 생각보다 더 약골이었잖아. 멍청한 새끼. 너는 내 상대가 아니야. 어디 가서 권솔친구라고 하지마라. 그 녀석 명성에 금 간다. 그리고 똑똑히 들어. 이 복희는 나 외엔 다른 남자에겐 관심 없어. 천성자체가 그렇게 타고 난 인간이야." 장우현은 무겁게 굳혀있던 가면을 발랄하게 바꿔 복희씨에게 폴짝폴짝 뛰어갔다. 패배의 쓴맛을 삼키기 위해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눈을 감았다. 다들 빨리 꺼져버려라. 당연히 복희씨는 장 우현을 데리고 방이든 밖이든 나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였다. 복희씨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우현은 싸늘하게 지나쳐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장 우현 때문에 또 때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당연히 날아올 그의 주먹이 감감무소식이었다. 은근슬쩍 실눈을 떴다. 그러자 살벌한 표정으로 굳어져 있는 복희씨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여차하면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손을 내려놓았다. “ 뭐, 뭐에요! 왜 왔어요? 내가 장 우현보다 더 많이 맞은 거 안 보여요? 나는 하나도 잘못 없어!” 그는 조용했다. 가만히 굳어있는 그 모습에 울분이 터져 나왔다. “ 나는 절대 안 맞아! 나는 이제 무적이란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자체가 굉장히 서러웠다. 난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 걸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또 울고 있었나 보다. 고개를 돌리는 내 머리를 억지로 붙잡으며 복희씨는 뺨을 어루만졌다. “ 지금보다 더 강해져라.” 복희씨의 태연한 목소리에 전의를 상실했다. 이제 와서 강해지라니. 도대체 뭘. “ 강해지라고요? 어떻게 하면 강해지는 건데요. 싸움을 잘하면 강해집니까? 돈이 많으면 강한 겁니까? 그렇게 하면 복희씨처럼 강해지는 건가요. 그게 정말 강한 사람의 전부라면 나는 영원히 약한 놈으로 살 거예요. “ “ 지금같이 병신처럼 맞으면서 말이냐.” 힘겹게 누르고 있던 인내심이 툭 끊어지며 쌓여 있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어느 순간 나는 복희씨의 멱살을 움켜쥐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 뭐에요! 왜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사람 이렇게 흔들어 놔요! 당신이 뭔데요! 왜 내 인생에 갑자기 날아와서 날 아프게 하냔 말이에요! 날 왜 비참하게 만들어요. 장 우현 같은 놈한테 왜 그런 소리나 듣게 만들어요! “ 그는 계속 볼을 문질러주는 것 외엔 말도,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 왜 나를 약자로 만드는 겁니까!” 확실히 서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흘러넘치는 눈물을 한 손으로 쓱 닦으며 말을 이었다. “ 나를 무시하는 게 재밌습니까?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게 유쾌합니까? 나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 행복합니까? 나는 재밌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불행하단 말입니다! “ 여전히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복희씨의 싸늘한 모습에 깊은 장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끝이 보이질 않았다. 자신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면서도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에서 원하는 순간, 시간에 따라 감정을 지워버리는 대단한 재주를 가졌다.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아니면 신기하단 얼굴로 나와 복희씨를 보고 있었다. 내가 복희씨에게 마음껏 대든다는 것에 놀라워하는 건지 아니면 복희씨가 잠자코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는 건지 확실히 감이오지는 않았다. “ 나도 이제 복희씨에게 휘둘리지 않을 겁니다. 아니, 이제 복희씨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야! 너는 천하의 나쁜 놈이니까. 나쁜 놈에겐 장난 없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용기내서 말한 사람이 맥 빠지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보였다. 그리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거의 낚아채다 시피 손수건을 뺏어 그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대포알처럼 코를 풀어댔다. 웃고 있던 복희씨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때 갑자기 복희씨는 양복 주머니를 뒤적여 어이없게도 노란 병아리 두 마리를 꺼내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도대체 이 상황에 맞는 짓거리냐. 힘 빠지게 울고불고 화낸 사람 무안하게 그는 병아리 주둥이를 엄지손톱으로 쿡쿡 찌르며 천진하게 웃었다. “ 오다가 천원에 두 마리 샀다. 가져라.” “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이게 뭐야, 진짜! 사람 기운 빠지게 또 장난이나 치자 이겁니까!” “ 너는 너무 말랐어.” “ 그게 병아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빨리 가져가요!” 복희씨는 도망가려 바동바동 거리는 병아리 두 마리를 무릎에서 떼어내 손에 꼭 쥐어주며 말했다. “ 키워서 닭 되면 삼계탕이나 끓여 먹어라.” …야, 이 미친 자식아. 그러면 애초에 처음부터 닭고기를 사오면 되지 왜 병아리를 사오고 지랄이야. “ 그렇다고 병아리를 사오면 어떡……” 복희씨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 키워서 잡아먹는 재미가 있잖아.” 그 재미야 너나 있겠지. 복희씨는 뿌듯하게 웃으며 병아리를 음흉하게 훑어보았다. “ 죽이지 말고 잘 키우고 있어라. 닭 되기 전에 집에 갈게.” 처음에 그 말이 무슨 뜻 인지 몰랐다. 이 복희씨는 정확히 5일이 지난, 새벽 4시 30분경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잡고 싶어서 안달 난 박태열씨의 목에 개목걸이 줄을 단단히 부여잡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복희씨에 의해 세기의 카사노바 박태열씨를 만나게 되었다. 가물가물했던 눈이 번쩍 떠지며 단박에 졸음이 달아났다. 그러자 이번엔 가만히 있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인생이 산 넘어 산이라고 험난하다지만 누가 보태줘도 아쉬울 이런 집에 도둑이라니! 빌어먹을! 침착하자. 제발, 침착해! 나는 침대에서 엉기적엉기적 내려와 주위를 살폈다. 몇 시쯤 되었을까. 밖이 어두운걸 봐선 아직 7시도 안 되었을 것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방바닥을 살금살금 기어 다니며 꿈틀대는 그림자를 피해 형광등 스위치를 켜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방문 앞에 어슬렁거리던 검은 그림자는 나보다 훨씬 민첩했다. 놈은 허공에 어색하게 들려있는 내 손등을 쳐대고 직접 스위치를 눌렀다. 띠-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몇 번 깜빡이다 환하게 켜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대 밑에 떨어져 있던 베개를 가져와 눈 밑을 가렸다. 왠지 무기라도 있으면 더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 여차하면 도둑놈에게 목숨만은 살려 달라 진지하게 부탁할 작정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 나다.” 익숙하게 들려오는 낮은 저음의 짜증 섞인 목소리. 검은 그림자는 이 복희씨였다. 그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날 잠시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 어이. 거기서 뭐 하냐, 쇼 하냐.” “ 지금이 몇 신줄 알기나 하세요? 아니지, 여긴 왜 왔어요! 그것도 이 새벽에! 미쳤어요?” 복희씨는 목을 조이는 와이셔츠 단추를 푸리며 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그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향했다. “ 며칠 전부터 갈수록 말이 짧아진다?” “ 복희씨가 나라면 당신한테 좋은 말이 나올 수 있겠어요!” 그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 응.” “ 양심 없는 인간! 지금 당장 이 방에서 나가요! 빨리요!” 안 본 사이에 넉살만 늘었나, 그는 눈썹을 꿈틀거린 것 외에 아무 말 없이 히죽 웃기만 했다. 하긴 그나마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할 말 없겠지, 라고 생각하고 그를 올려다보는데 복희씨가 날 무섭게 노려보며 할 말을 찾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하지만 그는 끝내 방을 나가라는 내 말에 마땅히 변명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복희씨는 눈에 띄게 화가 났다. 은근히 보면 유치하다니까. 복희씨는 뜬금없이 손목을 허공에 치켜 올렸다. 그의 손에 개 줄이 감겨져 있었다. 결국 복희씨는 화풀이 대상으로 손톱이 터져라 꽉 쥐고 있던 개 목걸이 줄을 정신없이 잡아당기며 울분을 토했다. 이런 꼬질꼬질한 단칸방에 무슨 놈에 개를 키운다고. “ 여기서는 개 못 키우는데요.” “ 누가 여기서 키운데?” “ 그럼요.” “ 집까지 너무 멀어서 잠시 데려온 거다. 신경 쓸 필요 없다.” “ 어떤 갠데요?” 복희씨가 히죽 웃으며 개 줄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 개새끼 중에 왕 개새끼지. 말로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잡종인 개새끼지.” 복희씨와 같은 종류인가 보군요. 복희씨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티는 개새끼 중에 개새끼 때문에 평상시부터 안 좋았던 인상이 노골적으로 나빠졌다. 그는 훅하고 숨을 들이 마신 뒤 무자비 한 팔 힘을 내세워 방 문 앞에 서성이던 개 모가지를 순식간에 방안으로 끌어당겼다. 대체로 무식한 놈들이 힘이 센 법이었다. 우당탕탕 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아슬아슬 했던 문 한 짝이 가볍게 뜯겨져 나가며 벌어진 문틈 사이로 거대한 덩치의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일반적인 개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건 흡사 사람 같잖아! 아니다. 저건 정말 사람이잖아! 방 한복판까지 끌려 들어온 젊은 남자는 추리닝 바지만 덜렁 입은 맨 몸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다시 방바닥에 엎드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불쌍한 척 하는 건가.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복희씨가 개 줄을 방바닥에 팽개치고 남자 앞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는 남자의 맨 등을 거칠게 발로 밟으며 행동과 다르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 아픈 척 연기그만하고 일어나라. 개새끼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예전 그 사내들처럼 죽이고, 때리고, 고문하려고 데려온 건가. 나는 서둘러 침대 귀퉁이로 기어가 열심히 몸을 숨겼다.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그나마 불빛이 비치지 않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만에 하나 복희씨가 폭력을 휘두른다면 당장이라도 녀석들을 깨우러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최대한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복희씨는 입고 있던 검은색 코트와 가죽장갑을 차례대로 벗어 방바닥에 툭툭 던져놓았다. “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덜 맞았다 이거냐?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복희씨는 입 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차가운 미소를 거두기가 무섭게 엎드려 있던 남자의 척추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꿈틀꿈틀. 파닥파닥. 일부러 은 듯이 널브러져 있던 사내의 몸이 크게 튀어 올랐다가 사그라졌다. 복희씨를 발로 그의 옆구리를 툭툭 때리다 방심한 사이 불시에 걷어차고 또 걷어찼다. 거친 발길질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죽은 척하는 연기에 한계를 느낀 남자가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 이 복희야. 그, 그만! 나 안 죽었다! 이제 그만 해라, 인마!” 복희씨의 이름을 복희야 라고 듣는 것도 또 색다른 기분이 들게 했다. 그나저나 친구? 뭐, 친구라니 그런대로 안심이다. 적어도 피를 볼일은 없을 테니까. “ 오랜만이다. 네 덕에 2년 동안 잘 썩히다 나왔다.” …아니다. 오해였다. 친구기 때문에 더 필을 볼 수도 있게 되었다. 남자는 웅크려 누어있는 상태에서 꼬리뼈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 어이, 친구. 그건 오해야! 오해. 누가 너랑 나를 이간질 하는 거라고! 내가 한건 오로지…….” 복희씨가 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시간이 지나자 점차 무시무시해져갔다. “ 우리 창고위치를 검사 측에 흘려보낸 것도 너는 오해라고 하는 거냐.” 남자가 번개 맞은 속도로 몸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그는 어느새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 오, 복희야! 그건 절대 오해다! 나도 사람인데 친구한테 왜 그런 몰상식한 짓거리를 하겠냐! 우리 사이를 시기와 질투하는 무리들의 개수작이야. 속으면 안 된다! 절대로! “ “ 염병. 개새끼라 잘은 짖네.” “ 하, 진짜 돌겠다. 기다려봐. 내가 우리 사이를 이간질 한 놈을 당장 잡아 올 테니까!” 그는 말을 하는 도중 슬금슬금 움직이다 거의 끝마칠 때가 되어선 씩씩대며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제 3자인 내 눈에도 확연이 느껴졌다. 상황을 어물쩍 넘겨 자리를 피해보려는 얄팍한 속셈을. 잔머리에 있어서 거의 통달 수준에 이른 복희씨였다. 그는 당연히 속지 않았다. 단순히 속아 넘어가지 않은 건 물론 한쪽 발을 걸어 사내의 중심을 흐트러뜨렸다. 본인의 뜻대로라면 밖으로 나가야 할 몸을 방바닥에 제대로 들이받은 상황에 맞닥뜨린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복희씨는 코웃음을 치며 사내의 뒤통수를 거칠게 움켜잡으며 으르렁거렸다. “ 2년 동안 주머니 꽤나 짭짤했지? 좋은 말로 할 때 내 돈 내놔라. 시발 새끼야.” 지금도 분명히 좋은 말로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점점 극으로 치닫는 복희씨의 표정을 봐선 사람하나 잡는 걸 떠나 산송장이라도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돈 문제라면 그는 더 잔인해 질 수 있겠단 생각에 이르자 나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 박 태열이 나 집어넣어 놓고 아주 살맛나셨겠네.” “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살맛이 나긴 뭘 살맛이 나! 내가 너 없는 동안 얼마나 슬퍼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다.” 그때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관찰하던 나는 복희씨에게 고개를 비틀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는 통에 소스라치게 놀라 앉은 자세에서 뒷걸음질 쳤다. 뭐야. 저 놈이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개 구진 얼굴에 가만히 있어도 움푹 파여 있는 작은 보조개. 작은 얼굴에 하얀 피부까지. 불법시술의 영향인지 아니면 여러모로 관리를 잘해온 덕분인지 나이답지 않게 완벽한 동안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한 이미지에 꽤나 귀여운 인상이었다. …너도 왕년에 여자 좀 울렸겠구나.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남자의 괜찮다 싶은 얼굴에 황홀해져 있자 진작부터 나를 보고 있던 박태열씨로 추정되는 (복희씨가 그렇게 불러서 알고 있음) 놈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뭐하는 거야. 어떤 개수작이냐. 순간 나도 모르게 놈의 행동을 자연스레 따라했다. 그때 알았다. 놈의 동안적인 외모에 홀려 나도 모르게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박태열씨는 입 닫으라는 뜻으로 입술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따라하다니. 졸라 쪽팔렸다. 축축이 젖어 있는 입술과 턱 밑에 흥건히 젖어있는 침을 훔치며 자숙의 시간으로 고개를 푹 숙이자 박태열의 경박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얌전히 있던 복희씨의 다리가 그의 얼굴로 올라갔다. 얍삽한 박 태열은 복희씨의 다리를 피해 멀찌감치 떨어져 나와 벽에 등을 기대었다. “ 이야, 절대불변의 법칙 이 복희도 시간 앞엔 어쩔 수 없구만. 안본사이에 취향이 몰라보게 많이 바뀌었다?” 아직 제자리에 내려오지 않던 복희씨의 다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이없음을 넘어선 황당함이 그의 얼굴에 번져 오르고 있었다. “ 그만해라.” “ 끈적끈적 야하게 생긴 놈이 취향 아니었냐? 나야 저런 타입 보면 좋아 죽겠다만 너는 유별나게 싫어했지, 아마.” 복희씨가 나를 돌아보고 한 마디 하려다 멈칫했다. 끈적끈적 야하게 생긴 놈 하니 제일먼저 떠오른 새끼가 하나 있었다. ……장 우현. “ 얌전히 입 안 닥칠 예정이면 미리 말해라. 몸 좀 풀어두게.” “ 생각보다 귀엽게 생겼다?” “ 그만하라고 했다.” 박태열씨가 이제 대놓고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민망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 어이, 머리 숙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봐. 근데 어째 보면 볼수록 도라에몽을 좀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식은 찐빵 같기도 하고 그러네.” 도라에몽? 내가 그렇게 대가리가 큰가. 나는 은근슬쩍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재 보았다. 그다지 크다고는 못 느꼈는데. 그때 나를 노골적으로 살펴보던 박태열씨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나뒹굴더니 “쟤 좀 봐, 쟤 좀 봐.’ 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방바닥에 구겨져 있던 코트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던 복희씨가 일어나 박태열씨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박태열씨가 연신 컥컥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완전히 웃음을 거둔 건 아니었다. 때리는 사람이나 맞으면서도 웃는 사람이나 내가 봤을 땐 도토리 키 재기였다. “ 화내는 거 보니까 역시 소문이 아니었어.” 복희씨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박태열씨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박태열씨가 윽 하는 비명을 지르다 말고 놀랍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의왼데.” 박태열씨는 말을 하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참기 위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복희씨의 얼굴이 폭파직전의 시한폭탄처럼 보글보글 연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복희씨가 인상을 찌푸리면 찌푸릴수록 박태열씨의 웃음소리는 커져만 갔다. “ 이 복희야. 네 이미지를 생각해서 특별히 크게 소문은 안 내마. 나 그거는 특별히 약속할 수 있다.” 웃고 있는 박태열씨의 정수리에 대고 복희씨는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의 상스러운 말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이 자칫 잘못 들었다간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평생을 암울하게 살고도 남을 만큼의 저급한 욕이었다. 우리 생활에 알게 모르게 숨어들어 있던 평범한 욕들이 복희씨 입에서 새롭게 재탄생되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저주의 시간들이 얼마나 길었는지 나도 모르게 쭈그리고 앉아 병든 닭처럼 꾸벅 꾸벅 졸 정도였다. 바에 나가고 나서부터 낮과 밤이 바뀐 생활 덕에 눈에 띄게 아침잠이 많아져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더군다나 해가 뜰 생각도 않는 새벽녘에 이런 상황은 지옥이다! 나도 모르게 복희씨의 기막힌 욕설을 자장가로 들으며 꼬박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릎을 거침없이 건드려 대는 험악한 발길질에 어렴풋이 눈이 떠졌다. 가물가물한 눈꺼풀을 느릿하게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자 새치름한 눈으로 이 복희씨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 빨리 일어나라. 저 새끼 옆에서 잠들면 위험하다.” “ 네?” “ 만약 자고 있으면 갈비뼈 하나 빼서 대가리에 꽂아놓는다. 알았냐.” 무슨 말을 해도 저 딴 식이다. 박태열씨는 세상모르게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아대며 꿈나라에 빠져있는 사태였다. 처음 본 사람 집에 와서 대단한 비위였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복희씨는 부가 설명 없이 달랑 ‘갈비뼈와 대가리를 기억해라.’ 한 마디를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상한 남자를 데려다 놓고 갑자기 나가버리면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복희씨가 사라지자 잠든 줄 알았던 박태열씨가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토끼처럼 깡충깡충 방을 뛰어다녔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완전 미친놈이 따로 없구나. “ 안녕, 자기. 자기가 김 계진이지?” …저 놈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미심쩍은 듯 눈을 깜빡이자 박태열씨가 눈병난 놈처럼 요란스럽게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 그런 표정 할 필요 없어. 자기는 이미 우리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니까. 물론 이 복희새끼 이거라는 이유 때문이긴 하지만.” 박태열씨가 새끼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발광을 했다. 그걸 보고 있는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 에이, 괜찮아. 빼지마.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어도 쪽팔릴 일도 아니잖아. 요새 내 인기가 팍 솟구치는 바람에 이 복희가 상대적으로 주춤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런대로 잘 나가는 놈이잖아.” “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 솔직히 외모는 모르겠지만 종합적으로 내가 더 낫지 않아? 내 자랑 같아서 이런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나 어디 가서 인물 빠진다는 말은 못 들어봤거든.”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이제 대놓고 자랑 질이네. 가만히 있다간 밤새도록 들어도 모자랄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박태열씨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 아니요! 복희씨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요! 복희씨는 장 우현이 있으니까….” 어물쩍 뒷말을 흐리자 박태열씨가 자랑을 멈추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웃을 상황 아닌데 미친 듯 웃기에 과감히 도전해 최선을 다했다. 급기야 배꼽을 잡고 방바닥을 나뒹굴며 웃어댔다. “ 푸-하하하하. 누가 그래?”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 뭐, 어때.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 이 복희씨가요.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박태열씨가 손등을 입을 가리며 늘어지게 하품을 찍찍 날렸다. “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 박태열씨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풍 걸렸나. 하고 의심스럽게 보자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 하여튼 복희새끼 어렸을 때부터 비열한 짓으론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니까. 그 버릇 개주나? 환갑 지나도 사기치고 돌아다니려면 치매는 안 걸릴 거야. 분명해. “ 나를 보는 박태열씨의 눈빛에 여전히 재밌어 하는 표정이 걸렸다. 보면 볼수록 어려보이는 얼굴에 적응이 안 된다. 스치듯 보면 이십대 초반, 자세히 봐도 어째 이십대 초반이다. 저런 얼굴에 29살이라니. 차라리 내가 형이라고 하면 믿을 판이었다. 박태열씨가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두 다리를 파닥 파닥대며 복희씨가 없는 틈에 자기 내키는 대로 귀여운 척을 했다. “ 아아, 도저히 못 참겠다. 배고파 죽겠어! 이봐, 자기. 남은 밥 없어? 없으면 라면이라도 좋은데. 오늘아침부터 하루 종일 굶었거든.” 내가 머쓱하게 웃자 그는 급조된 처량한 얼굴을 무기삼아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동정심을 유발해 쐐기를 박으려 했다. “ 오늘아침 섬진강휴게소에서 이 복희한테 잡히고 한 끼도 못 먹었어. 나 좀 봐줘! 먹고 죽을 만큼 썩거나 곪은 것만 아니면 아무거나 좋아. 제발! 입에 풀칠할 것 좀 줘.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이야. “ 아까부터 느꼈지만 진짜 넉살 한번 좋네. 그것도 대단한 재주군요. …복희씨의 주먹에 머리를 맞고도 굴하지 않고 실실댈 때부터 알아봤다만. 사실 아주 많이 귀찮긴 하지만 아침부터 굶었다는 사람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 같기에 어슬렁어슬렁 부엌문을 열었다. 방바닥에 거미처럼 달라붙어 있던 박태열씨가 조르르 쫒아와 부엌 문턱에 맨발로 올라섰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그는 턱 밑에 해바라기처럼 손바닥을 받쳐 마음 놓고 귀여운 척을 하며 배고픔을 잊으려 했다. 쟤는 또 왜 저럴까. 너무 배가고파서 염치가 없어진 건가. 나는 질척이는 플라스틱 슬리퍼를 질질 끌고 싱크대 서랍에서 라면봉지를 뜯으며 중얼거렸다. “ 라면 몇 개 끓여줄까요?” “ 세 개! 찬밥은? 자고로 라면은 밥 말아 먹는 게 최고지. 그 생각하니까 밥 없다고 하면 나 완전 슬퍼질 거 같아.” 살짝 고개를 돌리자 박태열씨가 코를 찡긋하며 밥통을 향해 무한한 사랑의 총알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 삐뽀삐뽀! 코드 꼽혀 있는 걸 보면 있다, 밥! 역시 한국 사람은 밥이 최고야!” 박태열씨는 맨발 그대로 부엌으로 우당탕탕 달려와 한 마리 짐승처럼 밥통 뚜껑을 열어젖혔다. 나는 그의 숙성되지 않은 행동에 더럭 겁에 질렸다. 자연스럽게 한 발짝 물러섰다. 저건 넉살이 아니었다. 얼굴에 철가면을 썼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한참동안 부엌을 들쑤시고 다닌 끝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찾아 찌그러진 철 밥상 위에 밥통 올려들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복희씨랑 친구라면서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 개성이 강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 자기! 대충 끓여서 빨리 가져와! 난 지금 개밥이라도 맛있게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박태열씨가 지나간 자리마다 시커먼 발자국이 생겼다. 나는 저 자국을 지우려면 또 다시 대청소를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진지한 고민을 하며 라면 세 개에 계란두개를 풀어 거대한 냄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단순히 잘 먹는다 한 마디로 단정 짓기엔 역부족이었다. 라면 솥단지를 상에 올려놓기가 무섭게 며칠 굶은 삽살개처럼 달려들어 신들린 젓가락질을 하는 박태열씨는 비전문가가 봐도 심각하게 이성을 잃어 보였다. 사람을 보고 기가 질렸다는 표현을 해도 된다면 박태열씨를 보고 있는 지금 내가 그랬다. 나는 거의 넋을 놓고 있다 박태열씨의 맹렬한 손놀림에 뻘쭘해진 젓가락과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상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 이건 뭐. 하루 굶은 사람 같지 않은데요. 라면 처음 먹어보는 사람 같네요.” 여전히 라면냄비에 꼴아 박은 상태에서 박태열씨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 응. 내가 그랬잖아.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고.” “ 그래도 그쪽은 조금 심한 거 같아요.” 박태열씨의 머리가 반쯤 들어 올려졌다.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동물에서 인간의 눈동자로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그는 젓가락을 가로로 세워서 면발을 들어 올리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 “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람을 하루 종일 굶길 수가 있지?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만 진짜 인정머리 없는 새낀 건 알아줘야 돼!” “ 다 먹고 말씀하세요. 면발이 방바닥에 다 튀잖아요!” “ 미안. 아-! 그런데 입을 얌전히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 어떻게 굶은 놈 앞에서 호두과자를 먹을 수 있지? 그런 형벌에 가까운 고문을 하는 놈은 그 자식밖에 없어!” “ 네. 알았어요. 그러니까 제발 다 먹고 말씀하세요.” 박태열씨가 얌전히 머리를 흔들며 잠시 느슨해졌던 젓가락질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맨손으로 단무지를 집어 거의 씹지 않고 목구멍으로 꿀꺽 잘도 삼켰다. 저런 겁 대가리 없는 짓거리를 걸 보면 축복받은 소화기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 맛있어요?” 박태열씨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무조건 순종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 응! 맛있어. 맛있어.” “ 그럼요. 맛있는 기념으로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응! 말해. 라면 값 대신으로 치고.” 나는 머뭇거리다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 장 우현이라고 아세요?” 박태열씨의 고개가 단박에 치켜 올려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살펴봤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점점 발그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박태열씨의 입 주위에 튀어있는 라면국물 때문에 크게 꿀릴 건 없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러놓고 입을 다물자 박태열씨는 숟가락으로 상다리를 두드리며 ‘집중!’ 하고 소리쳤다. 나는 그제야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잘-알지. 우현이.” 박태열씨는 라면국물에 열심히 찬밥을 말면서도 나를 훑어보는 이중적인 일을 전혀 무리 없이 해내고 있었다. “ 어떤 녀석이에요?” 질문한 사람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빠른 대답이 날아들었다. “ 너의 이 복희씨가 한때 죽고 못 살았던 새끼. 그렇게 표현하면 되려나.” 박태열씨는 이제 숟가락으로 성에 안차는지 밥통 속에 있던 국자를 꺼내 밥을 퍼먹으며 성의 없이 중얼거렸다. “ 이젠 걱정 마.”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내가 우현이랑 제대로 놀아줬거든.” “ 네?” 박태열씨의 심술궂은 눈이 반짝거렸지만 웬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듯 했다. 나는 박태열씨가 무슨 할까 걱정이 되어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박태열씨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 내가 우현이랑 사 겼거든. 아! 녀석이랑 헤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남이 봤을 땐 뺏은 게 되는 건가. 그럼 뭐, 뺏은 거겠지.” 방문을 뚫고 튕겨져 나갈 만큼 놀라 자빠지겠다. 너무 놀라서 오히려 조바심이 생겼다. 나는 지금쯤 얼굴에 고스란히 들어 나있을 속마음을 들킬까봐 초조해졌다. 슬쩍 올려다본 박태열의 시선이 너무 의식되어 난 살며시 눈길을 돌렸다. 복희씨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자, 다짐 하면서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도 모르게 나서게 되고 궁금해지고 묻게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제대로 알고 나서 마음은 정리해도 늦지 않을 거야. 라는 그런 식으로 나를 위로했다. “ 친구라고 아니에요? 친구 애인을 막 뺏어도 되는 거예요?” 박태열의 얼굴이 희한하게 변했다.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해진 표정을 띠다 얼만 가지 않아 그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쪽쪽 핥더니 결국엔 방바닥을 대굴대굴 굴러다니며 어마어마하게 큰 웃음을 터트렸다. 무안해진 마음에 나는 다급해졌다. “ 왜 웃어요? 뭐가 그렇게 웃겨요!” 박태열씨는 웃음을 참기위해 배를 아프지 않게 꾹꾹 누르며 다른 손으로 눈 꼬리에 맺힌 눈물 훔치다 또 다시 한참을 웃어댔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복수의 의미로 라면 국물에 말아진 밥을 마시듯 퍼먹었다. 그러자 박태열씨가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내가 들고 있던 냄비를 보물이라도 된 냥 빼앗으며 히죽거렸다. “ 너 진짜 웃기는 애구나. 내가 또 웃긴 거에 환장하는 놈이지.” “ 됐어요. 전 그런 말 듣자고 물어본 게 아니에요.” “ 오-사납게 말하면 또 그것도 나름대로 봐줄만 한데? 이야-그러고 보면 자기는 천의 얼굴이구나.” 박태열씨는 밥통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갑자기 양손으로 내 볼을 덥석 쥐었다. 그러더니 볼을 앞뒤로 흔들며 거의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대는 도라에몽인가, 찐빵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가만히 있으면 찐빵 판박이였는데 볼을 늘리니까 도라에몽에 더 가깝네? 신기하다.” 나는 사납게 고개를 흔들어 그의 손을 떨쳐냈다. 박태열씨는 다시 퍼지는 웃음을 막기 위해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 장난치지 마세요. 그 쪽이 아니어도 저는 이미 심신이 괴로운 사람입니다.” 풀 죽어 말하는 내 꼴이 안쓰러웠는지 박태열씨는 급격히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 자기가 지금 궁금한 게 이 복희가 장 우현이랑 사 겼냐고 묻는다면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응 이라고 대답할게. 이정도 대답이면 라면 값에 적당하지 않아?” 그는 남은 라면 국물을 후루룩 마저 마시고 상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 꽤나 오래갔지, 아마. 근데 의외로 잘 어울리지 않아? 이런 질문은 자기한테 상천가.” 박태열씨는 일부러 놀리는 듯 보이는 유들유들한 목소리를 만들었다. “ 능구렁이 같은 그 속을 누가 알겠나.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도 모르는데 지금 감정이야 나보다 자기가 더 잘 알지 않겠어?” 그가 성마른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덧붙였다. “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그럼 나도 하나만 묻자.” 박태열씨가 급격하게 친밀한 척 하며 몸을 붙여오자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의 진지하게 변한 눈빛에 갑자기 불편해졌다. “ 넌 정말 이복희랑 사귀는 사이냐?” ……뭐라고 대답하는 게 가장 좋을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아니. 아주 잠깐 좋아했다고 말해야 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가 한 말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 제가 조금 좋아했어요.” “ 끝?” “ 네. 끝.” 박태열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친 듯이 박수를 쳤다. “ 죽인다. 잘 됐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자기랑 그 새끼는 안 어울려. 흑과 백이잖아. 하긴 그 새끼가 누굴 좋아할 수가 있는 위인이었나. 이런 말 까진 안 하고 싶었는데 그 놈이 생긴 것처럼 싸가지 없는 걸로 유명했거든. 유치원 때부터 그 재수 없음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해서 중, 고등학교 때는 완전 가시넝쿨이 되었어. 학교폭력의 원흉, 우리학교 범죄의 삼분의 이는 그 놈이 일으키고 다녔다니까. “ 그는 무서운 속도로 말을 이었다. “ 아- 맞다! 고등학교는 잘렸었지. 자기, 참고로 나는 무사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는 것 확실히 체크하고! 왜 잘렸냐면 정학 처먹고 돌아온 놈이 배알이 꼴려서 수업시간에 같은 반 새끼 재떨이로 대가리나 찍찍 깨고 있으니 어느 부모가 가만있겠냐! 그 자식은 그런 놈이야! 대책이 안 선다니까.” “ 네. 상상이 되네요.” 박태열씨는 나의 동조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마지막 스퍼트를 내며 복희씨 뒤 까기에 열을 올렸다. “ 그에 비해 나, 박 태열을 봐봐. 대책 있다 못해 얼마나 아름답게 주먹질을 하는지 보면 자기는 아마 깜짝 놀랄 거다. “ ……아, 그랬구나. 하고 넘어가기엔 이 꺼림칙한 기분은 뭐지. 조금 전부터 등 뒤로 느껴지는 이 한기는 도대체 뭘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방문을 돌아봤다. 빌어먹을. 언제 왔지? 왔으면 왔다고 말이라도 하지 귀신처럼 지키고 서있는 건 또 뭐냐. 한 손에 용도를 의심케 하는 빨강색 형광 테이프를 들고 문턱에 구둣발로 올라서 있는 이 복희씨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라 훅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분노로 먹구름이 드리워진 얼굴에 자르르 살기가 번져있었다. 아마도 박태열씨의 말들을 전부 들은 모양이다. 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친구 욕하기로 유쾌하게 흥분해 있는 박태열씨의 귓가에 속삭였다. “ 저기요. 그래도 그,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뒤, 뒤에.” 시퍼런 멍 자국과 정신없이 엉켜져 있는 핏 자국으로 얼굴이 뭉개져 있는 박태열씨를 생각해 도와주려는 차원에서 연신 ‘뒤에, 뒤에.’ 라고 말하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툭 쳐내고 신들린 속도로 주둥이를 나불댔다. “ 뒤? 자기 화장실 가고 싶냐. 뒤는 뭔 놈의 뒤냐! 계속 들어보라니까. 그 놈하고 내가 알고 지낸지만 이십년이 넘었는데 어찌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지 그런 놈은 애초에 상종하지 않는 게 인생에 좋아.” “ 뒤에요! 제발 뒤 좀 보세요.” “ 뭔 소리야. 내가 일화를 하나 말해줄까? 중학교 땐가 학교를 끝나고 집으로……악!” 결국 참다못한 복희씨는 들고 있던 테이프 뭉치를 배구공이라도 된 것처럼 하늘높이 치켜 올려 박태열씨의 뒤통수를 향해 냅다 집어던졌다. 박태열씨의 머리통에서 덜 익은 배를 두드릴 때 울리는 소리가 딩딩 들려왔다. 뒤늦게 몸을 돌려 복희씨를 확인한 박태열씨는 지극히 계산된 동작으로 양손을 머리에 감싸고 바닥에 들어 누워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 아이고, 시발. 나 죽네, 나 죽어! 맞아주는 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가만히 있었더니 갈수록 지능적으로 때리고 자빠졌네!” 복희씨는 드디어 눈물연기에 돌입한 박태열씨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와 방 한가운데 늘어져 있는 상과 밥통, 라면 국물 따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심했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구부려지기 시작하자 최종적으론 분노한 악마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배고픈 걸까. 내가 건성으로 ‘라면 먹고 싶으세요?’ 하고 묻자 복희씨는 백년 묵은 여우 눈을 하고는 ‘내가? 내가 왜!’ 하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어느새 상다리를 거칠게 들어 올려 이미 열려져 있던 문 사이로 라면냄비, 밥통,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을 등을 차례대로 집어던졌다. 우당탕탕! 마당에 떨어진 철상과 그릇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듣기 싫은 소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산지 얼마 안 된 비싼 밥통정도는 건져야 했기에 나는 잽싸게 마당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복희씨가 불쑥 앞으로 튀어나와 나를 막아섰다. “ 됐어. 가지 마.” “ 못 본 사이에 더 웃겨졌네.” 어안이 벙벙해진 나와 다르게 박태열씨는 히죽히죽 거리며 중얼거렸다. 복희씨는 아무 말 도하지 않았다. 다만 내 어깻죽지를 죽 잡아당겨 침대로 밀쳐놓고 다시 박태열씨에게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낚아채 부엌문과 맞닿은 구석진 곳에 그를 쑤셔 넣었다. 또 왜 저러냐. 나는 그를 조용히 지켜봤다. 복희씨는 기대에 부응하듯 박태열씨의 머리를 맞히고 떨어져 있던 테이프를 어마어마하게 길게 뜯어내 방 가운데 휴전선처럼 하나의 경계를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방이 두 쪽으로 나뉘어 졌다. 테이프의 경계 중심에 앉으며 복희씨를 오른쪽, 왼쪽에 앉아 있는 나와 박태열씨를 번갈아 보며 최대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복희씨의 들짐승 같은 횡포에 쥐구멍만한 방에 어느덧 끝과 끝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게 된 박태열씨와 시에 고개를 들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박태열씨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 이거 완전 특종감인데. 네가 이렇게 유치하게 변할 수도 있다는 걸 너희 애들도 꼭 알아야 하는데. 이거 나만 보고 넘기기엔 영 아쉽네.” “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해라.” 박태열도 두 손을 머리위에 들어 ‘항복! 항복!’ 외치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넉살이 아니라 천성자체가 능글맞게 태어난 놈이었다. 복희씨가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 테이프에서 한 발자국만 넘어 와봐.” 박태열씨가 일부러 놀리는 듯이 물었다. “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데? 나 죽일 거냐?” “ 정 궁금하면 한번 해보던지.” “ 야. 너 지금 되게 어이없는 거 너도 알고 있지?” 복희씨가 사납게 욕을 퍼부으며 박태열씨의 종아리를 거칠게 걷어찼다. “ 너는 지금 그 일만 끝나면 네 똘마니 새끼들한테 제사상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전해둬라.” 박태열씨가 서서히 미소를 거두어들이며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항의하듯 한마디 하려다 복희씨가 몸을 돌리자 주먹을 쥐고 때리는 시늉으로 만족을 했다 나는 라면에 배가 빵빵하게 부르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졸음이 밀려왔다. 아! 진짜 자고 싶다. 잠, 잠! 눈알에서 레이저 빔을 쏘기 일보직전으로 눈싸움을 하는 두 죽마고우의 시선이 흩어져 있는 틈을 타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살금살금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아! 더럽게 따뜻하구나. 눕자마자 미친 듯이 잠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저절로 눈이 감긴다. ……자면 안 되는데. 둘 다 내 쫒고 자야 되는데. 아-. 뭐. 어차피 나가라고 해도 오냐, 그러마 하지도 않을 텐데 그럼 오 분만 자고 일어나서 내쫒자. 나는 그렇게 어차피 써먹지도 못할 다짐을 하며 꼬박 잠이 들었다. “ 으-아아악! 병아리! 병아리! 병아리!”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허공에 팔을 붕붕 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오, 제길! 빌어먹을. 꿈이잖아. 꿈을 얼마나 열정적이게 꿨는지 등과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깨는 천근만근 되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몸은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축 늘어지며 손가락하나 까딱일 힘이 없다. 꿈 한번 꾸고 넉 다운이다. 그나저나 무슨 놈의 꿈도 그딴 식으로 다 꿀 수 있을까. 완전 개꿈이었잖아! 꿈의 내용은 어디 가서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복희씨가 준 병아리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장성한 닭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리 치킨 배달용으로 고객님들의 주문에 부응하기 위해 기름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닭 날개에서 빵가루가 뿜어져 나오며 이 복희씨로 바뀌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 개꿈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밖은 이미 어스름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둑한 안개가 싹 가시진 않은 걸 보면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중턱쯤 되는 시간일 것이다. 꿈속에서 얼마나 요란하게 악을 질러놨는지 목이 텁텁했다. 나는 침대에서 엉기적엉기적 일어나 부엌으로 가기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발에 거치적거리는 무언가로 인해 걸음을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얼굴만 돌리면 바로 부딪칠 수 있는 거리에 비스듬히 누워 소눈깔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이 사람. 정말 더럽게 적응 안 된다. “ 아, 진짜 뭐냐. 놀랐잖아요! 무슨 저승사자도 아니고 기척 하나 없이 우두커니 보고 있는 게 어디 있어요!” 복희씨는 그제야 팔을 머리에 베고 일자로 평평하게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모빌을 발등으로 장난스럽게 툭툭 걷어찼다. 그러자 천사의 발끝에서 다-라라라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래서 지금 네가 감히 나한테 대드는 거냐?” “ 대드는 게 아니라 말이 그렇다 이거죠! 그리고 사람이 자고 있을 때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아닙니다! 실례에요. 그런 것도 모릅니까?” “ 그런 눈이 어떤 눈인데?” “ 사람을 잡아먹을 눈이요! 걸리면 죽는다, 하는 그런 눈이죠! 아까 그런 눈으로 노려봤다고요. 그 쪽이요!” “ 원래부터 찢어진 눈을 그럼 일부러 늘리고 다녀야 되냐.” “ 제발 벽보고 이야기 하는 기분 들게 하지 마세요. 제 말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니, 말을 말죠.” “ 그거 좋지.” 진짜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아이고, 천불이야. 답답해서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나와 대조적이게 복희씨는 상당히 침착했고 눈가에 웃음기까지 번지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 모습에 한줄기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인상을 써봤자 복희씨의 승리로 굳혀지는 꼴이 되는 것이기에 나름 분노를 절제하며 나를 다스렸다. “ 저기 말이에요.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예요?” 혹시 잠꼬대를 듣지 않았을까 해서 물었다. 복희씨가 장난스러운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네가 잠들고 10분 후부터였나. 잘은 기억 안 난다. 근데 그런 건 왜 묻냐.” …병아리-닭-치킨-복희씨로 이어지는 거지같은 잠꼬대를 들었을 확률 99.9999% 육박. 지금 당장 뛰쳐나가 세숫물에 코 박고 죽고만 싶다. “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내가 하는 말 들…들었어요?” “ 어떤 거.” “ 그 있잖아요. 내가자면서 중얼거리던 말. 그거 다 잠꼬대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 누가 뭐라고 했냐. 왜 혼자 지랄이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계속 히죽히죽 웃고 있는 폼이 아무래도 수상한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확실히 들었다면 그냥 넘어갈 복희씨도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은 안심하고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등 뒤에서 복희씨의 오리지널 낄낄거림이 들려왔다. “ 병아리! 병아리! 치킨! 치킨! 어? 복희씨! 복희씨! 뭐, 이런 거라면 질리게 들었지.” 나는 당장 그에게 달려가 마음 같아선 조잘대는 입술을 잡아뜯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진 못하고 애꿎은 내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 사기꾼! 처음부터 들었다고 순순히 말하면 어디가 덧난답니까?” 복희씨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등 뒤에 베개를 받히며 비스듬하게 누웠다. “ 내가 언제 안 들었다고 했냐. 왜 혼자 지랄이냐고 했지.” 시발. 저놈의 얄미운 주둥아리는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못 고칠 꺼다. 사람이 무슨 말만 하면 죄다 농담으로 받아넘기든지 아니면 은근슬쩍 말장난이나 치고 자빠졌다. 눈을 흘기며 복희씨를 최대한 매섭게 노려봤다. 불퉁하게 튀어나온 바지주머니에서 차키와 지갑을 꺼내고 있던 복희씨가 나를 힐끔 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깔깔깔 웃어댔다. “ 날 놀리는 게 나잇값도 못하고 그런 식으로 낄낄거릴 만큼 재밌어 죽겠어요?” “ 몰랐는데 생각보다 재밌네.” “ 나쁜 놈.” 고작 내가 한다는 말은 나쁜 놈이 전부였으나 이번엔 그 한마디로 끝내지 않고 재앙을 불러 올수 있는 큰 반박거리 찾고 싶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의미 없이 방안을 훑어보다 복희씨를 제대로 한방먹일 만한 것을 발견했다.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인생을 살다보면 그 말의 참뜻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이 그랬다. 나는 서둘러 냉장고 구석진 곳으로 달려갔다. 분해서 울먹이던 놈이 갑자기 방바닥을 달려 다니자 궁금하기도 했겠지. 부스럭부스럭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복희씨가 몸을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은 것이다. 나는 세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칼자국에 반으로 갈라져 있는 개 줄 손잡이를 집어 올리며 우렁차게 말했다. “ 시간 있으면 박태열씨나 잘 좀 감시하지 그러셨어요. 또 도망갔네요.” 역시 직방이었다. 복희씨는 내 손에 들린 개 줄을 거칠게 낚아채 구겨진 옷을 펴지도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두 놈들이 차례대로 하는 짓들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다. 그 놈에 그 친구란 말이 뻥이 아닌 모양이다. 아침 7시 45분 35초를 지나가고 있을 무렵. 살아생전 처음으로 비장해진 이 경원이 굵직하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권솔에게 선전포고했다. “ 씨발 권솔, 잘 들어라. 졸라 진지하게 말 하는 거다. 나 저 새끼랑 놀기 싫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저걸 데려왔는지 모르겠다만, 오늘 이후로 다신 데려 오지마라. 알았냐?”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사람 코앞에 삿대질을 하며 필요이상의 배짱을 발휘하는 이 경원처럼 싸가지 없이 할 생각은 없었지만. “ 몰라. 따라 온다고 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경원이 놈의 비장한 목소리에 턱없이 빈약한 솔이 새끼의 뚱한 대답이 들려왔다. 살아오면서 질리게 들어온 놈들의 퉁명스러운 대화는 이른 아침부터 지쳐있는 내 관심을 이끌어내기엔 졸라 역부족이었다. 내 초점은 새롭게 등장한 뉴 페이스에게 고정되고 있었다. 녀석들의 멸시와 천대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노릇하게 익어가는 삼겹살을 상추위에 올려놓기가 무섭게 주둥이에 몰아넣고 있는 복신 군은 자신만의 특별한 개성으로 내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 새벽에 너도 참 무던한 위장을 가지고 있구나. 그래도 눈치는 있었던지 복신 군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에 살짝 고개를 들어 화답을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한 손에 쌈을 놓지 않는 집중력까지 발휘해 녀석들의 고기에 대한 집념에 불을 집혔다. “ 절에 있으면서 고기를 못 먹어봐서 그래. 오랜만에 먹으니까 진짜 꿀맛이다.” 그랬구나, 쯧쯧. 6년 동안 절에 갇혀 있었으면 너도 참 고생이다. 측은한 마음에 다 익은 고기 몇 개를 쥐고 있던 상추위에 살포시 올려주자 복신군의 눈이 화사하게 밝아졌다. 애인이라는 권솔은 자기 먹는대만 열중해서 그가 쌈장 찍은 고추를 콧구멍에 찔러 넣든지 마늘을 먹다가 혀를 씹어 피를 흘리던지 신경도 쓰지 않으니 특별히 우리 집에 온 기념 하에 내가 챙겨 주겠다. 나는 도대체 왜 사귀는지 의문이 드는 정신병자 같은 두 커플 사이에 앉아 꾸역꾸역 서걱서걱 돌덩이 같은 밥만 먹었다. 어찌 된 일인지 오늘따라 더럽게 밥맛이 없구나. 밥알을 깨작깨작 대는 날 보고 경원이 놈이 등을 팍 후려치며 ‘팍팍 좀 퍼서 먹어라! 새끼야.’ 하고 핀잔을 줬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오늘만 그냥 눈감아주기로 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재미가 없어진 경원이 새끼는 부루퉁하게 변해서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른 녀석들에겐 뭐 재미있을 꼬투리 없나 하이에나처럼 살피다 기어코 무언가 발견했다. 놈은 웬일인지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쫄면을 퍼먹느라 진땀을 빼는 지만이 새끼의 귓불을 죽죽 잡아당겼다. “ 애 들어섰냐. 왜 먹으라는 고기는 안 처먹고 싼 쫄면만 처먹고 지랄이냐. 저 새끼들이 고기 다 먹기 전에 빨리 안 먹을래?” “ 오늘따라 매콤한 것이 쫄면이 콕콕 땅기는데.” “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했다. 싼 거 내려놓고 비싼 거 먹어.” 녀석은 주위를 살피며 지만 놈에게 귓속말로 소곤소곤 거렸다. “ 권솔 왼쪽 다리 밑에 봉지보이냐. 거기에 육회 있다. 몰래 먹어라. 병신처럼 들키지 말고. 알았지?” “ 육회? 나 육회 좋아! 어디? 어디!” “ 야! 멍청아.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들킨단 말이야. 권솔이 육회귀신인 거 모르냐? 쉿! 조용, 조용.” 이것들이 진짜 놀고들 있네. 자다가 한 손으로 소도 때려잡을 김 지만을 보며 이경원은 고기를 못 먹여 안달이 났다. 녀석의 행동은 대부분 마땅한 이유 없이 무턱대고 충동에 의한 것들이 많았지만 오늘만큼은 녀석이 이런 행동에 이유가 있었다. 정육점에 가서 고기를 살 때 녀석이 처음으로 돈을 많이 보탠 것이다. 장을 보러가거나 슈퍼에 갈 때는 항상 배가 아프거나, 빨래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청소를 한다는 이유로 시간을 벌이며 끝내 돈을 내놓지 않던 놈치고는 칭찬할만한 일이었다. 지금 녀석에겐 투자한 만큼 본전을 뽑아야 하는 절대적인 위기에 봉해있었다. 육회를 먼저 먹어라, 쫄면부터 먹겠다. 하는 덜떨어진 실랑이 벌이는 두 사람의 사랑싸움을 싹둑 자르며 복신 군이 갑자기 검은 봉지를 들어올렸다. 경원이 놈이 말하던 그 봉지였다. “ 여기 육회 있던데. 내가 이거 먹어도 될까.” 우리는 각기 다른 이유로 침묵했다. 그러자 이리조리 눈치를 살피던 복신 군이 주먹을 불끈 쥐고 우는 소리를 했다. “ 아임 헝가리! 헝가리!” 분위기는 극으로 치달았다. 차갑게 식은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유일한 인간, 이복신군만이 열심히 나불댔다. “ 헝가리라고. 너희들 혹시 영어로 하니까 못 알아들은 거냐?” 그는 기름기에 번들번들한 손바닥을 휴지로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엔 어느새 동정심과 안타까움이 내재되어 있었다. “ 내가 너희들 보다 좀 많이 안다는 이유로 거리감 따위는 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에 비해 크게 잘난 건 없어. 가방끈이 길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리고 헝가리라는 말은 배고프다 이 뜻이야. 이참에 알아두면 나쁠 건 없겠지. 헝가리! 헝가리! 자, 따라해 봐.” 그는 코로 훗훗 웃으며 ‘못 배운 것들과 상종 못하겠네.’ 하고 덧붙였다. 저 복구 안 되는 돌대가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만이 놈이랑 경원이 새끼 역시 일부러 못들은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어느 개가 짖고 있냐는 듯이 싹 무시하며 쫄면을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분위기를 수습할 사람도 복신 군의 입을 닥치게 만들 사람도 권솔 밖에 없었다. 슬쩍 옆구리를 찌르자 녀석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집어던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이 새끼야! 차라리 육회 너 다 처먹고 영원히 헝가리로 꺼져라.” 복신 군이 울상을 지었다. 그는 솔이 새끼의 팔을 잡아 붕붕 흔들며 말했다. “ 싫어! 내가 왜 헝가리를 가냐. 너랑 여기서 오래 살 꺼다.” “ 그럼 이제부터 밥 먹을 때만이라도 절대 입 닥치고 있어라. 소화가 안 된단 말이다!” 솔이 주스가 반 정도 담긴 페트병을 들어 복신군의 머리통을 쾅쾅 두드렸다. 안에 있던 주스가 출렁출렁 춤을 췄다. “ 나랑 여기서 오래 살고 싶으면 할 말이 세 개가 있으면 그중에 하나만 말해라.” 복신 군이 진지한 표정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새끼, 앙앙거리기는. 알았다. 나 목말라, 주스나 좀 줘라.” 때리는 대로 맞고 있고 욕을 해도 웃어넘기는 걸 보면 형제 셋 중에 확실히 성격은 제일 좋은 모양…, 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좋게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 오렌지 주스를 보니까 생각난 건데, 주스가 영어로 뭐냐.” 그의 말을 끝으로 우리 네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벌레 보듯 피하며 기계적으로 고기를 씹고 위장에 김빠진 콜라를 때려 부우면서 대화를 피할 수 있는 명분 찾기에 급급해있었다. 불판을 닦으며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 혹여 우리 중에 하나가 입을 연다면 또 어떤 이상한 말로 복신 군이 끼어들지 몰라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굳게 입을 다물었다. 비누를 달라, 컵을 달라 하는 꼭 필요한 말이 생기면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대체했다. 드디어 방바닥에 깔아놓은 기름밭이 신문을 솔이 새끼가 걷어서 쓰레기통에 쑤셔 박는 걸 확인한 후에야 각자 방으로 도망치듯 흩어졌다. ♠ 대학입학까지 남은 한 달여 동안 놀고 있는 꼴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본다는 이 복귀 사장님의 엄포에 그의 동생 이복신 군은 오늘부터 바스키아에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다. 사장 또한 복신군의 지극히 낮다 못해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적 능력을 감안해 ‘서빙은 절대 안 돼.’ 하고 신신 당부를 했는데 복신군은 그 말을 개 무시로 일관하고 홀과 룸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얌전히 술 잘 먹고 있는 사람을 괜히 건드려 무턱대고 ‘필요한 거 없냐.’ 하고 질문을 퍼부어 대다가 정작 술 이름을 대면 제대로 받아 적지도 못하고 ‘ 네 새끼가 지금 나 놀리는 거냐!’ 하고 화를 냈다. 나는 되도록이면 그를 피해 다녔다. 혹시 붙어 있다가 같은 취급을 받을까 두려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부러 피해 다니는 사람이 무색하게 복신 군은 복도를 지날 때 마다 알은체를 해왔다. 죽고 싶었다. 허리에 손을 받치고 머리를 닭대가리처럼 쳐들고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그와 떨떠름하게 서있는 내 모습을 힐끔힐끔 보고 지나치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저 놈이랑 저는 절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고 변명을 하기에도 이골이 났다. ……경원이 놈의 특단의 조치에 대한 충격이 컸는지 장미 놈은 오늘 하루 결근을 했다. 당연히 경원이 놈과 내가 또 룸을 맡았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못내 신경이 쓰였는지 오늘 하루 종일 경원이 놈의 안색이 어두웠다. 그때 하루의 일과처럼 여전히 양주에 물 타기를 반복하고 있는 바텐더 석에 이 복귀 사장님 의 등 뒤로 경원이 놈이 시무룩한 얼굴로 지나갔다. 한 마디 해줄까 싶었지만 놈이 얼굴이 영 아니라 그만뒀다. 나는 추가주문이 들어온 4번 룸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입구에 익숙한 인물들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새싹과 쌍칼이었다. 얼굴엔 덕지덕지 반창코를 붙이고 파란 멍 자국을 곳곳에 달고 나타난 두 사람은 홀을 두리번두리번 거리다 나를 발견하고 절뚝절뚝 뛰어왔다. 거대한 덩치답게 쿵쾅쿵쾅 소리가 홀 안에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은 여전히 민망할 정도로 예의바르게 구십도 인사를 해보였다. 나도 덩달아 팔십오도 인사로 예의를 지켰다. “ 오랜만입니다, 계진 씨.” “ 안녕하셨습니까, 계진 씨.” 새싹이 얼굴에 붙은 반창고가 민망한지 내 쪽에서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새싹의 비해 쌍칼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안색이 파리한 것이 많이 아파보였다. 가만히 있으면서도 땀을 뚝뚝 흘려댄다. 다 나은 거 같지도 않은데 가게에 왜 왔을까. “ 두 사람 다 몸이 안 좋아 보여요. 괜찮으세요?” 역시나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 괜찮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끼쳐드려서 송구스럽습니다.” “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새싹의 말처럼 괜찮아 보이지도 쌍칼의 말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튼 이래저래 복희씨 그 놈이 쳐 죽일 놈이다. 나는 조끼에 끼워져 있던 금색 손수건을 탈탈 털어 더 가까이 서 있던 새싹의 이마를 닦아줬다. 새싹이 깜짝 놀라 흠칫 물러섰다. 쌍칼이 얼굴은 ‘나 지금 감동했어요.’ 하는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나쁜 짓이야 복희씨가 했지만 두 사람을 보는 것 자체로 만으로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 빨리 가서 쉬세요. 정말 아파 보여요.” 쌍칼이 흐르는 땀을 한손으로 닦으며 또 꾸벅 인사를 했다. …이거야 원, 인사하는 인형도 아니고. “ 고맙습니다, 계진 씨. 그리고 전해드릴 말이 있는데…….” 나는 설마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차례대로 쌍칼과 새싹이 고개를 끄덕였다. “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잠시만 밖으로 나오시랍니다.” 어디 있나 찾을 필요도 없이 그의 차는 가로등 밑에 세워져 있었다. 차 지붕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가게에 오기 전, 찔끔찔끔 흐르던 빗물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이러다 집에 갈 때 쯤 되면 거의 우박수준이겠다 싶어 조금 불안해졌다. ……돈 모아서 택시나 탈까, 아니지. 최근에 내가 냈으니까 놈들보고 내라고 해야지, 하는 어줍지 않은 생각을 하며 복희씨의 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찌된 놈이 사람이 비를 맞고 오는 걸 뻔히 보고 있으면서 차 문도 안 내리고 붕어새끼처럼 뻐끔뻐끔 담배만 꼬나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욱한 감정이 치솟았다. 이대로 가게로 가버릴까 싶었지만, 눈치 하나론 염라대왕 싸대기를 후겨갈길 이 복희씨가 창문 밖으로 불쑥 주먹을 치켜올렸다. 그가 씩 웃었다. 그 웃음을 얼마가지 않아 딱딱하게 굳어지며 가만히 있어도 살인을 부르는 표정으로 둔갑해 내 목덜미를 짤짤 흔들었다. " 안, 안녕하세요." 시간이 지나도 내려가지 않는 주먹을 확인하고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그가 성의 없이 문을 열고 나를 힐끔 곁눈질했다. ……새끼, 야리긴. 고개를 휙 돌리고 문을 잡아 당겼다. 빗물에 미끈거리는 손잡이를 잡고 버벅대는 나를 보며 복희씨가 소리 내어 키득거렸다. 한 마디 해줄까 하다 어차피 '일반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을 감안해 인상을 찌푸리며 죄 없는 창문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려대는 걸로 내 남자다움과 자존심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복희씨가 갑자기 말도 없이 창문을 내리는 바람에 괜한 헛손질이 되어 버렸다. " 안녕은 무슨, 나 처음 보냐. 염병 말고 빨리 타" " 일찍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비꼬는 말투에 이 복희씨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빗속에 튕기고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쏘아 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잔뜩 심통 난 얼굴이었다. 뭐, 언제는 밝은 표정일 때도 있었나. 복희씨의 얼굴을 살피는 사이 후드득 떨어지던 빗물이 어깨를 찢어버릴 것처럼 사정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어둡고 음침한 복희씨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똥 만 한 진흙을 달고 다니는 내 낡은 운동화로 향했다. " 그건 뭐냐, 짚신이냐." 씨발. 아무리 생각해도 저 새낀 가난을 너무 몰라. " 짚신 아니고요, 운동환데요." " 하도 너덜너덜해서 난 또 짚신인 줄 알았지." 내 운동화가 뭐가 어때서! 지랄 마, 새끼야. 하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하나 뿐인 생명줄과 차후 일어날 뒷일을 생각해 입을 꾹 다물었다. 따발, 따발 거릴 놈이 의외로 침묵하자 복희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멈춰있던 자동차가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더니 앞으로 튕겨 나갔다. 비오는 새벽, 잔잔한 도로에 속력 한 번 제대로 밟아보겠다는 심중이 엿보였다. 미친놈이 지가 카레이서도 아니고 차만 타면 왜 저 지랄인지 모르겠다, 진짜. " 좀 천천히 가는 게 어……." 복희씨의 두꺼운 손바닥이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허공에 멈춰있던 그의 손이 정수리 위에 내려앉았다. 미친 듯이 사납도록 앞머리를 쓰다듬더니 재빨리 손을 가져갔다. 뒤늦게 눈을 뜨자, 복희씨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 누가 보면 어지간히 때린 줄 알겠다, 그렇지?" " 뭐, 꼬, 꼭 그런 건 아니고요. 내, 내가 원래 겁이 좀 많아서." 복희씨가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 그나저나 핸드폰은 어떻게 된 거냐." " 핸드폰이요? 핸드폰이 왜." " 더럽게 바쁜가봐? 전화 받을 시간도 없고, 한번 만나려면 이주 전에 예약해야 되는 거 아니냐." ……아, 정말. 비꼬는 거 하나론 네가 세계 최고다. " 전화가 아주 불통이야." " 그래요? 왜 그러지. 아! 잠시 만요." 혹시나 싶어 조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무겁게 큰 핸드폰이 주머니에 들어가다 말고 불안전한 상태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안테나를 쭉 끄집어내려는 찰나, 복희씨가 불쑥 가슴을 더듬었다. ……뭐, 뭐냐.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자 그는 주머니 끝을 톡 쳐올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이야, 이건 언제적거냐. 박물관 하나 차려도 되겠다. 신발에 핸드폰에, 생긴 것처럼 놀려면 너도 참 힘들겠어?" " ……." " 아쭈, 쥐방울. 이제 대놓고 씹냐." 씨발놈, 엿이나 먹어라. 속으로 천상선녀, 애기동자, 홍콩할매를 부르며 그를 좆 빠지게 씹고 있을 때, 복희씨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거의 무선전화기 크기 쯤 되는 내 핸드폰을 괜히 올렸다, 내렸다 장난을 치더니 이미 열려 있던 창문을 끝까지 죽 내렸다. 나는 주의 깊게 그를 살폈다. 그러나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는 창밖으로 내 핸드폰을 휙 던지고 매몰차게 문을 닫아버렸다. 안 그래도 폴더가 달랑달랑 거리는 거 초강력 테이프와 본드로 붙여놨더니 이제 아주 박살이 났을 것이다. " 뭐, 뭐에요! 차 세워요! 왜 갑자기 남의 핸드폰은 던지고 난리에요!" 내가 꽥 소리를 지르자 복희씨의 얼굴에 서서히 화색이 돌았다. 이건 뭐, 미친놈도 아니고 사람이 화내는 모습보고 좋아 죽는 건 또 뭐야. " 뒷좌석 봐. 종이가방 하나 있을 거다. 꺼내 봐." 나는 그를 지그시 노려보며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생각처럼 손이 닿지 않아 반쯤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헐렁헐렁한 유니폼 바지가 골반 밑으로 내려왔다. 한 손으로 바지를 움켜쥐고 뒷좌석을 샅샅이 훑었다. 정신없이 종이가방을 찾고 있을 때, 말캉말캉한 손이 엉덩이 사이로 쑥 들어왔다. 무려 팬티를 뚫고 맨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손의 정체는 그 놈 밖에 없다! 몸을 부르르 떨고도 가만히 있자, 능글맞은 손이 엉덩이 깊은 골짜기로 빨려 들어왔다. 상처와 굳은살로 딱딱하게 변한 손바닥이 열심히 허벅지를 쓸어댔다. " 웬만하면 그만 하시죠." " 내가 뭘." "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아!" 복희씨가 한 손으로 멱살을 쥐어 나를 의자에 도로 앉혔다. 힘으로만 보면 유도선수나 씨름선수를 시켜도 대성할 놈이었다. 조폭나부랭이가 되어 아까운 청춘을 어둠의 황제로 군림하지 말고, 4년마다 밖으로 나가 금이나 캐왔으면 사람들의 박수나 받을 텐데. 여러모로 아까운 놈이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다리를 훑던 손은 어느새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그를 노려봤다. " 성추행 범으로 고소할 예정인데, 내일 경찰서 앞에서 만나죠." " 그거, 좋지." " 제발, 우리 좀 진지해지면 안 되나요?" " 진지는 개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거나 잡고 있어." 복희씨는 턱 끝으로 핸들을 가리켰다. 나보고 운전을 하라고? 면허증도 없는 나보고? 그거 참 정신 나간 놈일세 그려. " 나 운전 못해요." " 내가 언제 운전을 하라디? 잡고만 있으란 말이다, 멍청아. 그것도 못 하냐." 못한다고 했다간 아주 잡아먹을 얼굴이다. 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복희씨는 친히 내 손을 핸들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 잡고 있어. 종이가방 하나 못 찾는 병딱이 새끼야." 그는 덜렁 그 마디만 하고 뒷좌석으로 휙 날아갔다. 나는 본의 아니게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라 다행히 차는 많지 않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덜덜 손을 떨며 힘겹게 '빨리요, 빨리 오세요.' 하고 말해도 이 복희씨는 박자에 맞지도 않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종이가방인지 뭔지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한테 운전을 맡겨놓고 불안하지도 않는 걸까. 복희씨는 등 뒤에서 열심히 부스럭대다 생각보다 빨리 종이가방을 찾아냈다. 그는 종이를 북북 찢고는 작은 박스를 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경직된 자세로 운전을 하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핸드폰이었다. 근데, 핸드폰은 왜. 발밑으로 툭 던져진 핸드폰 상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쿵하는 굉음이 들렸다. 눈앞에 번쩍번쩍 불꽃이 튀더니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척추 뼈가 와작이 날 듯한 충격이 몸을 감쌌다. 다행히 무거운 팔뚝이 내 목을 감싸 안고 앞으로 자빠지지 않게 옥죄고 있었다. 헛기침이 튀어 나왔다. ……콜록, 콜록 연거푸 기침을 뿜어대자 복희씨의 '씨발' 하는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그의 팔뚝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어찌된 것이 숨쉬기 더 편해졌다. 갑갑함이 사라졌다. 내겐 복희씨의 팔이 감당하기 더 힘든 존재였던 것이 분명했다. 깜빡이던 눈이 복희씨의 한 마디에 번쩍 뜨였다. " 염병, 잘한다. 눈깔 있으면 앞 좀 보시지."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장관 앞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재수도 없지, 저건 필시 외제차다. 은회색의 번쩍이는 외제차 범퍼가 완벽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부슬부슬 연기가 킁킁 뿜어져 나왔다. 웅성웅성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벌컥! 차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세, 네 명쯤 되는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저마다 손에 야구 방망이, 쇠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딱 봐도 주먹패들이나 동네에서 논다는 왈패들이 분명했다. 오금이 저렸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최대한 눈을 가늘게 만든 뒤, 권솔의 말에 의하면 1초만 봐도 침 뱉고 싶어진다는 불쌍한 표정으로 복희씨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코를 드르렁 골며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아마 저 떡대 놈들이 밖으로 나올 때부터 저런 포즈를 하고 있었으리라. 뛰는 김 계진 위에 나는 복희씨 있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멍해졌다. 저벅저벅 저벅. 조폭 놈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저승에 가까워지는 죽음의 소리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나는 복희씨 옆으로 잽싸게 날아가 그의 어깨를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 일어나 보세요! 산, 산적들이 몰려 와요! 우린 죽었어요. 어떻게 좀 해보세요!" 복희씨가 졸린 목소리로 중얼중얼 늙은 옹알이를 시작했다. " 우리? 너 참 말 이상하게 한다. 왜 우리야. 운전은 네가 했잖아. 나는 모르는 일이다."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는 복희씨가 시켜서 한 거잖아요. 물론 사고는 내가 냈지만, 그렇다고 나 혼자 두드려 맞기엔 불공평해요!" " 글쎄." " 글쎄라니, 글쎄라니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복희씨는 팔짱을 낀 채, 몸을 낮춰 자리에 편하게 드러누웠다. " 사람이 어쩜 그래요? 혹시 저 놈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감겨 있던 복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남자는 승부욕을 자극할 필요가 있지. 남에게 지는 것보단 썩은 밤고구마 한 포대를 씹어 먹는 것을 택할 복희씨의 정열적인 승부욕에 불이 붙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신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복희씨가 싸늘하게 웃었다. " 지금 내 앞에서 꼼수부리냐. 그만 앙앙거리고 나가 보시지, 네 친구들한테." " 쫄았으면 솔직히 쫄았다고 하세요. 무슨 조폭이 조폭을 무서워하고 그러냐." " 네 꼴리는 대로 생각하고 네 씨불이고 싶은 대로 지껄여 보시지. 어차피 맞아 죽을 텐데, 그 정도는 봐준다." " 아, 정말 안 일어날 거예요?" 복희씨는 보란 듯이 눈을 감고 인위적인 코골기를 선보였다. 남이 보면 정말 자는 걸로 착각 할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쿵쾅쿵쾅 요란스럽던 발소리가 어느덧 잠잠해졌다. 대신 어둡던 차 주위가 더 어둡게 변해 있었다. 나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헉! 조폭무리들이 차를 빙 둘러싸고 비를 맞으며 장승처럼 서있었다. 그 중 가장 직위가 높아 보이는 한 놈이 손을 까닥였다. 나오란 뜻이었다. 복희씨를 돌아보았다. 그는 잠꼬대까지 곁들여 혼 심을 다해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밖에서 손잡이를 벌컥 열어젖히는 바람에 힘없는 몸뚱이가 바닥으로 나뒹굴어졌다. " 뭐시여! 요 쥐방울만한 것이 우리 형님 붕붕이를 들이받았단 말이여? 오메, 나 환장하겠구만." 떡대1이 왈왈대자, 떡대 2가 거들고 나섰다. " 시방, 요것이 다 뭐시다냐. 요로코롬 얇실하게 생겨먹은 놈이 감히 우리 형님한테 도전장을 내밀어야? 저 잡것을 확!" 가만히 있던 떡대3이 내 멱살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창문에 붙어 밖의 풍경을 관전하던 복희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아, 저거 진짜 미친 거 아냐? 억울하다 못해 분해서 이를 드러내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 표정을 본 떡대, 3이 화들짝 놀라더니 멱살 쥔 손 그대로 형님으로 추정되는 대가리에게 나를 짐짝처럼 질질 끌고 갔다. " 형님, 요 새끼 표정 보셨소. 완전 인간 넙치같당께요. 요걸 확 사시미로 당장 회쳐버릴 수도 없고. 형님, 어찌하면 쓰것소?" 험상궂은 형님의 얼굴에 진한 칼자국이 춤을 췄다. 형님은 떡대3의 손에 잡힌 내 멱살을 풀어내더니 나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뾰족한 구둣발로 옆구리와 꼬리뼈를 자근자근 밟아댔다. 무서운 통증이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 복희씨를 살폈다. 허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깡패 놈의 무식한 주먹이 어여쁜 내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 아아아…악!" 형님으로 불리는 남자가 한 쪽 무릎을 구부려 내게 은밀히 귓속말을 해왔다. " 아가, 차를 바가 면서 들이받아야 그나마 모양새가 나는 거 아니것냐. 간만에 서울구경 왔다가 사람 떡 실신 만들고 싶진 않응께, 수리비만 내놓고 싸게 가부러라." 사내의 거대한 주먹이 부실한 턱 뼈를 내리찍었다. 하늘이 샛노랗게 보였다. 맞은 건 턱인데 희한하게 쌍코피가 터졌다. 뚝뚝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수, 수리비는 얼, 얼마 정도……." 사내가 딱 잘라 말했다. " 15억." " 예?" 나는 코피가 줄줄 흐르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수리비가 15억이라고? 아무리 외제차라지만 어디서 이런 개도 안 하는 덤탱이를! 사내가 낄낄 웃자 구령에 맞춰 똘마니들도 낄낄 웃었다. 콸콸 쏟아지는 코피가 와이셔츠와 조끼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복희씨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차 문을 반쯤 열고 바람을 쐬고 있었다. 한들한들 부는 바람에 그의 긴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사람이 얻어터지든 말든, 개폼 잡으며 새벽바람이나 쐬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그때, 감겨있던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복희씨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네가 양심은 있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상대가 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에겐 문제도 아니겠지요? 키키. 너희들 다 죽었어. 15억? 지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하고 있네. 그 순간, 나의 구세주 이 복희씨가 조폭무더기와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 와이셔츠에 잠시 멈추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주먹만 한 짱돌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 뭐냐. 복희씨의 어두운 분위기와 어마어마한 덩치에 잠시 경계태세를 갖추었던 조폭 놈들이 비웃음을 던졌다. 연신 휘파람을 불어재꼈다. 그러나 복희씨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놈들이 대놓고 빈정거리며 차 지붕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찍어도 복희씨는 침묵을 지켰다. 어라, 이럴 놈이 아닌데. 평소에 있는 대로 후까시 잡고 다니더니 진짜 쫀 거 아냐? 잠시 한 눈 판 사이 대왕 놈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놈이 내 무릎을 사정없이 찍어 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 아가, 돈 읍냐." " 없, 없어요! 그리고 수리비가 왜 15억이라니 말도 안 돼!" " 아가, 다시 한 번 말해보그라. 말이 안 된 다고야?" " 그, 그래요! 15억이라뇨! 생사람 잡지 마세요! 아저씨들 깡, 깡패죠? 나도 아, 아는 깡패 많아요!" 꽥 소리를 질렀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철 같은 주먹이 복부에 내리 꽂혔다. 날다람쥐처럼 몸을 빙빙 꼬며 발광을 하자 대왕 놈이 손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난 이제 죽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닫혀있던 차 문이 벌컥 열렸다. 젠장. 또 돌이나 모으러 가겠지. 집에서 공기놀이나 실컷 해라, 씹새. 울컥울컥 눈물이 뿜어져 나왔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복희씨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그는 조금 귀찮다는 얼굴로 뒷짐을 쥐고 걸어왔다. 복희씨를 경계하듯 대왕 조폭 놈을 포위하며 똘마니들이 모여들었다. 복희씨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감춰진 짱돌이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뭉툭했던 돌 끝이 칼날처럼 뾰족했다. 차 안에서 열심히 돌을 갈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무시무시한 짱돌을 보고 흥분한 똘마니 새끼 하나가 무턱대고 복희씨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쯧쯧' 혀를 차더니 들고 있던 돌을 가볍게 올렸다 내리며 장난을 치다 순식간에 떡대 놈의 목덜미를 돌 끝으로 내리찍었다. 검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축축했던 바닥에 놈의 피가 번져갔다. 다른 한 놈이 기합을 하며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복희씨가 옆으로 가볍게 피하자, 놈이 방향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복희씨는 역시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고 피 묻은 돌 끝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은 뒤, 놈의 정수리를 날카로운 부분으로 서, 너번 연거푸 내리찍어 목덜미를 사납게 비틀었다. 돌 끝이 관자놀이 부근을 매섭게 찍다 도로 빠져나왔다. 마지막 한 놈이 주춤 물러서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눈 위로 칼 같은 돌을 집어던졌다. 가속도를 붙어 날아오는 돌을 피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서있던 놈이 병든 닭대가리처럼 앞으로 꼬꾸라졌다. 복희씨는 피가 철철 흐르는 눈을 한 손으로 감싸고 쓰러진 놈을 확인한 후에야 흙 묻은 손을 털며 마지막으로 '쯧쯧' 혓소리를 냈다. " 애새끼들 관리 좀 잘해라. 출처도 없는 동네 양아치새끼한테 그럴 듯한 양복만 입혀놓으면 다 같은 건달이냐. 하여간 촌놈들은 이게 문제야." 복희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얼이 빠진 대왕 조폭 놈을 휙 밀쳐내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어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내 콧구멍을 주물럭거렸다. " 아프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한 오기였다. 네가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으면 나는 다치지도 않았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복희씨의 하얀 손가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불안하다 싶은 순간, 뭉글뭉글 코피로 막혀 있던 콧구멍 속에 검지가 푹 쑤시고 들어왔다. " 악! 아, 아파요! 이게 뭐하는 짓거리에요!" " 그러게 왜 대답을 안 해. 아프냐고 묻잖아." 재수 없는 놈. 그래도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아파서 돌아버리겠어요." 복희씨가 정나미 떨어지게 딱 잘라 말했다. " 그러냐. 난 하나도 안 아프다. 메롱." 고작 '메롱'을 하기 위해 남의 콧구멍을 쑤셔댔단 말인가. 졸라 복희씨다운 짓거리였다. 그는 장난스럽게 웃다가 우뚝 미소를 거두고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코핀지 콧물인지 죽죽 나오는 콧구멍에 얌전히 손수건을 받쳐 들고 복희씨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 왜 맞고 다니고 그러냐. 네가 다치면 내 가슴이 좆나 찢어지잖아." 하느님, 부처님. 제발, 제발. 저 저주받을 주둥이 좀 닥치게 해주세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 새끼, 이제 시집은 다 갔다. 얼굴 꼴이 말이 아니네." " 남자가 시집은 무슨." 복희씨는 언제나처럼 내 말을 못들은 척,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지껄였다. " 걱정 마. 그래도 노처녀로 늙어죽진 않을 거다."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저럴까. 그는 피 묻은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내 손에 쥐어주고 몸을 돌렸다. " 너를 구제해줄 사람이 하나 있잖아." 복희씨가 대왕 조폭 놈에게 다가갔다. 대왕 조폭 놈의 기개는 복희씨 앞에 무너져 내렸다. 그가 번개처럼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복희씨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만 돌려 나를 보며 덧붙였다. " 그게 바로, 나지." 이러니까, 이러니까 자꾸 기대하는 거다. 바보처럼 흔들리는 거라고!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대왕 조폭 놈의 얼굴이 과연 인간의 얼굴인지 짐승의 몰골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아리송하게 변해 있었다. 복희씨의 거침없는 구둣발이 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짓이겨 놓았다. 놈이 뻐끔뻐끔 붕어처럼 숨을 내쉬자 보기 싫게 빠진 앞니가 퉁퉁 튕겨져 나왔다. 붉은 피가 복희씨의 하얀 바지를 적셨다. 그는 바지를 툴툴 털어냈다. 그리고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놈의 입술사이에 물려놓고 몸을 돌렸다. " 타, 집에 가자." " 집에 가자면서요? 여기가 집이에요?"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기다리다, 한마디 툭 내뱉었다. 복희씨는 빙글빙글 돌리던 잭나이프로 당근을 푹 쑤셨다, 뺐다 살벌한 장난을 하던 중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남자가 진득이 앉아 있지 못하고 담배를 피웠다, 칼을 돌렸다, 요란 방정이었다.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아침이 되려면 아직 먼 시간이었다. 포장마차 안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술집 근처라 유별나게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연인들에서, 친구들, 회사동료, 등등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그룹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들 눈엔 복희씨와 내가 어떤 관계로 보일까 궁금해졌다. ……형, 동생? 친구? 뭐 그 쯤 될 테지. 아. 형, 동생이라.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쓸데없이 깊은 생각은 정신건강에 해롭다. 물기 묻은 메추리알 껍질을 쭉쭉 벗겨냈다. 감칠맛 나게 한, 두개씩 먹는 것보다 열심히 까서 한 번에 왕창 먹기 위해 까놓은 메추리알이 이미 접시 한 가득이었다. ……대충 먹는 척 하다 집에 가져가서 떡볶이 만들 때, 넣어먹어야지. 룰루랄라.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그때, 불쑥 복희씨가 휘두른 칼날이 내 곱디고운 메추리알을 겨냥해왔다. 나는 채소접시를 뺏어 내 앞에 놓으며 복희씨를 집중 경계했다. 그가 비정상적으로 손을 쭉 뻗어 메추리알 노른자를 푹푹 찔러대며 말했다. " 넌 어째 하는 짓마다 궁상이냐. 그냥 처먹어, 애도 아니고 그게 뭐냐." " 아, 나 좀 내버려 둬요. 왜 괜히 시빈데요. 나 그 쪽이 건들이지 않아도 인생 살기 힘들거든요?" 복희씨는 손등에 턱을 받치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웃겨죽겠다는 얼굴이다. " 쥐방울만한 게 힘들긴 뭐가 힘드냐. 나는 네 나이 때 철근도 씹어 먹었다." " 씹. 조금 전부터 계속 쥐방울, 쥐방울 하는데요. 이렇게 큰 쥐방울 봤어요? 그리고 그 쪽이랑 나랑 세살 밖에 차이 안 나거든요?" " 오호, 세살씩이나?" " 남자가 어째 한 순간도 진지하지 못하고 애처럼 저러냐." " 삽질하는 것보단 낫지, 안 그래?" 태연스럽게 말하는 복희씨의 얼굴에 메추리알 껍질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가만 보면 어지간히 나이 따진단 말이야. 그래, 너 늙어서 좋겠다. 다행히 국수와 소주 한 병을 들고 나타난 아르바이트생을 봐서 입을 다물었다. 중딩인지 고삘 인지 나이가 모호한 알바생 놈은 테이블 위에 국수, 소주 한 병, 소주 잔 두개, 오돌 뼈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 쌩하니 몸을 돌려 다른 테이블로 사라졌다. 복희씨가 대뜸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 그거 마시게요?" " 그럼 가만히 보고 있으려고 시켰겠냐." 나는 그의 손에 소주병을 잽싸게 낚아챘다. 이 복희씨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전하게 집에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지금쯤 분명 전철도 끊겼겠다, 버스도 없겠다, 아까운 택시비 들일 바에 어물쩍 태워다달라고 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그렇담 술은 안 되지. " 좋은 말로 할 때 그거 내려놓고 불어터지기 전에 국수나 좀 처먹지?" 복희씨가 내 손에 들린 소주병을 억지로 뺏으려 했다. 그의 손을 피해 몸을 휙 돌렸다. 복희씨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간 아주 작살나게 때릴 판이었다. 하긴 사람패서 밥 빌어먹고 사는 놈, 주먹 안 쓰리라는 보장도 없지. " 운, 운전해야 되잖아요. 음주운전은 안 되죠." " 소주 한 병이 무슨 음주운전.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라." ……생긴 거답게 술에 대한 개념자체가 실종된 놈이로구만, 그려. " 한 잔이 아니라 한 병이라니까요?" 복희씨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갑자기 터져 나온 우렁찬 내 목소리에 옆에 앉아 있던 대학생 놈들이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며 친구로도, 그렇다고 형 동생으로 보이지 않는 복희씨와 나 사이에 대해 쑥덕쑥덕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은근히 기분 나빠졌다.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 남의 일에 관심은 많아 가지고, 쯧쯧. 놈들의 수다소리가 커짐에 따라 복희씨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러나 놈들의 쑥덕거림은 얼마가지 않아 복희씨가 재빨리 칼날을 치켜들어 놈들의 목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시늉을 함으로서 일단락 지어졌다. 놈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뜨거운 오뎅국물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에 복희씨의 더러운 인상이 누그러졌다. " 음료수 드실래요? 콜라 시킬까요? 아니면 사이다?" 복희씨가 매몰차게 내 말을 무시했다. " 그래서 그거 안 내려놓겠다 이거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네." " 좋아." 복희씨가 선뜻 대답했다. 이건 순순히 대답을 해도 불안하니, 원. 복희씨의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던 찰나, 그는 번개 같은 속도로 내 메추리알 접시를 낚아채 자갈바닥에 집어던졌다. 손톱 사이를 찔려 가며 무려 삼십분 동안 깐 메추리알이 모래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 아악! 이런 개 같은 수법을!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술병을 내려놓고 접시를 집어 들었다. 구석진 테이블을 치우고 돌아 나오던 알바생 놈이 내 메추리알을 지근 밟고 지나갔다. 으깨터진 알들을 보고도 놈은 콧방귀를 뀌며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복희씨는 술병을 까고 소주잔에 술을 붇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복희씨 때문이었다. 나는 운동화 자국에 으깨터진 알들에게 애석한 유종의 미를 거두며 자리에 도로 앉아,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사람이 어쩜 그러냐." 그는 씩 웃으며 쓴 소주를 생수라도 된 듯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술고래가 따로 없구나. 하여간 새끼, 빈속에 병나발은. 나는 젓가락을 치켜들었다. 다행히 국수 면발은 쫄깃쫄깃했다. 콧구멍으로 기어 들어가는지 주둥이로 쑤셔 박혀지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그릇을 얼굴에 처박고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자, 복희씨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끌끌 혀를 찼다. 나는 김 가루를 국수 위에 팍팍 뿌리며 고개를 들었다. 복희씨가 소주병을 테이블 위에 쾅하고 내려놓았다. " 새끼, 난민캠프 뛰다 왔냐. 뭘 먹어도 걸신들린 놈마냥, 궁상은." 국수 면발을 쪼르륵 훑어 먹으며 대답했다. " 저녁부터 밥을 안 먹었다고요. 손님이 너무 많아요. 힘들어 죽겠어요." " 힘든 얼굴이 어째 그 모양이냐. 살덩이에 광대뼈가 푹 파묻혔구만, 뭘. 디룩디룩 돼지가 따로 없네. 살 좀 빼라." " 살 쪄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젖, 젖살이에요!" " 지랄하네. 주름살은 아니고?"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더만. 염병, 나 화났다. 나 진짜 화났다고, 인마!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국수사발을 밀어냈다. 복희씨가 소주잔에 술을 따르다 말고 가만히 내 행동을 주시했다. 흥!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 돌상처럼 굳게 입을 다물었다. 괜히 무게 잡을 필요도 없이 복희씨는 나를 보지도 않았다. 다만, 젓가락도 한 번 담그지 않은 자신의 국수사발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 국물까지 남기지 말고 깨끗이 처먹어라." " 됐어요. 지금 누구 가지고 놀아요? 돼지 같다고 할 땐 언제고!" " 먹어라." " 안 먹는다니까!" 그는 테이블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던 잭나이프를 들어올렸다. 뜨끔했다. 하지만 티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며 그의 눈을 피했다. 복희씨는 치켜든 칼날로 국수면발을 휘휘 저어댔다. 뜨거운 국물을 한참동안 헤엄쳐 다니던 칼은 기어코 퉁퉁 불은 어묵을 푹 꽃아 내 주둥이 앞으로 돌진해왔다. 먹는 거 가지고 장난질을 하다니. 천벌 받을 놈. " 자, 아 해봐." " 뭐에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쪽팔리게……." 나는 손으로 최대한 얼굴을 감쌌다. 진심으로 쪽팔렸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단순한 이 복희씨의 목소리가 굳어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 내가? 이, 내가 쪽팔리단 말이냐. 어떤 점이 쪽팔리는데?" " 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새끼야. 쪽팔리다면서? 뭐가 쪽팔린 지 말해보니까." 복희씨는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먹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은 '쪽팔리다' 는 단어 하나에만 과도하게 집착하며 심도 깊은 추궁을 시작했다. " 쪽팔려? 쪽팔리다고? 내가 쪽팔려? 뭐가, 뭐가! 뭐가 그렇게 쪽팔린데? 어? 메기 같은 주둥이로 열심히 씨불여보시지." 자연발화가 되어 복희씨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눈알 찢어지게 나를 노려보더니 방향을 바꿔 다른 걸로 사람을 달달 볶아대기 시작했다. "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주둥이 벌려." " 네?" " 아, 해보라니까. 셋 셀 동안 입 안 벌리면 찹쌀떡 같은 볼따구니, 뼈만 놔두고 갈기갈기 찢어놓겠다. 하나, 둘, 셋 반……." 평상시에도 또라이같은 놈, 술까지 처먹었으니 개또라이에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복희씨 눈치를 봐가며 조심스레 힐끔대던 놈들이 이제 대놓고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당장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복희씨가 내민 어묵은 내 아랫입술을 톡톡 건드려왔다. 단순한 것에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흥분하는 놈, 싫다고 하면 뽕 맞은 새끼처럼 굴지도 모른다. 질끈 눈을 감고 어묵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복희씨가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주넘은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 내가 주니까 맛있어서 질질 오줌 싸겠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희씨에게 남의 대답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기만 좋다면 싫다고 해도, 할 것이고 남이 좋다고 해도 자신이 싫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안 할 놈이었다. 그의 장난이 빨리 시들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그는 혼자서 '뭐줄까, 뭐주지.' 하고 지껄였다. 먹여주는 것에 재미 들린 것이 분명했다. 그는 쪼그라든 번데기를 푹 찍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똥 씹은 얼굴로 어쩔 수 없이 받아먹자, 복희씨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오이, 당근, 땅콩, 심지어 국수면발까지 칼날로 찍어다 내 입에 들이밀었다. 복희씨는 빵빵하게 불은 내 볼을 칼 뒤끝으로 콩콩 찌르며 허름한 포장마차가 흔들거릴 정도로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표정만 보자면 조금 전까지 화낸 사람이라곤 믿기 어려웠다. ……이건 뭐, 다중인격도 아니고 적어도 오중인격을 될 법했다. 별 다른 이유 없이 굉장히 즐거워져 있던 이 복희씨가 칼을 휙휙 돌리며 말했다. " 가게 때려치워." " 네?"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복희씨가 뜨거워진 칼날을 내가 입고 있는 와이셔츠 소매에 북북 문질러 닦았다. 옷에 달걀냄새 날 텐데, 짜증난다. " 나 아직 월급도 못 받아 봤어요." " 월급?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거 가지고 유난떨지 말고, 그만 두라고 할 때, 그만 둬라." 새끼, 참 말 쉽게 하네. 다니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만두라고? 허허, 인생 쉽게 살아 참 좋겠수다. 목구멍에 꽉 막혀 있는 당근쪼가리를 꿀꺽 삼켰다. " 싫어요. 멀쩡한 직장을 왜 그만둬요. 돈 많다고 다니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요." " 글쎄, 그게 누군데?" 이 사람은 진짜 몰라서 묻는 걸까. 진지한 얼굴도 시치미 떼는 것도 수준급이다. " 그만 두면 뭐하라고요. 놀고먹으라고요? 몸뚱이 팔팔한 놈이 팽팽 노는 것도 못할 짓이죠." " 앞서가지 마. 놀고먹으란 말은 안 했다." 복희씨는 당근을 우걱우걱 씹다 바닥에 '퉤' 뱉어냈다. 으미, 아까운 것. " 우리 집에 와서 빨래하고 밥해." 나는 화들짝 놀랐다. " 빨래하고 밥은 무슨. 나 요리 잘 못해요. 빨래는 세탁기가 하지, 내가 하나." 복희씨의 얼굴은 어느새 나를 향한 짜증과 혐오, 질타와, 무시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꿋꿋했다. 왜냐면, 저 인간도 밥이나 빨래 따위로 누군가를 무시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넌 도대체 삽질하는 거 빼고 잘하는 게 뭐냐."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는 괜히 사람 말꼬리를 질질 끌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 또 사람 무시하네. 그럼 남자가 얼마나 요리를 잘 해야……." " 그래서 시집가겠냐. 성격 좋은 나나 되니까 너 데리고 살려는 거지, 다른 새끼였으면 벌써 소박맞았다. 알고는 있냐."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건 이 복희씨,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뻔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 얼굴은 개판, 성격은 진상, 할 줄 아는 건 제로, 그렇다고 배운 게 있나, 아니면 모아놓은 돈이 있길 하나."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람이 만만하기로소니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하나. 뜨겁게 달궈진 가슴속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던 감정이 불끈 치솟았다. 울컥해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복희씨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 꼬리에 어린애 같은 장난기가 걸려 있었다. " 어쭈, 눈 안 까냐." 더는 들을 필요도 없는 말 투성이다.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복희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소주잔을 들고 있지 않던 다른 손으로 내 팔목을 비틀어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 너는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버릇없이 멋대로 일어나고 그러냐." " 어른이 어른다워야 말이죠. 아파요, 빨리 손 놓으세요. 어차피 할 말도 없잖아요." " 오늘 밤에 같이 있을까." 복희씨가 대뜸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무미건조했다. 입 꼬리엔 악의 없는 웃음이 걸렸다.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워졌다. 내가 얼빠진 얼굴로 가만히 있자, 복희씨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 뭘 그렇게 꼴아 봐. 너무 잘생겨서 아찔하냐? 정신 차릴 때까지 패줄까?" " 네? 아, 아니요, 나는 그냥, 뭐." 좀처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일부러 말을 흐렸다. 소주를 훌렁훌렁 들이키는 복희씨의 얼굴을 바라보다 뇌리가 뿌옇게 변해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흔들리지 말자. 속으로 되뇌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거다. ……그래, 그냥 아, 아는 형처럼, 아무렇지 않게. 순간 복희씨의 얼굴에 남의 고통을 즐기는 쾌감이 살짝 묻어났다. 그가 마지막 소주를 잔에 부으며 껄렁하게 말했다. " 농담이다. 빨리 처먹어. 나 바쁜 사람이다." " ……." 복희씨가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니다. 그만 일어나자." 그는 국수 한 젓가락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얼떨결에 따라 일어나, 계산을 하는 복희씨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깡패주제에 뭔 놈의 일이 그리 많다고 바쁜 척은 혼자 다하고 있네. 그는 거스름돈을 건네는 아줌마를 무시하고 차 앞으로 다가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 생각해보니까 썩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니야." 복희씨의 얼굴에 철철 흘러넘치는 자부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 내가 네 목까지 잘 생겼으니까 얼굴걱정은 하지 마,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성격 남자답지, 배운 것에 비해 능력 좋지, 급기야 돈까지 많아. 물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나열하면 몇 천 가지는 더 나오겠지." 염병하네. 폼 잡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네 잘났다는 거 아니냐. 나는 못들은 척 시미치를 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먹지 않은 당근과 오이, 땅콩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등 뒤로 악마 같은 복희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가 가지지 못한 걸 내가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있는 선까진 최대한 메워주겠단 말이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오이를 향해 손을 뻗은 자세로 가만히 서있었다. 짧은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멈춰있던 복희씨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가 멀어지고 있었다. 옅어지던 발소리가 아예 사라진 순간, 몸을 돌렸다. 복희씨가 뒷모습을 보이고 가만히 서있었다. " 네가 원한다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게 해줄 수도 있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땅히 할 대답이 없었다. 그냥 멍해질 뿐이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복희씨 자체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복희씨가 살짝 얼굴을 돌렸다. 차가운 눈매, 앙다문 입술, 감정 없는 표정. 얼굴만 보자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 가령 예를 들자면 바로 이런 거지." 또 다시 이어지는 침묵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복희씨에게 화가 치밀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내가 불쌍해진 걸까. 아니면 궁상스럽게 사는 꼴을 보고 새삼스레 동정심이 드는 걸까. 그러나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흔한 동정심 따위가 아니었다. 스쳐지나가는 측은지심이 아닌, 그 이상의 감정이었다. 물론, 그런 감정이 나만의 욕심이란 건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 앞으론 말을 해." 낮게 울려 퍼지는 복희씨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신이 아니다. 내 눈을 보고 말을 해서 확인시켜주지 않는 이상, 대충 그럴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그가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골목을 빠져 나가는 복희씨의 자동차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예사롭지 않은 운전솜씨는 술 먹어도 여과 없이 발휘되어 집으로 오는 오십분 동안 적어도 오백 번은 넘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무슨 놈의 인간이 남이 추월을 하는 걸 죽어도 못 본다. 뒤이어 달리던 놈이 앞으로 끼어들면 무조건, 앞질러야 직성이 풀리고 빵빵 소리가 났다하면 일부러 뒤로 끼어들어 똑같이 빵빵 클락션을 울려야만 그나마 분이 풀리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조금만 천천히 갔다하면 '운전의 참 맛을 모른다.' ' 차 안에서 씹질 하느라 늦게 달리냐' 하는 상스러운 욕과 함께 지독한 삿대질을 하는 통에, 이십분도 안 되는 거리를 삼십분이나 지체해야만 했다. 뻐끔뻐끔 붕어새끼 덕에 차 안은 지독한 담배연기로 질식하기 일보직전이었다.술 먹은 것도 불안한데, 제발 나 좀 잡아가쇼. 비명을 지르는 운전을 하는 통에 혹시나 경찰이 따라올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고귀한 나랏밥 먹는 놈들은 상습적인 음주운전을 하는 이 복희씨 같은 인간은 안 잡아가고 가끔 운 없게 과속하는 택시기사나 하물운전자에게 딱지를 팔랑이는, 완벽에 가까운 일처리 덕에 나는 무사히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완전히 사라진 그의 차를 확인하고 손에 들린 핸드폰 박스를 뜯었다. 반짝반짝 거리는 신형 카메라 핸드폰이 고귀한 수면에 취해 있었다. 스티로폼과 비닐껍질을 벗겨내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폴더를 열었다. 이미 계통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화면 가득 새 번호가 떴다. 무심코 0번을 꾹 누르자, 복희씨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왜, 찹쌀떡!'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재빨리 폴더를 닫아버렸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핸드폰이 요란스레 울려댔다. 화려한 불빛과 함께 화면엔 '무조건 받아' 문구가 떴다. 그 밑엔 복희씨의 핸드폰 번호가 무섭게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폴더를 열었다. 핸드폰을 귓구멍에 가져다 대기가 무섭게, '새끼야, 장난해? 네가 전화비 안 낸다고 괜히 장난전화질 하고 놀다간 뇌를 씹어 먹어주겠다! 돼지처럼 퍼질러 잠이나 자' 하는 노기 띤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뚜-뚜-뚜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처럼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복희씨의 행동은 이제 특별히 놀라운 것도 없었다. 하여간 좋은 걸 사주고도 말로 까먹으니, 고마운지 어쩐지도 모르겠네. 핸드폰 박스를 쓰레기봉투 위에 올려놓고 대문을 열었다. 놈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어디서 났냐, 얼마 줬냐. 하는 쓸데없는 추궁을 당하기 전에, 핸드폰을 주머니에 쑥 집어넣고 방 앞으로 걸어갔다. 권솔과 이 경원의 방은 아직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이유야 어찌되었건 가게에서 나만 먼저 빠져나온 게 미안해졌다. 아침에 감기가 어쩌고, 잔뜩 아픈 척 하던 솔이 새끼가 생각났다. 옷만 갈아입고 미리 보일러나 틀어놔야겠다. 얼큰하게 콩나물국이나 팍팍 끓여놓을까. 아니지, 연애하느라 바쁜 새끼 뭐가 예쁘다고. 괘씸한 놈의 행동을 억지로 떠올릴수록 인상을 찌푸리며 기침하던 권솔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에이씨, 망할 자식. 하여간 귀찮게 만들고 있어. 이놈의 정이 문제다. 툴툴대며 몸을 돌렸다. 주인 집 할머니 화단에 몰래 심어놓은 파뿌리를 듬성듬성 움켜쥐고 솔이 새끼 부엌으로 곧장 달려갔다.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국 한 사발을 처먹게 하고 재울 생각이었다. 콩나물 대가리 몇 개 남겼다는 이유로 머리털을 있는 대로 뜯어놓을 상상을 하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 경원아, 경원아. 내가 잘못했어." ……잠깐, 이게 뭔 소리지. 구슬픈 음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 경원아, 경원아아. 제발 문 좀 열어줘워." 이건 필시 김 지만의 목소리였다. 놈은 애타게 경원이 새끼를 부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잔뜩 주눅이 든 채, 훌쩍이고 있었던 김 지만의 '경원아아, 경원아아.' 하는 눈물겨운 음성이 다시 한 번 마당에 울려 퍼졌다. ……저러다 동네사람 깨우지. 뽑아놓은 파를 싱크대 위에 대충 집어던져놓고 밖으로 뿔뿔 기어 나왔다. 덩치로는 황소도 때려잡을 김 지만 새끼가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방문을 향해 눈물, 콧물을 한 바가지씩 쏟고 있었다. " 이봐, 곰. 너 거기서 뭐하냐." 김 지만이 흠칫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놈은 눈물범벅이 된 볼을 열심히 비비적거렸다. 이제 와서 안 울었다고 하려고? 인마, 늦었다. " 뭐하냐니까. 설마 경원이 내 방에 있냐?" " 응, 아마도." 지만이 놈이 거대한 대가리를 푹 떨어뜨렸다. 다리가 저린지 침을 묻혀 코를 찔러대는 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저런 자세로 앉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뉴스에선 날씨가 꽤나 풀렸다고는 하지만 봄이 되려면 아직 멀기만 했다. 하물며 새벽까지 내린 비 때문에 땅은 질퍽하게 젖어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인지 엊그제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바닥은 살얼음판처럼 꽁꽁 얼어있는 상태였다. 지만이 새끼의 청바지가 바닥에 들러붙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왜 하필 청바지냐. 이제 일어난다고 해도 잘못하다간 무릎부분이 푹 찢어질 것 같았다. " 왜? 너희들 무슨 일 있었어? 혹시 싸웠냐." 놈의 어린애 장딴지 만 한 팔뚝에 오돌오돌 돋아난 닭살이 눈에 띠었다. 코끝은 이미 빨갛게 부어 있었다. 닭똥처럼 뚝뚝 떨어진 눈물이 턱에 매달려 고드름이 될 지경이었다. 지만이 놈이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내가 잘못해서 우리 경원이가 좆나 화났다." " 글쎄. 내가 보기에 네가 잘못한 일이 크게 있을 거 같진 않다만……, 뭔데." 지만이 새끼가 곰 같은 손바닥으로 덥석 내 손을 잡아왔다. 시체처럼 차가운 손가락에 냉기가 흘렀다. 뼈마디가 시렸다. 억지로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놈은 빌빌대는 약골인 내가 감당할 수준의 힘이 아니었다. 김 지만은 개뼈다귀를 찾으려드는 필사적인 개새끼마냥 온기를 찾아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살며시 고개를 쳐들고 눈물을 글썽였다. 고요한 새벽에 고릴라 같은 놈이 우람하게 훌쩍이는 모습을 나 홀로 감당하자니 심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등치 아깝게 시리 눈물도 많으셔라. 김 지만이 손톱으로 퉁퉁 부운 눈두덩을 꼬집었다. " 나랑 말도 하기 싫대. 꼴도 보기 싫고, 눈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어쩌면 좋겠냐." " 아, 글쎄. 들어보나 마나 네가 잘못한 게 아니래도 그런다. 분명 별 시답지도 않은 걸로 심사가 빌빌 꼬여서 저 지랄이겠지." " 그야, 뭐." 녀석이 말을 얼버무리며 은근슬쩍 동의를 했다. " 그리고 하루 이틀 싸운 것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유난을 떨고 그러냐." 지만이 놈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 유난 아니다. 이번엔 심각해. 싸워도 각방을 쓰자고 한 적은 없었단 말이야. 나 이제 어쩌지?" 각방이라. 그래, 각방이란 말에 네가 똥줄이 탄 거였구나. " 어쩌긴 뭘 어째. 지금까지 죽 해오 던대로 바짝 엎드려야지. 야, 권솔은?" " 일 끝나자마자 피시방으로 날아갔다. 아침에 들어온다고 찾지 말라더라. 그리고 있잖아. 아, 아니다." ……새끼, 어색하게 아니라고 말하면 진짜 아닌 게 되냐. 그래서 내가 널 좋아 하는 거야, 지만아. 이, 순한 곰 새끼야. " 빨리 불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만이 놈이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아랫입술을 앙다물자, 놈은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소소히 고해바쳤다. " 확실한 건 아닌데, 그 새끼 잔돈 없다고 네 연두색 패딩잠바에서 팔천 원 오백 원 꺼내가는 거 봤다." 김 지만이 확실한 건 아닌데, 라고 시작한 말은 무조건 확실한 말이었다. 요새 천 원짜리가 만날 없어진다 했더니 범인은 역시나 권솔 짓거리였구만. 아침에 들어오면 내 이 자식을 당장……! " 경원이 새끼, 내 방에 있다고 했지?" 복슬복슬한 숱 많은 머리털을 쓰다듬자, 지만이 놈이 히죽히죽 웃었다. " 네 내시짓거리에 보답할 겸 경원이 반응 좀 떠보고 올께. 기다려 봐라. 아무튼 내가 너 때문에 귀찮아 죽겠다." 지만이 놈의 얼굴이 밝아졌다. 놈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깨를 떨어뜨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딱 보니 이놈은 처음부터 나를 이 경원 반응 떠보기의 도구로 삼기 하기 위해 권솔 새끼가 돈 훔쳐간 사실을 고해바친 듯 했다. 그것도 모르고 다크써클이 턱밑까지 내려오게 자판 두드리고 있을 권솔 생각하자 순간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까지 내 돈 훔쳐간 대역 죄인을 봐 줄 생각은 없었다. ……김 지만, 순진한 곰 새끼라고 했던 거 취소다. 너는 영악한 곰 새끼다. 불 여우같은 경원이 년이랑 살 섞고 산 게 무려 십년이다. 이쯤 되면 순수한 게 비정상이겠지. 이해한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오는 김 지만을 무시하고 방문을 열었다. 놈이 두 손을 붙잡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얼어붙은 땅바닥에 애인을 세워놓고 고귀한 이 경원께서는 주인도 없는 방에 대자로 누워 오이 마사지를 하던 중이었다. 만화책을 배에 세워 휙휙 넘기며 깔깔 웃고 있는 꼴을 내려 보고 있자니 다소 어이가 없어졌다. 놈이 나를 발견하고 발바닥을 까딱였다. 이 경원이 손목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때마침 시간이 다 되었던 건지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오이를 떼서 접시위에 던져놓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왜 빈손이냐. 너 내 문자 못 봤냐." 이 복희씨가 핸드폰을 박살내는 통에 당연히 못 봤지. ……이렇게 말했다간 왜, 어떻게, 그래서하고 따지고 들 게 뻔했다. 설명하기 귀찮다.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 아, 핸드폰을 잊어버려서 못 봤는데. 왜, 문자했었냐." 껍질도 벗기지 않은 애호박 같은 오이를 바지에 북북 닦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으며 놈이 말했다. " 올 때, 순대사오라고 문자 때렸지. 너 기다린다고 라면도 안 먹었는데, 씨발. 짜증나네." 내가 아니라, 순대를 기다렸겠지. 놈이 정신박약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많이 째려라, 네 눈만 아프다. 잠바를 훌러덩 벗어 방구석에 던져 놓고, 침대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 지금 순대가 문제냐. 지만이 새끼, 왜 저러고 있냐. 네가 시켰지?" 이 경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덧붙였다. " 야, 밖에 진짜 추워. 쟤 저러다 얼어 죽는다." 경원이 놈이 갑자기 지랄을 하기 시작했다. " 개새끼. 얼어 죽든 말든 내가 알게 뭐야." 놈은 먹다 남은 오이를 방바닥에 집어던지고 본격적인 흥분엔진을 풀 가동시켰다. " 요새 오냐, 오냐 했더니 임꺽정 같은 게 머리끝까지 기어오르고 지랄이야. 얼어 뒈지게 내버려둬. 그 씨발 새끼는 그래도 싸." 나는 반쯤 몸을 일으켜 양심 없기론 이 복희씨와 양대 산맥을 이루고도 남을 이 경원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얼굴을 죽 들이밀자 놈이 흠칫 놀라 허리를 뒤로 물렀다. " 얘가 왜 이래. 맨 정신으로 네 얼굴보고 있으니까, 현기증 일어난다. 가까이 오지 마, 새끼야." " 야, 우리 툭 까놓고 말해보자. 네가 오냐, 오냐 했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지만이가 너한테만 유별나게 성질 죽이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나는 네가 이럴 때마다 저 새끼 예전 성격 나올까봐 조마조마해 죽겠단 말이야. 제발, 우리 조용히 좀 지내면 안 되겠냐." 경원이 놈이 흥 콧방귀를 꼈다. 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가만히 있어도 좁아터진 방구석을 왔다, 갔다 거리기 시작했다. 놈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 개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어. 감히 내 앞에서 삶은 호박 같은 망할 년이랑……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아우, 씨발!" 놈은 죄 없는 솜이불을 주먹으로 미친 듯이 내리쳤다. 어찌나 흥분하셨는지 움켜쥔 손에서 바람소리까지 들렸다. 스치듯 맞아도 전치 1, 2주는 거뜬한 주먹이었다. 내가 이 경원의 짐승 같은 싸움실력을 모르겠는가. 있는 대로 갈아엎고 다녔던 고등학교시절은 꿈에서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놈의 살벌한 횡포에 침대가 삐걱삐걱 소리를 질렀다. 침대가 어긋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내 몸이 우선이다. 녀석을 피해 귀퉁이로 몸을 숨겼다. 말을 하지 않으니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녀석이 말한 '삶은 호박 같은 망할 년'의 안부가 묻고 싶어졌다. ……살아는 있겠지? 삶은 호박. " 야, 야! 정신 사나워. 그만해라, 좀." 경원이 놈이 열심히 주먹질을 하던 이불을 팽개치고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끝났나하고 안심할 찰나, 놈이 벌떡 일어나 베개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 왜 그러냐고오, 인마." 이 경원이 고양이처럼 죽 찢어진 눈알을 사납게 번뜩였다. " 이게 다 재수 털리는 사장새끼 때문이야!" 이 경원은 죄 없는 베개를 끊임없이 못살게 굴다가 흥분의 강도가 쌔짐에 따라 방바닥에 처박혀 있던 내 옷을 구석지로 뻥뻥 걷어찼다. " 갑자기 손님들이 떼거지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김 지만한테 홀 좀 보라고 시켰는데 말이야,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삶은 호박 같은 년이 저 새끼한테 연락처를 물어보는 거야. 나는 바텐더 석에 앉아서 김 지만이 어쩌나하고 가만히 있었어." " 그래서……." " 쥐 죽은 듯이 양주에 물 타고 자빠져있던 사장새끼가 갑자기 내기를 하자고 닦달을 하더라고." " 내기? 뜬금없이 무슨 내기냐." 이 경원은 억울한지 씩씩대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 그러니까 말이다. 걔네 핏줄은 다 또라인가 봐.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장 놈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지만이 새끼가 연락처를 받는 다에 내 월급 두 배를 걸잖아." " 두, 두 배씩이나?" " 솔직히 너라도 안 땅기겠냐. 자신 있었어. 당장 그러자고 했지. 근데 그 놈이 내가 지면 뭘 해줄 거냐고 묻더라. 난 당연히 돈은 없다고 했지. 그러니까 사장새끼가 뭐라는 줄 아냐, 한 번 대주래." " 대줘? 때리겠단 뜻이야?" 이 경원이 나를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 달나라 떡방아 찧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놈이 순진한 척하면 속물로 보는 세상이다. 적당히 해라." 이게 누구한테 뺨 맞고 와서 어디서 지랄이야. 저 고약한 성질머리 때문에 언젠가 제대로 후회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니, 제발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경원은 거지같은 성격에 비해 인생을 너무 순탄하게만 살아온 경향이 있다. 등 뒤에 불곰 한 마리가 단단히 지키고 서있으니 무서워서 누가 건들이기 하셨을라고. 아이고, 운도 좋으시지. " 그럼, 혹시 쌰바쌰바를 하자는 말이었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분명 밖에서 엿듣고 있을 게 분명한 김 지만에게까지 내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 경원이 쯧쯧 혀를 찼다. 녀석은 힐끔 방문을 바라보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나야 당연히 싫다고 했지. 그러니까 능글능글 쳐 웃으면서 한다는 말이 월급 한 달 치를 봉투째 걸라잖아. 내 생각엔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던 게 분명해. 은근슬쩍 인건비 줄이려는 속셈이지. 근데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내기를 했지……." 이 경원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의 구겨진 얼굴을 봤을 때, 놈의 목구멍에서 생략된 말은 간단히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김 지만이 연락처를 받아 챙긴 모양이로군. 이 경원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 마리 딱따구리가 되어 열심히 씨불였다. " 배신을 때려도 유분수지, 그 새끼가 나한테 감히 이럴 수 있냐. 아주 제대로 뒤통수치고 지랄이야." " 야, 너무 그러지 마. 애, 자체가 착해서 싫다는 말도 잘 못하잖아. 그 호박 같은 여자한테 미안해서 그랬겠지." 이 경원이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 너 뭔 소리하냐." " 응?" 놈이 침대 위로 올라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 어디 아프냐? 공자 왈, 맹자 왈 거리지 말고 병원이나 가라. 그리고 한국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지. 내가 화난 건 말이야, 그 새끼가 전화번호 적힌 쪽지를 받아서가 아니야. 어차피 그 호박 년 안볼 때,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 봤으니까 상관없어." ……그럼 뭐야, 특별히 화낼 이유도 없고만.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쯤 분명 동상이 되었거나, 추워서 기절해 있을 김 지만에게 따뜻한 생명수와 안락한 온기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방문을 열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이 경원이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하얗던 얼굴엔 의미모를 분노와 역한 감정이 드러났다. " 문 열지 마! 얼어 죽게 내버려 두라니까!" " 너 애가 왜 그 모양이냐. 밖에 진짜 춥다니까!" 이 경원이 저벅저벅 걸어와 방문을 막아섰다. 놈의 큰 키 덕분에 머리 위에 그늘이 졌다. 녀석이 내 어깨를 죽 잡아당겼다. 그리고 침대까지 질질 끌고 가 자리에 앉혔다. " 나는 애인이 있다, 연락처는 필요 없다, 그 호박 년 앞에서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놈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 너 진짜 양심도 없다." " 내가 뭘!" 이 경원이 꽥 악을 질렀다. " 장미 말이야. 너나 좀 확실하게 해. 누가 누구보고 뭐라고 하는 줄 모르겠네." 침대에서 일어나는 날 보는 이 경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보란 듯이 녀석을 무시하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신발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김 지만이 문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대감에 들뜬 놈의 얼굴이 방문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도와주려는 사람 민망하게 똥 씹은 얼굴이라니, 도로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보다! " 너의 이 경원 이께서 화 다 풀었단다. 빨리 네 방으로 데려가. 나 잠 좀 자자." 음침했던 김 지만이 얼굴이 밝아졌다. 추운 곳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던 덕분에 웃고 싶어도 제대로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아 움찔움찔 거리는 녀석의 표정을 보는 게 지독히도 무서웠다. 급기야 놈은 달려오다 엑스자로 다리가 엇갈려 얼음바닥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주인 할머니의 장독대 뚜껑이 덜컹거렸다. 바지에 들러붙는 얼음 조각을 떼어내며 김 지만이 엉기적엉기적 일어났다. 고통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녀석에 비해 얼음바닥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심심하고 할일 없는 겨울 밤, 네가 사람 제대로 웃기는 구나. 지만이 새끼가 문기둥을 덥석 붙잡았다. 놈은 산만한 덩치를 구부려 방을 힐끔거리며 최대한 귀여운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물론, 듣는 사람에겐 역겨운 목소리였다. " 경원아아아, 우리 방으로 가자아. 어이, 각시이이." 이 경원이 툴툴대며 마지못해 밖으로 나왔다. 추리닝 속에 손을 집어넣고 엉덩이를 북북 문지르는 경원이 놈을 바라보는 김 지만의 얼굴에 사랑스러워 당장 돌아버리겠다, 하는 감정이 묻어났다. " 경원아. 내가 잘못했다. 한번 만 봐줘라." 개 같은 성격의 이 경원이 대충 꼬투리 잡아, 분풀이하는 걸로 밖에 안 보이는데 지만이 새끼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녀석에겐 이 경원이 화난 이유보다, 단순히 화났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김 지만이 호박아가씨의 전화번호를 눈앞에서 찢었다 해도 이 경원이 왜 눈앞에서 찢냐, 그런 몰상식한 짓이 어디 있냐, 화를 냈으면 지만이 새끼는 아예 폭포수 아래서 웃통을 까고 앉아 용서를 구했을 것이 분명하다. 때려도 좋다, 욕해도 좋다, 무시해도 좋다, 저런 얼굴로 이 경원을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놈이니 당장 세 달치 월급을 가불해서 밍크코트를 척 사다 바쳤겠지. 그래놓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전화해서 왜 돈 안 붙였다고 하면 사장이 도망갔다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미루고 자빠졌으니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정답이다. 놈에겐 부모라는 존재자체도 경원이 놈에게 할 수 있는 선물을 축소시키는 기계로 밖에 여기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보면 볼수록 김 지만의 몸속엔 머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자명하다. 그때, 토라진 마님을 향해 머슴이 공손이 머리를 조아렸다. " 김치 볶음밥 해줄까? 햄이랑 계란 넣어서. 싫어? 음, 그럼 부침개 해줄까? 냉장고에 치즈 있던데." " 살찌잖아. 왜, 나 살쪄서 방바닥 굴러다니면 호박 년 만나서 놀라고? 개새끼야, 아서라." 저 새끼는 어쩜 생각하는 것도 꼭 저 모양일까. 김 지만을 놀리는 재미에 이 경원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놈은 괜히 툴툴대며 지만이놈의 안절부절 못하는 반응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 미안, 내가 잘못했어. 생각이 짧았다. 용서해 줘." 지만이 놈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머슴아, 걸려들었구나. 경원이 놈이 못 참겠다는 듯이 킥 웃었다. 그러다 재빨리 미소를 거두었다. " 가서 소주 한 병 사와. 참치 캔 있지? 김치찌개 끓여서 십분 내로 술상 봐와. 어? 빨리 안 뛰어가! 하나, 둘……." 머슴에 왕 팔불출 김 지만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님께서 미천한 자신에게 김치찌개를 끓이라는 하명을 한 것에 지나치게 감격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각시이, 잠시만 기다려! 빨리 갔다 올게." 김 지만이 기쁜 얼굴로 팔을 붕붕 저었다. 경원이 놈이 피식 웃자, 놈은 5세 미만 어린애도 하지 않는 다는 이단 폴짝 뛰기를 선보이며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경원이 놈이 킥킥대며 나를 돌아보았다. " 너도 한잔 하고 자라." 나는 덜컹이는 대문을 보며 말했다. " 됐어, 잠 와 죽겠어. 너희들끼리 오붓하게 놀아라. 11시까지 안 일어나면 아침에 깨우러 와." 경원이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나는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복희씨에 이어 김 지만, 이 경원 민망커플의 생 라이브 지랄까지 감상하고 나니 1년 묵은 피로가 몰려왔다. 추리닝만 갈아입고, 감긴 눈으로 이를 닦은 뒤, 바로 꿈나라로 이동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눈을 떴을 때,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려대고 있었다. 방 안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겨울이란 계절의 특성상 아침이 길어진 탓이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핸드폰을 찾으러 한참동안 방바닥을 기어다녔다. 그 사이 전화벨은 시끄럽게 울렸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받을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될 텐데 안 받는다 싶으면 톡 끊었다가 일초를 못 견디고 다시 전화를 하는 인간은 역시 '그'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번호를 아는 사람도 '그' 밖에 없을 테고. 비몽사몽한 정신에 겨우 핸드폰을 찾아냈다. 폴더를 열기가 무섭게 잔뜩 가라앉은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집 앞이다, 나와. 」 ---뚜뚜뚜뚜. 지금 몇신 줄 알긴 하냐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데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집 앞이라고 하지 않았나. 안 나간다고 하면, 당장 문을 때려부수고 쳐들어올 놈이었다. 괜한 자극은 서로에게 불필요할 뿐이었다.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욕을 퍼부우며 옷을 갈아 입었다. 방바닥에 돌아다니는 유니폼 바지를 도로 입었다. 조끼까지 그대로 입었다. 그 위에 코트를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가로등을 쫒아 골목을 꺾었다. 큰 길가로 한참을 내려온 끝에 인적이 드문 구멍가게 앞에 세워진 복희씨의 차가 눈에 띄였다. 차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지독히도 매서운 바람에 귓볼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징그럽도록 추운 날씨였다. 방향을 바꿔 운전석으로 돌아 가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복희씨의 손에 걸려 있던 담배꽁초가 발 밑으로 떨어졌다. 그가 짧게 숨을 토해내자,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한, 두잔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얼굴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그래서 더 불안해졌다. 말 한 마디 없이 나를 응시하던 복희씨가 조수석을 가리켰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 벨트." " 네?" 복희씨가 대놓고 짜증을 냈다. " 벨트 매라고." " 벨트는 왜요. 어디 가게요? 그냥 여기서 말씀하세요." 복희씨는 내 말에도 너는 짖어라, 나는 흘려듣는다.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 응, 어디가."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답으로 가볍게 대화를 종료시킨 뒤, 무서운 속도로 시동을 걸었다. 말 걸면 죽여버리겠다, 는 눈빛으로 묵묵히 운전을 하는 복희씨의 차가운 얼굴에 나도 모르게 겁을 집어 먹었다. ……겉모습은 평상시와 똑같아 보이는데 또 왜 저럴까. 나는 주춤주춤 벨트를 매고 복희씨의 무뚝뚝한 얼굴을 기웃거렸다. " 은근히 무섭네요. 갑자기 또 어디 가는 건데요?" " 날씨가 좋잖아." " 날씨가 좋아요?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 드라이브하기 좋은 날씨다." 복희씨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번개가 내리쳤다. 섬광같은 불빛이 눈 앞에 번뜩이며 가뜩이나 부실해 보였던 소나무가 두동강이로 분질러졌다. 날씨 한 번 퍽이나 좋으네요. 하얀서리가 불투명하게 가리고 있던 창문을 주먹으로 정신없이 문질렀다. 축축한 물에 젖은 밖의 모습이 어릿하게 비쳤다. 주룩주룩도 모자라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퍼부어 대는 실로 무시무시한 장대비. 대문을 나설 때 한, 두방울씩 내리던 빗줄기가 갈수록 두껍게 변해가고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겨울비였다. ……정말 미친 듯이 드라이브하고 싶은 날씨로군요. 묵묵히 운전만 하는 복희씨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급히 창문으로 고개를 돌림으로서 억지로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 요새 할 일 없어요?" 복희씨가 능글능글 웃었다. 갑자기 바뀐 표정에 미심쩍인 기분이 들었다. " 너랑 노는 게 내 일이다." 정말 할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대꾸했다. " 지금 몇신 줄 아세요? 그 쪽은 절대 모르겠지만,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잠자는 시간이에요. 남의 잠 깨우면서 노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생각 안 해." 내가 잠시 착각했다. 진지하게 말하면 그래도 듣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다. 이건 뭐, 소 귀에 경 읽는 게 차라리 쉬울 판이니 쓸데없는 힘 낭비는 하지 말아야겠고 다짐했다. ……눈을 감았다. 좌석에 몸을 파묻고 머리를 기대었다. 정신없이 울려대던 전화에, 재미없는 새벽 드라이브에 떠밀려져 똥싸다 끊긴 것처럼 찜찜하게 멈춰있던 졸음이 급하게 밀려왔다. 잘 돌아가지 않는 보일러 덕에 시베리아가 따로없는 방보다 차라리 차 안이 더 따뜻했다. 심연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던 수면욕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렇게 꿈의 나락으로 기쁘게 빠지려는 찰나, 볼 딱지를 강하게 후려치는 매서운 손길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무릎 위에 빈 담배곽이 떨어져 있었다. " 너는 애가 어째 그 모양이냐. 지금 잠이 와? 잠이?" 나는 담배곽을 운동화 뒤꿈치로 구겨밟았다. " 잠이 안 올 건 또 뭔데요. 정, 할 일 없으면 박태열씨나 잡으러 가시죠. 괜한 사람 불러서 이러지 말고." 박태열이란 이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희씨는 울트라 급으로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 "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바지에 도청장치 넣어났거든. 멍청한 놈, 지금 그것도 모르고 좆 대가리 땀띠나게 쑤시고 다니고 있겠지." " 역시 복희씨답네요." " 뭐가 나답다는 건데? 치밀한 행동이?" " 아니요. 비열한 짓거리와 수준낮은 말투가요." --------끽! 창 밖으로 머리통이 튕겨나갈 뻔 했다. 복희씨가 갑자기 거침없이 브레이크를 밟아댄 까닥이다. 흡사 걸레 빤 물에 세수를 한 것 같은 찜찜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던 그는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차를 사납게 몰았다. 쾌속질주를 표방하는 그의 거침없는 운전에 이번엔 와이퍼 사이로 머리가 튕겨져 나갈 뻔 했다. 그는 비오는 한 밤중에 신세기 사이버 포뮬러의 하야토처럼 심각한 스피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신호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문드문 세워져 있는 자동차 사이를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더니 요란한 곡예를 부리듯 갑자기 후진을 했다가 붕 하고 속도를 밟고 또 다시 급브레이크를 사정없이 밟아대며 나,미친놈임을 스스로 선전포고하고 돌아다녔다. " 진짜 돌은 거 같아요." 살짝 등만 건드려도 콸콸하고 쏟아질 것 같은 배속에서 울렁증이 일어났다. 비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 범위 안에서 창문을 열며 말했다. " 속도 좀 줄여요. 난 아직 죽기엔 젊은 나이라고요!” 복희씨의 속사포처럼 빠른 대답이 들려왔다. “ 그럼 나는 뒈지기 빠른 나이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복희씨도 죽기는 싫었는지 은근슬쩍 속도를 줄였다. 그는 내가 놀릴 만 한 짧은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뒤늦게 바쁜 척을 했다. 그가 뒷 좌석을 가리켰다. “ 주워 먹어.” 주워 먹긴 뭘 주워먹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 하고 그를 보자 복희씨가 '샀어.' 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리고 매몰차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저 주둥이를 내가 무슨 수로 열게 만들겠는가. 그의 부름대로 몸을 돌려 뒷좌석을 더듬거렸다. 어두운 차안 덕에 생각보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 좀 켜달라고 할까, 싶다가 긁어 부스럼이라고 괜히 귀찮게만 굴 거 같아서 그만 뒀다. 등을 최대한 구부려 손을 깊숙이 넣은 후에도 한참 만에야 구석진 틈 사이에 끼어있는 노란봉지를 끄집어냈다. 귀퉁이를 죽 잡아 올리자 벌어진 입구 사이에 뜨거운 김이 콧구멍 속으로 확 퍼졌다. 노릇하게 구워진 계란냄새와 달짝지근한 팥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또 붕어빵인가. “ 오는 길에 보니까 너 생각나더라.” 내 생각도 하고 의외네. 눈으로 대충 고마움을 표시하자, 복희씨가 정나미 떨어지는 말을 쏟아냈다. “ 너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럼 그렇지. 어째 잘 나간다 했다. 사람은 미워하되 먹을 건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고무줄로 질끈 묶여 있던 봉지를 얼어젖혔다. 돌덩어리 만 한 군 고구마와 고구마의 기세에 눌린 군밤 몇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 위에 붕어빵이 기본을 깔아주고 있었다. 사상은 불순했지만 아직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그런대로 맛은 있어 보였다. 고구마 봉지를 내려다보다 문득‘고구마 주세요.’하고 말하고 있었을 이 복희씨를 생각하니 낄낄 웃음이 났다. ……안 어울리니까 은근히 더 웃기잖아. 하긴 직접 사러가지 않아도 형님, 제발 심부름 좀 시켜주세요. 하고 온 몸으로 외칠 쫄다구가 있으니 어련했겠냐만은. 나는 제일 못생기고 뭉툭한 고구마 하나를 끄집어냈다. 호호 손을 불어가며 껍질을 벗겨 불쑥 복희씨 코 앞에 내밀었다. 놀랐는지 그가 움찔 물러났다. “ 아, 해보세요. 아까 나 이런 식으로 먹여줬잖아요. 이제 내가 먹여줄게요.” 복희씨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아렸다. “ 너나 배터지게 잡수세요.” “ 네.” 본인이 눈에 쌍심지를 켜도 싫다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부드러운 노란속살을 한 입 베어물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게 눈물나도록 제 맛이었다. ……생긴 건 거지같은 게 맛은 괜찮군. 이 복희씨를 보며 일부러 소리를 내어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역시나 예상처럼 복희씨가 빠른 반응으로 내 기대에 부응해왔다. “ 가만보면 은근히 재수 없더라. 그렇다고 진짜 너만 먹냐? 혼자 먹으니까 좋아서 질질 싸겠냐.” 고구마 먹은 거랑 질질 싸는 거랑 뭔 상관이라고, 저런 저질스러운 비유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능적인 변태임이 확실하다. “ 안 먹는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러세요.” 복희씨가 고구마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사납게 핸들을 꺾었다. 중심잡지 못한 몸이 창문에 쾅쾅 부딪혔다. " 가만히 있어도 술 먹은 거 알거든요? 좀 스무스하게 운점 좀 하시죠, 네?" “ 그딴 거 몰라. 내가 아는 건 다른거지. 적어도 뭐든 3번은 물어보는 게 예의라는 거." 그가 불타는 눈빛으로 또 다시 고구마를 노려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이 이제 지긋지긋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 나도 그런 예의 몰라요. 그리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을 예정입니다.” 복희씨가 기가 막힌 듯 눈썹을 브이 모양으로 만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아이고, 김 계진씨. 너 요새 참으로 깡이 쌔지셨습니다? 오, 눈빛 봐. 무서워서 눈물이 질질 흐르는구만." “ 다 그 쪽한테 배운 덕분이지요.” 나도 모르게 주둥이에서 말들이 술술 터졌다. 뭐랄까, 확실히 복희씨를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지금이 깡이 쌔졌다는 표현이 맞을까. 물론, 이렇게 되기 까진 이 복희씨의 수준낮은 언어, 몰상식한 행동, 나잇값에 반하는 돌출된 장난에 의해 변한점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조폭이나 깡패하면 무서워서 덜덜 피하는 게 전부였을 텐데 지금은 묘하게도 그냥 덤덤한 느낌이다. 하물며 새싹과 쌍칼도 얼굴만 봐선‘나, 졸라 조폭임.’하고 쓰인 외모에 나 '주먹질 하고 밥 먹고 사는 놈임.‘ 이라고 도배질한 겉모습이지만 무섭거나 거리감이 생기진 않으니까. ( 여기서 권 솔과 김 지만은 친구라는 이유로 젖혀놓기로 하자.) 어색한 분위기에 눌려 계산된 헛기침을 했다. “ 마실 건 없어요? 난 콜라가 좋은데.” “ 목 마르냐.” " 네." 기대하는 눈빛으로 이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나를 놀릴 만 한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 침 모아서 삼켜!" “ 아쉽네요. 근데 저기 있잖아요, 우리언제까지 언제까지 차 안에……어, 어? 앞에, 앞에 보세요!” '언제까지 뇌 없는 놈들처럼 빗속을 달려야 되는 건가요.' 하는 물음은 끝내 입 안에 갇혔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차는 더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반쯤 휘어진 나무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차 위에 드리워졌다. 덜컹거리는 불안한 소리가 한번 터지기가 무섭게 빵, 빵 두려운 굉음을 쏟아냈다. 그리고 결국 팡파르 터지는 폭죽처럼 '펑' 하는 소리를 끝으로 자동차는 바윗돌처럼 멈춰 섰다. ……오, 마이 갓. 복희씨를 만나고 나면 오, 마이 갓의 연속이었다. 과연 여긴 또 어디란 말인가. 이런 중요한 때 차가 멈춰버리다니, 이렇게 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지리 운도 없으시지. 나는 이미 열려 있던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짙은 어둠뿐이었다. 지금 이 곳과 가장 잘 어울리는 도둑고양이 울음소리와 과연 왜 우는 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미친개의 컹컹대는 소리가 이 복희씨와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러나 밖을 살피는 것 마저도 창문 틈 사이로 사정없이 떨어지는 빗물이 좌석매트를 적셔대는 통에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급격하게 침몰하는 마음을 다스릴세도 없이 억지로 창문을 가리고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될까 하는 심정으로 복희씨를 돌아보았다. 혹시 차가 고장 난걸 모르나, 싶을 정도로 편안한 수면을 취하고 계신 이 사람은 과연 고민이란 게 있을까. 문득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는데 깨웠다고 고운소리 나오지 않을게 분명했지만 언제 멈출지 끝도 보이지도 않는 비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잘난 드라이브 코스로 산등성이 같은 곳엔 뭐 볼게 있다고 이쪽으로 차를 몰았는지 뼈가 부러져라 실컷 때려주고 싶었다. “ 일어나요! 지금 잠이 와요?” “ 응.” 자는 게 아니었나. 복희씨는 기다렸다는 눈을 떴다. 그는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비가 많이 오네. 시원하지 않냐.” 현재 자신이 처한 한경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그의 무던한 말투에 무한한 존경심이 들었다. “ 지금 그런 태평한 말이 나와요? 우리는 지금 산에 갇힌 거예요. 혹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요?” 내 목소리는 다급해져 있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냐만 지나치게 태평한 복희씨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복희씨가 가죽장갑을 성의 없이 벗어 뒷 좌석으로 휙 집어던졌다. " 죽기는 또 싫은가봐?" " 당연한 거 아니에요? 오래살아야죠. 악착같이 오래 살아서 부귀영화 누리고 죽을거에요." " 부귀영화?" " 네. 부귀영화요. 물 쓰듯 돈도 펑펑쓰고 심부름 할 사람도 거느리고, 아무튼 죽을 때까지 돈 걱정 안 하고 사는거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부귀영화에요. " 단순하네." 그가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비꼬든가 말든가 내가 생각하는 부귀영화는 그랬다. 백만 장자가 된 다거나 억만 장자가 된 다거나 또 돈으로 측정할 수조차 없는 값 비싼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아예 동화속 이야기고 내가 생각하는 '부자'는 무조건 돈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적당한 직장에 적당한 가족에 적당한 재산만 가지고 있다면 그런대로 돈 걱정 하지않아도 되는 '부자'의 조건에 부합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이상의 돈을 가지고 싶단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나는 더도 말고 덜도말고 딱 중간 인생, 평범하게 살길 원한다.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부자의 절대 기준이었다. " 빨리 죽고싶은 사람도 있나요. 복희씨도 오래 살고 싶잖아요. 안 그래요?" " 안 그래." 그가 단호히 대답했다. 돈에 환장한 사람치고 어울리지 않는 답이었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복희씨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그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 난 필요이상 오래 살까봐 그게 항상 걱정돼. 늙으면 겁이 많아지니 생각처럼 자살도 쉽지 않을 테고.” “ 무슨 말이 그래요. 오래 살면 좋잖아요.” “ 왜.” “ 그거야, 뭐. 다들 오래살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또…….” 복희씨가 이것 봐라, 하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는 편안한 자세로 머리를 기대고 눈만 내게 돌려 말했다. “ 오래되면 기계든 인간이든 다 고물이 되는 게 순리야. 고물이란 뭐냐, 쓸모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거지.” “ 그래서요." “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고물되기 전에 세상에서 알아서 사라져주겠다는 뜻이지." “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도 자살은 옳은 방법이 아니에요. 살인은 더더욱 그렇고." 복희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이 사람은 웃는 것 하나에도 뭐가 그렇게 여유만만일까. 그의 무한한 자신감과 당당함은 저런 뜻 모를 미소에 기이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봐, 내 말은 문제점의 본질을 알고 가자는 거야. 범죄자가 문제를 일으키면 범죄자를 없애면 되고, 실버사회가 걱정이 되면 노인을 없애면 되. 인간들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데 국가가 못 받쳐주면 알아서 죽어야지 뭐 어쩌겠어. 그리고 우선, 늙으면 보기 흉하잖아. 안 그래?" “ 안 그래요. 사람이 늙은 건 자연스러운 거에요. 복희씨도 언젠가 늙고요. 백날천날 젊은 건 아니잖아요.” " 당연히 나도 늙지. 내가 영원히 젊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나 역시 늙으면 고물이 될 테고, 그럼 모두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될 테지. 불필요하다는 말은 필요가 없다는 거야. 필요가 없다는 건 잊혀진다는 거고, 잊혀진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거지.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지기 전에 내가 나, 스스로를 없애고 싶다는 뜻이지 내가 늙지 않을거라는 말은 안 했어. 꼴깝떨지 마." 그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웃었다.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 같은 태도에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 뭐에요. 뭐가 그렇게 웃겨요!" “ 웃기잖아. 좋은 대학가라 설득하는 선생도 아니고, 내 앞에서 교과서적인 말투 쓰지마. 정 떨어지려고 한다. 네가 뭐라고 지껄이든 늙으면 처치곤란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아, 물론 젊다는 이유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을 특별대우 하는 건 아니고." “ 늙으면 처치곤란이다. 그게 빨리 죽고 싶은 이유에요?” “ 그래.” 오싹했다. 죽는다는 것에 그렇게 생각해 왔다고 말하는 복희씨의 말보다 그런 사상이 올바른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정답인양 알고 있는 그의 사상이 무서웠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 정말 그런가.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다! 당당한 그의 주장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역시 그건 아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 그 흉한 사람들이 내 아버지, 어머니라면 그럴 수 없지요. 만약에 복희씨 부모님이라면 그런 말 할 수 있어요? 당연히 아닐…….“ “ 흉해서 죽이기까지 했는데 말을 왜 못해.” 저 깡패새끼 놈이 방금 뭐라고 했지? 충격으로 인해 관자놀이 부근이 띵하게 울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복희씨를 응시했다. 그는 놀란 사람 기운 빠지도록 환하게 웃으며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 어이, 자네. 기껏 말한 사람 기운빠지게 그런 표정을 되도록이면 삼가하라고." 복희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과장된 행동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밀봉된 과자봉지처럼 뭔가가 포장되어 있어, 이 사람. 막연히 드는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지도 않다. 솔이 새끼의 말대로 계산된 모습 중 하나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이 복희씨의 과거는 나의 가난과는 별개로 상처와 외로움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을 거란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강하면 강할수록 쉽게 휘어진다. 물건이든 인간이든 그렇다. 내면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끈 하나를 잡아 빼면 거대한 골격을 중심축을 기점으로 소소한 것까지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을 건축물에 비교하는 것일 테지. 그때 복희씨가 입을 열었다. 창문 쪽으로 돌아간 그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 난 이 세상에 약한 모든 것을 경멸해.”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 때문에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 그래서 강해진 건가요?” 복희씨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 그것도 그렇고. 내가 강하단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게 소름 돋게 재밌기도 했고.” “ 소름돋게 재밌다는 게 폭행인가요?” 어느새 목소리가 격양되게 흘러나왔다. 복희씨는 흥분하는 나를 흥미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 나랑 너의 차이점이 뭔 줄 알아? 넌 죄를 느끼는 타입이고,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거야. 밥 부터 먹는 사람이 있으면 국부터 먹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아셔야지." 복희씨가 창문을 열었다. 거칠었던 비줄기는 그런대로 잠잠해져 있었다. 열린 창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인 후, 속삭였다. “ 너랑 다르다고 해서 다 나쁜건가. 반대로 넌 네가 착하다고 생각해? 천만에. 넌 나약할 뿐이야. 권솔에게 의지하고 김지만에 기대고. 자기 몸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척, 넓은 오지랖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신경쓰고, 또 그러다 안 되겠으면 혼자 울고불고. 내 말이 틀린가? 틀리면 한 번 반박해봐. “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순간 하려던 말도 잊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대놓고 비난한 적도, 더군다나 욕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복희씨는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웃으면서 말하지만 이건 교묘하게 나를 비난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이 새벽에 고작 나를 비난하기 위해 불러낸 것일까. 혼란스러워졌다. “ 반박 못하겠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는 바보처럼 떨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표정변화 하나 없었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같은 그 얼굴에 나는 지독하리 만큼 큰 절망감을 느꼈다. 복희씨는 네비게이션 옆에 있는 새 담배곽을 집어들었다. “ 그렇세 살면 재밌냐.” 그는 마이 안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조용한 차 안에서 지지직 담배 불 붙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던 그가 감정없이 말을 뱉어냈다. “ 배운 거 하나 없이 그 나이되도록 알바나 하는 주제에 번 돈은 고스란히 권솔의 합의금에 다 쏟아 붇고, 그나마 하나있는 저금까지 깨서 김 지만 사글세 얻는데 탈탈 털어주고, 이 경원인가 하는 놈이 카드로 몇 백 만 원짜리 하는 옷 사도 심하게 말하면 그놈이 상처받을까봐 초조해 하는 병신. 그게 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과연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녀석들이 방을 얻을 때 보태준 보증금은 권솔과 경원이 놈이 최대한 모르게 한 김 지만과 나만의 비밀이었다. 경원이 녀석 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솔이 알면 당장 자신을 죽이려 들거라고 벌벌떨며 이 경원이 무덤까지 절대 비밀로 함구하자고 각서를 받아낸 중대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복희씨가 알고 있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 않는가. “ 왜, 내가 알고 있는 게 그렇게 놀라워? 이거 기대에 보답해줘야겠군. 그런 의미로 더 놀라운 것도 하나 말해줄까?" 식은땀이 흘렀다. 복희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병신처럼 멍해진 얼굴로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있는 날 보며 복희씨가 차갑게 말했다. " 이건 너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어. 아니, 분명 모르고 있을 거다." " 무, 무슨……." " 넌 권솔을 좋아해." " ……!" 그는 오늘 나를 당황시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 더 재밌는 건 뭔 줄 알아? 그 병신새끼도 널 좋아한다는 거다. 물론 여기까지만 보면 크게 재밌진 않지. 진짜 재밌는 건 말이야." 복희씨가 느긋하게 내 반응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 한 쪽은 좋아한다는 감정자체를 아예 모르고 다른 한 쪽은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거다. 네 옆에 붙어있으면서 그 영악한 새끼, 애 좀 태웠겠지? 그러게 왜 어울리지도 않는 내숭을 떨어서 선수를 뺏기냔 말이야." " 나는 그 쪽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어요." 복희씨가 유쾌하게 웃었다. " 아직도 모르겠다고? 나는 더 할 말 없어. 묻고 싶으면 네 잘난 친구한테가서 물어 봐. 당황할 얼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 자꾸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그 놈은 애인이 있다고요. 그것도 8년이나 사귄……." " 너랑 이 복신이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 지 기대되네. 하긴, 그 새끼한텐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겠지만.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마. 그리고 정 궁금하면 일부러 물에 빠져보던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는 말을 하기엔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억지로 피했다. 그러나 내가 억지로 피한 시선은 그가 내 얼굴을 잡고 거칠게 돌려버림으로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복희씨가 검지로 내 심장을 쿡 찔렀다. 쿵쾅쿵쾅 뛰던 심장에 화르륵 불이 붙어 정신이 아찔해졌다. " 쥐새끼들처럼 대가리 맞대고 잘들 쳐 놀아봐. 오랜만에 신경거실리고 아주 즐거워 죽겠으니까. 미리 경고하는데 말이다. 도는 넘지 않는 게 좋아. 너나, 그 내숭쟁이를 위해서나 그게 인생살기 편할테지. 특히 우리 내숭쟁이씨에겐 네가 귀뜸 좀 해둬. 사지 멀쩡하게 살고 싶으면 지금 그 선을 평생 유지하고 있으라고." 침을 꿀꺽 삼켰다. 복희씨가 다시 한 번 내 심장을 손가락으로 찔러왔다. 그리고 턱을 거칠게 잡아채더니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대하고 있자, 허허벌판에 나 홀로 남겨진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복희씨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인위적이게 느껴졌다. " 너는 내꺼야." " ……!"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런 내 감정변화는 필시 그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복희씨의 미소가 한층 두드러졌다. "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내일도 그래. 너도 네 친구가 병신이 되는 건 싫을 테지? 그럼 우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그 어줍지 않은 감정 빨리 집어치워. 그래야 내가 널 용서하지. 안 그래?" 복희씨가 내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길게 단축버튼을 누르자 '네, 형님.' 하고 쌍칼이 대답했다. 새벽이라 자고 있었을 텐데, 통화음이 채 세번도 울리지 않아 즉각으로 전화를 받고 자고 있었던 티를 내지 않는 그의 군기잡힌 목소리가 아득하게만 들려왔다. 복희씨는 그에게 현재 위치를 간단히 설명하고 '30분 내로.' 한 마디만 던진 후, 통화를 끝냈다. ……30분, 그래 30분 후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다. 쓰러지듯 자서 내일 모레쯤에나 일어나고 싶다. 머릿골이 욱신거렸다. 수면 부족인 탓이다.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옆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질퍽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매서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 놓았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을 땐, 이미 운전석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복희씨가 가만히 서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다, 무슨 이유인지 뒷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 넌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타입이야.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 혹 어쩌다 잘해주는 새끼 만나면 그게 사랑인줄 알고 병신처럼 떠받들면서 살아갈 줏대 없는 새끼들. 그게 현재 너란 놈의 전부지." 복희씨는 또 다시 내게 악담을 퍼부어댈 모양이었다. 그가 신랄하게 덧붙였다. " 제발 좀 그 새끼들한테 벗어나면 안 되겠냐. 네 힘으로 살아보란 말이야!"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확실히 비난에 익숙한 놈이 아니었다. 중학교시절엔 권솔이 내 친구라는 이유로 같잖은 영웅대접을 받았고, 고등학교 때는 권솔에 김 지만까지 더해져 평범한 또래녀석들에 비해 어줍지 않은 권력을 휘두룰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학교는 누구도 나를 직접적으로 비난할 수 없도록 완벽한 테두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녀석들은 나에게 당장 필요한 힘과 어이없도록 자랑스러운 우월감을 가져다주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십대 초반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건 나를 보호할 테두리가 단숨에 사라졌다는 것과 녀석들의 무턱대로 나를 감싸는 보호가 생각처럼 쉽게 먹히지 않아서였다. 당장 주먹이 권력과 위치를 판가름하는 학교와 다르게 사회는 녀석들에게 대놓고 손가락질을 시작했다. 돈을 뺏으면 범죄자가 되었고, 주먹질을 하면 폭행범이 되었다. 재생 안 되는 인간쓰레기, 조폭이 되어 별을 달았을 땐, 완벽한 거렁뱅이가 되었다. 놈들의 권력은 비웃음을 샀다. 녀석들을 신봉하며 떠받들던 놈들은 이미 학교를 떠나가 대학생이 되어 취업에 찌든 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와 손가락질을 할거면 애초에 괄시를 했어야 했다. 처음부터 떠받들지도 말아야 했다. 녀석들처럼 학교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폭력을 배운 놈들은 흔히 말하는 주먹 맛을 절대 잊지 못한다. 그것이 재생 못하는 인간 쓰레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와 욕을 할거면 그들이 엇나갈 때, 싹을 잘라줬어야 했다. 물론, 학교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제 3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사회는 냉혹했다. 녀석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대놓고 욕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돈을 뺏는 것과 주먹질을 하는 것에도 나이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들이었다. 집단 패싸움과 소소한 싸움질에 찢어지고 다치고 온 녀석들에게 치료하고 간호하는 것이 내 학창시절의 전부였다. 그런 일들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데, 복희씨는 내가 보낸 시간들을 나약함, 무능력이라는 단어로 쉽게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작정하고 덤벼드는 복희씨의 비난에 최소한의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 " 이리와." 잠시 사그라들던 빗줄기가 다시 거세어지며 복희씨의 목소리를 얼핏 가렸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 이리 오라고."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복희씨의 단단한 팔이 내 목덜미와 허리를 짓눌렀다. 그가 눈 깜짝 할 사이에 내 몸을 뒷좌석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힘없는 물고기처럼 그의 손에 딸려 올라갔다. 다리가 자연스럽게 엉키며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복희씨의 거대한 몸뚱이에 깔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코닿을 거리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팔뚝을 힘차게 내리찍고 허벅지를 걷어찼지만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는 내 한쪽 다리를 약하게 밟으며 복희씨는 건조하게 말했다. " 넌 날 좋아해. 그렇지?" 일순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내 몸 안에 있던 감각들이 싸늘히 죽었다. 알아주길 바랐다. 저 사람도 내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주길 바래왔다. 복희씨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바로 알아내는 사람이니 감정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테지. 눈치하나는 진짜 기가막힌 사람이니까. 비는 그칠 생각 없이 이어져 내리고 있었다. 물줄기가 잠시 약해지다가 그것도 잠깐 억수같이 퍼부어 댔다. 나는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아 복희씨에게서 몸을 돌려 와이퍼만 노려봤다. ……왜 또 갑자기 조용하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복희씨가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 나도 그래." ……뭐가, 그렇다는 건데. 그의 입술이 이번엔 턱 밑으로 내려왔다.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차가운 입술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맞닿은 찰나, 코트가 벗겨졌다. 복희씨는 코드를 돌돌 말아 내 머리 뒤에 받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송곳 같은 손바닥으로 불쑥 가슴을 매만졌다. 후드둑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가슴이 휑하게 드러났다. 차갑게 얼어있는 젖꼭지 위로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그의 혀가 내려왔다. 복희씨의 손은 어느새 내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내가 좀 더 심한 반항을 하자, 그의 혀가 입술 위를 훑고 지나갔다. 긴장한 티를 고스란히 보이며 석고상처럼 굳은 채, 가만히 있었다. " 느긋하게 할 시간 없으니 협조 좀 해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았다. 내 그런 행동에 복희씨는 긍정의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찌이익 소리를 내며 지퍼를 내렸다. " 빨고, 핥아줄 시간 없으니까 그냥 넣는다." 오기로 붙잡고 있던 심장이 덜컹거리며 쿵 소리와 함께 발밑까지 뚝 떨어졌다. 복희씨가 내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아랫배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가 엉덩이에 바짝 붙었다. 보드러운 촉감이었다. 척추 뼈 위로 그의 혀가 짧은 애무를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지독한 아픔이 몰려왔다. 첫 번째 정사로 축축하게 젖은 입구에 복희씨의 흔적이 흘러나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허벅지를 성의 없이 닦아냈다. 그리고 질퍽한 액으로 번들거리는 항문 속에 손가락 네 세 개를 모아 한 번에 쑤셔 박았다. 나는 우는 것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땀에 젖어 밀려 올라간 내 유니폼을 한 번에 죽 끌어올렸다. 그때 갑자기 복희씨가 매섭게 허리를 때렸다. 손바닥에서 짝 소리가 났다.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하체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이미 벌어질대로 충분히 벌어져 있던 구멍이 오므려지며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복희씨의 손가락들을 고통스럽도록 꽉 조여 댔다. 어느새 비는 완전히 그쳐있었다. 주위가 조용하자, 상대적으로 복희씨와 내가 차 안에서 만들어낸 음란함이 고스란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특히나 내 안에 거칠게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그의 손가락이 마찰하며 만들어낸 생경한 소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앙다물었다. “ 으……윽!” 복희씨가 억지로 쑤셔 박힌 손가락을 한 번에 쑥 빼냈다. 구멍 안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그의 흔적들이 주르륵 따라 나왔다. 꽤 오랜시간 그의 물건을 힘겹게 받아들이고 있던 은밀한 부위가 시끈거렸다. 지독히도 쓰라렸다. 이제 안 다물어지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내가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그가 뱉어낸 정액은 끊임없이 흘러나와 엉덩이와 허벅지를 적시고 있었다. " 하려면 좀 천천히 하세요! 그 쪽은 모르겠지만, 저는 죽을 만큼 아파요." 복희씨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바지만 벗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특별한 애무 없이 거친 정사로 인해 찔금찔금 피가 새어나오는 내 항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찢어져 있는 항문 근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그가 짜증을 냈다. 그의 '씨발' 하는 욕지거리가 듣기 좋은 적은 처음이었다. " 못 참겠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참아봐." 취소다. 좋은 적이 아니라 징그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엎드려 있는 내 몸을 부침대처럼 뒤집어 엎었다. 좁은 공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것조차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복희씨는 굳이 내 두 다리를 허리에 걸치게 만들었다. 그가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손으론 탱탱하게 부어있는 젖꼭지를 주물럭거렸다. 그리고 잠시 방심한 사이,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던 항문 속으로 흥분하다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으로 변한 흉기를 뿌리끝까지 단숨에 쑤셔박았다. 찢어져 있는 항문안으로 고환까지 말려들어 오는 것만 같았다. 헉 숨소리를 내뱉는 것조차 힘들었다. 복희씨가 헐떡이는 나를 보며 낄낄 웃었다. 허리 안으로 들어와 있던 굳은살 박힌 손바닥이 상체를 살짝 들어올리자, 결합되어 있던 부위가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 아아아! 아, 악!"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복희씨는 내 말에 전혀 흔들림 없이 목표한 바를 꿋꿋히 달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축 늘어져 있는 내 발목을 움켜쥐고 양반다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누워있던 상체를 직각으로 일이켜세웠다. 뱃 속이 찌르르 울렸다. 뜨겁게 달궈진 쇠꼬챙이가 내장을 들쑤셨다. 이미 한 번의 정액으로 질퍽하게 젖어있는 항문은 그의 덩치처럼 우람한 물건을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아픔못지 않은 쾌감이 온 몸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기둥을 삼킨 구멍사이로 질퍽한 액이 흘러나왔다. " 누가 더 좋아하는 지 모르겠구만." 복희씨가 히죽거렸다. 한 번에 쑥 빠져나갔다가 또 한 번에 쑥 밀려오는 거친 행위에 내장이 콕콕 쑤셨다. 그의 동물적인 정력에 머리가 어질했다. 현기증이 일었다. " 이 새끼, 은근히 화냥년 기질있는 거 아냐? 좆 대가리에 환장하면 약도 없다지. 이러다 안 박아주면 잠도 못자겠네. 크큭." " 하아, 하!" " 다른 새끼한테 구멍들추고 다니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 지 알지? 이거 은근히 불안하네. 딱 내 사이즈에만 맞게 길들여 놔야겠어." 저질스럽게 웃는 그를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복희씨는 일부러 못본 척 시치미를 뗐다. 갑자기 허리가 들어올려졌다. 머리가 흔들거렸다. 그의 딱딱한 물건을 삼키고 있는 부위가 자세히 보였다. 징그러웠다. 정액과 핏물로 범벅이 된 그의 남근이 거칠게 내 안을 치고 들어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복희씨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저절로 허리가 휘었다. 쾌락에 몸이 마비당하는 느낌이었다. 찢어져 있던 부위가 다시 찢어지고 내 안에 그가 세 번째, 액을 분출해 낼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신음을 뱉어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정을 한 뒤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지쳐쓰러졌다. 복희씨의 몸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겼다. 단단한 팔뚝이 내 몸을 감싸 안자 속이 더부룩해졌다. 끈적끈적한 몸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허리를 들었다. 아직 내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잠들어 있던 복희씨의 물건이 서서히 욕망을 드러냈다. 그거 조금 움직였다고 바로 반응이 오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 한 번 더 할까." 그가 킥킥대며 물었다. 그러나 질문과는 달리 그의 물건은 이미 '한 번 더 하자.'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 했다. 복희씨가 허리를 일으키자 내 안에 박혀 있던 그의 남근이 요동을 쳤다. 엉덩이가 죽 따라 올라갔다. 그의 가슴을 억지로 떠밀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복희씨가 변태처럼 웃으며 보란듯이 젖꼭지를 와그작 깨물었다. 나는 그의 지나친 성욕에 혀를 내둘렀다. 그때 똑똑하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왜 진작 못 봤을까. 복희씨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복희씨 역시 노크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는 멈추지 않고 물건을 찔러왔다. 머리통이 창문에 콩콩 부딪혔다. " 아! 아! 뒤에, 누, 누가 왔는……아!" 복희씨는 내 말을 무시하고 찔러대기에 열중했다. 결국 그는 내 직장 안에 정액을 쏟아붓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싸질러 놨는지 항문 밖으로 철철 흐르는 정액을 보던 복희씨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복희씨는 바닥에 떨어진 코트로 대충 내 몸을 가리고 차 문을 발로 걷어찼다. 검은 그림자는 쌍칼이었다. 그는 일부러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시큼한 냄새와 복희씨와 내 흐트러진 옷차림만 봐도 대충 상황은 짐작했을 것이다. 쌍칼을 마주대하기가 부끄러웠다. 코트를 얼굴 깊숙히 뒤집어썼다. 복희씨가 그런 날 보며 낄낄댔다. 그의 매서운 손바닥이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 차는." 복희씨가 쌍칼에게 말했다. 놈이 공손히 대답했다. " 가지고 왔습니다, 형님. 이 차는 내일 애들보고 처리하라고 할까요." 복희씨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쌍칼이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코트가 휙 들춰졌다.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쌍칼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정말, 취미도 고약하시지. 코트를 밟고 있는 복희씨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그가 재빨리 피하며 내 다리를 죽 잡아당겼다. 나는 땀과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반항 한 번 못하고 딸려갔다. 등 언저리가 쓰라렸다. 다리가 밖으로 빠져나오자 복희씨는 나를 감싸 안고 어깨에 들춰멨다. 꽥 비명을 질러도 소용없었다. 정액범벅이 된 허벅지를 타인에게 보인다는 것이 지긋지긋하게 창피했다. 복희씨가 움직이자 쌍칼이 재빨리 뛰어가 뒷좌석 문을 열고 그를 기다렸다. 복희씨가 내 몸을 휙 집어던졌다. " 집에 데려다 주고 와." " 네, 알겠습니다." 복희씨는 고장 난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 내 앞에 멈춰섰다. 정사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양복자락이 펄럭였다. 옷을 뒤적이는 그의 하얀 손이 찾아낸 것은 두툼한 봉투였다. 복희씨는 봉투를 대뜸 내 앞에 뚝 떨어뜨렸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대답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복희씨는 내게 등을 돌리고 서있었다. " 부족하면 전화해." 복희씨는 마지막 내 자존심마저 잘라내기로 작정한 사람같았다. " 그게 네 값어치니까." " ……!" 그게 무슨 뜻이야. 씨발, 왜 또 혼란스럽게 만들고 지랄이야.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복희씨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쌍칼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자, 멈춰있던 차가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어젯밤, 한숨도 자질 못했다. 신나게 따먹히고 나서 받은 게 고작 돈 몇 푼이란 말인가. 사실 강압적으로 따먹힌 것도 아니었다. 내심 좋았던 부분도 있었다. 내가 순결을 지키는 요조숙녀 나부랭이도 아닐 뿐더러, 어느 정도 합의가 있다면 관계를 맺는 것 자체에 큰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다. 차라리 '즐거웠다.' 한 마디로 끝냈다면 이렇게 혼란스럽지도 않았을 테고, 벌레 취급 당한 분노도 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봉투를 내밀었다. '돈 걱정하지 않고 살게 해줄수도 있다.' 는 말을 지켜보이고 싶었던 걸까. 혼자 골머리를 앓아봤자, 내가 이 복희씨의 어둠침침한 속내를 어찌 파악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정신 빠진 놈처럼 핸드폰과 봉투를 한참동안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문득 봉투를 비틀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하얀 백지수표 여러 장이 얌전히 누워있었다. ……돈, 돈 하는 놈이니까. 졸라 부자겠지? 물끄러미 봉투속을 들여다 보다, 홀린 듯 돈을 모조리 꺼냈다. 망설임도 잠시 궁금증에 지폐를 하나, 하나 세어보기 시작했다. 오천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과 백만 원짜리 수표 오십여장. 돈도 많은 놈이 그 동안 짠돌이처럼 굴었던 거구나. 역시 있는 놈이 무섭다는 말이 하나 틀린 게 없다. 나도 모르게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정신없이 웃어댔다. 옆구리가 땅길지경이 되어서야 웃음을 멈췄다. 꽉 쥐고 있던 돈 뭉치를 사정없이 구겼다. 관계자체가 싫었던 것은 아니니 나는 이 따위 돈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수표다발을 방바닥에 집어던져놓고 밖으로 나왔다. 솔이 새끼는 아직도 피시방에서 오지 않았는지 굳게 잠긴 자물쇠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나는 무턱대고 지만이 새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하는 나무문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울렸다. 방 안엔 먹다남은 김치찌개 냄비와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 경원이 알면 재잘재잘 시끄러울 것을 감안해, 김 지만만 깨우기로 했다. 절구통같은 지만이 놈의 허리를 감싸고 잠든 경원이 새끼를 피해, 이불을 걷어냈다. 술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김 지만의 귓볼을 사정없이 꼬집자, 황소같은 놈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 쉿! 나야, 일어나봐. 물어볼 게 있어." 김 지만이 험상궂은 얼굴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놈이 엉기적엉기적 일어나 떡진 머리를 북북 긁었다. 녀석의 거대한 대가리에서 하얀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 박 태열씨 알지? 전화번호 좀 가르쳐 줘." 지만이 놈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 그 형님은 왜." " 이 복희씨한테 전해줄 게 있어서 그래. 빨리 가르쳐주기나 해." 녀석의 가물가물하던 눈이 차츰 날카로운 빛을 드러냈다. 놈의 무표정을 마주대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나는 속으로 뜨끔해졌다. " 그 새끼랑 얽히지 마. 굳이 놀고싶으면 이 복희든 박 태열이든 한 놈이랑만 놀아.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 놈은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린 듯 했다. 구겨진 이불을 끌어다 경원이 놈의 등을 덮어주던 녀석이 덧붙였다. " 번호만 가르쳐주면 되냐." 나는 조용히 말했다. " 응." 김 지만은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이 경원의 머리맡에 굴러다니는 핸드폰을 꺼내 박 태열씨의 핸드폰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이 부르는 숫자를 속으로 외우고, 또 외웠다.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 지만이 덥석 내 발목을 잡아 반 강제적으로 방바닥에 앉혔다. " 권솔오면 요 밑으로 밥 먹으러 가자." ' 넌 권솔을 좋아해. 더 재밌는 건 뭔줄 알아? 그 병신새끼도 널 좋아한다는 거다.'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을까. 내가 솔이 놈을 좋아한다고? 물론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단어로는 부족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녀석은 내게 하나 뿐인 가족이고, 유일한 피붙이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경원이 놈과 지만이 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들게한다. 그건 나도 인정해왔던 바다. 하지만 그건 친구라는 전제하의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그건 권솔 역시 마찬가지 일거라고 확신한다. " 알았어. 솔이 오면 나 부르러 와. 아, 그리고 번호 고맙다." " 응." 지만이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밖으로 나왔다. 닫히는 문 사이로 자는 줄 알았던 경원이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핏 들으니 '박태열, 전화번호는 왜.'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자기 딴에는 중요한 이야기라도 되는 줄 알고 숨도 안 쉬고 자는 척 하고 있었을 이 경원을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마루에 걸터앉았다. 엉덩이 부근이 축축한 느낌이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열심히 외워온 박 태열씨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뽀로롱 꼬마마녀 주제곡이 정신없이 흘러나왔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어쩜 이리도 유치할까. ……역시 이 복희씨의 친구였다. 뽀로롱 꼬마마녀, 열 두 살 난 마법, 마법의 천사가 라는 가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착 가라앉은 젊은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 지금 당장 쓸어버리라고 했잖아, 이 새끼야! 」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내가 전화하기 바로 전까지 통화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불행인 건 그 전화로 인해 박 태열로 추정되는 사내의 기분이 매우 더러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 저기, 저는 김, 김계진이라고 하는데요. 예전에 이 복희씨가 집에 데리고……." 남자가 '김 계진, 김 계진.'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속삭임은 얼마가지 않아 탄성으로 뒤바뀌었다. 「 아! 기억났다. 자아아아기. 이야, 재주좋네. 내 번호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 차후 김 지만에게 일어날지 모르는 보복사건을 막기 위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 뭐, 그게 중요한가요. 근데 뭘 쓸고 있었어요? 방? 청소해요? 제가 방해가 되었나요?" 박 태열씨가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귀청이 찢어져라 깔깔깔대는 천박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어내고 그가 어서 웃어서 본론으로 들어가길 학수고대하고 기다렸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한 박 태열씨가 잔뜩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 맞아, 동생들한테 방 청소 좀 시켰더니 영 찝찝하게 하잖아. 뭐든 뒷처리를 깔끔하게 해야하는데, 안 그래? 자기이.」 " 그렇죠. 뭐든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야죠. 그래야 두고두고 손이 안 가거든요." 내 대답을 경청하고 있던 박 태열씨가 다시 한 번 박장대소를 했다. 빌어먹을, 이 새끼는 기껏 말한 사람 기운빠지게 뭘 그렇게 쳐웃는거야! 나는 그를 웃겼다는 가혹한 죄로 박 태열씨의 망나니같은 웃음소리를 꽤 오랜시간 들어주어야 했다. 「 내가 이래서 자기한테 반했나 봐! 이제 어쩌지. 상사병 날 거 같아. 이러다 이 복희한테 걸리면 작살나게 얻어터질텐데.」 ……500년 넘은 묵은지를 처먹었나. 얘는 또 왜이러니. " 저 나는 할 말 있어서 전화한건데요." 박 태열씨가 힘겹게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나 연신 끅끅대기 바빴다. 뭐가 그렇게 웃기다는 건지, 종 잡을 수가 없는 놈이었다. 「 아참, 그렇겠지? 뭔데. 말만 해. 자기가 원하면 저 하늘에 별이라도 못 따다주겠어? 」 박 태열씨의 입에 발린 닭살멘트에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잘 가꾸면 날개가 되어 이참에 아주 하늘로 날아갈 판이었다. " 이 복희씨 어디사는 지 알죠? 박 태열씨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박 태열씨는 예기치 못한 내 질문에 상당히 놀란 듯 했다. 그의 당황해하고 있을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근데, 친구 집 물어본 걸로 당황해하는 놈은 또 뭐야. 박 태열씨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그는 눈에띄게 우왕자왕대기 시작했다. 「 집? 당연히 모르지. 아, 모른다는 게 아니라 가르쳐 줄 수 없다, 는 게 아니고. 아, 아니. 그것보다 집은 왜. 」 " 알고 있다는 말로 들리네요." 박 태열씨가 잠시 망설이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응.」 “ 그 집 위치 좀 가르쳐주세요. 부탁할게요.” 박태열씨는 핸드폰에서 멀찌감히 주둥이를 떼고‘미치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본인은 안 들리는 줄 알고 하는 말 같은데 옆에서 하는 말처럼 아주 졸라 잘 들렸다. 「 주제넘겠지만 내가 이유 좀 알 수 없을까.」 " 꼭 돌려줘야 할 게 있거든요." 「 그 새끼가 너희 집에 자주 가는 거 같던데, 그때 주면 되지 않나.」 " 안 돼요. 언제 올 지도 모르고, 또 영영 안 올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 당장 돌려주고 싶어요. 부탁할게요. 정말 안 되나요?" 박태열씨는 몇 초 뜸을 들였다. 이 복희씨같은 집요한 놈에게 쫓기는 놈에게 어울리는 부탁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고 전화를 했지만 통화를 하면 할수록 기대감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만에 하나, 집을 모른다고 하면 이 복신이나 이 복귀 사장에게 전달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의외로 박태열씨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명랑해져 있었다. 「 좋아, 집이지? 기다려.」 " 네?" 「 집 아니야? 기다리라구우. 오피스텔 앞까지 데려다 줄께.」 " 집은 맞는데, 꼭 오실 필요는 없어요. 위치만 가르쳐주면 내가 알아서 갈……." 박태열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 싫어어. 돈 놀이하는 놈은 굳이 돈이 아니어도 절대 손해나는 장사는 하지 않는 법이야. 맨 입으로 가르쳐주라고? 아무리 자기라도그건 안 될 말씀이지. 」 요새 조폭 새끼들은 아주 걸신들린 놈들 마냥 돈에 환장하고 달려드는구만. 나는 헛기침을 했다. " 그럼 얼마나 드리면 만족하실런지요." 박 태열씨가 낄낄거렸다. 「 세일해서 이 복희 오피스텔까지 보좌하는 걸로 해주지, 어때. 괜찮은 액수지 않아? 」 덧붙여 돈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신진 깍두기님들께선 단체로 시간도 핑핑 남아도는 게 확실했다. " 하이, 자기이." 대문 앞을 얼쩡거리길 정확히 삼심 분, 천박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막을 더럽히는 허밍 음이 계속 이어졌다. 지구를 통틀어 나를 자기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물론 박태열씨였다. 그는 목 빠진 기린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핏 올려다 본 박태열씨는 흰색 남방에 군청색 카디건을 걸치고 찢어진 청바지에 초록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영락없는 고등학생 소풍복장이었다. 딱히 사람을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 복희씨가 지나치게 형님포스를 강조한다면 이 사람은 지나치게 동안으로 보이고 싶어 안달 난 놈 같았다. 그래봤다 두 새끼 모두 깡패짓거리하며 남에게 돈 빌어먹고 사는 건 똑같았다. 나는 찬찬히 박태열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고작 두 번째 보는 거지만 이 사람은 멋있다는 것보단 귀여운 얼굴에 가까웠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이다. 과연 저 순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쥐새끼처럼 엿보고 있을 혈기왕성한 동생들은 어떤 식으로 이끌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풍기는 이미지만 봐선 조폭은 고사하고 마냥 장난치기만 좋아하는 이도저도 아닌 날라리가 제격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는 형님으로 불리는 제법 그럴듯한 위치에 서있는 것이 확실했다. 예전에 허물어져가는 상가 안에서 복희씨의 담뱃불에 애꾸눈이 되어버린 남자의 말에 의하면 박 태열씨는 단순한 조무래기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 사람은 첫인상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더니, 박태열씨가 그런 경우인가. 하지만 조직을 이끌기엔 영 부실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구나. 그는 사람 불러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끙끙 소리를 내는 것 외에는 조용했다. 촉새 같은 놈이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도 알고 제법이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될까 잠시 망설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와줘서 고마워요. 정말 올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박태열씨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의 입술 끝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칭찬 좀 해줬더니 바로 뻐기고 드는 것이 어째 형님들 이미지와 오천만 킬로는 동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 자기야. 내가 뭐라고 했냐. 온다고 했잖아, 나는 그럼 무조건 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약속은 나 몰라라 하는 이 모 씨하고는 비교를 말아줘. 불쾌하거든.” 권솔에 창시한 이 복희 없을 때, 닥치는 대로 졸라 씹어대기 클럽에 박태열씨가 뒤늦게 합류했다. “ 자기,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이 모 씨도 자기보단 내가 더 잘났다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을 거야. 나는 말만 하는 앵무새가 아니야.” 그는 이참에 이 복희 씹기 전문 권솔의 자리까지는 넘보는 듯 했다. 나는 그만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자신의 주장에 동조한다고 멋대로 파악하고 결국 권솔을 넘어 또 하나의 신세계에 도달하려는 듯,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복희씨 험담을 늘어놓았다. 박태열씨는 천진하게 웃으며 낄낄대더니 내가 딱히 대꾸하지 않자 민망했는지 웃음을 거뒀다. 나는 흙 묻은 손을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태열씨가 따라 일어났다. 그가 앞으로 걸어가자 골목을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재빨리 움직였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어야 할 하얀 백조무리들이었다. 조폭이라 하면 검은 양복이 상징 아닌가. 박태열씨를 보좌하고 일렬로 선 그들은 온 몸으로 ‘탈 검은 양복’ 선언하고 있었다. 흰색 정장에 흰 넥타이, 급기야 백구두를 신고 장승처럼 서있는 그들은 두 대의 흰 자동차를 철통같이 경호하고 있었다. 아침이라 그다지 사람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쓸데없이 바쁜 척을 하더니 결국 할 일이 없다, 없다 너무 없어 우유배달 하는 아줌마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끝내 아줌마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결국 그녀 뒤를 쫒기 시작했다. 열 명쯤 되던 놈들이 미행을 목적으로 사라지자 일곱 명이 남았다. 훤한 아침에 저 많은 수를 대동하고 나타난 박 태열씨도 그렇지만, 귀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거리고 있는 놈들의 상태 또한 당장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할 이유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넌지시 그들을 가리키며 박태열씨에게 물었다. “ 그래도 검은 색이 낫지 않나요. 흰 양복은 때가 많이 탈 텐데요.” 그는 고개를 돌려 백조 무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박 태열씨의 시선을 받은 백조 무리들이 구령에 맞춰 구십도 인사와 동시에 ‘형님’하고 고함을 질렀다. 학교 가던 중, 고등학생들이 대놓고 힐끔거렸다. 흰 양복을 입으니 조폭인지 뭔지도 잘 모르는 것이다. 내 인생은 언제부터 이 망할 놈의 조폭새끼들과 줄줄이 엉켜 버린 걸까. 박태열씨가 허리에 손을 얹고 백조들 놈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귀여운 우리 애들에게 음침하고 칙칙한 색은 안 어울려. 좀 더 화려하고, 화사한 색이 필요했지. 근데 양복은 그다지 색이 많지 않잖아.” ……예상대로 별 뜻 없었군. “ 옷이 날개라더니 한 번 봐봐, 얼굴이 확 사는 거 같지 않아?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들.” 너의 그 귀여운 애들이 선량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회악이자 불필요한 폭력을 휘두르는 흉악범들이란 사실을 알고는 있냐. 아니, 절대 모르겠지. 그러니 끊임없이 흉악범을 제조해내는 것일 테지. 나는 옷 속에 감춰둔 돈 봉투를 단단히 여몄다. 찢어진 엉덩이가 조금 전부터 아프다고 아우성을 질러댔다. 오랜 시간 토끼자세로 쭈그리고 앉아있었더니 상처가 도진 모양이었다. ……이런, 제기랄. 쑤신 놈은 편안히 자빠져 자고 있겠지. 이게 무슨 고생이냐. 눈앞이 샛노랗게 보였다. 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박태열씨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별다른 긴장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힘없는 다리가 휘청거리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재수 없는 놈을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그런데 지금쯤 땅바닥에 퍼질러져 있어야 할 몸이 왜 이렇게 꼿꼿하게 서 있는 거냐. 해롱대는 정신을 붙잡고 올려다 본 머리위에 박태열씨의 까칠한 턱 끝이 스쳤다. 나는 그의 품에 계집아이처럼 얌전히 안겨져 있었다. 박태열씨의 가슴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팔을 놓아주었다. “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박태열씨는 둥근 보조개가 살포시 들어갔다. “ 나는 괜찮아, 괜찮아. 암, 절대 괜찮고말고.” “ 네.” 앉은 자세만 봐서 서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이야. 가까이서 본 박태열씨는 나보다 적어도 한 뼘 반 이상은 컸다. 거대한 덩치라고 생각했던 이 복희씨랑 비교해도 절대 작은 키가 아니었다. 새로운 사실이었다. 박태열씨가 놀라움에 나도 모르게 벌어져 있던 입술을 손끝으로 꾹 닫아주었다. “ 입 속에 빗물 들어가겠다. 안 추워? 우선 차에 타.” “ 네.” 박태열씨가 멈칫거리는 내 손을 덥석 잡아챘다. 억지로 팔목을 빼려고 하자, 그는 일부러 깍짓손을 꼈다. 박태열씨는 ‘춥잖아.’ 덜렁 한 마디만 하고는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나는 뻔뻔하도록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에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 싫어?” “ 싫은 건 아닌데 조금 놀라서요.” 박태열씨가 일부러 음습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행동 하나하나가 장난기가 흘러넘치다 못해 철철 쏟아졌다. “ 이거 가지고 놀라면 앞으로 놀랄 일 더럽게 많겠다. 안 그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다. 박태열씨가 차 앞으로 이끌었다. 박태열씨를 보고 트렁크에 기대서 있던 백조 한 마리가 달려와 절에 가까운 구십도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백조를 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박태열씨의 웃음소리에 내가 실수 했구나 깨달았다. 박태열씨의 뜬금없는 웃음소리에 깍두기 백조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나는 박태열씨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던 손을 서둘러 빼냈다. 험상궂은 백조 한 마리가 안내하는 대로 뒷좌석에 잽싸게 올라탔다. 박태열씨는 백조들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린 후, 내 옆에 앉았다. 많은 수의 백조들은 뒤차에 올라탔다. 고작 백조 두 마리 만이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는 영광을 누렸다. “ 이 복희 오피스텔로 가.” 박태열씨의 명령에 백조들이 짠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 안 됩니다.” “ 안 됩니다.” 경계하는 눈빛, 사나운 말투. 꼴에 형님이라고 보호하는 건가. 그러나 박태열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 가라면 가.” 박태열씨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장난치던 모습과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슬금슬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순간 재수 없게 눈이 마주쳤다. 박태열씨는 해맑게 미소와 함께 조작된 냄새가 팍팍 풍기는 귀여운 목소리로 ‘시간 좀 걸리니까, 한숨 자.’ 하고 속삭였다.이런 분위기에 자란다고 자겠냐. 그러나 나는 잤다. 그것도 코까지 드렁드렁 골며 쿨쿨 잤다. 추위에 긴장되어 있던 몸이 노곤해지며 발생하는 실수라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잠이 오면 자는 건 생리현상일 뿐이라 나를 위로하겠다. " 아함. 개운하다." 얼마나 잤을까. 잠에 취해 몽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은 돌아가는데 정신은 여전히 흐리멍덩했다. 오른쪽 뺨에 뜨거운 시선이 달라붙었다. 박태열씨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허공에 삿대질을 하던데 악몽이라도 꾼 건가.” 진작 깨울 것이지. 자는 사람을 관찰하는 건 실례라는 것도 모르나. 혹 코를 골고나 이를 갈지는 않았겠지. 설마 재수 없게 침을 질질 흘렸던 건……그렇다면 졸라 낭패다. 왜 안 깨웠나요.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박태열씨를 마주보았다. 그의 머리 뒤에 비춰진 창 밖 풍경이 굉장히 낯설었다. 처음 와본 곳이었다. 눈에 설익으니 당장 거부감이 들었다. 동네 전체가 고급 오피스텔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삭막하게 얽혀있는 건물들이 정신 사나웠다. 한 블록 지나면 건물, 두 블록 지나면 또 건물이었다. 왠진 장난감 왕국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자고로 집은 뻥뻥 뚫린 마당이 있어야 답답함이 없는 법이다. 탐구적인 눈빛으로 밖을 살피는 내 볼을 박태열씨가 콕 찔렀다. “ 누가 보면 가구조사 나온 줄 알겠네. 뭘 그렇게 봐.” “ 이런 데선 방 하나 임대해도 돈 엄청나게 깨지겠죠?” “ 아마도 그렇겠지. 왜, 이런데서 살고 싶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 아니요. 나는 이런데 살 돈 있으면 시골에다 땅 사서 집 지을 거예요.” “ 시골은 살기 불편하잖아. 이것저것 해야 되는 것도 많고 손가는 일도 많고.” “ 나는 이상하게 손가는 일이 좋더라고요. 시골로 가면 갈수록 땅값이 싸요. 평당 이 만원 하는 데도 많잖아요. 땅을 사면 우선 이층으로 집을 지으려고요. 어렸을 땐, 이층집에 살고 이층 침대 있는 애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잔 줄 알았어요. 뭔 놈의 이층이 그렇게 좋아보였는지.” 박태열씨가 미소 지었다. 그의 호응에 힘입어 나는 중얼중얼 늘어놓았다. “ 마당엔 꽃을 심고요. 그 옆엔 상추랑 깻잎을 심는 거죠. 반찬 없을 때 그거 뜯어다 대충 밥 먹고 뭐, 그런 소박한 삶을 사는 거는 게 유일한 꿈이었어요. 제가 좀 단순하거든요.” 박태열씨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놈도 골초였나. 나는 재빨리 코를 틀어막았다. 박태열씨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내다 말고 나를 곁눈질했다. 그는 웃으며 담배를 반으로 분질러버렸다. “ 담배 왜 안 펴요?” “ 자기가 담배냄새 싫어하잖아.” “ 아, 그야 싫기야 하지만 어째 내가 미안해지네요.” 박태열씨가 손을 저었다. “ 담배이야기는 됐고, 옛날이야기나 계속해봐.” “ 옛날이야기요?” “ 이층집이랑 상추네 깻잎이네 하던 얘기 있잖아. 재밌는데 왜, 계속하지.” “ 재밌긴 뭐가 재밌어요. 그게 끝이에요. 근데 이거 은근히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박태열씨가 갑자기 뜬금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건 대놓고 애 취급 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 처음엔 그냥 그랬는데 이제야 감이 오네. 나도 어지간히 둔해졌나봐.” 머리위로 손이 얹어졌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그의 손을 떨쳐냈다. 박태열씨는 탄식을 뱉어냈다가 속삭였다. “ 사랑하고 존경해마지 않는 내 잘난 친구께서 왜 너를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겠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나 혼자 좋아하는 거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박태열씨는 내 말을 대놓고 무시하고 여전히 뜬구름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 그 녀석 앞에서도 그런 말해?”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 무슨 말이요.” “ 방금 나한테 했던 말.” “ 이 복희씨한테 그런 말을 왜 합니까. 그 사람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을뿐더러 만났다하면 싸워서 남들이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조차 할 겨를이 없었어요.” 박태열씨는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해져서는 턱을 주물럭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가 드디어 생각을 끝냈는지 눈을 반짝였다. “ 좋은 소리 안 나오는 걸 보니 자기한테 어지간히 빡빡하게 굴었나보네. 하긴 둘만 있으면 그다지 재미가 없긴 하지. 연애를 해봤자 지긋지긋하게 참견하는 거 말곤 하는 것도 없을 테고 말이야. 그래도 알게 모르게 은근히 신경 쓰는 타입이다, 그 새끼.” “ 뭘요.” “ 팽팽 잘 돌아가는 대가리 덕분인지 한 번 들으면 잘 안 까먹어. 네가 그 놈 앞에서 이층집이네, 이층침대네 말했으면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언젠가 자기 턱밑에 사다 받쳤을걸. 그건 내가 장담하지.” “ 그건 돈 자랑 아닙니까. 나는 어찌된 게 돈 주고 선물 사다준다고 감동하는 타입이 아니라 서요.” 박태열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진짜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차 문을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박태열씨가 서둘러 따라 나왔다. 형님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인다, 는 모토에 걸맞게 곧장 버선발로 나오려는 백조 두 마리들에게 그는 손을 까닥였다. 문을 뚫을 기세로 나오려던 백조들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박태열씨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파란색 고깔모자 지붕이 보였다. 언뜻 보면 버섯모양 같기도 했다. 길게 이어진 화단이나 건물 군데군데 틈이 남은 곳에 만들어 놓은 장신구에도 정성이 보였다. 잘사는 동네는 땅바닥하나에도 돈을 들이는구나 생각했다. “ 경비아저씨가 내 얼굴을 아니까 옆에 바짝 붙어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박 태열씨 옆으로 붙어 섰다. 그는 묵묵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주인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강아지처럼 그의 꽁무니를 졸졸 쫒았다. 이놈도 다리가 길어서 인지 걷는 속도가 나 뛰는 속도와 맞먹었다. 파란고깔 지붕의 건물 앞에 다다랐다. 박태열씨는 잠시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닫혀있던 창문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파란 모자를 쓴 아저씨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박태열씨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잊고 나이를 뛰어넘는 훈훈한 대화를 나눴다. 박태열씨가 힐끔 나를 돌아보자 아저씨의 시선도 내게 옮겨왔다. 그는 미심 쩍인 표정을 지었으나 옆에서 재잘재잘 방아를 찧는 박태열씨의 넉살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박태열씨가 등 뒤로 손을 까닥였다. 나는 재빨리 그의 옆에 다가섰다. “ 수상하게 생겨서 안 들여 보내준다는 걸 사정사정 했다.” 고맙다고 해야 되냐, 아니면 저 경비 아저씨에게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 줄까. “ …….” 둘 다 아니었다.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태열씨는 아저씨에게 소소한 인사를 건네고 몸을 틀었다. 그는 크고 작은 건물로 올망졸망한 거리를 꽤 오랜 시간 걸어갔다. 지쳐서 잠시만 쉬웠다 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박태열씨가 화단을 돌아 사라졌다. 나는 급하게 뛰어갔다. 그는 이미 코너를 꺾어 첫 번째로 나타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손을 흔들었다. “ 여기야. 길이 좀 복잡하지? 나도 처음엔 어질어질하더라고.” 보면 볼수록 호화스러운 동네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려버렸다. 하물며 안은 어떨까. 박태열씨와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3호라고 쓰인 황금색 철재문패 앞에 다다를 때까지 말을 아꼈다. 이쯤 되면 내가 복희씨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할 법도 한데 박태열씨는 일부러 나를 배려해 묻지 않는 게 확실했다. 문패엔 복희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질리게 듣고 불러온 이름인데 왠지 색다른 기분이었다. 초인종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황급히 손을 내려버렸다. 집 앞까지 찾아온 주제에 뭘 망설이는 거냐. 주저하는 나를 속으로 타일렀다. 박태열씨는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삽질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단순히 어려보이는 외모라고만 생각했는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나는 의기소침해져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박태열씨가 더 빨랐다. “ 집에 있을 땐 거의 문 안 잠그고 사니까 벨 누르지 않고 그냥 들어가면 될 거야.” “ 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는 또 망설이고 있었다. 박태열씨가 담뱃재를 안전봉 위에 털어내며 말했다. “ 자기야, 여기선 택시잡기 힘들다.” 무슨 뜻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는 반이나 남은 담배를 벽에 문질러 꺼뜨렸다. “ 얘기하고 나와. 기다릴게.” “ 아니에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요.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도 충분히 고마워요.” 박태열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 고마우면 라면이나 끓여줘.” “ 네. 꼭 사드릴게요.” 박태열씨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자기가 끓여줘. 그게 더 맛있어. 그리고 있잖아, 자기. 빨리 이야기 끝내고 나오는 게 나한테 덜 미안한 거다. 그냥 알고나 있으라고.” 그냥 가라는데 괜히 기다린다고 하면서 지랄은. 실실 웃는 얼굴로 은근히 성질 있단 말이야. 만만하게 볼 놈이 아니야.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박태열씨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문고리를 돌렸다. 역시나 그의 조언대로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으르렁대더니 그래도 친구긴 친구인 모양이군.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오피스텔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조명등 하나 없이 깜깜한 실내가 나를 맞이했다. 그나마 현관에 불이 켜지면서 거실이 어스름하게 비쳤다. 햇빛을 등지고 자리한 위치도 아니었지만 실내가 유별나게 어두웠다. 앞으로 나가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일부러 빛을 다 막기 위해 달아놓은 두꺼운 커튼도 눈에 거슬렸다. 말년에 고야가 정신착란 증세가 방에 온통 검은색 물감을 칠했다던데, 자기가 천재적인 화가도 아니고 집안 전체를 암흑에 뒤덮이게 만들어 놓을 건 또 뭐람. 나는 현관불빛을 따라 더듬더듬 거실로 올라왔다. 주위를 돌아봐도 흔한 탁자나 티브이도 없었다. 남자혼자 살기엔 아깝다 싶을 정도로 넓은 거실엔 고작 소파 하나만 덜렁 놓여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집이었다. 아직도 도배냄새가 날 것 같은 하얀 벽지에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안에 중년여자가 웃고 있었다. 나는 이끌리듯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꽤 오랜 시간동안 여자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예기치 못한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방에서 나는 소리가 확실했다. “ 싫어! 싫단 말이야! 한번쯤 들어본 목소리였다. 찢어질 듯한 고음의 목소리는 흔한 게 아니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던 등이 서늘해졌다. ……돌아갈까. 그래, 차라리 돌아가자.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이 복희씨 앞에서 울고불고 소리 지를 수 있는 한 명 밖에 없어. 바보 같은 놈. 알면서도 설마 하는 거잖아. 그러나 나는 한 자리에서 뿌리내린 나무처럼 꼼짝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 사이 놈의 비명소리는 극에 달해있었다. 지독히도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거실을 지나 주방 앞까지 걸어갔다. 이미 비스듬히 열려져 있는 문틈 사이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 우현이었다. 놈은 침대에서 일어나 악을 지르며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녀석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신이었다. 울긋불긋 붉게 물들어 있는 가슴과 누구에게 얻어맞았는지 얼굴과 팔뚝에 파란 멍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방바닥엔 무거워 보이는 콘돔이 떨어져 있었다. 그 안에 미끌미끌한 정액이 카펫 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장 우현은 자신이 나체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 말 좀 해봐! 왜, 중요할 때 입을 다물어 버리는 거야!” 놈이 또 다시 소리를 질렀다. 장 우현의 얼굴은 침대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내에게 향해 있었다. 그 역시 속옷 한 장 입지 않은 나체였다. 상처로 툭툭 붉어진 등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용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문신, 담배. 사내는 당연히 복희씨 일 것이다. 그의 집이라는 걸 감안하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는 순간 그가 복희씨가 아니길 바랐다. “ 아침부터 지랄할 거면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마.” 보잘것없는 내 바람은 서슬 퍼런 살기를 담고 으르렁거리는 저음의 목소리에 산산이 부서졌다. 장 우현의 큰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복희씨의 신경질에 적잖게 놀란 듯 했다. 녀석은 정사의 여파인지 하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종이인형처럼 휘청거렸다. “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 왜 나한테 화를 내냐고! 너 정말 변했구나.” 장 우현은 방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복희씨는 그런 장 우현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 인간이라면 누구든 변해. 너도 그렇고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나는 울지도 그렇다고 웃지도 않았다. 다만 멍해졌을 뿐이다. 장 우현이 숨죽여 울며 계집아이처럼 끅끅댔다. 복희씨는 녀석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는 것 외엔 어떤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장 우현이 언제 울었냐는 듯이 신랄하게 퍼부었다. “ 내가 봐도 그 멍청한 놈은 당신을 좋아해요.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믿고 따를 머저리로 보이더군요. 그러니 이제 그만 만나요. 어차피 계속 만날 이유도 없었잖아요. 나를 화나게 할 생각이었다면 성공했어요. 아주, 아주 대 성공이야.” 가슴이 욱신거렸다. 쿵쿵 뛰어대던 심장은 이제 먹먹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비참해졌을 뿐이다. ……복희씨는 장 우현을 사랑해. 놈을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 나를 좋아할 수 없어.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는 거잖아. 나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퍼부었다. 비웃고 또 비웃어 복희씨를 쫒은 심장에게 그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독하게 각인시켜주고 싶었다. 소리치는 장 우현을 보는 복희씨의 표정이 무덤덤했다. 그는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탁자에 대충 비벼 끄며 조용히 말했다. “ 보기 흉해. 징징 짜지마.” 장우현은 오기로 더 서럽게 울어댔다. 놈은 바닥에 철퍼덕 누워 흐느적거렸다. 지금 내 눈엔 복희씨와 녀석이 나누는 대화 모든 것이 사랑싸움을 하는 연인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가야 할 자리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복희씨의 모습도 어색했지만 장 우현에게 매정하게 구는 복희씨의 모습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 내가 왜 그 녀석 때문에 불안해져야하죠? 사실 새벽에 이상한 전화를 시킬 때부터 설마 했어요. 하지만 이제 설마가 아니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세요? 그 멍청한 놈을 날로 씹어 먹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나 역시 그렇다. 지금 당장 너를 날로 사시미 칼로 회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럽게 우는 장 우현을 보는 복희씨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띄었다. 심장이 덜컹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장 우현을 부드럽게 안았다. 녀석은 툴툴대면서도 그가 이끄는 대로 가슴에 얌전히 안겨왔다. “ 나한텐 너밖에 없어.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들 사이에 더 이상 내가 존재할 이유는 없었다. 지독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안 주머니 안에 구겨져 있는 돈 봉투를 꺼내 방문 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힘없이 돌아섰다. 죽고 싶을 만큼 나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복희씨는 애초에 나 따위는 그냥 가지고 놀 목적으로 만났던 걸까. 설마 택시운전을 할 때부터 그런 생각이었을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집에 가서 죽은 듯이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발걸음을 붙잡는 그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 너에 비해 안는 맛도 별로였어.” “ 생각보다 빨리 나오네.”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머리위로 박태열씨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 보니까 막상 할 말이 없더라고요.” 너무 슬프면 오히려 눈물이 안 난다고 했던가. 아니면 어이가 없으면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대답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박태열씨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곤했다. 두통과 현기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쓰러지듯 벽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옆에서 박태열씨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의 물음 섞인 눈빛까지 신경 써줄 만큼 나는 그렇게 너그러운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딱히 뭐라고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부정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 복희씨와 박태열씨는 친구지 않은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내게 상처를 준 그와 나를 도와준 그의 친구는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반되는 표정으로 서있다. 웃기지 않은가. 인생은 알 수 없다지만 고작 3일 전만해도 거리에서 본다면 흔하게 스쳐지나갈 사람에 불과할 텐데, 그는 지금 불안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내가 오히려 놀랄 만큼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는 맛이 별로였다. 별로였다. 별로였다고 했었지. 나는 여자가 아니다. 성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섹스가 최고의 관계가 되겠지만 쾌락을 위한 섹스가 다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다. 복희씨가 나와 관계를 맺는다 해서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경원이놈과 지만이 녀석처럼 죽고 못 사는 연인관계가 될 거란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하지만 친밀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건 사실이다. 나는 관계 후 그를 조금씩 알아가길 바랬다. 허무했다. 내가 바랐던 것에 비해 결과는 너무 가혹했다. 나는 왜 항상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이럴 것이다,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겠지 하는 불확실한 추정을 해야 할까.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섣부른 법칙에 따르기엔 뭔가가 다르다. 이 복희씨는 내 앞에 그 의 순수한 포장되지 않은 속내를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 맞아, 항상 그게 문제였다. 복희씨의 숨겨진 무언가가 날 비참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든다. 그는 나에게 진짜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젠 나도 모르게 겁이 난다. 내가 모르는 그의 또 다른 모습에 나는 얼마나 더 상처를 받게 될까. 병신처럼 흔들리다 못해 결국은 너덜너덜한 심장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보여주지 않으면 보이는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 그가 보여준 말과 행동은 충분히 나를 상처 입혔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정하고 싶을 만큼 초라해졌으며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수치스러워졌다. 초라함과 부끄러움, 수치스러움과 모멸감이 내 감정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었다. 나는 도대체 뭘 바라고 있는 것일까. “ 집 앞까지 바래다 줄 수 있어요? 오늘 제대로 신세 지네요.” 오피스텔에서 나와 한 마디도 없던 내가 불쑥 던진 말에 박태열씨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신세랄 것까지야 있나. 그나저나 자기 괜찮아? 얼굴이 말이 아니네.” 뭐가 괜찮다는 거냐. 나야 당연히 괜찮지. 너무너무 괜찮아서 미칠 지경인데, 왜 이러시나. 나는 쾌활하게 웃으며 박태열씨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 뭐가요. 내 얼굴 색 원래부터 우중충했어요. 아씨, 기분이다. 오늘은 일 재껴야겠어요. 하루걸러 농땡이지만 뭐 별수 없죠. 잘리면 잘리는 거고.” “ 일부러 밝은 척 하지 않아도 되는데. 거울 있으면 한번 봐. 네 표정 진짜 말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 이상 어떤 말을 한들 박태열씨 눈에는 단순히 밝은 척 바락 하는 것으로 밖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박태열씨의 손이 불쑥 내 얼굴을 향해 들어 올려졌다. 나는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났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훌쩍 계단을 내려갔다.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는 박태열씨를 보며 나는 정말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복희씨와 장 우현이 있는 오피스텔로 고개를 돌렸다. 내게 보내는 복희씨의 마음처럼 역시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로 삐걱 이는 문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착각도 가지가지다. 나는 생각을 떨쳐버리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박태열씨를 쫒아 열심히 달렸다. 복도통로를 지나 유리문을 빠져나오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축축하게 젖은 뺨에 달라붙은 바람소리가 시큰하게 울렸다. 유독 얼굴만 싸늘했다. 조심스럽게 볼을 만져보았다. 끈적끈적했다. 울고 있었나. 언제부터 울고 있었을까. 설마 박태열씨 앞에서도 이렇게 울고 있었을까. 난감했다. 김 계진, 정말 추한 꼴 제대로 보이는 구나. “ 오늘 정말, 정말 고마웠습니다.” 나조차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앞으론 ‘깡패’에 ‘깡’ 자나 ‘조폭’에 조자가 나오는 인간들은 절대 불신할 예정이었으므로 이 정도는 약과에 불가였다. 지금은 무슨 꿍꿍이로 순한 양의 얼굴로 내 앞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놈도 언제 변할지는 하느님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예방차원에서 미리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더 생각해보면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테지만 말이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들었으면 곧바로 가면 될 것이지 박태열씨는 기어코 따라 나와 자신이 매너남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 작정했다. 그는 결국 차 지붕에 턱을 기대어 풀죽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을 오도 가도 못하는 애매한 상태로 만들었다. 그래, 너는 확실히 이 복희씨보단 착하게 생긴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 복희씨 그 놈도 잘난 낯바닥에 ‘나, 사람 감정 들쑤시고 다니는 개새끼임.’ 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진 않았다. 친구는 유유상종이라고 했다. 절대 조심해서 지능적인 능구렁이들에게 다신 속아 넘어가지 말자. 박태열씨의 유들유들한 웃음이 점점 옅어졌다. 내 경계의 눈빛을 읽었는지 아니면 내 생각이 눈에 보였던 건지 둘 중에 하나였다. “ 오늘은 라면 먹기에 분위기가 아니지?” 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하늘을 성의 없이 가리켰다. “ 네. 절대 그런 거 같은데요.” “ 아쉽네. 뭐, 시간은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짧은 시간동안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라면은 오늘 복희씨 집까지 데려다 주신 걸로 쳐요.” 숙이고 있던 그의 작은 머리통이 단박에 치켜 올라왔다. 키는 나보다 훨씬 큰 놈이 대가리는 이기적이게도 나보다 훨씬 작았다. 호박대가리 김 지만의 딱 절반정도의 크기였다. 저 안에 뇌는 다 들어갈 수 있었을까. 평범한 사람 화딱지를 일으키는 황금비율의 신체조건이었다. “ 이젠 그쪽이 내게 빚진 게 없으니까 값을 필요도 없어요.” 박태열씨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겐 퍽이나 괴로웠는지 몰라도 나에겐 그 표정이 어울리지 않게 어른흉내 내는 어린애 같기만 했다. “ 이제 쌤쌤이네요.” 말을 하는 내 표정이 이상한 모양이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박태열씨의 표정도 따라 이상해졌다. 박태열씨가 갑자기 내 팔목을 끌어당겼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코앞에 달라붙는 시선에 어색해졌다. 뭐 하자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애꿎은 돌멩이를 툭툭 걷어찼다. 곧이어 들려오는 박태열씨의 목소리가 어딘가 음침했다. “ 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너랑 노는 게 좋은데.” 피곤했다. 나는 쉬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 저는 별론데요.” 박태열씨의 눈동자가 흥미로움에 반짝이고 있었다. “ 자기는 내가 싫어?” “ 싫고 좋고 할 것도 없잖아요.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는 거 같네요. 그리고 그쪽과 나는 더 만나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고요. “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몸을 돌려버렸다. 대꾸하기 귀찮았다. 나는 사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도 차 시동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뒤통수에 따갑게 느껴지는 박태열씨의 시 선에 그가 아직도 날 보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무 싸가지 없게 말했나. 아니지, 확실하게 말해서 나쁠 건 없지. 영양가 없는 생각에 빠져 앞에 있는 돌부리를 보지 못했다. 무릎이 반으로 접혔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 탓에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씨발, 봤을까. 기다렸다는 듯이 박태열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놈을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명백해졌다. 대문을 발로 뻥 걷어찼다. 아침에 빨리 일어나면 사우나나 다녀올까. 비를 맞았더니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게 뜨거운 돌 판에 등이나 실컷 지졌으면 좋겠다. 김 지만과 권솔의 방을 지나쳐 내 방으로 곧장 내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싸하게 퍼져 나왔다. 운동화 끈을 풀고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김 지만의 방에서 무당이 춤추는 듯한 요란한 그림자가 나풀나풀 움직였다. 당연히 가게로 가있어야 할 놈들이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걸까. 그때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동시에 문짝이 뜯기듯이 열렸다. 이 경원이었다. 녀석은 주둥이에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재떨이를 마루 밑으로 탈탈 털어냈다. 담배꽁초는 꼭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주인집 할머니한테 있는 대로 소리를 들어놓고도 아직 저 버릇을 못치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꼬. 빈 재떨이를 방바닥에 집어던지다 나를 발견한 이 경원이 가운데 손가락을 까닥였다. “ 야 이년아. 계집애가 빨리빨리 못 다녀? 착한 오빠를 꼭 걱정시켜야 되겠냐. 씨발, 요새 인신매매 새끼들은 얼굴 안 보고 잡아가는 것도 모르고 저렇게 싸돌아다니니 내가 너 때문에 다리 펴고 잠을 못 잔다.” 계속 듣고 있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 분명했기에 나는 녀석의 말을 매정하게 잘라냈다. “ 가게는?” “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사장새끼 양주에 물탄 거 짭새들한테 걸렸다. 경찰서 간다고 내빼서 우리도 잠깐 집에 갔다 온다고 하고 나왔는데 그 뒤로 안 들어갔다. “ 그래. 참 자랑스럽게도 말하는구나. 알았다고 말하고 몸을 돌려 돌렸다. 이 경원이 어울리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날 불러 세웠다. “ 좆나 스톱. 그 방 말고, 이 방으로 와라.” “ 됐어, 오늘은 너희들끼리 놀아.” 퉁명스러운 내 목소리에 경원이 놈이 분개했다. 녀석은 주먹으로 문턱을 내리치더니 생각보다 아팠는지 자존심 상한 얼굴로 지껄였다. “ 네가 주인공인데 빠지면 우리끼리 무슨 재미냐. 오빠가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뛰어와라.” 주인공? 내가? 뭔 별나라 돌하르방 땀구멍 같은 말이냐. 하고 물으려 했지만 녀석은 평소처럼 성급하게 문을 닫고 이미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분위기를 좀 잡아보려 해도 방해를 하고 급기야 오늘 같이 혼자 있고 싶은 날에도 녀석들의 쓸데없는 술주정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정말 우울하다 못해 암울의 극을 달리는 삶이었다. 권솔의 방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짜랑짜랑한 소음이 극에 달했다. 고막이 윙윙거렸다. 이 녀석들 빼고 어느 미친놈들이 대낮부터 술 처먹고 이런 개 염병을 떨까. 놀고 싶으며 시간과 장소 따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판을 벌리는 녀석들의 이기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단칸방의 유흥이 오늘도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나오는 한숨을 틀어막았다. 신발을 벗어 대충 던져놓았다. 방문을 열었다. 빵------빵-빵-빵빵- 오른쪽에 서 있던 김 지만과 왼쪽에 있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룡이형이 내 머리위에 팡파르를 터트렸다. 나는 멍해졌다. 방 꼴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하게 술상이 거하게 차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집 제사상을 빌려왔는지 넓적한 상위엔 우리나라 야식계를 들었다 놨다하는 모든 음식들이 총 집합되어 있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구나. 고작 낮 술 처먹으면서 아주 상다리가 부러져라 안주를 시켜댄 모양이었다. 내가 가장 총애하는 오징어 회를 시작으로 팔보채, 탕수육, 보쌈. 말라비틀어져 보이는 피자에 치킨, 비싼 장어구이, 아귀찜, 쟁반국수. 김 지만이 좋아하는 두부김치까지. 그 외에 보고만 있어도 식육이 뚝뚝 떨어지는 정체불명의 음식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래도 하이라이트는 역시 무식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맥주 두 박스와 소주 한 박스였다. 아주 떡 실신이 되길 작정하고 모인 게 확실했다. 아니면 위장을 펑크 내서 단체로 가게를 말아먹으려 작정한 듯 했다. 방에 모여 있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기대에 들뜬 눈빛들이었다. 술과 담배로 찌든 타락한 영혼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방을 훑어보는 걸로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벽 한 면에 신문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옆을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감싸고 있었다. 쓸데없이 벽에 낙서를 하다니, 정신 나간 짓거리였다. 사인펜으로 앞니 전체가 썩어 문 들어진 이명박과 과도로 한 쪽 눈알이 애꾸가 되어버린 박근혜가 어설픈 악수를 하는 신문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김 계진, 26번째 생일 좆 빠지게 축하. 이 경원 외 4명, 일동.>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풍선하나가 뚝 떨어졌다. 발밑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풍선을 집어 들었다. 빨간 매직으로 쓴 영어단어 하나가 충격적이게 다가왔다. 누군가 birthday를 dirthday 라고 적어놓았다. 그러나 자신도 이상하단걸 눈치 챘는지 단어를 직직 그어버렸다. 그 대신 생일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벌쓰데의 라고 대문짝만하게 적어놓았다. 누가 썼는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이복신군을 돌아보았다. 그가 활짝 웃었다. 웃으니까 진짜 없어보였다. ……오늘이 내 생일이란 말이지. 기가 찼다. 권솔과 나는 하루사이에 생일이 끼어있었다. 원에서는 입소하는 날을 생일로 쳤다. 덕분에 나는 솔이 자식보다 하루 더 빨리 그곳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생일이 하루 더 빨랐다. 정확히 2월 28일. 놈은 3월 1일. 생일이란 게 별거 없지만 날짜가 쉬워서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녀석들은 버젓이 있는 진짜 생일을 놔두고 어만 날 생 지랄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 누구냐.” 놈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위급할 때,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수작이다. “ 누구냐고! 누가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그랬냐. 빨리 불어, 이 자식들아!” 경원이 놈이 그제야 깜짝 놀란 척 숙달된 베테랑 연기를 펼쳐보였다 “ 어? 오늘이 생일 아니었어? 이상하네. 난 오늘인 줄 알았는데. 너희들은 어떠니?” 김 지만과 권솔이 의기투합하여 맞장구를 쳤다. 양념치킨 닭다리를 나무젓가락으로 푹 쑤시다 생각보다 잘 안되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복신군만이 태평한 얼굴로 ‘생일 아니야?’ 하고 물었다. 나는 아랫목에 앉아 맹하게 눈을 깜빡이는 비룡이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형, 이 집엔 어떻게 왔어?” 형이 배시시 웃었다. 권솔과 김 지만 두 놈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 지만이가 너 생일인데 음식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왔어. 부엌에 미역국도 끓여놨는데. 계진아, 오늘 진짜 생일 아니야? “ 미친놈들. 밤새서 일한 사람을 깨워 불필요한 막노동을 시켰단 말인가. “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냐. 우리 고등학생 아니다. 제발, 생각 좀 해가면서 살자.” 내가 쏘아붙이자 어느 정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 김 지만과 권솔의 모습과는 다르게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고양이 수염가지고 놀릴 수 있는 간사한 쥐새끼 이 경원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 야. 생일이 뭐 별거냐. 어차피 곧 돌아오잖아. 며칠 앞당겼다고 쩨쩨하게 구네.” “ 내일부터 남남될 생각 아니면 그 입 좀 닥치시지.” 이 경원이 주둥이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하여간 넉살은 좋아. “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근데 세상 어떤 친구가 자기 술 먹고 싶다고 남의 생일을 멋대로 땅겨서 하냐. 이 기회에 너희들의 몰상식함을 반성 좀 해라.” 잔소리로 이어질까 염려한 이 경원 불 여시가 폴짝 뛰어 내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 미친 자식이 나를 김 지만 같은 떡대로 착각한 걸까. 급하게 친한 척 하는 녀석을 사정없이 떼어내며 말했다. “ 내년부턴 당장 저 새끼 생일부터 나 편한 날로 땅겨서 한다. 알고들 있어라.” “ 아오, 시발! 이 자식 말하는 거 봐. 좆나 귀여워, 좆나 귀여워. 안 그냐, 지만아.” 경원이 놈은 이쯤해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오두방정을 자진해서 오두방정을 떨었다. 빗물에 떡진 내 머리를 비비적거리고 뺨에 뽀뽀를 했다. 아무래도 이 경원은 오늘 작심하고 정신병자의 표본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놈처럼 굴었다. “ 와, 졸 꼴리는데? 이 새끼 인상 쓰는 거 봐. 완전 바비인형이다.” 나는 놈의 목을 짤짤 흔들며 으르렁거렸다. “ 그 주둥아리 닥쳐라.” 녀석의 입에 발린 말은 오래가지 않았다. 놈은 가슴팍을 킹콩처럼 때리며 권솔을 발가락으로 가리켰다. “ 나 진짜 억울하다. 생일은 저 자식이 먼저 하자 그랬어. 이 복신이랑 오늘부터 동거하는 기념으로 말이다.” 동거? 동거라고? 나는 깜짝 놀라 권솔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애매하게 웃으며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어느새 이경원은 의기양양해져있었다. “ 봐봐. 내가 먼저 그런 게 아니래도 그러네.” 권솔의 긍정의 표시에 급속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복희씨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성격 자체가 달랐다. 심장이 지끈거리거나 온 몸이 불타오를 것 같은 충격은 아니었다. 닭다리를 뜯어먹고 있는 이복신군에겐 장 우현에게서 느끼는 불같은 질투심도 일어나지 않았다. 덤덤했다. 그러나 나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우울해졌다. 그리고 머쓱하게 웃고 있는 권솔을 뺨을 미친 듯이 때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솔이 새끼가 늙어죽을 때까지 내 곁에만 있어주길 바랬나. 나는 복희씨를 좋아하고 그와 함께하길 지독히도 원했으면서 녀석에겐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품었던 것일까. 부정해야 하는데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내가 느끼는 실망과 섭섭함은 다 무어란 말인가. 권솔은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항상 내 곁에 있었다. 내가 맞고 오면 끝내 때린 놈을 찾아가 죽지 않을 만큼 패주고 오고, 돈을 뺏기고 오면 그 이상을 찾아와 주는 놈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유일하게 화를 내고 분노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무조건 함께 라는 것 자체를 의심해 본적이 없었다. 내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에 녀석이 전제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층집을 사고 싶었던 건 내가 위층에 살고 녀석이 아래층에 살길 바라서였다. 이층침대를 가지고 싶었던 것은 녀석과 침대를 위, 아래 나눠 갖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권솔에겐 이층보다, 어쩌면 나 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건 절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담담하게 멈춰있던 심장이 지끈거렸다. 정의내리기 힘든 감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깜짝 할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골칫거리로 뒤바뀌었다. 생경한 감정이 머리를 짓눌러왔다. 병신아, 제발 진정해. 그럼 백년 만년 권솔이 너만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냐. 이 경원에겐 김 지만이 있듯이 복희씨에겐 장 우현이 있고 권솔에게는 이복신군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거다. 나는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장애물이고, 친한 친구일 뿐 한 평생을 함께 살아갈 만큼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이좋게 술잔을 기울이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비로소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필요 없어질까, 사람들이 날 잊어갈까, 그리고 나를 잊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까 하는 공포감은 어렸을 때부터 내면에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우울증치료를 받아도 소용없었다. 의사가 약을 먹으면 깨끗이 낫는다고 했지만 그건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했다. 약을 먹고 나선 더 불안해졌다. 지금처럼 말이다. 나는 조용히 소주잔을 들었다. 이제는 권솔과 이복신군의 보금자리가 될 방을 낯설게 살펴보았다. 내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집요하게 쫒아 오는 솔이 새끼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녀석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그러나 놈은 웃지 않았다. 녀석의 얼굴에 냉기가 흘렀다. 뜨끔했다. ……왜 네가 인상을 쓰고 지랄인데. 마음 같아선 복신 군이 더 좋아, 내가 더 좋아. 하는 유치한 질문을 사납게 퍼부어 대고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동생이 생기자 질투하는 꼬마 애처럼 보일까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았다. 얼굴 위로 권솔의 따가운 시선 쏟아졌다. 그만 좀 봐, 얼굴 뚫어지겠다. 차가웠던 몸이 풀어지자 졸음이 밀려왔다. 이대로 있다간 당장 곯아떨어질 판이다. 억지로 눈을 뜨자, 전화통을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이복신군이 눈에 들어왔다. “ 이런 호로 쌍놈아. 기름에 튀긴 걸로 가져오라니까 왜 자꾸 개소리만 지껄이는 거냐.” “ 이 멍청아. 치킨하나 못 시켜서 세상 어떻게 살래?” 이복신군은 젓가락으로 열심히 삿대질을 하는 경원이 놈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더니 결국 전화기에 대고 울분을 토했다. “ 너 때문에 소리 들었잖아! 책임져, 이 새끼야.” 복신군은 무척이나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가 다시 전화기를 잡고 씨름하는 동안, 옆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힘없는 장어대가리처럼 꾸벅꾸벅 조는 비룡이 형의 머리가 기어코 방바닥을 들이받은 것이다. 나는 질질 베개를 끌고 와 형 머리위에 받쳐주었다. “ 못하겠으면 나 바꿔봐.” 경원이 놈이 억지로 전화기를 뺏으려 했다. 필사적으로 전화를 뺏기지 않으려는 쪽과 뺏으려는 쪽이 사투를 벌였다. 주거니 받거니 손에서 소주잔을 떼지 않던 두 놈과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향했다. “ 내가 통닭하나 못 시킬 병신으로 보이냐?” 경원이 과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 이 병신아.” 녀석의 대답에 이복신군은 제대로 자존심이 상한 듯 했다. “ 얼굴보고 봐줬더니 이참에 아주 머리꼭대기에서 놀아라. 내가 언제 저거 한 번 진짜 제대로 따 먹는다. 빌어먹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권솔이 배를 움켜쥐고 뭐가 좋은지 낄낄대며 방바닥을 나뒹굴었다. 주둥이로 가져가던 김 지만의 술잔은 그대로 멈춰있었다. 똑같은 말에도 두 놈의 반응이 상반되게 엇갈렸다. 지만이 놈이 은근슬쩍 빈 만두접시를 움켜쥐었다. 나는 보았다. 녀석이 교묘하게 접시를 돌려 일부러 모난 부위를 위로 향하게 만든 것을. 놈은 여차하면 복신 군 머리를 후려갈길 만만의 준비를 끝낸 뒤에야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였다. 입은 술을 마시는데 귀는 이복신군 주둥이에 바짝 날이 서있었다. 김 지만은 평소대로 안주를 퍼마시는 동물적인 식욕을 선보였다. 그러나 모든 게 다 가식이었다. 대어를 낚기 위한 교묘한 위장술이었다. ……탁! 경원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이복신군 얼굴에 집어던졌다. “ 말만해. 언제 시간나면 제대로 따먹혀 줄 테니까.” “ 오, 김 지만의 덜 익은 가지로는 성에 안찼나 보군. 지금은 어때?” 권솔이 혀를 내놓고 낄낄댔다. 더위 먹은 개 같았다. 이 경원이 놈이 낄낄 웃었다. “ 내가 먼저 네 마누라 후장 맛 좀 보고.” 녀석의 가운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웃음바다에 빠진 권솔이었다. 권솔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느끼한 이 경원의 시선에 항복을 한 건 이복신군이었다. 그는 시발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솔이 놈이 경기에 가까운 웃음을 멈추고 발딱 일어나 앉았다. 대신 바통 터치를 한 김 지만이 낄낄 퍼레이드를 이어나갔다. ……진짜 짜증난다. 망할 놈의 저질대화. 복신 군이 경원이 놈을 지그시 노려보며 전화기에 대고 양념이라고 꽥 소리를 질렀다. 상대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들어보지도 않고 대뜸 종료버튼을 눌렀다. 김 지만이 술잔을 내려놓고 있지도 않는 주름살을 꾹꾹 펴자, 그게 뭐가 좋다고 따라서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권솔이 말했다. “ 그거 오늘 안에 먹을 수나 있냐. 아예 기네스에 도전해라. 배달을 15분이나 시키는 놈이 조선팔도에 너 말고 또 누가 있겠냐.” 복신 군이 내 발밑에 떨어진 탕수육 조각을 주워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벌리고 꿈나라 여행을 하고 있는 비룡이형 입에 푹 집어넣었다. 친절히 입까지 닫아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 사람 빡 돌게 시리 튀긴 걸로 가져오라니까 자꾸 쓸데없는 말만 하잖아.” 권솔이 묻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 그 뒷말은 듣고 싶지도 않군.” 복신 군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억지눈물까지 짜내어 동정표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 이번엔 진짜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튀긴 걸로 가져 오라니까 그 놈이 대뜸 마일드요, 핫 스파이스요 하잖아.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웃기지 않냐? 무슨 그런 띨띨한 놈이 주문을 받냐.” 사건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우리는 서로 못 들은 척 했다. 복신군의 이야기는 더 들어볼 필요도 없이 시장에 가면 떨이로 팔아도 절대 사기 싫은 물건과도 같았다. 나를 제외한 세 놈들은 묵묵히 그를 외면한 채 음식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돼지들처럼 꾸역꾸역 먹고, 마시는 녀석들을 피해 방을 빠져나왔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지긋지긋한 소란스러움이 떨어져나갔다. 365일중 364일은 밝은 놈들이니까. 녀석들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미우나 고우나 친구라고 아무리 소란을 피우고 사고를 쳐도 진심으로 미워지질 않으니 나도 참 어지간히 둔한 놈이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날씨가 참 변덕스럽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눈이다. 주인 집 할머니의 보물 같은 장독대에도 하얗게 눈이 서렸다. 나는 방으로 걸어가다 말고 마당에 그대로 쭈그리고 앉았다. 맨 손으로 눈을 모았다. 많이 쌓이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가지고 놀만했다. 손가락 마디만한 눈사람 네 개를 만들어 일렬로 세웠다. 눈을 찢고, 콧구멍을 도려냈다. 주둥이도 푹 쑤셨다. 눈, 코, 입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 결과적으론 괴물을 만들어 버렸다. 눈사람 네 개가 동시에 웃는 거 같기도 했고, 반대로 울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머리통이 처음 생각과 다르게 커져만 갔다. 나는 운동화 바닥으로 왕 대가리 눈사람들을 동시에 뭉개버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형광등을 켰다. 복희씨가 준 병아리 두 마리가 방바닥을 찢어대며 삐악삐악 울고 있었다. 그가 준 병아리 따위 꼴도 보기 싫었다. 불을 꺼버렸다. 병아리뿐만이 아니다. 이 방 전체에 복희씨가 사다놓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나는 질퍽하게 젖어있는 유니폼 바지와 조끼를 훌러덩 벗어 방바닥에 대충 집어던졌다. 예고 없이 찾아온 충격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멈칫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고통스러운 기억이 하나, 둘 떠올랐다. 방에 어울리지도 않는 냉장고를 보면 그 안에 1시간씩이나 들어가 나를 놀래주려던 복희씨의 모습이 떠올랐고 천장을 보면 지붕을 뜯어낸 밑구멍으로 황소개구리를 집어넣으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했을 그의 모습이 스쳤다.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 필요 없는 기억이었다. 고통이었다. 속옷만 달랑 하나 입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썼다. 그러자 그의 오피스텔에서부터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뭐가 괜찮다는 거냐. 사실 하나도 안 괜찮았다. 나는 이렇게 너무 아파하고 있다. 그 사람 때문에 지독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복희씨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내가 그에게 고작 그런 존재 밖에 되지 않았다는 현 실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도 없을 때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것뿐이었다. 울음소리와 섞여 문소리가 들렸다. 이불로 눈물을 닦았다. 그나마 불을 꺼져 있어 다행이었다. 멸치국물에 팅팅 불은 메밀국수 같은 얼굴을 보이느니 차라리 접시에 코 박고 저 세상으로 떠나버리겠다. 나는 가슴을 비스듬히 일으켰다. 방바닥에 긴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 누구.” “ 나야.” 권솔이었다. 경원이 놈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녀석에게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 왜, 가서 더 놀지.” 방문을 닫고 녀석이 방 한 가운데로 들어와 침대 귀퉁이에 앉아 나를 돌아봤다. “ 피곤하다. 그냥 가.” “ 왜 피곤한데.” “ 나는 피곤하면 안 되냐?”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다. 그냥 제발 좀 가줘라. 울지 말라고 달래면 오기로라도 더 우는 어린애처럼 눈물도 어지간히 말을 안 들었다. “ 좀 일어나봐. 나랑 얘기 좀 해.” “ 너랑 할 말 없어. 귀찮게 굴지 말고 그냥 꺼져.” 놈이 멋대로 이불을 걷어 바닥에 집어던졌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떨어져 앉으려는 나를 비웃으며 녀석은 거칠게 내 팔목을 낚아챘다. 지독한 힘이었다. 권솔이 인정사정없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물에 걸린 꼴뚜기처럼 놈의 손에 딸려 올라갔다. 매트리스에 붙어 필사적으로 버티면 버틸수록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녀석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나몰라하는 심정으로 힘을 풀었다. 울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권솔이 촉촉이 젖은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어디 아프냐.” 평소엔 결코 구경도 할 수 없는 진지한 눈동자를 끊임없이 부딪혀왔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러나 나는 현재 배알이 꼴릴 대로 꼴린 청개구리 같은 심보였다. “ 아프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가 내 애인이냐. 가서 네 잘난 진짜 애인이나 챙겨.” 녀석이 팔목을 으스러뜨릴 듯 짓눌렀다. 손마디가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 너 지금 나한테 시위 하냐. 나 이런 거 재미없다. 어지간히 하고 끝내라.” “ 차라리 말을 말자. 말을 마.” 나는 침대에 드러누우려 했다. 그러나 녀석은 쓰러지려는 내 허리를 불쑥 끌어당겨 가슴에 끌어안았다. 쿵쿵 뛰는 녀석의 심장이 느껴졌다. 내 심장역시 녀석 못지않게 뛰고 있을 것이다. “ 내가 그 녀석이랑 동거하는 게 그렇게 못마땅하냐. 아니면 미리 말 안 했다고 삐진 거냐.” 놈은 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덧붙였다. “ 열 받고, 섭섭하고, 짜증나고, 지금은 질투 나서 미치겠지 않냐.” “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왜 질투가 나는데? 물, 물론 섭섭하긴 해. 말도 없이 이런 게 어디 있나 싶고, 그래. 짜증나는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질투는 아니야! 내, 내가 질투를 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놈에게 끌어안긴 상태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숨쉬기마저 곤란했다. 가슴을 밀치고 팔뚝을 꼬집어도 꼼짝도 안는다. 안 되겠다 싶어 권솔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겼다. 역시나 미동도 없다. “ 이상하네. 왜 질투를 안 할까. 나는 너 때문에 열 받아서 대가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데 말이야.” “ ……!” “ 나는 네가 다른 놈이랑 동거한다고 생각하면 질투 나서 밤낮을 설칠 거 같은데 너는 진짜 아무렇지 않냐? 진짜 그래? 이거 참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냐.” 놈이 내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나는 꽥 소리를 질렀다. “ 내가 널 모르냐. 들통 날 거짓말은 애초에 하지도 마라. 질투가 아니라고? 그럼 이 경원이 동거이야기 꺼냈을 때, 울 거 같은 표정은 뭐냐. 너는 나랑 멀어질까 불안했던 거야, 나를 뺏길까 봐 무서웠던 거라고.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 봐. 어설픈 뻥 까지마. 그럼 신나게 꼬투리 잡아 줄 테니까.” 권솔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서 나도 한숨을 쉬었다. 놈이 내 뒷머리를 빙빙 꼬며 장난을 쳤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네 말이 맞아. 질투나! 아니, 질투뿐만이 아니야. 약 올라서 죽겠어. 나도 어이없는 거 잘 아는데, 이기적인 것도 알고, 유치한 것도 알겠는데 그냥 무작정 화가 나.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 이런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게 질투라면 그렇다고 해두지 뭐. 이제 됐냐. 만족해?” 권솔이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나는 녀석의 등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러자 권솔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놈의 보잘것없는 웃음소리에 두 근 반, 세근 반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 네가 싫다는 건 무조건 안 해. 같이 살지 말라고 하면 안살아.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질 수도 있어. 내 마음 아직도 모르겠냐." " 나는 그냥 너무 화가 났어.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축하해줘야 할 일인데, 내 자리가 밀려나는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어. 나 너무 이기적이지? 오늘만큼은 마음대로 욕해. 나도 나쁜 거 알고 있으니까." 권솔이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녀석은 고개를 낮추어 집요하게 시선을 쫒아왔다. 억지로 피하던 시선을 겨우 맞추자 녀석이 환하게 웃었다. " 밀려나긴 누가. 너는 내 의지대로 밀려나고 말고 할 수는 존재가 아니야." " ……." " 너는 내 엄마잖아, 나는 네 영원한 꼬봉이고. 그거말고 우리사이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녀석의 어이없는 비유에 웃음이 터졌다. 권솔이 이 기회다 싶어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녀석의 얼굴이 기울어지더니 쭉 하는 살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놈의 입술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녀석은 이마에 입술을 붙인 채로 중얼거렸다. " 네가 싫으면 안 만나. 세상에 깔리고 깔린 게 사내새끼들이야. 네 마음에 드는 놈으로 골라가며 사귀지 뭐.” 엉엉 울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권솔의 넓은 어깨에 기대어 얼굴을 파묻었다. 놈이 내 목덜미를 주물럭거렸다. “ 나한텐 너 밖에 없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다.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내가 혐오스러워 진다.” 나는 녀석의 가슴을 힘겹게 밀어냈다. 놈이 순순히 물러섰다. 손등으로 눈을 비벼 닦았다.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 요새 사춘기인가 봐. 너한테 괜히 툴툴댔어. 나 진짜 나쁘지? " 그걸 이제 알았냐. 속없는 권솔이나 되니까 김 계진 죽자 사자 좋다고 하지 이런 놈을 누가 좋아해." " 맞아. 그래서 미안해. 나도 너 밖에 없는데…… , 너 뿐인데. 나를 좋아하는 건 너 밖에…… ." 목이 메여왔다.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권솔의 차가운 손가락이 뜨거운 눈두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놈은 눈물로 젖은 손끝을 혀로 핥으며 피식 웃었다. 나는 녀석의 입술에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스치듯 짧게 떨어지는 입맞춤이었다. 물러서려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녀석이 뒤통수를 강하게 짓눌렀다. 조금 전과 다른 강한 입맞춤이었다. 권솔의 칼날 같은 혀끝이 아랫입술을 건드렸다. 거부감 없이 입을 벌려주었다. 녀석이 곧장 혀를 집어넣었다. 차렷 자세로 가만히 있는 내 혀를 거칠게 감아올리며 녀석이 게슴츠레하게 실눈을 떴다. 나는 처음부터 눈을 뜨고 있는 상태였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내 시선에 놈이 흠칫거렸다. 나는 권솔의 아랫배를 발바닥으로 걷어찼다. 놈이 배를 움켜쥐고 침대를 뒹굴 거렸다. 주둥이가 댓발은 나온 놈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내 어깨를 흔들었다. “ 너는 뭘 처먹고 그렇게 무드가 없냐. 적어도 눈은 감아줘는 게 예의 아니냐. 아주 사팔뜨기 눈을 해가지고 잡아먹을 듯이 째려보고 자빠졌네.” “ 어차피 불 껐는데 눈뜨든 말든 그게 뭔 상관이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하려는 녀석에게 손을 들어 가볍게 제지시켰다. 흥분해서 달려들 것처럼 보이던 녀석이 갑자기 추리닝 지퍼를 내렸다. 또 다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권솔은 상의 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부루퉁하게 녀석을 보는데 놈이 내 옆에 바짝 붙어 봉지를 거칠게 뜯어냈다. 안에 있던 내용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을 것을 예상했는지 권솔이 손을 덥석 잡아 봉투 안에서 떨어져 나온 물건을 더듬게 했다. 이건 분명 돈이었다. 두툼한 돈다발에서 퀴퀴한 시멘트냄새가 묻어났다. 막노동이나 노가다에서 일을 사람들에게 나는 힘들고 고된 노동의 냄새였다. “ 이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좆 빠졌는지 아냐. 아마 넌 상상도 못할 것이다.” 솔이 놈은 한참동안 돈다발을 뒤적거렸다. 녀석이 ‘아, 이게 여기 있었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내 손바닥 위에 빳빳한 통장 하나를 올려놓았다. “ 네 거니까 네가 직접 열어봐.” “ ……!” 나는 교통사고에 당한 놈처럼 비실거렸다. 그러다 결국 조심스럽게 통장 앞장을 넘겼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녀석의 말대로 통장 앞엔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무심코 통장을 만든 날짜를 확인해보니 지금으로선 머나먼 옛날 같기만 한 1999년 10월 19일 날짜가 찍혀 있었다. 9년 전이었다. 더 정확힌 녀석과 내가 18살 때였다. 과연 우리에게도 패기로 들끓는 십대가 있긴 했었나, 싶을 만큼 까마득한 날이기도 했다. ……이딴 건 뭐 하러 만들었을까. 의문을 지우지 못한 채, 통장을 넘겼다. 어두워 생각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방문 앞으로 걸어가 녀석들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통장을 비쳤다. 하나, 둘, 셋…… 무려 공이 일곱 개였다. 숫자까지 붙이면 사천만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굉장한 돈이었다. 나는 다소 어안이 벙벙해졌다. “ 이거 어디서 났는데! 훔친 건 아니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에 허둥대는 나를 보며 권솔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이왕 훔친 거 열심히 써라.’ 고 말했다. 저런 미친놈. 나는 당장 통장을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 뭐야? 진짜 훔친 거야? 그런 거냐고! 이런 도둑놈 새끼! 나랑 지금 당장 경찰서로 가. 가서 빨리 자수해, 인마!” 권솔이 머쓱하게 코끝을 긁으며 대답했다. “ 너한테 뭔가 제대로 한 번 해주고는 싶었는데 그게 좀 늦었다. 네가 이해해라.” “ 이 도둑놈아!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자수…….” 권솔은 요란스러운 윙크를 마구잡이로 날리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꼴값은 그 정도하면 됐다. 누가 친구 선물을 도둑질을 하냐. 대충하고 넣어둬. 오빠들 선물이시다.” “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고작 돈 받자고 그랬나. 비참하게 하지 말고 가져가.” 권솔이 진심으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 가져가라니까!" “ 가져가긴 뭘 가져가. 사람 성의를 이런 식으로 무시 하냐. 빨리 넣으라니까!” 나는 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 보상받자고 네 뒤치다꺼리 한 거 아니다. 그리고 무시하는 게 누군데! 네가 이따위 돈을 내미는 게 나를 무시하는 거야! 필요 없다고 했잖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주제에 이게 어디서 돈 자랑이야!” 권솔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 나를 노려봤다. 나 또한 지지 않고 놈을 쏘아봤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째려보고 쏘아보고 지랄을 했다. 결국 권솔은 내가졌다, 포즈로 두 손을 머리위에 얹으며 침대에서 내려가 방바닥에 나뒹구는 돈을 조심스럽게 긁어모았다. 하란대로 순순히 움직이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또다시 열이 받아 꽥 비명을 질렀다. “ 그거 들고 내일 네 이름으로 바꿔. 너한테 돈 같은 거 받기고 싫고, 받을 이유도 없어. 네 돈은 네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이야. 바보, 멍청아.” 묵묵히 돈만 줍는 권솔을 내려다보며 나는 끝까지 횡설수설 댔다. “ 물론 성의는 아주 고마워. 정 선물을 하고 싶으면 먹을 거나 돈 안 드는 걸로 해와. 쌀이나 고기를 사와도 좋고, 반찬을 사와도 좋아. 그 정도는 기꺼이 받아주지.” 얼추 돈 뭉치를 거의 긁어모은 권솔이 고개를 돌렸다. 불빛에 드러난 녀석의 얼굴이 기괴했다. 놈이 생뚱맞게 느끼한 미소를 흘렸다. “ 나도 웬만하면 이 돈 한 입에 꿀꺽하고 싶은데 그러다 들키면 임꺽정이랑 기생 년이 쌍으로 덤벼들걸. 너는 내가 그런 시답지도 않은 새끼들한테 맞아서 골로 갔으면 좋겠냐.” 임꺽정이랑 기생은 또 뭐야. 내가 한 번에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개를 주억이자 권솔께서 부연설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 통장을 내가 만든 건 맞는데. 생각해 봐, 혼자서 무슨 수로 사천 오백을 다 채우냐.” 녀석이 말을 하다말고 굼벵이처럼 등을 구부렸다. 놈은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입으로 후후 먼지를 털어내며 놈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지간히 눈도 좋은 놈이다. “ 애들이랑 같이 모았다. 알바해서 남으면 넣고 잔돈 생기면 또 넣고 그렇게 셋이서 9년을 모으니까 꽤 액수가 커졌네. 우리도 놀랬어. 이렇게나 많이 불렀을 줄은 몰랐거든. 처음엔 서른 되기 전엔 줄 수 있을까 했는데 시간이란 게 의외로 빨리 가더라.” 권솔이 꾸깃꾸깃한 지폐를 바지에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 다음에 주나 지금 주나 비슷할 거 같아서. 3년 금방 가잖아. 그땐 우리도 정말 삼십대다. 지랄, 좆같지 않냐.” 권솔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열심히 지껄여댔다. “ 적어도 친구 등 처먹고 살았단 소리는 듣기 싫다. 면죄부라고 생각해도 좋아. 제발 모른 척하고 넣어둬. 경원이 새끼랑 한 밤에 칼부림하긴 싫으니까. “ 솔이 놈이 천천히 일어나 내 앞에 다가와 앉았다. 녀석은 방바닥에서 긁어모은 돈과 통장을 모조리 이불속에 밀어 넣었다. 놈은 한 손으론 내 머리를 다른 손으론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내 뺨을 어루만졌다. 녀석의 입술이 송이버섯 같은 내 앞머리에 닿았다. “ 가끔 드는 생각인데 말이야. 너는 네가 얼마나 괜찮은 놈인지 자주 잊어버리는 거 같아.” “ 뭐?” 녀석은 순경들이 보면 당장 파출소에 잡아갈 수준의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날개가 잘려나간 통닭처럼 양쪽 팔을 푸드득 거렸다. 놈의 어이없는 애교에 비웃어주려 노력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 결국 후크선장처럼 한 쪽 눈만 찡그렸다. “ 너는 날개 잃은 천사. 나는 날개주운 나무꾼.” 자기가 말해놓고도 웃긴지 놈이 낄낄댔다. “ 너는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 새끼야. 그러니까 너를 버려가면서까지 누군가에게 목매지 않아도 돼.” “ 비행기 태우지 말고 본론만 말해.” 권솔이 내 가슴부근을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녀석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 네가 있으니까 네 감정이 있는 거다. 감정에 충실하고 싶으면 우선 너부터 챙겨.” 심장이 요동쳤다. 녀석이 눈 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단호했다. “ 나는 네가 누군가에게 맞고 오면 널 때린 놈을 찾아서 죽도록 패줄 순 있어. 나는 그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너를 대신해서 맞아주진 못해.” 녀석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말을 하면서도 내가 꽤나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절절히 느껴졌다. “ 나는 김 계진이 아니니까.” 말을 마친 녀석은 이불에 힘없이 떨어져 있는 내 팔을 모아 엑스모양으로 꼬더니 가슴에 가져다댔다. 언뜻 보면 방어자세 같기도 했다. “ 그렇게 널 지키는 게 우선이야.” 녀석은 허무하게 응시했다. 권솔이 얼굴이 안타까움에 물들어 있었다. “ 널 지킬 수 있을 만큼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더 강해져라.” 권솔의 애원 섞인 목소리에 가슴이 싸하게 굳었다. 문득 머릿속에 생각해보지도 유치한 말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 너 나 사랑해?” 권솔이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필사적이었다. 끈질기게 대답을 강요했다. 이번에도 결국 녀석이 손을 들었다. “ 사랑해.” “ 그래, 알고 있어. 그리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해.” “ 아니야. 너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내가 더 많이 사랑해.” 밝아진 표정의 권솔이 내 허리를 잡아당겼다. 나는 교묘하게 놈의 손을 피하며 물었다. “ 얼마나 더 많이 사랑하는데?” 내 집요한 질문에 권솔은 잠시 생각하더니 명랑하게 대답했다. “ 어느 날 사막에 떨어졌는데 오아시스가 안 타나나면 나는 네 오줌도 달게 마실 수 있을 거 같아.” “ 우아, 진짜 대단하다. 나 네 사랑에 새삼 감동하려고 해.” 의기양양해진 권솔이 언감생심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 너는 어떤데.” “ 내가 잘못 생각 한 거 같아. 아무래도 네가 날 더 사랑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나는 쉽게 정의를 내렸다. 내 오줌도 달게 마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권솔은 고작 자신이 나를 더 사랑한다는 사실에 실망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너구리같은 표정을 짓는 녀석의 머리를 꺾어 주둥이 박치기를 시도했다. “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네가 있어서 졸라 행복하다. 내 사랑, 권솔.” 낯 뜨거운 사랑고백(?)에 권솔이 드디어 활짝 웃었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난 것이다. 놈의 펑퍼짐한 궁둥짝을 냅다 걷어찼다. “ 빨리 꺼져. 난 이만 자야겠다.” 입이 댓 발은 나온 권솔을 무시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곧장 떡방아 찧는 세계로 진출했다. ♠ “ 사내새끼 거시기를 팔딱팔딱 서게 만드는 이 얼굴에, 벗겨놓으면 코피를 질질 흘리게 만드는 황금 같은 몸매를 자랑하는 내가 지금 이런 굴욕을 참고 있어야 되겠냐. 어이, 친구 어찌 생각하시는가. “ 진심으로 염병한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한건 하나도 없으면서 이 경원은 내리 5분이 넘는 시간동안 외모와 몸에 자랑에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던 놈이 갑자기 벌떡 일어다 열심히 꼬나물고 있던 담배를 변기통에 집어던졌다. 놈은 물을 내리다 말고 들고 있던 대걸레를 바닥에 냅다 집어던지며 왈칵 성을 냈다. “ 에이, 씨발!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남이 빈대떡처럼 싸질러 놓고 토낀 거 뒤치다꺼리를 해야 되냐고!” ……그럼 나는? 우리는 가게에 오자마자 이 복귀 사장에게 어제 땡땡이 깐 것에 대한 심문과 소소한 반성문을 고해 받쳤다. 양주에 물 타서 잡혀 들어갔다 나온 놈이 진실성과 신뢰를 운운하며 벌로 어제 밤 고장 난 변기에 푸짐하게 싸놓고 줄행랑친 아무개 씨의 변을 뒷수습하라는 엄하고도 막중한 임무를 하사했다. 짠돌이기질은 집안 내력인가. 당장 변기 수리하는 사람을 불러도 모자랄 판에 사장이란 놈은 힘없는 종업원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시고 각자 양동이와 솔 두 개, 고무장갑만 던진 채, 그 동안 죽 해왔던 대로 양주에 물 타기를 하러 바텐더 석으로 사라졌다. 제대로 콩밥을 먹어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었다. 하긴 콩밥을 주면 진지하게 잡곡밥으로 바꿔달라고 항의를 할 놈이 고작 법을 무서워하겠는가. 이 경원과 나는 그런 눈물겨운 사정으로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 대 청소에 나선 것이다. 더군다나 장미 놈이 오늘도 여전히 지각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래도 우리는 홀이라 다행이지 지하로 내려간 김 지만과 권솔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퐁퐁을 뿌리고 솔을 정신없이 문질렀다. 칭찬합시다, 추천받을 만 한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 야! 말로 할 때 빨리 솔 들어라. 너 아까도 변기 하나도 안했지?” “ 응.” 새끼, 대답은 잘 한다. “ 너는 양심도 없냐? 제발 지옥이나 가라!” 경원이 능글맞게 웃었다. 야한생각을 하거나 남의 등쳐먹을 때 전문적으로 나오는 웃음이었다. “ 가서 염라대왕이나 따먹어야지!” 오늘은 그래도 야한 말로 그쳐서 다행이었다. 놈이 신고 있는 장화를 바닥에 비벼댔다. “ 생각 할수록 짜증나지 않냐. 저거 인절미 시루처럼 싸놓고 도망간 새끼 언제 잡히면 똥구멍만 식칼로 도려낸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해. “ 똥구멍 오려낼 생각에 눈을 반짝이던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세면대를 걷어찼다. 성격도 더러우시지. 나는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수채 구멍에 꼬여있는 머리카락 뭉텅이를 걷어냈다. “ 똥구멍 오려내기 전에 변기 하나만 닦아라.” 경원이 놈이 잇 사이로 뿡 소리를 냈다. 그리고 국가대표 급 콧방귀를 뽕뽕 꼈다. “ 헤이, 친구. 나 예쁘냐?”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질문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답을 갈구하는 놈의 진지한 눈빛을 생각해 짧게 대답했다. “ 조금.” 경원이 놈이 때를 놓치지 않고 기고만장해졌다. 건방짐이 하늘을 찔렀다. “ 예쁜 애들은 더러운 거 하면 잡아가. 몰랐지? 새로 생긴 법이라더라. 몰랐지? 사실 나도 오늘 알았어.” “ 대놓고 지랄을 해라. 그리고 예쁜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냐.” “ 아무 이유 없어.” 듣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말하는 놈만 재밌어 죽어났다. 배를 잡고 낄낄대는 놈을 보며 잠시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이 경원 성격으로 봐서 일부러 저 유행어를 하기위해 질문을 했을 텐데. ……쟤를 어쩌면 좋을까. 녀석의 메롱인 정신 상태에 묵념을 올리던 찰나, 화장실 문이 열렸다. 경원이 놈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너 참 오랜만이로구나. 오천년 만에 보는 장미 놈이었다. 장미 녀석은 나와 경원이 놈을 보고 깜짝 놀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려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녀석은 건전지 떨어진 플라스틱 인형처럼 절도 있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녀석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구석에 처박혀 담배를 꺼내고 있는 경원이 놈에게 박혔다. 장미 녀석의 양 볼이 홍시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이 경원을 보고 얼굴 붉히는 놈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장미 놈은 다소 적응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장 우현과 꼭 닮은 얼굴도 거북했다. 아무튼 좋아한다는 건 진짜였군. “ 경원이 새끼 때문에 온 거야?”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나도 웃긴다. 장미 새끼의 얼굴이 아예 불타는 장작처럼 달아올랐다. 놈은 눈에 띄게 허둥대더니 횡설수설 댔다. 도리어 보는 사람이 더 안쓰러워졌다. “ 아, 아니! 경원이 때문에 온 게 아니야! 절대 아니야.” 주둥이는 그렇게 씨불이면서 녀석의 눈은 줄곧 경원이 놈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원이 놈이 일어나 빈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 진짜 아니야?” 경원이 놈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어쩌면 화났을 때보다 더 차가워진 듯 했다. 녀석의 서슬 퍼런 시선에 장미 놈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 나, 나는 그냥…….” “ 나 때문에 온 거 아니면 제발 좀 꺼져라. 우리 청소하는 거 안 보이냐. 셋 셀 동안 안 꺼지면 너 혼자 청소하겠다는 뜻으로 안다. 하나, 둘……“ 장미 녀석이 질끈 눈을 감고 소리쳤다. 녀석 딴에는 대단한 용기였을 것이다. “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왔어! 경원이 너 때문에. 그러니까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경원이 놈이 손에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 녀석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축축하게 젖어있던 장갑이 장미의 얼굴을 맞히고 떨어졌다. 고무라 꽤 아플 텐데. 역시나 녀석의 분가루 묻은 뺨에 붉은 자국이 올라왔다. “ 경원이? 내가 네 친구냐. 버르장머리 없이 이게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려. 정 부르고 싶으면 형이라고 불러, 새끼야.” ……좋아한다잖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눈에 보이는데 너무 그러지 마라. 듣고 있는 내가 다 민망하다, 인마. 장미 녀석의 검은 동공에 물기가 찼다. 나 못지않은 울보였다. 이 경원이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장미 놈이 고개를 땅에 처박고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 나는 그냥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왔을 뿐이야. 기분 나쁘면 그냥 갈게…….” 경원이 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장미 녀석을 매섭게 노려보는 꼴이 사나운 고양이 같았다. 어색하게 남자다운 척 하는 녀석의 모습이 나에겐 웃기게만 보였지만 불타는 짝사랑에 빠진 장미 군은 바짝 긴장했다. 녀석의 어깨가 떨렸다. 의외로 순진한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명품 아니면 취급 안 해.” 이 경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내새끼가 뭔 놈의 명품을 저렇게 좋아할까. 생각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 경원을 보는 장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녀석은 다짐을 하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분홍색 종이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녀석의 손 끝에 작은 상자가 딸려 나왔다. 노란 색지와 검정색 리본이 인상적이었다. 상자마저 참 장미놈스러웠다. 녀석은 차마 경원이 놈 앞에 가까이 가진 못하고 상자를 어떻게 전해줘야 할까, 고민하다 결국 방향을 바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장미가 상자를 내밀며 애처롭게 말했다. “ 저기 있잖아, 경원이 친구. 진짜 미안한데, 귀찮지 않으면 이것 좀 경원 이한테 전해줄래? 내가 직접 만든 건데…….” 장미 녀석이 묘하게 말을 흐렸다. 어느새 눈물 젖은 황소 눈알이 필사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처절한 눈빛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지만아. 근데 원망하려거든 인기 많은 네 애인을 탓해라.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장미 놈이 리본 끈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왜…….’ 하고 물었다. “ 혹시 안보고 그냥 버릴까봐. 잠깐만.” 장미는 이미 반쯤 풀어져 있던 리본을 바닥에 내려놓고 상자 뚜껑을 재빨리 열었다. ……뭘까. 도대체 뭘 만들었다는 걸까. 솔직히 궁금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자 장미가 상자 안에서 플라스틱 유리판을 꺼내들었다. 유리전체에 야광 전선이 엉켜 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판때기를 불과했다. 그러나 녀석은 유리판을 소중하게 들어 올려 경원이 놈 앞에 흔들어보였다. “ 경원아. 여기 좀 봐줘.” 주둥이에 물러져 있는 담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때문에 녀석의 얼굴이 드문드문 가려져 있었다. 안 보여도 녀석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똥 씹은 표정을 거다. 녀석이 화나기 전에 제발 장미 녀석의 놈의 관심을 끌어주길 바랐다. 물론 그럴 확률은 미미했다. 장미 녀석은 잘 보이지도 않는 이 경원 앞에 유리판을 세우고 헝겊에 쌓인 리모컨을 눌렀다. 정신 사납게 엉켜있던 전구에 동시에 불이 들어왔다. 불투명한 글씨체가 화려하게 빛났다. 그것도 노란 야광 빛이었다. 삐뚤삐뚤하게 수놓인 전구가 만들어낸 건 장미♡ 경원. 이라는 유치찬란한 문구였다. 저런 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박수를 쳤다. “ 너 대단하다. 손재주가 좋은가봐. 힘들었겠다.” 가운데 박힌 하트에 붙어있는 인조 진주가 영 싸보였지만 대체로 정성과 시간이 묻어났다. 또 다시 지만이 생각이 났다. ……너도 준비 좀 해야겠다. 쟤 은근히 졸라 강적이야. 장미의 맹목적인 시선에 이 경원이 헛기침을 했다. 나는 들고 있던 솔을 내려놓고 고무장갑마저 벗었다. 얼추 청소도 끝냈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이 경원의 딱따구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스치듯 지나친 장미의 얼굴엔 고마움이 번졌다. 남의 연애문제에 끼어들면 골만 아파질 뿐이다. 눈치봐가며 빠져주는 게 도리다. 인생 새옹지마라더니 장미가 경원이 놈을 좋아할 줄이야, 꿈에서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1층 홀 안으로 걸어갔다. 의도치 않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다지 웃긴 것도 없는데 참 희한한 일이다. “ 그래서 넌 부식비 아낀다고 생선회에 쓸 우럭을 썩은 걸로 사왔냐!” “ 썩었습니까? 애석하군요.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십시오.” 가게에서 사장님에게 화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홀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는 아저씨는 쓰고 있던 두건을 한 손에 쥐고 탁자를 쾅 내리찍으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가계부에 계산서 용지를 다닥다닥 붙이고 있던 이 복귀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건방진 표정이다. “ 무슨 말씀이시랍니까. 전 최고급 품질을 자랑하는 싱싱한 생선만 취급합니다. " 아저씨가 뜨악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는 가계부를 돌돌 말아 이 복귀 사장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 얼씨구, 말은 잘 한다. 생선이 얼마나 싱싱했는지 사십 마리가 동시에 피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빠져 있더라. 냄새는 또 어떻고. 먹음직스러운 향기를 맡고 나타난 구더기가 바글바글 알을 까서 부화가 됐다고, 인마!” 이 복귀 사장이 들고 있던 볼펜을 내려놓으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 브라보, 역시 좋은 생선은 구더기가 먼저 알아보는군요.” “ 칼로 이빨을 다 뽑아버리기 전에 그 입 닥쳐라. 너 내가 모를 줄 아냐? 쓸데없는 기타 산다고 이번 달 예산이 구멍 난 거 아니냐! “ “ 그런 적 없습니다. 그리고 언제 적 얘기를 하고 계십니까.” 누가 봐도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아저씨의 얼굴이 미심쩍게 변했다. 그는 분노로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 언제 적? 무려 3일 전 얘기다! 음악에 미쳐서 기필코 가게를 말아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복귀 사장이 화들짝 놀라 소파에 펄쩍 뛰어 올랐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 오, 스몰 파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주 악담을 퍼부어대시는군요. 가게가 망하긴 뭘 망합니까. 제가 그렇게 경영능력이 없는 줄 아십니까.” 스몰 파……. 파파? 아저씨가 사장의 작은 아버지였단 말이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그다지 닮았다고 생각은 못했는데, 그랬었군. “ 경영능력? 네 따위 3류 깡패 놈한테 감히 그런 게 있을 거 같으냐. 제발 네 형 반만 닮아라. 그 놈이 여기 맡아서 할 때, 제일 장사가 안 되는 날이 지금 제일 장사가 잘 되는 날하고 매상이 똑같아! 지금 네 나이가 몇인 줄 아냐? 얼마 안 있으면 너도 서른이다. 언제까지 형 눈치만 보고 살래? 내가 너만 생각하면 답답해서, 원. “ 이 복귀 사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팔짱을 끼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답답할 게 뭐가 있습니까. 형님이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가게든, 사업이든 뭐 하나 주시겠지요. 그리고 나는 형님하고 경영철학 부터가 다르지 않습니까.” 아저씨가 쯧쯧 혀를 찼다. 한심해 죽겠다는 눈빛을 하면서도 은은한 진심이 묻어있었다. “ 무슨 놈의 경영철학이 썩은 생선으로 요리하고 양주에 물 타는 게 다 있더냐! 난 그런 쓰레기 같은 경영철학은 듣도 보도 못했다. “ “ 제 경영철학을 무시하는 겁니까.” 이 복귀 사장이 깔깔 웃었다. 천연덕스러운 그 모습에 아저씨가 머리를 흔들었다. “ 고추 달고 태어난 사내새끼라면 모름지기 야망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너는 야망이 없어. 계집년 끼고 아랫도리 비빈다고 다 같은 사낸 줄 아느냐. 욕심 없는 사내는 사내도 아니란 말이다, 이 덜떨어진 자식아. 너는 애초에 글러먹었어.” 이 복귀 사장이 웃음을 뚝 그쳤다. 그러나 눈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는 고개를 죽 빼고 아저씨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 그 말은 어째 형님 뒤통수 좀 쳐보라는 말 같습니다. 정말 그러길 바라십니까.” 아저씨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 뒤통수를 못 치면 적어도 꽁무니는 쫒지 말아야지. 고작 한 살 차이다. 근데 어째 너 하는 거 보면 한 살이 아니라 열 살은 차이 나는 거 같다. 이 멍청한 놈아, 충분히 놀았다고 생각하면 지금부터라도 바짝 쫒아.” 아저씨는 비장하게 덧붙였다. “ 여기서 더 차이나면 너는 개 박살나는 거 시간문제다. 가게나 사업을 떼어 준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지금 나가 죽어. 그게 더 편할 거다.” 갑자기 머리를 기울인 덕에 이 복귀 사장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사장의 가슴을 푹 찌르며 그를 자극했다. “ 가슴에 야망을 키우고 승부욕에 불을 집혀봐. 모름지기 사내라면 남이 버리고 간 음식만 주워 먹진 않겠지. 너도 사내 아니더냐.” 이 복귀 사장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걸까. 궁금했다. 귀를 쫑긋 세웠다. 그때 주방으로 이어진 쪽문에서 계진아,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숙이고 축 처진 커튼을 걷어냈다. 그 곳엔 낯간지럽게 웃고 있는 비룡이형이 있었다. 그는 내게 손짓을 하면 ‘ 계진아, 잠시만 이리와…….’ 하고 말했다. 나는 몸을 숙이고 있는 상태라 낮은 천장에 등이 닿지 않게 살금살금 기어 형 앞으로 다가갔다. “ 바쁜데, 미안해.” 형이 양손가득 들린 하얀 박스를 가리켰다. 박스에서 오백년 묵은 발 냄새가 솔솔 나는 것이 아무래도 아저씨가 말한 피눈물 흘리고 구더기 끓는다는 생선인가보다. “ 너무 많아서 혼자 다 못 버리겠어. 입구 앞까지만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정말 미안해.” 착한사람은 이런 사소한 부탁도 되게 미안하게 하는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내 주위엔 부탁을 명령처럼 하는 놈들 천지였으므로 형의 미안해하는 얼굴은 삭막하게 말라있던 내 가슴에 한줄기단비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형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봉지 서너 개를 들고 입구로 걸어갔다. 뒤에서 형이 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분주하게 쫒아왔다. 벌어져있는 봉지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양이 많아 축축 처지기까지 했다. 손잡이를 손에 돌돌 말고 발바닥으로 문을 걷어찼다. 그러나 내가 괜한 수고스러움을 하기도 전에 밖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로 인해 문이 활짝 열리고 있었다. 그 놈이었다. 어느새 종종걸음으로 내 등 뒤에 붙어선 형의 한껏 고조된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박태열씨.” 장신의 남자는 박태열씨였다. 그는 여전히 중학생 소풍복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황색 야구모자와 흰색 패딩잠바가 살짝 젖어있었다. 운동화도 젖어있었다. 밖에 눈이라도 오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참 이상도하시지. 이 복희씨를 죽어라 피해 다니는 놈이 제 발로 그의 동생가게를 찾아오다니. 이건 간이 크다고 해야 되나, 아니면 용기가 가상 하다고해야 되나. 아리송했다.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형과 나를 내려다보며 박태열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응, 안녕. 귀여운 비룡아.” 형이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들고 있는 이 망할 놈의 생선이나 빨리 좀 버려야겠다는 생각 했다. 쥐고 있던 봉지를 단단히 감아쥐고 박태열씨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했다. 생선이 터지지 않게 조심해서 뒤뚱뒤뚱 걸어갔다. 등 뒤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비룡이형인가 했다. 강한 힘에 의해 몸이 돌려졌다. 박태열씨였다. 그는 내게서 썩은 생선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 인사도 하기 싫어? 나는 자기 보러 목숨까지 내놓고 왔는데.” 저 놈은 입에 발린 말 전문가였다. 자기, 자기하는데 내가 왜 네 자기냐. 완전 개뿔이다. 나는 간단하게 고개만 까닥거려 인사했다. “ 얼굴 봤으니까 이제 가세요.” “ 그건 싫은데.” 박태열씨가 특유의 질질 끄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놈에게서 쓰레기봉투를 빼앗으려했다. 그가 다른 손으로 봉지를 바꿔 들며 실실댔다. “ 싫으면 시집이나 가시죠.” 나는 왜 항상 이런 식일까. 박태열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놈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웃고 있는 거 알아요. 절대 웃지 마세요. 나 농담 아니에요. 나 화나면 완전 무섭다고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방심한 틈에 얼른 쓰레기봉지를 빼앗았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고 썩은 생선을 탈탈 털어 넣었다. 손가락 틈새에 진득한 물기가 묻었다. 손등을 전봇대에 마구 비볐다. 등 뒤로 박태열씨가 다가왔다. “ 자기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 난 잘 모르겠다.” ……염병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네 생각만 덩그러니 말하면 듣는 사람은 못 알아먹는 다는 것도 모르냐. 예의도 없는 자식.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청소하고 있을 때만해도 밝았는데 벌써 밤이었다. 겨울은 쓸데없이 밤이 긴 게 문제였다. 옆에서 소곤대는 박태열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 거기 순둥이. 자리 좀 비켜줄래.” 내가 아니라 비룡이형에게 하는 말이었다. 가지마라. 제발 가지마! 그러나 형은 ‘네, 알았어요. 나 먼저 갈게. 계진아…….’ 라고 말하며 뒤도 안돌아 보고 쌩하니 가게 안으로 달려가 버렸다. 흡사 박태열씨의 ‘들어가라…….’ 이 말만 기다린 사람 같았다. 그 정도로 무서운 속도였다는 것이다. 길거리에 휑하니 둘 만 남게 되자, 분위기가……. 분위기는 무슨. 그냥 춥기만 했다. “ 할 말이 뭔데 형까지 들어가라고 하는데요?” 박태열씨가 웃을 듯 말듯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 뭔데요.” “ 차이면 쪽팔리잖아.” 그가 내 앞으로 한발자국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박태열씨가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두 발자국 물러섰다. 박태열씨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 그대는 내가 싫은 거야?” 뒤통수를 호미자루로 얻어맞은 것처럼 나는 멍해졌다. 저놈이 뭐라는 거냐. 그가 미묘하게 웃었다. 그러나 표정과 다르게 망설임 없는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 네가 무지무지 좋다.” 이번엔 앞니로 꼭꼭 깨물고 있던 혀가 땅바닥까지 축 미끄러질 뻔 했다. 내가 속전속결로 복희씨를 좋아한 것에 비교해서도 놈은 지나치게 앞서나가고 있다. 확실히 뒤로 잡아올 필요가 있었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봤다고, 좋다는 걸까. 라면 끓여줄 때 한번, 이 복희씨 집에 데려다 줄 때 또 한 번. 그리고 오늘. 저 새끼는 확실히 뇌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 사람 놀려요? 내가 어지간히 만만히 보이나 봐요. 내가 좋다고? 잘 됐네요. 나는 그쪽 사랑하거든요.” 신랄하게 비꼬았다. “ 사랑해요. 사랑해서 죽겠어요. 됐죠? 이제 할 말 다 한 거 같은데 전 이쯤해서 가게로 들어가려고 합니다만, 그 쪽 생각은 어떠신지…….” 웃고 있던 박태열씨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뜨끔했다. 저 놈도 깡패다. 깡패라 함은, 주먹질로 밥 먹고, 연장으로 돈 버는 직업이었다. 너무 깠다. 가만히 서있던 박태열씨가 움직였다. 그는 쓰고 있던 모자를 거칠게 벗었다. 목선까지 오는 긴 갈색머리가 물에 젖어있었다. 은근히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 자기, 미안한데. 그런 식으로 비꼬지 마. 남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어서 방어적으로 화낼지 모르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내가 움찔거리자 그는 웃어보였다. “ 기분 나빴다면 미안.” 나는 침묵했다. 박태열씨가 오두방정을 떨었다. “ 나도 모르게 욱 했다. 미안 잘못했어. 예쁜이, 좀 봐줘.” 사과는 오히려 내가 해야 했다. 박태열씨는 두 손을 모아 파리처럼 열심히 비벼대며 아양을 떨었다. “ 화 풀렸지? 그리고 자기 분명히 날 사랑한다고 했다? 그럼 결론 났네.” “ 뭘요.” 박태열씨는 깡충깡충 뛰어 내 앞에 섰다. 멀거니 서있는 나를 보며 그는 내 손목을 잡아 올렸다. 뭐하나 싶어 가만히 있었다. 그가 팔뚝에 입을 맞췄다. 설마 했는데 확실했다. 얘는 완벽하게 돌았다. 그리고 나 3주일 동안 목욕 안했는데. " 뭐긴. 나는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도 나를 좋아하니까 서약을……. “ “ 둘 다 떨어져라.” 낯선 목소리였다. 울림 가득한 저음의 목소리. 심장이 지끈했다. 박태열씨가 움켜쥐고 팔목을 서둘러 잡아 뺐다. 거의 다 빠진 손을 그가 다시 잡아왔다. 왜 이러냐는 눈빛으로 박태열씨를 바라보자 싱글싱글 웃기만했다. “ 좆 대라기 찢겨지고 싶지 않으면 그 손 놓는 게 좋을 거다.” 박태열씨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자동차에 기대어 무서울 만큼 차가운 얼굴로 서있는 복희씨의 모습이었다. 그는 무거운 침묵으로 박태열씨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복희씨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잔뜩 골이 난 것도 그렇고 걸리기만 하면 뭐든 때려죽일 기세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이유 없는 변덕이 두려웠다. “ 분위기 좋아 보이네.” 복희씨가 노골적으로 내 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섭기도 했지만 이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다. 부담스러운 이런 상황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복희씨의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 고개 들어라.” 초조해졌다. 소림 끼치도록 다정한 손길이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고개를 들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박태열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박태열씨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 귓가에 ‘ 열 꽤나 받지 않겠어? 있는 대로 폼 잡아봤자 사람은 단순해. 특히 남자는 더…….’ 하고 속삭였다. 또각또각 하는 구두소리가 가까워졌다. 그제야 박태열씨는 나를 놓아주었다. “ 내 자기한테 명령하지 마라.” 이 사람 오늘 진짜 미쳤나 봐. 복희씨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그도 나처럼 박태열씨가 오늘 제 정신이 아니라고 느꼈던 게 분명했다. “ 어지간히 간땡이가 쳐 부었구만.” “ 이젠 너만 갈아 치우면 더 클 필요도 없겠다.” 딸깍이는 라이터 소리에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깨를 껴안고 있는 박태열씨의 팔 힘에 짓눌려 뼈마디가 따끔거렸다. 박태열씨의 팔을 한 쪽으로 치워내고 몸을 틀었다. 순간 복희씨의 찌르르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심장이 묵직해졌다.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 막말을 지껄이는 걸 보니 네가 드디어 죽을 때가 다 됐긴 됐나보다.” 박태열씨는 별반 동요 없이 살짝 웃었다. 그게 전부였다. 박태열씨가 뒤늦게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 내가 가지고 있는 네 물건은 전부 돌려주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복희씨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전혀 동요 없는 얼굴로 묵묵히 박태열씨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가죽장갑을 벗으며 차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문득 나를 가리켰다. “ 맞아?” 복희씨의 음성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천지다. 그러나 나만 못 알아먹는 모양이다. 박태열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그게 얼마짜린지 알고는 있는 거냐.” 박태열씨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복희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 멍청한 놈.” 답답해 돌아버리겠다. 그러니까 무슨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전혀 감을 못 잡겠다. 복희씨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며 심술궂게 말했다. “ 몇 년 안 본 사이에 네가 순애보가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박태열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나는 적어도 사람가지고 장난은 안친다. 물론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 박태열씨는 삐뚤어진 모자를 바르게 쓰고 잠바에서 담배를 꺼냈다. “ 재밌고 즐거워. 지금도 그런데 앞으론 얼마나 더 신나겠냐. 안 그래, 자기이.”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는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다. 내 무덤덤한 반응에 복희씨가 으르렁거렸다. “ 어째 내 눈엔 너만 즐거워 보이는데.” “ 지금은 그래.” 박태열씨의 말을 끝으로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어느 정도 뜸을 들였다 생각했는지 박태열씨가 입을 열었다. “ 너는 어지간히 자신 있나봐.” 복희씨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 그래.” " 그거야 우리 자기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그리곤 진짜로 박태열씨가 물어왔다. 잠자리 해부를 하는 애린애 같은 돌연 탐구적인 눈빛이었다. " 자기, 멋대가리로 없고 난폭하기만 한 저 이씨가 좋아 아니면 상냥하고 부드러운 내가 좋아?" 나는 다소 어이가 없어졌다. 그건 신경 안 쓰는 척 하면서 은근히 나를 곁눈질 하는 이 복희씨의 단순함에 의해서였다. 박태열씨란 놈의 낯바닥 두꺼운 건 처음부터 알았지만 자신이 지금 화내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눈을 빛내는 복희씨도 그 못지않게 단순했다. 내가 주춤거리며 답을 꺼리자, 박태열씨는 무언의 압박을 가해왔다. " 둘 중 하나만 택해봐. 응? 자기 뭘 망설이는 거야. 내가 좋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 이 놈, 저놈 할 것 없이 몽땅 미친놈들이었다. 욕망을 갈구하는 듯한 박태열씨의 집요한 시선을 피해 몸을 틀었다. 퇴근시간이라 꽉 막혀있던 도로엔 자동차들이 정신없이 빵빵댔다. 빨리 가자, 운전 그 딴 식으로 할 거냐. 하는 말부터 쌍 시옷자 무성한 악다구니가 울려 퍼졌다. 내가 왜 이 말도 안 되는 선택에 순간에 서서 저 도토리 키 재기 같은 두 놈 중에 한 명을 골라야 한단 말인가. 등을 떠밀어 어이없는 상황을 만든 놈이나 그에 응해서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놈이나, 둘 다 지독한 개새끼들이었다. ……이참에 아주 ‘멍멍’ 짖어보시지. 나를 뭐로 보고! 눈알 빠지기 일보직전으로 복희씨와 박태열씨를 번갈아 가며 째려봐주었다. 박태열씨는 꼴에 썩어 문드러져도 양심이란 게 있긴 했는지 내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씨발놈의 이 복희씨는 지긋지긋하게 태평한 얼굴로, 심지어 지루해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이드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 끝까지 잘났다 이거네.” 용광로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급기야 내 속에 있던 분출되지 못한 용암들이 분화구를 뚫고 콸콸 흘러 넘쳤다. 나는 주먹을 허공에 치켜들어 위협적이게 말했다. “ 이런, 빌어먹을 깡패자식들아! 그렇게 내기를 하고 싶으면 나갖고 하지 말고 너희 둘이 방 잡아놓고 실컷 쎄쎄쎄나 해라! “ 박태열씨의 눈깔이 머리통만 해졌다. 놈이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 자기,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가뜩이나 열 받아 죽겠는데 그래, 너 이 새끼 잘 걸렸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쏘아보았다. “ 내가 왜 네 자기냐! 이 호로쌍놈아, 다신 자기소리 하면 주둥이를 식칼로 난도질 해버릴 거야! 너도 똑같아. 자기, 자기 하면서 은근히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림도 없지. 머리털 다 뜯기기 싫으면 너는 입 닥치고 있어!” 박태열씨의 얼굴이 알루미늄 판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놈의 급변한 표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현재 터프했다. 충분히 남자다웠다. 나는 근엄하게 몸을 돌리고 손쉬운 박태열씨보다는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또라이를 상대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이 복희씨는 여전히 열심히 한 번 짖어봐, 하는 무시와 괄시로 일관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의 태연한 모습에 혼자 분에 못 이겨 발을 동동 구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수리 부근에서 찜통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와 내 몸을 서서히 감쌌다. 축축이 흐른 땀들이 차가운 바람에 닿아 사늘하게 식었다. 조금 으슬으슬했다. “ 너희들 내 말 잘 들어라. 나 가지고 다시 장난치지 마! 이젠 봐주는 것도 지긋지긋해!” 필요이상 과장된 목소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쐐기를 박아야 한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주문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 지금까진 충분히 기고만장했었지? 앞으론 어림도 없어. 멋대로 사람 휘두르고, 장난치고, 가지고 노는 몰상식한 짓거리는 너희 집 개새끼한테나 실컷 해!” 박태열씨가 짧게 숨을 토했다. 마지막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거울 속에 빨려 들어갈 줄 알았던 복희씨의 얄미운 머리통이 뒤늦게 들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날 보더니 12시 이후에 보면 무서워서 오줌 질질 쌀 법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복희씨는 팔을 옥죄고 있던 와이셔츠 단추를 푸르며 피곤하다는 듯이 목을 좌우로 까닥까닥 거렸다.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듣기도 싫을 이런 순간에 딱 맞춰 뱉어냈다. 아주 징글징글했다. “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 죽겠네.” 복희씨는 목에 헐렁하게 묶여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뺐다. 그는 차 안에 타이를 집어 넣고 다시 몸을 돌렸다. “ 아이고 무서워라.” 대놓고 빈정거리는 어조였다. 그의 얼굴은 박태열씨를 향해있지만 정작 나에게 하는 말이란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저절로 입술이 실룩여졌다. 나는 분노했다. “ 사람이 말 하는데 이 씨발놈이…….” “ 언제부터 이렇게 까칠해 지셨을까.” 이제 대놓고 비꼬아댔다. 복희씨의 몰상식함에 박태열씨가 혀를 찼다. 그렇다고 재밌어 죽으려고 달려드는 꼬투리잡기 놀이를 그만둘 남자도 아니었다. “ 이젠 째려보기까지 하네. 진짜 무섭다. 사람하나 잡겠습니다. 계진씨.” 나는 그의 재수 없는 중얼거림에 확실히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퓨즈가 와장창 깨졌다. 이성이 날아가고 감정이 폭발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과연 복희씨의 머리채를 휘어잡을 거란 생각은 절대 못 했을 것이다. 나는 미친개처럼 반쯤 혀를 덜컹거린 채, 복희씨 앞으로 달려갔다. 히죽거리는 그의 얼굴에 네가 꼴아보면 뭐 어쩔 건데, 하는 똥배짱이 나타났다. 묵묵히 옆에 서있던 박태열씨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바짝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가운데 손가락을 교묘하게 날을 세웠다. 평상시의 두 배를 뛰어넘는 내 분노의 오로라를 알 턱이 없는 이 복희씨가 무릎을 구부려 눈을 맞추며 천진하게 물었다. “ 왜요, 혹시 그 주먹으로 나를 때려주시게요?” 그는 주먹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코웃음을 쳤다. “ 그 쪽은 내가 참 하찮게 보이나 봐요.” “ 제가요? 에이, 설마요.” 이 복희씨는 끝내 죄를 뉘우칠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나 나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 정중히 사과하세요. 나 정말 화났거든요.” 복희씨가 낄낄대며 내 볼과 콧등을 차례대로 콕콕 찔러댔다. 사납게 고개를 흔들어 손가락을 얼굴에서 떼어내자 복희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 화 풀어요. 아니면 무릎이라도 꿇어드릴까요?” “ 제발 그런 장난 좀 치지마세요!” 복희씨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 장난 아닌데요. 전 충분히 진지하고 또 진지해요. 하지만 계진씨, 네 눈에 그렇게 보이면 뭐 할 수 없죠.” 복희씨의 악당 같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몸속에서 축척되어왔던 분노의 세포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부화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마치 열 달 동안 숨어있던 태아가 답답함에 산모의 배를 톡톡 건드리는 것과 비슷했다. 생경한 기분에 사로잡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안에 숨어있던 오기와 자존심들이 흘러넘쳐 바닥을 흠뻑 적실 것처럼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그러자 당장 눈앞에 뵈는 게 없었다. 거대한 산 같기만 했던 이 복희씨의 존재가 투명하게 덮어지며 온 세상이 내 발밑에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씨발, 덩치 큰 거 말고는 볼 거 없어! 거대한 킹콩 한 마리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문에 빠져들었다. 자기최면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무턱대고 터져 나온 배짱을 앞세워 나는 복희씨 눈앞에 손가락을 휙휙 저었다. 이게 그 유명한 삿대질이었다. “ 당장 무릎 꿇고 내 바짓가랑이 붙잡고 사과해! 빨리!”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만 멀뚱멀뚱 나를 내려다보며 ‘사는 게 재미없어 죽겠으니 제발 나 좀 웃겨봐.’ 하는 건방진 어깨 으쓱거림만을 했을 뿐이었다. “ 추워서 뇌가 얼어버리셨나.” “ 아니! 난 멀쩡해! 뇌가 얼은 건 내가 아니고 바로 너다, 이 복희. 씨발, 이름도 촌스러운 게.” 박태열씨가 대놓고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복희씨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 이 복희? 내가 네 친구냐? 버릇없이 굴면 혼난다, 떽!” 이 복희씨는 억지로 내 머리를 끌어안으려했다. 잽싸게 몸을 피했다. 허공에 멈춰있는 그의 팔뚝을 주먹으로 쳐냈다. 나는 처음으로 그를 때렸다는 것에 흥분해서 폴짝폴짝 날뛰기 시작했다. “ 대 마왕 같은 놈. 너는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드려 맞아야 정신을 차릴 테지!” “ 보고만 있으니까 갈수록 가관이네. 이봐. 김 계진…….” “ 시끄러워! 이젠 네 말 안 들어! 이 능구렁이 같은 자식아!” 내게서 고개를 돌리는 복희씨를 보며 이때다 싶었다. 나는 당장 달려들었다. 그의 풍성한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았다. 그리고 앞뒤로 짤짤 흔들기 시작했다. 내 돌발적인 행동에 주춤 물러난 그의 팔을 부여잡고 나는 원숭이처럼 폴짝 뛰어올랐다. 코앞에 보이는 복희씨의 오른쪽 어깨를 사정없이 깨물었다. 그가 들릴 듯 말듯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내 귀엔 미니홈피의 배경음악처럼 잔잔하게 들렸다. “ 그 동안 날 속이고, 오오! 얼마나 혼자 재밌었겠어? 그렇지?” 그를 때리면 때릴수록 철저하게 이성을 잃어갔다. 살인적인 주둥이를 콧등에 옮겨 뾰족한 콧날을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복희씨가 조금 전보다 더 큰 신음을 삼켰다. 그가 나를 떼어놓으려 팔을 휘둘렀다. 나는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 이게 아주 미쳤구만. 좋은 말로 할 때 안 떨어져!” “ 응. 안 떨어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를 떼어놓으려는 그와 산 낙지처럼 들러붙는 내 모습을 보는 박태열씨의 얼굴에 얼이 빠졌다. 놈의 표정 따위는 관심 밖의 문제였다. 복희씨의 목에 거칠게 팔을 감았다. 그를 무조건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동적 몸이 밀착이 되자 나는 복희씨의 목덜미를 흡혈귀처럼 물어뜯었다. “ 윽! 이게 진짜 봐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그는 내 머리통을 억지로 떠밀었다. 바닥에 떨어뜨리려는 의도였다. 어림도 없다. 할 일 없으면 꺼지라고 말해주고 싶은 순간 존재자체를 의심케 했던 박태열씨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 자기, 복수는 좋은데 왠지 그 방법은 뒷일이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정말 진심으로 눈에 베는 게 없었다. 팔의 각도를 풀어 복희씨의 옆구리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대꾸했다. “ 제비주제에 뭐라는 거야! 너도 거기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 다음엔 네 차례니까.” 박태열씨가 어설프게 웃었다. 그는 연약한 척 가증을 떨며 어정쩡한 만세포즈를 취했다. 노력이 가상하니 저놈은 보류상태로 미뤄둬야겠다. 오늘 만큼은 복희씨를 물어뜯고 할퀴고 꼬집는데 에만 사력을 다하기로 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게 아니라, 젖소처럼 달려가 호랑이처럼 덤벼들었다. 생각보다 수확은 짭짤했다. 복희씨의 긴 머리카락은 마구잡이로 엉키게 되었고, 양복단추는 다 떨어져나갔다. 상의는 세탁기에 돌렸다가 말리지도 않고 그대고 입고 나온 것 같았다. 고급 와이셔츠는 김 지만이 사준 이천오백 원짜리 내 남방과 같은 회사에서 나온 제품이라고 믿을 만큼 볼품없이 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극한까지 복희씨를 몰아붙인 결과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탈진상태가 될 때까지 그의 뺨과 어깨를 닥치는 대로 때리고 기계적인 발길질을 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났다. 아이러니 한 건 내가 복희씨를 때리면 때릴수록 그는 최소한의 방어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맞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나를 억지로 떼어내려던 움직임조차 사라졌다. 망부석이었다. 결국 하얀 깃발을 들어 올린 건 나였다. 대한민국 젊은 남성의 평균 운동량에 절반도 못 미치는 녹슨 근육을 자랑하며 나는 복희씨에게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털 나고 이렇게 사람을 때린 적은 처음이었다. 주먹을 쓰는 것도 대단한 체력이 필요로 했다. 힘들었다. 이마에 몽글몽글한 땀이 뭉쳐져 있었다. 거친 숨이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 하아…….” 땀을 닦기 위해 손을 든 순간 눈에 보이는 건……. 이럴 수가. 이 복희씨의 긴 머리카락들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엉켜있는 머리카락들이 족히 한줌은 넘었다. 아팠겠구나 하는 생각보다 이거 들키면 작살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먼저였다. 이 복희씨가 서있는 쪽에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숨죽여 머리털을 떼어냈다. 옆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살기에 주춤했다. ……좀 참을 걸 그랬나. 아니다. 잘한 거다. 잘한 거겠지? 정말 잘 한 걸까. 일분이 십년 같았다. 이 복희씨는 왜 말이 없는 걸까. 호기심은 두려움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어느새 다가왔는지 얼굴이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복희씨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는 급변한 이 복희씨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꼬불꼬불 파마머리에 듬성듬성 빠진 머리가 어깨 위에 나부꼈다. 하물며 본인이 뿌듯해 마지않는 잘생긴 얼굴위엔 짐승의 흔적들이 엿보였다. 손톱과 이빨자국이 거하게 새겨져 있었다. “ 내가 살다 살다 너 때문에 별 거지같은 일을 다 겪는다.” 복희씨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심장이 움찔했다. 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이쪽, 저쪽 허리를 틀었다. 팔을 붕붕 젓기도 했다. 삐걱거리는 몸에서 우두둑 뼈 소리가 났다. 복희씨의 입가가 잔인하게 뒤틀렸다. “ 다 했냐.” 나는 꺼져가는 생명을 힘겹게 부여잡는 백혈병환자처럼 중얼거렸다. “ 뭐, 뭘요.” 복희씨가 내 운동화를 구두로 툭툭 걷어찼다. “ 다 때렸냐고.” 사형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내 목소리는 불안하게 흘러나왔다. “ 아마도 그, 그럴 거예요.” 복희씨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사납게 번득였다. “ 기대해라. 이젠 내 차례다.” 나는 감전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쌩하고 둘러봤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숨죽여 있으며 복희씨와 나를 보고 있는 박태열씨를 제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까놓고 말해 내가 이 복희씨에게 얻어맞다 혹여나 죽는다 해도 박태열씨만 입을 싹 닦으면 그대로 실종처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방광이 후끈했다. 오줌보가 터져 물이 질질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때마침 재수 없게도 복희씨와 눈이 마주쳤다. 속으론 저주를 잔뜩 퍼부으며 겉으론 상냥하게 말했다. “ 안녕히 계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미친 듯이 달렸다. 혹시 복희씨가 쫒아오나 싶어 불안하게 뒤를 보며 달렸다. 이 복희씨와 박태열씨가 나를 정신병자 보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달리기만 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상했다. 내가 열심히 달리면 달릴수록 이 복희씨의 사악한 눈동자에 어린아이 같은 기쁨의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뭘까. 박태열씨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그는 어깨너머 어딘가를 손끝으로 열심히 가리켰다. 이 복희씨가 박태열씨의 팔을 단 번에 쳐냈다. “ 내버려둬. 어디까지갈수 있나 한 번 보게.” “ 저러다 큰일날거 같은데.” “ 그럼 큰일 날 팔잔가 보지. 쓸데없이 주둥아리 나불거리지 말고 닥치고 있어.” 박태열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불안해서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놈들이 쫒아오나 안 오나 확인해야 했기에 계속 뒤를 보고 걸었다. “ 가만히 보고 있을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박태열씨가 아슬아슬하게 말을 이었다. “ 우리 자기 좀 봐, 이젠 웃고 있어.” “ 그러네, 진짜 웃고 있네. 병신 머저리 주제에 쟤가 사람하난 제대로 웃겨.” 두 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화의 주재료가 나인 건 확실했다. 거리가 눈에 띄게 차이를 보이자, 나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튼튼한 두 다리는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 멍청한 새끼들. 잡아보시지! 절대 못 잡을 걸. 바보들……악!” 박태열씨의 말대로 정말 가만히 보고만 있을 문제가 아니었다. ‘바보들아, 메롱! 이 망아지는 이제 안녕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바보들’이란 단어를 끝으로 강한 충격에 휩싸여 앞으로 꼬꾸라졌다. 힘없는 몸뚱이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 엉덩이가 반으로 완벽하게 접질렸다. 꼬리뼈가 지끈했다. 알싸한 고통이 척추 뼈를 타고 흘렀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내가 본 건 장승처럼 서있는 우람한 전봇대였다. 내 뒤통수를 때린 건 이 복희씨도, 박 태열씨도 아닌 전봇대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힘겹게 떴을 땐 나는 병원 응급실에 누워있었다.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건 소독약 냄새였고, 그 다음은 환자들의 돼지 멱따는 고함소리였다. 눈꺼풀을 한참동안 실룩거렸다. 백의의 천사 누님들과 의사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 거리는 틈바구니 속에……아, 맙소사. 그들을 발견했다. 쌍칼과 새싹이었다. 두 사람은 응급실에 있는 모든 의료인들에게 우리나라 의료법과 의약분업에 대한 습자지 같은 지식에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낭설과 괴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두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쌍둥이처럼 동시에 고개를 돌리던 두 사람이 흐리멍덩하게 앉아있는 날 발견하고 발꿈치에 모터 단 속도로 다가왔다. 새싹이 들고 있던 검은 깨죽 상자를 자랑스럽게 침대에 올려놓았다. “ 계진씨! 어떻게 되신 겁니까!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십니까.” 190이 넘는 놈이 침대에 철퍼덕 엎드려 울먹이자 병원 바닥에 진동이 왔다. 쌍칼이 등치 값 못하는 새싹을 오물단지처럼 찜찜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들고 있던 오후햇살 음료수를 내 발밑에 내려놓으며 다른 손으론 새싹의 등을 사정없이 떠밀었다. “ 맞습니다. 정말 걱정했습니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천사 같은 계진씨!” ……전봇대에 대가리 박은 것에 비해 참 호화스러운 대우였다. “ 네,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쌍칼이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난 새싹은 테크노 춤을 추듯 도리질을 했다. “ 별거 아니긴요. 머리로 전봇대에 들이받았는데요. 형님한테 전화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어떻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어떠십니까. 머리가 울리거나 속이 미식 거리진 않습니까.” “ 진짜 괜찮아요.” “ 아닙니다. 제 눈은 못 속입니다. 계진씨는 지금 괜찮은 게 아닙니다. 얼굴이 창백하세요. 의사를 부를까요? 헤이, 닥터! 야, 닥터!” 술집에서 웨이터를 부르듯이 새싹이 손뼉을 쳤다. 녀석은 필요이상 흥분을 하고 있었다. 간호사, 의사할 것 없이 우리 쪽으로 시선이 모아졌다. 쪽팔렸다.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이성을 잃지 않은 쌍칼이 새싹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깜짝 놀란 새싹의 쌍칼을 꼴아보았다. “ 왜 때려! 죽을래?” “ 계진씨가 별거 아니라잖아. 귀찮으시게 왜 자꾸 물어 봐. 네깟 무식쟁이가 뭘 안다고. 지랄하지 말고 앉아있어.” 쌍칼이 명령을 했다. 새싹이 배를 들이밀고 뻔뻔하게 따지고 들었다. “ 지랄? 환자에겐 절대 안정이란 것도 모르냐! 환자인 계진씨 앞에서 그런 상스러운 욕을 하다니! 너 진짜 막장이구나! 새싹의 비난에 쌍칼이 맞대응에 들어갔다. 전봇대에 부딪히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머리가 녀석들 때문에 아파왔다. “ 막장?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어이가 없군. 너 작년에 사고 쳐서 형님한테 깨질 때 앞장서서 구해준 게 누군데! 엉? 누구야! 이 자식아, 빨리 말해봐. “ 묵묵히 듣고 있던 새싹이 기고만장해졌다. 비장의 무기가 있는 듯 했다. “ 오, 그러셨어. 그래서 형님이 부산에 일 보러가자고 할 때 상철이 형님 추천했냐! 형님한테 찍혀서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를 개 무시하고? 나를 발판삼아 형님한테 귀여움 받으니까 퍽이나 좋으셨겠어. 에라이, 요 빌어먹을 놈아! “ 쌍칼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두 사람의 그칠 줄 모르는 고함소리에 비난과 눈총이 빗발쳤다. 이곳에서 그들을 유일하게 알고 있다는 책임 하에 나는 자진해서 입을 열었다. “ 새싹 군 참으세요! 쌍칼씨도 참으세요! 제발요. 부탁드려요.” 새싹이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 계진씨는 잠깐 빠지십시오. 제가 오늘 이놈 성격을 확 고쳐버리겠습니다.” 새싹은 거대한 덩치를 앞세워 쌍칼의 멱살을 덥석 후려잡았다. 가만히 있을 쌍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 나간 발길질을 퍼부었다. 두 사람은 결국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로의 얼굴에 엇 주먹을 날려댔다. 턱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거의 눈 밑까지 가렸다. “ 됐어. 너는 이제 꺼져. 내가 알아서…….” 이 복희씨였다. 그는 옆에 있는 박태열씨에게 나른한 표정을 말했다. 성큼성큼 걸어오던 발걸이 멈칫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어느새 바닥에 눌어붙어 있는 새싹과 쌍칼에게 향해 있었다. 복희씨를 보고 있던 박태열씨도 그를 따라 고개를 내렸다. 놀라움에 눈알이 커졌다. “ 너희 애들은 요새 레슬링도 하냐.” 복희씨는 조용했다. 박태열씨는 왠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 금메달이라도 따다 바칠 모양이다. 참 능력 좋아, 저런 애들은 어디서 구했냐.” 복희씨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뭐든 때려 부술 기세였다. 아니, 때려 부수고 있었다. 그는 철재책상을 주먹으로 거칠게 내리쳤다. 빠각하는 소리가 울렸다. 듣기 싫은 소리였다. 응급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다. 새싹과 쌍칼은 복희씨가 온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뒤엉켰다. 그들을 보는 복희씨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그는 상의 주머니에 비쭉이 튀어나온 가죽장갑을 끼는 순간에도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개처럼 엎드려 꼼짝도 못하고 두드려 맞던 새싹이 생각났다. 나는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쌍칼을 올라탄 채 허공에 주먹을 치켜드는 새싹의 귓가에 ‘이 복희씨 왔어요, 이쪽을 노려보고 있어요…….’ 하고 알렸다. 즉각 반응이 왔다. 새싹은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났다. 어벙한 얼굴로 누워 있는 쌍칼을 억지로 일으켜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기까지 했다. “괜찮아? 왜 갑자기 넘어지고 그래. 가슴이 다 철렁했다, 인마. 네가 넘어지지 않게 대비를 했었어야 했는데. 진심으로 미안하다.” 쌍칼의 얼굴은 덜 익은 파전을 씹은 듯 했다. 그는 불현듯 고개를 끄덕이곤 새싹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 네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사과를 하냐! 너 걱정이나 시키고 내가 면목이 없다.” “ 아니야! 내가 잘못 했다니까! 미안해.” 새싹이 단호하게 말했다. 쌍칼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 무슨 말이야! 내가 미안하다고 했지?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 거냐!” “ 너 자꾸 무슨 말을 하…….” 그때 복희씨가 새싹의 말을 매정하게 자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지랄 만담은 그만 하지.” 새싹과 쌍칼이 어색하게 ‘하하하’ 웃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손을 마주잡고 복희씨에게 인사를 했다. 부들부들 떠는 그들에 비해 복희씨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 너희 혹시 싸웠냐.” 쌍칼과 새싹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새싹이 필사적인 미소를 띠웠다. “ 아닙니다! 저희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아시잖습니까, 형님!” “ …….” “ 정말입니다, 형님! 제발 믿어주십시오!” 복희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그냥 귀찮아서 대답을 하지 않는 걸로 보였으나 새싹과 쌍칼은 그의 침묵에 얼굴이 하얗다 못해 누런 콩가루가 되었다. 박태열씨가 입을 가리고 숨죽여 비웃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박태열씨를 없는 놈 취급했다. 하늘 아래 형님은 단 한 사람이었다. 복희씨가 나이프를 빙글빙글 가지고 놀더니 새끼손톱 끝을 틱틱 잘라냈다. 쌍칼이 자동적으로 튕겨 나왔다. 위계질서 한 번 대단했다. 쌍칼은 재빨리 휴지를 뜯어 복희씨의 손톱이 떨어지는 방향에 맞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톱들이 쌍칼이 들고 있는 휴지 위로만 뚝뚝 떨어졌다. “ 너희들 싸우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있겠지?” “ 네, 형님.” “ 네, 형님.”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새싹과 쌍칼이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복희씨는 ‘ 둘 다, 조심해라…….’ 라는 말로 그들을 용서했다. 불쑥 내 이마 위로 손이 얹어졌다. 박태열씨였다. TOP 1,971 43 / 86 7 프리주댕 퍼옴소설 완결방 Ynight에 글을 퍼감을 허가해주신 작가님과 글을 퍼와주시는 회원들께 감사드려요. 1. 글을 퍼오시는 회원들께서도 작가분께 허가를 받고 올려주시는거 잊지마세요> 2. 글올리실때 제목은 [소설의 양/작가이름] 제목으로 올려주시고, 소설의 양은 [단편] [중편] [장편]에서 선택해서 올려주세요. [장편/ 비공개] 마왕, 발정하다.下 하늘늑대 09-16 15:59 | HIT : 177 “ 열은 없네.” “ 아……." “ 갑자기 충격을 받아서 기절한 거래. 지금 퇴원해도 된다고 그러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군요.” 박태열씨는 이불을 한 손으로 걷어내고 내 어깨를 부축했다. “ 나가자. 애들보고 차 가지고 오라고 했으니까 지금 나가면 와있을 거다.” “ 아니요. 안 그러셔도 되요.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혼자 갈 수 있어요.” “ 이 몸으로?” 박태열씨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전봇대에 대가리 한 번 찍혔다고 골로 가는 것도 아닌데……. 괜한 호들갑이다. “ 무슨 대단한 병인가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가서 일 보세요.”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운동화를 꼬불쳐 신었다. 어느새 시선에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부담스러웠다. 앞으로 한 발짝 내딛자, 아무렇지 않았던 관자놀이가 욱신댔다. 현기증이 일었다. 천장이 윙 도는 것만 같았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앞으로 꼬꾸라질 뻔 했다. 당연히 넘어질 줄 알았던 몸은 팔을 잡고 있는 새싹과 쌍칼, 어깨를 잡은 박태열씨의 도움으로 무사했다. 이 복희씨만이 병원에선 금연이란 개념자체를 어디다 팔아먹고 아주 시건방지시게 담배를 꺼내 물며 내가 넘어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 이제 괜찮아요.”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 끄며 이 복희씨가 말했다. “ 너도 참 어지간하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네 애새끼들 먹어 살리려면 발에 땀띠 나게 뛰어야지.” 처음엔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화낼 기회가 줄어들어 다행이었다. 박태열씨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네가 언제부터 우리 애들 걱정까지 해줬냐. 이거 고마워서 눈물이 나려고 하네.” “ 물어보면 신경 쓰는 거냐. 착각도 참 엿 같이 한다.” 박태열씨가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 그러는 너는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와 있는 거냐.” 복희씨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잘 아네. 맞아, 할 일 없어서 죽치고 앉아 있었다, 왜.” 저렇게 말하면 진짜 할 말 없어지지……. 역시나 박태열씨는 기가 막혀 쉽게 대답을 못했다. 복희씨는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이 못내 자랑스러운지 엉큼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성급하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새싹과 쌍칼이 복희씨의 눈치를 살피며 침대에서 최대한 떨어져 섰다. 복희씨는 두 사람이 내어준 자리에 파고들었다. “ 비겁한 약장사는 그만 꺼져라.” “ 사라져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그렇지 자기야.” 복희씨의 얼굴이 호랑말코였다. 박태열씨는 나에게 선택권을 떠넘겼다. 나는 뜻하지 않게 다시 주목을 받았다. 다들 대답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상황이 웃기게 돌아가고 있었다. “ 나는…….” 인간들이 바짝 모여들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보았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 나는 박태열씨랑 같이 갈게요. 바쁠 텐데 다들 이만 돌아가 보세요.” “ 봐, 나랑 간다잖아. 우리 자기가 ” ……그렇다고 꼭 너의 자기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딱히 복희씨 앞에서 그 말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박태열씨는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얼마가지 않아 ‘퍽’ 하는 둔탁한 소리에 묻혀 사그라졌다. 머리위로 이 복희씨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고개를 푹 숙였다. 양 볼을 감싼 손이 억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 아까 박 태열이가 뭐라고 했냐.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 못 들었다. 나랑 가고 싶다고 했겠지?” 이 새끼가 미쳤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 복희씨가 내 볼을 꾹 누른 상태에서 멋대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광대뼈가 얼얼했다. 살인적인 힘에 눌려 목뼈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 아파요! 놔요.” “ 뭐? 나랑 가고 싶어 죽겠다고?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오해할 뻔 했잖아.” 복희씨가 목젖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입안이 씁쓰름했다. “ 크……크크흑!” “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혹시나 내가 열 받아서 이 병원 엎어버리면 어쩔 뻔 했어. 하여간 내가 간을 너무 키워줬다니까.” “ 기가 막혀. 아프다고요! 놔! 이 개새끼야!” 그는 아예 내 목을 부러뜨릴 심산이었다. 꽥꽥 소리를 질렀다. 비명소리가 커질수록 복희씨는 즐겁게 목을 흔들었다. 숨 쉬기가 곤란했다. 목뼈가 얼얼하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조금만 더 조이면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눈 꼬리에 눈물이 핑 돌았다. “ 개새끼가 주물러주니까 아주 시원해 죽겠지? 하하, 참 시원할 거야. 암, 누가 해주는 건데. 무려 개새끼니까 말이야.” 그의 압력에 눌려 목소리가 겨우 새어나왔다. “ 가, 가요. 집에 데려다 주, 주세요.” 토해내듯 뱉어낸 말의 효과는 의외로 어마어마했다. 복희씨는 내 머리와 목을 조이고 있던 손을 재빨리 걷어냈다.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세 사람에게 윙크를 날리며 그는 풀이 죽어 앉아 있는 내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한 번에 쑥 들어 올렸다. 기운도 넘치시지. 전생에 망나니나 장비 중 하나인 게 확실했다. “ 나랑 가고 싶어 죽겠다고 난리를 통에 본의 아니게 힘 좀 썼다. 내가 워낙 손이 거칠잖아. 네가 이해해라.” ……사람이 어쩜 저렇게 하는 말마다 가식이 뚝뚝 떨어질까. 박태열씨 또한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 너 내가 알고 있는 이 복희가 맞냐. 안 본 사이에 변해도 어쩜 이런 식으로 변하냐. 초등학생이 다 되어 버렸네.” “ 벙어리 되기 싫으면 그쯤해서 입 닥치고 네 참새 새끼들한테 밥이나 주로 가.” “ 무슨 말을…….” 이 복희씨가 손을 들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모를 리 없는 박태열씨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참 어지간히 말도 잘 듣는다. 과연 친군지 동생인지 모르겠다. 다시 내 앞에 선 복희씨가 앉아있는 나를 다시 침대에 앉히고 내 발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 업혀.” 뭐라는 걸까. 업히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잘못 들었겠지. 그런데 저들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모두들 당황한 눈치다. “ 업히라니까.” 짜증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린 후에야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생각 했다. 그렇다고 넙죽 업힐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복희씨는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주춤거리는 내 종아리를 무턱대고 벌려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기우뚱하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복희씨의 단단한 팔뚝이 허벅지를 강하게 눌렀다. 나는 꼼짝없이 그에 등에 업힌 꼴이었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그다지 환자 같지도 않았다. 민망해서 얼굴을 파묻는 나완 달린 복희씨는 쏟아지는 시선에 콧방귀도 안 꼈다. “ 내일 아침 7시까지 오피스텔로 와.” 새싹과 쌍칼이 ‘네, 형님…….’ 하며 넙죽 인사했다.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통에 박태열씨와 눈이 마주쳤다. 박태열씨는 크게 기분나빠보이지도, 그렇다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복희씨가 말도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어찌나 보폭이 큰지 머리가 쿵쿵대며 등에 부딪혔다. 옆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응급환자를 피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비켜요! 환자에요! 급해요…….’ 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때문에 환자를 싣은 침대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나는 당장 복희씨에게 ‘뒤에 환자 있어요. 옆으로 조금만 비켜주세요.’ 했다. 그러나 복희씨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몰상식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리가 비키길 기다리고 있던 의사가 참다못해 복희씨의 팔을 툭툭 쳤다. 복희씨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 좀 비켜요! 환자 안 보입니까! 앞을 딱 가로막고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부끄러웠다. 복희씨의 등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차라리 이대로 자버리자. “ 너만 환자 있냐. 나도 환자 있다.” 그의 묘한 승부욕이 발동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기필코 잠이 들어야만 했다. “ 얘도 아파.” “ 지금 저랑 말장난 하자는 겁니까. 아무리 아파도 생사가 넘나들진 않잖아요. 지금 이 환자는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의사의 분노에 복희씨가 탄력을 받았다. “ 얘도 사경 헤맬 예정이야. 야, 야!” 그는 내 엉덩이를 쿡쿡 찌르며 덧붙였다. “ 이런 벌써 헤매고 있잖아. 이젠 곧 생사도 넘나들 거다.” “ 멀쩡해 보이는데 생사를 넘나든다고? 거 병명이나 좀 압시다.” 의사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굴한 복희씨가 아니었다. 그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 신종 바이러스에 걸렸어. 들어는 봤나, 다운증후군에 버금가는 이 복희 증후군이라고.” ……지랄한다. 졸라 유치 뽕짝이다. 그래도 신종 바이러스가 어쩌고 할 때부터 필사적으로 기억의 끈을 놓으려 노력한 결과 설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비몽사몽 대는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어째 불안하다 싶었더니 우리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익숙한 골목 대신 눈에 설익은 오피스텔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두워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 빨라진 발걸음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고깔모양의 파란 지붕이 나타났다. 박태열씨와 함께 왔던 이 복희씨의 오피스텔 앞에 풍경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여긴 우리 집이 아닐 텐데요.” 묵묵히 앞으로 걷기만하는 이 복희씨의 귓불을 죽 잡아당겼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 걷기엔 여기가 더 가깝잖아. 차도 없는데 너희 집까지 가면 다리 아작 난다.” 그럼 뭘 믿고 데려다준다고 큰 소리를 쳤던 걸까. 어지간한 배짱이다. 아니면 욱해서 말해놓고 뒤 돌아서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지 않는가. “ 진짜 사서 고생이야. 애초에 데려다준다는 말을 하질 말던지…….” “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한다. 특히 박 태열이 같은 기생충에겐 더더욱.”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의 억지논리에 울컥했다. “ 네, 잘나셨네요. 여기서 내려주세요. 이젠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나는 복희씨 등짝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귓불을 잡아당길 때완 다르게 복희씨가 흥분해서는 ‘한 번만 더 손 올리면 아주 발모가지를 분질러 놓을 줄 알아!’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굴하지 않고 다시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그가 ‘윽……!’ 소리를 질렀다. 고사리 같은 계집애들 손도 아니고 꽤나 아팠을 것이다. 사실 그걸 노렸다. “ 더 맞기 싫으면 빨리 내려주라니까요!” 그는 가볍게 묵살했다. 다리를 허공에 버둥거리며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고의로 보이지 않을 범위 내에서 복희씨의 허벅지를 운동화 뒤꿈치로 걷어차기도 했다. 때리다보니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눈앞에 보이는 복희씨의 어깨를 손톱으로 사정없이 꼬집어 비틀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호라, 언제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나 보자! 아귀 같은 주둥이를 쫙 벌리고 복희씨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송곳니가 매끄러운 살에 푹 찔러 들어갔다. “ 윽……!” 철갑상어든 로보캅이든 그 중 하난 줄 알았는데 이 복희씨도 인간이었나 보다. 새롭게 알게 된 중대한 사실이었다. “ 네가 개냐. 왜 물고 지랄이냐. 성질 같았으면 잇몸을 믹서에 갈아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네." “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거죠. 잘 알아두세요.” “ 모른다고 했다간 머리꼭대기에 올라앉겠다.” “ 정 궁금하면 계속 열 받게 해보시든가요.” 나는 다리를 붕붕 저었다. 바람소리가 났다.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붕붕 저었다. 복희씨와 내 몸이 동시에 흔들거렸다. “ 더럽게 팔락거리네. 가만히 좀 있어라.” “ 가만히 못 있겠는데요. 그 쪽이 계속 열 받게 만들고 있잖아요!” 울먹거리며 튀어나온 목소리였다. 듣고 있는 나도 놀랐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렇게 감정 섞인 목소리라니. 최악이다. 죽고 싶었다. 나는 급기야 복희씨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바보처럼 훌쩍였다. 줄줄 흐르는 콧물을 비비적거림 ‘시발’ ‘젠장’ ‘빌어먹을‘ 읊조렸다. 우니까 머릿골이 욱신거렸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늘어진 시체처럼 복희씨의 등짝에 들러붙어 딱따구리처럼 등을 깨물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손톱으로 구레나룻을 몇 가닥 뽑기도 했다. 상대가 반응을 하지 않으니 아무리 재밌는 놀이도 시들해지기 마련이었다. 나는 모든 저항을 멈췄다. 그리고 20여분 만에 도살장에 끌려가 소의 신세로 전락했다. 복희씨는 험한 고문을 참아낸 자신이 자랑스러웠는지 낄낄댔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건물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거울에 비친 나는 이미 몰골이 숙연하게 변해있었다. 이 복희씨와 나는 10층까지 오는 중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복희씨가 1003호 앞에 서서 지문인식 기능에 엄지를 가져다댔다. 또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이 복희씨가 구두를 벗기 위해 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거실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운 없는 몸이 축축 늘어졌다. “ 먼저 씻어.” 그는 어느새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고 있었다. “ 미쳤어요? 내가 여기서 왜 씻어요!” 복희씨는 찜찜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리고 빈 생수병을 싱크대 위에 대충 던져놓고 거실로 나왔다. “ 씻으라는 한 마디에 도끼눈 뜨는 것 좀 봐. 더러운 새끼.” 나는 눈꺼풀을 실룩거렸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문득 장 우현 여우 새끼와 누워있던 복희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함께 있던 방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졌다. 그 날과 다르게 방문은 닫혀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 그쪽은 인생 살기 참 편하겠어요. 남의 기분 전혀 신경 안 쓰고 살아도 주위엔 알아서 눈치봐가며 비위맞춰주고 떠받드는 인간들 천지잖아요.” “ 비꼬는 거냐.” “ 비꼬는 건 아닌데 그렇게 들리면 뭐 그런 거구요. 사실이긴 사실이잖아요, 안 그래요?” 복희씨는 팔짱을 낀 채,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그런 위치에 올라서 한번 살아봐. 퍽이나 인생 살기 편할 거다.” “ 부럽다는 말은 안 했어요!” “ 됐다. 잠이나 자자.” 복희씨는 이를 득득 갈았다. 불만가득 한 얼굴이다. 나는 무시했다. “ 지금 이 상황에 그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건방진 얼굴로 툴툴댔다. “ 할 일 없는 누구는 곰탱이처럼 퍼질러 자서 기운이 넘치시겠지만 나는 아니다. 며칠간 제대로 자지도 못했어. 벽보고 얘기 할 생각 아니면 나 일어날 때까지 입 닥치고 기다리고 있든지 아니면 무조건 퍼 자.” 복희씨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마지막 단추까지 풀어내자 형형색색의 등과 언제 봐도 상처자국으로 소름끼치게 울퉁불퉁한 가슴이 드러났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 홀리듯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른쪽 옆구리에 오 센티 정도 깊은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예전까진 없던 자국이었다. 상처를 감아놓기에만 급급한 엉성한 바느질에 터진 살들이 퉁퉁 부어있었다. 움푹 잘려나간 살이 상당했다. 깊은 홈 같았다. 이끌리듯 복희씨 앞으로 다가갔다. 검붉은 딱지로 엉켜있는 옆구리에 살짝 손을 가져다대었다. “ 이거 왜…….” 그는 대수롭지 않게 ‘놀다가 다쳤어…….’ 하고 말했다. 욕실로 들어가려는 복희씨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가 멈칫했다. “ 의사가 꿰맨 게 아닌 거 같은데요.” “ 뭐…….” 그는 대충 얼버무릴 심산이었다. 나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 돌팔인가 보네요. 아니면 잠결에 꿰맸거나, 그도 아니면 발로 꿰맸거나 둘 중 하나야.” 툴툴대는 내 목소리에 복희씨는 욕실로 가던 것도 잊은 듯 했다. 그는 한참동안 나를 내려다보더니 어색해진 내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입을 열었다. “ 화나?” “ 아니요! 내가 왜요!” 충동적으로 왈칵 화를 냈다. 당황스럽게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함부로 몸을 굴리는 이 복희씨 때문에 화가 난건지 그 모습에 은근히 화가 나는 나에게 화가 났는지 확실치 않았다. 배때기 뚫리고 온 놈도 엿 같았고 어중간한 감정으로 중심을 못 잡는 나도 지랄이었다. “ 내가했어.” “ 뭘……!” “ 바느질 내가 했다니까. 잘 됐지? 은근히 소질 있는 거 같지 않냐.” 복희씨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는 멍해졌다. 그러니까 네가 네 옆구리를 꿰맸다는 거냐. 바느질을 했다고? 아예 다음부터는 아랫배에 십자수를 하시지, 왜! 가만히 있는 나를 그가 흔들었다. “ 그 표정은 또 뭐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복희씨가 알아서 덧붙였다. “ 별 거 아니다. 밥 먹으면 나아.” ……또 저 소리! 자기를 과도하게 사랑하는 인간이 왜 몸은 저렇게 막 굴리는 걸까. 아니면 불로장생하는 불로초라도 된다고 착각하는 걸까. 나를 뚫어지게 주시하는 그를 퍽 밀쳐냈다. “ 밥 먹으면 나아요? 그럼 심장병도 밥 먹으면 낫고, 백혈병도 밥 먹으면 낫겠네요. 하, 나는 몰랐는데 농부가 의사고, 쌀이 치료제였네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병원은 왜 있고, 의료보험증은 또 왜 있는데요.” “ 조용히 해라. 머릿골 울린다.” “ 머릿골 울리는 건 신경 쓰면서 배 가죽 찢어진 건 신경 안 쓰이나 보죠?” “ 화내는 거 맞네.” 복희씨가 씹어내듯이 말했다. 그러다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 어지간히 걱정 되나봐. 거 참 기분 묘하게 만드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 복희씨가 순간 못 참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내 어깨에 한손을 올리고 다른 손으론 내 엉덩이를 방방 때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그는 이미 손을 떼어낸 후였다. “ 많이 컸다, 화도 내고. 더 무럭무럭 커라, 아가야.” 복희씨가 악당처럼 깔깔대며 욕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탁 문소리가 나고 지독한 눈빛을 거두어 들였다. 오피스텔 내부를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썰렁하기만 하고 볼 게 하나도 없는 심심한 집이었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덜렁 생수병 세 개만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하나는 빈 병이었다. 버려줄까 하다가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아 도로 냉장고 문만 닫았다. 소파에 앉아 이 복희씨가 나오길 기다렸다. 지루했다. 할 일이 없다보니 가게 나가고 얼마나 땡땡이를 깠나 세어보았다. 몇 주 전까지 따지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거 같아서 최근만 따졌다. 그제는 추워서 땡땡이, 어제는 이 복희 때문에 땡땡이, 오늘은 전봇대 때문에 땡땡이었다. 얼굴 도장만 찍었다하면 토꼈다. 빌어먹을 사장 놈이 월급을 반으로 깎아도 고맙습니다 해야 할 처지였다. 생각하니 열 받았다. 이게 다 이 복희씨 때문이 아닌가. 이 복희씨만 아니면 나는 얌전히 그릇을 닦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전봇대에 부딪히지도 않았고 그렇게 되면 이 집에 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걸까. 나오기 전에 가버리자.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지독한 사과향이 콧구멍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욕실 문이 열리고 골반에 하얀 타월을 걸친 이 복희씨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 가서 씻어.” “ 됐고요.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 어떤지나 말씀해보세요.” 복희씨가 들고 있던 수건을 내 얼굴 위로 집어던졌다. 나는 잽싸게 낚아채 다시 복희씨에게 집어던졌다. 그는 날아오른 상태의 수건을 발로 걷어차며 히죽거렸다. 흔히 볼 수 없었던 천진한 웃음이었다. “ 얘가 생사람 잡겠네. 내가 무슨 불법행위를 했다고 눈에 불을 키고 지랄이냐. 아쭈, 눈 안 깔아?” 이 복희씨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쭈, 눈 안 깔아……하는 말은 눈을 깔든, 말든 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만약 정녕 내가 눈을 깔길 바랬다면 조용히 일어나 부엌에서 젓가락 하나를 가져와 내 눈알을 살코기처럼 폭폭 쑤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 일어나지도, 부엌으로 가지도 않았다. 이죽거림이 가득한 얼굴로 빈정거릴 뿐이었다. “ 지금 날 납치했잖아요. 나는 분명 안 간다고 했는데 억지로 데려왔으니 불법이죠. 양심이 있으면 합법이란 말은 못 할 겁니다.” 한참동안 나를 주시하던 이 복희씨가 주둥이를 쩌-억 벌리며 하품을 했다. “ 법을 하루 이틀 어기고 살았어야 양심에 찔리고 말고 할 게 있지. 뭐, 불법? 좋아, 좋아. 너 비교하는 거 좋아하지? 이게 불법이면 목욕탕에서 오줌 눴던 인간, 길바닥에 똥 싸는 개 주인들도 다 잡아들여야 공평하지. 안 그러냐.” “ …….” “ 캬캬, 할 말 없으니까 못들은 척 해서 일부러 시간 때우는 것 좀 봐.” 이 복희씨가 대놓고 비웃으며 핵심을 파고들었다. 나는 울컥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법, 법 어기고 살아온 게 퍽이나 자랑스러운 모양이네요. 그럼 영원히 범죄자로 살아보시든가!” 그가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죽 펴자 붉은 용의 용안이 괴기스럽게 길쭉해졌다. 여의주는 농구공만 했다. “ 이왕 범죄자 취급 받은 거 끝까지 가보지, 뭐.” “ 아……!” 이 복희씨가 재빨리 다가와 덥석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낄낄대며 셔츠 밑으로 손을 성급하게 집어넣는 통에 발버둥을 치자 틈이 벌어졌다. ‘당장 손 치우시죠.’ 하고 꽥꽥댔다. 등을 노골적으로 주물럭대던 손이 의외로 한 번에 빠져나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복희씨가 나를 어깨에 들쳐 멨다. 코가 허리에 닿는 기묘한 자세가 돼서 등이 반으로 접혀졌다. 아무리 말랐다 해도 나는 남자였다. 가볍게 들 수 있는 무게가 절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른 장작개비처럼 나를 짊어지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삼손이 따로 없었다. 이 복희씨는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발바닥으로 방문을 뻥뻥 걷어찼다. 아주 박살낼 기세였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짐짝 내려놓듯이 나를 침대에 훌떡 집어던졌다. ……더럽게 개폼 잡더니 무겁긴 무거웠나 보지, 흥. 거실과 다르게 방안엔 제법 가구들이 있었다. 그래봤자 딱 필요한 것만 있는 간소한 방이었다. 하얀색 장롱과 하얀 침대, 하얀 테이블과 하얀 소파. 모든 게 하얀색이었다. 자기가 앙드레김도 아니고 아주 제대로 웃기고 있어……. 하나에서 열 까지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척하고 문 앞에 선 이 복희씨가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이 타월을 시원하게 벗어던졌다. “ 아악……!” 적어도 5초 동안은 그렇게 악을 질렀을 것이다. 당황한 나를 보며 이 복희씨는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파더니 드문드문 묻은 귀지를 방바닥에 후후 불었다. 이젠 하는 짓까지 찌질했다. “ 아함, 졸려…….” “ 왜, 왜 옷은 벗고 지랄 염병이에요! 진짜 돌았나봐.” 나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타월을 이 복희씨 얼굴에 대뜸 집어던지며 삿대질을 날렸다. “ 당장 입어요! 그 흉측한 물건 빨리 치우란 말입니다!” “ 흉측한 게 아니라 남자답고 늠름한 거겠지, 이 풋고추야.” 풋, 풋고추……! 충격적이었다. 멍해진 나를 보며 복희씨가 천박하게 낄낄댔다. 저질미소였다. 그는 발밑에 떨어진 타월을 보란 듯이 뻥 걷어차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물론 흉측한 물건은 가리지 않은 채였다. 정녕 남자답고 늠름하다 생각했는지 그는 다리를 쩍 벌리고 덜덜 떨기까지 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좆 빠지게 잘나신 그의 물건이 덜컹거렸다. 복희씨가 문득 나른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은근슬쩍 떨어져 앉으려는데 한 쪽 다리로 허리를 감고 한 손으론 목덜미를 짓눌러왔다. 나는 뽕 맞은 늙은 닭처럼 파닥거렸다. “ 나 분위기 잡을 예정이다. 가만히 좀 있어봐라.” “ 폭력에 강간이면 징역사는 거 알죠? 좋은 말로 할 때, 놓는 게 좋을 겁니다.” 복희씨가 억지로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징그럽게 나를 가지고 놀 목적이 분명하다. “ 오, 그렇게 법을 잘 아세요? 그럼 이참에 사법고시라도 보시지, 왜.” 나는 항의하려다 말고 종목을 바꿔 눈앞에 보이는 이 복희씨의 손등을 덥석 깨물었다. 송곳니가 있는 쪽으로 자근자근 씹어주었다. 철갑상어도 송곳니는 힘들었는지 ‘윽……!’ 하고 비명을 질렀다. 꽤 아팠을 텐데 불구하고 절대 다리는 안 풀어주는 집중력에 아주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 왜 사서 고생이래. 진작 풀어줬으면 이렇게 까진 안 했지, 나도.” 이 복희씨가 두 다리로 내 허리를 죽 끌어당겼다. 상의가 말려 올라가며 매트에 등이 쓸려졌다. 불에 덴 것처럼 징그럽게 따끔했다. 그는 위로 올라가 있는 내 몸을 단번에 뒤집어엎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복희씨의 가슴 아래 깔리게 되었다. 이마 위로 그의 까칠한 턱이 맞닿았다. 고개라도 들어 올렸다 치면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출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야리꾸리한 기분이었다.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던 복희씨가 짓궂게 웃었다. 나는 저 웃음의 의미를 아주 잘 알았다.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장난을 칠 목적이었다. “ 계진이 아니라, 완전 개구만. 너 까딱하면 사람 물고 늘어지는데 내일부턴 진짜 안 봐준다. 귀엽다, 귀엽다 할 때 정도껏하고 말아. 아무리 너라도 할 게 있고, 못할 게 있어.” “ …….” “ 그 나이에 틀니 끼고 밥 처먹고 싶은 생각 아니면 주둥아리 꽉 다물어. 성질나면 이빨을 몽땅 뽑아다가 한강에 던져버릴 거야. 내가 이런 말 한다고 해서 무섭다고 바지에 오줌 싸는 건 아니겠지?” 내가 잠자코 가만히 있자 이 복희씨는 뒷말을 질질 끌며 뒤늦게 부드러운 척을 했다. 가증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가증이었다. “ 얼른 발 풀어요. 강간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복희씨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히죽거렸다. “ 시커먼 뒷구멍 수백 개 따먹고 다녀도 절대 안전하니까 협박은 그만해. 똑같은 멘트 식상해지려고 한다.” 이 복희씨의 치약냄새 나는 이가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꽥 소리쳤다. 그는 느긋하게 내 반응을 즐기는 듯 했다. “ 못 믿겠으면 나한테 제대로 강간한번 당해봐. 그 뒤에 나 고소해서 내가 잡혀 들어가나, 안 가나 한 번 지켜보든지. “ 그의 목소리가 시니컬하게 들렸다. “ 그리고 말이다. 내 집에서 잠 좀 자겠다는데 징역살아야 되냐.” “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내 말은요…….” “ 네 말이고 내말이고 간에 잠 좀 자자.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뭐가 네 말이고 내 말이에요. 당연히 내 말이 맞는 거잖아요, 복희씨, 하고 기어오르겠지. 그래, 네 말이 다 맞고 내가 병신이다. 됐냐.” 이 복희씨는 어울리지 않는 내 성대모사를 구사하며 열변했다. 그는 방바닥에 굴러 떨어진 이불을 끌어 당겨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그만둬.” 흠칫 몸을 떨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런 귀신같은 놈……. 이불을 평평하게 만들고 있던 복희씨가 불쑥 내 눈을 들여다보며 씩 웃었다. “ 어떻게 알았을까, 이 귀신같은 놈. 그 생각했군.” “ ……!” 말만 함부로 못하는 게 아니라 이젠 생각도 함부로 못하겠다. 빌어먹을……! “ 예전에 영화 보면서 했던 내기 기억나냐? 이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했던 거.” 참 뚱딴지같은 말이었지만 재수 없게도 또렷이 기억났다. 사이좋은 게이커플을 반 강제적으로 헤어지게 만들어 버린 어이없었던 내기. 대답을 기다리는 복희씨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 기억나긴 하는데, 그건 갑자기 왜요.” “ 내가 이겼던 건 기억나지? 되도록이면 소원 하나 남았던 것도 기억해줬음 좋겠는데.” ……소원이라.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복희씨가 입을 열었다. 반쯤 잠에 잠긴 목소리였다. “ 내가 먼저 잠들어도 절대 가지마.” 무슨 뜻일까. 잔뜩 의문을 품고 물었다. “ 겨우 그게 소원이에요?” “ 그래.” “ …….” “ …….”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는 복희씨의 어깨를 툭툭 밀쳐냈다. “ 그쪽은요, 사람 기분 엿 같이 만들었다가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데 진짜 일가견 있어요. 사람 뒤통수치는 건 거의 완벽하게 타고났고요. 알고는 있어요?” 복희씨는 꼴 보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 몰라.” “ 모르면 이제부터 꼭 알아 두세요. 사람 가지고 장난치지도 말고, 특히 이제 나는 강해…….” “ 복희씨, 이젠 전 강해졌어요. 나는 초강력이니까요. 무시하면 가만 안두겠어요. 정말이에요. 난 이제 무적이에요. 그 말 할 생각이면 안 해도 돼. 내가 벌써 다 외우고 있으니까. 어찌나 흥분을 하셨던지 잊혀 지지가 않네. “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할 말을 강탈당한 허무함에 빠졌다. 내 레퍼토리가 지나치게 똑같았던 걸까. 아니다. ‘고작 한 번 듣고 외워버린 이 복희씨가 필요이상 기억력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말자.’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드디어 내 허리에서 족쇄 같은 팔을 거두고 벌러덩 누운 복희씨가 피식피식 거렸다. “ 너는 원래부터 강했고,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적 없어. 그리고 절대 초강력이고, 제발 날 가만두지 마. 나도 정말이다. 너는 항상 무적파워였어. 어때, 이제 됐냐. “ 된 거 같긴 한데 또 안 된 거 같기도 했다. 나는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 방심하지 마세요. 제대로 뒤통수치려고 칼 갈고 있으니까요.” “ 제발.” 그는 베개로 내 주둥이를 힘차게 틀어막았다. 나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나는 강해졌다, 다신 속지 않는다, 난 울트라다. 따위의 절대 영양가 없는 말을 지껄여 복희씨가 편하게 잠들 수 없게 만들었다. 다크서클로 얼룩진, 빡 돌긴 일보직전의 이 복희씨가 살며시 주먹을 말아 쥐자 난 그제야 ‘ 봐주기 싫지만, 봐준다.’ 는 말을 끝맺으며 입을 닫았다. 그리고 억지로 양을 세기 시작했다. ♠ 며칠 동안 못 잤다는 말이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던지 눈을 감고 얼마 안 돼서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악랄함의 전형적인 인간, 이 복희씨도 적어도 자는 모습만큼은 순수해보였다. 반대로 나는 희한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았다. 양을 세면 셀수록 정신이 맑아지고,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살금살금 일어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퍼질고 자빠져 자고 있는 이 복희씨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작동 해지 된 로봇처럼 완벽한 무방비 상태로 풀어져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색달라 보이기도 했다. 일 년 열두 달 ‘ 나 오늘도 초상집 다녀왔소.’를 외치는 검은 양복과 썩어빠질 넥타이가 없으니 그나마 인간다웠다. 뭐든 과도하게 격식을 차리는 모습은 심히 보기 안 좋았지만 그렇다고 팬티 한 장 안 입은 채, 중요 부위를 자랑스럽게 펼치고 누워있는 모습도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옷을 입으려면 와이셔츠 단추까지 꼭꼭 잠그든지, 아니면 속옷조차 안 입은 맨 몸이든지 뭐든 둘 중 하나 밖에 못하는 극단적인 놈이었다. 얌전히 잘 자던 놈이 갑자기 꿈틀댔다.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났다. 이 복희씨가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다리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흉측한 물건도 따라 기울어졌다. 큼지막한 게 참 실하기도 하지. 저 오동통한 물건에 혹해 넙죽넙죽 다리를 벌려주었을 게이 놈들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후장들을 홍콩에 보냈을까. ……제길, 졸라 열 받는다. 시대를 일찍 타고 났으면 하루 종일 물레방앗간에서 죽치고 있거나 밤마다 마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터다. 저딴 요망한 도깨비 방망이 따위는 성질 같았으면 당장 식칼로 잘근잘근 잘라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꿈틀꿈틀. 주인을 따라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홍두깨가 예고도 없이 불끈했다. ……뭐, 뭐야. 빌어먹을. 일, 일어서려는 조짐이었다. 진심으로 무서웠다. 나는 홍두깨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긴 팔이 척 날아와 허리를 감싸며 멀어지려는 나를 쑥 끌어당겼다. 지금 밀어내면 깰 거 같아 불쾌해도 잠자코 있었다. 불끈불끈하던 물건이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 발딱 일어섰다. 눈이 썩을 것 같았다. 이불을 끌어 방망이를 가려버렸다. 곰팡냄새 나는 눈깔에 안약을 뿌린 듯 시원해졌다. 이 복희씨는 천박하게 몸을 뒤척이다 답답했는지 이불을 뻥 걷어찼다. 슝 날아간 이불이 방문 앞까지 날아갔다. 껄떡대던 물건은 이제 완벽하게 일자로 서서 위용스러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탁상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1시였다. 말도 없이 나왔으니 녀석들이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최대한 조심히 일어났다. 허리를 조이는 이 복희씨의 팔을 떼어냈다. 나는 떨어져 있는 이불을 주워 이 복희씨에게 덮어주고 몸을 돌렸다. 다시 뻥 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내 머리 위로 날아갔다. 자면서도 사람 성의를 무시하다니. 아주 망할 자식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좆 대가리 부러지게 딸딸이나 쳐라, 흥. 테이프로 겨드랑이 털을 뭉텅이로 잡아 빼버릴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유치한 거 같아서 관둬버렸다. 위험부담을 감수할 정도로 효과적인 일은 절대 아니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바닥을 살금살금 기어갔다. 테이블을 지나쳐 문고리를 잡았다.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보이는 건 테이블 위에 주르륵 놓여있는 액자들이었다. ……여하튼 궁금한 게 많으면 죽어야 돼. 젠장! 방향을 틀었다. 의자에 앉아 액자 안에 꽂혀 있는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복 삼형제’ 들이었다. 어딘가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부부와 그 옆에 주방장 아저씨가 보였다. 작은 아빠란 말이 진짜긴 한 모양이다. 나는 의미 없이 사진을 번갈아보다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빛바랜 사진의 현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그들의 관계도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함이 있었다. 사진은 유치원, 중학교, 고등학교, 이십 대 초반까지 시간과 나이에 따라 일렬로 죽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경과 장소가 전혀 다른 것에 비해 사진 속의 그들의 위치나 자세가 모두 자로 잰 듯이 똑같았다. 포즈, 표정, 각도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일부러 그렇게 찍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거 같기도 했다. 어렸을 적 그들의 구분할 수 있었던 건 옷에 달린 명찰이 있어서였다. 그들은 시종일관 무표정에 조금 성이 난 듯한 인상을 풍겼는데 젊은 여자만이 복희씨를 안고 활짝 웃고 있었다.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어둡게 만드는 건 여자와 복희씨에게서 일 미터 가량 떨어져 등을 지고 서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는 사장님과 복신 군을 양 손에 들어 올리고 시종일관 무뚝뚝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전체적으로 독사 같은 인상을 풍기는 남자였다. 음울한 표정과 차가운 인상이 매우 불손했다. 그들에게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는 아저씨까지 참 언밸런스 가족사진이었다. 나는 의무적으로 복희씨를 돌아봤다. 피곤에 절어 깨어날 생각을 안 한다. 다시 사진을 바라봤다. 내가 전혀 모르는 또 그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혼란스러움과는 다르게 이유 없이 가슴이 욱신거렸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걷잡을 수도 없이 뜨거워졌다. 타인에게 필사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저 사람에게도 가슴속에 묻어둔 상처가 하나쯤은 있을 테지. ……그게 이 사진일까. 나는 순수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거의 이주일이 지나는 시간동안 나는 복희씨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일주일 쯤 되었을 때, 불쑥 새벽에 전화를 한 것 외엔 그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날 전화를 받았어야 했을까. 귀찮기도 했거니와 이런 저런 감정에 일부러 피해버렸다. 그 뒤론 깜깜무소식이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는 인간도 아니고 빚쟁이 잡으러 동방서주 뛰어다니며 몇 개 가지고 있는 술집도 안전하게 지키려면 필수적으로 주먹질도 해야 할 테니 이런저런 일로 꽤나 바쁜 것일 테지. 이미 다신 안 보겠다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킨 상태라 싶어 죽겠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퍼지는 궁금증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징그러운 골치 덩어리가 사라지자 또 다른 우환거리가 생겨났다. 이건 뭐……. 망둥이가 가만히 있으니 꼴뚜기가 날뛰는 꼴이었다. 칼이 잠들어 있으니 도마가 지랄이었고 고무신이 잠자코 있으니 짚신이 염병이었다. 꼴뚜기, 도마, 짚신은 물론 박태열씨였다. 밤에 가게를 나가는 나 같은 저녁 형 인간들에겐 굳이 모닝콜이 필요 없었지만 그는 ‘모닝 폰’ 으로 하루를 시작해 마감을 ‘굿 나이트 전화질’로 끝냈다. 이주일 동안 재수 없는 자기 소리를 오버 안하고 적어도 오천 번은 들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급기야 꼴뚜기와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라면을 먹는 일도 발생했다. 보름에 가까운 시간을 지켜본 결과 박태열씨는 조폭이 이래도 되나, 오히려 내가 다 걱정이 될 만큼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펑펑 남아도는 시간을 듬성듬성 나눠 출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찾아왔고 퇴근할 시간엔 집에 있다가도 칼 같이 뛰쳐나왔다. 가끔 마감까지 버티는 손님 때문에 무작정 한, 두 시간씩 기다릴 때도 있었다. 반대로 시간이 남을 때는 꽃 등심, 해물 탕, 장어구이, 무료 포장마차 시식권을 선사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토대로 연구한 끝에 박태열씨는 무섭도록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복희씨와 충분히 같으면서 또 다른 면이 많았다.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인 성격이 같다면 어울리지 않게 아기자기한 소품을 과도하게 집착하는 점이 달랐다. 액세서리나 귀여운 인형, 가발을 과도하게 수집하는 그는 모형 비행기, 운동화, 접시, 야구 모자, 코트, 파인애플을 유난히 좋아했다. 박태열씨의 불타는 안부전화에 힘입어 나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의구심과 낯설음을 서서히 지워갔다. 그는 나에게 조금씩 익숙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 “ 하아…….” 나는 지독한 한숨을 내쉬었다.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어정쩡하게 연락이 끊긴 후로 벌써 한 달 째였다. 이 복희씨는 거의 출근도장을 찍던 가게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형님이 안 오는데 졸따구들이 오겠는가. 새싹과 쌍칼도 동시에 행방불명이었다. 그들은 하루사이에 증발해버렸다. 당장 안 나타난다고 어찌 되었겠냐 만은 어젯밤, 부엌에서 사장과 아저씨가 하는 말을 우연치 않게 들은 후론 내 머릿속은 일순 정지 상태였다. 복희씨의 이름을 들먹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던 그들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아저씨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고 사장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평소 거들먹거리던 사장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다급하게 전화를 했고 상대가 받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나지 않은 사장의 성격을 봤을 때, 복희씨의 신변에 대단한 문제가 생긴 듯 했다. 협박성이 짙은 악담을 퍼부으며 으르렁거리는 사장의 얼굴을 보며 비로소 그가 굉장히 위험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전화를 붙잡고 있던 사장은 상대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핸드폰을 박살이 나게 깨부수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두 달 가까이 이 복귀 사장을 보면서 저렇게 화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복희씨와 거의 흡사했다.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나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어제부터 퍼부어대는 지독한 겨울비다. 반은 이 복희씨 생각에 남은 반은 비를 보며 고뇌에 휩싸인 나를 투박한 손모가지가 툭툭 건드렸다. 악당들이 빨리도 몰려왔구나.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대꾸하지 않자 웅성웅성 모여든 녀석들이 도마 위에 올려놓은 꽁치대가리처럼 나를 씹어댔다. “ 쟤, 뭐냐. 졸라 후까시 잡고 지랄이지 않냐.” 권솔이 천박한 말솜씨를 뽐냈다. 경박스럽기론 대한민국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이 경원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 어찌 된 게 저건 갈수록 꼴값이네. 누군 추워 뒈지겠구만 창문 열고 놓고 고사 지내고 자빠졌냐. 새끼야, 감기 걸려서 골골대기 싫으면 빨리 문 닫아!” 권솔이 닥치는 대로 낄낄댔다. “ 커피까지 홀짝홀짝 처먹어 가면서 뭔 놈의 분위기를 여기까지 와서 잡고 그런데.” 나는 수준 낮은 녀석들의 갈굼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보다 못한 김 지만이 거들고 나섰다. “ 우리 계진이는 원두도 아니고 이백 원짜리 인스턴트 마시면서 어떤 분위기를 잡고 싶은 걸까.” 내가 여전히 조용하자 눈에 띄게 흥미를 떨어뜨린 이 경원이 쐐기를 박으려 했다. “ 염병하네. 찜질방 와서 분위기는 무슨.” 권솔이 이빨이 생기고 처음으로 이 경원의 말에 동의를 했다. “ 그건 그렇다.” 쟤네들은 왜 한시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전생에 무슨 업보를 졌기에 저런 놈들은 친구로 만났을까. 정녕 이 모든 게 팔자소관이란 말인가. 나는 고작 녀석들의 방해로 이 복희씨의 가족사진에서 오는 혼란스러움과 아저씨와 사장의 대화를 통한 지독한 궁금증을 잠재우지 못한 채,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지 불과 1분도 안 돼서 조기 마감하게 되었다. 시커먼 사내놈들이 양머리를 만들어 서로 대가리에 끼워주며 낄낄대는 모습에 나오지 않던 한숨도 푹푹 나왔다. 나는 종이컵을 버리고 티브이 앞에 가 앉았다. 어느 샌가 내 뒤를 졸졸 쫓아온 이 경원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 서리하러 가자.” ……서리, 참으로 정겨운 단어였다. 그러나 나는 26살이었고 이 경원도 26살이었다. 서리하다가 있는 대로 면 팔리고 쇠고랑 차기에는 앞으로 삶이 만만치 않을 터다. 그보다 우리는 서리를 할 수 있는 연령제한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 무슨 수박밭 구경 나왔냐. 우리 원두막에 앉아 있는 거 아니다. 제발 정신 차리고 이참에 슬쩍슬쩍 하는 버릇 좀 고쳐라.” 이 경원이 콧방귀를 꼈다. 놈의 눈빛이 지독히도 불경스러웠다. “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도 모르나.” “ 너 이젠 한국말도 못 알아먹는 거냐. 그러니까 고치란 말이야. 자판기 털다가 주인한테 걸려서 된 통 당한 게 엊그제다. 제발 아서라.” 경원이 놈은 ‘잔소리 하려거든 꿈에서나 지껄여라…….’ 하고 내 말을 무시했다. 머리에 둘러쓴 수건을 팩 집어던진 녀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매점 앞으로 걸어갔다. 저러다 일치기 십상이지. 감시차원에서 놈을 쫓아갔다. 육식동물처럼 빵 앞을 어슬렁거리는 이 경원을 보고 알바총각이 ‘비닐 봉투 드릴까요.’ 했다. 이 경원이 저릿한 눈빛으로 당연할 걸 왜 물어 또 물어보면 눈깔을 쇠꼬챙이로 아예 지져버리겠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맹렬한 기세에 눌려 알바 총각이 움찔했다. 이 경원이 알바총각 손에 들린 봉지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그리고 계란이나 소시지, 초콜릿 따위를 쓸어 담았다. 나는 조용히 놈의 곁에 다가갔다. 녀석이 흠칫 놀라더니 나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알바총각이 채널을 바꾸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이 경원이 아니었다. 녀석은 카스텔라 방 봉지를 몰래 주워 담았다. 컵라면, 과자, 껌 따위를 개 눈 감추듯 쓸어 넣는 녀석에게선 숙련된 솜씨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녀석이 훈제오징어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알바 총각이 몸을 돌렸다. 심장이 튕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대로 걸리면 졸라 개망신이었다. 단순히 면 조금 팔리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놈들 둘이서 고작 간식 살돈 아끼자고 ‘서리’를 하다니.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불안감에 못 이겨 경원이 새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녀석은 태연했다. 이 경원이 내 손을 딱 쳐내고 대뜸 소리쳤다. “ 어이, 알바 쟁이. 그거 말고 스타실버벨 틀어봐.” 이건 대담한 거야, 아니면 뇌가 없는 거야. 하늘이 도우시어 무던한 알바총각이 ‘네…….’ 하고 대답해서 망정이지 고개라도 돌렸으면 어쩔 뻔 했어. 얘는 무작정 스릴을 즐기려고 하니 그게 문제다. 알바총각이 요리조리 채널을 돌리는 틈에 이 경원은 어느새 리듬과 박자를 타며 절도 있는 범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 야, 그 정도면 됐어. 대충하고 토끼자.” 위험의 줄타기를 하는 이 경원에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놈이 자그맣게 대답했다. “ 쌥치기 할 때는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목표를 향한 끝없는 자신감과 만에 하나 들켰을 때 직방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두둑한 배짱.” 녀석은 지나친 담력을 앞세워 걸리기 딱 좋아 보이는 네모난 과자상자를 집으며 피식 웃었다. 비닐봉지를 내려다본 녀석이 엄지를 치켜 올렸다. 얼추 만족한 양은 다 채웠다는 의미였다. 또한, 왕년에 우리가 주구장창 나누던 암호이기도 했다. 녀석은 ‘마지막이야…….’ 라고 속삭임과 동시에 껌 몇 통을 쥐어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볼이 따끔거릴까. 이 불길한 기운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오랜만에 왕년 내 역할로 돌아가 나는 녀석의 가리고 주위를 살폈다. 졸라 오, 마이 갓이었다. 리모컨을 쥔 알바 총각이 이 경원을 한심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활화산같이 불타오르는 알바총각의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공범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순간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껌만 쌥치고 자빠져 있는 이 경원 편에 서야할지, 순진한 양의 탈을 써야 할지 난감해졌다. “ 아니, 이 보세요! 지금 나이가 몇인데 도둑질을 한 답니까!” 내가 선택하기 전에 알바총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껌을 움켜쥔 경원이 놈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녀석의 얼굴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녀석의 트레이드마크인 싸대기 날리고 싶은 오만함과 주먹을 부르는 과도한 자신감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 너 방금 뭐라고 지껄였냐. 내가 도둑질을 했다고?”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말싸움계의 이단아 이 경원이라 할지라도 지금처럼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딱 걸리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망했다. 아니다, 너만 망했다. “ 왜요, 아니라고 오리발 내밀 작정입니까. 사람이 어째 그렇게 사십니까. 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거 같은데 껌 살 돈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닐 테고, 습관성 도벽 아닙니까. 그거 병입니다.” 경원이 놈이 도벽의 흔적을 내려놓고 씩 웃었다. 지긋지긋한 썩은 미소였다. “ 야, 이 미친년아.” ……대뜸 욕부터 날리다니 무슨 생각일까. 적반하장 콘셉트로 밀고 나가 사람을 어이없게 만든 뒤, 토낄 심산인가. 이건 우리가 고2 겨울방학 때까지 즐겨 써먹던 수법이었다. 고3이 되고나선 유치해서 그만뒀다. “ 미친년이라니, 남자보고 미친년이라니! 누가 진짜 미친년인지 모르겠네. 나 참 재수가 없으려니 별 거지같은 것들이 다 지랄이네.” 어이없게 만드는데 까지는 성공이었다. 이 경원은 봉지를 내 가슴팍에 억지로 떠안기며 소리쳤다. “ 네가 감히 나를 도둑으로 모니 당연히 미친년이지. 안 그러냐, 이 미친년아.” 알바총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연했다. 껌 따위나 훔치는 도둑새끼가 미친년 운운하는데 기분 좋을 놈이 어디 있겠는가. “ 잘못했다고 빌면 대충 눈 감아 줄 생각이었는데 더 이상 못 봐주겠네요. 당장 경찰서로 갑시다! 내 기필코 그 쪽 콩밥을 먹여야 다리 뻗고 자겠수다!” ‘경원아, 오늘은 안 되겠다. 이만 사과하고 끝내라.’ 하고 눈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 경원은 애꿎은 나를 팍 밀쳐내고 알바총각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 이게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 내가 훔쳤다는 증거 있어? 있으면 대봐.” 알바총각이 분통을 터뜨렸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 현행범에겐 증거가 필요 없지. 이상한 말로 시간 끌지 말고 당장 경찰서로 가자니까 그러네!” 이 경원이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당당함을 넘어 극에 달하는 녀석의 뻔뻔스러움에 알바총각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 도둑놈주제에 감히, 감히 나를……!” “ 내가 현행범인 증거를 대면 그렇다고 해주지.” 알바총각이 거칠게 가슴을 때렸다. 힘겹게 분을 삭이는 듯 했다. “ 현행범 자체가 증거지! 그것도 모르냐, 이 무식쟁이야!”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던 이 경원이 소시지 하나를 내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 그럼 얘도 현행범이네? 알바총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이없음에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경원이 놈이 미간을 찌푸렸다. 녀석은 주머니에 말아놓은 꼬깃꼬깃한 천 원을 알바총각 코앞에 흔들었다. “ 선량한 시민을 하루아침에 도둑놈으로 몰아? 확, 씨발. 인터넷에 퍼뜨려서 손님 뚝 떨어지게 만들었으면 속이 시원하겠네.” 알바총각이 의구심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 “ 돈, 돈을 주려고 했었다고요?” “ 하, 너는 속고만 살았냐? 운 좋은 줄 알아라, 새끼야. 나 같이 성격 좋은 놈이나 되니까 도둑으로 몰려도 허허 웃으면서 넘어가지, 다른 놈이었으면 진짜 어림도 없어! 알았냐. “ 내 친구지만 진짜 너무 뻔뻔했다. 사장도 아니고 일개 알바 생이 도둑을 잡네 마네, 경찰서를 가자, 가지 말자 하는 건 피차 귀찮은 일이었다. 역시나 놈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경원이 놈과의 싸움이 경찰서로 번질까봐 내심 귀찮아하는 기색이었다. 알바총각은 끝내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으면서도 자신 만만한 이 경원의 배짱 앞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알바총각이 단순해서 다행이었다. 악독한 사장에게 걸렸어 봐라. 당장 끌려갔지. 나와 이 경원은 돈을 탈탈 털어 과자 값을 지불하고 돌아섰다. 경원이 놈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 못내 분하고 억울했는지 방을 동동 굴렀다. 물 빠진 놈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 웃기지도 않아. 똑같이 했는데 왜 안 먹히냔 말이야.”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조용히 있었다. 놈이 풀이 죽어 시무룩해졌다. “ 예전에는 손톱이 안 보인다는 말도 들었는데 나이 들더니 너무 굼떠졌어.” 녀석이 어깨에 친밀하게 손을 얹었다. 무거웠다. 피하려는 내 허리를 바짝 끌어안으며 이 경원이 실실댔다. “ 서리 실패한 거 애들한테 말 하지 마. 안 할 거지? 그치? 너는 내 친구잖아. 그렇지?” “ ……무겁다, 떨어져라.” 발끈하려는 녀석을 무시하고 티브이 앞으로 갔다. 당연히 있어야 할 놈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여간 사람 귀찮게 만드는데 뭐 있다. 가까운 모래 찜질방 문을 열었다. 할 일 없이 노닥거리는 아줌마들로 바글바글했다. 경원이놈과 나는 다시 보석사우나로 방향을 바꿨다. 휑한 방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 권솔 새끼가 보였다. 문소리를 들은 녀석이 반쯤 일어나 내 손에 들린 봉지를 낚아챘다. “ 왜 이렇게 늦게 오냐. 오빠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경원이 놈이 ‘쉿! 조용히 해…….’ 했다. 쪽팔리는 게 뭔지 알기는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권솔은 이 경원 따위에겐 전혀 관심도 없었다. 녀석은 봉지를 헤집고 계란 껍데기를 까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 김 지만은 또 어디가고 너만 있냐.” 권솔이 소시지로 벽을 가리켰다. 바나나 우유를 까면서 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근데 쟤는 저기서 뭐하냐. 벽에 모기처럼 달라붙어 있는 김 지만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 유심히 살폈다. 꽤나 오랫동안 관찰한 끝에야 놈이 왜 벽을 향한 과도한 집착 증세를 보이는지 알게 되었다. 김 지만은 면도칼로 보석 사우나의 <보석>을 억지로 뜯어내고 있었다. 녀석이 지나간 자리마다 큼직큼직한 돌이 뭉텅이로 뜯겨나가 있었다. 친구가 저 상태면 적어도 말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되지 않나. 김 지만이 정신을 놓기까지에는 권솔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찜질방 한번오기가 이렇게 쪽팔려서야, 원. 친구의 정신병을 방조한 권솔이 계란 노른자를 쏙 빼내고 오목하게 드러난 부분에 초코우유를 따라 마시며 낄낄댔다. 짠했다. 녀석은 돌인지 보석인지 구분 못하는 김 지만을 결코 말릴 틈이 없었을 것이다. 본인의 병세도 만만치 않았음으로. 나는 혹여나 병이 옮을까 김 지만과 권솔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수건을 바닥에 깔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슬금슬금 기어온 이 경원이 나를 따라 수건을 깔고 드러누웠다. 하여간 독창성 없는 건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다. “ 권솔. 네 애인은 왜 안 보이냐.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나.” 애인이란 단어에 권솔이 계란껍데기를 으스러뜨렸다. “ 그 새끼 대학생 되더니 사람 자체가 좆나 달라졌다. 대가리에 구더기 끓나봐. 인격이 완전 썩어 들어갔어.” “ 왜…….” 권솔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자기는 대학 새내긴데 우리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친구로 받아들이기 쪽팔리대. 그 동안 고마웠다고 전해주라더라.” 어째 생각하는 수준이 참으로 이복신군다웠다. 이 경원은 듣는 척, 마는 척 일어나 보석 파는데 반쯤 혼이 나간 김 지만을 억지로 벽에서 떼어 놓으며 말했다. “ 거 참 잘됐네. 나도 그 새끼랑 놀면 은근히 뇌가 제 기능을 못할까봐 좆나 걱정했거든.” 지만이 놈과 권솔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권솔이 빼놓은 계란노른자를 빨대로 뭉개며 장난을 쳤다. “ 책도 사고, 옷도 사고 이리저리 돈 쓴다고 대놓고 신났던데, 그 정박아 새끼.” 경원이 놈이 재빨리 받아쳤다. “ 야, 진짜 준비해야 될 건 옷이 아니라 총장이라고 그래라. 뭔 놈의 그런 대학이 다 있냐.” “ 나도 몰라. 그러니까 똥통소굴이지.” 솔이 새끼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녀석은 진심으로 관심 없는 말투다. 과자 봉지를 발바닥으로 밀며 돌바닥에 드러누운 놈이 곁눈질로 나를 훑으며 ‘정말이야, 관심 없어. 내 마음 알잖아…….’ 너스레를 떨었다. 그 날 이후로 무슨 말만 했다하면 저 소리다. 도대체 네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게 뭐냐. 집요하게 쳐다보는 녀석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벽으로 달라붙으려는 김 지만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이 경원이 녀석에게 초코파이와 요구르트를 내밀고 있었다. 지만이 놈은 웬일로 먹을 걸 봐도 시큰둥한 눈치였다. 이 경원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지만이 놈이 마지못해 초코파이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저런 팔불출. 김 지만이 먹는 모습을 보며 이 경원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놈은 빨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향수를 느끼고 싶다는 이유로 요구르트 밑바닥을 물어뜯어 구멍 난 부분을 쪽쪽 빨아먹었다. 그 모습을 본 김 지만이 섣불리 따라하다 돌바닥에 요구르트 반 이상을 쏟아 부었다. 진득진득 엉키는 게 영 찝찝했으나 그걸 또 묘하게 놀이로 바꾸어 손바닥으로 거미줄을 만드는 김 지만의 재주가 비상했다. “ 계진아, 너 저 저번 주에 말 한마디 없이 어디 갔었냐. 복귀형님 좀 화난 거 같더라.” 이제 생각났다는 듯이 김 지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차. 말 한다는 게 깜빡했었다. “ 그래서 뭐하고 하셔?” 녀석이 턱 끝을 긁으며 대답했다. “ 형님이랑 아는 사이라 자를 수도 없고 돈이 어쩌고, 매출이 어쩌고, 혼자 날뛰다가 힘 빠졌는지 시 짓다가 말도 없이 퇴근해 버리던데……. “ 경원이 놈이 요구르트 밑바닥에 억지로 빨대를 쑤셔 넣으며 말했다. “ 맞는 말이다. 요새 너 징그럽게 빠지더라. 어제는 또 어디 갔었냐.” “ 그냥, 뭐.” 어제는 징징대며 귀찮게 구는 박태열씨랑 포장마차에서 우동 좀 먹느라 늦었다. 물론 녀석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이 복희씨 하나로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녀석들인데 박태열씨까지 알면 교대로 감시체제를 벌리려고 할 것이다. 일순 세 놈이 동시에 수상하다는 눈빛을 띄었다. 김 지만이 대표자로 말했다. “ 너 큰 형님 다시 만나는 거냐.” ……다시 만난다라. 어감이 어째 참 묘하구나. 뭐, 언제 제대로 만나기나 했어야지. “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세 놈의 의구심 가득한 눈빛은 풀어지지 않았다. 눈빛은 그럴지라도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초코파이 가운데 낀 하얀 부분을 파내고 초코만 개미핥기처럼 핥아 먹고 있는 지만이 놈과 여전히 계란을 컵처럼 사용하는 권솔을 보며 나는 감정 없이 물었다. “ 너희 박태열씨라고 아냐? 저번에 보니까 비룡이형이랑은 아는 사이 같던데. 형이 알면 당연히 아저씨도 알 테고, 아저씨가 알면 사장님도 알 테고. 그럼 너희도……몰라?” ……아이고, 깜짝이야. 왜 자식들이 쌍 토끼눈을 치켜뜨고 지랄이야. 경원이 놈만이 무던하게 요구르트를 처먹고 있었다. 그러나 권솔과 김 지만은 아니었다. 물에 말은 찬밥처럼 녀석들의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무거운 침묵을 깨부수며 권솔이 들고 있던 계란을 봉지에 처박았다. “ 그 새끼가 가게에 왔었다고?” 얘는 무조건 그 새끼라네. “ 응.” 권솔이 지만이 녀석을 바라봤다.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친 두 놈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들 저러나. 다행히 지만이 놈이 내 궁금증을 빨리 풀어주었다. “ 박 태열은 기업 형 주먹 패야.” 기업형이라. 표현 할 번 저돌적이다. “ 특이한 점이라면 굉장한 대어급 거물이라는 점이겠지. 재벌가 장남이라는 말도 있고 대단한 사채업자의 막내아들이라는 말도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건 그렇게 많지 않아. 태어났을 때부터 돈을 몸에 휘어 감고 태어난 부류라는 것만이 확실하지. 특히 현금으로 따지면 큰 형님이 가지고 있는 가게나 사업을 몽땅 꼴아 박아도 절대 상대가 안 돼.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대단한 능구렁이야.” 김 지만은 슬쩍 권솔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제 네가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권솔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말하기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다. “ 독불장군처럼 나대는 이 복희같은 족속들이 대놓고 적을 만든다면 박 태열은 그 반대인 놈이지. 둘 다 원하는 건 같은데 그걸 얻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 놈은 자기 손으로 직접 피를 묻혀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고, 다른 한 놈은 손을 더럽히지 않고 죽이는 방법에 있어서 거의 도가 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 그게 무슨 말이야?” 지만이 놈이 인상을 찌푸렸다.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고 있는 듯 했다. “ 큰형님이 판을 크게 벌리는 것에 비해 박 태열은 얌전히 앉아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제대로 뒤통수치는 타입이야. 그는 불필요하게 움직이는 것을 제일 싫어해. “ 경원이 놈이 입으로 뿡뿡 소리를 냈다. “ 그래봤자 3류 깡패새끼들 주제에 개폼은 더럽게 잡아요.” 나는 녀석의 이죽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지만이 녀석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 더 자세히 말 해봐.” “ 박 태열에 대한 건 나도 자세히 몰라. 물론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이 바닥에 있는 녀석 중에 그를 자세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밖에 없어.” “ 누구…….” 권솔이 괜히 분통을 터뜨렸다. “ 글쎄, 그게 누굴까.” 그래, 그 사람이란 말이로군. 김 지만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 두 사람이 왜 틀어졌는지는 잘 모르지만 한 배를 타지 않는 이상 언젠가 제대로 한 번 부딪치게 될 날이 올 거야. 반, 반씩 극명하게 패가 갈라니까 누가 이긴다, 진다 섣부른 판단을 하긴 그렇지만 큰형님이나 박 태열이나 굉장한 타격을 입을 거다.” 나는 대뜸 말했다. “ 그럼 안 싸우고 사이좋게 지내면 되잖아.” 뭐가 그리 우스운지 권솔과 김 지만이 마주보며 킥킥댔다. 녀석들의 희희낙락한 발끈해서 소리쳤다. “ 야!” 김 지만이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당연히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도 누가 우위에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가능해. 통 하나에 쥐 두 마리 집어넣고 치즈 한 조각 던져놨다고 생각해봐. 서로 먹으려도 달려들겠지? 그럼 한 놈이 이기면 조금 떼어줄 수는 있겠지만 두 마리다 처음부터 같이 먹을 생각은 절대 안할 걸.” “ 어째 수상하다. 네가 박 태열에 대해선 왜 묻는 건데. 너 그 새끼랑 말이나 제대로 해봤냐.” 권솔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 어……어.’ 하고 얼버무렸다. 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살폈다. 킁킁 냄새까지 맡는다. 녀석의 아랫배를 발로 쓱 밀어버렸다. 지만이 놈 옆에 있던 녀석이 경원이 놈 옆까지 밀려갔다. “ 비룡이 형이랑 친해보여서 누군가 하고 궁금해서.” 두 놈은 머리를 끄덕이며 ‘하긴…….’ 하고 중얼거렸다. 박태열씨가 절대 이 복희씨의 동생이 운영하는 가게로 직접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벽에서 열심히 캐낸 돌들을 만지작거리던 김 지만이 문득 나를 향해 말했다. “ 아! 좋은 표현이 생각났어.” “ 뭐가.” 녀석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하며 웃었다. 이 경원은 어느새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 오기 딱 좋을 시간이긴 했다. “ 박 태열은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어.” “ …….” “ 믿는 새끼에겐 무조건 뒤통수 날려서 보답한다.” 녀석은 반쯤 생각에 잠겨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한 소리였다. “ 절대 좋은 인간 유형은 아니지. 큰형님이나 그 인간이나 비슷한 족속이야. 다만 남의 눈에 덜 그래 보인다는 것뿐이지.” 가만히 듣고 있던 권솔이 굴러다니는 소시지 껍질을 빙빙 돌리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 남의 눈이 어떻든 간에 내가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로 돌아간다면…….” 권솔이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지만이 놈은 손톱에 낀 초코를 긁어 비닐봉지에 비비고 있었다. “ 박 태열 밑으로 가겠어. “ 녀석이 엄지를 까딱이자 김 지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 병신, 그래서 네가 나한테 안 된다는 거야. 나는 그래도 박태열 보다는 큰형님 밑에 있겠어.” 변강쇠와 마님 커플이 영화를 본다고 내뺀 후, 채 10분이 안 되어 권솔은 이 복신군의 전화를 받고 곧장 달려 나갔다. 혼자서 느긋하게 사우나 좀 즐기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사람들에게 치여 밖으로 빠져나왔다. 비가 오니 그런가, 내 꼴이 참 처량 맞게 느껴졌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잘 돌아가지도 않는 대가리 열심히 굴려가며 라디오에 사연 보내서 힘들게 받아놓곤 디자인이 구리다는 이유로 이 경원이 나한테 준 것이었다. 비싼 시계는 촌스럽다고 마다하는 녀석이 오천 원짜리 패션시계는 요일별로 바꿔서 잘도 차고 다닌다. 이럴 땐 녀석의 독특한 취향의 덕을 톡톡히 보니 기뻐해야 되나. 시계 작은 바늘이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집으로 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기엔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귀찮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비룡이형 마늘이나 까줄까 하는 생각으로 이른 시간에 가게로 향했다. 철문으로 굳게 닫힌 가게 정문을 돌아 뒷문으로 걸어갔다. 카드 위치에 맞춰 지갑을 갖다 댔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영업을 하지 않을 때의 가게는 지독하게 어두웠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도 힘들었다. 도무지 앞이 보여야 말이지. 더듬더듬 주방 복도로 내려가려는 찰나, 이 시간에 가게에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 못한 장미 놈이 시무룩한 얼굴로 테이블을 닦고 있는 게 보였다. 별일이로세. 나는 무심코 녀석 앞으로 다가갔다. 장미는 내가 온지도 모르고 기계적인 행주질만 반복하고 있었다. 약간 맛이 간 표정이었다. 나는 ‘흠, 흠……. “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넋을 놓고 있던 녀석이 기침소리에 깜짝 놀라 팔짝 뛰어올랐다. 그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놀라버렸다. “ 안녕.” 장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눈동자가 내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보아하니 경원이 새끼를 찾는 거 같은데 이거 어쩐다, 녀석은 김 지만이랑 쿵작쿵작 거리고 있을 텐데. 난감했다. “ 경원이 놈은 시간 맞춰 올 거야. 걔는 지금…….” 차마 영화 보러 갔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쉽게 속을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 집에서 자고 있을 거다. 너는 왜 이렇게 빨리 나왔냐.” “ 할 일도 집에 혼자 있으면 뭐하겠어. 저기, 있잖아. 경원이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라 함은 오늘 서리하다가 걸린 것 말고는 잔잔한 하루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장미 녀석이 안도감과 실망감으로 얼룩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놈처럼 비실댔다. “ 경원이가 전화를 안 받아서 걱정했는데 아무 일도 없다니 다행이네. 집에 있으면서 내 전화를 그렇게 피했나 보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되는 걸까. 경원이 놈이 김 지만을 놔두고 절대 흔들일 없으니 냉수 먹고 속 차리라고 해야 되나, 아니면 그 놈은 원래 자기가 전화 받고 싶을 때만 받으니 너무 상심 말라고 위로를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며 결국 대답을 못했다. 장미 또한 애초에 내 대답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했다. “ 문자를 이틀 동안 칠십 개나 보냈는데 다 씹혔어. 경원이는 나를 위해 손가락 좀 까딱이는 것도 힘든가봐.” “ 걔는 천성자체가 원래 무신경해. 전화 받는 것도 귀찮아 죽는 판에 문자는 오죽하겠냐.” 딴엔 위로를 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장미 녀석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 아니야. 나를 미워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지 않고선 문자 안 보내주면 접시에 코 박고 죽겠다는데도 쌩 깔 수는 없는 거야. 맞아, 경원이는 나를 지독히도 미워해! 그럼 이, 이제 나는 어떡해.” 과다 분출된 감정에 휩쓸려 장미는 들고 있던 행주도 내팽개치고 소파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댔다. 다 큰 사내새끼가 맨 정신으로 하기엔 지독히도 염병하는 모습이었지만 녀석이 하자 묘하게 어울렸다. 조금 귀엽기까지 했다. 선이 워낙 가늘고 야하게 생긴 놈이라서 그런가. 나는 놈을 빤히 바라보았다. 열심히 훌쩍이던 녀석이 떨어져 있던 행주에 코를 ‘킁킁…….’ 풀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예쁘긴 지랄 맞게 예뻤다. 게이들을 빨딱 발딱 세울 만한 외모였다. 젖은 눈꺼풀을 손등으로 쓱쓱 비비던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김 지만 미워! 너무 미워 죽겠어. 헝겊인형 만들어서 밤마다 배랑 가슴이랑 송곳으로 삼십 분씩 콕콕 찌르고 자는데 왜 그 다음날 보면 더 건강해 보이는 거냐고! 얼굴도 크고 못생긴 게 어떻게 경원이랑 사귀게 된 거야? 왜 경원이는 그런 도시락 통 같은 놈하고 사귀는 거냐고!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김 지만이 남들보다 얼굴이 크다고는 생각했는데 도시락 통 같아 보일 줄은 몰랐다. 뭐, 그러고 보니 좀 비슷한 거 같기도 했다. 의외로 관찰력이군. 녀석의 적절한 비유에 새삼 감탄했다. 장미는 눈물과 콧물로 푹 젖은 행주를 탁자 위에 사정없이 집어던지며 씩씩댔다. “ 걔네 둘 얼마나 사귄 거야? 오래된 거 같기는 한데 물어봐도 경원이가 말을 안 해주니까 잘, 잘 모르겠어.” 글쎄, 얼마나 사귀었더라. 우리를 만나기 전부터였으니까 아마도……, “ 십년은 확실히 넘었을 거야.”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나를 초롱초롱하게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맥이 딱 풀리는 듯 했다. 녀석은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 거렸다. “ ……흑! 김 지만이 너무 강적이야! 일 년도 아니고 십 년이면 나한테 승산이 없어! 나는 이대로 죽을 거야. 상사병에 걸려서 비실비실 말라서 죽게 될 거라고!” 녀석의 눈물이 더 굵어졌다. 중얼거림의 강도 역시 더욱 막강해졌다. 그리고 나는 난감해졌다. 보아하니 쉽게 그칠 수준의 울음보도 아니었다. 놈이 꺽꺽대는 소리가 홀 안을 징그럽게 울렸다. 성대 한 번 기똥차게 우람했다. 어린애처럼 우는 모습이 안타깝기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주머니 속에 손을 푹 쑤셔 넣고 돌아섰다. 그때 때마침 손끝은 초콜릿 하나가 거치적거렸다. ……초콜릿. 그리고 장미.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 꽥꽥거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단숨에 멈추게 할 수 있는 묘안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제조년도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초콜릿을 꺼냈다. 귀퉁이를 팔딱팔딱 폈다. 아직까지 눈물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장미의 어깨를 툭툭 때렸다. 녀석이 성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불쑥 초콜릿을 내밀었다. 푹 절인 배추처럼 눈물로 푹 삭은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나는 일부러 놀란 척 연기를 했다. “ 아, 이런! 깜빡하고 있었다. 자, 받아라.” 녀석이 초콜릿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살짝 누른다고 한 것 같은데 초콜릿이 반으로 뭉개지자 본인이 더 놀라 얼른 손을 떼어냈다. 하여간 더럽게 깜찍하기도 하시지. “ 이게 뭔데?” “ 초콜릿이다.” “ 초콜릿? 이걸 왜 나한테…….” 이제 적절한 연기가 필요할 시기였다.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자. “ 경원이랑 어젯밤에 반찬 사러 갔다가 슈퍼에서 산 건데, 하나 남으니까 네 생각난다고 하더라.” 장미 놈이 벌떡 일어났다. 녀석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포효하는 짐승의 절박한 환희 같았다. ‘경, 경원이가 나를 위해서. 나, 나를 위해서…….’ 하고 자꾸 같은 말만 반복하는 녀석에게 ‘그래, 맞아. 네 거다.’ 는 말로 귀찮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호응해줬다. 내 손바닥 만 한 작은 얼굴에 충격과 놀라움, 기쁨과 뜻 모를 성취감 등 수많은 감정들이 표면위로 떠올랐다. “ 경원이 놈이 전해준다고 했는데 내가 가게에 먼저 간다니까 너한테 주라고 하더라.” 녀석은 순간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다 다리에 힘이 풀려 결국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 이,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렇겠지?” “ 내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정도로 할 일이 없을까.” 개 뻥이었다. 나는 지금 미치도록 할 일이 없었다. 맨 정신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다리를 떠는 장미를 모르는 척 했다. “ 지금 내 몸 어디든 꼬집어봐. 얼른!” 나는 장미 놈의 허벅지를 약하게 꼬집었다. 녀석이 꽥꽥거렸다. “ 아! 졸라 아프다. 이게 뭐야, 꿈이 아니었잖아! 오, 이런 맙소사!” 눈에 한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녀석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자 뺨을 타고 주르륵 떨어졌다. 테이블 위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울지 말라고 한 거짓말에 더 울고 자빠졌으니 죽을 맛이었다. 녀석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대단한 보물인양 초콜릿을 감쌌다. “ 경원이가 나한테 선물을 주다니!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아.” “ 야, 초콜릿 하나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보기 흉하니까 그만하셔.” “ 맙소사, 맙소사!” 녀석은 저 놈의 오, 맙소사 소리를 넉넉잡고 몇 백번은 외쳐댔다. 다급한 목소리로 비룡이 형이 우리를 부르기 전까지 말이다. 형은 주방 뒤, 쪽문으로 기어 나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마냥 허둥댔다. 정신나간 놈처럼 고개를 흔들던 그는 나를 발견하고 ‘계진아, 계진아. 빨리…….’ 하고 말했다. 형의 다급한 모습에 덩달아 나까지 다급해졌다. 장롱 향 초콜릿에 이미 홍콩 간 장미 놈을 지나쳐 형 앞으로 갔다. “ 어디 불났어? 웬 호들갑이야, 형.” “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아, 아니지. 너라도 있어서 진짜 다행이다.” 형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귀신이라도 봤나, 뭘 그렇게 넋을 잃은 표정을 짓고 있어.’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형은 대뜸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얼떨결에 딸려갔다. 형은 무작정 2층으로 올라갔다. 팔목을 조이는 손바닥에선 진득한 땀이 묻어 나왔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실내를 제 집 드나들듯이 걸어가는 형을 따라 홀을 지나 바텐더 석을 돌았다. 형은 뒤처지는 내 어깨를 움켜쥐고 코너 구석진 곳으로 꺾어 들어갔다. 긴 터널 같은 복도를 오 분쯤 지났을 때, 문이 하나 나타났다. 형이 성급하게 문을 열었다. 어딘가 긴장한 기색이었다. “ 1층에 계진이가 있어서 데려왔어요.” 뿌연 연기에 휩싸인 방이었다. 형이 내게 들어가자는 손짓을 해보였다. 먼저 방으로 들어가는 형을 따라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달갑지 않았던 비린 냄새가 후각을 강하게 찔렀다. 지독한 피 냄새였다. 냄새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일반 사무실과 다른 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큰 원목책상이 하나 있고, 그 위에 노트북과 자잘한 필기구가 있었다. 책꽂이에 일렬로 쭉 늘어선 파일묶음들이 전부였다. 여기가 사장실이었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형, 말도 없이 사장실에 들어왔다고 사장 화낼 거 같은데…….’ 라고 말하며 몸을 돌렸다. 순간 눈앞에 보이는 처참한 몰골의 이 복희씨를 발견하고 나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그였다. 굳은살이 박인 심장이 느릿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의 두근거림이었다. “ ……!!” 이 복희씨는 쥐어짜듯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등과 가슴이 피로 흥건했다. 노란색 카펫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폭포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는 그의 아랫배는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손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몸 안에 있는 피는 모조리 다 쏟아져 나올 기세였다. 시간이 지나면 저 붉은 피도 묽어져버리진 않을까 두려웠다. 비정상적으로 하얗게 질린 그의 핏기 없는 얼굴이 바닥에 떨어졌다. 뭉쳐있는 핏덩이가 복희씨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오기인지 자존심인지 그는 이를 앙다물고 인상만 쓰고 있었다. 반대로 팔과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갔다. 목과 옆구리, 가슴으로 이어진 몸 여기저기에 새로 생긴 칼자국과 상처자국으로 가득했다. 결국 악다문 이사이로 고통에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윽!” 복희씨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 서있던 사람들 모두가 짠 듯이 물러섰다. 이 복귀 사장과 아저씨, 비룡이형과 나였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복희씨의 고통을 나눌 만큼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겐 관망하고 서있는 우리들이 아니라 지금당장 의사가 필요했다. 순간 나는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생각하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119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일번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사장 놈이 핸드폰을 낚아채갔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의사도 안 부르고 고사부터 지내려는 건가. 원망의 눈빛을 가득 담아 노려보았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사장의 얼굴에 짜증이 몰려왔다. 그는 친절하게 폴더를 접어 내 조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 멋대로 행동 하지 마. 전화는 무조건 안 돼.” “ 의사를 불러야 합니다. 저대로 놔뒀다간 분명 과다출혈로 죽어 버릴 겁니다!” 묵묵히 복희씨만 내려다보고 있던 아저씨가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사장을 밀쳐냈다. “ 계진아, 그래도 병원은 안 돼.” 가족이란 사람들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 나는 충동적으로 외쳤다. “ 왜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은 아픈 사람 구경만 하고 있는 겁니까. 얼마나 다쳤나 확인하러 온 겁니까. 그런 게 아니면 빨리 의사를 불러요! 늦어서 못 온다고 하면 병원에라도 가야죠! 피를 너무 많이 흘리잖아요.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아저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가 잔뜩 쌓인 얼굴이었다. “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 특히 보호관찰 기간에는 더더욱 그렇지. 닥치는 대로 갈고 다니는데 눈치를 챘어도 벌써 챘을 거다. 이리저리 쫒기는 판에 적을 일부러 늘릴 필요는 없다.” 사장과 비룡이 형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뭘 눈치를 챘다는 건지, 번거로워진다는 건 또 뭔지. 나만 겉도는 느낌이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복희씨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랫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현저하게 속도가 줄었지만 말라붙은 피 딱지가 덕지덕지 엉켜있는 배는 아직도 징그러웠다. 꽁꽁 싸매 놓은 실밥이 다시 터져 튕겨져 나왔다. 찢어진 살인지 엉킨 실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 진짜 아프겠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힐끔 나를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조곤조곤 이야기까지 나누는 그들에게선 초반의 당황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자주 있었던 일인지 ‘방심하다 큰 코 다칠 줄 알았다.’에서 ‘그래도 오늘은 조금 심하네요.’ 내지는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지…….’ 하는 말까지 빠르게 오고갔다. 시종일관 딱딱한 얼굴이 어느새 미소를 머금고 일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어리둥절한 건 나뿐이었다. 나는 복희씨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그의 이마와 얼굴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땀으로 젖은 얼굴이 끈적였다. 때려주고 싶을 만큼 미웠는데 정작 아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뒤숭숭했다. ……왜 이렇게 눈을 못 뜨는 걸까. 이대로 골로 가는 걸 아니겠지. 하기야,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위험했다면 아저씨가 이렇게 태평할 수도 없을 거야. 감겨있는 이 복희씨의 눈꺼풀을 살짝 꼬집었다. 눈썹이 꿈틀댔다. 자면서도 느낌은 나나 보네……. “ 절대 장사는 해야 해. 이렇게 된 판국에 문까지 닫으면 아주 대놓고 수상쩍어 보이겠지. 짭새들이야 밥 처먹고 하는 게 의심이지만 문제는 그 쪽이 아니잖아. 가게를 치고 들어온다고 해도 이 사장이 이러고 자빠져있는 통에 제대로 싸울 수도 없고. “ 조곤조곤 대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복귀 사장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저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 자식아, 제발 성의 좀 보이면 어디 덧 나냐…….’ 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사장은 귓구멍을 후비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저도 장사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못마땅한 표정으로 사장을 노려보고 있던 아저씨가 미심쩍은 듯 눈썹을 구부렸다. “ 네가? 은근슬쩍 땡땡치 까고 말 꼬리 잡으러 가려던 게 아니고?” 이 복귀 사장은 화들짝 놀라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겠다만 과도하게 횡설수설 대는 통에 아저씨의 의구심에 불을 질렀다. “ 나는 분명히 한 번만 더 말꼬리 잡고 늘어지면 너희 형한테 일러바치겠다고 경고했었다. 사람이 말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이건 원, 달구지 새끼한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말꼬리가 뭘까. 당황한 사장을 봐선 보통 말꼬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사장의 심중이 엿보였다. 가만히 있던 비룡이 형까지 거들고 나섰다. “ 맞아요, 스승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손님은 안 받아도 문은 열어야 돼요. 다만 2층에도 손님을 들여야 하는가가 문제네요.” 아저씨는 미심쩍은 눈으로 사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 당연히 똑같이 해야지! 사장실 문만 잠그고 이 복귀 너는 1층에만 짱 박혀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무슨 일이든 미리 대비한다고 나쁠 것 없지.” 복귀사장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 뭐 어쩌겠어요. 그렇게 해야지.” 아저씨와 비룡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사람이 짠 것처럼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깜짝 놀라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내 표정이 바보스러웠는지 대놓고 ‘쯧쯧’ 혀를 차는 사장의 주둥이를 찰싹 때리곤 아저씨가 책상 서랍을 가리켰다. “ 세 번째 서랍을 열면 치료할 만한 것들이 얼추 들어 있을 게다. 아주 간단한 것 밖에 없으니 기대는 말아라. 장사하려면 우리는 이만 1층으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네 말대로 죽을 지도 모르는 놈 혼자 두고 가기가 영 마음에 걸려서 불렀다. 무리한 부탁은 아닐 줄 안다. 계진아, 네가 우리가 올 동안만 옆에 있어 줄 수 있겠냐. “ “ 아…….” “ 오늘 홀은 당연히 빼주마.” 아저씨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사장과 비룡이 형은 말없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 두 사람 모두 초롱초롱한 눈이었다. 심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복희씨를 보며 힘없이 말했다. “ 그러세요. 뭐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여기 있을게요. 가서 일 보세요.” “ 내 그럴 줄 알았다. 역시 너는……, 너는 그 꼴통들하고 달라서 좋아. 그럼 수고해라.” “ 별말씀을요.” 이 복희씨와 나를 남겨두고 그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밖에서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문 잠그는 소리였다. 누가 열어주기 전까지 꼼짝없이 갇혀버린 신세였다. 이거 괜히 한 다고 했나……. 가만히 앉아서 시간만 때우면 되겠지, 뭐.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이 복희씨를 보다 책상 앞으로 갔다. 서랍을 열었다. 용기마다 알약과 하얀 가루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약 봉지 사이에 반창고, 붕대, 연고, 소독약, 집게 같은 자잘한 의약품이 끼어 있었다. 최대한 긁어모을 수 있을 만큼 모았다.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문 앞으로 갔다. 손잡이를 돌렸다. 역시나 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다시 복희씨 곁으로 돌아와 약품들을 낡은 소파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그 쓰러져 있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솜에 소독약을 듬뿍 묻혔다. “ 어, 어떻게 하드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손이 벌벌 떨렸다. 피로 얼룩진 배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딱딱하게 굳은 피들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약 솜이 상처부위에 가까이 닫자, 복희씨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함부로 몸 굴리고 다니더니 그거 참 쌤통이었다. “ 아파 죽겠어요? 그래도 참으세요. 안 하는 것보다 나을 거예요.” 상처부위를 무작정 열심히 문질러댄 결과 피 자국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피에 절은 솜뭉치를 버리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 다음엔 뭘 해야 되나……. 붕대와 반창고 사이에 손만 왔다 갔다 거리고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죽은 듯이 누워있던 복희씨가 갑자기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얼굴은 다 죽어가도 목소리만큼은 팔팔했다. “ 붕대.” “ 아! 네…….” 붕대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찢어진 배따기에 붕대만 감아도 되나. 피가 거의 멈추기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나는 서랍에 나뒹굴고 있던 정체불명의 하얀 가루를 복희씨의 찢어진 배때기에 수북이 쌓일 정도로 무작정 때려 부었다. 칼자국은 가루에 가려져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제 드디어 붕대를 복희씨의 배에 천천히 감기 시작했다. 바닥과 맞닿아 있는 등은 감을 땐, 꿈쩍도 안 하고 버티고 있는 이 복희씨의 아파 죽어도 절대 버리지 못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오기 때문에 특별히 애를 먹었다. 붕대 끝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발라 놨다. 해놓고 보니 또 그럴 듯 했다. “ 다 나으면 나한테 한 턱 내세요. 당신 같은 나쁜 놈에게 누가 이런 극진한 치료를 해준답니까. 나나 되니까 속없이 이러고 있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도망갔어요. 잘 알아두세요.” 그때 갑자기 복희씨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멀건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 물 줘.” 물? 주위를 훑었다. 뭔 놈의 사장실이 정수기도 없고 흔한 커피포드나 찻잔도 없었다. 더군다나 문은 잠겨 있는데 이 일을 어찌 할꼬. 그러고 보니 복희씨의 아랫입술이 건조하게 부르터 있었다. 그는 연신 아랫입술을 핥아댔다. 이건 진짜 능력 밖-----!!! 이 복희씨는 두껍게 감아진 붕대 때문에 잘 접히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던 그가 갑자기 내 목덜미를 거칠게 낚아챘다. 뭐지……, 하고 느낄 땐 이미 늦었다. 복희씨의 까칠까칠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던 내 입술에 부딪혔다. 그의 두 눈은 꼭 감겨 있었다. 기고만장한 이 복희씨의 혀가 망설임 없이 입안으로 쳐들어 왔다. 미친 듯이 입안을 훑고 강렬하게 혀를 빨아댔다. 그의 중심잡지 못한 힘이 나에게 쏠렸다. 무거워서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억지로 멀어지려해도 소용이 없었다. 밀어내면 낼수록 머리통을 사납게 붙잡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려 있는 입술이 급기야 얼얼해졌다. “ 아……!” 그가 내 혀끝을 덥석 깨물었다. 아파서 눈물이 났다. 침이 흘렀다. 더럽게도 그 침을 모조리 핥아 먹는 이 복희씨를 보며 나는 기가 질려버렸다. 그는 발정 난 망아지처럼 날뛰며 내 혀를 못 살게 굴었다. 질근질근 깨물어대는 통에 아파서 침이 고이면 또 다시 미친 듯이 빨아대는 몰상식한 행위가 적어도 15분에서 20분 정도까진 반복됐다. 결국 지쳐서 나가떨어진 이 복희씨가 기절한 듯 잠이 들었을 땐, 내 혀도 감각을 잃고 해롱거렸다. “ 하아…….” 기진맥진 해졌다. 피 묻은 솜으로 지저분한 소파를 아랑곳 않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퉁퉁 부은 아랫입술과 혀끝을 만져보았다. 그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짐승 같은 입맞춤이었다. 일정한 숨소리가 사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바닥에 뒹굴어 다니는 모포를 이 복희씨에게 덮어주고 나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어지러웠다. 눈을 감았다. 그나마 괜찮아졌다. “ 어라, 이거 환자 좀 지키고 있으라고 했더니 자빠져 잠을 자고 있네.” 겨우 눈을 뜨고 몰아치는 수면 욕구를 발로 걷어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언제 왔는지 이 복귀 사장이 멀뚱멀뚱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내 이마 위에 커피를 쏟을까, 말까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질질 흐르는 침을 닦고 잽싸게 일어나 사장님 곁에 최대한 떨어져 섰다. 사장 놈은 낄낄 웃으며 불쑥 종이컵을 내밀었다. “ 여기가 난방이 안 돼서 참 추웠을 게다. 마셔라.” 꼴랑 이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 가지고 생색은……. 내가 가만히 있자,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팔 떨어진다, 빨리 받으라고오…….’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 배턴터치.” “ 네?” “ 지겹지 않아? 이제부터 내가 있을 테니까 그대는 나가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 놈이 씩 웃었다. 그의 차가운 뱀 눈을 피해 복희씨를 내려다봤다. 대충 치료는 한다고 했으니 괜찮아지겠지. 나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이상하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발목에 족쇄가 달린 기분이었다. 영 마음이 안 놓인다는 표현이 맞을까. 참 얄궂은 생각이다. 일부러 쿵쾅대며 밖으로 나왔다. 술과 담배 냄새가 확 솟구쳤다. 테이블은 그런대로 빠져 있었다. 그래봤자 1층은 여전히 인산인해였다. 베란다에 기대고 서서 가만히 1층 홀을 훑었다. 룸에서 바텐더 석까지 한 눈에 다 보였다. ……농땡이 까도 다 보였겠군. 때마침 룸에서 빠져 나온 경원이 새끼가 눈에 띄었다. 녀석 뒤엔 눈치 채지 못할 범위 내에서 졸래졸래 쫒아 다니는 장미 새끼도 보였다. 권솔과 김 지만도 보였다. 녀석들은 술 처먹으면 도그 되는 새끼들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소파와 테이블을 줄 간격에 맞춰 배열을 하고 있었다. 그 뒤엔 웨이터 하나와 실랑이를 벌이는 이 복신군도 있었다. 오랜만에 있을 놈들은 다 있는 흔치 않은 날이었다. 나는 우선 주방으로 갔다. 나를 보자마자 놀란 토끼눈의 비룡이 형이 달려왔다. 형의 얼빠진 표정에 보고 있던 내가 더 놀랐다. 형은 가스레인지 위에 열심히 끓고 있는 유리냄비를 가리켰다. “ 왜 벌써 내려와? 이 사장님 벌써 일어나셨어? 죽 드셔야 하는데…….” “ 아니, 아직 안 일어났어. 사장님이 와서 나는 그만 내려온 거야.” “ 그랬구나. 아, 내 정신 좀 봐. 계진아 나가지 말고 잠시만 있어봐.” “ 응.” 나는 싱크대로 가서 퐁퐁으로 열심히 손을 비벼 씻어냈다. 손 틈에서 아직도 피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 형, 아저씨는 어디 갔어?” 형은 대접 같은 사발에 죽을 푹푹 퍼 담으며 대답했다. “ 병원에 의사 만나러 가셨어.” “ 병원?” “ 응. 이쪽으로 올 수 있나 해서……. 그나저나 계진아.” 형은 어울리지 않게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어째 불안했다. “ 2층에 한 번 더 올라가야겠는데?” “ 아……, 왜 또.” 형은 얼굴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죽사발을 머리 위로 들어보였다. “ 이 사장님한테 죽 좀 갔다 드려줘.” “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람한테 뭔 놈의 죽이야. 일어나면 먹으라고 해.” “ 죽은 데워 먹으면 맛없는데……, 하고 바로 먹어야 맛있는데.” 형이 억지로 훌쩍거렸다. 이제 보니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뭘 어쩌겠는가. 가짜 생일 날 잡혀와 하루 종일 음식 만들었던 고생을 생각해서 참아야지. 형의 손에 들린 죽사발을 빼앗듯 낚아채 가스레인지 서랍 위에 자빠져 누워있는 쟁반을 받쳐 들었다. “ 계진아, 수고해.” “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는 않지.” 배시시 웃는 형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나 많이 담았는지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사발위에 죽들이 출렁출렁 춤을 췄다. 왔던 길을 더듬어 사장실 문 앞까지 숨죽여 걸어갔다. 그런데 나올 때, 분명히 닫고 나왔다고 생각했던 문이 빠끔히 열려있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사장은 어디로 내빼버렸을까……. 참으로 용의주도한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문을 열었다. “ 수고했다.” 붕대에 칭칭 감겨 있던 배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방안에선 자욱한 담배연기가 퍼져 나왔다.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이 복희씨 일 것이다. ‘수고하긴 뭘 수고해요. 고마우면 당장 담배나 꺼요. 다 죽어가는 놈 살려놨더니…….’ 속으로 구시렁구시렁 거리던 말이 채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 뭐가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장 우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말 귀를 못 알아듣고 되묻는 녀석에게 복희씨는 핏물에 푹 젖은 붕대를 가리켰다. 내가 뜯어놓고 간 반창고와 하얀 가루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구멍 난 소파에 꼬불쳐 놓은 솜도 내가 해놓은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내가 어질러놓고 간 그 상태로 놓여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복희씨 앞엔 장 우현이 있고, 그를 지키고 있었던 나는 문 밖에 있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죽 그릇을 내려다봤다. 자조적인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럼 그렇지……. 장 우현은 복희씨가 가리키는 대로 붕대와 연고들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당연히 내가 할 일 인데요.” 아니, 저런 미친년을 보았나……! 거짓말은 하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묻어났다. 복희씨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장 우현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도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복도로 달려 나왔다. 민망하게 들려있는 죽 그릇을 그대로 들고 말이다. 완벽하게 잘라내지 못하는 나를 흔들어대는 이놈의 얼어 죽을 감정이 문제였다. ……이런 제기랄!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강한 힘에 의해 몸이 돌려 세워졌다. “ 할로할로, 자기이.” 형님 신분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캐릭터 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는 박태열씨였다. 그는 명랑하게 웃으며 내 손에 들린 죽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검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내가 나왔던 복도로 향했다. 한 번에 찾기 힘든 복잡한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초점이 정확히 사장실로 머물렀다. 박태열씨는 애늙은이처럼 혀를 끌끌 차더니 갑자기 훌떡 모자를 벗었다. 말라붙은 깻잎 같은 그의 앞머리가 심히 거슬려보였다. “ 우리 자기 우울하구나. 눈썹이 늙은 소나무처럼 축축 처졌네, 처졌어.” “ 제 눈썹은 원래부터 처졌어요. 이발 한지가 오래 됐거든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그는 배를 움켜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우리가 자기가 나 죽이네.’ 했다. 나는 아랑곳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건전지 떨어진 인형처럼 웃음을 뚝 그친 박태열씨가 내 어깨를 억지로 돌려세웠다. 나는 울컥 짜증이 났다.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데, 박태열씨가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 자기 내 앞머리 좀 쓰다듬어줘. 사랑의 손길로 부드럽게 말이야…….” “ 그 쪽은 참 할 일 없나 봐요. 이러고 다녀도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게 어지간히 신기하네요.” 박태열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후후후 웃었다.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해댈지 은근히 불안했다. “ 자기 지금 내가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있을까봐 걱정하는 거야? 자기가 내 걱정을 해주다니 나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그런 의미로 내 앞머리 좀 매만져 줘. 응? 빨리이…….” 대놓고 면박을 해도 이건 당최 먹혀들어가야지. 어이가 없다 못해 이젠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박태열씨는 방정맞은 목소리로 ‘웃었다! 웃었어! 웃어버렸다구우…….’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 나 지금 그쪽 기름진 앞머리 쓰다듬어 줄 기분 아니거든요. 적당히 좀 하시죠.” “ 왜 자기는 죄 없는 나한테 화를 내는 건데. 무섭단 말이야아아.” 진짜 골고루 염병이었다. 박태열씨는 열심히 치근덕거리다 휘파람을 불며 내 눈썹을 억지로 세우기 위해 난리를 쳤다. 겨우 그를 진정시켜놓고 입을 열었다. “ 일 해야 돼요. 볼일 보고 가세요.” 그는 돌아서려는 내 팔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이 복희씨처럼 막무가내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게 배려해 엉성하게 힘이 빠진 손이었다. “ 짜증날 땐 짜장면, 우울할 땐 울면, 복잡할 땐 볶음 밥. 자, 골라 봐. 뭐가 제일 먹고 싶어?” “ …….” 나는 침묵했다. 그러나 박태열씨는 더 심하게 활짝 웃으며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 자기 지금 먹는 게 싫구나. 그럼 옷 사줄까, 신발 사줄까, 가방 사줄까. 뭐든 골라보세요.” 정말 성격 한 번 희한한 사람이다. 나는 멀뚱히 박태열씨를 올려다보다가 문득 찜질방에서 지만이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 태열은 기업 형 주먹 패야……, 그리고 대단한 능구렁이야.’ 기업 형인지 혈액형인진 내 알바가 아니지만 능구렁이란 말은 천부당, 만부당 진실이었다. 반응 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것도 쉽지 않을 터다. 더군다나 그는 나보다 연상이지 아닌가. “ 됐어요. 내가 그 쪽한테 그런 걸 왜 받아요.” 조금 전부터 사장실이 있는 쪽으로 슬쩍슬쩍 눈길이 가던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박태열씨가 복도를 가리고 정면으로 서서는 팔을 휘휘 젓기 시작했다. “ 나랑 같이 있을 때는 제발 나에게만 집중해줘. 내가 아무리 자기를 열렬히 짝사랑 한다지만 이건 진짜 너무 한 거야. 그리고 나는 성격이 구려서 다른 새끼만 바라보는 상대를 백년이고 만년이고 좋아할 순진한 놈은 절대 못 된단 말이야.” 그는 훌쩍훌쩍 우는 시늉을 하며 징징거렸다. 그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 내 나이에 순애보라면 경찰이 잡아가.” “ 아이고 기가 막혀라…….” 박태열씨가 눈을 반짝였다. “ 자기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지? 그럼 나는 오죽 하겠냐고. 이게 다 자기 탓이야. 자기 매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좀 어떻게 좀 해줘.” 집요하게 바라보는 박태열씨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사장실로 눈이 갔다. 복희씨의 수고했다는 말이 자꾸만 귓가에 윙윙거렸다. 그러자 아파서 헐떡이던 이 복희씨의 모습과 징그럽게 입을 맞추던 모습까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순간 출처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분노는 노여움과 서러움이 섞여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감정이 이성을 좀비처럼 갉아 먹고 있는 듯 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결국 나는 흐려진 이성을 앞세워 전혀 마음과 상관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 우리 사귈까요.” 감쪽같이 사라진 사장님은 새벽 4시가 넘어가서야 어슬렁대며 나타났다. 그는 말없이 홀을 죽 둘러보더니 어느 정도 손님이 빠졌다 생각했는지 남은 사람들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내쫒았다. VIP 룸과 예약손님 몇몇이 있긴 했지만 가게에 불이 난 게 아닌 이상 들어갔다 하면 날이 밝기 전까진 절대 나오지 않는 할 일은 없되, 남아도는 건 돈 밖에 없는 거액 손님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경원과 나는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누가 더 많이 줍나 하는 덜 떨어진 놀이를 하다가 금방을 싫증을 내고 주방에서 마늘과 양파를 까는 걸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면 보면 이경원이 있는 곳에서 절대 일 미터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 장미 새끼가 자기도 하겠다고 웬일로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이건 도대체가 양파껍질을 까는 건지 양파 자체를 도려내는 건지 심중을 알 수 없는 칼질을 하는 통에 삼십 분이 넘도록 아저씨의 잔소리를 줄기차게 듣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사발에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열심히 비벼 먹다가 곰팡이 낀 누런 밥을 푹푹 퍼내고 있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단편적인 기억을 되살려냈다. 「장 우현은 맞아 죽었다…….」 맞아 죽은 놈이 벌떡벌떡 살아나 가만히 있는 사람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것처럼 쏘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저씨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지, 도대체가 왜 장 우현이 죽은 줄 알고 있는 걸까. 아저씨는 장 우현과 장미 새끼를 아예 구분 못하는 건가. 아니면…….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두 사람은 망할 엿 같은 쌍둥이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질문이 튀어 나올 뻔 했다. 혹시 모르는 미연의 주둥이 사고를 대비해 입술을 지근지근 눌러댔다. 그러다 불현듯 장미 녀석을 힐끔 돌아봤다. 녀석은 이 경원의 턱 선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입술엔 침이 흥건했다. 반대로 녀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이 경원은 지금 당장 뭐 하나만 걸려봐라, 완벽하게 조져버리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영양가 없는 모습들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땅이 꺼져라 길게 숨을 뱉어냈다. 그러자 아저씨가 냉장고 문을 열다 말고 우리들 앞으로 다가왔다. “ 다 했냐?” “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하고 있어야 되는 겁니까.” 경원이 놈이 들고 있던 과도를 세숫대야에 대뜸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장미도 덩달아 칼을 집어던졌다. 경원이 놈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젠 장미 녀석이 시무룩해졌다. “ 우리, 말은 똑바로 하자. 너희들이 할 일 없다고 주방에 쳐들어 온 거지, 내가 억지로 시킨 것은 아니잖아.” 아저씨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히 이 경원은 발끈하고 나섰다. “ 주방에 있으려면 무조건 양파를 까야 된다면서요. 어른이면 답니까. 일 년 먹을 양파를 다 가지고 나오면 어쩌라는 겁니까.” “ 왜 고깟 거 했다고 벌써 힘드냐? 쯧쯧……, 젊은것들이 그렇게 약해 빠져서 어따 쓰겠냐. 난 네들 나이에 놀이삼아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았다. 이 자식들아! “ 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이두박근, 삼두박근 억지로 팔 근육을 짜내서 보여줬다. 경원이 놈이 라이터를 껐다, 켰다 장난을 치다 말고 신경질을 냈다. “ 멀쩡한 소나 때려잡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벌리십니까. 어지간한 주책이십니다.” “ 어이 지만이 애인, 너 자꾸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꼬박꼬박 말대답 할 거냐.” 경원이 놈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 예, 계속 할 겁니다.” 아저씨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이 경원을 지그시 노려봤다. 그러나 녀석은 눈 깜짝하지 않고 묵묵히 운동화 끈만 바짝 묶고 있었다. 녀석의 버릇없는 그런 행동이 콩깍지 쓰인 누군가에겐 터프하게만 보이는지 이판에 눈깔이 아주 하트로 구부러질 판이었다. “ 하, 나도 성질 다 죽었다. 왕년에 나였으면 저걸 복날 개 패듯이 두들겨 놔야 밤에 겨우 발 뻗고 잤을 텐데. 지만이 애인, 너는 한풀 꺾일 때 나를 만난 게 그나마 운 좋은 줄 알아라.” 아저씨의 부득부득 이가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이 경원은 끝까지 잘난 얼굴을 빳빳이 들었다. 타협을 모르는 남자, 이 경원이었다. “ 아쉽네요. 아저씨가 젊었으면 저한테 지대로 개 발렸을 텐데요. 참으로 유감스럽네요.” “ 너희 부모님 한번 만나보고 싶다. 너 같이 싸가지 없는 아들놈 낳고 미역국 드셨을 때 심정이 어땠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녀석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지루해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 아저씨가 우리엄마 보면 꼰대랑 바로 머리 뜯고 쥐어뜯고 싸움 났을 걸요.” 아저씨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 왜…….” 녀석은 머리를 귀 뒤로 휙휙 넘기며 귀여운 척, 연신 눈을 깜빡였다. “ 우리엄마가 날 닮아서 일명 미친 미모거든요.” 저 놈의 자뻑은 어딜 가나 빛을 발한다. 아저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밥통을 싱크대 위에 내려놓고 말을 돌렸다. “ 양파랑 마늘 한 포대씩 다 깠냐?” 아직 반 정도나 남아 있었다. 경원이 놈이 빨간 망태기 끈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장미 놈도 덩달아 마늘 바구니를 흔들었다. 처녀가 유부남에 환장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임자 있는 이 경원이 뭐가 저렇게 좋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 경원만 보면 꽈배기처럼 몸을 빌빌 꼬고 몸부림치는 장미 놈이 부디 김 지만 새끼 앞에서 저러지 말길 바랄 수밖에. 나는 동병상련의 아픔에 장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자신의 등을 만진 사람이 나 인걸 확인한 녀석이 휙 손을 떼어내고 미심쩍은 듯 눈썹을 실룩였다. 이건 뭐, 지하철에서 거시기 비비다 걸린 놈도 이 보단 낫을 성 싶었다. 형제간에 기분 한 번 산뜻하게 해주는 구나. 나는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 거의 다 했어요.” “ ……어디 보자.” 아저씨가 앞치마에 펄럭이며 내 앞에 다가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우리가 좆 빠지게 까놓은 양파와 마늘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재듯 올렸다 내렸다 하더니 한참한 뒤에 말했다. “ 일주일 치는 되겠네, 다들 수고했다. 홀에 나가지 말고 탈의실로 바로가라. 옷 갈아입고 오늘은 그만 퇴근들 해라.” 퇴근이란 단어에 이 경원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 퇴근이요? 아직 한 시간 반이나 더 남았는데요?” 아저씨가 앞치마에 생긴 주름을 반듯하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 사장이 1시간 전에 퇴근시키라고 한 걸 내가 일손이 부족해서 좀 잡아뒀다. 지만이 애인, 왜 떫으냐.” 놈은 당연히 떫어했다. 녀석은 흥분하다 못해 거의 이성을 잃고 양파 망태기를 발로 뻥뻥 걷어차는 추태를 보이기에 이르렀다. “ 노동청에 확 신고해 버릴 라니까! 이건 노동력 착취라고요! 이 대머리 아저씨야.” “ 허허, 이 놈 보게. 잘못하다간 한 대 때리겠다.” 아저씨는 경원이 놈이 말꼬리를 늘어 잡지 못하게 재빨리 덧붙였다. “ 양파하고 더 오래있고 싶으면 남고, 지금이라도 집에 가고 싶으면 가고, 알아서들 해라.” 몸을 휙 돌리고 걸어가는 아저씨의 등 뒤로 경원이 놈이 가운데 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장미 놈이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 경원은 고작 네 딴 놈 웃기려고 힘들게 가운데 손가락 치켜든 게 아니다 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장미 녀석이 잔뜩 기가 죽어 어깨를 움츠렸다. 벌써부터 지겨워진 행동 패턴이었다. “ 저희들 먼저 갈게요. 수고들 하세요.” “ 오냐, 밤길 조심해서 들어가라.” “ 애들아 잘 가. 내일 보자.” 비룡이 형이 고무장갑을 낀 손을 흔들었다. 거품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꾸벅 인사 하고 몸을 돌렸다. 경원이 놈에게 빨리 나오라고 손짓하는데, 비룡이 형이 청소하려고 진즉에 뿌려놓은 비누거품에 장미 놈이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녀석은 옆에 서있는 경원이 놈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일부러 라기 보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휘어지던 다리가 곧게 펴졌다. 장미 놈의 다섯 살짜리 꼬마아이 같이 가는 팔이 어느새 이 경원의 가슴과 어깨에 둘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자세가 참 거시기하구나. 장미 녀석은 사고를 가장해 경원이 새끼의 가슴에 은근슬쩍 머리를 기댔다. 얼굴은 이미 벌겋다 못해 살짝 찌르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활화산이 되어 있었다. 녀석이 눈을 감고 웅얼거렸다. “ 경, 경원아.” 그제야 이 경원이 움직였다. 녀석은 현재 자신이 취한 자세와 장미 녀석의 팔의 위치를 훑어봤다. 녀석의 이마에 십자가 모양의 주름이 불끈 솟아올랐다. 이 경원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장미새끼의 팔을 거칠게 떼어내고 놈의 허리를 인정사정없이 밀어버렸다. 성냥개비 같은 장미 놈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 이게 은근히 기어오르네. 시발, 재수가 없으려니까 옷에 씹다 버린 껌이 달라붙고 지랄이야.” 아저씨와 비룡이형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미를 보고 놀라는 그들을 무시하고 이 경원은 닥치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 어쭈, 개새끼 머리 쓰냐. 하다하다 이젠 별 지랄은 다 하네. 똥구멍 장사 오래 하고 싶으면 똑바로 씨불여라. 너 일부러 넘어졌지? 넘어지는 각도가 좆나 부자연스럽던데, 어떻게 하면 나를 안아볼까 그 생각한 거 아냐? 이걸 확 그냥…….” 녀석이 번쩍 손을 들어 귀싸대기를 날리는 시늉을 했다. 장미 녀석이 팔목으로 머리를 감싼 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짠했다. 나도 참 어지간한 오지랖이었다. “ 아, 아니야! 일부러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믿어줘, 제발!” 경원이 놈은 운동화 끝으로 장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 이게 은근슬쩍 개그 날리고 자빠졌네. 너 내가 아까 분명히 홀에서 말했지?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너 병신이냐, 아니면 내가 그렇게 만만해? 씨발, 창녀 새끼가 누굴 호구로 아나.” “ 너무해. 너 정, 정말 너무한다. 나는 그냥 네가 좋은 거밖엔 없는데…….” “ 그러게 누가 좋아 하래냐.” 녀석이 잔뜩 빈정거렸다. 아무리 내 친구라지만 이번엔 솔직히 심했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장미 녀석도 꽤나 타격을 받은 듯 했다. 녀석은 할 말을 잃고 멈칫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엉덩인 비누거품에 푹 젖은 채였다. 그러나 엉덩이만 젖은 게 아니었다. 놈의 두 눈은 슬픔과 수치심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섣불리 울지 말라고 한 마디 해줬다간 대성통곡할 판이었다. “ 정말 너무해. 내 마음 잘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제발, 제발 나한테 그렇게 못 되게 굴지 말아 줘. 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상처 받아.” 장미의 진지어린 고백에 경원이 놈이 순간 당황한 듯 했다. 그 기회를 틈타 장미 녀석이 빠르게 덧붙였다. “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무작정 좋아하지 말라는 말 말고, 다른 건 다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미워하지 마.” 이 경원은 팔짱을 끼고 미생물을 바라보듯 장미를 훑어봤다. 동정심이나 그 이상의 어떤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눈빛이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아저씨나 비룡이 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럴 때, 이 경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이 경원은 솔과 지만이 놈과 다르게 특별히 더 이기적인 놈이었다. 녀석에겐 타인의 감정 따위는 전혀 알바가 아니었다. 놈의 대가리 속에 고작 들어있는 것이라곤 명품 가방과 김 지만이 오늘 밤에 만들 야참메뉴 밖에 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장미는 명품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야참메뉴 따위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담, 이 경원은 절대 장미에게 넘어가지 않을 거다. “ 경원아. 나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 그, 그냥 있잖아…….” “ 경원아? 하, 진짜 미치겠다. 이젠 완전 친구네, 친구.” “ ……경원아.” 장미 놈의 목소리는 어느새 애원조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오기인지, 자존심인지 그도 아니면 가게 나오기 전부터 쫄지 않기로 아예 작정을 했는지 이 경원의 이글거리는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연신 ‘경원아, 경원아…….’하고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두 놈을 보고 있었다. 반대로 비룡이 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한 얼굴이었다. 굼뜰 정도로 순한 형이 은근히 눈치가 빠르다는 것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거운 공기 속에 경원이 놈이 경박스러울 만큼 빠른 어조로 말했다. “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그 말 확실히 지킬 수 있어? 이봐, 염병새끼. 구라 까다 작살나게 얻어터지는 수가 있다.” 호의적으로 나오는 경원이의 태도에 장미 녀석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바짝 쫄아선 ‘구라 아니야.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하고 순종적이게 말했다. 내시처럼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녀석을 내려다보는 이 경원의 얼굴에 순간 익살스러운 미소가 서렸다. 놈이 마음껏 으르렁거렸다. “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절대! 알았냐? 너 분명이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했다. 씨발, 조낸 약속 안 지켜봐라. 이 기회에 턱을 아주 잘근잘근 씹어 먹어 버릴 테니까.” 장미 놈이 충격을 받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휘청했다. 녀석이 뻘겋게 물든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어떻게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그,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 할 수 있어?” “ 지랄하네. 네가 좋아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거냐. 야, 됐다. 삽질하려거든 그냥 꺼져라.” 장미 녀석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등 뒤선 비룡이형의 기침소리와 아저씨의 휘파람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원이 놈은 아랑곳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 내가 왜 네 감정을 신경 써야 하지? 나는 네가 아니니까 그런 거 몰라. 싫으면 좋아하질 말든가.” 저 새낀 어쩜 저렇게 정 떨어지는 말만 골라 할까. 내가 다 머쓱할 정도였다. 역시나 장미 녀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녀석은 부들부들 떨며 억지로 쥐어짜듯 말했다. “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 “ 씨발, 뭐야? 이 새끼가 죽을 라고 환장을 했나.” 경원이 놈의 윽박지름에 장미 녀석은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 미, 미안. 화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장미 놈은 축축하게 젖어있는 눈가를 쓱쓱 닦으며 애써 웃어보였다. 아저씨와 나, 비룡이형은 모두 숨을 죽이고 녀석을 지켜봤다. “ 하지만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잘 알잖아.” 경원이 놈이 손바닥을 귀에 붙이고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시늉을 했다. ……사람 면전에 대놓고 저 새끼도 참 어지간했다. “ 글쎄 내가 왜 쓸데없이 네 감정까지 신경 써야 되냐 이 말씀이다. 아함, 졸려라.” 장미 녀석의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귀까지 붉어졌다. 그러다 문득 녀석은 어수룩하던 얼굴을 풀고 급 정색을 하며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 나쁜 새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너 나한테 그러면 벌 받아! 너, 너!” “ 나 뭐…….” “ 너, 너 이 경원. 너…….” 녀석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언제까지 이 진부한 싸움을 지켜봐야 되나 지루해졌다. 아저씨도 생각한 것만큼 기대에 못 미치는지 ‘요새 젊은 것들을 도대체가 치고 박고 싸울 줄을 몰라. 왜 이렇게 몸을 사리는지……. 쯧쯧.’ 혀를 차며 수세미로 도마를 빡빡 문질러 닦았다. 비룡이 형만 뒤늦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경원이와 장미를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고리타분한 상황에 진저리를 치며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으려는 찰나, 뻔한 스토리와 결말을 예상했던 두 놈들의 싸움은 장미 녀석의 말 한마디에 극적인 전개를 맞았다. 누구도 예상 못한 기막힌 반전 중에 반전이었다. 녀석은 울먹이며 경원이 새끼에게 대들었다. “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저, 저번에 화장실에서 너 나, 나 따먹었잖아!” 이 경원은 찌른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도대체 뭘 따먹을까. 쨍그랑하고 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제외한 주방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장미 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선 경원이 놈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좆나 빌어먹을 이었다! 녀석은 진심으로 당황해 하고 있었다. 얼빠진 표정이나 살짝 벌어진 입술로 보아 장미 놈이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란 뜻이었다. 이 경원이 타인의 말 한마디에 한낱 방어조차 못하고 순수하게 당황해 하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보고 있는 내가 오히려 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적막감이 흘렀다. 누구도 예상 못한 어이없는 침묵이었다. 장미 놈은 자기가 말해놓고 본인이 더 놀란 눈치다. 녀석은 주방을 경악으로 몰고 간 주둥이를 손으로 가린 채, 경원이 새끼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장미 녀석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을 땐, 이미 이 경원은 분노로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 미안해. 진짜 잘못한 거 아는데 네가 자꾸 무서운 말만 하니까 나도 모르게…….” 녀석이 아무리 일부러 말 할 생각이 없었다 할지라도 이미 경원이 새끼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은 게 확실했다. 공황상태에 빠진 녀석이 본래 야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녀석은 이성을 앞세워 현재 돌아가는 상황들을 재빨리 감지했다. 이 경원의 주특기는 ‘무조건 우기기’였다. 나는 당연히 ‘무슨 소리야’ 아니면 ‘내가언제’ 이런 말로 열심히 쏘아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녀석은 부담스럽게 자신에게 쏠려있는 수많은 눈빛들을 무시하고 대뜸 장미 녀석의 허리를 뻥 걷어찬 후, 말릴 새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닫히는 문사이로 분노한 이 경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암캐냄새 풍기는 똥구멍 좋다고 벌렁거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비밀로 묵혀둔 걸 싹 까발려? 배신자 새끼! 다신 상대해주나 봐라.” ……이럴 수가. 어찌 되었건 결론은 두 놈이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다는 건데, 김 지만이 알면 두 새끼 모두 다 목숨부지 하긴 그른 일이었다. 둔한 김 지만이 평소처럼 무디게 넘어가면 좋을 여만 만에 하나 무절제한 레이더망을 펼치는 날이 온 다면 둘 다, 아니 장미 새끼는 팔이나 다리 하나쯤 포기하고 살아가는 게 오히려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이 경원을 좋아한다는 것 자체로도 죽은 듯이 엎드려 살아도 불안할 판에, 불타는 곰에게 아예 기름을 통째로 쏟아 부은 격이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이 경원의 개 같은 비위에 맞춰 힘들게 억누르고 있던 극악무도한 야수의 본능이 제발 이성을 잃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장미 새끼가 이상한 상자를 들고 온 그 날을 떠올렸다. 시간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내가 나가고 얼마 안 있다 두 놈이 일을 벌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여간 징그럽게 비위들도 좋으시지……. 화장실 청소하다 말고 썩은 오줌 냄새 맡으면서 떡을 치고 싶었을까. 장미도 장미지만 이 경원도 어지간한 이 경원이다. ‘책임지지도 못한 충동이면 억지로 잠재웠어야 하지 않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주관적인 내 생각일 뿐이었다. 애인을 현역으로 입대시켜놓고, 저는 방위로 빠져서는 설렁설렁 동사무소 다니며 입문하지 얼마 안 된 순진한 게이들의 아다를 마음껏 뚫고 다니는 놈에겐 일반적인 사상이 먹히질 않을 터다. 망할 이 경원이 꼴에 좆 달린 사내새끼라고 장미 새끼의 야리꾸리한 얼굴보고 꼴려서는 열심히 펌프질 한 것도 김 지만 입장에서 혀를 내두를 만 한 배신이었다. 평소 잘 쓰지 않는 좆 대가리가 녹슬지 않길 염원하여 김 지만이 아주 가끔 알아서 깔려주기도 하 것만 고세를 못 참고 다른 새끼 엉덩이에 좆 박고 있는 건 뭔 심보냔 말이다. 꼴에 아주 철면피는 아니었는지 장미 새끼 한 마디에 제대로 면 팔린 이 경원은 의리도 없이 택시타고 먼저 날라버렸다. 권솔과 김 지만을 기다릴까하다 언제 끝날 줄도 모르고, 할 일도 없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지루해서 옷만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김 지만의 사물함에 먼저 간다고 사인펜으로 대충 휘갈겨 놓는 건 잊지 않았다. 벌써 새벽 다섯이었다. 나는 코트단추를 턱 끝까지 꼼꼼히 잠그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대부분 사람의 흔적과 온기가 사라지는 새벽이 더 추운법인데 이번 겨울은 유난히 밤이 더 추웠다. 문제는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굉장히 길어졌다는 것이었다. 밤과 새벽의 경계도 불분명했다. 지긋지긋한 추위, 지겨운 밤, 무시무시한 추위였다. 이번 겨울은 어찌 된 게 눈 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리는 통에 기온이 올라갔다 하면, 뚝뚝 떨어지기 일쑤였다. 콧구멍을 간질이는 기침을 뱉어내며 주위를 살폈다. 휘이잉 바람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도로에 떨어져 있던 쓰레기와 과자 봉지가 사납게 휘날렸다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궁창에서 썩은 음식물 냄새가 풍겨왔다.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나이트클럽 팸플릿 종이가 발밑까지 날아왔다. <오빠들, 오늘 알지?>라고 써진 커다란 문구 앞에 쭉빵걸들이 풍만한 가슴을 오므리고 윙크를 하고 있었다. 실리콘 자국이 무성한 가슴엔 보형물이 입체적으로 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노력과 돈으로 얻어낸 호박 덩어리 만 한 가슴을 무심히 내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전봇대 밑에 숨어 있던 고양이가 잽싸게 뛰쳐나와 자동차 틈새에 숨어 있는 쥐새끼를 덥석 깨물었다. 모든 게 반복되는 일상의 한 부분들이었다. 도시가 어둠에 쌓여 죽어 있는 새벽에도 여전히 술 취한 사내들의 고함소리와 대한민국 청춘들이 대학에 적응하기 위해 억지로 마신 술을 힘겹게 토악질 해대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대학생들은 왜 다 저 모양일까. 대학 문턱을 밟아 본적이 없는 내 눈엔 학교를 공부하러 갔는지 술 처먹고 위장 구멍내로 갔는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3월이었다. 젊은 놈들이 술을 떡이 되게 처먹고 도로에 오바이트를 뿜어내도 그러려니 하는 달 말이다. 찌르르한 고함소리와 술 취해서 비틀대는 사람이 없다면 서울이, 서울이 아닌 거다. 나는 코트를 바짝 여미고 가게 정문을 돌았다. 뼛속 깊은 곳까지 칼날 같은 바람이 파고들어왔다. 지독한 추위였다. 이대로라면 4월이고 5월이고 계속 춥기만 할 것 같았다. 살얼음 같은 바람을 뚫고 한 걸음, 한걸음 겨우 왔더니 오늘따라 택시 승강장에 택시가 한 대도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콜택시를 불러야 하나. 당장 얼어 죽겠는 판에,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건 무리였다. 다시 가게 정문 앞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텅 비어있던 버스정류장엔 이십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가 짧은 청치마를 입고 다리를 쩍 벌린 채, 바닥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때마침 골목에서 빠져나온 아저씨들이 여자를 대놓고 훑어봤다. 저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리더니 손바닥 만 한 짧은 치마를 들치며 킬킬댔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 쫒아주고 싶은데 잘못하다 더 심한 변태로 몰리기 십상이고 무엇보다 그들은 네 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꿎은 볼만 긁적거리며 문 앞을 서성댔다. 등 뒤에서 삐걱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돌아섰다. 닫혀 있던 가게 문이 열리고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볼에 확 끼얹어졌다. 김 지만이나 권솔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불쑥 모습을 드러낸 건 박태열씨였다. “ 어라, 자기 아직 안 갔네?” 박태열씨는 친밀하게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옆으로 마주 섰다. 부담스럽게 달라붙는 그를 피해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다시 한 발작 쫒아왔다. “ 누구 기다려?” “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 하긴 자기 친구들은 다 집에 간 거 같은데 기다릴 사람이 없겠구나.” 나는 새치름하게 박태열씨를 올려다봤다. “ 다 갔다구요?” “ 두 시간 전이었나, 복귀가 자기랑 자기 친구들 다 퇴근하라고 했었잖아. 못 들었나.” ……복귀라. 얼굴만 봐서는 사장이 ‘태열아…….’ 하고 불러야 될 법 한데 박태열씨의 주둥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사장 이름에 그가 무려 한 살이나 더 많은 연장자라는 사실을 퍼뜩 떠올렸다. 알 수없는 나이의 세계라더니 정말 그렇지 않은가. 잠바 속에 파묻혀 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만 원짜리 신권의 거칠거칠한 촉감이 느껴졌다. 혼자가려면 택시비 꽤나 들 텐데 평소보다 돈을 많이 가지고 나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 그럼 저도 이만 가봐야겠네요. 그 쪽도 안녕히 가세요.” 돌아서려는 나를 박태열씨가 덥석 붙잡았다. 억지로 몸을 돌려세우는 강한 힘에 나는 박태열씨만 뚫어져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자기야, 우리 저어기 가서 술 한 잔 할까.” 나는 무시하는 태도로 툴툴댔다. “ 싫은데요. 내가 왜 그 쪽이랑 술을 먹어요.” 내 매몰찬 대답에 박태열씨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 나랑 술 먹으면 술 맛 떨어져서 죽고 싶은 거구나. 아아, 그랬던 거였어.” 박태열씨는 이제 어줍지 않은 자학까지 하고 덤벼들었다. 그는 나를 난처하게 만들어 목표한 바를 은근슬쩍 이루려는지 목적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되레 짜증만 났다. “ 나는 술 취해서 해롱해롱 대는 사람 뒤치다꺼리 하고 싶지 않은데요.” 박태열가 손을 허리에 바치고 하늘을 보며 ‘하하하…….’ 웃었다. 아주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웃고 있는데 휑하니 가버리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 나는 그가 다 웃을 때까지만 기다려주기로 했다. 박태열씨는 연신 하하하 대다가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주먹으로 그 손을 휙 걷어냈다. 부루퉁해 있는 내 볼을 누르며 그가 마저 낄낄댔다. “ 자기, 내가 그렇게 밖에 안 보여? 나는 절대 안 취해. 이건 자기한테만 말하는 특급 비밀인데,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에 그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에 또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물 대신 술을 마셔왔거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음주가무에 아주 능통한 집안이지.” “ 안 물어 봤거든요?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구요.” 나는 콧방귀를 드르렁드르렁 꼈다. 뚱한 내 표정에 아랑곳 않고 박태열씨는 ‘아이고 귀여워, 귀여워…….’ 하는 말도 안 되는 감탄사를 정신 나간 놈처럼 쏟아대며 괜히 발을 동동 구르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 제발 관심 좀 가져줘. 우리 영감탱이들이 섭섭해서 무덤 뛰쳐나올지도 몰라.” 그는 대단한 비밀인양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요망하게 주위를 훑어봤다. 그리고 나선 한다는 말이 ‘아무리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지만 적당히 튕기는 것도 나쁘진 않지…….’ 했다. 얼씨구. 이젠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너 혼자 다해라. 나는 저녁에 너무 많이 자른 손톱 때문에 욱신거리는 손끝을 바라보며 뚱하게 대꾸했다. “ 박태열씨는 고주망태 집안이 퍽이나 자랑스러운 모양이군요.” 내 대답에 박태열씨가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풍기문란으로 경찰에 신고 당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기가 질려 그를 올려다봤다. 제발 그 주둥이 좀 닥쳐 하는 눈빛이었는데 박태열씨는 눈을 치켜뜨니 귀엽다는 둥, 눈동자가 커서 사랑스럽다는 둥 작정하고 개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러던 그가 돌연 웃음을 뚝 멈추었다. 주춤 물러서는 나를 붙잡고 내 양쪽 귀를 아프지 않게 죽죽 잡아당겼다. “ 자기는 뚱하게 대답할 때 얼마나 귀여운 줄 알아?” 이제 완전히 맛이 갔구나. 박태열씨의 야릇한 미소가 심히 부담스러웠다. “ 술 안 마셔도 될 것 같은데요? 벌써 취한 거 같네요.” “ 노! 노! 전혀! 나 완전 멀쩡해.” 나는 박태열씨의 볼에 검지를 콕 찍었다 떼어냈다. 박태열씨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내려 보자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검지를 혀끝에 콕콕 찍었다. “ 확실히 맛이 갔네요.” “ 응. 자기 때문에 완전 맛이 가버렸어. 너의 귀여움 속에 헤어 나올 수 없을 거 같아. 나 이제 장가는 다 갔다! 다 자기 때문이라구우. 빨리 책임져! 책임져!” “ …….” “ 밥 먹을 때도 자기 생각, 일 할 때도 자기 생각, 술 먹을 때도 자기 생각, 잠 잘 때도 자기 생각. 심지어 딸 칠 때도 자기 생각이 난단 말이야. 나 이제 어떡해! 이대로 있다간 자기 아니면 내 삶은 옥수수가 아예 안 설지도 몰라.” “ …….” “ 그럼 남자로서 생명력은 완전히 끝난다고 봐야겠지. 검은 양복 입은 앙드레 김, 핵무기 없는 김정일 신세라고 보면 돼. 그렇게 되기 전에 자기가 나를 잘 보듬어줘 봐.” 혹시나 했던 생각이 그의 마지막 말로 인해 확실해졌다. 나는 미친놈을 단 한번 만에 알아본 내 자신이 못내 자랑스러워 졌다. 번지르르한 옷과 신발로 가린다고 해봤자 나사 풀린 놈들의 타의 초종을 불허하는 사고력과 기상천외한 말투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속으로 애도의 묵념을 올리려는 찰나, 박태열씨가 내 어깨를 잡아채선 앞으로 죽 끌고 갔다. “ 아! 왜 이러세요. 놓고 말해요!” 화를 내봤자 그의 눈가엔 웃음기까지 번지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 가자.” 그는 내 손을 덥석 잡아 호주머니 속에 쑥 집어넣었다. “ 이 시간에 가긴 어딜 가요.” 끌려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빡 주고 혼 심의 힘을 다해 버텼다. 발가락을 땅바닥에 밀착시키고 이를 앙다물었지만 내가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의지와 다르게 몸은 박 태열씨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지긋지긋하게 힘없는 나 자신을 나무라야 할 판이었다. 나는 일순 힘을 쭉 빼버렸다. 박태열씨가 힐끔 나를 돌아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싱글벙글댔다. “ 어딜 가는지 말이라도 하고 가요. 참고로 이 시간에 술집은 거의 마감하고 있을 테니 괜히 헛수고 하지 마시구요.” “ 24시간 내내 문을 닫지 않은 술집이 하나 있긴 한데…….” 나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신중해서 나쁠 거 없지 않나. “ 말도 안 돼. 그런 데가 어디 있는데요?” “ 궁금해? 자기, 제발 궁금하다고 말해줘.” 놈이 지랄하고 달려들기 전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다. 박태열씨는 생각보다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는 내게 일 년 열두 달 연구한 끝에 만들어냈을 것 같은 엽기 발랄한 표정을 지으며 설레발을 쳤다. “ 역시 내 자기다. 난 네가 궁금해 할 줄 알았다니까. 자, 갑시다!” “ 땅 안 무너지니까 앉아도 돼.” " 그러니까 나보고 그 쪽처럼 거기에 앉으라, 이 말인 거죠? 지금. 내 말 맞아요? “ “ 응, 제발 앉아봐. 자꾸 올려다보려니까 목 아파 죽겠어. 그리고 보기엔 이래도 의외로 넓어.” 박태열씨는 주춤주춤 일어나 넓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 옆자리에 어지럽혀져 있던 소주병과 오징어, 복숭아 통조림, 땅콩껍질 등을 열심히 치웠다. 웬만하면 노력을 높이 쳐서 ‘허허, 그거 참 깨끗하네요.’ 따위의 칭찬을 해주고 싶다만 이건 좀 많이 아니지 싶다. “ 안 불편하세요?” “ 나는 괜찮은데……, 왜. 자기가 보기엔 내가 그렇게 불편해 보여?” “ 그다지 편해 보이지만은 않은데요.” 박태열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왜 그러지? 나는 이 자세가 좋은데.” 트렁크 바닥에 신문을 깔고 퍼질러 앉아선 닥치는 대로 주둥이에 술을 때려 붓고 있는 놈이 할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가만히 서있는 나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 다리 안 아파? 솔직히 말해 봐, 아프지? 아파 죽겠지? 빨리 내 옆에 와서 앉으라니까 그러네.”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부으며 박태열씨는 옆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말이 빈자리지 다섯 살 난 어린애 궁둥짝 하나도 겨우 들어갈 만큼 틈이 좁았다. 허나 문제는 내가 앉나, 마나가 아니었다. 다리 아픈 건 고사하고 새벽 다섯 시가 넘는 이런 야심한 시각에 기껏 한강까지 차 끌고 와서 트렁크에서 앉아서 술을 마신다는 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못됐다. 물론, 여름이면 더우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었다. 그것도 연일 주룩주룩 내리는 비 때문에 기온이 축축 꺼진 한 겨울 말이다. 혹시나 보는 사람이 있을까 주위를 살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간혹 아침운동을 하러 나온 아저씨들이 이상한 눈으로 힐끔거리며 지나갈 뿐, 새벽의 한강은 적막할 만큼 한산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도저히 맨 정신으론 박태열씨와 트렁크에 마주앉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박태열씨가 소주 한 병을 다 먹을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더니 다리가 욱신욱신했다. “ 여기에 앉아 있으니까 갑자기 지세포가 생각난다.” 머리 위로 복잡 미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태열씨는 어스름하게 변한 새벽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웬일로 조용하고 차분한 그의 말쑥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손에 들린 소주잔과 침이 질질 흐르는 오징어 뒷다리로 인해 썩 좋은 모양새는 나오지는 않았다. “ 지세포? 그건 또 뭔데요?” 박태열씨가 나를 살짝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나는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한번 시원하게 웃어줄까 하다가 자기가 어쩌고저쩌고 지랄할까봐 그만 둬버렸다. 그는 소주를 입안에 탈탈 털어 붓고 빈 종이컵을 콱 구겨 풀밭에 던졌다. “ 거제도에 있는 포구이름이야. 그땐 진짜 세상 걱정 없이 살았는데…….” “ 그런 곳에서도 살았어요? 그 쪽은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이상한 경험 참 많네요.” ‘자기 내가 나이가 많긴 뭐가 많아, 아직 꽃다운 나이라고!’ 이렇게 말하면서 펄쩍펄쩍 날뛸 줄 알았던 박태열씨는 심드렁하니 말이 없었다. “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박태열씨는 고개를 저으며 ‘그럴 리가…….’ 하고 말했다. 허나 말과 다르게 얼굴은 평소보다 가라앉아 보였다. 이 놈, 저 놈 신경 쓰이게 하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오징어 대가리를 푹 찢어 고추장에 열심히 찍어댔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티 나지 않게 몰래 올려다 본 결과, 박태열씨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망설였다. 이윽고 그가 침묵을 깼다. “ 고 3때였나, 아니 스무 살 때였나. 한 달인가 두 달인가 거기서 살았어. 이복희 새끼랑…….” 그가 말을 하다 멈칫했다.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순간 툭 튀어나온 이 복희란 이름에 박태열씨는 지금껏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뜨고 나를 곁눈질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그 모습이 더 부자연스러웠던 모양인지 박태열씨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땀과 피에 푹 젖어있던 복희씨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심장이 뻐근해져왔다. 나는 일부러 장우현과 함께 있는 그의 재수 없는 모습을 억지로 떠올려 보았다. 묵직했던 심장이 평소처럼 빠르게 뛰었다. “ 계속 말해요, 지세포 또 뭐요. 고3이 어쩌고, 스무 살이 어쩌고 하다 말았잖아요.” 목구멍에서 쥐어짜듯 말했다. 박태열씨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 자식이랑 거기서 서울생각 없이, 걱정 없이, 고민 없이 그렇게 살았어. 물론 지금은 추억도 아니고 과거도 아닌 이상한 게 되어 버렸지만…….” 박태열씨는 말을 멈추고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는 굴하지 않고 동강 난 새우깡을 주워 내 입술을 콕콕 찌르며 ‘자기 아……, 아.’ 했다. 나이 값도 못하고 진짜 짜증 지대로였다. 고개를 팩 돌리자, 그는 내 턱을 움켜쥐고 새우깡 먹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찰까,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눅눅한 새우깡 좀 먹어줄까 고민하다 처음으로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박태열씨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동안은 단순히 성격이 유들유들 하다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저 놈은 어딘가 모자랐다. ……이런 덜 떨어진 놈 같으니라고. 완벽하게 목표를 달성한 박태열씨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 트렁크에 앉아서 술 먹는 것도 사실 그 새끼 버릇이었어. 한, 두 번 따라하다 보니까 은근히 재밌더라고. 사람은 떠나가도 추억은 남는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나봐. 그 녀석이 없어도 이건 생각나는 걸 보면 말이야. “ 어쩐지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싶었더니 역시 나였다. 왠지 복희씨라면 출근시간 도로한복판에서도 이러고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힘없이 픽 웃는데, 얼굴이 착 가라앉은 박태열씨가 조급한 한숨을 토해냈다. “ 그래봤자 이젠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이지만.” “ 살날이 며칠 안 남은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아직 서른도 안 됐잖아요. 물론, 내년이면 삼. 십대가 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문 낙담하진 마시구요.” 나는 일부러 삼십대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목뒤가 따끔거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박태열씨가 입술을 실룩이며 웃고 있었다. “ 나이야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리고 나는 애초부터 나이 드는 것에 별 다른 생각이 없어. 밥 많이 먹으면 나이도 같이 먹는 거고, 밥 적게 먹어도 나이는 먹는 거고. 그렇잖아?”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추억이 어쩌고, 기억이 어쩌고 왜 그렇게 폼은 잡는 건데요.” 박태열씨의 눈알 속에 볼썽사나운 애수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눈빛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당혹스러워졌다. 고심한 끝에,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능구렁이가 히죽거리며 못 다한 중얼거림을 시작했다. “ 유통기한처럼 인간관계도 때가 있는 법이지. 녀석과 나는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을 너무 많이 지나쳐 왔어. 그래서 이젠 되돌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돼 버렸지. “ 박태열씨의 목소리는 어느새 축 가라 앉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될까 고민하는 사이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녀석은 나에게 친구 이상의 존재였어. 그건 그 새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벌써 술 취한 걸까……. 살며시 올려다본 박태열씨의 얼굴은 술고래 집안의 아들놈답게 보통 멀쩡한 게 아니었다. 볼따구니와 코끝이 바람 때문에 조금 벌겋게 변한 것 외엔 평상시와 완벽히 똑같았다. 그나마 안심이 됐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자, 박태열씨가 내 정수리를 콕콕 찍으며 ‘난 절대 안취한다니까, 자기.’ 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박태열씨가 알아서 말을 이어나갔다. “ 가끔씩 생각해.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말이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어. 그 새끼나, 나나 서로 굽히고 들어가기엔 지긋지긋하게 대가리가 커버렸거든.” “ …….” “ 근데 참 이상하지. 친구가 밥 먹여 준다고 생각할 나이는 지났는데 무턱대고 서글퍼 질 때가 있어.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없을 때, 특히 더 그래. 술 한 잔 마시고 싶어도 오늘은 어떤 놈이랑 마셔야 되나 고민을 하고 앉는데 그거 참 이상하데. 자기도 그때 기분 참 엿 같지 않나. 아, 자기 주위엔 좋은 친구들이 득실득실해서 잘 모르겠구나.” 나는 손톱에 묻은 고추장을 빨다 순간 멈칫했다. 권 솔, 김 지만, 이 경원 = 좋은 친구?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위에 친구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좋은 친구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며칠 전부터 내 방에 있는 살림살이들이 하나, 둘씩 권솔과 이 경원의 방으로 옮겨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예로 들 수 있겠다. “ 글쎄…….” 나는 뒷말을 질질 끌었다. 박태열씨의 얼굴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 자기,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자고로 귀여운 사람은 호기심이 많은 법이니 자기도 당연히 궁금하겠지?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랬어. 그 녀석은 이렇게 하겠지 싶으면 저렇게 했고, 이거다 싶으면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하는 타입이었어. 그 성격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지. “ 검은 하늘하늘 만큼이나 박태열씨의 목소리는 아득하게 들려왔다. 가까이 있는데 반대로 멀리 있는 거 같기도 했다. 그는 어느새 내가 모르는 추억에 잠겨 있었었다. 박태열씨는 말을 하려다 멈추고 병뚜껑을 열더니 잔디바닥에 소주를 조금 흘려버렸다. 그리고 종이컵 한 가득 술을 부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우선 받아두었다. 잔디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손끝으로 톡 건드리자 물방울이 손등으로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잔디를 말없이 보고 있자, 박태열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운을 갖고 웅웅거렸다. “ 그때 나는 어렸어. 나이만 어린 게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무턱대고 어렸지. 내 수준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 아니다, 조금 예상은 했었는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봤을 땐, 그 새낀 이미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일을 크게 벌인 후였거든.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박태열씨와 그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되는 상황이 못내 짜증스러웠다. 나는 박태열씨처럼 추억에 잠기지도 않았고, 트렁크에 앉아서 소주병을 까고 있을 만큼 술이 고픈 것도 아니었다. 날씨는 충분히 추웠고, 내 기분도 그만큼 차가웠으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 실컷 퍼질러 자고 싶기까지 했다. 집에 간다고 할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사이 박태열씨는 새 종이컵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말을 이어나갔다. “ 큰일 내겠구나 생각은 했다만 낸들 그 시커먼 속을 어떻게 알겠나. 억울한 게 그 새끼 동생들은 그 일로 나만 보면 눈깔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지만 나도 전혀 몰랐단 말이다. 물론 알았다고 해도 모른 척 넘어갔겠지만……” “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요. 말을 좀 알아듣게 하는 게 어때요?” 박태열씨는 빈 소주병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조용히 나를 쳐다봤다. 나 역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뒤이어 들여온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무미건조해 거짓인지, 진실인지 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 몰랐다면 이 기회에 잘 알아두고, 알았다면 한 번 더 듣는다고 나쁠 건 없겠지. 고자질쟁이가 돼서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만, 시작을 했으면 끝은 봐야지.” 박태열씨는 기분이 착 가라앉아 보였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있는 대로 폼 잡고 ‘해장하러 가자, 자기.’ 따위는 아니겠지……. 그는 여전히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살인자야 그 녀석. 살인도 보통 살인이 아니지. 천륜을 어겼거든.” “ 그게 무슨 말……!” “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아버지를 죽였어.”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본능적으로 잔디를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콕콕 찔러댔다. 이슬이 팔목을 적셨다. 박태열씨가 내게 왜 이런 말을 해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은 과도하게 날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 복희씨의 집에 있던 사진들이 퍼뜩 떠올랐다. 그리고 중년의 사내가 기억의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사장과 이복신 군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서 있던 남자. 찌르르한 충격이 척추를 훑고 지나갔다. “ 모르고 있었다는 표정이군. 하긴 자랑도 아닌데 굳이 말했을 리가 없지. 그 녀석 같이 자기 자신을 잘 포장하는 인간은 흔치 않을 거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잔인한 악마근성을 철저하게 숨기는 게 녀석의 최대 장점일거야. “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감추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박태열씨의 목소리는 굉장히 시니컬했지만 그가 은연중에 내 반응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오늘 작정하고 내게 이 복희씨의 과거에 대해 말하려는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확실한 건 복희씨의 과거 따위와 버금가게 박태열씨가 하는 말도 썩 유쾌하게만 들리진 않았다는 것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썩어빠질 새끼. 그러는 지는 엔간히 깨끗한 줄 아나. 이거나 저거나 사람 등 처먹고 살아가다 약한 사람 피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흡혈귀나부랭이들이었다. 내 눈엔 도토리 키 재기 하는 걸로 밖에 안 보였다. 나는 자고로 깡패들을 싫어한다.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 깡패라는 것 자체로도 뱃가죽 땅길 때 까지 실컷 씹어주어도 시원치 않다. 박태열씨는 시큰둥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입술을 꼼지락 거리는 꼴을 보아, 일시정지를 누르고 있던 험담을 다시 시작할 모양이었다. 나는 은근슬쩍 부추겼다. “ 그래서요. 계속 말씀해보시죠, 왜.” 애석하게도 그는 내 빈정거림에 대한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실컷 중얼중얼 거렸다. “ 지금껏 녀석은 한때나마 제일 가까웠던 내가 봤을 때도 소름이 돋을 만큼 앞만 보고 달려갔어. 어머니가 물려주려고 애쓰던 재산도 버리고 그럴 듯한 명분과 허울도 버리고 혼자 힘으로 일어났지. 그런 녀석이 존경스럽기도 했고 반대로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구역질나게 징그럽기도 했어. “ “ 네…….” 살며시 올려다본 박태열씨는 어느새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의 눈동자 깊이 뿌리박힌 심연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붉게 물들었다가 가까스로 차분히 가라앉는 걸 똑똑히 지켜보았다. 보고 있는 내가 다 움찔할 정도였다. “ 그 새끼는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 몰랐어. 과도하게 자신을 맹신하고, 또 맹신했지. 물론 그 결과 타인에 의해 절대 흔들리지 않는 무딘 심장을 가졌겠지만 녀석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어.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을 때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맞아 죽었다고 했을 때도 녀석은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았거든.” “ …….” “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던 새끼가 이제 와서 나를 비난하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해? 정답은 아니라는 거야. 일본에 가있는 동안 전화한통 없는 새끼가 내세울 수 있는 권리가 절대 아닌데도 불구하고 녀석은 무조건 나를 비난하고 있어.” “ 듣자하니 이 복희씨는 참으로 불쌍하고 어지간히 쪽팔리는 사람이네요.” 이 복희씨의 친구 앞에서 그에 대한 영양가 없는 말을 지껄인다는 것은 제일교포 2세가 국사학자들에게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몰상식한 짓거리였다. 그러나 박태열씨는 내가 끝까지 말을 마칠 수 있게 배려해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며 얼마 남지 않은 소주를 병째 꿀꺽꿀꺽 들이켰다. 집안 대대로 물 대신 술을 마셔왔다는 말은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술고래를 넋 놓고 바라보다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 슬퍼도 울지 않는 건, 강해서가 아니라 정작 울고 싶어도 기댈 곳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 마땅한 이유도 없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박태열씨의 검은 눈동자가 정수리부근까지 내려왔다. 뻘쭘함에 못 이겨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만들어 했다. “ 그, 그러니까 내 말은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고 나이 값 못하도록 칭얼거리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니까 자기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 지금 성격이 그 모양, 그 꼴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 겁니다. “ “ 음…….” 박태열씨가 놀란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는 비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연신 ‘음, 음…….’ 소리를 냈다. 그 느긋한 얼굴에 나는 이상한 조바심이 스치는 걸 느꼈다. 급기야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흥분한 목소리 그대로 감정을 담아 고함을 질렀다. “ 네가 뭘 아냐고 묻지 마세요! 난 몰라요. 그 사람도 모르지만 당신도 결코 잘 알진 못해요!” “ 자기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왜 그렇게 흥분을 하는 거야?” “ 내가 언제요! 흥분을 하긴 누가 했다고 그러세요.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 하하, 기가 막혀 말이 다 안 나오네.” 박태열씨는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오징어 뒷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 지금도 흥분하고 있잖아. 아니야?” “ 야, 이 씨발놈아 아니라니까 왜 자꾸 지랄이야! 네가 실컷 얻어터져야 정신을 차릴래!” 순간 나도 모르게 욱해서 꽥꽥 소리를 질러버렸다. 급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박태열씨는 이미 배를 움켜쥐고 자지러지게 웃어대고 있었다. 화를 내고 보니까 솔직히 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가끔가다 그럴 때 있지 않나……. 이정도면 됐다싶어 확신하고 당당히 도둑놈으로 모니까 그제야 돈이 뒷주머니에서 꼬불쳐진 상태로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의 당황스러움. 지금의 내가 딱 그랬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건 이유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나는 흥분했고 그것만으로도 화를 내기엔 충분하단 생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고로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 욕한 건 죄송하긴 한데요. 그 쪽이 자꾸 귀찮게 추궁하니까 그랬어요. 우리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넘어갑시다.” 그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낄낄댔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나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 이 복희는 대단한 장사꾼이야.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하지만 반대로 돈이 되지 않으면 절대 허튼 것에 투자 하지 않아. 사람이든 주식이든 사업이든 그 룰은 녀석에게 절대적이야. “ 또 그 얘기냐……. 술 취한 것 같지도 않은데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지루했다. 고개를 돌리고 박태열씨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품을 찍찍 했다. “ 하지만 녀석의 절대적인 룰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어. 그 새끼가 알면 펄쩍 뛰고 달려들겠지만 귀신은 속여도 절대 내 눈은 못 속여. 확실히 요새 들어 이상해졌어.” 룰이 조금씩 흔들린다고? 무엇 때문에? 왜? 아니지, 그 이유가 뭘까. 절대 불변의 법칙처럼 올곧게 정신병자 같은 이 복희씨가 무슨 이유……. “ 그 모든 게 너 때문이다.” 나는 감자 칩을 집기 위해 손을 뻗다 그대로 멈칫했다. 나, 나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허무맹랑한 개소리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디서 이것들이 단체로 생 연기를 펼치고 지랄이야. 나는 원망가득한 눈으로 박태열씨를 정신없이 야렸다. 그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못 믿겠어? 하긴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으니까.” 나는 딱 잘라 말했다. “ 못 믿겠다는 게 아니고 사실이 아니니까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박태열씨가 돌연 얼굴을 굳혔다. 짐캐리가 따로 없었다. “ 투자한 금액 이상을 뽑을 수 있는 것에만 돈을 쓰는 새끼가 네 이름으로 닥치는 대로 땅하고 건물을 사고 있는데도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아 보여?” “ ……!!” “ 그것도 넉 달 전부터 말이다.” 넉 달 전? 넉 달 전이라면 그를 만나기 전이었다. 묵직했던 심장이 경박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저 놈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이 복희씨가 나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담 악당 이 복희씨가 장 우현 그 불여우 같은 년이랑 쿵짝해서 날 속인 건 다 무어란 말인가. 돌연 갑작스러운 반전으로 내게 닥친 이 씨발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 믿, 믿을 수 없어. 말도 안 돼요! 이 복희씨가 나한테 뭐 하러 그런 큰돈을 쓰겠어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박태열씨가 여유로운 미소를 던졌다. “ 우리 애들이 세 번이나 확인한 끝에 알아낸 거니까 더 이상의 의심은 나를 밉보이는 거야. 그리고 자기에겐 그 새끼가 왜 그랬는지를 궁금해 하는 쪽이 훨씬 생산적일 텐데." 박태열씨가 밤색 코트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달칵달칵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장난을 치던 그가 힐끔 나를 올려다보곤 피식거렸다. 저 인간은 당황해 하는 내 반응을 무지하게 재밌어 하고 있었다. 성질 같았으면 입에 물린 담배를 분질러 버리고 ‘뭡니까, 계속 말하십시오!’ 하고 개지랄을 떨고 싶었지만 연신 무게를 잡아대는 통에 차마 그렇게 하진 못하고 열심히 발만 동동 굴렀다. 그는 꼴랑 담배 하나를 느리다 못해 사람 애간장탈 정도로 굼뜨게 다 피우고 나서야 여유로움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를 내게 들려주었다. “ 이복희가 자기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자기도 짐작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이상하네. 나는 그렇게 느꼈는데.” “ 에?” 뜻하지 않게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박태열씨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이왕 놀랜 거 아주 뒤로 자빠져지게 만들어야지. 예전에 한번 가봤던 그 오피스텔 역시 자기 이름이었어. 어때, 이쯤 되면 슬슬 재밌어 지지 않아? “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걸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냔 말이야! 모르겠다. 아, 정말 모르겠어. 나는 머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 여기까지다.” 주위가 어두워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박태열씨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내게 향해 있다는 것만은 뚜렷하게 느껴졌다. “ 내가 그 녀석 친구로서 자기한테 가르쳐줄 수 있는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박태열씨는 트렁크에서 훌쩍 뛰어내려 내 옆에 주저앉았다. 그가 부담스럽게 나를 빤히 쳐다봤다. “ 내가 언제 의리 같은 거 키웠다고 하, 웃기지도 않아.” 그는 자신에게 말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라? 이마에 축축한 무언가가 바짝 들러붙었다. 돌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알이 시큰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눈꺼풀 위로 옮겨지더니 미끈미끈한 혀끝이 콧등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그림자를 밀쳐냈다. 그러나 그림자에서 불쑥 팔이 뛰쳐나와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허리를 틀어막고 가슴을 끌어안았다. “ 자기가 과거 따위에 얽매여 녀석을 동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녀석은 그럴 정도로 나약하지 않아. “ “ 하아, 숨 막혀요. 제발 떨어져…….” “ 왜에, 나는 이 자세가 제일 좋은데? 근데 자기 왜 이렇게 말랐냐. 보기엔 토실토실 해 보이는데 안아보니까 뼈 밖에 안 만져지잖아. 아, 씨발. 가슴이 좆나 찢어질 거 같아. 나를 좀 더 일찍 만났으면 뼈도 튼튼, 살도 포동포동 올랐겠지. 미안해. 백마 탄 왕자가 백마를 잃어버려서 좀 늦게 나타났어. 이해해줘.” 맥이 딱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쌓아온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쏟아내는 너구리 앞에 혼자서 고독을 씹어봤자 안하느니 못할 것 같아 조용히 눈만 흘겼다. 박태열씨는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듣기 싫은 말만 감쪽같이 딱딱 꼬집어서 뱉어냈다. “ 왕자들이 게을러 터져서 자기 할일 다 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공주들이랑 놀 거 다 논 다음에 정신 차려서는 신발을 찾네, 공주를 구하네 마네 하는 통에 신데렐라랑 백설 공주가 그렇게 다들 호리호리 한 거야. 하루 종일 계모 뒤치다꺼리하고 하는 일 없이 만날 처자빠져 잠만 자는데 살이 안 빠지겠어? 하지만 결과는 다 좋았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너무 늦게 나타났다고 미워하진 말아줘요. 내 사랑 계진공주우.” “ 아, 졸라 어이없어…….” “ 어이없는 게 아니야. 이를테면 자기 친구들이 계모와 새 언니고 이 복희 그 새끼가 독 사과 같은 존재라 이 말씀이야. 나야 물론 왕자님이지. 오매불망하던 왕자와 공주가 만났으니 이제 조연들은 퇴장할 시간이야.” 태열씨는 내 허벅지를 주물럭대며 음침하게 말했다. 아주 혼자 동화 한 편을 쓰고 있네……. 나는 뿡뿡 콧방귀를 꼈다. 나는 은밀한 곳을 파고드는 요망한 손가락을 거칠게 떼어내며 웩웩 구역질 하는 시늉을 했다. 순순히 떨어져 나간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늘어지게 달라붙었다. 빌어먹을 철면피 새끼를 피해 몸을 팩 돌렸다. 박태열씨는 돌아간 내 어깨에 발톱에 낀 때처럼 기생하려고 달려들었다. “ 뼈가 없어요? 말미잘도 아니고 제발 좀 빳빳하게 앉아 있어요! 왜 자꾸 달라붙고 염병이에요! 짜증나 돌아버리겠네 진짜.” 이쯤 되면 듣는 척이라고 할 것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그는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고 내 허리를 바짝 끌어안은 채, 등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 자기, 나는 무서운 사람이야. 그리고 거짓말을 굉장히 싫어하는 놈이지. 자긴 분명 내게 사귀자고 했어.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말만은 잊으면 안 될 거야.” 나는 거칠게 그의 몸을 떼어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으려는데 발목을 위로 휙 들어 올려졌다. 박태열씨는 끈질기게 버티는 내 발목을 질질 끌어당겨 억지로 시선을 맞추며 더없이 상냥하게 말했다. “ 자기만은 나를 화나게 하면 안 된단 말이야. 내가 왕자긴 해도 좋은 남자는 아니니까.”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쩍 벌렸다. 대문을 열다 말고 폭격기를 맞은 듯한 마당 안의 모습에 한 발자국 물러났다. 답답하게 조이고 있던 남방 단추가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목덜미에 빽빽이 새겨진 칼라 자국을 문질렀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입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주위를 살폈다. 저 미친 새끼들은 고작 하루를 평범하게 지나가질 못 하는 구나. 원래부터 썩 좋았다고 표현할 수 없는 마당 꼴이 가관이 아니었다. 전쟁 통 저리가라였다. 화면이 찌그러진 티브이와 난쟁이 똥자루 만 한 냉장고가 엎어져 안에 있던 밑반찬과 음식물이 줄줄 새어나오는 모습에 나는 쯧쯧 혀를 차며 대문을 마저 열어 젖혔다. 몇 걸음 앞으로 나오다 그대로 멈춰 섰다. 지금까지 본 것 시작에 불과했다. 기가 막혔다. 주인집 할머니의 보물1호인 몇 대 되지도 않은 장독대가 일제히 야구방망이 모양으로 깨져 간장과 묵은지가 마당에 퍼질러져 있었다. 정신없게 어질러진 독들 사이로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할 것 없이 자잘한 살림살이 들이 엉켜서 널브러져 있었다. 찌그러진 냄비와 뚜껑이 깨진 사기그릇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짝퉁 꼬리표를 떼고 있는 유일한 밥통은 귀퉁이가 형제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부서져 있었으며권솔이 번 겨울에 할부로 산 옥장 판은 촘촘히 박혀 있던 옥돌들이 듬성듬성 빠져나와 바닥이 아예 걸레가 되어선 마당 구속에 처박혀 있었다. 청소기는 흡사 싸리 빗자루처럼 변해 내가 걷어차지 않으면 급기야 하늘로 날아갈 참이었다. 솜 터진 겨울이불만이 힘겹게 마당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오래되어 누런 때 묻은 베개에 눌려 물에 젖은 널빤지처럼 벌러덩 누워 가뜩이나 정신없는 마당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지고 찢어지고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막 되먹은 꼴을 봐도 예전처럼 죽을 똥 쌀 정도로 놀랍진 않았다. 뭐 하루 이틀이야 놀래고 말고 할 것이 있지 무슨 일이든 십년 째 접어들면 놀랠 일도 담담해지고 귀찮아 지는 법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 특별히 심하다 싶은데……. 처음엔 이놈들이 단순한 사고를 쳤나 싶었던 생각도 혀를 내두를 만 한 사태 앞에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인 할머니 방부터 살폈다. 불은 꺼져 있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할머니가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딜 나간건지 모르겠지만 불이 꺼져 있단 것 자체만으로 일단은 안심이었다. 깨진 그릇들 사이사이를 조심히 밟으며 내 방으로 걸어갔다. “ ……헉!” 왜 진작 못 봤을까. 어두컴컴한 귀퉁이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몸을 숨기고 있는 인간 쥐새끼! 육이오 피난 온 것 같은 마당 귀퉁이에 숨어 권솔의 방, 창문어딘가를 슬쩍슬쩍 곁눈질 하며 기계적인 신들린 손놀림으로 자잘한 살림도구들을 챙기고 있는 경원이 새끼를 발견했다. 듣지 않고 더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권솔이 사다놓은 자잘한 살림도구를 챙기려는 녀석의 얄팍한 속셈을. 나는 녀석 앞으로 다가갔다. 때마침 권솔의 방에서 퍽-퍽-하는 주먹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향을 바꿔 권솔의 창문 앞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손때가 묻은 창문 양쪽엔 사람 손바닥 만 한 크기로 유리가 처절 하리만큼 잘게 깨부숴져 있었다. 창문의 낀 유리는 새시로 된 이중문이라 특별히 두꺼워 깨기도 힘들었을 텐데 정말 징그럽도록 놀라운 힘이다. 자잘하게 떨어진 유리조각에 핏물이 맺혀 있었다. 피를 보자 문득 불안해졌다. 창문을 두드렸다.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계속 두드렸지만 퍽-퍽 하는 주먹질 소리만 커질 뿐 그 소리 외엔 조용했다. 싸우는 걸까……. 나는 구멍 난 틈으로 방안을 살폈다. 얼룩이 묻은 커튼에 가려져 생각보다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릿한 두 인영이 엎치락뒤치락 하며 주먹질을 하는 모습만 언뜻 그림자로 비쳤다. 까치발을 세워 한참을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 김 지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계진아, 쥐새끼처럼 심히 보기 안 좋다. 빨리 이리 오너라.” 고개를 돌렸다. 지만이 새끼는 내 방 앞마루에 앉아서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어른 팔뚝만한 당근을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며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고 있었다. 망설이다 녀석에게 다가갔다. 놈은 내가 옆에 앉을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 앉으며 빈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김 지만이 개뼈다귀 모양으로 변한 당근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 맛있다. 맛 좀 볼래?”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놈은 ‘맛있는데 왜 싫데……. ‘ 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네 침이 묻었기 때문이야. ‘ 라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나는 알아서 입 닥치고 있었다. 녀석은 흡사 물어뜯은 개집 같이 변한 마당을 심드렁하게 훑어보며 경이로울 정도로 태평한 얼굴로 말했다. “ 밥은 먹었냐?”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당근 껍질을 앞니로 싹싹 긁어서 걸쭉한 침과 함께 신발장 앞으로 퉤 뱉어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주인 집 할머니 방을 힐끔거리며 귀퉁이가 찢어진 슬리퍼 끝으로 당근 껍질을 열심히 비벼서 흐트러뜨렸다. “ 우린 20분 전에 통닭 먹었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 응, 졸라 잘했다.” 녀석은 몇 번 씹지도 않은 당근을 평범한 사람들의 몇 배에 달하는 고 성능 위장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 네 것도 남겼어. 부엌 가서 봐봐.”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가득 담아 녀석을 훑었다. “ 정말?” “ 응, 날개 하나랑.” 녀석은 당근 귀퉁이를 씹다 말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양 눈을 빛냈다. “ 목도 있어.” 열심히 노력해서 찾아야지만 살이 붙어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부위들을 남겨줬구나. 나는 화재를 바꾸기로 했다. 쑥대밭으로 변한 마당을 둘러보며 권솔의 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 무슨 일 있었어? 마당이 엉망이잖아. 권솔 방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도 나고.” 지만이 놈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근을 좌우로 요란스럽게 흔들었다. “ 이 복신이가 선배새끼를 제대로 엎어뜨렸거든.” “ 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엎어뜨렸다고? 엎어뜨렸다? 엎어뜨렸다고! 녀석이 말하는 엎어뜨렸다는 의미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그러나 김 지만의 야릇한 눈빛으로 봤을 때 내가 생각하는 두 가지 이유 중 후자에 가깝다……. “ 정말? 이 복신이가 선배를 깔았단 말이야?” 나는 목이 터져라 펑펑 악을 질렀다. 김 지만은 당근을 입에 물고 감탄스럽단 얼굴로 짝짝 박수를 쳤다. “ 아이고 예쁜 내 새끼. 언제 이렇게 다 커서 눈치가 늘었을까?” “ 야!” 나는 주의를 줬다. 녀석이 당근으로 내 배를 꾹꾹 누르며 낄낄댔다. “ 개집아. 무슨 질문이 그 따위냐. 바람피우는데 이유가 어디 있냐. 뭐, 그냥 피우고 싶어서 폈겠지.” 나는 킹콩처럼 가슴을 팍팍 때렸다. 당근 귀퉁이를 아작아작 씹어 먹고 있던 놈이 그제야 날 진지하게 쳐다봤다. “ 바람이라잖아! 그냥이란 게 어디 있어! 이유를 들어봐야지!!” 녀석은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나는 울컥했다. “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어서……” “ 사정? 참나,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처음 듣네. 바람피우는 건 원래 이유라는 게 없다니까 그러시네.” “ 그래도…….” 나는 얼버무렸다. 김 지만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 넌 무슨 사정 때문에 다른 놈하고 뒹굴고 그러냐? 아니잖아. 굳이 이유를 따지라면 꼴려서 그랬겠지. 꼴리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네 일 아니라고 아주 태평하구나. ‘네가 장미 놈하고 경원이 일을 알고 나서도 이런 식으로 말할지 아주 기대가 된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바람이란 단어에 눈에 띄게 굳어져서는 들고 있던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떨어진지도 모르고 혼이 나가 있는 이 경원이 보였기에 나는 주둥이에 가까스로 지퍼를 채웠다. 문득 뒤통수가 따가워 고개를 돌렸다. 이 경원이 뚫어져라 나를 야리고 있었다. 나는 한심하단 눈빛을 졸라게 때리며 끌끌 혀를 찼다. 그러자 녀석은 언제 주눅 들었냐 싶게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검지를 주둥이에 갖다 대고는 ‘죽기 싫으면 닥쳐라…….’ 하고 입술로만 중얼댔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협박이냐! 나는 까불지 말라는 뜻으로 열심히 눈알을 부라렸다. 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검지를 재빨리 주먹으로 바꿔 나를 정신없이 패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제야 활짝 웃어줬다. 녀석은 내 표정을 재차 확인한 뒤에야 권솔의 살림살이를 자기네 부엌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게 바로 오리지널 굴욕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자고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 번 깊이 깨우쳤다. 애인이 순수한 감정을 이용해 열심히 박을 탄지도 모르고 당근 꼭지까지 씹어 먹고 있는 김 지만이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 우리 내기하자. 나는 이 복신한테 만원.”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녀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 권솔한테 아무도 안 걸면 재미없으니까 계진아, 너는 권솔한테 걸어! 각시야 너는?” 경원이 놈이 찌그러진 냄비를 간단한 손힘만으로 곧게 펴서 땅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 난 권솔. 그 맹랑한 년이 은근히 앙칼진 맛이 있잖아, 물오른 도둑고양이처럼! 이 복신은 대가리 상태처럼 하는 짓이 영 미덥지 않아. “ 지만이 놈이 고개를 흔들며 코웃음을 쳤다. “ 마누라. 난 네가 복신이 주먹 쓰는 걸 본 다음에도 그런 말을 한다면 정말 해줄 말이 없다.” 경원이 새끼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바꿨다. “ 그래도 네 만원은 내꺼야.” 지만이 녀석이 울상을 지었다. “ 난 네가 왜 그 소리 안하나 했어.” 놈은 내 배에 고개를 푹 파묻고 어깨를 심각하게 들썩거렸다. 우는 척인지 웃는 건지 애매했다. 놈이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뱃가죽이 땅기는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바짝 대가리를 치켜든 놈이 열심히 씨불였다. “ 너희들 잘 들어. 과수원 집 외아들로 어렸을 때 남부럽지 않게 살던 김 지만이란 놈이 이제는 완전 몰락해서 손님이 피다가 버리고 간 장초를 주워 폈다는 사실에 너희들 뭐 느끼는 거 없냐. “ 경원이 놈이 보자기 끈을 묶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 느끼는 거? 진심으로 네가 지랄한다고 느꼈다.” 지만이 놈이 경원이 녀석 말에 급 실망을 하고 내게 시선을 보냈다. 방금 이 새끼가 뭐라고 했더라. 과수원 집 외아들?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나는 고개를 쳐드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녀석에게 질문을 쏘아댔다. “ 그 과수원 너희 아버지가 노름 때문에 너 고등학교 때 다 날린 거 아니었어?” 놈이 고개를 쳐들고 항의하듯이 말했다. “ 그래도 배나무 두 개는 남았어!” 나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 나무 썩어서 네가 종이 공장에 헐값에 팔았잖아. 그 돈 보태서 우리 제주도 놀러 간 다음에 소매치기 당하고 이 경원이랑 나랑 배탈 나고 배 멀리하고, 졸라 완전 대박쳤지. 그것도 기억 안 나냐?” 녀석은 눈꺼풀을 실룩이다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 그래도 집은 남아 있잖아. 물론 내 명의는 아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했다. “ 이상하네. 그 집 너희 어머니가 제비한테 걸려서 차 사주고 옷 사준다고 날렸잖아. 아니야?” 급기야 지만이 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 그래도 우리 집에 있는 개가 얼마나 비싼 건지 알…….”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지만아. 그 개 복날에 보신탕집에 팔았잖아. 그 돈으로 네가 자장면 사줬잖아. 그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할 셈이야?” 마지막 내 말에 경원이 놈이 냄비를 줍다말고 바닥에 대굴대굴 구르며 자지러지게 웃어 댔다. 그러나 지만이 놈은 완벽한 울상, 진상, 개상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웃음보가 터진 이경원이와 날 뚫어지게 번갈아 보며 뭔가 더 내세울 만한 것이 남았나 곰곰이 생각하더니 끝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자 마지막 필살기 고함으로 바닥까지 추락한 명예를 단숨에 끌어올리려고 발버둥을 쳤다. “ 김 계진!! 넌 나한테만 너무 가혹한 거 같아!” 그거야 내 인생에서 네가 제일 만만하니까 그렇지……. 나는 억지로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미안. 대신 권솔한테 만 원 걸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산뜻한 표정을 지었다. 봄나물과 무쳐먹고 싶을 만큼 내 딴에는 귀여운 표정이라 생각했지만 이 경원에게서 당장 찌그러진 냄비가 날아들었다. 주먹으로 가볍게 쳐냈다. 워낙 반복되는 일이라 손과 발이 의도치 않게 불쑥불쑥 잘도 튀어 나왔다. 그 사이 김 지만 새끼는 삐짐이 완전히 누그러져 경솔하게 낄낄대며 경원이 놈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놈의 단순한 인간의 표본이었다. 저러니까 내가 만만하지……. 녀석은 이 경원에게 열심히 속닥거리다 시들시들한 사과하나를 꺼내들고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 바람을 피워도 권솔이 피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의외다 싶어.” 놈을 사과를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 소리가 아니라 냉장고에 오래되어 그랬는지 시들시들한 사과에선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열심히 먹다 혼자 먹기 그랬는지 내 주둥이에 사과를 쑥 내밀었다. 진득한 침이 고여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녀석은 계속해서 칭얼거리며 내 주둥이에 사과를 드밀었다.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눈을 뜨면 사과를 집어 던지고 싶을 것만 같았다. 놈이 안 볼 때 살짝 뱉어 내려 했지만 김 지만은 볼록 튀어나온 내 볼을 쿡쿡 누르며 즐거워했다. 경원이 놈이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며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지만아. 너는 이 경원이가 바람나면 어쩔 거냐?” 나는 악당처럼 실실 쪼갰다. 김 지만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놈의 하마 같은 주둥이에 사과가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 우리 색시가 바람을?” 김 지만 뒤에 사색이 되어 있는 이 경원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놈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거 참 쌤통이었다. 나는 하얗게 질린 이 경원의 얼굴을 좀 더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 응, 바람.” 지만이 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경원이 놈을 돌아봤다. 이 경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싸늘한 눈동자만은 열심히 나를 야리고 있었다. 저 따위 천박한 째림은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이 경원의 모가지를 짤짤 흔들며 좀 더 신나게 가지고 놀 권리가 있었다. 보란 듯이 ‘하하하…….’ 웃었다. 김 지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글쎄.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 왜, 왜! 빨리 생각해봐. 생각한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 자, 친구 이제부터 생각해보시게!” 나는 이제 대놓고 부추겼다. 순진한 김 지만은 알아서 넘어왔다. “ 뭐, 한 두 번은 봐주지 있지 않을까 싶어.” 이 경원보다 놀란 거 오히려 나였다. 나는 기겁을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이런 미친놈! 봐주긴 뭘 봐줘! 네가 이렇게 나오니까 이 경원이가 하루가 다르게 기고만장해 지는 거라고! 이 병신 머저리야!” 화낸 사람이 오히려 민망하도록 김 지만에게선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 경원의 굳어 있는 입 꼬리가 슬슬 올라가고 있었다. 녀석의 웃는 모습에 똥줄이 바짝 바짝 올랐다. “ 다시 생각해봐. 바람이라고! 바람! 정말 봐줄 거야?” “ 단순히 잠만 잔 정도라면 한두 번쯤은 모른 척 할 거 같은데.” 급기야 김 지만은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우리 색시가 다른 놈이랑 거기가 닳아질 정도로 뒹굴어도 나랑 하는 것만큼 좋진 않을 거야.” 놈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더니 놈이 그 짝이었다. " 사랑은 의무감이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녀석을 향해 애도의 눈빛을 보냈다. 놈이 나를 은밀하게 바라보며 키들키들 댔다. “ 물론 자신감 때문에 바람피우는 애인을 용서할 새끼는 많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저 새끼가 날로 씹어 먹을 수도 있을 만큼 좋다. 그래서 한두 번 바람피웠단 이유를 빌미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 실수는 누구나 있는 법이지. 저 녀석은 내가 정말 모르고 있다고 생각 하지만 뭐 그것도 썩 나쁘진 않아. 나름대로 잔 머리 굴리고 있는 게 귀엽지 않냐. “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은 설마! 설마. 아오, 이런 제기랄! 눈을 깜빡이며 애써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눈병 걸린 놈처럼 눈꺼풀만 실룩였다.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이제 눈에 띄게 불편한 얼굴로 과도하게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을 터다.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 지만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자기가 성인군자라도 된 냥 푸근한 미소를 짓고 나를 내려다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 용쓴다. 너무 그러지 마. 보고 있기 미안해지잖아.” 웃고 있는 김 지만의 얼굴이 이렇게 두렵게 느껴진 적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녀석은 경원이 놈을 의식해서 인지 잘 들리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에이, 그럼 나를 너무 무르게 봤네.” 나는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어깨를 축 떨어뜨리고 뻣뻣하게 웃었다. 그러나 결국 시선은 녀석이 아니라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 뭐, 뭘…….” 지만이 놈이 날 대놓고 훑어보더니 피식피식 거렸다. “ 아아, 계진아. 아, 제발 계진아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떡치고 다닌 건 이 경원인데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녀석이 단도직입적으로 죄를 추궁하거나 나를 닦달하는 건 아니었지만 괴롭히는 것 이상으로 바짝바짝 목이 타들어 갔다. 이 시간이후 이 경원에게 당장 달려가 바른대로 이실직고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김 지만이 불쑥 손등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마주치면 안 된다. 녀석의 눈을 본다면 틀림없이 ‘야, 있잖아. 네 애인, 화장실 청소하다 말고 빠구리 깠다…….’ 하고 따발따발 고해바칠 것만 같았다. 나는 열심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날 유심히 바라보면 김 지만이 여유롭게 말했다. “ 이 경원 다른 놈이랑 잤지?” “ ……헉!” 이 멍청아, 헉이라니! 아니, 또는 무슨 소리야! 하고 소리를 질러도 모자랄 판에 아예 대놓고 맞다고 광고를 할 셈이냐. 졸라 거지같은 기분이었다. 입대 일주일 전부터 오들오들 떨다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때와 맞먹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서는 부정도 긍정도 못하고 멍청하게 김 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내 모습에 김 지만은 완벽한 확신을 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마 했는데, 그랬군. 아, 그랬단 말이지…….’ 하고 특유의 질질 끄는 말투로 말했다. 김 지만의 표정은 점점 아리송하게 변했다.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했다. “ 그나저나, 친구.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녀석은 그다지 가려워 보이지도 않는 볼을 긁적이며 일부러 시간을 끌어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이제 보니 김 지만은 노련한 왕 너구리였다. “ 이거 은근히 섭섭하네.” 지만이 놈은 비웃음과 만족감이 깃든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 이제 추리를 한 번 해볼까. 요새 가게 말고는 대부분 집에, 그것도 만날 나랑 붙어 있었으니 밖에서 눈이 맞을 시간이 없었을 테고 그럼 손님 아니면 내가 아는 새끼 중에 하나란 말이네? 그렇지?” 나는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뒤로 넘어갈 만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녀석 또한 내 그런 반응을 모를 리 없었다. 김 지만이 이렇게 똑똑했단 말인가. 이제 보니 셜록 김 지만이 따로 없었다. 녀석은 계속해서 나를 고문할 작정인지 음습하고 한편으로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내 눈을 노골적으로 살피고 있었다. ……너희들 연애 짓거리는 너희둘이서 알아서 하란 말이야! 김 지만이 내게 바짝 다가와 앉았다. 녀석의 등 뒤로 이 경원이 긴장과 초조함으로 바짝 타들어갈 것만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아무리 주먹을 쥐고 나를 째려본다 한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개자식아……!! 한참 이 경원과 되먹지도 않은 눈빛 싸움을 하고 있을 즈음, 김 지만이 귓가에 대고 나른하게 말했다. “ 이 경원은 나 말고 다른 새끼한테는 순순히 바텀을 안 하려고 할 테고 그렇다면 범인은 몇 명으로 간추려 볼 수 있겠지. 손님하고 눈 맞다가 나한테 걸리면 어떻게 될 줄 아는 현명한 새끼니까 되도록 여러 번 마주치고, 빠구리 까도 들통 나지 않을 거라 안심할 새끼일거야.” “ ……!” “ 이거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서 시시하네. 범인은 한 명 밖에 없잖아, 안 그러냐. 계진아?” 녀석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섬뜩했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글, 글쎄…….’ 했다. 허나 내가 듣기에도 전혀 글쎄 답지 않은 말투였다. 오히려 당연하지, 또는 네 말이 맞아. 하는 동조 섞인 목소리로 들렸다. 김 지만은 내 숨통을 바짝바짝 조이는 추리놀이가 퍽이나 재밌는지 껄껄댔다. 놈의 호방한 웃음소리에 경원이 새끼가 눈알을 부라렸다. 나는 초조하게 앉아,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김 지만은 반 토막 난 사과를 추리닝 바지에 세차게 비벼 닦으며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 요새 장미 새끼는 잘 있나 모르겠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죄가 없다. 이 경원이 네가 칠칠맞게 증거들을 흘리고 다녀서 둔한 김 지만이 알아차린 거야……. 라고 말하면 경원이 새끼가 믿어줄까. 씨발. 이 경원이나 나나 이젠 망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김 지만이 미쳐 날뛰기 전에 이 경원이가 먼저 엎드리고 자폭하고 나가는 수밖에……. 나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이 경원을 바라보았다. 놈은 사건의 심각함을 모른 채, 권솔의 꽃무늬 김치 통을 훔쳐 즐거워하고 있었다. 코끝이 찡했다. 마당은 침묵에 잠겼다. 권솔의 방에서 여전한 주먹소리와 장독 뒤에서 쥐새끼의 찍찍거리는 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릴 뿐 조용했다. 주먹소리와 찍찍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체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차라리 아니라고 한 마디 했으면 더 나았을까. 상황을 오히려 내가 더 극악으로 몰고 간 건 아닐까. 사건의 주범 이 경원은 김 지만과 내가 붙어 있지 않자 ‘바람 론’ 이 끝났을 거라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만이 놈의 눈치를 살폈다. 녀석은 삼백 원짜리 라이터를 켰다 껐다하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표정이 지극히 평상시와 다름없이 똑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김 지만은 항상 저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화내는 법이 없고 조용하고 친절하고 부드럽다. 나는 오히려 녀석의 그런 성격에 처음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이런 식이다. 다른 놈들 같았으면 경원이 놈한테 달려가서 물어보거나 화를 냈을 테지만 이 녀석은 김 지만이다. 이놈은 권솔과 다르다. 화내고 성질을 부리지 않는다. 쉽게 주먹을 쓰지 않는다. 힘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눈과 직접적인 자기 일, 하물며 가족과 관련된 어떠한 일에도 나른하고 관심 없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김 지만만큼 완벽하게 감정을 남에게 숨기며 겉으로 조절 할 수 있는 녀석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충분히 화를 내도되는 상황에 오히려 화를 내지 않음으로서 상대방이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녀석의 특기중 하나다. 평소에 경원이 놈이 아무리 김 지만에게 대들고 무시해도 녀석이 이 경원을 ‘봐준다.’ 는 전제가 없었더라면 천하의 악바리 이경원이라도 김 지만에게 무턱대고 대들지는 못했을 것이라 장담한다. 그래서 분에 못 이겨 김 지만이 부순 티브이를 비롯한 전자제품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처음에 녀석을 봤을 땐 단순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이 못지않은 주먹실력도 그렇고 또래 나이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있을 것 같은 덩치와 타의 추정을 불허하는 흉악한 인상도 그랬다. 가끔 길을 가다가 꼬마들을 만나면 녀석은 예뻐서 죽으려고 발광을 하며 ‘이리와.’ 라고 하는데 아기들이 이 자식 얼굴만 보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는 걸 보면 김 지만의 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실로 청송의 사이코라는 별명이 납득이 갔다. 나는 이 녀석이 사람을 패는 모습을 정확히 두 번 본적이 있었다. 한 번은 권솔과 처음으로 만나서 큰 판을 벌였을 때고 두 번째는 나랑 그다지 친하지 않았을 때 내가 경원이 놈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나를 팬 것이 두 번째였다. 부러진 내 팔을 보고 이성을 잃고 왈왈대는 권솔이 두 팔 걷어붙이고 김 지만에게 달라붙는 통에 그럭저럭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지금은 녀석을 알기 때문에 나를 때렸다는 이유를 빌미로 악감정이 남아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경원이 만큼, 혹은 경원이 보다 더 김 지만을 좋아한다. 내가 인간 김 지만을 다시 본 계기는 의외로 사소했다. 녀석은 주먹 좀 쓴다는 놈 치고 학교에서 군림하고 싶은 자잘한 이기심과 십대 특유의 남들 머리위에서 상대를 지휘하며 느끼는 쓸 때 없는 오만함과 편협함이 조금도 없었다. 소문으로 들었을 때에도 김 지만이 주먹을 쓰는 상대는 같은 학교가 아니라 대부분 시답지도 않은 주먹으로 자기들이 최고라도 된 냥 떠들어대는 3류 양아치나 건달들이 많았다. 녀석은 처음부터 그랬다. 자기가 강하다는 이유를 앞세워 남들 앞에 떠벌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되먹지도 않은 자랑거리처럼 늘어놓으며 영웅행세를 하지도 않았다. 놈은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놀라울 만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주먹 쓰는 놈들 통에 끼어 학창시절을 보냈다. 강하다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 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번지르르하게 겉멋들은 놈들을 통해 똑똑히 보고, 들어왔다. 그러나 녀석은 아니었다. 그런 부류들과는 고작 종이 한 장이라도 차이라도 확연한 다름이 있었다. 김 지만은 학교와 인근 근방에 소문이 난 것처럼 사이코도 아니었고 물론 난폭하지도 드세지도 않았다. 놈은 무던했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했으며 마음만 먹으면 셀 수도 있을 만큼 말 수가 적었고 자기가 뜻하는 바가 있더라도 남들 의견이 그렇다면 언제라도 자신의 생각은 버릴 수 있는 인내심과 배려심이 있었다. 녀석은 내 기준에 봤을 땐, 이상적인 강한 남자의 표본 같았다. 끊임없이 주먹질을 하는 권솔과 이 경원은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점들이 녀석을 더 강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잠깐……!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김 지만 그놈 꽤 괜찮은 남자일세 그려, 하고 넘어가겠지만 그건 절대 오해다. 김 지만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고 민감하다 못해 유난히도 집착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아무리 친해도 자기보다 어리면 조금도, 전혀 반말하는 걸 못 참는다는 점이었다. 가끔 학교 후배가 술 처먹고 전화를 해서 ‘지만아…….’ 소리를 했다 치면 당장 술집으로 쳐들어가서 술판을 죽사발로 엎어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 이 놈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한두 살 차이나는 선배에게 죽어도 존댓말을 하지 않는다. 언젠가 날 잡아서 이유를 물었더니 팔십에 죽든 팔십 하나에 죽든 그건 다 노인이 죽었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한두 살 차이가지고 쩨쩨하게 굴고 싶지 않단다. 그럼 넌 왜 후배한테 그렇게 선배대접을 받으려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김 지만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할 말이 없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건 내 인생이니 네가 간섭마라.’ 는 말로 지적능력을 의심케 했다. 그 리곤 한다는 말이 내가 권솔과 이 경원한테는 안 그러면서 자기에게만 너무 꼬집어 물어봤다는 이유로 삐져서는 보름동안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소심함을 선보였다. 등치는 산만한 놈이 삐지는 걸로는 국보급 밴댕이 속을 가지고 있는 놈이 김 지만이었다. 내가 굳이 이런 쓸데없는 말을 길게 하는 건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안 궁금했다면 말고……! 경원이 녀석은 발밑에 쌓아둔 보자기 속에 냄비나 쓸 만한 그릇과 반찬, 과일을 챙겨들고 부엌으로 낑낑대며 들어갔다. 어른 허리만큼 쌓아 오른 잡동사니들을 미루어 봤을 때, 꽤 이런 식으로 옮겼던 것이 확실해졌다. 녀석은 먹을 만한 과일을 냉장고에 쑤셔 넣고 밑반찬은 흰 비닐에 차곡차곡 개어서 살림살이들을 대충 정리하고 다시 부엌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마당에 거치적거리는 스티로폼들을 발로 정신없이 걷어차더니 그런 식으로 해서 없어질 양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지못해 장독에 처 박혀있던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나왔다. 은근히 맹한 이 경원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김 지만이 조용히 침묵을 뚫었다. “ 생각해보면 은근히 신기하지 않아? 바람을 피우고 싶다고 필 수 있는 걸 보면 게이들이 진짜 많은 가봐. “ “ 글쎄. 뭐, 그렇게 되는 건가.” “ 그렇잖아. 더군다나 복신이 새끼는 학교에서 만났다고…….” “ 그건 잘 모르겠다만, 6년 공부해서 대학가 놓고 바람이나 피우고 자빠졌단 말이야? 고거 참 나쁜 놈이네.” 나는 마당을 서성이다 다시 마루에 앉았다. 김 지만이 내 남방단추를 벗겼다. 귀찮아서 내버려두었다. 놈은 허옇게 드러난 목덜미를 떡 주무르듯이 주물럭대며 연신 ‘시원해? 시원해’ 물어왔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등치만큼 힘도 거대한 놈이라 그런지 건성으로 왔다 갔다 거리는 것 같은데도 피로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놈은 지독한 힘에 밀려 마루 끝으로 물러나는 내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엉덩이가 공중에 들어 올려졌다. 녀석은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그 틈 사이에 내 엉덩이를 끼우더니 넓적다리를 내 허리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헉 소리 나게 아팠다. 밀려나진 않겠다만 허리가 쪼그라들 지경이었다. “ 잘 모르겠다고? 왜, 한 번 생각해 봐. 복신이가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상대가 있어야 피우는 거 아니겠어? 바를 간 것도 아니고 이태원을 돌아다는 것도 아니야. 무려 학교에서 상대를 만난 걸 보면 게이들이 많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어? “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러네. 때마침 경원이 녀석이 얼추 마당을 치우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바람이란 단어 앞에 옹졸하게 인상을 구기고 조마조마하던 얼굴은 어느새 오만함과 시건방짐으로 알록달록 물들어 있었다. 이 경원은 이유 없이 지만이 놈의 종아리를 걷어차며 권솔의 방을 가리켰다. “ 게이는 게이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특수한 유전자가 있는 법이지. 그리고 말이야.” 녀석이 뜬금없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가증스러운 낯바닥이었다. 이 경원은 눈만 휘둥그레 뜨고 가만히 있는 김 지만의 아슬아슬한 고무줄 추리닝 바지를 툭툭 튕기더니 망설임 없이 성기를 툭 끄집어냈다. 홍두깨 기둥이 불끈불끈했다. 눈이 썩을 것만 같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김 지만은 빌빌 몸을 꼬며 돌연 허리를 낮추고 낄낄 웃었다. 경원이 놈의 불기둥을 여러 번 주물럭대다 다시 바지 속에 집어넣었다. 김 지만이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 게이는 게이를 눈으로 알아보는 게 아닐 이걸로 알아보는 법이지. 딱 보면 서게 되어 있어. “ 오래사귀면 저런 점이 안 좋겠구나. 경원이 새끼는 벌써부터 불룩하게 튀어나온 지만이 놈의 앞섶을 쓰다듬으며 한술 더 떠 녀석의 귓불을 혀로 핥아 올리다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기까지 했다. 참고 봐주려니 속이 메슥거려왔다. 우웨웩! 토 쏠리는 시늉을 했다. 몸을 팩 돌렸다. 눈치 빠른 이 경원이 내 몸이 더 돌아가지 못하게 종아리를 발등으로 끌어당겼다. “ 잘 들어봐. 그래서 어떤 철학가가 이런 말을 했잖아. 철학가는 철학가를 알아보고 예술은예술가를 알아보며 시대는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나 시간은 천재를 외면하지 못하며 게이는 게이를 알아보고 콘돔은 게이를 외면하지 못한다. “ “ …….” “ …….” “ 죽이지 않냐?” 미친 새끼. 은근슬쩍 연기까지 하려 들다니. 세상이 망하려는 증조였다. “ 그 철학가가 너냐?” 경원이 놈이 번쩍 고개를 쳐들고 나를 경탄스럽게 훑어 봤다. “ 저게 눈치가 늘긴 진짜 늘었다.” 지만이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니까…….” 이 경원이 갑자기 시무룩한 얼굴로 돌변했다. “ 기분 또 엿 같아 지네. 그럼 난 이제 무슨 재미로 사냐. 저거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 이게 죽을 라고 환장 했나……!” 거기까지만 말하고 그만 뒀다. 꼴랑 한 마디 하고 백 마디 듣기 싫었다. 김 지만이 경원이 새끼의 골반을 잡아 편하게 자세를 만들어 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 근데 이복신이는 왜 하필 애인이 있는 놈을 건드려서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경원이 놈이 화들짝 놀랐다. 어찌나 놀라는지 보고 있는 내가 더 놀랄 정도였다.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애인 있었데?” “ 그 여자애가 전화 와서 권솔이 알게 된 거잖아. 몰랐어? 그것도 계집애던데…….” 계집애란 말이 떨이지기가 무섭게 이 경원이 지만이의 새끼의 팔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밑에 떨어져 있던 접시들이 우당탕탕 깨졌다. 나와 지만이 놈이 동시에 ‘놀랐잖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경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 말만 했다. “ 나 뭔가를 잘 못 들은 거 같은데, 너 방금 뭐라고 했었냐?” 못 듣긴 뭘 못 들어.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귓속말을 해도 제주도에 까지 들릴 것 같구만……. 김 지만이 기름 낀 대가리를 벅벅 긁었다. 하얀 분필가루가 내 청바지 위로 벚꽃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한줄기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바지를 툭툭 털어냈다. 간만에 거금주고 산 리바이싸 바진데……. 과도하게 열이 받았다. 놈의 궁둥이를 축구공마냥 뻥뻥 걷어찼다. 지만이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어 엉덩이를 긁으며 후후 웃더니 ‘쏘오리, 주말에 몰아서 감으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네…….’ 했다. 안 하느니만 못하는 사과였다. 녀석은 손톱 밑에 낀 때를 다른 손톱으로 빼내며 유쾌하게 말했다. “ 바람을 피웠다는 거?” “ 뭐라냐. 계집애 어쩌고저쩌고 씨불였던 거 있잖아!” 이 경원은 분통을 이기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나로선 녀석이 왜 저 지랄염병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지만이 놈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차근차근 말했다. “ 여자 친구가 있던 놈이었다니까 그러네. 권솔은 이복신이가 단순힌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에 열 받은 게 아니라 그 애인이란 년이 자기 애인은 게이가 아닌데 꼬리치지 말라고 울고불고 하도 난리를 쳐서 쪽팔려서 뚜껑열린 거야. “ ……아 그랬던 거구나. 이 경원을 힐끔거렸다. 안 그래도 폭발하기 일보직전의 녀석의 얼굴이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말하는 지만이 놈은 오히려 무덤덤한데 듣고 있던 녀석은 정체모를 분노를 아주 과도하게 느끼는 모습에서 나는 일순 호기심이 동했다. 저 새끼가 그렇게 권솔을 걱정했었나. 그건 절대 아닐 터다. “ 그러니까 이 복신이 그 머저리 같은 놈이 여자 친구 있는 놈이랑 뒹굴었다, 이거지?” 지만이 놈이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 응. 아마도.” 녀석은 억지로 ‘하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 “ 진짜 나쁜 놈이네! 너 그 여자, 전화번호 알아? 알면 가르쳐줘.” 지만이 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나야 모르지. 권솔은 알고 있겠지만…….” 경원이 녀석은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놈이 나한테 가르쳐줄 리가 없지. 아 생각하니까 좆나 분하네! 빌어먹을!” 그게 뭘 그렇게 화나는 일이라고 저 난리를 치는 걸까. 지만이 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 경원은 안절부절 못하고 마당을 왔다갔다 서성댔다. 그리고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발에 거치적거리는 쓰레기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 여자 친구 있으면서 뒷구멍으로 남자 만나는 놈들이 하나같이 웃긴 게 뭔 줄 아냐? 다 자기들은 게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남자들하고 아무리 뻑 치는 게 좋아도 난 게이가 아니라고 우기면 진짜 게이가 아닌 게 되냐? 그런 놈들이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엿 같이 말하는 줄 알아? ‘나는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너라는 한 사람을 사랑 한 거야.’ 라고들 개지랄 떤다니까. “ 지만이 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 각시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 경원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지만이 놈과 나를 동시에 야리는 묘기를 부렸다. “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면 그놈은 그냥 게이일 뿐이야.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너라는 한 사람을 사랑 한 거야, 라고 아무리 주저리주저리 지껄여 봤자 그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이 남자면 그 놈 역시 게이일 뿐이지. “ 나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래서 뭐 어쩌라고?” 경원이 녀석은 내 물음에 진저리를 쳤다. “ 이건 생각이 없는 건지, 어디가 부족한 건지 아무 짬이 없네. 이 멍청아, 아직도 못 알아먹겠냐? 나는 겉으론 양성애자인척 하며 살아가는 동정애자들이 짜증난다니까!” “ 이게 누구보고 멍청이래! 그러는 너도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왔잖아!” 내가 송곳같이 핵심을 파고들자 이 경원은 대놓고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 누, 누가 가방끈 가지고 그랬냐? 사람이 말을 하면 이해를 하고, 못하고의 문제잖아! 어쭈? 눈 안 깔아? 감히 오빠한테 눈알을 부라리고 지랄이야! 성질 같았으면 얼굴을 찌그러 뜨려버릴까 보다, 확!” 거지같은 게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나는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보란 듯이 코고는 시늉을 했다. 분노한 이 경원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거 참 쌤통이다. 나는 지만이 놈을 힐끗 쳐다보았다. 녀석은 흥분하는 경원이 놈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겨 죽겠는데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며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만이 놈은 표정과 다르게 한껏 무게를 실어 말했다. “ 진짜 양성애자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이 경원이 가슴을 팍팍 치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 그걸 말해야 아냐? 느낌이란 게 있지. 너희들은 돌대가리라 내 말을 못 알아먹는 거 같은데, 이성애자들이 커밍아웃한 게이들만 앞에서 욕하지 말고 밥 처먹고 할 일 없으면 동성애자 주제에 바이인 척 하는 것들이나 잡이나 사회에서 영원히 바이바이 시켜야 된다 이 말이었어, 내 말은. 이 무식쟁이들아, 이제 좀 알아듣겠냐? “ 모르겠다고 했다간 잡아 죽일 얼굴이었다. 별 웃긴 말은 아니었지만 왜 이렇게 웃길까. 나는 코를 움켜쥐고 킥킥댔다. 김 지만 역시 우거지 같은 얼굴을 힘겹게 구부리며 내 옆구리를 콕콕 찔러왔다. 우리는 아직도 분에 못 이겨 허공에 대고 게이 학을 펼치는 경원이 놈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나와 김 지만은 역시나 동시에 등을 돌리고 한참동안 키득키득 거렸다. 그때였다. 권솔의 방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 물체가 마당으로 가운데 쿵하고 떨어졌다. 혼자만의 철학에 빠져 있던 경원이 놈과 나와 지만이의 시선이 일제히 검은 봉지로 향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마당 중앙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등 뒤로 녀석들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봉지 끈을 풀려고 손을 드는데,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며 맨발의 권솔이 방에서 뛰쳐나왔다. 녀석은 마당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우리 쪽으로 급하게 뛰어왔다. 더 자세히는 우리가 아니라 검은 봉지 쪽이었다. 새벽에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니는 폼이 진심으로 미친 놈 같았지만 녀석의 얼굴상태 때문에 나는 차마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이놈이 오밤중에 웬 탈을 쓰고 있나 봤더니 가면 따위가 아니었다. 권솔의 망가진 얼굴에 우리들은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코피인지 콧물인지 흥건한 액이 질질 새어나오고 있는 오른쪽 콧구멍과 반쯤 뜯겨서 바람에 정신없이 휘날리는 앞머리, 파란 멍으로 볼터치가 된 양쪽 광대뼈와 찢어진 입술. 녀석이 싸우는 모습은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지겹게 봐왔다고 자부하는 나인데도 놈이 이렇게 죽사발로 맞은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 놈의 걱정보단 이 복신의 주먹이 대단하긴 진짜 대단한가보구나 하는 감탄이 먼저였다. 지만이 놈이 주구장창 하던 이 복신 주먹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 뭐야, 저것들. 여기서 또 한 판 하려나 본데. 씨발, 싸우려면 더 빨리 나왔어야지 기껏 청소했더니 짜증나네.” 이 경원이 툴툴 댔다. 녀석의 말대로 권솔은 장군처럼 척척 걸어와 옹기종기 붙어 있는 김 지만과 나, 이 경원을 밀치고 원 안으로 파고들었다. 녀석의 야수와 같은 모습에 우리는 움찔 물러났다. 이성을 잃은 권솔은 꿈틀대는 검은 봉지를 발바닥으로 사정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윽 하는 비명소리가 터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녀석은 일대 고등학교를 죽사발로 만들어 놓았던 자랑스러운 주먹을 치켜들고 봉지 가운데를 찔러 넣었다. 꿈틀대던 봉지가 사납게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녀석은 주먹만으로 성이 안 차는지 발, 종아리, 팔목 신체부위란 부위는 닥치는 대로 이용해 봉지를 깨부숴 나갔다. 적어도 몇 분 동안은 그런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다. 그 사이 검은 봉지의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다. 권솔 새끼의 이마에 흥건한 땀이 맺혀 턱밑으로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녀석은 잠시나마 손과 다리에 휴식기를 선사했다. 야수 같은 눈을 번득이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잠시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뜯어진 봉지 사이로 검붉은 피가 비집고 나왔다. 불 보듯 뻔했다. 안에 있는 건 이 복신군일 터였다. 봉지 안이 묵직해졌다. 오줌인지 핀지 흥건한 액체로 출렁였다. 물론 이 복신이 잘못은 했지만 정도가 너무 심했다. 권솔의 성격으로 봤을 때, 복신 군을 보자마자 주먹을 들고 덤볐을 게 자명했다. 나는 허공에 들린 권솔의 주먹을 두 손으로 힘겹게 막아섰다. 녀석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 봤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 야, 네가 깡패냐? 그 정도 했으면 됐어. 이젠 이유를 들어 봐야지. 무조건 팬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 권솔이 발바닥으로 내 옆구리를 살짝 밀었다. 아프진 않았다. 나는 미동도 없이 서서 놈을 더 열심히 노려봤다. 관람료 0원의 레슬링을 관람하던 두 연인이 무언가 대단히 갈구하는 눈빛으로 ‘빨리 비켜……. ‘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키지 않았다. 권솔이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말했다. “ 깡패냐고? 그래 나 깡패다. 이제 됐지? 빨리 비켜라.” 맞다, 실수했다. 저 놈이 깡패였다. 깡패한테 깡패냐고 묻다니. 나도 어지간한 놈이었다. “안 돼! 이제 그만해! 분 풀릴 때까지 때린 거 같은데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 권솔이 지겹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는 법이지. 그리고 결과가 어찌되었건 나는 바람을 피운 이유보단 피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 어떤 변명거리를 늘어놓아도 그건 나에 대한 무모한 도전으로 밖에 생각이 안 돼. 물론, 바람피운 것과 별도로 내 자존심을 스크래치 것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아내야겠다. “ “ 그래도 권솔!” 녀석이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나는 김 지만처럼 너그럽지도 못하고 너처럼 착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빨리 비켜라!” 분노로 얼굴색이 파랗게 변한 것이 조금만 더 고집을 피웠다간 이 복신이 아니라 나를 신나게 두들길 기세였다. “ 잘못하다 주먹 엇나가면 네가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진짜 안 비킬 거냐?” 놈이 주먹을 현란하게 우두둑 거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네 애인 네가 때린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럼 난 이만…….’ 하고 옆으로 재빨리 비켜섰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현재 이곳에서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싸움소 김 지만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이럴 때 이 경원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이용할 가치가 없단 말이었다. 지만이가 좋았다. 녀석이 있어서 든든했다.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내게 행복을 주어야 마땅할 놈은 어느새 핸드폰을 꺼내들고 권솔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검은 봉지를 찰칵찰칵 찍어대며 ‘졸라 재밌다, 흐흐흐…….’ 하고 대가리에 꽃 단 놈처럼 웃고 있었다. 믿었던 내가 병신이었다. “ 오오, 붙었다 붙었어.” 이 경원이 잔뜩 기대감을 나타냈다. 녀석의 말마따나 권솔이 봉지 앞에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그리곤 무슨 이유인지 봉지 끝을 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안 풀리는지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녀석이 눈빛이 순간 찬란하게 빛났다. 좋은 생각이 난 거다. 이 복신이 입장에선 무서운 생각에 가깝겠지만 녀석은 좋은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서슴없이 봉지에 불을 붙였다. 천천히 피어오르던 불기가 단숨에 무시무시한 활화산이 되어 솟아올랐다.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녀석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뺏으려 앞으로 나오는데 경원이 놈이 발을 걸어 엎어뜨렸다. “ 이제 재밌어 지려는데 자꾸 초 쳐라.” “ 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 쉿! 쉿. 조용.” 염병할 년. 그런 자기도 바람 펴서 걸린 주제에 아주 끝까지 잘난 척이야……. 뿡! “ 으-아악!!!!!” 이 비명소리는. 이 경원과 나는 서로를 노려보는 상태에서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권솔의 그이였다. 불타올라 한줌의 재로 변한 봉지 안에 잽싸게 뛰쳐나온 복신 군은 거두절미하고 수돗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는 호수 채 그대로 들고 머리와 가슴에 물을 정신없이 끼얹었다. 검정 때로 얼룩진 옷 여기저기서 퀴퀴한 연기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한 겨울이란 것도 잊고 연신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대다 얼추 연기들이 사라지자 다시 권솔 앞으로 뛰어왔다. 이 복신은 권솔의 얼굴을 멀뚱히 내려 보다 돌연 안색을 굳히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 씨발, 조낸 아무 말도 하지 마! 우선 내 말부터 들어줘. 너 이해해. 네가 지금 나 때문에 좆나 앵벌이 하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사정이 있었어. “ 앵벌이? 권솔이가 앵벌이? 잘못 들었나. 그러나 권솔의 심하게 어두워진 표정을 봐선 나만 앵벌이로 들은 게 아닌 듯 했다. 팔짱을 끼고 시종일관 여유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이 경원이 ‘저 병신 새끼 문자 쓰는 거 봐라.’ 하고 대놓고 비웃었다. 무릎 꿇는 거 까진 좋은 발상이었는데 맨 정신으로 보고 있기 무척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상황을 극으로 몰고 갔다. 복신군은 솔의 어두워진 얼굴에 놀라 더욱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 난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어. 그 새끼가 먼저 꼬리쳤단 말이다. 아니야, 아니다.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다 죽일 놈이라고!” 그리곤 마당에 대가리를 쿵쿵 박더니 밑도 끝도 없이 자기 뺨을 후려쳤다. 겨우 멎었던 코피가 터졌다. 그것도 쌍코피였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권솔을 향해 배시시 웃기까지 했다. 핏물이 앞니를 붉게 적셨다. 불쌍한 걸 떠나 정말 더러워보였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활짝 웃어 결국 이 경원과 나의 야유를 얻어냈다. 동정표를 형성하려던 그의 목표는 물거품이 되었다. 웃으면 웃을수록 더 정 떨어진다는 지극히 중대한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권솔에게선 조금도 동요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이 복신은 요망한 주둥이를 놀리기 시작했다. “ 솔, 솔직히 요새 만날 내가 댔잖아. 그래서 나는 그냥 순수하게 내 거시기가 잘 있나, 없나 살짝 확인만 해본 거였어. 그, 그러니까 맛만 봤다고 생각하면 되. 하하, 물론 잘 있긴 있더라고. 그래, 이건 마치 접속사고와도 같은 거라구.” ……이번엔 접속 사고냐. 오히려 네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고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냐. 눈뜨고 못 봐주겠다.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김 지만이 내 옆에 찰싹 들러붙어 사진으론 성이 안 차는지 이 모든 상황을 동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녀석은 굉장히 들떠보였다. “ 야, 그걸 왜 찍고 자빠졌냐!” 교묘히 핸드폰 각도를 바꾸며 김 지만이 대답했다. “ 엽기 사이트에 올리려고. 영상 올리면 다운횟수에 따라 건당 포인트 올라가.”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 너 돌았냐.” 지만이 놈이 갑자기 급 진지하게 말했다. “ 아니. 안돌았어.” 그렇게 말하니까 더 미친놈 같았다. 미친놈이 말했다. “ 포인트 쌓이면 야동사야지. 너도 보고 싶으면 말만 해. 아이디 빌려줄게.” “ 아니 나는 됐어. 이 경원이랑 눈알 빠지게 실컷 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경원이 놈이 ‘뭐! 이것들이 가만히 있는 사람 씹고 지랄이야…….’ 하고 주둥이에서 터지는 대로 지껄이며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내게선 건질게 없다고 파악한 딱따구리가 지만이 새끼의 멱살을 옮겨 잡고 ‘말해! 말하라니까! 뭐라고 씹었냐! 엉? 이 씹 새끼들아……’ 했다. 귀를 막았다. 천박한 목소리 따위로 내 귀를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것들이나 저것들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나만 온전한 뇌를 가진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방심한 사이 권솔과 복신 군의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권솔은 어울리지 않게 현명한 척 궁상을 떨고 있었다. 녀석은 이유도 없이 복신 군의 턱을 발꿈치로 최선을 다해 걷어찼다. 이 복신의 텅 빈 대가리가 팩 돌아갔다. 권솔이 싸늘하게 웃었다. “ 네가 방금 한 말 중에 틀린 단어가 두 개 있어. 그걸 찾으면 오늘은 밤은 여기에서 마무리 짓는 쪽으로 생각해보지. “ 이 복신이 강아지처럼 폴짝 뛰어 솔이 새끼의 품에 안겼다. 권솔이 백 팔십을 넘어가는 장신이라지만 복신 군이 손가락 마디정도는 더 컸기에 안기는 폼이 그다지 이상적인 포옹은 아니었다. 은근슬쩍 분위기에 묻어서 교묘하게 대답을 회피하려는 이 복신의 얄팍한 속셈이 눈에 훤했다. 눈치 빠른 권솔이 오냐, 그러마하고 넘어갈 리 없다. 녀석은 복신 군의 턱을 가차 없이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뼈에서 빠각 소리가 났다. 일말의 죄책감 따위는 눈 씻고 찾아 볼 수도 없는 도도권솔이 평상에 우아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녀석은 공작부인 같았다. “ 이십 초 안에 말해.” 공작부인의 목소리는 더 없이 냉랭했다. “ 응.” 대답은 자신감 넘치게 했지만 이 복신이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초조해보였다. 그는 경원이 놈과 나에게 대놓고 SOS를 보내왔다. 그의 눈빛에 ‘제발’ 이라는 필사적임이 스쳤다. 때마침 김 지만의 핸드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더니 전원이 꺼졌다. 유일하게 심성이 고운 김 지만은 친구의 구원의 눈빛에 아랑곳 않고 평소처럼 둔하게 ‘아 싸! 대박이다…….’ 라고 외치곤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 복신이 실망한 눈으로 경원이 새끼를 향해 간절히 손을 모았다. 멍청한 놈……. 나라면 절대 이 경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진 않을 거다. 이 경원이가 괜히 이 경원이 아니었다. 역시나 이 경원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입 모양으로만 중얼댔다. ‘3만원.’ ‘3만원.’ ‘3만원.’ 이 복신이 뜨악 하는 얼굴로 눈알을 부라렸다. 놀랬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돈 거래를 하자는 녀석은 처음 봤겠지. 그는 잠시 생각하다 어쩔 수 없이 답을 해왔다. 놈도 손으로 입을 가린 채였다. ‘1만원.’ ‘1만원.’ ‘1만원.’ 이 경원은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흉측스러운 가운데 손가락으로 복신 군의 눈알을 도려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복신 군의 만원에서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이 경원은 분노했다. 분노가 지나쳐 한 손으로도 모자라 양 가운데 손가락으로 눈알을 마구잡이로 찌르는 시늉을 하다, 생각처럼 재미가 없자 도리어 자기가 놀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당은 컸고, 나는 작았다. 이복신이가 마지막으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불안함이 내비쳤다. 자존심이 상했다. 울컥하고 소리치려다 솔이 놈의 사자 같은 얼굴을 보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앵벌이, 접속사고.’ ‘앵벌이, 접속사고.’ ‘앵벌이, 접속사고.’ 복신 군은 내 입모양을 유심히 보고 또 보고 ‘앵벌이, 접속사고.’를 달달 외우더니 고맙단 인사로 손을 싹싹 빌었다. 나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는 솔이 놈 앞으로 다다다 달려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 앵벌이, 접속사고……!” 이라고 하기가 무섭게 권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팔짱을 끼고 검사관 같은 매서운 눈초리로 복신 군을 위아래로 훑었다. “ 그래. 잘했다. 그 단어가 어디서 잘못 사용…….” 녀석의 ‘잘했다.’는 말에 흥분한 이복신군이 신이 나서 고함을 질렀다. “ 앵벌이, 접속사고!” 솔이 놈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잘했다고 멍청아! 이제 그 말을 네가 어디서 틀렸는지 말…….” 이번에도 그는 권솔의 말을 가볍게 틀어막고 용가리처럼 콧구멍에서 연기를 뿜어댔다. “ 앵벌이, 접속사고!!” 권솔이 서서히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 그래, 그건 이제 됐다고 이 씨발아! 어디서 틀렸는지…….” 이 복신은 또 다시 권솔의 말을 막으며 손등을 나팔꽃처럼 턱밑에 받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앵벌이, 접속사고!!” 이쯤 되면 이 사람은 영원히 제정신이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해야 될 때가 왔다. 그는 이미 지나치게 흥분한 채, 망둥이처럼 마당을 뛰어 다니고 있었다. 코끝이 찡했다. 더는 볼 수 없어 몸을 틀었다.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이성을 망각한 소음이 들려왔다. “ 앵벌이, 접속사고!!!!” 그는 자기가 작게 말해서 권솔이 화가 난 줄 알고 있는 듯 했다. 또 다시 뛰어다니려는 그의 다리를 걷어차고 머리통에 살인적인 주먹을 박아 넣으며 권솔이 으르렁거렸다. “ 설마 했더니 확실히 미쳤군.” 그렇게 그들의 싸움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도 귀한 하루가 이렇게 허망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심히 지친 하루였다. 방문을 열었다. 메케한 담배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비릿한 피 냄새와 답답한 의약품 냄새가 코 속으로 강하게 밀려들어왔다. 담배연기는 거의 소독차 수준이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연기에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손으로 정신없이 연기를 저었다. 어릿했던 방 안이 자세히 보이기가 무섭게 심장이 발끝까지 쿵하고 내려앉았다. 침대 기둥에 기대어 있는 이 복희씨가 보였다. ……아니, 저 미친놈이 여긴 어떻게 왔을까. 그 짧은 사이 날아왔단 말인가. 등에 날개라도 붙어있었단 말이더냐. 연기의 주범은 이 복희씨였다. 나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담배 빵 자국에 구멍이 뻥뻥 뚫린 방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누런 장판이 검은 재와 구멍 자국에 엉망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마당처럼 개판은 아니었지만 평소와 전혀 다른 색달라진 방 안 모습에 잠시 생각했다. ……오늘 정말 제대로 날 잡았구나. 몇 시간 전만해도 다 죽어갈 것처럼 땀에 절인 얼굴로 누워서는 피를 한 바가지나 흘린 사람이 멀쩡하다 못해 팔팔한 얼굴로 저렇게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버릇없이 다리를 달달 떨며 입에는 담배를 꼬나 문채로 말이다. 저 자식은 살가죽이 강철로, 뼈가 철근으로, 피가 샘솟는 우물로 만들어 졌단 말인가. 귀신이 좆나 곡할 노릇이었다. 예상치 못한 복희씨의 출현에 눈에 띄게 당황해서는 멍청하게 서 있는데, 살짝 감겨 있던 그의 눈꺼풀이 번쩍 떠졌다. 자연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복희씨는 자기 방처럼 더럽게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방주인이 오히려 당황해 있다니 떨떠름했다. 씨발, 이거 괜히 짜증나네.…… 아무 말 없이 멀뚱히 내려다보고만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복희씨가 살짝 몸을 일으켜 바른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위협적으로 팔을 허공에 붕붕 저어 뼈를 맞추며 말했다. “ 이상하네. 병아리가 안 보여. 벌써 잡아먹은 거냐.” 그의 목소리는 수면 밑으로 가라 앉아 있었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음침하게 들렸다. 나는 이 복희씨가 병아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놀라웠다. 그는 자기 자신외의 어떤 사소한 일에도 무관심하게 대해왔었다. 그래서 인지 별반 대단한 말도 아닌데 나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생소함을 느꼈다. 머리도 다친 게 분명했다……. “ 뒈졌어요.” 나는 최대한 흥분하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속상한 티도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도 당신처럼 무덤덤하고 감정 없이 차갑게 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이미 바닥까지 추락한 자존심을 살리는 방법도 아니었고 쓸데없는 오기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내 마음이었다. 내가 노력해서 만든 덤덤한 목소리보다 더 덤덤한 목소리로 복희씨가 말했다. “ 왜. 네가 죽였냐.” “ 내가 왜요. 그냥 자기 혼자 알아서 죽었어요. 이유는 몰라요. 밥도 안 먹고 시름시름 앓다가 꽥 했어요.” “ 불쌍하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목소리엔 조금도 불쌍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복희씨의 말이 떨이지기가 무섭게 본능적으로 ‘그럼 나는요…….’ 하고 툭 튀어나올 뻔 했다. 말해봤자 전혀 쓸모없는 말장난으로 받아치겠지. 항상 그랬으니까. 이거 생각하니 은근히 좆같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픈 놈이 집에 가서 처자빠져 잠이나 잘 것이지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온 행차하셨을까. 마땅히 그가 이 집에 올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뭐 언제는 이유가 있어서 왔던가. 조용한 침묵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벗어놓은 잠바 끝을 접었다 폈다 지루한 손장난을 쳤다. 복희씨가 앉아 있는 쪽에서 장판 지지는 냄새가 났다. 슬쩍 곁눈질로 살폈다. 예상대로 이 복희씨가 담배꽁초를 방바닥에 비벼 꺼뜨리고 있었다. 저런 개념 없는 짓거리를 잘도 하신다. 욕이 튀어나오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그러자 복희씨는 선수를 치고 나왔다. “ 재떨이를 찾아 봤는데 도무지 보여야 말이지.” 진심이 묻어나지 않은 애석한 표정을 그가 말했다. 분명 찾아보는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버젓이 발밑에 용도를 잃은 재떨이가 정말 안 보였을 리는 없는 법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 발밑을 한 번 보시죠.” 복희씨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더 당당하게 말했다. “ 저게 재떨이야? 나는 냄비뚜껑인 줄 알았지.” 씨도 안 먹힐 소리만 골라 하네. 그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훑으며 고개를 저었다. 복희씨는 네가 그렇게 나를 봤자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얼굴로 이마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다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이더니 밑도 끝도 없이 불쑥 한 마디 던졌다. “ 고마웠다.” 목구멍에서 반사적으로 성난 말이 튀어나왔다. “ 뭐가…….” 그는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정도 풀어 붕대에 감긴 배를 가리켰다. 여러 번 닦아내서 그런지 핏물은 생각보다 많이 묻어 있진 않았다. 내 야무진 손끝에서 나오는 정교한 응급처치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지. 흥!! 그런데 장 우현 그 백 여시가 가만히 있다가 대뜸 내 노력을 물어가 버렸다. 복희씨의 배에 붙어 있는 붕대를 보자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허리를 들어 등을 기댈 만한 곳을 찾아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항상 무뚝뚝한 표정만 지을 줄 알던 인간이 오만상을 찌푸리는 걸 보면 아프긴 진짜 아픈 모양이다. 별 움직임도 없었는데 벌써부터 복희씨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천성이 착한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은근히 기분이 시무룩해진다. 이 복희씨가 다시 붕대를 가리키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 이거.” “ 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럼 왜……. 의외였다. 나는 대답대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 아니야?” “ …….” 그는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였다 다시 물어왔다. “ 너였잖아. 그렇지?” 복희씨는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의 눈을 억지로 피했다. “ 어떻게 알았어요?” “ 우현이는 왼손잡이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우현이란 이름 앞에 좌절감만 들었다. 유독 우현이란 이름 앞에 복희씨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렸다면 그건 제발 내 빌어먹게 쓸데없는 착각이길 바랐다. 나는 말로는 복희씨를 잊었다, 잊겠다. 하면서 전혀 잊지도, 잊어 보려고 노력도 하지 않은 바보 멍청이였다. 내 나약한 의지와 보잘것없는 자존심이 부끄러웠다. 더 자세히 말해 나는 그가 생각보다 밉지 않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는 즈음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미워했다가도 뒤 돌아서면 미워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복희씨 앞에만 서면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는 나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머리가 아팠다. “ 신기하네요. 알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게 아니죠! 알고 있었으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 “ 무슨 말?” 나는 발바닥으로 방을 탕탕 두드리며 성질을 부렸다. “ 내가 모를 줄 알아요? 그 쪽이 장 우현이 그 싸가지 없는 새끼한테 그랬잖아요!” 나는 최대한 복희씨처럼 보이기 위해 과장되게 목소리를 내리 깔았다. “ 수고했다. 어쩌고저쩌고 그랬죠? 맞죠? 이거 어쩌나, 나 다 들어버렸다고요! 사람 없는데서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니죠! 더군다나 고생은 내가 했는데 왜 그 자식한테……. “ 나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던 주둥이를 급격하게 다물었다. 화내고 있는 사람 면전에 대고 웃고 있는 복희씨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튀어나오는 대로 말하느라 느끼지 못했지만 마치 장 우현하고 비교 당하는 게 싫어서 투정부리는 어린애처럼 보여 지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복희씨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반대편으로 돌아앉았다. 돌아앉았다고 이대로 물러나진 않겠다. 나는 벽을 보고 중얼댔다. “ 사람 뒤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정말 짜증나는 일이에요. 제가 뭐가 되겠어요. 완전 엿 되 는 거죠. 새 되는 겁니다. 뭐 한 두 번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상처를 받아요. “ 놀랍다는 말투로 복희씨가 내 말을 가로챘다. “ 사람 뒤? 넌 문 밖에 있었잖아. 그럼 사람 뒤가 아니라 앞에서 아닌가?” 나는 다시 복희씨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럼 내가 있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한 겁니까?” 복희씨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기가 막혀 입이 쩍 벌어졌다. 머릿속은 어지러운데 말이 생각처럼 잘 나오지 않았다. 그 틈에 복희씨가 말을 이었다. “ 왜, 그러면 안 되냐.” “ 하,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이 복희씨가 피식피식 거렸다. “ 나는 네가 그냥 우는 건 싫지만 나 때문에 우는 건 좋아. 화내는 것도 생각보단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밌다. 흥분해서 지랄하는 것도 뭐, 그럭저럭 봐줄 만 해. 지금도 그렇잖아. 이렇게 일부러라도 흥분을 하게 만들어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지. “ 연필 깎기에 대가리를 억지로 쑤셔 넣고 닥치는 대로 갈아버리고 싶었다. 나는 바득바득 대들었다. “ 그래서 내가 고맙다고 해야 됩니까?” 복희씨가 몸을 기울여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얼굴엔 악의도 선의도 없는 지루한 무관심만이 들어 있었다. “ 왜 너는 재미없었어?” 나는 독살스럽게 그를 노려봤다. 복희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 나는 네가 나 때문에 고민하는 게 좋아. 해답 없는 고민이 되겠지만 고민하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만 생각하겠지.” 저건 또 무슨 호랑말코 같은 소린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복희씨는 특유의 사람 속을 뒤집는 표정으로 낄낄대다 한껏 빈정거렸다. “ 감동 안 해? 이런 말 하면 여자들은 감동해서 지랄하던데.” “ 순순히 감동 먹기엔 어떤 사람한테 당한 게 너무 많아서요.” 그는 팔짱을 끼며 몇 초간 어울리지 않게 생각이란 걸 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팔을 풀고 굉장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 그 어떤 놈, 정말 더럽게 나쁜 놈일 거 같은 기분이 드네. 그렇지?” 나는 턱이 방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 네. 굉장히 악질인 놈이죠.” 복희씨는 또 다시 몇 초간 생각하더니 부루퉁하게 말했다. “ 나만큼?” 내가 대답했다. “ 네. 딱 이 복희씨 만큼이요.” 그는 언제부터 이렇게 시답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는 취미를 가졌을까. 복희씨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저었다. 또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 이거 왜 이러시나, 내가 이래봬도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완강하게 말했다. “ 좋은 일요? 잘 생각해보세요. 좋은 일이 아니라 조는 일 아니에요?” 복희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코를 잡고 키들키들 댔다. 야릇하게 웃는 모습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 나는 너랑 자 줬잖아. 처녀도 역사적으로 깨주고.” “ 이, 이 씨발!” 당황한 나를 무시하고 이 복희씨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 시작이 반이라는 말 모르냐. 첫 길을 잘 닦아줬으니 너는 아무래도 그 쪽…….”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언짢은 표정으로 비명 같은 고함을 쳤다. “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해요!! 아픈 사람이고 뭐고 찢어진 뱃가죽에 식칼을 박아 넣겠어요!” 복희씨가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와! 정말? 기대된다.” “ 제발! 그 얄미운 주둥아리 좀 닥쳐요!” “ 왜 닥치래. 할 말이 얼마나 더 많이 남았는데. 내가 또 어떤 좋은 일을 하냐면 말이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손바닥으로 복희씨의 폭격기 맞은 주둥아리를 억지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침대 위에 나뒹구는 베개로 여전히 히죽거리는 그의 얼굴을 팡팡 두드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배엔 무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힘 조절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나는 정녕 빌어먹을 새끼였다. 복희씨는 내 엉덩이에 깔려 과장되게 팔을 휘두르며 발버둥을 쳤다. 부실한 천둥이 쿵쾅쿵쾅 울렸다. “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고요! 이러다 이 경원이가 쫒아오겠어요!!” 나는 계속해서 그의 머리와 얼굴을 베개로 구타했다. 이 복희씨를 때릴 기회는 절대 흔치 않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의외의 집념이 솟아났다. 연속으로 박자를 타고 때렸다. 한참을 두들기다 어느 정도 만족한 시간이 흐르자 베개를 떼어냈다. 복희씨가 부스스해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나를 노려봤다. 그러나 악의적이거나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풀어헤쳐진 남방을 펄럭이며 툴툴댔다. “ 넌 진짜 좋겠다.” 나는 베개를 꼭 쥔 채 여차하면 그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준비를 마친 후 말했다. “ 뭐가요.” 복희씨가 뒤뚱뒤뚱 침대위로 올라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 진짜 몰라서 물으실까.” “ 모르니까 묻죠.” 그가 한심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 거냐.” “ 모른다니까요!” " 네가 좀 많이 멍청해서 다른 놈들한테 피해를 받으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넌 대체로 운이 좋은 새끼다." 나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복희씨는 듣는 척도 안 했다. “ 넌 나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특권을 가진 놈이야." 나는 순간 숨 쉬는 것도 잊고 이 복희씨를 올려다봤다. 이 남자는 생각 없이 하는 단순한 한 마디에도 내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또 기대를 하는지 정녕 모르는 걸까. “ 어이, 이봐. 김 계진.”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불필요한 고민을 하는 찰나, 복희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나 목말라.” 그는 계속해서 ‘물, 물…….’ 하고 칭얼댔다. 나는 네 고민 때문에 식욕이 떨어지는데 넌 참으로 태평한 놈이로다. 나는 방바닥에서 비틀비틀 일어섰다. 복희씨가 보고 있으니 그 단순한 동작에도 긴장해선 다리가 엑스자로 꼬여 앞으로 벌러덩 엎어졌다. 어마어마할 정도로 쾅 소리가 났으니 당연히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방을 배려해 적당한 선에서 웃고 넘어가면 될 것이지 그는 역시나 이복희답게 허공에 삿대질을 까지 하며 찢어진 배를 한손으로 움켜잡고 정 떨어지게 낄낄댔다. 나는 지그시 그를 노려보고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요새 대부분이 가게에서 밥을 먹거나 사먹는 게 전부여서 집에서 밥을 먹은 게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랬더니 냉장고가 아주 시장 통은 저리가라다. 오래되어 여기저기 썩는 냄새가 풍겼다. 밑반찬은 그렇다 치고 사과나 몇 안 되는 과일들이 아예 물렁물렁 하게 변했다. 나는 물병을 집어 들었다. 컵에 철철 넘칠 만큼 가득 따라 부었다. 역시나 물통에서 오래된 냄새가 솔솔 풍겼다. 병에 희미한 이끼까지 껴 있었다. 코끝을 가져다 댔다. 시큼한 냄새가 팍 올라 왔다.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 크지도 않은 눈이 반짝 빛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방안을 돌아봤다. 복희씨는 눈을 감은 채 침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아직도 웃긴지 피식피식 거리고 있었다. 절대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물 컵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주둥이에 갖다 댔다. 고전적인 방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을 한 입 가득 마시고 가글을 하듯 한참을 와글와글 거리다 다시 컵에 퉤 뱉어냈다. 그리곤 쟁반에 컵을 바쳐 들고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발소리를 듣고 복희씨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나는 그 앞으로 컵을 내밀었다. 일부러 복희씨와 떨어져 앉았다. 그가 정말 물을 먹나 안 먹나 지켜보기 위해 폼을 잡았다. 이 복희씨는 바로 물을 마시지 않고 컵 주위를 한참을 뚫어지게 관찰을 했다. 복희씨의 눈빛이 악역전문배우처럼 빛이 났다. 드디어 그가 컵을 들었다. ……잘됐다. 쭉쭉 들이켜라! 하지만 내 바람과 다르게 그는 컵을 내 발밑으로 내밀었다. 복희씨가 입 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말했다. “ 너부터 마셔봐.” 상황은 내 의도와 다르게 접어들었다. 안 마신다고 하면 들통 나겠지? 마시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 거겠지……가 아니고 내가 왜! 나는 뽕 맞은 놈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며 컵을 향해 팔을 뻗었다. 복희씨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오기로 컵을 부서질 듯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복희씨가 또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방문을 열고 컵을 땅 바닥에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가 났다. 유리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 그래! 내가 침 뱉었다, 뱉었어! 근데 뭐! 네가 뭐 어쩔 건데! 꼽냐!” 복희씨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내 앞에서 어설프게 잔대가리 굴리지 마.” “ 뭐, 뭐요!!” “ 어차피 너는 굴리고 굴려봤자 내 손바닥 안이겠지만 말이야.” 나는 일부로 쿵쾅대며 방을 왔다갔다 거렸다.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방구석에 처박힌 먼지를 일으키며 정신 사납게 구는 내가 짜증났는지 복희씨는 일종의 그만하라는 명령처럼 손을 내저었다. “ 내가 침대에서 잔다. 너는 너랑 어울리는 방바닥에서 퍼질러 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코웃음을 쳤다. “ 내가 왜요! 여긴 내 집인데요?” “ 침대는 내가 샀잖아.” 이런 치사한 새끼. 돈 가지고 유세를 떠는 건가. 왈칵 짜증이 났다. “ 지금 치사하게 네 꺼 내꺼 따지자는 거예요?” 복희씨가 뚱하게 말했다. “ 네가 먼저 네 방이라고 유세떨었잖아.” “ 내가 언제 유세를 떨었다고 그래요! 그러는 그쪽은 침대 자기가 샀다고 나보고 방바닥에 자라고 했잖아요! “ 그는 상종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팩 돌렸다. “ 네가 먼저 치사하게 나왔잖아. 그리고 내가 침대얘기를 했다고? 이거 어쩌나, 그런 하나도 기억 없는데.” 그래. 항상 이런 식이지!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어차피 말싸움을 해봤자 이유를 막론하고 내가 질 게 불 보듯 뻔했다. “ 우리말을 말죠. 아무튼 나는 침대에서 잡니다. 방바닥에서 자든지 아니면 마당에서 자든 알아서 하시죠. “ “ 죽을래?” “ 안 죽을 겁니다! 나는 복희씨 보다 백년만년 오래오래 살랍니다.” 나는 후다닥 침대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리고 일부로 요란스럽게 이불을 탈탈 펴서 머리끝까지 덮고 최대한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자세로 누웠다. 얼굴이 따끔했다. 불쏘시개 같은 시선이 볼을 누르고 있었지만 이 복희씨에게선 기척이 없었다. 얌전히 오냐 그러마하고 방바닥에 누워서 잘 인간이 아니었기에 불안감은 고조에 다다랐다. 나는 슬금슬금 이불을 내려 눈만 드러냈다. 열심히 주위를 살폈다. 그때 갑자기 이 복희씨가 반격을 하고 들어왔다. 이미 진작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이불을 휙 걷어내서 배에 칭칭 감고 내 허리를 발로 뻥 걷어찼다. 내가 필사적으로 들러붙어 망정이지 넋 놓고 있었다간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뻔 했다. 나는 침대 귀퉁이에 찌그러진 몸을 곧게 펴고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 왜 때려요! 왜 자꾸 나를 못 살게 구냔 말이에요!” 복희씨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내가 밀려나 생긴 공간을 다 차지하고 누웠다. 그는 음정, 박자 다 무시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이불을 배 주위에 돌돌 감고 휙 돌아누웠다. 뒤통수에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가까스로 손을 내렸다.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 “ 내가 널 때려? 그런 적 없다.” 나는 분노해서 발바닥으로 그의 허리를 냅다 걷어찼다. 아니 걷어차려다 말고 소리만 질렀다. “ 없다고요? 내가 치사해서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일일이 말하면 끝도 없을 걸요. 대표적은 예를 들어보죠. 장 우현이랑 있을 때 뺨 때리고 오늘도 이렇게 폭력을 행사 했죠. 사람이면 차마 모른다고는 안 하겠지. 벌써 두 개에요.” 복희씨가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른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 흐리멍덩한 눈이 제대로 잠에 취해있었다. “ 너 은근히 사람 열 받게 하는데 재주 있는 거 아냐? 내가 지금 너한테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기나 하냐. 근데 뭐? 내가 널 때렸다고? “ 나는 열심히 씩씩댔다. “ 네, 때렸어요! 교묘하게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때린 건 사실이잖아요.” “ 뺨을 때린 게 아니라 볼을 쓰다듬어 준거겠지. 내가 정말 널 때렸다면 지금처럼 멀쩡한 얼굴로 감히 나한테 바락바락 대들 수는 없는 법이다. 알았으면 그만 쫑알대고 퍼질러 자, 쪼다야. “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너무 당당한 모습에 되레 할 말을 잃은 나를 보고 그는 비린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눈꺼풀을 꼭꼭 눌렀다. “ 하긴 안 맞아도 그다지 멀쩡한 얼굴은 아니었지.” “ 얼, 얼굴 가지고 그런 말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복희씨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거침없이 두들겼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찡그림조차 없는 아주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 내가 할 일 없으면 퍼질러 자라고 했지? 가렵다, 그만하고 빨리 자.” 그러나 나는 쉽게 그만두지 않았다. 가운데 손가락을 볼록하게 튀어나오게 만들어 그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역시나 복희씨는 전혀 흐트러짐 없는 편안한 얼굴로 덧붙여 매우따분하단 어조로 말했다. “ 진짜 맞고 싶지 않으면 제발 사람 좀 그만 웃겨라. “ 복희씨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 내가 정말 널 다른 새끼들한테 하는 것처럼 주먹을 쓰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었다. 그가 말을 바꾸기 전에 반대편으로 휙 돌아누웠다. 주먹질을 이쯤해서 됐다 싶었다. 등 뒤에서 복희씨가 픽픽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넌 비웃어라 나는 잔다. 무시가 제일이었다. 눈을 감았다. 오지 않은 잠을 청하기 위해 매우 낡은 방법이지만 양을 세기 시작했다. 58마리째 세고 있을 때, 복희씨가 저 혼자 독점하고 있던 꽃 이불을 내 다리에 덮어주는 게 느껴졌다.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찌르르한 시선이 꽂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열심히 자는 척을 하면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복희씨의 성격만큼이나 차가운 손끝이 볼에 닿았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내 볼을 시작으로 목과 턱 끝을 스치듯 어루만졌다. 내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복희씨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눈썹이 실룩일 때마다 그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눈을 뜰까, 이제 와서 뜨긴 뭘 떠. 그냥 모른 척 하자……. 뜸을 들이는 사이 복희씨의 긴 앞머리에 볼 끝을 간질이더니 그의 입술이 내 입술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충격적이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었다. 복희씨의 입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촉 소리를 내며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오징어 먹고 이 안 닦았던 게 퍼뜩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추장이라도 덜 찍어 먹는 건데……. 씨발 놈의 박 태열이가 문제였다. 그나마 방안이 어두운 게 다행이었다. 나는 빨강고구마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을 것이다. 내가 부끄러움에 몸부림 칠 때, 복희씨가 반대편으로 돌아눕다 멈칫했다. 그 의 큰 손이 내 머리를 감싸 안아 품에 끌어당겼다. 그의 심장이 바로 코앞이었다. 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씻지 않은 이마에 복희씨의 입술이 간질였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깊은 암흑에 잠겨 왠지 내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 잘 자라, 쪼다야.” “ 자요?” “ 응.” “ 왜 안자요? 잠이 안 오세요?” “ 네가 쓸데없이 하도 뒤척거리니까 그래. 빨리 자라, 그래야 나도 자지.” 이불속에서 발가락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한 쪽으로만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어 그런지 어깻죽지가 욱신거렸다. 복희씨의 몸에 닿지 않게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은 감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어설픈 걸 보니 확실히 잠을 못자고 있었다. “ 나 하나만 물어봐요.” “ …….” “ 나 하나만 물어 본다고요. 안 들려요?” “ 응.” “ 들리네, 뭐. 나 물어봐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 꼭 묻고 싶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누가 들어도 떨고 있다는 게 느껴질 만큼 내 목소리는 부정확하게 튀어 나왔다. “ 장 우현을 좋아해요?” 복희씨가 눈을 떴다. 반대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나를 보는 공허한 시선에 볼이 따끔거렸다. “ 글쎄.” “ …….” “ 한때는 좋아했던 적도 있었겠지.” 복희씨의 대답은 과거형이었다. 암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안도감에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정말 웃긴 일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내 기분이 좌우지 된다는 것은……. 방 엔 어스름한 새벽빛이 들기 시작했다. 해가 짧아졌으니 두 세 시간만 있으면 완전히 해가 뜰 것이다. 나는 새벽에 취한 척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그러나 목소리는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 왜 좋아했는데요?” 복희씨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나한테 왜 이런 질문을 들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 좋아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되나?” 그렇지. 좋아하는데 딱히 이유는 없는 법이지……. 비참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이 검은 오로라를 분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말라 버린 시골 우물에서 바가지를 닥닥 긁어 바닥이 보일 때처럼 최선을 다해 질문을 던졌다. “ 그래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유는 없지만 혹시 이유 비슷한 게 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내가 생각해도 내 말이 억지처럼 느껴졌다. 복희씨는 성의 없는 말투였지만 의외로 대답을 들려줬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 그 녀석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 그는 잠시 말을 끊고 팔을 머리 뒤에 받쳤다. 어정쩡한 폼이 베개가 낮아서 많이 불편한 것 같았다. 복희씨가 언짢은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 이 새끼는 정말 나를 닮았구나.” “ …….” “ 적당히 밝히고,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계산적이면서 겉으론 아닌 척 하고, 가지고 싶은 게 생기면 물불 안 가리고 남에게 뺏어버리다가도 반대로 필요 없으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는 적당한 이기심들이 징그럽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 복희씨가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 그래서 좋았어. 그리고 나는 그 새끼가 편해. 나한테 그 만큼 적당한 놈이 어디 있겠어?” 복희씨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듯이 물어왔다. “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갑자기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 그게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복희씨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 그럼 너는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데.” 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내 앞에 말하는 것이 꽤나 민망할 법도 한데 복희씨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이유 모를 자신감에 나는 멍해졌다. 생각처럼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저도 잘 모르겠어요.” “ 너는 말이다.” 복희씨가 말을 하다 말고 내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눈을 뜨자마자 내 눈앞에 있던 복희씨의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 사람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놓고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에 굉장히 익숙해했다. 아니면 천성자체가 무한한 뻔뻔함을 갖추고 있거나. 복희씨는 접어진 이불을 펴서 내 목까지 덮어주며 말을 이었다. “ 너는 나와는 정반대인 놈이지.” “ …….” “ 멍청하고, 둔하고, 답답하고, 한심하고, 잘 울고, 다 뺏기고, 남에게 속고, 말도 못하지. “ 신랄한 복희씨의 말에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욱해서 소리치려는데 그가 억지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덥석 귓불을 깨물었다. 나도 모르게 ‘아……!’ 소리를 질렀다. 복희씨가 히죽이며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 그래도 괜찮아. 그 정도는 내 선에서 알아서 커버할 수 있는 문제니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목덜미를 끌어 당겼다. 힘없는 몸뚱이가 알아서 끌려갔다. 반항할 마음도 없었다. 귀찮았다. 눈을 감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복희씨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나른해서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 너는 계속 열심히 멍청해 해. 내가 네 몫까지 똑똑해질게. 너 하는 거 봐서 모자란 아이큐도 나눠 줄 수 있다.” " 말도 안 돼." 그는 내 입술을 아프지 않게 비틀었다 놓으며 턱 끝을 톡톡 건드렸다. “ 너는 이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지. 장 우현이 너였다면 지금쯤 내 머리 꼭대기에 위에 앉아서 내 머리채를 마음껏 쥐락펴락 할 수 있다는 우월감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을 테지. “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황당한 얼굴로 복희씨를 바라봤다. 그는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너는 김 계진이잖아. 그래서 네 위치파악도 못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아직도 내 발밑에 엎드려 있는 거 아니겠어? “ “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나도 못 알아먹겠어요.” 복희씨는 계속해서 내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마음껏 퍼부었다. “ 넌 너의 아둔함으로 인해 네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는지 상상이나 가?” " 아니요." 그는 흥얼거리듯 속삭였다. “ 지금도 그래. 네가 조금만 약은 새끼였다면 넌 나에게서 편해졌을 테지…….” “ …….” “ 난 너를 보고 있으면 최소한의 방어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한 새끼로 변할 것만 같아.” “ …….” " 신기하지 않아?" 복희씨는 내 코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코끝에 복희씨의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럽지만 한편으론 매우 간지러웠다.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간지러움이 더해졌다. “ 나는 문득 네가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은 감정에 때마침 나타난 나를 끼워 맞춘 건지 몹시 궁금해졌어.” 내 진심을 매도하는 그의 말에 분노가 솟았다. 나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에요. 나는 나름대로 진심이에요! 그 쪽처럼 사람 감정가지고 장난 치진 않아요. “ 글쎄, 뭐 그럴지도 모르지.” 복희씨는 내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꼬며 장난을 쳤다. 돌연 그가 피식피식 웃었다. “ 별개의 문제지만 나는 널 보면 매순간 끊임없이 시험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 “ 나는 고개를 쳐들고 어줍지 않은 훈계를 했다. “ 싫어요! 아니지, 왜요. 왜 그런 말도 안 돼는 욕구가 생기는 건데요?” 복희씨가 기묘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왜냐고? 거울을 봐. 넌 너를 모르는 새끼들도 이유 없이 놀려주고 싶을 만큼 만만한 얼굴을 가졌으니까.” “ 뭐? 놀려주고 싶은 얼굴? 나 참, 어이가 없네. 그 새끼는 말을 해도 꼭 그딴 식으로 하냐. 생각할수록 정 떨어지는 새끼네.” 흥분한 이 경원에 밀려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던 김 지만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 그 형님이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좋아해. 똑같은 말을 해도 좀 기분 나쁘게 한다고 할까. 어찌 보면 특기 같기도 하고, 하여간 여러모로 신기한 인간이지.” 경원이 녀석이 들고 있던 국자를 밥상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지만이 놈을 노려봤다. “ 특기 좋아하시네. 뭐 그딴 비렁뱅이 같은 특기가 다 있냐. 그건 특기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단점이라고 하는 거다.” 김 지만이 밥상머리 앞에서 하품을 찍찍 날리다 주렁주렁 매달린 눈물을 비벼 닦았다. 어찌나 매섭게 눈알을 비벼대는지 눈썹에 달라붙어 있던 눈곱이 손톱에 딸려 나왔다. 쟤는 하는 짓도 갈수록 찌질했다. “ 큰 형님이 원래 말을 곱게 하는 성격이 못 돼. 하지만 특별히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식으로 말한 건 아니었을 거야. 물론 그런 걸 담아둘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 내 말은 왜 쪽팔리게 하필 얼굴 가지고 그러냔 말이야. 그러는 자기는 얼마나 잘생겨서 그런 말…….” 녀석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아무리 눈 높은 이 경원이여도 이 복희씨가 꽤 번지르르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이 경원은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자 유난스럽게 흥분을 했다. “ 얼굴만 기생오라비처럼 반반하면 뭐해. 자고로 사람은 됨됨이야. 그 놈은 싹수부터가 노랗게 둥둥 떴어. 야, 개진! 방문 바짝 걸어 잠그고 이제 다시는 못 들어오게 해! 뭘 기대한다고 아직도 질질 끌려 다녀!! 내가 너만 생각하면 속 터져 죽겠다. 아오! “ 지금까지 관심도 없던 놈이 웬 흥분……. 녀석은 인상을 오발대발 쓰며 대접에 칼국수처럼 퉁퉁 불은 라면을 푹푹 퍼 담았다. 퍼진 라면은 흡사 꿀꿀이죽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고파서 녀석들 방으로 건너왔더니 밥이라고 준다는 게 고작 라면이었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라면에 길기만 하고 맛도 골 때리게 없는 국수를 삶아 넣다니, 우리가 60년대에 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밥상이 굴곡진 시대상을 반영해주시니 처먹는 맛이 아주 쏠쏠했다.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이 경원은 국자를 가진 자의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놈은 김 지만과 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몸을 돌리고 앉아선 자기 사발에는 꼬불꼬불한 라면면발을 담고 나랑 지만이 놈의 사발엔 푹 퍼진 수제비처럼 변한 국수를 푹푹 담았다. 그리고 교묘하게 계란과 파로로 면발을 덮어 감췄다. 불쌍한 지만이 놈은 그것도 모르고 젓가락을 쭉쭉 빨며 어제 찍은 권솔과 이 복신군의 동영상을 보고 낄낄대고 있었다. 요새 저 새끼 생각만 하면 무턱대고 눈물이 난다. 제길……! 경원이 놈은 국수사발을 개밥 던져주듯 툭툭 내려놓았다. “ 빨리 먹어라. 너희는 특별히 많이 담았다.” 어이가 없었다. 바람 빠진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꼴에 양심은 있는지 이 경원이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뻔뻔함으론 이 복희씨랑 맞먹을 놈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놈은 이 복희씨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힘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배는 고픈데 이상하게 입맛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밥 상 주위가 휑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자 특정 인물이 눈에 밟혔다. 지금쯤 우당탕탕 하면서 뛰어들어 왔을 권솔이 안 보였다. 나는 방문을 가리켰다. 반응이 없어 경원이 놈의 사발을 숟가락으로 때렸다. 녀석이 저만 맛있는 라면을 처먹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본능적으로 사발을 부둥켜안는 꼴이 참으로 볼썽사나웠다. “ 권솔이 왜 안 보이냐. 아직 자냐?” 경원이 새끼는 은근슬쩍 찬밥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 그 새끼 지금 없다. 안 궁금하겠지만 참고로 이 복신이도 없다.” “ 없어? 아침 댓바람부터 그것들이 갈 때가 어디 있다고?” 경원이 놈이 먹지도 않을 총각김치를 젓가락으로 푹푹 찍어댔다. “ 급하게 갈 때가 있긴 했지. 둘 다 해뜨기 전에 응급차에 실려 갔다. 삐뽀삐뽀 하는 소리 못 들었냐? 하긴 너는 한 번 곯아떨어지면 세상모르게 자빠져 자니까 못 들었겠군.” 나는 깜짝 놀라다 못해 다리를 잘못 뻗어 상을 엎을 버릴 뻔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얼마나 다친 건데? 내 그럴 줄 알았다. 권솔 그 새낀 성질 좀 고쳐야 돼. 지가 마냥 고등학생도 아니고 앞, 뒤 안 가리고 덤비고 드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이 경원이 웬일로 내 말에 군말 없이 동의를 했다. 핸드폰을 덮어 밥상 위에 올려놓던 김 지만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새벽에 오줌 싸러 마당에 나왔는데 네 방 마루 있지? 거기 밑에 피 떡이 되어서 둘 다 엎어져 있는 거야. 진짜 놀래서 뒤로 엎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깨워도 안 일어나고 호수로 물을 퍼 부어도 미동도 안 하고 나는 그 새끼들 진짜 골로 간 줄 알았네. “ “ 그래서?” “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안 일어나니까 불안해서 응급차 불렀지. 왜 이렇게 됐냐고 묻는데 쪽팔려서 차마 싸웠다곤 말 못하겠더라. 그래서 불량배한테 걸렸다고 대충 둘러댔다.” 녀석은 말을 하면서도 중간 중간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때 기억이 떠오르는지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이 정말 놀라긴 놀란 모양이었다. 지만이 놈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경원이 놈이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는지 밥숟가락으로 내 손등을 후려쳤다. “ 그때 너 깨우려고 네 방문 열었는데 갑자기 이 복희가 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복희씨는 새벽쯤에 간 모양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원이 놈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부들부들 주먹을 떨었다. “ 나 참,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네.” “ 왜. 무슨 일 있었냐?” 이 경원의 부르르 떨리는 음색을 보아 녀석은 화를 간신히 억누르는 기색이었다. 지만이 놈을 힐끔 쳐다보았다. 녀석은 경원 이한테 들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곧이어 경원이 새끼가 눈알을 한껏 부라리며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 이 모시기한테 당신 동생 이 복신이가 병원에 실려 간다고 말하는데 그 놈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 참, 그 오만방자한 표정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니까……. “ 김 지만이 라면 국물에 찬밥을 말던 손을 멈추고 픽 웃었다. 돌연 이 경원은 숟가락을 마이크처럼 입술에 갖다 대며 이 복희씨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 너 뭐야. 왜 새벽에 남의 집을 멋대로 기웃거리고 지랄이야. 얻어터질래?” 오버해서 목소리를 낮춘 것 빼곤 그런대로 비슷했다. 참으로 복희씨다운 말이었다. 지만이 놈과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경원이 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노려보더니 ‘아직 안 끝났어, 기다려봐…….’ 하고 고개를 저었다. “ 놈이 그런 몰상식한 말을 해도 나는 꾹 참고 저기요, 당신 동생이 지금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는데요. 여기까지 말했는데 글쎄, 이 모시기가 매너 없이 내 말을 칼같이 자르면서 나는 모르는 일이니까 너희들 알아서들 해 그리곤 진짜 뒤도 안 돌아보고 대문으로 가는 거야!! “ 나는 라면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짠 걸 별스럽게도 못 먹는 이 경원답게 국물은 굉장히 싱거웠다. 방바닥에 나뒹구는 양념 통을 집어 들었다. 소금과 고춧가루를 대충 뿌려 먹었다. 음식 간을 못 맞추는 대신 녀석인 자기가 식사 당번일 땐 항상 양념 통을 따로 들고 왔다. 이 경원 입맛에 맞추려면 국이나 물이나 거기서 거길 거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 경원은 조바심을 내며 상다리를 위험스럽게 내리쳤다. “ 솔직히 나도 웬만하면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병원비도 있고 이 모시기가 돈도 좀 있어 보이니까 솔이 새끼도 덕도 보고, 뭐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그래서 최대한 성질 죽이고 쫒아갔지. 그리고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여는데 그 놈이 휙 돌아서 내 머리를 무시무시한 주먹으로 쥐어박는 거야!! 어이없지? 어이없어 까무러치겠지 않냐?” 녀석은 자기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되는 경향이 강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만이 놈이 고개를 돌리고 하품을 찍찍 했다. 나도 슬슬 아침잠이 쏟아지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 경원은 아니었다. “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지 뭐야, 그때 이 모시기가 내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어. “ 지만이 놈과 내 눈이 동시에 녀석에게 모아졌다. 이 경원은 예상치 못한 주목을 받자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 병원비 나오면 이 복귀한테 연락해. 나한테 말하면 진짜 죽는다.” 대충 짐작한 말이었다. 지만이 놈과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던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경원이 놈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 왜, 별로냐?” “ 대충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지만이 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나도.” 경원이 놈은 완벽하게 시무룩해져서는 숟가락을 높이 쳐들고 불어터진 라면을 무서운 속도로 퍼먹기 시작했다. 지만이 놈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픽 웃었다. 갑자기 허벅지에 경련이 왔다. 자세히 봤더니 불이 깜빡이며 거대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번쩍번쩍한 폴더를 열기가 무섭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속에 들려온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옆에서 하는 말처럼 또렷이 들렸다. 「계진이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긴 한데, 퍼뜩 생각이 안 났다. “ 누구?” 「내 목소리도 못 알아보냐? 이 자식아!」 아, 이런 아저씨였군. “ 네, 깜빡했어요. 근데 웬일이세요?” 「너 지금 가게 좀 올 시간 되냐?」 “ 가게요?” 가게라는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경원이 놈과 지만이 놈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두 놈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 시간은 되는데……. 왜 그러시는데요?” 「 묻지 말고 그냥 와.」 “ 애들이랑 같이 가야 되나요?” 「 아니, 너만 와. 그 놈들은 주렁주렁 데리고 와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 네, 솔직히 그렇긴 하죠. 급한 일이세요?” 아저씨는 내 말을 불쑥 잘랐다. 「 이유는 와서 말해주마. 빨리 와라. 이만 끊는다.」 뚜-뚜-뚜 전화는 이미 끊어졌다. 하여간 성질도 급하시지. 그런데 갑자기 왜 오라는 걸까……. 나는 비적비적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놈이 동시에 나를 올려다봤다. 경원이 놈이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너 지금 가게 가냐?” “ 응.” “ 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 그럼 가지마.” 남의 말 하듯 태평하다. 나는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녀석들에게 말했다. “ 너희도 시간 맞춰서 와. 가게에서 보자.” 가게 입구에 카드를 갖다 대었다. 동그란 통이 살짝 돌아가며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비룡이형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손에 쓰레기 더미가 한 가득이었다. 형은 나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계진아, 왜 이렇게 빨리 왔어?” “ 아저씨가 빨리 오라고 전화 하셨더라고. 쓰레기 버리러 가? 내가 들어줄까?” 형이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 아니야, 먼저 들어가 있어. 쓰레기만 버리고 갈게. 아! 그리고 냉장고에 보면 꽃게탕 있거든? 밥 안 먹었으면 밥 먹어. “ 오늘도 친절한 비룡 씨는 턱짓으로 주방을 가리키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나는 돌아가는 형의 팔을 억지로 잡아챘다. 형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홀 구석을 가리켰다. “ 저 사람 또 왜 저래?” 비룡이형은 음식물 쓰레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순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형의 시선이 뒤늦게 나를 쫒아왔다. 이 복귀 사장은 해가 중천에 뜬 이 화창한 아침에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홀 구석에 자리 잡고 무려 실내에 텐트를 치고 자빠져 자고 있었다. 신문을 얼굴에 덮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꿈나라를 여행하는 모습이 아주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저절로 손가락질을 부르는 몰골이었다. 볼썽사나운 모습에 얼이 나간 나를 형이 고무장갑 낀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형은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비밀스럽게 말했다. “ 제발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있잖아, 이 상무 전세 아파트 팔았대. 아마도 당분간은 저렇게 가게에서 잘 거야.” 저런 식으로 가게에서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어찌 된 일인지 질문 할 생각도 못하고 있자, 형이 알아서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절대 다른 애들한테 말 하면 안 된다, 알았지? 만약 소문나면 이 상무는 나를 때려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몰라.” 형은 연신 주위를 훑으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말해 봐.” 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도 잠시 돌연 완강하게 말했다. “ 특히 이 사장님한테 말하면 안 돼. 이 사장님이 아시면 아마 상무는 뼈도 못 추릴 거야.” 나는 조바심이 스치는 걸 느꼈다. “ 알았다니까 그러네! 빨리 말해 보라니까!” 평소엔 둔한 사람이 이상한 것에 집착을 하려 들었다. “ 그래도 불안하네. 넌 사장님하고 친하잖아…….” 나는 망치로 폐를 얻어맞은 것처럼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 다들 왜 자꾸 나더러 이 복희씨랑 친하다는 거야? 나도 그 사람이 누구랑 친한지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사람 중에 하나야.” 형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았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형이 실실 웃으면 고개를 저었다. “ 너 이사장님하고 친하다고 가게에 소문 쫙 퍼졌어. 이제 와서 발뺌은…….” 확신에 찬 형의 목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은 지어내는지 언제 날 잡아서 따로 한 번 만나보고 싶네.” 무심결에 중얼중얼 거리자, 형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내 과도한 부정에 미심쩍었던 형의 얼굴이 평상시대로 무덤하게 돌아왔다. 그는 애꿎은 앞치마를 빙빙 꼬았다 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연 힐끔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말 타는 시늉을 했다. 요새 개발한 개인기 인가…….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 그게 뭐야.” 형이 안색을 굳히고 속삭였다. “ 이 상무가 요즘 경마에 반 미쳐있거든.” 경마라……. 사장이 운동 삼아 말을 타는 건 아닐 테고, 아파트를 팔았다 어쩐다하는 걸 보니 그것 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도박해? 정말?” " 응. 말 꼬리 잡다가 전셋집 날린 게 삼일 됐어." " 진짜 이 복희씨 알면 뼈도 못 추릴 만하네. 둘이 형제 맞아? 어쩜 그렇게 다를까." " 내 생각도 그래. 하여간 말꼬리 때문에 가게 돈도 빼돌리나 봐. 스승님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야." 나는 사장님이 자고 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고 큰 소리로 외쳤다. " 정말? 미친 거 아냐?" 형이 손바닥으로 내 주둥이를 민첩하게 틀어막았다. 우리는 허둥지둥 사장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시끄러운지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휙휙 후비며 이리저리 뒤척이다 깊은 잠이 들었다. 형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쉿……, 비밀 꼭 지켜.’ 하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한 뒤에야,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걸음을 우뚝 멈춘 형이 나를 돌아보곤 키득키득 거렸다. 그의 웃음은 끝까지 비밀스러웠다. “ 계진아, 비밀 꼭 지켜라.”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밖으로 나갔다. 형이 나간 걸 여러 번 확인하고 나는 낄낄댔다. 애들한테 말해줘야지,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었다……. 골 때리고 불쌍한 사장님! 낮엔 영업을 하니 살만하다해도 새벽은 날이 풀리지 않아 아직 추울 텐데 이 겨울을 어찌 보낼꼬. 따뜻해봤자 그냥 가게지. 비룡이형 말마따나 생 돈 도박에 꼴아 박았다는 사실을 이 복희씨가 알게 된다면 뒷일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복희씨가 알기 전에 사장님이 정신 차리길 기다릴 수밖에. 나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이층으로 갈까, 주방으로 가야될까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이층보단 주방에 계실 확률이 놓겠지. 주방복도로 향했다. 커튼을 걷어내려는 찰나, 이층 베란다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고막을 찔러왔다. “ 김 계진이 왔으면 2층 사장실로 날아와라.” 2층을 올려다보자, 아저씨는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들고 있던 행주를 일부러 내 머리 위로 탈탈 털었다. 나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잽싸게 피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있던 자리에 먼지와 자잘한 모래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아저씨가 등에 손을 받치고 껄껄 웃었다. 나이가 들어도 저 집안사람들의 주책은 여전할 모양이었다. 계단으로 올라갔다. 아저씨는 테이블 여기저기 흠집 난 부분에 색깔만 같은 페인트를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다. 교묘하게 상처를 가려 테이블 살 돈을 굳게 만들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페인트 통으로 사장실을 가리켰다. " 거의 끝났으니 먼저 들어가 있어라." " 네." 사장실은 이미 열려 있었다. 대청소 중이었는지 바닥에 비누 거품이 잔뜩 묻어 있었다. 창 귀퉁이와 문틈사이에 세재냄새도 풍겼다. 소파에도 물기가 묻어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물기를 대충 닦은 뒤 자리에 앉았다. 의미 없이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을 즈음, 아저씨가 고무장갑을 벗으며 사장실로 들어왔다. 그는 어깨로 문을 닫고 페인트와 붓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 다른 놈들은 자고 있냐?” “ 저 나올 때 까진 일어나있긴 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모르겠네요. 아침 먹으면 낮잠을 자는 게 물먹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놈들이라 서요.” “ 하, 팔자 한 번 좋네. 나이 먹어봐라, 낮잠 자는 시간도 아까워서 벌벌 떨지.” 아저씨는 비뚤어진 명패를 바로 세우며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 너희들이 이제 27살이냐?” “ 올해 넘으면 그렇죠.” 아저씨는 자신에게 되뇌듯 중얼거렸다. “ 너무 어려. 그 나이는 한창 자아가 혼란스럽게 꿈틀대면서 차츰 인격이 형성될 나이지.” 나는 실소했다. 스물일곱 살에 자아 운운하는 걸 보니 아저씨도 어지간히 회춘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 27살이요? 그건 17살 아니에요?” 아저씨는 반대로 돌아가 있던 의자를 바로 잡으며 엉망으로 어질러진 책상 위를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할 일도 없는 사장실이 더럽긴 또 어지간히 더러웠다. 아저씨는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끝을 가만히 응시했다. “ 17살은 한창 젖 빨고 있을 나이 아니냐?” 나는 항복하겠다는 듯 만세포즈를 취했다. “ 네, 그렇다고 해요.” 아저씨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 요즘 것들은 어린나이를 젊은 나이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 27살은 충분히 싱싱한 나이라는 걸 자각하며 살아라. 알았냐? 김 계진이. “ “ 27살이 뭐가 싱싱해요? 스물 한 둘 먹고 군대 갔다 오니까 싱싱함이 뭔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요새 애들이 얼마나 젊은 거 따지는데요. 연예인들도 27살은 이제 한물갔다고요.” 아저씨가 눈썹을 치켜뜨며 소파와 다가와 앉았다. 그는 성마른 표정을 지으며 혀를 끌끌 찼다. “ 네가 생각하는 27살이 언제쯤 되면 좋은 나이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줄 아냐?” 나는 머리를 뒤로 꺾어 아저씨와 시선을 마주쳤다. “ 글쎄요. 아마 서른이 넘으면 알게 되지 않을까요?”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치더니 민망할 정도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서른까지 갈 필요도 없어, 딱 내년. 네가 28살만 되면 27살이 얼마나 젊은 나이였는지 알게 된다. “ 아저씨는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후 뱉어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연기를 저었다. “ 어이, 김 계진이.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때가 언제인 줄 아냐?” “ 뭐, 아마 십대나 이십대 때겠죠.” 아저씨가 담배 끝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 물론 이십대나 삼십대도 후회가 되기야 하지. 허나, 오십 넷이나 먹고 나니까 가장 부러운 나이가 오십 세 살이야. 가만 생각하니 어지간히 젊고 좋은 나이란 생각이 들어야 말이지. “ 53살이 젊은 놈들이라고?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나는 속으로 아저씨의 심중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 나는 그놈들이 이유도 없이 무턱대고 부러워 질 때가 가끔 있거든.” 아저씨는 일부러 놀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왜요?” “ 왜냐고? 글쎄. 나이란 게 원래 그래. 떠나고 나면 허망해진다. 나는 오십 넷 하고도 넉 달이나 지난 다음에야 오십 세살이란 나이가 얼마나 젊고 좋았었는지 알게 되었거든. 하지만 정작 웃긴 건 오십 다섯이 되면 오십 세 살을 그리워하던 오십 넷을 추억이라고 곱씹어 보고 있을 테지. 안타깝지 않냐? 꼭 지나가야지만 그때의 소중함을 안다는 게 말이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우리도 그러는데 너희들이야 오죽하겠냐. “ 많아봤자 사십대 후반으로 봤는데 아저씨도 나름대로 관리를 한 외모였다니 충격적이었다. 오십이 넘어 동안으로 보인다는 것 자체로도 아저씨가 그 동안 들인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정녕 남자도 이제 외모를 가꿀 시대가 온 것이로다. 서른 되기 전에 나도 어서 관리에 들어가야겠다. 이 복희씨가 마사지하고 피부를 가꾼다고 망둥이처럼 날뛸 때, 비웃을 일만 아니었다.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자, 기가 막히게 눈치 챈 아저씨가 내 손등에 담뱃재를 떨어뜨려 주의를 줬다. 나는 입으로 후후 불어 먼지를 날렸다. “ 젊은 것들이야 스무 살, 스물 하나, 스물 둘, 꼬박꼬박 세면서 나이 한 살 두 살 먹었다고 무서워서 벌벌 떤다지만 나이 먹은 사람들을 뭉텅 거려 사십 대, 오십 대로 부르지 않느냐? 우리도 오십 하나, 오십 둘, 오십 셋 이라는 엄연한 나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 아저씨는 앞치마에서 불쑥 미니 재떨이를 꺼냈다. 이제 보니 단순한 앞치마가 아니라 아저씨의 자잘한 손가방용이었다. “ 나는 그래서 젊은 놈들이 인생을 흥청망청 보내도 억지로 타이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 왜요?” “ 내가 굳이 얼굴 찌푸리면서 쓴 소리 안 해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후회하면서 보내더라고. 하지만 정작 그 후회를 하는 중에도 시간이 지난다는 걸 몰라. 그래서 어른들이 나이가 들면 잔소리가 느는 법이다. 백 명 중에 구십 구명은 똑같은 경험이 있으니까. “ “ 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저씨가 말하는 어른들의 잔소리를 하기 위해 이른 시간에 나를 굳이 가게로 부른 게 아닐 텐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놔두고 의외로 뜸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저럴까. 내 이 같은 생각이 틀림이 않았음은 아저씨의 다음 말에 의해서였다. “ 너 이 사장이 어디 살고 있는지 알지?” 내가 가정해둔 질문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빤히 쳐다보며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달칵달칵 라이터 뚜껑이 열었다 닫혔다. 담배연기 때문에 사무실이 뿌옇게 변했다. “ 나나 자기 동생들한테 집을 가르쳐 줄 정도로 그 놈이 친절한 새끼도 아니어도 적어도 사귀고 있는 놈한텐 알려줬겠다 싶어 불렀다. 너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사귀고 있는 놈이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다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 복희씨가 사귀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백여우, 장 모 시기였다. 그러나 나는 굳이 아니다 라고 반박하진 않았다. 뒤이어 퍼부어댈 질문이나 피해갈 수 없는 대답이 번거롭고 귀찮았다. 아저씨가 내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 그 녀석이 나한테까지 말하지 말라고 하던?” “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저씨가 소파를 끌어당겨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맨 정신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자 술을 먹지 않아도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오는 듯 했다. 심장에 무리가 오는 부담스러운 인상을 억지로 피했다. 작두모양과 호랑이 이빨 자국으로 수놓아진 불그스름한 팔뚝이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소실 적 나 좀 놀아봤소, 하고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깨갱했다. “ 저도 이 복희씨 집이 어딘지 자세히는 몰라요.” 아저씨가 맹수처럼 눈을 번쩍였다. 나는 아차 싶었다. “ 자세히 모른단 말은 알기는 안다는 말이로군.” “ 그, 그게 저…….” 아저씨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내 볼따구니를 죽 잡아당겼다. 축 처진 볼 살이 아저씨가 움직이는 대로 늘어났다 좁혀졌다 난리를 쳤다. “ 빨리 그놈 집으로 앞장서라.” “ 정말 자세히는 모른다니까요. 아! 좀 놓고 말해요!” 아저씨는 그제야 내 볼을 놓고 소파에 드러눕듯 앉아 나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봤다. “ 모를 리가 없잖아? 명색이 넌 그 망할 자식의 애인이란 놈이 아니냐.” 나는 얼굴을 팍 구겼다. 아저씨도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 애인이요?” “ 그래, 애인.” 나는 아이처럼 짐짓 발끈 했다. “ 제발 그 애인이란 말 좀 집어치우세요! 지나가는 개가 웃겠네요. 제가 애인이요? 누구요? 이 복희씨요? 하하하, 아이고 웃겨라. “ “ 아직 여름도 안 왔는데 더위 먹은 놈처럼 왜 그러냐.” 나는 쉭쉭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 제가 애인이면 장 우현은 뭐겠어요? 그 놈은 뭐 조강지첩니까?” 장 우현이란 말에 아저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딱딱 부러지는 말투로 차갑게 말했다. “ 너 갑자기 죽은 놈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냐?” 죽은 놈? 죽은 놈이라……. 그 죽은 놈이 내 뺨을 때리고 내 자존심을 뭉개고 날 업신여겼다면 아예 졸도하시겠습니다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죽었다고요? 누가요? 장 우현이요? 하하하, 그 놈 때문에 제가 죽을 맛이네요.” 아저씨의 더러운 인상이 극도로 더러워졌다. “ 그게 무슨 말이냐?” “ 말 그대로에요. 죽은 놈이 갑자기 전화 한 통화에 살아나…….” 내 말에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아저씨 때문에 말을 끊은 게 아니었다. 나는 찌르르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재빨리 알아차렸다. 내가 의미 없이 쏟아내는 말 속에 중대하지만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친 가장 큰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왜 한 번도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왜 아저씨한테 물어볼 생각을 안했단 말인가. 머릿속에 응어리져 있던 궁금증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무게의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납덩어리가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하마터면 앞으로 꼬꾸라질 뻔 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 아저씨부터 먼저 대답해 보세요! 아저씨는 왜 장 우현이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겁니까?” 아저씨는 당황한 얼굴이 고스란히 내게 향했다. 그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하다 말고 먼지 묻은 행주로 부지런히 이마와 볼을 문질러 닦았다. 그 와중에도 아저씨의 검은 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저씨가 내 질문에 답을 한 건,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잘 모르겠다만, 이 복희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도망가 있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녀석이 가지고 있던 조직을 지금 여기 사장하고 세형에서 분담해서 일을 처리했었지. 돈이나 지분같이 금전적인 일은 이 복귀가 보고, 대내외적인 일정을 세형에서 처리했었는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저씨가 힐끔 나를 보곤 말을 이어나갔다. “ 하, 지금 와서 하나하나 말 할 시간이 없으니 네가 묻는 것만 대답을 하자면 그 녀석이 떠나기 전에 그때 사귀고 있던 장 우현을 특별히 부탁하고 간 모양이야. 힘이나 능력을 따지면 이 복귀랑 세형의 그 녀석이랑 차이가 많이 나니까 아무리 동생이어도 솔직히 못 미더웠겠지.” 나는 아저씨의 말을 가차 없이 끊으며 끼어들었다. “ 세형의 대가리 놈? 그 세형이란 곳에서 장 우현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아저씨는 쭈뼛쭈뼛 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장 우현과 복희씨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럴 것이다. 아저씨는 의심 한 점 없이 나와 이 복희씨가 사귀는 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는 난처한 듯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 그래. 허나, 녀석의 그런 특별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세형에서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우현이가 그렇게 되었으니 어쩌면 두 놈들이 지금 의절하고 얼굴만 스쳐도 으르렁 되는 이유는 충분하지.” 강렬한 충격에 휩싸여 몸이 부르르 떨렸다.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아저씨는 세 개째 담배를 입에 물고 내가 속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놀라는 진짜 이유는 복희씨와 박태열씨의 관계나 장 우현의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가 진짜 놀란 이유는……. “ 장 우현이 죽은 이유가 세형에서 한 눈을 판사이라고 하신 거죠?” 아저씨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나는 내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꼭꼭 말아 숨겼다. “ 그럼 혹시 장 우현을 죽인 조직의 이름이 뭔지 기억은 나세요?” 아저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 글쎄 그게 말이다. 나야 당연히 세형 녀석들이 말하는 대로만 믿었으니 그 뒷일은 잘……. “ 아저씨는 뒷말을 묘하게 질질 끌었다. 나는 그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혼란스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정말 모르고 있다는 증거일 터였다. “ 그럼 지금 그 말씀은 세형에서 장 우현이 다른 놈들한테 맞아죽었다고 말했다는 건가요?” 아저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 차원에 다시 한 번 물었다. “ 세형의 대가리가 박태열씨죠?” 아저씨는 보고 있는 내가 기운 빠질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한 핸들을 돌리는 아저씨를 보며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그건 내가 깨닫지 못한 명백한 진실이었다. 창가로 고개를 돌리고 혼란스러움을 정돈해나갔다. 또한 박태열씨가 트렁크에 앉아 무덤덤한 표정으로 툭툭 내뱉던 말들의 참뜻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관자놀이 부근이 욱신거렸다.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어줍지 않은 사명감을 갖고 되짚어 볼 수 있는 간단한 것들부터 거슬러 올라갔다. 이 복희씨는 진심으로 장 우현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가 내게 보여준 행동과 말들이 모두 거짓이었어도 장 우현을 좋아했다는 것만큼은 완벽한 진실이었을 터였다. 물론 그의 진실은 내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기도 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복희씨가 단순히 배신감 때문에 그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엔 박태열씨의 말과 행동이 거슬렸다. 그는 왜 장 우현이 죽었다고 말했을까……. 그는 복희씨가 장 우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내가 박태열씨를 파악하기 힘든 점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 놈의 행동엔 이유가 없지 않는가. 반대로 이 복희씨는 왜 내게 그런 행동을 보였을까. 혼란스러워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느새 차는 외각 도로를 한참이나 벗어나고 있었다. “ 여기냐?” “ 네.” “ 문 열어 봐라.” 심호흡을 하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심호흡을 하고 또 심호흡을 했다. 결국 집 앞에 도착한지 오 분 만에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는데 성공했다. 오른쪽으로 가볍게 한 번 돌리자 문은 예상대로 스르륵 열렸다. 저승 문이 열리고 내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문이 잠겨있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아저씨를 제치고 재빨리 날랐을 것이다. 기대감이 산산이 부서지고 지독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약도를 그려준다는데 굳이 나를 끌고 오는 건 또 뭐야……. 요새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투덜대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복희씨의 정장에서 희미하게 풍겼던 향기가 콧구멍을 쑤셔댔다. 등 뒤에 현관문이 알아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내게 바짝 붙어선 아저씨는 신발을 벗으며 어둠침침한 거실이 마음에 안 드는지 복희씨가 악마의 자식이라는 둥, 음침한 놈이라는 둥, 마음껏 그를 헐뜯었다. 어두침침한 것도 맞고, 악마의 씨앗도 확실한 거 같다고 맞장구 좀 쳐줄까 하다 별 소득 없는 짓거리 같아서 그냥 내버려뒀다. 그의 오피스텔은 여전했다. 가구가 없는 거실은 휑했고 블라인드에 가려 오후로 흘러가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실내는 어두웠다. 전기세는 하나는 안 들어 좋으시겠네. 현관 앞에 멈춰있는 내 어깨를 툭툭 스치고 지나친 아저씨는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더니 당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걷는 속도로 봐선 주방이아니라 화장실로 가야 될 듯 했다. 아저씨는 냉장고를 열고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턱밑으로 물이 줄줄 샜다. 늙으면 기관지까지 약해진다는 생각에 못내 서글퍼졌다. 내 앞으로 생수병을 들어 보이는 아저씨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두 번째라 그런대로 익숙했다. 잠시 망설이다 이내 결심을 굳히곤 복희씨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은 그 날과 달리 굳게 닫혀 있었다. 겨우 문고리를 잡았지만 생각처럼 쉽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살며시 눈을 떴다. 예상치 못한 풍경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얀 가운을 입고 창틀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고 있는 복희씨의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옆모습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손가락에 언제나처럼 담배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방안은 더러웠다. 지독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속옷과 가운이 나뒹굴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하얀 가루와 손가락 마디만한 작은 유리병에 노란액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테이블과 의자로 이어지는 카펫 위엔 사용하다 버린 주사기를 따라 시선을 옮겨가다 나는 숨을 헉……! 들이마셨다. 나는 너무 놀라다 못해 잘못하다간 방으로 뛰어 들어갈 뻔 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불현듯 아저씨와 같이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스르르 안심이 됐다. 시장 통을 방불케 하는 지저분한 방 한 복판에 하얀 가루와 질척한 액으로 뒤범벅이 된 녀석이 누워 있었다. 놈은 연신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중얼 거렸다. 발음이 새서 한 번에 알아듣긴 힘들었지만 목소리 톤이나 손짓으로 보아 투정이나 변명을 늘어놓는 걸로 보였다. 녀석은 저렇게 꽤나 오랫동안 누워있었는지 등과 허벅지에 살이 짓눌린 자국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석은 알몸이었다. 순간 놈의 주둥이에서 복희씨의 이름이 튀어 나왔다. 나는 복희씨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내려 장 우현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담배를 피우는 것만이 자기 할 일인 것 같은 얼굴로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 나는 다시 장 우현에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녀석은 언뜻 봐도 정상인 같지 않았다. 놈의 표정이 이상했다. 놈의 마른 두 다리가 비틀려 허공에 살짝 들려 둥둥 떠 있었다. 눈동자에 검은 동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눈알이 반쯤 까뒤집혀서는 내가 서 있는 문 쪽에서 보기엔 녀석의 눈은 흰자위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방 꼴과 녀석의 몸 상태를 종합해 봤을 때, 장 우현은 약에 취해 있었다. 그것도 온몸이 약에 찌들어 있었다. 머리털 나고 마약에 찌들어 있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고등학교 때 한때나마 권솔이 본드를 불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건 장 우현에게 비교하며 명함도 못 내질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문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봤다. 아저씨는 주방과 거실을 훑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복희씨처럼 하얀 가운만 입은 박태열씨가 욕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좌우로 고개를 까닥거리며 스트레칭을 하듯이 몸을 풀더니 눈알이 까뒤집혀선 게거품을 물고 있는 장 우현을 보곤 피식피식 거렸다. 박태열씨의 기묘한 미소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방을 서성대며 왔다갔다 거리던 박태열씨가 돌연 뜬금없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말없이 창문을 응시하고 있던 복희씨가 고개를 돌려 박태열씨를 응시했다. 잔잔했던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며 박태열씨를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박태열씨가 날아오른 라이터를 낚아채 코를 찡긋했다. “ 친구, 놀랬잖소.” 복희씨는 그를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담배를 창틀에 비벼 꺼뜨렸다. “ 송장 되서 나가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고 해.” 기다려도 박태열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문틈에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나는 절대 확신한다. 내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닥칠 위험과 놀라움보다 절대로 버금가지 못할 만큼 대단한 기억을 갖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박태열씨는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장 우현의 발목을 잡고 흐물흐물 대던 다리를 힘들이지 않게 벌리더니 가운을 벗어던졌다. 녀석의 은밀한 곳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박태열씨는 송곳같이 날카로운 남성이 녀석의 몸 안을 파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무방비하게 퍼질러져 있던 녀석이 역 배설되는 이질감에 몸을 덜덜 떨었다. 미, 미쳤어……! 나는 비명이 터지려는 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복희씨는 그 모든 것을 감정 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딱히 말릴 생각도 그렇다고 박태열씨처럼 즐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비록 과거였는지 몰라도 자신이 열렬해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을 무참히 농락하는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엔 동정심도 안타까움도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장 우현을 동정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나였다. 나는 녀석의 무가치하게 흔들리는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말려야 되나, 말아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박태열씨는 장 우현의 머리를 채를 거칠게 잡아당겨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주사바늘을 사정없이 내리 꽂았다. 노란 액체가 녀석의 몸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갔다. 잠시 멈추고 있던 박태열씨의 흉악스러운 남성이 녀석의 엉덩이를 헤집어 놓았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녀석의 허리를 반으로 걷어 올리는 통에 결합 부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빽빽이 들어차 있던 박태열씨의 무거운 성기가 조금씩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는 방바닥에 쏟아져 있는 하얀 가루를 손끝에 묻혀 장 우현의 코끝에 가져다 댔다. 놈은 박태열씨의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핥았다. 며칠 굶은 개 같은 형상이었다. 박태열씨는 장 우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복희씨를 올려다봤다. 복희씨 역시 박태열씨를 내려다봤다. 그는 나른하고 무료한 표정을 지었다. 박태열씨는 상처자국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장 우현의 턱 끝을 핥으며 가운 속에서 새 주사바늘을 꺼내 들었다. 더 이상 눈뜨고 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나는 다짜고짜 방문을 열어젖혔다. 복희씨와 박태열씨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뜬금없는 내 출연에 놀란 박태열씨가 장우현의 몸속에 파고들어가 있던 성기를 거칠게 빼냈다. 응고되지 못한 정액들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방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는 방바닥에 벗어둔 가운을 더듬어 빠르게 꿰어 입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허겁지겁 움직이는 박태열씨의 모습에 복희씨가 보일 듯 말듯 입 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박태열씨가 보여준 당황스러움에 비교해 전혀 흐트러짐 없이 비웃음을 날릴 수 있을 만큼 복희씨는 방 안 풍경과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느긋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내 모습에 놀라거나 당황한 걸 바랐던 건 아니었지만 흐트러짐 없는 복희씨의 표정에 나는 이상하게 맥이 빠졌다. ……잘난 놈이 어련하시겠는가. 역시나 과도하게 긴장하고 있는 건 오늘도 내 몫인 것 같았다. 나는 무작정 그 앞으로 걸어갔다. 복희씨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속이 경련이 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 자기야. 잠깐만!” 복희씨와 거리가 딱 한 뼘을 남겨두고 나서 어느새 가운을 다 입은 박태열씨가 불쑥 내 앞을 막아섰다. 그는 필사적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박태열씨의 굳은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복희씨가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박태열씨에게 손을 들어 입을 다물고 있으란 뜻을 내비쳤다. 박태열씨는 평소 능글능글 거리는 그 답지 않게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그는 내 옆으로 바짝 붙어서며 또 다시 입을 열었다. “ 자기 있잖아. 우현이랑 나는 말이야…….” 복희씨의 인상이 급격하게 짙어졌다. 그는 재빨리 몸을 구부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스탠드를 콘센트 채 뽑아 들고는 내 뒤통수를 억지로 숙이게 만들었다. 머리를 숙인 상태에서 겨우 고개를 쳐들자, 형광등이 빠진 스탠드가 박태열씨의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 꽂혔다. 간발의 차로 박태열씨가 머리를 숙였다. 복희씨의 무턱대고 넘쳐나는 팔 힘에 의해 빠르게 날아오던 스탠드는 박태열씨의 귓불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벽 한가운데를 맞히고 맥없이 뚝 떨어졌다. 단번에 스탠드 뚜껑과 스위치가 박살이 났다. 만약 박태열씨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의 머리가 저렇게 박살이 났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 인간이 동물하고 다른 점이 뭔 줄 아냐. 말로하면 알아듣는 척이라도 한다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너나, 개나 똑같아. 도무지 말귀를 알아먹어야 말을 하고 싶어지지.” 무겁고 살벌해진 방안 분위기만큼 복희씨의 목소리도 무겁고 살벌하게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 말을 하다하다 안 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다. 주먹이 나가는 수밖에…….” 박태열씨가 붉어진 얼굴로 스탠드를 가리키며 소리를 높였다. “ 진짜 저거 이상하다니까! 무슨 애도 아니고 나이 먹어서까지 폭력을 휘둘러야지 속이 시원하겠냐?” 복희씨가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 응.” 박태열씨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더듬더듬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움직이는 중에도 복희씨를 향해 ‘살벌한 새끼, 매정한 놈…….’ 따위를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테이블 위에 장식용 꽃병을 팔목으로 밀어뜨리고 빈 탁자에 양반다리로 앉은 후엔 나와 복희씨를 느긋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와 별개로 볼이 따끔따끔 하던 참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복희씨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집요하게 쫒아오는 눈동자에 이제 내가 말해야 할 차례란 것을 실감했다. 나는 조금 엄숙해진 표정으로 그 앞에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복희씨와 나의 거리는 이제 반걸음 밖에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숙였다. 발끝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왜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다시 이마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혼란스러움과 어지러움에 풀이 죽어있었다. “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복희씨가 팔짱을 끼고 나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며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 내가 다 봤는데도 정말 할 말 없으세요?” 질문을 받은 사람은 복희씨인데 등 뒤에서 박태열씨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토하더니 손가락을 탁자에 까딱까딱 거렸다. 방 안에 탁탁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자 복희씨가 내 어깨를 지나쳐 박태열씨를 노골적으로 노려보았다. 그제야 박 태열 씨의 손가락 소리가 옅어졌다. 복희씨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는 아슬아슬한 침묵을 지키며 입을 열지 않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살폈다. 그러다 불쑥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 할말?” “ 네. 할 말이요.” 내 목소리는 의도치 않게 잦아들었다. “ 변명 같은 거 말이에요. 나는 최소한 복희씨한테 변명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복희씨가 갑자기 내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입술이 코끝에 닿았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내 어깨와 허리를 거칠게 움켜쥐는 복희씨의 팔 때문에 더는 움직이질 못하고 그의 두 팔에 갇혀버린 꼴이 되었다. 내 자신이 팔딱대는 갑 오징어처럼 느껴졌다. 복희씨는 쥐고 있던 내 몸을 살짝 흔들었다 놓으며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 내가 너한테 변명을 하라 이 말이지?” “ 그래요.” 복희씨는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천진난만했다. “ 솔직히 내가 왜 그래야 되냐?”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복희씨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게서 손을 떼어내고 창틀에 비스듬하게 걸터앉은 뒤, 벽에 등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내 반응을 살피는 복희씨의 눈동자는 흐리멍덩한 내 눈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표정이 없었고 목소리에선 미세한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날이 서있었다. 그 뻔뻔스러운 얼굴을 보니, 이 상황에 질문을 해대는 내가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의 말대로 이 복희씨가 나에게 변명을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걸까……. 단지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나는 이 사람에게 이기적인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치졸한 억지를 부리고 있었던 것일까. 복희씨는 혼란스러움에 떨리는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바보 같은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움 감정을 다독였다. 그는 한 번도 나를 좋아한다거나 마음이 있다거나 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나 또한 복희씨가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해왔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감정에 최소한의 존중을 받고 싶어 했다. 복희씨의 성격상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만든 기대감에 무너져 그 안에 허우적거릴 때까지 기대하고, 또 기대하다 그 기대감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는 이 복희씨가 우울함에 빠진 나를 건져 올려주고 내 손을 잡아 줄 것이라 믿었다. 내가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할 때마다 녀석들의 잔소리가 들어났다. 이 경원이나 권솔의 말처럼 내가 나 스스로를 높이 사기 위해서는 이 복희씨를 그만 만나고 그를 좀 더 매몰차게 대해야 한다는 말들이 전혀 틀린 건 아니었다. 아니다. 녀석들이 하는 말이 전부 옳았다. 하지만 나는 청개구리였다. 나는 동시에 갑오징어였고 어린 너구리였으며 또한 다리 부러진 제비 같은 놈이었다. 멍청하게 복희씨의 말 한마디에 기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미련하게 행동하고 싶지 않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그 역시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를 때리고 화난 모습을 보여주며 나도 자존심이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지만 갑자기 돌변해서 내게 친절해진 복희씨 앞에 나는 그것마저 쉽게 행동할 수 없었다. 나는 갈팡질팡했고 힘없는 갈대밭에 불어 닥친 거센 바람처럼 예고 없이 불어온 복희씨의 순간적인 기분에도 내 몸이 꺾일 만큼 아프게 흔들렸다. 나 역시 내가 힘없는 어린애처럼 그에게 끌려 다니기만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복희씨 앞에서 좋아한다는 감정을 앞세워 항상 나약해 질수밖에 없는 약자의 위치에 있었다. 감정은 감정이다. 감정을 마음먹은 대로 통제할 수만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감정이라 아니라 이성일 뿐이었다. 나는 복희씨 앞에 감정을 차단할 수 있는 단단한 이성을 앞세우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람을 어이없을 만큼 나약하게 만들고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는 마냥 죄인이 되어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나 자신을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나는 복희씨를 용서하면 적어도 그 다음날에는 그를 볼 수 있다는 미련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 감정을 놈들에게 말했다면 거하게 손가락질을 했을 터였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실연을 당해서 가슴아파하고 그 다음날부터는 이제 절대 안 좋아해야지, 그만 좋아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될 수만 있다면 이 지구상에 사랑의 열병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최소한 내가 겪고 있는 감정에 대해 후회가 없기를 바랐다. 이 시기가 지난 후에 가슴에 남게 될 자존심과 비참함 만큼이나 어영부영 종지부를 찍게 될 감정의 잔재때문에 두고두고 추억을 곱씹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나 혼자서만 우격다짐 격으로 힘겹게 끌고 온 감정이 조금씩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것과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엔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애초부터 좁았다는 것을. 나는 현재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박태열씨가 보기에도 확연히 느껴질 만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 진짜 마지막으로 물어요. 정말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또 다시 박태열씨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내겐 박태열씨의 반응까지 살필 여력 따위는 없었다. 복희씨만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이마를 손끝으로 짚었다. 골치 아프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젠 그의 손짓, 눈빛만 봐도 척척 이었다. “ 내가 물어보는 것마저 귀찮으면 앞으로 다시는 물어보지 않을게요.” 힘겹게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복희씨가 푸념 섞인 목소리로 ‘귀찮아 돌아버리겠군…….’ 하고 말했다.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 그럼 묻지 마.” 복희씨의 목소리는 흐트러짐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다. 그 무뚝뚝함의 강도가 얼마나 강했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던 박태열씨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와 복희씨를 노려볼 정도였다. 박태열씨는 내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으며 복희씨를 향해 사납게 미간을 찌푸렸다. “ 네가 우리 자기랑 잘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만 진짜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 복희씨가 뚱하게 말했다. “ 네가 날 안 봐주면 뭐 어쩔 거냐.” 박태열씨가 진저리를 치다 돌연 내게 시선을 돌렸다. “ 자기, 제발 울 것 같은 얼굴 좀 하지 마. 그럼 내가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겠어? “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마세요.” “ 마음에도 없는 소리? 무슨 말이 그래? 너 혹시 저 악마 같은 새끼랑 나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나는 경멸어린 눈초리로 박태열씨를 노려보았다. 그가 깜짝 놀란 척 오버를 하다 내 어깨에 올라가 있던 손을 떼어냈다. “ 씨발, 이거 상황이 좆나 좆같이 돌아가잖아. 그래, 우선 나부터 변명 좀 하고 넘어가자. 보다시피 나 그래. 우현이랑 사귀었어. 뭐, 지금도 가끔 만나. 그거 때문에 화난 건 아니겠지. 자기? 그리고 저 새끼랑은……. “ 나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주먹을 꽉 쥐고 박태열씨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 그건 당신한테 들어야 할 말이 아니에요. 나는 분명히 이 복희씨에게 물었잖아요.” “ 아, 나는 자기가 오해할까봐…….” “ 시끄러워요. 그 입 좀 다물어요.” 나는 일부러 복희씨를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잠이 오는지 살며시 눈을 감고 있던 복희씨가 게슴츠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 나는 듣는다면 박태열씨가 아니라 이 복희씨에게 들어야겠어요.” 복희씨는 순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 이 복희씨가 직접 하지 않는 말은 나에게 소용없어요. 그건 사과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잖아요. 남이 해주는 말은 오히려 내가 괜한 상상만 붙여 쓸데없는 공상만 커질 뿐이에요. “ 게슴츠레했던 복희씨의 눈꺼풀이 차츰 옅어졌다. 그는 더듬더듬 창틀을 뒤적였다. 복희씨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졌다. 담배가 없어서 저러는 것이리라……. 가물거리던 번쩍 뜨고 방바닥을 훑어보던 그가 결국 담배를 찾지 못해 버럭 화를 냈다. “ 그래서 나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다는 건데?” 나 역시 만만치 않게 화가 났다. “ 변명이요! 이유요! 사과요! 나는 그런 게 듣고 싶어요! 당신은 최소한 나한테 그런 말들을 해줘야 될 의무가 있어요!! “ 복희씨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시간이 지나자 공포영화 괴수처럼 돌변했다. “ 내가 왜?” 복희씨가 돌아가 있는 내 몸을 돌려 세웠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지만 요새 들어 부쩍 자란 앞머리를 손끝으로 빙빙 감아 돌리며 장난을 치는 복희씨의 때문에 그것마저도 쉽진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어냈다. 하지만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장난을 치는 복희씨의 손은 집요하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손끝에 엉켜들어가 있는 머리카락을 팍 잡아당겼다. 머리통이 욱신거렸다. 그의 손에 얼굴이 딸려갔다. 복희씨가 내 귀가 입술을 바짝 붙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 섹스하고 난 뒤에 나른한 거 알지? 지금 내가 그런 상태다. 며칠 동안 계속 잠만 자고 싶어. 생각 같아선 너랑 당장 뒹굴고 싶다만 피곤하니까 다 귀찮아. 너도 빨리 집으로 돌아 가도록해. 대들고 싶으면 미리 말을 하고 와. 자, 이제 돌아가.” 조용한 방에서 그의 목소리는 울림을 동반해 더욱 크게 들려왔다. 박태열씨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더 수치스러웠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에서 풀어내고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침대로 걸어가 철퍼덕 누워버리는 복희씨의 모습에 박태열씨는 ‘암담하다, 암담해…….’ 하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나는 순간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지독한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박태열씨가 주춤주춤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큰 손이 볼을 쓰다듬으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자기, 미안해…….’ 따위의 영양가 없는 말들을 실컷 늘어놓았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참고 있던 눈물이 힘없이 떨어졌다. 복희씨 때문에 얼마 동안 울음을 터뜨렸고 그게 또 몇 번째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오늘처럼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 건 처음이었다. 남들은 몸이 힘들고 마음이 괴로우면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진다고 하는데 나는 떠올릴 부모가 없어 한참을 고민한 끝에 방구석에 퍼질러 자고 있을 김 지만과 이 경원, 응급실에 처박혀 있는 권솔을 떠올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녀석들이 없었으면 진짜 생각나는 사람이 없을 뻔했다. 그럼 좆 빠지게 슬펐을 것이다. 아……, 졸라게 좋은 친구들이야. 고마운 친구들을 위해 집으로 가는 길에 떡볶이를 사고, 멸치국물을 얻어가야겠다. 순대까지 사기엔 돈이 모자라다. 어딜 가나 이놈의 가난이 문제였다……. 가난, 가난, 가난.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족쇄 같이 나를 따라다니는 빌어먹을 가난이 순대와 나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있었다. 이 경원이는 분식하면 순대밖에 모르는데 이걸 어쩌나. 낭패였다. 그래, 떡볶이 대신 순대만 사자. 순대 봉지 채 들고 권솔 병문안을 가도록 하자……. 집으로 가는 길에 잃어버리지 않게 속으로 되뇌었다. 순대를 먹으면서 녀석들에게 이 복희씨 실컷 씹어댈 생각이었다.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었다. 그럼 녀석들은 나보다 더 흥분해서 화를 낼 것이다. 이 복희씨 미친놈이라고 신경질을 부리고 당장 죽이러 간다고 소리를 질러줄 것이다. 내가 엉엉 울면 또 따라 울어 줄 것이다. 녀석들은 나보다 더 많이 이 복희씨를 미워해줄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 놈인가. 별다른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이 복희씨를 미워하는 사람이 벌써 세 명이었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기분이 너무 좋다보니 눈물이 났다. 손을 잡으려하는 박태열씨를 뿌리치고 문고리를 잡았다. 빼곡한 주사바늘에 파란 멍이든 팔뚝을 움켜잡고 잠이든 장 우현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불쌍한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힘들게 녀석을 도와줘봤자 장 우현은 깨어나면 내가 자기를 도왔다는 것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고마워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문고리를 돌렸다. 문소리에 콧노래를 흥얼흥얼거리던 이 복희씨가 이불을 들추다 말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는 이불을 팔랑거리며 요란스럽게 펴더니 버릇처럼 허리부근을 칭칭 감고 편하게 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은 어느새 감겨 있었다. 당장 잠이 오고 피곤해지니까 남의 기분 생각치도 않고 저 눈물 나게 이기적인 남자는 정말 자려고 하고 있었다. 속이 답답했다. 돌연 복희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먹 만해진 눈깔로 나를 보는 박태열씨를 무시하고 복희씨가 덮고 있는 이불을 확 걷었다. 복희씨가 놀란 얼굴로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불과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나를 번갈아 보더니 서서히 짜증을 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투정 섞인 말들을 들어줄 기분이 절대 아니었다. 떨어진 이불을 보란 듯이 지근지근 밟으며 말했다. “ 너도 언젠가는 제대로 한 번 느껴봐. 감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대방에게 끌려다는 게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말이야! 너는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잘난 줄 알면서 살아왔겠지만 착각하지 마. 너는 사람 약점을 잡고 그걸 쥐고 흔들면서 그게 네가 잘났다고 믿는 그저 그런 깡패새끼에 불과해!! “ 박태열씨의 눈이 경악스럽게 커졌지만 복희씨는 놀라움은커녕 내 말에 진심으로 수긍하는 듯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의 담담한 얼굴에 나 역시 담담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잠시도 멈추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은 갑자기 솟아난 의지와 독기로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볼을 흥건히 적시는 눈물을 신경질 적으로 닦으며 소리쳤다. “ 네 말 한마디에 벌벌 기는 내가 웃겼겠지. 재밌었겠지? 그렇지? 너는 심심 할 때마다 나를 가지고 장난을 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 장난에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통스러움에 바보처럼 허덕거렸어! 이 개새끼야! 너는 절대 사람이 아니야. 너는 감정이란 게 없어." 복희씨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하품을 찍찍했다.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 이야, 따박따박 말 한번 잘하네." 나는 양손으로 귀를 막고 소리쳤다. " 이 마왕 같은 놈아, 죽을 때까지 깡패 짓 하다 네 쫄따구한테 칼이나 맞고 뒈져라! “ 복희씨가 어줍지 않게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바보처럼 되물었다. “ 마…, 마 뭐?” “ 마귀의 최고봉, 마왕! 네가 딱 그거다! 새끼, 쫄았냐!” 나는 연신 끅끅댔지만 내 자신이 최대한 이성적이게 보이길 바라며 말했다. “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분명히 물었어요! 나한테 할 말이 없냐고 변명이라도 해주고 성의 없는 사과라도 한마디 던져주길 진심으로 부탁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마저도 하지 않은 겁니다. 나를 하찮게 여기고 내 감정을 또 다시 짓밟은 겁니다. 좋습니다! 나도 이제는 이 복희씨를 보지 않겠습니다!! “ 그리곤 그대로 몸을 돌려 문고리를 확 열어 젖혔다. 복희씨가 ‘이봐, 김 계진…….’ 하고 말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흥분했어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 오늘 이후로는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당신이 내게 변명 따위를 할 수 있는 위인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그 금테 두른 주둥이 나불대지 말아요. 나도 이제 들을 말 없습니다. 우리는 명분도, 관계도, 그 뭣도 사라진 겁니다. 하긴 무슨 사이나 됐었나.” 나는 감정 없이 덧붙였다. “ 복희씨에게 저는 하찮은 존재였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나는 힘들었어요. 당신을 하찮게 여기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이제부터는 당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할 겁니다.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부터 복희씨 또한 저에게 하찮은 사람입니다. “ 내 할 말만 하고 복도로 나와 버렸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물이란 물들이 몸에서 축축 흘러내렸다. 소매 끝으로 눈을 비벼 닦았다. 옷을 뒤집어 콧물을 흥 풀려는 찰나, 벽에 기대 서 있던 아저씨가 불쑥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건네받고 가만히 서있었다. 서있는 것 자체로도 체력소모였다. 아저씨에게 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기운도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 복희씨의 작은아버지라는 그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그 역시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듯 했다. 아저씨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 분위기상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계진아, 괜찮으냐?”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 네. 너무 완벽하게 괜찮아요.” 그러나 어느 때보다 내 목소리는 힘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하물며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아저씨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내일 아침이면 퉁퉁 부어오를 눈두덩을 꼭꼭 주무르며 애써 웃어보였다. “ 가게는 오늘부터 못 나갈 거 같아요. 죄송해요.” 며칠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상황이 조금 그랬지만 속이 시원했다. 아저씨는 어느 정도 예상 했는지 차분한 얼굴이었다. “ 정말 가게를 그만 둘 생각이냐?” 아저씨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면서 다시 한 번 물어보는 수고스러움을 사서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장님께 월급은 이 경원한테 전해 달라고 말씀 좀 드려주세요. 혹 현금 맞추기 힘드시면 다음 달이나 그 다음 달까지 주셔도 저는 상관없어요. “ 아저씨가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 그 녀석 때문이냐?” 나는 애써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네요. 가게에 계속 있으면 복희씨를 만나게 될 거에요. 이렇게 불쑥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며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고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 너한테 차마 가게를 계속 나오란 말은 못하겠다. 그 녀석이랑 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만, 다 싸우면서 정 드는 거 아니겠냐. 네가 정 나가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일자리 구하기 힘들고 마땅치 않으면 언제든지 가게로 돌아와. 네 자리는 항상 비워놓으마. “ 눈물이 멈추지 않자 급격하게 목구멍이 답답해졌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눈을 가렸다. “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가게로 돌아가지 않아요. 설령 일자리가 영원히 안 타나나서 제가 백수가 된다고 해도 가게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 저를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저씨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계집도 아니고 사내새끼들이 만나서 싸울 수도 있지, 너무 멀리가진 마라…….’ 했다. 나 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아저씨가 따라 웃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택시에 올라 탄 순간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눈물이 집 앞에 와서도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소매 끝이 질척해지고 끈끈한 눈물로 목주변이 진득진득 해질 정도로 울어대자, 정작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나조차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하늘을 보고 복희씨가 벼락을 맞고 뒈지길 기도하다가 문득 그가 진짜 벼락 맞고 하루아침에 저승길로 날아 갈까봐 불안해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불안감도 옅어질 것이다. 그가 벼락에 맞아죽든 우박에 깔려죽든 지금보다 덜 걱정스러워질 것이다. 시간이 내 감정을 몽땅 다 쓸어가고 어떠한 일에도 무덤덤해진 나를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위로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택시비를 내고 술 취한 놈처럼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고 내 방을 향해 걸어가다 나는 마음을 바꿔 경원이 놈 방으로 걸어갔다. 문은 닫혀 있었다. 녀석들이 혹시 자고 있을지 몰라 조심스럽게 부엌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녹슨 철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때까지 녀석들을 깨워 권솔의 문병을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마당을 걸어오면서 문득 혼자 있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만큼은 경원이 놈의 잔소리도 달콤하게 들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솔이 눈물이 날 만큼 보고 싶었다. 나는 정신없이 엉켜있는 녀석들의 운동화를 밟고 나무문을 드르륵 열었다. 연탄방의 따듯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바짝 들고 의외로 조용한 녀석들이 수상쩍어 방안을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아……! 두 녀석들은 딱 달라붙은 조개껍데기처럼 엉겨 붙어 자고 있었다. 지만이 놈은 오래돼서 너덜너덜한 꽃 이불을 경원이 놈 어깨에 감아올린 엉성한 폼으로, 이 경원은 김 지만의 오른팔을 베개 삼아 녀석의 허리를 인형 삼아 쉭쉭 코를 골고 있었다. 열린 방문사이로 새어드는 바람이 추웠던지 지만이 놈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을 끌고 와 경원이 놈에게 먼저 덮어주었다. 그러자 경원이 놈이 목과 턱 끝을 간질이는 이불이 답답했는지 알아듣기 힘든 험한 말을 중얼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뻥뻥 걷어찼다. 김 지만이 고집스럽게 이불을 다시 끌어당겼다. 이 경원이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부리다 제풀에 지쳐 곯아떨어졌다. 김 지만은 결국 녀석의 목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지만이 새끼의 입 꼬리가 씩 올라갔다 다시 평평하게 내려왔다. 이윽고 녀석들의 숨소리와 대포알 같은 코고는 소리가 방안을 진동했다.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자빠져 자고 있는 이 경원과 김 지만이 순간 너무 잘 어울려 기분이 묘하기까지 했다. 혹시나 경원이네 부모님이 이 모습을 본다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게이라는 것과 당당히 사위로 김 지만을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생각이 들 만큼 녀석들은 눈부시게 바퀴벌레 한 쌍이었다. 정말 너희는 천생연분이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녀석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았다. 부엌을 나와 마당을 폼 잡고 꽤 오랫동안 거닐다 내 방문을 열었다. 방은 추웠고 서늘했다. 차가웠다. 녀석들의 방과 다르게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켜졌다. 눈이 부셨다. 과도하게 눈이 아파 다시 불을 껐다. 방은 다시 어두워졌다. 나는 침대 앞에 서서 어두컴컴한 방안을 처음 온 사람처럼 훑어봤다. 냉장고, 침대, 화장대. 그리고 벽지와 장판. 침대 밑 장판 한 가운데 구멍이 뻥뻥 뚫린 담배빵 자국까지 복희씨가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불과 어제 이 방에 왔었는데 이 복희씨란 존재가 나에게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엔 다리에 쥐가 나고 있었고 난방이 되지 않은 방 때문에 몸이 달달 떨렸다는 것이 생각났다. 춥고 배고프자, 절대 일부러 생각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문득 복희씨가 했던 말을 떠올랐다. 친구가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 다고 화를 냈던 그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솔에게 필요이상 의지하고 기대며 인생을 살아왔던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나로서도 주체하기 힘든 오기가 몸 안에 퍼져 들었다. 주섬주섬 일어나 쥐가 나는 다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기다시피 옷장으로 달려갔다. 어디다 뒀더라? 우선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아닌 거 같았다. 첫 번째 서랍을 닫고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속옷과 양말들이 빼곡하게 개어져 있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옷 사이사이를 정신 나간 놈처럼 파헤쳐나갔다.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푹 찌르고 또 푹 찔렀다. 한참을 그렇게 옷과 씨름하고 있다 내가 먼저 지쳐 떨어지려던 찰나, 손끝에 비닐봉지 끝이 걸렸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봉지 주위만 집중해서 옷들을 파헤쳤다. 속옷과 양말사이에 껴 있던 봉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맞아. 여기에 숨겨 뒀었지……! 옷 사이에 맞물려 숨어있는 봉지를 끙끙대며 뽑아들었다. 폭 빠진 봉지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바닥으로 휙 날아갔다. 나는 다시 엉금엉금 기어 봉지 앞으로 다가갔다. 꼼꼼하게 묶여져 있는 리본 끈을 풀어냈다. 현금과 통장은 권솔이 내게 줬을 때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놈이 내손에 쥐어주고 간 뒤에 한 번도 쓴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혹시 녀석에게 필요하거나, 아프거나, 중요한 일이 생길 때 쓰려고 일부러 찾기 힘든 곳에 숨겨둔다는 게 옷장이었다. 물론 옷장 말고는 숨길 적당한 곳도 없었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가 쓰게 될 줄이야. 나는 괜스레 녀석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깊은 감사를 느꼈다. 적은 돈도 아니고 모으려면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불 보듯 뻔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필요한 건 필요한 거였다. 와서 두 배로 다 갚아주면 되겠지……. 나는 망설임을 툴툴 털어버리고 돈과 통장을 꽉 쥐었다 놓으며 세 번째 옷장에서 어린애 셋은 거뜬히 들어가는 큼지막한 가방을 꺼내 들었다. 지퍼를 열고 지금당장 필요한 옷들과 입기 편한 추리닝 두어 벌, 속옷과 양말 몇 개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얼마 담지 않은 거 같은데도 가방은 금세 빵빵해졌다. 빈틈없이 빼곡해진 가방 제일 밑바닥에 통장을 깔아 넣고 옷들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담은 뒤에 가방지퍼를 꽉 닫았다. 앉은자리에서 가방을 살짝 들어보았다. 무겁긴 했지만 그런대로 들 만 했다. 녀석들에게 말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까? 혹시 찾지는 않을까? 말할까, 말까……. 사람들이 싫어 잠시 가출하는 놈이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훌훌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치켜들고 방문을 열었다. 마루로 한 발짝 나가다 말고 고개를 돌려 방을 훑어봤다. 혹시라도 뻔뻔스러운 낯짝 내밀고 이 복희씨가 이 방에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없는 거다. 황당해할 그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거 참 쌤통이다. 못 보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어쩌면 복희씨는 당황해하지 않고 자기 집 마냥 자빠져 자고 갈지도 모르지……. 그 모든 게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가방끈을 바짝 들고 마당을 벗어났다. 진짜 기분이 엿 같아지게도 짐을 싸들고 밖으로 나오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나 혼자 어디를 가본적도 없고 가려고 했던 적도 없었다. 나는 길 잃은 미아처럼 서울 시내를 좆 빠지게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있는 손님도 뚝뚝 떨어뜨리는 낡은 카페에 들어가 화이트 초콜릿을 시켜놓고 장작 3시간을 죽치고 앉아있었다. 화이트 초콜릿을 시키면 정말로 문구용품 화이트와 슈퍼에서 파는 초콜릿을 가져달 줄 것 같은 가게였다. 다시 나가기도 귀찮고 사람 많은 곳은 더더욱 싫어 그냥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밖엔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친구들끼리 웃고 떠드는 여대생,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 비도 안 오는데 이유도 없이 우산을 쓰고 아이들이 제각각 다른 얼굴, 표정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의미 없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 종업원에게 볼펜을 하나 빌려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종업원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위아래 훑어보더니 ‘꼭 돌려주세요.’ 하고 당부에 당부를 한 뒤에야 천박스럽게 껌을 짝짝대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여자는 카운터에 턱을 기대고 앉아서는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내가 정녕 모나미 볼펜 하나 들고 토낄 놈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호랑말코 같은 종업원을 생각하며 계산하고 나갈 때, 팁으로 오천 원을 더 주고 나갈 계획을 다졌다. 나를 무시한 대가였다. 나도 팁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별 시답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타이른 후, 종업원이 ‘빌려준’ 볼펜을 들고 휴지 위에 조심스럽지만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가게도 그만뒀으니 이제 시간은 남아돌았다. 휴가를 받아서 일주일을 쉰 적은 있었지만 하는 일없이 무기한으로 이렇게 쉬게 된 건 이빨 나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우선 첫 번째로 운전면허증을 따고……. 가만! 그건 학원비가 너무 비싸다. 그건 다음으로 미루자. 나는 볼펜을 짝짝 그어 운전면허증을 지웠다. 휑한 가로 란에 컴퓨터 학원을 새롭게 적어 넣었다. 이건 한 달에 십만 원도 안 되니까 가운데에 동그라미 표시와 발바닥만한 별표시를 두 개 넣었다.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그사이 두 번째 화이트 초콜릿을 들고 온 종업원이 내가 하는 양을 유심히 내려다더니 콧방귀를 뿡뿡 꼈다. 나는 휴지조각을 소파 밑으로 잽싸게 감추고 순간 진지하게 진짜 방구를 껴서 여자를 까무러치게 만들까 고민했다. 너무 치사하고 더러운 방법인 거 같아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여자는 마스카라에 떡이 된 눈알을 부라리며 볼펜을 가져간다는 말도 없이 내 손에 들린 모나미를 휙 낚아채 사라졌다. 저렇게 마땅한 이유도 없이 무턱대고 쌀쌀맞은 여자들을 보면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결혼도 못하고 늙어 주어라……, 흥! 큰 짐 가방 하나 덜렁 들고 할 일도 없이 카페에 죽 치고 앉아 있는 꼴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농촌 총각쯤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생각했다. 이젠 어디로 가야할까? 여관은 찝찝해서 싫었다. 무엇보다 잠만 자는 거 치곤 너무 비싸다. 그렇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니 혹시나 이 경원이나 김 지만을 마당에서 마주치면 녀석들은 내가 가출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여어, 외출했냐.’ 또는 ‘혼자 뭐 처먹고 와…….’ 소리를 지를 터였다. 그런 상황은 죽어도 싫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싫은 가장 큰 이유는 혹여나 이 복희씨를 만나게 될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약해지는 내 자신도 이제 더는 싫었다. 생각했다. 계속 생각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플 뿐 마땅히 내가 갈 곳은 없었다. 막상 집을 나와도 갈 곳 하나 없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불쌍한 나를 스스로 위로하며 깨끗한 테이블을 휴지조각으로 빡빡 문질러 닦고 있는데 문득 뇌리에 스치는 곳이 하나 있었다. 나는 휴지조각 대신 가방을 움켜쥐었다. 내가 왜 거기를 생각 못 했을까……. 나는 정녕 바보 멍청이였다. 세 시간 생각해서 딱 한군데였지만 그래도 갈만한 곳이 드디어 나타났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까운 화이트 초콜릿을 한 번에 죽 들이키고 계산을 했다. 밖은 겨울날씨 치곤 따뜻했다. 새치기에 새치기, 새치기를 해서 택시를 올라다 막무가내로 서울역만 외쳐댔다. ……서울역! 그렇다. 서울역이다. 나는 지금 서울역으로 간다. 서울역에 도차하자마자 서둘러 횡성으로 가는 기차표를 하나 끊었다. 아니, 끊으려 이십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더니 횡성은 역이 없어서 기차가 없단다. 나 하나 때문에 없는 역을 만들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조낸 난감해졌다. 어쩔 수 없지.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매 시간마다 운행하는 버스가 공교롭게도 내가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에 맞춰 날아갔다. 죽 쒀서 개주는 것도 아니고, 뭔가 하려고 하면 이 지랄이다. 마치 내가 재수없음을 몰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방을 들고 왔다갔다 거리니 주위에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전혀 괜찮은 사람이라고 웃어보이자 그들 중엔 핸드폰을 들고 당장 경찰서에 신고하려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그래서 나는 절대 웃지 말고 구석에만 처박혀 있기로 했다. 계란과 사이다로 빈속에 심심치 않게 위로를 해주고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랐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버스는 내가 마음껏 골라 앉을 있을 정도로 빈자리가 많았다. 나는 주머니에 표를 쑤셔 넣고 햇빛을 피해 구석지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 종일 가방을 들고 다녔더니 팔이 욱신거렸다. 팔을 주물럭주물럭 마사지를 하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횡성은 정말 감격스럽게도 오랜만이었다. 권솔이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3학년짜리 하나를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서울로 도망간 걸 내가 잽싸게 쫓아왔으니 그게 벌써 12, 13년 전이었다. 향수에 젖을 만큼 횡성이 그리웠던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 동화 같은 추억으로 이곳이 각인되어 만큼 즐겁거나, 과거를 곱씹으며 마냥 즐거운 정도로 나이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막연히 뭉클할 때가 있었다. 서울로 간다는 것에 무조건 신난 권솔과 모든 게 어리둥절하고 낯설기만 했던 14살의 내 모습을 떠올리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때는 서울로 오기만 하면 뭐든 쉬울 줄 알았는데……. 사는 게 생각처럼 쉽지 많은 않았다. 물론 서울로 왔기 때문에 이경원이랑 김 지만을 만났고 녀석들을 만난 건 내 인생을 통틀어도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행운이 매순간 인생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건 아니었다. 행운과 행복은 다른 문제였다. 나는 행운을 만났지만 마냥 행복하진 않았다. 나는 애써 암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창가로 시선을 보냈다. 멀어지고 있었다. 서울도 멀어지고 나무도 멀어지고 구름도 멀어진다. 지금 내 곁에는 서울에 있는 녀석들도 멀어지고 있었다. 이 복희씨도 멀어지고 있었다. 몸이 멀어지는 만큼 마음 역시 멀어지겠지……. 나는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고단했던지 생각보다 빨리 잠에 떨어졌다. 눈을 떴을 땐 이미 2시간이 지나 나는 서울이 아닌, 횡성에 와있었다. “ 할머니! 저 계진인데요. 할머니 계세요? 할머니.” 이상하다. 왜 이렇게 반응이 없지? 틀림없이 여기가 맞는데……. 나는 다시 대문을 주먹으로 쾅쾅쾅 걷어차며 목청껏 외쳤다. “ 할머니! 안 계세요? 저 계진이라고요!” 그러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 보다 더 단단하게 잠겨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대문 사이구멍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내가 이곳에 살 때만 해도 할머니는 혼자 살고 계셨는데 희한하게도 빨랫줄에 어린애 면 티와 반자리가 널려있었다. 마당 귀퉁이에 어린이용 세발자전거가 스러져있었다. 만일 하나 할머니가 이사를 가셨거나 다른 지방으로 내려갔을 거란 생각을 왜 못했을까……. 무턱대고 이곳으로 날아온 내가 잘못이었다. 전화라도 한 통 넣고 오는 건데.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무얼 하겠는가. 주의 깊게 마당을 살펴본 결과 할머니가 이사 갔다는 것에 좀 더 무게를 싣게 되었다. 하지만 수상쩍었다. 평생 이 곳에 나고, 자란 사람이 갑자기 웬 이사란 말인가. 아, 물론 내가 이곳을 떠나온 게 13년 전. 그 짧지 않은 시간이 할머니에게도 갑자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시 서울로 올라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는 사람하나 없는 여기에 남아 있을 수도 없고……. 오도 가도 못한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나는 우선 짐 가방부터 내려놓았다. 팔 아파 게거품 물기 일보직전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방이 유난스럽게 크게만 느껴졌다. ……젠장! 무턱 대고 이곳으로 온 게 잘못이었어.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뻥뻥 걷어차다 다리 아파서 그만 두고 그냥 편하게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한숨하다, 한심해. 나는 조용히 뇌까렸다. 그리고 찌그러진 가방을 손가락으로 죽죽 펴고 있는 찰나, 지옥문처럼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끼이익- 열렸다. 암울했던 기분이 희망으로 뒤바뀌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태라지만 할머니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렇게 작으셨나. 뭐, 늙으면 줄어들긴 하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방글방글 웃으며 ‘할머니…….’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허나 내 눈앞에 보이는 건 할머니가 아니라 꼬마아이였다. 그것도 할머니 고무신을 질질 꼬불쳐 신고나온 일곱 살짜리 꼬마아이……. 녀석은 대문에 기대어 인상을 찌푸리며 수상쩍은 시선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모습이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앙칼졌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보다 ‘넌 또 뭐야.’ 하는 강렬한 멸시와 조롱이 담긴 시선이었다. 아이에게선 포스가 느껴졌다. 크면 한 성깔이 아니라 두 성깔, 세 성깔 할 상이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마당을 가리켰다. 할머니가 안 계시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생긴 것처럼 건방진 꼬마는 내 말을 재빨리 가로채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 당신은 뭡니까? 예의라는 걸 모르십니까? 남에 집 대문을 그렇게 무식하게 두드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헉! 기가 막혔다.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자 꼬마는 신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눈꺼풀을 실룩였다. 턱밑에 뚝뚝 흐르는 시건 방이 하늘을 뚫고 나갈 기세였다. “ 용건이 뭡니까?” “ 뭐?” 헛말이 튀어나왔다. 꼬마 놈이 내 가방을 고무신으로 툭툭 찼다. 나는 녀석이 장난을 치지 못하게 가방을 얼른 감췄다. 꼬마 놈이 악마처럼 씩 미소를 지었다. “ 집 나왔습니까? 그 가방은 뭡니까? 여긴 집 나온 노숙자를 재워주는 곳이 아닙니다. 빨리 집으로 들어가십시오. 부모님 걱정하겠습니다. “ 하하하, 얼씨구.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짓고 있는 나를 무시하고 녀석은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놈의 포스에 눌려 정작 묻고 싶은 걸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다시 대문을 발로 쾅쾅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꼬마가 문을 벌컥 열고 나를 노려보았다. 놈은 심각하게 골이 난 얼굴로 버럭 고함을 쳤다. “ 나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잖아요. 아니면 용건을 말하든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가방을 재빨리 들이밀었다. 녀석이 황소처럼 콧김을 내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대문을 마저 열어젖히며 마당 안으로 무턱대고 걸어갔다. 꼬마 놈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 누구 멋대로 남의 집으로 들어…….” 이번에는 내가 녀석의 말을 막았다. 나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린아이 취급을 한다고 느꼈는지 녀석은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내 손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어린놈이라고 얕잡아 봤더니 은근히 주먹이 날카로웠다. 녀석에게 맞은 손 슬슬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쪽팔려서 아프다는 말은 안 했다. “ 혹시 네가 충식이 형 아들이야?” 뜨악 하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을 보며 덧붙였다. “ 여기세 살고 계시던 할머니 이사 안 가셨지? 할머니는 어디 계셔? 아빠는?” 녀석은 말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 할머니는 방에 계시고 아버지는 잠시 평택에 가셨습니다.” 녀석이 찌뿌듯한 얼굴을 풀고 빈정거렸다. 어린놈이 사람이 말하는데 빈정거릴 줄도 알고 크게 될 떡잎이 분명했다. “ 근데 우리 아버지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아이의 얼굴이 더러워졌다. “ 여기서 살 때 친했어, 충식이 형. 아니지, 너희 아버지랑. 그럼 나는 이제 수상한 사람 아니지?“ 녀석은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 아직 모르죠. 유괴범들도 최소한 그 정도 사전조사는 하는 법이니까요.” “ 심하다. 그래도 좀 믿어 줘봐.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나도 빨리 결혼했으면 너 만한 아들이 있었을지도 몰라. 그나저나 신기하네. 형이 벌써 결혼해서 아들이 있고……“ “ 나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어른들은 다 밥맛입니다. 쳇!” 녀석은 마당에 깔려 있는 자갈을 신발로 톡톡 건드리며 알아듣기 힘든 말로 중얼중얼 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계속해서 ‘하하하…….’ 웃었다. 그러자 녀석이 내 종아리를 힐끔 보더니 발로 찰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웃음을 거두고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다. “ 나 너희 아빠 친구야. 반갑다! 너는 아빠 친구를 만났는데도 전혀 안 반가워?” 꼬마 녀석은 싸늘하게 웃으며 내 손을 툭 건드렸다. “ 아빠 친구라면 아빠가 반가워해야지 내가 왜 반가워해야 됩니까? 나는 학교에서 내 친구를 봐도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댁이 아빠 친구라고 해서 나까지 덩달아 반가워 해야 될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 “ 우와! 너 되게 무서운 녀석이구나.”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녀석이 순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자기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면 대단한 자존심에 금이라도 가는 것처럼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려 힘겹게 웃음을 참아냈다. “ 흠, 흠. 그, 그런 말은 자주 듣습니다.” 녀석은 나를 묘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자기가 선생이라도 된 것처럼 망상에 빠져 중얼거렸다. “ 그런 걸 일명 카리스마라고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 오? 그래? 그렇구나. 그게 카리스마였구나. 너 영어도 참 잘한다?” 나는 흥에 겨워 아부를 떨어줬다. 녀석의 입 고리가 연신 실룩대더니 애써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이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췄다고 판단, 나는 가방을 단단히 쥐고 할머니가 계신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녀석은 툴툴대면서 의외로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졸졸 쫒아왔다. “ 근데 너 몇 살이야?”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녀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꼬마 놈이 내 질문에 기가 막힌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팔짱을 꼈다. “ 2001 년생입니다. 왜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아니, 그냥. 참 좋을 나이네……” 녀석은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가로질러 앞으로 걸어갔다. “ 2002 한일 월드컵 그 역사적인 현장에 저도 있었습니다.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2001년생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이라. 하긴 2002년생이 아니길 다행이네. 녀석은 새시 문을 열고 마루 위로 벌떡 올라섰다. 새시는 비싸다고 절대 안 끼우던 사람이 뭔 바람인지 이중 새시를 설치해놓았다. 좁아터지기만 했던 마당도 뒤채를 이어 붙여 훨씬 넓어졌고 지붕과 벽돌 색도 달라졌다. ……여기서 10명이 모여 살았던가, 아니면 12명이 살았던가. 마루위에 가방을 올려두고 나는 마당을 거닐었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번져 나왔다. 공동 수돗가와 아침마다 20분씩 줄을 서서 들어갔던 화장실은 그대로였다. 한참을 사색에 잠겨 있는데 꼬마 아이가 들어간 방에서 지글지글한 가래 끓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저게 누구야? 내 눈이 썩지 않았다면 저 새끼는 김 계진이가 아니냐!!”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도 전에 웃음이 삐죽이 새어나오는 입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여전히 쩌렁쩌렁한 걸 봐선 건강하다 못해 팔팔한 모양이다. 요새 노인들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더니 정말이었다. 나는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는 문턱에 팔꿈치를 받치고 들고 있던 숟가락을 치켜들고 나를 가리키고 계셨다. 검버섯이 낀 얼굴, 주름지고 가느다란 팔뚝. 절대 시간이 비껴갈 수 없는 게 얼굴에서 시간의 흔적이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방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맨발로 따라 나와 내 팔과 어깨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러다 갑자기 등짝을 매섭게 내리쳤다. 순간 눈앞에 별이 보이더니 좀 전에 먹었다 삶은 계란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 아, 아파요! 말도 없이 이렇게 때리면 어떡해요! 진짜 놀랬단 말입니다.” 만남의 기쁨은 잠시, 아픔은 오래였다. 할머니는 다시 한 번 내 등짝을 퍽퍽 갈기더니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 서울물이 좋더냐? 그 깡패새끼는 그렇다 쳐도 나는 너라도 여기 한 번 올 줄 알았지! 망할 놈. 서울 갔다고 코빼기도 안 비쳐? 젊은 놈들한테는 정 줘봤자 다 필요 없어! “ 등이 후끈후끈했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 죄송해요. 시간에 쫓기고 일에 쫒기다 보니까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됐어요.” “ 지금 그걸 핑계라고 씨불이고 있냐? 이런 잡놈아!! 그 깡패 자식하고 허구한 날 붙어 다니더니 혹시 너도 그 놈한테 물들은 거 아냐? 내가 그렇게 친구를 잘 사귀라고 했냐. 안 했냐? “ 나는 힘없이 웃어버렸다.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등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억지로 손을 빼려고 하는 할머니의 어깨를 바짝 끌어안았다. “ 할머니 때문에 오늘 솔이 새끼 귓구멍 가려워서 잠은 다 잤네요.” “ 됐어! 그럼 이야기는 하지도 마! 망할 놈, 내 돈 오십 만원 들고 토낀 거 경찰에 신고안한 것도 내가 속이 좋아서 그렇지, 다른 할망구들이면 어림없지! 당장 찾아와서 넙죽 절이나 한 사발하고 가라고 해!” 심술궂은 목소리에 키들키들 웃음이 나왔다. 욕이 욕 같지가 않았다. 화내는 것이 정말 화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 알았어요, 그렇게 말해 놓을게요.” “ 말만?” “ 아니요, 진짜로요. 아, 정말 죄송해요. 연락 해야지, 해야지 생각은 매일 했었어요. 사느라 힘들어서 그게 잘 안 됐지만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발 봐주세요. “ 할머니가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나는 더 와락 끌어안았다. 방에서 그런 날 바라보며 꼬마 아이가 코웃음을 치더니 불쑥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할머니 말마따나 다음에 올 때는 권솔을 확실히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꼬마아이랑 붙여놓으면 참 볼만 할 거다. “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나는 마음껏 칭얼댔다. 뜸을 들인 후, 할머니가 천천히 얼굴을 풀었다. “ 언제? 나 죽은 다음에?” “ 그럼 백년 뒤에? 할머니 앞으로 백년 더 살 거 아니었어요? 아, 난 또 그런 줄 알았지.” “ 망할 놈! 넉살은 여전하네.” 할머니는 내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행동과 다르게 손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할머니의 손을 마주잡고 가슴에 가져다 댄 후, 배시시 웃었다. 할머니가 못 마땅하단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 웃지 마! 네가 아무리 그래도 아직도 너 미워, 인마! 쥐방울만했을 때부터 공짜 밥에 공짜 옷에 반은 키워놨더니 이제는 다 컸다고 말도 없이 종이만 한 장 달랑 남겨 놓고 서울로 토껴버려? 내가 너 언제 한 번 만나면 죽을 만큼 패줄 생각에 못 죽고 있었다. 이놈아! 권 솔, 그 망아지 같은 새끼는 몰라도 너는 내가 얼마나 예뻐했는지 알아? 몰라? 엉? “ “ 내가 왜 몰라, 잘 알죠.” 그때 어줍지 않은 침묵을 지키고 있던 꼬마가 밖으로 졸졸 걸어 나오며 고의적으로 내 허벅지를 치고 지나갔다. “ 할머니 노망났어? 그렇게 궁금했으면 할머니가 연락하면 되지 자기도 안 해놓고 왜 갑자기 저 형한테 화를 내? 하여간 노인네들 궁상은 알아줘야 해. “ “ 뭐, 뭐야!” 할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아이의 종아리를 걷어차려 했다. 아이가 쏜살같이 피하며 혀를 날름거렸다. 폭력 적인 것도 여전하시네. 나이가 들면 성격이 바뀔 줄 알았는데 그건 불가항력인 모양이지. 할머니가 주춤거리는 틈에 마치 폭주족처럼 세 발 자전거에 올라탄 아이는 나를 향해 어퍼컷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네. 보다 못한 할머니가 고무신 한 짝을 녀석에게 냅다 집어던졌다. “ 이놈의 새끼! 너는 할미한테 노망이 뭐냐? 네가 주둥이를 그렇게 함부로 놀리니까 어미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 아니냐!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어미가 없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티 나게 쳐다보기 미안해서 곁눈질로 꼬마를 살폈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나를 진즉 나를 힐끔대고 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꼬마는 전기에 감전된 놈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 나가버렸다. 녀석은 가까스로 대문 앞에 멈춰 서서는 분노에 찬 주먹을 들어올렸다. “ 사람 약점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 망할 놈의 할망구는 지옥에나 떨어져라! 저승사자랑 빨리 살림이나 차려!” 생긴 것처럼 저 새끼 버르장머리 없네. 기가 막혔다. 어린애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절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지극히 태연했다. 자주 있었던 일인 것처럼 태평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가 그 틈에 우당탕탕 대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휑해진 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게 시선을 돌렸다. “ 너 말이다. 나 하나 보러 이 시골까지 들어오진 않았을 테고 뭔 일인지 빨리 말해라.” 나는 당황했다. 쉽게 대답을 못하는 나를 보고 ‘그럼, 그렇지. 너 혹시 계집년 하나 임신시키고 여기로 도망친 거 아니냐.’ 하는 말도 안 되는 추궁을 시작했다.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 차마 웃음도 안 나왔다. 할머니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힘없이 손을 저었다. “ 하긴 넌 그럴 놈이 아니지. 계집애가 배불러서 나타나면 얼씨구나 하고 당장 결혼하고 월급봉투 채갖다 바칠 놈이지. 내 말이 틀리냐? “ 나는 볼을 긁으며 픽 웃었다. “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시네요.” “ 그래서 왜, 아니야?” “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그러지 않을까 싶네요.” 할머니가 눈을 치켜뜨고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 여자 때문도 아니고 그럼 갑자기 무슨 바람으로 온 거냐?” “ 아, 그게 저…….” 나는 뭐라고 말해야 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할머니의 눈이 나와 가방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그리곤 불쑥 내 어깨를 툭툭 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한 상 거나하게 차려져 있었다. 시간 때를 보아하니 저녁 식사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탁탁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더니 할머니가 밥숟가락으로 상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 횡성에서 일주일은 서울에서 하루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일주일 동안 하는 일 하나 없이 막연히 시간이 참 잘 간다는 영양가 없는 생각과 더불어 어릴 적 추억을 곱씹으며 지냈다. 하루가 지나간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해가 뜨면 아침이 되고 아침이 되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밤이 되고 밤이 되면 저녁밥을 먹고 새벽이 되면 잠을 자야 된다는 의무감에 빠져 지냈다. 잠이 안 오면 이리저리 뒤치락거리면서 힘겹게 눈을 감고 잠이 들기 위해 노력한다. 처음엔 새벽에 항상 깨어 있던 습관 때문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습관이란 또 다른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요새 부쩍 낮잠이 들었다. 밤에 실컷 자놓고도 밥만 먹었다하면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곯아떨어진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처럼 방문을 부시고 들어와 학교에 가라고 소리를 지르지도, 아침은 꼭 먹어야 된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당연히 늦잠을 자도 예전처럼 수도꼭지를 틀어 내 머리에 뿌리며 이불을 빼앗아 가지도 않으셨다. 신기했다.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인데 예전에 비해 나이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할머니가 내게 하는 대우나 말투가 바뀌었다는 것은 한편으론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도 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퍼지기도 했다. 어른이 되면 누군가에게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그 간섭이 지나치면 무관심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관심을 즐길 때였다. 서울에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것이니까……. 녀석들 사이에서 북적북적 있을 때도 좋았지만 지금 이 생활도 편했다. 사람이 한가해지니 너그러운 기분도 들고 여유로워졌다. 그래서 나는 길어봤자 일주일을 생각하고 온 이곳에 서울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다행이 우리가 쓰던 방은 그대로였다. 녀석과 내가 서울로 떠나던 시기와 맞물려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고 했다. 여섯 개 일곱 개를 넘어가던 사글세방이 텅텅 비어있었다. 권솔과 내가 사는 옆 방 하나를 할머니가 창고로 쓰고 맞은편에 있는 방하나는 메주나 고추를 말리는 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누구 애써 이런 촌구석으로 들어오겠는가. 사람들이 와야 돈이 될 텐데, 방이 썩어나고 난다, 아주. 내 방은 그대로였지만 열쇠를 찾지 못해 나는 꼬마의 방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녀석의 구박과 등쌀에 못 이겨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지만 삼사일이 지나자 그것마저도 지극히 무심하게 넘길 수 있었다. 또 무엇보다도 도도한 순호 녀석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꼬마의 이름은 오 순호였다. 그러나 절대로 이름처럼 순하지 않았다. 녀석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첫 이미지처럼 순호는 또래아이 답지 않게 오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놈이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기가 질릴 만큼 승부욕의 강도가 어른 못지않았다. 순호는 싸움을 잘했다. 성격과 다르게 얼굴도 하얗고 예쁘장하게 생겨 타 유치원에의 여자애들에게서 러브콜이 들어 올만큼 인기가 많았다. 건방지고 성격도 별로 안 좋은 네가 왜 인기가 많을까 하고 묻는 내게 녀석은 ‘원래 여자들은 무뚝뚝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고 말했다. 나름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호는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공부도 무척 잘했다. 녀석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와 수학학원을 다니는 놈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하루에 매일 서른 개의 영어단어를 외우고 두세 개의 수학공식을 완벽하게 외워야지만 잠이 들었다. 나는 녀석이 공부를 좋아해서 저렇게 영어단어에 집착을 하나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녀석은 뚝뚝 떨어지다 못해 흘러넘치는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남에게 지는 게 싫어 무작정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또, 녀석은 일명 골목대장으로서의 사명감으로 사람이 많은 큰길가를 걸어갈 때에나 가까운 슈퍼를 가게 되면 항상 새 양말을 갈아 신고 세수를 하며 내 로션을 훔쳐 발랐다. 하도 어이가 없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다 팬서비스 차원…….’ 이라며 형은 몰라도 된다고 건방을 떨었다. 7살짜리가 하는 짓거리가 진짜 기가 막혔다. 나는 녀석을 독하다고 해서 독호로 불렀다. 내가 독호야, 독호야 부르면 놈은 나이 많은 나를 자기 또래로 여기는지 내 앞에서 대놓고 개집이, 개집이 하고 놀려댔다. 처음엔 녀석을 붙잡고 단단히 혼을 내고 성질을 부려보았지만 어른의 훈계가 잔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 독호에겐 내 달콤한 말들은 씨도 안 먹혔다. 나는 포기했다. 다행히도 일주일에서 이틀이 넘어가자 할머니는 열쇠를 찾아내셨다. 나는 할머니가 창고에서 열쇠를 찾은 그날 당장 순호의 방에서 우리가 살던 방으로 옮겨왔다. 공짜로 있을 생각은 없었다. 가지고 있던 현금을 탈탈 털어 할머니에게 방값으로 드렸다.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한사코 거절했다. 나는 그 다음날에고 또 그 다음날에고 방값을 드리려는 가진 노력을 기울였지만 할머니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올 거면 지금 당장 짐 싸들고 서울로 꺼지라고 역정을 내 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할머니 장판 밑에 몰래 돈 봉투를 끼워 넣었다. 그것마저도 귀신같이 눈치 챈 할머니가 돈 봉투를 마당에 집어던지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날 보며 한다는 말이 정 그러면 순호 과자나 사주란다. 나는 그 뒤로 녀석이 학교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시장을 봐서 간식거리를 만들어 주거나 밥을 해줬다. 할머니는 새벽에 나가 날이 저문 저녁에나 시장에서 돌아와는 통에 항상 밥은 혼자서 먹었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녀석은 반찬 투정 하나 없이 맛이 없든, 있는 만들어 주는 족족 개 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내가 절대 음식을 잘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녀석은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 반죽이 덜 된 빵이나 설익은 포크커틀릿도, 퍽퍽한 생선가스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녀석의 괴력에 나는 감탄할 정도였다. 리틀 김 지만을 보는 듯 했다. 아마 이놈은 십년 후에 김 지만 같은 무시무시한 거구로 돌변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오순호의 간식전담반으로서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가끔 시내에 나가 책을 보고 오기도 했다. 음식이 떨어지면 시장을 나가거나 또 그도 저도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순호 녀석을 데리러 (녀석은 나를 유치원 친구들이 가족으로 오해하면 자기가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온 신비주의이미지에 큰 시련이 불어 닥친다고 유치원 앞으로는 얼씬도 못하게 했지만) 유치원으로 나갔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하던 고민도 먹고, 자고, 싸는 인간의 3대 기본 욕구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이 사라졌다. 시간은 고요하게 지나갔다. 할머니는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시장에 나갔다.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마당에 나올 때엔 어김없이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마주친다. 봉지가득 담아봤자 천원 이천 원이 안 되는 나물을 씻고 다듬어 광주리에 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삼십 분 일찍 장으로 나가는 모습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온다. 방 틈사이로 퉁퉁 부은 손으로 피난민 짐 꾸러미를 태연하게 짊어지고 어두컴컴한 새벽을 걸어가는 할머니를 볼 때 마다 나는 인생을 큰 노력 없이 한심스럽게 살고 있다는 죄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 즈음, 나는 조금씩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시내에 나갈 때 마다 한두 권씩 사던 것이 얼추 모양새를 갖추었다. 큰 마음먹고 책꽂이도 하나 샀다. 그 다음날에는 좌식책상과 의자도 샀고 그 다음날에는 방안 공기가 안 좋아 가습기도 하나 샀다. 또, 그 다음날에는 요리책을 하나 샀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순호 녀석과 새로 산 요리 책만 믿고 도넛을 만들었다. 그러나 만든다는 도넛은 고사하고 괜한 부엌만 쑥대밭으로 만들고 비싼 식용유 한통을 맛도 없는 도넛에 쏟아 부었다는 이유로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바가지로 얻어듣고 쫓겨나 녀석과 한 시간 반 동안이나 대문 밖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순호 녀석은 억지로 부리며 떼를 쓰고 끝끝내 나를 졸라 만화방으로 가자고 부추겼다. 자라나는 꿈나무의 희망을 꺾고 싶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녀석을 데리고 만화방으로 갔다 오던 길에 벌서는 중에 마당을 지키고 서있는 할머니한테 걸려 빗자루로 종아리 아작 났다. ……이를 테면 뭐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다는 거다.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을 깨끗하게 쓸고 닦고 치워 얼추 사람이 살고 있긴 하구나 라고 느낄 만큼 만들어 놓자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금세 한 주가 또 보태졌다. 서울에서 말 한마디 없이 떠나 온지도 오늘로서 정확히 3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적 녀석들에게 전화나 문자하나 하지 않았다. 연락을 뚝 끊고 지냈다. 몇 번 전화를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전화기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내일하자, 내일하자 보면 또 내일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정말 내일이 되면 또 내일하자 미뤄 오늘이 되었다. 그나저나 정말 내일은 해볼까? 슬리퍼를 질질 끌고 마당으로 나왔다.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들을 속으로 되뇌며 대문을 여는데 내가 힘을 들이기도 전에 문이 알아서 밀려지고 있었다. 순호 녀석이었다.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는 녀석이 미심쩍어 유심히 얼굴을 살폈다. 평소보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온 것도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아뿔싸, 역시나……. 아침에 멀쩡히 들고 간 가방은 어디다 내팽개쳐 버리고 녀석이 달고 온 건 흙먼지와 자잘한 흉터, 그리고 퉁퉁 부은 눈이었다. 파랗게 멍이든 광대뼈와 날카로운 유리조각에 찔린 듯한 눈썹이 벌어져 찔끔찔끔 피가 뭉쳐져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녀석에게 어떻게 된 거냐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녀석은 밖에서 얻어터지고 온 주제에 애꿎은 나만 반항적으로 한번 쏘아보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거칠게 돌려세웠다. 녀석은 평소와 다르게 반항 없이 얌전히 딸려왔다. “ 너 혹시 초등학생 형들한테 맞았어?” 순호 녀석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핏물이 콧등 위를 적시고 있었다. 닦아 주려고 손을 들었다. 녀석이 고개를 팩 돌리며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내가요? 내가 초등학생 놈들한테 맞을 정도로 나약해 보입니까? 난 죽어도 안 맞습니다.” 순간 웃음이 튀어나오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발버둥치려는 녀석을 더 꽉 움켜쥐었다. “ 근데 얼굴이 왜 그래? 그럼 친구들하고 싸웠어?” 순호 녀석이 이제 나를 한 대 칠 기세였다. “ 자꾸 왜 그래요! 우리 유치원에서 나를 상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습니까? 이 돌대가리 형아.” “ 네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사실대로 말하면 알아먹을게. 만약 거짓말 하면 할머니 한 테 일러줄 거야. “ 순호는 나를 한심하단 눈빛으로 위아래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주의 깊게 녀석을 살폈다. 녀석은 위기를 기회삼아 나를 밀쳐내고 방으로 뛰어가려 했다. 오호,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녀석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보란 듯이 외쳤다. “ 할머니! 오순호가 졸라게 얻어터지고 왔네요!” 녀석이 내 신발을 지근 밝으며 눈알을 부라렸다. 어찌나 눈빛이 살벌한지 아기 사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 치사해!” 나는 피식피식 웃었다. “ 알아, 나 치사해. 그러니까 얼굴이 왜 그 꼴로 변했는지 빨리 말해.” 오순호의 얼굴이 일순 기묘하게 일렁였다. 고민과 번뇌, 갈등과 질투로 소용돌이치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인내를 갖고 기다렸다. 또 도망가면 할머니한테 이르겠단 협박도 넌지시 던졌다. 녀석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더니 내 협박에 끝끝내 굴복했다. “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야구방망이로 대가리를 두드려 맞은 충격에 얼이 빠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바보처럼 되묻자, 녀석은 선심 쓰듯 말했다. “ 사랑이 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왜요, 못 믿겠습니까?” “ 아니, 그건 아닌데…….” 녀석은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꼈다. “ 믿든 말든 그건 형 자유니까 터치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지극히 사실입니다. 나를 거짓말쟁이 취급 마십시오.” 녀석이 급격하게 안색을 굳히며 눈알을 부라렸다. 그러다 돌연 한숨을 내쉬며 볼 장 다본 사람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전 이런 식으로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살다가 사랑 때문에 비실비실 말라 죽을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장담할 수 있습니다. “ 말하는 꼬락서니를 봐선 지금 당장 이 경원이랑 빅 매치를 시켜 논다 한들 전혀 뒤처지지 않을 현란한 솜씨였다. 그 때문에 고생하는 건 나였다. 나는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에 우거지처럼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순호 녀석이 냅다 돌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 삐쩍 마른 애가 어떻게 된 게 손끝만 그렇게 매서운지 가만히 맞아주다가 뺨 찢어지고 대가리 깨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급기야 헛바람이 든 것처럼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녀석은 그런 날 탐탁지 않은 눈으로 물끄러미 올려보다 시무룩하게 말했다. “ 이게 다 사랑 때문이지요. 사랑이 아니었으면 지금 당장 달려가서……! 아,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해봤자 뭐 하겠습니까. 저는 그 애를 때릴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는 걸요. 연인관계에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 아닙니까? 그럼 전 영원한 약자입니다.” 기가 찼다. 숨죽여 웃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녀석의 급변하는 얼굴을 샅샅이 훔쳐보며 입을 열었다. “ 그래서? 계속 말 좀 해봐. 궁금해 죽겠다.” 순호 놈은 화장실 갔다가 뒤를 덜 닦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그것도 마당으로 쌩하니 걸어갔다. “ 제가 형한테 말씀드리면 길어도 하루 안에 할머니 귀에 들어가는 것에 오백 억을 걸겠습니다. “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너는 오만원도 없는 주제에 엊그제부터 말끝마다 오백 억이라고 하더라.” 녀석은 발꿈치를 들어 운동화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 그 많은 돈을 걸 수 있을 만큼 저는 자신 있다 이겁니다. 아무튼, 부탁드립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맞고 왔다는 건 절대 말하지 마세요. 할머니 아시면 절 때린 놈보다 맞고 온 제가 더 죽습니다. 사내자식으로 태어나 다른 놈한테 맞고 집으로 들어왔다는 건 집안 대대로 치욕이라고 생각하시니까요. “ 하긴, 할머니라면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지. 그렇다고 모른 척 넘어가기에 녀석의 얼굴은 지나치게 엉망이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할머니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녀석은 마루위에 가방을 쏜살같이 집어던지고 수돗가로 가서 천천히 핏물을 닦아냈다. 바가지채로 모래 묻은 팔뚝을 씻던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근데 밖에 나가려던 길 아니었습니까? 혹시 슈퍼가십니까?” ……아, 그랬지. 나 슈퍼 가던 길이었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슈퍼. 슈퍼 가던 길이었지.” 녀석은 양말을 훌러덩 벗고 비누를 발가락 틈새에 왔다갔다 문질러댔다. “ 볼일 다 보고 잔돈 남으면 오백 원짜리 소시지나 두 개 사다주십시오.” “ 그래, 그럴게.” “ 네, 고맙습니다. 성공하면 갚겠습니다.” 녀석은 고맙단 말을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얼굴로 말하곤 질척질척 거리는 신발을 자기 방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참, 보면 볼수록 별난 놈이로세.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걸 보면 가끔 귀엽기도 하고 또 그만큼 재수 없기도 하고……. 어찌되었건 요새 저 녀석 때문에 심심하진 않아 좋다. 방문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어 보이자, 녀석이 마지못해 고개를 흔들더니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심심하진 않다만, 재수 없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녀석들은 지금쯤 가게로 가고 있는 중이거나 아니면 저녁밥을 먹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가게에서 비룡이 형이 차려준 저녁을 먹고 있을지도 모르지. 누구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 될까 고민하다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무작정 익숙한 번호를 눌렀더니 권솔의 핸드폰 번호였다. 한번 울리던 신호음이 노랫소리가 바뀌었다. 시대에 전혀 동떨어진 한물간 테크노 음악이 흘러나왔다. 따-따따따-따-따-. 시끄럽기만 하고 전혀 즐겁지 않은 노래가 시작되었다, 끝이 나고, 또 시작이 되어도 녀석은 전화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일부러 전화 받을 시간에 맞춰 한 건데 왜 이렇게 안 받을까…….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이번엔 경원이 놈의 번호를 눌렀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가증스럽게도 재즈음악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다라라라라’ 의 다까지 시작했을 때,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왔다. 「 누구냐.」 너무나 이 경원다운 말투에 실소가 나왔다. 무거운 수화기를 바짝 치켜들고 또박또박 말했다. “ 경원아, 나다.” 당연히 욕이나 비명을 지를 거라 생각했던 녀석이 의외로 침묵했다. 5분 같은 5초를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녀석이 대뜸 말했다. 서릿발이 느껴지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 어디야.」 나는 어색하게 ‘하하하…….’ 웃었다. 녀석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도리어 내가 머쓱해졌다. 그래서 괜히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 나 잘 있어, 너희는 어떠냐? 말 안하고 와서 진짜 미안, 시간이 없었어. 날씨가 참 좋네.” 경원이 놈은 묻는 말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녀석이 핸드폰을 떼고 나지막이 씨발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뜨끔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돌연 이 경원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 지금 어디냐고, 이 씨발아! 사람 이런 식으로 엿 먹이면 기분 참 좋겠다? 그렇지?」 나는 녀석의 황소 같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수화기를 그대로 내려놓을 뻔 했다. 왜 이렇게 흥분을 하는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속에서 욱하고 열이 올랐지만 우선 녀석부터 말려야 될 것 같아 굽히고 들어갔다. " 아, 정말 미안하다. 말하고 올 시간이 없었어. 나 잘 있어, 너무 걱정하진 말고……. “ 놈이 내 말을 대뜸 잘랐다. 「 거기서 시간 없다는 말 한마디만 더 해라. 그땐 친구고 나발이고 진짜 죽는다.」 오래된 전화기에서 불 문명하게 들리는 녀석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열기와 분노의 빛이 느껴지는 걸 보니 이 경원이 화가 나도 정말 단단히 났군. 내가 생각해도 한 달은 조금 심했다. 미안한 마음에 가만히 있었다. 녀석이 씩씩대며 덧붙였다. 「 난 네가 정말 잘못된 줄 알았다고. 교통사고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좆나 엿 같은 거. 근데 뭐야, 시발 잘만 살아있네? 팔, 다리 멀쩡한데도 연락을 안 했단 말이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하하하, 나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말해! 아무 말이나 좀 해보라고! 조금 전까지는 좆 나게 나불대던 주둥이가 갑자기 막혀버렸냐? 왜 말이 없어? 빨리 말하라고 이 자식아.」 나는 조용히 웃었다. 경원이 놈의 흥분한 목소리에 안도감이 들다니 내가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 잘 있지?” 「 그래! 더럽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렇게만 살다가는 백오십 살이 되는 날엔 검은 머리가 앞머리를 덮을 지경이다. 하하하, 이거 어쩌나 네가 없으니까 너무, 너무 재밌어서 웃음이 안 멈추려고 한다. 하하하…….」 연신 하하하 대던 녀석이 일순 웃음을 멈추고 사납게 물었다. 「 너는? 우리 없으니까 밥맛 좋냐?」 나는 괜히 씩씩한 척 했다. “ 밥맛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잘 있긴 잘 있어.” 씩씩한 내 목소리에 이 경원이 분노했다. 「 망할 새끼. 우리 떠나니까 재미 좋다 이거냐? 하, 진짜 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 미안, 가게는 어때?” 녀석은 잠시 주춤거리다 대답했다. 「 때려 쳤다. 너 없어지고 일주일 더 다니고 바로 나왔어.」 차마 왜냐고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들고 있던 전화기만 더 꽉 움켜쥐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어두워졌던 하늘에서 기어코 한 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화 부스에서 고개를 죽 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방울이 눈썹위로 세차게 떨어졌다. 건조하게 말라있던 바닥이 어느새 축축해졌다.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커졌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낄낄 웃으며 저마다 신문을 뒤집어쓰며 뛰어다녔다. 빗소리에 맞춰 이유 없이 내 심장박동소리도 커졌다. 공중전화 부스의 때 낀 유리창에도 빗방울들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물기 묻은 유리를 손끝으로 죽죽 미끄러뜨렸다. 빗소리에 섞여 경원이 새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 너 서울 아니지? 서울은 지금 비 안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거두절미하고 지금 당장 서울로 기어와. 전화 끊고 바로 와! 바로! 알았어? 대답해.」 나는 미끈미끈 거리는 손가락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았다. “ 조금만 더 있다 갈게. 조금만, 아주 조금 더. 그렇게 길진 않을 거야.” 「 그게 언젠데.」 “ 나도 몰라. 근데 지금은 싫어.” 어째 조용하다 싶었더니 기어코 유리컵이 내던져지는 소리가 쾅 울렸다. 씩씩대는 녀석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성질도 고약하시지. 잠시 멎어있던 그릇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쾅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서 몇 초간 떼어냈다가 다시 들었다. 녀석의 목소리는 잔잔해져 있었다. 「 우리 가게 하나 차릴까.」 예상치 못한 물음에 눈알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유리창에 달라붙을 뻔 했다. 목소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가게? 뜬금없이 무슨 가게냐.” 「 넷이서 가게 차리자니까. 나는 뭐든 자신 있어. 음식이든 술이든 옷이든 아마 새로운 유행을 창조해 나갈 거다.」 자신감이 넘쳐 놈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에겐 자만심으로까지 비쳐질 녀석의 당찬 목소리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경원아, 넌 너무 인생을 쉽게 생각하는 거 같다. 우리가 무슨 기술이 있다고 장사냐.” 「 내가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네가 어렵게 생각하는 거겠지.」 “ 그건 그렇다 치고 돈은? 가게 세도 들고 밑천이 있어…….” 녀석이 불쑥 내 말을 끊었다. 「 아버지한테 부탁했어. 늦어도 이번 주 안으로 마련 할 수 있을 거다. 시발, 노력해도 좆도 안 되는 골프에, 영어라곤 땡큐 밖에 못하는 노인네가 외국 나가서 돈 쓰고 돌아다니는 것보단 하나 밖에 없는 자식 사업 밑천 대주는 게 그 나이엔 더 의미 있는 삶 아니겠냐? 그래서 내가 구제 좀 해주려고 그런다. 좆도 안본사이에 노망이 났는지 더럽게 짱알대긴 했지만 뭐, 주긴 준다더라.」 발랄한 녀석의 목소리와 다르게 내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심장에 추를 메달아 놓은 기분이었다. 녀석이 어떤 심정으로 집에 찾아갔을지 눈앞에 선했다. 벌레 씹은 얼굴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한 척 했을 것이다. 부모하고 인연 끊고 산지 횟수로 4년 째였다. 앓는 소리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하는 주제에 잘사는 모습은 고사하고 나이는 먹을 만큼 다 먹어서 손을 벌리는 건 죽기보다 싫었을 터였다. 나는 녀석이 부모님에게 보여준 무기력함의 원인이 내가 된 것만 같은 착각과 함께 쓸모없는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눈치 빠른 이 경원이 내가 눈앞에 있는 것 마냥 자신 있게 말했다. 「 자식이 돈이 없으면 부모한테 손도 벌릴 수 있는 거지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 그리고 부잣집 외아들인 거 모르냐. 집에 굴러다니는 골프채만 팔아도 사는데 지장 없을 거다. 그러니까 똥 씹은 표정 하지 마, 밥 맛 떨어진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 그, 그래. 옆에 지만이나 솔이 있으면 바꿔줘 봐. 목소리나 한 번 듣고 끊게.” 「 김 지만이 새끼는 옆에서 자고 권솔은 없다. 걘 묻지 마라, 네가 서울 와서 직접 봐. 그 새끼 일은 쪽팔려서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격앙된 경원이 놈의 목소리에 나도 다급해졌다. “ 왜? 혹시 무슨 일 있어?” 「 그 새끼 너 있는데 안 불고 개기다 완전 병신 됐어.」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그 놈한테 말한 적 없어.” 「 그래? 이상하네. 솔이 새끼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눈치던데? 하도 안 와서 경찰서에 신고하려고 하는데 그 새끼가 너 서울에 없다고, 올 때 되면 온다고 기다리라고 하더라. 좆나 느긋하게 폼 잡던데, 그게 다 뻥이었나? 하여간 너 없어지고 이주일 뒤엔가, 그 새끼가 불렀어. 누군지 말 안 해도 알지? 이 복희도 네가 어디 갔는지 권솔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이 경원은 분통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 늑골을 잘못 맞아서 방어도 못하는 새끼 갈비뼈를 반쯤 부러뜨렸다더라. 이 복신 그 대가리 병신이랑 퇴원하고 얼마 안 있다가 그런 통에 몸 상태가 원래부터 거지같았어. 제대로 주먹 한번 못 써보고 바로 기절했대. 지만이 말로는 몸 상태가 좋아도 결과는 똑같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나는 멍해졌다. 그냥 멍해지기만 했다. 그 사이에도 이 경원의 목소리를 윙윙거렸다. 「 진짜 병신 같은 새끼들이야. 셋이 있으면서 한 사람한테 그렇게 당하고 오냐. 하여간 대가리 병신이 권솔 제발 때리지 말라고 무릎 꿇고 울면서 비는데도 씨도 안 먹혔대. 권솔, 그 새끼도 어지간히 미친놈이지. 가만히 있어도 피 똥 쌀까, 말깐데 맞으면서 쳐 웃긴 왜 또 쳐 웃어서 이 복희 성질에 불을 피우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 …….”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녀석이 심호흡을 하며 알아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 너는 알고 있었냐?」 “ 뭘…….” 「 이 복희 그 미친 인간하고 사장이랑 대가리 병신이 친 형제가 아니라는 거.」 뭐? 심장이 또 다시 욱신거렸다. 나는 놀라다 못해 실수로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순간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단편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당장 생각이 나는 건 복희씨 집에서 봤던 가족사진이었다. 중년의 사내가 사장과 이 복신을 안아 들고 젊은 여자가 복희씨를 안고 있던 모습이 기억 속에서 점점 부각이 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빈속이 울렁거리며 갑갑해졌다. “ 그래서…….” 「 사장하고 대가리 병신은 부모가 같은 친형제가 맞대. 이복희랑은 문제가 좀 복잡한 모양이더라. 내가 들었을 땐 엄마만 같고 아버지가 틀리다는 말 같았어. 너도 몰랐었냐? 나는 이주일 전에 알았다. 어쩌다보니 비룡이형이랑 아저씨 하는 말을 엿들었거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와, 그 집안 완전 썩은 콩가루 집안이 더만.」 “ 계속 말해.” 「 그냥 집안 자체가 드라마야. 그것도 각본 없는 드라마! 잘 들어, 호적 꼬여서 못 알아먹을 수도 있으니까. 아저씨의 첫 번째 형이 이 복희의 친아버지야. 그 사람하고 이 복희 엄마랑 결혼해서 그 인간을 낳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이혼했대. 그리고 남편의 첫 번째 동생하고 다시 결혼을 해서 그 다음해에 사장을 낳고 또 그 다음해엔 대가리 병신을 낳았나봐. 두 번째 동생은 알고 있지? 아저씨야. 근데 사실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고 쳐. 요새 하도 콩가루, 밀가루, 쌀가루들이 날리니까 웃으면서 넘어가자고 뒤로 갈수록 더 재밌어져. 놀라지 마라.」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일까. 나는 이제 무섭기까지 했다. 숨을 죽이고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녀석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 이 복희의 친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아? 사장이 태어나던 날 교통사고로 즉사했대.」 눈꺼풀이 바르르 떨려왔다. 눈을 뜨면 현실과 바로 직면할 것 같은 두려움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 한번 생각해봐. 그렇다면 이 복희가 삼촌이자 자기의 양아버지를 미워할 이유가 충분하잖아. 근데 그렇지 않았대. 좋아했다는 다는 거야. 정말 친 아버지라고 믿고 따르고 존경했대. 좆나 이상하지? 나도 여기까지는 그냥 그랬어. 아저씨의 마지막 말을 듣지 않았으면 정말 오해할 뻔 했다니까.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빗줄기가 거세어지고 있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녀석이 꿀꺽 침을 삼켰다. 「 그 남자가 언제 죽었게? 이복희의 친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던 날, 즉 이복귀 사장의 생일날 죽었어. 진짜 재밌는 건 그 사람도 교통사고였대. 역시 똑같이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새벽에 멀쩡히 길 잘 가다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사고현장에서 뇌진탕으로 즉사했대.」 지나가는 투로 복희씨가 했던 말과 박태열씨가 내게 알려준 그의 과거가 떠올랐다. 나는 ‘똑같다, 똑같아…….’ 하고 뇌까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금에 와서야 복희씨나 박태열씨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달라지는 건 결코 없었을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복희씨는 내 동정 따위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 고마워, 경원아. 말해줘서.” 녀석은 조용한 내 목소리에 덩달아 기가 죽었다. 「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그래도 아무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복희가…….」 지독히도 굵은 빗물이었다.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지는 비를 무작정 그치기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오늘 밤 내내 내릴 지도 모르겠고. 나는 손을 죽 내밀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만지작거리며 수화기에 대고 서둘러 말했다. “ 경원아. 내가 내일이나 그 다음날 전화할게. 최대한 빨리할게. 오늘은 이만 끊어야겠다.” 「 야, 안 돼! 마지막 말만 들고 끊어. 야! 김 계진…….」 녀석은 다급하게 말했다. 때마침 동전이 다 되어 전화가 멋대로 끊어졌다. 나는 끊어진 수화기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부스에서 나왔다. 거칠 물줄기가 얼굴과 어깨로 고스란히 떨어졌다. 어느새 거리는 한적해진 도로를 따라 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했다. “ 계진이 형!” 대문을 열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부르는 독호의 목소리에 나 역시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맨발로 마당까지 뛰쳐나와 내 방문을 가리켰다. “ 방에 빨리 가보십시오! 누가 왔어요! 서울에서 온 거 같습니다.” 서울……, 서울이라고? 나를 찾아 서울에서 여기까지 올 사람은 권솔 밖에 없었다. 녀석이 벌써 퇴원했나.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새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순호 녀석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왔다. “ 오, 한 인물 하던데요? 친군데 어쩜 그렇게 다른지 깜짝 놀랐다니까요!” 나는 녀석의 쓸데없는 야유를 한귀로 흘려들으며 의미 없이 대답했다. “ 그래.” 녀석이 까치발을 세워 나를 힐끔힐끔 올려다보며 얼굴을 굳혔다. “ 형! 왜 그러십니까? 얼굴이 창백한데요?” 늘어지게 들러붙는 아이의 머리를 힘겹게 밀쳐내며 말했다. “ 저기 순호야, 오늘 저녁엔 자장면 먹을래?” 순호 녀석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맨발로 돌멩이를 툭툭 걷어찼다. “ 자장면 만요?” 얘, 참 웃기는 애네. 가만 보면 참 인생사는 법을 안다니까…….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 탕수육도 작은 거 하나 시켜.” 녀석은 갑자기 환호성을 지르며 내 팔을 자기 얼굴에 비비고 마당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녀석이 지나간 자리마다 시커먼 검정 때가 묻어 마룻바닥과 방바닥이 난장판이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어린애긴 어린애다. 근 한 달 만에 처음 안 사실이었다. 녀석은 전화기를 빼어 들고 내가 볼 수 있게끔 높이 치켜 흔들며 활짝 웃었다. 나는 터프하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리고 땅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족쇄 같은 두 다리를 이끌고 내 방 앞으로 한걸음씩 천천히 걸어갔다. 권솔에게 내가 있는 곳을 물었다고 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기대감 같은 건 없었다. 또 다시 복희씨에게 기대 할 정도로 나는 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고 싶지도 않았고 복희씨가 절대 보여주지 않을 감정에 파묻혀 나를 깎아 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순호 녀석이 ‘형, 형 뭐하십니까.’ 하고 물어왔다. 대꾸하지 않았다. 문고리를 옆으로 밀었다. ……쾅!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나는 강한 팔 힘에 의해 공중에 살짝 들려 방안으로 끌어당겨졌다. 거의 멱살이 잡힌 수준이었다. 목을 답답하게 조이고 있는 사람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복희씨였다. 그는 내 목을 바짝 비틀어 쥐고는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억지로 몸을 끌어올렸다. 복희씨의 뱀처럼 날카로운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는 신장 차이 때문에 까치발을 세워 나 역시 그를 똑같이 쏘아봤다. 잘 먹고 잘살고 있을 줄 알았던 복희씨의 얼굴은 생각과는 다르게 많이 상해있었다. 그의 눈빛은 원래부터 과도하게 재수 없었지만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심각하게 까칠해져 있었고 날선 면도칼에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던 수염은 언제 면도를 했는지 의아할 만큼 거뭇거뭇했다. 정돈 안 된 앞머리는 지저분했다. 얼굴은 자잘한 상처와 칼자국으로 빼곡했으며 만져보지 않아도 피부는 거칠어져 있었다. ……어라. 안 본 사이에 눈꺼풀 위엔 손가락 한 뼌 정도의 긴 칼자국이 이마까지 죽 찢어져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낮고 정도를 벗어난 흡연질로 탁하게 갈라진 복희씨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의미 없이 그의 상처를 어루만질 뻔 했다. 그런 중대한 실수를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 빌어.” 한숨을 내쉬는데 복희씨가 다시 내 멱살을 바짝 움켜쥐고 앞뒤로 짤짤 흔들었다. 어이가 없다보니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뻔 했다. 복희씨가 틀어쥔 멱살 때문에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추리닝 상의를 억지로 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 지금 당장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게 좋을 거다.” 그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며 차갑게 말을 뱉어냈다. “ 그럼 한 번 정도는 눈감아 줄 수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가 더 열 받기 전에 빨리 빌어.” 나는 의도하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복희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 내가 왜요? 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빌어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쪽은 거 같은데요. 하지만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죠. 그리고 나도 이제 상관없고요. “ 보고 있는 내가 더 당황스러울 만큼 그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 뭐?” “ 뭐가요…….” “ 나랑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냐? 그렇게들은 거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랑 상관없다고요. 나랑 당신은 이제 상관없어! 다시 한 번 말…….” 퍽-! 뺨을 맞은 적은 있었다. 그때도 물론 아팠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복희씨의 말대로 그는 나를 봐주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의 주먹은 내가 온 힘을 다해 힘겹게 막아내려는 노력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전혀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강했다. 나는 지독한 고통에 사로잡혔다. 몸 여기저기에 비참함이 들고 있어 섰다. 분함에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도 필요 없이 그의 칼날 같은 주먹이 다시 한 번 뺨에 내리꽂혔다. 바람에 휘날리는 종잇장처럼 다리가 후들거리며 나는 끝내 방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스러져있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려는 노력도 없이 무뚝뚝하게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 맞기 싫지? 나도 때리기 싫다. 말없이 도망간 거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어. 그럼 나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볼 테니까. “ 단단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툭 끊기는 느낌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복희씨의 말 한마디에 숨죽이고 있던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복희씨가 ‘뭐…….’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짜고짜 그의 뺨을 올려붙였다. 복희씨가 나를 때렸을 때 못지않은 퍽 소리가 들려왔다. 내 손이 다 얼얼했다. 충분히 아팠을 것이다. 쌤통이었다. 예상대로 복희씨의 조금 얼빠진 얼굴이 오른쪽으로 살짝 돌아가 있었다. 누가 처음이 어렵다고 했는가. 그 말은 완벽한 참이었다. 나는 다시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복희씨의 돌아가 있는 반대편 뺨을 거칠게 또 다시 올려붙였다. 그의 뺨과 내 손에서 동시에 짝 소리가 터졌다. “ 나를 때리지 마세요. 저를 한 대 때리면 당신은 이제부터 두 대씩 맞게 될 거예요. 복희씨 역시 맞기 싫죠? 나 역시 때리기 싫어요. “ 복희씨를 돌아간 얼굴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뺨에 곰 발바닥 같은 내 손자국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이 복희씨의 때렸다는 사실에 대한 우쭐함은 없었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뺨은 내일아침쯤 되면 아마 욱신욱신 쑤실 것이다. 나 역시 네 놈한테 맞고 그날 아침은 눈이 안 떠 질만큼 아팠다. 이젠 너도 좀 아파보라지……. 그러나 복희씨가 정말 아파서 눈이 부으면 어떨까 생각하자 슬그머니 마음이 약해졌다. 정말이지 나는 구역질나는 성격이었다. 누가 누구를 생각한다는 거냐. 나 참, 어이가 없었다. 가슴 한편에 무서운 속도로 퍼지는 어수룩함을 악독하게 물리치고 그를 오늘당장 회쳐버리겠다는 눈빛으로 기선제압에 들어갔다. 복희씨는 어이가 없는지 ‘하…….’ 하고 탄성 같은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 왜 때리냐.” 복희씨의 질문이 너무 단조롭고 허망해 내 목구멍에선 맥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 예?” “ 감히 날 때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금 화나는 사람이 누군데?” 나는 내가 화나는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물었다. “ 저기요, 뇌가 없으세요?” 복희씨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 내가 뇌가 왜 없냐. 시발, 나 뇌 큰 거 있어!” “ 그럼 제발 좀 뇌가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보세요. 그거 생각보다 쉬워요.” “ 너 지금 나를 가르치는 거냐? 네가 나를? 감히 나를?”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었다. 나는 복희씨에게 잡힌 멱살을 힘들지 않게 떼어내고 그를 밀쳤다. 그것도 잠시 이 복희씨가 팔을 잽싸게 낚아채 자신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방안을 훑어보더니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내 짐 가방을 용케도 발견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 좋은 말로 할 때 지금 당장 짐 챙겨라.” 나는 복희씨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기 위해 낑낑대며 말했다. “ 아직도 막무가내시네요.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복희씨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여기에 더 있게 싶어지네요. “ 복희씨가 내 팔목을 으스러뜨릴 듯 사납게 비틀었다. “ 아, 아……!” “ 계속 그런 식으로 비위 거슬리다 맞아 뒈지면 좆나 안 아프겠지?” “ 왜요, 때리게요?” 복희씨는 거두절미하고 하고 싶은 말만 했다. “ 짐 싸.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면 당장 그 오두막부터 부셔버릴 테니까 내 오피스텔로 들어와.” “ 하,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오네.” 손의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눈치껏 빼내려 했지만 생각처럼 속아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는 여유롭게 웃더니 팔목을 바짝 끌어당기곤 내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강하게 짓눌렀다. 어깨와 맞닿은 복희씨의 가슴을 미친 듯이 밀어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밀어내고 또 밀어냈다. 그리고 그게 잘 먹히자 팔을 얌전히 내려놓고 발버둥질을 개시했다. 허나 그것마저도 복희씨가 내 발가락들을 발바닥으로 내리찍어버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내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쉬지 않고 조이고 있었다.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 대답해라. 네 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 그게 어려워?” “ 어려운 게 아니라 하기 싫어요!” 복희씨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사나워졌다. 가슴이 덜컥했다.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 네?" “ …….” 심중을 알 수 없는 말을 덜렁 던져놓고 입을 다물어 버린 복희씨를 천천히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버럭 성질을 부렸다. “ 뭘 꼴아봐. 다시 시작하자는 말 못 들었냐.” “ 듣기야 들었죠. 근데 그게 뭐요…….” 순간 할 말이 없어진 이 복희씨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복희씨의 입에서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나온 다음 말은 나를 이유 없이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 잘못했다 “ 방금 뭐라고 했어요?” “ 다 들어놓고 뭘 새삼스럽게 또 물어, 짐 챙기라고 했잖아.” “ 아니요, 그 말 말고요. 그 다음에 했던 말 있잖아요.” “ 아무 말도 안 했어, 기억 안나.” 그럼 그렇지. 네가 맨 정신에 나한테 사과를 하면 넌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그 이복희가 아니다. 더군다나 그 쉬운 ‘미안해’ 한 마디 못하는 사람이 뜬금없이 ‘잘못했어.’ 라는 말을 할 수나 있을까? 나는 굉장히 쓸쓸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한 달이 아니라 적어도 두 달 아니면 세 달 그것도 아니면 1년 뒤에 이 남자가 날 만나러 왔다면 난 완벽에 가깝게 이 사람을 무시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괜한 기대감에 들떠있던 내 자신을 비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전혀 알길 없는 복희씨는 감히 내 주제에 자기 말을 씹었다고 생각하는지 심각하게 불쾌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보더니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정장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자연스럽게 입에 꼬나물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를 힐끔 올려다보기가 무섭게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방구석에 휙 집어던졌다. 그가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있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가볍게 씹어주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저녁도 먹고 청소도하고 할 일이 많았다. “ 어디가! 이 찌글찌글한 방에 나 혼자 남겨놓고 또 도망가려고?” 어린아이처럼 때를 쓰는 그의 이기적인 목소리에 나는 왠지 기운이 빠졌다. 서울에서 느꼈던 지저분한 감정들이 그대로 이어질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었다. 복희씨의 끊임없는 장난에 필요이상 감정소모를 하고 결국은 지치다 지쳐 이곳까지 도망치다 시피 떠나온 나였다. 또 다시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복희씨와 한 두 마디 더 주고받다가는 화병으로 타죽든지 아니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변명보다는 내 분노가 뭉텅 거려 넘어갈 확률이 높았기에 나는 이 방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복희씨를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기도 했고. 나는 대답대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 복희씨가 내 앞으로 쿵쾅쿵쾅 다가오더니 조금 전 그의 만행의 흔적대로 벌겋게 달아오른 내 팔목을 무자비하게 낚아챘다. “ 지금 내 말 씹었냐! 가자는 서울로는 안 간다면서 또 어디 나가냐고 묻잖아!” 무조건 고함을 지르는 복희씨에게 나는 더럭 어이가 없어져 딱히 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내 어이없는 표정에 자기가 보이는 이상한 행동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덩달아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 팔목을 억세게 쥐고 흔들었다. “ 그렇게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뭐? 뭐! 뭐!” 이 새끼가 안 본 사이에 농약을 먹었나. 진짜, 상종 못하겠네. “ 당장 이 손 풀어요! 못 풀어요? " " 싫어." " 풀라니까!” 복희씨는 네 놈이 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하는 오만방자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순간 그 표정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나는 평정심을 잃고 이마에 닿을락 말락 거리는 복희씨의 턱을 머리통으로 직방으로 받아버리고 싶었다. “ 진짜 마지막으로 말한다, 지금 당장 서울로 가자.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그 거지움막 같은 집 정리하고 내 오피스텔로 들어와. “ 나는 거의 경멸에 가까운 분노를 느꼈다. “ 너 또 무슨 생각인데? 그 집에 가서 너랑 장 우현이 그 놈하고 자는걸 보고 있으라고? 아니면 박 태열이랑 셋이서 관계하는 걸 보고 앉아 있으라고? 내가 미쳤냐? “ 나는 흥분해서 복희씨의 면전에 대고 버릇없이 반말을 날려대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복희씨 역시 크게 개의치 않는지 아니면 다행히도 눈치 채지 못한 건지 앵무새인형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반복했다. “ 난 분명히 가자고 말했다. 싫다고 한 사람은 너야.” “ 네! 싫어요! 싫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혼자 서울로 가세요! 용건이 끝났으면 여기 더 있을 필요도 없잖아요? “ 나는 모 그룹의 멤버처럼 속사포 랩을 하듯이 빠르게 덧붙였다. “ 그 동안 복희씨 한 마디에 바보 머저리처럼 눈물이나 줄줄 흘리던 저 김 계진이가 아니라고요!” 복희씨는 오락실 앞에서 만난 동네꼬마아이의 주머니를 노리는 백수청년같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 지랄하고 자빠졌네.” “ 지랄이요? 내가 언제요! 내가 언제 지랄하고 자빠졌어요! 저 안 자빠졌어요! 전 아까부터 계속 서 있었다고요! 이거 왜 이래요!! “ 당연히 한 마디 할 줄 알았던 복희씨는 의외로 한 발짝 물러나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때를 기다리는 맹수와도 같은 눈빛을 반짝였다. 나는 그가 내 손목을 놓자마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복희씨가 한 발짝 다가왔다. “ 멈춰요! 제 옆으로 오지마세요. 소리 지르겠어요!” 소리 질러 봤자 밖에는 순호 밖에 없었다. 순호가 복희씨를 이기고 나를 구해줄리 만무했지만 순간적으로 얼토당토않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 또 무슨 괴상망측한 짓을 하면 사람들을 부르겠어요.” 사람들이라, 아는 사람 따위라고는 전혀 없었다. 복희씨의 얼굴에 심술보가 돋우라졌다. 나는 다시 한 발짝 물러났다. 복희씨의 미간이 갈매기 모양으로 심각하게 구부려졌다. 그가 내 앞으로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끝까지 해보자는 심보로 나는 두 발짝 물러났다. 복희씨의 얼굴은 급격한 분노로 파랗게 물들었다. 힘들게 숨죽이고 있던 복희씨의 더러운 성깔이 들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모습에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맹수 같던 눈이 절정을 맞아 붉어지며 그는 결국 본색을 드러내고 마음껏 으르렁거렸다. “ 멈춰! 시발! 멈추라고! 한 짝만 더 내빼봐! 그땐 진짜….” 안 멈추겠다. 나는 보란 듯이 한 발짝 더 떨어져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얄미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복희씨의 분노가 툭툭 끊어지는 모습을 감상하는 게 재미가 쏠쏠했다. 복희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친 듯이 방을 왔다갔다 서성댔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 너희 친구들 앞에서 나를 비웃으면서 실컷 자랑해도 좋아. 뭐, 내 말을 안 듣고도 멀쩡한 얼굴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해져도 좋고. “ 아이고. 기가 막혀라! “ 그럼 넌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는 거야." “ ……” " 너 혹시 그걸 노렸냐?”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손등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나를 보며 복희씨는 이때다 하는 얼굴로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 단! 서울로 나를 따라가면. 어때? 괜찮지 않나?”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복희씨가 멈추라는 말에 한 발자국 뒤로 좀 움직였다고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갑자기 영웅이 되나요? 복희씨가 얼굴을 굳히며 팔짱을 꼈다. “ 그래서 지금 나한테 그걸 따지는 거냐? 여기서 긴말 할 필요 없이 서울로 가서 얘기해.” “ 왜 자꾸 애처럼 억지를 부려요! 싫다니까요! 싫다고 몇 번을 말해요!” 하지만 그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고집을 피웠다. “ 그럼 내일 아침은 어때? 밤에 짐 싸고 오늘만 여기서, 근데 여기 방 맞지?” “ 방 맞아요. 내 방이에요, 왜요?” 복희씨는 찜찜한 얼굴로 방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오히려 자기가 화를 냈다. “ 진짜 방 맞지? 근데 무슨 놈의 방구석이 이렇게 발 냄새나게 생겼냐?” 발 냄새 나는 방에 한 달 동안 좋다고 산 나는 뭐가 되겠냐. “ 이상한 말 하면 쫓아 낼 겁니다.” 복희씨는 눈썹을 치켜뜨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혹시 창고나 뭐 다락같은 곳인가 해서 물어봤는데 이게 어디서 성질이야!” “ 미운사람이 진짜 미운 말만 골라서 한다.” “ 내가 미워?” “ 그럼 안 밉겠어요?” “ 이상하네. 난 네가 별로 안 미운데? 말도 없이 토껴서 좆나 열은 받았지만.” 그는 입을 쩍 벌리는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를 팩 돌림으로서 복희씨의 말을 가볍게 씹어주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오히려 복희씨가 입을 열었다. 물론 상냥하거나 부드러운 말투는 아니었다. “ 그런 적 없지만 내가 한 발 양보……, 이럴 때 하는 말이 양보 맞지? 살다보니 내가 누구한테 양보를 하다니, 참 기가 막히네. 양본가 뭔가 아무튼 그거 해서 오늘은 여기서 자고 일 아침에 같이 가는 걸로 해. 그건 괜찮지? “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뿌듯해하는 복희씨를 향해 나는 찬물을 끼얹었다. “ 전혀 안 괜찮아요.” 복희씨가 귀를 쫑긋 세웠다. “ 뭐? 좋아 죽겠다고?” 나는 그 말에 막 대답을 하려다 멈추었다. 이유는 복희씨가 내 대답은 듣지 않고 뽕 맞은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 사실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나도 미리 생각해 둔 게 있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그 모습에 문 앞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복희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장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뭐가 이렇게 불안하지……. 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신호음이 떨어지고 굵은 저음의 사내가 전화를 받자 복희씨가 대뜸 명령했다. “ 트렁크에서 상자 좀 들고 와. 아니, 그거 말고. 그건 건드리지 마!” 그러나 상대방은 ‘그걸’ 건드렸는지 복희씨의 안색이 굳어졌다. “ 그게 아니라니까. 이 멍청한 새끼들아! 그 밑에 있잖아, 사과 박스로 된 거. 그래, 그거. 그거랑 조수석 발밑에 작은 상자 하나 더 있어. 그게 더 중요해. 조심해서 들고 와. 끊어. “ 복희씨는 폴더를 닫자마자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그 후 이상한 정막감이 방안에 감돌았다. 복희씨는 나를 대놓고 훑어보았다. 나 역시 그를 바라보다 도저히 맨 정신으론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민망함을 못 견디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복희씨의 시선은 아직도 내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괜스레 위압감을 조성하는 복희씨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방바닥에 편하게 앉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딱히 무슨 말을 하거나 할 말이 있는 거 같지도 않았다. 다만, 전화 통화 내용을 들어보나 자꾸 방문을 힐끔힐끔 돌아보는 걸 봐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물론 사람을 기다리는 건지 ‘사과상자’를 기다리는 건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500분 같은 5분 정도가 지나고 나자, 대문을 시작으로 마당까지 쿵쾅쿵쾅 마당을 찍어대는 들짐승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보폭을 맞춰 울리는 발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한쪽에서 쿵쾅거리면 다른 쪽에서 지지 않으려는 듯 오기로 발을 동동 구르며 더 크게 쿵쾅거렸다. 그러다 문득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다툼이 일어난 듯 찌르르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거니 받거니 옥신각신 해대는 목소리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말싸움은 길어졌다.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오 분인데 말싸움만으로 십 분이 지나갔다. 상황과 분위기를 전혀 가늠하지 못한 채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그들의 뇌기능 저하와 높아져가는 목소리는 최고조에 이르러서 퍽-퍽 하는 주먹질이 오갔다. 그에 따라 복희씨의 인상도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얼굴은 급기야 폭발하기 일보직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처음엔 방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두 사람의 말다툼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밥 먹는 것처럼 당연히 복희씨는 화가 났다. 그는 나무문을 부셔 버릴 듯이 열어젖히고 버럭 고함을 쳤다. “ 이 정신 빠진 새끼들아! 빨리 안 뛰어와!” 우당탕탕- 멈춰있던 발걸음이 빨라졌다. 두 사람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복희씨의 한 마디에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말다툼을 멈추고 앞 다투어 달려왔다. “ 미친 새끼들아! 오라면 빨리 빨리 올 것이지 왜 이렇게 굼떠! 요새 좀 풀어줬더니 몸이 근질근질하지? “ “ 형님! 그게 아닙니다! 사실은 쌍칼이요.” “ 형님! 그게 아니고요! 새싹이가 먼저 시비를 걸….” “ 좋은 말로 할 때 둘 다, 안 닥쳐!!” 자기가 언제 좋은 말로 했을까? 오랜만에 보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복희씨가 열어둔 방문사이에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방구석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쌍둥이처럼 입이 주먹만 하게 벌어졌다. 혹시 쌍칼이 먼저 말할까봐 안달 난 새싹은 연신 침을 꼴깍 삼키며 심각하게 들뜬 얼굴로 입을 열었다. “ 계진씨! 오랜만입니다. 저를 잊진 않으셨겠지요?” 나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뭐.” 잊어버릴 만큼 평범한 외모도 아니고.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내 대답에 감격한 새싹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쌍칼에게 복희씨 몰래 혀를 날름 내밀었다. 쌍칼이 주먹을 쥐고 멱살을 달랑달랑 흔드는 시늉을 하려는 찰나, 복희씨가 고개를 들자 금세 팔을 내리고 시치미를 뚝 뗀다. 불쾌한 웃음을 지으며 새싹이 말했다. “ 계진씨! 그 동안 찾아뵙질 못해서 죄송해요. 생각은 있었지만 요새 저희가 좀 바빴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얼굴은 보니 그래보였다. 까칠한 피부와 거뭇한 수염. 복희씨가 월급도 안주고 어지간히 괴롭히는 모양이다. “ 하지만 계진씨, 제 마음은 언제나 계진씨에게 향해 있다는……” 진심이 묻어나는 얼굴로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오밀조밀하게 말하는 새싹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복희씨가 발로 그의 가슴을 냅다 후려갈겼다. 그다지 아파보이지도 않은데 새싹은 과도한 헐리웃 액션을 선보이며 이유도 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한 바퀴 굴러 넘어졌다. 쌍칼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복희씨가 히죽이는 쌍칼을 노려보았다. 쌍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네가 왜 쟤를 만나. 쓸데없는 소리 한 번만 더 지껄이면 그땐 알아서들 해.” 새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울상이 되어 있었다. 쌍칼이 여유롭게 말했다. “ 형님 말씀 잘 알아들었겠지? 김 새싹이.” 복희씨가 코웃음을 치며 검지로 한 사람씩 콕콕 찍어 말했다. “ 뭐라고 지껄이고 있냐. 너희 둘 다 말이야, 이 새끼야.” 쌍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반대로 새싹의 구겨졌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복희씨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 형님, 상자들 가져왔습니다. 어디다 놓을까요?” “ 내 발밑에 놓고 가.” 새싹이 쌍칼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복희씨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박스 전부 다 말입니까?” “ 그래.” 새싹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고 쌍칼을 향해 손짓을 했다. 쌍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과 박스 두 개를 가뿐히 들어 복희씨가 발밑에 내려놓았다. 새싹이 그 위에 상자 두 개를 포개어 놓았다 “ 저 새끼가 오늘 안 간다니까 너흰 차키 주고 헌식이나 오늘 노는 새끼 하나 불러서 차타고 가. “ 새싹과 쌍칼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사람이 일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쌍칼이 머뭇거리다 결심을 한 듯 말했다. “ 계진씨, 형님이 너무 속을 썩여서 그런 겁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정작 말을 한 본인도 놀란 눈치다. 쌍칼은 자기가 감히 복희씨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덩달아 새싹의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복희씨만 지나치게 똑같은 얼굴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툭 뱉어냈다. “ 차키 주고 서울로 가라고 했잖아, 돌대가리들아.” “ 예! 형님.” 쌍칼은 그제야 최면에 깨어나 허둥대며 정장 주머니란 주머니를 하나하나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허둥댔는지 쌍칼의 손에 쥐고 있던 차키를 옆에 있던 새싹이 발견할 정도였다. 쌍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새싹을 감동스럽게 바라보았다. 새싹이 고개를 끄덕이며 복희씨 앞에 차키를 내밀었다. “ 형님, 차키 여기 있습니다.” 차키를 건네받는 복희씨를 보며 새싹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 형님, 제가 찾았습니다! 쌍칼이 손에 쥐고 있는 걸 제가 말입니다!” 쌍칼의 감동스러웠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분노로 치를 떨었다. 도와주려고 한 줄 알았더니 이 기회에 복희씨 눈에 더 들기 위해 그랬나 보다. 대단한 충성심이 아닐 수 없네. 둔감한 복희씨는 새싹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얼굴로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을 뿐이다. “ 괜히 여기서 놀다가 사고치지 말고 서울로 먼저 가 있어.” 그리고 정떨어지게 그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아직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정승처럼 그대로 서있는 쌍칼과 새싹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 요새 애새끼들 단속 좀 잘해라. 시건방진 새끼들이 한 둘이 아니야, 특히 어제 오늘 들어온 새끼들. 윗대가리도 모르고 너무 날뛴다.” 쌍칼이 주먹을 불끈 쥐고 경멸스러움에 몸을 떨었다. “ 한 번씩 잡아놨는데도 그렇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형님께서 서울오시기 전까지 교육 제대로 시켜놓겠습니다.” 복희씨가 피식피식 거렸다. “ 새싹아…….” 새싹이 쌍칼을 툭 밀쳐내며 앞으로 나왔다. “ 예, 형님.” “ 교육시키는 김에 쌍칼 저 새끼나 어떻게 좀 해봐라.” 새싹이 주먹을 우두둑거리며 우렁차게 ‘네!’ 하고 대답했다. 쌍칼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 아니, 형님! 저는 왜.” 복희씨가 상한 얼굴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쌍칼을 빤히 바라보았다. 쌍칼이 복희씨의 눈빛에 지레 겁먹고 주춤거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 너 어제 가게에서 외상 술 잘 처먹고 화장실가서 가만히 손 씻고 있는 새끼 뒤통수 치고 라이터 뺐어갔지? 기억 나냐?” 쌍칼이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 글쎄요, 저는 기억이 잘.” “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그럼 그 라이터 뺏긴 새끼가 웃으면서 라이터만 돌려주면 한 번은 봐준다고 했던 말도 기억 안 나겠네? “ 쌍칼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쥐어짜듯 말했다. “ 잘은 모르겠지만 그랬던 거 같기도 합니다.” “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좋아, 그럼. 라이터 뺏긴 새끼 구두에 오줌 싸질러 놓고 ‘나 잡아봐라, 나 잡아봐라‘ 노래 부르면서 도망간 것도 절대로 기억 안 나겠다, 그렇지? “ 어째 불길한데. 그때 마침 새싹과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와 나는 동시에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우리지금 같은 생각?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싹 역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쌍칼은 아니었다. 그는 재밌는 놀이를 발견한 것처럼 신기해하며 활짝 웃었다. “ 기억납니다! 기억나요! 그 새끼 저 때문에 좆나 열 받았죠. 그 짜릿한 기분!! 지금 생각해도 웃겨죽겠습니다. “ 쌍칼이 불현듯 웃음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복희씨를 올려다보았다. “ 근데, 그걸 형님이 어떻게!!” 복희씨가 미소를 뭉개며 차갑게 말했다. “ 너한테 라이터 뺏기고 좆나 열 받은 새끼가 나다.” “ 계진이 형, 자장면 왔어요! 빨리 나와 보십시오.” 우렁찬 순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난 정말 넋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복희씨는 새싹과 쌍칼이 가져다놓은 박스를 동봉한 노란 테이프를 잡아 뜯어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인정한다. 솔직히 궁금했다. 은근슬쩍 방바닥을 기어와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복희씨의 어깨너머를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개미떼처럼 까맣기만 했다. 양복이었다. 하나같이 다 양복이었다. 첫 번째 박스는 양복 마이, 두 번째 박스는 정장바지, 세 번째 박스는 와이셔츠와 넥타이였다. 어이없는 나완 다르게 복희씨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박스 밑바닥을 뒤적여 노란 포스트잇 종이를 꺼내들었다. 저것도 챙겨 온 걸까? 그는 호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게 산만한 등치를 구부려 깨알 같은 글씨를 써내려갔다. 많이 궁금했다. 이젠 대 놓고 훑어봤다. 정말 순수하게 코웃음이 삐져나왔다. 복희씨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쓰고 있는 건 월, 화, 수요일 하는 일별표시와 그 밑에 그날 입어야 될 양복스타일과 넥타이 색깔 같은 것이었다. 대책 없는 행동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내 웃음소리에 맞춰 복희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새끼, 비웃냐.” “ 아니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잠시 딴 짓에 빠져있는 사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허나 한 발짝 내딛기가 무섭게 귀신같이 알아차린 복희씨가 덩달아 일어나더니 내 어깨를 방바닥으로 지그시 내리눌렀다. “ 왜요, 양복정리나 마저 하세요.” 복희씨가 고개를 저었다. “ 너 진짜 안 되겠다.” 방바닥에 정신없이 뒹굴 거리는 비싼 양복을 축구공처럼 뻥뻥 찼다. 왜 저러나 싶었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복희씨는 내 팔을 자기 쪽으로 죽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박스와 옷들 사이를 골똘히 내려다보면서 무언가를 찾는지 굉장히 진지한 눈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순 그의 눈이 반짝했다. 드디어 발견한 모양이다. “ 뭐해요? 뭐 찾는 거예요?” 복희씨는 내 말에 아랑곳 않고 무릎을 살짝 구부려 박스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의 손이 다시 쑥 올라왔다. 그의 손은 혼자가 아니었다. 복희씨의 손끝에는 은색의 무언가가 반짝였다. 처음엔 팔찐 줄 알았다. 그러나 팔찌의 몇 배에 달하는 크기는 도무지 액세서리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복희씨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 마이 갓. 복희씨가 꺼낸 것은 그의 직업과 토 나오게 잘 어울리는 그것이었다. 도대체 저런 수갑은 어디서 구했는지 왜 여기로 가지고 왔는지 물어볼 틈도 없는 그는 내팔 을 잡아당겼다. 발버둥을 쳤을 땐 이미 늦었다. 그는 쇠고랑을 떡하니 내 팔목에 걸어 잠그고 다른 한쪽은 자신의 왼손에 걸었다. “ 처음엔 개목걸이를 가져올까 했는데 그건 네가 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킥킥 웃으며 덧붙였다. “ 그럼 또 네 친구 중에 한 놈을 아작 내야 하는데 그 새끼들은 죽어도 말을 안 듣는다 이 말이야. 그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골치 아프더군. 미리 방지하자는 차원이니까 너무 기분 더럽게 생각하지는 말고. “ “ …….” “ 솔직히 너도 네 친구들 병신 되는 건 싫지?” 잊어버리고 있던 솔이 생각이 들었다. 복신 군이랑 싸워서 입원했을 때도 못 갔는데 지금은 어떨까? “ 권솔은 어때요? 얼마나 다쳤어요?” 복희씨는 나를 내려다보며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따분한 어조로 말했다. “ 글쎄, 죽진 않았다.” “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는 내 속도 모르고 히죽 웃었다. “ 말이지, 그럼 막걸리냐.” 은근히 유머까지 치려고 하다니. 기가 막혔다. “ 진짜 사람이 왜 그래요? 왜 죄 없는 사람을 막 패고 그래요? 그러면 기분이 좋아요?” 복희씨는 순식간에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 죄가 없다고? 그 새끼가 죄가 없어? 나를 비웃고 우롱했는데도 죄가 없는 거냐?” “ 복희씨가 열 받게 했겠죠. 솔이 놈이 다혈질이긴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비웃거나 그러진 않아요. “ “ 그래서 나 보고 뭘 어쩌라고.” “ 뭘 어쩌라는 게 아니라 솔이 녀석에게 미안해서 걔 얼굴을 이제 어떻게 봐요.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모르는데 저는 이렇게 태평하게 있으니 얼마나 제가 밉겠어요? “ 복희씨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하면 차갑게 굳어졌다. 표정변화가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나는지 내 팔목과 그의 팔목에 채워진 수갑 때문에 떨어져 봤자 한 발자국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잊고 나는 주춤 물러섰다. “ 이 기회에 안 보면 되겠네. 사실 네가 권솔하고 노는 거 별로였어, 그거 참 잘됐네.” 나는 도무지 대화가 통화지 않은 이 복희씨의 기를 사그라지게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한발 양보했다. “ 걘 제 친구예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가족 같은 사람이라고요. 복희씨도 소중한 사람이 다치면 마음이 아프잖아요. 복귀 사장님과 복신 군이 다치면 기분이 어떨까요? 가슴이 아프겠죠? 그런 거랑 똑같은 거예요. 저도 권솔이 다쳐서 마음이 아파요. “ 그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 나는?” 나는 예기치 못한 질문에 놀라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즉각 대답을 하지 않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복희씨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그러나 수갑 때문에 생각처럼 자세가 나오지 않자, 그는 다시 팔을 내리고 부루퉁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 내가 다치면 마음 안 아파?”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아프겠죠. 하지만 솔이랑은 달라요. 만약에 복희씨 때문에 복신 군이 다쳤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당연히 죄책감이 들지 않겠어요? 그런 거랑 비슷해요.” 그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 난 그 새끼들이 죽어도 마음 안 아파.” “ 정말 안 아파요? 동생들인데요?” “ 딱히 동생들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역시 하루아침에 대화가 통활 리가 없었다. 나는 거의 포기상태에 이르렀다. “ 복희씨는 소중한 사람도 없어요? 정말 불쌍한 사람이…….” 그는 불쑥 내 말을 자르며 어린아이처럼 부루퉁해진 얼굴로 말했다. “ 나도 소중한 사람 정도는 있어!”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억지로 모래 한줌을 집어 삼킨 것 같은 껄끄럽고 까칠한 느낌……. 복희씨의 입에서 장 우현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웃어넘길 때 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게 또 못마땅한지 복희씨는 눈썹을 구부러뜨렸다. “ 왜 그래.” “ 아니요. 근데 이 수갑 좀 풀어주세요. 화장실은 어떻게 가고 또 세수는 어떻게 해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 안 돼.” “ 왜요?” “ 풀어주면 또 도망 갈 거잖아.” “ 가고 싶지만 이제 더는 갈 곳도 없네요.” 복희씨가 눈을 가늘게 떴다. “ 진짜? 아니지, 그래도 안 돼!” “ 속고만 살았어요? 사람을 왜 이렇게 못 믿어요. 무슨 놈의 의심이 끝도 없어. 풀고 얘기해요. “ 복희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수갑에 묶인 손을 아래로 빙그르 돌려 내 팔목을 잡아 당겼다. 균형 잡지 못한 몸이 그의 무서운 힘에 맥없이 딸려갔다. 복희씨의 턱이 이마중앙에 닿았다. 간지러웠던 느낌은 고사하고 며칠 동안 깎지 않은 수염에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 보여줄게 있어.” 꿈틀꿈틀 움직이는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누르며 복희씨가 말했다. " 보여줄 거? 뭔데요?" " 일종의 선물이라고나 할까." 보여줄게 있다는 사람이 보여주지는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분위기만 잡고 있었다. 그는 담배 한 갑을 방바닥에 꺼내놓기가 무섭게 오늘 당장 폐암에 걸리는 게 1차 목적인 사람처럼 뻐끔뻐끔 담배만 피워댔다. 연기 때문에 떨어져 앉아 있고 싶었지만 수갑 때문에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슬금슬금 떨어져 앉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복희씨가 내 옆에 달라붙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굳게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순호 녀석이 와서 ‘자장면을 먹으면 먹는다, 안 먹으면 안 먹는다 왜 말을 못해!’ 하고 화를 내고 돌아갔고 얼마 안 있다가 할머니가 딸기를 사 왔다고 방문을 두드렸을 땐 피곤하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부했으나 집에서 하루 종일 놀고먹는 놈이 뭐가 피곤하냐며 문을 열려는 통에 진땀 꽤나 흘렸다. 이불로 대충 복희씨를 가리고 감기기운이 있다는 허무한 핑계를 둘러댔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수고를 하는데 내 고민의 원흉께서는 지극히 태평한 얼굴로 나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복희씨는 고개를 돌리고 양복과 박스조각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방바닥을 주시했다.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꼴이 또 무언가 찾는 눈치다. 하루 종일 뭘 저렇게 찾을까? 복희씨는 가만히 앉아서 발끝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새싹이 두고 간 박스 중 제일 작은 상자를 끌어당겼다. 그는 입 꼬리를 피식 들어 올렸다. 박스는 데굴데굴 굴러 복희씨 허리부근까지 딸려왔다. 그는 박스를 들고 동봉된 테이프 끈을 사납게 끊었다. 그리곤 수갑을 움켜쥐더니 별 힘들이지 않고도 나를 단번에 돌려세워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들었다. 나는 별반 대수롭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복희씨는 박수를 손가락으로 퉁퉁 치다 불쑥 내 앞으로 내밀었다. “ 열어봐.” 쓰레긴가……. 나는 아무생각 없이 박스를 건네받았다. 이불을 걷어내고 무릎위에 올려놓고 지저분하게 달랑거리는 테이프를 휙 벗겨냈다. 갈라져 있는 상자를 열어젖혔다. 어? 이게 뭐지?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박스를 향해 턱짓을 했다. 열어보라는 뜻이다. 나는 서류뭉치처럼 차곡차곡 개어진 파일을 꺼내 위아래로 흔들어보았다. 툭- 파일사이에서 뭔가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통장과 도장이었다. 재빨리 서류 앞장을 넘겼다. ……부동산 검인계약서였다. 너무 놀라 헛구역질이 튀어나올 뻔 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다독이며 서류를 손끝으로 죽 따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서류 내용은 너무 방대하고 지루할 정도로 길기만 했다. 전문용어가 뒤죽박죽이 되어 도통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긴 서류상의 내용보다 시야를 사로잡는 건 단연 내 이름, 석자였다. 서류 마지막 장, 작성자 성명에 내 이름이 적혀있었고 서명 란엔 내 인감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서류뭉치들을 가리켰다. 나는 두 번째 서류뭉치를 펼쳐 들었다. 앞장부터 열었다. 손이 떨려서 두 장을 한꺼번에 넘겼다가 다시 한 장을 뒤로 넘겼다. 복희씨 오피스텔 명의 이전계약서였다. 역시 서류 마지막엔 내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 내 인감도장이 찍혀 있었다. 서류뭉치는 끝도 없었다. 나는 발밑에 떨어져 있던 또 다른 서류뭉치를 뽑아들었다. 첫 번째 장을 넘겼고 역시나 내 이름이었다. 이번엔 강남에 있는 건물주 명의였다. 네 번째 서류뭉치를 또 열어보았고 물론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땅문서와 건물들이 하나같이 모두 다 내 이름 앞으로 되어있었다. 나는 복희씨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통장을 집어 들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파일에서 떨어져 나온 통장사이에 또 다른 통장이 또 다른 통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제일 바깥에 있던 통장부터 넘겼다. 물론 내 이름이었다. 차마 뒷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얼마가 들어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통장을 내려놓고 다른 통장을 들었다. 그리고 앞장만 확인했다. 역시나 그랬다. 모두 다 내 이름이었다. 건물과 땅과 집과 돈들이 모두 다 내 이름이었다. 복희씨가 무슨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순간에 침묵했다. 복희씨는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 뱉어냈다. “ 전부 네 거다.” 그는 감정 없이 웃으며 담배를 꺼내들다 한 개비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담배 각을 구겨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 너는 오늘부터 부자야.” 복희씨가 나를 바라보며 성의 없이 읊조렸다. “ 반대로 나는 하루아침에 거지새끼가 됐고.” “ …….” “ 안 기뻐? 보는 사람 김빠지게 반응이 뭐 그래.” “ 안 기뻐요. 왜 갑자기 이딴 걸 줘요? 나는 이렇게 많은 돈은 필요 없어요.” 복희씨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에 손등을 받히고 내 눈을 아주 빤히 들여다보았다. “ 살다 살다 돈 싫다는 새끼는 또 처음이네.” “ 돈이 싫다는 게 아니라 의미 없는 돈이 싫다는 거예요.” 복희씨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네가 의미 있게 한 번 써봐.” “ 싫어요. 가져가세요. 받을 이유 없어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 분위기 한 번 잡아 볼 라니까 더럽게 짹짹거리네.” 나는 거의 울먹울먹 거리며 복희씨를 째려보았다. 울고 싶진 않았지만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 눈물에 그가 다소 당황스러워했다. “ 왜 울어? 주는 사람이 싫어서 그래? 아니면 더러운 돈이라서 그래?” 소매 끝으로 눈을 비벼 닦았다. 머리 위로 복희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맞아. 사람을 짓밟고 뭉개면서 번 돈이야.” 복희씨의 목소리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단조로웠지만 듣고 있는 나는 마냥 단조로 울 수는 없었다. “ 나는 돈이 좋아, 아무리 부모 자식 간에 허물이 없고 형제지간에 우애가 좋네, 어쩐다 해봤자 돈이 없으면 부모 자식도 없고 형제도 없어. 인간관계의 절대적인 가치는 돈이 결정하는 거다. 돈만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완벽한 가치이자 기준이잖아.” “ 그렇지만요…….” 복희씨가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 돈 없는 새끼들이 까딱하면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말하는데 한 번 생각해봐. 돈 없는 주제에도 세상이 살만하면 돈 있는 새끼들은 세상이 얼마나 더 살맛나겠냐? “ 내가 울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복희씨의 목소리가 조용해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꾸 귓가에 윙윙대는 울림이 들렸다. 내가 귀를 주물럭대는 사이, 그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 나는 17살 때부터 지금까지 닥치는 대로 돈만 모았어. 돈 앞에선 사람을 패는 것도 짓밟는 것도 완벽하게 즐겁기만 했으니 무턱대고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니지.” 그는 공허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 그게 내 20대 전부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신없이 엉켜있는 서류뭉치들과 통장들을 복희씨 앞에 내밀었다. “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받을 수 없어요.” 복희씨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물론 그냥 주는 건 아니야, 나는 뼛속까지 장사꾼이다. 내가 손해 볼 짓은 안 해. 그건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무조건 적으로 지켜온 법칙이야. “ 그럼, 이 사람은 나한테 무얼 바라는 걸까? “ 바꾸자.” 그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나는 풀이 죽었다. “ 나는 이 돈하고 바꿀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집도 없고 차도 없어요.” 복희씨는 턱을 개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돌연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 정말 없어? 아닐 걸.”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리고 완벽하게 비통한 기분이 들었다. “ 정말 없어요.” 복희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 좋아, 그럼 내가 바꿀만한 걸 찾아내면 어떻게 할 거냐?” “ 글쎄요, 하지만 정말 없는데…….” 조급한 한숨을 내쉬는 나를 바짝 끌어당기며 그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 내 과거하고 네 미래를 바꾸자.”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복희씨는 나를 놀리듯 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호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손톱 끝을 똑똑 자르며 말을 이었다. 병원에서도 저런 식으로 손톱을 잘랐었지. 그러고 보니 손톱이 많이 자라 있긴 했다. “ 이번처럼 멋대로 떠나지 않고 내 옆에서 죽을 때까지 있는 거다. 괜찮은 조건이지 않아?” “ 어른들 말씀 중에요.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요." 복희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 죽을래?” 그 얼굴을 보면 나는 깊은 상심에 잠겼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원인이나 시발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수심 깊은 곳에 감춰놓았던 질문이 순간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 내가 좋아요?” 복희씨가 다시 피식피식 거리며 수갑을 들추고 손목을 매만졌다. “ 그 비슷한 거.” “ 비슷한 거?” “ 그래. 비슷한 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 그럼 장 우현은요? 내가 좋으면 장 우현은 사랑하는 거네요?” 복희씨가 고개를 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 그건 아니고.” “ 나는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아요. 내가 갑자기 복희씨를 떠나서 이곳으로 오니까 당신은 일시적으로 화가 나는 거예요. 그게 무슨 감정인 줄 알아요? 말 잘 듣던 강아지가 다른 주인을 만나거나 집을 떠나면 섭섭하고 순간적으로 욱하는 기분이랑 비슷한 겁니다.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울해졌다. 말을 하는 사람이 더 씁쓸해지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 후회할 짓 하지 말아요. 통장이랑, 서류랑 다 챙겨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서울로 갈 때 가지고 가세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하시겠지만 집에 가면 아무도 모르게 잘 숨겨두시고요. “ 복희씨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철컹거리는 수갑 때문에 정말 죄수라도 된 기분이다. 헐렁한 팔목에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고 쓰라린 부분을 살살 문질렀다. 그때 석고상처럼 굳어있던 복희씨가 돌연 내 턱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 내가 우현이를 다신 안 만난다고 하면?” 나 역시 복희씨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얼음처럼 굳어있는 내 몸에 찬물을 쏟아 부었다. “ 내가 너만 본다고 해도 너 이렇게 싸가지 없게 나올 거냐?” 나는 흔들리는 나를 가까스로 다독였다. “ 화가 나겠죠. 내가 감히 복희씨 말에 거역하니까 지금 당신은 화가 나는…….” 복희씨가 갑자기 내 팔목을 움켜쥐고 억세게 비틀었다.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다. “ 거기서 한 마디만 더해봐, 살아있는 지옥이 존재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다.” 그렇게 말하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 넌 뭐가 그렇게 잘 났냐? 내가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먹어야 되는 거 아냐? 시발, 부드럽게 대해줄려고 했더니 더럽게 안 따라주네. 손뼉이 두드려야 소리가 나지 오른 팔만 가지고 백날 천 날 생 지랄을 떨어봐라, 소리가 나나. “ 왜 갑자기 화를 내고 지랄이야, 이 자식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웬일로 성질 죽이고 있나 했더니 역시 나다. 씨발놈의 근본이 어디 가겠는가. “ 나만 나쁜 새끼 만드니까 기분 째지냐? 그런 너는? 넌 날 알아보지도 못했잖아. 경식이 택시회사로 일부러 내가 찾을 갔을 때도 미련한 곰 새끼처럼 퍼질러 잠만 자더니 고작 일어나서 한다는 말이 뭐? 형님, 보스?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넌 내 이름도 몰랐잖아! “ 뭐지? 무슨 말이지? 근데 이놈이 미쳤나!! 사람 얼굴에 대고 악을 지르다니! 우리가 언제 진지한 적이 있었나! 또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왜 갑자기 고함을 질러요!! 놀랬잖아요! 진짜 보면 볼수록 예의가 없는 사람이네!!” 나는 지지 않고 버럭 거렸다. 그러자 복희씨는 아예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 예의? 그러는 너는 참 예의가 바르시네요? 아이고, 그러셨군요? 세상에서 제일 예의가 바른 분하고 한 방에 있으니 행복해서 좆 대가리가 벌름벌름 합니다!” 나는 속으로 분을 삭였다. “ 그런 식으로 놀리면 재밌어요? 무식한 거 티내면 즐거워요?” “ 이게 뭘 잘했다고 말대답이야! 내가 그때 친히 이 복희라고 이름까지 말해줬는데 넌 ‘내가만약‘ 그 노래만 불러댔지? 자존심 상해서 말을 안 했더니 이게 진짜 누굴 바보로 아나! “ “ 자꾸 무슨 말을 하는 거……!” 잠깐! 잠깐! “ 날 알고 있었어요? 그때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잖아요? 아니에요?" 복희씨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눈알을 부라렸다. “ 염병하네.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냐?” “ 정말 몰라서 그래요. 화만 내지 말고 말 좀 똑바로 해봐요.” 복희씨는 코웃음을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 너 영풍중 나왔지? 나 영풍고 나왔어.” “ 근데요? 그게 뭐!” 순간 눈앞에 불빛이 번쩍 들었다. “ 나를 그때부터 알고 있어요? 정말요? 왜요?” 복희씨가 가소롭다는 듯이 인위적으로 ‘하하하……’ 웃었다. 괜히 내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 너 이젠 연기도 하냐? 내가 권솔 그 쓰레기한테 너 데리고 나오라고 직접 영풍으로 찾아가서 말 했잖아. 그럼 이것도 기억 안 난다고 말해보시지! 왜. “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복희씨의 무서운 눈빛에 기가 죽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눈으로 ‘왜, 왜’ 하고 질문을 던졌다. “ 넌 나 같은 건달은 사람도 아니라고 했었지. 그리고 권솔 그 새끼가 우리학교로 찾아와 방송에 대고 네가 날 찼다고 떠벌리고 다녔잖아. 그것도 모른다고 할 테지? 하하하, 연기 한 번 죽이게 하셔. 아주 끝까지 오리발 내밀어 보시지! “ 충분히 어이없고 당황스러운 말이었지만 왜 이렇게 웃기지? 나는 혼란스럽다는 생각보다 괜스레 웃음이 터졌다. 억지로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 솔이가 그랬다고요? 사실이에요?” 복희씨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주먹을 쥐었다. “ 권솔 그 새끼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도대체 나를 언제부터 안 거에요?” “ 연기그만해라, 가증스럽다.” 나도 모르게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 그것만 말해줘요.” 복희씨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 고 1때.” 나는 화들짝 놀라 수갑이 아니었으면 천장으로 날아갈 뻔 했다. “ 복희씨 17살 때요?” 복희씨는 부루퉁한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너 14살 때.” 우연에 세 번이 겹치면 어느새 운명이 됩니다. (외전- 이 복희씨 이야기) 1995. 4월. “ 아버지는 뭐하시냐?” 순간 이 복희는 잘못들은 거 같은 얼굴로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았다. 젊은 남선생이었다. 발령받은 첫 학교이자 첫 담임이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필요이상의 열정이 돋보이는 인간이었다. 선생들 사이에 독보적인 소문을 들어선 양평이 어떤 곳인지 알 텐데 그는 26살의 패기와 자신의 노력으로 학생들이 선도되고 차차 바뀔 거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보였다. 양평 고등학교는 선생들의 순수한 노력으로 쉽게 바뀔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이곳은 완벽한 깡패소굴이었다. 학교 안에 들어오면 치기어린 세력다툼과 자존심 싸움에 하루가 멀다 하고 주먹질 소리가 들려오는 곳, 오히려 교문을 벗어나면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는 갈 수 있는 곳이 여기였다. 의외로 양평 안엔 학교폭력이란 게 없었다. 따돌림도 없었다. 이곳에서 일방적인 폭력이란 있을 수 없었다. 학생의 과반수이상이 중학교 때부터 이곳의 악명을 듣고 자청해서 들어온 게 전부였기 때문에 시비가 들어와도 대부분 피하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주먹 좀 쓴다는 놈들에겐 양평으로 가라라는 말이 떠돌았다. 조폭나부랭이들과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하는 재미와 호기심이 반반씩 섞인 말들도 오갔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허무맹랑한 말만은 아니었다. 양평 출신의 졸업생 대부분이 조폭이 되거나 정치가 뒷구멍을 책임지는 정치깡패가 되는 걸 보면 단순한 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지 서울과 경기지역의 대부분 학생들에게 이곳은 조폭양성소쯤으로 불리고 있었다. 양평의 교복을 입고 시내에 나가면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아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바라보는 어른들과 중학생들의 치기어림을 동반한 영웅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반된다. 그 마음에 남들 위에 서고 싶다는 섣부른 판단으로 양평에 입학하는 중학생들은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자퇴를 하거나 전학을 갔다. 딱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곳에선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강한 주먹이 없으면 자신의 약함을 남들에게 절대 들키지 않을 잔머리가 있어야 한다. 만약주먹도 잔머리도 없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켰을 때, 그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될 뿐만 아니라 영원한 반찬거리 신세로 전락한다. 보이지 않은 규율처럼 양평은 완벽한 1인자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 법칙은 이복희가 1학년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양평중을 졸업하고 양평고에 들어왔다. 그리고 입학과 동시에 느슨해져있던 양평의 분위기를 단숨에 뒤엎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강함이 절대적인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선, 후배관계는 명확했던 양평에 이상한 공식을 만들어 넣었다. 그에겐 강하다는 것이 법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법에 다른 이가 소소한 테클을 거는 것을 참지를 못했다. 이복희는 당시 3학년 최고주먹 김경식을 지나칠 정도로 처절하게 짓밟음과 동시에 3학년이1학년에게 구십도 인사를 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3학년의 반발이 커졌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자 그들의 반발은 의아스러울 만큼 일순간 급격하게 사그라졌다. 주먹학교라는 양평의 악명 또한 사그라졌다. 3학년이 좆도 없이 1학년 눈치를 보고 사는 위계질서가 엉망인 학교. 양평의 이미지가 물렁해졌다. 이빨 빠진 호랑이취급을 받았다. 시내에 나가도 양평과 비슷한 교복만 봐도 줄행랑을 쳤던 학교에서 괜한 시비를 받고도 배짱 좋게 웃을 만큼 만만한 학교가 되었다. 이복희는 양평을 완벽하게 자기 손에 쥐게 된 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신사다운방법을 쓰지 않았다. 이기기 위해선 남들 몰래 돌을 이용해 상대의 머리통을 으깨어 놓기도 했고 돌려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옆구리를 찢어놓기도 했다. 그는 이겼다는 말이 무의미 할 만큼 상대를 망가뜨리며 무서울 속도로 인근학교를 하나하나 밟아갔다. 이복희가 어느 학교를 밟았는지 어떤 도구를 썼는지 어떤 방법으로 이겼는지를 떠들어대는 것이 다른 학교의 유일한 장난감처럼 소문은 무성하게 번져 올라갔다. 칼을 쓰고 상대 몰래 도구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양평답지 않은 방법이다, 치사하다 뒤에서 씹어대는 소리가 담장을 넘겼지만 하나 둘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세 달이 되었을 때 어느새 이복희는 양평을 포함 일대 학교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반대로 선생들에겐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유명해짐에 따라 그가 보였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싸움 방식은 하나의 유행처럼 빠르게 번져갔다. 단순한 주먹싸움은 밋밋해졌다. 하나 둘 칼을 사용했고 각목에서 쇠파이프, 면도칼에서 사시 미가 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싸움에선 항상 칼을 쓰던 이복희가 주먹만 쓰기 시작했다. 잔인하고 무섭다고 정평이 났지만 뒤에서 그를 씹던 가장 큰 이유는 이복희의 검증되지 않은 주먹이었다. 그는 숨겨두고 있던 주먹을 남들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칼을 들고 덤비든 각목을 들고 덤비든 항상 주먹만 사용했다. 주먹으로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은 그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뻗은 주먹 한방에 맥없이 추락했다. 혹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괜한 기대감 또한 발밑으로 떨어졌다. 뒤에서 그를 씹어대든 소리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가 가장 자신 있는 흉기는 숨겨둔 주먹이었다. 무패신화는 이어졌다. 백전무패였다. 싸우면 무조건 이겼다. 혹시 하는 의심이 무색했다. 설마 하는 생각들도 필요치 않았다. 단순한 공포의 대상은 완벽한 전설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양평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했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다. 자신의 주먹을 완벽하게 알고 쓰는 인간도 더러 몇이나 있다. 하지만 이복희처럼 따분한 얼굴로 잔인하게 사람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인간은 없었다. 그는 남이 범접할 수조차 없을 만큼 강했지만 강하다는 한마디로 단순히 정의를 내리기 이전에 두려울 만큼 잔인했다. 그는 어린나이부터 어떤 방식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았다. “ 인마, 아버지 직업이 뭐냐고 묻잖아.” 대답을 하지 않는 이복희를 바라보며 툭 뱉어내 듯 말하는 담임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있었다. 그와 반대편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학생 하나가 파랗게 멍든 광대뼈를 꾹꾹 누르며 픽 웃었다. 반쯤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 이복희는 앉은 자리에서 보일 듯 말듯 인상을 찌푸렸다. “ 집에서 놉니다.” 감정 없는 대답에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느낀 선생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 너 이 새끼! 지금이 장난 칠 때냐!” 호진이라고 했던가? 호선이라고 했던가? 잘 기억나진 않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때렸던 기억은 난다. 심심했고, 거슬렸다. 별로 다친 얼굴도 아닌데 이 새낀 왜 이렇게 호들갑이지? 그때, 찢어진 입술에 맺힌 피를 혀끝으로 할짝할짝 핥고 있는 녀석이 이복희와 선생을 한번 씩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복희의 인상이 더 짙어졌다. “ 아버지가 집에서 놀고 있으면 장난치는 게 됩니까?” “ 뭐?” “ 백수 모르십니까? 저희 아버지 그겁니다.” 이복희는 팔짱을 끼며 팔꿈치를 책상에 갖다 붙였다. “ 그리고 선생님, 말 참 재수 없게 하는 거 알고 있습니까?” 담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책상에 놓인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연습장을 펼쳐 이복희 앞에 쭉 내밀었다. 이복희는 학생부실에 들어와 처음으로 담임을 바라보았다. “ 뭡니까?” 담임이 책상에 양반다리로 앉아 있는 녀석을 엄지로 가리켰다. “ 반성문이다, 최소한 사람을 때렸으면 반성의 기미라도 보여라.” “ 반성할 생각 없습니다.” 담임이 턱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 너 학교에서 알면 이번엔 무기정학이야, 저번처럼 봉사활동으로 안 끝나.” “ 상관없습니다.” “ 너 자꾸 이렇게 막 나올래? 학교는 졸업해야 될 거 아니냐." 순간 이복희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 할 일 없습니까? 가서 일보십시오.” “ 하…….” “ 그건 선생님 꼴리는 대로 하시고 제발 저 좀 여기서 보내주십시오. 솔직히 선생님도 제 얼굴 계속 보고 있는 건 싫을 거 아닙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우리 서로가 편하게 좀 삽시다. “ 담임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에서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출석부에 끼워져 있던 하얀 용지를 꺼냈다. 열린 창문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바람을 쐬고 있던 녀석이 다가와 담임의 팔을 덥석 잡았다. “ 선생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죠. 그럼 제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이복희가 학교에서 짤리면 전 다음날부터 학교생활 어떻게 해요. 좀 봐주세요. 네? “ “ 호선아, 너 참 성격도 어지간하다. 널 때린 놈이 뭐가 좋다고 감싸고도는 거냐.” 저 새끼 이름이 호선이었나 보군. 이복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했다. 점심을 먹자마자 방송에서 더럽게 불러대는 통에 그럼, 한번 가볼까 싶어서 왔더니 끝도 없다. 문득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 선생님! 솔직히 제가 맞을 짓을 좀 했어요. 말하자면 좀 길어요.” 그렇게 말하며 호선이란 놈이 이복희에게 고개를 돌려 눈을 찡긋해보였다. 선생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 그래도 반성문 정도는 써야 돼, 안 그럼 내가 죄송해서 너희 아버지를 어떻게 보냐.” 담임의 탐탁지 않은 시선에 이복희는 유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했더니 역시 그런 거였다. 다른 새끼들 열 번 때릴 때 저 새끼 한 번 때렸다고 담임 새끼가 더럽게 불러대더니 뒷배가 있었단 말이군. 일진이 사나우려니까 별 거지같은 새끼들이 다 건드네. 이복희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담임이 노골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 너 끝까지 반성안하지? 호선아, 미안하지만 네 부탁은 못 들어주겠다. 이런 새끼들은 근본이 썩었어. 한두 번 넘어가면 끝도 없어. 저런 놈들은 뿌리부터 썩어서 그걸 아예 싹 끊어놔야 정신을 차리지. “ 이복희는 하품을 하며 보란 듯이 기지개를 폈다. “ 제 뿌리까지 잘라주시게요? 몰랐는데 선생님, 참 친절하신 분이네.” 담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들고 있던 출석부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것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복희의 빈정거림은 끝도 없었다. “ 그 뿌리 내일 잘라주시면 안 돼요? 저 오늘 진짜 바쁘거든요? 저 때문에 집에도 못가고기다리는 놈들이 한 둘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제가 좀 바쁜 놈이거든요. 그럼 전, 이만.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복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선의 얼굴엔 그런대로 네가 참 많이 참았다 하는 표정이 스쳤지만 담임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이복희를 따라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 앉아!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억지로 자리에 다시 앉히려는 담임의 수고가 허망하게 이복희는 선생의 팔을 휙 쳐냈다. 그리곤 팔목에 먼지라도 묻을 것처럼 탈탈 털어냈다. “ 은근히 엉큼하시네. 만지고 싶으면 날 잡아서 따로 말씀을 하세요, 예약이 많거든요.” “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앉으라니까!!” 이복희는 어느 집 개가 짓나 하는 표정으로 심드렁한 얼굴로 선생에게 고개만 까닥거리며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누가 콩가루 집안 아니랄까봐, 쟨 하는 짓도 저러네. 저런 놈들 때문에 가정교육이 어쩌고 하는 거다. 너는 저런 놈하고 어울리지 말아야 된다. “ 이복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잔뜩 구겨진 인상그대로였다. 앉아 있던 호선이 그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라 주춤 물러섰다. 선생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복희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학생부실 문이 삐죽 열렸다. 이복희를 제외하고 학생부실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담임은 자신 앞에 서있는 이복희를 보고 깜짝 놀랐다가 자신이 놀라고 있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이복희는 선생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재떨이를 발견하곤 맨 주먹이 좋을까, 도구를 쓰는 게 좋을까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선생 됐다고 좋아할 담임 가족을 생각해서 한 번 봐줄까? 그래도 말하는 꼬락서니가 너무 괘씸한데? 어쩌지……. 정말 어쩐다. 한창 고민에 빠져 있는 그의 등 뒤로 변성기가 막 지난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기요 안녕하세요, 저는 영풍중학교 1학년 12반 김계진이라고 하는데요.” 한번은 봐줄까? 불쌍하잖아. 고민을 끝낸 이복희는 의미 없이 고개를 돌렸다. 문 사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어떤 못생기고 볼품없이 생긴 놈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떨어진 출석부를 주워 올리며 선생이 입을 열었다. “ 그래? 근데 무슨 일이지? 중학생이 왜 고등학교에.” 김계진은 민망한 듯 웃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입고 있는 중학교 체육복이 후줄근해보였다. 몸이 작은 건지 아니면 체육복이 유난히도 큰 건지 상의가 허벅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본인도 자신의 옷차림이 이상하단 걸 잘 아는 모양인지 이제와 올려봤자 그다지 차이도 없는 바지를 한손으로 잡아 올리고 다른 손으론 지퍼를 올렸다 내렸다, 의미 없는 동작을 반복했다. 뻘줌하게 서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걸 봐선 잔뜩 주눅이 든 얼굴이다. 선생과 호선을 번갈아 바라보던 김계진은 용기를 내듯 학생부실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닌 듯 한발 짝 들여놓다 뒤를 돌아보고 다시 문을 활짝 열었다. “ 야, 빨리 들어와.” 그러나 상대방은 싫다고 했는지 김계진은 ‘왜, 싫어…….’ 라고 말하며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젓가락으로 콕 찌르며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그 모습이 썩은 당근 같다고 이 복희는 생각했다.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에 민망했는지 한번 달아오른 얼굴은 목까지 시뻘겋게 변해갔다. 지루하다고 느껴지던 찰나, 김 계진은 싫다는 상대방의 멱살을 움켜쥐고 학생부실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멱살을 잡힌 남자의 큰 키 때문에 끌고 오는 사람이 되레 끌려오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는 남자를 끌고 오는 게 무척이나 힘에 겨워보였지만 꿋꿋하게도 열심히 끌고 왔다. 손에 땀이 묻었는지 멱살 잡은 손을 풀고 추리닝 바지에 손바닥을 닦는 김 계진에게 조용히 끌려오던 남자가 애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김 계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주인에게 버림받은 소 같았다. 책상 앞에 어느 정도 다다르자 김 계진은 자그마한 머리를 두리번거리며 담임 앞으로 다가갔다. “ 영풍고등학교 학생주임 선생님이신가요? 저기 있는 애가 영풍중학교 1학년 9반에 권솔인데요. 저번 주에 학생부실로 찾아오라고 하셔서 지금 왔는데……. “ “ 아! 주임선생님이 말하던 애가 혹시 쟤냐? 2학년을 때려눕혔다는?” “ 예, 아마 맞을 거예요.” 김계진이 부끄럽게 웃으며 권솔에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죄송하다는 듯이 선생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딱 봐도 잘못은 멀뚱히 서있는 놈 쪽에서 한 거 같은데 사과는 다른 놈에게 나온다. 순간 이복희는 내가 왜 안 나가고 있었지? 하는 생각에 문 앞으로 걸어가다 담임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2학년을 때려 눕혔다는? 어렴풋이 한두 번 들었던 기억이 났다. 중1한테 실신할 정도로 얻어터진 고2, 더군다나 공부만 파는 범생이 새끼도 아니었고 맞은 새끼는 영풍고등학교에 다니는 놈이라고 했다. 영풍의 교복을 입고 있으면 웬만큼 정신 빠진 놈이 아닌 이상 건들지 않는다.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영풍고의 2학년이 집을 가다다 중1한 때 퍽치기를 당했다는 사실은 충격을 떠나 경이로울 만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소문에 둔감하고 관심도 없는 이복희였지만 그 사실 만큼은 들은 기억이 났다. 이야기를 하는 놈이 워낙 흥분을 하며 의심스러울 만큼 과장되게 뱉어내는 큰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풍의 교복을 보고도 건들 수 있는 겁 대가리를 상실한 어린 중학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지 찾아다닐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오늘 보게 된 것이다. 이복희는 갑자기 흥미로움이 솟구쳤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그는 따분한 학교생활에 마침 잘 걸렸다 하는 악당 같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호선과 선생이 앉아 있는 옆 빈 의자를 벽 구석진 곳까지 끌고 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 선생님, 죄송해요. 그렇지만 얘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에요.” “ 크게 나빠 보이진 않는다만 나쁜 놈들도 얼굴에 나쁘다고 쓰고 다닌 것 도 아니고.” 김계진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얘는 그런 애들하고 달라요. 사실 가방 훔친 것도 순간적으로 그랬을 거예요, 돈이 없다보니까.” “ 글쎄다. 그 녀석이 우리 반도 아니고, 주임선생님 반이니까 그 분오시면 잘 말씀드려봐. 다행인건 중학생한테 맞은 게 쪽팔렸는지 그 녀석도 부모님한테 이른 거 같진 않더라. “ 김 계진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복희는 권솔에게서 김 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흥미로운 관계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사귀나……,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어이없는지 이복희는 소리 내어 피식피식 웃었다. 담임이 김 계진에게 말했다. “ 교무실로 가서 주임선생님을 한 번 만나볼래? 6교시 수업 끝나면 여기로 바로 오실 텐데 아니면 여기서 더 기다렸다 만나고 갈래? 너희들 편할 대로 해라 “ 염병할 새끼, 괜히 친절한 척은. “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고 갈게요.” “ 그래. 근데, 혹시 부모님은 알고 계시냐?” 김 계진은 눈에 띄게 당황해서 우물쭈물 거렸다. 권솔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키는 크지만 대체로 선이 가는 몸이다. 확실히 순발력이나 민첩함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싸움에서 민첩함은 적에게 드러난 결점을 완벽하게 가려 주지는 못할 것이다. 저런 스타일은 뒤에서 갈기거나 여러 명이 불시에 덤비면 처음에는 곧잘 버티다가도 스스로 스러지게 되어있다. 깡은 있지만 힘이 없고 자존심은 있지만 독기가 없다. 저런 애송이한테 당했다고? 어지간한 병신 같은 새끼였나 보군…… 이복희는 와이셔츠를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를 찾기 위해서였다. 선생이 있든 말든 담배만 있었다면 피웠을 텐데, 불행스럽게도 담배는 없었다. “ 부모님이요? 그게 저……" “ 저?” 옆에 앉아 있던 호선이 끼어들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권솔이 김 계진의 팔을 낚아채 등 뒤에 감추듯 숨기고 앞으로 나왔다. “ 저희 둘 다 부모 그런 거 없습니다.” 호선이 놀란 눈으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담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복희는 별다른 생각 없었다. “ 너희 둘 다?” “ 네.” 딱 떨어지던 대답에 담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 위에 한심스러움이 번졌다. 권솔의 얼굴이 굳어졌다. 담임이 이복희를 힐끔 곁눈질하며 말했다. “ 차라리 부모가 있느니 없는 거 같은 것 보단 아예 없는 게 낫겠다.” 짠 것처럼 일순간 이복희에게 시선이 쏠렸다. 담임만 아니었다. 이복희는 마지막으로 참고 있던 인내의 끈이 터져버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퓨즈가 펑 터치면 이런 느낌이겠지……. 그는 비적비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치적거리는 의자다리를 괴팍스럽게 걷어찼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담임이 이복희를 바라보았다. 그는 뚜벅뚜벅 담임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학교를 잘리겠다는 생각보다, 당장 저 새끼를 죽여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복희는 재떨이를 각을 세워 담임의 정수리 부근에 사정없이 내리찍어 비틀었다. 검붉은 피가 툭 터졌다. 사방으로 휘날리던 핏물이 이복희의 거무스름한 얼굴에 팍하고 튀었다. 하얀 와이셔츠에도 핏자국이 선명해졌다. 시발, 이렇게 손에 피 묻히는 고생까지 해놓고 멀쩡한 얼굴로 수업 기어들어오면 좆나 낭팬데……. 그는 의미 없이 웃으며 재떨이를 다시 허공에 치켜들었다. 그때,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사람 중에 김 계진만이 불쑥 튀어나와 이복희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조그맣다. 이복희는 김 계진을 처음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 작다. 쥐방울만한 놈이 발밑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김 계진은 부들부들 떨다 못해 사시나무가 되어 이복희를 올려다보았다. “ 저기, 형!” “ 형? 내가 왜 네 형이냐.” “ 네?” “ 너도 처 맞기 싫으면 꺼져.” 김 계진이 깜짝 놀라 주춤거리자 반대편에 서 있던 권솔이 후다닥 뛰어왔다. 그리고 담임 앞에서 했던 것처럼 김계진을 자신의 등 뒤에 감췄다. 이 복희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친구라고만 하기엔 뭔가 이상한데? 이복희는 들고 있던 재떨이를 구석에 휙 팽개쳐놓고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교복바지에 비벼 닦으며 놀라서 훌쩍거리는 김계진을 바라보았다. 실내화 밑에 명찰이 떨어져 있었다. 바보는 그것도 모르고 권솔의 팔에 매달려 울기에 바빴다. 병신 쪼다 같은 새끼. 친구 등에 기대서 저러고 싶을까, 계집애들처럼 예쁘지도 않고 다릴 거 달린 사내새끼 주제에. 하여간 별 거지같은 놈 다 보겠네……. 이복희는 자신도 모르게 뭉게뭉게 퍼지는 혐오스러운 기분에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는 피를 뒤집어쓰고 기절한 선생을 한번 바라보고 미련 없이 학생부실 문을 열었다. 그 날이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 확실히 그때가 처음이었다. 병신처럼 세상물정 모르고 착해빠진 새끼를 만난 건 말이다. “ 너 미쳤냐? 그렇게 죽고 싶으면 사람들 없을 때 혼자 자살을 해, 새끼야. 칼을 주먹으로 막는 새끼가 어디 있냐. 너는 아마 그 성격 죽을 때까지 못 고치면 언젠가 된통 당할 거다. “ “ 시끄럽다.” “ 형님의 충고가 시끄럽다고? 인마, 너 요새 보면 인생 종치려고 작정하고 사는 새끼 같아.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다만, 너보다는 아니다. 너는 절제라는 걸 몰라. 그렇게 놀다가 하루아침에 눈도 못 뜨고 골로 가는 수가 있다. “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라 지하철 안에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박 태열에게 이복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쓰고 있던 모자를 더 깊숙이 푹 눌러쓰며 이복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안 죽었으면 됐지 웬 지랄…….” 박태열은 답답하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팡팡 때렸다. 멀뚱히 창밖 어두운 터널만 바라보고 있던 이복희가 그제야 박 태열에게 시선을 돌렸다. “ 어쨌든 안 죽었잖아, 그럼 됐다고.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 주둥이 좀 다물고 있어.” “ 안 죽었으면 됐어? 되긴 뭐가 새끼야! 그거 말이냐? 시발, 좆나 무뚝뚝한 새끼. 시험 다재치고 뛰어온 친구한테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 이복희는 박태열의 수다에 가까운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채 교복 와이셔츠를 팔꿈치까지 들어올렸다. 팔목을 시작으로 팔뚝 전체를 감싼 붕대의 압박 때문에 온 몸에 기가 다 빠져 나가는 거 같았다. 찢어진 팔 때문에 아픈 건지 근육을 누르고 있는 붕대 때문에 아픈 건지 잘 모를 정도다. 돌팔이 새끼, 무턱대고 실하고 바늘만 찾더니 괜히 이상한데만 박아놓은 거 아냐? 찝찝했다. 완전 병신이 된 기분이다. 어느 학교, 누구였지? 반복되는 일상처럼 싸움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지금 싸운 상대가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오늘처럼 눈에 띄게 비겁한 새끼는 예외다. 방어가 최상의 공격이란 말처럼 이름을 안 다고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뚜렷하겐 아니어도 대충 얼굴은 알아보겠다 싶은 인상이었다. 물론 그 빌어먹을 자식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위로 발리송이 날리지 않았다면 절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칼날이 손잡이 부분에 들어가 있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게 실수였다. 본능적으로 막는다고 막았는데 조금 아프다 싶어서 내려다봤더니 그게 재수 없게도 팔목이었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방법인가 했다. 예전에 현진인가, 헌진이던가 하는 새끼에게 내가 썼던 방법과 똑같았다……. 몰래 버터플라이 날을 준비한 것까지 말이다. 내 팔목을 찌르고 지레 겁먹은 새끼가 칼날을 알아서 떨어뜨리는 통에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친히 얼굴을 그어준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말도 안 했는데 박 태열이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뒷수습은 잘 된 모양이겠지……. 찢어진 팔을 급하게 꿰매고 지하철을 탄다고 밖으로 나오자 10시가 넘었다. 그날 이복희는 몸 상태를 생각해 택시를 타고 가자고 우기는 박태열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지하철을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웬만하면 택시를 타겠는데, 그날따라 그냥 지하철을 타고 싶었다.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이었다. “ 잘했다.” 박 태열이 눈을 가늘게 떴다. “ 잘했다가 뭐냐, 이럴 땐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거다. 약은 새끼.” “ 그래, 고맙다.” 박 태열은 눈을 감고 일부러 안 들리는 척 유난을 떨었다. “ 못 들었다, 뭐라고?” “ 아무 말도 안 했다.” “ 너한테 뭔가를 바란 내가 잘못이다. 야, 우리도 다른 새끼들처럼 애정표현 좀 하고 살자. “ “ 나 죽으면 내 좆에 대고 실컷 해.” “ 나 참,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구만.” “ 그럼 하지 말든가.” 이복희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안내방송이 나오며 지하철이 멈추었다. 그리고 지-잉 하며 문이 열렸다. 박 태열은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열리는 문사이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 복희가 보이지 않게 픽 웃었다. 젊은 여자 한 명과 50대 중년 남자, 교복을 입은 학생 두 사람이 들어왔다. 여자는 사람들이 다소 잘 앉지 않은 의자 한 가운데에 앉았다. 중년 남자는 그들이 앉아 있는 반대편 기둥 옆에 앉아 가방에서 신문을 꺼내들었다. 이복희는 의미 없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에게서 남자, 마지막엔 자연스럽게 시선이 학생 둘에게 돌아갔다. 박 태열 또한 이복희를 힐끔 바라 보다 뭘, 보나하는 눈으로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뒤늦게 시선을 돌렸다. 키가 큰 쪽이 투덜거리며 욕설을 내뱉자 키가 작은 쪽에서 상대를 달래듯 등을 두드리다가 가방을 뒤적여 대일밴드를 꺼냈다. 그러나 키가 큰 사람이 귀찮아하는 티를 팍팍 내며 고개를 휙 돌려버리자 키가 작은 쪽에서 덩달아 토라져서 대일밴드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일부러 운동화로 쾅쾅 소리를 내며 지근지근 밟아댔다. 이복희는 그 모습에 피식피식 웃었다. 박 태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복희를 올려다보자 이복희가 턱짓을 해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모아졌다. 키가 큰 쪽에서 양보한 모양이다. 그는 등을 구부려 대일밴드를 밟아대는 녀석의 발을 치우고 대일밴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종이를 뜯어 상처가 났는지 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미세한 흉터자국위에 밴드를 붙이고 토라져 있는 상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간지러움을 태우고, 이상한 표정을 짓고,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키 작은 쪽이 못이기는 척 고개를 돌려 힘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 복희와 박 태열이 고개를 흔들었다. 키 작은 쪽은 이제 가방을 무릎위에 지퍼를 열어젖혔다. 열린 가방사이에 이상한 과일들이 터져 나왔다. 키 큰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울상을 짓는 상대의 표정을 보지 못한 키 작은 쪽이 바나나를 꺼내들어 껍질을 벗기곤 키 큰 사람의 입에 억지로 들이밀었다. 먹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 안 보이는 걸까. 힘겹게 바나나를 다 먹자 비닐봉지에 쌓인 딸기를 꺼냈다. 그리고 바나나로 볼이 볼록해진 큰 덩치의 입에 잎을 똑 떼어낸 딸기를 억지스러울 만큼 미련스럽게 쑤셔 넣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안 먹는다. 키 큰 덩치는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색 없이 내미는 족족 딸기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바나나를 드는 상대에게 겨우 싫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상대는 덩치의 어깨를 막무가내로 때릴 뿐, 바나나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 좋아 죽네, 좋아 죽어.” 갑작스러운 박태열의 목소리에 이복희는 고개를 내렸다. “ 누가? 키 작은 새끼가?” 박 태열은 말한 사람 민망할 정도로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 네 눈엔 그렇게 보이냐?” “ 글쎄…….” 박태열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 내 눈엔 키 큰 새끼가 더 좋아죽겠는 걸로 보인다.” “ 그런가.” “ 저 새끼들 게이다, 확실해. 내가 이 분야에선 도사다. 저것들 사귀든지 아니면 둘 중에 한명은 확실히 좋아하고 있어. 그런 냄새가 팍팍 풍기지 않냐? 친구는 아니다, 저게 어떻게 친구냐? “ “ 친한 걸 수도 있잖아.” 박태열이 단호하게 말했다. “ 아니, 절대. 단순히 친한 거면 내가 성을 간다, 성을 갈아.” 이 복희가 반박하려던 찰나, 키 작은 쪽의 무릎위에 열려 있던 가방 틈 사이로 오렌지 하나가 삐져나왔다. 툭-툭툭. 덜컹거리는 지하철 바닥에 통통 튀던 오렌지가 중심을 잡나 싶더니 힘없이 데구루루 굴러 내려갔다. 네 사람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졌다. 꽤 오랫동안 굴러간 오렌지는 거짓말처럼 문 앞에 서있던 이복희의 발밑에 멈춰 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키 작은 놈이 벌떡 일어나 가방 문을 재빨리 잠그고 뛰다시피 이복희가 서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교복, 어쩐지 눈에 익다했더니 양평중학교 교복이었다. 명찰이 달랑거렸다. 플라스틱에 써진 희미했던 글씨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글자가 뚜렷하게 다가왔다. 김 계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싸움터에서 그렇게 여러 번 본 새끼들 얼굴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잊어버리면서 왜 난 3개월이나 지난 네 이름과 네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거의 두 뼘 정도로 좁혀진 거리를 두고 박 태열이 이복희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 아는 새끼냐?” “ 뭐?” 이복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박태열을 처음 본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박태열이 뒤를 돌아보는 시늉을 했다. “ 난 또 아는 사람이라고. 근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 뭐가.” “ 방금 네 새끼 표정이 아무튼, 좆나 볼만했다.” 이복희는 일부러 못들은 척 고개를 돌리다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서있는 김 계진을 발견했다. 작은 키는 여전했다. 이 복희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며 고개를 푹 숙였다. “ 저기요, 형. 발밑에 제 오렌지가 떨어져있는데요.” 이 녀석은 자기보다 나이만 많다 싶으면 무조건 형이라고 부르는 건가. 김 계진이 손가락으로 오렌지를 가리키며 상대를 올려다봤다. “ 형, 형! 제 오렌지가……어? 어! 피, 피, 피다!” 갑자기 다급해진 김 계진의 목소리에 이 복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래봤자 가려진 모자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김 계진의 표정과 사뭇 대조될 만큼 태평한 표정을 지었다. “ 피에요! 팔에 피가 나는데요!” 그렇게 무작정 소리를 지르던 김 계진은 박 태열이 재밌는 얼굴로 입을 열자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서는 덩치에게 조잘조잘 귓속말을 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김 계진이 꽤 오랜 시간 동안 키 큰 쪽에게 설명을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이복희와 박 태열에게 향했다. 이복희와 키 큰 남자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김 계진은 몸을 돌려 잠가진 가방 문을 다시 열고 무언가를 찾는 듯 꽤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그러다 불쑥 손이 쑥 빠졌다. 가방 전체를 일일이 들쑤셔놓던 손에서 반창고와 붕대가 따라 나왔다. 뭘 하려는 거지? 김 계진이 쭈그리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이복희 앞으로 걸어왔다. 역시 손에는 붕대와 반창고가 들려있었다. 성큼성큼 자신 앞에 다가온 것과 다르게 은근히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여는 폼이 웃겼다. “ 형, 저기 뒤에 있는 애가 제 친군데요. 이거 쟤가 다칠 때를 대비해서 매일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제가 이래봬도 치료 같은 거 되게 잘해요. 그러니까 손 좀……. “ “ 왜.” 평소처럼 말한다고 나온 목소리가 굉장히 차가웠던 모양이다. 이복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김 계진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 치료해드리려고…….” “ 됐어, 도끼 눈뜨고 있는 네 친구한테나 가봐.” 김 계진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잔뜩 골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 계진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 쟤는 원래 눈이 찢어져서 그렇게 보여요.” “ 이상한 새끼네.” “ 형, 팔에서 계속 피가 나는데.” 치료를 해주겠다는 사람이 되레 부탁을 하는 얼굴이다. 박태열은 흥미로운 눈으로 이복희와김 계진을 번갈아보며 난간에 설치된 봉에 턱을 받치고 히죽 웃었다. 싫다고 하겠지, 저 자식은 남들이 자기 몸 만지는 걸 유별나게 싫어하는 놈이라.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이복희는 김 계진 앞에 불쑥 팔을 내밀었다. “ 자.” 막상 정말 손을 내밀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지 김 계진이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 치료한다며, 어디 한번 해봐.” 부탁하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명령조의 말투다. 김 계진은 머쓱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붕대를 둘-둘 풀었다. 한 손으로 이복희의 팔목을 붙잡고 풀어진 붕대를 피가 배인 부위에 감는 솜씨가 그런대로 제법 익숙해 보였다. “ 형, 잠시 만요. 제가 안 아프게 해드릴게요.” 이복희는 나풀거리는 붕대 끝을 손끝으로 누르고 새끼손가락에 끼워둔 반창코를 입에 무는 김 계진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끝으로 반창코를 칙 뜯어내는 폼이 여간 진지한 게 아니다. 팔을 들었다 내렸다 요란스럽게 구부리고 반창코를 덕지덕지 붙여놓고는 칭찬해줘 하는 얼굴로 김 계진이 고개를 들었다. “ 생각보다 잘 하네.” 박태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도 모르고 김 계진은 뿌듯하게 웃었다. “ 그렇죠? 제가 좀 잘해요.” “ 너.” “ 네?” “ 나 몰라?” 나는 기억하는데, 너는 왜 모르냐 하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복희는 어이없을 만큼 기분이 언짢아졌다. “ 저번에 영풍고등학교 학생부실에서 한번 만난 적.…….” 그렇게 말하곤 모자를 벗으려는 찰나, 키 큰 덩치가 가방에 오렌지를 쑤셔넣으며 버럭 소리를 들렀다. “ 김 계진, 빨리 와!! 다 왔어.” 김 계진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 어, 권솔! 잠깐만 있어봐, 이 형이 나를 아는 거 같아.” 역시 그 녀석이었다. 김 솔이라고 했던가? 권솔이라고 했던가? 긴가민가했더니 아직도 붙어 다니는 모양이군. 밀가루 반죽처럼 하얀 얼굴에 멀대 같이 큰 키. 남자치곤 워낙 곱상한 외모라 한번 봐도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독특한 이미지가 풍겼다. 저 새끼도 여전하네. “ 형! 저를 아세요? 사람 잘 못 보신 거 아니에요? 저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김 계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함소리가 이어졌다. “ 야! 빨리 오라니까 왜 안와! 나 내 가방만 들고 내린다! 알아서 해.” 안내방송이 울렸다. 여자가 어디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하철이 멈췄고 징-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이복희는 모자를 벗으려던 손을 허무하게 내렸다. 옆에 앉아만 있던 박 태열이 그런 이복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김 계진은 다급한 얼굴이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 가방만 들고 문 밖으로 나가고 있는 권솔을 노려보며 허둥지둥 인사를 했다. “ 형,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안녕히 계세…야, 야! 솔아, 기다려!!” 이복희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김 계진은 이미 덜컹거리는 문소리에 깜짝 놀라 떨어진 오렌지는 고사하고 들고 온 붕대와 반창고도 미처 챙기지 못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문 앞으로 갔다가 다시 자리로 와서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폼도 어지간히 희한하다. 그래도 예의는 있는 녀석인지 닫히는 문사이로 인사를 하고 또 인사를 해댄다. 이복희는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사라져간다. 멈춰있던 지하철이 움직이자 두 사람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이복희는 빙그르 몸을 돌려 반대편 봉에 몸을 기대었다. “ 저 새끼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치고 멍청하게 사네.” 의미심장한 친구의 말에 박 태열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 저 녀석은 너 모르는 거 같던데?” “ 뭐, 그런가 보지.” “ 뭐냐, 쟤.” “ 몰라.” 박 태열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꼈다. “ 진짜 몰라? 근데 아깐 왜 아는 척 했냐?” “ 내가 언제.” “ 했잖아.” “ 그냥 심심해서.” “ 내가 알던 이복희는 심심하단 이유로 모르는 새끼한테 아는 척 하진 않는다, 빨리 불어.” “ 재미없다, 그만해라.” 그러나 박 태열은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 시원히 말해줄 이복희도 아니었다. “ 하, 수상하단 말이야.” “ 할 일 없으면 나 쫒아 다니지 말고 날 잡아서 자살이나 해라.” 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태열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고개를 돌렸다. 문득 과일 하나를 가지고 옥신각신 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사귀나? 그는 뻗쳐오르는 궁금증을 애써 지우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근데, 내가 왜 기분이 더러워 지지? 내가 왜? 원래부터 성격이 거지같은 이복희는 경찰서에서 나온 직후 기분이 상거지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두 달 전부터 스무 살짜리 여대생 하나를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 자다보니까 상대를 하루하루 바꾸어 노는 것보단 나름 편한 점도 있고, 귀찮지도 않아서 고정적으로 만나는 여자였다. 고정적인 만남, 그게 실수였다. 할 때마다 콘돔을 끼우는 게 귀찮아서 받는 쪽에서 알아서 하라고 돈을 쥐어줬더니 망할 년이 옷만 사재끼고 피임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만났다하면 질펀하게 뒹굴고, 신나게 흔들고, 시원하게 싸질러댔다. 이렇게 뒤통수 칠 줄 알았다면 진작 고무장갑이라도 끼우고 할 걸 후회해 봤자 이미 일은 벌어졌다. 덜컥 임신을 하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가, 여우같은 년……. 이복희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여자에게 귀찮다는 듯이 ‘지워.’ 한마디를 던지고 가볍게 이별을 고했다. 서럽게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기에 그럴 줄 알았다. 빌어먹을 오산이었다. 그럴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머리채라도 질질 끌고 산부인과로 데려갔을 것이다. 사람 뒤통수를 쳐도 유분수지. 17살짜리 사내새끼랑 놀아난 걸 부모에게 얌전히 고해바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여자의 부모가 학교로 찾아왔다.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을 해서 애를 먹여 살리든지 아니면 아이를 낳으면 알아서 키우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리고는 자기네들은 종교 때문에 절대로 낙태를 할 수 없다고 박박 우기고 달려들었다. 내가 미쳤나, 애를 키우게……. 이복희는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자 어머닌가 이몬가 하는 여자가 분노로 몸을 떨며 주먹만큼 매서운 손바닥이 치켜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내가 타인에게 맞는 건가 싶었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꺼림칙했지만 아버지나 삼촌이면 뭐라고 한마디 했을 텐데 그래도 여자니까 참았다. 여자는 벙어리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이복희의 눈치를 살피며 울고만 있었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기도 좋아서 다리 벌려 놓고 피해자인 척 하는 가식을 떠는 꼴에 짜증이 확 솟구쳤다. 그래도 참았다. 허나 가만히 있으니 속도 벨도 없는 병신 취급이다. 또 다시 손바닥이 날아왔다. 교대로 돌아가면 손을 들었다. 물론 열은 받았지만 그래도 어른이라고 제법 나이도 있고 하니 인심을 베풀어 체면을 봐주기로 했다. 봐줄 때 그만 하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어른들은 단체로 눈치가 없는 걸까. 동시다발적으로 번쩍 손을 드는 여자의 가족 중 손에 낀 옥반지가 문제였다. 뺨에 닿았던 손이 떨어질 때 옥반지의 큼지막한 알이 그의 볼이 사납게 긁혀졌다. 피가 뭉글뭉글 뿜어져 나왔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복희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검지 끝으로 핏방울을 문질러 입술에 가져다댔다. 혀를 살짝 내밀었다. 비릿한 맛이 났다. 어이가 없다보니 웃음이 났다. 가만히 봐주고 있었다간 완전 순둥이취급 할 분위기였다. 미성년자에게 양육비 운운할 위인들이었다. 내가 그런 건 또 못 참지……. 그는 자신의 돌변하는 표정에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여자의 팔목을 비틀어 꺾고 손에 끼워진 반지를 빼냈다. 그리곤 보란 듯이 가운데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해 한번 씩 웃어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이야. 쯧쯧……. 그는 혀를 차고 아직까지 훌쩍이기에 여념 없는 여자의 머리채를 거칠게 들어올렸다. 얼굴이 들린 상태에서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혹시나 했는데 나름대로 반지를 뺏어 낀 보람이 있었다. 맨 주먹만 썼으면 상처가 이 정도는 아니었을 터다. 반지가 볼과 턱 뼈를 알아서 예쁘게 부숴주었다. 이복희는 흔들리는 여자의 몸을 바닥에 밀어뜨렸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해야 더 열이 받겠지. 그는 운동화 발로 배를 지근지근 밟았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가볍게 한 귀로 흘려들었다. 신나게 두드려대던 발이 지겨워 반지 낀 손을 치켜들었다. 역시 배만 때렸다. 이렇게 해서 애가 떨어지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나야 손해날 건 없지……. 한참동안 주먹을 박아 넣자, 여자의 다리사이에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정도면 됐나? 이복희는 경악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말리러 오는 여자의 가족을 피해 누워 있는 그녀의 머리채를 다시 감아 올려 일부러 자진해서 가족들 앞에 나아갔다. 질질 끌려가면서 본능적으로 버둥버둥 거리는 여자의 얼굴을 운동화 발로 지그시 밟으며 그는 씩 미소 지었다. 다시 주먹을 치켜들려는 찰나, 가족 중 하나가 경찰을 불렀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복희는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뻗은 주먹을 여자의 배에 강하게 꽂아 넣었다. 그 후로는 되풀이 되던 일상의 반복이었다. 시간이지나자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경찰 중 하나가 ‘또, 너냐.’ 하며 알은척을 했다. 경찰의 물음에 그는 평소답게 또 나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으니 작은 아버지가 달려왔다. 오마 마자 한다는 소리가 합의금이 얼마니, 너 때문에 돈이 얼마나 깨졌는지 아느냐 느니 하는 쓸데없는 잔소리가 대부분이었다. 담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4개월 만에 터진 사건이라 그도 염치는 있었는지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반상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건 지금 자신의 일에 발 벗고 나설 사람은 작은 아버지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루정도는 억지로라도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예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증스러운 풀죽은 얼굴에 마음이 약해진 작은 아버지를 두고 ‘사고를 치지 않기 위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퍽---!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복희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자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는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퍽----퍽!! 잘못 들은 게 아니었나? 퍽-퍽-퍽퍽. 역시 아니었다. 왼쪽으로 굽이진 골목길에 큰 나무가 보였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대충 짐작을 하건데 여러 명이 한 사람을 때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주먹을 휘두르는 쪽은 적어도 세 명에서 네 명 정도는 되어 보인다. 불쌍하게 무릎 꿇고 앉아서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새끼들 주먹싸움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엄연한 자숙시간이 아니던가. 이복희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때였다. “ 형들. 오, 오만원만 드리면 안 돼요?” 우뚝 발걸음이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릎 꿇고 앉아서 훌쩍이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 가방을 뒤적였다. 녀석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하얀 봉투를 꺼내들었다. 뭘 하려는 거지? 순간 이복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담배를 깊이 한 모금 빨아들이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가만히 서서 그들을 주시했다. 녀석은 척 보기에도 두툼한 봉투에서 조심히 오만 원을 꺼내들고 그중 가장 큰 덩치 앞으로 돈을 내밀었다. 서둘러 봉투를 가방에 집어넣고 지퍼를 잠그는 모습이 어지간히 놈들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빙 뜯는 건가…….’ 하고 이복희는 조용히 뇌까렸다. 무리들의 등치를 봐선 적어도 고2에서 고3 쯤으로 보였다. 나이와 힘을 앞에서 왜소한 중학생 하나를 못살게 구는 모습에 그는 조소를 머금었다. 잔챙이 놈들의 오늘 일용할 양식이 된 중학생은 가방을 가슴에 꼭 껴안고 덩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멍청한 새끼다. 이 복희는 생각했다. 차라리 가만히만 있었더라도 몇 대 맞고 끝나는 일일 텐데 자기가 알아서 아예 봉투 채 가져가라고 광고를 하고 있으니 어느 얼빠진 새끼가 ‘오 만원 고마워, 잘가.’ 손을 흔들겠는가. 이복희는 보이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대로 오만 원을 건네받은 덩치가 가소롭다는 듯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자 옆에 서 있던 세 놈이 따라 웃었다. 녀석은 그들의 웃음소리가 커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끌어안은 가방을 쥐고 있던 손을 은근슬쩍 풀었다. 그리고 속도 모르고 바보처럼 자기도 따라 웃었다. 이젠 자기를 보내 줄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 바보가 아니라 이제 보니 병신이었다. 녀석들의 웃음이 뚝 멈추었다. 덩치가 오른쪽에 서 있던 한명에게 턱짓을 하자 턱이 가는 놈이 툭 튀어나와 바보 녀석이 쥐고 있던 가방을 가볍게 낚아챘다.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녀석은 허무할 정돌 쉽게 뺏겨버린 가방을 보고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덩치가 울먹이는 중학생 녀석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는 듯 했다. “ 아가야, 형님들이 잘 쓰마.” 이복희는 그들을 보며 집으로 갈까, 아니면 좀 더 보고 갈까 잠시 갈등했다. 하긴 집에 가봤자 할 일도 없지. 그는 그들이 모여 있는 나무 밑으로 조용히 다가가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둡게 드리워진 나무를 지나쳐 전봇대 밑에 섰다.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양아치들은 멀리서 네 명으로 보인 게 의외로 세 명 밖에 없었다. 시선을 옮기자, 등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중학생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뺏긴 가방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안달복달하는 표정이 밟은 자라 같았다. 순간 이복희의 머리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의도치 않게 발걸음을 멈췄다. 중학생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그 녀석이었다. 김 계진……. 보름인가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녀석은 여전히 어수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 계진은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더니 결국 우는 소리를 했다. “ 주세요! 주세요! 그거 한 달 동안 알바해서 모은 거란 말이에요!!”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다. 이복희는 꽤 가까운 거리에 멈춰 새 담배를 꺼내 물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가로등에 비친 김 계진의 얼굴이 붉게 보였다. 소처럼 무턱대고 크기만 한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툭 건드리면 줄줄 흘러내릴 기세다. 꼴에 사내새끼라고 자존심은 있는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 부지런히 눈물을 닦아댔다. “ 형들 깡패에요? 왜 남에 돈을 가져가고 그래요? 돈이 좋으면 저처럼 알바를 하세요.” 많이 늘었네. 이복희는 담배연기를 후 뱉어냈다. 덩치 녀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 너 방금 뭐라고 씨불였냐? 가만히 있으니까 우리가 가마니로 보이냐?” “ 그게 아니라 제 말은. 아니지, 빨리 가방이나 돌려주세요!! 제발요!! 부탁…악!!” 덩치가 봉투를 꺼내 빈 가방을 김 계진의 가슴으로 사정없이 집어던졌다. 자신에게 날아오던 가방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녀석이 직격으로 맞고 힘없이 비틀거렸다. 녀석의 바보 같은 모습에 양아치 무리가 낄낄거렸다. 딱히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좆도 없는 것들이 강한 척 구는 모습은 심히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허수아비처럼 비틀대던 김 계진이 중심을 잡고 우뚝 섰다. 이 복희는 땅바닥에 침을 뱉고 고개를 흔들었다. 녀석은 줄줄 흐르는 콧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으며 덩치를 향해 막무가내로 달려들고 있었다. 저 새낀 하는 것도 왜 저 모양일까. 가만히 있어도 웃긴 새끼가 더 웃겨졌네. 이복희는 꽁초가 되어버린 담배를 돌멩이에 비벼 꺼뜨렸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상황이 역전되어 등치를 제외한 두 녀석이 김 계진을 흠씬 두 들겨 패고 있었다. 그러게 힘도 없는 새끼가 덤비긴 왜 덤비고 지랄이야.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이든 친구든 빨리 질려하는 그의 성격답게 이복희는 이 상황이 못내 지루해졌다. 그는 미련 없이 일어섰다. 불쌍한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주먹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눈에 띄게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다. 스러져도 사람들이 발견하면 병원에 옮겨주긴 하겠지……. 그는 허무할 정도로 빨리 쓰러져 가는 김 계진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을 던진 후,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나 한 발짝 앞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등 뒤로 들려오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 씨! 형들 우리 권솔한테 다 이를 거야! 두, 두고 봐. 복수할 거야. 조, 조낸 뒤통수 칠 거야!” 그들의 빈정거림이 이어졌다. “ 솔? 그건 뭐냐? 솔바람에 솔이냐? 아니면 솔방울에 솔이냐? “ 아니야! 솔이 우리를 복수한다잖냐. 그럼, 혹시 네 애인이냐? 하하하- ” 그 뒤로 잠시 멈췄나 싶었던 주먹소리가 오갔다. 이복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사귀는 건 아니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자신이 미처 느끼기도 전에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김 계진이 단순히 누군가에게 맞으면서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녀석의 입에서 터져 나온 ‘권솔’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김 계진은 이미 모래바닥에 얼굴을 처박혀 정신없이 날아드는 주먹에 맥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다들 덩치가 보통 수준은 웃돌았다. 유도나 씨름을 한 체구들이었다. 이복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 사람을 번갈아 지켜보았다. 유심히 지켜본 결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에 비해 제대로 쓰는 방법을 몰랐다. 기술이 없다. 저런 타입은 힘만 믿고 날뛰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다. 주먹만 뻗는다고 다 같은 주먹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양아치와 깡패라고 해서 다 같은 건달은 아니다. 녀석들은 주먹을 쓰는 방법에 있어 3류 날라리에 불과했다. 이복희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땅바닥을 살폈다. 모래바닥이라 그가 찾는 기왓장처럼 큰 벽돌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허리를 살짝 구부려 돌을 집어 들고 허공 위로 던졌다, 내렸다 장난을 쳤다. 다시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을 땐, 김 계진의 코에서 기어코 코피가 터졌다. 녀석의 턱을 향해 주먹을 뻗던 녀석 중 하나가 손톱에 묻는 핏방울을 바지에 닦으며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 자신을 보고 있던 이복희와 눈이 마주쳤다. 이복희는 하얀 이가 드러나게 씩 웃었다. 놈이 주춤 물러났다. 이 복희는 이때다 싶어 들고 있던 돌을 놈의 코뼈 중앙을 향해 집어던졌다. 바람소리를 내고 나르던 돌이 당황해 제대로 피하지 못한 놈의 코 가운데를 명중시키고 뚝 떨어졌다. 일부러 모서리 부분이 보이게 던졌으니 잘하면 기브스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뒤로 발라당 넘어진 친구의 모습에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이복희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김 계진 또한 허공에 들려 멈춰있는 주먹에 의아해 하며 고개를 들었다. 두 눈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지 연신 흙 묻은 손바닥으로 눈꺼풀을 지분거린다. 병신, 저러면 눈이 더 아플 텐데. 손에 흙이 묻은 지도 모르……, 흙? 그래, 흙. 이복희는 그들이 보이지 않게 몸을 돌려 흙은 한주먹 쥐었다. 그것도 모르고 무리중 하나가 무식하게 속도를 붙여 다가왔다. 그는 쥐고 있던 모래를 놈 의 눈에 뿌렸다. “ 으…윽!!” 두 눈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움에 헐떡이는 녀석의 등을 주먹을 내리 찍었다. 손가락 마디에 뼈들이 척추 끝을 향하게 했다. 중심을 잡지 못한 놈이 털썩 무릎을 꿇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운동화 발로 가슴을 짓밟고 바닥에 대자로 누운 녀석의 복부에 다시 한 번 주먹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또 다시, 또 다시 주먹을 복부에 내리 꽂았다. “ 컥…!!” 참다못한 놈이 헛구역질을 했다. 이복희는 기침을 내지르는 녀석의 턱을 반대로 잡아 그대로 돌려버렸다. 기침소리가 잠잠해졌다. 벌어져 있는 주둥이에 손에 남아 있는 모래를 쏟아 부어 주고 주먹으로 턱 뼈를 걷어 올려 억지로 입을 닫게 했다. 파닥거리는 놈의 갈비뼈와 허파 부근을 발로 두어 번 강하게 밟자 우두둑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멀뚱히 서있던 비쩍 마른 놈의 목덜미를 비틀어 악력으로 무릎 꿇게 만들던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마땅한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주먹 채로 놈의 얼굴을 내리 찍었다. 피가 튀고 볼이 쑥 들어갔다. 이제 그의 주먹은 놈의 옆구리를 친절하게 다져놓기 시작했다. 억눌린 비명이 터지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목덜미를 짓이겼다. 심장이 쿨럭하고 뛰는 소리에 이복희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는 스러져 헐떡이는 놈의 교복을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종아리를 직각으로 세워놓더니 발목과 다리를 엇비슷하게 만들어 반대로 콱 비틀어 꺾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조용했던 골목길에 뼈가 가학적인 주먹소리가 음침하게 울렸다. 그는 기이하게 돌아간 발목을 이리저리 흔들며 완벽하게 돌아갔나, 확인 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계진은 소스라치게 놀라 줄줄 흐르는 코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이복희를 응시했다. 이복희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삥 뜯기 참 좋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남은 두 녀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 덩치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가소로움에서 당황스러움으로 번졌다. 가로등 비친 이복희의 교복 때문에 놀란 얼굴이 그의 무자비한 주먹질에 급기야 경악스럽게 물들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복희는 운동화 끝에 묻은 피를 모래바닥에 비벼 닦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 가방.” 덩치 놈이 벌떡 일어나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 네?” “ 가방.” 덩치는 재빨리 바닥을 둘러보았다. 손을 덜덜 떨며 가방을 들어 올려 이복희 앞에 공손히 내밀었다. “ 오만 원.” “ 네?” 이복희의 인상이 어두워졌다. “ 아까 뺏어간 오만 원 말이다, 이 개새끼야.” “ 아.” 놈은 허둥지둥 돈을 꺼내 이복희 앞에 내밀었다. 이복희는 놈에게 돈을 낚아채듯 받아들고 구겨진 지폐 귀퉁이를 빳빳하게 폈다. 김 계진은 허망한 눈으로 이복희와 덩치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발목 부러진 새끼, 치료 잘 시켜라. 저렇게 놔두면 진짜 병신 된다.” 덩치가 머리를 조아렸다. “ 네, 네.” 이복희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 너만 멀쩡하다고 신나게 내빼지 말고 저 병신들 데리고 꺼져.” “ 감, 감사합니다.” 덩치는 이복희에게 넙죽 인사를 하고 스러진 친구들을 겨우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 저기요.” “ …….” “ 저, 저기요.” 이복희는 떨리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명랑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흐르던 코피가 딱딱하게 굳어 입술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퉁퉁 부운 눈을 감추지 않고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복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들고 있던 가방에 덩치 놈이 건네준 오만 원을 끼워 넣고 김 계진이 누워있는 바로 옆으로 가방을 떨어뜨렸다. 마땅히 무엇을 바라고 도와준 건 아니었다. 그는 흙 묻은 손바닥을 털며 미련 없이 돌아섰다. “ 저, 형!! 잠시 만요.” ……저 새끼가 또 형이라네. 이복희는 감정 없이 몸을 돌렸다. 김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방을 끌어와 주섬주섬 지퍼를 여는 모습을 그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왜 이렇게 안 열리지…….’ 김 계진이 중얼거렸다. 돌부리에 찧었는지 손등이 다 까져있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지퍼열기에 성공한 김 계진은 그나마 성한 손으로 가방 안을 뒤적이다 조금 전 이 복희가 끼워 넣은 오만 원을 꺼내들었다. 지폐 위에 핏물이 떨어졌다. 자기 피에 되레 자기가 놀란 얼굴이었다. 머쓱해진 김계진은 돈을 교복바지에 문지르고 오만 원을 정성스럽게 개어 이복희 앞에 내밀었다. “ 이거요, 얼마 안 되지만 성의에요.” “ 뭐?” “ 감사해서 드리는 거예요. 받아요.” 이복희는 정떨어질 만큼 딱 잘라 말했다. “ 됐다.” 김 계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 너무 적어서 그래요?” 김 계진은 봉투에서 정확히 삼만 원을 더 꺼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오만 원과 합쳐 다시 이복희 앞에 내밀었다. " 여기……."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봉투 채 다 줄 생각 아니면 집어넣어라.” “ 이것도 너무 적어요?” 돈이 필요 없다는 말을 제멋대로 파악하더니 김 계진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 죄송해요, 근데 이것밖에 드릴 수 없어요. 이게 저희한달 생활비거든요.” “ …….” “ 아!” 뜬금없이 탄성이 새어나왔다. 이복희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 계진은 다시 가방을 들었다. 이미 열어 있던 가방 안에서 초콜릿과 사탕, 먹다 남은 과자 봉지 등을 꺼내 이복희 앞에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복희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 형, 이거 드실래요? 이게 미국과자래요. 제 친구가 다른 놈한테 뺏어서 아, 뺏은 게 아니고 선물 받은 거예요. 이래봬도 조금 밖에 안 먹었어요, 맛만 봤어요. 진짜에요. 이거 다 드세요. “ “ 어이가 없네.” 이복희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이런 걸 착하다고 해야 되나, 멍청하다고 해야 되나. 순수하게 말이 먹히지 않은 상대는 또 처음이었다. 저놈은 무슨 말을 해도 자기 멋대로 생각한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주기엔 아까웠는지 가방에 몰래몰래 과자를 주워 담던 김 계진이 한참을 부스럭부스럭 대다 봉지에 쑥 손을 집어넣어 과자를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그 모습에 이복희는 또 어이가 없었다. “ 맛있어요. 드셔보실래요?” 밑도 끝도 없이 봉지를 쑥하고 내민다. “ 됐어.” " 왜요, 정말 맛있는데. “ “ 그러니까 너나 먹으라고.” 김 계진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 돈도 안 받으시고 다 싫다고 하시네. 그래도 인간의 도리로서 그냥 지나칠 순 없어요. 형은 저한테 정의의 용사란 말이에요. “ “ 뭐?” “ 정의의 용사 몰라요? 슈퍼맨 같은 거요. 형은 나쁜 놈들 보면 막 화나고 그러죠? 착한 사람은 원래 그런데요. “ 이복희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졌다. “ 내가 착하다고?” 김 계진은 머리가 땅에 떨어질 만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요! 물론이죠! 착하니까 저를 도와 준거잖아요. 싸움 잘하는 사람이 다 형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힘없는 애들은 학교 다니기 훨씬 편해질 텐데. 근데 전 잘 안 맞아요, 제 친구가 엄청 싸움을 잘하거든요. 걔랑 노니까 좋은 점도 있네요. “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잘도 조잘조잘 거린다. 이복희는 팔짱을 끼고 거의 신기한 야생동물을 바라보듯 김 계진을 내려다보았다. “ 하지만 제 친구는 저 형들처럼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진 않아요. 아무튼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면 다 나쁜 놈들이에요. 근데 형은 착해요. 왜, 그런 착한 사람들 있잖아요. 홍길동 같은 사람. 아무튼 내일 학교 가서 자랑해야지! “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이복희를 무시하고 김 계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 근데, 형. 지금 몇 신 줄 아세요?” " 8시 넘었다. “ 경찰서에서 나올 때 7시 50분쯤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들은 김 계진이 까무러치게 놀라 ‘미쳤군, 미쳤어.’ 하고 중얼대다 엉금엉금 바닥에서 일어났다. 떨어져 있던 가방을 주워드는 폼이 엉성했다. " 형, 제발 좀 받아 주세요." 흙 묻은 교복을 털 생각도 못하고 녀석은 손에 쥐고 있던 팔만 원을 이복희 앞에 다시 내밀었다. 이복희가 끝내 팔짱을 낀 손을 풀 생각을 않자 김 계진은 한숨을 내쉬며 돈을 이복희 교복 마이에 쑤셔 넣고 잽싸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 안 받으시면 저 오늘 잠 못 자요. 형이 아니었으면 저랑 제 친구랑 한 달 동안 쫄쫄 굶었을 거예요. 정말로 저희에겐 중요한 돈이었거든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 필요 없다니까." " 아니에요. 필요해요! 그걸로 꼭 맛있는 거 사드세요.“ “ 죽을래? 가져가.” “ 싫어요. 왜 주는 사람 민망하게 자꾸 싫다고 해요!" " ……." " 형,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알바 시간이 삼십 분이나 늦었거든요!!" " 잠시……." 김 계진은 쉭쉭거리며 말을 뱉어냈다. " 형, 정말 고맙습니다.” “ 야, 잠깐만!” “ 네?” 달려가려는 김 계진을 막긴 막았는데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복희는 난감해졌다. “ 삐삐, 아니. 집 전화번호라도 가르쳐주고 가.” 얼떨결에 말을 하긴 했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처음 본 사람이 무턱대고 전화번호를 묻다니, 정말 최악이구나. 이복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김 계진이 속도 없이 바보처럼 배시시 따라 웃었다. “ 나 삐삐 없어요. 집에도 전화 없는데…….” 머쓱해진 이복희는 대뜸 화를 냈다. “ 알았어, 잘 꺼져라.” “ 형, 삐졌어요? 삐지지 마세요. 그리고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다시 만난대요.” “ 염병하네, 죽사발로 얻어터지기 싫으면 빨리 꺼져.” 김 계진이 ‘하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 진짜에요.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다시 만나요!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집 앞에서든 말이에요. 아! 정말 늦었다. 형, 다음엔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그리고 김 계진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과자와 초콜릿 따위는 바닥에 내려놓은 채였다. 이복희는 김 계진이 뛰어간 골목과 주머니에 넣어준 돈을 번갈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병신, 쪼다, 삽살개 같은 놈이라 생각했다. 슈퍼맨 좋아하시네. 내가 진짜 슈퍼맨이었으면 지구는 벌써 불구덩이 속에 처박혔겠지. 너는 천국으로 갈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천국으로 가기엔 지은 죄가 너무 크다. 그 날이 세 번째였다.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날 이복희는 돈을 들고 김 계진의 학교로 찾아갔다. 교문 앞에 한 시간쯤 기다리고 있었다. 영풍중 교복을 입고 있는 놈 아무나 붙잡고 김 계진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경계의 눈빛을 가득 담은 권솔이 튀어나왔다. 눈에 불을 키며 조퇴를 했다고 했다. 돌아서는 이복희의 등 뒤에 대고 권솔은 김 계진을 건들지 말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건들면 자기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순간 이복희는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건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권솔은 눈알을 부라리며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오랜 만에 박장대소를 했다. 아, 정말 웃긴 놈들이잖아. ‘하하하…….’ 하고 웃는 자신을 보는 권솔의 앙칼진 눈빛에 좆 대가리가 불끈했다. 제대로 깔아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성격으로 보아하니 고분고분 깔릴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저런 놈들은 뒷구멍을 뚫어봤다는 그 자체로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는 자신에게 비웃으며 이복희는 당장 권솔을 죽을 만큼 아작을 냈다. 무성한 소문과 첫 이미지대로 스피드와 민첩함은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결정적인 펀치를 날릴 힘이 없었다. 안타까운 놈이었다. 차라리 스피드가 딸리고 몸이 반반하면 나이가 어리니 기술을 늘릴 시간이 충분할 테지만 이건 뼈가 약하니 맷집도 없을 것이다. 몸만 실했다면 전국적으로 이름 꽤나 날릴 떡잎인데……. 안타깝군. 주먹은 나를 지키는 것, 방어하는 기술이 반이다. 최상의 방어는 최상의 공격이란 말이 절대 그른 게 아니다. 이복희의 자신만만한 생각처럼 시간이 지나자 무너지는 건 권솔이었다. 한 부위만 집중적으로 밀어붙이자 금세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적당히 갈비뼈를 부러뜨려놓고 팔은 기브스 할 정도로만 꺾어 놨다. 피와 눈물로 엉망이 된 권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문득 김 계진이 생각났다. 녀석은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을 들고 생활이 운운을 했었다. 앞니 두 개와 어금니를 박살내려던 생각은 접었다. ‘이빨 가는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든다지. 친구 잘 만난 줄 알아라, 새끼야.’ 하고 뇌까리며 그는 권솔의 콧등에 퉤 가래를 뱉어냈다. “ 난 네가 범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다 죽어가면서도 오기로 주먹을 뻗는 권솔에게 차갑게 한 마디를 던졌다. “ 뭐, 뭐야!” 이복희는 버릇없는 주둥아리를 발로 냅다 걷어찼다. 묽은 피가 덩어리져 튀어 나왔다. “ 어이 아가야, 강해지고 싶으면 귓구멍 팍 열고 잘 들어. 집에 가서 무조건 많이 처먹고 살을 찌워. 그리고 운동을 해서 몸을 만든 다음에 맷집을 키워라. 칼슘 제를 하루에 한 통씩 씹어 먹어서라도 뼈를 굵어지게 만들면 적어도 스러지진 않을 거다.” “ 닥, 닥쳐! 쓸데없는 소리 마.” 이복희는 쯧쯧 혀를 찼다. 말을 해줘도 모르는 군. 그는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권솔이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복희가 코를 움켜쥐고 낄낄댔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날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권솔은 팔과 다리에 주렁주렁 기브스를 달고 나타나 영풍 고등학교 아침조회 시간에 방송부에 난입했다. 훈화말씀을 하는 교장선생님의 마이크를 뺏고 이복희가 영풍 중학교의 누군가에게 고백했다가 뻥 차였다는 말을 횡설수설 지껄여댔다. 소문은 삽시간에 영풍과 일대의 다른 학교에까지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이복희는 진지하게 한 번 더 손을 봐줄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 그 일이 터졌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작은아버지이자 자신의 양아버지가 깊게 개입되었다는 것과 어머니와의 지지 부지한 관계들을. 우선 당장 학교부터 때려 치웠다. 어차피 고등학교 따위는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서, 너 달에 걸쳐 똑같은 방법으로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성공적이었다. 완벽했다고 생각한 일이 생각지 못한 복병을 부딪쳐 살인미수 혐의를 받았다. 형사 처분을 피할 수 없는 나이였고 무엇보다도 존속살인이었다. 운이 좋아봤자 단기 7년 정도가 최대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축축 늘어지는 재판에 살인미수가 살인방조로 바뀌었다.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끝맺음이 지어진 건 그의 일생일대 최고의 행운이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 이복희는 작은 아버지가 바닥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키우고 있던 조직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선택의 폭이 좁았다. 고작 자신 있고 즐거운 일이라곤 사람을 어떻게 하면 더 치밀하게 때릴 수 있는가, 완벽하게 부숴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전부였다. 십대의 하루하루는 시안부의 얼마 남지 않은 삶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기계처럼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이복희도 김 계진을 잊어갔다. ♠ “ 거짓말쟁이.” “ 뭐가.” “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말도 안 돼. 날 알고 있었으면 처음부터 말했겠지. 할 말 없으니까 방금 생각해낸 거죠? “ “ 염병하면 재밌냐.” “ 참나, 할 말 없으면 꼭 욕하더라.”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잭나이프 칼날을 방바닥에 푹푹 찔렀다, 뺐다 하는 것까지 기가 막혔다. 망할 놈, 자기 집 아니라고 멋대로 굴고 지랄이었다. 칼끝이 들어갔다 나온 자리마다 길쭉한 흠집이 생겼다. 안 그래도 개집 지붕 덮어 줄 때 쓰려고 헐값에 주고 산 싼 장판이라 연탄을 갈 때마다 뜨거운 온도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던 방바닥이 산등성이처럼 올록볼록 했다. 여차하면 찢어진 방바닥에서 습기도 올라오겠다 싶었다. “ 죽을래?” 한참을 뜸을 들이다 한다는 말이 고작 저 소리였다. 앓느니 죽겠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볼멘소리를 했다. “ 할 말 없으면 죽을래, 죽을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특별히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네가 죽이고 싶게 만드는 생각은 안 들고?” “ 안 들어요, 그리고 수갑 빨리 풀어요. 세수하러 갈 거예요.” 그러나 복희씨는 가소롭다는 듯이 ‘후후후…….’ 웃으며 쪼글쪼글해진 누런 장판에 꽂힌 칼날을 성의 없이 톡 빼내더니 방구석에 휙 던져버리며 내 말을 가볍게 씹어주었다. “ 배고프다, 밥상 좀 차려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 싫은데요.” “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찬밥이라도 가져와봐.” “ 그건 누렁이 주려고 남겨둔 건데요. " 순간 개보다 못한 놈이 된 복희씨의 얼굴이 그가 만들어 놓은 장판처럼 우글우글 변했다. “ 밥 좀 가져오라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빨리 안 가져와? 어쭈, 네가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괜히 필요 이상 화를 내는 걸 보니 복희씨는 자신이 개밥을 탐냈다는 것에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눈치였다. 그의 원맨쇼에 가까운 다혈질 퍼레이드를 보자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 왜요, 설마 개 밥을 먹겠다는 건 아니겠죠?" 그는 뜨끔하는 눈치였다. 나는 기회를 살피다 쐐기를 박았다. " 아르마니 양복에 롤렉스 시계를 차는 사람이 개 밥을 먹으려고요? 하하하, 설마요." 복희씨가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했다. 손 바닥 만한 방을 둘러보고 또 불러보며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는 폼이 영 미심쩍었다. 나는 슬쩍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복희씨가 깜짝 놀라 주춤 물러났다. " 아직 누렁이 새끼가 입을 댄 건 아니잖아! 그럼 개 밥 아니야! 빨리 가져오라니까!" " 좋아요. 그럼 내 질문에 답을 해보세요. 누렁이는 이 집을 지키니까 밥 먹을 가치가 있어요. 근데 그쪽은요? 깡패에, 사람 가지고 놀고, 때리고, 돈 뺏고. 밥 먹을 가치가 없네요. 내 말이 틀려요?" 복희씨가 내 말에 급격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며 지독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한 마디 더 했다간 들고 있던 칼날로 내 배때기를 쭈실 기세였다. 덜컥 겁이 났다. 복희씨는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두드리며 화를 삭이려 애썼다. 그가 치욕스러움에 억눌린 신음을 뱉어냈다. " 하, 그럼 내가 개보다 못 하다 이거네?" " 글, 글쎄요." 일부러 말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이성을 잃고 날 뛰면 피차 곤란했다. 복희씨 역시 겨우겨우 참는 눈치였다. 그는 열심히 씩씩거리다 돌연 나를 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나선 한 다는 말이. " 나 배고파.” 나는 한껏 빈정거렸다. 화도 풀린 거 같은데 쫄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 이거 어쩌나, 난 배 불러서 속이 울렁울렁 하는데?" “ 내가 고프다니까?” “ 난 부르다니까요!!” 대뜸 성질을 부려놓고 찝찝한 마음에 복희씨를 힐끔거렸다. 그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달려들 맹수 같은 눈으로 손목을 조이고 있는 수갑 때문에 얇게 긁힌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돋보기를 들이대고 찾아도 보일 듯, 말듯 한 고작 저것도 상처라고 잔뜩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보면 어지간한 엄살쟁이였다. ……풀면 되지.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손등에 걸쳐 있던 수갑을 팔목에 쭉 올리는 걸 보면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정신 사납게 어질러진 방 안, 며칠 씻지 않은 놈처럼 잔뜩 기름진 얼굴, 답답한 손목까지 모든 게 왕 짜증이었다. 수갑을 풀어야 방을 치우고 세수를 하지! 이렇게 대뜸 손목만 묶어두면 어쩌자는 걸까, 저 개새끼는! 나는 복희씨가 가지고 온 박스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방안을 살펴보곤 울컥 짜증을 부렸다. “ 계속 이렇게 있을 거예요? 이쯤 하면 손 좀 풀어주시죠!” 그는 귀찮다 못해 며칠 자다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싫다니까 그러네.” “ 안 도망가요! 안 도망간다니까!!” 안하무인도 정도껏 해야 유분수지. 조금 전부터 삐뽀삐뽀 신호를 알리는 오줌통이 미친 듯이 덜렁거렸다. 이젠 한계였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묶여진 손목을 무턱 대고 흔들며 쇠사슬을 끊으려는 몬스터처럼 의미 없는 발광을 해댔다. 대단한 흡연가 이 복희씨가 지랄댄스를 선보이는 나를 보곤 흥, 콧방귀를 꼈다. 그러다 갑자기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곤 양복을 발바닥으로 끌어오던 희한한 동작을 우뚝 멈추어선 나를 야려봤다. “ 나랑 붙어 있는 게 싫어?” 나는 전기 맞은 놈처럼 사정없이 몸을 비틀어대던 동작을 멈추고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미쳤나, 아니면 못 보던 한 달 동안 저런 낯간지러운 말은 어디서 배운 거지? 박태열씨를 떠올려보았다. 아니다, 무슨 이윤지 두 사람은 남남이라고 말하기도 조차 껄끄러운 원수지간이 아니던가. 그럼, 복귀사장? 그 사람도 영……, 그렇게 상상의 삼천포로 빠지려던 찰나, 귓가에 철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갑갑하게 조이고 있던 손목이 휑해졌다. 팔목을 내려다 봤다. 복희씨와 이어져있던 수갑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싫다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온 몸으로 거부반응을 보인 것과 다르게 상대가 알아서 고분고분 나와 주시니,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썰렁해진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자 복희씨는 이미 눈깔에서 불이 튀어나올라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자기만 째려볼 줄 아나? 나도 째려본다. 못지않은 레이저 광선을 쏘아주었다. 그러자 복희씨가 내 도전적인 내 눈빛에 부담을 느꼈는지 손목에 늘어져 있던 수갑을 괴팍스럽게 걷어 벽에 사정없이 집어던졌다. 나는 얼른 방문을 살폈다. 여기가 무슨 방음 잘되는 호텔인 줄 아나. 할머니가 순호가 쫒아오면 어쩌려고 저 지랄인지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러나 이 복희씨는 이미 잔뜩 토라져서 방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부루퉁해진 얼굴과 툭 튀어나온 입술로 보아 그의 증상을 간단히 진단할 수 있었다. 화났다고 보기엔 전혀 때려 부술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살림살이를 갈아엎을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외로 침작한 복희씨의 행동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는 정확히 무려 삐져버린 것이다. 나는 스르륵 눈을 감는 복희씨의 눈꺼풀을 사납게 들어 올리고 당신은 지금 ‘서른 살!’ 이라고 고함을 질러주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가진 것이라곤 인내심 밖에 없는 내가볼 때에도 이 복희씨는 지나치게 나잇값을 못했다. 봐, 봐! 저것 봐라, 저것 봐……! 그런 내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려 작정했는지 그는 발이 거치적거리는 박스들을 천상을 향해 입으로 뻥뻥 소리를 내며 걷어차고 있었다. 저런다고 부서지기나 할까. 복희씨의 발등에 걸려 허공에 날아가던 불쌍한 박스가 끝내 힘없이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으하하하- 꼴좋다! 바닥에 곤두박질하는 박스를 피해 복희씨는 190을 가볍게 뛰어넘는 산만한 덩치를 쭈그려 말고 내가 앉아 있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디가!” 며칠 동안 대화도 하고 싶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이 귀신같이 몸을 돌려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번들거리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아까 들었잖아요, 세수한다니까요.” 복희씨의 죽어있던 눈빛이 번뜩 살아나기 시작했다. 씨발, 불안하게 왜 또 저래……. 찜찜한 마음에 눈이 저절로 가늘어 졌다. 애써 무시하고 몸을 돌리는데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신경 쓰지 않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복희씨가 나를 밀쳐내고 밖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 나부터 씻는다.” 저렇게 대놓고 우당탕탕 다니다 할머니가 눈치 채며 어쩌려고 저러는지! 나는 아슬아슬하게 가슴을 졸이고 건넛방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불은 꺼져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눈치를 살피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내가 누굴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또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사서 해야 되나 싶었다. …… 젠장, 박복한 인생이여!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후후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털어냈다. 복희씨가 제발 사고를 치지 않길 바라며 수돗가에 어설프게 쭈그려 앉아 찌그러진 세숫대야에 물을 퍼 담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 후에야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도 정신없어서 언제 다 치울까 싶었던 방은 의외로 쉽게 정리되었다. 제일 큰 박스의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어 그 안에 조각난 박스종이와 자잘한 쓰레기를 쑤셔 넣었다. 박스만 치웠을 뿐인데도 방이 원래 모습을 갖추었다. 방이 더러워진 원인도 모든 게 이 복희씨 때문이었다. 불쑥 울화가 치밀었다. 아니지,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잖아. 조용히 뇌까리며 나를 달랬다. 방을 닦아야 할 텐데, 걸레가 어디 있더라? 책상 밑에 처박혀 있는 구질구질한 파란 천 쪼가리가 보였다. 책상 앞으로 다가가 몸을 구부리고 한 손으로 걸레를 끌어당겼다.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장판 속에 파묻혀있던 걸레가 손끝에 닿을락, 말락 거렸다.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걸레를 빼내려고 폼을 잡는 순간,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앞머리에 물방울을 달고 나타난 복희씨였다. 그는 기묘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날 보며 야릇하게 웃었다. 뭐, 뭐야. 왜 또 처 웃고 지랄이야……. 이복희씨가 내 앞에 부리나케 달려와 어깨를 들썩이더니 내 엉덩이를 발로 쿵쿵 걷어찼다. “ 뭐하냐?” 나는 장판에 낀 걸레에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 방 닦으려고 걸레 빼요.” 드디어 걸레를 빼냈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날 가만히 응시하던 복희씨가 물에 퉁퉁 부운 발바닥으로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더러운 감촉과 찝찝한 느낌에 어찌나 놀랐는지 걸레를 떨어뜨리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배꼽을 움켜쥐고 낄낄댔다. 허공에 삿대질까지 하는 폼이 영락없는 미친놈이었다. 나는 그의 발등을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재수 없는 발바닥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방바닥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 사람이 어쩜 그래요? 왜 그렇게 나이 값을 못해요?”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복희씨는 옆구리를 감싸며 ‘아이고, 배야. 나 죽네, 나 죽어…….’ 하고 지랄을 함으로서 내 질문을 교묘히 넘어가려는 꼼수를 피웠다. 나는 축축해진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다 씻었으면 잠이나 자요!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웬일로 말대답을 하지 않은 복희씨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한 뼘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나는 당황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철면피의 탈을 쓰고 태어난 이 복희씨는 마주보고 있는 내가 더 당황스럽게 갑자기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얄궂게도 나는 당황해 버렸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복희씨가 내 턱을 쥐고 얼굴을 끌어당겼다.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그래, 저 놈은 미친놈이야! 미친놈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대략 10초 동안 그렇게 복희씨에 대한 욕을 (속으로만) 퍼 붇자 그는 쑥 내밀고 있던 얼굴을 원위치로 돌려놨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와이셔츠를 훌러덩 벗어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양복에 가려져 있던 복희씨의 숨겨진 자식들, 붉은 용과 푸른 용이 오랜만이라며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나도 눈썹을 꿈틀해줬다. 안 본 사이에 입에 물고 있는 여의주가 더 탐스러워져있었다. 눈이 가려워 눈꺼풀을 깜빡했다. 손톱으로 눈썹을 긁었다. 이번에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내 기억이맞다면 붉은 용꼬리 바로 밑에 희미하지만 분명히 이니셜자국이 새겨져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니셜 위엔 찢어지고 반복된 꿰맨 자국으로 뻣뻣하게 변한 살가죽이 눈에 띄게 울퉁불퉁 변해 있었다. 이런걸 보고 살이 뭉개졌다고 표현해야 되나. “ 왜 그래요. 등이 많이 이상해요.” 복희씨가 잘 보이지도 않은 등을 고개를 돌려 힐끔댔다. “ 잘 안 지워져서 지졌어.” 지졌어? 뭘? 뭘 지졌다는 거지? 속으론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복희씨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의식하기도 전에 복희씨의 뭉개진 살에 손끝을 가져다댔다. 우글우글 변한 살을 손톱으로 콕 찔려보았다. 딱딱했다. 오돌토돌한 실밥자국에 덧칠을 한 것 같기도 했고 모형 살을 엉성하게 붙여놓은 거 같기도 했다. “ 뭐로? 어떤 걸로 지졌는데 살이 저렇게 됐어요? 이상해요. 쭈글쭈글하고 딱딱해 보이고.” 복희씨는 무심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무심했는지 듣고 있는 나까지 무심해져야 했다. “ 라이터로.” “ 예? 왜, 왜?” 내 물음에 복희씨는 그제야 등을 라이터 불로 지져버린 이유를 찾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그냥, 그래야 될 거 같아서.” 가까이서 보지 않을 땐 몰랐다. 손끝으로 만져보니 확실해졌다. 검지 끝으로 상처를 훑었다. 라이터 자국에 툭 붉혀진 살에 적힌 이니셜은 W. H였다. 두근대던 심장이 일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복희씨는 왜 그렇게 장 우현을 좋아했을까. 왜, 왜. 이유가 뭘까. 녀석의 무엇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한 복희씨의 마음을 움직였던 걸까. 그건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무언가를 바라거나 완벽한 정답을 바라는 게 아닌 그냥 의미 없이 퍼져 나온 질문이었다. “ 그 녀석을 보면 내가 보여.” 복희씨가 내 어깨에 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럼 나한테선 안 보였던 걸까, 그랬나. 왜 그랬을까. “ 야!” 복희씨가 대뜸 고함을 지르는 통에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근데 이 망할 새끼,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맨 날 야, 야. 반말이야! “ 빨리 씻으라니까!” “ 걸레질 다 하고요.” “ 됐어, 우선 씻고 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씻는다고 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씻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걸까. 나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복희씨가 조작된 냄새가 풀풀 풍기는 가공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 달 동안 인스턴트 음식만 먹어도 이보단 소화가 더 잘될 것 같을 만큼 거북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 잔뜩 의구심을 매달고 입을 열었다. “ 왜 갑자기 씻으라고 난리에요, 의심스러운 거 알아요?” “ 뭐가 또 의심스러워. 내가 너 씻을 물 떠나서 그래. 자, 자 빨리 가자고.” 그렇게 말하며 복희씨는 무작정 내 겨드랑이 양쪽에 불쑥 손을 집어넣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끌려가지 않으려 발바닥을 방바닥에 철썩 붙이고 있는 꼴이 우습게도 나는 복희씨의 팔 하나를 질질 끌려갔다. 이 미친놈아! 왜 못 씻겨서 안달이야!! 다리가 문턱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를 열심히 밀쳐냈지만 오히려 복희씨가 보란 듯이 나를 어깨에 들쳐 멨다. 돌격 수돗가를 외치며 걸어가는 사이 내 딴에는 허공에 들린 두 다리로 열심히 발버둥이라는 걸 쳐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반항이라는 것이 세 살짜리 어린애 수준을 못 벗어났다. 제기랄, 현실을 즉시하자……. 떨어질까 싶어 결국 주저하고 주저하다 복희씨의 목을 감쌌다.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내려다보이는 땅이 그의 큰 키 때문에 생각보다 멀어보였다. 수돗가 다다르자 복희씨는 배려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이 나를 맨 바닥에 쿵 떨어뜨려놓았다. 엉덩이가 그대로 박살나는 줄 알았다. 꽥 소리를 질렀다. 모래바닥도 아니고 무려 시멘트 바닥이었다. 하는 짓이 딱 시정잡배 같은 놈이었다. 망할 새끼, 개잡놈! 지옥에나 떨어져라. 사람을 내동댕이 쳐놓곤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이 복희씨가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 세숫대야 봐.” 보긴 뭘 봐……, 가 아니고! 파란 호수가 푹 담가진 세숫대야에 물이 한강이었다. 나는 얼른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 위엔 봉숭아가 뿌리 채 뽑혀져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얼른 장독 옆 화단을 돌아보았다. 쭉 구령에 맞춰 이어져 있던 화분 하나가 텅 비어있었다. 여름에 할머니가 순호 녀석 손에 봉숭아 물들여 준다고 심어놓은 걸 이렇게 마음대로 뽑아버리다니……. 들키는 즉시 엿 되는 상황이었다. 세숫대야를 풀장삼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봉숭아 꽃잎을 보며 나는 복희씨에게 미쳤냐는 흔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다행인지 미친 복희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꽃잎이냐, 나뭇잎이냐. 그거 하나 띄워서 물 천천히 마시라고 하잖아. 근데 솔직히 꽃잎 하나에 물이 천천히 마셔지겠냐! 저 정도는 돼야지. 하하하……. “ 나는 할머니가 깨지 않게 숨죽여 짜증을 내었다. “ 지금 이건 마시는 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바가지가 아니에요! 이건 세숫대야라고요!!” 자기가 생각해 놓은 반응이 아니었는지 그는 순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화를 내는 나 역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부루퉁해진 복희씨는 뾰족한 구두 앞을 이용해 자잘한 돌멩이를 뻥뻥 걷어차며 말했다. “ 그래서 내가 떠놓은 물로 안 씻을 거야?” “ 네?” “ 저 물로 세수 안 할 거냐고! 응? 빨리 대답해.” 고작 한 달 사이 그는 애가 되어버린 걸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유치한 건 원래부터 그랬지. 하지만 별거 아닌 이런 일에 신경 쓰는 걸 보면 정말 달라지긴 한 건가……. 그런데 왜 갑자기 변했지? 설마, 내가 없어지고 나서 힘들었나? 아니면 자신도 모르고 있던 감정을 깨달은……. 아, 모르겠다. 흉물스러운 봉숭아뿌리가 보이는 것에 비해 물은 깨끗했다.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복희씨도 부담스럽고 빨리 씻고 방에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세숫대야를 질질 끌고 와 소매를 걷어붙이곤 두 손으로 물을 퍼 얼굴에 끼얹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복희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수 안 할 거야아.’ 하던 목소리와 강도부터 판이하게 차이가 났다. 그 웃음은 독립 운동가를 잡아들이는 일본 앞잡이들처럼 간교하기만 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매몰차게 째려봐주었다.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기 일보직전인 복희씨가 겨우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 바보, 멍청이. 똥개야! 그 물 내가 발 씻은 물인데! 속았지롱?” 그리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복희씨는 발랄하게 폴폴 뛰어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문을 열고 ‘나 잡아봐라~’ 하는 폼으로 ‘메롱, 메롱……!’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메롱을 끝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생각 안 나자 본인이 더 당황해서는 저 혼자서 열심히 구시렁구시렁 거리다가 방문을 부서져라 쾅 닫고 사라졌다. 아……. 정말 나는 바보, 멍청이, 똥개였다.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그러고 보니까 나 또 속은 거잖아!!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후드득 떨어지는 봉숭아 꽃잎에 대고 맹세했다. 복희씨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다신 믿지 말아야겠다고……. “ 자기, 너무 추워!” “ 우리 자기 추워? 저런, 저런! 나쁜 바람. 우리 자기를 춥게 만들다니, 용서치 않을 테야!” 미친놈, 내가 널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여자는 감동하다 못해 툭 건드리기만 하면 눈물을 줄줄 흘릴 기세다. 쯧쯧쯧, 한심한 것들……. 진심으로 우러나서 쯧쯧 혀를 찼다. 힐끔 복희씨를 살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앉아 지긋지긋한 닭살멘트를 날려대는 청춘 남, 녀의 대화의 들릴 법도한데 복희씨는 용기에 코를 처박고 걸신들린 놈 마냥 컵라면을 박살내고 있었다. 고작 두 젓가락으로 라면 하나 뚝딱이었다. 삼각 김밥을 네 개나 배때기에 쑤셔 넣고 저것까지 합쳐선 컵라면도 무려 세 개째였다. 복희씨의 무식한 식탐에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볼이 따가워서 고개를 돌렸다. 볼멘소리로 ‘뭘 봐요!’ 하고 쏘아대자 그는 웬일로 말이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벌써 자기건 다 처먹고 내 라면을 힐끔힐끔 노려보는 복희씨에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라면을 넘겼다. 면발이 이미 불을 대로 퉁퉁 불어 맛도 없을 텐데 정말 열심히도 먹는다. 적어도 김 지만은 라면을 먹을 때, 젓가락 정도는 사용했었다. 그러나 복희씨에겐 젓가락 따위가 필요치 않았다. 그의 주둥이가 완벽한 도구였다. 그는 먹다 남은 국물에 내 라면면발을 주르륵 섞더니 약수처럼 꿀꺽꿀꺽 들이켰다. 씹지도 않고 무턱대고 삼켜대는 그의 식충이 기질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닭살남녀의 대화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닭대가리처럼 얼굴이 길기만하지 멋대가리 없는 남자였다. 느끼한 놈이 연신 목구멍에 버터 칠을 했다. “ 우리 자기 나쁜 바람 때문에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어, 안 되겠어! 자.” 여자의 눈에서 하트가 뽕뽕 기어 나왔다.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추워, 추워.’ 하고 열심히 삐악삐악 거리자 남자가 거침없이 일어나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여자에게 덮어주었다. 지금이 몇 시였더라?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10시가 넘었다. 밤도 밤이지만 공원의 우거진 나무 때문에 유별나게 추울 텐데, 남자는 사랑에 눈이 멀어 반팔 티만 달랑 걸치곤 킹콩처럼 가슴을 때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 아주 생 지랄들을 하고 자빠졌네.” 고개를 돌렸다. 복희씨는 입가심으로 생고구마를 깎아먹고 있었다. 할머니가 밭에서 캐온걸 몇 개 훔쳐왔더니 아주 잘도 처먹는다. 칼로 껍질을 죽죽 벗겨 튼튼한 이로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폼이 현대판 임꺽정이 따로 없었다. 저렇게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성장기 땐 얼마나 처먹어 댔을까. 일주일에 쌀 한가마니는 가볍게 축냈을 것이다. 등치로 보나 사장이나 이 복신이의 장대한 골격으로 보나 버는 족족 식비로 바닥이 났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오싹했다……. “ 너도 춥냐?” 복희씨는 컵라면에 남은 국물을 돌 틈새 사이에 따라 붇고 빈 용기를 찌그러뜨리며 덧붙였다. “ 너도 춥냐구우.” 눈을 가늘게 뜨고 복희씨의 안색을 살폈다. 눈깔이 반짝반짝하며 정박아 수준의 장난을 계략하고 있다는 증거였기에 특별히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예상과 다르게 복희씨의 눈은 썩은 고등어껍질처럼 흐리멍덩했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말했다. “ 조금요, 오후 늦게까지 비가 왔잖아요.” “ 서울은 비 안 왔다.” “ 여긴 비 많이 왔어요, 하늘이 구멍 난 줄 알았을 정도로요.” 복희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 그래서 땅이 축축한가.” “ 아마 그럴 거예요.” 복희씨는 젖어있는 땅바닥을 슬리퍼로 쓱쓱 비볐다. 일주일 전에 시장에서 발 씻으려고 산 천오백 원짜리 내 슬리퍼였다. 맞지도 않은 슬리퍼에 억지로 발을 끼워 신느라 발꿈치가 뒤로 반이나 툭 튀어나와 있었다. 언제나 구두신은 모습만 봐와서 그런지 고작 슬리퍼 신은 모습에도 유별나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의미 없이 닭살남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나를 따라온 복희씨의 시선이 그들에게 멈춰 있음을 느꼈다. 어색해도 이렇게 어색할 수가…….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남을 관찰하는 걸로 시간을 때우고 앉아있는지 참으로 내 꼴이 처량했다. 픽픽 한숨이 나왔다. 어느새 남자는 여자의 몸 전체를 둘둘 덮은 잠바를 꼼꼼하게 펴고 지퍼를 정성스럽게 잠가주고 있었다. 귓속말을 하고 볼에 입을 맞추는 그들의 모습에 보통 연인사이가 그렇듯 사랑스러움이 느껴졌다. 복희씨는 심판관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훑어봤다. “ 부럽냐?” 나는 갈등했다. 그리고 갈등을 끝내기도 전에 욱하고 대답했다. “ 그런데요, 왜요.” 단순히 복희씨의 반응이 궁금했을 뿐이다. 그는 심각하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추리닝 지퍼를 단번에 죽 끌어내렸다. 이, 이놈이 정말 뭘 잘 못 먹었나! 이 복희씨도 로맨스를 알긴, 아는 걸까. 아니면 발 씻은 물로 세수를 하게 만든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걸까. 하긴 자기도 양심이 있었으면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해야 사람이지……, 그렇게 여러 각도에서 오만가지 상상을 하고 있는데, 복희씨는 죽 내려간 지퍼를 단박에 턱 밑까지 끌어올리곤 낄낄낄 웃으며 접혀있던 깃까지 빳빳이 세워 목을 감쌌다. “ 진짜 춥지 않냐. 으슬으슬 어깨가 다 시리네. 이러다 뼈에 구멍 나는 거 아니야? 하하하.” 저놈은 정말이지 지능적인 능구렁이 새끼였다. “ 하…….” “ 춥다 말고 너도 나처럼 이렇게 잠바를 꽉꽉 잠가야지.” 젠장! 그럼 그렇지. “ 진짜 어이가 없어…….” 진심으로 우러나온 말이었다. 복희씨는 불쑥 내 앞으로 얼굴을 밀었다. 벌렁벌렁하는 얇은 봄 잠바를 꼭꼭 포개주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이 너무 가슴을 주먹으로 팍 밀어내고 내가 알아서 단추를 잠갔다. 열심히 히죽거리던 복희씨가 돌연 내 볼을 쿡쿡 찔러왔다. “ 삐졌냐?” “ 아니요, 내가 왜 삐져요.” 그러나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는 확실히 삐져있었다. “ 삐졌구만, 뭘.” “ 아니라니까요!” 시종일관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을 넙죽 잡아서 찢어버리고 싶었다. 뉴에이지 음악을 생각했다. 발레를 생각했다. 가까스로 흥분된 마음을 추스르기가 무섭게 복희씨가 팔짱을 끼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네가 저런 계집애들하고 똑같은 줄 아냐? 부러워 할 걸 부러워해라. 아니면 자지를 콱 떼버리든지. 어차피 네 건 필요도 없지? 하하하.” ……자, 자, 자지? 이건 명백한 성희롱 적 발언이었다. 나는 분노했다. “ 무식한 놈들하곤 상종을 하지 말아야지,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리고 내가 언제 부럽다고 했나요? 복희씨가 박장대소를 했다. 그는 검지로 내 이마를 톡톡 밀며 말했다. “ 그걸 꼭 말해야 아냐, 네 얼굴에 그렇게 써져 있어. 부러워 죽겠음 이렇게…….” 그렇게 말하곤 그는 정말 내 이마에 <부러워->를 손톱으로 긁어 써재꼈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팔목을 거칠게 떼어냈다. 그는 보란 듯이 손을 바꿔 다른 손으로 내 볼에 <죽겠음-> 까지 써놓고야 손을 거두었다. 그는 나를 보며 연신 피식피식 거렸다. “ 한 달 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몰라. 바로 이런 걸 하고 싶었다고! 이런 거!” 복희씨는 볼을 양손으로 턱 붙잡고 앞뒤로 흔들어댔다. 이런 게 하고 싶었다고? 그럼, 나는 이걸 하고 싶었다. 씩 웃어주었다. 복희씨가 천진하게 따라 웃자 나는 폴짝 뛰어 그의 목덜미를 미친 듯이 물어뜯었다. 송곳니로 질겅질겅 씹어댔다. 복희씨가 비명을 지르고 발을 버둥거렸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쥐고 좌우 팔방으로 흔들어 제쳤다. 그제야 복희씨가 손을 들고 ‘항복! 항복.’ 했다. “ 안 부럽다고 했죠? 멋대로 판단하지 마세요! 정말 아니니까.” 내 결백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심쩍은 그의 눈빛은 여전했다. “ 쓸데없는 걸로 혹하지 마. 저런 건 다 보여주기 위한 개지랄이야. 눈에 보는 건 누군들 못하냐.” 너 못하잖아. 뭐든 말만 앞서는 놈치고 크게 되는 놈 못 봤다……. 나는 숨죽여 코웃음을 치며 애꿎은 실밥 터진 단추만 빙빙 돌렸다, 풀었다 반복했다. “ 눈에 보이는 건 쉽지. 보여주는 그대로만 믿으면 되니까. 근데 그런 건 오래 못가.” 복희씨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째 안 피우나 했나. 그 맛있다는 식후 땡을 그냥 넘어갈리 없는 골초가 담배연기를 코로 쓱쓱 들이켰다. “ 왜 못가요. 안 보여주는 것보단 훨씬 오래가겠네요, 뭘.” “ 야, 저것 봐봐. 옷 벗어주고 저 새끼 추워서 달달 떨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나는 복희씨가 가리키는 대로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가로등에 비친 남자의 모습을 대충 확인한 결과 그는 앉아 있지도 못하고 팔뚝을 문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반대로 여자는 남자가 덮어준 잠바에 얼굴을 파묻고 연신 흡족한 표정이었다. “ 저 새끼 속으로 엄청 후회하고 있을 거다.” 확고한 어투에 미간을 찌푸렸다. “ 그걸 그 쪽이 어떻게 아나요.” “ 직감이란 게 있잖아.” “ 글쎄요.” 그러자 복희씨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멀뚱히 올려다봤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내 팔목을 움켜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 복희씨를 마주보고 섰다. 그는 부드럽게 내 허리를 끌어당기고 이번에야 진짜로 추리닝 지퍼를 끝까지 내렸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아 알록달록한 문신의 맨가슴이 바로 드러났다. 복희씨가 내 어깨를 죽 잡아당겼다. “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폼이야. 추우면 같이 따뜻해질 생각을 하면 되지. 나를 버리고 희생하다보면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어. “ 불끈하고 심장이 움찔거렸다. 나도 모르게 복희씨의 가슴 위에 손을 포개놓다가 깜짝 놀라 재빨리 떼어냈다. 그러자 복희씨가 내 두 손을 다시 자신의 가슴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연신 빙글빙글 웃으며 추리닝 양쪽을 뒤로 돌려 그대로 내 등을 감쌌다. 가슴과 가슴이 빈틈없이 부딪쳤다. 그는 동상처럼 굳어 서있는 나를 무시하고는 지퍼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빽빽하게 잘 올라가지도 않는 걸 억지를 피우는 통에 추리닝 옆구리가 뿌지직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이런 기괴한 꼴을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팔팔한 거시기 달린 사내 놈 둘이서 한 추리닝에 끼어서 앉지도 못하고 서있는 모습이 어지간히 웃길 것이다. 내가 봐도 웃겼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복희씨의 차가운 입김이 귓불을 간질였다. “ 나는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이 양반은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러실까. “ 굳이 말 안 해도 알아요,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요.” 복희씨는 입으로 끙 소리를 내며 덧붙였다. “ 그럼 이것도 알아? 소설과 현실은 달라. 소설에선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끝을 내면 그게 해피엔딩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선 완벽한 결말이 나오지 않으면 또 다른 시작이 돼. 그리고 반복이 되고, 또 반복이 되지. 상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질기다 싶을 정도로 사람의 감정은 이어지게 되어있어. “ “ …….” “ 누군가와 헤어지면 또 다른 사람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답답함에 꼼지락거리자 내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댔다. 소름이 돋았다. 그의 혀가 목을 살짝살짝 스치자 원초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 어렵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 거 잘 알잖아요. " 복희씨답지 않게 주저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반대로 돌아간 그의 얼굴이 전혀 보이진 않았지만 띄엄띄엄 새어나오는 한숨소리에 문득 그런 기운을 느꼈다. 정막감이 흘렀다. 이윽고 복희씨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어색함이 깨어졌다. “ 나는 우현이 대신 널 만나고 싶진 않아.”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 변명이란 말 자체가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복희씨의 목소리를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조용히 울리는 파도같이 느껴졌다. “ 사랑하는 감정은 특별해도 사랑한단 말은 흔하잖아. “ 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 나는 그래요. 흔한 말도 흔한 사람이 하지 않으면 특별한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복희씨가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 계속해봐.” “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에 행복해 하는 거예요. 단순히 사랑한다는 단어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들려주는 상대 때문에요. “ “ 그래서?” “ 당신이 생각하는 그 흔한 말이 서로를 강하게 묶어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단어에 많은 상상을 하게 되요. 그리고 사람들은 끊임없는 생각들을 하잖아요. 나도 그렇고 그 쪽도 그렇죠. “ “ 사랑해.” 복희씨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의 입술이 짓궂게 말려 올라갔다. “ 많은 상상을 하게 된다며. 상상해봐. 그리고 행복해 졌나 말해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복희씨는 굳게 입을 다물고 정말 내게 상상할 시간을 주려는 듯 가만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그가 손목시계를 힐끔하곤 ‘이제 말해봐.’ 했다. 나는 머뭇거리다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 안 행복해요. 오히려 기분이 너무 더럽네요.” 복희씨가 내게 몸을 바짝 기울였다. 그의 입술을 여전히 내 목덜미를 짓누르고 있었다. “ 그것 봐, 의미가 없다는 건 바로 그런 거지. 너는 흔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물론 내 감정역시 흔한 말로 정의내리고 싶지도 않고. “ 복희씨는 꿈틀대는 내 손을 자기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 설령 내 선에서 주제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커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에게 그런 말 따윈 하기 싫어.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을 말을 밥 먹듯이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경멸에 가까운 기분이 들어. 나는 보통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화가 났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게 보통 연인들이 나누는 감정 따위는 바라지도 말라는 뜻이 아닌가. 고작 그 따위 말을 돌리고 돌려서 표현하고 있는 거였다……. 나는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던 손을 팩 끄집어냈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대충 알았어요. 걱정 말아요, 기대 안 해요.” 복희씨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화나는 사람이 누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기가 막혀 코웃음이 픽픽 나왔다 “ 진수성찬을 차려다 턱 밑에 받쳐 줘도 넌 숟가락도 들 생각도 안 해.” “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나는 지긋지긋 쏘아붙였다. 복희씨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처음부터 저 웃음이 재수 없었다. 뭐든 다 알고 있다는 잘난 척 쟁이 들의 가증스러운 미소. 심사가 뒤틀려 막말이 튀어 나왔다. “ 웃지 마세요!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요!” 복희씨는 무섭다는 듯이 억지로 깜짝 놀라더니 내 어깨에 코를 박고 낄낄댔다. 나는 그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가 오른쪽 다리를 뒤로 재빨리 빼냈다. 헛발질에 몸이 휘청했다. “ 그래서 다른 놈은 몰라도 너한텐 죽어도 할 수가 없어.” “ 뭘…….” “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냐.” 바람에 날리는 그의 목소리가 젖은 땅에 스며들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어깨가 시릴 만큼 추웠으면 가슴은 답답해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복희씨의 집요한 혀가 내 목덜미를 할짝거렸다. “ 너는 나를 끊임없이 짜증나게 만들어. 엿 같게 만들고, 열 받게 하고 또 지랄을 부리게 해.” 차분하던 복희씨의 목소리가 서서히 감정을 담았다. “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남 때문에 염병한 게 처음 있는 일이더라고. 신기하지 않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하하, 기가 막혀라. 저런 뻔뻔스러운 말을 맨 정신으로 하고 있는 게 바로 염병이었다. 그때 복희씨가 불쑥 성을 냈다. “ 씨발, 한번만 더 내빼봐! 그땐 네 친구고 뭐고 진짜 안 봐줘.”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 그럼 나도 복희씨 동생들 안 봐줘요.” 누구나 인정한 물주먹인 내가 복귀사장과 복신 군을 안 봐주면 뭘 어쩌겠는가. 클럽에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간 당장 술병 날아올 개소리였으나 복희씨는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 대다 즐거운 어조 말했다. “ 거 참 잘됐네. 뒤에 애들 뒤에 애들 붙여 줄 테니까 가서 당장 조져.” “ 미, 미쳤어요?” “ 아니 전혀. 한 놈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주기적으로 옆구리를 파열시켜서 갈비뼈 부위가 약하고 다른 한 놈은 어깨가 잘 빠져. 몇 번 쥐어흔들면 알아서 툭 빠질 거다. 정 궁금하면 가서 확인 해봐.” 즐거운 어투에서 점점 감정을 담는 그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쯤해서 복희씨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사명감에 부드럽게 말했다. “ 그래도 동생인데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요?” “ 그건 잘 모르겠고 귀한시간을 그 멍청한 새끼들 얘기하면서 뺏기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절실하게 든다.” 옆구리를 살짝 밀어내자 보란 듯이 허리를 끌어당기는 팔을 피하며 말했다. “ 근데요, 복희씨.” “ 왜.” 나는 억양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 답답해요. 옷 좀 풀어 봐요.” 복희씨가 곰곰이 생각에 쌓여 말했다. “ 그럼 하나만 말해봐.” “ 뭐요.” 복희씨가 순간 목소리를 낮추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 너 솔직히 나 보고 싶었지?” “ 하…….” “ 나는 보고 싶었다.” “ ……!!” “ 그것도 좆 털이 알아서 빠질 정도로 아주 많이.” 표현방식에 있어선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황당했다. 그리고 더 당황스러운 건 은근히 기대하는 투로 질문을 퍼부어대는 놈에 대해서였다. “ 너는? 너도 그렇지?” 나 참 짜증나 죽겠네, 진짜!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이 복희씨는 원하는 대답을 듣지 않으면 이 볼썽사나운 자세로 밤을 지새울 분위기였다. 어깨를 빳빳하게 펴고 내 가슴을 툭툭 튕기는 게 어째 옷도 풀지 않을 심보다. 어린애 같은 성격은 여전했다. 시간을 끌어보자 생각하고 대답을 아끼자 복희씨가 내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는 내 턱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펴댔다. 나는 그 틈에 이때다 싶어 가슴을 퍽 밀쳐내고 틀어진 공간사이로 쑥 빠져나왔다. 그리고 달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미친 듯이 달렸다. 빡 돌은 이 복희씨가 ‘좆 털 섰는지 안 섰는지 당장 보여주란 말이야’ 하고 고함을 지르며 ‘ 너 거기 안 서!’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당연히 안 섰다. 나는 그래도 예의를 지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네…….’ 라고 외쳐주고 느려졌던 발걸음을 분주하고 놀리는데 이번엔 고작 목소리가 아니라 복희씨가 직접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백 미터 기록이 11, 12초라는 둥 허풍을 떨며 깔깔댔다. 논바닥에 그의 천박한 웃음소리가 스며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밤 11시가 넘도록 어두컴컴한 시골동네를 한 시간 반 동안이나 뛰어다녔다. 고구마 밭에 몰래 숨어 있다가 발소리가 안 들리기에 간줄 알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등 뒤에 있던 복희씨가 피식피식 웃으며 내 멱살을 질질 끌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그는 땀 냄새 나는 내 얼굴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보고 싶었냐. 안 보고 싶었나하는 영양가 없는 질문을 앵무새인형처럼 반복했다.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벌써 문종이 사이로 어스름한 어둠이 걸려 있었다. 머리맡에 놓아둔 알람시계를 빠끔히 올려다보자 시계바늘이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감겨 있는 눈꺼풀을 엄지로 비비적거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라면 먹고 바로자면 얼굴이 팅팅 부어서 미용 상 안 좋다는 하면서 잠들기 싫다고 뻐기는 복희씨 때문에 새벽 두시쯤에야 어렵사리 잠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잠에 취해가는 나를 향해 며칠 굶은 악당처럼 저주를 퍼부어댔다. 그러나 내가 콧방귀도 안 뀌자 그는 잔득 골이 나서는 갑자기 바뀐 잠자리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을 걷어차며 잔뜩 신경질을 부렸다. 잠귀가 어둡다 못해 아예 마비의 경지에 오른 나는 당연히 신경 쓰지 않고 잠이 들었다. 달콤하게 꿈나라를 헤매는 동안에도 복희씨의 짜증은 저주는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아침 늦게까지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이 새벽에 어디 갔을까? 이불이 개미무덤처럼 둥그렇게 말아져 있는 걸 보면 자긴 잤다는 증건데……. 나는 텅 빈 옆자리를 한 번 더 바라보고 깜찍한 푸들처럼 엉금엉금 기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 기지개를 켜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새벽의 찬 공기가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갔다. 고개를 내밀고 마당을 훑어봤다. 어디 갔나, 찾을 필요도 없이 복희씨는 평상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평소 성격 같았으면 옆에 사람이 자든지 말든지 소방관처럼 연기를 뿜어댔을 텐데, 이건 설마 안 본 사이에 바뀐 그의 배려인가.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바람에 발랑거리는 잠옷을 여미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 발짝 움직이기가 무섭게 복희씨의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처럼 처음엔 나에게 하는 말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내가 있는 쪽에서 반대편 오른쪽 귀에 핸드폰을 밀착시키고 볼과 어깨를 바짝 붙인 채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 나도 사랑한다.” ……나도 사랑한다, 나도 사랑한다, 나도 사랑한다. 복희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벌처럼 웽웽거렸다.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그가 과연 저런 따뜻한 목소리를 낼 수나 있을까 무던히 상상해왔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하하하, 저 미친놈이 너를 사랑한데, 장 우현아. 너는 행복하냐? 아, 나, 나는, 나는 이렇게……,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은데 말이야. 복희씨가 평상에 앉아 있다는 사실도 잊고 부서져라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사이로 담배 끝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그의 고개가 들리는 게 느껴졌다. 조금 전처럼 졸졸졸 기어 이불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쪼그라져 있던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썼다. 염병 지랄, 또 생각났다. 나도 사랑해. 정말 그를 사랑한다고요? 이 복희씨도 사람이었어! 저 사람도 누군가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는 사람이었잖아!! 진심으로 놀라웠다. 너무 놀라워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열이 받았다. 진심으로 좆같았다. 어젯밤 복희씨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 따위가 어떻든 나는 단순히 보이는 것만 파악하고 들리는 것만 믿게 되는 평범한 놈일 뿐이었다. 그가 장 우현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면 당연히 녀석을 사랑 한다고 믿게 되어 있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지극히 평범한 거다. 그 말이 흔하든 어쩌든 내가 알게 뭐냐. 씨발. 그럼, 왜 녀석에겐 그런 말을 하는 걸까. 흔한 말이어서 하기 싫다고 좆나 앙앙거리더니. 왜, 왜! 나는 혼란스러움에 풀이 죽었다. 눈을 감았다. 거의 필사적이다 싶을 만큼 잠이 들이 위해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달기만 하던 아침잠이 멀리멀리 달아나며 정신이 또렷하게 맑아졌다.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찼다.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괜히 손만 아파서 그만뒀다. 조용하던 마당에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방 문 앞에서야 우뚝 멈췄다. 삐죽이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복희씨였다. 그는 신발을 벗다말고 고개를 들더니 머리에 까치집을 달고 멀뚱히 앉아 있는 나를 보며 한쪽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그가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쭈그러져 있던 이불을 다시 머리끝까지 뒤집어 덮어썼다. 어느새 다가온 복희씨가 이불을 걷어내 방구석에 휑하니 집어 던지며 말했다. “ 잘 잤어?” 아니, 못 잤다! 새벽까지 뒤척이는 너 때문에 못 자고 장 우현에게 사랑한다는 네 목소리 때문에 밤새 설친 잠도 달아나 났다구! “ 서울보다 공기는 확실히 좋아. 바람 쐬러 나갔다 올래?”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복희씨가 그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 어디 아파? 표정이 안 좋은데.” “ 아니요.” “ 뭐가 아니야, 얼굴이 창백한데.” 그는 의기소침해져 있는 내 얼굴을 살피며 턱을 손끝으로 들어올렸다. 복희씨의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 감기 걸렸냐?” “ 아니요.” 복희씨는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통풍이 잘 안 돼 꿉꿉해진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만지며 툴툴댔다. “ 썩을 놈의 온기가 없어, 온기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쯧쯧 찼다. “ 네가 무슨 아이스 맨이라도 되는 줄 아냐? 아무튼 쪼그만 게 겉멋만 잔뜩 들어…….” “ 박태열씨는 잘 계세요?” 불쑥 말을 끊긴 했는데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한 번도 생각도 한 적 없는 박태열씨가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전화 때문이었나, 아니면 정말 궁금해서? 그건 아닌데……. 설마 내가 화가 난 걸까. 복희씨가 장 우현에게 한 말 때문에? 그래서 애꿎은 박태열씨를 들먹여 보는 거라면 난 정말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놈이었다. 내가 의미 없이 박태열씨를 들먹이는 것에 비해 복희씨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아 아리송하게 변했다. “ 네가 그건 왜 물어.” 나는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내가 왜 복희씨 앞에서 우물쭈물해야 되나 생각하자 갑자기 욱해져서 말했다. “ 궁금하니까 물어보죠.” 사실 진짜 안 궁금했다. 복희씨가 나를 속이고 놀려먹는 걸로 1인자라면 박태열씨는 적어도 3인자 급은 될 텐데 내가 그런 놈을 뭐 하러 궁금해 하겠는가.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 게 복희씨가 장 우현을 걸고넘어지면서 나를 열 받게 했듯이 나 역시 그를 이용해 복희씨를 열 받게 하고 싶었다. 내가 장 우현이란 이름하나에 침착해질 수 없는 것처럼 복희씨 또한 그래주길 바랐다. 안 되면 말고. 밑져야 본전 아닌가. 이 복희씨는 방바닥을 만지작대던 손에 대단한 먼지라도 뭍은 듯 손바닥을 탈탈 털어내고 있었다. 표정은 지극히 평범했다. “ 궁금하니까 물어봤다구요.” 반복해서 말했다. 복희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네가 그 자식을 왜 궁금해 하는 건데.” “ 내 마음이죠. 나도 박태열씨의 안부를 물어볼 정도는 된다고 봐요.” 순간 복희씨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 어째서.” ……뭐가 어째서라는 거지. 대놓고 그렇게 물어보니 또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냥요’ 하고 넘기기엔 내 이미지에 극심한 타격을 미칠지도 모른다. “ 어째서긴요.” 나는 애써 도도한 척 말했다. “ 박태열씨가 나보고 사귀자고 했거든요. 나도 그러자고 했고요. 그럼 안부를 물어볼 수는 있지 않겠어요? 사실 박태열씨가……. “ 복희씨가 손을 들어 내 말을 급하게 가로막았다. “ 조용.” “ 조용하긴 개뿔이다.” 내 빈정거림에 복희씨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뜨끔했다. “ 너 방금 뭐라고 했냐?” “ 내가 뭘요.”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박 태열이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 나도 박태열씨의 안부를 물어볼 정도는 된 다고 했어요, 왜요.” “ …….” 고개를 들고 복희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화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복희씨의 얼굴이 심중을 가늠하기 힘들게 변해 있었다. 가늘게 그어져 있던 미간의 주름이 곧게 펴지며 표정이 완벽하게 사라져간다. 얼음판처럼 무감각하게 변해가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놀란 건 나였다. 화났나? 정말로 화난 건가? 지금 와 생각해보면 복희씨는 나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물론 소리를 지르고 악을 지르고 고함을 쳤던 적은 있었다. 다혈질적인 한 면만 보고 복희씨가 단순히 화가 났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그 모습이 되레 그가 평상시와 크게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복희씨는 얼굴에 심술궂은 표정을 주렁주렁 달고 나에게 성질을 부릴 때에도 항상 장난을 쳤다. 나는 그가 보이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이나 장난 속에 이 사람이 정말 화가 난 게 아니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건 응당 나한테만 국한된 경우가 아니었다. 복희씨가 새싹과 쌍칼에게 지독하게 욕을 퍼 부우면 화가 나지 않은 것이고, 정말 화가 났다면 공사판에서처럼 긴말 없이 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만 휘둘렀을 것이다. 내가 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건 복희씨가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감정 없이 굳어 버린 얼굴 그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 모습에 낚싯바늘에 지렁이를 끼워 넣고 작은 붕어 한 마리를 기다리다 때 맞힘 지나가는 식인 상어가 내 낚싯바늘에 걸려들었을 때처럼 나는 당황해하고 있었다. “ 저기요, 이 복희씨.” “ 잤냐?” “ 네?” “ 잤냐고.” 나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꼭 지 수준에 맞게만 생각하고 있네. 어이없어서 대답을 못하고 있자, 그는 딱 저 좋은 대로만 판단해 무시무시한 분노를 터뜨렸다. “ 셋 셀 동안 대답 안 하면 죽을 때까지 입 닥치고 살게 해준다. 하나, 둘…….” “ 기가 막혀.” “ 셋, 좋아! 지금 그 상태로 얌전히 입 다물고 있어. 괜히 움직이면 어금니까지 박살나니까.” 그는 진심이었다. 복희씨는 살벌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내 입에 꽂아 넣으려 했다. 재빨리 허리를 굴려 자리를 피했다.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그를 노려보았다. 복희씨는 어이없다는 듯이 주먹을 더 바짝 치켜들었다. “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진짜 잤네? 씨발, 그렇지?” 내가 이렇게 스릴을 즐기는 놈이었단 말인가. 딱 봐도 이 복희씨가 현재로서도 충분히 정상범주를 훨씬 뛰어넘어 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나는 그의 속내가 못내 궁금해졌다. “ 아, 뭐. 네…….” 결국 대답해버렸다. 뭐라고 할까. 그럴 줄 알았다고 할까 아니면 버럭 고함을 칠까? 하지만 내가 예상한 뻔히 보이는 그의 반응들이 한꺼번에 스쳐지나갔다. 복희씨는 번개 맞은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내가 앉아 있는 반대편으로 뒤돌아서서 허리에 양 손을 받치고 방을 왔다갔다 서성댔다. “ 저기요, 사실은요.” “ 개한테도 대주는 걸 보니 너도 어지간히 좆 대가리가 궁했했던 모양이야.” 나는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 일어나.” “ 싫은데요.” 복희씨가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제 성질에 못 이겨 내 팔목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 일어나라고, 새끼야! 이젠 직접 일으켜 주기까지 해야 되냐?” “ 일으켜 달란 말이 아니라, 내가 왜 일어 나야되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 일어나.” 눈앞에 멈춰있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질질 끌었다간 기어코 한 대 칠 기세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내 허리를 절대적인 힘을 앞세워 거칠게 끌어안았다. “ 너도 알겠지만 나는 성격이 좋은 새끼가 아니다.” 당연하지! 잘 알다 뿐이겠냐. 네가 개새끼라는 것도 숱한 경험에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 나를 엿 먹을 의도였다면 좋은 방법이야. 아주 기가 막혀. 너무 기분이 좋아서 널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야. 하하하…….” 거짓말 안 하고 이 복희씨는 5분 동안 미친 듯이 ‘하하하.’ 댔다. 그러나 입은 열심히 웃고 있었지만 팔뚝에 돋아난 심줄을 급기야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의 할리우드 급 명연기에 덜컥 겁이 나 단단히 붙잡혀 있는 손을 억지로 빼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팔목을 감아 가볍게 짓눌렀다. “ 나만 보는 숫처녀처럼 구는 건 재미없지.” 복희씨의 목소리는 냉랭해져 있었다. “ 다른 새끼들한테 대주든 계집년들하고 뒹굴든 그건 내 알바 아니다만.” 그의 눈이 한껏 짙어져 있었다. “ 다 돼도 그 새끼는 안 돼.” 저렇게 으르렁거리는 사람한테 이제 와서 ‘안 잤지롱, 네 반응 보려고 떠본 거지롱.’ 하고 미친 척 꼴값을 떨 순 없었다. 복희씨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나를 질질 끌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무릎이 방바닥에 쓸렸다. 따끔했다. 퍼질러진 발에 베개와 이불이 차이는데도 굴하고 않고 무직막지하게 나를 휩쓸고 가던 이 복희씨는 무턱대고 문을 걷어찼다. 그는 결국 내 허리를 끌어당겨 어깨에 가볍게 들쳐 멨다. 사내새끼를 엎고서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내가 어떻게 해볼 사이 없이 앞마당을 지나쳐갔다. 나는 그때까지 이 촌구석에서 완벽한 타지인인 이 복희씨가 과연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뒤통수를 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복희씨는 기어코 대문까지 걷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논두렁 앞에 검게 세팅 된 승용차 한대가 세워져 있었다. 보나마나 이 복희씨의 차였다. 그는 곧장 차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바지 호주머니를 뒤적여 차키를 꽂고 차문을 열어젖혔다. 복희씨는 운전석을 열자마자 곧장 반대로 돌아가 조수석 문까지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나를 좌석에 짐짝처럼 구겨 넣고 운전석으로 돌아가 핸들을 움켜쥐었다. 그는 놀란 내 얼굴을 보고도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 지,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복희씨가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했다. “ 보면 모르냐. 차타고 집에 가는 거지.” 나는 놀라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이었다. “ 미, 미쳤어! 나는 안 간다고 어제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런 게 어디 있어!” “ 네 나이에 이빨이 몽땅 빠져버리면 어지간히 슬플 거야. 좋아하는 고기도 못 먹지, 불편한 틀니는 계속 끼고 있어야지. 안 그래?” “ 하……!” “ 그 새끼랑 하면서도 네 그 주둥아리로 열심히 신음소리를 냈겠지? 하하하, 생각만 해도 이거 흥분 돼 죽겠네.”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하던 그가 돌연 안색을 굳히며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찍었다. “ 성질 같았으면 지금 당장 네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려도 시원치 않겠지만 만에 하나 내가 후회하게 될까봐 참는 거다. 아예 이빨이 하나도 안 남으면 내 거기를 아무리 쪽쪽 빨아도 긁는 맛이 전혀 안 나잖아. 안 그래?”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숨죽이고 있던 설움이 툭 튀어나왔다. “ 정말, 정말 너무 싫다.” 복희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거 참 잘됐네. 나도 마찬가지야.” “ 그럼 같이 있을 필요도 없네요. 빨리 내려주세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 내가 말했잖아. 화나면 굳이 그 감정을 참고 싶진 않다고. 너를 때릴 순 없으니 너 대신 맞아 줄만한 새끼를 찾으러 가야겠어. 물론 너는 나를 따라와야 하고. “ “ …….” “ 지금부터 입만 뻥긋해봐. 그나마 이렇게 참고 있는 것도 너에 대한 내 감정을 조금은 인정했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고 했다간 이참에 대가리 박살 날 줄 알아. 적당히 가지고 놀란 말이야, 적당히. 내가 이래봬도 로맨틱한 남자라구!“ 대꾸할 가치가 없었다. 복희씨가 룸미러에 비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자 일부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룸미러가 산산조각으로 깨부숴지며 무릎위로 유리파편이 튀었다. 복희씨의 날카로운 손가락이 내 턱을 움켜쥐고 시선을 맞췄다. “ 어른이 말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 그게 예의야.” “ 참 훌륭한 어른이시네요.” 질질 비꼬아 말했다. 그는 의외로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내 턱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 쓸데없는 소리 지껄여대지 말고 잠이나 퍼질러 자.” “ 잠 안 와요.” “ 그래도 자. 일어나면 서울일 거다.” “ 내려줘요. 이대로 갈수 없어요. 할머니한테 간다는 말도 못 했고 짐도 많다고요.” “ 조용히 하라고 했다.” 나는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분통을 터뜨렸다. “ 조용히 하긴 뭘 조용히 해요! 옷도 많고 책도 많은데 그거 다 옮겨야한다고요!” “ 서울 가면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씨발 새끼, 돈 자랑은. 잔뜩 꼬여 있는 나에겐 그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 돈 참 많은가 봐요?” “ 응.” 딱 떨어지는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복희씨의 눈이 반짝였다. “ 할 말 없지? 그러니까 잠이나 자라고.” 조금은 느긋해진 그의 표정에 우스꽝스럽게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창가로 눈을 돌렸다. 복희씨는 차 시동을 걸고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창문을 열고 있었다간 머리털이 아주 다 뜯겨나갔을 것이다. 서울까지 공포의 레이스가 이어질 조짐이었다. 두려움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약한 내 모습과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잠을 자야 한다. 그래야 머리가 덜 아프지……. 그러다 금세 곯아떨어졌다. “ 일어나.” 이 복희씨의 목소리였다. 말로 하면 될 것을 꼭 볼을 때리고 지랄이었다. 가물거리던 눈을 힘겹게 떴다. 어느새 차는 멈춰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이상했다. 이 으리으리한 저택들은 다 뭐란 말인가. 난생 처음 와 본 낯선 동네였다. 당연히 집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빛나간 어색한 풍경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잠에 취해 얼떨떨한 눈이 번쩍 뜨였다. 이슬이 맺힌 창문을 벅벅 문지르고 밖으로 찬찬히 내다보았다. 잡지에서나 봤을 법한 외국 배우들이 사는 거대한 저택들이 빼곡히 모여 있는 동네는 고작 대문하나가 내 방만 했다. 뾰족뾰족한 성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어 흡사 고전 미술책을 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집을 감싼 담장하나에도 시멘트가 아니라 돈을 처바른 게 분명했다. 가정부와 집사들이 몇 십 명쯤 있어야 집안 청소가 가능할 것 같은 드라마에서만 늘 열심히 보아왔던 그런 집이었다. 아니, 성이었다. 이런 집에 살면 난방비만 해도 장난 아니겠는데.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나에게 스스로 조소했다. 이런 집에 하루 살다간 가랑이 찢어지기 십상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복희씨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쿡쿡 찍으며 말했다. “ 내려.” 그가 먼저 훌쩍 차에서 내리자 나는 주춤주춤 따라 나섰다.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이러다 길이라도 잃으면 좆나 낭패였다. 나는 그를 바짝 뒤 쫒았다. 여긴 과연 어딜까. 그때 복희씨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골목을 꺾어 들어갔다.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왼쪽으로 가려다 그를 따라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복희씨와 나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십분 정도를 더 걸었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고작 한 가구가 이렇게 땅을 많이 차지하고 있어도 되는지 따지고 싶을 만큼 큰 저택 앞에서였다. 초인종을 누르려다 말고 복희씨가 차에서 내리고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불쑥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 이리와.” “ 네? 네.” 나는 느릿느릿 걸어 복희씨 뒤에 섰다. 복희씨는 초인종 대신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들었다. 구멍에 맞춰 열쇠를 돌리는 폼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 복희씨 집인가. 나는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건 아니지. 마땅한 이유는 없지만 그건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철커덩 쇳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복희씨는 냉큼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뜬금없이 내 손을 움켜잡더니 앞으로 죽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손에 끌려 어느새 그를 앞장 서 있었다. 운동장 만 한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을 둘러싼 가로수 만해도 어마어마했다. 멀뚱히 앞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 여기가 어디에요?” 복희씨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펴며 다시 깍지 껴 단단하게 잡았다. " 집." " 그건 나도 아는데요. 누구 집이냐 이 말이에요." 복희씨가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내 속에 있는 내가 까발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무뚝뚝하게 툭 내뱉었다. “ 애인새끼한테 눈앞에서 바람피우라고 사줬던 집.” “ ……!!" 그는 돌연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웃음이 싫었다. 자신을 힐난할 때 웃는 그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 나는 병신이었어. 지금의 너처럼. “ “ ……” “ 네가 나를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그 녀석을 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는 복희씨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내 팔목을 움켜쥐고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차마 그의 뒷모습에 대고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장 우현이 왜 바람을 피웠는지, 그 상대가 누군지 따위는. 그건 그 동안 이어져 오던 궁금증과 혼란스러움에 대한 마침표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었다. 복희씨와 첫 관계에서 장 우현의 전화는 조작 된 게 아니었어! 박태열씨와 오피스텔에 갔을 때, 그는 분명히 우리가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청장치를 넣어놨다고 느긋해하던 이 복희씨였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담 내가 그의 집에 나설 때, 등 뒤로 들었던 문 닫히는 소리도 분명 이 복희씨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는 왜 장 우현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면서 까지 나를 시험하고 싶었던 걸까. 내 감정이 그렇게 못 미더웠을까. 아니면 이 사람은 사람 자체를 불신하는 건가. 나는 머릿속에 사라지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끙끙대며 열심히 떠올리려 애썼다. 장 우현의 전화를 받고 흔들리던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아무리 칼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떨리는 눈, 흔들리는 감정, 자연스러운 한숨소리까지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매하게 찍은 감정의 마침표에 자신이 없어졌다. 걸으면 걸을수록 현관과 멀게만 느껴지는 정원을 계속해서 걷자, 갑자기 복희씨의 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 가다 그의 등에 코를 박고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혹시 누가 봤다 싶어 열심히 귀를 쫑긋하고 있는데 오른 쪽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랜만입니다, 형님.” 고개를 돌렸다. 복희씨 역시 이미 한 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 꽃밭과 이어진 수돗가 뒤에서 하얀 양복을 입은 세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짠 것처럼 일제히 복희씨를 향해 구십도 인사를 했다. 분위기를 봐서 직업적으로 주먹을 쓰는 놈들 같은데 검은 양복이 아니라 흰 양복에 백구두 착용하고 있어 유별나게 띄어보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흰 양복에, 백구두? 흰 양복에 백구두! 흰 양복에 백구두라고? 흰 양복에 백구두잖아……! 흰색 하니까 번뜩하고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박 태열씨!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다 못해 복희씨가 내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하늘로 튀어 오를 뻔 했다. 그러나 나와 극명하게 대조적이게도 복희씨는 지나치게 느긋했다. 그는 백조무리에게 까닥 고개를 끄덕이곤 현관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개중에 직위가 있어 보이는 대왕 백조 놈이 복희씨를 가로막고 섰다. 놈은 은근히 거만한 말투로 복희씨를 노려봤다. “ 안에 저희 형님이 계십니다, 형님.” 복희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 그런데.” “ 가급적이면 충돌을 안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여긴 우리 애들이 이미 자리를 깔고 앉자 있잖습니까.” “ 그러니까 나더러 알아서 피하라? 지금 그 말이네? 맞나?” 복희씨가 질문을 퍼 붇자, 대왕 백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 형님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몸을 좀 더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복희씨가 코웃음을 쳤다. 대왕 백조의 얼굴에 조바심이 스치는 걸 느꼈다. “ 너는 어른 공경, 예의범절이란 것도 모르냐?” 또 저 놈의 어른 공경, 예의범절 타령이었다. 그렇게 할 말이 없나. 가급적 레퍼토리 좀 바꾸길 바랐다. 이러다 귓구멍에 딱지 않겠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쓱쓱 후벼 파며 대왕 백조를 바라보았다. 놈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덩달아 놈을 바라보고 있던 조무래기 백조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대왕 백조가 급조해 말을 바꿔치기 했다. “ 형님,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서로가 좋은 게 정말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송구스럽습니다.” 복희씨는 대왕 백조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 춘배야.” 고놈 참 이름이 구수하구만. 얼굴은 잘생겼는데 이름이 영 아니올시다. 그러게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당장 기뻐하지만 말고 한 평생 가지고 가는 이름 조낸 진지하게 머리를 싸매서 생각에 생각을 한 뒤에 지어줘야 하는 거다. ……춘배가 뭐냐, 춘배가. 모냥빠지게시리. 복희씨의 부름에 춘배가 다시 구십도 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 예, 형님. 말씀하십시오.” “ 터졌다고 다 같은 주둥아리가 아니고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고 다 같은 말이 아니다.” “ 제,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다급해진 춘배 새끼를 대신해 옆에 서 있던 허여멀건 백조가 앞에 나섰다. “ 저희 형님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형님.” 불안한지 다시 춘배가 나섰다. “ 저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형님 종노릇만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태열이 형님 밑에 있다는 사실 좀 알아주십시오.” 복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춘배 외, 백조 두 마리가 안심하고 고개를 돌리던 찰나, 그가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또 무슨 재미난 장난을 생각한 거였다. 그에겐 재미난 것이 남에게 잔인한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지금까지 끈질기게 맞잡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놓으며 땅 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찾고 있던 걸 발견한 드디어 모양이었다. 한 쪽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려 올라간다. 덜컥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또 무슨 생각이지? 그는 발꿈치를 땅에 톡톡 찼다. 그리곤 구두 앞을 이용해 주먹 만 한 돌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크기에 비해 무게는 그다지 없는지 휙 튀어 오른 돌이 허공 위로 날아올랐다. 복희씨는 오른손으로 돌을 낚아챘다가 왼손으로 바꿔들었다. “ 어차피 볼 거 안볼 거 다 보여준 마당에 이제 와서 가린다고 가려지지도 않겠지.” 그는 돌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리고 주춤 물러나자 복희씨가 눈을 가늘게 떴다. “ 그렇지? 내 사랑.” 그의 노골적인 멘트에 백조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일이 벌어졌다. 복희씨는 씩 웃더니 바람처럼 몸을 돌려 춘배 놈의 종아리를 사납게 걷어차 올렸다. 놈이 풀밭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두려움에 어깨를 떨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춘배의 목을 복희씨는 구두 뒤꿈치로 사정없이 내리찍어 비틀었다. 놈이 컥 헛기침을 했다. 복희씨는 표정 하나 없이 놈의 멱살을 들어 자세를 바르게 만들더니 가지고 있던 돌을 오른 쪽 눈 위에 내리찍는 시늉을 했다. 놈이 질끈 눈을 감았다. 복희씨가 대놓고 비웃었다. “ 쯧쯧, 고작 이게 무서워? 박태열이 애를 겁쟁이로 만들어 놨네. 아주 못 쓰겠어.” 복희씨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몸을 풀었다. 돌을 올렸다 내렸다 장난을 치며 덧붙였다. “ 어이, 애송이. 밑구멍도 돈으로 닦는 재벌 형님을 모신 덕에 병신이 돼도 치료비는 넉넉하게 줄 거다. 보험만 잘 되어 있으면 그건 걱정 마.” 그는 이제 나른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놈의 입술을 향해 발을 뻗었다. 구두 끝이 입안으로 들어가 억지로 입술을 벌이게 했다. 그리곤 들고 있던 돌을 벌어진 주둥이 사이에 처박았다. 콰-직!!! “ 으, 으윽!!!” 돌멩이도 아니고 무려 자갈이었다. 복희씨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폴짝 일어나 어정쩡하게 붙어 있는 자갈을 발로 내리 찍었다. 구둣발에 닿은 돌이 복희씨가 뻗은 힘에 밀려 단박에 앞니와 아랫니를 산산이 깨부쉈다. 주둥이 틈새로 검붉은 피와 앞니가 뒤섞여 쏟아져 나왔다. 가만히 서있던 백조 두 놈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언제 주웠는지 긴 나뭇가지를 들고 서있던 복희씨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잘 봤지? 내가 이빨을 몽땅 빼버리겠다는 건 이렇게 하겠다는 뜻이야. 나를 속상하게 하지 마. 다른 새끼랑 놀지 말란 말이야. 그럼 너는 특별히 잇몸부터 찢어놓을 거야. 알았지? 내 사랑.” 내 사랑이 아니라 ‘내 꼬봉’으로 들렸다. 그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며 내게 대답할 것을 강요했다. 나는 겁에 질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희씨는 ‘옳지, 그렇게 나와야지.’ 했다. 그리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춘배 놈의 주둥이에 반쯤 튀어나와 있는 돌을 페트병 뚜껑을 돌리듯이 옆으로 비틀어 올리며 거칠게 쑤셔 넣었다. 돌이 이젠 어금니부위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며 그가 얼마나 폭력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인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제 복희씨의 발등은 춘배 놈의 턱뼈를 박살을 내기 시작했다. 고통에 못 이겨 헛기침을 뿜어대자 순간적으로 돌이 튕겨져 나갔다. 뻥 뚫린 주둥이에 뭉툭한 이빨이 우두두 뽑혀져 나오는 걸 보며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내 앞엔 그 녀석이 보였다. 약에 취해 있던 모습을 끝으로 한 번도 못 봤으니 실로 오랜만의 보는 장 우현이었다. 녀석은 피 떡이 되어 쓰러져있는 대왕 백조 놈의 안면에 주먹을 박아 넣는 복희씨를 발견하게 환하게 웃었다. “ 복희씨!”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았던 복희씨의 행동이 일순간 정적상태에 이르렀다. 사납게 움직이던 발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장 우현을 돌아보았다. 장 우현에게 나는 없었다. 놈은 분명히 나를 봤을 텐데도 불구하고 전혀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재수없는 놈을 뭘 해도 부엣 가심이었다. 그 사이 복희씨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장 우현이 한 발짝 다가와 안아 달라는 듯이 팔을 벌렸다. 얼씨구. 지금이 영화 속 한 장면, 자신이 여배우라도 된 듯 단단히 착각한 모양새였다. 놈이 지긋지긋하게 재수 없었지만 그것과 별도로 나는 그에게 확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불여우 년에게 걸어갈 줄 알았던 이 복희씨가 내 앞에 다가오자 깜짝 놀라 미친 듯이 심장이 벌렁벌렁 댔다. 놀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장 우현, 망할 새끼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듯 굳어졌다. 엿 이나 먹어라, 띱새. 복희씨가 내 손을 깍지 껴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너는 돌로 안 끝나. 수틀리면 갈비뼈도 다 뜯어내 버릴 거야. 그러니까 어디 내빼지 말고 서방님한테 잘해, 알았냐, 몰랐냐?” 복희씨는 장 우현은 무시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말만 중얼댔다. 불여우 년보다 내가 오히려 더 어이가 없었다. “ 내가 너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이유를 평생 기억해라.”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 나는…….” “ 왔으면 집으로 들어올 것이지 애꿎은 우리 애들을 왜 잡고 그러실까.” 머리 위로 들려오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복희씨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모습의 박태열씨였다. 그는 2층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복희씨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위를 벗고 반바지만 입고 있는 모습이 지극히 편안해 집주인 인 냥 익숙해 보였다. 담뱃재를 손바닥에 털던 박태열씨와 시선이 마주쳤다. 복희씨가 힘주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의무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 복희씨가 목소리를 낮추고 귓속말을 해왔다. “ 눈 마주쳤다? 앞니 하나.” “ 지금 그런 게 아니잖아요!” 복희씨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 흥분하는 걸 보니 그 짧은 사이에 눈으로 대화도 나눈 모양이지? 좋아, 앞니 두 개 어금니 세 개.” “ 나 참, 미치고 팔짝뛰겠네.” 복희씨가 흥미롭다는 눈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때 박태열씨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 자기야, 진짜 오랜만이다.” 박태열씨의 목소리는 지극히 쾌활했다. 너무 명랑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정원 꼴을 봤다면 부하 놈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을 텐데 그에겐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수작부리지마라, 새끼야.” 내가 할 말을 가로챈 복희씨의 목소리는 지극히 신경질적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베어나갈정도였다. 박태열씨는 지긋이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며 안전봉에 담배를 비벼 꺼뜨리곤 하하하 웃었다. 나는 그 모습에 나 조차 미처 느끼지 못 할 찰나에, 기울어져 있던 복희씨의 얼굴을 잡아당겨 눈을 올려다봤다. “ 거짓말 한 게 있어요. 사실 나요, 박태열씨랑 안 잤어요.” 복희씨는 나를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유심히 보는지 멀쩡한 눈썹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 알아.” 알아? 안 다구?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 정말요? 어떻게?” 복희씨가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던 내 손등을 손톱으로 콕콕 찔렀다. “ 넌 그럴 위인이 못 되니까.” 저게 좋은 말일까, 나쁜 말일까. 아무 짬이 없구나.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보고 복희씨가 눈썹을 꿈틀했다. “ 넌 나를 두고 다른 새끼랑 잘 배짱이 없다고. 그건 내가 알지.” 복희씨가 거의 확신에 차서 자신감 있게 말했다. “ 내가 너무 좋으니까.” 시발 놈의 왕자 병 새끼! 엿이나 먹어라. 뿡. “ 그렇다고 구라 깐 걸로 너무 미안해하지 마. 알고 나도 대충 뻥깠다.” “ 뻥? 뭐.” 복희씨가 얼굴을 쑥 들이밀고 내 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붙였다. “ 다른 놈들한테 대주든, 계집년들이랑 뒹굴든 말든 상관없다는 말. 좆나 개 뻥이었어.” 복희씨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 병신 되기엔 좆나 어린나이라는 거 알지? 말로 할 때 알아서 기어.” “ 복희씨!!” 복희씨의 협박 아닌 협박은 장 우현의 고함소리에 묻혀 지나갔다. 녀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복희씨 앞으로 걸어왔다. 팔짱을 끼고 난간에 편한 자세로 서 있던 박태열씨가 장 우현과 나를 번갈아 보며 요상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 친구, 너 드디어 착실해지기로 결심했구나.” 복희씨는 못 들은 척 박태열씨의 말을 씹고 계속해서 내게 귓속말을 했다. “ 특히 네가 왜 저 새끼랑 자면 안 되는지 가르쳐줄게.” 그는 주머니에 있는 내 손을 빼어냈다. 그리고 걸어오다 말고 멍청하게 서있는 장 우현에게 다가갔다. 어색하다는 표현이 오히려 감사할 만큼 거실 분위기는 냉랭했다. 창문틀에 기대어 서서 평소답지 않게 말을 아끼는 박태열씨와 전생에 나랑 무슨 놈의 원수가 그렇게 졌는지 눈알 터지기 일보직전으로 째려보는 장 우현, 내가 앉아 있는 반대편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약간 비튼 채 보는 사람이 더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앉아 있는 이 복희씨. 그리고 크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대궐 같은 집에 전혀 융화되지 못한 내가 있었다. 복희씨는 정원에서 내가 왜 박태열씨와 자면 안 되는지 가르쳐주겠다며 집으로 데려온 사람 맞는지 불과 5분 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몰라 탁자만 조용히 노려보며 쿠션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활짝 열려 있던 창문 밖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커튼이 나풀거렸다. 휘날리는 앞머리를 매만지던 찰나, 나를 보고 있던 박태열씨와 눈이 마주쳤다. ……거 참 더럽게 어색하네. 그는 굳은 얼굴을 잽싸게 풀고 처음 본 사람이 봤다면 진심으로 오해할 만큼 거짓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유유상종이라고 연기 하난 기가 막히는 새끼였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 툴툴거리며 장 우현이 소파로 다가왔다.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복희씨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눈 꼬리엔 ‘야 이 씹새 네가 왜 여기 있어…….’ 하는 물음이 서려 있었다. 녀석은 유심히 나를 지켜보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 작은 행동에 나를 한심한 멍텅구리쯤으로 여기는 녀석의 얼핏 보이는 듯 했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박태열씨 또한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론 나를 얼마나 미련한 놈이라고 비웃고 있을까, 장 우현은 복희씨 앞이라 소리 내어 말은 않지만 그만 없었더라면 마녀처럼 깔깔깔 웃음을 터뜨리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싶은 마음을 굳이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귀찮았다. 의도하지 않은 이런 복잡한 상황에 놓인 나도 귀찮았지만 그보단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곳에서 길을 찾아 헤매고 싶지도 않았다. 얼른 그들의 대화가 끝나고 녀석들이 있는 집이든 시골이든 조금 더 편한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방인이었던 거 끝까지 이방인처럼 굴면 되는 거였다. 나도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째려보지 말라고, 망할 자식아! 독살스러운 장 우현새끼의 얼굴에 대고 썩소를 머금어주자 녀석이 잔뜩 긴장하는 눈치다. 놈은 불쑥 말을 하려다 말고 복희씨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입술을 일그러뜨려 말을 아꼈다. 자기도 쪼는 주제에 있는 척은……. 가소로운 놈. 그렇게 장 우현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복희씨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나를 포함한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복희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소파에 어깨를 파묻고 누워있었다. “ 열쇠.” 복희씨의 눈이 장 우현을 훑었다. 녀석은 덜 익은 파인애플을 씹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 열쇠? 무슨 열쇠요.” 복희씨의 목소리는 더없이 감정 없게 흘러나왔다. “ 집 열쇠 말이다.” 집 열쇠? 갑자기 그건 왜 찾을까? 놈을 힐끔힐끔 살폈다. 장 우현의 눈빛에 희한한 활기가 돋았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활기가 아니라 당황한 것이라는 것 알아차리기 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놈은 자신이 복희씨의 말에 크게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째 그 미소가 더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 집 열쇠는 갑자기 왜요…….” 테이블에 박혀있던 복희씨의 고개가 그제야 들렸다. 그는 장 우현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 화내기 싫으니까 가져오라고 할 때 그냥 가져와.” 놈은 눈을 휘둥그레 치켜뜨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눌렀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놀라긴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하긴 비단 놀란 사람이 녀석만은 아니었다. 복희씨가 장 우현에게 강압적인 말투를 썼다는 것 자체에 나도 놀랐고, 이제껏 열심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태열씨도 담배를 피우다 말고 헛기침을 뱉어냈다. 그러나 복희씨는 여전히 감정 없는 로봇 같았다. “ 가져와.” 그러자 장 우현이 손바닥을 떼어내고 비장해진 표정을 지었다. “ 싫어요. 눈앞에만 있으라고 준거잖아요. 갑자기 그걸 왜 달래!” 복희씨는 소파에서 일어나 구겨져 있던 바지주름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는 장 우현을 지글지글한 눈빛으로 쏘아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거실 이곳저곳을 훑어봤다. 아무래도 그가 말하는 ‘열쇠’ 가 있을 만한 곳을 둘러보는 모양새였다. 박태열씨와 내 눈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복희씨의 눈동자는 소파구석, 창문, 액자사이, 2층 계단, 방문 사이를 차례대로 지나쳐 현관 반대편에 위치한 주방에서 멎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주방 앞으로 걸어갔다. 그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장 우현이 공포에 사로잡힌 듯 몸을 덜덜 떨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복희씨 앞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나한테 화난 거 있어요? 그럼 말로 해요. 당신이 이러는 거 하나도 재미없단 말이야! “ 내가 앉아 있는 쪽에선 정 반대로 돌아가 있는 복희씨의 등 때문에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머뭇거림 없이 튀어나온 목소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 입 닥쳐.” “ 싫어!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요?” 그러자 복희씨가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 그럼 좆 나게 처 맞을래?” 장 우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녀석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그 틈에 복희씨는 녀석을 짐짝처럼 밀쳐내고 주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들어간 후 얼마 안 있어 벌컥벌컥 서랍 문 열리는 소리와 물건이 깨부숴지는 소리,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의 파열음소리, 접시 따위가 바닥에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렇게 미친 듯이 주방을 들쑤셔놓던 복희씨가 검지 끝에 열쇠고리를 끼고 나타날 때까지 장 우현은 그가 자신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맞을래.’ 라는 말 한마디를 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 망연자실해져서는 거실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복희씨는 그런 녀석을 지나쳐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열쇠를 손가락을 바꿔가며 윙윙 돌리다 주머니에 구겨 넣더니 무슨 생각인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그를 마주보았다. 검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순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복희씨는 나를 뚫어지게 주시하면서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내 얼굴 위로 열쇠를 휙 집어던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고는 무섭게 날아오는 열쇠를 한 손으로 낚아챘다. 복희씨가 잘했다는 조용히 박수쳤다. “ 너 가져.” “ 네?” “ 그거 너 가지라고.” “ 미쳤어요? 이 집이 얼마짜린데요!” 내가 아니었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장 우현이 벌떡 일어나 외치는 고함소리였다. 녀석은 분노하다 못해 내 손에 들린 열쇠를 보고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흥분하지 않아도 나 또한 이집이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장 우현이 살았던 집이고 복희씨가 어떤 의미로 놈에게 선물한 집인지 아는데 좋아요, 감사해요 했다간 정말 미친놈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러나 놈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이 복희씨를 꼬드겨 이 집을 얻어내려는 천한 요부라도 된 냥 속물을 바라보는 저주의 눈빛을 보내왔다. 너무 어이가 없다보니 기가 막힌 게 아니라 콧구멍이 박혔다. 불여우의 눈빛이 어찌나 진실 되게 보였는지 보고 있는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놈은 당황해 있는 틈을 타 열쇠를 빼앗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발광을 했다. “ 네가 넘볼 수 있는 그런 집이 아니란 말이야! 이게 어디서 주제넘게…….” 이 미친 새끼가 뭐라고 씨불이고 자빠졌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자 알아서 몸이 떨려왔다. 이대로 입 닥치고 있다간 저 정신병자 같은 놈이 나를 정녕 만만한 호구로 보겠지?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장 우현의 옆구리를 퍽 걷어찼다. 놈의 휘청거리는 사이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재빨리 열쇠를 찾았다. 놈이 내 팔뚝을 꼬집으며 비명에 가깝도록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마디 없이 서 있던 박태열씨가 처음으로 내뱉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장 우현의 고함소리는 뚝 그쳤다. “ 우현아, 그 열쇠 우리 자기한테 돌려줘.” 나는 놈이 박태열씨에게 정신이 팔린 틈에 열쇠를 완벽하게 빼앗아 왔다. 장 우현은 휑해진 주머니를 뒤적이며 평소의 괴팍스러운 성격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 태열씨 미쳤어요?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요? 이 집은 내 거에요! 내 거라고!” 박태열씨는 빙그레 웃으며 담뱃재를 털어냈다. “ 이 복희가 이젠 네가 이 집 주인이 아니라잖아.” 부드럽게 떨어지는 박태열씨의 말에 충격을 먹은 듯 장우현은 비틀거렸다. 녀석이 필요이상 분노하는 것에 비해 복희씨는 조용했다. 그는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로 박태열씨가 서 있는 창밖을 바라보다 귀 기울려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비가 올 모양이군.” 박태열씨가 등을 안전봉에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전국적인 비라더니 하늘이 꽤 짙어. 소나기정도로 그치진 않을 거 같은데…….” 복희씨가 싸늘하게 말했다. “ 안 물어 봤다.” 박태열씨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 네가 물어봐서 대답한 거 아닌데?” “ 그럼 아가리 좀 닥치고 있어라. 네 목소리 듣는 거 지긋지긋하니까.” 복희씨의 살벌한 위압감에 굴하지 않고 박태열씨가 ‘하하하…….’ 웃었다. 대단한 넉살이었다. “ 너 하는 거 봐서, 인마.” 저 둘은 친군가? 아니면 원수? 둘 다 아닌 거 같은데. 아, 친구였는데 원수가 된 사이라고 해야 되나. 참으로 오묘한 관계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사리 끊어지지 않을 끈이 길게 이어져 두 사람을 묶어주고 있는 듯 했다. 복희씨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당장 칼을 들고 설칠 테지만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은 형제이상의 우애가 있었다. 그때 복희씨가 창 밖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틀어 나에게서 그 다음엔 장 우현에게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러다 그의 눈이 어느새 다시 나에게 완벽하게 돌아와 있었다. 복희씨가 나를 보며 서서히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표정을 보니 사악한 기쁨을 누리는 게 분명하다. 그는 끝까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장 우현에게 말했다. “ 너에게 이 집을 주는 게 아니었어. 그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 우현이 쪼르르 달려와 복희씨 옆에 앉았다. 말 잘 듣는 발바리 같았다. 놈은 복희씨의 손등에 얼굴에 부비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나한테 정말 화났나봐? 그, 그렇죠?” 복희씨는 귀찮다는 듯이 녀석을 떨어뜨리고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 나는 왜 그렇게 너에게 집착을 했을까?”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했고 과도하게 무성의했다. 장 우현의 얼굴에 초조함이 서렸다. “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복희씨가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보고 있는 사람이 더 민망해지는 의미 없는 웃음이었다. “ 그래, 그랬지. 그런데 너는…….” 복희씨가 처음으로 장 우현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변명을 하려다 말고 복희씨가 말을 이을 수 있게 너그러운 척,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다. 나는 진심으로 놈의 표정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 항상 생각했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너는 왜 나를 버리고 태열이 에게 갔을까, 이유가 뭘까 하고 말이다.” ……!! 상상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복희씨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어. " 장 우현은 겁에 질려보였다. 복희씨는 의무적인 티가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나를 가지고 논 거 밖에는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 물론 예전엔 그것마저도 좋다고 느꼈지. 하, 나도 너 때문에 어지간히 삽질 좀 했지. " " 이제 와서 왜 그런 말은 해요! 그런 말 하지 마!! " 문득 복희씨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 고작 2년이었어. 어떻게 2년을 못 기다리지? 너한테 고작 나는 그 정도였나. 어떻게 그 사이에 저 새끼랑 배가 맞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녀석은 이제 엉엉 울기 시작했다. “ 제, 제발.” "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빌어먹을 병신이야. “ 벌겋게 달아오르는 장 우현의 얼굴을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던 건가. 정말 그랬던 걸까. 그런데 나는 왜 한번 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거지? 왜. 문득 떠올랐다. 복희씨 앞에서 박태열씨와 장 우현 놈이 관계를 벌이던 모습과 그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말했던 집의 의미를. 조금만 더 생각을 해봤으면 쉽게 나오는 단순한 답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한번 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답이기도 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다. 속이 메슥거려왔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오늘이 끝이다. 막연히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오던 혼란스러움이 끄트머리에 다다랐다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울 만큼 박태열씨에게 시선이 향했다. 박태열씨는 복희씨가 하는 말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크게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베란다에 설치된 긴 원목나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있었다. 주둥이에서 나지막한 허밍 음이 질질 기어 나오는 걸 보면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 했다. 저 놈도 참 희한한 놈이지……. 장 우현 같은 마담뚜 같은 새끼가 취향이었으면서 왜 나한테 자기, 자기 꼬리를 친 거지? 생각하니 좆같았다. 나는 비로소 복희씨만큼 박태열씨도 시각적, 감정적 측면에서 보통사람에 비해 무엇이든 훨씬 웃도는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선 복희씨와 장 우현의 관계 속에 자신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이 탄로 났는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관심 없는 얼굴을 술을 마실 생각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잔에 흐를 정도로 가득 부운 포도주를 후루룩 입으로 핥던 박태열씨가 나를 보며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 한 잔 할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박태열씨가 애석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출렁거리는 와인 잔을 들고 베란다에 기대어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똥 폼은 어지간히 잡는 놈이었다. 복희씨의 낮은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장 우현이 더 빨랐다. “ 나는 사랑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사랑을 받고 싶기도 했단 말이에요. 그게 잘못이에요?” 녀석의 목소리엔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장 우현의 때 쓰는 목소리가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이기적이라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하마터면 낄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포괄적으로 녀석의 말을 분석해보자면 자신은 박태열씨를 지랄 맞게 사랑하는데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복희씨에게 사랑을 받겠다, 뭐 그렇게 되는 건가. 아, 그렇게 되는 구나. 너도 참 이기적인 새끼구나……. 하기는 누군들 이기적인 마음이 없겠는가. 투-투둑. 빗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기어코 한 두 방울씩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후로 접어든 시간도 아닌데 아침부터 비가 오는 걸 보면 박태열씨의 예고처럼 단순히 소나기로 그치진 않을 모양이었다. 나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팔을 밖으로 쭉 내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에 비비며 박태열씨가 나이 값 못하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저러면 재밌을까? 나도 한번 해볼까. 일어설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떨어지는 빗소리에 섞여 복희씨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 사랑해.” ……!! 아. 나는 체념한 듯 질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감기는 순간 박태열씨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 순간이 무서울 만큼 빨리 지나가 집에 가서 녀석들과 부침개를 부쳐 먹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간절해졌다. 비오는 날엔 뭐니 뭐니 해도 부침개지, 빌어먹을!! 부침갠데, 시발 진짜 부침갠데. 진짜 부침개 해먹을 건데. 왜 기분이……, 젠장!! 일부러 딴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흔들리는 빗소리 때문인지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애써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꾹꾹 눌렀다. 띵하고 울리던 머릿골이 조금 시원해지는 거 같기도 했다. 그때 장 우현이 희망에 들뜬 목소리로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 저도 사랑…….” 녀석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복희씨의 건조한 목소리가 놈의 주둥이를 급하게 막았다. “ 그러니까 더 이상 날 실망시키지 마라.” “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번뜩 눈을 떴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눈을 뜨자마자 복희씨의 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이더니 순간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혀끝으로 윗입술을 쓸어 올렸다. 지금 뭐하자는 거냐.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주시했다. 그는 장 우현에게 고개를 돌려 또박또박 말했다. “ 잘 가라.” “ 아……!” 어느새 내게 시선이 돌아온 복희씨의 얼굴엔 기묘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장난스럽게 휘어지는 눈 꼬리에서 들쑥날쑥한 입 꼬리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 야.” 복희씨가 대뜸 나를 불렀다. 그는 불과 5초 전에 자신이 한 말로 인해 얼마나 아니, 적어도 한 사람에게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 나 멋있냐?” 제발……, 저 주둥아리 좀. “ 야! 왜 대답이 없어! 멋있냐구!!” 정말 진심으로 이 복희씨가 닥쳐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 지금 네가 어른의 말씀을 감히 또 씹는 거냐?” 나는 그를 무시하고 장 우현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언뜻 봐도 비정상 일만큼 팔을 떨고 있었다. 흔들리는 팔목에 따라 듬성듬성 문신처럼 새겨진 파란 주사바늘이 가늘어 졌다 늘어났다 요동을 쳤다. 더럭 겁이 났다. 그리고 약에 취해있던 녀석이 떠올랐다. 설마 약발이 떨어져서 그러는 건가. 장 우현 놈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앞으로 한 발짝 떼기가 무섭게 사르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앞으로 꼬꾸라졌다. 맙소사. 나는 시계초침처럼 째깍 일어나 장 우현에게 다가가려 했다. 복희씨는 일어서는 나를 보며 내 어깨를 낚아채 억지로 소파에 앉히고 자신이 직접 다가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거실의 차가운 온도에도 불구하고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장 우현의 뺨을 사정없이 걷어 올렸다. 놈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무작정 몸만 떨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났다. 저러다 죽는 건 아닐까? 복희씨는 놈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고 인정사정없이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녀석은 다 죽어가는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그때 등 뒤로 발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박태열씨였다. 그는 긴장한 기색 없이 하나 없이 무덤덤하게 장 우현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베란다 우측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금세 거실로 나왔다. 건성건성 그를 보고 있던 나는 순간 눈이 부릅떠졌다. 박태열씨의 오른손엔 주사바늘이 들려있었다. 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복희씨는 박태열씨가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박태열씨는 침착해보였다. 그는 복희씨에게 들려 있던 장 우현을 무릎 위에 받히고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무서웠다. 박태열씨는 주사바늘을 손톱으로 툭 튕기며 액체를 조금 흘려보냈다. 그는 바늘 끝을 유심히 살펴보다 액체를 확인하고는 부르르 몸을 떠는 장 우현의 팔뚝에 바늘을 푹 꽂아 넣었다. 약물이 들어갈수록 죽어있던 녀석이 몸을 퉁퉁 튕겼다. 그 모습이 어찌 내 눈엔 살아있다는 알리는 발악처럼 보였다. 녀석이 턱 끝이 덜덜 떨려왔다. 놈이 겨우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무의식중에 복희씨부터 찾았다. 장 우현은 가만히 서있는 그를 발견하고 손을 뻗다가 황급히 내렸다. 박태열씨가 주사바늘을 솜뭉치에 돌돌 말다가 고개를 돌렸다. “ 얘 안 불쌍하냐?” 복희씨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 불쌍해.” 빈 주사바늘을 들고 일어서는 박태열씨를 보며 복희씨는 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 저 새끼가.” 박태열씨가 뒤늦게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가 재빨리 사그라졌다. “ 진짜 정신 차렸나 보네.” “ 난 원래부터 제 정신이었다. 너나 정신 차려라.” “ 싫다.” 박태열씨가 은밀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 내가 정신 차리면 또 너랑 싸워야 되니까 정신 차리기 싫다.” “ …….” “ 그러니까 함부로 정신 차리라는 말 하지 마라.” 이것들이 또 뭐라는 거냐. 알아듣기 힘든 말은 제발 둘만 있을 때 했으면 좋을 엿만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서로는 재빨리 알고, 또 알아듣고 얼굴까지 일그러뜨렸다. “ 죽고 싶어서 이젠 알아서 개 발악을 치고 자빠졌네.” 복희씨의 으르렁대는 고함소리에 박태열씨가 순순히 수긍했다. “ 진짜 그런가 보다.” 그 후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 연체동물처럼 소파에 기대어 늘어져 있던 장 우현 놈이 불안정하게 몸을 일으켰다. 시선이 놈에게 쏠렸다. 녀석은 생기 없는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다 발밑에 한 방울 정도 떨어진 약을 손끝으로 찍어 혀끝으로 핥아댔다. 얼마나 약에 취하면 저럴 수 있을까.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녀석을 보자 아주 눈곱만큼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었다. 집에 있는 녀석들이 알면 누가 누구 걱정 하냐고 콧방귀나 뿡뿡 껴댈 일이었지만 지금 기분으로선 놈을 보고 있기가 편하지 많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장 우현은 흐느적흐느적 소파를 붙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놈은 초점 없는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다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닌 희한한 포즈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녀석이 비웃음에 가까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생기 없이 마른 입술에서 푸 하는 바람 빠진 타이어 소리가 났다. “ 그래서 지금 나랑 헤어지겠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장 우현은 어느새 복희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희씨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가 애써 녀석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냉랭한 반응에 장 우현은 비참한 얼굴을 해보였다. 놈의 표정만 봤다면 어느 누구든 의심 없이 복희씨가 질려서 놈을 차는 거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가식적인 놈은 끝까지 가식을 떨어댈 모양이었다. 가련한 여주인공같이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던 놈이 갑자기 살벌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분이 나빠졌다. “ 지금까지 아무 말 없었으면서 고작 저 새끼 때문에?” 복희씨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답변보다 더 명확한 대답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내가 기뻐해야 되는 것 같았지만 그가 놈을 버렸다고 해서 보이는 그대로만 믿고 복희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을 만큼 난 순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 우현은 눈가에 살기가 번지는 걸 보면 보이는 그대로만 믿을 생각이 분명했다. 얼씨구. 웃기고 자빠졌네. 시간이 지날수록 놈의 얼굴에 분노가 나타났다. 복희씨는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상태였고 박태열씨는 이미 다시 베란다로 가서 못다 마신 포도주를 축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지금 당장 그들을 불러 모아 장 우현의 흡혈귀 같은 눈을 보여주며 실컷 비웃어주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기분이 점점 야릇해졌다. 분노를 떠나 과도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파랗게 질려가는 입술이 기이했다. 놈의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였다. 나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지가 뭐 어쩔 건데,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솟아나는 불안감을 걷잡을 수 없이 불어갔다. 인생에선 언제나 그렇듯 좋은 예감은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도 불길한 꿈과 예감은 구십 퍼센트 적중하게 되어있다. 이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삶을 살면서 그토록 후회되던 순간이 있었을까. 단연코 아니었다. 그날만 생각하면 혼자서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후회했다. 약에 취해있는 녀석이었다. 약물에 중독되면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져 사리분별력을 잃고 감정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충동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얼굴이 굳어지면서 극도의 불안감이 몰려왔지만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불길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하고도 아무런 대책 하나 없이 다가오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방관했다. 그것이 내 인생최대 실수였다. 그것도 지나치게 큰 실수. 생각했다. 그때 가까이 서있었던 복희씨를 불렀다면. 아니, 적어도 박태열씨라도 불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 사람 모두 나에 비해 월등히 힘이 세고 싸움판을 전전하던 덕에 상대를 제압하는 민첩함 정도는 있을 테니 간단하게 녀석을 막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만약 복희씨에게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적어도. 장 우현이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소파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는 이 복희씨는 조금 전부터 열심히 담배를 찾는 중이었다. 끝내 나타나지 않는 담배에 그는 꼬라지를 팍팍 부리며 진열장에 늘어선 위스키 병 하나를 들고 베란다로 걸어갔다. 박태열씨는 미니 칵테일 바에서 과일주를 만들고 있던 중이라 베란다는 텅 비어 있었다. 만약 박태열씨가 있었다면 복희씨는 처음부터 그리로 가지도 않았을 터였다. 박태열씨가 탁자를 탁탁 두드려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복희씨에게 ‘내거라도 피워.’ 하고 담배 각을 집어던졌다. 복희씨는 날아오는 담배 각을 군말 없이 낚아채더니 베란다 밑으로 휙 집어던져버렸다. 어쩜 하는 짓이 저리도 유치할까. 괜히 내가 민망해져 박태열씨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복희씨의 심술궂은 행동에 고개를 저으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암, 웃길 만도 하지. 테이블 위에 오늘 자 스포츠신문을 집어 들었다. 프로야구에 대한 톱기사가 실려 있었다. 헤드라인 기사를 읽다보니 어제 새벽에 충분하게 자지 못한 탓에 눈이 따끔따끔 쓰려왔다. 나는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신문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려던 찰나, 여태껏 방에 있던 장 우현이 갑자기 튀어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새끼 오줌 마렵나……. 화장실은 거기가 아닌데 왜 부엌으로 가는 걸까 하는 의문은 들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별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 오줌 누러갔다간 화장실에서 마주치기 십상이었다. 생각만 해도 뻘쭘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었다. 손끝에 침을 묻혀 한 장, 한 장 건성으로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나에게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복희씬가. 그때 난 왜 그렇게 둔했을까. 내가 하품을 찍찍하며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코앞까지 달려온 장 우현이 일반 과도보다 족히 두 배는 커 보이는 부엌칼을 무턱대고 내 눈을 향해 푹 찔러 넣은 직후였다.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소파를 이용해 녀석을 밀치거나 쿠션으로 놈의 대가리를 흠씬 두들겨 팰 수도 있겠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치켜들고 얼굴부터 감쌌다. 아! 다행이었다.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하긴 약에 취한 놈이 제대로 칼을 쓰기나 할 수 있겠어. 나는 주위를 힐끔힐끔 살피며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비린 냄새가 확 솟구쳤다. 정수리 부근을 시작으로 이마, 콧등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뚝뚝 떨어졌다.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손가락으로 콧등을 벅벅 문질러댔다. 겨울에 웬 모기……! 나는 죽은 모기를 비비적거리며 옷에 쓱 닦다가 손가락에 진득진득 묻어나는 물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기랄! 피, 피였다. 손가락, 손등 할 것 없이 뭉글뭉글한 검붉은 핏물이 피부와 옷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 아……!”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뽕 맞은 놈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얼빠진 얼굴에 박태열씨가 칵테일 바를 훌쩍 뛰어넘어 달려왔다. 그러나 내 눈엔 장 우현의 손에 들린 칼밖에 보이지 않았다. 칼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징그럽게 엉켜 붙어있는 핏물은 장 우현의 팔목까지 거미줄처럼 죽 이어져 있었다. 카펫바닥은 이미 붉은 빗물로 한강을 이루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발작을 일으켰다. 미친 듯이 벌렁벌렁 거렸다. 나는 차마 피의 근원지가 어딘지 확인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바보처럼 서있었다. 그것이 내 두 번째 실수였다. 나는 녀석의 손에 들린 칼을 무조건적으로 가로챘어야 했다. 그러나 놀라는 것 외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게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처음으로 복희씨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바보처럼 서있는 나와 자신이 무얼 하는지 자각도 못하고 칼을 휘두르는 장 우현 사이에 서있었다. 더 정확힌 내게 등을 보이고 녀석을 가로막고 있었다. 뚝-뚝뚝. 문득 물소리가 들렸다. 물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눈물이 박차 올랐다. 재빨리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눈을 크게 떴다. 복희씨의 바짓단을 붉게 적시고 가랑이 사이로 뭉텅이로 떨어져 내리는 주황빛 피를 보면서도 전혀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몰랐다. 나는 복희씨의 상태를 전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피만 아니었다면 칼날이 빗겨나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그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으며 자칫 태평하기까지 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나를 빠르게 훑었다. 멀쩡한 내 모습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거렸다.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그때 갑자기 복희씨의 옆구리를 지나쳐 내 아랫배를 향해 붉게 젖어있던 칼날이 빠르게 꽂혔다. “ 윽!” 아랫배를 뚫고 들어오려던 찰나, 이 복희씨는 내 무릎을 재빨리 걷어차 나를 소파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순간 목표를 잃은 녀석의 칼날은 아직 자세를 잡지 못하고 있던 복희씨의 발목을 파고들며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나는 멀쩡했다. 지나치게 쌩쌩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게 죽을 만큼 죄스러울 정도로 나는 괜찮았지만 이 복희씨는 아니었다. 그는 옆구리가 찢어질 대로 찢어져 벌어진 틈 사이로 폭포수처럼 새어 나오는 피를 힘겹게 막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긴 앞머리에 가려 다시 한 번 칼을 날리는 녀석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나 역시 숨을 힘겹게 내쉬는 복희씨에게 정신이 뺏긴 채였다. 약에 취해 비틀대면서도 녀석은 정확히 내 무릎을 향해 칼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복희씨는 무턱대고 다리를 뻗어 녀석의 칼날을 막았다. 피를 잔뜩 묻힌 괴기스러운 칼은 그의 발목에 푹 꽂혀 들어갔다. 조금 전 그 자리였다. 나는 차마 무너져 가는 그를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제발 꿈이었으면……. 이 모든 게 흘러가는 망상이었으면 바랐다. 퍼-퍽! 퍼-퍽!! 힘겹게 눈을 떴을 땐, 박태열씨가 환각상태에 빠져 허둥대는 장 우현의 뺨에 미친 듯이 주먹을 퍼 부어대고 있었다. 녀석은 그의 주먹에 못 이겨 종잇장처럼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나는 죄책감에 몸을 떨며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쩔 줄 몰라 나와 달리 평소 느긋하다 못해 태평하게만 보이던 박태열씨는 복희씨의 발목에 매달려 있는 칼날을 재빨리 빼내고 반바지 밑단을 찢어 그의 발목에 둘둘 감으며 소리쳤다. “ 정신 차려! 이 개새끼야! 제발, 제발 눈 좀 뜨란 말이다!” 복희씨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나는 불안함에 어깨를 떨었다. 박태열씨는 쿠션커버를 억지로 벗겨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복희씨 옆구리를 겨우 틀어막으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 야 이 새끼야! 눈 떠! 눈뜨라고! 빌어먹을!” 그때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복희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태열씨와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내려다봤다. “ 야.” 그의 목소리에 박태열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돌연 얼굴을 굳혔다. “ 좆같은 새끼, 지금 당장 엿 먹이고 싶은 거 참고 있는 거다. 사람 놀래 키는 게 취미냐? 취미야? 나 참,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서…….” 복희씨가 갑자기 손을 흔들었다. 그의 움직임이 많아지자 피가 울컥울컥 나왔다.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열심히 찾는 그를 박태열씨가 겨우 진정시켰다. “ 왜, 나 여기 있다.” 복희씨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속삭였다. “ 개새끼 너 말고.” “ 뭐?” “ 웃기게 생긴 애 있잖아. 걔, 걔 좀 불러봐.” 웃기게 생긴 애? 누구를 말하는 걸까. 박태열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데……. 그의 시선이 내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복희씨를 향해 턱짓을 했다. 웃기게 생긴 애를 찾는 거 같은데 왜 나를 부르는 것일까.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박태열씨가 복희씨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너 재수 없대. 그래서 우리 자기가 너한테 오기 싫단다.” “ 좆 까. 웃기게 생긴 주, 주제에 감히 튕겨?” 그러자 박태열씨가 또 나를 올려다보았다. “ 자기가 직접 와야겠는데?” 그때 갑자기 복희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구리에 피가 찔끔찔끔 샜다. 박태열씨는 억지로 그를 눕히며 으르렁거렸다. “ 이러지 않아도 성질 더러운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괜히 고집피우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너 옆구리 터졌다. 자꾸 움직이지 마라.” 박태열씨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복희씨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 씨발, 좀 불러보라니까!” 드디어 그가 제 성질에 못 이겨 버럭 소리를 질렀다. 쿠션이 더 붉어졌다. 박태열씨는 급기야 테이블보까지 빼서 복희씨의 옆구리를 칭칭 동여 묶었다. 그러나 복희씨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박태열씨를 밀쳐내고 나에게 오려고 어이없는 난동을 부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응고되지 못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복희씨의 안색은 지극히 창백해져갔다. 저러다 몸에 있는 피가 몽땅 뽑혀 나오는 건 아니겠지. 나는 결국 소파에서 내려와 복희씨 옆에 붙어 앉았다. 그는 발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무턱대고 내 발목을 끌어당겼다. 이끄는 대로 힘없이 죽 따라갔다. 손의 악력이 평소보다 눈에 띄게 약해져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코가 시큰거렸다. 그에게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손등을 쓱쓱 비벼 닦았다. 소파에 나뒹구는 쿠션 커버를 모조리 벗겨낸 박태열씨가 천을 내게 내밀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앉았다. 나는 커버를 두 번 접어 이 복희씨의 옆구리에 가져다댔다. 하얀 천이 금세 붉어졌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박태열씨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누가 이러면 고마워나 한데요?” 복희씨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낼 힘조차 없는지 팔을 들어 올리는 간단한 동작에도 무척이나 버거워했다. 나는 그 모습에 괜히 혼자 울컥해서 소리쳤다. “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당신을 평생 미워하면서 살아갈 명분이라도 생겼을 텐데 정말 아쉽네요. 왜, 왜 자꾸 나를 못살게 굴어요. 왜, 감정에 허우적대게 만드는 건데요.” 복희씨가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눈을 필사적으로 부릅떴다. “ 무, 무서워서 그랬어.” 말을 잇는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보는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 무서웠으면 피하면 되잖아요! 그랬으면 적어도 이렇게 다치진 않았잖아요!” 복희씨가 대놓고 나를 훑어보았다. 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 네가 다치면 그땐 진짜 끝이구나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웠어.” 머릿속에 먹먹해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복희씨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 씨발, 숨, 숨 쉬는 게 왜 이렇게 힘, 힘드냐.” “ 그러니까 말 하지 마세요. 자꾸 피가 나요. 엄청 많이요! 진짜 이러다 죽을 거 같단 말이에요!” 줄줄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턱밑에 멎었다가 그의 눈꺼풀 위에 떨어졌다. 나는 복희씨의 얼굴을 쓰다듬어 내 눈물을 닦아냈다. 그가 피식피식 웃었다. “ 여기서 보니까 네 콧구멍 좆 나게 웃긴다. 알고 있었냐?” “ 다 죽게 생겼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제발 입 닥치고 있어요. 박태열씨가 응급차 부르러 갔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힘내요. “ “ 진짠데. 진짜 웃긴데…….” 복희씨는 웃어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진 않은 모양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할수록 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갔다. 나는 조마조마하게 그를 살폈다. 그가 갑자기 손을 힘겹게 들어 올리더니 검지로 내 콧구멍을 푹 쑤셨다. 나는 깜짝 놀라 그가 환자라는 것도 있고 팔목을 주먹으로 때렸다. 복희씨의 팔목이 힘없이 떨어지는 걸 보고 아차 싶었다. 나는 괜히 화가 나서 버럭 소리쳤다. “ 그러게 가만히 있으라니까!” “ 있잖아, 네 콧구멍 말이야. 짝짝이다. 한 쪽은 길, 길고 다른 쪽은 동, 동, 동그랗다.” “ 제발요! 제발 입 좀 다물어요.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나는 지붕이 떠나가라 엉엉 울어댔다. 복희씨가 난감하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한참을 울다가 가슴을 두드리며 겨우 울음을 멈추었다. 복희씨가 주춤주춤 몸을 기울여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유난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 울지 마.” “ 씨발, 진짜 짜증나게 하고 지랄이야.” 우두두 떨어지는 내 욕에 복희씨가 소리 내어 웃었다. “ 그 박스 어디다 뒀는지 기, 기억하지?” 박스? 아무래도 시골에서 준 그 박스들을 말하는 거 같았다. 건물주 명의와 이상한 서류뭉치들과 섞여있는 통장 박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여는 복희씨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 박스 들고 작은 아버지 아니, 아저씨한테 가, 가서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돈, 돈으로 바꿔 달라고 해. 아마 그, 그렇게 해줄 거다. “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 그런 말하지 마요. 무섭단 말이에요.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는데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복희씨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 없는 고갯짓이었다. “ 차라리 넌 돈으로 가지고 있는 게 나아.” 힘겹게 틀어막고 있던 눈물이 복희씨의 가슴위에 미친 듯이 떨어졌다. 그는 반쯤 잠에 취해 있었다. 복희씨의 눈꺼풀이 감겼다, 떴다 한참동안 깜빡였다. 흰자위에 가린 검은 눈동자가 괴기스럽게 보였다. “ 병신처럼 또 친, 친구 새끼들이라고 있는 것들 뒤치다꺼리하는데 쓰면 진짜 죽, 죽는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끈적끈적한 눈물이 얼굴에 번져갔다. “ 안 써요! 안 써요! 안 쓸게요.” 복희씨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수렁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 나는 너에게 뭐였냐?” ……사랑이었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진지했어요. 내가 우물쭈물한 틈에 복희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너는 나에게 기회였다.” “ …….” “ 가슴 좀 열어봐.” 나는 고개를 들었다. “ 가슴? 아, 잠시 만요!” 나는 서둘러 복희씨가 입고 있는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손이 심하게 떨려 고작 단추 푸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힘들게 단추를 다 풀자, 복희씨가 ‘지갑’ 하고 속삭였다.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여 검은 가죽지갑을 꺼냈다. “ 지갑 꺼냈어요.” 복희씨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 지갑 열어봐. 사진 끼, 끼워 넣는데 보면…….”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이제 숨을 쉬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 네, 기다려요.” 서둘러 지갑을 열었다. 카드와 사진을 끼워 넣는 곳부터 살폈다. 반들반들한 표면에 딱 달라붙어 있는 명함쪼가리가 보였다. 손가락을 집어넣고 억지로 빼냈다. 구불구불해진 명함을 반듯하게 폈다. 천천히 읽어보았다. 단순한 명함이 아니었다. 그건 개인택시기사 등록증과 비슷한 것이었다. 복희씨의 이름 옆에 그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고 차번호가 적혀 있었으며 증서의 진본을 확인하는 도장이 박혀있었다. 취득날짜는 4월 말이었다. 내가 말없이 시골로 떠난 지 불과 이주일 뒤였다. “ 그게 내 미래였는데.” 그는 갑자기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눈은 천장을 향해 있었지만 안은 눈동자는 공허했다. “ 넌 나에게 완벽한 기회였어.” 복희씨가 찢어진 옆구리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 지긋지긋한 이 바닥을 손 씻을 기회,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기회, 떠난 새끼를 허망할 정도로 붙잡고 있는 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깨닫게 된 기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된 기회. “ 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 나, 나를 기억해. " 복희씨의 차갑게 식어가는 손바닥이 불쑥 내 볼을 더듬었다. “ 네가 나를 잊으면 내 인생은 그 뒤로부터 완전 좆 되는 거야.” " 그런 말 하지 마요!! " “ 참 이상하지.” “ 뭐가.” 나를 보는 복희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덜컥 겁이 났다.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피를 지독하게 많이 흘렸다는 흔적이 얼굴에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아픈 사람과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지금 당장 병원에 가도 시원찮을 판에 이렇게나 오랫동안 시간을 지체하다니 나도 어지간한 놈이었다. 나는 그에게 붙잡혀 있던 손을 풀어내고 박태열씨가 사라진 방으로 잽싸게 뛰었다. 그러나 복희씨가 온 힘을 다해 내 발목을 움켜쥐었다. “ 됐어, 귀찮아. 그냥 옆에 있어.” “ 구급차를 부를게요!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복희씨가 그만하라는 듯이 손을 고개를 저었다. “ 됐어, 됐어. 빌어먹을! 어디까지 씨불였더라. 너, 너 때문에 다 까먹었잖아.” " 그럼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요. “ “ 안 돼. 나중엔 시, 시간이 없어.” 복희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왜 저런 무서운 말을 하는 걸까. 나는 한마디 해줄까 하다 고개를 저었다. 복희씨가 감기는 눈꺼풀을 열심히 들어 올리는 모습에 가슴이 아련해졌다. “ 빈속에 이런 말하려니 창자가 꼴려 뒈져버리겠네.” 그는 질끈 눈을 감고 덧붙였다. “ 너는 못생겼는데…….” “ …….” “ 예뻐.” 힘겹게 말을 뱉어낸 복희씨는 배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낄낄댔다. 순간이지만 그 모습을 보고 그가 진짜 돌았나 생각했다. “ 아오, 젠장! 진짜 간지러워 죽겠네.” “ 간, 간지러워요? 어디가요? 등이요? 아니면 다리요? 손이 안 닿아요?” 복희씨가 희한한 표정을 짓다 말고 박장대소를 했다. 떨어지는 핏덩이에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나는 바닥에 뒹구는 커버로 그의 옆구리를 꾹꾹 누르며 울먹였다. “ 피가 나요, 자꾸 피가 나요!” 복희씨는 허리를 비틀어 내 손을 피하며 미친놈처럼 킥킥거렸다. “ 네가 그래서 좋아.” “ 네?” “ 멍청해서.” 나는 단지 복희씨를 조용히 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입을 열었다. “ 물수건 좀 가져올게요.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반쯤 일어서 있던 내 무릎을 복희씨가 피 묻은 손으로 어렵게 눌렀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를 내려다봤다. “ 됐어, 지금은 그냥 옆에 있으라니까. 씨발, 근데 아까 전부터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잠이 온다고? 드라마에서 보면 항상 주인공에 잠이 온다고 말한 뒤에 바로 화면이 바뀌고 강물에다 뼛가루 뿌리지 않던가. 심장이 덜컹했다. “ 자지 마요! 병원에 가서 그때 자요!! 아직은 안 돼! 일어나요! 눈 좀 떠봐요!” 나는 미친 듯이 그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그가 겨우 한쪽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 조,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그, 그때 놀아 줄게. 기, 기다리고 있어.” 나는 목뼈가 부러져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복희씨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 원래 낮잠 없잖아요!! 왜 갑자기 잔다고 그래요! 일어나요! 눈 떠요! 날 봐요, 제발!” 그때 복희씨가 필사적으로 뜨고 있던 한쪽 눈꺼풀마저 허망하게 쉽게 감겼다. 그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뱉어냈다. “ 울지 마. 나를 속상하게 하지 마.” “ 안 울게 하면 되잖아요!! 일어나서 또 이상한 장난치고 그러면 되잖아…….” 그때였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날 복희씨의 모습을 내가 과연 잊을 수나 있을까. 눈물에 젖은 얼굴을 겨우 들었을 때 복희씨의 힘없는 오른팔이 내 발밑으로 뚝 떨어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직감이란 것은 내 운명을 조금씩 갉아 먹을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몸, 핏기 없는 얼굴, 꼭 감겨있는 눈꺼풀, 굳게 다문 입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말라비틀어진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복희씨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오른쪽으로 푹 내려가 있었다. 시체처럼 차가운 몸을 넋을 잃고 주물럭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머릿속에 하얗게 질려갔다. 나는 어쩔 줄 몰라 괜히 복희씨의 입에 인공호흡을 했다. 시체처럼 늘어진 몸은 조금도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거칠게 뺨도 때렸다. 살을 매섭게 꼬집어 비틀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이 복희씨는 그런 나를 비웃듯 요지부동이었다. “ 제, 제발!” 믿을 수가 없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복희씨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 일어나요!!” 하지만 내가 간절해지면 질수록 복희씨의 눈꺼풀은 여전히 깊은 침묵에 잠겨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했다.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바람이 불었다. 그에 반해 강물은 잔잔했다. 나는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국화잎을 물 위에 띄웠다. 꽃잎은 물에 둥둥 떴다가 물결이 일렁이는 방향대로 흘려 내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러다 한 잎, 두 잎, 세 잎. 어느새 국화 한 송이 전부를 강 위에 띄워 보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권솔 새끼 말대로 너무 많이 울어서 눈알이 썩어버린 걸까.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눈알이 욱신욱신 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무릎위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팔뚝으로 쓱 밀어 닦고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꽃잎이 떨어져 볼품없이 변한 국화 줄기마저 강 위에 던져버리고 등을 돌렸다. 지금 일어서지 않으면 영원히 이곳에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 새끼, 청승은.” 꼭 생화를 사야한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부터 탐탁지 않아하던 권솔의 목소리였다. 나는 놈의 말을 언제나 그래왔듯이 가볍게 씹어주고 나무 밑에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오늘아침 박태열씨에게 전화를 했다. ‘이곳’에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는 죄책감 때문에 차마 얼굴을 내밀수가 없다고 내년엔 꼭 같이 가주겠다고 사정을 했다. 나는 예의상 한 번 더 권했지만 그는 끝내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내 부탁을 거절했다.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박태열씨가 느끼는 죄책감의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순 없었지만 그는 분명 힘들어 하고 있을 것이란 짐작만 갔다. 나 역시 그런데 어찌 그가 그런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천천히 걸어오는 내 모습을 본 새싹과 쌍칼이 하드 막대기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새싹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쫒는 게 느껴졌다. 녀석의 눈동자에 측은함이 엿보였다. 쌍칼이 나를 보며 입을 열다, 갑자기 다물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 계진씨, 울지 마십시오. 형님이 알면 슬퍼하실 겁니다.” 나는 대답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자 새싹이 쌍칼을 불끈 노려보더니 뾰족한 구두로 놈의 정강이 힘껏 걷어찼다. 쌍칼이 깜짝 놀라 다리를 움켜쥐고 깽깽거렸다. 이 사람들 또 시작이다. 몸싸움으로 번지려는 기미가 보이는 그들을 지나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느티나무 벤치 아래 오랜만에 보는 아저씨와 더 오랜만에 보는 이 복귀사장이 앉아 있었다. 그들 옆에 복신 군과 비룡이형이, 그 반대편 벤치에 이 경원과 김 지만이 쭈쭈 바를 먹으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흙 묻은 손바닥을 탈탈 털며 은근슬쩍 아저씨 옆 자리에 앉았다. 얼마 남지 않은 콜라를 후루룩 마시던 아저씨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끝났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네.” 사이다 캔을 따고 있던 이 복귀 사장이 남은 음료수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 피 섞인 나도 아무렇지 않은데 너는 참 청승이로구나.” “ 청승 아니에요. 사장님은 생일날 오셨지만 나는 오랜만에 보잖아요. 그래서 그래요.” “ 암울한 아이야, 너랑 나랑 같으냐.” “ 그래도요.” 아저씨가 복귀사장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복귀 사장이 입을 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둥이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아저씨는 못마땅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저씨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 벌써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냐. 너무 슬퍼하지 마라.” “ 여기 오면 그냥 슬퍼져요. 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 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 염병. 노인네가 알긴 뭘 알아요.” 등 뒤로 들려온 착 가라앉은 낮은 저음의 목소리에 아저씨와 나, 이 복귀사장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였다. 아이스크림 봉지를 덜렁덜렁 들고 울컥 짜증을 내던 그는 목발을 짚고 힘겹게 내 옆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거의 다 와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한 번 짜증을 냈다. “ 다음부터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한 새끼들 잇몸 박살 날 각오하고 말해라.” 나는 반쯤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 빨리 와요.” ▶ 새 완결 소설란 가기 ◀ 4, 1/1 비공개 [장편] 마왕, 발정하다 2부 불행이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모르는 곳에서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행복은 그 반대다. 행복은 베란다에 있는 작고 예쁜 곳이다. 또는 한 쌍의 카나리아다. 눈앞에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 -무라카미 류, 69중에서- 프롤로그. 운전을 하고 있는 이 복희씨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 복희씨는 저를 좋아하세요?” 그가 핸드폰 안테나로 귓구멍을 후비며 낄낄 웃었다. “ 아니었으면 네가 그 질문하던 중에 목젖 찢어졌어.” ……뭐, 뭐지. 좋아한다는 말인가. 분위기상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가슴이 꿈틀댔다. 나는 연령제한도 잊고 소녀처럼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예상외로 좋은 반응이 나오자, 그 동안 쌓아두고 있던 질문들이 와르르 튀어나왔다. “ 그럼 제가 어디가 제일 좋아요?” “ 지랄한다, 지랄해. 그러다 처 맞으면 어지간히 아플 텐데.” “ 한 번 말씀해보세요. 어디가 제일 좋은데요? 궁금해서 그래요, 제발요.” 이 복희씨는 킥킥 코웃음을 치다 목캔디를 꺼내 입에 물었다. “ 진짜 많이 컸다.” “ 자꾸 말 돌리지 말고요. 저기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요. 내 외모 때문에 좋아하는 거면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사람 외모에 혹한 감정은 그거 얼마 못 간대요. 통계적으로 나왔어요. 아무리 잘생긴 사람하고 예쁜 여자랑 결혼해서 유효기간은 2년 밖에……” 끽ㅡ. 말도 없이 브레이크를 밟아대는 통에 창밖으로 가슴이 튀어나갈 뻔 했다. 더군다나 나는 안전벨트도 안 매고 있는 상태였다. 어찌나 놀랬던지 엉덩이가 들썩일 때, 심장도 튕겨져 나가는 줄 알았다. 순간 가슴에 닿는 묵직한 느낌에 고개를 내렸다.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팔뚝이 내 가슴을 거의 신기에 가까운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 놀란 얼굴로 복희씨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나를 꿰뚫어질 정도로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 당장 안전벨트 매.” “ ……네? 아. 네.” 나는 그의 지시대로 안전벨트를 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단히 분노한 기색이었다. “ 가만 보면 넌 가끔 택시 탈 때도 안전벨트 안 매. 그렇지?” 그러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했다. 나지도 않는 사고를 대비해 꼬박꼬박 누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나. 답답한 건 딱 질색이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 또 말 돌린다. 지금 안전벨트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할 말 없으면 꼭 저러더라.” 복희씨의 눈빛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네가 참 그 짝 났다. 동물도 아니고 학습능력이 그렇게 없냐. 아니면 어지간히 큰 사고가 나야 정신을 차리겠냐. 안전벨트는 생명줄이야. 앞으로 차에 타면 무조건 매. 무조건! 알았냐.” 안전벨트 좀 안 맸다고 더럽게 지랄이다. 나는 콧방귀를 꼈다. “ 대답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괜히 안전벨트 타령하지 말고. 근데, 진짜 내 어디가 좋아…….” 그는 방정맞게 내 말을 딱 자르며 말했다. “ 계속 그런 식으로 염병 할 거면 괜히 방해하지 말고 찌그러져서 네 좆이나 빨아.” “ 입이 안 닿는데 내가 내 고추를 어떻게 빨아요!” “ ……그럼 내가 해줘?” 이 복희씨가 음흉하게 말했다. 상종할 가치조차 떨어지는 발언이었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꼴도 보기 싫었다. 일하는 사람을 끌고 나와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때부터 이상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재밌게 봐주자, 싶어서 따라갔더니 그는 중졸이라는 학력과 딱 어울리게 단순히 부시고, 박살내고, 피 튀는 액션영화를 택했고 나는 고등학교 졸업이란 높은 학력을 자랑하게도 학구적인 내 분위기와 고상한 인품을 고려해 뮤지컬 영화를 택했다. 사람이 이쯤 됐으면 상대를 위해 배려할 줄도 알법한데, 그는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당장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찾아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이미 표도 끊은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문자를 보냈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컴온.> 단 두 글자였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내가 보고 싶은 거 보고, 다음엔 그 쪽이 보고 싶은 거 보자. 대신 저녁도 내가 사고, 원하면 그 좋아하는 술도 사주겠다. 등등의 구구절절 장문의 문자를 연달아 세 개씩이나 보냈더니 무려 30분 후에 답문이 왔다. <내가 왜.> 나는 굴하지 않고 또 다시 구구절절 문자를 보냈다. 너무 구구절절해 뭐라고 보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눈물 없인 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있는 이 복희씨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고 자신했다. 그는 10분 후에 답문을 보냈다. <……누구세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그는 그 정떨어지는 문자를 끝으로 두 시간 가까이 핸드폰을 꺼놓고 있었다. 엿 먹이려고 작정한 놈처럼 말이다. 애초에 같이 볼 생각이 없었으면 뭐 하러 일하는 사람을 데리고 나왔냐고, 이 씨발놈아. 그러면서 저 새끼는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아, 하긴 했다. 그 사과라는 것도 완전 지 꼴리는 대로였다. 군고구마랍시고 어디서 찌글찌글한 걸 사와서는 내 주둥이에 처박으면서 이 복희씨는 이렇게 말했다. <화 풀렸으면 그거 코로 한 번 먹어봐.> 사람이 그걸 개그하고 자빠졌다. 그리고 그 사람은 현재 내 옆에 앉아 있었다. “ 사람이 제발 좀 진지해지면 안 돼요?” “ 안 된다.” “ ……왜요.” “ 내 마음이다.” “ 정말 알가다도 모르겠네, 진짜.” “ ……빨아줘?” 이 복희씨가 다시 음흉한 시선으로 내 아랫도리를 응시했다. 아, 정말 이 새끼는 어떤 상황이든 진지하게 임할 마음가짐이 안 됐구나. 방심한 사이 큼지막한 손이 바지로 날아와 지퍼를 쑥 내렸다. 나는 잽싸게 손등을 걷어냈다. 그리고 상종하기 싫다는 뜻을 담아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바지 뒷주머니에서 드르륵 진동음이 울렸다. 잘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이 왜 이럴 때 울리는지 모르겠군.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었다. 예상대로 광고 문자였다. 오빠 시간 있어 하는 질문으로 시작해 뜨거우니 제발 좀 어떻게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메시지였다. 폴더를 닫고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으려고 하는데 이 복희씨가 갑자기 내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별안간 차를 구석진 곳에 세우고 본격적인 문자메시지 탐방에 나섰다.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 복희씨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 요새 하루가 멀다 하고 문자가 빗발치더니 이거 딱 걸려서 어쩌나.” “ 문자가 빗발치긴 뭐가요. 와봤자 만날 저런 문자 밖에 없는데요, 뭘.” 그는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눈초리에 죄지은 것도 없이 뜨끔했다. “ 저런 문자?” “ 네, 봤잖아요. 그런 문자들이요. 어찌된 게 갈수록 노골적이게 변하는 거 같아요. 이쪽에서 오면, 또 저 쪽에서 오고. 좀 잠잠했다 싶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날 와요. 지겨워 죽겠어. 아예 못 오게 어디다 신청을 하던가 해야지.” 나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찌 된 게 내가 말을 하면할수록 이 복희씨의 얼굴에 살기가 서렸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지금까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의 기분이 언짢을 만 한 건 전혀 없었다. 나는 동상처럼 굳어있는 이 복희씨의 팔을 천천히 흔들었다. “ 저기요. 왜 그래요?” 그때 갑자기 이 복희씨가 팔을 번쩍 치켜들고 나를 때렸다. 질끈 눈을 감았다. 당장 내 귀싸대기를 베어버릴 것 같았던 그 무서운 손바닥은 어색하게 허공에 들려 있다가 애꿎은 핸들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대뜸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고통스러워 눈물이 차올랐다. “ 갑, 갑자기 왜 이래요!” “ 네 새끼가 감히 나를 기만해? 내가 문명에 조금 뒤떨어졌기로 소니 문자도 못 볼 줄 알았냐? 그래서 내 앞에서 딴 년이랑 문자 질을 했단 말이야?” 잠깐, 이거 또 뭔가가 이상한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당장 나를 씹어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우선 그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었다. “ 지금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내 번호는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안 되잖아요.” “ 그 중에 저 개 잡년도 끼어있겠지.” “ 나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지금 스팸문자가지고 이러는 거 되게 어이없지 않아요? 싸우려거든 제발 우리 상식적인 걸로 싸워요.” 나는 다시 폴더를 열어 문자메시지를 띄었다. 그리고 번호를 보이게끔 만들어 이 복희씨 눈앞에 내밀었다. “ 번호 좀 읽어보세요. 080으로 시작하죠? 그러니까 그거 스팸 광고 문자가 자꾸 오…….” “ 변명필요 없어. 입 닥쳐.” “ 변명이 아니잖아요, 지금!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나는 진짜 억울해요. 억울하다고…….” 살다 살다 광고문자로 의심받긴 또 처음이었다. 이 복희씨의 표정을 보건대 그는 정녕 내가 저 노골적인 성 묘사들과 지대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이걸 웃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어찌 됐건 오해 따위로 골치 아픈 건 사양이다. 억울함에 대해 피력하려던 찰나, 길쭉한 손가락이 입천장을 폭 찌르고 들어왔다. 이 복희씨의 기본 상식을 웃도는 치졸한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던 나는 핸드폰을 버리고 욱신거리는 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메시지 함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 새벽마다 문자가 울리더니 이유가 다 있었군." 그 동안 귀찮아 지우지 않던 광고 문자메시지까지 싹싹 긁어 읽은 이 복희씨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는 거의 힐난에 가까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 080, 060으로 시작하는 지역이 도대체 어디냐." 순간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물었다. " 그 번호 보면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 딱 떠오르는 거요." 복희씨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움푹 파인 미간의 주름이 심각하게 꿈틀댔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말했다. " 음, 080, 060이라." 평소와 달리 의외로 생각이라는 걸 하기에 나는 조금 기대했다. 그러나 ……. " 씨발, 뭔 놈의 번호가 이렇게 쉬워. 너 이번호 외웠지? 쉬워서 기억하고 있잖아, 솔직히 말해 봐! 아주 치밀한 년들이야. 쉬운 번호로 해서 일부러 외우게 만들다니. 이곳들이 작정하고 너한테 달라붙으려는 모양이야." 이 복희씨는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핸드폰과 나를 동시에 노려보았다. “ 오빠, 나 뜨거워? 염병하네, 미친년들. 뜨거우면 찬물에 샤워를 하면 될 거 아니야! 가만, 가만. 이렇게 뜨거워하는 거 보니까 대구 쪽에 사는 게 분명해. 그렇지?” 나는 이제 마땅히 변명할 거리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속으로만 어쩜 좋아, 어쩜 좋아를 외쳐댔다.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골몰하던 복희씨는 수첩을 꺼내들었다. 제가 탐정이라도 된 듯 사는 지역과 위치를 파악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모습이 필요이상 진지해 차마 말릴 생각도 못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는 당장 핸드폰을 뺏어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지금 뭐해요! 위치를 알면 뭐 어쩌게요. 찾아가게요? 스팸 문자 가지고 이러지 마세요. 이건 스팸이라고요, 스팸. 스팸! 알았어요? 스팸문자.” 복희씨는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물었다. “ ……스팸?” 이제 좀 말이 먹힐 모양이었다. 나는 들뜬 마음에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스팸이요. 스팸요!” 복희씨의 짝 찢어진 눈초리가 살짝 느슨해지더니 검은 동공이 혼란스럽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 ……햄?” “ 네?” 복희씨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오지도 않는 걸 억지로 만들어 하니 기침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인위적이었다. 그런데 왜 억지로 만들어 하는 걸까. 지금 이거 뭐지. 분명 당황한 것 같은데. 설마. 아니다. 오, 이런 맙소사. 그는 정말 당황하고 있었다. “ 스팸이 왜 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스팸과 햄. 어쩜 이리도 단순할 수가. 이 복희씨는 과연 운전면허증은 어떻게 땄을까 순수한 의문이 들 정도로 완벽한 기계치였다. 뭐든 만졌다하면 고장 나는 걸 물론 문자메시지도 끙끙대며 겨우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원체 핸드폰 따위엔 관심도 없고 기껏해야 밤에 깡패짓거리 할 때 전화를 받는 용도로 밖에 쓰질 않으니 번호가 노출될 염려가 없어 광고 문자가 거의 전멸수준해 있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이 복희씨의 살벌한 눈빛을 피해 눈을 감아버렸다. 어두컴컴한 시야엔 광활하고 험난한 가시밭길이 좌르륵 펼쳐지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건 기시감이었다. 앞으로의 일들이 단순히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그땐 몰랐다. 또 다른 사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마왕, 발정하다 2부- 1 어느새 아침잠이 쏟아지는 계절로 들어섰다. 가만히 집구석에 처박혀만 있어도 움푹움푹 빠져나가는 난방비와 정류장 마다 들어서 있는 붕어빵들만 봐도 햇빛의 쨍쨍 모래알은 반짝하던 게 귓불을 찢어져라 불어대는 바람으로 완연히 바뀐 날씨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 즘, 나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복희씨의 거지같은 성격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심층적인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저 지경까지 된 것은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이 경원의 의의제기에 의해서였다. 심히 공감하는 바였다. 저번 주에 장보러 나갔다가 서점에 들려 사온 범죄자 심리분석 완결 편, 인간탐구 완전정복, 인격형성과 성격장애 등을 밑줄을 그어가며 외우다가 그것도 모자라 연습장에 깜지를 써대며 걸신들린 놈처럼 공부를 해댔다. 외국의 사례들을 종합해 봤을 때, 복희씨는 다행히 생각했던 것만큼 심각한 병은 아니었다. 지속적인 정신과 치료와 의학적인 힘을 빌리면 그 형용할 수 없는 성격을 조금이나마 고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수로 병원까지 데려갈까. 단순히 부탁이라고 칭얼거리기엔 그의 성격은 지나치게 더러웠고, 나는 필요이상 소심했다. 물론, 나도 최소한의 노력은 해봤다. 그러나 엊그제 아침식사 시간에 지나가는 투로 정신병원 어쩌고 했다가 별안간 밥상이 마당에 내리꽂혔다. 굴하지 않고 병원에 가기 싫으면 약을 먹는 건 어떻겠냐고 했더니 이번엔 침대 기둥이 박살났다. 나는 밥통 채 들고 밖으로 나가 마당에서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단순히 가정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그의 동생들 역시 가만히 서있어도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썩다 못해 곪아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 복희씨만큼은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그의 성격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최근 순으로 나열을 해보자면 이랬다. 어느 날, 이 복희씨는 나에게 곰 인형을 선물했다. 두 팔로 안기조차 버거운 집채만 한 흑 곰이었다. 그가 곰을 끌고 집으로 온 건 내가 포장마차를 개업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장 일을 때려치우지 않으면 내 앙증맞은 가게를 불로 태워버리겠다는 지능적인 협박을 하던 사람에겐 매우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었다. 그는 곰을 앞세워 열심히 해서 떼돈을 벌라는 둥, 자신은 인내심이 많은 남자라는 등의 같잖은 충고를 일삼았다. 그리고 출근을 할 때면 항상 곰을 대동시키고 나가라고 신신당부를 곁들였다. 어느 미친놈이 일하는데 곰 인형을 끌고 다니겠는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날 밤, 그는 기름통을 들고 와 천막을 반 이상 태워버림으로서 자신의 협박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시켰고 돌 같은 무식한 근육덩어리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똘마니들을 시켜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듦으로 인해 자신의 명을 거역할 수 없음에 쐐기를 박았다. 그 후, 나는 어쩔 수 없이 흑 곰을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곰과의 동행이 깊어질수록 어찌 된 일인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시선은 매우 노골적이었고 예리했으며 매섭기까지 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시선에 내 경계심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누군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앙, 앙 물어버릴 것 같은 살얼음판 같은 정신상태가 지속되었다. 세상 모든 일에 먼저 의심부터 하고 보는 이 경원이 아니었으면 나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당장 병원에 입원했을 지도 모른다. 녀석은 밑도 끝도 없이 곰을 의심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과도로 눈알을 거침없이 도려내버렸다. 주먹만 한 눈알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살짝 벌어져 있던 오른쪽 눈에서 발견된 손톱만한 몰래카메라. 설마 했는데 정말 카메라였다. 순간 곰돌이를 내밀고 만족스럽게 웃던 섬뜩한 미소가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항상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명심해. 나 없을 때 술 취한 놈들하고 시시덕거리기만 해봐. 수틀리면 불알을 찢어버릴 거야. 평생 오줌 앉아서 싸고 싶으면 알아서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지켜본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 후로도 이 복희씨는 진심으로 상종하기 싫은 행동만 골라서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조금만 덜 좋아했더라면 지금쯤 쇠고랑을 차고 있어야했다. 불과 4일 전, 이 복희씨는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중년의 사내를 태우고 대전까지 장거리 운전을 하고 돌아왔다. 거리가 거리니 만큼 꽤 돈이 짭짤했는지 그는 평소보다 매우 기분이 업 되어있었다. 일 년 365일 중 그는 딱 5일정도 기분이 좋았는데 그날이 그 5일중에 하나였다. 이 복희씨는 그 좋은 기분을 마땅히 분출할 곳이 없자 장사를 하러 가야한다는 나를 질질 끌고 고기 집으로 향했다. 복희씨는 거만하게 꽃 등심 8인분을 시켰다. 육질에 핏기만 가셨다하면 주둥이에 넣어대는 통에 결국 나는 몇 점 먹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저 혼자 7인분을 다 처먹은 놈은 입가심으로 박하사탕을 씹어 먹으며 자기 덕에 포식한다는 둥, 남자를 잘 만나서 인생 폈다는 둥, 한껏 생색을 냈다. 그리고 새카맣게 탄 불판에 딱 한 점 남은 고깃덩어리를 가리키며 배터지게 먹으라고 하고선 스포츠 뉴스를 보러 사라졌다. 나를 위하는 척, 생각하는 척 하는 그의 잘난 척들은 맨 정신으로 봐주긴 참 거지같았지만 여기까진 그냥저냥 괜찮았다. 문제는 내가 식사로 나온 누룽지를 긁어 먹고 있을 때였다. 뉴스를 다 보고 온 이 복희씨는 지갑을 펼쳐들었다. 카드와 현금을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고기값으로 돈을 내기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담배를 피우며 한참동안 혀를 찼다.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식하러 온 단체손님들에게 다가가 그 중 가장 취해 보이는 젊은 사내를 붙잡고 ‘야, 박 태열 이 새끼야, 여기서 다 만나냐. 오랜만이다.’ 하며 숙달된 연기력을 선보였다. 저게 드디어 미쳤구나. 아침에 일어나서 목이마르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이빨로 병을 까고 생수대용으로 퍼 먹는 사람이었다. 그런 놈이 고작 소주 두병 반에 완벽한 개가 된 것이다. 그러나 눈이 초로초롱 한 것이 썩 취해보이진 않았다. 나는 불안하게 그를 응시했다. 젊은 사내는 물론 박태열씨가 아니었다. 청년은 반갑다 못해 눈물까지 흘릴 이 복희씨를 해롱해롱 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누구?’ 하고 운을 뗐다. 복희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너 초등학교 서울에서 나왔지?’ 했다. 대한민국의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다는 서울. 그의 떡밥은 넓고도 광대했으며 매우 안정적이었다. 실패 확률이 반 밖에 되지 않았다. 상대는 눈을 깜빡이며 ‘서일초등학교?’ 하고 물었다. 그제야 복희씨는 연신 하품을 하며 억지로 만들어놓은 가공된 눈물의 효과를 조금씩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맞아, 서일초등학교. 나야, 나. 모르겠냐.’ 했다. 상대는 추억과 감정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자세를 바르게 하곤 복희씨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15분이 넘는 시간동안 두 명의 담임선생님을 씹었고 대머리 교장을 욕보였으며 처녀 선생 하나를 성적으로 희롱한 것도 모자라 학생주임을 날로 까먹으면서 우정을 다졌다. 복희씨는 사내의 명함을 들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그때까지 난 그가 왜 저런 미친 짓거리를 하는지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그냥 심심했나 보구나, 하고 무심히 넘겼는데 사탕을 두 주머니 가득 쑤셔 넣으며 카운터 누님에게 하는 그의 당당한 발언에 나는 비로소 그의 미친 짓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계산은 저 오른쪽 테이블에서 맨 위에 앉아있는 사람이 할 거요. 내 친구거든.’ 순간 카운터 누님의 눈이 가늘어졌다. 복희씨는 보란 듯이 사내를 불러 손을 흔들었다. 청년은 눈물, 콧물 흘리며 복희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저 지갑 뜯어먹는 건 모르고 청년의 눈동자는 향수로 젖어 있었다. 술은 사고를 흐리고 사람을 타락시키는 요물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잠시나마 복희씨를 의심한 카운터 누님의 황송한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사기를 치고도 그의 얼굴은 자신감과 오만함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실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 복희씨의 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어딘가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핫도그를 물고 지나가는 꼬마 아이들이 보였다. 복희씨는 나와 꼬마 애들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지갑에서 과감하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들었다.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저는 쪽팔리니 못 사오고 나를 시키려는 개수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핫도그를 두 개 사와 그의 양손에 쥐어주었다. 까다로운 취향을 생각해 하나는 케첩을 뿌렸고 하나는 설탕을 발라왔다. 그제야 복희씨의 얼굴에 포만감이 서렸다. 가장 최근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제 새벽이었다. 그는 절대 타인으로 인해 성격이 바뀐다거나 다정해진다거나 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한결같은 성격에도 미세하게 변한 점이 있었는데 그 변화를 확신하게 된 계기가 바로 어제였다. 이 복희씨는 광적으로 내 친구들을 싫어했다. 마땅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싫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특히 그는 권솔만 보면 경기를 일으켰다. 아주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권솔 역시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복희씨를 저주했으니 그다지 할 말은 없다만, 유치함과 치졸함에선 향후 오백 년간 이 복희씨를 따라올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제 아침식사 때 나는 평소 권솔이 좋아하는 홍합미역국에 꽁치조림을 하고 옵션으로 간 고등어를 구운 뒤, 꼬막무침으로 식단을 마무리했다. 족제비 같은 이 경원은 의외로 반찬을 가리는 편이 아니니 크게 신경 쓸 건 없었고 김 지만은 냉장고에 있는 건 모든지 입에 넣고서야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초특급 꿀돼지였다. 녀석들이 맹렬한 기세로 접시를 비워갈 때쯤, 샤워를 하고 나타난 이 복희씨는 밥상을 보고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반찬이 마음에 안 드는구나. 이젠 표정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파악이 됐다. 그의 급변한 얼굴에 녀석들은 들고 있는 숟가락을 동시에 내려놓고 방구석에 일렬로 앉아선 서로 이 복희씨 옆에 있기 싫어 몸싸움까지 벌렸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때 김 지만이 속도 모르고 트림을 꺽 뿜어댔다. 이 경원이 당장 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복희씨는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고 가만히 서서 밥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복희씨는 비린 냄새 때문에 생선을 광적으로 싫어했다. 조개도 모래가 씹힌다는 이유로 꺼려하는 인간이었다. 대신 육 고기에 집착을 했다. 그런데 지금 밥상은 고기는커녕 순 생선에 조개류 밖에 없었다. 15년 가까이 권솔이 좋아하는 반찬으로 밥상을 차렸기 때문에 그게 나도 모르는 순간 어느새 버릇이 돼 있었다. 복희씨가 싫어하는 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권솔에게 길들여져 있는 내 버릇. 권솔과 나에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뭔가가 있었다. 물론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 가족 혹은 그 이상으로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는 상태에서 오는 어쩔 수 없음이다. 그러나 복희씨는 그걸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다음날 앞으로 한 달 치 식단을 프린트해서 벽마다 덕지덕지 붙여놓고서야 화가 풀렸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사건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쓸데없는 말다툼으로 불타올랐고 가슴을 후벼 파는 상처로 매듭지어졌다. 어제 역시 평범한 일상의 연장선 중 하나였다. 새벽이 오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솔은 복신이가 기숙사에 들어간 뒤로 방에서 혼자 지냈는데 이 복희씨가 새벽운전을 할 때면 나는 대부분 녀석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기름 값도 아끼고, 혼자 자는 것도 외롭고 겸사 겸사였다. 그런데 아침에 눈만 떴다하면 보이는 게 내 방 천장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이 복희씨는 분노한 얼굴로 다가와 ‘내가 옮겼다.’ 덜렁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다 그간 쌓아두고 있던 꿍한 속내를 와르르 털어놓기 시작했다. 요점은 즉, 이랬다. ‘ 안 죽일 테니까 너 한 번 솔직하게 지껄여봐.’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물을 때는 아주 유치하거나 심각하게 얼토당토않은 말들이 전부였다. 복희씨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 뜬금없이 부엌으로 달려 나갔다. 곧이어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들리더니 그는 어이없게도 식칼과 도마를 들고 왔다. 눈으로 ‘그건 왜’ 하고 묻자마자 복희씨는 덥석 내 손을 낚아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 마디 위에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가 작심하고 칼을 떨어뜨린다면 내 손은 당장 고기 덩어리처럼 서걱서걱 썰릴 판이었다. 나는 극도의 공포에 질려 꽥꽥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걱정 마. 어줍지 않은 구라로 날 속일 생각만 없으면 네 손가락들은 무사할거야. 허나 반대로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씨불인다 싶으면 당장 손가락을 잘라서 네 콧구멍을 후벼놓을 거야. 알았어? 몰랐어?’ 겁에 질려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내 모습에 복희씨는 낄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칼날을 쑥 내려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시늉을 했다. 가슴이 덜컥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중얼거렸다. ‘ 미, 미쳤어, 정말 미쳤다.’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던 복희씨는 몇 번 칼날을 올렸다, 내렸다하면서 무서워 벌벌 떠는 내 반응을 여유롭게 즐긴 후에야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뭐, 네 손가락을 잘라버리면 나야 좋지. 그 궁상맞은 포장마차 한다고 설치지도 않을 것이고, 빨빨 거리면서 싸돌아다니지도 못할 테니까. 안 그래?’ 복희씨는 다시 한 번 나를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나는 이번에도 무조건 고개만 끄덕였다. 상황이 참 지긋지긋하게 굴욕적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싫든, 좋든 복희씨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가 정신이 나가면 도그가 된다는 것은 지나가는 진짜 개도 알 테니 말이다. ‘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어.’ ‘ ……용, 용서할 수 없는 건 없는 거고, 우선 칼, 칼부터 치워요! 제발 좀!’ ‘ 아픈 건 또 싫은가봐?’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빨리 치우라고요!’ 그는 손을 휙휙 저으며 일부러 나오지도 않는 하품을 억지로 만들었다. 저 행동은 지겹다, 또는 졸리다 하는 뜻으로 5초 내로 입 다물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닥쳤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 그래서 말인데…….’ 끔뻑끔뻑 거리던 눈꺼풀이 쑥 들렸다. 복희씨가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 네 친구들을 하나씩 숙청해나가야겠어. 특히 권솔 그 새끼부터.’ ‘ 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복희씨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묻는 건 일관적으로 씹으면서 저 할 말만 하겠다는 이기주의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 너 나랑 권솔이랑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거냐.’ ‘ ……나 참, 기가 막혀라.’ 그 맥 빠지는 질문을 들으면서 동시에 반짝하고 떠오른 게 있었다. ‘너 솔직히 말해서 그 새끼가 먼저야, 내가 먼저냐.’ 어제 비디오를 보면서 권솔이 했던 질문과 거의 비슷했다. 역시 유치한 놈들끼리는 일맥상통한 구석이 참으로 많구나. 기가 막히다 못해 유치해서 딱히 대답할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허공에 살짝 들려있던 번쩍번쩍한 식칼이 손뼈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벌컥 소리를 질렀다. ‘ 당연히 이 복희씨죠!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 대답할 가치도 없군요!’ ‘ 오, 그러셔요?’ 어쩐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다급해졌다. 뒤에서 호랑이가 달려오는 것 같은 공포에 짓눌려 나도 모르게 막말이 술술 기어 나왔다. ‘ ……그, 그럼요. 권솔이 물귀신이 되든 말든 내 알바 아니죠!’ 백 프로 천연구라였다. 복희씨를 구하겠다는 말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권솔이 수영선수 뺨치게 수영을 잘했기 때문이지 별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복희씨는 칼날을 치우지 않은 채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날카로워진 눈을 보니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내 간절한 눈빛에 그는 어느 정도 마음이 넘어온 듯 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서 칼날을 조금씩 들어올렸다. 오늘 만큼은 이 복희씨가 단순해서 눈물 나게 고마웠다. ‘ 암, 그래야지. 좋아, 그럼 말이야.’ ‘ ……또 뭐, 뭐가요. 끝난 거 아니었어요?’ 복희씨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또 유치한 질문을 생각해낸 것이 분명했다. ‘ 그럼 권솔이랑 놀지마. 그리고 내일 당장 이사가.’ 저 놈의 이사타령. 순간 또 생각났다. ‘그 새끼랑 내일부터 그만 만나.’ 발로 리모컨을 두르며 어제 권솔은 그렇게 말했었지.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혹시 다음 말도 똑같을까. 이제 은근히 기대까지 됐다. 그러자 오징어를 씹으며 중얼거렸던 권솔의 대사들이 좌르륵 떠올랐다. ‘나 그 새끼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야.’ 연이어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는 새끼들 있잖아, 나한테 그 새끼가 그래. 그러니까 빨리 한 명만 선택해.’ 나는 얌전히 복희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복희씨는 나를 매섭게 쏘아보며 식칼을 벽으로 휙 집어던졌다. 이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인생을 살다보면 쳐다보는 것만으로 구역질나는 새끼들이 간혹 하나씩 있는데 나한테 그 놈이 딱 그런 새끼야. 그 놈만 보면 머리가죽부터 발톱까지 씹어 먹고 싶은 나를 봐서라도 너는 당장 이사를 가야 돼.’ ‘ 권솔,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아요. 조금 싸가지가 없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내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복희씨는 이제 대놓고 악담을 퍼부었다. ‘ 너는 어쩜 애가 생긴 것만큼 양심이 없냐. 내가 한 발 양보했으면 너도 보답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성질 같았으면 팔을 뜯어다 노를 저어 버릴까보다, 그냥!’ ‘ ……복희씨가 양보한 게 뭔데요?’ ‘ 이 썩은 집에서 같이 살아주는 거. 너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거지같은 집구석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처음엔 출처를 알 수 없는 복희씨의 분노를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그의 폭언을 듣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군다나 식칼도 치워졌으니 무서울 것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의지와 다르게 나는 복희씨의 주먹이 호주머니에 얌전히 꽂혀 있는 걸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 끝에야 아주 조금 성질을 부렸다. ‘ 장 우현한테도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했어요? 팔을 뜯어다 노를 젓는다고?’ ‘ ……뭐?’ 급속도로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아차 싶었다. 요즘 내가 가장 잘하는 말 중에 하나는 장 우현한테도, 장 우현은, 장 우현에게는 이었다. 장 우현은 복희씨를 효과적으로 건드리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자 방패 막이었다. 나는 놈이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머리부터 발 꽁지까지 이용해먹을 작정이었다. 그래, 나도 안다. 나는 약아 빠졌다. 하지만 작정하고 약아빠진 내가 상대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이 복희씨는 뼈 속까지 극도로 약은 새끼였다. ‘ 나는 아니라고 봐요. 장 우현한테는 칼 들고 와서 손가락 자르겠다고 설치지도, 팔을 뽑아버리겠다는 말도 절대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요.’ ‘ 그만.’ 나는 황소처럼 자극적으로 콧방귀를 뀜과 동시에 성질을 죽이려 애쓰는 그를 대놓고 우롱해나갔다. 좆나 쌤통이었다. ‘ 그만하긴 뭘 그만해.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을 바로 하라고 했어.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나보네? 아이고, 이걸 어쩌나.’ ‘ ……반말?’ 겉으론 쫀 티를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할수록 자꾸만 손끝이 떨려왔다. 의지로 고칠 수 없는 본능이었다. 두 달이란 시간은 내 소심함을 커버하기엔 지나치게 짧았고 상대는 이 복희씨였다. 거짓말 좀 보태서 오만 번 말싸움을 했다면 내가 이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난이라도 이 복희씨가 누군가에게 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조차 없었지만 그 상대가 나라고 해서 예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나를 지그시 노려봤다. 반말 한 번했다고 당장 칼로 배때기를 쑤실 것 같은 이 복희씨의 눈빛에 바짝 쫄아 나는 분위기도 모르고 까불었다. ‘ 반말 아니고, 얼룩말.’ ‘ …….’ 화를 풀어줄 심산이었는데 오히려 불을 붙이는 꼴이 돼 버렸다. 복희씨에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지글지글 장판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담배를 집어 이 복희씨의 입에 친절히 물어주었다. 그가 내 손을 신경질 적으로 후려쳤다. 손등이 욱신거렸다. ‘ 너 뭔가 대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그 새끼는 감히 나한테 말대꾸 자체를 안 했어.’ ‘ 그래서요? ‘ 그래서긴 뭘 그래서야. 네가 누구랑 비교당하고 싶어 안달난 거 같아 보여서 그 기대에 보답해준 건데 왜 눈을 치켜뜨고 지랄이야.’ ‘ 지랄? 지금 나한테 욕했어요? 욕 했냐고요!’ ‘ 그래 했다, 욕. 어쩔래.’ 내가 흥분할수록 이 복희씨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또 걸려들었구나. 어느새 그는 나를 일부러 화나게 만들고 그 반응 살피는 걸 대단히 고상한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저 고약한 표정 좀 보라지. 그러나 더 웃긴 건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 덫에 항상 걸리고 자빠지고 발악하는 나였다. 나는 당장 이 복희씨의 멱살을 쥐었다. 앞뒤로 짤짤 흔들었다. 생각처럼 잘 흔들어지진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이 복희씨가 갑자기 내 발목을 움켜쥐고 마당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러더니 빨랫줄 대용으로 쓰고 있는 전깃줄을 쑥 잘라 내 목에 칭칭 동여 묶었다. 비오는 거리를 헤치며 나를 끌고 가던 그는 전봇대 밑에 서야 걸음을 멈춰 섰다. 이 복희씨는 주머니에 챙겨온 노끈을 이용해 내 몸을 전봇대에 몸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무서워 벌벌 떠는 나를 보고 피식피식 웃었다. 좀 전까지 화창하기 만하던 하늘에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커먼 속내가 보였다. 이건 일제치하 시절 쪽 바리 새끼들이 하던 고문방식 중 하나였다. 그 유명한 전기고문이었다. 그는 우산을 쓰고선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며 내 몸에 전기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무려 한 시간동안이나 뚫어져라 관찰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눈앞에 파팍 불꽃이 튀었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다. 그는 빗물과 오줌에 절은 바지를 보고서야 낄낄대며 나에게 신체적 자유의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마왕, 발정하다 2부 -2 “ 도대체가 평범하게 살 수가 없어!” 평범함을 모르는 남자 이 경원이 외쳤다. 놈은 당근 껍질을 까다말고 반숙 계란에 밥을 비벼 먹고 있던 중이었다. 등에 딱 달라붙은 뱃가죽을 움켜쥐고 있는 소중한 친구를 무관심과 냉대로 일관하며 그 흔한 먹어보란 소리 없이 제 주둥이에 밥알이 미어터지게 쑤셔 넣고 있던 놈이 갑자기 숟가락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오늘 시장에서 사온 물건들을 가계부에 꼼꼼히 적어 내려가고 있던 나는 그제야 놈을 바라보았다. 양파 두 망태기, 대파가 두 박스, 계란이 네 판, 미나리가 반 박스, 다진 마늘이 두통. 혼자서 들고 오느라 좆 빠지는 줄 알았다. 초저녁부터 나 홀로 요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발광할 때 주둥이에 침 묻혀가며 퍼질러 자던 새끼가 지금 내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럴 땐 무시가 최고다. 영수증을 공책 앞장에 호치케이스로 콱 찍으며 싱크대에 밥그릇을 내던지는 이 경원에게 퉁을 놓았다. “ ……또 뭐가.” 입술 위에 붙은 밥풀을 천박하게 떼먹던 이 경원이 예상대로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 집에 너랑 그 이름 촌스러운 놈이랑 둘이 사냐. 새벽에 잠은 자야 될 거 아니야!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단 말이다!” “ 시끄러웠다고? 어제 씻고 그냥 바로 잤는데. 이상한 일이네.” 놈은 팔짱을 끼고 인생을 다 산 노인네처럼 나를 가르치려는 눈빛을 해보였다. 옴팡지게 재수 없었다. “ 잠귀 어두운 너야 바로 잤겠지. 그 이름 촌스러운 놈이 티브이 볼륨을 어찌나 짱짱하게 해놨던지 어제 드라마랑 영화는 싹 다 보고 잤다. 1절 밖에 안 나오는 애국가를 저 혼자 4절까지 처 따라 부르고 있더만, 그 미친놈.” “ 복희씨가 애국가를 불렀어? 진짜 이상하네. 나는 하나도 못 들었는데?” “ 너는 한번 자빠지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잖아! 이름 촌스러운 놈이 공중파 세 개를 돌려가면서 애국가를 불러대느라 새벽에 진짜 피똥 싸는 줄 알았다. 하여간 어지간히 체력도 좋으셔. 낮엔 택시 운전에 밤엔 깡패짓거리에,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음반도 내겠다고 설치겠어. 내가 당장 집을 나가던가 해야 그 꼴을 안 보지, 이름 촌스러운 놈 목소리를 만날 자장가로 들어야 되겠냐.” 이 복희씨, 이 복희씨, 이 복희씨. 글쎄, 별로 촌스럽지도 않고만 사람 없다고 씹고 지랄이야.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 자꾸 이름 촌스럽다고 하지 마. 말복이, 춘삼이, 덕배, 이런 것보단 훨씬 도시적이잖아.” 짧은 시간 내에 이 경원의 얼굴에서 혐오, 구역질, 역겨움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 염병. 까고 있네.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구만 두 번만 귀여웠다간 아주 맨손으로 작두 타겠다.” “ 앞에선 아무 말도 못하면서 뒤에서 씹으면 기분 좋냐?” “ 얘가 참 뭘 모르네. 사람은 자고로 뒤에서 씹어야 제 맛이지.” “ 알았어. 자꾸 그래봐. 나도 지만이 씹어야지. 그 자식은 일주일에 쌀 한가마니는 저 혼자 다 처먹을 걸? 그저께는 입가심으로 식빵 한 봉지를 거덜 내더니 어제는 목마르다고 우유 1,000ml를 두 통이나 원 샷 하더라. 가만 보면 그건 하루 종일 먹고, 싸는 것 밖에 안 한다니까. 돼지 새끼, 꿀꿀 꿀.” 이 경원이 엄지로 콧구멍을 후비며 도전적인 눈빛을 해보였다. 손끝에 달라붙은 코딱지를 보란 듯이 내 쪽으로 튕기더니 놈은 쯧쯧 혀를 찼다. 우악스럽게 손가락을 쑤셔 넣던 콧구멍 주위가 붉어졌다. “ 지금 돼지 욕 했냐? 좋아, 앞으로 삼겹살만 처 먹어봐. 주둥이를 갈고리로 확 찢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놈이 콧방귀를 뿡뿡 꼈다. 아무리 주둥이 터지게 말해봤자 이 경원은 듣는 척도 안 할 테지. 그렇담 이건 어떠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말을 말자, 말을 마. 아무튼 앞으로 또 이 복희씨 욕하면 다 일러줄 거야. 난 분명히 경고했다.” “ 오,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데? 좋아, 일러라, 일러. 일럼보야!” 속도 없이 낄낄대는 놈이 진심으로 딱해보였다. 테이블에 놓아둔 핸드폰을 툭툭 두들겼다. “ 일 끝나고 이쪽으로 온다고 했어. 진짜 일러줘?” 놈이 숨을 훅 들어 마셨다. 숨기려 할수록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재빨리 호주머니에 숨기고 ‘추워서 그래!’ 라는 어줍지 않은 변명으로 바닥에 떨어진 도도한 이미지를 재빨리 주워 삼키려 했지만 파랗게 질린 입술까지 숨기진 못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피식피식 비웃었다. 이 경원은 최후의 항변이랍시고 사시나무처럼 떨며 말했다. “ 그, 그래. 일, 일, 일러.” “ 굳이 일러바칠 생각은 없었는데 네가 정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오는 대로 말할게. 이름 촌스럽다고 한 거랑, 미친놈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욕한 거까지 그대로 말해줄게. 이 복희씨가 뭐라고 할지 참 기대된다, 경원아. 너도 그렇지?” 이 경원은 자신이 쫄았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가공된 헛기침을 선보였지만 절대 내 눈은 못 속였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내가 이 복희씨 욕하는 건 괜찮은데 녀석들 입에서 욕이 나오면 그게 은근히 듣기가 싫은 거다. 김 지만 말에 의하면 이게 그 유명한 내 남편 노터치 증후군이란다. 내 남편 노터치 증후군이란 친정엄마, 친구, 여동생 앞에서 닥치는 대로 남편 흉을 보고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씹어댄 다음에 누군가 한 명이 ‘맞아, 맞아. 네 남편 그런 점이 참 엿 같더라.’ 하고 동조의 기미가 보일라치면 싸움닭으로 돌변해 ‘야 이 잡것들아! 내 남편이 뭐가 어때서!’ 하며 머리채를 짤짤 흔들어대는 것인데 암만 생각해봐도 내가 그 병에 걸린 듯싶다. 오늘 오후 권솔과 싸운 것도 그 병 때문이었다. 권솔은 언제나처럼 이 복희씨 씹어대기로 하루를 시작했고 순간 욱한 나는 마시고 있던 커피를 놈의 바지에 뿌려버렸다. 배신감과 놀라움에 물든 놈의 얼굴. 아주 가관이었다. 놈은 고리타분한 우정 론을 펼치다 제풀에 나가떨어져 영업시간이 되도록 머리카락 하나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럴 때도 동업계약서 3조에 의거해 수입을 사등분해야 한다는 것이 못 견디게 서글퍼졌다. 그 서글픔의 원흉 중에 하나가 거짓눈물을 내보일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 지금 너 나한테 협박하는 거냐? 아이고, 아이고. 사랑에 눈이 먼 김 계진 무서워서 말도 함부로 못하겠네. 흑흑, 서러워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저 년이 아주 부뚜막을 씹어 먹네, 씹어 먹어.” “ 꼴값 떨지 마. 보기 흉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경원이 왼쪽 눈알에서 억지 눈물을 찔끔 짜냈다. 싱크대에 얼쩡거릴 때 수돗물을 눈썹에 몰래 몇 방울 묻히더니 그걸 이런 용도로 쓰려고 했구나. 찌질한 것이 정말이지 이 경원다운 행동이었다. “ 얘 좀 봐, 어쩜 이럴 수가! 너 변했어. 예전에 넌 친구가 우는데 꼴값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그래, 권솔 말이 맞았어. 그 새끼가 아무리 네가 변했다, 달라졌다, 해도 난 우리 개집이 그럴 리 없어, 개집일 욕하려면 차라리 나를 욕해, 하고 너를 변호했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꼴값 떨지 말라고 할 수가 있냐. 세상에서 제일 심한 욕이 꼴값이야, 몰라?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 염병하지 말고 제발 일 좀 해. 찜통에 있는 무 버리고 도마 위에 있는 다시마랑 멸치 넣어라. 그리고 나선 주꾸미 좀 꼬치에 끼워. 먹기만 잘하지 도대체가 할 줄 아는 게 없다니까.” 놈이 기겁을 하고 천박한 오버를 선보였다. “ 뭐? 염병이라니. 너 정말 무서운 애구나.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어쩜 그렇게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일 수가 있냐.” 가만히 놔두면 아주 똥을 바지게 쌀 놈이다. 은근슬쩍 내게 죄를 뒤집어씌워 죄책감을 느낀 내가 이 복희씨에게 이른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개지랄이었다. 사람은 변하는데 어쩜 수법이 고 1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자고로 사기를 치든, 유머를 때리든 시대를 앞서가야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법인데 놈은 선조시대 때 써먹던 수법으로 나를 우롱하려하는 것이었다. 눈물 나게 한심했다. “ ……귀찮아, 제발 정도껏 설쳐.” 이것저것 잘 먹히지 않자 경원이 새끼는 테이블에 엎드려 엉엉 우는 시늉을 했다. 어색해도 보통 어색한 게 아니었다.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닦으며 아까운 휴지만 동내 던 놈이 벌떡 일어나 이유도 없이 왔다갔다 거렸다. 험악한 분위 조성을 위한 쓸데없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놈을 내버려두고 원금 착수를 향해 신들린 계산에 나섰다. 시발, 오지게 적자였다. 한두 달은 돈 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아저씨가 그렇게 말해도 마음이 영 찝찝한 것이 이제 불안하기까지 했다. 이러다 쫄딱 망하고 이 복희씨가 준 통장만 야금야금 파먹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 복희씨의 잔소리도 적잖게 두려웠다. 설레발치는 걱정이 아니었다. 술 먹고 해롱대다 경운기 바퀴에 깔려 발가락이 부러진 어머니를 만나러 김 지만이 시골로 내려간 뒤 포장마차는 아주 개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경원과 권솔은 과연 돈을 벌려고 나왔는지 단체로 손가락질을 받고 싶어 환장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오묘한 행동을 일삼았다. 바뀐 날씨 때문인지 녀석은 단체로 대가리에 히로뽕 맞은 뽕쟁이들처럼 굴었다. 자릿세 운운하며 하루걸러 나타나는 동네 양아치 무리들의 엉덩이와 볼기짝을 신나게 두들길 때를 제외하곤 놈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거치적거린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짐짝만한 개똥은 포스트잇 종이에 ‘일주일정도 휴가 냄’ 하나만 덜렁 써놓고 멋대로 시골로 꺼져버리고 얍삽한 개똥은 되먹지도 않은 우정 운운하다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제발 사라지길 바라는 개똥은 갈 때도 없는지 죽자 사자 내 옆에 붙어 안주나 축내고 자빠져 있었다. 가계부를 탁하고 접었다. 지난 두 달은 찬찬히 돌이켜보았다. 눈물 없이 견딜 수 없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애초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안했다만 손님끼리 시비가 붙으면 응당 주인으로서 말리고 나서야 할 판에 놈들 쪽에서 먼저 태클을 걸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주인이 하루걸러 손님하고 쌈질을 하니 근방에 손님 때려잡는 포장마차로 명성이 쫙 깔렸다. 부리나케 달려오는 경찰차를 보고 무섭게 불어나기 시작한 소문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전과자들이 모여 장사를 한다느니, 흉악범들이 들끓는다느니, 살인이 일어났다느니 해서 안 그래도 없던 손님이 뚝뚝 끊어지다가 결국은 왕파리들만이 상주하는 폐허로 전락했다. 일주일 내내 숟가락만 빨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직접 손님 찾아 터를 옮긴 게 세 번째였다. “ 걱정 마, 안 이를게. 그니까 제발 오버 좀 그만 떨고 일이나 해.” 정리된 가계부를 싱크대 밑 보물단지에 쑤셔 박으며 중얼거렸다. 이 경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발딱 일어나 물수건으로 거짓눈물의 흔적들을 지웠다. 금세 의기양양해진 녀석은 디저트로 라면 두 개를 끓여 면발을 김에 싸먹는 극악무도한 짓을 벌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시장에서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깨끗한 빈 박스에 일회용 그릇을 넣다가 멈칫했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담배 끝을 뾰족하게 세워 이를 쑤시던 이 경원까지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오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다. 오백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건 절교 운운했던 권솔이었다. 놈의 코트에 눈송이가 몽글몽글 붙어 있었다. (저것도 내가 카드로 긁어 사준 거다, 아직 할부도 다 안 끝났다. 내년에 끝난다.) 뉴스에서 말끝마다 눈이 온다고 떠들어대더니 정말 오긴 온 모양이었다. 앞치마 두르고 당장 상추나 씻으라고 한마디 하려다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서 단단히 뒤틀린 심사가 그대로 보였다. 말이라도 한마디 걸라치면 닥치는 대로 때려눕힐 기세였다. 술 취한 김 지만이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저 새끼가 얼마나 무뚝뚝한 줄 아냐. 저게 은근히 너한테 내숭떤다니까.’ 아닌 게 아니라 지금 표정만 보면 그 동안 멍청했던 얼굴들이 숙달된 연기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저게 갑자기 돌았나. 권솔은 나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로 일변하고 이 경원에게 몇 마디 쑥덕거리더니 테이블에 쟁여놓은 생선박스를 옮기기 시작했다. 별 생각 없었는데 천대 받는 거 같아 은근히 열 받는다. 나는 씩씩대며 놈에게 다가갔다. 권솔은 불량청소년처럼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생선 비닐을 벗기고 있었다. 나는 나무 도마를 운동화 앞으로 쿡쿡 찼다. 놈이 폭발하기 일보직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라, 열 받으셔? 그래, 열 받아라. “ 솔직히 말해봐. 너 나한테 삐졌지?” 권솔은 아무 말 없이 생선 아랫배에 식칼을 쑤셔 넣었다. 꼬불꼬불한 창자를 단번에 뜯어내 발밑에 집어던지더니 칼날을 도마에 팍 내리 찍었다. 칼의 끝머리가 도마에 단단히 틀어 박혔다. “ ……전혀.” 그래, 삐지긴 삐졌단 말이구나. 나는 빈 박스를 거꾸로 세워 놈 앞에 앉았다. 등 뒤에서 이 경원이 천박한 목소리로 저들은 둘이라고 자기만 쏙 빼놓고 비밀얘기를 한다, 지만이가 없으니 자신을 천대한다는 등의 개소리를 으르렁대다 정작 김 지만이 전화가 오자, 놈에게 권솔과 내가 자기만 부려먹는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신나게 씹어댔다. 쟤도 가만 보면 진짜 상종 못할 놈이다. 핸드폰을 붙들고 구석지에 처박힌 이 경원을 확인하고 뚱해있는 권솔에게 말했다. “ 그럼 전화는 왜 안 받는데? 문자는 또 왜 씹어.” 권솔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직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흠흠 거리며 다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잔소리를 이어가려던 찰나, 놈이 밑도 끝도 없이 대뜸 중얼거렸다. “ 이사가.” “ ……뭐?” “ 이사 가라고. 허구한 날 그 새끼가 이사, 이사 노래를 부르잖아. 사람 살리는 셈치고 그냥 가.” “ 그거야 그렇지만. 근데 왜 갑자기 이사를 가라는 건데? 너도 애국가 때문에 그래? 이 복희씨가 새벽에 노래 불러서 시끄러웠다던데, 경원이가.” 권솔은 도마에 박힌 칼날을 쑥 잡아 빼 꽁치 대가리를 서걱서걱 잘라냈다. 놈이 물고 있는 담배꽁초에서 다 타들어간 재들이 손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솔은 신경질적으로 담뱃재를 털어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까지 시건방짐이 철철 흘러넘쳤다. 하긴 평소 권솔은 숨 쉬는 모습까지 싸가지 없어 보였다. “ 몰라. 나는 자느라 못 들었어.” 고개를 돌려 이 경원을 바라보았다. 놈은 머리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정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향후 3년간은 대화를 자제해야 될 것 같았다. 얌전히 생선다듬기로 복귀해 있는 권솔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후려쳤다. 놈이 인상을 썼다. 쟤는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인상을 썼다. “ 이사 가라는 소리를 하는 거 보니까 정말 삐지긴 삐졌나보네. 꽁생원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말을 해.” 권솔이 들고 있던 식칼을 멀찌감치 집어던졌다. 휭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간 칼이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딱 멈춰 섰다. “ 네가 이사를 가야 내가 그 새끼를 안 볼 수 있잖아. 안 그래?” “ 그렇게 싫어?” 녀석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가렵지도 않은 콧등을 긁적거렸다. “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 그럴 거야.” “ 너도 참 어지간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 아니 나는 그냥. 저기,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이 안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잖아. 이 복희씨도 그럴 거라고. 네가 이렇게 대놓고 싫어하면 내가 뭐가 돼? 그 사람 보기도 민망하고 너한테도 그렇고.” “ 터진 입이라도 말을 바로 하라고 했다고 나 때문이 아니라 그 새끼가 조금이라도 기분나쁠까봐 그런 거 아니냐.” 나는 쉽게 인정했다. “ 그래, 맞아. 이 복희씨가 기분 나쁜 거 싫어. 그게 너 때문이라면 더 그래. 지만이는 안 그러는데 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하다못해 이 경원이도 앞에선 안 그래. 이 복희씨가 눈치가 없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넌 벌써 뒷산에 파묻혔을 거야. 아침만 해도 그래. 너 부엌에서 이 복희씨가 마실 물에 침 뱉었잖아. 아니야? 사람이 왜 그렇게 유치해? 나이 값 좀 하면 안 돼?” 권솔은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소리쳤다.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 김 지만하고 나를 비교해? 사람을 한 순간 수치스럽게 만드는 법을 아주 제대로 아는군.” “ 뭐야! 우리 지만이 뭐가 어때서! 없다고 뒤에서 사람 씹는 거 아니다.” 김 지만의 이름이 나오자 이 경원이 발끈하고 나섰다. 좀 전에 내가 저한테 했던 말을 고대로 뱉어내던 놈이 아차 싶었는지 급격하게 입을 다물었다. 권솔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입 닥치라는 뜻이었다. 이 경원은 구시렁구시렁 거리다 얌전히 물러났다. 현재 김 지만은 이곳에 없었다. 고로 둘이 붙으면 제가 피 박 쓰고 얻어터질 걸 직감하고는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인심 쓰는 척 가장해 실속을 챙기려는 심산이었다. 나는 놈의 얌체 짓을 가만히 묵인해주었다. “ 너랑 싸우기 싫다, 그만해.” “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네가 유치한 짓만 안하면 나도 이러진 않아.” 앞치마에 손을 닦던 녀석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거운 정적을 뚫고 권솔이 나를 사정없이 노려보았다. “ ……유치? 너 지금 나한테 유치하다고 그랬냐?” “ 왜, 맞는 말이잖아. 밥에 몰래 담뱃재 섞고 물에 침 뱉고, 국에 모래 섞고. 그거 요즘 초등학생도 안 해.” 놈이 칼날을 씹어 먹은 것처럼 차갑게 말했다. “ 미워서 그래. 지긋지긋하게 싫으니까 그랬다, 왜.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어 죽겠는데 그럼 간도 쓸개도 없는 놈처럼 백날, 천 날 꼬리나 흔들고 엎드려 있어야 되냐.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이 경원의 목소리가 일순 잦아들었다. 탁- 폴더 닫히는 소리가 들고 대신 질질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구경꾼이 되어 권솔과 내 중간에 위치를 잡았다. 흥미로운 눈동자였다. 누구한텐 재밌어 죽겠는 상황이 또 다른 누구에겐 까맣게 속이 타들어갔다. 권솔은 할 말 있으면 해봐, 하는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다그쳤다. 나는 지독한 한숨을 내쉬었다. “ 너 정말 꼬였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래도 앞에선 좀 적당히 해야 되는 거 아냐?” “ 안 돼.” “ 왜.” “ 싫은데 어떻게 좋은 척을 하냐. 내가 싸이코냐.” 작정하고 쏘아대는 권솔에게 나도 점점 화가 났다.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솔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조끼에서 오징어 쥐포를 꺼내 라이터로 구워먹던 이 경원이 킥킥 비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엄청난 발언을 했구나. 권솔의 얼굴만 보자면 대단한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함을 탈피하기 위해 목구멍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네가 노력 좀 하면 안 돼? 네가 그 사람을 싫어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일순 침묵했다. 이 경원만이 라이터를 까딱까딱 거리며 여전히 쥐포를 태우고 있었다. 탄 냄새가 콧구멍으로 솔솔 들어왔다. 슬금슬금 권솔의 표정을 살폈다. 녀석은 잡아먹을 것처럼 나를 노려보다 도마를 발로 냅다 걷어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보니 이틀 내내 깽판을 부릴 것 같았다. 놈은 앞치마를 신경질적으로 벗어서 싱크대에 집어던지고 코트를 걸쳤다. 뭐, 뭐야. 김 지만이 없어서 일손도 부족한데 이대로 토끼려는 건가. 가슴이 철렁했다. 괜히 놈을 흥분시킨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권솔은 문 앞으로 걸어갔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움직여 말릴 틈도 없었다. 놈은 갑자기 의자를 들어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서릿발이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 김 계진이 사랑이 정말 대단하네. 계속 그렇게 밥 맛 떨어지게 굴어봐.” “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놈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 찍었다. 저 놈이 아주 미쳤구나. 기물파손으로 당장 신고해버릴까 하다 말았다. 권솔은 썩은 가재미눈을 해선 나를 정신 사납게 야렸다. “ 너 많이 변했어. 예전에 사랑스러운 나의 김 계진이 아니야. 너는 악랄하고 지독한 김 계진으로 변해버렸어!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 이 멍청아, 너 자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놈이 킹콩처럼 가슴팍을 두들겨댔다. “ 그 새끼가 나타나기 전까진 넌 내거였다고! 알아? 하지만 이제 나는 뒷전이야. 내가 왜 너한테 김 지만이나 이 경원이랑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하지? 착각하지 마. 너는 만인의 연인이 아니야. 너는 나만의 연인이었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 너에게 난 안중에도 없겠지. 그래, 알아. 알고 있어!” “ 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제발 오버 좀 하지…….” 놈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내 말을 막았다. “ 너 어제 냄비에 밥 했지? 예전에 너였으면 냄비에 밥 할 때마다 누룽지 남은 걸 기름에 튀겨서 간식으로 만들어 줬었어. 네가 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왔지. 아주 꿈같은 날들이었어. 하지만 어제 넌 어땠지? 그 새끼가 입맛이 없다고 하니까 내 누룽지를 팔팔 끓여 그 놈에게 갖다 바쳤어. 나는 충격을 받아 꼼짝도 할 수 없었어. 너에게 애인이 생겼으니 내가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밀려나듯 이제 누룽지까지 그 새끼 차지가 돼 버린 거야.” 유치하다, 유치해. 어쩜 저렇게 유치할까. 쥐포를 씹던 이 경원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나도 그런데 놈은 오죽하겠는가. 만 번, 천 번 이해한다. 나는 씁쓰레 입맛을 다셨다. 권솔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듣기 싫지만 토 나오게 진지한 표정을 봐서 가만히 들어줬다. “ 누룽지만이 아니야. 점점 바뀌어가는 반찬도 너와 함께 하는 시간도, 심지어는 너의 단축번호 0자리까지 그 놈에게 다 뺏겼어!” 권솔은 시무룩해져선 고개를 푹 숙였다. “ 그 놈이 내게서 너를 완전히 뺏어갔어.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너는 평소처럼 누룽지를 바삭바삭하게 튀겨 나한테 주면서 이렇게 말했겠지. 솔아, 출출하면 먹어. 하지만 이제 너한테서 그런 모습은 기대할 수 없을 거야. 모든 게 엉망이야. 이보다 최악일 순 없어! 이 모든 게 그 새끼 때문이야!” 어쩜 애가 저러냐. 누룽지 한 번 안 튀겨줬다고 더럽게 염병한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누룽지 운운하던 놈은 제 말만 지껄이다 휭 하니 나가버렸다. 두 살만 더 먹으면 나도, 저 놈도 서른이었다. 고작 먹을 거 가지고 삐지기엔 우리 나이가 만만치 않았다. 하긴 세살이나 더 먹은 이 복희씨를 보면 삐지는 데는 연령제한이 없는 게 확실했다. 그때 가만히 보고만 있던 이 경원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얘도 나이 값 못하는 걸로 좀 전에 지랄하던 놈과 더불어 굉장히 유명했다. “ 저거 진짜 미친년 아니냐. 유치해서 못 살겠네, 진짜.” 이 경원은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 아니지. 저거 일부러 토끼려고 작정하고 지랄한 거 아니야?” 나는 휑하게 비어버린 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글쎄, 그래도 울긴 울었는데.” 조작된 눈물이든 어쩌든 우는 걸 보니 마음이 썩 편치만은 않았다. 저대로 집에 가진 않을 것이다. 멍청이, 감기도 잘 걸리는 주제에. 근데 내가 뭐가 달라졌다는 걸까. 단축번호는 이 복희씨가 핸드폰 사줄 때 멋대로 저장해 놓은 거고 누룽지는 이 복희씨가 밥 맛 없다고 해서 한 번 끓인 건데. 어찌 되었건 다 이 복희씨 때문이니 할 말은 없다만 쟤도 가만 보면 더럽게 쪼잔 하단 말이야. 나는 복잡해진 머리를 툴툴 털어냈다. 권솔은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했다. 이렇게 멋대로 가게를 나왔다, 들어갔다 해놓고 수입의 사등분 운운하면 당장 목구멍을 잘라놓을 심산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없던 손님이 오늘따라 유독 쏟아졌다. 다행히 이 경원은 평소와 다르게 끝까지 남아 가게를 지켰다. 그리고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빠 그 좋아하는 만만한 손님에게 시비 거는 몰상식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면 물론 좋았겠지만 일을 크게 벌이진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새벽 두 시경 사거리에 있는 트랜스 젠더 바(Bar)에서 젠더 누님 셋과 매니저로 추정되는 건장한 사내가 술을 마시러 왔다. 젠더 누님들은 남자치곤 징그럽게 예쁜 경원이 자기들과 같은 부류로 착각해 이년, 저년 붙이며 주문을 했고 얼굴과 다르게 성격이 지나치게 남자다운 이 경원은 대뜸 쌍년으로 시작해 개잡년으로 끝나는 무식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사람이라면 응당 그 노골적인 욕설에 부끄러워하거나 당장 멱살을 잡고도 남았을 텐데 젠더 누님들은 일제히 기쁨의 눈물을 터뜨렸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누님 하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표정만 보면 꼭 성난 야수 같았다. 그녀의 환호성에 길가 던 사람들이 싸움이 난줄 알고 구경 왔다가 실망해서 돌아갔다. 매니저는 그들을, 아니 그녀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성공했다, 이제야 빛을 본다, 등의 위로를 지껄여댔다. 한참을 꺼이꺼이 울어대던 젠더 누님들은 겨우 눈물을 삼키고 멍해 있는 경원이 놈에게 이번에도 동시에 고맙다는 말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있는 좆 떼고 없는 가슴을 붙여 놨다만 험상궂은 얼굴 때문인지 언제나 이놈, 저놈 소리만 듣다가 그토록 원하던 이년, 저년 소리를 들으니 자기들이 진짜 여자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이 경원의 천박한 욕지거리에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그녀들은 나와 녀석에게 술을 대접했다. 급기야 자진해서 골든 벨까지 울렸다. 통 크기가 늠름한 사내대장부들이 따로 없었다. 이 경원은 소주, 맥주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떡을 쳤다. 술장사를 하려면 모름지기 주인이 초 뺑이여야 한다. 그래야 손님이 권하는 술을 옆에서 아작 냈다가 몰래 몇 병 꽁생원 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 먹고, 싸고 해줘야 계산기를 팍팍 올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녀석들은 최고의 마담들이었다. 그 중 둘이나 없는 게 내심 아쉬웠지만 이 경원이 정열적으로 퍼먹은 결과 넷이서 마신 술값이 이십 만원이 조금 넘게 나왔다. 그 중 절반을 이 경원 혼자 처먹었다. 녀석은 베스트 중에 베스트였다. 최고의 장사꾼이란 말이다. 이 복희씨가 포장마차 문을 연건 저 좋을 대로 실컷 오버만 하고 떠난 권솔이 사라지고 나서도 5시간 30분 후였다. 그는 거의 마감시간에 맞춰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푹 젖은 게 아무래도 집에서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 정도 손님이 빠지자 이 복희씨에게 다가가다 순간 훅 숨을 들이마셨다. ……왜, 자꾸 내 추리닝을 입을까. 잠옷, 잠옷 노래를 부르기에 아디다스 추리닝 한 벌과 운동화를 큰 마음먹고 사줬더니 맞지도 않은 내 추리닝을 입고 나왔다. 아까워서 안 입는 건 절대 아닐 테고, 아무리 자기 얼굴에 과도한 자신감을 표출하는 이 복희씨라도 복사뼈와 팔뚝을 훤히 드러내는 추리닝은 영 아니었다. 아동복을 입은 황소 꼴이었다. 가끔 저렇게 내 옷을 입을 때 나는 이 복희씨가 김 지만을 버금가는 거구라는 것을 실감했다. 킥킥 비웃는 경원이 새끼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나는 ‘뭐 먹을래요?’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이 복희씨가 터질 것 같은 추리닝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더미를 꺼냈다. 복권이었다. 그는 오백 원짜리 동전으로 성심성의껏 복권을 긁어댔다. 뭔가에 집중하는 이 복희씨는 또 처음이었다. 안타깝게도 다 꽝이었다. 마지막 한 장을 남겨놓고 그는 중얼중얼 기도를 외우더니 천천히 동전을 굴렸다. 이런, 마지막 번호 하나를 남겨두고 숫자가 완벽하게 일치했다. 짧은 시간에 이 복희씨의 얼굴에 환희와 기쁨, 포만감이 떠올랐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마지막 숫자를 개봉했다. ……역시나 꽝이었다. 내가 저래서 복권을 안사는 거다. 실컷 들뜨게 만들었다가 뒤통수치는 건 사람이나 복권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실망한 이 복희씨의 눈빛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그는 죄 없는 복권을 쫙쫙 찢어 라이터 불로 지져버렸다. 차근차근 돈을 벌어 저금해서 불리면 될 것을 저렇게 한탕 잡으려다 말짱 꽝 된다. 저 현실적인 이 복희씨가 요 근래 복권을 사는 건 내게 통장과 땅 문서를 모두 넘기고 나서부터였다. 저 딴에는 노후대책이라도 세우는 모양이지, 뭐. 나는 시무룩해져있는 이 복희씨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 ……왔어요?” “ 왔으니까 여기 앉아있지.” “ 아, 맞다. 그건 그러네요.” “ 쯧쯧, 멍청한 놈. 어째 오늘은 돈 좀 많이 벌었냐.” “ 뭐, 그냥 적당히요. 복희씨는 어땠어요? 손님 많았어요?” 복희씨가 갑자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 손님은 지랄. 완전 똥 밟았다. 어떤 개잡놈이 술 처먹고 시트에다 국물 한 방울 까지 깔끔하게 다 쏟아내고 토끼는 바람에 그 망할 종자 잡으러 다니느라 얼마 못 벌었다. 손님이나 차나 아주 개떡 같은 날이었어.” 돈을 못 벌었다는 말보다 순간 술 처먹고 시트에다 토악질을 해댄 어떤 개잡놈의 안위가 걱정됐다. 코트에 묻은 빗물을 툭툭 털어내는 폼이 그런대로 평온할 걸 보면 제가 원하는 걸 분명 이루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 그 술 처먹고 토한 놈은 과연 되었을까. “ 그래서 잡았어요?” “ ……누구?” “ 토하고 도망간 사람이요.” 이 복희씨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물론. 근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지? 내가 하는 일인데 당연한 거 아냐?” 잘난 척 대 마왕이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나를 비웃었다. “ 그래서요?” "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잡아다 이참에 아주 저 세상으로 보내버렸지. 지옥에서 실컷 먹고, 싸고 지랄하다 위궤양으로 까무러칠 거다, 그놈. “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 내가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왜 그 새끼 이야기를 하면서 1분 9초를 허비해야 되는지 모르겠군. “ 이즘 되면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말로 할 때 내 쪽에서 알아서 입 닥쳤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목캔디를 꺼내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성질이 급해서 사탕 하나를 입에 녹을때까지 못 가지고 있는 사람답게 조각난 사탕을 바닥에 퉤퉤 뱉어버렸다. 껌도 단물만 씹고 버리는 사람이 어련하실까. 이 복희씨는 불현듯 내 앙증맞은 직장을 혐오감 가득한 시선으로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진짜 궁상은 궁상이다. 벽에 똥칠 할 때까지 놀고먹게 해줬는데도 사서 고생을 하고 자빠졌으니 이건 멍청한 건지, 병신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 일 없이 놀고만 먹으면 치매 걸린대요. 요즘 청년치매 무서운 거 몰라요?” “ 김 궁상, 걱정 마. 너는 죽을 때까지 내가 알아서 일을 시킬 테니까 치매 걸릴 걱정은 없어. 치매 예방 차원에서 이 거지 움막에서 이러고 있는 거면 당장 때려 치지 그러셔요?” 이게 어디서 뺨 맞고 누구한테 성질이야. 저러게 심보가 고약하니 복권이 너를 빗겨가는 거다. 물론 소리 내서 말하진 않았다. 아직 생명보험을 들지 않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때려주고 싶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이 복희씨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팔을 질질 잡아끌었다. 나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팔뚝을 밀어내며 다리에 힘을 주고 딱 버티고 섰다. “ 왜, 왜요.” “ 일 다 끝났으면 나가서 거하게 땀이나 빼자고. 허리가 찌뿌듯해.” 거하게 땀을 뺀다고? 그게 무슨 뜻일까. 설, 설마. 얼굴에 뜨거운 김이 확 끼얹어지는 기분이었다. 내 반응을 느긋하게 살피던 이 복희씨가 음흉하게 웃었다.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것이 꼭 성난 산적 같았다. “ 왜 갑자기 얼굴은 빨게 지고 그러실까 몰라.” “ 네? 그, 그냥 조금 더워서요. 참 더, 덥네요.” 나는 손부채로 얼굴에 바람을 불었다. 복희씨가 팔짱을 끼고 킬킬댔다. “ 우리 김 궁상은 연기하시는 것도 어쩜 이렇게 깜찍하신지 몰라. 아주 씹어 먹고 싶을 정도야.” 그는 얼굴을 굳히며 덧붙였다. “ 오버하지 마. 사우나 가자는 말이었어.” “ 아아…….” 나는 마지막 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중년사내 혼자서 3시간 넘게 술을 푸고 있었다. 이 세상 고민은 저 혼자 짊어진 표정이 참으로 우중충한 몰골이었다. “ 저 손님 가면요.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고 계세요.” 복희씨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 시간 아깝게 기다리긴 뭘 기다려. 왜, 내가 저 새끼 쫒아줘?” 핸드폰으로 실컷 게임만 하고 있던 이 경원이 도둑고양이처럼 듣고서는 ‘네, 네!’ 소리를 질렀다. 없을 땐 미친놈 어쩌고 하더니 정작 앞에선 존댓말이 알아서 술술 기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이 복희씨는 꽥꽥대는 이 경원을 무시로 일관하고 내 코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불빛에 비춰보고는 기겁을 했다. 손가락에 내 콧기름이 흥건했다. 사람이 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거 가지고 놀래고 그러실까. 이 복희씨는 오물단지를 바라보듯 찜찜한 시선으로 나를 야리다 어깨를 툭툭 밀어냈다. “ 조금만 더 모으면 콧기름으로 고구마도 튀기겠다. 어휴, 더러워. 날 잡아 세수하는 법부터 제대로 가르치던가 해야지.” 피가 확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제 딴에는 농담인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워 돌아버리겠다. 나는 얼굴을 감싸며 웅얼거렸다. “ 일하다 보면 뭐 그럴 수도 있지. 씨,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사람 민망하게.” “ 됐어, 됐어. 어이 기름공장, 가서 소주나 한 병 들고 와.” 이 복희씨는 냉장고 문을 열고 물수건을 꺼내 꼼꼼히 손가락을 닦았다. 저는 기름 없나, 흥. 반박거리를 찾아 꼼꼼히 이 복희씨의 얼굴을 살폈다. 기름은커녕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있다는 땀구멍도 없었다. 역시 피부와 공부는 당장 표시가 안 나도 절대 노력을 배반하지 않는단 말이 만고의 진리였다. 허구한 날 화장대 앞에서 뭘 처바르더니 이제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얼굴이 탱글탱글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 그 쪽은 피부가 참 좋아 보이네요. 마사지라도 했나요.” 나는 이 복희씨의 거무스름한 피부를 검지로 콕콕 찔렀다. 그는 겉으론 싫은 척 하면서도 내가 좀 더 편하게 제 피부를 만질 수 있게 은근히 볼을 쭉 내밀었다. 하여간 자랑하는 건 징그럽게 좋아한다니까. “ 계란 마사지했다. 왜, 부럽냐.”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있던 이 복희씨가 거만하게 말했다. 지단 붙이려고 사놓은 달걀들이 하나, 둘 없어 진다했더니 범인은 바로 저 놈이었군.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더니 그 말이 참이로다. 내일부턴 썩은 달걀로 바꿔놓아야겠다. 그때 갑자기 꼬르륵하는 천박한 소리가 울렸다. 좀 전까지 미어터지게 뱃속을 빵빵하게 채워놓은 내 배는 아닐 터였다. 슬금슬금 이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주위를 살폈다. 표정을 보니 정말 제 배에서 나는 소린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 저녁 안 먹었어요? 배고파요?” 복희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전혀.” 그때 다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또 이 복희씨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하여간 자존심을 높아가지고 배고프단 소린 죽어도 못하시지. 잘났다, 잘났어. “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쟁반에 소주 한 병과 사이다, 꼼 장어와 양념장에 버무린 닭발을 가져다 이 복희씨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 경원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먹고, 자고, 싸고. 정말 귀여워 죽겠다. 나는 싱크대 선반 위에 개어놓은 담요를 꺼내 놈의 어깨에 덮어주고 이 복희씨 앞에 앉아 소주 잔 가득 술을 따랐다. 안주를 담아오는 그 짧은 사이에 복희씨는 평소에 즐겨하는 칼날을 이용한 손톱정리에 심취해 있었다. “ 드세요. 집에 가서 라면 끓이라고 하지 말고 지금 많이 드시고 가세요.” 복희씨는 무릎에 떨어진 손톱을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 네가 이렇게 궁상을 떨면서 돈을 버는데 공짜로 먹을 수야 없지. 주머니에 지갑 있어. 카드 가져가.” 지금까지 어지간히 공짜로 처먹어 놓고 꼭 저런다. 제가 먼저 성의를 보이니 사양하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법. 나는 손을 쭉 뻗어 이 복희씨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을 안 가지고 다니는 그답게 지갑은 홀쭉했다. 얼마 있나 보려다가 그만뒀다. 어떤 걸 꺼낼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카드라곤 덜렁 하나 있었다. 짤막하게 깎여나간 손톱을 후후 불며 이 복희씨가 중얼거렸다. “ ……3개월 무이자로 끊어라.” 염병한다는 말이 순간 톡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이만 원도 안 되는 걸 3개월 무이자는 무슨.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는 이 경원에게 일시불로 긁으라는 명을 하려던 찰나, 물렁물렁한 촉감에 고개를 내렸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그러다 다시 이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피식피식 웃기 바빴다. 정신없이 나뒹구는 손톱을 쓱 밀어내고 테이블에 아예 얼굴을 파묻고 파안대소하는 복희씨를 보며 나는 왈칵 인상을 구겼다. 어쩐지 술값을 낸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 공중전화 카드를 3개월 무이자로 끊으라고?”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갔다. “ 그게 공중전화 카드였어? 아아, 나는 몰랐지.” 얼씨구, 이제 연기까지 한다. 그는 천박하게 낄낄거리다 겨우 입 꼬리를 늘어뜨려 힘겹게 웃음을 참으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좋을 때는 참 고분고분 대답하더라. “ 못 끊겠냐? 그럼 말고.” “ 진짜 어이없어 말이 안 나오네.” “ 말 만 잘하는구만, 뭘.” 여전히 픽픽 비웃음이 새는 것이 신나게 뒤통수를 후려갈기기에 제격인 얼굴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중전화 카드를 이 복희씨 지갑에 도로 끼워 넣었다. 메추리알이나 까서 주둥이에 쑤셔 넣으려는데 이 복희씨가 뻐끔뻐끔 피우던 긴 장초를 내 쪽으로 성의 없이 퉁겼다. 그는 뚜벅뚜벅 선반 앞으로 걸어갔다. 맥주 컵을 꺼내들었다. 뭐하나 가만히 지켜보았다. 복희씨는 냉장고 문을 열고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맥주 한 병을 꺼내들었다. 앞치마에서 병따개를 꺼내 앞으로 내밀자 이 복희씨가 답답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그는 빈 박스에 처박힌 빈 병 주둥이를 이용해 마개를 퐁퐁 따냈다. 뭐냐, 서커스도 아니고. 저것도 기술이라 치면 기술이다. 의기양양해진 그는 컵 가득 맥주를 흘러넘치게 따라 붓고는 잔 안에 소주잔을 퐁당 담갔다. 출렁거리는 컵을 위, 아래 사정없이 흔들더니 생수 들이키듯 꿀꺽꿀꺽 원 샷으로 비워낸 이 복희씨가 갑자기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또 왜 저러나 싶어 가까이 갔다. 그가 내 귓불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몸이 기우뚱거리는 사이 그는 내 코에 대고 꺼억 트림을 했다. 맥주 냄새가 콧구멍에 확 솟구쳤다. 나는 복희씨의 가슴을 팔목으로 밀쳐내고 코를 움켜쥐었다. “ ……윽, 더럽게!” 복희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 더럽다고? 어째서? 역시 넌 말로만 나를 좋아한다 했었던 거로군.” “ 참 나,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요? 그럼 내가 그 쪽 얼굴에 대고 꺽꺽 거리면 댁은 퍽이나 좋아하겠네요?” “ 물론, 나야 좋지.” 저 남자는 이제 더러운 걸로 우기기 시작했다. 머릿골이 띵했다. 말싸움하기도 귀찮았다.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피하려는데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이 복희씨가 내 팔을 죽 잡아당겨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는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돌아왔다. 라이터로 병뚜껑을 따내는 솜씨가 가히 신의 경지였다. 그는 빈 잡에 콜라를 가득 따라 내게 내밀었다. “ 그거 먹고 내 얼굴에 꺽꺽 해봐. 내가 얼마나 향기롭게 맡아내는지 보여주지.” “ 하긴 뭘 해요.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요. 그리고 제발 집에 좀 가요!” “ 집은 너랑 같이 가야지.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자, 어서해보라니까.” 그는 급기야 내게 트림할 것을 종용했다. 나는 이 희귀한 광경을 이 경원에게 들킬까봐 노심초사했다. 힐끔힐끔 놈을 살폈다. 놈은 주둥이에서 침을 한 대 빡은 뽑아내며 자빠져 자느라 지금 이 복희씨의 행동을 일체 기억 못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숨이 폭폭 새어나왔다. “ 제가 잘못했네요. 그러니까 그만 하…….”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건장한 사내 둘이 담배를 뻐끔뻐끔 거리며 안으로 들어오고 왔다. 돈도 돈이지만 문 닫을 시간이 고작 삼, 사십분 남겨두고 온 손님들은 딱 질색이었다. 그렇다고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더군다나 인상을 보니 동네 건달들이 분명했다. 한 놈은 긴 칼자국에 이마가 동해바다처럼 드넓었고 다른 한 놈은 평범한 외모였지만 어딘가 어둡고 굉장히 날카로운 느낌이 들었다. 상대를 압도하는 사내다움이 공기를 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복희씨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첫 느낌과 거의 흡사했다. 뜬금없이 심장이 불끈했다. ……왜. 어이가 없었다. 테이블 한 가운데 자리를 잡은 그들을 확인하고 슬쩍 경원이 놈을 살폈다. 놈은 세상떠나가라 코를 골고 있었다. 이번엔 이 복희씨를 곁눈질 했다. 그는 닭발로 테이블에 붙은 땅콩껍질을 떼느라 정신이 없었다. 순간 미치도록 징그럽게 권솔이 보고 싶었다. 놈이 있었으면 저 딴 놈들은 알아서 숙청했을 터였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긴 칼자국의 청년이 얌전하게 생긴 사내에게 형님, 형님 하면서 도끼 파, 상구 파, 갈삼 파, 양파, 쪽파, 대파 어쩌고 하는 것이 한, 두 시간 있다가 일어설 기미가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저기, 저기요 대 여섯 번은 한 뒤에야 소리 내어 말했다. " 저기요. 손님." 칼자국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팔을 저었다. 인상을 쓰니 우락부락한 얼굴이 도드라져 보였다. " 주문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저희가 부를 때까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 저기 그게 아니라. 지금은 마감시간이라 손, 손님을 받지 않아요. 저 죄송하지만 내일 다시 오시…….” 뚱뚱한 칼자국 놈이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마를 퍽 밀어젖혔다. 나는 뒤뚱거리다 바닥에 힘없이 나뒹굴어졌다. 본능적으로 테이블을 움켜쥐느라 상이 내 배 위로 무너지는 바람에 골반 뼈가 지끈지끈했다. 손바닥에 돌멩이가 쿡쿡 박혔다. 쪼개질 것 같은 엉덩이를 움켜쥐고 주춤거리는 사이 칼자국이 내 멱살을 움켜쥐고 가볍게 끌어올렸다. 허공에 발이 들렸다. 흡사 고목나무에 매미가 대롱대롱 매달린 폼이었다. 나는 끙끙대며 칼자국의 팔을 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칼자국은 끄떡도 안 했다. 별다른 기교도 쓰지 않았는데도 힘이 무지막지했다. “ 형님과 대화가 끝날 때까지 이 가게는 영업을 하는 겁니다. 잠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칼자국의 경어가 복희씨의 욕만큼이나 무서웠다. 나는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쫄려고 했는데 무서우니까 우선 눈물부터 났다. 나는 뼈 속까지 비굴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었다. 턱 끝에 방울방울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쓱 문지르려는 찰나 서류더미를 넘기고 있던 사내와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쳤다. 움찔했다. 그러자 사내가 조용히 웃었다. 쟤는 웃으니까 더 온순해 보였다. 칼자국이 내 멱살을 풀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달려 이 복희씨 옆에 찰싹 들러붙었다. 그는 열심히 가지고 놀던 닭발을 내려놓고 나를 힐끔 보다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돌래 칼자국의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 손님 왔잖아. 안 가봐?” “ 알, 알아요. 저 사람들 깡패들이에요." " 깡패? 생긴 건 숙맥들로 보이는데?" " 깡패 맞아요. 건들면 안 돼요. 갈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돼요.” 복희씨가 버럭 성을 냈다. “ ……뭐가 어쩌고 저째?”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도리 없는 망언이었다. 잡지책에 있는 모델들과 눈싸움을 벌일 정도로 승부욕 강한 이 복희씨에게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건들면 안 된다고? 갈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오, 이런 맙소사. 엿 같았다. 소주병을 집으려 손을 뻗던 이 복희씨의 팔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그가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힌 내 이마였다.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단단한 손이 턱을 움켜쥐었다. 턱이 빠개질 것 같은 악력이었다. “ 이마는 또 왜 그래? 부었잖아.” 칼자국이 만들어 놓은 상처였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자 복희씨가 내 이마를 만지려했다. 손이 얼굴에 다가오는 순간 찔끔했다. 어지간히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어깨를 움츠린 채, 표 나지 않게 저 쪽으로 물러났다. 이 복희씨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저승사자처럼 싸늘해져서는 내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낚아챈 후, 뜨끈뜨끈 달아올라 있는 이마를 꼼꼼히 매만졌다. 서늘한 촉감에 손가락이 시렸다. “ 대답하라니까.” “ 그게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대충 얼버무리면 되겠지 싶었다. 복희씨가 입 꼬리를 들쑥날쑥 거렸다. “ 그게 어쩌다 보니까 저 새끼한테 얻어맞았다? 지금 그 말이지?” 심장이 덜컹했다. 그는 형님, 형님하며 이것저것 보고를 하는 칼자국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작 다 보고 있었구나. 나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복희씨의 차가운 손가락이 갑자기 입술사이에 물렸다. 곤란하면 입술을 깨무는 내 버릇을 항상 못 마땅해 하는 이 복희씨였다. 내 아랫입술을 톡톡 건드리던 그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저 놈을 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잘 알고 있다고 감히 단언하겠다. 그는 제가 때리는 건 괜찮고 내가 남한테 맞고 오면 못 견뎌 할 자식이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지만 정작 내겐 따뜻하게 굴지도 않으면서 남이 내게 제가 하는 것과 똑같이 대하면 절대 참지 않는 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톡톡히 알게 됐다. 이번 역시 그럴 것이다. 칼자국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복희씨를 말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내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나는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복희씨의 오른 손에 미처 보지 못한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저건 또 뭘 하려고. 쾅-----! 번개처럼 날아간 소주병이 칼자국의 정수리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조각난 유리들이 파편처럼 주위로 흩어졌다. 까딱까딱 거리는 칼자국의 목덜미를 움켜쥔 복희씨는 빈 박스에서 맥주병 하나를 더 들고 와 찢어진 머리통에 병 두 개를 연달아 내리쳤다. 김빠진 맥주가 사방에 튀었다. 결국 칼자국의 힘없는 머리통이 뒤로 꼬꾸라졌다. 광활한 이마와 콧등에 핏물이 빗물처럼 주룩주룩 쏟아졌다. 사내가 들고 있던 서류뭉치에도 붉은 물줄기가 콸콸 쏟아졌다. 큰 싸움으로 번지면 안 되는데……. 슬쩍 사내의 안색을 살폈다. 맙소사. 대단하다, 대단해. 사내는 표정변화 없이 묵묵히 앉아 서류더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관심도,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이고, 뭐 저런 돌부처 같은 놈을 보았나. 잠시 신경을 판 사이, 복희씨는 ‘머리는 대충 됐고.’ 하고 구시렁거리더니 깨진 술병 위로 칼자국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제, 제기랄. 와그작와그작 소리를 내며 조각난 유리들이 칼자국의 엉덩이에 듬성듬성 박혀 들어갔다. 연한 베이지색 바지가 붉게 물들었다. 허벅지가 너덜너덜 찢어져 걸레가 됐을 터였다. 엉기적대며 일어나려는 칼자국의 복부를 발로 걷어찬 복희씨가 ‘아까 넘어진 것도 이쯤 됐고.’ 했다. 그리고 ‘멀쩡한 몰골로 양아치 짓거리 계속하고 싶으면 상대를 봐가면서 주먹을 뻗어라.’ 하고 덧붙였다. 가만 보니 내가 맞은 것대로 복수를 하는 것 같긴 한데 난 저딴 유치한 복수는 절대 사양이었다. 나는 뒤늦게 복희씨에게 뛰어갔다. 그의 팔을 잡아 구석으로 이끌었다. “ 조금만 평범해도 안 잡아먹어요. 운전해서 번 돈 얼마나 된다고 깽 값 물어주다 볼일 다 보겠네, 진짜. 빨리 저 쪽으로 가요. 빨리, 빨리요!” 복희씨가 내게 잡힌 팔을 휙 빼내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흠칫했다. 왜 저렇게 골이 난 걸까. 화난 이유도 이제 별로 안 궁금했다. " 김 궁상, 너한테 손 안 벌릴 테니까 염려 말고 꺼져. “ “ 왜 갑자기 나한테 화를 내는데요?” 나도 조금 화가 났다. 그때 갑자기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이 경원이 복날 더위 먹은 개처럼 달려와 귓속말을 했다. ‘ 삐졌어, 삐졌다. 더 이상 피 보기 싫으면 빨리 칭찬해, 어서. 이 멍청한 것아.’ 무슨 칭찬을 하라는 건지 알가다도 모르겠네. 복희씨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쓰러져 있는 칼자국과 나를 동시에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아. 했다. 뭘 먹고 저렇게 유치해 졌을까. 머릿골이 띵했다. 나는 이 복희씨 앞에 다가가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 실수했어요. 이 복희씨 복수해줘서 고마워요. 역시 저한텐 이 복희씨 밖에 없네요.” “ ……흥! 그야 뭐, 당연하지.” 유치함과 더불어 단순하기까지 했다. 설마 화가 풀릴까 싶었더니 정말 풀렸다. 이 복희씨는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내 이마를 꾹꾹 눌렀다. 화가 안 풀린 척 억지로 성난 얼굴을 만들어 팔짱을 끼는 폼이 어지간히 웃겼다. 나는 어이가 없이 픽픽 웃었다. 옆에서 이 경원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무사히 넘겼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이 복희씨는 내 팔을 죽 잡아당겨 ‘사우나가자! 사우나.’ 했다. 그때 서류만 넘기고 있던 사내가 파일을 호치케이스로 찍으며 말했다. “ 잠깐.” “ ……뭐야.” 복희씨가 성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 방금 제 동생에게 상대를 봐가면서 주먹을 뻗으라고 하셨습니까.” “ 그런데?” 이 복희씨는 나를 경원이 쪽으로 휙 밀쳐내며 앞으로 나왔다. 사내가 나와 복희씨를 번갈아보며 조소했다. “ 그 말씀, 제가 그 쪽한테 되돌려 드리고 싶군요.” 사내가 여유롭게 웃으며 다가왔다. 마왕, 발정하다 2부 -3 사내의 오른쪽 주먹이 복희씨의 턱 뼈를 향해 날아갔다. 허공에서 바람소리가 울렸다. 굉장한 속도였다. 상대가 어디로 피할 것이다, 하는 예상까지 머릿속에 그려놓고 움직이는 정확한 주먹이었다. 어깨를 젖혀 간발의 차로 피한 복희씨의 얼굴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비록 헛손질이 됐긴 했지만 제대로 맞았더라면 아무리 맷집좋은 이 복희씨라도 무사하진 못했을 것 같았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덩치도 이 복희씨와 비교해 봤을 때 하등 차이가 없었다. 그렇담 고작 힘에서 밀리진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쉽게 집중하지 못하는 이 복희씨의 정신 착란증세를 단 번에 사로잡은 주먹이라면 기교역시 만만치 않을 터였다. ……혹시라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복희씨가 저 남자한테 곤죽이 되게 얻어터진다면 나는 어쩌지. 사내야 때리고 도망가면 그 뿐이었다. 뒷감당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승부욕에 불타 똥, 오줌 못 갈릴 그를 생각하자, 오금이 저렸다. 김 지만이 경배해 마지않은 이 복희씨의 주먹이 어느 수준인지 내 짐작할 바는 아니었지만 지금껏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안 되겠다 싶으면 유치한 꼼수로 스리슬쩍 이 상황을 모면할 것이다. 남에게 지는 것보단 야비한 것을 택할 이 복희씨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진지한 자세로 상대를 대하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새로운 모습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이 복희씨의 야수를 끌어올린 사내의 존재가 실로 대단해 보였다. 마주보고 서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서릿발시린 냉기가 흘렀다. 순간 이유도 없이 초조해졌다. 그때 끝임 없이 마른안주를 거덜 내고 있던 이 경원이 귓속말을 해왔다. ‘ 난 저게 얼굴 몇 대만 때려줘도 당장 형님이라고 부를 거야. 씨발, 제발 그래야 될 텐데.’ 생기다 만 삼생이 같은 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당장 놈의 목을 짤짤 흔들어 주고 싶은 걸 겨우 억눌렀다. 심각하게 재수 없다지만 그래도 이 복희씨잖아. 누구한테 지면 밤, 낮으로 피눈물 흘리다 그 눈물에 코 박고 자살할 사람인데……. 이 복희씨에게 들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내를 응원하는 곱살스러운 이 경원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복희씨 힘내세요! 제가 복희씨를 응원하고 있어요. 파이팅.” 파이팅하기엔 분위기가 참으로 엿 같았다. ……무슨 초등학교 운동회도 아니고. 사내와 경원이 놈의 시선에 내게 꽂혔다. 오지게 뻘쭘했다. 뒤늦게 복희씨까지 눈알을 빙그르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입 꼬리가 들쑥날쑥 거리는 것이 저도 웃기긴 한 모양이었다. 괜스레 얼굴에 달아올랐다. 내가 오버를 해도 한참을 했구나.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억지로 만들어했다. 그런 날 보며 복희씨가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그가 내게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인정사정없었다. 섬뜩했다. 주둥이에 쥐포가 한 가득 틀어박혀 있는 채로 경원이 천박한 탄성을 내질렀다. 더럽고 볼썽사나워 보여 입술을 가만히 오므려주었다. 녀석은 턱밑에 흥건히 고인 침을 닦으며 ‘이거 여간내기가 아닌데, 이러다 진짜 죽사발 되는 거 아냐.’ 했다. 반박하려 입을 여는 찰나, 머리 위에 그림자가 쏜살같이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쾅쾅대는 굉음이 울렸다.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사내의 주먹이 무서운 속도로 벽에 내리 꽂히고 있었다. 손마디가 찢겨져 피가 주룩주룩 흘렀다. 정통으로 맞았으면 복희씨의 계란마시지 한 얼굴이 아작 날 뻔 했다. 걸레가 된 주먹에도 아랑곳 않고 사내는 복희씨에게 다시 주먹을 뻗었다. 거의 얼굴에 맞부딪힐 정도가 돼서야 복희씨는 고개를 숙여 사내의 공격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장난스럽던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이쯤 되자 상대가 고작 심심풀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아님을 간파한 것에서 나오는 짜증이었다. 찢어진 살점으로 너덜너덜해진 주먹을 사내가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그리고 시계를 풀러 테이블 위에 던졌다. “ 피하는 겁니까, 아니면 겁먹은 겁니까. 저는 그 쪽처럼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뭐든 빨리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와이셔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리던 사내가 갑자기 내게 시선을 던졌다. “ 애인 앞에서 쪽팔리지 않을 정도로만 봐드리겠습니다. 먼저 공격하십시오.” 섬뜩한 존댓말이 매섭게 울렸다. 팔짱을 끼고 사내를 훑어보던 복희씨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피식 웃었다. 뭐가 그리도 웃긴 건지 흡사 바람 빠진 타이어 같았다. 그는 특유의 껄렁껄렁 거리는 건달걸음으로 사내 앞에 섰다. 그리고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사내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얼굴을 죽 잡아당겼다. 고작 한 뼘 정도의 사이를 두고 복희씨가 사내를 마주보았다. “ 요새 애들은 왜 이렇게 어른 공경할 줄을 모르나.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말세야, 말세.” “ 어줍지 않은 농담 따먹기는 집어치우시죠. 대충 시간 끌다가 도망가려는 심산이면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사내의 협박에 복희씨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 이봐, 애송이. 잘 들어. 앞으로 일대일로 싸울 땐 말이야. 되도록 먼저 공격하지 않는 게 좋아. 나 같은 적장의 눈엔 너 같은 피라미 새끼의 허점이 아주 잘 보이거든.”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 애송이 너는 운이 좋아. 오늘따라 내가 기분이 좋아서 무료강습을 시켜줄까 하거든.” “ 자신감이 지나쳐서 어째 무모해보이기까지 하군요.”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자 복희씨는 그를 움켜쥐고 있는 손에 불끈 힘을 넣어 목을 오른 쪽으로 확 꺾어 비틀었다. 사내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제야 복희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 옳지, 그렇게 하는 거야. 주먹은 별로여도 사람 성질 돋우는데 그런대로 쓸 만하네. 좋아, 다 좋은데 너는 주먹을 쓰면서 과하게 잔대가리를 굴려. 꼴랑 그 실력가지고 동네 양아치 짓거리 계속 하고 싶으면 한 번 말할 때 꼼꼼히 새겨들으라고, 이 멍청이야. 뭣 모르는 것들이 꼭 얼굴로 주먹을 뻗는데 그건 나 병신이오, 하고 대놓고 외치는 것과 같아.” 느긋하게 웃던 복희씨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싸늘한 김이 폴폴 풍겼다. 그는 사내의 목덜미를 찍어 비트는 것과 동시에 가슴 바로 아랫부분을 주먹으로 딱 한 번 내려쳤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사내가 가슴을 움켜쥐고 컥컥 숨을 몰아쉬었다. “ 아까 나한테 주먹 세 번 휘둘렀지? 내가 너였다면 그 세 번을 다 얼굴에 쏟진 않았을 거다. 기회를 줬는데도 그걸 눈앞에서 날려버리나. 주먹질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머리가 아니라 바로 주먹이라구우, 이 귀여운 돌대가리야.” 허리를 살짝 젖힌 채로 복희씨를 올려다보는 사내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내는 고작 주먹 한 방에 엄살이 아닌가 싶을 만큼 과도하게 아파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딜 맞아서 저렇게 맥을 못 추는 걸까. 옆에 쥐죽은 듯 이 사태를 관전하고 있던 이 경원이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 주둥이만 나불거리는 건 열 살 먹은 계집애들도 다 할 줄 압니다.” “ 애송아, 지금부터 풀코스로 보여 줄 테니까 눈만 껌뻑껌뻑 뜨고 있다가 병신 될 준비나 하고 계셔. 아니면 네 동생이라는 저 머저리를 깨워서 내가 어떻게 하는지 고대로 받아 적게 하든가.” 복희씨가 손톱을 후후 불며 말했다. “ 그건 그렇고, 잠깐. 우리 김 궁상이가 어디로 갔지?” 경원이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기우뚱하던 몸이 앞으로 꼬꾸라지며 며칠 굶은 오리처럼 꽥 비명을 질렀다. 복희씨와 사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신인 연기자처럼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복희씨가 쯧쯧 혀를 차더니 ‘어이, 거기 밟힌 찐빵, 우리 김 궁상이가 놀래서 바지에 오줌 싸나, 안 싸나 잘 지키고 있어.’ 하고 말했다. 밟힌 찐빵이 누구지……, 하는 얼굴로 경원이 고개를 돌려 찐빵을 찾자 이 복희씨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 거기 너, 밟힌 찐빵 너 말이야.’ 했다. 놀란 경원이 검지로 자기를 가리키고는 눈빛만으로 암묵적으로 물었다. 복희씨가 가운데 손가락으로 ‘그으래, 너’ 했다. 그는 요령 있게 제 손을 빠져나가려는 사내의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 이제부터 찍 소리 말고 잘 봐. 돈 주고도 못 하는 구경을 시켜 줄 테니까.” 복희씨는 손가락을 푸는 척 하다 돌연 사내의 가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또 한 번 불시에 급습을 당한 사내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휘파람까지 불며 그 모습을 느긋하게 즐기던 복희씨는 사내의 몸이 휘청거리는 순간 빠르게 주먹을 날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주먹이 가슴과 배꼽 중앙에 정통으로 꽂혔다. 사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기가 막힌 맷집만큼이나 정신력 또한 끝내줬다. 의외라는 듯 복희씨가 눈썹을 꿈틀댔다. 그러다 의외로 그는 잠시 몇 초간 침묵을 지켰다. 그 기다림에 답하듯 사내의 신체부위에서 덜컥덜컥 거리는 소리가 울리며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복사뼈를 두어 번 툭툭 걷어차자 사내의 가슴은 이제 완전히 뒤로 꼬꾸라져 버렸다. 복희씨는 엎어져 있는 사내의 허리와 가슴께를 음흉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가슴 바로 아래, 갈비뼈 정중앙을 노려 운동화 발꿈치로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앙 다물고 사내의 이사이로 왈칵 핏물로 뿜어져 나왔다. 붉은 액이 목덜미를 콸콸 적셔 들어갔다. 핏물에 젖은 양복이 무거워 보였다. 억눌린 신음소리가 연달아 새어나왔다. “ 애송이의 세 번 공격에 맞춰 주먹을 쓰느라고 혼났어. 이 고마움을 알란가 몰라.” 녹신하게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는 복희씨의 눈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거짓된 연기에서 우러나오는 표정이 기가 막히게 인위적이었다. “ 이제부터가 중요해. 귓구멍 팍 열고 새겨들어. 애송이가 처음 맞은 곳이 단중이야. 흉부의 정중앙에 있는 여기가…….” 복희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운동화 끝으로 사내의 가슴 중앙을 툭툭 걷어찼다. 그다지 힘들이지 않은 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사내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했다. “ 그래, 여기. 유방, 아니지. 아아, 애송이는 남자였지. 깜빡했지 뭐야. 하여간 젖꼭지 가운데 있는 여기를 잘못 잦으면 불알 반쪽을 생으로 뜯어내는 것만큼이나 죽을 맛일 거야.” 유방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이 일부러 남자를 도발하려는 심산이었다. 복희씨는 거인 같은 발바닥으로 사내의 가슴 한 가운데를 팡팡 쳤다. 이번 역시 사내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 여기는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잘 알고 있겠지. 가슴뼈 아래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 여기가 수월(水月)이다. 명치가 급소부위 중에 하나인 건 잘 알고 있겠지? 쯧쯧, 헌데 뭐가 잘났다고 상대에게 가슴을 활짝 펴가 있냔 말이야. 제발 죽여 달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고, 멍청하게 시리.”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반박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다르게 나오는 건 덩어리진 핏덩이 밖에 없었다. 복희씨는 심드렁한 얼굴로 귓구멍을 후볐다. 새끼손톱에 노란귀지가 딸려 나왔다. 그는 귀지를 뚫어져라보더니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 모습을 보던 경원이 쥐포를 씹다말고 헛구역질을 했다. ……뭘 저 정도가지고. 나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그런대로 볼만했다. 가끔 빨래집게로 내 콧구멍을 찌른 뒤, 제가 코를 후벼주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저 정도는 아주 약과였다. 녀석의 등을 팍팍 두들겨주는데 귀지를 코딱지 뭉치듯 동글동글하게 말던 복희씨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했구나. 복희씨는 귀지와 입을 벌리고 누워 있는 사내를 야릇한 눈빛으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의도적으로 귀지를 떨어뜨렸다. 오, 맙소사. 벌어진 사내의 입속으로 노란 그것이 쏙 빨려 들어갔다. “ 감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귓전으로 흘려들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을 경청할 준비가 안 됐군. 따끔한 벌로 귀지만한 게 없지. 꼭꼭 씹어 먹으라고, 이 애송이야.” 깜짝 놀란 사내가 쿨럭쿨럭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복희씨의 사내의 입술을 발로 막으며 곧장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네가 세 번째 맞은 곳이 어딘 줄 알아? 거기가 바로 기해(氣海)야. 한의학에서는 하단전(下丹田)이라고 부른다던데 그거야 내 알바 아니고. 여기도 절대로 피해야할 급소부위지. 주먹을 딱 세 번 사용했다면 내가 말한 그 세 곳 중에 하나라도 건드렸어야지. 애송이, 다른 건 필요 없어. 단중, 수월, 기해만 기억하면 돼.” 피식피식 웃던 그의 얼굴이 돌연 굳어졌다. 좀 전까지 장난을 치던 모습과 같은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껏 봤던 복희씨의 표정 중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다. 가슴이 서늘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열나게 쥐포를 뜯던 경원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 이건 뭐 하이드 박사도 아니고 사람이 갑자기 맛이 갔어.” 복희씨는 손바닥을 추리닝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돌연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꼼지락거리더니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태양보건소> 라고 써진 파란인쇄글자가 형식 보였다. 보건소에서 공짜로 나눠주기에 주말에 내가 받아온 거였다.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저걸 또 언제 훔쳤을까. “ 이래봬도 나는 청결을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내 손에 핏물 튀는 건 절대 사양이야.” 복희씨는 손수건을 탈탈 털어 장갑처럼 손에 끼었다.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서고 있는 사내의 가슴에 곧장 주먹이 내리꽂으려는 찰나, 천막 문이 부스럭거리며 활짝 열렸다. 권솔이었다. 녀석은 집채 만 한 솥단지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개를 요란스럽게 휙휙 돌려 주위를 훑어보던 녀석이 복희씨를 확인하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곤 난장판으로 변한 가게를 보고도 티끌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내게 곧장 달려왔다. 솔은 옆구리에 낀 솥단지 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놈과 이렇게 노닥거릴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 ‘권솔, 이 멍청아. 빨리 찌그러져. 지금 이럴 때 아냐.’ 하고 경원이 한 마디 했다. 권솔은 경원이 놈을 가볍게 무시로 일관하며 없는 사람 취급했다. “ 자, 이거 봐. 초특급 왕 누룽지다.” 녀석의 말마따나 정말 초특급 왕 누룽지였다. 일반 누룽지에 세배 쯤 되는 초 대왕 누룽지를 펼쳐든 권솔의 얼굴에 제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솥단지에 밥을 눌리고 찢어지지 않게 떼어내고 있었을 녀석을 생각하자 가슴이 한 구석이 싸했다. 허나 싸한 건 싸한 거고 분위기는 분위기였다. 복희씨의 섬뜩한 눈빛이 놈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지글지글 거리는 것이 지독히도 매서웠다. 이러다간 사내가 아니라 권솔이 먼저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나는 놈의 팔뚝을 질질 끌어다 구석에 떠밀었다. 주위가 겨우 조용해지자 복희씨의 주먹이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 또다시 천막이 젖혔다. <꼬꼬 덱, 꼬꼬꼬꼬꼬> 누군가 밖에서 걷어 올린 틈 사이로 닭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실토실 토종닭들이었다. 한 마리는 오골계였다. 닭 두 마리 모두 붉은 밧줄이 동여 묶여 있었다. 길게 이어진 줄은 시골 내려간다고 일주일 내내 정신 사납게 설치다 거의 피난민 수준의 짐들을 들쳐 메고 사라졌던 김 지만의 팔목까지 죽 이어져 있었다. 곰 같은 놈이 엉금엉금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순간 깜짝 놀란 오골계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 덩달아 놀란 김 지만이 끈을 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골계가 날렵하게 도망쳤다. 나 잡아봐라, 나 잡아봐라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사뿐거리는 발걸음이 별나게 가벼워 보였다. 자만심 깔린 놈의 표정을 보건대 도망치기 위해 일부러 연기를 한 것이 확실했다. 지만이 놈이 천막을 겨우 걷어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 경원아. 우리 경원이 어디 있어? 권솔에게서 쏟아졌던 주목이 김 지만에게 넘어갔다. 복희씨는 이미 폭발일보직전으로 변해 김 지만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겁먹은 경원이 미친 듯이 달려가 김 지만의 옆구리를 질질 끌고 데려왔다. “ 왜 벌써 왔어? 일주일간 가 있는 다면서?” 김 지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를 말아 경원이 어깨에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물, 콧물 빼내는 모습이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경원아, 너랑 떨어져선 한 시도 못 있겠어.’ 내지는 ‘경원아,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봤자 둘 중에 하나일 터였다. “ 경원아 너랑 떨어져서 못 살겠어. 진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내 가슴 좀 만져봐.”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고 설마가 사람 잡았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어놓고 일 년 열두 달 생이별을 한 것처럼 구는 김 지만을 보자 불끈 살인충동이 일었다. 그런 내 속을 전혀 모를 김 지만이 경원이 놈의 손을 덥석 잡아다가 제 가슴을 비비며 덧붙였다. “ 만져져? 너 보고 싶어서 새카맣게 재가 돼 버렸어.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엄마가 나 보니까 한숨만 나온대. 효도하는 셈치고 그 말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어, 헤헤헤.” 경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 병신, 바보처럼 웃지 좀 마. 쪼다 같아.” “ 알았어, 알았어. 네가 그러라면 또 그래야지.” “ 엄마는 괜찮으시데?” 내가 주위를 살피며 묻자 지만이 풀 죽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 계진아, 어떡해. 우리 엄마 바람났어. 나보다 여섯 살인가 많은 놈팡이한테 우리 엄마 완전 뻑 갔어. 아빠는 엄마 발 다친 것도 몰라. 동네 창피하다고 당장 중대가리 만들어서 집에 들어앉힌다고 입에 게거품 물고 난리야. 병원에 갔더니 그 새파랗게 어린놈하고 아예 병실에 살림을 차렸다니까.” 녀석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십만 원 짜리 수표 두 장을 꺼냈다. 다른 쪽 주머니에서 플라스틱 보석함까지 마저 꺼낸 녀석은 그것을 이 경원에게 몽땅 내밀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 그 놈이 용돈 줬어. 삼 십 만원이나 주더라. 자기를 삼촌처럼 편하게 대하래.” “ 염병하네. 병신아, 그걸 왜 받아와. 네가 거지야? 내가 진짜 답답해서 못살아.” 경원의 꾸중에 의기소침해진 지만이 보석함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 그런가. 내가 잘못한 거야? 그 놈팡이한테 받은 돈으로 너 펜던트도 하나 샀는데 아무래도 내일 바꿔서 그냥 돈하고 다 같이 돌려줘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경원은 지만이 놈의 손에 들린 보석함을 낚아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놈이 어색하게 하하하 웃었다. “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미 받은 걸 꼭 되돌려 줄 필요는 없지. 그 사람 말마따나 삼촌처럼 편하게 대하는 것도 네 입장에서 썩 나쁜 건 아니야. 그 놈 아니더라도 엄마하고 아버지는 이미 갈 때까지 간 뒤로 죽 각방 써왔잖아. 생각해봐, 엄마도 여잔데 남자 품이 안 그립겠어? 아버지야 다방 레지들 가슴 주무르면서 딸 치면 그만이지만 엄마는 여자잖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것보다 한 놈하고 붙어먹는 게 있어 보이고 더 좋아.” 단순한 김 지만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 진짜 그럴까?” “ 당연하지. 너는 내 말만 믿어.” 나는 고작 펜던트에 눈이 팔려 가만히 있어도 불쌍해 보이는 놈 하나를 날로 등쳐먹는 현장을 목도 하고 있었다. 홀가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 지만의 덜떨어진 모습에 안심한 이 경원은 구석에 처박혀 똥을 한 자배기나 싸대고 있는 오돌 계를 턱으로 가리켰다. 녀석은 복희씨 눈치를 살피며 ‘닭은 또 뭐야.’ 하고 조그맣게 물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관심이 없을 김 지만이 지붕이 떠나가라 우렁차게 대답했다. 속도 없는 놈들은 역시 달라도 너무 달랐다. “ 너랑 개집이 불 닭 해주려고 집에서 데려왔어. 저것들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기차 타느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 바지에 똥 싸고, 오줌 싸고. 누가 보면 닭이 아니라 똥 싸는 기계인줄 알았을 거야. 아차, 집에 숯도 사놨어. 개집아, 진짜 기대되지 않아?” 지만이 어린애처럼 손을 맞잡은 채로 활짝 웃었다. 덜떨어져 보일 정도로 순수한 미소였다. 네가 웬일로 나까지 신경써주고 고거 참 고맙다만 지만아, 분위기가 좀……. 면도날을 씹어 먹을 것만 같은 복희씨의 표정에 나는 지만이 놈의 주둥이를 막고 경원이 새끼에게 떠밀었다. 쟤 좀 알아서 닥치게 해라, 하는 눈빛을 보냈다. 다행히 녀석은 제대로 알아먹었는지 김 지만의 입술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끊임없이 해보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김 지만이 주위를 훑어보다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멍청하게 속도 없이, “ 형님,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입니다. 근데 거기서 뭐하고 계세요?” 하고 잘도 지껄여댔다. 나와 이 경원은 동시에 눈을 감아버렸다. 복희씨가 돌 같은 주먹을 들고 김 지만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경원이 말릴 틈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 역시 그의 주먹보다 열리는 문이 더 빨랐다. “ 얘들아, 권솔. 지만아. 여기들 있어? 집에 갔는데 불이 꺼져 있어서 걱정…….”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실로 대단히 오랜만에 보는 이 복신이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은 시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공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그는 솔과 우리들을 보고 겨우 안심한 눈치였다. 지금까지 수업 받다 온 것은 아닐 터, 주둥이에서 턱까지 길게 이어진 침 자국까지 친절히 매달고 온 걸 보아하니 신나게 퍼질러 자다가 깨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책 표지가 우리 쪽으로 잘 보이게끔 고쳐들고 당당히 들어오던 이 복신은 제 형님을 보고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당장 오줌이라도 지릴 듯한 얼굴이었다. 어렸을 때 두 형들에게 작살나게 얻어맞고 자랐다는 복신의 푸념이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저 리얼한 표정만으로도 녀석의 굴곡진 인생이 그대로 투영돼 보였다. 너무 맞아 돌대가리가 됐나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복희씨가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내 앞에 다가왔다. “ 이거 오랜만에 재미 좀 보려고 했더니 말짱 꽝 됐잖아.” 지금까지 한 건 뭐고요. 나는 말없이 어색하게 웃었다. 복희씨가 내 손을 잡아 앞으로 죽 잡아당겼다. 그는 척척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왜요.’ 하고 묻자 그는 ‘집에 가려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눈앞에 문을 두고 그의 발걸음이 딱 멈춰 섰다. 그는 술에 취해 꼬꾸라져 있는 중년사내, 피 떡이 돼 쓰러져 있는 칼자국, 보기만 해도 힘겨워 보이는 자세로 서있는 사내를 번갈아 보다 마지막으로 녀석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복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대충 다 알겠는데 쟤는 누구냐. 못 보던 놈인데 김 궁상이 새로운 친군가. 쯧쯧, 어째 얼굴이 영 맛이 갔다.” 제 막내 동생을 보고 복희씨가 심각하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반대로 자신을 못 알아보는 형님을 확인한 동생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주말까진 장대비가 퍼붓는다고 했었다. 하늘이 오랜만에 일기예보를 지킬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앞서가던 복희씨의 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녀석들의 걸음도 동시에 멈추었다. 나는 땅에 고개를 처박고 걷다가 전봇대처럼 서있는 복희씨의 등에 코를 부딪쳤다. 이 복희씨가 갸우뚱거리는 내 허리를 재빨리 붙들었다. 뿌옇게 젖어 있는 가로등 불빛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이유도 없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저러냐.’ ‘또 뭐야.’ ‘추워죽겠다.’ ‘배고파.’ 눈빛만으로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그 통일되지 않은 반응들 속에 딱 하나 공통된 것이 있었는데 놈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게 눈짓, 코 짓, 발짓으로 복희씨를 가리켜대며 왜 저러는 지 물어보라는 뜻을 전해왔다. 일부러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눈알을 부라리며 나를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안 좋은 건 꼭 내 몫이었다. 이 복희씨는 고개를 살짝 내려 어딘가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하고 물으려는 찰나, 그가 갑자기 한 쪽 무릎을 구부렸다. 녀석들의 눈알이 호박마차처럼 부풀려졌다. 나 역시 그랬다. 복희씨는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려는데 그는 내 발목을 앞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풀어져 있는 운동화 끈을 묶기 시작했다. 녀석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맙소사, 운동화 끈으로 발목을 끊어 죽이려나봐.’ ‘아니야, 운동화가 마음에 안 드니까 당장 벗으라는 뜻이잖아.’ ‘그럼 맨발로 뛰어가라는 소린가.’ ‘하여튼 화난 게 분명해. 내 일 아니니까 우리는 모른 척 하자.’ 그렇게 놈들은 저들끼리 정 떨어지는 귓속말들을 했다. 녀석들의 다양한 반응을 뚫고 복희씨가 젖은 손을 문지르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는 비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툭툭 털고는 제일 먼저 골목을 꺾었다. 그 뒤로 녀석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권솔만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죽으나 사나 나한텐 너 밖에 없구나. 꽁초가 돼 버린 담배를 빗속에 퉁기고 계시는 고귀한 권솔에게 사뿐사뿐 뛰어갔다. 아니, 뛰어가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귀엽게 껑충껑충 뛰어오르다 맥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질퍽질퍽한 진흙물이 무릎과 가슴이 흠뻑 적셨다. 뾰족한 돌멩이가 복사뼈에 부딪혔다.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대단한 힘이 발목을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놀란 솔이 쪼르르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우다 멈칫했다. 놈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 어쩐지 이 씨발 새끼가 고분고분 무릎을 굽히더라니. 야, 네 운동화 좀 봐.” 녀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풀어져 있던 운동화 끈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두 끈이 친절하게 하나로. “ 이 복희씨는 심보가 고약하니 죽으면 필시 지옥에 떨어질…….” 수돗가에서 대충 씻고 방으로 들어오다가 주춤했다. 저건 또 뭐지. 태연하게 앉아 물을 마시고 있는 복희씨의 등 뒤로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에서 봤을 법한 무식하게 큰 화환 두개가 병풍처럼 떡 버티고 서있었다. 사이좋게 분홍 라벨을 하나씩 달고 서있는 화한들에게서 이유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 그 짧은 사이에 빗방울이 방안으로 후드득 쏟아졌다. 문지방에 고인 빗물을 발바닥으로 쓱 문질렀다. 추리닝 윗도리를 벗어던지던 이 복희씨가 돌연 정색을 하며 말했다. “ 지옥에 간다고 하더라도 절대 혼자선 안 간다.” “ 혼자서 안 가면요?” “ 당연히 너랑 사이좋게 들어가야지. 우린 파트너니까.” “ 파트너는 무슨……. 저 화환들은 또 뭔데요.” 복희씨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화환을 질질 끌어다 내 앞에 내밀었다. 어쩐지 표정이 뿌듯해져 있는 것이 필시 대단한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방바닥에 앉아 푸릇푸릇한 잎사귀를 꼼지락거리며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을 해보였다. 그러나 복희씨는 대답은커녕 제가 더 궁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 뭔데요? 돈 주고 산 건 아닐 테고. 누가 줬어요?”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인상을 함지박이나 쓰고는 대답할까, 말까 무려 고민이라는 것을 하고 계셨다. 오래살고 볼일이었다. 저 놈이 뭔가 주저하고 있는 것을 보다니……. 낯설었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은 했다. “ 진짜 어디서 난 건데요? 궁금해요. 말 좀 해봐요.” “ 어디서 나긴 뭘 어디서 나. 누가 이 비싼 걸 공짜로 준다고. 당연히 내가 사왔지.” 복희씨는 선심 쓴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곤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방안에 갑자기 어색함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이 들쑥날쑥 거리는 것이 흡사 더 하고 싶을 말이 있는데 누가 시켜서 말을 못하고 있는 어린애처럼 이 복희씨는 과도하게 초조해보였다. 어랍쇼. 급기야 그는 새끼손톱을 물어뜯음으로서 자신의 정신상태가 메롱임을 스스로 공표했다. 나는 화환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 근데 이걸 왜 샀는데요. 이렇게 큰 건 십 오 만원이나 줘야 한다던데” “ 왜 사긴. 당연히 너 주려고 샀지.” 그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방바닥에 귀청이 떨어 졌나 살폈을 정도로 거대한 목소리가 천장을 찌를 듯 했다. “ 나를 왜?” “ 뭘 거 같으냐. 당연히 선물이지. 잡소리 집어치우고 그냥 넣어둬.” 이렇게 큰 걸 넣긴 뭘 넣어……. 씻으러 안 가고 코딱지 만 한 방구석을 배회하는 것이 안 그런 척 하면서 내 반응을 살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힐끔힐끔 나를 곁눈질 하다 정작 시선이 마주치면 제가 더 놀래 고개를 돌려버렸다. 요새 참 여러모습 보여주네. 한 겨울에 더위 먹은 건 아닐 텐데 하는 짓이 꼭 더위 먹은 누렁이 같았다. “ 그래요. 고맙게 잘 받을게요. 정작 이걸 왜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뜯어진 벽지를 구부렸다, 폈다하는 이 복희씨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말했다. “ 가게 개업할 때 바빠서 안 갔잖아. 그래서 샀어. 별거 아니야. 보기 좋게 가게에 갖다놔.” “ 네, 뭐. 그럴 게요.” 양말을 벗어 곧장 밖으로 들고 나가던 복희씨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가와 벗은 양말을 내 머리 위에 탈탈 털었다. 나는 깜짝 놀라 팔목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이 복희씨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이게 미쳤나. 속에서 욕지거리가 한 바가지가 튀어나왔다. 그가 툴툴대며 먼저 선수를 쳤다. “ 안 고맙냐.” “ 고마워요.” “ 고마운 표정이 아닌데?” “ 내 표정이 원래 이 모양인 걸 나보고 뭐 어쩌라고요.” 대충 치고 빠져야 할 타이밍에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내 일취월장한 말싸움 실력에 복희씨가 분노했다. “ 사람이 선물을 줬으면 최소한 고맙다, 뭘 이런 걸 다 샀냐는 말 정도는 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가만 보면 은근히 무뚝뚝하단 말이야. 좀 곱살 맞게 굴어보라고!” “ 안 고마운데 왜 고맙다는 말을 해야 되는데요? 나는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거치적거리기만 한다고요.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서 도로 무르던가 해요, 그럼!” “ 샀는데 어떻게 도로 무르냐! 장사한다는 놈이 너는 기본 상식도 없냐! 이건 특수제작해서 물릴 수도 없다고, 이 멍청아.” “ 참나, 자기가 언제부터 상식적으로 행동했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네. 나는 분명히 말했어요. 이상한 거 가지고 와서 괜히 사람 귀찮게 할 생각이면 내일 당장 물러요.” 복희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 이상한 거? 너 방금 이상한 거라고 했냐? 내 선물이 이상하다 이 뜻이냐?” 눈앞이 깜깜해졌다. 암흑을 뚫고 달리다 벼랑 끝에 선 기분이 딱 이럴 것이다. 우선 복희씨의 안색부터 살폈다. 그는 대노한 기색이 역력하다 못해 잘못 건드리면 왈왈 왈 짖어댈 분위기였다. 미친개는 슬슬 달래다 알아서 피해하는 게 제일이었다. 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미인계였다. 복희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새파랗게 물들었다. 새 신발에 똥을 밟아도 저보단 더 유쾌한 표정일 터였다. 미인계도 먹히지 않는구나. 내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무기가 눈앞에서 허망하게 사라졌다. 난감한 순간이었다. “ 미안해요. 제가 실수 했어요. 화 푸세요.” 나는 화해의 제스처로 복희씨의 팔뚝을 슬슬 문질렀다. 그는 방바닥에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는 때려잡듯 내 손을 내치더니 쌩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다못해 이제 저 놈이 삐지기까지 하려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하는 건 다해보려는 심산이었다. 최악이었다. 나는 방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늘의 원흉이 돼 버린 화환을 이유도 없이 잡아당기며 분을 풀었다. 그때 눈이 번쩍 뜨였다. 화환을 치렁치렁 감싸고 있는 분홍 라벨에 시선이 머물렀다. 김 계진 개업축하로 시작한 문구가 제일여고 32회 동창생 모임으로 끝나 있었다. 다른 라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 계진 열심히 해로 시작한 글자는 어느새 말끔히 자취를 감추고 김 영춘씨 70번째 생신을 축하합니다, 부녀회장 오 복녀로 마무리 돼 있었다. 이런, 제기랄……. 선물은 하고 싶은데 돈이 아깝더냐! 이 망할 자식. 아주 깜찍하게도 제가 산 것처럼 거짓말을 늘어놓았겠다! 남에 걸 훔쳐다가 덧칠만 한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냔 말이다! 벌컥 벌컥 흥분이 치솟았다. 나를 희롱하고 마음껏 농락한 라벨을 덥석 쥐어뜯어버렸다.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화이트자국을 손톱으로 와르르 벗겨냈다. 이렇게 완벽한 증거 앞에서라면 아무리 이 복희씨라도 빼도 박도 못할 것이다. 나는 한껏 격양되어 있는 심신을 효율적으로 달랜 후, 미친 듯이 욕을 퍼부어댈 준비까지 완벽히 마쳤다. 곧장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때 방바닥에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이 복희씨 폰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폴더를 열었다. “ 네, 여보세요. 이 핸드폰은 이 복…….” 내 말을 무 자르듯 자르며 상대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 거 이 복희씨 핸드폰 맞습니까? 여기 경찰선데요. 지금 당장 서로 달려와 주셔야겠습니다.” 경, 경찰서라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 복희씨는 경찰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출소한지 고작 이틀 지나 있었다. 귀동냥으로 흘려듣느니 무려 이년이나 살다 나왔다 했다. 그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이곳에서 일 년을 보내면 암흑천지 그 곳에서 일 년을 살다시피 해서 지금껏 새해를 맞이해 왔다고 복신이 지나가는 투로 몇 번 말했었다. 이 복희씨가 지금 감방에 들어가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옥바라지를 해야 되나, 그냥 눈 딱 감고 다른 놈 찾아 떠나야 하나. 그 짧은 사이에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 이 복희씨 본인 맞습니까? 본인하고 꼭 통화를 해야겠는데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물쭈물 바보처럼 구는 내가 답답했는지 상대방이 왈칵 짜증을 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 겨우 말했다. “ 이, 이 복희씨 지금 씻으러 갔는데……. 저 이 복희씨가 사람을 죽, 죽였습니까.” “ 네?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사람을 죽이다니요.” 나는 이미 상대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그럼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었습니까. 합의금으로 안 되는 겁니까. 제발 봐주세요. 이 복희씨가 조금 많이 미쳐있긴 하지만 생각하는 것만큼 씨발놈은 아닙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도 많아요. 물론 며칠 동안 찾아야 겨우 보일 정도로 매우……, 아. 어떡해 정말. 감방가면 어떡해.” 목이 꽉 멨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더니 급기야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콸콸 흘렀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문지르며 애써 태연한 척 심호흡을 했다. 전화기를 통해 새어나간 울음소리에 상대방이 난감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 이봐요, 크게 걱정 말아요. 그 쪽도 이미지란 게 있는데 설마 악플 좀 달았다고 무조건 감방에 처넣겠습니까. 잘 하면 합의금으로 끝날 겁니다. 우선 조사할 게 있으니까 서로 나오세요.” “ ……네? 악플이라뇨?” 너무 놀라 눈물도 멎었다. 상대가 쯧쯧 혀를 차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 그러게 나이도 먹을 만큼 잡수신 분이 왜 악플놀이를 한 답니까. 서 영지씨 알죠?” 서 영지, 서 영지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긴 한데. 그렇게 이름을 되뇌길 여러 번, 겨우 생각났다. “ cf 많이 나오는 영화배우 아니에요? 이번에 여우주연상 받은.” “ 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그 여배우 사진에 악성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이 복희씨가요. 그게 뭐라고 했냐면, 아까만 해도 해도 여기 있었는데 이게 또 어디로 간 거야. 잠깐만 계셔보세요.” 핸드폰 너머 부스럭거리며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상대가 대화를 이어갔다. “ 11월 30일 오전 02시 13분 17초경에 단 댓글의 내용이 아주 가관도 아닙니다. 너무 흉측해서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래도 알아야 될 거 같아서 우선 말합니다. 잘 들어요, 혹시 귀 썩을지도 모르니까. 이 복희씨가 뭐라고 썼냐면 ‘이 갈보 년아. 너 S그룹 회장하고 빠구리 틀다가 임신했지?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낄낄낄, 유학 간 게 아니라 원정 출산하러 떠난 거라며? 그래놓고 티브이 나오면 청순한 척 가증 떨지. 그렇게 살면 재미있냐.’ 이게 우선 첫 번째 댓글이었고요. 이 비슷한 수준의 악플이 대, 여섯 개나 더 달렸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대가 빠르게 덧붙였다. “ 소속사 측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답니다. 이건 배짱도 보통 배짱이 아니네요. 악플다는 사람이 아이디도 아니고 실명에다가, 마지막에 자기소개는 왜 한 거랍니까. 그 덕에 우린 고생안하고 범인을 알아냈으니 한결 편해졌지만 경찰생활 17년 만에 이런 인간은 또 처음입니다. 고맙다고 해야 되나, 이걸 뭐라고 해야 되나.” 문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흠뻑 적신 빗물을 툴툴 털어내며 복희씨가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입엔 거대한 브라보콘이 물려 있었다. 제 전화기를 붙들고 멍청하게 앉아 있는 나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던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발밑으로 아이스크림 하나를 성의 없이 툭 던졌다. 그리고 역시나 아무 말 없이 이층 침대 위로 올라가 버렸다. 바보, 이층은 내 자린데……. 나는 복희씨가 던져놓고 간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요새 잘 나오지도 않는 사과 맛 아이스크림이었다. 돌덩이처럼 꽝꽝 얼어 있는 걸 보아하니 냉동고 제일 밑바닥에 숨어 있는 걸 겨우 찾아 왔을 것이다. 정말이지 복희씨다운 사과 방식이었다. 나는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살인죄도 아니고 고작 명예훼손이라지 않는가. 명예훼손이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일 줄이야. 마왕, 발정하다 2부 - 4 이 복희씨가 한 것이라곤 저를 루이 14세쯤으로 여기는 덜떨어진 부하 놈에게 전화를 걸어 살벌한 명령 몇 마디 한 것 밖에 없었다. 내용인즉슨 이랬다. <악플 달았다. 혹시 했는데 바로 걸렸지, 뭐냐. 두 시간 타자 쳐서 겨우 자기소개까지 했더니 그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이렇게 빨리 잡으러 올 줄 몰랐다. 썩은 동태눈깔이어도 짭새는 짭새니까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놈으로다가 물어 와라. 그렇다고 너무 허무맹랑한 놈 잡아 오면 갈비뼈 뜯어다 시골에 계신 너희 어머니 곰탕 끓여 잡수라고 소포로 보내줄 수도 있으니 유념들 해라. 나 닮은 놈이 흔치 않겠지만 능력발휘들 좀 해봐. 30분 내로 안 오면 영원히 두 발로는 못 걸을 거다. 31분에 오려면 아예 올 생각 말고.> 최고의 여배우를 성적으로 농락한 최악의 악플러가 고작 전화 한 통에 쓰레기더미 같은 아우의 인생을 구제해준 인정 있고 의리 있는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탈바꿈한 건 이 복희씨의 경고대로 29분 59초에 일어난 일이었다. “ 형님, 저도 이번 일을 계기로 빛 좀 볼 수 있는 거겠죠? 저도 내일 모레 서른하납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도 모셔야겠고 예쁜 색시만나 쿵작쿵작 결혼도 해야 할 텐데…….” 서른하나가 스물넷에게 형님이라고 했다. 아주 놀고들 있네. 똥 밭에 굴러도 개중에 상전이 있다더니 그 짝이로군. 이 복희씨가 새싹과 쌍칼을 왜 옆에 두는지 내 알바 아니지만 그들이 직위를 남용하는 현장을 가만히 지켜보려니 영 꺼림칙했다. “ 알았어, 알았어. 인마. 너도 이번 일만 잘 되면 출셋길이 훤히 열리는 거야. 너는 이제 탄탄대로라고. 그러니까 지금은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 4년 동안 한 번도 안 자르고 애지중지 길렀던 머립니다. 형님, 부디 예쁘게 잘라 주십시오. 근데 저……큰 형님은 제 이름이나 아실까요?” “ 형님이 고작 네 이름을 어떻게 알겠냐. 그래도 이번 일 잘 끝나면 며칠간은 알아주시겠지.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 말고 들고 있는 프린트나 잘 외워라. 짭새들은 원래 질문을 많이 하는 법이다, 짭새가 왜 짭새냐. 짭짭거려 짭새다. 몇 시에 악플을 달았냐. 원한이 뭐냐 물으면 거기 세 번째 줄 빨강색 형광펜으로 칠한 그대로 말하면 돼. “ 네, 알겠습니다.” “ 아,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랑 주소는 필수적으로 외워둬라. 짭새랑 면담할 땐 그건 네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야 한다.” 김 새싹이는 번쩍번쩍한 가위 날로 프린트를 척척 가리키며 명령했다. 새벽부터 불려나온 꼬붕남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형님, 근데 짭새는 caps, caps해서 짭새가 된 거 아닙니까.” 방바닥에 주저앉아 오로지 사과껍질만 벗겨내고 있던 쌍칼이 꼬붕남을 힐끔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기껏 깎아놓은 사과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와서는 꼬붕남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 네가 지금 대학 나왔다고 우리 무시하는 거야? 엉? 이 씨발놈아.” 가만히 있던 새싹이 뭐야, 그런 거였어? 어쩐지 기분이 나쁘더라. 하고 거들고 나섰다. 꼬붕남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급기야 새싹은 번쩍거리는 가위 날을 꼬붕남의 목에 들이밀며 무시했냐, 안 했냐를 가지고 유치한 협박을 퍼부었다. “ 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짭새가 질문을 많이 해서 짭, 짭샌 거 같습니다!” 꼬붕남이 결국 울음보를 터뜨렸다. 새싹과 쌍칼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서로 눈길을 주고받다가 겨우 화를 억눌렀다. 쌍칼이 눈썹을 두 번 꿈틀거리며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새싹이 마지못해 가위 날을 거두어들였다. 꼬붕남의 목덜미에 희미하게 생긴 칼자국을 훑어보던 쌍칼이 쯧쯧 혀를 찼다. “ 너는 운이 좋은 편이야. 형님 민증에 박힌 사진하고 얼추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이 무슨 호사냔 말이야. 로또 1등 당첨된 놈이 알면 당장 제 복권하고 맞바꾸자고 할 걸. 네 위에 경식이랑 만철이가 백날, 천 날 똥파리새끼들처럼 손 비비고 다녀도 이런 기회가 올 거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 너는 주둥이 벌리고 있다가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 처먹으면 돼, 알았냐.” 꼬붕남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애써 웃어보였다. 웃는 모습이 어딘가 많이 모자라보였다. “ 네, 형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쌍칼은 사과 껍질을 손가락에 돌돌 감아 쩝쩝쩝 씹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쉬지 않고 훌쩍거리는 꼬붕남의 울음소리가 방 안에 구슬프게 진동했다. 저것들이 이제 단체로 개그를 하는구나. 이 모든 것이 다 할 일이 없어서 생겨나는 일일 터, 이 복희씨는 지금 당장 제 똘마니들에게 조폭다운 일감을 줄 필요성이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간사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이 복희씨에게 2층 침대를 뺏기고 1층 매트 위에 앉아 이불을 턱까지 끌어다 뒤집어쓰고 있는 상태였다. 저 놈이 악플만 안 달았어도 나는 지금쯤 꿈나라를 헤매고 있어야 했다. 피곤하다 못해 이제 눈꺼풀이 깜빡깜빡 감기려 했다. 앞으로 꾸벅거리던 머리통이 뒤로 확 젖혀 질려는 찰나, 긴 다리가 침대 난간에 툭 내려왔다. 눈앞에 이 복희씨의 맨발이 대롱대롱 흔들리며 나를 우롱했다. 얄미운 발등을 주먹을 쾅쾅 내려찍으려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렸다. 역시 이럴 때 보면 내 머리도 꽤 쓸 만하다니까……. 당장 경원이 방으로 달려가 빨간 매니큐어를 훔쳐 왔다. 여전히 대롱대롱 흔들리는 발목을 붙잡고 발톱에 열심히 색을 칠했다. 그때 갑자기 닥치는 대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이 복희씨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천장에 머리가 직방으로 부딪혔다. ……낄낄낄. 고거 참 쌤통이로구나. 머리를 감싸 쥐며 그가 나지막이 욕설을 지껄였다. 그 바람에 한창 작업에 열중하던 그들이 복희씨에게 달려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 형님, 괜찮으십니까.” “ 형님, 다치셨습니까.” 쌍칼과 새싹이 쌍둥이처럼 동시에 말했다. 복희씨는 침대 기둥을 한 손으로 붙잡고 훌쩍 뛰어넘어 바닥으로 내려왔다. 남세스럽게도 그는 딸랑 사각팬티 한 장만 입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등이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이 복희씨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들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꼬붕남을 건조한 시선으로 위, 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자동으로 일어서는 꼬붕남을 보고도 그는 일언반구 없이 담배만 입에 물었다. 오늘 하루 제 대신 경찰서에 끌려갈 놈을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쯧쯧, 불쌍한 꼬붕남. 그는 찰칵찰칵 위협적으로 가위를 휘두르는 새싹에게 팔뚝을 뒤덮는 긴 머리카락을 온전히 내맡겼다. 어깨와 가슴엔 신문이 뒤덮인 채로 흡사 표정만 보자면 세상을 초탈한 선인 같았다. 새싹이 가위를 내려놓고 바리캉을 집었다. 눈동자가 희열과 흥분으로 번뜩였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갈랐다. 꼬붕남의 왼쪽 눈 꼬리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크윽, 세차게 코를 들여 마시는 소리가 역겨웠다. 시커멓게 자란 턱수염에 이 복희씨가 불쑥 라이터를 갖다 대는 바람에 방안은 겨우 조용해졌다. “ 분부하신대로 형님 주민등록증 사진하고 제일 닮은 놈으로 데려왔는데, 형님 보시기엔 어떠신지요.” 쌍칼이 졸졸졸 내시처럼 쫒아와 복희씨 옆에 찰싹 붙어 섰다. 복희씨가 귀찮다는 듯이 팔을 저었다. 쌍칼이 풀 죽은 얼굴로 딱 한 발치 떨어졌다. 복희씨의 뱀같이 얍삽한 눈이 꼬붕남을 찬찬히 살폈다. 꼬붕남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긴장했다. 바지에 오줌이라도 지릴 기세였다. “ 제일 닮은 놈? 이게 미쳤나. 내가 저렇게 멍청하게 생겼단 말이냐.” “ 형, 형님 그 무슨 말씀을……. 혹시 저 놈이 마음에 안 드신 겁니까? 다른 놈으로 잡아…….” “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대가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생각 좀 하라고, 생각 좀. 아침까지 오랬는데 지금 다른 놈 잡아올 시간이 어디 있냐, 이 병신새끼야.” 이 복희씨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급변한 우두머리의 표정변화를 확인한 A급 똘마니들이 앞 다투어 잔뜩 얼어붙은, 또는 무서워 죽겠다는 표정을 연출함으로서 복희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상대적으로 이 복희씨의 성향을 모르는 C급 똘마니는 진실로 제 두목이 열 받은 줄 알고 과도하게 안절부절 못하다 찔끔 오줌을 지리는 추태를 보였다. 졸졸졸 흐르는 누런 오줌줄기가 복희씨의 가랑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지나갔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멈춰 선 긴 소변도랑을 확인한 이 복희씨가 주먹을 치켜 올렸다. 얼굴에 멍 나면 안 되잖아요, 경찰서 가야된다면서요. 하는 말로 나는 꼬붕남의 생명을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최선을 다했다. 복희씨가 마지못해 주먹을 내리는 대신 거대한 발바닥으로 벽을 쾅 내리쳤다. 하여간 성질은 더러워 가지고는……. 후줄근한 천장에서 부스스 떨어진 모래가 꼬붕남의 머리위에 내려앉았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글썽글썽한 눈으로 내게 고마움을 알렸다. 인자한 부처의 미소로 씩 웃어주었다. 꼬붕남이 겨우 눈물을 억누르며 덩달아 미소를 짓다가 내 등 뒤에 서있는 이 복희씨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얼굴을 굳혔다. 왜, 왜 저러지……. 고개를 돌려 이 복희씨를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날로 회 처먹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솔직히 말해봐. 너희 둘 눈 맞았지? 왜 서로 쳐다보면서 음흉하게 웃는 거지? 빨리 말해. 이유가 뭐야.” “ 음흉은 무슨.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싶어서 그래요. 적당히 해요, 제발 적당히.” 이 복희씨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멱살을 쥐고 위로 끌어올렸다. 그 바람에 내 발은 공중에 들어 올려졌다. 이놈은 뭘 처먹었기에 힘이 이렇게 세졌을까, 순간 어이없게도 나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 아까 눈 마주쳤잖아, 이게 어디서 발뺌이야, 발뺌이. 눈썹이 꿈틀꿈틀 거리는 것이 아주 대단한 밀애라도 나누던 표정이던데, 너희들 혹시 아는 사이 아니야?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봐주니까 기고만장해져서는 감히 내 앞에서 다른 놈이랑 시시덕거려?” “ ……네?” 뜻밖의 상황에 얼빠진 목소리가 새나왔다.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돌변해 나를 침대 쪽으로 팍 밀쳐버렸다. 그 바람에 중심잡지 못한 몸뚱이가 기둥에 직방으로 부딪혔다. 어깨가 찢어져 도망가는 줄 알았다. 머릿골이 욱신거리다 못해 눈알이 핑글핑글 돌 지경이었다. 머리 위에 별과 달이 한꺼번에 날아다니며 나를 희롱하기에 이르렀다. 구석 한 쪽에 찌그러져 있는 나를 보고 놀란 쌍칼과 새싹이 한꺼번에 달려왔다. 나는 싸움대회에 출전한 황소처럼 콧김을 뿍뿍 내뿜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여차하면 이 복희씨에게 달려가 당장 물어뜯어놓으려 했는데……. 분명 그랬었는데. 화를 내기엔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이상했다. 생전처음 본 낯선 얼굴의 이 복희씨였다. 그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여차하면 울음보를 터뜨릴 것만 같은 어린애처럼 침대 기둥에 부딪힌 내 팔뚝과 제 손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복희씨라니. 꿈에서조차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복희씨의 모습에 나는 놀라다 못해 냉동인간처럼 굳어버렸다. 복희씨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 복희씨가 놀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 딴엔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근데 뭐가……. 뭐가 충격이라는 거지. “ 나는 때릴 생각은 없었어. 나는 그, 그냥 네가 저 새끼랑 웃으니까…….” 이 복희씨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논리정연하게 말하려 했지만 그가 노력을 하면 할수록 말은 얽히고설켜 나왔다. “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저 새끼랑 웃으면 안 된다는 거야. 그 이유가 뭐냐면……뭐냐면 아니, 물론 다른 놈한테 웃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 앞에선 절대 그러면 안 돼. 그 이유는 그래, 그 이유가 뭘까. 아, 네가 나를 좋아하니까 그러면 안 되지. 그게 예의라는 거다. 하여간 네가 잘못 한 거다, 알았냐. 아! 씨발,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런 빌어먹을.” 그는 결국 죄 없는 화장대 거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고작 주먹 한 방에 강판유리가 입안에 씹히는 밥알처럼 으깨어졌다. 옆에 방관자처럼 서있던 쌍칼과 새싹은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꼬붕남은 이미 내 소관 밖의 문제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화장대에 혈흔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눈알이 번뜩했다. 줄줄 터진 핏물이 꼬리를 타고 길게 이어지더니 이 복희씨의 손등에서 머져있었다. 나는 재빨리 티슈를 빼내 핏물이 고여 있는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꼼꼼하게 훔쳐냈다. “ 다 좋은데요, 제발 부탁이니까 성질 좀 죽여요. 적어도 내 몸이 힘든 건 안 해야죠.” 이 복희씨는 벌서는 초등학생처럼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를 처음 본 사람마냥 쳐다보는 얼굴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 김 궁상.” “ 네.” “ 고개 좀 들어봐.” “ 왜요.” “ 감히 개겨? 빨리 고개 좀 들어보라니까.”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 데는 뭐 있는 놈이라니까. “ 아…….” 고개를 드는 순간 이미 내 인중 밑에 숨어 얌체같이 기회를 엿보고 있던 복희씨의 검지가 콧구멍으로 쏙 말려들어왔다. 어찌나 강력하게 콧구멍을 찔러대는지 몸이 기우뚱거리다 못해 허공에 헛손질까지 해댔다. 그 모습에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던 이 복희씨는 중지까지 다른 쪽 콧구멍에 쑤셔 넣고선 숨 막혀 죽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리는 내 모습을 느긋하게 즐겼다. 등 뒤에서 새싹과 쌍칼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 지금 비웃는 새끼들 뭐야. 오라, 내장 목도리 차고 싶어 안달 난 모양이군.” 제가 웃겨놓고 또 저런다. 나는 방심한 사이 복희씨의 팔목을 비틀어 겨우 손가락을 빼냈다. 그가 별 힘들이지 않고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재미를 느꼈는지 그는 순순히 만세포즈를 취해 더 이상 내 콧구멍을 못살게 굴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 됐어, 이제 나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복희씨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벽에 매미처럼 붙어 있는 쌍칼과 새싹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소소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여차하면 다시 한 번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꼬붕남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바리캉으로 밀다만 뒤통수가 고속도로처럼 가운데만 휑하게 비어있었다. 저 인간도 참 안 됐다. 왜 하필 이 복희씨랑 키, 몸무게, 거무스름한 얼굴색깔까지 비슷해서 제가 죄를 뒤집어써야 하는 것일까. 하필 민증사진에서의 이 복희씨는 지금과 다르게 짧은 스포츠머리에 가까울 정도로 반삭을 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났으니 머리가 길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문제를 이 복희씨의 과대망상으로 인해 꼬붕남의 머리는 하루아침에 봉변을 당할 참이었다. “ 너는 바로 가게로 가. 사장도 없는데 오랫동안 자리 비우면 바로 소문난다.” 새싹이 마지막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려는 찰나, 이 복희씨가 짧게 명령했다. “ 네, 형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새싹이 문을 닫으며 내게 인사했다. 시끌벅적한 그들이 우르르 사라지자 방안은 황량할 정도로 메말랐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탈피하고자 열심히 머리를 굴려 질문 하나를 힘겹게 생각해냈다. “ 가게에 사장이 없어요? 왜요, 있잖아요. 이 복귀 사장 지금 어디 갔어요?” 이 복희씨가 제 동생 안부를 묻는 내게 정 떨어지도록 살벌한 어조로 대답했다. “ 그 딴 노름 쟁이 필요 없어. 나가 죽든지, 말든지.” 순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집이 없어 가게 구석에서 텐트를 치고 그 안에 신문쪼가리를 덮고 잠을 자고 있었던 이 복귀 사장의 초췌한 얼굴이 망상처럼 어른거렸다. “ 그럼 지금 어디 있는데요? 겨울이라 추워서 가게 말고는 잘 데도 없을 텐데.” 이 복희씨는 그만하라는 듯이 손을 저으며 내 말을 끊었다. 사람 참 몰인정하다. 언젠 뭐 따뜻한 구석이라도 있었나. 구세군 냄비에 수표 한 장 집어넣고 거스름돈 돌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사람이 아무리 제 동생이 숟가락만 들고 나앉았다고 해서 선뜻 손을 내밀지는 않을 터였다. 하물며 이 복희씨는 둘 밖에 없는 동생을 거의 벌레 보듯 대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머쓱해질 정도였다. 복신이 접촉사고를 당했을 때도 자기는 그런 이름 모른다고 문병한 번 안온 사람이 아닌가. 그래도 형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복신의 풀죽은 얼굴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사람이 왜 저렇게 삐딱할까, 어쩜 저렇게 못 되 처먹었을까. 내가 속으로 제 욕하는 걸 아는지 그는 귓구멍을 후비며 방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꼬붕남의 머리카락을 발로 툭툭 차더니 1층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 저기요, 복희씨. 사장님 말인데요. 그래도 가게 있을 때 운영은 잘 했잖아요. 안 그래요?” “ 응, 안 그래.” “ 생각도 안 해보고 나오는 대로 말하지 말고요. 저는 사장님 참 좋았어요. 우리들한테도 대체로 잘해줬거든요. 마지막 월급도 하나도 안 까고 그대로 넣었더라고요. 그런 고용주가 어디 있나요. 그러니까 가게를 다시 맡겨 보는 게…….” “ 그만해라, 시끄럽다.” 어차피 내 말이 먹힐 거란 생각도 안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걸 보니 헛된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 복희씨에게 나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갑자기 코끝에 지린내가 훅 끼얹어졌다. 꼬붕남이 싸질러놓고 간 오줌이 때문이었다. 제길, 아침에 치우지 뭐……. 괜한 생각에 무거워진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이층 계단에 발을 딛으려 할 때였다. 새벽의 서슬 퍼런 어둠에 쌓인 일층 침대에서 복희씨의 팔이 성급하게 튀어나와 내 팔목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저절로 무릎이 꺾였다. 나는 어, 어 하다가 복희씨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꼬꾸라졌다. 붙잡힌 손을 빼내려 하자 그는 다른 손으로 내 허벅지를 가볍게 끌어다 침대에 올려놓았다. 나는 눈 깜짝 할 사이에 복희씨 옆에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 “ 밤에 열심히 궁상떨려면 지금부터라도 푹 자라.” “ 답답해요. 2층 가서 잘게요. 복희씨도 편하게 주무세요.” 성인 남자 둘이 눕기엔 답답할 정도로 비좁은 매트리스였다. 나는 이 복희씨의 팔을 거두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그는 보란 듯이 내 후드 티에 손을 집어넣고 비쩍 말라 있는 젖꼭지를 주물럭거렸다. 예기치 못한 습격에 깡깡 얼어 있던 젖꼭지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급기야 팽팽해져 버렸다. 이 복희씨가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얼마 후 상체를 비틀어 등을 보이게 눕혔다. 귀찮기도 하고, 졸리기도 해서 나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반항의 기미를 보이지 않아 재미가 떨어졌을까. 복희씨는 목덜미에 얌전히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 더는 내 몸을 만지지 않았다. 꿈틀꿈틀. 그때 엉덩이 은밀한 곳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그의 물건이 빠르게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뒤늦게 그가 발기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그렇지…….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고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복희씨의 어딘가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모른 했다. 곧이어 거대한 졸음이 온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불러봐라, 그런다고 줄어드나……. 내가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진 뒤에도 김 궁상, 자? 김 궁상. 하는 풀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피식피식 웃다가 진짜로 잠이 들었다. “ 너 안자지? 계속 자는 척 하고 있으면 눈알에 침 뱉는다.” 그래, 안 잔다. 열심히 자긴 했다만 네가 하도 뒤척거리는 바람에 눈꺼풀이 알아서 떠졌단다. 나는 이 복희씨가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허리로 인해 구부정한 자세로 40분이 넘는 시간동안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런 깊은 뜻을 저 단순한 놈이 알란가 몰라……. “ 잠이 안 오냐.” 그렇게 말하는 복희씨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역시 잠기운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 자다 깼어요.” “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말이다. 넌 앞으로 네가 몇 년이나 더 살 거 같으냐.”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저런 질문은 왜 하는 것일까,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걸까. 그때 목덜미에 착 달라붙어 있던 복희씨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웃고 있는 것이다. “ 그 돌대가리 참 열심히도 굴러간다. 별 뜻 없으니까 그냥 말해. 대답 기다리기 귀찮다.” “ 교통사고 당하지 않는 이상 4, 50년은 더 살지 않을까요.” “ 교통사고가 제일 무섭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복희씨가 갑자기 내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머릿골이 지끈거렸다. “ 말로 해, 말로. 이게 건방지게 어디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어. 죽을라고.” 미친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 속 긁어놓는 건 또 뭐 있다. 나는 콕콕 쑤시는 목덜미를 주물럭거리며 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 암도 무섭고 백혈병도 무섭고 뇌종양도 무서워요. 그래도 굳이 하나만 꼽자면 교통사고가 제일 무서워요. 얌전히 죽고 싶어도 너무 얽히고설켜 있는 게 많아서 죽어도 편하게 눈감기는 힘들걸요. 차라리 병에 걸리면 병원에 안 가고 나 혼자 알아서 죽을 수 있지만 교통사고는 안 그렇잖아요. 죽어서까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싸우는 걸 봐야 해요. 참 귀찮은 죽음이죠.” 복희씨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상체를 완전히 일으켰다. 그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조명등을 킨 후,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달칵거리는 라이터 뚜껑 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매캐한 담배연기가 허공에 퍼졌다. “ 어차피 한 번 죽는 거 아무렴 어때. 늙으면 너도 뱃살이 늘어나고 흰머리가 생기겠지?” “ 뭐,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요.” “ 그래, 아마 그럴 거다. 그거 참 보기 흉하겠지. 주름살이 지고 검버섯이 생기고 뱃살이 늘고. 또 이빨은 몽땅 빠져서 뭣 좀 먹을라 치면 하루 종일 틀니를 찾아야 할 테고. 그게 끝인가. 한 달에 한번 하는 염색에 죽자 사자 매달려야 할 걸. 그러다 있는 재산 없는 재산 싹 자식한테 끌어다 받치면 뻥뻥 뒤통수 터지기 일쑤지. 요새도 효도가 의문가. 절대 아니라고 봐. 효도는 미덕이야. 효도를 안 해도 욕먹는 시대는 지났잖아. 신(新) 고려장도 나오는 판에 재산분할청구 소송 건다고 설치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지. 자식한테 안 뜯겨 먹으려면 넉넉하게 변호사도 하나 사야할 거야. 늙으면 참 할 일이 많아. 그 일 중에 누군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버릇도 생기지.”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며 담뱃재를 방바닥에 뚝뚝 털어냈다. 지가 치우는 거 아니라고 저게 진짜……. 재떨이 찾아다 대령해 주는 것도 번거로워 이 복희씨가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 “ 그래서 내가 게이가 된 거다. 자식은 안 낳으려고. 물론 애를 낳아도 절대 내가 번 십 원하나 물려주지 않겠지만.” 나는 시골에서 이 복희씨가 그의 분신들을 내밀었을 때의 얼굴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무슨 생각으로 준 걸까. 어쩌면 그는 내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을 알고 그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담 어차피 그가 가지고 있으나 내가 가지고 있으나 똑같은 돈이니까. 이 복희씨는 내 감정에 대해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걸까. 그래서 그 어마어마한 재산들을 떠넘기고도 태평할 수 있었을까. “ 만약 헤어진다고 해도 그건 네 거다. 다른 뜻은 없어. 괜히 머리 굴리지 마.” “ 가난해도 사기꾼은 싫어요. 이 복희씨가 준 통장만 뜯어먹다가 죽을 생각 추호도 없고요. 그건 다 이 복희씨 거예요. 내거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복희씨는 손에 턱을 받친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 사실 포장마차 처음 할 때 이 복희씨 통장에서 천오 백 꺼냈어요. 근데 그것도 곧 갚, 갚을 거예요. 저번 주에도 백만 원 넣었고, 이번 주에는 장사가 좀 안 돼서 그렇지 삼십만 원 넣었어요. 아직 갚으려면 멀긴 했지만 떼어먹을 생각 전혀 없어요. 조금씩 차근차근 갚으면 돼요. 이자는 없지만 이 복희씨가 원하면 그것도 어떻게…….” “ 그만.” 짧게 명령하는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입 꼬리가 들쑥날쑥 변하더니 피식피식 거렸다. 꼭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생각할 땐 저런 표정으로 변하는 걸 보면 이번 역시나 그럴 터였다. 그가 고개를 내려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피하지 않고 담담히 시선을 받았다. “ 너는 좀 약을 필요가 있어. 특히 나한테는.” “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 앞으로 4, 50년 후에도 너는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 그는 내 질문을 눈앞에서 개 무시하고 제 할만 했다. 성급하게 대답하려다 멈칫 했다. 평소보다 더 어두워져 있는 그의 얼굴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유독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다른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어두운 분위기가 나를 침묵케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이 복희씨는 마지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나이가 들고, 주름이 지고, 돈도 없고, 힘을 잃어도 나를 좋아할까. 너는, 그럴까. 글쎄.” 나는 방바닥에 나뒹구는 이불을 주워와 팬티차림의 싸늘해 보이는 복희씨의 허리에 덮어주고 은근슬쩍 내 발도 끼워 넣었다. “ 나이가 든 복희씨를 좋아할 거냐고요? 이 복희씨가 나이가 먹을 때 나는 뭐 가만히 있나요. 나 역시 주름지고 지금보다 더 볼품없어 지겠죠. 나는 내 다름대로 열심히 좋아 하고 있을 겁니다. 이 복희씨를 좋아하지 않는 내 모습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거든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거 뭐 쉬쉬할 감정이었나.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이 복희씨 역시 이런 내 감정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꽁초가 돼 버린 담배를 들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그 팔뚝을 끌어당겨 억지로 눕혔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안 했다. 다만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황망하게 내려다 볼 뿐이었다. “ 오늘 야간반이잖아요. 빨리 주무시라고요. 그래야 밤에 졸음운전 안 해요. 이 복희씨는 자신을 무슨 초인쯤으로 알고 있는데 절대 아니에요. 그 쪽도 사람입니다. 안자면 졸려요. 뭐해요? 빨리 자라니까.” 나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이 복희씨의 눈꺼풀을 친히 덮어주고 허리를 끌어다가 침대에 눕히려 했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갑자기 이 복희씨가 나를 바닥으로 사정없이 밀쳐내며 벽에 착 달라붙었다. 당황스럽다 못해 열이 받았다. 그는 아랑곳 않고 이불을 끌어다 허리에 칭칭 동여 묶더니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탁탁 두들겼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지나치게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는 화를 내는 것도 잊고 귓불까지 붉어져 있는 이 복희씨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말했다. “ 이, 이 복희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정말 아파서 그래요?” 나는 열이 있나 없나 보려고 그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매정할 정도로 무서운 힘으로 내 손등을 콱 내려쳤다. 손마디마디가 욱신욱신 했다. 이쯤 되자 나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 왜 때려요! 자꾸 왜 때리고 지랄…….” 그때 이 복희씨가 허리를 감고 있던 이불을 휙 걷어내 내 머리 위로 집어던졌다. 나는 떨어진 이불과 이 복희씨를 번갈아 보다가 불현듯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오, 이런 제기랄……. 저게 갑자기 왜 저렇게 커졌을까. 축 늘어져 있어야할 그의 분신이 하늘을 향해 위용스럽게 뻗어 있었다. 추리닝 바지를 뚫어버릴 듯한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눈앞이 깜깜했다. “ 저, 저게 이유도 없이 왜, 왜…….”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날 보며 이 복희씨는 거의 울 거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 네가 아까 허리 만졌잖아. 그때 그랬나봐.” 나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잽싸게 거리를 두고 앉은 나를 반 야속하게 반 서운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 얼, 얼마나 만졌다고 반응이 이렇게나 빨리. 어, 어떻게요. 갑자기 왜 저런데요? 네?” 그는 번쩍 고개를 치켜들고서 소풍 때 자기 소개하는 어린애들처럼 수줍어하며 말했다. 이거 미치겠네. 이 복희씨가 수줍어하다니. 나는 문을 열고 해가 서쪽에서 떴나, 안 떴나, 확인했다. 해는 예상과 다르게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 이게 그 유명한 만졌다 하면 발정하는 발정 병 인가봐. 조루도 아니고 씨발, 발정 병에 걸려 버리다니. 이거 쪽팔려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겠고. 빌어먹을!” “ ……발정 병이요? 그런 병도 다 있어요?” “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만져서 이렇다고! 왜 만져, 왜 만져! 내 허리 왜 만져!” 그는 갑자기 죄 없는 내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벽에 머리를 들이박고 자학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사천리로 변하는 그의 행동에 따라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벽에 머리를 들이박고 작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거무스름한 이마에 한줄기 핏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이 복희씨는 부랑아 같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콱 가래를 모아 방바닥에 뱉어냈다. 지가 안 치운다고 저게 끝까지 저러네. 이 복희씨가 돌연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 책임져. 네가 허리만 안 만졌어도 나는 내가 발정 병에 걸린 지도 모르고 평범하게 살아갔을 거야. 빨리 어떻게 좀 해봐.” “ 내, 내가 뭘요. 제발 말도 안 되는 걸로 생사람 좀 잡지 말세요.” “ 너 때문이라니까! 아니다. 됐다, 됐어, 말싸움 할 기력도 없어. 우선 물부터 빼봐!” 그는 내 팔목을 덥석 잡아 질질 끌고선 빵 터질 것만 같은 자신의 물건에 강압적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내가 억지로 손을 빼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내 팔목을 으스러뜨리려 작정한 놈처럼 억세게 비틀다가 결국 짐짝 내팽개치듯 손을 쳐냈다. 나는 욱신거리는 팔목을 감싸고 이 복희씨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그의 물건은 아직도 꼿꼿하게 서있었다. 어째 갈수록 팽팽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이 복희씨가 내게 베개를 집어 던지며 중얼거렸다. “ 계진아.”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 복희씨가 내 이름을 틀리지 않고 온전히 부른 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무언가 잔뜩 억눌린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러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파악해야 될까 갈등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짓누르며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거 같아. 아니면 이 몹쓸 병을 다 뭐라고 설명하겠어.” 슈퍼에 들러 찌개거리를 사오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 복희씨 말대로 발정 병이 존재한다면 그는 그 병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는 말인데 절대 그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럼 이층 침대의 때문인가. 물론 내 쪽에선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이 복희씨 입장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그는 난봉꾼이다. 거지같은 성향에 어울리게끔 적당한 선에서 하드섹스를 즐기는 타입으로 장 우현을 만나고 있을 때에도 절대 놈하고만 관계를 맺진 않았을 터였다. 이 복희씨가 아랫도리를 꽁꽁 싸매고 지낸지 이제 겨우 두 달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이 복희씨는 하고 싶어서 나를 구슬리려 드는 것이다. 이내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불끈불끈 솟아오른 물건을 애써 달래기 위해 애국가를 부르는 걸 보면 제 딴에는 노력을 하는 거 같기도 한데……. 이거 참 해골 복잡하네. 홀쭉해진 뱃가죽에서 꼬르륵 경종을 때렸다. 밥부터 먹고 보자. 나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코앞에 대문이 보였다. 골목을 하나 더 꺾고 가로등을 지났다. 나는 지척에 와서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집 앞에 낯선 손님들이 서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둘이었다. 나는 일부러 속도를 낮추며 낯선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8살에서 7살쯤 돼 보이는 꼬마아이들이었다. 두 아이는 손을 꼭 붙잡고 벽에 기대어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더 큰 녀석이 자꾸 대문으로 시선을 두는 걸 보아하니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진 않았다. 아이들을 보면 볼수록 불현듯 누군가가 떠올리게 했다. 두 아이는 서로 지나치게 많이 닮아 있었다. 분위기만 봐도 한 눈에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내가 알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심각하게 닮아 있었다. 누구지, 누구더라……. 떠오를 듯 하면서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내 눈은 여전히 아이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형으로 보이는 아이는 시종일관 얼굴을 굳히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반대로 동생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댔다. 아이들은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얇디얇은 봄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엔 땟물이 줄줄 흘렀다. 둘 다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걸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저렇게 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슈퍼에 나갔을 때만해도 문 밖엔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게 벌써 1시간 전이었다. 아마 아이들 역시 거의 한 시간쯤 밖에서 저렇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발밑엔 놓여 있는 짐 꾸러미에는 내복과 양말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모른 척 하고 지나치려는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게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두 아이들 목에 이름표처럼 채워진 명함 한 장이었다. “ 저, 안녕.”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큰 아이가 동생을 제 등 뒤에 감추며 눈알을 부라렸다. 어린 나이에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대단했다. 아이는 가래 섞인 침을 위협적으로 내뱉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좀 더 공략하기 쉬운 어린 애에게 시선을 돌렸다. “ 안녕, 꼬마야. 여기 왜 서있는 거야? 누구 만나러 왔어?” 동생꼬마는 부끄러운지 제 형 뒤에 숨어 힐끔힐끔 나를 살폈다. 그때 대뜸 형이 소리를 질렀다. “ 미친년아, 내 동생 건드리지 빨리 말고 꺼져.” “ ……뭐, 뭐?” 아이는 위협적으로 주먹을 말아 내 허벅지를 쾅쾅 내려쳤다.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는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 서울엔 유괴범이 많다면서? 씨발,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게 다 지랄이네. 우리 돈 없어, 그러니까 눈앞에서 썩 꺼지라고!” “ 꼬마, 나는 유괴범이 아니야. 너희들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남의 집 앞에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빨리 너희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걱정하신다.” 아이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증오와 혼란스러움이 적절히 섞인 눈동자에서 나를 향한 증오가 번져 올랐다. “ 씨발, 지금 놀리냐. 우리 엄마 그저께 뒈졌다, 어쩔래! 엄마도 없는데 걱정은 무슨. 아주 생 지랄을 해라, 염병.” “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나는 그것도 모, 모르고. 엄마 얘기한 건 미안하다.” “ 미친년. 이제 와서 착한 척은. 너처럼 내숭떠는 것들이 제일 밥맛이야. 알아? 개잡년, 교통사고나 당해 뒈져라.”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이건 너무 하지 않나. 나는 벌컥 화를 내려다 아이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명함을 재빨리 낚아챘다. 명함 속에 적힌 주소가 우편물 함 위에 적혀 있는 주소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 너희들 누가 여기다 데려다 놓고 간 거지? 그치?” 아이는 침을 콱 내뱉으며 내 발등을 밟았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아이의 발길질을 피하며 명함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 빨리 내놔. 빨리 내놓으라고! 우리한텐 중요한 거야! 빨리 내놔!” 게걸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아이를 한 손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명함에 적힌 이 복희씨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확인 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왜 중요한데? 이 명함이 너희들한테 뭔데?” 아이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끅끅거리며 눈물을 참는 소리가 애달프게 울렸다. 나는 아이가 다 울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아이는 겨우 봄 잠바 소매에 눈물을 쓱쓱 문지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 씨발, 그 새끼 꼭 만나야 돼. 만나서 당장 죽여 버려야 돼. 그러니까 돌려줘, 제발 돌려줘! 미친년아.” “ 욕하지 말고 말해. 그럼 돌려주지 않을 거야.” 나는 명함을 꺼내 반으로 찢어버리는 시늉을 했다. 아이가 눈을 번쩍 뜨고 내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 그 놈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쳤어. 놈을 만나서 단판을 지을 거야.” “ 왜.” 나는 잔인하리 만큼 친절하게 되물었다. 가슴이 욱신욱신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아이는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다 한숨을 내쉬었다. “ 그 놈이 우리 아빠니까.” 마왕, 발정하다 2부 -5 넓디넓은 오지랖을 앞세워 꼬마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욕쟁이 큰 놈은 열심히 투덜투덜 대면서도 의외로 큰 반항 없이 내 뒤를 따랐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이 복희씨의 아이들을 발견한 경위, 시간, 있었던 일, 심지어 형 놈의 걸걸한 입담까지 녀석들에게 깡그리 고해바쳤다. 눈앞에 나타난 아이들이란 완벽한 증거 때문인지 거시기에 털 나고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한 놈들은 별 말 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얼굴부터 구기더니 최종적으론 나를 향해 동정의 레이저빔을 쏘아댔다. 저 치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봐도 뻔했다. 이 복희씨가 더위 먹은 개처럼 날 뛸 때도 막상 뒤돌아서지 못한 나였다. 아이들이 나타났다 해서 쉽게 변하지 않을 거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염려였다. 나는 놈들의 당황스러운 얼굴을 살피며 이 기막힌 사태를 그냥 모른 척 넘어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골몰했다. 허나 나오는 건 한숨밖에 없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내 인생이 그 짝이로구나. 정녕 암울한 인생이었다. “ 저게 그 놈 아들이란 말이지. 음, 계속 보니까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어째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이 경원이 빈 밥그릇에 담뱃재를 털며 중얼거렸다. 찬밥에 우유를 말던 김 지만이 퍼뜩 고개를 쳐들고 힐끔힐끔 꼬마들을 살폈다. “ 언제 저런 애들을 만드셨을까. 부지런도 하시지.” “ 거 참 이상하네. 우리 큰 형님은 여자랑 안 자는데 어째 저 꼬맹이들이 생겼을까. 요새는 눈만 마주쳐도 애가 생기는 걸까.” 쟨 기말고사라고 아예 학교를 날로 먹을 작정이구나. 하긴 그 놈의 똥통 대학 나오나, 안 나오나 이 복신이가 청년실업에 한 일원으로서 통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잘난 깡패 형님들이 뒤에서 둘씩이나 버티고 계시는데 생일선물이라고 으리으리한 술집하나 떠안고 룰루랄라 신나게 살겠지. “ 만약 저 꼬맹이들이 진짜 우리 형님 자식이면 진짜 쟤들 인생도 참 불쌍하다. 어린나이에 감당하기엔 좀 충격이 클 텐데. 근데 아무래도 수상해. 우리 큰 형님은 열아홉 살 이후로 절대 여자랑 안 한다고……, 근데 어찌 저것들이 나왔냐 이 말씀이야.” “ 왜 여자랑 안 하는데?” 경원이 대뜸 물었다. 이 복신이 잠시 망설이다 얼굴을 굳혔다. “ 그게, 그게 아……, 하, 하여간 여자랑 안 해. 그건 확실해.” 그래, 제발 이 복신이 네 말대로 이 복희씨의 아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두커니 앉아 손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달려있는 것보다 떨어진 단추가 더 많은 누더기 봄 잠바를 입고 있는 꼬락서니가 보릿고개시절 동냥하고 다니는 동네거지들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엄마 없는 티가 나는 얼굴이란 바로 저런 상판대기들을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어릴 때 나와 권솔이 딱 저 상태, 저 꼴이었다. “ 네 형님이 여자랑 자는지 남자랑 자는지 아니면 트랜스랑 자는지 그걸 네가 어찌 아냐. 이 돌대가리야.”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는 복신의 눈꺼풀을 뽁 찌르며 경원이 토를 달았다. “ 형님은 게이잖아, 당연한 거 아냐?” 순진무구한 복신의 대답에 경원이 애늙은이처럼 혀를 찼다. 놈은 거만한 얼굴로 복신의 머리를 쓰다듬다 돌연 이마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들겼다. 복신이 아야,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 좀 봐줘, 우리 각시가 성격이 좀 터프하잖아. 응?” 콩자반 떠먹기에 혈안이 돼 있던 김 지만이 벌러덩 누워 있는 이 복신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 쳇, 네가 그렇게 감싸고도니까 쟤 성격이 날이 갈수록 더러워지나 보다. 내가 절에 갔다 온 뒤로 성격이 온순해져서 그렇지 예전 같았어봐, 저건 지금쯤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을 거다.” 복신이 입을 삐죽이며 툴툴댔다. 손에 턱을 바치고 심드렁하게 누워 있던 이 경원이 손가락을 관자놀이 부근에 빙글빙글 돌리는 시늉을 했다. 분노한 복신이 폭주하려 날뛰려는 그 순간 김 지만이 코끼리 허벅지를 이용해 놈의 허리를 감싸 앉혔다. 참담한 기분에 저것들이 아주 불을 지르는구나. “ 지랄, 지랄, 지랄, 지랄, 지랄, 지랄, 지랄하네. 까지 마, 이 새끼야. 언제 한 번 날 잡고 일대 일로 붙자. 근데 지만이랑 나는 한 몸인 거 알지?” 저 식상한 멘트 좀 보라지. 상대만 바꿔서 징글징글하게 우려먹는구만. 이 경원은 조금 독창적일 필요가 있었다. 식상한 놈을 상대로 더 식상한 놈이 외쳤다. “ 뭐,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게 1+1 세일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나도 권솔이랑 손 잡는다?” “ 염병. 권솔이 과연 그럴까?” 복신이 글썽글썽 거리는 부담스러운 눈으로 권솔을 바라보았다. 남들이 젓가락을 내려놓은 사이 침착하게 접시들을 싹쓸이하던 권솔이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새끼, 뭘 꼴아봐. 밥 맛 떨어지게. 눈깔 안돌려?” “ 이걸 어쩌나. 권솔이 어련히 알아서 손 잡아주겠다고 하시네? 어휴, 이 복신이 좋겠네, 좋겠어. 아이고, 부러워라.” 김 지만이라는 대단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이 경원이 저 좋을 대로 지껄였다. 영양가 떨어지는 그 모습에 질려 나는 시선을 비스듬히 돌려버렸다. ……닮긴 어지간히 닮았네. 어째 저 욕쟁이가 조용하나 했더니 녀석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두 꼬맹이 사이를 오가던 눈이 일순 동생 꼬맹이에게 멎었다. 아이는 시커멓게 변한 잠바 끝을 빙빙 꼬았다, 풀었다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든 아이와 시선이 맞부딪쳤다. 동그랗게 커진 눈에 경계의 빛이 서리다 이내 눈 꼬리가 살짝 쳐졌다. 나는 어수룩하게 따라 웃다가 봉지에서 귤 하나를 꺼내 아이 쪽으로 굴렸다. 꼬맹이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부지런히 귤껍질을 까서 주둥이에 통째로 몰아넣었다. 아이는 맹렬한 기세로 귤 하나를 박살내고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얼떨결에 봉지 채 내밀었다.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얼굴은 약하디 약하게 생겨가지고 먹는 걸 보면 기골이 장대한 사내 놈 같았다. 가만, 저거 여자냐, 남자냐. 형, 형 하는 걸 보면 남자긴 한데, 이건 어째 성별이 모호하게 생긴 것이 어릴 적 이 경원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복제인간도 나오는 판에 좀 계집애처럼 생겼다고 대수일까 만은 너도 학교가면 놀림 좀 받겠구나. “ 요새 꼴 같지 않은 것들이 남자, 여자 안 가리고 하잖아. 난 네 형님이 그 꼴 같지 않은 것들에 속해 있다는 것에 이번에 산 더블코트 건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나저나 야, 개집아. 야!” “ …….” “ 야, 김 개진이! 이게 정신이 잃었네, 잃었어. ……야!” 이 경원이 미친 듯이 어깨를 흔들어 대는 통에 나는 떠나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놈들이 하나같이 나를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원이 내 눈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 아서라. 지금 미치기엔 우리 나이가 심각하게 젊다?” 꼬맹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 자는 모습을 보니까 좀 닮긴 닮았네. 그렇다고 미리 겁먹고 삽질하진 마. 혹시 아냐, 이 복귀 사장의 아들이 잘못 알고 찾아…….” 녀석이 말을 도중에 끊고 이마를 툭툭 쳤다. 그리곤 다시 꼬맹이들을 유심히 훑어봤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한 순간 콜롬보 이 경원이 되어 놈은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다른 놈들까지 덩달아 녀석을 골똘히 응시했다. “ 가만 있자. 지금 보니까 이 복귀 사장을 더 닮은 거 같지 않냐.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봐, 닮았잖아. 덜 떨어진 눈매랑 재수 없는 콧대가 완전 똑같은데? 이거 진짜 사장 새끼 자식들 아니…….” “ 씨발, 사람 자는데 왜 자꾸 쳐다보고 지랄이야, 좆나 기분 엿 같네.” 꼬마의 말 한마디에 방 안이 얼어붙었다. 연체동물처럼 대굴대굴 굴러다니던 여덟 개의 눈알이 정확히 한 곳에 멈추었다. 권솔의 꾸역꾸역 밥알을 씹어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나는 애꿎은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그때 권솔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놈이 귓속말을 전해왔다. ‘잘 됐다. 애 딸린 홀아비랑 붙어먹을 거 아니지? 이 기회에 쫑 내라, 쫑내.’ 했다. 놈은 어딘가 들떠보였다. 나는 젓가락으로 놈의 주둥이를 흠씬 두들겼다. 놈은 요리조리 피하며 연신 낄낄거리기 바빴다. “ 너 방금 뭐라고 했냐.” 경원이 드디어 침묵을 깼다. 꼬맹이가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날렸다. “ 귓구멍 썩었냐. 다 들어놓고 뭘 또 처 물어보냐.” “ 무슨 놈의 애새끼들이 말본새가 그 따위야! 야 이놈의 새끼야, 너는 가정교육도 못 받았냐? 네 어미가 그렇게 가르치디? 콩알 만 한 것이 감히 어디서 동네 굴다리 밑에서 쓰던 말버릇을 그대로 씨불이고 있어!” “ 그러는 지는……. 사돈 남 말하고 자빠졌네.” 이 경원이 들고 있던 밥숟가락을 냅다 집어던졌다. 건방진 꼬마의 오른쪽 귓불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 숟가락이 벽에 쾅 부딪혔다. 아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금 전 경원이 놈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눈이 알아서 아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큰 놈만 보자면 완벽한 이 복희씨 판박이였다. 메롱적인 성격이나 밉살스러운 얼굴이 매우 흡사했다. 지금도 저 닥치는 대로 경거망동하는 모습 좀 봐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 그러는 지는? 너 지금 감히 반말했냐. 이게 어디서 반 토막 말을 씨불이고 지랄이야.” 애라고 절대 애 취급 하지 않는 이 경원이 발끈하고 나섰다. 이 복희씨가 일어날 때까지 제발 저 꼬맹이도 잠들어 있길 바랐지만 녀석은 이미 잠이 싹 달아난 듯 했다. “ 염병하네. 그러는 너는 엔간히 가정교육 잘 받았나 보다? 말 하는 걸 보면 영 아닌데, 쇼하지 마라. 개잡년아.” “ 개, 개. 뭐? 너 다시 한 번 말해봐.” “ 개잡년, 개잡년, 개잡년. 늙어서 귀까지 처먹었나, 이 개잡년아. 왜 계속 해줄까? 개잡년아.” 저, 저것 좀 봐……. 리틀 이 복희씨의 현란한 욕설에 놈들의 입이 적 벌어졌다. 가만히 있을 이 경원이 아니었다. 대뜸 손이 날아갔다. 녀석은 당장 욕바가지의 멱살을 쥐어틀고 앞뒤로 짤짤 흔들어 댔다. 아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 씨발, 놔! 안 놔? 빨리 놓으라고! 골빈 년아. 빨리 놓으란 말이야!” 꼬마는 경원이 놈이 단단히 쥐고 있는 멱살을 풀기 위해 아등바등 거렸다. 그럴수록 이 경원은 비열함과 장난기가 섞인 야수로 돌변해갔다.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뒷골이 빠개지는 것 같았다. “ 그럴 땐 빨리 놔주세요, 형. 하고 말하는 거다, 이 천박한 꼬마새끼야. 이게 감히 어디서 써먹던 버릇을 누구한테 들이대고 있어. 잠깐, 이거 보인다, 보여.” 경원이 놈은 욕바가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 틈에 녀석이 잽싸게 몸을 돌렸지만 호락호락 넘어갈 이 경원이 아니었다. 놈은 김 지만 같은 타고난 천하장사가 아니면 상대하기 힘든 불도저에 가까운 괴력 자였다. “ 역시 내 눈은 못 속이지. 네 속에 범죄자의 싹이 꿈틀대고 있는 게 보인다고, 인마.” “ 놔! 안 놓으면 죽여 버릴 거야, 너 자고 있을 때 식칼로 심장을 찔러버릴 테다!” 경원이 깜짝 놀란 척 너스레를 떨었다. “ 아이고, 무서워라. 이거 너무 무서워서 오줌이 줄줄 나올 거 같은데? 염병, 이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어릴 때 뿌리 뽑지 않으면 이놈 커서 9시 뉴스 꽤나 출몰하겠는데? 어이 아가, 너는 앞으로 나를 만날 걸 두고두고 고마워 할 것이다. 왜냐, 내가 오늘 네 버릇을 싹 뜯어고쳐 놓을 생각이거든.” “ 지랄하지 마, 미친년아. 고치려면 네 얼굴부터 고쳐.” 이 경원이 삽시간에 얼굴을 굳혔다. 시종일관 하하, 웃으며 거 맹랑한 꼬마네 소리 외엔 조용하던 김 지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한 마디 하겠다는 뜻이다. “ 꼬마야, 우리 솔직히 말해볼까요. 저 형이 화내서 밉다뿐이지 예쁘긴 하지요오? 어릴 때부터 거짓말 하는 버릇은 못 써요. 거짓말 하면 나쁜 사람…….” 지만아, 욕을 해도 안 듣는 애한테 그 느끼한 존댓말은 좀. 역시나 아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지만이 놈을 가잖다는 듯이 훑어봤다. “ 뭐야, 이 멧돼지 같은 새끼는.” 것 봐라, 내저럴 줄 알았다. 김 지만이 밥상에 철퍽 쓰러졌다. 아랫목에 앉아 이를 쑤시며 권솔이 보다 못해 한 마디 했다. “ 시끄러워 밥을 먹을 수가 없잖아! 적어도 식사시간에는 조용히 해야 될 거 아니야!” 자연스레 놈의 밥그릇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밥 풀 하나 없이 삭막하게 말라있는 빈 밥그릇만 해도 벌써 세 개 째였다. “ 씨발 새끼, 돼지처럼 지금까지 퍼먹었으면 됐지. 너나 아가리 닥쳐.” 욕바가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솔이 뒷목을 잡고 넘어가는 시늉을 했다. 경원이 욕바가지의 이마를 검지로 툭툭 밀며 말했다. “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나! 진짜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녀석이 주먹으로 욕바가지의 머리통을 쾅쾅 내리쳤다. 그 기세에 욕바가지가 뒤로 휘청거렸다. 제 형 등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던 꼬맹이가 주춤 물러나다 발이 꼬이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꼬맹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훌쩍이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자 얌전히 울음을 그쳤다. 역시 아이들도 누가 볼 때 울어야 제 맛인 걸아는 모양이었다. “ 뭐야,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드르륵ㅡ. 예기치 못한 순간, 제일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 딱 맞춰 방문이 열렸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툭툭 털며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는 이 복희씨였다. 타이밍도 절묘하시지……. 암담함에 몸이 휘청거렸다. 그 사이 녀석들은 일사불란하게 아랫목 주위를 벗어나 연탄불이 잘 들어오지도 않는 구석지에 일렬로 처박혔다. 뒤에서 주둥이 불어터져라 씹던 놈들이 순식간에 말 잘 듣는 일등급 충견으로 돌변해 있었다. 제 몸 하나 기가 막히게 챙기는 놈들다웠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이르라고 닦달하던 이 경원이 제일 간교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 정신사납다, 앉아.” 이 복희씨가 축축해진 수건을 휙 던지고 아랫목에 앉자, 그제야 놈들이 하나둘 이 복희씨 눈치를 살피며 엉덩이를 내렸다. 일식집 종업원처럼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은 채였다. 나 참, 이럴 땐 어쩜 저렇게 단합이 잘 되는지, 원. 아침만 되면 이 거지같은 꼴을 해야 되니 놈들에겐 생지옥이 따로 없을 테지. 놈들이 왜 이사를 부르짖는지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이 복희씨가 어깨에 묻은 물을 툭툭 털며 김 지만에게 턱짓을 했다. “ 담배.” 김 지만이 쏜살같이 담배를 꺼내 이 복희씨 입에 물려주었다. 불까지 옵션으로 대령해 받쳤다. 이 복희씨가 재떨이, 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그의 발밑에 현란하게 생긴 즉석 귤껍질 재떨이가 이동되었다. “ 왜 꿔다놓은 보리자루마냥 왜 그렇게 앉아있냐. 춥다, 이리와.” 이 복희씨가 내게 손을 까닥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밥하랴, 빨래하랴 부산을 떠느라 녀석들에게 고스란히 자리를 뺏긴 후, 나는 줄곧 문가 옆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딱 부엌데기 형상이었다. 이 복희씨의 못마땅한 시선을 눈치 챈 녀석들이 슬금슬금 서로의 등을 떠밀었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군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이 복희씨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으니……. “ 너지? 네가 이 복희란 놈이지? 맞지? 맞지? 엄마가 말하던 거랑 쌍판떼기가 아주 똑같네. 딱 이다, 딱 이야. 그래, 너 마침 잘 걸렸다.” 욕바가지가 이 복희씨에게 달려들어 냅다 턱을 후려갈겼다. 그의 얼빠진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기겁을 하고 벽에 바짝 붙었다. 욕바가지의 고사리 손이 다시 한 번 복희씨의 뺨을 노리고 날아간 순간, 그가 앉은 상태에서 욕바가지의 배를 뻥 걷어찼다. 입에 걸레를 물었다 해도 어린애였다. 가벼운 몸뚱이가 허공에 부웅ㅡ, 하고 날아가 벽에 쾅 부딪힌 뒤,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쥐죽은 듯 앉아있던 꼬맹이가 제 형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 형, 형! 죽었어? 죽었어? 엉엉……어, 어떡해. 형, 형. 죽지 마.” “ 형? 이 거지들은 뭐야. 얼굴이 고장 난걸 보니 중국산이냐.” 이 복희씨가 훌쩍이는 꼬맹이를 거칠게 밀어내고 욕바가지의 발목을 질질 끌어내렸다.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있던 욕바가지가 쇠꼬챙이에 찔린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 놔! 놔! 이 씨발 새끼야. 네가 뭔데 날 때려! 네깟 놈이 뭔데! 뭐냐구우! 남자가 쪼잔시렵게 무서워 내빼기나 하고, 에라이!” 욕바가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경원이 아무리 협박을 해도 울지 않던 놈이 대성통곡할 기세였다. 옛 선조들이 왜 회초리로 자식을 키웠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복희씨가 욕바가지의 발목을 단단히 틀어쥐고 위로 휙 뒤집었다. 아이의 자그마한 머리통이 방바닥에 퍽퍽 부딪히다 잽싸게 들어 올려졌다. “ 정도껏 까불어야 귀엽지. 애라도 안 봐준다.” 욕바가지가 최선을 다해 주먹을 뻗었다. 이 복희씨가 틀어쥐고 있는 발목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힘없는 욕바가지의 몸뚱이가 요란하게 펄럭거렸다. 머리가 아픈지 놈이 꽥꽥 악을 질렀다. “ 내려놔. 내려놓으라고! 이 미친 새끼야. 네가 감히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있냐구우! 자식 버리고 도망간 주제에 뭐 잘났다고 큰 소리야!” 이 복희씨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 ……반말? 너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냐.” 또 저 발끈하는 반말타령 나왔다. “ 그래, 너한테 하는 소리다. 이 븅딱아. 왜, 아니라고 잡아 뗄 생각이냐?” 욕바가지가 구석에 처박혀 훌쩍이는 꼬맹이를 가리켰다. “ 네가 내 동생이랑 나 버리고 내뺐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 누가 그래? 네 어미가? 이거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을 잘못 찾았어. 하늘을 봐야 별을 따……아, 이런. 별은 다른 놈이 본 거 같군.” 이 복희씨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툭툭 쳤다. “ 개수작 떨지 마. 이제 모른 척 하겠다 이거냐? 치사한 새끼.” 복희씨가 아이의 발목을 반으로 접어 휙 집어던졌다. 구석에 처박힌 제 형에 달려가려는 꼬맹이를 경원이 붙잡아 무릎에 앉혔다. 꼬맹이는 끊임없이 훌쩍거리면서도 크게 반항하거나 품을 빠져나가려는 기색은 없었다. 역시 순한 애들은 상대하기가 편하네. 잠시 한 눈판사이 이 복희씨가 숨을 홱홱 거리는 욕바가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는 아이의 인중 인정사정없이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인중은 명치중 하나라 잘못 건드리면 죽, 죽는다던데……. 심장이 덜컹했다. 일순간 녀석들이 딱딱하게 굳은 채 욕바가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종이인형처럼 흔들리던 아이의 몸이 뒤로 풀썩하고 꼬꾸라졌다. 동시에 팍 하고 터진 코피가 턱 밑으로 줄줄 새나왔다. 뭉글뭉글 번지는 핏물을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복희씨가 갑자기 티브이 안테나를 가볍게 뜯어냈다. 그는 말릴 새도 없이 욕바가지를 들쳐 메고 밖으로 나갔다. 녀석들이 우르르 뒤를 쫒았다. 이 복희씨는 마당 한 복판에 걸려 있는 빨랫줄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옷들이 땅바닥에 후루룩 떨어졌다. 그는 안테나를 욕바가지의 겨드랑이에 하나씩 끼우고 빨랫줄로 녀석의 허리를 꽁꽁 묶은 뒤, 대문에 살짝 걸쳐놓았다. 아뿔싸, 나는 그제야 이 복희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했다. 저놈의 일제치하 전기고문을 재탕해먹으려는 속셈이었다. 욕바가지의 머리 위에 흉흉한 두꺼비 집이 입을 적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마르지 않는 빗물 덕에 지지직거리는 불꽃소리가 파닥파닥 거렸다. 아이는 흐르는 코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 뭐, 뭐하는 거야! 이거 놔! 당장 놓으란 말이야!” 이 복희씨가 욕바가지의 뺨을 연달아 후려쳤다. “ 이거 잘못했다고 싹싹 빌 때까지 풀어주지 마. 오늘 오후부터 비 온다고 했으니까 기쁜 마음으로 전기 좀 통해봐, 꼬맹이. 적당히 불꽃 좀 맞아주면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게 될 거다. 신나지 않아? 아주 재밌을 거야. 기대하고 있으라고.” 제 말만하고 이 복희씨가 매몰차게 돌아섰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와 내 앞에 멈춰 섰다. “ 내 허락 없이 혼자 삽질하면 죽어.” “ ……네?” “ 오해하지 말란 뜻이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야.” 그가 우격다짐 격으로 강조하며 말했다. 내가 아무 말도 않자 이 복희씨의 미간이 주름이 잡혔다. “ 글쎄 내 애 아니라니까? 열아홉 살 이후로 여자랑 한 이불을 덮은 기억이 없는데 애는 무슨 놈의 애야.” “ 또 모르죠, 뭐. 그건 제가 확인해 볼 수 없는 문제니까…….” 나는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복희씨의 얼굴 또한 흐려졌다. 그는 갑자기 내 입술 양 쪽에 검지를 쑤셔 넣고 억지로 입 꼬리를 들어 올리려 했다. 나는 나대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녀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놀고들 있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뻘쭘했다. “ 잤다고 해도 나는 그 새끼처럼 뒤처리가 미진하지 않아.” “ ……그 새끼라니, 누구.” “ 누구긴 누구야 내 인생의 오점인 거머리 자식 하나 있잖아. 아니지, 둘이었지.” 이 복희씨의 고개가 묘하게 틀어졌다. 그의 시선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주위를 살피며 주입 집 할머니 장독에서 몰래 고추장을 훔쳐 먹고 있는 이복신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나, 이 복희씨가 제 동생을 알긴 알고 있었구나. 이 복희씨가 나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가 복신이 놈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눌러 비틀었다. 복신이 팔을 붕붕 저으며 살기를 간청하자, 뒤늦게 손을 풀었다. 녀석의 볼 한쪽에 진득한 고추장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네 형, 내 눈에 머리카락 하나 안 보이게 꽁꽁 숨어 있으라고 해. 혹시 눈에 띄었다 싶으면 무릎에 신발신고 살아가게 될 거야. 그리고 똑똑히 전해. 오늘 당장 저 떨거지들 쓸어가라고.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복신이 열심히 훌쩍이며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복희씨가 사우나 명목으로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하고, 나는 거부하는 이복신이를 끌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김 지만과 권솔은 막중한 장보기 당번의 일임을 임무하기 위해 120만 원짜리 똥차를 끌고 시장에 토낀지 3시간이 넘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분명 김 지만이 포장마차에 죽치고 앉아 내장 터지게 떡볶이를 퍼먹고 있을게 확실했다. 갈굴 놈들이 없어 심심했던 차에 이 경원이 염탐하는 살쾡이 눈으로 은근슬쩍 따라붙었지만 보란 듯이 문을 닫아버렸다. 문 뒤에서 육시랄로 시작해서 십장생으로 빠졌다가 저주로 마무리 되는 육두문자가 생 라이브로 들려왔다. 더럽혀진 귓구멍 몇 번 후벼주고 모른 척 했다. 곧이어 시위하듯 티브이 볼륨소리가 높아졌다. 유치한 놈, 무슨 대단한 비밀얘기라고 하는 줄 아나……. 맨 바닥에 쭈그려 앉는 복신이 놈에게 대뜸 핸드폰을 내밀었다. 놈이 얼떨결에 핸드폰을 건네받고 머리를 긁적였다. “ 전화해봐, 사장님한테.” “ ……왜, 받을지도 모르는데?” “ 받을지도 모르는 데라니. 당연히 받으라고 하는 거야, 자 빨리 번호 찍어.” 나는 싱크대 서랍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바닥에 깔고 앉았다. 친절히 폴더까지 열어주었다. 복신이 푹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글쎄, 우리가 아무리 형제라지만 전화통화를 할 정도로 친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 그래도 이 복희씨 보다는 더 친할 거 아니야?” 녀석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그야 그렇지. 작은 형님은 적어도 때린 다음날엔 잘해줬으니까. 하지만 큰 형님은……!” 녀석이 목멘 소리로 말하다 울컥했다. 실룩거리던 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기어코 굵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사랑스러운, 아니 자세히 보면 어딘가 사랑스러울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 동생에게 이 복희씨가 도대체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고작 말 한마디에 눈물을 보이는 걸까. 궁금했지만 절대 깊이 알고 싶진 않았다. 나는 키친타올을 뜯어 녀석에게 건넸다. 그 짧은 순간 이복신의 얼굴에선 제 삶을 돌아보는 20대 젊은이의 희로애락이 녹아있었다. 나는 놈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애수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한 복신이 키친타올에 그르렁그르렁 코를 풀며 말했다. “ 작은 형님한테 전화만 걸어주면 되는 거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번호를 찍었다. 몇 번 통화음이 가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어보나마나 이제는 빈털터리 도박꾼이 된 이 복귀 사장이었다. 「 누구냐. 」 “ 형, 형님 저 막낸데……요.” 「그런 사람 모른다.」 뚜뚜ㅡㅡㅡㅡ. 분명 이 복귀 사장 목소리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전화가 끊겨졌다. 내가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복신이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탈탈 털어댔다. 힐끔힐끔 방문을 살피는 것이 제대로 토끼려는 심산이다. 나는 가까스로 녀석을 주저앉혔다. “ 한번만 다시 해봐.” 이 복신이놈 주둥이가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 그런 사람 모른다잖아, 가만 생각해보니까 이 번호도 엄청 오래된 거야, 그 사이 번호가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 이 복신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지껄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 그럼 아까 그 목소리는 뭔데? “ 전화만 다시 걸어주면 되지?” 진즉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녀석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번호는 누르는 동안 나는 늘어지게 만들어 놓은 누룽지를 꺼내 먹었다. 티브이 소리를 뚫고 신호음이 울렸다. 복신이 애꿎은 새끼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뚝ㅡ. 전화를 받긴 했는데 이번엔 말이 없었다. 복신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저 형님, 저 막낸데요. 이 복신이요. 복신이.” 이 복귀 사장이 무 자르듯 복신의 말을 낚아챘다. 「 옆에 누구누구 있냐. 」 지독히도 퇴폐적인 그 목소리에서 예전에 느꼈던 기고만장한 자신감과 타인에 대한 우월감은 눈 씻고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일용직 노동자의 아픔과 슬픔이 배어나오는 굴곡진 목소리에 날선 경계심을 읽을 수 있었다. 복신이 잽싸게 나를 쳐다봤다. 수화기를 막고 ‘뭐라고 해.’ 입모양으로 물었다. 나는 ‘대충 둘러대.’ 하고 즉시 대답했다. 복신이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옆에 아무도 없습니다. 저 혼잡니다, 형님.” 핸드폰 너머에서 톡 쏘는 비웃음이 뚫고 들어왔다. 복신과 내가 동시에 흠칫 몸을 굳힌 건 사장의 다음 말 때문이었다. 「 네가 앉은 자리의 오른 쪽 방향에서 바람소리가 들린다. 바람소리를 보아하니 대체로 콧구멍이 크고 얼굴이 넓적한 놈일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 이거 돗자리 깔아야 되는 거 아니야. 아주 졸도하시겠구만……. 그때 은근슬쩍 내 코 평수를 확인한 이 복신이 킥킥거렸다. 혹시 콧구멍에 이물질이? 몰래 콧구멍 좀 후빌까 하다 없어 보일까 싶어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넓은 얼굴하면 딱 떠오르는 놈이 하나있지. 옆에 버젓이 도라에몽을 놔두고 내게 잘도 거짓말을 했겠다? 이 복신이 갈비뼈 잘 추스르고 있어라. 조만간 자고 일어나면 몇 개 없어져 있을 것이다. 언제 한번 시간 될 때 경찰서에서 만나자. 제길! 내가 지금 얘랑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복신이 후딱 전화한 용건이나 말 하 거라.」 이 복귀 사장이 나근나근하게 말했다. 이 복신이 공포에 벌벌 떨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미친 듯이 손을 저었다. 녀석이 우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 오늘 아침에 어떤 꼬맹이들이 찾아 왔어요. 그거 혹시 형님하고 관련된 애들 입니까.” 「 뭐라는 거냐. 알아듣게 설명 하 거라. 」 “ 꼬맹이 둘이라구요, 둘. 목에 큰 형님 명함을 끼고 집 앞에 서 있었다던 대요. 그리고 한 놈이 계속 큰 형님이 자기 아빠라고 우기더랍니다.” 벼락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 뭐야! 이 망할 놈의 할망구가 미쳤나. 이번 달 양육비 좀 깎았다고 고세를 못 참고 애들을 보내? 이런 빌어먹을! 」 복신이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녀석이 내 속을 빠져나온 것처럼 족집게같이 질문을 던졌다. “ 그럼 형님 애들이었습니까? 이상하네, 꼬맹이들은 큰 형님을 아빠로 알고 있던데요.” 「 그야 당연히 내가 형님 통장으로 돈을……, 이만 끊는다. 죽기 전에 한 번 만나자.」 내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는 복신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헤헤헤, 웃었다. 녀석이 그 틈에 내 손에 들린 누룽지를 훔쳐 방으로 달아났다. 무슨 정글도 아니고 방심할 틈을 주면 안 돼……. 그러나 지금만큼은 저 덜떨어진 모습도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포용하려 애썼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복희씨 아이가 아니란 건 확실한 거잖아. 꽤 소득 있는 전화 통화였다. 꼬맹이를 이층 침대에 겨우 재우고 즉시 대문에 걸린 욕바가지를 구하러 출동했다. 껌을 고기 씹듯이 질겅거리던 이 경원은 비가 올 때까지 기다려 욕바가지의 몸에 흐르는 전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자식이었다. 복신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바람에 도미노처럼 경원이 놈과 나도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욕바가지의 얼굴이 아주 개떡이었다. 실로 참담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끊임없이 왈왈거리던 경원이 놈마저 몰골이 아리송하게 변한 욕바가지를 확인하고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을 정도였다. 누가 아동학대죄로 신고하지 않은 게 용했다. 피에 푹 젖은 봄 잠바가 아이의 몸을 힘겹게 감싸고 있었다. 늘어져 있는 목을 보니 꽤 오래전에 기절한 듯 했다. 좀 더 빨리 오려 했는데 이게 다 이 복희씨 때문이었다. 곧장 방에 몰아넣고 오줌도 못 누게 감시를 하는 통에 한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우선 욕바가지부터 끌어내렸다. 이 복희씨의 말마따나 두꺼비 집에서 지지직거리는 전기 통하는 소리가 기똥차게 울리고 있었다.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안테나를 수돗가 쪽으로 던지고 아이를 등에 들쳐 업었다. 당장 대문을 박차고 나가려는데 이 복신이 손을 저었다. 놈이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훑어보며 내뱉었다. “ 병원 갈 정도는 아니야. 애초에 입원할 정도로 패지도 않았을 거고.” 이 복신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녀석은 욕바가지의 윗입술을 들쳐 잇몸을 매만졌다. “ 부러지진 않았네. 따뜻한 물로 씻겨서 몇 시간 푹 재운 다음에 밥 먹이고 약 먹이면 끝나. 겉만 그렇지 속은 하나도 안 다쳤어. 대충 혈관만 건드린 거야. 애들은 피를 보면 우선 놀라니까. 내 생각엔 형님이 저 꼬맹이 기부터 죽이려고 그런 거 같은데. 뭐 놀래서 기절한 걸 보면 반쯤 성공한 거 같다.” 오, 그런 거였군. 하긴 아무리 그래도 앤데 병신을 만들었을라고. 그나저나 저 놈이 저렇게 말을 잘 했나. “ 죽 같은 거 먹여야 되나?” 나는 몰라보게 대학생다워진 위대한 이복신이를 향해 멍청한 질문을 던졌다. 경원이 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이 복신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이 복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이도 멀쩡한데 죽은 무슨. 밥 줘, 밥. 지가 알아서 잘 먹을 거다. 아마 일어나면 적어도 몇 시간은 고분고분 할 거야. 저때 내가 형들한테 얻어맞고 딱 저랬거든. 애석하게도 저거 얼마 안 있다가 변해. 원래성격 돌아오는 거 금방이야. 근데 형님이 이, 삼일 후로 버릇 싹 뜯어고쳐놓을 테니까 열 받아도 그때까지만 참아.” 복신이 위로차원에서 경원이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녀석은 이 복신이의 팔을 휙 떨쳐내고 내 등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아이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이게 고작 이, 삼일 안에 성격이 바뀔 거라고? 진짜?” “ 지금 못 믿겠지만 나는 백 프로 바뀐다고 봐. 형님이 애새끼들 두들기는 건 또 일가견이 있거든. 제발 머리만 안 맞게 조심해야 하는데, 잘못 맞으면 영어 단어 하나 외우고 두 개 까먹게 되는 부작용에 시달리게 되니까 말이야.” “ 그거 네 얘기지?” “ 딱 네 얘기네.” 경원이 놈과 동시에 외쳤다. 복신이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녀석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헉! 그걸 어떻게 알았어?” 위대한 이 복신이 어느새 꼴통 이 복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절규하는 녀석을 무시하고 경원이 놈은 자기 방으로,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욕바가지를 침대 기둥에 삐뚜름하게 세워놓고 비린내 풀풀 풍기는 누더기 잠바부터 벗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수건에 물을 묻혀 얼룩덜룩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그리곤 곧장 부엌으로 날아가 가스 불에 물을 펄펄 끓였다. 고기를 못 먹어서 그런지 자그마한 얼굴에 이끼 같은 버짐이 다닥다닥 피어 있었다. 내 자식도 아닌데, 뭐……. 하다가 순간 뜨끔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삭막하게 변해 버렸나. 정신 나간 놈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찬물 섞으랴, 흐느적거리는 욕바가지를 씻기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또래에 비해 비정상적이게 마른 몸뚱이가 물 먹은 솜처럼 픽픽 꼬꾸라지기 일쑤였다. 허벅지로 허리를 간신히 옥죄어 넣고 물속에 욕바가지를 담가 땟물을 짤짤 빼냈다. 자동 탈수 기능까지 해주고 나자 이제 내 몸에서 삑삑 적신호를 알렸다. 마른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주고 고스란히 침대까지 내준 뒤에 연탄까지 갈아줬다. 일등급 호텔에서도 이 정도는 못해줄 것이다. 이 고마움 저 싹퉁바가지께서 알까 몰라……. 방안에 코고는 소리가 진동했다. 꼬맹이들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 후에야, 나도 쓰러지듯 곯아떨어졌다. < 마중 나와.> 달나라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을 때 놈들은 집에 없었다. 고세를 못 기다리고 저들끼리 먼저 나갔군. 뒤늦게 저녁을 먹고 가게로 나가려하는데 삑 문자가 울렸다. 이 복희씨였다. 신나게 사우나 하러 간 놈이 일가는 사람에게 마중이라니, 몰상식한 자식 같으니라고. 지랄하기 전에 두툼한 파카만 달랑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열자마자, 꼴랑 문 뒤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 복희씨의 모습이 보였다. “ 다 왔으면서 들어오지 왜 마중이니 뭐니 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구는 겁니까?” 이게 사람이 말하는데 쳐 다도 안 봐? 기분이 팍 상했다. 툴툴대며 이 복희씨 뒤로 다가섰다. 저 놈 저거 아직도 저 거지같은 버릇 못 고쳤네, 쯧쯧……. 이 복희씨는 손바닥 만 한 길이의 두툼한 지렁이를 한 손에 들고 잭나이프로 몸통을 서걱서걱 쳐내고 있었다. 새카만 동공이 붉은 살기로 사납게 번뜩였다. 지렁이 살인마가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뿔사, 때마침 초대형 지네가 섹시하게 몸을 빌빌 꼬며 이 복희씨를 바라보았다. 외설적인 눈빛이었다. 이 복희씨의 입술에 침이 흥건히 고여 들었다. 지네의 꼬임에 넘어간 이 복희씨가 덥석 손을 뻗는 순간 나는 쿵쿵 발소리를 냈다. 그가 성의 없이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봤다. 차가운 그 눈빛에 죄지은 것도 없이 가슴이 뜨끔했다. “ 지렁이가 먼저 그랬다.” “ ……네? 뭐가요.” 그는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변명을 했다. “ 못 믿겠지만 지렁이가 나한테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이야!” 구라가 날이 갈수록 수준급이었다. 이 복희씨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삭막하게 인생을 마무리한 비천한 지렁이들에게 침묵으로 심심한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잠시 후, 내가 말했다. “ 알았어요, 지렁이가 참 나빴네요. 나 지금 가게 나가봐야 돼요. 오늘 야간이죠? 그럼 아침에 봬요.” 고개를 까닥하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쌩하니 내빼려는데 담배꽁초를 전봇대에 비벼 끄고 이 복희씨가 다른 손으로 내 팔목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저 놈은 관자놀이에도 눈알이 박힌 게 틀림없다. “ 마당에 걸어놓은 꼬맹이 어쨌냐. 안 보이던데? 누구 소행이야, 빨리 이실직고 하시지.” 이 복희씨는 시선이 내 어깨너머 대문을 훑어봤다. 돌연 내 팔을 질질 잡아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방향이 어째 요상하다. 이 복희씨는 왔던 길을 되돌아 골목을 벗어나고 있었다. “ ……어, 어디 가는데요?” “ 배고프시다.” 동맥이 찢어져라 쥐고 있는 손의 악력 때문에 뼈가 지끈지끈했다. 한참을 말없이 끌려가다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다. 그 틈에 시간을 확인했다. 정각 7시였다. 맙소사, 30분이나 늦었잖아……. 놈들이 셋이나 있어봤자 장사준비는커녕 지금쯤 저녁밥이다 뭐다 잡다한 구실로 위액 올라오게 퍼먹은 다음 돼지처럼 퍼질러 자고 있을 게 뻔했다. 곧장 가게로 날아가도 오늘 장사를 말아먹나, 마나하는 기로에 서있는데 저녁은 무슨 놈의 저녁. 더군다나 찬밥 남은 걸 아깝다고 위속에 몽땅 때려 붓는 통에 내장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 지금 가게에 가야한다구요. 늦었어요, 늦었다구우!” 담배를 찾는지, 뭘 찾는지 추리닝 윗도리를 뒤적거리는 이 복희씨의 등짝을 팡팡 두들겼다. 그가 분노한 기색으로 날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화난 게 아니라 평소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까진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 너 하루 없으면 그 움막집 망한다고 하더냐? 적당히 궁상떨고 밥 먹으로 가자.” “ 아까 많이 먹어서 전 배 하나도 안 고픈데요? 이 복희씨도 집에서 밥 먹어요. 집에 밥 많은데 왜 괜히 밖에서 돈 쓰나요.” “ 어휴, 식비 모아서 김 계진이 63빌딩 주인 되는 날도 멀지않았네? 이러다 이 건희 이기고, 빌게이츠랑 맞먹겠어. ……감히 까불어? 말대꾸 딱딱 하지 마.” “ 내가 언제 말대꾸를 했다고, 참나. 그리고 나 배부르다니까요.” 이 복희씨가 갑자기 쌩뚱맞을 정도로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이거 영 불안한 것이 또 뭔 말을 하고 싶다는 뜻인데……. “ 싫어? 싫으면 시집가라.” 그래, 저거였나 보다. 녀석들이 없길 다행이었다. 들었으면 9박 10일 놀림감이었다. 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자, 이 복희씨가 은근히 실망한 얼굴로 이쪽저쪽 정처 없이 눈알을 굴렸다. “ 뭐야. 재미없냐. ……흥!” 저딴 덜떨어진 유머를 쳐놓고 호응을 바라는 이 복희씨의 남을 배려하지 않는 척박한 성격에 잠시 갈등을 때렸지만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힘겹게 입 꼬리를 들썩거렸다. 잘 올라가지 않는 걸 억지로 올리느라 아주 죽을 맛이었다. 내 인위적인 미소 앞에 이 복희씨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이윽고 기분이 좋아진 이 복희씨가 거만하게 말했다. “ 돈 생겼다, 꽁 돈. 비싼 거 사줄게. 칼질하는 걸로.” “ 칼질은 뭐, 그다지. 근데 꽁 돈이 왜 생겼는데요? 누구 돈 빌려줬었어요?” “ 빌린 돈 받는 게 왜 꽁 돈이냐, 그거야 당연한 거고. 야, 꽁 돈이라니까, 꽁 돈. 꽁 돈 뜻 몰라?” 배부른데 저 생각해서 억지로 밥도 먹어주려는 사람한테 이거 어디서 성질이야……! 때마침 신호등이 바뀌었다. 이 복희씨가 손을 죽 잡아당겨 제 호주머니에 내 손을 쑤셔 넣었다. 사람들이 괜히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았다. 사내새끼 둘이 손잡고 가는 꼴이 퍽이나 재밌을 것이다. 겨울이라 어두워서 다행이지 여름이었으면 쪽팔려서 이 자리에서 바로 즉사하고도 남았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복희씨가 손을 더 단단히 쥐었다. 이 양방은 부끄러움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모르는 모양이었다. “ 그러니까 그 꽁 돈이 왜 생겼냐고요. 복권이 당첨 된 것도 아닐 테…….” “ 맞아, 로또 맞았어. 그것도 왕 대박으로.” 미심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당장 탐문수사에 나섰다. “ 이거 어째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이 복희씨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다가 급하게 주둥이를 닫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서 묘하게 빗겨나 있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한번, 두 번, 세 번 연달아 이 복희씨와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확인했다. ……이건 또 뭐야! 그는 액세서리 노점상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복희씨가 갑자기 몸을 휙 돌려 리어카 앞으로 걸어갔다. 젊은 남녀들이 바글바글했다. 어째 골라도 사람들이 제일 많은 곳에서 멈춰선 이 복희씨가 산 낙지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어 있는 커플을 헤집고 억지 반, 완력 반으로 나를 거울 앞에 세웠다. 수많은 눈깔들이 내게 우수수 쏟아졌다. 앞뒤 사람들로 인해 집중 포화상태에 이르러 파카 깊숙이 고개를 처박았다. 쪽팔려서 눈물이 찔끔 났다. “ 사고 싶은 걸로 사.” 손, 손님 뭘 드릴까요, 하고 묻는 젊은 총각을 무시하고 이 복희씨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음정박자를 박살내고 멋대로 휘파람을 불렀다. 젊은 주인장이 손님 기분 좋은 신가 봐요, 하고 물었다. 이 복희씨에게서 미친놈, 네 놈이 알거 없잖아,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복희씨는 장승처럼 꼿꼿하게 서있는 나를 대신해 지가 알아서 핀과 머리띠를 고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도무지 실용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왕 큐빅 특대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핀을 한참동안 불빛에 비춰보던 이 복희씨가 갑자기 내 정수리에 냅다 꽂아 박았다. “ ……아아악!” 도살장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울부짖었다. 오버 안 하고 그 짧은 순간 달나라까지 뛰어 올라갈 뻔 했다. 그는 생살을 파고드는 공포에 벌벌 떠는 나를 무시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이게 왜 이러냐. 씨발, 이거 불량품 아냐? 이 복희씨가 내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어찌나 손이 날쌘지 피하고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그는 씩 웃으며 핀을 일직선으로 세워 내 정수리에 꼴아 박았다. “ ……아아아아아악!” 거짓말 안 보태고 진짜 바지에 피 똥 쌀 뻔했다. 드르륵드르륵 두피 긁히는 소리가 싱싱하게 울려 퍼졌다. 이런 미친놈, 핀을 세로로 꽂는 놈이 어디 있냐! 차라리 나를 때려라, 아니면 욕을 해! 여기저기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핀을 고르는 시커먼 사내놈 둘에게 오묘한 관심이 집중 된 탓이다. 등 뒤, 옆, 대각선 할 것 없이 게이가 어쩌고 호모가 어쩐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 어라? 왜 그러지. 제대로 꽂았는데 자꾸 떨어지네? 다시 한 번…….” 저 봐라. 핀 끝에 불그스름한 핏자국이 묻어 있는 걸 보란 말이다! 이 복희씨가 내 머리카락을 쑥쑥 잡아당기며 살인무기를 대갈빡 위로 가져갔다. 나는 펄쩍 뛰어올라 이 복희씨와 일정거리를 두고 섰다. “ 남자가 핀은 무슨! 나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제발 밥 먹으로 가요, 갑자기 미친 듯이 배고파 죽겠어요. 제발요!” “ 아니야, 밥은 나중에. 나 돈 많다니까? 너한테 선물하나 못 사줄까. 빨리 고르기나 해.” 남자한테 머리핀을 마음껏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놈의 얼굴이 잔뜩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그는 괜히 이유도 없이 핀들을 들었다, 놨다하면서 팔꿈치로 나를 찔렀다. “ 사준다고 할 때 마음껏 골라보라니까 그러네?” “ 선, 선물은 나중에요. 우선 밥, 밥부터 먹고 나서 좀 생각해보자구요!” 대가리가 박살날 지경에 놓인 후에야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 복희씨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내 뒷머리 채를 낚아채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핀을 앞머리 한가운데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 ……이야, 죽이는데? 딱 네 거다, 네 거. 어두워서 그런지 유별나게 잘 어울린다. 꼭 뭐냐, 그거! 아! 대가리에 붙은 닭 벼슬 같다. 옳지, 이봐. 꼬꼬댁 한 번 해봐. 꼬꼬댁, 꼬꼬. 자, 해봐.” 그는 이와 중에 빌어먹을 닭 성대모사까지 요구했다. 내가 꾸물대자 그는 답답했는지 빨리해, 빨리! 하고 어린애처럼 보챘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속삭였다. “ 꼬, 꼬꼬댁, 꼬꼬.” 이 복희씨가 파안대소하며 내 어깨를 움켜쥐고 고개를 처박았다. “ 그걸 시킨다고 진짜 하냐. 완전 멍청하네, 이거.” “ 하, 하라면서요. 지금 뭡니까! 사람 놀려요?” 나는 볼멘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이 복희씨가 특유의 질질 끄는 말투로 귓가에 속삭였다. “ 팬티까지 홀딱 벗고 대갈빡에 그 닭 벼슬만 하나 꽂고 있으면 정말 죽일 거야. 그렇지?” 얼굴에 뜨거운 김이 확 솟구쳤다. 이 음담패설의 황제 같으니라고. 아니지, 저 놈은 나사가 풀려서 화내고 성질내면 좋아라하고 더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은 밖이다. 보는 사람들이 많다. 구경꾼이 몰리는 최악의 상황의 연출하진 말자. 고로 입 닥치고 있자. “ 이봐, 멸치 대가리. 저거 얼마야.” 이 복희씨는 어느새 주인 총각 앞에 서서 내 머리에 매달려 있는 머리핀을 가리켰다. 얼굴이 심각하게 갸름하긴 했지만 멸치까진 아니었다. 주인 총각이 매우 부적절한 표정을 지었다. “ 이만 팔천 원입니다. 큐빅이 많아서 조금 비싸요, 손님.” 이 복희씨가 지갑을 꺼내다 멈칫했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 비싸긴 한 모양이었다. “ 나 참, 뭐가 이렇게 비싸. 좀 깎아. 이만 오천 원이나 감사하게 받으라구.” 그는 제가 알아서 가격을 흥정하더니 지갑에서 이만 오천만원 덜렁 꺼내 주인 총각에게 적선하듯 던져주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만 원짜리를 얼떨결에 주워든 주인총각의 얼굴이 벌집에 쏘인 것처럼 삐쭉 삐죽거렸다. “ 아니, 손님. 그건 원가도 비싸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아요. 이만 오천원면 저는 뭐 먹고 사나요. 대단한 적잡니다. 적어도 십 원 하나는 남겨야 저희도 장사를 하지요.” 제발 이 복희씨가 삼천 원을 저 안타까운 총각에게 건네주길 바랐다. 이 복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듣는 척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내 머리에 달려 있는 핀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는 억지로 큐빅 몇 개를 뜯어 주인장에게 내밀었다. “ 자, 됐지? 큐빅 삼천 원 어치 뺐으니까 그만 좀 징징거려. 우린 바빠서 이만 가볼 테니까 돈이나 많이 벌라구.” 이 복희씨는 큐빅이 듬성듬성 빠진 볼품없게 변한 핀을 억지로 내 앞머리에 매달아 주고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그가 안 볼 때 잽싸게 핀을 빼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벙 쪄 있는 주인총각에게 삼천 원까지 쥐어주고 멀어져 가는 이 복희씨를 따랐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구우. 그 뭐냐, 거 있잖아. ……아! 로, 로, 로맨티스틱.”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 로맨티스틱?” 복희씨가 나를 콧구멍에 삐져나온 코털 바라보듯 매우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훑었다. “ 그래, 이 무식쟁이야. 왜 티브이에 나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남자들 부를 때 여자들이 로맨티스틱, 로맨티스틱 하잖아. 너는 것도 모르냐. 우리 제발 상식은 쌓고 살자. ……흥!” 자신만만해진 이 복희씨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그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저 만치 멀어져갔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더니 그 말이 딱 이구나. 저는 싫다고 입으로 말해봤자 저렇게 이 복신이랑 친 형제임을 스스로 떠벌리는데 도리가 있나. 오늘따라 이 복희씨의 무한재생적인 자신감이 실로 대단해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로맨티스틱으로 불리고 싶어 안달 난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마왕, 발정하다 2부 -6 칼질, 칼질 노래는 부르는 이 복희씨를 데리고 가까운 한정식 집으로 갔다. 꼬부랑 메뉴판으로 인해 무식을 티내고 싶지 않은 내 특단의 조치였다. 바람만 불어도 폭삭 무너질 것 같았던 외부와 다르게 내부는 대체로 깔끔했다. 가옥자체가 오래돼서 군데군데 땜빵용 페인트로 떡칠해 놓은 것만 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 정돈 맛만 좋으면 쉬이 커버될 문제였다. 혹시 이 복희씨가 깽판을 쳐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제일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을 두리번거리는 이 복희씨에게 방석을 내밀었다. 그가 코를 움켜쥐고 볼멘소리를 했다. “ 더럽다, 저리 치워라.” “ 방석인데요? 이게 뭐가 더러워요. 사람 참 보면 볼수록 별나다니까.” 이 복희씨의 눈썹이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 “……왜, 너는 거기 앉으려고?” “ 그럼요. 방석을 앉으려고 뺐지 그럼 들고 있을까 봐요. 거 웃긴 사람이야, 정말.” 나는 픽 코웃음을 쳤다. 찜찜하게 바라보는 이 복희씨 보란 듯이 방석을 깔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맨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으며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고개를 까닥거릴 때마다 우두둑 뼈 소리가 들렸다. ……어디 아픈가. 대단한 엄살쟁이께서 아프면 벌써 아야, 아야 하고도 남았다. 나는 얌전히 종업원을 기다렸다. 이 복희씨가 갑자기 상다리 밑으로 발을 집어넣어 내 허벅지 안쪽을 툭 건드렸다. 반동에 엉덩이가 살짝 밀렸다. “ ……또, 왜요.” “ 이거 가만 보면 어지간히 생각 없다니까. 쪼다야, 머리 좀 굴려봐라. 거기에 어느 나라 궁둥이가 붙었다 나갔는지도 모르는데 더럽지도 않냐. 밥 처먹고 아주 뿡뿡 싸대고 갔을 거다. 아휴, 더럽다, 더러워.” 방석에 대한 참 짜증나도록 새로운 해석이었다. 깔끔쟁이 이 복희씨의 경박스러운 시선에 이끌려 방석을 저만치 던져버렸다. 그는 구석에 처박힌 방석을 보고 덜떨어진 놈처럼 히죽거렸다. 때마침 방문이 열리고 계량한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스무 살에서 많아봤자 둘, 셋 더 먹었을 것 같은 매우 젊은 여자였다. 분홍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있으니 별나게 청순해 보였다.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정신이 알딸딸할 지경에 놓이고 나서야 내 앞에 메뉴판이 내밀어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앞장만 휙휙 넘겨 제일 위에 있는 거 아무거나 찍어 여자한테 내밀었다. “ 수라정식으로 2인분 해드려요? 저희 집 황태구이랑 오이 연어 쌈도 참 맛있어요.” 이 복희씨가 갑자기 박수를 쳐 여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핸드폰 안테나로 귓구멍을 후비며 메뉴판을 툭툭 쳤다. 식당까지 와서 꼭 저렇게 귓구멍을 파야 했을까. 밥 맛 떨어지는 자식 같으니라고. “ 배부르다는 놈이 웬 수라상 정식이냐. 괜히 아깝다고 남은 음식 다 먹다가 배탈 나지 말고 가벼운 걸로 먹어.” 이 복희씨가 메뉴판을 다시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이번에는 나름 정성들여 메뉴판을 탐방한 끝에 제일 먹음직스러운 것 몇 가지를 골랐다. “ 그럼 호박 통 밥하고 갈비구이를 먹을래요. 음, 해파리냉채도 맛있겠다. 어라, 구절판도 맛있어 보이는데…….” 침이 고이다 못해 그림만 보고 있어도 아주 홍콩 갈 지경이었다. 찬밥으로 가볍게 워밍업을 했는데도 맛있는 걸 보니 책상다리도 뜯어먹을 것 같았던 어렸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전투적으로 변한 뱃가죽을 쥐고 메뉴판을 빠르게 훑었다. 뒤로 갈수록 돈 단위가 노망난 망아지마냥 날뛰었다. 속으로 공 단위를 세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이 복희씨와 눈이 마주쳤다. 괜한 뻘쭘함에 ‘아, 아까 그게 어디 있지, 어디더라’ 하면서 첫 페이지로 다소곳하게 돌아왔다. 픽픽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동안 쌓은 내공으로 가볍게 무시하고 수첩에 받아 적을 준빌 마친 여자에게 이것저것 가리키며 말했다. “ 그냥 간단하게 호박 통 밥하고, 갈비구이, 황태구이, 육사시미랑, 아! 홍어 삼합이 빠지면 서운하지! 그리고 간장 게장은 2인 기준으로요, 아차! 식사 전에 마선 죽 가져다주시는 거 잊지 마시구요! 음, 또 뭐가 남았지. 아니다, 많이 먹으면 탈나니까 나는 가볍게 이 정도만 할게요. 저기 이 복희씨는요?” 여자가 컥컥거리며 겨우 메뉴를 다 적은 뒤, 이 복희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복희씨가 갑자기 내 손에서 메뉴판을 휙 낚아채 여자의 발밑으로 내동댕이쳤다. “ 나는 수라상정식. 쟤도 수라정식으로 먹는대. 자, 가봐. 뭘 봐, 가보라니까?” 온 몸에 청개구리 피가 흐르는 놈다운 선택이었다. 저렇게 말 할 줄 알고 좋아하지도 않는 호박 통 밥을 골랐던 거다. 윽박지르는 이 복희씨의 언성에 놀란 여자가 헐레벌떡 방을 나가다 치마에 걸려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 복희씨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한 건 찰나였다. 그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속도로 여자의 치마를 들쳐 올려 머리에 덮어씌웠다. 맙소사, 속치마를 입어 그나마 다행이……아니었다. 여자가 놀라 뒷걸음 친 것과 이 복희씨가 속치마에 손을 뻗은 건 동시였다. “ 이 복희씨, 제발 그만 좀 하시죠! 성희롱으로 신고당하고 싶어 환장했습니까.” 이 복희씨가 왈칵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여자가 내게 고개 짓을 한 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그는 쾅 하고 닫히는 문을 보고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 뭐가 성희롱이야. 장난 좀 친걸 가지고 더럽게 쩨쩨하게 구네. ……쳇!” “ 장난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여자가 놀랬잖아요. 별 달고 싶어서 환장한 거 아니면 제발 이상한 짓 좀 하지 마세요.” “ ……흥!” 자꾸 뭘 사준다, 어쩐다 하는 걸 보면 제 딴에는 잘 하려하는 거 같긴 한데 어째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엉망이 되는 것 같았다. 상에 깔려있는 한지를 들춰내고 물수건으로 상다리를 닦는 꼬락서니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 “ 장난도 이 복희씨가 하면 범죄가 돼요. 장난을 치고 싶으면 제발 집에 가서, 특히 혼자 있을 때 하세요. 아셨지요?” 날카롭게 번뜩이던 이 복희씨의 눈 꼬리가 잠시 주춤했다. 그는 순간 꾸중 듣는 초등학생 코스프레를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분통을 터뜨렸다. “ 너 지금 저 년 때문에 나한테 대드는 거야? 싸우자는 거야, 뭐야! 기껏 선물 사주고 비싼 밥까지 사주려는 사람한테 이게 감히 어디서 보도 못한 걸레한테 홀려서 나를 막 대하고 있어! 너 진짜 나 이렇게 막대해도 돼? 엉? 이 자식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냐구!” 얘가 오늘 따라 더럽게 오버하네. 이 복희씨의 과도한 오버에 맞춰 나도 적당히 왈왈 소리를 질렀다. “ 선물은 무슨. 그리고 내가 뭐 가지고 싶다고 했나. 순 자기가 억지로 사놓고 어디서 성질이래. 그 이상한 핀 때문에 나 머리통 다 까졌다고요! 자, 봐요!” 나는 가르마를 쫙 펴서 이 복희씨 앞으로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이 복희씨가 물수건으로 내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눈에 불똥이 확 솟구쳤다. 나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매몰차게 그를 째려봤다. “ 씨! 또 때렸어. 가만히 있으니까 자꾸 때리고 지랄이네, 이 미친놈이.” “ 내가 반말하지 말라고 누누이 경고했을 텐데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냐. 진짜 혼나볼래?” 이 복희씨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쯤 했으면 빠져야 할 때였다. 얌전히 꼬리를 내려 분위기 수습에 나섰다. “ 그, 그건 아니고……요.” “ 이왕 이렇게 된 거 미친놈한테 제대로 맞아 볼 생각은 없고? 뇌 박살나면 대가리 꽤나 시원해 질 거야, 응?” 이 복희씨는 물수건으로 밥상을 두들겼다. 상에 찰싹찰싹 부딪히는 소리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경쾌하게 울렸다. “ 아까 이상한 선물도 받아줬는데 오늘은 이쯤하고 넘, 넘어가죠. 반말한 건 실수였어요. 실수. 사람이 살면서 실수도 좀 하면서 사는 거지. 이제 보니 이 복희씨 너무 각박하시네.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섬뜩한 미소와 함께 물수건을 빙글빙글 돌리던 이 복희씨가 돌연 내 앞에 수건을 냅다 집어던졌다. 슝 날아온 수건이 상 위에 철썩 달라붙었다. “ 오호라, 그러니까 싫은데 억지로 받았다? 지금 그 말이네? 그래, 좋아. 좋다구! 내가 사준 거 당장 이래 내놔. 빨리!” 저 놈이 이제 치사하게 줬다 뺏기까지 하려는 구나.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쓸모도 없는 왕 큐빅 핀을 밥상 위에 내던졌다. 이 복희씨는 지글지글한 눈빛을 내게 고정시킨 채, 손바닥으로 핀을 쾅쾅 내리 찍었다. 나는 움찔했다. 핀 귀퉁이가 박살나 벽으로 튕겨져 나갔다. 집게부분은 가루가 돼 있었다. 이 복희씨가 돌연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코끼리 허벅다리 같은 그 팔뚝을 재빨리 낚아채 밥상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폭력은 나쁩니다. 폭력은 사건을 해결해 주지 않아요. 열 받으면 무조건 손 올리는 버릇부터 고쳐요, 좀!” 이 복희씨가 비릿하게 웃으며 되받아쳤다. “ 내가 언제 너 때리던? 귀여워서 쓰다듬어 준 기억밖에 없는데. 이걸 어쩌나?” 옆에서 문이 열렸다. 역시나 한복을 입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 이 복희씨에게 못 볼꼴을 당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 뒤에 장정 둘이 들어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걸게 차려진 밥상을 원래 있던 테이블과 바꾸어갔다. 빈틈하나 없이 접시들도 빼곡하게 들어찬 상위에 주황 불빛이 비쳤다. 별나게 휘황찬란해 보였다. “ 우선 밥부터 먹고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내뿜는 이 복희씨를 살살 달랬다.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놈이 톡 쏘아붙였다. “ ……무슨 얘기.” 네 더러운 성격에 대한 이야기다, 씨발놈아. “ 그냥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 이야기죠, 뭐. 쉽게 말해 인생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서로 모르는 것도 공유하고 이참에 알건 아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그쪽이랑은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거 같아요. 우리, 평범하게 대화나 좀 해요.” 그는 턱을 주물럭대며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잘 돌아가지도 않는 대가리가 픽픽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이윽고 생각을 다 마친 이 복희씨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쓱 들이밀었다. “ 그래 우선 먹어, 먹자고.” 나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쥐었다. ……먹자, 그래 먹자고. 헌데 정작 먹자는 놈은 숟가락은 안 쥐고 담배만 쥐락펴락했다. 필까, 말까 망설이고 기색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 복희씨가 고개를 돌렸다. “ ……뭘 봐.” “ 밥 안 먹어요? 담배는 밥 먹고 나서 피지.” 그는 보란 듯이 담뱃불을 붙이며 연기를 내 얼굴에 후후 불었다. 나는 재빨리 손으로 연기를 저어 없앴다. “ 난 안 먹어. 너나 많이 먹어.” “ 배고프다면서요. 처음부터 안 먹을 거였으면 왜 2인분이나 시켰는지 몰라.” “ 생각해보니까 조금 있다 약속이 있네. 깜빡했지 뭐냐. 내 거까지 네가 다 먹어라.” 그는 제 앞에 놓인 밥공기를 내 숟가락 옆에 놓았다. “ 나도 배부른데…….” “ 배불러도 2인분이야. 너한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 복희씨가 차갑게 비꼬았다. 지가 말해놓고 뭐가 그리 웃긴지 터지는 웃음을 막으려 어깨를 늘어뜨렸다. 염병, 처 웃기는. 나는 놈을 매섭게 노려보며 숟가락으로 밥을 푹푹 퍼 먹기 시작했다. 이 복희씨가 갑자기 내 젓가락을 휙 가져갔다. 그리고 더덕구이와 생채, 삼색나물 같은 반찬들을 깔짝깔짝 거렸다. “ 밥 안 먹는다면서요? 밥 드려요?” 나는 밥공기를 쥐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 복희씨가 고개를 저었다. 접시사이를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거리던 그의 젓가락이 조기구이 앞에 딱 멈추었다. 비린내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놈이 생선 먹으려고? 왜 저러나 싶어 가만히 있었다. 이 복희씨가 돌연 매섭게 조기머리통을 떼어 내 숟가락 위에 올려놓았다. “ 자, 아…….” 수북이 쌓인 밥알 밑으로 삐죽 튀어나온 조기 창자가 밥알에 칭칭 감겨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식욕이 싹 도망갔다.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이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 이야, 생각보다 재미있네.” “ 재밌긴 뭐가, 재밌어요. 그 쪽은 생선 머리통 먹이는 게 퍽이나 즐거운 모양이죠.” 순간 자기를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으로 착각하고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 복희씨가 씹어내듯이 말했다. “ 밥 위에 반찬 얹어주는 거 말이다. 티브이에서 신혼부부들이 이렇게들 많이 하잖아. 요즘은 이런 게 좋아 보인다니까.” 그는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 내가 변하긴 변했나봐. 네가 봐도 그런 거 같지 않냐, 김 궁상.” ……제발 안변하고 그대로나 있었으면 더 좋겠다. 허나 이 복희씨는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하고 있었다. 썩 마딱치 않았다. “ 아까 말했지? 나도 은근히 부드러운 남자라고. 왜, 내가 갑자기 로맨트, 로맨……부, 부드러워져서 당황스러운가 봐?” 이 복희씨가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봤다. 제가 로맨티스트 단어를 스리슬쩍 넘어간 걸 눈치 챘나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놈의 채면을 생각해 못들은 척 넘어가줬다. 파도치듯 실룩거렸던 그의 눈썹이 곧이어 잔잔하게 펴졌다. “ 그냥 우리 밥이나 먹죠.” “ 말해봐, 내가 변해서 싫어? 싫냐구우!” ‘싫어’ 에 묘하게 악센트를 줘서 말하는 이 복희씨의 얼굴에 찬 경련이 일어났다. 싫다고 말했다간 저 조기 대가리마냥 뜯겨져 나갈 판이었다. 나는 씁쓰레 웃었다. “ 가만히 있는 게 날 도와주는 건데……요.” 겨우 드라마 속에서 빠져 나온 이 복희씨의 평소 건방진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또 이상한 말을 꺼내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 이보세요. 부드러워진 건 뭐라고 안하는데 생선 대가리보다는 살을 좀 올려줬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이 복희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제시했다. “ 왜, 너 생선 환장하잖아?” “ 네. 그거야 그렇긴 한데요. 아무리 그래도 머리통은 조금…….” “ 진짜 생선 좋아하는 놈들은 특히 대가리를 좋아하던데? 쯧쯧, 너는 너무 가리는 게 많아. 이런 편식 쟁이 같으니라고.” 이 복희씨는 내 밥숟갈 위에 외롭게 앉아 있는 생선 대가리를 벽에 휙 집어던지고 조기 살을 올려주었다. 그는 밥그릇을 탕탕 두드리며 빨리 먹을 것을 종용했다. 나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리고 주둥이에 밥숟갈을 쑤셔 넣었다. 밥 먹는 사람 뭐 볼 게 있다가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나 몰라. 문득 이 복희씨가 명랑한 말투로 말했다. “ 맛있냐. 내가 줘서 더 아주 맛있어 죽겠냐?” 나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 네, 이 복희씨가 줘서 더 맛있는 거 같긴 하네요.” 그냥 조기구이 맛이었다. 밥풀 묻은 숟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데 갑자기 언짢은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내 칭찬에 힘입어 그는 이번엔 더덕구이를 집어 들었다. 아주 넝쿨 채였다. “ 계속 그렇게 반찬을 하나하나 얹어주려고요?” “ 어, 그럴 생각인데. 왜” “ 아니요. 너무 좋아서 꿈인가 싶어 한 번 물어봤어요.” “ ……꿈까지야, 뭐” 이 복희씨가 웃었다. 악의 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방금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선 시선으로 그를 훑어봤다. 저 놈이 저렇게 천진하게 웃을 수도 있구나. 새로운 모습이었다. 기묘한 감각이 등줄기를 뻐근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내 가슴속에 손을 푹 집어넣고 심장을 쥐락펴락 것 같은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연달아 먼 곳에서 제야의 종소리까지 들려왔다. 저게 뭐가 그리도 좋을까. 따지고 보면 크게 잘난 것도 없었다. 무식하고, 깡패에, 범죄로 얼룩진 과거는 물론, 양 어깨에 전과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으며, 성격은 길게 말하면 입만 아팠다. 그렇다고 상대를 존중하는 배려심이 있길 하나, 따듯한 말 한마디를 할 줄 아나. 내가 생각해왔던 이상형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완벽하게 밉지가 않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완벽하게 미워지지 않기 때문에 저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복희씨에 대한 감정이 단번에 쓸려나가지 않는 것이다. 나도 참 어지간한 바보구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재확인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힘없이 웃었다. 귀찮은 생각을 떨쳐내고 얌전히 더덕구이나 받아먹었다. 이 복희씨가 덥석덥석 얹어주는 반찬을 몽땅 먹어치워 치웠을 때 즘 내 배는 산달을 앞둔 산모처럼 빵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남방단추를 까내고 옆구리를 득득 긁었다. 어찌나 통이 크신지 반찬을 한번 집을 때마다 접시의 반을 긁어다 밥숟갈에 얹는 이 복희씨 때문에 배꼽 위에 우선을 꽂고 날아갈 지경이었다. 초강력 위장을 자랑하는 나나 먹지, 이 경원이었으면 벌써 응급실 갔다. 빈 공기를 치우고 이 복희씨의 밥그릇으로 슬금슬금 숟가락을 가져갈 때 즘 그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 너 아까 야한 생각 했지?” 이, 이게 뭐라는 거야…….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덩달아 나도 눈을 가늘게 떴다. “ 야한 생각이요? 그런 적 없는데요.” 이 복희씨가 입술을 들썩였다. 사악한 기쁨에 젖어 들어가는 눈동자가 형광등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병신처럼 아주 그냥 넋 놓고 히죽거리던데? 내숭까지 말고 빨리 불어, 야한 생각 했잖아.” 아무래도 조금 전 이 복희씨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히 되짚고 있었을 때,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보다. 살쾡이 같은 자식, 눈치는 또 어지간히 빠르단 말이야. “ 야한생각은 무슨. 그냥 밥 맛있다 그 생각했어요.” 담배연기 사이로 이 복희씨가 눈썹을 실룩였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고수하던 그가 돌연 표정을 고쳐 말했다. “ 좋아, 그렇다고 쳐. 대신 여기서 딸딸이 쳐봐. 그럼 믿어주지.” 손가락에 쥐고 있던 숟가락이 뚝 떨어졌다. 이 복희씨가 느물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 갑자기 궁금해지더란 말이지. 너도 남자잖아? 근데 난 네가 딸 치는 거 한 번도 못 봤거든. 쯧쯧,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 불능은 아니잖아. 그래서 나온 결론이 딱 두갠데 하나는 나 없을 때 몰래, 아주 틈틈이 딸을 잡아주시거나 아니면 화장실 가서 순식간에 싸고 나오는 거야. 어때, 내 생각이. ……둘 중 하나지?” 눈앞에 적신호가 켜졌다. 나는 떨어진 숟가락을 밥상에 올려놓고 침착하려 애썼다. 말려들지 말자, 말려들면 안 된다. 집도 아니고 이런 공공장소에서 딸 잡는 최악의 사태는 피해야 한다. 이럴 땐 대충 비위를 맞춰 구슬리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 내, 내가 자위하는 게 뭐가 궁금하다고요. 그러는 이 복희씨는요?” 은근슬쩍 질문을 돌렸다. 그는 아직도 장난기가 가시지 않은 번득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엔 담배꽁초가 간신히 물려 있는 채였다. 다 타들어간 재가 밥상 위로 뚝 떨어졌다. “ 오, 머리 쓰네? 그게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딱히 대답 못해 줄 것도 없지. 나야 어제 너 잘 때도 두 번 치고 잤다. 적당히 물을 빼줘야 숙면을 취할 수 있거든. 남자들은 다 그런다. 근데 이상하게 넌 안 그렇단 말이지. 참 희한한 일이야. ……너 혹시 여자냐.” 놈이 이제 나를 비정상으로 몰아갔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쭉 뻗더니 내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 희한하네. 무슨 놈의 계집애가 이렇게 가슴이 납작하냐. 너 혹시 남자 아니야?” 망할 자식. 저걸 유머라고 치고 앉아 있냐. 나는 점점 농도를 더해가는 얄궂은 그 손목을 휙 쳐낸 후, 변명하듯 톡 쏘아붙였다. “ 나도 가끔은 쳐, 쳐요. 딸, 딸. 뭐 하여튼 그거요.” 순간 나오는 대로 말하긴 했는데 내가 한 말이지만 아차 싶었다. 이 복희씨의 심술궂은 눈이 극도로 반짝거렸지만 의외로 주둥이는 얌전히 다물어져 있었다. 그가 턱짓을 했다. 계속 해보란 뜻이었다. “ 그냥 가끔, 아주 가끔 한 번씩 한다고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할 때도 있고, 바쁠 땐 정기적으로 말일에 몰, 몰아서 두 번 할 때도 있고요.” 나는 심각할 정도로 사실대로 말했다. 이 복희씨는 금방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잠시 내 말을 되씹어 보는 듯 했다. 혼자 알 수 없는 말로 중얼중얼 거리더니 입가에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이어 풍 걸린 놈처럼 어깨를 부들부들 떨다 급기야 밥상에 머리를 들이받고 방바닥에 대굴대굴 굴러다졌다. 저게 드디어 미쳤구나.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이 복희씨가 담배꽁초를 삼색 나물 중앙에 꽂으며 말했다. “ 무슨 곗날도 아니고 자위를 말일에 몰아서 하는 건 또 뭐야. 가만 보면 은근히 골 때린다니까. 아이고, 배야. 낄낄낄.” 진짠데 뭐가 그렇게 웃긴 걸까. 나는 잠자코 앉아 이 복희씨가 제 정신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나름 정상인으로 모습과 엇비슷해진 이 복희씨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 딸 치는 건 내일 집에서 보기로 하고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는 이 복희씨 앞으로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 저기요, 후식으로 수정과랑 한과 준다는데 그거 먹고 가면 안 될까요.” 이 복희씨는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 놀리듯이 말했다. “ 더 들어갈 자리가 남았냐. 아주 끝도 없이 기어 들어가는구만.” “ 뭐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요. 이 복희씨에겐 내가 개보다 못한 존잰가 보네요. 역시 그랬던 거네요.” 나는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힘없이 대응했다. 자리에 일어나려던 이 복희씨가 주춤하는 게 보였다. 그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해줄 심산을 굳혔다. 아주 흔하고 발에 채일 정도로 굴러다니는 구닥다리 수법이었다. 그런데 그 유치하고 뻔한 수법으로 인해 이 복희씨의 얼굴에 아연실색한 표정이 깊게 패였다 사라지는 걸 똑똑히 확인 할 수 있었다. 보고 있는 내가 오히려 더 놀라버렸다. “ 아니다, 그런 거.” “ ……예?” “ …….” 이 복희씨는 눈썹을 치켜뜨고 입술을 삐죽이다가 끝내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어이없는 일인 시위는 지배인이 수정과와 한과를 가지고 올 때까지 쭉 이어졌다. 내가 마지막 한 개 남은 한과까지 쪽쪽 다 빨아먹은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복잡 미묘하게 변한 이 복희씨의 얼굴에서 그가 조금 전 내 말을 곱씹어 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고 또 진지해진 표정에 어안이 벙벙했다. 솔직히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역시 의미 없이 받아들일 걸 알고 있었고. 그런데……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은 내가 생각한 반대의 효과를 가지고 왔다. 나는 답답함에 질식할 지경에 놓이고서야 천천히 침묵을 깼다. “ 이 복희씨 농, 농담이에요.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요. 진짜 농담이라니까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 농담이에요? 그 농담 퍽이나 재밌겠다.” 이 복희씨가 내 말을 따라했다. 신랄한 어조였다. 날선 눈 꼬리에서 그가 대단히 화가 나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왜 화가 난 걸까.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문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는 얼떨결에 따라 일어나 벌컥 소리쳤다. “ 화났다면 미안해요. 근데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 이 복희씨가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와 내 앞에 섰다. 그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길로 한참동안 나를 노려보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왔다갔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어댔다. “ 너는 나를 너무 모르는 거 같아.” 어딘가 심통 난 어조였다. 이 복희씨가 나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너를 개보다 못……하여간 그럴 리가 없단 말이야.” “ ……아” 예상대로 저 놈이 그 말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휘청했다. 주저앉듯이 자리에 앉자, 이번엔 슬금슬금 웃음이 나는 걸 억지로 집어삼키느라 죽을 맛이었다. 이 복희씨는 어느새 새 담배를 꺼내 물고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눈깔이 흰자만 둥둥 떠다니다 사시되기 일보직전이 되어서야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는 척하면서 눈에 힘을 풀었다. “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지금으로선 뭔가 부족한 거 같아.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게 필요해.” 간장종지에 담뱃재를 털고 있던 이 복희씨와 시선이 마주쳤다. 갈색 빛이 많이 섞인 눈동자다. “ 몰랐는데 눈이 참 크네요, 이 복희씨는.” 갈색 눈은 대부분 황소고집이라던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이 복희씨의 눈꺼풀을 조심히 더듬었다. 그리고 뺨, 콧등, 수염 때문에 따끔따끔 거리는 턱을 매만져보았다. 딱히 그의 얼굴을 더듬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손이 저절로 미끄러졌을 뿐이다. 꽤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주물럭거린 뒤에야 가출했던 사고가 돌아왔다. 그런데 어째 손바닥에 닿는 촉감이 요상했다. 설마설마 하면서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숨을 훅 들어 마셨다. 손바닥이 미묘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과 목덜미를 변태처럼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물구나무로 운동장 오백바퀴를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이 일었다. 황급히 손을 떼어내려는 찰나, 이 복희씨가 내 손목을 덥석 쥐었다. “ 가만 보면 순진하게 생긴 것들이 더 엉큼하다니까. 만지고 싶으면 만져. 자, 자!”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위풍당당한 목소리였다. 제가 알아서 손목을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통에 나는 본의 아니게 그의 아랫배와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한참동안 내 손목을 쥐고 억지로 자기 몸을 성희롱 하게 만들더니 돌연 손에 힘을 풀었다. “ 할 말 있으면 해.” “ ……네? 뭐가요.”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이 복희씨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 네 놈이 방금 또 할 말이 있는 거 같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니까. 그러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하라…….” “ 내가 그 쪽 참 많이 좋아한다고요.” 귀찮게 굴기 전에 아무 말이나 하나, 싶어 한 말이 바로 저거였다. 말을 한 나도, 듣고 있던 이 복희씨도 얼굴을 찌푸렸다. 나야 그렇다 쳐도 저는 왜 인상을 쓰는 거냐. 기분 나쁘다 이거야, 뭐야. 감히 나한테 사랑 받는 주제에 고맙단 소리를 못할망정, 쳇. 나는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변명하듯 덧붙였다. “ 뭐 굳이 말 안 해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시종일관 따닥따닥 거리던 놈이 정작 중요한 순간엔 또 저런다. 나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이 복희씨는 잠시 나를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 응.” 어찌 가게 앞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어색했고 그와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돼 있었다. 두 세 걸음 앞서가고 있는 이 복희씨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내가 뒤에 따라오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다. 가게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와 길쭉한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접시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장사를 말아먹으려 작정 한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 복희씨는 자연스럽게 가게를 지나쳐가고 있었다. 내가 부르지 않았으면 계속 앞만 보고 걷다가 여기가 어디지 했을 게 분명했다. “ 저기요, 다 왔어요. 그만가세요.” 이 복희씨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계인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왔던 길 되돌아오기가 생각보다 쪽팔리긴 하지.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 복희씨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다. “ 들어가라.” “ ……네.” “ …….” “ …….” 침묵이 발목을 움켜쥐었다. 들어가라고 한 이 복희씨도 알았다고 대답한 나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빙그르 내 눈알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어색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이대로 헤어지긴 뭔가 조금 아쉽기도 하고 이상하게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복합적인 감정이 어깨를 짓눌렀다. “ 가세요.” “ 간다.” 간다는 놈이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 힘주어 말했다. “ 늦었어요. 빨리 가세요.” “ 간다니까.” 정 떨어지도록 삭막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턱을 긁적이던 이 복희씨는 결심하듯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거의 점이 되어 없어질 때쯤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이 복희씨가 꺾어 들어간 골목에서 검은 그림자가 뛰쳐나와 내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왜요, 뭐 잊은 거 있어요. 하고 묻기도 전에 이 복희씨가 나를 끌어안았다. 팔뚝과 어깨를 감싸는 악력에 무릎이 꺾일 뻔 했다. 이런 철갑상어 같은 놈이 다 있나. 속마음을 감추고 물었다. “ 왜요, 뭐 있는 거 있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 복희씨의 혀가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입술을 뚫고 들어왔다. 전투적인 기세였다. 몰아붙이는 힘에 밀려 허리가 삐끗했다. 그러자 팔목으로 감아 단단히 고정시키고 목덜미를 억세게 짓눌렀다. 더는 뒤로 밀려나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 몸이 녹신했다. 나는 까치발을 세워 그의 목에 엉성하게나마 팔을 감았다. “ ……아!” 이 복희씨가 강하게 입안을 삼키고 입천장을 훑었다. 목젖을 지능적으로 건드려대는 바람에 토기가 밀려왔다. 가슴을 살짝 밀자, 거부당했다는 생각에 그는 더 심하게 몰아붙였다. 입 안 가득 그의 체취가 나는 것 같았다. 머리 위에 가로등 불빛이 비쳤다. 이 복희씨의 길고 가는 속눈썹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꼼꼼히 매만졌다. 바스락거리던 속눈썹이 거짓말처럼 떠진 순간 마치 처음만난 사람처럼 어색하고 기묘한 감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입술이 맞닿은 상태에서 이 복희씨와 나는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에도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들어가 있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줄기처럼 길게 이어진 타액을 검지로 뚝 떼어내며 이 복희씨는 건달처럼 킬킬댔다. “ 들어가. 진짜 간다.” 이 복희씨는 퉁퉁 불어있는 내 아랫입술을 툭툭 건드리곤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이 복희씨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 이 복희씨는 내가 한심하고 멍청해 보여요?” 이 복희씨가 멈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녀석들은 내가 바보래요. 멍청하고 한심하대요. 난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녀석들이 자꾸 그러니까 진짜 바본가,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는 허리를 꽉 조이고 있는 내 팔을 풀어내고 몸을 돌리려 했지만 나는 그럴수록 등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이 복희씨는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포기했다. “ 몸 돌리지 마세요! 얼, 얼굴 보면 말 못할 거 같아서요. 그냥 그대로 계세요.” “ ……왜.” 어딘가 심상한 어조였다. 정말 모른다는 건가. “ 내가 그 쪽한테 기죽어 지내는 거 보면 몰라요? 아직은 무, 무서우니까 그렇죠. 가끔 차가운 표정 지으면 예전에 이 복희씨가 나한테 미친 짓거리 일삼았을 때 있잖아요, 그때 생각나요. 그렇다고 무조건 그 쪽 잘못이란 건 아니에요. 내가 워낙 겁이 많기도 하니까…….” 균형 잡힌 딱딱한 어깨가 잘게 경련하는 걸 보아 나는 그제야 이 복희씨가 웃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내가 저한테 쫀다는 게 그렇게 웃기나. 나는 꿈틀거리는 그 어깨를 두어 번 팡팡 때리곤 비통한 어조로 덧붙였다. “ 믿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요. 나 이 복희씨 만나기 전까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어요. 오해 말아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단 뜻은 아니니까요. 권솔이 날 너무 오냐오냐 키웠단 말이에요. 키웠다는 말에 어폐가 있긴 해도 사실이에요. 고 3땐 나 같은 엄살쟁이한테 1학년들이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다녔다는 게 상상이나 가요? 복도에서 날 밀친 놈은 팔에 깁스를 하고 나타나고, 체육시간에 축구하다가 태클 건 놈의 목발을 짚고 다니더라고요. 그게 다 우리 솔이 작품이었죠. 그런데 누가 나를 감히 건드릴 생각을 했겠어요. 그러니 내가 거만해 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뭐.” “ 그래서.” 퉁명스러운 이 복희씨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간 신이 나서 말했다. “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예요. 그랬다 이거죠. 아차! 이건 말 했나 모르겠네. 제 이름이 학교에서 워낙 유명하니까 신입생 중에 한명이 교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제 밑에서 차근차근 배우고 싶다는 거 있죠? 배우긴 뭘 배우겠다고, 진짜 웃기지 않아요? 내가 한 주먹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이런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다 우리 솔이 때문에 생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이 복희씨가 갑자기 내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 비틀었다. 사악 기쁨에 젖어 있는 그의 목소리가 분노와 노기를 띤 건 그 다음이었다. “ 쪼다 같은 소리만 하고 자빠졌네. 돌 대갈빡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질투하는 모습 보고 싶었던 거라면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까 뒷산에 파묻어 버리기 전에 그쯤 해둬.”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둠 속에 파란 불빛이 번졌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귀찮다는 팔을 풀려는 이 복희씨의 허리를 더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 쪼다 아니에요. 사람 말도 안 끝났는데 김빠지게 왜 그래요.” 이 복희씨는 내게 등을 맡긴 채 가만히 있는 대신 벌컥 짜증을 냈다. “ 권솔, 권솔, 권솔. 우리 솔이, 솔이, 솔이. 그래놓고 아직도 할 말이 남으셨어? 넌 가끔 내가 너그러운 성격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절대 오해라는 거 미리 말해두마. 한 번만 더 권솔이 어쩌고 하면 오늘 당장 네 궁상맞은 움막가게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는 걸 목격하게 될 거다. 자, 하고 싶으면 계속 해보라고.” 에이, 설마 가게를 폭파시킬라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내가 진짜 많이 크긴 컸다. 나는 너그러운 척 후후 웃으며 이 복희씨의 등에 코를 비비적거렸다. 그 유명한 초 필살기 강력한 애교작전이었다. “ 그 쪽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우리 솔이 우주최강으로 강한 줄 알았을 거예요. 내가 그 쪽 때문에 아파하는데 솔이 이 복희씨를 때리러 가지 않는 걸 보면서 그때야 알았어요. 이 복희씨는 참 무서운 사람이구나. 솔이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구나. 나한테 강하다는 것의 절대 기준이 솔이었어요. 참 단순한 생각이죠? 나도 알아요, 나 원래 단순해요.” 내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새 거의 간청하는 말투로 속삭거리고 있었다. “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 쪽은 진짜 나쁜 사람 인 거 같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 봐요. 그 쪽이 나를 너무 아프게 했잖아요. 자꾸 초조하게 만들고 지금도 끊임없이 내 애를 태우잖아요. 그래도……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요? 그래도 안 미운데 나는 어쩌나요?” “ …….” 그는 침묵했다. 라이터 뚜껑을 달칵이며 손장난을 쳤을 뿐이다. “ 솔직히 아주 안 미운 건 아닌데 그 쪽이 아주 가끔 잘해주면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정도로 화가 쉽게 풀리는 거 있죠? 이래서 녀석들이 바보라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해요. 그 쪽이 봐도 내가 좀 그래 보이죠?” 콧구멍 속으로 이 복희씨의 향수냄새가 알싸하게 퍼졌다. 화장대에서 봤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더럽게 길고, 어려운 단어였는데. 기억을 더듬으려 할수록 어렴풋이 생각나던 것도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괜한 향수이름 따윈 떨쳐버리고 이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 나는 한심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아요. 좋아하면서 자존심 때문에 아닌 척 하고 괜히 오해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보다는 솔직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내 감정에 책임질 줄 아는 행동을 했으니까요. 물론 미련한 방법이긴 했지만요.” 이 복희씨가 내 손목을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몸을 반대로 휙 돌려 머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의 턱에 맞닿은 이마가 까칠까칠 쓰라렸다. “ 나는 이 복희씨를 참 좋아해요. 씨발놈인지도 모르고 속없이 달라붙고 싫다는 대도 멍청하게 굴었어요. 그래서 벌을 받았잖아요? 하지만 그건 내가 한심해서 받은 벌이 아니라 이 복희씨를 좋아하기 때문에 받은 벌이잖아요. 그건 내 감정에 대한 내 책임이에요. 책임감은 어른의 의무에요. 나는 바보가 아니죠? 단지 의무를 다했을 뿐이……야. 그렇죠? 저기, 빈말이어도 그렇다고 한번만 말씀해보세요.” 나는 눈알만 치켜 올렸다. 여전히 그의 턱 외엔 잘 보이지 않았다. 이 복희씨가 고개를 살짝 내려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이마를 벅벅 긁었다. 그러자 이 복희씨는 아예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 킥킥거렸다. “ 재미없는 코너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마지막 하이라이트 감상하는 기분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지. 왜, 사람 지루하고 만들고 그러시나. 어이, 좀 짖어봐.”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훑어 내리는 눈동자에서 한 순간도 진지해지려는 순수한 노력조차 하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함을 느꼈다. 이 복희씨에게선 내 진심도 단순한 오락거리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더해지자 나는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 책임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감정을 빨리빨리 옮기니까 그러지 못하는 내가 병신처럼 보이나 봐요. 좋아서 쩔쩔매고 한 사람한테 끙끙대는 내가 머저리로 보이는 거죠? 그렇죠? 그 쪽도 내가 그랬어요? 저 좋다고 죽자 사자 하니까 바보로 보였겠죠? ……아마 그랬을 테죠.” 그는 이마에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 나는 네가 굳이 권솔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바짝 얼어붙은 나뭇잎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이 복희씨는 나뭇잎을 발로 짓이기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혼자 조용히 웃었다. “ 사람이 다 똑같으면 무슨 재미로 사냐.” 나는 이 복희씨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기침 때문에 코를 비비적거리자 내가 훌쩍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건을 만지면 당장 코를 풀고 싶은 본능을 억제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다 안다는 듯이 부처님의 미소를 따라하던 이 복희씨가 불쑥 내 콧구멍 밑에 손수건을 바짝 갖다 붙였다. 나는 더는 사양 않고 크윽, 크윽 코를 풀었다. 부처님이고 나발이고 이 복희씨의 얼굴이 저승사자처럼 파리해졌다. 그는 가까스로 화를 다독이며 침착하려 애썼다. 예전과 다르게 화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 그것만 잘 키워. 그럼 권솔보다 더 완벽한 뒷배가 생길 거야. 두고 보라고.” 이 복희씨는 내 가슴을 검지 끝으로 콕콕 찔렀다. “ 세상에 완벽한 짝사랑은 없어. 그리고 너는 한 번도 짝사랑을 한 적이 없어. 지금 내가 한 말, 무슨 뜻인지 알아?” 글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거 같기도 하고. ……어려웠다. 나는 살짝 고민하다 어차피 저 눈치 빠른 놈이 거짓말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아니라고 판단, 안전 빵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 잘 모르겠는데요.” 이 복희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빠르게 말했다. “ 그래서 네가 강한 거야. 자고로 무식한 놈들이 용감한 법이거든. 용감하다는 게 뭐냐. 그게 바로 강하다는 거다. 하하하” 그는 허리에 팔을 대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웃어댔다. 머리 좀 풀고 지퍼만 살짝 내리며 완벽한 망나니 폼이었다. “ 앞에 대놓고 무식이니, 어쩌니. 지금 사람 놀려요?” 돌아서려는 나를 이 복희씨가 다시 돌려세웠다. 그는 잽싸게 나를 끌어안고 키를 맞추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무릎을 구부렸다. 그는 내 어깨에 턱을 갖다 대며 조곤조곤 말했다. “ 무럭무럭 커라, 김 궁상. 그래서 나를 이겨 먹어. 이긴 다음엔 내 머리꼭대기에 앉아서 신나게 흔들어봐. 그럼 기쁘게 흔들려 줄게. 거 참 재밌을 거야, 그렇지 않냐.” 나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 복희씨가 내 짱구뒤통수를 손가락으로 긁으며 덧붙였다. “ 너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다. 너는 강한 놈이니까. ……나를 능가할 정도로.” “ 이 복희씨, 좋아해요.” 솔직히 말한다. 괜찮은 멘트가 생각 안 났다. 그래서 삼탕 째 우려먹었다.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다. 신선한감은 좀 떨어지긴 해도 좋아한다는데 침 뱉을 놈 없다. 대답 없으면 생 깐다고 분명 화낼 놈이 저 좋다니까 오히려 내 어깨에 코를 박고 킬킬거렸다. 봐라, 내가 효과 있다고 했지. 낄낄거릴 수 있을 만큼 낄낄거리던 이 복희씨가 한참만에야 고개를 치켜들었다. “ 진짜 간다. 빨리 들어가라.” “ 이, 이 복희씨 정말 좋아해요.” 네탕 째 우려먹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쯤 되면 지루했다. 이 복희씨는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 우아한 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야멸치게 몸을 돌려 골목을 벗어나 버렸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그가 까만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후에야 몸을 돌렸다. 그때 핸드폰에 드르륵 진동음이 울렸다. 이 복희씨였다. 나는 턱을 이용해 현란하게 폴더를 열어젖혔다. 무심코 문자를 확인하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 복희씨의 문자는 평소대로 짤막하고 성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성의 없이 짤막한 한 줄의 문자에 비실비실 웃음을 삼키느라 애써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내가 더 맣이 > ㄴ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맞춤법 틀렸다고 답문 보낼까 하다 괜히 로.맨.티.스.틱. 하게 변한 남자 기분만 조질 거 같아 그만뒀다. 결국 ㄴ은 생사는 전송되어 날아오는 중 기계의 실수로 사라졌으리라 생각해 주기로 했다. 나는 문자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웃기긴 진짜 웃기는 놈이란 말이야. 머리에 꽃 단 놈처럼 히죽거리며 가게 문을 열었다. 아니, 내가 굳이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열려 있었다.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문을 빠끔히 열어놓고 낙타처럼 침을 줄줄 흘리며 음흉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 지만과 이 복신이 때문이었다. 문의 방향이 어째 골목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걸 보아하니……! 이 새끼들 이거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구나. 절망적이었다. 곧이어 변태들의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 복희씨, 좋아해요. 사랑해요. 자고 싶어요. 미치겠어요. 낄낄낄.” “ 너는 강한 놈이니까 끝까지 참아봐! 김 궁상, 많이 커라! 쑥쑥 커라. 그리고 이참에 거시기까지 커서 내 걸 한 번 능가해봐. 하하하. 아, 배야. 나 죽네, 나 죽어!” 김 지만과 이 복신이 내 목소리와 이 복희씨의 말투를 흉내 내며 꼴리는 대로 대화 내용을 각색하더니 급기야 배를 움켜쥐고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당장 몸을 날려 놈들을 들어 눕히곤 주둥이를 있는 힘껏 비틀었다. 그런데 이 매저새끼들은 입술이 뒤틀어진 서로를 확인하곤 또 미친 듯이 낄낄댔다. 그렇게 웃음에 굶주린 돌대가리들은 권솔이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한꺼번에 싸잡아 밖으로 밀어버리지 않았으면 날이 밝을 때까지 저렇게 덜떨어진 모습으로 웃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권솔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그런데 놈은 찬바람을 쌩쌩 일으키며 친하지도 않는 이 경원 옆으로 가버렸다. 당연히 이 경원이 왜 왔냐고 성질을 부렸다. 놈들은 예상대로 삿대질을 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눈만 마주쳤다면 으르렁거리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닐 텐데 참 대단들 하다, 대단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손님들이 으르렁거리는 녀석들을 보고 장사 안 하나봐, 분위기 이상하다 등등의 대화를 나누다 사라졌다. 아이고, 머리야……. 젠장. 손님이고 뭐고 일주일동안 신나게 놀림받이가 되겠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 복희씨의 문자를 정성들여 저장했다. 때마침 쓰레기봉투를 뜯고 기어 나온 김 지만과 이 복신이가 영양가 없는 이 복희씨 성대모사를 시작하자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귀신들은 뭐하나 몰라, 저런 것들 안 잡아 가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정말 귀신이 놈들은 데려 갈까봐, 재빨리 취소했다. 마왕, 발정하다 2부 -7 바야흐로 시간은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상납금에, 자릿세 운운하며 나타난 조폭무리들을 상대하기 위해 권솔이 냉동고에 48시간 얼려놓은 못 박힌 나무 몽둥이를 치켜들고 김 지만과 사이좋게 사라진 바로 직후였다. 연말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한 테이블로 가게는 전쟁 통을 방불케 했다. 딱히 상을 차려놓고 식사할 겨를도 없어 한 사람이 밥을 먹으면 그 다음 사람이 밥을 먹는 순이었다. 빈 박스를 가져와 맥주병과 소주병을 분리해 담고 있을 즘이었을까. 앳된 목소리가 가게를 울렸다. 병을 간추려 넣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여자 셋이서 이 복신이 하나를 빙그르 둘러싼 진풍경이 펼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전공 책이 쌓여있는 걸 보아하니 나이는 얼추 대학생쯤 돼 보였다. “ 어머, 오빠. 진짜 잘 생겼다. 나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요. 영화배우 하지 왜 이런데서 일해요? 저 여자 친구는 있어요? 에이, 내가 너무 당연할 걸 물었나.” 술에 취해 살짝 꼬부라진 여대생들의 목소리가 점점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이 경원이 코끝에 밥풀을 매달고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을 정도였다. “ 야, 그걸 뭐 당연할 걸 묻고 그러냐. 오빠 그럼요, 여자 친구랑 얼마나 됐어요? 한 달? 두 달? 빼지 말고 한 번 말해 봐요. 아! 근데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호피무늬 코트를 입은 단발머리가 당황한 이 복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며 말하자, 여우목도리를 한 생머리가 맞장구를 쳤다. “ 혹시 모르지. 등잔 밑이 어둡다고 없을지도 몰라. 잘생긴 오빠, 어떤 타입 좋아해요? 귀여운 스타일? 섹시한 스타일? 아니다, 오빠 얼굴 보니까 딱 여자다운 여자 좋아하게 생겼네.” 여자들이 까르르 웃으며 소주잔 주고받듯 이복신이를 상대로 농을 쳤다. 교과서 대신 각목 날 세워 깎아서 들고 다니던 놈이 참 여자답기도 하것다. 말을 할 때마다 눈에 흰자위가 번쩍번쩍 거리는 것이 얘들 아주 맛 갔다. 정상적이지 않은 눈에서 보니 이 복신이 잘 생겨 보일 수 밖……아니지 돌대가리 때문에 빛을 못 봐서 그렇지 쟤도 남자답게 생긴 것이 썩 괜찮은 페이스란 말이야.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여차하면 권솔에게 일러바칠 만만의 준비를 마쳤다. 윗입술을 실룩실룩 거리던 이 복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 나는 내가 굳이 안 챙겨줘도 되는 사람이 좋은데. 예를 들면 여장부 스타일? 튼튼한 사람이 좋아.” 파마머리가 깜짝 놀라 항의했다. “ 어머나, 오빠. 남자들은 보호본능 일으키는 여자 좋아한다던데 오빠는 좀 특이하시네요.” 단발머리가 뜬금없이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 그러게. 뭐,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그나저나 오빠 진짜 여자 친구 없어요?” “ 글쎄, 그 비슷한 게 있긴 한데…….” 그치, 있긴 하지. 여자가 아니라 기골이 장대한 남자 친군 게 문제지만.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찰나 오빠소리에 신난 이 복신이 은근슬쩍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그 바람에 눈이 딱 마주쳤다. 깜짝 놀란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생머리가 터프하게 놈의 팔목을 잡아 자리에 도로 앉혔다. 이 복신이 붙잡힌 팔목과 나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거짓 동정심으로 선처를 바라는 듯 했다. 나는 손날로 즉각 목을 긋는 시늉을 함으로서 놈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예상대로 놈이 뽕쟁이처럼 다리를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안 좋은 추억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때, 피 좀 보긴 봤지 아마. 이 경원이 왜 나를 가지고 노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 가지고 노는 재미가 쏠쏠했다. “ 애, 애인 있지. 아주 튼튼한 놈이야.” 교묘하게 뒷말을 흐려 기회의 장을 열어놓았던 좀 전의 대답과 다르게 녀석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모습이 또 어지간히 귀여워 보였는지 생머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호 웃었다. 파마머리와 단발머리 역시 호호호 따라 웃었다. 생머리가 리더였나 보다. “ 오빠, 여자한테 튼튼한 놈이라뇨. 여자 친구 알면 화나겠다. 에이, 진짜 아쉽다. 오빠 딱 내 취향인데. 어때요? 여자 친구랑 헤어질 생각 없어요?” 생머리가 화끈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흥미가 더해지고 있었다. 이 복신이 뭐라고 대답할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이, 3인분이 넘는 김치찌개를 저 혼자 박살내고 돌아온 이 경원이 내 얼굴에 대고 꺼억ㅡ 트림을 했다. 이런 스컹크 족속들. 요새 이것들이 왜 이렇게 남의 얼굴에다 트림을 해대는지 몰라. 나는 뒤늦게 코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 저것들 뭐하냐.” 녀석은 내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한 손으론 콧구멍을 후비며 다른 손으론 빨대 꽂은 병 콜라를 들고 있었다. 단칼에 무시하고 내 말만 했다. “ 내가 가게에 있는 거 축내지 말라고 했지? 너 콜라도 딱 한 모금 마시고 다 버리잖아. 그거 다 돈이란 말이야. 제발 아끼자, 아껴. 아껴야 잘 산다는 말도 모르냐.” 놈이 내 주둥이를 움켜쥐고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겨우 빠져나와있는 힘껏 놈을 째려봐줬다. 째려보고 싶어서 째려본 게 아니라 마땅히 할 게 없어서 알아서 눈이 돌아갔다. “ 잔소리 하려거든 알아서 닥치셔요. 야, 지금 저것들 뭐하는 거냐니까. 설마 저 꼴통, 저 새끼 저거 요새 접대부로 취업했냐. 웬 조개들 사이에 둘러 싸여서 희희낙락거리고 지랄하신다니.” 놈의 숙성되지 못한 비린 냄새 풍기는 언어습관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 조, 조개? 너는 말을 해도 꼭 그런 표현을 쓰더라. 제발 여성부에 끌려가서 사형이나 당해라.” 빨대를 잘근잘근 씹어대던 이 경원이 돌연 내 턱을 덥석 깨물었다. 꽥 비명을 질렀다. “ 아이고, 귀여워라. 우리 개잡년 씨는 덕담을 해도 참 깜찍하게 하시어요.” 이 경원은 전생에 선인장이나 고슴도치였을 것이다. 주둥이에 돋친 가시가 이제 아랫입술을 뚫고 기어 나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내가 눈알을 부라리고 가만히 있자 놈이 코딱지 묻은 손가락을 은근슬쩍 내 앞치마에 비비려 했다. 찰싹ㅡ 손등을 후려갈겼다. 녀석은 아쉽다는 듯이 코딱지를 뭉쳐 옆으로 휭 날려버렸다. 이런 못 볼꼴을 보고, 나도 참 오래살긴 오래 살았다. “ 여자들이 보기에 복신이 생기긴 생겼나봐? 처음 메뉴 네가 받았던 테이블이잖아. 너한텐 아무 말도 안 하더니 복신이 가니까 얼굴에 화색이 돈다. 역시 예쁘게 생긴 것보다 남자답게 생긴 게 더 대중적이긴 하지.” 살짝 아리기 시작하는 턱을 움켜쥐고 꼭꼭 눌렀다. 끝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빨대를 버리고 병째 콜라를 들이키고 있던 경원이 멈칫 하는 게 느껴졌다. 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대로 명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내 자신이 미친 듯이 자랑스러워졌다. “ 친구, 조개들이 술 먹고 사람, 짐승 구분 못하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섭섭하게 말씀하시나. 술 깨고 저 얼굴 보면 당장기절해서 내년 구정에나 일어날 거다. 두고 보라니까.” “ ……글쎄, 그건 좀 오버하는 거 같은데.” 놈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왈왈 짖어댔다. “ 그럼 내가 저 금수새끼보다 못하단 말이냐! 미모 하나로 일대를 장악했던 나야. 너 불나방, 이 경원이라고 알아, 몰라! 어라? 대답 안 한다 이거지? 에이 씨.” 놈이 분에 못 이겨 콜라병 주둥이를 돌멩이로 쾅쾅 내리쳤다. 불쌍한 놈, 네가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 손을 뒤늦게 호주머니 속에 감추려 해도 나는 이미 다 봤단 말이야. 얼굴 하난 기가 막히게 자신 있어 하는 이 경원이었다. 더러운 성격을 반영하듯 녀석의 신경질적인 얼굴은 보고 또 봐도 일품이었지만 그건 중, 고등학교 여학생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고 대학생 이상 가는 여자들에게 놈은 인기가 참담했다. 나름 두터운 팬 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놈의 자존심에 금을 입힌 게 바로 포장마차를 하면서 부터였다. 믿기 힘들 정도로 열화와 같은 인기와 직업여성들의 전폭적인 성원에 힘입어 승승장구하는 이복신이와 대조적으로 놈의 인기는 말 그대로 거품 인기였던 것이다. 밀물, 썰물, 단물, 쓴물 다 빠져 난간 이 경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으니, 이십대부터 많게는 사, 오십대 중년 여성의 가슴에까지 불을 집히는 이가 바로 이 복신이었다. 옛 영웅이 대중의 입맛에 적응 못해 밀려난 그 자리에 새로운 영웅이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야 할 옛 영웅께서는 코끝에 붙어있는 밥풀을 뜯어 먹으며 분을 삭이고 계셨다. 흉흉해진 눈빛으로 보아 현 영웅을 끌어내릴 만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구역질나게 유치했다. “ 옳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 경원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녀석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꽃피우는 이 복신이 무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앉으란 말도 하기도 전에 의자를 질질 끌어다 복신이 놈 옆에 철썩 달라붙었다. 원치 않은 불청객에게 여자들이 시선은 모은 건 당연지사였다. “ 내 친구 참 잘생겼지? 근데 이거 어쩐다니. 이거, 애인 있거든. 그것도 실하고 아주 건장한 놈이라 바람피우다 걸리면 아작 난다지, 아마.” 경원이 복신이 놈 어깨에 어색하게 팔을 둘렀다. 저게 또 왜 저런다니.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단발머리가 속도 없이 감탄하듯 말했다. “ 와, 여자 친구 되게 터프하신가보다. 하긴 남자친구가 저렇게 잘생겼으면 나라도 가만 안 있겠다.” 생머리와 파마머리가 어딘지 기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원이 소리 없이 씩 웃으며 앞치마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테이블 가운데로 죽 밀었다. “ 요새 싸이 다 하지? 애인이 일촌검사까지 하는 건 아니니까 가끔 안부 묻고 그럼 되겠네. 안 그냐, 복신아.” 순진무구한 얼굴로 복신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단발머리, 생머리, 파마머리가 일사불란하게 환호를 내질렀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현재 이 복신이 싸이를 아냐, 모르냐가 최대 관건이었다. 모르면 쪽팔릴 만한 상황을 어떻게든 만들어 낼 야비함과 간사함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경원이었다. 복신이 머리를 긁적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 싸, 싸이?” 생머리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 네, 오빠. 싸이 주소 좀 적어줘요. 제가 집에 가자마자 쪽지 보내 놓을 테니까 일촌 수락해 주세요. 네? 오빠, 제발요.” 단발머리가 제발요, 하면 파마머리가 주소 좀, 하고 소리쳤다. 생머리는 전두전능하게 그들을 지휘해 오빠 싸이 주소 좀 가르쳐줘요. 하고 제일 긴 대사를 후려쳤다. 이 경원은 소란스러워진 그녀들을 차갑게 훑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신만만한 저 표정을 보아하니 어떻게든 이 복신의 텅 빈 돌대가리를 까발리겠다는 뜻인데, 객관적이나 주관적이나 이 방법은 너무나 단순했다. 놈은 초등학교 3학년 과정부터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줄곧 곤혹스러운 표정만 짓고서 우물쭈물해 있던 복신이 펜을 집어 들었다. 생머리 외 2명이 기대에 찬 시선을 보냈다. 복신이 뭔가를 천천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원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본 건 복신이 메모지를 그녀들에게 내민 직후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놈에게 다가간 순간 파마머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 어머, 세상에 이 오빠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유머도 짱이다.” 파마머리가 메모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거리가 있어 나는 보이지 않았지만 생머리와 단발머리는 용케 확인하고 얼굴에 꽃을 달았다. 리더답게 생머리가 메모지를 낚아채며 소란을 피웠다. “ 아, 귀여워. 진짜 최고다. 오빠, 진짜 귀여워요. 완전 내 이상형이에요.” 이 복신이 쑥스럽게 웃으며 별거 아닌데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했다. 의미 없는 그 말 한마디에 생머리를 필두로 눈알이 하트 모양으로 바뀌더니 그녀들은 서로 메모지를 갖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점점 산으로 가는 상황에서도 말 한마디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 경원의 입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녀석에게 다가갔다. 아옹다옹 거리는 틈에 반으로 찢겨진 메모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무릎을 굽혀 찢어진 메모지를 들어 올렸다. 불빛에 비쳐 찬찬히 훑어봤다. - www. psy. com - 놈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싸이 주소라고 쓴 게 고작 저거란 말인가. 진짜 싸이의 공식홈피쯤 돼 보이는 주소에 그녀들은 이복신이를 얼굴 잘생긴 오빠에서 유머감각까지 있는 오빠로 단숨에 승진시켰단 사실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경원이 뒤로 까무러칠 만 했다. “ 저기…….” 그녀들의 비명소리만 난무하던 가게 안에 시종일관 가공된 순수미소를 사용하고 있던 이 복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 농촌, 어촌까진 알겠는데 아직 일촌은 잘…….” 놈은 이번에도 뒷말을 묘한 부분에서 흐렸다. 그녀들은 잠시 침묵하더니 멍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생머리가 탁자를 두들기며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독창적이지 못한 단발머리와 더 독창적이지 못한 파마머리도 연달아 낄낄댔다. “ 아아, 완전 웃겨! 이 오빠, 진짜 개그맨이다. 귀여워 미치겠어. 오빠, 오빠도 알아요? 오빠 진짜 웃겨요.” 패닉상태에 빠져 생사를 넘나드는 이 경원을 원 자리에 데려다 놓고 찬물과 뜨거운 커피로 지친 심신을 달래줬다. 어디서 웃어야할지 몰라 잠시 방황하던 이 복신이 생머리가 소주를 마시는 틈에 재빨리 끼어들어 빙구처럼 따라 웃고 있었다. 살아생전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 형제들 중 이 복희씨 상태가 ‘정상인’과 제일 흡사했다. 내가 계속 놈을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복신이 입으로 왜, 하고 물었다. “ 그냥 좀 신기해서.” “ 그냥 뭐어어…….” 인기 남에 만족 못한 이 복신이 콧소리를 앵앵거리며 내친김에 죽도 못쓸 귀여운 척까지 해댔다. 조금 전 먹었던 순두부찌개가 위장에서 충돌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구역질이 나오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미친 듯이 부대끼는 아랫배를 누른 채 입을 열었다. “ 유전자가 같아서 그렇다지만 이건 닮아도 너무 닮았잖아.” 놈이 배시시 웃었다. 없어 보이는 그 웃음에 생머리 외 2명이 핸드폰을 치켜들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 복신은 주둥이론 형식적으로 왜 이래 하지 마, 애들아 하면서 티 나지 않게 턱을 치켜들고 부드럽게 턱을 감싸는 둥, 80년대 하이틴 잡지에서 봤을 법한 공식유치포즈를 취했다. 쟤도 인생 참 재밌게 산단 말이야……. 놈의 천연적인 꼴값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 복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 내가 누굴 닮았는데? 장 동건? 정 우성? 원 빈?” 몰랐는데 저건 텅 빈 대가리만큼이나 양심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억지로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네 큰 형님 말이야. 두 사람 진짜 많이 닮았어. 아주 심각하게 많이.” ……토 나오게 무식한 게. 뒷말은 들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중얼거렸다. 내 참뜻을 알 리 없는 복신이 생전 처음 맞선보러 나온 농촌총각처럼 구수한 미소를 지었다. 제 형이랑 닮았다니 은근히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내가 좀 생기긴 생겼나 봐?” 어이가 없어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 복신이가 부드럽게 뺨을 감싸 쥐고 덧붙였다. “ 이야, 대학 간 보람이 있네. 내가 그렇게 지적으로 보이나? 그럼 나도 이제 에, 에…….” 놈이 급격하게 우리 눈치를 살피더니 비명을 지르듯 목청을 높였다. “ 에, 에리트냐.” 아주 쐐기를 박는구나, 쐐기를 박아. 저 무식쟁이가 이젠 하다못해 교복이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경원이 참담해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우여곡절 끝에 메모지를 차지한 단발머리의 눈에 거친 의심의 빛이 피어오른 건 그때였다. 불신의 싹은 전이되는 특성이 있었다. 예상대로 생머리와 파마머리의 눈초리가 새치름해졌다. “ 대학이 좋긴 좋아. 단번에 에리트 냄새가 배어 버리고 말이야, 하하하.” 무럭무럭 피어나는 의심의 불길에 이 복신이 저 스스로 기름을 퍼부었다. 그녀들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덜렁 술값만 계산하고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꼭꼭 챙기는 현금영수증과 다르게 이 복신의 싸이 주소가 적힌 메모지는 바닥에 버려진 채였다. 에리트 이 복신이 이것들, 어디로 갔지 하고 주위를 둘러봤을 땐 이미 녀석 곁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경원의 자존심을 끌어내린 것치곤 쓸쓸한 최후였다. 새벽이 무르익어갈수록 궁둥이와 의자가 접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홉시 전후로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린 여파인지 새벽 두시에 어울리게 두 테이블을 제외하곤 가게는 조용했다. 손님도 손님이지만 놈들이 웬일로 한 명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모처럼 찾아온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학교 측과 관계없이 지 멋대로 대로 일주일 앞당겨 방학을 한 이 복신에게 주문을 맡기고 시종일관 여유로운 자세로 부식비 계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때 앞치마에서 말린 바나나를 꺼내 먹던 김 지만이 펑퍼짐한 궁둥이를 끌고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 나 배고파. 오늘은 간식 없어?” 계산기를 두들겨 대던 손가락이 순간 삐끗했다. 놈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사람이냐, 식충이냐. 도가 지나친 식탐에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불과 20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놈에게 뭘 해줬더라. 녀석들의 무관심으로 냉장고 안에서 생을 마감하던 치킨을 발견, 눅눅한 튀김옷을 벗기고 손수 새 옷으로 갈아입힌 다음엔 양념까지 발라 놈의 거대한 주둥이 앞으로 갖다 바쳤다. 근데 저 꿀돼지가 화장실 한 번 갔다 오더니 처먹은 걸 다 싸질러 놓고 또 다시 배고파 타령을 시작한 것이다. 해골 아파지는 상황이 도래했다. 성난 황소보다 배고픈 돼지가 더 무서운 법이다. 워, 워ㅡ 우선 놈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 계산하는 사람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가서 국수를 좀 삶아 먹는 건 어떻겠니?” “ 싫어, 싫어. 만날 국수랑 우동만 먹어서 똥 눠도 면발 밖에 안 나온단 말이야…….” 김 지만이 어딘가 빈곤해 보이는 어리광을 부렸다. 또 다시 위장 속에 순두부찌개가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 그럼 가서 밥이라도 먹든지 해. 컵라면도 몇 개 있는……아, 너 라면 먹기 싫다고 했지.” 내가 생각보다 관심을 보이지 않자, 김 지만이 눈에 띄게 당황해 했다. 놈은 코를 후비고 귓구멍을 쑤시는 등, 보기만 해도 사람 역겨워 지게 만들더니 최후에는 덜떨어진 애교작전으로 나왔다. “ 가서 김밥 사올래. 김밥, 김밥! 계진아아아, 돈줘워.” 이럴 땐 못들은 척 하는 게 최고였다. 계산기를 눌러대는 손가락에 절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어째 볼따구니가 축축해진다 싶더니 성난 돼지가 갑자기 내 주판과 계산기를 한 손에 낚아채 등 뒤로 감췄다. 나는 허망한 눈으로 놈을 쳐다봤다. 그때 받으라는 주문은 안 받고 부엌 가위로 코털을 자르고 있던 이 복신이 현재 상황과 앞 뒤 맥락을 싹 무시하는 한 마디를 던졌다. “ ……꿀꾸루우 꿀꿀 꿀꿀꾸루 꿀.” 일동 침묵했다. 속살이 찔릴 듯한 정막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복신이는 황망해진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저 고집대로 밀고나왔다. 이럴 때 보면 철이 없는 건지 은근히 성깔이 있는 건 지 도통 구분조차하기 싫어졌다. “ 뭐야, 이것들 왜 이렇게 조용해. 모두 자, 나를 따라해 보라구우! 아 세이 꿀, 유 세이 꿀꿀. 꿀, 나 먼저 꿀꿀…….” “ 그만 해라.” 지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보고 있으면 답답할 정도로 허허실실거리는 놈이 절대 너그럽게 넘어가지 않는 것이 딱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이 경원과 관련된 일이오, 그 다음은 먹을 것을 상대로 장난치는 놈들이었다. 딱히 복신이 먹을 걸 가지고 장난을 친 적은 없었지만 화나면 그런 걸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지만이 똑똑하지 않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불길한 예감이 습자지처럼 번져왔다. 가계부를 덮었다. 이놈 이거 표정이 시베리아 벌판 같은 것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안 그래도 빈곤한 돌대가리를 한 손에 박살낼 기세였다. 지만이 놈의 급변한 표정에 알아서 입 닥칠 줄 알았던 복신이 기대와 다르게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주둥이를 놀려댔다. “ 김 지만이, 이 돼지 새끼야. 나 따라 해보라니까아아. 아 세이, 꿀 유 세이…….” “ 저 자식이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끊임없이 지랄거리네.” 지만이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움을 요청하고자 슬쩍 이 경원을 바라봤더니 놈은 권솔과 누가 더 빨리 하나, 설거지 내기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권솔은 입에 보글보글 거품까지 일어난 상태였다. 승부욕 하나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들이 맞붙었으니 오늘 안에 내가 고무장갑 끼는 일은 없을 터였다. 다만 문제는 저 올바른 승부욕이 일 년에 한번 쯤 나올까, 말까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툼한 지만이 놈의 허리를 눌러 간신히 자리에 앉혔다. 놈이 분에 못 이겨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맨 정신으로 보기 아찔했다. “ 저 화상은 여기 왜 오는 거야? 저게 지금은 암말 안 하고 있어도 말일에 알바 비 몰아서 토낄게 분명해. 괜히 돈 낭비하지 말고 지금 잘라 버리자, 응? 빨리 잘라, 잘라, 잘라, 자르라고 계진아.” 지만이 두 손을 모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 복신이 불타는 눈깔을 치켜뜨고 있는데 오냐, 그러마! 할 수도 없고 이거 참 미치겠네. 우물쭈물 대충 시간이나 때울 심산으로 입 닥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이 복신이 알아서 대화를 이끌어갔다. “ 이 돼지 새끼, 가만히 일 잘하는 나를 왜 잘라. 자르려면 널 잘라야지. 만날 먹고, 싸는 거 말고 네가 잘하는 게 뭐 있다고 나를 걸고 넘어지냐.” 가만히 있다간 더 큰 싸움으로 번질 거 같아 한 마디 던졌다. “ 제발 그만들 좀 해. 야, 지만아 그냥 네가 참아.” 이 복신이 초점을 잃는 눈빛으로 나를 사납게 야려보았다. “ 야! 너 어쩜 말을 그렇게 하냐. 지만아 네가 참아? 하, 너희들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저들끼리 더 오래 됐다고 나 은근히 왕따 시키고!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런 식으로 소외감 느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야. 신 멤버에 대한 예의가 없잖아. 나 참, 더럽고 치사해서 진짜…….” 아주 가지가지 하네. 김 지만이 더 가까이 있으니 참으란 말 한 마디 밖에 안 했는데 저건 왜 또 오버 질이야. 콧김을 씩씩 뿜어대는 이 복신을 보는 지만이 놈의 눈동자에 악의가 가득 찼다. " 그럼 너랑 나랑 싸우면 계진이 네 편 들 줄 알았냐. 그리고 내가 아무리 먹고, 싸는 것 밖에 못 해도 태어날 때부터 대가리에 똥만 차 있는 너 보단 낫다, 이 새끼야. “ 이 쓸모없는 자식들이 기어코 한 판 벌이려는 작정이었다. 고개까지 끄덕이며 열심히 듣는 척 하던 복신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곤 고무장갑을 벗었다. “ 고졸 주제에 감히 대학생 무시 하냐. 옛날 같았으면 고졸이랑 대졸이랑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어. 이게 불쌍해서 친구해줬더니 뭘 잘 했다고 감히 대들고 지랄이야. 꿀꿀 아,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그게 더 깔끔해 보이는 거 아냐.” 복신이 갑자기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고무장갑을 미친 듯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와 풍선처럼 팽팽해진 그것으로 지만이 놈의 등짝을 퍽퍽 후려쳤다. 방심하고 있던 지만이 얻어맞을 대로 다 얻어맞은 뒤에야 쏜살같이 일어나 복신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복신이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다리를 휘청했다. 김 지만이 건달다운 미소를 지었다. “ 오호라, 지금 해보자가는 거냐. 좋아, 도전을 받아들이지.” 김 지만이 후다닥 싱크대로 달려가 식칼을 꺼내왔다. 옆구리를 주물럭거리고 있던 복신이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달려드는 지만이 놈을 겨우 피해 저도 식칼 하나를 움켜쥐고 돌아왔다. 곧이어 머리 위에서 챙챙ㅡ 칼 부딪치는 소리가 명랑하게 울려 퍼졌다. 점점 더 과격하게 변하는 칼부림 쇼에 이 경원과 권솔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권솔이 따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저것들 뭐하냐.” “ 몰라, 칼싸움이라도 하나보네. 저러다 칼날 망가지면 어쩌려고 저 지랄들이야. ……어이, 개집. 둘 중 하나 죽으면 미리 말해줘. 구경 가게.” 경원이 귀찮다는 투로 말하자 솔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죽겠다 싶으면 버리고 와. 화장시킬 돈도 아깝다. 요새 뼛가루 담는 통 하나에도 몇 십만 원씩 받아 처먹더라.” “ 뭐가 그렇게 비싸냐. 저것들은 그냥 과일박스에 담자.” 권솔이 사뭇 진지해진 얼굴을 했다. “ 글쎄. 과일박스는 너무 크니까 꿀단지가 괜찮이 보이지 않냐. 그게 사이즈도 괜찮고 남들 눈도 있고 하니까 여러모로 적당할 듯 싶은데.” “ 그럼 꿀단지로 하자.” 두 놈이 의기투합해 한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장난이라곤 티끌만치도 안 보이는 살벌한 칼싸움에 완벽하게 태평할 수 있는 녀석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권솔과 경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저들 설거지로 돌아가 성난 야수로 변해가는 동안 나는 챙챙ㅡ 거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신이 손목을 겨냥하고 칼날을 휘둘렀다. 김 지만이 손등을 움켜쥐고 얼굴을 찌푸렸다. “ 하, 저놈 봐라. 왜 멀쩡한 손등을 감싸 쥐고 그러실까. 이 양반아, 거긴 스치지도 않았어. 연기를 하시려면 제대로 하셔야지.” “ 오, 제법인데?” 이복신의 조롱에 김 지만이 발끈하듯 손등을 털어냈다. 복신이 녀석의 말마따나 김 지만의 손등은 주부습진 걸린 나와는 대조적으로 살 오른 돼지마냥 뽀얀 것이 눈곱만한 상처도 없었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고생한 줄 안다고 했다. 놈의 손을 보자 비로소 저 자식 역시 이경원이와 마찬가지로 가게를 얼마나 많이 토꼈는지 어림짐작이 갔다. “ 저게 봐주니까 갈수록 기고만장하네. 좋아, 한 명이 죽어 나갈 때까지 끝까지 해보자.” 지만이 칼날을 앞치마에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복신이 가까이 오라고 도발적으로 손짓했다. 이를 앙다물고 눈에 독기를 품은 것이 대참사를 야기하고 있었다. 지만이 앞, 뒤 안 가리고 뛰쳐나가려는 찰나 나는 놈의 팔목을 힘겹게 쥐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반동으로 가슴이 앞으로 딸려가는 걸 재빨리 테이블을 잡아채는 통에 가까스로 참사는 면했다. 녀석이 주춤했다. 가계부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놈의 앞치마에 쑤셔 넣었다. “ 제발 가서 김밥 좀 사 먹어. 거스름돈은 너 다 가져도 좋아.” 놈이 앞치마를 내려다보더니 천진난만하게 좋아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빨리 나타난 단순한 반응에 나도 힘없이 웃어버렸다. 지만이 이게 왜 내 손에 있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칼을 바닥에 팽개치고 앞치마에서 돈을 꺼내 문 앞으로 걸어갔다. “ 밤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웬일로 사람다운 말을 하나 싶었던 김 지만이 밖으로 나가다 말고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 계진아, 열다섯 줄만 사올까. 음, 그건 너무 적은가.” 놈이 순진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실룩실룩 거리는 눈알을 보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저 놈의 새끼 위장엔 도대체 뭐가 들어가서 저럴까. “ 그냥 열 줄만 사…….” 복신이 식칼을 치켜들고 지만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놈이 번쩍거리는 칼날을 김 지만의 옆구리에 바짝 들이대며 득득 이를 갈았다. “ 너 싸웠다고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먹는 걸로 그러면 벌 받아, 지옥 간다고 이 새끼야.” 김 지만이 정처 없는 시선으로 복신이 놈을 내려다봤다. 복신이 절대 작은 키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불곰 앞에 서있는 놈은 지나치게 왜소해보였다. “ 이게 뭐라는 거야. 할 일 없으면 가서 마늘이나 까라. 적어도 밥값은 해야 될 거 아냐.” 지만이 코웃음을 치고 밖으로 나가려하자 복신이 재빨리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김 지만의 코웃음을 진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당황한 이 복신이 알게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 열다섯 줄이 뭐야, 열다섯 줄이. 그걸 누구 코에 붙이라는 거냐. 돼지 새끼, 너만 입이냐. 나도 김밥 먹을 줄 안단 말이야. 적어도 스무 줄은 사야 될 거 아니야! 김밥은 간만 보냐! 엉?” 복신이 툴툴댔다. 김 지만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놈은 복신이 놈을 빤히 쳐다보더니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 계진아.” “ ……어? 어, 어.” 놈의 불신 가득한 눈빛에 눌려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지만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테이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쿵쿵거리던 계산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아슬아슬하게 낚아챘다. “ 계진아.” “ 왜, 왜.” 놈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움찔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김 지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 계진아, 내가 돼지야?” “ ……뭐?” 그때 복신이 지만이 놈 반대편에 앉아 얍삽하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나 김 지만은 올곧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이마를 긁적였다. 복신이 눈을 깜빡였다. 어서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 글쎄, 돼지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어딘가 혼이 나가 보이는 몰골에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놈은 누가 봐도 꿀 돼지였다. 침묵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복신의 휘파람 소리가 박자를 무시하고 울려 퍼졌다. 지만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놈의 그 혼란이 지극히 코믹했다. 저건 거울도 안 보고 살았나. 뭘 새삼스럽게 저러나 몰라. 침묵이 지루해지던 참에 지만이 겨우 입을 열었다. “ 나, 나는 너희들이 놀린다고만 생각하고 귓전으로 흘려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지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흠칫했다. 저게 먹을 게 없어 이젠 염치까지 먹어치웠구나 싶었다. 복신이 테이블 위에 나동그라지며 박장대소했다. “ 너 돼지야, 완전 돼지. 그걸 인제 알았냐. 이 꿀꿀 아, 그러니까 그만 좀 처먹어라. 너 솔직히 말해봐. 맞는 바지가 있기는 하냐.” 지만이 얼굴을 붉혔다. “ 있, 있어!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 왜 모르냐, 네가 돼진 건 잘 알고 있지. 혹시 맞는 옷 없으면 후딱 말해라. 최 홍만이 옷 맞춰 입는데 알아봐 줄 테니까, 하하하.” 나는 촐랑 방정을 떠는 복신의 주둥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나 놈은 맞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지만이 놈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끝까지 긁어댔다. “ 이건 몸매만 보면 밥샙인지 인간 드럼통인지 구분이 안 가는구만.” 나는 놈을 무시하게 울 거 같은 얼굴로 시무룩해져 있는 지만일 위로하기 위해 두 팔 걷어붙였다. “ 왜, 내가 보기엔 건강하고 좋기만 한데. 지만아, 너 돼, 돼지 아니야. 걱정 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려니 양심이 찔렸다. 그러나 그 눈에 뻔히 보이는 구라 한 마디에 김 지만이 안개꽃처럼 얼굴을 활짝 펴는 걸 보자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 그렇지? 계진아, 나 돼지 아니지?”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하지 마, 넌 양심도 없냐 하고 달려드는 복신이 놈의 발등을 힘껏 내리찍었다. 녀석은 배고픈 돼지처럼 꽥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 위로 풀썩 쓰러졌다. 김 지만은 내게 돼지가 아님을 확인받은 후 한결 가벼워진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엽다, 정말 귀여워.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의미 없이 물었다. “ 너 백 킬로는 안 넘지? 근데 뭐가 돼지래. 뭐. 말이 백 킬로지 그거 넘으면 사람이냐. 너 진짜 안 뚱뚱해. 네가 뚱뚱한 거면 백 킬로 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냐.” 놈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녀석의 얼굴을 확인한 나와 이 복신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껴안고 뒷걸음을 쳤다. 김 지만의 눈빛이 확 달라져 있었다. 붉게 충혈 된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했던 것이다. “ 너 만은 믿었는데.” “ 지, 지만아. 무, 무섭게 왜 그래.” 놈이 호랑이처럼 어흥어흥 울부짖었다. “ 그래, 나 사람 아니다! 계진이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대놓고 놀리는 돌대가리보다 네가 더 나빠! 처음부터 내 몸무게 알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교묘하게 사람을 농락할 수가 있냐.” “ ……뭐, 뭐야. 너 백 킬로 넘어? “ 지만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발끈하고 나섰다. “ 알고 있었으면서 시치미 떼지 마! 그래, 네가 알고 있는 대로 나 백 이 킬로다. 하지만 그렇게 돼지는 아니란 말이야! 계진이, 미워!” 놈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나, 백 이 킬로다 하는 소리를 대 여섯 번은 외친 뒤 밖으로 쌩하니 달려 나가버렸다. 등 뒤에서 권솔이 히죽거리며 저거 백 킬로 넘었대, 너 알고 있었냐 하고 입을 열자 경원이 심드렁한 얼굴로 나한텐 구십칠 킬로라고 했는데 저거 뻥 쳤네. 하는 쓸데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귓불로 고막을 막아버렸다. 복신이 잘했다는 듯이 내 어깨를 툭툭 쳤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저거 언젠간 성인병으로 병원 신제 좀 지겠구나. 오면 비만의 위험성을 단단히 일러둘 필요가 있었다. 이 복희씨에게서 전화가 온 건 마감을 삼십분 앞둔 다섯 시쯤이었다. 별반 신기할 것도 없는 전화 한통에 점당 백 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있던 놈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백 이 킬로 김 지만은 물만 처먹고 이미 곯아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경원이 다이어트 시킬 요량으로 물만 먹였더니 놈은 오기로 물살을 찌우겠다고 시위를 했다. 기어코 끝까지 쫒아 나오는 권솔을 겨우 따돌리고 밖으로 나왔다. 「 나.」 “ 네, 알아요.” 핸드폰 너머로 잡음이 시끌시끌했다. 쇠방망이로 바닥을 내리찍는 것 같은 쿵쿵거리는 소리와 또각또각 울리는 구둣발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입 험한 사내들의 걸쭉한 욕지거리와 콱, 퉤 하는 가래 침 뱉는 소리까지 더해지자 핸드폰에 귀를 바짝 붙이고서도 이 복희씨의 목소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앵무새처럼 잘 안 들려요, 잘 안 들려요, 만 반복했다. 그는 핸드폰을 잠시 입에서 떼어내고 듣고만 있어도 귀가 썩어버릴 것 같은 흉흉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곧이어 평온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 복희씨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 말 한다는 걸 깜빡하고 왔다. 새벽에 문단속 잘 하고 자라.」 “ 그게 끝이에요?” 나는 조금 당황했다. 껌을 짝짝 씹어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 그럼 또 뭐.」 딱히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서운함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잘 묶여 있는 앞치마를 이유도 없이 풀었다, 다시 묶었다. 문틈사이로 인위적으로 왔다갔다 거리는 그림자들은 어느새 셋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 복신이 이경원이까지 끌고 온 모양이었다. 자체적인 입단속이 필요한 시기였다. “ 그게 아니라, 근데 뭘 그런 걸 가지고 전화래요. 여자도 아니고 문단속이야 아무렴 어때서요.”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릴 정도로 이 복희씨가 다그치듯 말했다. 「 도둑맞고 환장하고 싶은 거 아니면 문단속 잘하고 자.」 일말의 불안감에 눈썹이 바짝 치켜떠졌다. “ 꼭 도둑이 들것처럼 말씀 하시…….” 「 네, 다섯 시 전후로 비렁뱅이 새끼하나 찾아갈 거다. 네 놈이 나보다 신뢰하는 문고리에 밥숟가락 걸어 잠그는 최첨단 시스템으로 열심히 한 번 물리쳐봐. 혹시 아냐, 문에 손만 갖다 대도 밥숟가락이 비상등처럼 깜빡거릴지. 재주껏 하라고, 재주껏.」 이게 놀리는 거야, 뭐야.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미 신경은 바짝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 나 지금 가게 들어가 봐야 되거든요? 이상한 걸로 장난치지 말고 일해요, 일. 저 설마해서 묻는 건데요. 지금 손님이랑 있어요?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혹시 일 안하고 어둠의 세계에 발 담그러 간 건 아니겠죠?” 때마침 여기저기서 형님, 형님 소리가 빗발쳤다. 발만 담그러 간 게 아니라 이미 온몸으로 샤워까지 마친 듯 했다. 이 복희씨는 변명 한 마디 없이 제 말만 이어나갔다. 「 나는 분명 말 했다. 버스 지나간 뒤에 후회하지 말고 문고리에 국자라도 꽂아놓지 그러냐. 」 이 복희씨가 제 말만 하니, 나 역시 내 말만 하기로 했다. 한 쪽에서 져주지 않는 이상 원활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놈은 내 터프함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어야 했다. “ 그 쪽이 모르고 있는 거 같아서 말해주는데요. 난요, 이 복희씨 빵에 들어가도 안 기다립니다. 적당히 괜찮은 사람 만나서 결혼할 랍니다.” 「 잘됐네, 기다리지 마. 애초에 기다릴 필요도 없었는데 뭐 하러 굴삭기 돌아가는 소리만 골라 하시나 몰라, 우리 김 궁상여사께서는.」 “ 여, 여 뭐요?” 내가 발끈하고 나서자 이 복희씨에게서 떡밥 던져놓고 컵라면 까먹는 베테랑 낚시꾼과 같은 농도 짙은 비웃음이 날아왔다. 「 대신 들어가겠다고 번호표 들고 서울부터 부산까지 짝 서있는데 내가 왜 그런 시궁창에 가나. 만에 하나 간다고 해도 혼자 갈까?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럴 때 보면 우리 김 궁상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나를 징그럽게 모르셔, 이거 너무 그러니까 섭섭해지려고 하네. ……흐, 흑.」 그는 급기야 훌쩍, 훌쩍거리며 어색한 연기까지 선보였다. 옆에서 큰 행님, 와 그러시오. 형님, 눈이 따갑소. 감히 우리형님께서 눈물을. 따위의 비명과 같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들어가면 혼자 들어 갈까봐? 이보셔요, 그건 아니지요. 대충 1, 2년 썩힐 거 덮어 씌어 줄 테니까 같이 레드카펫을 밟아보자고. 간단해. 애들한테 썩은 해물 몇 박스 딸려 보낼 테니 섞어서 팔아봐. 우선 식중독으로 가볍게 두, 셋만 골로 보내면 그 뒤는 내 선에서 알아서 해줄게. 인생 한 번 재밌게 살아보자고!」 뚜뚜ㅡㅡㅡ. 몰인정한 새끼 같으니라고.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전화 한통만 해도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참담할 수가 없었다. 내게 이 복희씨의 규정하기 힘든 존재감은 여전히 거대한 산과 같았다. 또는 풀 때마다 답이 다른 수학문제, 아침마다 외워도 외워지지 않는 썩은 호빵 같은 영어단어, 토익 만점 맞고도 외국인 앞에 서면 바싹하고 입이 얼어붙는 기이현상과도 비슷했다. …… 언젠간 나아지겠지, 그래 언젠가 놈을 쥐 잡듯 잡을 날이 올 거다. 그게 얼마나 걸릴 진 모르겠지만 꿈의 그 날을 위해 차곡차곡 내공을 쌓은 다음에 늙고 힘없어 지면 당장 골방에 가두자. 그리고 밥은 하루에 한 끼씩만 주기로 하자. 나는 물 흐르듯 단순하게 돌아가는 내 머리에 스스로 탄복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개업 이래 처음으로 녀석들이 마감 준비를 끝내가고 있었다. “ 곧 크리스마슨데 우리도 트리 만들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만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겨울의 새벽은 아직도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골목을 비추고 있었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틈새까진 빛이 들어오진 못했다. 큰 대로를 지나 두 번째 골목을 꺾어 들어갔다.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삶은 앞치마를 들고 제일 앞장서 걷고 있던 이 복신이 슬금슬금 뒷걸음을 쳐 지만이 놈 옆으로 붙어 섰다. “ 트리? 난 그거 돈 아깝던데. 전구 빤작빤작 거리는 거 다 전기세야. 그냥 티브이로나 구경해.” “ 댁한테 안 물었어. ……만들자, 만들자. 응?” 지만이 반대로 몸을 휙 돌려 나를 보고 걸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얘 좀 어떻게 해봐, 하는 뜻으로 이 경원을 봤더니 놈은 씹고 있던 껌을 검지로 둘둘 말아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주둥이에 도로 집어넣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났다. 앞으로 반나절은 상종 말아야겠다. “ 정 그렇게 만들고 싶다면 그래야지. 집에 가면 트리 살돈 줄게.” 지만이 씩씩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됐어. 땡전 한 푼 안 들이고 잘 만들 수 있는데 뭐 하러 돈을 써.” “ 동사무소 앞에 있는 거 훔쳐 올 생각이면 애초에 하지 마라.” 제일 뒤쳐져 걷고 있던 권솔이 끼어들었다. 순간 지만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움찔했다. 저 극적인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 동사무소 앞에 있는 걸 훔쳐올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놈이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게 미리 잡아준 권솔이 감사했다. 얌전히 걷고 있던 경원이 바닥에 침을 콱ㅡ 뱉었다. “ 트리 그거 치울 때 귀찮기만 한데 왜 만들어. 돌대가리 말마따나 티브이로나 실컷 봐.” 슬쩍 지만이 놈을 쳐다봤다. 놈은 믿었던 경원이 반응이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덩치는 초 대량 불곰에 속은 걸음마도 떼지 않은 애기 곰이었다. 나는 지만이 놈의 변강쇠 같은 어깨를 툭툭 쳤다. “ 재료비 줄게. 열심히 만들어 봐.” “ 다 싫어하는 트리는 왜 자꾸 만들래. 됐다고 봐, 꿈에서나 실컷 만들어 보라지.” 복신이 끝까지 천박스럽게 촐랑거렸다. 보이지 않게 놈의 옆구리를 꼬집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복신이 잔뜩 비아냥거리며 입술을 심술 맞게 말아 올렸다. “ 저 봐, 저 봐. 아까부터 가게에서부터 대놓고 차별대우 한다니까. 헛소리나 지껄이는 김 지만은 내버려두고 왜 나만 때리는 건데! 밥그릇이랑 숟가락도 저들끼리만 똑같고 나는 개 밥그릇이나 주고 시장 갈 때도 자기들만 속닥속닥 모여가고! 에라이, 씨팔! 치사하고 더러워서 안 논다, 안 놀아.” 이 복신은 마음껏 오버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놈의 덜 떨어진 모습에 경원이 한 마디 했다. “ 뭘 처먹으면 상태가 저렇게 되냐. 절대 피해야겠다.” “ 글쎄. ……어라? 지만이는 어디로 갔지?” 좀 전 까지만 하더라도 옆에 있던 게 고세 사라졌다. 순간 이복신이를 따라갔나 싶어 골목을 쳐다보다가 나는 그런 내 생각을 스스로 비웃었다. 놈은 절대 빨리 뛰지 못하는 특수한 몸매였다는 것을 깜빡했다. “ 담장 위를 봐.”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솔이 무심하게 말했다. 경원이 놈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솔이 말마따나 김 지만은 남의 집 담장에 기어 올라가 있었다. 그것도 반쯤 정신이 나가 번쩍거리는 식칼로 앙상해진 은행나무를 미친 듯이 자르고 있었다. 누가 볼까 무서웠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시간이 시간이라 골목은 우리를 제외하곤 깊게 잠들어 있었다. 경원이 담배를 무는 권솔을 지나쳐 후다닥 달려가 실룩실룩 춤을 추는 놈의 궁둥짝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 내가 진짜 쪽팔려서 못 살아. 거긴 왜 올라가고 지랄이야, 지랄이. 당장 안 내려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김 지만은 바지 속에 손을 쑤셔 넣고 쥐어짜듯 엉덩이를 긁어댔다. 다른 한 손엔 은행나무가 넝쿨 채 들려 있었다. 녀석은 태평한 얼굴로 잠시만 마저 다 긁고 하고 지껄이더니 꽤 오랫동안 엉덩이를 주물럭거린 다음에야 땅으로 내려왔다. 놈이 잘린 은행나무를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 이걸로 트리 만들 거야. 와아 신난다. 경원아, 너도 좋지? 좋지?” 경원이 할 말을 잃은 채 벙 진 얼굴로 놈을 올려다봤다. 김 지만은 내친김에 은근히 칭찬까지 바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 아예 말을 말자. 여기서 밤샐 거 아니면 빨리 앞장 서! 추워서 동태 될 지경이다.” 경원이 툴툴대며 쏜살같이 걸어가 버렸다. 녀석의 뒷모습이 흐릿해지자 지만이 헐레벌떡 뒤를 쫒았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따라가는 내 앞을 권솔이 턱하니 막아섰다. 갑자기 내 얼굴을 양손에 감싸 쥐고 밑도 끝도 없이 뽀뽀를 쪽쪽 해댔다. 오른 손엔 담배가 끼워져 있는 채였다. 자칫 잘못하다 담배 빵 당할까봐 가만히 있으니 놈이 끊임없이 뽀뽀를 퍼부었다. 입안에 담배 향이 알싸하게 퍼졌다. 얘는 왜 이렇게 뽀뽀를 좋아하는 걸까. 이번엔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다. 이마가 따끔따끔했다. 골목 저만치서 이 경원과 김 지만이 나와 권솔을 쳐다보고 있었다. 놈들의 표정이 알쏭달쏭했다.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권솔의 가슴팍을 확 밀쳐냈다. 가만히 있었으면 더 나았을까.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태도에 권솔은 물론 녀석들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경원이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 “ 당사자들 문제니 얌전히 입 닥치고 있었다만 혹시나 해서 말인데…….” 놈의 느긋한 목소리에 숨넘어갈 지경이었다.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저렇게 뜸을 들이나.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며 잠자코 있었다. “ 너희들 좀 이상한 거 알고는 있지?” 이 경원의 짜증나리 만치 즐거운 기색에 순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심장이 세차게 튀어 올랐다. 그러다 점점 딱딱하게 변했다. 한 마디 할 거 같았던 권솔은 의외로 조용했다. 경원이 솔과 나를 검지 끝으로 툭툭 가리키며 덧붙였다. “ 좋아, 손잡고 뽀뽀하고 끌어안는 건 그런 그렇다 쳐. 근데 추울 때 속옷까지 싹 벗고 끌어안고 자는 건 좀 심각해져야 될 문제 아니냐. 아님 너희들 혹시 변태냐.” 가만히 서서 변태취급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발끈하고 나섰다. “ 변태가 뭐냐, 변태가. 친하면 그럴 수도 있지. 갑자기 이 얘기가 왜 나온 건지 모르겠네.” “ 친하면 그럴 수도 있어? 너 그 말 후회 안 하지?” 놈의 당당한 기세에 눌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후회는 무슨…….” “ 그래, 좋아. 후회하지 마. 근데 참 이상 하지. 그렇게 당당하신 분이 왜 이 씨 앞에선 권솔 눈도 못 쳐다보실까 몰라.” “ 그거야 당연이 이 복희씨가 솔이랑 붙어 있는 걸 싫어하니까 그렇지!”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내가 물러난 만큼 가까이 왔다. 자연스럽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 그러니까 이 씨가 왜 너랑 솔이 붙어 있는 걸 싫어하느냐 이 말씀이야.” “ 그거야 당연히…….” 말을 하는 도중에 뒷말이 암흑 속에 빨려들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은 또 처음이었다. 이 복희씨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 권솔을 싫어했나. 절대 아니라고 본다. 싫으면 그냥 싫은 거겠지 마땅한 명분을 가지고 감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이 복희씨는 그랬다. 그렇게 잠시 딴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경원이 벌써 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 얼마나 친했으면 서로 펠라도 해주고 그러실까. 참나, 우정 한 번 야릇하게들 나누셔.” 내 또 저 말 할 줄 알았다. 고등학교 그것도 한창 자아가 충돌하던 1학년 때 있었던 일을 까딱하면 꺼내는 저 놈의 밉살스러운 주둥이를 당장 회쳐버릴까 하다 생산적이지 못한 행동은 애초에 시작하지 말자 다짐했다. 놈이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왜, 왜 맞잖아 하고 끊임없이 깐죽거렸다. 별반 특별한 기억도 아니었다. 아니, 이렇게 한 번씩 경원이 들쑤시지 않으면 애초에 기억조차 못하고 시간이 묻혀 지나갈 일이었다. 인정한다.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똑같이 달린 거 밤마다 물고 빨고 생 쇼를 하는 이 경원과 김 지만이 하도 신기해서 의미 없이 따라해 본 것에 불과했다. 이제와 말이지만 절대 내가 먼저 꼬드긴 건 아니었다. 당시 순수함의 결정체였던 나를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건 권솔이었다. 더군다나 두고두고 이 경원의 놀림거리로 씹힐 일이었다면 절대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잊힌 기억들이 양파처럼 하나씩 벗겨지자 급기야 최악의 순간까지 무섭도록 선명하게 떠올랐다. 목구멍에 잘못 새들어온 정액 때문에 사레가 걸렸다. 콸콸 쏟아질 거 같은 입술을 움켜쥐고 화장실을 가는 도중 문을 여는 동시에 주둥이가 열렸다. 그 뒤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인류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한 겨울이었는데도 불구하도 3박 4일 창문 열어놓고 잤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입맛이 씁쓰레 했다. 무려 11년 전이었다. 솔이나 나나 부끄러울 정도로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 오, 김 계진이 입술이 들썩들썩 거리는 걸 보니 야한 생각하는 거 같은데? 권솔이 딸 쳐주는 생각 하냐.” 아주 육교 밑에 돗자리를 깔아라. 저건 시도 때도 없이 예민해서 탈이다. 무당 이 경원이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 요새 친구는 애인인지 뭔지 개념들이 없어. 아랫도리에 물차면 알아서 물 빼줘, 입이 심심하면 뽀뽀해줘, 하다못해 목욕할 땐 꼭 둘이 같이해야 직성이 풀리지. 굵직굵직한 사내새끼들이 곱살스럽게 다라이에 마주보고 앉아서 도대체 뭘 하나 몰라. 이래놓고 변태가 아니라는데 나 참 어이가 없네.” 평소 같았으면 따지고 달려들었을 권솔이 끝까지 침묵하는 통에 마땅한 반박거리를 찾지 못했다. 근질거리는 주둥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변태로 보일 줄은 몰랐다. 아니, 친구끼리 추우면 옷도 벗고 잘 수 있는 거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하다 머리가 번쩍했다. 권솔이 경원이나 지만이 놈이랑 옷 벗고 잔다는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술을 왕창 처먹고 곤죽이 되게 두드려 맞은 뒤에 의식을 잃으면 몰라도 절대 한 방에, 그것도 끌어안고 잘 놈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와 솔은……. 뒤늦게 경원이 말한 의미를 이해했다. 친구라도 추우면 옷 벗고 잘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한 번도 한 순간도 달리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놈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낸들 알았나. 머릿속에 긴 똬리가 틀어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살며시 솔을 올려다봤다. 녀석은 시큰둥이 서서 연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애초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거다. 어느새 다가온 김 지만이 질질 끌고 다니던 은행나무를 옆구리에 끼고 이 경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 아이, 경원아. 분위기 심각하게 왜 그래.” “ 내숭 까고 있네. 처음에 이상하다고 귀띔해줬던 건 너였잖아.” 나는 깜짝 놀라 지만이 놈을 쳐다봤다. 놈 역시 나만큼 놀란 표정이었다. 녀석은 아니라는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막상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천성이 착해 거짓말을 못하는 녀석이다. 침묵이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긍정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 저 착한 녀석이 보기에도 나와 솔이 이상해 보였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 헤이, 김 계진이 너는 평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일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어. ……신이 왜 엿 같은지 아냐. 좀 살만하다 싶으면 꼭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만들기 때문이야. 그리고 선택을 강요한단 말이지. 양 손에 쥔 떡이 둘 다 맛있어 보일 땐 거 참 죽을 맛일 거야.” 경원이 끊임없이 읊어대는 훈화 말씀에 꾸뻑 졸음이 밀려왔다.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시늉을 하자 경원이 놈이 자존심 상한 얼굴로 팩 돌아섰다. 그 뒤를 김 지만이 졸졸 쫒아 달렸다. 녀석들이 골목을 꺾을 때가 돼서야 권솔이 담배꽁초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 왜 넋을 잃고 있냐. 우리도 가자. 네가 앞으로 가.” “ ……어?”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나는 놈이 밤에 걸을 때 항상 내 뒤에 서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암암리에 지켜온 우리의 룰이었다. 내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때문이었다. “ 왜긴. 뒤에 걸으면 귀신이 등에 올라타는 느낌난다고 무서워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앞에 서라고.” 솔이 웃으며 내 등 뒤로 돌아섰다. 나는 앞으로 천천히 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너랑 있으면 내가 땡깡쟁이가 된 기분이야. 그 버릇 참 안 좋은 건데.” “ 내 선에서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뭐든 다 괜찮아.” 나는 약 떨어진 로버트처럼 부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솔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거리낌 없이 손을 잡아오는 녀석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이유였다. 녀석은 점퍼를 내려 내 등을 끌어안은 상태로 앞으로 걸었다. 경원이 놈의 말 때문이었을까.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행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큰 의미로 다가왔다. 세상 어느 친구가 그것도 사내새끼들이 춥다고 가슴을 껴안고 걷나. 머리가 지끈하고 울렸다. 그러자 갑자기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부반응이 일었다. 나는 은근슬쩍 녀석의 품에서 빠져 나와 거리를 두고 걸었다. “ 왜 그래 추위 많이 타잖아. 감기 걸리지 말고 이리와.” 목소리만 들어선 썩 기분이 상한 거 같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분주하게 앞으로 걸었다. “ 아니야, 됐어. 집에 가서 옥장 판 켜면 돼.” “ 가는 동안 춥잖아. 이리오라니까.” “ 아니야, 이젠 그럼 안 될 거 같아.” 터벅터벅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기척에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쫒아온 권솔이 내 팔을 낚아채 빙그르 몸을 돌렸다. “ 그럼 손잡고 걸을까.” 나는 마치 죄지은 사람마냥 직선적인 놈의 시선을 회피했다. “ 아니야, 것도 안 될 거 같아. 이상한 버릇은 빨리 고치는 게 좋아, 너도 좀 고쳐봐.” 내 말에 권솔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 이상한 버릇? 그 이상한 버릇이란 게 뭔데? 너 설마 경원이 년 말 신경 쓰는 거냐. 하, 참 너도 너다. 그 새끼가 언제 바른 말 한 적 있냐. 대충 흘려들어야지 귀에 다 담고 있으면 복장 터져서 못 살아.” 놈은 소리 내어 웃으며 내 손을 저 잠바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활짝 펴고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나는 마지못해 얌전히 끌려갔다. “ 경원이 봐서 이상한 거면 다른 사람이 봐도 이상했을 거야. 손잡는 것도 세 번에서 한 번으로 줄이고 목욕은 되도록 이제 같이 하지 말자. 내가 생각해도 그건 오해할 만 해. 또, 이 복희씨 야간일 때도 웬만하면 같이 자지 말고 작년 네 생일에 사준 커플 귀걸이 있지, 그건 짝수 홀수 번갈아서 겹치지 않게 해야겠다. 하여간 오해할 만한 건 하지 말…….” 놈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내 말을 싹둑 잘랐다. “ 좀 오해하면 어디가 덧나냐.” “ 나는 싫어. 괜한 걸로 싸우기도 싫고 불필요한 걸로 오해하는 것도 지겨워. 이 복희씨가 정상인 보다 좀 더 유치하잖아. 보면 분명 오해하고도 남지. 그래서 미연에 방지하자는 거야. 나쁠 건 없잖아.” “ 하루 종일 복희씨, 복희씨. 그렇게 좋으면 아예 전업주부로 들어앉아서 그 새끼 얼굴만 쳐다보고 살지, 왜.” “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내가 또 언제 복희씨, 복희씨 그랬다고…….” “ 왜 맞잖아. 그럼 복희야, 복희야 그랬냐.” “ ……나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 그럼 지금 하는 건 말 아니고 막걸리냐.” 얼씨구, 은근슬쩍 유머까지. 아주 골고루 하고 자빠졌다. 네가 가잖게 눈알을 부라린다고 해서 내가 눈썹하나 휘날려 줄줄 알았더냐. 옷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듯 권솔의 손등을 팍팍 쳐냈다. 그리고 씩씩거리는 놈을 귀불이 떨어져라 달려가 대문을 걸어 잠갔다. 얼어 죽든 말든 아침까진 안 열어줄 생각이었다. 쾅쾅쾅ㅡ 놈이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대문을 두들겨 댔다. 고거 참 쌤통이로구나. 그때 머리 위에 웬 그림자가 비치는가 싶더니 레이스 달린 빨강의 주인 집 할머니가 삽 같은 주걱으로 내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나는 앞머리에 붙은 밥풀을 떼어먹으며 한참을 훌쩍거리다 제풀에 지쳐 대문을 열어주었다. 제기랄. 뭐든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없는 밤이었다. 마왕, 발정하다 2부 -8 세수를 하려 보니 수도가 꽝꽝 얼어 있었다. 대야를 휘감고 있는 호수사이로 노르스름한 물줄기가 툭툭 붉혀져 나왔다. 무심결에 고드름처럼 솟아난 노란 기둥을 운동화 뒤꿈치로 쿵쿵 내리쳤다. 단단히 얼어 박힌 줄기는 이미 망부석이 되기로 작정한 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별 소득 없이 괜히 발만 아팠다. 그러게 물을 썼으면 꼭 대야를 덮어두라고 열심히 지껄여도 듣는 척도 안하는 망할 것들이 있으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 아니겠는가. 또 귀찮은 일 하게 생겼다. 후딱 부엌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끓여 나왔다. 수도꼭지 위에 물을 끼얹자마자 아니 이게 웬일, 오줌지린내 특유의 독한 암모니아 냄새가 콧구멍을 매섭게 후벼 팠다.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저 시정잡배 같은 놈 중 하나가 화장실 가기 귀찮아 여기다 오줌을 갈겨놓고 토낀 게 분명했다. 이럴 땐 주인집 할머니가 당장 방 빼라고 하지 않는 게 용했다. 사이좋게 두 갈래로 뻗어있는 오줌줄기를 피해 대충 연지곤지 세수만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한 겨울엔 당장 씻는 것부터 시작해 곤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뜨거운 물은 꼭 가스 불에 데워서 써야하지, 아침에 일어나면 제멋대로 단수가 되는 날이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허다했다. 시도 때도 없이 얼어붙어 정전기 일으키는 수도꼭지는 또 어떻고. 날씨가 추워질수록 이사, 이사 노래를 부르는 이 복희씨의 마음도 백번 이해가 갔다. 더군다나 이렇게 희끄무레한 냉기를 뿜어내는 방바닥을 볼 때면 몰골이 송연해지기까지 했다. 밤마다 연탄을 갈아야하는 수동식 가옥의 병폐를 줄줄 늘어놓던 이 복희씨가 어설프게나마 연탄을 갈기 시작한 게 정확히 삼일 전이었다. 동지가 지나자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진 탓이었다. 똥 폼도 잡아먹는 추위였다. 문 밖에서 쿵쾅쿵쾅 뛰어다니는 소리가 요란했다. 놈들도 뒤늦게 연탄불 지피느라 바쁠 테지. 잠바를 단단히 여미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싱크대 선반 위에서 구공탄 하나를 꺼냈다. 라이터를 뒤적이는 중에 하나 남은 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얌전히 구공탄을 내려놨다. 우선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어야겠다. 어제 주인 할머니의 사랑스러운 애첩 꼬꼬한테서 얻은 달걀 두 개가 나를 보고 음흉하게 손짓하고 있었다. 제발 먹어달라는 뜻이렷다. 한 손에 병 콜라를 쥐고 개선장군처럼 방으로 돌아왔다. 방은 아직도 얼음장이었다. 한두 시간 후면 따뜻해지겠지.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거리는 찰나 등 뒤에서 얄팍한 신음소리가 새나왔다. 침대 쪽이었다. 분명 이 복희씨의 음성은 아닌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정신이 번쩍했다. 사장님의 꼬맹이들이었다. 정확힌 입 한번 잘못 놀린 대가로 복날 개처럼 두드려 맞은 욕바가지가 끙끙 앓는 소리다. 일 나가기 전 갈아놓고 간 연탄불이 꺼진 게 문제였을까. 욕바가지의 신음소리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형광등부터 켰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갑자기 들어온 환한 불빛으로 동공이 움찔했다. 욕바가지의 얼굴에 피가 흥건했다. 땀과 섞인 핏물은 연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지만 베개와 이불을 적신 양이 상당했다. 아이의 머리를 무릎에 받치고 조심스럽게 흔들어 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그때 때마침 방문이 열렸다. 망할 놈의 삐짐 쟁이 권솔이었다. 조금 전 싸운 것 때문인지 녀석은 잔뜩 심통 난 얼굴이었다. “ 밖에 비와. 운동화 부엌에 들여놨다. 네 신발 비 맞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 줄 아냐? 그 잘난 이 복희씨도 나만큼 널 생각하진 못할 거라 이 말씀이야. 그것도 모르고 바보 같은 게 그 새끼 앞에서라면 무조건 헤헤거리고만 자빠졌으니. 쳇, 잘 자든가 말든가.” 땅에 고개를 처박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기가 막히게 유치뽕짝이었다. 놈은 애초에 내 대답 따윈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재빨리 몸을 돌려 버렸다. 안, 안 돼. 이왕 온 거 나랑 같이 고생해야지, 이 자식아. 나는 다급한 마음에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우선 지껄이고 보았다. “ 권솔 잠시만!……애, 애가 이상해. 완전 맛이 갔어.” 놈이 문을 닫으려다 멈칫했다. 그러나 아직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였다. 제가 삐져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저럴 것이다. 나만큼 저놈을 잘 아는 놈이 있으려고. 권솔이 젓가락 집는 각도에 따라 어떤 반찬을 먹으려는지 눈 감고도 알아맞히는 나다. 고로 피식 거리는 모습을 보아 주둥이 잘못 놀리려는 수작이었다. “ 무슨 애. 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언제 애 낳았냐.” 자, 저것 보라니까. 어지간하면 웃어주겠다만 이번 건 영 아니올 시다였다. “ 그게 아니라 진짜 애가 이상하다니까 그러네.” “ 흥, 못 나올 구멍으로 나와서 상태가 이상해졌나 보지.” 녀석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시선은 여전히 땅에 처박혀 있는 상태였다. 아주 가지가지해라. 상황도 모르고 어린애처럼 구는 그 모습에 적잖게 열이 솟구쳤다. “ 낮에 이 복희씨한테 얻어맞아서 애가 이상해졌단 말이야! 그렇게 계속 꼬투리나 잡고 있을 거면 빨리 꺼지든가!” 권솔은 그제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봐라, 보고 네 유치한 말장난을 반성해라, 하는 의미로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 녀석에게 비스듬히 기울여 보여줬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녀석이 허둥지둥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득달같이 달려왔다. 놈이 내게서 욕바가지를 가로채가더니 이리저리 훑어보며 말했다. “ 얘, 왜 이래. 언제부터 이랬냐.” “ 나도 잘 몰라.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니까 끙끙거리고 있었어.” 나도 양심이 있다. 부엌에서 라면 먹을 때까지 나 몰라라 했던 건 쏙 빼먹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권솔이 욕바가지의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 올리며 동공을 빤히 살폈다. 보면 지가 뭘 안다고. 그래도 녀석이 있으니 적잖이 안심이 됐다. “ 피는 나올 만큼 다 나온 거 같으니까 가서 물이나 좀 끓여. 목욕부터 시켜야겠다.” 권솔의 어줍지 않은 박력에 나는 우선 고개부터 끄덕였다. 터프한 사람한테 기가 죽는 건 내 선천적인 고질병이었다. “ 그래, 알겠어.” 권솔은 가만히 있는 날 보며 뭐해 빨리 안 가냐, 하고 퉁을 놓더니 땀에 푹 젖은 욕바가지의 옷을 훌러덩 벗겨 내렸다. 허름한 티셔츠는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침대 시트와 이불을 걷어내는 놈의 일사불란한 행동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부엌으로 달려갔다. 싱크대 밑에 처박혀 있는 솥단지를 끌어다 물을 가득 퍼 담았다. 그리고 가스 불에 옮겨 물을 팔팔 끓이는 동안 힐끔힐끔 권솔의 행동을 살폈다. 녀석은 아이의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휙휙 벗겨냈다. 그러다 갑자기 제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욕바가지의 맨 몸을 둘둘 감아놓고 밖으로 나갔다. 설마 토낀 건 아니겠지……하고 외롭게 의심의 싹을 피우는 사이 녀석이 돌아왔다. 손에 구급상자와 붕대가 들려 있었다. 놈은 욕바가지를 가볍게 들어 올려 제 무릎에 눕혔다. “ 우선 수건에 물 먼저 묻혀와.” 아까부터 저게 은근히 명령이네. 아니 꼬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시키는 대로 했다. 마른 수건을 솥단지에 살짝 담갔다 뺀 뒤 놈에게 건넸다. “ 자, 여기 있어.” 권솔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 손에 들린 수건을 잡아채듯이 뺏어갔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얼룩덜룩한 핏자국을 팍팍 문질러 닦는 모습이 적잖이 새치름해져 있었다. 놈은 이 복희씨가 만든 멍 자국위에 파스를 뿌린 다음 온 몸을 마사지하듯 주물러댔다. 다른 손으론 콧구멍에 솜을 쑤셔 넣고 있었다. 드디어 물이 다 끓었는지 부글부글 소리가 기똥차게 울려 퍼졌다. 뒤늦게 나도 할 일이 생겼다. 곧장 수돗가로 달려가 큰 대야를 끌고 왔다. 적당히 물의 온도를 맞춰 욕바가지가 푹 잠길 수 있을 만큼을 담아놓고 다시 방으로 뛰어 갔다. 정신이 없어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 물 다 끓여서 통에 넣었다. 빨리 애기 업고 부엌으로 와.” 곯아떨어져 있는 아이를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는 권솔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쳤다. 그제야 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드는 것이 아닌가. 권솔을 일말의 망설임 하나 없이 112 버튼을 눌렀다. 뭔지 모르겠지만 우선 막아야겠단 생각이 먼저였다. 잽싸게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그러자 솔이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봤다. “ 내놔.” 이 상황에 장난전화나 하려던 놈이 큰 소리는. 나는 끌끌 혀를 찼다. 최대한 거만하게 놈을 훑으며 대답했다. “ 요새 장난전화하면 추적한다더라. 112가 아니라 119잖아. ……네가 봐도 병원부터 가야겠지? 그럼 목욕부터 시키고 데려갈까, 아님 그냥 먼저 가?” 권솔이 하, 짧게 숨을 내셨다. “ 경찰서에 신고하는데 너는 119누르냐.” 나는 바닥에 던져놓은 잠바를 집으려다 말고 놈에게 시선을 돌렸다. “ 경찰서 신고? ……그건, 왜.” 권솔이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 몰라서 묻는 거냐. 아동폭행 범으로 당장 잡아 처넣으려고 그런다, 어쩔래. 아무리 말버릇이 썩었다 해도 그래도 애는 애다. 근데 이런 식으로 패냐. 아직 보호관찰기간도 안 끝났을 텐데 이참에 들어가서 푹 쉬다 나오라지 뭐.” “ 그, 그러니까 뭐야. 아까 너 이 복희씨 신고하려고 그랬다는 거네? 맞아?” 녀석은 임신한 암사자처럼 으르렁 거리다 돌연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욕바가지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터벅터벅 곧장 부엌으로 걸어갔다. 녀석을 뒤좇아 부엌 문 앞에 딱 멈춰 섰다. 하나 남은 부엌 슬리퍼를 놈이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솔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물속에 집어넣었다. “ 이거 범죄야. 세상에 어떤 나사 풀린 새끼가 제 자식을 이렇게 때리나.” 제 자식? ……아, 녀석은 아직 모르고 있지. 순간 이 복희씨 변호인이 되어 그의 누명 아닌 누명을 벗겨주어야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썩어빠질 오지랖이었다. “ 욕쟁이 고 녀석, 이 복희씨 아이 아니야. 사장님 아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그래.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제발 내 앞에서 까딱하면 이 복희씨 욕 좀 하지 마, 라고 하고 싶은 말은 속으로만 삭혔다. 권솔이 때밀이에 비누거품을 일으키다 말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 마디만 더했다간 아주 잡아먹을 기세다. “ 형제 판에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하고자빠졌네. 그럼 그 빌어먹을 새끼는 또 어디 처박혀 있는 건데? 제 새끼들이 여기로 온 건 알고 있냐.” 앞에선 공손하게 작은 형님 하던 것이 또 저런다. 놈의 흥분된 페이스에 눌려 나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 아마도. 곧 데리러 오지 않을까 싶은데…….” 심술궂게 입술을 말아 올리던 권솔이 물속에 주먹을 강하게 내리쳤다. 욕바가지나 녀석이나 할 것 없이 확 솟구친 물기둥에 몸이 흠뻑 젖었다. “ 아마도? 김 계진이, 참 태평하게 인생사시네. 네가 이 애들 맡아 키울 거 아니면 당장 데려가라고 해야 될 거 아냐! 거지같은 종자들이 누굴 고생시키려고 애까지 딸려 보내! 그 잘난 너의 이 복희씨가 지 조카라고 손이나 까딱할 거 같아?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내가 진짜 너만 생각하면 복장 터져 못살겠다. 이 병신아! 제발 한 순간이라도 싸가지 없게 좀 살아보란 말이야!” 녀석이 어찌나 호통을 쳐대는지 나는 금방 입을 떼지 못했다. 이 복희씨 아이도 아니라는데 제가 화낼 건 또 뭐야. 아이의 거처는 다음문제다. 우선 확인했으니 됐다 싶었다. 근데 녀석은 그 다음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대놓고 한심해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요 근래 놈의 행동을 돌이켜보자면 수능을 앞둔 여고생처럼 내게 앙앙거리기 일쑤였다.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 ……가!” 권솔이 나를 깔보듯 올려다봤다. 왜 저럴까. 왜, 왜, 왜 저 망할 자식은 이유도 없이 툴툴거리는 걸까.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애 놔두고 네 방으로 가라고.” 욕바가지의 뒤통수를 뒤로 젖혀 목덜미를 문지르는 놈을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에도 놈은 듣는 척도 안 했다. 기분 나쁜 걸 떠나 이젠 속이 상했다. 이 복희씨와 싸울 땐 순간 기분이 나빠도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권솔이라면 좀 다른 문제였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없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권솔이 내게 저렇게 툴툴거리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못 견디게 화가 나는 건 저대로 녀석이 제 방으로 가버리면 나는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할 거란 사실이었다. 불현듯 들려온 놈의 목소리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잠시 접어두었다. “ 너 혼자? 웃기고 있네. 이게 갓난 애긴 줄 아냐. 딱 봐도 여덟 살, 아홉 살은 먹었을 거 같은데 너 혼자 뭘 어떻게 한다고 그래. 다 씻기고 내 옷으로 갈아 입혀놓고 갈 테니까 거치적거리지 말고 얌전히 방에나 앉아있어. 감기도 잘 걸리는 게 진짜 웃기지도 않아” 저나 나나 똑같이 건장한 남자가 애 하나 못 씻길 줄 알고? 흥, 너나 웃기지 마. 오기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맨발로 부엌으로 내려가 놈의 손에 들린 때밀이를 잽싸게 뺏고 아이까지 억지로 떠안았다. “ 내가 왜 못해! 너 보다 더 잘할 수 있어! 뭐 하나 하고 투덜투덜, 또 뭐 하나하고 투덜투덜. 그럴 거면 애초에 하질 말든가!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가서 네 잘난 애인하고 소꿉장난이나 하시지, 왜! 그리고 내 앞에서 이 복희씨 욕 하지 마! 아무리 너라도 듣기 싫은 게 있는 법이야!” 보란 듯이 몸을 문질러 닦았다. 벙 진 얼굴로 가만히 있던 권솔이 하, 짧게 숨을 내셨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놈의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시발, 나한테는 진짜 한 마디를 안 지지.” 싸한 정막감이 찾아왔다. 축축 처지는 어깨만큼이나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도 모르게 문으로 눈알이 자꾸 돌아갔다. 아무래도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콩콩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니, 근데 저 자식 추워죽겠는데 왜 문은 열어놓고 지랄이야. 나는 욕바가지와 문을 한 번씩 번갈아 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꽤 오랜 시간 정성들여 아이의 목욕부터 끝냈다. 마른수건으로 몸을 둘둘 말아 단숨에 들어올렸다. 물론 생각만큼은 그랬다. 야식과 불규칙한 생활로 다져진 녹슨 허리가 휘청했다. 부엌 문턱에 머리통이 처박히려는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렇다 할 아픔이 전해지지 않았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붕 날아간 욕바가지를 어깨에 들쳐 멘 권솔이 눈앞에 서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난감해 있는데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 이불 젖어서 없잖아. 오해하지 마, 너 예뻐서 가져온 건 아니니까. 감기 걸리면 일주일 넘게 앓잖아. 너 때문에 나 감기 옮으면 안 되니까.” 고개를 돌린 녀석이 턱짓으로 내 발밑을 가리켰다. 겹겹이 쌓인 이불들이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욕바가지에게 제 겨울 후드 티를 입히고 있는 권솔에게 다가갔다. “ 야.” “ 왜. 번개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자식 무뚝뚝하기는. 놈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화해의 제스처였다. 어느새 옷을 다 입힌 권솔이 이게 뭐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내가 아까는 좀 심했지?” “ ……됐어.” 권솔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늦었다. 좋아서 입술을 실룩실룩 거리는 네 놈 주둥이를 나는 다 봐버렸단 말이다. 나 이상으로 단순한 녀석이라니까. 나는 화해 기념으로 놈의 궁둥이를 두어 번 때려줬다. 놈은 이제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좋아 죽겠다는 뜻이다. “ 주인집 할머니네 어제 제사였나 봐. 냉장고 보니까 나물 많이 가져다놨더라.” 나는 실실 웃으며 권솔의 안색을 살폈다. 놈은 관심 없는 척 욕바가지의 가슴을 토닥여주고 있었지만 귓불이 자동적으로 쫑긋쫑긋 거리는 것까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놈은 그 유명한 당나귀 귀였던 것이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밥통 문을 열었다. 아침에 이 복희씨 먹을 거 까지 해놔서 밥은 충분했다. 혹시 몰라 라면 먹고 들어갈 자리를 조금 마련해 둔 게 다행이었다. “ 나물 넣고 참기름 뿌려서 양푼에 밥이나 실컷 비벼 먹고 잘까. 우리 날씬한 삐짐 쟁이는 새벽이라 당연히 안 먹겠지? 그래, 아쉽지만 나 혼자 먹어야겠다.” 최대한 도발적으로 말한 뒤 나는 숨죽여 킥킥거렸다. 놈이 움찔했다. 챙챙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밥 긁는 소리로 놈을 유혹했다. 최후의 일격은 고소한 참기름 냄새였다. 드디어 권솔이 못 참겠다는 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왔다.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가히 장관이었다. “ 치사하게 먹는 거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다.” “ 먹을 게 눈에 들어오는 거 보니까 화 다 풀렸나 보네?” “ ……내, 내 것도 해.” 가려워보이지도 않는 볼을 긁적이는 권솔을 보며 나는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놈은 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었다. 눈이 벌컥 떠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렬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옆구리 양쪽엔 오소소 닭살이 돋아나 있었다. ……누구지, 누굴까. 부엌에서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주황불빛이 방안을 환히 비추었다. 빛 사이로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 검은 인영을 목격한 후,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쾅쾅ㅡ. 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아침댓바람부터 벌떡거리는 이 복희씨의 물건처럼 귀가 쫑긋쫑긋했다. 곧이어 득득 밥그릇 긁는 소리와 함께 짜금짜금 총각 무 씹는 소리가 무섭게 울려 퍼졌다. 주섬주섬 핸드폰 시계부터 확인했다. 권솔이 아침 댓바람부터 피시방 운운하는 김 지만의 덩치 값 상실한 징징거림에 울며불며 따라나선 게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도둑이면 때려잡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조용히 이불을 걷어냈다.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갔다. 문고리에 손을 올려놓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렸다. 틱, 하고 형광등이 켜졌다. 동공을 쑤시는 강한 불빛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 야, 일어나. 스물여덟 이 창창한 나이에 늦잠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야 없지! 들어는 봤나, 이경원표 특허 부침개. 비오는 날엔 뭐니 뭐니 해도 부침개가 최고지! 친구, 사이좋게 앉아서 주둥이에 쑤셔 넣어 보자고!” 웃통을 홀딱 벗은 상태에서 목도리만 칭칭 감은 눈살 찌푸려지는 패션의 이 경원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놈은 옆구리에 끼고 온 신문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았다. 김이 폴폴 나는 뜨거운 부침개 서너 장이 간장종지와 함께 사이좋게 잠들어 있었다. 간혹 오징어와 홍합의 흔적도 심심치 보였다. 녀석이 짜잔, 짜잔 신명하게 효과음을 내며 뒷주머니에서 치즈 두 장을 꺼내 부침개 위에 올려놓는데도 눈알이 자꾸 부엌으로 쏠렸다. 부엌 불은 이미 꺼져있었다. “ 부엌에 누가 있는 거 같아. 느낌이 이상해.” 혹시나 들릴까 싶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무젓가락을 미친 듯이 비벼대고 있던 이 경원이 속도 없이 명랑하게 외쳤다. “ 부엌에 있긴 뭐가 있어. 부엌 쥐가 왔다 갔나 보네. ……야, 식겠다. 빨리 먹으라니까!” 녀석은 무서운 속도로 부침개를 찢었다. 두툼한 부침개 속에 박힌 해물들을 보고 녀석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 웬일인지 제일 큰 조각을 내 앞에 내밀었다. 녀석의 성의를 생각해 겨우 부침개 하나를 집어 먹었을 때였다. 부엌에서 플라스틱 컵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경원이 놈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엌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야, 이 씨가 와있으면 와있다고 미리 말해줬어야지. 괜히 입맛만 버렸잖아.” 젓가락을 무릎으로 우그러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녀석을 재빨리 붙들었다. “ 복희씨 지금 퇴근 시간 아니야. ……복신이 아니야?” 경원이 놈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부엌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이어 입을 연 녀석이 한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 돌대가리 김 지만이랑 권솔이 데리고 피시방 갔잖아. 그럼 저건 또 누구야.” 녀석과 내 눈이 동시에 커졌다. 미처 내가 대답을 틈도 없이 경원이 놈은 부엌으로 달려가 터프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녀석의 등에 껌 딱지처럼 달라붙어 서서 이리저리 부엌을 살폈다. 예상대로 조금 전 우당탕탕 소리는 플라스틱 컵의 소행이었다. 바닥엔 컵을 포함한 밥그릇, 접시, 숟가락, 젓가락 할 것 없이 살림살이들이 모두 패대기쳐져 있었다. 그러나 제일 시선은 잡아끄는 것은 1박 2일 먹어도 끄떡없을 만큼 수북했던 밥통이 앙상하게 엎어져 있는 것이었다. 밥상 밑으로 반찬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역시나 깨끗하게 비어진 채였다. 저 많은 걸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김 지만 밖에 없었다. 그런데 녀석은 지금 없다. 그럼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그 궁금증은 이 경원의 짧은 비명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 계진아, 빨리 냉장고 옆에 봐봐.” 이 경원이 내 이름을 온전하게 부른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냉장고 구석진 틈 사이에 처박혀 라면을 부셔먹고 있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사내가 눈에 띈 것이다. 녀석과 나는 동시에 외쳤다. “ 사장님!” “ 사장님!” 이 복귀 사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둥이엔 축축하게 젖은 라면스프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녀석과 나는 흠칫했다. 그는 눈 밑에 있어야 할 다크서클이 턱수염 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채였고 입고 있는 옷은 거의 누더기에, 구두는 앞이 반이나 벌어져 진흙물이 칙칙 나오고 있었다.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눈에 띄게 앙상해진 몰골이 그의 현재 굶주림의 척도를 가늠케 했다. 한 눈에 봐도 맛이 간 이 복귀 사장이 입술을 달싹인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 ……밥이 모자라.” 구정물 밴 손으로 잘도 부침개를 찢어먹던 이 복귀 사장은 경원이 남은 반죽까지 긁어와 접시를 박살난 다음에야 드디어 배부르단 소리를 내뱉었다. 손으로 주섬주섬 거리는 폼이 안 본 사이에 인도식 식사법이 몸에 완벽하게 배어있었다. 그는 산달을 앞둔 임산부처럼 볼록해진 배를 때 낀 손톱으로 득득 긁으며 꺼억ㅡ 트림을 했다. 먹을 것을 향단 그의 맹목적인 집착에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었다. “ 그동안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얼굴이 그렇게 반쪽이 됐대요? 밥도 못 먹고 살았어요?”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을 경원이 대신 했다. 이 복귀 사장은 남산만한 배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연속으로 꺽꺽 트림을 했다. 나는 재빨리 코를 감싸 쥐었다. 이 경원이 곧장 나를 따라 코를 보호했다. 이 복귀 사장은 방바닥으로 미끄러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침대 기둥에 팔을 걸었다. “ 이놈의 빈곤한 동네는 어찌나 다 똑같이 생겼는지 좆 털 빠지게 두 시간이나 찾아 헤매고 돌아 다녔다. 이대로 공 쳤으면 큰일 날 뻔 했지 뭐냐. 배고파서 거의 아사직전이었거든.” 사장은 인스턴트커피를 한 번에 죽 들이켠 뒤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이 흡사 생활력 강한 바퀴벌레처럼 보였다. 경원이 구멍이 숭숭 난 그의 양말을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 그 동안 뭐하고 있었냐고요. 비룡이 형 말로는 가게에 안 나온다면서요. 꼴을 보니 백수도 그냥 백수는 아니고, 아주 빈털터리가 된 모양이네.” 이 복귀 사장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흐리멍덩한 눈빛이 순간 반짝반짝 빛났다. 경원이 눈싸움하듯 그 눈을 되받아쳤다. “ 왜요, 맞잖아요. 딱 보니 거지상이네. 꼴에 째려보면 뭘 어쩐다고, 쳇.” 좀 심하다 싶어 녀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녀석은 가재미눈을 해선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하고 꽥꽥거렸다. 슬쩍 사장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새끼손톱과 검지를 이용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귀지를 뽑아내고 있었다. “ 어이, 지만이 각시. 너는 어째 시간이 지나도 주둥이에 물고 있는 독침은 그대로냐. 그렇게 앙앙거리다 지만이 바람날라.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했다. 조심하여라.” 다 굶어죽게 생겼어도 저놈의 사군자 성대모사는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는 씩씩대며 여차하면 달려들 기세의 이 경원을 싹 무시하고 뒤늦게 방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모빌부터 시작해 화장대, 냉장고, 장롱, 순으로 빠르게 돌아가던 그의 눈동자가 이층 침대에 딱 멈추었다. 사장은 어딘가 야릇해진 눈빛으로 침대 기둥을 쓰다듬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 어이, 황소눈깔.” 이 복귀 사장은 어느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고 되물었다. “ ……저요?” “ 그래, 황소 눈깔 너 말이다. 오, 이거 은근히 뚝심이 상당한데? 결국은 형님이랑 샤바샤바 된 모양이다?” “ 김 개집이가 알게 모르게 고집이 있긴 하죠. 화를 잘 안내서 그렇지 한번 열 받으면 꼬라지 장난 아닐걸요? 내숭 까는 애들이 더 무서운 법이잖아요.” 이 경원이 대답을 가로채갔다. 내가 그, 그런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연신 피식피식 거리던 사장은 누더기 잠바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저 차림새에 담배 살 돈은 있었나 보네. 좀 신기한 생각에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장이 무릎으로 톡톡 쳐내 담배 한 개비를 내 발밑으로 데구루루 굴렸다. “ 이 복귀가 주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영광을 황소눈깔에게 주겠다. 밥 얻어먹는 것도 있고 하니까 큰 맘 먹고 주는 거다. 한 모금 빨고 나를 생각하고, 두 모금 빨고 나를 찬양하면서 아껴 피우도록.” 방향 감을 상실한 채 옆으로 비껴나간 담배가 경원이 놈 앞에 딱 멈춰 섰다. 녀석은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얼굴로 잽싸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는 뒷주머니에서 나왔다. 길게 한 모금 빨아들인 녀석이 천국을 다녀온 듯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뿌옇게 번져 올라온 연기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뜬 이 복귀 사장이 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 내가 여유가 있으면 하나 더 주고 싶지만 딸랑 두 개비 안 남아서 앞으로 아껴 펴야하거든.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진 말아.” 더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나는 후딱 손을 저었다. “ 네, 괜찮아요. 저는 원래 담배 안 피우거든요.” “ 도라에몽처럼 얼굴만 넓적한 줄 알았더니 마음도 넓적하네.” 도라에몽 소리를 듣자마자 순간 누군가 뇌리에 팍, 하고 지나갔다. 나를 그렇게 부른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였더라. 머릿속에 초강력 지우개가 있는지 어찌된 게 곱씹어 볼수록 더 생각이 안 났다. 괜히 해골만 복잡해졌다.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 근데 진짜 어떻게 살았어요? 가게는 왜 안 나가요?” 담배 하나에 호의적으로 변한 이 경원이 나름 상냥하게 물었다. 이 복귀 사장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딱히 음악이 필요 없는 저만의 박자를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못 나간다. ……왜냐, 잘렸거든.” 필요이상 명랑한 목소리에 처음엔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경원이 나를 보며 눈썹을 꿈틀댔다. 이젠 내가 물어보라는 뜻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이 복귀 사장에게 다가가 본격적인 질문공세에 나섰다. 어느새 따라온 녀석이 내 어깨에 턱을 걸쳤다. 책임감이 막중했다. “ 사장이 왜 잘려요. 사장이잖아요, 아니에요?” 그는 이제 휘파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경원이 놈과 나는 그 지옥 같은 휘파람소리를 무려 이십분 동안이나 경청한 끝에야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 사장이지. 그 유명한 월급쟁이사장. 애초에 내 가게가 아니었어.” “ ……그럼.”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임을 스스로 직감했다. 이 복희씨는 장사 잘되는 그럴싸한 술집도 있으면서 한탕 잡을 생각에 혈안이 되어 그렇게 복권을 긁어댔단 말인가. 그의 돈에 대한 욕심의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 스크루지 영감 같은 주제에 그 동안 모은 전 재산을 내게 떠안겨 줄 땐 속 꽤나 쓰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제 돈에 대한 행방을 물은 적이 없었다. 아니, 내게 돈을 줬다는 사실자체를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관심하게 일관했던 이 복희씨였다. 처음 택시운전을 할 때 만해도 그랬다. 미리 말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개인택시를 할 수 있게끔 돈을 쥐어줬을 것이다. 어차피 내 돈이 아니니 주고 말고 할 문제도 아니었다. 회사에 묶여있는 택시운전사들이 하루일정금액을 맞춰야 하는 상납금 때문에 골몰한다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건 천하의 이 복희씨라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였다. 그 눈치 빠른 이 복희씨가 권솔의 오리털 파카, 김 지만의 더블코트, 이 경원의 루이비통 가방의 출처를 몰랐을까. 엄창까고 절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제 돈을 흥청망청 쓴다 해도 모른 척 하겠다는 뜻인가. 그렇담 이 복희씨는 엿 같은 대운하건설에 내가 통장 채 갖다 바친다 해도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갑자기 쌩뚱맞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혼자 조용히 피식거렸다. 근데 어째 분위기가 싸했다. 무시무시한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복귀 사장과 이 경원이 쌍둥이처럼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암울하게 생긴 아이야,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 것이더냐.” “ ……예? 제가요? 글, 글쎄요. 더워서 그런가.” 나는 재빨리 손부채로 바람을 일으켰다. 사장은 이내 흥미가 떨어졌는지 쯧쯧, 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밑도 끝도 없이 콜레라 걸린 닭처럼 양 날개를 퍼드덕거리는 시늉을 했다. “ 하여간 그 가게는 황소눈깔 봉의 것이다.” “ 봉이요?” 경원이 하이 톤 최상의 고음으로 되묻자, 사장은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 그래, 봉. 그러니까 황소눈깔, 너는 형님을 뜯어먹을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뜯어 먹으려무나. 밍크코트, 악어 백, 여우 목도리, 명품 가방, 시계, 옷, 보석 할 것 없이 싹 긁어내란 말이다. 내가 그 정도 봉을 물었으면 지금쯤 완벽하게 빈털터리로 만들었을 텐데 너는 어째 좀 시원찮다. 아직도 이런 거지 움막에서 사는 걸 보니 영 글렀다, 글러.” 안타까움 반, 한심함 반이 섞인 사장의 눈빛에 나는 뒤늦게 항의했다. “ 보통은 자기 형을 상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지 않나요.” 사장이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의에 찬 표정과 달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실룩거리는 동공이 당장 언덕위의 하얀 집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와 한 방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꺼림칙해진 순간이었다. “ 형 좋아하시네. 그 인정머리 없는 자식은 이제 내 철천지원수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 다만 그동안 쌔빠지게 일한 사람을 어쩜 그렇게 단칼에 잘라 낼 수가 있냐. 평소대로 일하러 갔는데 형님 애들이 가게에 떡을 치고 자빠져 있더군. 특히 김 새싹이, 그 저팔계 같은 놈이 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어찌나 낄낄대며 웃는지 그때 내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졌다. 다신 생각도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 말씀이야. 더 이상 뒷말은 하지 않아도 대충 알아먹겠지? 자, 이제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으니 황소눈깔, 너부터 감상문을 읊어봐.” 사장은 침을 팍팍 튀기며 흥분했다. 어찌나 열변을 토하는지 보고 있는 이경원이와 내 손에도 땀이 쥐어질 정도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제가 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 사장님, 그 버릇 아직 못 고친 거 아녀요? 말 꼬리 잡으러 이제 경마장 안 가요?” “ 뭐야, 저 인간 도박꾼이었어? 진짜 가지가지 하네.” 경원이 대놓고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 복귀 사장의 눈알이 바둑알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놀그의 불안정한 눈빛에 대고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 예전에 텐트에서 자는 거 봤죠. 아! 그렇다고 내가 이 복희씨한테 말한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가게 사람들도 다 아는 거 언제까지 이 복희씨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게 진작 버릇 좀 고치시지. 이 복희씨도 이 복희씨지만 내가 보기엔 사장님도 잘한 거 하나 없네요.” “ 나 참, 기가 막혀서 원. 이봐, 황소눈깔! 너 대놓고 애인 편드는 거야, 뭐야!” 눈알을 뒤집고 게거품 물 준비를 끝낸 사장을 보고도 나는 속눈썹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김 계진이, 나도 많이 컸다 이거야! “ 애인은 무슨……. 이보세요, 사장님. 아무리 돈 좋아하는 이 복희씨라도 사장님처럼 한탕에 눈멀어 마냥 경마장 쫓아다니진 않아요.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인 거 몰라요?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가게 돈도 손댔죠? 그걸 알면 이 복희씨가 오냐, 잘했다 할 줄 알았어요? 내가 봤을 땐 사장님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요.” “ 나, 너, 너……말 다했냐.” “ 아니요, 덜 했어요. 사장님이 말씀 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요. 은근슬쩍 넘어가는 거 같아서 그냥 지금 말할게요. 저 아이들 말이에요. 사장님 애들이라면서요? 근데 왜 저 꼬맹이들이 우리 이 복희씨 명함을 들고 있는 건데요? 혹시 이 복희씨 이름 사칭하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이 복귀 사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좀 심했나.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턱을 긁적였다.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경원이 놈이 팔짱을 끼고 나를 박물관에 진열된 도자기 보듯 감정하는 눈빛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눈으로 왜, 그러느냐 물었다. 녀석이 가랑이 사이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말싸움의 대가께서 흐뭇하게 웃었다. 제자를 바라보는 사부의 인자한 미소였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녀석에게 칭찬을 받았다.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러나 지금은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앞에 골칫덩어리부터 깔끔하게 해결해야했다. “ 저기요, 사장니이임. 제가 말이 좀 심했다면 죄…….” 경원이 옆구리를 툭툭 쳤다. 저기 좀 봐, 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복귀 사장이 어느 샌가 침대에 앉아 깊게 곯아떨어져 있는 욕바가지를 끌어안고 한 편의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의 긴 속눈썹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딘가 매우 인위적인 모습이었다. “ 아이고, 아주 상거지가 됐네. 못난 애비 만나서 네가 이게 무슨 고생이냐!” 지금껏 방에 들어와서 한 번도 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몰인정한 아버지의 한탄이었다. 욕바가지가 진심으로 측은해졌다. “ 인생을 아주 다이내믹하게 사시는 분이 하나 더 있었네. 그래도 너 한시름 놨다, 그치? 그놈 새끼들이었어 봐. 그 즉시 바로 골 빠개지는 거지.” 경원이 놈이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의 말마따나 이 복희씨의 아이가 아니라 해서 무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쁜가. 아니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건 응당 당연한 거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의 목에 고개를 처박고 꺼이꺼이 울어대는 이 복귀 사장에게 다가갔다. “ 얼마 만에 만나는 거예요? 애가 복희씨를 아빠라고 생각한 거 보면 사장님 얼굴도 기억 못 하나 봐요. 대체 얼마동안 안 만났으면 아빠 얼굴을 다 잊어…….” 사장은 뒤늦게 고개를 쳐들고 눈물, 콧물로 흥건해진 얼굴을 소매 끝으로 열심히 문질러 닦았다. “ 돌잔치 이후로 처음 봤다.” 입이 쩍 벌어졌다. 자기 일 아닌 이상 절대 침착한 이 경원이 벌어진 내 입을 오므려주고 제가 대신 말했다. “ 돌잔치 이후로 처음 본 주제에 그렇게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단 말입니까? 보면 볼수록 명물이네.” 이 복귀 사장은 아이의 멍든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유독 파랗게 짙어진 멍 자국에 머물렀다. 그는 쯧쯧, 혀를 찼다. 얼굴만 보면 진심으로 가슴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저 바다 속보다 수심 깊은 속내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 보자마자 갑자기 부정이 철철 솟구치는데 나더러 뭘 어쩌란 말이냐. 그래도 꼬박꼬박 양육비는 보내고 있었다.” 경원이 놈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 애가 돈만 처바르면 쑥쑥 큰답니까. 애정과 관심으로 자라는 게 어린 앱니다. 양육비는 그나마 사장님이 양심에 털 나지 않은 아주 최소한의 증거일 뿐이지요. 그게 뭐가 자랑이라고 참 떳떳하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복귀 사장은 웬일로 큰 소리 없이 욕바가지의 머리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버럭 한 건 5초도 지나지 않을 무렵이었다. “ 이 모든 게 내 인생을 망치려 드는 그 망할 여자 때문에 생긴 것이니 나를 너무 몰인정하게 생각하진 말거라. 근데 내 아들 얼굴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넘어지거나 부딪혀서 생긴 흉터는 이렇게 섬세하게 표가 나지 않는다. 누가 때린 게 분명하다! 도대체 누구냐, 누구야!” 토끼눈을 뜨고 으르렁거리는 사장에게 경원이 신나서 대답했다. “ 사장님의 잘난 형님께서 그랬지 누가 그랬겠어요. 욕 몇 마디 하니까 당장 주먹이 날아가던데요. 저 꼬맹이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애라고 딱히 봐주는 것도 없더군요. 역시 피를 나눈 형제지간의 우애는 참 끈끈해요, 그렇죠?” 사장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어찌나 속전속결로 얼굴이 변하는지 포커페이스의 대명사 이 경원까지 주춤했을 정도였다. 평소 깐죽대고 시시한 농지거리나 던지던 사장과 현재 내 앞에 앉아 묵묵히 아이를 내려다보는 사내가 정녕 같은 사람일까, 하는 심한 괴리감이 왔다. 천천히 굳어지던 그의 얼굴이 불시에 창백해졌다. “ 내 이 새끼를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서슬 퍼런 분노가 전해져왔다. 이 복귀 사장은 말릴 틈도 없이 욕바가지를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고 이층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순둥이를 가볍게 떠안고 밖으로 나가다 문 앞에서 멈칫했다. 당장 문을 부술 것 같던 사장이 몸을 돌렸다. 그의 속눈썹이 시계초침처럼 깜빡였다. “ 황소눈깔아.” 나는 주춤주춤 앞으로 나왔다. “ 네, 사장님.” 이 복귀 사장의 먹구름 낀 얼굴에서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보고 있는 사람이 더 답답해지는 침묵이 찾아왔다. 경원이 불쑥 말했다. “ 사람 불러놓고 궁금하게 왜 말을 안 해요. 이 양반이 갑자기 조개가 됐나, 어쨌나.” “ 야, 야아…….” 놈의 발등을 아프지 밟았다. 녀석이 버럭 하려다 말고 짐짓 점잖은 척 내숭을 깠다. “ 왜, 내 말이 뭐 틀리냐. 이제 사장도 아닌데 그럼 말끝마다 사장님, 사장님 할 건 또 뭐야. 안 그러쇼? 형씨.” 슬그머니 사장의 안색부터 살폈다. 그는 애초에 경원이 놈의 말 따위는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어깨에 대롱대롱 메고 있는 아이들을 원래 있던 자리로 차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다소곳하게 목까지 덮어주고 내게 다가왔다. “ 보름만 맡아 주거라. 내가 꼭 찾으러 오겠다.” 과거를 보러 떠난 이 몽룡이 이보다 애절할까 싶었다. 그는 어쩐지 매우 촉촉해진 눈빛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애가 있다고 누구하나 손을 까닥해줄까. 녀석들 빨래에, 설거지에, 이 복희씨 비위맞추기에, 장사를 시작하고부턴 재료준비 외 다수의 모든 집안일들까지 올곧게 내 차지였다. 그러나 또 마냥 싫다고 할 순 없는 게 이 복귀 사장의 행색을 보아하니 당장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백수지 않은가. 나는 우물쭈물 했다. 그때 내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경원이 또 한 번 끼어들었다. “ 이 양반이 뭐라는 거야. 내 친구가 왜 사장님 애를 맡아요. 그러다 영영 안 찾으러 오면 내 친구 인생 조지는 거 아닙니까. 흥, 어림도 없는 소리 제발 작작 좀 하시죠!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경원이 입에서 나오는 내 친구란 단어가 그렇게 이질적이게 들릴 수가 없었다. 이 복귀 사장은 못 들은 척 완벽한 모르쇠 자세로 일관한 채,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 저기요, 사장님.” 경원이 놈과 이 복귀 사장이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내 말 한마디에 따라 두 사람의 반응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이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진짜 보름이면 되겠어요?” “ ……야! 이 쓸개 빠진 새끼야!” “ 황소눈깔아, 고맙다!”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귓구멍이 따끔따끔했다. 귓불을 움켜쥐고 나는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왔다. 우선 씩씩거리고 있는 경원이 놈에게 말했다. “ 애가 무슨 죄겠어. 그리고 보름만이라잖아.” 이번엔 감격의 눈물이라도 줄줄 흘릴 기세의 이 복귀 사장에게 말했다. “ 꼭, 꼭 찾으러 오셔야 돼요. 제가 밤에 일하니까 아침에 만날 잠만 자요. 밥도 못 챙겨주고 따로 놀아주지 못할 거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으세요?” 그는 말 잘 듣는 꼬마아이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장대 두 번째 서랍 문을 열었다. 지갑을 꺼내 가지고 현금을 탈탈 털었다. 동전까지 싹 긁어 벙 진 얼굴로 서있는 사장의 호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었다. “ 얼마 안 돼요. 굶지는 마시라고요.” 옆에 있던 경원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저런 바보가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녀석들이 나를 보면 흔히 짓는 표정 중 하나였다. 망부석처럼 꼼짝없이 서있는 이 복귀 사장의 손등을 툭툭 쳤다. 뒤늦게 그가 정신을 차렸다. “ 너, 너는 정말 천사구나?” “ ……하.” 저절로 맥 풀린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경원이 약 올라주겠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 저게 천삽니까. 저건 완전 바봅니다, 바보요! 일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지가 무슨 슈퍼맨이라고 애까지 떠맡고 지랄이야, 내가 진짜 못살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허공에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하는 녀석을 무시하고 말했다. “ 사장님, 제가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실 하나 말해도 될까요.” 이 복귀 사장이 눈을 치켜떴다. 나는 손목시계를 톡톡 가리켰다. “ 지금쯤 이 복희씨 거의 집에 다 도착했을 걸요?” “ ……다시 볼 때까지 잘 있어라.”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아침부터 한 바탕 씨름 아닌 씨름을 하고 피곤했던지 나도 모르게 꼬빡 잠이 들었다. 두툼한 패딩잠바를 둘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수돗가에 쌓아둔 빨래만해도 벌써 세 바구니 채였다. 일 갈 때까지 부지런히 하면 대충이나마 끝낼 순 있을 것 같았다. 다만, 팔이 나마날진 모르겠지만. 세탁기를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버릇처럼 냉장고 문을 열었다. 락앤락 통에 꾹꾹 눌러 담은 밑반찬들이 텅 비어 있었다. 유리병에 달라붙은 하나 남은 멸치가 나를 빈곤하게 응시했다. 그 어줍지 않은 눈빛에 순간 전업주부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집안일이란 게 그렇다. 쌔빠지게 한 것에 배해 도무지 티가 안 난다. 어쩌겠는가. 이것도 업보라면 업본데…….나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남은 반찬들을 긁어 버리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지갑을 챙겨들고 대문을 열었다. 한 달 치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으리라 다짐하며 밖으로 한 발짝 나갔을 때였다. 두두두ㅡ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덥석 발목을 움켜잡았다. 소리의 근원지는 김 지만의 방이었다.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경원이 놈과 이 복신이 티브이를 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대굴대굴 굴러다녔다. 뭐가 저리도 재밌을까.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언일병 구하기였다. 병사 하나가 총알 박힌 다리를 감싸 쥐고 고통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참담한 모습에 녀석들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아주 자지러졌다. 참나, 진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지……. “ 어? 이제 일어났어? 추워, 빨랑 들어와.” 주둥이에 라면 쑤셔 넣기 바쁜 김 지만이 아이처럼 외쳤다. 그러자 입안에 들어가 있던 면발이 용기 안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어라, 이게 왜 나왔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녀석이 거침없이 국물을 들이마실 땐 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 슈퍼 가는 길이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사다줄게.” “ 나는 초코우유랑 초코 빵, 초코 칩, 초코 바, 초콜릿.” “ 맥반석 계란, 계란, 계란 사다줘! 양갱도 하나 부탁해요.” “ 떠먹는 요구르트 알지? 그거 사와. 아! 유통기한 꼭 확인해라.” 어찌나 속전속결로 쏘아대는지 누가, 뭐라고 말하는 지도 못 들었다. 이럴 땐 해결방법이 딱 하나 있지. “ 곧 밥 먹을 건데 초콜릿 먹으면 입맛 버려. 그리고 맥반석 계란을 왜 돈 주고 사먹어. 집에 있는 달걀 삶아서 간장으로 까맣게 칠해줄게. 또, 아! 떠먹는 요구르트는 무슨. 그냥 냉장고에 있는 요구르트 접시에 부어서 숟가락으로 떠먹어라. 천원에 세 개 묶어서 파는 과자 있지? 그거 사온다.” 항의가 빗발쳤다.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당장 티브이부터 꺼버렸다. 녀석들의 농성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 그럼 오늘 점심 메뉴는 뭔데?” 옆구리를 득득 긁으며 이 복신이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 글쎄,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 “ 김치찌개 싫어! 계진이 싫어! 우리는 정말 싫어!” “ 에이 씨, 무슨 사골국도 아니고 끓이고, 끓이고, 또 끓이냐.” “ 씨발, 뭐야! 장난 하냐.” 몸무게 순으로 김 지만, 이 복신, 이 경원이 외쳤다. 그렇게 싫으면 자기들이 하든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했다. 학교급식을 봐라. 메뉴는 영양사가, 조리는 아주머니들이 다 한다. 급식비를 내는 학생들도 물론 메뉴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는다. 내가 돈을 받나, 뭘 하나. 그러니 녀석들은 내가 주는 대로 아무생각 없이 가축들처럼 먹어야할 의무가 있었다. “ 단식투쟁한다!” “ 나도, 나도!” 이 경원이 손을 번쩍번쩍 들고 외치자, 줏대 없는 이 복신이 잽싸게 따라했다. 쌀도 떨어져 가는데 오랜만에 바른 소리한다. 녀석들의 탄식투쟁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거였다. 김 지만까지 그래준다면 저물어가는 올해,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전혀 굶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 나는 김치찌개에 고기만 있으면 일 년 동안 먹을 수 있어. 계진아, 고기 많이 넣어. 참치 넣으면 너한테 아주 많이 실망할 거 같아.” 김 지만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애원했다. 나는 녀석들이 말을 바꾸기 전에 얼른 선수치고 나섰다. “ 지만이 빼고 너희 둘은 밥 안 먹는다 이거지? 그래, 좋아. 원하시는 대로 쫄쫄 굶어봐” 그리고 쾅 문을 닫았다. 마당을 가로질러나갔다. 신발에 날개가 돋친 듯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배신자 운운하며 김 지만이 열심히 다구리 당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건 내 알바 아니었다. 내리막길을 거의 반쯤 남겨두고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슈퍼 앞에 검은 선팅으로 도배된 자동차가 한대가 얌전히 세워져 있었다. 이 복희씨 차였다. 일 끝났으면 후딱 집으로 와서 잠이나 퍼질러 잘 것이지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사뿐사뿐 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복희씨, 하고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보조석 문이 열렸다. 나는 얼른 전봇대 뒤로 숨었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열린 문에서 장신의 사내가 나왔다. 쌍칼이나 새싹이, 둘 중 하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저 사내는……! 누군가 내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붕대로 침침 감고 있어 처음에 몰라봤다 뿐이지, 확실했다. 저번 가게에서 이 복희씨에게 얻어맞고 쓰러진 그 남자였다.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사내가 뒷좌석 문을 열자, 후드 티에 추리닝 바지를 입은 이 복희씨가 껑충껑충 뛰어 나왔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죽 폈다. 어깨를 붕붕 젓다 이쪽저쪽 허리를 흔들기도 했다. 그러다 돌연 검지와 중지를 치켜들었다. 사내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벌어져 있는 틈 사이에 꽂아주었다. 라이터 불도 즉각 대령 되었다. 그는 이 복희씨가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울 때까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굳이 따로 설명이 없어도 사내와 이 복희씨가 어떤 관계인지 한 눈에 파악이 됐다. 억지로 짜 맞춘 상하관계처럼 그들 사이엔 검은 바람이 휘감고 있었다. 저 사내는 누굴까. 이내 머리를 툴툴 털어냈다.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망할 놈의 인간, 어째 문자 좀 쓴다 싶더니 제 부하를 시켜 깜짝 쇼를 했구나. 바득바득 이가 갈겼다. 곧이어 운전석 문이 열리고 쌍칼이 나왔다. 두 사람이 꾸벅 구십도 인사를 하자, 이 복희씨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들은 차에 올라탔다. 복희씨 역시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나는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사내가 죽을까, 그래서 이 복희씨가 다시 감방에 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간이 미친 듯이 아까워졌다. 슈퍼에서 밑반찬 재료들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 복희씨를 비롯한 녀석들 모두 낮잠을 자고 있었다. 누군 이렇게 생고생 하는데 참, 팔자들 좋다. 나는 비닐봉지 채 냉장고에 던져놓고 밀린 빨래부터 시작했다. 슈퍼타이를 폴폴 풀어 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찬물에 잠근 발가락이 아사직전까지 내몰린 뒤에야 두 번째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그때 드르륵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렇다면……. “ 김 궁상이, 거기서 뭐하시나.” 사각팬티 한 장 덜렁 걸친 이 복희씨가 맨발 채 수돗가로 내려왔다. 내가 길거리에서 산 두 장에 만원하는 코끼리 팬티였다. 하나는 지금 내가 입고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근질근질해진 느낌이었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내게 이 복희씨가 평소대로 성질을 부렸다. “ 내가 뭐하냐고 묻잖아.” 보면 모릅니까, 빨래하잖아요. 하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그가 팬티 가운데 벌어져 있는 틈으로 흉측한 제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열심히 빨아놓은 청바지 위에 오줌을 싸갈겼다. 티도 아니고 무려 제일 빨기 귀찮다는 청바지였다. 그는 내 불타는 내속도 모르고 오줌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성기를 사납게 털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쟤는 도대체가 부끄러움이라는 것도 없는 걸까. 머릿속에 퓨즈가 팍 터지는 기분이었다. “ 미쳤습니까! 겨울에 빨래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 쪽이 알기나 해요?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는 거 뭐 있다니까!” “ 그럼 너도 내 팬티 위에 싸든가.” “ 그거랑 이거랑 같습니까!” 나는 들고 있던 솔을 냅다 집어던졌다. 이 복희씨가 갑자기 엄지발가락으로 내 볼을 콕콕 찌르며 너 콧구멍 커졌다. 오, 주먹도 들어가겠는데? 하고 낄낄댔다.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나! 나는 있는 힘껏 그의 발등을 물어뜯었다. 송곳니에 살이 푹 들어가는 소리가 매우 경쾌했다. 그가 윽ㅡ,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 이게 감히 내 고귀한 발등을 물었겠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야?” 말과 다르게 그는 피식피식 웃기 바빴다. 아, 그렇지. 저건 내가 화를 내면 낼수록 즐거워하는 놈이었지. 깜빡했다. 나는 뒤늦게 최대한 관심 없는 척 빨래로 돌아왔다. 심드렁한 표정을 필수였다. 그러자 거짓말 같게도 이 복희씨는 조금 맥 풀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슬리퍼를 끌고 와 엉덩이에 깔고 앉았다. 훼방꾼으로서 본격적인 장난을 시작할 기미였다. “ 어이, 나 발 씻겨줘.” “ 싫어요.” “ 내가 하라면 하는 거지 싫은 게 어디 있나.” 가랑이사이로 불쑥 발이 들어왔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발바닥과 발꿈치 사이사이로 모래자갈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는 그 흉악스러운 발을 이용해 깨끗한 티셔츠들을 억지로 비비는 시늉을 했다.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호수로 대충 물을 뿌려 발바닥을 씻겨줬다. “ ……새끼, 지금 장난해?” “ 그 쪽은 혼자서 발도 못 씻어요?” 그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 응, 몰랐냐?” “ 장난은 그만하구요. ……밥은 먹었습니까?” 대놓고 화제를 돌렸다. 길게 말싸움을 해봤자 좋은 꼴 못 봤다. 찜찜한 표정으로 나를 야리던 이 복희씨가 웬일로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 네가 안 차려줬잖아.” “ 그래서 안 먹었다고요?” “ 그래, 배고파 죽겠어.” 그가 배를 움켜쥐고 급하게 배고픈 척 연기를 했다. 가증스러웠다. “ 아! 몰랐네요. 이 복희씨는 남이 꼭 상을 차려줘야지만 밥을 고귀한 분이란 걸요.” “ ……이봐, 말로 할 때 그만 좀 까불지?” 나는 정녕 그의 말대로 그만 까불어야 할 때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배고픔은 사람을 동물로 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쫄쫄 굶은 이 복희씨가 미쳐 날뛰기 전에 알아서 셔럽했다. “ 방에 가 계세요. 이것만 다 하고 차려드릴게요.” 발가락 사이에 비누거품을 쑤셔 넣으며 이 복희씨가 말했다. “ 이게 뭔데?” “ 보면 몰라요? 빨래잖아요.” 그는 끄응, 거리며 대놓고 못마땅한 티를 드러냈다. “ 몰랐는데 우리 김 궁상님께선 참 깔끔하신 분이셨네. 이게 다 몇 벌이야. 너는 겨울옷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갈아입냐. 그러니까 이렇게 일이 많지. 좀 적당히 해.” 순간 손이 삐끗했다. “ 이게 다 내 옷이라고요? 웃기고 있네. 저는요, 보름에 한 번 갈아입을까, 말까 합니다. 모르면 아예 말을 마세요.” 이 복희씨는 슬리퍼를 신은상태에서 바가지 채로 물을 뿌려 비누거품을 헹구고 있었다. 나는 대야 주위에 고여 있는 비눗물을 호수로 걷어냈다. 그리고 수도꼭지 위에 청바지와 물이 잘 빠지지 않는 후드 티를 올려놓았다. “ 네 옷이 아니면?” 빨지 않은 남방으로 발등을 문지르며 이 복희씨가 말했다. “ 권솔이랑 이 경원 겁니다. 걔네들이 은근히 옷을 자주 갈아입거든요. 그래서 한번 빨래하면 이렇게 일이…….” “ 이리 줘.” 이 복희씨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바보처럼 네?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척척 가리키더니 이거, 저거, 이거, 이리 내놔, 했다.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구석에 처박힌 슈퍼타이와 호수, 빨래더미가 보였다. “ 왜요? 복희씨가 빨래 해주시게요?” 나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이 복희씨의 입 꼬리가 쓱 올라갔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건달의 교과서적인 미소 앞에 나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 내가 왜…….” 어깨가 흠칫했다. 그로선 매우 당연한 대답이었겠지만 조금 실망스러웠다. 괜한 기대를 한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할 일을 잊고 주춤주춤하는 나를 지나쳐 이 복희씨가 수돗가 가운데로 들어왔다. “ 지금까지 이걸 너 혼자 다했다?” 나는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지독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 복희씨가 버럭 고함을 치는 통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린 내 얼굴에 그는 어느 정도 화를 누그러뜨렸다. “ 이걸 너 혼자 다 했단 말이지, 그랬단 말이지. ……진짜 기가 막히는군.” “ 기가 막혀요? 그럼 면봉이라도 갖다드릴까요?”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짜증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던 이 복희씨가 슈퍼타이와 산더미 같은 빨래들을 어깨에 가볍게 들쳐 멨다. ……왜 저럴까. 궁금했지만 꾹 참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수도꼭지에 돌돌 말려있는 호수를 죽 잡아 뺐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최대한 틀어놓고 곧장 김 지만의 방 앞으로 걸어갔다. 거의 달리는 수준이었다. 그는 발가락으로 가볍게 문을 열어젖혔다. 녀석들은 여전히 비몽사몽 꿈나라 여행 중이셨다. 권솔은 없었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담배꽁초와 과자봉지를 발로 툭툭 걷어차며 이 복희씨는 쯧쯧, 혀를 끌었다. 그때 놀라운 기시감으로 이 경원이 번쩍 눈을 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복희씨는 그 많은 빨래 감을 짐짝 던지듯 녀석들 얼굴에 덮었다. 그리고 슈퍼타이를 통째로 때려 부은 다음, 콸콸 흐르는 호수를 녀석들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겨울잠을 자던 곰들이 벌떡벌떡 일어났다. “ 아아아, 악!” “ 에이, 씨팔! 이게 뭐야!!” 녀석들이 겨우 빨래더미를 헤치고 얼굴을 들어냈을 땐, 이미 온 몸에 세제거품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방안엔 비눗물로 홍수를 이루었다. 콘센트와 냉장고 밑으로 긴 물줄기가 이어져 내렸다. 옥장 판 구멍사이로도 물이 가득했다. 원상태로 복구하는데 만해도 넉넉잡고 하루를 고스란히 쏟아 부어야 될 것 같았다. 그때 경원이 이불을 미친 듯이 걷어차고 내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 계진아, 계진아. 제, 제발 부탁할게. 제발 이사 좀 가! 가서 저 인간 좀 안 보게 해줘!!” 뒤이어 김 지만과 이 복신까지 내게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 이사 가면 그 다음날부터 나 너한테 형님이라고 부른다. 진짜로, 맹세해!” 김 지만이 콧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자, 옆에 있던 이 복신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미투, 미투, 미투, 미투, 미투, 미투!” “ 병신들의 향연이군.” 이 복희씨는 호수입구를 녀석들 얼굴에 대고 어느 놈을 맞출까요, 딩동 댕 동 알아 맞혀 봅시다. 하고 노래를 불렀다. 복신이 얼굴에서 다ㅡ,가 멈추자 옆에 있던 김 지만이 박수를 치며 과도하게 좋아했다. 이 복희씨의 얼굴이 야릇해졌다. 그는 티 나지 않게 호수위치를 바꿨다. 그리고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지만이 놈의 주둥이에 물총을 쐈다. 폭포수 같은 물줄기에 지만이 놈이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이 경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 계진아, 제발 이사 좀 가란 말이다!!” 다급해진 녀석의 기세에 눌려 나는 이 복희씨의 팔목을 아프지 않게 쳐 내렸다. 이 복희씨가 매우 언짢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 ……우, 우리 이사 갈, 갈까요?” 이 복희씨가 그제야 호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 48평 밑으론 안 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지만이 두 손이 닳아져라 싹싹 빌었다. 다른 놈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동정어린 표정들을 하나씩 꺼내들었다. 그다지 석연치는 않았지만 사람 셋 살리는 셈 치고 말했다. “ 그래요, 그건 이 복희씨 좋을 대로 하세요.” “ ……정, 정말?”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그렇게 좋을까. 나는 피식 웃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제가 거짓말하기엔 나이가 조금 많네요.” 이 복희씨가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사람이 대놓고 너무 좋아하니, 보고 있는 내가 오히려 다 떨떠름했다. 그는 호수를 내팽개치고 내 팔을 질질 끌었다. “ 저 망할 놈의 이층 침대도 버리고 가는 거겠지?” “ ……글쎄요, 그건 좀.” 그러자 이 복희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호수를 잡아챘다. 녀석들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이 복희씨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게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 그, 그래요. 그러죠 뭐.” 그는 호수를 멀찌감치 집어던지고 여유자작 휘파람을 불었다.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잡아당겼다. “ 왜요.” “ ……왜긴 뭐가 왜야, 당연 이삿짐 싸러 가야지! 오늘 밤에 당장 떠나자구우!” 과도하게 즐거워 보이는 이 복희씨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어깨에 둘러멨다. 코가 그의 등에 처박힌 기묘한 자세로 나는 대롱대롱 매달려 밖으로 실려 나갔다. 이 복희씨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모가지가 병든 닭처럼 흔들거렸다. 비틀린 허리 틈 사이로 손뼉을 치며 좋아하고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인생이 이리도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까. 내일부턴 또 어떤 재수 없고 기상천외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방문 앞에서 슬리퍼를 휙휙 벗어던지며 이 복희씨가 귓가에 속삭였다. “ 나 그 동안 많이 참은 거 알지? 이제야 인생이 좀 즐거워질 모양이야. 너도 기대되지?” 얘는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능글해 졌을까. 생각도 하기 싫었다.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 인생은 즐거워! 즐겁다고!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소설로 또 뵙겠습니다. *^^* 홈페이지 메일 보내기 쪽지 보내기 회원정보 보기 이름으로 검색 메일 보내기 쪽지 보내기 회원정보 보기 이름으로 검색 메일 보내기 쪽지 보내기 회원정보 보기 이름으로 검색 Copyright 1999-2008 Zeroboard / skin by kidd^^ / Modify by 로렌